<- 프롤로그 -> 200x 년 4월 26일. '나는 죽었다.' .. 라고 하니까 어쩐지 분위기 있어 보이는 것이.. 얼마 전에 봤던 일본만화영화의 시작부분을 따라해 본 것 뿐이지만 꽤나 탁월한 문장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내 눈앞에 죽어있는 내 모습이 떡하니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내 이름은 '강지훈'. 올해로 17살인, 대한민국 소속의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난 이제껏 내 자신이 평범하다는 것에 대해 단 한번도 의심을 해본 적이 없었다. 운동 실력도 또래중의 보통이고, 성적도 보통. 신체 사이즈며 외모며 그야 말로 무엇 하나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 내가 평범하지 않다면 세상의 그 누가 평범하다는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평범한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평범 이란 세상의 그 어느 일보다 쉽고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아침, 아니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내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방금 전의 그 '사고'를 당하기 전까진.. " 우아악... 미치겠네!! 왜 내가 이딴 일을 당해야 하냐고오!! " 애초부터 사고의 발단은 별거 아니었다. 한국이란 나라는 워낙에 땅덩어리가 좁은데다가, 교통체제가 복잡하고, 단순무식한 무 대포 정신의 운전자들이 많기 때문에, 흔하디흔하게 일어나는 것 중의 하나가 교통사고다. 얼마 남지 않은 모의고사 준비 때문에, 평소엔 하지도 않던 공부 좀 해보겠답시고 영어 단어장을 들고 외우고 다니던 게 화근이었다. 신호를 무시한 자동차 한 대에 손도 못써보고 그대로 치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치이던 직전에 실신한 정신은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지금과 같은 황당한 장면만 덩 그라니 두뇌 속에 각인시키고 말았다. 허공에 떠있는 내가, 바로 아래에 죽어있는 내 모습을 바라보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말이다. ' 허허허.. 이래서 평소에 안하던 짓하면 죽는다는 얘기가 나온 거구나...'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선조의 지혜란 그저 아무데서나 꾸며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른들 말씀을 무시한 죄로 받는 형벌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벌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지 않아? 허허허..나는 허탈하게 웃으면서 망연자실한 얼굴로 죽어있는 내 몸을 다시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웅성웅성. 사거리의 대로 한가운데서 벌어진 사건인데다 한창 창창한 대낮이어서 그런지, 너무나도 눈에 띄는 내 시체주위엔 사탕에 꼬인 개미마냥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사고지점이 횡단보도의 중간쯤이라 도로마저 꽉 막혀버려, 주변은 막혀진 차들과 구경나온 사람들로 무척이나 시끄러웠다. 아마도 병원차가 내 시체를 치워갈 때까지는 한동안 이 곳 사거리 도로는 혼잡한 교통체증을 이루게 될 것만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불안해 보였고, 개중엔 울면서 도망가는 간작은 인간들도 간혹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썩을 놈은 재미라도 났는지 카메라 폰으로 내 시체를 열심히 찍어대며 킥킥 거리고 있다. 저런 놈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하는 거야! .. 어쨋든 그러한 혼잡한 상황. 바로 그 중심부분에 볼썽사납게 도로에 뻗어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숯 많은 시커먼 고수머리에 두꺼운 뿔테안경(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우리학교 트레이드마크인 촌스런 검청 색 교복을 입고 있는 손엔, 사건의 원흉인 영어단어장이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쥐어져있다. 그 앞에서 아까부터 계속 안절부절하며 내 의식을 확인하고 있는 사람은, 신호를 무시하고 막나가다가 공교롭게도 나를 치어버린 자동차의 운전자였다. 순간의 실수로 살인자가 되어버렸으니 지금 속이 어지간히 썩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게 누가 교통법규를 어기라나. 법을 지키라고 만들어 놓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캬캬캬.. 물론, 별로 세게 치이지도 않은 주제에 훼까닥 영혼을 떨구어 버린 내 약해빠진 몸뚱 아리에도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근데 정말 말이 나와서 말이지, 내 시체는 그 흔한 핏방울이며 긁힌 상처자국하나 없었다. 오죽하면 영혼이 된 내가 보기에도 멀쩡해 보여서, 내가 다시 육체로 들어가 보려 시도까지 해보았겠는가. 하지만 여러 번의 시도에도 빈번히 육체는 내 영혼을 튕겨 냈고, 지금은 숨을 안 쉰지 20분이 넘어간 상태라 나도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아.. 나는 정말 이렇게 어이없게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내가 그렇게 어이없게 짧은 생을 마감해 버린지도 벌써 사흘을 넘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교복차림으로 평소와 다름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녔고, 가족들이 내 시신을 거둬가는 것도 지켜봤으며, 더불어 장례를 치르고 있는 요즘은 내 영정을 놔둔 식탁(?)앞에서 나한테 인사하러 오는 반 녀석들에게 아는 척을 하고 있었다. " 야~ 박규철! 너도 왔냐? 짜식- 나 죽어도 절대 내 장례식엔 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어째 용케도 왔네. 역쉬 너밖에 없다니깐~ 핫핫핫 " "......."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여기서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저들에게는 전~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저녁때라면 유령처럼이라도 보일까 해서 돌아다녀 봤지만 그것도 실패. 내 사진아래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하얀 국화꽃을 바라보며 나는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까진 영혼이 된지 얼마 안돼서 영혼들이 받는 혜택-예를 들면 벽을 통과한다거나 공중을 날아다닌다거나 하는-에 재미를 붙이고 있지만, 이제 이것도 익숙해지면 할 일이 없을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내 평생의 염원이던 세계여행이나 느긋하게 다녀볼까? 아, 그것도 꽤 괜찮을지도. 한 가지 의문이라면, 왜 아직도 나에게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의례 죽으면 영혼을 인도하는 사자들이 나타나서 그 영혼을 천국이든 지옥이든 데려다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죽은 지 사흘이나 지난 내게는 저승사자는커녕 '사랑과 영혼'에 나왔던 하늘에서의 빛조차 비췬 적이 없었다. 설마 그게 모두다 사람들의 상상? 죽으면 그냥 이런 식으로 땡이란 말이야? 허..이렇게 허탈할 수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영혼이 또 있나 싶어 돌아다녀 봤지만 이 동네는 죽은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나 말고 다른 영혼은 없는 것 같았다. ' 설마 나 혼자 영원히 이렇게 외톨이로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문득 불길함이 엄습해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혼자인 것은 정말 질색이다. 난 혼자만 되면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쉴 새 없이 잊어버리곤 하니까. 난 누구지? 내가 왜 여기 있을까? 난 무엇에 의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거지? 등등. 이런 식의 답 없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을 때면 차라리 술 취한 아버지의 당구 채에 두들겨 맞는 편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내 생각을 알았더라면 아버지는 더 신이 나서 날 쥐어 팼을 테지만. 그리고 어머니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역시 못난 놈'이라 중얼 거렸을 테고. 형들과 누나는 눈살을 찌푸렸겠지. 하도 당해왔던 일이라 이젠 슬픔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익숙하다. 솔직히 우리 가족 중에서 날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까. 원치도 않았는데 느즈막히 본 막내아들이라 윗 형제들하고는 나이차이가 벌어져 그들과 내 사이는 언제나 소원했다 아버진 아이를 싫어하는 독불장군이었고, 어머니 역시 가난한 살림에 돌볼 식구가 늘어난 것에 짜증만 더 느셨던 것 같다. 막둥이가 생기면 그저 오냐오냐하고 응석받이로 키우는 보통의 다른 가정에 비하면, 나는 참으로 태어날 집을 잘못 잡은 셈이다. 지금도 봐라. 그래도 막내아들이 죽었다고 장례는 치르고 있지만 사흘간 끈질긴 관찰의 결과로도난 이들이 내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이다. 이들에게 내 죽음이란 것은 '어차피 죽을 거 괜히 태어나 집안 살림만 축낸 죽일 놈' 정도에나 머물고 있는 듯 하다. 오죽하면 내가 살아있을 적에 이 사람들과 친 부자, 형제지간이 맞나 싶어서 혈액형검사까지 받아봤겠는가! 우기고 우겨서 받은 DNA의 검사가 친 가족이 맞다는 판정이 내렸을 땐, 낳아준 부모를 의심한다며 또다시 이어지던 아버지의 구타보다 지구가 먼저 거꾸로 돌아 세상 하직하겠구나 싶었다. 돌잔치는커녕 이제껏 생일한번을 챙겨준 적이 없고, 보기만 하면 원수 대하듯 욕하고 때리는 사람들이 정말로 내 친 혈육이라니.. 억울하고 서러워서 자살까지 결심해 본적도 몇 번 있었지만 내가 죽어봤자 저들 좋은 일 밖엔 되지 않겠구나 싶어서 참고 또 참았었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이딴 집 독립해서 멋지게 인간처럼 살아보겠다고 다짐도 하면서 말이다. ... 결국 이런 식으로 정말로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에휴. 어쨌든 난 혼자인건 죽어도 싫다.(아니 이미 죽었으니 상관없나?) 애정결핍이든 뭐든 옆에 있어줄 존재가 필요하단 말이다! 어디 적당히 연배 맞는 유령 한 마리(?) 없냐고요~~~!! 내가 운명이 없다고? " 아! 그렇지! " 지루함에 몸부림치며 절규하던 그 순간,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난 얼굴을 환하게 밝혔다. 현재 나의 장례가 치러지는 이곳은 큰 종합병동의 지하 영안실이었다. 한 층 전체가 여러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있는 이곳은, 식당과 휴게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방들이 죽은 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다고 설마 이 많은 방들이 단 한 사람을 위한 것이겠는가? 개인 실로 마련된 방들이긴 하지만, 각 방마다 놓여있는 사진은 분명 얼굴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즉, 나만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장례가 여럿 치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돌아다녀본 결과로 이미 영혼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뒤였지만, 나는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인연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않은가! 죽고 난 다음의 영혼을 찾기가 힘들다면 이제 곧 죽을 사람 옆에서 영혼이 나오길 죽치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병원이란 곳은, 그 특성상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곳이 아니던가! 곧 죽을 사람 구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나는 친구 생겨서 좋고, 신참유령도 외롭지 않아 좋을 테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제잡고, 꿩 먹고 알 먹고 인 것이다! 이~예쑤!! " 좋아! 그럼 이제 가 볼까나? " 즉시로 결정을 한 나는 내 장례가 치러지고 있는 병동 안을 미련 없이 벗어나서 지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전혀 슬프지도 않은 주제에 체면치례상 장례를 치르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내 언젠가 영력(?)이 높아져서 기(氣)만으로도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경지가 되면, 제일먼저 가족들부터 놀래켜 주고 말 테닷! (아무래도 '사랑과 영혼'을 너무 많이 본 듯.) 누군가 지금 나에게 현재의 심정을 세 가지로 표현해보라면, 난 서슴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황당하고, 황당하며, 황당하다. 정말 내 평생에 이토록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던가! 종합병동에서 중환자실을 찾는 건 의외로 간단하고 편했다. 우선 현관 1층에 걸려있는 병원 층 안내판도 있었고 벽을 자유자재로 통과하는 영혼인 덕분에 계단을 일일이 오르거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중환자실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난 동지(?)를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여전히 의욕에 불타오르는 상태였다. 지금도, 아니 앞으로의 며칠까지도 나를 황당하게 만들어 버릴 그 일이 생기기 전까지 말이다. 중환자실은 평소에 생각해왔던 이미지대로 숨 막히는 긴장감과 음침한 분위기가 여기저기서 풍겨 나오는 곳이었다. 일반 병실의 환자들과는 달리 이곳의 환자들은 그야말로 생사를 오락가락 하는 사람들뿐이라,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알 수 없는 상태. 앓는 환자 자신이나 지켜보는 가족이나 괴롭기만 할뿐인, 온갖 슬픔과 고통의 밀집장소인 것이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고.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거나, 그 사용여부를 심히 의심해 봄직한 복잡한 기계들을 몸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끔찍한 것은 그렇게 달려진 기계들이 대부분 생살을 뚫고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면 저런 식으로 기계를 몸에 매달 수 있는 걸까? 차마 눈뜨고 봐줄 만한 광경이 아닌지라, 나는 필사적으로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 사람들 옆엔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명 이라는 게.. 저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남아서까지 지켜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것인가? 나 같으면 차라리 영원한 안식을 얻는 쪽을 택하겠다. 생살을 뚫고, 약물을 복용하고, 기계에 의존하며 생을 연맹 하는 건 어쩐지 바보 같아.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조금 매정 한건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노력했다. 조금 씁쓸하긴 하지만. 난 그야말로 이미 죽어버린 몸이 아닌가? 살아있는 저들과는 이미 차원이 다른 몸이시다~ 이거야. 저들을 동정하고 위로하는건 죽은 내가 할짓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면 모를까. 때문에 나는 다시금 당당하게도 처음 중환자실을 방문하려고 했던 목적인- 누군가 죽어나가기를 끈기있게 기다리고 있었다. " 사..상민아! 안돼!! 눈을 떠 상민아! " " 오빠! " 내가 운명이 없다고? 내 바램이 너무 지나쳤던 탓일까. 중환자실에 올라온 후 그다지 별로 시간이 흐른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통사고라도 당한 모양인지, 환자 가운 안으로 온통 붕대 칠을 하고 있는 내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 한명이, 산소 호흡기를 쓰고 있는 데도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온몸을 사정없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달려와 여러 가지로 손을 써보고는 있었지만 소년의 사그라드는 호흡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의학지식이 전혀 없는 내 눈에도 그 소년은 이미 가망이 없었다. 왜냐하면.. 소년의 영혼이 그 육체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 허억... "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그 리얼한 광경을 눈앞에서 똑똑히 목격한 나는 그저 숨을 크게 들이쉬는 것 말고는 어떤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무슨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미 딱딱하게 식어버린 녀석의 누운 몸 위로, 옆의 벽면까지 그대로 허옇게 비취는 투명한 모습을 가진 또 하나의 녀석이 서서히 일어섰던 것이다. 차라리 영혼이나 죽은 시체인, 둘 중 어느 한쪽만 보였다면 이렇게 간담이 서늘하지도 않았을 것을.. 판박이로 닮은 똑같은 녀석의 상반되는 두 가지 모습이 동시에 보이자 그저 비명을 질러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나도 영혼인 주제에! .. 아무튼 소년의 영혼이 그 육체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킨 순간, 의사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고, 소년의 가족들은 오열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완전히 죽은 것이다. " 자아. 그럼 면상이나 터볼까나. " 소년의 가족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었던 만큼 나는 아직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것 같은 녀석에게 반갑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 파아아앗. "..... 엉? " 소년의 영혼이 앉아있는 병실 침대 옆으로 난데없는 빛 무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도 울고 있는 사람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평범한 빛이 아닌 게 분명했다. 놀란 나는 신참 녀석(?)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고 정말 소심하게도 벽면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고개만을 내밀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동태만을 살피기로 한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용기 없고, 꿀꿀하며, 소심함의 극치를 달리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 직후 보이는 장면으로 인해 난 내 행동에 스스로 부끄러워할 겨를도 없이 두 눈만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 뭐야 저 사람들은? ' 빛 무리에서 걸어 나온 것들은 분명 사람이었다. 그것도 외국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끝내주게 잘생긴 서양인들이었는데, 빛에서 나온 두 사람 모두 현대의 옷차림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그리스시대에나 입었을법한 하늘하늘한 천 소재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거기다 머리는 어찌나 긴지 별다른 장식이나 꾸밈없이 길게 기른 머리카락이 등 뒤를 넘어 발끝까지 치렁거렸다. 잘생기긴 잘생겼지만 그래도 남자인 주제에 저러고 다니다니. 아무리 사람들 눈엔 안 보인다지만 정말 잘도 저러고 다니는 구나, 쪽팔리지도 않나 싶었다. 그 화려하고도 화려하고 민망하다면 민망스러운 차림을 한 남자들은, 익숙한 일인지 아무 거리낌 없이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에게 다가가더니 녀석을 사이에 두고 자기들끼리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 물병 자리 생 최상민, 국적 한국. 16세의 고등학생. 사인은 교통사고입니다. 운명부에 기록이 끝났습니다. " " 이동은? " " 내세의 길을 걸어야 할 겁니다. 짊어진 업이 너무 많습니다. " " 그렇다면 중앙소속이로군. 오늘 영혼은 이것으로 마감인가? " " 일단 저희 파트는 그렇습니다. " 똑같은 금발이었지만, 약간 주황빛이 도는 금발 쪽 머리가 백 금발 쪽의 남자보다 지위가 더 높은 듯 보였다. 일방적으로 보고하던 다른 쪽 (백 금발) 남자의 대답을 마치자, 그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직도 멍하니 앉아있는 소년의 팔을 잡아 가볍게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완전히 한손으로 나무에 매달린 원숭이 꼴이었지만, 들어올린 남자나 잡혀있는 소년이나 별다른 감정은 없어보였다. 그는 그렇게 소년을 잡고 있는 상태 그대로 고개만을 돌려, 부하로 보이는 다른 쪽 금발머리의 남자에게 입을 열었다. " 이만 돌아가지. " " 예. 프레우니스님. " 파-앗. ....... 하. 하. 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응? 내가 지금 뭘 본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빛 무리와 세 명의 영혼들을 보며,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저 멍하니 그들이 있던 장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챌 수가 있었다. 아니, 바보가 아니라 면 야 눈치 채지 못할 리가 있겠는가! 저렇게 뻔한 상황이 눈앞을 오갔는데! "..... 날 안 데리러 오길 래 저승사자 따윈 없는 줄 알았 는데.. " 살아온 한평생도 순탄치 않았거늘. 이제 저승세계까지 나를 물 먹이자는 건가? 서럽고 억울 하다기 보다는 화가 제일 먼저 치밀었다. 저 녀석은 데려가고 난 안 데려가는 이유가 뭐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 했기에? 나 죽을 땐 영혼 담당하던 저승사자가 어디 화장실이라도 갔었다냐?! 이럴 순 없어! 이럴 순 없음이라고~! 나는 필사적으로 방금 보았던 사실을 잊기 위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자. 나는 아무것도 안본거야, 아무것도 보지 않았어. 방금 내 눈앞에선 아무것도 안 죽었고, 코스프레 차림의 외국인들도 나타나지 않았어. 결정적으로, 그들이 죽은 소년의 영혼을 데려가는 꿈같은 상황도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나를 안정시키는 말을 되 뇌이며, 스스로 끝없이 세뇌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하면 이 서러운 감정과 치미는 억울함이 어느 정도 씻겨나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사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결국, 별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한가지의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역시 저승세계는 날 따돌리고 있었어!!!! ' 처음엔 그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다른 영혼들을 찾아다니기에 바빴었다. 응급실이며 중환자실은 기본이고, 일일이 일반 입원실까지 돌아다니는 수고도 아끼지 않으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죽는 그때마다 전에 보았던 빛 무리는 어김없이 나타났고, 등장하는 저승사자는 모두 달랐지만 어찌됐든 영혼을 데리고 다시 돌아가기를 계속하는 거였다. 5 명을 발견했는데, 그들 모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저승사자에게 영혼이 인도 되었다. 이러니 저승세계가 날 따돌리는 게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이야!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처음엔 '어디 한번 두고 보자'하고 독을 품은 채(?) 지켜보던 나도, 하루가 1년같이 지나갈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정말 실수로 안 데려간 거였으면 어쩌나. 그래서 지금도 날 찾고 있는 거면 어쩌지? 이대로 이곳에 영원히 혼자 있게 되는 건 아닐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날 보거나 만질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는 이런 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얼마 안 가서 미쳐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날더러 이대로 영원히 혼자 떠들고, 혼자 웃고, 혼자 장난치며 놀라는 거야? 말해두지만, 그건 지옥의 형벌 중에서도 가장 끔찍하고, 괴로우며, 잔혹한 벌이 될 것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그래서 나는 한참을 고심하고 궁리한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것은.. 조금 억울하고 민망하고 남사스럽고 수치스럽고 창피하더라도 남자답게 정정당당히!!.... 저승사자들한테 가서 나도 데려가 달라고 매달리는 거다. 제길. 무슨 자수해서 광명 찾자도 아니고, 내 잘못은 어딜 봐도 없는데 자존심도 버리고 내가 매달려야 하다니. 크흑. 생각할수록 원통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대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것 보단 백배 더 낫지 싶어서 자존심이란 놈은 마음속 깊은 곳에 살포시 묻어두기로 했다. 장하다 강지훈. 원래 인생은 스스로 개척하는 거라잖아? 지금의 비굴함이 후에는 너를 더욱 빛나게 만들고 말거야. 넌 할 수 있어!! 일단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그 즉시 저승사자가 나타날만한 장소를 물색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생사를 오락가락하는 중태에 빠진 환자를 찾으러 다녔다는 소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응급실에 실려 온 중환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아아. 이 사람 이미 늦었네. 벌써 혼이 몸을 일으키고 있잖아. 쩝. 나로서는 이득이지만 저 사람 가족들은 안됐군. " 이미 며칠째 보던 광경이지만 다시 봐도 언제나 으스스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사라져가는 호흡을 살린답시고 충격마사지다 뭐다 하면서 급히 응급처리를 하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로 인해 주변은 아수라장이었지만, 육체에서 떠난 영혼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마치 잠들어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지난 며칠간 으레 그랬듯이 빛 무리가 나타나기 전에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앞에 다가서며 저승사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들 대부분이 저승사자가 올 때까지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거다. 대개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상태고, 정신을 차린다 해도 이미 저승사자에게 손목이 잡히고 난 후라 '아'소리도 못하고 저승으로 끌려가는 것이다. 지금도 내 앞에 멍하니 있는 여자영혼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하나도 없다. 육체에서 분리될 때의 충격이 큰 걸까? 나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눈앞에서 손이라도 한번 흔들어 볼까 하고 내가 잠시 쓸데없는 고민에 빠지던 때였다. - 파아앗. " 오옷, 드디어 왔다! " 나 때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착실히 번쩍이며 나타나는 빛 무리를 보며, 나는 반가움과 동시에 씁쓸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느껴야만 했다. 이윽고 희뿌옇게 빛 덩이를 토해내던 밝은 공간 안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 어? 저 녀석 들은..' 긴장해서 바라본 저승사자들은 내 눈에도 상당히 낯익은 모습이었다. 발끝까지 흘러내린 금발머리카락에 그리스 식 옷차림. 그리고 모델 뺨치는 곱상한 외모. 내가 제일 처음에 발견한 영혼을 데려갔던, 바로 그 저승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제껏 한번도 같은 저승사자를 두 번 이상 본적이 없던 지라 그들을 본 내 두 눈이 휘둥그레지는 건 당연했다. 이게 바로 인연이라는 건가? 그들은 전에 했던 방식 그대로 여자의 영혼 옆에 서더니, 곧 한사람은 보고하고 한 사람은 그것에 짧게 답하는 식으로 대화를 나눠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무심코 내 쪽을 돌아본 백금발의 남자가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되는 것이었다. " 좋아, 그렇다면 이 영혼의 이동은... 응? 표정이 왜 그러지, 하레스? " " 프..프레우니스님.. 저.. 저 소년은.. " " 응? 무슨 소리를.. 헉!!! " 보고를 하던 남자의 경직된 자세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남자는,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아마도 이제껏 나를 살아있는 사람으로 여겼던 모양인데, 내 시선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걸 알고는 내가 영혼인 걸 깨달은 것 같다. 그들은 한참이나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깜빡이다가, 민망해진 내가 헤벌쭉 웃어주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무척 허둥대는 모습을 보였다. " 이..이게 어찌된 일이냐 ,하레스? 어째서 영혼이 인도자도 없이 저리 혼자 돌아다니는 건가!" " 그..그것이 .. 그..그럴 리가 없는데? 오늘 운명이 다 한 영혼 중에 저런 아이는 없었습니다, 프레우니스님. " " 뭐? 그럼 저건 영혼이 아니고 대체 뭐라는.. " " 당연하죠, 전 오늘이 아니라 벌써 일주일도 더 전에 죽었으니까요. "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더 지켜볼까 했지만 난 곧 순순히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내가 죽은 건 이미 열흘이 넘었으며, 계속 날 데려가줄 존재를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도 없어서 직접 당신들을 찾아왔노라고. 그러나 그들은 나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더욱 불신의 빛을 띄우며 의심스럽게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그럴 리가 없다. 영혼이 생기면 그 파장은 자동으로 우리 인도자들에게 전해지게 되어있단 말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열흘씩이나 인도자들이 너의 파장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엇?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죽은 자 특유의 파장이 느껴지지 않는 거냐? " " 그것뿐만이 아닙 니다- 프레우니스님! "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프레우니스라는 남자 옆으로, 하레스란 이름의 백 금발 남자가 황급히 끼어들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것은 투명한 판넬에 끼워진 얇은 가죽종이 였는데, 무언가를 위한 기록용인 듯 빼곡한 글씨가 적혀있었다. " 저 소년이 죽었다는 4월 26일의 기록 어디에도 '강지훈'이란 소년은 없습니다. 거기다 더욱 곤란한건.. " " 영혼이 이렇듯 멀쩡히 눈앞에 있는데 기록이 없다니? 설마 유체이탈인가.." " 아닙니다. 단순한 유체이탈로는 영혼이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몸 안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저 소년의 말에 의하면 이미 육체는 소각된 모양인데, 유체이탈의 경우 이런 상황이면 십중팔구 '죽음'으로 기록되어 운명부에 이름이 올라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 " 연고가 없는 영혼이 있는 것 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단 말인가? "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심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나는 어쩐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냥 '나 왜 안 데려 갔어요?' 하고 물어보면 '아니! 이런 실수가 있었다니!'하고 잠자코 저승세계로 데려갈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귀신 보듯 -아니 엄밀히 따진다면 귀신으로 볼 수도 있지만- 바라보면서 잔뜩 경계만 하는 게 아닌가. 가뜩이나 미운털 박힌 저승 계에 또다시 불만이 쌓여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던 나 역시, 하레스란 남자의 다급한 외침엔 돌덩이가 된 것 마냥 딱딱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 이 소년의 존재 자체가 생명부에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운명이 없는 아이'입니다! " " !!! "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내가 '운명이 없다'니? 비록 구박만 받는 심히 불쌍한 인생을 보내왔다지만 엄연히 나에게도 기억하는 과거가 있고 죽지만 않았다면 앞으로 이어질 창창한 미래도 있었다. 그런 내가 운명이 없다니!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은 그럼 뭐라는 거야! 니들 장난 하냐?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충격에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 나란 인간은 죽고 난 이후부터 제대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도 없느냔 말이다!! " 운명이 없다? 그게 무슨.. 애초에 운명이 없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 " 저도 그 점이 의문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이 영혼은.. "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하레스란 남자가 얼빠진 내 얼굴을 힐끗 바라 보았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그의 상관에게 더듬더듬 거리며 말을 이었다. " 결정자 '아레히스'께 데리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 *** 곳곳에 상아색 기둥이 세워진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홀이 눈앞에 드러났다.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의 넓은 공간은 모조리 흰색 일색이었는데, 기둥을 장식하는 오밀조밀한 꽃이며 창문에 달려있는 고급스런 커텐, 심지어 창문을 장식한 스테인 글라스의 색깔까지 투명한 흰색이어서 가뜩이나 밝은 공간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바닥에 깔려진 대리석은 신기하게도 투명에 가까운 은색이다. 걸을 때마다 자그맣게 들리는 사박거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딱히 구경 할 거리는 하나도 없다. 앉아 있을만한 의자라든지, 식탁 같은 것도 눈에 띄지 않았다. 벽에 그림이 달려져있는 것도 아니고, 기둥에 장식된 꽃들이 특이하거나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다. 티끌하나 묻어있지 않은 하얀색 꽃은, 마치 석고로 빚어놓은 것 같아서 오히려 인공적인 위화감만 조성하고 있었다. 그저 희뿌옇게 빛나는 공기 중의 빛 덩이가 유일한 호기심 거리랄까? 하얀색 외에는 어떠한 색도 담고 있지 않은 넓은 공간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니, 꿈을 꾸는 듯한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생명부에 기록이 없다느니 운명이 없다느니 떠들어대던 저승사자들은 한동안 호들갑을 떨며 안절부절 하더니, 곧 하레스란 남자의 제안으로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직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누군가를 데려온다고 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도 외국인의 이름은 외우기도 어렵고 그다지 기억해 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겠으니까. 하아. 그나저나 정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모르겠네. 이대로 넋 놓고 있어도 괜찮은 건가? 위기를 느끼고 탈출하고 싶어도 지금 내가 있는 이 공간은 어떻게 되어먹은 곳인지 나가는 문짝하나 벽에 달려있지 않았다. 영의 세계답게(?) 문 없이 통과해서 다니는 건가하고 다가가 봤지만 통과는커녕 무시무시한 방전만 일으켜서 하마터면 감전사(?) 당할 뻔했다. 아마 일정거리 이상 허락되지 않은 자가 벽에 다가오면 전기를 내뿜도록 되어있는 모양이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면.. 아까의 그 사자들은 저 벽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했기 때문이다. 쳇. " 아아. 심심해에.. 언제까지 이렇게 놔둘거냐고오~~~ " " 이런,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지훈군. " " !!! ..... " 그다지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적막한 흰 공간에 혼자만 덩 그라니 앉아있자니 심심해서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날 버리고 가버린 저승사자들을 속으로 열심히 씹으면서 푸념처럼 한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바로 그 순간 낯선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움찔하며 경계하는 시선으로 돌아보니 언제 왔던 건지 날 이곳에 데리고 왔던 저승사자들과 한명의 사람(?)이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서있던 것처럼 태연하게 서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아.. 안녕 하세요 " 허억.. 내가 원래 이렇게 얼빵 했던가.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존재에게 내가 제일 처음 취한 행동이란 것이.. 바로 '안녕 하세요'라는 인사였다, 인사.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예의가 발랐다고!! 스스로가 해놓고도 민망하고 어이가 없어서 내 얼굴은 순식간에 불타는 화로처럼 붉게 물들어 버렸다. 새로 등장한 인물의 양 옆에 서있던 저승사자들이 킥킥거리며 웃는 것이 보인다. 크아악 걍 죽어라 강지훈 너 왜 이러고 사니, 응? ... 아. 나 이미 죽은 거지. 참.. .. 바보는 죽어서도 못 고친다는 말이 사실이었단 말이냐!!!! " 후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럼 제 소개부터 할까요? 제 이름은 아레히스입니다. 영의 분배와 관리를 책임지고 있지요. 직분으로 치자면 지훈군이 살던 세계에서 말하는 부장 급쯤 되겠군요.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을 아레히스란 이름으로 소개한 남자는 어깨까지 기른 검은색 머리카락에 푸른색 눈동자를 지닌, TV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미남이었다. 그의 뒤에 서있는 저승사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하얀색 계통의 부드러워 보이는 천으로 몸을 감싼 그리스 식 옷차림을 한 그는, 전체적으로 무척이나 고풍적인 분위기의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풍기고 있었다. 만약 우리 반의 남자킬러 송혜은이 봤다면 벌써 팬클럽을 결성해서 쫓아다니고도 남을 경이적인 외모랄까? 남자인 내가 봐도 이렇게 가슴이 벌렁거리는데 여자애들이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얼굴 잘생겼지, 친절하지, 지위도 높지.. 으으 영의 세계라는 것도 별거 없구나. 어딜 가도 불공평은 존재한단 말인가!! 아..아참 내 소개도 해야지. 그의 외모에 놀라느라 뒤늦게 소개를 듣고도 멍하니 있었던 걸 깨달은 나는, 황급히 정신을 수습하여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려고 했다. " 아.. 죄 죄송합니다. 저는.. " " 알고 있습니다. 강지훈 군. 실례였지만 이곳에 오기 전에 당신의 리스트를 미리 흩어보았습니다. 프레우니스와 하레스가 놀라서 저를 찾은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더군요.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당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찾아드리기 위해서입니다. " " 원래 있어야 할 곳? " "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무척 길어질 것 같군요. " 이 적막한 공간에 앉을 곳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설마 바닥에 주저앉자는 소리인가? 이해를 못한 내가 눈만 동그랗게 뜨자 아레히스란 남자는 또 쿡쿡하고 웃더니 그저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리는 것으로 모든 행동을 마쳤다. 그래서 누군가가 의자라도 가지고 오나 하고 기대하던 나는, 갑자기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제대로 놀라지도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서 넘어질 뻔 한 것이다. " 허억.. " 그것은 공간의 뒤틀림이었다. 나로서는 정말 그렇게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아레히스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마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지만, 나름대로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던 하얀 공간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이 모양이 일그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이한 현상은 놀란 내가 제대로 입을 뻐끔뻐끔 거리기도 전에 제자리를 찾는 듯 한참이나 뒤엉키더니, 정신을 차린 순간 아까 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 되어있었다. 마치 근대의 유럽식 귀족 별장과도 같이 화려한 방안에, 바닥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4명이 충분히 앉을 수 있는 숫자의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있는 공간으로 말이다. 나는 그냥 한자리에 서있었을 뿐인데.. 어째서 뒷 배경이 지 멋대로 바뀌는 거야! " 자, 여기에 앉으세요. " 서울에 갓 상경한 시골뜨기 마냥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상냥하게 웃으며 테이블의 한쪽의자를 가리켰다. 결국, 나는 영의 세계라서 일어나는 신기한 현상이려니 ..하고 억지로 납득하고 체념하면서 권해주는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표정들을 보아하니 저들에겐 이런 현상이 너무도 당연하고 익숙한 것인 듯한데, 나 혼자만 당황하고 놀라워해봤자 나만 바보가 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분위기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아레히스는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머릿속에서 정리하는 듯 잠시 침묵을 지키더니 곧 투명한 판을 하나 꺼내어 내 앞으로 내밀었다. 재질을 전혀 알 수 없는 판에는 마치 물감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여러 가지의 색깔이 동그란 모양으로 그려져 있었다. "......? " 처음 보는 물건에 의문을 보내는 내게, 아레히스는 물건에 대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려는지 다른 말로 화제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우선, 지훈군에게는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번 일은 전적으로 저희 쪽의 착오에 의해서 생긴 사고였습니다. 영혼의 분배가 잘못 되었달 까요? 지훈군은 피해자입니다. " " 영혼의 ..분배요? " " 내세의 길을 걷는 영혼이든 새로 창조된 영혼이든 일단 육체를 빌어 태어나는 영혼들은 모두 이곳 명계에서 분배의 과정을 거쳐 그 나름대로의 정해진 운명의 궤도를 걸어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분배과정 연산에 착오가 생겨서 원래 가야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억지로 분배 되는 경우가 있지요. 지훈군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혹..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받지 못하지는 않았나요? " " !! " 불에 데인 듯이 화들짝 놀라는 내 반응에 아레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약간의 연민과 죄책감, 동정이 어린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 그들에게는 지훈군이 자신들 가족의 운명에 정해지지 않은 존재였으니 소홀히 대하는 것이 당연했을 겁니다. 아마 그들도 지훈군을 홀대하면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왜 우리는 이 아이를 냉대하는가' 하고 말이지요. 저희들의 실수 때문에 지훈군이 받지 않아도 될 상처를 입게 만들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흐음. 뭐 그런 거라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데. 사실 내가 너무 둔감한건지 무식한건지.. 가족들의 그 심오한 냉대를 있 는대로 받아왔으면서도 별로 상처받고 살지는 않았었더랬다. 아니면 너무 일찍 그런 대우를 받아버린 바람에 감정도 못 느낄 만큼 익숙해져 버린 것 일수도 있고. 아버지가 구타를 할 때는 억울하고 서러운 느낌이 들긴 했지만. 뭐, 그것도 몸이 아픈데 그런 느낌을 안 받는 게 더 이상한거 아니야? 그리고 말이 좋아서 말이지, 사람을 실수로 죽여 놓고 사과하면 땡이냐? 아, 내 경우에는 실수로 잘못 태어나게 한거지만. 어쨌든. 잘못을 인정했으면 이제라도 고치면 되지 않겠느냐고. 캬캬캬.. " 저어. 그런데 운명이 없다는 소리는? 생명부에도 제 기록이 없다고 그러던데.. " " 아, 그건 지훈군이 잘못 태어나는 바람에 원래의 태어나야할 장소에 공백이 생겨서 그런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훈군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분배의 과정을 기다리는 영혼인 셈이지요. 태어나지 않은 자에게는 운명이 없으니까요. " 허거걱. 그럼 내가 이제껏 산 것이 다 무효라는 소리? 죽어라 풀고 있던 시험문제가 잘못 된 거라면서 새 시험지로 교체되었을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까? 할말을 잃고 망연자실해 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다음 말을 이었다. "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훈군이 지금껏 살아있었다는 게 더 신기했습니다. 왜냐하면 운명이 없는 영혼을 담은 육체는 영혼과의 단결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조금 큰 충격에도 쉽게 영혼과 분리가 되기 때문이죠, 지훈군은 몸을 굉장히 소중히 다루었던 모양입니다. " " 하...하...하... " 어쩐지.. 별로 심하게 부딪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죽어버려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저 이 험한 세상, 몸이 재산이라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사려왔던 것이 이리 될 줄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어려서 사리분별을 하지 못할 나이에 죽었다면 스스로 인도자를 찾아가지 못해서 우연히 발견되기까지 영원토록 혼자서 떠돌아 다녔을지도 몰랐다는 것이다. 그 말을 아레히스에게 듣는 순간, 상상만으로 너무 끔찍하고 소름끼쳐서 그나마 나에게 운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스스로 얼마나 위안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운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 자, 그럼 지훈군의 원래 위치를 찾아보도록 할까요? 이것을 봐주십시오. " 이미 지난 17년의 공백이 있기 때문에 되도록 빨리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 아레히스가 나에게 내민 것은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 꺼내두었었던, 투명한 판에 물감이 여기저기 찍혀있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아레히스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 이것은 '소울 메이트'라는 것으로 여기 묻혀진 색깔들은 영혼의 운명을 나타내는 겁니다. 이렇게 보여도 주신의 신력으로 만들어진 신뢰성이 높은 물건이죠. "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아레히스 자신부터 전혀 믿음이 가지 않는 시선으로 그 물건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저런 행동을 취하면서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건가? 나는 불안함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면서 판에 그려져 있는 여러 개의 색깔들을 흩어보았다. " 뭘 어떻게 하는 건데요? " " 음..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색깔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정말 쉽지요? " .. 겨우 그것만으로 운명의 위치를 찾을수 있다고? 다시금 불안한 심정으로 아레히스를 못미덥게 바라봤지만, 아레히스도 그렇고 옆에 앉아있는 두명의 사자들도 연신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바람에 할 수 없이 시선을 다시 소울 메이트에게로 돌렸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속아주는 셈치고 그냥 색깔이나 골라 볼까나? 가장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기만 하면 된다고 했으니 어려울 것도 없겠다, 좋아 까짓 거 해보지 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울 메이트의 색깔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묻혀진 파레트처럼 가지런히 정돈 되어있는 색깔들은 7종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각기 초록색, 붉은색, 검은색, 흰색, 금색, 파란색.. 그리고.. " 이게 가장 마음에 드네요. 이 색깔로 할래요. " 그것은 투명하도록 맑은 연녹색의 빛깔이었다. 거기다 각도를 다르게 볼 때마다 색깔이 조금씩 달라졌는데, 그 때문인지 다른 색들보다 훨씬 더 반짝이고 신비해보였다. 물감으로 혼합한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런 빛깔을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고 신기했다. " 어디 볼까요? 지훈군이 선택한 색...은.... " " 헉! 아레히스님! 이건!!! " " .....엉? " 뭐..뭐야? 왜들 그러지? 유쾌한 표정으로 내가 색깔을 고르기를 기대하고 있던 아레히스와 사자들은 내가 가리킨 연녹색의 빛깔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안색이 달라졌다. 그리곤 한참이나 무언가를 가져오거나 자료 등을 찾는 듯 술렁거리기 시작했는데, 상황을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설마 내가 고른 색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그저 빛깔이 예뻐서 선택한 것뿐인데. 으으..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잖아! 그냥 다른 걸로 바꾼다고 할까? 불안해진 내가 색을 다시 골라도 되냐고 막 물어보려던 때였다. 마침 그들끼리의 대화가 끝났는지 다시 침착한 표정이 된 아레히스가 나를 똑바로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 하아. 이거 정말 행운이랄지.. 운명이랄지.. 아무래도 드디어 찾은 것 같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 " 예? " " 지훈군은 모르겠지만 이 소울 메이트의 선택은 단순히 마음에 드는 색깔을 고르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기서 선택된 색은 비록 아무렇지 않게 찍는다거나, 누군가의 강요로 이뤄진 것이라고 해도 반드시 그의 운명의 색깔을 선택하도록 되어있지요. 예를 들어 지훈군이 다시 색깔을 선택할 기회를 부여받는다 해도 지훈군은 반드시 이 색에 다시 끌리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지훈군의 운명의 색이기 때문이죠." 아레히스는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고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격양되어있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그의 두 뺨은 아까전과는 달리 옅은 붉은색으로 상기되어있었다. " 여기 있는 색깔들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소울 메이트의 첫 번째 색은 영혼에게 부여된 육체의 종족을 나타냅니다." " 종..족이요? " " 그렇습니다. 지훈군이 살던 세계에는 생소한 단어겠지만 무수한 타차원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들이 수없이 존재하지요. 초록색은 초목을 상징하는 엘프, 붉은색은 열정을 상징하는 인간, 검은색은 어둠을 지배하는 마족, 흰색은 신성을 상징하는 신족, 파란색은 고귀함을 상징하는 드래곤, 그리고 금색은 뛰어난 기술성을 상징하는 드워프입니다. 그리고 이 연녹색은.. 부연과정이 더 필요하겠군요." "......? " 판타지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려한 종족의 순서가 모두 지나고 나자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내게 아레히스는 생긋 웃더니 곧 또 다른 소울 메이트를 꺼내어 내 앞에 내밀었다. 전거와는 다르게 단 네가지의 색만이 담겨있는 소울 메이트에는 각기 파랑, 빨강, 금색, 그리고 흰색이 가지런히 병렬되어있었다. 내가 다시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아레히스는 다시 한번 색깔을 고르도록 권유했고, 결국 난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다시 소울 메이트에게로 시선을 집중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고른 것은 사파이어보다도 푸르고 반짝거리는 시원한 파란색의 빛깔이었다. 갑자기 목이 말라 와서 선택한 것뿐이었지만, 내가 그걸 고르는 순간 아레히스는 무척이나 진지해진 표정이 되더니 '역시..'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리곤 여전히 영문을 모르 고있는 내게 천천히 설명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 지훈군. 이 전 생에 있었을 때, 몸이 약하거나 잔병치례를 자주하지는 않았습니까? " " 예? 아..네. 체력이 약한 편이긴 했는데.. " " 비가 자주 오거나 태풍, 혹은 장마로 인한 피해를 입은 적은요? " " 직접적인적은 없었지만 매년 여름마다 수해가 나긴 했어요. 장마가 길기도 했고요...그게 무슨 문제라도? " 그러고 보니 내가 태어나던 해부터 죽기 전까지의 한국의 여름은 지독하게도 비가 자주 내려서 사람들의 원성을 들었던 것 같다. 거기다 요 몇 년 전부터는 무슨 심술인지 날씨의 기승이 더욱 심해진 터라 수해민의 피해가 갈수록 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그 이야기가 왜 지금 여기서 아레히스의 입을 통해 회상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무효로 돌아가 버린 전생인데 죽어버린 지금에 와서 무슨 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지금은 원래의 내 위치를 찾고 있는 중이 아니었던가. " 아아,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눈빛이군요. 지훈군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지금부터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아까 전에 지구만이 아닌, 여러 종족이 존재하는 타 차원이 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런데 그 차원중의 하나인 '아크아돈'에 재앙이 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벌써 10년 이상을 비가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 " 헉? " " 다행히도 그곳 사람들의 자체적인 힘으로 인공 비를 뿌리는 등, 사태의 최악으로 치닫는 길은 막고 있지만 그것도 언제까지 유지될지 아무도 모르는 위태한 상황입니다. 주신이 허락하신 재앙이 아닌지라 한때 이곳을 포함한 명계와 모든 신계의 관리들이 원인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 했었죠. 그리고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아냈습니다. " " 뭐..뭐였는데요? " 나랑은 상관이 없는 얘기였는데도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잔뜩 긴장한 채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자 아레히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니 곧 다음 말을 이었다. " 아크아돈은 주신이 직접 개입하는 지구와는 달리, 4대 정령을 통해 자연계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특히나 각 정령왕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생태계의 흐름을 좌지우지 할 수 있을 정도죠. 정령왕들의 수명은 대략 1만에서 2만 사이이며 그들이 죽게 되면 곧바로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여 그 뒤를 잇게 됩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번 아크아돈에 물의 정령왕이 소멸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았던 겁니다. 10년간의 재앙의 원인은 바로 거기에 있었죠. " " 겨우 그거 하나로요? " 물의 정령왕인지 뭔지 하나가 없다고 10년간이나 비가 내리지 않는단 말인가? 어이가 없어진 내게 아레히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겨우'가 아닙니다, 지훈군. 그 만큼 정령왕의 존재가 대단한 겁니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한다면 모든 자연계의 '물'에 대한 권리와 통제가 가능한 존재니까요. 아무튼 그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는 바람에 신계와 명계는 다시 한번 발칵 뒤집혔습니다. 정령왕으로서의 분배를 기다리고 있던 영혼이 갑자기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뒤늦게 발견되었거든요. 아, 정령왕들도 영혼이 있습니다. 다만 인간의 경우와는 조금 달라서 육체가 아닌 자연의 기운을 빌어 태어나지요. 소멸이 가까워진 정령왕은 이곳 명계에 와서 주신이 창조한 순결한 영혼에 자신의 모든 힘을 부여하여 정령왕을 만든 후,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의 길을 걷습니다. 그럴 경우 가장 많이 환생하는 케이스가 '드래곤' 이란 종족 이죠- 이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겠습니다. 어찌 됐든 이미 정령왕 으로서의 힘을 부여받은 영혼은 이제 자연과 동화되어 정령계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라졌으니 저희로서는 정말 난감한 상황일 수밖에요. " 속사포로 말을 마친 아레히스는 지금도 생각하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니 오한이 이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째 처음에 보았을 때 느꼈던 신비하고도 이지적이던 분위기가 상당히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아레히스는 전혀 쑥스러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그러고는 정말로 태연한 목소리로 엄청난 소식을 나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 그런데.. 오늘 드디어 그 정령왕의 영혼을 찾아내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지난 십 수 년 간 그를 찾기 위해 고생했던 모든 일들이 물거품처럼 아득해 지네요. " " 예? 찾았어요? 어디에 있는데요? " 혹시나 운이 좋으면 그 대단한 존재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나는 눈빛까지 반짝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그 즉시 바로 대꾸한 아레히스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 정령왕에게 소개 좀 시켜 달라는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질렀을지도 몰랐다. 아니. 평소의 내 성격을 짐작하건데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정말로 바보 같은 행동을 말이다! " 어디에 있긴요. 바로 제 앞에 앉아계시지 않습니까. " " 네? " 대체 무슨? 아레히스의 앞이라면 나밖엔 없는... 에에엑? 서.. 설마? 순간 당황하는 나를 보는 아레히스의 표정이 무척이나 오만하게 보였던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그는 승기를 잡은 장군마냥 의기양양한 포즈로 입가에 씨익 미소를 띄웠다. 저것 하나만으로도 그렇게나 얄미워 보일수가 없는 것이.. 크윽 아깝다. 저 꽃 같은 외모만 아니었어도 돌이라도 하나 던져 줄 수 있는 것을.. 남 속을 다 뒤집어 놓는 엄청난 말을 꺼내면서도 아레히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 두 번째 소울 메이트의 색은 종족의 지위. 각도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연녹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정령을.. 그 중에서도 사파이어와 같은 시릴 듯한 푸른색은 '물의 정령'을 나타냅니다. 하지만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은 현재 모두 소멸한 상태. 정령왕이 먼저 태어나지 않으면 하위정령들은 태어날 수가 없죠. 따라서 이번 소울 메이트에서 물의 정령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는 '물의 정령왕'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 " 하..하아? " "그동안 운명을 잃은 많은 영혼들에게 시도해봤지만 이 색깔은 선택한 자는 단 한명도 없었지요. 정말 오래 동안 찾았습니다,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 " 에에에에엑?? " *** 옛날옛날~ 아주 먼 옛날에 ~ 세계를 다스리는 4대 정령왕이 있었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불의 이프리트, 바람의 미네르바, 땅의 트로웰, 그리고 물의 엘퀴네스 였어요. 어느 날 물의 엘퀴네스는 자신이 소멸할 때가 다가옴을 알았고, 곧바로 명계에 가서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모든 힘을 부여해 주었답니다. 새로운 물의 정령왕이 탄생한거예요.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새로 탄생한 물의 정령왕은 그만 띨.띨.하게도 엉뚱한 세계에서 잘못 태어나 온갖 구박을 받으며 인간 노릇을 하였 답니다~ 지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면서 말이죠. 참 어이없지 않나요? 글쎄 글쎄~ 명계의 사람들이 잘못을 지적해 줄때까지 자기가 정령왕인지도 몰랐다지 뭐예요? 자기 때문에 다른 쪽 사람들은 물이 없어서 죽어가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것 참 정말 띨.띨.한.놈. 아닙니까? 하. 하. 하. " 글쎄 몇 번이나 말씀드렸지만 이번일은 지훈.. 아니 엘퀴네스 님의 잘못이 아니라니까요. 당신께서 그렇게 자책하실 일이 아닙니다. " 어느새 나에 대한 호칭을 극존칭으로 바꾼 아레히스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심한 자기 모멸감에 빠져 환상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를 더 이상은 못 봐주겠던 모양이었다. " 당신이 잘못 태어나신 건 저희 쪽의 불찰이었으니 당신의 부재로 인한 아크아돈의 피해도 어디까지나 저희 책임입니다. 이미 그것에 대한 여러 가지 시정조치를 취해둔 상태이고, 다행스럽게도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당신을 찾았으니 이제 남은 일은 모든 일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뿐이에요. " 아레히스가 말한 원 상태 라는 것은 내가 아크아돈의 정령계라는 곳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뜻했다.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일말의 불안감 때문에 나는 쉽사리 그의 말에 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 그런데.. 정말 착각하는 거 아니 예요? 나같이 평범한 놈이 정령왕이라니... " 머리가 특별히 뛰어났던 것도 아니고.. 외모도 그저 그래서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만들어 본 역사가 없는 내가 사실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며 확인을 요구하는 말을 꺼내자, 아레히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단번에 정색을 하면서 단 한마디로 나의 생각을 일축해 버리는 것이다. " 소울 메이트는 주신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것. 착각일 리가 없습니다. " " 하..하지만.." " 지훈군이었을 때 몸이 약하다고 했었죠? 그건 정령왕의 강대한 힘을 인간의 육체가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비, 바람과 폭풍이 잦았고, 그것이 해가 지날수록 피해가 커진 것은 당신이 성장함으로서 그 안에 담겨진 정령왕의 기운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죠. 이래도 납득이 되지 않으십니까? " ... 그래도 납득이 안되는 데요?... 사실 저승세계 라는 곳이 이렇게 서양 놈(?)들이 판치는 판타지 풍 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납득이 안 되는 나인데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죽는 순간부터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던 염라대왕은 코빼기도 안보이고. 원래라면 검은 삿갓을 쓰고 창백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야 할 저승사자들은 어디 연예계에 데뷔 시켜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엄청난 꽃 미남들 뿐이다. 안 그래도 딸리는 내 외모에 주변에서 넘실거리는 꽃배경은 정말이지 감당하기 힘들었다. 아아. 내 숯 많은 고수머리가 이렇게 원망스러울 줄이야! 나는 이런 내 심정을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서 아레히스에게 털어놓았고, 그 말을 들은 아레히스는 잠시 어이없다는 얼굴이 되더니 곧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비웃는 듯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째 바보가 된 것 같아서 되게 기분이 나빠지려는데 그는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곧 입을 열었다. " 아, 죄송합니다. 실례를 했군요. 흠.. 그러니까 엘퀴네스님은 이곳 명계가 그 동안 당신이 생각해 왔던 이미지와 많이 달라서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신가요? " " 예? 아니, 뭐.. 조금 놀라긴 했지만.. 적응을 못할 정도는 아닌데요? " 외국인과 마주치면 그대로 석상이 되어버리는 내 버릇이 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에 조금 신기할 뿐이지 별로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동양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한 서운함 정도랄까.. 까짓 적응을 못하면 또 어떻겠는가. 어차피 이곳에서 아주 눌러 사는 것도 아니고. 곧 다른 곳에서 태어난다는데..그냥 신기한 구경하려니 하고 견디는 수밖에. 어쩌면 나는 이미 내가 정령왕이라는 얼토 당토않는 아레히스의 설명도 이런 식으로 억지로 납득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반박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내 대답을 들은 아레히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 그건 다행이로군요. 이제 엘퀴네스님이 돌아가셔야 할 곳도 이곳과 비슷한 분위기거든요. 적응을 못하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 "......." 그것은 그곳 인간(?)들이 꽃 미남들 뿐이라는 소리일까, 아니면 서양인들 뿐 이라는 소리일까.둘 중 어느 하나도 반갑지 않은 나로서는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 질 수밖에 없는 애매모호한 설명이었다. 엘퀴네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다 싶긴 했지만. 이대로 태어나면 서양세계에서 태어나는 건 거의 확실한 듯.. 크흑. 우째 이런 일이! 언어는 정말 자신 없는데에!!! 그나마 보통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을 받았던 다른 과목들에 비해 언제나 전매 특허 미스테리의 최악점수를 매번 영예롭게 기록하던 나의 영어 실력을 떠올리자, 차라리 이대로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맹렬한 유혹에 사로잡혔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레히스는 원래 모든 사람의 생김 샘이는 서양인계열이었다느니, 그러던 것이 사는 곳의 지형과 풍토, 의식주의 형성에 따라 모습이 달라지게 된 것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열심히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들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물론, 이제 막 현실을 깨달은 이유로 몸에 긴장이 잔뜩 들어간 나는 전혀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어? 그런데 지금 생각하니까... 아레히스도 외국인(?) 이잖아? 그런데 나는 어떻게 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는 거지? " 아레히스, 혹시 한국말 할줄 알아요? " 탄생 그리고 만남 나의 뜬금없는 질문에 아레히스는 설명하던 것을 멈추고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떳다. 그리곤 내 질문의 의미를 알았는지 잠시 '아'하고 감탄사를 내뱉더니 큭큭 거리며 짧게 웃었다. " 무슨 소린가 했더니.. 쿡쿡. 엘퀴네스님. 영혼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일 때의 의식이 남아계셔서 착각하고 계시는 거겠지만, 지금 저희가 하는 대화법은 입으로 내뱉는 소리가 아니라 의지로 이루어진 파장의 전달입니다. 아, 그리고 보니 정령어와 비슷하군요. 그들도 의지로 파장을 전달하여 대화하죠. 다시 태어나셔도 대화하시는 데엔 큰 지장이 없을 겁니다. " 그렇다면 지금 말하면서 움직이는 입 모양은 뭔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내게 아레히스는 아직 이런 대화법에 익숙하지 않은 영혼들에게 무의식 적으로나마 대화를 유도해내기 위한 일종의 속임수라고 대답했다. 상대방이 입 모양을 움직이며 말을 걸어오면 영혼도 별 다른 거부감 없이 살아있을 때 하던 대로의 대화를 구사하게 된 다나 어쩐다나. 하긴, 소리는 분명히 들려오는데 어딜 봐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사람들 뿐 이라면 초짜 영혼입장에선(?) 무섭기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영혼으로 떠돌아 다닐 때 궁금해 했었던, 이제 막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왜 그리 멍하니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냈다. 일단 처음에 생각 했었던 데로 육체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영혼이 받는 충격이 만만치 않아서 이기도 했지만, 육체에서 벗어나자마자 바로 정신이 들면 인도자들이 오기 전에 자리에서 일탈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에 그들을 통제할 수단이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하루가 바쁜 저승사자들이 일일이 일탈한 녀석들까지 찾아다니는 수고를 더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금제를 걸어둔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가끔씩 정신이 일찍 깨어 인도자가 도착하기 전에 사라져버리는 녀석들이 간혹 생기는데 그런 녀석들은 운 좋게 발견되지 못하면 귀신이 되어 이승에 남는단다. 그러다 나중에 붙잡히면 구제받을 길도 없이 호된 벌을 받고 가장 구질구질한 내세를 걷게 된다고 하니, 괜시리 이승에 미련이 남는답시고 인도자들을 피해 다니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아레히스의 푸념 섞인 설명이었다. " 아, 그리고 엘퀴네스님의 지금 모습은 진짜가 아닙니다. 인간으로 있을 때 입었던 육체에 영향을 받아서 본래의 모습이 변질되었습니다만,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신다면 그것도 본 모습을 되찾으실 겁니다. " " 그..래요? " 지금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라서 나는 조금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서양세계에 동양인인 지금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데다, 서양인으로서의 내 모습이 진짜 모습이라고 하니 기대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심란해 졌다. 그래도 17년 동안 한결같이 아침 거울을 통해 인사하던 얼굴이랍시고 잘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정이 좀 들었던 모양이다. *** " 이런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서두르셔야겠습니다. 이 이상 아크아돈에 물의 정령왕의 부제를 늘일 여유가 없네요. " 그다지 오랜 시간을 앉아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니었는데 아레히스와 두 명의 저승사자들은 학교 지각하기 1분전의 학생처럼 초조한 기색이 되더니, 마냥 태평하게 앉아있던 나를 재촉해서 일으킨 후 곧 어디론가 끌고(?)가기 시작했다. 이왕 늦은 거 차 한잔 대접해줄 여유도 없나. 여기 손님 대접이 너무 엉망인거 아니야? 무어라 한마디 핀잔을 주고 싶긴 했지만 내 팔을 잡고 걸어가는 아레히스의 굳은 얼굴이 너무나 비장해 보여서 차마 투덜거리지 못하고 속으로만 꿍얼거렸다. 원래 저렇게 성실,친절,온유하게 생긴 것들이 잘못 건드리면 일본야쿠자 보스보다 더 사악한 법이다. 저 젊은 나이에(?) 높은 자리까지 꿰어차고 있는 놈이니 오죽이나 더 하겠는가. 열 받으면 정령왕이고 환생이고 다 때려치우고 당장에 소멸시킨다고 덤빌지도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나는 순순히 아레히스가 이끄는 데로 테이블이 있었던 방을 나와 새하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는 복도는 마치 미로처럼 높은 벽 이곳저곳에 통로가 뚫려있었는데 뿌연 안개 같은 것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앞을 분간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들은 시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는 건지 단 한번도 머뭇거리는 기색 없이 방향을 척척 잘도 정하는 거였다. 탄생 그리고 만남 거침없던 그들의 발이 멈춘 것은, 내가 거의 하루 종일을 걷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이 멈춘 곳은 복도의 마지막으로 보이는 막다른 벽면에 덜렁 놓여진 나무 문 앞이었는데, 여전히 기승을 부리는 안개들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새겨진 장식들이 매우 고풍스러웠다. 덕분에 아까까지의 강행군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문에 달려진 팻말을 조심스럽게 읽어보았다. " '차원 17, 아크아돈의 정령계'라... 설마 이 문안으로 들어가면 아크아돈의 정령계인지 뭔지에서 태어난다거나 하는 건 아니겠지? " 그래. 설마 아무려면 그럴 리가. 태어나는 게 그렇게 썰렁하고 간단한 형식일 리가 없어. 암 그렇고 말고. 그러나 스스로를 세뇌하듯 다짐하던 나에게 아레히스의 가차 없는 대답이 화살촉처럼 날아와 박혔다. "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건 '생명의 문' 이라는 것으로 이것을 통과한 자는 각 문이 가리키고 있는 차원에서 주어진 운명에 따라 알맞은 신분과 외모를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단번에 알아내시다니 눈치가 빠르신데요? " "....." 제길. 난 왜 꼭 이런 쓸데없는 건 잘 맞추는 거지? 내 얼굴은 순식간에 벌레 씹은 것 마냥 사정없이 구겨졌다. 영특하다느니, 똑똑하다느니 하는 아레히스의 칭찬이 들려왔지만 싸악 무시해 줬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아부 성 칭찬 따윈 하나도 안 반가워, 쳇! " 자, 그럼 이제 이 안으로 들어가 보도록 할.. 아..참참. 그걸 잊을 뻔 했네요. " 시간이 없다고 서둘렀던 것 답게, 당장이라도 문을 열어 나를 들여보내려는 듯 급하게 손잡이에 손을 갖다대던 아레히스가 무슨 일인지 잠시 멈칫했다. "........? " 영문을 몰라 눈만 멀뚱히 뜨고 있는데 이제껏 별말 없이 아레히스의 옆만 지키고 있던-그래서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두 명의 사자 중 프레우니스가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러더니 도대체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던 건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 하나를 내게 불쑥 내미는 것이었다. 당연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는나는 '이게 무슨 짓이지?' 하는 시선으로 그의 상관인 아레히스를 바라봤고,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한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 이 문을 통과 할때 받는 차원의 압력을 완화시켜주는 용액입니다. 마셔두는 게 좋을 거예요. 환생의 여러 가지 부작용을 막는 역할도 하거든요. " " ...그.. 그래서 이걸 마시라 구요? " 그것은 마치 용암과도 같은 붉그스름한 색깔의 걸쭉한 액체였다. 이따금씩 부글거리며 떠오른 방울이 툭툭 터져나가는 것을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거.. 정말 마셔도 괜찮은 걸까? 의도 하지 않았는데도 내 표정은 자연스럽게 구겨졌다. 그 때문인지 내 심정을 어느 정도 눈치 챈 아레히스가 냉큼 뒷말을 덧붙였다. " 조금 쓰긴 해도 맛은 크게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인체(?)에도 무해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드세요. 설마하니 제가 먹고 잘못되는 것을 드리겠습니까? " " 아..하하. 그..렇죠? " 그런데 말이지, 아레히스씨? 당신은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무서워. 탄생 그리고 만남 차마 면전에 대고 '네' 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서 어설픈 웃음으로 맞장구 쳐주었지만 그럴수록 정체불명의 액체에 대한 나의 거부감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내가 아레히스한테 말 대꾸한 게 있었나? 아니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항이라도? 생각해내자, 생각해내. 이건 안심시킨 뒤에 교묘히 살해(?)하려는 아레히스의 교활한 속임수 일지도 몰라! 그러니 꿀리는 일은 무조건 생각해 내서 용서를-!! " 자자, 뭘 그렇게 망설입니까? 몸에 좋은 약일수록 입에 쓰다는 거 몰라요? 얼른 마셔요, 얼른~ " " 우왓-!! " 그것은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자꾸만 재촉하는 아레히스의 강압적인 권유에 못 이겨 얼떨결에 컵을 입 가까이 대고 있었던 나는 그가 무심코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손도 못써보고 그대로 용액을 입안으로 들이키고 만 것이다!! 아주 조금만 맛을 먼저 보고 괜찮으면 마시려고 했었거늘..크흑 이로서 부질없는 목숨. 조금만 더 구차하게 연명해 보려던 내 처절한 시도는 어이없게 무너지고 말았다. 물컹거리는 액체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쓴맛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갔다. 꿀꺽.. " 우웨에에에엑!!!! " 세상의 모든 쓰디쓴 약들은 거의 종류별로 먹어봤고, 심지어 덜 익은 생감마저 아무렇지도 않게 씹어본 경험이 있는 나다. 그러나 기필코 하늘에 맹세하건데 그때 맛보았던 그 어느 쓴맛이라 할지라도 지금 내 목을 타고 넘어간 액체만큼 내 혓바닥을 유린할 수 있었다 라고는 감히 칭하지 못할 것이다! 아레히스의 반 강제적인 권유로 인해 억지로 액체를 삼킨 나는 쓰다는 투정을 부릴 겨를조차 없이 곧바로 돌아서서 구역질을 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아무리 토해내려고 해도 한번 들어간 액체는 다시 세상구경을 하진 못했다. 덕분에 쓴맛의 찝찝함과 느글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한동안 정신이 없던 나는, 다시 진정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이딴 것을 조.금.쓰고 인체에 해가 없다 우긴 뻔뻔한 장본인을 한껏 째려봐 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내가 아무리 살기에 가까운 째림을 날려도 여전히 유유부동, 여유만만한 자세로 미소까지 머금으며 나를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행태가 마치 약물 실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코 박사처럼 보여서 나도 모르게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런 썩을.. 나 혹시 인간 마루타 된 거 아니야? 정령왕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로 사람 정신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말 그대로 인체실험을 한 것일 수도.. 흐흠, 내가 생각해도 그건 오버다. 자중하자 강지훈.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내가 진정된 것을 느꼈는지 안색을 바로 하고 엉뚱한 질문을 꺼낸 아레히스에 의해서.. " 자, 그럼 엘퀴네스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1 + 1 이 뭐죠? " "......" 이 후로부터 나는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명계의 높으신 분을 죽일 수 있을까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절할 만큼 쓴 약을 먹여 사람 울화를 돋구 더니.. 뭐? 이젠 뭐가 어쩌고 어째? 1 + 1 이 뭐냐고 그랬어, 지금? 엉? 1 + 1 ???!! 할 수만 있다면 당장 멱살이라도 쥐어 잡아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짤짤짤 흔들어 주고 싶은 충동이 전신에서 물씬물씬 풍겨 나왔다. 설마 답이 중노동이니, 창문 이니 하는 것 따위의 넌센스는 아닐 테고.. 대체 저것(!! 점점 말이 험해지고 있 다.)들은 내 머리를 뭐로 보고 있는 거야!! 진지한 표정들을 보니 정말로 내가 그걸 모르고 있을거라 생각하는 모양이다.(울컥) 대답하는 내 자세가 삐딱해진 것은 그야말로 당연한 일이었다. 탄생 그리고 만남 "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슈? 1 + 1 이면 5살짜리 코흘리개도 다 알아, 이거 왜이래! 내가 바보야? 엉? 내가 바보 냐구!! 2 잖아, 2! 2 아니야? 여기선 1+ 1이 2가 아닌 가부지? 하, 그래? 여기선 2가 아니야? 아! 여긴 숫자의 개념이 다른가 보지? 엉? 그런 거냐고!!! " " 흠흠.. 아..알았으니 진정 좀 하십시오... 흐음.. 역시 안 되네.. 이걸 어쩌지... " 나의 반항 섞인 태도가 생각보다 과격했는지 아레히스는 잠시 땀을 삐질 거리며 할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는 성질내던 내가 스스로 무색해 질 만큼 나에게 보내던 시선을 완전히 끊더니 같이 온 사자들과 저들끼리 심각하게 쑥덕이는 거였다. 대체로 소곤거리는 목소리라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이따금씩 용액을 더 먹여봐야 겠 다느니 , 성공할 때 까지 먹여 보자느니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아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리며 그들에게서 멀어지고자 노력했다. 저런 최악의 음료수는 내 평생 단 한 모금이면 족하다! 아니, 넘치고도 남아!! 내가 저딴걸 두 번 다시 먹을 줄로 안다면 그건 인간 강지훈을 너무 우습게 본거라고! 내가 이대로 얌전히 당해줄 줄 알고? 그들끼리의 대화가 끝났는지 서서히 내게로 집중되는 6개의 눈동자들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도망칠 구석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사정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생명의 문이 들어온 것은 병아리가 자라 닭이 되듯. 너무나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저 이상한 액체가 차원의 압력을 완화시켜주는 거라는 걸 알고 있다. 저걸 제대로 마시지 않고 들어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 앗! 잠깐만- 엘퀴네스님!! " " 에잇, 난 몰라! 이렇게 되면 이판사판이다 ,뭐! 그딴 액체 다시 마시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낫다고 빌어먹을!! " ...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 아무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목숨을 가지고 도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지독할 만치 쓴 약으로 인해 이성이 마비되어 버린 난 아레히스의 만류를 채 듣기도 전에 겁도 없이 생명의 문을 벌컥 열어 젖혔고. " 우아아악! " 정신을 잃을 만큼 거세게 빨아 당기는 기류에 밀려 문 안으로 떨어져 버렸다. 희미하게 부르는 아레히스의 외침이 들렸던 것도 같지만 기류에 밀려드는 순간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기 때문에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딴에는 내 걱정 한답시고 이것저것 챙겨주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배은망덕 한 것 같다고 속으로 책망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명계와 이별하고 새로운 세계에서의 출발을 시작했다. ***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리면서 생명의 문 안쪽의 기류가 거세게 소용돌이 쳤다. 방금 전에 지훈이 들어가 버린 영향으로 기류는 전에 없이 난폭해져있었지만, 언제나 그랬듯 그것은 명계의 인물인 아레히스나 두 명의 영혼 인도자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았다. 저 기류가 빨아들이는 것은 오로지 인세에 탄생할 영혼들뿐이다. " 흐음. 그렇게도 이 약이 싫었나. 저렇게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가버리다니. " 지훈이 제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는데도 아레히스의 표정은 예의 평소와 같이 지극히 담담하고 평온했다. 그로서는 이제껏 명계의 골머리를 썩혀오던 사건 하나가 해결된 것이니, 오히려 시원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인도자들이 생각은 조금 달랐음인지 그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 어쩌시겠습니까, 아레히스님. 망각의 물이 소용이 없었으니 엘퀴네스님은 인간의 기억을 가진 채 탄생하게 될 텐데요. 혼란이 빚어지지는 않을까요? " " 그렇습니다. 전생의 기억 때문에 혹시나 정령왕 으로서의 직무를 못하시면.. " " 후훗.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인간으로 살았었다 곤 하지만 그는 인간과는 영혼의 근본부터 다른 순결한 정령왕 이니까요. 적응과정에서 진통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오히려 저는 기대가 되는데요? " 인간이었을 적의 기억을 지워보고자 사용했던 망각의 물은 지훈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본래라면 마시는 순간부터 숫자의 계산은커녕,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말하는 법조차도 잊게 만들어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리는 전설의 액체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정령왕의 존재가 어지간한 신(神)과 맞먹는 고위 지성 체라서 그렇기도 했지만, 지훈이 '물'을 다스리는 엘퀴네스였기 때문에 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망각의 물의 함량을 더욱 높인 것이었는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을 보면 후자 쪽의 이유가 더 맞았다. 아레히스는 점점 잦아드는 기류들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웠다. " 인간을 이해할줄 아는 정령왕이 있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을 겁니다. " 탄생 그리고 만남 꽁꽁 얼어버린 손과 발을 그대로 더운물에 녹이는 것처럼 따뜻하고 아른 한 느낌이 들었다. 한 겨울 아침에 늦게까지 누워있는 이불 속 과도 같은 포근한 기분. 이대로 계속 꿈에 젖어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상관없을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는 기억하지도, 기억나지 않아도 좋았다. 지금 이 상태로만 계속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이대로 가만히.. ... 그러나 이전에도 한번 말한바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 " 드디어 탄생했다! " " 우와~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십 수 년이 길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 이라고. " " 이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 대체 왜 남 잠자고 있는데 와서 떠드는 거냐! 어휴, 징글징글한 놈들. 분명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민수 자식이랑 그 일당들 소행일거다. 니들 이번에야 말로 다 죽었다고 복창해라! 나도 더 이상은 못 참아. 오늘 진짜 갈 때까지 가보자고!! 잠자는 강지훈을 건들면 인생이 어떻게 되는지 친히 그 몸으로 새겨주고야 말 테닷!! 늘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잠들면 고의적으로 괴롭혀서 억지로 깨우는 것을 즐기는 사악한 친구 놈을 떠올리며 나는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그리하여 분명히 책상에 엎어져 있을 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전신의 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곧 닥칠 찌뿌드한 느낌과 함께 엄습할 무시무시한 근육통들을 미리 대비해두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 응? 근데 뭔가 이상하다? ' 분명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는데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필요치 않은 근육을 억지로 사용하는 듯한 불쾌한 기분만 느껴졌던 것이다. 가물가물하는 시야는 아직도 온전치 않아서 희미한 빛만을 간신히 인식하고 있을 뿐, 제대로 앞을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느낌에 한동안 고개를 갸웃한 나는 결국 약간의 짜증을 동반하며 억지로라도 몸을 움직이기 위해 팔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첨벙. ' 어엉? 왠 물소리가? ' 나는 그저 단순히 팔을 움직인 것뿐인데 어디선가 크게 물이 휘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도 젖는 듯한 느낌이나 물이 튀는 감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허걱. 귀신에라도 쓰였나? 이게 대체 무슨 조화라지? 순간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고, 그 때문에 또 다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뒷걸음질 쳤어? 내가? 나 지금 책상에 엎어져있는 게 아니라 서있는 거였단 말이야? ' 정녕 이제는 서서도 잠들 수 있는 경지까지 마스터했다는 것인가! 확연히 느껴지는 발밑의 감촉에 나는 등 뒤로 어색한 식은땀을 흘렸다. 인간이 서서도 이렇게 깊게 잠들 수 있다니.. 과연 또 하나의 한계를 깨버렸다는 생각에 기분마저 경건해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꿈도 꿨더랬다. 내가 죽었는데. 왠 서양 판타지 풍 저승사자들이 나타나서는 내가 사실은 인간이 아니라 정령왕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던 것.. 같... 은....... 허억.. ' 이런, 바보! 꿈이 아니잖아!!!' 한겨울에 얼음물로 세수한 것 같은 오싹한 감각이 전신에 엄습했다. 그리고 그제 서야 나는 몽롱한 정신을 깨고 퍼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떻게 된 거였더라. 아, 그래.. 생명의 문이라는 걸 열었었지. 그리고 엄청난 충격에 휘말려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정말 기이한 일이다. 정신이 들고나니 아까 까지 흐리멍텅했던 기억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다. 온몸을 찢어발기는 듯한 엄청난 압력과 고통 속에서 끝내 정신을 잃었던 그 순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똑똑히. 정신을 잃은 직후 그것이 꿈으로 이어져, 한동안 꿈나라를 왔다 갔다 하다가 이제야 깨어나게 된 모양이었다. ' 헤에.. 그 맛없는 액체. 딱 한 모금 마신 건데도 효과는 좋은데? 그 기류에 휘말려 놓고도 정신멀쩡하고 아픈 곳도 없는 것 같으니. 난 무사한건가? 하지만 다신 마시고 싶지 않아. ' 탄생 그리고 만남 아직도 입안에 느껴지는 비릿하고 씁쓸한 액체의 맛을 떠올리며 나는 몸서리를 쳤다. 태어날 때마다 그런 걸 마셔야 한다면 차라리 영원히 환생안하고 영혼으로 사는 쪽을 택하고 말겠다. 이번에야 어쩔 수 없이 모험을 감행했다지만 다음엔 절대로 마시지 말아야지. 명계라는 곳, 너무 서비스 정신이 부족한거 아냐? 그놈의 액체맛 좀 개선시킬 생각은 없는 건가? 환생하는 영혼들 전부를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다면야.. 어떻게 그딴 액체를 마시라고 권유할 수 있는 거냐고, 쳇. 내가 그렇게 생각만 해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지는 고약한 액체를 떠올리며 잠시 회상에 빠져있을 때였다. " 형체가 완성되었군. 이제 눈만 뜨면 돼. " " 헤에.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랬던 건가? 되게 신기하다. " " 뭐야, 이거? 남성체야, 여성체야? 엄청 헷갈리게도 생겼네. " 아까 전 나를 잠에서 깨게 만들었던 누군가의 떠드는 목소리가 또다시 두런거리며 들려왔다. 꿈결에 잘못 들었던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전신에 긴장이 저절로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기류에 휘말린 충격과 쓰디쓴 용액으로 인한 불만 때문에 까맣게 잊고 있던 현실이 그제 서야 온몸으로 엄습해 들어왔다. 난 정신이 깨어나는 순간부터 당연히 인식해야 했던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온몸을 찢어발기듯 거세게 휘몰아치던 그 엄청난 기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고요해져 있는 것의 의미를. 애초부터 내가 그 맛없는 액체를 마셔야만 했던 이유와. 대책 없이 뛰어든 방문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확연하게 느껴지는 존재감과 현실감 때문에라도 나는 순순히 현재의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환생 성공... 인가? 아하하하... ' *** 풍요로운 대지와 맑은 공기, 넘치는 생수와 따뜻한 불꽃으로 가득 채워진, 생명력이 넘쳤던 축복받은 차원 아크아돈에 때 아닌 재앙이 임한지도 벌써 10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이 십 수년의 기간동안 단 한 방울의 비도 대지를 적시지 못했다는 것. 몇 만 년을 이어오던 풍요로운 대지는 단 십 년 만에 마르고 갈라져 변변한 과실도 제대로 맺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으로 변해버렸고, 언제나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던 바람은 가득한 먼지만 날리는 애물단지가 되어버렸으며, 인간들의 발전에 크나 큰 기여를 하여 사랑받았던 불꽃은 건조한 공기가 기폭제가 되어 나날이 흉폭 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매한 인간들은 재앙의 원인을 그 왕에게 물어 저들끼리 심판을 하기도 하고 신에게 빌어보기도 하며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나, 그 땅에 비가 내리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에 있었다. 바로- 주신의 임명을 받아 아크아돈을 관장하고 있던 4대 정령계에서 물의 정령왕이 탄생하지 않은 것. 그 한 존재의 부재로 인한 재앙이었던 것이다. 탄생을 기다리고 있던 정령왕의 영혼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는, 그야말로 어이없는 명계에서의 보고를 들은 정령계는 한동안 물의 정령왕의 부재를 매우기 위해 많은 고심을 치러야만 했다. 그리하여 간신히 아크아돈의 멸망이라는 사태의 최악으로 치닫는 길은 막을 수 있었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희망적이지만도 않은.. 반복되는 가뭄과 흉년으로 진통하며 물의 정령왕을 빨리 찾아내기를 기다리는 나날만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낙관적이지 않은 것은 정령계도 마찬가지인지라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 봉인하여 피해의 정도를 약화시키고 있던 나머지 3대 정령왕들은 물의 엘퀴네스의 공간에 이상한 뒤틀림이 생기고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이자마자 서로에게 안부를 전할 겨를도 없이, 제일 처음 그 기이한 현상을 접한 바람의 정령왕-미네르바에게로 앞 다투어 질문을 퍼부어댔다. " 엘퀴네스의 영역에 무슨 변고가 생겼다고? 그거 좋은 일이야, 나쁜 일이야? " " 설마 영역 자체가 소멸되는 건 아니겠지? 아~ 제길. 가뜩이나 요즘 힘줄이고 있느라고 한시가 안 편하다고. 나 살빠진 거 보이냐? " 탄생 그리고 만남 "........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지금부터 확인하러 가는 길이야, 이프리트. 그리고 트로웰. 정령은 살이 빠지지 않아, 소멸하는 날까지 외모가 변하지도, 힘이 약해지지도 않지. 그걸 너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 " 쳇 딱딱하기는. 말이 그렇다는 거지. " 트로웰의 투덜거림은 가볍게 무시했다. 미네르바는 엘퀴네스의 영역까지 앞장서서 걸어가면서 자신이 봤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나도 자세히 보지는 못했어. 정찰로 보낸 실프가 물의 영역에 뒤틀림이 일어나고 있다는 보고를 해서 서둘러 달려가 본 것뿐이야. 내가 봤을 때는 가볍게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 " " 실프를 다시 보내보면 안될까? " 트로웰의 의견에 미네르바는 고개를 저었다. " 무리야.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지금은 실프의 접근이 완전히 통제된 상태거든. 우리 힘이라면 뚫을 수 있겠지만 하급정령으로는 어림도 없지. " " 뭐야, 그게? 정령왕이라도 탄생하는 거래? 주제에 왠 하급 정령이라고 차별을 한담. " " !!! " 반 장난스레 내뱉은 이프리트의 말에 순간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 바로 그거야!!! " " 뭐? " (X2) " 왜 진즉에 못 깨달았지? 트로웰과 이프리트의 탄생도 지켜봤으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 이프리트! 네 말이 맞아. 영역의 뒤틀림은 정령왕이 탄생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야! " 미네르바의 폭발선언에 멋모르고 있던 이프리트와 트로웰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 뭐어? 그걸 이제야 깨달으면 어떡해!!! " " 그럼 이렇게 느릿느릿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 빨리 가보자구!! " 황급히 말을 내뱉은 트로웰의 모습이 순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본래 물과 궁합이 잘 맞는 땅의 정령왕답게 엘퀴네스의 탄생을 제일 기다리고 있던 터라, 다른 정령왕들의 반응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급하게 물의 영역으로 텔레포트를 한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고 피식 웃은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자신들도 곧 트로웰의 뒤를 따라 물의 영역으로 텔레포트를 시전 했다. 세 명의 정령왕이 도착한 물의 영역은 말 그대로 물의 영역이 되어있었다. 엘퀴네스가 탄생하지 않은 뒤로 흔적도 없이 말라버렸던 메마른 공간이 어느새 생명력 넘치는 생수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물고기만 없을 뿐이지, 바닥에 오밀조밀 깔려진 자갈과 물살에 우아하게 흔들리는 해초들은, 마치 바닷 속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거침 없는 물의 공간 한가운데에 회오리치듯 소용돌이로 맴돌고 있는 커다란 기류 하나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탄생 그리고 만남 아직까진 물의 소용돌이-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주변에 충만하게 깔려진 물의 기운에 의해 세명의 정령왕들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정령왕이 탄생 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걸 깨달았다. " 드디어 탄생했다!! " " 우와~~ 기다리다가 목 빠지는 줄 알았네. 십 수 년이 길게 느껴진 건 이번이 처음 이라고. " " 이거 축배라도 들어야 하는 거 아냐? " 감격에 빠져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은 소리에 문득 물의소용돌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설마 옆에서 떠든다고 화내는 건가? 하기사 물의 정령왕들의 싸가지 없음은 대대로 이어져오던 전통이나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전대 엘퀴네스의 오만했던 성격을 떠올리며 세 정령왕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표정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거세게 휘몰아치던 소용돌이는 이윽고 천천히 가라앉으며 진정이 되는 듯 폭발적인 흐름을 멈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흐름들은 끊임없이 하나의 형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드디어 정령왕의 탄생이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수도 셀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물거품들이 얼핏 형체를 이루고 있는 물 덩이에 벌 떼처럼 달려들었다. 물 덩이에 흡수되듯이 하나둘 물방울들이 사라질수록, 엘퀴네스의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이윽고 엘퀴네스를 감싸고 있던 물방울들이 온전히 사라지며 상아빛의 투명한 피부에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났다. 허리까지 찰랑이는 머리카락은 주변을 이루고 있는 물 과 같은 색의 청명한 파란색이었다. " 형체가 완성되었군, 이제 눈만 뜨면 돼. " " 헤에.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랬던 건가? 되게 신기하다. " " 뭐야, 이거? 남성 체야,여성 체야? 엄청 헷갈리게도 생겼네. " 푸른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을 물속에 흩날리며, 마치 잠자고 있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는 평온한 엘퀴네스의 모습을 본 세 정령왕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평가에 반응이라도 하듯, 약간 움찔거린 엘퀴네스의 감긴 눈이 천천히 떠졌다. *** 눈을 뜨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물' 이었다. 정말 그것 말고는 어떤 말로도 설명하기 힘들만큼 내 주변은 온통 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바다 속이나 강물 속에 빠져있는 듯한 기분이랄까? 아니, 어항 속의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고 하면 더 적절 하려나.. 순간 너무 놀라서 거의 본능적으로 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 막을뻔 했다가 멀쩡하게 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곧 그만 두었다는 것만 빼곤 무지 신기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팔다리를 움직이는 데도 물 속 특유의 저항감으로 인한 무거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공기 중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식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상황에 처하고 보니 갑자기 내가 너무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아서 기쁘기보단 먼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규현아, 이 자식아! 나 물속에서도 숨쉰다! 어떠냐? 부러워 죽겠지? 음핫핫핫. 판타지의 맹신자였던 친구놈을 떠올리며 나는 승리감에 빠져 허허 거렸다. 그런데 아까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누가 와있는 것 같았는데... 어디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계속 따끔따끔 거리는 미묘한 시선들이 느껴지는 것 같다.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두리번거리자 곧 어렵지 않게 나를 바라보고 서있는 3명의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각각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로 보이는 외모에 수려한 미모를 가진 눈에 번쩍 띄는 미인들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난 분명 이들을 오늘 처음 보는 건데도 전혀 낯설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도대체 언제부터 미인들에게 면역력이 생겼다지? 조금만 예쁘장하게 생긴 사람만 봐도 금새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가빠지는 등, 소심함의 중증을 앓고 있던 내가 이런 미인들 앞에서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의연해 질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세가 임박한 것이다. 설마 아레히스나 저승사자 때문에 적응이 되 버린 건가? 그 잠깐 사이에? 그들은 내가 한참이 지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쳐다보고 있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탄생 그리고 만남 " 탄생을 축하해. 엘퀴네스. 하지만 너무 늦었는 걸? 뭐, 이제라도 와줘서 다행이긴 하지만. " 정령왕이라는 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도 역시 같은 정령왕급의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난 굳이 이러한 상식을 계산해 보지 않아도 내 앞에 서서 말을 건넨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얀 피부에 기묘한 느낌을 주는 하얀색 눈동자. 허리를 타고 내려가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투명에 가까운 은회색. 차가운 무표정이 너무나도 빼어나게 어울리는 여성의 모습을 한 그는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였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지극히 자연스러운 절차를 치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내 머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었던 것이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기분에 내가 잠시 혼란스러워 할 때였다. 기다렸다는 듯 미네르바의 뒤를 이어서 내게 말을 건네는 존재가 있었다. " 만나서 반가워, 엘퀴네스. 너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다고. 아아 이제 이것으로 안심이야. 아크아돈도 다시 평화를 찾을 수 있겠어. " 장난 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 윙크해 보이는 그는 완벽한 흙색의 피부에 칠흙 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린 악동의 이미지가 다분한 미소년 이었다. 대지의 축복을 거머쥔 땅의 정령왕, 트로웰 인 것이다. 참고로, 나는 검은색 피부가 사람을 섹시하게 보이게 한다는 걸 들은적은 있었지만, 그 표현이 이토록 지.독.하.게. 어울리는 존재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무리 봐도 남성의 이미지가 강한 트로웰인데도 그의 섹시한 눈웃음 한방이면 전 세계에 홀리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말이다. ' 어..어쩐지 나부터 조심해야 할 것 같은... 쿨럭.. ' 아무리 여친 하나 없는 불행한 청소년 이었다 해도 금단의 사랑(?) 에 빠질 생각은 추호도 없던 나는 장렬하게 트로웰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어찌 보면 거의 외면이라 할 만큼 상대방을 무시해 보이는 걸로 비춰질 수도 있는 태도였지만, 정작 트로웰은 그다지 불쾌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 역시 물의 정령왕. 차갑기가 바람 같군. 실망을 시키질 않는다니까~' 라고 중얼거려서 옆에 서있던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의 눈총을 받았다. 자아~ 그럼 남은 건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인가? "........."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본 난 순간 할말을 잃었다. 붉은 불꽃을 상징하는 불의 정령왕이기 때문에 당연히 예상했던 바대로 이프리트는 눈동자도 머리카락색도 모두 타오르는 듯한 붉은 색이었다. 그 옆에 다가서서 손이라도 대봤다간 금새 라도 화상을 입을 것 같이 정렬적인 새빨간 색이랄까? 피부색은 옅은 핑크색이었는데, 피부색으로는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 특이한 색깔이 이프리트와는 어색함 없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화려한 붉은 색의 곱슬머리에 약간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가 무지 성깔 있어 보였는데, 마음만 먹으면 천하의 바람둥이라도 휘어잡을 것 섹시한 이미지였지만, 여성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런지 트로웰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트로웰이 살인 미소라면.. 이프리트는 여왕님이랄까? 아하하..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멋쩍게 웃으며 여전히 나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3명의 정령왕들을 바라보았다. 인사도 해줬는데 (이프리트 제외.) 아무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건 예의가 아니겠지? 자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나? 왠지 이들에게는 '안녕 하세요' 따위의 존대 말은 절대 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저들과 같은 정령왕이니 당연한 거라면 당연한 거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 내가 명계에서의 그 얼빵한 행동을 다시 할 것 같아? ' 처음 대면하는 자리에서 나의 '안녕 하세요'란 인사에 어이없음을 감추지 못하던 아레히스의 표정을 나는 소멸하는 날까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쌈박해 보이면서도 비굴해 보이지 않도록 웃는 얼굴 하나에도 최대의 신경을 써야만 했다. 으.. 억지로 웃는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지만,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오나니!! 그리고 말하는 거야, 이 상황에서 가장 잘 어울릴만한 인사말을 말이야!! " 안녕? ... " 탄생 그리고 만남 "........" "........"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기묘한 정적이 나와 세 명의 정령왕들 사이로 흘렀다. 크흑.. 알았어. 미안해... 나도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지 몰랐다고 그러니 이제 그만 차가운 바람 좀 잠재워주지 않겠어, 미네르바? 물속에서 바람을 일으키니까 소용돌이를 치잖아! 어지럽다고! 그리고 지진 그만 일으켜도 돼 트로웰. 이 공간이 모두 엎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프리트.. 너는 여길 모두 증발시키기로 작정한 모양이지? 나 다시 죽을까? 쿨럭.. 이미 모두의 인사가 끝난 시점에서 (역시 이프리트 제외) '안녕'이라고 말을 건넨다는 건 내가 봐도 앞뒤의 정황이 맞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인사가 늦었네, 앞으로 잘 부탁한다.' 라고 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 이었을 거라는 것도. 아, 아무래도 나는 어딘가 모자란 게 분명해. 학교에서 친구 놈들이 나만 보면 '얼빵 한 놈'이라 중얼거렸을 때는 그저 이 몸의 뛰어난 유머센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우매한 것들이라 생각했었는데,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아.. 이제 와서 다시 잘 부탁한다고 말을 할수도 없고..대체 어찌해야 한다지? 나는 무척이나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세 정령왕들을 난감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미..미안해. 내가 자기소개에 좀..약하거든....." "......" " 으윽..그..그러니까 일부러 썰렁하게 만들려고 그런 게 아니란 거야. 내 딴에는 엄청 진지하게 인사한거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살벌한 표정은 좀.. " 그만 치워주지 않겠어? 그래도 초면이랍시고 겉으로 폭발하지 않고 은근히 살기만 흘리는 세명에게 나는 무척이나 긴장하면서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러자 그들은 아차 싶은 표정이 되더니 곧 자신들이 너무 본능에 충실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과 함께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 아. 미안해. 전대 엘퀴네스와 성격의 괴립이 너무 커서 잠시 혼란스러웠을 뿐이야. 아무튼 환영한다. 앞으로 잘 지내보자. "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 도대체 어땠기에? 아니, 그것보다, 당신들은 혼란스러우면 살기부터 뿌리나 보지? 이거 한번만 더 혼란시키면 멀쩡한 정령하나 잡겠구먼. 나는 속으로만 투덜거린 후 겉으로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령왕의 수명이 1만에서 2만 사이라지 않은가. 그 동안 곧 죽어도 얼굴보고 지내야할 동료들과 벌써부터 삐걱거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착해 보이려고..얼굴에 경련이 이는 것도 참으면서 미소를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태클이 들어왔으니.. " 흥. 생글생글 웃는 얼굴 집어 쳐. 바보 같아 보이니까. 하긴..너 바보 맞지? 오죽 어리 버리 하면 탄생도 제대로 못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다가 이제야 겨우 돌아온담. " 커헉. 가뜩이나 찔려하던 부분이건만.. 그렇게 정확하게 가격하다니. 비웃음이 가득 머금어진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나는 웃던 것을 멈추지도 못하고 어색하게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탄생 그리고 만남 그러자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무척이나 도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프리트가 떡 하니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저 정령왕은 이제 태어난 정령한테 왜 시비를 걸고 그런다지? 처음부터 다른 정령왕들과 달리 나한테 인사도 하지 않고 노려보고만 있었기에 심사가 뒤 틀려 있나보다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시비 거리를 만들어서 정면 도전할 줄을 몰랐던 나는 조금 당황했다. " 이프리트! 왜이래. 초면인 상대한테 실례잖아. " " 사실을 말한 것 뿐이야. 트로웰. 저 녀석이 공석인 동안 내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지 알기나 해?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저 녀석과 어느 정도 궁합이 맞으니까 별일 없었겠지만, 내 쪽은 상극이라 저 녀석의 기운이 줄어들면 반대로 내 기운이 더 강해진다고. 인간계에 해마다 불바다가 일어나는 것을 어쩌지도 못하고 기운 줄이려고 노력한 내 고충을 어찌 알겠어? 모두 다 저 녀석이 멍청한 탓이야. " " 그만해 이프리트. 이번일은 엘퀴네스의 잘못이 아니라고 명계에서도 그랬어. 그날 영혼분담을 책임지던 자가 하필이면 초보였었다는 게 문제였다고. 엘퀴네스도 피해자야. " 아, 그랬군. 그때 영혼 분담하던 놈이 신입이었다 이거지? 허허.몰랐는데 가르쳐줘서 고마워 미네르바. 그리고 아레히스? 나중에 내가 소멸하면 다시 한번 만남의 장을 가져야겠는걸. 신입한테 그런 중요한일을 맡기다니! 덕분에 나만 이프리트한테 미움 받게 생겼잖아! 이걸 어떻게 책임 질 거야!!! " 그래~ 알았어. 어차피 너희는 엘퀴네스가 그저 반갑기만 하지? 흥. 다들 똑같아. 난 이딴 물의 영역에 오래있어서 피곤하니 먼저 돌아가겠어. 반가운 존재끼리 잘들 놀아 보라고." " 이프리트!! " 잔뜩 기분상한 얼굴로 심통 맞게 중얼거린 이프리트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나를 노려보고는 그대로 불길이 되어 사라졌다. 물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라.. 나름대로 신기하고 멋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감탄할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이프리트가 사라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오늘 처음 본 나한테 밉살맞은 말을 하고 그냥 돌아가 버릴 정도로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었나 생각해 봤지만.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잖아!! 처음만나서 한말이라곤 '안녕'이 전부였고 내가 공석이었기 때문에 생긴 피해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미네르바가 친절히 설명까지 해줬다. 그런데 도대체 저 녀석은 나한테 뭐가 불만인거야! " 아, 이런. 미안해 엘퀴네스. 기분 상했지? 원래 대대로 엘퀴네스와 이프리트는 서로 상극이라서인지 사이가 좋질 못했어. 전대 엘퀴네스와 지금의 이프리트도 틈만 나면 으르렁 거렸지. 그러니 너무 마음 상해 하지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록 해. " 미네르바의 침착한 설명에 나는 다시 한번 뜨악한 심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날더러 저 여왕님과 매일 마주칠 때마다 싸우란 말인가...허허허... " " 뭐라고? " " 아, 아니야.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나를 그냥 엘퀴네스로 불러도 되고, 지훈이라고 불러도 좋아. 아직은 지훈이란 이름 쪽이 더 편하지만. " " 지훈이라니? " " 음..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가졌던 이름이야. 강지훈인데. 강은 성이니까 그냥 지훈이라고 불.. " 본래의 내 이름이라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어서 그런 건지 엘퀴네스란 소리가 아직 귀에 거북했다. 그래서 좀더 익숙한 쪽을 사용하고 싶어서 '지훈'이란 이름을 애칭으로 불러달라고 하려던 거였는데 내 말을 듣자마자 미네르바와 트로웰의 표정이 뜨악하게 변하는 것이었다. 내가 또 뭔가 잘못한 건가 싶어 멍청히 하던 말을 자르자 트로웰이 기다렸다 는 듯이 내게 질문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탄생 그리고 만남 " 설마 엘퀴네스! 인간으로 태어났던 거야? 차원의 틈에 빠져서 헤매고 다녔던 게 아니라? " " 차..차원의 틈? 아니.. 분배가 잘못 되서 인간으로 태어났던 건데.. " " 우..우와! 이거 진짜 짱인데~! 유희 정도가 아니잖아. 정령왕이 인간으로 태어나다니.. 살다보니 이런 일도 생기는구나. 역대 정령 왕 서에 영원토록 기록되고도 남을 일 아니야, 미네르바? " " ...흔한 일은 아니지. " 호들갑떠는 트로웰과는 달리 그나마 미네르바는 침착해 보였다. 그래도 눈빛에 가득 담긴 호기심을 지우지는 못했지만. " 다른 차원으로 빠진 모양이지? 이름이 이곳 발음이 아닌걸 보니.. 하긴. 이곳에서 태어났다면 우리가 금새 발견했거나,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속출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 " 아. 응. '지구'라는 곳인데.. 여기서 얼마나 떨어진 건지는 잘 모르겠어.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가보고 싶긴 한데, 가능할지도 의문이고. " 가족들은 별 생각 없었지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친구 녀석들은 무척 보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내 장례식 때 와서 울고 간 녀석들도 꽤 많았는데. 어떤 녀석은 '시험 전날에 죽다니..넌 참 복도 많은 녀석이다. 시험보고 죽는 것 보다는 낫지. 안 그러냐, 부러운 자식.' 이라는 말로 사람 복장을 뒤집어 놓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 녀석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눈물이며 콧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친구들을 뒀다는 생각에 감격했었던 기억이 난다. .... 좀 추잡했던 게 흠이었지만. " 흐음. 지구? 거긴 주신께서 관장하는 곳 일 텐데..어쨋든 '지훈'이라고 부르면 된다는 거지? 별로 어려울 건 없네 뭐. 어차피 엘퀴네스며 미네르바며.. 이런 건 다 우리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거지 딱히 이름이라고 할순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트로웰이란 이름이 더 편하니까 그냥 트로웰 이라고 불러.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인간세상에서 살았을 적 얘기를 듣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음기회로 미루도록 할게. 앞으로 한동안은 바빠질 것 같으니. " 잠시 회상에 빠져있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그게 무슨 소리야? 바빠진다니? " " 네가 태어났으니까 지금까지 편법으로 얼기설기 막아놓은 자연의 규칙들을 다시 재정비 해야지. 당분간은 아크아돈의 회복에 집중해야 할 거야.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회복되겠지만, 그래도 우리가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편이 빠르지 않겠어? " 그..그런가? 아레히스한테서 들었을 때는 그저 내가 다시 돌아가는 것만으로도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굴었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어설프게 끄덕였다. 나 때문에 그렇게 되 버린 거니 내가 힘써야 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아직 물 속에서 숨 쉬는것 말고는 특별할 게 전혀 없는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야? 이러한 내 걱정은 미네르바와 트로웰이 뭔가를 요구하는 것 마냥 나를 빤히 쳐다보자 더욱 심각해졌다. 그냥 아무 말도 없이. 내가 뭔가를 시작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그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들의 시선을 맞받아 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말라고. 정령왕이 되긴 했어도 독심술을 익힌 것은 아니란 말이야. 그렇게 쳐다만 본다고 없는 눈치가 생기리? 결국 장시간의 침묵과 눈싸움 끝의 승리자는 나였다. 탄생 그리고 만남 "... 후우.. 멀뚱히 서있지만 말고 이제 그만 시작하지? " 기다리다 못한 미네르바가 한숨과 함께 드디어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에 담긴 뜻을 내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 뭘 시작하는데? " " 자연을 회복해야지." " 그러니까..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 "....... 장난 하냐? " 으윽..그렇게 스산하게 말해봤자 알지도 못하는 걸 어떻게 하냔 말이야!! 가뜩이나 적응이 안 되는 미네르바의 하얀색 눈동자에 꾸물꾸물한 어두운 기운이 서리니까 차마 말도 제대로 못 붙일 만큼 무서웠다. 거기다 누가 바람의 정령 아니랄까봐 화가 나니 은회색 머리카락이 등 뒤로 흩날리는 모습이 딱 저 상태로 공포영화에 출연하면 정말이지 대박 날 듯싶었다. 그러자 보는 것만으로 잔뜩 질리게 만들어버리는 그 호러 틱 한 장면에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 있는 게 불쌍했는지 옆에 있던 트로웰이 냉큼 한마디 보태주었다. " 정령을 만들어야지, 정령을. " " 저..정령? " " 그래. 정령! 하급의 나이아스들이야 네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기운을 느끼고 탄생하겠지만 중급과 상급정령들은 네가 직접 만들어야 돼. 요 몇 년 사이 전대가 만들어 놓은 물의 정령들이 모두 소멸했으니까 다시 만드는 게 당연하지. 어라? 뭐야 그 표정은. 정말 몰랐다는 얼굴이네? " 정말 몰랐던 거 맞는데. 내 표정이 상당히 어리 버리 했는지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그제 서야 내가 장난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확인하듯이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두 정령왕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뭐랄까..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듯한 얼굴이랄까.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을 눈앞에 대면한 사람이 있다면 그 표정이 딱 저랬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두 눈에 경악을 담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할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바로 저런 모습. 그런데..이제 막 태어난 내가 그런 걸 모르는 건 당연한거 아닌가? " 틀려. 이거 뭔가 잘못됐어. 정령왕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연의 흐름을 읽고 그에 따른 대처방법을 저절로 깨닫게 된다고.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처럼 아크아돈이 메말라 있는 상황에서 물의 정령왕인 네가 아무것도 자각하는바가 없다는 건 말이 안돼. 우리가 먼저 말하지 않았더라도 너 스스로 정령들을 만들어 분포했어야 했단 말이야! " 그..그러냐?.. 근데 트로웰.. 너 독심술도 익힌 거야? 어떻게 내가 딱 궁금해 하던 그 시점에서 바로 '틀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거지? 기가 막힌 우연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 맘을 읽었는지, 무척이나 혼란스러워하는 트로웰을 보면서 내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 있는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듯하던 미네르바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지훈.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 지금 여기서 정령을 만들라고 하면 만들 수 있겠어? " " 그,글쎄. 만들어 본적이 없어서 잘.. " "...... 흐음.. 역시 그렇군. " 정령 만들기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 내 대답을 들은 미네르바의 표정은 아까보다 더욱 어두워보였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뭔가를 음산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간간히 '명계 이 자식들 절대 가만두지 않겠어' 라는 말이 들리는걸 보니 절대로 좋은 단어를 입에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트로웰이 궁금증을 못 이겨 옆에서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도 족히 1만년은 계속해서 그러고 있었을 거다. 그만큼 미네르바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는 얘기다. " 미네르바! 뭔가 알아낸 거야? 혼자만 알지 말고 얘기 좀 해봐. 가뜩이나 답답해 미치겠는데 너까지 이럴 거야? " " 아!.. 미안. 흠..그러니까 지금 지훈의 상태는.. 인간으로 태어난 부작용 같은 거야. " " 부..부작용? " 멀뚱히 되묻는 나를 보며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이라니? 그런 게 있다는 소리는 아레히스도 안했는데? 십 몇 년의 세월이 도로 무용지물이 된 것도 억울한데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병까지 겹쳤단 말이야? 그게 뭔 소리야! "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 때문에 그 습관을 버리질 못하고 있어. 나는 인간이니까 이런 건 불가능하다고 미리부터 한계를 정하고 마는 거야. 능력을 좀먹고 있달 까? 이거 골치 아프군. 명계에선 왜 망각의 물을 주지 않은 거지? " " 줬다 해도 소용없었을걸. 지훈은 물의 정령왕이잖아. 물에 대한 가드가 가장 강한 정령왕이 그깟 망각의 물 정도에 기억을 잃을 리가 있겠어? " " 하긴... " 한마디로 종합하자면 내가 인간으로 먼저 태어나버렸기 때문에 그 습관이 굳어져서 무의식적으로 내가 인간이라고 아직도 '착각'을 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이럴 경우 태어나기 전에 망각의 물이라는 것을 마셔서 인간일 때의 기억을 지워야 하지만, 나 같은 경우는 정령왕, 그것도 물계열의 정령왕이라서 망각의 '물'은 나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혹시 그 엄청나게 썼던 빌어먹을 액체가 망각의 물인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마시고 난후에 난데없이 1+1이 뭐냐고 물어봐서 사람 염장을 지르기도 했었지. 그게 만약 기억을 잃었는지 안 잃었는지 확인해본 거였다면 그 액체가 망각의 물이 맞다 는 소리가 된다. 지금으로선 확인해볼 길이 없지만. *** " 하지만 미네르바…. 내가 스스로 한계를 정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잖아. " 내가 인간일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가 정령이라는 걸 잊고 있는 건 아니다. 조금 적응이 안 되긴 해도 물속에서 숨도 쉬고 있잖아? 만약 내가 인간이라고 계속 우기고 싶었다면 지금쯤 익사하고도 충분히 남아 돌 시간이 지났다 이 말이야. 그래서 내 딴에는 아직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당당하게 주장했던 것인데 미네르바는 지극히 무심한 얼굴로 내말을 단칼에 잘라버렸다. " 그래? 그럼 한번 정령 만들어봐. " " ……. " " 그렇게 머뭇거리는 것부터가 자각이 덜 됐다는 증거야. 설마 만드는 방법을 모른다는 말로 변명할 생각은 아니겠지? 정령왕이라면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정령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누구한테 배우지 않아도 말이야. " 크흑. 그래, 내가졌다. 난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바보에 인간이라고 착각까지 하는 멍청이다. 그러니 그 한심하다는 눈빛 좀 이제 그만 거둬주지 않으련? 나도 내가 비참한거 안다고! 정령 만들기 " 그럼 이제 어떡하지? 설마 계속 이런 상태로 있는 건 아니겠지? " 완전 참패를 당한 내가 구석에 가서 찌그러지는 모습이 심히 보기 안 좋았는지 트로웰이 땀을 삐질 거리며 미네르바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다시 생각하는 포즈를 취하더니 곧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 그렇지는 않을 거야. 누가 뭐래도 지훈이 정령왕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 물속에서 숨 쉴 수 있는걸 보면 아주 자각을 못하는 건 아닌 것 같으니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해결될 문제라고 봐야 할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엘퀴네스의 능력이 필요한 시점이라…. " 본래 아크아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내가 정령왕으로서의 자각을 더디게 하더라도 전대가 이뤄놓은 성과가 있으니 별 피해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이라 물의 정령이 모두 소멸되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내가 능력을 자각해서 정령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것이 미네르바의 설명이었다. 하급정령인 나이아스 만으로는 공기 중의 수분은 어찌할 수 있더라도 바다나 강, 호수의 오염된 물은 정화할 수도 생성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그러고 보니 비도 내려야 돼. 바다에서 끌어오는 물만으로는 땅을 만족시키는데 한계가 있으니까. 미네르바랑 합작으로 폭풍우도 불어서 오염된 공기도 몰아내야 하고.. 나는 막혀진 수맥을 다시 뚫어놔야 하고. 휴우, 정말 오랜만에 할일이 산더미 같겠군. " 뭣시라? 비를 내리고 폭풍을 불고, 수맥을 뚫어? 트로웰의 푸념 섞인 말에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 정령왕들이 그런 것도 해? " " 뭐 그렇지….원래는 상급정령들한테 시키지만, 단기간에 복구시키는 거니까 우리들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더 빠르거든. 한달, 아니 두 달 정도면 완전히 예전으로 회복 될 거야. " " 아니, 그게 아니라…. 신은 뭐하고? 그런 건 신이 하는 거 아니야? " 비를 내리고 바람 불게 하는 건 당연히 신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조금 황당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오히려 그게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냐는 듯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 신? 신계에서 매일 팔자 좋게 늘어진 그 신들을 말하는 거야? 그들이 왜 우리영역을 넘봐? 아크아돈의 자연은 주신께서 우리 4대 정령 왕 들에게 전격으로 위임한 곳이라고. 오히려 신들이 판치면 항의해도 모자를 판에 누가 뭘 해? " " 그, 그래? 그럼 여기는 신을 믿는 사람들이 없는 거야? " " 없지는 않지. 몇몇 심심해서 미치는 신들이 아크아돈에 놀러올 때가 많거든. 주신께서는 매일매일 밀려드는 업무에 과부하가 걸리실 지경인데 그놈들은 하급이라고 팔자도 좋다니까? 덕분에 인간들이 아크아돈에 4대 정령 왕이 가지는 가치를 자꾸 잊어버린다고. " " …하하…." 신곈지 뭔지의 신들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인지 그 후로도 트로웰은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덕분에 석유에 불을 붙인 꼴이 되 버린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땀만 삐질 삐질 흘려대는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복잡한 얼굴로 뭔가를 골몰히 생각하던 미네르바가 드디어 결론을 맺었는지 한결 나아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뭔가 숨겨진 비책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기대했던 바와는 달리 그가 내놓은 결론은 너무나 간단해서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정령 만들기 " 어쩔 수 없지. 전례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 당분간은 지훈이 우리 나머지 정령왕들에게 정령왕의 업무를 배우는 것이 좋겠어. " 무지 진지하고 엄숙하면서 비밀스럽다는 듯이 내뱉은 말이 겨우… 나보고 업무를 배우라고? 정말 그것 뿐 인거야?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거잖아! 그럼 너희들은 안 가르쳐줄 생각이었냐!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여전히 진지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그런 뻔한 결론을 내리는데 몇 분이나 머리를 소비한 미네르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설마 겉으로 보이는 이 지적이고 똑똑해 보이는 모습은 다 거짓이란 말인가! 그러나 더욱 황당한 일은 다음에 일어났다. " 뭐어?우리가 지훈을 가르친다고??? 아무리 한시가 급하다지만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는 듯 기겁을 하고 대답하는 것은 트로웰이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정말 미안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이다. " 어쩔 수 없다고 했잖아. 지훈만 괜찮다면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훈 입장에서는…." 마지막 말을 쭈볏 거리며 우물거리는 트로웰. 그리고 엄청나게 죄책감을 느끼는 듯한 미네르바의 표정. 나한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저렇게 유난 떨 정도로 큰 일이던가? 미네르바에 이어서 트로웰까지 저런 반응이 나오자, 오히려 황당해 하고 있던 내가 더 이상한 놈이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찝찝했다. 그렇다고 '니들 바보 아냐? 그런 건 당연히 가르쳐 줘야지~' 하고 말하기에는 둘의 분위기가 너무 진지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고…. 결국 나는 그들의 이유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어색하게 웃으면서 미네르바의 말을 긍정해 줄 수밖에 없었다. " 나는 괜찮아, 미네르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다. " " …정말? " " 지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 허걱. 그렇게 놀라면서 다가오면 이 몸이 더 놀라잖니? 특히 트로웰! 너는 제발 내 반경 1m 안으로 다가와 주지 않았으면 좋겠는데..하하. 가까이선 본 트로웰의 얼굴은 조금 떨어져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섹시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젠장. 같은 남자만 아니라면 작업한번 걸어보는 건데…. 아깝다. 쿨럭. " 지훈. 너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이번 물의 정령왕이 이렇게 마음이 넓다니 너무 반갑다. " " 아하하…. 그, 그래? " 겨우 이런 정도의 일로 좋은 녀석이란 소리를 듣다니, 미지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당히 얼떨떨해졌다. 오히려 이번일은 내가 가르침을 달라고 부탁해도 모자르지 않나? 거기다 선뜻 나서서 가르쳐 준다고 하면 고마워해야 할 자는 아무리 봐도 내가 되어야 하는데. 이거 뭔가 잘못 돌아가도 한참 잘못 돌아가는 것 같다. 입장이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정령왕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거나 배우는 일에 상당히 민감하다고 한다. 특히 같은 정령왕끼리 배우고 가르친다는 건 서열이 나뉘어 지는 것 같은 기분을 받기 때문에 아무리 마음 좋은 정령왕이라고 해도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는다나 뭐라나. 그래서 어떤 일이든 정령왕들이 서로에게 뭔가를 가르치려 한다는 건 상당한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했다. 정령 만들기 거기다 대대로 물의 정령왕들은 다른 정령왕들에 비해 그런 것에 유난히 민감한 편인데다, 내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대가 그중에서도 제일 심각했기 때문에 나도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성격이기에 그 후손(?)이라는 이유 하나로 같은 녀석일 거라 치부할 수 있는 걸까? 새삼 내 전대의 엘퀴네스에 대해 궁금해 졌지만 이때까지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성격이 그저 괴상하다고 여기고만 나였다. 이래서 조상도 잘 만나고 볼 일 이라는 걸까? 쩝. *** 정령계라고 해도 낮과 밤은 있었던 모양이다. 단지 지구에서처럼 어두워지면 별과 달이 나타나고 반대로 환해지면 태양이 뜨는 효과는 없었지만 일단 밤이 되니 주변 시야가 어두워진 것만은 확실했다. 물 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주변에도 자세히 살펴보니 침구와 자잘한 생필품들이 구비되어 있었고, 물이라는 공간 특성상 맘대로 부유하며 헤엄쳐 다닐 수 있었던 나는 그야말로 천국을 만난 기분이었다. 어릴 때 꿈이 비행조종사가 되어 중력이 없는 곳에서 날아다녀 보는 거였단 말이다! 비록 우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물속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공기 속에서 헤엄쳐 다니는 기분이니 내가 만족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던 것이다.(영혼일 때도 공중을 날아다니긴 했지만 공기와 접촉하는 기분이 들지 않아서 그런지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거기다 밤이 되어 어두워진 공간에도 내 시야는 주변을 살펴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시력이 나빠 언제나 돋보기안경을 쓰고 다녀야만 사물을 구분할 수 있었던 과거의 나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 아니, 출세 한거라고 표현해야 할까나? 아무튼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내가 생활할 곳을 익혀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 테이블. 식탁보. 의자. 침대…. 우와, 없는 게 없네~ 정령계라고 해서 무슨 원시시대인줄로만 알았더니 여기도 문화라는 게 있었구나~ TV 랑 컴퓨터도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건 좀 너무 무리한 희망사항인가? 하하. 어? 거울이다! " 그러고 보니 아직 태어나서 한번도 내 모습을 본적이 없는 것 같다. 예전의 나는 차마 내가 봐주기도 민망한 얼굴이라서 거울을 회피 했었더라지만, 아레히스 말로는 다시 태어나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예전 강지훈의 얼굴하고는 틀리 다는 소리겠지? 다른 정령왕들의 외모가 서양인 이었던 걸 감안해 보자면 나도 크게 그들과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두근두근한 가슴을 안고 기대 어린 시선으로 무지 화려한 장식으로 감싸진 거울을 쳐다보았다. 평범해도 좋다! 제발 추하지만 말아다오!!! 안 그럼 다른 정령왕들이랑 비교해서 너무 딸리잖아~! 그런 건 사절 이라고. " 에엑? 이게 뭐야~!!! " 거울을 쳐다본 난 그대로 경악을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비춰진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것이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웨이브진 파란색 머리카락은 그렇다 쳐도.. 아니 오히려 이런 완벽한 물빛색은 지구에서 돈 주고도 염색 못할 그야말로 천연의 빛깔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만 길이가 너무 길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그것도 나중에 자르면 되니 논외로 치고, 문제는.. " 이건 완전히 계집애 얼굴이잖아~~!!! "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지금의 내 얼굴은 비록 구질구질했었지만 그래도 남자다워 보였던 강지훈의 얼굴이 아니라, 우유를 잔뜩 빨아들인 다음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하얀 피부에, 날카로운 콧날과 피 칠이라도 한 듯한 붉은 입술. 거기에 조막막한 계란덩어리 같은 얼굴형까지 ..그야말로 예쁘장하게 생긴 계집애의 전형적인 얼굴이었다. 툭 하고 치면 팍 쓰러질 것 같이 비실거리는 몸에 머리카락까지 기니까 누가 여자냐고 물어봐도 할말 없을 것 같다. 하고 많은 얼굴 중에 하필이면 이따위 얼굴을 가지고 태어나다니, 이런 빌어먹을. 정령 만들기 같은 예쁘장한 타입이라도 차라리 트로웰 쪽이 훨씬 나았다. 페르몬이 과다 분비되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남자로 보이기는 하니까. 이딴 청순가련형 타입은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야~~!! 밋밋한 가슴에 여자얼굴이라니 웃기지도 않다. 머리카락이라도 자르면 좀 나아보이려나? 이건 미네르바 보다 더 약해보이잖아. 음? 근데 뭔가 허전한 듯한…? 불만스러운 눈으로 새로 생긴 몸을 흩어보던 나는 어딘지 익숙하지 않은 허전한 기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어야할 것이 없는 듯한 찝찝한 느낌이랄까? 아까까지도 아무렇지 않았던 게 이제 와서 이렇게 불편한걸 보니 그다지 중요한건 아닌 모양인데. 그게 뭐지? 나는 천천히 내 몸을 하나씩 더듬어(?) 보면서 이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 뭔지를 차근차근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어렵지 않게, 아니 오히려 처음에 못 찾은 것이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아주 쉽게 그 이유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이다. " !!~~~~~~~~~!#$@%#$^&!!! " 100 만 볼트에 그대로 감전 당하는 듯한 엄청난 충격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덜덜 떨리는 손은 방금 전 믿지 못할 감각을 맛본 탓이었다. 어이없다는 표정을 담고 있던 거울은 이젠 금방이라도 울듯이 일그러진 내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 없어…. 없…어! 없다 구~!! 크아악 말도 안 돼!!! " 굳건히 지키고 있던 신념이 무너질 때의 기분이 바로 이럴까? 17 년 평생을 당연하게 알아왔던 한 가지 사실이 부정됨으로서 나는 살고 싶다는 의지마저 잃어버렸다. 그야말로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해도 이런 기분을 맛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왜 내가 여자가 된 거야!!! " **** 그날 저녁…. 내 몸의 중요한 부위가 없어짐으로서 내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잠을 못자서라기보단 정신적인 쇼크로 몰골이 초췌해져있는 나를 본 이프리트는 다분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짧게 나에 대한 평가를 내렸다. " 이거 바. 보. 아냐? " " 크흑!! 하, 하지만!! " " 하지만은 무슨 하지만이야. 미네르바한테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하고 있었는데.. 정말 인간의 기억에 연연하고 있을 줄이야. 정령왕 주제에 정령이 성(性)이 없다는 것도 모르다니…. 전대 엘퀴네스가 알았다면 그대로 까무러쳐서 다신 일어나지 못했을 거야. 하- 기가 막혀서." " 그러니까 나는~ …엥? " 신랄하게 비꼬아가는 이프리트의 말에 필사적으로 내 자신을 변호하려던 나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방금 이프리트가 뭐라고 그랬더라? 뭐시기? 정령은 성이 없다고라?? 놀란 내 표정이 상당히 얼빵 했던지 이프리트의 표정은 아까보다 훨씬 더 구겨졌다. " 기본적으로 정령은 무성(無姓)이라고. 남자니 여자니 구분 지을 필요가 없단 말이야. 다만 외형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차이가 날뿐이지. 정령이 자식 낳았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어? 나나 미네르바만 해도 외모로는 확연히 여성체이지만 가슴은 없잖아? 너랑 똑같다고. " 정령 만들기 " 헉. 그, 그러고 보니…. " 그래, 그러고 보니 여자주제에 가슴이 이 정도까지 나오지 않은 건 말이 안 돼는 것 같아. 아무리 발육이 덜된 절벽가슴이라고 해도 어림잡아 17~20대 초반의 여성이 이렇게 밋밋한 가슴을 가질 수는 없는 것이다. 아, 다행이다. 그럼 내가 여자가 된 건 아니란 건가? 무성인 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실감이 나진 않지만. 일단 여자가 아니라는 거 …맞지? 나는 적잖이 안심되는 가슴을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남자. 그것도 한때 가부장제도의 주축으로 기반을 다지던 한국의 남자로 살아온 내게 있어서 여자가 됐다는 건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으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남녀차별이 아니다. 가치관의 차이랄까? 만약 내가 여자였어도 남자가 됐다면 똑같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 내리는 나를 보고 이프리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굴에 한껏 감정이 비틀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네 얼굴 어디가 여자같이 보인다는 거야? 조금 예쁘장한 편이긴 해도 아무리 봐도 남자 녀석 얼굴인데. " " 그, 그래? 하핫. 이것 참…. 인간이었을 때 남자가 조금만 예쁘장하면 무조건 여자얼굴이라고 생각했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나봐. " " 흥. 미련스럽기는. " " 하하하…. " 그래, 그러고 보면 아랫도리가 허전했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여자가 됐다고만 철썩 같이 믿었던 것 같다. 청순 틱 해서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에 비해서는 그래도 남자라고 볼 수도 있는 얼굴인 것을…. 이런 게 바로 미소년이라는 건가? 쿠쿠쿠…. 남들은 돈 주고도 못 되서 아쉬운 것을 다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거저먹었으니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 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만 자르고 나도 지금 보단 훨씬 남자다워 보일 테고. 근육이야 운동이라도 해서 키우면 될 것이다. (근데 정령도 근육이 생기나?) 헉. 근데 생각해 보니 정말 이상하네. 위는 밋밋한 가슴에 아래는 허전하고…. 이건 완전히 위는 남자. 아래는 여자 가 된 꼴이잖아? 욱, 변태 같애. 간신히 가라앉은 마음에 또다시 파문이 일어나며 찝찝함이 생기는 것이, 아무래도 이 요상한 몸에 적응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더 이상 불쾌한 기분이 들기 전에 나는 내 신체에 대한 관심을 끊어버리기로 작정했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의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행복해질 지름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란 걸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곧 고요해진 마음과 평안한 상태를 다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자 한편으로 흡족한 마음이 들면서도 뭔가 꺼림 직한 기분이 드는 것이… 아! 맞다! " 그런데 이프리트가 여긴 웬 일이야?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어쩌고? " 너무 당황했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했는데, 내가 살고 있는 물의 영역에 와 있던 정령왕은 바로 이프리트였다. 어제 그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놓고 심통 맞게 돌아가 버린 정령왕이 무슨 이유로 이곳을 다시 찾은거라냐. 행동을 봐서는 족히 몇 천 년 간 인연 끊고 살 것처럼 굴었던 녀석이 여전히 퉁명스럽긴 해도 다시 나한테 찾아왔다는 사실에 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정령왕의 업무를 가르쳐주겠다고 자기들 딴에는 파격선언(?)을 해놓고서는 코빼기 도 비치지 않는 미네르바나 트로웰도 그렇고…. 이 세계는 앞으로도 내가 배워야 할 미묘한 부분이 많은 듯. 쿨럭. 이프리트는 내가 이제 서야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챘단 사실에 기분이 상했는지 어제처럼 사정없이 표정을 구겼다. 그리곤 뭐라고 한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음산해 보여서 나는 나도 모르게 땀을 삐질 흘리며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던 것이다. 설마 이프리트! 저주라도 거는 것이냐? 정령 만들기 " 뭐야 그 겁먹은 표정은?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니? 전대 엘퀴네스는 건방지긴 했지만 그래도 품위라도 있었는데 너는 대체 그놈의 꼬락서니가…. 쯧쯧. " " …품위 없어서 미안하게 됐네요. " 그러는 자기는 품위가 넘쳐나는 줄 아나. 꼭 압구정 판 생 양아치 같이 생겨가지고서는..쳇. 그러나 나는 이 말을 당당히 이프리트 앞에서 중얼거리지는 못했다. 목숨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소중하고 아깝기 때문에. 후훗, 너무 비굴하게 산다고 뭐라고 하지 말길 바란다. 원래 비굴한 자가 생명줄 하나는 끈질기게 이어나갈 수 있는 법이다. 흠,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가 압구정이나 양아치라는 소리를 알아들을 리가 없으려나? 여기와는 차원이 다른 공간, 그것도 한국이라는 비좁은 나라에서나 통하는 언어니까 당연히 못 알아들을 수도…. 그럼, 배 째는 셈치고 한번 말해볼까? 에이, 관두자 관둬. 말을 못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억양에서부터 좋은 의미가 아니란 걸 눈치 챌 텐데. 그 후에 일어날 일을 짐작하고도 무모하게 시도해보기에는 내 배짱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 그나저나 정말 이 정령왕이 왜 온 거라지? 설마 일부러 시비 거리를 만들기 위해 행차한 것은 아닐 테고…. 이런 내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었나 보다. 이프리트는 다분히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곧 당당하게 자신의 방문 목적을 밝혔다. " 앞으로 너의 교육을 내가 담당하기로 했다. " " …… 뭐? " " 거참. 정령이 귀 먹을 수도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알았네. 못 들었어? 내가 너의 교. 육. 을 담. 당. 하기로 했다고. " 허거거.... 이건 신의 농간이다. 아니면 아레히스의 음모야! 이럴 수는 없어! 말도 안 돼! 어째서 저 정령왕이 내 교육담당이 되버린 거냐~!! 벼랑 끝으로 침몰하는 듯한 기분으로 경악에 빠져있는 내게 이프리트는 비웃는 듯이 입술 끝을 살짝 치켜 올렸다. 다른 사람이 보면 무지무지 섹시하고 엄청엄청 도발적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내게는 하늘에서 악마라도 강림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그만큼 사악하고 흉악하게 보였다는 말이다. 도대체 왜? why? 무슨 이유로!! " 죽어가는 표정 집어 쳐. 기분 나빠지니까. 누군 좋아서 맡은 줄 알아? 미네르바나 트로웰은 아크아돈의 회복에 집중 하고 있어서 바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맡게 된 거라고. " " 이…프리트…너는 안 바쁘고? " " 응. 나는 지금 겉잡을 수 없이 흉폭 해져 있는 불기운을 줄이기만 하면 되거든. 그래서 다른 애들보다는 시간이 널널한 편이지. 걱정 마. 내가 일주일 안에 완전히 정령왕으로 각성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 " ……." 그런 식으로 노려보면서 말하면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있냐고! 시련은 달리 있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하루밖에 안됐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이어질 꾸질 꾸질한 앞날을 생각하며 상심해져 있는데 이프리트가 대뜸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정령 만들기 " 너. 나한테 뭔가 할말 없어? " " 엉? " 할말? 할말이야 많지. 저기 이프리트, 나 가르치는 건 말인데…. 그거 다시 생각해 보면 안 될까? 내가 이렇게 착해 보이고 성실해 보여도 사실은 말이지. 머리도 엄청 나쁘고 반항도 조금 할줄 알거든? 네가 아무리 스파르타식으로 달달 볶아도 내가 못 따라가면 너만 고생하는 거잖아. 그치? 그러니까 부탁이니 제발 다시 생각을…. 수없는 상념들이 머리 속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입으로 나온 단어는 '엉?'하고 되묻는 말이 전부였다. 그게 어찌나 답답해 보였는지 이프리트의 표정은 도무지 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마 속으로 열 번을 넘게 '바보'라고 욕해 댔을지도 모르겠다. " 진짜 귀먹었냐? 나한테 할말 없냐고 물어봤잖아! 어제 미네르바나 트로웰한텐 너를 '지훈' 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며! 근데 나한텐 그런 말 안하겠다고? " " 엉? 아~ 그거 말이구나 하하…. " 씩씩거리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나는 뜨끔한 심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어제 그런 식으로 가버려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눌 기회가 없던 만큼 나름대로 내 소개를 기대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내가 눈치도 없이 그저 이프리트의 교육시간을 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인상이 안 좋았다고 은근히 따를 시킨 듯한 분위기라 이프리트에게 상당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표현방식이 제멋대로일 뿐 이프리트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닐지도 모르는 것을. 내가 너무 내 멋대로만 단정 짓고 박정한 게 군 것 같다. 이리 편협한 시선으로 세상을 살면 안 되는데, 쩝. 그래서 나는 기분 좋지 않았던 어제의 첫인상을 지워버리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이프리트와 잘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고 나니 어째 이프리트에게 업무를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밝은 표정으로 되도록 좋은 인상을 남기도록 노력하면서 입을 열었다. " 아, 미안. 그러고 보니 제대로 인사를 못했네. 앞으로 잘 부탁해 이프리트. 아직 이름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데.. 미네르바나 트로웰처럼 '지훈'이라고 불러줬으면 해. " 그리고 그런 나의 눈물겨운 노력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으니…. " 싫. 은. 데? " …엉?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하하. 웃고 있는 얼굴 그대로 석상이 되어 굳어진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꼬리를 휘었다. 그리곤 무척이나 오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것이다. " 미네르바가 그러던데… 너 인간일 때의 기억에 매달려서 정령왕의 자각을 못하는 거라며? 그런 상황에서 '지훈'이라고 부른다면 오히려 자각하는데 방해만 될 걸? 그러니 나는 널 '엘퀴네스'라고 부르겠어. 이 몸의 깊으신 뜻을 고마워하라고. " " …그, 그럼 어째서 나한테 지훈이라고 불러달라는 말을 하라고 했던 건데? " 처음부터 엘퀴네스라고 부를 거였다면 이런 과정이 전혀 필요 없었잖아! 싫다고 반박할거라면 대체 뭣 하러 그랬던 거야! " 그야 재미있으니까. " " ……." 휘이잉. 허무 하게 부서져가는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내일부터 교육을 시작할거라고 말하더니 미련 없이 돌아섰다. 자기 딴에는 안 들리게 한다고 조심해서 말한 모양이지만 텔레포트 하는 순간에 이프리트가 중얼거린 말은 내 귀에 또렷하게 들려왔다. " 다른 건 몰라도 놀리는 재미만큼은 톡톡한 녀석이네? 아~ 당분간은 심심하지 않겠다. " "……." 바야흐로…… 여왕님과의 전쟁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크흑. *** " 그게 아니야!! " " 그, 그럼 이렇게? "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아!! 너 돌머리야? 어째서 한번 본걸 그대로 따라 하지 못하는 거야! 전대 엘퀴네스 만큼은 못하더라도 그 발밑은 흉내라도 내야 할 것 아니야! 너 정말 그 녀석 능력을 제대로 물려받은 거 맞는 거야? 어째서 4대 정령왕중 최고의 가드와 공격을 자랑하는 물의 정령왕의 실력이 이따윈 거냐고! 설명 좀 해봐, 설명을!! " 그걸 내가 알았으면 벌써 바닥에 돗자리를 깔았다, 쳇.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이프리트의 수업은 말이 좋아 수업이지 완전히 수련을 빙자한 구박공격(!)의 연속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나 던지더라도 곱게 나오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시작할 때부터 불길했다. 뭐랬더라? '전대 엘퀴네스의 능력을 받았다면 내 수업을 못 따라올 이유가 하나도 없으니. 못하면 각오해라!'였나? 정령 만들기 그러면서 시작한 수업이란 것이 정령왕이 무엇이며 능력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론은 몽~~~땅 배제시킨, 곧바로 상급정령을 만들어내는 실습과정이었으니 내가 황당해하는 것은 당연한 거 아닌가! 그것도 눈앞에 떡 하니 불의 상급정령 하나를 만들어서 보여주더니 나보고 그걸 보고 그대로 따라하란다, 허허. 별다른 특징이란 하나도 없고, 그저 손 하나만 쭈욱 내밀기만 했는데도 불쑥불쑥 생기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고 따라하냔 말이냐. 초보한테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거 아냐? " 난 태어나자마자 할 줄 알았는데? " " ……." " 못하는 네가 오히려 이상한 거라고. 그것도 이렇게 눈앞에서 직접 시범까지 보여줬는데도 아무런 자각하는 바가 없다니, 으으 속 터져. 대체 뭐가 잘못 된 거지? " 답답하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푸념이 길게 늘어졌지만 나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지가 아무리 답답해봤자 어디 당사자인 나보다 더 하겠냐고, 쳇.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아레히스가 줬던 쓴 용액을 다 마시지 않은 걸 후회할 정도다. 그걸 다 마셨다면 기억을 잃게 됐을지도 모르고, 그럼 오늘날 이 모양처럼 정령왕으로 서의 자각을 못하게 되지는 않았겠지. 한 모금 이라도 더 마시느니 차라리 죽겠다고 외쳤던 그 빌어먹을 액체를 오히려 마시지 않은 게 후회가 되다니. 게다가 그게 정말 망각의 물이 맞다 면, 지금의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전혀 다른 내가 된다는 것인데,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후회가 될 정도이니 내 심정이 오죽한지 알만하지 않은가. 이게 다 저 정령 하나 태워 죽일 듯이 몰아붙이는 이프리트 때문이다! 원체 날 보는 시선이 곱지 않는 녀석이었는데 수업을 시작하고 나서부턴 원수도 이런 원수를 본적이 없다는 듯이 대한다. 말끝마다 '멍청한 놈 한심한 놈' 이라며 자존심에 상처 입히는 건 기본이고 '네가 이런 걸 어떻게 하겠냐, 그치?'라며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 데다 전대 엘퀴네스와 사사건건 비교해대는 것 까지. 정말 올바른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덕목만 모조리 외워 놓은 것 같은…. 아, 흠흠. 이건 아니지. 이프리트가 내 선생도 아니고. 지금 이프리트가 날 교육 시키는 것은 정령왕 으로서의 자각에 도움을 주고 있는 것뿐, 그가 내 선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정령왕들은 서로에게 동급. 낮춰 볼 수도 올려 볼 수도 없는 존재이니까. 그러니 이프리트가 날 달달 볶는다고 해서 학생의 입장으로 선생을 원망하는 심정이 되면 안 되는 것이다. 어째 그것이 더욱 억울해 지지만…. 근데 정말 이상하네. 전대 엘퀴네스와 이프리트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지 않았나? 사이가 안 좋았던 정령왕들 치고는 이프리트가 나와 전대 엘퀴네스를 비교 하는 것이 어째 심상치 않다. 설마하니 속으론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시비 걸고 싸움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가 아니네.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거기다 대대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던 이프리트와 엘퀴네스 였으니 드러내놓고 친해지지가 쉽지 않았을지도…. 흠. 그래서 이프리트가 날 그렇게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가?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호감 있던 존재가 소멸한 것만도 불쾌 할 텐데 그 자릴 꿰어찬 놈 이란 게 나같이 얼빵 하고 소심한 녀석이었으니 울화가 치미는 게 당연할지도.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보니 나에 대한 이프리트의 무조건적인 반감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에 대해 쌓여가는 감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니, 어쩌면 나 혼자만의 억측일지도 모르겠다. 이프리트가 전대 엘퀴네스를 정말로 좋아하고 있었다면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들과 같이 지내왔던 트로웰이나 미네르바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으니까. 그럼 뭘 까나…. 그냥 좋은 라이벌이 사라진 것에 대한 울분정도가 될까…? 으윽,관두자 관둬. 괜시리 어울리지도 않는 추리해본답시고 고민해봤자 머리나 아프지. 아무래도 이 문제는 나중에 날이라도 한번 잡아서 이프리트와 진지하게 대화를 해봐야 할 것 같다. " 남은 열심히 가르치고 있는데 무슨 딴 생각에 빠져 있는 거야! 너 진짜 그따위로 할래? " 열심히 가르치기는 개뿔이…. 옆에서 빨리 만들어 보라고 호통만 치는 게 열심히 하는 거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를 위한 희생정신으로 투철한 인간들이냐? 따지고 싶은 마음으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정령 앞에서 딴 생각 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그냥 참고 넘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프리트의 교육방식은 정말 따라가기 힘들다. 내가 무슨 천재도 아니고 말이야. " 이프리트. 자세히 설명 좀 해주면 안 될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보는 것만으론 이해가 안 되서 그래. " 더불어 그 보는 것도 딱 한번뿐이었다. 쪼잔한 이프리트는 그 한번 이후로 따라해 보라고 닦달 만 할 뿐 다시 정령을 만들어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내 부탁 아닌 부탁에 아까 전 이프리트가 만들었던 불의 상급정령 이그니스가 쩔쩔 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불새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이그니스는 이프리트의 옆에 서있는 것이 몹시도 황송한 모양인지 아까부터 우물쭈물하며 나와 이프리트의 실갱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정령왕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직속 상관(?)도 아니고. 자신의 왕인 이프리트에게 이토록 면박을 당하고 있는데도 이그니스는 전혀 나를 비웃는다거나 깔보지 않았다. 정령과 정령왕은 그 속성의 계열이 다르더라도 절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 저런 충실한 모습을 보자니 나도 빨리 정령을 만들어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무럭무럭 자란다. 세상에 자신의 절대적인 쫄다구가 생긴다는데 싫어할 존재가 어디에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나 시작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한 나의 정령 만들기 수업은 도무지 진지하지 않은 이프리트로 인해 계속해서 난관을 거듭하고 있었다. " 설명? 그래, 좋아 설명해주지. 그냥 정신을 집중해. " " …겨우 그것? " " 그럼 뭘 더 바라는데? 잔말 말고 빨리 정신이나 집중해봐. 너의 기운을 한자리로 모은다고 생각해 보라고. " " ……." 이후로도 이프리트가 나에게 계속해서 강조하는 말은 그저 정신이나 집중하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뭔가를 해보려고 해도 옆에서 계속 종알거리는 이프리트의 참견 때문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집중 할수 없었고 결국 날이 어두워 질 때까지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정령 만들기 아무리 먹거나 잠자지 않아도 살수 있는 게 정령이라지만-영혼으로 지낸 며칠간으로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이 사실을 알았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정신적인 스트레스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인지 날이 저물고 나자 나와 이프리트는 상당히 녹초가 되어버렸다. 투덜투덜 거리면서도 날 가르쳐야겠단 사명감에 불타오른 이프리트는 내일을 기약하자면서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갔고, 나는 스스로에 대한 한심함과 창피함에 한동안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녕 나에게도 정령을 만드는 날이 오기는 할라나? *** 저녁이 되자 사방이 어두워짐과 동시에 주변은 무척이나 고요해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적막감이 이제 서야 느껴진다는 것은 아무래도 오늘 하루 종일 옆에서 종알거렸던 이프리트의 잔소리가 없는 탓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폭탄선언을 하러 잠시 이프리트가 들린 이후로는 하루 종일을 혼자서 멍하니 보냈다. 비록 대화가 통하지 않더라도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혼자인 것을 죽어도 싫어하는 내가 낯선 환경에서 종일을 있었어도 아무런 느낌 들지 않았다는 것은 솔직히 굉장히 묘한 기분이었다. 이건 내가 원래의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마음이 안정된 탓일까, 아니면 정령왕이란 존재 자체가 이렇게 생겨 먹은 건가… " 흐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조금 심심하긴 하다. 뭐 할 거 없나? " 바쁘다는 핑계로 내 교육을 이프리트에게 위임해 버린 미네르바나 트로웰도 정령계의 저녁시간에는 일을 잠시 쉰다고 들었다. 둘은 지금쯤 자신들의 영역에서 놀고 있을 테고, 놀러 가면 분명히 반갑게 맞아주겠지만…. ' 텔레포트하는 방법을 모르잖아, 제길. ' 걸어가는 방법도 없지는 않겠지만, 가는 방향도 모르는데 무조건 나설 수는 없다. 그러다 운 나쁘게 불의 영역으로 가버리면 이프리트의 무수한 잔소리를 또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정령을 만드는 일이 시급한건 알지만 이런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미리 알려줘도 상관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프리트는 너무 쪼잔 하다니까. 하긴, 정령왕에겐 숨쉬는 것보다 더 쉽다는 정령 만들기 에서부터 걸리는 나인데 어디 텔레포트가 가당키나 하나 만은. 그래도 쪼잔 한 건 쪼잔 한 거다, 뭐. 쳇…. "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프리트가 말한 정신집중이나 해볼까? 참견쟁이도 없겠다~ 조용하겠다, 아까보단 잘 될 것 같은데. " 하루 종일 혹사당한 정신을 또다시 부추긴다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소란스러운 이프리트 옆에서는 아무리 해도 진전이 없을 것 같아서 나는 혼자가 된 지금 다시 시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잠도 안와서 할일도 없는데 잘됐다 싶은 태평한 기분으로 말이다. 지금은 실패하더라도 놀려댈 불의 정령왕도 없고, 실패한 나보다 더 민망스러워할 불의 상급정령 이그니스도 없다. 그러니 맘 놓고 시도해 보는 거야! 핫핫핫. 될 대로 되라하지 하는 심정으로 침대 한 켠에 자리를 잡은 나는 마음을 가다듬은 상태로 두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눈을 뜨고 있는 것보단 감고 있는 쪽이 집중하기에 더 편하기 때문이다. 넘실거리는 물의영역에서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자 기다렸다는 듯 새카만 어둠이 꾸물꾸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완벽한 적막감. ' 그래~ 이 정도는 되 야 집중하기에 편하지~ '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당연하다 눈을 감고 있으니까.)들리는 소리역시 하나 없는, 그래서 온전히 혼자가 된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름끼치는 감각이 전신에 물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종류의 적막함은 나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생활의 일부였던 것이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나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 지난 며칠간 중에서 가장 행복한 기분이었다. 안정이 된다고나 할까? 아직 인간이었을 때의 버릇-그래봤자 얼마 지나지도 않았지만- 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정령 만들기 ' 장난 아니었지, 그때. 아버지는 매일 술 취해서 들어오지… 형들은 시비 거리 찾기 위해 두리번 거리지. 자기들이 무슨 먹이 감 찾는 하이에나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지, 하이에나는 오히려 귀엽게 생기기나 했지. 나랑 똑같은 유전자를 받은, 그 열등한 외모로 얼굴마저 일그러뜨리고 다녔으니 보기만 해도 짜증이 났다고. 아무튼 그 인간들 피해서 벽장에 숨어 지내던 우울한 과거가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만….쩝. ' 술에 취한 아버지한테 일단 한번 걸리면 그날은 온몸에 피멍이 들도록 모질게 맞았다. 형제들이나 어머니나 그러한 행태를 말려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지칠 때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구타를 당했던 거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술을 마셨다! 하는 정보를 입수하면 조용히 윗 층의 다락방으로 가서 몸을 최대한 숨겼었다. 나를 찾아낼까봐 불안감에 몸을 떨고, 숨소리마저 들킬까봐 최대한 호흡 양을 줄이면서, 가족이 모두 잠든 새벽이 올 때까지. 그 다음날이면 오랜 시간 벽장에 틀어박힌 결과로 전신에 근육통이 도져 아파 돌아가실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한 고비 무사히 넘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안도하고 가슴이 뿌듯해졌는지 모른다. 딱딱한 나무로 만들어져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당구 채로 두들겨 맞는 것보단 근육통이 백배 이롭지 않은가? 게다가 근육통은 하루면 사라지지만 당구 채로 맞아서 생긴 멍은 며칠이고 계속 아프단 말이다. ' 아, 이런 잡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집중하자, 집중. ' 오랜만의 적막감을 맛봐서 그런지 쓸데없는 기억이 자꾸만 도지는 것 같다. 나는 산만한 정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면서 기운을 한자리로 모으라는 이프리트의 설명을 떠올렸다. 기운? 기운이라…. 무협지에 나오는 무사들처럼 나에게도 기운이 흐르고 있다 이 말인가? 그걸 내가 지금 캐치하지 못한다는 것? 도대체가 무슨 소린지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줘야 할 것 아닌가.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거늘, 기운도 느끼지 못하는 날더러 기운을 모으라고 하면 그게 그렇게 쉽게 되겠냐고. 지금쯤 자신의 영역에서 달콤한 잠에 빠져있을 이프리트를 잠시 씹어준 다음 나는 내 몸에 흐를 것이라 추. 정. 되. 는. 기운의 흐름을 알아내기 위해 감각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예민해진 피부 탓인지 아까까진 느껴지지 않았던 주변의 물의 흐름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미약한 것이라 자칫 마음을 놓아버리면 다시 찾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뭐랄까. 우리가 공기 중에 있으면서도 공기의 흐름을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달 까? 공기는 분명히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도 바람이 불지 않으면 신경이 가지 않는 것처럼, 지금 내가 있는 물의 영역역시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데도 그 움직임이 너무나 미미해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움직임을 잡아내고 나자 나는 이들이 미세하게 움직일 때마다 내 몸도 같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었다. ' 이게 뭐야? 겨우 이정도의 흐름에 몸이 흔들리다니….대체 어떻게 된 거라지? ' 공기의 흐름이 아무리 급작스러워도 사람의 몸을 흔들 수는 없는 것이다. 태풍이 불 때라면 모를까. 자연스럽게 스치고 지나가던지, 혹은 흡수를 하던지 통과를 하던지 해야 할 물의 미미한 흐름에 내 몸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조금 신기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마음을 편하게 하고 물의 흐름에 온 신경을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이 자연스러운 흐름에 둥실둥실 흔들리는 감각을 맘껏 즐기기로 했다. 내 몸에 흐르는 기운을 알아내어 정령 만들기 수업에 진전을 보여야겠다는 처음의 의지는 몽땅 소각시킨 상태였다. 뭐 , 아무렴 어때. 어차피 복습 이라는 것은 나하곤 어울리지도 않는다. 마땅히 할일이 없기에 시도 해보려던 것 뿐, 신기한 것을 발견한 지금에 와서까지 고집할 정도로 집착이 가는 일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종일 시달린 일이 이제와 집중해 본다고 해결된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은 자유시간이니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마음 아닌가? 훗훗. 이프리트가 안다면 꽤나 인상을 찌푸릴 생각 이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눈을 감은 채 물의 흐름 만을 느끼도록 정신을 집중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그러고 있었더니 이제는 물이 흐르는 미약한 소리까지 내 귀에 닿고 있었다. 재잘재잘 거리는 것 같은 맑은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아까 전 까지만 해도 느껴졌던 적막감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나는 무척 편안한 상태가 되어 마치 처음부터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기분 좋은 감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정령 만들기 아아, 그래, 나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내 주변에 넘쳐나는 물들, 그것들과 함께 있었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나도 물이라는 소리가 아닐까? 비록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지만 내 몸도 물로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이 들고 보니 주변의 물과 한걸음 더욱 가까워진 것 같았다. 신선한 기분, 신선한 감각, 신선한 감동. 마음껏 물의 소리와 흐름을 즐기던 나는 문득 이것들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물이니까, 물의 왕이니까 내가 하고 싶어 하는데로 움직여 주지 않을까?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너무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한 나머지 정신이 잠깐 나간 것일 수도. 나는 물에 집중 하고 있는 그 상태로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저녁이 되도 여전히 푸른빛으로 아름다운 물들이 나의 몸을 감싸듯 유유히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참, 이상도 하지. 분명히 눈을 감기 전엔 이런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말씀이야. 새삼 집중해보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 자아, 이제 이 물들을 어떤 식으로 움직여 볼까나?' 평소의 나라면 이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거다. 물을 움직여 볼까 라니. 물이 무슨 내 수족도 아니고. 내 몸에 붙어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무슨 수로 원하는 모양으로 움직인단 말이냐. 하지만 지금 나는 너무도 당연하게 물들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드디어 미친 건가? 뭐, 아무렴 어때. 주변에 가득 넘실거리는 물의 공간은 사파이어를 잘게 부셔서 넓게 펴 발라 놓은 것 같았다. 이부분에서 한 덩이를 떼어다 동그랗게 만든다면 꽤 예쁠 것 같다. 물의 색깔이 원래 이렇게 예뻤었나? 나는 마음속으로 물 덩이가 내 앞에서 이루어지는 상상을 했다. 아니, 상상을 한다고 말할 수 도 없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내 앞으로 물이 천천히 모여 들더니 하나의 덩이를 만들어 버렸으니까. 마치, 내가 손을 움직이기 위해 따로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이다. 가공되지 않은 사파이어 원석 같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농구공크기의 물 덩이를 보며 나는 얼떨떨한 심정으로 땀을 삐질 흘렸다. 설마 진짜로 물을 움직일 수 있을 줄이야. *** 일단 한번 물을 조정 할 수 있게 되자 그 다음부턴 일사천리였다. 유심히 집중하여 나약하게 흐르는 물의흐름을 애써 잡아내지 않아도 아주 쉽게 움직임을 찾아낼 수 있었고, 조정하는 물의 모양도 자유자재가 되었다. 처음엔 그저 단순한 농구공 모양의 물 덩이였던 것이 조금씩 다듬어 내자 나무모양도 되고 별 모양도 되는 것이다. 때문에 물의 모양을 만들기에 재미를 붙여버린 나는 무슨 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 조각가가 되는 마냥 심혈을 기울이며 여러 가지 작품을 선보이고 있었다. 강아지 모양이나, 새. 호랑이 등등. 물의 공간은 순식간에 여러 가지 동물의 모양을 한 물 덩이가 여기저기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 참에 사람도 만들어볼까? 마땅히 떠오르는 모델이 없어서 전생의 내 모습을 만들어 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갑작스런 방문자로 인해 생각으로만 만족하고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 " " 엥? 이프리트? " 물의 영역 한쪽에 시뻘건 불꽃이 솟아오른다 했더니 금새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내곤 사라졌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에 섹시한 눈매가 매력적인 이프리트와 불사조형상을 한 불의 상급 정녕 이그니스였다. 이프리트는 그렇다 치고 -어제 만든 것이 분명한- 저 이그니스는 왜 데리고 온 거라지? 설마 정령하나도 못 만드는 날 약 올리려고? 딴 녀석이라면 몰라도 이프리트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시 이프리트의 교육방식은 틀려먹었어. " 뭐야, 그 의미 모를 도리질은?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빠진다? " " 아하하 그저 잡생각 을 좀.. 근데 왜 벌써 왔어? " 정령 만들기 이프리트가 내일을 기약하며 돌아간 지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별다른 기별 없이 다시 왔다는 소리는.. 설마 저녁에도 공부하자는 소리?? …그건 아닌 모양이다. 이프리트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면. " 무슨 헛소리야. 날이 밝은지가 언젠데. 이제까지 한껏 여유 부리다가 온 거란 말이야. " " ……엥? " 나, 날이 밝았다고? 황당한 심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허걱…. 정말 어느새 날이 밝아있었다. 물로 뭔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매력에 빠져 창작에만 열중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황당한 일이. 내가 이렇게 집중력이 좋았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침을 맞아버린 물의 영역은 침침한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고 완연히 흰빛으로 사방을 밝게 비추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잠시 주위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이프리트는 내가 결과적으로 밤새 만들어 놓은 물로 된 조각상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특유의 오만한 포즈와 함께 뜬금 없는 말을 내뱉는 것이다. " 흠. 난 역시 천재라니까? " " 뭐, 뭐가? " 내가 만든 조각상을 보고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건 뭔가 커다란 오류가 있는 것 같지 않냐, 이프리트? 내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지 이프리트의 시선은 조각상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러더니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밤새 이만큼의 진전을 보이다니! 난 역시 대단해~ 이 정도로 정교하게 물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 정령을 만드는 것도 이제 시간문제야. 역시 가르치는 방법이 좋았어 " " ……." 아아. 정말이지 네가 언제 그렇게 좋은 방법으로 날 가르쳤냐고 따지고 싶다. 분명 정신을 집중하라는 이프리트의 말에 힌트를 얻어서 이뤄낸 성과이긴 하다. 하지만 그의 말을 인정할라 치면 가슴속에서 뭔가가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것이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뭐랄까..차마 말로 형용 할 수 없는 울분 혹은 격분이라고나 할까? 이건 절대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런 게 아니다. 내 얼굴에 미미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 을 눈치 챘는지 이프리트는 짐짓 딴청을 피우며 헛기침을 했다. 저도 찔리는 게 있는 건 아는 모양이지? 덕분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주 조.금. 지렁이가 물고 다니는 모래알만큼, 불개미의 연약한 더듬이만큼, 온 세상에 널리널리 퍼져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의 크기만큼!!! " 뭐, 뭘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나한테 관심 있어? 흐응~ 전대 엘퀴네스 만도 못한 실력으로 나를 넘보다니. 간도 크구나~? " " 커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 " 어머? 그렇게 이글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는데 그럼 아니란 말이야? 하긴~ 나처럼 섹시하고 예쁜 정령을 찾아보기는 힘들긴 하지. 나한테 반하는 네 심정을 내가 어떻게 모르겠어? 그치만~그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말이지~ 나는 물의 정령하고는 친하게 지낼 생각 없거든? 날 그냥 포기 해줘." 공주병도 있었더냐 ,이프리트? 세상의 삼대 불치병(암, 에이즈, 공주병)중에서도 가장 고치기 힘든 것에 걸리다니..잠시 묵념 해줄까? 물론, 이프리트가 예쁘게 생기긴 했다. 강지훈 이었던 그 시절의 우리 반 여자 애들에 비하면 거의 천사처럼 보일 지경이고, 한가닥 한다는 유명연예인들을 한자리에 모아놔도 이프리트보다 예쁜 인간은 찾기가 힘들 정도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공주병은 경도가 미미하다면 무난히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저 얼토당토 않는 도끼병(어느 이성이든 자신을 무조건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무시무시한 병)까지는 너무 한 거 아니야? 하늘에 맹세 하건데 너한테 흑심이나 연애 감정 따위는 품어 본적이 없단 말이다! 트로웰 이라면 또 모를까…쿠, 쿨럭. 이, 이게 아니지 흠흠. 어쨌든 이프리트의 말에 정신적 충격을 받은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기 위해 부들부들 말을 이었다. " 저기, 나는 너한테 그런 감정 전혀 없거든? "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허튼 상상은 제발 그만둬 주지 않으련? 나도 보는 눈은 있다고. 이렇게 말하면 이프리트가 반격이라도 할줄 알았다. 그럼 왜 그렇게 뜨겁게 쳐다 봤냐느니, 창피하다고 감정을 숨기지 말라느니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특유의 도도한 표정으로 '농담 이었어' 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 어? 이, 이프리트? "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머물러있었던 장난끼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얼굴로 이프리트는 날 바라보았다. 어쩐지 굳어 보이는 표정. 가늘게 노려보는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슬픔? 혹은 원망. 아니면 그리움.그 순간 나는 이프리트와 나 사이에 무언가 침범할 수 없는 차가운 벽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마치 서로 절대 어울릴 수 없는 물과 ,기름. 불길과 물길처럼. 이프리트가 불의 정령이고, 내가 물의 정령 이란 걸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 녀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정도 까지 거리감을 받은 적은 없었는데. 두 눈에 가득 담긴 적의. 이프리트는 지금 화내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분노인지는 어쩐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이프리트가 노려보고 있는 것은 나지만, 담겨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한참을 나를 통해 그 '누군가'를 노려보던 이프리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알고 있어. 네가 나한테 아무런 감정 없다는 거. " 아련한 슬픔이 묻어나는 저 목소리 역시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나한테 말하고 있지만, 이프리트가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쩐지 건드리면 안 될 부분을 건드리고 만 것 같아서 나는 속으로 땀을 삐질 흘렸다. 제길…. 나는 그냥 인류의 적인 도끼병을 조금만이라도 퇴치해보고자 했던 것뿐인데. '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야!!' " 돌아가겠어. " 어찌할 바를 몰라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내게 어느덧 '나'를 바라보기 시작한 이프리트가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전의 일로 무지 감정이 상했는지 심술 맞은 표정이었다. " 도, 돌아가다니? " " 흥, 귀찮아 졌어. 내가 왜 널 가르쳐야 하는지. 생각해보니까 그럴 이유가 없겠더라고. 혼자서도 물을 다룰 수 있게 됐으니 내가 없어도 상관없겠지? 앞으로 잘 해봐~ " " 뭐어? 자..잠까안~~!! " 커헉.. 늦었다. 이프리트는 이그니스와 함께 불길이 되어 내 영역 안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미 사라져버린 이프리트가 있던 공간을 허무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가르침도 아니었거늘, 이런 식으로 팽개치고 도망가 버리다니! 아까 그거 혹시 귀찮은 일을 그만 두려던 이프리트의 고도의 연기력이었던 거 아니야? 막막한 미래를 생각하자 현기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강지훈- 겁나게 운 좋아 정령왕으로 태어난 인간. 아니, 겁나게 운이 나빠 인간으로 태어났었던 정령왕. 이프리트에게 정령왕 업무 배운지 이틀 만에 파토 나다. 크흑…. 운디네와 시큐엘 그 날 이후, 정말로 이프리트는 나 혼자 하게 내버려두었는지 다시는 물의 영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미네르바나 트로웰에게 도움을 바란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소리 아닌가. 결국 나는 며칠째 혼자서 물을 가지고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거리고 있었다. 주변의 물들을 하나의 존재로 인식하고 나서부턴 혼자라는 적막감 따위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 옆에서 수다를 떨고 재잘재잘 거리는 것 같아서 이프리트가 옆에 있을 때 보다 더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맑은 물 흐르는 소리가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로 들리다니 정녕 내 귀가 이상해 진 것이 틀림없다. - 만나서 반가워. 이번에 새로 태어났구나 - 그래, 그래. 너도. 후훗. - 그런데 왜 운디네님 들은 안 오시는 걸까? 벌써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 시큐엘님도 없어.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이 광활한 바다를 전부 정화 할 수 없는데…. 엘퀴네스님은 왜 가만히 계시는 거지? " ……." 이 정도쯤 되면 단순히 귀의 이상정도 가 아니다. 그동안 안 쓰던 머리를 너무 굴렸던 부작용 인 거야. 난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해!! 처음 물을 다루게 된 것을 계기로 수군거리며 들리기 시작한 이 수다 소리는,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내가 정령을 만들기 위해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들리는 범위가 커지고 소리가 뚜렷해지고 있었다. 지치지도 않고 떠들어대는 소리에 질려버린 내가 어느 한순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버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에는 늘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뜬금없이 그들의 수다 속에 내 이름이 간혹 들어가는 때도 있다. 설마 싶어서 주위를 둘러봐도 보이는 거라곤 여전히 정적인 물의 흐름밖에는 없는데, 도대체 이게 어디서 들려오는 건지. 환청이어도 문제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에게는 충분한 고민거리였다. 뭐, 그래도 요 며칠 간 많이 익숙해지는 바람에 긴장했던 처음과는 달리 이젠 그들이 떠드는 세상얘기를 들으며 즐길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래서 알게 된 건데, 이제부터 내가 정 붙여야할 이 아크아돈 이라는 세계는 그전에 살았던 '지구'와는 이해해야하는 개념부터 다른 세상이었다. 귀족과 평민. 상인과 노예라든지, 기사나 레이디. 황제에 대한 얘기가 나왔을 때만 해도 그저 지구에 비교해서 몇 세기 뒤떨어진, 중세시대 정도 되나보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레드 드래곤이 헤츨링을 낳았다느니, 엘프 숲의 누군가가 결혼식을 올렸다느니, 마법사나 소드 마스터가 어쨌다느니 하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결코 이곳이 평범한 세계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가 그랬었지. 아크아돈은 인간을 비롯한 타 종족이 함께 존재하는 차원들 중의 하나라고. 내가 없는 동안 부족한 물을 인공 비를 내려 보충시켰다는 말에 그저 과학의 발전이려니 생각하고 말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지구에서는 너무나 생소하지만, 여기서는 숨쉬는 것보다 당연한- 마법.(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마법을 할줄 아는 건 아닌 것 같다. 마법사가 되는 것은 그 자질을 가지고 태어난 선택받은 소수에 불과하며 사람들에게 꽤 존귀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특히나 요 십 몇 년 간 비가 내리지 않을 때 그들의 힘이 무척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제국의 황제보다 더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나 뭐라나.)그것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기사. 정령이라는 존재가 생태계를 유지한다는 곳인데, 지구와 똑같을 리는 없겠지. 이들의 말을 듣자면, 전 세계는 지구와 아크아돈을 포함한 여러 차원과, 주신을 포함한 여러 상, 중, 하급의 신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신계, 그리고 악한 속성을 지닌 존재들이 주를 이루어 구성되어있는 마계와, 죽은 이들이 모이는 명계, 그리고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정령계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신들은 신계에 머물면서 각각 자신들이 맡은 차원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데, 주신이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지구'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차원들의 일은 중, 상급 신들의 손을 거쳐서 이루어지지만, 차원의 멸망이나 탄생 같은 존속문제 만큼은 주신의 허락을 받아야만 한다고 한다. 전쟁과 사랑, 인간의 희노애락을 관장하는 것은 대부분 중급 신들의 일이고, 차원의 유지와 전체적인 모든 것을 관장하는 것은 상급 신들의 일. 하급 신들은 인간세상의 자연을 가꾸는 일을 하지만, 아크아돈에서는 그 일을 정령왕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하급 신들이 필요하지 않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꿋꿋하게 놀러 와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어 가는 몇몇 하급 신들이 있는데, 전에 트로웰이 투덜거리던 대상이 바로 이런 하급 신들인 모양이다. 몇 백 개에 해당하는 숫자의 차원들 중에서도 아크아돈은 '정령'이라는, 다른 곳에는 없는 특별한 존재의 힘으로 자연을 꾸려나가는 만큼, 인간세상도 그만큼 다른 차원보다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고 들었다. 종족들의 분포도 빠짐없이 고루고루 되어있는 편이고, 인간의 능력도 타 차원의 인간들보다 훨씬 상회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정령을 다룰 줄 안다는 정령사와 마법사의 능력이 뛰어나다나 어쨌다나. 정령 만들기에 성공하고 나면, 바깥세상 구경하러 돌아다닐 수 있으려나? 아, 마법사 보고 싶다…. - 들리는 소문으로는 엘퀴네스님이 인간으로 잘못 태어나시는 바람에 그 기억에 매어 왕의 업무에 적응을 못하시는 거래. - 뭐어? 그게 정말이야? 그래서 운디네님들이 못 오시는 건가…. - 설마~ 아무리 그래도 왕이신데 정령하나 제대로 못 만드셔서 쩔쩔매시진 않잖겠어? - 맞아. 만약 그렇다면 엘퀴네스님은 바보야. - 쿡쿡쿡. 맞아. 정말 바보야. …썩을. 그래, 나 정령왕인 주제에 정령도 못 만드는 바보 중에 최고 바보다, 어쩔거냐, 이것들아! 이렇게 마구 마구 내 뒷담을 까고 있는 걸 보면 이 수다쟁이들은 자기들의 소리를 내가 듣고 있다 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이 녀석들. 혹시 나이아스들인가? 운디네나 시큐엘과는 달리 내가 직접 만들지 않아도 스스로 내 기운을 느끼고 탄생한다는 물의 하급정령을 떠올리며 나는 표정을 사정없이 구겼다. ' 이것들이 감히 지 상사(?) 뒷담을 까? 내가 그렇게 만만히 보인다 이거지? ' 어째서 전 세계에 고루 퍼져있어야 할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거리낌 없이 나를 '왕'이라고 부르고, 정령들 밖에는 모르는 내 불우한 탄생스토리를 알고 있는 것을 보아 이것들은 틀림없이 정령들이 맞는 것이다. 그것도 바다를 정화 할 수 없다느니 운디네와 시큐엘은 왜 이리 안 오냐 느니 떠들어대는 걸로 봐선 확. 실. 한. 물의 정령들이었다. ' 어허 통제라…. 동료복도 없는 나는, 부하복도 없는 놈이었단 말인가? 우째 이런 일이.' 하지만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도 이상하게 화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철부지 여자아이들의 가는 미성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들끼리 재잘거리는 것 같아 그저 귀엽다고만 생각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자의 여유라는 건가? 아니면 어른들이 대드는 꼬마를 바라볼 때의 심정인가. 아무튼, 빨리 정령들을 만들어야 저런 괘씸한 대화들이 오고가지 않을 것인데 말이지. 문득 부하한테 무시 받고 좌절하는 상사의 기분으로 한심해져있는데 예상치 못한 힌트가 나이아스들의 대화에서 들려왔다. - 그거, 그거~ 그냥 명령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 그럴걸? 물의 흐름을 한자리로 모으면서 탄생하기를 명령하면 될 텐데. - 에이~ 그렇게 쉬운 걸 엘퀴네스님이 못하실 리가 있어? 다른 방법이겠지. - 그런가? 맞아, 그렇겠다. 다른 방법일거야. " ……." 명령? …명령이라…, 하하. 그러고 보니 나는 지난 며칠 간 어찌하면 정령을 만들 수 있을까 하고 끙끙거렸을 뿐, 뭔가 시도를 해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내 기운을 한자리로 모으려면 먼저 기운을 느껴보는 수밖에 없단 일념으로 하루 종일 명상에 잠겼다가 허탕 친 적도 많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안색을 하얗게 굳혔다. 설마 이프리트가 말한 내 '기운' 이라는 것이 물이란 말이야? 물의 흐름을 잡아내는 것? " 허허허. 하긴, 내가 물이니까 물의 흐름이 내 기운의 흐름이나 마찬 가지겠… 이런 빌어먹을!!! " 아아, 나의 고상한 입에서 요즘 들어 너무 험한 말이 많이 나가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정령왕으로 태어나고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난 며칠 간 고입 시험 때도 굴리지 않았던 머리를 쥐어 짜가면서 혹사시켰건만, 정녕 내게 돌아온 결과는 이런 것이란 말인가? 물의 흐름은 이미 진즉에 잡아냈단 말이다! 이제는 그 흐름까지도 내가 마음먹은 대로 바꿀 수 있는 경지에까지 올랐거늘. ' 아니지, 이제라도 알아내서 다행이라고 해야지. 나이아스들이 떠들지만 않았어도 난 계속 끙끙거리고 있었을 거고. 그렇다고 이프리트가 다시 와서 친절하게 가르쳐 줬을 리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건 운이 좋은 거야. 그, 그렇게 생각하자. ' 운디네와 시큐엘 때론 매사를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특히나 나같이 불행한 정령에게는 더더욱. 자, 우울한 감정은 멀리멀리 떨어내고~~ 이제 방법도 알았겠다! 고대하던 정령을 만들어 볼까나? 훗훗. 가까운 길을 아주 멀리 돌아서 온 것만 같다. 오늘이 오기까지 그 얼마나 구석에 처박혀 궁상을 떨었더냐. 나는 잠시 북받쳐 오르는 감동을 느낄 뻔하다가, 아직 정령 만들기에 성공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곤 천천히 감정을 가라앉힌 다음, 그동안 해왔던 대로 물의 흐름을 느끼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사실 이젠 굳이 집중하고 말 것도 없이 물의 기운쯤이야 자연스럽게 찾아낼 수 있지만, 아무래도 사안이 사안인 만큼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신중을 더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미미한 물길의 흐름에 내 몸은 살며시 흔들렸다. 나를 중심으로 퍼져있는 물의 잔잔한 진동은 내가 정신을 집중하자 더욱 선명히 느껴지며 어미 닭을 쫓는 병아리처럼 천천히 나에게로 모여들었다. 그 이동시에 느껴지는 물의 파장들이 너무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부드러운 실크 천에 푸욱 파묻히게 된다면 그때의 기분이 이럴 것 같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 들어가 있는 태아도 이런 느낌일까? 완연히 하나로 뭉쳐진 물의 기운들은 곧 떨어질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고 천천히 정렬되기 시작했다. 가만, 물도 정렬된다고 표현할 수 있나? 이게 무슨 군대의 군인들도 아니고. 흠, 냅두자. 여기까지가 내 표현력의 한계인 게야. 헐헐.. " 자, 그럼 모두 모아놨으니 이제 명령을…. 에? 명령? 뭐라고 명령해야 하는 거지? " 한시름 덜어 놨다 했더니 예상치 못한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기운을 모아 놓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떤 식으로 명령해야 하는지를 내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중급과 상급이라면 만들어지는 과정이 서로 다를 수도 있는데 어찌해야 한다지? " 그냥 운디네 태어나라!…는 아니겠지. " 역시나 말을 꺼낸 내가 스스로도 무안해 질 정도로 기운들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 태어나라' 가 아니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탄생해라? 만들어 져라? 안 태어나면 죽일 겨? 제발 태어나 주세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두서없고 멋대가리 없는 문장만 떠오른다. 그래, 매번 국어점수 75점을 들락날락 하던 실력으로 무슨 멋드러진 문구냐, 문구가.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 제발 태어나 달라고~! 이프리트는 어떻게 명령해야하는지를 왜 안 가르쳐 준거야! 어쩐 일인지 내 앞에 모여 있는 물의 기운들이 식은땀을 흘려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몸이 허 해진 게 아닐까. 나는 명령어를 생각하느라 흐트러진 정신을 다시 기운들에게 집중시켰다. 이런다고 뭔가 해결책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별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물의 흐름만 열심히 정돈해두는 수밖에.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기운에 집중하는 방법은 의외의 효과를 일으켰다. 점점이 점멸 하는 빛들과 새롭게 탄생하는 빛들은 물 속에서 마냥 살기가 좋은지 무수히 활개 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투명한 푸른색의 공간 속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수없이 많은 빛 무리는 물 속 특유의 아련한 느낌과 어우러져 가히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새삼스럽게 넋을 잃어버린 나는 차츰 꿈을 꾸듯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중 3때 아버지 몰래 마시고 취했던 소주의 느낌이랑 비슷한 듯. 왜, 아름다운 것을 보고도 취한다고들 하잖아? 내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 이 순간 내가 물의 정령왕 이라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너무도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 같다. 불이나 땅, 바람이었다면 이런 황홀한 광경을 하루 종일 구경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참을 그러고 넋을 잃고 있던 잠시 후, 나는 물의 자태(?)에 정신없이 감탄하느라 정령 만들기는 싸~악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 허걱. 또 딴 생각했네. 어쩐지 자꾸 어리 버리 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빨리 만들어야 하는데….' 그런데 황당한 일은, 지난 며칠을 이어 계속해서 끙끙거리고 있었던 그 골치 아픈 문제 거리를 생각하면서도 내 심정이 너무도 담담해 졌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너무 태연해서 속으로 아주 뼛속까지 포기해버렸구나 하는 허탈한 기분까지 들었을 정도로. 잠시 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이에 해탈의 경지라도 이룬 건가? 아무튼 나는 지극히 태연한 눈으로 여전히 앞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아름다운 물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듯.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입을 벌리면 쏟아져 나올 듯한 아슬아슬한 충동 감. 자꾸만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의식을 점령하는 무언가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태초부터 존재하는 나의 아이들아, 너희의 아버지이자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명령 하노니, 나의 부름에 응답하고 지금 이곳에서 탄생할지어다. 】 애 띤 소년의 낮으면서도 부드러운, 약간의 울림을 담은 듣기 좋은 미성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허스키 하면서도 터프 한 내 목소리는 어딜 가고 이런 갸날픈 음성이 나온단 말인가! 내 입에서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나왔다는 것에 나는 참으로 설명할 수 없이 묘한 기분이 되었다. 얼떨떨한 심정으로 다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데로 주절거려봤지만 이번엔 평소의 내 목소리 그대로다. 설마. 아까 그건 환청이었나? 그러나 그 직후 물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난 더 이상 그것에 의구심을 가지지 못했다. *** 내 앞에 장벽처럼 펼쳐져 있던 물의 기운들이 타오르는 화산처럼 순식간에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폭풍에 휘말리는 듯 거대하게 몰아치는 소용돌이. 성난 폭군 마냥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물결은 나에겐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 하고 있는 데도 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기가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묘하게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다 라며 속으로 흡족해 하고 있는 나는 어딘가 상당히 삐뚤어진 성향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엉망으로 뒤엉키는 물의 소동을 보자니 또다시 뭔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거참. 이상도 하지. 이프리트는 정령 만들 때 이런 식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설마, 정령왕들마다 정령 만드는 법이 다 다른 건가? 불쑥 생기는 의문을 애써 떨치면서 난 이번에도 머리 속에서 맴도는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물의 아름다움에 반한 순간부터 내 머리 속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기 멋대로 생각하고 행동을 구속하고 있었다. 자각을 못할 뿐 본성은 훌륭한 정령왕 인지라 아무래도 본능의 의지가 이성을 누른 게 아닌가 싶다. 【 나의 명령받아 탄생하는 자의 이름은 운디네, 그리고 그 이상에 선 자- 시큐엘이니. 자연이 원하는 그 수만큼 머물지라. 제약을 받지 말고 이동할지라. 】 아. 또 내 목소리가 아닌 것이 흘러나간다. 대체 어찌된 일이라지?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 목소리가 지금의 외모와 어울리긴 했다. 그래서 나는 대책 없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지하고 의문을 넘기기로 해버렸다. 솔직히 여기서 태어난 이후(정확하게는 지구에서 죽고 난 이후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정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괜시리 고민해 봤자 내 머리만 아프다는 쓸모 있는 교훈을 톡톡히 가슴에 새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 앞에서 뭉쳐져 형상을 이루어 내는 수많은 물방울들 때문에라도 그런 사소한 것(?)에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기도 했다. 정적인 흐름만을 유지하던 물의 공간은 어느새 수십만 개의 물방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서로 뭉쳐서 뭔가를 이루었다가 금새 해체되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얼핏 물방울들이 뭉치는 순간에 흐릿한 형체가 보이는 듯도 했지만, 너무 순식간이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다. 그 엄청난 물방울들의 움직임은 내가 이상한 목소리로 명령한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을 쉬임없이 계속되었다가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아니, 순간에 사라진 건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물방울들의 반복된 움직임에 지겨워진 내가 중간에 잠들어 버려서 그들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니까. 내가 깨어난 것은 그 물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고 다시 정적으로 변하고 나서도 한참이 흐른 뒤였던 것 같다.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한참 헤매고 다니던 달콤한 꿈속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운디네와 시큐엘 - 저, 엘퀴네스님. " …우움…뭐야…." -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사를 올리려 하는데 괜찮으시겠는지요? " …엉?" 뭘 받고 뭘 올린다고? 아직 완전히 깨어난 상태가 아닌 머리 속으로 나는 멍청이 되물었다. 내가 봐도 충분히 한심스러웠고, 이프리트가 봤다면 머저리라고 욕할지도 모르는 그 답답한 작태에도 상대방은 침착하게 자신의 말을 다시 번복했다. - 엘퀴네스님의 부르심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인사를 올리려고 하는데요.. " 후음. 내가 언제 불렀다는…어엉?? " 고요하면서도 깊이가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젊은 남자의 목소리에 나는 조금 짜증내듯이 되묻다가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제길. 앞으론 잠 같은 것 자지 말아야지. 어째 나란 놈은 잠만 잤다 하면 정신을 못 차리는 거 라냐. 내 이름 뒤에 거창하게 '님'자를 붙이는 데다 내가 불러서 태어났다고 하면 단 한 가지 존재밖에 없잖아!! 그때서야 나는 멍한 정신을 완전히 수습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들기 전까지도 수십 개의 물방울들로 바글거렸던 물의 영역은 어느 샌가 평소처럼 티끌하나 없는 정적으로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무난한 물의 움직임 속에서 여러 군데 자리 잡은 가구들이 보였고,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낯선 두 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 헉. 뭐, 뭐야 너희들….놀랐잖아. " - 죄, 죄송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안 깨어나시기에. 이번에 대답한 것은 하이 소프라노톤의 맑은 소녀의 목소리였다. 내 앞에 서있는 것은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귀여운 소녀 한 명과,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생긴 늑대 한 마리였으니, 대답한 쪽은 소녀였다. 처음 정령들을 만났을 때처럼 난 이들이 본능적으로 내 휘하의 정령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하대가 나갔을 때도 별로 어색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쪽이 운디네고, 어느 쪽이 시큐엘이지? 내가 막 그것에 궁금해 했을 때, 타이밍 좋게도 정령들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 높으신 분을 처음 뵙습니다. 샘물과 강을 지휘하는 운디네 입니다. 아하~ 저 소녀형상을 한 정령이 운디네로군. 체구로 봤을 때 어림잡아 12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모습을 한 운디네는, 입고 있는 물색 원피스의 양끝을 잡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상큼하게 생긴 아름다운 얼굴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모습에 저절로 감탄이 들만도 하련만, 내 눈엔 꼬맹이가 어른흉내를 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아 보여 그저 웃음만 나왔다. 아, 왜 친구 녀석들이 결혼하면 딸 낳을 거라고 난리를 쳤는지..그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가는 순간이다. ' 너무 귀엽잖아~~~! ' - 고귀한 왕을 뵙습니다. 바다의 광활한 영역을 감시하는 시큐엘입니다. 내가 잠시 운디네를 보며 속으로 감동하고 있는 사이, 늑대 형상을 한 물의 상급정령-시큐엘의 소개가 이어졌다. 시베리안 허스키처럼 풍성한 털과 우람한 덩치에 날카로운 눈매, 전체적으로 투명한 물색으로 되어있는 시큐엘은 그 목소리만큼이나 강직하고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시큐엘이 운디네 만큼이나 꽤 마음에 들었다. ' 시베리안 허스키!! 말라뮤트!! 이 얼마나 내가 키워보고 싶어 안달이 나던 동물이던가! 집에선 절대 못 키우니까, 독립이후로 미뤄 뒀던 것을 이렇게 비슷한 거나마 얻게 되다니!! ' 거기다 이 허스키(?)는 말도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훌륭한 애완동물(?)이란 말이냐! 아마 이런 내 생각을 시큐엘이 알았다면 태어난 것을 죽도록 후회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연히 독심술을 익힌 바 없는 시큐엘은 그저 나의 음침한 눈빛에 움찔 하는 것으로 사태를 방관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후후후. 이제부터 아주아주 예뻐해 주마, 시큐엘. 나의 사랑스런 강.아.지.로 말이야. 흐뭇한 내 시선에 두 정령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이 보였다. 내가 그렇게 속 보이는 웃음을 지었던가?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정령 만들기가 성공한 것도 모자라서 그 태어난 정령들이 이렇게 마음에 드는데 어떻게 표정을 감출 수 있겠냐고. 때문에 나는 그들이 떨던 괴로워하던 웃는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기로 했다. " 내가 잡아 먹냐? 왜 겁을 내고 그래. 흠, 근데 이상하네. 겨우 너희 두 명 만드는데 하루하고도 꼬박 반나절이나 걸리다니. 이프리트는 금방 만들어내던데 말이야. 내가 모자란 건가? " 나야 성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지만, 이프리트나 다른 정령왕 들에게는 미덥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당장이라도 물의 중, 상급 정령들이 대거 필요한 때에 달랑 두 명만 만들어냈으니. 거기다 두 명당 하루 반나절이면, 다른 녀석들을 더 만들어내려면 10명만 만들어도 열흘은 족히 넘는단 소리가 된다. 그런데 세계라는 곳이 그렇게 작은 곳이 아닌데다, 바다도 좁다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니, 적어도 몇 백 명, 혹은 몇 천 명이 필요할지도 모르는데. ' 설마 이 두 명이 아크아돈 전체의 나이아스들을 부릴 수 있다고는 상상 할 수도 없고. ' 그렇다면 정령을 만드는 데만 2~3년은 걸린다는 소리? 그것도 한차례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내야만 가능할 것 같다. 이렇게 막막할 데가. 정령왕 이라는 것은 정령을 찍어내는 공장이라도 되는 것인가? 운디네와 시큐엘을 보고 정령왕 되기 잘됐다는 감동을 느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좌절감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자 시큐엘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 무슨 말씀 이 신지. 왕께서 부르신 정령들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그들은 왕의 명령을 따라 이미 지정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희들은 왕의 보필자로서 옆을 지키기 위해 남은 것입니다만. " 엉?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탄생한 정령들이 너희만이 아니라는 소리야? " - 왕께서 그렇게 부르시지 않았습니까? 아크아돈이 원하는 수만큼 탄생하여 제약을 받지 말고 지정된 자리로 위치하라고 분명히. 허거걱.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녀석 들을 부를 때 이상한 목소리로 말한 내용이… 【 나의 명령받아 탄생하는 자의 이름은 운디네, 그리고 그 이상에 선자- 시큐엘이니. 자연이 원하는 그 수만큼 머물지라. 제약을 받지 말고 이동할지라. 】 …였지. 아마. 내가 말하고도 기억을 하지 못하다니, 정말 그동안 바보가 다 됐나보다. 그럼 난 이미 정령을 모두 만들어 전 세계에 고루고루 분포했다는 소리인가? 급한 불은 다 껐다는 뜻? 그저 막막해 보이기만 했던 미래에 드디어 한줄기 빛이 내려오는 것 같다.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 살았다. 그럼 이제 내가 할 일은 뭐가 남은 거지? " 실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이야 나중에 차근차근히 배워 가면 되는 거니 그리 급할 건 없다. 정령도 만들었겠다, 자기들이 알아서(?) 전 세계로 이동도 했겠다, 생각 같아서는 나는 자유인이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어쩐지 마음속에 뭔가 자꾸만 걸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던 건지, 내가 뭔가 해야 할 것 만 같은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 바로 그 시점에 예상치 못했던 방문객이 등장했다. " 여어~ 지훈! 정령들 모두 잘 분포 됐어~ 이프리트도 대단한데? 정말로 일주일 안에 정령을 만들어내게 하다니. 엉? 이프리트는 어디 갔어? " " 트로웰 오랜만이네…." 바닥이 갑자기 치솟는다 했더니 여전히 생기발랄한 얼굴로 매력 있게 웃는 트로웰이 튀어나왔다. 과연 , 땅의 정령답게 이동시에도 땅을 이용하는구나..하는 태평한 기분으로 바라보자니 트로웰은 반갑게 다가오다가 한 존재의 부재를 알았는지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그 한 존재의 부재 란 게 바로 이프리트다. " 뭐야? 이프리트. 설마 그냥 널 내팽개쳐 둔 거야?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그래서 미네르바의 의견을 그렇게 말렸던 건데. 결국 이프리트한테 맡기더니 이렇게 됐잖아. 차라리 내가 저녁 틈틈이 알려 주는 게 더 나았을 뻔했다고. " 어떻게 내 옆에 이프리트가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 모든 상황을 유추해 낼 수 있는 걸까? 단순히 이프리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을, 너무 정확하게 맞추니까 어쩐지 수상한 기분이 든다. 설마 정말로 독심술을 익힌 건 아니겠지? 운디네와 시큐엘 " 흐음~ 그래도 어떻게 혼자서 여기까지 잘 했네? 역시 완전히 본능을 잊어버린 건 아니었구나. 어쨌든 한시름 놨어. 오염된 바다가 급속도로 정화된 건 물론이고, 지하수도 다시 솟아나기 시작했으니까. " " 아, 그래? " 몰랐다는 듯이 되묻긴 했지만 사실은 나도 알고 있었다. 아까부터 부산스러워진 나이아스들의 수다 소리가 아크아돈의 변화를 전부 알려주고 있던 것이다. 아무래도 물의 영역에서 나이아스들의 대화가 들리는 것은 내가 아크아돈의 모든 영역을 살펴보기 편하게 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얼마나 위대한 혜택이냔 말이다. 정령왕 이라는 거.. 너무 대단한 것 같아. " 헤에~ 뭐야, 이제 나이아스들이 떠드는 소리도 들리는 거야? 몇 가지만 제하면 완전히 엘퀴네스로 자각한 것 같으네? " " 커헉.. 정말로 독심술이 있는거냐 , 트로웰? 어떻게 알았어? " 뜨악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트로웰은 생긋 웃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는데 곧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듯이 말하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렸다. " 뭐라고 해야 하나. 굳이 들린 다기보다는 유추해내는 능력이 빠르다고 해야 할 거야. 눈치가 좋다고 할까나? 그렇다고 아주 안 들리는 것도 아니고, 설명하기 복잡하네." " 허억. 정말로 들려? " " 음, 혜안이라고 하나, 이런 걸? 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약간의 힌트만 있으면 마치 경험한 듯이 실감할 수 있어. 더 나아가 그 상대방의 과거부터 이어질 미래까지 넘볼 수도 있지. 거기에 내 경우는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능력까지 첨가된 거야. 대대로 트로웰들에게 내려진 특별한 능력이지. 정령왕들은 저마다 특유의 능력이 하나씩 있거든. " 허걱. 그럼 내가 생각하는 소리가 전부 들린단 건가? 처음 트로웰과 대면했을 때 그를 보면서 평가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내 안색은 자동으로 하얗게 질렸다. 무성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성체인 트로웰을 보며 섹시하게 생겼다느니, 남자 건 여자 건 홀리지 못할 것이 없겠다느니, 나부터 조심 하자 느니 얼마나 주책을 부렸었던가! 그걸 트로웰은 다 듣고 있었단 말이잖아! " 어어? 뭐야, 그 표정은? 아주 파랗게 질렸네? 괜찮아~ 괜찮아~ 아주 다 들리는 건 아니라니까? 네가 남한테 알려주기 싫다고 생각하는 감정은 읽히지 않아. 같은 정령왕 급이라서 혜안이 통하는데도 한계가 있거든. 인간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 …참으로 지옥 끝에서 구조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저절로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들이키며 이마에 삐질 거리는 식은땀을 닦았다. 설마, 트로웰. 일부러 이런 반응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여유 만만 한 듯 웃고 있는 녀석을 보니 아주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이 녀석 앞에 있을 때는 속으로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겠군. " 그, 그런데… 정령왕들마다 한 가지씩 특유의 능력이 있다면, 미네르바나 이프리트는 뭔데? " 무안해 하는 것 자체가 속으로 찔리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는 걸 알기에 나는 최대한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서 원래 그다지 궁금해 하지 않았던, 나머지 정령왕들의 능력도 알아볼 생각을 한 것이다. 내 질문에 트로웰은 기다렸다는 듯이 눈에 빛까지 뿜어가면서 대답했다. " 미네르바는 최대의 바람을 이용한 강력한 실드를 생성할 수 있어. 그 무엇. 심지어 신계의 상급 신들까지도 부술 수 없을 만큼 강력하지. 그리고 이프리트는 최상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불의 검을 소환 할 수 있어. 그 검에 닿은 어떤 것도 형태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걸?그 둘이 싸워보면 볼만 할 텐데. 애석하게도 한번도 본적이 없으니 결과가 어찌 되는 진 알 수 없지. 유추하기로는 '주변의 피해가 막대하다 '…정도? " " 하, 그, 그래? " 그러나 이러한 공격과 방어에 대한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정령왕들 끼리는 서로의 힘에 별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별 볼일이 없다고 한다. 온전히 그 힘이 가해지는 경우는 그 상대가 정령이 아닌 다른 존재일 경우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신계의 신들이 정령계로 일부러 찾아와 시비 걸지 않는 이상, 그들과 맞붙을 일도 없는 데다 인간계에서는 정령왕 본래의 힘의 2/3 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에 이래저래 본래의 힘이 드러날 일이 거의 없는 능력이라는 소리다. 그래서인지 어느 한쪽의 극에 달한 것이 아닌, 공격과 방어 모두를 일반적으로 무난히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정령왕-엘퀴네스가 가장 강한 정령왕으로 알려져 있다고 그랬다. 그 얘길 듣는 순간 어찌나 황당하고 민망스럽던지. 남들 다 하는 정령 만들기도 이제 겨우 성공해서 기뻐하는 내가 가장 강한 정령왕이라니, 웃기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도 그랬다. 4대 정령왕 중 최고의 가드와 공격을 자랑하는 엘퀴네스의 실력이 왜 이따윈 거냐고. 흐흐흐…. " 그렇게 의기소침해할 필요 없어. 지훈의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될 것들이니까..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벌써 한계의 일부분을 깨트렸잖아? 정령도 만들었고 말이야. 그러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 이런, 나도 모르게 너무 조급해 했던 모양이다. 이제 정령을 만들기에 성공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배워 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게 아니었던 거야. 음.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적잖은 감동과 위안을 얻었다. 달달볶는 이프리트에 비하면 이 얼마나 위대하고 따스한 천사의 모습인가 말이다! 트로웰! 내가 네 팬클럽 회원 1호가 되 주마!! " 아참. 그리고 또 하나! 엘퀴네스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야. 엘퀴네스가 가진 고유의 능력 도 만만치 않지. " " 내 능력? "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정령계의 모든 정보를 나한테 알려주기로 작정을 한 모양인지 트로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 트로웰, 이프리트의 능력만 들을 생각만 하고 정작 내 능력을 알아볼 생각은 안 했던 것이다. 호기심에 눈빛을 반짝이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물의 정령왕 고유의 능력은 치료 술이야. 그것도 목숨만 붙어있다면 언제든지 100% 원상복귀 시킬 수 있는 완벽한 회복능력이지. 이건 타인이 아닌 본인에게도 시전 할 수 있기 때문에 물의 정령왕을 상대로 장기전은 거의 불가능해. 체력에 상당히 자신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단기전도 도박이지. 인간계에서야 좀 약해지긴 하겠지만..그래도 여느 고위 신관들보다는 훨씬 뛰어날걸? " " 오오 " 상처를 회복시킬 수 있다고? 그게 인간이야? 아, 참 나 인간 아니지, 흠흠. 하지만 이런 대단한 능력 역시 정령들에게는 그다지 필요할 일이 없다고 한다. 우선 정령계 자체가 워낙에 평화로운 곳이라 정령들이 다칠 일이 없다는 것이 그렇고, 인간계에서는 실체가 아닌 정신체로서 자연에 동화되어있는 상태 기 때문에, 정령계의 본체가 죽지 않는 한, 외부의 힘을 받아도 다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엘퀴네스의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고칠 정령이 없는 데야 쓸모가 없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닌가. 환자 없는 의사의 신세가 처량하듯. 엘퀴네스의 능력도 그런 범주였던 것이다. 사실, 고만고만한(?) 정령왕들 중에서 누가 더 강하다느니 따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엘퀴네스가 그런 식으로 알려졌는지 모르겠다는 내 말에 트로웰은 키득거리고 웃으면서 그 일의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운디네와 시큐엘 " 우리들한테야 필요 없는 능력이지만 인간들은 아니잖아? 어떻게 하다가 보니 네 능력이 우연하게 인간들에게 알려졌는데, 그걸 듣고 인간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정령왕의 등급을 매겨버린 모양이야. 녀석들이 그렇게 열광하기 전까진 엘퀴네스도 그 능력의 쓸모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말이지. 하기사. 인간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강한 정령왕은 엘퀴네스니까. " 공격과 방어가 무난히 되고, 거기다 다치면 회복까지 자유자재로 되니, 솔직히 무적이긴 했다. 쩝. 나로서는 능력이 있어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르니 도무지 실감이 들지 않지만. 그래서인지 지금 트로웰이 설명하는 엘퀴네스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전혀 연관이 없는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졌다. 이것도 내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일까나? " 아, 근데 트로웰. 한 가지 물어볼게 있는데…. " " 뭔데? "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질문을 건넬 의사를 보이자 트로웰은 너무 반갑다는 듯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질문 받는 게 저렇게 좋나? 아니면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보람을 느끼는 걸지도. 그렇다면 트로웰은 딱~ 학교 선생님 체질이로군. 10 대 후반의 매력적인 외모에 섹시한 눈웃음을 가진 선생님이라…. 생각만 해도 실실 웃음이 새어져 나왔다. ' 아마 그 학교 학생들은 트로웰만 보러 등교할거야. ' " 에이~ 그 정돈 아니다. 학생들이 공부하러 학교를 가야지~ 선생을 보러 학교를 오면 안 되는 거 아니야? " " 쿠, 쿨럭…. 부탁이니 내 마음 읽지 말아 줘.." " 하하~ 뭘 그렇게 쑥스러워해~ 우리사이에." 난 바보인 거야. 어쩌자고 트로웰이 마음을 읽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딴 생각에 빠져들었단 말인가. 사실 트로웰도 내 마음을 읽어볼 생각은 없었지만, 내가 질문은 안하고 딴 생각에 빠져 실실거리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알아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트로웰의 혜안이란 능력은, 타인의 감정. 더 나아가 그의 과거와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특이한 능력이지만 본인이 원치 않으면 사용하지 않을 수도 있고, 정령왕을 상대로는 거의 통하지 않는다고 하니까. 그래서 트로웰은 비교적 능력을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읽게 된 경우에는 지금처럼 아~주 솔직하게 타인이 속으로 생각하던 내용에 대한 대답을 해버리는 것이다. 참으로 적응이 안 되긴 하지만, 듣고 나서 모른 척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 나였다. " 물어볼게 뭔데? " " 아, 그게 말이지. 정령을 만들었을 때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달라진 것 같아서 말이야. 환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선명하고, 그렇다고 그냥 넘기려니 자꾸 마음에 걸려. " " 흐음? 그런 경우는 듣도 보도 못했는데..진짜 환청 아니야? 목소리가 어떻게 변했는데?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는 트로웰로 인해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 하고 말았다. 어라? 목소리가 변하는 건 정령을 만들 때 일어나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생각해버렸는데, 그게 아니란 말이야? 나 설마 엄청 중요한 일을 무심하게 넘겨버린 게 아닐까? 의문 섞인 트로웰의 시선을 보자니 그럴 확률이 80%는 되어 보인다. 크흑, 나란 놈이 워낙에 눈치 없고 둔감한 녀석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한심스러울 줄이야. 나는 밀려오는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면서 재촉하는 트로웰의 시선을 못 이겨 떠듬떠듬 대답했다. " 변성기가 덜 지난 남자의 목소리랄까? 왜 있잖아, 여자애처럼 가늘지도 않고, 남자처럼 걸걸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목소리. 내 목소리는 약간 허스키하고 굵은 편인데 그런 목소리가 나와서 얼마나 놀랐는지. " 어라? 내가 뭔가 잘못 말했나? 나를 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미묘하게 굳어 있는 것 같다. 사태가 생각보다 더 심각한 것일까? 나도 모르게 바짝 긴장해서 바라보자니 트로웰은 한참이고 그런 나를 응시하다가 이윽고 뜬금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지훈. 네 목소리가 어떻다고? " " 에? 굵고 허스키한 편이라고 했잖아. 듣고도 몰라? " 어째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운디네와 시큐엘의 표정까지 이상하게 변하는 것 같다. 왜들 그런 다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시선으로 맞받아 치자 트로웰의 한숨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 에구구. 아직도 갈 길이 멀 구나. " " 그게 무슨 소리야? " " 무슨 소리긴~ 아직도 인간의 틀을 완전히 벗지 못했다는 거지. 지훈 네 목소리가 뭐가 굵고 허스키 하다는 거야? 아주 아주 듣기 좋은 소년의 미성 이라고. 정령은 인간과 달리 의지로 파장을 전달하는 형식이니까 스스로가 목소리가 달라졌음을 눈치 챌 겨를이 없었겠지." " 허걱. 그럼 지금 내가 듣고 있는 이 목소리는 실제가 아니라는 거야? " " 그래, 인간일 때의 목소리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에 너에겐 그렇게 들린 것뿐이야. 그나마 나쁜 결과는 아닌걸. 우연이나마 '그것'을 사용하게 되었으니 " " 그것? "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듯한 어휘선택에 내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도대체 언제 나타났던 건지 예상치 못하게 등장한 방문자가 나의 의문을 자연스럽게 받았다. " '언령' 을 말하는 거겠지. " " 이프리트!! " " 야아~! 너어. 왜 이제야 나타난 거야, 지훈의 일은 너한테 맡겼었잖아! " 여느 때와 같이 도도하고 우아한 모습으로 나타난 이프리트는 나의 놀란 외침이나 트로웰의 면박 어린 추궁에도 불구하고 전혀 위축되는 기색 없이 당당하게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내 옆에서 새로운 정령왕의 등장으로 인해 눈에 띄게 움찔거리고 있는 두 명의 정령, 운디네와 시큐엘을 탐색하듯이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아니, 가뜩이나 정령왕들 때문에 기죽어있는 애들을 그렇게 쳐다보면 어쩌겠다는 건지. 그나마 시큐엘은 담담한 척 애를 쓰고 있었지만 운디네의 표정은 울기 직전의 꼬마 여자애와 똑같아서 불쌍한 기분이 들었다. " 그만 노려봐,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 " 노려보긴 누가 노려봤다는 거야? " 그럼 그렇게 치켜 뜬눈으로 바라보는 게 노려 보는 게 아니라면 뭐라는 건데? 기가 막혀 할말을 못하고 있자 이프리트는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놈의 정령왕은 어째 갈수록 하는 짓이 얄미워진 다냐. 며칠 만에 보는 거니 반갑기도 해야 하련만, 오히려 불쾌한 기분만 드는 것을 보니 이프리트와 나는 틀림없는 악연인 거다. 여기서 이대로 당할 수 없단 생각으로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운디네와 시큐엘 " 누구 긴 누구야, 이프리트 너지. 얘들한테 무슨 감정 있어? 봐~ 떨고 있잖아. " " 흥. 시끄러워. 정령왕이 3명이나 모였는데 정령들이 기를 못 펴는 건 당연한 거지." " 뭐… 시, 시끄러워? 네가 쳐다보면 서부터 무서워하기 시작했단 말이야. 즉, 원인은 너라고! " " 뭬야? 그래서 어쩌라고? 지금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프리트의 전신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은 이프리트의 노려보는 눈빛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때 나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평소라면 찍소리도 못하고 움츠렸을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고도 코웃음을 친 채 정면승부를 걸었던 것이다. " 하! 해보자면 못할 줄 알아? " 당당하게 맞받아 친 다음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한쪽 손에 물의 기운을 끌어 모았다. 내 손을 중심으로 금새 둥그렇게 형성된 물 덩이는 그냥 보기엔 별거 아니다 싶었지만 자세히 보면 끊임없는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내 상대가 정령왕이 아닌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 한방으로 저세상 구경을 하러 보내줄 수도 있을 만큼의 강력한 힘이었다. 그리고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이 물의 영역 전부를 이용해서 이프리트를 공격할 수도 있었다. 싸움이라고 하면 육탄전밖에 떠오르지 않는 내가 이런 식으로 물을 움직여 공격을 하려하다니, 정말 장족의 발전이지 않은가. 때마침 옆에서 트로웰이 중얼거리지만 않았더라면 물의 영역은 나와 이프리트의 싸움으로 초토화 됐을 것이다. 틀림없이! " 흠….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건가? 어째 전대 엘퀴네스를 보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 " 엉? " " 이딴 녀석하고 그를 비교하지 마!! " 첫 번째의 어리 버리한 대답은 나고, 두 번째의 앙칼진 대답이 이프리트였다. 거의 동시에 외쳤지만, 내 대답(?)이 상대적으로 짧은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이프리트의 뒷말은 너무도 선명하게 물의 영역을 혼자 메아리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처절한 메아리가 끝나는 순간, 이프리트의 분홍색 얼굴은 트로웰보다 더 검은 흙빛으로 변해버렸고 반대로 나의 얼굴엔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던 것이다. 후. 후 .후. 이프리트? 너. 딱. 걸. 렸. 어.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본인이 드러내질 않으니 속마음을 알 길이 없어 설마 하고 있었는데, 이건 완전히 제 입으로 전대 엘퀴네스한테 마음 있다고 광고한 꼴이 아닌가? 이미 승기는 내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약간 비웃는 것 같이 입 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딱딱하게 굳어진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 호오~ 이프리트? 방금 그 말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 " 윽. 그, 그게 아니라.. " " 나.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그' 전대 엘퀴네스가 그렇게 대단했던 모양이지? 사이가 안 좋았다더니 그렇지도 않은 가봐? " 후후후. 점점 더 당황해 하는 이프리트를 보라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와 설움들이 한꺼번에 해소되는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 내가 씨익 웃는 모습을 보고 트로웰이 '역시 괜히 엘퀴네스가 된 게 아니었어….'라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든 내 말의 오묘함을 깨달은 이프리트는 이젠 더할 수 도 없을 만큼 새빨개진 얼굴로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다. " 그게 아니야! 그냥 말이 헛 나온 거야. 네 실력이 전의 엘퀴네스보다 아직 모자란 건 사실이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 못 들어 보셨나? 이거 왜이래~~ 그리고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다는 건데? " " 윽. 그러니까…그게…." " 엉? 왜 강한 부정이 긍정이 돼? " " ……. " 한창 잘 나가고 있는데 옆에서 트로웰이 초를 쳤다. 크흑. 질문을 하려면 나중에 하란 말이야. 왜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결국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한순간 당황한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고, 이프리트는 이런 순간의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갔다. " 그래~ 나도 그게 궁금하네. 왜 강한 부정이 긍정이 된다는 거야? 하여튼~ 인간세상에서 몇 년 살다왔다더니 완전히 이상한 사상에 절어들어 있다니까. 그러니 그런 말도 안돼는 추측에만 빠져서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는 거 아냐~ " 커헉. 저 정령왕이 또 생 정령 잡네? 내가 언제 말도 안돼는 추측에 빠져서 본업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거냐?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너한테 뭔가 꿀리는 게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 거야? 지금 이프리트는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유감스럽지만 약점을 잡힌 것은 이 몸이 아니라 바로 너라고! " 이게 지금 나를 물로 보나~ 너 자꾸 내 우중충한 과거 들쑤셔서 복장을 뒤집는데 말이야! 이번엔 상황이 다르단 걸 모르겠냐? 그래, 너 말 잘했어. 도대체 내가 이상한 사상에 절어서 했다는 그 추측이 뭔데? 엉? 말해봐, 나도 궁금하네. 그게 대체 뭐냐고! " " 으, 으윽…. " " 어라? 지훈, 너 물 맞잖아? " " …크흑!! 트로웰!!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 내가 뭘…. " 가만히만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데.. 트로웰은 한술 더 떠서 말하는 족족 태클을 걸고 있으니 내가 뒤집어 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원망 섞인 시선으로 째려보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받아 치니 더욱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도 그의 말을 꼬투리 잡아 나에게 반격할 줄 알았던 이프리트는 꾸욱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후훗. 나의 승리인가? 그 때였다. " …ㅇ… 싫어. " " 뭐?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에 표정이 가려진 이프리트가 떠듬떠듬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어쩐지 위험스러운 분위기랄까.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깨며, 아까부터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한 불의 아지랑이들이 주변 공기를 급격하게 살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내가 너무 이프리트를 궁지로 몰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숨을 들이켰다. 운디네와 시큐엘 ' 젠장. 망했다.. 그냥 가볍게 놀리려고 했던 건데. '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을 또 건드리고 말았다. 나는 대체 왜 이렇게 생각 없이 행동 하는 거야! 이번엔 아까처럼 티격태격하는 말다툼 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다. 분노로 타오르는 이프리트의 기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던 것이다. ' 이젠 끝장이다. 태어난 지 한 달도 안됐는데 그냥 이렇게 죽는 건가~! ' 그러나 내 염려와는 다르게 이프리트는 그 상태로 한참이나 가만히 서있기만 할뿐, 다른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숙였던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프리트가 내 영역을 그의 힘으로 초토화 시키는 것 만큼이나 나에게는 커다란 복수와 마찬가지였다. 나를 노려보는 이프리트의 두 눈엔 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 커헉, 이..이프리트? "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미인의 눈물은 때론 독사의 송곳니보다 더욱 처절한 맹독이 되어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나 역시 그러한 남자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지라, 이프리트의 눈물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할말을 잃고 굳어져 버린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앙 다문 입술을 열었다. " 네가 정말 싫어. " " ……." " 돌아갈 거야, 다시는 너 같은 거 보지 않을 거야. " " ……." 그게 끝이었다. 더 무수한 저주나 폭언을 퍼부은 것도.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설이 난무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게 딱 두 마디만 또박또박 말한 이프리트는, 내가 아차 할 기회도 없이 그대로 불길이 되어 영역 안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건, 이제껏 이프리트가 나에게 했던 그 엄청난 구박이나 험한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 나 같은 놈은 죽어야 돼에~~!!' 만약, 트로웰이 여전히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중얼거리지만 않았다면 나는 내 자신을 책망하고 또 책망하며 후회의 난무로 남은 여생(?)을 마쳐야 했을지도 모른다. " 헤에. 이프리트 삐졌네. 저 모습도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할걸? 본인도 아마 감회가 새로울 거야. 레파토리가 하나도 안 변했으니까. " " ……뭐? " " 전 엘퀴네스와는 매일 생활이 이런 것이었거든. 싸우고 울고 삐지고. 그때는 엘퀴네스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어서 항상 이프리트가 졌었어." " 하하하." 매일 이런 생활이었다고? 그리고 언제나 울고 나서 삐졌다고? 오.랜.만.에. 봐서 신선하고..본인의 감회도 새로울 거라 이거지. 하, 하하…. 이런 썩을~~! ' 또 당했다!' 애초부터 이프리트를 여자라는 관점으로 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까짓 좀 울렸다고 가슴이 미어질 건 뭐란 말인가!! 괜시리 머뭇거리고 죄책감 느꼈다가 오히려 나만 바보 됐잖아!! 어떤 일이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나보다. 더 이상 어찌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재기불능이 되어 허우적거리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쿡 하고 짧게 웃었다. " 지훈이 너무 마음이 좋아서 그런 거니까 괜찮아. 오히려 이프리트가 문제지. 근데 왜 화가 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네. " " 보고도 몰라? 이프리트가 전 엘퀴네스를 좋아하잖아. 그걸 내가 자꾸 추궁하니까 열 받은 거지. " 나한테 태클 걸 생각만 하느라고 정작 이프리트와 나 사이에 오고간 대화는 못들은 모양이다. 근데 이걸 이렇게 그냥 말해버려도 되나 몰라. 이프리트가 비겁한 수(남자에게 눈물공격은 비겁하다!)까지 써가면서 은폐하려고 했던 진실인데. 하긴, 나 정도의 둔치가 눈치 챌 정도면 트로웰이나 미네르바는 이미 훤히 꿰고 있던 사실일 테니 별 상관없으려나? 하지만 이런 내 생각과는 다르게 트로웰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뜨악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 이프리트가 엘퀴네스를 좋아하다니? 둘이 만나기만 하면 싸웠는데? " " 그거야 이프리트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 연기한 거겠지~ 아까도 전엘퀴네스가 나 같은 거랑 비교 당한다고 엄청 화내는 거 못 봤어? 하여간 유치하다니까. " " 에에? 하지만 이프리트는 매일 엘퀴네스가 싫다고 노래를 불렀는걸? " " 그러니까~ 그게 바로 좋아하는 걸 숨기기 위해서 한 연극이라니까? " " 말도 안 돼. 왜 좋아하는데 일부러 싫은 척을 한다는 거야? 지훈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아닐까?" " …그, 글쎄? " 다른 녀석이면 몰라도 타인의 감정을 읽을 줄 아는 트로웰이 이렇게 말한다면 생각이 달라진다. 때문에 나는 고집스럽게 내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애매모호 하게 끝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이프리트의 아까 그 행동은 도대체 무슨 이유란 말인가. 설마 나한테 말발로 밀렸다는 것에 대한 울분? 그거야 자존심이 상하긴 했겠지만, 애초에 그것도 이프리트가 전 엘퀴네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면 반박을 못하지도 않았을 거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 질질 울면서 삐져있는 것은 이프리트가 아닌 나여야 한다는 소리인데. ' 그렇다고 트로웰의 능력을 무시할 수도 없고. 으 정말 골치 아프네.' 트로웰의 말을 듣자니 의심 가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고, 그렇다고 내 직감을 믿자니 너무 신뢰도가 떨어진다. 남의 연애 사 라는 것이 복잡한 것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골치가 아플 줄이야. 한창 끙끙거리고 있는데 트로웰이 지나가듯 한마디 이었다. " 어쨌든 이프리트와 화해할 생각이라면 네가 먼저 찾아가는 게 좋을 거야. 한번 삐지면 100년간 상종 안하려 드니까. 전 엘퀴네스와는 500년 가까이 말도 안한 적도 있었어. " " ……." 연도가 적응이 안 된다, 연도가. 5 일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500년? 커헉. 1 만년을 넘게 사는 종족들이니 500년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100년을 기한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입장에 익숙해져 있는 나에게는 정말 경악이 저절로 흘러나올 만큼의 긴 시간이었다. 그러자 막상 단순히 삐진 것 이라고 생각했던 이프리트의 태도도 다시금 심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운디네와 시큐엘 ' 농담이 아니야, 100년이나 이프리트와 안면몰수하고 지내라고? 아무리 못마땅한 사이라지만 친구들끼리 어떻게 그런 험악한 정령관계(?)를 만들 수 있겠냐고. 그래! 사과하자. 어쨌든 남의 연애 사를 빌미로 놀리려고 한건 내 잘못이니까. ' 그래서 나는 당장이라도 이프리트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역시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으니…. " 어? 왜 그러고 있어? 이프리트한테 사과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 " 그 자리에서 굳어져 도무지 움직이지 못하는 나를 보며 트로웰이 의아하게 물었다. 이프리트한테 간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떡 하니 알고 있는 것을 보니 틀림없이 내 마음을 읽은 것이겠지만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그것보다 당장 급한 문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최대한 덤덤해 보이는 표정을 유지하며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지금 이 순간, 신이 나에게 희망을 내려줬다면 그것은 바로 트로웰이 내 옆에 있다는 것이었다. " 저기 트로웰…. " " 응 ? " " 텔레포트는 어떻게 하는 거지……? " " ……." 이후로 트로웰은 장장 1시간을 넘도록 물의 영역 전체를 굴러다니며 웃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운디네와 시큐엘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위엄스럽게 있었지만 얼굴에 부르르 떨리는 경련까지는 막지 못하고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정령왕이었다. *** 미친 듯이-정말 미쳤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트로웰은 오도 방정을 떨며 웃어댔다.- 웃어대던 트로웰이 진정한 것은 물의 영역주위로 스산한 밤의 기운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장장 2시간이나 쉬지도 않고 웃어대던 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던 나는 그가 진정할 기미를 보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이러다 날 새겠거니 하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부분 아무리 재미있는 상황이 와도 몇 분 웃고 나면 다시 시시해 지고 말텐데 트로웰은 정말 징글맞게 웃었다. 꼭 웃음자루를 입안에 넣어놓고 다니는 녀석처럼 말이다. 오죽하면 처음엔 그와 같이 웃음을 참고 있던 운디네와 시큐엘까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겠는가. 진정이 되고 나서도 트로웰은 한동안 계속 키득거려서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하아. 정말이지 예쁘니까 봐준다, 트로웰. 네 외모를 평생의 복으로 알고 살 거라. " 쿡. 알았어, 지훈. 미안해. 삐지지 마. 내가 원래 한번 웃으면 좀 정신을 못 차리거든. 키득. " 또 내 맘을 멋대로 읽은 거냐? 그나마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하니 다행 이다만. 불쾌하다는 듯이 바라보긴 했지만 그다지 트로웰이 얄미운 것은 아니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저렇게 오랫동안 가슴속을 뻥 뚫리게 만들만큼 크게 웃을 수 있는 트로웰의 풍성한 감성이 부러웠다. 거기다 어른스러운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의 외모와는 달리, 트로웰은 10대 중반 정도의 아직 어린 소년의 모습에 더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 그 모습이 순수하게 보였던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이유로는 그의 뛰어난 외모 탓이라 하겠다. 흐흠, 원래 예쁘면 뭐든지 용서가 되는 법이다. 이건 절대 변하지 않을 만고불변의 진리 중에서도 베스트 상위권을 차지한다고 봐야 옳다. 조금 시간이 더 흐른 뒤, 완전히 진정된 트로웰은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너무 오랫동안 그의 웃는 모습만 보느라 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진지하게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처음엔 그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 한참을 버벅 거려야만 했다. " '언령'이야. " " 엉? " 갑자기 난데없는 왠 '언령'? '언령'이 뭐시긴데? 생소한 단어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로웰은 처음부터 내가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텔레포트 하는 방법 말이야. 네가 물어봤잖아 어떻게 하는 거냐고. '언령'을 사용해라! 그게 내 대답이야. " " 아~ 그거, 근데 '언령'이 뭔데? " 처음 듣는 단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낯익은 기분이 든다. 언제 들은 적이 있던 건가? 누구한테? 잠시기억을 되짚어 본 난 곧 어렵지 않게 낯익은 기억의 출처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 아,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가 나타나자마자 했던 말이 그거였지, '언령'이라고….' 트로웰은 내가 우연히 라도 '그것'을 사용하게 되어 나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것'? 하고 되물었던 바로 그때 이프리트가 나타나 '언령'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바로 나와 이프리트의 실갱이가 벌어지는 바람에 대화 자체가 무산되어 버렸었다. 하필이면 그때 나타나서 복장을 뒤집어 놓았담. 정말이지 이프리트는 여러 가지로 내 정령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다. 또 다시 그에 대한 불만의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들이 미려는 데 그보다 먼저 트로웰의 설명이 이어졌다. 덕분에 이프리트에 대한 반감은 기세도 펼치지 못하고 조용히 한쪽 구석에 처박히고야 말았다. " '언령'이란 건 정령왕들이 사용하는 마법을 말하는 거야. 드래곤에게 용언이 있는 것처럼 정령왕 고유만의 힘이라고나 할까? 마나를 배합하고 원하는 위치를 지정해야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인간이나 여타 다른 종족들과는 달리, 드래곤과 정령왕은 자신들의 힘을 끌어낸 '말'을 내뱉는 것으로 마법을 부릴 수 있어. 효과도 일반 마법에 비할 바가 못돼." " 드, 드래곤? 용언?? 마나? " " …못 알아듣는구나, 어쩔 수 없지. 그냥 그런 게 있다고만 알아둬.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다는 '언령' 이라는 거고 , 넌 그 '언령'을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이미 사용했다는 거야. " " 엥? 내가 언제? " 운디네와 시큐엘 트로웰은 이프리트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하던 대화에서도 내가 '그것'-언령-을 사용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도무지 언령 이란 것을 사용한 기억이 없는 것이다. 설마 이 정령왕의 본능이라는 놈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상한 것(?)을 습득해 버린 것인가? 속으로 맹렬히 머리를 굴렸지만 막상 떠오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 어떤 얘기를 하다가 그 말이 나왔더라? 아, 그래. 내 목소리가 이상하게 변했다고 트로웰한테 말하니까, 아직도 갈 길이 멀다나 어쨌다나 하더니 그래도 '그것'을 사용하게 되어 나쁘진 않다고 했었지. 흐음.. 혹시 목소리가 변했다는 걸 내가 인식 했다는 게 언령 이란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아, 그래. 내가 목소리가 변했다 는걸 알았을 때가 정령을 만들 때였지. 헉!! 그럼 정령을 만든 게 설마!! ' " 그래, 그게 바로 언령을 사용한 거야. 말을 내뱉음으로서 정령을 탄생시켰지? 그것도 한 개체가 아닌 다수를 대량으로 탄생시킬 수 있는 건 언령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지. 그것 하나만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어도 정령왕 으로서의 모든 행동 가짐을 깨우쳤다고 봐도 될 거야, 소감이 어때? "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하는 트로웰의 말에 나는 입을 어버버 거리며 할말을 잇지 못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말을 그냥 내뱉었던 것뿐인데, 그게 언령이라는 마법이었다고? 내가 그렇게 운이 좋은 놈이었던가? 도무지 믿기질 않는다. 전에 정령을 만들었던 방식은 이미 내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나는 이제 얼마든지 다시 정령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건 한마디로, 내가 언령을 언제든지 구사해 낼 수 있다는 소리와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이 믿기지 않는 행운(?)에 감동하고 있는 나를 보는 트로웰의 표정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를 보는 형(!)마냥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긴 뿌듯한 모습이었다. 전생의 가족으로부터는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기특하단 시선에 괜시리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트로웰은 쑥스러워하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언령이란 사용할수록 주문의 길이가 짧아지고 숙련된 단계에 이르러서는 속으로만 생각해도 시전 될 수 있으니 열심히 연습 하라고 충고해주었다. 원래라면 정령왕은 일일이 연습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언령을 마음껏 다룰 수 있지만, 나는 특이케이스이기 때문에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 아참, 그러고 보니 이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뭐, 어쩔 수 없지. 우선은 물의 상급정령들이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 " 엉? 왜? 무슨 문제라도 있었어? " " 아니, 그게 말이야~ 사실은 지금부터는 네가 직접 인간 세상에 나가서 비를 불러야 했거든. 자연이 너무 망가져 있어서 시큐엘들 만으로는 단기간에 회복시키기가 무리라서 말이야. 하지만 뭐, 지금은 이프리트의 일도 있고 하니 그냥 넘어 가주지. 나중에 하자." 그렇게 말한 트로웰은 마치 수업을 땡땡이치는 친구를 눈감아 주는 녀석처럼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미네르바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테니 자신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나? 내가 정령을 만들고 나서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인 모양이다. 그 후 트로웰은 앞으로의 정령생활에 필요한 자잘한 정보와 텔레포트를 하는 언령의 방법 등을 가르쳐 주곤 이프리트와 '잘해 보라'면서 땅의 영역으로 돌아갔다. 뭐랄까.. 어쩐지 코끝이 찡하면서 감동이 둥실거리며 밀려오는 것이..낯선 세계, 낯선 환경에서 불안감만 가득했던 내가 처음으로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난 듯한 기분이었다. 드디어 안심이 되는, 믿을 수 있는 존재를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내 기분이 정령들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되는 건지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운디네와 시큐엘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자아, 그럼 이제 이프리트와의 면담을 시작해 볼까나? 나는 가벼워진 기분으로 이프리트에게 가기 위한 언령의 주문을 외웠다. 정령계의 구조는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진 커다란 성 4개와 그 앞에 펼쳐져 서로를 연결하고 있는 무한한 정원이라 보는 게 옳았다. 단지 그 성이란 것이 바깥의 정원에서 바라볼 때만 '아, 이게 성이었구나' 하고 납득하게 만드는 건물로 보인다는 것이지, 안으로 들어가면 각 고유의 정령왕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끝없는 공간의 확장에 불과할 뿐이다. 이를테면, 엘퀴네스의 성으로 들어갔을 경우, 문을 연 순간 보이는 것은 여느 성의 구조와 같이 넓게 이어지는 복도라던가, 수십 개의 방문 또는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따위가 아니라 곧바로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온 듯한 광활한 물결의 중심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정령왕들의 사정도 마찬가지. 참으로 가구의 배치나 인테리어 따위는 과감히 무시한, 실속만을 중시하는 엄청난 실용주의적인 공간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가 없었다. ' 성'이라 불리는 각 정령왕들의 고유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는 존재는 하급을 제외한 각 속성의 정령들이다. 본래라면 정령왕의 허락이 있을 경우엔 하급도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만, 하급의 정령들이 워낙에 정령왕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강하기 때문에 감히 성으로 들어갈 엄두를 못내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하급정령들은 영역 밖의 정원에서 각 정령왕들의 기운을 강하게 느끼는 것 만으로 만족하며 지내는데, 이 때문에 정령왕들이 하급 정령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 몸을 영역 안에서 빼어 정원으로 행차하시는 웃지 못 할 사례가 여러 번 일어나기도 했다. 정령왕들이 서로 왕래하게 되는 경우, 사용하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마법을 사용하여 공간이동을 하는 방법으로, 가장 간편하고 빠르기 때문에 정령왕들이 가장 각광 하는 방법이고, 나머지 하나는 영역에서 나와 -지훈은 아직 그 존재도 모르고 있는- 정원을 통해서 각 정령왕의 영역으로 걸어가는 방법인 것이다. 각 정령왕의 영역 중심에 펼쳐져 있는 이 아름다운 정원의 이름은 ' 에바스 에덴 ' 푸르른 창공과 그 위를 흐르는 유유한 구름들, 정원을 가득 채운 수많은 풀숲과 아기자기한 나무들, 그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청명한 바람. 풀숲에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꽃들의 잎은 모두 인간세상에서는 진귀한 보석이 되는 것이었다. 사파이어의 잎사귀에 루비의 꽃잎, 순금으로 만들어진 개나리와 다이아몬드로 빚어진 장미, 불꽃으로 피어있는 카네이션과 백금으로 만들어진 에델바이스. 유리로 된 아카시아의 꽃잎에서 나오는 꿀은 인간세상의 술과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그날 나무의 기분상태에 따라 돌아가며 바뀌는 맛은 칵테일, 샴페인, 백포도주와 와인의 맛. 그리고 그 사이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오고가는 수많은 4대 하위 정령들은 환상보다 더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세상의 누구 하나라도 보았다면, 그 눈에서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릴 만큼 지독히 아름다운 광경. 그러나 이 아름다운 정원을, 무심한 시선으로, 그것도 자신의 공간 안에 주저앉아서 영상을 통해 바라보고 있는 한 존재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이프리트. 모든 불꽃의 권능이자 수장이 되며, 주신의 명령에 따라 이곳 아크아돈의 모든 불의 세력을 관장하는 정령들의 왕. 장작도 없이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의 한가운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주저앉아있는 이프리트의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위험스러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뜨거운 불길 속에 휩싸여져 형체도 없이 타버릴 것만 같은데, 정작 이프리트 본인은 자신이 현재 앉아있는 것이 불길 위라는 것 자체에 대한 인식마저 없어 보였다. 그저 땅이라도 꺼지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한숨만 푹푹 늘어놓으며 인상을 사정없이 구기고만 있는 것이다. " 하아. 우울해. 저 딴 정원 아무리 봐도 나아지지가 않아. 나란 녀석은 항상 왜 이러는 거지? 이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이제 어떡하냔 말이야…. " 이프리트는 한쪽 무릎을 세운 체 그 아래로 고개를 푸욱 숙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방금 전, 엘퀴네스의 영역에서 벌이고 온 행동의 탓으로 현재 이프리트의 마음은 몹시 심란한 상태였다. " 그 녀석도 화났겠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참고 넘기는 게 한두 번이지. 으윽, 그렇게 매정하게 대하고 왔으니 이제 두 번 다시 상종 안 하려 들지도." 이전대의 엘퀴네스는 농담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까탈스럽게 굴거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동을 하면 그때그때 잘못을 끄집어내어 싸움을 벌이는 것은 기본이고, 한번 사이가 틀어지면 100년간은 상종 안하려 드는 것이 예사였으며, 사과 받기 전까지는 설령 아크아돈의 공적인 일에 관계된 일이라 할지라도 먼저 말을 붙이는 법이 없었다. 그게 너무 얄미워서 이프리트 자신도 똑같은 수법으로 맞받아 쳤기 때문에 다른 정령왕들 한 테는 피장파장이란 소리만 들었을 뿐이지만. 그러던 그가 딱 한번, 정말 딱 한번 이프리트의 새침한 말에도 그저 웃으며 넘어간 일이 있었다. 그 날도 시작은 평소랑 똑같았었다. 언제나 처럼 정원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정령왕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빈정 거리를 찾기에 바빴었고, 결국 입씨름에 밀린 이프리트가 자기도 모르게 ' 빨리 소멸이나 해버려!' 하고 외쳤었다. 한두 번 하던 말도 아니었고, 그때마다 빈번히 화를 내며 몇 백년간을 상종 안 하던 엘퀴네스가 이상하게 이때는 그냥 웃었었다. 즐거워 보이지도, 그렇다고 씁쓸하다거나 외로워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엘퀴네스는 그냥 웃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 이프리트는 정말로 거짓말같이 엘퀴네스가 소멸을 하러 명계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정말로 믿을 수가 없어서 차라리 다음 대의 물의 정령왕이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는데, 그게 또 무슨 하늘의 장난인지 정말로 다음대의 엘퀴네스가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어서 닥친 아크아돈의 재앙. 물의 정령왕의 부재로 인한 사태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다. 정령왕 본인들도 자신들의 존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그제 서야 깨달았을 정도니 말 다했지 않은가. 모조리 말라버린 샘과 강물. 염분이 늘어 걸러 마실 수도 없게 되어버린 바다와 속속히 늘어나는 사막. 간신히 다른 차원의 자연을 관장하는 신들의 힘을 빌려 멸망이라는 최악의 결과까지는 막을 수 있었지만, 너무나 망가져 버린 자연은 설령 엘퀴네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다시 회복 될 수 없을 것만 같이 보였다. 미래의 걱정에 시름하는 정령왕들 사이로, 이프리트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책임인 것만 같아 가슴이 더욱 무거워졌다. ' 내가 그때 이번 엘퀴네스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아니, 그때 그 녀석한테 얼른 소멸해버리라고 말하지만 않았어도….' 만약 그랬다면 지금 느끼고 있는 죄책감의 절반도 그가 느껴야할 이유가 없을 것이었다. 실제로 정령왕의 탄생 유무가 누군가의 저주 따위가 개입 될 수 없는 것이며, 엘퀴네스의 소멸 역시 주어진 운명에 대한 순응 이었을 뿐, 그가 했던 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는데도 이프리트는 스스로를 심하게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드디어 엘퀴네스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 것은, 아크아돈의 회복 문제를 떠나서도 이프리트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프리트는 이번에 태어날 물의 정령왕에게 반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돌아와 준 것이 너무도 고. 마. 운. 그 존재에 대한 호감이 더욱 강한 상태였다. 다시 생명이 충만해진 물의 영역을 보는 것이 눈물나도록 반가웠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며 탄생하는 엘퀴네스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감동 이라는 것을 느꼈다. 전 엘퀴네스와 꼭 닮은 푸른색 머리카락. 투명하도록 시린 하얀 피부와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수려한 이목구비. 전체적으로 여성적이지도, 남성적이지도 않은 중성적인 분위기가 묘한 충동감을 불러일으켰다. 외모상으로는 전 엘퀴네스와 그다지 닮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물의 정령왕만이 가지는 특유의 청명한 기운만큼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맑고 시원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의 영혼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탓이겠지. 그래서 이프리트는 더욱 그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심혈을 기울여 정성껏 조각한 사파이어를 그 두 눈에 박아 넣은 것 같은 아름다운 눈동자가 천천히 떠지는 순간, 이프리트는 울컥해버리고 말았다. 전 엘퀴네스와 너무도 똑같아서, 그 라고 착각하게 만들어 버릴 만큼 선명한 파란색 눈동자가 다른 정령왕들을 눈에 담는 순간, 무척이나 푸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이다. 보는 사람이 절로 마주 웃어버리게 만들만큼 따스한 미소는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 무척 잘 어울렸지만, 이프리트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어버렸다. ' 왜 저렇게 바보같이 웃는 거야!! ' 대대로 내려오는 엘퀴네스의 성격은- 싸가지 그 자체였다.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이 딱 그랬다. 인간을 벌레 보듯 하는 건 기본이며, 심지어 물의 정령 외의 다른 정령은 정령 취급도 안 하던 엘퀴네스도 있었을 만큼, 그들의 성격은 같은 동료 입장에서 보기에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뭔가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가 가장 심각했는데, 그나마 시비 걸기 위해 삐죽삐죽 말을 걸던 이프리트를 제외하면 누구도 먼저 그에게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될 정도였다. 그런 최강의 싸가지 집안(?)에서 태어난 녀석이!! 저딴 헤픈 웃음 이라니이!! 어리 버리 하게 내뱉은 '안녕?' 이란 소리도 웃기지 않았다. 엘퀴네스들이 언제부터 다른 존재에게 인사를 하는 녀석들이 되었단 말인가. 미네르바와 트로웰이 그에게 더욱 호감을 가지는 것을 보자니 가슴속에서 한없이 끓어오르던 것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 저런 녀석이 엘퀴네스의 능력을 물려받았다니, 인정할 수 없어! ' 그래서 일부러 화내는 모습을 보기 위해 첫 대면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만나는 족족마다 시비 걸기 일쑤였으며,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정령 만드는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마음만 좋은 물의 정령왕이 그러한 이프리트의 기대에 만족을 시켜주는 듯싶었다. 자신이 시비걸때마다 일일이 말대꾸하면서도 결국 밀리고 마는 모습이 재미있었고, 진행하기 어려운 수업방식에 쩔쩔매는 모습이 고소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렇게 바락바락 대들고 있는 엘퀴네스의 모습이 정작 진짜로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점이 못내 이프리트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때문에 그나마 조심스러웠던 처음과 달리 갈수록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반격까지 가하게된 엘퀴네스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는 결국 절교선언(?) 까지 퍼붓고 돌아와 버린 것이다. 불의 영역으로 돌아와서 마음이 진정되고 나서야 아차 싶었으나, 이미 때는 늦은 일. 조금만 심통을 부려보려던 것이 겉잡을 수 없이 커져버렸다. 이프리트와 엘퀴네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의 골이 너무 깊어져 버린 것 같았다.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는 엘퀴네스가 사과할 리는 없을 것 아닌가? 그렇다고 자기가 먼저 사과를 하기는 곧 죽어도 싫은 이프리트였다. " 몇 년이나 갈까…. 10년? 100년? 아니, 이번에야말로 대 기록을 세워 1000년이 될지도 중얼중얼…. " 이보다 우울할 순 없다! 하는 포즈로 구석에 처박힌 이프리트는 실성한 듯이 중얼거렸다. 그에 대답하듯, 믿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족히 몇 십 년간을 그러고 앉아서 궁상을 떨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 뭐야~ 나랑 1000년이나 말 안하고 지내겠다고? 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1000년은 좀 너무 한 거 아니냐? " " !!! " 텔레포트하는 방법은 굉장히 심오하면서도 간단했다. 그 순서를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첫째, 정신을 집중한다. 둘째, 텔레포트할 대상을 계속 생각하며 언령의 주문을 외운다. 셋째, 그럼 눈 앞에 가야할 장소가 갑자기 환영처럼 등장할 것이다. 거기로 쭈욱 걸어가라. 너는 그냥 걸어가는 것 같아도 남들이 보기엔 텔레포트 한 것이다…였다.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라고 외치고 싶겠지만… 사실이 그러하니 날더러 어쩌라고? 실제로 나는 지금 그 방법을 써먹어서 불의 영역에 도착했다. 지금 산 증인이 눈앞에 있는데 못 믿겠다고 우길 거야? 내가 도착하자마자 본 광경은 금방이라도 온 세상을 태워 시커먼 그을음을 만들어 낼 것 만 같은 엄청난 불구덩이 였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들은, 화산 속 용암처럼 벽을 타고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온 공간을 크고 작은 불씨들로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공기가 덥다거나 바닥이 뜨거운 건 아니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 벌렁거렸다. 바닥의 시뻘겋다 못해 새까맣게 보이는 숯덩이들을 보자니 걷고 싶은 마음도 싹~ 사라진다. 이거 그냥 걸어가면 화상 입는 거 아닐까? 텔레포트한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 웬 시뻘건 형체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 으악! 허억. 뭐야, 이그니스. 놀랐잖아. " 그것은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였다. 내 허리만큼이나 오는 커다란 독수리의 모양을 한 이그니스는, 부리며 깃털이 모두 타오르는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그 때문에 주변의 불덩이와 헷갈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 죄, 죄송합니다. 엘퀴네스님. 계속 한자리에만 서 계시기에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 싶어….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제발 용서를…. " 엥? 아니, 뭐 그렇게 까지 말하면 내가 더 미안하지. 뭘 그 정도 갖고 용서를 구하고 그러냐? 듣는 정령왕 무안하게 시리…. 아참, 이프리트는 어디에 있어? " - 예, 예? 아, 왕께서는 현재 침소에 계십니다. " 침소? …라고 해봤자 그냥 여기서 쭈욱 걸어가면 되는 거지? 어느 쪽이야? " - 오, 오른쪽입니다. 어라? 정말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된단 말이야? 나는 그저 불의 영역이라고 해도 물의 영역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 이었다니.허허허. 이를테면 간단하다. 각 영역들은 하나의 커다란-그 커다랗다는 것이 거의 웬만한 야구장 정도의 거대한 크기이긴 하지만- 원룸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 커다란 방안 한쪽구석에 침구를 비롯한 자잘한 생필품이 준비되어있고, 화장실이나 욕실이나 부엌은 필요 없으니 제외. 한마디로 가구라고는 침대와 손님 접대용 테이블 몇 개뿐이 없는, 정령이 얼마나 간소하고 썰렁하게 지내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년이란 긴 수명을 다 채우고 죽는다니, 도대체 정령이란 것들은 하루 종일 뭐하고 지낸단 말인가? 그야말로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미래의 일은 미래에 가서 걱정할 일이니 지금은 논외로 치고. 나는 이그니스가 가리켰던 방향인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맨발이었기 때문에 바닥에 발이 닿을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뭐…여기까지 와서 불 바닥(?)을 걷기 싫다는 이유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어쩔 수 없지. 그냥 눈 감고 걸어가는 수밖에. 조금 걸어가다 보니 불구덩이 속에서도 용케 타지 않고 버티고 있는 침대와 책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 주저앉아 심각한 얼굴로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이프리트도 보였다. 대체 뭐하고 있는 거라지? 그냥 바닥도 아니고, 숯덩이가 끓어오르는 불구덩이에 앉아서 혼자 뭔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자니, 도라도 닦는 인도의 기인들 같이 위대해 보인다. 저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한국의 매스컴에 뿌린다면 정말 대박 날 텐데, 아깝구만. 쩝.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혼잣말로 떠드는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평소의 너무 생기발랄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목소리는 어디로 갔다 버렸는지, 잔뜩 기죽어진 목소리엔 후회가 가득 담겨있었다. " 몇 년이나 갈까. 10년? 100년? 아니, 이번에야말로 대 기록을 세워 1000년이 될지도 중얼중얼…. " 커헉! 저건 설마 나랑 인연 끊고 지내겠다는 기간을 말하는 것인가? 기운이 없어 보이 길래 그래도 제 잘못은 아나보다 했더니만, 1000년이라니!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 뭐야~ 나랑 1000년이나 말 안하고 지내겠다고? 야,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1000년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 " !!! "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놀랐는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든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곤 한참동안이나 멍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곧 설레설레 고개를 저으면서 다시 얼굴을 무릎에 파묻는 것이다.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그 엄청난 작태에 나는 내 말이 씹혔다는 것에 대한 민망스러움도 차마 느끼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사람, 아니 정령을 눈앞에서 무시하기냐? 덕분에 사과하려고 했던 기분이 싸악 사라져버렸다. 오냐, 그래 이프리트. 네 도전을 받아주마. 어디 한번 갈 때까지 가보자고! 나는 한 손을 펴서 당당하게 이프리트를 가리키곤 소리쳤다. " 에에잇! 이젠 나도 못 참아! 결투다, 이프리트! 여자처럼 생겼어도 안 봐줄 거야!!! " " 시끄럿! 환상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 엉? 뭐야, 너 진짜 엘퀴네스였어? " 이제 서야 알아봤다는 듯이 놀라운 표정을 지어 보이는 이프리트. 그, 그럼 너는 뭐냐. 지금 나를 환상 취급했다는 거야? 기가 턱 막혀오면서 모처럼 결심했던 결투의지가 처참히 사그라들었다. 정말 한순간에 여러 가지 감정을 가지게 만드는 괘씸한 이프리트였던 것이다. 그런데도 이 반성할 줄 모르는 정령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한참이나 내 여기저기를 찔러보고 살펴보더니, 드디어 내가 현실인걸 알았는지 갑자기 도끼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네가 여긴 웬일이야? 내가 너 다시는 안 본다고 했잖아? " 훗. 그렇게 말하면 내가 쫄 줄 알고? 이미 나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다~ 이 말씀이야. 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프리트의 시선을 맞받아쳐 주면서 씨익 웃었다. " 트로웰한테 다 들었어, 이프리트. 전대 엘퀴네스하고 맨 날 그렇게 싸웠다며? 오랜만에 봐서 감회가 새롭다고까지 하던 걸~ 그 정도 가지고 어린애 같이 삐. 지. 기. 는." " 뭐, 뭐야? " " 솔직히 내가 틀린 말 했나. 전 엘퀴네스 좋아한 거 맞잖아? 내가 아무리 눈치가 꽝이라도 그 정돈 알아챈다 이거야. 그게 뭐가 창피하다고 숨기고 그러냐? " " 뭐, 뭐가 어째? 너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좋아하긴 누가!! " " 그럼 아니란 말이야? 에이~ 그건 말도 안 된다. 그럼 아까 내 말에 왜 반격을 못한 건데? " " 으윽. 그, 그건…. 뭐, 뭐야 지금 너! 아까 로는 부족해서 더 시비 걸려고 온 거야? 트로웰이 그건 말 안 했나 본데~ 난 한번 화가 나면 적어도 100년 이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 안 한다고!" 벌떡. 스프링이 튕기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프리트가 신경질 적으로 소리쳤다. 두 눈을 어찌나 부릅뜨고 있는지 그 붉은 눈동자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그 앙칼진 태도에 순간 찔금 했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여전히 이죽대는 낯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봐 주었다. " 어라? 정말 그렇단 말이야? 백년이라니…. 아까 나 왔을 때 중얼거린 걸로는 천년이라고 하지 않았어? 천년에서 백년이면 감지덕지네 뭐. 나 백년 후에 다시 올까? " 내 말이 그렇게 쇼크 적 이었나? 벼락을 맞은 듯이 온몸을 부르르 떠는 이프리트의 상태가 정녕 심각해 보였다. 아마 내가 이렇게 까지 반격을 가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하긴, 나도 지금 스스로의 말발에 놀라고 있는 지경인데, 딴 녀석이야 오죽하겠는가. " 뭐, 뭣시라? 필요 없어, 백년이든 천년이든 다신 너 안볼 거니까 찾아오지 마! " " 정말? " " 그, 그래, 정말이야. 뭐야, 지금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너 자꾸 그런 식으로 밀어붙이면 내가 사과라도 할 줄 아는 모양인데~그건 천만의 말씀 이라고! "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붉게 물들어버린 얼굴로 바락바락 소리친 이프리트는 당장이라도 나를 영역 밖으로 쫓아 낼 듯이 사정없이 한 손을 훠이훠이 흔들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나가!'라는 말은 이프리트의 입에서 나오지도 못하고 결국 최후의 운명을 마감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가지고온 '비장의 카드' 로 인해서. " 알아들었으면 지금 당장 나… " " 미안해. " " …!!! " 이 순간 이프리트는 완전히 한방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누가 봐도 질질 끌면서 시비 걸 것 같았던 내가 대뜸 미안하다고 사과해버렸으니 황당한 건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완전히 할말을 잃었는지 '뭐라고?'라며 되묻지도 않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난 정말 미안한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만 화 풀어. 남의 감정을 가지고 장난치려고 했던 건 확실히 내 실수였어. 정말 미안해. " " 너, 너…지금…. " " 원래는 오자마자 바로 사과하려고 그랬는데, 어쩌다 보니 또 투닥 거리게 됐네, 하하, 내가 원래 좀 이렇다. 미안." 어라라? 근데 어째 사과 받는 이프리트의 표정이 영~ 아니다? 내가 숙이고 나오면 신나서 방방 뛰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잘난 척 하면서 '당연히 그렇게 나와야지~' 라고 말할 줄 알았거늘. 벌레라도 씹은 듯이 잔뜩 표정이 구겨져서 부들거리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설마 내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그럴 리가. 굳이 만들자면 난 사과한 죄 밖에 없단 말이다! 그러나… 정말 엉뚱하게도... 이프리트 에게는 그것이 죄가 되는 모양이었다. " 왜 네가 사과를 하는 거야! " " 엥? 왜, 왜냐니…." " 바보 아냐? 왜 네가 사과를 해? 내가 가서 사과할 때까지 기다릴 자존심도 없는 거야? 네가 왜 날 찾아와? 왜 네가 먼저 숙이고 들어오는 거냐고! " " 저, 저기…이프리트? " 사과하는 게 그렇게 대단한 일이었단 말인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땀만 삐질 거리는 데, 그 사이에도 이프리트는 계속해서 바락바락 소리쳤다. " 태도가 너무 밋밋하잖아! 화가 났다면 계속 화를 내란 말이야. 전 엘퀴네스라면 이런 식으로 넘어가지 않았어! 찾아오기는커녕 우연히 만나더라도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버렸을 거야! 100년이고 200년이고 사과를 받기 전까지는 꿈적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게 누구의 잘못이던 간에!! " " 그, 그건 좀 심했다. 그리고 난 전 엘퀴네스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 그의 능력을 물려받았잖아! 그와 똑같은 기운을 가지고 있잖아! 똑같은 파란색 눈동자에 똑같은 물빛 색 머리카락이잖아! 그런데 왜 그와 다른 거야!!! " " ……." 으으음… 그렇게 물어보면 내가 할말이 없지. 복잡 미묘하면서도 떨떠름한 것이 어째 돌아가신 아버지의 옛 애인이 나타나 '왜 네 아비를 닮은 구석이 없냐!' 하고 따지는 것을 듣는 아들이 된 심정이었다. 도대체 전 엘퀴네스는 어떤 놈이었기에 이다지도 나를 괴롭힌단 말인가. " 언제나 거만하게 혼자만 위대한 척 지내란 말이야! 다른 녀석들에게 웃지도 말고, 얘기도 나누 지마! 시비 거는 녀석은 반죽음을 만들어 놓는 한이 있어도 그냥 넘어가지 말고, 그것 때문에 다른 녀석들과 사이가 틀어져도 절대 사과하지도 마! 다른 하급정령들이 조금만 실수해도 그 존재 자체를 소멸시켜 버리라고! " " 허걱. 이프리트. 나를 성격 파탄자로 만들고 싶은 거냐? " " 맞아! 성격 파탄자! 바로 그거야!" " ……." 이프리트. 너 정상이 아니구나. 크흑. 아주 당당하게 '바로 그거야'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정말 내가 왜 여기까지 와서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지 회한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퍼뜩 스치는 것이. ' 설마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이 그랬던 건가? ' 친하게 지내고 싶다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성격을 저렇게까지 단호하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강조하고 있는 이프리트의 태도를 보면 거의 확실한 것 같다. 이프리트와 항시 투닥 거리면서도 져본 역사가 없다기에 과연 대단한 성격일거라 짐작은 했었지만, 그런 엄청난 녀석이었을 줄이야. 전 엘퀴네스도 대단하지만, 그런 녀석을 좋아한 이프리트가 훨씬 더 위대해 보인다. 그러고도 모자라 순진한(?) 후대의 나까지 똑같은 성격으로 만들고자 하다니…. 너의 정신세계는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거냐! 난 여기서 확실하게 선을 그어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이 위대한 이프리트가 나를 전대 엘퀴네스와 똑.같.은. 성격으로 만들고도 남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네가 틀렸어. 이프리트는 전 엘퀴네스를 좋아한 게 맞았다고~! " 저기, 이프리트? 말해두지만, 나는 전대 엘퀴네스가 아니야. " " …? 그건 나도 알아. " " 아니야, 너 지금 착각하고 있어. 난 전 엘퀴네스와 같은 녀석이 아니야. 그러니까 그 녀석과 똑같은 성품을 지닐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다고. 내가 아무리 전생의 기억에 매여 정령왕의 자각이 더디다고 해도, 이프리트 네가 전대 엘퀴네스의 성격을 나에게 강요한다는 건 잘못됐다는 것 정도는 알아. 지금 네가 취하고 있는 행동은… 그래, 기억을 잃은 녀석에게 억지로 기억해내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아. 실제로 그 녀석은 그저 닮았을 뿐인,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도 말이야. " " ……." 내 말이 어느 정도는 맞았는지 이프리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곤 기운이 빠졌는지 기세 좋게 일어나던 것과는 반대로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물론, 여전히 불타오르는 바닥에 적응을 못하고 있던 나는 순간 움찔하며 놀랐지만 말이다. 그 후 이프리트가 다시 나에게 말을 건넨 것은 조금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뭔가를 정리하는 듯이 한참을 가만히 앉아서 생각하던 이프리트는 곧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촉촉이 젖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마디로 그동안 나는 계속 서있었던 것이다! 손님이 왔는데 앉으라고 권유하지도 않다니!! 가 아니고…허걱, 왜 또 우는 거야!!! " …내가 바보 같지? " " 엉? " " 그래, 내가 생각해도 나 정말 바보 같아. 근데 말이야. 정말 그런 식으로 엘퀴네스가 소멸하게 될 줄은 몰랐거든. 만약 알았다면, 너 같은 거 빨리 소멸해버리라는, 그런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거야. " " 쿨럭. 그, 그랬었냐? " " 응. 정말 이상했어. 분명히 나는 그를 좋아했는데 왜 입으로 나가는 말은 항상 저주와 비난이었을까? 사랑한다고 고백해도 모자랐을 시간을 자존심만 내세우고 싸우느라 바빴어. 지금도 마찬가지야. 사실은 네가 먼저 사과하러 와줘서 기뻤어. 그런데도 이런 식으로 밖에 대하질 못하다니, 난 모순덩어리야. " 씁쓸한 듯이 고개를 젓는 이프리트가 처음으로 슬퍼 보였다. 다가가서 어깨를 끌어 안아주고 '괜찮다'라고 말해주고 싶었을 만큼. 으음, 이럴 땐 대체 뭐라고 말해야 위로가 되는 걸까? 이상한 말하느니 차라리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게 더 나을지도. 그러나 입은 이러한 내 생각과는 다르게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괜찮아~ 이프리트. 원래 인간은 다 모순적인 존재라고…에엥? 그러고 보니 우린 인간이 아닌가. 허걱. " 그렇다면 정령들은 모순적인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걸까? 트로웰이나 미네르바가 나보다 훨씬 오랜 기간을 이프리트와 있었으면서도 이프리트의 감정을 눈치 채지 못했던 이유가…녀석의 '모순' 적인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을지도.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강한 부정은 긍정' 이란 말에 의문을 표했었다. 그것보다 더 확실한 인간의 모순을 표현한 단어는 없었겠지. 정령이 만약 모순이란 것의 개념이 없다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싫다고 하는데 좋다고 알아듣는 것 자체가 무리니까. ' 이렇게 놀라 울 데가! ' 정령세계의 새로운 한 가지를 깨달아 버린 까닭으로 정신없이 감탄해 하고 있는 날 보던 이프리트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넌 어째 갈수록 어리버리 해지냐." " 내, 내가 뭘? " " 내가 가장 궁금한 게 뭔지 알아? 전 엘퀴네스가 지금 여기 나타나서 널 보면 무슨 말을 하게 될 까야. 대대로 싸가지의 전통을 이어오던 집안(?)에서 이번 대에 이런 얼빵한 녀석이 탄생했으니 아마 적잖이 기가 막혀할걸? " 쳇, 그딴 싸가지는 부럽지도 않네요. 본인이 옆에 있는데 아주 대놓고 욕을 하는 이프리트를 바라보면서 나는 속으로 조용히 투덜거렸다. 남이 모처럼 새로운 경지(?)를 깨달아 감탄하고 있건만, 축하해주지는 못할망정 구박을 하다니.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정령이 모순 이란 걸 모르고 있다면, 이프리트는 대체 어떻게 그런 걸 습득 한 거라지? 그냥 모순이란 것의 대한 개념만 없을 뿐, 정령들도 얼마든지 모순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이프리트는 정령의 탈을 쓴 인간인 것이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날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던 이프리트는 문득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 아무튼 네가 먼저 사과했으니, 나도 미안하다고 인정해 주지. 이제 그만 돌아가. 혼자서 생각할게 있으니까. " 그게 진정 사과하는 태도냐? '미안하다'도 아니고… 미안하다고 '인정'해준다는 또 뭐람?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돌아서는 이프리트의 표정이 정녕 쓸쓸해 보여서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혼자서 생각할 거란다면, 지금 상황에서야 전 엘퀴네스에 대한 과거 회상밖에 더 되겠는가. 그나마 나를 통해서 엘퀴네스의 부재를 만족하려던 모양이었는데, 그걸 내가 단호히 끊어버렸으니 지금의 이프리트는 굉장히 허전하고 허탈할 것 같다. 고백이라도 한번 해봤다면 후회라도 없었을 것을…. 이프리트의 말에서 유추하기로는 엘퀴네스가 소멸하기 직전까지 싸웠다고 하니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하고 원망스러울까? 전 엘퀴네스 녀석은 이런 이프리트 마음도 모르고 지금쯤 신나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갑자기 전 엘퀴네스가 괘씸하게 느껴졌다. 뭐랬더라? 소멸한 정령왕은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에서 환생하거나..둘 중 하나라고 했던가? 아, 그러고 보니 내세에서 환생하게 되는 경우, 가장 많이 태어나는 케이스가 드래곤이라고 했었던 것 같다. 그럼 혹시나 여기 아크아돈에서 드래곤으로 환생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참으로 그럴듯한 생각에 나는 한줄기의 희망을 느끼면서 이프리트를 돌아보았다. " 이프리트, 혹시 이번에 드래곤 새끼가 태어났다거나, 뭐 그런 일 없었어? " " 드래곤 새끼라니…. 해츨링을 말하는 거야? 글쎄.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레드 드래곤의 헤츨링이 태어났다는 얘기는 들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 이프리트 입장에서는 돌아갈 줄 알았던 내가 전혀 뜬금없는 질문을 늘어놓으니 황당했을 거였다. 그런데 내가 워낙 진지한 태도로 물어보니까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친절히 답을 해준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러한 이프리트의 마음씀씀이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성심 성의껏 내 생각을 내놓았다. " 아니, 그게 말이야. 정령왕이 소멸하게 되면 드래곤으로 태어나게 될지도 모른 다잖아. 혹시 이번에 태어난 헤츨링이 전 엘퀴네스가 아닐까 해서. "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정령왕이 소멸하면 드래곤으로 태어난다니? " " 아니, 전부다 드래곤으로 태어나는 건 아닌 것 같고,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로 환생하거나 둘 중 하나라던데. 그럴 경우에 가장 많이 태어나는 게 드래곤이라고… " "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오는 이프리트로 인해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저건 아직 정령왕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그런 건 언제 배웠냐는 뜻일까, 아니면 전혀 금시초문인 사실을 내가 어떻게 알고 있냐는 뜻일까? 비참해지지 않으려면 후자의 질문이 더 나은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억지로 후자의 뜻이라 여기고는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 명계에서 들었어. 영혼의 위치를 찾아준다는 '소울 메이트'에 대해 설명할 때였나? 신계로 들어간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락해보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 " 세상에. 정령왕이 신이 되기 전의 견습과정이라는 말이 사실이었구나…. " " 엉? " 그건 또 뭔 소리래?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충격 받은 듯 멍한 얼굴이 되어있는 이프리트가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실은 이전부터 그런 소문이 돌았거든. '신'으로 탄생한 존재가 '신'이 되기 전에 미리 업무에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직분이 바로 '정령왕'이란 거야. 정령왕으로 있을 동안에 이룬 성과에 따라 인세로 가느냐, 신이 되느냐가 결정되는 거지. 본인이 신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면 바로 인세로 들어 갈 수도 있다고 하더군. 소멸된 이후에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그저 떠도는 소문이거니 했었는데… 명계에서 허튼 소리를 할 리가 없으니 아마 네 말이 맞을 거야. " " 헤에, 그래? 그럼 전 엘퀴네스가 지금 신이 됐을 수도 있다는 거네? " " 그럴 거야, 아마. 정령왕들은 업적이 나쁘거나 타락하는 일이 거의 없을뿐더러, 엘퀴네스들은 자존심이 강해서 스스로 인세에 얽매이지 않으니까. " 그, 그렇게 말하면서 왜 나를 쳐다보는 건데? 아무래도 이 성질 나쁜 불의 정령왕은 내가 소멸하게 되면 반. 드. 시. 인간세상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얍삽하게 올라간 눈 꼬리하며, 비웃는 것 같이 살짝 치켜진 입 모양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하기사 정령왕이 되자마자 업무에 차질을 빚은 최초의 녀석인 데다가, 자존심도 없는 놈이니 나중에 인세에 들어가게 되도 할말은 없다만. 젠장, 괜히 말해줬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속 태우는 거나 구경하고 있을 것을. 왜 나란 정령은 스스로 삽질을 해서 놀림 당할 일을 늘여 놓는단 말인가. 정말이지 내가 생각해도 나란 녀석은 이해할 수 가 없다. " 쳇. 그거야 모르는 일 아니야? 전 엘퀴네스가 신계에 들어갔을지, 인세에서 환생하게 됐을지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잖아. 네가 엘퀴네스가 신이 된 거 봤어? 봤냐고~! " " 누가 봤다니? 애석하지만 신계를 비롯한 다른 차원에는 텔레포트가 불가능해.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신'과 명계의 인물 들 뿐이라고. 거기다 설령 네 말처럼 드래곤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여기 아크아돈에서 태어났으리라는 보장도 없잖아? 드래곤이 존재하는 차원이 어디 한두 개 인줄 알아? 운이 좋아 아크아돈에서 태어났다 치자. 기운이며 외모며 모든 것이 달라졌을 텐데 그걸 어떻게 알아봐? 너 바보야? " " 크, 크흑, 아니 이 정령왕은 왜 걸핏하면 날더러 바보래? 내가 뭘 어쨌다고! " " 그럼 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보던가! 에잇, 너 때문에 기분만 더 잡쳤잖아! 짜증나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 " 이프리트의 명백한 축객령에 내 얼굴은 금새 분노로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 이놈의 정령왕은 예뻐할래야 예뻐할 구석이 하나도 없는 거야! " 뭣이라? 남은 기껏 생각해줬더니 한다는 말이 겨우 그것뿐이냐? 내가 차원이동이 가능한 게 신이나 명계 놈들 뿐 인줄 어떻게 알….어? 잠깐만. 명계의 사람들이 차원이동이 가능하다고? " 한바탕 벼락으로 몰아치려던 소란이 한순간 가라앉는 듯한 고요한 기분이 들었다. 퍼뜩 떠오른 생각으로 소리 지르던 것을 멈춘 나를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본 이프리트는 무뚝뚝하긴 했지만 내가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 …? 그거야 당연하지. 죽는 사람은 차원을 가리지 않고 발생하니까. 그들을 명계로 데려오려면 그 정도 권리는 당연한 거 아니야? " " 아하~ 그렇구나. 아무래도…그렇지? " " ……? " 훗훗훗. 이프리트? 나 방금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나를 보고있는 이프리트를 마주보았다. " 어쩌면…전 엘퀴네스의 현재 상황 정도는 알 수 있을지도 몰라. " " 뭐? 어, 어떻게? " 내심 자포자기를 하고 있었던 탓인지, 어두워 보였던 이프리트의 표정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에 나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우선은 내가 먼저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기 시작했다. " 그런데 말이야. 정령왕이 소멸하게 될 때는 명계로 가서 후계자에게 힘을 물려준다고 그러던 데… 차원이동이 불가능하다면 어떻게 명계로 들어가는 거야? " " 그거야 당연히 명계의 인도자들이 데리러 오니까지. 인간들이 죽을 때처럼, 정령왕도 소멸시기가 가까이 오면 명계에서 인도자들이 데리러 오거든. " " 아하. 그럼 명계의 사람들은 자신 외의 다른 존재도 같이 차원이동을 시킬 수 있다는 거네? " " 그거야 그렇… !! 너 설마? " 잠깐의 대화에서 내 계획을 눈치 챘는지 이프리트의 입 모양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그렇다. 바로 그런 것이다. 명계의 인도자들이 어디든지 나타날 수 있는 거라면, 그들에게 부탁해 신계로 차원이동을 할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설령 그게 불가능하더라도 적어도 현재 엘퀴네스가 어떤 처지인지를 알아봐 줄 수는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그런 내 말에 기뻐하면서도 상당히 회의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좋은 방법이긴 한데, 아마 불가능 할 거야. 이미 끊어졌던 전생의 인연을 새로운 삶에서 거듭하는 건 명계에서도 그렇지만 운명의 신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야. 서로간의 사이가 아주 좋았던 정령왕들도 소멸하고 나서 다시 찾는 경우는 없었거든. " " 흐음, 그거야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지. 스스로 찾아볼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 만난 것 일 수도 있잖아? 운명에 너무 순종적이랄까? '이미 소멸했으면 끝이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는데도 외면한 것일 수도 있어. " " …!… "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 이프리트의 말처럼 쉬운 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우선 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명계의 저승사자들을 만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전의 한국에 있었을 때야 병원이란 곳이 있었으니,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도 됐다지만. 정령계에 병원이 있을 리는 없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승사자들을 만날 수 있다지? 가뜩이나 만만치 않은 문제인데 첫 번째부터 이런 난관을 겪게 되다니,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계속 뭔가에 충격 받은 얼굴로 멍하니 앉아있었을 뿐이지만. 그래도 눈빛에 어린 기대를 풀지 못하는걸 보면, 아닌 척 해도 어지간히 전 엘퀴네스를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더 더욱이 이번 계획을 성사시켜야겠다는 사명감으로 불타오르는 나였다. 내 생전(?)에 사랑의 큐피트 역할을 자청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이래봬도 한때는 '닭살커플 훼방 놓기 운동 본부 회'의 총 회장 직을 맡았었던 몸인데 말이다. " 후우. 그나저나 진짜 큰일이네. 저승사자를 만나야 뭔가 시도라도 할 것인데. 도대체 어딜 가야. " " 있어. " " 응? " 푸념처럼 한마디 내뱉은 말에 이프리트가 정신을 차렸는지 단호한 얼굴로 대답했다. 기쁨으로 가득 만개한 얼굴엔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희망이 샘물 솟듯 철철 넘쳐흐르고 있었다. " 명계의 인도자들이 가끔 여유 삼아 놀러 오는 곳이 정령계에 있어. " **** 내 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진 푸르른 초원과 한편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꽃밭이었다. 정령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보는 구름 가득한 창공과 넓은 대지, 초원을 사이로 흐르는 맑은 시냇물에 나는 할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니 그것들을 구경하기에 정신이 없었다. 둥그런 언덕 너머로 보이는 숲은 자그마한 바람에 잎사귀를 흔들며 나를 반기는 듯 맞이하고 있었고,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한때의 요정들은 바람의 하급정령인 실프가 틀림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본 그 광경은 더욱 가관이었다. 이름을 알 수조차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꽃들이 전부…전부! " 보석이잖아! " 척 보기에도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수십만 종의 꽃들이 전부 보석으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순간, 그 눈부심에 차마 눈을 뜰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자세히 보니 시냇물아래 깔려있는 조약돌은 전부 다 물방울 다이아몬드다. 은은히 퍼져있는 향기는 꿀 향 보다 더욱 진하고 달콤했고, 나무에 익어있는 과실마다 먹음직스러운 빛이 튼실하게 맺혀있었다. 굴러다니는 쓸모없는 돌멩이라고 여겼던 것은 전부 금덩이요, 은덩이다. " 무슨 이런 황당한 곳이 다 있어!~! " 감탄보다는 먼저 경악으로 굳어져버린 내게 이프리트가 옆에서 친절하게 이곳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 에바스에덴. 이곳 정령계 밖에 없는 황금의 정원이지. 너도 보다시피 굉장히 아름다운 광경이라, 신계나 명계에서 관광차(?) 자주 놀러오는 곳이야. " " 뭬야? 그런데 왜 나한테는 이제 서야 가르쳐 주는 건데?!! " " 그야 내 맘이지. " " ……." 그렇다. 나는 정령계에 이러한 정원이 있었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던 것이다. 명계의 저승사자들이 자주 놀러 오는 곳이 있다는 말에 반색을 하며 이프리트와 함께 나와서 본 광경은 그야말로 하나의 절경이었다. 텔레포트도 아니고, 그냥 무작정 불의 영역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이프리트의 행동에 처음엔 왜 저러나하는 심정이었지만, 조금 걷다보니 보란 듯이 왠 문짝이 떡 하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서야 나는 정령계의 본 모습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이어진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무한한 보석의 정원을 가운데로 두고 각각 동서남북으로 하나씩 커다랗게 지어진 그림 같은 궁전 4개. 그것이 바로 정령계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안에서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엄청난 모습에 놀라고 있는 나를 보면서, 이프리트는 그 4개의 궁전이 각 정령왕 고유의 영역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정원은 4대 정령들의 성질이 모두 혼합된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정원 곳곳에서 서로 다른 4대 상, 중, 하급의 정령들이 어울려 뛰놀고 있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 그런데 저 녀석들은 왜 저렇게 벌벌거리는 건데? " 나는 아까부터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면서 벌벌 떨고 있는 바람의 하급정령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결 좋은 생머리에 전체적으로 투명한 모습을 가진 실프들은 내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크기였는데, 그들의 왕인 미네르바의 축소판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분위기가 닮아있었다. " 하급들은 정령왕의 기운에 본능적인 두려움이 굉장히 강하거든. 그나마 저 녀석들은 용감한 편이라 저렇게 공중에 떠있기라도 하지, 땅의 정령들은 이미 땅속으로 숨어버렸을걸? 잘 찾아보면 나이아스들도 있을 거야, 네 휘하의 정령들인데 아는 척 이라도 해두지 그래? " " 흠. 그럴까. 물의 정령이니까 샘물 가까이에 있겠지? 아, 부르면 오려나? 나이아스! 집합! " 그러고 보니 운디네와 시큐엘은 봤지만, 정작 내가 애써 만들지 않아도 저절로 탄생해주었던 기특한 나이아스들은 본적이 없었다. 호기심이 생겼지만, 그렇다고 직접 찾아다니기는 귀찮고 해서 그들을 내 쪽으로 부르기로 했다. 설마하니 지들 왕이 부르는데 배 째라고 버틸 녀석이 있겠는가 싶은 심정으로 말이다. 그런 내 생각이 틀린 것이 아니었는지, 내가 그들을 부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내 앞으로 수 십 개의 물방울들이 우르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방울들은 내 앞에 도착하자마자 수 십 명의 물의 하급정령-나이아스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실프와 같은 손바닥 크기의 작은 나이아스들은, 푸른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귀여운 생김 샘이 였는 데, 귀와 허리아래가 물고기의 지느러미로 되어있었다. 한마디로, 동화 속에서나 존재하는 인어공주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박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 이렇게 신기할 수가! ' 내가 감탄하는 사이, 나이아스들은 갑작스런 나의 부름에 무척 당황했었는지, 척 보기에도 한없이 움츠려드는 모양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부, 부르셨습니까, 왕이시여.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신 지요. 전에 물의 영역에서 들었던, 끊임없이 재잘거리던 수다쟁이들의 소리와 똑같은 목소리였다. 다만 지금은 긴장한 탓인지, 주눅이 들은 목소리에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너무 무서워하지 않도록, 나름대로 착해 보이려고 애쓰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기로 했다. " 하핫, 겁먹지 마. 그냥 보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 첫 대면이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 " - !!!! 술렁. 내 인사가 뭐가 잘못되었을까? 갑자기 눈이 호박 만하게 동그래진 나이아스들이 무척이나 놀란 듯이 저들끼리 심각하게 쑥덕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미처 왜 그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생글생글 웃더니, 갑자기 내게 소란스럽게 인사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 꺄악 꺄악 잘 부탁드려요, 엘퀴네스님~~ - 엘퀴네스님 너무 예뻐요~ 멋있어요~ 사랑해요~ - 엘퀴네스님 저도 잘 부탁해요~~~ 꺄악 " ……." " 하급정령들은 정령왕의 마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거든. 네가 자신들에게 호의적인걸 알고 두려움이 없어진 거야. 저 수다쟁이들을 앞으로 감당하려면 좀 힘들겠네. 잘해봐. " 순식간에 일어난 태도의 변화에 내가 적응을 못하고 있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지나가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그런 건 진작진작 좀 말해주란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겁이 없어진 나이아스들은 그때부터 정말로 끈덕지게 나를 쫓아다니며 이리저리 수다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찌나 쟁알쟁알 떠들어대는지, 나중에는 파리채로 한 마리씩 휘어잡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 좀 조용히 해!' 라고 외치면 ' 네에~ ' 하고 대답하는 것이 귀여워서 봐주고는 있지만, 정말이지 이 징글맞은 수다쟁이들을 앞으로 감당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떡 하니 명계에서 놀러온 저승사자들을 발견한 것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축복이나 다름이 없었다. 드디어, 드디어 이 시끄러운 녀석들을 떨구어 낼 수단이 생긴 것이다! 나는 기쁜 마음을 굳이 숨기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나이아스들을 바라보았다. " 저기, 얘들아. 나는 이제부터 아~ 주 중요한 일을 해야 하거든? 그러니 이제 너희들끼리 놀지 않으련? " - 에? 정말요? 에이.. 더 놀고 싶었는데. - 그럼, 엘퀴네스님~ 다음에 놀아주세요. 네? - 헤헤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엘퀴네스님~ - 그럼 이제 뭐하고 놀지? - 실프들이다, 우리 실프랑 놀러가자. - 꺄악~ 그래그래~~ " ……. " 다행스럽게도 이들을 떨궈버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들끼리 알아서 다른 장난거리를 찾아 떠났던 것이다. 아마 내 마음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만큼, 내가 그들의 수다에 지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 쉽게 물러난 걸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 마치 몇 년 만의 여유를 찾는 듯한 해방감에 나는 감격으로 눈물을 그렁그렁 맺었다.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보는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그냥 조용히 무시했다. 그 대신 이제 막 정원에 도착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는 저 세상(?)사람에게 큰 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 거기~! 정령 아닌 녀석! 잠깐 스토옵~~~~!!! " 내가 너무 큰소리로 외쳤나? 나의 외침을 들은 저승사자가 불에라도 데인 듯이 화들짝 놀라는 것이 보였다. 아니, 실제로 불에 데였다. 마침 타오르는 불꽃으로 만들어진 장미에 흥미를 보이던 녀석이 그것에 다가가려는 때에,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놀라 꽃잎에 손을 대고 말았던 것이다. 데인 손을 부여잡고 '아뜨뜨~' 를 외치고 있는 녀석이 진정으로 괴롭고 불쌍해 보였다. 옆에서 이프리트가 박장대소를 하고 웃지만 않았더라도 충분히 나는 그에게 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위로해줄 용의가 있었던 것이다. " 꺄하하하하~~ 저거 바보 아냐? " " 이, 이프리트. 너무 그렇게 웃지 마. 나 때문이잖아.. " " 훗. 척 봐도 불로 된 꽃에 가까이 다가가는 놈이 정상이 아닌 거지, 정 미안하면 가서 치료라도 해주던가. 회복능력은 엘퀴네스들의 특기잖아? " 이런 썩을. 내가 그런 것까지 할줄 알면 오늘날 이 시점에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겠냐? 많은 의미가 담긴 눈으로 쏘아보자 이프리트는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날 놀리는것을 정령생활의 보람이라도 잡은 모양이다. " 크읍.. 아, 정령왕들을 뵙습니다. 저를 부르셨습니까? " 화상의 통증을 조금 가라앉혔는지, 처음보다 많이 진정된 저승사자가 우리들을 알아보곤 인사를 걸어왔다. 초록색의 짧은 컷트 머리에 구릿빛 피부. 검은색 망토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는 몸은 그냥 겉으로 보기에도 근육으로 떡 벌어져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전에 명계에서 봤던 저승사자들과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라고나 할까? 예쁘장하기만 했던 그때의 저승사자들에 비해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녀석은 부리부리한 눈매에 눈썹이 굵은, 전체적인 선이 투박한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못생긴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정말 남자답게 생겼다는 거다. 이런 걸 터프하게 생겼다고 하지, 아마. 꽃 소년들과는 다른 의미로 여자들을 울리고 다닐 놈이었다. 젠장, 나도 이젠 평범하게 생긴 놈을 만나고 싶어! " 부르긴 했는데, 저기. 괜찮아요? 화상 입은 것 같던데. " " 아, 하하. 괜찮습니다. 잠시 실수한 것이니까요. 그나저나 이곳 에바스에덴은 정말 아름답군요. 선배들이 관광지로 적극 추천한 까닭을 알 것 같습니다. 거기다 운이 좋게도 이렇게 정령왕들까지 뵈었으니…. " 그러나 그렇게 멀쩡하게 대답하는 녀석의 손은 그냥 보기에도 괴로울 정도로 시뻘겋게 달아올라있었다. 살짝 데인 건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꽃잎을 세게 움켜쥐었었나? 살풋 인상을 찡그리자 이프리트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 그 꽃은 그냥 불로 된 게 아니거든. 지옥에서 피어나는 염화의 일부야. 땅속 깊은 곳에 흐르는 용암과 같은 성질이라고 보면 될 거야. 육체를 가진 녀석은 물론, 영혼에게도 상처를 입히지. 그러니 저 정도 화상으로 그친 것이 용한 거라고. 자칫하면 손이 아주 녹아버렸을지도 모르니까. 뭐, 그렇다고 지금도 괜찮은 상태라는 건 아니지만." 아아. 이런. 경악으로 굳어져버린 저승사자가 보인다. 녀석은 화상 입은 손을 부여잡고 실성한 듯이 '지옥의 염화를 만지다니~!' 라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 염화라는 것이 상당히 무서운 놈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용암이나 마찬가지라는데 대단하지 않을 수가 없지. 꽃 주제에(?) 왜 그런 위험한 성질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거기다 저걸 정원에 심어놓은 이유는 또 뭐고? 저러다 정령들이 다치면 어쩌려고. " 저거…저렇게 그냥 둬도 괜찮은 거야? " 아닌 게 아니라 꽃 위를 날아다니는 실프들의 모습이 굉장히 위태해 보였다. 나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여전히 시큰둥한 이프리트의 대답이 이어졌다. " 정령들은 각 자연의 속성을 극한까지 가지고 있는 녀석들이야. 불의 정령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물의 정령이라고 해도 염화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해. 지 까짓게 아무리 화상을 입히려고 난리를 쳐도 물의 기운에 덮쳐 버리거든. 아무렴 정령에게 위험한 것을 정령계의 정원에 가져다 두겠어? " " 하긴 그렇겠구나…. 하하. " "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하고, 저 인도자의 상처나 어떻게 해봐. 염화의 불꽃은 만만한 게 아니어서 완전히 치료하기까지 화상의 열기가 멈추지 않고 전신에 퍼지니까. 저러다 죽을지도 몰라. " " 헉? " 이프리트의 말에 놀라 황급히 상처를 살펴보니, 정말로 손바닥에 입었던 화상이 팔뚝까지 번져있었다. 연신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땀을 흘리는 폼이 심상치가 않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녀석의 화상 입은 손을 꾸욱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끙끙거렸다. " 어떡하지, 이프리트? 치료할 수 있는 약 같은 건 없는 거야? " " 그런 게 어디 있어? 정령이 다칠 일이 있어야지. 거기다 다치게 되더라도 엘퀴네스의 능력이 있으니 필요하지도 않았단 말이야. 네가 알아서 해봐.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까. 저, 저런 마녀 같으니라고~!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저렇게 태연하게 대꾸하다니. 눈앞에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저승사자가 떡 하니 보이는데, 이프리트는 '나하고는 상관없음' 이라고 이마에 써 붙여 놓은 듯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잠시 이프리트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낸 뒤, 이 화상을 어찌 처리하면 좋을 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번져 가는 상처는 벌써 어깨를 타고 올라가 있었다. 나는 우선 저승사자의 몸을 감싼 망토를 벗겨낸 후, 서있는 것도 힘들어하기 시작한 녀석을 편히 자리에 앉혔다. 화상을 입은 사람의 응급처치가 뭐였더라…. 아, 그래. 우선 찬물로 열을 식혀야지. " 이프리트! 가서 물 좀 떠와! " " …넌 지금 네 자신을 뭘 로 생각하는 거야? " 엥? 그게 무슨… 아, 맞다. 내가 물의 정령이구나. 이런 바보 같은~!! 물을 관장하는 정령왕이 다른 것도 아니고 물을 떠오라고 시키다니.. 정말이지 나는 갈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모른단 말이야! " " 아주 바보라고 광고를 해라!! " 물의 영역에 있었을 때는 사방에 보이는 모든 것이 물이었으니 그걸 내 마음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됐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공기 중에 있을 때는 물을 가지고 놀(?) 방법이 없는 것이다. 내가 무슨 수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물을 만들어 낸단 말인가! 엄청난 난관에 직면해 뻣뻣하게 굳어버린 내게 이프리트는 바락바락 소리쳤다. " 네가 물을 만들긴 뭘 만들어, 멍청아! 네 자체가 물이란 말이야, 물!! 네가 이 녀석 팔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물로 식히고 있는 상태라고! " " 헉? 정말? " " 그래!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공기 중의 수분은 물 아니냐? 그걸 끌어만 모아놔도 호수 한 개는 만들겠다! 한 가지만 알아둬. 아크아돈의 모든 물은 완전히 네 거야. 네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 원하는 대로 이동한다고! 그러니 어디 가서 물이 없어서 뭘 못하겠다는 멍청한 말은 하지 마. " 흠. 어지간히 열 받았나 보다. 과격하게 씩씩거리는 이프리트를 뒤로하고 나는 조용히 내가 잡고 있는 저승사자의 팔 부분을 바라보았다. 이프리트의 말을 들어서 인지 몰라도 아까 봤을 때는 심각하게 보였던 상처가 조금 진정된 듯도 하다. 새빨갛게 익어있는 피부위로 커다란 물집들이 보기 흉하게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으음, 이걸 어떻게 좀 치료를 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내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였을까? 어쩐지 이 화상 입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상처부위를 잡고 있던 손바닥에 물의 기운을 끌어올린 것이다. 끌어 올려진 물의 기운은 마치 수증기가 증발하듯, 수십 개의 물방울이 되어 내 손바닥을 통해 저승사자의 화상부위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저승사자의 상처부위를 완전히 장악한 물방울들은, 내가 '앗'하고 소리치기도 전에 그의 피부 아래로 스며들더니, 곧 상처가 완전히 회복된 말끔한 피부를 드러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간으로 치자면 불과 몇 초 사이에 일어난,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인 것이다. 덕분에 뭔가 더 잔소리를 하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이프리트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고, 아픈 팔을 끙끙거리며 부여잡고 있던 저승사자의 눈도 동그래졌다. 그는 화상 자국이라곤 찾아볼 길이 없이 깨끗해진 자신의 팔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었다. " 이, 이런! 지옥의 염화로 인한 상처가 이렇게 말끔하게 회복되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요. 엘퀴네스님의 회복능력은 귀가 따갑게 들어왔지만, 이렇게 제 눈으로 확인하게 될 줄이야. 정말 영광입니다. " " 하아. 피곤하니까 말시키지 마요. "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몸이 피곤해졌다.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육체적 피로인 것 같았다. 덕분에 기운이 빠지는 것을 느끼면서 자리에 털푸덕 주저 앉아버렸는데, 저승사자 녀석은 상처가 나은 것이 마냥 기뻤는지 성의 없게 대답하는 내 말에도 연신 싱글벙글한 미소를 감추질 못하고 있었다. " 돌아가면 선배들에게 자랑할겁니다. 정령왕들을 뵌 것도 모자라 이렇게 직접 은혜까지 입었으니 말입니다. 아마 다들 부러워서 뒤집어 질 거예요. 하하하 " 퍽이나 부럽기도 하겠다. 자칫하면 죽었을 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 직면했던 놈치고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질 못했다. 육체를 가진 종족이야 죽어도 영혼이 있으니 배 째라고 버티기라도 한다지만, 이미 영혼인 저승사자는 죽으면 그걸로 끝 아닌가? 근데 저 놈은 왜 저렇게 멀쩡한 거야? 나와 같은 심정인지 놈을 보는 이프리트의 표정도 황당함으로 가득했다. " 엘퀴네스보다 웃긴 놈일세. 너 그거 알아? 엘퀴네스가 치료를 안 했으면 네 존재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었을 거라는 거. 지옥의 염화에 의한 화상은 어지간한 상급 신 정도의 치유력이 없으면 못 고친다는 거 알지? " " 하하. 물론입니다. " " 근데 왜 그렇게 태연한 거야? 너 방금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거라고. " 껄껄거리고 웃는 저승사자의 모습에 불만을 느꼈는지 이프리트의 이마가 살짝 찡그려졌다. 그러나 이놈의 간덩이가 부은 저승사자는 그저 모든 것이 아름답게만 보이는지 여전히 태연하게 대꾸하는 것이다. " 죽을 뻔하긴 했지만,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것은 명계의 인도자들이 할 짓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살아있는 데 무엇 하러 죽었을지도 모를 미래를 상상한단 말입니까? 아무튼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이네요.하핫 " " ……. " 강적이다. 단숨에 이프리트가 할말을 잃게 만들어 버린 대단한 저승사자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호기롭게 웃어 보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은 '너'가 아니라 ' 유라우스 ' 라면서 친근하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대단한 넉살이라고 보지 않을 수가 없다. " 아,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님에 대해서는 명계 에서 많이 들었습니다. 이번에 저희 측 실수로 큰 폐를 끼쳤다고, 결정자님의 염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셨지요. 하지만 오늘 이렇게 치유 술을 하시는 모습을 보니, 안심하셔도 된다고 보고 드려도 될 것 같습니다. " " 하아. 뭐 보고할 것까지야." " 아닙니다. 우연히 라도 정령계에 갈 때 엘퀴네스님을 뵙게 되면, 어찌 지내시는지 알아봐 달라고 모든 인도자들에게 신신당부의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굉장히 기뻐하실 겁니다. " 결정자라고 하면… 아레히스를 말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아도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헤어져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게 까지 나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니. 어쩐지 내가 천하의 몹쓸 짓을 하고 도망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으음. 그놈의 맛 더럽게 없던 액체만 아니었어도 마지막까지 고운 인상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것을. 잠시 옛 추억(?)에 잠기면서 나름대로 찡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데, 유라우스가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 " " …!! 아, 맞다. 상처 치료하는 것 때문에 깜박 잊고 있었어. " " ……. " 찔끔한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니, 어쩐 일인지 대뜸 '바보'라고 중얼거려야 했을 녀석이 이번엔 묵묵부답이다. 그렇다는 것은…. ' 너도 잊고 있었냐!! ' 뜨악한 눈으로 보자 붉어진 얼굴로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것이 정말로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무관심한 척 태연한 눈으로 있었어도, 저승사자가 다쳤을 때 당황하긴 당황했었나 보다. 거기다 이 놈의 저승사자가 워낙의 타고난 언변(?)으로 정령왕들의 정신을 다 빼놓았으니, 제 아무리 이프리트라도 페이스를 잃지 않을 순 없었겠지. 어쩐지 굉장히 기분이 유쾌해졌다. 동지를 만난 것 같은 기분 이랄까나? 후훗. 그런 내 모습이 못마땅했는지 표정을 잔뜩 구긴 이프리트가 빽하고 소리쳤다. " 뭘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는 거야? 바보같이. 빨리 저 녀석한테 용건이나 말하라고. " " 아아. 미안. " " 저어. 저는 '저 녀석'이 아니라 엄연히 '유라우스'라는 이름이…. " " 시끄러. 닥쳐. 내가 저 녀석이라면 저 녀석 인 거야. 어디서 말이 많아!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거야? " " ……. " 살벌하게 몰아붙이는 이프리트의 말에 결국 저승사자는 찍소리도 못하고 움츠리고 말았다. 아니, 그것보단 어느새 이프리트의 손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불로 된 아름다운 검의 기새가 너무 찬란했던 탓이지 싶다. 역시 욕은 만국 공통어이고, 폭력 앞에서는 장사도 없다는 말이 진리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의 능력은 최상의 공격력을 자랑하는 불의 검을 소환하는 거라고 했던가? 한번도 본적이 없고, 이프리트가 그렇다고 말해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이프리트가 지금 들고 있는 검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쉽게 눈치 챌 수 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저절로 기겁을 할 만큼, 흉흉한 불길에 타오르고 있는 황금빛 검신의 검이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손잡이까지 불로 감싸져 있으니 아마 저것을 온전히 쥘 수 있는 자는 불의 정령 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이프리트만을 위한 검인 것이다. 이 얼마나 부러운 것이란 말인가! 쳇. 나도 이런 기운 빠지는 치료 술 말고 저런 멋지구리한 검을 소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힘으로 여자에게 밀리는 것은 남자로서는 최대의 수치이자 비극이다. 아무리 이프리트가 여자가 아니고, 내가 남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슬픈 것은 슬픈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 나는 한껏 부럽다는 눈빛을 이프리트에게 보내면서, 저승사자 유라우스에게 힘없이 말을 걸었다. " 저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혹시, 우리들을 신계로 이동시켜 줄 수 있을까요? " 기대로 반짝이는 이프리트의 눈동자가 보인다. 그러나 저승사자는 내 말을 듣는 순간 몹시도 허둥대는 기색으로 사정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 예에? 신계요? 아, 안됩니다. 아무리 저희 인도자들이 차원의 이동이 가능하다지만, 신계로의 출입은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정자가 동행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 " 결정자? 그럼 그를 만나게 해주면 안 될까요? 그에게 부탁해 볼게요. " " 하, 하지만 불가능 할 겁니다. 아무리 그 분이라도 공식적인 업무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신계로의 방문은 꺼리시는 편이라…. " " 그래서 해주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 시뻘겋게 타오르는 이프리트의 검신이 순간 저승사자의 목을 향해 겨누어 졌다. 같은 정령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지만, 정령이 아닌 타인. 그것도 힘의 제약을 전혀 받지 않는 정령계에서의 이프리트의 능력은 굉장히 위협적인 것이다. 미네르바의 방어벽이 상급신의 능력으로도 뚫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것이라고 하니, 이프리트의 능력도 그것을 상회했으면 상회했지, 적어도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저승사자의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것은 당연한 일. 결국 그는 벌벌거리는 얼굴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모, 모시겠습니다. " 사랑에 빠진 여자(?)는 위대했다. 외전- 전대 엘퀴네스의 이야기 " 넌 하루 종일 이런 곳에 있으면 심심하지 않니? " 어느 날 문득 내게 그렇게 물어오는 녀석이 있었다. 무료한 시선으로 돌아보니 얼마 전 새로 탄생한 이프리트가 새초롬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무시하기 시작해서 언제나 말을 걸어도 무시. 존재를 봐도 무시. 계속 무시하고 있는데도 꿋꿋하게 말을 걸어오는 이상한 녀석. 혹시 이번 대의 이프리트는 학습능력이 없는 건가? 그렇다면 정말 곤란한걸. 다른 건 다 참아도 피곤한 건 못 참는다고. 제길. 아무래도 저 녀석은 몇 번 밟아줘야 주눅이 드는 스타일인가 보다. 재수 없는 인간들 중에 학대를 즐기는 미친놈들이 있다더니, 그게 이 녀석한테도 옮은 모양이다. 정령에게도 옮기는 전염병이었던가? 하여간 인간들이란 박멸을 해도 모자를 해충이라니까. 아아 짜증나. 언제고 한번 날 잡아서 쓸어버리든지 해야지 원. 나는 굉장히 인심 쓰는 기분으로 이 녀석에게 고운 말로 그냥 돌아가도록 권유했다. 지금 나의 위대한 정신이 너로 인해 피폐해져 가고 있으니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가라고. " 꺼져. " " 뭐, 뭐야? 뭐, 이런 싸가지가!!! 나는 그래도 하루 종일 정원에서 멍하니 구경만 하고 있는 네가 불쌍해서 말이라도 걸어주러 왔건만! 정말 이렇게 나오기야? " " 후…. 착각도 지나치면 분수를 모르는 게 되는 거다. 꼬맹아. 한번만 더 그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봐. 어떻게 되는지 몸소 체험하게 될 테니. " 지금 이 위대하신 몸은 정령왕들 중에 가장 연배가 높다 이 말이시다. 이제 겨우 태어난 지 500년 밖에 안 된 네가 시비 걸 대상이 아니시라고. 정령왕들의 힘은 다 비슷하지만 경험과 연배는 절대 그냥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싸움을 하더라도 나의 경우엔 더 효율적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방법을 몸으로 습득하고 있다 이 말씀이야. 그래도 아주 무모한 건 아니었는지 나의 경고에 잠시 분한 표정을 짓던 이프리트는 곧 말없이 돌아섰다. 그래. 그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조금만 더 귀찮게 굴었으면 날려버리려고 했으니까. 각 정령왕 고유의 힘(트로웰의 혜안이나, 미네르바의 방어력, 이프리트의 공격력을 말함)으로는 같은 정령왕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지만, 그냥 보통의 힘으로는 충분히 소멸까지 가능한 상처를 낼 수 있다고.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런 힘으로는 나 엘퀴네스가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특히나 속성이 불인 이프리트는 더 치명적인 데미지를 받겠지. 그런데 저 녀석이 언제부터 나한테 시비 걸 게 되었더라? 처음엔 그래도 다른 녀석들처럼 가만히 있었던 것 같은데. 태어나는 그 순간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 면상 깔어! ' 라고 대꾸해준 뒤로 100년간은 이프리트도 꽤 얌전하게 지냈었다. 트로웰은 마음을 읽는 녀석인 만큼 내 속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 귀찮게 안 했었고…미네르바는 원체가 모든 일에 무관심한 녀석이니 귀찮다는 상대한테 굳이 맞춰주는 타입은 아니었지. 그건 전 이프리트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중요한 볼일이 아니면 먼저 말을 걸어오지 못하도록 내가 압력을 가해두었으니까. 그런데 저 녀석은 왜 꿋꿋하게 면박을 당하면서도 오냔 말이야… 뭔가 모자란 게 있는 게… 아! 그렇군. 그때부터였나. 이프리트가 태어나고 나서 얼마 후에 있었던 일이었던가. 녀석이 시범 삼아 만든 불의 정령이 실수로 내 귀한 머리카락 한 올을 증발시켜버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불의 정령을 초토화시키고 싶은 것을 넓은 아량으로 그놈 한 놈만 몸소 소멸시켜주었거늘….그걸 고맙다고 여기지는 못할망정 이프리트가 대들기 시작했지. 음.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한 녀석이다. 그나마 안면이 없다고 봐준 것도 모르고 덤비다니. 더불어 그때부터 계속 눈만 마주치면 삐죽삐죽 시비를 걸어오니 만날 때마다 짜증이 샘물 솟듯이 솟아오르는데 미치겠다. 언제 한번 날 잡아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줘야 하나? 아…귀찮은 건 질색인데. 그때였다. 벌써 돌아간 줄 알았던 이프리트가 냉큼 돌아서더니 나에게 혀를 낼름 내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 엘퀴네스 바~~보!! 멍청이~~!!!! 그대로 소멸이나 해버려라~! 늙은이야!! " " !!! " 뭐, 뭐가 어쩌고 어째!!! 그래도 제 잘못은 아는지 그렇게 외친 이프리트는 쏜살같이 어딘 가로 텔레포트를 해버렸다. 나는 그야말로 화낼 타이밍도 못 잡은 상태로 녀석에게 꼼짝없이 당해버린 것이다. 이제는 허무하게 비어버린, 이프리트가 방금 전까지 있었던 자리를 노려보며 나는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훗. 이프리트? 나 정말 열 받았어. 건드린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 " 으에엑!! 이프리트! 너 또 엘퀴네스한테 뭐라고 한 거야!! " " 내가 뭘? " " 정원의 모든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고! 엘퀴네스 화나면 속성이 얼음으로 변하는 거 몰라? 최악이야!! 정원의 모든 꽃이 말라버렸어. 나이아스들이 얼음덩어리가 되 서 다른 하급정령들을 괴롭히고 있단 말이야. 인간계는 지금 일주일째 우박만 내려! 벌써 아크아돈의 상급신이 몇몇 와서 경고하고 갔단 말이야.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가만히 안 있을 거래!! " 트로웰이 허둥지둥 내뱉는 말을 여유 있게 듣고 있던 이프리트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갔다. 이 싸가지 물의 정령왕이 또 무슨 짓을 저지르는 거야! 며칠 전 그를 약 올리고 도망친 사건이 불쑥 떠올랐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자신의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이프리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흐흥~ 그까짓 얼음이야. 내가 녹여버리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걱정 마~ 지금 당장 이그니스들을 대량으로 탄생시킬 테니. " " 미쳤어? 그러다가 역효과가 나서 불바다가 되면 어쩌려고 그래? 인간세상은 너희들이 시험 삼아 장난치는 장소가 아니야. 당장 가서 엘퀴네스에게 사과하고 그만두라고 해! " " 시, 싫어.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정 안되겠음 트로웰 네가 가면 되잖아!! " 붉어진 얼굴로 팩 쏘아보며 말하자 트로웰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러자 이제껏 묵묵히 옆을 지키고 있던 미네르바가 나섰다. " 갔었어. " " 뭐? " " 엘퀴네스한테 갔었다고. 어찌됐든 누구든 말려야 했으니까. 가서 본전도 못 찾고 엘퀴네스의 얼음 그물에 갇혀서 장난감이나 되 주고 왔다는 게 문제지만. " " 으에에~~ 미네르바! 말하지 마! 그 악몽이 다시 생각나잖아! " 머리를 부여잡고 흔들어대는 트로웰. 그런 트로웰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는 이프리트와 재밌다 는 듯 무표정한 얼굴에 눈빛을 빛내는 미네르바. " '귀여운 짓' 10가지를 하고서야 풀려났지. 피식 " " 으아아악~~ 그마안~~~!! " " 미, 미네르바…넌 그동안 뭐하고? 그냥 구경만 한 거야? 동료가 당하고 있는데? " 다른 정령왕들에 비해 그나마 엘퀴네스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미네르바인지라, 엘퀴네스도 그의 의견은 어느 정도 존중해 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엘퀴네스에게 하는 부탁은 그의 입을 통해서 이루어졌었기에 이프리트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 말려보긴 했지. " " 그, 그런데? " "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죽여 버릴 거라 더 군. " " ……." " 그러니 당장 가서 사과하도록. " " 시, 싫어! 나도 자존심이 있지! " 매일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놀리는데 성공하게 되도 그 뒤에 이어지는 엘퀴네스의 보복에 밀려 결국은 사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번만은 기필코!! 라는 신념으로 끝까지 버텨보려는데 무표정한 미네르바의 안색이 유달리 흐려지는 것이 이프리트의 눈에 포착되었다. " 너의 자존심 때문에 정령계가 소멸되어도? " " 하,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 " 내가 장담하지만 엘퀴네스는 마음먹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녀석이야. " 그리고 실제로 과거에는 그 비슷한 지경까지 간 적이 있었다. 현재의 이프리트가 탄생하기 전, 그러니까 전대 이프리트가 쌩쌩하게 살아있을 시절의 일이었지만. " 무서웠지. 그때 이프리트가 자존심 살린답시고 몇날 며칠 시비 걸었다가 거의 소멸 할 뻔하고 정령계는 반 초토화 됐지. 지금 이프리트 네 영역이 그 시절한번 무너졌다가 다시 복구한 거란 거 알아? 소식을 들은 상급 신들이 필사적으로 엘퀴네스를 막아준 바람에 간신히 그 정도에서 그친 거라고. 그 사건으로 엘퀴네스는 몇 백 년 근신처분을 받고 말았지만 이프리트는 두 번 다시 엘퀴네스를 건드리는 만행을 저지르지 못했어. 엄청난 교훈을 몸으로 보여준 거지. " " ……." 싸가지가 괜히 싸가지라 불리겠는가. 아무리 유치한 행동을 하는 녀석이라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찍소리도 못하고 당해야 하는 것이 약육강식의 세계였던 것이다. 결국 이프리트는 그 날로 두 정령왕의 눈치를 못 이겨 엘퀴네스를 찾아가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엘퀴네스가 소멸하기 직전까지 되풀이되는 정령계의 일상적인 나날 중 한 개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 내일이면 소멸인가. 정령이란 몸은 정말 편리하게도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오면 정확하게 신호가 들어온다. 내 바로 전에 소멸한 이프리트도 일주일 전부터 소멸할거라고 떠들고 다녔었지. 그리고 모두의 배웅 속에서 인도자들의 팔에 꿰어 정령계를 떠났다고 들었다. 왜 들었다라고 하냐고? 그거야 내가 배웅이란 귀찮은 일을 할 리가 없잖아? 그래서 하루 종일 영역 안에서 빈둥빈둥 놀았지만, 마지막까지 내 면상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하니 난 녀석에게 매우 고마운 일을 해준 거나 다름없다. 그 빚은 언제고 꼭 되받아야지 하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제 얼마 안 남았군. 명계에 가면 녀석의 소식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붙잡아서 이자까지 고이 쳐서 받아먹을 테다, 후훗.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면서 이제 오늘이면 정령왕으로서는 마지막일 정원의 광경을 다시금 둘러보았다. 2 만년인가…. 지긋지긋하게도 오래 살았군. 보통 정령왕의 수명이 1만 5천…길어야 1만 8천년에서 끝난다는 점을 감안해 봤을 때 나는 정말 끈질기게 오래 살아남은 녀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가. 새삼스레 감회가 드는 것이. 문득 센치해 지는 기분이다. 이게 바로 떠나는 자의 고뇌인가. 그러나 그런 아련한 기분을 단번에 망가뜨리는 목소리가 내 상념에 끼어 들었다. " 안 어울리게 멋있는 척하기는! 네가 그렇게 폼 잡으면 뭔가 있어 보이는 줄 아냐? 그래봤자 넌 싸가지 밖에 안 돼~! " …이프리트. 이제 제법 연륜이 있다고 부쩍 대드는 횟수가 많아진 녀석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를 찾아와 시비를 걸었다. 그래봤자 이제 겨우 2천살밖에 안된 주제에 2만년의 긴 수명을 다 채운 내 앞에서 까불어 대다니. 이게 바로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건가. 정말이지 질리지도 않는 녀석 같으니 라고. 뭐,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니 좀 가볍게 놀아 줄까나. " 싸가지라. 어느 입이 그렇게 예쁜 말만 골라서 할까. 매 타작이 요즘 줄었지? " " 으, 으윽. 치사하게 힘으로 해결하려고 들다니!! " " 훗. 치사라. 강한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양육강식의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아닌가? 억울하면 너도 힘을 기르던가. " " 으으으윽!! " 그래도 몇 천년동안 나와 티격태격하면서 저 녀석 성격도 내 고귀한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한마디로 더러워졌단 소리다.) 세상을 살아가는 또 다른 힘을 부여받은 셈이니 감격해도 모자를 녀석이 오히려 원망이라니. 은혜도 모르는 놈. 뭐, 그래도 재미있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녀석이 시비 걸러 오지 않으면 오히려 하루 종일 지루하고 심심해졌다. 만사가 다 귀찮은 나에게도 재미라는 것이 생겼으니 저 정도의 괘씸죄는 봐주도록 할까. " 흥! 난 이제 꽃다운 2000살이라고! 차오르는 초승달 몰라? 네가 아무리 용 써봤자 어차피 정령왕은 거기서 거기! 연륜이나 경력쯤은 금새 따라잡힌다 이거야!! " " 그런 건 따라잡고 나서 얘기하는 거란다, 꼬맹아. 가서 수련이나 하고 오던가. " " ~~!! " 네가 아무리 용 써봤자 태어난 차이를 어찌해볼 수는 없는 거지. 무식하면 그런 것도 무시할 수 있는 거냐? 라는 눈빛으로 바라봐 주자 부들부들 떠는 이프리트의 어깨가 더욱 격렬해졌다. 오, 이제 폭발할 차례인가? " 이이익. 너 따위! 너 따위 빨리 소멸이나 해 버렷!!! " 역시.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떻게 넌 내 예상에서 하나도 벗어나질 않는 거지? 자기가 말해놓고도 스스로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니 괜히 우스워졌다. 평소라면 바로 반격을 가해야 할 내가 오늘은 잠잠하니 이상한 거겠지? 의연한척하고 있어도 속으로 놀라고 있는 게 다 보인다, 꼬맹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울리는 재미가 꽤 있었던 녀석이었는데.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인가? 아, 그건 좀 아쉽다. 2만년의 긴 세월엔 미련 따윈 안 남을 줄 알았는데. 약간의 충격요법을 먹이고자 소멸한다는 말은 입도 벙긋 안 했으니 아마 적잖이 놀라겠지. 그걸 못 본다는 게 또 아쉽구만. 흐음. 꽤 볼만할 텐데. 불의 정령을 모아다가 하나씩 사형시키는 재미도 꽤 쏠쏠했지. 거기에 경악하는 이프리트 모습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 내가 약 올릴 때마다 눈물이 그렁하게 맺힌 눈동자를 보는 것도…재미있었던 것 같아. 아. 이상하다. 미련이 남는 게 너무 많아졌어. 그게 하필이면 이프리트 녀석과 관계된 것 들 뿐이라 더 혼란스러워. " 운명에 순응하실 시간입니다. " 명계에서 온 두 명의 인도자가 천천히 허리를 굽히며 내게 말했다. 운명에 순응? 웃기고 있네. 그냥 죽을 시간 됐다고 하면 됐지, 거창하게 운명은 무슨. 저 놈들은 한 두 번 본 사이도 아닌데 꼭 이럴 때 폼을 잡는단 말이야. 저번에 정원에 놀러왔을 때 나한테 호되게 놀림 당하고 울면서 돌아간 주제에. " 저어. 엘퀴네스. 정말 이프리트한테는 아무 말도 안하고 갈 거야? 서운해 할 텐데. " 옆에서 배웅을 해주러 나온 트로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난 너한테도 소멸한다는 말 한 적이 없을 텐데? 하여튼 땅의 정령왕들은 속마음을 읽어서 곤란하다니까. " 귀찮아…." " 아, 아무리 그래도 이프리트 한테 알려줘야…. " " 기각. " " ……." 아, 역시. 이프리트랑 달라서 대들지 않는 트로웰은 너무 심심하군. 그냥 이프리트한테 배웅 나오라고 할 걸 그랬나? " 저어.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물의 정령왕이시여. 이제 그만 가지 않으면…." " 입 닥쳐. 누가 안간 댔냐? 하여간 별것도 아닌 것들이 쫑알쫑알 잘도 나불거린다니까. " " 크흐흑. 너무해요." 반항의 기미를 보이는 인도자 녀석들을 잠시 지긋이 밟아준 다음, 난 그들이 이끄는 데로 차원이동의 행렬에 몸을 맡겼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얼굴을 마주보지도 않고 잘 있으라고 해주지도 않았으니 좀 매정하게 대했나? 아, 귀찮은데 아무렴 어때. 뭐, 그래도… 내 다음대의 물의 정령왕은 너희들을 끔찍하게 위해주는 녀석이기를 바래주지. 그 정도면 되겠지? 이제 조금 있으면 이프리트는 내 소멸을 알고 길길이 날뛸 거다. 그렇게 좋은 걸 왜 이제야 알려줬냐고 트로웰을 붙들고 닦달할지 도 모르지. 아니면 그새 미운 정 이라도 들었다고 좀 서운 해 하거나. 가끔씩은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는 걸… …이프리트 녀석. ============================================== 재회 " 하아.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엘퀴네스님. " 난처한 얼굴로 낮게 한숨을 쉬면서 말하는 이는 그 이름도 유명한 결정자- 명계의 부장 급이라 밝힌 바 있던- 영혼의 분배와 관리를 책임지는 아레히스였다. 그는 나와 이프리트가 유라우스를 끌고 명계로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척하니 나타나더니, 마치 처음부터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 마냥 대뜸 이런 말을 꺼내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혹시 이 녀석도 트로웰처럼 혜안인지 뭔지가 있는 거 아냐? 어떻게 저승사자와 도착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저런 말이 가능한 걸까? 당황한 것은 이프리트나 유라우스도 마찬가지인지, 벌쭘한 얼굴이 되어 나만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내 힘으로 해결해 보라는 것 같다. 제 아무리 이프리트라도 명계의 높으신 분한테는 함부로 굴 수가 없던 모양이다. 아니면 명계에서는 불의 검의 힘이 약해지는 것일 수도. " 하하, 오랜만이네요, 아레히스…. " 오랜만이라고 해도, 제대로 계산하면 아직 헤어지고 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레히스는 그런 내 인사에 별다른 지적 없이 예의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응수해주었다. " 그렇군요.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사실 그렇게 헤어져 버려서 걱정이 되었거든요. 외모도 몰라보게 바뀌셨군요. 만약 제가 영혼의 기운을 느끼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때의 지훈군과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 " 하하…그거 칭찬인가요? " " 물론입니다. " 그렇게 말하면서 씨익 웃는 아레히스의 얼굴이…어쩐지 한대 쳐주고 싶을 만큼 얄미워 보였다. 그러나 그가 곧바로 정색을 하며 얼굴색을 바꾸는 바람에 시도도 해보지 못한 채 찔끔한 상태가 되 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그는 이제껏 본적 없는 굉장히 엄한 얼굴로 훈계하듯 말을 이었다. " 무모하셨습니다. 정령왕이 둘씩이나 아크아돈에서 자리를 비우다니. 몇 년 간의 부재로 재앙의 위기까지 갈 뻔했던 것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엘퀴네스님은 아직 자각이 덜 되어서 그렇다 치더라도. 이프리트님까지 동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 " 하, 하지만… " " 하지만이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서로 상극인 두 분이 함께 자리를 비우셔서 망정이지, 두 분 중의 어느 한 분만 빠졌어도 간신히 진정된 아크아돈에 또 다른 피해가 생겼을 겁니다. 완벽한 힘을 가졌다고 하는 정령왕에게 차원 이동의 능력을 정하지 않으신 주신의 뜻을 모르시겠습니까? " " ……. " 쩝. 할말 없다. 명계의 인간들은 모두 왜 저렇게 말발이 세단 말인가? 눈에 띄게 기죽어 버린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나마 나는 어느 정도 안면이 있던 지라 그의 말투에 익숙해져 있었다지만, 이프리트는 첫 대면에서부터 정확하게 문책을 당한 꼴이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눈빛이 확고한 것을 보니, 이제라도 그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아무리 시어머니 같은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해도, 현재 아레히스가 전대 엘퀴네스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이프리트의 결심을 읽었는지, 아레히스도 그 이상 책망의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그 대신 한결 담담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 그래, 여기까지 오신 용건은 무엇입니까? 이리 대책 없이 차원까지 건너오셨으니 중요한 일이겠지요? " " 어라?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난 우리가 오자마자 나타나 길래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 " 설마요. 저는 단지 인도자들의 차원 이동시에 발생하는 파장에 정령왕들의 기운이 서려 있기에 서둘러 나와 본 것뿐입니다. 아무리 명계의 책임을 맡고 있는 자들 중에 하나라곤 해도 직접 보지 않은 일까지 다 알아낼 방법은 없거든요. 그러니 말씀해 보십시오. " 아레히스의 그 말이 마쳐짐과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이 전에 영혼의 위치를 찾기 위해 사용했던, 화려한 티 테이블과 카페트가 깔려진 바로 그 방인 것이다. 순식간에 달라진 공간의 배경에 무척 놀랐는지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래지는 것이 보였다. 나야 이미 한번 경험한바가 있고, 유라우스는 이런 것이 생활이나 마찬가지 일 테니 별로 놀라지는 않았지만. " 자, 앉아서 얘기하도록 하죠. 유라우스, 두 분 왕을 모시고 오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만 가도 좋습니다. 분명 휴가 중이었지요? " 테이블의 의자를 권유하면서 지나가듯이 하는 말에, 마침 자리에 앉으려고 했던 유라우스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뭔가 애원하듯, 갈망하는 눈동자로 아레히스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 저어. 저는 이대로 함께 있다가 왕들이 돌아가실 때 정령계로 다시 모셔다 드렸으면 합니다만." "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 " 아, 예….그게 제가 실수를 하여 크게 다쳤었는데, 여기 엘퀴네스님의 도움을 받아 무사할 수 있었기에, 뭔가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 " 흐음. 그렇습니까? 그럼 좋을 대로하십시오. 어차피 휴가기간이니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든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문제니까요." 아레히스의 허락에 유라우스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저렇게 부탁하면서 까지 우리를 도와주려 남을 필요는 없는데… 괜시리 마음에 부담이 든다. 사실 그를 치료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 이었을 뿐, 오히려 엘퀴네스의 능력을 자각하게 되었으니 도움을 받은 것은 내 쪽이나 마찬가지 아니던가. 금쪽같을 휴가기간까지 쪼개어서 도움을 받는다는 건 가당치도 않은…. 어? 잠깐. 휴가? 휴가라고?? " 명계에도 휴가가 있어요? " 뜨악하게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자 아레히스가 친절히 웃으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 물론입니다, 엘퀴네스님. 영의 세계라고 해도 인간계와 크게 다르지 않답니다. 명계는 뭐랄까, 하나의 직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명계의 인간들 모두가 이 직장을 이루는 구성원들인 셈이지요. 설마 저나 여기 있는 유라우스가 하루 종일, 몇 날. 몇 백. 몇 천년간을 일만하며 산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 " 아, 아니. 하하…. " " 이 기회에 알려드리겠습니다. 명계를 구성하는 종족은 대부분 신족으로, 명계에는 크게 세 가지의 부서가 존재합니다. 운명이 다한 영혼을 판별, 지정하고 각 영혼의 선악을 구분하는 '감시 부'와 , 수명이 다한 영혼을 명계로 데리고 오는 '인도 부', 영혼의 위치를 지정하고 분배하는 등, 명계의 총 관리를 책임지는 '결정 부'입니다. 이들 중에서도 각 부서의 책임자들을 가리켜 각기 감시자, 인도자, 결정자라고 칭하지요. 계급으로는 결정자가 가장 높고, 그다음이 감시자. 인도자 순입니다. " " 헤에? 책임자라고 하면…. " " 흐음. 설명하기 쉽게 지구에서 사셨을 때의 세계관으로 말씀드릴까요? 책임자들은 한 부서의 팀장, 혹은 과장급입니다. 부서마다 여러 개의 팀으로 다시 나뉘기 때문에 팀장이라고 보는 쪽이 정확하겠군요. 그 중에서 감시부의 수가 조금 많은 편입니다. 전 차원 모든 영혼들의 운명을 살피고 선악을 판단하여 인도부와 결정부에 보고해야하기 때문에 가장 고되고 기피하는 부서지요. 그리고 인도부는…뭐랄까. 그냥 형식적인 부서입니다. 책임자도 따로 있지 않고, 소수의 팀원으로 명계 밖을 주로 돌아다니지요. 보통의 사원들보다는 직위가 높지만, 결정자와 판별자의 명령을 따릅니다. 이를테면, 특수요원 이랄까요? " 그리고 결정자는 아레히스를 비롯한 5명의 원로회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결정자라고 해서 모두 다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고, 각 사람마다 조금씩 명계의 관리를 나누어 맡았는데, 그중 아레히스가 맡은 것이 바로 운명을 잃은 영혼의 위치를 찾아 다시 재분배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이번에 내가 잘못 태어나게 된 것은 영혼의 처음 분배와 생산을 관리하고 있는 결정자 '아스카'측의 소관이었다면서, 자신의 잘못이 없음을 피력했다. 이번 아스카의 팀에서 새로운 신입을 대거 투입했는데, 그들 중에 한 명이 벌인 실수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근신에 들어가 있다고 들었다. 한 차원의 존재를 위태하게 한 일인 만큼 원래라면 사형을 선고받아도 할말이 없지만, 아직 신입인 점과 이번에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감안해 비교적 가벼운(?) 500년의 근신 처분과 신분상승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 5, 500년이 짧은 건가요?" " 짧은 거지요, 무척. 신족의 수명은 2만년이니까요. 인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거의 무한대로 사는 종족인데 500년이면 잠깐 낮잠 잤다고 할 수도 있는 시간 아니겠습니까? " 도리어 정색을 하고 되묻는 아레히스로 인해 오히려 내가 민망해졌다. 그거야 그렇지만…신족이란 게 그렇게 오래 사는 놈들인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냐고. 어째 인간들만 차별 받는 기분이 든다. 인간은 아무리 용 써봤자 100년 밖에 못사는데 다른 종족들은 너무 오래 사는 거 아냐? 은근슬쩍 부아가 치밀었지만 대놓고 투덜거리지는 못했다. 어찌됐던 이젠 나 역시 오래 사는 종족이 되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어떻게 눈치 챈 건지, 빙긋이 웃는 아레히스의 말이 이어졌다. " 수명이 긴 종족들은 그 만큼의 짊어져야 할 책임이 더 강한 겁니다. 엘퀴네스님만 해도 인간이었을 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의무와 책임을 느끼고 계시지 않습니까? 거기다 지금은 인간이라 해도, 내세를 거치면 어떤 다른 운명을 맞이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 " 하, 하. 그렇군요. 음…그럼, 유라우스나 아레히스도 신족 인건가요? " 정해진 수명이 있는 거라면 정령계에서 다쳤을 때 담담했던 유라우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일단 육체가 있는 거니 죽어도 다른 삶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는 거니까. 거기다 자기 자신이 직접 저승사자의 역할을 해봤으니, 죽어도 무서울 게 없다 는 걸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런 내 생각이 틀렸는지, 곧바로 이어지는 이프리트의 반격이 있었다. " 바보야, 아레히스는 결정자! 명계의 관리를 맡고 있는 존재야. 하나의 차원을 관리하는 건 신계의 중급 신 이상이 아니면 안 된 다고. " " 헉…. 신? " 아레히스가 신이라고? 저 모습의 어디가? 신이라고 하면 일단 근엄하고 흰 수염이 가득 난 할아버지 인상이어야 하는 거 아냐? 그에 비해 아레히스는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여러 여자들을 껌뻑 죽일만한 엄청난 미남이었다. 검은색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어깨에서 찰랑거리고 싱글싱글거리는 저 느끼한 미청년의 어디가 신으로 보인다는 거냐!! 경악으로 굳어진 내게 피식 웃은 아레히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 맞습니다. 그리고 유라우스도 신족이 아니지요. 신족은 신계에 사는 인간종족을 칭하는 말입니다. 짊어진 업이 없거나, 이미 내세를 통해 업을 소멸한 영혼들이 새로이 부여받는 종족이지요. 신족의 삶을 통해서 쌓인 업이 다시 내세로 이어지긴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다시 신족으로 태어나게 되어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된다고나 할까요? 유라우스와 같은 인도자의 경우는, 이미 죽어 육체에서 나온 영혼이 자의로 명계에 남아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지요. 당연히 영혼이기 때문에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 " 그, 그럼 감시자라는 것은. " " 그들도 신족이 아닙니다. 명계를 구성하는 인물들 중에서 책임자의 직분을 받은 자는 모두 신족이 아니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시자들은 신계의 하급 신들 중, 그 능력이 보통에 못 미치는 자들에게 벌주기 위한 직분입니다. 하루 종일 서류의 바다에 파묻혀서 일만 하는 직위거든요. 상당히 피곤한 일이죠. " " ……. " 뭐랄까. 참으로 세상이 달라져 보였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시선이 바뀌어졌다고 해야 하나? 신족이며, 정령이며 그냥 그런 게 있구나하고 막연하게 생각해버렸던 것과 달리, 이번엔 정말 현실로 납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멍청히 굳어져 버린 나를 무시한,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 아, 잠깐만. 신족들이 신계에 살고 있다면 어떻게 명계로 오는 거지? 설마 그들도 차원 이동이 가능한 거야? " " 아아. 명계에서 일하기를 희망하는 자들 만입니다. 그들에게는 특별히 상급신의 이름으로 차원이동의 권리가 내려졌지요. 하지만 명계외의 다른 차원의 이동은 불가능합니다. " " 호오~ 상급신이라면? " " 천국을 담당하는 신, '에누스'님과 명계의 신 '헬라스트'님입니다. 두 분 사이에 암묵적인 협약이 있는 것 같더군요. 덕분에 한동안 마족들도 명계에서 일하고 싶다고 탄원이 들어오는 바람에 골치가 아팠습니다. 지옥의 신인 '크라제'님이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지요." 여기서의 천국이란 신족이 사는 신계를 뜻한다고 했다. 그리고 마계가 바로 지옥인데, 마계의 전부가 그런 살벌한 곳인 건 아니고, 그곳에 지옥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어찌 할 수 없을 정도의 구재 불능이거나,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되는 악한 영혼들을 벌주기 위한 장소라는 것이다. " 마족 들은 바로 그러한 지옥의 관리를 겸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원체가 호전적인 성향이 강하고 난폭해서인지 별다른 거부감 없이 공존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크아돈에도 가끔 놀러 가는 것 같으니 어쩌면 보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 예? 아크아돈에 놀러 와요? 뭐야, 신과 명계인 빼고는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불가능한 거 아니었어요? " 설마 이프리트가 또 날 놀리려고 거짓말 한 거야? 씩씩거리는 얼굴로 돌아보자 무슨 멍청한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잔뜩 구긴 이프리트가 보였다. " 내가 말한 차원이란 건 인간계를 제외한 나머지 4대 차원 이었다고. " " 그건 또 뭔 소리야? " 태초에 주신이 정하신 차원은 모두 5개. 신계와 마계, 정령계와 명계, 그리고 인간계였다. 그 중 4대(大) 차원이라 불리는 신계, 마계, 정령 계, 명계는 오로지 하나씩 존재할 뿐이고, 인간계는 몇 백 개의 무수한 차원으로 또다시 세분할 된다. 바로 그것들 중에 아크아돈이 들어가는 것이다. " '4대 차원'은 상급신의 허락을 받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과 명계인을 제외한 타종족의 자유로운 출입을 금하고 있어. 그에 비해 인간계에 속한 차원들은 몇 가지 제약이 걸리긴 해도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지 이동할 수 있지. 하지만 우리와는 상관없잖아? 어차피 우리가 갈려고 했던 건 신계였으니까. 그래서 알아듣기 쉽게 '4대 차원' 만을 기준으로 설명한 것뿐이야. " " 그럼 인간계의 다른 차원은 우리도 갈 수 있는 거네? " 혹시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지구에도 갈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 나는 눈빛을 빛내며 이프리트에게 물었다.그러나 이프리트는 잠깐의 생각도 고려해 보지 않은 채 매몰차게 부정했다. " 아니, 아크아돈과 정령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동이 가능하지만, 다른 곳은 안돼. 우리가 정령계를 비우면 아크아돈의 자연이 큰 타격을 입거든. 그래서 주신께서는 애초부터 정령왕에게 차원이동의 능력을 정하지 않으셨어. 아까 아레히스가 화낸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정령왕이 둘이나 아크아돈을 비웠으니까." " 그, 그렇군. 어? 잠깐만…. 그럼 유라우스도 명계인이니까 신계에 갈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결정자의 동행이 있어야만 한다고…. " " 아아. 그건, 이동이 불가능하다기 보다는 관례문제입니다. 규칙이랄 까요? 신계는 신족이 사는 왕국과 신들이 있는 성지로 구분되지요. 유라우스가 말한 신계는 아마 신들이 모여 사는 성지를 뜻했던 걸 겁니다. 지엄한 신들이 모여 계시는 곳에 인도자 혼자 함부로 드나들면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서 말입니다. 괴팍한 신들이 꽤 되거든요. 신족의 영혼을 인도해야 할 인도자들이 정작 신계에 못 들어간다는 건 말이 안 되죠. 그런데 여기에 오신 이유가 신계에 가시려던 거였습니까?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2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636 / 35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재회 " ……. " 아레히스의 물음에 나와 이프리트는 똑같이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찔끔하는 심정 이었달 까? 그 대신 이제껏 별말 없이 옆자리에 앉아있던 유라우스가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 정령계에서 뵈었을 때 저에게 신계로 이동해줄 수 없냐고 물으셨습니다. 신계에 용건이 있으신 게 맞는 듯 합니다. " " 흐음? 엘퀴네스님은 이제 갓 태어나셨으니 신계와 안면이 없으실 텐데요. 그렇다면 이프리트님의 문제로군요. 아무리 저라고 해도 개인적인 용건으로 타인을 신계에 들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그러나 그걸 그렇게 쉽게 대답하면 천하의 이프리트가 아니었다. 아무리 나한테 들켰다지만, 적어도 몇 백, 혹은 몇 천년간을 숨기려고 아웅다웅했을 감정이 아니었던가. 오늘 처음 보는 생판 남한테 세세하게 설명해줄 수는 없을 것이었다. 힐끗 돌아보니 역시나 잔뜩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프리트가 보인다. 이미 아레히스는 이번 일의 요점이 녀석에게 있을 것이라 단정하고는, 계속해서 이프리트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 ……. " " ……. " 짧은 침묵이었지만,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천만년같이 긴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거의 울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프리트를 보자니 아무래도 안 되겠지 싶다. 결국 나는 내 한 몸 희생해서 한 생명을 구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지금 속이 바짝바짝 마르고 있을 이프리트일지, 아니면 더 이상의 수모(?)를 참지 못한 이프리트에 의해 쓰러질 가까운 미래의 아레히스일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신계에 용건이 있는 건 저예요, 아레히스. " 마치 자수하듯 한 손을 들어 보이며 하는 말에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특히나 이프리트는 저게 지금 뭘 잘못 먹었나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괜히 총대 매고 나선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크흑. " 엘퀴네스님이요? 하지만 당신은…. " " 예, 신계에 아는 녀석은 없어요. 하지만 만나고 싶은 존재가 있어서요. " " 만나고 싶은…? "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레히스에게 씨익 웃어주었다. 근데 어째 옆에 있는 유라우스 놈의 얼굴이 붉어지는 게야? 너 나한테 뭔가 숨기는 거 있냐? 의심이 치솟았지만 녀석과 만난 기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점과, 때문에 나한테 뭔가 숨길만한 건덕지가 없다는 생각이 미쳐 그냥 넘어가 주었다. " 제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였다는 자를 만나보고 싶어요. 이프리트가 자꾸 그와 비교하는 바람에 우울증 비슷한 것까지 경험했거든요. 대체 얼마나 잘난 면상인지 구경이나 해 보려 구요. " 뭐, 뭐라? 내가 언제? " " 그랬잖아. 툭하면 전 엘퀴네스는 이랬다느니, 저랬다느니. 듣는 정령 얼마나 기분 나빴는지 알아? 아마 스트레스로 머리카락이 수십 개는 빠졌을 거다. " 멀쩡하게 잘만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을 집어 보이며 당당하게 외쳐봤자,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정령이란게 스트레스로 인한 탈모증을 겪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전혀 금시초문이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 괜히 신이 된 게 아니었는지, 기가 막혀하는 이프리트에 비해 아레히스는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무슨 재밌는 걸 발견한 아이처럼 눈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꼭 '나는 지난여름에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그러니 순순히 불어!' 라고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거 잘못 건드린 거 아냐? 도둑이 제 발 저린 다고 괜시리 뜨끔한 심정으로 그 눈빛을 마주해 주는데, 이 상하리 만치 유쾌하게 느껴지는 아레히스의 음성이 들렸다. " 고생이 많으셨군요. 어쩐지 피곤해 보이신다 했습니다. 그런데 전 엘퀴네스님이 현재 신계에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찌 하신 겁니까? " " 보, 보장은 없었는데요. 그냥 무작정 가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 전에 아레히스가 그랬잖아요. 정령왕이 소멸하면 신계로 들어가거나 내세의 길을 걷거나 둘 중 하나라고. 그래서 그냥….이프리트는 제가 같이 가자고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따라온 거예요…." " 흐음 그런가요…. " 무언가 잔뜩 의미가 담긴 한숨을 내쉬며 아레히스는 말끝을 길게 끌었다. 어딘지 착잡해 보이는 어두운 표정에 내 등뒤로 식은땀을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너무 사사로운 용건이라 안 되는 걸까? 차라리 그냥 사실대로 말해놓고 동정심 작전을 끌걸 그랬나? 사랑하는 존재의 소멸. 그러고도 그를 포기하지 못하는 애틋한 이프리트의 마음을 알아준다면 일이 수월히 풀릴지도 모르는 것을. 삽시간에 굳어지는 주변공기를 느끼며 나는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리곤 잔뜩 기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나마 이프리트에게 위안을 줄 수 있는 타협점을 내놓기로 한 것이다. " 저기, 곤란하다면 그냥 전 엘퀴네스가 지금 어떻게 됐는지 라도 알아봐 주심 안 될까요? 설마 그것도 어려울까요? " " 글쎄요." 무지 난처하다는 듯이 어색한 미소를 짓는 아레히스의 표정을 보며 난 절망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그냥 돌아가야 하는 건가? 신이라면서 그 정도는 봐줘도 괜찮잖아, 아레히스!! 잔뜩 침울해진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자니 괜한 기대감을 안겨준 것 같아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걱정 마, 이프리트. 정 안되면 유라우스를 협박해서라도 반드시 신계에 가고 말 테니까.' 내가 그렇게 속으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였다. " 엘뤼엔 입니다. " " 예? " 뜬금없는 아레히스의 말에 나와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퍽 이나 웃겼는지 잠시 쿡쿡거리고 웃은 아레히스는 여유 만만한 자세로 다시 말을 이었다. “ 전 엘퀴네스님의 새로운 이름말입니다. '엘뤼엔*크리노*루사테' 라 합니다. 엘퀴네스님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분은 현재 신계로 들어가 상급신의 지위를 받았습니다. 차원 ' 바이톤 '을 담당하게 되셨지요. " " 허억? " " 저, 정말요? " 이프리트의 손끝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초조하고 불안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자세-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살짝 떨면서 입술을 깨무는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긴장이 되 버렸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이프리트의 표정에서 작은 아쉬움이 맴돌았지만, 곧 사라졌다. 아마 전 엘퀴네스의 현재 상황을 안 것만으로 만족하려고 애쓰는 거겠지.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뭔가 확고해진 듯한 눈빛의 아레히스가 천천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 뭐하십니까? 신계에 안 가실 겁니까? " " 예에? 아… 그, 그럼? " 설마 신계에 데려다 주겠다는 거야? 유라우스도 말한바 있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공식적인 업무에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신계의 사사로운 방문은 꺼린다고 했었다. 게다가 타인까지 함부로 출입을 시키는 거니 어지간히 곤란한 것 일 텐데. 생각지도 못한 수확에 놀란 나와 이프리트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아레히스가 피식하고 웃었다. " 엘퀴네스님에게는 빚이 있으니까요. " " 아…그, 그래도…. " " 대신 잠시만 입니다. 아크아돈을 오래 비워두면 안되니 아주 잠시만 만나보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은 없다는 것도 알아두십시오. 이번 일은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이거든요. 정령왕이 선대의 정령왕을 만나기 위해 차원을 건넜다는 것도 그렇지만, 만나는 것에 성공한 사례도 이제껏 없었으니까요. "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것을 촉구하는 아레히스가 굉장히 위대해 보였다. 그 동안 얄밉다거나 뻔뻔하다고 생각했던 거 다 취소할게, 아레히스. 당신은 진정한 신이었어!! 말 만 해, 내가 뭐든지 다 들어줄게!! 아레히스 '님' 이라고 불러줄까? 내 눈빛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부담스러웠던 걸까? 안내를 하기 위해 먼저 앞장서서 걸어가던 아레히스의 발이 잠시 멈칫했다. " 아, 그렇군. 한 가지를 빼놓을 뻔했군요. " " 말씀만 하세요, 아레히스!! " " ……? " 씨익. 어느새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버린-존대 말을 쓰는 것이 그 증거다- 이프리트를 바라 본 아레히스의 고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로 돌려졌다. 어째 식은땀이…. " 동료를 위하는 마음은 아름답지만, 거짓말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 " " 아, 하하…." ' 들켰다!! ' 하기사 용건이 있던 녀석치곤 내가 너무 담담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오히려 이프리트가 안절부절 했으니 눈치를 못 채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민망한 기분에 헤벌쭉 웃어 보이는데, 이프리트가 그제 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 뭐야, 그런 거였어? 나는 왜 네가 갑자기 끼어드는 가 했지~ 재미있다, 너? " " 재미있다니….그럴 땐 고맙다고 말하는 거라고. 친구를 위해 총대를 맸는데 감상이 그게 다냐? " " 흐응~ 누가 그러랬나? 뭐 어쨌든, 너한테도 좋은 점이 있긴 하구나. " " ……."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고맙다고 말하는 건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모처럼 친구를 위해 줬다는 보람이라도 얻을 줄 알았거늘. 오히려 신기한 동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대하는 이프리트의 태도에 기운이 쭉 빠져버렸다. 어째 앞으로도 저 녀석과는 친해질 일이 영원히 없을 것 같다는 기분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내가 안돼 보였는지 유라우스가 냉큼 달려와 내 옆으로 와서 섰다. " 저렇게 말씀하셔도 상당히 기뻐하시고 계실 겁니다. 엘퀴네스님이 잘하신 거예요. " " 하하하…." 당근이 기쁘기야 하겠지. 뭐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바로 코앞에 고대하던 님을 만날 순간이 다가왔으니 말이다. 거기다 본인의 입으로 말하기엔 민망스러울 과거 고백까지 자체 생략되었으니 지금의 이프리트는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 같은 기분일 것이다. 그게 다 잘난 동료를 둬서 그렇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지만. " 자 여기 입니다. " 티 테이블에서 벗어나 조금 걸어 도착한 것은, 방의 한쪽 벽면에 크게 자리 잡은 어른 크기만 한 길이의 거울 앞이었다. 은으로 둘러진 테두리에 별다른 장식 없이 전체적으로 심플한 디자인이었지만, 마치 호수처럼 고요하게 빛나는 맑은 유리를 보는 순간,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보석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누가 보면 나르시스트가 아니냐고 물어봐도 할말 없을 만큼 정신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는데(정확하게는 거울의 유리를 쳐다본 것 뿐 이다) 아레히스의 입이 열렸다. " '연결의 거울' 입니다. 중급 신 이상의 존재가 동행하지 않을 시에는 그냥 평범한 거울이지만, 지금과 같을 때에는 신계로 이어주는 통로의 역할을 하지요. 텔레포트를 해서 가도 상관없지만 이 편으로 가는 쪽이 두 분 정령왕께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그럼, 가볼까요? " " 에? 거, 거울을 통과 한다고요? " 아니나 다를까. 싱긋 미소 지은 아레히스의 손이 거울에 닿는 순간, 마치 잠잠한 호수의 파문이 일어나듯 유리의 면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유라우스가 척하니 등장. 나 보란 듯이 먼저 거울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다. " ……!! " 아무런 거리낌 없이 걸음을 내딛던 유라우스의 형체는 곧 거울 속으로 빨려들어 간 듯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 헤에…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 먼저 들어가도 되죠? " " 차례는 상관없습니다. " 긍정적인 아레히스의 대답에 신이 난 이프리트는 콧노래를 부르며 거울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면서 ' 이따 보자~ ' 하고 여유 있게 손까지 흔드는 것이…거울을 통해 어딘가를 간다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 자체가 없는 모양이다. 머뭇거리는 내 태도에 아레히스의 재촉이 이어졌다. " 엘퀴네스님은 안 들어가십니까? " " 저, 저기….하하, 꼭 거울로 가야하는 건가요? 신기한 경험이긴 하겠지만 웬만하면 텔레포트로 가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하하." " 흐음~ " 그러나 이러한 내 바램은 아레히스의 친절한 한마디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 빨리 안 들어가면 거울 문이 닫힐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직 안 들어간 상황에서 거울 문이 닫혀 버리면 먼저 들어간 이프리트님과 유라우스는 영원히 거울 속에서 헤매게 될지도…." " 으악~!! 가요! 간다고요!! "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승리감에 젖어 씨익 입 꼬리를 올린 아레히스의 짓궂게 휘어지는 눈동자를!! 얄밉고 뻔뻔하다고 한 거 취. 소. 했. 던. 거 다시 취. 소. 야!! 제길!!!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3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554 / 31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재회 버글거리는 사람들, 곳곳에 자리 잡은 수많은 상가들과 노점. 탁 트인 창공과 활기찬 길거리. 이것이 바로 오늘 신계를 처음 본 나의 감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신계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고 있던 지난날의 과거가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솜사탕을 들고 뛰어다니는 꼬맹이들부터 시작해서 여유 있게 물건값을 흥정하는 장사꾼들까지…전체적인 복장이 그리스시대 라는 것 빼고, 도대체 인간세상과 다른 게 뭐가 있는 거야!! " 이게…신계? " 떨떠름하게 중얼거린 내 말을 들었는지 옆에서 길을 안내하던 아레히스가 돌아보았다. " 말씀드렸잖습니까. 신족이란 신계에 사는 인간 종족이라고. 그러니 신족들의 삶이 인간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건 어쩔 수 없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 인간들은 신과 공존하며 산다는 것의 차이지요. 실망하셨나요? " " 하아, 뭐…. 상상력의 차이겠죠 이런 건. " 억지로 거울을 통과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한 마디로 나는 속은 것이다. 아레히스가 들어가지 않아도 거울 문은 안전하게 두 존재를 신계로 이동시켜둔 것이다! 아레히스는 거울 문을 여는 역할만 할뿐, 실제로 그가 이동에 동참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나 어쨌다나(뿌득)- 이프리트와 유라우스 보다 커다란 상가들과 지나다니는 무수한 사람들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우리들로 인해 잠시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우리 일행 중에 아레히스를 발견하고는 황망히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비켜주기 시작했다. 과연 신은 신이구나 하고 생각했달 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신들이 산다는 성지에서 조금 떨어진 신족들의 왕국이었다. 신족들의 왕국은 몇 개의 커다란 마을로 이루어진 부족이 뭉친 형태였는데, 왕국이라곤 해도 단 하나뿐이고, 인구의 수도 적어 대체적으로 한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가정을 꾸리고 살긴 하지만, 종족 번식의 능력이 없는 신족들은 아이를 기르기 위해서는 신들이 사는 성지로 가서 새로 신족의 삶을 부여받은 아기를 데리고 오는 형식이라고 들었다. 성지의 커다란 과수원에 있는 나무에서 새로 신족이 태어날 때마다 열매가 맺히는데, 그 열매를 받아다 안을 가르면 그 안에서 아이가 나온다는 것이다. " …너무 엽기적인거 아니야? " " 마 족에 비해서는 나은 편입니다. 마 족의 아이들은 대게 마물의 몸에서 기생하며 자라다가 태어날 때에 마물의 몸을 가르고 나오거든요. " " ……. " 무슨 에일리언이냐? 남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 족이란 녀석들의 성격이 그리 좋을 것 같이 보이진 않았다. 나중에 만나더라도 친해지지 말아야지. 그렇게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여전히 북적거리는 사람들을 헤치며 열심히 아레히스의 뒤를 따라 걸었다. 아레히스를 본 신족들이 자연히 길을 비켜줘서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복잡한 길거리와 상가들은 확실히 한산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 그런데 여긴 왜 이렇게 복잡해요? 인구도 적다면서. " " 하하. 여긴 왕국의 수도에 해당하는 마을입니다. 교육기관을 비롯한 상가가 다수 밀집되어있는 지역이지요. 성지에 가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하는 곳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 " 왕국이라…. 신족들에게도 왕이 있는 건가요? " " 당연하죠. 마 족들에게 마왕이 있는 것처럼 신족들에게도 성왕이 있답니다. 천성이 게을러서 성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지만요. 그에 비해 마왕은 굉장히 활달한 성격이라 들었습니다. 마신의 허락을 얻어 종종 이곳에도 놀러 오기도 하죠. 심심한 걸 못 참는 녀석이거든요. "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커다란 성이 나타났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공주님이 살았어요~ 라는 뻔한 설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전형적인 동화 속 왕궁의 모습 그대로다. 벽돌로 가지런히 쌓여있는 성벽과 그 뒤로 아련하게 보이는 궁전의 지붕을 덮은 돔, 그 위에는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었다. 성문은 활짝 개방된 상태로 여러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고, 한쪽 구석에 책상과 걸상을 놓은 몇몇의 왕궁 관계자들이 오가는 이의 출입증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프리트의 감상은 아주 담담했다. " 전~ 혀 품위가 없어. " " 뭐가? " " 그렇잖아. 왕궁이라고 하면, 절도 있는 옷차림새의 보초들과 성벽의 경비들. 그리고 한때의 기사들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왕성 출입을 관리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근데 저건 너무 한가롭잖아. " 허허롭게 웃으며 사람들과 농담까지 주고받는 푸근한 인상의 왕국관계자라… 중세를 경험한 적이 없으니 어때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조금 이상하긴 했다. 하다못해 한국에서 살았을 적 어지간한 회사의 경비도 저렇게 허술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런 우리들의 의문은 옆에 있던 유라우스가 대화에 끼어듦으로서 자연스럽게 해소됐다. " 신족들은 업이 없어 내세를 걷지 않는, 선한 성품을 가진 영혼들이 입은 육신입니다. 인간처럼 희노애락의 감정을 가지긴 해도 본성이 선하니 딱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거든요. 그래서 대체로 자유로운 분위기인 겁니다. " " 아하. 그래요? 그럼 마족은? " " 마족은…정 반대죠. 너무 악하다 못해 지옥으로도 벌을 줄 수가 없는 어둠의 속성을 가진 영혼들이 가지는 육신입니다. 개중엔 착한 녀석들도 있긴 하지만, 본성은 하나같이 썩어빠졌죠. 엘퀴네스님도 나중에 녀석들을 만나면 아시게 될 테지만, 만나면 무조건 피하고 보십시오. 끈덕진 놈들이거든요. 얼마나 심각하면 마족의 삶을 사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선한 일을 하면 바로 다음 생에 드래곤으로 태어나는 혜택을 누리겠습니까? 허~ 참. " " …하하하. " 알고 보니 유라우스가 바로 그 마족들의 영혼을 인도해오는 담당이란다. 그 동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인지 한시도 쉬지 않고 마족을 씹어대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보지 않아도 그간의 쌓인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죽 스트레스가 많으면 남들의 배에 해당하는 휴직을 받고서도 얼마를 못 가 다른 담당으로 바꿔 달라 사정을 해대겠는가. ' 참된 인도자의 삶은 마족의 영혼을 인도하는데서 비롯된 다' 라는 명언까지 있을 정도란다. 그만큼 인내심과 끈기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성 문 앞 출입을 담당하는 관계자들의 앞으로 가자 아레히스를 알아본 그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가운 기색이 역력한 두 신족은 무척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 이야~ 아레히스님 아니십니까? 유라우스도 오랜만이군요. 명계의 분들이 이곳엔 웬일로… 드디어 성왕의 영혼을 인도하러 오신 겁니까? " " 이봐~이봐~ 그럴 리가. 성왕의 영혼을 인도하러 오실 목적이었다면 유라우스의 모습이 우리 눈에 보일 리가 있나? 성지에 용무가 있으신 게지. 거기다 아직 왕의 열매도 열리지 않았다네. " " 아, 그런가? " 무언가 굉장히 아쉽다는 얼굴로 입맛을 다신 신족 하나. 그리고 그것에 맞장구 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다른 신족 하나였다. 설마 자기들 왕이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무서운 놈들. 저런 것들을 부하라고 거느리고 있을 성왕이란 작자가 심히 안타깝게 여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앞으로의 정령생활에서 운디네와 시큐엘에게 잘해줘야겠다는 결심을 다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왕의 열매? " " 성왕이 태어나는 열매 이름입니다. 황금색의 커다란 메론 열매인데, 그 안에서 태어나는 신족만이 왕이 될 수 있지요. 현 왕이 죽을 때가 되면 다음 대의 왕을 담은 열매가 탄생의 나무에서 열리게 됩니다. " 호오? 그런 편리한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왕의 열매 안에 들어갈 신족이 결정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후계자문제에 골치를 썩이지 않아도 되니 굉장히 편리할 것은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건, 바늘 가는데 실 가듯 신족 설명에 마족 얘기를 빠트릴 수 없다며 마왕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유라우스에 의해서 증명되었다. " 마족들의 경우는 1천년에 한번씩 피의 제전이 열립니다. 그것에 참가한 마족 들끼리 배틀로얄식으로 하나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무참히 학살하죠. 그때 살아남은 마지막 마족이 왕이 되는 겁니다. 마왕은 피의 제전에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하죠. " " 하…하… 그럼 여러 마족이 한 마족을 왕으로 추대할 가능성은? " " 없습니다. 마족은 개인 중심적이라 서로 간에 협조라 는 걸 모르는 녀석들이거든요. 여럿이 모여 한 존재를 왕으로 추대할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피의 제전'이 열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뭐, 덕분에 마족 들은 대부분 2만년이나 되는 수명의 절반도 못 채우고 죽지만요." " 대단하네요. 그렇게 호전적이라면 왕 노릇하기도 힘들겠군요. " 얼떨떨하게 중얼거리자 곧 유라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 그렇진 않습니다. 일단 마족들은 자신들보다 힘이 강한 존재에게는 절대로 반항하거나 저항하지 않거든요. 스스로가 상대방을 넘어설 힘이 있다고 자부하기 전까진 무슨 일이 있어도 덤비지 않습니다. 좋게 말하면 주제파악을 잘 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비열한 사고방식이란 겁니다. 그러니 왕에게는 고개조차 못 들지요. " 그, 그렇군. 역시 마족들은 상종 못할 것들이었어. 아직 만나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선입견이 생기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어색하게 눈앞의 신족들을 바라보았다. 어깨까지 흐르는 꿀 같은 금발에 준수한 얼굴들이 무척이나 상대방에게 호감 있는 인상이다. 마족들 얘기를 듣고 나선지 몰라도, 선량하게만 보이는 이들에 대한 호감이 배로 상승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방금 전에 신족들의 말에서 유라우스에 대해 언급한 것을 떠올리고는 조심스럽게 옆에 서있던 이프리트에게 물었다. " 영혼을 인도하러 올 때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안 보이는 거야? " " 응. 저승사자가 눈에 보이는 거 봤어? 지금은 휴가 중이라서 특별히 사람들 눈에도 보이는 거야. 유라우스가 걸고 있는 목걸이 보이지? 그 목걸이가 주변의 마나를 조합해서 육체의 모습을 형성해주지. " 우리들의 대화가 들렸는지 유라우스가 몸소 망토사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던 목걸이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금 사슬로 이어진 목걸이엔 역시 금으로 되어있는 매달이 달려있었는데, 커다란 별무늬의 조각에 군대 군대 어지러운 도형들과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헤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마법 진 이란건가? 신기한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자니, 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상태인 유라우스와 자연스럽게 신체접촉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근데 이놈은 또 왜 얼굴이 붉어지는 거야? 역시 나한테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거 아냐? 혹시나 '에바스에덴'에서 꽃 한 송이 슬쩍한 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솟구쳤다. 온통 보석으로 도배가 되어있던 꽃밭이니 그 중에서 한 개 챙겨간다고 눈치 챌 수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한번 추궁해볼까? 그러나 이러한 내 생각은 나와 이프리트의 존재를 눈치 챈 두 신족으로 인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 그런데 이 분들은 뉘신지…? 처음 뵙는 분이로군요. 청명한 기운이 꼭 불과 물의 정령왕이라 해도 믿겠습니다. 하하, 물론, 말이 안 되는 소리이긴 하지만요." 그 순간 두 신족을 바라보는 아레히스의 눈빛이 사악하게 빛나 보였던 건 내 착각만이 아니었다. 단아한 미소로 표정을 감춘 아레히스는 아주 담담하게 두 신족이 경악할만한 사실을 내 뱉었다. “ 맞습니다. 정령왕들 이십니다. " " ……. " 휘이잉~방금 전 까지만 해도 선선한 봄바람 같았던 것이 겨울의 태풍보다도 매서운 추위로 변해 우리들과 두 신족의 사이를 유유히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뭔가를 잘못 들었다는 듯 한참이나 머리를 쥐어흔들며 귀를 파내던 신족들은 다시금 경련이 일어나는 얼굴을 감추면서 친절하게 물어왔다. " 하하. 저도 이제 갈 때가 다 되었나 봅니다. 환청을 듣다니. " " 자네도 그런가? 나도 그렇다네. 신족의 육체라는 것도 영 쓸모가 없다니까. 늙으면 인간이나 신족이나 다 매한가지지. 그런데 방금 뭐라고 하셨죠? " …으음, 이봐요 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들은 20대 초반의 창창한 젊은이들로만 보이는 걸? 아직도 주름하나 잡히지 않은 탱탱한 얼굴을 가진 주제에 늙었다느니 갈 때가 다 되었다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울컥하는 심정이었다. 전 차원의 인간들을 적으로 돌릴 소리를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절거리다니, 그 용기에 새삼 감탄의 박수를 쳐주고 싶을 정도다. 너무 황당한 소리를 들어서 현실도피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그 이름도 위대한 아레히스는 결코 이들이 편한 세상으로 도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 아니요. 아주 잘 들으셨습니다. 저는 분명히 정령왕이 맞다 고 했거든요. 늙은 게 아니니 기쁘시겠습니다? " " 허어어억! 아레히스님!! 대체 그 무슨!!! " " 무슨 짓을 저지르신 겁니까! 정령왕들이 아크아돈을 비우게 하시다니! 대체 어쩌시려고! " 더 이상의 진실외면은 소용없음을 깨달았는지 이번엔 아레히스의 말에 정통으로 충격을 받은 신족들의 모습이 가히 가관이었다. 어버버 거리면서 할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면서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려대는 모습을 보자니, 찔끔하고 양심에 작은 가책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우리에게도 우리 나름대로의 사정이란 게 있다고. 명계에서도 그랬지만,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단 말이야. 그리고 그건 아레히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끝을 보고야 말겠다는 것인지 성지로의 절대 출입불가를 외쳐대기 시작한 신족들에게 음흉한 미소를 날린 것이다. 신의 성지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성왕이 머무는 왕성 내부에 새겨진 마법진을 통해 가는 수밖에 없다. 때문에 필수불가결 적으로 왕궁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우리들로서는, 왕궁의 출입을 관리하고 있는 두 신족의 허락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무력으로라도 억지로 들어가 버릴 수 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이 신족들이 가만히 안 있을게 분명하고. 괜한 트러블 때문에 조용히 전 엘퀴네스만 보고 가려했던 계획이 물거품 된다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이프리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 어서 아크아돈으로 돌아가십시오. 이번 사건이 채 가라앉지도 않았는데 또 다시 말썽을 일으키시려는 겁니까? 무례하다 생각지 마시고 제발 조금만 더 생각해 주십시오!! " " 아레히스님도 그렇습니다. 어쩌자고 두 정령왕을 이곳으로 모셔 오신 겁니까? 누구보다 위치의 책임과 의무를 잘 알고 계시는 분이…. " "…훗. " 헉. 그 순간 나는 보았다. 언제나 미소를 잃지 않았던 아레히스의 이마에 새겨지는 작은 십자 모양의 혈관을!! 단단히 열 받았는지 검은 기운을 풀풀 풍기기 시작한 아레히스로 인해 두 신족들도 그제 서야 자신들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안색을 시퍼렇게 굳혔다. 그러나 이미 타올라 버린 아레히스의 표정은 도무지 펴지지 않은 채 지극히 차가워진 눈으로 두 신족을 쏘아보았다. " 지금 감히 신족의 위치로 신인 나에게 책망을 하는 것인가? " " 그, 그런 것이 아니오라." " 다, 당치도 않으십니다, 아레히스님. 저희는 그저…. " " 닥쳐라. 지금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너희들의 말에 이리저리 참견 받을 사항이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한가지의 권리에 빠져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감히 신족주제에 신이 하는 일을 지적하는 것인가! 성지로 이동하는 마법진이 너희의 왕국에 있다 하여 그것이 너희 것으로 보이는가 말이다! 정녕 이대로 신의 심판을 받아 지옥구석으로 떨어지고 싶은 거냐? " " 히이이익. " 휘익~나도 모르게 작은 휘파람이 나왔다. 박력 있는 아레히스라니, 그동안의 모습으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이 아닌가. 존칭을 사용하던 그는 충분히 고고하고 위대해 보이긴 했지만, 언제나 상대방에게 한 수 접어주는 기분이 들었었다. 마치 칭얼거리는 꼬마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사항을 양보하는 어른의 모습이었달 까? 그런데 이렇게 상대방에게 하대를 하는 모습을 보니 과연 역시 신이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들었던 것이다. 주위로 퍼지는 고고한 검은색의 오오라에. 날카롭게 뻗어진 차가운 눈빛. 상대방을 찍소리도 못하게 만들만큼 강력한 카리스마를 전신에서 풍기는 당당하면서도 오만한 자태. 얌전한 놈이 화나면 무섭다고 했었지 아마. 감춰둔 본성이 드러난 아레히스는 지옥의 사자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분위기만으로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4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435 / 36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재회 과연 명계의 신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던 거다. 그 와중에서도 '잘생긴 사람은 뭘 해도 멋져 보이는 구나'…하고 태연하게 생각한 내 속마음을 알았다면 아마 이중에서 가장 대단한 놈은 나라고 생각하게 될지도. 솔직히 이프리트까지 찔끔해있는 현재의 상태에서 나는 스스로가 놀랄 만큼 너무도 태평한 기분이었다. 후에 트로웰이 이 얘기를 듣고 '그게 바로 엘퀴네스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본성(?)'이라고 말해주긴 하지만. 이때 나는 정말 아무생각 없이 분노하는 아레히스의 모습을 무슨 그림 감상하듯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숨 막히게 고요해진 신족과 우리 일행들 사이를 보며, 가장 먼저 말을 꺼내 분위기를 전환시킨 것도 나였다. " 미안합니다. 제 고집으로 아레히스님께 부담을 드렸습니다. 아크아돈엔 되도록 피해가 되지 않도록 성지에서의 용건을 되도록 빨리 마무리 짓고 돌아갈 테니, 두 신족 분께서 양해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 " 예, 예? 아, 그, 그게…. " 그들로서는 아레히스가 설마 이렇게 까지 분노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는지 무척 당황한 상태였다. 신족의 신분으로 신에게 무례를 범한 죄는 절대로 가벼운 것이 아닐 터.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심판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상황인 것을 내가 짐짓 미안한 척 나서자 그들은 움찔하면서도 은근히 안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의 등장으로 인해 서릿발같이 차갑게 굳어있던 아레히스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기 때문이다. " 엘퀴네스님이 사과하실 사항이 아니십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 무례한 신족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니까요. " 오오. 다시 존대 말로 돌아왔다! 솔직히 열 받은 마당에 신족이고 정령왕이고 구분 안하고 막말로 나갈 것 같던 아레히스가 너무 쉽게 진정된 듯해서 마음 한구석에 은근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아, 그래. 그동안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새침 때고 있었지만, 이래뵈도 나는 남의 불행을 상당히 기뻐하는 녀석이라고. 오죽하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도 죽은 내 걱정을 하기보다, 날 치어버린 운전자를 더 고소해 했겠는가. 커플 훼방 놓기 위원회의 회장 직을 맡았던 과거로도 지난날의 화려한 전적이 충분히 입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악동 적인 심술이 은근슬쩍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오, 역시 그렇군요.'하고 물러서서 아레히스가 신족들을 압박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초인적인 인내로 참았다. " 이분들로서는 아크아돈에 문제가 생기면 아레히스에게도 책임이 돌아 갈 테니 걱정이 되어 그런 거겠죠. 그러니 아레히스가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저 때문에 정말 여러 가지로 피해만 끼쳐드리네요. 어떻게 사과를 해야 할지. " " 그렇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에게는 빚이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당신이 겪으신 일에 비하면 이 정도의 피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뭐, 그래도 엘퀴네스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들의 무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아레히스의 말에 두 신족이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리곤 날 향해 존경과 감동의 눈빛을 새록새록 보내오는 것이… 어지간히 감격한 모양이다. 아마 속으로 나를 엄청 착하고 친절하다고 여기고 있을지도. 그렇게 생각되니 양심이 찔려왔다. 난 그냥 여기서 더 이상의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는데. 싸움구경도 시간이 남아 돌 때나 재미있는 거지, 지금처럼 한시가 촉박한 상황에서는 시간 끌기 밖에 더 되겠는가? 그러니 그렇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란 말이야! 다행히도 신족들은 더 이상 내게 시선을 집중시키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안심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잽싸게 아레히스가 다시 그들에게 말을 붙였던 것이다. " 레오, 마테르. 두 사람은 이번 생을 살고 나면 하급천사로서의 생을 부여받던가요? " " 예? 아, 그…그렇습니다. 아레히스님. 이번이 신족으로서 꼭 3번째 삶입니다. " " 저도 그렇습니다. " 다시 평소대로의 존대 말로 돌아온 아레히스의 말투에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한편으론 바짝 긴장한 상태가 되었다. 여기에서 또 무슨 말을 잘못해서 꾸지람을 들을지 모르기에 아까보다 신중을 가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무엇을 느낀 건지, 아레히스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섬뜩하게 빛났다. " 이번에 '업'이 생기면 모든 것이 수포가 되겠군요. 내세의 길을 걷게 될 테니까요. 두 분의 목표는 상급천사입니까? " " 헉. 어, 어림없습니다. 저희는 하급천사로도 충분히 만족합니다. " " (끄덕 끄덕) " 신족들은 천사가 될 수 있다. 다만 그렇게 되기 위해선 조금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것은 신족으로서의 삶을 3번 이상 거쳐야 하급천사로서 승격이 된다는 것이다. 평균 2만년가까이 사는 신족의 삶을 3번. 신족은 업이 없는 선한 영혼이 가지는 종족이기 때문에, 다음 생에서도 신족으로 태어나려면 절대로 사는 동안 새로운 업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만 6만년 가량을 업을 만들지 않고 살아야 비로소 하급천사로서의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급천사로서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중급천사. 중급천사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상급천사로 승격된다. 상급천사의 삶을 다시 3번 살면 '대 천사장'의 칭호를 받게 되는데, 이때의 천사는 하급 신 보다 지위는 낮지만, 주신을 보좌하게 되면서 그와 맞먹는 대우를 받게 된다고 했다. 하급천사의 날개는 두 개이며, 중급은 4개. 상급의 날개는 6개인데. 대 천사장인 천사들의 날개는 무려 8개란다. 아무튼 그 와중에 단 한 개라도 업이 생성되면 이미 천사가 된 신족은 호된 벌을 받거나 다음 등급으로의 승격을 영구히 포기하게 되고, 천사가 아닌 신족들은 변명할 기회도 가지지 못한 채 내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수명이 사라지는 혜택'을 받는 대 천사 장을 제외한, 누구에게나 골고루 적용되는 일종의 규칙이라고 했다. 천사들은 성지의 출입이 허락되어 신들의 일을 돕는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신족과는 엄연히 존재가 구분되어 서로의 영역에 참견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를테면 인간세상의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직분이었다. 인간세상과 다르다면, 명예는 있어도 혜택이 따르지 않는다 정도…?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건지 대부분의 신족들은 천사의 반열에 오르려 혈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내 눈앞에서 아레히스의 말에 쩔쩔매고 있는 두 명의 신족도 바로 그러한 신족들 중 하나였다.그들은 난데없이 '천사'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아레히스의 태도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거의 새파래진 얼굴로 진땀을 흘려대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아레히스는 여전히 여유 있는 모습으로 태연하게 남들의 심장을 녹일만한 얘기를 지나가는 개 품평하듯 간단하게 털어놓았다. " 흐음. 그런데 이를 어쩐다. 아무래도 천사가 되기엔 무리겠는데요. " " 예, 예에? 어, 어째서요?? " " 아아.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아시다시피 저는 명계를 관리하고 있는 신이라서 말입니다. 영혼의 업이 눈에 훤히 보이거든요.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두 분의 영혼엔 어떠한 업도 없었습니다만." " 그, 그런데요? " 덜덜거리며 불안하게 물어보는 신족들을 아레히스는 미안한 듯이 바라보았다. 옆에서 맙소사.하고 고개를 수그리는 유라우스를 보자니, 그에게도 영혼의 업이 눈에 보이는 모양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아레히스의 대답에 신족들과 마찬가지로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을 삼키고 있던 나와 이프리트의 입은 저절로 경악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 당신들의 태도에 제가 화를 냄으로서 '업'이 생기고 말았군요. 보통의 신족끼리라면 화해하는 것으로 금새 소멸될 정도의 사소한 것이었지만, 제가 신인 관계로 '신성모독죄'가 된 모양입니다. 이 일을 어쩌지요? " " 허어어억! " " 그, 그럴 수가…. " 이번이 3번째라는 신족의 삶. 하급천사로서의 승격도 얼마 남지 않은, 고지를 눈앞에 두고 두 신족들은 무너지고 만 것이다! 듣자니 이 두 신족은 반드시 천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새로 탄생하기 전에 마셔야 하는 망각의 물까지 거부하고 6만년의 긴 세월을 모든 기억을 가진 채 살아왔다고 했다. 원래 신족의 경우는 다시 태어나더라도 특별히 전생에서 가졌던 자신의 목표와, 현재의 탄생이 몇 번째인지를 알려주기 때문에 그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 이들은 자신의 각오를 다지기 위해 명계에 몇 번이고 부탁해서 망각의 물을 거부해 왔던 것이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것은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세상이 멸망한 듯한 표정이 되어 넋을 잃어버린 두 신족은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두 눈에 금새 눈물이 차올랐지만 용케 흘리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에서 이들이 얼마나 좌절하고 상처받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아레히스는 이들이 결코 이 상태로 좌절에 빠져드는 것을 묵인하지 않았다. 지금까지가 채찍이었다면, 이제부터는 당근을 사용할 작정인지 조금 미안한 눈빛을 보내는 아레히스의 말투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 " ……? " " ……? " 처연한 표정이 된 두 신족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그에 대한 공경심만 가득할 뿐, 눈빛에 원망이라곤 한줌도 자리 잡고 있지 않다니. 설명으로 들은 마 족과는 또 다른 의미로 대단한 놈들이다. 괜히 6만년이나 신족으로 산 게 아니라는 건가? 그 모습이 만족스러웠는지 아레히스는 뜸들이지 않고 다음 말을 이었다. 그들이 먹을 수밖에 없는 먹음직스러운 당근을 내민 것이다. "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명계의 신이라서 말입니다. 이미 생성되어 어찌할 수 없는 '업'이라 해도 소멸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 " 그, 그게 정말입니까?!! " " 오오! 아레히스님! " 언제 그랬냐는 듯 벌떡 일어서서 감동하는 두 신족.' 저게 정말이야?'하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유라우스에게 보내자 맞다 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명계의 신들은 임의로 영혼에게 지워진 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될 것을 어째서 저런 식으로 두 신족의 애간장을 녹였단 말인가?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그 이유는 금새 알 수 있었다. "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두 분 정령왕들을 모시고 왔다는 사실을 비밀로 붙여주십시오. 물론, 성지로의 통과도 허락하시고요. " 이때 빛나는 아레히스의 눈빛이 사악하게 느껴진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이것을 노리고 신족들에게 화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신의 노여움을 입으면 반드시 '신성모독죄'가 되어 업을 지게 된다고 하니까. …아레히스의 진정한 위대함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5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373 / 30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재회 " 아레히스, 상당히 약았어요. " 후에 이 말을 듣고 아레히스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안 그러면 저 멀리서 하얗게 우리를 배웅하는 두 신족의 얼굴을 영원히 못 잊을 것 같아. 저 무언가에 초월한 것 같은 허무한 표정들을 보자니 양심에 가책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현재 우리는 두 신족의 허락을 받고 왕성 안의 성지로 통하는 마법 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왕궁의 출입인을 기록한다는 서류에는 아레히스와 유라우스의 방문만 기록될 것이다. 고도의 협박 술로 이루어진 이른바 '증거인멸' 이랄까? 서류상으로는 오늘 나와 이프리트는 신계에 들어온 적조차 없게 되었다는 소리다. " 솔직하게 말해요. 그때 일부러 화낸 거 맞죠? 일부러 업을 지게 만들어서 그걸 빌미로 협박하려던 거였죠? " " 하하하. 글쎄요. " 나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아레히스는 여전히 태연한 미소로 응수하고 있었다. 그러나 끝말을 길게 늘이는 것을 보아 내 생각이 맞다 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어떻게 신이란 자가 신족들을 상대로 협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우리 때문에 벌어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기가 막힌 기분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이거 왠지 멀쩡한 신하나 망가뜨린 기분이 들어서 영 찝찝하달 까…. " 그럴 필요까지 있었나요? 아까 화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통과 시켜줄 것 같았는데. " 묘한 시선으로 아레히스의 뒷통수를 바라보자 옆에서 따라 걷고 있던 유라우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 어쩔 수 없답니다. 신족들의 영혼이 선하긴 하지만, 그 부작용인지 뭔지, 굉장히 고지식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거든요. 우선은 분노한 아레히스님을 달랠 작정으로 통과를 허락하긴 했겠지만, 그 뒤로 성지의 출입을 관리하는 신에게 당장 보고가 될 겁니다. 이런 식으로 약점을 잡아두지 않으면 뒷일을 감당하기 어렵죠. " " 그, 그래요? 음…. 하지만, 그렇게 고지식하다면 지금이라도 보고하게 되지 않나요? 아레히스가 업을 소멸시켜줬잖아요. " " 아직 아닙니다. 신이 임의로 소멸시켜주는 업은 영혼인 상태에서만 가능하거든요. 그들은 죽기 전까진 업을 지우지 못 할 겁니다. 그러니 뒷 수작을 부릴 래야 부릴 수가 없을 걸요? " 하아. 그야말로 완벽한 약점을 잡힌 셈이로군. 나는 다시 한번 아레히스의 위대함을 깨닫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인간이 아닌 것이 이때만큼 감격스러운 일도 없을 거야, 아마. 마법진이 있는 곳은 왕궁 안의 거대한 홀 가운데였다. 순백색의 고아한 복도를 걸어서 하얀 기둥과 조각상이 장식된 방을 지나자 사방이 탁 트인 넓은 파티 홀이 드러났다. 색 색깔의 스테인 글라스에 기둥마다 장식된 갖가지 보석들이 화려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지만, 예전에 명계에서 보았던 하얀 공간의 홀보다는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명계에서의 홀은 아무것도 없이 온통 하얗기만 했어도 뭔가 숨길수가 없는 위압적인 신비감(?)이 풀풀 풍겨 나왔단 말이야. 그에 비하면 이 왕궁의 홀은 넓고 화려하긴 해도 어딘지 신성하단 분위기가 사뭇 떨어지는 것이다. 성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마법진이 있는 곳치고는, 그다지 점수를 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홀의 가운데에 새겨진 동그란 모양의 금빛 무늬를 보고 나자 싹 바뀌었다. 그것은 유라우스가 걸고 있는 목걸이의 무늬와 비슷한 모양이었는데, 넓은 금빛의 테두리에 화려한 별 모양과 여러 가지 도형들이 새겨진 그림이었다. 마치 그림 자체가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는 무늬는 흡사 별 가루라도 뿌려놓은 것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 넓은 공간이 오로지 이 금빛무늬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라면…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걸까? 하하. 멋쩍게 웃는 나를 보고 의문 어린 눈빛을 보내는 유라우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에 간단하게 내가 생각했던 것을 반 장난스럽게 말하자 그는 뜻밖의 사실을 알려 주었다. " 바로 보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지로 통하는 마법진이지요. 이 홀 전체가 저것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엘퀴네스님이 생각하신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 " 허걱. 저게 마법 진이었나요? " " 예에. 이제 저 위에 올라서시면 바로 성지로 이동 될 것입니다. 마법 진을 이용한 공간이동은 처음이신 가요? 하긴, 아직 인간 세상에 소환되신 적 없으시죠? " " ……? " 마법진의 이동이 처음인 것 과 인간 세상에 소환되지 않았던 게 무슨 상관이 있나? 진지하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여 혼자 납득하는 유라우스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프리트가 그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 정령들이 인간계에 소환될 때는 마법진이 뜨거든. 너도 언젠가 경험하게 될 거야. " " 흐음. " 언젠가 경험하게 될 거라…그럼 지금은 굳이 염두에 두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뜻이렸다? 그래서 나는 그 문제를 그냥 가볍게 넘겨버렸다. 어차피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일을 지금 머리 싸매고 고민해서 알아봤자 이득이 될게 전혀 없겠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우리는 곧 아레히스의 재촉에 따라 마법진에 다가갔고, 서로의 눈치 볼 겨를 없이 사이좋게 마법진에 올라섰다. 파아앗. 금빛의 무늬는 우리가 그 위에 올라서자마자 앞도 제대로 안보일 만큼의 엄청난 빛을 뿜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득한 현기증. 발밑의 허전함과 함께 짧은 추락감을 느끼며 내 몸은 잠시 어지러움에 휘청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단단히 부축해 주는 손길이 느껴진다. 누구? 살짝 찡그린 얼굴로 도와준 사람을 보자 유라우스가 유난히 붉어진 얼굴로 내 허리를 팔로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자마자, 나는 곧 주변의 풍경이 확연히 달라진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왕궁의 홀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백합 향이 진동하는 흰색 꽃 일색의 정원 한가운데에 서있는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 여, 여기가…성지? " " 아아….사실 저 마법 진은 랜덤이라서요. 성지의 아무 곳이나 무작위로 텔레포트 시키는 것이라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이 백합정원이라면, 꽃의 하급여신인 '프라워스'님의 정원 같은데… 엘뤼엔님의 영역에서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떤 때는 만 하루를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의 장소에 떨어지기도 하거든요. " 아레히스의 설명에 입이 뜨억 하게 벌어졌다. 마법진이 랜덤? 아무 곳에나 무작위로 떨어진다고? 대체 어째서 그딴 것을 만든 거야!! 지금 보니 이프리트의 표정 역시 상당히 요상하게 찡그려져 있었다. 나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녀석인데도 이런 상황은 똑같이 금시초문이었던 거다. " 하, 하하…. 어째서 그렇게 불편한…. " " '마법'분야의 '이동'에 관련된 것을 담당하신 상급 신 '하이튼'님이 워낙 괴짜라서 어쩔 수 없답니다. 그분의 소소한 장난거리 중 하나죠. 그 바람에 다른 신들에게 박해를 당하고 계시지만…. " 박해를 당해도 싸다~~! 그 순간 내가 마음속으로 외친 생각이었다.(나중에 알고 보니 이프리트도 이때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아무리 괴짜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성지로 연결되는 마법 진을 저따위로 만들 수가 있단 말인가. 오늘이야 운이 좋아서 엘뤼엔의 영역과 가까운 곳에 떨어졌다지만, 만약 아레히스 말처럼 하루 걸어서 도착할 장소에 도착했다면 어쩔 뻔했냐고!! 그리고 동시에 전 엘퀴네스라는 엘뤼엔에 대한 새로운 궁금증이 생겼다. 지금 보니 신들은 자신이 맡은 차원 외에도 한가지의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를테면, 꽃의 여신이라든가 마법의 신이라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엘뤼엔은 어떤 걸 담당하고 있는 거지? 나는 나의 궁금증을 가장 간결하고 빠르게 해결해줄 대상-아레히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 저기, 아레히스. 전 엘퀴네스라는 엘뤼엔은 지금 어떤 담당의 신인가요? 지금 보니 신들마다 맡은 분야가 있는 것 같은데. 꽃의 신이라던가, 마법이라던가 하는. " " 으음. 그게 궁금하십니까? " 그러자 이제껏 담담하던 아레히스의 표정에 미미한 동요가 일었다. 뭔가 꺼림직 하면서도 말해줘야겠단 사명감이 깃 든 복잡한 표정이랄까? 그 옆엔 내 질문에 덩달아 긴장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이프리트의 부담스럽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있었다. 그것을 잠시 비장하게(?) 마주본 아레히스는 뭔가 체념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곧 '각오하고 들으십시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시작으로 입을 열었다. " 엘뤼엔님이 담당하신 차원이 '바이톤'이라고 했던 걸 기억하십니까? " " 아, 예. " " 바이톤은 말입니다…마계와 유일하게 공간이 연결되어있는 차원입니다. 정령계와 연결된 아크아돈과 마찬가지지요. 당연히 마족들이 가장 자유롭게 왕래하는 차원이 되어, 현재는 제 2의 마계라고 칭해지는 곳이랄까요? " " 헤에." " …몇몇 상급 신들이 담당하셨다가 몇 년도 안돼서 포기했던 차원이죠." " …에? "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신들이 포기했던 차원이라고? 멍청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곳엔 우는지 웃는지 모를 애매한 표정으로 나와 이프리트를 바라보는 아레히스가 있었다. " 마계의 상급신은 2명입니다. 지옥의 신인 '크라제'님과, 마계의 신인 '카노스'님이시죠. 말씀드리지만, 이 분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떤 신도 마계를 감당하지 못했었습니다. 워낙에 성정이 난폭한 마족들이라, 그들을 돌보다 보면 하루에도 몇 십 번씩 울분을 참지 못해 쓰러지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그런데 이런 마 족들이 판치는 또 하나의 '마계'가 등장한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이톤'이죠. " " 꿀꺽. " " 아무리 마신이라 하여도 마족들을 살피는 데는 한계가 있고,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 마족들까지 일일이 관할하기는 어려운 일이죠. 그래서 대부분 자신들이 담당하는 차원의 존재가 타 차원으로 넘어갔을 경우, 그 처분은 그쪽차원의 상급 신에게 넘겨주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바이톤은 말씀드렸다시피 또 하나의 마계로 불릴 정도로 마 족이 많아서 말입니다. 보통 신들이 감당을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어떤 신은 열 받아서 차원을 아주 소멸시키려고 벼르기까지 했다니까요. " " 아하하…. " 그런데 그런 엄청난 차원을 전 엘퀴네스가 담당하게 되었단 말인가? 맙소사.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만남엔 악운이 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프리트의 안색도 하얗게 질린 것이…그리워하는 님이 엄청난 위험에 매일같이 시달리고 있다는 것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상급신이 된지 얼마 안 된 엘뤼엔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모한 차원이었던 거다. " 에, 엘뤼엔은 괜찮은 건가요? " " 하아, 왠지 엄청 위험할 것 같은데…. "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아레히스가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보았다. " 전 엘퀴네스의 새로운 이름인 '엘뤼엔*크리노*루사테'가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 알 리가 있나.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자신에 가득 차있는 듯한 태도에 나와 이프리트는 서로를 마주보며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어갔다. " 엘뤼엔은 신어로 '파괴시키다'란 뜻입니다. " " 허억? " " 크리노는 '심판하다'. 루사테는 ' 헐다'. 또는 '파멸시켜 죽이다'…라는 뜻이지요. " " !!! " " 한마디 참고하자면, 현재 마 족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은 마신들이 아니라, 바이톤의 '엘뤼엔' 이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 할말을 잃고 우어어 거리는 우리를 보며 아레히스는 피식 웃었다. " '형벌'의 신인 엘뤼엔님에게 '바이톤'보다 적절한 차원이 없다고 판단하신 건 주신의 뜻입니다. 그러니 두 정령왕들께서는 그 분을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 " ……." 그리고 나와 이프리트는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형벌? 하하. 그래, 형벌. 형벌의 신이라 이거지. 문득 옆을 보니 이프리트가 '그 녀석이 그럼 그렇지'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나 그녀석이랑 만나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6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456 / 31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재회 전 엘퀴네스가 형벌의 신이 되었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나의 걸음은 지독히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가 자처해서 들어온 길이라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영 내키지가 않은 만남이었던 것이다. 아크아돈을 비우고 왔다고 뭐라고 하면 어쩌지? 이번엔 아레히스처럼 그저 엄한 훈계정도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휴우. 강지훈. 넌 왜 사서 고생하는 거냐, 응? 아주 무덤을 팠구나, 팠어, 크흑. 하지만 이런 우울한 내 마음과는 별개로 이미 우리들은 처음 도착했던 장소인 백합정원을 지나서 크고 웅장한 기둥으로 받쳐진 넓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두 팔로 감싸도 다 끌어안지 못할 만큼의 큰 기둥들이 곳곳에 세워져 높은 지붕을 받치고 있는 형식의 건물은, 기둥에 새겨진 조각이나 장식을 포함한 모든 것이 흡사 그리스로마 시대의 신전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바닥의 색은 투명한 하얀색, 가끔씩 피부 위를 스치는 실바람엔 아까 정원을 스치면서 맡았던 향기로운 백합 향이 묻어있었다. 나는 낯선 곳에 들어오는 이가 흔히 그렇듯, 주위를 천천히 두리번거리면서 아레히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여기가 어디예요? " " 엘뤼엔님이 거처하시는 성입니다. 집무실과 생활관이 같이 포함된 신전이지요. 신들은 각기 성지에 자신만의 신전을 가지고 있답니다. 저 같은 경우는 명계에 거의 살다시피 하느라 있으나 마나한 곳입니다만. " " 그, 그럼 엘뤼엔이 지금 여기 있는 건가요? " " 아마도 그럴걸요? 하급 신들이라면 몰라도 일단 상급 신들은 맡은 일이 너무 많아서 자리를 쉽게 뜨기 힘드니까요. 아마 집무실에 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 그의 친절한 대답에 이프리트의 전신이 바짝 굳어 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 조금 있으면 엘뤼엔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생각보다 무척이나 떨리는 모양인지, 아까부터 전혀 안정을 못하고 있는 이프리트의 표정은 거의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왠지 저러다 '나 그냥 돌아 갈래'라고 대뜸 억지를 부릴 것 같은 모습이랄까? 그러나 다행히도 이프리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스스로 차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돌아가고 싶어져서 문제였지. 음. 조금 복도를 걸어가다 보니 막다른 곳으로 커다란 문이 드러났다. 상아색의 양손이 달린 문 두 개에 금빛으로 빛나는 테두리. 그 위에 작은 팻말로 처음 보는 글자가 가지런히 적혀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오늘 처음 보는 생판 낯선 글자임에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이 뜻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 집무실> 오오, 여기가 엘뤼엔의 집무실? 뭐야. 생각보다 빨리 찾았네? 운이 좋은가? " 헤에. 다 왔나 보네요… " " 그렇군요. 그럼 이제 노크를 할까요? " " 으악!! 자, 잠깐만!!! " 너무 쉽게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멍하니 하는데, 마침 노크를 하려는 아레히스의 손을 막는 이가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새빨개진 얼굴로 간신히 서있는 것 같은 이프리트가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의 행동과 전혀 매치가 안 되는 그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오는 걸 참지도 못하고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 풋. 뭐야, 이프리트….지금 긴장했어? " " 시끄럿!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긴장을 안 할 수 있어? 우리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라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못 봤었단 말이야. 거기다 저쪽은 신 이래잖아, 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냐? " " 흐음. 의외네. 이프리트라면 당장 문 열고 들어가서 '어이~ 나왔어!' 하고 외칠 줄 알았는데. " " 뭐야? 이래봬도 나 역시 감수성이 풍부한 정령이라고! 누굴 그런 무대포로 보는 거야, 지금? " " 흐음. 투닥 이시는 걸 보니 긴장이 다 풀리신 모양인데요? 그럼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 " 아아 역시. 대단한 아레히스. 이프리트의 입을 단 한번에 다물어 버리게 하다니. 과연 존경할만한 지고. 하지만 이프리트와의 짧은 대화는 마찬가지로 긴장하고 있던 내 마음도 상당히 풀어지는 효과를 일으켰다. 나만 떨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그런지 조금 해 볼만 해졌달 까? 그래서 인지 나는 그 이름도 용감 무식하게 겁도 없이 집무실의 문을 열어보는 무모함을 보였던 것이다. " 으아악!!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 쉿! 그냥 살짝만 열어보는 거야. 안에 무슨 상황인지를 먼저 알고 들어가는 것도 괜찮잖아? "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랬다고! 엘뤼엔이 우리의 적 인 건 아니지만 어쨌든 알아놔서 나쁠 게 없는 대상인 이상, 현재 안이 어떤 상태인지 몰래 살펴보는 것도 꽤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운 나쁘게 뭔가 중요한 회의를 하는 중에 들어가게 된다면 반기기는커녕 크게 혼쭐만 나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 내 생각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레히스도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군요. 이런 편이 긴장을 푸는데도 도움을 줄지 모르지요. 상황이 나쁘면 몰래 빠져나가기 편하고 말입니다. " " 으으음. " 아레히스까지 그렇게 인정하고 나자 이프리트도 마지못한 듯 동조의 빛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사냥꾼이 몰래 염탐하는 것처럼 문 옆에 바짝 기대서서 안에서 들려올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손잡이를 돌리자 소리도 없이 스윽 하고 열리는 문 틈 사이로 네 명의 눈동자가 호기심에 반짝 빛을 내뿜었다. 안의 공간은 문틈으로 얼핏 보는 건데도 상당히 넓어 보였다. 따사로운 햇살을 그대로 여과 없이 투과시키는 창문과 부드러운 실크의 커튼. 한쪽벽면에 자리 잡은 테이블과 소파. 그리고 서류가 산처럼 쌓여 위태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넓은 책상이 보였다. 그 책상에 기대어 무언가를 열심히 흩어보는 한 사람을 발견한 순간, 나와 이프리트의 숨이 동시에 멎었다는 것은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거이라 생각된다. 그의 머리카락은 등을 타고 내려올 만큼 긴 눈부신 백 금발이었다. 입고 있는 하얀색 옷과 마찬가지로 햇살을 받아 더욱 투명하게 빛나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비롭고 고아해 보였다. 조각해놓은 것 같은 수려한 턱 선과 섬세한 손가락이 자칫 여자 같다는 느낌을 주었으나, 강한 눈매라든지 다부진 어깨가 위풍당당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금새 그런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레히스만큼 아름답게 생겼지만. 그처럼 느끼하다는 인상은 받기 힘들었다. 아레히스의 인상이 부드럽고 유약하다면, 저 사람(?)은 좀더 정제된 느낌이랄까? 날카롭게 다져진 분위기랄까. 뭐, 암튼 그랬다. 냉철한 꽃미남이란게 바로 저런 이미지를 두고 하는 말 일 테지. 웬만한 여자보다 훨씬 아름다웠지만, 절대로 여자라고 볼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잠시 감탄의 눈으로 바라본 나는 옆에서 나와 같이 몰래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이프리트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 어때? 엘퀴네스 맞아? " " 으응. 머리색깔이 달라졌지만… 맞아. 틀림없이 녀석이야. " 힘들게 고개를 끄덕인 이프리트는 그렇게 대답한 후 다시 정신없이 엘뤼엔의 모습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마 그 직후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뛰어가 엘뤼엔을 끌어안고도 남을 만큼 절박함이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가? " " …입니다. " " 응? 누가 또 있었나? " " …!! " 엘뤼엔을 발견한 탓에 주변을 더 자세히 둘러보지 못했더니 이런 복병이 존재했을 줄이야. 집무실 안에는 엘뤼엔 혼자만 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바짝 긴장한 채 안을 살펴본 우리는 곧 어렵지 않게 엘뤼엔 앞에 서있는 또 하나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강한 오렌지 빛을 머금은 긴 금발에 수려한 외모. 드레스처럼 바닥에 끌리는 통이 큰 옷을 입은 그는 어깨에 그의 몸집 만한 4개의 커다란 하얀색 날개를 매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와 이프리트가 흠칫 하고 놀라자 아레히스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 중급 천사로군요. 아마 엘뤼엔님의 일을 돕는 수행천사 일겁니다. 무슨 보고중인 것 같은데요? 아까 노크하지 않기를 잘했던 것 같네요. 일하시는 중이었군요. " " 아…. " 그러고 보니 천사들은 신의 일을 돕는다고 했었지. 날개 달린 사람(?)은 처음 봐서 적응이 안 되는 구만. 저렇게 큰 날개를 등에 매달고 있으면 무겁지 않으려나? 내가 잠시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지는 사이, 안에서는 엘뤼엔과 천사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그래서 신전에 청원을 넣었다? " " 예, 그렇습니다, 엘뤼엔님. 그들은 이번 문제의 가장 빠른 해결책을 당신으로 보고 도움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 " 흠. 무슨 문제였지? " 건성건성 대답하는 엘뤼엔의 목소리엔 작게나마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다지 흥이 가지 않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이 귀찮았는지, 들고 있는 서류의 검토도 한눈에 대충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보고하는 천사는 의례 당연히 그래 왔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계속해서 그가 원하는 대답을 늘어놓고 있었다. " 두 어미가 있습니다. 한 여자는 아이를 낳은 어미이고, 또 다른 여자는 아이를 길러준 어미이지요. 친 어미는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어버린 이후 계속해서 행방을 찾아왔고, 양어미는 길을 잃고 헤매는 아이를 데려다가 제 자식처럼 키웠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 친 어미가 드디어 아이를 발견해 낸 것이죠. " " 유치하군. 그래서? " " 두 어미 모두가 아이를 너무 사랑하여 서로에게 내주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동정도도 비슷한데다 아이의 입장도 애매해서 섣불리 한 사람의 편을 들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고민 끝에 이 문제의 해결을 신에게 맡기기로 하고 신전을 찾았습니다. " " 호오. 그 신전이 하필이면 내 신전이라고? 그것들은 대체 형벌의 신을 뭘 로 보는 거야? 내가 무슨 재판의 신이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는 거 아니야? 귀찮게 됐군. " 짧게 투덜거린 엘뤼엔은 살풋 인상을 찡그리며 이마를 덮었던 머리카락의 일부를 가볍게 쓸어 올렸다. 그 모습이 무지 멋있어서 이프리트의 얼굴이 다시금 빨개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나저나…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네. 천사의 말마따나 누구 하나 섣불리 편들어 주기 어려운 상황이잖아, 이거? 누구 한사람이라도 나쁜 인간이었다면 처리하기도 쉬웠을 텐데, 이 경우는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고. 아이도 어찌해야할지 몰라 하는 것 같다니 아무리 신이라고 해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엘뤼엔은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떤 식으로 해결할 생각이지? 명 재판관의 현명한 판정을 기다리는 사람 마냥, 잠시 나는 두근두근한 가슴을 부여안고 이 흥미진진한 상황이 어떻게 해결이 될지 몹시 기대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엘뤼엔의 첫인상이 무척 호감이 있던 탓이었는지, 이때의 나는 그가 '형벌의 신'이라는 것과 '마족'이 가장 무서워하는 신으로 꼽히는 존재라는 소릴 들었던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그러한 기대를 가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셋 다 죽여. " " 예? 하지만…. " " 서로 아이는 죽어도 포기 못하겠다!? 그럼 죽어야지. 그리고 스스로 부모를 선택하지 못하는 멍청한 놈도 살 자격은 없다. 그냥 죽여. 아니면 분쟁의 시발점이 된 아이만 죽기를 원하는 건가? " " 그,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 " 그럼 그냥 잔말 말고 죽여라. 신의 심판을 받아 죽는 거니 반드시 지옥으로 떨어지겠지. 그 속에서 저 살 궁리 하다보면 그런 시덥지도 않은 일로 고민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다. 어차피 인간이란 다 그런 생물이야. 자기들 욕심밖에 모르는 이기심 덩어리니까. 위기가 닥치면 가장 사랑한다고 여기던 것도 외면하는 법이지. 이러니저러니 감정싸움에 매여 있어도 결국은 다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 법이니까. " " 알겠습니다, 엘뤼엔님. " 커허헉, 정말로 그 셋을 다 죽인다고? 엘뤼엔의 그 파격적인 판정은 우리 일행 사이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충격으로 한마디도 못하고 얼이 빠져버린 나와, '역시 저놈은…'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드는 이프리트, 지옥에 갈 영혼이 또 늘어 곤란하다는 아레히스와 저 영혼을 인도하게 될 저승사자를 위해 기도하는 유라우스. 대체… 대체 저 놈의 사고방식은 어떻게 되어먹은 거야!! 그 순간 나는 현재의 상황도 잊고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말았다.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의 모습에 엘뤼엔이 의아하게 돌아보는 것이 보였지만, 이때의 나는 뒤에서 혼비백산하는 일행들도, 내 목적이 무엇인지도 까맣게 잊은 채 당당하게 소리쳤다. " 인간의 생명이 무슨 벌레인줄 알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네 마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7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728 / 35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 이놈의 자식, 죽어라! 죽어!! 빨리 죽어서 그 재수 없는 면상 좀 내 눈앞에서 꺼지란 말이야!!!> < 대체 왜 이래요! 내가 뭘 잘못했는데!!!> < 아니, 그래도 이놈의 자식이? 네가 뭘 잘못했냐고? 오냐, 그래 알려주마!! > < 넌 태어난 것 자체가 죄였어!!! > " 으으음…. " 정신이 대략 몽롱해지고 눈앞이 뿌연 것이 잠시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힘겹게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에 다이아를 박은 듯한 샹데리아가 보였다. 여기가 어디지? 자다 일어나서 그런가,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정령계가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데 말이야.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정신을 차려보려 고개를 흔들었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알 수 있는 거라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방안에 내가 누워있었다는 것 정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하자 찌릿찌릿한 엄청난 통증이 전신으로 퍼졌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아픈 고통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꼭 아버지한테 붙들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난 다음날 같은 것이…. 이래서 그런 꿈을 꾼 건가? 꿈에서의 나는 중학교1학년 때의 모습이었다. 평소처럼 어김없이 이어지는 구타에 이제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그날따라 이상하게 억울한 기분이 들어서 처음으로 반항을 시도 해보았던 날. 그때 되돌아온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에 그대로 굳어버려 이후로 반항이란 건 생각해 본적도 없었는데. 이제는 다시 경험할 일이 없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지난날의 불쾌했던 과거가 꿈이라는 수단을 이용해서 다시 나를 괴롭힐 줄은 몰랐다. 아무리 새로운 육체를 얻었어도, 전생을 기억하는 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걸까? 상당히 무뎌져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조금 아프다고 금새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니….아무리 생각해도 한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 내 몸이 왜 이렇게 아픈 거지? ' 흠. 멍든 것 같지는 않은데 여기저기 상당히 쑤시네. 흠씬 얻어터진 것 같기는 한데 말이야. 이래봬도 정령 왕인 내게 대체 누가 이런 짓을? ' 그러고 보니 전 엘퀴네스를 찾기 위해 아레히스의 도움을 받아 신계에 왔었던 것 같다. 왕궁 문을 지키는 신족들과 작은 트러블이 있긴 해지만 아레히스의 재치(?)로 무난히 상황을 넘겼었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엘뤼엔이라고 하는 전 엘퀴네스가 사실은 형벌의 신이라는 것. 그 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이후의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다. ' 뭔가 엄청난 일이라도 있었었나? 으으 어디 보자. 아, 그래. 엘뤼엔의 신전까지 들어갔었던 것 같은데. 집무실도 엄청 쉽게 찾아서 운이 따라준다고 생각했었고. 몰래 문을 열어서 안을 살펴봤었던가? " 그래, 그랬었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나자, 묶어뒀던 보따리가 풀어지듯 그 다음 상황이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서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대체 어째서 잊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도 선명하게.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인간들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엘뤼엔의 모습에 화가 난 나는 대책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화를 냈었다. ' 인간의 생명의 무슨 벌레인줄 알어? 함부로 죽이네, 마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라고 외쳤던가? 그래서 나는 의례 그가 낯선 이의 등장에 당황하거나, 침착한 상태로라도 ' 넌 뭐야? 누구지?' 라고 물어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엘뤼엔은 그런 상식적인 반응들을 싹 무시한, ' 네가 왜 여기 있지?' 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치 오랜 시간을 알아왔던 상대가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것처럼. 정령계에 있어야 할 내가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 듯한 눈빛에 처음엔 내가 아니라 이프리트를 보고 있는 건가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게 틀렸다는 걸 증명이라도 듯,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서 떨어지지 않는 엘뤼엔의 시선을 보고서야 그가 한눈에 내가 엘퀴네스임을 알아봤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신족들도 나와 이프리트가 정령 왕인걸 알아봤었지…. 도대체 어떻게? 내가 그렇게 물의 정령왕인게 티 나게 생겼나? 정령 왕들마다 특유의 기운이 있다는 걸 아직 몰랐던 내가 예상 밖의 상황으로 움찔하는 순간, 냉랭한 표정의 엘뤼엔의 목소리가 낮게 흘러나왔다. " 돌아가라. " " 아니, 뭐… 그렇지 않아도 잠깐만 보고 갈 생각…이 아니라! 잠깐 기다려!! 쓸데없는 참견이긴 하지만, 네 판정에 항의하고 있잖아! 그런데 아무런 변명도 안 할 생각이야? " " 변명? 누가? 그들이 원해서 내린 판정이다. 그런데 왜 내가 그것에 변명을 해야 하지? "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한 엘뤼엔은 들고 있던 서류중의 일부를 거칠게 책상위로 던져놓았다. 그리곤 한낮의 햇살을 그대로 머금은 창문을 흘낏 보더니 앉아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 그들이 원한 건 두 사람 중의 한 명이 아이를 키울 수 있게 되는 거였잖아. 셋 다 죽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 "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지. " " 헉. " 순간 ' 뭐 이런 싸가지가~~ '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쳐 올랐지만 필사의 의지로 억눌렀다. 내가 이곳에 저 녀석이랑 싸우러 온 것도 아닌데 지금 여기서 뭐라고 땍땍 거려 봤자 이프리트에게 좋을 게 하등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아직 정령 왕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형벌의 신'인 엘뤼엔의 상대가 될 리도 없었고 말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게 말할 시간이 없었다는 표현이 적당하겠다. 텔레포트라도 한 건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코앞으로 다가온 엘뤼엔이 내가 미처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음산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던 것이다. " 난 분명히 돌아가라고 했다. 그 경고를 어긴 건 너야. 그러니 원망하지 말도록. " " 엥? " 그 직후, 나는 엘뤼엔의 손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는 것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엄청나게 아픈 것 같은 느낌, 전신에 몰아치는 뜨거운 바람을 느끼며 내 의식은 점차 몽롱해져갔다. 얼핏 비명을 지르는 이프리트와 다급한 아레히스의 목소리가 들린 듯도 했으나, 거의 희미했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들었던 건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기절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한 나는 쑤시는 몸도 무시한 채 거칠게 이불을 제치고 침대 위에서 내려섰다. 말도 한마디 없이 갑자기 사람을 공격해서 기절시키다니…뭐 그딴 놈이 다 있어!! 기억나는 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눈부신 빛과 몽둥이로 타작 당하는 것 같은 아릿한 통증뿐이었지만, 마지막의 엘뤼엔의 말에서 녀석이 나를 때린 게 분명하다고 나는 확신했다. 뭐? 분명히 돌아가라고 경고했어? 그걸 어긴 건 나니까 억울해 하지 말라고? 너 같음 그런 말 듣고 나서 기절하면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 맞아도 싸요.' 이러겠냐! 준수한 외모 덕에 엘뤼엔에게 쌓였던 처음의 호감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진 후였다. 아마도 그렇게 기절시킨 뒤에 신전의 아무 방에나 던져놓은 모양인데~ 만나기만 해봐라!! 기필코 절단 내고 말 겨!! " 아, 엘퀴네스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 얼마나 씩씩거리고 있었을까. 전신에 엄습하는 통증에 이를 악물던 내가 문득 회복능력을 떠올리고는 부리나케 치료에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문이 벌컥-열리더니 유라우스의 얼굴이 빼꼼이 내밀어졌다. 그는 내가 일어서서 스스로 치료하고 있는 모습을 조금 멍하니 바라보더니, 곧 무지무지 반가운 표정으로 허겁지겁 방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 걱정했습니다. 아무리 깨워도 도무지 일어나실 생각을 못하시기에, 이러다 정령계로 강제 송환 되는 게 아닌 가 얼마나…. " " 강제송환? " " 모르셨습니까? 정령들은 정령계를 벗어나면 일단 실체가 없어지거든요. 외부의 공격을 받아 소멸하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정령계로 강제 송환되는 겁니다.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 처하면 본능적으로 정령계로 송환되게 되어있어요. " " 실체가 없다뇨? " " 정령이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정령계 뿐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마나를 이용하여 겉모습만 투영하는, 어디까지나 임시모습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정령계가 아닌 곳에서는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상처를 입거나 죽지 않지요. 그나마 4대차원에서는 모습이라도 투영할 수 있지, 보통의 인간계에서는 '소환'이 되어 계약을 맺지 않는 한,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범한 인간들이 계약을 하지 않은 자연계의 정령을 보기는 무척 힘들다고요. " 아마 내가 지금 이 상태로 아크아돈의 인간계에 가게 되면, 사람들은 내가 바로 옆에 있는지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4 대 차원의 마나는 인간계에 비해 그 성질이 온순한 편이라 누구나 마음껏 다룰 수 있는데 비해, 인간계의 마나는 굉장히 거칠고 난폭해서 그것을 다루기 위해선 누군가 매개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령들은 인간세상의 종족들과 계약을 맺어, 자신의 모습을 인간 세상에 투영시킬 수 있는 마나를 제공받는 대신 그들이 원하는 일을 도와 준다고 했다. " 그렇다고 모든 종족이 다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반드시 정령을 '소환'해 내는 존재만이 가능하지요. 굳이 '소환'형식을 거치는 건, 정령과 계약을 할 자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것입니다. 정령을 무사히 세상에 투영시킬만한 마나와 자연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거랄까요? 이것은 상급정령으로 올라갈수록 훨씬 많은 수치를 요구하죠. 그래서 보통의 존재가 정령왕의 존재를 소환하기는 하늘의 별을 따내는 것보다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 " 보통의 존재…라고 하면? " " 별다른 특징이 없는 평범한 인간. 혹은 능력수치가 높은 종족이더라도 본인의 실력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 으음. 평범한 인간은 정령왕을 소환해 내기 힘들다는 건가. 이거 참….이왕 소환될 거라면 인간과 계약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군. 상상의 존재로만 알려져 있는 드래곤을 만나 보는 것도 나름대로 굉장할지도. 모처럼 유익한 지식을 습득했다며 만족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내 앞에 유라우스와 함께 나타나야할 존재들이 없음을 깨닫고, 의아한 눈을 들어 유라우스를 바라보았다. "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요? 이프리트나 아레히스는? " " 아, 그분들은 지금 엘뤼엔님과 면담중이십니다. " " 면담? " 그러니까 유라우스 말에 의하면, 내가 엘뤼엔의 공격을 받고 기절한 직후, 그 장면을 목격한 한정령왕과 중급신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엘뤼엔에게 달려들었다(?)고 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천사가 엘뤼엔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았고, 이에 열 받은 이프리트가 당장 불의 검을 소환해서 녀석에게 들이댔으며, 그것을 막느라 진땀 흘리는 아레히스…그리고 그 사이에서 쓰러진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느라 동분서주한 유라우스로 인해 집무 실안이 상당히 난장판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흘리는 말이, 이프리트가 화냈던 것이 엘뤼엔이 나를 공격해서라기 보단, 그 천사가 엘뤼엔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인 것 같다고 했다. 일단 중성이긴 하나 빼어난 미인인 만큼, 질투심을 느낀 것 같다나? " 뭐, 그래봤자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가지긴 하지만, 몇몇 신들이 천사들과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억측이라고 볼 수는 없지요. " " 엥? 신인데 아이를 가진다고요? " " 신은 성별이 있으니까요. 남신과 여신으로 나뉘지요. 두 상급 신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능력 차이에 따라 중급신과 하급신이 됩니다. 모르셨어요? " 허걱. 몰랐다. 신들이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는다니. " 그, 그럼 아레히스도 누군가의 아이…라는 거예요? " " 아~ 그건 아닙니다. 신이 되는 경우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에서 중급신은 주신께서 애초부터 중급 신으로 태어나게 한 경우와, 두 상급 신 사이의 결합에 의해서인 경우죠. 아레히스님은 주신께서 처음부터 중급 신으로 창조하신 경우입니다. 남신이니까 누구 다른 여신과 결혼하시면 하급 신을 낳을 수는 있겠지 만요. " " 하하. 그, 그래요? 그럼 상급신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설마….주신이 결혼해서? " 얼떨떨하게 웃으며 질문하자 유라우스가 금새 정색을 하며 얼굴을 굳혔다. 주신이 결혼하다니,절대 그런 일은 없다나? 상급신은 주신이 신으로서 창조한 순결한 영혼이, 정령왕의 직분을 거치고 나야 받는 직위라는 것이다. 정령왕의 직분을 거치지 않은 존재는 아무리 애를 써도 절대 상급신의 위치를 받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설명을 들은 나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 역시 엘뤼엔이 괜히 상급신이 된 게 아니라는 거네요, 그럼. " " 물론입니다. 그나저나 몸에 별다른 이상은 없으십니까? 아무리 실제적인 형체가 아니라 공격을 받아도 상처가 생기지 않는다지만, 신력에 의한 직접적인 손속이었던 만큼 고통이 상당하셨을 텐데요. 그것 때문에 지금 이프리트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 호오? 이프리트가 내 걱정을 다 했다고? 생소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녀석이 이젠 걱정씩이나 해주는 단계로 승격을 하다니. 세상 살고 볼 일이라는 걸까? 나는 문제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생긋 웃었다. 또다시 유라우스의 얼굴이 붉어지긴 했지만 그거야 원래 그랬던 녀석이니 그랬다 치고. 문제는…. " 엘뤼엔과 면담중이라니, 이프리트와 아레히스…괜찮을까요? " " 아, 괜찮을 겁니다. 저도 그 분들과 함께 하던 중에 엘퀴네스님의 상태가 걱정되어서 혼자 빠져나온 거거든요. 걱정되시면 같이 가보시겠습니까? " 유라우스의 제안에 나는 냉큼 '그러겠다' 고 대답하며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솔직히 말해서 이프리트와 아레히스의 안전보다는, 엘뤼엔에 대한 분노와 억울한 감정이 더욱 컸기 때문에 빨리 만나서 그 녀석과 담판을 짓고 싶었다. 신이면 다야? 어차피 지금 내가 아무리 공격을 받아도 죽지 않는다는 걸 안 이상, 이제 무서울 게 없다 이거야!! 그놈의 재판건도 그렇고, 기습적으로 공격한 것도 그렇고…정말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지 않은가. 대체 이프리트는 그런 놈의 어디가 좋아서 그렇게 애걸복걸을 해댔던 건지.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8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397 / 34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설마 엘뤼엔의 외모만 보고 좋아했던 거 아니야? 그렇다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다른 건 몰라도 얼굴만큼은 단번에 호감을 얻을 만큼 잘나게 생긴 엘뤼엔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디 성격이 저래서야 학대를 당하길 즐기는 변태가 아니라면 오래 버티지도 못하고 떨어져 나갈 것이 틀림없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프리트를 끌고 정령계로 돌아가야겠다는 사명감에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친구의 사랑은 응원해야 마땅하지만, 상대가 저따위라면 말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이 내 평소 지론이니까. 그리하여 나는 발걸음도 당차게 유라우스의 안내를 받아, 엘뤼엔과 내 일행들이 면담중이라는 응접실로 향했던 것이다. 처음 만났던 장소인 집무실은 이프리트가 발작을 하는 바람에 여기저기 쌓여있던 서류더미가 무너져서 완전히 쓰레기더미가 되 버렸다나? 뒤늦게 호출되어온 수행천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차례로 실신해 버릴 정도로, 앞으로 그 방을 정리하려면 무척이나 까다로울 것이라고 했다. 엘뤼엔 마저도 그 광경엔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렸다니까. 그 말을 듣고 어찌나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지…아무래도 나는 엘뤼엔에게 단단히 미운 털을 박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내가 한 것 도 아닌, 다른 사람의 우연한 행동으로 인해 곤란한 지경이 된 그가 그렇게나 고소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기분은 응접실에 도착하여 엘뤼엔과 아레히스의 대화를 듣는 순간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처음 응접실에서 본 두 신들은 각자 맞은편의 소파에 앉아있는 상태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었다.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노려보는 쪽은 엘뤼엔이고, 아레히스는 여유롭게 그 모습을 감상하는 얼굴이었지만. 아마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던 모양인지, 이미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숨막히게 돌아가는 위압적인 공기에, 멋모르고 응접실에 들어섰던 나는 한순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춰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마침,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던 엘뤼엔의 입에서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냉기를 풀풀 뿌리며 흘러나온 것이다. " 그렇지 않아도 아레히스. 그대하고는 할말이 많이 있었다. 만나기를 고대해왔지만 보다시피 일거리가 잔. 뜩. 쌓여있어서 말이야.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더군. " " 그러십니까? 상급신의 일이 고되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설마 잠깐의 여유도 허락되지 않는지는 미처 살피질 못했군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 짐짓 모르겠다는 듯 의아하게 물어오는 아레히스였지만, 어색하게 굳어진 표정을 보니 그는 이미 엘뤼엔의 용건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그 바람에 더욱 살벌하게 굳어진 엘뤼엔의 눈빛에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한바탕 해주려고 했던 나는 슬그머니 눈치만 보는 것으로 사태를 좌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째 이때 건드리면 이번엔 그냥 기절하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달까? 흘낏 아레히스의 옆을 보니 잔뜩 굳어져 앉아있는 이프리트가 보였다. 그런데 녀석의 시선은 엘뤼엔에게 가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엘뤼엔의 수행천사에게 머물러 떨어질 줄 모르는 것이다. 흡사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눈을 부릅뜨고있는 그 모습에 내가 얼떨떨해 하자, 유라우스가 ' 내 말이 맞지요? 질투라니까요~ '하면서 또 잽싸게 참견을 해왔다. 그리고 그때만큼은 나도 그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고 말았다. 옆의 살벌한 기운은 전혀 개이치 않은 상태에서 이프리트가 천사만 노려보고 있을 이유가 그것 말고 달리 설명할 방도가 없는 것 같으니까. 어이, 이프리트? 너는 지금 저 두 신들의 묘한 상태가 안 보이는 거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려보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고~! 지금 시덥잖은 존재를 보며 질투나 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그러는 와중에도 엘뤼엔과 아레히스의 대치는 계속 되고 있었다. 노려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얼굴을 한 엘뤼엔은 진정 아레히스가 가증스럽다는 듯이 가볍게 치를 떨었다. " 몰라서 묻는 건가? 명계에서 만났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설마 잊었다는 건 아니겠지? 신인 그대에게 망각의 물이 통할 리도 없고 말이야. " " 으음,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 " 잊었다면 말해주지. 나는 이야기를 끄는 것이 질색이다. 그때, 엘퀴네스의 임무를 마치고 선택의 시간을 갖았을 당시. 나는 분명히 내세의 길을 걷길 바랬었다. 안 그런가? " " 아아, 예에. " 뜨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아레히스의 대답에 나는 경악했다. 저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는 듯한 싸가지가 내세의 길을 걷기를 바랬다고? 이프리트도 놀랐는지 천사를 노려보던 시선을 돌려 황당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을 말끔히 무시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 귀찮은 것은 싫다, 그렇게 말했었지. 신이 되면 맡아야 할 의무와 책임이 많아지니 아무리 누릴 권리가 많다 해도 사양하고 싶다고. 그런 것은 이미 정령왕인 지난 시절로도 신물 나게 겪었다고 말이야.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신이라는 것에 적성이 맞지 않는 존재였다. 애초부터 신이 되기 전에 정령왕의 직분을 먼저 수료하는 이유가 자기 스스로를 진단해 보기 위한 것 아니었던가? " " 그렇습니다. 엘뤼엔님. 그리고 저는 당신만큼 신의 위치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다고 설득했지요. " " 그래. 기억하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리고 나는 다시 거절했지. 아무리 그래도 역시 내세의 길을 걷겠다고 말이야. 그대도 그걸 납득한 듯이 보였다. 그런데…. " 잠시 말을 끊은 엘뤼엔은 서슬 퍼런 표정으로 아레히스를 노려보았다. " 왜 내가 신이 되어있는 거지? " " 아 하하…그, 그게…. " " 기가 막히더군. 그대가 안내하는 길로 따라 걸으면서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내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잠시 눈을 감고 깨어나 보니… 뭐? 상급 신? 엘뤼엔의 이름을 하사 받아? 거기다 나중엔 기다렸다는 듯이 그 썩을 것들인 넘쳐흐르는 땅 바이톤을 담당하라고 서둘러 임명장이 오더군. 그때부터 나는 그대를 다시 만나기를 정말 손. 꼽. 아. 서. 기다렸지. 감동해도 좋아. 내가 누군가를 이토록 그리워해 보기도(?) 처음이니까. " 이를 갈 듯이 낮게 말하는 엘뤼엔. 대충대충 아무렇지 않게 설명했으나 그 말이 끝나고서 오는 파장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만 벌리고 있는 이프리트는 그렇다 치고, 일단 나만해도 경악으로 인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잖은가. 유라우스 역시 십 년은 갑자기 늙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설마 아레히스, 아레히스 당신! ' 엘뤼엔을 속여먹은 거야??!' 맙소사.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일이 아닌가?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반장자리를 맡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일이었다. 기가 막혀서 할말을 못 찾는 일행들 사이로 아레히스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머리를 긁적였다. " 그게, 변명을 하자면 정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제와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주신께서 미리 당부해 두신 일이 있었거든요… " " ……? " " 하아. 상급신이 대거 부족해져서 말입니다. 요즘 정령왕의 수료과정을 거치신 신의 영혼들이 이상하게 다들 내세의 길을 고집하시는 바람에…. 새로운 차원은 자꾸만 늘어나는데 그것을 담당할 상급 신들의 수는 부족하고, 그래서 주신께서 고민하신 끝에 이번에 선택의 시간을 갖는 신의 영혼은 억지를 쓰더라도 반드시 신이 되게 하라고…. " 일단 내세의 길을 선택한 신의 영혼들은 자신들이 스스로 만든 업을 소멸하기 전까진 보통의 영혼들처럼 계속해서 내세를 떠돌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동안의 업이 전부 소멸하게 되면 신족의 삶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신이냐 내세의 길이냐는 선택의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얼마든지 내세를 경험하고 나서 나중에 신이 되더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번에 주신께서 새로운 차원을 대거 생성하셨는데, 그것을 맡을 상급 신들이 부족해지자, 이번 선택의 시간을 갖게 될 신의 영혼은 강제적인 수단을 이용해서라도 반드시 신의 길을 택하게 만들라는 엄명이 명계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엘뤼엔은 그것에 희생된 운 나쁜 첫 번째 타자라고 할 수 있었다. 거기까지의 설명을 들은 엘뤼엔은 기가 막히다 는 표정으로 한참을 무언가 납득해보려는 듯이 생각을 곱씹더니,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여는 것처럼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 그럼 내가 '바이톤'을 맡게 된 이유는? " " 그게, 원래라면 엘뤼엔님은 이번에 새로 창조된 차원 중에 하나를 담당하셨어야 합니다만. 당신의 성정과 능력이 너무 뛰어난 관계로 바이톤 만큼 합당한 차원이 없다며 주신께서…. " " …… 빌어먹을. " 유라우스가 말하기를, 제 아무리 대단한 엘뤼엔이라 하여도 유일하게 반항하지 못하는 단 한가지의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을 창조한 주신이라고 했다. 주신께 대항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것은 마치 본능과도 같은 거라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허락 받은 모든 창조물들은 주신의 명령에 절대적인 복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 아레히스도 필사적으로 주신의 핑계를 댔던 것이고, 엘뤼엔 역시 폭발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거겠지. ' 으음, 엘뤼엔. 너도 알고 보니 꽤 불쌍한 놈이었구나. '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내게 벌인 행동을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말씀. 유달리 우중충해지긴 했으나, 급박했던 상황이 대충 정리된 듯 하자 나는 발걸음도 당차게 엘뤼엔의 옆으로 가서 크흠 하고 인기척을 냈다. 그러자 여지껏 다른 곳에 신경 쓰느라 내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아레히스와 이프리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 엘퀴네스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몸은 좀 어떠세요? " " 엘퀴네스! 너 뭐 하는 놈이야!! 이런 곳까지 와서 기절씩이나 하는 놈이 어디 있어!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알아? " 언제나 그렇듯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말투의 아레히스, 그리고 말과는 다르게 전혀 걱정이 묻어나지 않은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이프리트의 말이 차례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작 내가 관심을 끌려고 했던 엘뤼엔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세상 다 산 듯한 무료한 표정만을 지어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그의 공격을 받고 바로 저 세상으로 갔다 하더라도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인지 나는 괜히 울컥하는 마음에 걱정하는 아레히스들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엘뤼엔에게 시비를 걸어버리고 말았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59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5381 / 30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뭔가 해줄 말 없는 거야? " " ……? " " 다짜고짜 멀쩡한 정령을 쳤잖아? 이럴 땐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지, 뭔가 납득할만한 이유를 대야하는 게 아니냐고. 그렇지 않아도 오랜만의 통증 때문에 잊고 싶었던 기억까지 떠올라 버렸으니까 뭔가 변명이라도 하란 말이야, 안 그러면…. " " 안 그러면? " 재미있다는 듯이 씨익 입 꼬리를 올리는 엘뤼엔의 모습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고 말았다. 내가 뭐라고 떠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것 같더니, 또 갑자기 웬 관심 이라냐? 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곤 퉁명하게 대꾸했다. " 나도 똑같이 맞장 뜰 거라고. 어차피 공격받아도 안 죽는다는 걸 안 이상, 무서울 게 없다 이거야. " " 흐음? 안 죽는다고? 누가 그러지? " " 그거야 유라우스가…. 정령은 정령계를 벗어나면 실체가 없다고 했어. 죽는 것 같이 보여도 실제론 정령계로 강제 송환되는 거라고. " 내 말에 조금 어이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 엘뤼엔은 잠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 바람에 이프리트가 말세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 저 녀석이 웃을 줄도 알았나? ' 라고 기겁하며 외치긴 했지만 ,정작 그 모습을 보는 나는 꼭 비웃음 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매우 나빠지기 시작했다. " 뭐야, 왜 웃는 건데? 멋대로 정령 쳐놓고 기절시키더니, 이젠 웃기까지 하냐?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여? 아~ 그래. 나 자각도 제대로 못하는 덜떨어진 정령왕이다. 그래서 뭐? 니가 뭐 보태준 거 있어? " 이상하게 이 녀석의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짜증이 났다. 막무가내의 판정 건이나 나를 때려서 기절시킨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것 자체에 울화가 치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것을 가지고 나는 괜히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에 이프리트가 ' 저 녀석이 저렇게 화낼 줄도 알았나? 오늘 여러 가지로 신기한 경험을 하네… ' 하고 중얼거리긴 했지만 당연히 무시. 나는 당돌하게 엘뤼엔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녀석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 대답해 줘야겠어. 어째서 나를 때려 기절시켰는지. 아니, 그전에 그 인간들의 재판 건도 해명 해줘. 셋 다 죽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잖아? 너의 판정은 너무 권력남용이야. " " 하아, 이거야 원. 이렇게 감정적인 엘퀴네스가 태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역시 불가능은 없다. 이건가? 정령왕이란 녀석이 정령에 대해 다른 존재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납득을 하다니 웃기지도 않아서…. " " 쳇. 그거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남이사 감정적이던 덜떨어지던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빨리 대답이나 하란 말이야! " 욱 하는 심정에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엘뤼엔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전처럼 소리 소문 없이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헉, 설마 또 때리려고?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한 발짝 물러서자 엘뤼엔은 망설임 없이 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따악- " 아얏! 이게 무슨 짓이야!! " " 말부터 높여. 네가 너보다 나이를 먹어도 몇 만 년은 더 먹었고, 능력도 너보다 훨씬 강하며, 너의 직계 선배나 마찬가지야. 봐주는 것도 이번뿐이다. " 이런 나쁜 놈. 갑자기 꿀밤을 때려놓고 할 소리냐, 그게? 그리고 네가 언제부터 나를 봐줬다는 거야? 아까 때려서 기절시킨 게 봐 준거면 안 봐주는 건 대체 뭐라는 건데? 정말 기가 막히는 건 욱씬 거리는 이마를 부여잡고 인상을 쓰는 나를 보며 천사가 하는 말이었다. 녀석은 아주 감탄했다는 듯이 손뼉까지 치며 엘뤼엔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 그분이 굉장히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엘뤼엔님. 이 정도로 가볍게 처벌하시는 건 처음이신 것 같군요. " " 아아. 그러게. 물의 정령이라 그런가?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은걸. " ' 나는 기분 나빠!! ' 아주 정령왕 하나를 바보 취급하는 한 신과 천사를 보며 나는 증오심에 이빨을 갈았다. 그리하여 더 이상은 못 참아!! 하고 달려들어 한방이라도 먹여보려 했건만…바로 그 찰나- 생각났다는 듯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여는 엘뤼엔으로 인해 내 계획은 잠시간 보류되고 말았던 것이다. " 그 인간들이 왜 내 신전에 와서 청원을 넣었다고 생각하지? " " 에? " " 그 인간들은 '바이톤'의 주민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자신들의 차원을 담당하는 상급신을 제쳐두고 나를 찾아왔지. 그게 어떤 의미일 것 같아? " " 그게 무슨? " " 너는 잘 모르겠지만, 상급 신들은 전속으로 담당하는 차원 외에도 각기 맡고 있는 분야가 하나씩 있어.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차원 '바이톤'을 담당하는 상급신이기도 하지만 또한 '형벌'의 신이기도 하지. 모든 차원의 '형벌'에 대한 것을 관리하고 책임질 의무가 있다는 소리야. 그래서 바이톤 외의 다른 차원에서도 나를 섬기는 신전이 있지. " 그런데 그게 대체 어쨌다는 건가? 지금 자기 신도 수가 많다고 자랑하는 거야? 도무지 요점을 알 수 없는 엘뤼엔의 설명에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 생각해봐라. 내 신전이 있다는 것은 다른 신들의 차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소리다. 예를 들어, 이번 사건의 경우는 나보다는 재판의 신이나 명철의 신을 찾아가는 것이 더욱 현명했을 거야. 게다가 그들이 사는 차원을 담당하는 상급신은 '타협과 평화'의 여신이었지. 그런데 왜 하필 나를 찾아왔을까? " " 그, 그러고 보니…. " 듣고 보니 그렇잖아? 정확한 판정을 원했던 거라면 재판의 신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은 성격도 더러운 엘뤼엔의 신전을 찾은 거지? 그 해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옆에서 나와 같이 설명을 듣고 있던 천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내놓은 것이다. " 형벌…. 엘뤼엔님의 직함이 '형벌'을 뜻하기에 그러했겠지요. " " 엥? " " 그래. 바로 그거야. " 이미 설명에 열중해 버린 엘뤼엔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엄청 지저분한 벌레를 바라보는 것처럼 인상을 잔뜩 구기더니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내가 '형벌'의 신이라서 찾아 온 거다. 빌어먹을 놈들은 처음부터 아이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어. 당연히 이 아이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 앞에서 사연을 구구절절이 늘어놓으면 아이를 노린 괘씸한 상대방에게 '형벌'을 내릴 것이라 기대한 거지. 그것도 서로 똑같이 말이야. 그런데도 내가 봐줘야 하나? " 헉… 그런 뜻이 있었단 말이야? 그래서 일부러 '형벌'의 신인 엘뤼엔을 찾았다고? 어쩐지 굳게 믿고 있던 상대에게 배신당하는 기분이었다. 하얗게 질려 가는 안색을 느끼며 그래도 나는 희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 떠듬떠듬 최소한의 반박을 시도해보았다. " 으음. 그, 그렇다 해도 아이까지 죽이는 것은 불쌍한 것 같은…데…. 아이는 잘못이 없지 않나? " "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이거야 원.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이프리트 녀석한테 꽤나 장난감이 되 주고 있겠군. 그건 그렇다 치고 너 말이야. 그 '아이'가 대체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 " ……? " 뜬금없는 엘뤼엔의 질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이가 몇 살이라니? 적어도 '아이'라고 불리 울만한 나이 라면…7살? 10살? 아무리 많이 잡아도 13살 정도는 될 것 같은데? 그러나 이런 내 예상은 깨끗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 올해로 21살이다. 그것도 남자 녀석이지. 가족부양의 책임을 질 수도 있고, 혼자 독립해서 살아가기에도 충분한 나이다 이 말이야. " " 헉? " " 키워준 어미는 부자였다. 낳아준 어미는 가난뱅이지. 아들은 선택해야만 했어. 욕심으로는 부자어미가 좋았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가난한 친 어미도 외면할 수 없었다. 녀석 역시 두 어미가 신전에 청원을 넣을 때 함께 자리했지. 그것이 '형벌'의 신전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야. 그 녀석은 두 어미가 모두 '형벌'을 받길 바랬어. 부자어미가 죽으면 유산이 돌아올 테고, 친 어미가 죽으면 귀찮은 일에서 해방이었으니까. 그걸 어떻게 생각해? " " ……. " 할말을 잊어버렸다. 뭐라고 말을 꺼내지도 못하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날 보며 엘뤼엔은 짓궂은 목소리로 한마디 뼈아픈 교훈 어린 충고를 덧붙였다. " 네가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하지만 기억해 둬. 인간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추악한 욕심덩어리다. 세상이 모두가 아름답지는 않다고들 하지? 바로 인간이란 존재가 그렇기 때문이야.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히려 마 족보다 인간을 더욱 혐오한다. 왜냐고? 마 족은 원체가 썩은 놈들이라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지만, 인간은 착한 척 하면서 뒤로 호박씨를 까거든. " " ……. "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는 내 스스로의 웃기지도 않은 정의감을 내세워 엘뤼엔의 판정에 항의 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보니, 멋대로 엘뤼엔을 원망하고 나쁜 놈이라 단정 지은 내가 몹시도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으으, 내가 미쳤나봐.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랬던 거지? 아무래도 지난 몇 일간 정령왕의 대접을 받고 나더니, 나도 모르게 우쭐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 틀림없다. 인간이 그리 아름답지 않은 생물이란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는데. 이제 무슨 얼굴로 엘뤼엔을 바라보냔 말이야~! 난 맞아도 싼 녀석이었잖아! 어쩌면 엘뤼엔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투가 거칠고 행동이 제 멋대로 이긴 해도, 나를 배려했기 때문에 저런 것도 설명을 해주었던 걸 테지. 멋대로 선입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려 한 건 확실히 내 실수였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진심 어린 마음을 담아 그에게 사과를 하고 용서를 빌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바로 그 직후에 이어진 엘뤼엔의 말을 듣기 전까진. " 아, 그리고 널 때린 이유도 설명해 달라고 했나? 그건 그냥 짜증나서 때렸다고 해두지. 나는 두 번 경고할 줄 모르는 녀석이거든. 그때도 말했지만 처음 경고 때 안들은 건 너니까 불만 없지? 그리고 말해두겠는데, 실체가 없다고 해서 죽지 않는 건 아니야. 신력으로 인한 공격은 정령계가 아니더라도 즉석에서 소멸시킬 수 있거든. 그러고 보니 아까 한 공격이 신력을 사용했던 거였나? 화가 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깜빡했네. 그래도 뭐…. 살. 았. 으. 니. 까. " " ……. " ' 역시 이 녀석은 성격이 나쁜 거였어! ' 벙쩌지는 일행들을 사이로 두고 아무 문제없지? 라고 말하는 듯 눈을 빛내는 엘뤼엔을 보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죽어도, 죽어도 잘못했단 말 하나봐라!!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0 회] 날 짜 2004-08-12 조회 / 추천 6196 / 96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 이이이익! 태도가 그게 뭐야, 태도가! 사람을 죽일 뻔했으면서 너무 능청스럽잖아! " 결국 나는 또다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재판 건은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끼어 든 실수라고 쳐! 하지만 나를 멋대로 죽이려고 했던 것만큼은 절대로 이해 못해! 네버!! 네가 신이면 다냐! 그러나 그 순간, 엉뚱하게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엘뤼엔에게 조금이라도 더 효과적으로 대항할 수 있을만한 방법 따위가 아니라, 저 멀리 정령계에 있을 트로웰의 반응이었다. ' 그 녀석. 분명히 지금 내 말을 들었으면 '어라? 넌 사람이 아니라 정령이잖아?' 라고 트집 잡았을 게 분명해. ' 참으로 대담하지 않은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긴장감을 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찌 저 위험한 엘뤼엔에게 대항을 해놓고서 딴 생각에 빠져들을 수가 있었단 말인가! 녀석이 생각보다 나쁜 녀석이 아니란 걸 알게 된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위험천만한 모험을 감행 한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부실한 대응의 결과로, 나는 당연한 듯이 이어지는 엘뤼엔의 가벼운 처벌을 면하지 못하고 말았으니. 따악- " 아얏!! " " 존. 대. 말. 하랬지. 한번 말하면 못 알아듣는 녀석이군. 아니면 그냥 말로 해서는 안 듣는 타입인가? 봐주는 건 아까 뿐이라고 말했을 텐데? 내가 왜 형벌의 신으로 선택되었는지 그 몸으로 직접 가르쳐 줄까? " 허거거걱. 전혀 표정이 없는 얼굴로 싸늘하게 노려보는 엘뤼엔의 눈빛은 정말이지 정면으로 마주 바라볼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나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하자,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그제 서야 입술 끝을 올려 보이는 엘뤼엔. 그러나 그 직후 능글맞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의 사람(?)들은 또다시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 흐음. 역시 마음에 든단 말이야? 어이, 아레히스. 이 녀석 나주면 안 돼나? " " 허거거걱? 무슨 소리를? " " 으음. 그것은 곤란합니다, 엘뤼엔님. 엘퀴네스님이 무슨 물건도 아니고. 거기다 영혼의 등급으로 따지자면 엄밀히 저보다 상급의 위치 신지라. 저한테 허락을 구하셔봤자…. " 안타깝다는 듯이 말끝을 흐리는 아레히스로 인해 가뜩이나 패닉으로 치달은 내 머리는 한계 직전까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 신들이 지금 순진한 정령왕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건가?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됐다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그러나 나는 이러한 속 터지는 상황에도 뭐라고 한마디 퍼부어 줄 수가 없었다. 울컥하는 심정에 막 따지고 들려는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엘뤼엔의 수행천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 든 것이다. " 엘뤼엔님. 그런 식의 발언은 좋지 않습니다. 엘퀴네스님이 오해하실 겁니다. " " 오해라니? " " 그러니까 예를 들면… 엘뤼엔님의 말씀은 자칫하면 일종의 구애라고 생각이 되는…." 그런 식으로 생각 안 했어!! 나를 대체 뭘 로 보는 거야! 정말이지 괘씸한 천사가 아닌가? 말려줄 생각은 안하고 오히려 상황을 더욱 최악으로 몰아넣다니 말이다. 그 바람에 엘뤼엔은 '그런가?'하며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어버렸고, 아레히스는 '그런 뜻인 게 아니었습니까? ' 하고 되물었으며, 이프리트는 ' 천사주제에 어딜 끼어드는 거야! 엘뤼엔에게 충고 하지 마!' 라고 외쳐서 나를 더욱 심란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딜 봐도 남신인 엘뤼엔이 역시나 어딜 봐도 남자의 모습을 한 내게 무슨 억하심정으로 사랑고백을 지껄이겠냔 말이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라면, 엘뤼엔이 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님은 생각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럼 뭐냐고? 뻔한 거 아니겠는가? 가지고 놀기 적당한 장난감 취급하는 거라고! 그러니 유라우스! '저도 그 심정 이해합니다' 라면서 고개 끄덕이지 말란 말이야! 너 날이 가면 갈수록 이상해지고 있다는 거 알아? 분한 마음에 방금 전까지 당했던 처벌도 잊고 다시 엘뤼엔을 노려보았다. " 당신 때문에 내 입장만 자꾸 곤란해지고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괴롭히기 좋게 생겼어…요? 왜 자꾸 나만 갖고 이러냐구…요!! " 훗. 어떠냐? 이 정도면 훌륭한 존대 말이지? 비록 아슬아슬한 끝말의 컨트롤이 좌우하기 했지만 어쨌든 반말은 아니었다. 그 점이 나쁘지는 않았는지, 엘뤼엔도 더 이상 내 말투에 꼬투리를 잡지는 않았고 말이다. 그 대신 그는 여전히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흠, 역시 이런 타입에게는 단도직입적인 표현이 어울리려나? " " 그런 것이 옳을 듯 합니다. 엘뤼엔님. 이제 다들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니 서두르시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만. " " 크아악!!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어? 돌아갈 시간이라니? " 천사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아레히스를 바라보았다.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라고 묻는 내 눈빛에 그는 그렇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이 이상 지체하시면 아크아돈에 무리가 갑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것이…. " " 하, 하지만 온지 얼마 안됐잖아요? 아직 제대로 된 용건도…. " 내가 여기로 온건 순전히 이프리트와 엘뤼엔의 묵은 감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였다고! 이런 식으로 죽어라 놀림만 당하고 씩씩거리기 위해서 온 게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그 뒤에 이어지는 유라우스의 말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 으음. 엘퀴네스님이 기절하시고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 " ……. " " 더불어 이프리트님의 용건 역시 모두 끝마쳐진 상태고, 다들 엘퀴네스님이 깨어나시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습니다. " " ……. " 세상에 이 보다 더욱 허무한 경우가 있을까? 밤을 새서라도 꼭 보고 싶었던 TV프로를, 방영하기 바로 10분전에 깜빡 잠이 들어 놓쳤다 하더라도 이보다 더욱 억울하고 서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정말 내가 기절한 그 잠깐 사이에 모든 상황이 종결지어졌단 말이야? 구원을 바라는 듯한 눈빛으로 잽싸게 이프리트를 쳐다봤지만 돌아온 결과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쑥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슬쩍 붉힌 녀석은 헛기침을 동반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던 것이다. 고백을 했는지, 아니면 끝까지 대판 싸웠는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이미 이프리트의 얼굴은 굉장히 홀가분한 상태. 말 그대로 자유인의 모습이 되어있었다. 그것을 목격한 내 심정이 다시 한번 무너졌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건, 이건~~! " 전부 다 당신 때문이야!!! " " 오, 그래. 결정했다. 너 내 아들 해라. " 홱 소리가 나도록 고개를 돌리며 무엄하게도 손가락질까지 한 나는 그대로 엘뤼엔에게 원망의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 놈의 성격 나쁜 신은 그런 와중에서도 전혀 엉뚱한 말을 꺼내놓아 내 복장을 또 다시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뭣이라? 뭘 하라고? 아들? 지금 당신 날더러 아들 하라고 그랬어?? 세상에 어떤 부자지간이 '너 내 아들해라' 그러면 '네'하고 대답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진단 말인가! 그것도 '할래?' 라고 물어보는 권유채도 아니다. 다짜고짜 '아들 해라' 라니! 이런 것도 명령으로 때울 수 있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아니, 그건 그렇다 쳐도…. " 갑자기 무슨 아들타령이야? " "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아들 하라고. 마침 자식도 가지고 싶었거든. " " 허거걱. 당신은 마음에 들면 무조건 아들로 삼고 보나 보지? 아이를 가지고 싶으면 결혼을 하면 될 것 아니야. 날 끼워 넣지 마. " 내 대답에 엘뤼엔 뿐만이 아니라, 저 멀리 나와 녀석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의 미간도 살며시 찌푸려졌다. 으음. 오늘 이러다 두 성격 나쁜 녀석들한테 고이 죽어 주는 건 아닐까 몰라. 어째 정령왕이 된 이후로 점점 상황이 나쁘게 돌아가는 것 같다면 내 착각 일까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엘뤼엔의 제안-강요라고 보는 쪽이 더 맞을 듯 하지만-은 너무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마음에 들었다는 것 도 믿을 수 없는 일이건만. 갑자기 아들이 되라니? 20 대 초반의 창창한 얼굴로 나처럼 다 큰 녀석을 아들로 삼고 싶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해? 더구나 나는 부자지간이란 것에 상당히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당연하다. 내게 있어서 언제나 아버지란 폭행을 밥 먹듯이 하고 저주의 말을 퍼붓길 주저하지 않는 철천지의 원수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한, 아마도 아버지란 존재는 영원히 그런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었다. 특히나 오늘은 잊고 있었던 기억까지 꿈으로 되살아나는 바람에 더욱 타이밍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엘뤼엔은 불만이 가득 찬 내 얼굴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 결혼이라…. 그건 내키지 않아. 난 아들을 갖고 싶을 뿐이지, 아내가 필요한 게 아니니까. " " …정상적인 가정에는 항상 여자와 남자가 주축을 이루는 법이라고. 그리고 다른 녀석들도 많잖아. 왜 하필이면 나야? " 어느새 나는 엘뤼엔에게 존대 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다시 반말 체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아니면 그 역시 못 느끼고 있는 건지 엘뤼엔은 이전처럼 처벌을 내리지 않고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 웃기만 하는 거였다. " 마음에 들었다고 했잖아?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필요하나? 그리고 정상적인 가정이란 것은 인간들에게나 존재하는 범위다. 그런 것에 내가 맞춰갈 필요는 없어. " "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아들을 하라니, 납득을 못 하겠다고. " 불만스러운 듯이 투덜거리자 엘뤼엔은 다시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의외로 이런 것에는 끈질김을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성질대로라면 벌써 날려버리고 ' 하라면, 해!'라고 외칠 것만 같았는데 말이다. " 갑자기는 아니야. 널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 " 누, 누구 맘대로? " " 그야 내 맘이지. 너에게도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절대적인 아군을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 이, 이런 뻔뻔스러운 것을 보았나! 너는 처음 보자마자 '아들로 삼아야 겠다' 생각한 녀석을 단순히 짜증난다는 이유로 패서 기절시킬 수 있는 거냐?!! 이런 녀석이 아버지가 되면 분명히 돌아올 결과는 뻔할 뻔 자였다. 도대체 과거의 아버지와 녀석의 다른 점이 뭐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단숨에 고개를 가로 저었다. " 거절할래. 아군은 별로 필요하지도 않고, 아버지란 존재가 절대적인 아군이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어. " " 그래? 그럼 지금 네가 나한테 반말하는 것에 대한 처분을 내려도 상관없겠군. " " ……. " 싸악. 핏기가 모두 얼굴에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드니, 존대 말을 하라며 경고를 줬던 때의 서늘한 엘뤼엔의 눈빛이 정면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손에는 어느새 만들었는지 둥그런 모양의 빛 덩이가 살포시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다. 바보가 아니라 면 야 저것이 나를 기절시켰을 때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신력'이란 것을 눈치 체지 못할 리가 없잖은가! 치사하다!! 라는 무언의 항쟁을 담은 눈빛으로 떨떠름하게 노려보자, 엘뤼엔은 능청맞은 표정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 아들이 되었을 때의 첫 번째 혜택. 반말을 해도 용서해 준다. 어때? 지금의 너에게 굉장히 필요한 조건이 아닐까? " " ……. " 비겁한 놈. 놈의 잔머리와 그것을 능가하는 사악성에는 정말이지 감당할 수단이 없었다. 아들이 안되면 죽이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결국 나는 암담한 미래와 불행한 현재의 처지.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억지로 정리하며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뻐하는 천사와 흥미진진한 아레히스. 감탄하는 유라우스와 깔깔거리는 이프리트 따위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 그대로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 할게. 한다고!! 하면 되잖아!!!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버. 지.! 젠장!! " 발악을 하듯이 소리 지르는 나를 만족스러운 눈길로 바라본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그런 행동에 어쩐지 자상함이 배여 있었던 같이 느꼈다면 나만의 착각이겠지? 이상 하리 만치 부드럽게 대답하는 엘뤼엔의 목소리도 역시 착각이길 바란다. 급조로 만들어진 아버지 따위에 기대고 싶어지길 바라지 않으니까. "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들아.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1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814 / 41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그 이후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갔는지 모르겠다. 거의 반 협박이긴 했지만 어쨌든 엘뤼엔의 아들로 낙점 받고 난 이후,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며 아레히스가 정신없이 나를 신계에서 이끌어 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엘뤼엔의 입에서 흘러나온 ' 아들아 ' 라는 소리에 이상하게 목이 매인 나는 가빠오는 숨을 진정시키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고, 유라우스의 '저에게 맡겨주십시오'라는 말이 들린다 싶자 어느새 정령계로 돌아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주변은 보석으로 도배된 꽃밭과 향기로운 바람, 부유하는 정령떼들이 활개치고 있는 정령계의 황금정원-'에바스에덴' 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광경이 무척 낯익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자, 이번에는 방금 전까지 신계에 있었던 일이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뭐랄까. 무척이나 달콤하면서도 가슴 아픈. 복잡한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랄까? 가슴이 어째 뻥 뚫린 것처럼 허전한 것이.. 무언가 말 못할 미련을 가득 담고 돌아온 것만 같아 기분이 영 찝찝하다. 이건 혹시나 차원 간에 벌어지는 시차적응이 안돼서 일어나는 현상 일까나? 바로 옆에 유라우스나 이프리트가 서있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신계에서의 일을 한 낯의 낮잠정도로 치부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어라? 그러고 보니 아레히스는? " 분명 신계에서 나온 사람은 나를 비롯해서 4명이었는데, 도착한 것은 3명뿐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유라우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 기억 안 나십니까? 그 분은 곧 바로 명계로 직행하셨습니다. 가시면서 인사도 하셨잖아요? " " 그, 그랬던가? " " 그랬어. 멍청하게 그것도 못 듣고 뭐하고 있었던 거야? 아니, 그것보다 말이야. 나 한 가지 결심했어! " " ……? " 그건 또 무슨 소리래? 거창하게 웬 결심씩이나. 얼마나 또 대단한 각오인가 싶어 나는 자세까지 바로 하며 이프리트의 이어질 말을 기대했다. 지금 상황에서야 이프리트가 각오할 것이라 한다면 엘뤼엔과 관계된 것 밖에 더 있겠는가. 기절하는 바람에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는 나로서는 앞으로의 이프리트가 걸어갈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나 …누누히 말하지만 세상은 그다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당당하게 화색이 만연한 얼굴로 나를 가리킨 이프리트는 이렇게 외쳤던 것이다. " 나 말이야~ 네 엄마가 될 거야! " " ……. " 역시 신은 내 편이 아니었어! 그렇지 않아도 엘뤼엔의 '아버지선언' 때문에 받은 쇼크가 아직 제대로 풀려지지도 않는 상태였다. 그런 와중에 이번엔 또 뭐? 엄~마아? 니들 전부 쌍으로 날 놀리려고 작정한 거지? 엉? 그렇지 않다면 절대 이럴 순 없음이야. 이럴 순 없음이라고! 패닉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한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샐쭉하게 입을 내밀었다. " 목표가 그렇단 거야, 어디까지나. 넌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엘뤼엔의 아들이니까. 엘뤼엔과 결혼하려면 너라는 아들을 감수해야 한다는 거라고. 그걸 미리 각오하겠다는데 그렇게 경악할 필요는 없잖아? " " …후우,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녀석의 제안을 거절했어야 했는데. 그깟 죽음이 뭐가 대수라고 겁먹어 가지곤 냉큼 아들이 돼버렸는지…. 내가 생각해도 충분히 한심하니까 이제 농담은 그만해. 그보다 내가 기절한 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너… 엘뤼엔에게 제대로 고백은 한 거야? " 나의 푸념 섞인 한탄을 들은 이프리트는 뭐라고 반박하려는 듯 입술을 들썩였다가 그 후로 이어지는 질문에 뚝하고 다물었다. 오호라 설마 묵비권을 행사하시겠다? 이거 왜 이러셔~ 알 거 모를 거 서로 다 아는 처지에, 그렇게 튕긴다고 내가 포기할 줄 알아?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 왜? 엘뤼엔이 너 싫대? " " 무, 무슨 소리야? " " 대답을 안 하니까 궁금해서 이러는 거잖아. 계속 수행천사만 노려보면서 질투하는 것도 그렇고, 내 엄마가 되기를 목. 표. 로 한다니…. 일이 제대로 안 풀린 게 아니고 뭐겠어? 솔직히 말해봐. 고백도 안하고 보자마자 싸움만 했던 건 아니야? " " 으~~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네가 멍청하게 엘뤼엔한테 맞아서 기절했기 때문이잖아!! " 억울하다는 듯이 날카롭게 소리 지르는 이프리트의 반응에 이번엔 내 쪽이 당황하고 말았다. 허걱. 설마 정말로 싸웠던 거야? 그것도 나 때문에? 불안한 표정으로 유라우스를 바라보자 그는 난처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말씀드렸잖습니까. 엘퀴네스님이 기절하신 직후, 이프리트님과 아레히스님이 엘뤼엔님께 공격을 감행했다고. " " 헉, 맞다. 그랬었지…. " 그래. 그러고 보니 그랬었다. 그때 열 받은 이프리트가 불의 검을 소환해서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엘뤼엔의 집무실 안이 엉망이 되어버렸었다고. 사실 그것은 날 위해서라기보다는 수행천사에 대한 질투의 의미가 더 강한 난동이긴 했지만, 어찌됐든 그 모든 일의 원인은 다름 아닌 나인 것이다. 내가 기절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그때 제멋대로 안으로 뛰쳐 들어가 엘뤼엔에게 항의만 하지 않았어도, 엘뤼엔과 이프리트는 훨씬 더 원활한 재회를 이루었을 것 아니겠는가? 찔끔한 표정으로 이프리트의 눈치를 보는 내게 유라우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 바람에 엘뤼엔님이 폭발해 버리셔서… 이프리트님과 계속 다투셨죠. 결국 ' 왜 왔냐 ' 는 엘뤼엔님의 질문에 이프리트님이 순간적으로 ' 보고 싶어서 '라고 대답하시는 바람에 상황이 종결되었지만… " " 유라우스! 그건!! " " 호오오…. " 뭐야? 그럼 결국은 어떻게든 고백은 전해졌다는 소리잖아? 이게 바로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걸까? 만약 고백도 못하고 싸우기만 했던 거면 나는 정말 천하의 죽일 놈보다 못한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친구의 사랑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방해만 해버린 꼴이니까.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 잘된 거 아니야? 이프리트 네 성격상, 진지한 분위기에서 제대로 된 고백은 닭살 돋아 못했을 것 같으니까 말이야. 오히려 그런 식으로 티격태격하는 중에 얼떨결에 흘러나오는 고백이 상대방에게 더 큰 타격을 입히는 법이라고. 엘뤼엔도 많이 놀랐겠네? " " 글쎄에? 놀라기나 했을려나? 그 녀석 말이야. 아주 당연한 듯이 '정령왕 수료나 끝낸 뒤에 찾아와' 라는 거야, 글쎄!! 여신이 되기 전엔 상대도 안 해주겠다 이거지. 어째 신이 된 이후로 성격이 능글맞아 졌다니까? 아아, 정말 기분 나빴다고. " 흐음? 그래도 어째 그 정도 대답이면 많이 신경 써준 것 같은데? '여신이 된 이후'에는 연인으로서 바라볼 생각이 있다는 뜻이잖아. 아닌가?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기쁜 기색을 비추는 이프리트의 모습을 보자니 내 생각이 아주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엘뤼엔은 의외로(?) 신계에서 인기가 좋아서 그와 교제하려는 여신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어지는 애정공세에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 꺼져 ' 를 연발해 오던 녀석이 이프리트에게만은 ' 더 커서 와라 ' 라는, 그야말로 희망적인 답변을 내주었다는 소리였다. 그 이야길 아레히스로부터 전해들은 이프리트가 얼마나 기뻐했을 지는 대충 상상이 가지 않겠는가? 엘뤼엔도 물의 정령왕 시절, 은근히 이프리트에게 마음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 후우. 그럼 그냥 나중에 너랑 결혼해서 아이를 가지면 될 것을, 왜 갑자기 날 아들로 삼겠다고 하는 건지, 원. " 단순히 가지고 노는 것이라 보기에는 엘뤼엔의 마지막 표정이 너무도 마음에 걸렸다. 내가 녀석의 아들이 되겠다고 체념했을 때, 엘뤼엔은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기쁜 표정을 지어 보였던 것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나는 그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져 온 것이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상태였고 말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연달아 한숨을 쉬는 나를 보며 이프리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 글쎄. 내가 생각하기에는 말이야. 엘뤼엔에게 너란 존재는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 " " ……하아? " " 흐음. 같은 물의 정령왕이라서 뭔가 통하는 거라도 있는가 보지. 신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 속성이 전부 변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자연의 4대 속성은 모든 인성의 기본을 이루거든. 그래서 너에게 더 정감을 느끼는 걸지도 몰라. " " 흐음…. " 정말 같은 물의 정령왕이라 호감이 있다는 걸까? 겨우 그런 걸로 상대방에게 호의를 보이기엔 엘뤼엔의 성격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뭐, 얼떨결에 성립된 부자관계라고 해도, 앞으로 엘뤼엔과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테니 크게 상관은 없겠지. 애초부터 아레히스는 신계로의 차원 이동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경고했었다. 엘뤼엔이 찾아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우연히 라도 우리가 다시 만날 확률은 0%가 된다는 소리다. 녀석이 나를 만나기 위해 귀찮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차원이동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안 되고, 또한 그러고 싶어도 상급신의 일이 워낙 많기 때문에 자리에서 꼼짝도 못할 것이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엘뤼엔과의 악연은 이것으로 끝이란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오히려 아쉬워지는 건 왜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찝찝한 여운이 감정 끄트머리를 집요하게 잡은 채 놔주지를 않았다. 나 설마 엘뤼엔이랑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는 거 아닐까? 으악. 말도 안 돼!! 그 때였다. 정리가 안 되는 복잡한 감정에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드는 내게 유라우스가 비장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 " 뭐, 뭔 데요? " “ 어째서 엘퀴네스님이 엘뤼엔님의 '아들'이 되는 겁니까? 정령은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성이잖아요? 그럼 굳이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고 해도 될 텐데 말입니다. " " 아, 하지만… 딸 쪽은 좀 이상…. " " 왜요? 엘퀴네스님은 상당히 중성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성의 이미지가 더 강한걸요? 오히려 아들이라고 하면 다들 고개를 갸웃할 것 같은데.. " " ……. " 내가…여성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고? 그거 한마디로 여자같이 생겼다는 소리? 커헉. 말도 안 돼! 이프리트는 아무리 봐도 남자같이 생겼다고 그랬단 말이야!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이프리트를 돌아보자, 녀석은 뻘줌한 표정이 되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아주 여자같이 생긴 건 아니야. 엄청 예쁘장한 남자아이 같달까….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여자로 보일 수도 있는 거지 뭐, 으으음. " " 이프리트!! " " 에잇! 정령한테 성별을 따지는 저 놈이 더 웃긴 거야! 남자든 여자든 생긴 게 뭐가 중요해? 어쨌든 나한텐 남자 녀석으로 보이니까 그렇게 알고 살아! 유희 다닐 때 양 쪽 성별을 다 사겨 볼 수도 있으니 오히려 좋지 뭘 그래! " "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 양 쪽 성별을 다 사귀어 보라니… 날더러 변태가 되라는 건가? 허망한 얼굴로 되묻는 내게 이프리트는 '양성'을 가졌다는 드래곤까지 예로 들어가며 새로운 시각의 연애론을 장장 1시간동안 펼쳐놓았다. 오래 살아가는 종족일수록 한 성별에만 매여 있는 건 좋지 않다나, 어쨌다나. 오히려 신선하게 살아가기로 치자면 중성적인 내 모습이 딱 좋다는 것이다. 정령이 누군가와 사귄다는 것 자체도 기가 막히는 일이었지만, 오랜 시간의 설명을 듣자니 점점 설득이 되어 가는 나를 보며 어쩐지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나 이러다 정말 이프리트 말에 홀라당 넘어가 어느 세월엔가 남자 녀석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어있는 게 아닐까?-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넘어가고 있다는 증거다-그러나 그런 혼란한 생각은 갑자기 등장한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 기각. 이 녀석은 내 '아들'이야. 앞으로 남자로 안보는 놈들은 다 죽여 버린다. " " !!! " 도대체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내 뒤에 서서 태연한 자세로 모든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엘뤼엔이 한마디 내뱉은 것이다. " 엘뤼엔? 네가 여긴 어떻게??!!! " 숨도 못 쉴 정도로 놀라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며 엘뤼엔은 가볍게 미소를 그렸다. " 무정한 아들놈이 인사도 제대로 안하고 돌아가서 말이야. 교육 좀 시켜주려고 왔지. " " 허걱. 그, 그건 아레히스가 멋대로 끌고 간 건데…. " " ' 핑계 없는 무덤 없다. ' 익숙한 속담이지? 자아~ 아들아, 우리 진지한 대화를 나눠볼까? " " 크어어. "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은 엘뤼엔은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신력으로 만든 몽둥이를 생성시켰다. 이 나쁜 놈! 할 짓이 없어서 신력으로 몽둥이 따위나 만들다니! 아들은 패려고 만들었던 거냐? 엘뤼엔이 무기(?)를 꺼내자, 이번에는 내가 맞는 것을 볼 수가 없다는 듯, 유라우스가 냉큼 내 앞을 감싸며 막아섰다. " 안 됩니다, 엘뤼엔님! 차라리 저를 치십시오!! " 오오오! 이 얼마나 투철한 희생정신이란 말인가.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자 얼굴이 붉어진 유라우스가 짐짓 쑥스러운 듯이 헛기침을 했다. 자기가 무슨 위험에 빠진 공주를 구해주는 기사라도 되는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신은 유라우스가 그 이상의 폼을 잡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여기서의 신은 그 이름도 위대한 엘뤼엔을 뜻했던 것이다. "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너한테 사용하려고 꺼낸 것이다. 걱정하지 말아. " " ……에? " " 여자같이 생겼다고 말해서 내 아들에게 혼란을 줬지? 자아~ 나는 본분을 잊지 않는 신이라서 말이야. 형벌… 개시해 볼까나? " " 허어어어억! " 그 날, 에바스 에덴에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괴 생명체의 비명이 한동안 정령계를 메아리쳤다고 한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2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630 / 39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 헤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 그 뒤, 엘뤼엔은 '위험인자'는 절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며 일장 연설을 펼친 다음, 유라우스를 끌고 신계로 돌아갔다. 아마도 가는 길에 적당한 자리에다 녀석을 떨구고 갈 생각인 모양이었다. (정확히는 버리는 거지만.) 엘뤼엔이 가버리자 이프리트도 피곤하다며 불의 영역으로 들어갔고,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은 정원에는 정령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어버렸는지 나 혼자만이 적막한 상태로 덩 그라니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정말로 반갑게도, 우연히 정원으로 나오던 두 명의 정령왕, 트로웰과 미네르바를 조우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디에 갔었던 거냐며 울기 직전까지 되어버린 트로웰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제 서야 우리들의 외출을 다른 정령왕들에게 한마디 언질조차 건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프리트와 싸운 걸 사과하려고 갔다가 얼떨결에 신계까지 쳐들어간 거였으니, 말 할 시간조차 없었다는 표현이 옳았지만. 화해하러 간다는 녀석이 갑자기 행방이 묘연해져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해 했겠는가? 거기다 이프리트까지 더불어 사라진 다음에야 두 정령왕의 근심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필사적으로 사과하며 이제껏 있었던 신계에서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었다. 흥미진진하게 듣던 두 정령왕은 내가 엘뤼엔의 아들이 되 버렸다는 대목에서 황당한 표정을 감추질 못했으나 결국은 어떻게든 납득하는 듯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트로웰의 반응이란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으니…. " 잘됐다. 지훈. 아버지가 생겼잖아? 엘뤼엔이라면 예전부터 자기 것에는 지극히 호의적이었으니까 너에게 도 잘 해줄 거야. " " 자기 것이라니? 내가 엘뤼엔 거라는 거야? " " 자식은 기본적으로 그 부모의 소유잖아? 하지만 정말 의외였어. 정령왕이 죽어서 신이 된다니 말이야. 그것도 다름 아닌 상급신이라니…가만? 그럼 지금 여기 아크아돈을 책임지고 있는 상급신도 예전엔 정령왕이었단 소리네? " " 그렇군. 어쩐지 유달리 정령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다 했지. 흐음. 그나저나 나야말로 의외인걸. 이프리트가 정말로 엘뤼엔을 좋아했었다니… " 정령왕들에게는 이름이란 것이 특별히 중요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전 엘퀴네스의 이름이 '엘뤼엔'으로 바뀌었다고 하자 바로 거부감 없이 엘뤼엔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을 보니 말이다. 하긴, 정령왕들의 이름은 직위에 대한 호칭이지, 정확한 이름이 아니라고 했었던가? 나는 미네르바의 중얼거리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얼굴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 정말 눈치 못 챈 거야? 마음을 읽을 수 있는데도? " " 말했잖아. 같은 정령왕끼리는 능력이 통하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숨기고 있는 감정은 읽히지 않아. 이프리트는 자존심이 강해서 약점이 될만한 마음은 한 톨도 허용하지 않거든. 겉과 속이 반대인 모순적인 행동에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로서는 그냥 겉모습만 보고는 알아채기가 쉽지 않아. 그런 의미에서 지훈, 넌 정말 대단한 거야. " " 하하. 뭘 그 정도 가지고…. " 사실 나도 의심만 있었지 확신이 있던 건 아니었다. 어쩌다 밀어붙이다 보니 고백을 받아낸 꼴이랄까? 어색한 웃음으로 맞받아치자 미네르바가 조용히 대답했다. " 그렇지 않아. 우리는 의심을 가진다 해도 '그럴 리가 없다'고 치부해 버리고 말거든. 지훈 처럼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려 하지 않지. 그래서 낭패를 보는 경우도 많아. " " 킥킥. 맞아, 미네르바. 너 그때 인간과 계약했을 때 실수했었던 적 있었지? " 여간해서는 표정을 거의 짓지 않는 미네르바가 트로웰의 장난스런 말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대체 어떤 실수이기에? 궁금한 눈으로 재촉하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 지금은 죽었지만, 한때 미네르바의 계약자가 인간이었는데 말이야. 그 녀석이 속으로 어떤 백작가의 여자를 좋아하고 있었거든. 그 여자도 계약자에게 매달리는 상태여서 잘만 하면 둘이 사랑하게 되는 것도 시간문제였지. 근데 이놈이 워낙에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라, 겉으로는 여자를 굉장히 싫어하는 척을 했다는 거야. 그리고는 멍청하게도 미네르바한테 부탁까지 하면서 '귀찮으니까 제발 저 여자 좀 죽여줘' 라고 말한 거지. " " 헉? " " 미네르바는 그 백작영애가 계약자에게 항상 편지를 건넨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리고 그것을 볼 때마다 투덜거렸던 계약자도 알고 있었지. 어지간히 귀찮았나 보다 생각하고 큰 선심을 써서 여자를 죽여줬던 거야. 근데 알고 보니 그 계약자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말하면 미네르바가 '그래선 안 된다. 그녀의 사랑을 받아줘라' 라고 할 줄 알았다나봐. 그럼 위대한 존재의 권유를 못 이겨서라도 그녀와 결혼하려고 했던 거지. " " ……. " 기가 막힌 놈이 아닌가? 사랑하는 여자를 받아들일 용기도 없어서 남의 힘을 빌리려 하다니 말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애매한 웃음만 흘리는 내게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한심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 웃기는 녀석 아니야? 그런 주제에 정말로 그녀를 죽이고 돌아온 미네르바에게 온갖 저주란 저주는 다 퍼부었어. 자신들 인간과 정령왕의 사고방식이 사소한대서 틀어질 수도 있다는 걸 생각지도 못하던 녀석이었지. 그 이후로 사람들에게 '바람의 정령왕'은 잔 학 무도하고 냉정한 정령이라고 알려져 버렸다고. 미네르바로선 정말 억울한 일이지. " " 그런 녀석을 그냥 놔뒀어? " " 물론 계약이 파기됐지. 녀석은 한순간에 가장 강력한 무기를 잃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명예를 잃은 거야. 죽을 때까지 폐인이 되어 미친 듯이 거리를 돌아다녔어. " 그러나 그 순간마저도 미네르바는 어째서 인간이 자신을 원망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원하던 소원을 들어주었는데 왜 화를 내는지 말이다. 모순이란 감정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한눈에 분별 해 낼만큼 익숙해져 있는 상태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을 살았어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며 미네르바는 어색하게 변명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언급하는 게 싫은지 은근슬쩍 다른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 그나저나 엘뤼엔의 성격도 많이 변했군. 이곳에 있었을 땐 무엇에도 관심이 없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분위기만 풍기더니…. " " 후후. 다행이잖아? 지훈에게 아버지가 생겼다고. 좋은 게 좋은 거지 뭘 그래~ " " 에? 왜 나한테 아버지가 생긴 게 좋은 일이 되는 건데? " 별로 아버지 따윈 필요 없었단 말이다! 오히려 귀찮다고. 샐쭉한 표정으로 트로웰의 말을 받자,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이런, 그 의미를 모르겠어, 지훈? 엘뤼엔이 너에게 굳이 아버지라는 형식이 되어 관계를 맺은 이유 말이야. " " ……? " 의미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엘뤼엔은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들어 아들로 삼고 싶다고 했다. 그것 외에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마주보자 이번엔 미네르바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네가 인간의 입장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야. " " 엉 ? " "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경험이 인간생활이었기 때문이었는지, 너는 정령왕의 본능을 상당수 스스로 억누르는 경향이 있어.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지만, 앞으로도 인간의 입장으로 다른 것을 판단하게 될 거야. 아크아돈엔 여러 가지 종족이 있어. 엘프와 인간과 드래곤, 드워프와 수많은 몬스터들이지. 그 종족끼리 전쟁이 벌어졌을 때, 너는 너도 모르게 인간의 편에 서게 되고 말걸? " " 그, 그럴지도? " 확실히 인간과 몬스터가 싸운다면 인간의 편을 들어 몬스터를 없애줄지도 모르겠다. 설마..그러면 안 되는 걸까? 긴장한 시선으로 두 정령왕을 바라보자 트로웰이 따뜻한 눈빛으로 미소를 그렸다. "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너무 지나친 건 좋지 않지만,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인간 세상에 꼭 중립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도 없으니까. 하지만 너의 경우는 인간세상을 너무 동경하게 되어 정령왕의 세월을 무료하게 여길 가능성이 있어. 지금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못 느끼고 있을 뿐, 100년만 지나가도 적응하기 힘들어 질 거야. 특히나 아끼던 사람이 죽었을 때, 그 허망감을 배로 느끼게 되겠지. " " ……. " 내가 좋아하던 사람이 나보다 먼저 죽는다. 나보다 어렸던 아이가 어느 샌가 할아버지가 되어 병들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지금의 모습 그대로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나… 지금의 처지를 너무 낙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보다 훨씬 살아간다는 것이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 " 맞아. 서서히 본능이 깨어날수록 그 상태가 약해지겠지만, 네 전생의 기억이 남아있는 한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는 거야. 정령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가족의 존재를 동경하게 될지도 모르지. 동료는 우리들이 있으니 상관없고, 연인도 만들 수 있겠지만, 가족은 힘들잖아. 특히,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는 말이야. " " …!!… " “ 나나 다른 정령왕들은 처음부터 부모에 대한 개념이 없어. 우리가 나중에 신이 되어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내세를 경험하면서 누군가의 아이가 되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도 하나의 유희로 밖에 인식을 못하겠지. 어차피 인간들과 우리는 처음부터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이미 독자적인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정령보다 '인간'의 개념을 먼저 이해했어. 아마 그리워하게 될 거야. " " 그…렇지 않아. 나… 예전에도 부모님하고는 좋은 기억도 없었고…. " " 하지만 부모란 것이 아이에게 어떤 의미라는 것은 알고 있겠지? '절대적인 아군' 이라고들 하잖아? 행복한 가족을 볼 때마다 지난날의 부모를 떠올리게 되겠지. '나에게도 저런 부모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그 사람들이 저런 부모였다면 행복했을 텐데…'하고 말이야. 그건 정령에게는 있을 수 없는 감정이야. " " ……. " 날카롭게 벼린 칼로 심장을 내려 꽂을 때의 기분이 이럴까? 사정없이 후벼지는 듯한 따끔한 통증을 느끼며 나는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본 트로웰은 한숨을 쉬며 다음 말을 이었다. " 이를테면 다른 정령왕들이 가볍게 인식해버리는 것을, 너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 다는 거야. 아마 그것 때문에 가장 정이 많고, 가장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령왕이 되겠지. '지훈'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한 그건 신이 돼서도 변하지 않을 거야. 나쁘지 않아. 정말 나쁘지 않은데… 네 스스로 상처를 만들까봐 걱정스러운 거야. 우리들은. " " …….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3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610 / 38 선작수 2592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새로운 시작 그런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었다. 과거의 내가 인간이었던 간에 지금의 나는 정령이고, 다시 태어남으로 인해서 지난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다른 녀석들의 눈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나는 이제껏 인간 세상에 연연해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는데? 설마…내가 능력의 자각이 느렸기 때문에? " 기뻐했기 때문이야. " " 응? "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들자 트로웰이 자상하게 미소 지었다. " 엘뤼엔이 네 아버지가 됐다고 말했을 때 네 감정이 말이야… 두근두근하고… 굉장히 기쁘게 울렸거든. 네가 태어나고 나서 이제껏 그런 기분 좋은 울림을 느낀 적이 없었어. 그래서 알았어. '아, 지훈은 부모를 가지고 싶었던 거구나.' 하고…." " ……! " " 그리고 또 알았지. 엘뤼엔 역시 이런 너를 알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되고자 했던 것이란 걸. 아마 너를 처음 봤을 때부터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언인지 깨달았을 거야, 엘뤼엔은. " " ……때려서 기절시켰는데도? " 조심스런 나의 의문에 트로웰도 한순간 말이 막혔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것만큼은 그 자신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언가 홀가분하다는 표정으로 트로웰은 어렵지 않게 그 대답을 내놓았다. " 엘뤼엔은 괴팍하니까. 아마 시험해 보려던 것이었을걸? " " 시험? " " 네가 자신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는지 말이야. 신력에 의한 타격은 아무리 정령왕 이라지만 굉장히 위험 하다고.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기절하고도 너… 엘뤼엔에게 전혀 기죽지 않았었지? 오히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 이런 심정 아니었어? " " 그, 그랬었던 것 같아. " 얼떨떨한 나의 대답에 트로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키득키득하고 웃었다. " 그게 마음에 들었던 걸 거야. 고분고분하기만 하는 타입은 엘뤼엔이 금방 싫증내거든. 아마 누군가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도 너처럼 키울 자신이 없었을 거야. 엘뤼엔에게 육아라니…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아마 때려서 성격을 아주 버려 놓던가. 기죽게 만들어서 소심하게 만들던가. 둘 중 하나밖에 안될걸? 그런 점에서 지훈 너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알고, 적당히 반항할 줄 알고, 적당히 정을 주기도 하니 완벽했던 거지. " " ……. " 여기서 납득이 된다는 게 더 무서운 점이다. 나쁜 놈. 그거야말로 정말 장난감 취급이잖아? 하지만 그런 식의 호의도 평소의 엘뤼엔에게는 정말로 어림없는 일이라고 하니 나로서는 정말 대단한 행운을 잡게 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비록 전혀 내키지 않는 행운이었지만. " 받아들이도록 해.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훈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그것이 우리들 다른 정령왕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료, 혹은 친구로서 서로의 갈 길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한 자리에서 너를 지켜봐 준다는 거니까… 외로움을 잘 타는 지훈에겐 가장 커다란 의지가 될 거야. " " 으음…. " " 엘뤼엔은 일단 자신의 것이라고 정해놓은 것에는 한없이 자상한 면이 있었어. 예전에도 물의 정령들에게는 어떠한 해코지도 하지 않았지. 절대적인 그들의 방어책이 되 주는 거야. 너는 아들이니까… 그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못하지는 않을 걸? 그 증거로 너를 '아들'로 인정했잖아? 딸로 칭할 수도 있는데도 굳이 아들이라고 한 것은, 네가 '남자'라는 자각이 강하기 때문이야. 네가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는 이상, 엘뤼엔은 너의 의견을 언제까지나 존중해 줄 것이 틀림없어." " 쿨럭… 그, 그런 가…? " " 그래. 네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던, 무슨 사건에 부딪치던 엘뤼엔은 절대로 너를 외면하지 않을 거야. 그건 네게 큰 힘이 되어…네가 정령생활을 못 견디게 힘들어할 때도 가장 큰 의지처가 되어주겠지. 그리고 나중에는 '지훈'이었던 시절을 잊어버릴 만큼, 새로운 시작에 익숙하게 만들어 줄 거야. " " ……!! " 새로운 시작이라. 정령으로 태어나게 된 지금도 충분히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아직도 해결해야 할게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확실히 트로웰의 말은 옳았다. 아마도 나는 정령으로 살면서도 끊임없이 인간들의 생활에 간섭하게 될 테고. 그들의 모습을 동경하게 될 테지. 나보다 어린 사람이 먼저 나이 들어 죽는 것에 큰 충격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게 될 이는 아버지인 '엘뤼엔'이 될 것이었다. 나의 절대적인 아군이 되어주겠다는 약속 하나로… 한없이 의지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싶어지게 될 테니까. 과연 정말로 녀석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했다. 그것은 트로웰이나 미네르바. 이프리트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존재가 있는 이상, 그것만으로도 나는 얼마든지 힘든 일을 털고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 부탁이 있는데… " " 뭔데? " " ……? " 똑같은 눈빛으로 의아하게 바라보는 두 정령왕을 보자니 괜시리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하면 오히려 천벌 받을 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방금 떠오른 제안을 조심스럽게 내보았다. " 내 이름말이야… 다시 엘퀴네스로 불러줄래? " " 어? " " ……? " " 지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면, 어쩐지 계속 과거에 얽매여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너희들의 동료로서, 하나의 정령왕으로서 다시 나의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 " ……!! " " ……. " 엘퀴네스란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전에 사용했던 ' 지훈 ' 이란 이름을 고집했었다. 하지만 이프리트는 '자각을 위해서'란 명목으로 '엘퀴네스'란 이름으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름대로 이프리트만의 애정표현일지도 몰랐다.' 수긍 ' 해줌으로서 나의 마음을 배려해준 트로웰과 미네르바와는 또 다른…' 강요' 라는 이름의 진실을 알리는 애정. 투덜거리며 심통만 부렸지만 본심은 나의 인간으로 살았었다는 기억을 지워주고 싶었던 걸지도. 그래서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정한 '시작'을 위해서 과거의 나를 벗어 보겠다고. 뭐, 사실 서양사람 얼굴에 '지훈'이란 이름이 어울리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런 내 감정을 알아챈 건지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미네르바는 피식 웃으며 언제나 그렇듯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어렵지 않아. 엘퀴네스.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한 걸? " " 헤헤…. " " 아아, 맞아 이건 어때? 애칭으로 엘퀴네스를 줄여서 '엘'이라고 부르는 거야. 귀엽겠다~ " " 쿠, 쿨럭. 귀엽다니…트로웰…. " 귀여운 건 오히려 네 쪽이라고~! 붉어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자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하하 웃었다. 난데없는 정령왕들의 웃음소리에 저 멀리 꽃잎에 누워 잠들어 있던 수많은 실프들이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공중에 떠다니는 자그마한 불씨들은 불의 하급정령인 카사들이었다. 나비의 모양을 한 카사는 저들끼리 춤을 추며 밤하늘에 별빛보다 아름다운 무늬의 수를 놓았다. 언젠간 이 모든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될 때가 오겠지. 그리고 그때에 난 더 이상 외롭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얼마든지 나를 아찔한 행복 속으로 밀어 넣는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는 동료들과, 부하(?)들. 그리고 아직은 어색한… 사랑을 주는 이름, 아버지. " 탄생을 다시 한번 축하해. 엘. 정령계로 온 것을 환영할게.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4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917 / 37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트로웰로부터 '엘'이라는 애칭을 받은 이후, 내 일상은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크아돈의 지연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격적인 복구 작업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그 동안은 능력 자각이 안 되었단 이유로 수업에만 전념했던 나도, 그 날부터는 다른 정령왕들과 함께 인간세상으로 나가게 되었다. 뭐, 그렇다 해도 사람들은 나를 알아보지도, 옆에 있는지도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에 별다른 재미는 없었지만 말이다. 전에 유라우스에게 들었던 바대로, 정령이 그 모습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건 정령 계뿐이었고, 인간 세상에는 '소환'되어 '계약'을 맺지 않는 이상은 그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곳에선 정령계에서 발휘할 수 있는 힘의 1/3밖에 낼 수 없었기 때문에, 처음 인간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노곤해지는 몸과 무거워진 팔 다리에 적응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둥 둥 떠다니는 가벼운 공기에 갑자기 중력이 가해지는 기분이랄까?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적응한 나는 다시 정령계에 있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었다. 바다의 모든 정화작업과 폭풍우를 불러오는 작업을 끝내자 이후부터는 자잘한 샘물과 우물의 정화가 시작되었다. 때때로 잔비를 내리게도 하고 숲이 있는 곳에는 집중적으로 물을 퍼부었다. 트로웰의 도움으로 지하로 내려가 지하수의 양을 조절하기도 하고, 각 지역에 맞는 운디네와 시큐엘의 수를 다시 조정하여 재배치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는 아크아돈의 자연이 100% 회복단계에 돌입한 상태였다. 그리고 처음 트로웰이 장담했던 대로 인간세계의 시간으로 꼭 두 달이 흐르고 난 뒤였다. " 우와, 정말 네가 말했던 대로네? 완벽하게 회복되었잖아?" 깨끗해진 강과 물, 청명한 공기를 담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감탄을 내뱉자 트로웰이 생긋 웃었다. " 수고 많았어, 엘. 처음치고는 정말 잘했어. 이제 능력의 자각이 완전히 된 것 같은데? " " 하하. 그런가? 뭐 요즘은 엘뤼엔도 틈틈이 와서 요령을 알려주니까 말이야. 확실히 머뭇거리는 건 없어진 것 같아." " 후훗 엘뤼엔도 지극 정성이네. 상급신이라면 바쁠 텐데…요즘은 매일같이 오지? " " 으응. 그래서 전에는 천사가 와서 끌고 갔다니까. 아무래도 갈수록 성격이 능청스러워 지는 것 같아. " 부자의 정을 돈독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핑계로 엘뤼엔은 거의 날마다 아크아돈을 드나들고 있었다. 그러면서 틈틈이 내가 아직 정령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 점을 집어내어 알려주기도 하고, 그것에 대한 대처방법 따위를 가르쳐 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 장면을 조우한 다른 정령왕들은 처음에는 엘뤼엔의 그 파격적인 성격의 변화에 도무지 적응을 못하다가, 요즘에 들어선 그래도 많이 익숙해졌는지 때때로 농담까지 걸어올 정도로 화기애애해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 엘뤼엔의 기분이 좋았을 때 일뿐, 조금이라도 뒤틀렸을 때 건드렸다간 그야말로 죽음의 형벌이 이어졌다. 제 버릇 남 못 주는 격이랄까? 트로웰은 그것만으로도 무궁한 발전이었다고 감탄했지만 말이다. " 나중에 유희를 나가게 되면 가보라면서 ' 인간세상 명소 베스트 10 ' 까지 지정해 줬다니까? 하여간 못 말려. " " 쿡쿡. 좋지 뭘 그래? 이프리트는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널 질투하느라고 정신이 없다구. 엘뤼엔이 오면 항상 너한테만 볼일보고 그냥 돌아간다고 말이야. 이러다가 나중에 이프리트가 신이 되면 '질투의 신'이 되지 않을까 싶다니까? " 으으…그렇지 않아도 요즘은 이프리트를 만나기가 영 껄끄럽다. 만날 때 마다 날더러 '엄마'라고 불러보라고 성화이질 않나, 엘뤼엔을 너무 독차지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을 하질 않나. 오죽하면 내가 엘뤼엔더러 이프리트와 놀아주라고 등을 다 떠밀고 있겠는가. 그러거나 말거나 엘뤼엔은 전혀 요지부동, 여전히 태연 자작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지만 말이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제쯤 인간세상으로 유희를 나가볼 수 있을까? " " 으응? " 문득 떠오르는 의문에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트로웰이 유달리 흠칫 하며 놀랐다. 너무 뜬금없었나? 이제 겨우 자연이 회복된 지경에 유희를 나가고 싶어 한 건 조금 무리였을지도. 그러나 그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치 양심에 가책이라도 받은 마냥 조마조마한 표정을 지은 녀석은, 의아한 눈빛을 보내는 나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결국 체념 비스 무리한 한숨을 내쉬고는 그 연유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미안, 엘. 아마… 유희는 무리일거야. " " 에? 왜? 자연도 다 회복되었잖아? " " 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정령왕은 소환되는 사례가 정말 드물거든. " " 헉…. " 일반 정령들에 비해 정령왕의 소환에는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의 많은 마나와 자연 친화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보통의 인간들 중에서 정령왕의 소환에 성공한 경우는 대개 100년에서 1000년 꼴에 겨우 한 명 나올까 말까한다는 것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많은 인간들 중에서 아직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소환에 성공한 인간은 역사상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어본 내게 트로웰은 물의 정령왕이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기 때문에, 소환을 위해서는 그 만큼 더 많은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냥 정령왕을 소환하는 것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물의 정령왕은 그보다 더 많은 마나를 요구한다니, 아무리 기적을 되풀이하는 것이 인간들이 삶이라지만 어디 가당키나 하겠는가? " 헉… 말도 안 돼. 그럼 이제껏 물의 정령왕들은 한번도 유희를 경험 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 그런데 엘뤼엔은 어떻게 그렇게 인간 세상에 대해 잘 아는 건데? " 설마 사람들 눈에 안 보이는 상태로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걸까? 그럼 하나도 재미없잖아, 그게 무슨 유희라는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 내게 트로웰은 다시 한번 미안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었다. " 그러니까, 그건 인간들의 경우라니까? 다른 종족들은…예를 들면 드래곤 같은 경우는 무리 없이 엘퀴네스를 소환할 수 있어. 자연 친화력도 인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하고 마나도 풍부하니까. 그래서 이제껏 물의 정령왕의 소환은 드래곤과 이루어졌는데… " " 엉? 그럼 나도 드래곤이랑 하면 되는 거 아니야? " " 후우. 그게 바로 무리라는 거야. " 이제는 아주 불쌍하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고개를 흔드는 트로웰. 덕분에 나는 점점 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뭔지 이유를 제대로 설명해 줘야 긍정을 하던 부정을 하던 할 것이 아니겠는가? 다짜고짜 무리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아냔 말이야! " 아, 미안. 그러니까 네가 무리인 건… 후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지? 으음." " 괜찮으니까 그냥 아는 대로 말해 줘.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거야? " " 아니야. 너한텐 아무 문제없어. 문제는… 그 드래곤들한테 있는 거지. " " 드래곤들이 왜? " 설마 드래곤들이 나하고 계약 맺기 싫다고 시위라도 벌이는 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기가 막히게도 이런 내 생각은 반쯤은 맞는 것이었다. 틀린 것이 있다면, 나와 계약을 맺기 싫은 게 아니라 맺고 싶어도 못 맺게 되었다는 거랄까? 드래곤들은 각기 레드, 블루, 그린, 화이트, 실버, 블랙, 골드로 그 종류가 나뉜다고 했다. 각 종류는 드래곤들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자연의 4대 속성의 한가지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레드 드래곤은 불의 정령왕의 속성을 닮았고, 블루 드래곤과 화이트, 실버 드래곤은 물의 정령을, 그린 드래곤은 바람의 정령을, 블랙 드래곤과 골드 드래곤은 땅의 정령왕의 속성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리고 각 종류마다 힘과 성격이 차이가 강한데, 그 중에서도 레드 드래곤의 성격이 가장 포악하고 육체적인 힘 역시 가장 강하다는 것이다. " 문제는 그 레드 드래곤중에서 '라피스 라즐리'라는 녀석이… 드래곤들과 물의 정령왕과의 계약을 방해하고 있다는 거야. " " …왜? " " 그 녀석이 전대의 엘퀴네스. 그러니까 지금의 엘뤼엔한테 홀딱 빠졌었거든. " " ……. "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경악한 얼굴로 입만 멍하니 벌리고 있자, 트로웰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동정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리곤 이렇게 된 김에 제대로 설명을 시작할 생각이었는지, 작정하고 날 붙잡아 놓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 편의 신파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레드 드래곤의 일족에서 '라피스 라즐리'라는 녀석이 태어났어. " " ……. " " 드래곤은 1000살이 되기 전까진 아직 어린 드래곤이란 의미로 '헤츨링'이라 불리며 일족의 보호아래 있게 돼. 성룡이 되기 전의 기간동안 어른 드래곤에게 일족의 일을 배우면서 살아가는 지혜를 익히지. 정령들과 계약하는 것도 이 시기야. 솔직히 성룡이 되면 정령들의 도움이 필요 없으니까. "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에서 일어났다. 이놈의 '라피스 라즐리'라는 드래곤이 아직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주제에 정령왕을 소환해 낼만큼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보통의 헤츨링들은 어린 시절에는 상급의 정령밖에 소환하지 못한다. 우연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속성과 직계열의 정령왕 밖에는 안 되는 것이다. 속성에 상관없이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는 것은 성인식을 치룬 드래곤들만 가능했다. 그런데 라피스 라즐리는 이러한 상식을 깨고, 헤츨링 시절에 자신의 속성과 정 반대의 정령왕인 엘퀴네스-즉 현재의 엘뤼엔의 소환에 성공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 당연히 전대미문의 일이라고 레드일족에선 굉장히 반가워했지. 자신의 일족에서 뛰어난 드래곤이 태어난 것만큼 기쁜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엘퀴네스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했던 거야. 아직 작달만한 드래곤의 새끼가 물의 계열도 아닌 주제에 떡 하니 자신을 소환해 내버린 게 말이지. " " 으음. " " 정령왕들은 소환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로 계약을 거부할 수 있어. 대부분 거절하는 편은 아니지만, 엘퀴네스 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계약을 이행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지. 그래서 계약을 원하는 녀석을 단호히 거절하고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어. " " 헉. " 그러나 하필이면 이때 라피스 라즐리는 물의 정령왕에게 완전히 홀려버린 뒤였다. 채인 거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엘뤼엔이 돌아가 버리자, 상심해 있는 그를 다른 드래곤들은 애써 추켜 세워주며 나머지 다른 정령왕들과의 계약으로 추진했지만, 어느 정령왕도 엘뤼엔만큼 녀석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직 계열인 이프리트를 소환했을 때는 ' 너무 날라리 같아서 싫어. 엘퀴네스는 도도했단 말이야. ' 라고 대답하는 바람에 그의 분노를 사버렸던 것이다. 이후 라피스 라즐리는 계속해서 엘퀴네스의 소환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엘뤼엔은 매정하게 거절했다. ' 너 따위가 아니어도 계약할 드래곤은 넘쳐난다'고 했다나? 그래. 그게 문제였던 것이다. 열 받은 라피스 라즐리는 그때부터 다른 드래곤들과 엘퀴네스의 계약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 녀석은 헤츨링때부터 이미 보통의 성룡의 힘을 가뿐히 뛰어넘었어. 게다가 성격도 포악해서 마음에 안 차는 일에는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지. 다른 종족은 무리지만, 드래곤들은 정령왕과 중복의 계약이 가능하거든. 이미 계약해 버린 드래곤은 어쩔 수 없지만, 계약하지 않은 다른 드래곤들은 엘퀴네스를 불러내지 못하도록 협박해버렸던 거야. " " 헉. " " 드래곤들은 힘의 지배를 강하게 받아. 그래서 나이가 어려도 자신보다 힘이 강하면 굴복할 수밖에 없지. 그런 녀석의 독단적인 행동에 유일하게 제외되는 경우는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는 '헤츨링'밖에는 없었는데, 아쉽게도 물의 계열 쪽의 헤츨링이 한 마리도 없었어. 다른 헤츨링들은 엘퀴네스를 소환할 힘이 없고, 소환할 수 있는 성룡들은 라피스 라즐리의 협박 때문에 엄두도 못 내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야. " " 하하하…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5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752 / 32 선작수 2591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그랬다. 그랬던 것이다! 이미 엘뤼엔이 죽고 세대가 교체되었건만, 그것을 알 리가 없는 드래곤들은 아직도 라피스라즐리의 행패를 두려워해서 물의 정령왕의 소환 자체를 꺼리고 있었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여전히 물 계열의 헤츨링들이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모든 이야기를 경청한 나는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 그럼, 트로웰 네가 가서 엘퀴네스의 세대교체가 있었다고 알려주면 안 될까? 그럼 그 레드드래곤도 포기할거 아니야. " 이미 죽어버린 엘뤼엔에게 미련을 가져서 뭘 어쩌겠는가?(비록 지금은 신이 되긴 했지만.) 이쯤 되면 그 녀석도 포기하겠지 싶어 희망을 건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트로웰은 고려해볼 시간도 없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 으음, 그게 말이야… 녀석이 유희를 떠나버려서 지금 소식이 없대. 그래서 알려줄래야 알려 줄 수가." " …녀석이 없다면 더 잘된 거 아니야? 없는 사이에 계약해버리면? " " 드래곤들이 녀석을 너무 무서워해서 안 될 것 같아. 나도 몇 번이나 상황을 설명해줬는데도 다들 무리라고 고개를 흔들더라고. 아무래도 라피스 라즐리가 유희에서 돌아와야 이야기가 통할 것 같더군. " " …그게 언젠데? " 멍하니 되묻는 내게 트로웰은 미안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이번 아크아돈 재앙이 내리기 직전에 출발한 유희였다고 하니까 이제 겨우 17년 남짓 지났나? 드래곤의 유희는 대부분 500년 정도 이어진다고 하니까…앞으로도 몇 백 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걸? " " ……. " 나쁜 자식! 나중에 만나면 절대 가만 안 둘 테다! 그 날, 나는 처음으로 한 드래곤에 대한 살의를 가졌다. 그것이 바로 성격 나쁜 레드 드래곤, 라피스 라즐리와의 악연의 시작이었다. **** " 어? 가뭄의 기간이 10년이었어? " 인간세상이 완전히 회복이 되자 딱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에바스에덴에서 엘뤼엔과 수다를 떠는 것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번 가뭄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자,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가지의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인간세상에서 '재앙'이라 불리는 가뭄의 기간이 10년이었다는 것. 내가 탄생하지 않을 때부터 내리지 않았다는 비가 어째서 겨우 10년 밖에 안 된단 말인가? 지구에서의 17년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차이였다. 의아한 눈으로 물어보는 내게 엘뤼엔은 간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재앙이 바로 시작된 건 아니야. 내가 소멸하고 나서 15년 후부터 일어났으니까. ” “ 엥? 15년 후부터? ” “ 음. 그 때까진 이전에 내가 만들어둔 물의 정령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지. 그 녀석들이 몽땅 소멸해버린 탓에 10년 재앙이 일어난 거야.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면 네가 태어난 건 내가 소멸한 뒤 25년 만이라는 거지. ” 어, 어라? 25년? 그래도 나와는 시간차이가 나는 거 아닌가?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차원 간에는 시간차이가 나기 마련이야. 그게 좀 뒤죽박죽이긴 하지만. " " 뒤죽박죽? " " 그래. 네가 17년을 살았어도 이곳에 오면 10년이 흘렀을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이곳에서 3년을 살았는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1시간도 안 흘렀을 때도 있지. 차원간의 이동을 관장하는 놈이 워낙에 엉뚱한 놈이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버렸어. 이를테면 랜덤이랄까? " 가만… 이거 어디서도 들었던 말인데? 낯익은 말에 고개를 갸웃한 난 곧 어렵지 않게 그 말의 출처를 떠올릴 수 있었다. 분명, 신계로 통하는 마법 진 역시 랜덤이었다고 했었던 것이다. " 잠깐! 설마 그 차원간의 이동을 관장하는 신의 이름이… ' 하이튼 ' ? " " 호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 역시. 신기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엘뤼엔의 반응에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설마 그 엉뚱한 신의 이름을 여기서 또 거론하게 될 줄이야. " 하아. 전에 신계에 갔을 때 아레히스가 말해줬어. 마법진이 랜덤인 이유가 그 신이 워낙 괴짜라서 그런 거라고. " " 아아. 그러고 보니 신계로 통하는 마법진의 관리도 그 녀석이었던가? '이동'에 관한 부분을 관할하는 거니 그렇기도 하겠군. 언젠가 만나면 손봐주려고 벼르고 있었지. " " ……. " 으음. 역시 엘뤼엔도 그 신한테 쌓인 게 많았구나. 하긴… 매일같이 신계로 들락거릴 때마다 마법진의 랜덤을 경험한다면, 스트레스가 여간 쌓이는 게 아닐 것이다. 싱긋 웃는 얼굴에 살기가 일렁이자 나는 황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 차원간의 시간차가 랜덤이면… 정령계와 신계의 시간차도 그런 거야? " " 아니, 4대 차원끼리는 시간차를 받지 않아. 여기 정령계와 신계의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지. 그래서 내가 언제나 일정한 시간에 널 찾아올 수 있는 거잖아? " " 그렇구나. 그럼 인간세상과 정령계는? " " 그것도 상관없어. 랜덤이 발동되는 것은 인간세상의 차원들끼리니까. " 흐음? 그럼 내가 아크아돈의 인간세상에서 다른 인간세상으로 가게 되면 랜덤이 발동된다는 건가? 어차피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엘뤼엔은 그것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 맞아. 정령계에서 이동하게 될 때는 상관없지만, 인간세상으로 나가서 다른 곳의 인간세상으로 이동하게 되면 랜덤이 작용할거야. 복잡하지? " " 하아. 대체 왜 그런 짓을? " " 그러니까 그 녀석이 괴짜라고 불리는 거지. 차라리 그냥 죽여 버릴까…. " 허걱. 왜 또 얘기가 돌아온 거지? 다시 한번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은 엘뤼엔을 진정시키려 나는 급한 마음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 아, 아참. 엘뤼엔. 라피스 라즐리라는 드래곤 기억나? " " …그게 누구지? " " 어? 아, 그러니까 레드 드래곤인데.. 몇 번이나 엘뤼엔을 소환해서 계약을 하려고 했다는데? " " 언제?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물어 오는 엘뤼엔 때문에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하고 말았다. 뭐야? 저 아무것도 모르겠단 표정은? 설마… 기억을 못하는 건가? 황당한 심정이었지만 나는 곧 트로웰에게 들었던 말에서 어렵지 않게 엘뤼엔이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대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 그러니까 3천 년 전? 그때 헤츨링이었던 레드 드래곤이 엘퀴네스를 소환해서 이슈였다고 하던데… 아니었어? " " 3천년? 흐음. 그러고 보니 건방진 도마뱀새끼가 한 마리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 허걱! 정말 기억을 못하잖아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6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745 / 31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이게 뭐야!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지금 유희도 못나가게 생겼는데… 정작 당사자인 엘뤼엔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억울하다기보다는 기가 막힌 심정에 말을 못 잇고 있자, 엘뤼엔이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 그런데 그걸 왜 물어보지? " " 하, 하… 그게… 그 레드 드래곤이 엘퀴네스와 드래곤들의 계약을 방해하고 있다고…하더라고. " " 흠…그렇게 할 일 없는 드래곤도 있었나? 웃기는 놈이군. 그래서? " 그 원흉이 바로 너란 말이야, 너! 정말 아무런 자각도 없는 거냐? 아무리 3천년이나 지난 일이라지만 정령왕과의 계약을 방해한 최초의 드래곤이란 점에서, 기억을 하지 못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재촉하는 엘뤼엔의 표정을 못 이겨 떨떠름하게 대답하면서도, 내 표정은 이미 처참하게 구겨져 있었다. " 엘퀴네스와 계약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고 협박을 해버리는 바람에 다른 드래곤들이 지금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기를 꺼리고 있대. 엘퀴네스의 세대교체가 있었다고 해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라는 거야. 거기다 녀석은 그 상태에서 유희를 떠나버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고. 덕분에 나는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유희는 꿈도 못 꾸게 됐다는 거지. " " 나 때문인가? " " 글쎄? 그 녀석이 너와 계약을 하고 싶었는데, 네가 거절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 버렸다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 사실은 100% 엘뤼엔 때문이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하면 엘뤼엔이 미안해 할 것 같아 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돌려서 했던 것이다.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린 엘뤼엔은 곧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라피즈 라즐리라고? 잠깐만 기다려라 아들아. 죽이고 오마. " " 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 " 골치 아픈 놈은 재빨리 제거해 버리는 게 상책이야. 천사들을 동원하면 현재 있는 위치 쯤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니 적당히 없애버리면…. " " 제발 참아 줘. " 결국 나는 유희는 나중에 나가도 된다며 엘뤼엔을 설득하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조금 편히 놀고 싶다고 멀쩡한 드래곤을 죽일 수야 없는 일 아닌가? 조금 괘씸한 녀석이긴 하지만, 그거야 나중에 만나서 내 손으로 직접 복수를 해줘도 늦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정령들의 삶은 만년이 넘는 다잖아? 조급해 하지 않아도 나중엔 질릴 정도로 나가 보게 될 테니 지금은 정령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에바스에덴에 있으면 정말 하루종일 질리지 않았다. 정령들의 춤을 보거나, 그들의 수다를 듣는 것이 즐거웠고, 보석으로 된 꽃잎을 하나씩 수집해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금전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다른 정령왕들이야 '그런 걸 왜 모으냐'고 물어왔지만, 나로서는 돈 덩어리를 보고도 ' 아, 예쁘다 ' 하고 넘어갈 양심이 없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에바스에덴의 꽃은 아무리 꺾거나 짓밟아도 금새 다시 피어나고 깨끗하게 회복된다는 것이었다. " 흐흐흐… 부자네, 부자야. 이것만 한 개 있으면 몇 십 년을 놀고먹겠네, 그려…. " 루비로 된 장미 꽃잎을 보며 음침한 미소를 흘리고 있자 그것을 참견하는 앙칼진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 쯧쯧. 그런 인간적인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네가 오늘날 이 꼴이 되어있는 거야. 차라리 엘뤼엔이 말한 대로 그 드래곤을 없애버리면 되잖아? 다들 유희 나가느라 정신없는데, 혼자서 궁상맞게 이런 대서 놀다니, 너도 앞날이 뻔하다, 뻔해. "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차며 나를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이프리트였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보석 꽃잎 수집에 정신이 팔려있는 내가 어지간히도 불쌍해 보였는지 ,가끔가다 자신도 옆에서 거들며 하나씩 따주면서 늘 이런 식의 꼬투리를 잡는 것이다. 이프리트가 건네주는 다이아몬드로 된 방울꽃을 받으며 나는 샐쭉하게 투덜거렸다. " 내가 놀러가고 싶다고 멀쩡한 생명을 죽이는 건 내키지 않아. 차라리 내 손으로 패준다면 모를까… 또 모르잖아? 드래곤이 아니라 다른 종족이 나를 소환시킬 수 있게 될지? " " 그게 바로 허무맹랑한 꿈이라는 거야. 트로웰한테 못 들었어? 엘퀴네스의 소환은 보통의 정령왕보다 더 힘들단 말이야. 그만한 자연 친화력과 마나를 몸에 담고 있을 수 있는 인간은 없어. 인간의 육체는 얇은 유리그릇과 같아서 조금만 뜨거운 물이 담기면 파삭 하고 깨져버리고 말거든. " " 정령을 소환할 수 있는 종족에 인간만 있는 건 아니잖아? " " 설마 엘프들한테 기대를 걸려고? 아서라, 아서. 정령왕의 소환을 뭐로 보는 거야? 그건 하나의 ' 기적 ' 이라고. 엘프들은 조화의 종족이라 세상의 균형을 깨는 '기적'과 같은 일은 벌이지 못해. 정령들과 가장 친숙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들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다고. " " 으으. 그럼 물의 계열 쪽의 드래곤이 태어나길 기다리지 뭐… " 나의 포기 어린 말투에 이프리트는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인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곤 몸을 털고 일어서더니, 기지개를 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마음대로 해. 나는 지금부터 유희를 나갈 생각이니까. 아, 그리고 말이야. 엘뤼엔도 바빠져서 당분간은 여기로 못 올걸? 저번에 내가 신계에 갔을 때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집무실 있지? 거기에 중요한 서류가 굉장히 많이 있었다나 봐. 그거 다시 복구하려면 시간 오래 걸린다지? " " ……. " " 돌아다니다가 라피스 라즐리라는 드래곤 만나면 잘 얘기 해 줄게. 저도 양심이 있으면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있었다는 말까지 들었는데도 그냥 내버려두겠어? 뭣하면 녀석이 다시 소환을 시도 해 볼지도 모르지. " " 그 녀석한테 소환되고 싶지는 않아. " " 네가 지금 찬물 더운 물 가릴 처지야? 이대로 가다간 정령왕 최초로 유희한번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 쳇.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3 천년 전에 태어났다면 지금 그 드래곤 나이가 3천년 정도 됐다는 건데, 이제 겨우 태어난 지 두 달 넘어가는 나와 똑같은 수명을 가질 리가 있냐? 대부분의 드래곤의 수명이 1만년에 그친다니, 차후의 선택으로 녀석이 죽을 때까지 7천년만 참아도 나머지 내 수명동안은 얼마든지 유희를 누릴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게다가 녀석 이후로 물 계열의 드래곤이 탄생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잖아? 하지만 지금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는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날더러 고작 유희하나 떠나보겠답시고 7천년이나 참고 기다리라고? 누굴 호구로 아나? 그렇게 까진 못한다고! 그때는 내가 먼저 엘뤼엔에게 놈을 척살해 달라고 부탁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그리 되기 전에 그 라피스 라즐리라는 놈이 나를 소환하는 것이 더 나을지도. " 그런데 이프리트 너는 그 레드 드래곤을 본적이 없는 거야? " " 3000천년 전이라면 내가 태어나기 전이니까 그 사건 때에는 없었지. 게다가 그 녀석도 엘뤼엔에게 몇 번 차인 뒤로는 정령왕의 소환을 시도하지 않았다니까, 만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맞을 걸? 나 이래봬도 한 드래곤하고만 계약한 상태거든. 다른 드래곤들은 아직 만난 적 없어. " " 태어나기 전이라…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 아, 그러고 보니 트로웰과 미네르바의 정확한 나이도 모르고 있었군. 한집 사는 식구끼리 나이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꽤나 충격이었다. 몇 백 년은 살았거니 하고 생각만 했지 정작 몇 살인지 물어볼 생각을 못했었던 것이다. 나의 물음에 이프리트는 현재 '2013'세 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 트로웰은 4230세고, 미네르바는 1만 6360세야. 소멸전의 엘뤼엔과 나이차이가 거의 나지 않았지.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평균 수명 넘었네. 조금 있으면 소멸하게 될지도 모르겠는 걸? " " 헉…. " 과연 정령왕이라 그런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어디 옆집에 놀러간다는 것 마냥 담담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죽고 나면 신이 된다는 걸 뻔히 알고 있는데도 나는 이렇게 심장이 다 벌렁거리는데 말이다. 이후 이프리트가 '나중에 보자'며 에바스 에덴에서 사라졌을 때도, 나는 끝 모를 허전함과 두려운 마음에 한동안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엘뤼엔이 엘퀴네스였을 시절, 그가 소멸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프리트의 마음도 이랬을까? 아직 누구도 내 옆을 떠나지 않았건만, 나는 벌써부터 미래에 예정된 이별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이 아무리 다음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이었다 해도. 뒤숭숭한 마음으로 물의 영역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스산한 어둠이 가라 앉아있는 상태였다. 침대 위에 누워 한동안 복잡한 기분을 가라앉히던 나는 어느새 깜빡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던 내가 중도에 깨어나게 된 것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의해서였다. 【 엘퀴네스 】 " 우웅… 뭐야…. " 분명히 사람의 목소리이긴 했는데… 이상한 건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정령들의 대화도 목소리가 아닌 파장으로 전달하는 형식이라 머리에서 울리는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렬하게 '신기하다'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다가온 적은 없었다.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기 때문이라 치부하며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는데 그 새를 참지 못한 목소리가 다시 나를 흔들었다. 【 엘퀴네스! 】 " 으으. 알았어. 일어나고 있으니까 그만 불러… " 대체 이 저녁에 누가 나를 찾는 거지? 인간일 때의 습관 때문에 저녁이 되면 꼬박꼬박 잠을 자는 나를 잘 알고 있는 정령왕들은, 가능하면 저녁 일 때는 나에게 용건이 있더라도 다음날로 미루곤 했다. 그런데도 오늘은 이렇게 부르는 걸 보면, 어지간히 중요한 일인가 보다…하면서도 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계속 침대 위에서 미적거리자 목소리는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또 다시 재촉했다. 【 제발, 엘퀴네스! 】 " 하아, 그러니까 도대체 왜… 으으, 알았어~ 일어나고 있다니까? " 엘퀴네스라고 풀 네임을 부르는 것을 보면 트로웰은 아니었다. 녀석은 엘이란 애칭을 지어준 이후로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꼭 나를 부를 땐 '엘'이라고 불렀으니까. 엘뤼엔은 '아들아'라고 부르니 제외. 그렇다면 미네르바나 이프리트. 둘 중의 하나라는 소리인가? 그런데 목소리가 어째… 조금 틀린 것 같은데? 확연히 여자들 특유의 고음을 가진 미네르바나 이프리트와 비교해 봤을 때, 지금 들린 목소리는 조금 낮으면서도 깊은, 소년의 목소리에 더 가까웠다. 그것에 조금 의문을 가진 순간, 예의 나를 깨우는 목소리가 더욱 간절한 느낌으로 울렸다. 【 나에게로 와 줘, 엘퀴네스! 】 ……와달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야! 너 누구야! 뭐 하는 놈이냐고! 짜증이 난 나는 아직도 눈꺼풀을 잡고 놓지를 않는 잠 귀신들을 한번에 떨쳐버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기가 막히게도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 뭐, 뭐야…설마 귀신? " 황당한 심정으로 중얼거린 나는 여전히 스산한 어둠에 가라앉아 있는 물의 영역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 상태로 앉아있었다. 그리고 무심코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려 둘러보는 순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전 명계에서 봤던 '연결의 거울'만큼이나 커다란, 둥그런 모양의 그림이었다. 내 눈앞에 마치 홀로그램처럼 둥실거리며 떠 있는 그것은, 찬란한 금색의 테두리에 복잡한 무늬의 글자들과 도형들이 일종의 규칙성을 띄고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을 잠시 멍한 눈으로 바라본 나는 곧 어렵지 않게 그것이 유라우스가 걸고 있었던 마법목걸이나, 신계로 이동했을 때 봤던 마법진의 그림과 아주 많이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순간, 그 둥그런 홀로그램 안에서 아까 나를 깨우던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던 것이다. 【 제발 나에게로 와 줘, 엘퀴네스! 부탁이야! 제발!! 】 그리고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경악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본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허탈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소환…마법 진?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7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770 / 33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억측이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일에는 빠짐없이 등장하고야 마는 본능은 그것이 소환 마법 진임을 알려주고 있었었던 것이다.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없는 물의 영역에 어떻게 저런 괴 형체의 그림이 떠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설마 어느 용감한 드래곤이 라피스 라즐리를 무시하고 소환주문을 외웠던 걸까?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그것을 멍하니 보던 나는 그 후 나도 모르게 마법 진으로 손을 가져다 대었다. 파아앗-내 손에 닿은 마법 진은 놀라울 만큼 눈부신 금빛을 사방으로 뿌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압력에 의해 마법진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어찌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높은 고층빌딩 위에서 떨어지는 것만 같은 추락 감을 느끼며,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도 참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잠시였을 뿐이었다. 몸이 안정된 것을 느끼고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주변은 물의 영역이 아닌 생판 처음 보는 낯선 땅으로 변해 있는 상태였다.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라는 말이 저절로 흘러나올 만큼, 낯익은 느낌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장소였던 것이다. 그곳은 끝없이 널찍이 퍼져있는 풀밭과, 그것으로 이어지는 나무 숲길. 그리고 그 옆에 자리 잡은 작은 옹달샘이었다. 사방이 어두컴컴했지만 저녁에도 사물을 보는 데에 무리가 없었던 시야는 주변에 그것밖에 없음을 나에게 확실히 알려주었다. 어디 산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있는 기분이랄까? 설마 드래곤이 이런 곳에 사는 거야? 황당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본 나는 무심코 내려다본 땅바닥에 누군가가 엎드려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헉. 뭐, 뭐야… 사람? " 그랬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것도 전혀 멀쩡해 보이지 않은, 발작이라도 일으키고 쓰러진 마냥 얼굴을 고통으로 일그러뜨린 채 기절해 있는 남자였던 것이다. 나이는 내 또래 정도나 될까? 그다지 커 보이지 않는 키나 앳된 얼굴이 아무리 좋게 봐줘도 10대 후반 정도 되는 소년의 모습이었다. 이 야심한 저녁에 이런 곳엔 왜 나와 있던 거지? 설마 몽유병이라도 있나? 당황한 나는 어떻게든 깨워보려고 소년에게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내 몸이 녀석의 신체에 접촉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녀석의 몸 상태에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되었으니… " 허걱. 마나가 하나도 없어. 이게 뭐야? 이러고도 살아있다니. 이거 인간 맞아? 가 아니라!! 날 소환한 게 이 녀석이란 말이야?! " 주변에 이 녀석 말고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부터 단번에 알아차렸어야 할 일을 나는 그제 서야 깨닫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인간이 아닌가? 트로웰이고 이프리트고, 하나같이 나를 소환하기에 무리라는 종족에 인간을 꼽을 정도였는데,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폴리모프한 드래곤? 종종 마법을 이용하여 인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는 그들의 습성을 생각해 보자면 아주 틀린 건 아니겠지만. 무언가 핀트가 엇나간 듯한 느낌이 든다. 드래곤이 겨우 나를 소환하는 것 정도에 몸 안에 있는 마나 전부를 소모 할 수 있는 걸까? " 아아.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러다 죽겠다. 우선 마나를 회복시켜야… " 정령왕을 소환할 때 소모되는 마나는, 소환이 성공하고 나면 정령왕의 임의로 다시 시전 자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이미 소환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시전자의 도움 없이도 나 스스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와 형체를 유지할 수 있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녀석에게서 받은 마나를 다시 그의 몸에 불어넣었다. 그러자 확연히 안색이 좋아진 녀석은 비칠거리는 몸을 조금씩 움찔 하더니 신음소리를 흘리며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괜찮냐'고 물어볼 정신도 없이 녀석에게로 바짝 다가섰다. " 이봐, 네가 날 소환한 거 맞아? 너 인간이야, 드래곤이야? " …내가 생각해도 좀 너무 했지 싶다. 거의 죽었다 살아난 놈한테 다짜고짜 물어보는 말이 종족이 뭔 지에 대한 것이라니. 하지만 그때의 난 그런 것을 깨달을 겨를도 없이 다급한 마음뿐이었다. 역시 별것도 아닌 일에 쓸데없이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 모양이다. 완전히 정신을 들지 않았는지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녀석은, 쓰러져 누워있는 그 상태에서 멍한 눈만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바싹 마른 입술을 움직여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처음엔 소리가 너무 작아서 말하는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 당신… 누구? … 파란 색 머리카락…꿈?… " " 뭐야? 네가 불러놓고 기억 못 해? 나 엘퀴네스야, 엘퀴네스. 소환한 거 기억 안나? " " 엘퀴네…스? 그건… 또 무스… !! 엘퀴네스?!!! " 벌떡. 헉 깜짝이야. 다 죽어 가는 듯이 비실거리던 놈이 내 이름을 듣는 순간 갑자기 눈에 번쩍 불을 키며 몸을 일으켜 세우자 나는 놀라서 움찔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녀석은 그런 것은 전혀 아랑곳없이 그대로 다가와 내 어깨를 부여잡더니, 사정없이 흔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녀석의 행동에 나는 저항조차 못하고 그대로 맥없이 짤짤짤 흔들렸다. 우어어. 어지럽다~ 핑글핑글 돌아가는 눈을 주체하지 못하고 정신을 못 차리는 데 한이 맺혀도 단단히 맺힌 듯 한 녀석의 고함이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 왜 그랬어! 왜 그랬냐고!! 말을 해! 말을 하란 말이야!! " " 대체 무슨…? 우어어~~ 어지러워~~ " " 시끄러워! 빨리 대답해~ 왜 그랬어! 너 때문에 나는… 우리 부모님은! 대체 왜~! " 풀려진 눈이 정상이 아니다. 역시 이 놈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거다. 그런 주제에 무슨 힘은 이리 괴력이란 말이며, 밑도 끝도 없는 추궁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종족 하나 물어보려다가 생 정령 잡힐 뻔한 심정으로 나는 이 곤란한 상황을 어찌 해결하면 좋을지 맹렬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를 흔들어 대고 있는 녀석은 필사적으로 계속 외치고 있었다. " 말해-! 말하란 말이야! 어서 대답해! 어서!! " 결국 나는 폭발했다. " 으아악~ 대체 뭔 소린지 알아야 대꾸를 해줄 거 아니냐고! 이거나 놓고 말하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놈아!! " " 엘퀴네스!! " " 그래! 내 이름 엘퀴네스 맞으니까 그만 부르고 제발 좀 닥쳐! 네가 내 소환자면 다야? 지금 드래곤들이 나 따 시킨다고 너까지 무시하는 거냐고! 에에잇! 왜 나는 되는 일 마다 다 이 따윈 거야! " 세상 어느 소환 자가 목숨과 맞바꿔 소환에 성공한 정령왕을 가지고 대책 없이 짤짤 흔들어 대며 추궁이나 하겠냔 말이다! 그것도 도대체가 무슨 이유인지 설명조차 안하고 무조건 대답이나 하라는데… 내가 천재냐? 아님 트로웰처럼 혜안이라도 있어서 네 속마음을 읽을 줄 아는 걸로 착각이라도 하는 거야? 그런 걸 원하는 거라면 처음부터 트로웰을 소환했음 되잖아! 왜 나 같은 걸 소환해서 서로 고생하고 있는 거냔 말이다! 씩씩거리면서 노려봐 주자 그제 서야 조금 진정이 되는 듯 흔드는 손을 멈춘 녀석이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 정말 …엘퀴네스? " " 하아. 그래, 엘퀴네스 맞아. 의심이 그리 많아서야 대체 어디다 써먹겠냐? 아, 그래. 너 드래곤 아니지? 의심이 많은 걸 보니 틀림없이 인간이야. 그렇지? "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데도 녀석은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다. 아직도 눈빛이 멍한 것이, 계속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이거야 원. 자는 사람한테 주절거려도 이보다 더 한심하지는 않겠군.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내 어깨를 잡고있는 녀석의 팔을 툭 하고 치웠다. " 내가 보인다니 소환엔 확실히 성공한 모양이네. 대체 너는 무슨 생각으로… " " 나와 계약 해줘!! " " ……. " 말 도안돼는 다그침을 끝낸 지 1분도 안돼서… 이제는 계약을 해달라고? 나는 하던 말도 멈추고 황당한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뭔가가 어긋나는 느낌이랄까? 이 녀석… 제정신이긴 한 거야? 설마 미친 인간한테 소환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불안한 눈으로 녀석의 모습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초췌한 안색이긴 하지만 흰 피부와 번듯한 이목구비가 꽤나 잘생긴 축에 속하는 놈이다. 곱슬 거리는 짧은 금발머리는 저녁 빛에도 반짝거릴 만큼 결이 좋았고, 입고 있는 옷차림도 수수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단정했다. 그 모습에 미쳐서 거리를 정처 없이 활보하는 놈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 나는 일단 안심하기로 했다. " 소환에 성공한 자는 종족을 불문하고 계약을 할 자격이 있어. 나의 이름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너는? " " …이사나. 이사나 란느 솔트… " " 아아. 그래 이사나. 너는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계약하겠어? " " 응!! " 여전히 제정신을 못 차린 것 같이 눈동자가 풀려있었지만, 얼굴 가득히 드러난 기쁨엔 거짓이 없었다. 꿈이라도 꾼다고 생각하겠지? 깨어나서 정말로 정령왕과 계약한걸 알면 어떤 얼굴이 될지 궁금해지는 걸? 나는 피식 웃으며 두 손가락을 모아 집중적으로 물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그리곤 그것을 그대로 이사나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파아앗-청명한 물방울이 부서지며, 내 손가락을 타고 흘러간 물의 기운은 이사나의 이마에 아름다운 푸른색의 무늬를 새겨 나갔다. 정령왕의 계약자를 뜻하는 물의 인장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령들에게만 보이는 것으로, 앞으로 이사나는 어디를 다니든지 나보다 하위의 정령들에게 엘퀴네스의 계약자로서 존중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처음 하는 계약이었지만 별 다른 실수 없이 완벽하게 끝마쳐진 걸 느끼며 나는 인간세상이면 어김없이 반감되던 힘이 10% 정도 되돌아 온 것을 깨달았다. ' 우와. 계약자가 생기면 힘의 제약이 조금 더 풀리는 건가? ' 이제 이사나가 살아있는 한, 나는 인간 세상에 나올 때 얼마든지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킬 수 있었다. 감격스러운 마음에 처음 이사나에 대해 생겼던 불쾌한 감정도 잊은 나는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 계약은 완료되었어. 이제 너는 나의 계약자로서 언제든지 필요할 때 나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내 휘하의 하급정령들을 계약 없이 부릴 수 있어. 아, 그런데 부를 때 조심해야 할 거야. 나는 정령왕이라 일단 계약만 하면 나 스스로 주변의 마나를 끌어와 사용할 수 있지만, 보통의 정령들은 네 몸 안에 있는 마나를 사용하게 되거든. 너무 많이 불러내면 마나과다 사용으로 죽을지도 몰라. 조심해. " " 정말… 계약 한 거야? 내가? "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내 손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리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다시 웃었다. 얼떨결에 하게 된 계약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몇 백 년 뒤로 미뤄뒀던 것을 이렇게 앞당기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한 손을 내밀어 이사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 앞으로 잘 부탁해, 계약자씨.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8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762 / 32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 아…으응! "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하던 이사나는 황급히 내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려 했다. 그러나 녀석은 붙잡기도 전에 갑자기 힘없이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버리더니,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무래도 나를 소환할 때 소모한 마나의 양이 많았던 탓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쇼크가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당황한 나는 녀석이 완전히 바닥으로 엎어지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받아내어 부축했다. 하아. 이걸 이제 어찌한다? 거의 끌어안다시피 이사나를 받친 후,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이사나에게 소환되어 온 곳은 말 그대로 첩첩 산중이었다. 주변에 보이는 거라곤 나무와 풀밖에 없었고, 무성한 잎사귀에 가려진 하늘은 별 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근처에 민가가 있나 싶어 나이아스들을 불러 살펴보게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민가는커녕 제대로 된 공터 하나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려고 해도 족히 3시간은 걸어가야 했다. 도대체 험한 산에, 그것도 이런 한밤중에 어린 녀석이 무엇 하러 올라왔단 말인가? 이 녀석은 겁도 없나? 여긴 한국처럼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곳이라 가로등도 없고, 간판에 들어오는 현란한 빛도, 자동차의 라이트도 없었다. 저녁이 되면 오로지 하늘에 떠있는 달과 별이 내뿜는 소량의 빛으로만 사물을 분간해야 한다는 소리다. 나야 정령왕으로 태어나고 나서는 시각이 극도로 좋아져 아무리 어두워도 앞을 보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지만, 이 녀석- 이사나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가? 용케 이런 곳까지 혼자 들어왔다고 생각하며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마을에 내려가야 할까? " -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왕이시여. 인간들은 저녁이 되면 경계심이 더욱 강해집니다. 낯선 사람의 방문을 반기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이사나를 이렇게 놔둘 수는 없어. 지금은 가을이란 말이야. 낮에는 상관없지만, 저녁에는 꽤 추우니까. 피곤해진 몸이 견디지를 못 할 거야. " - 그런 거라면 따뜻하게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불의 정령들을 불러오면 괜찮을 겁니다. 게다가 이 소년이 마을에 내려가도 좋을 상황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 그게 무슨 소리야? " 침착하게 대답하는 시큐엘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을에 내려가도 좋을 상황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마을에 내려가면 위험 할 수도 있다는 소리?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내게 시큐엘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 마냥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곧 어렵지 않게 말을 이었다. - 주제넘은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저녁에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에 들어와 있는 자라면,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거나? " - 예, 왕이시여. 쫓기지는 않더라도 마을에 내려가면 상당히 골치 아픈 상태일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아. 역시 그런가. 어쩌면 나 엄청난 범죄자와 공범이 된 걸지도…? 상당히 찝찝한 기분이었지만, 어차피 이미 계약해버린 거 다시 해지하기도 뭣해서 나는 그냥 상황을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내 또래로 밖에 안 보이는 어린 녀석이 사람들을 피해 다닐 만큼 엄청난 범죄자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이사나님께 무슨 짓을 한 거냐? " " 헉… "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온 것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한 명의 시커먼 남자였다. 조끼로 된 윗옷에 통이 큰 바지. 떡 벌어진 어깨와 팔의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차림을 한 그는, 코끝까지 눌러쓴 복면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기는 어려웠지만, 존재감만으로도 어지간한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기 충분한 모습이었다. 설마 이런 산 속에 또 다른 인간이 있었다니. 이사나의 일행 인 건가? 그는 이사나를 안은 채 굳어져 있는 나를 시퍼런 눈빛으로 노려보더니, 곧 허리춤에 매여 있던 검을 뽑아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스스릉. 설마 영화에서나 보던 달빛에 비추는 검신을 실제로 조우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은색의 반짝이는 칼날에 달빛이 춤을 추는 장면은 감탄할 정도로 멋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넋 놓고 구경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찔린다고 죽는 것도 아니건만, 나는 절로 긴장되는 허리를 느끼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 그…칼 좀 치워줄래요? 무섭거든요? " " 넌 누구냐? 이사나님께 무슨 짓을 한 거지? " ' 이사나 '님'? ' 헤에~ 이 녀석… 보기보다 꽤 신분이 높은 녀석인가 보지?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기절해있는 이사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사내자식 치고 얼굴도 지나치게 곱상한 것이.. 태어나 고생이라곤 하나도 안 해본 것 같이 생겼다. 혹시 귀족인 걸까? 호기심으로 물드는 내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정체 모를 남자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재밌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두렵다거나 곤란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다. ' 하긴, 신인 엘뤼엔을 비롯한 다른 정령왕들의 존재감을 매일같이 겪고 지냈으니, 인간이 뿜어내는 위압감에 질릴 리가 없나? ' 나도 이젠 어느새 정령왕이 다 되 버렸나 보다. 태연하게 속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곧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이사나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몸이 지친 상태라 쇼크를 일으킨 것뿐이니까요. " " 이 자식-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 " 알렉! 잠시만요, 이사나님의 상태가 이상해요." ' 어라? 다른 사람이 또 있었나?' 길길이 날뛰려는 '알렉'이란 이름의 남자를 순식간에 진정시키며 뛰어든 사람은, 훤칠한 키에 온순한 얼굴, 전체적으로 유약해 보이는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공부벌레 같은 느낌이랄까? 지나치게 단정해 보여서 이런 험한 산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그저 한가로운 방안에서 두꺼운 책을 펴놓고 차를 마시고 있으면 딱 어울릴 것 같은 타입? 내가 그렇게 속으로 품평하는 사이, 남자는 황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고 이사나를 빼앗아 녀석의 여기저기를 짚어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 이런 탈진상태라니, 설마 이사나님-! " " 대체 무슨 일인가, 페리스? 무언가 알아낸 것이라도? " " 이거 큰일입니다, 알렉. 아무래도 이사나님은 정령소환을 시도하신 것 같아요. 제 탓입니다. 제가 물의 정령이 필요하다고만 하지 않았어도…. " " 정령소환? " 페리스란 이름으로 불린 온순한 인상의 남자가 죄책감으로 고개를 떨구자 이번엔 알렉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69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4793 / 38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 정령소환이라니? 그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인가? 이사나님의 상태는 대체 어찌 된 거야? " " 크흑. 그게…실은, 이사나님께 미약하나마 정령사의 소질이 보이기에 장난삼아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더욱 정진하시면 정령을 소환하게 되실 지도 모르겠다고요. 지금 이사나님은 극도의 탈진상태로 몸 안의 마나가 상당히 희박해져있습니다. 이것은 정령을 소환하다가 실패한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현상이죠. " " 그런…. " 아니, 이봐이봐, 왜 멋대로 이사나가 소환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니들 눈앞에 있는 나는 대체 뭘 로 보이는 거냐고? 내가 보기엔 페리스란 남자의 진단은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맞는 것도 아니었다. 정령의 소환에 실패하면 그 반동으로 몸 안에 있던 마나가 급속도로 소모되어 탈진하는 경우가 일어나긴 하지만, 반대로 성공하게 되도 그런 현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현재 이사나처럼 자신의 능력보다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게 되는 경우였는데, 이때 시전 자가 가지고 있는 마나가 정령소환에 필요한 마나에 미약하게 못 미치게 될 경우, 최소한의 생명을 유지하는 마나까지 함께 소진하여 소환의식을 치르기 때문에 당연히 시전 자는 극도의 탈진상태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페리스가 그런 가능성을 전혀 제시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는 처음부터 이사나에게 정령소환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 당신… 정령사? " 울상을 짓고 있는 페리스에게서 미약한 정령의 기운을 느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물었다. 자세히 보니 이마에 바람의 하급정령이 새겨둔 ' 바람의 인장 ' 이 보였다. 헤에~ 바람의 정령사인가? " 어, 어떻게 그걸? 당신도 정령사 인가? " 자신의 능력을 너무 쉽게 알아낸 것이 놀라웠는지 페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사나의 상태 때문에 나에 대한 신경을 끊고 있던 알렉까지 덩달아 미간을 좁히면서 다시 검을 들이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 넌 누구냐!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사나님을 처치하러 온 거지? 정체를 밝혀라! " " 이런… 진정해요. 사주를 받고 처치하다니. 나 그런 사람 아니라고요. 게다가 나를 부른 건 이사나란 말 이예요. " " 이사나님이 너를 어찌 아시고 부른단 말이냐! 이 자식! 솔직하게 불지 못… " - 크하하하하하~~~ 휘이잉… 순간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이 쾌활하게 웃으며 내 앞을 스쳐지나갔다. 정령들 중 유일하게 청년의 모습을 한 녀석이었는데, 차분한 겉모습과는 반대로 상당히 난봉꾼기질이 있는 녀석이라 미네르바가 가장 다루는데 고심하는 정령이다. 정령이니 만큼 인간인 알렉이나 페리스에겐 보이지 않았겠지만, 녀석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강한 바람은 하늘을 잔뜩 가리 우고 있던 나뭇가지들은 무수히 흔들어 놓았고, 그 때문에 공중의 틈새가 벌어지자 이 때가 기회라는 마냥 눈부신 달빛이 쏜살같이 파고들어 지상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주변 사물이 환해지자, 그제 서야 알렉과 페리스는 내 모습을 제대로 알아 본 듯 했다. 파란색 머리카락이라 신기한걸까?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두 남자를 마주보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 아,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보다 이사나를 저에게 맡겨주시겠어요? 아직 외상의 치료밖에 해본 적이 없지만, 체력의 회복도 가능할 것 같은데…. " - 가능하십니다, 엘퀴네스님. 다만 정령계에 있었을 때보다 힘의 소모가 심하실 것입니다. 아, 역시? 시큐엘의 대답에 나는 싱글벙글 웃으며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직도 얼떨떨하게 서있는 페리스에게서 이사나를 받아 든 다음, 녀석의 이마에 손을 얹은 후 회복을 위한 언령의 주문을 외웠다. 【회복】 슈우욱… 작은 파동 음과 함께 나의 손을 타고 물의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저항 없이 이사나의 이마로 스며들어 녀석의 기운을 말끔히 회복시켰다. 아까보다 한결 밝아진 이사나의 얼굴을 만족한 눈으로 본 나는, 녀석을 다시 페리스에게 넘겨주며 중얼거렸다. " 생각보다 안 어렵네. 전에 유라우스의 손을 치료했을 때는 힘이 다 빠졌는데 말이야. 이건 뭐랄까…오히려 더 간단한 느낌? " - 체력을 회복시키는 건 비교적 쉽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유라우스님의 경우는 보통의 화상이 아니라, 지옥의 염화에 의한 것이었으니까요. 상급 신조차 치료에 힘들어하시는 것이니 능력의 소모가 심하신 건 당연한 겁니다. " 으음… 그렇구나. " " 이봐! 아까부터 뭘 그렇게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는 거지? 대체 넌 뭐 하는 녀석이야? " 시큐엘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 혼자 떠드는 걸로 착각한 알렉이 신경질 적으로 물어왔다. 내가 그의 생각보다 어려 보였던 탓인지, 처음 대했을 때의 경계심 가득하던 살벌한 기운이 한층 누그러진 모습이다. 게다가 이사나의 체력을 회복시켰다는 것도 눈치를 못 챈 듯싶다. 그저 이마에 손을 얹고 수상한 행동이나 한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사나를 가리켰다. " 저 녀석이 깨어나면 물어봐요. 내가 누군지. " " 뭐, 뭐야? " 기가 막히다 는 표정이 되어버린 알렉은 이후로 몇 번이나 더 내 정체를 캐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더욱 수상한 놈으로 당당히 인정받아, 그들이 머무는 아지트 까지 동행하게 되었는데도-끌려갔다는 소리다- 순순히 정체를 밝히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굳이 이유를 묻는다면야 뭐…인간 중에서 엘퀴네스를 소환한 건 이사나가 처음이잖아? 때문에 그것을 가장 먼저 자랑할 수 있는 이도 이사나가 되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랄까. 원래 선물의 포장을 가장 먼저 열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 선물을 받은 사람인 법이니까 말이다. 쓸데없는 배려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괜히 그러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녀석이 깨어나서 날 보면 뭐라고 할지 궁금해지는 걸? 여러 가지로 기대 부푼 밤이었으나, 마지막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지트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한쪽 구석에 처박혀 밧줄에 묵인 신세가 되 버렸던 것이다. 그곳에는 알레과 페리스 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남자들이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며 모여 있었는데, 알렉에게서 내 이야기를 들은 직후 묘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더니, 곧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나를 밧줄로 묶어 한 구석에 던져두었다. " 쓸데없는 행동을 하면 가만히 안 두겠다, 꼬마야. 네 말대로 이사나님이 깨어나시면 네 정체를 물어봐 주지. 그 전에 조금이라도 수상한 짓을 했다간 내 애검이 네 목과 몸 사이를 빠이빠이 시켜줄 거다. 앙? 알았냐? " " 하…하 , 네… " 내 키만 한 장검을 목에 들이대며 살벌하게 협박하는 말에 나는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으으음… 아무래도 괜한 오해를 산 것 같군. 그냥 '나 정령 이예요'. 라고 말하는 건데 그랬나? 그래봤자 믿어줄 리도 없었건만, 지조 없게도 나는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사나 녀석. 대체 뭐 하는 놈이 길래 저런 남자들을 줄래줄래 달고 다니는 거지? ' 설마 산적의 아들…? ' 이 후로 나를 감시하기 위해 붙어있는 남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기절한 이사나를 극진한 모습으로 자리에 누이느라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그냥 바닥에 천하나 달랑 깔아 두었을 뿐이지만,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호사인 걸 증명이라도 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맨 땅에 몸을 누이는 상태다. 둥그런 지형의 한 가운데에 타다 말은 모닥불 자국이 군데군데 남아있는 걸 보면 아마도 이 근처에서 계속 머물고 있었던 모양인데…이제껏 뭘 하느라 고 제대로 된 모포하나 준비해 놓지 않은 걸까? 시큐엘이 말했던 것처럼 마을에 내려가서는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 궁금한 것 투성 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상황을 주시했다. 그것이 더욱 사람들의 의심을 부추긴 것 같았지만 밧줄이 단단히 묶여있단 것을 몇 번이나 확인 해 둔 때문인지 시비를 걸어오는 자들은 없었다. 계약의 첫날은 그렇게 허무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0 회] 날 짜 2004-08-13 조회 / 추천 5798 / 117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인간세상으로의 소환 " 이봐, 큰일이야. 케이의 열이 더 심해졌어. " " 뭐? 젠장, 이젠 약도 다 떨어졌는데…. " 묶여진 상태로 깜빡 잠이 들었던 나는 사람들의 두런두런 떠드는 목소리에 힘겹게 정신을 차렸다. 몽롱한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자, 뿌연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듯 밝아진 시야에 주변의 모습이 더 자세히 보이기 시작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잠들기 전보다는 많이 환해져 있는 상태다. 자취를 감춰가기 시작하는 별무리를 보며 나는 나직히 중얼거렸다. " 새벽인가…. " 그런데 이런 이른 시각부터 무슨 소란이지? 의아한 듯이 주변을 살핀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언가 다급한 듯, 혹은 침통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남자들은 분주한 움직임으로 -아마도 병자인 듯한- 누워있는 사람을 살피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건가? 놀란 나는 현재의 상황도 잊고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 어떻게 된 거예요? 누가 아파요? " " 시끄러, 꼬마.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찌그러져 있어. 젠장, 어디 물이라도 없어? 땀을 너무 많이 흘리잖아. 이러다 탈수를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 " 이사나님을 발견한 곳에 작은 옹달샘이 있었어. 다녀올게! " 신경질 적으로 다그치는 말에 대답하며 일어나는 것은, 나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던 알렉이었다. 생각보다 급박한 상황인 듯. 얼른 물주머니를 챙겨 뛰어가려는 그를 나는 황급히 불러 세웠다. " 무슨 일인 진 모르지만, 이사나를 발견한 곳이라면 여기에서 한참 떨어져 있잖아요? 준비해 놓은 물이 하나도 없는 건가요? " " 그런 게 있을 턱이 있어? 이런 산 속에서 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게다가 우리들은 지금…에잇! 아무튼 마을에 내려가면 안 되기 때문에 물을 사올 수도 없었단 말이야! " 금방이라도 뚝뚝 눈물을 떨구어 낼 듯, 잔뜩 눈가를 붉히고 있는 그는 애써 울음을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런데… 물을 사오다니? 여기는 자연환경이 맑아서 강물을 그냥 떠 마셔도 상관이 없을 텐데? 설마 마을에서는 물을 사야 하는 걸까? 의아한 기분이었지만 상황이 급해 보여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이제껏 손목과 발목을 결박 하고 있던 밧줄을 가볍게 끊어 버린 것이다. 후두둑. " 헉!!! " 얼핏 봐도 17세 정도밖에 안 되는, 그것도 계집애 같이 희멀겋게 생긴 녀석이 두꺼운 밧줄을 이불 솜 뜯듯 끊어 내는 모습이 충격이었는지, 그 장면을 목격한 남자들은 경악 어린 신음을 내뱉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개중엔 자기도 모르게 검으로 손을 뻗치는 자도 있었으나, 그것들을 가볍게 무시한 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헤치며 다가갔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내 앞을 막을 생각을 못하고 있어서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심한 부상을 당한 채 누워있는 남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바래진 금발 머리에 훤칠한 키를 가진 20대 초반의 청년이었는데, 창백한 안색에 연신 식은땀을 흘리는 상태였다. 배 부분을 하얀 천으로 둘러쌓았는데도 시뻘건 핏물이 흥건히 묻어있는 모습에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런 심한 상처는 강지훈이던 시절, 저승사자를 찾아 중환자실을 왔다 갔다 했을 때나 봤던 거다. 죽지 않은 게 용한 상처랄까? 이렇게 다쳤는데 의사한테 안 보이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속으로 투덜거린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주변의 사람들을 보며 물었다. " 언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상처가 얼마나 됐죠? " " 어어? 아…오늘로 3일째…아니, 이봐! 넌 대체… " " 3일?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 3일이나 그냥 방치했단 말 이예요? 아주 죽이려고 작정을 하지 왜… 에구, 됐어요. 됐어. 잠깐만 기다려요. 우선 열을 식히고…. " " 뭐라고? 대체 무슨… " 그러나 항의하려는 듯 입을 달싹인 남자는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내가 손바닥에 물의 기운을 끌어 모아 부상당한 남자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기 때문이다. 차가운 성질을 띈 물의 기운이 이마에 닿자, 움찔하던 병자의 얼굴이 조금 편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걸로는 어림도 없지. 나는 곧 다른 손으로 회복의 기운을 끌어 모아 상처 입은 복부에 가져다 대었다. 그 모습에 기겁을 한 사람들이 경악을 내지르며 말리려는 듯 손을 뻗어왔지만, 내 손에 집중된 회복의 기운이 남자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더 빨랐다. 【 회복 】 슈우우욱- 파앗! 이사나의 체력을 회복시켰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기운의 이동이 적응이 되지 않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 그럭저럭 괜찮았다. 상처의 회복에만 집중하느라 그 순간 사람들이 얼빠진 표정이 되어 내 모습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알았다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의 상처가 완전히 깨끗해진 것을 깨달은 나는 그의 복부에 가져다 대었던 손을 떼어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알렉이 내 어깨를 부여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 어, 어떻게 된 거야?! 너 대체 케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고 보니 어제 이사나님께도 그랬었지? 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고! " " 이 사람 이름이 케이예요? 으음, 우선 상처는 치료해 뒀는데… 오래된 거라 지금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 무리일 것 같아요. 천천히 시간을 두고 회복시켜야… " " 치료? 너 방금 치료했다고 그랬어?!! " 아니, 그럼 내가 치료했다고 그러지 치질 걸렸다고 그랬겠냐? 웬 인간들이 그리 의심이 많은 거야!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나는 그대로 말없이 케이의 배를 감싸고 있던 천을 벗기며 보란 듯 이 내밀었다. 약간의 붉으스레한 기운만 남아있을 뿐, 말끔해져있는 복부를 보며 남자들은 짧은 신음성을 삼켰다. " 이, 이게 어떻게 된… " " 넌 설마 신관인가? " " 아니, 그보다 그 밧줄을 끊어낸 괴력은 도대체… " 괴력이라니~! 난 그저 물의 기운을 칼날처럼 변동을 시켰을 뿐이라고! 사람을 치료해 놓고도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더더욱 수상하다는 눈빛을 받자 이제껏 참아왔던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에 막 따지려 드는 찰나, 때 마침 케이가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시선에서 외면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으으… 무, 물…. " " 세상에! 케이!! 정신이 드는 거야? " " 신이시여! 어이, 이봐! 일어나 봐! 케이가 살았어! 깨어났다고! " " 뭐야?! " 아무래도 이 케이란 남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꽤나 신뢰받는 인물인 듯 했다. 그가 깨어났다는 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눈을 뜨는 남자들을 보며 나는 할말을 잃고 그저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그다지 나쁜 인간들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말이야. 대체 이런 산 속에서 뭘 하고 있던 걸까? 가벼운 의문을 속으로 삼킨 나는 곧 공기 중에 있던 수분을 모아 한 입 크기로 들어갈 만한 물 덩이로 생성시킨 후, 그것을 조심스럽게 케이의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것 때문에 기뻐하던 남자들의 행동이 다시 떡 하니 굳어버렸다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내가 넣어준 물 덩이를 꿀꺽꿀꺽 받아 삼키는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갑자기 조용해진 주변에 의아한 눈을 들었다. 그리곤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한결같이 창백한 안색이 되어있는 것을 보고 '이건 또 뭐 하는 걸까?' 하며 의구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챙강. 맑은 쇳소리와 함께 손에 들고있던 검을 떨어뜨린 알렉이 천천히 주저앉으며 물었다. " 너는… 아니, 당신은 누구십니까? " 하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갑작스런 경어 체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 얼굴마다 떠오른 두려운 빛은 또 뭐란 말인가? 밧줄로 묶어두고 칼로 협박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이 되질 않았다. 황당해 하던 나는 곧, 방금 내가 보인 능력이 보통의 인간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상기하곤, 그제 서야 아차 하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동안 정령계에서 몇 달 살았었답시고, 이런 희한한 능력의 사용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게 된 모양이다.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이었던 주제에 말이다. 멋쩍은 듯 입맛을 다신 나는 잠시 내 정체를 밝혀야할까 말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직 이사나는 깨어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냉큼 대답해 버리자니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녀석이 깨어나게 되면 다 알게 될 거, 지금 내가 말하더라도 나쁠 것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나는 여전히 두려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생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나는 물의 정령왕 ' 엘퀴네스 ' -' 이사나 란느 솔트 ' 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 소환되었습니다. 인사가 늦었네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 그리고 나는 보았다. 멀뚱히 서있던 남자들의 무릎이 털썩 하며 차례로 바닥에 꿇리는 것을 말이다. 마치 도미노처럼, 줄줄이 주저앉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당황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어느새 뜨거운 눈물을 두 눈 가득 흘리고 있던 알렉이 큰소리로 외쳤다. " 이 땅에 영광 있으라! 신은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았다!! " " 우와아아아아! " 그리고 이어지는 커다란 함성. 대충 10명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었는데도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산의 전체가 다 진동하는 기분이었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그저 그들의 환호하는 모습을 멍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라지?' 어느새 주변은 완연히 떠오른 해로 새하얗게 밝아져 있었다. 완전한 아침,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1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4263 / 40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아크아돈은 단 하나의 대륙으로 이루어진 소(小)차원이었다. 그나마도 사막이나 황무지 같은 버려진 땅이 많아 인간들이 제대로 터전을 잡고 살고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적었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지구의 5대양 6대주에서 2개 정도의 대륙만 따로 떼어놓은 크기랄까? 전체의 크기가 중국과 미국을 합쳐놓은 크기보다 조금 더 컸으니, 소 차원이란 말만큼 이 곳을 제대로 표현한 단어는 없을 것 같다. 하나의 대륙이다 보니 쓰는 언어도 같았고, 생활하는 문화권이 많이 다르지도 않았다. 복식이나 의식주 역시 비슷비슷했고, 건축양식이나 사람들의 생김 샘 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 서양의 구분 없이 무조건 백인만 사는 것이다. 물론 같은 백인이라도 나라마다 미묘한 특색이 보이긴 했지만, 어차피 동양인의 얼굴에 익숙해져 있는 내가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인 놈들이다. 지구에서 살았을 때도 미국인과 프랑스 인을 구분하지 못했던 나다. 여기라고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때문에 나는 알렉이 설명하는 말을 자세히 경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현재 대륙엔 3개의 제국과 10개의 소왕국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중 카터스 제국과 알폰프 제국은 벌써 100년 이상 앙숙인 관계이고, 다른 한 제국인 솔트레테 제국은 중립이지요. 소왕국 중 5개의 나라는 연합을 이루어 현재 '5개 연합국'이란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습니다. "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인간들은 서로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서 수 없는 전쟁을 일으켰다고 했다. 처음엔 작은 부족에 해당하던 마을들이 약 50년간에 걸친 대륙전쟁이후. 세력을 급속히 구축해 나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왕국, 드디어는 제국을 이루었다. 그렇게 생긴 제국은 처음엔 5개였으나, 그 중 두 개는 최근에 일어난 정복전쟁에 의해 멸망하여 작은 왕국으로 전락해 버렸고, 현재는 단 3개만이 남아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놀라운 건 이 모든 일의 과정이 단 2천년에 걸쳐 끝마쳐졌다는 것이다. 아크아돈의 나이가 현재 8만년인 것을 생각해 보자면, 인간들은 짧은 역사로 다른 종족에 비해 가장 빠른 발전을 이룬 셈이었다. 실제로 아크아돈에 '인간'이란 종족이 등장한건 얼마 되지 않았으며, 이전까지는 엘프와 드래곤만이 유일한 지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차원이었다니 말이다. 그런데도 엘프와 드래곤은 아직도 그 숫자가 적어 찾아보기가 힘든 반면, 인간들은 대륙의 절반이상을 차지할 만큼 숫자가 불어있었다. " 흐음? 그럼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는 어느 나라죠? " " 여긴, 솔트레테제국의 변방에 위치한 산맥의 안쪽입니다. 여인왕국의 국경과 아슬 하게 닿아있는 지점이지요. 이곳에서 북동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아마데우스 부족이 나옵니다. " " 아마데우스 부족? " " 여인왕국에만 존재하는,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소규모의 부족입니다. 남자를 일절 반기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여성들만 접근할 수 있지요. 일반인들에게는 비교적 야만적인 여성으로 인식되어있습니다. " 헤에? 밀림의 아마존과 비슷한 건가 보군. 어렵지 않게 납득한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내 정체를 밝힌 이후, 알렉을 비롯한 이사나의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듯한 얼굴로 서럽게 울었다. 그리고는 그것에 당황한 내가 '왜 그러냐'고 물어오자, 그때서야 자신들이 내게 한 짓을 생각했는지 서로 죽여 달라 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히 알렉같은 경우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장검을 그대로 꺼내 목을 그으려고까지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보다 순발력이 좋았던 내가 잽싸게 달려들어 검을 빼앗았기 때문에 시도에만 그치고 말았지, 까닥했으면 바로 눈앞에서 사람 목이 떨어지는걸 목격할 뻔 하지 않았던가? 생각만 해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를 하면 되지, 죽으려고 할 건 또 뭐냔 말이야! 내가 그렇게 성격이 나빠 보여? 황당해 하는 나에게 정령사 페리스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그의 행동을 변명했다. " 그것은 그의 기사로서의 명예였습니다. 정령이신 당신과 사고의 차이가 있겠지만,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 " 기사? 당신들이 기사였어요? " " 이, 일단은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그렇다고 아니면 아닌 거지. '일단 그렇습니다'는 또 무슨 소리인가? 곤란해 하는 페리스의 얼굴에서 이들이 자신을 당당히 기사라 밝힐 수 없는 사연이 있음을 짐작했지만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리곤 알렉에게 현재 대륙의 정세에 대해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나에 대한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겠다는 조건이었다. " …겨우…그런 것 따위로요?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얼빠진 얼굴이 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잠자코 아직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이사나를 가리켰다. " 저 녀석이 계약하자마자 바로 뻗어버리는 바람에 이름 빼고는 들은 게 아무것도 없다구요.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건, 당신들 목숨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정보예요. " " 하, 하지만…. " " 막말로 당신들이 지금 내 눈앞에서 죽는다고 해결되는 게 뭐라도 하나 있어요? 괜히 멀쩡한 정령왕 기분만 찝찝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내가 하자는 대로 하지 그래요? " "……." 결국 짧은 의견충돌은 나의 승리로 돌아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창창한 나이에 죽고 싶진 않았을 테니, 내 제안을 거절해서 저들에게 나쁠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설명을 맡은 알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내 주변에 빙 둘러앉아 함께 그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간간히 '그게 아니야~'라며 꼬투리를 잡아가면서. " 좋아, 알았어요. 그러니까~ 현재 대륙엔 3개의 제국과 연합국. 나머지의 소왕국이 있다는 말이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그 제국중의 하나인 솔트레테의 변방에 해당하구요? " " 네, 맞습니다. 솔트레테는 세 제국 중 유일하게 마신을 섬기는 어둠의 신전의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보통 어둠의 신전의 신관들은 마족과 계약하여 그 힘을 빌려 쓰는 것으로 능력을 대체하는데, 이때 쓰는 힘도 치료를 위한 신성력보다는 저주와 파괴에 해당하는 것이 많지요. 때문에 다른 제국이나 왕국들에게 가장 배타적인 대우를 받고 있는 형편입니다. " 오오. 마족과 계약을 하는 신관이라고? 그런 것은 또 처음 듣는군. 그럼 다른 제국은 무슨 신을 섬기는 거지? 호기심이 동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 그럼 다른 제국들은 무슨 신전의 비호를 받는데요? " " 카터스 제국은 빛과 사랑의 여신인 헤레미스를, 알폰프 제국은 대지의 신인 유엘을 섬깁니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공식적인 국교로 지정해 둔 것일 뿐, 다른 신전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지요. 섬기는 신이 다르다 하여 딱히 배척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신을 모시는 신전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 " 그럼, 설마 형벌의 신인 엘뤼엔의 신전도? " 나의 물음에 알렉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생긴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분명 존재합니다. 특이한건 그곳의 신관들은 다른 신전의 신관들에 비해 신성력이 압도적으로 높은데다, 마신교(어둠의 신전) 신관들의 능력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 입니다.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마신교와 계약한 마족들이 형벌의 신관과 대치하길 꺼린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형벌의 신전과 마신교는 그 성향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형벌의 신전 쪽이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가는 추세입니다. 아직은 신도수가 적어 활약하는 부분이 적지만요. " " …하하… " 아마도 그 마족들은 엘뤼엔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아 그렇게 몸을 사리는 것 일거다. 현재 마계에서 마신보다 더 무섭다고 알려진 것이 엘뤼엔이라니 말이다. 속으로 웃음을 삼킨 나는 다른 질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 세 제국의 세력은 비슷한가요? 솔트레테는 중립이니 그렇다 치고, 알폰프와 카터스제국은 앙숙이라면서요? " " 하하, 그것도 이제 옛말로 잊혀질 겁니다. 최근에 일어난 10년 재앙으로 인해 제국의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었거든요. " " ……? " 10 년 재앙으로 정세가 바뀌다니?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내게 알렉은 잠시 헛기침을 하더니 다시 설명을 이었다. " 카터스제국은 예전부터 마법사의 육성에 제국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할애하고 있을 정도로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독자적인 마법제국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요. 그리고 알폰프 제국은 대륙에서 가장 건국 역사가 긴 제국으로, 옛 시대의 유물과 던전이 가장 많이 잠들어 있는 땅이라, 학자와 모험가의 방문이 잦습니다. 죽음의 숲을 끼고 있어 몬스터의 출현빈도수가 높기 때문에, 용병들과 기사의 숫자가 많기도 하고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세 제국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세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만…이번 10년 재앙동안 카터스 제국이 마법사를 동원한 인공비의 분사에 성공하는 바람에, 현재 가장 높은 실세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 " 헤에. 인공비라…대단한걸요? 그럼 다른 나라들은? " " 카터스 제국으로부터 인공 비를 불러올 마법사를 초빙하거나, 이미 말라 썩어가는 물을 요령껏 정화해서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솔직히 지난 몇 달 사이에 완전히 복구된 것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이 많이 망가져 있었거든요…." 그렇게 말을 흐린 알렉과 남자들은 은근슬쩍 내게 원망의 시선을 던졌다. 설마 내가 사람 사는 곳의 물을 가지고 장난이라도 쳤다고 생각한걸까? 나로 인해 벌어진 문제이긴 했지만, 그것에 대해 피해를 입은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나는 정당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나는 억울한 표정으로 작은 변명을 시도했다. " 그건…내가 의도했던 게 아니었어요. " " 예? 아, 아니… 그, 그런 뜻으로 바라본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희들도 자연을 관장하는 건 신의 일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다만, 이전에 이사나님이 이곳의 자연을 관리하는 건 신이 아니라, 정령왕의 일이라고 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그만…. " " 이사나가? " 호오? 그거 정말 제대로 알고 있었네? 트로웰 기뻐해!! 이 곳 아크아돈의 자연을 관장하는 것이 정령왕의 일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는 인간이 있었어! 하지만 알렉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워하는 내 모습을 그저 어이없어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민망스러운 표정이 되어 우물쭈물 대답했다. " 으음… 옛 고문서를 뒤적이다 그와 같은 문구를 발견했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누구보다 엘퀴네스님, 당신에 대한 원망을 많이 가지고 계셨던 분이었는데, 바로 그런 분이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게 되시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한 일인지… 세상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 " …….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2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4021 / 32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그렇구나. 원망하고 있었구나. 그래서 처음 날 소환했을 때 그렇게 거친 반응을 보였던 거였어. '왜 그랬냐'고 했다. 도대체 '왜 그런거냐'고…. 극심한 체력의 소모에 정신이 나가있는 줄만 알고 되려 성질을 내버렸는데, 알고 보니 나에게 책임을 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 세계를…아크아돈의 자연을 왜 망가뜨렸냐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원망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는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죄를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해명한다고 해도… 믿어줄까? 마음으로부터 용서해 줄 수 있을까? 씁쓸한 입맛을 다신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는 이사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실바람이 지나칠 때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이마에 번듯하게 잡힌 물의 인장이 보였다. 깨어나 나와 계약한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 역시 싫어하겠지? 하지만 계약을 자청한건 이사나 쪽이었으니,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계약해서 두고두고 부려먹으려는 심보였을지도 모르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체 나는 되는 일마다 왜 이리 꼬이는 건지. 혹시 누가 저주라도 거는 거 아니야? 계약자에게 미움받을까봐 걱정하는 정령왕은 내가 최초일거다. 차라리 소환에 응하지 않고 버티다가 나중에 드래곤하고나 할 걸 그랬나. 당장 놀러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멀어 앞뒤 사정 볼 것 없이 덥썩 계약에 응하는 게 아니었다. 이러니 이프리트가 나를 볼 때마다 한심해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않은가. 내가 한참이나 말없이 복잡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응시하고 있자, 화가 났다고 생각했는지 눈에 띄도록 안색이 달라진 알렉이 허둥지둥 그를 변호하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사나님이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거든요. 아끼는 수하를 잃고, 이곳저곳 방황하는 신세가 되시다 보니 자연스레 신세를 한탄하시게 된 거지요. 나쁘게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오해라는 것을 아시게 되면 금세 뉘우치실 겁니다. " 그게 오해가 아니니까 이러는 거잖아! 차마 말로 쏘아붙이지는 못하고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하아. 네… 뭐, 오. 해. 란. 걸. 알게 된다면…이지요. " " 예? 그게 무슨? " " 아니에요. 그보다, 이사나는 이런 산속에는 왜 들어와 있던 거죠?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는데 의원에게 보이지도 않다니… 혹시 누군가에게 쫓기는 중인가요? " " 헉. " 정곡이었나 보다. 바늘에라도 찔린 것처럼 화들짝 놀라는 알렉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평생 동안 거짓말 못하고 살 양반이 아닌가. 저렇게 표정으로 드러나서야 어디 누굴 속일 수나 있겠어? 푸석푸석한 갈색머리카락에 며칠동안 씻지 못했는지 땟물이 줄줄 흐르는 더러운 피부, 넝마나 다름없는 옷차림임에도 눈동자만큼은 옳 곧게 빛나는 사람이었다. 비록 지금은 허점을 찔려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에 천상 어디 가서 나쁜 짓은 못하고 살 사람이라고 생각한 나는 다시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아~ 사실을 불라고! 난 이사나의 계약자로서, 녀석이 처한 상황을 알아둘 자격이 있단 말이야~. 하지만 그런 나의 독촉어린 시선에도 알렉은 한참이나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만큼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일이라는 걸까? 혹시 반란이라도 꾸민 거 아니야? 고민하는 듯 표정을 굳히고 있는 그에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 난 인간이 아니라 정령이예요. 그걸 잊고 있는 건 아니겠죠? " " 아! 그,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닌지라 경을 치실까 두려워 정작 중요한 사실을 배제하고 있었군요…. 당신이 정령이시라는… 인간과 다르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니.. " "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됐어요. 그러니까 말해 봐요. 이사나는 어떤 일로 이런 산속에 숨어 있는 거죠? 난 당신들의 정체와, 모든 사연을 들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내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당신들의 일을 묵인하길 바라나요? " " 헉, 당치 않으십니다! 저희에게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부디 그런 오해는 다시 하지 말아주십시오. "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겠다는 소리가 어지간히 충격이었는지, 알렉을 비롯한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퍼렇게 질려서는 쩔쩔매는 얼굴로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을 뿐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설마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당황해 할 줄은 몰랐던 나는 속으로 헛기침을 삼켰다. 이거 괜히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민망해진 나는 괜히 퉁명스러운 얼굴이 되어 딱딱하게 대꾸했다. " 그럼, 말해줄 거예요? " " 물론입니다! 전부 다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 아아. 속으로 나를 얼마나 욕하고 있을까? 투정부리는 어린애 같다며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왠지 자꾸만 정신연령이 어려지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또 심통이 났다고 오해했는지, 알렉은 서둘러 말 보따리를 풀었다. " 10년 재앙의 기간동안 각 나라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물을 얻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카터스 제국의 마법사들이 독보적인 활약을 펼쳐, 현재 가장 뛰어난 실세를 구축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말씀드렸지요? "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야기라 잊어버릴 리가 없었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 모습을 본 알렉은 무척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띄웠으나, 그것도 잠시. 그는 금세 침울한 표정이 되어 어두운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 카터스 제국은 정말 훌륭한 방식으로 제국을 지킨 예입니다. 자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까지도 살렸지요. 위대한 성황폐하, 아름다운 성자의 나라- 현재 카터스 제국이 다른 제국인들에게 불리 우는 호칭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이곳 솔트레테의 황제폐하는 비운의 황제로 통하고 있지요. " " 비운의 …황제?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3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942 / 32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알렉은 더 이상 설명을 이을 수 없었다. 때마침, 잠들어 있던 이사나가 드디어 신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놀란 알렉은 설명을 하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이사나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솔트레테의 비운의 황제에 대한 생각 따윈 싸악 사리지고 난 후였다. " 으으으……. " " 이사나님!! 이사나님! 정신이 드십니까? " " 오오, 다행입니다. 저는 어찌되실까 얼마나… " 케이의 상처가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저만큼은 기뻐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은 부산을 떨며 이사나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미 치료까지 확실히 해 둔 뒤라, 신체적으로 문제될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단순히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랬다. ' 확실히 중요하기는 엄청 중요한 꼬마인 모양이지?' 속으로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나는 이제 막 알렉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소년-이사나에게로 천천히 다가섰다. " 으응… 시끄러워. 대체 무슨 일…모, 목말라. " " 목이 마르십니까? " 홱. 그 순간, 사람들의 눈동자가 몽땅 내게로 집중되었다고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었다. 쳇. 알아서 물을 내놓으라는 건가? 내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가는 것을 의아하게 지켜본 이사나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 누, 누구? " 어쭈구리. 이것 봐라? 이젠 날 기억도 못 하시겠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녀석을 보자니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잠자코 물이나 만들어 건네주려고 작정했던 것이다. 그것으로 내 존재를 눈치 챌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잽싸게 끼어들어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 안돼요! 엘퀴네스님이 그런 하찮은 일을 하시다니! - 괘씸한 인간들! 감히 누구에게!! 저희에게 맡겨주세요 왕시이여. 계약자님께는 제가 물을 드리겠어요. 그것은 어느새 내 주위를 포진하며 나타난 한때의 나이아스들이었다. 아까부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내가 물을 주려는 타이밍에 끼어들어 절묘하게 반대하고 나서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꾸했다. " 너희들이 이사나에게 물을 주겠다고? " - 예, 하지만 현재 계약자는 본인의 자각이 덜 되어 저희에게 마나를 줄 수 없는 상태니까 왕께서 그의 마나를 저희에게 나눠주세요. - 계약자의 마나는 지금 굉장히 풍부해요. 저희들에게 나눠주어도 위험하지 않아요. " 으음. 괜찮을까…. " 내가 이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이사나는 다른 일행들로부터 내 정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모양이었다. 잠시 후 짧은 비명소리를 내지른 녀석은 자리에게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 뭐어? 엘퀴네스?!! " " 헉. 이사나님. 진정하십시오. 갑자기 일어나시면…. " " 내 몸은 멀쩡해! 그보다 저 사람이 엘퀴네스라고? 말도 안 돼! 나는 그저 물의 정령을 소환하려고 했을 뿐이야! 페리스! 당신도 말했잖아? 내 자연 친화력은 아직 정령소환을 하기엔 무리라고! 그런데 그런 내가 어떻게 정령왕씩이나 소환을 한다는 거야? 당신들은 지금 헛된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저 사람한테 속고 있는 거라고! " 바락바락 소리치는 이사나의 태도에 사람들은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녀석이 하도 고집적으로 '속고 있다'를 외치기 시작하자 점점 의심이 어린 눈빛으로 바뀌더니, 드디어는 나를 완전히 사기꾼을 보는 듯한 혐오감 어린 얼굴로 쏘아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특히 가장 열심히 나에게 잘못을 빌고, 또한 현재까지 일어난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었던 알렉은 어찌나 성을 내는지, 그대로 내버려두면 두 눈에서 불똥이 다 튈 지경이었다. 내참. 사람들이 저렇게 귀가 얇아서야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이런다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사나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경계하는 시선으로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다 대었지만, 당연히 무시. 긴장한 표정으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는 녀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 상황판단을 못하고 있는 건 너잖아? " " 뭐, 뭐? " " 목이 마르다고 했나? 모든 일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지. 기운이 조금 빠지더라도 참아. 어차피 익숙해져야 할 일이니까. " " 대체 무슨?…윽!! " " 이사나님!! " 나는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내 멋대로 녀석의 마나를 취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나이아스들에게 부여해 버렸다. 갑작스런 마나의 소모에 이사나가 휘청거리자 사람들이 경악성을 내질렀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면 …공중에 번듯하게 떠오른 나이아스들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도 똑똑히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 헉! 저, 저건? " " 세상에…. " 반은 물고기의 꼬리에 상체는 인간소녀의 모습을 한 물의 하급정령은, 처음 보는 이라면 당연히 신기해할 모습이었다. 그것은 이사나도 마찬가지였던 지라, 현기증을 느낀 듯 비실거리며 얼굴을 찌푸리던 녀석은 곧 자신에게 물을 가져오는 나이아스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리고는 다시 잽싸게 나를 바라보는 폼이 꼭 ' 이 녀석은 뭐야? ' 라고 묻고 있는 것 같길래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던 것이다. " 물의 하급정령인 나이아스들이야. 하지만 겨우 이정도의 마나소모에 휘청거리다니. 너 정말 어떻게 날 소환한거냐? 진짜 특이하네. " " 나, 나이아스? 너…물의 정령사인거야? " 이런 썩을!! 물의 정령사는 너잖아! 내가 너한테서 뽑은(?) 마나로 나이아스들을 세상에 투영시킨 거 못 봤어? 앙? 이제 그만 상황판단 좀 하란 말이다! 이쯤 되니 이제 얼떨떨한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이사나에게 돌아간 상태였다. 정의는 승리한다고(?)… 녀석들도 드디어 내가 아니라 저들이 모시는 소년 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남자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하자 당황한 녀석은 '왜, 왜 그래?'하며 말을 오물거렸다. 그 모습이 어찌나 한심하고도 답답했는지, 나는 정령도 두통을 느낄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으며 이쯤에서 확실하게 녀석과의 관계(?)를 정돈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 깨어나면 제일먼저 원망부터 들을 줄 알았더니…이게 뭐야? ' 잠깐 속으로 투덜거린 후, 나는 처음 계약 때 못 다한 인사를 마저 하려는 마냥 다시 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 나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네 부름을 받고 이 땅에 소환되었고, 어제부로 계약까지 완료된 상태야. 이제 와서 모른 척 하면 섭섭하지 않겠어? 잘 지내보자. " " 아? 어, 어째 꿈에서 같은 상황을 겪었던 것 같아…. " " 그러니까 그게 꿈이 아니라니까? 뭐야, 나랑 계약한거 싫어? 다시 해제해 줄까? 말해두지만, 먼저 계약을 청한 건 네 쪽이었다고. " 왜인지 친절하게 대답하면 바로 원성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또 퉁명스럽게 몰아붙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내 태도에도 전혀 아랑곳없이 내 얼굴만 빤히 쳐다보던 이사나는 한참이나 아무 말 없이 그러고 있더니, 곧 얼이 빠진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내가…정말 엘퀴네스를 소환했다고? 하필이면 내가? " " 뭐? " " 말해봐!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널 소환했으면…아버지가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 " 그게 무슨…소리야? " 당황한 나는 조심스럽게 되물었으나 녀석은 이미 듣고 있지 않았다. 마치 실성한 듯이. 자조적으로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하는 녀석의 말은 계속해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내용이었다. " 1년만…아니 한달 전에만 소환을 시도해봤어도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을까? 5년 전이었다면? 아아, 그래. 아주 10년 전에는 어땠을까? 그렇다면 우리 제국은 재앙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왜 바보같이 난 그동안 물의 정령을 소환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거지? 왜 이제야! " " 이사나? " 울고 있었다. 어느새 그렁그렁 차오른 푸른 눈은 물줄기만 고통스럽게 뱉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상태 그대로, 이사나는 증오를 가득 담은 눈을 들어 나를 쏘아보았다. "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라고? 네가? 지금 그 말이 내게 어떤 의미인줄 말해줄까! " " 이사나님!! 크흑…. " " 바보 같은 등신자식! 제 아비도 구하지 못한 채 영광도 부귀도 다 빼앗겨 버린 멍청이! 그런 주제에 이제야 지난날의 삶을 되찾겠답시고 목숨을 연명하는 머저리! 널 저주해 엘퀴네스! 하지만 그만큼 원하고 마는 내가 싫어…." "……." 할말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대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인가? 어느새 울음바다가 되어버린 주변을 돌아보며 나는 저절로 토해지는 한숨을 삼키려 부단히도 애써야만 했다. 날 저주한다? 하지만 그 만큼 원한다니, 너… 사이코냐? 아아… 이럴 때에도 진지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한심한 내가 원망스럽다. 나는 극단적인 이사나의 반응에 안절부절하는 나이아스들을 다시 돌려보내며 체념하는 시선으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껄끄러운 쇳가루를 잔뜩 들이킨 마냥 찝찝한 여운을 가득 담고 있었다. " 그래서? 네가 바라는 게 뭔데?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4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920 / 30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뭐? " " 바라는 게 뭐냐고. 내가 싫은 거냐? 그럼 계약 해지해 줄까? "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내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주변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이사나는 점차 성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 책임을 회피할 셈이야? " " 책임이라니? " " 너 때문이란 말이야. 내가 이렇게 된 게 모두 너 때문이라고! 그런데도 뻔뻔하게 그냥 돌아가겠다고?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 …이 쯤 되면 내가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그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다. 나는 반쯤 기가 막힌 시선으로 녀석을 응시하며 물었다. " 내가 너에게 뭘 어떻게 했는데? 미안하지만, 나는 지금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조차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겠거든? 너야말로 무작정 남에게 덮어씌울 생각 말고 제대로 설명이나 해봐. " " 이익! 물이 없었단 말이야! 그것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졌단 말이야! 물을 관장하는 것은 물의 정령왕인 네가 하는 일 맞지? 옛 고문서에 기록되어있는 걸 읽었어! 비를 조정하는 건 엘퀴네스의 일이라고! " " 하아. 너 바보냐? " " 뭐? " 멍청이 대꾸하는 이사나를 보자니 그대로 한대 쳐주고 정신이나 차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녀석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입을 열어 '그것은 오해라느니', '정령왕이 아니라 신이 하는 일이라느니' 떠들어 대기 시작했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거기 너희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마찬가지면 제발 닥치고 있어!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 아, 그래. 자연계의 물을 관장하는 건 내가 맞아. 그래서 뭐? " " 뭐, 뭐라니? " " 내가 설마 심심해서 장난이라도 쳤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곳의 자연을 가지고 얼마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면 멸망할지, 어떨 지? 그리고 그걸 다른 정령왕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고? 그런 거야? " 다른 정령왕들의 존재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이사나는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보려는 아이마냥 사정없이 고개를 휘저은 녀석은 작은 반박을 시도했다. " 하, 하지만 엘퀴네스는 정령왕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고 했어. 다른 왕들의 개입이야 힘으로 억압하면… " " 미쳤냐? 정령왕들은 평등한 존재야. 힘이 더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다고. 애초부터 그런 순위를 멋대로 정한 건 인간들이잖아?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이지, 여기가 멸망하면 정령계도 무사하지 못해. 그런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냐? 내가 무슨 자살 신봉자라도 되는 줄 알아? " " 하지만…. " " 하지만은 무슨 얼어 죽을! 말해두겠는데 이번 일에 피해를 입은 건 나도 마찬가지라고! 원망을 하려면 제대로 알고 해야 할 거 아냐? 도대체 내가 왜 처음으로 소환된 인간한테 다짜고짜 저주한다느니, 책임을 지라느니 따위의 말을 들어야 하는 건데? 아악. 신경질 나! " " ……. "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씩씩거리는 나를 멍하니 보던 이사나는 무언가 맥이 풀린 마냥 추욱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리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싸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뱉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16살도 넘어 보이는 다 큰 사내자식이 훌쩍이는 꼴은 곱게 봐줄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문득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았다. 녀석을 바라보는 얼굴마다 하나같이 안타까움이 표출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평생 동안 울 눈물을 이번기회에 다 털어놓으려는 듯, 한참이나 흐느끼던 이사나는 간신히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 정말… 내가 오해한거야? 이번 재앙이… 정령왕이 일으킨 게 아니야? " 아~ 거참. 사람…아니 정령왕 말 되게 못 믿네!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이사나의 표정이 워낙 진지했기에 나는 말없이 고개만을 끄덕여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침울하게 고개를 숙인 녀석은 이윽고 한참을 망설인 끝에 한마디를 뱉어냈다. " 믿고 싶지 않아. " " 뭐? 야, 너 정말~! " 지금 나 놀리는 거냐? 하지만 화를 내려던 나보다 이어지는 이사나의 말이 더 빨랐다. " 원망할 존재가 필요했어. 그래야 내가 살아나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네가 아니라고 하면 …난 누구에게 짐을 돌릴 수 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께? 아니면… 숙부를? " 망연히 중얼거리는 것이 꼭 인생 다 포기한 인간 같다. 그것을 본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단숨에 물의 기운을 끌어 모아 그대로 이사나의 머리에 직격으로 퍼부어 주었다. 촤악 " !!! " " 헉. 이사나님! " 엄청 시원했을 거다. 일부러 차가운 성질만 모아서 뿌려줬으니까. 갑작스런 물세례에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녀석을 보며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 이제 정신 들겠냐? " " …? " " 책임을 회피하는 건 오히려 네 쪽인 거 같은데? 다른 사람 원망할 시간 있으면 좀 더 제대로 살아볼 구상이나 더 해봐. 너 거울은 보고 다니냐? 지금 모습, 진짜 못 봐주겠다. " " ……. " 지구에서야 흔하디흔한 게 거울이었지만, 이곳 아크아돈에서는 금보다 귀한 값으로 거래되는 것이 유리이고, 때문에 이런 상거지 꼴을 하고 있는 무리가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 리가 없던 나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여주곤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리곤 꼬맹이에게 훈계하는 어른마냥 자못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 나도 나름대로 혼자 땅 파는 타입이긴 한데 말이야, 넌 아무래도 정도가 더 심한 것 같다. 그리고 오해란 걸 알았으면 사과부터 하는 게 예의 아니야? 설마 그 정도도 못하는 주제에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건 아니겠지? " " 아, 아니야. 미안해. 난 그저… " " 좋아. 사과 받았으니 됐어. 그럼 이제부터 자세한 설명이나 해봐. 도무지 뭔 소린지 알아야 장단이라도 맞춰주지 원. 나를 트로웰이라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속으로 백날 궁리해봤자 소용없으니 말로 털어놓으란 말이다. 자 뭐부터 말할래? " " …….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5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910 / 26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내가 너무 능청스러웠나? 주변의 사람들은 저마다 할 말을 잃고 눈만 말똥말똥 굴리고 있었다. 그 중 이사나는 설마하니 내가 사과를 받아줄 거란 생각을 못했던 건지,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화…내지 않는 거야? 그렇게 심한 말을 했는데? " " 아아. 괜찮아. 그 정도 악담은 익숙하니까. " " ?? " 강지훈 이었을 시절, 아버지나 형제들에게 걸려 된통 맞을 때마다 들었던 말에 비하면, 이사나가 퍼부은 악담정도는 그야말로 애교나 마찬가지였다. 영문도 모른 채 다짜고짜 욕부터 먹은 게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그 정도 가지고 끝까지 치사하게 굴 정도는 아니라는 말씀. 게다가 사과까지 받았는데 감정을 악화시켜 좋을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지어버리는 나는, 아까와는 달리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상황설명을 재촉했고, 그 몫은 이제까지의 설명을 전담했던 알렉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망설이는 이사나를 대신해 번쩍 손을 들어 자청했던 것이다. "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엘퀴네스님. 아마도, 아까 전에 못 다한 설명의 연장일 듯싶으니까요. " " 헤에. 그래주겠어요? 나야 설명만 들을 수 있다면 아무나 상관없지만… " " 예. 아무래도 이사나님은 많이 지쳐계신 듯하니,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전에 잠시, 왕시이여? 이사나님의 성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 엥? 별안간에 왠 성?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 이사나*란느*솔트.…맞죠? " " 예. 정확히 맞추셨습니다. 그리하다 면, 현재 저희가 있는 이곳이 어느 나라라고 했는지도 기억나십니까? " " 흐음? 정령왕의 기억력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솔트레테 제국의… 엥? 솔트? 그러고 보니 이사나의 성과 비슷하네? " 뭐야? 나라의 이름을 성에 붙여도 되는 건가? 아니면 이 나라 귀족들의 성은 모두 솔트라는 이름으로 시작하던가. 새로운 사실에 놀라워하자 이사나는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고, 알렉은 맞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습니다. 정령왕께서 인간세상의 관습을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대륙에서는 '성'을 쓸 수 있는 건 소수의 귀족들뿐입니다. 이사나님은 이곳 솔트레테 제국 황실의 피를 계승하시는 분이시죠. " " 그, 그래요? " 귀족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황실의 피를 잇고 있을 줄이야. 그럼 황자라는 걸까? 그렇다면 알렉 등이 기사들이라는 것도 쉽게 납득이 갔다. 그래도 한 가지 껄끄러운 점이라면… ' 황자씩이나 되는 주제에 왜 이런 곳에서 거지꼴을 하고 있는 거지? ' 태어난 본바탕은 나쁘지 않았지만, 지저분한 옷과 먼지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좋게 봐도 귀족으로도 보기 힘들었다. 며칠을 굶은 듯 비쩍 마른 몸과 거친 피부가 기아 직전에 빠져 허덕이는 소말리아 난민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황당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고 있자, 알렉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사나님께서 이리 되신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마도 정령인 당신께서는 이해하기 힘드실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 흐음, 설마 10년 재앙이 원인이 되서? 그러고 보니 아까 그랬었죠? 솔트레테의 황제는 비운의 황제로 통한다고…. 이사나가 황실의 피를 잇고 있다면, 그것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겠네요. " " …맞습니다. "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알렉의 설명은 듣는 나로서는 입이 저절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충격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그러니까 때는 재앙이 시작되고 난지 7년, 모든 작물과 곡물이 말라버리고 바다와 강물이 그 흙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수십 수천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 ' 카일 란느 솔트'는 계속되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해, 국교인 어둠의 신전에 청하여 마신의 신탁을 받기에 이른다. 현 재앙의 원인과, 그 해결 방식을 그들이 믿는 신에게 의뢰했던 것이다. 마침, 그의 동생인 ' 유카르테 란느 솔트' 대공이 마신교의 신관장의 위치에 속해있었기에, 신탁을 받는 행사는 모든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에서 공공연히 행사되었다. " 신탁은 그다지 잘 내리는 편이 아닙니다. 때문에 황제폐하께서도 그다지 기대하고 계시지는 않았지요. 다만, 전혀 나아지지 않는 상황의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여 어떤 방법이라도 닥치는 대로 써보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 하지만 정말로 기적적으로, 신탁은 의식을 행사한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내려오고 말았다. 마신 역시 아크아돈의 재앙을 염려하고 있었던 걸까? 사람들은 드디어 재앙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환호성을 올리며 신탁의 내용이 공개되길 기다렸다. 그러나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 공개된 신탁의 내용이란 것이… " 현황제의 업보에 의해 일어난 재앙? 그래서 죽음으로서 속죄를 해야만 끝난다고 했다고요? " 기가 막힌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알렉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신탁의 내용은 신언으로 이루어져 있어, 대 신관이라 하여도 정확한 내용의 해석이 불가능 합니다. 하지만, 그날 공개된 신탁은 정확한 의미를 담고 재앙의 책임을 황제 폐하에게 돌리고 있었지요. …때문에 민중은 분노하고 말았습니다. " [ 타오르는 열기의 울음은 어둠의 지배자를 책망하는 도다. 그대 삶의 1년은 백성의 10년을 대가로 하는 것. 죽음만이 속죄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의 '어둠의 지배자'란, 마신교를 국교로 정하는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를 뜻하는 것이었다. 즉,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가 백성의 10년 삶을 자신의 생명과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 자, 잠깐만요. 그 신탁이란 것이…신뢰성이 있는 건가요? 어떻게 그렇게 쉽게 믿을 수 있죠? " " …신탁이니까요. 신이 직접 내려주시는 것인데 어찌 불신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때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재앙을 끝내야한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뭄의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에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었던 거지요. …그러니 역사 중 가장 위대한 성군이셨던 황제폐하에게 그리 쉽게 등을 돌릴 수 있었던 겁니다. " " 크흑. " 생각하는 것만으로 분했는지, 알렉의 말을 듣고 있던 이사나는 입술이 새하얗게 되도록 깨물면서 짧은 신음을 삼켰다. 그 모습을 잠시 멍하게 바라본 나는 결말이 뻔히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 설마… 죽은 거야?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알렉은 어두운 표정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백성은 이미 폐하께 등을 돌렸고, 황제 다음으로 권력행사가 높은 마신교에서는 신탁의 내용을 들먹이며 폐하를 향한 탄압을 끊질 않았으니… 그분께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었지요. 결국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을 당하신 것이 바로 두 달 전 이야기입니다. " " !!! " 맙소사. 두 달 전? 그땐 내가 막 태어났을 시기잖아! 과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잠자코 듣고만 있던 이사나가 당장이라도 물어뜯을 것 같은 얼굴로 분노에 찬 목소리를 내뱉었다. " 그리고 나서 바로 자연이 회복단계에 돌입하기 시작했지. 비가 내리고, 물이 깨끗해지고, 공기에 수분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러자 '설마'하던 사람들이나, 폐하의 처형을 반대하던 사람들까지 모두 마신교로 돌아서고 말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폐하는 그들을 누구보다 사랑했어. 당신이 드실 물조차도 백성을 위해 쓰라고 하셨던 분이라고!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그들이!! " " 이사나님…. " " 하아, 그래서… 비운의 황제라고 했던 거군요. " 이사나가 황자라면, 처형당한 황제는 그의 아버지란 소리가 된다. 가족간의 애틋한 감정은 경험한 적이 없어 잘 모르겠지만, 사랑하는 존재가 그런 식으로 어이없게 죽는 것을 목격했다면, 절대로 멀쩡한 감성을 유지할 리가 없겠지. 그야말로 누구하나 붙들고 원망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 화살이 나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는 이유도 충분히 공감했고 말이다. 설마 그런 말도 안돼는 것을 빌미로 황제를 처형할 줄이야. 민주국가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아닌가. 이래서 중세인들은 무섭다니까? 아연한 표정으로 멍하니 중얼거리자, 알렉이 냉큼 끼어들었다. " 아,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만. '비운의 황제'의 정확한 명칭은 여기, 이사나님께 향한 것입니다. ' " …에? " 그건 또 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이사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금은 심통 맞으면서… 쑥스러워하는 것 같달까? 그 해답은 이제껏 모든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정령사 페리스에 의해 드러났다. 슬픈 듯, 안타까운 듯, 괴로운 표정을 채 숨기지 않은 그는, 그러면서도 은근히 자랑스럽다는 기색으로 이사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 선황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황제 위를 그분의 아들이셨던 황태자전하께 물려주셨습니다. 재앙의 책임은 선황 자신에게만 해당할 뿐, 핏줄에까지 이어진 건 아니었으니까요. 바로 이사나 란느 솔트,- 이분이 솔트레테 제국의 현 황제십니다. " " !! " 뭐어??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 황제가 왜 이런 꼴이 되어있는 거야!!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6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855 / 34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나는 이후로도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멍하니 입만 벌리고 이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으음. 어쩐지 신계에서 엘뤼엔이 '역시 내 아들이야. 첫 계약자가 황제라니, 날 닮아서 능력도 좋다니까? '라고 중얼거리는 듯한 환청이…가 아니잖아!! 도대체 저 녀석의 어디가 황제로 보인다는 거야! 그런 내 심정을 공감했는지, 자신들이 말해놓고도 한동안 머쓱한 얼굴이 되어 서로를 마주보던 사람들은, 결국 무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여, 역시 믿기 힘드시겠지요? 제국의 황제폐하와 그 호위 기사들이라고 한다면…. " " 에에… 보시다시피 식사는 벌써 3일째 굶고 있고, 옷도 걸레와 다름없는 넝마에, 갑옷이나 쇠붙이종류는 눈에 뜨일까봐 버린 지 오래. 휴우, 믿지 않으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 " 인원도 처음엔 이보다 많았지요. 황제폐하의 직속 친위기사단이니까요. 중간 중간 다치거나 굶어 죽은 녀석들이 나오는 바람에, 지금은 12명 정도밖에 안 남았지만. " " 그것도 오늘로서 11명이 될 뻔했잖아? 케이 녀석,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 " ……. " 케이라면… 내가 치료해준 남자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꽤나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제대로 된 응급처치조차 되어있지 않아, 잔소리를 퍼부으며 회복시켰던 기억이 났다. 죽은 동료들의 모습이 생각난 탓인지 주변의 공기는 순식간에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그 갑작스런 암울함에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할 무렵, 이제껏 침묵을 지키던 이사나가 쓸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내가 아니었다면, 그들도, 케이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을 거다. 부족한 주군을 만나 그대들의 고생이 심하구나. " " 그, 그런! 당치 않으십니다 이사나님. 폐하의 탓이 아닙니다. 이 모든 건 그 간악한 유카르테 대공에 의한 것이 아닙니까? " " 맞습니다! 오늘의 받은 이 수모와 모욕, 동료들의 억울한 한을 반드시 그 목숨으로 받아내고야 말 것입니다. 저희는 끝까지 폐하와 함께 하겠으니, 부디 물러서지 말아주십시오! " " 저희들의 목숨은 폐하와 언제까지고 함께 할 것입니다! " 이제 상황은 죽은 부하를 위해 애도하는 군주와, 그것을 위로하는 기사들의 모드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넝마 같은 차림과 지저분한 얼굴만 아니었다면 꽤 봐줄 만 했을 텐데. 아쉽게도 내 눈엔 하나같이 거지꼴이 된 남자들이 어린 소년하나 붙들고 엉엉거리는 것으로 밖에 안보여, 그다지 감동이 느껴지진 않았다. 대체 얼마나 억울한 사연이기에 황제라는 녀석이 이 지경까지 되어 산속을 헤매고 있는 걸까? 이미 그 아버지의 일로도 충분히 심각했지만, 녀석의 겪은 일 또한 만만치 않아 보여 나는 잠자코 이사나의 앞에 주저앉으며 물었다. " 유카르테 대공이라면, 너의 숙부라는 그 사람? 설마 황 좌를 노리고 너를 숙청하기라도 한거야? " " 으으응? " " 그렇잖아. 10대의 소년황제-라고 한다면 대부분 뒤에서 섭정을 하는 사람이 등장하니까 말이야. 그걸 섭정 왕이라고 하던가? " 분명 책이나 드라마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직 세상사를 모르는 어린아이가 왕으로 즉위했을 경우, 그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국정을 대신 돌보아 주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 말이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 심취한 나머지, 진짜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가 왕으로 즉위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었지 않은가. 이사나의 나이는 얼핏 보아도 이제 10대 중반. 섭정 왕이 등장하는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문을 표하는 내게, 이사나는 짧은 신음과 함께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 맞아. 내가 성년이 되는 2년 후까지 내 대신 국정을 치리하도록 되어있었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내가 의지할 사람이라곤 숙부밖에 없었기 때문에 맡겼던 거였는데… 설마 그가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세울 줄이야. " 역시. 그래서 궁에서 쫓겨나 간신히 몇 사람만을 데리고 도망쳐 다니는 건가? 산에 숨어 있는걸 보면 계속 쫓기는 중인 것 같은데… 이 녀석이 살아있는 이상, 유카르테 대공이란 녀석은 온전한 황제가 될 수 없을 테니, 이사나는 앞으로도 계속 위험한 상황에 처하겠지. 젠장. 엄청 골치 아픈 녀석하고 계약했잖아? 내가 속으로 이렇게 투덜거리는 것도 모르는 채, 흥분한 기사들의 목소리가 높여졌다. " 대공은 반드시 죄 값을 치르게 될 것 입니다. 감히 존귀한 솔트레테제국의 정통하신 황제폐하에게 등을 돌리다니! 신이 용서하지 않으실 겁니다! " " 그 간악하기 이를 데 없는 마신 교 놈들! 그 신탁도 분명 거짓이었을 겁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대공의 간교한 꾀에 빠져, 그의 손안에서 놀아났던 거라 구요! 뿌드득! " " 선황폐하께서 어찌나 원통하셨을꼬. 지금도 한이 되어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계실 겁니다. 반드시 이 원수를 갚겠나이다! " …아니, 분노하는 중에 미안한데 말이야. 이미 선황의 영혼은 저승사자들에게 무사히 인계 되었을걸? 지금쯤 명계를 거쳐 다시 환생의 궤도에 올랐을지도 모르지. 업이 없는 상태라면 신족으로 태어났을 테지만. 하지만 워낙에 사람들의 기세가 흉흉했던 관계로, 이러한 속마음은 꿀꺽 하고 삼켰다. 괜시리 잘못 건드렸다가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꼴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나자 이사나는 황궁에서 쫓겨나게 된 자세한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 처음엔 기사들의 대련 중에 일어난 사고를 가장한 암습이었어. 하지만 운 좋게 목숨을 건지자, 이번엔 끊임없이 음식에 독을 타기 시작했지. 웬만한 독엔 내성이 되어있는 관계로 그마저도 듣지 않자, 이판사판이었는지 군대를 일으켜 밤중에 몰래 죽이려고 했어. " " 으음…" " 다행히 알렉이 그들의 계획을 한발 먼저 눈치 채었던 바람에, 나는 이렇게 오늘까지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밤을 틈타 도망치던 중에 부하의 반 가까이가 죽거나 다쳤지만, 무력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대체 무엇을 위한 황제라는 거지? " 자책하듯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깊은 한이 서려있었다. 스스로의 나약함에 대한 한심함과 자괴감. 아마도 자신을 지키다가 죽는 사람들을 보며 차라리 먼저 죽고만 싶었을 테지. 모든 절망을 한꺼번에 드러낸 듯한 슬픈 푸른 색 눈동자를 보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 .황성을 지킬 생각은 하지 않았던 거야? 황제잖아, 일단은. 군대를 일으키면 반역으로 간주하여 오히려 역으로 네가 진압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 " 크윽. 무리야, 그건. " " 응? " 계획까지 미리 눈치 챘다 면서 어째서 무리라는 거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기사들 중 한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그의 대답을 대신했다. " 이미 황궁 안엔 폐하의 무리가 없었습니다. 간교한 대공이 어느 샌가 하나둘씩 제 편으로 흡수시켜버린 뒤였지요. 폐하의 편이 되 줄 만한 세력을 가진 귀족은 자택 내에 강제칩거를 당해버렸고, 외성과 내성 안팎으로 대공의 수하들이 들어 찬 상태였습니다. 직속 친위기사단인 저희들만으론 간신히 도주로를 확보할 수 있었을 뿐, 진압은 무리였습니다. " " 흐음…이사나, 그렇게까지 될 동안 넌 뭘 하고 있었던 건데? "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신에게서 돌아선다. 좋건 싫건 분명히 느낌으로 어느 정도 파악이 됐을 텐데, 어째서 이 녀석은 방관만 하고 있었던 걸까? 내 질문이 직구였는지, 움찔 어깨를 떤 이사나는 입술을 가늘게 깨물었다. 그리곤 아직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은 목소리를 떠듬떠듬 내뱉었다. " 미워했으니까. 내게서 돌아서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어. " " 뭐? " " 선황폐하의 죽음에 대한 충격이 너무 컸어. 그 분은 나의 전부였으니까. 때문에.. 그분을 그렇게 쉽게 파멸시킨 존재들을 원망하는 것을 달래는 것만으로 하루하루가 버거웠지. 차마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해. 이런 내가 구제불능인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어. 한심해 해도 돼. " " ……. " 의지하고 있던 상대가 어이없이 죽는다면 누구나 다 화가 날것이다. 특히나 이사나의 경우는 나이가 어린 만큼, 감정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을 테지.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 가장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신이었다. " 난… 황제다. 광활한 영역 솔트레테를 통치하는 황국의 지배자야. 16세의 어린 나이라는 것도, 의지할 사람을 잃었다는 것도 변명이 안돼. 난 한 사람이기 전에, 스스로가 황제라는 위치임을 자각했어야 했어. 그것을 못했기 때문에 죄 없는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고…또 그것에 자학하는 나날을 반복하게 됐지… 정령의 왕인 너라면, 이런 내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겠지? 이 세계의 모든 정령들의 네 휘하에 있으니까." " 그, 글쎄…? " 정령 왕이라고는 해도, 위치상의 서열이 높다는 것만 알뿐, 정령들에게 특별하게 느껴지는 책임감이라던가, 왕이라는 자각을 필요로 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왜 주변에선 나에게 왕으로서 보여야할 덕목이나 위엄 같은 걸 공부시키지 않는 걸까? 능력의 자각은 꽤나 주의를 주면서도, 성격 조정에는 전혀 관심들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런 내 의문을 눈치 챘다는 듯 어느새 옆에 등장한 시큐엘이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왕께서는 존재하시는 것만으로 이 세계의 균형을 이루시는 분, 그 존재만으로 이미 모든 정령들의 생을 책임지고 계십니다. 왕으로서 요구되는 책임은 이미 능력을 자각하신 순간부터 모두 이루신 상태입니다. " …아, 그렇구나. 하긴, 꽤 애먹긴 했지. 빨리 능력을 자각해야만 이 세상이 살아난다고 닦달들을 해댔으니 말이야. " " 응? 누구와 이야기 하는 거야? " 아참, 그러고 보니 시큐엘은 사람들 눈에 안보이나? 이사나의 마나를 부여하면 보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하급정령만으로 빌빌거리던 녀석이 시큐엘을 감당할 것이라곤 보기 힘들었기에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 아, 옆에 시큐엘이 와있거든. " " 시큐엘? 설마 물의 상급정령? 그런데 왜 내겐 안 보이는 거지? " " 그거야 네가 '소환'하지 않았으니까. 마나를 부여하지 않으면 정령들은 인간 세상에 겉모습을 투영시키지 못해. 넌 나의 계약자니까, 굳이 시큐엘하고는 계약하지 않아도 소환할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도 마나가 너무 부족해서 말이야. 나이아스들만 으로도 버거워. " " 그, 그런 거야? 하아… 왜, 왠지 실감이 안나. 네가 정령왕이라는 것이.…아, 아니…내가 정령왕과 계약을 했단 것이… 이거, 꿈은 아니겠지?" 이제까지 아무렇지 않게 대화도 나누고 정령왕이 어쩌고저쩌고 떠들던 녀석이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어색해 하자 오히려 내가 더 뻘줌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도 이제껏 누적된 피로감과 절망감에 의해 인식하지 못하던 현실이, 드디어 피부로 실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자 이제까지 무겁게 흐르던 짓눌린 분위기가 차츰 밝아지더니, 기사들의 표정도 한결 여유로워졌다. 그들은 감탄 반, 동경 반의 시선으로 나를 흩어보며 어딘지 들뜬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 정말 대단하십니다, 이사나님! 인류최초로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신 겁니다. 역대 정령사의 역사서에 단연 돋보이는 이름으로 기록되실 겁니다. " " 엘퀴네스의 능력은 뜬 구름 식으로만 알려져 있어, 제대로 알 수가 없었는데… 이번에 보니 과연 대단합니다. 그 엄청난 치료능력이라니! 또한 이 고아한 품위와 자태는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저는 처음엔 여신이라도 하강한줄 알았다니까요? " " 쿨럭. 여, 여신??? " 왜 하필이면 하고많은 비유 중에서도 여신인거야? 경악할 일은 다음이었다. 뜨악한 표정으로 되묻는 나를 이상하단 듯이 바라보던 기사들이 하나둘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어라? 실례지만. 엘퀴네스님은 여성이…아니셨습니까? " " 엥? 저는 틀림없이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이사나님도 그렇지요? " 끄덕끄덕. " !!! " 이 인간들이 눈이 다 삔 거 아니야? 어떻게 이런 빈약한 가슴을 보고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냐고! 너무 기가 막혀서 말을 못 있고 있는데,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정령사 페리스가 자랑스럽게 끼어들었다. " 이런, 그런 실례되는 발언을! 정령은 성별이 없습니다. 정령에 대해 조금만 관심이 있으셨다면 아실 수 있을 텐데. 설마 모르셨나요? " " 아? 그런 거야? 그럼 무성?? " " 예, 역대 정령왕서를 보면, 정령들은 전체적으로 무성이고, 겉모습에 따라 여성 형, 남성 형이 구분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엘퀴네스님은 여성 형 쪽의 정령이실 뿐. 인간적인 개념으로의 여자인 것은 아니라는… " " 무슨 헛소리야!! 난 남성 형이란 말이다!!! " 그나마 믿음직했던 페리스마저 배신 때릴 줄은 몰랐기에 나는 거의 울고 싶은 기분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이 썩을 놈들은 오해한 것을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저들이 더 충격 받았다는 듯한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 말도 안 돼. 저 얼굴이 남성 형이라고? 그럼 여성형의 정령은 대체 어떻게 생겼다는 거야? " " 빌어먹을. 한눈에 반했었는데! 남성 형이라니!! 나 설마 그쪽이었던 건가? " " 이럴 리가 없어. 이건 사기야~!!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7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823 / 36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 " 이, 이것들이! 촤아악! " 으악!~~ " 결국 열 받은 나는 그대로 녀석들에게 사이좋게 한 덩이씩의 물을 퍼부어 주고 말았다. 하지만 이놈의 겁 없는 녀석들은 비 맞은 생쥐 꼴이 되고서도 정신을 못 차린 채, 여전히 불신의 눈빛을 보내며 저들끼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 봐~ 외모에 민감한걸 봐선 여자가 맞다니 까? 저 얼굴로 남성 형이라니 믿을 수가 없어. " " 크흑. 끝내주는 미인이라고 감탄했었는데. 남성 형이라니… 싫닷! 그냥 여자로 생각해 버릴 테다! " " 저 얼굴이 남성형인 것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에 대한 도전이라고. 순순히 인정할 성 싶으냐! " " ……. "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저런 것들을 상대하다간 내가 제명에 못 죽을게 틀림없어. 암 그렇고 말고. 그리하여 녀석들을 과감히 무시하기로 결정지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사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 이 녀석도 내가 여성 형이란 것 에 점수를 주는 모양이었지만, 후환이 두려웠는지 차마 내색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이빨이 바드득 갈리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야? " " 응? " 갑작스런 질문이 이해가 안 되었던지 이사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역시 아무리 봐도 황제로 안보여. " 황제라며? 궁에서 쫓겨났다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정해야 할 거 아니야? 역시 돌아가고 싶겠지? " " 하, 하지만. 숙부가 무슨 짓을 해놨는지, 나와 나를 따르는 기사들을 반역의 무리로 모함하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어. 사람이 있는 곳엔 내려갈 수 없는걸. " 허걱? 황제를 반역자로 모함할 수도 있는 거였나? 뭐, 나라를 팔아먹으려 했다거나, 황제가 아닌 다른 세력으로 꾸몄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처음으로 강지훈일 시절, 학교에서 역사공부를 제대로 해 두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삼국지건, 수호지건, 혹은 스타크래프트같은 게임이라도 전략이나 역사에 관한 것은 닥치는 대로 배워두는 건데! "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곳에 죽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밥도 못 먹었다며? 이대로 굶어 죽을 생각이야? " " 그, 그건…. " " 어휴. 답답아. 몽타주가 전 세계에 도배 되도, 관심이 없으면 못 알아보는 게 사람의 뇌라는 거야. 괜히 미아 찾기가 힘든 줄 알아? " " 모, 몽타주? 미아 찾기? 그게 뭐야?" " 그런 게 있어. 아무튼 뭣하면 내가 도와 줄 테니까, 우선 내려가고 보자고. 그대로 있다간 쓰러질 것 같다. " 무심코 꺼낸 말이었는데 그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순간 사람들의 눈빛이 희망으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 맞습니다! 폐하! 지금의 우리에겐 정령왕 엘퀴네스님이 함께 하십니다! 이 대로라면 저 간악한 대공을 몰아내고 황성을 되찾는 것도 시간문제일겁니다!! " " 오오! 차라리 이대로 황성으로 진격하는 것이 어떠실지? 폐하께서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의 마음도 돌아설 것 입니다! " 하지만 이사나는 아무래도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한결 안색이 어두워진 녀석은 한숨과 함께 나와 기사들을 차례대로 둘러보더니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황성에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이미 나는 백성들로부터 신임을 잃었다. 절망과 한탄에만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는 나태한 황제로 찍힌 지 오래야. 무력으로 황성을 쟁취할 순 있어도, 그들의 마음을 돌리는 것은 쉽지 않을 거다. "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충격으로, 이사나는 황제가 되고서도 국정에 전혀 관여를 하지 않았다. 황제의 일 따윈 오로지 섭정왕인 그의 숙부에게만 맡겨 둔 채, 모든 일에 방관하는 입장을 취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겨우 1달 밖에 안 되는 짧은 치리기간이었음에도, 사람들의 기대를 끊어버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특히 그와 달리 현명한 섭정을 펼쳐가는 유카르테 대공의 활약으로, 이사나의 입지는 나날이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은 도망치듯 쫓겨나고도, 당당히 궁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재의 처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기사들은 비통한 표정이 되어 소리치기 시작했다. " 크흑.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 그때 이사나님은 선황폐하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너무 깊어, 국정에 전념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누가 아비를 잃고 멀쩡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그들도 폐하의 진심을 알아줄 것입니다!" " 그건 우리만의 생각일지도 몰라. 실제로 나는 백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이곳 솔트레테가 타국에서 어떤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지 조차 알지 못하는 미숙한 황제다. 아마 이대로 황성에 돌아가게 되도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 " 폐하…. "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보던 사람들은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로 어색한 시선만을 교환하고 있었다. 이럴 때 이프리트나 엘뤼엔이라면 가차 없이 '그럼 황제자리 때려치우면 될 거 아냐! ' 라고 말하겠지? 속으로 쿡쿡 웃은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바닥만 노려보고 있는 이사나에게 입을 열었다. " 그렇게 깨달았으면 된 거 아니야? " " 응? " " 방금 그랬잖아? 백성이 어떤 삶을 사는지, 네가 다스리는 나라가 타국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고. 황성으로 돌아가게 되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을 거라고 말이야. 그럼 이제부터는 알아갈 수 있다는 소리잖아? 평생 모르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고 보는데? " " 하, 하지만…. " " 그 정도면 됐다고 생각해. 알아가고 싶다는 '의지'만 있으면 넌 분명히 잘 해갈 수 있을 거야. 백성들의 삶이라는 게 별거 있나? 황제인 너보다 조금 못 먹고, 조금 못 입을 뿐일걸? 돈 많다고 으스대지만 않으면 세상사는 대충 사이좋게 돌아간다 이 말이지. 아, 여기는 한국과 달라서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 한국? " " 그런 게 있어. " 대충 얼버무렸지만, 그다지 궁금했던 건 아니었는지, 이사나는 금새 다른 생각으로 진지한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했던 말의 의미를 되씹어 보는 모양인 듯. 점점 확고해지는 표정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내가 말하고서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저 녀석이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째 괜히 멀쩡한 애한테 나쁜 바람이라도 넣은 것 같다. 그냥 해본소리라고 둘러 댈까나? 하지만 내가 막 '농담이야~'라고 변명하려는 순간, 완전히 결심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이사나로 인해 그 말은 목구멍까지만 차오른 채 다시 안으로 넘어가고야 말았다. " 카웰 형님을 찾아뵙겠어. " " 엉? " 갑자기 웬 난데없는 형님? 그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주변에 있던 기사들도 하나같이 얼빠진 얼굴이 되어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그나마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던 알렉이었다. " 예에? 카웰님이라면…폐하의 사촌이신?? " " 외가 쪽의 형제다. 외조부님으로부터 작위를 하사받고, 현재는 후작이 되었다고 했어. 대관식을 치른 이후, 여러 가지 일로 만나지 못했었는데…아무래도 그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 " 하지만, 폐하? 황성은 어쩌시려고요? 카웰 후작령은 수도와 정반대의 방향에 있지 않습니까? 이러는 사이에도 대공은 세력을 더욱 확장시킬 겁니다. " " 알고 있어. 하지만 이정도의 인원으로 황성을 찾아가는 것은 도리어 반격당할 우려가 있다. 이미 숙부는 우리를 반역자로 간주했어. 무사히 귀환하기는 힘들 거야. " " 하지만 우리에겐 엘퀴네스님이! " 필사적으로 외치는 소리에 이사나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약간 흔들렸다. 하지만 금방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은 녀석은, 술렁이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분명, 엘퀴네스와의 계약은 내 인생에 다시없을만한 행운이며, 기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에게 의지할 생각만은 없어. 미안해 엘퀴네스. 모처럼 계약해줬는데… 난 아무래도 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일어서고 싶어. " " …어떻게 할 생각인데? " 사실 말만 정령왕이지, 내가 제대로 할줄 아는 거라곤 물을 만드는 것과,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이 전부였다. 그런 내가 도와달라고 부탁한다고 뭘 해줄 수 있겠는가? 내심 뜨끔한 심정으로 어설프게 묻자, 이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카웰 후작은 백성들로부터 선망이 두터운 자야. 또한, 현재의 황실에서 얼마 안 되는 내 편이기도 하지. 그의 군대를 빌리고 싶어. 개인의 사병이라고 해도, 2만에 다다르는 숫자니까 숙부와 맞서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해. " " 으음…. " " 이건 내 자신을 위한 시험이야. 카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여러 가지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주겠지. 그 결과가, 나보단 숙부가 황제가 되는 편이 백성에게 이롭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나는 기꺼이 그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다. " " 헉, 폐하!! " " !! 무슨~!! " 경악한 기사들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지만, 이사나의 결심은 철회될 생각이 없어보였다. 사실 그 결정이 누구보다 억울했을 것은 바로 이사나 자신일 텐데. 원인이야 어찌됐든, 녀석의 아버지는 숙부가 몸담고 있던 종교의 삼판을 받아 죽었고, 그 자신은 반역이란 모함을 받으며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백성을 위해 선뜻 황제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결심을 하다니… 아무리 봐도 내 나이 또래가 가질 생각이 아니었다. 과연 황제는 황제라는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지. 네 마음대로 해, 이사나. 어차피 나로선 도와줄래도 그다지 쓸데가 없었을 거야. " " 그, 그렇지 않아! 물의 정령왕의 위대함을 모르는 이는 이곳에 아무도 없어. 너의 능력을 무시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게 아니야, 난 그저…. " " 알아. 요컨대 인간들의 일은 인간들끼리 해결하고 싶다, 이거잖아? 나도 솔직히 골치 아픈 싸움에 끼어드는 건 내키지 않았으니까 상관없어. 아, 그래도… " " ……? " 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에 불쾌해 할줄 알았던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녀석은 내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대꾸하자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내가 금새 다른 말을 할 것처럼 말끝을 흐리자, 다시 굳어진 얼굴이 되어 입술을 꽉 앙다물었다. 아마도 내가 당장이라도 계약을 해지하자고 말할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미안해서 어쩌나? 난 이왕에 잡은 유희의 기회를 그렇게 쉽게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거덩? 대답하는 내 얼굴은 스스로가 의식하기에도 무척 즐거운 표정이 되어있었다. " 그냥 따라다니는 것은 상관없지? 이왕에 계약한거니까 말이야. 썩혀버리면 아깝잖아? " " ……!! " " 그래, 이렇게 된 거 네 일행 중에 한사람으로 끼워 넣어주라. 마침 나도 여행 다녀보고 싶었거든. 그 정도면 괜찮지? " " 아…무, 물론이야! 당연하지!! 고마워, 엘퀴네스!! 정말 고마워! " 함지막하게 벌어지는 입을 보니 어째 내가 엄청나게 착한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일행으로 쭐래쭐래 따라다니겠다는 건데, 뭐가 저리 반가운걸까? 불안해하던 처음과 달리, 어느새 흐뭇한 시선이 되어 '폐하의 결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라는 표정을 짓고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며, 나는 어쩐지 마음속 깊은 곳에 따스한 기운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 역시 소환에 응하길 잘 한 것 같네. ' 드래곤과 했다면, 이런 극적인 느낌도, 또래의 친구라는 느낌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불쾌했던 첫 인상은 어느새 스멀스멀 녹아내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내기 힘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 기뻐하는 이사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모처럼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8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723 / 33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아구아구… 꿀꺽, 크아~ 이제야 살 것 같다! " " 우물우물 쩝쩝, 닥치고 더 먹기나 해!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고! " " 어이! 그건 내가 찍어둔 거야! 손대지 마! " " 지랄! 먼저 집은 게 임자지 어디서 생깡이야? 한번 죽어 볼 테냐? " 엄청난 폭언을 날리며 게걸스럽게 음식을 입에 집어넣는 사람들은, 바로 얼마 전부터 나의 일행이 된- 이사나의 기사들이었다. 며칠을 굶었으니 허겁지겁 먹는 건 그렇다 쳐도.. 저 험한 말투는 정말 적응이 안되는구만. 어떻게 바꿀 수 없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만지작거렸다. 제발 나의 여행에 대한 환상을 깨트리지 말란 말이다! " 싸우지 말고 천천히 먹어요. 음식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 " 아, 저도 그러고 싶은데 저 개쉐이가 성질을 건드리잖습니까? 저 딴 자식은 인간 말종이라 언제고 한번 두들겨 놔야 한다고요. " " 뭐가 어째? 이 자식이 죽고 싶어 발악을 하는구만! 오냐~ 어디 한번 해보자! 덤벼! " 삼류 건달 같은 대사를 날리며 일어선 남자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투박한 검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식당 안은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다른 손님들의 비명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꺄악! " 어둡고 좁은 가게였지만 한창 점심때였던 지라, 안에는 식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소동이 반가울 리 없을 터. 사색이 된 주인은 냉큼 달려와 곤란한 얼굴로 말리기 시작했다. " 다른 손님들께 피해가 갑니다. 제발 진정하십시오. " " 시끄러-주인장! 내가 누군지 알아? 나는 말이야! 이래봬도~ 이 검 하나로 대륙을 떠도는 방랑무사란 말이시다! " " 흥~ 그래봤자 미천한 삼류용병밖에 더 되냐? 오늘 만난 의뢰주 만 아니었어도 당장에 굶어 죽었을 판국이었으면서 허풍은~ " " 이 자식이!! " 아아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된 꼴인가? 결국 그들을 제재하는 것은 졸지에 '의뢰 주'로 찍혀버린 내 몫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마에 작은 혈관마크를 그리며 짜증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었다. " 자꾸 이런 식이면 의뢰고 뭐고 다 그만 둬버릴 거예요. 이래도 멈추지 않을 건가요? " " …쳇- 너 말이야. 오늘 이분 때문에 산 줄 알아! 원 재수가 없으려니! " " 누가 할 소리! 닥치고 밥이나 마저 처먹어! " 과연 내 한마디의 타격이 컸는지, 금새 얌전해진 그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사이좋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식당의 주인은 내게 감사의 눈길을 보내며 친절한 목소리를 건네 왔다. " 저분들을 진정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소란이 커지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 " " 아, 미안해요. 이분들은 제가 고용한 자유 용병인데, 워낙에 거치시다보니… 곤란을 끼쳐드렸네요. " 후드로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로 내가 아직 어린 것임을 눈치 챈 식당주인은 한결 정중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나이어린 소년이 용병을 고용했다는 대목에서, 아마 여느 부자 집 도령이라고 생각해 버린 모양이었다. " 괜찮습니다. 이곳엔 용병이 자주 오거든요. 이런 종류의 소란은 늘 익숙하답니다. 필요하신 것은…? " " 으음. 그렇다면 약 5명의 인원이 먹을 1주일분의 식량을 준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부터 여행을 갈 예정이라 서요. " " 물론입니다. 그 밖에 따로 더 필요하신 것은? " " 그거면 충분해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 반갑게 대답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인이 총총히 사라지자, 나는 그제 서야 숨겨뒀던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한껏 껄렁거리는 표정을 짓고 있던 두 명의 남자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번이 마지막이지요? 엘퀴네스님. 휴우. 정말 못해먹겠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체면도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하는 심정이라니... " " 나도 동감.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니까요. " " 쿡쿡. 다들 잘 하시던데, 뭘 그래요? 저번 타임의 알렉과 페리스보다 훨씬 그럴 듯 했다고요. " " 그, 그게 정말입니까? 헤헤. " 슬쩍 건네는 칭찬에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쁜 빛을 숨기지 못했다. 역시 순진하달까. 아까전의 험악한 말을 골라하던 남자들과는 도저히 동일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둘러본 뒤, 아무도 우리의 대화를 신경 쓰고 있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이것으로 대충 식량은 전부 확보한 것 같은데요. 이런 식으로 4번 정도 식당을 돌았으니까.. 적어도 한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예요. 모자라면 중간에 다른 마을이라도 들려서 구해야 할 테지만…. " " 하지만 정말 현명하신 방법이었습니다. 한꺼번에 대량의 식량을 구입하는 무리가 있으면 의심의 눈을 받게 될 여지가 있으니, 인원을 나눠 가장 한적한 곳만 골라 구입한 것 말입니다. " " 그것도 지금처럼 용병의 무리로 속여, 귀족이라는 의심을 받지 않게 했다는 점도요. 정말 대단한 판단력이셨습니다. " 그랬다. 내가 이사나의 일행으로 합류하기로 결정된 날. 그날로 카웰 후작령을 향해 떠나야 했던 우리에게는 한 가지 변고가 존재했으니- 그것은 바로 이들이 벌써 며칠째 굶고 있다는 것과, 앞으로도 먹을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령인 나야 먹지 않아도 살수 있으니 상관이 없다지만, 다른 이들은 엄연히 생식기관이 있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때는 초겨울. 산속이라 해도 그 흔한 풀뿌리 하나 제대로 캐어먹을 만한 계절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추위와 배고픔에 허덕이는 이들에게 무리한 강행을 요구할 수 없었던 이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근처의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도 들릴 생각을 했지만,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문제점이 가로막고 있었으니 그것은… " 먹을 거 살돈은 있어? " " ……. " " 설마 이 근처의 마을엔 너희들에 대한 수배령이 내려져 있지 않다는 건 아니겠지? 한꺼번에 수상한 무리들이 우르르 마을을 돌아다니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 " ……. " 이상하다 뿐이겠는가?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경찰에 달려가 신고하고 만다! 아무튼 당연하다면 당연한점에서 허를 찔린 무리들은 이후로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못한 채 그대로 뻣뻣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너무 급하게 도망쳐 나온 탓에 귀중품이라고는 하나도 들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때문에 식량으로 바꿀만한 금전적인 가치를 가진 무엇 하나 지닌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앞뒤 생각 없이 무작정 도망만 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나사 하나가 빠져있던 상태였음이 틀림없었다. 결국 심한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행을 구제해준 것은 나였다. 나는 이전에 에바스 에덴에서 채집(?)한바 있던 보석 꽃잎들을 꺼내어 이사나의 눈앞에 살짝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쩌억-하며 입만 벌리는 녀석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 나중에 갚아라. " " 에, 엘퀴네스…. " " 식량을 사는 것은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인원을 분산시켜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옷도 사야겠네. 이사나. 네가 보기엔 이 꽃…아니, 보석을 돈으로 바꾸면 얼마나 될 것 같아? " 하지만 이사나는 감격해 하느라 내 말에 차마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자 녀석을 대신해서 옆에 있던 정령사 페리스가 냉큼 끼어들더니, 보석을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 제가 잠시 봐도 괜찮겠습니까? 꽤 큰 캐럿의 다이아 같은데. 호오…그러고 보니 꽃잎 모양이군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공은 처음 봐요. 정말 훌륭한 결정입니다. 이정도의 커트면, 못 받아도 60골드는 받지 않을까요? " " 60골드라고 해도… 얼마의 가치인지 모르겠는데. 으음, 그 정도면 한 달 치 식량을 살수 있을까요? " " 사다 뿐입니까? 식량은 물론,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옷과 말까지 구비하고도 남는 돈입니다. 아마 도시 쪽으로 가면 경매에 붙여 100골드까지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 오오! 백합 꽃잎 한 장에 그런 어마어마한 가치가? 하긴, 다이아몬드는 지구에 있었을 때도 천문학적인 금액을 넘나드는 보석이었다. 이곳이라고 금전적인 가치가 다를 것은 없겠지. 루비로 된 장미나, 사파이어로 된 풀잎을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꽃잎을 붙들고 서로 눈을 붉히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작게 키득거렸다. 꽃잎을 채집하며 황홀해 하던 나를 보고 쯧쯧 거리던 이프리트의 심정이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기분이었달 까? 이후 나는 물정에 밝은 듯 보이는 페리스만을 동행한 채 그날로 하산을 하여 가까운 마을의 보석상점을 찾기로 결정지었다. 그리하여 도착한 보석상에서 그는 엄청난 언변을 사용하여 주인을 홀린 뒤, 60골드의 가치였던 꽃잎을 80골드 이상까지 받아내어 나의 존경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알고 보니 페리스는 평민 출신으로, 정령사라는 능력이 눈에 띄어 귀족이 된 케이스였기 때문에, 날 때부터 귀족이었던 다른 이들에 비해 물건을 사고파는 것이나 흥정을 하는 것에 익숙했었던 것이다. 제법 묵직한 돈 자루를 들고 흥얼거리는 그를 보며 나는 문득 궁금하단 표정으로 물었다. " 특별한 능력이 있으면 귀족의 작위가 수여 되나 봐요? " " 음… 모든 나라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솔트레테 제국이 그러 면에서 관대한 편이지요. 인재의 양성에 힘을 쏟는 취지랄까요? 하지만, 정령사인 경우는 그 수가 워낙 희박하기 때문에, 저 같은 하급정령사라 할지라도 어느 나라에서나 귀족의 작위를 내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영지는 없는 이름뿐인 귀족이지만요. " " 흐음. 그렇다 해도 꽤 대단한데요? 10년 재앙 때문에 그동안 다른 정령왕들도 스스로의 힘을 최대한 줄이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상황에서 정령과 계약할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페리스는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거예요. " " 호오? 그랬습니까? 정령왕들께서 힘을 줄이고 있었다고요? 그래서 요 근래 정령사의 배출이 적었던 거군요.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얼굴에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유야 어찌됐든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태어나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속사정을 모르는 페리스는 그저 순수하게 정령왕들의 노고를 치하했을 뿐이었다. " 정말 고생들이 많으셨겠군요. 자연계의 평화를 유지하려면 균형을 맞춰야 하니, 물이 극도로 없는 상태에선 다른 분들의 능력역시 줄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새삼 정령왕들께 감사한 마음이 생깁니다. " ================================================= 마녀홈에 올려진 것과는 약간씩 다른 부분이 있을겁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79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3701 / 28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하하. 나한테 뭐라고 하지는 않는 거예요? 내가 의도한건 아니었지만, 가뭄이 든 건 내 관할내의 일이었다고요. " " 하지만… 엘퀴네스님께도 피치 못한 사정이 있으셨겠지요. 저는 한낮 미천한 인간일 뿐. 정령왕께서 하시는 일에 대항할 마음을 먹을 만큼 어리석은 인물이 못됩니다. 저는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엘퀴네스님을 직접 뵙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 그렇게 말하며 웃는 페리스의 얼굴에는 정말 순수한 기쁨 외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새삼 이사나 옆에는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라고 생각하며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요. 그나저나… 옷을 사야겠죠? 지금의 차림으로 돌아다니기에는 문제가 많으니…. " 그나마 페리스는 깔끔한 편이었지만, 넝마나 다름없던 기사들의 옷차림을 떠올리며 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페리스 역시 공감하고 있었다는 듯,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내 팔을 잡아 길을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와는 다른 것이었던 모양이다. " 물론입니다! 빨리 옷을 사야겠어요! 역시 후드가 좋겠지요? 얼굴을 가리기엔 그것보다 제격인 게 없을 겁니다. " " 후드? 얼굴을 가리는 건 상관없지만… 그 많은 인원들이 다 모자를 뒤엎고 다니면 수상해 보이지 않을까요? " " 아니, 엘퀴네스님 말입니다. " " …에? " 갑자기 내가 왜? 당황한 나는 얼른 내 옷차림을 살펴봤지만, 지나다니는 마을사람들과 비교해서 딱히 이상한 점이라고는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옆의 페리스와 비교해서 상당히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기야 했지만…그게 큰 문제가 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나를 힐끔힐끔 바라 보는 것 같았다. 그저 외부인임이 한눈에 티 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바라보는 줄 알았더니, 내 차림이 이상했던 거였나? 나는 멋쩍은 얼굴로 페리스를 바라보며 짧게 사과했다. " 미안해요. 이런 차림이 눈에 뜨일 거란 생각을 못했네요. 정령계에서는 항상 당연했던 거라…. " " 예에? 옷차림이 뭐가요? 아무렇지 않은데요? " " 엥? 그런데 왜 후드를? " " 그거야 엘퀴네스님이 너무 미인이시라 그런 거죠. 벌써부터 몇 놈들이 흑심을 품고 바라보고 있잖습니까? 쓸데없는 사고는 미연에 방지해야지요. " " 하하하하…" 미, 미인? 그렇지 않아도 '여성 형'이란 말에 충격 받은 것이 아직 다 가시지도 않았는데, 이런 곳에서 또 타격을 받을 줄이야! 할말을 잃는 나는 그저 허무한 웃음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잠자코 그의 의도대로 후드가 달린 옷차림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 자체가 물로 되어있다 보니, 겉모습을-기본적인 외모는 바뀌지 않지만, 옷차림이나 형체를 바꾸는 건 가능하다- 형성하는 것도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매우 신기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페리스는 금새 기쁜 얼굴로 경비를 절감했다며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어쩐지 숨겨둔 살림꾼이 등장한 것 같아 소름이…쿨럭. 그 후, 근처의 옷 상점에 들려 기사들이 입을 여행복과 평상복, 외투와 신발 등을 고른 우리는, 그제 서야 여유로운 기분으로 마을의 분위기를 살펴볼 수 있었다. 마을은 제국의 변방이라고 해서 아주 낙후된 시골마을을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제법 규모도 컸고, 상점과 건물들의 분배도 깔끔하게 되어있는 편이었다. 영주가 사는 성과 그것을 지키는 경비대들도 있었고, 중앙공터에는 사람들이 나와 어울릴만한 커다란 광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페리스는 어지간한 소도시 급의 마을이라면서 짧게 감탄하기도 했다. 광장 한쪽에 마련된 벽보에는 한 장의 그림과 함께 제시된 금액이 기제 되어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살피던 나는 그려진 사람의 얼굴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아주 흡사하게 닮았다는 것을 떠올리곤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안색을 굳혔다. [ 이사나 란느 솔트 - +죄명+ 황제라는 지위를 망각하고 제국의 중대사항에 관련된 기밀을 타국에 유출한 혐의- 17세 전후로 보이는 짧은 금발. 하얀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녔음. 신고하는 자에게는 포상금을 내리겠음. (1만 골드.) 책임자- 교황 하이오네.] " 헉… 뭐야 이건? " 황제한테 현상금 따위를 매기다니! 뭐 이런 나라가 다 있어? 경악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놀라고 있자니,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페리스가 그것을 힐끗 보고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 결국 여기까지 마신교의 힘이 미쳤군요. 어쩔 수 없죠. 솔트레테는 타국과 달리 황권과 신권이 분리되어 있는 곳입니다. 어둠의 신전 교황의 힘이 황제의 권력과 비례하지요. 하지만 이런 모함까지 하며 황제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이 아니었는데… 왜 이렇게 되 버렸는지. " " 으음…. " " 아무튼 이런 식이라면 빨리 움직여야겠습니다. 대공은 이사나님이 사촌이신 카웰님에게 찾아갈 것을 예상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 그곳에 대공의 기사들이 지천에 깔려있을 지도 몰라요. 서두르시죠, 엘퀴네스님. " " 알았어요. "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나는 페리스와 함께 다시 이사나들이 있는 산으로 돌아온 후, 간단하게 그들을 씻기고-나이아스들한테 시켰다- 준비해온 옷을 입힌 뒤, 조를 짜서 인원을 나누었다. 그리하여 총 4차례, 자유용병과 그들을 고용한 의뢰주의 모습을 연기하며 마을에 들러 식량을 사 모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눈속임을 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 차이를 두고 이루어졌고, 때문에 모든 일이 끝났을 때는 밤 깊은 어둠이 지면에 내려앉아 있는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출발을 내일 새벽으로 미룬 우리는 한자리에 모여앉아 앞으로의 일정과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의견을 제시한건, 차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알렉이었다. " 지금의 인원 전부가 함께 행동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카웰님이 계시는 영지까지 가는 길은 총 3개의 도시를 거쳐야 하는데, 10명이 넘는 인원은 검문을 할 때 눈에 뜨일 겁니다. 적당히 인원을 갈라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게 좋을 듯 합니다. " " 하지만 인원을 나눈다고 해서 별도리가 있나? 이미 수배되어있는 상태라고. 몇 명이든 검문에 걸리면 들킬게 틀림없어. " " 우리들 중에 몇 명은 가족을 인질로 붙들려서 협박을 당하고 있는 처지다. 어차피 들켜서 죽을 거라면, 함께 움직이는 게 더 나아. " " 그렇지 않아. 우리는 어떻게 되더라도 폐하는 무사해야 할 것 아닌가? 폐하. 저희들은 이곳에 남겨두고, 엘퀴네스님과 함께 떠나십시오. " " 무, 무슨 소리를?? " 알렉의 발언에 대한 파장은 삽시간에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일행들에게 전염되었다. 경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사나와 달리,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표정의 기사들을 보며 나는 그들이 처음부터 이 말을 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전까지의 대화는 그저 이 말을 유도해 내기 위한 복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 저희 전부와 함께 이동하시면 그만큼 대공의 기사들에게 쉽게 뜨일 겁니다. 저희는 폐하를 지키기 위한 근위기사단. 폐하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행이도 수배를 내린 전단에는 저희들의 대한 것은 자세히 기제 되어있지 않으니, 당분간은 이 마을에서 숨어 지내도 무리가 없을 겁니다. 반드시 카웰님과 함께 수도로 돌아오십시오. 저희 역시 수도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불허한다! 그럴 순 없어! 이제껏 고생을 같이한…나를 위해 가족도 목숨도 버린 그대들을 버리라는 거냐? " " 버리는 게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선 다시 황성으로 돌아오시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수도에 가게 되면 현재 귀족들 중, 대공과 이사나님 편에서 중립을 지키고 있는 자들을 설득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니 저희들을 믿어주십시오. " " 불허한다! 불허해!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럴 수 없다. 난, 나는-! " " 폐하! 제발 현명하신 판단을…. " " 통촉해 주십시오, 폐하. " " 폐하…. " 으으음… 아무래도 내가 끼어들면 안 되는 상황 같지? 격한 얼굴로 계속해서 고개를 가로젓는 이사나와 그것을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보며 연신 '폐하'라고 외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아니, 소름이 끼친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많은 남자들이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소년을 위해 목숨을 버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위험을 떠안는 모습은, 분명 한국이라는 민주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참을 밀고 당기던 지루한 감정싸움은, 결국 이사나의 패배로 끝이 나고 말았다. 녀석에겐 기사들의 확고한 결단을 막을 용기가 없었고, 또한… 그 역시도 이 많은 인원을 한꺼번에 데리고 이동하는 것 에 따르는 위험부담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이사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 미안하다. 이렇게 약한 황제라…이렇게 모자란 주군이라…그대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 " "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주군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기사는 저희들의 꿈 입니다, 폐하. 저희들의 염려는 하지 마시고, 부디 무사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저희들은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 " 그렇습니다, 폐하! " 눈시울이 붉어진 이사나는 연달아 '염려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기사들을 바라보며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가장 자신의 앞에 있던 알렉을 와락 끌어안은 녀석은 크게 흐느끼며 소리쳤다. " 흐윽, 흑…약속한다. 반드시…반드시 숙부를 이길 기사들을 데리고 돌아올 테니까…그리하여, 반드시 황성을 되찾을 테니까. 너희들도 약속해라. 절대로 죽지 않겠다고. 돌아오는 나를 환송하는 무리에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 " 크흑. 물론입니다, 이사나님….부디…부디…다시 뵈올 날까지 강녕하십시오. 이 알렉!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이들과 함께 수도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 " 흐윽…흑…으흐흐흑… " 주변은 어느새 울음을 삼키는 사람들도 가득 차 버리고 말았다. 얼싸안은 알렉과 이사나의 어깨를 서로 감싸며 눈물을 터뜨린 기사들은, 한참동안 서로의 안전과 무사함을 당부하며 하늘에 있는 신에게 빌고 또 빌고 있었다. 간간히 내게 보내는 눈빛에서 '이사나를 잘 부탁 한다'는 것을 읽은 나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만으로 그들은 안심이 되었는지 한결 감정을 가라앉힌 눈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 엘퀴네스님이 함께 하시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폐하. 이제부터 설득시킬 중립귀족들도 엘퀴네스님이 폐하와 함께 하신단걸 아시면 분명 흔쾌히 손을 들어주실 겁니다. " 그러나 이사나는 그것에 만족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흔든 녀석은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마주보며 여전히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어. 그대들은 무사하기만 하면 된다. 나를 위해 더 이상 희생하지 말아.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약은 모습을 보여도 좋다. 내가, 너희들의 주군이 그것을 허락한다. " " 크흑. 그리하겠습니다, 폐하. 주군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 " 주군의 명령을 따르겠나이다. " 그날 저녁은 밤새도록 기사들과 이사나의 못 다한 이야기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기라도 하는 마냥, 지난날의 황성에서 있었던 일이며, 자신들의 가족들 얘기를 꺼내는 사람들의 얼굴은, 슬픔보다는 안도와 서로에 대한 위로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그때 그러셨지요? 폐하? 하루에도 몇 십, 몇 백번씩 검을 휘두르시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었는지. 분명 위대한 검사가 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 " 지금은 아니라는 거야? " " 쿡쿡. 그럴 리가요.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강하고 멋지신 걸요. 폐하께서는 앞으로도 더욱 굳건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 이 백성이 폐하를 찬양하고 경배하게 될 겁니다. " 다정하게 오가는 말임에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내 착각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남을 기약하는 이별임에도 이렇게 가슴이 아프다면…다시는 만나지 못할 사람과의 이별은 얼마나 아프게 될까?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아릿한 통증에 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시큐엘이 위로하듯 얼굴을 내게 부벼오자 나는 그것을 쓰다듬어 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의 이별은 앞으로 아무것도 아닐지도 몰라. 나중엔… 이런 장면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익숙해져 버릴까? 그만큼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게 될까? 아무래도..내키지 않아, 시큐엘. 하지만…이별이 두렵다고 해서 만남을 거부한다면… 나는 세계 최고의 바보 정령왕일거야. 그렇지? " - 아무도 엘퀴네스님을 바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 않을 겁니다. " 쿡쿡쿡…그럴까? 하지만. 나 자신은 분명히 그렇게 느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것을 견디지 못하게 될 테니까…. 하아, 어쩌면 정령왕이란 거…적성에 안 맞을 지도 모르겠는 걸? " 하지만 인생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법. 정령왕으로 태어나, 유희를 즐기겠다고 작정한 이상은, 이 모든 것은 내가 감수해야만 할 문제였다. [받아들이도록 해.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지훈에게는 의지할 존재가 필요해. 그것이 우리들 다른 정령왕들이 될 수는 없을 거야. 우리는 어디까지나 동료, 혹은 친구로서 서로의 갈 길이 달라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한 자리에서 너를 지켜봐 준다는 거니까… 외로움을 잘 타는 지훈에겐 가장 커다란 의지가 될 거야. ] 언젠가 트로웰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였을까? 유난히 엘뤼엔이 보고 싶어진 밤이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0 회] 날 짜 2004-08-14 조회 / 추천 4638 / 95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다음날 아침, 나는 여행을 위해 모아둔 식량 중, 일부를 제외한 전부를 기사들에게 넘겨주었다. 나에겐 아직도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보석이 넉넉했기 때문에, 모자라면 언제든지 다시 살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금전관리가 가장 확실해 보이는 페리스에게 보석을 팔고 남았던 돈의 전부까지 넘겨준 나는 감격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는 그들 하나하나를 마주보며 ' 조심하라 ' 고 신신당부를 거듭했다. 그들은 나와 이사나가 떠나고 나서도 당분간은 이대로 산에 남아 가끔씩 마을을 내려가며 제국의 동태를 살펴볼 작정이라지만, 그 사이에 정체가 발각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 때문에 이사나의 얼굴은 이미 한참이나 우울해져 있는 상태였다. " 저희들의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수배전단에는 저희들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기제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으니까요. 엘퀴네스님이 주신 경비도 넉넉하니 수도까지 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겁니다. " " 흐음? 인원이 많은데 괜찮겠어요? 페리스, 돈이 얼마나 되죠? " 완전히 안심이 되지 않는 마음에 나는 서둘러 재정담당(…)인 페리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염려 말라는 듯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면서 품안에서 큼직한 주머니를 꺼내보였다. " 저희들의 옷과 식량, 몇 가지 무기를 구비하고도 30골드 이상이 남았습니다. 이 정도면 헤리카(솔트레테 제국 수도 이름이다)에 도착할 때까지 당할 여러 가지 변고를 예상하더라도 넉넉히 쓰고도 충분히 넘칠 양입니다. " " 으음. 그래요? 그건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마실 물은… " " 아, 그것도 걱정 마십시오. 이 정도 금액이면 일행이 돌아가며 목욕할 양의 물도 살수 있으니까요. " " 아, 그래요… 가 아니라, 네에? "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인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져 되물어 버리고 말았다. 바, 방금 뭐라고? 물을 산다고 한거야, 지금? ' 아니. 한국처럼 물이 오염 되서 아무대서나 떠먹지 못하는 것도 아니면서 물을 왜 산다는 거지? 물을 담을 통을 산다는 걸 잘못 말하는 거 아니야? " 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페리스가 했던 말은 사실이었다. 이후 이들이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 필요한 물을 구입해야 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놀라는 나를 보며 알렉은 차분한 설명을 곁들였다. " 10년 재앙이후로 물이 귀하게 되어 버렸거든요. 그래서 일정 양의 물을 한 통에 담아 판매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한 수익은 그 지방의 영주에게 돌아가 재앙의 해결책을 마련하는 경비에 포함되지요. 대부분 비구름을 불러올 마법사를 초빙하는 데에 쓰입니다만…. " " 저기, 잠깐만요. 지금은 자연이 완전히 회복 계에 돌입했을 텐데요? 그런데 아직도 물을 사고판다는 건가요? " 가뭄이 들었을 때야 물이 부족하니 사고팔았다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재앙이 끝난 시기가 아니던가. 더구나 요 몇 달간 4대 정령왕의 필사적인 수고로 인해 아크아돈의 자연은 완전히 재앙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가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가뭄시기에 실시한 정책을 유지하다니… 대체 뭐하자는 거지? 어이없는 표정으로 묻는 나에게 페리스는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 제 배를 채우자는 몇몇 파렴치한 귀족들의 행패입니다. 힘없는 평민들은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요. 그렇게 판매하는 물의 값이 너무 비싸서… 한 양동이당 10실링이나 한다고 하더군요.(평민 노동자 하루 품삯이 50실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끔씩 내리는 빗물을 받아다가 다음 비가 올 때까지 생활을 연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맙소사. 대체 이놈의 제국 황제는 뭘 하고 있는… 아, 맞다 이사나가 황제였지, 참. 정말로 기가 턱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귀족과 평민의 신분차이가 크다지만, 먹는 물…그것도 자기들이 만든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치사하게 나올 줄이야. 그래도 설마하니 이들이 산에 들어와 있는 며칠사이에 상황이 호전이 되지 않았을까 슬그머니 기대했던 나는, 마을 근처에 흐르는 시내에 떡하니 경비대가 버티고 서서 물을 떠가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는 것을 보고는 그대로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뒤따라왔던 페리스가 냉큼 한마디 덧붙였다. " 참고로 엘퀴네스님이 소환되셨던 산속의 연못은 저희들이 이곳에 와서 발견한 것입니다. 요 몇 달 사이에 내린 폭우로 만들어진 것인지, 아직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았더군요. 참으로 운이 좋았지요? " 하지만 난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때 마침 갓난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 하나가 경비대에게 매달려 하소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 나으리. 제발 부탁드립니다. 남편은 죽고 이 어린 것 하나 키우며 혼자 살고 있는 여자가 무슨 힘으로 하루에 10실링이나 하는 금액을 마련하겠습니까요. 모쪼록 자비를 베푸셔서 물 좀 마시게 해주세요. 한 모금이라도 좋습니다. 벌써 5일이나 한모금의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요. 이 아이에게 만이라도 제발… " 검댕이 잔뜩 묻은 바래진 금발머리와 누더기 같은 옷차림.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아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컥컥거리고 있었다. 여자가 비쩍 마른 손으로 경비병의 바지자락을 붙잡자, 남자는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인상을 화악 찡그리더니, 거친 동작으로 여인의 배를 걷어찼다. 퍼억- " 아악! " " 빌어먹을. 어디서 거지 년이 와서 행패야? 나설 때 못 나설 때를 가릴 줄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감히 추렛 기사단의 일원인 나를 우습게 보는 거냐? 앙? 애새끼와 함께 세상 하직하고 싶지 않으면 좋은 말로 할 때 꺼져! 네 년 놈들 입을 적셔줄 자비로운 물 따위는 없다!" 꽈악.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부들부들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키면서 나는 타오르는 분개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걷어차인 충격으로 몇 번이나 기침을 하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온 피를 뱉어냈다. 등 뒤의 아이는 울 힘도 없었는지, 작은 신음만을 색색거리며 눈동자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보자 다급해진 여자는 아픈 배도 무릅쓰고 다시 남자의 바지춤을 붙잡기 시작했다. " 제발 부탁드립니다, 나으리! 제발 한번만 자비를! 이 불쌍한 어린 것을 봐서라도, 제발! 제발 나으리!! " " 아니, 이 년이 그래도?! " 눈을 부라리며 다시 발을 치켜드는 남자. 그리고 맞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붙잡는 손을 놓지 못하는 여자. 나는 더 이상 그 것을 지켜보지 못하고 그 들 사이로 끼어들며 남자의 행동을 가로막았다. " 그만 둬!! " "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또… 헉. 뉘, 뉘신지? " 처음 그 경비는 험상궂은 얼굴이 되어 갑자기 끼어든 나에게 한바탕 욕을 퍼부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후드를 벗어 훤히 드러난 내 얼굴을 보고는 금새 대경실색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피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일반 평민들에 비해 눈에 띄게 새하얀 피부와 곱상한 외모를 보곤, 귀족 집 아들이라도 되나보다며 지레짐작했던 모양이다. 나로서야 나쁠 것 없는 오해이지. 특히나 이런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나는 일부러 도도한척 턱을 거만하게 세우고는 강압적인 말투로 경비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 아이를 가진 여인에게 너무 심한 행동이 아닌가? 그 까짓 물이 몇 푼이나 한다고 사람을 이리 대한단 말인가. 이런 그대가 기사라는 직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거요? " 어디선가 '기사도'는 여인과 약자를 지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던 나는 최대한 당당한 표정으로 그의 잘못을 꾸중하려고 했다. 그럼 적어도 양심의 가책은 받겠거니 하고 말이다. 그러나 녀석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를 철부지 아이 보는 듯한 시선으로 흩어보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능청맞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 쯧쯧, 어디서 기사도에 관한 글이라도 읽으신 모양입니다만, 요즘 세상에 그런 고리타분한 것이 통용되다 여기시다니. 영애께서도 참으로 순진하십니다, 그려. 그 고운 얼굴 다치시기 전에 얼른 본가로 돌아가십시오. 저런 거지 년은 영애같이 아름다우신 분이 감싸줄 대상이 아닙니다. " " 뭐, 뭣? " 여, 영애에??? 지금 그거 나한테 '아가씨'라고 부른 거나 다름없는 거…맞지? 전혀 예상치 못한대서 직격한 쇼크에 한순간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를 보며, 녀석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껏 비굴해진 모습으로 두 손을 슬며시 마주 비벼 보였다. " 헤헤. 수행원도 없이 귀하신 분이 혼자 나오시다니.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그러십니까? 거처를 알려주시면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실례지만 영애의 성함은…? " " 죽… " 죽고 싶냐!! 나는 대뜸 녀석의 면상을 향해 이렇게 쏘아붙여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등장한 페리스에 의해 그것은 앞글자만 장식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웃음을 참는 듯한 억눌린 표정으로 나타나더니, 당장이라도 물 공격을 퍼부으려는 내 손을 남몰래 제지시키며 경비를 향해 입을 열었다. " 저런, 수행원이 없다니, 실례입니다. 저희 영. 애. 께서는 분별없이 혼자 행동하실 정도로 감성적이신 분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 비록 태어날 때부터 귀족이 아니었다고 해도, 정령사라는 특별한 능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이사나의 옆에서 그를 보필해왔던 페리스는 겉으로 보기에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귀족, 또는 귀한 사람을 모시는 수행원으로 보였다.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나는 그를 본 경비는 쳇-하고 짧은 불만을 삼키더니 곧 싱글싱글 웃으며 나에게 허리를 굽신거렸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1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401 / 25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10년 재앙과 비운의 황제 " 일행이 있으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이 근방에 산적이 나타난다고 하니 서둘러 돌아가시지요. 영애께서 불쾌히 보셨던 저 거지 년의 처분은 맡겨주십시오. 깨끗하게 처리하여 다시는 이 땅을 밟지 못하게 할 테니까요. " " 뭐… " " 아니,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 여인에 대해서는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하지요. 여러 가지로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했습니다. " 이번에도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내가 화낼 순간을 미리 캐치한 페리스는, 떨떠름한 표정의 경비가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냉큼 작별인사를 건네더니, 쓰러져있는 여자를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무언가 아쉽다는 의미가 가득담긴 얼굴로 계속해서 내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을 무시하며, 페리스와 함께 물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한적한 장소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주변에 아무런 다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내가 제일먼저 행한 행동이 뭐였냐면… 콰아앙--! " 크아악! 그 빌어먹을 자식! 누구더러 여자라는 거야!! " 머리끝까지 치솟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내리친 바닥은 반경 1m의 원을 그리며 커다란 구덩이를 남기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 안에서 맑은 샘물이 치솟아 오르자, 남자에게 맞은 배를 감싸 안으며 끙끙거리던 여인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동그래졌다. 신기했던 것은 페리스 역시 마찬가지라, 그는 참던 웃음을 터뜨리지도 못하고 놀란 눈으로 순식간에 만들어진 샘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인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대놓고 감탄하지는 못하고 일부러 여자에게 들으라는 듯이 떠들었다. " 호오, 아무리 엘…크흠…님의 힘이 장사라지만 이런 효과가 나타날 줄이야. 아무래도 수맥을 건드리신 모양인데요? 마침 잘 되었군요. 목이 마르다고 하셨지요? 이거라도 좋으시다면 드시겠습니까? " " 저, 정말입니까요? 나으리? " " 물론입니다. 이런 행운은 흔한 게 아니니 어서 드시고 아이에게도 먹이십시오. " "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으리! " 허둥지둥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던 여인은 곧 폭발적인 기세로 달려들어 샘물을 움켜쥐듯 떠 마시기 시작했다.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로 꾸역꾸역 물을 들이키는 모습을 보니, 경비에게 여자로 오해 받은 일 따위로 화내고 있던 내가 한심해 질 정도로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여자 앞에 다가앉았다. " 천천히 마셔요. 물도 채 한 다구요.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오히려 탈이 나요. " " 꿀꺽 꿀꺽. 크흡. 읍… 웁 꿀꺽 " 하지만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급하게 물을 들이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사람이 물에 목마르면 저렇게 까지 될 수 있는 걸까? 한참 만에 자신의 먹을 양을 채운 여인은 업고 있던 아이를 앞으로 안아 서둘러 물을 한 모금씩 입안에 떠 넣어 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는 엄마만큼의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모양인지, 넣어주는 물을 거의 다 삼키지 못하고 입 밖으로 그대로 흘러버리고 있었다. 작게 경련을 떠는 가녀린 육체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위태한 모습이었다. 아이가 좀처럼 물을 받아 마시지 못하자, 다급해진 여자는 울먹거리며 어떻게든 물을 넣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아이를 다독였다. " 레이. 이것 좀 마셔 보거라. 물이야. 우리레이, 물이 마시고 싶다고 했었지? 물이야, 물..자, 봐. 이렇게나 많아. 제발…아가야, 제발 한모금만이라도…흑흑. 아가야…. " 이제 겨우 5살쯤 되었을까? 앙상한 뼈만 드러난 팔뚝은 태어나 살아온 동안 얼마나 고생이 심했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사나들도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지만, 이 아이의 경우는 그보다 더 심했다. 하긴 5일이나 물조차 마시지 못할 환경이었으니 오죽했겠는가. 나는 누구에게 향한 건지도 모를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여자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았다. 그러자 여자가 기겁을 하며 도로 뺏어들기 위해 달려들었으나, 이후에 아이의 몸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곤 그대로 떡-하니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회복 】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아이의 몸을 감싸더니 다 죽어가던 몸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엘퀴네스의 고유의 능력인 치유술이 발휘된 것이다. 보통의 심한 상처에 해당하는 내상과 외상 외에도, 엘퀴네스의 능력은 이렇듯 체력이 극도로 약해진 신체에 생명의 기운을 회복시키는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빛이 사라짐과 함께 안색이 한결 밝아진 아이를 보고 눈이 동그래진 여인은, 내가 그 대신 아이에게 물을 떠 넣어 주는데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리곤 아이가 방금 전과 달리, 제법 기운이 도는 얼굴로 얼른 물을 받아 마시는 모습을 보고는 감격적인 표정이 되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줄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내가 아이에게 무슨 짓을 한건지, 내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이 없는 듯한, 오로지 무한한 감사와 안도가 드러난 표정이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 이해심 깊은(?) 여인이 구나 ' 하며 속으로 다행이다 여기는 순간, 울먹이는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나는 아이에게 물을 떠 먹여주던 손을 멈칫했다. " 아아아… 이런 곳에서 설마 엘뤼엔님의 사제를 만나게 될 줄이야. 정말 감사합니다, 사제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정말 죽을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흐흐흑.. " " …예? " 에, 엘뤼엔의 사제라니? 설마 이런 곳, 이런 상황에서 엘뤼엔의 이름이 나올 줄은 몰랐던 나는 당혹한 표정으로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를 치료했으니 여느 신관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해한다 쳐도… 왜 그게 하필이면 엘뤼엔이야? 그 녀석은 치료와는 전혀 상관없는 '형벌'의 신인데? 그런 내 혼란한 마음은 옆에서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페리스에 의해 해결되었다. " 흐음. 확실히… 엘뤼엔의 사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치료순례를 도는 특이한 행사를 한다고 했었지. 보통 다른 신전들의 사제들은 공짜로 치료 같은 걸 해주지 않으니까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가. 더구나 엘퀴네스님이 그마한 괴력을 보이고 난 뒤였으니…. " " 에? 그건 무슨 소리예요, 페리스? " " 음? 아, 들으셨습니까? 그러니까… 엘뤼엔신의 사제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치료순례를 행하거든요. 대부분 사람들은 설마 형벌의 신의 사제들에게 치료에 대한 신성력이 있을 거란 생각은 못하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체술 역시 상당히 뛰어나서, 어지간한 무장 병들과 싸워도 거뜬히 이긴다고들 하더군요. 아마도 그래서 이 여인이 오해한 듯싶습니다. "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설명을 들으며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다른 사람을 벌주는 것에 의미를 두는 엘뤼엔의 사제들이 치료 술을 쓸 줄 알다니…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러자 마치 그 의문을 예상했다는 듯한 페리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 형벌의 신이라고 해도 자비심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요. '선'을 이해해야 '악'을 처벌할 수 있다는 취지로, 일정 기한을 정해 이런 식의 치료순례를 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워낙 그 수가 적어 알고 있는 이가 오히려 드문 일이었는데, 이 여인이 용케도 알고 있던 모양입니다. " " 그, 그렇군요. " 수없는 감사의 말을 읊조리며 고개를 숙이는 여자를 보자니, 새삼 이제와 엘뤼엔의 사제가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무안했던 나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지어 주었다. 그러자 여인은 나를 완벽하게 엘뤼엔의 사제로 믿어버렸는지, 다시 감격적인 얼굴이 되어 연거푸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간절하게 내뱉는 부탁의 말에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 부디 사제님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오늘 입은 은혜는 후에 이 아이가 자라 반드시 갚게 할 겁니다. 그 때 아이가 사제님을 찾을 수 있도록 은인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 " 에? 제 이름이요? 아… 그, 그러니까…음…. "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것이라 나는 적잖이 당혹한 심정이 되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만큼은 페리스도 도와줄 마땅한 명분이 없었는지 마찬가지로 곤란한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본래의 내 이름을 알려줄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적당히 꾸며 대자니, 후에 정말로 나를 찾게 될지도 모를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활활 타오르는 여인의 기새를 보니, 정말로 아이가 자라면 나에게 은혜를 갚으라며 집에서 내 쫓고도 남을 것 같았던 것이다. 엘뤼엔의 정식 사제로 등록되어있지도 않은, 그야말로 뜬 구름 같은 은인을 찾기 위해 대륙을 헤맬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때문에 대답을 고르는 내 자세는 무척이나 신중해져 있었다. " 으음. 제가 엘뤼엔의 사제는 맞긴 합니다만, 현재는 신전을 나와 방랑중인 몸입니다. 언제 다시 돌아가게 될지도 알지 못하지요. 신의 섬기는 사제로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니, 은혜라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 "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제님은 죽을 뻔한 저희 모자를 구해주신 은인이십니다. 부디 살아있는 몫을 다하도록 사제님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 간곡한 목소리에 서린 단호한 의지에 나는 변명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면 눈앞에서 죽어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있는 것 같은 비장한 표정이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며 고심하던 나는 결국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 정 그러하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저의 친우들은 저를 '엘'이라 칭합니다. 현재는 거처할 곳을 나와 떠돌아다니는 몸입니다만. 후에 당신의 아들이 저를 찾고자 한다면, 솔트레테 제국의 황성- 황제폐하를 알현하도록 하십시오. " " 예, 예? 화…황제폐하를?? " 눈을 동그랗게 뜬 여인의 표정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드러났다. 하지만 페리스는 그것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그가 걸고 있던 수정 목걸이를 빼어 여인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아이의 목에 걸어주는 것이었다. 그리곤 의아해 하는 여자에게 생긋 웃으며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 찾아올 때에는 황성의 경비대에게 이 목걸이를 보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아이를 황제폐하에게 안내할겁니다. 당신의 눈앞에 서계신 분은 엘뤼엔신의 고위 사제이자, 현 이사나 란느 솔트황제 폐하의 최 측근이시랍니다. " " !! " " 겁이 나신다면 찾아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목걸이는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데 쓰셔도 무방합니다. " 현재 이사나가 제국의 반역자의 누명을 쓰고 쫓기는 상황에서 그의 측근이 건네준 소지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죽음과 연결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페리스는 그 점을 짚어 여인이 포기한다 해도 나무라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으나, 순식간에 표정을 굳힌 여자는 나와 페리스를 번갈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어차피 죽을 몸이었습니다. 반드시 은혜를 갚을 것입니다. 귀하신 분들을 미천한 몸이 뵙게 되어 영광이옵니다. " " 과연…백 명의 기사보다 더욱 용맹한 여인이로군요. 그대의 용기를 높이 사서, 여기 엘님은 반드시 당신을 기억하고 계실 겁니다. 당신의 아들이 무사히 엘님을 찾아올 수 있도록 빌어드리겠습니다. " 어이어이. 지금 내 기억력을 너무 맹신하는 거 아니야? 이 꼬맹이가 자라려면 아직도 한참인데…내가 그걸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을 거란 말이냐! 황당한 심정에 가슴이 뜨끔해져 왔지만, 이미 분위기는 내가 거절하게 만들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여인은 감동어린 표정으로 다시 절하며 소리쳤다. "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으리. 이 아이의 이름은 '레이'입니다. 평민이라 성은 업사오나 부친이 살아생전 뼈대 굵은 용병이었으니, 장성하면 어지간한 성인의 몫은 해낼 수 있을 겁니다. 후에 사제님의 노예로 부리시던, 다른 이에게 팔아넘기시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아이도 기쁜 마음으로 사제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 …으으음.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정말 기억을 못하게 되면 곤란하지. 그래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페리스가 아이에게 걸어준 목걸이의 수정에 남모르게 내 기운을 불어 넣었다. 아마 나중에 만나게 되면, 얼굴과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익숙한 내 기운을 느끼고 알아볼 것이리라. 이후 여인은 페리스가 급하게 마련해서 건네준 물주머니와, 몇 푼의 돈을 받고 몇 번이나 감사의 말을 건네며 돌아갔다.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뒷모습을 보던 나는 그제 서야 아차 싶은 마음에 페리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 괜찮은 걸까요? 일을 벌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뭣하지만…저러다 저 사람이 경비대에 밀고라도 하면…. " " 후후. 괜찮습니다. 저런 류의 사람은 자신의 신념은 굳게 지키니까요. 또한 마음이 변심해 밀고를 한다 하더라도, 거지와 다름없는 행색의 여인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이사나님께 엘뤼엔의 고위사제가 최 측근으로 있다는 것부터가 어부성설 이니 말입니다. " " 하하하… " 대책 없던 나와는 달리 페리스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정령왕이고 누가 인간인지 헷갈리는 걸?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며, 속으로 대책 없던 자신을 반성했다. 하지만 저런 신중한 모습의 그를 보니, 헤어져 있어도 잘 지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믿음직스러운 얼굴로 그를 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물었다. " 그러고 보니 페리스, 물의 정령과 계약할 생각 없어요? 일일이 물을 사는 것보다 정령과 계약하는 편이 편할 텐데. " " 예? 제가 물의 정령과 계약을요? 아…이것 참. 저는 바람의 정령사라 물의 정령과의 계약은 무리…. " " 바람과 물은 그다지 거스르지 않은 속성이니까 상관없어요, 친화력만 충분하면 소환이 가능할걸요? 10년 재앙기간에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페리스의 친화력이라면, 운디네하고도 계약이 가능할거예요. " " 예, 예? 그게 정말입니까? " 일반적으로 정령사는 자연의 4대 속성 중 1가지의 속성만을 다루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은 검사가 마법과 검술을 동시에 부리기 힘든 것과 같은 이치였지만, 어디까지나 세상사는 예외가 있는 법. 크게 속성이 다르지 않는 한, 소환할 정령의 친화력과 마나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다른 계열의 정령도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페리스의 경우는 물의 정령왕인 내가 바로 곁에 있었으므로, 물의 정령을 소환할 때의 친화력을 쉽게 이끌어 낼 수 있었다. 10년 재앙동안 모든 정령왕의 힘이 극도로 축소된 상황에서, 바람의 정령과 계약한 그의 정령사로서의 자질을 생각하면,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운디네가 아닌 시큐엘하고도 계약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런 내 생각을 조심스레 건네자 페리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화악 밝아졌다.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자의 표정이었다. "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법사가 높은 서클을 구사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정령사 역시 보다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고 싶어 하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 " 그럼 해보겠어요? 이번 소환에 성공하면 나중에 바람의 중급정령과도 계약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속성의 제한을 받아 바람의 상급정령의 소환은 힘들겠지만…. " " 상관없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엘퀴네스님! " 매사에 침착한 표정으로 생글거리던 페리스가 이순간은 두 눈에 불을 뿜듯 안광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색한 웃음으로 바라본 나는 곧 사람들의 시선이 모일 것을 우려해, 처음 내가 이사나에게 소환되었던 산속의 샘으로 곧장 텔레포트했다. 물론, 페리스 역시 같이 데리고 온 것은 물론이다. 그리곤 기대가 잔뜩 서린 얼굴로 눈을 빛내고 있는 페리스를 샘 옆에 앉힌 후,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게 한 다음, 그의 주변으로 내 기운을 퍼뜨리며 물의 상급정령-시큐엘의 소환주문을 외우도록 종용했다. 처음 그는, 내가 그의 옆으로 퍼트린 물의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어려워하는 듯 했지만, 금새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와 또박또박 입을 벌려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 태초의 자연은 나의 마나를 받아 운동할지어다. 바다의 광활한 영역을 감시하는 자- 그대 물의 시큐엘이여, 이 순간 그대의 소환을 원하는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 슈우욱- 내가 도와준 덕분인지, 아니면 페리스의 정령사의 능력이 워낙 뛰어난 탓인지, 응답은 금새 이루어졌다. 그가 주문을 마치는 순간, 페리스의 주변을 돌던 물의 기운들이 폭풍이 치듯 거칠게 요동하더니 곧 그의 눈앞에서 한가지의 형체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나의 급격한 소모 때문에 안색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페리스는 그 모습에서 눈을 때지 못하며 멍하니 감격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풍성한 몸체를 자랑하며 멋들어진 갈기를 휘날리는 물로 된 늑대의 형상이 드러나자, 페리스는 헉-하고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나 등장한 시큐엘은 그런 페리스의 모습은 거들떠도 보지 않고, 먼저 그 옆에 서있던 나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 위대하신 물의 정령왕을 뵈옵니다. 바다의 광활한 영역을 감시하는 자- 시큐엘이옵니다. 모습은 완벽하게 똑같았지만, 이번에 소환된 시큐엘은 평소 내가 데리고 다니던 그 녀석이 아니었다. 그렇다 해도 녀석 역시 내가 만들어낸 정령중의 하나였으므로, 나는 반가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다쟁이인 나이아스나 수줍은 많은 운디네에 비해 시큐엘은 상당히 터프한, 과묵한 느낌의 정령이다. 간단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선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소환자인 페리스를 바라보며 엄숙하게 물었다. - 그대가 나를 소환한 자인가? " 그, 그렇습니다! " - 무례한! 정령왕의 앞에서 어찌 나에게 말을 높이는가? 그대는 지금 이 순간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왕을 모실 의무가 주어지는 몸이다. 살펴본바, 그대는 나와 계약하기에 충분한 자격을 지니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나와 계약하겠는가? " 무, 물론 입…아니, 물론이다. 내 이름은 '페리스 드 해머.' 그대 물의 상급정령 시큐엘과의 계약을 원하는 바다. " - 좋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페리스여. 그대는 나를 소환함으로서 원하는 것을 구하며, 나는 소환됨으로서 그대의 뜻을 돕는 보필자가 됨을 약속한다. 파아앗- 짧은 대답을 마친 시큐엘은 둔갑하는 구미호처럼 몸을 뒤로 빙글 돌리더니, 그대로 한줄기 물이 되어 페리스의 이마에 강하게 내리 꽃히며 사라졌다. 그러자 그의 이마엔 미리 새겨져 있던 바람의 인장 옆으로, 물의 상급 정령사를 뜻하는 물의 인장이 선명하게 자리 잡는 것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줄기가 닿은 이마를 매만지던 페리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 저, 정말 제가 시큐엘과 계약한겁니까, 엘퀴네스님?? " " 쿡쿡. 믿지 못하겠으면 지금 불러보면 되잖아요. " " 예? 아…그, 그렇군요! 으음. 시…시큐엘? " - 불렀는가? 평소의 지적인 모습은 어디다 내 팽개쳤는지 상당히 흐트러진 모습으로 시큐엘을 부른 그는, 한 마리의 늑대가 공중에서 순식간에 등장하며 물어오자 기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참으로 혼자보기 아까운 장면이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저렇게 상급정령을 자주 부르면 몸의 마나가 바닥이 날 텐데 말이지. 아니나 다를까. 계약직후인 상태에서 다시 몸에 무리한 마나의 소모가 생기자, 페리스의 안색은 그냥 보기에도 위험해 보일만큼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던 나는 얼른 시큐엘에게 돌아갈 것을 명령한 후, 페리스에게 회복의 주문을 외워주며 엄한 목소리로 충고를 시작했다. " 당분간은 운디네와 나이아스들만 불러서 마나의 소모에 익숙해지도록 해요. 시큐엘의 소환은 아직 몸에 부담이 되는 것 같으니까요. 꾸준히 수련하면 나중엔 시큐엘 여럿을 한번에 불러내고도 끄덕 없을 겁니다. " " 미…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 내가… 대륙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상급정령사가 되다니. 모두 엘퀴네스님 덕분입니다. " 감격이 서린 목소리로 연신 내 덕분이라 말하는 페리스의 눈은 어느새 촉촉이 젖어있었다. 정령사의 재능을 인정받아 황성에 들어왔지만, 하급정령을 다루던 그는 여러 가지로 천대받는 나날을 계속해 오고 있었다고 했다. 애초에 그가 이사나를 모시게 된 경위가, 어느 곳에도 쓸모가 없는 그의 처분을 고민하던 유카르테 대공이, 이사나를 더욱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붙여준 것이 계기였다니 말이다. 오히려 이사나 본인은 그의 정령사로서의 능력을 무척 아끼며 실프들을 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페리스는 자신이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서 몇 번이나 좌절감을 맛보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또 자신과 계약을 한 실프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이어져 페리스는 종래에 스스로를 자학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고해성사를 하듯, 그동안의 모든 심정을 고백하는 그의 복잡한 얼굴을 보던 나는 어린아이에게 그러하듯, 그의 숙여진 머리를 쓰윽 쓰다듬어 주었다. " …? …에, 엘퀴네스님? " " 강해지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도 누구나 마찬가지이죠. 그것이 지켜야 할 자가 있다면 더욱 그렇고요. 실프들도 그것을 이해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니 페리스가 자책할 필요는 없어요. " " 하, 하지만…. " " 친구라고 인정해 주기만 하면 되요. 정령을 당신의 수하가 아닌 친구로만 받아준다면, 실프들은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해 줄 겁니다. 설마 페리스는 약한 친구를 외면하는 사람은 아니겠지요? " "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 말도 안 된다는 듯 얼굴까지 붉히며 반박하는 모습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쿡쿡. 그래요. 그거면 됐어요. 본래 하급정령은 공격이나 방어의 입장보단 곁에 머물러 위로해주는 의미가 더 강하니까요. 아마도…가장 자연 그 자체인 것은 하급정령일지도 몰라요. " " 에, 엘퀴네스님…. " 상급의 정령일수록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힘은 상상을 초월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입장에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될 뿐, 언제까지나 곁에 머무는 친구의 모습이 되어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급정령들만큼 친근하고 항상 곁에 둘만한 존재를 찾기도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급정령의 능력을 우습게보면 곤란한데 말이야. 아마도 페리스는 실프들을 정찰 외의 목적으로 불러내본 적이 없는 모양이지만, 실프의 바람의 칼날은 꽤나 위력적이라, 어지간한 나뭇가지라도 단번에 꺾어 낼만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다른 하급정령도 마찬가지. 결국 정령 능력의 상하유무는 사용자의 능력수준에 비례한다는 소리다. 특히 하급정령의 경우, 인간 세상에 소환되고 난 후에는 계약자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소환자가 얼마만큼 컨트롤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능력사용이 무궁무진했다. 뭐, 그 점을 굳이 알려줘서 페리스에게 자격지심을 느끼게 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든 좋은 게 좋은 거니 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수하게 물의 정령과 계약함을 기뻐하고 있는 페리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사나로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측근이 한 명 더 생긴 것과 마찬가지. 황궁 탈환의 계획은 조금 더 순조롭게 진행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2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372 / 24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나와 페리스가 시내 근처에서 경험한 일은 이사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 역시도 물을 돈으로 사고판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착취하다시피 평민들을 괴롭히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었던 것이다. 한참이나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하던 녀석은, 급기야는 자신이 직접 그곳으로 가 경비를 맡은 기사를 처단하겠다는 망발을 꺼내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의 진땀을 다 빼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녀석은 이성을 잃으면 눈에 뵈는 게 없는 타입인 모양이다. 결국 이사나를 중제 시키는 역할은 고스란히 그와 '동격, 혹은 그 이상'인 내 몫으로 돌아왔다. " 그만 둬. 그러다 정체가 밝혀져서 황성으로 끌려가려고 이래? 네가 황제가 되면 다 개선할 수 있는 문제잖아. 자꾸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다른 사람들이 난감해 진다고. " " 하, 하지만! 그런 사이에도 백성들이 몇 명이나 물이 없어 죽을지 몰라. 그것을 보고만 있으란 말이야? " " 지금 네가 나서서 고치려고 해도 아무런 소용없어. 괜한 일 만들지 말고 지금은 가만히 있으라고. 그리고 넌 정말 나를 놔뒀다 국 끓어 먹으려고 그러냐? 조금만 머리를 굴려서 생각하면 되잖아? " " 응?? " 의아하게 물어오는 모습에 머리가 다 지끈지끈거렸다. 아무래도 이 인간들은 내가 정령인 걸 자꾸만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때문에 나는 내 정체성을 다시 일깨워 줄 겸, 이사나의 고민도 해결해 줄 겸, 간단하게 손을 휘저어 이 모든 일을 단번에 해결할 만한 행동을 보였다. 그것은 바로… 후두둑. 쏴아아- " 헉… 비, 비온다!! " " 어떻게 먹구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서, 설마 엘퀴네스님이?? " 이제야 알았냐, 이 놈들아! 조그만 비구름을 불러왔을 뿐이었지만, 이사나의 주변을 적시기엔 충분히 넘치고도 많은 양이었다. 당황하던 사람들은 곧 이것이 나로 인해 벌어진 상황임을 눈치 채고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그러나 그 들 중에서 나의 의도를 알아챈 이는 유일하게 페리스- 그 밖에 없었다. " 그렇군요! 엘퀴네스님이 비를 자주 내려주시면 사람들이 굳이 비싼 돈을 내고 물을 사먹지 않아도 되지요. 그런 간단한 해결방식이 있었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 그러자 그제 서야 내 뜻을 깨달은 다른 이들도 덩달아 놀라워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사나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눈을 부릅뜬 채 멍하니 입을 벌리는 것이었다. 설마 정말로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 " 그런 것이 가능할지는 몰랐어. 정령이라고 해도… 그다지 익숙한 존재가 아니니까. 역시 대단하구나, 정령왕이란…. " …아무 생각도 없었던 것 맞군. 창피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지만, 결국 결론을 말하자면 '몰랐다'였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불러왔던 비구름을 공기 중으로 흩어 버렸다. 그리곤 순식간에 걷힌 빗물을 신기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생각해둔 계획을 꺼내었다. " 엘퀴네스가 다룰 수 있는 비구름의 양은 무한정이야. 내가 원하는 때에 얼마든지 어떤 형식으로든 비를 내릴 수 있어. 같은 시간 전 대륙에 비를 내리는 것도 가능하지. 그러니 오늘부터 삼일에 한번씩, 12시부터 1시까지의 약 1시간동안 솔트레테 제국 안에 비를 내리겠어. 그러니, 알렉 여러분은 수도로 올라가면서 소문을 내주도록 해요. 사람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 " 그, 그렇게 하셔도 되는 겁니까? " " 상관없어요. 누가 딴지를 걸고 오면 소환자의 소원을 들어준 것뿐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크아돈의 자연은 전적으로 정령왕들의 몫이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었다. 아마도 내가 어떤 일을 벌이더라도 항의를 걸어올 신들은 없으리라. 하지만 그런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벌어질 다른 가능성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 삼일에 한번씩 내리신다는 것은, 한번에 내리실 때 많은 비를 내리신다는 거겠지요? 삼일이란 시간도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양을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칫 홍수가 나지 않을까요? " " 그 점은 나이아스들에게 지시해서 물을 증발시켜도 되고, 뭣하면 땅의 정령왕의 도움을 받아도 되요. 그 시간 내려진 빗물은 모두 땅으로 끌어들여 바다로 내 보내면 되니까요. " 물론 가능하면 트로웰을 귀찮게 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자신 있게 응답하는 나를 보고 용기를 얻었는지 사람들의 표정도 어느새 밝고 활기차지기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페리스의 제안을 마지막으로 기사들의 얼굴엔 기쁜 웃음이 가득 피어올랐다. " 그렇다면, 소문의 방식과 내용은 저희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으시련 지요? " " …? 그거야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어떻게든 빠른 시간에 모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해요. 페리스라면 바람의 정령이 있으니 더 빠르게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거예요. " " 예, 알겠습니다. 엘퀴네스님. 후후후… " 대체 뭘 생각하고 있기에 저렇게 음침한 미소를 흘리는 걸까? 뒤 늦게 서야 소문 방식도 지정해 줄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강은 건너고 난 후였다. 이후 모두의 조심스런 당부의 인사를 들으며 기사들과 헤어진 나는 이사나와 함께 간단한 배낭만을 챙긴 채 산을 내려왔다. 그때가 마침 약속한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이사나에게 간단한 보호막을 쳐주어 비를 맞지 않게 한 뒤, 최대한 많은 양의 비구름을 불러와 솔트레테 전역을 적시도록 물을 조정했다. 쏴아아- 곧 눈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은 만큼의 엄청난 폭우가 집중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만족한 시선으로 보던 나는 그때까지도 이사나가 우울한 표정으로 서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 왜 그래, 이사나? 기사들과 헤어져서 슬픈 거야? " " 그게 아니야.. " " 그럼 왜? 그렇게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가서 네 사촌형이란 사람의 도움을 구할 수 있겠어? 기운 내라고. 다 잘 될 거야. " " …미안해 엘퀴네스. "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갑자기 뜬금없이 웬 ' 미안해 ' 인가? 어리둥절하게 반문하는 나를 보며 이사나는 더욱 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 난 황제 자격미달인 사람이야. 페리스도 눈치 챈 네 심중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게다가 네 도움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또 이런 식으로 도움을 받아버리고… 하아. 정말이지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어. " " 뭐어? 무슨 소리야~ 페리스가 유달리 눈치가 빠른 것뿐이야. 다른 사람들도 내 계획을 모르긴 마찬가지였잖아? 게다가 이 정도 일은 도움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라고. 그저 능력 있는 친구 둬서 편하다고 생각할 수 없어? " " 하, 하지만. 감히 내가 어떻게 정령왕의 친구가…. " 어쭈구리? 어떻게 감히 정령왕의 친구가 되냐고? 그러면서 꿋꿋하게 반말하는 것은 뭔가 상당히 어긋나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냐?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이사나를 보던 나는 곧 서운하다는 표정을 가득 지으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 어? 나는 지금까지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는 아니었단 말이야? 이거 엄청 서운한데… " " 으응? " " 아아, 뭐 어차피 나는 너한테 따라다니는 짐밖에 안되는 거였나? 에휴, 어쩔 수 없지 뭐. 애초부터 내가 그러겠다고 했으니… " " 무, 무슨 소리야, 엘퀴네스! 네가 짐이라니? 그럴 리가 없잖아! 오히려 내가 짐이라면 몰라도… 네가 얼마나 나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데, 짐이라니 말도 안돼! "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구 귀여운 것. 아마 효선이가 이사나를 보면 '아방 수'의 등장이라며 호들갑을 떨고도 남겠는 걸? 강지훈 이었을 시절 반 친구였던 '박 효선'은 가끔 남자애들을 가져다 서로 커플을 만들어 주고는 혼자 히히덕거리는 것이 취미였는데, 그 때문에 반에서 은근히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물론 본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지만.) 골라대는 녀석들도 하나같이 반에서 미모가 뛰어난 사람들 뿐 이라, 남자 녀석들은 효선이의 그런 커플 맺기 작전을 변태스러워 하면서도 은근히 기대하곤 했다. 일단 녀석에게 찍히면 반에서 외모가 상당히 뛰어남을 인정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물론,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번도 녀석의 마수에 걸려든 적이 없던 나는 안도와 함께 뼈아픈 마음의 상처까지 동시에 입고 말았지만. 뭐 아무튼. 그거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이니 상관할 바가 아니지. 나는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는 이사나를 바라보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겉으로는 여전히 삐진 듯한 퉁명스러움을 유지한 상태였다. " 그럼 친구로 생각해 준다는 거야? " " 다, 당연하지! 엘퀴네스 너만 좋다면 오히려 내가 친구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 " 흠. 그럼 간단하네. 우리는 진작부터 서로를 친구로 여기고 있었다는 거잖아? 그러니까 앞으론 친. 구. 인 나한테 부탁하는 걸 어려워하기 없기다? " " 어어? 으, 으응…. " 아직 완전히 수긍한 것 같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엔 일말의 비장감까지 어려 있었다. 어째 강압적으로 친구선언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하긴 해도… 뭐, 이정도면 다 잘된 건가? 다행히도 이사나의 표정은 이제 굳어진 모습에서 한결 풀어진 상태였다. 나에게 느꼈던 부담감이 ' 친구 ' 가 됨으로서 어느 정도 사라져 버린 듯 했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퍼붓는 비를 바라보는 것에 미소를 짓던 나는, 문득 페리스가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라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분명… ' 소문의 방식 ' 을 마음대로 해도 되냐고 물었으렷다? 대체 뭐라고 꾸며댈 작정이기에 그러는 거지? 되도록이면 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 선에서 잘 해결해주었으면 했던 나는, 그들이 그런 점을 감안할 리가 없단 생각에 일찌감치 자포자기 하는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말한 '소문'을 접한 것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인, 카웰 후작령으로 가는 길목에 인접한 어느 작은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3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313 / 20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 소문 들었어? 요즘 들어 삼일에 한번씩 내리는 폭우 말이야. 그것이 황제폐하께서 신께 서원해서 이룬 것이라는 거! " " 응, 응! 나도 들었어. 백성을 위해 눈물을 쏟으며 기도하셨다고 하더군! 그 간악한 섭정 왕 유카르테 대공이 모함을 한 게지! 그렇게 훌륭하셨던 선황폐하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그런 이사나님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가 없었다고, 나는! " " 다들 쉬쉬 하고 있지만,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걸? 모를 수가 있나! 정보길드의 마스터가 직접 확인한 것이니 말이야. " " 그 모진 탄압을 받으며 쫓기는 와중에도 신께 백성을 위한 기도를 드리셨다니, 얼마나 갸륵하신 마음이신가! 지금껏 세태에 물든 어린 황제라, 통렬하게 비웃었던 내가 다 부끄러울 지경이야. 차마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구만. " 조그만 식당 한켠에서 연거푸 술을 들이키며 떠들어 대는 말에 나와 이사나의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설마 정보길드에게 소문을 팔아넘길 줄이야. 전 대륙에 길드가 있는 조직(?)이니 만큼, 가장 확실하게 소문을 내줄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에서 챙긴 이익금을 저들끼리 홀랑 받아먹었다는 생각에 이만 부득부득 갈렸다. 30골드론 모자랐단 말이냐, 페리스!! 거기다 또 이사나가 서원했다는 그 신이라는 것도 웃기지 않았다. 페리스는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솔트레테의 국교신인 마신을 미뤄두고, 그 이름도 대단한 엘뤼엔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지극히 호의적이었다. " 엘뤼엔 신전의 사제들은 예전부터 가난한 자들에게는 자비심이 깊었지. 그런 사제들이 모시는 신이신 만큼, 폐하의 간청을 무시할 수가 없었던 걸게야. 암, 그렇고 말고. " " 맞아. 나도 이전에 엘뤼엔의 사제에게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그것도 공짜로! 요즘 세상에 다시없을 순결하신 사제들이시지. " 아아아. 당신들은 지금 속고 있는 거야, 속고 있는 거라고! 차마 소리 내어 말 해줄 수가 없음이 그저 무한한 통한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엘뤼엔이 불쌍한 인간을 굽어보는 자비 깊은 신이 되었던 것이냐. 얼굴이 후드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안 그랬음 잔뜩 일그러진 내 표정이 이사나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났을 테니 말이다. 오랜만에 식당에서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던 이사나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와 심상치 않게 굳어진 나를 보며 바짝 긴장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다행히 알렉들은 아직 발각되지 않은 모양이야. 이대로라면 무사히 수도까지 당도할 수 있겠지? 정보길드에게 접근하려면 위험부담이 컸을 텐데… 용케 모험을 감행한 것 같아. " 아무리 수배명단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정보길드에서까지 그들의 인상착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알렉들로서도 꽤나 위험부담을 감수하고 벌인 일 이었을 테지. 하지만 나는 그들이 정보길드의 입을 막기 위해 사용했을 방법이 훤히 드러나 보였기에, 전혀 그런 노고를 치하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 분명 나를 팔아먹었겠지. 정령왕 엘퀴네스의 최초의 소환 자- 이사나에 대한 정보를 팔아 넘기는 것으로 입막음 했을걸? ' 대륙 최초의 엘퀴네스의 계약자. 단지 그것만으로도 정보길드에서는 쌍수들 들고 환영하며 다른 사소한(?)문제 거리는 덮어둘 의사를 보였을 것이다. 덤으로 페리스가 나의 도움을 받아 물의 상급 정령-시큐엘의 계약자가 된 것까지 떠넘기면, 그야말로 대륙 최고의 일등급 고객이 될 것이라는 것에 내가 가진 전부를 걸 수도 있었다. 게다가 이번 일을 도와줌으로서, 이사나가 나중에 다시 황권을 되찾았을 때에 받을 보답을 계산하는 것만으로도 수익이 짭짤할 테니, 정보길드에서 무시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지. 새삼 이사나가 나를 소환했다는 걸 알았을 때, 열광하던 기사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거야 완전히…봉 잡은 거잖아! " 왜 그래, 엘? 기분이 나빠 보여.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아무튼 소문 하나는 확실하게 퍼진 것 같네. 어쩌면 네 사촌형이라는 사람에게도 닿았을지 모르겠는 걸? 협상이 빨리 진행될지도 모르겠어. " " 으음…그런데 어쩌지? 앞으로 그곳까지 가려면 검문소를 두개나 거쳐야 하는데… 우리에겐 통행증이나 제시할만한 신분증이…. " " 아아. 그건 걱정 마. 뭣하면 날아가도 되고… 아니면 강을 타고 수로를 통해서 통과해도 되니까. " 설마 내가 그런 것 까지 생각해 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건가? 나의 간단한 해답에 괜히 고민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이사나는 다시 안심한 표정으로 식사에 임하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들어온 식당은 마을에 위치한 여관 중에서도 가장 별 볼일 없고 구석진 곳에 위치한 초라한 장소였다. 알렉들과 헤어진 이후, 소지했던 꽃잎 중에 하나를 팔아 얼마든지 고급여관을 이용할 정도의 금액을 소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가급적 사람들의 눈에 띄지 말자는 의도였던 것이다. 낡은 식당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거렁뱅이 차림을 한 아저씨들이나, 남들 눈 신경 안 쓰고 술 마시기 좋아함직한 용병차림의 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본래 이런 상황이라면 나이가 어린 우리 둘이 가장 눈에 띄었겠지만, 얼굴을 후드로 온통 가리고 있는데다 말없이 식사만 하고 있었으니,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일이 전혀 없었다. 마침 이 여관의 자랑이라는 주인의 손녀가 서빙을 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경 쓸 건덕지가 없는 상태였다는 게 더 옳았지만 말이다. " 휘익~ 에이미. 오늘은 더 예쁜데? 마이크자식 기쁨의 눈물을 흘리겠는 걸? " " 크하하~ 그 불쌍한 자식. 벌써 몇 년째 네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거냐? 이제 그만 받아줄 때도 되지 않았어? " 짓궂은 표정으로 농담을 건네는 남자들의 말에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들고 나오던 갈색머리의 소녀가 눈살을 찌푸려보였다. 나이는 이제 16세 정도 되었을까? 귀염성 있는 얼굴은 자잘한 주근깨 때문에 더욱 소녀의 분위기를 발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하얗지는 않지만 적당히 그을린 건강한 피부라든지, 전체적으로 날씬하게 균형 잡힌 몸매는 그 나이 때의 소년이라면 누구나 한번이라도 돌아봄직한 매력을 가득 담고 있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쟁반을 남자들 앞에 내린 소녀는, 짜증이 서린 목소리로 앙칼지게 대꾸했다. " 지금 마이크 따위를 받아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런 녀석 한 무더기가 와도 사양이라 구요! 저에게도 나름대로 꿈이 있단 말이 예요! " " 킬킬킬. 또 시작이다. 아서라, 에이미. 너 같은 평민 계집아이를 어디 귀족 나으리들이 눈 하나 깜짝해 줄 것 같아? 그냥 마이크가 죽자 살자 따라다닐 때 모른 척 하고 받아주라고. " " 요즘 시대에도 백마 탄 왕자를 꿈꾸는 철부지 소녀가 어디 있어? 마이크정도면 과분하다니까~ " " 아니, 이 아저씨들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 " 크하하하하하~! 오늘 정말 술 맛 좋구만! 어이 주인장! 여기 맥주 하나 더 추가해 주시오! " 아마도 이러한 말씨름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듯. 익숙하게 되받아치는 남자들의 모습에선 일상에서 묻어나는 여유까지 보였다. 다만 에이미라는 소녀만이 분을 못 이겨 가슴을 두드려 댔을 뿐이지만, 그렇다 해도 어쩌겠는가.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 넘겨줄 줄 아는 것도 때론 생활을 익혀가는 지혜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사나는 문득 궁금하다는 듯이 나를 보며 물었다. " 근데 있지, 엘… 맥주는 무슨 맛일까? 저것도 술이겠지? " " 으응? 응…술 맞아. 왜? 마셔보고 싶어? " " 아,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이전에 페리스가 맥주가 꽤 맛있다고 한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 차마 마시고 싶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어영부영 상황을 넘기려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런 대화를 근처의 용병들이 들은 모양이다. 그들은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들고 있던 잔을 보이며 크게 소리쳤다. " 어이, 아직 맥주도 마셔 보지 못한 샌님이냐? 이 맛을 모르면 어른이 됐다고 할 수 없는 거라고! " " 크하하. 이제 겨우 성인딱지 뗀 모양인가 본데, 마셔볼래? 맛이 기가 막히 다고! " 아니, 이 인간들이 지금 순진한 미성년자에게 음주를 권해도 되는겨? 나는 그들의 하는 말에 혹한 이사나가 '그래볼까'하기 전에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 뜻을 밝혔다. " 괘, 괜찮아요. 이 녀석 술이 무지 약해서 한잔만 마셔도 뻗어버리거든요. 마음만 고맙게 받겠습니다. " " 호오, 뭐야? 여긴 또 보호자 등장이신가? 그러지 말고 형씨도 마시는 게 어때? 그리고 술이야 원래 마실수록 느는 거라고. " " 아무렴, 술을 모르면 남자라고 할 수도 없는 거지. 하핫 " 저런 근거 없는 말은 도대체 어디에서 흘러나왔단 말인가. 악의 있는 말은 아니었지만 마땅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난감해 하는 내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한 테이블의 용병들과 입씨름을 하던 소녀가 이번엔 술을 권하는 사람들에게 핀잔을 늘어놨던 것이다. " 그만 두세요. 잭 아저씨. 술이 약하다는 사람에게 마시라고 강요하는 게 어디 있어요? 민폐라고요, 민폐! " " 어이, 에이미~ 우리한테 화풀이 할 셈이냐? 그리고 이건 강요가 아니라 권유라고, 권유! " " 하하핫~ 오늘 우리 에이미 아가씨가 기분이 매우 나쁜 모양이네? 알아서 몸을 사려야 겠는걸? " 그들의 말에 테이블에 앉아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쾌한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작고 낡은 가게치곤 손님이 많은 편이다 생각했더니, 오랜 시간부터 이곳을 찾아온 단골들이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집중되었던 시선들이 흩어지자 나는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며 이사나에게 조용히 충고를 덧붙였다. " 아직 네 주량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술은 될 수 있는 한 마시지 않는 편이 좋아. 자칫 하단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고. " " 으응. 미안. 괜히 나 때문에 소동이 벌어질 뻔 했네… "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인 이사나는 다시 식사를 하는 것에 집중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우리에게 호기심을 보인 다른 이가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다시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 어이. 이 곳은 처음인 모양이지? 혹시 여행 중? "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음침해 보이기도 했으련만, 전혀 개이치 않는 다는 듯 유쾌하게 묻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40대 전후의 중년층의 남자가 많았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20대 중 후반인, 비교적 젊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푸석한 짧은 검은 머리카락에 구릿빛 피부. 갈색의 가죽 재킷을 걸친 그는 한눈에 봐도 거치게 살아온 것을 증명하듯, 멋지게 잡힌 근육 여기저기에 투박한 상처자국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인상만큼은 서글서글하니 단번에 호감이 가는 얼굴이었다. " 예, 맞아요. 저희 둘이서 여행 중이죠. " " 헤에~ 용감한데? 이 지역을 벗어나기 시작하면 몬스터가 자주 출몰한다고. 둘이서 괜찮겠어? 어디까지 가는데? " 그의 물음에 나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가르쳐 준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 되도록 아무렇지 않은 어조를 띄며 가볍게 대답했다. " 클모어 후작령 까지요. 그곳에서 사촌을 만나기로 했거든요. " " 엥? 클모어? 거긴 지금 대공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고. 검문이 엄청 까다롭다고 하던걸? 변한 신분을 증명할 사유가 없으면 문전박대 당할 텐데…사촌이 그곳 영지에 사나보지? " " 으음. 정확하게는 사촌도 그곳 사람은 아니 예요. 단지 클모어에서 만나기로 한 것일 뿐이거든요. 근데 상황이 그렇다니 조금 난감한데요? 어떻게 하지…. " 이사나의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이 후작령에 기사들을 풀어 놨을 거라는 건 알렉들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모르는 척 능청맞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이사나는 신기한 동물이라도 구경하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정령왕인 내가 이렇게 거짓말에 능숙할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겠지. 속으로 어색한 식은땀을 흘리는 내게 남자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 둘이서 여행할 정도면 어느 정도 검술이나 체술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임시적으로 용병단에 가입하는 게 어때? 이번에 클모어까지 가는 용병단이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어이, 네 단이었지? 거기. " 그가 돌아본 쪽은 같은 테이블에 앉아 묵묵히 술을 마시던 금발머리의 또 다른 남자였다. 한 덩치 하는 그에 비해 '도련님'이라고 불려질 정도로 가냘픈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곱상한 외모와 달리 눈빛만큼은 보는 것만으로 심장을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고 매서운 빛을 뿜고 있었다. 추정되는 나이는 마찬가지로 20대 중, 후반. 남자의 말에 귀찮은 표정으로 우리 쪽을 흘깃 쳐다본 그는 다시 입안에 술을 털어 넣으며 짧게 대꾸했다. " 애송이는 안 받아. 그것이 아무리 의뢰기간 뿐이라고 해도 말이야. " " 엑? 뭐야, 그건? 사정이 딱하지도 않아? 클모어까지 가는 길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얼마인데, 저 두 사람이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거야? 휴센, 너 그렇게 안 봤는데 엄청 냉정한 인간이었잖아? " " 시끄러워. 네 말대로 클모어까지 가는 길에 등장하는 몬스터가 얼마인데 저런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들까지 챙기며 간다는 거냐? 네가 할 일이 아니라고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 투닥거리는 폼을 보니 한두 해 알아온 사이가 아닌 것 같다. 괜히 우리일 때문에 저들사이까지 틀어질 것 같아 걱정이 된 나는, 둘 사이에 험악한 말이 나오기 전에 얼른 손 사레를 치며 괜찮다는 의사표시를 보였다. "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저희들일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요." " 엥?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 " 괜찮습니다. 그렇지, 라이? 우리끼리 갈수 있지? " 여기서 '라이'란 즉석에서 지어낸 이사나의 가명이었다. 전혀 뜬금없는 이름에 당황하던 이사나는 그것이 저들을 속이기 위한 가짜 이름인 것을 눈치 챘는지 곧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저 두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벙쩌진 얼굴로 우리를 보던 그들은 잠시 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내키지 않는 다는 듯이 물었다. " 노파심에 묻는 건데… 그쪽… 혹시 나이가…? " " 예? 아, 이쪽 라이의 나이는 올해 16세구요, 저는 17세…. " " 제기랄~! 이래서 제크 네가 관련되면 되는 일이 없다니까!!! " " 킥킥킥. 잘 되었지 뭘 그래? 어이, 너희들- 휴센이 어린애들에게 약하다는 것에 감사하라고. 이 녀석, 나이를 못 들었다면 모를까. 이제 절대로 모른 척 할 수 없을 걸? " 재밌다는 듯이 박장대소를 하며 웃는 말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런 반응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솔직히 어느 단체에 속하게 되면 곤란해지는 것은 오히려 우리 쪽이었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매사 몸조심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정령왕으로서의 내 능력의 발휘도 자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막대한 손실이며 피곤한 일인가! 그러나 이미 상대방은 우리를 데리고 가는 것으로 결정을 지었는지, 마시던 술잔을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 내 이름은 휴센이다. 샴페인 용병단의 단장이지. 클모어까지 간다고 했지? 마침 이번 의뢰가 클모어까지 가는 상단의 호위를 맡는 것이었으니 상관없겠군. 동료에게도 인사를 시켜야 하니 따라와. " " 예, 예? 아니, 괜… " " 나는 귀찮게 말을 끄는 것이 질색인 사람이다. 잔말 말고 따라와. " " ……. " 이럴 줄 알았으면 나이를 속여 말하는 건데 그랬나? 설마 일이 이렇게 꼬이게 될 줄은 몰랐던 나는 낭패한 얼굴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녀석 역시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결국 어쩔 수 없겠단 판단을 내렸는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구나 휴센이란 자가 나가면서 이사나가 먹은 음식값까지 대신 지불해 버리는 바람에, 말 그대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렸던 것이다. " 어이~ 다음에 기회가 되면 보자고! 오늘 만나서 즐거웠어 ~~ "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한 마냥 입가에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처음에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던 바로 그 남자였다. 제 딴에는 호의를 베풀었다고 한 것이었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그에게 원망하는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다. 애초에 저 사람이 쓸데없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잖아! 마음속으로 이를 갈며 서둘러 이사나와 함께 식당을 벗어나자, 우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휴센이 묵묵히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 우리 용병단의 인원은 6명이다. 남자 4명에 여자가 2명이지. 하지만 쓸데없는 호기심을 보이지 않는 게 좋아. 여자라고 해도 실력은 남자들을 가볍게 제압할 정도의 괴물이니까.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 다들 너희에게 상냥할 거다. " " 저, 저어. 마음을 써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정말 우리들로도 괜찮은…. " " 너희들은 운이 좋은 거야. 샴페인 용병단이라고 하면, 용병 길드 내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알아주는 소수정예의 집단이니까 말이다. 가는 길까지 목숨의 위협을 받는 일은 없을 거다. " " ……. " 전혀 듣고 있지를 않는군. 대꾸해줄 가치조차 없다 이건가? 애초부터 16,7세의 남자들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는 자각은 못 하는 거야? 후드 속에 가려진 얼굴을 제대로 확인하려 하지도 않고 무작정 이끌고 가는 것부터가 불길한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울고 싶은 기분으로 쭐레 쭐레 따라간 곳은, 번잡한 시장을 지나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드러난 ' 나무샘의 쉼터 ' 라는 이름의 여관 앞이었다. 아마도 용병 길드 내에서 지정해준 여관인 듯,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동료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알려준 휴센은, 잠시 기다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혼자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덩그러니 남겨진 나와 이사나는 그들 몰래 도망칠 것 인가에 대해 맹렬한 고민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 어떡하지? 그냥 우리끼리 가버릴까? " " 하지만…가다가 우리랑 다시 마주치면 어떡해? 이 쪽 일행들도 후작령까지 간다고 했잖아. " " 아. 정말 미치겠네. 미안 이사나. 나 때문에 일이 꼬이는 것 같다. " " 무슨 소리야?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 마침 안에 들어간 휴센이 일행들을 데리고 나오는 바람에 우리의 대화는 자연히 거기에서 종결되었다. 해가 중천에 뜬 오후임에도 이제야 일어난 티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람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 아함~ 단장, 누굴 데리고 간다고? " " 자는 사람을 왜 깨우고 그래? 아직 출발하려면 시간도 남았으면서. 으…그러고 보니 출출하다? 지금 몇 시지? 어이, 이릴? " " 내가 네 시계인줄 알아? 뻔질나면 나한테 시간을 물어보고 난리야? " " 아아. 두 사람, 또 싸우려고 이래요? 지금은 점심시간을 막 지난 시간 이예요, 헤롤. " " 크흑. 역시 너 밖에 없다니까 매튜! " 감격적인 표정으로 시간을 알려준 소년을 끌어안은 근육질의 남자는, 새초롬한 인상의 여자에게 타박을 당하고 물러서고 말았다. " 자꾸 그렇게 매튜를 끌어안지 말라고, 이 짐승! 네 속마음을 누가 모를 줄 알아? 매튜! 이리와. 저런 변태 근처에 있다간 잡혀 먹는다고. " " 하하하… " " 어어? 너무해, 이릴! 나의 어디가 변태라는 거야~ " 울먹이는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눈초리와 매서운 타작뿐이었다. 꾸엑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발차기에 날아가는 남자를 멍하니 보던 나는, 그가 끌어안고 있던 매튜라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까무잡잡한 다갈색 피부에 결 좋은 검은색 머리카락. 다정한 빛을 머금은 황금색 눈동자가 그저 마주치는 것만으로 얼굴을 붉히게 만들 만한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언뜻 봐선 소년인지, 소녀인지 맞추기가 힘들만큼 가냘픈 체구는, 상체를 거의 드러낸 듯한 옷차림이 아니었다면 여자로 오인하고 접근하기 딱 좋을 타입이었달 까? 때문에 그를 끌어안은 남자를 여자가 변태라고 몰아붙여도 할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나는 이런 분위기를 가진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홀릴 듯한 섹시한 분위기와, 상대방의 마음을 뚫어보는 듯한 침착하고 단정한 황금색 눈동자. 설마… " ……트로웰??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4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248 / 31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내뱉은 작은 목소리였지만, 매튜란 이름의 소년은 그것에 확실하게 반응했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는 잠시 후 입가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웠다. 서, 설마 정말 트로웰?? 그때였다. 벙쩌진 나와 이사나는 무시한 채, 저들끼리 떠들기만 여념이 없던 사람들은 매튜의 시선이 정확히 나를 향하자 그제 서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 어라? 얘들은 뭐야, 단장? " " 아까 말했잖아. 이번 의뢰에 합류할 일행이라고. " " 엑? 애들을? 아- 알았다. 너희들 클모어 후작령까지 가는 길이지? 그런데 이 주책없는 양반이 같이 가자고 끌고 온 거고? 안 봐도 뻔하지. 단장이 애들한테 약한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 " 이 자식, 마이티! " 붉어진 얼굴로 소리 지르는 휴센의 기새는 제법 사나웠으나, 이미 일찌감치 익숙해져 버린 일인지 일행 중 그 누구도 움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헤죽헤죽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마이티란 사람의 말을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 맞는 말이지, 뭘 그래? 단장은 괜히 찔리니까 심술이야. " " 큭큭. 휴센씨가 저런 게 어디 한 두 번이야? 이제 그러려니 해야지, 뭐. " " 너, 너희들!! " " 그나저나, 이름들은 어떻게 되요? 나이는? " 머리끝까지 화가 난 휴센이 뭐라 소리치기 전에 가볍게 말을 끊은 것은 매튜란 이름의 소년이었다. 기대감을 가득 담은 황금빛 눈동자가 나와 이사나를 향하자, 자신이 너무 흥분했음을 깨달은 휴센은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매튜의 기가 막힌 화제전환에 감격했다. " 역시 매튜! 이참에 단장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 " 히야~ 볼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대단한 말 끊기라니까. 멋지다, 매튜! " 가벼운 휘파람을 비롯한 일행의 환호가 이어졌지만, 매튜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얼굴로 나와 이사나- 정확하게는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휴센은 불쾌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노려보면서도 서둘러 우리의 소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어흠, 소개하지. 이번 클모어 후작령까지 가는 의뢰에 합류할 일행이다. 이름은… " " 앗, 이…아니, 라이 라고 합니다. 나이는 16세. 잘 부탁드립니다. " " …17세. 엘…이라고 불러주세요. " 떨떠름하게 내 뱉는 말에 매튜의 눈빛이 더욱 반짝였다. 환한 웃음을 터뜨린 그는 당황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무시하고 답싹 나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 엘~! 오랜만이야!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거야?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 " …!! " ' 역시! 트로웰이 맞았잖아! ' 사람이 너무 반가우면 한순간 하고 싶은 말도 안나오나 보다. 놀란 표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는 내게, 오히려 나보다 더 놀란 주변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씩 떠들기 시작했다. " 설마, 둘이 아는 사이? 맙소사. 나는 매튜가 저렇게 웃는 모습 처음 봤어. " " 뭐, 뭐야? 둘이 무슨 사이야? 나 지금 라이벌 생긴 거야? " " 호오~ 베일에 싸인 매튜의 정체가 한꺼플 벗겨지는 순간인가? 이런 곳에서 매튜가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이는 바로 이사나였다. 정령왕인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가운 표정으로 나를 '엘'이라고 부른 것에서 멈칫한 녀석은, 트로웰이 정령왕이란 것에 생각이 미쳤는지 새하얗게 안색이 질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본 나는 작은 목소리로 트로웰에게만 들리게끔 속삭였다. " 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 네가 왜 여기 있어? 매튜란 이름은 또 뭐고? " " 나도 유희 중이었지. 설마 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소환 됐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만날 줄이야. 역시 아크아돈이 좁기는 좁구나. 헤헤. 아, 매튜는 나의 유희중의 이름이야. 이쪽은…네 계약자? " 트로웰의 흥미로운 시선이 닿자 이사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때 마침 예상치 못한 상황에 드디어 적응한 휴센이, 헛기침과 함께 말을 거는 바람에 자연히 어색한 분위기가 무마될 수 있었다. " 흠흠. 서로 아는 사이였다니, 의외로군. 우선 들어가서 대화를 하도록 하지. 응? 그런데 이릴, 네 파트너는 어디 간 거야? 분명 빠짐없이 나오라고 했을 텐데? " " 쉐리 말이야? 아침 일찍 나갔어. 근처에 '이글 용병단'이 와 있다나봐. 그곳에 애인이 있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야. " 그렇게 대답한 '이릴'이란 이름의 여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머리카락에, 햇빛에 그을린 피부와 검은색 눈동자를 가진 20대 초반의 늘씬한 미녀였다. 그녀의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이름이 마이티 였던 것 같다-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이마를 짚으며 신음을 흘렸다. " 이건 말도 안돼! 쉐리에게 애인이 있다니!! 젠장~~할~~! " " 크하하. 헛물 켰구나. 마이티. 그러게 넘볼 나무를 넘봐야지. 쉐리가 어디 너 같은 놈한테 눈이나 깜짝한다냐? " 마지막 말을 장식한 것은 처음에 이릴에게 '변태'라 낙인찍힌 헤롤이란 이름의 용병이었다. 건장한 근육질의 체구에 180은 넘어 보일 듯 한 큰 장신을 가진 그는, 짧게 자른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놀리는 듯한 시선으로 마이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곧 이어지는 이릴의 반격에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으니… " 변태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어. " " 커헉! 이릴! 너 아까부터 자꾸 왜 나한테 시비를 거는 거야? " " 흥! " 울먹이는 얼굴로 항변을 늘어놨지만 이번에도 돌아오는 것은 여전히 무시하는 표정뿐이었다. 절망에 빠진 헤롤만을 남겨둔 채, 휴센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으며 여관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여관은 식당과 겸업을 하고 있었는지, 총 2층으로 된 건물 안을 각 층별로 식당과 숙박을 목적으로 하는 구조로 나누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해진 식당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은 무리는,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트로웰을 배려해서인지 더 이상 우리 쪽으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을 고마운 눈으로 바라본 트로웰은 곧 흥미로운 미소를 띄우며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를 흩어보았다. 그 때문에 움찔하고 놀라던 이사나였으나, 이어지는 트로웰의 말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딱딱하게 몸을 굳히고 말았다. " 인간 최초의 엘퀴네스의 계약자를 여기서 보게 되는군. 반가워. 나는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야. '이사나 란느 솔트'. 이 제국의 어린 황제 폐하를 봤으니 감격해 해야 하는 건가? " " 헉… 어, 어떻게? " 말해주지도 않은 사실을 어떻게 아냐는 거겠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으로 놀라는 이사나에게 나는 차분한 어조로 설명을 덧붙였다. " 트로웰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너무 놀라지마. 이사나. " " 아… 아, 응…으음. 처, 처음 뵙겠습니다. 땅의 정령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 쿡쿡쿡. 땅의 정령왕의 모습이 이렇게 꼬맹이라 놀랐어? 뭐, 겉모습에 현혹되는 건 인간들의 가장 큰 취약점이기도 하지. 덕분에 우리들의 유희도 한결 수월하고 말이야. " …아마도 이사나가 트로웰을 보고 속으로 꼬맹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단박에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에게 나는 그저 어색한 미소만을 띄워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미리 주의를 준다고 해서 대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속으로 하는 생각이라는 게 마음처럼 그렇게 쉽게 컨트롤 될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앞으로 적응하려면 고생 좀 할 걸? 그 동안 속마음을 들킬 때마다 얼마나 깜짝 깜짝 놀랐던가. 그나마 나는 같은 정령왕이기 때문에 감출 수 있는 마음이 있었다지만, 인간인 이사나는 트로웰이 원하는 대로 그 마음이 적나라하게 읽히게 될 것이었다. 앞으로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닐 이사나에게 짧은 묵념(…)을 올린 나는 곧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 그나저나, 트로웰. 네 계약자는? " " 응? 그 녀석은 이곳에 없어. 블랙 드래곤인데… 계약만 하고 거의 나를 찾지 않거든. 그래서 나 혼자 여행 중. 후훗. " " 그렇구나. " " 참! 요즘 삼일에 한번씩 제국에 큰 비를 내리고 있었지? 정령계에 가 봐도 네가 없길 래 내, 마음대로 흙에 떨어진 빗물 대부분을 수맥으로 이동시켜 버렸어. 그대로 두면 홍수가 날 것 같아서 말이야. " 아차. 그러고 보니 트로웰의 협조를 구하는 것을 잊었구나. 어쩐지 그동안 내가 물을 증발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잘 사라진다 했었다. 그제 서야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며 짧은 사과를 건넸다. " 미안. 협조를 부탁한다는 것을 잊어버렸어. 어째 번거롭게 해버렸네… " " 무슨 소리야? 그런 걸 부탁할 정도로 우리가 남인가, 뭐? 덕분에 이곳 사람들의 생활도 한결 괜찮아 졌다고. 앞으로도 내 신경은 쓰지 말고 하고 엘이 싶은 대로 해. 아마도 기한은… ' 이사나군 ' 이 황권을 되찾는 순간이겠지? "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쉽게 수긍하는 것을 보면, 이사나의 마음을 읽으면서 그간의 소소한 사건들까지 전부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내 예상이지만 아무래도 한달 정도는 계속될 것 같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더 갈수도 있고. 내 계약자가 좀 고집불통이라, 나의 전면적인 도움은 그다지 바라지 않더라고. " " 에, 엘~! " " 쿡쿡. 인간치곤 기특하지 뭘 그래? 내 옛날의 인간 계약자는 어찌나 바라는 게 많던지. 짜증나서 계약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었다니까? 엘은 운이 좋은 거야. " 재밌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대답하는 말에 나 역시 '그렇지?'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트로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뜸 이사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 엘은 원래 인간이 아니었어, 계약자씨. 편하게 대할 수 있다고 해서 인간으로 착각하면 곤란해. " " 핫. 아, 예… " " …응? 무슨 소리야? "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이사나의 모습엔 묘한 죄책감마저 묻어져 나왔다. 그것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 내가 묻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 이제야 엘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길 래, 정정해준 것뿐이야. " " 아하하. 그, 그래? 내가 원래 좀 자각 없이 살긴 하지. 신경 쓸 필요 없어, 이사나. 괜찮으니까." " 으응….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5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225 / 29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나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도 이사나는 무안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고개만을 끄덕이고 있었다.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차마 얼굴을 마주볼 생각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괜찮다고 하는데도 저러는 걸 보면, 그동안 내색하진 않았어도 나에 대해 어지간히 환상을 깨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묘하게 이사나에 대한 트로웰의 태도가 차가운 것 같단 말씀이야? 얼굴은 여전히 미소 짓고 있었지만, 이사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그다지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관대하고 상냥하게 대할 것 같던 트로웰이 저러니 도무지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지? 잠시 이사나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트로웰만을 따로 불러 여관 밖의 한적한 장소로 이동했다. 그리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 왜 그래, 트로웰? 기분이 안 좋아? " " 응? 엘이야 말로 무슨 소리야? " " 아니. 내 느낌일 지도 모르지만… 이사나에게 조금 차가운 것 같아서. " " 에? 하핫. 그 얘기였구나. 괜찮아, 엘. 이사나만이 아니라 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대부분 이런 태도니까. " " 응?? " 모든 인간들에게 그런 태도라니? 놀란 표정을 짓는 나에게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 뭐랄까. 우월의식이라고 해야 하나? 되도록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일단은 정령왕인 이상, 인간을 대등하게 나와 같은 존재로 인식할 수가 없는 거야. 이프리트나 미네르바도 마찬가지일걸? " " 그, 그래? " " 음, 그래서 엘은 되도록이면 인간에게 소환되지 않기를 바랬는데 말이야. 아직 정령왕으로서의 자각이 더 필요한 시점에서 인간하고의 접촉은 위험하거든. 특히 그들은 감정의 전염성이 강하니까. 후우, 하지만 뭐..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소환을 축하해, 엘. 설마 정령왕 중 가장 소환이 어려운 네가 인간에게 당첨될 줄 몰랐어. 아마도 상황의 특이성이 작용한 모양이지만 말이야. " " 상황의 특이성? "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지만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사나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령왕을 소환할 만큼의 친화력이나 마나가 충분한 녀석이 아니다. 꾸준히 수련을 한다 해도 겨우 나이아스를 소환하는 수준에만 그쳤을 재능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사나가 떡하니 나를 소환해 낸 것은, 아마도 무언가 특이한 기연이 존재하지 않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이어지는 트로웰의 대답도 그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 단기간에 자연을 회복하다보니, 너무 많은 엘퀴네스의 기운이 대륙에 충만해져 있었어. 그렇게 모인 기운들은 일시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가 곧 소멸되는데, 아마도 이사나는 그 자리에서 너를 소환하게 된 모양이야. 그래서 그 기운들을 잠깐이나마 이용할 수 있었던 거지. 굉장히 운이 좋은 케이스랄까? " " 헤에. 그렇구나. " " 그런데 엘뤼엔도 이 사실을 알고 있어? 정령계에 갔을 때 네가 없으면 무척 서운해 할 텐데. " " 응? 아~ 괜찮아. 이프리트가 그러는데, 엘뤼엔은 당분간 신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댔어. 지난번에 이프리트가 벌여놓은 사건을 수습하는데 만도 정신이 없을 거라고 했거든. " 그게 아마도 바이톤 주민들의 생명 기록서를 왕창 날려버린 일이었었나? 작성하는 데만도 10년이 걸린다고 했으니, 지금쯤 엘뤼엔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프리트를 원망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밖에도 무너진 집무실이나 엉망이 된 서류들의 복구, 새록새록 결제를 바라고 올라올 다른 서류들까지 합하면 적어도 20년 이상은 엘뤼엔의 코빼기도 보지 못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차원이동을 할 수 있었으면 가끔이나마 내가 찾아가 볼 수 있었겠지만, 이쪽은 엘뤼엔이 오지 않으면 신계에 갈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의식하진 않았어도 대답하는 내 표정이 씁쓸했었는지, 트로웰은 눈에 띄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며 안타까워했다. " 아마 엘이 소환된걸 알면 가장 기뻐할 존재가 엘뤼엔 일 텐데. 미안, 내가 괜한 걸 물었나 보다. " " 아니, 괜찮아. 그나저나…트로웰이 용병이라니. 정말 놀랐어, 그건 어떻게 된 거야? " 언뜻 보기에 나보다 더 어려보이는 외모를 가진 트로웰이 어떻게 용병단에 무사히 합류할 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었다. 그것에 대한 트로웰의 대답은 무척 간단했는데, 유희를 나선 첫째 날 용병이나 되 볼까 생각하던 차에, 때 마침 새 단원을 모집하고 있던 '샴페인 용병단'을 보고는, 대뜸 찾아가 가볍게 집 채 만한 바위를 들어보였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어린애는 안 된다며 악을 쓰던 단원들은 얼이 빠진 얼굴로 입만 벌렸고, 단장인 휴센은 그렇지 않아도 어린애에게 약한 매리트까지 작용하여 결국 순순히 트로웰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 하하하… 왜 그렇게 까지…. " " 인간은 쇼크에 약하거든. 정신적인 충격으로 정신을 못 차리는 틈에 냉큼 가입하는 거지 뭐. 길드는 번거로우니까 말이야." 일반적으로 용병이 되는 방법은 길드로 찾아가 실력을 테스트 받고 용병패를 발급 받는 법과, 이미 단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을 찾아가 직접 단원으로 받아달라고 신청하는 경우의 2가지가 있었는데, 트로웰은 후자에 속했다. 길드에서 용병이 되면 궁합이 맞던 안 맞던, 무조건 길드에서 지정해주는 파트너와 함께 활동해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직접 마음이 맞을 만한 단원을 구하러 다녔다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귀찮게 여기고 길드를 찾아가는 추세였지만, 마음을 읽을 줄 아는 트로웰에게 궁합이 맞는 상대를 찾기란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 으응, 사람들은 좋아 보이더라. " " 그렇지? 대부분 용병 일을 하는 사람들은 거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데,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서 상당히 마음에 들었어. 그러고 보니 앞으로 당분간은 함께 다니게 되겠네? 재밌겠다. 헤헤. " " 응. 당분간 잘 부탁할게. 후후. "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나름대로의 일정과 계획이 있는 이상, 무조건적으로 내 일에 협조해주길 바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아무래도 트로웰과는 목적지인 클모어 후작령에 도착하자마자 헤어지게 될 테지만, 그 동안은 함께 여행 나온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겠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반가운 재회를 맞은 하루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 " 자, 이거 받아라. " 트로웰들이 클모어영지로 떠나는 것은, 호위를 의뢰한 상단의 준비가 마무리 지어지는 이튿날 오후였다. 때문에 나와 이사나는 샴페인 용병단과 함께, 그들이 머물고 있던 여관에서 함께 하룻밤을 더 머무를 수밖에 없었는데, 다음날 아침 식당으로 내려오는 우리에게 단장인 휴센이 건네준 것은 투박한 느낌의 가죽 목걸이였다. 걸려진 나무패에 검과 도끼가 교차된 문양이 새겨진 것만 빼곤, 어디에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을 듯한 단조로운 구조다. 대체 이게 뭐에 쓰이는 거라지? " ……? " 단지 전달만 해주었을 뿐, 전해준 목걸이에 대해 일절의 설명이 없는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뒤따라온 헤롤이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 임시용병을 상징하는 용병패야. 검문소를 통과할 때 보여야 하는 거니까 잊어버리지 말고 가지고 있어. " " 아, 이게 용병패? " " 아직 임시일 뿐이지만 말이야. 정식 용병은 이렇게 등급에 따라 동, 은, 금 으로 패를 만들거든. 볼래?" 그렇게 말하며 그가 보여준 패는 둥그런 은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새겨진 문양은 내가 받은 나무패의 것과 동일했으나, 일단 번쩍번쩍한 금속으로 만들어져서 인지 확실히 '정식'이란 느낌을 피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이는 목걸이를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헤롤은 그 밖에도 알려 달라 부탁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대충 용병이 하는 일이 무엇이며,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한 용병들인가에 대한 자랑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쓸모 있는 정보를 모으자면 대충 이랬다. 용병은 3단계로 등급이 구분된다. 동의 패를 받은 사람은 용병 중에서도 가장 흔해빠진 3 류에 해당하는 자들로, 주로 좀도둑을 잡거나 마을의 순찰을 도는 의뢰를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은의 패를 받은 자는 2류. 상단의 호위나 몬스터의 퇴치를 맡는 비교적 수준급의 용병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여기서 헤롤이 2등급의 용병이라는 것에 나는 경악했다.) 그리고 금의 패를 받은 용병이 바로 1류라 칭해지는 자들이었는데, 이들은 나라에서 맡기는 대어 급의 의뢰나, 던전의 해제, 까다롭기로 이름 높은 일급정보를 구해다 주는 일을 맡는다고 했다. 상급으로 올라갈수록 용병의 숫자가 적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의외였던 것은 바로 이곳 용병단의 단장인 휴센이 그 얼마 되지 않는다는 금의 패를 가진 용병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 헤에. 휴센 단장님이요? " " 그래. 놀랍지? 금의 패를 가진 용병들은 대부분 개인플레이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장은 이쪽이 더 편하다나봐.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아마 올해가 지나면 매튜도 금의 패를 받을지 몰라. " " 에엑? 트…아니, 매튜가요?? " 용병은 나이가 아닌 실력으로 등급을 판단하기 때문에, 아무리 어리더라도 능력만 인정받으면 얼마든지 상급의 패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설마 트로웰이 상급용병이 될 줄은 몰랐던 나는 기겁을 하며 되물었고, 헤롤은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피며 대답했다. " 대단하지? 그동안 길드에서 매튜의 활약을 눈여겨 본 모양이야. 매튜의 경우는 정식으로 길드에서 수순을 밟아 용병이 된 건 아니지만, 일단 용병단에 들어오면 길드에 신원을 접수하게 되어있거든. 빠르면 올 겨울이 지나고 나서 바로. 늦어도 여름이 되면 금의 패가 나올 거야. 이로서 샴페인 용병단에 금의 패를 가진 용병이 두 명이나 되는 거라고! 나도 분발해야지. " " 하하하…. "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말로는 샴페인 용병단의 인원들은 전부 은의 패를 소지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때문에 그들이 맡는 의뢰도 대부분 몬스터의 퇴치나 상단의 호위에 대한 것이 많았는데, 그런 상황에서 집 채 만한 바위도 가볍게 들어 보이는 매튜의 활약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 참에 나도 정식 용병이나 될까? 지금까지 딱히 아크아돈 내에서 신분을 가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트로웰의 모습을 보자니 적잖이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이내 이사나를 떠올리고는 용병에 대한 미련을 유감없이 접을 수밖에 없었다. 현재 나는 혼자서 유유자적 유희를 즐기는 몸이 아니다. 이사나의 계약자로서 녀석을 도와주기로 결정지은 이상, 여러 가지 귀찮은 상황을 불러올만한 신분을 만드는 것은 내키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병이 되면 길드에서의 참견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데다, 일단 이사나가 황제라는 상황에서, 용병을 보필자로 두고 있는 것은 여러모로 볼품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용병은 평민이다. 민주주의시대라면 몰라도, 이렇게 신분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회에서 황족인 이사나가 평민을 수하로 부리는 것은, 꼬투리 잡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로 책잡힐 우려가 있었다. " 흐음. 그렇다고 계속 이대로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쩐다. " " 응? 왜 그래, 엘? " 내가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는지. 목에 걸린 패를 만지작거리던 이사나가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생각나는 사실. 내가 이사나에게 소환되었다는 사실이 아마... 딱히 비밀로 한 게 아니었던가? 이사나는 가능한 나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다고 했을 뿐, 나를 소환한 사실에 대한 것까지 함구를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페리스들이 정보길드에 내 존재를 팔아 넘겼을 테니(거의 확실하다) 아마도 조만간에 제국 전체에 소문이 퍼지겠지. 그렇다면 처음부터 내가 이곳에서 가지고 살아야할 신분을 궁리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어차피 싫든 좋든 정령왕 으로서의 내 존재가 드러나게 될 테니까 말이다. 에이씨! 괜히 고민했잖아? 이래서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니까? " 아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쓸데없는 고민을 좀…. " 벌레 씹은 얼굴로 투덜대듯 대답하자, 돌아보는 이사나의 눈이 더욱 동그래졌다. " 쓸데없는 고민? " " 아니, 앞으로 인간 세상에 있으면서 지닐 신분에 대해 고민했거든. 근데 생각해보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것 같아. 어차피 네가 정령왕을 소환했다는 게 밝혀지면 내 정체도 자연히 드러날 테니까 말이야. " " 흐음. 그래도 당분간은 밝힐 생각 없으니 그 동안에 가지고 있을 신분을 만드는 건 상관없지 않아? " " 아아, 그래. 그럴 수도 있겠… 엥? 뭐? 당분간 밝힐 생각이 없다고??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뜨억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이사나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말했잖아. 이번 일은 가급적 내 힘으로만 이루고 싶다고. 그런데 내가 정령왕을 소환한 게 알려지면 더 이상 내 힘으로만 한다고 볼 수 없잖아? 그래서 알렉들에게도 그 점에 대해서는 함구해 달라고 했어. 나중에 내가 황권을 되찾고 나서 알려져도 상관이 없다고 말이야. " " 헉? 그렇다면 대체 페리스는 정보길드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자신들의 정체를 묵인 받은 거지? 위험하잖아! " " 삼일에 한번씩 비가 내리는 것이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잖아? 그것이 내가 신께 서원해서 이룬 일이라면 더욱. 게다가 페리스 본인이 물의 상급 정령사이기도 하고 말이야. 10년 재앙이후로는 정령사의 존재가 극소로 줄어든 데다, 물의 정령사는 특히 더욱 찾아보기 힘들거든. 그 점만 가지고도 정보길드로서는 꽤나 매력적이었을걸? " 대공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전 대륙에 지점을 가지고 있는 정보길드를 탄압하기는 힘들었다. 아마도 정보길드의 마스터는 바로 그 점을 믿고, 뻔히 정보 출처의 추궁이 돌아올 것임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페리스의 의뢰를 받아들였을 것이었다. 그 만큼 페리스가 제시한 정보의 내용이 엄청났다는 소리인 것이다. 하기야 처형당한 선황제를 이어 어린나이에 황위에 오른 이사나가, 섭정왕인 숙부에게 누명을 당하고 도망친 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데, 그런 와중에 물의 상급정령사라는 엄청난 측근을 만든 것도 모자라, 백성을 위해 신에게 빌어 삼일에 한번씩 큰 비를 내리게 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셈인가? 결국 내 존재를 팔아넘겼다며 페리스들을 원망하던 나만 바보가 됐다는 소리다. 아아. 민망해라….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6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169 / 29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대체 나는 언제쯤이 돼야 정령왕으로서의 위엄과 통찰력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나름대로 이제 완전히 정령왕 다 되었다 싶었는데.. 아직도 갈 길은 멀었나 보다. 에에. 그거야 어쨌든. 그럼 이제부터 무슨 신분을 가져야 하는지 또 고민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아무리 복잡한 표정으로 궁리해 봤자, 아직 아크아돈의 세계관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내가 제대로 된 걸 고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내가 차후로 선택한 방식은… " 응? 어떤 신분으로 살 건지 결정을 못하겠다고? " 유희의 경력이며 나이며, 지혜나 통찰력부분을 통틀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고 확. 신. 되는 트로웰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뜬금없는 내 부탁에 멀뚱한 표정으로 이사나 쪽을 보더니, 금세 상황을 알아버렸는지 쿡쿡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 굳이 신분을 정할 필요는 없잖아?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지금 이렇게 임시 용병패까지 받았으면서. " " 하지만… 언제까지 이쪽 일행들과 함께 활동하는 건 아니니까. 당장 이사나의 사촌이라는 사람 앞에 가서도 적당히 둘러댈 만한 신분이 필요한 걸? 그래야 그 쪽도 나를 믿어 줄 거고. " " 흐음~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면 그렇겠다. 그럼 정령사는 어때? 엘은 외모가 여려서 용병같이 거친 일을 할 것으론 보이지 않으니까. 정령왕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위장술이 바로 정령사거든. " " 아, 그럴까? " 하지만 그것도 곧 페리스의 존재로 인해 무너지고 말았다. 이미 상급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이사나 옆에 있는 시점에서, 또 다른 정령사를 붙이는 건 순전히 억지 성이 강해 보인다는 내 주장에 의해서였다. " 아, 차라리 나를 페리스라고 속일까? " " 무리일걸? 페리스란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일단 황제의 측근일거 아니야? 그런 사람을 사촌이란 자가 몰라볼 리가 없잖아. " " 그, 그럴까? " 나름대로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것 역시 안 된단 말인가. 낭패한 얼굴로 한숨을 쉬는 나를 빤히 바라보던 트로웰은, 잠시 후 뭔가 내키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있지. 이 말 듣고 화내면 안 된다? " " 응? 뭔데, 트로웰? " " 사제가 되는 건 어때? 엘뤼엔의 사제 말이야. " " 엥? " 사, 사제? 그것도 엘뤼엔의 사제가 되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자, 그것을 어떤 의미로 해석했는지 트로웰은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물론 그의 아들이 되는 입장 상, 심부름꾼이나 다름없는 사제로 격하되는 게 내키지는 않겠지만… 엘의 특기는 치료 술이기도 하고, 꽤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야. 이미 엘뤼엔의 사제로 오해받은 적도 있는 것 같고. " " 그, 그거야 그렇지만. 하, 하지만 트로웰? 그 사제라는 게…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맘대로 되는 거야? 신전에 가서 등록해야 하는 거 아니야? " 신전이나 사제에 대한 것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선 소속된 기관이 필요할 터였다. 어쩌면 시험을 치러서 자격을 알아볼지도 모르지 않은가? 하지만 그것에 대한 트로웰의 대답은 간결했다. "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보통 어린시절부터 신전에 들어가 사제가 되기 위한 수련을 하니까. 하지만 모든 사제가 다 신전에 등록되어 있는 건 아니야. 특별한 경우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신의 부름을 받고 혼자 수련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 " 그, 그래? " " 음. 엘은 이미 치료능력을 쓸 수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신성력인지, 정령의 능력인지 구분하지 못 할 테니까. 문제라면 사제들만이 가지는 고유의 낙인에 관한 건데…. " " 낙인? "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내게 트로웰은 그가 알고 있던 사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신의 부름을 받아 사제가 된 사람은, 신전에서 생활하는 사람이든, 개인적으로 수련하는 사람이든, 반드시 신의 사람이라는 증거로 낙인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전에서 임의로 찍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이 신체의 한 부위에 문장을 내려주는 것인데, 어디를 가든 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통행증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했다. 또한 신들마다 각기 내려주는 문장의 모양이 다르며, 고위사제일수록 낙인의 크기나 색깔이 달랐다. 문장이 찍혀있지 않은 사람은 제 아무리 사제라고 우겨도 믿어주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신을 모독한다며 힐책을 당할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 그건 뭐냐… 정령이 계약할 때 소환 자에게 인장을 찍어주는 것과 비슷한 건가? " " 맞아. 인장이 찍혀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정령사라 우겨도 정령들이 코웃음만 칠 테지? 그것과 마찬가지야. 한 가지 다르다면, 정령의 인장은 우리 정령들에게만 보이지만, 신이 내려주는 인장은 모두에게 보이는 거랄까? 그래서 사제로 생활할 생각이라면 반드시 신의 낙인을 받아야 해. " " 으윽. 그렇다면 처음부터 무리잖아, 트로웰. 나한테 신의 낙인이 어디에 있어? " " 그래서 내가 화내지 말라고 한거잖아… 엘뤼엔에게 직접 부탁해 보면 안 될까? " 그거야 만날 수 있었다면 진작 에 그렇게 했겠지. 아니, 부탁한다고 들어주기나 하려나? 자신이 말해놓고도 상당히 자신 없었는지 곤란한 표정을 짓는 트로웰을 보며 나까지 덩달아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유희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나니까, 내가 마음에 드는 걸 골라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부탁을 했으니 제대로 안 될 수밖에. 괜시리 트로웰까지 고민하게 만든 것 같아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정말 구제불능이야 나는. " 미안 트로웰. 아무래도 괜한 부탁을 한 것 같네. 급하게 결정지어서 잘 될게 뭐가 있겠어? 지금은 그냥 이대로 있어야겠다. 하하하… " " 흐음, 괜찮지 않을까? 엘뤼엔이 아들의 유희를 방해할 성격도 아니고 말이야. 문제는 그가 바빠서 만날 기회가 없다는 건데… 아, 그래! 이번에 가는 곳이 클모어였지? 그곳에 엘뤼엔의 신전이 있다고 들었어. 후작령에 도착하면 바로 사촌을 찾아가지 말고 그곳부터 먼저 가봐. 엘뤼엔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신전을 향한 귀는 열어두고 있을 테니까, 그곳에서 기도하면 단박에 찾아와 줄 거야. " " 엥? 그런 것도 가능해? " 아무리 생긴지 얼마 안 된 신전이라고 해도, 바이톤을 포함한 전 차원에 있는 엘뤼엔의 신전을 모두 합한다면 그 수가 상당할 터였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 많은 신전에서 나오는 기도를 일일이 들어주고 있다는 말인가. 엘뤼엔에게 귀가 몇 백 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불신어린 표정으로 묻는 내게, 트로웰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대답했다. " 신이 괜히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못 듣는다 하더라도, 엘뤼엔 대신 반드시 그 기도들을 접수하고 있을 천사들이 있을 거야. 나도 직접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지만, 접수한 기도들은 중요한 순서대로 나열해서 신에게 보고한다고 들었어. 다른 것도 아니고, 아들인 엘이 보내는 기도를 천사들이 뒷전으로 넘겨 두지는 않을 걸? " " 그, 그럴까? 에휴… 복잡하다. " 아무리 엘뤼엔의 일방적인 강요로 이루어지다 시피한 부자관계라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데 이렇게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거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고려하는 편이 낫지 않으려나… " 그냥 검사나, 마법사 같은 걸로 할까? " " 흐음? 하지만 엘은 검술이나 마법 못하잖아? 그저 이사나와 함께 행동할 때 좀 더 편하기 위해서라면, 그냥 대충 아무 작위나 꾸며서 귀족이라고 우겨도 그만이야. 황제인 이사나가 그렇다고 동조해주면 꼬투리 잡을 귀족들이 없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건 엘이 원하는 바가 아니겠지? " 칭얼거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마냥 자상한 어조로 묻는 말에 나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나는 트로웰의 입장에서 보면, 갓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애와 다름없었다. 겉모습은 소년이긴 해도, 그는 이프리트보다 더 나이가 많았으니까 말이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벌써 반만년의 역사를 살아온 셈이니, 이제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된, 그것도 겨우 17년의 인생만 기억하고 있는 내가 그저 어리게만 보여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 가. …겉과 속이 전혀 매치가 안 된다는 게 문제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트로웰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 이왕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결심했다면, 정령사나 사제 둘 중에서 고르는 게 좋아. 같은 귀족층에서도 능력의 유무에 따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니까 말이야. 엘의 말처럼 검사나 마법사로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건 차후로 배워나갈 문제니까. 현재 가능한 수위에서 골라야 하지 않겠어? " " 으응. "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7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137 / 23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의 입가엔 진한 만족감을 담은 미소가 그려졌다. 그나마 이번에 마주친 게 트로웰이라 다행이랄까? 만약 이런 상황에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이프리트였다면, 녀석은 나를 굉장히 한심해 하면서 주눅 드는 말만 골라서 쏘아 붙였을 게 뻔했다. 미네르바는 무심한 태도로 '알아서 해'라고 말할 가능성이 크고. 새삼 이번 여행길엔 운이 따라주나 보다 생각하며 나는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이제까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돼, 엘. 이번일은 나 혼자만의 힘으로… " " 그러니까 지금 내가 인간인 척 하려는 거잖아? 정령왕으로서가 아니라, 이사나의 친구인 한 인간으로서 도와주는 거야. 뭐 보통 인간 치곤 능력이 출중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누구도 내 덕에 네가 황권을 되찾는다고는 생각 못할걸? " " 그, 그렇지만… " " 따라다니겠다고 결정한건 나니까. 이왕이면 옆에서 도움을 주는 쪽을 택하고 싶다는 것 뿐이야. 그것도 싫어? " 서운함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묻자, 이사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얼굴을 어색하게 붉혔다. 물론 덮어 쓴 후드에 가려져서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동안 같이 지내면서 파악해온 그의 성격을 볼 때, 십중팔구 난처함에 얼굴이 빨개져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결국 초롱초롱 쳐다보는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시, 싫지 않아. " " 정말? 고마워, 이사나. 나 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노력할게. 간섭의 수위가 넘는다 싶으면 언제든지 지적해줘. 조심할 테니까. " " 바, 방해라니. 전혀 그렇지 않아. " 도리도리 고개를 젓던 녀석은 이쪽을 보고 있던 트로웰과 눈이 마주치더니 흠칫 어깨를 떨며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 보기엔 보통의 평범한 소년일 뿐이고(그 미모가 범상치 않긴 하지만) 대체로 상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트로웰의 어디가 그렇게 어려운건지… 나와는 달리 트로웰에게서는 정령왕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문득 돌아본 그 역시 이사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보곤 나는 갈수록 복잡한 기분이 되었다. 대충 상황을 정리하고 식당으로 가니, 이미 샴페인 용병단의 대부분이 식사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한 쪽 구석에서 은밀한(?) 잡담을 나누던 우리가 드디어 나타나자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각기 자신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합석을 제안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접전을 벌인 것은 첫 만남부터 범상치 않았던 헤롤과 이릴이었다. " 어이, 꼬마들. 이쪽으로 와서 앉아. " " 무슨 소리야? 언제나 그렇듯, 매튜는 이쪽이라고! 그리고 당연히 매튜의 친구들도 이쪽! " " 뭐어? 너무하잖아, 이릴! 나도 한번쯤은 화기애애한 식사자리 좀 갖게 해달라고. 이런 아저씨들에게 둘러싸여서 먹는 음식이 맛 좋을 리가 없잖아. " 투정부리듯 투덜거리는 말에 그의 앞에 앉아있던 마이티란 이름의 남자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흘러내린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더니 싸늘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아저씨라 미안 하군 헤롤. 이래봬도 너하고 1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말이지~ " " 엥? 헉. 마이티! 이건 딱히 너를 두고 했던 소리가… " " 그럼 나에게 한 말인가? " 당황하는 표정으로 변명하는 헤롤에게 직격탄을 날린 것은 바로 그의 옆에 있던 휴센이었다. 정말로 아무 사심 없이 한 말이 제 무덤을 판 격이랄까? 우두둑- 가벼운 동작으로 손가락의 관절을 푼 그는 하얗게 질려버린 헤롤을 바라보며 웃었다. " 요새 기합이 부족했지? 아저씨들하고 식사하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들어 줄까? " " 허, 헉! 아닙니다요, 형님! 제가 잘못 했습니다요! 그, 그러니까 절대 형님들을 두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니까요? " " 그야 그렇겠지. 이들 중 그 누구도 아직 '아저씨'라는 호칭을 들을 정도로 나이가 들지 않았거든? 그렇지 마이티? " " 물론이지, 단장. 자아~ 어떻게 요리해줄까, 헤롤? 지금 우리 단장님이 상당히 상처받으신 것 같은데 말이야. 사죄해야겠지? " " 허어억 " 얼마나 무서웠는지, 하지도 않던 존대말까지 사용하며 휴센의 마음을 풀어보려던 헤롤의 시도는, 그것을 전혀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두 사람으로 인해서 결국 끝을 보고야 말았다. 우아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소리와 함께 경쾌하게 울리는 타작소리를 들으며, 나와 이사나는 트로웰이 안내하는 대로 이릴의 옆에 앉았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헤롤의 하는 양을 구경하던 그녀는 우리가 자신의 옆에 앉자, 승리자 만히 지을 수 있는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그리며 깔깔거렸다. " 호호호~ 넌 내 상대가 안 된다니까, 헤롤? 이제 포기할 때도 되었잖아? 변태는 변태답게 혼자서 찌그려져 있으라고. " " 쿠어억! 이릴~ 너어~~~ 우악! " " 자아~ 저런 바보는 무시하고. 너희들 뭐 먹을래? 매튜는 언제나 처럼 주스면 되니? "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고,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고 했던가?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거리는 헤롤을 너무도 가볍게 무시한 이릴은,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도 항상 같은 메뉴를 먹었던 모양인지, 너무도 당연하게 묻는 그녀의 말에 트로웰 역시 미소를 지으며 짧게 대답했다. " 네. 부탁드릴게요, 이릴. " 소환자의 마나를 이용해 겉모습을 세상에 투영시키긴 했지만, 결국 정령은 이 세계의 자연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살아가기 위해 음식물을 섭취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간단한 주스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때우려 했고, 이미 일상적인 일로 굳혀진 탓인지 동료 중 그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단지 간신히 두 남자의 마수에서 벗어난 헤롤이 버릇처럼 한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어이, 매튜, 너 자꾸 그렇게만 먹으면 키 안 큰다? 간식도 안 챙겨 먹는 주제에 매 끼 식사를 물로 때워서 어쩌자는 거냐? 그런 주제에 그 무식한 힘이라니… 정말이지 몸 구조가 뭐로 되어있는 건지 궁금하다니까? " " 하하. 헤롤이 못 봐서 그렇지 이래봬도 잘 챙겨 먹는 다구요. 사람이 어떻게 물만 마시고 살수 있겠어요? " " 그래도 내가 볼 때는 항상 물만 마시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한창 자라야할 성장기에 주스만 홀짝이는데 어느 형님이 걱정을 안 하겠어? 많이 좀 먹으라고. "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를 주는 말엔 일행을 아끼는 친절한 마음이 묻어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나운 눈을 치켜뜬 이릴에 의해 그는 또다시 절망감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 개 폼 잡지 말고 너나 잘하셔. 매튜가 너 같은 줄 아니? 너 보다는 스스로의 몸을 컨트롤 할줄 아는 아이니까, 쓸데없는 참견은 오히려 귀찮은 법이라고. " " ……. " " 쿡쿡쿡. 그보다 이릴, 쉐리는요? 아직도 안 들어온 건가요? " 웃으면서 묻는 말에 이릴은 헤롤을 놀리던 것을 멈추고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지난밤의 외박으로도 모자라 아침 식사를 시작하는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 바람에 여유로운 표정으로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던 마이티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고, 휴센은 단의 기강이 덜 잡혔다면서 잔뜩 투덜댔다. 찌푸려진 얼굴을 보니 돌아오면 잔소리를 바가지로 퍼부어주겠다고 다짐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재미있게 둘러보던 나는 아직 이사나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곤 조심스레 물었다. " 이사…아니, 라이? 뭐 먹을래? 아침이니까 간단한 스튜에 베이컨으로 할까? " " 아? 으응. " " 아, 여기 비프스튜 꽤 맛있어. 그럼 그걸로 할래? 음, 엘이랬지? 너는? " 아마도 이릴은 헤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대체적으로 자상한 편인 것 같았다. 그를 대할 때와는 달리 무척이나 친절하게 걸어오는 말에 나는 절로 긴장되는 것을 느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 아. 저는 입맛이 별로 없어서요. 그냥 물이나 한잔…. " " 응? 말도 안돼. 식당까지 내려와서 그냥 물이나 마시겠다고? 17살이랬지? 한창 자라는 시기에 끼니를 걸러선 안돼. " 하하하. 저기? 그게 아까 헤롤에게 쓸데없는 참견이라며 대놓고 핀잔을 준 장본인이 해도 되는 말인가요? 이런 생각은 헤롤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단번에 인상을 찌푸리며 이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 그건 아까 내가 매튜한테 했던 말이잖아? 너나 잘하라고 했던 게 누구더라? " " 흥. 네가 말한 것과 내가 말한 게 같아? 그리고 이쪽은 이제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잖아. 신경써줘야 하는 건 의무라고. 의무! 그건 그렇고… 너희들 그 로브 불편하지 않니? 아무리 겨울이라지만 너무 칭칭 감고 있는 거 아니야? 얼굴이 궁금하다, 얘. " 전혀 예상치 못했던 쪽으로 화제가 전환되자 나와 이사나는 단번에 얼굴을 굳히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야 그렇다 치고, 대략의 인상착의가 제국 전체에 알려진 이사나로서는 후드를 벗을 래야 벗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아. 이래서 이들과 동행하는 게 싫었던 건데… 얼굴을 보지 않고도 너무 순순히 받아 주길 래 안심하고 있었더니만, 결국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마는 건가. 상황은 이쪽을 보던 휴센이 동조하고 나서는 바람에 더욱 긴박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 그러고 보니 아직 얼굴도 제대로 못 봤군. " " 엥? 단장까지? 뭐야, 단장! 신분을 확인하는 건 둘째치더라도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파악해야 하는 거 아니야? 단기간 이라고 해도 일단은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건데 어떻게 그렇게 소홀할 수가 있어? " " 킥킥 뻔하지 뭘 그래? 단장이 애들한테 약한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나이만 듣고 무작정 끌고 온 걸 걸? 아아, 너희들 너무 긴장하지 마. 나쁜 의도로 궁금해 하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 선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레를 치는 마이티 였지만 그 말을 듣고서도 나는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나쁜 마음이 없지만…정체를 알고 나면 달라질걸요? 무심코 스쳐 본거였지만 이사나의 목에 달려진 현상금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를 상회했다. 이제 만난지 겨우 하루밖에 안된 이들이 우리에게 무슨 의리가 있다고 정체를 묵인해 줄 것인가. 때문에 나는 그들의 재촉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도저히 후드를 벗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순간, 트로웰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냉큼 끼어들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 한 가지 말해둘게 있어요, 헤롤, 마이티. 지금 엘의 모습을 보면 반드시 후회할거예요. 그래도 괜찮아요? " " ……? " " 에엥? 후회라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매튜가 그렇게 말하니 은근히 겁나는 걸? 이제껏 매튜가 하는 말 중에서 허풍인 게 없었잖아? " " 후훗. 후회라고 해도 상관없다. 쫓기는 신세의 고명한 왕족이라고 해도 용서해 줄 테니 어디 보이기나 해봐. 궁금해서 미치겠다. " …그래. 이제 서야 이릴이 헤롤을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아. 이 봐 당신!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말을 떠들어도 되는 거야?? 얼 핏 돌아본 이사나는 굳이 표정을 확인 해보지 않고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온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는 내게 트로웰은 생긋 미소 지으며 머릿속을 그대로 파고드는 듯한 음성을 전달했다. - 그들의 시선을 끌도록 해, 엘. 네가 먼저 후드를 벗어. " 트, 매…매튜? " 입을 다물고 있는데 어떻게 목소리가 울리는 거지? 신기한 것은 그 소리가 나에게만 전달되는 것이었는지 주변의 누구도 이상한 표정을 짓는 이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저 갑자기 놀란 표정이 되어 트로웰을 바라보는 나를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트로웰은 인상을 살풋 찡그리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다시 아까와 같은 방법으로 말을 이었다. - 바보. 이럴 땐 정령어를 사용해야지. 아, 설마 사용하는 법을 모르나?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지금은 내 말대로 해. 후드를 벗어, 엘. 자못 엄하게 재촉하는 모습에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무의식적으로 덮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어 내렸다. 찰랑. 어디서 불어온 거지 모를 바람이 살며시 내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가자 훤히 드러난 물빛의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며 어깨를 타고 흔들거렸다. 그것이 거추장스러워 묶을 머리끈을 찾느라, 나는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어느새 멍해져 있다는 것도, 그중에서도 특히 헤롤과 마이티의 표정이 경악되어 간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지나치게 조용해진 것 같은 식당의 분위기에 그제 서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나와는 달리 시종일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트로웰은 딱딱하게 굳어진 헤롤과 마이티를 보며 짧은 웃음과 함께 유쾌한 한마디를 내 뱉었다. " 거봐요. 내가 후회한다고 그랬죠? 쿡쿡 " " …? 무슨 소리야? " " 응? 아무것도 아니야, 엘. 아아, 헤롤! 미안하지만 엘은 여자 아니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아요. 마이티도 마찬가지. 그런데 어쩌나? 라이의 얼굴도 볼 참 이예요? 이 쪽은 더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 트로웰의 이 한마디가 몰고 온 파급은 엄청났다. 왠지 '사기다'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사람들은 그의 '더 후회 한다'는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잔뜩 새파래진 얼굴로 고래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했다. 아니, 그보다는 헤롤과 마이티의 절망어린 목소리가 커지는 바람에 미처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으려나? " 크허헉! 이건 말도 안돼! 나는 매튜만으로 충분히 버거웠다고! 진정 신은 나를 금단의 영역으로 인도하려 작정하신건가! " " 제길! 데려가시려면 헤롤만 데려가시지! 왜 나까지? 나는 쉐리밖에 없단 말입니다! 시간을 제발 돌려줘어~~~ "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로 엎드려 통곡하는 그들이었지만 나는 도저히 동정해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저거…내가 여자가 아닌 것에 충격 받아서 저러는 거 …맞지? 그리하여 그 순간 내 머릿속을 강타하던 생각은 바로… ' 젠장! 이프리트! 어디가 남성 형이라는 거야? 나중에 만나기만 해봐라!! ' 저승사자 유라우스를 이어 벌써 세 번째 당하는 오해였다. 이렇게 되면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도저히 의심을 멈출 수가 없지 않은가! 설마 나 …정말 여성형인 건 아니겠지?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8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099 / 25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마음속 한구석에 은밀히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누르며,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아주 감정을 숨길수가 없었기에,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에서 내가 불쾌해 한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헤롤과 마이티)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화제를 전환시키기 위해 필사적이 되었다. " 아, 흠흠. 호, 혹시 귀족? " " ……? " " 으음. 생김새가 상당히 곱상… 아니, 수려해서 말이야. 희멀건 피부도 그렇고…아, 아니지. 귀족이라면 임시용병이 되겠다고 따라오지도 않았으려나? " " 더불어 매튜의 친구가 되었을 리도 없지, 안 그래? " 나에 대한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이릴은 단번에 헤롤의 말을 꼬집었다. 그러자 그녀의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을 보며, 도리어 영문을 모르게 된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 친구가 되었을 리가 없다니…? " " 아아. 알면서 그런다, 엘. 내가 귀족을 싫어한다는 건 너도 알잖아? 그래서 너랑 처음 만났을 때도 귀족으로 오해하고 퉁명스러웠던 거 기억 안나? " " 엥? 아하하. 그,그랬다. 맞아…. " 다른 사람들 모르게 살짝 윙크를 하며 건네는 말에, 뒤늦게 서야 그것이 트로웰이 유희중에 정한 '매튜'의 설정이라고 생각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서야 자세히 들은 거지만, '매튜'는 어린시절, 귀족의 하인으로 살면서 그들에게 지나친 괴롭힘을 당한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유난히도 귀족에게는 반감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설렁설렁 여행을 다니는 나와 달리, 트로웰은 초반부터 아주 철저하게 유희동안 사용할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두고 있던 참이었다. 이왕에 즐기는 거 아주 확실하게 즐기기로 작정을 본 모양이다. " 드래곤들과 계약하면 이런 점이 편해. 인간과 달리 그들은 우리의 도움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거든. 그저 호기심이나 허세를 부리기 위해 계약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하고 나서도 찾는 경우가 거의 없어. 덕분에 별다른 간섭 없이 혼자서 넉넉하게 유희를 즐길 수 있는 거지. " " 그렇구나. " 작은 목소리로 알려주는 말을 들으며 나는 부러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드래곤과 계약해서 따라올 이점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당장의 나에겐 절대 무리인 영역이 아닌가? 그 빌어먹을 라피스라즐리인지 뭔지 하는 레드 드래곤 때문에, 그가 유희에서 돌아올 때 까지 그들과의 계약은 물 건너 간 셈이니 말이다. 그나마 이사나와 계약한 것만으로도 천운이었다 생각하며, 스스로를 달래는 길이 울화통이 도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 그런데 그 예쁜 얼굴을 왜 그렇게 가리고 다닌 거야? 아깝잖아? " 차마 내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하는 헤롤이나 마이티와 달리, 처음부터 흥미진진한 미소를 띄고 있던 이릴이 그렇게 물어왔다. 그것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 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얼마 전 페리스가 했던 말을 떠올리곤 담담하게 대꾸했다. " 글쎄요. 전에 만난 어떤 사람이 되도록 후드를 덮고 다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말이죠. 뭐, 라이의 경우는 피부가 워낙 약해서 햇빛을 받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더 강했지만. " " 아아…. " 어이! 다들 그렇게 납득이 간다는 표정을 짓지 말라고! 멀쩡한 사춘기의 소년 가슴에 상처 입힐 일 있어? 불만어린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소리 내어 항의 해줄 용기가 내게 있을 리가 없었다. 만약 이런 상황을 당하는 것이 엘뤼엔이나 이프리트였다면, 당장에 노려보며 ' 눈깔아. 안 깔아? 죽고 싶냐? 내가 이렇게 생긴 것에 니들이 보태준거 있어? 오호라~ 있다고? 그럼 책임을 져야지? 지옥을 구경시켜 주마! 얌전히 죽어!! '…이랬을 텐데. 하지만 부러워한다고 모든 상황이 해결되었다면, 나는 진즉에 아이슈타인만큼의 천재적인 두뇌에, 엘뤼엔 만큼이나 강단 있는 성격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성격의 개선이 시급한 것 같아. 앞으론 종종 반항모드를 시도해봐야겠어. 마음속으로 그렇게 결의를 굳히는 사이, 주문한 식사가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즈음 마치 예정된 수순처럼 금발머리의 소녀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선 것 역시, 신이 나를 위해 안배해준 화제전환의 기회인 것처럼 보였다면 너무 터무니없는 생각일까? 그녀는 호리호리한 가냘픈 체구에 몸매를 거의 드러내는 달라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18~20 살 사이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겁도 없이 용병들이 득시글거리는 여관 문을 열어젖힌 것에서부터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 생김 샘이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버터를 녹여 만든 것 같은 샛노란 머리카락에 한봄의 새순을 연상시키는 초록색 눈동자. 부분적으로 햇볕에 그을린 자국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하얗다고 볼 수 있는 피부는, 내 앞쪽에 앉은 이릴 만큼이나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던 것이다. ' 역시…난 이 세계에 와서 지나치게 눈을 호강시키는 것 같아. ' 어이없긴 했지만 사실이기도 한 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여자의 모습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누가 들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제 앞에 놓인 음식을 먹기에만 정신이 없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쉐리!! 지금이 몇 시 인지 알아?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던 거지?! " 헉. 저 여자가 아직까지 등장하지 않았던 또 다른 일행이었단 말인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내가 소리 없이 굳어지는 사이, 쉐리라고 불린 금발 여인은 시큰둥한 얼굴로 사나운 표정의 휴센을 쳐다보았다. " 어디를 다녀오는지 일일이 보고해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 " 그래도 일단은 한 목적을 가지고 뭉친 용병 단이다. 일행에게 걱정을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건 기본이 아닌가? " 어머? 걱정이나 했던 거야? 휴센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아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 외박은 의도한 게 아니었으니까. 클렉이 놓아주지 않는 걸 어쩌라는 거람? 인기인은 피곤하단 말이야. " 뭐랄까. 이상하게 말에 가시가 돋아 있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휴센은 그것에 화를 내기도 전에, 발작처럼 몸을 일으키는 마이티에 의해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 크, 클렉? 쉐리! 네 애인이 클렉이었어? 그 자식! 분명 저번에 떠봤을 때는 애인 같은 건 없다고!! "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기에 나는 잠시 그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화가나 따지고 드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휴센에게서 이어질 잔소리를 피했으니 고마워해도 좋으련만, 쉐리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분한 듯이 이를 악물고 있는 마이티를 바라보았다. " 없는 게 맞을 걸? " " 엑? 하, 하지만?? " " 순진하기는…. 하룻밤정도야 그날 마음이 맞는 선남선녀가 함께 보낼 수 도 있는 거지, 뭘 그렇게 놀래? " " 헉? 쉐, 쉐리?! " 그 말에 놀란 것은 마이티 뿐만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멍한 표정으로 쉐리를 바라보던 사람들은(트로웰만은 빙글거리고 있었지만.)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떨떠름하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맙소사. 쉐리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정조나 일편단심의 표본 아니었어? " " 허허허.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단장의 무심함에 드디어 눈을 뜬 거지 뭐. 그럴 거면 차라리 마이티를 택할 것이지. 목맨 세월이 얼만데 눈앞에서 엉뚱한 놈한테 뺏길 줄이야. 그나저나 불쌍한 여자인생 하나 망친 기분이 어때, 단장? 이젠 나도 몰라. 둘이서 마음대로 하라고. " " ……. " 기가 막히다 는 듯 손 사레를 치는 말에도 휴센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어째 상황을 듣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이… 설마 쉐리란 사람이 휴센을?? 아니나 다를까. 감흥 없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있었지만, 유독 휴센을 향한 그녀의 눈빛은 타오르듯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거이거, 보답 받지 못한 사랑에 상처입고 막나가는 케이스 였던거야? 잠시 휴센 쪽을 노려보던 쉐리는 곧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그렇게 이상하게 볼 거 없어. 그냥 기분전환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밤을 새다 와서 그런지 피곤하네. 올라가서 자도 돼지? 아직 떠나려면 시간도 있으니까. " " 시, 식사는? " 아직 완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도 용케 묻는 마이티의 말에 그녀는 '필요 없다'고 짧게 대꾸했다. 그러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2층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그런 쉐리의 걸음을 붙잡은 것은 이제껏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던 휴센이었다. " 네 눈엔 새로 온 사람들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자리에 와서 앉아. 이번 의뢰동안 함께 행동하게 될 테니 인사정도는 해둬라. " 그제야 우리의 존재를 눈치 챘는지 돌아본 쉐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당황스럽게도 그 눈은 나와 마주치는 순간, 마치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앙칼진 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왜, 왜 그러지?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 …? " 별 다른 말없이 한참이나 내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잠시 후 이죽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휴센이 데려왔겠지? 목걸이를 보니 임시인 것 같은데… 뭐야? 이번에도 동정? 꼬마들에게 약한 건 여전하다니까? 비겁해. 정작 중요할 때는 그 약한 모습도 허용하지 않는 주제에. " " 에? 저기? " 아무래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얼른 무슨 소리냐고 반문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한층 씁쓸한 표정이 된 쉐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나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 하지만 정말 너무하네. 내가 그렇게 나가버렸는데… 다시 또 다른 여자애를 끌어올 기분이 들었던 거야? 역시… 휴센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 " !!! " 맙소사! 죽이는 걸로 모자라 아주 확인사살까지 하려는 거냐? 제 딴에는 상당히 분위기 잡으려고 꺼낸 말이었겠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일행의 반응은 전혀 딴 판이었다. 풉-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틀어막으며 부들부들 떨던 그들은, 그 상태로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폭소를 터뜨리고야 말았다. " 푸, 풉…푸하하하하!! 아이고, 배야! 누가 나 좀 살려줘!! " " 끄흑. 끄흑. 맙소사, 쉐리. 너 그대로 극단에 나가도 되겠다. 휴센이 누굴 끌고 왔다고? 낄낄낄…엄매 나 죽어어!!! " " 크하하하하! 아니, 아니…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야. 킥킥킥… 크큭. 어떻게 휴센하고 연결을…크하하학 …학학… 우우, 죽겠다…헥헥. " " ……. " 이 상황에서 웃지 않는 이는 오로지 당사자인 나와, 영문을 몰라 하는 쉐리 밖에 없었다. 심지어 이제껏 묵묵하던 휴센까지 탁자를 부여잡고 부들거리자 나는 저절로 떨리는 이빨을 부드득 갈았다. 또한 내색하지 않았지만 후드로 가려진 입을 얼른 틀어막는 이사나를 보자니, 그 배신감과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고 있었다. 큭큭거리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마주 노려보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이 모든 일의 주범인 쉐리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나와 눈이 마주쳐서 흠칫거리는 그녀의 손을 잡아챈 후, 그것을 본 사람들이 미처 경악도 하기 전에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 무, 무슨?……!! 꺄, 꺄악!! " 휘익~ 마치 불경한 것에라도 닿은 것처럼 놀란 그녀는, 잡고 있던 내 손을 뿌리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니 열 받아 돌아가시고 싶을 정도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 해도 기분이 완전히 나아지는 것 역시 아닌지라, 나는 조금 차갑게 느껴진다 싶을 정도의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이제 무엇을 오해했는지 아시겠습니까? " " 서, 설마…남…자?? " 어이! 헤롤 마이티! 왜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거야! 그래도 설마 이런 파격적(?)인 방식으로 내가 남자임을 확인 시킬 거라곤 생각을 못했는지, 보고 있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상태였다. 언뜻 스쳐본 얼굴마다 약하게 상기되어 있는 것이…대체 무슨 생각들을 하기에 저러는 거지? 때 마침 이제까지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트로웰이 냉큼 끼어드는 바람에 분위기는 한결 수월한 방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89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103 / 26 선작수 2590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이후 >>> 샴페인 용병단 " 너무 심했어요, 쉐리. 그렇지 않아도 엘은 외모에 민감한 나이라고요. 물론 사과하실 거죠? " " 아… 매, 매튜. " " 엘도 너무 화내지 마. 사람이란 누구나 모르고 실수할 수 있는 거니까. 그렇지? " " ……. " 토라진 아이를 타이르듯 자상하게 건네는 말에 울컥거리던 속이 한층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자주 느껴온 거지만 트로웰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것이 땅의 정령왕 특유의 능력인 혜안 때문인지, 트로웰 본인의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그와 대화를 하는 것만으로 많은 점을 깨닫거나 인정하게 된 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히려 엘뤼엔보다 더 아버지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해야 하나? 이 생각을 알면 엘뤼엔이 상당히 서운해 할 테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의 말에서 별것 아닌 오해에 너무 치졸하게 군다고 생각이 든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굳어져 있던 안색을 풀었다. 그리곤 여전히 당혹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쉐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 엘이라고 합니다. 이번 클모어까지 가는 길에 임시적으로 동행하게 되었으니 잘 부탁합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저는 남. 자. 니까요, 쉐리양이 오해하실 일은 '절대로' 없을 거예요. 안심하세요. " " 아…죄, 죄송. 큰 실례를 했네요. 원래 제가 오해를 잘 하는 성격이라.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샴페인 용병단의 실버 급 용병, 쉐리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쉐리는 새침한 외모와는 달리,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되는 일엔 확실한 사과를 건네는 타입이었다.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로 간단한 악수가 끝나자, 그 장면을 묵묵히 보고 있던 휴센이 추가적인 설명을 이었다. " 엘군의 나이는 너와 같은 17세야. 용병일은 처음인 듯하니, 또래인 네 도움이 절실할거다. 물론 매튜가 옆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긴 하겠지만, 만약의 경우에서 가장 큰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나와 매튜 밖에 없으니까. 그때엔 네가 엘군들을 챙겨주도록 해. 옆에 있는 소년의 이름은 라이, 너보다 한 살 어린 16세다. 피부가 약해서 로브로 햇빛을 가려야 한다고 했으니, 동료들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거다. " " …알았어. " 짧게 대답한 그녀는 이사나와 눈짓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다. 이미 주문한 아침식사가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기에, 먹고 가라는 이릴의 만류가 잠깐 있었지만, 쉐리는 피곤하다고 둘러대며 서둘러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사라지자 사람들의 눈초리는 막 식사를 시작하는 휴센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를 쏘아보는 눈빛마다 가히 곱지만은 않았지만, 그 중에서도 대놓고 투덜거린 것은 쉐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 버린 마이티였다. " 너무한다, 단장. 지금 밥이 입에 들어 가냐? " " 당장 오후에 출발이야. 장시간 체력을 유지하려면 먹을 건 꼬박꼬박 챙겨먹어야 한다고. 용병 생활 철칙이지. 모르진 않을 텐데?" " …쉐리는? 그녀는 여자인데다 나이도 어리다고.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라도 일단은 한배를 탄 용병인데, 단장인 주제에 걱정도 안 되는 거야? " " 물론 걱정이야 되지. 하지만 쉐리도 프로야. 내가 이것저것 챙겨줄 이유는 없어. " " 그거야 그렇지만…. " 단체가 익숙한 기사단과 달리, 개인플레이가 철저한 용병들은 서로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참견을 배제하고 있었다. 실질적인 전투가 몸에 배여 있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외의 다른 것을 돌볼 여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때문에 등급이 높은 프로용병일수록 스스로에 대한 컨트롤은 필수사항이었다. 그것이 감정에 관한 문제든, 육체적인 질병에 관한 문제이든 말이다. 냉정하게 답하는 휴센의 말에 할말을 잃은 마이티는 곧 마지못한 표정으로 자신 앞에 놓여진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헤롤과 이릴 역시 한숨을 내쉬기는 했어도, 휴센과 쉐리. 둘만의 문제에 끼어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는지 그저 묵묵히 식사에 임하기 시작했다. " ……. " " ……. " 불편한 얼굴을 채 숨기지 않은 일행들로 인해, 식사는 상당히 묘한 침묵 속에서 아주 어색하게 이루어졌다. 음식을 씹어 삼키는 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 그야말로 체할 것 같은 식사 분위기 속에서 나는 간간히 물로 입술을 축여가며, 포크를 깨작거리고 있는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동안의 고생과 굶주림으로 인해, 아주 보잘 것 없는 식사라도 아주 소중히 여기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불편한 표정으로 음식을 채 넘기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 식당의 분위기가 얼마나 딱딱하게 굳어져있는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 이사나, 오후에 출발하면 계속 노숙을 할 것 같으니까 지금 잘 먹어둬. 제대로 된 음식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으니까. " 작은 목소리로 건네는 말에 이사나는 얼른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더니 우리의 대화를 듣는 이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숨죽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 알았어, 엘. 그런데 우리 클모어에 도착하면 어떻게 하는 거야? 엘뤼엔의 신전을 찾아갈 거야? " " 글쎄. 우선은 상황을 봐야지. 정령사도 나쁘진 않지만, 우리 둘 다 정령사라고 밝히면 오히려 시선을 집중 시킬 위험이 있을 테니 사제 쪽이 낳을지 몰라. " " 응? 우리 둘 다…라니? " 멀뚱하게 되묻는 말에 나는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트로웰의 말마따나 내가 정령왕인 걸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건가? 지금 나를 소환한 게 누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 이사나. 너도 정령사잖아. 그것도 인간 최초로 엘퀴네스를 소환한 물의 정령사. 잊었어? " " 에? 아!! 그, 그렇지… 참! " " 바보. 정말로 잊고 있으면 어떻게 해? 너도 이제부터는 자주 정령들을 불러내서 그들과의 호흡에 익숙해지는 게 좋아. 그래야 페리스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컨트롤을 보일 수 있으니까. " " 으응 " 창피한 듯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과연 이 녀석이 한나라의 황제란 인간이 정말로 맞는지 다시 의심스러워졌지만 어쩌겠는가. 그저 내 팔자려니 하며 사는 수밖에. 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들끼리 속닥거리는 것을 보고는 그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 둘이서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러고 보니 클모어 까지는 왜 가는 거야? 거긴 지금 행방불명된 이사나 황제를 찾는답시고, 대공의 기사들이 쫙 깔려있어서 분위기가 무지 흉흉한데. 어린애들끼리 갈만한 곳이 아니라고. " " 에? 아… 일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이릴. 제 작년이었나? 이맘때쯤 친척과 그 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었거든요. 설마 이런 시기에 불미한 사건이 터질 줄은 예상치 못했었죠. 일단 정한 약속이니 무효로 돌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변변한 전서구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약속장소를 바꾸기도 힘들었거든요." " 흐음. 그도 그렇겠다. 그런데 너희 둘로만 가려고 했던 거야? 휴센과는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거라며? 안 그랬으면 너희들끼리 떠났을 거라고 그러던데. " 아마도 우리가 식당에 내려오기 전에 미리 휴센으로부터 우리들과 만난 대강의 경위를 전해들은 모양이었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고 있는 이릴과 그 일행들을 본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랬을 거예요. 사정이 어찌되었든 우린 꼭 거길 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용병단에 가입하게 되다니, 운이 좋았어요. " " 흐음~ 안심하긴 이를걸? 뭐, 휴센이야 어린애들이라고 하면 무조건 보호하려고 드니까 그렇다 치고. 이래봬도 '부단장'인 나는 실력테스트는 엄격히 하자는 주의거든. 아무리 임시단원이라지만 똑같이 돈 받는 입장에서 동행하는 처지에 너희들까지 보호해야 한다면 우리 쪽이 불리하잖아? 안 그래? " " 엑? 이릴? 네가 언제부터 부단장씩이나 된 건데? " " 맙소사, 이릴! 아직 애들이야. 무슨 놈의 실력테스트?? 게다가 매튜의 친구라고! 아직 단원으로 받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미 용병패까지 건네준 상황에서 무슨 뜬금없는 소리야? 재미없으니 그만 둬. "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하는 말에 곧바로 헤롤과 마이티의 반격이 이어졌지만, 그녀는 눈도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도하게 세운 턱을 살짝 어루만진 이릴은 그녀의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면서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 클모어까지 가는 길에 몬스터의 출현이 빈번 하다는 건 아주 유명한 사실이니 알고 있었겠지? 그런데도 굳이 둘이서라도 가겠다고 결정했을 정도라면 어설픈 실력은 아닐 것 같은데. 게다가 매튜의 친구라고 하니 더 흥미가 생기는 걸? 어때? 이 누나랑 식사 후에 가볍게 한판 해 볼래? " " ……. " 쿠, 쿨럭. 누님. 그 말 어째 상당히 오해성이 짙어 보이걸랑요? 이릴의 말을 들은 주변의 남자들은 그 다분한 오해 성으로 인해 몽땅 얼굴이 붉어졌지만, 나는 초연적인 의지로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태연한 겉모습과 반대로 속마음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그대로 피가 말라가는 심정이었다. 그런 나를 도와준 건, 옆에서 그녀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그는 홀짝이던 주스를 채 반도 마시지 않은 채 내려놓더니,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 미안하지만, 이릴. 엘은 검술을 할 줄 몰라요. " " 응? 상관없어. 나도 검을 쓰지 않는 걸? " "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엘의 주특기는 사람을 헤치거나 보호하는 일이 아니 예요. 그러니까 이릴과의 결투도 불가능 하다는 거죠. " " 엥? 말 도 안돼. 그럼 어떻게 둘이서 험난한 여행을 하려고 했던 건데? " 놀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에 이제까지 그녀를 만류하기 바쁘던 다른 일행들도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나와 이사나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뭐랄까. 어째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달 까? 그러자 트로웰은 그 질문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 소개가 늦었지만, 라이는 물의 하급정령사예요. 본래라면 귀족의 작위를 받을 수도 있었겠지만 체질에 안 맞는다고 거절했어요. 그렇지, 라이? " " 아. 네, 네. " 트로웰의 말에 '설마….'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이사나가 긍정하자 소란스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10년 재앙 이후 급격히 사라져, 찾아보기가 힘들었던 정령사의 존재를 바로 코앞에서 보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일이겠는가. 아직 한산한 아침이라 식당 안에 우리 일행외의 사람이 적다는 것이 그나마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안 그랬음 헤롤이나 마이티가 보이는 반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따가운 시선들에 꼬치구이가 되고도 남았을 거다. " 저, 정령사?? " " 헉? 네가 정령사라고? 그것도 물의 정령사? " " 세상에. 나 정령사를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야! 이봐, 하급정령이라면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우리한테 좀 보여줄래? " 황당해 하는 이릴, 놀라는 헤롤, 흥미진진하게 눈빛을 빛내는 마이티. 처음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던 나와 트로웰을 제외하면, 이들 일행 중에서 그나마 침착한 사람이라곤 오직 휴센밖에 없었다. 그 역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단장으로서의 체면 때문인지 다른 사람들처럼 대놓고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았다. 일행의 놀란 시선이 모조리 자신에게 집중되자 이사나는 더 이상 가려질수도 없을 것 같은 로브의 후드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한참을 쩔쩔매던 녀석은 정령이 보고 싶다는 마이티의 재촉이 이어지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내 쪽을 흘끔 바라보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저어. 지금은 힘들고요, 이따가 식사가 끝나면… " " 엥? 식사? 이 판국에 밥이 넘어가겠냐? 나 다 먹었어! 그러니까 빨랑 보여줘, 응? " " 야, 야. 너는 먹었을지 몰라도 라이는 아직 이잖아! 짜식이 왜 이렇게 눈치가 없냐? 걱정 말고 천천히 먹어, 라이. 기다릴 수 있으니까. " 하지만 누구라도 자신의 먹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빤히 바라본다는 걸 자각하면, 음식을 입안에 넣기가 더욱 민망스러워 진다. 특히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질식할 것 같이 무거운 공기 때문에 깨작거리고 있던 이사나가 그런 시선까지 감당해 낼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녀석은 한숨을 내쉰 뒤, 들고 있던 포크를 힘없이 내려놓았다. " ……아니오. 저도 다 먹었어요. 여기선 곤란하고, 밖으로 나가서 보여드릴게요. " " 오오! 정말? " " 그럼 빨리 나가자~ 빨리! " 도대체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애인지.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헤벌쭉 미소 지은 헤롤과 마이티는 어느새 문 앞까지 달려 나가 이사나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체념한 듯 피식 미소를 흘리더니, 그들의 손짓을 따라 문 밖을 나섰다. 나도 따라 나갈까 고민했지만, 일단은 이사나 혼자서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아 트로웰과 함께 자리에 남아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기로 했다. 의외였던 건 이릴이었는데, 그녀는 당장이라도 나가볼 듯이 궁금한 얼굴을 하고서도 좀처럼 발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자리에서 안절부절만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무심코 발견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 궁금하면 이릴도 나가보지 그래요? " " 으음? 아니, 됐어. 나는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것 같아." " 어째서? 굉장히 궁금해 하는 것 같은데…. " " 궁금해. 그것도 무지무지 궁금해. " " 그런데 왜요?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이릴은 곤란하단 듯이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한참이나 망설이는 모습으로 입을 뗄 듯 말 듯 하더니, 한참만에야 조심스럽게 물어 오는 것 이었다. " 물의 하급정령이면 나이아스들이겠지? 물고기의 하체에 귀여운 소녀의 얼굴을 했다고 들었는데. 맞아? " " 예? 아, 맞아요. 인어와 닮았어요, 아주 귀엽게 생겼죠. " " 크흑. 역시 난 안돼. " " ……? " 도대체 나이아스들이 귀엽게 생긴 것과 이릴이 정령을 보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마 정령에도 알레르기 같은 게 있는 걸까? 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끝끝내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못하는 이릴은 나에게 충분한 미스터리 감이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그러나 난 곧 오래지 않아, 트로웰로부터 그녀의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 모든 사정을 들을 수 있었다. " 이릴은 귀여운 것에 약해. " " ……엥? " " 그것도 상당히 많이. 어느 정도냐 하면, 전투 중에라도 귀여운 아이를 발견하면 모든 일을 다 때려 치고 그 아이만 넋 놓고 구경할 정도야. 그럴 때면 사람이 아주 변해버려서, 누구도 가까이 갈 엄두를 못내. 조금 무서울 정도야. " " 그, 그래? " " 응. 반대로 우락부락한 것엔 또 굉장히 반감이 강하지. 헤롤이 툭하면 이릴의 핀잔을 듣는 건 그의 외모 때문이야. 거친 남성미를 드러내는 타입은 이릴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거든. 그래도 '아름답거나, 예쁜'것엔 어느 정도 이성을 차리는 모양이니까 엘은 안심해도 돼. 그녀는 뭐랄까. '작고 앙증맞은'것에 미치는 거야. " " 하하하…." 확실히 나이아스들이라고 하면, 그 무시무시할 정도의 수다만 빼놓는 다면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작고 사랑스러웠다. 만약에 이릴이 그들을 보게 되면, 이사나의 마나가 몽땅 바닥나버려 나이아스들이 강제로 송환될 때까지 붙들어 놓고 구경하게 될 것이란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린애'에게 약한 단장과 '귀여운 것'에 약한 부단장이라…. ' 정말 이들과 함께 여행해도 괜찮은 걸까? ' 트로웰만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에 이사나를 들쳐 매고 야밤도주를 감행했을 지도 몰랐다. 작 가 비단비 제 목 엘퀴네스의 장 [90 회] 날 짜 2004-08-15 조회 / 추천 2371 / 63 선작수 2589 공지 공지가 없습니다 옵 션 <<< 이전 샴페인 용병단 그날 오후부터 클모어를 향한 본격적인 출발이 시작되었다. 예상외였던 것은, 이번 호위를 맡게 된 상단에게는 이미 샴페인 용병단 외에도 다른 용병단이 더 있었다는 것이었는데, 이점에 관해 불쾌한 빛을 보이는 휴센 단장에게, 상단의 대표자는 이번 행렬이 워낙 대 규모이다 보니, 많은 숫자의 용병이 필요했다며 짧게 변명했다. 다행히도 그 점에 관해서는 별다른 트러블 없이, 서로 호위를 맡을 구역을 분배하는 것으로 결정지어졌다. 그래서 우리가 맡게 된 쪽은 무리의 후방이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렬의 앞쪽을 보호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후방도 그에 못지않게 위험하고 보호가 필요한 곳이었다. 몬스터나 산적이란 것이 언제나 일괄적으로 선두에 선 녀석들부터 공격해 오는 것이 아니라서, 방심하기 쉬운 뒤쪽을 노리는 놈들도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급박한 상황에서 탈출하게 될 경우, 뒤따라오는 적을 처리하는 것 역시 언제나 후방의 몫이었다. "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상단의 물건을 사수하는 것이지, 몬스터의 퇴치가 아니라는 점이다. 괜히 흥분했답시고 무리를 이탈해서 몬스터나 쫒아 다니는 놈은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특히, 헤롤! 이번에도 문제를 일으켰다간 단원에서 제외시켜버리겠다. " " 췌엣. 알았어. 알았다 구. 아아, 젠장. 얌전하게 호위나 하는 건 내 적성에 맞지 않는데 말이지. " 사나운 눈빛으로 노려보는 휴센의 말에 헤롤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릴이 상큼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어머나~ 그렇겠네. 머릿속에 근육밖에 안든 바보에게는 그저 도끼 들고 뛰어나가 몬스터나 찍어대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 어쩌니, 헤롤? 넌 아무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단원에서 제외되겠구나? 호호호호호호 " " 이익! 이번에는 안 그런다니까? 이릴, 너 자꾸 시비 걸 거야? "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며 대꾸하는 헤롤이었지만, 단원의 그 누구도 순순히 납득해주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하~ 그러셔? 얼마나 잘 그러는지 두고 보자' 하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그야 그럴 것이 헤롤은 이전에도 몇 번씩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에 미쳐 행렬을 이탈한 전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사라진 그를 찾느라 이동자체에 큰 차질이 빚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앞서 단장이 했던 충고는 이미 몇 년째 똑같이 이어지던 것이었고, 헤롤의 대답역시 똑같은 것이었으니 단원들이 신뢰를 보인다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 아니겠는가. 단원 모두가 실버등급 이상의 엘리트로만 구성된 샴페인 용병단이었지만, 헤롤의 이런 제멋대로의 행동 탓에 상단으로부터의 의뢰는 도리어 동급의 패를 가진 용병단보다 더 적다는 것이 이릴의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 트로웰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 전생에 틀림없이 마족이었을 거야. " " ……. " 마족을 실제로 본적은 없지만, 이전에 신계에 갔을 때 들은 유라우스의 설명만으로 나는 충분히 그들이 얼마나 끔찍한 종족인지를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에일리언처럼 마물의 몸을 가르고 태어나는데다, 1천년에 한번씩 피의 제전인지 뭔지를 통해서 왕을 뽑는 무식한 것들이 아니던가. 도대체 헤롤은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종족들에 비교 당하는 거라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그의 어깨에 방금 전까지 본적 없던 거대한 도끼가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저걸 무기로 쓰는 건 아니겠지? 의심이 깃든 눈초리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내 속마음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맞아. 저게 헤롤이 다루는 무기야. 검에 비해 섬세함은 떨어지지만, 파괴력이 상당하지. 한번에 두 세 마리씩의 오크들을 처리하거든. 굉장하지? " " 저, 저걸 들 수나 있는 거야? 헤롤의 키보다 더 커 보이는데? " 언뜻 살펴도 헤롤의 키는 180을 훌쩍 넘어보였다. 그런 그보다 더 큰 무기라니. 보통의 사람이라면 들기는커녕 그 무게에 먼저 압사 당할 텐데도, 헤롤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가끔씩 한손으로 그것을 휘둘러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설마 저게 저렇게 보여도 사실은 무지 가벼운 건가? 하지만 나는 그 생각을 바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똑같이 신기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이사나가, 헤롤에게 졸라 도끼를 잠시 받아드는 순간 창백한 표정으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가 주저앉는 순간 헤롤이 얼른 도끼를 잡아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이사나는 그대로 도끼에 맞아(?) 세상을 하직할 뻔 했다. 놀란 나는 얼른 달려가 쓰러진 녀석을 일으키며 상처가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 이… 라이!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 " 아, 으응. 난 괜찮아. 조금 놀랐을 뿐이야. 들려고 했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어. 굉장해요, 헤롤. 그걸 한손에 들 수 있다니…." 이사나의 순수한 감탄에 헤롤은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면서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잘난 척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크하하. 내가 원래 한 힘 하지! 자랑은 아니지만 이 녀석을 들 수 있는 건 대륙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힌다고! 이 녀석 한방이면 제 아무리 오우거라도 쩔쩔맨단 말씀이야! 푸하하하 " " 시끄러, 헤롤! 어린애한테 큰 상처를 입힐 뻔 했으면서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아무리 궁금해 한다고 해도 그렇지, 그 무식한 무기를 들게 하다니! 사람 잡을 일 있어? " 언제나 그렇듯, 허허거리는 헤롤의 말 뒤에는 항상 그것에 꼬투리를 잡는 이릴의 말이 이어졌다.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그녀의 말에 움찔하던 헤롤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항변을 시도했다. " 엑~ 너무해. 다치지 않았잖아? 떨어지는 순간 얼른 잡았다고. " " 어쭈?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거야? 못 잡았으면 어쩔 뻔 했어? 이건 애가 다치거나 안 다치거나의 문제가 아니라고. 위험한 짓은 애초에 피해야 할 것 아니야? 그렇게 상식이 없니 , 이 무식한 놈아! " " 우쒸~~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됐냐, 이 마녀야! 그렇게 자꾸 땍땍거리니까 이제까지 노처녀로 있는 거라고! " " 뭐가 어쩌고 어째! " 이어지던 핀잔은 울컥해버린 헤롤로 인해서 겉잡을 수 없는 감정싸움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 겨우 23살인데다, 동안이라 누가 봐도 10대 후반으로 밖에 안 보이는 그녀의 어디가 노처녀로 보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여인에게 있어 이보다 더 모욕적일 수 없는 말을 지껄인 헤롤 탓에, 이후부터 우리는 이릴이 폭주하는 현장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살벌했는지, 뼈 조각이 박힌 채찍을 휘둘러 대는 폼이 정녕 이날을 위해 작정하고 기다려 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잠깐, 채찍? '채찍이라고?' 무심코 중얼거리던 나는 무언가 굉장한 위화감이 느껴지는 무기의 이름을 읊으며 다시 한번 헤롤이 죽어가고 있는 현장을 돌아보았다. 쫘아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음푹한 자국을 내고 있는 저 것의 이름은 분명 채찍이었다. 대체 이릴은 언제부터 저런 것을 들고 다녔던 거지? 그러나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든 말든,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헤롤의 비명은 그 순간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 우아악! 이 마녀가 어디다가 그 무식한 무기를 들이미는 거야! 날 죽이려고 작정했어? " " 무식하다니! 네 놈의 그 더럽게 무거운 도끼 따위보다 훨씬 실용적인 이것의 어디가 무식하다는 거야? " " 트롤의 머리를 한번에 날려버리는 채찍이 그럼 무식하지 안 무식하냐! 어이! 제발 구경만 하지 말고 이 마녀 좀 말려봐!! 이러다 죽는다고! " 겨우 채찍 몇 방 정도에 기겁을 하다니. 솔직히 말해 헤롤의 우람한 덩치가 다 아까울 정도였다. 그 거대한 도끼를 한손에 쥐고 휘두르는 사람이 내뱉는 말치고는 너무 엄살이 심해 보였달 까? 채찍이란 것을 단순한 고문도구 라고밖에 인식을 하지 못했기에 그랬던 거였지만, 아무튼 이때의 나는 헤롤에게 실망 비스무리한 감정까지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내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은, 이릴이 휘두른 채찍이 우연히 한그루의 커다란 나무에 감기는 것을 목격하고 난 직후였다. 촤악- 빠지직 빠지직- 쿠우웅-- " …! 헉, 저 채찍 대체 뭐야? " 채찍에게 감긴 순간,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던 나무가 깨끗하게 이등분 되어 바닥으로 매쳐졌던 것이다. 세상 어느 채찍이 나무를 자를 수 있단 말인가! 저거 생긴 것만 채찍이지 사실은 도끼였던 거 아니야?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놀라는 내 심정이 이해됐는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인 트로웰의 설명이 이어졌다. " 이릴이 사용하는 무기는 저 채찍이야. 보다시피… 나무는 물론, 몬스터까지도 가볍게 이등분하는 위험한 녀석이지. 이릴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연금술사가 만들어 준거라는데, 채찍에 박혀있는 하얀 덩어리 보이지? 저건 끝을 날카롭게 다진 미스릴 조각이야. 얼핏 보면 뼈조각으로 보이긴 하지만. " " 미, 미스릴? " " 으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금속이라고 설명하면 이해가 되려나? 다이아몬드보다 강도가 더 강하거든. 기를 주입해도 부서지지 않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를 지망하는 검사들에게는 꿈의 금속으로 알려져 있지. 그걸 채찍에다 박을 생각을 한 괴짜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하여간 인간들은 엉뚱한 곳에서 재치를 발휘한다니까? 킥킥. "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는 트로웰의 모습은, 눈앞의 헤롤의 다급한 상황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평화로워 보였다. 어이, 저래 봬도 일단은 동료인데 걱정도 안돼는 거야, 트로웰? 그 순간에도 이릴은 첫 번째로 쓰러트린 나무 외에도 헤롤이 도망치는 곳곳의 나무 몇 그루를 가볍게 쓰러트려가고 있었다. 대체 채찍에 무슨 조작을 하면 저런 괴력이 나오는 거란 말이냐!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초유의 사태에 놀란 것이 나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당연하단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샴페인 용병단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턱이 빠져나갈 정도로 입을 벌린 채 하나같이 경악이 가득 찬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물론 나서서 도와주려는 기특한 마음가짐은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사태의 위급 성을 알면서도, 차마 채찍이 휘둘러지는 사정권 안에 다가서기가 꺼려졌던지, 넋 놓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을 보며 헤롤은 다시 한번 분개의 함성을 내질렀다. " 으아악! 제길! 누가 좀 나서서 이 마녀 좀 말려보란 말이야아아! " 으으음. 이렇게 되면 '겨우 채찍정도에' 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아닌가. 그제 서야 사태가 다급하다는 것을 깨달아 버린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마주치는 시선마다 하나같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괜시리 나서다가 불똥 맞지 말라는 친절한 충고이리라. " 괜찮아. 헤롤 녀석이라면 한방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몰라. " " 그, 그건 무엇을 근거로 한 건데요? " " 글쎄? 에이. 뭘 그리 따지냐? 설마 이릴이 동료를 죽이기나 하겠어? 가볍게 뼈가 드러나는 상처를 입는 것에 그치고 말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구경이나 하자. 핫핫핫. " " ……. " 저것이 그나마 헤롤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마이티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오죽하겠는가. 트로웰은 처음부터 이런 종류의 트러블엔 참견할 생각이 없는 듯 했고, 휴센이나 쉐리는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보니 도무지 팔 붙이고 나서서 도와줄만한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나 또한 그렇게 앉아 넋 놓고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나이아스들이라도 불러서 이릴을 진정시켜 볼까 고민했지만, 귀여운 것에 미친 그녀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지대하다는 트로웰의 말에 미련 없이 접었다. 결국 그날의 소동은 행렬의 이동을 서두르기 시작한 상단 사람들의 재촉에 의해 간신히 진정되었다. 공사 구분을 정확히 할줄 알았던 그들이기에, 의뢰인까지 무시해가며 다툼을 연장시킬 의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뒤로도 헤롤은 한참동안을 도와주기는커녕 구경하기 바빴던 자신의 일행들을 향해 투덜거렸다.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동료가 죽어가는 데 말이야, 도와주기는커녕 히죽히죽 웃으며 구경하는 작태라니! 도망 다니는 와중이라 못 볼 줄 알았지, 쉐리? 손뼉 치는 거 다 보였어! " " 어머? 나는 그저 이릴언니가 멋져 보이기에 응원한 것뿐이야. " "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하냐! 네 눈엔 이 상처가 안보여? 제기랄! 직접 맞은 것도 아니고 공기만 스친 건데도 이렇게 까졌다고! 정말로 맞았으면 죽었을 거란 말이야! " 헤롤의 말마따나 그의 몸에는 벽돌에라도 긁힌 듯한 생채기가 이곳저곳에 자리 잡혀 있었다. 보기에 그다지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만약 지금이 타는 듯한 여름이었다면 파상풍을 의심해봐야 했을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지금도 낮에는 좀 더운가? 가을이라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긴 하지만, 낮에 내리쬐는 햇빛은 결코 여름에 뒤지지 않았다. 뒤 늦게 서야 그 점을 깨달은 나는 얼른 그를 치료해 주려고 했다가, 주변의 보는 눈을 의식해 우선은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감아두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헤롤은 충분히 감격해 하는 듯 보였다. " 크흑. 역시 진정한 미인은 착하다니까. " " 뭐냐, 그 말도 안돼는 논리는? 대체 누가 내린 거야? " " 시끄러, 넌 친구도 아니야, 빌어먹을 놈아. 뭐? 나라면 한방정도는 버틸 거라고? 설마 마녀가 동료를 죽이겠냐고? 내가 못 들었을 줄 알아? 넌 이따 휴식시간만 돼 봐. 가볍게 뼈만 드러나는 상처가 어떤 건지 체험하게 해 줄 테니. 빠드득. " " 하하하. 드, 들었냐? "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뒷걸음질치는 마이티였지만, 그렇다고 헤롤의 성난 눈빛을 피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조만간 유혈사태가 벌어지겠는 걸? 속으로 식은땀을 흘린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둘 사이도 진정시킬 겸 질문했다. " 그런데 지금 몇 월 달이예요? 아직 가을인거 맞지요? " " 으음? 아아. 한낮의 정취를 즐기는 여신의 발걸음이 머물러 있는 달이지. 조만간 포악한 성자가 얼음 창을 들고 행차하실 테지만 말이야. " 이곳 사람들은 계절을 말할 때 정확히 몇 월 이라고 구분 짓지 않는다. 그 대신 각각의 계절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정해져 있었는데, 예를 들면 봄은 잠에서 깨어는 페어리의 하품, 여름은 푸른 물가를 달리는 정령들의 축제, 가을은 한낮의 정취를 즐기는 여신의 발걸음, 겨울은 포악한 성자의 행차라는 식의 순이었다. 뭐, 사람에 따라 조금씩 더 시적인 표현을 첨가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부르기도 한다지만, 대체적으로 낯간지러운 방식으로 계절을 표현한다는 점에선 같았다. 때문에 이들이 하는 말에서 날짜의 정확성을 찾아내기란 낙타의 바늘땀 찾기보다 내게는 더 어려운 것이었다. 생각해 봐라.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그가 나에게 ' 잠에서 깨어나는 페어리가 드디어 눈을 깜빡일 때, 그 해가 조금이나마 기울어지는 시각에 만나세.' 라고 하면 대체 뭐라고 하는지 내가 알게 뭐겠는가. 무슨 추리탐정도 아니고 말이다. 아마 그 즉시로 녀석의 멱살을 잡고 ' 나 머리 나쁜 거 놀리냐? 날짜 제대로 불어, 이 자식아! ' 라고 소리치게 될 지도 모른다. " 그런데 그건 왜? " "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요. 여기서 클모어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 " 흐음, 적어도 도착하게 되면 포악한 성자가 그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쯤 일 테지. 클모어는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라 성자의 안배가 더욱 살아 숨쉬고 있을 거야. 두꺼운 옷을 준비해 두는 게 좋아. " " 하하, 네에. " 웃는 얼굴로 대답은 했다만, 정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라고 하면… 초겨울 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12월? 여신의 발걸음이 물러있지만, 조만간 포악한 성자가 온다고 대답했으니 지금은 한가을이라는 소리다. 내 예상이 맞다 면 11월쯤이라는 건데, 그럼 여기서 클모어까지 한달이 걸린다는 걸까? ' 제길. 머리 나쁜 놈은 여기서 오래 살지도 못 하겠군. '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끙끙거리고 있자니, 어느새 다가온 트로웰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간단하게 현재의 고충을 털어놓자, 그는 특유의 생글거리는 얼굴로 친절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 ' 포악한 성자가 얼음 창을 지면에 꽂아 넣을 때 ' 라고 하면 이미 초겨울은 지난거야. 초겨울 일 때는 그저 '행차'했다고만 말하지. 또한 한겨울일 때는, 그 얼음 창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말해. 그러니까 헤롤이 말한 것은 초겨울과 한겨울의 중간 이야." " 그, 그래? " " 응. 정확한 표현으로 하면 1월 초를 뜻해. 그러니까 여기서 클모어까지 대충 2~3달 이 걸리는 거야. 한국에서는 1년을 12달로 나눈다고 했지? 그건 여기도 마찬가지야. 다만 이곳 사람들이 워낙 시적인 표현을 좋아해서 '말 유희'를 하는 것뿐이지. 서로 애매모호한 뜻을 풀이하면서 즐거워한달 까? " 으으. 나처럼 정신고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동감하지 못할 취미다. 그냥 쉽게 말하면 될 것을 왜 일부러 비비 꼰단 말인가. 아무튼 사람만큼 스스로를 자학하길 즐거워하는 생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잠시 투덜거리던 나는, 새롭게 봉착한 다른 걱정거리가 떠올라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그나저나 큰일이네, 곧 겨울이라는 건 틀림이 없다는 건데…. " " 왜? 겨울이 어때서? " " 삼일에 한번씩 내리는 비말이야. 지금까지는 액체에 불과하니까 쉽게 땅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지만, 겨울이 되면 눈이 될 거잖아. 그럼 제거하기에도 힘들 텐데, 방치하면 오히려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될지 몰라. " " 흐음. 그럼 내리는 간격을 더 벌려보는 게 어때? 눈이라 해도 일단 녹이면 다시 물이 되니까, 사람들에게는 필요할거야. 어쨌든 돈 주고 사는 것 보다는 낫잖아? 일주일에 한번씩이면 적당할 것 같은데. " " 그럴까? " 하지만 트로웰이 제안해준 계획은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접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 로부터 얼마 후, 더 이상 백성들로부터 물세를 받지 않겠다는, 섭정 왕 유카르테 대공의 공문이 내려졌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삼일에 한번씩 비를 내린지 정확히 한달이 되던 때의 일이었다. 딴에는 저들끼리의 조사를 통해, 이제 재앙이 완전히 끝난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결정된 사안이라고 둘러대고는 있었지만, 대충의 사정을 아는 누구라도 이것이 근래 들어 백성들의 신임을 받기 시작하는 이사나 황제에게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취한 조취라는 것을 알고 있을 터였다. 이것을 전해 듣게 된 건 이동 중에 우연히 길가에서 마주친 어느 농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였는데, 그 들의 입에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내 입가에는 승리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한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우리들은 대공을 향한 그 어떠한 본격적인 위협을 가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스스로 겁을 내어 경계하기 시작했다. 깨닫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올 이 제국의 진정한 황제 이사나를. *** " 제기랄, 이게 대체 무슨 수치인가! 이 내가 그 새파란 꼬맹이의 술수에 놀아나 급급해하는 꼴이라니! " 쾅-소리와 함께 세차게 내리쳐진 책상이 크게 흔들렸다. 그 위에 올려진 고급 도자기와 향유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깨어졌으나, 이미 분노하고 있는 남자의 눈에 그런 것이 제대로 들어올 리 없었다. 붉은 카페트 위에 쏟아진 향유의 냄새가 온통 진동하자, 남자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사람이 얼른 옆에 있던 시동 중 한명을 향해 눈짓을 했다. 그러자 벌벌 떨고 있던 소년들 중, 붉은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아이가 급하게 다가와 깨어진 유리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안에 있던 소년들은 모두 한결같이 아름다웠지만, 붉은 머리카락의 소년은 그 중에서도 여자라고 오해해도 할말 없을 만큼, 묘한 끌림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평소라면 그 감탄할 만큼 아름다운 자태에 흥미를 보일만도 하건만, 현재의 남자는 너무 화가 나 있는 상태라 그 점 역시 눈에 차지 않았다. 방금 공문을 통해 백성들에게 내려졌던 물의 세금을 파기하기로 선언한 남자- 유카르테 란느 솔트 대공은 쓰고 있던 황금 관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 도대체가 그 말도 안돼는 헛소문을 믿는 어리석음 이라니! 하- 신에게 빌어서 비를 내렸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그 이사나가? 바보들이 아닌가.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 " " 백성들이란 원래 그런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점이 보이면 맹목적으로 집착을 하지요. 알고 계셨지 않습니까?" " 그래, 알다마다. 알고 있고말고. 바로 그 점을 이용해서 형님을 죽였는데, 내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정말 어리석군, 정말 어리석어. 이사나가? 제 아비의 죽음으로 모든 인간을 증오하고 원망하는 그 아이가 저들을 위해 신에게 빌어? 하- 정말 당치도 않은 소리. " 설마 그런 어리석은 소문을 사람들이 정말로 믿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헛소문이 돌았을 때부터 막았어야 할 일을, 믿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내버려둔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을까? 근래 들어 중립을 선언하고 있던 귀족 중 몇몇이 이사나의 편으로 돌아섰다는 말에 드디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던 대공이었다. 이사나. 그 빌어먹을 조카가 정말로 움직인 것인가. 애초부터 그는 이사나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막상 이런 식으로 두각을 드러내는 녀석을 보자니, 치밀어 오르는 살심을 점점 더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대체 무슨 수로 비가 내릴 것을 미리 알아내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확실히 대공 쪽의 패배였다. " 들리는 소문으로는 이사나 황제의 측근인 페리스 자작이 상급의 물의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번 비는 그가 내린 게 아닐까요? " " 당치 않은 소리! 상급의 정령사는 확실히 훌륭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 대륙에 일정한 시간만큼 비를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야. 애당초 그 얼빠진 녀석이 상급정령사가 됐다는 것도 믿을 수 없어.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바람의 하급정령으로 버거워하던 놈이, 어떻게 갑자기 상급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건가! " " 하지만 소문이…. " " 그놈의 소문, 소문! 좀더 확실한걸 알아올 수는 없나! 지금의 내게는 뜬구름 같은 이야기보단 정확한 출처가 있는 정보가 필요하단 말이다! 아참, 그래! 그 놈의 정보길드 마스터는 뭐라고 하지? 아직도 입을 다물고 있나? " 앙칼지게 묻는 말에 그의 앞에 있던 남자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그는 우물쭈물한 기색으로 어렵사리 대답했다. " 대답할 의무가 없다, 의뢰주의 신상보호는 길드에서 최선으로 지키고 있는 사항이므로 발설할 수 없다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벌써 몇 번째나 똑같은 답변입니다. " " 빌어먹을-! " 쾅- 다시 한번 그의 앞에 놓여진 책상이 흔들렸다. 이번엔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옆에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들은 절로 몸을 움찔거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런 그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씩씩대기 바쁜 대공은 한참이나 씹어 발기듯 허공을 노려보기에 바빴다. 그런 그가 진정하게 된 것은 무심코 돌아본, 자신이 입고 있는 하얀 법의에 시선이 미치면서부터였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그린 대공은, 분노하던 방금 전과는 달리 차분하고도 자신 있는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 훗. 제 까짓 것들이 아무리 날 뛰어 봤자 지. 그 분이 내 편을 들어주셨다. 이미 이 제국은 나의 것이야. 유카르테 란느 솔트 황제! 그것이 나의 이름이란 말이다. " "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 아직 버젓한 황제 이사나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섭정왕인 유카르테 대공을 향해 '황제 폐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반역죄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르는 이는 진심을 다해 그렇게 불렀고, 듣는 이 또한 그 점에 대해 어색해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누구도 아닌 바로 '그 분'이 자신의 편에 서 계시므로. 이 땅의 모든 백성은 언제고 자신을 향해 '폐하'라고 부르게 될 것이었으니까. 유카르테 대공은 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직감했다. 이미 모든 일이 거의 다 이루어 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때까지 철없는 조카의 부질없는 발악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리라. " 어디 마음대로 해 보거라, 이사나. 이 숙부의 손에서 그 가는 목이 비틀어 질 순간까지 말이다. 하하하하- " 마치 그 순간을 상상하듯, 대공은 자신의 움켜진 주먹을 바라보며 잔혹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가녀린 목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쉽게 부러질 것이다. 그의 형이 아무런 대책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것처럼. 한편, 한쪽구석에서 떨고 있던 소년들 중, 깨어진 유리병을 치웠던 붉은 머리의 소년은 그들의 하는 말에 미간을 살며시 좁히고 있었다.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고 있는 것 같았지만, 소년은 그의 말에서 느껴졌던 위화감이 지나칠 정도로 신경이 쓰였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하급의 정령만을 다루던 사람이 불과 몇 달 만에 상급정령사가 되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서 시작되는 '삼일의 기적' (백성들이 삼일에 한번씩 내리는 비를 향하여 칭하는 말이다.) 이것이 과연 우연일까? 이사나 황제는 정말로 삼일의 기적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걸까? 그저 우연히 정보를 미리 들어, 그것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소년이 알기로, 정령사의 능력을 갑자기 향상시키거나, 전 대륙에 일정한 양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단 한 존재 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년은 입가에 매혹적인 미소를 그렸다. ' 너구나, 엘퀴네스. ' =============================================== 이러면 안되는데.. 이라크가 정말 싫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여서라도 막아야 할만큼, 우리나라의 존재가 그들에게 그렇게 위협적인 건가요? 대체 무엇을 잘못했길래? 미국도 싫고 이라크도 싫고. 살리고 싶었어도 결국 살리지 못한 우리나라도 싫습니다. 부디 고인이 좋은 곳으로 가셨길 바라며, 유가족분들이 마음의 위로를 얻기를 바랍니다. 음.. 그리고 엘퀴네스의 장은 진지를 가장한 코믹이 맞습니다.; 원래 이 글의 모토가 가볍고 맘 편하게 읽는 글을 쓰자!에서 나온 것이었고, 진지하게 쓰고 싶어도 필력이 딸려서 못쓴다지요; 핫핫핫..^^; 보석은 물론 좋아합니다^^ 하지만 사는것보단 구경하는걸 더 좋아한다지요. 제 글의 캐릭터들에게 보석이름을 붙여주는건, 그 보석의 아름다움이 제 글에도 묻어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에서랄까..; 또는 그 보석만큼이나 미소년, 미청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쿨럭;) ->먼치킨 숭배자;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이번 샴페인 용병단에게 호위를 의뢰한 피닉스상단은, 대륙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큰 지부를 가지고 있는 상단이었다. 도착지인 클모어에는 두세 달에 한 번씩 그곳에 있는 지부에 비단과 밀가루를 공급하기 위해 방문했는데, 워낙 몬스터의 출현이 빈번하다보니 갈 때마다 많은 인원의 호위를 필요로 했다. 본래는 상단 내에서 결성된 호위무사를 대동하였지만, 최근에 들린 마을에서 무얼 잘못 먹었는지 단체로 집단 식중독에 걸리는 바람에 부득이 하게 용병단에게 호위를 요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상단의 대표자라는 사람을 비롯한 대부분의 상인들은, 행렬이 시작된 지 사흘이 넘어가는 지금까지도 안색이 파리해 보였다. 마차의 수는 짐을 실은 마차까지 포함에서 모두 5개로, 헤롤의 말에 의하면 보통 상단의 행렬치고는 초라한 수준이라고 했다. 고용한 용병단은 우리를 포함해서 3개였는데, 20명에 해당하는 인원들 중 골드 급의 패를 가진 사람은 우리 쪽의 휴센 단장 밖에 없었다. 이전에 들었던 말마따나 골드 급의 용병들은 개인플레이를 더 선호하기 때문에 어느 단체에 속해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앞서가는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은 가끔씩 신기한 생물이라도 보듯 휴센 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었다. 개중에는 노골적으로 경외와 동경심이 담긴 눈빛을 보내오는 자도 있었다. “ 흐음, 금패를 가진 용병이 그렇게 대단하건가요? ” “ 당연하지. 골드 급의 용병이 개인플레이를 선호하는 이유가 뭐겠어? 단체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만큼, 의뢰를 혼자서도 너끈히 해결할 능력이 된다는 소리야. 이 큰 상단을 혼자서 호위한다고 생각해봐. 정말 대단하지? ” “ 헤에.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 하긴, 제 키보다 큰 도끼를 한손으로 들고 휘두르는 헤롤이나, 덩치 큰 나무도 가볍게 잘라버리는 채찍을 가지고 있는 이릴도 아직 실버 급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들 보다 더 대단한 능력이라니. 새삼 휴센을 보는 눈빛이 달라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특히나 그는 다른 일행들에 비해서 가장 무난한 형태의 ‘검’을 무기로 소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은근히 그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운이 좋으면 영화에서나 보던 중세시대의 검술을 실제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사실, 검이라는 것의 위력을 아직 제대로 체험한 바가 없던 내가 그러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 다음 휴식시간은 언제예요? ” “ 아마도 한 시간 후? 곧 점심시간이니 행렬을 멈추겠지. 아, 벌써부터 뱃가죽이 진동을 한다. 배고파 죽겠어. 빨리 밥 먹고, 이 녀석들도 풀 좀 뜯게 풀어놔야지. ” 그렇게 대답한 헤롤은 그가 타고 있던 갈색말의 목을 쓰다듬으면서 씨익 미소지어보였다. 클모어까지 가는 길의 이동수단은 말이었다. 이미 샴페인 용병단원에겐 개인적으로 소유한 말이 있어 따로 구입할 필요가 없었지만, 나와 이사나가 탈 말이 없었기 때문에 출발하기 직전 근처의 마 시장에 들러 괜찮은 말 한 마리를 구입한 참이었다. 왜 한 마리냐고? 그건 내가 말을 타 본 경험이 전 무 했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배워서 타볼까 고민도 했지만, 어차피 정령인 탓에 무게감도 없고, 어릴 때부터 배웠다는 이사나의 승마실력이 워낙 출중했기 때문에 나와 이사나가 한 마리를 같이 타고 가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것에 대해 사람들은 처음엔 다 큰 사내 녀석이 두 명이나 타면 말에게 부담이 크다며 만류하는 기색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말이 지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묵인해 주고 있었다. 진실을 아는 트로웰만이 가끔씩 씁쓸한 미소를 보내왔을 뿐이다. -그럼 차라리 나랑 같이 타고 가지. 약간은 서운하단 표정을 지은 녀석은 이전에 한번 사용한적 있던, 머릿속에 직접 울리는 대화법으로 말을 걸어왔다. 정령어라고 했던가? 처음에 들었을 때는 깜짝깜짝 놀랐는데, 몇 번 듣고 보니 그 원리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간단하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성대를 사용하지 않은 의지의 파장만으로 목소리를 전달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는 계속 같은 형식으로 말을 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상황에 따라 성대를 사용하기도 하고 파장을 사용하기도 하면서 보다 편리한쪽을 추구하고 있었다. 물의 영역에서는 파장만으로 대화를 했던 것을, 인간 세상에 소환되고부터 성대를 통한 목소리를 내뱉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의지의 파장만을 이용한 대화법은 육체를 가진 인간에게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는데, 아마도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그것을 깨닫고 대처해 냈던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이제와 새삼 이곳 인간들의 언어를 알아듣고 말하는 것을 신기해하는 내게, 언어는 정령왕으로서 가지는 기본 소양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 역시 본능적으로 알아내는 것이니 놀랄 것이 없다고 조언한 트로웰은, 정령왕의 본능이 살아나기 시작했다며 무척 흡족해 했다. - 미안, 트로웰.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임시용병에 불과한 내가, 팀의 가장 큰 전력인 너의 움직임을 제한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 흐음..뭐..사실이 아니긴 해도 별수 없나? 어쨌든 지금은 유희중이기도 하니. 사실 저기 있는 휴센 보다 엘이 더 큰 전력인데 말이야. - 엑? 나 싸움 같은 거 못해. 지금 같은 경우는 남들 보는 눈도 있어서 물도 다루지 못하고. - 그건 상관없을 걸? 그냥 가만히 앉아서 정령왕의 기운을 내뿜기만 해도 알아서 몬스터들이 물러가거든.. 나 혼자 여행 다닐 때는 종종 그렇게 쫓아버리곤 했어. 헤에. 그런 방법이? 솔직히 말해서 몬스터라는 형태의 생물을 실제로 본적이 없던 나로서는 그들과의 싸움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머릿속에서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지금이야 날 대신해서(?) 싸워줄 용감한 용병들이 지천에 깔렸다지만, 나중에 이사나와 둘이서 여행 다니게 되면 어찌해야 하나 난감해 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트로웰은 그런 내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줄만한 해결책을 내놓았던 것이다. 정령왕의 기운을 이용해서 쫓아낸다니, 되도록 큰 소동 없이 일정을 유지하고 싶은 내게 있어서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듯싶었다. - 그런데 몬스터들이란 게 대체 어떻게 생긴 거야? 괴물? - 음? 지구에는 몬스터가 없었어? - 맹수라고 하는 개념은 있었지만, 몬스터는 없었던 것 같아. 설마 늑대나 사자 같은 것을 몬스터라고 하는 건 아니지? - 아니, 그건 맹수라고 하는 게 맞아. 몬스터는 그보다 좀더 포악하고, 강하며, 지성이 있는 생물체야. 그러면서 트로웰이 설명해준 몬스터는 대체로 인간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흉측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흔히 만화에서 등장하는 특이한 형상을 가진 생물이었달 까? 사람처럼 서서 걷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말까지 흉내 낼 수 있다고 하니, 나라는 존재가 과연 인간과 몬스터를 구별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로웰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그럴 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 몬스터는 인간보다는 엘이 말한 맹수의 모습과 흡사해. 사람과 구분하지 못할 리는 없을 거야. - 그, 그래? - 응, 어떤 것은 새끼 때부터 길들이면 온순한 것도 있어. 겉모습은 귀여운 동물인데, 알고 보면 몬스터인 경우도 있고. 하지만 한 가지 알아둘 점은, 겉모습이 아름다울수록 포악한 상급의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야. 원래 상급몬스터는 잘 나타나는 편이 아니지만, 일단 근처에 드래곤의 레어라도 있을 경우, 마주칠 가능성도 있으니까 미리 알아두는 게 좋아. - 응? 그것과 드래곤의 레어가 무슨 상관인데? 설마 그 상급 몬스터란게 드래곤의 레어 근처에서 자주 출몰하는 족속들인가? 궁금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내 생각을 미리 읽었는지 트로웰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드래곤은 몬스터를 조종하는 힘이 있거든. 사람들에겐 몬스터의 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지. 마족이 마물을 다스리는 것처럼, 드래곤도 그와 같은 범주야. 그래서 드래곤의 레어 주위엔 대체로 몬스터들이 많이 몰려드는 편이야. - 엑? 마족과 같은 범주라니.. 그럼 드래곤도 몬스터의 배를 가르고 태어나는 거야? - 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미 드래곤이란 존재가 도마뱀과 상당히 흡사한 파충류 과임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정말 어이없게 그렇게 물어보고 말았다. 그것도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닌 그저 단순하게, 드래곤이 몬스터를 다루는 것이 마족이 마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은 범주라는 말에서 이끌어낸 결론이었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뒤 늦게 서야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은 나는 홍당무가 되어 고개를 숙였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트로웰에게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는, 내가 신계에서 저승사자 유라우스에게 들었던 마족의 이야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아아. 마족들의 탄생에 관한 건 알고 있었어. 마물의 몸에 기생했다가 나중에 그 몸을 가르고 나오는 것 말이지? 드래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임신하면 한 개의 알을 낳아. 그리고 그 알에서 나중에 해츨링이 태어나게 되지. - 으응. 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상상력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으로 우물거리며 대답하자, 트로웰은 무엇이 그리 좋은지 즐거운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 모습에서는 무식한 나에 대한 실망이나 한심함 따위는 전혀 없었다. - 쿡쿡. 재미있는 걸, 뭐. 솔직히 말해서 누군가에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준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어. 특히 엘 같은 경우, 아크아돈의 기본지식이 하나도 없이, 타 차원에 익숙한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해. 보는 각도가 남다르다고 해야 하나? - 에? 그런가.. - 응. 사실 ‘몬스터가 어떻게 생겼나’ 라는 질문을 받은 것도 이번이 처음인 걸? 그들을 사람과 구분할 수 없을까봐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야. 이런 말 하면 기분 나쁠지 모르겠지만, 엘은 정말 굉장히 귀여워. - 하하하.. 이거야 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지는 걸?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까지. 내 평생 동안 들을 ‘귀엽다’는 소리를 몽땅 트로웰이 다 불러주고 있는 기분이었다.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두 뺨이 물오른 사과만큼이나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옆에서 그 모습을 우연히 보고 있던 마이티가 짓궂은 표정이 되어 놀리듯 입을 열었다. “ 여어~ 둘이서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다니! 설마 금단의 로망이 탄생하는 거야? 이거 질투 나서 못살겠는데? ” “ 엑? 그..그런 거 아니 예요! ” “ 후후후. 그런데 왜 그렇게 둘이 열렬한 눈빛들을 주고받았던 건데? 궁금해. 나도 좀 알자, 응? 무슨 일이었는지 가르쳐 주라. ” “ 으윽. 그게 아니라니깐요.. ” 그의 입장에서야 정령어가 들리지 않으니, 나와 트로웰의 대화하는 장면이 그저 말없이 서로를 빤히 쳐다보는 것으로 보여도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금단의 로망’이라니.. 말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통하는, 위대한 우정으로 봐줄 수는 없던 건가? 물론 트로웰이 너무너무 예쁘고 귀엽고 매력적으로 생겨서, 보고 있으면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더 가슴을 벌렁벌렁 거리게 만든다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냐고. 쳇.쳇. 하지만 트로웰은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착한 녀석이다. “ 후훗. 만약에 정말로 금단의 로망이라고 하면, 누가 수이고 누가 공인데요? ” “ ....... ” ...아니, 단지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뿐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경악할 말을 내뱉은 트로웰로 인해, 오히려 처음 놀리는 말을 꺼냈던 마이티가 더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 중얼중얼 거리는 말이 ‘역시 매튜는 놀리는 게 아니었어.’ 라나? 트로웰이 유희를 떠난 건 나보다 며칠 앞선, 이제 겨우 두 달 남짓에 불과했다. 그 말대로 풀이하자면 그가 샴페인 용병단에 합류하게 된 것 역시 두 달 밖에 안 되었다는 건데도, 이미 일행들은 트로웰의 진정한 무서움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담임을 알면서도 그것을 절대 농담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냉정함. 그것이 바로 일행들이 트로웰을 어려워하는 이유였다. 의외였던 것은 나를 만나기 전의 그는 일행들에게 웃음조차 제대로 지어 보인 적이 없는 싸늘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말하는 것과 사람을 대하는 행동은 정중하기 그지없었지만, 표정만큼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의 표현이 지극히 적었기에, 그것을 보다 못한 헤롤은 이 무뚝뚝한 소년에게 감성을 되찾아 주자는 취지아래 변태라는 오명까지 뒤집어 써가며 과한 애정과 스킨쉽을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와 자꾸 생글거리는 모습을 보니, 도리어 이전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위화감이 느껴진다는 고백을 하는 그였다. “ 흐음, 저는 매튜의 웃는 모습밖에 보지 못해서.. 무표정의 녀석이 오히려 더 상상이 안 되는 걸요? ” “ 헤에. 웃는 모습밖에 보지 못했다고? 하긴. 뭐, 그럴 수밖에 없겠네. ” “ ......? ” “ 너 말이야. 뭐랄까. 분위기가 굉장히 화사하거든. 외모가 예뻐서가 아니라, 느껴지는 기운 자체가 가뭄속의 청량감 같다고나 할까? 사람을 웃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 매튜 옆에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 “ 하하. 그런 굉장한 칭찬은 처음 들어봐요. ” 강지훈일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만 보면 속이 터져’ 였다.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절망에 빠트린다고 얼마나 구박을 많이 받았던가. 그런 내가 전혀 낯선 세상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에게 ‘ 웃음을 주는 매력 ’ 이 있다는 칭찬을 듣게 될 줄이야. 그러고 보니 반 친구 중에서도 그런 식의 말을 해주는 녀석이 있었다. 이름이 하태진이라는 놈이었는데, 내가 아버지한테 맞고 도망쳐 나올 때마다 자기 일처럼 분개하며 경찰에 신고한다고 난리치던 녀석이었다. ‘아버지가 나만 보면 속 터진대’라는 말에 ‘ 네 아버진 눈이 나쁘신가 보다. 네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 놈인데, 안 그래? ’ 라는 말로 심심치 않은 위로를 건네고는 했다. 그밖에도 나를 위해 도시락을 두개씩 들고 오던 최민식이나, 잦은 지각도 선생님 몰래 눈감아 주던 반장 유지태. 내 고민을 들어주고 상담해주던 착한 이정민 등.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지옥 같던 전생에도 친구 운은 그다지 나쁜 편이 아니었던 것 같다. 녀석들 모두 내 장례식 때 와서 엄청 울고 갔었는데..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가 태어난 지 몇 달 밖에 안 되었다고 해서, 그곳의 시간도 몇 달밖에 안 흘렀을 거라는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4대 차원과 인간계의 차원에 흐르는 시간이 일정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명계에서 정령계로 환생되었을 때의 시간이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찰나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나는 문으로 뛰어 들고 나서 잠시 정신을 잃었었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 무렵 환생되었음을 깨달았었다. 어쩌면 그 짧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길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을 대충 1년 정도로 잡는다면, 친구 녀석들의 기억에도 슬슬 내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을 것이었다. 두고두고 슬퍼하느니, 차라리 잊어주는 게 나았지만 막상 그리 생각되고 보니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자 헤롤은 나름대로 했던 칭찬에 내가 웃기는커녕 씁쓸한 표정이 되자 당황한 얼굴이 되어 어쩔 줄 몰라 했다.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뒤늦게야 그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굳었던 안색을 풀며 어색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 아, 미안해요, 헤롤. 잠시 딴 생각을 했어요. 헤헤. ” “ 그..그래? 나는 또 내 칭찬이 기분 나빴나 보다 했지. 무슨 생각을 했기에 그렇게 죽상이야? 어두운 표정도 미소년이 지으니까 꽤나 어울리긴 하다만.. ” “ 하하.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일을 잠깐... 별거 아니 예요. ” 하지만 헤롤의 못미더워 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그는 나의 별거 아니라는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아마도 트로웰이 설정한 ‘매튜의 귀족을 싫어하게 된 어린시절’과 연관이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엄숙한 표정을 지은 그는 다 이해한다며 몇 번이나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비록 전혀 엉뚱한 상상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 따뜻한 마음씨가 너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것 같다. 얼핏 시선이 흐려진다고 생각한 순간, 나를 보는 일행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치는 것을 보고 나는 또 바보같이 헤헤 웃어주고 말았다. 이건 또 얼마 만에 울어본 거더라? 7살 이후, 눈물을 흘리면 더 많이 맞게 된다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래서 지금은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나에게는 흘러내릴 설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했던 것은 오랜만에 흘려본 눈물은 내 생각만큼 기분 나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입술을 적시는 눈물의 맛은 이제 더 이상 이전처럼 짜지 않았다. 그 사소한 것에서 나는 새삼스럽게 다시 한번 내가 인간이 아니게 되었음을 깨닫고 있었다. 내가 ‘몬스터’라는 생물을 실제로 본 것은 그로부터 2주일이 흐른 어느 햇볕이 따가운 날의 오후였다. 그날은 마침 클모어로 가기 직전에 거쳐야 하는 두개의 검문소중 첫 번째 검문소에 거의 다다를 무렵이었는데, 사방이 탁 트인 평원에서 마주친 몬스터라는 생물은 황당하게도 사람의 몸체에 돼지의 머리를 달고 있었다. 처음부터 행렬을 노리고 나타난 듯, 상단을 호위하는 용병의 숫자에 맞춰 30마리 가까이나 되던 몬스터들은 취익취익하는 불쾌한 울음소리를 내며 살기어린 시선을 일행들을 향해 쏘아 보내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헤롤의 것보다 짧고 투박한 모양의 도끼였다. “ 뭐..뭐야 저건? ” 그때가 마침 이사나의 숙부인 유라우스 대공이 물세를 폐지했다는 소식을 막 들은 참이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아져 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그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돼지머리의 인간들을 바라보자, 옆에서 말을 몰던 트로웰이 전혀 긴장감이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 오크들이야. ” “ 오크? 설마 몬스터야? ” “ 응. 단체로 몰려다닌다는 것만 빼면 비교적 상대하기 쉬운 하위급 몬스터야. 인간의 말도 어느 정도 할줄 알고, 지금처럼 약탈을 목적으로 덤비기 때문에 지능적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실제론 굉장히 단순하지. 조금 끈덕질 정도로 귀찮게 굴어서 질리기도 하지만 말이야. ” “ 헤에. 그렇구나. ” 오오. 저게 바로 그 말로만 듣던 몬스터라는 건가? 단체 빼곤 별 볼일 없는 하위급 몬스터라더니, 과연 오크들이 행렬을 빙 둘러싸서 포위하고 들어오는 데도 상단의 사람 누구도 긴장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다만 나만큼이나 몬스터를 접할 기회가 없던 이사나만이 움찔하며 잡고 있던 말의 고삐를 더욱 세게 쥐었을 뿐이다. 행렬을 압박해 들어오던 오크들이 취익거리던 울음소리를 걷어내고 드디어 말을 걸어 왔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 취익- 인간. 짐만 내리고 가면 죽이지 않겠다. 취익. 얌전히 물건을 내 놓아라 취익 ” “ 숫자도- 취익. 우리가 더 많다, 취익. 쓸데없는 반항하지 말고-취익. 물건을 내 놓아라. ” ‘우와. 정말로 말을 하잖아? ’ 하체가 인간이긴 했지만 돼지머리를 달고서 사람 말을 하니 정말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돼지가 사람 말을 하는 것 같았달 까? 신기한 표정으로 오크들을 바라보고 있자 어느새 가볍게 주먹을 풀고 있던 트로웰이 눈짓을 보내왔다. “ 옆으로 피해있어. 엘. 지금부터 보는 것은 그다지 좋을 게 없으니까. ” “ 응? 뭘 하려고? ” “ 녀석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는 없으니 처리해야지. 조금 끔찍할지도 몰라. 라이랑 같이 눈 가리고 있어. ” “ 에? 그래도 돼? 같이 싸워야 하는 거 아니야? ” “ 괜찮아. 우리들 선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 다른 용병단들도 그다지 나쁜 실력은 아닌 것 같으니까 엘은 피해있기만 해. 알았지? ” “ 으응.. ” 그는 지난번에 내가 울었던 사건(?)이후로, 이전보다 훨씬 더 나를 챙기고 있었다. 그밖에 다른 일행들의 반응도 전보다 상당히 조심스러워 지긴 했지만, 트로웰의 행동은 그 의미부터가 남달랐다. 아무래도 울었던 그때 상당부분 감정이 흐트러진 탓에 트로웰에게 내 전생의 편린들이 읽힌 것 같으니까 말이다. 영문을 모르고 동정하는 것과, 모든 사정을 알고 동정하는 것은 다르다. 원래 나는 쥐뿔도 가진 것 없이 자존심만 센 녀석이라 누군가 나를 동정하는 것을 못 견디게 싫어했었지만, 그 대상이 트로웰이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트로웰이 나를 보는 시선이 어쩌면 동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보다는 뭐랄까. 위로받는 기분이 더 강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게는 친구 운만큼은 따라주는 모양이다.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 순간, 유쾌함이 느껴지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행렬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 어이, 돼지머리들. 그건 우리가 할 말이라고. 얌전히 도망가 주면 죽이지 않으마. 응? 어떻게 할래? ” 그리고 이어지는 킥킥거리는 웃음소리. 아마도 행렬의 앞쪽 호위를 맡은 ‘보드카 용병단’들인 모양이었다. 그들은 샴페인 용병단 처럼 8명에 해당하는 단원 전체가 은패를 소지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거친 인상을 가지고 있어서 지난 시간동안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었다. 그래도 행렬 중반의 호위를 맡은 ‘샐러드 용병단’들 하고는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농담을 주고받을 사이까지 발전했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들의 말에 기분이 상한 오크들은 순식간에 거친 신음소리를 내 뱉으며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고, 곧 그것은 대기하고 있던 용병들과의 전투로 이어졌다. 퍽-하는 소리와 함께 내리꽂힌 창에 의해 오크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터진 뇌수와 붉은 선혈이 온통 지면을 적셔 들어가기 시작했다. “ 윽-! ” 내가 싸우는 것도 아니고. 단지 지켜만 보는 건데도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트로웰의 충고를 무시한 대가랄까? 멋모르고 전투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살육현장에 그대로 창백하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손이 떨려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정령이라 토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넘어올 것 같은 기분에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람들이 휘두르는 무기에 무참히 찢겨나가는 오크들의 모습은 계속되고 있었다. “ 크하하하- 바로 이 맛이야! 그동안 이동만 하느라 지겨워 죽는 줄 알았는데! 니들이 나를 돕는구나! 푸하하하!! ” “ 헤롤! 도망가는 놈들까지 다 죽여야 해! 이놈들은 내버려 두면 더 많은 놈들을 데리고 돌아온단 말이야. ” “ 알고 있어! 맡겨 두라고! ” 어느새 말에서 뛰어내려 도끼하나만 짊어든 채 오크무리로 뛰어든 헤롤이 호기롭게 외쳐보였다. 휘익 하는 날카로운 음과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세 마리의 오크들의 머리가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또 다시 터져 나오는 피 분수. 으윽. 역시 괜히 봤다. “ 이 빌어먹을 놈아! 애들 보는 것도 생각하란 말이야! 좀 얌전하게 죽일 순 없어? 트롤도 아닌데 뭣 하러 멱을 따는 거야? ” “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마녀야! 채찍의 강도 좀 조절하라고! 네 눈엔 저 반쪽으로 갈라진 몸통이 보이지도 않냐? ” “ 시끄럿! 터진 머리통보다야 훨씬 나아! ” “ 웃기지마! 흘러내린 내장들 보다야 동강난 머리통이 낫다고! ” “ 뭐가 어째?? ” 으아아. 이건 정신 고문이야! 시선을 피하고 있어도 친절하게 들려오는 헤롤과 이릴의 생중계(?)때문에 나와 이사나의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얼굴을 살짝 찌푸린 트로웰이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시켰다. “ 헤롤, 이릴! 말다툼할 시간 있으면 싸움이나 빨리 끝내요. 이러다 해 진다구요. ” “ 앗, 미안 매튜. ” “ 쳇, 너 매튜 때문에 봐주는 줄 알아! ” 그리고 상황 끝. 이라고 했으면 좋을 뻔 했으나 이 후로도 둘의 말다툼은 좀처럼 끝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더 이상 몬스터를 죽이는 방식을 가지고 떠들어 대지 않았다는 점이랄까? 종종 덤벼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해 가면서 여유롭게 다투고 있는 모습에서, 이런 생활이 그들에게 숨쉬는 것보다 익숙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울고 싶은 기분으로 트로웰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매끄러운 동작으로 오크들을 한방에 날려 차는 그의 모습에 그대로 멍하니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의 발을 맞고 나가떨어진 오크는 부들부들 거리며 개 거품을 물더니 그대로 바닥에 추욱 늘어졌다. 단 한방의 발차기에 절명해 버린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쪽으로 내 뻗어 오는 오크들의 도끼에 살짝 올라탄 그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 같은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며 여러 명의 오크들을 일격으로 저세상에 보내고 있었다.. 피가 튀지도 않고 끔찍한 잔해도 없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처리방식 이었다. 어찌나 멋있었는지, 한창 싸우느라 정신이 없던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까지 트로웰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볼 정도였다. 또한 깔끔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몬스터의 급소만을 노리는 휴센의 모습도 충분한 감탄을 사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안하고 멍하게 있는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다. 이사나의 경우는 동경을 가득 담은 눈빛으로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 정말 대단하다.. ” 눈 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몬스터가 처리되자 트로웰은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모습으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물러서자 다른 샴페인 용병단원들도 돌아섰고, 남아있는 몇 마리의 살아있는 오크들은 다른 용병단원들로 인해 그 최후의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비릿한 피 냄새와 널려진 시체들 때문에 저절로 얼굴이 찡그려지긴 했지만, 큰 활약을 이루고 돌아오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정말 대단해요.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많은 몬스터가 죽다니. ” “ 후훗. 그 정도야 우리들한테는 식후 디저트보다 못하지. 어때? 나 괜찮았어? ” “ 네, 정말 멋졌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 “ 우리는 괜찮아. 저쪽 인간들은 좀 다친 모양이지만. ” 그렇게 말하며 마이티가 가리킨 방향엔 보드카 용병단의 몇몇이 도끼로 길게 그어진 상흔을 입고 오만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조금 주변을 정리하는 가 싶더니, 마차 안에서 누구가가 뛰어나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새하얀 로브를 입은 금발의 남자였는데, 그가 상처부위에 손을 얹으며 무어라 중얼거리자 흰빛이 새어나오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치료가 되는 것이 보였다. “ 헉. 설마 신관? ” “ 헤에. 그러게. 역시 대륙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상단이네. 이 정도의 초라한 규모에도 그 비싼 신관을 동행하고 가다니 말이야. 돈이 썩어 넘쳐나는 모양이지? ” “ 내버려 둬. 덕분에 저 녀석들은 빨리 낫게 되었으니 좋은 거지 뭘 그래? 아아, 덥다. 나 땀 흘린 것 좀 봐. 미안한데 라이, 물 좀 줄 수 있을까? 시원한 물마시고 싶은데. ” “ 네! 지금 당장 나이아스들을.. ” “ 으앗! 잠깐!! 내가 안 보는데서 해! ” 마지막에 비명을 지른 이는 이릴이었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이아스들을 보지 않기로 작정을 본 모양인지, 다른 사람이 황당하게 본다는 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후다닥 달려가 마차 뒤로 숨어버렸다. 결국 이릴은 이사나가 불러낸 물의 정령이 다른 사람들의 목을 축이고 몸을 씻어줄 동안 꼼짝도 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있어야만 했다. 아직 이사나가 물의 정령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샴페인 용병단 밖에 없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까지 이 사실을 알고 물을 부탁했다간, 이릴은 오늘 밤이 새도록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항상 도도하고 오만하기 까지 했던 그녀가, 단지 귀여운 것을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모습을 보니 웃음이 흘러 나왔다. 트로웰의 말마따나 정말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 닉콘이 업그레이드 됐어요~~ 반짝반짝~ 깜빡깜빡 거리는 에드군이 보이십니까!+ㅁ+// 셔가님이 만들어주셨다지요~ 냐하하~ 정말 감격했습니다>ㅁㅁ< => 엘퀴네스의 장-11. 피치 못할 사정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며칠 전에 오크떼를 만난 이후로 행렬은 별 탈 없이 무사히 첫 번째 검문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검문소는 넓게 쌓인 성탑 밖으로 작은 초소가 지어진 형식이었는데, 그 안에서 담소를 나누던 기사들은 우리가 도착한 것을 보곤 심드렁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마차 안에 있던 상단의 대표자가 얼른 자신의 신분증명서와 목적지를 제시한 패를 보이자,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마차와 용병일행을 쭈욱 둘러보기 시작했다. “ 흠, 피닉스 상단의 일행인가? 클모어까지는 무슨 일로 가는 거지? ” “ 그곳에 있는 저희 지부에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단과 다수의 밀가루포대입니다. ” “ 그렇군. 이쪽들은 용병인가? 소속된 용병패와 단증을 제시하시오. ” 그의 말에 샴페인 용병단을 비롯한 용병들은 한두 번 해본일이 아니라는 듯 무척이나 익숙한 포즈로 자신들이 걸고 있던 용병패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의 행동을 바라보던 나와 이사나도 서둘러 목에 걸려있던 목걸이를 꺼내보였는데, 금속으로 번쩍번쩍한 이들에 비해 나무패로 만들어진 목걸이는 확실히 초라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어찌나 분위기가 칙칙한지 금패를 달고 있는 휴센보다 오히려 더 튀어 보일 지경이다. 혹시나 기사들이 이 나무패에 관심을 가지고 이사나에게 후드를 벗어보라고 하면 어쩔까 걱정이 되었는데, 그것이 기우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은 패를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성의 없는 태도로 고개만을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에서 어쩐지 너무 형식적이란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 샴페인 용병단 8명, 보드카 용병단 8명, 샐러드 용병단 7명이라. 짐에 비해 호위가 너무 많은 것 아닌가? ” “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오기 직전에 마주친 몬스터 때가 30마리 가까이나 되었는걸요. 이 정도의 용병을 고용해야 무사히 짐을 지킬 수 있습니다. ” “ 흐음. 그런가? 그놈의 몬스터들은 갈수록 기승을 부리는 군 그래. 좋아, 통과를 허락한다. 어이, 성문을 열어!. ” 검문을 하던 기사가 큰 소리로 외치자 성벽 안쪽에 있던 경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적어도 짐이 무엇인지, 호위하는 용병이나 상단의 사람 중에 수상한 인간은 없는지 자세히 확인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너무도 간단하게 끝난 검문에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 저어, 원래 이렇게 간단한가요? ” 결국 의문을 참지 못하고 몰래 옆에 있던 헤롤에게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국경이 아니라서 그래. 제국 내부에 있는 검문소들은 대부분 형식적인 경우가 많아. 딴 나라로 튀지만 않으면 어찌됐든 자신들 손바닥 안이라는 거지. ” “ 헤에. 그런 게 가능해요? ” “ 물론 불가능 하지. 한마디로 망할 징조라는 거야.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실 사정이 어지러운데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있겠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지. ” “ ....... ” 그의 말에 내 앞에서 덩달아 듣고 있던 이사나의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순간 괜히 물었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국의 현 사정을 확실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나는 좀더 낮은 목소리로 헤롤에게 입을 열었다. “ 그래도 섭정왕 유라우스는 꽤 훌륭한 정치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제가 틀린 건가요? ” “ 엥? 누가 그런 말도 안돼는 소리를 해? 물론 처음에야 그랬지. 제법 사람도 잘 다룰 줄 알고, 신관장이란 신분도 가지고 있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이사나 황제가 갈수록 방탕한 생활을 하느라 국정에 전혀 상관을 하지 않았으니 그에 비해서 돋보일 수밖에 없는 거 아니야? 하지만 그게 다 속빈 강정이었다는 거지. ” “ 속빈 강정? ”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헤롤은 조금 더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 대공이 신경 쓰는 건 소수의 귀족들 이었어. 정작 관심 가져주고 지켜주어야 할 백성들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지. 황제폐하에게서 세력을 빼앗자니 당연히 귀족들만 신경이 쓰였겠지. 그 과정에서 일정양의 무력이 동반된 것도 사실이고 말이야. 하여간 전반적으로 대공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아. 선황폐하의 죽음이나 현 황제폐하의 행방불명이 다 그가 개입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 정도니까. 섭정기간이 길기나 해? 1, 2년도 아니고 불과 몇 달 만에 이런 소문이 돌 정도면 말 다한 거 아니냐? ” “ 그렇군요. ”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행렬은 검문소를 벗어나 마을 안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식량을 재정비 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나게 될 것이라는 설명을 들은 나는, 일행이 적당한 여관을 알아보기 위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이사나의 어깨를 툭툭 치며 즐거운 표정으로 열었다. “ 다행이다, 이사나. ” “ 응? 뭐가? ” “ 황제자리를 포기 하지 않게 되서 말이야. 너 그랬잖아? 대공이 정치를 잘 하고 있다면 순순히 그 자리에서 물러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보니 물러날 필요가 전혀 없는 것 같아. ” 내 딴에는 좋은 소식이랍시고 전한 거였는데, 그 말을 들은 이사나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더 우울해 보였다. 왜..왜 그러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기운 빠진 목소리로 힘없이 대답했다. “ 사실은 나..그다지 자신이 없어. ” “ 응? 그게 무슨 소리야? ” “ 글쎄. 나라고 숙부에 비해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뭐랄까. 이 나라, 이 백성들이 내 행동 하나하나에 운명이 바뀐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아. 이대로라면 무사히 돌아가더라도 제대로 해낼 수 없을지 몰라. ” 아마도 잘 해야겠다는 욕심이 부담감으로 바뀐 듯.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우물거리는 이사나를 보자니 이번엔 무슨 말로 용기를 불어넣어줘야 할지 막막해졌다. 남의 위에 군림한다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비록 경험에서 얻은 지식이 아닌, 학교에서 배운 제국의 역사를 보며 느낀 사실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적어도 이사나는 재물이나 명예욕에 취해 왕이 되려는 인간들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어깨에 수 만 명의 생명이 올라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숙지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피식 웃으며 이사나의 후드로 가려진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 .....? ” “ 지금은 어떻게든 황성으로 돌아가 황권을 되찾는 것. 그거 하나만 생각해, 이사나. 한번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니까 머리가 아픈 거야. ” “ 하..하지만.. ” “ 설마 부담감 때문에 황제하기 싫다고 하려는 거야? 너 말이야. 내가 만약 부담감이 너무 강해서 정령왕 안하겠다고 버텼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 나의 뜬금없는 물음에 이사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벌어졌다. 설마 정령왕의 지위를 거부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 저..정령왕을 하기 싫다고 안할 수 있어? ” “ 글쎄. 다른 정령왕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 같은 경우는 태어나는 날짜를 더 늦추게 만들 수 있었을걸? 그럼 이곳 대륙에 비가 내리는 일도 늦어졌을 거고, 결국 자연이 회복되는 기간역시 훨씬 늦어졌겠지? ” “ 으응.. ” “ 마찬가지야, 이사나. 네가 황제가 되기 싫다고 버틸수록 이곳 사람들의 생활이 평안해 지는 날도 점점 더 멀어진다는 거지. 어차피 이래나 저래나 피하기 힘든 상황이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임하는 게 좋지 않겠어?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건 대공보다는 네가 황제가 되는 편이 백성들에게 더 이롭다는 거야. 대공보단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더 강하잖아? 안 그래? ” 눈을 찡긋하며 묻는 말에 멍하니 나를 보던 이사나의 볼에 작은 홍조가 떠올랐다. 그리곤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킥킥 웃기 시작하는 것이다. 눈에 눈물까지 맺혀가며 한참을 웃던 녀석은 무언가 한결 후련해진 얼굴이 되어서야 간신히 평소대로 돌아왔다. “ 헤롤 말이 맞았어. ” “ 응? ” “ 엘은 사람을 웃게 만드는 신비한 매력이 있다고 한 말 말이야. 정말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위로해 줘서 고마워, 엘.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어. ” “ 그..그래? 하하하. 도움이 됐다면 나야 좋지. ” 사실 그다지 제대로 된 위로라고 할 것도 없었다만, 이사나가 기운을 얻으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니겠는가. 서로를 마주보며 웃던 우리는 때 마침 거처를 정한 일행이 돌아오는 것을 보곤 얼른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어차피 다음날 아침 모여서 출발할 것이었으므로, 다른 용병단이나 상단과는 다른 거처를 마련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에 비해, 일행은 모두 같은 여관을 숙소로 잡아둔 참이었다. “ 다행히도 이만한 인원을 한꺼번에 수용할 만한 여관이 마을 안에 있더군. 이곳에서 소모되는 경비는 계약내용에 따라 모두 상단 측에서 부담하기로 되어있으니 마음껏 쉬어도 돼. 단, 3층 전부는 상단 측에서 전세를 내 버렸으니 되도록 올라가지 않도록 하고. ” “ 3층이라니? 그럼 우리는 몇 층을 쓰는 건데? ” “ 1층. 3인실 두개에 2인실 하나야. 나와 헤롤 마이티. 세 사람이 한방, 매튜와 엘, 라이가 한방. 나머지 2인실은 이릴과 쉐리가 쓰도록 하지. ” 간결하게 대답하는 휴센의 말에 즉각 반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 소란의 중심엔 못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마이티와 헤롤이 있었다. 이제는 너무 많이 겪어서 당연할 정도로 느껴지는 반응이랄까? “ 말 도 안돼! 왜 내가 이 녀석과 한방이라는 거야? ” “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단장! 너무 한거 아니야? 미소년들만 한 방에 몰아넣는 건 전 국가적인 손실이라고! 그러다 저녁에 누가 덮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한 사람쯤은 지킬 사람이 있어야지! ” “ 네 놈들은 어째 점점 위험한 방향으로 생각이 전개 되는 것 같군. 한 가지 말해두겠는데, 헤롤? 도대체 어떤 녀석이 매튜를 상대로 덮칠 수 있다는 거지? ” “ 그..그거야! .....어라? 생각해 보니 없네. ” 발차기 한방으로 오크를 저 세상으로 보내는 괴력의 매튜에게 겁 없이 덤빌만한 상대가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말문이 막힌 헤롤은 즉각 입을 다물었고, 그것은 마이티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장 골칫거리였던 두 사람이 잠잠해 지자, 휴센은 한결 개운해진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았다. “ 노숙도 지긋지긋 해졌을 테지? 오랜만에 침대에서 자보는 것도 좋을 거야. 오늘만 지나면 다시 노숙행일 테니까, 마음껏 즐겨두라고. ” “ 네, 그럴게요, 휴센. 그런데 다른 용병단들은 몇 층을 쓰는 거예요? ” “ 우리와 같이 1층이야. 여관이 생각보다 넓더군. 아마 단체인원을 전문으로 한 곳인 것 같아. 이미 며칠을 동거 동락해온 사이고, 여관방을 쓰는 게 단 하루뿐이긴 해도 특별히 마주쳐서 좋을 건 없으니 조심하는 게 좋아. 특히 이릴과 쉐리. 너희는 일행 중 유일한 여자들이니까 더 신경을 쓰도록. ” 하지만 그 말에 대답을 하는 건 이릴 밖에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대답도 아니었지만. “ 우리보단 엘을 더 주의시키는 게 좋지 않겠어? 솔직히 실버 급의 패를 지닌 우리를 누가 감히 건드려? 엘은 외모로만 보면 여자로 오해해도 할말 없으니까 정말 조심해야 할 걸? ” “ 이..이릴! ” “ 어머?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아무튼 매튜! 엘 잘 지켜. 그렇지 않아도 보드카 용병단 쪽 몇몇이 엘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정말 심상치 않았다고. ” “ 쿡쿡. 명심할 게요. 오늘은 그럼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가 되어볼까? ” “ 헉? ” ‘ 맙소사! 트로웰~~!! 너 까지? ’ 경악한 표정이 되어서도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만 뻐끔뻐끔거리는 내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일행들은 일제히 웃어젖히기 시작했지만 단장인 휴센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선은 아까부터 샐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쉐리에게 향해있었다. 한참을 그녀만 바라보고 있던 휴센은 쉐리가 끝까지 자신 쪽을 돌아보지 않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 쉐리. 너는 왜 아무 말이 없지? ” “ ...뭐가? ” “ 일행 중 여자는 이릴과 너 둘 뿐이니까 특별히 주의하라고 말 했을 텐데? ” “ 글쎄. 그다지 신경 쓸 필요를 못 느끼겠는 걸? 솔직히 나는 누가 덮치러 와도 상관없거든. 오히려 내 쪽에서 먼저 꼬셔볼까 생각 했는걸? ” “ 쉐리!! ” 좀처럼 진지하지 않은 그녀의 대답에 휴센은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성난 함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쉐리는 전혀 굽힐 기색이 없는지 오히려 눈을 사납게 치켜뜨며 그를 노려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방금 전까지 웃고 있던 일행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일행 중 분위기 메이커를 자청하는 헤롤이 조심스럽게 달래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것을 전혀 받아줄 생각이 없는 쉐리로 인해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 저, 이봐, 쉐리. 단장은 네가 걱정이 되서 그런 거야. 그런데 그런 식으로 대답할 것까지야.. ” “ 흥! 그게 바로 쓸데없는 참견이라는 거야. 단에게 피해만 돌아오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야?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데 무슨 상관?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숨 막힐 정도의 적대감. 이미 대강의 사정을 눈치 채고 있는 상황이라지만 한 배를 탄 일행끼리 서로를 노려보는 모습이 보기 좋아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그것이 애정과 관련된 경우라면 더욱. 으윽. 사람들이 사내(???연애를 반대하고 싫어하는 이유를 드디어 알 것 같아. 난 괜히 질투 나서 그러는 줄 알았더니 이런 부작용이 있었을 줄이야. 닭살 행각으로 노총각, 처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식으로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주변 사람들까지 덩달아 불편해 지는 것 아니겠는가. 한참을 이어지던 두 사람간의 묘한 대립은, 여관으로 출발할 것을 독촉하는 상단 일행들과, 쉐리의 한 마디로 인해 드디어 끝을 맺고 말았다. 서늘한 초록색 눈동자로 휴센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던 그녀는, 약간의 악에 바친 듯한, 억눌린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 뱉고는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섰다. “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휴센. ” “ 쉐리! ” 그리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휴센의 얼굴에 떠오르는 당혹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상 일부러 만든 듯한 차가운 표정과 무뚝뚝한 말투를 고수하던 그가, 쉐리의 한 마디에 동요하여 드디어 그 표정의 일부를 무너뜨린 것이다. 그로서는 그다지 내킬만한 상황은 아니었겠지만, 보는 내 입장에서는 이제야 28이라는 그의 나이답게 보여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솔직히 무뚝뚝한 표정의 그는 본래의 나이보다 2~3살은 더 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쉐리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가 생각보다 더 곤란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확실히 우정에서 사랑으로 변하는 게 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 아아, 정말 짜증나 죽겠네. 어떻게 좀 해봐, 단장!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 나보다 더 이런 상황을 많이 겪었을 이릴이 투덜거리는 말에, 다른 사람들까지 덩달아 불만어린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휴센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생기 없는 멍한 표정에 어떠한 감정도 담아내고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상당히 처연해 보였기에, 차라리 저런 표정을 짓느니 쉐리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결국 보다 못한 내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끌자, 그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 마냥 화들짝 놀라더니 정신을 차린 듯 얼른 일행을 다독여 여관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가서 쉬어야지. 샴페인 용병단 전원 이동이다. ”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에 돌아오는 건 단원의 투덜거리는 목소리뿐이었다. “ ....쉐리는 벌서 이동했는데 무슨 샴페인 용병단 전원이야? 정신 좀 차려, 단장! ” “ 하아. 정말이지. 고지식한 누구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람 ” “ 내버려 둬. 그러다 나중에 후회하면 그때나 실컷 놀려주자고. 자자~ 출발이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음식이나 마음껏 먹어볼 수 있겠군~ ” “ 그러게. 근데 거기 음식이나 제대로 하는 여관이래? 잠이야 아무대서나 잘 수 있지만 맛없는 음식은 못 먹는다고. ” “ 그래? 난 지금 상태라면 먹고 죽지만 않으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 “ ........ ” 순식간에 단원으로부터 소외된 휴센은 쓸쓸한 표정이 되어 말없이 일행의 맨 끝에서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어쩐지 세상 다 산 듯한 허탈한 모습이었달 까?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도 절대로 쉐리의 편에서 돌아설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에 인맥 관리를 잘해둬야 한다는 소리가 나온 모양이다. 어라? 그럼 쉐리는 평소에 일행들에게 잘 보여 둔 타입? 그런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데. 결국 난 호기심을 못 참고 트로웰에게 몰래 물어보고 말았다. “ 저기. 사람들이 왜 다 쉐리 편을 드는 거야? 단장이 그렇게 인기가 없어? ”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쉐리가 여자여서 인 것 같아. ” “ 겨우 그 것 뿐? ” “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까. 인간의 남자들이란 본래 어린 여자들에게 더 상냥한 경향이 있는 모양이야. 미안, 엘. 되도록이면 사람들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이 이상의 설명은 무리인 것 같아. ” “ 음? 마음을 읽지 않을 수도 있어? ” 뜻밖의 사실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지어보이자 트로웰은 당연하단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당장 죽어가는 사람이 나와도 엘이 치료술을 쓰지 않으면 그만이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사람의 마음을 읽지 않으려고 하면 읽지 않을 수 있어. 그렇지 않으면 유희가 상당히 재미없어지니까 말이야. ” “ 으음. 그러고 보니 그렇겠다. ”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속마음이 다 들린다면 여러 가지로 상당히 시시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건 트로웰이 원하는 유희를 즐기는 바가 아니겠지. 순순히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다시 생긋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 불쾌하지 않아? 지금이라도 당장 마음먹으면 자세한 사정을 알아낼 수 있는데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서 말이야. ” “ 그럴 리가. 처음부터 자세한 사정을 알려고 물어본 것도 아니었는걸? 그냥 호기심 때문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트로웰도 내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게 보지는 않을 거잖아? ” 나의 말에 그는 잠시 그 상황을 생각하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단호하리만치 짧은 대답을 내뱉었다. “ 그건 틀려. ” “ 으응? 아..그렇지.. 역시 생명을 소홀히 하는 건 나쁜 건가..? 아하하.. ” “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오히려 엘이 그런 인간을 치료해 준다고 나서는 걸 반대할 테니까 말이야. ” “ ........엥? ” 그건 또 무슨 소리?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내가 멍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트로웰은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심각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 작은 상처를 치료하는 것과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그 힘의 차이가 상당히 달라. 나는 엘이 인간을 위해 그런 큰 힘을 소모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 “ 저..저기 트로웰? ” “ 미안해 엘.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이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어. 엘도 그 점을 분명히 깨달아 주었으면 좋겠어. ” “ 으응.. 그야 그렇지만. ”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버벅 거리는 사이, 어느새 우리 눈앞엔 하루 밤 묶을 숙소로 정해졌다는 여관이 드러났다. <떡갈나무 향기>라는 나무 간판을 단 5층의 대형 목조건물이었는데, 여관의 일꾼으로 보이는 소년들이 얼른 일행의 말을 받아 마구간으로 몰아가자, 사람들의 표정에도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제 곧 시작될 저녁식사가 벌써부터 기대가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행들이 모두 여관 안으로 들어갔음에도 나는 트로웰에게 붙잡혀 옮기던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의 진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명심해, 엘. 이건 어디까지나 유희에 불과해. 꿈에 너무 빠져서 현실로 돌아올 수 없게 되면 곤란해. ” “ 아.. 으응. 주의할게. ” “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다시 인간들 때문에 눈물 같은 거 흘리면, 이 세계의 모든 인간이란 존재를 멸해버릴 거야. ” “ 헉! 트..트로웰??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 세상의 인간들을 멸해버린다고?? 전혀 농담이라고 할 수가 없는, 차가운 표정의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 심정을 알았음인지 단단히 굳어있던 그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긴 했지만, 나는 아직도 놀란 가슴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했던 트로웰에게서 그런 말을 들어 더 충격이 컸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나도, 곧 이어지는 그의 말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미안해. 이전에 잠깐 네 전생을 읽어버리고 말았어. 좋은 친구가 있었다고 해도, 나는 엘의 과거가 그다지 좋은 기억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아. 때문에.. 좀 더 확실한 태도를 바라는 거야. 다시는 인간들에게 상처 같은 거 입지 않도록. ” “ ....... ” “ 너무 쓸데없는 참견이라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 “ 아, 아니야. 그렇지 않아. 염려해 줘서 고마워 트로웰. 하지만 모든 인간들이 다 나쁜 건 아니야. 그러니까.. ” “ 쿡쿡. 알았어. 나도 방금 그 말은 좀 심하다고 생각했어. 그만큼 내가 화가 났다는 뜻이겠지만.. 그렇게 되면 엘이 오히려 더 상처받을 테니까 이번만은 무효로 할게. ” “ 미..미안해 트로웰. 괜히 걱정시켜서.. ” 어색한 표정으로 사과를 건네자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가 놀랍도록 부드러운 빛을 띄었다. 그리곤 마주보는 상태 그대로 손을 올려 내 머리카락을 살짝 흐트려 놓는 것이다. “ ....? ” “ 나중엔 우리끼리 여행 다녀 보자, 엘. 재미있을 거야. ” “ 아, 으응. ” 상냥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내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이거 아무래도 사람을 웃게 만드는 힘은 나보단 트로웰이 더 가지고 있는 것 같은걸? 솔직히 말해 그의 말과 행동에 위안을 얻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그날은 정말 행복한 하루였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벌컥- “ 어이, 아직도 안 들어오고 뭐해? 너희 둘 정말 수상하다? 정말 그렇고 그런 사이 되는 거 아니지? ” “ 크헉! 안 돼! 절대로 안 돼~! 훠이훠이~ 단원들 간의 러브조성 금지!! 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고 싶지 않단 말이야~~ ” 놀리기 위한 것이 분명한, 좀처럼 진지하지 않은 마이티와 헤롤로 인해 순식간에 기분이 찝찝하게 가라앉고 말았다. 문제라면 트로웰은 그런 놀림에도 전혀 위축되거나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생글생글 말짱하다는 것이다. 그런 묘하게 당당한 모습이 두 사람의 가슴속에 피어나는 오해의 불을 더욱 지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점을 알면서도 고치려는 생각 역시 없어보였다. 때문에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한 가지의 결심을 굳히고 말았으니.. ‘ 앞으론 절대 트로웰과 단 둘이서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 그래도 차마 그와 거리를 둘 생각은 못하는 나였다. =============================================================== 음.. 성급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선 좋은소식(일까, 과연..)이기에 공지 올립니다~ 저어..'엘퀴네스의 장'이 출판 제의를 받았어요..(쓰면서도 계속 두근두근..) 아직 출판여부에 대한건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제의를 받았다는게 기뻐서 먼저 알려드려요^^; 다음 주 쯤에 출판사를 찾아가기로 했으니 곧 결판이 날테지요.ㅎㅎ; p.s- 이번 챕터 제목이 수상하다고 하여 결코 엘과 연관을 지으시면 안됩니다.-_-; 이번편은 정말 쥐어짜며 쓴거라 자신이 없네요;(훌쩍) 참! 샴페인용병단의 숫자를 6명으로 수정하겠습니다; 처음 7명으로 설정했는데 쓰다보니 한사람을 빠트렸더군요; 이제와 새삼스럽게 넣을수도 없어서 그냥 빼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는 설령 엘이 트로웰과 사랑에 빠진다 해도 야오x가 될수 없습니다! 왜냐! 엘이 남자가 아니기 때문이죠~! 푸하하! 자기가 아무리 스스로를 남자로 생각하고 있으면 뭘합니까! 정작 성별이 남자가 아닌것을..(그렇다고 여자도 아니지만;) 그래서 저는 마음 놓고 동성feel을 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_-;(물론 생각만입니다;) 공, 수를 모르시는 빛의 자녀분을 위해 잠시의 설명을.. 할까 했지만, 이건 모르시는 대로 좋습니다. 지금 마녀넷에서는 한사람이라도 더 많은 빛의 자녀가 필요합니다-_-; (<-어둠의 자녀를 늘린 장본인;) 아참, 아이콘 또 바뀌었어요^^ 리플을 갈망하는 저 빠릿빠릿한 눈동자가 보이시죠? ㅎㅎ 이번에도 저를 위해 수고해주신 빠롱세이님(셔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엘군의 전생에 관한 번외편이라..그건 정말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이해를 위해 필요할것 같네요^^ 구상해 보겠습니다^^ 조언 감사드립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칵테일 용병단과 토마토 용병단..후후 언젠가 꼭 등장시킬겁니다!)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날 저녁 정말로 쉐리는 보드카 용병단의 한명을 꼬셔내는 것(?)에 성공하고 말았다. 그때가 마침 일행의 모두가 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늦은 시각에 여관 밖을 나서는 남녀가 있어 무심코 돌아보았던 나는 그대로 사레가 걸려 기침을 콜록거렸다. 평소보다 더욱 과감하게 몸매를 드러낸 옷차림을 한 쉐리가, 그녀 몸집의 3배는 되어 보이는 근육질의 남자의 품에 안겨 새초롬한 표정으로 여관을 나서고 있었던 것이다. “ 읍..켁켁.. 으.. 쉐..쉐리?? ”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정말 작업(?)을 건거냐는 등,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정작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거친 기침과 이름을 부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쉐리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는 것엔 성공한 듯 했다. 그녀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샴페인 용병단 전원을 보더니, 비웃는 것 마냥 입 꼬리를 슬며시 치켜 올렸다. 하지만 그런 시선도 막상 휴센에게 이르러서는 집요할 정도로 강하게 변하고 있었다. 마치, 이런 자신의 모습을 봐주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 소개할게. 이쪽은 보드카 용병단의 ‘숀’ 이라고 해. 지금부터 나와 데이트 할 예정이야. ” 아무리 좋게 봐줘도 휴센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는 정말 근육 빼고는 봐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햇빛에 그을린 구릿빛 몸 이곳저곳에 그 출처를 의심해 볼만한 커다란 상처 자국이 잡혀 있었고, 부리부리한 눈매나 매부리코, 얄쌍한 입술이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야비한 인상을 피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드카 용병들에겐 ‘무섭다’란 인상이 강하던 나였기에 절로 반대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막상 그 시퍼런 눈동자가 나에게 딱 멈추어 섰을 때는 숨이 막혀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왜..왜 날 보고 입술을 핥는 거야! “ 호오. 이 용병단에는 미인이 많군. 이거 정말 실버급의 단원들로 구성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운 걸? ” 무척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은 좀처럼 내 쪽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쉐리는 가볍게 대답했다. “ 전부 다는 아니야. 이번에 클모어까지만 동행하는 임시용병도 있거든. 그보다 우리 빨리 나가자. 밤바람 쐬고 싶어. ” “ 아. 그러지. ” 구체적으로 누가 임시용병인지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이미 지난 동행에서 보아왔던 우리의 모습에서 나와 이사나가 임시라는 것을 눈치 챈 듯 했다. 사실 빠릿빠릿 움직이는 다른 단원들에 비해 우리는 대부분 보호받는 느낌이 강했고, 드러나도록 행동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받는 것만으로 불쾌해지는 묘한 시선을 내 쪽으로 던진 그는, 쉐리의 재촉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돌이켰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그녀의 가는 허리를 더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욱. 어째 내가 당하는 것도 아닌데 소름이 돋는 다냐. 그러니 평소 그녀의 추종자를 자청하던 마이티가 폭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 야! 너 이 자식! 쉐리에게서 떨어져!! ” 너무 직접적인 도전이라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거의 고함을 지르듯 내뱉는 말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우리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쉐리를 감싸고 밖으로 나가려던 숀이란 남자 역시 돌아보았다. 우람한 그에 비해 마이티는 헤롤보다도 근육이 적은 날씬한 체구였지만,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들고 있는 패로 사람을 평가하는 버릇이 있다. 때문에 그가 같은 실버급인 마이티를 쉽게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가소롭다는 듯이 입가를 이죽거리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 그게 무슨 소리지? ” “ 쉐리는 내가 몇 년 전부터 찍어뒀다고! 이제 와서 근본도 모를 다른 놈한테 빼앗기게 놔둘까 보냐! ” “ 훗. 그런 건 쉐리 본인한테 물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녀가 택한 사람은 나니까 말이다. ” “ 뭐..뭐가 어쩌고 어째? ” 기가 막힌 마이티는 더 이상 두고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당장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들려고 했다. 그가 평소에 쓰는 무기는 두개의 단검과 활이었지만, 가끔은 장검도 애용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눈물겨운 시도도 막상 쉐리 본인이 나서서 제지하는 데야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그만둬, 마이티.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 “ 하지만 쉐리! ” “ 내 일에 참견하지 마, 제발! 자꾸 이러면 더 이상 나와 샴페인의 단원으로 활동할 수 없을지도 몰라. ” “ ...!!..쉐..쉐리.. ” 딴에는 걱정한답시고 취한 행동이었는데 쉐리는 정말로 가차 없이 냉정하게 굴었다. 그래도 설마 단에서 탈퇴하겠다는 뜻까지 보일 줄은 몰랐는지, 이번만큼은 항상 담담하던 이릴의 안색까지 하얗게 질려있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쉐리의 눈빛에 약간의 죄책감이 스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이것이 그녀의 본심이 아닐 거라 직감했다. 그리고 단원들이 좀처럼 휴센의 편을 들려고 하지 않는 이유역시 깨달았다. 그녀로부터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게 만들면서도, 그것에 대해 일절 대책을 취할 생각이 없는 그가 얄미워서였던 것이다.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한 일행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내려앉자 쉐리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이 얼른 숀을 끌고 여관 밖을 나서고 말았다. 당황한 내가 나도 모르게 쫓아 나가려고 했지만, 이어지는 제지의 손길이 있어 도로 자리에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 내버려 둬, 엘. 지금 쉐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거야. 차라리 멋대로 굴게 놔두는 게 좋아. ” “ 하지만 이릴.. ” “ 그보다 아까 그 숀이란 녀석 눈빛 봤어? 쉐리는 눈치 못 챈 모양이지만, 그 녀석 엘을 뚫어지게 바라봤다고. 옆에 있던 내가 다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니까? 조심해야겠어. 오늘 뿐만이 아니라 클모어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로 보드카 녀석들과는 마주치지 말도록 해.. 알았지? ” 걱정스런 이릴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그 시선에 불쾌한 기분을 받았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어차피 여자로 오해해서 그런 거니까 남자라고 밝히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릴은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바보. 저런 놈들은 외모만 곱상하면 남자, 여자를 안 가린다고. 오히려 남자 쪽만 노리는 변태들도 있단 말이야. ” “ 헉. ” “ 매튜도 그것 때문에 초반에 고생이 많았지. 물론, 그한테 한번씩 나가떨어진 이후론 다시는 건드리지 않지만 말이야. 그렇지, 매튜? 선배로서 엘에게 찐~한 충고를 해주는 건 어때? 예를 들면 그런 상황에서의 대처법이라던가... ” 그러자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내 쪽을 빤히 쳐다보던 트로웰은 갑자기 품 안에서 제법 칼끝이 날카로운 단검 하나를 꺼내었다. 그리곤 그것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화사할 정도로 환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 덮치려고 하면 정확히 심장을 찔러. 어깨나 다른 부위를 찌르면 화가 나서 더 난폭해지거든. 그러니까 처음부터 단번에 생을 마감시켜 주는 게 좋아. ” “ ........... ” 쿨럭. 변태는 사람 취급도 안 해준다는 거냐? 마치 가축을 도살하는 방법을 일러주듯, 너무도 차분하게 하는 말에 나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 까지 덩달아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오죽하면 충고를 부탁했던 이릴까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겠는가. 아무튼 그녀의 부탁대로 아주 찐~한 충고를 날려준 트로웰로 인해, 일행들은 다시 한번 사람의 외모만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듯 했다. ‘ 어쩌면 정령왕 중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트로웰 일지도.. ’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는 생각을 읊조리며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휴센이 지정해준 3인실은 측면에 붙은 이층침대와 바닥에 깔려진 담요하나가 전부인 비교적 단출한 구조였다. 잠만 자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안엔 침대외의 어떠한 가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이전에도 몇 번 여관을 경험한 적이 있고, 노숙도 익숙해질 만큼 오래되었지만, 새삼 여행 다닌 다는 기분을 숨길 수 없어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지금까지 이사나와 나, 트로웰 셋이서만 따로 시간을 갖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인지 마치 수학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들뜬 기분이었다. “ 자, 그럼 엘이랑 이사나가 침대를 쓰고, 내가 담요를 덮고 바닥에서 잘게. ” “ 앗! 아니야. 내가 바닥에서.. ” “ 괜찮아, 괜찮아. 난 원래 땅과 익숙한 성질이라 침대보다 바닥이 더 편하거든. ” 듣고 보니 그랬다. 트로웰은 본래 땅 자체니까 오히려 땅과 가까운 편이 더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치고 보면 그의 입장에서는 여관보다는 노숙이 더 편하다고 느껴질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째 외관상으로나 느낌상, 트로웰 혼자 바닥에서 자는 건 내키지 않아, 나도 덩달아 그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곤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트로웰에게 베시시 미소 지었다. “ 어차피 지금 잘 거 아니지? 모처럼 놀러온 것 같은 기분도 나니까 놀다가 자자. ” “ 훗. 나야 상관없지만.. 뭐하고 놀려고? 그리고 우리와 달리 이사나는 인간이라 육체적인 피로를 풀어줘야 해. 적어도 그 만큼은 자야할걸? ” 그러자 옆에서 뻘줌한 표정으로 서있던 이사나가 얼른 정색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치 자신만 빼고 우리가 놀게 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다분한 모습이었다. “ 아니요, 저도 괜찮습니다. 피곤하지 않아요. ” “ 그래? 그럼 잠깐 대화나 할까? 아니면 이 기회에 자연 친화력을 조금 더 높이는 수련을 해도 되고. ” “ 수련? ” “ 응. 지금 이사나는 나이아스들밖에 소환하지 못하잖아? 수련을 통해서 레벨을 좀더 올릴 수 있어. 엘이 옆에서 도와준다면 빠른 시간 안에 시큐엘의 소환도 가능해 질 거야. ” 헤에. 지난번에 페리스의 친화력이 향상된 것과 관계가 있는 건가? 하지만 그때의 그는 이미 잠재된 소질적인 면에서 충분히 상급 정령의 소환이 가능한 상태였고, 그것을 내가 물의 계열로 이끌었을 뿐 별달리 도움을 준 것이 없었다. 때문에 자체적인 소질이 높은 것도 아닌, 그저 엄청나게 운이 좋아 정령왕을 소환하게 된 이사나의 경우엔 어떤 식의 수련을 쌓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아무 문제없다는 듯한 트로웰의 자신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별로 어려운건 아니야. 엘이 대량의 물의 기운을 이사나에게 퍼부어 주면되는 거니까. 이미 정령왕을 소환한 상태라 하위 정령과 따로 계약할 필요가 없으니, 그 것만으로도 충분히 능력 향상에 도움이 될 거야. ” “ 아, 그래? 그럼 쉽네. 어때, 이사나? 해 볼래? ” “ 응? 어떻게 하는 건데? ” 그래서 나는 이사나에게 눈을 감고 정좌를 하게 한 다음, 내 몸 전체를 이용하여 물의 기운을 이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올린 기운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이사나의 몸으로 퍼부어 주기 시작했다.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일절의 거부감 없이 물의 기운을 흡수하는 이사나의 모습에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 헤.. 이런 식이라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도 정령사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혼잣말에 트로웰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 맞아. 실제로 대륙의 인간들 중, 어지간한 상급 정령사들은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경우가 많아. 단, 아주 조금이라도 정령사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해. 마법사가 마나를 느끼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처럼, 정령사 역시 자연과의 친화력이 없으면 소용이 없거든. ” “ 그렇구나. ” “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꽤 대단한 자질의 땅의 정령사를 만났는데 말이야.. ” “ 에? 언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어?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그때를 회상하듯 즐거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꽤나 유쾌한 만남이었는지 평소와 다르게 눈동자에서 묘한 흥분감 마저 느껴지고 있었다. 덕분에 나까지 절로 긴장되어 바라보자 그는 비밀 보따리를 풀어놓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그때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 엘과 만나기 전이야. 그때가 마침 샴페인 용병단에 가입한 직후였거든. 카터스 제국이라고 하는, 이곳과 상당히 떨어진 나라에서 의뢰수행 중이었는데, 별안간 땅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지는 거야. 그래서 몰래 한밤중에 빠져나가 만나봤어. ” “ 헤에. 어떤 사람이었어? 남자? 여자? ” “ 여자. 그것도 13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였어. 신기했던 건 그렇게 강한 땅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정령과 계약하지 않은 상태였다는 거야. 본인의 능력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더라고. ” “ 흐음. ‘그렇게 강한 땅의 기운’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 ” “ 당장 상급의 정령도 소환가능 할 정도였어. ” 오오. 그건 정말 대단한 걸? 상급정령이 얼마나 소환하기 힘든 것인지는 이미 페리스의 경우를 보아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당장 소환해 놓고도 힘에 부쳐 허덕이던 것을 생생히 목격했으니까 말이다. 그런 대단한 힘을 이제 겨우 13살짜리 소녀가 가지고 있다는 것에 놀란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 그럼 지금은 상급 정령사가 된 거야? ” “ 아니, 타고난 힘은 강하지만, 아직 육체가 완전하지 않은 성장기라 상급정령은 무리였어. 그나마 중급인 멀든도 내가 도와줘서 간신히 계약 했는걸?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지만..그래도 10년 후엔 상급정령사가 될 수 있을 거야. 자기 말로는 반드시 나를 소환하겠다고 장담 하고 있지만 말이야. ” “ 에? 트로웰을? ” “ 응. 뭐랄까? 참 색다른 느낌의 인간이었어. 아직 어린애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다른 인간들에 비해 불쾌한 느낌도 별로 없었고. 그래서 상당히 재밌었던 것 같아. ”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소녀와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이었지만, 느낌이랄까? 아직 숨겨진 이야기가 더 남아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말해주지 않으려는 걸 굳이 캐낼 필요는 없단 생각에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트로웰이 즐거웠다면 그걸로 된 거니까. ‘ 설마 그 여자애가 트로웰한테 결혼이라도 해달라고 매달린 건 아닐까? ’ 엉뚱한 상상으로 피식 웃은 나는 문득 이사나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난감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창 물의 기운을 흡수하고 있어야 할 녀석이 그 상태로 그냥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새근새근 숨을 고르고 있는 녀석을 보니, 다시 깨우기도 민망해서 그냥 침대로 옮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반쯤은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잠깐 투덜거렸다. “ 으이그. 이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피곤하지 않다고 버티지나 말 것이지. ” “ 쿡쿡쿡. 물의 기운이 꽤나 기분이 좋았나 보네. 하긴, 모든 인간은 다 어미의 뱃속에서 양수를 경험하니까 말이야. 태초의 장소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마음을 편하게 가라앉혔는지도 모르지. ” “ 흐음. 그런가? 그런 거라면 할 말 없지. 이 녀석,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을 테니까. 잠깐이라도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면 나야 오히려 환영이야. ” 하루 종일 로브로 몸을 감싸고, 같은 일행에게조차 얼굴을 들켜야 하지 않아야 하는 나날이 피곤하지 않을 리 없었다. 역시 용병단에 가입하지 않는 편이 나았을 지도? 조금은 무책임하게 일을 진행시켰다는 생각에 나는 작은 죄책감을 받았다. 지금 이 녀석이 믿을 존재는 나 밖에 없으니까 내가 의지가 되어줘야 하는데, 예상치 못하게 트로웰을 만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게 되고 만 것이다. 이래서야 산에서 헤어진 알렉들을 다시 볼 면목이 없는 걸? 그러고 보니 그들은 지금쯤 수도에 도착 했으려나? 어쩌면 이미 도착해서 중립을 고수하는 귀족들을 설득시키고 있을지도 몰랐다. 꽤나 목숨을 건 위태로운 일정을 보내는 그들에 비해,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한가하단 느낌이 들었다. 긴장감이 떨어졌달 까? “ 역시 하루라도 빨리 클모어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데 말이지.. ” 그래서 빨리 후작을 이사나의 편으로 만들고, 수도로 진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사나가 언제까지 거리를 전전하게 둘 수도 없는 일이고, 황성의 주인을 오래 비워두는 것도 위험하니까 말이다. 또한, 이미 대공은 이사나가 움직이는 걸 눈치 챘을 테니, 그에 대한 대책이 구체화가 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치는 편이 유리했다. 대강의 사정을 알고 있던 트로웰은 나의 걱정 어린 한숨에 얼른 고개를 저어보였다. “ 아직 클모어까지는 한달하고도 일주일이 더 남았어. 너무 조급해 하면 둘만 더 힘들어질 거야. 이사나의 기사들도 수도에 도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고 말이야. 수도는 다른 곳보다 경비가 더 삼엄하니까, 예정보다 뚫고 들어가는 시간이 더 걸릴지도 몰라.” “ 아, 그럴까? ” “ 응. 그리고 부탁인데, 미리 각오를 단단히 해두는 편이 좋을 거야. 대공과의 싸움은 절대로 수월할 리가 없을 테니까. 엘은 아직 누군가를 해쳐본 적이 없어서 더 힘들지도 몰라. ” “ 으응.. ”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염려했던 부분인지라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몬스터가 눈앞에서 죽는 것만으로 몸이 떨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다. 황성에서의 싸움은 분명 사람끼리의 전투가 될 텐데, 내가 과연 그 상황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있을까? 가끔 영화에서 보면 사람을 죽이고 미치는 사람도 꽤 있었다. 나라고 그렇게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기에 저절로 입술이 깨물어 졌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트로웰이 한결 가라앉은 표정이 되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힘들다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돼. 그럴 땐 물의 정령들에게 맡기고 엘은 그냥 눈을 감고 있어. 사실 엘의 존재 하나로 적의 사기가 한층 사그라들 테니까 직접 표면적에서 나서지 않아도 될 거야. ” “ 으응.. ” “ 그리고 아마도.. 이번 싸움은 엘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 “ .....? ” 그건 또 무슨 뜻?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한 곤란한 얼굴이 되어 미간을 찡그렸다. “ 미안. 역시..같은 정령왕을 상대로는 혜안이 그리 선명하게 통하지 않아. 하지만 뭔가 불온한 움직임이 있어. 그것이 엘과 상당히 깊이 연관이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이 돼. 정령왕이 감당하지 못할 상대라니 이해가 안 되기도 하지만, 확실히 대공은 만만한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아. ” “ 그..그래? ” “ 응. 그리고 또 하나의 선명하도록 강한 기운. 그것이 엘을 향해 지나칠 정도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 그것의 정체는 조만간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현재까진 적의인지 호의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아.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건 이정도가 전부야. 클모어에 도착하게 되면 반드시 엘뤼엔을 찾아가도록 해, 엘. 그는 틀림없이 네게 도움이 될 거야. ” 트로웰의 혜안이란 능력이 종종 상대방의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것이라고 들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기는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따뜻한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보던 나는 염려 말라는 뜻으로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알았어, 트로웰. 너무 걱정하지 마. 나 이래봬도 꽤 운이 좋은 편이니까 말이야. 의외로 문제가 쉽게 해결될지도 몰라. ” “ 나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 ” 아직 완전히 안심한 기색은 아니었지만, 내가 씩씩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위로가 되었는지 트로웰은 피식 미소 지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자 좀 더 재미난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려고 했던 나는 문득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옆에 있던 트로웰 역시 마찬가지였다. “ 이것 놔, 왜 들 이래? 자꾸 이러면 소리 지를 거야!! ” “ 후후. 소용없어. 우리 중엔 마법사가 있거든. 이미 사일런스(Silence : 침묵) 마법이 발동되어 있을 걸? 소리 질러도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들리지 않는 단 말씀. 못 믿겠으면 한번 질러 보든지?. ” “ 무.. 무슨? ” 아직 소녀의 느낌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소프라노의 목소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두 세 개의 낮은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일런스 마법이라는 게 정령에게는 통하지 않는 모양인지, 너무도 선명하게 전달되는 대화에 나는 그대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쭙잖은 영웅심리 따위가 아니라, 그 목소리중의 하나가 너무도 내 귀에 낯익었기 때문이다. “ 설마 쉐리? ” “ 응.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밖에서 시비라도 붙은 건가? 위치가 생각보다 떨어져 있어. 빨리 가봐야겠는 걸? ”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트로웰이 얼른 대답하며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여자 한명을 둘러싼 건달들의 행패는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도 아니지만, 그것이 쉐리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엇보다 그녀는 가냘픈 외모에 비해 실버급의 패를 지닌 실력 있는 용병이었으니까 말이다. 한 두 사람의 장정쯤은 가볍게 제압할 실력을 가진 그녀가 저렇듯 당혹해 한다는 건 상대방의 실력역시 만만치 않음을 의미했다. 어쩌면 이번 상단의 호위로 동행한 사람들 중 다른 용병단의 실버급 용병들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마법사도 있지 않은가. 자칫하면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때문에 나와 트로웰의 발걸음은 자연히 서둘러 질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모두 잠든 시각이라 박차고 나간 여관복도에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깨울까 고민했지만,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단 생각에 트로웰과 단 둘이서 가보기로 결정지었다. 어차피 두 명의 정령왕만큼 큰 전력은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막상 여관 밖을 벗어났을 땐 주변엔 어두컴컴한 숲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정령왕이 되고 난 이후 상당히 시력이 좋아진 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라면, 쉐리는 이 근처에 없다고 보는 것이 옳았다. 당장 눈앞에서 곤란한 상황인 쉐리를 만나기를 기대한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선 티끌만치의 모습도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기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야하지? ” ================================================================ 후후..제목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판단(!) 급히 바꾸었습니다; 나중에 또 바뀔지도 모릅니다;;; 역시..마녀넷에는 빛의 자녀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았다는.. 훗.. 아아, 알고 있습니다. 사피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제가 이런 한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쿨럭; 트로웰과 엘이라.. 물론 트로웰은 제가 가장 예뻐라 하는 캐릭이긴 하지만.. 사실 엘의 짝은 초반부터 정해져 있었기에..(먼산) 어..어떻게든 되겠지요..(무책임;) 참! 이번 편에서 등장한 트로웰의 과거(?)= '땅의 정령사의 자질을 가진 소녀'와의 만남은 후에 외전으로 등장합니다. 언제 나올지는 몰라요; 아마 소설의 시간 상 꽤 늦게 나오게 될 듯; 출판 제의를 받은것 뿐인데도, 열렬한 성원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열심히 하겠습니다>ㅁ< p.s- 시험 보시는 마녀홈 식구들 모두 좋은 점수 받으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 잠깐만. 지금 땅의 기억을 읽고 있어. 아마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금방 찾아갈 수 있을 거야. ” “ 땅의 기억이라니..그런 것도 가능해? ” “ 응. 엘도 할 수 있어.. 공기에 포함된 수분의 기억을 읽어봐. 기척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지금껏 트로웰이 가르쳐 준 대로 해서 틀린 적이 있었던가. 나는 잠자코 눈을 감고 공기 중에 퍼진 물의 기운을 찾았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이어지는 나이아스들의 수다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 어머, 저기 여자애가 남자들한테 둘러싸여 있어. - 응큼해. 인간의 남자들이란, 어째서 저러는 거람? - 호호호. 그래서 인간들이 다른 종족에 비해 빨리 번식하는 거잖아? - 쿡쿡쿡쿡. 맞아, 맞아. 아, 이 녀석들. 설마 쉐리가 있는 방향을 알고 있는 걸까? 절대 순순히 납득하고픈 대화는 아니었지만, 현재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기에 나는 무시하기로 했다. <그녀가 있는 방향이 어디지? > 무심코 중얼거리자 나이아스들이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 엘퀴네스님이다! - 물의 정령왕이셔! - 그 아이가 있는 곳은 저 어두운 숲의 안쪽. -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있어요. - 남자들은 덩치가 아주 커요. 3명이나 되요. - 한 사람은 마법사. 로브를 입고 있어요. < 아아, 그래. 고마워. > 필요한 정보를 얻고 나자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이것을 위해 들려온 목소리인 듯.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뜨는 나에게, 기다리고 있던 트로웰이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지금 것이 수분의 ‘기억’. 공기 중에 퍼져있는 하급정령들에게 그들이 본 것을 묻는 거야. 정령왕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하면 다시 입을 닫아버리지. ” “ 헤에.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 거야? ” “ 하급정령들은 겁이 많거든. 정령계의 에바스에덴에서 놀 때를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숨어서 지내. 뭐, 나이아스들의 경우엔 엘보다는 내가 옆에 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은 것 같지만 말이야. ” “ 으음. 그렇구나.. ” 하긴 이전에 이사나에게 물을 주려고 했을 때, 나이아스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들이 하겠다고 난리친 것을 보면, 그다지 나에게는 겁을 먹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역시 내가 너무 무르게 대하고 있는 건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란 생각에 그냥 체념하고 말았다. 엄하게 대하는 바람에 정말로 겁을 먹게 되어 나를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다면, 그건 그것대로 불쾌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그나저나.. 쉐리가 숲 안쪽에 있다고 하던데. 커다란 나무 한그루에, 덩치 큰 남자가 3명이있다고 했어. ” “ 응. 나도 같아. 저 숲에 눈에 뜨일 정도로 커다란 나무는 그것 한그루밖에 없는 모양이니까 찾기는 쉬울 거야. ” 그렇게 대답한 트로웰은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하며 망설임 없이 어두운 숲 안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숲 안쪽으로 향하는 산책길이 있어, 풀과 나무들을 일일이 헤치고 나갈 염려는 없었다. 허리밖에 오지 않는 고만고만한 나무들을 지나 몇 걸음 걷지 않아서 드디어 눈앞에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나무가 드러나자, 트로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은 채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낮게 쉿-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나무 저편에서 이전보다 더욱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싫어! 건드리지 마!! 다가오지 마아!! ” “ 이거~ 왜 이래? 다 같이 즐기자는 건데. 그렇게 대담하게 남자를 꼬시고 다니는 주제에 설마 처녀라고 둘러대려는 건 아니지? 큭큭 ” “ 포박 마법으로 꼼짝도 못하니, 도망 칠 수도 없을 걸? 원망하고 싶으면 동료를 따돌리고 혼자서 멋대로 구는 네 탓을 하라고. 흐흐흐 ” “ 아아, 이거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즐겨보겠군. 걱정 마 아가씨, 지금 여기서 얌전히만 굴어준다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이야기 하지 않을 테니까. ” 욱..그야말로 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대화가 아닌가. 저런 놈들이랑 같은 남자라는 것이 다 수치스러울 정도였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런 끔찍한 상황을 겪게 될 줄이야. 그 순간, 화가 나서 주먹을 부들거리는 내게 트로웰의 차분한 제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진정해, 엘. 섣불리 움직였다간 쉐리가 더 위험해 질수도 있어. - 하..하지만.. - 나한테 계획이 있어. 저기..근데 엘한테는 조금 미안한 부탁일지도 몰라. - 응? 뭔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돌아보자, 트로웰의 눈빛에 약간의 난처함이 떠올랐다. 정말로 망설여지는 부탁인지 한참을 뜸을 들이던 그는, 내가 재촉하는 시선을 보내고서야 간신히 마지못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엘이 미끼가 되어줄 수 있을까? - 엥? 미끼? - 아니, 저 사람들.. 아무래도 이번 상단 호위에 동참한 용병단들 같아서 말이야. 내가 거의 골드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아니까.. 아마 내가 먼저 나타나면 경계가 더욱 심해져서 쉐리를 인질로 잡을지도 몰라. 그래서.. - 아~ 내가 먼저 나가서 저 사람들 정신을 흐트려 놓으라는 거지? 뭐야,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네. 그게 뭐가 어려워서 뜸을 들였어? 아무래도 트로웰은 내가 겨우 미끼의 역할밖에 못한다는 것에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정령왕의 자존심이란 게 워낙 하늘 같이 높다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당황해 하는 그의 모습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뭐, 나의 경우엔 전대 엘퀴네스, 그러니까 엘뤼엔의 성격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그 후손이라는 점을 반영하게 된 걸 테지만. 확실히 여기 있는 이가 엘뤼엔이나 이프리트였다면 당장에 성질부터 내고 남았을 것이다. 그 녀석들은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약해 보인다’라는 인식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으니 말이다. - 하지만..정말 괜찮겠어? 기분 나쁘지 않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트로웰에게 나는 문제없다는 듯이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 괜찮아, 괜찮아. 아무튼 나는 혼자인척 등장해서 저 사람들 시선을 끌 테니까, 트로웰은 쉐리의 구출에만 신경 쓰도록 해. 어차피 나 칼에 찔려도 안 죽잖아? - 으응. 미안해, 엘. 부탁할게. 차라리 쉐리가 실버급의 용병이 아니고, 저 사람들 또한 그저 평범한 건달에 불과했다면, 이런 번거로운 작업 없이 트로웰 혼자서도 무난히 처지가 가능 했을 것이다. 그들이 쉐리를 인질로 잡기도 전에 재빠르게 바닥에 눕힐 수 있을 실력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유희에서 설정한 ‘매튜’의 능력으로는, 세 사람의 실버급 용병에(그 것도 한사람은 마법사다) ‘인질’까지 잡힌 상태의 전투는 아무래도 힘들었다. 쉐리가 보고 있지 않다면 모를까, 가능하면 본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트로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던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까지 철저히 유희를 즐길 배짱을 지닐 수 있겠지. 속으로 미소 지은 나는 트로웰에게 한쪽 눈을 찡긋 해보인 뒤, 혼자서 산책을 나온 마냥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 가까이 다가가기 시작했다. 사일런스 마법인지 뭔지가 걸려있다고 했으니, 지천에 다가서서도 그들의 대화를 못 듣는 척 해야 옳았다. 내 연기력으로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쉐리를 괴롭히고 있던(?) 녀석들은 나의 등장을 크게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별안간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흠칫-하고 놀라며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가, 그것이 산책 나온 나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곧바로 비소를 흘리며 작은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척 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 후후. 오늘은 정말 운이 좋은걸? 설마 다음 타켓으로 노렸던 녀석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 ” “ 아아. 샴페인 용병단의 신입이지? 정말 보면 볼수록 미인이군. 흐흐. ” “ 마..말도 안돼! 당신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엘은 건드리지 마! 내버려 두라고!! 저애를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 “ 쿡쿡쿡.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생각이지? 어이, 가서 저 녀석 끌고 와. 반항하면 가볍게 손봐줘도 상관없어. 단, 얼굴은 때리지 마. ” “ 킥킥. 알았어. ” 우욱. 이렇게 소름끼치는 대화를 못 듣는 척 하려니 더욱 곤욕이었다. 별을 보는 척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대충 타이밍이 잡힌다는 생각에 무심코 둘러보는 척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붙잡혀 있는 쉐리와 근처의 남자들을 보곤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어...? 쉐리? ” “ 바보야! 도망가!!! ” 하지만 아무리 비명을 질러봤자, 사일런스 마법의 영향권에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내게 닿을 리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혼신의 연기력을 불살라 못 알아듣는 척 미간을 찌푸리는 수밖에 없었다. “ 무슨..? 대체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시각에? ” “ 도망가! 도망가라고!! 제발!! ” 그러자 그 순간 갑자기 내 앞에 시커먼 형체가 나타났다. 어찌나 빨랐는지, 그들 중 누군가가 나를 잡으러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그대로 놀라서 뒤로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미처 반항이란 걸 시도도 해보기 전에 복부에 느껴지는 충격을 느끼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퍼억! “ ..크윽! ” 사실.. 그다지 아프진 않았지만 이렇게 해야 덜 맞는 다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고 있었달 까. 살짝 맞고서도 굉장히 아픈 척하는 건 내 특기중의 특기였다. 가끔 힘으로 남을 누르기를 즐거워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식으로 엄살을 부리는 편이 좋다. 괜히 버텼다간 정말로 심각하게 아파질 때까지 얻어터지니까 말이다. 아무튼 내가 별다른 저항 없이 한방 맞은 것으로 비실거리며 쓰러지자,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 쿡쿡. 역시 짐작했던 대로 별다른 능력은 없는 녀석이군. 잘됐어. 오히려 이쪽보다 더 구미가 끌리는 걸? 어이, 데리고 와! ” “ ok. 자아- 일어나. 얌전하게 굴면 심하게 대하지 않을 거다. ” “ 무..쿨럭..무슨.. 윽.. ” 음..내가 생각해도 좀 가증스러운가? 실은 전혀 아프지 않은 주제에 이렇게 비실거리는 척이라니. 하지만 날 일으키려고 부축하던 녀석이 목덜미에 이상한 숨을 불어 넣었을 때는 정말 소름이 돋아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긴장시키고 말았다. 그것을 겁먹은 것으로 오해했는지 유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어이, 이 녀석 남자 맞아? 피부가 굉장히 매끌매끌해. 사실은 여자인데 남장을 하고 있다던가, 그런 거 아니야? ” “ 킥킥킥. 그럴지도? 사실 그 얼굴이 남자라는 것 자체가 믿음이 안 가는 걸? 한번 확인해 볼까? ” “ 좋지~ ” ‘ 이..이 썩을 것들이! ’ 누군 좋아서 이런 얼굴로 태어났는지 알아? 이래봬도 강지훈일 시절에는 남자답다는 소리 많이 들었단 말이다! 기가 막힌 나는 아픈 척 하는 것도 잊고 화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가, 막상 마주친 얼굴이 낯익었던 바람에 그대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쉐리를 포박하고 있는 마법사 옆에서 능글맞은 표정으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저녁식사가 끝난 직후 쉐리와 데이트 하러 나갔던 보드카 용병단의 남자- 숀이었던 것이다. “ 다..당신은..아까 전에 쉐리와.. ” “ 호오~ 기억하네? 이런 미인이 기억해 주니 영광인 걸? ” “ 그 애한테 손대지마!! 이 짐승 같은 놈아!! ” 허걱.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상황이라지? 둘이 애인인거 아니었어? 설마 쉐리가 다른 남자를 맘에 품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을 만났다고 이런 식으로 복수했던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저 인간은 정말 치졸하고 쓰레기 같은 놈이다. 정말 생긴 데로 놀고 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비열함의 극치를 달리는 녀석인 것이다. 아무튼 처음 의도대로 남자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만 집중되자 나는 속으로 아싸~를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쉐리를 향해 미소 지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에 의해 꼼작도 하지 않는 몸을 원망하며 어떻게든 움직이기 위해 악을 쓰다가, 우연히 미소 짓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곤 그대로 숨을 들이켰다. 이상 하리 만치 여유 있는 내 모습에서 다른 아군이 근처에 있음을 눈치 챈 것이다. 그걸 깨달은 순간, 그녀의 옆에 있던 마법사가 갑자기 뒤로 나동그라졌다. 퍼억- “ 으악- ” “ 뭐..뭐야! 우악!!” “ 꾸에엑-- ” 전광속화 같은 속도로 나타난 트로웰은 미처 다른 사람들이 경계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전에 가볍게 세 사람을 바닥으로 눕혔다. 얼마나 빨랐는지, 그때 마침 나를 부축하고 있던 녀석이 날 인질로 이용하려고 마음먹기도 전에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이거.. 처음부터 나라는 미끼가 필요도 없었던 거 아니야? ’ 이렇게 빠른 속도라면 내가 시선을 끌지 않아도 충분히 트로웰 혼자서 처리가 가능했을 것이었다. 어쩐지 바보가 된 것 같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순식간에 남자들을 처리한 트로웰이 얼른 다가와 내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 괜찮아, 엘? ” 평소와는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과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나도 모르게 움찔할 만큼 묘한 박력을 품고 있었다. 그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당황한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다가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가 시퍼런 빛을 띄고 있는 것을 보곤 멍하게 입을 벌렸다. ‘ ....어째 상당히 화가 난 것 같은데..서..설마 아니겠지? ’ 모든 상황이 깔끔하게 해결된 상태에서 그가 화를 낼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그것이 ‘괜찮냐’고 묻는 이유를 궁금해 하는 거라 생각했는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아까 전에 저 녀석한테 맞고 쓰러졌잖아. 움직일 수는 있는 거야? ” “ 아.. 머..멀쩡해. 그냥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려고 아픈 척 한 것뿐인데.. ” “ 그렇지 않아. 미안해, 엘. 내가 괜한 부탁을 했어. 이런 식으로 과격한 대접을 받을 줄 알았다면 절대로 미끼 같은 거 요청하지 않았을 거야. 저 자식들. 전부 죽여 버리겠어. ” “ 헉..트.. 매..매튜??? ”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쉐리가 곤란한 상태에 빠졌음을 알고도 여유 있었던 트로웰이 내가 맞는 모습을 보고서 정말로 화가나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일사천리 하게 남자들을 처리했단 생각에 나는 그대로 아연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뭐? 주..죽여 버린다고? 자상함의 대명사인 트로웰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런 말을?? 맙소사! 트로웰!! 너 까지 엘뤼엔을 닮아 가면 어쩌자는 거야! 저 뒤쪽에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쉐리가 안보이냐! 나는 화가 난 트로웰이 쓰러진 녀석들에게 더한 폭력을 휘두르기 전에 얼른 현재의 상황을 자각시키기 위해서 소리쳤다. “ 매튜! 쉐리가 마법에 걸려서 꼼짝도 못하는 것 같아. 저것..해지시키는 방법 있는 거야? ”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당장이라도 이성을 잃고 달려들 것 같던 트로웰의 움직임이 움찔하며 멈추었다. 그리곤 포박된 쉐리와 쓰러진 남자들을 한번씩 돌아가며 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이전보다 한결 진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포박마법 정도는 나도 풀 수 있어. 하지만 쉐리는 내가 마법을 쓴다는 것을 모를 테니까.. 할 수 없지. 저 녀석한테 해지하라고 할 수밖에. ” 나한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트로웰은 이윽고 천천히 다가가 쓰러져서 콜록거리고 있는 마법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언제 꺼냈는지 모를 단검을 그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 대며 생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 쉐리에게 건 마법 풀어. 지금-당장. ” “ 히익! 아. 알았으니 진정해! 제발 목숨만은 살려줘. 부탁이야.” 그로부터 잠시 후, 완전히 몸이 자유로워진 쉐리는 울고 소리 지르느라 다 써버린 체력 때문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고, 나는 그것을 핑계 삼아 트로웰을 여관으로 데리고 돌아갈 건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괘씸한 녀석들의 응징보다는 아픈 사람의 간호가 더 시급하다는 말로 설득 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 말에는 순순히 동조하면서도 이들을 이대로 그냥 두고 갈수 없다는 강경한 뜻을 내비쳤다. “ 엘을 때린 인간들이야. 가벼운 기절로는 화풀이가 안돼. ” “ 윽.. 나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사실 그다지 아프지도 않았고.. ” “ 아픈 게 문제가 아니야, 엘. 지금의 폭력으로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을 거 아니야? ” “ ....에? ”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그러면서도 무언가 짐작될 것 같은 말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엉키는 기분이었다. 사실 그랬다. 큰 폭력이건 스치는 작은 타격이건, 몸의 고통은 어김없이 전생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그다지 아프지 않을 경우에는 ‘아버지한테 맞을 때보단 안 아프네 뭐. ’ 큰 타격엔 ‘아버지보다 심하네, 이 자식’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그때마다의 대처법을 떠올리면서도 ‘역시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게 나아’, ‘아니다, 이 방법은 아버지 때는 통해도 여기선 안 통하는 구나’ 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설마.. 트로웰은 내가 이런 식으로 그때의 생각을 하게 되는 것 자체를 싫어하고 있는 걸까? 그러자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트로웰의 즉각적인 긍정이 이어졌다. “ 맞아. 난 엘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예전 기억을 떠올리고 그것에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 “ 아..저기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나 이제와 별로 새삼스럽게 아프다거나 하지는.. ” “ 물론 엘로서는 필사적으로 ‘괜찮다’고 세뇌를 걸어왔을 테니까 그렇게 느꼈을지도 몰라.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라고 말이야. 하지만.. 잠재의식이라는 거 알아, 엘? ” “ 잠재의식? ” 에..그 뭐냐. 의식이 접근할 수 없는 정신의 영역. 또는 우리들에게 자각되지 않은 채 활동하고 있는 정신세계인가 뭔가 하는 사전적 의미의.. 아니, 그러니까 아무튼! 내가 확실히 자각하고 있지 않은 마음 속 깊은 곳을 말하는 건가? 하하.. 설마 그 잠재의식으로는 내가 아직도 아파하고 있다던가, 그런 것? ‘에이 설마.. ’ ....일 리가 없나.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인식하지 않은 마음속 깊은 곳에선 아직도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하지만 나 정말 괜찮아, 트로웰. 지금까지도 괜찮았고,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게다가 지금은 이렇게 멋진 친구가 바로 내 앞에 있으니까 말이야. ” “ 엘.. ” “ 그러니까.. 트로웰도 되도록이면 아무렇지 않게 봐주었으면 좋겠어. 으음. 사실 화내는 트로웰의 모습은 적응이 안 되기도 하고. 아, 만난지 얼마 안 된 내가 이런 말 하면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 “ 쿡쿡.. 이상하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알았어. 알고 있어, 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군 것 같아. 뭐랄까, 엘은 보호본능을 자극해서 말이야. 그래서 자꾸 챙기려고만 했어. 불쾌했다면 미안..” “ 에? 아니, 사과할 필요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어, 트로웰. 오히려 기쁜 걸? 마음 써 줘서 정말 고마워. ” 나의 순수한 감사인사에 트로웰 역시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여러 가지로 찝찝했던 사건은 따뜻한 우정으로 승화되어 가볍게 마무리 지어졌다..라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성급한 결론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 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별안간 가느다란 여성의 목소리가 나와 트로웰의 사이로 선명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 ......트로웰이라니? ” “ 아, 그건..헉!! 쉐..쉐리! 깨..깨어있었어요?? ”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곳엔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건지 추욱 늘어진 몸을 추스르려 노력하는 쉐리의 모습이 보였다. “ 음.. 아..방금..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근데 방금 매튜더러 트로웰이라고? ” “ 헉.. ” 으아아. 낭패다. 이 일을 어쩌지? 해꼬지를 했던 남자들과 쉐리가 기절해 있기에, 마음 놓고 본명으로 부른 것이 실수였던 것이다. 설마 이런 상황이 발생할 줄이야. ===================================================================== 일주일의 시작입니다! 좋은 하루 보냅시다아~! 아참~ 다른 작가분들께 책 한권 분량을 물어봤는데요~ 130P라고 하더군요. 한달에 한권을 목표로 하면, 하루에 5장씩 써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훗.. 생각만으로 눈 앞이 아찔해지더라는;; 자아~ 엘퀴네스는 소수의 빛의 자녀의 의견도 존중하고 있습니다; 걱정마세요...(쿨럭) 갈수록 내용이 재미가 없어지는 것 같아 우울한..;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당황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얼른 트로웰를 바라보았다가 그가 괜찮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을 보고서야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진정하자 강지훈. 아니, 엘퀴네스. 아직 쉐리는 우리가 정령왕이라고 의심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그냥 트로웰이란 이름이 들리기에 궁금해 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아직도 흐린 눈동자를 보니, 이제 막 기절에서 깨어난 상태라 제대로 된 사고판단 역시 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어떻게든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 대충 납득시키는 것이 중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핑계의 역할을 맡은 것은 예상 외로 트로웰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변명거리를 만들려고 머리를 쥐어뜯는 사이에 그가 쉐리의 가까이에 다가가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꿋꿋하게 수상한 점을 캐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 몸은 괜찮아요, 쉐리? ” “ 으응.. 근데 방금 엘이 너에게 트로웰이라고.. 그거 정령왕의 이름 아니야? ” “ 아아~ 네, 맞아요, 땅의 정령왕 이름이죠. 왜요? 안 어울려요? ” “ 아니, 어울리긴 하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라.. ” ‘헉? 트로웰? 대체 무슨 소릴? ’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의 여지를 더 심어주는 말을 하면 어쩌자는 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일단 트로웰이 하는 일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싶어 참견하지는 않았다. 그로서도 당장 유희를 그만 둘 생각은 없는 이상 나름대로의 대처법이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미심쩍어 하면서도 쉐리가 순순히 대답하자 청산유수와 같은 매끄러운 트로웰의 설명이 이어졌다. “ 사실은요, 엘의 본명이 ‘엘퀴네스’거든요. 알죠? 물의 정령왕 이름. 엘이 그것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있어서, 그럼 나도 정령왕 이름 갖지 뭐, 하고 붙인 거예요. 이왕이면 물의 정령과 궁합이 잘 맞는 땅의 정령으로요. 우리끼리 통하는 애칭이라고 할까? ” “ 에에..그런 거야? 엘의 본명이 엘퀴네스였어? 세상에. 부모님이 굉장히 특이하시다. 어떻게 자식한테 정령왕의 이름을? ” “ 엘의 부모님이 한때 정령사가 꿈이었거든요. 나중에 자식을 낳았는데 머리카락이 파라니까, 물의 정령왕의 이름을 붙인 거지요. " “ 아~ 그렇게 깊은 뜻이? ” 전혀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철썩 같이 믿는 쉐리의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안도의 한숨의 쉬어지는 나였다. 정말 한순간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랄까?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하지 않는 것이 이렇게 살 떨리는 일인 줄 몰랐다. 나..아무래도 현재 이사나의 처지를 너무 낙관하고 있었는지도. 속으로 잠시 반성하고 있는 사이 트로웰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 부탁인데.. 사람들한텐 말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헤롤과 마이티는 놀리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엘은 이름 때문에 어릴 때부터 놀림이 심해서.. ” “ 응, 그 정도쯤이야 뭐..아니, 그보다 매튜! 아까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 ” 다행스럽게도 화제의 전환은 쉐리 본인에 의해 쉽게 이루어 질 조짐을 보였다. 트로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뒤쪽에 쓰러져 있는 세 명의 남자를 가리켜 보였다. “ 사람들이라면.. 저 녀석들? ” “ 아, 맞아! 어..어떻게 된 거야? 주..죽었어? ” “ 설마. 가볍게 기절한 것 뿐 이예요. 기억 안나요? 엘이 이쪽의 시선을 끄는 사이에 내가 와서 쓰러트렸잖아요. ” 그러자 쉐리는 아주 오래전의 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렸다. 그리곤 간신히 기억났다는 듯 멍한 표정이 되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아..맞아. 그랬던 것 같아. 나 정말 너무 무서워서.. ” “ 그러게 왜 함부로 아무 사람한테나 접근하고 그래요? 때마침 우리가 근처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잖아요. 아무리 화가 나도 스스로의 몸은 소중히 생각해야죠. ” “ 으윽..미안... 나...그냥... ” “ 그냥이 아니 예요. 나이가 어려도 쉐리는 한사람의 어엿한 숙녀니까, 조금 더 조심해서 상대를 고르지 않으면 안 된다 구요. 좋아하는 사람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건 좋지 않은 행동 이예요. ” “ ........미안. ” 설교조의 트로웰은 평소의 모습보다 훨씬 더 어른스럽다. 그렇지 않아도 차분한 이미지의 그가 엄격하게 건네는 말은, 비록 화내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듣고 있는 사람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것이기에, 쉐리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상태로 그냥 두면 아주 울어버릴 것 같아 나는 얼른 웃으며 농담하듯 말을 걸었다. “ 휴센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 “ 에..엣? 앗..그..그건.. ” “ 물론 잘생기고 책임감이 강하긴 하지만. 말수 없고, 무표정하고, 남자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아닌가? ” “ 트..틀려! 그는 상냥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정말 멋있는 남자라고!! ” 아, 이런 흥분했다. 여자애들 흥분하면 무서운데..찔끔한 나는 얼른 ‘그렇다’고 수긍하려 했지만 일단 말이 터진 쉐리의 입에서는 내가 끼어들 타이밍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이어지는 모든 말들은 전부 휴센단장에 대한 칭찬의 말이었다. “ 나는 그처럼 검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을 이제껏 한사람도 보지 못했어. 말수는 조금 없어도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헤롤이나 마이티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무표정한건 오랜 용병 일을 하다보니 생긴 버릇이야. 그래도 가끔가다 웃을 때면 얼마나 멋있는데? 아이들한테도 자상해서 가끔 길드에 갈일이 생기면 근처 신전의 아이들에게 꼭 사탕이며 과장 따위를 사다준단 말이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나 따위를 소질 있다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줘서 이렇게 까지 이끌어 준 것도 그 사람뿐이었어. 그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데! ” “ 에..그..그런가요.. ” “ 그래! 그래서 정말 좋아했는데. 아니 지금도 좋아하고 있는데. 바보 같은 휴센은 돌아봐주지도 않아.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흐윽..” “ 헉.. 저..저기. 쉐..쉐리?? ” 분위기를 바꿔보려다 순식간에 멀쩡한 여자 하나 울려버린 꼴이 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당황한 내가 어떻게든 달래보려고 하는 순간, 트로웰이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 그만. 울지 마요, 쉐리. 여기서 당신이 울면 엘이 곤란해지잖아요? 그보다는 지금 저 녀석들의 처리가 더 시급하다고요. 분명 보드카 용병단들이지요? ” “ 훌쩍. 흐윽. 미안. 으응 보드카 용병단의 사람들이 맞아. 설마 마법사까지 있을 줄은 몰랐어. 흑.. ” “ 이번 일은 자칫하면 단끼리의 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이 있어요.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같은 상단의 호위를 맡은 동행 간에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확실하게 잘못을 추궁해서, 그쪽의 단장에게 사과를 받아내야겠군요. 그렇게 하려면 우선 휴센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해요. 괜찮죠? ” 그러자 조금 망설이는 기색이던 쉐리는 천천히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당한 험한 일을 알리는 것은 괴로워도, 역시 같은 범주로 여자로서 당할 뻔한 수치심을 그대로 넘길 생각 또한 없었던 것이다. 그 단호한 결단에 트로웰은 만족했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어디선가 밧줄을 가져와 아직도 기절해 있는 세 사람의 몸을 꽁꽁 묶어 두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서도 마법사는 조금 더 꼼꼼하게 손목과 발목을 결박한 뒤 입에는 제갈까지 물려두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냐고 묻자 간단한 답변이 돌아왔다. “ 마법은 입으로 내뱉는 언어와, 손이 움직이는 배열에 따라 시전 되거든. 때문에 마법사를 생포하는 경우엔 조금 더 특별히 신경 써 두는 게 좋아. ” “ 그렇구나. 이 마법사 강한 거야? ” “ 포박마법과 사일런스마법은 4서클이니까, 그다지 나쁜 실력은 아니야. 사실 정말 강한 마법사는 이 정도의 대책 가지고는 어림도 없어. 마나를 봉인하는 물건이 따로 필요할 정도랄까? 그것도 드래곤에 이르면 무용지물이지만. ” “ 헤에..드래곤이라.. 그들도 마법을 해? ” 내 질문에 트로웰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쉐리는 그것도 몰랐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서야 차라리 정령어로 물을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왕에 벌어진 일, 그냥 모르는 척 새침 떼기로 결정지었다. 그러자 언제나처럼 트로웰의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 드래곤은 마법생물이라고 해. 태어나면서 죽기까지의 모든 과정에 마법이 빠지면 이상할 정도지. 인간에게는 꿈의 영역이라 알려진 9서클을 성인식전에 미리 다 마스터 해버릴 정도니까. ” “ 으음. 9서클이라 해도.. 실제로 보질 않으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을 못하겠는걸.. ” “ 뭐랄까. 대단위 공격범위를 지정하는 마법인 경우가 많아. 하늘에서 운석을 떨어트리거나,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기도 하지. 하지만 대부분의 실용적인 마법은 다 낮은 서클에 있으니 그다지 쓸 일은 없어. ” “ 헤에. 그렇구나. ” “ 대체 엘은 어떤 환경에서 자란거야? 그 정도는 이 대륙에 사는 사람한테는 상식 아니던가? ”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쉐리의 말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저 배실거리고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말 못할 사정이 있다고 짐작했는지 쉐리는 별 다른 참견 없이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캐묻는 것은 용병의 철칙에서 위배된다. 솔직히 용병의 일이라는 게 몬스터의 퇴치나, 암살위험으로부터의 보호, 전쟁의 참여 등 목숨을 거는 의뢰수행이 대부분이 아닌가. 그런 위험한 직업을 택한 사람치고 지난 과거가 순탄한 경우는 거의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 사이에서는 타인의 과거를 묻지 않는 것이 예의로 작용했다. 쉐리 또한 훌륭한 용병이었으므로, 그 점을 확실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 내가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네. 사람마다 사정이란 게 있는데 말이야. 그보다 저 녀석들..휴센한테는 언제 말할 작정이야? ” “ 글쎄요. 지금 깨우면 역시 실례일까? 새벽이라 한참 잠들어 있을 텐데. ” “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이 상태로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 난감한 듯 턱을 쓸며 중얼거리는 모습에 내가 얼른 대답하자, 그 순간 트로웰의 눈동자가 반짝하고 빛이 났다. “ 아니, 그게 좋겠어. 그냥 내버려 두자. ” “ 엥? ” 정말 그냥 내버려 두자고? 그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쉐리는 궁합이 맞았는지 한껏 즐거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한 술 더 떠서 하는 말이라는 게 그야말로 경악을 저절로 방불케 했던 것이다. “ 그럼 나무에 매달아 놓는 건 어때? 아침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모두 구경할 수 있도록 말이야. 아아~ 재밌겠다! ” “ 헉..그, 그러다 경찰한테 잡혀가면 어쩌려고요? ” “ 응? 경찰이 뭐야? ” “ 아- 그러니까. 음.. 경비대 말 이예요. 사람을 매달아 놨는데 처벌받거나 하지 않을까요? ” “ 그럴 리가. 저 쪽이 먼저 잘못 했는걸? 이런 야심한 시각에 아녀자를 희롱하다니! 용병길드에 신고해도 당장 처벌감이야. 우리 쪽은 아무런 잘못이 없단 말씀! ” 그렇게 대답하는 쉐리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던 데다, 트로웰까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나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말리기는커녕 트로웰이 그들을 나무위에 매달아 놓는 것을 도와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숲 안쪽의 나무도 아니고, 몸소 끌고 나와 여관과 가장 가까운 나무위에 매달아 놨으니, 다음날 아침이 되면 여관뿐만 아니라 길거리에 다니는 모든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었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은 쉐리가 아주 옷까지 다 벗겨놓자는 과격한 발언을 늘어놓았지만, 그것만은 내키지 않는다는 트로웰의 뜻에 따라 간신히 무마될 수 있었다. 역시 한을 품은 여자는 무섭다고나 할까. 아무튼 찝찝한 마음과는 별개로 은근히 다음날 아침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아마도..절대로 조용하게 넘어갈 수는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같은 의뢰를 수행하는 단원에게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당장 길드마스터에게 신고하겠소!” 그날 아침, 잠이 덜 깬 의식으로 식사를 위해 1층으로 내려오던 샴페인 용병단들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보드카 용병단의 단장을 보고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모든 사정을 알고 있는 나와 트로웰, 쉐리가 입을 다물고 있던 탓에 아직 일행의 누구도 자세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미쳤나’하는 표정으로 보드카의 단장을 보고 있던 헤롤은, 부스스 해진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사정이나 알고서 신고 당 합시다? ” “ 이 뻔뻔스러운! 모르는 척 할 셈이요? 당신들 단원들이 어제 우리 단원에게 행패를 부린 것을! ” “ 행패애? 누가 누구에게? 거참~ 귀가 먹었나. 다시 한번 말해보시지? ” “ 아닌 척 해도 소용없소! 증인이 있으니까!! ” 그러면서 그가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어김없이 어제 저녁 나와 매튜가 남자들을 매달아 놓았던 바로 그 나무 앞이었다. 증거확보를 위해서인지 내려오지도 못하고 아직도 나무위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그들 아래에는, 구경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법석을 이루고 있었다. 두 손과 발이 완전히 결박당한 채 끙끙거리며 매달려 있는 그 볼썽사나운 모습에, 헤롤은 터지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경련이 일어나는 입가를 얼른 손으로 틀어막았고, 그 옆에서는 마이티는 배를 움켜쥐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 푸하하하- 저게 대체 뭐야! 걸작이다, 걸작! ” “ 어이~ 정말 거하게 당했는데? 설마 어제 하루 종일 저렇게 매달려 있었던 거야? 휘익~ 누가 했는지 진짜 멋지다!! ” “ 이익! 끝까지 시침 뗄 생각이오?! 당신들 단원이 이랬다니까!! ” 그러나 일단 한번 웃음이 터진 일행들에게 혈압이 머리끝까지 오른 보드카 단장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그나마 행렬을 이끄는 책임자로서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던 휴센이 아니었다면, 그는 진즉에 제 성질을 못 이겨 뒤로 넘어갔을 것이었다. 무언가 납득이 되지 않는 듯,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휴센이 상대편의 단장에게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려는 순간, 나무에 매달려 있던 녀석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큰 소리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 이익! 이 빌어먹을 자식들! 당장 이거 풀어놓지 못해!! ” “ 죽여 버릴 테다! 곱상하게 생겨서 봐줬더니 감히 우리에게 이런 짓을! ” “ 으으으으으읍!! 읍읍!!! ” “ 얼래? 정말 우리중의 누가 한 게 맞나 보네? ” 대충의 사실을 짐작했음에도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는 마이티의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그러자 일행들은 일제히 헤롤을 향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 설마, 헤롤 너냐? 쯧쯧. 어째 너는 가는 곳마다 사고를 치냐? ” “ 헉. 니들 눈엔 내가 곱상해 보여? 그러는 마이티 너야말로 네가 해놓고서 시침 떼고 있는 것 아니야? ” “ 췌.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세 사람의 실버 급을 상대로 흠짓 하나 없이 매달아 놓냐? 안보여? 그 흔한 멍 자국 하나 없잖아. 저건 단 한방의 일격에 쓰러트린 솜씨라고. 나는 절대로 아니야. ” “ 어머? 그럼 둘 다 아니라는 거야? 우리 단원 중 곱상한 외모에 엄청난 힘을 가진 사람이라면..헉! 설마, 매튜, 네가? ” 헤롤을 향할 때는 ‘그럼 그렇지’하던 시선이 트로웰에게 이르러서는 ‘믿을 수 없다’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매달려 있는 남자들의 악을 쓴 외침이 다시 한번 이어졌다. “ 이익! 당장 풀어놔! 이 자식들! 거기 너! 푸른색 머리하고 검은색 머리말이야! 감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줄 알아! ” “ 어머머. 정말 맞나보네? 그런데 푸른색 머리라면.. 설마 엘도? ” 놀란 표정의 이릴의 시선에 나는 그저 난처한 얼굴로 미소지어주고 말았다. 그러자 그 모습에서 용기를 얻은 보드카의 단장이 휴센을 향해 금새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 이걸 어떻게 책임 질 거요! 단끼리의 불화를 일으키다니! 절대 길드에서도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리 골드급이라 해도 화를 면치 못할 거라구! ” “ 흐음. 기다려 보시오. 무언가 사정이 있는 것 같으니.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매튜는 쓸데없는 일에는 상관하지 않는 타입이거든. ” “ 사정은 무슨 놈의 사정! 당장 사과하시오! 그렇다 해도 길드의 통보는 면치 못할 테지만! ” 그러나 그렇게 언성을 높이던 그도 곧바로 이어지는 쉐리의 말에는 그대로 경직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려는 듯 팔짱을 낀 자세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가 드디어 반격에 나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 어머, 우리 쪽이 문책을 당하게 될 정도면, 새벽녘에 아녀자를 희롱한 당신들 단원은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되겠군요. ” “ 응? 그..그게 무슨 소리지? ” “ 말한 그대로예요. 어제 저녁에 저 세 사람이 나를 강간하려고 했거든요. 치사하게 포박마법으로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하고,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까지 걸어서 소리쳐도 소용이 없게 했었죠. 우연히 근처에 매튜와 엘이 없었다면 정말 큰일 날 뻔 한 것은 이쪽이라는 소리입니다만? ”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당당하게 하는 말에 보드카단장을 포함해서 일행의 누구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눈동자를 심하게 흔들고 있는 휴센의 모습에서 그가 굉장히 당황해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얼른 그녀의 말에 덧붙이는 설명을 이었다. “ 실버급 용병이 세 명에다, 그 중 한사람이 마법사라 매튜 혼자서도 힘들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다가가 주위를 끈 다음, 그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 매튜가 일격으로 쓰러트렸죠. 행동에 전혀 반성이 없는데다, 하는 짓이 너무 괘씸해서 맛 좀 보라고 매달아 놓았던 거에요. 이런 경우는 정당방위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 “ 헉...그..그건... ” “ 당연히 정당방위지! 정당방위! 그것도 너무 많이 봐준 거 아니야? 옷이라도 확 벗겨놓지 그랬어! 아니면 아주 사내구실을 못하게 고자를 만들어 놓던지! 저것들을 콱-!! ” 흥분한 이릴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일행을 포함해서 주변의 구경나온 사람 중 남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고자라니..상상만으로 끔찍한 단어가 아닌가. 이제 그들은 매달려 있는 남자들을 보면서, 어제 그들이 건드린 여자가 이릴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서 혐오와 비난이 가득한 눈빛을 던지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아아.. 어둠의 자녀분들.. 흥분을 가라앉혀주세요..버리다니! 그 무슨 엄한 말씀을!; 저는 '빛의 자녀의 의견 역시' 존중하겠다는 뜻이었을 뿐.. 전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답니다;;;쿨럭. 점점 재밌다고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운을 얻어서 일일연재 했습니다! 푸하하하~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하루 5장 도전 이틀만에 무너진 인간....)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되자 당황한 보드카 용병단의 단장은 이마에서 솟아오르는 식은땀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어설픈 미소만을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보기에 따라 상당히 비참해 보일정도로 불쌍한 모습이었지만, 일행의 누구도 곱게 봐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어느 누가 자신의 일행이 당할 뻔한 불행을 무심히 넘겨주겠는가. 다들 화난 표정으로 보드카의 용병들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휴센의 얼굴은 포효하는 맹수보다도 더 사나워보였다. 그 무시무시할 정도의 박력에 밀려 보드카의 단장이 움찔하고 물러서는 순간, 씹어 발기는 듯이 으르렁거리는 낮은 휴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누구더러 사과하라고? ” “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저 이 녀석들이 샴페인 용병단원의 소행이라고 해서.. ” “ 그래서 고작 그 말만 듣고 자세한 사정 따윈 묻지도 않은 채 우리를 향해 비난을 늘어놓았다는 건가? ” 정말로 화가 났는지 존대조차 무시해버린 강압적인 말투에 보드카 단장의 몸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같은 단장이라 하더라도, 금패를 지닌 휴센과 은패를 지닌 그의 능력은 천지차이. 설령 휴센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 실력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단순한 트집도 아닌, 명백한 잘못을 지적당하고 있는데서야 무어라 변명할 말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보드카 단장의 안색은 이미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서도 봐줄 생각이 없었는지, 휴센은 말없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미처 주변의 사람들이 말리기도 전에, 그대로 보드카의 단장을 밀쳐내고 나무위에 매달려 있던 남자들에게 휘둘렀다. “ 허억! ” “ 꺄아아악! ” 설마 눈앞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건가 싶어 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가 없었다. 평소 차분하다고 생각했던 이미지인 휴센이, 이런 식으로 격한 반응을 보일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충격은 더욱 심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너무 갑작스러운 전개에 눈 감을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멍하니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휴센은 맹렬할 정도의 기세로 검을 휘둘렀는데, 매달려 있던 사람들의 몸에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묶여 있던 밧줄하나 끊어지지 않았다. “ .....? ” 설마 실패? 다른 이의 심정도 나와 다르지 않은지, 모두 비명을 지르던 것을 멈추고 멍한 얼굴이 되어 휴센과 묶여 있는 남자들을 번갈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이루고자 했던 궁극적인 목표를 깨달을 수 있었다.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묶여 있던 남자들이 입고 있던 옷이 산산조각이 나서 떨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순간 아까와는 다른 의미의 비명소리가 여기저기 구경하던 여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 끼아아아악~~ ” “ 어머머머머~ 난 몰라아아아 ” “ 엄마야아~~~ 난 아무것도 못 봤어요오~~~” .....그 비명이 즐겁게 들렸다는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휘파람과 환호성이 어우러진 비명이, 어찌 수줍어서 내지른 소리가 될 수 있겠는가. 진 정 무서운 여인네들 같으니라고. 속으로 짧게 혀를 내두른 나는 이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린 휴센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정말로 옷을 벗길 줄이야. 평소라면 촘촘히 묶인 밧줄을 피해서 얍삽하게 옷만 (그것도 상처 없이) 잘라버린 그의 검술 실력을 감탄했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 푸..푸하하하하! 대박이다, 단장! 정말 엄청 오랜만에 마음에 든 일 한거 알아? ” “ 꺄하하하하! 잘했어, 휴센씨~ 당신 정말 멋져~~ ” “ 크하하하하! 진짜 불쌍한 자식들! 이제 니들 장가 다갔다! 얼레~꼴레~ 거시기 다 보인데요오~~ ” “ .....하하하....” 아마 지금 이 순간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면 이 후 다시는 샴페인 용병단을 건드릴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저 처절한 복수라니. 결투에서 신나게 얻어터지는 것 보다, 수백억의 돈으로 변상하는 것보다 가장 확실하게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방법이 아닌가. 유치하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막상 그들도 자신이 저런 상황을 당하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특히 므흣한 미소를 흘리고 있는 여자들의 적나라한 시선 앞에서 벌거벗겨진 상태가 된다면 말이다. 그 후 우리는 아침부터 좋은 구경 시켜줘서 고맙다는 여관 주인(여자였다)의 호의에 따라 공짜 술을 얻어 마실 수 있었고, 보드카 용병단들은 ‘두고 보자~’를 외치며 상단과의 계약을 파기하고 그 길로 다른 방향으로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계약 파기 시에 물게 되는 위약금이 절대 적은 돈이 아니라는 헤롤의 말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은 지금쯤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피 눈물을 흘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나중에 복수하러 온다고 하면 어떡해요? ” 도망치듯 돌아서는 모습이 적잖은 원망을 담고 있었기에, 은근슬쩍 걱정이 된 나는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나 일행 중 누구도 그 점에 대해 크게 염려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 걱정 마. 저런 놈들은 소리만 크지 실제론 아무것도 못하거든. 정 귀찮게 굴면 길드에 신고하면 돼. 평생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잘 처신하겠지. ” “ 길드의 영향력이 굉장히 큰가 봐요? ” “ 그거야 물론이지. 모든 용병은 다 용병 길드의 소속이니까 말이야. 일단 이 패를 발급 받지 않으면 누구도 의뢰를 주지 않거든. 적절한 선은 터치하지 않지만, 단끼리의 불화는 절대 용납 못하는 것이 길드야. 패를 회수당하고 싶지 않아서라도 조심해야 할 걸? ” “ 그렇군요. ” 사람이 사는 곳엔 다 나름대로 적용하는 규칙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구에 비해 심각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아크아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이 TV도, 컴퓨터도 없는 세상에 정이 들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흥겨운 분위기로 아침 식사를 마친 일행은, 상단 사람들이 제시한 출발 시간에 맞춰서 장비를 재정비 하고 여관 앞 공터에 모여 들었다. 그곳엔 이미 떠날 준비를 모두 갖춘 다른 용병단의 일행들이 나와 있었는데, 보드카 용병단이 빠지는 바람에 사람 수가 모자를 것이라 예상하고 있던 나는, 낯선 사람들이 더 늘어나 있는 것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옆에서 호기심어린 눈빛을 한 마이티가 싱글벙글 중얼거렸다. “ 호오~ 능력도 좋으셔? 그새 새 용병단과 계약했나 보지? ” “ 아, 그런 거예요? ” “ 마을마다 용병단은 꼭 몇 개씩 존재하니까. 사실 중요하건 여기서부터 거든. 몬스터가 본격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바로 이 마을 다음 관문부터니까 말이야. ” 과연, 그래서 서둘러 새로운 용병단과 계약을 체결한건가? 출발 전의 휴식을 취하고 있던 그들은 우리가 여관 안에서 나오자 앉아있던 몸을 일으키더니, 얼굴 가득 호의가 가득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어주자 그들 중에서 단장으로 보이는, 30대 후반의 날렵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얼른 다가오며 휴센을 향해 악수를 신청했다. “ 만나서 반갑소. 오늘부터 클모어까지 함께 동행 하게 된 칵테일 용병단의 피트라고 하오. 조금 전의 구경은 덕분에 잘 했습니다. 정말 굉장한 실력의 검술이더군요. ” 아마도 그는 휴센이 이른 아침에 선보였던 ‘옷 벗기기 기술’(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을 목격한 사람 중 한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순수하게 감탄 하는 얼굴에는 휴센도 불쾌하지 않았는지, 그는 드물게 미소 지으며 마주 인사했다. “ ..반갑습니다. 샴페인 용병단의 휴센입니다. ” “ 휴센씨는 금패를 소지하신 용병이라지요? 대부분 금패를 가진 사람들은 자유용병의 성향이 강한데, 당신은 특이하시군요. 하지만 단원들을 보니 모두 밝고 상큼해서 좋습니다. 우리 단원 애들에 비하면 그야말로 천국이로군요. ” 아무런 사심 없이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단원들 전부를 싸그리 지옥취급을 한 대가는 바로 이어졌다. 헤롤이 가진 것보다는 작았지만 그에 만만치 않게 투박한 모양의 도끼가, 피트라 이름을 밝힌 남자의 목 언저리에 스산하게 닿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두 번 당하는 일이 아닌 듯, 그는 턱 밑의 피부에 작은 생채기가 나는 상황에서도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이 담담했다. 오히려 그의 목에 도끼를 가져다 댄, 정체모를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더욱 으르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 방금 한말 다시 해봐, 영감탱이! ” “ 허허허. 자네는 언제나 그 험한 말투를 고칠 텐가? 이제 겨우 34살인 나에게 영감탱이라니.. 너무하네, 그려. 아참 인사들 하지? 이 녀석은 우리 용병단의 코웰이라는 놈이오. 보다시피 성격은 이렇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 “ 이익! 내 성격이 어디가 어떻다는 거야! 정말 죽고 잡냐, 이 망할 영감탱이가! ” 그렇게 되받아 치며 분한 듯이 이를 아드득 갈고 있는 남자는 이릴 또래 정도로 보이는 20대 초반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키는 180정도 되었을까? 비교적 마른 체구에 근육이라곤 하나도 없었지만, 척 봐도 상당히 무게가 많이 나가 보이는 도끼를 한손에 들고 휘두르는 것을 보니 근력이 약할 것 같지는 않았다. 푸른 눈동자에 서글서글한 인상과 달리 말투에서 묻어나는 성격은 상당히 거칠어 보였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조심스럽게 이릴을 향해 물었다. “ 그런데 이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용병단 이름이 다 술 이름인 거예요? ” “ 응? 술 이름 이라니? ” “ 아니, 그렇잖아요. 우리 용병단 이름도 ‘샴페인’이고, 저번에 있던 사람들은 ‘보드카’였고..처음엔 우연이 겹친 건가 했는데 이번엔 또 ‘칵테일’이라니까 이상해서요. 용병단 이름은 술 이름으로 정하자는 규칙이 있나요? ” “ 어머, 엘! 그건 오해야. ” “ 아, 역시 그런가. 하긴 샐러드 용병단도 있으니까 딱히 술 이름만으로 한건.. ” “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용병단 이름이 술 이름이 아니라고. ” “ 네? 하지만 샴페인은... ”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다른 일행들도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어라? 그럼 설마 이곳에서는 샴페인이란 술이 없는 건가? 그러나 나는 곧 그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술 이름이 아니라고 했던 정확한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옆에 있던 쉐리가 여 보란 듯이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으로 된 테두리에 주황색 빛깔이 나는 보석이 박힌 모양이었는데, 처음엔 그 의미를 몰라 버벅 거리던 나는, 엄습하는 한가지의 가정을 떠올리곤 아연한 심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설마.. 이 보석.. 샴페인? ” “ 맞아. 예쁘지? 우리 용병단의 이름은 이 보석의 이름에서 따온 거 야. 그러니까 절대 술 이름이 아니지. 몰랐어? ” “ 그, 그렇군요. ” 그렇다. 세상엔 동명이인이 많은 것처럼 동음이의어도 많았던 것이다. 설마 샴페인이 술 이름이 아니라, 보석 샴페인을 뜻하는 것일 줄이야. 참으로 한 사람을 바보 만들기에 탁월한 작명센스가 아닌가. 민망한 표정으로 어설픈 웃음을 흘리던 나는 어딘가에서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가, 뭔가 형용할 수 없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코웰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역시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것을 어이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것일까? 일단 마주친 김에 인사나 하려고 했었지만 그가 갑자기 확- 얼굴을 붉히며 투덜거리는 말에 그 생각을 180도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 쳇- 무슨 놈의 여자가 용병질이야? 얼굴도 곱상하니, 귀족가의 첩으로나 들어가면 딱이겠구만. ” “ 뭐...! ” 무슨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실제 저건 여자가 들었다 하더라도 모욕이 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순간 너무 황당해서 무어라 쏘아붙여주려 했지만, 그보다 칵테일단장이 나서서 그를 나무라는 소리가 더 빨랐다. 물론, 그 말을 듣고서 내 기분은 더 최악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 코웰! 자네 내가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나! 대체 언제 그 험한 입버릇을 고칠 작정이야? 이런, 실례했소. 저 녀석은 예쁘장한 숙녀분만 보면 저런 식으로 쑥스러움을 표현하곤 해서 아주 골치가 아프거든. ” “ 수..숙녀요? ” “ 예, 그러니까 이쪽의 숙녀 분? 푸른 머리카락의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름은 무엇인지? 내가 저 녀석을 대신해서 사과하리다. ” “ ....... ” 제기랄. 난 정말 이 얼굴이 싫어. 뒤편에서 조용히 배를 움켜쥐고 키득거리는 일행들을 보며 나는 그대로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만약 태어나는 존재의 얼굴을 담당하는 신이 있다면, 그대로 멱살을 움켜쥐고 짤짤짤 흔들어 주고 싶은 심정이다. ‘ 이봐, 신님! 내가 많은걸 바랬어? 난 그저 강지훈이었던 시절보단 조금, 아주 조~~금 잘생겨 지고 싶었을 뿐이야. 아, 그래 솔직히 말할게. 실은 무지무지 잘생겨져서 여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싶었어. 하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보는 사람마다 여자로 오해하게 만들면 어쩌자는 거야! 앙? 내 얼굴 내놔~~~ ’ 정말 이렇게 소리쳐 주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한이다. 아무튼 내가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 버리자 당황한 칵테일의 단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이후 휴센에게서 내가 ‘남자’라는 소리를 듣고서야 크게 경악해했다. 때문에 나는 이제 더 이상 비참한 기분이 들지 않겠다며 자조했으나, 마찬가지로 똑같은 소식을 접한 코웰이 다시 한번 중얼거리는 소리에 나아지기는커녕 도리어 회복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름대로 사과하겠답시고 하는 말이 그대로 내 가슴에 비수를 내리꽃았던 것이다. “ 저 얼굴이 남자라고? 아무리 사기성 짙은 세상에서 태어났다지만 좀 심하다~ 아, 그래! 너 정도면 귀족가의 남첩으로 들어가도 충분하겠다. 걱정 마. 사람은 다 살아갈 수단이 있는 거니까. ” “ ...... ” 누가 살아갈 방식을 고민 한답니까! 쓸데없는 참견은 관둬욧!! 그 후, 내가 다른 칵테일 용병들과도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내린 결론은 ‘역시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 였다. 어찌 다들 하나같이 나를 남자로 봐주질 않는 거냐! 조금정도는 의심해도 상관없잖아? 크흑. 나의 남자로서의 자부심이!! 때문에 나는 앞으로 절대로 칵테일 용병단과는 친해지지 않겠다는 모종의 결심을 다지고 말았다. 강지훈일 시절에는 그렇게나 부러워하던 곱상한 얼굴을 싫어하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정말이지 세상은 살고 볼 일이었다. 상단을 호위하는 행렬은 점심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겨둔 시각에 이동을 시작했다. 이왕이면 식사를 하고 출발하자는 항의가 이어졌지만, 정해진 시간에 목적지에 당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핑계로, 결국 그날 점심은 말 위에서 간단한 건량을 씹는 것으로 대충 해결하고 말았다. 지겨울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 날이 어둑어둑 해질 무렵, 나는 이사나로부터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 엘. 이것 봐! 나 나이아스들을 더 많이 부를 수 있게 됐어! ” “ 엇? 정말? 대단한데, 이사나? 그때의 수련이 조금은 효과가 있었나? ” 그의 말마따나 이전에는 겨우 2마리에 그치던 물의 하급정령들이, 이제는 그 수가 늘어 5마리 가까이나 되어 있었다. 수줍은 듯 볼을 붉히며 이사나의 주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나이아스들 보며 나는 반가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 힘들진 않아? 상태는 어때? ” “ 응, 처음엔 조금 힘들었는데, 이젠 괜찮아. 기분만으로는 운디네도 소환 할 수 있을 것 같아. ” “ 그럼 소환 해봐.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잖아. ” “ 에? 하지만 이제 겨우 5명에 성공한 것뿐인 걸? ” 자기가 말을 꺼내놓고도 자신이 없었는지 이사나는 난감한 기색으로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계속하라는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 운디네 까지는 실패해도 위험한거 없으니까 괜찮아. 걱정 말고 한번 해봐. ” “ 으응.. ” 그러자 무언가 단단한 결심을 굳힌 듯 호흡을 고르던 이사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그의 주변에서 강한 마나의 파동이 모아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결연한 표정의 이사나의 입에서 잔뜩 긴장한 듯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운디네> 소환. ” 그러자 어느 순간 청량할 정도의 시원한 느낌이 나와 이사나의 사이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이사나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그의 주변을 여러 번 맴돌더니, 이윽고 허공위에서 천천히 사람의 형상을 이루어 가기 시작했다. 투명한 물로 이루어진 몸체에, 상큼한 외모를 가진 귀여운 소녀- 물의 중급정령 운디네가 소환된 것이다. 이 뜻밖의 성과에 이사나는 그대로 눈을 부릅떴고, 나는 너무 기뻐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티를 내지는 않았다. “ 우와! 이사나, 대단해! 정말 소환에 성공했어, 운디네야! ” “ 핫, 정말 운디네인거야?? ” 믿기 힘들다는 목소리. 갑작스런 마나의 소모로 탈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사나의 얼굴에선 기쁨의 빛이 떠나질 않았다. 소환된 이후로도 잠시 동안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운디네는, 그녀를 소환한 인간 옆에 내가 있음을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공손한 자세로 입고 있는 물색 드레스의 양 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처음 정령들을 탄생시켰을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정중하기 그지없는 인사였다. - 고귀하신 물의 정령왕을 뵈옵니다. 샘물과 강물을 지휘하는 정령, 운디네입니다. “ 아? 엘? 운디네가 뭐라고 하는 거야? ” 아마도 나 밖에 안 들리는 소리인 듯. 이사나가 기대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채근하자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나한테 인사한거야. 우선 내가 이 들의 왕이니까, 샘물과 강물을 지휘하는 운디네라고 신분을 밝힐 필요가 있는 거지. ” “ 아아. 귀족들이 나한테 와서 무슨 무슨 가문의 누구입니다- 라고 밝히는 것과 같은 건가? ” - 그렇습니다. 왕이 되신 분께 미천한 저의 신분을 알리는 것은 삶을 허락받은 이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의 계약자시여. 또랑또랑 대답하는 운디네의 모습은 귀여운 소녀의 이미지와 반대로 무척이나 성숙하고 어른스러워 보였다. 나는 생긋 웃으며 얼른 그녀의 말을 전달해주었다. “ 네 말이 맞대. 지금 너한테도 인사하는데? 처음 뵙겠대. ” “ 앗! 나..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해, 운디네. 나는 이사나라고해. ” 흥분을 잔뜩 담고 말하는 모습은 16세의 소년 그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천진한 느낌이 운디네에게도 느껴졌는지, 비교적 무표정인 경우가 많았던 그녀의 입술에 작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것을 본 이사나가 더 흥분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 와! 우와! 이것 봐, 엘! 운디네가 웃었어! 날 보고 웃었다니까? 세상에, 정말 귀엽다~ ” 그 모습이 꼭 갓 태어난 딸을 넋 놓고 바라보는 아빠들의 모습 같아 나는 피식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다른 건 몰라도 한가진 확실하다. 이사나는 절대로 무뚝뚝한 아빠는 되지 못할 것이다. “ 앞으론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수련하자. 시큐엘을 소환하는 것에는 운디네의 몇배에 해당하는 마나가 필요하니까 더 각오해야 할 거야. 음. 지금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이사나? ” “ 글쎄. 그냥 불러놓기만 하는 거면 1시간도 끄덕 없을 것 같아. 하지만 운디네가 능력을 사용하면 오래 못 버틸 거야. ” “ 그래, 그럼 지금당장은 운디네를 불러놓고 5시간은 문제없도록 연습하는 것을 목표로 하자. 더불어 능력을 사용하고도 2시간은 버틸 수 있으면 더 좋고. ” “ 에엑? 그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 “ 하면 다 돼. 내가 도와주는데 무슨 걱정이야? 실제로 그 정도는 버텨야지 실생활에서도 정령을 부리는 데 유리하다고. ” “ 그..그치만.. ” 벅찬 일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눈앞이 아득해지는지 이사나는 바로 울고 싶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모른 척 엄숙한 표정만 지었고 말이다. 그러나 녀석에게 정말로 울고 싶은 기분을 들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였다. 속닥거리는 우리들의 모습을 무심코 돌아보던 이릴이 정면으로 운디네와 그 시선이 마주치게 된 것이다. “ 어머, 너희들 뭐가 그리 재미있... ” “ 아..별로.. 헉! 이..이릴? ” “ !!! ”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운디네를 바라보는 눈이 멍하니 풀리기 시작하는 이릴을 보며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낀 나는 얼른 정령을 자연계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모든 상황을 눈치 챈 트로웰의 다급한 외침이 이어졌다. “ 멈춰, 엘! 운디네를 돌려보내면 안돼! ” “ 허..허걱. 매..매튜? ” 갑작스런 외침에 나는 물론이고, 근처에 있던 일행들의 시선까지 전부 이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겨운 일정으로 하품까지 흘리던 그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뭐야?’하는 시선으로 돌아보았다가, 현재 상황- 이릴이 운디네를 보고 있고 나와 이사나가 땀을 삐질 거리는-것을 보더니 그대로 안색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랄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언제나 이릴과 말다툼을 하던 헤롤이었다. “ 젠장! 누가 저 마녀한테 귀여운 거 보여줬냐? 으이구~ 내가 미쳐!! ” “ 저, 저 기괴한 안광을 봐라~ 이미 늦었다! 야, 누가 좀 나서봐! ” “ 미쳤어? 저 상태의 이릴 언니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뻔히 알면서 그래? ” 기겁하는 마이티와 신경질 내는 쉐리. 비록 무표정이었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휴센단장을 보며, 나는 생각보다 이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한 것임을 깨달았다. 아니 깨달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흐흐흐..하는 음침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하는 이릴이 시퍼런 안광이 흐르는 눈을 번뜩이며 당장 허리춤에서 그 무시무시한 채찍을 꺼내들었으니 말이다. “ 으흐흐흐흐..자아~ 아가야? 이 쪽으로 오려언?? 이 언니가 이뻐 해 줄게~~ ” “ 헉. 이..이릴? ” “ 호호호호홋~ 이 세상의 귀여운 것은 모두 다 컴온! 자아! 사양하지 말고 이리와~~ ” “ 으악! 이릴 진정해요! ” 얼마나 흉흉한 모습이었는지, 소환되어있던 운디네가 다 얼굴을 파랗게 질리고 뒤로 물러섰을 정도였다. 설마 자연계의 정령이 정령왕이 아닌 존재에 겁을 먹고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이릴이 우리들 쪽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기 시작하자 등 뒤로 식은땀을 흘렸다. 가까이서 마주친 눈동자가 이미 동공이 완전히 풀려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절대 정상이 아니다. “ 자..잠깐만요, 이릴!! ” “ 으하하하하하하~~ 방해하는 자식들은 다 죽여 버릴거야아~~~ 꺄하하하하하하하하~~!!! ” “ 히이익! ” 저것이 어찌 인간의 웃음소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그녀의 폭주가 거기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몰래 이릴의 뒤편에 다가온 트로웰이 단 한번의 타격으로 그녀를 기절시켰기 때문이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추욱 늘어지는 이릴의 몸을 얼른 받아 부축한 매튜는, 모두의 감탄어린 환호성을 받으며 난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 놀랐지, 엘? 이런 경우엔 어쩔 수 없어. 기절 시키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거든. ” “ 맞아! 저 마녀는 말이야, 일단 귀여운 것에 미치면 그게 사라져도 발광하고 있어도 발광하거든. 아까 그 눈빛 봤냐? 아~ 진짜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무지 소름끼치더라. ” “ 하..하하하.. ” 여기서 원인제공자인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이후 나와 이사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엄청난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 후후후. 일일연재 3일 연속 해냈다!!-_-V 저, 오늘 출판계약 했어요^.^* ~ 아마도 앞부분이 좀 압축 되어 출판 될 듯. 여행파트가 두두러지게 될 것 같습니다^^ 리플이 많이 달릴수록 쓰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니 열심히 달아줍..(퍽;;;)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이릴이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마침 저녁 식사 시간으로 모든 행렬이 멈춘 상황이었기에, 정신을 차린 그녀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끄응 하는 신음 소리와 함께 트로웰에게 맞은 뒷목을 문지르며 눈을 뜬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일행을 둘러보다가,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는지 헤헤헤 하고 어설픈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헤롤은 기가 막히다 는 듯이 중얼거렸다. “ 지금 웃음이 나오냐? 그 놈의 빌어먹을 병은 대체 언제 고칠 생각이야? ” “ 시끄럿. 이건 조건반사라고. 고칠 수가 없는 거란 말이야. ” “ 커헉. 그럼 평생 그렇게 살 생각? 안됐다, 이릴. 넌 절대 시집가서 애 못 낳겠구나. ” 오랜만에 제대로 놀릴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짓궂은 미소를 짓는 헤롤 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이릴의 반응은 전혀 가차 없었다. “ 네 아이 낳는 것도 아닌데 신경 끄시지? ” “ 큽.. 쿨럭 쿨럭 쿨럭! 이 마녀가!! 놀라서 사례 걸렸잖아! 거기서 그 말이 왜 나와! ” “ 어머? 그래서 그렇게 신경 쓴 거 아니었어? 난 또~ 그런 줄 알았지. ” “ 크아악~ 이제 되지도 않은 도끼 병까지 걸린 거냐!! ” 그러게 항상 당할 거면서 왜 시비를 거는 건지.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두 사람의 다툼을 들으며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옆에서는 트로웰이 조금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나름대로 살짝 친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더 아픈 모양이야. 조절을 잘 못했나? ” “ 글쎄. 역시 기절을 할 정도의 타격이면 조금은 아프겠지? 내가 치료해 볼까? ” “ 안돼, 엘. 아직 신관의 인장을 받지 않았잖아? 사제라고 둘러댈 수도 없는데 능력을 함부로 드러내선 곤란해. 차라리 상단 측 신관에게 부탁하는 게 낫겠어. ” “ 상단 측 신관? ” 그건 또 누구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말없이 멈춰진 행렬의 마차 쪽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엔 저녁 식사를 위해 밖으로 나온 상단의 일행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 낯익은 하얀 옷차림의 남자를 본 나는 예전의 일을 상기하곤 짧게 아-하고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이전 오크들과의 전투가 일어난 후, 부상당한 용병을 치료해줬던 바로 그 신관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카락에, 얼핏 보면 눈웃음 치고 있는 것처럼 뜬 건지 안 뜬 건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의 가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흰 피부와 마른 체구가 신관이라기 보단 학자풍의 이미지가 더 강해 보였는데, 빙글빙글 미소 짓고 있는 얼굴이 속을 알 수 없다는 느낌을 풍기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선량해 보이는 타입이었다. “ 부탁하면 공짜로 치료를 해줄까? ” 무심코 그렇게 중얼거리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 아마도 그럴 것 같은데. 그게 저 사람의 목표인 것도 같고. ” “ 응? ” 공짜로 치료해 주는 게 목표라고? 내가 알고 있기로 신관들은 누군가의 치료를 위해 신성력을 쓸 경우, 그것에 대한 수고비를 명목으로 일종의 대가를 받는다고 들었다.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니고, 하루에 쓸 수 있는 양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한 자비는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짜로 치료를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신관이 있다니. 감탄한 표정으로 다시 그 쪽을 바라보자, 트로웰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었다. “ 엘뤼엔의 사제야. ” “ 에? ” “ 저 신관 말이야. 엘뤼엔의 사제야. 신전의 문장이 들어간 옷을 입고 있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팔목에 엘뤼엔의 문장이 찍혀있어. ” “ 헉. 저..정말? ” 그 말에 놀란 나는 얼른 표정을 바로하고 그의 손목 부분을 집요하게 바라보았다. 과연, 피부의 한 부분만 탈색한 듯 유달리 희끄무리한 그림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여지지 않은 천칭을 뱀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었는데, 그것을 알아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저게 엘뤼엔의 문장? ” “ 응.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것은, 판결을 내림에 있어서 선과 악의 구별이 없음을 뜻해. 그리고 그 것을 뱀이 감싸고 있는 것은, 그 결과가 어찌되든 신이 내리는 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형벌의 신인 엘뤼엔에게 딱 어울리는 문장이야. ” “ 헤에. 그렇구나. ” “ 팔목에 찍혀있는 걸 보면 꽤 고위 쪽 신관인 것 같아. 문장이 내려지는 부위에 따라서 사제의 등급이 정해지는데, 사람들의 눈에 뜨이기 쉬운 부위일수록 지위가 높다는 뜻이거든. ” 호오, 그런 의미가? 나는 새삼스럽게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번 신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 챘는지 한참 상단의 사람들과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던 그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허걱. 눈 마주쳤다.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나를 돌아본 그가 이야기 중이던 다른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이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예상치 못한 손님을 맞이하게 되어버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거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똑바로 내 앞에 다가온 그는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 샴페인 용병단의 일원이시지요? 저는 이번 상단 측 일행과 동행하게 된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 “ 앗, 아, 네! 아..안녕하세요. 엘..이라고 합니다. ” “ 그렇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엘. 아까부터 제 쪽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 “ 예? 아, 그..그게 아니라. ”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만나는 상대는 언제나 당혹스럽다. 나는 곤란한 표정을 수습하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키곤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 실은 사제님이 어느 신전의 신관이신지 궁금해서 친구와 이야기 하고 있었어요. 엘뤼엔의 사제셨군요. 만나서 영광입니다. ” “ 호오? 어떻게 그걸? ” 놀랐는지 입을 동그랗게 만들긴 했지만 그다지 불쾌하다는 기색은 없어보였다. 그것에 안심한 나는 그의 오른 쪽 손목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 보였거든요, 손목에 찍힌 신의 문장이요. ” “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요? 동체시력이 굉장히 뛰어나시군요. 게다가 한눈에 보고 이 문장의 의미를 알아내시다니, 일반인들은 대부분 못 알아보고 지나치는 건데 말입니다. ” “ 아.. 실은 제가 엘뤼엔 신과 꽤 인연이 깊어서.. ” “ 호오. 엘뤼엔님의 신도셨습니까? 정말 반갑네요. 이곳 솔트레테는 유일신을 믿는 풍습이 있어, 엘뤼엔님의 신도를 찾기가 힘들거든요. ” 멋대로 착각하고 알아서 내 설정을 정해버리는 신관의 모습에 나는 그저 어설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트로웰이 얼른 끼어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 실은 엘도 엘뤼엔의 사제가 되기 위해 수련중이예요. 이번에 클모어에 가면 신의 음성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한다고 했거든요. ” “ 어라? 그렇습니까? 실례지만 나이가? ” “ 음.. 17살 입니다. ” 그러자 카이테인이란 이름의 신관은 어느새 나를 보는 표정을 반가움에서 탐색으로 바꾸어 가기 시작했다. 나의 머리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주욱 흩어보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 정직한 수련을 거치신 것 같군요. 청결하고 정갈한 느낌입니다. 하지만 괜찮을지 어떨지. 대부분 신의 음성을 듣는 시기는 가장 천진한 시기의 10살 이하인데, 17살이라.. ” “ 10살 이하요? 신의 문장은 그 이후로는 못 받는 건가요? ” “ 극히 드뭅니다. 아무래도 때가 덜 탄, 순결한 영혼 쪽일 때가 보다 신의 근처에 다가갈 수 있으니까요. 실제 제가 이 문장을 받은 때의 나이도 2살 이었답니다. ” 그러면서 덧붙이길, 고위사제일수록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신의 문장을 받게 된다고 했다.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문장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탄성을 질렀다. “ 우와. 그럼 그런 사람들은 따로 수련을 거칠 필요가 없는 건가요? ” “ 방향이 달라질 뿐, 수련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신의 문장을 일찍 받은 사람은 그 능력의 컨트롤을 위한 정갈한 마음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지요. 대부분 신전 내에서 생활하다가 적절한 때가 되면 치료순례를 행합니다. 저 역시 15살에 시작하여 이제 순례 4년차가 되었답니다. ” “ 헤, 그럼 카이테인씨는.. ” “ 그냥 카이라고 불러주세요. 그 쪽이 더 편하니까요. ” “ 예에. 그럼 카이씨는 지금 19살 이라는 건가요? 치료순례중이시구요? ” 그러자 그는 그렇다는 뜻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단의 일행과 동행하게 된 건 우연으로, 순례의 중간보고를 위해 클모어에 있는 신전으로 가던 길의 그가, 상단 쪽 사람들의 동행 제시를 받고 어렵지 않게 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식사와 이동수단을 제공해주는 대가로 그는 일행들이 아플 때 치료를 해주겠다는 약조를 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친절한 얼굴로 혹시 일행 중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어려워하지 말고 언제든지 알려달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 저는 아픈 사람이 많을수록 좋답니다. 벌 받을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야 순례를 도는 의미가 생기니까요. ” “ 앗. 그럼 죄송하지만 오신 김에 저희 일행 분 좀 봐주시겠어요? 심하게 다친 건 아니고, 뒷목 쪽을 강하게 맞았거든요. ” “ 저런, 어쩌다가? ” “ 아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잠깐. 하하.. ” 다행히도 그는 그 점에 관해선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고 순순히 이릴을 치료해 줄 뜻을 밝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얼른 뒤쪽을 바라보며 그때까지도 헤롤과 다투고 있던 이릴을 불렀다. “ 이릴, 잠깐만요! 이쪽으로 와주실래요? ” “ 응? 무슨 일이야? ” 이릴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자 트로웰은 재빨리 다가가 그녀의 뒷목을 살폈다. 그리곤 미안한 얼굴로 짧게 사과했다. “ 이런, 역시 부었네. 미안해요, 이릴. 조절을 한다고는 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강하게 때렸었나 봐요. ” “ 응? 아아~ 괜찮아. 별로 아프지 않아. 오히려 말려줘서 고마운 걸? 그보다, 이분은 누구? ” 이미 한달가까이 동행해온 사이였어도, 카이씨는 마차 안에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얼굴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나 역시 그를 주목해서 본 것이 불과 몇 분전부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여전히 예의바른 표정을 잃지 않은 카이씨는 궁금해 하는 이릴을 위해서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 제 이름은 카이테인, 형벌을 관장하는 엘뤼엔 신의 미천한 종입니다. 실례지만, 아가씨의 상처를 봐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 예? 아..아가씨? ” “ 실례. 싫어하시는 호칭인가요? ” 그러자 이릴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전투를 하는 순간만큼이나 투지에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 아니요, 전혀! 오호호호!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저기, 멋지신 사제님! 성함이 어찌되신다고요? ” “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카이라 불러주십.. ” “ 어머머! 이름도 너무 멋지시다! 카이님!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엘뤼엔의 사제라고 하셨나요? 세상에! 만나서 너무 반가워요, 잘 부탁해요. 제 이름은 이릴이예요. 호호호호 ” “ ...... ” 저..저렇게나 ‘아가씨’란 호칭이 좋았던 걸까? 한순간도 웃음을 멈추지 않으며 떠들어 대는 모습에, 나와 샴페인 용병단의 얼굴에는 저절로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무리 무시무시한 채찍을 휘두르고, 싸늘한 말만 골라하는 그녀라도 일단은 여자였던 것이다. “ 저 마녀, 빨리 결혼시켜야 될 것 같지 않냐? 아가씨란 호칭에 목말라 한다는 건, 벌써 결혼 적령기가 지났다는 증거라고. ”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중얼거리는 헤롤의 말에 다른 일행들도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은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당장 이릴의 신랑감을 찾는다고 나설 생각인 듯 했다. 아무튼 한참의 호들갑 끝에 치료를 받은 이릴은-놀랍게도 그런 상황에서도 카이 씨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아주 만족했단 표정을 지으며 일행에게 다시 돌아왔고, 다시 한번 이어지는 헤롤의 투덜거림에 제 2라운드의 혈전을 벌여야만 했다. 싸우면서 정든다고, 어쩌면 이릴의 신랑감은 의외로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몰랐다. 그날 저녁 불침번은 샴페인 용병단이 맡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조를 이루어 각기 담당할 시간대를 설정했는데, 사람들이 잠든 9시경부터 자정까지는 쉐리와 마이티가, 자정부터 3시까지는 이사나, 헤롤, 이릴이, 마지막 3시부터 7시까지를 휴센과 나, 트로웰이 맡게 되었다. 일행들의 가장 큰 전력인 휴센과 트로웰이 모두 마지막 시간대에 편중된 것은, 그 시간대가 가장 몬스터가 적을 노리고 덤벼들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나 같은 경우는 그냥 마땅한 시간대가 없어서 끼어든 꼴이랄까. 또한 정령사라 밝혀진 이사나에 비해, 아무 능력이 없는 걸로 알려진 나는 실제적인 전투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으므로, 가장 강한 사람들에게 보호받게 하자는 의미가 강했다. “ 엘, 일어나. 엘- 우리 차례야. ” “ 으음? ” 이미 모두의 순번이 지나 내가 담당한 시간이 되자, 먼저 일어난 트로웰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졸린 눈을 비비며 막 잠에 들기 위해 자리에 눕는 이사나들이 보였다. 사방은 아직도 한 밤중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만큼 어두컴컴한 상태였다. 가는 풀벌레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었다. “ 아, 미안해, 매튜. 잠깐만 눈을 감고 있는 다는 게 정말로 잠들어버렸어. ” “ 쿡쿡. 괜찮아. 휴센도 방금 일어났어. 모닥불 쪽으로 갈까? ” “ 응. ” 이제 겨울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가을날씨는 밤 보다 새벽이 더욱 쌀쌀했다. 정령인 탓에 추위를 느끼진 않았지만,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모포를 어깨까지 걸친 상태에서 미적미적 모닥불 옆으로 기어갔다. 꺼질 줄 모르는 장작이 이따금씩 작은 불똥을 튀어내며 타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비교적 잠기운이 가신 맑은 얼굴을 하고 있는 휴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가져와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고 있는 중이었는데, 나와 트로웰이 다가가자 ‘여어’하고 짧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피곤하지 않아? 아무래도 불침번은 견디기 힘들지? ” “ 괜찮아요. 휴센이야 말로 힘들지 않아요? ” “ 나야 이런 생활이 익숙해질 데로 오래되었으니까.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고나 할까. ” 그가 용병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그가 13살 되었을 무렵이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모두 용병이셨기에 어릴 때부터 체계적인 전투방식을 익혀 왔던 그는, 제 집보다 오히려 용병길드에서 노는 일이 더 많았다. 또래들과 어울리기 보단, 용병들을 따라다니며 사냥하는 법을 배우기를 즐기던 휴센이, 훗날 그의 부모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임은 이미 주변에서도 예감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 하지만 위험하잖아요? 특히 휴센은 금패를 가진 프리급 용병이니까, 위험한 의뢰가 많이 들어올 텐데. ” “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난 내가 용병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거칠고 싸움밖에 모르는 삶이라고 해도, 동료들과 어울리고, 함께 여행을 다니는 지금 생활이 좋아. 뭐,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을 갖지 못하지만 말이야. ” 그때 마침 트로웰이 주변을 둘러본다며 일어나는 바람에 대화가 잠시 중단 되었다. 같이 따라 나서려는 나에게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만류한 트로웰은, 한가한 태도로 저만치 어두운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그때 마침 휴센이 무언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을 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쉐리가 모포를 어깨까지 덮은 상태로 잠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녀를 향한 눈빛이 너무 따스해 보였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 설마 쉐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 ” “ 뭐..뭐? ”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것 마냥 화들짝 놀란 휴센이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의심의 냄새가 풍기는 순간이 아닌가.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 용병일이 좋기 때문에 정상적인 가정을 갖기 힘들 거라고 그랬잖아요. 혹시 쉐리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이유가 그것 때문인 거예요? 안정된 집을 약속할 수가 없어서? ” “ 따, 딱히 그런 이유는.. ” “ 그럼 왜요? 쉐리는 예쁘고, 또 귀엽잖아요? 휴센도 그다지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뭐, 마음에 없는 상대를 억지로 사귈 수는 없는 거겠지만요. 하지만 이대로는 그녀가 가엾어요. 좋아하는 상대한테 자꾸 거절당하면 분명 상처가 클 거예요.” “ ...... ” 진지한 표정으로 하는 내 말에 휴센은 무언가 고심하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리곤 잠든 쉐리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거친 동작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푸욱 수그리는 것이었다. 답답해서 미치겠는데, 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듯 했다. 보다 못한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 휴센? ” “ 아아, 미안하다. 그러니까 나는.. 뭐랄까. 그다지 쉐리가 싫다는 건 아니야.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아이지. 아마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 ” “ 그런데 왜? ”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자 휴센의 얼굴이 더욱 복잡해졌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고 싶은 건지, 본인 또한 종잡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꺼낸 말은 나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말이었다. “ 쉐리를 용병으로 키운 건 나야. ” “ 에? ” “ 고아원에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고 다니던 작은 여자아이였지.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집으로 데리고 와 밥을 먹이고, 그때부터 한식구로서 보살피게 됐다. 그러면서 틈틈이 검술도 가르치고, 용병으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요령도 알려줬지. 소질이 뛰어난지 뭐든지 금방 배우더군. 그래서 나를 따라 용병이 되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실버 급의 용병이 되었지. 상당히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 “ 저기, 지금 그게 무슨 상관.. ” “ 알았어? 나와 그 아이는 11살 차이야. ” “ !! ” 그때서야 나는 휴센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를 깨닫고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그런 중에서도 그의 한탄 섞인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 처음 만났을 때 쉐리는 겨우 9살이었고, 나는 성인식을 2년이나 넘긴 20살이었지. 엘, 너라면 네가 키우다 시피 한 여자아이가 사랑한다며 고백을 전해오면 어떻게 하겠나? ” “ 쿠..쿨럭. 음..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사실 11살 차이는 그리 심한 차이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걸로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 하지만 나는 그 순간 휴센의 눈이 시퍼렇게 빛나는 것을 보고 아무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세로 내 어깨를 덥썩 부여잡은 그는 이미 어찌할 도리가 없는 처절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 헉. 휴..휴센? ” “ 그래, 알지! 알고말고. 그깟 나이차이가 무슨 상관이야? 쉐리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니까 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엘. 생각해 봐라. 내가 정말 쉐리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녀와 결혼한다 했을 때, 주변에서 뭐라고 생각하겠나? 아니, 주변까지도 필요 없어. 당장 이곳에 있는 헤롤이나 마이티 자식을 생각해 봐! ” “ 네에? ”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자, 이미 제정신이 아닌 휴센의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 듯 했다. 평소의 차분한 이미지 따위는 저 멀리 날려버린 그는, 풀린 눈동자로 실성한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 뻔하지? 뻔할 뻔자지! 그 자식들이 가만히 있겠어? 미친 듯이 놀려댈 거라고. 특히 마이티 자식은 공공연하게 쉐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날 죽일 듯이 노려보겠지! 헤롤이 할 말은 뻔해! 다 늙은 영감탱이가 회춘한다고 떠벌릴 거라고! 나..난!! ” “ 휴..휴센! 지..진정해요! ” “ 난 로리가 아니야! ” “ ....... ” 맙소사. 결국원인은 그 두 사람이었던 거냐. 헤롤과 마이티의 놀림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새삼 지난 시간동안, 그가 단장으로서 일행들에게 얼마나 많은 심적 고통을 당하고 살아왔는지 충분히 짐작이 되고 마는 나였다. 이래서 사람은 친구를 잘 사겨야 한다는 건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간신히 진정한 휴센은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처절한 한마디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난 로리가 아니다, 라...’ 그 어떤 말도 이보다 더 그의 심정을 표현하기 힘들지 않을까? 무언가 위로가 될 말이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막상 소리가 되어 나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의 복잡한 표정을 본 휴센은 피식 웃으며 ‘ 스스로 컨트롤 할 문제이니 신경 쓰지 말아 달라 ’고 했지만, 막상 내가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보니 그대로 침울해지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그의 말마따나 스스로 해결할 문제다. 나로선 그가 주변 사람들의 놀림 따윈 아무렇지 않아 할 정도로 열렬한 사랑에 불타오르기를 바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무뚝뚝한 표정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해보이는 휴센이, 타인의 놀리는 시선에도 꿋꿋해질 수 있을지 과연 의문이었다. 그나마 수확이라고 한다면 쉐리를 연인으로서 대할 생각은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정말이지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커플이 어찌 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후후훗! 지금 시각 11시 40분! 아슬아슬 하긴 해도 일일연재 달성!(퍽;;) 그동안 입력 해둔 내용의 공백부분 줄이느라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그러고 나니 300페이지가 안되더라는..(털썩) ㅠ_ㅠ 아, 저번편에서 엘이 조심성 없이 '이사나'의 본명을 부르는 것에 대한 조언!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실, 제가 헷갈려서 어쩔수가 없었습..(퍽;;) 그 둘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닥이고 있는거였거든요, 그래서 본명으로 불러도 상관없겠거니 했지요;; 시간나는 대로 고쳐보겠습니다^^ 에, 그리고 비평은.. 훗, 제가 소심한 성격이니 살살해주세요^^;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p.s- 요플레님 다리 빨리 나으세요;ㅁ;/ <정령왕의 유희> -엘퀴네스의 장- <<외전>> : 벌써 1 년.. “ 글쎄. 나도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 오랜만에 찾아간 그 집에서, 태진은 뒤늦은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1년 사이에 잔뜩 초췌해진 얼굴에, 때늦은 후회와 연민을 가득 드리우고 있는 50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태진은 결코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탄식은 그 스스로 벌어들인 일이었으니까. 여기서 그를 동정하면, 그런 식으로 가버린 친구에 대한 어떠한 위로도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태진은 테이블 밑에 가려진 손으로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뭐랄까. 그때의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라도 쓰인 것 같이 굴었지. 지금 생각해 봐도 죽은 그 아이를 볼 면목이 없다. ” “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예요, 아저씨. 그런 말 이제 와서 듣고 싶지 않습니다. ” “ 태진아.. ” “ 지훈이는 죽었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요. 그 녀석이 죽는 그 순간부터, 저는 아저씨의 가족을 미워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 “ ...... ” 단호하리 만치 냉정한 태진의 대답에 상대편 남자는 할 말을 잃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친구의 기일 때문에 잠시 들린 곳이고, 이 후로는 절대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굴어도 상관없겠지. 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그 아이는 필사적이었어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가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하지만 그때 아저씨는 전혀 받아주시지 않았죠. 결국 장례식에서 조차 슬퍼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 “ ....... ” “ 오늘은 지훈이가 가버린 지 1년 된 날이라서 들린 것 뿐 이예요. 마음 같아서는 이런 집, 단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이후로는 다시 뵐 일이 없을 겁니다. 안녕히 계세요. ” “ 태..태진아! ” 애처로운 부름이 들려왔지만 태진은 결코 뒤 돌아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 존재에 대한 유일한 마음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친구도 한번쯤은 이런 식으로 자신 쪽에서 먼저 가족을 외면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약한 녀석은 절대로 그의 핏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기랄.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휘이잉. 밖으로 나서니 4월 특유의 강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놓기 시작했다. 지훈이 죽은 날도 꼭 이런 바람이 불었었다. ‘벌써 1년인가.. ’ 태진은 새삼스럽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엊그제 친구의 장례를 치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1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고 마는 것이다. 강 지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웃음을 잃은 일이 없던 그 녀석을, 이제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 그런 식으로 가 버리다니. 치사한 자식.. ”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지훈은 몸에 그 흔한 멍 자국 하나 없는 말끔한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멀쩡했는지, 태진은 처음 병원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랬다.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깨우려고 했는데, 눈을 감아버린 친구의 무거운 눈꺼플은 그 이후 다시 떠지는 일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그 마지막의 얼굴이 가장 평온해보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일찍 가버렸잖아.. ” 겨우 17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지훈은 아직 세상을 떠나가 버리기엔 이른 나이였던 것이다. 졸업하면 집을 독립해서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녀석이었다. 절대로 그렇게 죽어버릴 녀석이 아니었는데... 다음 날 보자며 손을 흔들고 교실을 나가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진의 기억에 지훈이란 이름의 소년은 또래보다 약간 키가 작은 소심한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편성된 반에서 만난 짝이었고, 늘 창백한 안색이라는 걸 제외하면 다른 애들과 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튀는 편에 속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항상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인 탓에, 반에서 생기는 시끄러운 사건엔 항상 녀석이 속해 있었던 것이다. ‘커플 훼방 놓기 위원회’라나, 뭐라나. 반에서 결성된 황당한 클럽에 지훈이 회장직을 맡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태진은 그를 정말 황당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멀쩡한 커플을 방해해서 무엇이 재미있단 말인가? 그런 그에게 지훈은 솔로들의 슬픔을 알아야 한다며 언제나 쫓아다니면서 일장 연설을 펼치곤 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태진은 지훈이 언제나 팔뚝이며 몸 여기저기에, 붕대나 밴드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큼이나 운동을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실제로 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라도 하다가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 뒤 지훈과 같은 중학교를 나온 녀석에게서 그 상처가 가족들의 폭행으로 입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태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을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외면을 받았다고 했다. 갓 태어난 친 자식의 어디가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도 아직 눈도 못 뗀 아이를 외가의 할머니에게 맡겨놓았단다. 그러다 지훈이 1살 될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이어지는 건 모진 괴롭힘과 폭력이었다. 처음엔 밥을 제때에 안주거나 울거나 채근해도 안아주지 않는 것에서 그쳤다. 그러나 지훈이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걸어 다닐 때가 되자,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손찌검이 이어졌다고 했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해도, 결국 친 부모란 이유로 아이는 다시 그들 손에 돌아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지훈은 살아남기 위해 웃는 법을 배웠다. 말이 조금만 없어도 반항하는 거냐며 꼬투리를 잡는 가족들에게 유일하게 잘 보이는 방법은 항상 웃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창 사춘기 무렵인 중학교 때는 무수한 폭언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반항도 몇 번 해보았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가 집을 떠나지 않았던 건, 그런 모진 가족이라 해도 자신의 친 혈육이라는 그 사소한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지훈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더욱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차마 말릴 수가 없던 것은, 녀석의 하나 남은 희망을 자신의 입으로 걷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네 가족은 절대로 널 돌아보지 않아, 이제 그만 현실을 봐! ’ 지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집착한 것이다. 졸업하면 독립하겠다고 한 말은, 어쩌면 이제까지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가족에 대한 미련을, 그때서야 완전히 끊어버릴 결심을 굳혔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결국, 끝까지 그 미련을 접지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지만.. 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훈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마음 약한 녀석이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질투 나서 몇 번이나 ‘차라리 내가 네 가족이 되 줄까?’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자신은 그저 순수한 호의로 형제처럼 지내자는 뜻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옆에 있던 반 여자애들이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추억일 뿐이다. 울었던 시간만큼이나 지훈에 대한 기억 역시 하나둘씩 사라지겠지. 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햇살만큼은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1년 전 오늘, 지훈 역시 이런 하늘을 보면서 눈을 감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버렸던 걸까? “ 난.. 환생 같은 거 믿지 않아. 아니, 믿지 않을 거야. ”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진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1년 전 이날에도 흘렀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 왠지 알아, 강지훈? 환생하면, 언제 어디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야. 나, 너 오래 기다리는 거 싫거든. ”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가 천국 과 지옥, 두 가지로만 나뉘어 있다면.. 적어도 죽고 난 이후 그의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거처를 알지 못해 가슴 아파 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그의 영혼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지훈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이어온 자신과의 인연은 단순한 전생으로만 치부될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바램과 달리 정말로 환생이란 게 존재한다면 부디.. “ 다음 세상에서는 너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 그리하여.. 보답 받지 못하는 애정으로 가슴 아파 하는 일이 없기를.. ** “ 엘? 왜 그래? ” 의아하게 물어오는 말에 딴 생각에 빠져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돌아본다고 했던 트로웰이 어느새 다가와 내 옆에 앉아 있었다. 휴센과 쉐리의 일을 걱정하느라고 그가 돌아오는 지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 아, 미안 매튜. 근데 어디 갔다 온 거야? ” “ 아아. 잠깐,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거든. ”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말에 잠자코 모닥불만 지피던 휴센이 흠칫 놀라 바라보았다. 몬스터냐고 묻고 있는 눈동자였다. 그러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잘못 느꼈나 봐요. ” “ 하지만, 매튜 네가 잘 못 느낄 리가.. ” “ 뭐, 가끔은 이런 일도 있는 거죠, 어차피 한번은 돌아봐야 했으니까요. ” 행여나 행렬에 지장이 생길까 걱정이 가득한 휴센 이었지만 트로웰은 담담해 보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건가? 하지만 그 순간, 내 쪽을 바라본 트로웰은 똑바른 정령어로 내게 한 가지 소식을 전달해주었다. - 엘,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기억해? 엘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강한 기운이 있다는 말. - 아, 응. 그게 왜? -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기운의 정체가 곧 밝혀질 거야. - 헉, 저..정말? 아직 호의인지 적의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한다고 했었다. 설마 그것이 적의라면? 예상치 못한 소식에 당황하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이 생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 괜찮아, 엘.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 에? 하지만.. - 걱정 마. 어차피 인간계에서는 아무리 다쳐도 정령계로 강제 송환될 뿐이고, 너를 헤칠 수 있는 인간이 있을 리 없어. 내가 절대로 가만히 보고 있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도 돼. - 고..고마워, 트로웰. - 무슨 소리야? 이건 친구로서 당연한 거라고. 게다가 우리가 뭐 보통 친군가? 전 차원에서 단 4명뿐인 정령왕이야.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걸?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 가족이라... 생긋 웃으면서 대답하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강지훈 이었을 때는 그렇게 듣고 싶어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가족이란 터울 안에 들어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을 힘들어했던가.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벌써 두 번째나 가족의 이름으로 내게 먼저 다가와주는 존재들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이것이 꿈이라면 절대 깨어나지 않길. 전생에 사귀었던 친구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서운해 할지도 모르지만(그것도 상당히), 아무래도 나는 이 세계에 와서 진정으로 나를 위해주는 존재들을 만나게 된 건지도 모른다. ‘ 행복해라, 강지훈. ’ 문득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울고 싶어질 만큼 그리운 느낌이었다. ================================================== 우울한 외전이었습니다~ 아아.. 쓰면서 기분 급 하강. 사실 한편 더 쓰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이걸 쓰다보니 기분이 우울해져서 다음편 내용이 안 떠오르더라는;; (퍽;) 재미없어도 용서해 주세요;; 어쨌든 일일연재 달성! 5일째!! 훗훗훗! 나는 할 수 있다!!=ㅁ=; p.s- 참, 저번 편의 휴센이 자신을 '로리'가 아니라고 지칭한 것은, 꼭 쉐리를 좋아하는 게 로리가 된 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휴센 혼자 그렇게 느낄 뿐이죠; 왜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결혼하면 주위에서 그런게 아니라도 '로리'라고 놀리지 않습니까?^^ㅋㅋ휴센은 그것에 대한 부정을 스스로 하고 있는 것 이라는;; (혼자 땅 파는 타입 이랄까요.. ) .....그리고 생각해 보니 정말 샴페인 용병단엔 제대로 된 사람이 없군요...일단 매튜는 사람이 아니니;;;(쿨럭) => 엘퀴네스의 장-12. 두 번째 소환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나와 이사나가 샴페인 용병단과 함께 동행 하게 된 지도 벌써 한달을 넘어서고 있었다. 처음 출발했을 땐 막 가을의 중반에 접어들 무렵이었는데, 어느새 나무들의 잎사귀마다 색색이 물들어 떨어지고 있는 상태다. 길마다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들이, 한 눈에 보아도 완연한 가을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도착지인 클모어까지는 출발점으로부터 2달간의 거리라고 했으니, 이제 겨우 반을 온 셈인가? 아마도 카웰 후작을 만나게 될 쯤엔 눈이 내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더 이상 한가롭게 날짜를 가늠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앞에 있던 수풀 속에서 무언가 커다란 것이 휘익 솟아 올랐던 것이다. “ 쿠웨에에에에!! ” “ 으악! ” “ 엘-!! ” 벌써 며칠째 듣는 소리이건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괴이한 울음소리에 기겁하는 사이,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트로웰이 나에게 덤벼들던 한 마리의 몬스터를 가볍게 차서 쓰러트렸다. 요즘 들어 나 때문에 저절로 반사 신경이 극에 달하게 된 그였다. 입가에 거품을 물며 꿈틀거리는 고블린의 숨을 완전히 끊어놓은 트로웰은, 놀라서 헉헉거리고 있는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 괜찮아? ” “ 으응. 고마워, 매튜. ” “ 수풀 쪽엔 가까이 가지마. 숨어있는 몬스터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나저나.. 그쪽은 다 해결 됐어요, 헤롤? ” 그러자 다른 쪽에서 열심히 고블린들을 향해 도끼질을 하던 헤롤이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앞에는 목과 몸체가 따로 분리된 몬스터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 어, 우리 쪽은 완벽해! 다른 놈들도 도와주러 갈까? ” 그러나 상큼 시원하다는 듯이 내뱉는 헤롤과는 달리, 쉐리는 들고 있던 검까지 집어 던지며 악을 쓰기 시작했다. “ 에에잇. 난 이제 지쳤어! 이게 대체 몇 번 째냐고오! 아무리 몬스터가 많이 출몰한다고 해도 그렇지.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야? 두 번째 검문소에 다다르기도 전에 지쳐 쓰러지겠다! ” “ 쉐리~ 이왕 쓰러질 거면 내 품안에.. ” “ 이 녀석들과 같이 땅바닥에 뒹굴고 싶은 게 아니면 닥쳐! ” “ 크흑. 너무해.. ” 아무리 마이티가 애걸복걸 해봤자, 이미 휴센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쉐리가 돌아봐줄 리가 없었다. 가녀린 포즈로 울먹이고 있는 마이티를 완전히 무시한 그녀는, 주변에 널려있는 몬스터의 시체를 혐오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옷에 묻은 초록색 점액을 닦아내느라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전투 중에 고블린들의 피가 튄 모양이었다. 첫 번째 검문소를 지난 후부터 행렬을 위협하는 몬스터들의 습격이 점차 잦아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등장하는 몬스터들 마다 현재 있는 용병들 선에서 처리가 가능한 하급 종류였기에 곤란한 지경은 아니었지만, 그 숫자가 워낙 많다 보니 처음엔 신이 나서 날뛰던 헤롤이나 이릴도, 그것이 며칠이나 계속된 요즘에 들어선 상당히 지겨워하는 기색이었다. 지난 시간동안 그들이 처리한 몬스터의 숫자만 꼽아도, 마을하나는 채우고도 남을 것 같으니 말 다한 셈이다. 오죽하면 트로웰이 근처에 드래곤의 레어가 있나보다고 투덜거리겠는가. “ 진짜 독한 놈들이네. 한번 깨졌으면 좀 물러설 줄 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도대체 뭘 볼게 있다고 이렇게 덤벼드는 거야? ” 채찍에 묻은 몬스터의 채액을 털어내면서 이릴이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헤롤이 얼른 되받았다. 전투 중에 쓸데없는 말다툼을 자주하긴 해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땐 손발이 척척 맞는 그들이었다. “ 그러게 말이다. 뭐, 그것도 두 번째 검문을 통과하고 나면 좀 나아진다니까, 조금만 참자고. 어차피 얼마 안 남았어. ” “ 에구구, 그래. 누구 다친 사람은? ” “ 우리 쪽은 없는 것 같은데? 뭐, 신관도 있으니까 알아서 치료하겠지. ” 몬스터의 습격이 계속되자 행렬 안에서도 서서히 부상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카이씨의 절묘한 타이밍에 힘입어(?) 아직까지 사망한 사람은 없었지만, 크게 다쳐서 더 이상 말을 타고 이동하기가 힘든 사람이 꽤 많이 늘어났다. 움직이지 못할 만큼의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대부분 급조한 수레에 실려 가는 신세가 되어 있었다. 일행의 전부가 동패를 가진 샐러드 용병단이나, 그와 비슷한 전력을 가진 칵테일 용병단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심심치 않게 부상자가 생겨나곤 했다. 사방을 포위하고 들어오는 몬스터를 여러 번 상대하다 보니, 미처 방어하지 못한 부분에서 기습공격을 당해 다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제까지의 험한 전투에서 가장 선두에 서 있었으면서도, 스친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샴페인 용병단을 보며 하나같이 질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솔직히 말해, 몬스터를 볼 때보다 더 괴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 중에서도 칵테일 용병단의 단원인, 코웰의 불만이 심했다. “ 쳇. 이건 사기야. 동패와 은패의 차이가 이렇게 심하다니! 어이, 피트? 당신은 은패여도 저 정도는 아니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야? ” 칵테일 용병단은 단장인 피트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모두 동패를 가진 이른 바 ‘삼류용병’에 해당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실력이 일반적인 동패를 가진 다른 용병보다 훨씬 나은 편인데다, 리더인 피트의 통솔력이 뛰어나 일행들 간의 단결력이 좋았던 탓에, 종종 길드로부터 고급의뢰를 받기도 하는 등 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축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그들 스스로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것이 요 며칠 우리들과 동행하게 되면서 산산이 부서지게 된 것이다. 금패를 가진 휴센이라면 모를까, 설마 그들의 단장이 같은 실버급의 패를 가진 이릴 들에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는지 코웰의 표정은 진득한 실망감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러자 단원들 간 반역(?)의 분위기를 읽은 피트는 당황한 표정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 “ 같은 실버급이라 해도 경력에 따라 전투시의 노련함이 다르다네. 자네, 내가 은패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잘 알면서 또 왜 그러나? ” “ 뭐야, 그럼? 저 녀석들은 나랑 나아차이도 별로 나는 것 같지 않은데, 피트보다 훨씬 전에 은패를 받았단 소리야? ” “ 당연하지. 그들 대부분이 10대 중, 후반에 은패를 딴 사람들이라고. 용병길드에서 샴페인 용병단을 모르는 자들은 없어. 단원 전부가 실버급인 용병단이 어디 그리 흔한 줄 알아? ” “ 10대 중, 후반? 진짜 괴물들 이었잖아. ” 상당히 불쾌하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감탄을 잃지 않은 표정으로 우리 쪽을 바라보는 코웰의 눈동자는, 자신보다 뛰어난 동년배를 향한 질투와 호승심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당장 검을 꼬나쥐고 결투를 신청하려 들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한두 번 겪어보는 일이 아닌 듯, 일행의 누구도 그런 모습에 대해 발끈하거나 상대해주려는 의사는 없어보였다. 오히려 귀찮다는 표정이랄까? 피곤한 얼굴로 코웰쪽을 바라보던 헤롤은 일행들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 늦게 용병 질 하는 놈들은 저래서 싫다니까? 꼭 주제도 모르고 덤비려고 하지. ” “ 킥킥. 내버려 둬. 어차피 진짜 덤비지도 못할걸? 사용하는 무기부터가 다르잖아. 시작도 하기 전에 내 채찍에 갈라지고 말 거라고. ” “ 다음에 몬스터 만나면 그냥 몇 번 맞아줄까? 원, 살벌해서 살수가 있나. ” “ 아서라. 눈 먼 망치에 맞아 세상 하직할 일 있어? 괜히 만용 부리다가 바로 골로 가는 수가 있다고. ” 이릴의 따끔한 일침에 마이티는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아무리 갖은 말로 시비를 거는 사이라 해도, 일단 옳은 말을 들었을 땐 꼬투리를 잡지 않는 다는 룰이 있는 것 같았다. 허물없는 사이에도 상대방에 대한 예우는 확실하게 지켜주는 사람들이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전투현장에서 멀어진 곳에 혼자 멀뚱히 서있던 이사나를 발견하고 다가갔다. 얼마 전에 소환한 운디네로 인해 현재 일행들에게 물의 중급 정령사로 알려진 녀석은, 실제적인 전투에 참여할 능력은 되었으나, 귀여운 것에 약한 이릴의 고질병 때문에 빈번히 이런 식으로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사나로서는 못내 불만인 듯 했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황제로서 일행을 독려하며 전투를 이끌어 가기는커녕, 나약한 입장이 되어 보호받는 상황에 처한 다는 것이 그리 달갑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엔 검이라도 써볼까 궁리했던 모양이지만, 어릴 때부터 받아온 황실의 검법이 너무 정직하게 배어있는 바람에, 정체를 들킬 위험성이 크다는 트로웰의 판정을 받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는 전투에 직접 나서려고 하기 보단, 다른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유심히 지켜봐 두는 듯 했다. 웬만큼 노련한 검사들은 다른 사람의 전투를 관망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실력 향상에 도움을 받는다고 들었다. 이사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보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 라이, 어디 다친 곳은 없어? ” “ 응. 난 여기서 구경만 하고 있었을 뿐인 걸? 솔직히 온몸이 근질근질 할 정도야. 기사수업을 받았을 땐, 검을 쓰는 게 이렇게 멋지다는 걸 몰랐거든. 앞으론 나도 분발해야겠어. ” “ 그래, 그래. 후작을 만나고 나면 남들 시선 의식하지 않고 열심히 검을 쓸 수 있을 테니 괜찮을 거야. 그 전까진 정령을 다루는 수업에 집중하자. 시큐엘을 다룰 수 있게 되면, 이릴 옆에서도 정령을 불러낼 수 있으니까. ” “ 응? 그럼 시큐엘은 귀여운 편이 아니야?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이사나의 말에 나는 순간 시큐엘이 귀엽던가..하고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물론 내 눈에는 그저 귀엽게 보이긴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녀석은 한 마리의 용맹한 늑대의 모습에 가까웠다. 풍성하게 휘날리는 갈기와 사납게 치켜뜬 눈동자, 뾰족한 송곳니를 보고 귀엽다고 할 사람은 없으리라. 때문에 나는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이 가볍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 귀엽다기 보단, 멋있게 생겼어. 늑대의 모습이거든. 말수도 그다지 많지 않고 꽤 도도한 편이야. ” “ 와아, 늑대? 빨리 만나보고 싶다. 열심히 연습할게, 엘. ” “ 그래, 힘내. 지금 같은 속도면 분명 조만간에 소환에 성공할 수 있을 거야. ” 내가 옆에서 도와준 덕분인지 몰라도 이사나의 정령술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었다. 처음 운디네를 한명 불러놓고 허덕이던 것과 달리, 이제 와서는 3명까지도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정도다. 시큐엘의 소환은 말 그대로 시간문제인 셈. 그런데도 정작 동료들에게 물을 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어째 이사나를 위해서라도 샴페인 용변단원 들과는 빨리 헤어져야 할지 싶다. 나로선 트로웰과 떨어지는 것이 그다지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종종 만날 수 있을 테니 크게 서운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그의 유희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마저 들고 있었다. “ 역시..그때 휴센의 호의를 무시하는 게 더 나았을지도.. ” 아무리 가족 같은 친구사이라 해도 배려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나의 등장 때문에 트로웰이 활동에 지장을 받는다면 곤란했다. 저번만 하더라도 내 실수로 그의 정체가 들킬 뻔 하지 않았던가. 정말이지 갈수록 한심해 지는 기분이었다. 전투를 마친 일행들이 잠시 숨을 돌리는 사이,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여러 가지의 생각으로 복잡한 머리를 정리하던 나는 행렬의 한 구석에서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는 카이씨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마도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듯, 재빠르게 움직이는 손길에선, 여유 있는 표정과 달리 다급함이 묻어져 있었다. 간간히 상처부위에 닿는 손위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 헤에. 저게 신성력인가? ’ 언뜻 보기엔 내가 치료 술을 행할 때 나오는 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 인간 세상에 와서 치료 술을 행했을 때, 놀라던 알렉들이 나를 신관으로 오해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정도다. 신기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 도움이 될 것 이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사람이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는지 바쁜 와중에도 돌아본 카이씨는 나와 눈을 마주치곤 의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 어라? 엘, 당신이 여긴 왜..? ” “ 혼자서 바쁘신 것 같아서요, 제가 뭔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이래봬도 심부름은 꽤 잘하는데. ” “ 옷에 피가 튈 텐데요. 게다가 생각보다 심하게 다친 사람도 많아서, 보시기에 끔찍할 수도 있습니다만. ” “ 괜찮아요. 요 며칠 몬스터들의 시체를 하도 많이 봤더니, 이제 어지간한 상처는 아무렇지 않을 정도니까요. 환자가 많은데 카이씨 혼자 하시긴 힘들잖아요? 뭐부터 도와드릴까요? ” 나의 쌈박한 대답에 카이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어보였다. 일단 예의상 한번 만류해 보려던 것이었을 뿐, 실제로는 한 손이라도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는 내게 깨끗한 천과 물을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한 뒤, 그 자신은 팔이 부러진 남자의 부목을 고정시키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것이 완성되자, 그 위에 일정양의 신성력을 붓는 것이다. 처음엔 잠시 뼈를 고정시키기 위해 부목을 했나보다 생각했던 나는, 그가 신성력을 쓰고도 여전히 그대로 내버려 두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다 나은 게 아닌 건가? “ 저어, 카이씨. 신성력을 쓰면 완치가 되는 게 아닌가요? 그런데 왜 부목을 계속.. ” “ 아아. 능력을 조금만 부었기 때문입니다. 환자가 많아서 많은 양의 신성력을 한 사람에게 집중 시킬 수가 없거든요. 자체치유력도 높일 겸, 약간의 상태호전만 시키고 있는 상황입니다. ” “ 하긴, 혼자서 많은 환자들을 상대하시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신관도 꽤 요령이 필요한 직업이군요. ” 납득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자 그는 단정한 입매 끝을 살짝 들어올렸다. 내 대답이 재미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직업이라. 하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그것도 꽤 골치 아픈 직업이랍니다. 더구나 제가 소속된 신전 같은 경우는, 어둠계열이면서도 치료능력을 행할 수 있어서 곤란하달까요. 사실 형벌의 신을 모시는 사제가 사람을 치료하러 다니는 게 평범해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 “ 흐음, 저는 상관없다고 보는데. 형벌이라는 게 그 종류가 다양하지 않나요? 신체의 고통만 주는 것이 형벌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자체가 형벌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한 사람이 살아있음으로서 그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형벌이 될 수 있지요. 그것을 위해서면 치유술이 있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엘뤼엔의 사제들이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건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 “ ....! 호오, 그렇군요. 그런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는걸요? 그러고 보니 엘은 엘뤼엔님의 사제가 되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신다고 하셨지요. 이거 기대가 되는 걸요? ” “ .....? ” 도대체 무슨 기대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얼핏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는 다시 생긋 웃어보였다. 그리곤 내가 궁금해 하고 있는 그의 말에 대해 정확한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 비교적 형벌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혹시 당신이라면 엘뤼엔님의 음성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거, 가까운 시일 내에 제 후배가 되실 지도 모르겠는데요? ” “ 아하하...그, 그럴까요? 그럼 저야 영광이죠. ” ....하지만 과연 엘뤼엔을 만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는 걸요. 아니, 만난다 하더라도 그가 순순히 협조해 줄 거란 보장도 없어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뒷말을 삼키며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그것을 단지 쑥스러워한다고 오해한 카이 씨가 가능성이 충분하니 자신감을 가지라는 말을 이었지만 별 다른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때문에 격려해줘서 감사하다는, 예의상의 답변만 짧게 늘어놨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이런저런 대화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는 것과 그것을 도와주는 일에만 전념했다. 대개 피가 흐르는 상처 부위를 간단히 씻어내고 지혈을 시키고 나면 카이 씨가 다가와 신성력을 부어주는 식이었다. 그러고 나면 붕대와 비슷한 느낌의 하얀 천으로 상처부위를 감아두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정도의 처치로도 괜찮은 상태였지만, 몇몇은 카이 씨가 탈진할 정도의 신성력을 붓고도 그다지 호전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내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사람이었는데, 당장 죽지 않은 것만도 신기해 보일 정도였다. 마음 같아서는 카이 씨 몰래 치유 술을 시전하고 싶었지만, 신의 문장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치유 술을 시전하면 단번에 정체를 의심 당한다는 트로웰의 충고를 떠올리고 간신히 참았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현재 나와 아는 사이로 알려진 트로웰까지 휘말리게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치료할 사람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조금 든 다는 것 뿐,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무사히 깨끗하게 회복될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밀려오는 양심의 가책을 외면하며 끝까지 치료를 보조하는 선에서 그치고 말았다. 유희라는 것.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 일일연재 6일째~ 냐하! -_-b [척] 음 저번 편에서 *^^* 님이 질문해주신것에 대한 답인데요, 엘은 분명 지구에서는 '운명'이 없는 아이로, 가족의 운명안에 지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친구사이는 조금 다르답니다. 엘은 우선 영혼이 정령왕이니까, 자연의 성질(그것도 물)을 띄고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본능을 따르지요. 그래서 친구복이 좋았던 겁니다^^; 하지만 가족의 경우는 일종의 핏줄이 이어진 '천륜'의 인연에 반하므로 민감하게 굴었던 거라는..;; 엘이 가족을 멀리할 수 없었던 이유도 그 '핏줄'때문이었지요. 결국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것을 증명하는 외전이 되겠습니다;;(뭔가 말이 안됌;) 생각보다 외전의 반응이 좋아서 당황했습니다, 후후후. 글솜씨가 나날이 좋아진다는 과한 칭찬을 들어서 정말 기뻤다는^^** 모두 좋은 주말 보내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 덕분에 치료가 훨씬 수월해 졌네요. 고마웠습니다, 엘. ” “ 뭘요. 앞으로도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제가 이런 식으로라도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쁘네요. ” 부상자들의 상처를 거의 돌보고 나자 어느새 해가 질 무렵이 되었다. 그때 마침 사방에 깔려진 몬스터들의 시체를 피해, 조금 더 앞으로 이동한 다음 야영지를 정한다는 소리를 들은 나는, 얼른 카이 씨를 일별하고 일행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러자 처음엔 반갑게 맞아주던 트로웰이 갑자기 얼굴을 찌푸리더니 나의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쭈욱 흩어보는 것이었다. 뭐가 묻었나? 왜 그러지?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보니, 카이 씨의 충고를 무시했던 대가인지 옷의 여기저기에 보기 흉할 정도의 핏자국이 묻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흘렸을 리는 없으니, 아마 부상자를 치료하는 중에 묻은 모양이었다. 그 차림 하나만으로 트로웰은 내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왔는지 단번에 유추해냈다. “ 어디 갔나 했더니.. 부상자들 치료해 주고 있었어? ” “ 아, 응. 그렇지만 치료 술은 안 썼으니까 걱정 마, 매튜. 좀 지저분하지? 금방 갈아입을 게. ” 하지만 정작 트로웰이 불쾌해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는 사람들 몰래 옷차림을 바꾸고 있는 나를 보며 지나가듯 한 마디 중얼거렸다. “ ...흐음. 나는 엘이 인간의 심부름 따위 하는 것, 마음에 안 들어. ” “ 응?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꼭 토라진 것처럼 얼굴을 잔뜩 부풀리고 있었다. 항상 자상한 미소만 짓는 모습밖에 보지 못해서 그런지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랄까? 이제야 겨우 어려보이는 겉모습과 행동이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당황했을 상황임에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 나왔다. “ 쿡쿡. 화났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는걸. 카이 씨 혼자 하기는 힘들어 보였단 말이야. ” “ 그건 그 사람이 감당해야 할 수련의 인고야. 엘 까지 고생하는 거 내키지 않아. ” “ 흐음.. 원래 유희를 할 때는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어야 하는 거 아니야? 편하게 살기 위해서라면 그냥 정령계에 눌러 있는 게 나을 걸? 난 괜찮으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매튜. ” 여전히 못 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트로웰에게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말하자, 그는 무언가 생각하듯 잠시 미간을 좁혔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네 말이 맞아, 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던 것 같아, 미안해. 이상하게 너한테는 자꾸 사과할 일만 생기네. ” “ 에에? 난 전혀 아무렇지 않아. 매튜가 얼마나 날 생각해 주는지 알고 있는 걸? 아, 그래! 전에 우리 가족이라고 했었지? 그러니까, 고맙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처럼, 미안하다는 말도 하지 않아도 돼. ” “ 쿡쿡. 그래, 알았어. 내가졌어. ” 그렇게 대답한 트로웰은 항복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쩐지.. 아마 이후로도 내가 그에게 질 일은 평생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항상 어떤 일에든 그가 먼저 손을 들어버리고 말 테니까. 내가 정령왕 중 가장 막내라고 봐주는 건지, 아니면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인지, 트로웰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나에 대해 관대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이 고마우면서도 또 한없이 미안해지는 나였다. “ 참, 혹시 몰라서 미리 말해두는 건데 말이야, 엘. ” “ 응? ” 무슨 일인지 갑자기 정색을 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 또한 덩달아 긴장한 얼굴이 되어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하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지, 정령어를 사용하여 그의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달했다. - 갑자기 일행들과 떨어지는 일이 생겼을 때는, 당황하지 말고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 어? 그게 무슨 소리야? - 아니, 내가 바로 찾아갈 수는 있겠지만 혹시 몰라서 말해두는 거야. 일행과 떨어지게 되면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그럼 이사나가 다시 너를 부를 거야. 계약자의 소환은 정령계에 있어야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지니까 침착하게 행동해야 해. 알았지? - 설마 그건 예언? 당황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자 트로웰은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마도 가까운 미래에, 내가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는 모종의 사건이 벌어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그가 느꼈던, ‘불온한 기운의 정체가 곧 밝혀진다’는 것에 은근히 속으로 걱정하고 있었던 나는, 이번 충고가 그것과 연관이 없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일행들에게서 떨어져 혼자가 될 상황이 다가올 거란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트로웰은 곧바로 안색을 바로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를 전해왔지만, 생각처럼 쉽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 후 약간의 이동 뒤에 노숙할 만한 적당한 공터를 찾은 행렬은, 부랴부랴 저녁식사 준비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함께 동행 하는 사이라곤 해도 크게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기에, 식사준비는 각 단원들끼리 따로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메뉴도 단 마다 크게 달랐는데, 간단한 건량과 물 한잔으로 끼니를 때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식으로 스튜도 끓이고 베이컨을 구워 제대로 된 식사를 마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샴페인 용병단이 그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일단 일행 중 여자가 두 명이나 있어서 인지, 먹을 것, 입을 것을 챙기는 것이 다른 용병단에 비해 꼼꼼했던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매 끼니의 식사시간만 되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말 그대로 보통의 인간들에게나 해당하는 것이지, 나나 트로웰 같은 경우는 오히려 곤란하달까? 음식을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란 게 생각보다 훨씬 불편해서, 음료수 하나 마시는 것도 느낌이 상당히 이상했던 것이다. 꼭 배터지게 먹어 소화가 안 되는 상황인데도, 억지로 입안에 먹을 것을 우겨넣는 기분이었다. 입맛이 없다고 거절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계속 음식을 안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때문에 내게는 식사시간이 고문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지난번 쉐리에게 ‘트로웰’의 이름을 부른 것을 들킨 이후로는 매사의 행동에 조심을 더 하느라, 억지로라도 음식을 흘려 넣고 있었기에 그런 기분은 더 했다. 그래서 가끔은 트로웰의 도움을 받아 몰래 먹는 척하면서 음식을 땅에 묻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애써 식사를 준비해주는 일행들에게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자, 여기 엘 몫의 스튜야. 엘은 적게 먹으니까 많이 담지 않았어. 괜찮지? ” “ 아, 예. 고마워요 이릴. ” “ 에? 너무 적게 준거 아니야? 한창 자랄 시기인데 그것 가지고 되겠어? ” 내가 얼른 이릴이 건네주는 스튜그릇을 받자,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헤롤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투덜거림은 어김없이 이번에도 음료수만 마시는 트로웰 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매튜, 너도 누누이 말하는 거지만, 좀더 많이 먹어두지 않으면 안돼. 간식 따윈 아무리 많이 먹어도 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식사를 제대로 해야지, 식사를. ” “ 후훗, 알았어요, 헤롤. 다음부턴 제대로 챙겨 먹을 테니 오늘은 좀 봐줘요. 사실 어릴 때부터 이렇게 먹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이 버티질 못해요. ” “ 대체 무슨 놈의 집이.. 휴우. 아니, 아니다. 맛있게 먹어라. ” 아마도 그는 트로웰이 설정해 놓은 ‘매튜’의 어린시절에 대한 설명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귀족가의 하인으로 자라, 모진 학대를 받았다는 매튜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었을 리가 없다는 것에 공감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를 바라보는 눈빛엔 측은함과 동정심이 어우러져 있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이릴이 버릇처럼 한마디 참견하고 들어왔다. “ 왜 남의 식습관을 가지고 따지고 그래? 알아서 잘 챙겨 먹는 다잖아. 매튜가 적게 먹는다고 팀워크에 불리한 행동을 한 적이 있어? 쓸데없는 참견은 오히려 독이야, 헤롤. ” “ 쳇, 알았어. ” 퉁명스럽게 대답한 헤롤이었지만 식사는 별 탈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역시 음식을 다 넘기지 못하고 땅의 정령을 빌려 남겨진 양을 바닥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제길,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가 바로 먹는 것이라는데. 이 아까운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서 그냥 버려야 하다니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내 대신 음식을 먹어줄 애완동물이라도 한 마리 키워야 할 것 같았다. 그 날 저녁, 나는 이상 하리 만치 불안한 기분에 휩싸여 쉽사리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어차피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실생활엔 전혀 무리가 없었으므로, 다음 일정에 지장을 줄 일은 없겠지만 버릇이 되어서인지 상당히 찝찝한 느낌이다. 잠시 동안 이 불안한 마음의 정체를 고민하던 나는, 잠을 못이루는 이유가 오늘 들었던 트로웰의 충고 때문이란 것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벌써부터 걱정 삼매경이라니, 정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난 너무 소심한 성격인 것 같다. 누운 자세에서 눈만 뜬 상태로 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그대로 눈동자를 굴려 옆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오늘 불침번을 맡은 샐러드 용병단의 몇몇이 모닥불 근처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그 주위로 깊게 잠든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요 며칠 계속 된 전투로 몸이 남아나질 않을 테니 하루라도 푸욱 자두는 편이 피로회복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신의 문장을 받았으면 이럴 때 피로회복을 위한 치유술을 시전해 줄 수도 있을 텐데. 정체를 숨긴 정령왕, 그것도 유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생 초보 정령왕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 같다. 확실히 일행에게나 트로웰에게나 내 존재는 민폐 이상이 될 수 없었다. “ 그나저나.. 일행과 떨어지게 되는 사건이라니,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진 다는 걸까.. ”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나는 멍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머릿속에서는 별의 별 상상이 다 떠오르고 있었다. 설마 납치라도 당하게 되는 건가? 아니, 그런 경우라면 옆에서 트로웰이 가만히 보고 있을 리가 없는데, 대체 무슨 수로 나를 일행들과 따돌리게 만든 다는 거지? 생각이 더해질수록 잠은 점점 더 오지 않았다. 결국 버티다 못한 나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억지로 누워있느니 차라리 주변을 돌아다니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개운해질 것 같아서였다. 앉아 있던 자세에서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문득 모닥불 근처에 앉아있던 샐러드 용병단들에게 시선을 미치고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모두 지난 시간동안 얼굴을 익혀놨던 사이였기에 말을 걸때 머뭇거릴 필요는 없었다. “ 수고하시네요. 힘드시죠? ” “ 엇-? 엘? 안 자고 왜 이곳에.. ” “ 아, 오늘따라 잠이 안 와서요. 저, 잠시 여기에 앉아도 되죠? ” “ 그럼, 물론이지. 앉아. ” 얼른 서로의 옆을 가리키며 앉으라는 말에 나는 짧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자리에 앉았다.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장작의 소리가 듣기 좋았다. 복잡한 속이 한결 가라앉는 기분이랄까. 처음에 잠깐 대화를 나눈 이후로 내가 계속 물끄러미 장작만 바라보고 있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여러 가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 무슨 일 있었어? 설마 단원들끼리 싸운 거야? 아니면 무섭게 대한다거나..” “ 에? 그런 거 아니 예요. 모두 얼마나 친절한데요. ” “ 헤에, 그래? 나는 그 이릴인가 하는 누님이 채찍 휘두르는 모습 볼 때마다 소름이 끼치던데. 절대 친절하다고는 상상이 안가. ” “ 나도, 나도. 헤롤 형님의 도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그렇게 잔인하게 몬스터를 죽이는 사람은 처음 봤다니까? ” 그들은 모두 샴페인 용병단들 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지만, 일행들을 향해 극존칭을 사용하는 것을 전혀 어색해 하지 않았다. 그중 한사람은 꼬박꼬박 이름마다 ‘님’이라는 호칭을 붙여 부를 정도였다. “ 어디 누님뿐이냐. 다른 분들은 어떻고? 전투 시엔 절대 인간으로 볼 수가 없다니까? 아, 그러고 보니 엘, 너는 매튜님이랑 친하지? 그분은 어때? 소문으로는 굉장히 냉담한 성격이라던데 말이야. ” “ 하하, 매튜님이라.. 글쎄요. 그다지 냉정한건 모르겠는데. 저하곤 예전부터 친했던 사이라 아주 상냥해요. ” “ 헤에, 그래? 좋겠다. 나도 그 분과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말이지. 싸울 때 봤어? 그 아름다운 움직임이라니!! 용병이라는 게 절로 아까울 정도라니까? 뭐, 내년엔 금패를 받는다고 하시지만 말이야. ” 아마도 트로웰의 추종자인 듯.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며 잔뜩 흥분한 모습에 나는 어설픈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몰랐던 사실이었지만, 그들은 이번 행렬에 동참하면서 샴페인 용병단들을 거의 우상화 취급하고 있는 것 같았다. 워낙 길드 내에서 칭찬이 자자한 단이라 평소에도 관심을 가졌던 모양이었는데, 직접 가까이에서 그 실력을 확인하고 나서는 완전히 팬이 되 버린 것이다. 나처럼 아무 능력이 없는 사람이 임시라는 패를 걸고, 샴페인의 이름에 끼어있는 것을 불쾌해 하지 않는 것이 다 신기할 정도였다. 무심코 목에 걸고 있던 임시 용병패를 만지작거리자, 옆에 있던 사람이 퍼뜩 떠올랐다는 듯이 질문을 건네 왔다. “ 그러고 보니 엘 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대로 길드에 가서 실력을 검증받고 정식 패를 발급 받는 건가? ” “ 호오. 그 라이라는 친구는 정령사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은패일걸? 희귀한 능력이니까 길드에서도 크게 대우해 줄 거야. 근데 엘 너는 별 다른 능력 없지? 에에, 샴페인에도 드디어 동패를 가진 용병이 생기겠네?” 악의 없는 말이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일행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무거워져 있던 내게는 꽤나 치명적인 말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토라진 표정을 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쳇. 그래요, 뭐. 저 아무런 능력도 없어요오. ” “ 어라? 삐진 거야? 노..농담이었어. 계집애처럼 뭘 그런 거에 다 삐지고 그러냐? ” “ 아, 제길. 귀엽다. 그냥 놔둬라. 삐진 것도 어울리는 사람이 하면 그저 예쁜 법이다. 엘, 너는 미인계 하나로 은패를 딸 수 있을 거야. 절대 좌절하지 마라. ” “ ...... ” 젠장. 이놈의 얼굴은 화내는 것도 상대방한테 제대로 전달을 못한단 말인가. 토라지는 것도 상대방의 반응이 있어야 할 맛이 나는 법이다.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순순히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들이 현재 착각하고 있는 한가지의 사실을 정정하는 말을 덧붙였다. “ 라이랑 저는 클모어에 도착하게 되면 단에서 탈퇴할거예요. 어차피 가는 방향이 맞아 임시로 동행한 것뿐이거든요. 정식으로 용병이 될 생각은 없어요. ” “ 에에? 정말? 그럼 뭘 할 생각인데? ” “ 글쎄요.. 희망사항으로는 현재까지 신관이랄까.. ” “ 엑? 신관?? ”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그러면서도 뭔가 어울린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근데 카이 씨 말로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서 신성력을 가지긴 불가능 할 거래요. 뭐, 설마 이 넓은 세상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없겠어요? 어떻게든 되겠죠. ” “ 흐음.. 신관이라.. 조금 의외인 걸? 하지만 어울려. 특히 빛과 사랑의 여신인 헤레미스님의 사제라고 하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거다. ” “ 헤레미스? ”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이름에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 아아. 카터스 제국의 국교신인데, 그곳 신전의 신관들은 모두 기가 막힌 미인들이거든. 얼마 전에 의뢰 때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정말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지. 하지만, 엘 너에 비하면 그리 예쁘다는 걸 못 느끼겠다니까? 남자주제에 너무 미인으로 태어난 것 아니냐, 너? ” “ ......사실은 저도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 ” “ 응? 뭐가? ” “ 아니, 아무것도 아니 예요. ” 내 정체가 정령왕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내가 여성체가 아닌지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 사람들이라면 ‘내가 사실 여자였다’- 라고 밝혀도 전혀 의심 없이 믿어줄 것만 같아 더더욱 입을 뗄 수가 없었다. 비참한 심정으로 고개를 수그리자 문득 생각났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미인 하니까 생각나는 건데 말이야. 샴페인용병단과 클모어에서 헤어진댔지? 거기에선 각별히 조심해라. 후드라도 써서 얼굴을 가리고 다니도록 해. ” “ 네? 왜요? ” “ 왜긴. 대공의 기사들이 지천에 깔려 있다잖아? 근데 그 놈의 대공이란 작자가 미소년들을 좋아한다는 말이 있어서 말이야. 괜히 눈에 띄었다간 바로 잡혀갈지도 몰라. 아니, 이건 단지 소문일 뿐이지만 말이야. ” “... 쿨럭. ” 맙소사. 형의 죽음에 일조하고(확실한건 아니지만) 친 조카를 쫓아내는 걸로 모자라, 이젠 변태적인 취미까지? 뭐 그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어?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소문의 일부랍시고 가르쳐 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 안색은 급격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 이미 상당수의 소년들이 대공에게 바쳐졌다지? 밤마다 침실에서 신음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린다잖아. 채찍은 기본이고, 뜨거운 기름까지 붓는다는 거야. 그래도 절대 얼굴은 안 건드린다더라. ” “ 소년들뿐이야? 계집 중에서도 이쁘장한 것들은 진즉에 바쳐졌다고. 18세 이하의 것들만 모아놓은 할렘이란 소리도 있다던데, 뭘. 설마 전혀 근거도 없는데 헛소문이 돌았겠어? 이미 섭정 왕이 되기 전부터 그렇고 그랬다는 거야. 마신교의 신관장이라고 해봤자, 어차피 정조나 신성과는 관계가 없으니까 제 하고 싶은 일 다 한 셈이지. ” “ 오죽하면 이사나 황제가 도망친 이유가 그 자식이 찝쩍거려서라는 말이 다 있겠어? 크하하. ” “ ..... ” 그들로서는 시간 때우기 용 심심풀이 대화였을지는 몰라도 듣고 있는 나는 그야말로 아득한 심정이었다. 당장 클모어에 도착하게 되면 후작과 결탁하여 대적하게 될 상대가 대공이 아니던가. 하필이면 그런 변태 같은 자식이랑 만나야 하다니, 대체 내 팔자는 왜 이리 기구한거야! 내가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겁이라도 먹은 건줄 알았는지 그때부터 열심히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는 겉모습만 봐선 어느 대단한 귀족가문의 도련님이라고 봐도 모자람이 없으니, 제 아무리 대공의 기사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건드리진 못할 거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아무리 들어도 그다지 위로가 되지 않는 것이.. 머리를 식히러 왔다가 오히려 더욱 찝찝한 심정만 떠안은 기분이었다. 내가 일행과 떨어지게 되는 불온한 기운의 정체가 대공이 아니기 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고 있었달까? ============================================== 후후후..아슬아슬한 일일연재!(현재시간 11시 50분!) 어쨌든 7일 째 업! 크흑. 시간 맞춰서 급하게 올리느라 수정을 제대로 못했어요.. 간간히 어설픈 표현이나 중복된 문장이 있더라도 이해해 주세요..ㅠ_ㅠ;; 이왕이면 재밌게 봐주셨으면 좋겠지만서도...(쿨럭) 음. 찜한녀석 2부는 현재 구상중입니다. 쓰고는 있는데 언제 올릴지는 몰라요; 1편보다 재밌다는 장담도 못하고요, 주인공이 멋지다는 장담도 못해요....(털썩)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땅을 파는 내 상태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는지, 이후로는 누구도 대공에 관한 소문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마땅히 이어나갈 다른 화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적막해 졌고, 그것이 또 나 때문에 벌어진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던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위험하다는 만류가 잠깐 있긴 했지만, 근처만 돌아다닌다는 말로 안심시킨 뒤였다. “ 추운데 모포 덮고 계세요. 이제 겨울이 다 되 서인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까요. ” “ 아아. 그렇군, 곧 포악한 성자가 이곳을 행차하시겠더구나. 엘, 너야말로 옷을 따뜻하게 입고 다녀. 그러다 성자가 그 얼음 창을 지면에 꽃아 넣기도 전에 감기에 걸리겠다. ” “ 아하하.. 네, 그럴게요. ” 여전히 적응 안 되는 시(X)적인 계절 표현에,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뭐, 이것도 그들 나름대로 재밌다 면 재미있는 놀이인가. 오죽 할 게 없으면 말 유희 따위를 즐기겠는가 싶어 탓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고 있는 사람들을 피해 으슥한 숲 쪽으로 다가서자 가을 특유의 진한 흙냄새가 화악 풍겨왔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타고 저만치 흘러가고 있었다. 정령의 몸이란 건 내 생각보다 훨씬 신기해서, 인간의 육체를 가졌을 때처럼 춥다, 덥다의 느낌은 없지만, 공기 중에 포함된 온도의 높낮이는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처음 인간 세상에 나왔을 때 느꼈던 공기와 현재의 공기는 그 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다. 뭐, 굳이 그런 게 아니라도 이전에는 가끔씩만 보이던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이, 요즘 들어 유달리 많이 보이는걸 봐서도 계절이 변해간다는 느낌은 피하기 어려웠지만 말이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물의 정령들은 날이 갈수록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공기 중에 포함된 수분이 점점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나 까지 괜히 몸이 노곤해 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청명한 가을하늘은 저녁에도 그 고아한 색을 절대 잃지 않았다. 한국에서 보았던 하늘과는 전혀 다른, 수십 수 만개의 빛 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검은 밤하늘을 바라보던 나는, 순간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아 눈을 작게 깜빡거렸다. 하지만 돌아본 곳에는 아무도 없었고, 저편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깨어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하늘을 보던 것을 계속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좀더 확실한 느낌으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퀴네스..> “ ......응? 누구? ” 무심결에 대답하긴 했지만 속으로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 본명을 알고 있는 이는 쉐리와 트로웰, 그리고 이사나 뿐이다. 하지만 들려온 소리는 셋 중의 누구의 목소리와도 닮은 것이 아니었다. 설마 정령들이 부르는 건가 생각했지만, 언제나 왕으로서 극존칭을 사용하는 그들이 달랑 이름만 부를 리는 없을 거란 생각에 곧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또한 여자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인 미네르바나 이프리트 역시 제외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이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소리다. 당황한 표정으로 정신을 집중하자, 아까보다 더욱 선명해진 목소리가 다시 귓가를 울리기 시작했다. 소름끼치도록 낮은, 그럼에도 가슴이 두근거릴 듯한 묘한 달콤함을 담은 미성이었다. 소년이라고 하기엔 성숙했고, 어른이라고 치기엔 약간 가벼운 느낌을 담고 있었다. < 엘퀴네스. > “ 윽.. 뭐, 뭐야. 이거.. 설마 귀신? ” 목소리 자체는 훌륭했지만, 나를 부르는 소리엔 뭔가 설명하기 힘든 명령적인 태도가 섞여있었다. 내가 돌아봐주길 바래서 부르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부르면 당연히 돌아봐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부르는 목소리랄까? 괜시리 반항심이 생겨서 작게 투덜거리자 부르는 소리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 이 쪽으로 와, 엘퀴네스. 내게로.. > “ 뭐..? 어딘지 알아야 갈 것.. ” < 너는 나의 소유다. 누구에게도 줄 수 없어. 거부하지 말고 이쪽으로 와, 내게로. > “ 으윽!! ..뭐....뭐야, 이 자식! ” 낯 뜨겁게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야! 그런 말을 하려면 우선 얼굴부터 보이란 말이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놈이 아닌가. 불렀으면 자신의 정체 또한 밝히는 게 예의 아니야? 이게 무슨 이사나 때처럼 소환되는 것도 아니고, 목소리만 들리면 어쩌자는.. ‘ 잠깐! 소..소환? ’ 그제 서야 퍼뜩 스치는 생각에 나는 그대로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이 느낌은 분명히 나를 부르는 소환의 목소리다. 그런데 어째서? 이미 계약된 상태의 정령은 다른 사람에겐 소환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전개에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순간, 내 앞에는 어느새 이전에도 한번 보았었던 소환 마법진이 펼쳐지고 있었다. 허공을 잠식하는 눈부신 금빛의 무늬가 당장이라도 나를 삼킬 듯이 일렁거렸다. 당황한 나는 혹시 누가 이 장면을 보고 있지 않나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다. “ 뭐, 뭐랄까. 일단은 가봐야 하는 거겠지? 일이 어떻게 된 건지도 알아봐야 하고.. ” 설마 트로웰이 말했던 일행과 떨어지게 되는 사건이란 게 바로 이것이었던 건가? 이사나가 아닌, 제 2의 인물에 의한 소환? 과연, 그렇다면 당연히 일행들하고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누가 부르는 건지 몰라도 일단 이 근처에 있는 사람이 소환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혹시 나에게 보이는 누군가의 지나칠 정도의 관심이라는 것도 이것과 관계된 걸까? 정령왕을 소환하려고 마음먹은 누군가가 생겼다는 소리? 복잡한 표정으로 마법진을 바라보고 있자 재촉하는 듯이 아까의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한테만 들려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자고 있는 사람들 전부를 다 깨우고도 남을 정도의 큰 소리였다. < 엘퀴네스! 거부하지 말고 와라! > “ .....젠장, 누군지 진짜 건방지네. 간다, 가! 간다고! ” 똑같은 소환인데 어째 이렇게 이사나에 비해 예쁜 곳이 없는지. 그 녀석은 애절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하듯이 불렀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나는 이사나 외에 다른 존재와 계약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가자마자 거부하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때문에 걱정되던 처음과 달리 마음이 느긋해지기 시작했다. 결심을 굳힌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천천히 한 손을 내밀어 마법진위에 갖다 대었다. 그러자 이전에 겪은 것과 똑같은, 우악스러운 힘이 나를 끌어당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으며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그대로 입술을 악물었다. 제기랄. 이 추락하는 느낌을 또 받게 하다니! 누군지 만나기만 해봐라! 가자마자 한대 때려 줄 테다!! 두 번째라서인지 이번엔 처음 소환 때처럼 갑작스런 공간의 이동에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다. 마법진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널따란 호수와, 그 앞에 펼쳐진 나무숲이 드러났다. 달빛에 반사되는 물의 느낌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금방 돌아갈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얼른 소환자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나로선 무척이나 당황스럽게도, 이번 소환자는 이사나 때처럼 기절해 있을 것이란 생각과 달리, 안색하나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는 나보다 한 두 살 쯤 위일까? 허리까지 흐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런 장식 없이 늘어뜨린 그는, 오랫동안 운동을 했는지 근육이 보기 좋게 잡힌 날씬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가을이라 쌀쌀할 텐데도 어깨의 소매가 없는 가벼운 차림인데다, 그 흔한 망토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다. 단정한 이목구비는 마치 조각 같은 느낌이라, 솔직히 아주 조금 과하게 말하면 엘뤼엔보다 더 잘생긴 것 같았다. 숨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이지만 않았다면, 사람 크기 만 한 인형이 앉아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머리카락보다 더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약간 미간을 좁힌 그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정말 엘퀴네스 맞아? ” “ .....부른 사람이 그렇게 물어보면 나야 할말이 없습니다만. ” 나보다 연상이란 느낌이 그런지 절로 존대 말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그는 점점 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조각 같던 그의 외모를 한껏 찌푸리기 시작했다. “ 뭐야, 웬 존대 말? 뭔가 이상한데? 기운은 확실히 엘퀴네스 같은데 말이야...하지만 외모가..설마 정령이 폴리모프를 할 수 있을 리는 없고.. ” “ 무슨? 당신은 이미 저를 알고 있다는 소리로 들립니다만? 언제 저와 만난 적이 있었나요? ” “ 하아? 만난 적이 있냐고?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건가? 이번 째까지 벌써 32번의 소환이다. 그런데 만난 적이 없다고 발뺌할 셈이야? 뭐야, 너. 갑자기 물을 싸그리 걷어버리기에 드디어 아크아돈을 멸망시키려나 보다 했더니 요 몇 달사이에 또 갑자기 회복시키질 않나.. ” “ .....무..슨.. 헉, 설마 당신.. 드래곤? ” 그러자 그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얼굴을 더욱 찌푸려 보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드디어 모두 짐작해 내고 말았던 것이다. 맙소사. 설마 이 드래곤이 엘뤼엔의 스토커인 ‘라피스 라즐리’? 내 유희에 지나친 방해를 심어준 그 장본인 이란 말이야? 나는 설마 싶은 생각에 다시 한번 그의 정체를 확인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 실례지만, 당신 이름이 라피스 라즐리? ” “ ....너야 말로 무슨 농담을 하고 있는 거지? 모르는 척 해도 소용없어. 이번만큼은 절대로 그냥 물러서지 않을 테니까. ” 그랬다. 정말 이 녀석이 그 망할 드래곤이었던 것이다. 엘뤼엔에게 한눈에 반해서, 그와 계약 못하는 앙갚음으로 다른 드래곤들까지 덩달아 엘퀴네스를 소환하지 못하게 방해했던 바로 그 나쁜 놈. 예상했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다른, 냉정한 이미지의 미남이었지만 나는 저절로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수 없었다. 설마 아직도 정령왕의 세대교체를 모르고 있었을 줄이야. 어쩐지 이렇게 되고 보니 괘씸 하다기 보단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평생 보답 받지 못한 짝사랑을 한 셈이 아닌가. 후세 된 도리로 조금은 친절하게 굴어줘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미안합니다만, 상대를 착각하신 것 같네요. ” “ 그게 무슨 뜻이지? 아무튼, 너 외모가 너무 많이 변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내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닌 이상 엘퀴네스는 분명 남성 체였는데, 어째서 몇 년 사이에 여성체가 된 거지? 뭐, 나야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말이야. ” “ 이익! 여성 체 아니 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으음..그러니까 당신이 지금 상대를 착각하고 있다는 소리입니다만..” “ 뭐? ” 그제 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그나마 부드러웠던 붉은 눈동자가 서슬 푸른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저절로 긴장이 되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침착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 처음 뵙겠습니다. 내 이름은 엘퀴네스, 최근에 물의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일어나, 태어나게 된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기억하고 계시는 존재는 이미 소멸하신 전대의 엘퀴네스 일겁니다. ” “ .......방금 뭐라고 했지? ” 히익. 싸늘하게 바라보는 것이,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뒤로 주춤거렸고, 그 모습을 본 라피스라즐리의 눈빛은 더욱 험하게 번뜩거렸다. 한참동안이나 나를 쏘아보던 그는 노려보는 얼굴을 거두지 않은 상태로 크게 일갈했다. “ 웃기지마! 그런 방법으로 나를 완전히 떨쳐내겠다는 수작인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엘퀴네스 너는 내거다. 소환이 필요하다면 몇 십번이고 해주지. 이 몸속에 있는 드래곤 하트가 마나를 바닥날 때까지 소환하고, 또 소환해주겠어! 하지만 나를 모른 척 하는 건 용납 못해! 네가 귀찮아하는 것 같아서 요 몇 년간 소환하는 걸 멈춰 준건데!” “ 하아. 믿기 힘들다고 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고집을 부리시면.. ” “ 너야말로 고집 피우지마! ”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순순히 인정해 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하긴 자기가 좋아하던 존재가 죽었다는 데 그 누가 멀쩡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실랑이를 유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사실을 못 박았다. “ 이번 10년 재앙이 일어난 것은 명계의 착오로 저의 탄생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못 믿겠으면 다른 드래곤들에게 물어봐도 좋아요. 아마 이전 엘퀴네스와 계약했던 드래곤들이 있겠지요? 그 존재들의 계약은 이미 다 해지되었을 겁니다. ” “ !! ” “ 사실은 제 유희가 당신 때문에 초반에 조금 힘들 뻔 했습니다. 당신이 드래곤들과 물의 정령왕 과의 계약을 방해하고 있다지요? 그들은 이미 전 엘퀴네스가 소멸했음을 알고 있는데도, 당신이 무서워서 저를 소환할 생각을 못하더군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다른 정령왕들도 부를 수 있겠네요. 뭣하면 이프리트에게 물어보세요. 그 녀석도 처음에 제가 태어났을 때 무척이나 투덜거리던 녀석이니까, 당신과 궁합이 잘 맞겠네요. ” 조금은 냉정하게 들릴 정도로 딱딱하게 하는 말에 그는 무언가 크게 얻어맞은 듯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놀란 표정도 미남이 지으면 그림이 된 달까. 묘하게 아름다운 모습에 나도 모르게 가슴을 두근거리는 사이, 조금은 현실을 인식한 듯한 그의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정말....엘퀴네스가 소멸 했다고? ” ================================================ 흐흐흐. 드디어 레드 드래곤 라피스 라즐리의 등장! (현재시간 11시 17분!) 8일째 일일연재 달성!! 음.. 대공에 대한 변태적인 소문은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 아직 확인된 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후후후후훗 참, 저 내일 할아버지 생신이라 시골 내려간다죠; 그래서 당분간 못 올릴 거라는.. 대신 돌아오면 다시 성실연재 돌입하겠습니다^-^;;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 정확하게 말하면 이미 환생의 궤도에 올라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절대 당신 앞에 엘퀴네스의 이름으로 나타날 일이 없을 거예요. ” 단정하게 대답하는 말에 그의 안색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안 된 일이지만 이제 오해도 풀렸겠다, 더 이상 상대할 필요는 없겠지. 내가 간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돌아서려고 하자, 표정을 잔뜩 일그러트리고 있던 라피스 라즐리가 사나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사실 이미 계약자가 있는 상태인데 소환 되서 당황했거든요. 드래곤은 중복계약이 가능하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네요. 사람들이 저를 찾아 나서기 전에 가봐야 해요.” “ .....어디를 간다는 거지? ” “ 예? 그거야 당연히 일행들에게.. ” 그러나 나는 그 이상의 말을 잇지 못했다. 듣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은 그가 큰 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웃기지 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한 존재다! 애태우고 또 애태워서 미치게 만들더니, 이제 뭐? 소멸되었으니까 포기하라고? 전대의 엘퀴네스가 소멸되었으면, 현재의 엘퀴네스와 계약하면 되는 거다! 나는 이미 계약할 자격이 충분히 있을 텐데? ” 그거야 그랬다. 상대가 누가 되었든, 일단 정령을 소환한 존재는 반드시 그와 계약할 자격을 가지게 된다. 엘뤼엔의 경우가 워낙 특이했던 거지, 본래는 소환되면 무조건 계약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 너무도 당연한 요구에 할말을 잃은 나는 씩씩거리고 있는 드래곤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 뭐, 다..당신 전대 엘퀴네스를 사랑해서 집착한거 아니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날더러 계약을? ” “ 하- 사랑? 나는 그저 물의 정령왕이 가지는 특유의 기운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그래서 갖고 싶어 한 게 뭐가 나빠? 너희들은 그런 것도 사랑이라고 여기나 보지? 잔말 말고 계약을 이행해라! ” 너무나 뻔뻔한 태도로 밀어붙이는 모습에 나 역시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처음에 느꼈던 얄팍한 동정심마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 정령왕이 무슨 물건인줄 알아요? 가지긴 뭘 가져! 그리고 난 이미 계약자가 있다니까요? 다른 존재완 계약할 생각이 없단 말입니다!! ” “ 너 역시 전 엘퀴네스와 똑같은 말로 날 거부할 생각인가? 날 화나게 만들지 마라. 참고 견뎌주는 것도 지금뿐이니까! ” 당신이라면 그런 말 듣고도 계약해 주고 싶겠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르는 말을 삼킨 나는 그대로 입술을 악물며 라피스 라즐리를 노려보았다. 이래서야 엘뤼엔이 그와의 계약을 거부하려 했던 심정을 절절이 이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존심 강한 그로서는 자신을 물건 취급하는 저런 싸가지 없는 행태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지난 시간동안, 조금이나마 저런 놈을 불쌍하게 여겼던 내가 너무도 한심스러워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내 말투는 자연스럽게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 그래도 끝까지 거부하겠다면? ” “ 아마 지금의 유희를 포기해야 할 걸? 난 널 소환하는 걸 멈추지 않을 거고, 너는 그러한 부름을 피할 수 없을 테니까. 드래곤들은 참 편한 생물이지 않아? 인간들이 목숨을 걸고 소환하는 정령왕을 언제 어느 때든지 쉽게 소환해 낼 수 있으니까 말이야. ” “ 진짜 뻔뻔한 녀석이네. 드래곤들은 원래 다 당신 같아? ” 이젠 존대 말이고 뭐고 다 필요 없다. 난 원래 호의엔 호의로, 적의엔 적의로 대하는 편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여전히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그렇게 묻자, 그는 전혀 울컥하는 기색 없이 여유만만하게 응수했다. “ 지상 최고의 종족은 뻔뻔해도 상관없는 법이다. ” “ 하.. 지상 최고의 종족? 드래곤들이? 그건 또 금시초문이네. 그럼 그렇게 대단하신 종족이 왜 한낮 미천한 정령왕 따위한테 이런 지대한 관심을 보이시는지? ” “ 말했지 않은가. 엘퀴네스가 가지는 특유의 기운이 마음에 들었다고. ” 비꼬는 말에도 전혀 반응이 없다. 정말 만만치 않는 놈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린 나는 정색을 하며 단호한 표정으로 또박또박 대답했다. “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우선 가지고 있는 기운부터가 당신은 불이고, 나는 물이잖아? 정 반대의 성질에 끌리는 변태적인 취미에 대해 뭐라고 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나까지 그것에 끌어 들이지 말아줘. ” “ .. 정말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군. ” “ 이하 동문이야. ” 끝까지 지지 않고 맞받아져 추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 꼬리를 슬며시 들어 올려보였다. 그 단순한 행동하나로 그의 외모가 더욱 반짝반짝 업그레이드되는 기분이다. 이 세계에 와서부터 지나치게 눈을 호강시킨다고 생각했는데, 라피스 라즐리는 그동안 보아온 존재들과도 차원을 달리할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러운 성격 정도는 아무런 흠이 되지 않을 정도라고 해야 할까? 어째 매달리는 쪽과 튕기는 쪽이 반대가 된 것도 싶다. 왠지 주눅 드는 기분에 얼굴을 찌푸린 나는, 이 이상의 상대는 시간낭비밖에 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그냥 돌아서려고 했다. 근처만 둘러본다고 나간 녀석이 한참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당연히 사람들이 걱정할 것이고, 어쩌면 큰 소동으로 번질 위험이 있었기에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조급해 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막 돌아서려는 그때, 어딘지 상당히 위험한 느낌을 담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듯한 라피스 라즐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내가 어째서 지난 가뭄기간 동안 엘퀴네스를 소환하지 않았는지 알려줄까? ” “ 에? ” “ 몇 십 번의 소환에도 전혀 요지부동이던 그 오만한 물의 정령왕을, 나는 힘으로라도 가지고 싶었지. 타협이 안 되면 강제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어? 그래서 미친 듯이 마법연구에 몰두했다. 엘퀴네스란 이름의 아름다운 새를 철장 안에 가두는 방법을 말이야. ” “ 무..슨? ”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당황하는 중에도 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쩐지 빨리 이 자리를 피하지 않으면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딱딱하게 굳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 하지만 과연 이 세계의 자연을 관장하는 존재라서인지 묶을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더군. 그래서 내 쪽이 조금 양보하기로 했다.. 정령계 정도는 마음대로 활보할 수 있도록 말이야. ” “ 정령계..정도라니? ” “ 아아, 정령계에서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일단 인간 세상에 나오면 무조건 내가 지정해둔 구역 안에선 벗어날 수 없게 하는 거지. 꽤 쓸만한 방법이지? 마법의 틀을 설정하는 데만 5년이 넘게 걸리더군. 마법생물인 드래곤 중에서도 천재라 불리던 이 몸이 말이야. 그리고, 최근에 완벽하게 완성했다. 이제 실행만 하면 돼. " “ 뭐- 자, 잠깐! ”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더 이상 입을 열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주지 않은 그가 바로 마법을 실행해 버렸던 것이다. “ <그대는 내가 원하는 구역 안에서, 철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새가되리라, 포박!> ” “ !!! ” 파아앗- 그 순간 나는 내 눈 앞을 감싸는 눈부신 빛의 기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빛을 피해 눈을 감아버렸고, 다시 떴을 땐 이미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 되어있었다. 내 앞의 불과 1m도 채 되지 않는 반경으로, 투명한 빛의 막이 둘러져 있었던 것이다. 무심코 손을 내밀자, 아무것도 없는 허공임에도 딱딱한 감촉에 느껴졌다. 꼭 유리컵 안에 갇혀 있는 소인 족이 된 기분이랄까? 황당해진 나는 화낼 생각조차 못하고 멍한 표정으로 히죽거리고 있는 망할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 “ 당장 도망가지 못하게 우선은 그 정도로 해둔 거다. 계약하겠다고 말하면 풀어주지. ” “ 커헉. 당신 사이코지! 안하겠다는 데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 “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어. 절대로 계약하기 전까진 풀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말이야. ”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에 엘뤼엔이 이 녀석을 없애준다고 했을 때 그냥 말리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다. 이게 웬 낭패란 말인가! 때늦은 후회로 탄식하는 내 속을 알고나 있는지, 여전히 미소 지은 얼굴을 거두지 않은 라피스 라즐리는 계속해서 재촉하기 시작했다. “ 일행들이 기다린다고 하지 않았어? 빨리 끝내고 가야하지 않을까? ” “ 이익! 이런 협박이 어디 있어? 당신은 계약의 기본 원칙도 모르는 거야? 원래 아쉬운 쪽이 숙이고 들어오는 법이라고! ” “ 그래, 말 잘했어.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과연 누구일까? ” 그야 나지.. 젠장! 어째서 이 놈은 말발까지 좋은 거야! 당황한 나는 녀석 몰래 조심스럽게 이동에 관한 언령의 주문을 외워봤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정말 정령계로 돌아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단 말인가! 복잡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고민하던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저기, 혹시 계약만 할 생각? ” “ .....? ” “ 아니, 계약만 해주면 날 내버려 두겠냐는 뜻이야. 아까 일행들이 기다리니 빨리 가야하지 않겠냐고 물어봤잖아? 그렇단 건 내가 일행에게 돌아가도록 순순히 허락하겠다는 소리? ” 만약 그렇다면 까짓 거 개한테 물리는 셈 치고서라도 계약을 해줄 생각이 있었다. 유희를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야, 계약 한두 개가 더 늘어난다고 문제겠는가? 처음 그는 당연하다는 듯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 나에게 불씨만한 희망을 안겨주는 듯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바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그대로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 물론 내가 부를 때는 와줘야겠지. ” “ 그때가 언젠데? ” “ 글쎄.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할 때나, 음식을 만들 때 물이 필요할 경우, 내가 누군가와 대화하고 싶을 때 대화 상대도 되어 줘야 하고.. 여행 다닐 때 동반자가 돼 주면 더욱 좋겠지. ” “ 그건 거의 하루 종일 이잖아!! 게다가 세수나 음식에 필요한 물 정도는 다른 물의 정령들한테 부탁하란 말이다! ” “ 아니, 네가 아니면 안돼. 모처럼 계약한 건데 그 정도에도 쓸모가 없으면 곤란하잖아? ” 곤란하긴 개뿔이! 저건 나를 무슨 파출부 아줌마라도 되는 줄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기가 막힌 기분도 잠시. 나는 또 다시 이 상황을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에 대한 궁리에 빠지기 시작했다. 녀석과의 계약이 내 무덤을 파는 짓이란 걸 안 이상, 절대로 순순히 응해줄 생각 따윈 없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계속 갇혀있을 생각역시 없었기에 마음은 점점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며칠 전부터 트로웰에게 주의를 들어왔었는데도 방심을 하다니. 무사히 돌아가게 된다 해도 그의 얼굴이나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지 도저히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행들과 떨어지게 되면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지금이라도 가면 괜찮은 걸까? 이사나가 제대로 다시 나를 불러낼 수 있을까? 슬슬 대답해 줄 때도 되었으련만, 여전히 자리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라피스 라즐리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 자꾸 고집 피워봤자 너만 힘들어 질 텐데? 말해두지만, 난 절대 포기할 생각 없어. 이미 몇 천 년이나 결심해 왔던 일인데, 이제와 번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지금 유희는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쉽게 그만 둘 수 있을 거야. ” “ 그거야 당신 생각이지, 난 아니야! 그를 도와주기로 결심했다고! 그리고 당신 같은 사람 따라다니며 뒷수발 해 주고 싶지도 않아! ” “ 흐음. 그럼 좀 더 그 안에서 갇혀 있던가. 아, 그런데 너.. 여성체가 아니라고 했던가? 설마 그 얼굴로 남성체임을 우기는 상황? ” 미운 놈은 무슨 짓을 해도 밉다고. 이 자식은 어째 하는 짓마다 나를 열 받게 하는 말만 골라서 하는 거지? 나는 대답대신 그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내 딴에는 정말 심각한 욕이랍시고 해준 거였지만, 그것을 보고서도 의아한 표정만 짓는 것이.. 제길! 여기선 아직 이 욕이 발명(?)되지 않은 거냐아! “ 그건 그렇다는 뜻? 아니면 아니라는 뜻? ” 도리어 순진무구하게 물어오는 모습에 나만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무척 찝찝해졌다. 때문에 대답하는 말은 절로 사나워 지기 시작했다. “ 젠장! 닥치고 꺼지라는 뜻이다, 멍청아! " “ 호오. 이렇게까지 남성 체의 의식이 확실한 정령도 드문 걸? 어차피 무성이면서 뭐가 그렇게 기분 나쁜 거지? 너희들은 성별과 관계없이 연인을 사귀잖아? ” 내가 욕을 하든 말든, 전혀 상관이 없다는 듯한 능청스런 질문에 나는 인상을 화악 구기고 말았다. 본인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 같았지만, 듣는 나로서는 비꼬는 게 아닌 가 절로 의심이 생기는 말이었다. 성별과 관계없이 연인을 사귄다니, 어째 양성애자가 된 기분이랄까? 벼랑 끝까지 침몰된 듯한 기분은 더 이상 회복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 그래서 뭐 어쨌다고? 양성애자는 하나의 성별인식을 하고 있으면 안 된다는 소리야? ” “ 그렇다고 말하진 않았다. 어째 너는 내가 말하는 건 전부 기분 나쁘게 들리는 모양이군. ” 알았으면 말 시키지 마! 눈으로 그렇게 쏘아붙여 준 나는 순간 물의 힘을 끌어올려 주변을 가로 막고 있는 빛의 막을 강하게 타격했다. 혹시나 강한 기운을 받으면 깨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이게 웬걸.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꿈적도 하지 않는 막은 그 흔한 진동조차 울리지 않았고, 이어지는 망할 드래곤의 말에 나는 다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소용없다고 말했을 텐데? 정령계라면 모를까. 본래 힘의 2/3도 발휘하지 못하는 지금의 네 능력으로는 내가 용언으로 만든 결계를 부술 수 없어. ” “ 제길! 정령계로 가버릴 거야! ” “ 마음대로. 하지만 나는 다시 너를 소환할거고, 그때 네가 오게 될 곳은 또 다시 이 자리가 될 거다. 그 점은 각오하고 가도록 해. ” “ ....... ”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눈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한다는 말이 저런 것뿐이다. 이렇게 될 바에야 차라리 계약을 해주는 것이 나으려나. 그리고 나서 바로 해지해 버리면.. ‘아, 그렇지! 그러면 되는구나! ’ 그때서야 떠오르는 생각에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줄기 광명의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환희를 느꼈다. 그랬다. 까짓 거 계약을 하더라도 나중에 얼마든지 정령왕의 임의로 해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바보같이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나는 미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기도 전에,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라피스라즐리의 말에 막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 설마 싶어서 미리 말해두는 거지만, 계약하자마자 해지하겠다느니 따위의 귀여운 행동을 벌였다간 이 아크아돈이 깨끗하게 인간계의 차원에서 사라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거다. 또한 그때는 너와 다시 계약하게 되더라도 절대 그 안에서 꺼내주지 않을 거야. ” “ ..... ” 눈치가 귀신같은 놈이다. 내가 그렇게 티 나는 표정을 지었던가? 나는 낭패감을 느끼며 그대로 풀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힐끗 보니 벌써 새벽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불침번을 서던 샐러드 용병단의 사람들은, 슬슬 내가 돌아오지 않음을 걱정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돌아가긴 그른 것 같고..우선 누군가에게 이런 상황을 알리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 아, 그래. 트로웰-! ’ 그라면 내가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일행들에게 적당한 핑계거리를 대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나는 얼른 주저앉아 있던 바닥의 흙을 두드렸다. 그리곤 라피스가 눈치 채지 못하게 정령어를 사용하여 땅의 하급정령인 놈을 불렀다. - 놈! 지금 여기에 있지? 어서 나와 봐.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땅 속에서 불쑥 얼굴만을 내민 놈이 나타났다. 워낙에 왕에 대한 겁이 많은 정령이라, 나를 똑바로 보지도 못하고 몸을 덜덜 떨고 있는 상태였다. 힐끔 라피스 라즐리 쪽을 보니, 그는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을 뿐, 갑자기 등장한 땅의 정령에 대해서는 어떠한 흥미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소환되지 않은 자연계의 정령은 제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 부, 부르셨습니까, 물의 정령왕이시여. - 그래, 너라면 지금 트로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지? - 그..그렇습니다만.. - 하아, 잘됐다. 그럼 지금 당장 가서 트로웰에게 내가 이곳에 있다고 전해줄래? 골치 아픈 일에 휘말려서 쉽게 일행에게 돌아가기 힘들 거라고도 전해 줘. - 예, 혹여 왕께서 자세한 상황을 물어 오시면 제가 본 그대로의 것을 전달해 드려도 괜찮으시겠는지요? 눈을 말똥말똥 굴리며 묻는 놈의 말에 나는 순간 어찌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녀석이 본 그대로의 상황이라니, 그럼 내가 라피스 라즐리의 술수에 속수무책으로 빠져 쩔쩔매는 꼴까지 적나라하게 전해진다는 게 아닌가. 아무리 다급한 상황이라지만 정말 내키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숨길수도 없는 일. 어차피 맞을 매라면 일찍 맞는 게 낫다는 생각에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도 찝찝한 심정으로 비굴한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 난 나름대로 최대한 반항을 한거라고 변명해줘.. ======================================= 시골 다녀 왔습니다~>ㅁ-엘퀴네스의 장- 그 후 완전히 해가 떠올라 주변이 환해 질 때까지도 놈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대로 소식을 전달이나 한건지, 아니면 위치가 너무 멀어 아직 당도도 하지 못했는지 알 길이 없었기에 나는 그야말로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녀석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중에도 눈으로는 끝까지 망할 드래곤 놈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였다. 녀석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내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입가에 여유 만만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할 수만 있다면 비 오는 날 먼지가 날리도록 패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면, 내가 먼지 말을 걸때까지 자신도 침묵을 고수하자는 심보인 듯 했다. 나 역시 순순히 당해줄 성격은 아니었기에 트로웰에게 놈을 보낸 이후로 입을 꾸욱 다문 채 노려보고만 있었지만, 한국인 특유의 빨리빨리 근성에 사로잡혀 먼저 지쳐버리고 말았다. 결국 장시간의 침묵을 견디다 못한 나는 퉁명스럽게 한마디 중얼거렸다. “ 당신도 유희 중인 거 아니었어? 이 시간에 여기 와있어도 괜찮은 거야? ” “ 이번 유희는 네가 유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끝냈다. 네가 걱정해 줄 일은 아니야. ” “ 누가 걱정을 했다는 거야? 아니, 그건 그렇고. 내가 유희를 시작했다는 건 대체 어떻게 안거지? 정령왕의 세대교체도 모르고 있던 녀석이 새삼 관심을 기울 일거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 추궁하는 듯한 어조로 묻자 그는 느긋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러고 보니 너, 인간들을 위해 기특한 짓을 했더군? 삼일에 한번씩 비가 내리게 한 것- 네가 한 일이 맞지? ” “ 하아? 설마 그것 하나로 알아 맞춘 거야? 아무튼, 내가 당신에게 기특하다는 소릴 들을 이유는 없어. 아크아돈은 정령왕이 관장하는 세계다. 겨우 드래곤 주제에 나보다 우위인척 굴지 마. ” “ 호오, 대대로 엘퀴네스들의 도도함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 넌 그나마 덜 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본성은 어쩔 수 없다 이건가? 하지만 그런 말도 지금 상태에서 해봐야, 내 귀에는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가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그게 싫다면 나와 봐, 네 힘으로. 그럼 계약 요구건도 철회해 주지. ” “ 크흑.. ”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다고 했던가. 라피스 라즐리는 내게 있어 딱 그런 존재였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해도 져줄 생각을 않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미 드래곤의 치맛바람에 휩싸여 세상을 다 자기 발 아래로 두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계속 있으면 바보취급만 당한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처음 몇 번의 타격이후로 포기했던 막을 다시 깨부술 궁리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수한 물의 힘으로는 안 되는 걸 알았으니 다른 방법을 강구해 볼 생각이었다. ‘ 그러고 보니 언령은 드래곤의 용언이랑 비슷하다고 했었지. 지금 여기서 강한 언령의 발현을 하면 깰 수 있지 않을까? ’ 꽤나 오랫동안 공들여서 만든 마법이라고 하니, 쉽게 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시도를 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결심을 굳힌 나는 라피스 라즐리가 비웃든 말든, 정신을 집중하며 눈앞의 막이 걷히는 상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언령은 의지의 발현이다. 강한 의지가 생길수록 시전 되는 언령의 힘도 강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필사적으로 이곳을 빠져나가야겠다는 다짐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부수어져라】 처음 한 마디를 내 뱉었을 때만 해도 막은 여전히 요지부동한 상태를 고수하고 있었다. 또한 나를 바라보는 드래곤의 표정역시 여유 만만한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두 번째 언령을 시도했고, 그 때 처음으로 나를 감싼 막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자 환호하는 나와는 달리, 라피스 라즐리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곁눈으로 살펴본 나는 다시 세 번째 언령을 시전 했다. 【부수어져라】 우웅- “ 제길, <포박의 힘이여 견고해져라, 사로잡은 먹이를 놓치지 말 지어다! > ” 두 번째보다 더욱 눈에 띄도록 흔들리는 막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 당황한 드래곤이 업그레이드(?)주문을 외우자 그것은 다시 뻣뻣해 지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세상에서는 힘의 제약을 받기 때문에, 언령 몇 마디 내 뱉은 것만으로 힘들어 죽겠는데, 그것이 보람도 없이 원 상태로 돌아오고 나자 나는 그대로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앞으로 사용 가능한 언령은 고작 몇 번이 한계인데, 저 녀석이 외울 업그레이드 주문이 몇 단계까지 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내가 절망하고 있음에도 드래곤의 표정은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어쩐지 약간 창백해진 안색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 역시 정령왕 이라는 건가. 이만한 용언을 퍼붓고도 완전히 제압을 하지 못하다니. 이거 꽤나 사나운 맹수를 길들이게 되는 군. 조금 힘들겠는 걸.. ” “ 이익! 누굴 멋대로 애완동물 취급하는 거야!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려엇--!! 】 ” 화나서 격해진 감정은 조금 더 강한 의지를 발현시키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 되어준다. 아무생각 없이 내 뱉은 언령이었지만, 그 순간 나를 감싸고 있던 막 위로 미세한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을 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이번에도 용언을 써서 막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라피스 라즐리는 급격히 창백한 얼굴이 되어 크게 뒤로 주춤 거렸다. 아무래도 이 막에게 가해지는 위협은, 그것을 만든 드래곤 본인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되는 모양이었다. 꽤나 충격이 컸는지, 다시 용언을 사용해서 막을 생각도 못하고 몸을 추스르기에 바쁜 라피스 라즐리를 보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내가 이런 기회를 놓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감을 되찾은 나는 남아있는 마지막의 모든 힘까지 사용하여 다시 한번 언령을 발현시켰다. 【부수어져랏!!】 “ 자- 잠깐! 크윽! ” 촤아아아- 쨍그랑-! 언령이 실현됨과 동시에 눈앞을 감싸고 있던 막은 마치 유리가 깨지듯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동안 공중을 흩던 그것은 빛 가루로 산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그와 동시에 라피스 라즐리는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나 역시 너무 많은 힘을 써버린 탓에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고 풀썩 바닥으로 엎드려졌다.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은 물론이며, 눈앞은 주체하기 힘들만큼 빙글빙글 돌았다. 이런 상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강제로 정령계에 소환될 것만 같았다. “ 하아. 하아. 우에에~ 죽을 것 같아.. 헉 헉.. ” 그러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근처에 있던 나이아스들이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보곤 서둘러 달려와 하나둘씩 나에게 물방울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것도 잠시. 나는 곧 그들이 주는 물방울이 내게 흡수될수록, 빠져나갔던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미약한 양이었지만 지쳐서 움직이기 힘들 정도의 상태는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 아.. 고, 고마워. 얘들아. ” 감격 반, 당황 반의 표정으로 입을 열자 열심히 내게 물을 퍼 나르던(?) 나이아스들이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평소 가공할만한 그들이 수다조차도 예뻐 보이는 순간이었다. - 당연한 일을 한거예요, 엘퀴네스님. - 몸은 괜찮으세요? 움직일 수 있으시겠어요? - 물을 더 가져다 드릴까요? - 운디네 님도 호출할 수 있어요! 그럼 더 많은 물을 가져올 수 있을 거예요. - 꺄아아 이렇게 지치시다니. 나쁜 드래곤! 감히 엘퀴네스님께 무슨 짓을! - 엘퀴네스님이 너무 예쁘셔서 그래요. 원래 미인이 가는 길엔 고난과 역경이 따르는 법! - 강공한테 지시면 안 돼요, 엘퀴네스님! 그것은 앙탈수의 의무이자 권리라고요! “ ...... ” 마지막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지만 어째 후환을 위해서도 묻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잠자코 침묵했다. 그리곤 대충 돌아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된 것 같아 몸을 추스르며 드래곤 쪽을 바라보았다. 마침 녀석도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는지 주저앉아있던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안색만큼은 무척이나 창백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걸 느꼈는지 내 쪽을 돌아본 그는 시선이 마주치자 씁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도망친 새는 다시 찾을 수 없는 법이지. 내가졌다. 일행에게 돌아가라. ” “ ...헤에. 의외네? 또 가둘 줄 알았는데. ” “ 드래곤들은 입 밖으로 내 뱉은 약속은 어기지 않아. 그것이 신용을 지켜야만 할 상대라면 더욱 그렇다. 결계를 부수면 계약 건을 철회한다고 했으니, 그 말을 지키는 것뿐이야. 놀리더라도 할 말이 없다. ” 짜증날 정도로 끈끈하게 집착하던 것과 다르게, 일단 포기를 하고 나니 이렇게나 깔끔한 결말이었다. 지금까지 막에 가두어 둔 채 계약을 강요하던 놈과 동일인물인지 의심해 볼 정도로 ‘가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일말의 아쉬움하나 담겨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내가 너무 마음이 약하기 때문일까? 그러나 내가 막 그에게 말을 붙이려는 순간, 아까 와는 비교도 할 수없을 만큼의 강한 기운이 내게 전달되는 것을 느끼고 그대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회복의 속도가 남다른 것이, 절대 나이아스들이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본 나는 등 뒤로 반가운 얼굴이 서 있음을 발견하곤 크게 놀라 소리쳤다. “ 트로웰! ” 놈에게 부탁하여 현재의 상황을 알리게 했음에도 전혀 감감 무소식이던 그가 어느새 이쪽으로 와줬던 것이다. 기쁜 표정으로 바라보자,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이 굳어진 트로웰이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어왔다. “ ...괜찮은 거야, 엘? 내가 너무 늦었지? 미안해, 장소를 찾는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 강한 기운에 막혀서 위치를 알아내는 것을 방해받았거든. ” 그렇게 말하며 라피스 라즐리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정녕 살이 떨리게 무섭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사나웠다. 나에 대한 호의가 큰 것만큼, 나를 위협하는 존재에게는 냉정한 트로웰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결계를 깨는 바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드래곤이, 분노한 그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생각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난 멀쩡해, 트로웰. 그 보다 지금 기운이 갑자기 회복된 건.. ” “ 아아. 지친 것 같기에 내 기운을 조금 나누어 준거야. 어때, 움직일 수 있겠어? 놈에게 들었을 때는 네가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걸? 설마 지친 이유가 거기에서 벗어나려다가 그런 거야? ” “ 아, 으응. 언령을 마구 남발했거든. 그래도 어떻게든 잘 해결 됐어. 다른 사람들은 벌써 다 일어났겠지? 내가 없어져서 걱정하지는 않아? ” 혹여나 소동이 일어났을 까봐 불안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어 보였다. “ 괜찮아. 우연히 근처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됐다고 말해뒀어. 아침 식사가 끝나기 전까진 돌아올 거라고 했으니까 아무 문제없을 거야. ” “ 하아, 정말? 다행이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하는 거 아니야? ” “ 음, 그렇긴 하지만.. 잠깐만. ” “ .....? ” 내가 얼른 돌아가자고 재촉이라도 할 줄 알았는지, 그는 미처 말려보기도 전에 성큼성큼 라피스 라즐리의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의 바로 앞에 서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더니, 그대로 주먹을 들어 있는 힘껏 얼굴을 날리는 것이었다. 퍼억- 강한 타격소리와 함께 맥없이 나가떨어지는 드래곤을 보며 나는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만 벙긋 거렸다. 설마 몬스터를 한방에 보내는 힘으로 얼굴을 칠 줄이야! 이거 일이 더 커지는 거 아니야? 그러나 불같이 화낼 거라고 생각했던 라피스 라즐리는 말없이 맞은 부위만 만지작거리고만 있었고, 트로웰은 더욱 냉담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 이 정도에서 끝내는 걸 다행으로 알아라, 레드 일족의 라피스 라즐리. 전대의 엘퀴네스였다면 절대로 너를 살려두지 않았을 거다. 계약은 어디까지나 정령왕의 의사를 우선으로 하는 것, 하기 싫은 상대와 억지로 이행할 의무 따윈 없다. 오늘 너의 행동은 4대 정령 전체의 자긍심을 무시한 것이었어. 로드에게 말해 엄중한 훈계 조치를 받게 하도록 하겠다. ” “ ..... ” “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대형 사고를 터뜨리는 군. 전대의 엘퀴네스가 왜 너와 계약을 하려 하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 또 다시 엘을 상처 입히면 그땐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지금 참아주는 것도 엘이 싫어할까봐 지 너를 위해서가 아니야. 그 점 명심해라. ” 소년의 모습이라고 해서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게 쏘아붙이는 트로웰의 눈빛은 차마 말 도 못 붙일 만큼 매서웠다. 그런 그를 바라본 라피스 라즐리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알았어. 이번은 내가 심했다는 걸 인정하지. 전 엘퀴네스가 소멸되었다는 것에 정신을 잃은 모양이다. 앞으론 절대 이런 일이 없을 거야. " " 네가 전 엘퀴네스를 처음 소환했을 때, 그는 이미 1만 7천세의 나이를 넘어서던 때였어. 충분히 소멸을 예측할 수 있었을 텐데? 이성을 잃다니 너답지 않군. ” 그가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자 트로웰의 굳은 표정도 한결 풀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너 답지 않다’ 니... 설마 둘이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조금 나아진다 싶자, 그때부터 두 존재간의 본격적인 대화가 오가기 시작했다. “ 나답지 않다니. 이래봬도 무척 감수성이 예민한 드래곤이라고. 내 성격이 이 지경이 된 건 너희 그 잘나신 전대의 엘퀴네스 때문이잖아. 다 자업자득이야.” “ 그러게 처음에 계약을 실패했을 때 포기했으면 좋았잖아? 미련을 못 버리고 오기를 부린 건 너야. 전 엘퀴네스처럼 좋고 싫음이 분명한 존재에겐 통할 행동이 아니었어. 그런 주제에 새로 탄생한 엘퀴네스한테 까지 미움을 사다니. 대체 너는 뭐가 되려고 이러는 거야? ” “ 시끄러. 겨우 나보다 2000살 더 먹은 거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상관하지 마, 트로웰. 나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단 말이야. 자꾸 끌린다고. 그래서 가지고 싶어 하는 게 뭐가 나빠? 나 역시 미치겠단 말이다! ” “ ...... ” 이래서야 동생의 투정을 받아주고 있는 형제의 모습이 아닌가.(외모가 그 반대라는 게 문제지만.)당장 치고받고 싸울 것 같이 굴던 것이 왜 갑자기 이렇게 변한거지?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어쩐지 혼자 소외된 것 같아 서운한 마음까지 들고 있었다. “ 설마.. 둘이 아는 사이? ” “ 음? 아, 엘. 사실은 이 녀석, 지금 내 계약자의 아들이야. 헤츨링 시절부터 봐왔지. ” “ 헤에, 정말?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벌레를 잔뜩 씹은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라피스 라즐리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 쳇. 시시한 대화나 할 거면 그만 가보라고. 남 염장 지르지 말고. ” “ 흐음, 이제 정말 포기한 모양이지? 그런데 라피스, 지금 네 유희는 어떻게 된 거야? 듣자니 이번엔 10대 초반정도인 소년의 모습으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아니네? ” “ 아아. 엘퀴네스가 유희중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만 뒀어. 어차피 슬슬 짜증나기도 했으니 잘 된 셈이지. 가라, 난 이대로 레어에 돌아가서 잠이나 잘 테니까. 그러고 나면 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소유욕도 어느 정돈 가라앉겠지. 초면에 실례가 많았다, 엘퀴네스. ” 당당하다 못해 뻔뻔스러웠던 모습은 어디다 갖다 버렸는지, 마치 버림 받은 아이처럼 쓸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내가 미처 대답도 하기 전에 기운이 빠진 몸을 흐느적거리며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보통 이럴 땐 텔레포트 해서 돌아가지 않나? 대체 레어가 어디에 있기에 저렇게 걸어가는 거지? 의아했던 것은 트로웰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얼른 걷고 있는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 라피스! 네 레어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져 있잖아? 설마 걸어서 갈 생각이야? ” 그러자 라피스 라즐리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그것에 놀란 트로웰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나라고 정령왕을 가두는 결계를 만드는 게 쉬웠는지 알아? 게다가 그게 강제로 깨지는 바람에 지금 속이 말이 아니라고. 드래곤 하트 내에서 일어난 마나의 운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졌어. 이 상태로는 마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해. ” 헉. 결국 나 때문인가.. 내가 그것을 깨느라 고생한 것 만만치 않게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녀석 역시 힘들었다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막이 깨졌을 때 피를 토했지 아마? 당황한 나는 얼른 뛰어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 아핫~ 이상하게 제가 쓰는 캐릭터들은 다 한번씩 귀엽다는 칭찬을 듣는군요...(도대체 왜?) 저번편의 리플!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 라피스 죽일놈! 엘뤼엔 불러~! ' 란 의견이 압도적인듯 합니다만.. (쿨럭) 실은 라피스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니랍니다.^^; 독점욕이 강한 것일 뿐....이런 타입은 상대방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면 오히려 지고지순해질 가능성이 높죠^.^* (라피스 편애 모드 발동! 음하하하하하) 참, 엘이 인간세상에서 발휘가능한 능력은 본 능력의 1/3 입니다. 2/3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드래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수 밖에 없는거지요. 또 그놈이 보통 드래곤입니까? 이미 헤츨링 시절부터 성룡의 힘을 뛰어 넘던 놈입니다^^; 게다가 방심마저 했으니 당할 수밖에 없지요; 그리고 라피스가 친 결계는 설령 다른 소환자가 소환을 한다 하더라도 마법진만 뜰 뿐, 그 안에 갇힌 상태에선 절대 이동이 불가능 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엘뤼엔을 부르려면 신계에 가야 하는데, 정령왕들은 차원 이동의 능력이 없답니다...(그래서 예전에 저승사자를 협박한 거라는;) 랄라~ 어쨌든 토요일! 모두 좋은 주말 보내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 …뭐야? ” 놀라서 바라보긴 했어도 내가 붙잡은 것에 그다지 불쾌해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도 제 죄를 알긴 아는 모양이라며 속으로 웃은 나는 별 다른 설명 없이 치유술을 시전 해주었다. “【회복!】 ” -파아앗. “ !! ” 그로서는 당장 엎어놓고 패줘도 후련치 않은 입장인 내가 도리어 치료를 해주니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몸 상태가 한결 나아졌는지 잠시 눈을 깜빡이던 라피스 라즐리는 매우 감탄한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 굉장해, 엘퀴네스들의 회복능력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완벽할 줄이야. 이 정도면 결계를 치기 전의 몸 상태와 비견해도 뒤지지 않겠는 걸? ” “ 물의 정령왕의 치유술은 어떤 상태에서건 100%회복시키니까 말이야. 아무리 인간세상이라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해도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거야. 엘에게 고맙다고 해, 라피스. ” 그러나 이 망할 드래곤은 트로웰의 말은 한귀로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는 사이, 그는 어딘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정말 나랑 계약하기가 싫은 건가? ” “ …에? ” “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밖에 살아오지 않아서 너에게 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해. 내 표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겠다. 계약 건, 다시 제고해 줄 순 없는 건가? ” 기세당당하게 요구하던 것과 달리 이처럼 숙인 자세에서 들어오는 모습을 보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상당히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고 싶어도 트로웰은 계약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소환한 자와 소환된 정령왕, 둘 만의 문제라며 참견할 의사를 일찌감치 떼어낸 상태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궁리하던 나는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 계약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현재의 유희를 그만 둘 생각은 없어. 그러니 당신이 나를 찾아도,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상관없는 거야? ” “ 그럼 계약한 의미가 없잖아? 나는 다른 일족처럼 남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정령왕과 계약하는 게 아니야. 너와 함께 있고 싶어…. ” 으음. 순간 닭살이 돋아 온몸을 긁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었지만 참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비꼬는 표정으로 협박하듯이 요구하는 것 보단 훨씬 낫다고 위로하면서. 내가 잠깐의 고민도 할 필요 없이 바로 곤란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젓자, 그는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이 얼굴을 환하게 밝히면서 내게 또 다른 한 가지를 제안했다. “ 아! 그럼, 지금의 네 유희에 내가 동참하는 건 어때? 그러면 항상 같이 있을 수 있잖아? ” “ 헉. 그렇게 여유 만만한 여행이 아니라고. 또 지금의 계약자가 새로운 일행을 어려워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 그런 건 좀…. ” “ 하지만 그것 외에는 방법이 없잖아? 계약해도 내가 부르면 오지 않겠다며. 그럼 내가 가는 방법 외에는 없잖아. 나로서도 많이 양보한거다. ” 하긴, 똑같은 계약자인데 어느 한쪽만 편애하는 건 좀 너무한 건가? 첫인상이 나빴던 건 이사나도 마찬가지였고, 그렇게 치면 둘 다 피장파장인데 말이다. 게다가 드래곤이 일행이 되면 현재 이사나의 처지에도 많은 도움이 될지 몰랐다. 그가 일행이 되었을 때의 여러 가지 이점과 불리한 점을 따져보며 한참동안 속으로 고민하던 나는 잠시 후 한결 정리가 된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 저기, 라피스 라즐리…라고 했던가, 당신? ” “ 그냥 라피스라고 불러. 라피라고 해도 상관없고. ” “ 아, 그래, 라피스. 좋아, 계약할게.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 나의 ‘계약할게’라는 말에 기쁜 표정을 짓던 그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조금은 실망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좋으니 얼른 말해보라는 뜻 같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나는 말없이 검지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 ……? ” “ 한달이야. 지금부터 한달 안에 유희중인 나와 내 계약자를 찾아. 소환해서는 안 되고, 다른 누구한테 물어봐서도 안돼. 오로지 당신 혼자만의 힘으로 나를 찾아내는 거야. 그럼 일행으로도 받아주고 계약도 해줄게. ” “ !! 정말인가? ” “ 난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면 거짓말 안 해. 지금 같은 경우는 계약하고 싶지 않으면 내가 끝까지 거절하면 되는 거잖아? 거짓말 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야. ” 나의 단호한 대답에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우던 그는, 혹여 마음을 바꿀 새라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 조금 힘들겠지만 못할 것도 없지. 한달이라고 했나? 좋아. 반드시 그 기간 내에 찾아내겠다. 그때 가서 딴소리하기 없기야. ” “ 거짓말 안한다고 했잖아? 그쪽이야 말로 실패한 다음에 다시 계약해달라고 떼쓰지나 마. ” 새초롬한 표정으로 대꾸해주자 그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유쾌한 얼굴로 뜻 모를 소리만 중얼거리는 것이다. “ 장담하지만 널 미워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을 거다. ” “ 뭐? ” “ 아니, 귀엽다는 뜻이야. 남의 일에 상관 안하는 트로웰이 널 싸고도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고. 갑자기 등장하셔서 뺨을 친 녀석이 땅의 정령왕이라서 말이야. 역시 내가 큰 죄를 저지르긴 저지른 모양이지? ” 그다지 호응해 주고 싶은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더 이상 상대하다간 정신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아침식사가 끝나갈 시간이었기에, 빨리 일행에게로 돌아가야겠단 생각을 굳힌 나는 더 이상 뒤돌아 볼 것 도 없이, 그때까지 멀뚱히 상황을 구경하고만 있던 트로웰을 재촉했다. “ 트로웰, 어서 돌아가자. 사람들이 기다릴 거야. ” “ 아, 그래. 알았어. 그럼, 라피스. 일이 잘 해결 된 것 같으니 건투를 빌겠다만, 엘에게 피해가 돌아간다 싶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각오하도록 해. ” “ 명심하지. ” 그 뒤, 나와 트로웰은 언령을 사용하여 일행들이 야영하던 공터 근처의 숲으로 이동했다. 혹시나 벌써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아직 식사조차 마치지 않은 무리가 꽤 되었다. 마찬가지로 한창 식사 중이던 샴페인 용병단들이 숲 안쪽에서 나타나는 우리를 알아보고 얼른 손을 흔들었다. “ 어이, 엘, 매튜! 지금 오는 거야? ” “ 아, 미안해요, 이릴. 오래 기다리셨죠? ” “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이런 곳에서 누굴 만났다는 거야? 용무는 제대로 다 끝났고? ” 트로웰이 변명했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물어오는 것에 나는 작은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좀 더 자세히 상황을 물어볼 만도 하련만, 그들은 용무가 다 끝났다는 것에만 신경이 미쳤는지 다른 건 그다지 궁금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것이 타인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용병들의 철칙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관심이 없어서 안 물어보는 건지 파악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뭐, 물어보지 않으면 나야 편하니 상관없었지만 말이다. “ 식사는? ” “ 음, 간단히 먹었어요. 안 주셔도 괜찮아요. ” “ 아- 나도요, 이릴. ” “ 그래? 흐음, 그럼 남은 건 저 돼지들에게 돌아가겠군, 옛다- 많이 먹어라. ” 그러자 한순간에 돼지로 낙점 찍힌 헤롤과 마이티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이어졌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래봤자 막상 음식이 다가오면 잔말 없이 먹어 치울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웃으며 일행들을 둘러보던 나는 이사나가 한쪽구석에서 빵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그의 옆에 다가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는 내가 어딜 다녀왔는지 궁금해 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간략하게나마 설명해줄 작정이었다. “ 라이, 많이 먹었어? ” “ 으응. 그런데 어디를 다녀오는 거야? 트… 아니, 매튜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지기에 걱정했어. ” “ 아아, 좀 골치 아픈 녀석을 만났어. 그래서 말인데, 아마 한 달 후에 일행이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괜찮을까? 일정에 지장을 줄 것 같지는 않은데. ” “ 나야 상관없지만…. 그게 누군데? ” 어차피 말해줄 생각이었으므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작은 목소리로 ‘드래곤’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사나에게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정도의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입을 떡 벌린 녀석은 들고 있던 빵이 떨어지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 이… 라, 라이? ” “ 헉….저, 정말 드래곤이야? 지상 최강의 생물이며 전 대륙에 그 존재가 50명 내외라고 하는 그 드래곤?? ” “ 글쎄. 지상최강의 생물인지는 잘 모르겠고, 숫자가 50마리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알바가 아니지만 어쨌든 드래곤인 건 맞아. 아무튼 그가 한 달 후에 내 여행에 동참할 뜻을 전해왔어. 네게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단 허락했는데…괜찮은 거지? ”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는 얼떨떨해 하면서도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그제 서야 떨어트린 빵에 시선이 미쳤는지 아깝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다. 아직 라피스와 만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이렇게 기 싸움에서 밀리면 어쩌자는 건지. 녀석과 만나게 될 한 달 후가 걱정이 되어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트로웰이 그런 내 어깨를 툭하고 건드렸다. “ 괜찮겠어? 라피스의 성격은 봐서 알겠지만, 감당하기 힘들 거야. ” “ 헤헤. 뭐 어쩔 수 없지. 나름대로 각오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 그나저나, 오늘 나 때문에 많이 놀랐지, 매튜. 미리 주의를 받았는데도 방심하다니, 정말 면목이 없다. ” “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일찍 눈치 챘으면 엘한테 그런 고생 안 시켰을 거야. 그리고 내가 준 주의라고 해봤자, 일행하고 떨어질 일이 있으면 정령계로 돌아가라- 이것밖에 없었잖아? 하지만 놈이 해준 말을 들어보니 정령계로 간다고 해도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겠던걸? 일행과 떨어지게 된다는 것만 알았지, 설마 그 녀석이 소환할거라곤 생각도 못했어. 제대로 된 대처법을 알려주지 못해서 미안해, 엘. ” “ 에에?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 사과할 쪽이 바뀌면 어떡해~ ”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트로웰 역시 양보할 생각이 없는 듯 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넨 그는, 내가 마지못해 알았다고 대답해서야 만족했다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이건 설마 아무 잘못 없는 상대방의 사과를 먼저 들음으로서, 묻어뒀던 자신의 양심을 저절로 찔리게 만드는 고도의 수법인가? 아무튼 사과를 받으면서도 이렇게까지 마음이 편치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검문소에 다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일행을 습격하던 몬스터들도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동안 피가 마를 날이 없던 용병단의 무기가 드디어 한숨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간간히 오크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 수는 지난시간동안 마주친 몬스터들의 숫자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던 지라, 샴페인 용병단에게는 차례가 돌아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하기가 비일비재였다. 그 바람에 요즘 들어 도끼를 휘두르지 못한 헤롤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커져가고 있었다. “ 으아아, 진짜 짜증나 죽겠네. 이런 조용한 일정은 내 구미에 맞지 않단 말이다! 대체 몬스터는 언제 나오는 거야~~ ” “ 시끄러, 이 학살 광아! 별 탈 없어서 좋기만 하구만 어딜 죽이질 못해 안달하는 거야? 닥치고 제대로 가기나 해! ” “ 왜 맨날 나만 미워해! ” “ 예쁜 짓이나 해보고 그런 말을 하던지! 휴센, 저 자식 단에서 쫓아낼 생각 없어? 이러단 우리까지 품격이 떨어진다고! ” 씩씩거리는 이릴의 말에 묵묵히 말을 몰고 있던 휴센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일은 몰라도 헤롤을 괴롭히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동참하길 좋아하는 그였다. “ 정말 그렇군. ” “ 크아악- 그렇긴 뭐가 그렇다는 거야~ 이 망할 단장아! 당신 자꾸 그따위로 나오면 쉐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소문내 버릴 거야~! ” 꿈틀. 그 말을 듣는 순간 휴센의 얼굴근육이 크게 움직였다는 것을 느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쉐리의 마음을 쉽게 받아들여 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저 헤롤의 놀림을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이지 않던가. 불침번을 서던 그날, 내 어깨를 붙들고 로리가 아니라고 처절하게 외치던 그의 얼굴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를 정도다. 한마디로 헤롤은 지금 벌집을 건드린 것이었다. 그 대가는 이후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무 말 없이 허리춤에 달린 검 집에서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을 꺼내든 휴센은,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그대로 헤롤을 향해 응징을 가하기 시작했다. “ 우아아아악~ 단장이 미쳤다아!! 사람 살류~~~ ” “ 시끄러- 이 망할 놈아! 죽어라아아아아~~~~ ” 그리하여 이어지는 숨 막힐 정도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이랄까. 이성을 잃은 휴센의 모습을 처음 보는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은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마냥 얼굴이 핼쓱하게 질려있었지만, 샴페인 용병단의 다른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가 이성을 잃어 응징을 가하는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헤롤이었기 때문이다. “ 휘익~ 단장, 최고! 저 자식 오늘에야 말로 눈물 좀 빠지게 해줘~! ” “ 그냥 그어버려도 괜찮아. 시체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줄 테니 뒤처리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 “ 힘들면 말해, 휴센님! 당장 도와주러 갈 테니까! ” 오죽 기뻤으면 ‘씨’에서 ‘님’으로 호칭이 격상되겠는가. 아무튼 헤롤은 여러 가지로 사방에 적을 만드는 타입이은 확실했다. 장난이라 치기에는 절대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로.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잘리고, 옷자락이 찢겨 핏물이 배어나오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장난으로 볼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같은 일행에게까지 살(??검을 쓰는 그 잔인한 손속에 다른 단원의 사람들은 샴페인 용병단을 아주 사악한 집단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그렇다고 오해(?)를 풀 노력을 할 리가 없는 그들이었다. 헤롤의 비명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다. “ 진짜 죽일 작정이야아?? 거기 손뼉치고 있는 니들 전부 두고 보자아아아!! ” “ 두고 볼 필요 없을 거다, 망할 자식아! 넌 여기서 뼈를 묻을 테니까!! ” “ 우에에에에에! ” 그러나 막상 저렇게 소리 질러도 검을 휘두르는 이나 그것을 피하는 이나 재미로 저러는 것임을 일행들의 모두는 다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그들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랄까? 그렇기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응원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물론, 그 때문에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살인을 부추기는 행태를 즐긴다며 더욱 사악한 집단으로 인정받고는 있지만 말이다. 쿨럭. 이 순간,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웃지 않는 이는 한층 어두운 표정이 된 쉐리밖에 없었다. 그녀는 휴센이 어떤 마음고생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때문에 헤롤이 놀리는 말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그가, 단순히 자신을 연애상대로 고려조차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면 두 사람이 온전히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족같이 지내온 시절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막상 연애감정으로 보았을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눈치 채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혹시나 휴센이 받아줄 생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조금은 변화가 생길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그의 염려를 이해하게 된 그녀가 먼저 포기하고 물러서게 될 수도 있었다. 원래 사랑에선 먼저 반한 쪽이 죄인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마 앞으로도 이 두 사람의 문제는 해결되기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이 들고 있었다. ===================================================== 후후. 이제 주일 연재는 쉬어야 겠어요. 비축분 만들 시간이 모자라다는;ㅁ; 참! 예전에 페리스가 시큐엘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은, 그가 상급 정령이기 때문입니다^^ 운디네와 나이아스들은 계약자에게 의사를 전달 할 수 없지만, 시큐엘은 상급정령이라서 가능하답니다^^ 그리고 보통의 정령들도 소환되고 나서 계약전까지는 대화할 수 있어요. 계약하려면 소환자의 의사를 확인해야 하니까 어쩔수 없달까요;; 그리고 물론 저는 리플을 모두 빠짐없이 읽습니다! 리플은 삶의 힘! 제가 글을 쓰는 힘의 원동력 이랍니다^-^V 그러니까 마구마구 달아주세요~ 랄라~ * P.S 1. - 지난편의 나이아스들의 대화에서 '험난과 역경'을 '고난과 역경'으로 수정하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험난에는 역경이 포함되어 있더군요.-_-; 조언 감사드립니다^^ * P.S 2. - 아아.. 제글은 어둠의 자녀를 너무 많이 연성시키는 군요. 좀 자제해야 할듯.. 쿨럭. * P.S 3. - 찜한녀석 2부는 특별 프로젝트(...) 진행중입니다만. 과연 올려도 몇분이나 읽어주실지.. 읽으실 분 한번 손들어 보세요=ㅁ=; 참고로 1부 만큼 판타지성 난무하지도 않고, 두근두근한 감정 싸움도 없고; 은근히 짜증나는 악역까지 등장합니다.. 게다가 짧습니다. 아무리 길어도 10편 완결은 못 벗어 날 겁니다; 그래도 올리길 바라십니까?=ㅁ=? => 엘퀴네스의 장-13. 그 남자 그 여자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두 번째 검문을 거치고 도착한 곳은 마을이라기보다는 도시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까지 지나온 마을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커다란 건물들과 상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감탄을 내뱉었다. 바닥도 그냥 흙이 아니라 벽돌로 포장해둔 길이 대부분이었다. “ 와아, 여기는 지금까지 본 마을과는 뭔가 상당히 다른데요? ” “ 하하, 그래? ” “ 네. 높은 건물이 굉장히 많네요. 시장도 활발한 것 같고.. ” 또한 다른 마을에 비하여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을 꼽자면, 유달리 서점으로 보이는 건물이 많았다는 것이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차림도 마법사나 신관의 복장을 한 사람이 많았다.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옆에 있던 마이티가 간단하게 그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 여긴 지혜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서적과 문서가 충만한 지역이거든. 대부분의 아카데미가 집중되어있는 곳도 여기야. 그래서 지식 탐구에 미친 학자나 마법사들의 방문이 잦은 편이지. 뭐, 지혜의 제국이라 불리는 알폰프에 비하면 형편없겠지만 말이야. ” “ 헤에. 그럼 여긴 도시인건가요? ” “ 응. 클모어보다는 규모가 작지만 다들 도시로 취급해주고 있어. 두리번거리다간 길 잃는다. 게다가 치안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까 물건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 ” “ 네에.. ” 이렇게 많은 용병단이 한꺼번에 들어서는 데도 전혀 시선을 모으지 않을 만큼, 거리엔 사람이 깔리고 또 깔려 있었다. 저번에 들린 마을과 달리 이곳에선 며칠 묵어가게 될 거란 소리에 헤롤과 이릴은 오랜만에 푸욱 쉴 수 있겠다며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이번엔 용병단끼리의 마찰을 빚지 않기 위해, 각자 따로따로 여관을 잡기로 합의를 본 뒤였다. “ 무기나 다른 여러 가지 수선할 게 있는 사람들은 미리미리 맡겨두도록. 출발은 3일 뒤니까 그 전에 되찾을 수 있도록 해. ” “ 알았어. 그런데 이번엔 방을 어떻게 잡는 거야? ” “ 이전과 마찬가지로 3인실 두개에 2인실 한 개다. 조 원도 저번과 같아. ” “ 크흑! 단장~ 당신 진짜 너무한 거 알아? ” 절망어린 표정으로 항의하는 헤롤의 말은 제고의 가치도 없이 완벽하게 무시되었다. 그것을 웃으며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이사나에게 시선을 미치곤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여행으로 입고 있는 로브며, 가죽신발이 해어질 대로 해어져 있었던 것이다. 모처럼 들린 마을이니(도시라고는 하지만)상점에 들러 새 옷과 신발을 구입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뒤 묵을 여관의 위치를 대강 확인한 우리는 각자의 용무에 맞춰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함께 거리를 나선 나와 이사나는 옷가게를 찾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같이 가고 싶어 했던 트로웰은 이미 헤롤의 도움요청을 받아 그와 동행하게 된 후였다. “ 에, 엘. 난 괜찮다니까? 지금 옷으로도 문제없어. ” “ 무슨 소리야? 이렇게 낡았는데. 몬스터들의 피가 묻어서 지저분하기까지 하잖아. 그리고 이제 겨울이니까 좀더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해. 지금 옷은 너무 얇아서 감기 걸린다고. ” 끝까지 괜찮다고 우기는 이사나를 떠밀고 들어간 곳은, 옷부터 시작해서 장신구며 신발까지 모두 고루 갖추고 있는 어느 잡화점이었다. 들어왔을 때 얼핏 보았던 간판이 ‘없는 게 없는 집’ 이었으니, 탁월한 선택을 한 셈이다. 딸랑. 종소리가 울리며 우리가 들어왔음을 알리자 안 쪽에 앉아있던 여주인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덩치가 크고 통통한 푸근한 인상의 중년여인이었다. “ 어머, 어서들 오세요. 무엇을 사러 오셨나요? ” 싹싹하게 웃으면서 잽싸게 우리의 위아래를 흩어보는 모습엔, 오랜 상점경력을 드러내는 듯한 노련함이 보이고 있었다. 이사나의 지저분한 차림에 실망한 듯이 미간을 좁히던 그녀는 내 쪽으로 시선을 미치곤 화들짝 놀라며 얼른 고개를 숙여보였다. 정말 내가 어느 귀한 집 자식으로 보이긴 보이는 모양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옆에서 쭈볏거리고 있던 이사나를 가리켜 보였다. “ 이 녀석이 입을만한 두꺼운 옷을 볼 수 있을까요? 추위나 눈에도 끄덕도 하지 않을 정도로 따뜻한 것으로요. ” “ 그거야 물론입죠, 당연히 있습니다요. 어떤 종류로 보여드리면 괜찮을지? ” “ 여행하면서 입을 수 있는 것으로요. 후드가 달린 것이면 더욱 좋겠네요. 망토도 부탁드립니다. ” “ 예에, 이쪽으로. 쟈콥-! 겨울 옷 중에서 괜찮은 여행복 몇 벌을 골라 오거라. ”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가게 안쪽에서 누군가가 산더미 같은 옷을 짊어지고 걸어 나왔다. 갈색 고수머리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였는데, 덩치가 큰 여주인에 비하면 깡말라 보일 정도로 마른 체구였다. 그런데도 힘은 장사인지 족히 몇 십 벌은 되어 보이는 옷을 들고 나오면서도 거뜬한 표정이다. 우리가 보기 쉽도록 테이블 위에 한 벌씩 옷을 늘어놓은 그는 유쾌한 말투로 인사를 건네 왔다. “ 저희 상점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 곳 점원인 쟈콥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여행복들만 가져왔습니다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다른 걸 보여드리겠습니다. ” 그러면서 그가 가리키는 옷들은 전부 눈에 뜨이는 화려한 색상에다 고급원단을 사용함직한 세련된 스타일이 전부였다. 마치 귀족들이 나들이 갈 때나 입는 옷 같아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옷은 예쁜데, 너무 색상이 눈에 뜨이는 걸요. 좀 더 단순한 스타일로 보여주시겠어요? 원단은 고급이어도 상관없어요. 오물이 묻어도 쉽게 드러나지 않을 정도의 어두운 색으로 골라주세요. ” “ 흐음, 그렇다면 이 건 어떠십니까? 크란 산맥에서만 서식하는 흑 소의 가죽으로 만든 것으로, 신축성이 뛰어나고 가벼우면서도 따뜻하답니다. 값이 좀 비싸다는 게 흠입니다만, 손님이 찾으시는 기호에 딱 알맞을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 그가 보여준 옷은 검은색의 바지와 셔츠 위에 조끼를 덧입는 형식의 비교적 무난한 스타일이었다. 그 위에 걸쳐 입는 겉옷엔 후드가 달려있어, 얼굴을 가리기에도 용이해 보였다. 한 가지 흠이라면 단순한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원단이 고급이라는 티가 너무 확연히 드러난다는 것이었지만, 어차피 위에 망토를 걸치게 할 생각이었으므로 그다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괜찮은데요. 어때, 라이? 마음에 들어? 네가 입을 거니까 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야지. ” “ 아, 나야 상관없지만.. ” “ 그럼 이걸로 정할까? 아직도 도착하려면 한달이나 남았으니까 색이 쉽게 바래지지 않는 걸로 고르는 게 좋겠지? 흑 소의 가죽이라고 하면 염색원단은 아니니까 물이 빠지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 “ 오, 아름다우신 손님이 물건 보실 줄 아시네요. ” 싱글거리는 얼굴로 얼른 비위를 맞추는 쟈콥과 여주인 이었지만, 나는 간단하게 무시하면서 옷에 맞춰 입을 망토와 신발을 주문했다. 옷은 딱 맞추기 보단 소매와 바지의 기장을 헐렁하게 부탁했다. 한참 성장기인 이사나가 비록 한 달 동안이라고 해도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마침 그러한 조건에 맞는 사이즈가 있었기 때문에 따로 수선을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점원의 말마따나 비싸긴 엄청 비싼 옷인지 총 3골드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상점을 나오자 그때부턴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여관으로 가봤자 일행들이 돌아와 있을 리는 없고….그냥 거리 구경이나 다녀볼까? “ 혹시 뭐 더 필요한거 없어? 이왕 나온 김에 사가자. ” “ 이대로 안 돌아가고? ” “ 응. 어차피 가 봤자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지도 않았을 걸? 아, 혹시 배고파? 밥 먹으러 갈까? ” 내 물음에 이사나는 머뭇거리는 표정이면서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라 시장해질 무렵이었던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에 자리 잡은 식당이 여럿 보였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음식이니, 고급음식점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건물이 크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사나가 잠시 기겁을 하긴 했지만, 사람이 많은 곳일수록 오히려 정체를 숨기기 쉽다는 말에 순순히 납득하는 듯 했다. “ 어서 오십시오. ” “ 죄송하지만, 사적인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까요? 이왕이면 사람들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요. ” “ 물론 입니다. 식사는 두 분이 하시는 겁니까? 저를 따라오시지요. ” 정중한 어조로 대답한 종업원은 그 후 우리에게 식당안의 구석진 자리 쪽을 안내해 주었다. 부탁했던 대로 근처에 사람이 별로 없는 한적한 분위기였다. 종업원은 우리가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이번엔 주문할 메뉴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 어떤 것으로 드시겠습니까? ” “ 으음. 뭘 로 하지…. 저, 이 가게에서 추천하는 요리는 없나요? ” “ 점심시간에는 특별 정식 ‘한입의 기적’과 ‘잊을 수 없는 행운’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 “ 에에? 그게 어떤 건데요? ” 한입의 기적이라니…. 여기선 정식 메뉴의 이름도 특이하단 말인가! 이미 계절을 표현 하는 방법부터 범상치 않다고는 생각했지만, 새삼 식당에서까지 이런 표현을 들으니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내가 놀라는 진정한 이유를 깨닫지 못한 종업원은 단지 메뉴의 종류를 궁금해 한다고 생각했는지 망설임 없이 설명을 이어갔다. “ ‘한입의 기적’은 신선한 해산물 요리와 바닷가재, 새우스프. ‘잊을 수 없는 행운’ 베이컨과 비프스튜, 양고기가 나옵니다. 모두 저희 가게에서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메뉴입니다. 후식으로는 각각 아이스크림과 홍차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 오오. 듣는 것만으로 군침이 절로 도는 이름들이 아닌가. 그런데도 난 먹을 수조차 없다니…. 새삼 정령의 몸이 원망스러워 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 어떤 걸로 먹을래, 라이? ” “ 으음, 두 번째 걸로. 해산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 “ 그럼, 이…‘잊을 수 없는 행운’ 이랑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주세요. ” 거기까지 말한 나는 이사나 혼자 먹는 모습을 보이면 어색할 것 같아 한마디 덧 붙였다. “ 제가 지금 입맛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데, 그냥 간단히 먹을 만한 스프 아무거나 한개 더 주시겠어요? ” “ 예, 그럼 이쪽의 도련님께는 ‘잊을 수 없는 행운’과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을, 레이디께는 저희 가게 자랑인 야채스프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저희 식당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 …젠장. 또 여자로 오해한거냐! 이젠 일일이 화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막상 나와 시선이 맞추진 종업원이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니, 이 자리를 떠나고 싶은 생각이 물씬물씬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성전환이라도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은 심정이다. 차마 여자가 아니라는 반박도 못하고 얼굴만 울그락 불그락 거리고 있는 내가 재미있었는지, 이사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 어차피 정령은 무성이라면서 뭘 그렇게 신경 써? ” “ 그래도 기분 나쁜 건 나쁜 거야. 이 외모 때문에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씀! 하아, 나 정말 여성 체 인걸까? ” “ 글쎄. 확실히 여성 체 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은데? 언뜻 보면 남자로 보이기도 하니까 말이야. 엘 너는 상당히 중성적인 얼굴이야. 보는 사람에 따라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인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뿐이니까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 “ 여성적인 부분을 두드러지게 보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문제지. ” “ 어쩔 수 없잖아. 엘이 예쁘니까. 예쁜 외모를 여자로 착각하는 건 당연한거 아닐까? ” 하지만 엘뤼엔이나 라피스 같은 경우, 똑같이 예쁜 외모여도 절대 여자로 착각이 되지는 않은걸? 더 따지고 들어봤자 결국 내 무덤 파는 짓이 될 것 같아 나는 그쯤에서 그냥 수긍하고 말았다. 이러다 나중엔 여자로 오해받지 않으면 오히려 서운해 하게 되는 건 아닌지 두려워 지는 심정이었다. 우리가 이 도시의 이름이 ‘할버크’임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식사를 하는 도중이었다. 마침 우리 근처에 있던 빈 테이블에 연배가 꽤 높은, 학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다가와 앉게 되었는데, 그들이 하는 대화 중에 이 도시의 이름이 들어갔던 것이다. 그들은 흰 수염을 발끝까지 길게 기른 초로의 노인한명과, 검은 곱슬머리를 가진 30대 초반의 중년남자였다. 딱히 주의를 기울일 것도 없다는 듯이 큰 소리로 떠드는 바람에 듣지 않으려 해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대화가 들릴 수밖에 없었다. “ 허허. 글쎄 요즘 남문근처에서 상급 몬스터가 대거 출현 한다더군. ” “ 그거 걱정이군요. 저희들이 갈 방향도 남문 쪽이 아닙니까? 이거 용병이라도 고용해야 하겠는걸요. 혹여나 라이칸 슬로프 한 마리라도 나왔다간 뼈도 못 추릴 텐데요. ” “ 상급 몬스터를 상대할만한 실력 있는 용병은 고용비가 너무 비싸. 하지만 목숨이 걸린 일이니 어쩔 수 없지. 이거야, 원. 황실에서 보내준 보조금을 전부 용병을 고용하는데 써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 그의 입에서 나온 ‘황실’이란 소리에 막 스튜를 떠먹던 이사나의 손이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솔트레테 제국 황실 관계자인걸까? 나까지 덩달아 긴장해서 눈치를 보기 시작하자, 그것을 의식했는지 중년 남자 쪽이 황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세리엄님! 누가 들으면 어쩌시려고. ” “ 무슨 상관인가? 내가 카터스 제국 황실의 수석 마법사라고 떠들고 다닌다 해서 딱히 가해질 위협이란 게 있을 턱이 없는걸. 필립, 자네는 너무 겁이 많아서 탈이야. ” “ 하, 하긴 여긴 알폰프 제국이 아니지요. 게다가 세리엄님은 7서클의 마스터이시기도 하고…. 제가 너무 걱정이 지나쳤습니다요. ” 헤헤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이는 필립이란 이름의 남자의 모습에 세리엄이란 이름의 노인은 다시 쯧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 학자라는 양반이 그런 눈치도 없어서 쓰겠는가? ” “ 하지만, 솔트레테는 지금 황실이 어지럽습니다. 그런 중에 타 제국 황실의 수석마법사가 방문했다는 걸 알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무리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요. ” “ 입은 뒀다 뭐하나? 그냥 관광차 왔다고 사실대로 말하면 될 것을…. 자넨 바보인가? ” “ 크흑! 세리엄님은 너무 순진하십니다. 세상엔 말로 해서 안 통할 때가 있는 법이라고요~! ” 억울하단 듯이 소리를 높여보는 필립이었지만, 상대편의 노인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오히려 대화는 그의 주도아래 점점 심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그러고 보니 이곳 황제의 나이가 우리제국 태자전하와 같은 나이던가? ” “ 헉, 세리엄님! 그 황제에 관한 것은 금기입니다. 오시면서 공문도 못 보셨어요?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해도 반역자로 간주하여 처형한다잖아요? ” “ 흥, 섭정왕이 발악을 하는 게지. 어디 해파리가 무서워 헤엄을 치지 못한다던가? 게다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게 아니네. 우리 황태자 전하가 16세 라는 거지. ” “ 그 분이 16세인 게 지금 여기서 우리가 목숨을 걸고 있는 것과 무슨 상관이랍니까? 세리엄님은 정말 너무하십니다요. ” 그러나 이번에도 그의 투덜거림을 무시한 노인은 여전히 제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계속 내 뱉고 있었다. 어지간히도 뻔뻔한 성격인 듯 했다. “ 16세인 게 상관이 없다니? 아니, 자네는 모국의 황태자가 벌써 16세가 된다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건가? 16세란 말일세, 16세!! 이제 곧 성인이 되신단 말이네! ” “ 예에~ 그렇습지요. 그런 주제에 아직도 평민들의 삶에 대한 환상을 못 버리셔서 뻔질나게 가출이나 하시지만 말입니다. 이거 어디 창피해서 꺼낼 수나 있는 말이랍니까? 다 세리엄님이 너무 싸고 도셔서 일이 이지경이 된 거라 이 말씀입니다! ” “ 아니, 이 사람이! 자네가 지금 내 앞에서 눈을 부라리는 겐가? 엉? ” …다 큰 어른들이 저게 뭐하는 짓일까. 나는 저절로 지어지는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그 심정은 이사나도 마찬가지인지 혹여나 자신에 대한 무슨 소문이라도 들을까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녀석은 피식 하고 허무한 미소를 흘렸다. 그런 중에도 두 사람의 신경전은 계속 되고 있었다. “ 제가 언제 눈을 부라렸다고 그러십니까? ” “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이 늙은이가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무시하는 겐가? 젊은이가 그렇게 늙은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 법이네! ” “ 아아니~ 제가 또 언제 무시를 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대체 세리엄님은 왜 그리 저를 못 잡아 잡수셔서 안달이신 거냐고요! 태자전하가 다 세리엄님을 닮아서 그리 제 멋 대로인 성격이신 겁니다! ” “ 태자전하의 성격이 어디가 어때서! 자네 지금 감히 내 앞에서 전하를 욕보일 생각인가? ” “ 헉. 누,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시고 그러세요, 헤헤. ” 결국 승리는 끝까지 고집스러운 입매를 씰룩이고 있던 노인에게 돌아갔다. 어느새 비굴모드로 전향하여 비위맞추기 바쁜 필립이란 남자를 보며, 나와 이사나는 저절로 피어나는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로 별난 사람들이었다. ============================================================ 우오오오~ 엘퀴네스 리플이 처음으로 100을 넘었습니다!! 아아아아아 감격!ㅇㅁㅇ// 너무 행복해서 두려울 지경입니다! >ㅁ< 모두 싸랑해염~~~~!(퍽;) P.S 1. -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는 아무래도 심각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어떤 만화, 어떤 글을 읽더라도 어둠의 자녀는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즐겨합니다.(;) 둘째로, 어둠의 자녀는 전염성이 강하고 중독성까지 있는대도 그것을 거부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_=) 셋째로, 어둠의 자녀는 여 주인공(혹은 조연이라도 주인공의 사랑을 받는 여자)를 싫어라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그외 기타 등등... P.S 2. - 에에.. 제가 이번에 유조아에서 '방울토마토'란 닉네임으로 엘퀴네스의 장을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마녀홈 작품은 독점연재입니다만.. 마녀님께 허락 받았다지요; (출판 홍보를 위해서입니다; 아마 연재기간이 짧을거예요;) 그래도 역시 저는 마녀홈이 좋답니다^-^* 여기다 뼈를 묻을 거예요...음하하하 P.S 3. - 이사나와 헤어진 페리스들의 이야기가 첨가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후에 짤막하게 첨가하거나, 외전의 형식을 통해서라도 다루겠습니다^^/ P.S 4. - 찜한녀석 2부는 7월 말에 올릴 예정입니다. 그렇다고 엘퀴네스의 연재에 지장이 있지는 않을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말씀드렸다시피 10편 완결의 아주 짧은 글이 될겁니다..후후후. <아루시님께 축전 받았어요~^^ 너무 예쁘다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대강의 식사를 마치고 거리를 구경 다닌 우리는 거의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여관으로 돌아갔다. 여관 1층의 홀에서 잡담을 나누고 있던 일행들은 우리가 들어오는 것을 보곤 반갑게 손을 흔들며 맞아주었다. “ 어딜 다녀온 거야? 생각보다 늦어져서 찾아 나서려던 참이었다. ” “ 아, 죄송해요. 신기한 게 많아서 구경하느라고.. 그런데 헤롤들은 어딜 다녀오신 거예요? ” “ 아아, 도끼 손잡이가 헐거워져서 장인에게 맡기러갔지. 그리고 나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왔어. 참, 엘 너 이거 받아라. ” “ ……? ” 헤롤이 건네준 것은 팔에 차면 딱 맞을 듯한 10cm 넓이의 금색 고리였다. 가운데엔 투명한 물방울 모양의 구슬이 박혀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여성용 장신구란 느낌이 강해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설마 날 놀리는 건가? 그러자 그는 오해라는 듯이 급히 손사래를 치며 그것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 호신용 팔찌야. 남녀 공용이라고. 악세사리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 “ 에? 호신용 팔찌요? ” 의아하게 되묻는 말에 헤롤은 말보단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얼른 다가와 팔찌에 달린 구슬을 돌려보였다. 그러자 달칵-하는 금속음과 함께 팔찌의 모양이 순식간에 단검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뿌듯함이 담긴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었다. “ 마법물품중 하나야. 어느 멍청한 상인이 팔찌인줄 알고 팔고 있더군. 운이 좋았달 까? 이건 어지간한 귀족들도 못 구하는 거라고. 차고 다니다가 신변에 위험에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단검으로 전환시켜 찔러버려. ” “ 헉. 이런 귀한 걸 저한테 주셔도 되는 거예요? 차라리 이릴이나 쉐리에게 주는 편이.. ” “ 괜찮아, 괜찮아. 저것들을 누가 건드리겠냐? 정 위험하면 쉐리는 단장이 지켜주겠지 뭐. ” “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럼 나는! ” 그의 말을 들었는지 이릴이 눈 꼬리를 사납게 치켜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헤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뭐가 걱정이냐는 듯이 냉큼 대꾸하는 것이었다. “ 얼굴이 무기인 주제에 뭐가 또 필요한데? ” “ 뭐야아? 이 자식이 진짜! ” “ 흥! 아무튼 그건 엘 너 주려고 산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가져. 어차피 우리한텐 그다지 필요 없으니까 말이야. 참, 구슬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단검이 되고, 왼쪽으로 돌리면 안쪽에서 독침이 나와. 그걸 상대방에게 찌르면 바로 즉사할거야. ” “ 헤에. 그래요? 고맙습니다.. ” 이런 무시무시한 살인도구를 받으면서도 그다지 찝찝해 하지 않는 나도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살았을 때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이 아닌가. 내가 헤롤에게 받은 팔찌를 넋을 잃고 구경하고 있자, 이번엔 트로웰이 다가와서 이사나에게 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그리곤 당황하는 그에게 친절한 설명을 이었다. “ 제법 좋은 게 있기에 샀어. 이젠 슬슬 검을 쥐고 싶다고 생각할 때지? 오늘부터 클모어에 도착할 때까지 휴센이 봐주기로 했으니까 그에게 실전에 맞는 검술을 배우도록 해. ” “ 앗,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매튜. ” “ 별로. 엘의 일행이니까 제 몫을 다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자꾸 잊어버리는 것 같아서 말해두는 거지만. 명심해, 라이. 이 여행의 중심인물은 너야. 네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엘은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해. 알았어? ” “ 예, 명심할게요. ” 새삼 책임감을 느꼈는지 이사나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트로웰은 피식 웃어보였고, 일행들은 자세한 연유도 알지 못하면서 기백이 좋다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여관 문이 거칠게 열리며 한때의 용병들이 들이닥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앙- “ 주인장! 신관을 불러주시오! 지금 당장!! ”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그곳엔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남자들이 보기에도 처참한 몰골로 간신히 문에 기대어 있는 상태였다. 두터운 흉갑으로 보호하고 있었음 직한 가슴부위가 날카로운 것에라도 짓이겨진 마냥 깊이 패여 있었고, 그 사이에서 샘물 같은 피가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사람도 아니고, 들어온 5명의 남자가 전부 그런 모양이었기에 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여관의 주인이었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인 듯, 부상당한 사람들 하나하나와 시선을 맞추던 그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에밀, 지금 당장 신전으로 가서 치유 술을 하시는 사제 분을 모셔 오거라! 얼른! ” 그러자 샴페인 용병단들도 덩달아 다급해져서 행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부상자들을 부축한 헤롤들은 피가 흐르는 상처를 살펴보며 급히 주인을 채근했다. “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서 사람들을 눕힐 공간을! 상처가 심하니 지혈부터 해야 하오! 준비된 약초가 있습니까? ” “ 있긴 합니다만, 비상용일 뿐이라 극히 소량입니다. 이들 모두에게 쓸 수는 없을 겁니다. ” “ 우선 그거라도 가지고 오시오! 그리고 깨끗한 천도! ” 이후 여관의 홀은 식당에서 임시 병동으로 그 기능이 바뀌어 버렸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사람들을 방으로 옮길 수가 없었기에 그대로 맨 바닥에 눕혀두었던 것이다. 그들 상처의 공통점은 부러진 곳은 하나 없이, 모두 하나같이 피부가 깊이 찢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는 뼈가 보일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은 자도 있었다. 단단한 천으로 상처를 감아 지혈하는 와중에도 휴센은 긴장한 표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무자비한 상처라니, 칼에 당한 것 아닌 것 같은데…. 설마 몬스터에게 당했소? ” “ 크흑. 그, 그렇소. ” 그러자 옆에서 부상자들의 상처를 돌보던 일행들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휴센은 침착한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어떤 몬스터이기에 5명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돌아온 겁니까? 숫자가 많던가요? ” “ 쿨럭. 5, 5명이 아니오. 11명이었소. 살아 돌아온 사람이 우리 뿐 인겁니다. 게다가 몬스터는 단 두 마리에 불과했소.” “ !! ” 웅성. 그의 대답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당황하기 시작했다. 설마 11명의 사람이 단 2마리의 몬스터에 이렇게까지 당할 줄이야! 그러나 휴센을 비롯한 샴페인 용병단은 오히려 점점 더 침착한 표정이 되 가고 있었다. 무언가 짐작이 가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상처를 살펴보려는 듯 그들의 몸을 찬찬히 흩어보던 휴센은 한참만에야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 손톱에 찍힌 상처로군. 이건 이빨에 긁힌 건가? 그것도 동시에 여러 군데를 공격한 것 같은데…. 정말 2마리 뿐 이었소? ” 끄덕끄덕 이제는 말하는 것도 힘이든지 누워있던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했다. 그와 함께 일행들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 한번에 여러 군데를 이빨로 긁을 수 있다는 것은 머리가 여러 개란 소리겠지. 게다가 손톱에 의한 상처도 무시할 수 없으니…. 설마,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 인가? ” “ 맙소사. 그건 상급 몬스터 중에서도 최악이라고, 단장! 거의 마물로 취급되는 놈들이잖아! 대체 그 놈들이 죽음의 숲은 놔두고 여긴 어떻게 온 거래? 그것도 두 마리나! ” 죽음의 숲은 이곳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바다건너에 알폰프 제국 내에 존재하는 어둠의 지역이었다. 워낙 몬스터의 출현 빈도수가 높고 평소라면 눈을 씻고 찾아보기 힘든 상급 몬스터가 무리지어 다니는 곳이라, 사람들이 출입이 엄중히 금지된 곳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마족의 영역이라고 하여, 마신을 섬기는 이곳 솔트레테의 신관들에게는 오히려 신성한 지역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기겁하는 헤롤의 말에 휴센은 짧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 상급몬스터가 전부 죽음의 숲에만 존재하는 건 아니야. 산맥 꼭대기에 살고 있던 것이 내려왔을 가능성이 크지. 하지만 두 마리라니, 위험 하군…. ” “ 위험하다 뿐이야? 케르베로스 한 마리면 실버 급 용병이 몇 명이나 필요한지 알면서 그래? 자그만 치 10명이라고, 10명! 한 마리당 10명이 붙어야 간신히 해볼만 하다니까? 그런데 두 마리 라잖아! 이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다고! ” 평소엔 몬스터가 어서 나오기를 바라던 헤롤 조차도 상급 몬스터라는 말에 학을 떼고 있었다. 하긴 실버 급의 용병이 10명이 있어야 겨우 한 마리의 처리가 가능한 존재라니, 겁먹지 않으면 그것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그러자 옆에서 지혈에 효과가 있는 약초를 열심히 빻아 상처에 붙이고 있던 여관주인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입지요, 사실 이 사람들은 요 근래 남문에서 활개 치는 상급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고용된 용병들입니다. 모두 은패를 지닌 실력 있는 자들이라고요. 그런데 반 이상이 당해서 돌아올 줄이야. 이러단 조만간에 남문이 폐쇄될지도 모르겠군요. ” “ 남문이라니. 제길 골치 아프게 됐군. 클모어로 가려면 그 길 밖에 없는데. ” 딱딱하게 중얼거리는 마이티의 말에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잔뜩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우리가 갈 방향 쪽에 상급 몬스터가 등장할 것은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운이 지지리도 따라주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때 마침 여관 종업원이 부르러 갔던 신관이 달려왔기에, 대화는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그러나 반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던 여관주인은 막상 신관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는 실망한 얼굴이 되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 제기랄. 애송이를 보내다니, 비겁한 자식들. ” “ 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 “ 말 그대로 애송이입니다. 제가 몇 번 봤는데, 저 사람은 신력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신관이라고요. 귀족이 다쳤다고 하면 당장에 고위신관을 보내는 것들이, 용병이라는 말에 가장 말단의 사람을 보낸 거예요! 저 사람의 신력으론 바닥에 넘어져서 긁힌 상처나 치료할 수 있으면 다행일겁니다! ” 흥분하는 여관주인의 말에 달려온 신관은 얼굴을 붉히며 흠흠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다. 당장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사람에게 애송이 신관을 보내다니?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난감한 표정을 하던 신관은 대뜸 고개를 치켜들며 거만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무엄하오. 그게 치료를 하러 온 신관을 보고 할 말입니까? 나는 치유의 신을 모시는 사제로서, 당신들에게 이러한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소. 환자나 보여주시오. ” “ 하- 당신 앞에 누워있는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 답니까? 어디 그 잘나신 치유력으로 치료를 해보시지요! ” “ 응? 어디에 사람이…. 헉. 이, 이 사람들이오? ” 한눈에 보아도 당장 죽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의 심한 상처를 입은 용병들에게 시선이 미치자, 그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뻘줌한 표정이 되어 하는 말이라는 게, 자신의 능력 밖의 일이니 다른 사제를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분노한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지도 않은 지, 그는 정말 그렇게만 말하고 꽁지가 빠져라 여관 밖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겨우 불러온 신관이 애송이이다 못해서, 그나마 적은 신력이라도 부어주지도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리자 사람들은 황당 반, 분노 반의 심정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 저런 것들도 신관이라고 있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가! ” “ 크흑, 이럴 때가 아니야. 어서 다른 신전의 사제라도! ” “ 필요 없어! 다들 똑같다고! 우리 같은 평민에게는 신전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을 잊었나? 차라리 의원을 부르라고. ” 낙담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안절부절하던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을 견디느라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고 있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트로웰 쪽을 바라보자 그는 절대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 하, 하지만 트로웰…. - 안돼. 내가 한 말 잊었어? 신의 문장을 받기 전까지는 치유술을 써서는 안돼. - 그럼 신의 문장은 몸 안에 있다고 변명해도 안 될까? 저 사람들 죽으면 어떡해…. - 그래도 안돼. 여긴 번화한 곳이기 때문에 강한 치유술을 쓰는 사람이 나오면 반드시 신전에서 조사가 나올 거야. 고위 사제일수록 눈에 뜨이는 곳에 문장이 있다는 것 알지? 옷에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문장을가진 사람이, 저 사람들을 다 치료하는 건 말이 안 된단 말이야. - ……. 나를 걱정하느라 말린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 보니 야속한 심정이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나는 그 순간 한 사람의 존재를 떠올리곤 화색이 돌아 외쳤다. “ 아! 헤롤! 상단의 사람들은 지금 어느 여관에서 묵고 있는 거예요? ” “ 응? 여기서 조금 멀어. 왜 그러는데? ” “ 카이 씨가 있잖아요! 그 분이라면 도와주실 거예요! ” “ 에에? 그 신관 말이야? 그렇군! 그 사람이라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내가 지금 가서 불러올게! ” 그러나 헤롤은 굳이 수고스럽게 뛰어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가 나가려는 순간, 기적처럼 카이 씨가 여관 문을 열고 들어섰던 것이다. 느긋한 모습으로 들어서던 그는 나가려던 헤롤과 부딪힐 뻔 하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여관 안을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느꼈는지 금새 심각한 얼굴이 되어 얼른 부상자들에게 다가서기 시작했다. 그리곤 갑자기 등장한 사람을 보며 저도 모르게 경계하는 여관주인에게 손목에 새겨진 엘뤼엔의 문장을 가리켜 보였다. “ 엘뤼엔님을 모시는 사제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 “ 예에에? 에..엘뤼엔님의 사제요? 허억!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사제님 잘 오셨습니다! 이 사람들 좀 살려주십시오! 몬스터에게 당해서 초죽음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요! 사례는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 ” 엘뤼엔의 사제가 치유 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손목에 신의 문장을 받은 고위신관의 몸이었으니, 마른 가뭄의 봄비처럼 느껴져도 할말이 없으리라. 설마 대가가 섭섭하다며 치료를 거부할까봐 겁이라도 났는지, 여관주인은 물어보지도 않은 사례까지 운운하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러자 카이 씨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어보였다. “ 저는 치유순례를 행하는 몸, 대가를 받으면 엘뤼엔님의 노여움을 살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환자를 살피게 해주십시오. ” “ 허억!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이후 카이 씨는 사람들의 감사인사를 받으며 부지런히 부상자들을 치료하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상처가 심했던 터라, 그가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의 치유력을 퍼붓고도 온전히 회복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당장 생사를 좌우할 만한 심각한 상처만 깨끗이 회복시킨 그는, 나머지의 상처는 약간의 상태 호전을 시켜두는 정도에서 그치며 간신히 한숨을 돌렸다. 그러자 그가 치료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행여나 집중력을 흐트릴까봐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 감탄한 표정이 되어 물어왔다. “ 저, 저어 다 끝난 것입니까? ” “ 후우. 우선 당장 위험한 상처만 치료했습니다. 나머지는 가벼운데다, 제가 자체 치유력을 높이도록 상태 호전을 시켜뒀으니 후에 의원에게 보이면 될 겁니다. ” “ 오오오! 정말 감사합니다, 사제님!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 “ 별 말씀을…. 저에게 치유의 은사를 주신 엘뤼엔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그나저나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군요. 지나는 길에 엘을 보려고 들린 것이 천운이었나 봅니다. ” 엥? 나를?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생긋 미소 지었다. 그리곤 잠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나만을 데리고 따로 한적한 곳으로 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 뒤 주변을 둘러본 그가 누구도 듣지 않음을 확인한 후 전해준 말은, 나로서는 결코 상상치도 못했던 전혀 뜻밖의 사실이었다. “ 실은, 기도하는 중에 엘뤼엔님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분께서는 엘이 당신의 신전을 찾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셨습니다. ” “ 에엑? 에, 엘뤼엔…님이요? ” 허걱.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엘뤼엔이 계시를 내리다니? 설마 그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내다보고 있다는 건가? 경악한 표정으로 되묻자 카이 씨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제까지 기도하는 동안, 이렇게 분명한 계시를 받은 것은 기억하기로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 그분은 빠른 시일 내에 엘과 만나기를 희망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신전까지의 안내를 제가 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클모어에 도착하면 신전을 방문한다고 하셨지요? ” “ 그, 그렇긴 하지만…. 그런데 정말 엘뤼엔…님이 저와 만나고 싶다고 하던가요? ” “ 예, 아마도 저 만이 아니라 신전에 있는 모든 고위사제들에게 당신의 방문이 전달되었을 겁니다.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도 덧붙이셨습니다. ” “ ……. ” 맙소사, 엘뤼엔. 내 유희를 망칠 작정이야? 정중하게 대하기는 뭘 정중하게 대해! 비록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는 카이 씨의 눈빛에서 내 정체를 캐내고자 하는 의도가 섞여 있음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나는 바보가 아니었다. 정말이지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 아하하... 이제 슬슬 비축분 만들기가 힘들어 지는군요=ㅁ= 과연 언제까지 성실연재가 유지 될 것인가! P.S 1.- 식당에서의 대화 중 ' 정식 A, B' 에 대한 표현이 어색하다는 지적,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ㅁ^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알파벳을 사용할 리가 없더군요;; 급히 수정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P.S 2. - 유조아에서 선작, 추천, 코맨트 해주신 분들 모두 정말 감사드립니다! 역시 님들밖에 없어요!;ㅁ; 그런데 그놈의 유조아..너무 복잡해서 뭐가 뭔지 도대체 모르겠더군요.. 친구 목록은 자꾸 오류난다고 안 들어가지고.. 흑. 컴맹은 살기 힘든 동네라는..=ㅁ= P.S 3. - 엘퀴네스 표지제작 들어갔대요^^ 예쁜걸로 만들어 지게 기도해주세요!ㅇㅁㅇ/ 그보단 앞 부분 몇가지 수정해서 다시 보내야 할듯.. 혹시 초반에 쓸데없는 표현이라 삭제했으면 하는 부분 있나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다음 날 샴페인 용병단은 상단의 사람들과 더불어 대책회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클모어로 가는 지름길인 남문방향에 상급 몬스터가 출현한다는 것을 알았으니, 무시하고 이대로 일정을 추진할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길로 우회하여 돌아갈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미 은패로만 구성된 용병들 11명이 몬스터의 토벌에 나섰다가 반수 이상이 당해 돌아온 사실이 소문으로 퍼져있었으므로, 상단 측에서도 현재의 일정을 고수하기가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쪽 문으로 우회해서 돌기 시작하면 도착 날짜를 한참이나 어기게 되므로 그것역시 추진하기가 힘들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난데없는 재앙을 일으킨 두 마리의 케르베로스를 저주하기 시작했다. “ 거 참…. 정말이지 이번 일정은 왜 이리 꼬이는지 모르겠군요. 대체 상급 몬스터가 마을 근처에 왜 나타난 거랍니까? 그 동안 경비대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원. ” “ 이곳 할버크의 영주도 타락한지 오래됐소. 마을의 치안보다야 주색놀이에 더 열심인 걸 모르는 사람이 없던 걸요. 경비대도 새로 뽑지 않고, 훈련조차 시키지 않는다더군. 자랑스러운 솔트레테 제국의 역사도 슬슬 끝나가는 게지. ” 한탄하는 상단 사람들의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무릎위에 놓인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그럼에도 이 자리를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가 황위를 되찾게 되면 가장 먼저 부딪힐 문제가 바로 귀족들의 부패를 바로잡는 일 일 테니, 미리 각오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가진 황제라는 신분으로서의 자존심이었다. 그러나 휴센은 시간낭비에 불과한 그들의 한탄을 들어줄 여유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 그래서 어찌 하실 생각이십니까? 상급 몬스터는 만만치 않은 상대입니다. 동패를 가진 다른 사람들이야 짐 밖에 되지 않을 것이 뻔하고, 오히려 희생자만 늘이는 꼴이 될 겁니다. 동문 쪽으로 회유하시겠습니까? ” “ 흐음. 곤란하오. 동문으로 돌아가게 되면 적어도 일정이 한달은 더 늦어질 것이오. 약속된 기한까지 도착하지 못하면, 그곳 지점에게 돌아갈 불이익이 너무 큽니다. 샴페인의 단장께서는 금패를 가진 용병이라 들었는데… 그래도 안 되는 겁니까? ” “ 글쎄요. 저와 매튜가 합세하면 한 마리는 문제없을 겁니다. 나머지 한 마리는 다른 일행들이 맡아주면 될 테지요. 하지만, 상단의 물건과 다른 용병들까지 보호해 가면서 싸우기는 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 짐짓 희망적으로 들리는 말에 환하게 안색을 밝히던 상단의 사람들은, 이어지는 마지막 말에 실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물건을 최대한 보호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아무리 살기 위해서라도 몬스터와의 전투에만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황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사람들 사이로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제까지 잠자코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트로웰이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만. ” “ 오오. 그게 무엇이오? ” “ 상단의 물건과 사람을 보호하면서 싸우기가 힘들다는 것 뿐, 저희들 만이라면 충분히 상대가 가능할겁니다. 그러니 임시적으로 몬스터 토벌대를 형성하여 출발하기 전에 먼저 놈들을 처리하면 되겠지요. ” “ 호오! 그런 방법이! ” 그러자 이번엔 그의 옆에 있던 이릴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내키지는 않는다는 느낌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위험수당을 더 추가로 지급해 주셔야 해요. 용병의 목숨은 돈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겠죠? ” “ 무사히 처리해주기만 한다면 까짓 위험수당 추가지급이 문제겠습니까? 우리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클모어에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오. 원하는 금액을 말씀하시오. 얼마든지 지급하겠소. ” “ 흐음. 적어도 한 사람당 50실버씩은 주셔야 해요. 상급몬스터는 그 만큼 위험한 존재니까요. 저희들이 간다고 해서 무사히 토벌할 수 있을지 확실하지도 않거든요. ” 그 말에 당장이라도 추가수당을 지급한다고 혈안이 되어있던 상단 사람들의 얼굴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들었다. 개인으로 치면 그리 많은 금액이 아니었지만, 일단 합치고 나면 4골드나 되는 거액이었던 것이다. 보석을 팔고 받은 금액으로 몇 백 골드에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도 그것이 큰 액수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몬스터의 토벌이 시급하다 하나 선뜻 내주기는 어려운 금액이다. 그러자 이미 그럴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피식 웃은 이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하지만, 일단 처리하고 나면 그 만큼의 값은 되돌아 올 겁니다. 지옥의 파수꾼 케르베로스의 가죽은 시가로 몇 골드를 상회한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워낙 희귀한 가죽이니 경매에 붙이면 몇 십 골드도 챙길 수 있을 테지요. ” “ 헉. 지, 지옥의 파수꾼? 이번에 등장한 상급 몬스터가 바로 그 놈이란 말이오? ” “ 그렇습니다. 일단 잡기만 하면 그것의 가죽은 온전히 당신들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겁니다. 분명 이득이면 이득이지, 당신들에게 불리한 점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 깨끗한 휴센의 마무리에 상단의 사람들은 갈등이 되는 듯 한참이나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들이 케르베로스의 사냥을 나서서 성공할 확률과,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 따위를 계산해 보는 듯 했다. 그 모습에 어딜 가도 상인은 이윤을 따지는 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피식 미소가 흘러나왔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우리 쪽을 바라본 그들은 결정을 내렸는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들의 요구를 수락하겠습니다. 부담이 큰 금액이긴 하나, 놈들을 무사히 처리할 수 만 있다면 돌아올 이득이 손해를 가뿐히 넘긴다는 것을 알았소. 그 만큼 우리들이 샴페인 용병단의 실력을 신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 “ 저희들도 목숨이 아까운 줄은 아는 사람들입니다. 절대 쉽게 당하진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 회의가 끝난 후 일행들은 본래 묵었던 여관의 홀로 돌아와 본격적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평소엔 툴툴거리며 장난치기 일쑤이던 사람들이 지금은 아주 진지한 표정이 되어 적극적으로 휴센의 말에 응해주고 있었다. 그 만큼 상대하기 쉽지 않은 몬스터라는 생각에 내 마음까지 저절로 무거워 졌다. “ 케르베로스는 머리가 세 개인 상급 몬스터야. 또한 상당히 재빠르기 때문에 3마리의 상급 몬스터를 동시에 상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까도 말했다시피 한 마리는 나와 매튜가 상대할 수 있어. 문제는 나머지 한 마리인데…. ” “ 우리들만으로는 버거울 거야. 게다가 이릴과 마이티같은 경우는 활과 채찍이 휘둘러지는 사정권이 필요하니까, 빠르고 단거리 승부를 장점으로 하는 상대는 아무래도 힘들지. ” “ 하아, 골치 아프네…. 참, 피트라고 했지. 칵테일용병단의 단장도 실버 급이었잖아?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 좋은 의견이 떠올랐다는 듯 번쩍 손을 들고 의견을 내놓은 마이티였지만, 일행이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휴센은 짧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 그는 아직 은패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용병이다. 게다가 동패를 지닌 용병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아, 은패끼리의 호흡에 익숙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또한 이번일은 우리끼리 해결하기로 상단 측과 합의가 되었으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힘든 상황이다. ” “ 그렇다고 우리 4명이서 한 마리를 상대할 순 없잖아. ” “ 아니, 할 수 있어. 너희들 실력은 일반적인 실버 급 용병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편이다. 게다가 4명이 아니잖아? 라이와 엘도 있으니까. ” “ 무슨…. 헉, 단장! 설마 애들까지 이번 일에 끼게 할 생각이야? 안돼! 위험하다고! ” 그의 말에 놀란 것은 이릴만이 아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일행들을 보며 휴센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 위험한 것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지금은 한 손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다. 라이의 정령술은 분명 쓸 만 할 거야. 엘, 라이? ” “ 예, 예? ” “ 미안하다. 힘든 일이란 걸 알지만, 너희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다. ” 그의 말에 우리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그동안 일행에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 했던 이사나의 반응이 뜨거웠다. “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 역시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부족하지만 일행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 “ 헉…. 무, 무슨 소리야! 안돼! 위험하다고! 아무리 정령술을 사용할 줄 알면 뭐해? 이릴 때문에 불러내지도 못하잖아? ” “ 그래서 오늘은 종일 수련해 보려고요. 어쩌면 시큐엘의 소환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럼 정령을 불러내도 문제없을 거예요. ” “ 에에? 상급정령이라는 게 원래 그렇게 쉽게 소환되는 거야? ” 물론 아니다. 정령왕보다 확률이 더 높을 뿐이지, 상급정령의 소환역시 중급 정령을 소환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많은 힘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이사나의 말을 믿어줄 사람이 있을 리는 없었지만, 휴센의 말대로 지금은 정말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상황이었으므로 다들 어쩔 수 없이 수긍해주는 듯 했다. 문제라면 나인데…. “ 엘은 그냥 근처에만 있어도 괜찮아. 칼을 한 자루 줄 테니까 몬스터가 덤벼들면 그걸로 공격하는 게 아니라, 최대한의 수비에 치중해줘. ” “ 아… 네. ” 어째 ‘방해만 하지 말아 달라’는 뜻 같지? 크흑. 이럴 줄 알았으면 그동안 트로웰 에게라도 검을 배워둘걸.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어왔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나는 어설픈 미소만을 지어보였다. 그날 오후부터 본격적인 이사나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이사나를 편한 자세로 앉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아 그의 머리위로 쏟아 부어 주었다. 얼마나 많이 끌어다 모았는지, 옅은 수증기가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이 내 눈에도 보일 지경이다. 그리고 이사나는 빠른 속도로 그 기운을 몸 안에 흡수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늘 저녁 안에 시큐엘의 소환이 가능할 것 같아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트로웰이 한마디 덧붙였다. “ 그냥 소환만으로는 안돼. 당장 시큐엘을 불러놓고도 그 능력을 부리기가 힘들다면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 “ 응, 그래서 오늘은 소환에 성공해도 계속 내가 기운을 불어 넣어줄 생각이야. 그럼 1시간 정도는 무리 없이 버틸 수 있을 거야. 나 같은 경우는 실제 전투에서 아무 도움이 안 되니까, 이사나라도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어? ” “ 그러니까 엘도 정령사라고 하면 좋았을 텐데…. ” “ 무리인거 알잖아, 트로웰. 소환된 정령왕이 하위 정령을 사람들 눈에 보이게 하려면, 계약자의 마나를 사용해야 하니까 말이야. 나까지 마나를 끌어다 쓰면 이사나의 몸이 버티질 못 할 거야. ” 그런 의미에서는 라피스와의 계약이 오히려 나에게 이득이 될 수도 있었다. 드래곤은 마나가 충분해서 내가 아무리 가져다 써도 별로 탈이 안 난다니 말이다. 그냥 기한 주지 말고 바로 계약할걸 그랬나? 녀석에게 당했던 기억은 어느새 잊었는지 무심코 후회하던 나는 곧 고개를 저어보였다. ‘ 아니야. 그 엄청난 성격을 감당하느니, 차라리 정령을 안 부르고 말지…. ’ 거만하고 오만한건 물론이며, 이기적인 데다 독점욕 강하고 심술도 만만치 않다. 비록 마지막에 나한테 깨지는 바람에 상당히 수그러들었다곤 해도, 몇 천 년을 이어온 성격이 그리 쉽게 변할 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 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한달내기가 실패할지조차 정확하지 않은 마당에 벌써부터 아쉬운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잠자코 이사나에게 기운을 퍼붓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한 시간쯤이 흘렀을까? 흡수된 양이 충분하다 싶어, 나는 눈을 감고 있던 이사나의 어깨를 흔들며 시큐엘을 소환해볼 것을 권유했다. “ 이사나, 시작해. ” “ 으응, 알았어. <시큐엘> 소환. ” 파앗- 운디네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차가운 물의 기운이 이사나의 몸에서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발산된 기운은 이사나의 앞에서 점점 하나의 뚜렷한 형체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확실히 힘든 모양인지,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변화가 없었던 이사나의 표정이 점점 창백한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표정이 굳어지는 것은 물론이며, 어깨가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본 나는 얼른 그에게 부어주던 기운을 더욱 많이 끌어 모았다. 이미 녀석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 이사나, 정신을 흩트리지 마. 숨을 쉬어! ” “ 하윽- 으, 으윽. 엘…퀴네스 이건 아무래도 무리….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서 포기하면 다시 처음부터 해야 해. 집중해. 내가 도와주고 있으니까. ” “ 으, 응 ” 지금까지 부어주던 것의 두 배로 많은 양을 받고서야 간신히 진정하기 시작하는 이사나였다. 이미 온 몸을 흠뻑 적신 땀이 마치 비 오듯 그의 이마를 타고 턱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혹시 이러다 정말 죽는 거 아니야? 슬슬 걱정이 되는 순간, 때 마침 눈앞에서 형체를 이루고 있던 시큐엘의 형상이 완벽해 지기 시작했다. 흐트러지던 물의 기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한 늑대 한 마리가 고아하게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 녀석과 눈이 마주친 이사나가 안심한 나머지 그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뻔 했지만, 내가 어깨를 꽈악 붙드는 바람에 간신히 맥을 끊지 않을 수 있었다. “ 정신 차려, 이사나! 지금 기절해 버리면 다음에 소환할 때 더 힘들 거야. 이 상태로 조금만 더 견뎌보자. 알았지? ” “ 으, 응…. 하아. 마, 만나서 반가워 시큐엘. 내…이름은 이사나야…. ” 힘겹게 내뱉는 이사나의 말에 시큐엘은 점잖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물론 녀석에게 향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향한 것이었지만, 일단 나를 향한 인사가 먼저 끝나고 나자 이번엔 이사나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약간의 웃음기를 담은 단정한 목소리였다. - 처음 뵙겠습니다, 왕의 계약자시여. “ …아? 말을 하네? 아니, 원래 말하긴 했는데 그 동안 나한테 들리지 않았던 건가? ” - 상급정령부터는 계약자에게 의사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응… 그, 그래…. 고…마워…. ” “ 이사나! ” 그 말을 끝으로 이사나는 맥없이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더 이상 버티기가 한계였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녀석에게서 받은 마나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시큐엘은 바로 공중분해(갑자기 소름이 끼쳤다)되어버렸고, 나는 치유 술을 시전 하여 창백해진 이사나의 상태를 회복시키는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색이 온전해 졌음에도 그는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를 소환했을 때보다 더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 흐음…. 설마 몇 분도 견디지 못하다니, 큰일인걸. 밤새 연습한다 해도 내일까지 시큐엘을 한 시간이나 유지시킬 수 있을지 장담하기가 힘들겠다. ” “ 그, 그러게. 트로웰 어떡하지? 이렇게 힘들어 할 줄은 몰랐어. 에휴, 이릴만 괜찮았어도 운디네를 부르면 되는 건데…. ” “ 어쩔 수 없지. 오래 버티기는 힘들더라도, 아주 잠깐 동안 시큐엘이 공격할 수만 있으면 돼. 결정적인 순간에 소환하게 만들면 되니까. 근데, 엘… 너는 괜찮은 거야? 기운을 그렇게 많이 퍼부어 주면 아무리 너라도 버티기 힘들 텐데….” 그의 걱정스러운 얼굴에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생긋 웃어주었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나보다 더 고통이 심한 이사나를 앞에 두고 괴로운 티를 내는 건 엄살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며칠 전에는 이보다 더 심하게 힘을 소모한 일도 있지 않았던가. 아주 탈진할 지경이 되어 정령계로 강제 송환되는 게 아닌지 걱정을 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힘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삼 하위 정령과 달리, 정령왕은 일단 소환되고 나면 다른 정령들을 형체 화 시키는 일 외엔 계약자의 마나를 끌어 쓰는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만약 내가 쓰는 힘을 전부 이사나가 감당했다면, 녀석은 벌써 세상을 하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잠시 동안 골골거리고 있는 이사나의 잠든 표정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트로웰을 얼른 돌아보았다. “ 아참, 그러고 보니 트로웰. 신들이 인간에게 계시를 내릴 수도 있는 거야? ” “ 으음…. 보통 인간은 힘들고, 신의 문장을 가진 전속의 신관들에게는 계시를 내릴 수 있다고 알고 있어. 그런데 그건 왜? ” “ 그, 그게…. 카이 씨가 엘뤼엔의 계시를 받았다고 해서…. ” “ 그게 정말이야? ” ================================================ 우에에.. 더워 죽겠어요...ㅠ_ㅠ 흑흑.. 어째 어제보다 더 더운거지? P.S 1- 에.. 엘뤼엔 참으로 인기가 많은 놈이군요. ^-^; 음, 아직 나오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한다는..그 전에 일어날 사건이 몇개 더 있답니다; P.S 2- 찜한녀석 2부는 사피의 자식들이 주인공입니다^-^ 아마 사피와 알시의 비중이 거의 크지 않을 거예요; 초반에 너무 기대하고 보시면 바로 실망합니다. 마음을 비우세요+_+/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트로웰에게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면서 그에게 전해 들었던 말도 함께 덧붙였다. “ 엘뤼엔이 나를 만나고 싶어 한대. 정중하게 대하라는 말까지 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카이 씨가 클모어에 있는 신전까지 동행하고 싶다고 했어. ” “ 헤에. 용케 인간세상을 내려다 볼 짬이 있었던 모양이지? 엘이 유희중이라는 거 몰랐을 텐데…. ” “ 그러게 말이야. 아무튼 그의 조심성 없는 말 때문에 지금 카이 씨가 나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아. 클모어 말고 다른 곳엔 엘뤼엔의 신전이 없어? ” 만약 클모어보다 가까운 거리에 존재한다면 그곳부터 먼저 들려볼 작정으로 묻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트로웰은 곧 고개를 저었다. 엘뤼엔이 워낙 생긴 지(?) 얼마 안 된 신이라 그를 모시는 신전의 수 역시 지극히 적다는 것이었다. 현재 이곳 솔트레테 제국에는 후작령인 클모어와 수도인 헤리카에만 하나씩 존재할 뿐이고, 전 대륙을 통틀어 그 수가 10개를 넘지 않을 것이란 설명도 추가했다. “ 그래도 요즘 들어 신도의 수가 무서울 정도로 불어나고 있으니까, 십년 후에는 어느 왕국의 국교 신으로 자리매김 할지도 몰라. 벌써 행사하는 영향력이 여느 신전 못지않으니까 말이야. ” “ 흐음. 신도수가 늘어날수록 엘뤼엔만 힘든 거 아니야? 더 바빠질 텐데…. ” “ 쿡쿡. 왜, 걱정돼? ” 어딘지 놀리는 듯한 트로웰의 표정에 괜히 내가 파파보이가 된 것 같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통하지도 않을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그,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저… 그렇지 않아도 바쁜 엘뤼엔이 더 바빠질 것 같아서… 그럼 이제 얼굴 보는 게 더 힘들어 지겠구나 하고…. ” “ 후훗. 알았으니까 너무 창피해 하지 않아도 돼. 아들이 아버지를 위하는 건 당연한 거지, 뭘 그렇게 정색을 해? 엘 말대로 아마 꽤나 바빠질 거야. 아니, 지금도 이미 충분히 바쁜 상태일걸? ” 그런 주제에 틈을 내서 일일이 신관들에게 나의 방문을 계시하고 만날 의사를 제시하다니, 애라고는 한번도 낳아보지 못한 초보아빠 주제에 꽤나 위해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 기분이랄까? 어느새 내 입가에는 나도 의식하지 못한 미소가 그려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트로웰은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 카이테인 이란 신관, 나쁜 인간은 아니야. 엘의 정체가 들키게 된다 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야. 엘뤼엔의 사제들에게 그의 아들인 너는 오히려 보호하고 경외할 대상일 테니까 너무 걱정 하지 마. ” “ 응, 그럴게. ”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마음속 한구석에 쌓여있던 일말의 불안감이 한결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째 이젠 정체를 들켜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트로웰과의 대화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며 무심코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난 것 같아 슬슬 이사나를 다시 깨우기 시작했다. 깊이 잠들어 있는 녀석을 깨우는 것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당장 내일 떠나는 몬스터 토벌에서 일행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오늘 안에 수련을 다 마쳐야 했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이사나, 이사나? 일어나. 시큐엘 한 번 더 불러보자, 응? ” “ …으음…뭐어? ” “ 내일 시큐엘을 불러낼 수 있으려면 오늘 제대로 수련해야 해. 일어나. 이번엔 처음보다 부어주는 기운의 양을 더 늘릴 테니까 많이 힘들지 않을 거야. ” “ …무슨… 헉! 나 설마 기절했던 거야? ” 벌떡. 그때서야 모든 상황을 파악한 듯 눈을 번쩍 뜬 이사나는 황당한 표정이 되어 몸을 일으켰다. 기절하기 직전의 상황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듯, 그렇게 애쓰고 애써서 소환한 시큐엘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한참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녀석을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 네가 기절하는 바람에 마나의 연결이 끊어져 다시 자연계로 돌아갔을 뿐이야. 언제든지 다시 부를 수 있는 거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 “ 아아. 미안해, 모처럼 소환한건데…. ” “ 나한테 사과할 필요가 뭐가 있어? 속상한건 네 쪽인데. 아무튼 계속 소환 해 보자. 적어도 불러내서 공격을 행하도록 만들 정도는 돼야 일행들에게 도움이 될 테니까. 힘들면 조금 있다가 할까? ” 그러자 이사나는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잽싸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절해 있었던 그 잠깐의 시간조차 아까워 죽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열의로만 치면 지금 당장이라도 시큐엘을 여러 마리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지금 당장 할게, 엘. ” “ …좋아. 이번엔 아까보다 더 오래 버텨야 한다는 것 알지? 그럼 시작한다? ” 끄덕끄덕 그와 함께 나는 처음에 했던 것처럼 내 기운을 이사나에게 부어주기 시작했다.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놀라울 정도로 기운을 흡수하는 이사나의 모습은 아까보다는 훨씬 여유가 있어보였다. 그렇다 해도 막상 시큐엘을 소환하는 순간에는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되어 과도한 탈수 증상을 일으켰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몇 번 하다보니 몸이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정도가 되었고, 새벽 동이 터오를 시점이 되서는 시큐엘이 공격을 위해 그의 마나를 끌어다 쓰게 되도 기절하지 않게 되었다. 초반에 소환한 것만으로 쓰러졌던 그를 생각하면 참으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러고도 그는 계속해서 수련을 하고 싶어 했지만, 이번엔 기운을 퍼다 주는 내가 지쳐버리는 바람에 더 이상 이을 수 없었다. 솔직히 그가 마지막 수련을 마칠 즈음 되서는 라피스의 결계를 깨던 때만큼이나 힘이 들었으니까. 온 몸이 탈진하여 눈앞이 가물거리는 내 상태를 눈치 챈 트로웰이 적절히 끼어들어 중재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그날 정말로 정령계로 강제 송환 됐을지도 몰랐다. 뒤 늦게 서야 내가 너무 무리했음을 깨달은 이사나가 연거푸 사과를 건네 왔지만 그것에 '괜찮다‘고 대답할 힘도 없었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리하여 나는 새삼 페리스가 얼마나 정령사의 소질이 넘쳐흐르는 존재인지를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조만간에 정령을 통해서라도 근황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무기를 정비한 일행은 남문의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여관의 홀 앞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이미 무참하게 당하고 돌아온 다른 용병들의 전적이 있었기에 지켜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하나같이 불안해 보였지만, 일행들의 표정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담담해 보였다. 특히 어제까지만 해도 잔뜩 질린 표정을 하고 있던 헤롤은 오늘은 오히려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 되어 얼른 사냥을 가자고 일행을 재촉했다. 죽고 사는 경지를 초월해 버린 건지, 아니면 갑자기 이길 자신이 생겨서 그런지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 어라? 그러고 보니, 헤롤. 도끼가 다른데요? ” “ 아아. 내 것은 손잡이가 헐거워져서 고치려고 맡겼거든. 그래서 급하게 하나 장만 했지. 일회용으로 쓸려고 산 것 치곤 꽤 감도도 좋고 괜찮은 것 같아. 헤헤, 난 오늘 컨디션 최고라고! 케르베로스든 뭐든 다 덤비라고 해! ” 자신 있게 도끼를 휘둘러 보이는 그 모습에 다른 일행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결국 미소를 흘리고 말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해도 속으론 많이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인지, 그제 서야 분위기가 한결 여유로워지는 그들이었다. “ 그래, 그래. 까짓것 잘못돼봤자 죽기밖에 더 하겠어? 겨우 두 마리 몬스터 때문에 겁낸 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암, 그렇고 말고. ” “ 쿡쿡. 그래 맞아. 아, 참! 라이 너는 어떻게 됐어? 정령 술 쓸 수 있겠니? ” 웃으며 마이티의 말을 맞장구치던 이릴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이제까지 이사나가 정령을 불러 낼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그녀였으므로, 그것에 대해 약간의 책임감 까지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러자 이사나는 해맑은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힘차게 끄덕인 긍정의 표시로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는 뜻을 읽어낸 일행들은 감탄 반 놀라움 반의 얼굴이 되었다. “ 헤에. 정말 상급정령을 소환했단 말이야? 굉장한데, 라이? 한 달 전만 해도 하급 정령사였던 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벌써 상급 정령사가 되다니! 혹시 천재 아니냐? ” “ 상급 정령사라…. 제국마다 귀족으로 모시려고 난리친다는 바로 그 존재! 우와~ 멋지다, 라이! 넌 절대 어디 가서 굶을 일 없겠다, 짜식! ” “ 헤헤. 상급 정령사라고 해도 아직은 너무 미숙해요. 처음부터 소환하는 건 무리고요, 기회를 봐서 적절한 타이밍에 불러낼 생각 이예요. ” “ 오냐. 너만 믿고 있으마! 하하하하 ” 부담이 한결 가라앉았는지 일행들의 분위기는 점차 활기를 띄어가기 시작했다. 상급정령은 마음만 먹으면 어지간한 산까지도 순식간에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다. 그러니 어찌 든든하지 않겠는가. 벌써부터 싸움에서 다 이겼다고 생각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 내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트로웰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 그나마도 엘이 도와주지 않으면 소환하지도 못하는데. ” “ 쿡쿡. 아직 이사나의 힘이 부족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내가 문제네? 녀석한테 기운을 주랴, 몬스터 잡으랴 정신없겠는 걸? ” “ 엘은 최대한 피해있도록 해. 미리 말해 두는 거지만, 다치면 정령왕도 피가 흘러. 물론, 유희를 좀더 편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보이는 일종의 환각에 불과하지만, 엘 같은 경우는 전생에 인간이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피를 흘린다는 사실 자체에 쇼크를 받을 가능성이 높아. " “ 그, 그래? ” 하긴 칼을 맞았는데도 그 흔한 상처 하나,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의심을 피하기가 힘들 것이다. 정령이란 몸은 먹지 못한다는 것만 빼곤 정말 완벽한 듯. 나는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여느 사람의 피부와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내 팔을 만져보았다. 이 살색의 피부가 사실은 물이다-라고 하면 믿어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어이없는 심정이었다. “ 아, 참. 엘 이거 받아. ” “ …? ” 생각났다는 듯이 트로웰이 건네준 것은 제법 날카로운 칼날을 가진 장검이었다. 겉보기와는 달리 막상 들고나니 별로 무겁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게, 그는 짧게 ‘경량화 마법’이 걸려있다고 설명했다. 본래 훈련용 검에는 수련을 위해서라도 무게를 일부로라도 늘이는 편이지만, 지금은 검술에 초보인 내가 임시로 사용하는 상황이니 들고 있기 편하게 마법을 걸었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나는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 설마 트로웰…네가 걸었어? ” “ 응. 나도 간단한 마법은 할 줄 알거든. 사람들한텐 우연히 지나가는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받았다고 했으니까 엘도 그렇게 알고 있어 줘. ” “ 아, 알았어. 근데… 나도 혹시 마법 배울 수 있을까? ”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트로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모처럼 품었던 희망을 다시 접을 수밖에 없었다. “ 정령이 인간세상에서 다룰 수 있는 마나는 한계가 있어. 그래서 아무리 이론을 알아도 실제로 사용가능한 영역은 4서클 까지가 전부지. 그것도 소환자의 마나를 빌려 쓰는 거기 때문에 현재의 엘로는 힘들어. 차라리 제약을 받지 않는 언령을 쓰는 게 나을 거야. ” “ 하아. 그렇겠다. 어차피 효과가 비슷하다면 차라리 내 순수의 힘으로 발현할 수 있는 언령을 쓰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 설마 이곳에서 쓰는 마나는 무조건 소환 자를 통해서만 다룰 수밖에 없는 거야? ” “ 응. 인간세상의 마나는 굉장히 불규칙해서 정령이 다루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중간 매개체인 소환자의 육체가 꼭 필요해. 계약하지 않은 정령이 몸을 실체화 시킬 수 없는 것도 그것과 같은 맥락이니까, 어쩔 수 없지. ” 거기까지 말한 트로웰은 이번엔 몬스터가 덮쳐들었을 때의 대처법과 검을 휘두르는 방법 등을 설명하고는 다시 한번 위험한 상황에서 최대한 피해있으라며 신신당부하기 시작했다. “ 알았지? 절대로 몬스터 앞에 나서면 안돼? 엘은 이사나한테 기운을 불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히 힘들다고. 아마 그 상황이 되면 제대로 도망치는 것도 힘들게 될 거야. ” “ 쿡쿡. 알았어, 주의할게. ” 우리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일행에는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 한 명 더 추가되었다. 몬스터 토벌 소식을 들은 카이 씨가 참여할 의사를 보였던 것이다. 당황하는 우리에게 그는 단정한 목소리로 자신이 함께 가고자 하는 이유를 밝혔다. “ 케르베로스는 상급 몬스터 중에서도 포악한 쪽이라고 들었습니다. 싸우는 중에 부상자가 생길 수 있으니, 치료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만…. ” “ 하지만 위험합니다. 보시다시피 저희의 전력으론 사람을 보호해 가면서 싸울 경황이…. ” “ 엘뤼엔의 신관들은 모두 방랑자로서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의 체술은 익히고 있습니다. 절대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 동행을 허락해 주십시오. ” 솔직히 한 사람도 아쉬운 판에 그의 참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휴센은 순조롭게 카이 씨를 일행으로 받아들였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남문으로 향하게 되었다. 용병들이 몬스터에게 당하고 온 날부터 남문 쪽은 사람들의 출입이 드물어졌다. 변변한 경비대 하나 지키고 있지 않았으니, 알아서 행동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들이 그 곳에 도착했을 때는 몇몇 구경나온 사람들 빼고는 문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상태였다. 끼이익. 몬스터가 도시 안에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을 열자, 끝없이 이어지는 흙길과 양 주변을 감싸고 있는 울창한 숲이 드러났다. 쌀쌀한 가을날씨였지만 하늘은 놀랄 만큼 화창했고, 물든 나뭇잎 마다 바닥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몬스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설마 다른 곳으로 도망갔나 하는 생각도 잠시, 아까전보다 더욱 얼굴이 경직된 휴센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살기다. 녀석들은 이 근처에 있어. 모두 긴장하고 주위를 살펴라. ” “ 이미 그렇게 하고 있어. 쓰읍- 누가 상급 아니랄까봐 엄청 살벌하구만. 그나마 이곳을 떠나지 않고 또 다른 곳을 습격하지 않은 게 다행인건가? ” “ 아, 젠장.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이 마지막 만찬만 아니길 바랄뿐이다. ” 마지막으로 투덜거린 마이티의 말에 일행들은 일제히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원래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던가. 잘 되자고 해도 모자를 판에 초반부터 초를 치는 그를 곱게 볼 리가 없는 것이다. 순식간에 모두의 싸늘한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마이티는 찔끔한 표정이 되어 어깨를 움츠렸다. 그리곤 쳇-하고 혀를 차며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다’라고 중얼거렸으나 이미 어느 누구도 그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마침 스치는 바람을 타고 무언가 위험한 느낌이 다분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 크르르르르…. ” 그것은 낮은 짐승의 신음소리였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인 듯, 숲 안쪽 이곳저곳에서 동시에 울리고 있었다. 꿀꺽 마른 침을 넘긴 일행들은 서로 등을 마주보는 자세에서 둥글게 진을 짜며, 각자 다루는 무기들을 손안에 꽈악 움켜쥐었다. 흡사 개의 경계하는 소리 같은, 으르렁거리는 몬스터의 신음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 크르르르르……. ” 탐색전인가. 이미 공격 의사가 확실해 보이는 사람들이 나타났음에도 섣불리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은, 녀석들이 그 만큼 샴페인 일행들의 진가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들이 근처에 있음을 확신했다. “ 헉…. ” 순간 무심코 바라본 왼편의 숲 안쪽에서 붉은 빛 덩어리 여러 개가 반짝거리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던 나는, 정작 옆에 있던 트로웰이 품안에서 꺼낸 단검을 그와 정반대의 장소에 던지는 것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나는 곧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검을 던지던 바로 그때- 일행을 향해 덮쳐들어오는 커다란 그림자가 휘익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던 것이다. 트로웰의 단검은 그런 몬스터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어 놓고 있었다. 촤아아악- 퍼억! “ 크와아아아아앙! ” “ 으악! ” ===================================================== 하아아아.. 이놈의 더위 땜시 새벽 작업만 하다보니 대략 정신이 가물가물.. 다음편은 전투씬..일까나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 전투씬 정말 못씁니다..;; P.S 1- 크흑! 페린님, 죄송해요! 저도 사실은 출현 시켜드리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막판에 쓰다보니 전개가 지 멋대로 나가는 겁니다;ㅁ; 그래서 도무지 틈을 만들수가 없었습니다아~;ㅁ; 대신 2부에서라도 등장을 위해 노력을!! 아아아.. 정말 죄송합니다아;ㅁ; .....털썩. P.S 2 - 어색한 부분 및 오류지적 정말 감사합니다^-^V 모두 수정했어요! 참, 섭정 왕 유라우스 대공의 이름을 유카르테로 급히 수정합니다! 저승사자 유라우스와 같은 이름이더군요; 지적받고 화들짝 놀랐다는;;^^;; P.S 3- 찜한녀석 2부에서 사피의 자식은 딸 하나, 아들 하나 입니다~ 음하하하! 지금 씬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는....훌쩍. 모두 더위 조심하세요~~~;ㅁ;/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때까지도 몬스터가 공격해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경악하여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몬스터의 모습을 제대로 확인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 맙소사…. ” 그것은 정말 어지간한 황소만한 덩치의 커다란 표범이었다. 아니, 개라고 봐줄 수도 있었지만 유연한 허리곡선이나 날카로운 송곳니가 좀더 맹수다운 표범 쪽을 연상시켰다. 꼬리는 호랑이처럼 둥글며 길었고, 발톱은 돌맹이도 단숨에 부술 수 있을 것처럼 굉장히 크고 날카로웠다. 핏빛의 눈동자를 번뜩이고 있는 세 개의 머리는 모두 똑바로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 중 가운데 머리의 이마에 트로웰이 던진 단검 하나가 박혀 있었다. 붉게 흐르는 선혈이 콧등을 타고 흘러 땅으로 뚝뚝 떨어졌다. 설마 단검을 이마에 맞고도 살아 있을 줄이야. 괴로운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크게 소리 지르는 놈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의 파수꾼이란 별명이 무색치 않은, 무시무시한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 크와아아아앙!! ” “ 엎드려! ” 히이익. 멍하게 있던 나는 그 순간 머리 위를 지나가는 또 다른 그림자를 느끼곤 사색이 되어 허리를 숙였다. 케르베로스가 두 마리였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빠르기는 또 무지하게 빨라서, 방금 전에 이쪽에 있던 것이 잠깐 돌아본 사이에 건너편으로 건너가 있었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휴센의 뺨엔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 젠장! 뭐가 이렇게 크고 빨라! ” 헤롤의 비명에 백번 속으로 공감하면서 나는 잔뜩 질린 표정으로 두 마리의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누런 타액을 질질 흘리고 있는 커다란 입이 무시무시한 송곳니 사이로 끊임없는 울음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일행들을 빤히 둘러보는 핏빛의 눈동자가 마치 누구를 먼저 사냥할지 고민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번에도 일행 중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트로웰이었다. “ 하압-! ” “ 트… 매, 매튜!! ” 순식간에 등을 맞대고 있던 일행들에게서 이탈한 트로웰이 강한 발차기를 날리며 한 마리의 케르베로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이미 그의 움직임을 눈치 채버린 몬스터는 재빠른 움직임으로 발이 닿는 사정권에서 벗어나 버렸고, 그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공격찬스를 놓쳐버린 트로웰의 등 뒤가 그대로 비었던 것이다. 놀란 것도 잠시, 마치 그럴 것이라 예상했단 듯이 피식 미소 지은 그는 품속에서 또 하나의 단검을 꺼내 빈틈을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몬스터의 이마를 꿰뚫었다. 두 마리의 케르베로스가 사이좋게 가운데 머리에 검이 박히는 순간이었다. “ 크와아아앙! ” 트로웰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빙글 돌아 한발을 들어 그대로 괴로워하고 있던 몬스터의 다른 쪽 머리를 찍어 내렸다. 그 와중에도 자신을 향해 세차게 휘둘러지는 앞발을 가볍게 피하며 뒤로 물러서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 치의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 오~예! 좋았어! 이거 해볼만 하겠는데? ” 순식간이었지만 트로웰이 여유 있게 우세한 싸움을 이끌어 나가자, 멍하게 보고 있던 다른 일행들의 얼굴도 자신감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신이 난 헤롤은 쥐고 있던 도끼날을 쓰다듬으며 경계하고 있는 다른 한쪽의 케르베로스를 노려보았다. “ 헤- 정말 무식하게 덩치만 커서는 머리가 세 개나 달려 있잖아? 이럇차! 헤롤어르신이 나가 신다아!! ” “ 앗! 잠깐! ” 옆에 있던 이릴이 기겁을 하며 말렸지만 이미 그의 도끼는 크게 휘둘러진 뒤였다. 그러나 자신만만하게 무기를 내리치던 것과 다르게, 헤롤은 금새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계산했던 것보다 몬스터의 움직임이 훨씬 빨랐던 것이다. 순식간에 도끼를 피한 케르베로스는 그대로 비어진 헤롤의 등허리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 으아악! ” “ 이, 바보! 그래서 내가 잠깐 이라고 그랬잖아! ” 다행스럽게도 이릴이 채찍을 얼른 휘둘러 헤롤을 향해 덤비는 몬스터의 머리 중 하나를 감아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데 성공했다. 나무며, 동물이며 한번에 듬성듬성 자르던 그 무시무시한 채찍이 이 순간에는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묶어두는 역할 밖에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몬스터의 움직임이 잠시 주춤하자 틈을 노리고 있던 마이티가 이때라 하고 녀석의 몸통을 향해 활을 쏘았고, 덕분에 헤롤은 무사히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케르베로스를 더욱 화나게 만든 꼴이랄까? 붉은 가죽을 뚫고 화살이 촘촘히 박히기 시작하자 몬스터는 몸을 크게 뒤틀며 단번에 목에 감겨있던 채찍을 물어뜯어버렸다. 그 바람에 녀석을 제압하고 있던 이릴이 크게 휘청 이며 뒤로 넘어졌다. “ 꺄아아악! ” “ 이릴!! ” 순간의 상황이었지만 빈틈을 놓치지 않은 몬스터는 그대로 넘어진 그녀의 위로 덮쳐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한건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릴이 위험하다!’라는 걸 깨달은 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그녀의 앞에서 검 한 자루로 케르베로스의 무식한 이빨을 막아내고 있었다. “ 에, 엘!! ” “ 피해요, 이릴! 어서요! ” 맙소사, 강지훈. 네가 더 걱정이란 생각은 안 드는 거냐? 간신히 한 개의 머리만 막고 있었을 뿐인데도 엄청난 힘에 밀려 온 몸이 저릿저릿해지기 시작했다. 인정사정없이 휘둘러진 놈의 앞발에 어깨 부근의 옷이 찢겨지며 싸늘한 아픔이 밀려왔다. 흘낏 바라보니 상당부분의 피부가 찢어져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환각일 뿐이지만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생생한 감각이었다. “ 이 자식~ 엘한테서 떨어졋! ” “ 크와아아앙! ” 다행스럽게도 그 고통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기겁하여 달려온 헤롤과 마이티가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고 나와 대치하고 있던 몬스터의 뒤를 공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덕분에 녀석의 주위가 그들에게로 돌아서자 나는 검을 놓치며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전 처음 겪는 완력에 온몸이 후들후들 흔들리고 있었다. “ 엘! 엘, 괜찮아? 괜찮은 거야?? ” “ 괜찮으십니까? ” 서둘러 달려온 이릴과 카이 씨가 걱정스럽게 물어오는 것에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였다. 솔직히 상처로 인한 아픔보단 저 무시무시한 괴물을 코 앞에서 본 것에 대한 충격이 더 컸으니 나름대로 견딜 만 했다. “ 하아, 하아. 미안해요. 꼴사납게 겨우 이 정도에…. ”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이 아니었으면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라고. 이 상처 좀 봐! 얼른 치료해야…. ” “ 아니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보다 빨리 도와야…참! 이릴, 채찍은요? ” 쉐리, 마이티, 헤롤 세 사람만으로는 저 한 마리를 온전히 감당하기 힘들었다. 트로웰과 휴센이야 우세를 보이며 잘 싸우고 있었지만, 다른 쪽의 상황은 안 봐도 뻔한 것. 슬슬 이사나에게 정령을 소환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치료도 거부하고 몸을 일으키던 나는 문득 이릴의 채찍이 맥없이 끊어진 것을 떠올리곤 얼른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허리춤에 감겨있던 또 하나의 채찍을 꺼내들더니 생긋 미소 지었다. “ 괜찮아. 예비용이 있거든. 하지만 자르기는커녕 간신히 감는 것에만 그치다니,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 “ 라이가 정령을 부를 거예요. 시큐엘의 공격이 온전히 먹히도록 잠시 동안만 붙잡아 주실 수 있을까요? ” “ 아, 그래? 그 정도야 쉽지, 나한테 맡겨. ” 그런 사이에도 이미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은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다. 동해 번쩍 서해 번쩍 하듯 몸놀림이 재빠른 몬스터이니 제 아무리 한 마리라 해도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특히 활을 날리기 위해 일정한 사정권을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마이티로서는 여간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놈의 몬스터가 제 자리에 있어야 활을 제대로 날리든 말든 할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휘익- 갑자기 사라진 몬스터의 모습에 잠깐 방심하는 찰나-케르베로스의 머리 중 한 개가 그의 허벅지 부근을 처참하게 물어뜯었다. “ 크아아악! ” “ 마이티!! ” “ 이런, 빌어먹을! ” 기겁한 헤롤이 얼른 도끼를 휘둘러 머리를 떼어내게 했으나 이미 물린 허벅지는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는 피의 양이, 출혈에 의해 그대로 쇼크사 할 수 있을 만큼 심각해보였다. 나는 얼른 이사나에게 기운을 퍼부어 주며 카이 씨를 돌아보았다. “ 카이 씨! 마이티를 부탁드려요! ” “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 그와 동시에 이사나는 준비했던 대로 시큐엘의 소환을 시전 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급격한 기운의 소모가 일어나자, 그것을 모조리 흡수한 이사나가 단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 시큐엘, <소환!> ” 그러자 곧 그 앞에 물의 형상을 이룬 고아한 늑대 한 마리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현 전투의 불리함을 알기라도 하듯 평소보다 매우 위엄 있고 경계어린 모습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물의 정령에 사람들이 멍해져 있는 사이, 나는 얼른 이릴을 바라보았다. “ 이릴- 지금 이예요! ” “ 알았어! ” 신나게 대답한 그녀는 매서울 정도의 채찍을 휘둘러 지금은 헤롤을 향해 덤벼들고 있던 몬스터의 머리하나를 감는데 성공했다. 갑작스런 목의 조임에 몬스터의 움직임이 주춤하기 시작하자, 이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단숨에 시큐엘을 향해 공격을 명령했다. “ 시큐엘! 저 몬스터를 뚫어버려! ” 촤아아악----!! 퍼어어억! “ 크아아아아아왕!! ” 시큐엘은 정말 인정사정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몬스터의 몸통을 뚫어버리고 말았다. 달려든 녀석이 케르베로스의 몸을 파고 들어가는 모습은 너무 잔혹해서 잠깐 동안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살을 거칠게 꿰뚫는 끔찍한 소리가 들리고 나자, 선명한 피분수가 온통 터져 나와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몸 위로 고스란히 떨어져 내렸다. 후두둑 후두둑 찝찝한 피비가 내림과 동시에 공중으로 몸을 뒤틀었던 몬스터의 몸은 크게 부들거리며 땅으로 맥없이 매쳐지고 말았다. 털썩- “ 허억, 허억, 허억…. ” “ ……. ” 한참동안 멍해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닥위에는 몸통의 반이 뚫려 흥건한 피를 흘리고 있는 케르베로스가 추욱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이사나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와 함께 오만한 듯 공중을 휘돌고 있던 시큐엘의 형상도 그대로 사라져 자연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 ……. ” “ ……. ” 한참동안의 적막. 잠시 동안 자신들의 눈앞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일행들은 멍한 얼굴로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는 케르베로스와 기절한 이사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랬을까. 드디어 몬스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확인한 그들은 크게 환호성을 지르며 들고 있던 무기를 치켜들었다. “ 마, 만세! 우리가 이 놈을 죽였다아!! ” “ 말도 안 돼! 정말 죽은 거야? 겨우 그 한방에? 뭐야, 이거? 나와 헤롤은 다친대도 없다고! ” 황당한 표정의 쉐리였지만, 그녀 역시 승리에 대한 기쁨으로 만연한 얼굴이었다. 흘낏 보니 트로웰과 휴센 쪽도 거의 처리가 되가는 듯싶었고, 부상당한 마이티도 카이 씨의 치료 덕에 대체적으로 무사한 모습이었다. 설마 이렇게 쉽게(?) 이기게 될 것이란 생각은 못했는지 일행들은 저마다 환한 표정을 지으며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 와아아! 이게 웬일이야! 우리가 정말 상급 몬스터 두 마리를 이긴 거야? ” “ 어이, 아직 이라고. 아직 매튜와 휴센쪽은 싸우는 중이야. ” “ 저 사람들이야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그보다 나 어땠어? 죽여주게 멋지지 않았냐? ” 긴장이 풀렸다 싶자, 헤롤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있는 힘껏 폼을 잡으며 잘난 척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연히 그 꼴을 가만히 못 보는 이릴의 타박이 이어졌다. “ 멋지기는 개뿔이! 남자는 자고로 연약한 여자를 보호해 줄때가 가장 멋있는 법이라고! 엘 못 봤어? 이 가는 팔로 내 앞을 막아서서 몬스터를 받아냈다고! 본 좀 받아라, 이 화상아! ” “ 에엑? 그거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로서는…. ” “ 됐네요! 엘이 아니었으면 난 바로 죽었다고! 명색이 몇 년을 함께해왔다는 동료가 정작 위험한 순간에 손을 놓고 있다니! 정말 실망이야, 헤롤! ” “ 뭐, 뭐야! 나도 하면 하는 인간이라고! ” 처음엔 미안했는지 말을 더듬던 그도 이릴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자 저절로 반응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릴이 그것에 어디 콧방귀나 뀌는 사람이던가? 단번에 혀를 찬 그녀는 헤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며 말을 잔뜩 비꼬기 시작했다. “ 하긴 뭘 해? 정작 중요한 순간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주제에. ” “ 이익, 이 마녀가! 그런 너도 이번에 제대로 한거 없잖아? 채찍은 끊어먹고, 빈틈투성이로 넘어지느라 엘이 보호하게 만든 주제에! ” “ 이거 왜 이러셔? 라이가 부른 물의 정령이 몬스터를 뚫을 때, 그 때까지 녀석이 꼼짝 못하도록 만든 건 바로 이 몸이라 이거야! ” “ 하- 나무도 한번에 베어내는 채찍으로 겨우 고~정? 잘났다, 이릴! 너도 드디어 한 물 갔구나? ” “ 뭐가 어쩌고 어째? ” …도대체 두 사람은 무슨 원수를 졌다고 툭하면 싸우려 혈안이 되어있는 건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절한 이사나를 안아들고 카이 씨에게 다가갔다. 마침 마이티의 치료를 완전히 끝내고 있던 그는 새로운 부상자냐며 놀라워 하다가 별 다른 이상이 없음을 눈치 채고는 피식 미소 지었다. “ 과도한 힘을 써서 일어난 탈수증상 이군요. 회복의 주문을 외워 드리겠습니다. 한결 나아질 겁니다. 그보다, 엘. 당신의 상처는…. ” “ 에? 아~ 괜찮아요. 저 원래 자체치유력이 빠르거든요. 이 정도 상처는 내일이면 아마 다 나을 걸요? 그보다 매튜 쪽은 괜찮은 건가? ” 흘낏 돌아보니 그곳엔 새로 합세한 쉐리까지 합쳐서 3명이 각자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하나씩 맡아 싸우고 있었다. 지친 기색은 아니지만 이왕이면 빨리 끝내는 게 좋겠지? 가볍게 결정지은 나는 카이 씨에게 이사나를 맡기고 그들을 도우러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 …어? ” “ 엘? 왜 그러는… ” 나의 멍한 신음소리에 덩달아 돌아본 카이 씨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또한 마찬가지로 내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헤롤과 이릴의 옆에서 몸이 뚫린 채 꿈틀거리던 케르베로스가… 핏빛의 눈동자를 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이다. “ 말…도 안돼…. ” 어떻게 몸이 뚫려서 피가 그렇게 많이 쏟아졌는데 멀쩡하게 일어날 수 있는 거지? 당황스럽게도 두 사람은 싸우느라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상황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그들이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어느새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는 ‘크르릉’하는 짐승의 낮은 신음소리와… 자신들을 감싸는 커다란 그림자를 인식하고 난 후였다. “ 어, 어라? 내가 지금 꿈을 꾸나? ” 한동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서 피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몬스터와 눈만 맞추고 있던 그들은, 어느새 다투던 것도 멈추고 경직된 시선으로 천천히 서로를 마주보기 시작했다. 성난 몬스터의 잔혹한 이빨이 그들을 향해 덮치는 것과, 내가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 크와아아앙! ” “ 안 돼! 이릴- 헤롤!! 도망 쳐요!!! ” =========================================================== 저 전투씬 못쓴다고 그랬잖아요......손에 든 돌맹이 내려놔요..........ㅠ_ㅠ P.S 1 - 시큐엘의 송환에 관한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음.. 말씀하신 대로 마나의 연결이 끊어진 정령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그건 계약된 특정한 정령만이구요.. 그저 '소환하기만 한' 정령은 인간세상의 자연계로 돌아가 이제까지 하던 일을 마저 한답니다(;;) 이사나의 경우는 어느 특정한 시큐엘과 계약한게 아니라, 이미 계약된 엘퀴네스의 힘을 빌려 그의 부하(?)인 물의 정령을 마음대로 불러내는 거기 때문에 항상 똑같은 시큐엘이 나타나는게 아니예요. (제 멋대로 지어낸 정령의 설정이라는..;;) ....설명이 너무 빈약한 가요? 죄송해요;ㅁ; P.S 2- 핑키님! 꿈에서 엘퀴네스 표지를 보셨다고요?ㅇㅁㅇ/ 어떻던가요? 알려주세요~~>ㅁ-엘퀴네스의 장- 케르베로스는 정확하게 이릴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두 사람 중 보다 약한 쪽을 먼저 공격한 것이다. 몬스터와의 거리가 너무 짧은데다 달려드는 속도도 빨랐기 때문에 그녀는 미처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뒤로 넘어졌고, 그 위로 날카로운 몬스터의 이빨이 내리 찍히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그녀의 무사를 바라기 힘든 상황이었다. 퍽- 콰직- 콰아악! “ 꺄아아악! ” 그러나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와 날카로운 비명이 울리고 났을 때… 눈앞에 드러난 것은 이릴이 아니라, 피투성이가 되어 어깨와 배 부분에 케르베로스의 흉물스런 이빨을 박아 넣고 있는 헤롤의 모습이었다. “ ……. ” “ ……. ” 순간 시간이 멈춘 듯. 피가 떨어지는 그 느릿한 순간 외에는 아무런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침 몬스터를 헤치 우고 황급히 돌아서던 매튜나 휴센, 쉐리의 얼굴역시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헤롤의 아래에 깔려 눈을 크게 치켜뜨고 있는 이릴은 그의 피를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굳은 듯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천천히 흔들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헤, 헤롤? ” 그와 동시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다른 일행들이 서둘러 달려들어 아직도 헤롤의 피부를 찢고 있는 케르베로스에게 검을 찔러 넣었다. 퍽-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맥없이 떨어져 나가는 몬스터였지만 누구도 그것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부릅뜬 눈으로 처참한 상태의 헤롤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혀 있던 이빨이 뽑혀나가던 순간부터 흐르는 피의 양이 눈에 띄게 불어나고 있었다. 어깨는 거의 다 으스러져 뼈가 드러나 있는 상태였고, 배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허벅지는 발톱에 찢겼는지, 날카로운 상처자국 위로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뒤에서 느껴지던 거대한 무게가 사라지자 그대로 풀썩 쓰러진 그였지만, 그래도 의식은 남아있었는지 한참만에야 힘겨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쿠, 쿨럭. 괜…찮냐, 마녀? ” “ 뭐, 뭐야! 지금 내 걱정을 할 때가 아니잖아, 바보야! 왜, 왜 네가…!! ” “ 어…어때? 이만하면 나도…쿨럭. 확실하게 지키지? 이래도 실망이야? ” “ !!! ” 이런 상황에서조차 장난스런 미소라니! 이런 경우엔 상처가 아프지 않다 기 보단 죽음에 처연해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헤롤은 이미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입가에 머문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이제…너 어떡하냐, 마녀? 나 없으면 앞으론 재미없을 걸? 나처럼 구박 당해주는 사람 찾는 것도 쉽지 않다고….쿨럭. ” “ 말하지 마! 응급조치의 기본도 몰라? 움직일수록 피가 더 많이 나온단 말이야! 입 다물어, 제발! ” “ 쳇. 마녀 결혼식 땐 신랑자식 붙잡고… 놀려주고 싶었는데…. ” “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말하지 말라니까? ” 그러나 헤롤은 그녀의 애원에도 절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듯, 생각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뱉어내고 싶다는 얼굴이었다. “ 저거 알고 보면 성질 더러워요, 얼굴 보고 결혼한거지? 반드시 후회할거다. 부부싸움하면 그날로 사형신고나 마찬가지일걸? 라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러면서…. ” “ 말 하지 마, 말하지 말란 말이야! 바보야, 죽고 싶어? ” “ …왜 내가 찍어놓은 것 뺏어 가냐고 한방 먹여주고 싶었는데…. ” “ !!! ” 헉. 맙소사, 설마 헤롤이 이릴을?? 경악하는 이릴의 표정은 보이지도 않은지, 그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곧 병든 병아리처럼 몸을 추욱 늘어뜨렸다. 감겨진 눈이 다시 뜨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이릴은 가득 차오른 눈물을 삼키며 소리쳤다. “ 이 바보자식아! 죽지 마! 죽으면 가만 안 둘 거야! 정신 차려!! ” “ 이릴, 진정해! 네가 소리 지르면 어떻게 해? ” “ 신관님! 어서 이 녀석을 봐주세요, 어서! ” 완전히 정신을 잃은 건지, 아니면 죽은 건지 조금의 미동조차 없는 헤롤을 붙잡으며 휴센과 쉐리가 소리치자, 카이 씨는 창백한 표정으로 얼른 그들 곁으로 달려갔다. 나도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도무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이 온몸의 힘을 다 갉아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혼란한 머릿속이 이럴 때는 무슨 생각을 해야 좋을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세차게 저은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간신히 쓰러져 있는 헤롤 쪽으로 다가갔다.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지는 기분이었다. 그 동안 수많은 몬스터가 죽는걸 봐온 나였지만, 그리고 많은 부상자들도 보았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몸이 처참하게 뚫리는 것을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고 떠들고 있던 나의 일행이란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암벽을 등반 하듯 거친 숨을 삼키며 드디어 도착했을 땐, 카이 씨는 이미 모든 신성력을 퍼부어 헤롤의 상처를 고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가 치료하기 위해 소모하는 신성력보다, 헤롤의 상처에서 벌어지는 피의 속도가 훨씬 빨랐다. 그나마 고위신관이란 사실에 희망을 가지고 지켜보던 일행들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 말도 안돼…. 지금 치료가 안 되는 것 맞죠? 그렇죠, 신관님? ” “ …죄송합니다. 제 능력으로는 여기 까지가 한계입니다. 지금도 계속 치유술을 쓰고 있습니다만 도무지…. ” “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이 정도의 상처가 치료가 안 될 리가 없다고요! 신관님! 포기하지 마시고, 제발!! ” 실성한 듯이 매달리는 이릴이었지만, 그렇다고 없던 신성력이 갑자기 불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점점 창백해져가는 헤롤의 얼굴을 보며 휴센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 제발 부탁드립니다, 신관님. 이 녀석- 언제나 말썽만 부리긴 해도 저희의 소중한 일원입니다.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 “ 후우.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해보겠습니다만, 역시 이런 경우엔 마음의 준비를 해두셔야 합니다. ” “ 흐윽- 흐윽! 말도 안돼요, 말도 안돼! 이 무식한 자식이 이렇게 죽을 리가 없다고요! 헤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 울며불며 매달리는 이릴은 이제까지 보아온 도도한 이미지 따윈 산산이 날려버리고 오로지 한 남자에 대한 처절한 슬픔과 안타까움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옆에서 쉐리가 말려보려 했지만 그런다고 쉽게 진정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을 지키려다가 이렇게 다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마지막의 그 애매모호한 고백이라니. 아마 탈진해서 쓰러져 버리기 전까지는 그녀를 말릴 수단은 없을 듯 했다. 그때 멍하니 헤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문득 옆에 서있던 트로웰을 돌아보았다. 무슨 의미가 있어서도 아니고, 무엇을 바랬기 때문에 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돌리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것뿐인데, 그 순간 그의 고개가 짧게 끄덕여 지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시원해지는 커다란 청량감을 느꼈다. 그리고 곧 그 의미를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아, 그랬구나, 나…. 헤롤을 치료하고 싶다고… 나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트로웰에게 허락을 구했던 거였어. 내키면 내 마음대로 해도 좋을 것을, 이런 상황에서조차 나는 그의 충고를 무시하는 것을 겁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나에게 실망하게 될까봐, 겨우 그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되냐며 한심해 하게 될까봐 말이다. 바보같이, 그가 그럴 리가 없는데도…. 아무튼 그의 허락에 환한 표정이 된 나는 얼른 카이 씨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는 이미 몇 번이나 계속된 신성력의 시전으로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회복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나는 잠자코 그의 팔을 붙잡아 막 치유를 하려는 것을 제지했다. “ …엘? 무슨…. ” 어서 해달라고 재촉하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말리는 내 모습에 일행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있었다. 그러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 왜 그러냐 ’고 항의하지는 않았는데, 아마도 내가 그를 말리는 이유가 헤롤이 이미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여기는 듯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 말에 모두는 물론이고 카이 씨 까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 미안해요, 카이 씨. 많이 수고하셨다는 거 알지만…. ” “ 아아. 그렇군요. 아무래도 헤롤군은…. ” “ 지금부턴 제가 치료하겠습니다. ” “ ……예? ” 벙쩌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가볍게 무시하면서 나는 우선 헤롤이 살아있는지 파악하기 위해 그의 심장에 손을 짚어보았다. 다행히 카이 씨의 신성력이 아주 쓸모가 없지는 않았는지, 두근거리는 작은 템포와 미약한 숨소리가 유지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대로는 위험한 상황. 그렇게 많은 신성력이 퍼부어졌음에도 전혀 상태가 나아지지 않은, 그의 이리저리 찢겨진 너덜한 육체를 보며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 에, 엘? 잠깐만요, 무슨…. ” 【 회복 】 -파아앗! “ !!! ” 직접 보고 있지는 않았지만,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와 헤롤의 몸을 감쌀 것이라는 것은 지난 경험으로 어렵지 않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나의 온몸을 타고 흐르던 기운이 모두 누워있는 육체를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많이 다치긴 다친 모양인지, 평소 자잘한 상처를 치료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힘을 잡아먹는 상태였다. 갑작스런 힘의 소모에 입술이 저절로 악물려졌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텼다. 그나마 이사나한테 기운을 부어줄 때보다는 훨씬 덜하다고 위로하면서 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몸을 타고 돌던 기운이 더 이상 헤롤에게 전해지지 않음을 깨달은 나는 그제 서야 천천히 감았던 눈꺼플을 들어올리며 다시금 그의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치료가 온전히 먹힌 모양인지, 눈앞에는 찢어진 옷 외에는 아무 상처 없이 말끔한-거기다 혈색까지 완벽한!-헤롤이 평안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심장의 템포는 물론이며 호흡도 훨씬 안정적으로 돌아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도하는 나와는 달리, 주변 사람들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이 창백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 중에서도 바로 내 옆에 있던 카이 씨의 놀라는 얼굴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같았던 그가 나를 향해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을 보며, 실례인줄 알면서도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쿡쿡. 이제 됐어요, 이릴. 헤롤은 무사해요. ” “ 그, 그래 정말 멀쩡해 보여! 어떻게 이런 일이? 엘, 너 설마 신관이었니? ” “ 그것도 카이씨보다 더 완벽한 치유 술이라니-! 도대체 어떻게? ” 그제 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서둘러 헤롤의 상태를 확인한 그들은 그가 멀쩡해졌다는 것을 깨닫고서 눈을 동그랗게 뜨기 시작했다. 이미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마땅히 둘러댈 변명거리가 없어 난감한 표정을 지은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 으음…제 유일한 특기랄까요…. ” “ 특기라니? 설마 치유술이 특기라고? 역시 너 신관이었던 거니? ” 당황한 얼굴로 묻는 말에 나는 잠시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친분을 쌓은 사이라고 해도 섣불리 정체를 밝히기에는 지금 내가 처해있는 입장이 여러 가지로 꼬여있는 것이다. 내가 정령왕이란 게 밝혀지면 당연히 이사나가 인간 최초의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것도 알려져 일행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될 테고, 이전에 고민했던 바와 같이 과거에 나와 아는 사이로 되어 있는 ‘매튜’의 정체까지 들킬 우려가 있었다. 그냥 신관이라고 우겨버릴까? 신의 문장을 추궁당하면 뻔히 들통 날 거짓말이었지만 일단은 위기부터 넘기고 보자는 생각에 막 입을 떼려는 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그렇군요. 이제야 알아 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엘. 당신 역시 엘뤼엔님의 사제셨군요. ” “ …에? ”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단정한 얼굴로 돌아온 카이 씨가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일행들은 ‘역시 그렇구나!’하는 표정이 되어 안색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관인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으니 다른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그 확신어린 어조에 도리어 내가 놀라 반박하는 말을 꺼냈을 정도였다. “ 저, 저의 어딜 보고? ” “ 아아, 가끔 신의 능력을 먼저 받고, 나중에 신전에 가서 문장을 받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당신의 경우는 이미 엘뤼엔님의 계시까지 받은 상태니 오해의 여지가 없지요. 정말 대단한 신성력이군요. 대사제께서도 크게 놀라워하실 겁니다. ” 더할 나위 없는 깔끔한 마무리가 아닌가. 미리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대답을 준비해 놓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내가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든 말든 진실을 모르는 일행들은 그제 서야 헤롤이 낫게 된 것을 온전히 기뻐했고, 분위기는 당장이라도 축제라도 벌일 것처럼 밝아지기 시작했다. 덥썩 나를 끌어안은 이릴은 그대로 볼에 입을 맞추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 아아, 이 예쁜 것! 고마워, 엘! 덕분에 헤롤이 살았어! 정말 고마워! ” “ 우, 우왓! 이, 이릴~! ” “ 흐윽, 흑흑… 네가 아니었으면 이 자식 죽었을 거야. 그렇게 바보같이 가버렸을 거라고. 정말 고마워, 엘. 흐윽… ” 이제야 겨우 안심이 되었는지 이릴은 나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목 놓아 흐느끼기 시작했다. 여자는커녕 평생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안긴 경험이 없던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난감을 표정을 지었지만, 곧 피식 미소 지으며 그녀의 등을 툭툭 토닥여 주었다. 많이 놀랐을 테니 진정이 될 때까지 하는 대로 내버려둘 생각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말없이 웃으며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두 마리의 케르베로스를 무찌른 사건은 생각보다 더욱 파장이 컸다. 토벌을 요청한 상단 은 물론이고, 마을 사람들까지 전부 구경나와 감탄이 서린 얼굴로 바라보았던 것이다. 지난 시간동안 몇 차례나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앗아갔던 흉물스런 존재가, 채 하루도 되기 전에 불과 7명에 해당하는 용병들에게 처참히 당했다는 소문은, 미처 말려볼 틈도 없이 이미 도시 전체에 퍼져있는 상태였다. 더구나 그렇게 용감하게 무찌르고 돌아온 일행들의 몸에 그 흔한 상처자국 하나 없음에야! (물론, 신관이 치료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덕분에 샴페인 용병단의 위명은 몬스터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온 그날 점심때를 시작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작 유명세를 탄 당사자들은 피곤하다며 종일 여관 안에 들어가 잠이나 청했지만 말이다. 마침 기절한 이사나를 침대에 옮겨두던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 똑똑. “ …네? ” “ 실례합니다만, 엘. 잠시 시간 괜찮으시겠습니까? ”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카이 씨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까 일행들 앞에서 일부러 정체를 덮어주는 느낌을 받았던 터라, 이리저리 찔리는 것이 많았던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열었다. 평소보다 더욱 진지한 분위기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잠든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여기선 곤란한데… 한적한 곳으로 가지요. ” 끄덕끄덕 그렇게 해서 이동한 곳은 여관 뒤편에 마련된 작은 공터였다. 겨울 때 장작을 패는 곳인지 산더미 같은 나무 조각들이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눈에 뜨이는 장소가 아닌지라 지나다니는 사람하나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혹시나 듣는 이가 있나 싶었는지 카이 씨는 비교적 꼼꼼히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정말 아무도 없다고 판단을 내린 그가 그 다음으로 취한 행동에 나는 그대로 경악해 버리고 말았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은 그가 내게 허리를 숙여 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고귀하신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을 뵙습니다. 그 동안 알아보지 못한 점을 용서해 주십시오. ” “ !! ” 순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식어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안거지? 경직된 표정을 추스르기가 힘들었지만 나는 우선 상황파악을 할 목적으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억지로 침착 하려고 애썼기 때문일까?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딱딱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 일어나십시오. 내가 당신에게 이런 식의 영접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 “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의 모든 물과 치료를 관장하시는 엘퀴네스님은 당연히 모든 인간의 위에 군림하셔야 마땅합니다. 또한, 엘뤼엔님의 계시에서 정중히 대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므로, 저는 그분의 사제로서 도리를 다해야 마땅합니다. ” “ …어떻게 알았습니까? ” 그러자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 했다. “ 헤롤군을 치료하시는 것을 보았을 때입니다. 사실 그만한 상처는 설령 대 신관님이 나선다 하더라도 온전히 회복시키기 힘든 것이기에, 감히 그러한 것이 가능한 존재를 가늠하던 중에 엘퀴네스님이 떠올랐습니다. 실례지만, 함께 동행 하신 라이란 이름의 소년은 이 제국의 황제 이사나가 아닌지요. ” “ …! ” 약간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만으로 내가 그의 말에 긍정했음을 깨달은 카이 씨는 곧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를 침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일전에 삼일에 한번씩 내리던 큰 비가, 이사나 황제가 엘뤼엔님께 서원하여 얻었다는 소문이 퍼질 때부터, 저는 계속 정령왕의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고위 사제에 속하는 제가 엘뤼엔님의 역사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거든요. 그리하여 다른 한가지의 가능성으로, 물을 관장하는 엘퀴네스님의 조력이 있었다고 판단했습니다. ” “ …그래서 마침 그러한 조건에 맞는 사람들이 있어 주시했다는 건가요? ” “ 정확하게는 엘뤼엔님의 계시가 내려졌을 때부터입니다. 그 분이 만나기를 희망하여 저에게 안내를 명령할 정도라면, 인간으로서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 위치의 높은 분이라 짐작했습니다. 나중에 상황에 따라 예측을 들어 맞춘 것뿐입니다.” “ ……. ” 결국 한 마디로 말해서 엘뤼엔이 원흉이었던 거잖아! 물론 카이 씨가 내 정체를 알았다 해서 이리저리 떠벌리고 다닐 타입이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나는 밀려오는 낭패감에 이마를 짚고 말았다. 유희고 뭐고 전부 다 끝장난 심정이랄까?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눈치 챘는지, 그는 얼른 고개를 숙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 절대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겠습니다. 엘퀴네스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원하신다면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겠습니다. ” “ …호오, 정말인가요? ” “ 물론입니다. 믿어주십시오. ” 두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한 확고한 대답에 무거워졌던 마음이 한결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마침 트로웰 역시 그를 믿어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던가. 한번 내뱉은 말을 번복하는 사람이라곤 절대 생각되지 않았기에, 나는 그를 신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좋아요, 카이테인. 당신을 믿어보겠습니다. 염치없는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제 정체에 관해서는 일행에게 함구해 주시길 바랍니다. ” “ 염치가 없다니 당치 않으십니다. 엘뤼엔님께 맹세코 오늘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 단정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를 마주보며 씨익 미소 지었다. 꽤나 듬직한 공범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도대체 이번 쳅터 제목과 내용이 무슨 상관이 있냐고 물으신다면...그저 할말이 없습니다..; =_= P.S -1. 크흑. 전투씬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ㅠ_ㅠ 덕분에 용기가 좀 생겼다는..(퍽;) P.S -2 . 핑키님 오타지적 정말 감사합니다;ㅁ; 그리고 Ctrl + F 키 사용법도 정말 유용했습니다!(몰랐다는..;) 앞으로도 오타 지적 부탁드릴게요^^ㅇㅎㅎ P.S -3. 에에, 아무래도 찜한녀석은 2부라서 부담이 되는 듯..; 원래 1부 만한 2부가 없잖습니까^^; 괜히 이것때문에 1부까지 이미지 버릴까봐서리..-_-; 으음... 2부는 두 사람(?)의 감정만이 중심이 됩니다. 사피처럼 이래저래 굴러 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는..(물론 제 생각만이지만;) 이번 달 안에 반드시 올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마음을 비우고 기다려 주세요...;;;(먼산) P.S -4. 표지는 아직 안 나온듯 합니다. 출판사 이름은 뫼비우스라지요^^;/ <내일은 연재 쉽니다~! >.....무슨 신문 같은.....;;; => 엘퀴네스의 장-14. 새로운 일행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헤롤이 눈을 뜬 것은 몬스터와의 전투가 벌어진 다음날 오후였다. 몸의 상처는 완전히 다 나았어도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충격이 컸었는지, 좀처럼 깨어나지 않던 그가 드디어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일행들은 모두 기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정작 깨어난 본인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 구분을 하지 못하는 듯 했다. 생사를 다투는 험한 인생을 살아온 용병답게, 자신이 입었던 상처가 쉽게 회복될 수준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거, 혹시 꿈? ”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 한사람 한사람과 일일이 눈을 맞추더니 갑자기 기겁을 하여 소리쳤다. “ 뭐야, 너희들! 그깟 몬스터 두 마리를 못 이겨서 죄다 죽은거냐~! ” “ 엥? 무슨 헛소리야? ” “ 그게 아니라면 너희들이 어떻게 이곳에 와있는 거야! 아아, 그래. 그놈들 좀 세더라. 다 죽었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고. 자, 그건 그렇다 치고… 가장 중요한 게 남았어. 여긴 천국이냐, 지옥이냐? ” “ ……. ” 전혀 의심의 여지없이 물어오는 진지한 표정에 일행들은 모두 어이없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이제까지 불안하게 지켜보며 걱정했던 것이 몽땅 손해 보는 기분이었달 까? 여전히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헤롤은 나와 눈이 마주치곤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가 다음으로 이릴을 보더니 실망어린 표정을 지었다. “ 쳇… 엘이 있어서 천국인가 보다 했더니, 역시 지옥이었던 거냐…. ” “ ……죽을래? ” 애틋한 고백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지옥이라고 하다니. 대체 헤롤의 말은 어디까지가 진심이란 말인가. 설마 죽어가는 와중에서 거짓고백을 했을 리는 없고. 당황한 이릴이 인상을 험악하게 찡그리자 헤롤은 반색이 되어 고개를 휘휘 젓기 시작했다. “ 헉, 그, 그런 뜻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뭐랄까… 이왕이면 너는 살았으면 했달까? ” “ …? ” “ 바보냐, 너? 내 말은 귓등으로 흘려들었냐? 이왕이면 사랑하는 사람은 살아주는 편이 행복하잖아. 너까지 여기로 와버리면 모처럼 내가 지켜준 보람도 없고, 볼 때마다 가슴 아플 텐데 그게 지옥이 아니고 뭐야? ” “ 그, 그런 소리를!! ” 오오, 저 도도한 이릴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민망해 하는 모습이라니. 저런걸 보면 그녀도 딱히 헤롤에게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다. 킥킥거리고 웃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쯤에서 그만 정신을 차리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거침없는 동작으로 아직도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롤의 뒤통수를 빠악-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상황파악 하지 못하고 있던 그가 기겁을 한건 당연한 일이었다. “ 우아악- 이게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 “ 호오? 아프냐? 영혼 주제에 챙기는 것도 많다, 너? ” “ 에엥? 어? 그…그러고 보니 그렇네. 영혼도 아픔을 느끼나? ” 경험자로서 대답하는 거지만 정답은 ‘아니다’ 였다. 일단 벽에 부딪치게 된다 해도 닿는 느낌이라곤 하나도 없고, 오히려 통과해서 건너편 장소에 도착하기 일쑤였으니까 말이다. 아, 그래도 역시 같은 영혼들 끼리 부딪치면 아플려나?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사실로 고민하고 있는 사이 헤롤을 향한 일행들의 면박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 야, 이 자식아! 보자보자 했더니 아주 소설을 써라~! 네가 죽긴 왜 죽어? ” “ 엥? 그럼, 설마… 내가 안 죽었다고? ” “ 그래, 보면 몰라? 몸 하나 다친 곳 없이 멀쩡하잖아! ” “ 에엥? ” 그제 서야 상처에 생각이 미쳤는지, 몬스터의 억센 이빨과 발톱에 찍혔던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하는 헤롤이었다. 이미 완벽하게 치료된 몸에 붕대 따위가 감겨있을 리 만무, 거기다 통증하나 느껴지지 않았을 테니 그가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조심스런 기색으로 몸을 살펴본 그는 또 다시 멍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그럼 설마…내가 몬스터랑 싸운 것이 꿈? ” “ …정신 차려, 임마. 어떻게 된 게 네놈 머리는 그쪽으로밖에 안 돌아 가냐? 치료했다는 생각은 도무지 못하겠든? ” “ 오오, 치료를? 아하~ 그러고 보니 카이테인씨가 있었지! ” 이제야 확실히 상황판단이 되었다는 듯 얼굴을 환하게 밝히는 그였지만, 이번에도 일행의 반응은 가차 없었다. 쯧쯧 혀를 차며 헤롤을 바라본 쉐리는 새침한 표정으로 나를 가리켜 보였다. “ 생명의 은인은 이쪽. 어서 고맙다고 해, 헤롤. ” “ 엥? 엘한테? ” “ 그래. 헤롤을 치료한건 엘이야. 글쎄 그동안 신관인 걸 깜찍하게 속이고 있었지 뭐야? 카이테인씨 조차 놀랄 정도로 대단한 신성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 말이야. 아무튼 엘이 아니었으면 넌 죽었을 거라고. 어서 고맙다고 해. ” “ 아하하… ” 그녀의 말에 헤롤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어설프게 웃어보였다. 인사를 받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라서인지 현재의 분위기가 상당히 민망한 느낌이었다. 거창하게 생명의 은인 어쩌고 할 것 까지는 없는 건데 말이다. 당황한 나는 변명하듯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 아니, 사실은… 카이 씨가 초반 응급처치를 확실하게 하셨기 때문이라, 전적으로 저의 공로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요. 아무튼 헤롤 괜찮으세요? 어디 아픈 곳은요? ” “ 아… 전혀. 오히려 아주 상쾌해. 근데 네가 정말 신관이었어? 어느 신전의? 치료 능력이 있을 정도면 꽤 대단한 고위급 사제인거 아니야? ” 물론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내 입으로 ‘나 고위사제 맞소!’ 라고 어찌 대답하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양심이 찔리는 것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의 호기심어린 눈동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되었다. 그런 나를 구제해준 것은 어김없이 위급한 상황마다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트로웰이었다. “ 자자, 죽다 살아났으니 할 말이 많을 테죠? 우린 이제 슬슬 자리를 비켜주는 게 어때요? ” “ 아…! 그, 그렇지, 참! ” “ 어머, 그러고 보니 너무 눈치가 없었네? 호호, 두 사람 잘해봐! ” “ 응? 무슨… 너, 너희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사람들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릴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미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일찌감치 물러서서 방을 나서고 있는 중이었다. 당황해서 붙잡으려고 했던 것도 잠시. 뒤에서 들려오는 진지한 목소리에 그녀는 결국 망설이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 나 할말 있어, 이릴. 다른 사람들 듣는 게 민망하면 그냥 내보내는 게 나을 걸? ” “ ……. ” 아무래도 고백을 하고 나니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듯, 대담한 발언을 내뱉는 그로 인해 싱글벙글 나서던 마이티와 휴센의 표정이 약간 일그러졌다. 당황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정작 당사자인 헤롤이 너무 담담하니 약이 오른 것이다. 특히 그동안 그 때문에 쉐리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던 휴센은 무언가 상당히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의 연애를 방해한 인간 치곤 꽤나 조짐이 좋은 상태가 아닌가. 아무튼 두 사람만 남겨둔 채 방을 나선 우리는 그대로 뿔뿔이 제 할일을 찾아 떠났다…고 했으면 좋았을 뻔 했으나, 장난끼 많은 무리는 절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살짝 열어놓은 문 틈 사이로 방안의 사정을 정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과연 전투에 뼈가 굵은 사람들답게 기척을 죽이고 호흡을 가라앉히는 것에 기똥차게 익숙한 모습이었다. “ ……. ” “ ……. ” 이릴과 헤롤은 방안에 단 둘이 남아서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평소와 다르게 한참이나 서로의 눈치를 보던 두 사람은, 결국 만사를 포기한 듯한 헤롤의 거침없는 음성을 시작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단숨에 흐트려놓았다. “ 에잇,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사귀자, 이릴. ” “ 뭐, 뭐야? 너 미쳤니? ” “ 뭐 어떠냐? 지금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나 아니면 누가 너 같은 마녀를 바라본다고 그래? 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든 세상, 여자를 위해 몬스터 앞에 뛰어드는 용병이 어디 흔한 줄 알아? 넌 봉 잡은 거라고. ” “ 우, 웃기지 마! ” 그렇지 않아도 자존심 센 그녀가 그런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리 없었다. 자연스럽게 대화는 두 사람의 다툼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 뭐야? 내가 어디가 부족한데? ” “ 그럼 너의 어디가 완벽하다고 생각하는데? 너 너무 꿈이 큰 거 아니니? 아니면 날 너무 만만히 보는 거야? 목숨 하나 바쳤다고 기겁을 하며 사겨줄 여자로 보여? ” “ 누가 그렇댔냐? 그 만큼 내 사랑이 지고지순하단 뜻이잖아,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먹겠어? ” “ 그래! 못 알아먹겠다! 내가 너와 사귀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대봐! 대체 무슨 심보야? 이제까지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던 주제에! ” 앙칼지게 맞받아치는 말에 헤롤은 신경질이 난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곤 퉁명스런 목소리로 뜻밖의 사실을 고백했던 것이다. “ 그럼 어떡 하냐? 네가 날 그렇게 싫어하는데, 나 혼자 열 내는 모습 보이는 게 기분 좋겠냐구. 그나마 동료취급이라도 받으려면 얌전히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야. ” “ 호오, 그러셔? 그러던 게 갑자기 죽을 때가 되니 아까워졌고? 그래서 이때가 기회라고 고백한거야? 그렇다면 넌 대단히 이기적인 놈이라고 밖에 할말이 없다. 그 상태로 네가 죽었으면 나는 뭐가 되니? 평생을 죄책감에 치여 살라는 소리야? ” “ 우씨- 그래! 그렇게라도 날 기억해주길 바랬다, 떫냐? ” “ ……뭐? ” 할 말을 잃어버린 건 오히려 이릴 쪽이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다 포기한 헤롤은 이제까지 용케 감정을 숨기고 있었구나 생각될 정도로 당황스러울 만치 강압적으로 밀어붙였던 것이다. “ 내가 이기적인 놈인 거 이제 알았어? 그 동안 좋아한 세월이 아까워서라도 네가 날 알아주길 바랬 다고. 그게 그렇게 큰 문제냐? 마지막인데 좋아한단 고백도 못해? 사실 나도 무지 고민했어, 과연 해도 좋은 말인지 어떨지! 근데 네가 막상 딴 놈이랑 행복하게 살 미래를 생각하니까 속이 뒤집어 지는 걸 어쩌라고! ” “ ……. ” “ 그래도 살았잖냐? 살았으니까 이제 기회를 버리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거잖아! 그걸 그렇게 못 봐주겠냐? 이놈의 용병이란 게 직업상 언제 황천길을 오락가락 할지 모르는데, 그 전에 사랑하는 여자랑 연애한번 해보자는 게 그렇게 어이없냐고! ” “ 무, 무슨 소리를! ” 낯 뜨거운 소리에 얼굴이 붉어진 이릴이 얼른 제지하려고 했지만, 헤롤은 용납하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사인지, 쉴 새 없이 떠드는 입은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 사귀어야 할 특별한 이유를 대보라고? 그게 목숨까지 받쳐서 구해준 사람한테 할 소리냐? 이릴 너 정말 그렇게 잔인하게 나오기야? 그래, 이거 한가진 확실하게 약속할 수 있다! 너 나랑 결혼하면 애 낳을 수 있을 거다! ” “ 뭐어? ” 갑자기 웬 자식 타령인가? 문틈에서 엿보는 우리나, 이릴이나 하나같이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데 헤롤은 당당하게도 가슴을 쭈욱 피더니 자랑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가리켜 보였다. “ 이 얼굴을 닮은 꼬맹이가 있다고 생각해봐라! 절대 안 귀여울걸? 그러니 귀여운 애들한테 미치는 너의 그 고질병도 무사통과라 이거지! 안심해라, 이래봬도 대대로 내려오는 악성 유전병이라 내 피를 이은 자식은 절대로 이 얼굴에서 벗어나질 못할 거다! 어때, 이래도 안 끌려? ” “ ……. ” ……쿨럭. 비, 비참해요, 헤롤. 차마 이렇게 말해주지 못하는 것이 정녕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설마 저런 말도 안돼는 이유를 갖다 붙일 줄이야. 그것을 본 마이티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으며 동정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 크흑, 불쌍한 자식. 얼마나 갖다 댈 이유가 없었으면…. ” “ 아니, 이릴에게는 꽤 현실적인 문제일걸? 저래 봬도 상당히 끌릴 거야, 아마. ” “ 킥킥킥… ” “ ……. ” 하긴 이릴이라면 정말 그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을 지도…. 묘하게 수긍이 가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다시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문 안의 상황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침 굳어있는 이릴을 두고 헤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 그리고 또 있어! 나만큼 네 잔소리 감당하고, 다툴 수 있는 존재도 없을 거다! 이 정도면 평생 같이 살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이유 아니야? 너 지금 당장 내가 다른 여자하고 결혼하게 되도 멀쩡할 수 있어? 후회하지 말고 내가 매달릴 때 잡으란 말이다! ” 그렇게 쏘아붙인 헤롤은 그대로 쭈욱 양 팔을 벌렸다. 침대에 앉아 반쯤은 이불에 덮힌 초라한 모습이었지만 포즈만큼은 당당하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 자존심도 내세울 때 내새워, 이 고집불통 아가씨야. 이렇게 매달리는 남자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목숨 버려, 자존심 버려, 널 위해서 다 버렸는데 자꾸 그렇게 튕길 셈이야? ” “ ……. ” “ 이리와. ” “ ……. ” 놀라운 일은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언제까지고 자리에 서서 뻣뻣하게 굴 것 같았던 이릴이 난감한 표정을 짓는 가 싶더니 천천히 헤롤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혹시나 이대로 다가가서 어퍼컷을 날리는 반전이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나는,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 없이 푸욱 헤롤의 목을 끌어안는 것을 보고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 무언가 한방 먹었다는 듯 묘하게 복잡한 표정을 짓던 사람들은 허탈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 허허허… 설마 이릴도 헤롤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 “ 미치겠네. 오늘 여러 가지로 진귀한 경험 한다. 허허허… 이거 완전히 마녀와 머슴 아니냐? ” “ …멋지다…. ”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다름 아닌 쉐리였다. 맙소사, 여자애들은 왜 저런걸 보면 감동하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게다가 헤롤이 했던 설득이라는 것도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전혀 무드가 없는 말이지 않은가? 세상 어떤 인간이 못생긴 자식을 낳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여자를 꼬신단 말이냐! 꽉 끌어안은 두 사람이 어느새 키스를 하기 시작하자 민망해진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지만, 일행들은 히죽 웃으며 그것을 끝까지 구경했다. 사실 단번에 쳐들어가서 휘파람을 불러주고 싶은 것을,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이릴의 채찍이 무서워 참고 있는 듯 했다. 한참동안 두 사람의 애정씬을 관람하던 휴센은 허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이거, 이거…헤롤 자식이 나를 앞지르게 생겼군. ” “ 헤에? 왜, 부러워? 단장이 웬일이야? 킥킥 ” “ 아니… 뭐…. ” 그러면서 힐끔, 쉐리를 돌아보는 표정엔 묘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상 용기를 내지를 못하는걸 보면 11살 차이라는 게 어지간한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나는 작은 목소리로 휴센에게만 들리게끔 입을 열었다. “ 용기 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는다, 몰라요? ” “ …응? ” “ 헤롤을 잘 봐둬요, 사랑을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매달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 “ ……. ” 닭살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부럽지 않을 수가 없을 걸? 어쩌면 이번 일을 기회삼아 휴센도 좀 더 분발하게 될지도 모른다. 피식 웃은 나는 좀더 부채질할 목적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 시간을 끌면 끌수록 휴센과 쉐리의 감정의 벽은 두꺼워 질 거예요. 나중에 30넘어서 받아들이면 그 땐 정말 도둑놈 소리 듣는 다구요. ” “ ……쿨럭. ” 그러니 아직 20대일 때 확실히 잡아라! 라는 눈빛을 보내자 그는 얼떨떨해하면서도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일 모래가 30인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뼈 속 깊이 공감이 가는 소리였던 것이다. ============================================== 오늘도 밤 새야 겠다는..후훗.-_-; 참, 10년 재앙의 기간을요, 전대 엘퀴네스(엘뤼엔)의 소멸 이후 15년 뒤로 설정했습니다. 한마디로 엘은 엘뤼엔이 소멸한지 25년 뒤에 태어난 셈이죠. ^-^ (그런고로 현재 엘뤼엔의 나이는 신의 나이로 25세입니다) 내용상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_+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어쩌면 조만간에 한 커플이 더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흡족해진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평생 솔로로 살아온 몸으로서 배가 안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사람들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정령왕으로 탄생한 이후, 벌써 내가 알게 된 커플만 3개나 되는 셈인가? 그 중에서도 가장 내 삶에 영향력을 끼치는 존재라고 하면 당연 엘뤼엔과 이프리트 커플을 꼽겠다. 이프리트의 소멸이후로 시기가 늦춰지긴 했어도 일단 두 존재간의 관계가 진전될 희망이 보였으니 말이다. 게다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밀어붙인 커플이기도 하고. 그런데…설마 정말 이프리트를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뭐, 엘뤼엔도 딱히 ‘아빠’라고 부르라고 강요하지는 않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실제적인 나이가 몇 천 년이나 많다고 해도, 외모 상으론 나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여자(?)한테 엄마라고 부르기가 쉬운 건 아니니까. 그렇게 치고 보면 엘뤼엔의 외모도 그렇게 나이 많아 보이지 않은데, 별 다른 거부감 없이 쉽게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협박이 있었다곤 하지만, ‘형’보다 ‘아버지’란 인식을 강하게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카리스마가 남다르다는 뜻이 될까? 어쩌면 그가 선대의 엘퀴네스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게 된 것일지도. ‘ 흐음, 그럼 같은 범주로 엘뤼엔이 나를 아들로 보게 된 것도 내가 후대의 엘퀴네스이기 때문인가? ’ 신이 된다 해도 본 성질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다고 치면, 같은 물의 성분(?)을 가진 존재에게 끌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혈육의 이끌림과 비슷한 거랄까? 그나마 이런 식으로 유대 할 수 있는 관계가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헤롤이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상단일행은 다시 출발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론 처음 계획에서 며칠이 더 늦어버린 꼴이 되었지만 예상치 못했던 수입도 있었고(케르베로스의 가죽이 생각보다 값이 더 비싼 모양이다), 동문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인지 누구도 별다른 불만을 내비치지는 않는 상태였다. 특히 그 동안 몬스터 때문에 남문을 이용하지 못하던 도시 사람들이, 감사의 뜻으로 서로 식사를 대접하려고 했었기에 쉽게 떠나버리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괜찮다고 한사코 물리는 데도 하루에도 몇 번 씩 빵 바구니와 구하기 힘든 귀한 술을 종류별로 가져다주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확실히 이곳이 한국에 비해 인정이 살아있는 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 저희는 용병으로서 의뢰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이런 대접은 곤란합니다. ” “ 아이고, 그래도 용병님들 덕분에 저희가 살았는걸요? 이제까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이룬 영웅들께 이런 것도 못해드려서야 오히려 저희들이 면목이 없습니다. 한 끼 식사 정도는 대접하게 해 주십시오. ” 이런 식의 호의를 보이는 사람이 지금까지 몇 차례나 있었는지 모른다.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것도 한 두 번이지, 너무 과하면 그것도 부담스러운 법. 휴센은 적절히 예의바른 미소를 유지하며 부드럽게 거절했다. “ 이미 충분히 과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일행의 출발시간도 가까우니 지금은 그냥 마음만 받도록 하겠습니다. ” “ 허허…이것 참, 아쉬워서 어쩌지요. ” 쩔쩔매는 상대방이었지만, 이미 우리의 품에는 그가 만들어 보내준 쿠키와 빵이 한가득 안겨있는 상태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계속 무언가를 더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일행들은 받아들일 수도, 그렇다고 냉정히 거절할 수도 없는 난감한 상태에 빠져야만 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가 머무는 여관 앞으로 한때의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겁먹은 얼굴이 되어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금발머리에 나름대로 준수한 얼굴의 20대 남자한명이, 백마에 탄 모습으로 갑옷을 입은 10명의 남자들과 함께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번쩍 번쩍한 옷차림이나 깔끔한 생김을 봐서도 어느 잘난 집안 자제임이 한눈에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설마 귀족인가? 속으로 의문을 삼키는 사이 어느새 우리 코앞으로 다가온 무리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시선만을 내려 주변을 쭈욱 흩어보았다. 그 중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갑옷을 입은 사람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 그대들이 이번 남문에 등장한 몬스터를 퇴치했다는 용병들인가? ”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질문이었지만, 말투에 서린 오만함은 감출 수 없었다. 무슨 혐오생물이라도 보듯, 투구아래 가려진 그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휴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 샴페인 용병단의 단장 휴센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온지…. ” “ 크흠. 나는 피닉스 기사단의 단장인 크렌트라고 한다. 여기 계신 분은 이곳 할버크의 영주로 계시는 카일 드 클란 후작님의 장남이신 엘키노 도련님이시다! 이번에 그대들이 도시의 경비대를 대신하여, 남문의 몬스터를 퇴치하신 것을 치하하기 위해 귀하신 걸음을 하셨으니 모두 무릎을 꿇어라! ” 그러자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일행을 제외한 근처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기 시작했다. 헉. 여기는 설마 귀족아들이 치하하러 나타나면 죄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야? 이러느니 차라리 칭찬하러 오지 않느니만 못한 게 아닌가. 그 자리에서 몸을 숙이지 않은 사람은 미처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샴페인 용병단들 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후작아들인지 도련님인지 하는 녀석 얼굴이 불쾌감으로 일그러지자, 당황한 남자는 큰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 이 무례한 것들! 뉘 앞이라고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는 거냐!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할까! ” 그러자 그제 서야 돌아가는 상황을 인식한 일행들은 하나같이 벌레 씹은 표정이 되어 천천히 무릎을 꿇으려 했다. 의외였던 것은, 여기서 이사나가 지지 않고 반박하는 말을 꺼냈다는 것이었다. 녀석은 갑옷 입은 남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황법에 규정된 바, 무릎을 꿇어 인사하는 예절은 제국의 황족에게만 취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귀족의 아드님이시라고는 하나, 황족이 아니신 분께 극상의 예우를 보일 수는 없습니다. ” 오오! 그런 법이 있었단 말인가? 과연 틀린 말은 아니었는지 찔끔한 표정을 짓는 기사였으나, 그는 곧 지지 않겠다는 듯이 흥분하여 소리쳤다. “ 무, 무엇이!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는 구나, 감히 이 분이 뉘시라고! ” “ 설령 마신교의 법황이라 하더라도 황족이 아닌 이상, 백성들로 하여금 무릎을 꿇어 보이는 인사를 받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당신은 당신이 모시는 주인을 반역죄로 이끄실 셈입니까? ” “ …!!!… ” 과연 맞는 소리였다. 황족만이 받을 수 있는 인사를 자진해서 받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가 황족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의미. 즉, 현재의 황족을 몰아내고 새로운 황권을 확립할 의지를 보이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반역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지만 기사단의 단장이라는 그는 절대 쉽게 수긍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긴 커녕 도리어 그의 수하들을 돌아보며 일행들을 위협할 것을 명령하는 것이었다. “ 이…이익! 무얼 하느냐! 이 무엄한 것들을 즉각 결박해라! 죄목으로는 귀족을 향한 도전과 모욕이다! 감히 엘키노님 앞에서 무례를 범한 죄 값을 치르게 하겠다! ” “ 예, 알겠습니다! ”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험악한 기세로 달려들어 당장 일행들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어디 샴페인 용병단이 쉽게 당할 인간들이던가. 순순히 잡히기 보단 싸우다 죽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는지, 일행들은 저마다 쥐고 있던 무기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실버급의 용병 이라고 하면 어지간한 전투에 뼈가 굵은 기사들이라 해도 쉽사리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포획하러 오는 기사들의 표정은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마도 소문을 통해 우리가 은패를 가진 용병단이라는 것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 표정도 점점 긴박해 졌다. 아무리 이사나의 말이 옳다곤 해도, 일단 영주의 아들과 대적하게 되는 셈이니 쉽사리 무운을 빌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 기사들과 일행이 대치하려는 순간, 한손을 들어 그것을 제지한 것은 예상외로 도련님이라는 귀족의 아들이었다. “ 멈추어라. 지금 나는 용병들의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온 것이지, 싸움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 “ 옛? 하지만 도련님! 저 무례한 것이 감히… ” “ 불쾌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더구나 저 안에는 여인들도 있지 않은가? 기사된 그대가 아무리 평민이라 하나 여성에 대한 대우를 험하게 할 셈인가? ” “ 시, 시정하겠습니다. ” 단호하게 꼬집는 질타에 기사단장이라는 남자는 단번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여보였지만 나로서는 기가 턱 막히는 심정이었다. 이 나라의 기사도가 땅에까지 떨어졌다는 것은, 이전에 페리스와 함께 샘터에서 목격한 사건으로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때 한모금만 물을 달라고 하는 여자를 모질게 걷어찬 기사의 입에서 스스로 기사도라는 것이 얼마나 썩어빠졌는지를 자백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새삼 이곳의 기사들이라고 그들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더구나 정작 그렇게 만류하는 도. 련. 님.이란 인간의 눈빛이 노골적으로 흑심을 담은 채 쉐리와 이릴을 바라보고 있다면, 순수한 기사도를 내세운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 아닌가? 불쾌한 표정으로 오만 인상을 찡그리는 사람들을 보면서도 입맛을 다시는 꼴을 보자니 내가 다 소름이 끼치는 심정이었다. “ 호오~ 용병이란 항상 거칠고 험한 인상을 받아왔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기가 막힌 미인들이 있을 줄은 몰랐군. 부하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아가씨들. 나를 봐서라도 말입니다. ” 도대체 녀석의 어디가 봐줄게 있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 이릴과 쉐리는 마지못한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히죽 띄우더니 그대로 훌쩍-타고 있던 말에서 몸을 내리는 것이었다. 그리곤 탐색하듯 두 여인을 다시 쭈욱 흩어보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일행들의 어깨는 기사들과 대치할 때보다 더한 긴장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 후후후, 이거 횡재로군. 섹시한 미녀와 청순한 소녀라…. ” “ …네? 방금 뭐라고… ” “ 아니, 아니오. 무례를 사죄하는 의미로 오늘 저녁 만찬에 초대하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 능글능글한 미소는 같은 남자가 보기에도 느끼할 만큼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가만히 있는 거지? 평소라면 이때 쯤 나서서 정중하게 거절했을 휴센이 잠자코 있자, 당황해서 돌아본 나는 그대로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를 비롯한 세 명의 남자-마이티, 헤롤, 휴센-이 하나같이 화난 표정이 되어 당장이라도 덤빌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공식적으로 이릴과 커플로 지정된 헤롤은 물론이며, 쉐리에게 마음이 있는 두 남자(휴센과 마이티)가 그녀들에게 찝쩍거리는 남자에게 고운 마음을 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독기서린 표정이 그래도 차마 귀족이라고 당장 주먹부터 내지르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일행 중 가장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던 트로웰이 휴센을 대신하여 단정한 태도로 대답했다. “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저희는 몇 시간 후면 의뢰일정에 맞추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니 저녁 만찬에는 참석할 수 없습니다. ” “ 으응?…!… 호오, 그대는? ” 거절하는 말에 불쾌한 듯이 미간을 모으던 영주아들은 정작 트로웰에게 시선을 미치고는 묘한 표정으로 미소지어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또…이릴이나 쉐리를 향할 때만큼이나 끈적끈적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한 발짝 물러서고 싶을 만큼 소름끼치는 시선이었으나 트로웰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 샴페인 용병단의 일원입니다. ” “ 호오, 지금 몇 살이지? ” “ 15세입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 “ 아니, 아니, 후후… 어린 나이에 험한 세계에 몸을 담았군. 전투에 실전 경험이 많을 테지? 과연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몸매야. ” “ ……칭찬 감사합니다. ” 늦가을이라 상당히 쌀쌀했지만 어차피 계절을 타지 않는 트로웰은 여름에 입는 차림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어깨와 몸의 굴곡이 거의 드러나 보였는데, 그것을 어찌나 느끼하게 쳐다보던지 바람도 불지 않는데 온몸에 닭살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여자인 이릴이나 쉐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어딜 봐도 소년으로 보이는 트로웰한테 까지 저런 관심이라니… 저 자식! 혹시 변태 아니야? 나를 비롯한 일행의 얼굴엔 모두 혐오스러운 빛이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영주아들은 여전히 트로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 그대로 ‘찝쩍’거리는 행동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불쾌한 취급을 당하면서도 안색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그가 정말이지 위대해 보일 정도였다. “ 용병패의 등급은 어떻게 되지? ” “ 은패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 “ 호오, 15살에 은패의 용병이란 말인가? 정말 대단하군. 그렇지 않아도 성을 지키는 사람이 모자라서 용병을 모집하는 중이었는데…어떤가? 내 저택에서 일해보지 않겠나? 원한다면 기사의 작위도 내려줄 수 있는데 말이야. 수당도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지. ” 지금 저 말을 순수한 스카웃으로 받아들일 존재는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저절로 욕설이 흘러나오려는 것을 삼키며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그런 나를 힐끗 바라 본 트로웰의 표정이 살짝 찡그려졌다. 절대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 트, 트로웰? - 가만히 있어, 엘. 아직 이 녀석은 널 발견하지 못했어. 후드로 최대한 얼굴 가리고 기척 내지 마. - 하, 하지만… - 난 괜찮아. 우습지만 이런 상황 익숙하거든.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절대 끼어들지 마. 알았지? 그렇게 말한 트로웰은 내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은 채 바로 영주아들을 바라보며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와 다르게 싸늘하게 굳어진 모습이었지만, 일행들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것이었는지 다들 감회가 새로운 표정이었다. “ 죄송합니다만, 저는 단에서 탈퇴할 생각도, 기사작위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모처럼 제안해 주신 거지만 사양하겠습니다. ” “ 흐음, 싸늘한 태도도 마음에 들어. 꽤나 도발적인 눈이로군. 이런 아름다운 황금색 눈동자는 처음 보는 걸? 정말 올 생각이 없나? 이런 곳의 용병으로 굴러다니는 것보단 훨씬 많은 돈을 벌수 있을 텐데? ” “ 거듭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어떤 이유로도 단에서 탈퇴할 생각은 없습니다. ” 단호한 대답에 그는 의외로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물러나는 듯 했다. 끈덕지게 추근거리던 것에 비해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것 같아 의아한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다른 사냥감을 찾듯 휘이-일행을 흩어보던 영주아들의 시선은 이번엔 후드로 온통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이사나에게 고정되었다. 그 순간 그의 입가에 드러난 미소는 트로웰 때처럼 흥미본위가 아닌, 무언가 약점을 잡았다는 듯한 희열을 담고 있었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그가 걱정되어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영주아들은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 황법으로 규정된 사항을 알고 있다니, 그대는 꽤나 공부를 많이 한 듯 하군. 혹 학자인가? ” “ …아닙니다. 아직 임시용병에 불과할 뿐입니다. ” “ 호오, 그래? 그런데 그 후드가 참 답답하군. 얼굴을 보여봐라. ” ‘ 헉… ’ 순간 심장이 멈추는 기분이었지만, 이사나는 요령 있게 위기를 넘길 변명을 만들었다. 얼굴에 심한 흉터가 있어 타인에게 보이기가 꺼려진다고 대답한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꽤나 심미안이었는지, 못생겼다는 얼굴을 일부러 들여다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 감히 내 명령을 어기다니! 보자보자 했더니 평민 주제에 너무 기어오르는 구나! 귀족을 모욕한 명분은 이것으로 차고 넘친다! 이들을 저택의 지하 감옥으로 인계하라! ” …라는, 말도 안돼는 어거지가 전개 되어 버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일부러 시비건 것이 명백한 태도였지만, 귀족인 그에게 대항할 수단이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감옥에 끌려갈 것 같아 당황한 내가 나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찰나, 그것을 먼저 눈치 챈 트로웰이 얼른 끼어들어 소리쳤다. “ 잠깐만요! ” “ 응? 무슨…? ” ===================================================== ...이런대서 끊어서 죄송합니다....-_-;;; 쿨럭.. P.S 1- 날씨맑음님! 당신은 아직 순수한 빛의 자녀이십니다!!!-_-b[척!] 그대로 쭈욱~ 유지하세요^^ P.S 2- 엘뤼엔의 나이가 25살인건, 그러니까 그가 소멸한 이후 15년 동안은 그가 만들어 두었던 물의 정령들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15년 이후 물의 정령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자 10년 재앙이 일어났죠. 현재의 엘퀴네스는 그 10년 재앙이 끝난 상황, 즉 25년 후에 태어난 셈입니다^^ (유조아에 올리는 엘퀴네스에는 설명이 첨가 되었다는..) P.S 3 -다들 새로운 일행을 궁금해 하시는 군요. 우후훗~♥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 순간, 그를 바라보는 영주아들의 두 눈이 반짝 빛이 나는 것을 본 나는, 이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깨닫고는 안색을 새하얗게 굳히고 말았다. 녀석은 일부러 일행을 자극해서 트로웰이 당황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새침 뚝, 모르는 척 되묻는 모습에 생전 느껴보지 않았던 살의가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트로웰 역시 그 시선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용케 내색하지 않으며 침착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실례합니다만, 얼굴에 상처가 많아 타인에게 보이길 꺼려하는 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해 주시지 않는 겁니까? 건방지다고 해도 할말은 없습니다만, 지금의 처사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 “ 호오, 억울하다는 건가? ” “ …적어도 지하 감옥으로 끌려갈 정도의 큰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기는 힘듭니다만. ” 한 치의 물러섬이 없는 대답에 영주아들은 뭐가 그리 마음에 드는지 히죽거리기 시작했다. 경계하는 일행들을 쭈욱 흩어본 그는 오만한 표정으로 거들먹거리며 대답했다. “ 귀족의 말이 곧 법이다. 아무리 죄가 없다 해도 내가 있다고 하면 그만이야. 그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가 됨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뭐, 그대가 내 저택의 호위로 들어와 준다면 너그럽게 보아 넘겨줄 용의는 있다만은…. ” ‘비열한 자식!’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킨 나는 눈이 아플 정도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트로웰의 ‘나서지 마’라는 시선만 아니었다면, 주먹이라도 한대 내질러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를 향해 탐욕스러운 표정을 가득 드러낸 영주의 아들은, 그것도 모자라 처음 이릴과 쉐리에게 뻗쳤던 마수까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 후후훗, 걱정 말아. 당장 지하 감옥으로 가게 된다 해도 아가씨들은 융숭히 대접을 해 줄 테니 말이야. 물론 침실에서의 서비스를 기대해야겠지만. ” “ …이 빌어먹을 자식! ” “ 헤롤! ” 더 이상 참지 못한 헤롤이 악에 받쳐 소리치자 옆에 있던 마이티가 기겁을 하고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귀족인 그를 자극해봤자, 상황만 더욱 나빠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하지만 이미 분노에 눈이 뒤집힌 그의 머릿속엔 눈앞의 남자가 영주의 아들이라는 것 따위는 고려할 가치도 없어진 듯 했다. “ 이걸 그냥 참으란 말이야! 제기랄, 목숨 걸고 몬스터 죽여줬더니 치하한다는 핑계를 내새워 남의 여자를 가로챌 궁리나 해? 썩어빠진 인간 같으니-! ” “ 그만해, 헤롤! ” “ 귀족 따위가 별거야? 이 나라가 망해가는 이유가 뭐고, 선황폐하가 돌아가신 이유가 뭔데! 다 저놈의 같지도 않은 귀족들이 무지한 백성을 충동질해서 일이 이렇게 돌아간 거 아니야! 이거 놔! 내가 오늘 저 자식 아주 회를 뜨고 말테다! ” 흥분하는 그의 말에 휴센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고, 다른 일행들은 만사를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전엔 정당성이라도 유지했던 것이, 그의 말로 인해 완벽히 귀족 모욕이 성립되어 버린 것이다. 분노한 영주의 아들은 기사들을 명령하여 당장 우리들을 포박하도록 명령했다. “ 이 미천한 것들이 감히! 보자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군!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이 것들을 묶지 못해? 당장 지하 감옥으로 연계해라! ” 그러자 그의 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일행들을 억압하곤 억지로 무릎 꿇린 뒤 준비된 밧줄로 포박하기 시작했다. 잡히는 과정에서 소란이 일어나게 되면 가중되는 죄의 무게가 몇 배나 커지게 되므로 모두들 어쩔 수 없이 순순히 잡혀주는 기색이었다. 나 역시도 그들과 다를 바 없었기에 지푸라기로 짠 굵은 밧줄에 뒤로 돌려진 손목을 결박당하기 시작했다. 도망치기 못하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일행의 실력을 고려한건지 몰라도 한 치의 배려도 없이 꽉 묶는 통에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아얏- 헉…! ” 크게 뒤틀려지는 어깨의 느낌에 약간 몸을 움직인 것이 화근이었다. 얼굴에 걸친 듯이 쓰고 있던 후드가 그대로 스스륵 흘러내렸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뜨이는 푸른 색 머리카락이 고스란히 햇빛에 노출되자, 영주의 아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쳇-하고 짧게 혀를 차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호오, 특이한 머리색이군. 이렇게 선명한 푸른색은 또 처음인 걸? 고개를 들어봐라. ” 미쳤냐, 내가 고개를 들게? 평소에도 자주 사람들에게 여자로 오해받는 얼굴이다. 저 녀석이라고 그다지 다를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그야말로 낭패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꼼짝도 하지 않고 땅만 바라보고 있자, 영주아들은 서슴없이 다가와 휙-하고 거친 손길로 내 턱을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뒤쪽으로 손이 묶인 상태라 반항도 제대로 할 도리가 없던 나는, 별 수 없이 귀족아들놈의 크게 뜨여진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하고 말았다. 흡, 하고 숨을 잠시 멈추던 녀석은 트로웰을 보았을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내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 이거…정말 대단하군. 그대도 이 용병단의 일행인가? ” 보면 모르겠냐?…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이상하게 입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난생 처음으로 마주한, 형용할 수 없는 소유욕과 욕정으로 얽힌 눈을 바라보는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아 그대로 굳어버렸던 것이다. 솔직히 소유욕이라고 하면 라피스 자식 역시 만만치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런 식으로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마치 온몸에 뱀이 기어 다니는 것 같은 미끌거리는 눈빛에,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설을 가라앉히는 것만도 곤욕이었다. 그것을 겁먹은 것이라고 오해했는지 녀석은 더욱 마음에 든 다는 듯 헤죽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 도도한 것도 좋지만, 순결한 처녀를 더럽히는 재미도 꽤 쏠쏠하지. 그대도 남자를 알게 되면 안아 달라 매달리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될 걸? ” “ …!… ” 역시 이 자식은 변태였어! 밀려드는 수치심과 분노는 그렇다 치더라도, 점점 턱을 따라 얼굴을 더듬는 손길 때문에 이성이 끊기려는 순간이었다. 소름끼치도록 낮으면서도 고요한, 그러면서도 잔잔한 분노를 머금은 목소리가 영주아들을 향해 똑바로 울려 퍼졌다. “ 거기까지. 더 이상 그를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 “ 으응? ” 어리둥절해진 녀석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그럴 필요가 없는 상태였다. 어느새 결박을 푼 트로웰이 주변의 기사들이 눈치 챌 틈도 없이 다가와 영주아들의 목덜미에 단검을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뒤 늦게 서야 그것을 깨달은 녀석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 …헉! 이, 이게 무슨 짓이야! ” 웅성웅성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기사들은 물론이고 몰려있던 동네 사람들까지 전부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손아래서 빛나고 있는 단검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 탓에 누구도 섣불리 접근하지는 못했다. 안절부절 하는 기사들에게 눈빛으로 ‘다가오면 이 녀석 죽는다’라고 쏘아붙인 트로웰은, 지금까지 한번도 지은 적 없던 피식-하는 비웃음을 흘리고는 영주아들을 향해 나직이 쏘아붙였다. “ 경고를 늦게 해서 미안하군요. 당신은 실수 한거야. 그를 건드림으로서 내가 이성을 잃게 만들어버렸으니까. ” “ 무, 무엄한! 내 너를 어여삐 여기려 했거늘, 감히 평민주제에 귀족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절대 무사치 못할 것이다! 너는 물론이고, 네 일행인 용병들도 모조리 참수시킬 테다! ” 그의 협박에도 트로웰은 코웃음도 치지 않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러자 긴장한 표정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이 통쾌하다는 듯이 환호하며 소리쳤다. “ 역쉬, 매튜! 그렇게 나와야지! 아주 잘 하고 있어, 기특한 짜식! ” “ 저 자식 그냥 멱을 따버려. 귀족을 죽인 죄로 평생을 쫓겨 다니는 한이 있어도, 우선은 저놈 빌빌대는 꼴을 봐야겠다! ” “ 마지막 숨 쯤은 남겨 놔! 나도 분풀이 하고 싶으니까 말이야. 자~ 그럼 우리도 처리해보실까? ” 그 말을 마지막으로 결박되어 있던 밧줄을 아무렇지 않게 후두둑 후두둑 끊어버린 일행들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며 그들 주변을 둘러싼 기사들을 똑바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헤롤은 오늘 아침 되찾아온, 그의 도끼를 한번 탁탁 바닥에 굴려보고는 신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 한 놈, 두 놈, 세 놈… 뭐야, 겨우 10명? 이 정도면 나 혼자도 가뿐 하겠는데? 어떻게 할래, 너희들? 구경이나 할래? ” “ 흐음, 마음대로 해. 마음껏 날뛰어 보는 것도 좋겠지. 학살방법이 워낙 잔인해서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 것도 오랜만이잖아, 너? ” “ 무, 무슨 짓을! ” 그제 서야 사태가 돌아가는 것이 심각하다는 것을 파악한 기사들이 질린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누구도 귀담아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헤롤은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듯 그들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처음 기사단의 단장이라고 소개했던 중년 남자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이, 이번일이 알려지면 너희는 물론이고, 너희에게 호위를 요청한 의뢰 주 측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용병은 신용이 가장 중요할 텐데? ” “ …!… ” 과연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는지 헤롤은 다가가던 것을 멈추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화가 나서 현재 동행중인 상단 측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던 것이다. 쳇-하고 혀를 차는 그의 모습에서 용기를 얻었는지 영주아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 그, 그래! 아버님이 절대 고이 넘기지 않으실 것이다! 너희들의 용병생활은 물론이고, 의뢰주인 상단도 무사치 못할 거다! 너희들 우리 아버지가 어떤 분인 줄 알아? 섭정왕 유카르테 대공이 가장 아끼는 수하 열사람 안에 들어가신 단 말이다! ” 그의 말에 단검을 대고 있던 트로웰의 얼굴도 약간 굳어졌다. 일을 벌인 건 후회하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미친 파장이 너무 커서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당장 유희를 끝마칠 생각이 없는 그에게는 현재 영주아들이 지껄이는 말이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였다. 일행이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자 기사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반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아직 그들의 도련님이 인질(?)로 잡힌 상태이긴 해도, 타인의 입장을 의식하기 시작한 샴페인 용병단들이 함부로 굴지는 못할 거란 자신감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들어맞는 것이라, 일행들은 처참히 구겨진 얼굴이 되면서도 둘러싸는 기사들의 포위진열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오만함을 되찾은 기사단장은 뽑아든 칼을 트로웰에게 들이대며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 도련님을 놓아드려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이 너를 칠 것이다! 순순히 잡혀 간다면 도련님께서도 지금의 네 무례를 크게 탓하지 않을 게다. ” 이미 승기는 자신 앞으로 돌아왔다는 듯 승승장구하는 표정의 기사들이었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싸늘하게 미소를 띄운 트로웰이 영주아들의 목에 대고 있던 검을 더욱 깊이 박아 넣었던 것이다. 녀석의 피부를 뚫고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자 자신만만하게 다가서던 사람들은 그대로 움찔 몸을 굳히고 말았다. “ 무, 무슨! 감히 도련님의 몸에 상처를 내다니, 처벌이 두렵지 않은 거냐! ” “ ……. ” 점점 불리해지는 상황이었지만 트로웰이나 다른 일행들이나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대로 죽으면 죽으라지, 뭐.’ …라는 느낌이랄까? 그 흉흉한 분위기가 깨어진 것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 호오, 이건 또 무슨 구경거리라지? 이 동네는 정말 볼게 많단 말씀이야? 명색이 기사라는 놈들이 멀쩡한 용병들에게 시비를 걸다니, 이건 돈 주고도 못 본다고! 필립, 어서 영상석을 준비하게! ” “ 헉, 세리엄님! ” 그것은 흰 수염을 발끝까지 길게 늘어뜨린 나이 지긋한 노인 한명과, 검은색 고수머리를 가진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간단한 여행복 차림의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타 지역 사람임이 눈에 뜨이는 복장이었는데,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유쾌한 말투에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던 나는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도시에 처음 도착하던 날 이사나와 함께 들린 식당에서 보았던, 온통 흥분하며 대화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리둥절해 하는 기사들이나 일행들은 완전히 무시한 채 저들끼리 심각하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 제발 낄 때 안 낄 때를 가리시란 말입니다! 타국의 귀족들이 행하는 일에 참견하시다니, 그러다 크게 경을 치시면 어쩌려고 이러세요! ” “ 행하는 꼴들이 같잖아서 이러는 거 아닌가! 이래봬도 정의의 세리엄이란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네! ” “ 사람들을 협박해서 그렇게 부르게 해놓고서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면 천벌 받으십니다요! ” “ 아니, 지금 자네 내게 도전하는 겐가? ” “ 누, 누가 그렇다고 했습니까? 아무튼 이런 식의 전개는 위험하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조용히 다녀도 모자를 판에 어째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시는 겝니까? ” 여전히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두 사람이었다. 멍한 표정으로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기사단장은 한참만에야 퍼뜩 정신을 차리는 듯 하더니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큰 목소리로 일갈했다. “ 상관없는 것들은 꺼져라! 네놈들까지 처단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원, 재수가 없으려니 어디서 굴러먹다 온지도 모를 빌어먹을 늙은 것들이… ” 그리고 그것은, 열심히 세리엄이란 노인을 말리고 있던 필립이란 남자가 그대로 분노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스윽-하고 기사들을 돌아본 그는 그의 옆에 있던 노인이 흥분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가 되어 외치기 시작했다. “ 뭐가 어쩌고 어째? 늙은 것들?? 이놈의 썩을 나라는 위아래도 없단 말인가! 세리엄님, 그냥 저것들 다 쓸어버리시죠? 보자보자 하니까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 “ 호오, 그래도 되는 겐가? 나는 그렇다 쳐도 자네는 문책을 면하기 어려울 텐데? ” “ 그래봤자 반성문 천장입니다! 내 오늘 이 땅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저 놈들의 끝을 봐야겠습니다! ” 그나마 이성을 갖추고 있던 그 까지 흥분해 버리자 세리엄이란 노인은 히죽거리며 장단을 맞춰주기 시작했다. 그는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기사들에게 겨누더니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 지금이라도 반성하고 사죄한다면 봐줄 생각이 있다! 용병들은 내버려두고 조용히 돌아가라. ” 그러나 어딜 봐도 평범한 노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며 겁을 낼 사람들이 있을 리가 없었다. 기사들은 기도 안 차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 별 미친것들이 울화를 돋구는 군, 젠장. ” “ 저 들부터 먼저 포박할 까요? ” “ 포박할 필요까지 있나? 미친 것들에겐 매가 약이다. 간단하게 몇 번 두들겨 주고 성문 밖으로 쫓아 버려. ” 그렇게 대꾸한 기사단장은 다시 영주아들에게 칼을 대고 있는 트로웰에게 몸을 돌리려고 했다. 일단 인질로 잡힌 거나 마찬가지인 그들의 도련님부터 구하는 것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 분노한 노인이 그대로 지팡이를 치켜 올리며 큰 소리로 마법주문을 시전 했던 것이다. “ 이익, 저런 버르장머리를 보았나! <눈앞의 적을 섬멸하소서! *파이어 스톰!* > ” “ 헉, 마…마법?! ” 생각지도 못했던 능력은, 막 그들을 위협하기 위해 다가서는 기사들을 당황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이었다. 노인의 손에서 순식간에 생성된 불의 폭풍은 미처 아차 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날아가 10명 가까이 되는 기사들을 차례로 꿰뚫어 버렸다. 슈우욱- 콰아앙! 커다란 폭염과 연기가 터지기 시작하자 단장은 물론이고, 트로웰에게 잡혀있던 영주아들의 얼굴역시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 이, 이게 무슨 짓이오! ” 눈 깜짝할 사이에 대부분의 기사들이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쓰러지자, 영주아들은 옴쌀달싹도 못한 자세에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세계에서 마법을 할 줄 아는 이는 귀족이란 소리와 다름이 없었다. 정령사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국가에서 존귀한 대접을 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게다가 방금 전에 시전한 마법이 꽤 대단한 마법이었는지, 무리는 어느새 노인에 대한 경계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 .........알아요, 저도 안다구요.. 문체도 점점 이상해지고 내용도 점점 재미 없어진다는거 저도 다 안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으흑흑.. 더위에 맛이가서 그렇지 않아도 힘들단 말이예요;;ㅠ_ㅠ P.S - 이놈의 변태 귀족은 왜 등장 시켰단 말인가! 너 때문에 스토리가 꼬이잖아!!(버럭)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 어째서 마법사인 그대가 귀족을 위협하는 거요! 지금 상황을 봐도 알 수 있을 텐데? 불리한건 이쪽이지 이 용병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 흥분한 영주의 아들은 목에 들이밀어진 칼에 계속 상처가 나는 것도 무시한 채 거친 동작으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표정을 지으며 태연하게 귀를 후벼 보았을 뿐이었다. “ 노인도 공경할 줄 모르는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에게 훈계를 해 준 것뿐이다. ” “ 이익, 먼저 참견 해 온건 그쪽이 아니오! 다른 귀족이 하는 일에 끼어들다니, 마법사라 해서 무사히 넘어갈 거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닐 테지! 대체 당신들은 누구요! ” 지지않고 되받아 치는 말에 노인은 짧게 혀를 차보였고, 필립이란 이름의 남자는 약간 몸을 움찔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이 제국의 귀족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행 중인 귀족이 타 제국 귀족의 일에 참견하면 국가간의 분쟁으로 번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애꿎은 일에 휘말린 것 같아 걱정이 되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노인은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듯한 당당한 태도였다. 또 다른 낯선 인물이 끼어들어 단정한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카터스 제국 황실의 수석 마법사이신 세리엄 폰 알지오님이시군요. 이곳 할버크를 방문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설마 이런 상황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 “ …응? ” “ 리오! ” 그는 금발머리를 어깨까지 늘어트린, 보라색 눈동자의 단정한 얼굴을 가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20살 쯤 되었을까? 영주아들과 마찬가지로 10명 남짓의 기사들을 이끌고 걸어오고 있었는데, 바닥을 뒹구는 부상자들과 영주아들이 처한 상황을 보더니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서 내뱉는 말에 일행은 물론이며 주변에 있던 사람들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 그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형님? ” “ …!! ” 혀, 형님? 설마 저 사람이 영주아들의 동생이라는 건가? 그의 정체는 뻣뻣하게 서있던 기사단장이 얼른 부복하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에서 온전히 확인할 수 있었다. “ 리글레오 도련님께 인사 올립니다. 이곳까진 어쩐 일로… ” “ 크렌트 경, 그것은 내 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군.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어째서 형님이 저런 상황에 처해있으며, 기사단장인 그대는 손을 놓고 있는 것이지? ” “ 소, 손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오라…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었던 탓에 그만… ” “ 변명은 듣지 않겠소.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책임은 차후 돌아가서 묻겠습니다. 어찌된 일인 진 모르겠으나, 소년이여? 우선은 형님을 놓아주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황에 대해서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 그러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순순히 잡고 있던 남자의 목을 놓아주었다. 목숨을 보전했다 싶자, 그는 씩씩거리는 표정으로 얼른 자신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 이게 무슨 짓이냐, 리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 때문에 살아난 것과 다름이 없으면서도 그는 오히려 동생을 힐책하는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조금은 억울한 감정이 생길만도 하련만, 리오란 이름의 청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우선은 형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긴박하니 저라도 나서서 중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 흥, 저 자가 타 제국 황실의 수석마법사인지 뭔지 라서 그런 것이냐? 감히 다른 제국 귀족이 하는 일에 참견하려 들다니! 당장 아버지께 고해 그 책임을 물게 할 것이다! ” 그의 말에 노인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어보였고, 그의 옆에 있던 필립이란 남자는 불쾌한 듯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모습에 동생 쪽 남자가 당황하여 얼른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죄송합니다. 형님은 현재 극심한 스트레스에 의해 제대로 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상태가 아니십니다. 대신 사죄드릴 테니 저를 보아 너그럽게 넘어가 주십시오. ” “ 뭐, 뭣이? 리오, 네 녀석이 감히 무슨 소리를? ” “ …흐응,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인간이 한명이라도 있으니 다행이구만. 내 아까부터 쭈욱 지켜봤지만, 이번일은 일방적인 자네 형 되는 사람 쪽의 잘못이었네. 이들을 풀어주고 차후 이번일로 피해가 돌아가지만 않게 한다면 용서해 주지. ” 노인의 제안에 리오란 남자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러마’라고 대답했다. 그의 형이란 녀석이 입에 거품을 물고 항의하려 했지만, 기사들을 시켜 간단히 제압시켜버린 뒤였다. 두말 할 필요도 없는 깔끔한 마무리에 일행들이 멍해져 있는 사이, 그는 우리 쪽을 바라보며 진심어린 사죄의 말을 건네었다. “ 불쾌한 경험을 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번일로 그대들에게 다른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약조하겠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형님을 대신하여 이번 남문에 출몰한 몬스터를 퇴치해주셔서 무척 고맙다는 인사도 드리고 싶군요. 덕분에 사람들이 한결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한다면 수고비를 지급하고 싶습니다만…. ” “ 아, 개인적인 의뢰를 받고 처리한 일이니 그렇게 까지 신경써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로서는 현재의 상황에서 무사히 벗어나게 된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니까요. ” “ 이익! 리오 이 녀석! 감히 네가 나를 엿 먹이고 이 따위로 놀아? 머리에 하나 든 것 없는 멍청한 놈의 자식이라,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오냐오냐 봐주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에잇- 이것들 놓지 못해?! 당장 저 용병들부터 사로잡으란 말이다! ”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고 발악을 하는 남자였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혀를 끌끌 차던 세리엄이란 노인이 서슴없이 다가가 딱-하고 지팡이로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제대로 된 반항 하나 하지 못한 상태에서 당한 불시의 기습이라, 그는 미처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대로 추욱 늘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한 동생은 생긋 웃으며 다시 한번 노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보였다. “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께서도 정신을 차리시면 마음을 가다듬으실 겁니다. ” “ 호오, 자네는 내가 하는 행동이 불쾌하지는 않은 겐가? 자네의 부하들을 다치게 한 것도 모자라, 형까지 기절시켰는데 말일세. ” “ …후후, 세리엄님의 행동에 불쾌한 감정을 입을 리가 없지요. 카터스 제국은 마법사의 제국. 그 중 황실 수석마법사이신 당신은 언제 어느 때나 황제폐하와 독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타 제국이라 하나, 고작 지방 영주의 아들을 훈계한 사건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지는 않을 테지요. 이 자리에서 바로 처단하셨다고 해도 무어라 항의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단정한 대답을 들은 노인은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그렸다. 막무가내인 형에 비해 훌륭할 정도로 처세가 똑바른 동생이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그 후 노인이 그에게 건넨 말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뜻을 담고 있었다. “ 자네는 모시는 주인에 따라 검이 되기도 하고, 방패가 되기도 하겠구만. 부디 이 나라를 제대로 이끌 주군을 선택하길 바라네. ” “ …명심하겠습니다. ” 그 순간 이사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낀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녀석의 시선은 아까부터 리오란 남자에게 머물러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원하던 인재를 발굴했을 때의 집요한 눈빛이랄까? 아마도 그와는 조만간에 다시 조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 몇 번이나 거듭 일행들에게 사죄의 뜻을 밝힌 리오란 이름의 남자는, 데리고 온 기사들을 시켜 부상자들과 기절한 변태귀족을 저택으로 옮길 것을 명령했다. 그러면서 차후로 이번 일 때문에 피해가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다시 한번 약조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변태 귀족 입장에서 보자면, 오만하게 등장했던 것에 비해 그야말로 너무도 비참한 후퇴를 맞이했던 셈이다. 그것을 마냥 기분 좋게 바라보던 일행들은 뒤 늦게 서야 우리를 위기해서 구해준 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노인을 바라보며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 정말 감사합니다, 어르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 “ 허허허. 별 것 아니었네. 나야말로 그대들이 남문의 몬스터를 퇴치해 주는 바람에 따로 호위용병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 한결 가뿐해졌는걸. 정말 크게 경을 칠 뻔 했군. 세상엔 별 이상한 놈들이 많단 말일세. ” “ 정말 그렇군요. 어르신께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저희들은 꼼짝없이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을 겁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휴센의 인사에 세리엄이라 불린 노인은 만족스럽게 웃어보였다. 그런 그의 옆에서는 필립이란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세리엄님은 잘 하신 거 하나도 없습니다. 이건 국제적인 망신이라고요. 원, 이번 일이 다른 나라에 소문이나 날까 두렵습니다요! ” “ 어허, 무슨 소리인가! 이 사람들이 내 덕에 살았다지 않은가! ” “ 어련하시겠습니까? 물론 선량한 사람들이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다행입니다만, 꼭 그렇게 극단적으로 손속을 쓰지 않으셔도 되었잖아요? 정말이지 태자전하가 세리엄님을 닮아 난폭해 질까 걱정입니다요! ” “ 무엇이? 자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앙? ” 또 다시 버릇처럼 투닥이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 모습을 불편해 하는 사람은 일행 중 아무도 없었다. 잠시 웃으며 그들의 하는 양을 지켜보던 나는 퍼뜩 트로웰을 떠올리고는 얼른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마침 단검에 묻어있던 변태 귀족의 피를 오만인상 찡그리며 닦아내고 있었던 그는, 내가 오는 것을 보더니 굳은 얼굴을 펴고 평소처럼 생글 미소지어보였다. “ 미안, 매튜. 괜찮아? 나 때문에 어려운 일만 하게 되고…정말 미안해. ” “ 무슨 소리야? 나야말로 제대로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한걸. 이런 입장만 아니었어도 바로 목을 그어버렸을 거야.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심한 살의를 느껴본 것도 꽤나 오랜만이니까 말이야. 그 녀석 시선 정말 불쾌했지? 엘이야 말로 괜찮은 거야? ” “ 하하, 뭐… 좀 적응이 안 되긴 하더라. 하지만 뭐 나만 당했나? 이릴이나 쉐리, 매튜 너도 똑같이 심한 취급 받았는걸. 그런 주제에 혼자서 엄살 떨 수는 없지. ” 씩씩하게 웃으면서 대답하는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이사나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망설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녀석은 묘한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미안해, 내가 그때 나서지만 않았어도… ” “ 응? 무슨… 아아, 그 무릎 꿇는 거 말이야? 아니야, 라이. 네가 틀린 게 아닌 걸? 솔직히 똑바로 반박하는 모습 보고 아주 통쾌했다고. ” “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것 때문에 더욱 눈에 뜨여버린 거잖아…결국 또 나 때문에 붙잡힐 계기를 만들기도 했고…. ” “ 그건 그 변태자식이 너를 이용한 것뿐이야. 죄책감 같은 거 받을 이유가 못된다고. 라이, 너도 분했을 거 아니야? ” 별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꽉 악문 입술을 봐도 그가 얼마나 분노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행들을 위험한 상황에 몰고 간 것에 일조하게 된 데다, 그것에 대해 당당히 항의할 입장이 되지 못하는 현재의 처지가 너무나 비참했을 지도 모른다. 고개를 숙인 채 한참이나 감정을 추스르던 녀석은 잠시 후 약간의 물기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 나…그때 정령들을 불러내야 했을까? 가만히 넋 놓고 있을 게 아니라, 그들을 혼쭐내줬어야 했는지도 몰라. ” 그러나 그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라 트로웰이었다. 단정한 빛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사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 그럼 너는 그때 왜 가만히 있었던 거지? 얼마든지 기회는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얌전히 있었다는 건 뭔가 생각해 둔 것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 “ 아…나는 그저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내 정체가 들키면 일행들에게 더욱 피해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 ” “ 그럼 그것으로 된 거야. 네 생각처럼 샴페인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해주는 성격도 아니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이후로도 네가 옳다고 생각한 일을 후회하지는 말아. 넌 조금 더 네 자신의 행동에 자신을 가질 필요가 있어. 내가 전에도 말했지? 여행의 주체는 너다. 네가 바로서지 않으면 누구도 도와주지 못해. 곤란하다고. ” “ ……. ” 그리 자상하다고 볼 수 없는 딱딱한 말투였지만, 담겨진 말에는 이사나를 향한 격려가 담겨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평소처럼 위축되기 보다는 환한 표정이 되어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알 수 없는 한 마디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 이대로라면 그 아이에게도 짐이 될 뿐이니까…. ” “ 응? 방금 뭐라고 했어, 트로웰? ”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엘. 그냥 혼잣말이었어. ” 흐음, 어째 뭔가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내 착각이었나? 평소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생글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의심하는 것 자체도 한심스러운 기분이었기에 나는 굳이 캐물으려 하지 않았다. 그 뒤 행렬의 출발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은 우리는 세리엄 일행과 헤어져, 처음 출발 장소로 잡아두었던 남문 앞으로 서둘러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미리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용병단의 사람들이 그런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들 중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칵테일 용병단의 일원인 코웰이었다. “ 여어~ 늦었네? 무슨 일 있었어? 당신들이 온 방향에 아까부터 사람들이 계속 몰려가는 것 같던데. ” “ 아아, 잠시 복잡한 사건에 좀….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다들 모인 겁니까? ” “ 가장 중요한 상단일행이 늦고 있어.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샴페인 용병단이 케르베로스 두 마리를 잡았다며? 우리 단장이 자기도 끼워주지 그랬냐고 아주 난리라고. ” “ 코, 코웰! ” 붉어진 얼굴로 기겁이 되어 말리는 피트였지만 이미 뱉어진 말을 다시 주워 삼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식거리며 웃은 코웰은 민망해 하는 피트를 가리키며 놀리듯 말을 이었다. “ 늙은 것이 주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만, 좀 이해해줘. 원래 상급 몬스터라고 하면 용병들의 꿈이잖아? 꼴에 은패랍시고 희망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야. ” “ 코웰!! ” “ 쿡쿡. 미안합니다, 피트씨. 사실 당신에 대해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습니다만, 상단에서 제시한 조건도 있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에 함부로 도움을 요청하기도 죄송스럽더군요. 이해해 주십시오. ” “ 아, 아닙니다! 저는 전혀 그런 생각이…코, 코웰이 제멋대로 오해한겁니다. ”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그였지만 잔뜩 붉어진 얼굴에 담긴 일말의 아쉬움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확실히 코웰의 말마따나 상급 몬스터의 토벌을 꿈꾸고 있었긴 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에 일행들은 미안함 반, 웃음 반의 시선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조용히 키득거렸다. 잠시 후 상단사람들이 호위 물품을 실은 마차를 이끌고 나타나자, 흩어져 있던 용병들은 일제히 한 자리로 모여 들기 시작했다. 상인들이 탄 마차 안에는 카이씨도 함께 앉아있었는데, 그가 우리와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 용병들의 숫자를 대충 확인한 상단의 대표자가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모두 모인 것 같으니 이제 슬슬 출발하도록 하지요. ” 그는 케르베로스의 가죽을 얻은 날 이후부터 지나치게 얼굴근육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한마디로 하루 종일 생글생글 웃고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평소 삭막하기 그지없던 그의 인상이 요즘 들어 10살 박이 어린아이처럼 아주 해맑게 보일 지경이었다. 아마 머릿속을 들여다보면 케르베로스의 가죽을 경매에 팔아넘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 까 싶다. 돈이 저렇게 좋을까? ‘ 하긴…돈 싫어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냐 만은… ’ 누구나 십분 공감이 갈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는 서둘러 이사나와 함께 말 위에 올랐다. 이제 곧 있으면 클모어에 도착하게 된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분이 들뜨는 심정이었다. 뭐, 그렇다곤 해도 족히 15일은 더 가야하는 긴 여정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한 달 내에 반드시 찾아내겠다고 자신만만하게 호언장담하던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지금쯤 어느 엉뚱한 동네에 가서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지. 변태귀족을 만나고 난 이후여서일까? 그에 대한 호감이 훨씬 높아진 느낌이었다. =================================================== 마법사 할아버지는 새로운 일행이 아니었습니다! 음하하하~(퍽;) 에구구. 더위 먹었나 봐요. 자꾸 눈 앞이 멍해지는 군요.-_-;; 으흐흐.. 이런 넋나간 상태에서 쓰는 글도 재밌게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여러분 밖에 없어요;ㅁ;) 참, 분량 적어지고 있는거 아니예요;ㅁ; 무조건 한편마다 a4용지 5장을 채우고 있다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클모어에 가까워질수록 날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나무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기 시작하고,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도 한층 차가워 진 것이, 이제 완연히 겨울이라고 불러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일행들을 춥게 만드는 건 이런 날씨가 아니라… “ 이릴, 자기~ 춥지? 일루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 “ 아잉, 헤롤씨도 참… ” …따위의 두 마리(?)의 닭이 일으키는 닭살들이었던 것이다. 기온의 변화 외에는 춥다, 덥다를 느끼지 못하는 나조차 한기를 느끼고 부르르 떨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그러니 마이티와 휴센의 얼굴빛이 점점 창백해진다 해도 탓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일정에 지대한 차질을 빚고 있는 한 커플을 바라보았다. 투닥거리며 싸울 때는 언제고, 마음을 확인한 이후부터는 아주 찹쌀떡이 되어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이었다. 자기야~ 우리 애기~ 따위의 닭살 언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키스나 포옹 같은 과한 애정표시 같은 것도 서슴치 않는 것이다. 그것이 무수한 솔로들의 염장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라서 더욱 문제였다. “ 저어…헤롤, 이릴. 우리만이 아니라…다른 사람들도 보고 있는데 키스는 좀… ”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충고를 건네 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뭐가 어떻냐는 태도뿐이었다. “ 원래 연인끼린 수시로 애정을 확인해줘야 하는 거야, 엘! 너도 남자라면 알아둬라! ” “ 아하하…그, 그런가요? ” “ 제기랄, 그렇긴 뭐가 그래? 엘! 저런 놈 말 따위에 홀릴 것 없어! 이 배신자! 너 혼자 평생 잘 먹고 잘 살아봐라!! ” 결국 질투에 눈이 돌아버린 마이티의 절규가 이어졌다. 그 옆에서 휴센은 적극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말이다. 그러나 어디 헤롤이 그런 말에 눈이나 하나 깜짝할 인간이던가? 그는 오히려 약 올리듯 히죽 웃으며 이릴의 허리를 더욱 힘차게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 왜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냐? 이릴이랑 같이 잘 살 거다~ 니들이야 말로 솔로들끼리 잘 해보셔~ 음하하! ” “ 이익~ 빌어먹을 자식! ” “ 저 자식 그냥 죽여! ” “ 표창하나 던질 깝쇼? ” 때는 점심시간. 식사를 위해 행렬을 멈추고 있던 용병들은 모두 살벌한 시선으로 헤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어진 이릴의 말에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고 말았으니… “ 어쭈? 눈들 안 깔아? 지금 누구를 노려보는 거야? 앙? 채찍에 맞아 다 죽어볼텨? ” “ 아이~ 자기 멋쟁이~~ ” “ 오호호호~ 당근이지, 자기~ 앞으로 괴롭히는 것들 있으면 말만해. 내가 다 쓸어버릴 테니까. ” “ 응, 응! 자기만 믿을게~~ ” “ ……. ” 신이시여…저것이 진정 한달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인간들이 맞단 말씀입니까? 새삼 연애란 것이 사람을 어디까지 망쳐놓나 확인하는 사례라고 되새기며 나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로서는 점점 닭털을 날리는 헤롤과 이릴도, 그것을 부럽게만 바라보는 쉐리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현상이었다. 이건 설마 지난시간동안 연애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 젠장, 이래봬도 한때는 커플 훼방 놓기 위원회 회장이었던 내가! ” “ 응? 무슨 소리야, 엘? ” “ 아…아무것도 아니야, 매튜. ”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에 괜시리 민망해져서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나이 4000살.(정확하게는 4230살) 지금까지의 유희에서 단 한번도 연애를 경험하지 않았을 리는 없을 테지. 설마 트로웰도 저렇게 닭살커플이었을까? 척 봐도 침착, 냉정, 온유하게만 보이는 그가 헤롤처럼 주책스럽게 자기야~라고 하는 모습을 떠올리려니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쩐지 이미지가 산산이 망가지는 것이… “ 미안, 매튜…. ” 차마 사과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두려워졌던 것이다. 앞뒤 설명을 죄다 빼놓은 사과에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해했다는 듯이 피식 웃어보였다. “ 뭐, 연애 경험이 아주 없다곤 못하지만…그래도 저 정도는 아니었어. ” “ 쿨럭. 역시 그렇겠지? 아하하… ” “ 상대방 쪽에서 적극적으로 나와서 곤란한 적은 몇 번 있었지. 보다시피 외모가 이래서, 꼬마숙녀들과 애틋한 감정만으로 끝날 때가 대부분이었지만 말이야. ” “ 헤에… 그, 뭐랄까. 폴리모프인가 하는 마법으로 모습을 바꿀 수는 없는 거야? ”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묻자 그는 살짝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게 알고 보니 꽤나 고위급이 마법이라, 적어도 6서클이 되어야만 완벽한 변화를 시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의 제약 상 4서클밖에 부릴 수 없는 그로서는 평생을 가도 시도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었다. “ 가끔은 드래곤들에게 부탁해서 모습을 바꾸기도 해. 그게 아니라도 현재의 형체를 조금 바꾸는 정도는 정령의 힘으로도 가능하니까 말이야. 이게 본래의 모습일 뿐, 사람들에게 투영시키는 겉모습을 다르게 하는 건 가능한 편이거든. ” “ 헉,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어른의 모습으로 변할 수 있는 거야? ” “ 응. 왜? 보고 싶어? ” 당연히 보고 싶지! 초롱초롱한 눈동자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여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작은 목소리로 ‘키만 커지는 것 뿐’이라고 강조하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었다. “ 그러니까 너무 기대하면 곤란해. ” “ 하지만 신기한걸. 어라? 그럼 나도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거네? ” “ 그렇긴 하지만…바꿔도 별로 달라질게 없다니까? 머리색이나 눈동자색은 절대로 안 바뀌고, 단지 키나 몸체가 커졌다 작아졌다 할뿐이야. 인간처럼 늙는다는 개념이 없어서 나이가 더 들어보이게 하는 것도 힘들어. 그래서 드래곤의 힘을 빌리지 않는 한은 대부분 유희가 짧게 끝나는 편이지. ” “ 흐음, 그렇구나…. ” 그렇게 치면 드래곤은 정령왕들의 유희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인 셈인가? 마음껏 마나를 가져다 써도 별 탈 없고, 가끔은 모습을 바꾸는 서비스(?)도 받을 수 있고. 어떤 유희, 어떤 생활을 하든 지나친 참견이나 도움 같은 것도 요청하지 않고. ‘ 아, 물론 라피스 녀석의 경우는 마지막 사항이 제외지만. ’ 그 녀석은 남의 일에 참견하고 싶어 안달인 타입이니 말이다. 드래곤 중에서도 돌연변이라고 해야 돼나? 그러고 보면 난 참 특이한 경우의 사람들만 만나게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떡하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된 이사나나, 신(v)최초로 양자를 들인 엘뤼엔이나, 다른 존재의 유희에 어떻게든 끼어들고 싶어서 애쓰는 라피스나…. ‘ 하긴…이러는 나도 정상적이냐고 묻는다면 그다지 할말이 없다만. ’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일단 나부터가 제대로 된 정령왕이 아닌 주제에 다른 사람을 탓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그때까지도 일행들을 닭털 속으로 밀어 넣기를 주저하지 않는 이릴과 헤롤을 돌아보았다. 이미 휴센과 마이티는 참는 경지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들거리는 어깨가 거의 경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생각될 때쯤, 그제까지 꿋꿋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휴센이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 단원 간의 연애 따위 당장 금지 시켜 버릴테닷!! 두 사람 다 그만 떨어지지 못해! 애들도 보는 앞에서 무슨 추태들이야!! ” “ 어머머~ 단장은 괜히 부러우니까 심술이야. ” “ 킥킥킥, 냅둬, 이릴. 저게 바로 솔로의 슬픔이라는 거야. ” “ 뭐가 어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좀 반성을 해라, 이것들아! ” 새빨개진 얼굴로 소리를 지르는 휴센은, 저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만큼 같은 솔로된 입장으로서 바라보기에 절절한 안타까움을 유발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30대의 미래가 두려워지는 참에, 후배라고 있는 것이 옆구리에 애인을 끼고 히히덕거리고 있으니, 그것을 마음 좋게 받아줄 인간이 몇이나 되겠는가. 옆에서 열심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던 쉐리가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중얼거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 그러니까 순순히 내 마음을 받아주면 될 텐데. ” “ 뭐…뭐어? ” 당황하는 휴센의 표정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받아주지 않는 짝사랑이 오기로 번진 것인지, 어떻게 해서든 밀어붙이겠다는 태도가 강경한 모습이었다. “ 내가 틀린 말 했어? 이렇게 예쁜 여자가 언제 또 대쉬할 거라 생각하는 거야? 미안하지만~ 난 내가 못 먹는 건 남도 못 먹게 하자는 주의라서 말이야. 다른 여자랑 잘 되는 꼴은 절대 못 보니까 그렇게 알아. 휴센은 평~~생 홀아비로 늙어죽을 거라고. ” “ 쿨럭… ” 아주 뼛속 깊이 작심한 듯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쏘아붙이는 말에 휴센은 어색하게 마른 기침만을 뱉어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그가 다시 눈을 들었을 때, 휴센은 이제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마음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조짐이 좋은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당차기만 하던 쉐리의 얼굴에 작은 홍조가 피어오르자,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휴센은 한숨처럼 한마디 내뱉었다. “ 나 같은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그러는 거냐? 넌 아직 17밖에 안됐어. 얼마든지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아무리 취향이 특이하다곤 하지만… ” “ 휴센은 늙은이 아니야! 아직 28살밖에 안됐잖아? 그리고 휴센만큼 다정하고 멋진 남자도 없다고. ” “ 하아. 칭찬은 정말 고맙다만. 너 말이야. 혹시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 같은 감정과 착각 하는 건 아니냐? 아무래도 다시 생각을… ” “ 읏… 어린애 취급하지 마! 나도 이제 알거 다 아는 나이란 말이야!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연인을 바라보는 감정을 헷갈릴 리가 없잖아! ” 사실 어른의 입장에서 보면 17살은 아직도 한참이나 어린 꼬맹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어릴 때부터 거의 자식처럼 키우다시피 한 아이라면 더더욱. 휴센으로서는 아무리 호감이 있더라도, 그것이 연애 감정인지, 딸을 바라보는 부정 같은 심정인지 구분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때문에 쉐리에게도 다시 한번 숙고해 보라며 기회를 주는 것 같았는데, 그런 마음도 몰라주고 그녀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당차게 대답해 버리자, 그는 곧 난감한 표정이 되어 볼을 긁적거렸다. 하늘한번 보고 땅 한번 보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그의 시선은 마지막에 내 쪽을 향하더니 결심을 굳힌 듯 단호한 눈빛이 되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조용히 충고 한바 있던…30대가 되면 도둑놈 소리 듣는다는 게 어지간히 충격으로 자리 잡은 듯 했다. 이후에 벌어진 헤롤과 이릴의 애정행각이 그런 심정에 더더욱 불을 지폈고 말이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휴센은 희멀건 스튜그릇을 아무렇게나 스푼으로 휘젓고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 후회할 거다, 반드시. ” “ 안 해! 그런 거! ” “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다정한 인간도 아니고, 재밌는 사람도 아니야. ” “ 그런 건 지난 시간동안 같이 살아온 세월로 이미 다 파악했어. 날 뭘 로 보는 거야? ” “ ……난 헤롤 자식처럼 닭살 같은 거 죽어도 못 떤다. ” “ 처음부터 기대도 안…뭐, 뭐야? 지금 그 말? ” 그제 서야 휴센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깨달았는지, 쉐리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헤롤과 이릴, 마이티, 심지어 트로웰마저 황당한 얼굴로 그들의 단장을 돌아보았던 것이다. 나야 일찌감치 그의 감정과 고뇌하는 바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별달리 당황스러울 게 없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전혀 티낸바 없던 그가 냉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쑥스러웠는지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는 모습에 쉐리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집요하게 캐묻기 시작했다. “ 그렇게 대답하는 거…내 마음 받아준다는 뜻… 맞아? ” “ …크흠. ” “ 똑바로 대답해, 바보야! 사람 기대하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대답하란 말이야! 지금 한 말 나랑 사귀어 준다는 뜻 맞지? 그렇지? ” “ …저 두 녀석이 놀리지만 않는다면. ” “ 헉… ” 그렇게 말하며 휴센이 가리킨 손가락의 끝엔 어김없이 헤롤과 마이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뭔가 상당히 억울한 표정을 짓던 그들은, 쉐리가 도끼눈을 뜨고 바라보자 필사적인 태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애꿎은 남의 연애사에 끼어들어 장렬하게 희생당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그 때만큼 그녀의 인생에 찬란한 햇살이 비치는 순간도 다시없지 않을까 싶다. “ 이 바보야! ” “ 우왓- ” 감격한 쉐리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무시하고 그대로 휴센의 목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처음엔 당황하던 그도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그 동안 이래저래 겪었을 서러움에 들썩이는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 주는 것이었다. 그 태도가 얼마나 부드럽고 다정스러웠던지, 기가 막힌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행들은 모두 허탈한 미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뭔 일 이라냐… ” “ 크흑! 나의 쉐리가 결국 저 무뚝뚝한 인간에게! ” “ 허허허허… ” 때는 클모어를 불과 3일 앞으로 남겨둔 어느 초겨울의 한적한 오후. 헤롤과 이릴을 이은, 샴페인 용병단의 또 다른 공식 커플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클모어 후작령은 이사나의 사촌형인 카웰 드 콘첼 후작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로, 흔히 말하는 자유 무역도시-이른바 상인들의 천국이었다. 알폰프와 카터스 제국을 오가는, 항구를 이용한 모든 수출, 수입품목은 반드시 이곳을 거쳐서 거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두 제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지름길인 카리프해(??가 바로 이곳 클모어 영지를 끼고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역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클모어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항구는 모두 해적의 왕국이 존재하는 알지르만 섬을 경유해야 하기 때문에, 진즉에 그 기능이 폐쇄된 지 오래되었다고 들었다. 오갈 때마다 해적을 만나게 되지는 않는다 해도, 일단 한 번 걸리게 되면 감당할 손해가 만만치 않으니, 굳이 안전한 장소를 놔두고 일부러 이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군대를 보내 토벌을 한다면 할 수도 있는 문제였지만, 해적들의 해전병술이 워낙 뛰어난 데다, 전쟁이 발발할시 소모되는 국력 또한 만만치 않았기에, 딱히 어지러운 현 황실의 사정을 고려치 않더라도 제국에서도 어쩔 수 없이 손을 놓는 입장이라고 했다. 또 이제까지 그렇게 강경할 대응을 취할 정도로 해적들이 난동을 부린 적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클모어는 상인들의 입장이나, 제국의 입장에서나 눈에 불을 켜고 사수해야 하는 장소였던 것이다. 일단 솔트레테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무역 항로였으니, 각 나라에서 내놓으라 하는 큰 상단의 지부가 한 개씩 꼭 들어차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워낙에 오가는 타국인이 많아, 사사건건 영주민과 시비가 벌어질 것을 우려해, 자체적인 치안이 다른 곳에 비해 몇 배나 발달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후작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사병의 숫자만도 2만에 해당한다니 말이다. 만약 이사나가 황권을 되찾는데 그의 협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굳이 지역적인 이점을 따지고 들지 않더라도 대공과 해볼만한 세력을 충분히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클모어에 가까이 도달한 우리들은 바로 그 점 때문에 난감한 상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성문 앞 치안이 어찌나 철저하던지, 이제까지 거쳐 온 그 어느 검문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비들이 눈에 불을 켜고 사람들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사나를 찾으려는 대공의 기사들까지 합세한 탓이겠지만, 단지 용병패를 제시한다고 해서 쉽게 통과될 거란 기대를 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 헤에. 이거 장난 아닌데? 검문이 엄청 철저하네? ” “ 하아, 그러게요…. ” 빼곡히 늘어서있는 행렬 한사람 한사람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는 기사들을 보며,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해결할 방도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딱딱하게 어깨를 경직시키고 있는 상태였다. ================================================== 왜 자꾸 올리는 시간이 늦어지냐고 물으신다면....그것은 다 이놈의 더위탓이라고 하겠습니다;; 날이 더워서 낮에는 글쓰는게 한없이 느려지거든요.;;-_-; 비축분이 떨어져서 그날그날 써서 올리는 상황이라는;; 한마디 더 말씀드리자면......여러분은 모두 예리하십니다, 음하하하하하!(퍽;)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저 어떻게 하지…라는 막연한 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검문 행렬은 점차 줄어들 것이고, 곧 우리차례가 될 것임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장시간의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바로 이곳에서 샴페인 용병단과 헤어져야 겠다는 생각이었다. 나와 이사나, 두 사람만이라면 어떻게든 이목을 속이고 들어갈 수 있다. 정 안되면 성문 앞에 흐르는 수로를 이용해서 숨어 들어가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인원들 사이에서는 눈에 뜨지 않게 갈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헤어지게 되도 성문 안에 들어가면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들에게 검문을 피한다는 인상을 강하게 풍기게 되므로 차라리 이쯤에서 완벽하게 정리해 두는 게 나았다. 더 이상의 폐를 끼칠 수 없다는 생각에서라도 가능하면 이릴들과는 다시 마주치지 않게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 이러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을 때,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낸 이는 바로 단장인 휴센이었다. “ 이렇게 된 바에야 어쩔 수 없지. 엘, 라이. 너희들과는 여기에서 헤어지는 편이 낫겠다. ” “ 예? ” “ 이 무리에 있으면 아무래도 검문을 피하기 힘들 거야. 성벽의 왼편을 따라 돌아가다 보면 숲이 나오는데, 그 숲과 연결된 구석을 잘 살펴보면 안으로 들어가는 작은 통로가 있을 거다. 너희들이라면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상단 측에는 일이 있어서 돌아가게 됐다고 말해둘 테니 지금 가도록 해. ” “ 예…예에? ”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한 나와 라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들…우리가 검문을 피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건가? 뜬금없는 단장의 말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일행들을 보니, 이미 그들끼리는 이번 상황에 대한 정리가 끝난 모양이었다.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었달 까? 따스한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던 그들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이사나를 향해 차례대로 허리를 굽혀보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경악한 것은 그들이 취한 행동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에 의해서였다. “ 예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점을 용서하십시오, 황제폐하. 부디…원하시는 일을 달성하시기를 바랍니다. ” “ !! ” “ 헉…어, 어떻게? ” 숨이 턱 막힌 듯 눈을 부릅뜬 이사나를 대신해서 내가 그렇게 되묻고 말았다. 이제까지 전혀 우리를 향해 어떠한 의심의 시선도 보낸 적이 없던 사람들이다. 갑작스런 상황전개에 놀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설마 이들은 처음부터 우리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건가? 무심코 시선이 마주친 트로웰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그러자 이번엔 휴센을 대신하여 그의 옆에 있던 헤롤이 침착한 태도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 실은 이전부터 얼굴을 가리시는 모습을 보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폐하 또래의 외모에, 얼굴을 감추려 하는 것, 굳이 이런 위험한 시기에 클모어로 가시려고 하던 것 등이 그런 생각을 점점 확신으로 이끌어 갔지요. 특별한 능력이 없는 소년과 동행하시기에 설마 했습니다만…그것도 이번에 그가 엘뤼엔의 사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납득이 되었습니다. ” “ …그런…. ” “ 지난날에 저질렀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저희는 잠시나마 폐하의 일정에 도움이 되고 싶었습니다. 배운 것 없는 미천한 용병이라, 예법에 맞지 않는 행동으로 심사를 많이 어지럽혀드렸을 것입니다. 부디 우매한 백성들의 마음을 너그럽게 보아주시길 청하나이다. ” “ ……. ” 할말을 잃어버린 이사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샴페인 용병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들이 어떠한 흑심을 품고 우리와 동행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오히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이사나가 무사히 이곳까지 도착하게 만들기 위해 협력해 온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녀석은 무한한 감동이 드러나는 얼굴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현재의 녀석은 정령사인 라이가 아니라,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 이사나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일행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이전까지 보이지 않은 굳건한 위엄과 기백이 서려있었다. 그러나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채 완전히 숨기지 못한 탓에 그 눈동자는 아까부터 쉴 새 없이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페리스들과 헤어질 때도 이사나는 저런 식으로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막상 산에서 돌아섰을 때의 그는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모습으로 단 한번도 그들을 뒤돌아보지 않았었다. 그 순간의 만남이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가 황제라는 자각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기사들이 원하고 있던 바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떨리는 눈동자로 동행해온 용병들 하나하나를 돌아보던 이사나는,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듯 잔뜩 가라앉은 쉰 목소리를 천천히 내뱉었다. “ 미안합니다. 미덕한 본인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마는 군요. ” “ 그렇지 않습니다, 폐하…저희 모두는 당신께서 속히 황권을 되찾으시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이 땅의 백성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 …이런 나약한 황제라도 믿어주는 겁니까? 나의 앞날은 앞으로도 희망적이라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이번의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당신들 또한 무사할 수 없을 겁니다. ” 도와준 은인들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자 함인지, 이사나는 끝까지 그들을 향한 존칭을 거두지 않았다. 냉정하게 답하는 말 속에 담긴 걱정을 느꼈는지 이릴들은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렸다. “ 낳아준 어버이를 배덕하는 자식이 어디 있나이까. 폐하께서 백성을 저버리시지 않는 한, 저희 역시 폐하를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무사히 원래의 영광을 되찾으십시오. 폐하께서 이루시는 역사에 잠시나마 동참했다는 사실을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고 살아가겠습니다. 끝까지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는 부족한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 “ ……그대들 한 사람, 한사람을 이 땅을 지키는 100명의 기사들보다 더 의롭다 칭해도 이 순간 나를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오늘의 일은 나의 숨이 끊어지는 날까지 잊지 않겠습니다. ” “ 크흑, 폐하… ” 그렇게 이사나와 샴페인들이 이별을 고하는 사이, 나 역시 트로웰과 작별인사를 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을 일행 중 누구라도 보았다면, 뻔한 대화가 필요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아름다운 우정이라고 생각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오해를 하든 말든 우리는 꿋꿋하게 정령어를 사용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결국 이렇게 헤어지게 되네, 트로웰. 혹시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 아니라고는 말 못하지. 쿡쿡. - 하아, 너무해. 나 정말 무지 놀랐단 말이야. - 미안, 미안. 하지만 헤어지게 되서 아쉬운 건 오히려 이쪽이라고. 정말이지, 엘은 처음부터 너무 힘든 유희를 선택한 것 같아. - 풋. 왜?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아서 불안해? - 응? 물의 정령왕인 네가 물가에 다가가는 게 왜 불안한데? “ ……. ” 정말 오랜만에 발동된 말 끊기…랄까.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굴리고 있는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저런 식이라도 농담을 건네는 것을 보니, 혜안을 통해 본 이사나의 앞날이 아주 캄캄하지는 않은 모양이지? 결국 먼저 미소를 지은 것은 내 쪽이었다. -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은 하지 마. 헷갈린다고… - 쿡쿡. 엘이 먼저 내 마음을 떠보려고 했으니까 그렇지. 내가 걱정하는 건 당연한거 아니야?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지는 않더라도, 그 비슷한 심정은 가지고 있어. 이전처럼 이상한 인간한테 걸릴까봐 염려도 되고…. - 흐음, 설마 그런 변태귀족이 또 있을려고. - 그건 모르는 일이야, 엘. 대륙엔 사람이 많아. 그 중에서 엘에게 해꼬지 할 인간이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지. 안 그래? 진지하게 묻는 말에 나는 내가 너무 경솔한 태도로 대답했다는 걸 깨닫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트로웰이 아니면 누가 또 내게 이런 걱정을 다해주겠는가. 당장 두 달이라는 시간동안 동거 동락해왔던 샴페인 용병단들도 전부 내게 이사나를 잘 부탁한다는 말만 전하는데 말이다. - 알았어, 트로웰. 주의할게. - 내가 끝까지 함께 가주지 못해서 미안해, 엘. 종종 놈들을 통해 연락 보낼게. 가끔씩은 정령계로 돌아와서 서로의 근황을 알려주는 시간도 갖자. - 으응. 트로웰은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 글쎄. 보수를 받고 나면 수도에 있는 용병길드 본사에 올라가게 될 것 같아. 승급시험을 받아야 하거든. 아아, 그러고 보니 트로웰은 이번 겨울을 지나면 금패를 받게 된다고 그랬던가? 당장 전투라도 벌어지게 되면 가장 먼저 수도로 진격하게 될 텐데, 그 소란에 휩싸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작 당사자인 트로웰이나 샴페인 용병단이나 그 점에서는 크게 염려하는 기색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 어차피 용병들의 생활이란게 다 전쟁입니다. 그런 것에 겁을 냈다간 은패를 딸 수도 없었을 걸요? ” 걱정하는 이사나를 보며 유쾌하게 대답하는 헤롤들의 모습에 그나마 적은 위안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말을 뒤로하며, 우리는 그렇게 샴페인 용병단과 작별했다. 이미 한차례의 전적이 있어서 그런가? 아쉬운 이별임에도 처음보단 많이 담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들 일행에 트로웰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다 괜찮을 거란 믿음을 심어주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 아차, 그러고 보니 카이 씨는 어쩌지? ” 샴페인 용병단과 헤어져 이사나와 함께 휴센이 가르쳐준 비밀통로(일명 개구멍)로 가던 나는, 그때서야 퍼뜩 떠오른 사실에 낭패감을 느끼곤 얼굴을 찡그렸다. 엘뤼엔의 신전까지 안내를 해주기로 약속한, 신관이자 공범인 카이 씨를 그대로 행렬 안에 놔두고 온 것이다. 부득이하게 헤어지게 됐을 경우 다시 만날 장소를 정해둔 것도 아니었기에, 그와의 만남은 오리무중으로 돌입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그렇다고 지금쯤 기사들에게 검문을 받고 있을 행렬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결국 우리들은 카이 씨에 대한 것은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결정지었다. “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그도 엘뤼엔의 신전에 볼일이 있다고 했으니,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사정이야 그때 가서 설명해도 늦지 않겠지, 뭐. ” “ 으음. 운 좋으면 성안에 들어가서 우연히 만나게 될 지도 모르고. ” 카이 씨가 들었으면 서운함에 눈시울을 붉혔을지도 모를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은 우리는 킥킥 웃으며 숲 안 쪽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느 세월에 이렇게 지었는지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기나긴 성벽을 따라 걸어가니, 울창한 숲의 그늘과 나무 넝쿨에 가려져, 작정하고 찾으려 들지 않으면 쉽게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틈새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덩치 큰 어른은 무리더라도, 아직 근육이 연한 시기인 이사나라면 충분히 비집고 들어가 볼만한 크기였다. 잠시 주변을 살펴본 나는 나이아스들을 통해 벽 너머에도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곤 이사나부터 먼저 들어가도록 했다. 나야 원래 형체가 물이니, 마음만 먹으면 벽이고 뭐고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허탈할 정도로 간단하게 성안에 들어온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곧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 뭐야, 이런 식으로 들어올 수 있으면 애초에 검문 같은 게 필요도 없는 거 아니야? 휴센은 용케 이런 장소를 알았네? ” “ 지난번에 한번 의뢰 때문에 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우연히 마을 아이들이 드나드는 것을 봤다나봐. 카웰 형님을 만나게 되면 보수공사를 건의해달라고 하던걸? ” “ 흐음, 그렇군. 그럼 이제 가보자, 이사나. 먼저 엘뤼엔의 신전부터 들려야겠지?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신전으로 가는 길을 물어보면 될 거야. ” 그러자 알았다는 뜻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이던 이사나가 문득 궁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 그런데…왜 꼭 엘뤼엔의 사제가 돼야 하는 건데? ” “ …응? 글쎄. 굳이 이유를 대자면야…다른 신들보다야 그한테 신의 문장을 부탁하기가 더 편해서일까? ” “ 부탁이라니…그럼 엘은 형벌의 신인 엘뤼엔하고 아는 사이란 말이야? ” “ 어, 어라? 내가 말 안했나? ” 허걱. 그러고 보니 난 그동안 이사나한테 엘뤼엔의 사제가 되겠다고만 말했을 뿐, 굳이 그래야만 하는 정확한 사정을 설명해 준적이 없었던 것 같다. ‘몰랐어’라는 의미가 다분히 포함된 시선을 느끼며 나는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그게…사실은 내가 엘뤼엔하고 개인적인 친분이 있거든. ” “ 헤에? 정령왕과 신들은 서로 교류도 할 수 있는 거야? ” “ 우리 쪽에서는 불가능한데, 신들은 할 수 있어. 워낙 바빠서 제대로 만날 수는 없지만 말이야. ” “ 그, 그럼 마신하고도? 마신하고도 가능해? ” “ …응? 글쎄…마신하고는 아직 만나본적이 없지만…굳이 못할 건 없지. 그런데 왜? ” 무심코 되묻던 나는 금새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는 아차하며 입을 다물었다. 솔트레테 제국의 선(-)황제, 즉 이사나의 아버지가 처형당하게 되었던 배경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10년 재앙의 책임을 뒤집어 쓴 것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마신이 내린 신탁 이 아니었던 가. 나는 바로 후회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 미안해 이사나. 내가 괜한 말을 한 것 같다. ” “ 으음, 아니야…사실은 가능하면 마신을 만나서 왜 그런 신탁을 내렸는지 묻고 싶었어. 정말 아버지에게 무슨 잘못이 있었는지. 그리고 있다면 그게 무엇인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해선 안 되는 거겠지? 하루빨리 원래 자리를 되찾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야. ” 그렇게 대답하며 해맑게 웃는 이사나는 이미 확고한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자신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또 다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되었던 것이다. 두 달 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부쩍 성숙해진 눈빛을 마주하며 나 역시 덩달아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 그래. 나중에 네 것을 모두 찾고 나면, 그땐 내가 엘뤼엔을 협박해서라도 마신 불러오라고 할게. 그럼 우리 둘이서 실컷 따져보자. 아니, 아예 트로웰과 이프리트, 미네르바까지 합세 시킬까? 아무리 마신이라도 4명의 정령왕이 따지고 들면 꼼짝도 못할걸? ” “ 킥킥, 응. 그때가 되면 잘 부탁할게. ” 자칫하면 무거워 질수도 있던 분위기가 별 다른 탈 없이 가벼워지자 나와 이사나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신전을 찾기 위해 거리를 나서기 시작했다. 쇠뿔도 단 김에 빼랬다고, 이왕 도착한 김에 하루라도 빨리 엘뤼엔을 만나서 문장을 받고, 후작과 담판을 짓고 싶었던 것이다. 성 안은 자유무역 도시라는 말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과 수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지각색의 복식을 갖춘 사람들이 저마다 실어온 물건을 나르거나 서로 넘길 값을 흥정하는 등, 활기 있는 거리는 마치 시장 통 한가운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번잡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에 비해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무언가에 조심스러워 하는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요 근래 대공의 기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수시로 사람들의 검문을 하는 것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주로 후드를 눌러쓰고 다니거나, 일행이 많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고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눈이 내리는 바람에 우리가 거리를 나설 때쯤엔 거의 손을 놓고 있는 상태였다. 머리를 적시지 않으려는 사람들 대부분이 모자를 눌러쓰고 다녔기에 일일이 검문을 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만약 엘뤼엔에게 아크아돈의 계절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일부러 그가 이런 현상을 유도한 게 아닐까 생각될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 흐음, 포악한 성자가 쥐고 있는 창에서 드디어 그 첫 번째 얼음가루가 떨어지고 있네. 이제 정말 그의 휴식이 시작되나 보다. ” …해석하자면 ‘와, 첫눈이다. 이제 정말 겨울인가 봐.’의 뜻이다. 눈이 내리는 게 신기한지 감탄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이사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떨어지는 눈 덩이를 손바닥에 받기 시작했다. 어차피 피부에 닿아봤자 금방 물이 되어 사라지는 대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다른 눈송이를 잡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하는 대로 내버려 두던 나는 곧 지나가는 한 사람을 붙잡고 신전으로 가는 길을 묻기 시작했다. 마침 이곳 주민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에게서 비교적 자세한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 저, 죄송합니다만, 엘뤼엔의 신전은 어디에 있어요? ” “ 음? 아아, 엘뤼엔님의 신전 말이지. 도시 북쪽 숲 외각으로 나가야 할 게다. 가장 춥고, 험난한 지형에 새하얀 신전이 있지. 지금 그런 차림으로 가는 건 어려울 거야. 산을 타야하거든. ” “ 예? 산이요? 여기서 먼가요? ” “ 글쎄, 여기서 산까지라면 몰라도, 산에서 신전까지 가는 길은 족히 하루가 더 된다고 알고 있다. 요즘 같은 때에는 옷과 식량을 잘 챙겨가는 편이 좋아. 참배를 드리러 가다가 얼어 죽은 인간도 꽤 되거든. 그래서 엘뤼엔님의 신전은 다른 말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라고도 하지. ” “ ……. ” 으음. 누가 괴팍한 성격 아니랄까봐 모시는 신전도 꼭 그런 곳에…. 아무래도 이사나에게 지금 입은 것보다 더 두꺼운 망토를 사서 입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선 나는 그대로 마주친 장면에 그대로 몸을 굳히고 말았다. 동네 불량배로 보이는 거친 인상의 형님(…)들 4명이, 혼자 있던 이사나를 둘러싼 채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저들을 용병이 아닌 단순한 불량배로 보는 까닭은 낡은 셔츠위에 덧입은 조끼와 민 바지뿐인 평범한 옷차림에, 아무런 무기를 소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이 생명인 용병들은 간단한 산책을 나갈 때도 평소 전투 시에 착용하는 보호 장비와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 언제 어느 때에 무슨 시비에 휘말릴지 모른데다, 의뢰를 요청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난 용병이니 용건 있는 사람은 오시오!’라고 몸으로 홍보하고 있는 셈이랄까? 샴페인 용병단 같이 유명한 사람들이야 그런 번거로운 작업 없이도 알아서 의뢰가 쇄도 한다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용병들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 수단을 마련하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거친 성격을 가진 용병이라고 해도 이사나처럼 성인도 아닌 어린애한테 시비를 걸거나 행패를 부리는 인간은 없었다. 전투로 먹고 사는 사람이 어린애하고 싸워서 이겨봤자, 도리어 자존심만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저렇게 쪽수만 믿고 덤벼드는, 무기도 소지 하지 않은 상태의 인상 험악한 인간들은 그저 불량배라고 보는 편이 더 옳았다. 그래서인지 이사나는 갑자기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덩치 큰 남자들이 다가오는 데도 별 달리 긴장하거나 두려운 빛이 없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불량배 중의 한명이 얼굴을 찌푸리며 낮게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 요거 맹랑하네? 도망갈 생각도 안 해? 호오~ 어디 귀한 집 도련님이라도 되는 거냐? 그래서 수하들이 도와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 “ …무슨 일인 진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시비를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일행이 기다리고 있으니 비켜주시겠어요? ” 그러자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도 나타날 줄 알았는지 흠칫 하고 놀라며 돌아본 남자들은, 이사나가 바라보는 방향에 내가 멀뚱히 서있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후드에 가려져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긴 해도, 키나 체구만 봐서는 도무지 그의 또래란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로 그 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들이 용병이 아니거나, 혹은 그렇다 해도 제대로 된 용병이 아님을 확신했다. 원래 실력 있는 사람일수록 상대방의 외모만을 가지고 능력을 판단하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트로웰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어린애라고 함부로 만만하게 여길 수 없을 테니까. ‘별 귀찮은 놈들이 다 있네.’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 라이, 무슨 일이야? ” “ 글쎄, 모르겠어. 갑자기 이 사람들이… ” “ 어이, 꼬마들. 무섭게 안 할 테니 가지고 있는 거 좀 내놔라. 여긴 통행세가 존재하거든. 니들 이 도시 처음이지? 여기 오면 반드시 우리한테 돈 내게 돼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도 다 같이 먹고 살 거 아니겠냐? ” 허허허. 겉보기에 깡패, 알고 보니 불우이웃을 도웁시다?…일리는 없고. 정말 너무 상투적인 수법이로군. 속으로 짧게 혀를 찬 나는 괜히 사건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순순히 대답했다. “ 보시다시피 저희는 나이가 어려서 그렇게 많은 돈을 들고 다니지 않아요. 얼마를 드리면 되는 데요? ” “ 헤에, 이 녀석, 말이 좀 통하는 녀석이네? ” “ 낄낄, 안 그럼 우리들이 섭섭하지. ” 기분 나쁘게 클클 거리면서 웃은 남자들은 이사나에게서 시선을 떼곤 내 쪽으로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말하는 투나 행동에서 내가 돈을 가지고 있음을 짐작한 것이다. 대부분 이런 류의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돈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맡곤 하는데, 이들도 그런 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엔 기분이 더러워도 그냥 참고 넘어가는 쪽이 속 편하다. 하지만 그렇게 다짐하던 나도 막상 건들거리는 남자 중의 한명이 우악스럽게 어깨를 움켜잡았을 때는 인상을 그대로 구길 수밖에 없었다. 아픈 건 둘째 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 더도 말고 덜도 말고 1골드만 내 놔라. ” “ 네에? ” 1골드라니! 대충 알아본 바로 이곳의 500실링은 1실버에 해당하고, 200실버는 1골드에 해당했다. 평민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대충 10실버이니, 그것은 평민노동자 한달 품삯과 거의 맞먹는 금액이다. 아무리 내가 보석을 팔고 받은 금액으로 돈이 썩어 넘칠 만큼 많이 있어도 선뜻 내주기 어려운 액수였던 것이다. 대체 우리의 어딜 보고 그렇게 많은 돈을 요구하는 거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자 남자들은 히죽 웃으며 이사나가 입고 있는 옷을 가리켜 보였다. “ 낡은 망토로 가리고 있다고 못 알아 볼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저거 꽤 비싼 가죽으로 만든 옷이지? 아마 못 받아도 3골드는 하는 걸걸? ” “ 헉…저건 부모님이… ” “ 정 지금 주기 힘들면 부모님께 가서 받아오던지. 아, 물론 저 녀석은 우리와 함께 기다리고 있어야 할 테지만 말이야. ” “ ……. ” 정말이지 걸려도 된통 걸렸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큰맘 먹고 산 비싼 옷이 이런 상황에서 발목을 잡을 줄이야. 차라리 그냥 몇 대 패고 도망칠까? 속으로 맹렬히 머리를 굴리던 나는 문득 머리 위가 허전해짐을 느끼곤 그대로 경악했다. 이 빌어먹을 깡패들이 멋대로 후드를 벗겨버렸던 것이다. 그나마 이사나가 당한 게 아니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마주친 시선마다 놀라는 것을 보고나니 불쾌한 기분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 이거 왜 이래요? ” “ 헤에, 너 여자였나? 죽이는 파란색 머리네? ” “ 남이사 여자든, 남자든! ” 이젠 일일이 여자가 아니라고 대꾸하기도 귀찮아 신경질적으로 말한 것뿐이었는데, 그것을 들은 남자들은 어느새 나를 완전히 여자로 단정하기 시작했다. 지난번에 보았던 변태귀족만큼이나 느끼한 시선이 오간다는 생각이 들 찰나, 나로서는 믿고 싶지 않은 말이 남자들 중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 1골드를 당장 마련하기가 어렵다면 몸으로 갚는 수도 있지. ” “ 뭐, 뭐어? ” “ 간단해. 우리들이랑 딱 3시간만 같이 보내자고. 그럼 네 일행은 무사히 돌려보내 줄 테니까 말이야. ” ‘ 내가 미쳤냐! ’ 더 이상 참았다간 무슨 말을 들을지 겁나, 나는 드디어 폭력을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트로웰처럼 화려하게는 못하더라도 단번에 기절시켜 버릴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막 물의 기운을 끌어올린 주먹으로 그들을 차올리려는 순간- 갑작스런 등장인물이 그보다 먼저 깡패들을 제압해 버리기 시작했으니… 퍽- 콰악- 퍼어억- “ 꾸에엑- 어떤 자식이… ” “ 우왁- ” “ 꼬르르르륵 ” 그 순간 내 눈에 보이는 거라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으로 깡패들을 넘어뜨리고 있는 하나의 거대한 불의 폭풍이었다. 육체를 가진 자의 움직임이라곤 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붉으스레한 무언가가 단 일격으로 남자들을 기절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눈만 깜빡이고 있던 나는 한참만에야 붉으스름한 그것이 사람의 머리카락임을 알아보곤 멍하게 입을 벌렸다. ‘ 사…사람? ’ 그러나 나는 그 사실을 깨닫고도 온전히 감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제 정신을 차리는 순간, 4명의 건달들을 완전히 땅바닥에 눕혀버린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돌아섰던 것이다. 어림잡아도 180은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허리까지 찰랑이는 붉은 색 머리카락.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마지막으로 루비를 박아 넣은 것 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치고는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그런 나의 심정과는 전혀 반대로, 그는 잘생긴 얼굴을 한껏 찡그리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고 있었다. “ 이런 조무래기 들을 상대로 뭘 쩔쩔매고 있는 거야? ” “ ……라…피스? ” ======================================================= 크흑...12시가 넘어버리다니........ㅠ_ㅠ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맙소사. 저 녀석이 대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거지? 당황한 내가 입만 뻐끔뻐끔거리고 있는데도 그는 전혀 개이치 않는 태도로 씨익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리곤 성큼성큼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그대로 불쑥 손을 내미는 것이다. 마치 뭔가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 마냥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였다. “……?”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찌푸린 얼굴로 붉은 눈동자를 가늘게 치켜 올렸다. 그러나 화가 났다 기 보다는 어딘지 불안한 듯한, 난감해 하는 표정에 더 가까웠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열심히 눈을 굴리던 라피스는 잠시 후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속대로 찾아냈으니까 계약 해줘.” “…!” 그렇지 않아도 4명의 깡패를 때려눕힌 직후라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으로 주목된 상태였다. 그런 자리에서 다짜고짜 계약을 해달라고 하면 날더러 어쩌란 소리인가! 벌써 약속한 한달이 지난건가 라는 의문도 잠시, 나는 얼른 그의 팔을 잡고 그대로 이사나와 함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그는 내가 무작정 이끄는 것에 놀라는 듯 했지만 별 다른 반항 없이 순순히 따라와 주고 있었다. 미로보다 복잡한 골목길을 한참이나 돌아, 누구도 이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숨소리 하나 벅차지 않은 라피스를 돌아보았다. “이봐, 당신!” “라피스.” “아, 그래! 라피스! 그런 장소에서 다짜고짜 계약해달라는 말을 하는 게 어디 있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봤잖아!” “남들 시선이 무슨 상관이야? 나는 약속을 지키라고 말 한 것뿐이다.” 으이구, 그래 너 잘났다. 정말 이렇게 대꾸해 주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랄까? 잠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려 이마에 손을 짚고 있던 나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침착 하려고 무던히 애를 썼건만 분한감정을 완전히 숨길 수 없었는지,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떨리고 있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딱 한달 만 이잖아. 대체 어떻게 찾은 거야?” “흐음? 그게 궁금한가?” “당연한거 아니야? 정령한테 추적마법인지 뭔지가 통하지도 않을 테고, 내가 어디에 간다고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어떻게 찾을 수 있어? 설마 드래곤들은 천리안이라도 있는 거야?” 그러자 옆에서 나와 라피스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던 이사나가 흠칫 놀라며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전에 내가 말해 준 바 있던, 일행으로 새로 합류할 드래곤이 바로 그임을 눈치 챈 것이다. 충격이 꽤나 컸는지 녀석은 차마 소리만 내지 못하고 있을 뿐, 당장 이 자리에서 쓰러져도 하나 이상할 게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그것을 힐끔 바라 본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담담하게 대꾸했다. “천리안 같은 건 없어. 한 가지 말해줄까? 난 한달 전부터 이곳에 와있었다.” “엥?” “우연히 와 있던 건 아니야. 정확히 너를 기다리고 있었지. 너무 늦어서 찾아 나설까 생각하던 참이었다고.” “어, 어떻게?” 나의 놀란 표정을 감상하듯 여유롭게 눈을 굴린 녀석은 이번엔 정확히 이사나를 가리켜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얼굴이 창백해져 있던 녀석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사나 란느 솔트, 이 제국의 황제전하가 맞으신가?” “…!!헉, 그건 또 어떻게 안거야?” “간단한거 아닐까? 난 이미 네가 3일에 한번씩 비를 내린 주범이라는 걸 눈치 챘는데 말이야.” “…!…” 그제 서야 나는 그가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이미 대륙 전체에 솔트레테의 ‘3일의 기적’이 알려진 마당에, 그 배후인물을 찾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으니 말이다. 기적을 일으킨 장본인이 나라는 걸 알고 있는 라피스 로서는, ‘3일의 기적’을 서원한 이사나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걸 눈치 채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만 알면 행보가 뻔한 게 아니겠는가. 섭정왕인 대공조차도 이사나가 사촌인 카웰 후작을 찾을 것을 염려해 미리 클모어에 기사들을 풀어둔 마당에, 드래곤인 라피스라고 그것을 짐작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뭐야, 그게…’ 아무래도 손해 본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어,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 모습을 유쾌하게 바라본 라피스는 아까 전처럼 다시 한번 내 눈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젠 계약해 줘. 그리고 일행에도 포함시켜 주는 거다.” “하아…이건 사기야.” “흐음? 난 일부러 다 알고서도 잠시 나를 떼어놓으려고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그게 아니었나 보지? 하지만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거잖아?” “으윽, 그래 나 바보다. 쳇,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지. 계약해! 한다고!” 그렇지 않아도 비참해 죽겠는데 아주 염장을 지르는 거냐? 하여간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놈이라니까?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계약해준다니까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니 투덜거리고 싶은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지난 시간 동안 질릴 정도로 잘생긴 얼굴들만 봐왔어도, 아주 면역이 된 건 아닌 것 같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계약을 맺기 위한 의식의 언어를 중얼거렸다. “너는 나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이다. 계약…은 당연히 할 테니 따로 의사를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 퉁명스럽게 묻는 말에도 그는 마냥 기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거만이라도 떨면 얄밉기라도 할 텐데,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그를 보니 오히려 화내는 것이 더 바보 같아 졌다. 순식간에 끌어올린 물의 기운을 손가락위에 집중시키자 얇은 푸른 막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라피스의 이마위에 닿자마자 선명한 푸른색의 문장을 새기며 산산이 부수어져 갔다. 이사나의 이마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물의 인장인 것이다. 약간 차갑기만 할뿐, 별다른 느낌도 없을 텐데 라피스는 기운을 음미하듯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감격에 젖어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한 것 같아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소감이 어때? 드디어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는데 말이야.” “…느낌이 이상해.” 여전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조용히 대답했다. 어딘지 가라앉은 목소리가 현재의 기분이 어떤지 짐작하기 힘든 상태였다. 설마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아서 실망한건가? 그러나 잠시 후, 간신히 들어올린 눈꺼플 안에는 확연한 기쁨을 드러낸 붉은 눈동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차가운 감촉이 기분 좋아.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이제야 겨우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야.” “헤에, 당신은 레드 드래곤인 거 아니었어? 레드 드래곤은 불의 성질을 따른다고 알고 있는데…내가 틀린 건가? 하긴, 3천년이나 바라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니 그 감격이야 오죽 하겠냐 만은…” “글쎄…감격일까. 그런 것보다는 드디어 네가 내 것이 되었다는 것에 실감이 든다는 것이 맞겠군.” “헉.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아무래도 이 녀석은 나를 물건 취급하는 것을 끝끝내 고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것도 모자라 그대로 이사나에게 시선을 돌리며 엄하게 한마디 내뱉는 것이 아닌가. “이봐, 인간. 네가 엘퀴네스와 먼저 계약했다고 해서 나보다 더 그에 대한 소유권이 많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제부터 나한테 동료취급이라도 받고 싶다면 알아서 나서지 않는 게 좋아.” “하…하하….” 갑자기 드래곤에게 라이벌선언(?)을 당한 이사나의 심정이 오죽 황당했겠는가. 차마 대답도 못하고 어설픈 미소를 짓는 녀석을 보다 못한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나를 소유하는 권한이 생기는 건줄 알아? 그리고 당신!” “라피스.” “그래, 라피스! 저번에 분명히 표현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뭐야? 한달이 지나도록 전혀 변한 게 없잖아! 그리고 이번 여행은 이사나를 위한 거라고! 멋대로 네 마음대로 굴면 곤란해.” “일정에 참견할 생각은 없어. 그저 저 인간이 먼저 계약했답시고 까불까봐 미리 경고하는 것뿐이야.” “하아, 당신이란 드래곤은 정말이지…” 저 녀석 눈에는 겁에 찔려 떨고 있는 이사나가 보이지도 않는 건가? 드래곤이란 사실하나로 저렇듯 경계하는 녀석이 그에게 까불 리가 없지 않은가! 복장이 다 터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라피스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고 느껴진다 싶더니, 무언가 부드럽고 말캉한 느낌이 입술 위를 맴돌았던 것이다. “…!!!” 그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나는 물론이고 옆에 있던 이사나의 눈까지 크게 부릅떠지고 말았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느라, 나는 어느새 형체를 유지하던 마나의 기운이 평소보다 몇 배나 강해진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저…저 썩을 놈의 드래곤이 내게…내게!! “이게 무슨 짓이야!!” “음? 인간세상에서 쓸 수 있는 마나를 좀더 강화시켜 준 것 뿐인데? 뭐가 문제인가?” “뭐가 문제냐고? 너…너 지금 나한테!” “아아. 마우스 투 마우스(mouth to mouth)의 방식이 문제였던 건가? 그게 어때서? 마나를 주는 방식이야 내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지금 그걸 말이라고오!” 넌 어떨지 몰라도 난 첫 키스였단 말이다! 지금 그걸 빼앗아가 버리고 뭐가 어떻냐는 표정이 나와? 경악하는 내 모습을 보고서도 그는 끝까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남자와 남자사이에 일어난 일이라고 가볍게 넘어가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키스에 대한 개념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놀라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지금 그건 인간들을 흉내 내는 것?” “하아?” “뭐랄까. 반응이 묘하게 첫 키스를 빼앗긴 인간들이 충격 받는 모습과 비슷해서 말이야. 그런 건 따라할 필요 없어. 여긴 네 정체를 아는 존재들뿐인데 굳이 연기하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텐데?” “…….” 대화가 안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게 이렇듯 비참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첫 키스를 어이없게 잃어놓고도 도리어 이상한 놈 취급받으니 기가 막혀 한이 뼛속까지 사무치는 기분이었다. 만약 이 장면을 트로웰이 봤다면, 그도 화내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까? 아니…그는 내 전생을 알고 있으니 어느 정도는 이해해 줄지도. ‘크흑, 17년간 고이 모셔두었던 나의 로망이…’ 이래봬도 훗날에 사귈 여자친구를 위해 아끼고 또 아껴두었던 영역이었는데. 비록 가벼운 뽀뽀에 불과하다 해도 처음인건 처음인 것. 더구나 원체 스킨쉽이란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는 벼락을 맞은 것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참을 수 없었던 내가 취한 행동이란… “라피스.” “뭐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한테 딱 한대만 맞아라.” …였던 것이다. 그 밑도 끝도 없는 말에 라피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고, 나는 애써 미소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안 그럼 내가 미쳐버릴 것 같거든? 정령 하나 살리는 셈치고 그냥 맞아줘.”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이유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면서도 그는 여유 만만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때리는 주먹은 아프지도 않을 거라는 건가? 빌어먹을 자식, 넌 지금 그렇게 허락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리하여 나는 그 언젠가 트로웰이 그랬던 것처럼 강한 펀치로 라피스의 얼굴을 날려 버렸던 것이다. 퍼억! 경쾌한 타작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그때와는 달리 라피스는 전혀 미동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살짝 미간을 찡그려보였을 뿐이었다. 너무 열 받아서 다짜고짜 날리느라, 주먹에 제대로 물의 힘을 싣지 않은 것이 치명적인 실수였던 것이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맞은 부위를 만지작거리며 한마디 중얼거렸다. “아프군.” “…말이라도 고맙다. 그 말 들으니까 그나마 살 것 같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든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걸로 대충 매듭지은 걸로 해두지. 더 이상 불만은 없겠지?” “…….” 한대 더 때려도 되냐고 물어볼까? 견딜 수 없는 유혹이 스멀스멀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 “어허, 그러니까 나는 이번 일에 상관하고 싶지 않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가.” 책으로 빼곡히 가득 찬 서재 안, 은밀한 한 구석에서 정색을 가득담은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깔려진 붉은 융단과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테이블이, 자연스럽게 이곳이 어느 귀족가의 사택 안임을 연상시켰다. 벽면 한쪽에 장식된 방패에는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 새겨져 자랑스럽게 걸려있는 상태였다. 포효하는 사자를 꿰뚫는 날카로운 창대의 모습-그것이 현 솔트레테 제국 실세중의 한사람이라 이름 높은 ‘플레어 드 바이스’공작가의 문장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 제국내의 귀족들 내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더불어 그가 현 황제와 섭정왕 유카르테의 사이에서 일찌감치 중립선언을 한 귀족이란 사실도 말이다. 불쾌한 듯 미간을 모으는 공작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두 명의 남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찌 이 제국의 사활이 걸린 일에 상관이 없다 하십니까? 공작께서 돌아서시기만 하면 상황이 크게 반전될 것입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십시오.” “크흠,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자들이군. 내 그대들이 무단으로 저택 내에 침입한 것에 대해서 관대하게 넘어가 주려 했는데, 도무지 안됐겠네. 당장 기사들을 부르기 전에 어서 나가게.” “…바이스 공작가는 황제폐하에게서 돌아서실 작정이십니까?” “무슨 소릴! 나는 그저 누구의 편도 들고 싶지 않을 뿐이라고 몇 번이나…” 당황한 공작이 변명하듯 말을 이었지만 앞에 앉은 이의 차가운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지 않고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섭정왕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제국의 하나뿐인 황제폐하를 반역죄로 몰아 신전의 쫓김을 당하게 하고, 거액의 현상금을 매긴 것을 보시고서도 중립을 지키신다함은, 이미 대공에게로 돌아섰음이 아니고 무엇인지?” “페리스 드 해머! 겨우 하급정령사인 그대가 지금 나를 능멸하는 겐가!” “공작께서 끝까지 이 상태를 고수 하겠다 하시면 능멸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이 저택 안에 소리 소문 없이 침투한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 소름끼치도록 냉정한 목소리에 공작은 목에 칼이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닌데 날카로운 아픔이 밀려들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페리스의 옆에 있던 기사가 내뿜는 살기 때문이라고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고도 알 수 있으리라. 설마 회유가 안 되면 죽일 작정이었던 건가?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킨 그는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게 있네. 황제폐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곁에 두신 세력이라고는 자네들 밖에 없는 분이지 않은가? 그나마 대공의 편을 들지 않고 이렇듯 중립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그분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네.” “그저 목숨을 부지하고 싶으신 것뿐이겠지요. 당장이라도 대공의 편으로 돌아서고 싶으신 것을 참고 계신 것 아닙니까? 만에 하나 황제폐하가 일으킬 ‘기적’을 대비해서 말입니다. 혹시나 운이 좋아 폐하께서 사촌이신 카웰 후작의 힘을 손에 넣게 되면 대공을 대적할 힘을 일으킬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승산을 판가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크흠, 무, 무슨 소리를….” 붉어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해대는 공작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페리스와 알렉의 시선은 변함없이 차가웠다. 삐닥하게 고개를 휘저은 페리스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을 회유하려 하는 건 다른 중립을 지키는 귀족들을 회유하기에 편하게 만들기 위해서지, 공작님이 정말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현재는 목숨을 부지하셔도 다음이 위태로울 것입니다.” “…그런 협박에 내가 넘어가리라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하급정령사인 자네가…” 그러나 공작은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피식 웃은 페리스가 한 손을 내밀자 그 위를 타고 거대한 물의 늑대가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책에서나 보던 물의 상급 정령-시큐엘의 모습이라는 것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헉-사, 상급 정령?? 어떻게!!” 경악하는 공작의 모습을 보며 페리스는 후드 속에 가려진 입가에 살짝 미소를 그려보였다. 그의 눈동자는 처음 공작을 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공작께서도 3일의 기적에 대한 소문은 들어보셨을 테지요.” “헉! 그, 그럼 설마…그것이 정말 사실이었단 말인가? 그 기적을 일으킨 존재가 황제폐하가 맞단 말인가?” 이미 대륙전체에 파다히 퍼져있는 소문을 그라고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단순한 우연을 가지고 퍼진 헛소문이라고 치부하고 말았는데 그것이 설마 사실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빛을 띄고 있는 공작의 눈을 보며 페리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것역시 그 기적의 일부이지요. 아아,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습니다. 공작께서 아무리 아니라고 하셔도 황제폐하는 이미 두 번의 기적을 이루셨으니 까요. 아마도 지금쯤이면 클모어에 당도하셨을 겁니다. 카웰 후작이라면 절대로 폐하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을 터. 앞으로 더욱 강건해지실 폐하를 상대로 섭정왕은 과연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지?” “헉…” 확연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있는 시큐엘의 모습은 보는 그 자체로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런 엄청난 존재를 아무렇지 않게 불러낸 페리스의 모습도, 이 순간엔 감히 쳐다보기도 힘들만큼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손끝을 느끼며 공작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내, 내가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 때는 이사나와 페리스 일행이 헤어지고 난지 정확히 두 달하고도 15일이 지난 어느 날. 솔트레테의 수도 헤리카에서는, 중립을 선언한 귀족들이 섭정왕의 눈길을 피해 차례대로 그들의 어린 황제를 향해 돌아서고 있었다. ======================================================= 무려 1페이지 완성하는 데 1시간.......ㅠ_ㅠ 우어어~늦어서 죄송해요;; 지금까지 기다려 주시는 분 계신가요?;ㅁ; => 엘퀴네스의 장-15. 부자상봉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조금씩 내리던 눈은 라피스와 만나고 난 이후로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한치 앞도 안 보일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치고 보기 드문 폭설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당장 신전을 찾아 산을 오르려 했던 내 계획도 어쩔 수 없이 눈이 그친 뒤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나와 라피스는 그렇다 쳐도, 순수한 인간의 몸인 이사나로서는 저 거센 눈발을 뚫고 산을 오를 체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슬슬 날도 저물고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셈이었다. “엘뤼엔의 신전이라니…생긴지 얼마 안 된 초보 신의 문장 따위를 받아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정령왕이 청하면 마신이라도 나와 줄 거다. 차라리 그의 문장을 받는 게 낫지 않아?” 아직 전 엘퀴네스가 엘뤼엔으로 환생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라피스는 단순히 산에 가기 귀찮다는 이유로 그렇게 되물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된 초보신이라니…엘뤼엔이 들었으면 당장이라도 벼락을 내릴 소리다. 그 초보신이 현재 마계에서 마신보다 더 두려움을 받는 존재라는 걸 알면 어떤 얼굴이 될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인 친분을 일부러 썩힐 필요는 없잖아? 그리고 엘뤼엔도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으니 어차피 가 봐야해. 그나저나…눈을 피할 곳이 필요한데.” “흐음, 식당에라도 들어가면 되잖아? 마침 식사 때니까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건 그렇지만…여긴 다른 곳보다 몇 배로 이사나의 포스터가 붙어있어서 말이야. 얼굴이 눈에 뜨일까봐 사람들 많은 장소는 못가겠어.” 그러자 라피스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이사나가 움찔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처음보단 익숙해졌답시고 크게 어려워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그는 잠시 고민하듯 흐음…하고 짧은 신음을 삼키더니, 곧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을 건네어 나와 이사나를 사이좋게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타입이 좋아? 미소년? 미청년? 아니면 미 중년? 붉은 머리? 파란머리? 뭣하면 은발도 상관없는데.” “그, 그게 뭔 소린데?” “얼굴이 다르면 알아볼 수 없잖아? 그러니까 지금 마법으로 바꿔주겠다는 거다. 최대한 취향을 고려해 주겠다는 거니까 빨리 대답해.” “헤에…” 알고 보니 그 폴리모프 마법이란 걸 걸어주겠다는 소리였던 것이다. 역시 드래곤이란 편한 존재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고민할 필요 없이 계약해 줄걸 그랬나? 나름대로 기특한 행동을 하는 라피스를 나는 매우 감탄스러운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런데 왜 예를 드는 것마다 미소년, 미청년뿐인데? 눈에 안 뜨이려면 평범한 얼굴이 낫지 않아?” “기각. 이 위대하신 몸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아름답지 않은 건 못 봐준다.” “…….” 그래서 네 얼굴이 그렇게 지나치게 잘 생겼던 거냐? 차마 대답을 듣기가 두려운 질문을 삼키며 나는 고심하는 표정으로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지나치게 예쁘장한 얼굴은 오히려 평범한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 현재의 내 결론이다. 특히나 평범 이하였던 과거가 있는 인간 일 수록 그 괴리감이 말도 못하게 커지는 것이다. 바로 현재의 내 처지처럼. 그렇다고 이사나의 얼굴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지만(아니 오히려 잘생긴 축에 속하지만)역시 무리를 해서라도 라피스의 의견을 뒤집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색머리에 푸른 눈동자. 지금보다 약간 터프해 보이는 게 어떨까?” “갈색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색이야. 똥파리 골드 놈들이 생각나거든. 지네들 딴에는 황금색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말이야. 그게 어디 금색인가? 똥색이지. 후훗.” “…그럼 검은 머리는?” “칙칙해보여서 싫어.” “일일이 당신 취향에만 맞출 수는 없어.” “마법을 실행하는 건 나야.” “…….” 결국 한참의 실랑이 끝에 깨끗이 포기를 선언한 나는 이사나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해 버렸다. 어차피 마법이 걸리는 건 녀석이니까 알아서 마음에 드는 외모로 선택하라고 떠넘겼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참의 고민 후에 이사나가 선택한 얼굴은 희멀걸한 피부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진 은발의 미소년이었다. 솔직히 말해 십분 라피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이사나는 되도록이면 눈에 안 띄는 방향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도, 그가 뻔뻔스럽게 밀어붙였던 것이다. 항의 하는 눈빛 따위는 일찌감치 무시되었다. “자, 그럼 실행해볼까? <폴리모프>” 눈부신 빛이 터지고 나자, 어느새 눈앞에는 새하얀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소년이 서있었다. 얼굴의 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에 희멀건 피부는, 내리는 눈과 어울려져 지독할 정도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동화책에나 등장하는 눈의 요정의 모습이랄까? 나이는 16살로 설정했다더니, 막상 바뀐 모습은 이전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럼에도 여자애로 착각이 되지 않는다는 게 더 용할 정도다. 바뀐 녀석의 모습을 보며 흡족해 하는 리피스에게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건 너무 눈에 띄잖아. 내 충고는 귓등으로 흘려들었어?” “어차피 나와 네 모습만으로 충분히 눈에 뜨여. 이 정도는 가볍지 뭘 그래?” “이왕 눈에 뜨이는 거 아주 작심을 하고 시선을 끌어보자 이거냐? 이래서야 그냥 후드를 눌러쓰고 있는 게 더 낫잖아!” 내리는 눈에 묻혀서 머리카락인지 눈인지 구분할 수도 없을 정도의 은발이 어디 흔하냔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따지고 들어봤자 라피스는 죽어도 다른 모습으로 폴리모프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고집스럽게 고개를 젓는 그를 보며 체념의 한숨을 내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바뀐 자신의 모습을 요리조리 살펴보고 있던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다, 이사나. 특별한 일이 없으면 되도록 후드를 쓰고 다니는 방향으로 하자.” “으응. 그런데…이런 은발이 실제로 존재하는 색일까? 신기해.” “글쎄…그리 흔한 색은 아니지 않을까?” 그러자 라피스는 생색내는 듯한 거만한 표정이 되어 대답했다. 내 속이 뒤집어 지든 말든 그로서는 자신이 원한바대로 이루어져서 매우 만족스럽다는 모습이었다. “실버 드래곤들이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게 되면 바로 그런 색의 머리카락을 가지게 되지. 너무 눈에 뜨인다고 다른 색으로 일부러 바꾸고 다니지만.” “것 봐! 역시 눈에 띄잖아!” 같은 종족인 드래곤조차도 일부러 바꾸는 색을 선택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이번 일정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다 자신하던 드래곤이 맞단 말이냐! 기가 막힌 표정으로 노려보며 소리치는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도 당당했다.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너보다는 덜 하니까.” “…….” 내가 무슨 말로 저 녀석을 당하겠는가? 이왕 이렇게 된 거 더 이상 말싸움으로 기를 소진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미 발목까지 쌓인 눈길을 헤치며 적당히 들어갈 만한 식당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고급 음식점으로 들어가자는 가당찮은 드래곤의 요구는 깨끗이 무시해준 직후였다. 다행히도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적당한 크기의 음식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에 오가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거리마다 여행객을 위한 여관과 식당들이 즐비했던 것이다. 남들 눈에 흔히 뜨이지 않으면서도, 라피스의 취향에 맞게 상당히 깔끔한 내부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한창 서빙을 돌고 있던 여자애가 달려와 인사를 건넸다. “앗, 어서오세…!! 어, 어서오세요!” 당차게 소리치던 소녀는 라피스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치고는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소녀만이 아니었다. 손님으로 온 사람들 중 우리 쪽으로 시선을 주던 여자들 대부분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튀는 외모가 양 사이드로 음침하게 후드를 덮은 우리를 끼고 있으니 더욱 빛이 나는 건 당연한 거겠지만, 막상 여자들이(심지어 남자들 까지도)소란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니 새삼 라피스의 외모가 얼마나 잘났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뭐, 그래봤자 본체는 도마뱀의 확장판밖에 더 되겠느냐 만은…. “이, 이쪽으로 오세요. 손님은 세 분이신가요?”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이면서도 투철한 직업정신(?)으로 우리를 자리까지 안내해준 종업원 소녀는 쭈욱 라피스에게만 시선을 건네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것을 보고 은연중에 그를 우리들의 리더라고 생각한 모양이다.(단순히 얼굴이 잘나서 바라보는 건지도 모르지만) 머리와 어깨에 쌓여 있던 눈이 녹아 물이 되어 뚝뚝 떨어지자 소녀는 얼른 주방에서 마른 수건을 가져와 건네주었다. “저어…이걸로 닦으세요.” “음, 고마워요. 이 가게는 손님에게 서비스가 좋군요.” 놀랍게도 그는 생긋 미소까지 지으며 소녀가 건네주는 수건을 건네받았다. 그러면서 여유 있게 가게를 둘러보더니 우리를 향해 친절하게 물어오기 까지 하는 것이다. “식사는 어떻게 할까? 따로 먹고 싶은 것 있어?” “…….” “…….” 가게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나긋나긋한 모습을 보이자 나는 물론이고 이사나까지 소리 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설마 저 녀석…여자들 앞에서는 내숭떠는 타입이었단 말인가? 황당하게 쳐다보던 우리가 간신히 제 정신을 차린 건 그가 다시 재촉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뭐 먹을 거냐니까 왜 이리 말들이 없어? 어디 안 좋아?” “…아니, 아무것도. 난 입맛이 없어. 그냥 물 한잔. 라이 너는?” “으음, 나는 그냥 아무거나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그러자 라피스는 이번에도 나긋한 태도로 베이컨과 훈제로 처리한 양고기, 비프스튜를 차례대로 주문했다.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던 얼굴은 소녀가 주방장에게 달려가고 나자 다시 싸늘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눈살을 찌푸린 모습이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그 불만의 화살촉은 정확히 나를 겨냥하고 있었다. “물 한잔이라니. 그럴 거면 식당에는 왜 들어와?” “어쩔 수 없잖아. 음식을 먹으면 오히려 넘어올 것 같단 말이야.” “응? 설마 액체종류밖에 못 먹는 거야?” 의아하게 물어오는 것에 나는 그렇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물 외에는 아무것도 넘어가지 않는다. 억지로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삼킬 때마다 몸이 오염되는 것 같은 미식거리는 느낌을 받는다면 누가 음식을 먹고 싶겠는가. 정체를 숨겨야 했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이미 내가 정령왕인 걸 알고 있는 일행과 어울리면서도 억지로 식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나는 새로운 정보를 입수했다는 듯이 흥미롭게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스를 향해 퉁명스럽게 되물었다. “너야말로 아까 그 태도의 변화는 뭐야? 아주 딴 사람 같잖아.” “어쩔 수 없어. 얼굴이 이렇다 보니 평소처럼 대하면 귀족으로 오해받거든. 너희들은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이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으니, 조금 친절하게 대해준 것뿐이다.” “그게 더 튄 것 같은데. 특히 저 소녀한텐.” 열심히 서빙을 도는 와중에도 힐끔 힐끔 이쪽을 쳐다보는 종업원을 가리키자 라피스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한 행동에 내가 꼬투리를 잡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큰둥하게 소녀를 한번 돌아본 그는 이번엔 나와 이사나를 느릿하게 바라보면서 한마디 내뱉었다. “내가 보기엔 너희 둘이 더 튀어. 물이 뚝뚝 떨어지는 후드를 언제까지 쓰고 있을 생각이냐?” “…….” 흐음, 할 말 없다. 식당 안에까지 들어와서 젖은 옷을 그대로 입고 있으면 당연히 시선이 쏠리겠지.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머뭇거리며 주변을 돌아본 이사나는 잠시 후 천천히 쓰고 있던 로브의 후드를 벗어 내렸다. 그로서는 꽤나 오랫동안 얼굴을 감추고 다녔으니, 마법으로 바뀐 지금에 와서까지 마음대로 드러내 놓고 다닐 기회를 놓치기 싫었을 것이다. 사라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보다 더 하얀 은발이 드러나자 여기저기서 탄성의 신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라피스가 등장한 이후부터 우리 쪽을 주시하고 있던 주변 손님들이, 청아할 정도로 아름다운 이사나의 외모에 감탄했던 것이다. “헉…” “흐읍” “호오…” 솔직히 폴리모프한 이사나의 모습은 내가 보기에도 넋을 잃고 바라볼 만큼 묘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파란색 머리나 붉은 색 머리도 한국에 있을 때 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지만, 역시 은발 쪽이 더욱 신기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가발로도 구경하기 힘든 색깔이라서 그런가?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처음 녀석은 후드를 벗자마자 사람들이 놀라는 것에 움찔하는 듯 했지만 금새 평온한 표정이 되어 여유 있게 식사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 모습이 마치 이런 종류의 시선에 오래도록 익숙하다는 듯한 모습이라, 또 다시 사람들의 감탄을 사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걸 무대체질이라고 하지 아마? 한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연예인이 됐을 거다. “뭐해? 넌 안 벗어?” “하아,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마.” 그러나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과 다르게 나는 속으로 무지 망설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성체로 오해받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보니 불길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거 혹시 멋진 남자를 둘이나 끌고 다니는 복 많은 여인네로 찍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식당 안에 여자의 존재가 더 많다보니 고민하는 행동이 굼떠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답답하단 듯이 바라본 라피스가 성질 낼 때가 되서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이 후드를 벗었다. 아까보다 조용해진 가게 안이라든지, 여자들의 흉흉한 시선 따위는 저 멀리 외면하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으이씨. 난 어차피 젖어도 상관없단 말이야. 물에 닿는 느낌도 없는데 꼭 벗을 필요 없잖아?” “그거야 네 사정이고. 보는 사람은 답답해 보인다고. 실내에까지 들어와서 얼굴을 감추고 있는 건 수상하다는 인상밖에 안돼. 그러고 있으니 한결 낫군.” “이봐, 당신…” 그 때 마침 주문한 식사가 나오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따지고 들 수 없었다. 차분히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 종업원 소녀의 무시무시할 정도의 따끔한 시선을 느끼면서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처음으로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고 말았다. 그래서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을 때 어쩔 수 없이 헤실거리며 웃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로서는 어떻게든 분위기를 가볍게 해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달 까? 그러나 웃는 내 얼굴과 마주친 소녀는 그대로 휙-고개를 돌려버렸고, 라피스의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시선만 되돌아 왔을 뿐이었다. 제기랄. 내가 왜 여자한테 라이벌 의식을 심어줘야 하는데? 착잡한 심정으로 물을 들이키려는 순간,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라피스가 내뱉는 말에 나는 그대로 사레에 걸리고 말았다. “여성 체 주제에 여자 꼬시지 마.” “쿠, 쿨럭- 쿨럭, 쿨럭! 무, 무슨 소리야!” “넌 내거니까 나만 바라봐. 다른 쪽에 시선 돌리는 건 용서 못해. 또 한번 더 그딴 식으로 웃으면서 사람들 쳐다보면, 식당이고 뭐고 다 엎어버릴 테다.” “헉…” 말도 안돼는 ‘여성 체’의 오해는 그렇다 쳐도…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협박까지 하는 거냐? 아무래도 이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간 점점 증상이 심각해 질 것 같아, 나는 이쯤에서 재지를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녀석이 가장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부터. “난 남성체야.” “…뭐?” “너야말로 한번만 더 날 여자취급하면 계약이고 뭐고 다 파토 내 버리고 잠적해 버릴 테다.” “…….” ======================================================== 1편마다 1시간이 아니라...........1페이지 마다 1시간이라는 .......지금 분량이 5페이지니까.......쓰는데 5섯시간이 넘게 걸린거랍니다...ㅠ_ㅠ; 우어어..현기증이 나고 있어요;;; 우선 올리고 보자는 심정으로 올린거라.....수정이 전혀 안되어 있습니다; ......역시나 12시가 넘어버렸군요. 후후후후...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꽤나 충격적이었는지 라피스는 내 협박(?)을 듣고 난 이후로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것도 잠시. 그는 다시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와 씨익 미소 지었다. “남성체라도 상관없어. 어차피 정령은 무성이잖아?” “…….” 하긴, 저 녀석은 엘뤼엔의 그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고도 반했던 녀석이다. 단순히 엘퀴네스가 풍기는 특유의 기운이 마음에 든 거라고 했으니, 외모가 어떻든 상관없는 건가? 어쩐지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은 기분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다. “그렇다면 이왕 상관없는 거, 확실하게 남성체로서 대우해 줬으면 좋겠어. 아무리 무성이라고 해도 익숙해진지 이제 겨우 4달 지났을 뿐이고…여자로 오해받는 것도 슬슬 짜증나니까 말이야.” “흐음? 이상하군. 정령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 가치관이 없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게 남성체를 고집하는 이유가 뭐야?” 여기서 잠시 뭐라고 대답할까 망설였지만, 저 녀석을 설득하려면 확실하게 사정을 설명을 해둬야겠단 생각에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차피 숨겨봤자 좋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난 17년간 남자로 살았던 기억이 있어.” “뭐?” “…?” “그러니까…전생에 남자였다고. 갑자기 무성으로 태어났다고 해서 쉽게 행동패턴을 바꿀 수는 없단 말이야.” 나의 담담한 대답에 이사나는 무슨 소린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었고, 라피스는 놀란 표정으로 얼굴근육을 딱딱하게 경직 시켰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 뱉는 목소리는 경악과 흥분으로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거짓말.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명계의 몫이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어. 정령왕은 윤회의 기억이 없는, 처음 창조된 가장 순결한 영혼으로만 탄생되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태어나는 과정에 잠시 실수가 생겨서 엉뚱한 차원으로 떨어졌다 돌아온 거라고 밖에. 아무튼 난 확실히 전달했으니까 그렇게 알아두라고.” “거참…그 동안 행동이 묘하게 인간 같았던 건 그래서였던 건가.” “……?” 모든 것을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라피스에 비해 이사나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뭐 자랑할게 있다고 그다지 유쾌하지도 않은 과거를 두 번이나 떠벌이겠는가.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좋을 것을…라피스는 끝까지 짓궂은 표정으로 내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헤에. 그럼 역시 상당히 충격이었겠네. 그 ‘키스’ 말이야.” “…제길,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기억 베스트 1로 기록 될 거다. 됐냐?” “킥킥. 지금 당장은 그래도 천년정도만 지나면 전생의 기억이 가물가물 해질걸? 남자였다는 사실은 아무렇지 않아질 날이 분명히 올 거다. 그건 정령들의 본성이나 마찬가지니까.” “…….” 사실은 나도 그렇게 될 까봐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성격이 많이 바뀌어 가는 것 같아서 겁난단 말이다. 굳이 일깨워주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친절하게 충고하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악물었다. 그때 마침 분위기를 환기시킬 목적인지 문득 생각난 듯한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참, 이제부턴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 유희중이시니 본명을 부를 수는 없을 텐데…” “아아, 상관없어. 그냥 라피스라고 불러.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라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저는 되도록 정령사의 모습으로 꾸밀 생각입니다만.” “흐음, 그래? 그럼 난 뭘 로 할까나…” “자, 잠깐! 그런 대화는 사람들 없는 곳에서 하자고.”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거래도 작정하고 엿들으려 하면 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뒤 늦게 서야 우리의 대화가 너무 위험수위(?)로 치닫는 것을 깨달은 나는 혼비백산한 표정이 되어 서둘러 가로막았지만 돌아오는 건 자신만만한 라피스의 대답뿐이었다. “이미 우리 주변에 사일런스 마법을 실행해 뒀어. 다른 인간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다.” “헉! 어느새?” 사이좋게 놀라는 나와 이사나의 표정을 보면서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드래곤의 마법을 인간과 같은 범주로 생각하지 마. 이 정도는 캐스팅이나 시동어 없이도 시전 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아까 하던 얘기나 계속 하지? 나는 그냥 무난하게 검사로 나갈까?” “엥? 검술도 할 수 있어?” “나이 3천 먹은 드래곤치고 유희 중에 검술 한 두 개 쯤 익혀두지 않은 존재는 없어. 마법만큼 완벽하진 않아도 이 녀석 하나 지킬 정도는 충분히 될 거다.” 그러면서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이사나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유희를 많이 해본 인간(?)답게 이번 일정의 핵심인물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달 까. 앞으로 이사나에 대한 것은 그에게 떠넘기면 될 것 같다고 속으로 흡족해 하는 나에게 라피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너는 신관이 될 거라고 했던가? 이름은…?” “그냥 엘이라고 불러. 사실 신관이 되는 건 확실하지 않아. 엘뤼엔의 협조가 없으면 불가능하거든. 일단 와보라고 한다니 희망은 있지만 서도…” “…대체 그 엘뤼엔이란 신하고 너는 무슨 관계인거지? 부탁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지만, 막상 허락을 내릴지 어떨지는 가늠해 봐야 한다니. 단순히 편한 친구사이라고는 보기가 힘든 걸? 그가 너보다 서열이 위라는 건가?” ‘예리한 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라피스는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이어지는 내 말에 결국 침묵하고 말았다. “직접 만나보면 알아.” “…….” 아무렴, 직접 만나보지 않으면 절대 모르지. 아마 엄청 놀랄걸? 자기가 3천년이나 매달렸던 그 도도한 물의 정령왕이 떡하니 신이 되어 나타났는데 놀라지 않을 녀석이 어디 있겠어? 너무 기뻐서 자기도 엘뤼엔의 신관이 되겠다고 설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었다. 잔뜩 폼 잡고 있는 현재의 모습을 봐서는 전혀 상상이 안 가진 하지만, 그가 엘뤼엔에게 보인 집착의 세월이 그만큼 길었으니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은 것이다. 말이 좋아 3천년이지, 10년에도 변한다는 강산을 그보다 몇 십 배나 반복한 세월동안 바라보던 존재인데,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으면 그게 더 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설마 이프리트처럼 내 엄마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건 아니겠지?’ 무성이던 시절이면 모를까, 이제 완벽한 남성이 된 엘뤼엔을 보고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진다. 만약 정말 그런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계약이고 뭐고 다 끊어버릴 테다. 엘뤼엔이 누군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채 그저 싱글거리는 라피스의 얼굴을 보며 나는 속으로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트로웰의 말마따나 정말 순탄치 않은 유희였다. 밤늦도록 그칠 줄 모르던 눈은 아침 해가 떠오르고서야 간신히 진정될 기미를 보였다. 무릎까지 차오른 눈을 헤치고 산을 오른다는 게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언제 다시 눈이 내릴지 몰라 되도록 서둘러서 신전을 찾아가기로 결정지었다. 어제 저녁식사를 한 식당 근처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머문 우리는(3인실의 방을 주문했더니 여관 주인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가 왜 남자 둘이랑 같은 방을 쓰냐나? 열 받아서 내 멋대로 남매라고 대답해 버렸다.)간단하게 먹을 음식을 준비 하곤 도시 외각의 북쪽 숲을 향하기 시작했다. 출발하기 전에 얼핏 들은 소문으로는, 클모어의 북쪽 외각에 있는 숲은 ‘마법의 겨울’이라고 하여, 한여름에도 공기의 온도가 현저하게 낮은 데다 눈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는 데, 바로 그 숲과 연결된 산맥을 타고 올라가야 엘뤼엔의 신전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었지만 신전에 까지 이르는 산맥의 일부도 추워 얼어 죽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제 길에서 물어본 아주머니가 ‘동사한 사람이 많다’고 했을 때는 이 맘 때에만 해당 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사시사철 그런 고난을 감수해야 했던 것이었다. 이곳 외에도 전 대륙에 퍼져있는 얼마 안 되는 엘뤼엔의 신전들은 죄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 세워져 있다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내 장담하지만 엘뤼엔은 신도의 숫자를 불리려면 제일 먼저 신전의 위치부터 바꿔야 할 거다. 안 그럼 죽어도 안 모일걸? 성문 앞의 검문을 간단하게 통과한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척 봐도 사람들이 발길이 한적한 숲 안쪽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건, 어느 지점을 벗어나면서부터 몸을 감싸는 공기의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뭔가 설명하기 힘든 이질적인 기운이 감도는 것 같았달까? 계절 차이가 극명한 여름에 와서 본 광경이라면 모를까…겨울인 현 상태에선 겉으로 보기엔 일반 숲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기에, 나는 그 묘한 느낌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 거렸다. 1년 내내 겨울이라 온도가 더 낮은 건가 하는 의문도 잠시, 미간을 살짝 찡그린 라피스가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어떤 쓰잘데기 없이 할 일 없는 놈이 이런 짓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표정으로 묻자 그는 여전히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또박또박 대답했다. “이곳만 사계절 내내 겨울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아? 누가 숲 전체와 산맥의 일부에 마법을 건 거다.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건 실버놈들밖에 없지만, 드래곤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걸로 봐선 현재 유희중이거나, 레어를 옮긴 모양이군. 떠나면서 마법을 해지하지 않은 거야.” “헉, 그건 생태계 파괴잖아!” 마법으로 일정한 공간을 겨울로 만든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나는 이 순간 산맥의 일부를 못 쓰게 만들어 버렸다는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면서 천상 정령왕이라며 거친 동작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뭐, 뭐하는 거야?”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 마법이 풀리면 단기간 안에 원상태로 복구되니까 말이야. 자아 그럼 가볼까?” “자, 잠깐!” “…?” 당장이라도 걸음을 옮기려던 녀석은 내가 필사적으로 제지하자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리곤 내가 가리키는 손끝에 이사나가 있음을 깨닫고는 얼굴을 살짝 찡그려 보이는 것이다. 멀쩡하니 잘만 걸어오던 녀석은 숲 안쪽으로 들어오면서부터 지나치게 몸을 떨고 있었다. 확실히 숲 저편보단 이곳의 온도가 훨씬 낮은 모양이다. “또 뭐가 문제야?” “사실은 이사나가 입고 있는 망토가 그렇게 두꺼운 게 아니거든. 이곳에 오기 전에 새로 사서 갈아입히려고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몸을 따뜻하게 하는 마법은 없어?” “…정말이지 귀찮은 동행자로구만. 기다려 봐.”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리면서도 라피스는 순순히 한손을 들어 이사나의 머리를 짚었다. 보온 마법이라던가? 그의 입에서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창백하던 안색에 혈색이 돌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마법이란 게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이렇게 여러 가지로 실용적인 모습을 보고나니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아, 고맙습니다…굉장히 따뜻하네요.” “다음부턴 미리미리 말하라고. 난 행동 굼뜨는건 딱 질색이니까. 엘퀴네스가 널 언제까지 챙기게 만들 거냐? 어리광 좀 작작 부려라.” 감사의 인사에도 매몰찬 대답을 내뱉는 녀석은 정말이지 정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없어보였다. 그나마 같은 일행이랍시고 함부로 굴지 않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려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내가 좋아서 챙겨주는 거야. 그렇게 느린 게 싫으면 알아서 먼저 마법을 걸어주던가.” “유감이지만 이 몸은 부탁받지 않은 일은 안한다.” “…너 잘났다.” 드래곤들은 원래 다 저런 건가? 아무런 거리낌 업이 당당한 태도로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 세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현재의 삶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빠지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엘뤼엔보다 더 제 멋대로의 존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 세계에 와서 내 주변에 ‘절세미인’들 말고 늘은 게 또 있는 건가? 그것은 바로 지나칠 정도로 거만한 존재가 많다는 것. 벌써 내가 알고 있는 이만 해도 세 명이 넘지 않은가. 이프리트부터 시작해서, 엘뤼엔, 라피스까지. 서열구분이 확실한 세계이니 만큼 앞으로도 말도 못하게 많은 거만덩어리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런 복잡한 기분도 이어져 오는 라피스의 재촉에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뭐해? 안 갈 건가? 그 놈의 문장인지 뭔지 빨리 받고 떠나자고.” “아, 알았어. 흐음? 근데 어째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뭐야, 겨우 마법 하나 해줬다고 기분 상한거야?” 동료한테 도움 준 것 가지고 생색내는 거냐! 라고 불쑥 외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묻자, 이상 하리 만치 불쾌해 보이던 라피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툴툴거렸다. “얼음은 불의 속성과 반대야. 공기만 맡고 있어도 짜증난다고. 제기랄. 이래서 실버놈들이 싫다니까.”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피스가 그런 말을 하면 한참이나 현실감이 떨어진다. 불과 가장 정반대의 성분인 물의 정령왕과 계약하려고 발악을 했던 놈이 아닌가. 그런 내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이사나 역시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어…실례지만, 물 역시 불과 반대 성분인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걸 모른대?” “아니…그, 그래도 엘퀴네스하고는 계약 하셨잖습니까?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대답이라고 꺼내는 말은 정말이지 가관이었다. “엘퀴네스는 처음부터 예외다. 비교할 가치가 안 된다고. 저런 얼음덩어리 따위하고는 차원이 달라.” “…….” 기가 막힌다. 저 자식은 3천년이나 산 주제 얼음의 본질이 물이라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아직 실제로 체험해 본건 아니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분노가 일어나면 나를 이루는 형체의 속성이 얼음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실제로 엘뤼엔은 엘퀴네스였을 시절 몇 번이나 그 수법(?)으로 대륙을 꽤나 살벌하게 만든 전적도 있었고 말이다.(주로 이프리트와 싸우고 난 직후였다.) 반박하는 내 목소리엔 나도 모르게 바짝 힘이 들어가 있었다. “물을 얼리면 얼음이 된다는 거 몰라? 뭐가 차원이 다르다는 거야?” “당연히 다르지. 저건 마법으로 만든 인공적인 얼음이라고. 자연 그 자체인 너의 속성하고는 그 본질부터가 달라. 엘퀴네스의 ‘물’은 이 피부 밑에 흐르는 혈액까지도 지배하는 것이다. 아무리 나와 속성이 반대라고 해서 싫어할 수가 없잖아? 자연에 속한 그 무엇도 정령의 손길은 피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그가 굳이 속성을 거부하면서 까지 물의 정령왕에게 집착하는 사유로는 너무도 빈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그것 말고 다른 이유에 대해선 딱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기에 더 이상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그저 타고난 성격이 괴짜려니…하고 넘어갈 수밖에. 그 괴짜가 하필이면 내가 태어난 세대에 존재한다는 것이 비극인 것이다. 뭐, 그래도 생각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도움이 되고 있어서 현재로선 그다지 큰 불만이 없었지만 말이다. ========================================================= 어색한 표현 지적 감사합니다! 이번에도 부탁드려요!(또 수정을 안했다는 소리;) 우훗. 하늘이 맑군요...(캄캄해서 보이지도 않는다)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신전에 도착하기까지는 정말 꼬박 하루가 걸렸다. 최대한 이사나의 체력을 고려해서 수시로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설마 산위에서 밤을 샐 줄 몰랐던 나는 상당히 찝찝한 기분으로 다음날 아침 해를 맞았다. 그래도 과연 보온 마법이란 게 효과가 좋았던 모양인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바닥에서 잠을 자면서도 이사나는 한번도 떨거나 얼굴이 창백해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손을 만져보면 평소보다 체온이 뜨거울 정도다. 살얼음 같은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는 상황에도 지나치게 혈색이 좋으니 그건 그것대로 뭔가 위화감이 들기도 했다. 밤을 샜던 장소가 신전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았었던 듯,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걸음을 옮긴 우리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널따란 평원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을 발견했다. 탁 트여진 외관과 건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의 모습이 이전에 신계에서 봤던 엘뤼엔의 신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한 가지 신기했던 건 신전을 이루는 벽돌이 그저 단순한 돌을 흰색으로 페인팅 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 하얀색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보통 다른 건물을 보았을 때보다 그 격이 달라져 보였다. “헤에, 드디어 도착인가?” 떠오르는 아침햇살에 찬연히 빛나는 건물은 그 자체로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눈과 얼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산 위에 떡하니 세워져 있는 그림 같은 신전이라니…종교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다 감동하며 바라볼 장면이 아닌가 싶다. 엘뤼엔의 신도가 아닌 사람이라도 이 것을 보면 당장에 신관이 되겠다고 설치게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원치 않은 강행군에 산에서 밤을 샜다는 불쾌감으로 온통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 라피스나, 화려한 황실건물에 익숙해져 있던 이사나에게는 별 다른 감흥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와 달리 이곳을 꼭 방문할 목적이 있던 인간들도 아니니 투덜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무슨 놈의 신전을 이따위 구석에 박아 둔거지? 정말 할일도 더럽게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흐음, 그래도 상당히 멋진데요.” “뭐? 네 눈엔 저게 멋져 보여? 생긴지 25년 정도밖에 안된 초급 신 따위의 신전이?” “흐음…확실히 마신전에 비하면 소박한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소박한 게 아니라 초라한 거다, 저건!” 신전을 코앞에 두고 서로 품평하고 있는 라피스와 이사나를 보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무리 대통령도 없는 자리에선 욕한다지만, 그래도 명색이 상급신의 신전을 가지고 초라하다느니 소박하다느니 떠들고 있다니. 엘뤼엔이 들으면 정말 크게 경을 칠 일이 아닌가. 신전 앞에는 신관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청소를 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소란스럽게 걸어오는 우리를 보더니 서둘러 몸가짐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여느 무리와 같이 신전에 기도를 드리러온 방문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중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머리의 남자가 가슴부위에 손가락으로 한바퀴 원을 그리더니(성호인 모양이다) 공손하게 말을 걸어왔다. “엘뤼엔님의 가호가 임하시길 바랍니다. 저는 엘뤼엔님의 종 세이렌이라 합니다. 신전의 방문 목적과 머물 시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신의 문장이 눈에 띄지 않는 걸 보면 아마 가장 하급의 신관이거나, 수련사제일 경우가 높았다.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속으로 망설이는 사이 인상을 팍 찡그린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문목적이야 뻔한 것 아닌가? 기도하러 왔으니 신전 안으로 안내해라.” 초반부터 반말인데다, 오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데도 정작 신관들의 태도는 크게 불쾌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식의 대우에 익숙하다는 모습이랄까? 오히려 내가 더 당황해서 허둥지둥 말을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아, 죄송합니다. 초면에 실례를…” “아니, 괜찮습니다. 기도하러 오셨다니, 안내를 붙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 신전 안으로 들어가실 때는 쓰고 계신 후드를 벗어주십시오. 그 어떤 사연을 가진 자라도 신께서는 전부 포용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당장 죽을죄를 짓고 도망치는 죄인이라도 신전에서는 묵인해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때까지도 내가 후드를 쓰고 있었다는 걸 몰랐던 나는 얼른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건, 나와 시선이 마주친 신관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경직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벼락이라도 맞은 듯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무, 무슨?” “알아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토록 방문에 대해 통보를 받았으면서도…어, 어서 오십시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엘뤼엔의 계시가 내려진 게 카이 씨 만이 아니었던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라피스나 이사나도 그랬지만, 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우리의 심정도 모른 채 신관들은 서둘러 안에 들어가 나의 방문을 알렸고, 곧 얼마 지나지 않아 한때의 청년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20대 초 중반의 외모인 듯. 아무리 많아 잡아도 30은 넘지 않은 것 같았다. 입고 있는 옷은 하나같이 드레스로 착각될 만큼 풍성한 자락의 흰 법복이었는데, 가운데 금색 문장이 새겨진 한 사람을 제외하곤 다들 은색실로 꼬아진 덮개를 걸치고 있었다. 그들 중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나는 현재 상황도 잊고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카, 카이 씨?” 그랬다. 대략 10명 남짓해 보이는 청년의 무리엔 본의 아니게 일찍 헤어져 버렸던 카이씨도 속해 있었던 것이다. 평소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여 트린 그는, 감았는지 떴는지 구분이 안 되는 가는 눈동자를 반달모양으로 휘면서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엘님.” “하아…여기 오면 만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정말 이렇게 될 줄은…”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유일하게 금색 문장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던-남자가 성큼 걸어오더니 정중한 태도로 대답했다. 짧은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단정한 느낌의 얼굴이랄까. 신체의 굴곡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기장이 넓은 옷을 여러 개 겹쳐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무척이나 엄숙하고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다. 얼핏 본 손등위로 새하얀 엘뤼엔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곳까지 단번에 오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수련사제에게만 지정되는 이동 아이템이지요. 당신과의 동행에 함께 하지 못했다며 무척 죄스러워 했습니다.” “헤에…당신은?”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형벌의 신 엘뤼엔님의 첫 번째 종, 루얀이라고 합니다. 엘뤼엔님의 계시를 받고 당신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종?” 그러자 불쾌한 듯이 미간을 좁히고 있던 라피스가 냉큼 대답했다. “대 사제란 뜻이다.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 밖에 안 되는 데 벌써 대 사제라니…” “후훗, 엘뤼엔님의 신전은 역사가 짧으니까요. 나이 30을 넘지 않은 대 사제가 저 말고도 여럿 있답니다.” 신관의 능력을 제대로 받는 시기가 10세 이전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치면 이제 25년 밖에 안 된 신전의 신관들이 연령대가 높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태아 속에 있을 때부터 신력을 받았다 쳐도 25세 라는 소리니까 말이다. 사실 50대 이후의 신관이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여타 다른 유구한 역사를 지닌 신전에 비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라고 했다.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기에 그것에 대한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엘뤼엔님께서는 조속히 당신을 만나 뵙기를 희망하고 계셨습니다. 제대로 된 응접을 하지 못해 죄스럽습니다만…바로 기도실로 가시겠습니까?” “아, 그렇게 할게요. 이 두 사람도 함께 하고 싶은데…괜찮을까요?” “일행에 대한 언급은 없으셨지만,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루얀이란 이름의 사제는 조심스럽게 앞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신전 안에는 기둥 사이로 각기 다른 장식으로 된 나무문들이 달려 있었는데, 그 중에서 천사가 조각된 문이 바로 기도실이라고 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새겨진 천사의 모습이 신계에서 봤던 엘뤼엔의 수행천사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그 순간 붉은 머리의 새초롬한 존재를 떠올리고 피식 미소 지었다. ‘이프리트가 보면 당장 부숴버리겠다고 난리치겠는 걸?’ 신전의 모습도 엘뤼엔의 계시에 따라 지은 거였을까? 유난히도 신계에서 봤던 그의 신전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아니, 그때 본 그 모습을 그대로 옮겨다 지었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기도실에는 나와 이사나, 라피스 세 명만 들어가게 되었는데, 아마도 개인적인 신의 면담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신관들의 배려인 듯 보였다. “기도가 끝나실 때 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예에? 아니…꼭 그러실 필요는…” “괜찮습니다. 신의 손님을 모시는 사제로서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무사히 신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하하…가, 감사합니다.” 아무리 계시에 이끌려온 사람이라고 해도 엘뤼엔의 강림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그것은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카이 씨나 라피스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고 굳이 신계에서 내려올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말이다. 그 증거로 라피스는 문이 닫히자마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고 닦달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빨리 문장 달라고 그래. 어서 돌아가자고.” “으윽, 좀 기다려 봐. 어쨌든 이왕 온 건데 구경 좀 해도 되잖아?” “이런 초라한 신전에 볼게 뭐가 있다고 구경이야?” “라, 라피스. 기도실에서 그런 소리를 하시면…신이 들으신다고요.” 기겁한 이사나가 얼른 나무랐지만 그렇다고 반성하는 기색이 있을 리가 없었다. 오히려 들을 테면 들으라는 듯이 흥-하고 콧방귀를 뀌는 것이다. 저러다 후회해도 난 모르지…무심코 생각하는 순간, 나는 눈앞에 모셔진 제단에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것을 깨닫곤 멍하게 입을 벌렸다. “헉…” 기도하는 자리에서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단상위엔 엘뤼엔을 위해 쌓아둔 제단과 성수를 받치고 있는 천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위로 해맑은 빛이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천장을 바라봤지만 그 어느 곳에도 햇빛이 들어올 만한 구멍 따위는 뚫려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설마 신전 측에서 신비감을 조성하기 위해 일부러 마법으로 빛을 만들어 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 예상이 맞다면 저것은 아마도… “어떤 싸가지 없는 자식이 감히 내 신전 더러 초라하다는 예쁜 말을 지껄이는 걸까?” “…에, 엘뤼엔!” “뭐어?” 어느새 제단 위에는 그가 나타나고도 사라지지 않은 빛줄기를 고스란히 후광으로 등진 채, 선명한 백금발을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는 엘뤼엔이 느긋한 자세로 앉아있었다. 조각같이 단정한 얼굴은 방금 전에 들은 라피스의 말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못 본지 몇 달 밖에 안 된 건데도 꽤나 오래 동안 떨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예상치 못한 신의 강림에 경악하는 두 사람도 의식 못한 채 나는 너무 반가워서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은 엘뤼엔은 앉아있는 상태 그대로 두 팔을 벌렸다. “이리와, 엘.” “뭐, 뭐?” “흐음?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냥 손 흔들고 말 생각? 나는 널 만나기 위해 장장 10년 치 서류도 등지고 나왔는데 말이다.” 그 서류라는 게 이전에 이프리트가 날려버린 바이톤 주민의 생명 기록서 라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일. 숨도 못 쉴 정도로 바쁜 와중에 나를 위해 짬을 내줬다는 게 고마워서 나는 이번만은 얌전히 아들 역할을 해주기로 했다.(한마디로 가서 안겨줄 생각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을 때, 방해를 한 것은 다름 아닌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였다. “가긴 어딜 가! 저 자식은 대체 뭐야?” 아마도 역광 때문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듯, 아직까지도 라피스는 그가 전대의 엘퀴네스라는 것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과 반대로 이사나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고 있었고 말이다. 신의 위압감이라는 걸까?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나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그의 시선은 잔뜩 찌푸려진 채 라피스를 똑바로 쏘아보고 있는 상태였다. “저~자식? 엘, 저 싸가지 없는 도마뱀은 뭐냐?” “아? 드래곤 인 거 알겠어?” “신한테 불가능은 없다. 어떤 인물이든 그 본질만이 보이니까 말이야. 흐음, 근데 어째 상당히 낯이 익다?” 3천년이나 자신을 쫓아다닌 존재가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더니, 막상 만나고 나니 무언가 생각이 나긴 하는 모양이다. 그와는 반대로 라피스의 얼굴은 점점 더 험악해 지고 있었다. “크아악! 뭐? 도마뱀?? 겨우 25년짜리 초급 신 주제에!!” “…거기서 한 마디만 더 해라. 불에 구워진 도마뱀아. 한번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무렇지 않게 덤덤히 대답하는 엘뤼엔 이었지만 나는 그가 두 번은 경고하지 않는 다는 것을 이미 첫 대면에서 깨달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것을 모르는 라피스는 겁도 없이 그의 말을 무시한 대가를 고스란히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뭐가 어쩌고 어…우왓-” 퍼억-하는 경쾌한 타작음과 함께 그의 몸은 저만치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구석에 처박히고 말았다. 우수수 떨어지는 벽돌의 잔해가 그가 얼마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과연 드래곤이랍시고 기절은 하지 않고 피만 토하고 있었는데(이게 더 심한가?) 그것을 보면서도 엘뤼엔은 여유 있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만 있었다. 여전히 제단에 걸쳐진 몸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웁- 쿨럭 쿨럭-쿨럭!” “내가 한 마디만 더 하면 맞는다고 그랬을 텐데?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내 말을 귓구멍으로 쳐듣는 놈들이 없다니까. 엘 저딴 놈하곤 일찌감치 계약 끊어버려라.” “아하하…” 순간 계약한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신인 그가 정령왕이 새겨둔 물의 인장을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단 생각에 그저 어설픈 미소를 흘리고만 나였다. 서, 설마 저것도 경고인건 아니겠지? 라피스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든 것과, 엘뤼엔이 이사나에게 흥미를 보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신의 위압감에 질려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것을 바라보며 쯧쯧거리고 혀를 찬 엘뤼엔은 주변을 감싸고 있던 신의 기운을 차츰 감소 시켰다.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을 것 같던 안색이 그나마 한숨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이익, 너 이 자식!” “흠, 역시 인간들은 약하다니까? 최대한 줄인 건데도 이렇게 힘들어 할 줄이야. 그런고로 나는 오랫동안 인간 세상에 나와 있지 못하겠다, 엘. 그나마 신전이니까 이 정도의 신성이라도 뿜어낼 수 있는 거지, 다른 곳에선 어림도 없어.” “아, 굳이 만날 장소를 신전으로 한 것도 그것 때문?” “그래. 네가 유희중이 아니면 정령계로 찾아가면 될 텐데, 인간계에 있는 너한테는 도통 연락이 닿아야지 말이다. 종종 주시하고는 있었는데, 바빠서 그것도 영 시원찮고. 젠장, 상급신이라고 때려 칠 수도 없으니 원.” “하하하…” “크악! 나 무시하지 맛!!” 이제 완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라피스가 성난 목소리로 외쳤지만 그런다고 돌아봐줄 엘뤼엔이 아니었다. 역대 엘퀴네스 중 가장 도도하고 성격 더럽기로 유명했던 그다. 상급 신이 된 이후로 험악한 것들(마족)을 담당하면서 더 나빠졌다는 말도 있는데서야 어디 라피스가 상대나 되겠는가. 예상대로 아주 깔끔하게 무시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경외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봐, 인간. 네가 이번 엘의 유희상대인가?” “예? 아, 그…그렇습니다. 이, 이사나라 합니다. 지, 지극히 높으신 분을 뵙게 되어 영광…” “그거야 당연한거고. 뭐, 너한테도 상당히 볼일이 많았다만 지금은 반성의 기미가 넉넉해 보이니 넘어가 주마. 정신 차리고 처신 똑바로 하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계약을 중지 시켜 버릴 거다.”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다시금 창백한 빛을 띄웠다. 예전이라면 이런 경우 ‘네가 뭔데?’라고 되받아 쳤을 나지만 돌아올 대답을 뻔히 알아서인지 그다지 상관하고 싶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분명히 아버지가 그 정도의 참견도 못하냐고 그러겠지.’ 그러나 당연히 이런 사실을 모르는 라피스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무시당한 충격에 그가 나에 대한 이런저런 참견을 하고 있으니 더욱 화가 났던 것이다. “네가 뭔데 엘의 계약을 참견하는 거야! 신이라고 정령왕의 영역에 상관할 수는 없을 텐데?” “나는 가능해.” “뭐가 어째? 이 빌어먹을 초짜 신…어?” 그 순간 당장이라도 멱살을 움켜쥘 듯 엘뤼엔에게 덤벼들던 라피스는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 사람 마냥 멍한 표정이 되어 행동을 멈췄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도도한 얼굴이 어딘가 상당히 익숙하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장장 헤츨링 시절부터 목매던 바로 그 존재가 눈앞에 있는 것을…. 경악으로 벌어진 눈동자가 이보다 더한 놀람을 담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뭐, 뭐야. 너…어째…” “…?” “설마…에, 엘퀴네스??!!” 충격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라피스의 모습에 엘뤼엔은 잠시 고민하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러나 그다지 진지하게 대답할 생각은 없는 건지 턱 끝으로 나를 슬쩍 가리켜 보였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 도마뱀? 엘퀴네스는 여기 있을 텐데?” “제길! 그게 아니잖아! 그, 그 얼굴은!” “앙? 내 얼굴이 어때서? 흐음~ 네놈 면상보단 확실히 낫지. 설마 반했다는 건 아닐 테지? 오, 그래. 반했다고 하니 생각나는 놈이 하나 있군. 너 만한 시끄러운 도마뱀이 한 마리 있었었지, 아마.” 그러면서 혼자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직도 라피스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억하는 부분이 없는 것 같았다. 왠지 3천년동안 혼자서 열 낸 그만 불쌍해지는 느낌이랄까. 역시 이래서 반할 상대도 제대로 골라야 한다는 거다. 그러자 답답하단 듯이 가슴을 두드린 라피스는 정공법을 택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정체를 캐물었던 것이다. “너 설마 엘 전대의 엘퀴네스냐!!” “흐음,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한 치의 당황함도 없이 여유롭게 되묻는 모습에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린 그는 복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이유라니…그야 얼굴이 똑같으니까. 머리색이 달라지긴 했지만 분명…” “날 만난 적이 있었나?” “만난 적이 있었냐니…역시 전대의 엘퀴네스??” 놀란 것은 라피스만이 아니었다. 이사나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표정으로 이쪽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왕이 소멸하면 신으로 환생한다는 것은, 바로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정령계에서 조차 소문으로만 인식되고 있던 사실이었으니 그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설마 누가 한때 정령왕으로 이름을 날린 존재를 신으로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겠는가.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 불만이 많은 엘뤼엔으로서는 그다지 동조해 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그들에게 엘뤼엔은 삐닥한 시선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쥐어터지고 싶지 않으면 눈 깔아라.” “큭, 그러고 보니 이 더러운 성질머리까지 똑같잖아! 역시 전대의 엘퀴네스가 맞는 건가?” “뭐, 보시다 시피 그렇다 만은…넌 뭐냐, 도마뱀? 나를 어떻게 알지?” “…너를 어떻게…아냐고?” 이런….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처음 내가 소환되자마자 ‘날 알아요?’라고 물었을 때 굉장히 서운해 했었다. 장장 몇 십 번의 소환에도 얼굴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닦달을 했던가. 그때는 내가 본인이 아님으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현재의 엘뤼엔은 진짜 그가 원하던 엘퀴네스. 기억을 하지 못하면 당연히 충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척 화를 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반대로 라피스는 뚱한 표정으로 퉁명스럽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헤츨링 시절부터 엘퀴네스와 계약하기 위해 소환주문을 몇 십 번이고 외우던 드래곤이다. 기억 안나?” “아아, 네가 설마 라피스 라즐리? 나한테 보복한답시고 다른 드래곤들과의 계약을 방해했다는 그 썩을 도마뱀이냐? 덕분에 엘의 유희를 다분히 망칠 뻔한?” “흥, 어디가 유희를 망쳤다는 거지? 아무튼 난 이제 너한텐 볼일 없어. 소원하던 엘퀴네스도 손에 넣었으니까.” “손에…넣었다?” 딱딱하게 중얼거린 엘뤼엔의 미간이 꿈틀거리고 움직인 것을 느낀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급격히 표정이 없어진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하자 나는 무슨 의민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른바 ‘난 저런 자식 손에 들어간 적 없어!’라고나 할까. 그러자 분위기가 한결 여유로워진 엘뤼엔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인데?”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그가 내 것이 된 것은 변함이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네가 그와 친한 척 하는 현재의 상황이 상. 당. 히. 마음에 안 들어. 무슨 운이 좋아 신이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대면 전대답게 신계에만 얌전히 처박혀 있으라고.” ‘헉! 너 미쳤냐?’ 3천년이나 매달린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을 넘어 적대까지 보이는 라피스의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설마 그는 이제껏 ‘엘퀴네스’였기 때문에 그에게 집착했다는 소리? 그래서 엘퀴네스가 아닌 현 상황에서는 필요가 없다는 건가? 감동까지는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 정도는 표시할거란 초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는 순간이었다. 모욕이나 다름없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노려보던 엘뤼엔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천천히 뒤로 쓸어 넘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당장의 손속을 가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까부는 상대는 즉시로 척살하는 평소의 그 치고는 놀랄 만큼 관대한 반응이었다. “죽고 싶냐, 도마뱀? 이 자리에서 그대로 저승가기 싫으면 그만 닥치시지?” …물론 험한 말투는 숨길 수 없었지만 밀이다. 하지만 라피스가 어디 보통 드래곤이던가? 성깔이라고 하면 엘뤼엔 못지않은 그였다. 역시 만만찮은 기세로 쏘아붙인 대답이 흘러나왔다. “흥, 그렇게 말하면 누가 겁먹을까봐? 네가 아무리 그래도 엘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다. 바로 내가 그렇게 정했으니까.” “호오, 연애감정이냐?” “그런 건 너와 상관없을 텐데?” 눈을 번뜩이고 쏘아보는 두 존재덕분에 가운데에 끼인 나와 이사나만 죽어나갈 지경이었다. 특히 엘뤼엔의 경우, 감소시켰던 위압감을 다시 고스란히 드러내는 바람에 이사나가 거의 기절할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었다. 당황한 나는 얼른 라피스에게 소리쳤다.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아버지라는 엘뤼엔한테 성질을 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라피스 그만해! 엘뤼엔은 신이야! 당신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상대가 아니라고! 그리고 저번부터 말하는 거지만, 내가 왜 당신 거라는 거야? 물건 취급 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뭐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저 신의 편을 들 생각?” “네 쪽이 잘못한거잖아!” 먼저 시비 건 쪽이 한눈에 봐도 명백하거늘, 어디서 눈을 부릅뜨고 항의를 하는 건가. 불만어린 눈빛으로 쏘아보자 전혀 반성할줄 모르는 목소리가 울컥하고 튀어나왔다. “난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일러둔 것뿐이다. 잘못한거 없어.” “아하~ 그래서 남들 다 오해하도록 내 것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거냐? 내가 분명히 말 했을 텐데? 난 남성체니까 그렇게 대우해 달라고. 그런데 왜 하필 엘뤼엔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하필이라니…엘뤼엔의 앞에서는 해서는 안 되는 소리라 이건가?” 뭔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떨떠름하게 되묻는 모습에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어째서? 엘뤼엔이란 존재가 네게 어떤 의미가 되기에?” “어떤 의미라니?” 쪽팔리는 것도 상대를 봐서 쪽팔려야 한다는 건가? 누구라도 물건취급 당하는 모습을 보이면 황당해 하는 게 당연한데도, 라피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엘뤼엔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당히 골치 아픈 도마뱀한테 걸렸구나, 아들아. 후환이 없도록 죽여주랴?” “엑?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런 녀석은 두고두고 널 괴롭힐 타입이다. 미리 없애두는 게 나을 걸?” 흠, 확실히 예전처럼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는 게…상당히 끌리는 제안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 앞에 닥친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라피스는 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의 단어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들이라니?” “응?” “방금 엘뤼엔이 너한테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어?” “아아. 그게 무슨 문제라도?” 아직 이사나와 라피스에게는 엘뤼엔과 나의 관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던 나는,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바라봤고, 라피스는 점점 복잡한 표정이 되어갔다. 그러자 그 심정을 헤아려준다는 듯, 엘뤼엔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엘은 내 아들이다.” “……뭐?” “내 아들이라고, 이 썩을 도마뱀아. 그러니 함부로 대하면 그날로 죽을 줄 알아라. 봐주는 것도 이번뿐이니까.” “…엘뤼엔?”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처음 라피스를 가차 없이 날려버렸던 그 치고 지금은 지나치게 관대해 보였던 것이다. 모욕적인 말은 둘째 치고, 평소 자신보다 연배가 어린놈이 반말하고 들어오는 것에 굉장히 예민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지? 눈빛에 서린 한기를 보면 틀림없이 화난 상태인데, 크게 손속을 두지 않으려는 모습에 나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하- 웃기는 소리! 정령왕과 신 사이에 어떻게 부자지간이 형성된다는 거지? 그런 꼴 같지도 않은 관계를 인정해줄 존재가 얼마나 된다는 거야?” …라는, 상당히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라피스의 말에 엘뤼엔은 이곳으로 나타난 이후 한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훗-하고 미소를 짓는 얼굴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는 듯이 극한 희열로 가득 찬 상태였다. 설마 엘뤼엔…완전히 돌아버릴 때까지 화를 참고 있던 건 아니겠지? 슬며시 드는 불안한 생각을 애써 털어버리려 노력한 나는, 이후 입을 잘못 놀린 대가를 극명하게 받고 있는 한 존재를 바라보며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폐를 찌를 듯한 비명소리와 커다란 폭격음. 작렬하는 빛줄기와 함께 신전의 기도실이 무너져 내린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밤 샜습니다...ㅠ_ㅠ 이번에도 수정 못하고 그냥 올려요; 그래서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 많을지도; 어쩌면 너무 장면 전환이 빠르다거나, 표현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는..;(졸려서 제정신이 아니거든요;) 후후, 그러고 보니 빨간색을 좋아하냐고 물으셨던가요? ....네, 좋아합니다^-^ 그래서 드래곤들 중에서도 레드 드래곤이 가장 좋아요. 그 다음이 실버드래곤이라죠.ㅎㅎㅎ 그 때문인지 제가 쓰는 글의 주인공들도 빨간머리가 많아진다는;; (먼산) P.S- 참, 어쩌면 내일부터는 성실연재가 힘들어 질지도 모릅니다.. 요즘 날씨 때문인지 몸 상태가 나빠졌다는;; 의자에 오래 앉아있는게 힘드네요..ㅠ_ㅠ;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망연자실. 이 네 글자의 단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현재 엘뤼엔의 사제들은 모두 신전 안에서 나와 밖으로 대피한 상태였는데, 그들의 눈앞에는 처음의 위풍당당한 형체는 찾아보기도 힘들 정도의 하얀 돌 조각이 폐허가 된 잔해를 이루고 있었다. 엘뤼엔이 무너뜨린 기도실이 알고 보니 신전 전체를 이루는 대들보중 하나가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것이 쓰러졌으니 건물 전부가 붕괴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사제들, 특히 루얀이란 이름의 대신관은 창백한 표정이 되어 할말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쓰러진 건물에만 신경 쓰느라 어느새 우리 일행이 한 사람 더 늘어났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참동안 하늘과 땅을 오가며 기도하던 시선은 우리들(정확하게는 나와 이사나)가 죄책감에 질식할 무렵이 되어서야 간신히 더듬거리는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게…도대체…” “아…죄, 죄송합니다. 그저 사소한 다툼이 잠깐…” “사…소한 다툼이라고요?” 그러면서 다시 빤히 무너진 신전을 바라보는 모습에,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자세한 사정이야 어찌됐든 이 모든 사태는 전적으로 그가 벌인 일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열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이런 건물 안에서 신력을 무자비하게 날려댔으니, 무너지지 않았으면 그것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이다. 신전이 붕괴되도록 라피스를 패놓고도 기분이 풀리지 않아 계속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엘뤼엔은, 내가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곧 한숨을 내쉬며 항복하듯 두 손을 살짝 들어보였다. “조금 과격했다는 건 인정하마.” “…그렇다고 건물을 죄다 부셔놓을 건 없잖아.” “저 자식이 날 자꾸 열 받게 하니까 그렇지.” 신경질 적으로 가리킨 손가락 끝엔 기절 상태로 누워있는 라피스가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심하게 맞은 건지 굳게 감겨진 눈이 좀처럼 떠질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하긴, 정령왕인 나도 꼬박 하루 종일을 기절해 있다가 일어났었으니 그라고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아까 맞은 양으로만 치면 적어도 일주일 후에나 깨어나게 될 지도 몰랐다. 쌤통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엘뤼엔의 신력이 얼마나 아픈지 아는 나로서는 약간은 안쓰럽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게 바로 동변상련이라는 건가? 엘뤼엔이 소리치는 말에 멍한 표정으로 건물의 잔해만 살펴보던 사제들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이제야 우리 일행 중에 낯선 사람이 추가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로서는 갑자기 늘어난 일행의 숫자보단, 그가 신전을 무너뜨린 범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한 듯 보였다. “건물을 부수어 놓다니…그럼 기도실이 무너진 건 이분 때문입니까?” 자신들의 터전을 완전히 망친 사람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꿋꿋하게 존칭을 사용하는 루얀의 모습엔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올 정도였다. 그 모습이 기특했는지 엘뤼엔은 한결 느긋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끼었다. “흐음, 네가 대신관인 루얀인가? 올해로 나이 25살인?” “그렇…습니다만, 신전을 부수신 이유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신의 터전을 상하게 하시다니…엘뤼엔님의 분노를 살까 두렵습니다.” 또박또박 대답하면서도 그는 자신들의 앞에 있는 금발의 남자가 엘뤼엔 본인일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적인 신성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어느 누가 신의 강림이 이렇게 쉽게 일어날 거라 생각하겠으며, 정작 강림한 신이 자신의 신전을 부수는 사태가 일어날 거라 짐작하겠는가. 사제들이 몰라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엘뤼엔 특유의 오만한 분위기에 휩쓸려서인지 섣불리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살피는 사제들의 모습을 본 엘뤼엔은 피식 미소 지으며 볼품없이 무너진 그의 작품을 돌아보았다. “아주 깨끗하게 쓰러졌는걸? 이 기회에 신전을 다른 곳으로 옮겨버릴까?” “헉? 무슨 소릴? 신전을 옮기 다니오!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호오, 권한이 없다고?” 흥미롭게 반짝이는 엘뤼엔의 눈빛을 눈치 채지 못한 루얀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이 신전은 엘뤼엔께서 직접 세우신 것. 저희는 계시를 받고 이 자리에 모여 있던 그분의 종들 일 뿐입니다. 그분께서 세우신 신전을 임의로 옮기는 행동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헤에? 이 신전을 엘뤼엔이 직접 세운 거라고? 하긴, 이런 험한 지형까지 돌을 옮겨다 건물을 짓는 건 인간의 상식으론 불가능한 일인 것 같았다. 그래서 신계에 있는 그의 신전과 모양이 비슷한 건가하고 짧게 감탄한 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머금고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럼 직접 세운 그 신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건 불만 없겠군.”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아직 저는 엘뤼엔님께 그러한 사실에 대한 계시를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우리가 엘뤼엔의 손님으로 왔다는 사실 때문일까? 사제들은 불쾌하단 듯이 미간을 모으면서도 끝까지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래도 마음속 깊은 곳에 잠식된 분노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던 듯, 꽉 움켜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엘뤼엔에게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신전을 옮기는 건 무리잖아? 이 사람들이 지낼 곳도 필요하고. 이왕 지어 놓은 건데 다시 복구 시킬 수는 없는 거야?” “평소라면 그랬겠지. 저 썩을 녀석이 초라하다 뭐다 떠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쿡쿡. 뭐야~ 그런 걸 마음에 두고 있었어? 나는 마음에 드는데. 설원 위에 세워진 새하얀 신전이라니, 뭔가 환상적이잖아?” “흐음, 그래?” 내 칭찬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신전을 다시 보수하기로 결정했다. 아들이 좋다는데 다른 잡것들(라피스)의 의견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다나?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제들이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여유롭게 돌아선 엘뤼엔의 입에서 단 한마디의 단어가 나온 순간, 잔해가 된 돌덩어리들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복구】 우르릉거리는 소음과 함께 날아오른 돌들은 점차 차곡차곡 쌓이며 본래의 형태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서 신전을 이뤄가는 모습은, 마치 돌덩이가 스스로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경악한건 사제들만이 아니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이런 식으로 신전이 복구될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언령일 뿐이야. 상급 신정도 되면 어지간한 산 정도는 말 한마디로 만들 수 있지. 차원전체를 만드는 주신께 비할 바 하겠냐 만은….” “헤에. 정령왕이 쓰는 언령과는 수준이 다른 것 같은걸?” “정령왕은 인간 세상에 내려올 경우엔 힘의 제약을 받으니까. 정령계에서는 신과 거의 동급의 언령을 사용할 수 있어.” “그렇구나.” 그럼 나도 정령계에서는 말 한마디로 건물을 만들 수 있다는 소리인가? 호오, 그거 정말 굉장한 걸?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점을 가지고 감탄할 수 없었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사제들이 모두 흙빛이 되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던 것이다. 루얀과 카이 씨는 이미 훨씬 전에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진 상태였다. 아마 드디어 엘뤼엔의 정체를 깨달은 듯 보였다. 사실 조금 늦은 감이 있는 반응이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남자. 그것도 흔치않은 잘생긴 외모에,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풀풀 뿌리고 있는 존재를 평범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가. 그럼에도 그들이 뒤늦게야 눈치 챈 것은, 말했다 시피 ‘신’의 강림이란 게 워낙 흔치 않은 현상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인간이 이렇게 쉽게 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는가. 내가 만약 저들과 같은 입장이었다 해도 별 다른 반응을 보이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었는지 루얀은 침착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보며 좀더 확실한 확인을 요구했다. “미천한 존재가 감히 청하옵니다만, 사실대로 말씀해 주십시오. 형벌의 신…엘뤼엔님이 맞으십니까?” 담담한 척 애를 쓰고 있어도 눈동자와 목소리는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을 주시하는 사제들을 힐끔 바라 본 엘뤼엔은 신전이 전부 완성되었다 싶자 지나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깨닫고 있는 사실에 확인을 요구할 필요는 없다. 오늘 본 일에 대해서는 함구하라.” “오오! 엘뤼엔님!!” “세상에! 나의 신이여…” 감격한 얼굴로 고개를 조아리는 사제들. 엘뤼엔이 감춰두고 있던 그의 신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순간은 바로 그 때였다. 파앗- 햇빛보다 강한 빛이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커헉!” “허어억!” 나조차도 움찔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존재감이었다. 그 바람에 엎드려있던 사제들 대부분이 그대로 기절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도 흘러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 흐느끼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질 환자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입에 거품을 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엘뤼엔은 좀처럼 드러낸 존재감을 거둘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아니, 그러긴 커녕 터져 나오는 빛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었다. 이젠 누가 빛이고 누가 사람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빛 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에, 엘뤼엔?”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눈부신 빛 속에 잠겨있던 그의 형체가 살짝 움직였다. 나를 향해 내밀어진 손(이라고 추정되는 부분)을 잡았더니,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따스한 체온이 그대로 옮겨지고 있었다. 느낌만으로 치면 빛 덩이와 닿아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를 자신 쪽으로 바짝 끌어당긴 엘뤼엔은 잠시 후 난처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다. 존재감을 감추는 것도 더럽게 힘들군.” “엑? 정말? 그럼 지금 신계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아아. 모처럼 만인데 미안하다. 신들은 인간 세상에 오래 동안 못 내려와 있거든. ‘능력의 제한’이 있는 정령왕과 달리, 신들은 머물 수 있는 ‘시간의 제약’이 있어. 아무리 그래도 하루 정도는 될 텐데…언령을 써서 그런가? 엄청 당겨졌군.” 투덜거리는 엘뤼엔의 목소리는 현재 상태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 같아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꽉 잡았더니 피식-미소를 흘린다. 그리곤 마치 어린애를 다루듯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것이 아닌가. 이건 또 뭐하는 짓이지? 하는 시선으로 올려다봤지만 이제 눈앞엔 거대한 빛 덩어리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엘뤼엔의 형체가 사라질수록 그나마 버티고 있던 사제들도 그의 존재감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있었다. 대신관 루얀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전부 정신을 잃자, 엘뤼엔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이라 추정되는 부분)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익숙지 않은 열기가 미간 위의 피부를 뜨겁게 달구었다. “……뭐야?” “이번 유희에 필요한 거. 이게 필요해서 나 만나려고 했던 거 아니었나, 아들?” “응? 아! 설마 신의 문장?”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분명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것 이란 느낌이 들었다. 잠시 동안 이마위에 머물던 열기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어색한 기분에 만지작거리고 있으려니 재미있다는 듯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흠, 엘퀴네스한테 신의 문장을 내려준 신은 아마 내가 처음일걸?” “엥? 어째서? 그 동안 다른 엘퀴네스들은 한번도 사제가 된 적이 없었단 말이야?” “음…역대의 물의 정령왕들은 자존심이 강했거든. 그래서 다른 존재한테 부탁 하는 걸 상당히 싫어했지. 사실 신관은 정령왕이 하기에 적합한 유희가 아니야. 치유능력이 없는 몸으로 사제가 되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으니까.” “하지만…마신교의 사제들은 치유능력이 없다고 하던데?” “그거야 그렇지. 대신 마족들과 계약해서 그 능력을 부릴 줄 알아야 해. 정령왕들이 일일이 유희를 도와줄 마족을 찾아다니는 것도 우습지 않아? 그들이 정령왕을 소환한 경우라면 모를까.” 하지만 마족이 정령왕을 소환할 확률은 드래곤이 바늘에 찔려 사망할 확률보다 적다고 했다. 워낙 자연과 친숙하지 않은 족속들이라, 정령과의 친화력이 눈꼽만큼도 없다나? 파괴와 살상을 주로 이루는 존재라니 쉽게 도움을 청하는 것도 어려웠고 말이다. “흐음…마족들은 어떻게 생겼는데? 신족들은 인간하고 별 다를 게 없었는데 말이야.” “마족도 마찬가지야. 아니, 오히려 상당히 아름답지. 외관이 아름답다고 방심하면 큰 코 다칠걸? 녀석들은 아름다울수록 고위급의 힘을 가지고 있거든. 아마 죽음의 숲 근처에 가면 한 두 놈쯤은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제 2의 마계라 불리는 바이톤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족들은 다른 차원에도 수 십 명씩 놀러 다닌 다고 했다. 아크아돈의 죽음의 숲은 바로 그렇게 휴양(?)온 마족들이 마음 편하게 머물기 위한 공간이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숲 안에 마을이라도 지어놨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실제로 놀러왔다가 아주 눌러 살게 되는 녀석들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럼 이만 가봐야겠다. 아, 모를까봐 미리 말해두는 건데, 이제부턴 그 문장을 통해 나와 언제든 대화할 수 있을 거다. 저 썩을 도마뱀이 괴롭히면 곧 바로 연락해라.” 아직 완전히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나직한 살기가 흐르는 목소리에 나는 그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도 아들의 동료랍시고 기절선에서 끝내준 그의 자제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말이다. 그 뒤 엘뤼엔은 종종 연락을 취하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를 감싸고 있던, 눈앞을 현란하게 만들던 빛 덩어리들 까지 모두 공중으로 분해 되고 난 후였다. 한참동안 그가 사라지고 난 장소를 멍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윽고 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사제들을 보고는 허무하게 중얼거렸다. “…이 사람들을 안으로 다 어떻게 옮기지?” 그야말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이사나와 사제들이 정신이 차린 건 그로부터 약 1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라피스에게서 뽑아낸(?)마나로 정령들을 불러내서 그들을 신전 안으로 옮겨뒀던 나는, 하나 둘 씩 정신을 차리는 신관들을 보며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질문들을 대비하느라 잔뜩 긴장했다. 흔치않은 신의 강림 이었으니, 나와 엘뤼엔의 사이부터 제일 먼저 캐물을 것을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깨어난 그들은 기절하기 얼마 전부터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곤란해 질 것을 염려한 엘뤼엔이 미리 손을 써두었던 모양이었다. “저희들이 어째서 이런 곳에서…아, 엘님. 기도는 다 끝나셨습니까?”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대신관 루얀은 나와 눈이 마주치곤 서둘러 그렇게 물어왔다. 우리가 기도실에 들어간 직후부터의 기억이 사라진 듯싶었는데, 손님을 모셔놓고 잠이 들었다며 한참이나 자책하는 것을 괜찮다고 말렸더니, 내 얼굴(정확하게는 이마)을 보며 그대로 경악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근처 에 있던 다른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세…세상에, 신이시여!” “오오! 어떻게 이런 일이!” “맙소사…” “…무, 무슨?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라이, 왜 그래?” 하나같이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모습에 당황한 나는,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이사나까지 덩달아 놀라는 것을 보며 불안하게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한 손을 들더니 여 보라는 듯이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무런 설명 없는 간단한 동작이었지만 내가 지금의 상황을 인식하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설마 엘뤼엔…이 아버지가! “혹시…신의 문장이 이마에 새겨진…거야?”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이사나 뿐만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모든 사제들까지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고위 신관일수록 신의 문장은 눈에 뜨이는 부위에 새겨진다. 대신관이라는 루얀조차 손등에 새겨진 것을, 나는 정면으로 드러나는 이마에 받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가 문장을 새길 동안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오르자, 나는 낭패감에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제기랄, 엘뤼엔! ‘자식 사랑도 적당해야 한다는 거 몰라?’ 차마 터뜨릴 수 없는 원성을 삼키며 허무한 웃음을 흘리고 만 나였다. ====================================================== 에에.. 일주일간 잡혀있던 계획이 예상치 못하게 취소되었습니다^^; 그래서 빨리 돌아오려고 했습니다만...글이 안써지더군요..-_-;;; 부랴부랴 간신히 한편 만들어서 올립니다^^ 으음. 근데 엘뤼엔이 좀 빨리 사라지나요? 하지만... 이 녀석(;)은 처음부터 엘에게 문장을 주는 것 외에는 역할이 없어서..어쩔수 없었다죠;; 다음 등장 기회를 노리는 수밖에요.허허허;;;(과연 언제가 될지;)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역사가 짧은 엘뤼엔의 신관을 제외하고도, 역대의 수많은 사제들을 통틀어 얼굴에 신의 문장을 받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것이 대 신관 루얀의 설명이었다. 그것도 대부분 날 때부터 문장을 받은 이들로 차기 법황(교황이라고도 한다), 또는 현재의 대 신관이 되는 이들에 한해서였다. 나처럼 10살이 넘은 나이에(실제는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지만) 일반인으로 살아온 시간이 긴 사람은 신의 문장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로도 충분히 기적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얼굴 부위에 받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다고, 엉뚱한 타인이 한순간에 대 신관의 위치를 뛰어 넘어 버린 것이다. 현재 엘뤼엔의 신전은 국교화가 되지 않은 관계로 대 신관 외에 따로 사제들을 통치하는 교황의 존재가 없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어쩌면 내가 그들 중에 가장 높은 사람이 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 증거로 아까보다 훨씬 대접이 지극해진 사제들을 보며 나는 결코 평탄치 않을 앞날을 예감했다. 때문에 가장 먼저 물어본 질문이란 것이 바로… “솔트레테는 마신을 유일신으로 섬긴다고 알고 있는데요. 다른 종교를 배척하지는 않나요?” 지금까지 일정을 통해서 본 사람들의 반응으로는 딱히 마신이라고 해서 더 섬기거나, 다른 신이라고 거부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그렇게 물었다. 원래 어떤 종교든 말단보단 지도부측에 속하는 인간들이 더 위험한 법이다. 다른 몇 백의 신도보다 한사람의 지도자를 잡는 것이 탄압을 하는 것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얍삽하다고 욕할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유지시킬 생각은 없는 나였다. 당장 엘뤼엔을 다시 호출하는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지워버리고 말리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희망적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마음속 밑바닥엔 마신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다른 신전을 배척하거나 밀어내지는 않습니다. 이번 10년 재앙을 거치면서 그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죠. 그나마 솔트레테는 교황의 권력이 강해 모두 조심하고 있지만, 다른 제국은 피해만 주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라도 받아들이는 추세입니다.” “흠, 이를테면 모든 신은 평등하다…라는?” “약간의 높낮이는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쉽게 무시하거나 경멸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지구에 비해 신의 개입이 자유로운 아크아돈은 오히려 유일신을 섬기는 것이 더욱 무리였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어떤 제국, 어떤 왕국을 가도 신관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일반 귀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했다. 일단 신의 문장을 받은 것만 확인 되면, 여행 시 영주의 저택에 머물 수 있는 권한까지 획득된다는 것이다. 이전에 변태귀족에서 시비를 당했을 때, 카이 씨가 일행 중에 속해 있었다면 훨씬 간편하게 물리칠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엘뤼엔의 고위사제라고 하면, 마신교의 법황이라고 해도 쉽게 대하지 않는다니 말이다. 처음 루얀은 내가 왜 그런 것을 묻는지 궁금해 하는 눈치였지만, 곧 여행 중이란 사실을 자각했는지 침착하게 설명했다. “엘님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로서 대 신관의 자격을 수여받으실 수 있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엘님에게 새겨진 문장을 보면 신전의 실세라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아무리 타 종교를 배척하지 않는 풍토라 해도, 여행 다니실 때 불편하신 점은 감수하셔야 할 겁니다.” “하아…역시 그런가요?” “신전에 계시기를 권유하는 바입니다만, 지금까지의 일정이 있으니 쉽게 결정하긴 어려우시겠지요. 정 귀찮으시면 앞머리를 내리거나, 서클렛을 통해 가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서클렛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말에 옆에 있던 이사나가 이마를 장식하는 보석류라고 설명했다. 대부분 귀족들이 착용하는 것으로, 쉽게 떨어지지 않게 고정되기 때문에, 앞머리보다는 그것으로 가리는 편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이다. 거의 500원 짜리 동전 크기만한 문장을 무난히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보석 알이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말이다. 상인들의 천국이라는 클모어에 설마 그 정도의 서클렛 하나 없겠는가? 일단 구입하기 전까지는 앞머리로 가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참, 그러고 보니 라피스는? 아직도 못 일어났어?” “으응.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좀처럼 눈을 못 뜨던데…” 사제들과 마찬가지로 기억이 사라진 이사나가 걱정스럽게 물어왔지만 그의 프라이드를 존중하는 셈치고 그냥 입을 다물었다. 신한테 까불다가 죽도록 얻어터졌다고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아마 그의 일생 최고의 수치로 기록되는 사건이지 않을까 싶다. “좀 불미스러운 일이 약간….별거 아니야. 그나저나 신력으로 다친 것도 치료가 될까 모르겠네.” “신력으로 다치다니?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그냥 기절한 게 아니라 어디가 아픈 거야?” “음, 확실하게는 않지만 내상을 입었을 거야, 아마. 우선 치료부터 해보고 안 되면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엘…어쩐지 점점 사악해 지는 것 같아…” 훗. 너도 그 징글징글한 자식한테 한번 이리 채이고 저리 채여 봐라. 고운 말이 입에서 나오나. 솔직히 일정이 급하지만 않았어도 치료 같은 건 시도하지도 않았을 거다. 이왕 이렇게 된 거…알아서 쫓아올 때까지 내버리고 가버려? 상당히 솔깃한 유혹이 치밀어 올랐지만 미운 놈 떡 하나 주는 셈치고 치료해 보기로 했다. 방문하는 손님들을 위해 마련해 둔 숙소로 가니 침대위에 떡하니 누워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보였다. 이사나의 말처럼 아무런 흉터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 그냥 잠들어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평온한 모습이다. 잘생긴 얼굴이니 입만 다물고 있으면 상당히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을 텐데…. 속으로 혀를 끌끌 찬 나는 곧 녀석의 복부에 손을 올려놓은 뒤 치료를 시작했다. 【회복】 파아앗- 밝은 빛이 터져 나와 라피스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지만, 눈에 띄는 외상이 없어서인지 치료가 제대로 된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대충 충분하다 싶을 정도의 힘을 퍼부어줬는데도 도무지 반응이 없자, 나는 그가 알아서 눈을 뜰 때까지 내버려 두기로 작정했다.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실하지 않는 것에 진을 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설마 진짜로 일주일 뒤에 깨어나지는 않겠지.” “왜?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거야?” 치유술을 사용했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는 라피스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이사나는, 내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심각하게 되물었다. 트로웰을 꼭 닮은 황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안심시키기 위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니까 괜찮을 거야. 이래봬도 드래곤인데 곧 눈을 뜨겠지.” “흐음. 그럼 라피스가 일어날 때까진 이곳에 머물러야겠네?” “응, 뭐 어쩔 수 없지. 그냥 내버려두고 갈수는 없으니까.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좀 쉰다고 생각하자. 그 동안 편하게 논 적 거의 없었잖아?” 속단은 금물. 클모어까지 별 탈 없이 왔다 하더라도, 이 다음의 일정 역시 순탄할 것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정작 이곳까지 와서 후작의 도움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쩌면 이미 그 사이에 후작이 대공의 편으로 돌아섰을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앞으로의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만큼은 아무생각 없이 편히 쉬어두고 싶었다. 이사나도 같은 심정인지 크게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만약 후작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글쎄…사실 이곳에 와야겠단 결심을 굳힐 당시만 해도, 카웰형님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그냥 포기해 버릴 생각이었는데…이젠 아니야. 날 믿고 지켜준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수도로 돌아가겠어.” “후훗, 여전히 내 도움은 필요 없고?” “이미 받을 대로 받고 있는 걸. 사실 엘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도 힘들었을 거야.” “그건 동료로서 당연한 거고. 뭣하면 네가 정령왕의 계약자라고 밝혀도 괜찮아. 나는 상관없으니까.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처지는 아니잖아?” 운도 하나의 실력이다. 고로 나를 소환하게 된 이사나의 운도 실력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그가 나를 이용해서 황권을 되찾든, 세계를 정복하든, 그것역시 그의 실력으로 봐줘도 무방했다. 자존심이 강한 이사나는 그 점을 상당히 민망스러워 하는 것 같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막상 후작으로부터의 지원을 약속받지 못하면, 녀석은 어쩔 수 없이 라도 ‘정령왕’인 내 존재를 이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불어 드래곤인 라피스의 힘 역시. 이용할 수 있는 대로 모두 이용하고 보는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려진 밥상을 못 먹는 쪽이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사나가 그 단계를 잘 조절할 수 있기만을 바랄뿐이었다. 라피스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4일 뒤, 그것도 사람들이 한참 단꿈에 젖어 있을 새벽 무렵이었다. 마침 그의 상태를 보려고 침대 곁에 다가갔던 나는, 아무런 미동 없이 눈만 시뻘겋게 뜨고 있는 그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라 헉-하고 숨을 삼켰다. 정신을 차렸으면 차렸다고 기척이라도 낼 것이지, 눈만 뜨고 누워있을 건 뭐란 말인가? 멍하니 나를 돌아본 라피스는 잠시 후, 내가 괜찮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잔뜩 쉬어터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자식은?” “응?” “그 자식 어디 있냐고. 그…엘뤼엔…말이야.” “엘뤼엔? 신계로 돌아갔는데.” “뭐?” 벌떡. 4일이나 꼼짝 않고 누워있던 놈치곤 지나치게 멀쩡하게 일어나는 것을 보며 놀라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내가 치료술을 시전 해줬다는 것을 상기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인 치료는 무리였어도, 일단 통증은 가라앉힌 셈인가…. 그러나 그런 숨겨진 노고(?)를 전혀 모르는 라피스는 그저 엘뤼엔이 없다는 사실 하나로 분개하여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비겁한 자식. 반격의 틈도 주지 않고 팬 다음에 튀었다 이거지. 감히 25년짜리 초짜 신 주제에! 뿌득” “그 정도로 감사해. 더 쥐어 패려는 걸 참는 것 같았으니까. 말해두지만, 이번 일은 라피스 네 잘못이 컸어.” “내가 뭘?” 억울한 듯이 돌아보는 라피스의 표정엔 일말의 자책감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저 엘뤼엔만 죽일 놈이라는 건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자꾸 그의 성질을 건드렸잖아. 먼저 시비 건 쪽이 너라는 생각 안 들어? 오랜만에 만난 건데 말을 그 정도밖에 못해서야, 원. 그러니 이전에도 계약을 안 해줬지.” “흥, 이미 과거의 일일 뿐이야. 물의 정령왕이 아닌 그에겐 관심 없어. 그러니 상냥하게 대해줄 필요도 없다고.” “…그럼 나도 엘퀴네스에서 물러나게 되면 상관없다는 소리?” “그거야 당연하지. 하지만 엘뤼엔에게 정말로 화난 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야. 같지도 않게 네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잖아? 아들이니 뭐니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하아. 그러니까 자기 물건을 넘봐서 기분이 나빴다 이건가? 엘퀴네스를 향한 그의 집착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완벽하게 ‘물의 정령왕’만을 원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상대방을 향한 관심법이 서투르다고 생각한 게 잘못이었을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미안한데…엘뤼엔 말이 맞아. 일단은 내가 그의 아들이라고 되어있으니까 말이야. 비록 양자이긴 하지만.” “뭐? 너까지 그의 말도 안돼는 장단에 놀아나고 있는 건가?” “글쎄.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건, 너보단 그가 더 나를 생각해 준다는 거지.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물건’보단 ‘아들’취급이 더 좋거든.” “…물건이라고 하진 않았어.”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긴 해도 찔리긴 찔리는지 표정이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아주 양심이 없던 건 아닌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부족한 게 많은 정령왕이라도, 당신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닐 이유는 없어. 물건 취급은 더 더욱 사양이야. 동료로서 받아주는 행동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그 점 명심해 줬으면 좋겠어.” “못하겠다면? 그럼 계약을 다시 해지할 텐가?” “그거야 당연한거 아닐까? 더불어 앞으로의 유희에 지장이 생긴다는 판단이 생겼을 시 그에 따른 조취도 서슴지 않을 생각이야.” “호오, 죽이기라도 하겠다고?” “적어도 드래곤 본체의 모습일 때라면 ‘살해 한다’라는 자책은 받지 않겠지.” 직설적으로 ‘그렇다’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이미 충분히 뜻은 전해졌을 것이다. 나도 이렇게까지 막 나갈 생각은 없었지만, 전혀 반성 없는 그의 태도로 봤을 때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나도 모르게 격해진 감정으로 응수한 것이 꽤나 효과가 좋았던 모양인지 라피스는 천천히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반쯤은 분한 듯이 투덜거렸다. “기절했다가 일어난 사람한테 걱정의 말은커녕 살벌한 협박부터 건네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일어나자마자 엘뤼엔을 욕한 네가 더 나빠. 조금은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라고. 물의 정령왕이 아니니 상냥하게 대해줄 필요가 없다니. 너야말로 너무하다는 거 알아?” “쳇. 사실을 말한 것뿐인데…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소리는 내가 노려보는 눈빛에 눌려 그대로 쑤욱 들어가고 말았다. 질린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제 서야 딱딱하게 굳히고 있던 안색을 조금 풀었다. “맞은 덴 어때? 아픈 곳 있어?” “이제 서야 물어보는 거냐? 너 말이야. 정령왕 주제에 아버지를 챙기는 것도 좀 웃기지만…당장 현재의 동.료.에 대한 태도가 너무 무르다는 생각 안 들어?” “멀쩡한 모양이네. 그럼 문제없지? 아침 되면 신전을 내려갈 생각이니까 준비 해 둬. 네가 안 일어나서 벌써 4일이나 신세지고 있었다고.” “뭐?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경악하는 라피스에게 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러면서 ‘일주일은 더 기절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깼다’며 친절한(?) 설명을 추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신에게 맞아서 기절한 드래곤이라니…아무리 생각해 봐도 웃기지 않은가? 덕분에 라피스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마냥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그런 주제에 하나도 아픈 곳이 없다는 것을 단순히 자신의 신체적 조건이 뛰어나서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으윽! 그 빌어먹을 초짜신! 다음에 두고 보자! 감히 나를 4일이나 의식불명의 상태로 만들어? 드래곤 종족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박살을 내주고 말테다!” …저건 나도 일어나자마자 생각했던 말이었으니 딱히 꼬투리를 잡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사실 그가 아무리 애써봤자 엘뤼엔의 상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라피스는 무심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나의 이마를 향하고 있었다. “뭐냐, 그게? 신의 문장을 이마에 받으면 어쩌자는 거야? 눈에 띄려고 작정했어?” “아아, 그게…엘뤼엔이 좀 오버한 모양이야. 아무래도 가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아.” “나 참. 그 녀석은 신 주제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정말이지 어쩔 수 없군. 기다려 봐.” “……?” 툴툴 내뱉듯이 말한 그는 그 상태로 한 손을 내밀어 공중의 한 곳을 휘젓기 시작했다. 꼭 파리를 쫓아내는 듯한 볼 품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행동이 끝났을 때 그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둥그런 물건이 들려있었다. 은으로 꼬아진 둘레에 푸른색의 촘촘한 보석알로 이루어진 그것은, 가운데에 야구르트 밑 바닥만한 크기의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었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새가 보석을 볼 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상당히 값비싸 보였다. 갑자기 등장한 정체불명의 물건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것도 잠시. 나는 곧 라피스가 그것을 내 이마에 씌워주려는 것을 느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이거 서클렛?” “보면 몰라?” “헉. 이게 갑자기 어디서 난거야? 분명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잖아.” “아공간에 저장해둔 내 개인 수집품중 하나야.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인가? 마황국 황실의 보물이었지. 인간들에게는 황금시대의 유산이라고 알려진 모양이다만.” ===========================================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러가지 일로 마음이 심란해서 타자가 안 쳐지더라구요.-_-;; 지금도 간신히 한편 분량 만들었다는;; 세기의 천재라고 알려진 작가라고 해도 모든 독자들의 구미를 맞출수는 없는 거겠죠? 사실 초반엔 많이 흔들렸지만 이제 마음 다잡기로 했습니다. 요구하는 대로 끌려다니게 되면 글이 오히려 망쳐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언과 지적을 해주신 분들께 정말정말 감사하고 죄송스럽지만, 일단은 초반에 제가 설정해둔 대로 밀고 나가볼 생각입니다; 지금 들은 지적들은 모두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후에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습니다^^(자신은 없지만;;) 참, 엘퀴네스 설정 중 바뀐 부분 있습니다^^ 금전에 대한 것인데요. 초반엔 500실링에 1실버, 200실버에 1골드. 평민노동자 하루 품삯이 10실버였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중세시대 평민 치고는 너무 많이 번다는 판단.-_-; 수정했습니다. 500실링에 1실버, 100실버에 1골드. 평민 노동자 하루 품삯은 (굳이 받는다고 했을때) 50실링이며, 일반인들은 평생을 가도 1골드를 모으기가 힘듭니다. 처음 엘퀴네스가 보석을 팔고 받은 금액도 80골드로 바꿨구요,(그래도 역시 많다는;) 물 값도 한 동이에 10실링으로 바꿨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시고~ 활기찬 월요일 맞이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5권!!!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출판본을 안 보신 분들을 위한 전편 줄거리.> 엘퀴네스 일행은 엘뤼엔과 헤어진 뒤 무사히 후작의 성으로 침투(?)합니다.^^ 후작은 이사나를 도와줄 의지를 보이지만, 그를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하죠. 왜냐하면 이사나가 예전에 폐인 정치(..쿨럭)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정이 나빴다곤 해도, 백성에게서 등 돌린 황제는 언제고 다시 배신할 수 있다고 하면서, 이사나의 양심을 사정없이 몰아붙입니다. 그러자 이사나는 반박하며,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말 하지요.^^ 후작은 마음의 결심이 확고해진 이사나를 보면서 기뻐합니다. 드디어 제정신 차렸다는 걸까요.(훗)-사실 그렇게 대답하길 노린 겁니다.- 엘은 그 모습을 제 자식 보듯 아주 기특하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후작의 여동생에게 은근슬쩍 추파를 던지고 있던(?) 라피스의 질투빔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계약 해지할텨?"라는 엘의 협박에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말지요. 바로 그 다음 상황이 아래에 이어집니다^^ 한편, 무언가 심상치 않은 꿍꿍이를 꾸미고 있던 마족들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마왕은 악신이 되기 위해 대공과 손을 잡고 1만명에 해당하는 어린아이를 재물로 삼습니다. 그러나 마계 4대 공작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마왕 혼자 비밀로 진행시키는 프로젝트(?)거든요.^^ 마계 4대 공작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루카르엠은 굉장히 강한 힘을 지녔지만 왕의 자리에 욕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족이 누구입니까! 욕심 없다고 그냥 고이 놔 둘 종족들이 아니죠. 그래서 마왕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루카르엠과, 정령왕 엘퀴네스를 동시에 처리하기 위해 이사나 사살 계획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사실 마왕이 노리는건 이사나 죽음보단, 루카르엠의 제거입니다. 엘퀴네스가 이사나의 죽음을 얌전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되면 십중팔구 루카르엠이 죽을 수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정령왕도 큰 타격을 입길 바라는 거죠^^ 대충 전편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 글 이어집니다^^ ================================================================================ “후후후, 무슨 대화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세요?” 투닥거리던 우리를 향해 말을 걸어온 사람은 후작의 여동생인 에이프릴이었다. 그러자 라피스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듯이 금새 얼굴 표정을 바꾸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다. 인간의 안면근육이 어찌 저리 순식간에 뒤바뀔 수 있는지, 새삼 인체의 신비에 대해 조사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별 일 아닙니다. 그나저나, 후작각하께서 꽤나 기뻐하시는 것 같군요.” 없는 자리에선 이놈 저놈 잘만 불러대던 녀석이, 고작 여자에게 잘 보일 작정으로 ‘각하’란 칭호까지 다는 것을 보자니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녀석의 본질을 알 리가 없는 에이프릴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그저 수줍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폐하를 가장 많이 걱정하시던 분이니까요. 지금 이렇듯 성장한 모습을 보았으니, 기쁘실 수밖에요. 아마 천하를 다 가지신 기분일 겁니다.” “하긴, 주군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보다 즐거운 일은 없겠지요. 이거 후작각하가 부러워지는 군요.” “어머? 라피스님… 이렇게 불러도 되지요? 라피스님은 마법사라고 들었는데요. 그런데도 주군을 섬기는 기사의 마음을 이해하신 다는 건가요?” “하핫. 기사만이 주군을 모시는 건 아니랍니다. 마법사라 하여도 얼마든지 주군을 모실 수 있지요. 저 역시 주군을 찾아 헤맨 지 몇 년이나 되었으니까요.” ‘맙소사…주~구~운? 네 입에서 그딴 말이 나오다니. 진정 하늘이 두렵지 않냐, 라피스?’ 기가 막힌 내 시선에도 녀석은 뻔뻔할 정도로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내 장담하지만 놈은 다른 사람을 섬길 바엔 차라리 죽는 것을 선택할 타입이다. 일족 안에서 천재라 일컬어지며 떠받들어 살아온 탓인지, 자신외의 잘난 존재는 절대 두고 보질 않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주군이라니? 내숭의 강도치고는 너무 심각한 게 아닌 가 절로 생각이 들었다. “어머, 제가 실례를 한 것 같네요. 그러신 줄 모르고….” “아닙니다, 레이디. 일반적으로 마법사들이 주군을 섬기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으니까요. 그러니 이해를 못하신다 하셔도 탓할 일이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후후 꽤나 멋지신 분이시네요. 폐하 곁에 라피스님 같은 분이 계셔서 다행 이예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녀석의 연기에 완벽히 속아 넘어가버린, 가련한 여인의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한숨만을 내쉬었다. 새삼 콩깍지가 얼마나 세상을 피폐하게 몰아가느냐 탄식하면서 말이다. 그런 생각은 카이씨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그는 아까부터 불편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연신 헛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역시 사제도 인간이었던 건가. 사례가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아 나는 말없이 그에게 물 한잔을 내밀었다. “아, 감사합니다, 엘님. 그나저나…용케도 태연하신 얼굴이네요. 대게 저런 상황을 보고 나면 속이 거북해지지 않나요?” “그야 그렇지만, 이미 몇 번 경험이 있어서 그런가? 생각보단 참을 만 하네요. 그새 면역력이 생겼나 봐요.” “그거 부럽군요. 엘뤼엔님의 은총으로 저도 제발 빨리 익숙해지길 바래야 겠습니다.” “쿡쿡쿡. 글쎄요, 엘뤼엔이라면 익숙해지기보단 차라리 눈앞에서 없애는 쪽을 선호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장난스럽게 대꾸한 내 말에 대답한 것은 카이씨가 아니었다. 문득 머릿속으로 똑바로 전달해 오는 듯한 선명한 음성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게 정답이다, 아들아. 부탁이니 저 느끼한 녀석 좀 그만 떨궈내라.> “에, 엘뤼엔?” “헉, 설마 엘뤼엔님의 계시입니까?” 덩달아 당황한 듯한 카이씨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후작과 이사나만을 신경 쓰느라 누구도 우리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잠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카이씨의 시선을 무시하며 작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갑자기 이런 곳에서 텔레파시(?)를 보내면 어떡해!” <호오. 지금 반항하는 거냐? 이 아비는 바쁜 와중에도 이렇듯 짬짬이 시간을 내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타이밍이 나쁘잖아. 주변에 사람들도 많단 말이야.” <괜찮다. 어차피 너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밖에 생각 안 할 테니. 그래봤자 미친놈 취급 밖에 더 받겠냐?> ‘바로 그게 문제야!’ 아무튼 라피스나 엘뤼엔이나 이놈의 지독할 정도로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이 문제다. 자신에게 피해가 없으면 어떤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 같은 선의의 피해자가 속출하는 것 아니겠는가. 불만이 가득한 내 표정을 본 카이씨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물어왔지만, 나는 전혀 친절하게 대답해 줄 기분이 아니었다. “엘뤼엔님이 뭐라고 계시를 내리신건가요? 혹, 나쁜 소식입니까?” “그냥 미친놈 취급당하고 살라는데요.” “예에?” <그런 식으론 말 안했다, 아들. 별거 아닌 것에 투덜거리다니, 평소답지 않은걸? 혹시 인간들이 자주 겪는다는 사춘기라도 오는 거냐?> 세상 어느 정령왕이 사춘기를 겪는단 말인가. 게다가 태어난 지 몇 달밖에 안된 나는 더더욱 해당사항이 없는 거 아니야? 내 표정은 아까보다 더 찌푸려졌다. “이젠 나를 일반적인 정령왕의 개념에서 아주 제외시켰나 보지?” <전혀. 네가 평소와 다르기에 해본 말이다. 그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구나.> “아아, 이것저것…” 그 스트레스의 주범에 엘뤼엔 역시 포함 된 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씨도 먹힐 리 없으니. 그 대신 나는 현명하게 그가 갑자기 말을 걸어온 용건을 묻기로 했다. 곤란한 대화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화제전환이 장땡인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로 연락을 다 했어?” <아버지가 아들한테 연락해선 안 된다는 거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예감에 뭔가 용건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지.” <그런 거 없다.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말이야. 그때 만난 이후로 벌써 며칠 흘렀으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는 말투인데도 나는 어쩐지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다. 혹시 나도 모르게 사고 쳐놓고 시치미 떼고 있는 거 아니야? 하지만 내가 트로웰처럼 투시력을 가지지 않은 이상, 엘뤼엔의 숨겨진 본심을 알아낼 방도란 게 있을 턱이 없었다. 무언가 알 듯 말 듯한 미묘한 기분에 인상을 찡그리고 있자니, 가벼운 혀 차는 소리와 함께 타이르는 듯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의심이 많아서 어디에 쓰겠냐, 아들. 별거 없다. 아마도 조만간 누군가와 마주치게 될 것 같아 신경이 쓰였던 것뿐이니까.> “누군가라니?” 그럼 그렇지. 역시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구만. 엘뤼엔처럼 바쁜 신이 쓸데없이 안부를 확인할 요량으로 말을 걸 리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모른 척 하려 하다니.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너무 만만히 보였나 싶다. <자세한건 만나보면 알게 될 거다. 당부할 것은, 그에게 절대로 내 문장을 받았다는 소리는 전하지 말라는 거다. 알겠냐, 아들? 절대로다. 절.대.로.!> “아, 알았으니까 그렇게 강조하지 마.” 엘뤼엔의 기세가 워낙 흉흉했던 탓에 나는 ‘왜 그런 거냐’라고 물어보지도 못한 채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농담이라도 ‘싫다’고 했다간 당장 아들이고 뭐고 사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질린 표정으로 대답하자 옆에 있던 카이씨의 표정까지 덩달아 딱딱하게 굳어졌다. 행여나 신의 계시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들은 게 아닌 가 염려하는 얼굴이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시선도 슬슬 이쪽으로 몰려드는 것 같아, 나는 그쯤에서 양해를 구하곤 엘뤼엔과의 통신(?)을 끊었다. 제 멋대로 미친 사람 취급하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엘뤼엔님의 천사가 무언가 안 좋은 소식이라도 전달하던가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안부 차 인사한 것뿐이니까요.” “예에? 하지만 표정이 많이 어두우셨는걸요.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겁니까?” “네.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카이씨. 그보단 우선…이 상황부터 해결해야겠군요.” “네?” 내가 가리키는 상황이란, 바로 눈앞에서 웃고 있던 후작과 이사나였다. 한참동안 껄껄거리고 웃던 후작이 우리를 향해 연신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이사나에게만 따로 긴히 전달할 말이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눈치 없이 계속 자리에 붙어 앉아 있던 탓에 자리를 파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속만 끓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마 헛기침도 몇 번 하면서 시선을 주목하려고 노력도 해본 모양인데, 아시다시피 나와 카이씨는 엘뤼엔과의 대화에 정신이 없었고, 라피스 역시 에이프릴을 유혹하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 본의 아니게 무시한 셈이 되었다. 황제를 도와준 은인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니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뒤 늦게 서야 그것을 눈치 챈 나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다는 오래된 격언(?)을 떠올리며 어색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지었다. “오래 걸어왔더니 많이 피곤하네요. 이만 쉬고 싶습니다만…실례가 되지는 않을까요?” 다행히 후작은 별다른 꼬투리 없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잠깐 이어진 라피스의 ‘너 미쳤냐?’라는 시선은 무시하기로 하자. “오, 아닙니다. 미처 손님들이 피곤하실 것을 예상치 못했군요. 그럼 이만 일어나실까요? 에이프릴, 네가 손님들을 방으로 안내해주겠니?” “네, 그럴게요 오라버니.” “감사합니다, 후작각하. 그럼 저희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예의바른 태도로 정중하게 고개까지 숙이고 나자, 그제 서야 상황을 눈치 챘는지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그리곤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포즈로(귀족가의 인사 예절인 모양이다)허리를 굽히며 우아하게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닌가! “귀한 시간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각하. 오늘 저녁식사 굉장히 즐거웠습니다. 제 평생에 다시없을 훌륭한 만찬이었습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저 역시 매우 즐거운 저녁 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대답한 것과 달리 라피스를 바라보는 후작의 눈빛은 미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봐도 멋지구리했던 그의 인사법에 혹시나 귀족이 아닌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마법사는 대체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작위를 받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겉모습과 행동까지 완벽한 귀족처럼 보일 수는 없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른 탓에 예법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약 어릴 때부터 궁으로 들어와 교육을 제대로 받은 평민이라 쳐도, 그럴 경우 십중팔구 윗사람들에게 얼굴이 알려지게 되므로 후작과 안면이 없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특히나 폴리모프 같은 고급마법이 가능한 평민출신 마법사를, 후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모르고 있을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가 라피스를 귀족가의 사람이라 짐작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귀족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이 또 있을까? 후작의 얼굴은 자연히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보 라피스. 일부러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 좋을 게 뭐가 있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곧 이상 하리 만치 생글거리는 라피스의 표정에서, 그가 일부러 이런 상황을 유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성격이 꼬인 녀석이었다. =================================================== 오, 오랜만입니다아;;; (털썩) 그동안 사시미 가시느라 얼마나 노고가 심하셨습니까;; 시험이 끝난것은 아니어요...그저 오늘이 제 생일인지라..;; 이른바 자축형식 이었달까요? (으응?) 본격적인 연재는 다음 주 부터입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해요.ㅠㅠ 대신 다음주엔 연참 하겠습니다^^;(띄엄띄엄 올리는 식이겠지만;) 하도 오랜만에 글을 썼더니 내용연결이 좀 안되는 느낌; 빨리 시험을 끝내고 본 페이스를 되 찾아야 겠네요^^; 모두 행복한 하루 보내시고~ 다음 주 에 뵈어요;ㅁ;/ 정령왕 엘퀴네스 5-2. 클리프 상단의 주인 (2) “폐하, 저들은 대체 어떤 경로로 만나게 되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요, 형님?” 질문의 의도를 알 법도 하련만, 이사나는 모르는 척 시침을 떼며 그렇게 물었다. 아니, 한편으론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자신을 제외한 사람들은 이미 나가고 없는 상태였지만,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해서 지금의 대화를 듣지 못할 일행들이 아니다. 혹여나 카웰후작의 입에서 그들을 비방하는 말이라도 나왔다간 크게 경을 칠 일이 분명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피스님은 절대 가만두지 않겠지.’ 그러나 이러한 이사나의 속을 모르는 후작은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주군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곳까지 오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들 치고는 지나치게 능력들이 좋은 것 같군요. 상급 정령사에 고위급 마법사에, 신관까지 말입니다.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볼 수는 없는 상황이 아닐까요?” “저들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군요.” 심각하게 구겨지는 후작의 얼굴을 보며 이사나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진실의 말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아직은 모든 것을 밝힐 때가 아니었다. 또한 일행들 역시 현재 ‘작정하고’ 유희를 즐기는 셈이었으므로,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사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단순히 운이 좋았던 겁니다. 신이 내리신 안배지요.” “폐하, 그렇게 우유부단한 태도로 넘기실 일이…” “걱정 마십시오, 형님. 저들의 목적과 의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어려운 처지의 나를 도와주려는 것 외에는 어떠한 뜻도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를 믿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형님이 우려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만.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끝까지 의심의 기색을 떨치지 못하던 후작은 이사나가 맹세까지 들먹이고서야 수그러드는 듯 했다. 그렇다곤 해도 개인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밝히려는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 어느 부하가 주군의 곁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인간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겠는가. ‘부디 쓸데없는 일에 힘을 너무 많이 소비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자신의 말을 순순히 믿어주지 않는 후작에 대한 서운함이 들면서도, 그게 또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쓴 웃음을 짓고 마는 이사나였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후작이 하루라도 빨리 포기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후작은 이사나에게선 그들의 정체를 알아낼 방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지 순순히 다른 쪽으로 화제를 전환시키기 시작했다. 이사나와 나눌 본격적인 밀담이 벌어진 것이다. “저들을 물리셨을 때부터 눈치 채셨겠지만,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황제폐하 본인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기회와도 연관이 되지요.” “…!! 그게 무엇입니까?” “폐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제가 개인적으로 모을 수 있는 사병은 2만 명에 달합니다. 보통 귀족들 사이에서는 흔치않은 숫자라고는 하나, 대공에게 대적하기는 턱도 없는 숫자지요. 그렇다고 용병을 모집하자니, 당장 수도로 진격할 것이 아닌 이상 너무 눈에 뜨입니다. 어쩌면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칠 기회를 마련하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건 그랬다. 아무리 은밀하게 진행시킨다 해도, 대규모의 용병들이 이동하는 것이 포착된다면, 눈치 빠른 대공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마족이니, 마왕이니, 정체불명의 집단까지 공격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이상, 섣부른 행동으로 화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근심하는 이사나에게 후작은 침착한 태도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을 정당하게 모을 한 가지 방법이 있으니까요.” “그게 정말입니까?” “예. 바로 상단의 힘을 이용하는 겁니다. 시국이 불안하여 상단을 지킬 용병들을 고용하는 식이라면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겁니다. 무역도시인 클모어에는 상단의 숫자도 많으니, 그 만큼 용병들의 숫자가 불어도 이상할 일이 없지요.” “아? 하지만 상단이라면…” 이사나의 얼굴은 금새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대부분의 상단들은 이사나의 승리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후작은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미리 생각해둔 계획에 따라 차분하게 대화를 진행시켜 나갔다. “대부분의 상단들이 설득되지 않는 건 사실입니다. 오히려 솔트레테에 세운 지부를 폐쇄하고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겠다는 강경한 상단도 있었지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건 클리프 상단뿐입니다.” “클리프 상단?”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낯익은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자, 후작은 자못 비장한 표정으로 단숨에 설명을 이어나갔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신생상단입니다만, 급속도로 규모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대륙 10대 상단의 상위권에 속할 정도지요.” “아아, 기억해요. 아까 식사 때 말했던 거지요? 상단의 주인이 근래에 바뀌어서, 안팎으로 굳건해질 계기가 필요하다고 했던…” “예, 그렇습니다. 오직 그곳만이 우리들의 도움 요청에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지요. 두고 볼 여지없이 그곳을 뚫어야 합니다. 지금 상단들은 막막한 앞날에 도박을 걸 수 없어 잠자코 있는 것뿐입니다. 클리프 상단이 우리 편이 되 준다면, 그것을 계기로 다른 이들도 충분히 돌아설 겁니다.” 단호하게 대답한 후작의 말에 이사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요즘 들어 한창 주가를 달리는 상단이 이사나의 편이 되 준다면, 다른 상단들 역시 솔깃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상인들은 무엇보다 이득을 노리는데 혈안인 종족들이니까. “뿐만이 아닙니다. 새로 바뀐 클리프 상단의 주인은 예지력을 가지고 있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만큼 미래를 읽을 줄 알고, 그가 인정한 사람은 반드시 대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선택한 행동에서 손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상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겁니다.” “하아? 그렇다면 설마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에…” “맞습니다. 상단의 주인을 만나십시오, 폐하. 그리고 그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 쿠궁- 벼락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충격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가 상단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때부터 무언가 불안하다고 느낀 이사나였지만, 정말로 이렇게 직구를 날릴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무리 쫓겨났다곤 해도 황제는 황제였다. 고귀하다 칭송받는 황족 중에서도 가장 높은 이가 아닌가? 그에 비하면 상인은 평민 중에서도 가장 천한 취급을 받는 종족이다. 한 마디로 지금 후작은 인간 중에서 가장 높은 이더러, 그와 가장 반대의 신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얕게 생각해도 충분히 ‘모욕’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 이사나는 아찔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려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호오~ 이거 벌써 테스트 시작인가? 저 후작 놈,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드는 걸?” 지금 우리는 라피스의 방에 모여앉아 사이좋게 영상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이미지 마법이라던가, 뭐라던가. 우리가 보지 못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스캔하는 마법이라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이 생생한 화질과 음감이 눈앞에서 고스란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지금 당당하게도 후작과 이사나의 상황을 도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초에 시작은 이사나가 뭘 하는지 궁금하다는 내 말이 화근이었지만, 일을 벌인 것은 라피스이니 들켜서 문책당할 책임을 고스란히 전가시키도록 하자. 덕분에 저 은밀한 대화를 생 라이브(?)로 목격하게 되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정말 성격 이상하다니까. 마음에 들긴 뭐가 마음에 들어? 이사나가 저렇게 곤란해 하는 거 안 보여?” “모르는 소리. 저게 다 녀석의 역량을 시험하는 게 아니고 뭐냐? 지금 후작은 저 한마디로 여러 가지를 노리고 있다고. 이사나가 뜻을 위해서는 천민에게도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인물이 되는지,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는 사람인지. 그리고 모욕적인 제의를 한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 만큼의 관대함이 있는 사람인지.” “흐음. 그렇군요. 그러다 일이 잘 되면 상단의 주인을 설득시키는 귀찮은 작업을 이사나님에게 떠넘길 수도 있고 말입니다. 또한 운이 좋아 인정까지 받으면 일석이조의 효과로 다른 상단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겠지요.” “바로 그거야. 여~ 신관 녀석. 똑똑한데?” 라피스는 연신 카이씨를 기특하단 듯이 바라보면서 내게는 본 받으라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저 건방진 눈빛이라니. 아무래도 조만간에 놈과의 계약을 해지해야 할 듯싶다. “너 또 쪼잔하게 계약 해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냐?” “내, 내가 언제?” “말 더듬는걸 보니 맞나보군. 난 가끔가다 정말 네가 정령왕이 맞는지 의심스러워 진다.” “뭐, 뭐가 어째?” 그렇지 않아도 아픈 부분을 사정없이 찌르다니. 네가 그러고도 내 계약자란 말이냐! 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라피스는 그저 코웃음 한방으로 무시해 버릴 뿐이었다. 세상 사 무서울 것 하나 없다는 그 태도에 열 받는 나는 분에 겨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에이프릴에게 네놈의 비리를 다 폭로하고 말 테닷!” “그러든지 말든지. 이미 그녀는 나한테 80%는 넘어왔다고. 이제 와서 무슨 말을 들어도 흔들리지 않을 걸?” “이익! 이 천하에 다시없을 느끼만땅 왕자 병 도마뱀 같으니!!!” 귀신은 뭘 하고 이런 썩을 도마뱀 하나 잡아가지 않는 단 말인가! 씩씩거리는 내 말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귀엽다는 듯이(뿌득) 흐뭇한 표정을 짓는 녀석을 보자니 살심이 불끈불끈 치밀어 올랐다. 역시나 엘뤼엔이 처리해 준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었어야 했던 거다. 이게 다 어른의(?) 말씀을 무시한 죄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너 자꾸 날 그따위로 취급하면…!!” “쉿! 기다려. 이사나 녀석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는 군.” “!!” 너무 열 받은 나머지 현재 상황도 잊고 길길이 날뛰려던 나는 라피스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찾고 덩달아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이 기가 막힌 타이밍이 정말로 우연인건지, 아니면 녀석이 뭔가 술수를 부린 건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질 일이다. 영상에 비친 이사나는 생각을 완전히 정리한 듯, 감고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뜨고 있는 상태였다. 맑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똑바로 후작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나 그 눈에 담긴 것은 노여움도, 서운함도 아닌 단단한 각오의 빛이었다. 그것을 보고나니 나는 듣지 않아도 그가 어떻게 대답할 건지 충분히 그린 듯이 예상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나는 차분한 표정으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형님께서 그것으로 저를 인정할 수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평민에게 고개를 조아리는 일을 태연히 받아들이는 무리라고 생각했는데요.> <쿡쿡쿡. 아시면서 떠보다니 형님도 많이 짓궂어 지셨네요. 하지만 형님의 성품상 허튼소리를 할 리는 없는 법. 그 만큼 상단의 주인이 대단한 인물이라는 소리겠지요. 무릇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내가 태연한건 그러한 이유에서 입니다.> 거기까지 짧게 말을 끝낸 이사나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후작에게 미소 지으면서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놀란 건 사실입니다만, 모욕이라고 여기진 않았습니다. 그걸 노리고 한 제의인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그 장단에 일일이 맞출 필요는 없겠지요. 어때요? 이 정도면 훌륭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많이 변하셨군요, 폐하. 몇 달 전의 그 분이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 할 정도 입니다. 감히 폐하를 시험하려 했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후작은 기쁨 반, 당혹감 반인 표정이 되어 얼른 고개를 수그렸다. 설마 자신의 생각까지 전부 이사나가 짚어낼 줄은 몰랐다는 투였다. 그 모습에 이사나는 웃을 듯 말 듯한 묘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글쎄요. 모욕감을 느끼지 않았다 해도 괘씸한 건 괘씸한 것. 아무리 사촌 형제라 하더라도 공과 사는 정확해야 하는 법이지요. 설령 그것이 충의를 가지고 벌인 일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러니 어찌할까요?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형님?> <원하시는 대로 처벌하여 주십시오, 폐하.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있느라 이사나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는 걸 듣고, 그가 화가 나 있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나는 교훈 한 가지를 얻으며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이래서 눈싸움이 중요하단 거구나. 시선을 끝까지 떼면 안 된다니까?” “킥. 너 다운 말이다. 저 모습을 보면서 하는 말이라는 게 고작 그거냐?” ================================================================== 즐거운 월요일입니다~~(시험이 끝난 관계로) 자아 5권 버닝이랄까요!+_+/ 정신없이 쓴거라 날림체가 많으니(;) 읽으시다가 틀린부분, 어색한 부분 있으면 지적해 주세요~;; 엘퀴네스는 현재 10권 완결 예정입니다만. 더 길어질 수도 있고 더 짧아질 수도 있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ㅁ <하, 하지만…> <뭐, 정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내려드리지요. 형님께선 이 못난 아우의 여정을 부디 끝까지 지켜봐 주십시오. 잘되면 잘 되는 것으로, 안되면 안 되는 것 그대로의 저를 형님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형님께 내릴 수 있는 벌의 전부입니다.> <…!!폐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기억해 주고 응원해 주는 존재를 바라게 되나 보다. 그리하여 언제고 문득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와 카이씨완 달리, 라피스는 짧게 혀를 차며 ‘소심한 놈’이라 중얼거렸다. 이왕에 벌을 줄 거라면 화끈하게 손모가지를 비틀거나 재물을 달라고 할 것이지, 겨우 기억해 달라는 게 뭐냐고 말이다. 어느새 감격한 얼굴이 된 후작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나의 앞에 부복했다. 올려다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신(臣) 카웰 드 클모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전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전하의 끝과 함께 할 것이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가문 대대로 폐하께 충성을 바치겠습니다! 클모어의 핏줄은 솔트레테의 정통성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형님…> 눈물을 드리우고 있는 이사나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그야말로 한편의 영화를 본 기분이었달 까? 마법이 사라지고 났을 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서 박수를 칠 뻔 했다. 정작 전생에 영화관에 갔을 때는 아무리 감동적인 장면을 봐도 박수는커녕 하품만 하기 일쑤였는데 말이다. ‘혹시 감수성이 풍부해진건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리며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고단한 하루의 마지막이었다. *** 엘퀴네스 일행이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는 바로 그 시각, 명계의 신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으로 긴급회의를 열고 있었다. 명계의 모든 것을 총괄 하는 5명의 중급 신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것은 어지간히 중대한 일이 아니면 극히 드문 일로, 모여 있는 당사자들 역시 당혹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시선은 처음 소집령을 내린 중급신 메테르에게 향해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렇지 않아도 일거리가 많아서 정신이 없는데 말입니다. 우리 5명을 모두 소집 할 정도로 위중한 일이오?” 개중에서 가장 성격이 급하기로 유명한 중급신 아스카가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더러 모이라고 했던 메테르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단 듯이 난처한 기색뿐이었다. 그는 명계에서도 영혼의 죽음과 인도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었다. 대부분의 인도자(엘은 저승사자라고 부른다)는 모두 그의 소속이나 다름없다. 매사에 침착하고 표정이 흐트러지는 일이 없기로 유명했던 그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다른 신들 역시 불안한 심정이 들기는 마찬가지. 결국 분위기를 바꾼 것은 이제까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있던 아레히스였다. 그는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메테르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말씀해 보십시오. 소집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겠지요? 사실 저 역시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있습니다만.” “아아. 역시 아레히스님은 눈치 채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오늘 제가 이렇게 소집령을 내린 것은, 아무래도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의견을 구하려고 모신 겁니다.” “대체 무슨?” 잠시 숨을 삼킨 메테르는 모두의 궁금하단 눈빛을 무시한 채 테이블 위에 새하얀 빛의 구를 띄웠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빛 덩어리를 바라보던 신들은 그 안에 갇혀진 것이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한 인간의 영혼임을 깨닫곤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게 뭡니까, 메테르? 어째서 죽은 영혼이 환생의 궤도를 타지 않고 이렇듯 모여 있는 것이오? 개인의 취미생활을 위해 인간의 영혼을 악세사리로 이용하는 건 불법임을 모르시지는 않지 않소이까!”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이건 실제 영혼이 아니라 기록용 환상에 불과합니다. 모여진 영혼의 숫자를 세어보십시오. 모두 어린아이입니다.” “어린아이인 것은 척 보면 알 수 있소! 어디보자, 한 9천 9백 명 정도 되겠군. 이렇게 많은 어린아이들의 영혼 기록은 무엇 하러 모아두신 게요?” 불쾌하단 듯이 턱을 쓸며 대꾸한 한 중급신의 말에 다른 중급신들 역시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메테르의 말에 그 장소에 있던 누구도 감히 입을 먼저 열 용기를 지닐 수 없게 되었다. “정확히 9천 9백 명 이 맞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 모두 요 몇 십 년 사이에 차원 아크아돈에서 거두어 들였지요. 사인은 한결 같습니다. <마신께 바치는 재물>이었습니다.” “!!!” “무슨!!!” 덜컹- 커다란 소리와 함께 대부분의 신들이 놀라움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란으로 가득한 얼굴은 하나같이 한가지의 사례에 대한 염려를 담고 있었다. “서, 설마 그 일을 벌이는 존재가 또 다시 생겼단 말입니까?” “아니, 아니. 진정하십시오. 아직 확실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아크아돈은 오랜 물의 정령왕의 부재로 10년 사이에 멸망직전까지 치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의 대부분은 그 사이에 생겨났으니, 마신께 기우제를 지낸 인간들의 행위라고 보셔도 타당합니다. 특히나 아이들을 제사지낸 나라는 마신을 섬기고 있는 제국이니까요.” “하지만 만약이라는 것이 있지 않소이까! 벌써 9천 9백이라지 않았소! 설마 또 다시 누군가가 악신이 될 생각이라도 하고 있다면-!!” “피렌체님!” 모두가 상상하고 있던 사실을 입으로 뱉어내자, 아레히스는 굳은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모여 있던 신들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당연했다. 악신이 누구인가! 주신의 가장 강력한 저주를 받은, 악의 정점에 선 신의 이름이 아니던가! 1만 명에 해당하는 어린 인간의 피. 그것을 모조리 흡수하여 탄생하는 가장 사악한 존재! 그 강대한 힘은 주신을 필적하며, 마음만 먹는다면 중간계 뿐만 아니라, 신계의 대부분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진정 위기라고 하면 위기인 것이다. 오히려 태연해 하는 것이 더욱 무리가 아닌가. 술렁술렁. 도무지 진정할줄 모르는 신들의 모습에 아레히스는 쾅-하고 커다랗게 테이블 위를 내리쳤다. 그 바람에 간신히 시선이 집중되자 애써 차가운 표정으로 메테르를 바라보았다. 그 냉기어린 눈빛에 메테르는 꼼짝없이 몸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영혼의 죽음과 인도를 담당하신 것은 메테르 님입니다. 9천 9백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가 모일 때까지 침묵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보, 본의가 아니었소. 당시 아크아돈은 아이들 말고도 죽은 인간이 많았기 때문에 숫자를 깊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는 쪽이 정확합니다. 가뭄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 만에 해당했으니 딱히 큰 문제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갑자기 이상하다고 여기신 계기는요?” “이미 가뭄이 끝나는데도 재물을 바치는 일이 계속 되고 있었기 때문이오. 혹시나 마신을 향한 기우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숫자가 벌써 만에 달하니 혹시나 하신 거겠지요. 맞습니까?” 아레히스의 말에 메테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해 보였다. 그 바람에 모여 있던 신들의 얼굴은 더욱 불안감으로 물들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신들이 술렁거리든 말든, 한참동안 눈을 감은 채 침묵하던 아레히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엘퀴네스님, 당신과 조만간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겠군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그는 다시금 확고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며 그와 함께 모여진 4명의 명계의 신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딱딱한 목소리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우려하는 일이 벌어지는 그대로라면, 우리 중 누구도 주신의 문책을 피할 순 없을 겁니다. 또한, 현재 그 일을 벌일 것으로 예상되는 가장 유력한 대상인 마신께서도 결코 무사히 넘어가진 못 할 테지요.” “크윽…” “하지만 메테르님은 아직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여기서 이런 식으로 떠들어봤자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요. 일단 모여진 숫자가 숫자이니만큼, 상급신께는 반드시 보고해야 합니다. 지금, 대표로 신계로 다녀오실 분을 선정하겠습니다.” 명계의 가장 깊은 곳, 으슥한 장소에서 벌어진 긴급회의의 마무리가 지어지는 순간이었다. 한편 엘뤼엔의 수행천사들은 딱 자살하기 좋은 심정을 경험하고 있었다. 신전을 들어갈 때마다 느껴지는 그 서슬퍼런 살기라니! 보통 신도 아니고, 신계의 흔치않은 상급 신 중 하나인데다, 마 속성을 가진 신이 뿜어내는 살기는 마음이 여린 천사들이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한파 아닌 한파 속에, 천사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신계에도 겨울이 있냐고 물어보기 좋은 상태다. 대체로 딱딱한 느낌이긴 했어도 조용하던 엘뤼엔이 신전이, 요 며칠 새 이렇듯 분위기가 바뀐 이유는 간단했다. 살신(?)적인 스케줄로 쉴 틈 없이 몰아붙여지던 엘뤼엔이 드디어 그 한계를 느껴버리고 만 것이다. 그것은 며칠 전 그의 신전으로 당도한 한 무더기의 서류더미가 원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배달된 정체모를 양피지 더미. 그리고 파일마다 수줍게 붙여진 <마계 내 총괄 관리>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엘뤼엔의 잠자고 있던 마성이 한순간에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그 영감탱이! 죽여 버릴 테다!!!!!!!” “에, 엘뤼엔이시여! 진정하셔요, 진정!!”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어어어어엇!!!!!” 그야말로 미친 듯이 소리치는 와중에도 행여나 서류가 상할 새라 신력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는 엘뤼엔이었다.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주신이 보았다면 한달쯤은 포상으로 휴가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왜 내가 마계까지 담당해야 하냔 말이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원망을 터뜨리며 엘뤼엔은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의 머릿속엔 얼마 전에 벌어졌던 ‘원흉’과의 만남이 바로 어제 일처럼 그려지고 있었다. 그날도 엘뤼엔은 일에 치여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이프리트가 날려버린 서류의 분량이 생각보다 더 많았던 대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엘의 유희를 살펴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이다. (그럼 엘의 유희를 살펴보는 것을 그만 두면 될 텐데. 그건 죽어도 그만 두지 않는 엘뤼엔이었다.) 때문에 어지간한 신들은 엘뤼엔의 그 방대한 작업분량에 질린 나머지, 용건이 있더라도 간단히 천사를 시켜 전달하는 선에서 그치곤 했다. 그것을 싸악 무시하고 찾아온 이는 신계에서도 지극히 패륜적이기로 유명한 마계의 상급 신 카노스였다. 그는 어깨까지 기른 자신의 검은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쌈박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여어- 엘뤼엔. 신계 최초로 과로사한 신이 되고 싶은 건가? 뭐가 이렇게 바빠?” “알았음 꺼져.” …한 가지 참고해 둘 사항이 있다면, 엘뤼엔은 카노스에게 전혀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쪽이 더 타당했다. 이 방대한 분량의 일거리들 대부분이 바이톤에 놀러온 마족들이 벌여놓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을 관리하는 마신을 곱게 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듯한 엘뤼엔의 기세에 카노스는 과장된 포즈로 ‘어머 무셔라~’를 외쳤다. 그러나 그의 생글 웃는 얼굴 어디에도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기색 따위는 전혀 찾아볼 길이 없었다. 엘뤼엔은 간신히 가라앉힌 혈압이 다시 도지는 것을 느끼며 빠득빠득 한마디씩 내뱉었다. “대.체.또.무.슨.짓.거.리.를.하.러.온.거.야.이.썩.을.놈.의.자.식.아.” ========================================================== 우후후~ 연참이군요~ 아아...머리가 아파요오..ㅠㅠ OTL........ 에에..글 내용 속의 욕(..)을 자제해 달라는 독자분의 요청을 들은 지 하루도 안 되서 또 다시 험한 말을 쭈욱 늘어 놓고 마는 후후후였습니다... 설마..이게 천성인 건 아닐테지요;; 어쩔 수 없었답니다.ㅠㅠ 이제 와서 엘뤼엔의 캐릭터를 바꿀수가 없어서;;; 다만 앞으로 계속 자제하겠습니다^^;; 아하하...(허무한 웃음을 뿌리며 사라지는 중...) 정령왕 엘퀴네스 5-4. 클리프 상단의 주인 (4) “어라라.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무려 한 때 같은 직업에 종사했던 신으로서 말이야~ 좀 더 곰살맞게 맞아줄 수는 없는 거야?” “너 같은 놈이 ‘한 때’ 엘퀴네스 였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 입 다물어. 할 말 있으면 빨리 말하고 사라지라고. 내 눈앞에서 영원히!” “쳇- 재미없기는. 난 나름대로 후배한테 최선의 예우를 다하는 데 말이지. 이봐~ 엘뤼엔씨. 그렇게 인상 쓰다가는 주름살 생긴다고.” “닥.쳐.!” 카노스는 엘뤼엔의 눈빛에 흉흉한 살기가 감돌고서야 아쉽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쌀쌀맞기 그지없는 반응이었지만, 그나마 이런 식으로 ‘상대’라도 해주는 이는 신계 전체를 통틀어 엘뤼엔 밖에 없었다. 다른 신들은 모두 그와 시선이 마주 칠 새라 도망치기 바빴기 때문이다. 언제고 그 사실을 서운해 하는 카노스에게 엘뤼엔은 담담히 한마디 충고한 바 있다. <친해지고 싶으면 남을 괴롭히는 그 못된 성격부터 고치라고.> <내가 뭘~> <내가 뭐얼? 꽃의 신한테 선물한답시고 벌레자루를 건네준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덕분에 그녀의 정원의 꽃들이 죄다 벌레 먹어 시들어 버린 것은 누가 벌인 짓? 학자의 신을 찾아가 축구를 가르친 건 누구며, 밤의 신을 찾아가 빛의 신이 사용하는 망토를 덮어씌운 건 또 누구? 그 신은 그때 입은 화상 때문에 한동안 신전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었지, 아마?> <헤에. 누구냐. 그 엄청나게 사악한 짓을 벌린 놈은?> <바로 너야, 너!!> 그나마 엘뤼엔은 서류 때문에 너무 바빠 그를 제대로 상대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술수에서 비교적(아니 상당히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새로 신계에 들어온 신들이 거의 ‘신고식’처럼 치른다는 마신의 장난을 당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존재였으므로, 다른 상급신들이 엘뤼엔을 존경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 사실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 바로 단 한명의 존재로 인해서…. “그러고 보니 엘뤼엔 너 이번에 양 아들 들였다며?” “…엘 건드리면 죽인다.” “호오, 정말이었나 보네? 네가 웬일이냐? 자신외의 존재한테는 티끌만치도 관심 없던 놈이. 이름이 엘이라고? 실속을 따지는 네가 인간을 아들 삼았을 리는 없고…누구냐? 그 엄청난 행운아가?” “관심 꺼.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보지도 마. 생각하지도 마. 절~~~대 호기심으로 물어보지도 마.” “쳇~ 이거 아들 없는 신 어디 서운해서 살겠냐? 그러지 말고 가르쳐 주라. 누구야? 응?” 그걸 가르쳐 주느니 차라리 내가 혀를 깨물고 만다. 엘뤼엔은 그렇게 다짐하며 맹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실수로라도 알려주었다간,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시간 여유가 남아도는 마신이 언제 또 정령계를 뒤지고 다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엘로서는 저 엄청난 성격을 절대 감당할 수 없으리라. “난 내 아들이 기절하는 꼴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너 같은 선조(?)가 있다는 사실 역시 가르쳐 주고 싶지 않아.’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속으로 쏘아붙이며 엘뤼엔은 꿋꿋하게 버텼다. 한 번 마음먹은 일은 곧 죽어도 지켜내는 그였으므로, 마신 카노스는 아쉬운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본인의 입으로 정체를 알아내기는 어려울 듯 했다. (그럼 다른 사람의 입으로는 들을 의향이 있단 뜻인가!) “대체 무슨 일이야? 나 바쁜 거 안보여? 용건만 간단히. 수초내로 말하고 가라.” “아아. 사실은 말이지, 내가 출장을 가게 되서 말이야. 못 보는 동안 잘 지내라고 인사차 들렸지.” “…출장이라니?” 신이 출장을 다닌다는 소리는 생전 듣도 보도 못 했다. 하루 종일 신전에 갇혀 서류싸움을 한다는 소리라면 모를까. 웬 출장이란 말인가? 그렇지 않아도 이리저리 뺀질거리며 놀러 다니기 바쁜 녀석이었던 터라, 엘뤼엔은 슬며시 불쾌한 감정이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러간단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단 말이야?’ 그랬다. 그리고 엘뤼엔으로서는 무척 불행하게도… 그건 사실이었다. 카노스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무려 중간계로 무기한 유희 플레이! 그 동안 노고가 심했던 나를 위해 내려주신 주신의 선물이랄까나?” “크윽!! 이건 차별이야!!!” “큭큭. 너도 알다시피 신들은 인간세상에서 1시간 이상을 버티질 못하잖냐. 근데 이번엔 특별하게도 무려 5년이나 기회가 주어졌단 말씀. 대신 행사할 수 있는 신력이 상당히 줄어들겠지만 말이야. 어때? 부럽지?” “뿌득. 염장 지르러 온 거면 그냥 가라. 나 지금 엄.청. 바쁘거든?” 살기를 담은 엘뤼엔의 목소리에 카노스는 과장된 몸집으로 움찔하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게 엘뤼엔의 화를 더 돋운다는 건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행동이었다. “킥킥. 어디로 가는지는 안 물어보는 거야? 우리로서는 상당히 인상 깊은 곳인데.” “뭐냐, 마계라도 가는 거냐?” “설마. 그럼 내가 굳이 ‘중간계’라고 말할 리가 없지. 아크아돈이야. 엘퀴네스였을 때 수시로 가본 곳이었지만 오랜만에 가니까 감회가 새로운 걸?” “뭐? 어디라고? 아크아돈?!!” 벌떡- 엘뤼엔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차원 중에 아크아돈이라니! 저 녀석의 성격상 우연히 엘을 만나기라도 하면 가만히 두고 보지 않을 것이 아닌가. 맙소사. “절대 안돼! 다른 곳으로 가!” “에? 뭐야~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라고. 주신께서 그 곳으로 지정해 주셨단 말이야.” “그래도 안돼! 빌어서라도 다른 곳으로 옮겨!” “쳇~ 시잃어. 나도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기분이라 상당히 들떴다고. 아무튼 다녀올 때까지 잘 부탁해. 너만 믿고 있을 테니.” “뭐, 뭐야? 자, 잠깐!!” 그것을 마지막으로 휭하니 사라져 버린 마신 카노스 였으니… 엘뤼엔으로서는 그야말로 낮잠 자다가 날 벼락을 맞은 심정이었다. 담담한 표정과 달리 그의 눈앞은 점점 새 하얗게 변해가고 있었다. 저 장난밖에 할 줄 모르는 마신이 엘을 만나기라도 하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에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아들임이 밝혀지기라도 하면 더욱 낭패인 것이다. ‘아버지 친구라는 핑계로 애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지도 몰라! 그것만은 절대 안 돼!!’ 그러나 당시의 엘뤼엔은 아들의 걱정만을 하느라, 정작 카노스가 마지막 남기고 갔던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처절한 결과는 며칠 후,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돌아오고 말았던 것이다. 무려 ‘마신의 부재동안 대신하여 서류처리’라는 극악의 방법으로 말이다. 평소 처리하던 분량의 몇 십 배를 가뿐히 넘기는 방대한 서류더미를 보며, 이성을 잃은 엘뤼엔이 외치는 말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내 이놈의 마신 놈을~!! 크아악! 그 자식 당장 불러와아앗!!” “엘뤼엔님! 제발 진정하세요오!” 명계와는 다른 방법으로 한바탕 파란이 몰아치고 있는 신계였다. *** 다음날 아침 날이 밝는 대로 우리는 클리프 상단의 주인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이왕 해치우는 거(?) 하루라도 빨리 담판을 짓고 수도로 진격하자는 것이 일행의 하나같은 의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아침이 되고 나자 라피스는 단 한마디로 자신의 불참의사를 밝히고 말았다. “재미없을 것 같다. 난 안 갈 테니 알아서 잘 들 다녀와.” “거짓말. 에이프릴이랑 승마 가기로 해서 그런 거지? 아까 식사 중에 속닥거리는 소리 다 들렸어.” “쳇. 알아들었으면 이 형님 좀 도와줘라. 인간 중에서 그만한 미모를 찾기가 쉬운 줄 아냐? 남의 연애사업에 끼어들면 벌 받는다?” “뭐야, 그럼 지금 내가 당장 나가서 누굴 꼬셔와도 방해하지 않겠다는 말?” “그것과 이건 달라.” 다르기는 개뿔. 아무튼 지독할 정도로 이기적인 녀석의 행동에는 두 손 두발 다 들었다. 얼굴을 살짝 찡그린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어차피 따라 다녀봤자 이것저것 잔소리만 늘어놓을 테지. 맘대로 해. 에이프릴이랑 승마를 하든, 춤을 추든.” “호오, 설마 질투하는 거냐?” “드래곤이 착각 속에 사는 생물인 걸 깜빡 잊었네, 미안.” “하여튼 말이라도 못하면.” 쯧쯧거리는 폼이 영락없이 철없는 어린애 대하는 투다. 내가 전생에 인간이었던 데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아주 애 취급을 하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그 고운 마음씨에 나는 화사하게 웃으며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주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킥킥거리는 녀석을 보니, 아무래도 아침 식사에 누가 약이라도 탄 게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역시 이 대륙엔 정신과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흐음. 그게 무슨 뜻이길래 라피스님이 저렇게 웃으시는 겁니까, 엘님?” “아아. 비속어를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데…저 녀석은 욕먹는 게 좋은가 보네요.” “비속어라면 어떤?” “그, 그게 말이죠. 이를테면…‘꺼져’랄까.” 차마 신관인 그에게 알려주기 민망한 말을 입에 담자, 카이씨의 표정이 묘해졌다. 불쾌하다기 보다는 재미있다는 투였다. “신기하군요. 저는 처음 보는데 그런 건 대체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아, 하하…그게 그냥 어디선가 잠깐.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뻘쭘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카이씨는 그것으로 족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문득 사제복을 입은 그가 사람들을 향해 생글 웃으며 뻑큐~를 날리고 있는 장면이 떠오르고 말았다. 찰랑이는 검은 머리카락이 햇빛 속에 눈부시고, 가운데에서 찬연히 빛나는 손가락이라. “……” 생각보다 상당히 웃기구나. 그래서 라피스가 그렇게 미친 듯이 웃었던 건가? 외모와 전혀 안 어울려서? “쳇. 그냥 강지훈이던 시절의 외모를 돌려줘…” “네? 그건 또 무슨?”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하하.” 혹시라도 무슨 소리였는지 물을 새라 나는 냉큼 얼버무리곤 이사나를 찾았다. 마침 녀석은 후작과 함께 방에서 나오고 있었는데, 이제까지완 달리 고급스러운 느낌의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평소 우중충하게만 보이던 그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진 느낌이다. 옷이 날개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아, 엘. 미안, 오래 기다렸지. 그냥 아무거나 입겠다는데도 형님이 자꾸만 정복을 입혀서 말이야.” “한 나라의 황제로서 초라한 옷차림을 하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는 여행 중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셔도, 제가 옆에 있는 이상 다시는 그런 옷차림은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난처하게 변명하는 이사나의 말에 덩달아 굳은 표정으로 못을 박는 후작이었다. 그 옆에서는 어느새 따라 나온 에이프릴이 쿡쿡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오라버니도 너무 하시다니까요. 폐하께서 괜찮으시다는 데도 계속 고집을 부리시니. 듣자니 상단까지 가는데 호위 기사를 10명이나 대동시키신 다면서요?” “당연한거다, 에이프릴. 혹여나 밖에 나가셨다가 무슨 변고라도 당하시면 어쩌란 말이냐.” “하지만 실력 있는 정령사가 바로 옆에 계시는 걸요. 오라버니는 너무 과보호 세요.” 웃음기를 머금은 에이프릴의 말에 후작의 뚫어질 듯한 시선은 고스란히 내게 돌아왔다. ‘ 폐하를 잘 부탁하오. 실수하면 알지?’라는 듯한 목소리가 듣지 않아도 귓가에 쟁쟁 울리는 기분이었다. ======================================================================== 우후후 우후후후... 이건 기적인 것입니다! 무려 3연참이라니! 정령왕 엘퀴네스 5-5. 클리프 상단의 주인 (5) “흠. 그러고 보니 어제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소. 물의 상급 정령사라 하였습니까?” ‘아니요, 정령왕인데요. 정령사는 그 쪽이 껌뻑 죽고 못사는 이사나랍니다~’ “아, 부족하나마 정령을 조금 다룰 줄 압니다. 폐하의 신변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 경호할 테니까요.” 입과 생각이 따로 노는 진귀한 경험을 하며 대답하자, 후작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드리웠다. 그러나 그의 좋은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아 곧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바로 옆에서 그의 여동생에게 추근거리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한 탓이다.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군요. 승마하기 딱 좋은 것 같은데요? 멀리 나가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군요.” “호호호, 저 이래봬도 말 잘 타요. 여자라고 우습게 보셨다간 큰 코 다치실 걸요?” “어디, 그 솜씨 지켜보겠습니다, 레이디.” 남들이 보면 한 쌍의 완벽한 선남선녀라고 칭찬할지 모르지만, 여동생을 둔 오라비 입장에서는 그저 꽃에 접근한 나방정도로만 보일 광경이었다. 얼굴 가득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에이프릴과 친근한 대화를 나누는 라피스를 잠시 살벌하게 쏘아보던 후작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미소를 띄웠다. “허허허. 젊은 사람들이 저렇듯 마음이 맞으니 보는 사람 입장에서 참으로 기분이 좋군요.” “그렇군요, 형님. 그러고 보니 에이프릴 누님도 슬슬 혼처를 정해야 할 시기가 아닙니까? 벌써 여럿 혼담이 들어왔을 것 같은데요.” “아, 그, 그렇지요. 하하하!” 이사나. 너는 후작의 이마에 돋아난 시퍼런 혈관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아무리 눈치가 없기로서니, 저 탐탁치 않은 시선을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디? 결국 모든 상황을 정리하고 후작의 마음을 안정시킨 것은 나였다. 이왕 가는 거 시간 지체하지 말고 얼른 떠나자고 재촉했던 것이다. 그 완벽한(?) 화제 전환에 후작은 고마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이사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일행은 별 탈 없이 상단의 주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 “죄송합니다만, 총수께서는 지금 새벽까지의 과한 업무를 마치시고 이제 겨우 잠이 드신 참입니다. 몇 시간 후에 다시오시지요.” “뭐라! 지금 우리가 모셔온 분이 뉘신 줄 알고 감히!!” 화를 내며 닦달하는 기사를 보자니 도리어 내가 묻고 싶어졌다. ‘그러는 당신은 우리가 누군지 아냐’고. 아직 후작은 기사들에게 이사나의 정체를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저들도 단순히 귀족이라고만 짐작하고 있을 뿐, 정작 이사나가 누군지 알 리가 만무한 것이다. 그런 주제에 당당하게 ‘뉘신 줄 알고’를 연발하는 기사의 모습을 보자니 헛웃음이 나오다 못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클리프 상단의 본점을 찾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타 제국에 본점이 있는 다른 상단에 비해, 클리프 상단은 솔트레테 제국에 본점이 있는 몇 개 되지 않는 상단이었으므로, 이곳의 주인을 찾는 일 또한 식은 죽 먹기 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도착하고 나서였다. 총수라는 인간이 너무 피곤한 관계로 독대를 피하고 있다나, 어쨌다나. 덕분에 자신만만하게 우리를 안내해온 기사들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그러셔도 곤란합니다. 깊이 잠드신 분을 깨울 수는 없습니다.” “무엄하다! 일개 상단의 주인이 감히 귀족이 요청한 만남을 거부한단 말인가! 가서 네 주인에게 이르거라! 당장 나와 맞이하라고 말이다!” 큰 목소리도 이정도 면 민폐다. 더구나 이사나는 지금 당당히 나설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무엇보다 상단의 주인에게 ‘인정’을 받고 돌아가야 하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사나의 얼굴엔 난처한 빛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나는 다시 소리치려는 기사의 팔을 붙잡곤 만류했다. “그만 두세요. 저들도 사정이 있는데 이쪽 입장만 고집할 수는 없잖아요?” “예? 하지만…” “까짓 몇 시간쯤 기다리면 됩니다. 시간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니까요.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으니 기사 분들은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후작님께서도 상단을 방문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신 것이 없으니, 저희들의 의견에 따라주십시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각하께선 손님들을 무사히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밖에서 따로 대기해 주세요. 기다리시기가 지루하시다면 한 몇 시간쯤 주변을 둘러보다 돌아오셔도 좋습니다.” 나의 단호한 표정을 본 기사는 반박하려는 듯이 입을 뻐금거리던 걸 그만두곤 할 수 없단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0명이나 되는 장정들이 우르르- 몰려나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좁아 보이던 건물 안이 탁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여전히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상단의 사람에게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총수께서 일어나실 때까지 이 안을 둘러봐도 될까요?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만.” “아…아! 그, 그리 하시다면 곧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테이블에 앉아서 기다리시지요.”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만 폐를 끼치겠습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나와 이사나, 카이씨)는 눈에 띄는 테이블의 아무자리나 잡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곧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녹차와 간단한 다과가 담긴 접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상단의 사람을 붙잡고 총수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불쾌감 없이 선선히 대답해주는 그의 말에서 전혀 뜻밖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총수께서…여자 분이시라는 겁니까?” “예, 다들 그 사실을 알면 놀라시더군요. 하지만 저희 상단의 총 책임자분은 틀림없는 여성이십니다. 하지만 일반 평범한 아낙과 비교하시면 곤란합니다. 이카나님은 혼자서 장정 열 사람 몫을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는 범상치 않은 분이니까요.” “이카나…라, 그분의 이름?” ‘장정 열사람’이란 대목에서 대책 없이 덩치가 큰 우락부락한 근육녀가 떠올랐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자랑스러운 빛이 가득한 눈으로 얼른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단을 일으킨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라더니, 상단 사람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 것 같았다. “외모도 얼마나 아름다우신데요. 지금까지 그 분께 청혼을 한 귀족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만, 전부 다 거절하셨습니다. 사실, 전 총수님의 연인이셨거든요. 그 분에 대한 의리를 저버릴 수 없었던 거지요.” “대단하신 분이군요. 평소에도 저희처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까?” “물론입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이들이 많지요. 지금은 아침이라 사람이 뜸한 것일 뿐, 점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붐빌 겁니다.” 그들이 아침에 상단을 방문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지금처럼 총수란 인간이 잠잔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빨리 담판을 짓자며 이른 새벽부터 서두른 우리만 바보가 된 셈이었다. ‘그나저나 아름다운 외모에 무식하게 힘이 센 여자라니…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걸? 설마 그 장정 열사람 몫이라는 게 힘이 아니라 머리를 뜻하는 걸까? 아, 그렇다면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건물 안이 상당히 따뜻하군요. 딱히 눈에 띄는 난로도 없는 것 같은데…혹시 마법입니까?” 혼자서 무심코 생각하던 나는 카인씨가 주위를 둘러보며 묻는 말을 듣고 서야 건물 안의 공기가 훈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찬바람이 부는 밖과 달리, 이곳은 별달리 불을 지펴둔 곳도 없는데 보일러를 틀어놓은 것처럼 공기가 가벼웠던 것이다.(정령왕은 온도를 피부로 체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의해서 느끼지 않으면 눈치 채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자 상단의 남자는 자부심이 깃든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마법이 아닌 특별한 방법이 있다나? 그 아리송한 대답에 이사나와 카이씨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 뜻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눈앞을 어지르며 돌아다니는 붉은색의 나비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어디보자,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대충 세는 숫자만도 10마리가 넘네. 이렇게 많은 카사들을 건물 내에 통제를 해두다니, 상단 사람 중에 불의 정령사라도 있는 건가?’ 척 봐도 계약 되지 않은 자연계의 정령들이었다.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불의 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는 것 같았다. 카사들은 그의 기운을 느끼고 몰려온 것일 테지.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눈앞을 팔랑거리는 불의 하급정령을 향해 살며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녀석들은 흠칫 놀라며 부끄러운 듯 팔랑팔랑 저 쪽으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힐끔힐끔 눈치를 보는 것이 멀어지면서도 어쩐지 아쉽다는 얼굴이다. 정말이지 이프리트와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부하였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나는 곧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상단의 주인이라는 여자가 불의 정령사인건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불의 정령사라니오?” “아, 그게요. 아까부터 불의 카사들이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거든요. 건물 내의 공기가 전체적으로 따뜻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거예요.” “카사라면…불의 하급정령 말씀이십니까? 호오, 소환되지 않는 정령들도 인간 세상에 기운을 미칠 수 있는 건가요?” 궁금하다는 듯이 묻는 카이씨의 말에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근처에 있던 상단의 남자가 개인적인 용무 때문인지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마음 놓고 설명 할 수 있었다. “정령은 자연 그 자체니까요. 자연의 기운은 항상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도 굳이 ‘소환’의 형식이 있는 건, 좀더 본질적인 속성의 기운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자연계의 정령들이 근처에 있다는 것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겠군요.” “물론이죠. 다만 막무가내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계절의 성질을 따르지만요. 지금과 같은 겨울엔 바람의 정령이 활기를 띄어요. 그들은 대체적으로 쾌활한 성격이기 때문에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바람을 일으키죠. 반대로 불과 물의 정령의 기운은 감소하고요.” “하지만 지금은 겨울인데도 불의 정령이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훈훈할 정도로요.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여전히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질문에 나는 가볍게 ‘불의 정령사나 선천적으로 불의 기운이 강한 인간’이 있을 경우, 자연적으로 그 속성에 해당하는 정령들이 모이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그 예로 이사나의 옆에도 항시 물의 정령이 따르지요. 다만 물은 언제든지 기온의 영향으로 온도가 달라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근처에 있어도 별 다른 느낌이 없는 거예요.” “에? 그, 그런 거야?”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는 듯, 이사나는 무척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보이지도 않는 허공을 향해 손을 마구 휘저었다. 제 딴에는 무심코라도 정령을 만져보고 싶었던 모양인데, 정작 그 바람에 녀석의 팔에 앉아 있던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꺄하하하~ 웃으며 미끄럼틀을 타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극성스러운 녀석들이라니까.’ 그래도 전혀 미워할 수가 없는 건, 그들이 나와 한 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서 일 것이다. 이제 슬슬 정령이란 몸에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건물 내의 이것저것을 구경하면서 무료함을 달래던 우리는 곧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오는 한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겨울이라는 날씨 자체를 무시하듯, 얇은 반소매 차림이었는데, 묘하게 당당해 보이는 태도를 보니 지금까지 우리를 접대하고 있던 남자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인 듯 했다. “실례합니다. 혹시 여러분이 이카나님을 만나러 오신 분들입니까?” “예, 그런데요.” “저는 클리프 상단의 부총수 엘드란 이라고 합니다. 이카나님께서 지금 막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들어오시라고 하셨으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헤에, 벌써요?” 시간이 꽤 지난 것 같기는 해도, 1시간도 채 채우지 않은 시각이었다. 당장 몇 시간이라도 기다릴 각오로 앉아있던 우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총수라는 엘드란은 그런 우리들의 모습을 묘한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곤 다짜고짜 뜬금없이 이렇게 대꾸하는 게 아닌가. “아마 좋은 결과를 얻어 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이카나님이 저렇게 빨리 기침하실 때는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예지가 밝은 분밖에 없거든요. 분명 원하시는 대답을 얻어 가실 겁니다.” “!!!” 아, 그러고 보니 상단의 주인이란 여자에게 예지력이 있다고 했던가? 순간 내가 상단에 와있는 건지 점집(?)에 와 있는 건지 헷갈렸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크게 다른 심정은 아닌 듯,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엘드란은 그런 시선이 익숙하다는 듯 별달리 신경 쓰지 않은 채 우리를 주인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 이제 5장만 더 쓰면 자러 갈 수 있습니다...크흑.. 졸린 눈 부벼가며 쓴 거라 오타가 있을 지도;; 지적 부탁 드려요..ㅠㅠ 정령왕 엘퀴네스 5-6. 클리프 상단의 주인 (6) 내가 상단의 총수라는 여자- 이카나를 보자마자 가장 처음먼저 내뱉은 말은 ‘맙소사’였다. 어쩐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크게 휘둘리는 기분 이었달 까? 그녀는 나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보이지도 않은지 특유의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를 응접실까지 안내해온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분들과 따로 긴히 할 말이 있으니 엘드란은 그만 나가 있어.” “네, 이카나님. 마실 것이나 다과는?” “기다리시는 동안 실컷 드셨을 테니, 간단한 음료정도로만 하지. 어때요? 괜찮으시겠죠?” “아, 네. 그렇게 해주십시오.” 생글거리며 동의를 구하는 이카나의 모습에 이사나와 카이씨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나만이 연신 ‘신이시여~’를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마주앉은 우리 사이에 따뜻한 찻잔이 놓여지자, 이카나는 서둘러 엘드란을 내보냈다. 그리곤 미처 다른 사람들이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나를 향해 두 팔 벌려 외쳤던 것이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엘!! 그 동안 잘 지냈어?” “왜…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제 서야 마음 놓고 경악하는 나에게 이카나, 아니 이.프.리.트.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특유의 핑크빛 피부는 어디로 날려버렸는지(?) 백옥같이 하얀 피부가 시선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어머? 정말 이러기니, 아들? 오랜만에 만난 엄.마. 한테.” “어, 엄마?” “헉…” 그의 엽기적인(!) 발언에 놀라버린 두 인간들을 보며 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믿지 마! 나는 결백하다고! “크윽! 대체 누가 엄마라는 거야! 소름끼치는 소리 좀 하지 마! 부모노릇 하는 건 엘뤼엔 만으로 벅차다고!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네가 여기 있냐고!” “보다시피 유희중이지~ 물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 너였구나. 어머나~ 운 좋은 계약자 씨도 함께셨네. 반가워라. 그런데 이런 미소년이었어? 엘~ 너 능력도 좋다?” “말 돌리지 마! 유희기간은 나랑 별반 차이도 나지 않은 주제에 어떻게 상단의 총수씩이나 된 거야? 제대로. 똑바로 설명해.” 중얼거리면 못들을 줄 알았지! 뭐? ‘쳇, 그동안 많이 영악해 졌군’ 이라고? 잔뜩 찡그리고 있는 내 얼굴에 이프리트는 자신의 붉은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기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쩌긴 뭘 어째? 상단 주인을 꼬셨지. 단기간에 신분상승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다행히 이정도의 몸매와 얼굴이 받쳐줘서 말이야~ 아주 쉽게 꼬여 냈단 말씀!” “너…너어어어!!” “엘뤼엔한테 일렀다간 죽어! 알았어? 그날로 너랑 나랑 사이좋게 죽는 거야.” “……” 아니, 실망시켜서 미안한데 말이야, 이프리트. 이미 엘뤼엔은 내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통해 이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을 거거든? 그런고로 내가 이르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네가 바람피운 사실이 다 접수된 단 거지. 이거…미안해서 어쩌나. 그러나 서슬 푸른 얼굴의 이프리트를 보니 ‘당분간은’ 녀석을 살리는 셈치고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마침 이전에 엘뤼엔이 했던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말이다. ‘문장을 받았다는 걸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지. 설마 엘뤼엔은 이 상황을 미리 짐작하고 있던 건가?’ 그의 질투와 분노의 시선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 해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내 입으로 진실을 알리는 일은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겠다. “저어, 엘님? 대체 어떻게 된…” “에? 아- 그러고 보니 카이씨와 이사나는 초면이었죠. 내 정신 좀 봐. 그러니까…간단히 소개할 게요. 이쪽은…내 동료이자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랄까요.” “예에?” 아아. 저 놀라다 못해 소스라치는 모습을 보니 죄책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딱딱하게 굳어진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나는 짧게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이런 녀석이 정령왕이라서.” “하, 하아?” “뭐어? 야! 엘! 너 그게 지금 무슨 뜻이야!” “무슨 소리긴! 우린 잔뜩 기대하고 왔단 말이야. 인정을 받느니 마느니 얼마나 가슴 떨렸는데, 떡하니 나타난 녀석이 이프리트라니! 내가 얼마나 황당해 했을지 생각해 봤어?” “그거야 네 사정이지. 나야말로 네가 날 찾아올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고. 즉, 황당한 건 나도 마찬가지라는 말씀!” 당당하게 가슴을 쭈욱 펴며 하는 말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이프리트. 그 키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가슴 좀 없애줄 순 없는 거야? 보는 남자들이 상당히 민망스럽거든? 어쩐지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이프리트가 아닌 것 같아 나는 퉁명스럽게 빈정거렸다. “잘~ 한다. 미래의 남편이 버젓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잔뜩 치장하고 다른 남자나 유혹하고 다니다니.” “시, 시끄러! 이건 그냥 단순한 유희란 말이야! 너 엘뤼엔한테 이르면 진짜 죽~어?” 당황한 듯 잔뜩 얼굴을 붉히면서도 할말은 다하고 마는 이프리트였다. 그때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는지, 이사나와 카이씨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서, 설마…정말로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맙소사.” 그들로서도 이렇게 흔하게(?) 정령왕을 만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반대속성의 정령끼리 만나 투닥거리며 싸우는 광경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을 테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그와의 휴전을 선언했다. 지금은 내 일행부터 챙기고 볼 셈이었던 것이다. “너무 그러게 놀랄 필요 없어요. 이렇게 만난건 정말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 정령왕도 유희를 즐기니까요.” “아, 그렇지만 정말 굉장한 우연이군요. 이런 곳에서 불의 정령왕을 뵙게 될 줄이야. 만나서 영광입니다, 이프리트님. 저는 카이테인이라 합니다. 미약하나마 엘퀴네스님의 여정에 동반하고 있습니다.” “아. 저, 저는 이사나입니다. 아시는 것 같지만 일단 엘퀴네스의 계약자이고요. 불의 정령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호호. 마음에 드는 인간들이네. 엘 녀석은 남성체 주제에 이렇게 멋진 남정네들만 끌고 다니다니. 좀 부러운 걸?” “이프리트! 너 정말!!” 그러니까 말을 제발 가려하란 말이다! 지금 이 대화 엘뤼엔이 다 듣고 있다니까? 행여나 불벼락이라도 떨어질 새라 나는 얼른 하늘을 쳐다보며 안절부절 소리쳤다. 그러나 이프리트는 단순히 잔소리가 귀찮다는 듯한 태도로 손을 내젓기만 하는 것이다. 이미 한차례 엘뤼엔의 경고도 있었던 이상, 속 시원히 다 털어놓을 수도 없고. 이래저래 나 혼자 답답해서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를 찾아온 용건은 뭐야? 설마 그냥 인사하러 온 것은 아닐 테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간신히 진정한 나는 이프리트의 한 마디에 그제 서야 여기를 온 목적을 깨닫곤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런 나를 향한 다분히 한심스럽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오늘날 몇 겹이나 쌓아온 철판신공을 빌어 무시할 수 있었다. “아, 그게 말이야. 사실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어서.” “호오~ 부탁이라니? 뭔데?” 눈을 흥미롭게 빛내며 묻는 말에 나는 지금까지 이어진 일정과 이사나의 상황 등을 차근히 설명해 나갔다. 자칫 지루하게 들렸을지도 모르는 이야기였는데, 이프리트는 동화책을 듣는 것 같이 재밌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어제 후작과 만나 담판을 짓게 된 것과, 그가 이사나더러 클리프 상단 주인의 ‘인정’을 받고 돌아오라는 대목에서는 폭소를 하며 웃어 젖혔던 것이다. “꺄하하하! 정말 재미있다. 이런 흥미로운 유희를 벌이다니, 너도 제법인 걸?” “알아주니 고마운데 말이지. 그렇게 되서 현재 네 인정이 필요해. 조금만 도와줄 순 없을까?” “흐음. 글쎄다. 모처럼 엘의 부탁이니 딱히 못 들어줄 것도 없지만 말이지.” 여기서 이프리트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은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며 얼굴을 환하게 밝히게 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된 그와의 말싸움을 통해, 이프리트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님을 온몸으로 체험한 바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시나 이프리트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모두의 얼굴이 기대에 물드는 것을 천천히 흩어보고서야 냉큼 ‘싫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단번에 천국에서 지옥을 오가는 일행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금부터는 심리전이다. 어디 누가 이기나 해보자고. “너 진짜 그러기야? 네 말처럼, 모처럼 부탁하는 걸 그렇게 냉큼 거절해도 되는 거냐고.” “싫은 건 싫은 거야. 귀찮단 말이야. 그리고 이런 가벼운 일 하나하나 신경 쓰기에는 내가 너무 바쁜 몸이라서 말이지.” “그냥 인정만 해주면 되는 거잖아. 나도 너 못지않게 바쁜 몸이라고. 그 가벼운 일 하나 못해줘서 동료간의 의리를 상하게 해야겠어?” “어머?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의리가 있었단 거람?” “뿌득. 그렇게 나오시겠다? 너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이런 식으로 내 쫒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무려 황제에다 정령왕의 계약자인 사람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가 뭔데?” “그거야 내 맘이지. 그동안 너 하는 행동 얄미웠던 거 복수하는 셈 치지 뭐.” 대체 내가 언제 그렇게 얄미운 행동을 했다는 거냐! 속으로 잠시 이를 간 나는 곧 피식 웃으며 거만한 포즈로 팔짱을 끼었다. 바야흐로 비장의 카드를 내밀 때가 도래한 것이다. “아하~ 그러셔? 그럼 나도 너한테 복수하는 셈치고 지금까지 네가 벌인 행동을 엘뤼엔한테 ‘고스란히’ 알려줘도 상관없는 거겠네?” “!! 이익! 너어어~!” 쳇, 그러게 누가 내 성질 돋우라나. 나로서도 많이 굽히고 들어갔던 거라고. 까짓 인정하나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려워서 이런 식으로 괴롭히냔 말이다. 결국 승리한건 엘뤼엔을 등에 업은 내 쪽이었다. 아직까지 짝사랑 확정! 중인 이프리트로서는, 엘뤼엔에게 미움 받는 다는 걸 상상 이상으로 무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울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을 보고나니 괜시리 애꿎은 여자애 한명 괴롭힌 꼴이 된 것 같아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로서도 사정이 급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굳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프리트의 중얼거림을 듣는 순간 확신되었다. “쳇, 그냥 ‘엄마’라고 한번만 불렀어도 순순히 들어줬을 텐데. 아무튼 밉살맞은 아들이라니까?” “누가 아들이라는 거냐, 너…”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엄마’운운하는 소리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인식하지 못한 사이에 세뇌라도 시키려고 작정한 게 아닐까. 그러나 불안하게 바라보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프리트는 투덜거리며 태연히 다음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내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인정’해 준적은 없었어. 그러니까 너라고 해도 마찬가지야, 엘. 나의 인정을 받고 싶다면 그에 해당하는 조건을 이루고 돌아와야 할 거야." "조건을 이루고 돌아오다니?" ======================================================================== 드디어 목표 분량 다 채웠습니다...ㅡㅜ 밤을 꼴딱 새버렸네요.. 모두 좋은 꿈 꾸고 계시는지... 이따 저녁에 다시 만나요~~...(그리고 그대로 기절) 정령왕 엘퀴네스 5-7. 출발! 바론 던전을 향하여! 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당황하는 나와 이사나에게 이프리트가 내건 조건이란 다음과 같았다. 역사와 유래가 깊기로 유명하여, 타 제국에 비해 고성과 던전의 숫자가 많기로 유명한 알폰프 제국에서 최근에 또 다시 새로운 던전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바론 사막' 부근에서 발견되었다고 해서 바론 던전이라고 이름 붙여졌다나 뭐라나. 문제는 그것이 발견된 장소가 마물들이 판 치는 죽음의 숲 근처인데다, 여기저기 위험한 지형이 많아 제대로 된 안내자가 없으면 입구조차 찾기가 힘들다는 것이랄까? 처음 발견 된 이래 벌써 3년 동안 수많은 탐험가들이 도전을 시도한 모양이다만, 던전의 끝까지 가본 일행은 아직까지 단 한 팀도 없었다는 것이 대체로 알려진 기본 설명이었다. 그리고 이프리트가 내건 조건은, 그 던전 깊숙이 잠들어있는 단 하나의 검을 가져다 달라는 것이었다. “검이라니? 그 던전 안에 검이 있다는 거야?” “그래. 아마도 내 예상이 맞다면, 던전의 가장 최하층 에 있는 건 오직 검 한 자루 뿐이야. 그걸 가져오면 ‘인정’해 주지.” “헤에.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그런데 넌 그 던전에 검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아무런 사심 없이 무심코 물은 질문에 이프리트의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당혹한 감정을 숨기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그 던전을 만든 사람이 사실은 너였다던가?” “아니야! 난 그런 쓸모없는 일에 기운 소비하는 건 딱 질색이라고. 그냥 예전에 알고 지내던 인간이 만든 거야. 인간의 도전정신을 연구해 봐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말이야.” “그럼 그 검도?” “농담하니? 던전의 최하층에 있는 검의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이그니스가 봉인된 마법검이라고. 그걸 인간이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쳇. 보지도 못한 검이 마법검인지 식칼인지 내가 알게 뭐람? 한심하다는 듯한 이프리트의 시선에 잠시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이윽고 드러난 또 하나의 진실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잠깐만~! 이그니스라고? 불의 상급정령인 그 이그니스? 그럼 검을 만들었다는 게 설마…” 이프리트! 바로 너였단 말이냐!! 아니나 다를까. 경악하는 내 시선에 이프리트는 뻘쭘한 시선을 옆으로 돌리면서 나직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저것이야 말로 죄를 시인하는 행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는 잠시 내가 시큐엘을 데려다가 검안에 봉인시키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오직 단 하나! 그건 결단코 감정을 가진 생물로서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 내 목소리는 지극히 험해지기 시작했다. “야! 너 미쳤어? 불의 정령왕 주제에 이그니스를 검에다 봉인을 시켜? 그리고 뭐? 8백년? 그 오랜 시간동안 혼자서 검안에 갇혀있을 이그니스가 가엽지도 않았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시끄러. 내 휘하의 정령을 어떻게 하든 그건 내 마음이잖아. 지금이라도 생각나니까 다시 데려오겠다는 거고. 하여간 별것도 아니 것 가지고 쨍알거리긴.” “별 것도 아니야아? 이프리트, 너 정말!” 저런 사악한 것도 왕이랍시고 제대로 된 거부도 못한 채, 꼼짝없이 검안에 갇혀 지냈을 이그니스를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나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프리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연신 투덜댔다. “싫으면 관 둬. 어차피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언제고 한번 가서 찾아올 생각이었는데, 보시다시피 지금은 좀 바빠서 말이야. 한 백년 뒤에 쯤 가서 느긋하게 한번 들려보지 뭐.” “뭐? 그러다 그 사이에 인간들이 들고나가면 어쩌려고?” “그럼 찾는 게 좀 더 나중으로 미뤄지는 거지. 그래봤자 몇 백 년 밖에 더 가겠어?” “이프리트…너 정말…” 도무지 반성할 줄 모르는 그의 태도는 하루 이틀 만에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어쩌면 최초의 정령왕 때부터 이루어진 본능 같은 것일 지도 모른다. 그걸 이제 와서 나 같은 돌연변이가 나타나 ‘옳지 않다’고 떠들어 봤자 씨알도 먹힐 리가 없는 것이다. 결국 어디까지나 ‘쓸데없는 실갱이’가 될 가능성이 컸기 때문에 나는 얌전히 먼저 항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대신 이프리트! 죽어도 내가 널 엄마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다. 알아? 넌 오늘 실수한 거라고! “하아. 알았어. 그러니까 그 검을 가져오면 인정해 주겠다는 거였지? 일행의 숫자에 제한 같은 건 있는 거야?” “그런 게 있어 봤자지. 몇 명이 가든 어차피 네가 나서면 다 해결될 일 아니야? 말이 좋아 ‘조건’이지 이건 완전히 형식적인 거라고.” “그래, 그래. 눈물나게 고맙다, 정말.” 이후에도 계속 칭얼거리려는 녀석의 말을 간단한 손사래로 받아친 나는, 아직까지 전혀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이사나와 카이씨)를 일으키곤 상단의 문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이프리트의 염장을 지르는 한 마디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은 채. “저기 말이야, 이프리트. 아무래도 미리 알아두고 있는 편이 마음의 준비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말이지.” “…?” “엘뤼엔이 가끔가다가 내 일정을 알아보는 모양이더라구. 혹시 모르잖아? 우리가 나눈 ‘대화’를 몽땅 듣게 되었을지?” “뭐, 뭐?!” “…명복을 빈다.” “크악! 그게 대체 무슨 소리얏! 야, 야!! 엘퀴네스! 너 거기 안서?!!” 벙쩌진 이프리트가 처절한 비명을 질렀을 때는 이미 나는 저만치 문 밖에서 멀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 마디로 The end. 즉, 상황종료인 셈인 것이다. 십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건물 밖에서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과 함께(원망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건 살포시 무시해 주었다.) 성으로 돌아온 우리는, 마치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이 불쑥 나타난 후작의 손에 잡혀 무작정 접대실로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곤 다짜고짜 상단에서의 일이 어떻게 되었냐고 캐묻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못 차리는 나와 이사나를 대신해 카이씨가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설명하자, 곧 심각한 얼굴이 되어 수염도 없는 턱을 쓸어보였다. “끄응.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바론 던전이라니, 전혀 뜻밖의 조건이로군요. 하필이면 그런 위험한 곳을.” “아직 아무도 최하층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그게 사실입니까?” “맞습니다. 이르기는커녕 대부분 입구부분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죠. 알폰프 제국에서 몇 번이나 탐험가를 보냈는데 결과는 하나같이 전멸이었습니다. 지금에 와선 누구도 자진해서 찾아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지요.” “전부 전멸이라니…그렇게 위험한 요소가 많나요?” 위험하다고는 들었지만 전부 전멸할 정도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기에, 나는 벙쩌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후작은 여전히 근심어린 빛을 감추지 못하며 진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바론던전은 아시다시피 알폰프 제국에서 발견된 던전입니다. 오른쪽으론 죽음의 숲을, 왼쪽으로는 지옥 땅거미의 서식지로 유명한 바론사막을 끼고 있지요. 두 지형의 교차점이라고 해야 할 까요? 때문에 던전의 입구는 항시 수많은 마물들과 거미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그럼 던전 자체는 그리 위험한 게 아니라는 건가요?” “그건 아닐 겁니다. 던전 내에도 수많은 트릭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하니까요. 마법으로 만든 건지, 완전히 깨부수기 전까진 망가지지도 않는다는 군요. 안은 미로로 되어있어 길을 찾기도 쉽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극악한 마물들과 트릭들이 판치는 곳이라…. 설마 이프리트. 그걸 처리하고 다니는 게 귀찮아서 이제껏 가만히 내버려 둔건 아니겠지? 크윽! 어디 돌아와서 두고 보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번 묻어뒀던 녀석에 대한 복수심을 피워 올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후작의 근심은 그칠 줄을 몰랐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걱정이군요. 그런 위험한 던전을 소규모의 일행이 감당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타 제국 안에 가문의 기사들을 보낼 수도 없는 일이니.” “내가 인정받기 위한 시험이잖습니까? 형님은 전혀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일행은 저와 함께 오신 이들로 충분하니까요.” “예? 말도 안 됩니다, 폐하. 바론던전이 어떤 곳인지 설명 드렸잖습니까? 그런 위험한 곳에 달랑 3명의 일행들과 동행하시다니요! 정규군대가 가서도 며칠 만에 몰살된 장소입니다. 절대 불가합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입장을 털어놓은 이사나의 말에 후작은 경악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러면서 처절한 목소리로 말리기 시작했는데, 하나같이 나와 일행들의 실력에 대해 불신을 포함하고 있는 내용이 전부였다. “괜찮습니다. 라피스님은 훌륭한 마법사이시고…” “그래봤자 머리카락과 얼굴을 바꾸는 수준의 기초적인 폴리모프 마법이 한계 아닙니까! 6서클의 마법사 두 명이 가서도 비참하게 당했단 말씀입니다!” “에에…카이테인씨는 치료능력이 가능한 신관이신데다…” “아무리 그래도 다 죽어가는 상처는 회복시키지 못할 겁니다!” “그, 그리고 엘은 상급 정령사…” “아, 글쎄 상급정령사가 아니라 정령왕이 나타나도 그 던전을 뚫을 수는 없다니까요!” …마지막 말에는 조금, 아니 ‘상당히’많이 울컥해 버렸다. 까짓 던전 주제에 대단하면 얼마나 대단하다고 정령왕이 뚫을 수 없다고 장담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후작의 피를 토하는 외침은 마침 에이프릴과 산책을 마치고 돌아온 라피스에 의해 그 종말을 맞이하고야 말았으니. “대체 무슨 일이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데이트가 아주 흡족했었는지, 평소완 다르게 기분 좋은 미소까지 싱글거리고 있는 녀석이었다. 아무래도 처음부터 설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나는 얼른 그를 자리에 앉히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중요한 부분을 대충 간추려 설명했다. 상단에서 일어난 일부터, 지금 후작이 반대하고 있는 상황까지 말이다. 물론 후작과 에이프릴의 시선을 생각해 그 상단의 주인이 이프리트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흥미로운 표정으로 끝까지 경청하던 녀석은 다 듣고 나서는 ‘그럼 가면 되네. 그렇게 간단한 걸 가지고 뭐가 어쨌다고 이 난리야?’라고 대답하여 다시금 후작이 발작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바야흐로 말싸움 제 2차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 글쎄 그곳이 위험한 곳이란 말이오! 나는 폐하의 기사로서 절대로 그런 위험한 여정에 당신들만 보낼 수는 없소이다!” “아아~ 걱정 마시죠. 제 마법 실력도 쓸 만 할 겁니다.” “겨우 폴리모프 마법의 초급단계만 구사하는 수준이 아니오! 그것에 모든 걸 기대하기에는 바론 던전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그거야 가봐야 아는 거죠. 게다가 다치면 여기 이렇게 치료할 신관도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파티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리 신관이라 해도 다 죽어가는 상처는 치료할 수 없을 것 아닙니까!” “그나마도 없는 것보단 낫죠. 또 상급 정령사도 함께 하잖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크게 다칠 일도 없을 겁니다.” “상급 정령사가 아니라 정령왕이 나타나도 위험하다는 데도요!” “호오. 상급정령을 너무 만만히 보시는 군요. 그럼 지금 당장 시험해 볼까요? 아마도 이런 성 따위는 단 한방에 무너질 거라 생각합니다만.” “……” 한 마디로 후작의 완벽한 K.O 패였다. 저 라피스의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이 이런데 써먹힐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감탄한 표정으로 녀석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기뻐할 거란 내 예상과는 다르게, 라피스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뭐가 또 불만이야?” “엥? 뭐가?” 나름대로 칭찬한다고 했던 건데 생각 외로 차가운 반응을 보이자 좀 당황한건 사실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투덜거리는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방금 한 행동 말이야. 넌 나한테 불만 있을 때만 꼭 이상한 행동 보이잖아. 근데 어째 전에 보던 것과는 다르다? 이번엔 대체 무슨 뜻이냐?” “!!” 마치 벼락이 훑고 가는 듯한 충격이 내 몸을 강타하는 듯 했다. 서, 설마 이 동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네가 최고다’라는 뜻이 만들어지지 않았단 소리? 그래서 지금 가운데 손가락을 드는 것과 헷갈려 하는 거야? ‘맙소사…’ 웃기다. 엄청 웃기다. 너무 웃겨서 돌아가실 것 같다. 나는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웃음을 얼른 한손으로 틀어막았다. 아이고 배야! 누가 나 좀 살려줘!! “큭…아, 아무것도…아니야. 큭큭큭큭…푸흡!!” 그래도 나는 꿋꿋하게 참고 넘어가려고 했다. 그동안 이런 사소한 상식하나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은(?) 내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진 라피스의 말에 결국 한계를 느끼고 말았으니-! “…혼자서 욕하고 비웃지 말고 순순히 불어라. 자식이 점점 귀여운 짓을 한다니까? 너 자꾸 까불면 나도 똑같이 되받아 치는 수가 있어.” “푸…푸하하하하하하하!” “에? 뭐, 뭐야?”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라피스가 덩달아 욕한답시고 엄지손가락을 당당하게 치켜드는 장면이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눈물까지 찔끔거리면서 미친 듯이 웃는 나를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정말이지 태어나서 가장 많이 웃어본 날인 것 같았다. ======================================================================== 하아..한편 분량 채우기가 생각보다 힘들군요..(끄덕끄덕) 오늘 안으로 또 목표할당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무리라고 본다;) 훗.. 갈수록 먼치킨의 극을 달리는 엘퀴네스 였습니다! 이러다 드래곤볼이 재현되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군요; 정령왕 엘퀴네스 5-8. 출발! 바론 던전을 향하여! (2) 휘이잉. 살을 에이도록 차가운 겨울바람이 잎이 다 떨어진 마른 잔가지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하늘을 활개 치는 수많은 정령들 중에서 요즘 들어 부쩍 눈에 띄이는 것은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이었다. 바야흐로 완연한 겨울이 도래한 것이다. 깔깔거리기 바쁜 정령들의 춤사위를 구경하던 검은 머리의 소년은 어깨에 덮어쓴 모포를 걷어내곤 어딘지 나른한 듯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바람이 부는 군…” 그러나 소년의 혼잣말은 결코 혼잣말로 그치지 않았다.(?) 어느새 귀신같이 알아들었는지 옆에 있던 일행들이 덩달아 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아. 그렇네. 바람이 불지.” “그것도 더럽게 차가운 바람이 말이지.” “이 바람이 백번 정도 불고나면 우린 다 동사한 시체로 발견 되지 않을까?” “아마 그럴걸?” “이익! 이게 다 너 때문이야, 헤롤!!” 무료한 듯 이어지던 대화는 한사람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는 것으로 그 끝을 마무리 짓고 있었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집중을 받게 된 불쌍한 청년, 샴페인 용병단의 한 사람- 헤롤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으며 작은 항변을 시도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네가 여행 경비가 담긴 주머니를 잊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오늘날 이런 추위에 노숙할 지경까진 이르지 않았을 거 아니야!” “그게 어떻게 내 탓이야! 말안장에 달린 주머니가 헤져서 떨어진 거잖아! 내가 일부러 잊어버렸냐?” “어쭈! 끝까지 잘났다는 거냐!” 코끝까지 로브를 눌러쓴 마이티는 괘씸하다는 시선으로 헤롤을 바라보며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렸다. 애초부터 일행의 모든 식비와 노숙 경비가 담긴 주머니를 그에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나서야 후회가 되다니, 정말이지 땅에 엎드려 통곡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사람 다 그만둬. 지금 이런 상황에서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려봤자지. 아무튼 오늘도 역시 노숙이니까 알아서 아침까지 살아남아라.” “크윽! 휴센! 그게 명색이 용병단의 대장으로서 할 말이야?” “그럼 어쩌란 거냐? 능력 있으면 당장 여관비를 마련해 오던지.” “쳇-” 야속하게 들리긴 했지만 어찌됐든 구구절절이 휴센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싸우면서 기를 소비하기 보단 적당한 잠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더욱 시급했던 것이다. 짧게 혀를 찬 마이티는 헤롤을 향한 원망의 눈빛을 부라리며 불을 피우기 위해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준비를 끝마칠 생각이었다. 엘 일행과 헤어진 이후, 지금쯤 뜨뜻한 여관방을 만끽하며 수도인 헤리카를 향해 신나게 이동하고 있어야 할 샴페인 용병단들이, 오늘날 이 겨울에 오돌오돌 떨며 노숙하게 된 사연은 간단했다. 클모어에서 받은 의뢰비를 포함한, 일체의 모든 경비가 담긴 가죽주머니를 헤롤의 부주의로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은 여관은커녕, 매 끼의 식사조차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특히나 요즘같이 추울 때에는 무엇보다 잘 챙겨먹어 체력을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았던가! 며칠 새 부쩍 수척해진 얼굴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접해 보인다는 표현이란 게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 했다. 식욕이 왕성한 헤롤이나, 마이티, 휴센은 말 할 것도 없고, 이릴과 쉐리 역시 힘들어 하기는 마찬가지. 요즘 들어 고기를 부르짖는 것이 어찌나 심상치 않은지, 더 이상 내버려 두었다간 인육(人肉)이라도 뜯어 먹을 기세라, 트로웰은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일 아침엔 제가 근처에서 멧돼지라도 잡아오지요. 그러니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평소의 트로웰 답지 않은 무뚝뚝한 음성이었지만, 일행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익숙하다는 얼굴이다. 당연했다. 그것이 바로 엘과 합류하기 이전부터 보아왔던 트로웰의 ‘본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과거의 친구를 만나 탈선(?)을 하긴 했지만, 다시 돌아오는 게 당연하다고 느낄 정도로 그들에겐 무뚝뚝한 매튜 쪽이 오히려 친근한 느낌이었다. “정말이야, 매튜? 우웃! 이렇게 감동스러울 데가! 역시 너 밖에 없다!” “저놈의 헤롤 자식만 아니었어도, 어린 너를 고생시키지 않는 건데…” “아, 글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다니까?” “야! 마이티! 헤롤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잖아! 왜 애꿎은 사람을 볶고 난리야?”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애정을 과시하며 이릴이 냉큼 헤롤을 감싸고돌았다. 그러나 그 행동으로 돌아오는 것은 오직 일행들의 우우~ 하는 야유소리 뿐이었다. “감싸줄게 따로 있지, 이릴언니. 지금 헤롤 편 들어줄 기분이 나? 우리가 이렇게 고생 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휴센 얼굴이 반쪽이 된 게 안보여?” “어머, 얘 좀 봐~사람이 살다 보면 실수도 할 수도 있는 법이지, 그걸 가지고 계속 무안을 주고 그러니? 그리고 반쪽이 된 게 어디 휴센 얼굴뿐이야? 우리 헤롤도 안됐기는 마찬가지라고.” “크아악! 이것들이 지금 애인 없는 사람 놀리나! 당장 그만 두지 못해?” 마지막으로 이어진 것은 처절한 마이티의 절규였다. 그렇지 않아도 춥고 배고픈데 옆구리가 시리다는 비극적인 사실까지 인식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릴과 쉐리가 누구인가! 그녀들은 결코 굴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연인을 챙기기 시작했다. “봐, 봐! 휴센의 얼굴이 더 말랐다고! 헤롤관 달리 휴센은 몸이 말라서 잘 챙겨 먹어야 한 단 말이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 않아?” “무슨 소리! 헤롤이야 말로 이 체격을 유지하려면 평소에 많이 먹어둬야 한다고! 이 쑤욱 들어가는 근육 안보여? 탄력을 잃었잖아, 탄력을!” “우아아악! 그만~~!! 이 화상들아! 제발 솔로의 심정도 헤아려 달란 말이다!” 뻘쭘해 하는 두 남자와 절규하는 한 남자, 그리고 두 여자의 유치한 애정 과시를 지켜보던 트로웰은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러고 밤을 샐 생각은 아니겠지? ‘하긴, 추위를 잊는 데는 ’대화‘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지.’ 비록 체력소모라는 심각한 부작용이 따른 다는 단점이 있긴 했지만, 트로웰은 굳이 그 사실을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을 챙기고 다니는 건 애초에 그가 설정해둔 매튜의 설정에 한참이나 위배되었던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그는 엘퀴네스와 함께 했을 때의 ‘그’와는 다른 인품이었으므로. ‘그러고 보니 엘…무사히 후작이란 인간과 만났을려나?’ 알아서 잘 하고 있으련만, 역시나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듯 진심으로 ‘보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었다. ‘하긴, 이제까지의 정령왕들과는 전혀 다른 타입이니 어쩔 수 없지.’ 지금껏 정령왕들은 그에게 동료, 또는 동등한 조건의 쌍둥이 형제라는 느낌뿐이었다. 어떤 일, 어떤 행동에도 자신보다 뒤처지거나 우위에 있다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엘은 그 보다 좀 더 어린 느낌이랄까? 본인이 들으면 상당히 불쾌해 하겠지만, 트로웰은 아무래도 그가 자신의 ‘동생’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로인해 마치 한편의 가족구도가 완성되어 가는 기분이다. 정령으로 태어나, 항상 혼자라는 인식이 강했던 그로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각이었다. ‘어디보자…. 엘뤼엔이 아버지 역할이라고 치면, 이프리트는 내 쌍둥이 누나 쪽? 지독한 파더 콤플렉스라 아버지가 편애하는 막내, 그러니까 엘하곤 맨날 싸우는 거지. 흐음, 그럼 엘뤼엔이 내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는 소리? 쿡쿡. 이거 정말 재밌네. 엘뤼엔이 알면 그대로 기절하겠는 걸? 흐음, 그리고 미네르바는…’ - 크하하하하핫!! 휘이잉- 그때 마침 강한 바람이 트로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멍하니 올려다본 하늘위엔 겁도 없이 정령왕의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 용감무쌍한 진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처연해지는 심정이었달 까? 이와 같은 기분을 그는 과거에도 몇 번이나 경험해 본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엔 왠지 견딜 수 없을 것 같아, 미네르바…”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트로웰은 그렇게 나직히 중얼거렸다. *** 바론 던전으로 향하는 일행의 숫자를 결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충돌이 거세어, 결국 밤샌 공방으로 치닫고 말았다. 이사나는 절대로 처음 4명에서 인원을 더 늘릴 뜻이 없다는 의견을 고집했고, 그와 반대로 후작은 기사와 용병을 모집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거기다 중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후작의 동생인 에이프릴까지 덩달아 합류하고 싶다는 뜻을 밝히는 바람에 상황은 난데없는 삼파전으로 돌입하고 있었다. “그건 안 될 말이다, 에이프릴! 여자의 몸으로 어찌 그런 험한 곳으로 가겠다는 거냐! 바론 던전은 네가 어릴 때부터 호신술 삼아 배운 검술로는 상대가 안 되는 곳이란 말이다!” “그래요, 에이프릴 누님. 그것만큼은 저도 형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목숨이 위험할 지도 모르는 곳에 누님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폐하, 오라버니. 부디 저를 힘없는 여인으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세요. 스스로를 지킬 능력은 충분히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같이 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저도 이제 보호만 받는 여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뜻은 거창했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숨겨진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에이프릴의 시선이 아까부터 상황을 방관중인 라피스에게서 떨어지지를 않았던 것이다. 이건 설마…사랑하는 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르겠어요! 라는 상황인 게냐!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라피스를 향해 낮게 이를 갈았다. “정말이지 능력도 좋으셔~? 대체 언제부터 이런 사이로 발전한거야?” “그건 무슨 소리?” “능청 떨지 마. 에이프릴의 시선이 따갑지도 않아? 보아하니 널 따라갈 생각인가 본데, 그냥 두고 볼 셈? 달래든지 해서 어떻게든 말려보란 말이야.” “흐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라피스의 모습에 기가 막힌 나는, 억한 심정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그녀를 말려야 할 이유’에 대해 하나씩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녀가 여자라서 벌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불편한 사항은 둘째 치고서라도 가장 큰 문제는-! “정체를 또 숨기고 다녀야 하잖아.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이사나 본인도 제 실력을 마음껏 발휘하기가 어려울 텐데 그래도 상관없단 말이야?” “흠…확실히 그렇겠군. 하지만 그거야 솔직하게 다 밝히면 그만인 거 아닌가?” “하아? 그 말 진심이야?” 유희 중인 드래곤이 자진해서 정체를 밝힌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설마 그 정도까지 저 여자에게 빠져있던 거였나? ‘으윽. 이거 진짜 미치겠네. 친구의 사랑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 녀석 사정 때문에 일행들 모두가 불편을 감수할 수도 없으니 원.’ 그러나 나는 곧 빙글빙글 미소 짓는 라피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것이 놈이 내게 벌이는 지독한 장난임을 깨닫곤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은 단순히 내가 곤란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뿐인 것이다. 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식 같으니-! 그리하여 나는 사정 봐주지 않고 가장 극악한 처방을 내리기로 결정지었다. “그냥 네가 여기 남아서 저 여자 맡아라.” “뭐?” “아무래도 나는 친구의 사랑을 위해 이 한 몸 희생할 정도로 위대하신 정신을 가지지 못하겠거든? 그러니까 네가 그냥 남으라고. 우리가 알아서 검을 가지고 돌아올 테니. 설마 드래곤하나 빠진다고 전력에 큰 차질이 생기겠어? 그러다 정 쓸모없으면 계약을 파기하면 그만이고.” “……알았어, 내가 어떻게든 말려보면 될 거 아니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 못내 아까웠는지, 라피스는 이후로도 계속 꿍얼꿍얼거리며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어찌됐든 에이프릴이 일행에 합류할 의사를 취소하게 된 것은 기정 사실. 그리하여 갈 곳 잃은 삼파전은 다시 후작과 이사나- 두 양대 산맥(?)간의 대립으로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 졸면서 쓴거라 내용이 엉망일지도 모르겠스니다..ㅡㅜ 앞으로도 10장은 더 쓰고 자야하는데;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가 한계인 것 같네요. 눈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스토리가 전혀 떠오르질 않는다는;(<-현 새벽 2시) 아무래도 어제 너무 버닝모드에 몰입했었나 봅니다;;ㅡㅡ; 헐... 나머지는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차근차근 써야겠어요;ㅁ; 어색한 부분, 오타, 등등의 지적 받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보내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5-9. 출발! 바론 던전을 향하여! (3) “폐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바론 던전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장소입니다. 더구나 대공이 보낸 추적자가 언제 따라 붙을지 모르는 상황이 아닙니까?” “하지만 형님.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형님이 생각하시는 것만큼 여기 있는 일행들의 실력이 보잘 것 없는 것도 아닙니다. 쓸데없는 동행은 오히려 불편을 일으킬 뿐이지요.” “그러나 폐하…” “그만! 아무리 형님이라 하셔도 내가 정한 일에 대한 참견은 용납지 않겠습니다. 나는 누가 뭐래도 지금 여기 있는 일행들과 함께 출발할 겁니다.” 간곡한 후작의 부탁에도 이사나는 전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얼굴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뜻을 굽힐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아닌 척 하면서도 지난 몇 달 간, 샴페인 용병단과 동행하면서 정체를 숨기고 다녔던 일이 어지간히도 불편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반대하는 후작의 입장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동행의 숫자를 늘릴 수는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다른 말로 이사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폐하는 여기 남으시고 일행들만 보내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차피 검만 가져오면 되는 거니 굳이 폐하께서 가지 않으셔도 상관없을 텐데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형님? 그런 말씀을 하시려거든 그만 두십시오. 누가 뭐래도 저는 갑니다. 여기 있는 일행외의 다른 동행은 전혀 필요치도 않구요.” “하지만…” “형님!!” 결국 후작은 더 이상 참지 못한 이사나가 ‘명령’운운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러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나고 말았다. 더 이상 어떠한 말로도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한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결론이 내려지기 까지 무려 하루라는 시간을 꼬박 잡아먹었으니, 정말이지 징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형제싸움인 셈이었다. *** 다음 날부터 후작의 성은 긴 여행을 떠날 우리를 위한 준비로 분주해 지기 시작했다. 마련되는 것은 던전을 오가면서 먹을 넉넉한 양의 식량과, 갈아입을 옷. 타고 다닐 말과 간단한 여행경비의 수준이었지만, 아무래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하려다 보니, 다 준비 되는 데까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때문에 우리가 본격적으로 후작의 성을 빠져나와 던전이 있는 제국-알폰프로 떠나기 전까진 그 후로부터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러나 여행의 첫날부터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말의 안장에 실려진 엄청나게 많은 수의 짐들이었다. 넉넉잡고 1년을 예상하여 준비한 물품이라, 그 수가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다간 던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물건의 무게에 실려 압사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차라리 따로 짐말이나 수레를 부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사람의 무게에 짐의 무게까지 견디려면 말이 너무 힘들 텐데 말입니다. 꾸준하게 회복마법을 걸어 준다 해도 오래 버티지 못할 텐데요.” “하지만 수레는 너무 느린 걸요. 말을 하나 더 사자니 왠지 돈이 아까울 것 같고. 그렇다고 짐을 덜어 낼 수도 없으니, 이래저래 곤란하네. 어떻게 생각해, 이사나?”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마땅한 대비책을 궁리하지 못해 끙끙거리는 우리를 비웃은건 그 이름도 위대하신 레드 드래곤- 라피스였다. 녀석은 아주 간단한 손동작 하나로 지금까지 우리가 고민했던 것을 바보짓으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아공간 워프>” 파앗- 그 간단한 한마디의 단어는, 말의 안장에 얹혀져 있던 무수히 많은 짐들을 한꺼번에 투명화 시키는 초유의 기적을 유발시켰다(?) 즉, 한마디로 말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대체 그 짐들이 다 어디로 날아갔단 말인가!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피스!!” “헛…이것도 마법 입니까, 라피스님?” “설마…가져가시기 귀찮다고 죄다 소멸시킨 건 아니죠? 그거 준비하는데 꼬박 일주일 걸린 거란 말이에요.” 경악하는 나와 놀라워하는 카이씨, 그리고 울먹거리는 이사나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이어지자, 라피스는 그런 우리들을 한심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면서 귀찮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내가 알고 있는 공간에다 이동시켜 둔 것뿐이야. 나중에 언제든지 꺼내올 수 있으니까 걱정 말라고. 보다시피 당연히 마법이다. 그리고 이사나, 내가 그렇게 한심한 놈으로 보이냐?” “아하하. 그,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아무튼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제발 소란 좀 피우지 마. 특히 엘! 이 몸은 계약자로서 네놈의 대범한 모습을 볼 날이 있을지 심히 의문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쳇 남의 일에 신경 끄셔!” 거들먹거리는 꼴이 하도 얄미워서 혀를 낼름 내밀어 주었더니 라피스 녀석의 표정이 딱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척[!]하고 엄치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맙소사! 상상하던 일이 현실로 벌어지면 어떡해! 너, 너무 웃기잖아!! “풉! 푸하하하하!” “…대체 왜 웃는 거야?” …아무래도 녀석은 지난 번 사건 이후로 엄지손가락을 드는 것을 ‘너 잘났다!’라고 쏘아 붙이는 것 정도로 인식 한 듯 했다. 당연히 재미있었으므로 그것이 잘못된 정보라고 지적해 주는 일은 패스(pass).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수의 서곡이 흐르는 순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세상에서 다시없을 ‘개그’에 배를 움켜잡고 웃는 나를, 녀석은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정말 이상한 녀석이라니까? 혼자 웃고 혼자 궁리하고. 대체 뭐가 그렇게 웃긴 거냐?” “쿡쿡, 아, 아무것도 아니야. 크흠. 그럼 우리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너무 웃어서 경련까지 이는 볼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었더니 마침 배웅 나오던 후작과 에이프릴이 냉큼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에게 폐하를 잘 부탁한다고 거듭 인사를 건네던 후작은, 마지막으로 두툼해 보이는 가죽 주머니를 이사나에게 쥐여주며 진지한 목소리로 당부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혹시나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시면 이 돈으로 용병을 고용하십시오, 폐하. 넉넉히 챙겨 넣었으니 상급 용병 다섯은 충분히 고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아. 배려 감사드립니다, 형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꼭입니다, 폐하! 꼭 그리 하셔야 합니다!” “알았다는 데도요.” 아무래도 그는 일행의 숫자를 늘리는 일에 끝까지 미련을 떼지 못한 것 같았다. 눈을 부라리며 ‘꼭’을 강조하는 후작의 모습에선, 감히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집념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옆에선 에이프릴이 라피스를 향해 ‘돌아오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어요’라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 일단 넘어가기로 하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내가 없는 동안의 일을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고 맡겨주십시오. 수도에 있는 폐하의 기사들에게도 소식을 넣었으니 곧 연락이 닿을 것입니다. 그 동안 저는 언제 어느 때든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도록 완벽한 전쟁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부디 아무쪼록 무사하게만 돌아오십시오.” 지금 쯤 수도에서 다른 귀족들을 회유시키고 있을 친위 기사단들이 돌아온다면, 상황은 훨씬 이사나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지도 몰랐다. 거기에 다른 황제파의 귀족들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더욱 금상첨화이리라. 그들이 데려올 군대의 숫자까지 합치면 충분히 승산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문득 하나의 사실을 떠올리곤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굳이 이런 모험을 감행하면서 까지 이프리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어차피 군대가 모이기 시작하면 대공의 눈에 띄일테고, 그럼 몰래 용병을 모집하기 위해 상단의 도움을 받을 이유도 없잖아?” 그러자 귀신같이 알아들은 라피스의 반박이 이어졌다. 녀석은 전에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이번 여행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모르는 소리. 용병들의 문제는 확실히 그렇겠지만, 나머지 다른 이득을 배제할 수 없지. 일단 인정을 하고 나면 그 상단은 이사나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어. 자신이 인정한 사람이 형편없이 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거든. 인간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알아?” “글쎄? 군대의 숫자일까? 아니면 똑똑한 지휘관?” “그것도 그렇지만 일단 무기와 식량문제가 가장 시급하지. 내가 생각하기론 대공이나 이사나나 모을 수 있는 군대의 숫자는 서로가 비슷비슷 할 것 같거든. 그렇게 되면 누가 얼마나 더 좋은 무기를 가지고 있는 가로 승부가 갈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어? 또 체력을 보존하려면 식량을 확보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 굶어가면서 싸울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자~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그 많은 군대들의 식량과 무기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유통할 수 있는 존재는 누가 있을 까요? 1번 상인, 2번 기사, 3번 귀족, 4번 알아서 구한다.” “뭐야 그건…당연히 1번이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내 말에 라피스는 기특하다는 듯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엘뤼엔이나 이놈이나 점점 나를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갈수록 태산이다. 언제 한 번 날 잡아서 대모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나 나의 불쾌하다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설명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튼 그러한 관계로 전쟁 시 상단의 협력은 굉장히 중요해. 특히나 클모어는 무역도시로서 타지에서 온 상인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더 유리하지. 클리프 상단의 ‘인정’은 다른 상단들의 협력까지 이끌어 낼 수 있으니, 물자 면에서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해지는 셈이야. 즉, 만에 하나 고립되어도 절대 굶어죽을 일은 없다는 셈이지. 여차하면 독립 국가를 형성해 버려도 그만 이랄까?” “헤에. 그걸 대공이 얌전히 보고만 있을까? 무엇보다 녀석들한테는 마족이라는 존재가 있잖아? 인간들은 상대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리고 이쪽에는 ‘드래곤’과 ‘정령왕’이 있지. 충분히 해 볼만한 싸움 아니야?” “……그렇군.” 그의 말대로 치자면 대공과의 싸움은 어떤 식으로 계산해 보아도 이쪽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직 대관식조차 치르지 않은 대공은, 황권에 ‘정통성’이 있는 이사나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만한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지금 마신전에서 내세우고 있는 ‘반역’의 모함도 터무니없는 트집에 불과했으니, 생각이 있는 귀족이라면 함부로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당장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치고, 후작의 얼굴에선 그리 어두운 기색을 읽어낼 수 없었다. 단지 승리를 확신하는 당당한 기사의 모습만이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 ‘아하, 그러고 보니 카웰 후작이 소드 마스터라고 했던가? 그래서 저렇게 기세등등한 거였군. 하지만 대공 쪽에도 만만치 않은 기사가 있을 것 같은데…’ 이를 말이겠는가? 나중에 이사나에게 슬쩍 물어본 바에 의하면, 대공의 오른팔이라는 카리브디스 공작이란 자가, 바로 후작과 함께 대륙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 소드 마스터의 일원이었다. 또한 왼팔이라는 세트니오 백작은 대공의 친위대인 ‘어둠의 기사단’을 이끌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제국에서 내놓으라 하는 최정예 기사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므로 결코 만만하게 여길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어지는 이사나의 추가설명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실한건 아니지만 지금 나를 뒤쫓고 있는 무리가 바로 그 어둠의 기사단일지 몰라.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대장의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헉, 그게 정말이야?” 이제껏 별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추적자들의 존재가 그렇게 대단했다니, 축구하다 잠시 한눈 판 사이에 패스를 놓쳐도 이렇게까지 찝찝한 느낌이 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따라잡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달 까? 그래서 나는 지금부턴 흔적을 더욱 꼼꼼히 지우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단할 여행길에 끔찍한(실은 귀찮은) 피 부림 만큼은 사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과연 이번 주 안에 한 권 분량을 완성 할 수 있을까요? 슬슬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 OTL..... 정령왕 엘퀴네스 5-10. 출발! 바론 던전을 향하여! (4) 엘의 일행이 알폰프 제국을 향해 길을 떠난 그 시각, 카리브디스 공작 이하 어둠의 기사단들은 클모어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할버크에 머물러 있었다. 이사나가 벌써 후작과 합류한 것으로 모자라, 새로운 목표를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조금이라도 정보를 얻기 위해 영주관을 쳐들어간(?) 참이었다. 그 때문에 할버크의 영주관은 예상치 못했던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할버크의 영주인 카일 드 클란 백작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카리브디스 공작을 만났다는 감격에 살짝 몸을 떨며 연신 몸을 굽혀 인사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리브디스 공작님. 갑자기 찾아오셔서 놀랐습니다. 사람을 찾고 계시다고요?” “그렇소. 감히 대공전하께 대적한 반역자를 찾는 중이오. 그러니 백작은 최선을 다해 협조를 해야 마땅할 것이오.” “여부가 있겠습니까? 반역자라니, 당연히 그리 해야지요. 영지 내에 공문을 돌렸으니 곧 수상한 자들에 대한 인상착의가 파악될 것입니다.” 단지 ‘반역자’라고만 칭했지만 그것이 이사나 황제를 뜻하는 것임을 모르는 자는 이들 중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 건, 그가 생각하기에도 반역자라는 호칭이 억지나 다름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개 힘없는 지방의 영주가 무슨 용기를 낼 수 있겠는가? 지금으로선 권력의 정점에 선 대공을 따르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최선이었다. 백작은 화제를 돌릴 겸, 옆에 있던 자신의 큰 아들을 향해 얼른 인사를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번 기회에 공작의 눈에 잘 보인다면, 어렵지 않게 높은 자리를 꿰어 찰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시선을 눈치 챈 장남- 엘키노 드 클란은 기다렸다는 듯이 생글거리며 허리를 굽혔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각하. 엘키노 드 클란이라 합니다.” “흐음? 백작의 아들이오?” “그렇습니다, 공작님. 이 녀석이 공작님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우기는 바람에 이렇게 데리고 나왔습니다, 허허.” “공작님의 위용은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습니다. 비록 아직 기사의 작위는 받지 못했지만 한 사람의 검사로서, 검의 경지에 달하신 분을 뵙게 되어 정말 무한한 영광입니다.” “흐음…” 엘키노는 자신이 공작의 마음에 들 것이라 확신했다. 무엇보다 그는 정식 아카데미의 수료까지 거친 검사였으니 말이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남작의 딸을 겁탈하려다 적발되어 작위가 취소되었다.) 작위를 받지는 못했지만, 엘키노는 자신의 실력이 대단한 것임을 한순간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제 출세하는 건 시간문제지. 그동안 리오 녀석만 오냐오냐 하던 아버지도 땅을 치고 후회하실 걸? 이런 보석을 옆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셨으니 얼마나 미안하시겠어?’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공작은 그리 탐탁지 않은 얼굴로 엘키노 모습을 흩어보고 있었다. 명색이 기사라는 주제에 그 육체에서 수련한 느낌을 전혀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런 몸으로 잘도 검사라고 우기는 군.’ 검의 실력만큼이나 검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던 그로서는, 있으나 마나한 실력주제에 검사 운운하는 그가 오히려 건방져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불쾌한 시선으로 백작의 큰아들을 노려보던 공작은 곧 새로운 사실을 떠올리곤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고 보니 클란 백작가라고 하면, 이번 황실에서 주체한 백일장에서 최고득점을 얻은 청년의 가문이 아니오? 분명 이름이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들었던 것 같소만.” ‘에? 뭐야, 왜 갑자기 리오녀석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엘키노는 뜬금없이 동생인 리오의 화제가 나오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자신의 모습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동생만을 칭찬하는 공작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비인 백작의 입장으로선 누가 되었든 공작의 눈에 띄는 것이 중요했으므로, 화색이 되어 얼른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공작님. 부족한 제 둘째 아들놈이지요. 덕분에 이번 대공 전하의 대관식에 초대를 받게 되었으니, 정말 가문대대로의 영광입니다.” “그랬군. 대공전하께서 꽤나 칭찬했던 걸로 기억되오. 상당히 훌륭한 청년이더군. 그런데 보이질 않은 걸 보니 지금 자리에 없는 건가?” “아, 그, 그것이…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짐을 꾸려 나가버렸지 뭡니까? 좀 더 많은 세상을 둘러보겠다나 뭐라나…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보기완 다르게 고집이 센 녀석이거든요. 아, 아마도 대공전하의 대관식 이전엔 돌아올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그것은 얼마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느닷없이 성문 앞에 나타나 사람들의 통행을 어렵게 만든 상급 몬스터를, 우연히 지나가던 용병단이 처치한 사건이 있었다. 그 소문을 들은 백작은 자신을 대신해 큰 아들인 엘키노를 시켜 수고를 치하하고 오라고 일렀고, 혹시나 문제가 생길 것을 대비해 둘째인 리글레오를 불러 몰래 따라가 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큰 아들은 여지없이 용병들과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고, 리오는 아버지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장엄히 등장! 무수한 사과 끝에 간신히 뜯어말렸다…는게 그날 벌어진 대충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 때 이후부터 리오의 행동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을 하는가 하면, 이전엔 뜸하던 외출이 부쩍 잦아지는 것이 아닌가! 설마 마음에 드는 여인이라도 발견한건가 싶어, 한번은 그가 나 갈 때 몰래 사람을 딸려 보낸 적이 있었는데, 별 다른 특이한 점을 발견 할 수는 없었다. 외출 시마다 만나는 이는 어느 초라한 차림의 노인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만났다기 보단 우연히 마주치는 경우가 더욱 허다하다고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리글레오는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생각을 정리할 계기가 필요하다며 짐을 꾸리더니, 그대로 여행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미처 말려볼 틈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낭패로군. 공작이 불쾌해 하면 어쩌지?’ 혹시라도 불호령이 떨어질까, 백작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떠듬떠듬 대답했다. 마지막에 덧붙인 ‘대관식 전에는 돌아올 것이다’라는 것도 당장 분노할 그를 달래기 위한 변명일 뿐. 리오가 정말로 그럴 것이란 기대는 처음부터 가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니, 대관식이 며칠인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그러나 예상과 달리, 공작은 그것을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더욱 더 마음에 들었다는 얼굴이다. “그 나이 때의 청년이라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기 마련이지. 한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훌륭한 아들을 두어서 든든하시겠소, 백작. 그에게 거는 대공전하의 기대가 크오.” “여, 영광입니다. 공작각하.” 크게 경을 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이 의외로 별 탈 없이 넘어가자 백작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을 계기로 그가 둘째아들을 더욱 편애하게 되었다는 건 당연지사. 이래저래 소외당한 장남 엘키노만이 분한 얼굴로 입술을 악물고 있을 뿐이었다. *** 여행을 핑계 삼아 집을 떠난 리오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카터스 제국이었다. 이전에 벌어진 소동이 인연이 되어,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 세리엄 폰 알지오의 일행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저 더 넓은 세상을 체험하고 좀 더 많은 학식을 겸비하고 싶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그의 속사정에 대해서는 누구도 짐작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별 탈 없이 진행되던 여행길에 난데없는 제동이 걸리고 말았으니- 그것은 카터스 제국 황실로부터 날아온 한편의 통신구가 원인이었다. “아아니! 지금 뭐라고 그랬나? 황태자 전하가 뭘 어쨌다고?” 마냥 태평하고 능청맞게 굴 것 같았던 세리엄은 이 한편의 통신구로 인해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옆에 있던 그의 수행원-필립이란 남자도 놀라 굳어있기는 마찬가지. 리오는 이 흔치 않은 사태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수정구에 나타난 사람은 단정하고 밋밋한 옷차림으로 미루어 보건데 카터스 제국의 시종장인 듯 보였다. 안색이 잔뜩 어두워진 그의 입에서는 방금 세리엄을 경악시킨 단어가 다시 나열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태자 전하가 ‘또’ 황궁을 탈출하셨다는 말입니다, 세리엄님. 이번엔 채 한달도 버티지 못하셨습니다.> “그건 나도 들어서 알아!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 다음 말이네! 전하가 어디로 가셨다고? 아무래도 내 귀가 잘못 된 것 같아서 그러는데 다시 한번 말해주겠나?” 흥분하는 그의 목소리에 수정구에 나타난 남자의 얼굴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나직하게 대답했다. <세리엄님의 귀가 잘 못 되신 게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그렇게 전달했으니까요. 황태자님은 바로 며칠 전 ‘알폰프 제국으로 놀러가겠다’라는 쪽지를 남기시고 황궁을 탈출 하셨습니다.> “허억! 신이시여~맙소사!!” “말세로군.” 경악하는 세리엄, 그리고 이어지는 필립의 세상을 다 산 듯한 목소리였다. 그 격한 반응을 본 리오는 조심스럽게 알폰프 제국과 카터스 제국과의 관계에 대해 떠올렸다가, 그대로 헛바람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그 두 제국은 벌써 몇 백 년 째 이어진 철천지원수 지간 이었던 것이다. 원인은 한 여자를 두고 다툰 두 초대 황제의 비극적인 사랑(?)이었다는데, 그것이 발전하고 발전해서 영토싸움으로 까지 이어졌고, 종래에는 만나기만 하면 서로 호시탐탐 목을 벨 기회를 노리는 사이로까지 이어진 참이었다. ‘그런 극악한 장소에 스스로 걸어 들어갔단 말인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가 대책 없는 성격이라는 것은 그도 어느 정도 소문을 통해 알고 있던 참이었지만, 이 정도까지라고는 결코 예상치 못했다. 이건 완전히 무대포 수준이 아닌가! 황당해 하는 리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세리엄은 애꿎은 수정구를 향해 호통을 치고 있었다. “도대체 궁정 안에 사람이 몇 명인데 그것 하나 말리지 못했단 말인가! 하루 이틀 가출하시는 것도 아니고, 이젠 척하면 척이어야 할 거 아니야! 도대체가 도망칠 낌새도 하나 못 차린단 말인가? 그러고도 월급으로 산 음식이 입에 들어가나? 앙?” 그러나 억울한 건 수정구의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질 수없다는 표정으로 반박론을 펼쳐보였다. <황태자전하의 연기실력이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 하시는데 저희가 뭘 어쩔 수 있단 말입니까? 말씀하신대로 하루 이틀 가출하시는 것도 아닌데, 그분이 바보라고 순순히 티를 내시겠냐고요! 이것도 애시당초 세리엄님이 ‘남자라면 모름지기 여행을!’ 이라고 주장하신 덕분이 아닙니까? 저희도 지금 미치겠단 말입니다!> “뭬야? 그래서 지금 그게 내 탓이라는 건가?” <그럼 아닙니까? 지금 황제폐하의 진노가 극에 달하셨다고요! 전하의 수호기사들은 물론, 시녀들과 저까지 당장 내일이라도 처형대에 오르게 생겼습니다! 이번엔 아주 작정을 하셨는지 궁에 있는 물품이란 물품은 죄다 챙겨가셨단 말입니다! 이걸 어쩔 겁니까? 예?> “아니, 지금 그걸 나한테 따져서 어쩌자는 건가? 앙?” <애초에 시작을 하셨으면 책임을 지시란 말입니다! 7서클 마스터의 마법은 놔두셨다가 스프 만들어 드실 겁니까? 당장 알폰프 제국으로 뛰어가셔서 황태자 전하를 끌고 오시란 말이예욧!!> “뭐가 어쩌고 어째?” 세리엄은 분노했다. 황제조차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이 황실의 수석 마법사였다. 아무리 자신이 실수한 게 사실이나 하나, 한낮 시종장에게 막말을 들을 정도로 낮은 신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시종장의 말에 그는 화내려던 것도 잊고 그대로 멍하니 굳어져버릴 수밖에 없었으니… <…라는 게 지금까지 이어진 황제 폐하의 전언이셨습니다. 참고로 찾기 전까진 고국에 발도 들이밀지 말라 십니다. 전 분명히 전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알아서 잘 다녀오십시오. 건투를 빌어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뭐…뭐어엇? 자, 잠깐! 이보게!” “헉…” 눈 뜬 채 코가 베여도 지금보다 황당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통신이 꺼진지 한참 후에서야 화들짝 정신이 든 세리엄이 목 놓아 소리쳤지만, 이미 잠잠해져버린 수정구에서 대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그의 옆에 있던 필립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일찌감치 누울 땅을 파고 있는 상태였다. 알폰프 제국이라니! 지금 우리더러 그곳에 가서 황태자를 잡아 오라는 것인가? 그것도 황제폐하의 명령으로? 일단 한번 내려진 황제의 어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만 하는 게 카터스 제국내의 황법이었다. 그것은 제 아무리 수석마법사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만 것이었다. 이제 그들은 황태자를 찾기 전까진 고국에 발조차 들여놓을 수 없었다. 들여 놓는 순간 황법을 어긴 반역죄가 성립되어 근위대의 추격을 받을게 뻔한 것이다. 대체 그 넓은 알폰프 제국 어디에 가서 황태자를 찾는단 말인가! 쩍 하니 할 말을 잃어버린 두 남자를 보며 리오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신은 아무래도 그의 여행길을 길게 잡으실 모양이었다. “이거 어째 예정보다 상당히 여정이 길어지겠군요.” 움찔.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세리엄과 필립의 어깨가 자연스럽게 흔들거렸다. 다음으로 이어질 그의 말을 절대로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현실도피랄까?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리오의 얼굴엔 어느새 해맑은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알폰프 제국으로…” 가차 없는 확인 사살이 통보된 순간이었다. ================================================================= 10장은 20장으로.. 20장은 40장으로..어느새 점점 늘어나는, 미뤄져 가는 분량들..;;; 이걸 다 언제 채우나;;;ㅁ;;; 정령왕 엘퀴네스 5- 11. 사기 치는 엘프 (1) 후작의 성을 떠난 후 며칠 뒤, 우리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처해 당황해야만 했다. 클모에서 알폰프 제국으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두 제국 사이에 흐르는 카리프 해(海)를 건너는 수밖에 없었는데, 우리가 탈 배의 선장이란 사람이 말이란 동물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황당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어찌나 고집이 황소 같은지, 추가비용을 지급하겠다고 해도 전혀 요지부동이었다. “아, 글쎄 내 눈에 흙이 들어와도 절대 말들을 배에 실을 일은 없을 거다! 얼마의 돈을 주든 마찬가지야! 그렇게 말을 타고 싶으면 육로를 타고 가면 될게 아닌가!” “말도 안돼. 배로 가도 한달이 넘는 거리를 어떻게 육로로 가요? 산맥이라도 넘지 않는 이상 일부러 빙빙 돌아가야 하잖아요. 가는 데만 꼬박 1년을 잡아먹을 거라고요.” “그게 싫으면 말들을 처분 하던가! 아니면 다음 배를 기다려. 헹, 그래봤자 아무도 태워주지 않겠지만.” “엥? 왜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되묻는 나에게 선장은 선심 쓰는 듯한 태도로 이곳 카리프 해(海)에만 있는 징크스를 알려주었다. 배에 말을 실고 가면 그 날은 틀림없이 바다괴물이 출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다 괴물이요?” “그래. 몸은 뱀같이 생겼는데, 그 크기가 200미터를 훌쩍 넘는 다고.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이런 배의 갑판 따위는 한입에 산산조각을 낸다니까? 머리에 달린 촉수로 사정없이 공격을 해오는데, 일단 한번 놈에게 걸리면 그날은 죽었다고 복창하는 수밖에 없어. 그래서 우리는 놈을 죽음의 사자라고 부르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떠는 선장에게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말을 실을 때만 나타나는 데요?” “낸들 아나? 아마도 놈이 말고기를 좋아하는 모양이지. 냄새는 귀신같이 잘 맡는 녀석이거든. 이 징크스를 어기고 항해를 나섰다가 죽은 인간이 어디 한둘 인 줄 알아? 아무튼 말은 절대 안 돼. 이 배를 타고 떠나고 싶으면 알아서 처리하고 오라고.” “……” 결국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알폰프 제국에 도착해서 다시 구입하기로 결정을 내리곤, 그때까지 타고 있던 말들을 근처에 있던 마시장에 가져가 처분하는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멀쩡한 지름길을 놔두고 육로를 통해 빙빙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말을 팔고 돌아오는 길 내내 라피스는 연신 투덜거림을 멈추지 못했다. “쳇, 마음에 안 들어. 그런 시덥잖은 징크스인지 뭔지 때문에 이 귀찮은 작업을 해야 하다니. 인간들은 왜 그렇게 겁이 많은지 모르겠다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야? 바다 한 가운데잖아. 배가 부서지면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는 건데, 조금의 위험이라도 방지하는 게 낫지.” “그래도 겨우 돌연변이 뱀 하나 따위에 설설기는 꼴이라니. 인간은 그 빠른 번식력 빼고는 도대체가 봐줄만한 게 없다니까?” 그러자 ‘빠른 번식력을 빼곤 봐줄만한 게 없는 두 인간’- 이사나와 카이씨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곧 반박하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호오, 그럼 라피스님은 왜 그 별 볼일 없는 인간으로 폴리모프하신 겁니까? 이왕이면 엘프라던가, 드워프로 하시질 않고.” “맞아요. 게다가 지금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건 바로 인간이라고요.” 그러나 라피스가 누구인가! 녀석은 코웃음도 치지 않은 채 차례대로 두 사람의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렸다. “흥, 누군 인간으로 폴리모프하고 싶었는지 알아? 눈에 띄지 않으려면 대륙에서 가장 썩어 넘쳐나는 종족의 모습으로 행동 하는 게 편하니까 어쩔 수 없었던 거라고. 그리고 차지하고 있는 땅의 숫자가 많다고 해봤자…그것도 역시 인간의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잖아? 정말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숫자 외에는 내세울게 없는 종족이로군.” “쳇…” 결국 승리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라피스에게 돌아갔다. 괜히 따지고 들었다가 이번에야 말로 완벽하게 ‘숫자만 넘치는 종족’으로 매도당한 두 사람은, 분한 표정으로 비통한 한숨만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때 인간이었던 몸으로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을 대신하여 복수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는 드래곤은 힘 빼곤 별 볼일 없는 종족 아닌가?” “뭣시라? 드래곤이 어쨌다고?” “사실이 그렇잖아. 아무리 잘났다곤 해도 결국 생김새는 도마뱀의 확장판 밖에 더 되냐고. 덩치는 쓸데없이 커가지고 집 지을 때 땅이란 땅은 잔뜩 잡아먹고, 인내심 부족에, 이해심 결여. 배려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도 없음. 유희를 핑계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이중, 삼중, 더 나아가 다중인격을 연기하고 다님. 한마디로 심각한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성격파탄자다 이 말이지.” “뿌득~! 너 지금 말 다했냐?” 분노로 이글거리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퍼졌다. 그런데 어쩌나? 아직 내 얘기는 다 끝나지 않은 것을. “나로선 숫자 외에는 자랑할게 없는 인간이, 성격파탄자인 드래곤 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해. 그래도 어쩌겠냐? 이왕 태어난 건데 살아야지. 부디 꿋꿋하게 살아남아라, 라피스. 본체는 별 볼일 없어도 일단 폴리모프한 네 모습은 봐줄만 하니까 말이야.” “크아악! 더 이상 못 참아!” “호오? 못 참으면 어쩔 건데? 계약이라도 해제하자고?” “너, 너, 너어어어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나를 가리키는 라피스의 모습은 완벽하게 충격 먹은 인간의 형상 바로 그 자체였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고 당하면서 살 줄 알았냐? 이래봬도 나 역시 한때 한 성질 하던 인간이었단 말이다. 어쩔테냐! 하고 덩달아 쏘아보는 나를 기가 막히다는 듯이 쳐다 본 녀석은, 곧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한 손을 휘익 들어올렸다. 헉! 설마 저대로 때리려는 셈? “에?”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내 몸 어느 곳 하나 커다란 충격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것이 어찌된 일인 고 하니 …라피스 녀석은 이번에도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있었던 것이다. 머리끝까지 열 받은 표정을 한 주제에 ‘넌 최고다’의 포즈라니! 나는 이번에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쿠쿡, 라피스 너…킥킥킥.” “뭐야? 웃어? 감히 나를 모욕한 주제에 태평하게 웃~~어? 그나마 너라서 이 정도에 끝내주는지도 모르고!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넌 벌써 내 손에 죽었어! 알아?” “아하하, 아, 알겠는데. 이왕이면 다른 걸로 바꿔라. 너 그게 무슨 뜻인지나 알고 사용하는 거야? 쿡쿡.” “뭐긴 뭐야! 어쨌든 욕하는 거잖아!” “땡! 틀렸어.” “뭐가 어쩌고 어째?” 화난 얼굴로 눈을 부라리는 라피스 녀석이 그날따라 귀여워 보인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뜻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이사나와 카이씨도 저렇듯 재밌다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너무 심하게 놀렸나 싶어 나는 순순히 잘못된 지식을 고쳐주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그가 더욱 수치스러워 할 거란 계산을 아주 배제한건 아니었다. “그건 내가 살았던 세상에서 ‘너 굉장하다, 최고야’라고 할 때 보여주는 표시야.” “…뭐?” “그러니까 욕 같은 게 아니라고. 오히려 칭찬하는 거란 소리지. 설마 전혀 눈치 못 챘어? 아무렴 내가 날 욕하는걸 보고도 웃었겠냐?” “…….”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라피스가 길길이 날뛰는 일 뿐이었다. 어쨌든 몇 번이나 본의 아니게 이 몸을 즐겁게 해 주었으니(?) 자존심 강한 녀석으로서 얼마나 화가 날 것인가! 어쩌면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맞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몸을 살짝 긴장시키고 있었다. 누가 순순히 맞아줄 줄 알고? 그러나 이런 내 예상은 깨끗하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녀석은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 가득 의미심장한 미소를 피워 올렸던 것이다. “호오, 그럼 그때 나를 칭찬했었단 말이지?” “뭐?” “그때 후작 녀석하고 다투고 있었을 때 말이다. 네가 나한테 엄지손가락 들어올렸잖아. 그거 칭찬한거 맞는 거지? ‘네가 최고다’라고?” “그, 그거야 그렇지만?” “후후후, 그랬단 말이지.” 미소를 잔뜩 머금은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는 녀석은 누가 보기에도 확실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설마 그 때 받은 칭찬하나로 저렇게 즐거워하는 건가? 그 뒤로 이어진 무수한 쪽팔림도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헤에, 라피스 녀석, 생각보다 단순한 놈이었군.’ 그랬다. 아무리 덩치가 커도 녀석은 드래곤의 나이로 3천 살. 그건 인간으로 치면 이제 18살 먹은 철부지와 다름이 없는 숫자였다. 아무리 성인식을 치뤘으면 뭘 하겠는가? 칭찬하나로 저렇게 헤벌쭉거리는 단순한 놈이었던 것을. 어쩐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동안 내가 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라피스.” “아아, 저도 동감입니다, 엘님.” “나도 동감…” 피식 웃으며 중얼거린 내 말에, 마찬가지로 어이없다는 듯한 카이씨와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지 세상은 오래살고 볼 일이었다. =========================================================== 오타지적 정말 감사합니다. 새벽에 멍한 정신으로 쓰다 보니 아는 단어도 자꾸 틀리고; 틀린 단어를 봐도 가물가물 하더군요;;ㅡㅡ;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__)(<- 스스로 고쳐볼 노력은 안 할 셈?;) 내용이 점점 지루해지지 않나 걱정이네요. 뭔가 화끈한 전투가 벌어져야 할 텐데... 워낙 그런 내용에 약해서..ㅠㅠ 본문에 나온 '18살 철부지'라는 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전혀 사실무근임을 밝힙니다..ㅡㅜ 태클은 사절이어요... 정령왕 엘퀴네스 5-12. 사기 치는 엘프 (2) 배에 오르기 전 우리는 하나의 요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하나같이 출항을 코앞으로 두고 있는 선장들이 한 자리에 모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얼굴이나 키를 보건데, 채 15살도 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었다. 그 들 중에는 우리가 탈 배의 선장도 있었으므로, 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떠들어 대고 있는 소년에게 향했다가 그대로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었다. 소년의 귀가 일반 사람처럼 둥글지 않고 마치 장식이라도 붙인 것처럼 뾰족했기 때문이다. 이미 옆에 있는 동료들 덕분에 눈이 높아질 데로 높아진 내게 있어서는 그럭저럭 봐줄만한 수준이었지만, 보통의 인간 아이치곤 얼굴 역시 지나치게 아름다운 편임은 확실했다. 나는 그것으로 저 소년이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확신 할 수 있었다. “헤에. 혹시 저게 말로만 듣던 엘프라던가?” “엘프라던가, 가 아니라 엘프다. 피부색이나 머리카락으로 보건데 노말엘프가 확실하군. 숲의 종족이 이런 항구엔 웬일이지?” 신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내 말을 들었는지, 라피스의 추가 설명이 이어졌다. 엘프를 보는 녀석의 표정은 나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운 빛을 띄고 있었다. “노말엘프? 그게 뭐야? 엘프에도 종류가 있어?” “아아. 세 종류로 나뉘어지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일반적인 엘프들은 저 녀석 같이 흰 피부에 금발 머리를 가지고 있는 노말 엘프를 뜻 해. 그 외에도 그리 흔하진 않지만 다크 엘프와 블루 엘프가 있지.” “헤에, 생김새가 다른 거야?” 호기심 어린 내 표정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옆에선 이나사와 카이씨 역시 궁금한 얼굴로 이어질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블루 엘프는 대체로 푸른색 피부에 은발머리가 많아. 노말 엘프보다 약간 날카롭게 생긴 편이지. 그리고 다크 엘프는 짐작했다시피 검은색 피부에 검은 머리카락. 대체로 다른 녀석들이 아름다운 편이라면, 다크 엘프는 우락부락하달까? 터프한 놈들이 많지.” “아아, 저도 이전에 여행 다닐 때 우연히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엘프의 상식을 깨던 자들이더군요.” “엘프의 상식?” 조금은 질린 듯한 얼굴의 카이씨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애초에 그들이 어떤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내게 있어서, 그의 말은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라피스는 군말하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갔다. “인간들은 그저 엘프라는 말만 듣고 몽땅 한 성향으로 보는 경항이 있지. 하지만 각 엘프들은 말이 좋아 엘프지, 사실은 종류마다 성격과 생활습관이 천차만별이야. 보통 숲의 종족이라고 표현하는 엘프는 노말 엘프, 그리고 블루 엘프는 바닷가 근처에 터전을 이루지. 이유는 간단해. 그들이 어패류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흠, 그럼 노말 엘프가 숲의 종족인건 과일이나 채소를 좋아하기 때문? 그럼 다크 엘프는?” “다크 엘프는 잡식성이랄까? 살기 편하면 아무 곳에나 자리를 잡기 때문에 딱히 자신들끼리 사는 마을이란 개념이 없어. 아마 인간들과 가장 교류가 흔한 게 녀석들이 아닐까 싶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일반적인 엘프의 기준을 노말 엘프로 정하게 된 계기는 간단했다. 세 종류의 엘프들 중에서 그들이 가장 숫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크 엘프의 경우는 평생가도 한 번 볼까 말까한 희소성을 자랑하는 수치라고 했으며(거의 드래곤 다음으로) 그나마도 인간들과의 혼혈이 많아 순수 오리지날을 보기는 더욱 어렵다고 했다. 또한 블루 엘프 같은 경우는 숫자도 많은 편이 아니지만, 타 종족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인간 세상에 발을 디밀지 않는다는 게 더욱 큰 이유랄까?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엘프나 사람이나 유명해지려면 자기홍보가 중요한거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 아무튼 순하기로 따지면 노말 엘프가 가장 온화하지. 블루 엘프들은 차가운 성격이고, 다크 엘프들은 화통해. 인간세상의 개념으로 치면 아마 거의 용병수준일거다.” “헤에…그럼 저 녀석은 노말 엘프의 탈을 뒤집어 쓴 다크 엘프라는 소리?” “뭐? 그게 무슨…!!” 황당한 표정으로 내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라피스는 그대로 소리 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선장들과 떠들고 있던 엘프 녀석이 일그러진 얼굴로 어떤 한 사람의 멱살을 쥐어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차마 듣기 민망한 수많은 육두문자들과 함께. “야 이 XX 같은 XX 자식아! 뭐가 어째? 누굴 감히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사기꾼인데? 네 눈엔 내가 엘프로 안 보이고 인간으로 보이냐? 어? 이 XXX해서 XX하고 XXX 해 먹을 놈아! 너 몇 살 X먹었어? 새파랗게 어린 자식이 감히 날더러 이놈저놈 했다 이거지!” 내가 보기엔 엘프의 나이가 훨씬 더 어려 보였지만, 일단 그들이 인간보다 오래 산다고 하니 겉보기만으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꽤나 예쁘장한 얼굴임에도 인상을 구기니까 제법 험악한 모습이다. 나는 ‘이런 말도 안돼는-!!’을 외치고 있는 한 도마뱀과 두 사람(카이씨와 이사나)를 무시하며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히이익! 난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너 지난번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폭풍이 분다고 해서 잔뜩 겁주더니, 결국 그날은 화창했단 말이다.” “시끄럿! 그게 다 두려워하는 네 마음을 헤아린 정령왕의 섭리셨단 말이다! 내가 그런 것까지 일일이 말해줘야 하냐?” “헹! 그럼 지난번 폭풍 때는 왜 그냥 잠자코 있었던 건데? 그 놈의 정령왕은 시도 때도 없이 기분이 바뀌나 보지?” “뭐? 너 지금 내 앞에서 정령왕을 모욕했다 이거지! 이 XXXX! 죽여 버린다!” “……” 대체 뭔 일이기에 멀쩡한 정령왕을 들먹이고 있는 건지.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는 날 보며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노말 엘프가 욕을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혼란스러워 할 땐 언제고 그새 적응이 된 모양이다. “엘프들은 정령들과의 친화력이 강하거든. 그래서 정령왕에 대한 존경심이 어마어마하지. 무슨 일인 진 몰라도 그걸 건드렸으니, 아마 저 인간 무사하지 못할 거다. 평소엔 온화한 녀석들이지만 열 받으면 사정 봐 주지 않으니까.” 그 말이 끝나는 순간 나는 엘프 소년이 불러낸 커다란 물의 화살을 볼 수 있었다. 언뜻 봐서 몰랐는데, 녀석은 자그마치 시큐엘의 계약자였던 것이다. 덕분에 그 장소에 있던 사람들은 기겁하며 도망치기 시작했고, 갑판은 허겁지겁 배에 오르는 인파로 인해 무척이나 부산스러워졌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했냐고? 뭐 별 수 있나, 그냥 배에 오르는 수밖에. 어차피 시큐엘의 공격이 나한테 통할 리는 만무했지만, 남들 다 도망치는 상황에서 멍하니 구경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순순히 대세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돌아서자니 엘프 녀석이 일으킬 피해가 걱정되어, 나는 다른 쪽에 있던 자연계의 시큐엘에게 그의 공격을 무마시키도록 명령했다. 엘프가 욕먹는 건 상관없지만, 애꿎은 우리(?) 시큐엘까지 공범으로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콰아악- 파지직-촤아악!! 기특하게도 녀석은 엘프가 소환한 또 다른 시큐엘이 막 물 화살을 쏘아 보내려는 순간에 멋지게 끼어들어, 그것을 공중으로 분해 시키는 데 성공했다. 분수처럼 사방으로 터지는 물살이 그 자리를 피해 도망치고 있던 사람들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지만 대부분 무슨 일이 터졌는지도 눈치 채지 못한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통 인간들에 해당되는 사항일 뿐, 공격을 방해받은 당사자인 시큐엘은 정확하게 내가 서있는 방향을 돌아보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들은 존재가 같은 물의 상급 정령(그것도 소환되지 않은)이란 것에 약간 놀란 듯 보였지만 적이란 생각엔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감히 누가… 그러나 으르렁거리던 것도 잠시. 나와 시선이 마주친 놈은 그대로 놀란 표정이 되어 몸을 뻣뻣하게 굳힐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 노려보던 자가 바로 자신들의 왕이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에, 엘퀴… 움찔거리면서 입을 달싹이는 것이 당장이라도 인사를 건넬듯해 나는 환한 표정으로 생긋 웃으며 나직히 한 마디 충고해 주었다. -지금 나 아는 척 하면 죽는다. -헉! 그때 마침 엘프의 성난 목소리가 이어진 탓에 시큐엘은 미처 대답할 타이밍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지금 날 방해한 놈 어떤 새끼야!!” “엔딜! 이제 그만 하게. 아무리 녀석이 말실수를 했다지만 이런 공격을 할 것 까진 없지 않은가.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 어떤 자식이 시큐엘의 공격을 방해했단 말이야! 누구야? 어떤 놈이냐고!!” “다들 도망치느라 정신없는 와중인데 무슨 소리야? 내가 보기엔 시큐엘이 실수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 미친-! 세상 어느 상급 정령이 공격하는 걸 실수해? 아악! 아까운 내 마나만 소모됐잖아! 누군지 잡히기만 해봐라! 아, 그래! 시큐엘, 네가 대답해봐. 공격을 방해한거 누구였어? 너라면 어디서 그랬는지 알 수 있을 거 아니야!” 그러나 엘프 소년은 그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뼛속까지 나와 공범인 시큐엘이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난 모르는 일이다. “뭐야? 네가 모르면 대체 누가 안다는 거야? 너 설마 알면서도 침묵하는 거 아니지?” -글쎄 모른다면 모르는 거다. 대체 이런 추궁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뭐지? “뭐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쉑아!!” 삐딱한 시큐엘의 반응에 엘프는 이제까지 이어진 화려한 입담을 죄다 그를 향해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끝까지 모르는 척 시침을 떼자, 악악거리던 얼굴이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험한 입만큼이나 성격 역시 차분한 녀석은 아닌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옆에 있던 배의 선장들이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고 슬슬 달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이, 어이, 엔딜. 정령에게 화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나? 이제 그만 기분 풀게. 내 이번 항해를 마치면 거하게 한턱 쏘겠네.” “그래, 자네가 이해하게. 뭔가 실수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그렇게 다그친다고 해결되겠어? 출발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 그만 배에 올라야지? 자네가 없으면 물의 정령이 함께 해주시질 않잖나.” “쳇-” 하나같이 아부성이 짙은 말들에 욕쟁이 엘프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리곤 곧 건방진 태도로 시큐엘을 향해 돌아갈 것을 명령했는데, 그게 어찌나 열 받던지 나는 당장이라도 녀석의 머리위에 물벼락을 퍼붓고 싶은 것을 참느라 죽을 뻔 했다. 지금까지 정령이라고 하면 벌벌거리는 사람밖에 못 봐서 그런지, 저렇게 하인부리 듯 하는 모습을 보니 도무지 참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설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저런 식인 걸까? 그런 내 불안한 마음을 읽었는지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이 특이한 거야. 물의 상급 정령한테 함부로 하는 건 인간은 물론 하이 엘프(엘프 중에서도 귀족에 속하는 무리)중에서도 없다고. 아니, 그 이전에 엘프들은 정령을 자신의 친구로 여기기 때문에 명령이란 것 자체를 하지 않아. 한 마디로 저 녀석은 돌연변이인 셈이지.” “뿌득, 감히 돌연변이 주제에~~” “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화 풀고 우리도 이제 배에 오르자고. 이러다 놓치겠어. 설마 다음 배를 기다릴 셈은 아니겠지?” “……” 대충 알아본 바에 의하면 다음 배는 3일 후에나 표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일행들의 손에 이끌려 배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역시 첫인상이란 만만한 것이 아닌지라, 내 머리 속에서는 어느새 엘프 종족 전체를 싸가지 없는 무리로 매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배에 오르자마자 만난, 한 무리의 노말 엘프들을 발견했을 땐,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그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도 무엇도 아닌 단지 짜증, 그 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배가 출발한 뒤, 그 욕쟁이 엘프를 우연히 다시 만나는 순간까지 계속 되었다. ============================================================ 훗.. 이거 제목을 욕쟁이 엘프로 바꿔야 하는게 아닌지 모르겠...(퍽) 개인적으로 제가 상당히 마음에 들어하는 열혈엘프 엔딜의 등장이었습니다^^(<-네가 마음에 안들어하는게 어딨냐!) 그런데 ...이거 어째 점점 연재 속도가 느려지는 군요....역시 광참신공을 익히기는 역부족이었던가;   흐음, 아무래도 저는 마공체질인 모양입니다..ㅡㅡ; (퍽;) P.s- 사용하시는 닉콘의 크기는 마녀홈 규정에 맞게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너무 크면 스크롤의 압박이;;; 정령왕 엘퀴네스 5-13. 사기 치는 엘프 (3) 항해는 무척 순조로웠다. 바람도 선선하고 하늘도 맑았기 때문에 갑판은 바다를 구경나온 사람들로 여기저기 가득한 상태였다. 대부분 바다여행이 처음인 듯, 얼굴가득 신기한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도마뱀, 라피스의 말에 의하면 저런 것도 하루 이틀이지, 3일만 지나도 지겨워서 경기를 일으키게 될 거라고 했다. 하루 종일 물만 보게 되면 당연히 질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 하는 종족이라서 어쩔 수 없다나? 녀석의 한심스럽다는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이사나는 분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반박하는 말을 내뱉었다. “저렇게 멋진 바다를 보며 질릴 리가 없잖습니까!” “하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 인내심 강한 이 몸조차도 길어봤자 일주일이라고. 바다는 블루 드래곤처럼 아예 물을 끼고 사는 놈들이나, 여기 이 녀석처럼 물의 정령들에게나 좋은 곳이지, 일반적인 평범한 육체를 가진 종족은 견디기 힘든 장소라고.” “그건 라피스님의 생각뿐이겠지요. 본인이 오래 버티지 못하니 다른 사람도 그럴 거라고 짐작하시는 건 아니에요? 두고 보세요! 제가 알폰프 제국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나 안 버티나!” “호오? 자신만만한데?” “그럼요! 인간들을 우습게보지 마시라니까요!” …그러나 녀석은 그렇게 당당하게 외치고 난 정확히 한 시간 뒤부터 지독한 배 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한달은커녕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바다의 위력에 K.O패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하루 종일 비실거리며 선실에서 끙끙거리는 이사나를 보다 못한 카이씨가 자청해서 간호하는 역을 맡았고(멀미에는 신성력도 통하지 않는다.) 그것을 보며 연신 쌤통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 녀석은 좀 버티는가 싶더니, 곧 따분하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배가 항해를 시작한지 3시간이 넘어가는 현재- 일행 중에서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 혼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래가지고 한달을 어찌 버티려는 지…쯧쯧.” 태어나서 처음으로 배를 타본 다는 이사나야 그렇다 쳐도, 라피스나 카이씨까지 덩달아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으니 혼자서 들뜬 기분이 된 나만 이상한 놈이 된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나는 지겹긴 커녕 오히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반가움만 가득했으니 말이다. 이건 설마 내가 물의 정령왕이라서 그런 걸까? 사실 전생의 ‘강지훈’이던 시절의 나는 그리 바다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뭐랄까, 물만 보면 이상하게 기운이 없어지고 몸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느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것이 인간의 육체가 정령왕의 힘을 견디지 못하고 폭주하기 직전으로 몰아치던 상태인 것 같다. 평소엔 멀쩡하다가도 강이나 바다 같이 방대한 양의 물을 보면 그런 느낌이 강했으니 아마 틀림없을 것이다. ‘헤에. 그때부터 이미 내 몸은 돌아갈 곳을 찾고 있었단 건가?’ 새삼 신기한 기분에 나는 천천히 내 몸을 흩어보았다. 어쩐지 내 나름대로 큰일을 해낸 기분이랄까? 이럴 바에는 차라리 좀 더 일찍 죽었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아무래도 나는 지금 이 세상이 너무 마음에 들어버린 것 같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마음껏 바닷바람을 만끽하는 나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딱히 시비 거는 일은 없었기에 그냥 무시했다. 일행들 없이 나 혼자 있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묘한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곧 난데없이 끼어든 어느 불청객의 침범으로 마음껏 즐기던 자유시간을 포기하고 말았으니… “계집애가 이런데서 혼자 뭘 하는 거냐? 뱃사람들이 얼마나 험한지 알아? 구경은 일행들이랑 같이 하고 지금은 그냥 들어가 선실에나 처박혀 있지 그래?” “뭐?”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 나는 옆에 다가온 이를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얼굴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배를 타기 직전에 봤던 입이 험한 엘프! 시큐엘의 적인 그 녀석이 껄렁껄렁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던 것이다. 내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너- 너!!!” “어쭈? 언제 봤다고 초면부터 말을 까냐? 이 몸의 성함은 엔딜이다. 보는 엘프 기분 나쁘니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짓은 좀 피해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좀 한 성질해서 말이지, 대접이 시원찮으면 폭주하는 경향이 있걸랑?” ‘그러는 너는 초면에 반말이 아니냐, 이놈아!!’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에서 나는 할 말을 잃은채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설마 이 극악한 놈을 다시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을 못했던 탓에 전혀 대비책을 준비해 두지 않았던 것이다. 따지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이 많았거늘, 막상 눈앞에 두고 나니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그냥 날려버릴까? 그런 나를 보며 겁이라도 먹었다고 생각한건지, 욕쟁이 엘프는 씨익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마치 달래기라도 하는 듯이. “뭘 그런 거에 쫄고 그러냐? 걱정 마셔. 아무리 나라도 계집애한테까지 함부로 하지 않으니까.” “뭐? 누가 계집애라는-!” “일단 충고하는데 말이지~ 이 배에는 인간의 귀족들도 많이 타는 걸로 알거던? 그러니까 조심해라. 오랜 항해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귀족 놈들은 가끔 돌아버리는 모양이니까. 너 정도 외모면 여기저기서 찝쩍거리는 놈들이 많을 거야, 아마. 킥킥.” “…하아?” 청순한 외모에 단정하게 생긴 분위기로 내뱉는 말치곤 하나같이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것뿐이다. 대체 어디까지 타락하면 엘프가 이 지경이 될 수가 있다는 거냐?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엘프는 이제 한 술 더 떠서 중요한 정보랍시고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중요한 정보라는 것이… “태풍이 분다고? 그것도 이번 항해 중에?” …였던 것이다! 놀란 표정을 감추질 못하는 나를 보며 엘프녀석은 선심 쓰듯 고개를 크게 끄덕여 보였다. “그래, 틀림없다고. 나는 바다의 날씨를 읽을 수 있거든. 틀림없이 태풍이 분다니까?” “그런 말을 하는 근거는?” 지금은 이렇게 맑게만 보여도 바다의 날씨가 언제 어떻게 변하게 될 줄 모른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만약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그 말을 듣고도 크게 위화감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의심하는 척 노려봐도 적어도 속으로는 은근히 불안하겠지. 바다 한 복판에서 난파당하면 십중팔구 무사를 기원하기 힘들테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그 이름도 유명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바로 이 몸이란 말씀! 아크아돈의 자연을 관장하는 내가 태풍이 불도록 가만히 놔둘 리는 없을 뿐더러, 애초부터 항해 중에 태풍을 일으킬 예정조차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대체 이 엘프는 뭘 믿고 저리 당당하게 태풍이 분다는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의 근거 없는 자신감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의미심장어린 미소를 지은 녀석이 자신의 옆에 시큐엘을 불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녀석은 바로 몇 시간 전에 엘프에게 하인 취급당했던 바로 그 비운의 시큐엘이었다. 제법 당당한 포즈로 나타나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소리쳤다. “무, 무슨!” “어때?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이야. 이래도 날 못 믿겠어?” “아니, 그게 아니라…” 확실히 시큐엘이라면 바다에 태풍이 일어나는지 안 일어나는지 정도는 예측할 수 있다. 일단 태풍이란 게 바로 시큐엘과 바람의 상급 정령인 진들이 일으키는 합동작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태풍을 불게 한댔더냐, 시큐엘? 넌 설마 네 주인이 탄 배를 전복시킬 생각이냐?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큐엘을 바라보자 녀석은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가 겁났는지 고개를 은근슬쩍 돌렸다. 이 자식! 바른대로 불지 못해? “아아. 그렇게 노려봐도 시큐엘인거 틀림없으니까 괜한 기운 빼지 말라고. 이래봬도 나는 엘프 중에서 꽤나 잘난 축에 속해서 말이야~ 물의 상급 계약자란 말씀!” “…흐응 일단 네 말은 알겠는데 말이야.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지? 태풍이 분다 해도 도망칠 곳이 없는데 알아 봤자 소용없잖아? 오히려 모르니만 못한 정보라는 생각은 안 들어?”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인간이로군? 내가 설마 그 정도 대비도 못했을 거라 생각했냐?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너 공부 좀 해야겠다. 그래가지고 어디 시집이나 가겠냐?” “그 따위 노파심 전~혀 고맙지 않으니 그 대비라는 거나 말해 보시지?” “쳇, 성깔은. 하여튼 엘프나 인간이나 얼굴 값하는 것들이 있다니까? 자, 두고 보고만 있으라고.” 어디 얼마나 귀엽게 노는지 봐주마! 라는 심정으로 쳐다보고 있으려니 녀석은 주섬주섬 자신의 품안에 갈무리 해둔 하나의 비단뭉치를 꺼내보였다. 그리곤 그 안에서 웬 결 좋은 종이 한 장을 내미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아한 심정으로 받아 보자니 복잡한 그림들과 도형들이 즐비해 있는 것이, 어째 부적 같은 느낌이었다. 설마 이걸 몸에 지니고 있으면 태풍이 비껴간다느니 하는 황당한 말을 할 생각이냐? “설마, 그럴리가. 네 손에 들려진 건 다름 아닌 텔레포트 스크롤이란 말씀! 배가 출발하던 항구로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거지.” “텔레포트…스크롤?” 그건 또 뭐래? 이럴 땐 라피스 녀석이 옆에 없다는 것이 아쉽다. 잘난 척 대장이긴 하지만 이 세상의 상식을 알아내는 데는 꽤나 유용했는데 말이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엘프 녀석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척 세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그리곤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단 돈 3골드에 모시겠습니다!” “뭐? 이거 설마 돈 받고 파는 거냐?” “그럼 내가 무슨 자선사업간 줄 알아? 시세보다 비싼 건 사실이다만, 목숨과 바꾸는 값인데 그 정도는 지불할 가치가 충분히 있지.” “하지만 정말로 태풍이 불건지도 확실치 않은…” “무슨 소리야, 너? 여기 시큐엘을 보고도 의심하는 거냐? 사실 4골드는 받아야 할 걸 네가 계집애라서 좀 깎아준 거라고. ” 아니, 글쎄 나는 여자가 아니라니까…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 이 자식! 설마 시큐엘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먹고 다녔던 거냐아? 그러나 난 거기에 화를 낼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느새 엘프의 곁으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대, 대화 중에 실례하오. 태풍이 온다는 게 정말 사실이오?” “아, 보면 몰라? 여기 이렇게 시큐엘이 있잖아! 이 녀석이 제공한 정보니까 틀림없다 그러네?”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어. 항해 때마다 날씨를 예측해주는 엘프가 있다고 말이야. 그 이름이 엔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바로 그 엔딜이 이 몸이란 말씀!” “오오오!”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말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저 녀석의 이런 사기술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 모양. 이미 이름까지 알려져 있던 모양인지 녀석을 보는 얼굴마다 신뢰가 가득 깃들어 있었다. ======================================================== 결국 일주일 완성 프로젝트는 물 건너 가고 말았습니다..ㅠㅠ 조신하게 11월 초까지 마무리 될 수 있도록 노력이나 해야겠어요.. 흑흑흑... 정령왕 엘퀴네스 5-14. 사기 치는 엘프 (4) 하긴 그러고 보니 출발하기 전에도 선장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펼치고 있었지. 그땐 녀석의 하는 행동이 신기해서 구경하느라 제대로 살피지 못했는데, 분명 폭풍이 어쨌다느니, 사기가 어쨌다느니 하며 흥분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애초에 시큐엘을 불러냈던 이유가 자신을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사람을 응징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게 대체 어떻게 되먹은 세상이야!’ 사람들은 서둘러 스크롤을 사고 있었다. 단체용도 아니고, 일반 개인용. 그것도 단거리 스크롤이라 시세로는 1골드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그 보다 몇 배인 3골드에 파는데도 끽소리도 못하고 구입하는 것이다. 목숨이 일각에 달했다는데 재물이 아까울 수가 있겠는가! 황당한 표정으로 시큐엘을 바라보자 녀석은 여전히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었다. 그 배신감을 당해보지 않은 정령왕은 모를 거다. 사기 치는 엘프는 둘째 친다 이거야. 하지만 시큐엘! 네가 공범이 되면 어쩌자는 거냐! 분노하는 속과는 반대로 내 입에서는 어느새 미소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 일까나, 시큐엘? -헉, 그, 그러니까 그게 말입니다, 엘퀴네스님. -설마 너 혼자 태풍을 일으킬 건 아닐 테고. 대체 몇 마리의 시큐엘이 이런 작당을 펼치고 있는 거냐? 아니, 태풍이라면 바람의 진들도 합세했겠군. 감히 계약자 하나를 위해 자연을 좌지우지하려 들어? 그것도 정령왕도 아닌 상급 정령 주제에? -에, 그, 그것이…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사~~정? 고작 텔레포트 스크롤 하나 비싼 값에 팔아넘기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사정’에 포함된단 말이냐? 이 자식이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누굴 보자기로 알아? 잘못했다고 빌 긴 커녕 변명을 찔끔찔끔 늘어놓는 시큐엘의 모습에 열 받은 나는 말 그대로 사정 봐줄 필요 없이 단칼에 시큐엘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그때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녀석은 소멸되었을 것이다. “한심하군요. 저런 녀석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인간들이라니…” “글쎄 내말이 바로 그 말!! 에? 누구?”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내 뒤에는 언제 온 건지 한 무리의 노말 엘프들이 서 있었다. 그것도 하나같이 고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였다. 그 중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초록색 머리카락의 엘프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실례합니다. 저희들은 이번에 알폰프 제국으로 여행가는 엘프들입니다만, 사람들이 모이기에 무슨 일인가 하여 잠시 들려보았습니다.” “아아. 저는 저기 있는 엘프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거든요? 아하하” “알고 있습니다. 사실 ‘날씨를 읽는 엔딜’이라고 하면 저희 마을에서도 유명하니까요. 나이 3백이라 해도 인간들로 치면 어린아이나 다름없는데, 일족의 아이가 이래저래 피해를 끼치게 되어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렇게 말한 초록색 머리의 엘프는 이번에도 예의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그와 함께 있던 다른 엘프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사과의 말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겠는가. 분위기가 어찌나 숙연한지, 꼭 일생일대의 역죄를 짓고 사죄를 건네는 것 마냥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일정 선에 다가갈 수 없도록 경계선을 두고 있는 모습은 절도 있다는 느낌보단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여러모로 욕쟁이 엘프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 저 녀석과 같은 마을이세요?” “일단은 저희 마을 소속의 엘프가 낳은 아이긴 합니다만, 같은 마을에 살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저는 또 같은 일행인 줄로만…” “설마요. 같은 엘프라곤 해도 마주치는 횟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걸요. 엔딜은 바닷가에서만 사니까요. 숲의 종족인 우리와의 교류가 없을 수밖에 없답니다.” 그러면서 얌전히 호호호 웃는 이는 어깨까지 드리운 금발머리를 가진 여자 엘프였다. 단아한 외모와는 반대로 어쩐지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는 느낌이었데,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이 확실하게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저런 녀석과 같은 마을이라니, 생각하기조차 싫군요. 엘프로서 가장 수치스러울 테니까요. 아니, 사실 지금도 수치스럽긴 마찬가지지만 말입니다.” “예?” “인간들을 속여서 돈을 벌다니, 선의의 종족인 우리 엘프들을 배덕하는 행동이 아니겠어요? 정말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엘프와 숲의 신인 크리아텔님이 무척이나 슬퍼하실 거예요.” 아무래도 그동안 욕쟁이 엘프한테 쌓인 게 많았던 모양. 그러나 이 한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어느새 우리들의 대화를 들었는지 욕쟁이 엘프(이름이 엔딜이라는)녀석이 눈에 시퍼런 불을 키고 노려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누가 속였다는 거야? 이 망할 아줌마가! 내가 속이는 걸 봤어? 봤냐고!!” “오, 엔딜. 교양없긴. 당신이 우리와 같은 하이엘프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군요. 그 험한 말투는 언제쯤 자중할 생각이죠?” “닥쳐! 여행을 하려면 조신히 여행이나 다니라고! 별 거지 같은 것들이 남의 속을 뒤집고 난리야? 그 놈의 엘프와 숲의 신은 할일도 더럽게 없나보다? 나 같은 것의 품행방정을 위해 슬퍼할 시간도 있고 말이야!” “엔딜! 감히 크리아텔님을 모욕하는 발언을 하다니요!” 그러나 발끈한 초록색 엘프의 말에 돌아오는 것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엔딜은 아주 작정하고 시비를 붙이기로 한 것인지 눈짓으로 시큐엘을 가리키며 히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꼬우냐? 그럼 덤벼! 네놈들 따위 몇 십 마리가 달라붙어도 여기 있는 시큐엘 하나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뭣하면 내가 먼저 시큐엘더러 네놈들을 가볍게 손봐주라고 지시할 수도 있다구?” “엔딜! 정령의 힘을 그런 식으로 사용해선 안돼요! 정령은 우리의 친구랍니다. 아무리 당신이 시큐엘의 계약자라고 해도 이런 태도는 용서할 수 없어요!”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 건데? 그래봤자 시큐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주제에? 가식적인 태도 집어치우고 눈 앞 에서 꺼져주시지? 네놈들 면상 보는 건 생각보다 더 밥맛 떨어지는 일이거든. 이건 엄연히 영업방해라고.” 무언가 만류해 보려던 다른 엘프들도 엔딜녀석의 강경한 태도에 결국 입술을 깨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발머리의 여자 엘프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마지막으로 싸늘한 한 마디를 내뱉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해봤자 어차피 당신은 인간들과 융합될 수 없을 거예요. 아니, 이미 뼈저리게 느꼈을려나? 주변의 인간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나요, 엔딜? 정말 가엽군요, 당신이란 존재는. 평생을 그렇게 외롭게 살다 죽어갈 테니.” “씹! 거기서 한 마디만 더 지껄이면 죽여 버리겠어!” 이글이글거리는 푸른 눈동자. 그 안에 담겨진 소름끼칠 정도의 차가운 살기에 엘프들은 모두 움찔하더니 곧 창백한 얼굴이 되어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안 그러면 정말 사단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체 저 녀석에겐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나는 복잡한 눈으로 멀거니 녀석을 바라보다 문득 옆에 있던 시큐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은 침착한 얼굴로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왕께서 생각하시는 것만큼 나쁜 아이는 아닙니다.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를 부려먹는 것도 아니고요. 단지… -단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계약자가 허락할 때까진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만…. 이해해주십시오. 왕이시여 빠직. 순간 머리에서 혈관이 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허락할 때까진 말을 못하니까 곤란해? 왕인 날더러 이해를 해 달라고? 기가 막히다. 설마 엘뤼엔때도 정령들이 이런 식의 태도를 보였을 리는 없고, 역시 내가 너무 무른 탓인가?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지로 눌러 참은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대꾸했다. 내 감정이 정령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말이다. -시큐엘, 네가 선택한 계약자니 그에 따른 행동의 결과도 네가 책임져야 할 몫이겠지. 친구대접을 받든 종 취급을 당하던 나와는 상관없어. 계약자를 잘못 정한 네 탓이니까. 그렇지? -호, 혹시 화나셨습니까? -화? 내가 왜? 아무튼 시큐엘. 멋대로 자연을 이용한 대가는 나중에 받아내도록 하겠다. 말해두지만 나는 너희들한테 임의로 자연을 부릴 권리를 준적이 없어. 한 번 만 더 멋대로 굴었다간 전부 제명시키고 새로 만들어 버릴 겨! -헉!! 그, 그게 아닌 데에… 무언가 심히 억울하다는 듯한 시큐엘의 항변이 이어졌지만 이미 나는 듣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 아직도 씩씩거리기에 바쁜 욕쟁이 엘프 엔딜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어이, 너한텐 미안한 얘긴데 말이야, 이번 항해 동안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거다.” “뭐? 너 지금 뭐라고 그랬어?” 꿈틀. 이마의 근육을 심하게 부들거리는 채로 되받는 녀석의 표정엔 말 그대로 분.노. 이 두 글자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마주본 나는 다시 한번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번 항해 동안 절대로 태풍이 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람들에게 판 스크롤 값을 다시 돌려주는 게 좋을 걸? 안 그러면 알폰프 제국에 도착하고 나서 넌 뼈도 못 추릴 테니. 아. 상관없나? 어차피 너는 태풍이 불던 안 불던 항해가 끝날 시점에서 도망칠 테니 말이야.” 웅성웅성. 지금까지 녀석에게 열심히 스크롤을 사가던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눈치 챈 엔딜은 입술을 악물면서 나를 사정없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 이 계집애! 대체 무슨 꿍꿍이야!” “…아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넌 눈이 나쁘구나? 나의 어딜 보고 여자로 오해하는지 모르겠지만 말이지. 나름대로 상당히 열 받거든? 아무튼 내 충고 흘려듣지 마. 태풍은 불지 않을 거야.” “제길! 헛소리 하지 마! 태풍은 와! 반드시 온다고! 이건 시큐엘 뿐만이 아니라 정령왕께서도 계획하고 계신 거라고!” “허업!” “호오~” 녀석의 악에 바친 말에 ‘정령왕’이란 단어가 들어가자 사람들의 반응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상급 정령에 ‘정령왕’이라니, 무언가 굉장히 대단해 보였나 보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정령사도 무엇도 아닌, 그저 평범한 소년에 불과해 보였으니 엘프 쪽으로 대세가 기울인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셈이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에 약하니까. 그것을 빤히 둘러본 나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며 엔딜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 근데 이걸 어쩌나, 내가 알기론 정령왕이 그렇게 한가한 존재가 아닌데 말이지. 멀쩡한 정령왕을 팔아먹다니, 너 그러다 벌 받을 거다.” “헹! 웃기지도 않은 소리! 너 같은 일반인이 정령왕의 마음을 어찌 안다는 거냐? 여기 이 시큐엘이 어떻게 나와 계약하게 되었는지 알아? 바로 내가 정령왕께 기원해서 얻어낸 선물이란 말씀!” “!!” 이건 또 뭔 소리래? 내가 시큐엘을 선물로 주었다고? 나는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한번 엔딜의 모습을 흩어보았다. 녀석의 말을 듣고 나니 무언가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이마에 새겨진 흐릿한 시큐엘의 문장. 그래, 바로 이거였다. 내가 녀석을 보고 한눈에 시큐엘의 계약자임을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시큐엘. 설마 너… -요, 용서하십시오, 왕이시여. 그래도 지은 죄는 아는 모양인지 슬금슬금 고개를 숙이는 늑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한손으로 짚었다. 기가 막히게도 저 엔딜이란 엘프에게서는 상급 정령과 계약할 수 있을 정도의 친화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아무리 자연과의 친화력이 강한 엘프라고 해도 상급 정령을 소환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녀석처럼 일족 안에서 ‘어린아이’취급 당할 나이엔 더더욱. 그런데도 대책 없이 시큐엘의 계약자가 되서 녀석을 마음대로 부리고 있는 게 어딘지 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설마 시큐엘이 자청해서 계약자로 나선 것이었을 줄이야.’ 짐작컨대 아마도 시큐엘은 저 엔딜과 계약을 하기 위해 자연계 상태로 옆에 머물면서 친화력을 높여 주었을 것이다. 당장은 무리지만 몇 달 정도 꾸준히 자연계의 정령이 붙어있다 보면 친화력이 높아지는 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영구적으로 높아지는 게 아니라 다시 정령이 떠나면 사라지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임의로 늘어난 친화력이 드디어 상급 정령을 소환할 수준에 도달했을 때, 시큐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 엔딜과 계약을 한 셈인 것이다. 한 마디로 정령 스스로가 원해서 이뤄낸 계약이랄까? 때문에 소환자의 이마에 찍힌 시큐엘의 문장이 흐릿한 게 당연한 셈이다. 그야말로 이사나와 맞먹는 운이 아닌가! -이건 설마 종족을 넘는 사랑인 게냐? 뜨악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시큐엘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 모습에 왠지 모를 서운함이 느껴졌다. 이건 뭐랄까… 다 키워놓은 자식이 애인 생겼다며 부모를 나 몰라라 하는 심정이랄까?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면 실토하도록 만드는 수밖에!’ 정말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제 내 눈에는 엔딜이 그저 싸가지 없는 엘프가 아니라, 남의 귀한 자식을 넘보는 도둑놈으로 보였다. 때문에 자연히 놈을 노려보는 내 눈빛이 살벌해 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내 흉흉한 눈과 마주한 녀석이 질 수없다는 표정이 되어 당당하게 되받아 치는 것이 아닌가! 이 괘씸한 놈! “뭐, 뭐야! 그렇게 노려본다고 누가 쫄 줄 알아?” “난 너 같은 사위(?) 둘 생각 없어!” “뭐어? 무슨 헛소리야?”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녀석의 얼굴을 무시한 채 나는 내 옆으로 또 다른 시큐엘을 소환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시큐엘엔 시큐엘이다 이거야! 너만 상급 정령사인 줄 아냐, 이놈아! 라는 심보였달까? 이런 내 작전은 깨끗하게 먹혀 들어가 주변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모두 놀란 얼굴로 신음성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은 꿋꿋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던 엔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 옆으로 어느새 다섯 마리의 시큐엘이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헉!” “흐읍!!!” “맙소사…” 같은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정령을 소환해 내느냐에 따라 등급이 구분된다. 겨우 한 마리로 간당간당한 엔딜에 비해 나는 다섯 마리의 시큐엘을 소환해 내었으니 이로서 누가 더 우세하냐가 증명이 된 셈이다. 놀라서 할 말을 잃은 엔딜을 보며 나는 비웃는 표정으로 이죽거렸다. “이제 우리 둘 중에서 누가 더 정령왕의 선물을 많이 받았는지 알았겠지? 태풍은 불지 않을 거다, 꼬맹아. 정 못 믿겠으면 내기할까?” “이익!” 여유 있게 웃는 내 얼굴을 본 엔딜은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악에 바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렇게 신경질을 내던 것도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 곧 스크롤을 환불하려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는 통에 녀석은 꼼짝없이 돈을 내주는 수밖에 없었다. “크흠. 아무래도 다시 환불해야 겠소. 돈을 돌려주시오!” “나도! 스크롤은 돌려주겠소.” “아아, 나도!” “쳇! 환불해 주면 될 거 아니야!!” 잔뜩 얼굴을 구긴 녀석이 돈을 아무렇게나 던져주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다시금 그의 옆에 있던 시큐엘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느낌으로 자신의 계약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를 향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보면, 그건 역시 내가 왕이기 때문이겠지? 그의 슬픈 얼굴을 보며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곧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정령은 계약자의 하수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이야.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시큐엘? 녀석을 돕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 이런 식의 상품가치로 전락하는 꼴은 절대 두고 보지 않을 테니까. -왕이시여… -똑바로 생각하고 행동해. 너와 계약한 건 저 엘프에겐 분명히 큰 행운이었겠지. 하지만 짊어져야 할 책임 역시 만만치 않아. 정령사의 이미지는 둘째쳐도, 버틸 수 있는 체력이 얼마나 갈까? -!!! 일단 소환되고 나면 자신이 알아서 마나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정령왕과 달리, 상급 정령인 시큐엘은 소환자의 마나에 고스란히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도 친화력이 부족한 ‘어린’엘프가 감당하기에는 힘든 상대인 것이다. 이미 몇 번이나 계속된 소환에 지금까지 태풍을 불기 위해 부어준 마나까지 보태면 아마도 저 엘프는 이미 여러 면에서 한계에 달해있을게 틀림없었다. 그걸 감안하면서까지 사기를 치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서야 그것을 눈치 챈 모양인지, 급하게 엔딜을 바라보는 시큐엘의 눈빛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보 엘프 옆에 붙어 다니더니 저 녀석까지 바보가 된 모양이다. ======================================================= 결국 엔딜은 정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낙점!<-틀려!! 모두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5-15. 바다괴물의 출현 (1) 그 후로 엔딜은 아주 오랫동안 갑판위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충격이 큰 것인지, 아니면 내 짐작 따라 시큐엘을 소환한 몸의 부담이 이제야 제대로 적용된 건지 알 길이 없었지만, 꽤 오랜 시간 녀석을 보지 못한 것만큼은 틀림없었다. 항해를 시작한지 2주일이 지났을 무렵이던가? 통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해서 은근슬쩍 선장에게 엔딜의 행방을 물었더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전혀 뜻밖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동생이 아파요?” “그렇다고 하더군. 아무래도 희귀병인 모양인데, 그나마 효과가 있는 약초를 파는 사람이 알폰프 제국에 사는 모양이야. 그래서 6개월 마다 한번씩 꼭 이 배를 타고 알폰프 제국으로 건너가지.” “헤에? 그게 언제부터인데요?” “글쎄. 꽤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나마 요즘 들어서야 약초 구하기가 쉬워졌지, 지난 10년 가뭄 때는 정말 힘들었다고 하더군. 입이 걸걸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야. 환경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거지. 좀 무례하다 생각되어도 이해해 주게.” 흐음. 그럼 시큐엘이 말한 ‘사기 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정’이란 게 혹시 이것과 관계된 걸까? 아픈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서?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집안에 어른 엘프들도 있을 거 아니에요. 아까 들어보니 엔딜이란 녀석…성인식도 넘기지 못한 것 같은데 혼자서 약을 사러 다녀도 괜찮은 건가요?” “글쎄.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엔딜은 엘프마을에서 살지 않는다더군. 동생이랑 단 둘이서 살고 있다고 하던걸?” “네? 그럼 녀석이 없을 동안에 동생 병간호는 누가해요? 희귀병이라면서요.” “동네 사람 중에 봐주는 이가 있는 모양이야. 마을에서 나온 것도 거의 추방 식이었다는데, 어린 나이에 딱하게 되었지. 부모란 엘프가 살아있는 건 확실한 것 같은데…나 참, 제 자식을 버리고도 멀쩡할 수 있는 건가? 하여튼 엘프란 종족이란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순간 심장 한 구석에 서늘한 칼날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그 말 한마디가 남의 일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전생의 트라우마랄까. 어쩌면 엘프 답지 않은 걸걸한 입담이나 거친 성격이, 자신의 종족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심스럽게 들기 시작했다. 이거 시큐엘을 불러다 진상규명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왠지 모를 찝찝함에 속으로 투덜거리는 순간,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움에 돌아보니 어느새 갑판위로 나온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특히 라피스) 항해가 시작된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배 안에 있던 모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만행을 벌였는데, 지금처럼 셋이서 우르르 갑판이라도 나올라치면 여기저기서 감탄성과 신음성이 터지기 일쑤였다. 그 소란의 내용이란 다음과 같다. “아아, 멋져. 정말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이지 않니? 저 조각 같은 얼굴로 나에게 미소지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심장이 터져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저 환상적인 은발 좀 봐! 눈의 요정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아아, 한번 말이라도 걸어봤으면…” “어쩜, 고아한 느낌의 사제님을 봐! 정말 다정하실 것 같지 않니? 저렇게 어린 사제님이 고위급 사제라니, 너무 멋지다!” 꺅꺅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지만, 다행인건 저 닭살스러운 상황 속에 내가 끼어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행 초반, 시큐엘을 다섯이나 불러내버린 관계로 본의 아니게 내가 너무 눈에 띄여 버려, 항해 내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귀찮게 굴기 시작해서 어쩔 수 없었달까? 그리고도 벌어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갑판에 나와 있을 때는 서로 아는 척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상태였는데, 주변 반응을 보니 그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패턴으로 봐서 십중팔구 이번에도 여자로 오해받을 것이 뻔한데, 나로선 도무지 질투에 불타오를 여인네들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숨처럼 한마디 중얼거렸다. “결국 이래저래 나는 왕따 일수밖에 없는 거지.” “응? 왕따? 그게 뭡니까?” “??” 갑자기 끼어들어 나의 말을 되받은 사람은 180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을 가진 남자였다. 머리카락은 짧은 검은색.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평소에 흔히 볼 수 없었던 옅은 호박색이었는데, 동공 안으로 살짝 붉은 빛이 감돌았다. 분명 오늘 처음 본 건데도 낯설지 않은 기분이랄까? 한동안 그 느낌의 정체에 골몰하던 나는 곧 어렵지 않게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던 존재들을 떠올리곤 얼굴을 굳혔다. “당신 혹시…마족?” “하하. 이런, 벌써 들키다니 민망한데요? 과연 정령왕 엘퀴네스님이시군요.” “!!” 마족인데다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설마 이번에도 마왕이 보낸 자객 녀석인가? 나의 눈은 자연스럽게 서늘한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런 나의 경계하는 태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정체가 들켰음에도 여전히 천연덕스럽게 다음 말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제 이름은 루카르엠. 마계 4대 공작의 일원입니다. 그냥 간단하게 루카라고 불러주십시오. 엘퀴네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별로 반갑진 않은데요. 대체 무슨 꿍꿍이인가요?” “그런 서운한 말씀을. 저는 여러분께 전혀 악감정이 없답니다. 그러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러면서 생긋-미소 짓는 얼굴은 카이씨에 비견될 만큼 상냥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미 머릿속에 '마족=사악한 종족'이란 공식이 성립되어있는 나로서는 그 모습이 전혀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이게 바로 세뇌교육의 결과!) 때문에 나는 경계를 풀기는커녕 도리어 퉁명스러운 태도가 되어 대꾸했다. “본인은 악감정이 없어도 위에서 시키면 싸워야 하는 게 부하 아닌가요?” “하하. 이거 할말 없게 만드시는 군요. 꽤 날카로우신데요? 맞습니다. 사실 부하란 게 어쩔 수 없는 직업(?)이라서 말입니다. 원치 않아도 싸워야 할 때가 상당히 많죠. 그래도 일단은 엘퀴네스님의 일행에 합류하는 게 목표입니다만.” “엥? 우리 일행에 합류를? 무슨 이유로요?” “으음. 마왕님의 명령이 바로 그거였거든요. 엘퀴네스님의 일행에 속해 있다가 기회를 봐서 저쪽에 있는 이사나님을 처단하라는 것이었는데…역시 안 되겠지요?” “그걸 말이라고!!” 이 녀석 혹시 바보가 아닐까? 계획을 미리 다 말해줘서 뭘 어쩌려는 거야!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바라보자 루카르엠이라고 밝힌 검은머리의 마족은 난감한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방심작전을 유도한다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이었기에 나는 다시 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놈의 마족이 무슨 꿍꿍이인겨!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엘퀴네스님한테 미움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입니다. 에…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마왕님의 계획에 따를 생각이 별로 없거든요. 지금 엘퀴네스님께 접근한건 순순한 제 의지니까 너무 예민하게 구실 필요는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은 겁니다.” “그리 신용이 가는 말은 아닌데요.” 전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바로 되받아 치자 마족의 얼굴이 더욱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곧 표정을 정비(?)하곤 다시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거 너무 경계하시니까 대화가 통하지 않네요. 결국 시간이 해결하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걸까요? 좋습니다, 엘퀴네스님.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다시 찾아뵙도록 하죠.” “…그건 우리를 쫓아다니겠다는 말?” “물론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당신의 일행에 합류하는 것이 목표라고. 일단 명령을 받드는 척이라도 해야 마왕님께 혼나지 않거든요. 그 대신 제가 엘퀴네스님의 적이 아니라는 증거로, 기척을 숨기고 다니지는 않겠습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 따라다니는 것만 허락해 주십시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의 말 어디에도 진심일거란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한 차례 마족들의 공격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다,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마왕의 명령을 받고 찾아왔다는 데 순순히 의심을 풀어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구나 나를 노리는 것도 아니고, 이사나를 겨냥하고 있는 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련하게 바라보는 루카의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나는 반드시 허락을 해줘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난 어느새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강지훈! 아니, 엘퀴네스! 너 미쳤냐? 당연한 말이지만 루카르엠은 그 찰나의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헛. 정말이죠? 허락 하신 거죠? 감사합니다, 엘퀴네스님.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찾아와서 생때를 쓰는데도 그리 불쾌한 기색 없이 허락해 주시다니. 알려진 소문과는 다르게 정말 좋으신 분이네요! 저를 믿으신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아아, 네에… 부디 그러길 바랄게요.” 이미 쏟아버린 물을 다시 담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찝찝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뭐, 어쩔 수 없지. 지금부턴 이사나 옆을 철저히 지키는 수밖에. 누굴 탓하겠는가? 내 매를 내가 번 것을. 이번 일이 일행들에게 알려 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눈앞에 선했다. 라피스는 재밌다며 킥킥댈 것이 분명하고 카이씨는 걱정할 것이며, 이사나는 불안 해 하겠지. 그런데도 나를 원망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신뢰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속이 푸근해 지는 느낌이었다. “어? 그새 어디로 갔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루카르엠은 이미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뒤였다. 등장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었지만 근처에서 그의 기운이 느껴지는 걸 보면, 숨어서 따라다니겠다는 약속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속을 짐작할 수 없기에 더욱 경계가 된다고 해야 하나? 나는 서둘러 바다 위를 떠다니던 자연계의 시큐엘에게 이사나의 주위를 지키도록 지시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신변의 위협이 느껴진다는 판단이 설 시, 주저하지 말고 바로 보고하라는 명령도 덧붙인 후였다. 덕분에 이사나는 약 10마리에 해당하는 시큐엘들의 보호를 받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저 쯤 되면 아무리 감이 둔한 사람이라도 감시당한다는 느낌을 피할 순 없겠지만…살려면 무슨 짓을 못 하겠는가! 불안한 듯 움찔거리면서도 끝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찾아내지 못하는 이사나를 향해 나는 슬그머니 미안한 시선을 보냈다. ‘미안, 이사나. 불편해도 좀 참아줘. 마족한테 뒤통수 맞는 것보단 낫잖아?’ 그러나 딴 사람들은 다 속여도 라피스의 눈은 속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정령, 특히 물의 정령에 대한 감이 남들에 비해 몇 배나 발달되어 있던 녀석은, 어렵지 않게 이사나의 옆으로 모여든 기운을 눈치 채곤 나에게 무척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슬그머니 이쪽을 향해 퉁명스러운 한 마디를 던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체 무슨 꿍꿍이야?” “뭐가? 갑판에 올라온 상태에서는 아는 척 금지 아니었던가?” “말 돌리지 마. 내가 못 느낄 줄 알아? 이사나를 감싼 정령의 기운은 둘째 치고, 아까부터 확연히 느껴지는 마족의 기운은 뭐라고 설명할 거냐? 아까 너한테 말 걸었던 시커먼 놈. 마족 맞지? 지금 숨어있는 녀석이 그 놈이냐?” 으음. 이 예리한 놈 같으니라고. 대체 언제 또 나랑 루카르엠이 대화하는 장면을 본거라지? 어차피 숨길 사항도 아닌 것 같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바람에 녀석의 눈빛이 한층 가늘어 졌지만 그런다고 기죽을 내가 아니다. “별 거 아니야. 일행으로 넣어달라고 하길래 싫다고 했더니, 그냥 따라 다니는 건 허락해 달라잖아. 그래서 그러라고 한 것뿐.” “호오. 그 별거 아닌 일 때문에 이사나를 저렇게 보호하기 시작한 거고?” “만일을 위해서야. 공격의사는 없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말이지.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 내가 쫓아다니지 마란다고 해서 안 쫓아다닐 마족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서 대 놓고 허락하셨다 이거군. 이럴 바엔 일행에 포함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걸 보면,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일행으로서 동행하는 것과 쫓아다니는 건 엄연히 달라. 난 수상한 사람한테 뒤통수 맞는 건 참아도 ‘같은 일행’이 배신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거든. 이사나에게도 그런 경험은 한번으로 족하니까 말이야.” “아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숙부한테 배신당한 거였던가? 흐음, 일리 있는 말이네. 나야 재미있으니 상관은 없다만, 앞으로 좀 피곤해 질지도 모르겠는데? 저 마족 녀석. 생각보다 등급이 높은 것 같아서 말이지.” 마계 4대 공작의 일원 이랬으니 등급이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정령왕과 드래곤이 보호 하고 있는 소년을 쉽게 건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생각은 라피스도 마찬가지인 듯, 곤란하다는 말투 어디에도 진심으로 긴장하는 구석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적(?)과의 미묘한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 엔딜을 향한 열렬한 반응이 무척 뜨겁군요, 과연 열혈캐릭!!<-달라!! 이번 편에선 루카르엠이 잠시 등장했습니다. 마왕한테 명령 받은 주제에 지금까지 미적거리다 이제와서 등장하다니... 이 녀석은 그 동안 어디서 놀고 있었던 걸까요..ㅡ.ㅡ; <-능력 부족인게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강한데 머리가 지끈지끈, 눈이 시큰시큰 해서 괴롭습니다; 감기가 오려는 걸까요?;;; 어제까지만 해도 떠오르던 스토리가 전혀 감이 안 잡혀서 난감; 이래서야 11월 초에 5권이 나올 수 있을련지;; 제게 힘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ㅁ;/ P.S- 제 닉콘을 장식한 귀여운~소년은 강철의 연금술사 에드군입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5-16. 바다괴물의 출현 (2) 이사나의 친위기사단들은 현재 수도인 헤리카를 벗어나 있는 상태였다. 얼마 전 정보 길드내의 은밀한 루트를 통해 카웰 후작에게서 보내진 한통의 전서구가 도착했던 것이다. 그 안에 담겨진 대강의 사정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읽은 페리스들은 앞뒤 사정 볼 것 없이 곧 바로 클모어 행을 결정지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정보길드 마스터의 도움을 받아 추적자들로부터 은신할 수 있었지만, 수도를 벗어나면 곧바로 위치가 발각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친위기사들로서는 목숨을 건 위험을 떠안은 셈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길을 나서는 기사들 중 누구도 불안한 얼굴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주군을 찾으러 가는 길이 괴로울 수가 있겠는가! 그들로서는 한시라도 빨리 이사나와 합류해서 그의 안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을 뿐이었다. “페리스, 클모어로 가는 방향이 이 쪽이 맞던가? 지도를 봐도 도무지 방향을 찾을 수가 없는데.” 전문적인 지도 제작꾼이 만든 것이 아닌, 일개 잡화점에서 구입한 지도에서 세밀한 지형 표시를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무리였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단 생각에 챙겨들고 온 것이었는데, 역시나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자 리더인 알렉의 얼굴은 난처하게 물들었다. 그때 마침 그 옆에서 일행의 점심식사 준비를 돕던 페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맞을 겁니다. 우리가 가는 방향이 헤리카에서 똑바로 이어진 남서쪽이라면 말이죠.” “어이. 지금 그걸 확신할 수가 없어서 이러는 거잖아. 거~참. 이상하네. 지금쯤이면 크란 산맥의 꼭대기라도 보여야 하는데 말이야. 그 산맥 너머에 클모어가 있는 거 맞지?”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만,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요. 검문소를 피하기 위해 힐튼 산맥을 경유한 것이 문제가 된 걸지도. 혹시 길을 잘못 든 건 아닐까요?” “허어억. 말도 안돼. 지금까지 걸어온 시간이 얼만데! 그러지 말고 실프에게 길 안내를 부탁해 보는 건 어때? 바람의 정령이면 지형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을 거 아니야.” 그러나 간절하게 부탁하는 알렉의 말에 돌아온 건 냉정한 거절의 말이었다. 계약자가 처음 가 보는 곳의 지형은 제 아무리 바람의 정령이라도 알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마지막 희망까지 사라져 절망하는 알렉에게 페리스는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간단하게 끓인 스튜 한 그릇을 내밀었다. “일단 뭐라도 먹으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죠. 실프의 말에 의하면 아까부터 점점 공기가 훈훈해 지고 있다는 군요. 클모어는 남쪽이라 수도인 헤리카에 비해 따뜻한 지역이니, 틀리게 온건 아닐 겁니다.” “휴우.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군. 말이 없으니 이동이 느려서 큰일이야. 이러다 중간에 대공놈들한테 발각이 되기라도 하면 더 지체되겠는걸.” 그러나 염려스러운 건 오직 알렉 뿐인 듯 했다. 친위기사단의 다른 이들은 그게 뭐가 어떻냐는 듯한 태도로 연신 음식을 먹기에 바빴던 것이다. 아무래도 지난 몇 달간 이어진 도피 생활이 그들의 행동을 점점 무대포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막나가는 상태랄까? “그래봤자 몇 달일 텐데 뭘. 까짓 좀 늦어진다고 해서 그 사이에 거사가 벌어지겠어? 설마 우리만 쏙 빼놓고 수도로 진격하지는 않겠지. 후작님 쪽에서도 다른 귀족들과 연락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맞아. 진격이야 거사 당일 날 합심해서 한다손 쳐도, 연락하랴, 군대 정비하랴 준비하다보면 정신없을 걸? 느긋하게 가자고, 알렉. 급하게 해서 제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맞아. 사실 우리야 아쉬울 거 없잖아? 이미 수도 내에 침투해서 귀족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상태니까. 황제파와 대공파가 극명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으니, 이젠 우리는 살아남기만 하면 돼. 그것이 이사나님과 한 마지막 약속이었으니까.” “옳소!!” …그렇다고 정말 살.아.남.기.만. 할 생각이냐, 너희들? 지난 시간동안 기사들의 성격에 묘한 변화가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역시 피부로 체감하니 새삼스러운 느낌이랄까. 저런 느긋한 태도들이라니. 이사나가 쫓겨나기 전, 그러니까 지금의 친위단이 황성에 머물러 있었던 때에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런 생각으로 황당해 하는 알렉을 보며 페리스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보기 좋은데요. 낙천적인 성격은 정신건강에 이롭잖습니까.” “저건 낙천적인 게 아니라 아무생각이 없는 거라고. 전에도 좀 대책 없는 놈들이긴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후훗. 글쎄요. 하지만 바뀐 사람은 알렉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일단 저를 대하는 말투부터가 좀 더 가벼워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랬다. 이전의 알렉은 페리스를 대함에 있어서 언제나 ‘하오’체의 정중한 말투와 함께 일정한 경계선을 그어둔 듯한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기사단 내의 유일한 정령사였으니 친분을 쌓을 기회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페리스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이 묘하게 기사들과 그의 사이를 소원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었다. 그랬던 것이 지난 몇 달간 함께 동거동락 하면서부터 완전한 일행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 점을 날카롭게 꼬집힌 알렉은 반박할 말을 잃고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쩝. 할 말 없군. 그렇게 치면 우리 중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사람은 페리스인가? 말투도 성격도 여전하니 말이야. 물론 능력 면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바가 아니지만.” “과찬이십니다. 다 엘퀴네스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말투는 본래 버릇이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성격이라면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알렉.” “맞아, 난 페리스가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줄 근래에 알았으니까. 귀족들 협박할 때 봤어? 일행이었으니 망정이지, 적으로 뒀으면 난 살고 싶지 않았을 거야. 정말 무시무시했다고.” “와하하하!” 과장되게 몸을 떠는 한 기사에 말에 함께 식사를 하던 다른 이들도 모두 맞장구를 치며 웃기 시작했다. 수도에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크게 웃거나 인기척을 드러내는 일에 민감한 편이었다. 사방에 대공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로서는 적진 한 가운데 들어와 있는 것과 진배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찌 여유를 부릴 수 있겠는가! 때문에 이들이 이렇게 웃으며 느긋할 수 있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랄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알렉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해방감을 만끽해도 상관없겠지. 이제부터 시작이라지만 그 동안 고생이 심했으니까.’ 하지만 알렉은 곧 이러한 생각을 진지하게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근처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조금만 부주의 했어도 놓칠 수 있을 만큼 미세한 그것은, 감지되는 곳이 여러 군데인 것을 보아 한 사람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는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하나, 둘, 셋… 대충 6명 정도인가? 이 정도로 기척을 숨길 수 있는걸 보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인 것 같군. 설마 추적자가 벌써 따라 붙을 줄이야.’ 인기척을 느낀 이는 알렉 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실프를 통해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페리스 역시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의 존재를 확인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른 기사들 또한 인기척을 느끼고 얼굴을 굳히기 시작했으나, 페리스는 안심하라는 듯 한 손을 들어보였을 뿐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러 온 실프의 표정이 생각보다 그리 어둡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인 것 같군요. 추적자는 아닌 것 같으니 안심하십시오.” “하지만 이 정도로 인기척을 낮춘 이들이 평범할 리가…” “글쎄요. 아마도 꽤 수준급의 용병들일지도 모르니까요.” 바로 그때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경계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울려 퍼지는 상쾌 발랄한(?) 음색이 있었으니-!! “꾸웨에에에엑!!!!” “엥? 꾸웨에엑?” “이건 웬 돼지 멱따는?” 이윽고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들 머리위로 ‘날아든 것’은 집 채 만하다는 표현이 무색치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덩치를 가진 커다란 멧돼지였다. 그것도 입에 거품을 잔뜩 물고 있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미쳐있는’ 돼지였던 것이다. 그 장대한 모습을 본 기사들은 긴장하던 것도 잊고 모두 신기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오오오옷! 날아다니는 돼지다!!” “진짜 크다! 저거 돼지 맞어?” “꾸웨엑이라고 비명 지른 걸 보면 돼지 맞을 걸? 사자가 꾸웨엑거리고 울지는 않잖아?” “아하! 그렇군!” “지금 그걸 가지고 품평하고 있을 때냐, 너희들!!” 버럭 외친 알렉은 상황을 따질 겨를도 없이 얼른 검을 뽑아 자신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돼지를 처단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한발 먼저 나타나 재빠른 동작으로 상황을 종결시키는 사람이 있었으니! 휘리리릭! 퍼억! 콰아아아앙!!! “뭐, 뭐야!” “대체 무슨…으응?” 현란한 폭발음이 들렸지만 그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확인 한 사람은 그들 중 아무도 없었다. 매캐한 먼지가 거치고 난 순간에 보인 것은 완전히 기절한 돼지 한 마리와 그 앞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한 사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것도 아무리 잘 쳐줘도 16살은 넘기지 않은 것 같아 보이는 ‘소년’이었다. 이 추운 겨울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가벼운 민소매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어색한 느낌이 들지 않은 것은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한 소년의 피부 때문인 것 같았다. 마치 햇볕에 그을린 듯한 느낌이라 그 혼자 여름을 지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던 것이다. 설마 저 소년이 돼지를 잡았단 건 아니겠지? 알렉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소년의 손에는 어떠한 무기도 들려있지 않았던 것이다. 저 가냘파 보이는 맨몸으로 돌진 했다고 하기에는 기절한 돼지의 덩치가 커도 너무나 컸다. ‘대체 무슨 수로 기절 시킨 거지?’ 그때마침 숨을 진정시킨 소년의 무심한 황금빛 눈동자가 똑바로 알렉들에게 향했다. 덕분에 정면으로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그들은 범상치 않은 그 미모에 또 다시 얼빠진 얼굴을 해야만 했다. “…설마 여자애?” “바보냐? 아무리 봐도 남자라고 본다.” “으으,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나 그들의 혼란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새 소년의 곁으로 5명의 남녀가 모여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나같이 흔치 않은 미형을 가진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 중 허리에 채찍을 감고 있던 보라색 머리카락의 섹시한 여자가 기쁜 얼굴로 소리쳤다. “꺄아악! 역시 매튜가 최고야! 해낼 줄 알았어! 저 무식한 배틀피그를 잡다니! 이리와~! 누나가 예뻐해 줄게~”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만쉐이! 이걸로 오늘 저녁도 고기다! 고기! 으흐흐흐흐!” “수고했다, 매튜. 훌륭한 솜씨였다.” “그러게 말이야. 정말 볼수록 감탄한다니까? 집 채 만한 배틀피그를 한방에 때려눕힐 수 있는 건 세상에서 매튜 한 사람밖에 없을 걸?” “자아~ 그럼 이제부터 들고 가 보실까!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 배고파 죽을 것 같다고.” 마지막으로 말한 남자는 자신의 덩치의 3, 4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깔려 죽을 만큼 무거워 보이는 그것을,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한손으로 휘둘러 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알렉 이하 기사들은 그 모습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저거 도끼 맞어?” “우린 지금 인간을 보고 있는 거냐? 아니, 그전에…아까 그 돼지를 저 소년이 잡았다고 한거 맞지? 그것도 단 한방으로?” “말도 안돼. 도끼를 든 남자라면 모를까, 저 소년의 어디에 그런 힘이 있다는 거야?” “옷차림을 봐선 저 사람들 용병인 것 같은데. 용병이란 직업 말야… 혹시 힘이 센 기준으로 뽑는 건 아닐까?” “헉, 그런 거였어?” 지금까지 황궁에만 있었던 데다, 세상에 나온 이후로도 도피하기에 바빠 보통의 평범한 용병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기사들은, 눈앞에 있는 이들이 용병 사회에서도 ‘괴물’이라고 불리는 존재라는 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세상의 모든 용병들을 모두 그와 같은 기준으로 해석하는 만행을 벌이기 시작했다.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가장 처음 본 것을 부모로 믿고 따르는 것과 같은 이치였달 까? 그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던 페리스는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알기로 용병이 되는 기준 어디에도 괴물 같은 힘을 본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 분들이 용병 중에서도 특별하신 것 같은데요?” “…흠흠.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웃기네. 방금 전까지 내 말에 고개 끄덕이고 있던 주제에.” 기사들은 서로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며 민망해 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은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결국 전혀 해결되지 않은 의문을 삼키며 그들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용병들의 정체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 등장하라는 바다괴물은 안나오고.........OTL..... 정령왕 엘퀴네스 5-17. 바다괴물의 출현 (3) 한편 샴페인 용병단 역시 기사들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수도로 출발한지 며칠 만에 홀홀 단신이 되 버린 그들은, 지금처럼 간간히 사냥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멧돼지 중에서도 덩치가 커서 거의 몬스터 급으로 분류되는 배틀피그를 발견하곤 쫓아오던 참이었다. 평소처럼 날렵한 매튜의 움직임으로 간단하게 돼지를 제압한 것까지는 문제가 아니었으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웬 한 무리의 인간들이 멍한 얼굴로 쑥덕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옷차림은 볼 품 없었지만, 휴센의 예리한 눈썰미는 그들이 차고 있는 무기가 범상치 않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의 생각으로 아마 명망 있는 가문의 기사쯤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저 사람들은 뭐래?” “글쎄? 척 보니 식사 중이었던 모양인데. 혹시 우리가 방해한건가? 사과할까, 단장?” “방해한거라면 물론 그렇게 해야겠지. 일단 우리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야 할 필요가 있겠군.” 겉보기엔 태연자악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지만 눈빛에 어린 경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샴페인 용병단들은 둔감하지 않았다. 그 중 한 사람은 저릿저릿 할 정도의 살기까지 내뿜고 있었으니 말이다. 휴센은 낭패한 얼굴로 낮게 투덜거렸다. ‘이거 괜한 소동에 휘말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수련해온 검사의 감으로 휴센은 저들의 실력이 결코 자신들의 하수가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한사람 한사람마다 풍기는 기운이 검술의 상급수련자에게서나 느꼈던 그것과 동일했던 것이다. 더구나 기사는 곧 귀족이 아닌가! 여러모로 판단해 봐도 자신들이 불리한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좋게 마무리 지을 생각으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소란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저희는 지나가던 용병단으로, 단지 사냥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 경계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러나 기사들의 태도는 좀처럼 바뀔 줄을 몰랐다. 오히려 점점 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해 하는 휴센에게 말을 건 것은 학자타입의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용병이시라면 길드에서 발급받은 단증을 가지고 계시겠지요. 실례지만 저희가 쉽게 타인을 신뢰할 상황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여기 있습니다만.” 휴센은 곧 품안에 갈무리 하고 있던 단증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개인 등급을 알려주는 금패에 소속된 용병단과 길드의 인장이 찍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본 남자와 기사들의 얼굴에 잠깐 감탄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샴페인 용병단의 휴센씨군요. 금패의 용병을 여기서 뵙게 되다니, 놀랍네요. 잠시나마 수상한 인물로 의심을 해서 죄송했습니다. 제 이름은 페리스 입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신분은 밝힐 수 없지만, 여기 계시는 분들과 함께 클모어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저희는 클모어에서 의뢰를 마치고 수도로 돌아가는 중입니다만.” 그때였다. 휴센은 자신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눈빛이 갑자기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리더 격으로 보이는 매서운 인상을 가진 남자의 반응이 단연코 돋보였다. 그는 갑자기 다가와 휴센의 손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휴센은 난생처음으로 사람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부담스럽다고 생각했다. “클모어에서 왔다고! 그게 정말입니까?” “예, 예? 아,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실례지만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지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 쭈욱 가면 클모어가 나오긴 나오는 거요?” 남자는 흥분한 듯,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가며 쓰고 있었다. 설마 길을 잃었던 것일까. 휴센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요. 지금 방향으로 계속 가시면 아마도 에른으로 가시게 될 것 같군요.” “엑? 에른이라면 클모어와는 정 반대쪽에 있는 도시가 아닙니까?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 힐튼 산맥을 경유해서 남서쪽으로 왔는데!” “힐튼산맥? 흐음… 혹시 중간에 동굴을 거치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출구가 여러 군데라서 말입니다. 잘못 나오면 방향이 틀어질 가능성이 높죠. 아무래도 지금까지 계속 동쪽으로 내려오신 것 같은데요. 설마 산맥을 넘으시면서 나침판도 준비하지 않으신 겁니까? 그게 아니라도 해가 지는 방향만 살폈다면 충분히 제대로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상당히 운이 나쁘셨던 것 같네요.” “……” 심장에 비수를 박는 휴센의 말에 알렉은 그대로 쓰러져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어버렸다. 나침판을 준비하자는 페리스의 말에 문제없다며 행군을 강요한 것은 그였다. 어두컴컴한 산맥 안에서 해가 뜨는 방향 아니냐는 말에 지고 있다고 우기던 것도 그였다. 한마디로 일행들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오게 된 것은 모두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죽어라, 이 자식! 너 때문에 지금까지 생고생을!!” “뭐? 서쪽이 맞아? 내가 아닌 것 같다고 할 때 그렇게 박박 우기더니! 야! 삽 가져와! 이 자식 묻어버려!” “어디서 낡아빠진 지도 하나 들고 왔을 때부터 이상하다 했어! 이리 와서 다들 밟아!!” “우와악! 사람을 죽일 셈이냐!” 분노한 동료들의 발길질은 진정으로 매서웠다. 퍽!퍽!퍽! 경쾌한 타작 소리를 외면하며 페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샴페인 용병단을 향해 정중히 사과의 인사를 건넸다. “실례했습니다. 원래 저런 분들이 아닌데…그 동안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네요. 하하.” “아뇨, 재미있는 분들이군요. 클모어로 가실 거라면 이대로 서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오셨던 길을 다시 돌아가셔야 겠지만요. 넉넉잡고 한달이면 도착하실 겁니다.” “흐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크란 산맥까지는 대충 며칠이나 걸립니까?” “크란 산맥이오? 아, 혹시 산맥을 넘어 들어가실 생각? 그럼 검문소를 거치는 것보다 열흘이상 늦어질 텐데요. 더구나 지형이 험악하고 복잡해서 나침판이 없으면 정말 방향을 잡기가 힘들 겁니다. 해마다 몇 십 명씩 조난자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의 말에 페리스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침판은 소량 제작인데다, 큰 도시에서만 비싼 값에 팔기 때문에, 도피하는 처지의 그들이 구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추적자들에게 위치가 발각될까봐 일부러 마을을 들리지 않고 숲과 강을 전전하는 상황이 아니던가! 수도에 있었을 때였다면 정보길드의 도움을 얻었겠지만, 이제와선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모험을 한다면야 못할 것도 없었지만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러나 다음순간 끼어드는 말에 페리스는 한줄기 광명을 받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으니-! “그렇다면 우리를 고용하셔도 될 것 같은데요. 어차피 지금은 딱히 의뢰받은 일도 없으니. 안 그래요, 휴센? 크란 산맥의 지형은 훤히 꿰고 있잖아요. 안내 정도야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 의뢰비를 많이 받을 필요도 없구요.” “헛!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지금까지 계속 무심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검은 머리카락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매튜라고 했던가? 흔히 팀 안에서 가장 어린 사람의 발언은 무시당하기 십상인데도, 돌아보는 용병단의 얼굴은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응? 하지만 매튜, 너 승급시험은 어쩌고? 수도에 있는 길드 본부에 가야 승급 시험을 치를 수 있잖아.” “별로. 꼭 올해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보단 곤란한 상황에 처한 분들을 돕는 게 먼저 일 것 같군요.” 여전히 무심한 표정이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배려심이 깊은 것들뿐이었다. 페리스는 어쩌면 저 소년이 생각만큼 무뚝뚝한 성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얼핏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스쳐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우리로선 할 말이 없지. 어떻습니까, 페리스씨? 안내만 해드리는 거니 의뢰비는 매끼식사를 책임져 주시는 걸로만 해도 좋은데요.” “예? 그런 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가 알기로 금패를 가진 용병 한 사람을 고용하기 위해 지급하는 의뢰비는 적게는 몇십 실버에서 시작해서 기본적으로 몇 골드는 가뿐히 상회했다. 뿐만 아니라 쉽게 의뢰를 받아주는 일도 드물어서, 지금처럼 자청해서 의뢰를 수행해 주겠다는 경우는 길드 역사상 몇 번 일어날까 말까한 천문학적인 수치를 자랑하는 일인 것이다. 이 믿을 수 없는 행운에 놀라는 페리스에게 휴센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사실 일행의 부주의로 경비를 전부 잃어버렸거든요. 보다시피 식사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자급자족 하는 형편이라, 매튜의 일만 아니었다면 진작 클모어로 돌아가서 적당한 의뢰인을 알아보고 다녔을 겁니다. 마침 녀석이 상관없다고 하고, 페리스씨도 곤란하신 것 같으니 겸사겸사 가는 거지요. 그런 걸로 의뢰비를 챙겨 받을 순 없잖습니까?” “아, 이렇게 고마울 데가…” 사실 알렉들로서도 용병을 고용해 보겠단 생각을 아주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용병이란 원하는 만큼의 돈만 쥐여주면 의뢰인이 누구인지, 무슨 사정이 있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기사들의 안내인으로서 가장 탁월한 존재인 셈이었다. 하지만 도망 다니기도 바쁜 와중의 그들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가지고 있을 리 만무. 이사나와 헤어질 당시, 정령왕 엘퀴네스로부터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정도의 돈은 받긴 했지만, 이번 클모어로 가는 길에 충당할 식량을 사는 것으로 전부 소비했던 탓에 사람을 고용할 여유가 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페리스는 결코 거절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면 모를까. “저로서는 상당히 기쁜 제안입니다만. 다른 분들은 어떨지 모르겠군요. 혹시 짐작 하셨을 지도 모르지만, 저희 사정이 좀 곤란한 편이어서…”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편한 길을 놔두고 일부러 험한 길을 택하는 사람치고 사연이 없는 경우는 없으니까요. 앞으로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저희들은 못 본 걸로 하겠습니다. 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이보다 더 완벽한 대답은 없다, 라는 것이 페리스를 포함한 기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불안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나 대공이 보낸 사람들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갈 길을 몰라 방황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 안내인을 자청하는 용병단이라니, 우연치곤 지나치게 좋은 타이밍이 아닌가. 기쁜 미소를 드리우는 것과 달리 페리스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친위기사단들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조심해야겠군. 아무리 소드 익스퍼드의 실력이라도 기습에는 도리가 없으니 말이야.’ 문득 고개를 든 그는 또 다시 매튜란 이름의 소년과 시선을 마주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무심하리만치 고요한 황금빛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마치 광활한 대지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었다는 것이었다. 청명한 하늘과 그 아래 끝없이 이어져 있는 거대한 대지의 운동. 쉴 새 없이 돌고 도는 위대한 자연의 섭리! 그곳에서 페리스는 아주 볼품없는 작은 생명체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숨조차 쉬기 힘들만큼의 압박감이 그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허억!!” “어이, 페리스? 갑자기 왜 그래? 이봐!” “무슨 일이야? 설마 발작이라도 있는 건가?”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동료들이 서둘러 다가왔지만 누구도 원인을 알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 분주한 상황에서도 페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소년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소름끼치도록 낮은 목소리와 함께. <너무 예민한걸. 엘퀴네스가 도와준 부작용인가? 친화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져 버렸네. 앞으론 기운 컨트롤에 신경 좀 써야겠군> “!!!” 그 순간 온몸을 억압하고 있던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억눌려있던 숨이 한순간에 터져 나오자 그는 급하게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허업! 욱- 쿨럭! 쿨럭! 쿨럭!!” “어이, 페리스! 괜찮아? 설마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거야?” “콜록. 하아, 괘, 괜찮습니다. 잠깐 몸이 경직되었던 것 같네요.” “대체 갑자기 뭔 일이래. 그 동안 너무 무리했던 거 아니야? 그러게 굳이 정찰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고집스럽게 실프들을 불러낼 때부터 불안하더라니.” 걱정스러운 말들이 이어졌지만 페리스의 신경은 온통 샴페인 용병단의 소년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러나 집요하리만치 바라보는 시선에도 소년의 무심한 표정은 조금도 변할 줄 몰랐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라도 봤던 걸까? ‘아냐, 그 생생한 대지의 감각은 분명 꿈이 아니었어. 게다가 엘퀴네스라느니, 기운의 컨트롤이라느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이었을까? 설마 저 소년이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는?’ 바로 그 때, 소년과 시선이 마주친 페리스는 그만 아연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피식 미소 지은 소년-매튜가 한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살짝 가져다 대었던 것이다. 저것은 어딜 봐도 ‘비밀 지켜!’의 포즈가 아닌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보았던 정령왕 트로웰에 대한 기록이 스쳐지나가고 있었으니! 『땅의 왕을 만났을 때에는 그 생각을 조심하라. 그와 마주치는 순간부터 이미 네 머릿속은 그의 지배 하에 속함이니, 어설픈 속임수로 화를 당하지 말지어다.』 ‘분명 땅의 정령왕은 타인의 마음을 투시하는 능력이 있다고 했었지. 아하하…그럼 정말로 트로웰님?!’ 대체 정령왕이 무슨 일로 이런 곳에서 돼지나 잡고 있는 거냐~! 페리스는 그야말로 눈앞이 아득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로서 한 가지는 확실해 졌다. 샴페인 용병단은 절대로 대공이 보낸 수하들이 아닌 것이다. 설마 그는 이 간단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정체를 밝혔던 걸까? 그것은 앞으로 페리스가 풀어야만 할 숙제였다. ====================================================== 결국 샴페인을 기사들에게 떠 넘겨 버린 ....우후후 내용상 오류, 오타지적 모두 환영입니다~ ㅡ▽ㅡ*/ (<-제정신이 아님;) 정령왕 엘퀴네스 5-18. 바다괴물의 출현 (4) “예? 대공 쪽에서 움직임을? 에이프릴 누님을 어쩐다고요?” 알폰프 제국에 도착하기 보름을 앞둔 어느 날. 후작이 건네준 통신구로 클모어와 연락을 시도한 이사나와 우리는 뜻밖의 사실을 전해 듣고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선언하고 있지만 어딜 보아도 대공파임이 ‘확실한’ 클란 백작의 큰 아들이 에이프릴을 향해 청혼을 했다는 것이다. 사실 말이 좋아 청혼이지, 보내온 편지의 내용은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에이프릴을 내 주지 않으면 대공에 대한 반역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클모어에 군대를 집합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설마 대공이 낌새를 느끼고 먼저 선수 치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들의 얼굴은 볼품없게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형님? 에이프릴 누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계획이 빨리 진행되는 한이 있더라도 안 될 말입니다, 폐하. 하필이면 클란 백작의 큰 아들이라니오! 무능력에 패륜아로 유명한 자가 아닙니까! 그런 녀석에게 소중한 누이를 줄 오라비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에이프릴은 지금 며칠 째 울고만 있습니다.” “형님의 마음 이해합니다. 일단은 클란 백작의 아들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좀더 자세히 알아보십시오. 대공이 뒤를 봐주는 자라면 뭔가 의미가 있을 테니까요. 이왕이면 제가 돌아갈 때까지 미뤄두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것이 무리라면 형님 뜻대로 일을 진행시켜도 탓하지 않겠습니다.” “최대한 시간을 벌 예정이지만 가능하려는 지. 클란 백작의 아들놈이 아주 기세가 등등해져서 며칠 내에 방문할 것을 통보해 왔습니다. 일단은 두고 보겠습니다만…참지 못하고 일을 벌이더라도 용서하십시오, 폐하.” 같이 있던 시간을 얼마 되지 않았지만, 후작이 여 동생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모르는 이는 우리 중 아무도 없었다. 라피스가 접근할 때만 해도 눈빛이 시퍼렇게 변해서 안절부절 하지 않았던가. 헉? 라피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괜찮은 건가? “!!” 아니나 다를까. 평소 투덜거리는 일이 잦아도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던 라피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었다. 노려보는 붉은 안광은 금방이라도 불이 튀어나올 것 같이 이글거렸고, 여유 있게 팔짱을 낀 것과 달리 그 팔은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한마디로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상태였던 것이다. “헉, 라피스…괜찮아?” “안 괜찮다면?” “어이어이. 일단 진정을 해. 네가 여기서 화내봤자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다고 클란 백작의 아들이란 녀석이 무서워 할리도 없… 에? 클란 백작?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다?” 정령왕이 된 이후 기억력이 좋아진 탓인지 어디서 언뜻 들어본 듯한 이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자 막 통신을 끝내고 돌아서던 카이씨가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클란 백작이라면 우리가 클모어에 도착하기 직전에 거쳤던 도시 할버크의 영주입니다. 왜, 그때 케르베로스가 나타났던…” “헉! 그럼 그 큰아들이란 녀석이 설마, 그때의 그 변태귀족??” “맙소사.” 이사나와 나는 동시에 이마를 짚고 아득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필이면 하고 많은 귀족 중에서 어찌 그 변태귀족이 마수를 뻗쳐온단 말인가! 그러자 이 의미심장한 포즈(?)를 본 라피스의 미간이 꿈틀- 움직였다. “변태귀족이라니?” “아, 그, 그런 게 있어. 인상도 나쁘고 야비한 성격이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간이었는데…하필 이런 식으로 다시 그 이름을 언급하게 될 줄이야.” “그런 녀석한텐 절대로 누님을 줄 수 없어! 다시 형님께 통신을 드리겠어. 어떤 강경한 대응을 해서라도 이 결혼 막을 거야.” 평소와 다르게 씩씩거리는 이사나 또한 그때 입었던 수치심을 잊지 못하는 듯 했다. 자신 때문에 일행이 곤란한 일을 겪었다며 얼마나 죄책감을 느꼈던가. 그 순간 당장이라도 다시 클모어에 통신을 넣을 듯한 녀석의 움직임을 막은 건 다름 아닌 라피스의 한마디였다. “그럴 것 없어. 내가 직접 간다.” “뭐? 라피스, 너 지금 뭐라고 했어?” “헉.” “라피스님??” 웬 환청을 들었나 싶어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우리들에게 라피스는 또박또박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직접 간다고. 가서 그 클란 백작의 아들인지 변태인지 하는 놈을 친히 응징해 주고 오겠어. 감히 내 것을 넘본 녀석을 내버려둬서야 체면이 말이 아니잖아?” “에이프릴양이 대체 언제부터 네놈 것이…아니, 그건 둘째 치고. 그럼 던전엔 우리끼리 가란 말이야? 한사람이라도 아쉬운 판에 네가 빠지면 어떡해!” “그건 정말 곤란한데요, 라피스님. 아무리 엘님이 계시다곤 하지만 던전 안이 어떤지도 모르는 판국에 중요 전력이 빠져버리면…” “굳이 라피스님이 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부끄러운 말이지만 우리들로서는 엘의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다들 한마디씩 늘어놓으며 어떻게든 녀석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한 번 마음의 결정을 지은 라피스는 끝까지 자신이 직접 클모어로 가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선실 안에 묘한 대치가 이루어지자 그 긴장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넉넉잡고 이주일이야. 이 배가 제국에 도착하려고 해도 앞으론 보름은 더 가야할거고. 도착하고 나서도 바로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까진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에이프릴이 무섭다고 가지 말라고 매달리면 안 올 거면서.”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엘, 일단 나도 유희를 즐기도록 해달라고. 드래곤은 꿈을 꾸는 종족이야. 그 안에 로맨스가 빠진다면 말이 되겠어?” “허허. 그래서 이번 꿈은 백마 탄 기사인가 보지? 공주님을 위기에서 구출하는?” 비꼬듯이 말하는 말에도 녀석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 전혀 창피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이렇게 되고나면 할 말 없는 쪽은 오히려 우리가 되는 셈인가? 가지 말란다고 안갈 녀석이 아닌지라 차라리 곱게 보내주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허락하는 말을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되도록이면 돌아오는 방향으로 결정해줬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던전에 가는 것은 ‘우리’ 뿐만이 아니잖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못을 박았지만 신경 쓰인다고.” 여전히 주변에서 알짱거리는 기운을 가리키며 말했더니 라피스 역시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생각해 보지’라는 한마디를 남긴 채 그대로 파앗- 텔레포트를 하며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성질도 급한 녀석 같으니!! “……” “……” 순간에 찾아온 정적. 남겨진 우리 세 명은 연신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의 일정을 다시 짜기 시작했다. 그렇다 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문제는 마법 항목에 대한 모든 공력 및 저항력이 완벽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손해가 커도 너무 컸다. “미운 짓만 하는 놈이었지만 능력 면에선 쓸모가 많았는데. 하아, 앞으론 좀 힘들어 질지도 모르겠는걸.” “저어, 그보다 더 큰 현실적인 문제가 있는데요, 엘님.” “네? 무슨?”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드니 그곳엔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이 된 카이씨가 앉아있었다. 라피스가 ‘떠난다’고 선언했을 때도 약간 난처한 기색만 있었을 뿐,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던 그가 아닌가! 아무래도 단단히 중요한 일인 것 같아 나와 이사나는 덩달아 긴장하기 시작했다. “알폰프 제국에서 써야할 물품과 경비…라피스님이 보관하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헉” “…선실에 제공되는 모든 음식은 유료입니다만, 이제부터 우리는 굶어야 하는 걸까요?” “……” 그랬다. 나야 안 먹어도 상관없는 몸이지만 평범한 인간인 두 사람은 매끼 식사마다 먹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아무리 나에게 정령계에서 가지고온 꽃잎들이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사방에 바닷물뿐인 배 안에서 마땅히 돈으로 바꾸어줄 만한 곳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을. 그렇다고 내다팔면 족히 몇 십 골드를 받을 수 있는 물건으로 달랑 음식만 사먹을 수는 없는 일. 거스름돈이야 안받을 수는 있다 쳐도 그 보석으로 인해 배에서 벌어질 파란까지 감당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피스 이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바야흐로…일행의 생계를 책임질 위에 빠지고만 나였다. ***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날부터 우리 식단에 올라온 메뉴는 전부 해산물과 생선이었다. 바다에서 구할 음식이란 게 한정되어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것도 종류별로 하다보니 대충 먹을 만 했던지 두 사람의 불만은 없었다. 대충 바다 속에서 건져 올린 돌덩이로 자리를 만들고 그 아래에 불의 중급 정령인 샐러맨더를 앉힌(?)다음, 그 위에서 요리를 하는 식이었는데, 이것도 하다보니 나름대로 재미있다. 뭐, 직접 먹어야 하는 두 사람의 심정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맛있습니다. 대륙에선 생선이 귀해서 맛보기 힘들었는데, 요새 엘님 덕에 호강하는 기분이네요. 정령왕이 직접 바다에서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과 고기를 먹어본 사람은 아마 저희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벌써 며칠째 생선만 인데 질리지 않아요?” “아니오, 괜찮습니다. 엘님께서 매끼마다 바다에 들어가시는 수고도 마다하시는데, 불만이 있을 리가 없죠.” 그러면서 생긋 웃은 카이씨는 오히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 왔다. 하급 정령들에게 시켜도 될 일을, 좀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바다에 들어가서 잡아오는 내 남모를 노력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그날도 평소처럼 물고기를 잡기 위해 갑판에 나와 있을 때였다.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시각은 다들 잠들어있는 늦은 새벽이기 때문에, 자연히 내가 활동하는 시간도 그 시각에 맞춰져 있었다. 오늘은 어떤 물고기를 잡을까, 속으로 중얼거리며 막 바다 속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언제 나와 다르게 갑판위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던 것이다. 그 중 한명은 나에게도 낯익은 녀석이었다. 작은 체구에 인간과 다른 뾰족한 귀. 바로 사기 치는 엘프-엔딜이었다. ‘그동안 통 안보여서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런 새벽에 무슨 일로 나온 거지?’ 나는 아직 그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을 틈타, 얼른 선박 뒤로 몸을 숨겼다.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들이 금방이라도 중요한 대화를 나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엔딜과 함께 있는 인간들은 모두 덩치가 크고 우람한 체구였는데, 조금은 껄렁거리는 듯한 태도가 불량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닌 듯, 그들을 바라보는 엔딜의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 자는 엘프를 깨우고 지랄이야! 난 할말 없다고 했잖아.” “킥킥. 아니지, 엔딜. 넌 할말이 없어도 우린 할말이 있거든. 이제 슬슬 줄 때가 되지 않았나? 조금만 더 가면 제국에 도착하는데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셈이야?” “제기랄. 니들도 봤잖아. 이번 수입은 꽝이었다고. 빌어먹을 정령사 때문에 손님을 전부 놓쳤단 말이야! 한 푼도 없어.” “그건 네 사정이지. 여기서 마음 놓고 장사할 수 있는 게 누구 때문인지 잊었어? 그리고 없을 리가 없잖아? 네 주머니에 돈이 들어있는걸 난 이미 알고 있는데.” 느긋하게 건네는 말에 엔딜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녀석은 마치 빼앗길 새라 품을 끌어안은 채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건 안돼! 세실의 약값이란 말이야! 그 앤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글쎄, 그건 네 사정이라니까? 우리로선 매달 받아야 하는 납부금을 꼭 챙겨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맞아, 맞아. 엔딜. 너도 그 동생인지 뭔지 하는 것 때문에 배타고 돌아다니는 거 힘들지 않냐? 그만두고 엘프 마을로 돌아가는 게 더 편할 것 같은데 말이야.” “씹! 뭐가 어쩌고 어째?” 엔딜의 눈꼬리가 바싹 치켜 올라갔다. 거기에서 한 마디만 더 하면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상대편 남자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낄낄거렸다.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잘 생각해보라구. 벌써 이게 몇 년 째냐? 이제 피곤할 때도 되지 않았어? 어차피 네 동생이란 것, 반쪽만 같은 거잖아. 그 앤 몰라도 넌 엘프의 숲에 돌아갈 수 있을 텐데? 고귀하신 하이엘프가 이런 곳에서 고생하는걸 보니 마음이 아파서 그렇지. 킥킥” “나 화낼 거다. 거기서 더 이상 지껄이지 마.” “오오, 무서운데? 어차피 비밀도 아니면서 무슨. 엔딜의 여동생인 세실이 사실은 인간과 섞인 하프엘프이고, 그 때문에 마을에서 추방당했다는 거.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유명한 얘기 아니야? 사실대로 말해봐, 엔딜. 그 희귀병이라는 거. 부모가 저지른 금단의 사랑으로 인한 저주 같은 건 아니냐? 크하하핫!” “죽여 버리겠어!!!!” 그 순간 분노한 엔딜 녀석이 막무가내로 덩치 큰 남자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다구 있는 돌진과 다르게 그 움직임은 맥없이 한사람의 손에 잡혀 간단히 억압되고 말았다. 뒤틀린 손목의 아픔으로 인한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퍽-이어지는 짧은 타격음. 눈 깜짝할 사이에 엔딜의 몸은 어느새 저만치 구석으로 처박혀 있었다. 쿠웅! 그와 동시에 웃고 있던 남자들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졌다. “불쌍한 녀석. 그 자랑하던 정령술도 더 이상 못쓰게 되었으니 이젠 어딜 가서 약값을 벌까나? 신파 그만 찍고 이 형님이 충고해 줄때 잘 귀담아 들으라고. 세실은 가망 없어. 백날 약으로 처발라봤자 죽는 기간만 늦출 뿐이야. 그러니 그나마 몸 성히 움직일 수 있을 때 엘프의 숲에 돌아가라는 거다. 킬킬.” “맞아, 맞아. 넌 이제 날씨도 읽지 못하게 됐잖아? 엘프 따위를 고용해 줄 정도로 마음씨 좋은 사람은 없다고.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걸? 이러다간 세실도 너도 사이좋게 세상 하직 할 거라고.” 뭐? 정령술을 못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그 사이에 계약을 해지라도 한건가? 전혀 뜻밖의 이야기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나 서둘러 살펴본 녀석의 이마에는 여전히 흐린 듯한 시큐엘의 문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때 마침 몸을 일으키고 있던 엔딜이 앙칼지게 소리쳤다. “시끄러! 죽기는 누가!! 그따위 망발 입에 담기만 해봐! 죽어도 가만히 안 둘 테니!” “헤헤, 여전히 씩씩하구만. 그런데 정령도 못쓰는 녀석이 우리를 어떻게 가만히 안 둘지 모르겠네? 설마 그 비리비리한 몸으로 덤벼보겠다고? 그러다 지금처럼 또 쓰러지기나 하지.” “킥킥킥. 주제도 모르는 놈. 이봐, 엔딜. 충고할 때 정신 차리라고. 이 세상에 널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말이야. 엘프들도 네 녀석이라면 치를 떤다는 사실을 모를 줄 알고?” “크윽!” “아무튼 도착 할 때까지 돈 마련해 놔. 동생의 약값이든 뭐든, 정해진 수금은 지켜야 하지 않겠냐? 지금 당장이라도 연락만 하면 네놈의 동생 따윈 한순간에 운명을 달리 할 수 있다는 거 모르진 않겠지?” “이 치사한 자식들!!” 설마 협박이라도 당하고 있었던 걸까? 바락바락 소리치면서도 차마 덤벼들지 못하는 엔딜의 모습을 보면서 난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이게 바로 시큐엘이 말했던 그 ‘어쩔 수 없는 사정’일지도 모른다고. ‘바보 녀석.’ 갑자기 사라져 버린 정령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마에 남아 있는 상급 정령의 문장을 볼 때부터 나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진정 저 녀석을 사위로 맞이해야 한단 말인가! 그때였다. 쿠우우웅!!! 커다란 소리와 함께 선박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판에 나와 있던 나와 엔딜들은 물론, 자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까지 전부 다 깨울 정도로 엄청난 진동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시퍼렇게 얼굴을 굳힌 선장과 선원들이 서둘러 붉을 밝히며 사태를 알아보기 위해 애를 쓸 무렵, 쿠우웅 하고 한차례 진동이 더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균형을 못 잡고 넘어진 사람들은 곧 물 위로 떠오르는 거대한 형체를 보고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앗! 이게 뭐야!!” “괴, 괴물이다아!!!” “으아아아악!!” 소름끼칠 정도로 붉은 세 개의 안광과 뱀을 연상시키는 미끄러운 동체. 낼름거리는 기다란 혀 위에서 날카롭게 번뜩이는 송곳니. ‘맙소사!’ 항해 전 선장이 그렇게도 두려워했던, 바다괴물이 출현하는 순간이었다. ====================================================== 바다괴물 출현 했습니다! 제목 안 바꿔도 돼요...(아아, 뿌듯...)   그리고 라피스 떨구기 작전 대성공! 음하하하! 미안하다, 라피! 앞으로 등장할 무수한 인간들을 위해서 네가 잠시 희생해라. 자아~ 다음은 누구차례로 할까나~(룰루) 아참, 의도하지 않게 정령왕들이 이사나 옆으로 모이게 된 건 사실이지만; 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유희중인 상태, 그 이상의 도움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자아~ 저는 이제 다음 편을 쓰러....<-이미 마감 날짜 넘긴 인간; 정령왕 엘퀴네스 5-19. 바다괴물의 출현 (5) “말도 안 돼! 어째서 바다괴물이? 말을 싣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신이시여…” 뒤늦게 깨어난 사람은 물론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갑판위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산처럼 거대한 괴물의 모습에 질린 나머지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바다 한가운데서 도망쳐봤자 얼마나 도망갈 수 있겠냐 만은. 잠시 후, 손님들 중에서 몇몇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다가와 선장의 멱살을 잡아 올리기 시작했다. “지금 신이나 찾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 괴물은 뭐야? 왜 바다 속에서 저런 게 나오냐고!!” “바, 바다괴물이오. 이곳 카리프 해(海)에 출몰하는 몬스터라고 알고 있소. 심해 속에 깃들다가 가끔 배고플 때만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데, 설마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방법을 찾아내란 말이야, 방법을! 이대로 전부 죽을 셈이야?” 격하게 소리친 사람들은 선장의 얼빠진 얼굴을 보고서는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갑판 구석에 처박혀 있던 엔딜을 발견하곤 만연에 화색이 되어 소리쳤던 것이다. “아, 그래! 저 엘프 녀석 텔레포트 스크롤을 가지고 있었지!” “오옷! 진정 이런 곳에서 죽으라는 법은 없군! 이봐, 스크롤을 내놔! 돈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나도!!” “나도 하나 줘!” 웅성 웅성, 시끌 시끌. 순식간에 우르르 몰려든 남자들은 엔딜이 직접 꺼내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억지로 강탈하다시피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반항할 거란 생각과 달리, 엔딜은 멍한 시선으로 괴물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엔딜? 대체 무슨…’ 녀석의 두 눈동자에 담겨 있는 감정은 분명 체념이었다. 그 모습에 의아한 기분이 든 것도 잠시, 이후에 벌어지는 상황에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엔딜에게서 빼앗은 종이를 열심히 찢던 사람들이 곧 당혹한 얼굴이 되어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와앗! 이게 뭐야! 텔레포트 스크롤이 아니잖아! 왜 이동하지 않는 거야!!” “내 것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이 자식!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잔뜩 성난 얼굴을 한 남자가 우왁스러운 손으로 엔딜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체구가 작은 녀석은 곧 볼품없이 몸이 들려 그대로 목을 죄일 수밖에 없었다. 콜록- 낮은 기침을 깨끗하게 무시한 남자는 험악하게 소리쳤다. “사실대로 말하지 못해?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킥- 보면 몰라? 그게 가짜라서 그런 거지. 바보들 아냐? 진짜 텔레포트 스크롤과 가짜도 구별 못해?” 분명 숨을 못 쉬어 괴로울 텐데도 엔딜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비웃는 듯이 입 꼬리를 치켜 올리는 것이 아닌가. 자조적인 목소리가 녀석의 억눌린 입에서 흘러나오자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짜 스크롤이라니!! “너, 너 이 새끼! 감히 우리를 속여? 이건 고발하면 당장 지하 감옥행이라고!!” “미친 놈. 어차피 태풍이 부나, 몬스터가 나타나나, 죽으면 말짱 끝인데 고발은 무슨 고발? 그래봤자 죽고 나면 속았다고 하소연할 곳도 없잖아? 이걸 두고 완벽한 증거인멸이라고 하는 거지.” 싸늘하게 대꾸하는 말에 남자는 물론, 주변에 있던 사람들까지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격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이 망할 엘프가!! 오냐, 그래! 그렇다면 네가 쓸 스크롤은 있겠지! 당장 그것이라도 찾아서-!!” “없어.” “뭐, 뭐?” “없다고. 약값 벌기도 빠듯한 내 형편에 스크롤은 무슨? 의심나면 한번 찾아보든지. 아마 백날 뒤져도 안나올걸? 사실 그동안은 시큐엘이 있었기 때문에 바다 한 가운데 빠져도 안심이었거든. 그런데 운도 더럽게 없지. 몇 주 전부터 소환이 안 되대? 뭐, 결국 다 사이좋게 죽는 거지. 그래도 다행이야. 안 그래? 저승길 동무가 이렇게 많으니 죽을 때 외롭지는 않을 테니까” “이 빌어먹을 자식! 웃기지마! 누가 너 따위와!!” 킥킥거리며 중얼거리는 엔딜의 말에, 멱살을 잡고 있던 남자는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만졌다는 듯 혐오서린 표정으로 녀석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친 기침을 내뱉고 있는 녀석의 작은 몸을 사정없이 걷어차는 것이 아닌가! “이 자식! 여기서 바로 죽여주마!” 쿠우우웅- 그때 또다시 괴물 녀석의 거대한 꼬리가 선체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엔딜을 걷어차던 남자의 몸이 주욱 미끄러지며 바닥을 뒹굴자, 그때서야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한 사람들은 녀석을 향해 화내던 것도 잊고 다시금 선장을 닦달하기 시작했다. “이보시오! 선장! 어떻게든 해보란 말이오!” “배를 돌려! 도망치란 말이야!!” “젠장! 이런대서 죽을 순 없어! 없다고!!” “진정,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소란을 피우면 괴물이 흥분합니다! 모두 진정하세요!”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그들 모두 볼품없이 추욱 늘어진 어린 엘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생존본능이란 것은 때론 사람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몰고 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소란을 피우는 틈을 타 나는 얼른 엔딜에게 달려가서 부축했다. 남자에게 맞은 데다 아까 배가 흔들릴 때 구른 탓인지 녀석이 몸 여기저기에 얼룩덜룩한 상처가 나 있었다. “이봐, 괜찮아?” “쿨럭, 상관 말고 꺼져. 어차피 발악해 봤자 소용없다구. 이런 바다 한 복판에서 어떻게 도망칠 수 있다는 거야? 추잡하다고 이런 거. 죽으려면 깨끗하게 죽는 게 낫지.” “그 무슨 인생 다 산 듯한 소리야? 아직 괴물이 배를 부순 것도 아니잖아.” “하, 녀석은 그저 가지고 놀고 있을 뿐이야. 빌어먹게도 내겐 들리거든. 저 녀석은 지금 이 배를 어떻게 가지고 놀까 궁리하고 있어. 이제 곧 본격적인 요리에 들어갈걸? 배가 많이 고픈 모양인데, 누가 가장 먼저 괴물의 입 속에 들어가게 될까? 킥킥.” 혹시 아까 발로 걷어차일 때 머리라도 맞은 건 아닐까? 녀석의 웃는 얼굴을 보며 나는 심각하게 고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멀쩡하게 웃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본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걸? 그랬다. 엔딜은 울고 있었던 것이다. 유쾌하게 떠드는 입과는 전혀 다르게 녀석의 두 눈에서는 구슬픈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곤 반쯤 실성한 듯한 얼굴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죽으면 세실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 “이럴 줄 알았으면 약값으로 모은 돈으로 맛있는 거나 잔뜩 사주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몸이 말라서…안쓰러운 녀석이었는데. 내가 죽으면 세실은 정말 혼자가 될 텐데. 나처럼…길동무로 끌고 갈 녀석도 없이 정말 혼자서 죽게 될 텐데.” “야, 너 지금 무슨 소릴…” “정령왕 엘퀴네스를 알아?” “!!”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나는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것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을 녀석은 여전히 눈물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긴. 모를 리가 없지. 너 역시 물의 정령사였지? 엘퀴네스는 물의 정령왕이잖아. 온 세상의 물을 다스리는 멋진 정령왕, 그에게 걸리면 저런 괴물 따윈 한 주먹감도 안 될 테지. 어때? 너도 그 분을 소환하는 게 꿈 아니야?” “그, 글쎄?” “흐음.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어찌됐든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으니까. 시큐엘을 소환했을 때는 당장이라도 엘퀴네스님의 소환도 가능할 줄 알았지. 하지만 안 되더라? 엘프는 조화의 종족이라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행동은 할 수 없다는 거야. 정령왕의 소환은 그만큼 기적 이라는 거지. 그런데…인간은 가능하다고 하더군.” “뭐, 나도 그렇다고 들었다만.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괴물의 혀가 바로 코앞에서 날름거리고 있는데도 녀석은 잘도 태평한 얼굴이었다. 엔딜은 무언가 꿈을 꾸는 듯한 멍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인간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엘퀴네스님이라면 세실의 병을 고쳐주실 수 있을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내가 어떻게 되도 상관없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아예 시도조차 불가능 하다니…이걸 바로 불공평 하다고 하는 걸까?” “……” “우습지 않아? 엘프들은 말이야, 은연중에 인간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스스로를 정령의 친구라고 자청하며, 마치 종처럼 그들을 부리는 인간의 행동을 비난하곤 해. 그런데 막상 ‘세상을 바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건 엘프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거지. 그걸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지금 내가 여기서 인간 애찬론이라도 펼쳐주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엔딜은 뭐가 그리 우스운지 또다시 킥킥거리고 웃었다. “처음엔 이해를 못했는데 말이야, 어머니가 인간에게 반했던 이유도 그런 게 아닐까 해. 그리고 세실은 그 기적의 피를 반이나 가진 존재인 거지. 그러니…결코 하등한 존재가 아니란 말씀! 누구도 그 앨 천하다고 비난할 자격이 없단 말이야.” “동생이 인간과 혼혈인가 보지? 아까부터 듣자니 약값을 번다느니, 엘퀴네스라면 고칠 수 있다느니…어디가 많이 아프기라도 한거야?” 내 물음에 엔딜은 힘없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침대에서 일어나질 못해. 몸에 열도 없고 신체에 아무 이상도 없는데 말이야. 그나마도 약을 먹지 않으면 눈도 뜨지 못하더군. 매일 꼬박꼬박 챙겨줘야 하는데, 보다시피 이런 상황에 이르렀으니 다 틀린 거지 뭐. 결국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게 된 셈이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런데…죽고 나서 다시 만날 수 있긴 한 걸까?” “쯧, 궁상떨지 마. 죽긴 누가 죽어? 저까짓 괴물, 좀 힘들긴 해도 상대 못할 정도는 아니야. 시큐엘 몇 마리면 충분하다고.” “그래? 하긴, 그렇겠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찬가지야. 사람들을 속인 게 들켰으니 난 도착하고 나면 틀림없이 지하 감옥에 가게 될 테니까. 이래저래 세실을 챙겨줄 존재는 없어지는 셈이지. 나로선 여기서 죽는 게 오히려 더 편할 것 같은데? 고문당하다 죽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지하 감옥의 고문은 끔찍하다고 들었어.” …할 말 없다. 이 엘프놈의 자식! 속속들이 옳은 말을 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바로 그때, 배에 붙어있던 괴물 녀석의 몸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쿠우웅! 거대한 진동과 함께 깃발을 지탱하고 있던 기둥 하나가 우지끈 부서지더니, 사방으로 나무의 파편이 튀었다. 커다랗게 벌려진 괴물의 입 안에선 덩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음의 울음소리가 마치 비명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삐이이이익---!!”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 소리를 이용한 공격 방법인걸까? 괴물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모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귀를 틀어막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그대로 입에 거품을 물며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는걸 봐선 아마도 고막이 터진 것 같았다. 엔딜 역시 마찬가지로 귀를 부여잡고 신음을 내뱉었다. 이 중에서 멀쩡한 존재가 나밖에 없는 걸 보면, 정령에게는 통하지 않는 공격인 모양이다. “크, 크으윽!” “엔딜! 괜찮아?” “너, 너는 대체 어떻게 멀쩡, 악! 귀- 귀가 아파!!” 설마 이사나와 카이씨도 이런 상태인 걸까? 갑판위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봐선 선실에 있는 게 틀림없었지만 나는 슬며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단은 저 괴물 놈부터 처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놔두기엔 엔딜의 상태가 심각해 보였기에, 나는 서둘러 녀석의 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크윽, 뭐, 뭘 하려는…” “조금만 참아. <회복>” 파앗- 엷은 흰 빛 덩이가 손에서 뿜어져 나오자 방금 전까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던 엔딜의 얼굴이 서서히 안정되었다. 찰나의 시간 후,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 졸면서 쓰는지라 문맥상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수정도 안하고 올리기 때문에 더 심할 수 있어요.ㅠㅠ 머리가 멍해지면 평소 알고 있던 단어도 생각이 안나서 헤맨다죠;; 부디 넓으신 마음으로 봐주시길 바랍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5-20. 바다괴물의 출현 (6) “지, 지금 뭘 한거야?” “보다시피 치료했는데.” “뭐? 하지만 너는 정령사잖아. 정령사가 사람도 치료할 수 있는 거야?” 글쎄다. 내가 알기론 꽤나 어려운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말이지. 정령들의 능력이 여러 면에서 쓸모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 부여된 건 오로지 물의 정령왕인 나뿐이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정체를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변명하듯 대답했다. “흠, 일단은 신관과 겸업(?)을 하고 있다고 해두지.” “뭐야, 그 어설픈 대답은? 내가 바본 줄 알아? 정령사와 신관은 서로의 마나패턴의 현저히 다르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함께 배울 수 없다는 건 기본 상식 중에 상식이라고!” “뭐, 아무렴 어때. 살다보면 이런저런 일도 있는 거지. 정령왕도 소환하는 마당에 두 가지 능력을 사용하는 것쯤이야. 이것도 기적의 일부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그걸 지금 핑계라고! 솔직히 말해! 너 대체 정체가 뭐…” 쿠우웅-!!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바다괴물!! 다시 흔들리기 시작한 배 때문에 중심을 못 잡고 쓰러지는 엔딜을 얼른 붙잡아 앉히면서,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완벽한 핑계거리를 잡았으니 어찌 아니 기쁠 쏜가! 그러자 피식거리는 내 얼굴을 본 엔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이익! 어째서 너는 배가 이렇게 흔들리는 데도 멀쩡한 거야!” “대화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지금은 저 괴물부터 처리하는 게 순서인거 같은데?” “알았으니까 마음대로 해. 그래봤자 나는 도움도 되지 않을 테니. 잘나신 너랑 달라서 나는 있던 정령도 소환 못하게 된 처지거든.” 비꼬듯이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녀석의 얼굴은 씁쓸한 빛을 잔뜩 드리우고 있었다. 아닌 척 해도 시큐엘을 소환 못하게 된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그것을 곁눈질로 힐끔 바라 본 나는 애써 못 본 척 무시하면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배를 부수려는 바다괴물을 향해 돌아섰다. ‘완전히 엉망인걸.’ 솔직히 말해 갑판은 이미 손쓰기도 힘들만큼 망가진 상황이었다. 배의 방향을 잡고 있던 키는 물론, 돛대는 이미 훨씬 전부터 망가져 보기 흉하게 나뒹굴고 있는 상태. 그 중에서는 미처 쓰러지는 기둥을 피하지 못하고 깔린 사람도 있었고, 파편에 부딪쳐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나마 신체 말짱한 사람들도 방금 전 괴물이 지른 울음소리 때문에 바닥에 엎드려져 귀를 부여잡고 있는 상태라, 배 위의 광경은 흡사 생지옥을 보는 듯 했다. 선실 쪽 상황은 가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아마도 이와 별반 다르진 않을 것이다. ‘이사나, 카이씨…괜찮은 걸까? 이럴 때 라피스만 있어줬어도.’ 남의 탓 할 처지가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 모든 일은 내가 조금만 더 행동을 빨리 했다면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애초에 선장이 바다괴물 운운할 때부터 경계를 했다면, 처음부터 괴물이 접근하지도 못하게 막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정령왕이라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나와 함께한 일행들에게 부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니, 그보단 자기 살기만 급급한 이기적인 사람들을 조금 혼쭐 내주고 싶었다는 쪽이 옳을 것이다. 흠, 그래도 배가 이지경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둔건 좀 너무했나?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은 나는 곧 2마리의 시큐엘을 불러냈다. 낮게 자세를 낮춘 상태에서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녀석들의 모습을 보자니 문뜩 떠오르는 사실이 있어 무심코 입을 열었다. “어이, 엔딜. 마지막으로 물어볼게 있는데 말이야.” “…뭐야.” “증거인멸이라고 하니까 생각난 건데, 그 가짜 스크롤 팔 때마다 일부러 폭풍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죽였던 건가하고 말이지. 만약 그렇다면 정말 시큐엘에게 나쁜 짓을 시킨 거잖아.” “쳇, 나쁜 짓은 무슨…” 투덜거리듯 대답하면서도 잔뜩 찌푸린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나마 나름대로 양심은 있었던 모양이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엔딜은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아마도 내가 못 듣기를 바라고 한 말인 것 같지만, 녀석으로서는 불행하게도(?) 정령왕의 청각은 아주 선명하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내게 전달해 주고 있었다. “가짜 스크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고. 나로선 지하 감옥에 갈 감수까지 하고 준비한 거란 말이야. 애초부터 이번 항해엔 태풍을 일으킬 생각조차 없었어. 아무리 내가 최악이래도 살인 따위는 안 해.” “헤에,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인데? 너 생각보다 쓸모 있는 엘프구나?” “…젠장…귀 한번 더럽게 밝네.” 당황한 듯 고개를 푸욱 수그리는 엔딜은 목부터 시작해서 귀까지 잔뜩 시뻘개져 있었다. 그것을 쿡쿡 웃으며 바라본 나는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괴물을 바라보며 그때까지 대기하고 있던 시큐엘에게 명령했다. “괴물의 몸을 배에서 떼어내. 가능한 배가 뒤집히지 않도록 조심하고.”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명령을 받듭니다! “시큐엘들이 계약자에게 존대말을 하다니?!” 놀란 엔딜을 무시한 녀석들은, 언제나처럼 충실한 모습으로 공중을 향해 솟구쳐 올랐다. 마치 또아리 트듯 배를 감싸고돌기 시작하는 바다괴물을 떼어내기 위해 합동작전에 돌입한 것이다. 촤아악! 콰아앙!! 한 녀석이 괴물의 머리를 붙들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자, 나머지 한 녀석이 솜씨 좋게 등허리 부분을 떨쳐내기 시작했다. 우지끈! 촤악! 콰악! 콰아아아앙!! “키에에엑!!!” 커다란 물소리와 함께 꿈틀거리는 바다괴물과 시큐엘의 실갱이가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쳐든 녀석이 크게 입을 벌린 것을 본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또 다시 소리 공격을 할 셈이야! 성대를 막아 울지 못하게 만들어!” -명령을 받듭니다!! 다행스럽게도 시큐엘의 재빠른 행동 탓에 녀석은 삐-소리를 채 지르지도 못하고 입을 막혀 버둥거릴 수밖에 없었다. 촤악, 촤악! 쏴아아! 첨벙 첨벙. 뱀처럼 긴 몸뚱이가 요동칠 때마다 다량의 물이 갑판위로 밀려 들어왔다. 그 바람에 본의 아니게 짠 물을 뒤집어 쓴 사람들의 옅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으윽! 쿨럭 쿨럭!” “아, 사- 살려줘…” ‘아차, 사람들을 잊고 있었네. 내 정신 좀 봐.’ 나는 또 한 마리의 시큐엘을 불러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다. 원래 이런 일엔 운디네를 불러도 상관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얄미운 라피스 자식의 마나를 펑펑 써 줄 작정이었던 것이다. 오늘 어디 탈진 좀 해봐라, 이 나쁜 놈아!! 구으윽!! 구으윽!! 성대를 막힌 괴물은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면서 마치 허파에 바람이 빠진 듯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첨벙거리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배를 뒤집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다른 한 마리의 시큐엘이 몸뚱이를 제압하고 있는 탓에 원하는 바를 이룰 순 없었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던 엔딜은 시간이 지나도 내가 별 다른 지시를 내리지 않자, 살짝 인상을 쓰며 입을 열었다. “왜 제압만 해두는 거야? 마나 소모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쯤에서 그만 끝내지 그래?” “그럴 순 없지. 목표는 녀석이 탈진할 때까지 마나를 소비하는 거니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 그, 그게 아니고. 사실은 저 뱀…맞나? 아무튼 저 괴물의 시체도 팔면 돈이 될까 생각하고 있었어. 상황에 따라 유체를 보존시키느냐, 안되느냐가 결정되거든.” “시체를…팔아?” 얼떨떨한 듯이 바라보는 엔딜의 표정에 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황당한 얼굴을 하는 녀석을 대신해서 대답을 한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한 존재였다. “호오 안목이 상당히 높으신데요? 저 바다괴물의 본 명칭은 스켈라, 드래곤에 필적하는 두꺼운 가죽은 귀족들이 없어서 못사는 물건이죠. 붉은 눈은 연금술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마법 물품의 재료가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몇 백 골드는 충분히 챙기실 수 있을걸요?” “오오, 역시 몬스터는 죄다 돈이었…헉! 루카르엠??” 황급히 놀라서 돌아보니 그곳엔 기절한 이사나와 카이씨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있는 루카르엠이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 사람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던 나로서는 그대로 눈이 뒤집힐만한 광경이었던 것이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야! “아아, 그렇게 노려보시면 저 상처 받습니다. 이건 제가 한 짓이 맞긴 하지만 절대 고의는 아니었다고요.” “고의는 아니었다?” “네. 그러니까 사정을 말씀드리자면, 배가 심하게 요동쳐서 선실 안에 있던 물건들이 죄다 엎어졌거든요. 그대로 놔두면 위험할 것 같다 싶어 도와드리려 했더니 잔뜩 경계를 하셔서 말입니다. 괴물이 음속공격을 하는데도 통 협조를 안 하시길래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만든 결과, 랄까요?” 그러면서 ‘난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으로 생긋 웃는 얼굴을 본 나는 그대로 할말을 잃고 말았다. 결과야 어찌됐든, 일단 일행들을 도와준 마족에게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아니, 이건 오히려… “고맙습니다, 라고 해야 하는?” “설마요. 인사를 듣기 위해 한 행동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잘 보이기 위해 미리 포석을 깔아둔 셈 치지요.” 또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이사나와 카이씨를 눕히는 루카르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착잡한 심정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이 행동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루카르엠은 짓궂은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이래도 역시 일행으로 합류는 안 되는 걸까나요?” “…본인이 더 잘 알거라 생각하는데요. 오히려 무슨 꿍꿍이인지 저의가 궁금해집니다만?” “에에, 저의 같은 건 없었는데. 그냥 단순히 구해주고 싶은 마음에도 이유가 필요한 건가요?” “처음부터 쫓아다니는 의도가 불분명한 존재라면, 없던 이유도 의심해 볼 수밖에 없죠.” “헉, 의도가 불분명 하다뇨. 이미 말씀 드렸잖습니까? 명령이라 어쩔 수 없다고. 뭐, 그 전에 일단 재미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지만요.” 그다지 신뢰성이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마족이 재미있을만한 상황이란 게 피와 살이 튀기는 전투밖에 더 되겠는가? 나의 탐탁지 않은 시선을 본 루카르엠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사실 이건 비밀인데 말입니다. 당신을 따라다니다 보면 아무래도 조만간 만나게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만나요? 누구를?”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라 나는 그대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알기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마족과 친분이 있는 이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던 것이다. ‘아, 맞다. 엘뤼엔이 있었지!’ 그라면 평소에 담당하고 있는 마족들이 많으니 어쩌면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루카르엠의 입가에 머문 미소가 짙어졌다. “바로 우리들의 위대한 어둠의 군주시지요.” “에? 어둠의…?” “그렇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굽어 살피는 지배자-라고나 할까요?” 그럼 엘뤼엔은 아닌 건가? 하긴, 아무리 마계의 4대 공작이라고는 해도, 나와 엘뤼엔의 시시콜콜한 사생활까지 다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형벌의 신과 엘퀴네스가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 일 테니 말이다. 그럼 대체 누구를 만나겠다는 걸까? 하지만 루카르엠은 그 이상 더 설명을 할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자연스럽게 말을 끊는 폼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궁금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닌가 싶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쉽게 다 밝혀버리면 밑천이 바닥나지 않겠습니까? 저도 먹고 살아야 해서 말이죠.” “이를테면…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면 일행으로 넣으라는?” “뭐,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군요. 쿡쿡. 그럼 다음에 다시 설득 하러 오겠습니다. 아참, 저 몬스터의 내장은 최고급 요리로 미식가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으니, 죽이실 땐 간단하게 질식사 시키는 편이 이로울 겁니다. 저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루카르엠은 마지막으로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그래도 처음 약속대로 여전히 기척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보면, 조금은 믿어도 괜찮은 녀석인 걸까? ===================================================== 후후후... 저는 나름대로 성실연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꾸 성실연재 하라는 압박을 주시면 좌절합니다아...(털썩)<-그래도 역시 성실연재를 해야 하는 인간; 결국 오늘 밤도 새는 건가....... 정령왕 엘퀴네스 5-22. 흔적 (1) 바다괴물에 의한 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사망자 2명을 포함, 선장과 선원을 합친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돛대와 키가 부서지는 바람에 배가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선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고 말했다. 카리프 해(海) 한가운데서 바다 괴물을 만난 배는, 반드시 난파당하여 전원이 몰살 한다는 게 일반적인 정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일행들은 본의 아니게 배를 위기에서 구한(사실이긴 하지만) 영웅이 되어 최고 대접을 받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의 대우가 부드러워진 틈을 타, 그들이 엔딜을 사기꾼으로 신고하지 못하도록 설득시켰다. 가짜 스크롤에 대한 부분은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단 식으로 둘러댄 것이다. (그동안 태풍을 일부로 일으켰단 얘기는 교묘히 감췄다.) 실제로 녀석에게 물건을 사서 피해를 본 사례는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색내는 셈치고 이해해 주기로 결론을 내렸다. 그 바람에 나를 향한 엔딜의 눈동자가 더욱 초롱초롱 해졌다는 것은, 굳이 입 아프게 얘기 하지 않아도 눈치 챘으리라 본다. 내가 엘퀴네스 임이 밝혀진 순간부터 내 옆에 딱 달라붙기 시작한 녀석은, 사람들에게 신고당할 걱정까지 사라지자 어떤 일에도 결코 떨어지려 들지 않으려 들었다. 그나마 라피스처럼 이사나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질투하는 건 둘째 치고 당장 부러워할지도 모른다는 내 예상을 깨끗이 무시한 엔딜은, 그저 이사나를 대단하다며 칭찬하기에 바쁜 모습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엘프의 본성이 온유하다는 라피스의 말이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또래 친구라도 만난 듯, 어느새 친해진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게 카이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엘님! 이제 거의 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육지가 보이는군요.” “앗, 정말이네. 헤에, 저기가 알폰프 제국이라는 건가?” 그의 말마따나 과연 저 멀리 히끗히끗한 육지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거의 한달에 다다른 항해 끝에 도달한 땅덩어리 였던 것이다. 그 때문인지 갑판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무한한 감격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역시 사람은 땅을 밟아야 사는 종족이라는 걸까? 그동안 남모르게 바닷물을 움직여 배의 항해를 도왔던 나의 노력이 조금이나마 보상받는 순간이었다. 연신 감사의 말을 건네는 선장을 뒤로하고 배에서 내렸을 땐, 새로운 문제가 일행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로 엔딜 녀석의 처리(?)에 대한 것이었다. 녀석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아픈 동생에게 돌아가 병을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상황이 긴박한 쪽을 우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쉽게 그러마라고 고개를 끄덕일 입장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흐음, 곤란한걸. 우리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그건 안돼! 세실의 약이 떨어질 때가 됐단 말예요. 오가는 것만으로도 족히 두 달은 걸리는 거리인데 여기서 시간을 더 늦출 수는…” “나도 알아. 그래서 지금 이렇게 궁리하는 거잖아.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미 도착하기 전 나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었던 일행들은 모두 똑같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무언가 홀가분하다는 듯한 카이씨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절대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니! “이러면 간단하겠는 걸요. 제가 엔딜군과 같이 가겠습니다.” “예?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카이씨!” “헉…” 당혹한 얼굴로 표정을 굳히는 우리를 보며 카이씨는 마치 달래는 듯한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들어보니, 엔딜군의 동생이 앓고 있다는 병은 고위신관이 고칠 수도 있다는 거잖습니까? 그게 안 되더라도 엘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수명을 늘리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테고요. 먼저 가서 기다리는 셈 치면 될 것 같은데요.” “하, 하지만!” “어차피 저는 던전에 가서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오히려 엘님이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크죠. 마침 소녀의 희귀병이란 것에 호기심도 있었으니, 제가 가는 편이  나을 것 같군요. 엔딜군도 그 점은 조금 양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저, 저야 병을 고칠 수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들으셨죠? 이보다 더 완벽한 해별 방안은 없는 듯 싶습니다만?” 우물쭈물 대답한 엔딜의 말에 카이씨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나는 엄청난 파렴치한 죄인이 된 것 만 같아 미처 고개를 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안합니다, 카이씨. 제 개인적인 약속 때문에 카이씨가 번거롭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 무슨 섭섭한 말씀을. 엘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 저는 오히려 기쁜데요? 이렇듯 딱한 처지의 소년을 엘님께서 외면하지 않아 주셔서요. 뭐, 완전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린다는 거니까 너무 부담스러워 하지 마세요. 사실 제가 간다고 해서 소녀의 병이 나을 거란 확신도 없으니까요.” “아니, 카이씨라면 가능하실 겁니다. 엘뤼엔의 고위사제에게 못 고칠 병이 어디 있겠어요? 그럼 일단, 저를 대신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꾸벅 고개를 숙이자, 카이씨는 황망한 듯이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엔딜 녀석까지 덩달아 나를 향해 허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엔딜? 인사라면 여기 있는 카이씨에게…” “하, 할거야! 하지만 그보단 당신한테 먼저 감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서.” “…?”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도와줄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을 거 아니야. 엘퀴네스님이 직접 가지 않아서 아쉬운 건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니까. 아니, 오히려 나 때문에 일행과 헤어지게 만들어서 미안해. 이 빚, 언젠가 꼭 갚을게요.” 여전히 반말과 존대말을 섞어쓰는 엔딜의 얼굴은 마치 화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저렇게 쑥스러워 하는걸 보면 생전 누군가에게 감사치레를 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한참동안 나를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던 녀석은 이번엔 카이씨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폐만 끼치는 녀석이지만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난 원래 좀 버릇없고 건방진 성격이라 대하기 피곤할지 모르지만, 그, 그래도 은인에게까지 함부로 하지는 않아. 머무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할게.” “쿡쿡쿡. 그거 영광인걸요? 저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우리 같이 동생의 병이 나을 수 있도록 노력해 봐요.” “으…응! 고마워!” 엔딜 녀석, 아주 물 만난 물고기가 된 심정인지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저렇게 기뻐하는 걸 보니 내가 직접 가주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이 커졌지만, 그래도 상대가 카이씨다 보니 안심하고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서운한 감정을 가득 담은 이사나와 짧게 작별을 고한 카이씨는, 아마도 당분간은 이곳 항구에 머물면서 엔딜의 동생을 치료할 약초를 구입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신성력만으로 안될 경우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엔딜이 모아놓은 돈으로는 넉넉한 양의 약초를 구입하기는 무리였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근처에 있던 상단을 찾아가, 바다괴물의 시체를 팔아 넘겼다.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 상단 사람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감탄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오! 이 견고한 스켈라의 가죽이라니!” “그야말로 흠집하나 없는 완벽한 상품입니다! 황제폐하께 진상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정도군요!” “내장의 보존 상태가 깨끗하군요. 죽은 지 일주일이 넘었다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급 요리점에 비싼 값에 넘길 수 있겠어요.” “이렇게 강력한 이빨이라니! 쓰일 곳이 상당히 많겠군요! 그야말로 드래곤본에 뒤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 선명한 붉은 홍체는 어떻구요! 이런 완벽한 특상품을 보게 되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 없습니다! 연금술사들이 불을 키고 달려들 겁니다.” 황홀한 얼굴로 바다괴물의 시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품평한 결과, 나는 상단으로부터 우대손님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무려 5백 골드라는 거금을 챙길 수 있었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엔딜의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 설마 저런 몬스터의 값이 몇 백 골드를 상회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는 그중에서 3백 골드를 카이씨에게 건네주었다. “이렇게 많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엘님도 쓰셔야 하잖아요?” “괜찮아요. 저흰 2백 골드로도 충분하니까요. 혹시나 모자르게 되더라도 정령계에서 가져온 보석도 있으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카이씨야 말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경비는 넉넉히 챙겨가야죠. 자주 시큐엘을 보낼 테니, 전달사항이 있으면 그 녀석한테 말하면 될 겁니다.” “이것 참…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배려 감사합니다, 엘님. 그럼,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뵙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아앗! 나도! 엘퀴네스님! 꼭 다시 만나러 와야 해?” “쿡쿡. 알았어, 알았어. 대신 카이씨를 잘 부탁해.” “그거야 물론이지!” 활기찬 대답만큼이나 씩씩한 얼굴을 한 엔딜은 동생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지 표정 가득 생기가 가득 차 올라 있었다. 아마 그래서 더욱 녀석과의 이별이 아쉬웠는지도 모른다. 힘차게 손을 흔들며 뒤돌아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멍한 시선으로 한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든 것은, 이사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를 흔들었을 때였다. “엘, 괜찮아?” “으응? 아, 미안. 결국 카이씨도 가버렸네. 어라? 그러고 보니 다시 또 두 명만 남은 건가?” “쿡쿡. 그러게. 이게 얼마만이지? 알렉들과 헤어진 이후로는 거의 처음인 것 같은데.” 재미있다는 듯이 웃음을 짓는 이사나의 모습에 나는 새삼 인연이란 게 얼마나 돌고 도는 것인지 깨닫고 말았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 무수히 엮어나는 인연들 속에서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존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언젠간 이사나도 그 수많은 인연 중에 하나로 잊혀지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가슴 한 구석이 저며 오는 기분이었지만, 나는 애써 즐거운 마음으로 털어냈다. “뭐, 이것도 오랜만이니까 좋네. 그보다 이제 어떡하지, 이사나? 또 혼자 밥 먹게 생겼네.” “신경 쓰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나저나…던전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알폰프 제국도 대륙공용어를 쓰기 때문에 의사소통엔 문제가 없겠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려면 지도를 구입해야 하는 게 좋을까?” “글쎄? 일단 쉴 곳부터 찾아보자. 날이 저물어서 어차피 오늘은 아무것도 못할 것 같으니. 운 좋으면 그 안에서 바론 던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지도 몰라.” 내 의견에 이사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을 해보였다. 그리하여 우리가 선택한 곳은 바닷가에서 약간 벗어난 도시에 세워진 3층짜리의 여관건물이었다. 제법 장사가 잘 되는 곳인지 식당으로 마련된 1층 안엔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 사람들의 출입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끌벅적 떠들고 있었다 ============================================================== 자아~ 카이씨도 떼어 냈습니다~(랄라~)<- 지금부터 무한 연참 시작합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5-23. 흔적 (2) “저어, 빈방 있나요?” 낯선 타지인이라 쉽게 방을 내주지 않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투박한 인상의 주인은 별다른 꼬투리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2인실 하나, 3인실 하나. 1인실 3개가 비었수. 어떤 걸로 하겠수?” “2인실로 하나요.” “하룻밤에 150실링이유. 거기에 식사와 목욕을 포함하면 1인당 1회 200실링이 추가되는데, 어찌 하겠수?” “목욕은 필요 없는데…저, 1인분의 식사만 포함할 순 없을까요? 여기서 3일정도 머물 계획인데요.” “그렇게 하슈. 그럼 50실링이요. 식사비는 먹을 때 내도 상관없소만, 방은 선불이올시다. 3일이면 450실링이오.” 그러면서 척- 두꺼운 손바닥을 내미는 모습에 할말을 잃은 나는 군말 없이 품에서 1실버짜리 한 개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자 주인은 익숙한 태도로 잔돈을 거슬러 주더니 앞에 놓여진 수많은 열쇠중의 하나를 내게 건네주며, 막 서빙을 돌고 있던 종업원 하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내 또래로 보이는 주근깨 가득한 소년이었다. “어이, 미첼! 손님이다, 방까지 안내해 드려라!” “예, 예, 가요! 자아, 두 분이신가요? 2인실? 그럼 이쪽으로 오세요. 열쇠에 적힌 번호가 몇 번인가요?” “에? 203…” “아, 203호실이군요. 거기 전망 꽤 좋아요. 며칠 편하게 묵기 딱 좋은 방이죠. 식사는 어떻게 하셨나요? 아, 1인분이요? 그럼 한분은 안 드시는 거예요? 아쉽네. 자랑인 것 같지만 여기 음식 정말 맛있거든요.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주문하세요. 헤헤.” “……” 이것도 나름대로 서비스 정신인걸까? 쉴 새 없이 떠드는 소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어느새 우리는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것을 멍하니 본 나는 마침 떠오른 생각에 돌아가려는 소년을 다시 붙잡았다. “저기, 잠깐만요. 식사를 방에서 하고 싶은데…” “아, 그럼 저한테 식사비 까지 합쳐서 55실링을 주시면 되요. 배달금액은 별도거든요. 오늘 저녁 메뉴는 양고기 스튜에 베이컨, 마늘 빵과 야채주스입니다만. 이외의 더 필요하신 것이라도?” “음, 식사는 그 정도면 충분하고, 달리 필요한 거라면… 저, 혹시 제국지도를 구해다 주실 수 있을까요? 이왕이면 던전의 위치가 대충이라도 표시되어 있으면 하는데요.” “헤에, 던전이요? 그런 것은 왜… 오옷! 혹시 모험가세요?” 부담스러울 만치 눈을 반짝인 소년은 우리들의 옷차림을 보고는 확실하다고 느꼈는지 얼굴을 환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로브와 후드로 몸을 음침하게 가리고 있는 폼새가, 무언가 상당히 ‘있어 보임직’ 했던 모양이다. “아, 그런 건 아니고…” “어.쩐.지! 등장하면서부터 뭔가 팍- 느낌이 왔었다니까요? 하긴 우리 제국이 워낙 던전의 숫자가 많아서, 모험가가 많기도 하죠. 근데 몬스터가 그렇게 흉악하고 강하다는 게 사실이에요? 전 태어나면서부터 이 동네를 떠나본 적이 없어서 몬스터라는 걸 실제로 구경해 보지 못했거든요. 나이도 어려보이신데 벌써 모험이라니…정말 멋지다! 어느 던전으로 가시는 거예요? 두 분이서만 가시는 건가요?” “아, 일단은 그렇긴 한데…실은 바론던전이란 곳을…” “헉! 바론 던전이요? 그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살아 돌아 올 수 없다고 알려진 위험한 바론 던전을 말씀하시는 거예요? 지금까지 누구도 최하층으로 내려가 본적이 없다는? 우와~ 대단하세요! 그런 곳을 단 두 분이서만? 실력이 대단하신가 봐요! 저도 한때는 던전을 탐험하는 게 꿈이었어요! 멋진 일행들과 마법검을 들고 괴물을 무찌르는 거예요! 상상만 해도 신나지 않아요? 뭐, 결국 여관 종업원으로 만족할 수밖엔 없었지만요, 헤헤.” “……” 흔히들 있다. 현실과 이상을 착각하는 녀석들이. 멋진 일행과 마법검은 무슨 얼어 죽을! 혹시 마왕을 무찌르고 공주님을 구한다는 동화 속 얘기를 꿈꾸고 있는 건 아니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소년은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미안해요. 제가 원래 말이 좀 많아서요. 헤헤. 아! 제가 돌아다니면서 알아봐 드릴수도 있지만 자세한 정보를 원하신다면 정보길드를 찾아가시는 게 더 괜찮으실 것 같은데.” “정보길드?” “네, 요 앞 광장에 나가면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이 보이실 거예요. 적절한 금액만 제시하면 그에 맞춰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전해준다고 알고 있어요. 아마 거기라면 지도도 구하실수 있을 걸요?” “아, 그렇군요. 도움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고마움의 뜻으로 식사비로 지불할 55실링과 함께 1실버를 꺼내 소년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를테면 팁이랄까? 수고비 치고는 꽤 많은 금액이었지만, 가끔 이런 낙이 있어야 일할 맛도 날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돈을 받는 소년의 눈빛이 더욱 초롱초롱 해지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뿐. 다음날 아침, 소년이 알려준 대로 찾아간 정보길드에서 무려 1골드나 지급하고 얻은 것은, 바론 던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이 자세하게 그려진 지도와, 던전이 존재하는 지역의 주변 생태계, 그리고 지하 3층까지 설치된 대강의 트릭들에 대한 정보였다. 누구도 끝까지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총 몇 층으로 되어있는지 확인된 바 없으며, 4층부터 미로가 시작된다는 것이 길드에서 알아낸 전부. 일단 4층 아래로 내려가고 나면 살아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희박하다는 것이 길드측의 말이었다. “희박하다고 하면…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기는 있다는 건가요?” “네, 그렇긴 하지만 별다른 정보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다들 쇼크로 미쳐있는 상태라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들 중 대부분은 얼마 못가 자살한다고 하더군요. 반응이 한결같은 것을 보아 아마도 환상마법에 의한 정신적 착란이 아닐까 유추됩니다만.” “……" 완전히 사람 잡는 던전일세. 그런 곳에 이사나를 데리고 들어가도 괜찮은 걸까? 길드에서 돌아오는 내내 나는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떨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이프리트는 ‘정령왕’인 나라면 문제없다고 했지, 같이 가는 동료들에 대한 점까지 언급한건 아니었다. 그건 해석하기에 따라 나 외의 다른 존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이사나를 떼어놓고 나 혼자 갈수도 없는 일이고. 이걸 어쩌지?’ 혼자서 중얼중얼 고민하면서 걷고 있자, 길드를 방문하기 전 중간에 서점에 들린다는 이유로 헤어졌던 이사나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의 손에는 방금 구입한 듯한 새 책이 들려 있었다. “무슨 책이야?” “아, 엘. 음…그게 말이야. 정령왕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서 내용도 안 보고 샀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이거 좀…로맨스 소설인 것 같아.” “엥? 로맨스?” “응. 소환된 정령왕이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 있잖아. 그리 특별한 건 아니야. 흔히들 퍼져있는 이야기니까.” 아무래도 괜히 샀다는 듯한 이사나의 말투에 나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책을 들여다보았다. 대륙에 떠도는 정령왕에 대한 전설(주로 사랑에 관한부분)을 모아서 묶어놓은 식이라는데, 두꺼운 가죽으로 덮힌 겉표지엔 유려한 필기체로 ‘정령왕의 인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리 건전해 보이지 않는 느낌이랄까. “흠. 정령왕이라고 하면 4명 전부에 대한?” “응. 각 정령왕 마다 단편 식으로 실려 있어. 가장 최근의 이야기래 봤자 2천년 전? 어차피 이런 거야 다 지어내는 거겠지 뭐.” “아냐, 혹시 또 모르잖아? 정말 옛날에 있었던 실화를 이야기로 꾸며놓은 것일지. 이거 내가 봐도 될까?” “응. 마음대로 해.” 읽어봐서 허황된 마구잡이 식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웃기겠지만, 만약 실화라고 한다면 그것만큼 재미있는 것도 없을 것 같았다. 두근두근 한 것이…부모님의 과거를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기분이랄까? ‘아, 그러고 보니…2천년 전이라면 엘뤼엔의 이야기도 있을지도?’ 다른 녀석들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했지만, 역시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내 전대의 물의 정령왕, 엘뤼엔의 과거일 수밖에 없었다. 대충 넘겨본 페이지에 ‘엘퀴네스’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여관에 도착한 뒤에 제대로 읽어보기로 작정하고 말없이 그것을 품안에 끌어안았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다. 원래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숨겨진 비리가 드러나지 않던가! 그러나 막상 방에 돌아와서 뒤져본 책의 내용은 이사나의 말마따나 ‘로맨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낯 뜨거운 정사 씬까지 적나라하게 묘사되어있는 것을 본 나는,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를 수 만 번 외치며 장렬하게 책을 덮고 말았다. 도무지 맨 정신으로는 책의 내용을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트, 트로웰이…계약자를 겁탈… 이프리트가…이프리트가 할렘을…” “쿡쿡. 그런 류에 등장하는 로맨스야 뻔하지 뭐. 아무래도 실화는 절대 아닌 것 같지?” “으응. 그래도 뭐…아주 허구는 아닌 것 같은데? 미네르바의 얘기는 내가 들은 것과 비슷하거든. 분명 로맨스는 아니었지만.” “정말? 어떤 얘긴데?” 책에 등장한 미네르바의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4천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대충 정리하자면 인간이었던 계약자를 짝사랑하던 미네르바가 결국 그가 사랑하는 여인을 무참히 죽이고, 끝끝내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계약자마저 파멸의 길로 인도하고 만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바람의 정령왕은 그날 이후로 질투의 정령이란 명칭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 나도 이 내용은 알아. 꽤 유명하던걸? 근데 이게 로맨스가 아니라고?” “응. 사실과 전혀 틀려. 내가 듣기론 여자를 먼저 죽여 달라고 부탁한건 계약자 쪽이었거든. 그냥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미네르바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뿐이지. 그걸 사람들이 잘 못 해석 한 게 아닐까?” “헤에, 그렇군. 하긴, 4천년이라면 충분히 내용이 와전되고도 남을 시간이지.” “응. 그런데 좀 이상한 게…4천년 전에도 인간이 살았었어? 전에 알렉한테 듣기로는 인간이 탄생해서, 부족에서 제국으로 발전한 역사가 단 2천년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처음 인간세상으로 소환되고 난 후, 이사나의 기사들에게 들었던 아크아돈의 정보를 떠올리며 묻자 이사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곧 아하~를 외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황금시대에 대한 설명을 뺀 것 같은데? 현 시대는 고대의 황금시대가 멸망하고 나서 다시 세워진 거거든.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지만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멸망했다고 하더라고. 천지가 개벽이라도 했는지 몇 개의 유적을 제외하곤 아주 깨끗하게 자취를 감췄지. 지금 시대는 그때 살아남은 사람들의 후예가 다시 일으켜 세운거야. 그 성장기간이 2천년일걸?” “헉, 그런 거야?” “응. 그 시대에는 지금보다 더 무수한 종족이 있었다고 해. 뿔이나 날개를 가진 말도 있었다고 하고, 인간들도 9서클의 마법이 가능했다고도 하고. 정령과의 계약도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다고 하더라고. 뭐, 어차피 내가 아는 것이야 전부 소문일 뿐이니까 확실하진 않지만.” 흐음. 그렇다면 언제고 라피스나 엘뤼엔한테 자세한 걸 들어봐야겠군. 그러고 보니 날개가 달린 말-아마도 페가수스랑 비슷한 듯-이라고 하면, 책에 나온 엘퀴네스에 대한 기록에 잠시 등장했던 것 같다. 황당한 것은 그 말이 엘뤼엔의 라이벌이었다는 것이다. 처녀들을 홀리기 좋아하는 페가수스가 엘퀴네스-그러니까 엘뤼엔의 계약자를 유혹하려고 해서 결국 두 존재의 피 튀기는 싸움으로 전개된다는 내용…이었달까?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던 만큼, 읽고 난 뒤의 허탈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왜 하필 하고 많은 라이벌 중에 ‘말’이란 말인가. “엘뤼엔이 보면 그 자리에서 기절하려고 하겠는 걸? 하여튼 사람들 생각이란 대단하다니까?” “흠… 하지만 미네르바의 내용이 실화와 비슷하다면, 이것도 그렇지 않을까? 말이란 게 꼭 정말 말이 아니라, 누군가를 비유한 것 일수도 있잖아.” “그건 그래. 어쩌면 로맨스가 아닌 전혀 다른 상황일 수도 있지. 만약에 그렇다면 말이야…트로웰이 계약자를 덮치는 거나, 이프리트의 할렘은…대체 어떤 점이 와해가 된 걸까?” “……” 그것은 결코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 조용한 침묵이 방안에 깔리는 순간이었다. *** 세 명의 정령왕들이 유희로 자리를 비운 와중에도 정령계는 언제나처럼 평화로웠다. 정원에 깔려진 드넓은 꽃밭은 평소처럼 영롱한 꽃잎을 피워냈으며, 맑은 시내와 선선한 바람은 일정한 주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한겨울인 아크아돈에 비해 정령계의 계절은 항상 화창한 봄의 오후. 그곳에서 미네르바는 바람을 통해 실프들이 전달해 주는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요즘 들어 한창 나른해진 몸 탓에 쉽사리 유희를 나가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본래라면 이맘때쯤의 그는 오히려 전신에 힘이 넘치고 생기가 가득해야 했다. 바람의 정령들이 가장 본격적으로 행동하는 겨울의 계절이 아크아돈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의 패턴이 바뀌기 시작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미네르바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루비로 된 장미꽃밭에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있던 그는, 때 마침 엘퀴네스의 일정을 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데다, 전생의 기억까지 가진 그가 과연 유희를 수월히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반의 예상치고 그는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 만나는 일행마다 기상천외하기 짝이 없었고 특이한 구석뿐이라, 정말이지 심심할 때 보고 있으면 종일 질리지 않을 정도였다. 문득 무심한 듯한 미네르바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흘러갔다. “아아, 그건 아니야, 엘퀴네스. 트로웰의 이야기는 정말 헛소문. 이프리트라면 상당히 가능성 있는 내용이지만 말이야.” 어디선가 구해온, 정령왕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읽은 엘퀴네스가 한창 계약자와 토론을 하는 것을 들으며, 미네르바는 무심코 그렇게 덧붙였다. 그래봤자 들릴 리도 없겠지만. 그러자 그의 옆을 알짱거리던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이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가서 전해드리고 올까요? 빨리 도착할 자신 있는데! “훗. 너는 그저 지금의 역할에만 충실하거라. 지금의 나는 방관자일 뿐. 모든 것은 엘퀴네스, 그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야.” -에이~ 그치만 심심하잖아요~ 정령계는 다 좋은데, 너무 지루한 게 탈이라니까요? 푸하하하하! …… 고지식하고 무뚝뚝한 시큐엘과는 달리, 진들은 대체적으로 성향이 자유롭고 분방한 편이었다. 감히 자신들의 왕인 미네르바 앞에서조차 저렇게 껄껄거리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렇지 않은 유일한 바람의 상급 정령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저렇듯 활기찬 진의 모습을 볼 때면 그렇지 않은 한 존재에 대한 기억이 가슴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다른 한 존재의 모습과 함께. “사랑한다고 말했었지.” 씁쓸한 듯이 중얼거리는 것과 달리 미네르바의 표정은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본래 감정 표현이 드문 그였지만 지금만큼 그 모습이 차갑게 느껴진 적은 거의 없었다. 만약 트로웰이 본다면 틀림없이 슬퍼했을 테지만 그걸 알면서도 미네르바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입으로 그 눈으로, 그 품으로 나를 사랑한다고 했었지. 그렇게 야속한 인간이었지…” 책에 기록된 내용과는 분명 달랐지만, 미네르바는 그를 사랑했었다. 아끼고 아끼는 마음이 넘쳐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다른 정령왕들과 대적했을 만큼. 그리하여…배신을 당한 그 순간엔 견고한 정령왕의 정신으로도 한순간 미쳐버렸을 만큼. [블레스터어? 하- 그따위 인간을 위해 검을 만들어? 너 미쳤어, 미네르바? 제정신이야?] 이미 4천년도 더 지난 일인데,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미네르바는 감고 있는 두 눈을 살짝 찡그렸다. 자신을 향해 호통을 치는 이 목소리는 분명 전대의 이프리트. 이때만큼은 사이가 나빴던 전대의 엘퀴네스도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었다. 당시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트로웰의 눈물을 본 것도 그날이 처음이었다. [그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 미네르바. 하지만 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지. 그의 입과 머리는 항상 따로 놀고 있어. 네 사랑이 귀찮지만, 권력을 쌓기 위해 필요하니까 사랑받길 원해. 모순이란 말 알아? 단지 널 이용하고 있을 뿐이야.] [그럴 리 없어.] [과연 그럴까? 조만간 그는 스스로 함정을 파게 될 거다. 넌 네 손으로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될 거야. 알겠어, 미네르바? 지금의 너는 불안해. 내가 이렇게 쉽게…미래를 읽어버릴 정도로.] 그때의 경고를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멈췄다면 지금의 나는 조금 덜 후회하고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미네르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지금의 아픔은 흔적이었다. 자신이 한때 한 인간을 너무도 사랑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흔적.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희석된 과거에 지나지 않았지만, 묻혀진 흔적이라도 언제고 드러나게 마련. 그 한순간의 어리석음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내몰게 될 줄 알았다면, 미네르바는 결코 사랑이란 감정을 배우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뭐, 이런 걸로 심란해 하는 것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지만…말이지.”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어설픈 과거의 회상을 걷어내며 그는 피식 미소 지었다. 점점 나른해 지는 몸과 선선한 바람의 기운,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모를 미네르바가 아니었다. 지금으로선 오히려 반가울 정도 일까. “그나저나…‘그 엘퀴네스’가 말과 라이벌이라…쿡쿡. 이프리트가 들으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그가 인간들의 사고회로를 이해하는 날은 아무래도 영영 돌아올 날이 없을 듯싶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5-24. 잊혀진 기억? (1) 알폰프 제국은 전체적으로 솔트레테 제국에 비해 기온이 따뜻한 나라였다. 이미 겨울의 대부분이 지나가 버리기도 했지만, 굳이 두꺼운 망토를 걸치지 않아도 될 만큼 거리의 공기는 무척 훈훈했다. 던전 근처에 사막이 있다는 걸 미루어 보아 아마도 그 지방은 열대일 가능성이 컸고, 어차피 우리가 던전에 도착할 무렵이면 초여름에 닿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준비품목에서 과감하게 겨울옷을 빼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 안은 여행 중 필요한 물건으로 가득 차서 더 이상 채워지기 힘들 지경이 되어 있었다. 사야할 것은 많은데 들고 다니기는 힘드니 그것만큼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나머지는 그냥 다니면서 그때그때 사야겠어. 이러다간 가방이 터져버리는 건 둘째 치고 무거워서 이동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그거야 상관없지만…뭘 그렇게 많이 준비하는데? 먹는 것도, 입는 것도 나 하나뿐인데 그것치곤 양이 많은걸?” “노숙을 자주하게 될 텐데, 언제까지 건량만 씹을 순 없잖아. 간단한 요리도구들과 식료품을 산건데 이러네. 바론 던전까지는 아무리 지름길로 가도 족히 3개월은 걸리는 거리인데다 늪지대가 많아서, 마을에 들릴 수 있을 때 많이 챙겨둬야 할 것 같거든.” 현재 우리는 처음 제국에 도착해서 머물렀던 도시를 벗어나, 그곳에서 얼마 되지 않는 거리에 떨어져 있는 마을에 들린 참이었다. 이곳을 떠나면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약 3주일이라는 시간이 소비가 된다는데, 그때까지 평야와 늪지대 밖에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많은 비상식량을 상비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상당히 무거운데다 부피가 커서, 들고 다니기에 여간 귀찮았던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럴 때 라피스가 있었으면 뭔가 도움이 됐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욱 기분이 심란해져서, 나는 시큐엘 한 마리를 소환하여 그 위에 짐을 싣고 다닐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딱 3개월만 이어지면 제 아무리 마나가 남아도는 라피스 녀석이라 할지라도 틀림없이 탈진할 것이다. 후후후. “흐음, 뭔가 곤란하신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잉? 모처럼 라피스 녀석 말려죽일 계획을 방해할 셈…아, 루카르엠?” “…? 아! 저 사람!!” 갑자기 등장한 루카르엠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하던 이사나가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이전에 바다괴물이 나타났을 때 잠깐 만났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리 도와줄 의도였다곤 해도 누군가에게 맞아서 기절한 것이 좋은 기억일리는 없었기에, 이사나의 어깨는 저절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카르엠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태도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아아, 그렇게 긴장하시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는 절대 여러분께 나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아니거든요.” “동기는 충분히 불순합니다만? 긴장하지 마, 이사나. 그냥 요즘 들어 우리를 따라다니는 마족이니까.” “헉, 마, 마족??” “응. 그런데 방금 도와주신다고 했었나요? 어떻게요?” 이미 몇 차례 안면을 틀고 난 상황이었는지, 이전처럼 그의 방문이 긴장되거나 경계되지 않았다. 불안하게 눈을 굴리는 이사나를 다독이며 태연하게 묻자, 루카르엠 역시 의례 그래왔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물건엔 경량화 마법을 걸어버리면 장땡이거든요. 그리고 안에 아공간을 설치해 두면 아무리 많은 물건을 넣어도 끄덕 없단 말씀! 아마 산 하나의 분량을 넣어 가지고 다녀도 될걸요?” “헉. 그게 이런 평범한 가방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죠. 마법 자체가 어려운 것이지, 그것이 발휘되는 장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과 같은 이치랍니다. 제가 이래봬도 마법 실력 하나는 탁월하거든요. 걸어드릴까요?” “에? 그럼 저야 좋지만…” “그럼 결정 되었군요. 잠시 가방 좀 줘 보시겠습니까?” 척 손을 내미는 손에 무심코 가방을 건네주었더니, 루카르엠은 안에 있던 물건을 죄다 빼고는(넣는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작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겉보기에 별로 달라져 보이지 않는 가방을 다시 내게 건네주는 것이 아닌가. “경량화 마법과 아공간 마법을 걸어 두었으니, 이젠 괜찮을 겁니다. 물건을 꺼내실 땐 가방 안에 손을 넣고 원하시는 이미지를 떠올리기만 하면 되요. 간단하죠?” “굉장히 빠르군요….” “까다로운 마법이긴 하지만 저한텐 별로 어려운 게 아니니까요. 그나저나, 단 두 분이서만 가시는 겁니까? 혹시 일행이 부족해서 심신이 고단하신다거나…” 그러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루카르엠의 모습에 나는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크게 흔들리고 말았다. 전투 외에는 필요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자잘한 부분에서 쓸모가 있을 줄이야! 그냥 눈 딱 감고 일행으로 받아들일까? 하지만 경계하는 이사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아무래도 당분간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런 생각으로 짤막하게 거절하는 나에게 루카르엠은 아쉬운 기색 없이 생긋 웃어보였다. “뭐, 어쩔 수 없죠. 처음부터 수상하게 등장한 제 탓이니까요. 이렇게 따라다니는 것도 나름대로 재밌으니 지금은 이대로 만족하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 무언가 흥미가 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루카르엠은 곧 한손을 내밀어 천천히 한 곳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이 위치한 것이 정확히 내 이마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화들짝 놀라 뒤로 슬그머니 물러났다. 혹시나 엘뤼엔의 문장 때문에 호기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카르엠이 가리키고 있던 것은 문장이 아니라, 그 위를 가리고 있던 푸른 보석의 서클렛이었다. “호오, 이제까진 제대로 살피질 못했는데…이걸 여기서 보게 되다니. 2천년 전 이후로 말끔히 사라져서 소실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설마 엘퀴네스님이 가지고 계실 줄은 몰랐는걸요?” “에? 서클렛이요? 이건 그냥 우연히 얻은 건데.” “그렇습니까? 흐음,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여기선 좀 귀찮아 지실지도 모르겠네요.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서클렛은 고대 마신전의 제단을 장식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거든요. 그냥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각기 하나씩 숨겨진 능력이 있지요. 마족들이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악세사리 중 하납니다.” “…능력이라면 어떤?” 그렇지 않아도 이전에 라피스에게 이 물건의 출처를 들었을 때부터 무언가 심히 불길했던 나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심정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노릴 것이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늘 해왔기 때문에 달리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서클렛 자체의 숨겨진 능력이란 면에선 상당히 신경 쓰였다.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서클렛의 보석을 만지작거리는 나에게 루카르엠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서클렛을 착용한 사람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고 언뜻 들은 바는 있습니다만, 정확하게는 모르겠군요.” “착용자를 보호한다고요?” “네, 정확하게는 착용자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시, 그를 ‘보호하는’ 마물이 등장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마물이라는 게, 마족 외에는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보통 일반인들에게는 오히려 위험에 직면하게 하는 도구입니다만. 뭐, 엘퀴네스님이라면 문제없겠죠.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니… 이건 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마물이 등장한다는 부분에서부터 이미 새하얗게 변해버린 이사나의 얼굴을 보며 나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도대체가 왜 내 주위에는 물건하나 조차 평범한 것이 없는 걸까? 정말이지 언제 한번 날 잡아놓고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고 맞는다 했던가. 루카르엠에게 서클릿의 정확한 정체를 듣고 난 이후, 넣어도 넣어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가방에게 홀려 어느새 그것에 대해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나는, 무심코 밖을 나섰다가 한 무리의 검은 로브를 입은 남자들에게 붙잡혔다. 아무래도 작정하고 나온 건지 한 무리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까지 대동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인 목덜미에 새하얀 문장이 있는 걸로 봐선 어느 신전의 신관인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신교라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그들 중 후드를 깊게 눌러쓴 중년의 남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소. 나는 마신교의 사제 카올리스라고 합니다. 잠시 우리와 동행해 줄 수 있겠습니까?” “…마신교의 사제분이 무슨 용무신지?” “당신이 착용하고 있는 서클렛이 우리 마신교의 보물로 전해져온 페네트와 아주 흡사하다는  신고가 들어와서 말입니다. 동일한 물건인지 잠시 보았으면 하오만.” 말투는 경어인데 그 어투는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겉보기의 내 나이가 어려 보여서 인지, 아니면 마신교라는 권력을 믿고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나로서는 상당히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론 의문이 들기도 했다. 정작 마신교의 본산이라는 솔트레테에서조차 무사히 넘겼던 일을, 어째서 이곳 알폰프 제국에서 추궁당해야 하는 거지? 내가 알고 있기로 알폰프 제국은 대지의 신 유엘을 국교신으로 섬기고 있었다. 아무리 대륙 전체 모토가 타 종교를 타박하지 않는 취지라 해도, 이곳은 엄연히 마신교가 드러내 놓고 활동할 구역이 아닌 것이다. 대답하는 내 목소리는 자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불쾌하군요. 이건 내 지인이 직접 선물해 준 물건입니다. 흡사하다는 여부로 의심하기에는 상당히 흔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긴 하지만, 서클렛의 가운데에 달려있는 보석은 흔한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정말 문제가 없다면 보여주는 것쯤은 문제가 없지 않소이까?” “상대방을 떠보는 듯한 말투, 저는 상당히 싫어합니다. 이 서클릿에 달려있는 보석은 분명 흔치는 않지만, 그렇다고 구하지 못할 종류도 아니라고 들었는데요? 마신교의 신관들은 원래 이렇게 막무가내로 사람을 추궁합니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내 태도에 마신교 신관들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누구라도 자신들이 말을 걸면 설설 눈치를 보며 굽힐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로선 그럴 수가 없는 게…이미 엘뤼엔의 신관들 중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인정을 받은 이상, 쉽게 다른 신의 사제들에게 만만히 보일 수 없었다. 그것이 이사나의 목을 틀어쥐고 있는 대공이 관련된 종교라면 더더욱. “협조를 구하고 싶다면, 제가 착용한 서클렛이 당신들이 찾는 것이 맞다는 증거를 가져오세요. 애초에 마신교에 내려오는 보물이 있다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저로서는 당신들의 요구가 그저 막무가내적인 생떼라고 밖에 보이질 않네요.” “이 무엄한!!” 아마도 성기사인 듯, 신관들을 호위하고 있던 검은 갑옷의 기사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당장이라도 검을 뽑으려는 것을 한손을 들어 저지시킨 마신교의 신관은, 아까보다 좀 더 굳은 표정이 되어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서클렛은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고대의 마신교를 장식한 마지막 신물이오. 한 때 마신교가 몰락하면서 제단위에 놓여있던 대부분의 신물들이 강탈당하기전 까지, 무려 2천년이란 역사를 마신교와 함께해온 것입니다. 어떤 경로로 당신의 손에 들어갔는지 모르나, 우리는 절대 쉽사리 포기하지 않을 거요.” “…이미 말씀드렸다 시피, 내게서 이것을 요구하려면 확실한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런 어림 잡이 식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미 2천년이나 전에 사라진 물건을, 이제 와서 다시 되찾겠다고 생각하는 심보도 상당히 문제가 있군요.” “큭! 고운 대화로 끝내려 했더니, 말이 통하지 않는 작자였군. 일단은 물러가주지만 이 대륙에 있는 한, 당신은 절대 마신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요.” “협박도 고단수시네요. 이게 마신교의 방식인가요? 새삼 알게 되서 반갑군요.” 약간 비웃음 어린 어투로 되받아치자 신관들의 얼굴은 더욱 험악해졌다. 어차피 좋은 말로 한다고 해서 포기할 생각도 아닌 주제에, 자신들 쪽에서 선심 썼다는 듯한 태도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대공이 관계된 이상 언제고 한번은 마신교와 부딪쳐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 시기를 앞당기게 되니 과히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나와 이사나의 진정한 고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5-25. 잊혀진 기억? (2) 당장 다음날부터 쳐들어올 거란 예상과 달리, 마신교의 신관들은 한동안 불안할 정도로 잠잠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였을 뿐, 우리가 마을을 벗어나 평야지대로 들어서고 나자 그때부터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다 악운은 겹친다고, 우리가 항구에서 바다괴물을 비싼 값에 팔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돈을 노린 도적떼의 습격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아마도 항구에서부터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가 마을을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짜증나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도둑들이 몰려드는 거지?” “어쩔 수 없지. 알폰프 제국은 대륙 전체에 퍼져있는 도둑길드의 총본부가 있는 곳이니 만큼, 흔치 않은 규모와 숫자를 자랑하거든. 한번 노린 것은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신념이 있는 것 같아.” “흐음, 제국 내 치안이 너무 엉망인거 아니야?” “글쎄? 들리는 뒷소문으로는 도둑길드를 지원해 주는 곳이 바로 제국의 황실이라는 말도 있는걸? 그 예로, 이곳의 도둑들은 절대 자국내의 상인들은 건드리지 않아. 우리처럼 신분이 확실치 않은 모험가나, 타 제국의 상인들만 노린다고 알고 있어.” …그건 국가 분쟁으로 번질 요지가 상당히 높은 거 아니야?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이사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뻔한 수법이라도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항의를 걸래야 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알폰프 제국을 돌아다니려면 어지간히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없는 이상은 용병들을 고용하는 편이 이롭다는 것이 그가 말한 대강의 설명이었다. “가진 돈을 내놓아라! 그렇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뻔한 대사를 읊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등장하는 도적들의 모습에, 나는 귀찮음을 넘어선 분노 그 이상의 것을 느껴야 했다. 결국 더 이상 참다못한 내가 시큐엘들을 풀어 주변을 초토화 시키는 것으로 간신히 잠잠해 졌지만, 마신교의 추적은 여전히 멈추지 않은 상태. 끈질김만으로 치자면 정녕 물의 정령에 대한 라피스의 집념에 못지않은 그들이었다. “귀찮은데 그냥 줘버릴까?”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기사들이 정확히 무슨 명령을 받았는진 모르겠지만, 주든 안주든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은 없었을 거라 생각해. 지금까지 마신교의 신물을 가지고 있던 사람치고 교단의 추격을 받아 살아남은 인간은 못 봤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상해. 왜 하필 이런 순간에 들키게 된 거지? 지금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던 거잖아. 겉으로 보기엔 그냥 평범한 서클렛하고 별다를 게 없으니까 말이야. 어쩐지 누가 고의적으로 신고한 거란 의심을 피할 수가 없는 걸?” 그 중 가장 유력한 용의자라고 한다면 당연 루카르엠- 그 밖에 없었다. 그 말고는 이런 짓을 할 존재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서클렛이 마신교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나와 라피스 밖에 없지 않았던가! 젠장, 같은 편인 척 할 때는 언제고! 그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속을 읽을 수 없는 존재는 이래서 싫다. 나는 얄미울 정도로 생글생글 웃던 루카르엠의 얼굴을 떠올리며 부드득 이빨을 갈았다. 어디 나중에 두고 보자! 바로 그때, 어느새 바짝 쫒아온 마신교의 기사들이 검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그들의 뒤에서는 여유 있게 말을 탄 신관들이 미소 짓고 있었다. “도망은 거기까지다. 순순히 말할 때 서클렛을 내 놓아라!” “…도둑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군요. 무엇을 근거로 남의 물건을 내놓으라고 하는 겁니까?” “닥쳐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것은 틀림없는 우리 마신교의 신물! 우리는 의당 돌려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는 것뿐이다!”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네. 이런 식으로 나온다고 해서 순순히 내 줄 생각은 없어요. 정 무력을 사용하겠다면, 우리 쪽에서도 그에 합당한 대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함께 마치 미리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이사나가 두 명의 운디네를 소환했다. 평소의 순한 표정은 걷어낸 채, 제법 사나운 얼굴로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물의 정령들의 모습에 마신교 신관들의 입안에서 옅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끄응, 정령사인가…” “과연, 우리들 앞에서도 태도가 묘하게 당당했던 이유가 이것이었군. 설마 동료가 정령사였을 줄이야. 그것도 물의 중급 정령인가?” 그때서야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했는지, 신관들과 기사들의 태도가 바짝 긴장되는 것이 느껴졌다. 저런 사람들에게 굳이 이사나가 상급 정령사…아니, 정령왕을 소환한 존재라고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간만에 녀석이 활약할 기회라고 생각하며 나는 자신감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래요? 끝까지 고집한다면 이쪽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겠습니다만?” “건방진! 그깟 중급 정령 하나로 마신교의 성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오만하구나! 정 말을 듣지 않겠다면 강제가 될 수밖에! 무엇들 하는가! 당장 신물을 되찾아라!” “예! 알겠습니다!” 크게 소리쳐 대답한 기사들은 모두 흉흉한 살기를 띄운채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평범한(?) 나보단 정령사 쪽을 먼저 제압해야겠다는 생각인지, 시퍼런 칼날들은 모두 이사나에게 겨냥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처해나갔다. “운디네! 물의 바람을 이용하여 공격해! 저들의 시야를 막아! 다른 한명은 방어를 해줘!” 끄덕끄덕. 휘이이익! 촤아악! “크악!” “우욱!!” 그 동안 시큐엘만 불러서 서운했던 걸까? 전에 없이 매섭게 기사들을 몰아붙이는 운디네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녀석들의 표독스러운 표정이 나에 대한 무언의 시위로 느껴졌던 것이다. 아무리 애를 써서 검을 휘둘러도 물로 된 운디네들의 공격을 피할 순 없었다. 쐐에엑!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들릴 때마다 기사들은 팔이며 몸뚱이 여기저기에 상처를 입곤 하나둘씩 재기불능 상태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강하게 회전하는 물기둥이 두꺼운 쇠 갑옷을 마치 총알처럼 뚫고 들어가 기사들을 유린했던 것이다. “크아악!” “커헉!!” “이, 이 자식들!! 지금 뭘 하는 거얏! 공격을 하란 말이다, 공격을!! 이렇게 많은 놈들이 고작 2명을 상대 하지 못해!!” 닦달하는 신관들의 재촉에도 그리 호응을 해주지 못하는걸 보면, 생각보다 성기사들의 실력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가 끼어들지 않아도 알아서 잘 싸우는 이사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느새 흐뭇한 미소와 함께 관람하는 자세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이거 앞으론 내가 나설 필요도 없이 이사나가 다 알아서 하게 내버려둬도 되겠는 걸?’ 바로 그때였다. 안절부절하는 신관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눈을 감고 주문 비슷한 것을 외우는 것이 보였다. 혹시 마법사라도 있는 건가고 긴장한 것도 잠시, 나는 곧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소름끼칠 정도로 어두운 기운에 흠칫 놀라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게 뭐지?’ 신관이 모은 어둠의 기운들은 모두 그의 손안에서 천천히 둥그런 모습으로 압축되고 있었는데, 그 위력은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곧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큰소리로 외쳤다. “이사나! 위험해!!” “어? 우왓!!” 콰아아앙!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그 타격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사나가 서있던 장소 위로 반격 3미터 폭의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린 것이다. 다행히 아슬아슬한 순간에 내가 시큐엘을 불러 피하게 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늦었어도 이사나는 그대로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고스란히 마신교의 신관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졌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람을 죽일 작정이야?” “큭큭큭. 이미 말 했을 텐데? 순순히 말할 때 서클렛을 내 놓으라고. 경고를 어긴 네놈들의 멍청함을 탓해라! 이것이 바로 우리 마신교 신관들의 힘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이미 또 하나의 검은 기운을 모아두고 있는 상태였다. 여차하면 바로 던질 기세라, 나는 뒤돌아 볼 기색 없이 바로 시큐엘에게 명령했다. “시큐엘! 이사나를 보호해!” “크하핫! 소용없다! 이 순수한 암흑의 덩어리는 제 아무리 정령이라 해도 막아낼 수 없음이야!!” 신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또다시 던진 검은 물체와 부딪친 시큐엘의 모습이 그대로 파앗- 분해 되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콰아앙!! 공중에서 현란하게 폭발하는 물체와 산산히 흩어지는 시큐엘의 모습을 보며 나는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역(逆)소환?!!” “하하하핫! 이제 틀림없이 보았겠지! 보아하니 저 소년, 중급이 아닌 상급 정령사였던 모양인데, 나이치곤 대단한 능력 이었다만 그것도 여기까지다! 마신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크하하하!!” …이런 상황에서 라피스의 마나를 끌어다 시큐엘을 불렀다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좀 매정한걸까? 지금쯤 역소환의 부작용으로 피를 토하고 있을 라피스를 생각하며 나는 과감히 묵념을 올렸다. 미안하다, 라피스. 속이 좀 쓰리더라도 참아라. 그러게 누가 날 버리고 가래?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그들이 웃고 있는 틈을 타,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이사나에게 달려갔다. 거친 기침을 내뱉고 있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흔적은 없는 것 같았다. “윽! 쿨럭, 쿨럭, 쿨럭!” “이…라, 라이! 괜찮아?” “으응. 난 괜찮은데…시큐엘이…” “시큐엘이라면 걱정할 거 없어. 충격은 받았겠지만 죽지는 않았어. 단지 정령계로 역 소환 된 것뿐이야.” “그, 그래? 다행…” “라이!!” 직접적으로 폭발에 휘말린 것이 아닌데도 그 타격이 심각했던 건지, 맥없이 기절하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서둘러 치료술을 시행하자,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던 신관들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네 녀석! 신관이었나!” “치료능력이 가능한 것을 보면 의술의 신인 헤르메슨의 사제로군! 그닥 별 볼일 없는 신의 사제주제에 감히 마신교를 거역하다니! 따끔하게 본보기를 보여주겠다!” 그놈의 마신, 마신! 마신이 잘났지, 네놈들이 잘났냐? 내 이놈의 마신 녀석 만나기만 해봐라, 사제들 교육을 저 모양으로 시켜놓은 것을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속으로 이를 바득바득 간 나는 또다시 검은 덩어리가 날아오는 데도 전혀 피하지 않았다. 제 까짓게 아무리 잘났어도 결국 마족의 힘을 끌어온 것에 불과한 것. 그 정도 가지고 정령왕인 내 몸에 타격을 입힐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폭발이 터지는 순간 아무런 상처 없이 멀쩡해 있을 내 모습에 경악하는 신관들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바로 그다음이 네놈들 제사상이 차려지는 순간이다! 쐐애애액! 콰아아아앙!!! ‘응? 전혀 아무런 느낌도 안 드는 듯한?’ 고통은 없어도 어느 정도 몸에 와 닿는 느낌은 있을 줄 알았던 나는, 신관이 던진 어둠의 농축덩어리가 바로 앞에서 터지는 중에도 별 다른 일이 없자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 이마가 왜 이렇게 뜨거운 거지? 정확하게는 이마위에 놓여진 서클렛의 보석이 뜨거워져 있었다. 매캐한 검은 연기에 가려져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눈앞에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서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누, 누구? 설마…라피스라도 온 건가?’ 혹시나 녀석이 우리들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하고 날아온 건가(?) 싶어,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연기가 걷히길 기다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런 상황에서 등장할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의례 녀석이려니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등장한 것은 라피스도, 무엇도 아닌. 심지어 사람이라고 할 수도 없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였으니-! “맙소사…” 매끄러운 등선과 기다란 목. 곧게 뻗은 우아한 다리와 옅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눈부신 은빛의 갈기. 긴 속눈썹 사이로 드리워진 청명한 푸른 눈동자와, 이마에 돋아있는 금색의 기다란 뿔. 그리고… 비둘기와 같은 새하얀 날개라니!!! “……유니콘?” 그랬다. 그건 유니콘이었다. 이리보고 저리 봐도, 심지어 두 눈을 비벼보고 수 십 번 깜빡여 봐도 유니콘은 유니콘이었다. 설마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상당히 멍청한 표정으로 한없이 구경하고 있자니, 유니콘의 푸른 눈동자가 똑바로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뭔가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이윽고 푸드덕 날개짓을 하며 작게 푸레질을 하는 것이다. 은쟁반위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한 맑은 음색이었다. “푸르르르…” 그런데 문제는…이 어딜 보아도 말의 푸레질로 밖에 안 들리는 소리가, 내 귀에선 전혀 다르게 해석되어 들렸다는 거랄까? [보고 싶었어…엘. 널 기다렸다.] “…엥?” ============================================================================ 정령왕 엘퀴네스 5-26. 잊혀진 기억? (3) 그 뒤로 상황이 어떻게 됐냐하면, 대충 이렇다. 난데없이 등장한 유니콘에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마신교의 신관들 또한 갑자기 나타난 이 정체모를 동물의 등장에 당황했던 것이다. 한참동안이나 환상마법이네, 어쩌네 저들끼리 신나게 떠들던 그들은, ‘그래도 문제없다’며 곧 재차 다시 공격하려 했고,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얌전히 있던 유니콘이 갑자기 발작(?)을 하더니 쭉 뻗은 금빛 뿔로 불을 뿜어 내는 희귀한 광경이 연이어졌다. 그런데 그게 어찌나 효과가 탁월한지, 마치 마법 중 강력한 살상력을 자랑하는 파이어 스톰의 위력과 맞먹는 불덩이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신관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그대로 불길에 구워져 줄행랑을 쳐야만 했던 것이다. 이 예상치 못한 상황전개에 멍해져 있는 내게, 유니콘은 의아한 얼굴을 들이밀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 분명 ‘말했다.’ [엘, 왜 그래? 어디 아파?] “으응?” [왜 그렇게 멍하게 있는 거지? 내가 보고 싶지 않았어?] “저, 저기?” […?] “방금…네가…아니, 당신이 말 한건가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여기에 나 말고 다른 녀석이 있던가?] 그야 이사나가 있기는 합니다만, 기절해 있는 상태니 말을 할리는 없겠지요. 아하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이놈의 세계가 기상천외한 나라라지만 날개달린 유니콘이 등장한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 그것도 모자라 말까지 하다니. 이거…정말 환청이 아닌 거 맞지? 내 표정이 이상하게 굳은 것을 느꼈는지 유니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그리곤 걱정이 가득 담긴 어투로 또다시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한데? 정말 어디가 아픈 거 아니야? 날 봐도 전혀 반가워하지도 않고, 너 지금 상당히 이상해. 엘.] “저…죄송합니다만, 날 알아요?” [응? 그건 또 무슨…? 혹시 장난? 아니면 아까 폭발 때문에 충격이 너무 큰 건가. 흠, 아무튼 인간들이란 너무 약하다니까.] 엥? 인간이라고? 오케바리. 이제 확실히 알았어, 유니콘씨. 당신은 지금 날 다른 인간이랑 착각하고 있었던 거야. 아~ 그랬던 거였어. 휴우. 이상한 놈한테 걸린 건줄 알고 깜짝 놀랐네. 나는 되도록 친절하게 보이도록 마음먹으면서 생긋 미소를 띄웠다. 그리고선 덩달아 히죽  거리는(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유니콘에게 지금 하고 있는 착각을 정중히 정정해 주기 시작했다. “아무래도…다른 사람이랑 착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뭐어?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엘이 아니란 거야?] “아, 일단 제 이름이 엘인 건 맞지만…그건 애칭이고. 정식 이름은 엘퀴네스. 현 아크아돈의 물의 정령왕입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죠.” [하아? 대체 무슨 소린지… 너 엘퀴네스하고 계약하고 다니더니 뭔가 이상해 진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물의 정령왕…어? 그러고 보니 너 머리색깔이 다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분명 금발이었는데?] “그러니까…당신이 아는 사람과 다른 존재라고요. 저야말로…이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은데요?” 어설프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더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유니콘의 얼굴이 팩 일그러졌다. 그리곤 갑자기 척척 다가와 그대로 주둥이(…)를 내 목덜미에 파묻고 킁킁거리는 것이 아닌가! “히익! 무슨…!!” [엘 맞아. 이 특유의 체향을 몰라볼 리가 없잖아. 게다가 얼굴도 똑같고, 말투도, 성격도 똑같아. 너-! 오랜만에 만났다고 나를 이렇게 놀리기야? 그 동안 답답한 공간 안에 갇혀 있던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글쎄! 나는 당신을 모른다니까요!!” [거짓말!] “아, 글쎄! 이렇게 눈에 띄는 말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잖아! 한번 봤다고 쉽게 잊혀져 버리는 인상도 아니고!!” 당연하다. 누구도 유니콘을 보고 나면 잊어버릴 리가 없다. 세상천지 날개 달린 말이 어디에 또 있겠는가? 억울한 마음에 신경질 적으로 반박하자, 유니콘은 냄새를 맡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빛이 반짝 반짝 한 것이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지 심히 두려워지는 기분이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눈에 띄는 마알?] “헉! 기,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지만, 어쨌든 내가 보기엔 당신은 말로밖에…” [아하! 이 모습이라 몰라보는 거야?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렇게 간단한 것을…] “에? 헉…” 의아한 얼굴로 반문하던 나는, 이윽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상에 그대로 몸이 굳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있던 유니콘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온다 싶더니, 그 형체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새 내 앞에는 푸르스름한 피부에 새하얀 은발을 가진 남자가 친근한 미소를 띄우며 생긋 웃고 있었다. “이제 나 알아보겠어? 나야, 나. 시벨리우스. 정말 오랜만이지?” “……” 저기…당신은 대체 누구신가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이 머릿속을 맴도는 순간이었다. *** 다행스럽게도 나의 어색한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마족 루카르엠이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때만큼 그의 등장이 반가운 순간은 없는 것 같았다. “호오, 이거 굉장히 신기한데요? 마물이 아니라 유니콘이라니.” “루카르엠!” “넌 뭐야?” 꿈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게 환한 미소를 띄우고 있던 유니콘(본인의 말로 시벨리우스라고 하는.)의 얼굴이, 루카르엠을 향해서는 적개심으로 변해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을 뿐이었지만. “미안합니다, 엘님.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마신교에 서클렛 이야기를 흘린 건 저였습니다.” “하아? 대체 어째서 그런 짓을?” “서클렛 안에 담겨진 마물이 뭔지 궁금했거든요. 적당히 위험한 상황만 되어주면 등장할 것 같아서 말이죠. 사실 그동안은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하는 통에 엘님이 본격적으로 나설 기회는 별로 없지 않으셨잖습니까. 하핫” “…이봐요, 당신…” 단순히 어떤 마물이 나올지 궁금해서 그런 짓을 벌이다니, 당신 지금 제 정신이야! 황당한 표정으로 차마 화조차 내지 못하는 내게 루카르엠은 변명처럼 서둘러 말을 이었다. 바로 유니콘 시벨리우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정말 유니콘 일 줄은 예상 못했습니다. 이 종족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아크아돈에서 깨끗하게 증발해 버렸거든요. 신계의 한 부분에 귀속되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거참, 이상한 일이네요.” “에? 유니콘이 종족?” “엘, 저 녀석 대체 누구야?” 뭔가 상당히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사실 나로선, 루카르엠 보단 시벨리우스의 정체가 더욱 궁금했던 것이다. 그러는 너야 말로 대체 누구란 말이냐! “호오, 엘님과 벌써 이렇게 친해지신 건가요? 유니콘과는 친해지기는 어렵다고 알고 있는데, 과연 정령왕은 다르시군요.” “정령왕?” “아? 모르셨습니까? 일단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자면, 처음 뵙겠습니다, 위대한 유니콘의 후예시여. 제 이름은 루카르엠, 당신이 ‘엘’이라고 칭하는 분은 이곳 아크아돈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이시랍니다.” “엘…퀴네스?”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시벨리우스는 고개를 살짝 갸웃 해보였다. 그리곤 다시 나를 한참이나 돌아보더니 냉큼 이렇게 잘라 말하는 것이 아닌가! “틀려. 내가 보았던 정령왕 엘퀴네스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 이 녀석은 그저 ‘엘’이라고. 너야말로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호오? 엘퀴네스를 보셨다고요? 그것 참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 이쪽에 계시는 분은 틀림없는 엘퀴네스님인데 말입니다. 아아, 혹시…” “…?” “문제하나 드리겠습니다! 올해가 몇 년일까요?” 상큼발랄하게 묻는 목소리에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잠시 고민하듯 눈동자를 굴리더니, 곧 어렵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세이크 제국력 445년?” “저런, 틀리셨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세이크 제국은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있었던 나라입니다만.” “…뭐?”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이 좁아지던 그는 드디어 상황을 깨달았는지 무섭게 표정을 굳혔다. 잠깐…4천년 전이라고? “무슨…그럼 지금이 그때로부터 4천년이 지났다는 소리야?” “정답입니다. 그 증거로 현재 이 세계에 남아있는 유니콘 종족은 단 한분도 안계시거든요. 아니, 지금 이렇게 당신이 나타나셨으니 아크아돈의 유일한 유니콘이 되신 건가요? 아까 말씀드렸다 시피 유니콘 종족은 신계로 흡수되어 그곳에서 살고 있답니다.” “말도 안돼! 그럼 여기 있는 엘은?” “정령왕 엘퀴네스님이시죠. 당신이 보신 엘퀴네스님이란 분은 지금 계신 분의 전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만. 아마도 서클렛 안에 봉인된 동안의 기억이 없으신 것 같군요.” “……” 지금 보는 엘퀴네스의 전대…라면 역시 엘뤼엔이겠지? 우연찮게도 나와 같은 이름에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그 시절 살았던 모양이다. 4천년 동안의 기억이 없다니, 대체 서클렛 안에서 무슨 생활을 하고 있었던 걸까? 완전히 현실을 깨달은 시벨리우스는 말 그대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툭 치면 당장이라도 푸른 눈동자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얼굴. 그래서 였을까?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저어…신계로 갈 수 있게 알아봐 드릴 수 있어요. 당장은 무리더라도 곧 가족들에게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4천년이 시간이 날아가 버린 건 좀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도 풀려나서 다행이라고 생각을 하면…” “그럴 것 없어. 날 그 서클렛 안에 가둔 녀석들이 바로 내 일족이니까. 어차피 다시는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고.” “…에?” “그보다…네가 엘이 아니라면 대체 녀석은 어떻게 된 거지? 아, 하긴. 녀석은 평범한 인간이었으니까…이때까지 살아있을 리 없겠지. 하- 기가 막혀서. 잠깐 자고 일어난 기분이었는데, 그새 4천년? 제기랄!!!” 콰앙-!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큰 소리를 내뱉은 순간 바닥 한 가운데가 음푹 패여 들어갔다. 그것에 놀래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자, 잔뜩 화가 난 듯한 시벨리우스의 시퍼런 눈동자가 내게 똑바로 돌아서는 것이 아닌가. “너 뭐야?” “…에?” “넌 뭐냐고! 네가 뭔데 엘이랑 똑같이 생긴 거야! 왜 그와 같은 체향을 풍기고 있어? 정령왕인 주제에 무슨 권리로 엘의 모든 것을 그대로 담고 있냐고! 제길, 정령왕이라고 하면 하나같이 재수 없는 기억밖에 안 떠올라! 그런데 끝까지!!” “저기, 그건 여기 계신 엘님께 따질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무엇보다 4천년 전의 일을…” “닥쳐! 엘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너! 당장 애칭 바꿔!” “……” 이건 또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대책 없이 친한 척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지만 무작정인 적개심도 그다지 기분 좋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게 내 잘못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대체 엘뤼엔은 옛날에 뭘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만나는 녀석마다 나를 괴롭게 한단 말인가! 어쩐지 점점 피곤해 지는 기분에 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때 마침 기절해 있던 이사나가 깨어나는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시벨리우스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으음…” “앗, 이사나! 정신 들어?” “…엘? 윽! 어,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아까 그 장소?” “아아. 상황이 갑자기 이상하게 전개 되 버려서 말이야. 일단 그 신관들은 전부 물러갔어. 대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청객들이 몇 명 등장했지만.” “불청객?” 내 기분이 별로라는 걸 눈치 챘는지, 의아하게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시벨리우스와 시선을 마주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블루엘프?” 아, 그러고 보니 유니콘이 변신한 모습이 블루엘프라는 종족이랑 같은가? 약간 푸른색이 도는 피부에 은빛 머리칼, 뾰족한 귀를 보니 새삼 그렇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그러자 이사나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친 시벨리우스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야, 이 인간은?” “아, 이사나님입니다. 현 엘퀴네스님의 계약자시지요. 당신이라면 이마에 새겨진 물의 인장이 보일 텐데요?” “흥미 없어, 그런 건. 그나저나 인간 계약자라… 별 일이군. 계약도 더럽게 어렵다는 엘퀴네스가 연이어서 인간에게 소환되다니. 그럼 이번이 두 번째 계약자인가?” “에? 첫 번째 인데요?” 그러자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시벨리우스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 마치 씹어 발기는 듯한 목소리가 앙다문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가.첫.번.째.라.고?” “여기 있는 이사나가 전 엘퀴네스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최초의 인간 소환자라고요. 이건 다른 정령왕들에게도 확인한 사실이니 틀림없어요.” “무슨 소리야! 그럼 엘은 대체 뭐라는 거야!! 내가 알기로 엘퀴네스를 가장 최초로 소환한 인간은 바로 엘이었다고!” “아, 글쎄 내가 알기론 아니라니까요? 그쪽이야 말로 뭔가를 단단히 착각한거 아니에요?” “뭐가 어째? 지금 나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아, 시끄러! 정신 사납게 쫑알거리지 좀 마! 이 빌어먹을 말 같으니!!” ====================================================== 정령왕 엘퀴네스 5-27. 잊혀진 기억? (4) “……” “……” 순간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신경질적으로 임하는 내 태도에 시벨리우스를 포함한 사람들이 굳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녀석을 똑바로 노려보며 숨도 쉬지 않고 소리쳤다. “그렇게 의심나면 돌아다니면서 대륙 역사서를 뒤져보면 될 거 아니야! 너야말로 지금 정령왕의 기억을 의심해? 난 분명히 들었다고! 여기 있는 이사나가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란 말이야! 너 아까 나한테 뭐냐고 그랬지? 그 말 나도 좀 해보자. 너 누구냐? 대체 누군데 갑자기 나타나서 멀쩡한 정령왕의 정신을 이렇게 피폐하게 만드는 거야? 뭐? 애칭을 바꿔? 못 바꾸면 어쩔 건데! 어? 니가 정령왕인 나를 어쩔 거냐고!!” “어이…너…” “보자보자 하니까 이제 별게 다 나타나서 시비야! 처음엔 드래곤, 다음엔 마족이더니, 이번엔 유니콘이냐? 아~ 그래. 내가 보기에도 나 안 평범해. 그래서 내 주위에 특이한 놈들이 모여도 찍소리 못할 처지란 거 알거든? 근데 이건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 누군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줄 알아?” “…엘.” “그래, 내 이름 엘이다! 엘퀴네스건 엘이건 강지훈이건! 다 내 이름이라고! 이 세상에 동명이인이 어디 한 둘인 줄 알아? 넌 이 대륙 모두 돌아다니면서 엘이란 사람들 이름 다 뜯어 고칠 거야? 어? 그런…으악!!”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많았던 건지, 스스로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의식 못한 채 열심히 쏘아붙이던 나는, 갑자기 벌어지는 현상에 놀라 그대로 말을 멈추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어느새 시벨리우스의 품에 끌어 안겨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무, 무슨!” “엘이다….” “어? 뭐라고?” “엘이다. 분명히 엘이야. 그럼 그렇지. 내가 잘못 봤을 리 없지. 엘이 아닐 리가 없지.” “에엑?” 대체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거냐. 아니 무엇보다, 나는 인간도 아닐 뿐더러, 4 천 년 전엔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러나 차마 등 뒤로 뚝뚝 눈물을 흘리는 녀석을 향해 그렇게 말해 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진 화내느라 전혀 고려치 않았던 녀석의 심정이, 이제야 어느 정도 공감이 되는 기분 이었달 까? 잠깐 잠들고 일어났는데 4천년이란 세월이 흐른다면, 누구나 다 당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전에 알았던 친구와 똑같이 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더욱 현실의 변화를 믿을 수 없겠지. 만약 엘뤼엔이랑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를 모른다고 말한다면? 트로웰이나 이사나랑 닮은 사람이 날 모른다고 한다면… 난 어떤 기분이 될까. ‘좀…심한 말을 해버린 걸지도.’ 욱씬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얼굴을 찌푸리자 한참동안 나를 끌어안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천천히 몸을 떼어냈다. 올려다 본 그는 눈물 가득한 얼굴로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예전에 엘도 화가 나면 나한테 그렇게 소리쳤었어. 분명히 엘이야.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저기, 미안한데…” “괜찮아. 엘이 아니라도 상관없어. 분명한건, 넌 엘을 대신하기 위해 내게 나타난 존재니까.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그렇게 믿을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날 책임져.” “!!!”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소리냐. 순간 눈앞에 별이 왔다 갔다하는 환상이 펼쳐졌다. 경악하는 이사나나, 감탄을 연발하는 루카르엠의 얼굴은 전혀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패닉에 빠져 버린 것이다. 정녕 내 인생에 평탄한 길은 없단 말인가? 진정으로 울고 싶어진 하루였다. 유니콘 이란 종족은 아크아돈이란 차원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존재하던 생물로, 정령왕과 드래곤에 버금가는(?)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인간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기 시작하면서, 몇몇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영토를 점령당하게 되자, 더 이상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주신께 의뢰하여 신계로 떠나버린 것이다. 만방에 팔방미인으로 이름 높은 그들은 외모면 외모, 전투면 전투, 요리면 요리, 그야말로 각 분야에서 뒤처지는 구석이 전혀 없었다. 바로 그것이 내가 녀석을 군식구에서 쓸모 있는 놈이라고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 “흐음, 그렇게 대단하다면 인간들에게서 영토를 지켜내면 되잖아? 뭣 하러 여길 떠난 거지?” “우리들이 제대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것은 본체일 때뿐이야. 지금처럼 인간체로 변신해 있을 경우엔 큰 능력을 발휘하기 어렵거든. 바로 그때를 틈타서 인간들이 우리를 붙잡았지. 다시 본체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마법으로 금제까지 걸어 놓으니 별 다른 방도가 없었어. 게다가 우리 종족은…치명적인 약점이 있거든.” “치명적인 약점?”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한창 요리를 하던(이것이 바로 쓸모 있는 이유인 것이다!) 시벨리우스(줄여서 시벨)의 손이 잠깐 멈칫했다. 그러면서 상당히 난처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여자한테 약해.” “엥?” “그, 뭐랄까. 순결한 처녀한테 본능적으로 약한 종족이야. 그래서 여자로 유혹하면 백이면 백 전부 잡혔지. 아아, 한심하게 생각해도 돼. 전에 이 얘길 들었을 때의 너도 상당히 황당해 했으니까.” “음. 그러니까 나는 그 엘이 아니란…휴우, 관두자. 아무튼, 전혀 의외인걸. 아,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유니콘이 처녀들을 좋아한다는 얘길 들어본 것 같아. 그게 이곳에서도 적용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아, 그 얘기! 전에도 말했어.” 그러면서 생긋 웃는 모습에 나는 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막막해 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착각해도 단단히 착각하는 놈을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그나저나 너 정말 이거 못 먹는 거야? 조금도 못 먹어? 응?” “말했잖아. 난 정령이라서 음식은 소화 못해. 주스로도 벅찰 정도라고. 그래서 지금까진 본의 아니게 이사나의 식사가 소홀했는데, 그나마 네가 합류해서 다행인걸까? 요리를 잘 할 줄은 전혀 몰랐는걸.” “아아, 이래봬도 노숙 경험이 많거든. 유니콘은 방황하는 종족이기 때문에 성인식만 지나면 대체적으로 잘 돌아다니는 편이야. 그래서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할 기회가 있었지. 아, 하지만 못 먹는 다니 아쉽네. 예전에 너…내가 만든 요리 상당히 좋아했었는데.” 그러니까 그건 내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 듣겠냐, 이 화상아! 버럭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가슴만 두드리자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이사나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멋대로 나를 ‘엘’이라고 인정한 뒤부터 시벨은 이사나에게 무척 자상해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급속도로 친해져 버린 두 사람(?)은 이제 내가 ‘일행으로 인정 못해!’ 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지경까지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시벨리우스 녀석. 아마도 본능적으로 우리 일행의 진정한 리더가 누군지 파악하고, 미리 포섭을 펼친 모양이다. 그 예로, 이사나에게 인정받지 못한 루카르엠은 여전히 기척만 드러낸 채 쫓아다니는 상태였으니 말이다. 역시 이래서 사람은 공략 대상 선정을 잘 해야 한다니까? “그러고 보니 널 이 서클렛 안에 가둔 게 네 일족이라고 했지? 대체 무슨 이유였어?” “별거 아니야. 장로할아범한테 대판 대들었거든. 억지로 결혼시키려고 하는데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다고 세상에! 멀쩡한 유니콘을 서클렛 안에 봉인시키는 장로가 어디 있어? 아무리 그 상대자가 장로의 손녀였고, 나 때문에 상사병이 도졌다지만 해도해도 너무 하잖아?” “헤에. 여자한테 약하다더니, 일족의 여자일 땐 경우가 좀 다른가봐?” “아니. 별 다른 건 없는데, 뭐랄까. 그때 나는 이미 다른 존재를 마음에 두고 있었거든.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자란 거나 마찬가지인 웰디는 눈에 안 차는 게 당연했지. 뭐, 그렇다 해도 내가 특이한 경우인건 사실이었지만. 원래 유니콘들은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주의라서 말이야.” “정말 제대로 된 바람둥이 종족이로군. 인간에게 박해받아도 싸다.” “아! 그 말! 그것도 전에 말했었어, 엘.” “……” 무슨 말만 해도 이렇게 전의 ‘엘’과 연관을 지으려고 하니, 이젠 말을 꺼내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덩치에 안 맞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도 상당히 부담스러웠고.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지금 몇 살이나 된 걸까? “나? 당시에 1200살이었으니까…지금 나이는 5200살이네. 유니콘은 별다른 일 없으면 만년까지는 살거든. 그나저나 봉인 된 시간도 몸에 적용이 된 건지 몰라? 지금 보면 그다지 생체 리듬에 큰 변화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슬쩍 물어보니까 순순히 가르쳐 주는 건 좋은데, 대답이 참으로 신선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럼 1200살에서 시간이 멈춘 셈?” “아마도 그런 것 같아. 그런 게 아니라면 잠들어 있던 4천년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런데 엘은 어떻게 된 걸까? 시간이 멈춘 건 아니고…환생이라도 한건가?” “그럴 리가. 정령왕은 처음 창조되는 영혼으로만 탄생된다고 했어. 전생이 있는 경우는 그야말로 특별한 케이스라고.” “네가 그 특별 케이스일지도 모르잖아.” 그래, 맞다. 내가 바로 그 특별 케이스란다. 하지만 절대 4천년 전의 기억은 가진 바가 없다고. 남들은 하나도 없는 전생을 날더러 두개나 가지란 말이냐?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주자 시벨은 불만스럽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그 때 마침 요리가 알맞게 익었기에, 우리들의 화제도 자연히 그 쪽으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시벨이 저녁식사로 마련한 것은 간단한 베이컨에 양고기 스튜였을 뿐이지만, 마을을 벗어난 이후 건량으로 끼니를 때우기가 일 쑤던 이사나로서는 그야말로 만세를 절로 외칠 정도로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때문에 녀석의 입가엔 아까부터 웃음이 떠나질 않고 있었다. “와, 맛있겠다. 시벨님, 정말 요리 잘하시네요. 저도 한번 배워보고 싶은 걸요?” “아, 그래? 언제든지 말만 해. 내가 한때 황실 요리 자격증까지 가지고 있었단 말씀. 가르쳐 주는 것도 잘 할 수 있어. 사실 내가 요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엘 때문이었는데 말이야.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 항상 간식거리가 입에서 떠나질 않았어.” “윽, 또 시작이냐.” “아냐, 정말이라니까? 그런 의미에서 엘, 너도 한번만 먹어봐, 응?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뿐이지, 조금쯤은 먹어도 무리 없는 거잖아? 전대의 엘퀴네스 -그 놈도 가끔 빼앗아 먹었다고.” “…엘뤼엔이?” 그 엘뤼엔이 남이 만든 요리를 빼앗아 먹었다고? 전혀 상상이 가지 않는 얘기에 뜨억하게 입을 벌리자 시벨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응? 엘퀴네스라니까, 엘뤼엔은 또 누구?” “아,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난 사양할래. 음식은 조금만 먹어도 속이 거북해 져서 싫어.” “쳇, 언젠간 반드시 먹이고 말테다.” 이상한 것에 집착을 보이는 유니콘-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라피스가 떠난 이후 가라앉았던 두통이 다시 도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은 녀석이랄까. ============================================================================ 정령왕 엘퀴네스 5-28. 잊혀진 기억? (5) 이사나와 호흡이 잘 맞는다는 점에서는 분명 라피스보단 점수가 높지만, 저 시도 때도 없이 전 ‘엘’과 연관짓는 것을 내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시벨이 언제까지 나를 전 ‘엘’로 보게 될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지금 저렇게 상냥한 것은 단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어서 일 뿐, 다시 현실을 자각하고 나면 분노했을 당시처럼 싸늘하게 돌아올 것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녀석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한 녀석은 나를 물건취급하고, 또 한 녀석은 다른 사람이랑 착각을 하고. 에휴, 내 팔자야…’ 세상 어떤 정령왕이 나보다 더 처량한 신세가 될 수 있을까? 정말이지 갈수록 한숨쉴 일만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비참하게 고개를 수그리는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시벨과 이사나는 연신 저들끼리 떠들면서 오붓한 시간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헤에, 네가 이 제국의 황제라고?” “아뇨, 여기가 아니고 바다건너 솔트레테라는 제국이에요. 지금은 황권을 다시 되찾기 위해 노력중이죠.” “흐음, 그럼 본인의 나라에서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다건너까진 왜 온 건데?” “나를 도와주기로 약속한 사람이 가져와 달라고 한 물건이 있어서요. 그걸 가져와야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쳇, 쪼잔한 놈일세. 도와 줄려면 그냥 도와줄 것이지, 조건을 다는 건 또 뭐야? 그런 건 친구도 아니라고.” 그건 네 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시벨. 심지어 친구를 넘어서서 ‘엄마’를 자청하고 있는 존재라면 더더욱 문제가 되지 않겠니?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을 보았는지, 이사나는 또다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오직 상황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시벨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뿐. “아, 그런데 시벨님은 왜 블루 엘프족으로 변신하신 거예요?” “응? 왜? 이상해?” “아니, 이상한건 아니지만, 흔한 종족은 아니잖아요. 여행 다닐 때 분명 눈에 띄었을 텐데, 불편하시지 않았어요? 이왕이면 평범한 노말 엘프나, 인간으로 변신하셔도 될 텐데.” 그러고 보니 그건 나도 궁금했다. 굳이 변신할 거면 인간으로 할 것이지, 뭣 하러 눈에 띄는 블루 엘프를 선호한 걸까? 그러자 우리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한 몸에 받은 시벨은 곤란한 듯 미간을 잠시 좁히더니 도리어 의아하단 듯이 물었다. “블루 엘프가 눈에 띈다고? 그거야 말로 금시초문인데. 설마 그 몇 천 년 사이에 종족의 분포수가 바뀌어 버린 거야?” “에? 옛날엔 블루 엘프가 흔했어?” “적어도 특이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지. 노말 엘프나 블루 엘프나, 거의 비슷비슷 했어. 인간과의 교류도 상당히 활발한 편이었고.” “헤에. 지금은 아니야. 블루 엘프들은 소수로 모여서 따로 숨어 지낸다고 하던걸? 아마 그대로 다니면 상당히 눈에 띌 텐데, 괜찮겠어?” 안 그래도 특이한 종족인데 세빌은 외모조차 상당히 아름다운 편이라 더욱 눈에 띄였다. 블루 엘프를 실제로 본적은 없었지만 세빌이라면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외모로 꼽힐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지나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은 전부 휘어잡지 않을까? 그러나 정작 세빌 본인은 그런 점에 대해 크게 신경 쓰는 얼굴이 아니었다. “난 이대로가 좋은데. 너희들이 불편하지 않다면 이 상태로 있고 싶어. 전의 엘과 다녔을 때도 이 모습이었기 때문에, 좀 애착이 있는 편이거든.” “아, 저도 그다지 상관은 없어요. 어차피 지도 대로 가면 마을을 거칠 일도 별로 없고.” “흐음, 그럼 결국 이 상태로 가는 건가? 뭐, 나도 본인이 좋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지. 블루 엘프는 처음이라 신기하기도 하고. 자아, 그럼 오늘은 이만 여기서 자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길 떠나볼까?” 그러자 침낭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거리는 나에게 세빌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뭐 하는 거야?” “응? 침낭이랑 담요 꺼내려고. 자려면 필요하잖아?” “그런 거라면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렇게 말한 세빌은 우리들에게 양해를 구하더니, 처음 나타났던 유니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곤 이마에 뻗은 금색의 뿔을 통해 커다란 원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서 번져 나오는 금가루가 정확하게 나와 이사나가 있는 공간을 감싸고 나자 순식간에 거대한 텐트가 등장하는 것이었다. 놀란 얼굴로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여느 가정집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춰져 있었다. “헉!” “우와…” “침대는 세 개로 설정해 놨으니까 편하게 잘 수 있을 거야. 안에 들어가서 문을 닫으면 자동으로 투명화 마법이 실행 되서 도둑들의 습격을 받을 걱정도 없지. 어때? 나 이만하면 쓸만하지?” 마치 나 일행으로 삼길 잘했지? 라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에 나는 의식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시벨리우스…녀석은 참으로 제대로 된 복덩이었던 것이다. *** “반려의 운명을 가진 소녀입니다.” 그것은 거무튀튀한 손으로 연신 수정 구슬을 매만지고 있던 늙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가래침이 잔뜩 섞인 쉰 목소리였지만 앞에 앉아있던 남자의 표정에는 별다른 불쾌감이 서리지 않았다. 오직 노인이 하고 있는 말의 내용에 집중하고 있을 뿐. 어두컴컴하여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은 동굴 안에서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반려의 운명이라…. 정확하게는 누구의?” “클클클, 제왕입니다. 이 세상을 지배할 위대한 군주의 반려지요.” “호오, 흥미로운 걸? 그렇다면 내가 그녈 취하게 되면 그 제왕의 자리는 내 것이 된다는 건가?” “킥킥, 나이를 생각하셔야지요. 당신이 넘보기에는 아까운 별입니다.” “…!” “이놈! 감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노인의 직설적인 어투에 화가 난 듯, 남자의 옆에 서있던 기사한명이 성난 표정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그것을 한손을 들어 제지시킨 남자는 이윽고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자네의 농담은 언제 들어도 유쾌하지 않군. 뭐, 좋아. 어차피 내가 원한 것은 반려 따위가 아니었으니.” “클클클. 그렇게 대답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이 소녀만큼 당신의 요구에 적합한 존재는 없을 것 같군요. 제 일생에 이렇듯 강렬한 별의 기운을 느낀 것은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소녀가 있는 곳은?” 노인의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일순 달라졌다. 자신이 그렇게 찾고도 찾았던 존재를 드디어 발견 한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력과 부귀! 그것을 손에 넣을 순간을 더욱 앞당겨줄 바로 그 존재를! 남자의 두 눈에 서린 탐욕의 감정을 읽은 노인은 곧 클클 미소 지으며 탁자위에 아무렇게 나 쌓아두었던 양피지 더미를 집어 들었다. 그가 한참을 뒤적여 남자에게 건넨 것은 그중 얇은 비단으로 감싸져 있는 것이었다. “…이건?” “소녀의 초상화와 간단한 인적사항, 현재 사는 거취가 기록된 것입니다. 언제고 방문하실 날이 있으면 전해드리려고 가지고 있었지요. 클클.” “준비성 하나는 확실하군. 그런데 괜찮겠나? 내가 소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모르진 않을 텐데?” “클클. 괜찮을 이유도, 그렇지 않을 이유도 없지요. 저는 다만 찾아온 사람들에게 제가 읽은 별의 정보를 제공해 줄뿐.” 노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받은 그것을 옆에 있던 기사에게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서류의 겉봉을 뜯은 기사는, 곧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알폰프 제국, 드레프 백작의 외동딸인 알리사노 알 드레프, 라고 적혀있습니다. 첩이었던 어미가 평민 출신이라 집안에서의 위치는 그리 견고하지 않으며, 올해로 나이 13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개월 전, 정령사의 자질이 있음이 밝혀져 제국 황실로 불려갔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와 현재는 제국을 방황하는 중이며, 지금 머무르고 있는 곳은 죽음의 숲 근방의 바론 사막입니다.” “사막? 호오, 그런 곳엔 어째서?” “정령과의 친화력을 쌓기 위해서…라고 되어있군요. 아마도 땅의 정령사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흐음, 재미있군.” 그러나 싱글거리며 중얼거리는 그의 눈동자는 마치 얼어붙은 듯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그것을 본 노인은 다시 조롱하듯 이죽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재밌다시는 분이 눈은 전혀 웃고 계시지 않군요. 클클. 그리 그 아이가 욕심나시는 겝니까?” “…물론이다. 그녀는 나를 부유하고 위대하게 만들어줄 완벽한 전초전의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거기다 제왕의 반려라니, 더욱 마음에 드는 군. 아마 내 평생에 바친 가장 고귀하고 비싼 제물이 될 거야.” 흐릿하게 웃은 남자는 그 상태 그대로 기사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어둠의 기사단 제 2진을 보내라. 결코 실수 없이 잡아와야 할 것이다. 반드시 ‘순결한 상태 그대로의’몸으로 데려오도록. 기간은 1년이다.” “대공전하의 명령을 따릅니다!” 경직된 자세로 대답한 기사는 서둘러 남자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어두침침한 동굴 안을 나섰다. 기사로부터 ‘대공전하’라고 불리운 남자- 유카르테 란느 솔트는 이번엔 노인을 바라보며 나직히 경고했다. “오래 살고 싶다면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거야. 그간의 정성을 봐서 지금은 살려주지만, 상황은 언제고 바뀌는 법이지.” “호오, 협박이신가요? 클클…” “사실을 말한 것이다. 어차피 얼마 남지도 않은 인생, 편하게 살다 가고 싶겠지? 그렇다면 기억에서 나와 관련된 모든 것을 지워라.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한목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알고 있는지라 말입니다.” 그렇게 대답하며 히죽 웃는 노인을 본 대공은 이곳을 방문한 이례 처음으로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곧 상대 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건지, 홱-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몸을 돌리며 뚜벅뚜벅 동굴 밖을 향해 걸어갔다. “클클클…” 대공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이 모두 사라지자, 노인은 조심스럽게 들고 있던 수정구를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말갛기만 하던 수정 위로 어느새 검은 밤하늘이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 위로 박혀있는 수많은 별들을 무심한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은, 문득 다른 별들보다 유난히 빛나는 세 개의 빛 덩어리를 보곤 천천히 미소 지었다. 여전히 가래서린 쉰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왕의 반려는 하나…선택된 제왕은 둘. 대공전하, 그대는 과연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까?” 밝혀지지 않은 진실하나가 조용히 그 빛을 드리우던 순간이었다. ========================================================================= 여기까지 입니다..... 우후후후.. 어제 밤을 샌 결과 입니다. 한숨도 못잤더니 눈앞이 가물가물 하군요. (그래도 역시 뿌듯.) 이것으로 5권 원고의 대부분이 완성되었습니다. 자, 여러분?^^ . . . . . . . 오늘 저녁에 삭제합니다. 푸하하하하!!! 제왕의 반려 (1) "이게 대체 뭐하자는 짓이야!" 소녀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하며 앙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진 추격전에 온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추욱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끊임없이 공격이 이어지는데, 정작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있는 건 오로지 메마른 사막과 그 위에 드리워진 자신의 그림자 뿐. 소녀는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휘이잉. 그때 마침 푸석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얼굴을 헤집고 있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에 가려져 있던 소녀의 얼굴이 살짝 드러났다. 얇게 구불거리는 금발머리카락에 희고 고운 얼굴. 비록 누더기와 다름없는 차림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소녀의 아름다움을 가리지 못했다. 긴 앞머리 사이에 언뜻 보이는 눈동자는 선명한 주황색. 애띈 얼굴이었지만 누구라도 보았다면 먼저 탄성부터 내지르고 볼 외모였다. 말 그대로 경국지색(傾國之色). 이대로 몇 년 만 지나면 그 외모하나로 사로잡지 못할 남자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외모에 관심이 없는 건지, 고운 얼굴을 잔뜩 일그러트리며 바람결에 헝클어진 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길 뿐이었다. 정확하는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아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지만. "정말이지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한눈에 보기에도 대부호나 귀족의 딸로 보이는 소녀가 정처 없이 사막 위를 떠돌아다니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사실 알폰프 제국 드레프 백작가의 서출로, 정령사의 자질을 인정받아 최근에 제국 황실로부터 부름을 받았었다. 보다 넓은 공부를 할 수 있는 환경과, 멋진 삶을 기대했던 것도 잠시. 서출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만만히 보고 괴롭히기 시작한 사람들 때문에 2달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뛰쳐나고오 만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백작가의 옛 집으로 돌아갈수도 없는 일이라, 그녀는 할 수 없이 정령술이라도 열심히 연마(?)해서 사람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줄 생각이었다. 땅의 정령을 다룰 수 있는 그녀에게 가장 최적의 환경은, 방해자가 다른 잡스러운(?)것 하나 없이 오로지 무한한 땅만 이어지는 이곳 바론 사막이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갑자기 침입한 정체모를 적들에 의해 빛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박힌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아악!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쫒아다니고 있는거야! 공격을 하려면 모습이라도 드러내란 말이얏!" 청순한 얼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과격한 목소리가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무리 인내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장장 3일간을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쫓기다보면 신경이 예민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저들이 직접적으로 피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상대방을 피로하게 만들어 쓰러지게 만들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적의 정체 따위, 너무 짐작 가는 부분이 많아서 꼽을래야 꼽을 수도 없는 게 현재의 처지. 소녀는 암울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잘나신 1황자님의 엉덩이에 장렬한 손가락질(일명 똥침이라고 한다)를 하고 튀어서? 아니면 2황자님의 식사에 겨자가루를 섞어서? 아니면 1황녀님의 치마단을 실수인 척 밟아 뜯어놓아서? 재수 없어! 그런 것 쯤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의 애교로 봐줄 수도 있는 거잖아! 황자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쪼잔하기는!" ...구구절절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 유감이었지만 여하튼 소녀로서는 원망이 컸다. 올해 나이 13살. 한창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어리광 피워도 모자를 시기에 이 한낮 볼 것 없는 사막에 와서 수련하는 것도 억울한데, 그것도 모자라 추격자들까지 나타나니 이래가지고 인생이란 게 과연 살망한 것인가 싶었다. 하긴, 백작가의 저택에 있었을 때도 그녀는 이래저래 쓸모없는 천덕꾸러기였을 뿐이었지만. 만사 귀찮다는 얼굴을 한 소녀는 제풀에 지쳐 마른 돌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론 사막의 터줏대감이라는 악명 높은 지옥 땅 거미 떼에 둘러싸여있을 때에도 지금처럼 심신이 괴롭지는 않았다. 땅의 정령을 불러내어 상대를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지금처럼 몸이 약해진 상태에선 정령을 소환해 봤자 오히려 계약자인 자신만 힘들어질 뿐이다. 문든 손에 닿은 땅의 느낌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안색을 창백하게 굳히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정체모를 적에게 쫓기는 사이, 저도 모르게 죽음의 숲과 가까운 늪지대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이 상태로 계속가면 늪 옆에 진치고 있는 수 많은 마물들까지 상대해야 할 위험부담이 컸기에, 지금까지 자신을 쫓아온 정체모를 적과의 결판은 곧 죽어도 여기서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문제는....소녀에게는 지금 몸 하나 까딱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었지만. "정말 미치겠네. 나 설마 여기서 죽는 걸까? 하다못해 모슨 이유로 공격하닌 지만 알았으면..." 애초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중얼거린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아무리 빽빽거리고 이유를 물어도 침묵하던 자들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소녀의 예상과는 달리, 추격자들은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소녀의 앞에 천천히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소녀의 주위는 어느새 검은 두건으로 얼굴 전체를 감싼 5명의 낯선 남자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었다. 그들을 본 소녀의 눈이 동그랗게 벌어지자 그 중 리더로 보이는 듯한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인가. 어린 나이치곤 꽤나 애 먹인 상대로군. 반나절도 못가서 쓰러질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다,당신들 뭐야? 누구야?" "아아, 그렇게 겁 먹을것 없어, 꼬마 아가씨. 우리들은 너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을 거니까 말이야.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 네가 얌전히 우리를 따라가는 것 뿐이다.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소녀는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치사한 수로 사람의 몸을 몰아붙인게 누군데 이제와서 '위해를 끼치지 않겠다'의 태도란 말인가. 가장 중요한건 지금까지도 그들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녀는 앙칼진 태도로 몸을 긴장시키며 입을 열였다. "내가 궁금한 건 당신들이 누구냐는 거야. 사람을 데려가라면 우선 본인들의 정체부터 밝히라고." "후후. 꽤나 당찬 아가씨로군. 좋아, 말해주지. 우리에게 너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신 분은 저 위대한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폐하님이시다. 자, 이정도면 설명이 충분하지? 알리사노 알 드레프양? 아니 전혀!! 남자로부터 이름이 불려진 소녀-알리사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자의 정체가 이 순간에 거론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솔트레테 제국...황제 폐하?" "그렇다,꼬마 아가씨. 선택 받은것을 기뻐하라고. 너는 장차 이 대륙을 지배하실 그 분의 위명을 돋울 영광스러운 제물이 될 몸이니까." '제...제물?' 알리사노의 얼굴은 금새 사색이 되었다. 재물이라니, 이 무슨 밑도 끝도 없는 소리란 말인가! 설마 진심인가 싶어 올려다봤지만, 두건에 가려져 있는 얼굴 따위, 감정을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며, 알리사노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입을 열였다. "제물이라니? 내가 왜? 솔트레테의 황제가 타 제국의 소녀를 제물로 쓴다는 입장을 떳떳하게 밝혀도 되는거야? 난 안가! 절대 싫어! 황제인지 뭔지 모르지만, 남의 목숨을 함부로 할 자격은 없다고!" "후훗, 그것은 아가씨 본인에게만 통하는 정의겠지.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란 말씀. 가기 싫다고 해도 우리가 억지로 끌고 가면 그만이지. 안심해. 처음 말했던 대로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을 거니까. 바로 그것을 위해 지난 며칠간 아가씨가 탈진할 때까지 기다린 거고 말이야." "!!" 농담이 아니다. 그 순간 알리사노는 진정으로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긴 마찬가지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이대로 끌려가면 죽는 것이다. 두건을 쓴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쳤다. "멀든!!" 쿠구궁- 그녀의 부름에 우르르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따. 이대로 순순히 잡혀가느니, 차라리 마나를 완전히 다 써버리는 한이 있어도 정령을 소환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완전히 지쳐버린 소녀가 정령을 불러낼 체력을 숨겨두고 있었다는 것을 미쳐 감지하지 못한 검은 두건의 남자-유카르테 대공의 기사들은, 흔들리는 땅위에서 균형을 잡으며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후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지진이 일어나듯 갈라지는 땅 덩어리 위에서 커다랗게 솟아 오르는 커다란 거인의모습을 볼 수 있었다. 땅의 중급 정령-멀든의 등장이었다. *** 정보길드에서 건네준 던전까지의 지름길은 말이 좋아 '길'이지 완전히 늪지대나 다름 없었다. 사방의 땅은 온통 질척질척 하고 나무엔 이끼가 잔뜩 끼어있었으며, 주변엔 전체적으로 뿌연 물안개가 퍼져있었다. 마치 TV속에서는 보던 밀림의 정글 같은 분위기랄까? 조금이라도 발을 잘 못 디뎠다간 그대로 늪에 빠져버릴 것 같아, 일행들의 걸음은 이제까지와는 비교됴 할 수 없을 만큼 조심스러워 졌다. 이래서야 차라리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돌아가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 정도다. 그러나 정작 나를 당황하게 만든 건 열악한 환경보다, 앞서 지도를 보며 걷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단 한마디였다. "어라라. 어떡하지,엘. 여기서 길이 끊겼는데?" "뭐라? 길이 끊겨?" "응. 이 바로 앞부분부턴 죄다 물이야. 제대로 딛고 걸어갈 부분은 없는 것 같아. 이 제도 제대로 된것 맞아?" 곤란하다는듯이 중얼거리는 시벨의 말에 나 역시 당혹한 얼굴이 되서 지도를 다시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가 잘 못 온건 아니고, 그렇다고 정보길드에서 틀린 지도를 제공할리도 없을테니 이것은 아마도... "이런, 비가 내리는 바람에 물의 수량이 불어났군." "비?" "응. 타이밍 좋게도 우리 오기 바로 직전에 폭우라도 쏟아진 모양이야. 지금 흐르는 강은 일시적으로 늘어난 빗물이란 소리지. 원래 열대지방일수록 비가 단기간 동안 한꺼번에 내리는 경향이 있거든. 아마도 지금이 이 지방의 우기(雨氣)인 것 같아." 요즘 들어 부쩍 감을 잘 잡게 된 내가 아무 망설임 없이 설명하자 이사나와 시벨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다.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할 생각에 앞길이 막막해 진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나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기는 그렇잖아?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으니까." "무슨 방법? 내가 본체로 변신해서 너희들을 옮기는 건 무리야. 우기라면 비가 언제 또 내릴지 모른다는건데, 자칫 중간에 내리기라도 하면 낭패거든. 깃털이 젖으면 날지 못하게 되니까." "아, 그래? 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안되겠네. 비를 안 내리게 할 수는 있지만 더 간단하게 해결 할 수 있는 일을 일부러 번거롭게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해 볼까? 물 위를 걷는 기분이 어떨지 생각해 본적 있어?" "...?" 내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슬슬 기운을 집중시켜 늪지대를 이루는 물의 이동을 붙잡았다. 사실 정령왕인 나로선 물의 표면을 일시적으로 딱딱하게 만드는 것 쯤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겉보기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강물을 향해 걸어보라고 하자 이사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결국 시벨리우스가 가장먼저 걸음을 내딛게 되었는데, 분명 물 이에 닿았음에도 밑으로 빠지지 않자 곧 신기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마치 단단한 얼음 위에 올라선 기분인걸? 엘, 너 정말 정령왕이 된 거 맞구나."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어때? 걸을 만 해? 이사나도 걱정말고 가봐. 빠지지 않을 테니까." "으응.." 민망한지 뻘쭘한 표정을 짓던 녀석은 곧 시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불안해하는듯 하더니, 어느새 적응이 되었는지 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광장해. 지금까지 걷던 질척한 흙바닥보다 더 단단한 느낌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대운 대리석 위에 올라서 있는 것 같아." "칭찬 감사합니다. 자아, 그럼 가볼까?" 보너스(?)로 텁텁하게 숨을 채우던 습기까지 제가하고 나자, 이사나와 세벨리우는 안색이 훨씬 가뿐해졌다. 지금까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늪지대를 이동하는 것이 두 사람(?)에게 상당히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 중 이사나는 표 안나게 입술을 삐죽이며 작은 항의를 늘어놓기도 했다. "너무해, 엘. 이런게 가능했으면 진작 좀 해주지. 여긴 너무 덥고 습해서 답답했단 말이야." "미안. 깜빡 잊고 있었어. 내가 불편한 걸 못 느끼다 보니..아하하." 만약 내가 이사나의 입장이었으면 불 같이 화를 내며 목을 쥐고 흔들어 대지 않았을까.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린 이사나는 부럽다는 시선을 보내왔을 뿐이었다.(시벨의 경우는 '엘'이 하느 ㄴ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는 주의니 신경 쓰지 말기로 하자.) 이보다 더 편한 일행이 어디 있겠는가! ※ 5권 연재 뒷 부분을 못보신 분들을 위해 짧게 내용 설명 추가하겠습니다. 바다괴물과 싸운 이후, 엘 일행은 알폰프 제국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카이테인, 엔딜과 헤어지게 됩니다. 결국 남은 사람(?)은 이나사와 엘 뿐. 가끔씩 루카르엠의 도움을 받으면서 여행 하던 두 사람은, 엘이 착용하고 있던 서클렛이 문제가 되어 마신전 신관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러던 중에 서클렛 안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정체불명의 생물이 튀어나오게 되지요. 녀석의 이름은 시벨리우스. 이미 4천년 전에 사라진, 아크아돈 대륙의 유니콘 종족중 하나입니다. 서클렛안에 있던 시벨리우스(애칭'시벨)은 지난 4천년간의 기억이 없습니다. 다만 엘을 보고 예전에 친했던 친구 '엘'과 착각. 줄곧 그로 오해하고 있지요.(환생했다고 믿고 있는 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스테리한 점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라피스와 비견되는 마법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유니콘 본체였을 때뿐. 인간체로 폴리모프하고 나면 그 능력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현재는 블루엘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하여, 엘 일행과 함께 동행하는 중입니다. 자, 그럼 여기까지.(자세한 내용은 출판될 5권을 참고해 주세요^^) 6권 연재 시작합니다! =================================================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새삼 동료 복이 좋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주위를 살피고 있던 시벨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기만 넘으면 바로 던전이라는 거지? 마른 흙냄새가 느껴지는데, 근처에 사막이라도 있는 건가?” “응, 맞아. 바론 던전은 죽음의 숲과 바론 사막의 중간지점에 존재한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흙냄새가 느껴질 정도면, 이 늪지대가 사막과 가까운 건가?” “아니, 그건 장담을 못하겠는데. 흙냄새와 거의 비슷한 수치로 마물 특유의 퀴퀴한 냄새도 풍기니까 말이야. 후각이 발달된 종족에겐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곳이군.”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시벨은 확실히 지금 이 상황이 즐거워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투덜거리지 않는다는 점이 라피스 녀석과는 다른 점이랄까. 이래저래 동료로서는 손색이 없는 녀석이다. 가끔 나를 두고 이전의 ‘엘’과 혼동하는 것만 빼면. “그러고 보니 엘…예전의 너도 자꾸 이런 곳 돌아다니면서 뭔가를 찾았는데 말이야. 그건 어떻게 됐어?” “글쎄. 그렇게 말해도 기억나는 게 없는걸.” “흠. 꽤 중요한 것 같기에 그것만큼은 기억할 줄 알았는데 역시 무리인가? 하지만 그때 굉장히 절박해 보였어. 반드시 찾아야 한다고 했었는데 그게 뭐였는진 정확히 기억 안 나네. 사람이었는지, 물건이었는지 조차도.” “그렇게 절박한 것이었으면 찾았겠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생각보다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거고.” “흐음, 그런가?” 내 말에 시벨은 어느 정도 납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어느 정도 이런 대화패턴에 익숙해져서, 내가 겪지 않은 일임에도 자연스럽게 그랬다는 듯이 대답할 지경에 까지 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으니, 정신을 피로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내 나름대로의 대처 방식이었달까. 나중에 제정신을 찾은 녀석이 이때 일을 빌미로 따지고 들면 나 역시 그만큼 항의해줄 작정이다. 처음부터 일방적인 오해로 나를 괴롭게 한건 네 쪽이라고!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숲 저편이 상당히 소란스럽다는 느낌을 받은 나는 몸을 멈칫 세우고 말았다. 희미한 기운이었지만 들썩이는 땅의 움직임에 정령의 기척이 스며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연계의 정령이 아닌, 인간에게 소환되어 능력을 행사하고 있는 기운이었다. ‘이런 곳에 웬 정령이?’ 평소라면 무심코 넘겼을 정도로 미약한 느낌이었지만,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갑작스런 정령의 기운에 신경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얼굴을 찌푸리고 있자, 앞서가고 있던 시벨과 이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왜 그래, 엘? 무슨 일이야?” “으음. 뭔가 저쪽에서 소란스러운 일이 벌어진 것 같아서 말이야. 싸움인 것 같기도 하고, 좀 신경 쓰이는 걸?” “싸움? 아아. 내 귀에도 확실히 그렇군.” “어디? 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이사나가 연신 귀를 기울이는 것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대충 멀리 떨어진 지점이라고만 인식할 뿐,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없었던 탓이다. 그런 나에 비해 시벨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소란스럽다곤 해도 적어도 여기서 반나절은 더 가야 하는 거리야. 나와 엘의 청각이 유난히 좋은 탓이니까, 보통은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지.” “헉. 반나절? 그렇게 먼 거리에서 벌어지는 소리도 감지한단 말이에요?” “별로 놀랄 건 없어. 우리 유니콘 종족은 마음만 먹으면 나흘이 떨어진 곳에서 일어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거든. 응? 엘? 뭐하는 거야?” “아아. 물의 기억을 읽어볼까 하고.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말이야.” 그냥 싸움도 아니고 정령이 개입된 것이니 정령왕이 된 입장으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까지 이어지는 수분의 감각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근처에서 싸움을 관전(?)중인 여러 마리의 나이아스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한 여자아이를 상대로 저렇게 많은 인간들이 공격을! -여자아이가 위험해. 저러다 죽겠어. -아니, 죽이진 않을 거야. 납치하는 게 목적인 것 같은걸?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멀든님의 얼굴이 무서워. -하지만 곧 역소환 되실 것 같은데? 여자아이의 힘이 다 떨어진 것 같아. -지금의 상태론 아무리 멀든님이라 해도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여전히 재잘거리기에 정신이 없는 나이아스들은 하나같이 한 존재에 대한 걱정을 가득 담고 있었다. 그들이 내뱉는 이름이 낯설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곧 묘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이 정령사 인 것 같아. 그것도 땅의 중급인 멀든을 다루는 모양이야.” “그럼 중급 정령사라는 말이야? 꽤 재미있겠군.” “글쎄. 상황을 보니 그리 유리한 것 같지는 않은걸. 마나가 거의 다 소모된 상태인가 봐. 나이아스들 말로는 아직 어린 소녀라는데, 어째서 이런 곳에서…” “뭐? 소녀?” “으응?” 순간 나는 이상하리만치 광채가 돌기 시작하는 시벨의 눈동자에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녀석은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구하러 가자, 엘!” “헉…제정신이야? 걸어가면 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여기서 반나절이라고, 반나절.” “그런 것 쯤 내가 본체로 변신해서 날아가면 1시간이면 충분해. 그 동안만 잠깐 비 안 내리게 하면 되잖아? 정령사라잖아, 정령사. 다치면 어떡해?” “어떡하냐니, 그거야 그 쪽 사정…뭐야, 시벨. 혹시 여자애라는 말 때문이야?” “응? 아, 아니, 그게…” 당황한 얼굴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는 것을 보니 대충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다. 여자한텐 사죽을 못 쓰는 종족이라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그 꼬리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손사레를 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기 시작했다. “내, 내가 그 앨 만나서 뭘 어쩌겠다는 뜻은 아니야. 단지 우리 종족 자체가 여자에 대해선 무조건 호의적이라 그래. 어린 여자애가 어려움에 처했다는데 무시할 순 없잖아.” “하지만 만약 그 여자애 쪽이 잘못한 거였다면?” “그렇다 해도 일단 목숨은 구해줘야… 그렇게 보지 마, 엘. 지난 시절의 버릇은 이미 다 고쳤다고. 지금은 정말 순수하게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뿐이란 말이야.” 지난 시절의 버~릇? 아무래도 녀석은 한창시절 잘 나가는 바람둥이로 이름을 떨쳤던 모양이다. 저렇게 민망해 하며 변명 비스 무리한 것을 털어놓는 것을 보면. 뭐, 유니콘의 본능 자체가 그렇다는 걸 내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멀쩡한 일행을 팽개치고 유희의 로맨스를 즐기겠다며 홀로 떠난 라피스 같은 자식도 있는데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옆에 있던 이사나를 돌아보았다. “어떡할래, 이사나? 너도 시벨리우스의 의견에 찬성이야?” “글쎄. 몰랐다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는데 모른 척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않을까?” “그럼 할 수 없지. 시벨리우스! 아까 네가 말했던 대로 유니콘으로 변해서 빨리 다녀오자고. 시간이 더 지체됐다간 물 위에서 자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아, 응!” 파앗- 눈에 띄게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녀석은 금세 날개달린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곧 우리들을 향해 등에 타도록 재촉했다. 그리곤 우리가 등에 앉는 걸 확인하자마자 날개를 펄럭이며 곧바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 그럼 간다! 둘 다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우왓- 잠깐!! 시벨 좀 천천히…” 그러나 시벨리우스의 몸은 이미 전 속력으로 질주하는 상태였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구름들과 쐐애애액- 터지는 무서운 바람소리. 반나절을 한시간만에 주파한다는 녀석의 말이 허언이 아님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지만 나로선 절대 기뻐할 수 없었다. 녀석의 위에 안장도 고삐도 없던 탓에, 등에 탄 우리는 갈기털 하나만 붙잡은 채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상 최악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 * * 나와 이사나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밝은 금발머리를 가진 소녀 한명이 6명의 남자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나를 무리하게 끌어다 쓴 탓인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는데, 짐작보다 어려보이는 모습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중급 정령사를 다룰 줄 아는 정령사라면 아무리 어려도 15세 이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저 소녀는 겉보기에 결코 12세를 넘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나 역시 놀란 표정인건 마찬가지였지만, 녀석이 놀란 이유는 나와는 전혀 다른 것 이었다 “검은 복면? 설마 숙부의 기사?” “응? 무슨 소리야?” “소녀를 공격하고 있는 남자들 말이야. 입고 있는 옷과 복면이 나를 추격하는 어둠의 기사들과 같아. 내 짐작이 맞다면 저 녀석들은 숙부의 기사들이야.” “엥?”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런 낯선 타국의 오지. 그것도 전혀 뜬금없는 상황에서 나타난 게 대공의 기사들이라니? 나는 황당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물었다. “정말 대공의 기사들이 맞아?” “틀림없어. 나를 쫓던 추격대와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는 걸.” “그럼 혹시 저 여자애도 누군지 알아?” “아니, 전혀. 오늘 처음 보는 아이야.” “정말? 뭔가 대공과 연관 있는 애인 건 아니고?” “글쎄…” 어이없기는 이사나도 마찬가지인 듯, 녀석은 그들이 왜 우리가 아닌, 전혀 상관없는 여자애를 공격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땅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조금 더 자세히 소녀가 처한 상황을 관찰 할 수 있었다. 소녀가 불러내었다는 땅의 중급 정령 멀든은 우리가 이곳에 오는 사이 이미 역소환 되었는지, 지금은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주위엔 몇 마리의 놈들이 흙을 이용하여 높은 방어벽을 구축해 놓고 있었다. 상대편 남자들의 매서운 공격을 보건데, 얼마지 않아 무너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대단한걸. 계약된 정령의 역소환은 어른한테도 상당히 큰 충격일 텐데. 그걸 견디는 중에 또 다른 하급정령들을 소환해 방어진을 형성하다니… 정말 어린애 맞아?’ 당장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도 전투에 철저하게 임하는 걸 보니, 어리다고 절대 얕볼 수 없는 소녀였다. 그래서인지 상대편 남자들의 얼굴에도 사뭇 비장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중 일행의 리더인 듯한 남자가 입을 비죽이며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한 꼬마로군. 방심했다가 큰 코 다칠 뻔 했어. 이런 와중에도 몸을 보호할 힘이 남아있다니, 과연 폐하께서 선택한 아이 답구나.” “헉, 헉-” 소녀는 말 할 기운도 잃었는지 큰 눈을 힘겹게 깜빡일 뿐이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이제 포기하는 게 좋을 거다. 우리로서도 너를 상처 입히고 싶진 않으니까 말이야. 소중한 제물이 다치면 곤란하지 않겠어?” ‘제물?’ 피식 웃는 남자의 미소가 어쩐지 잔인해 보인다는 인상을 받은 순간, 나는 그의 말에서 어렵지 않게 최근에 들었던 대공에 대한 이야기 한 가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마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어린아이들을 잡아간다고 했었지!’ 맙소사. 그럼 정말 저 녀석들이 대공의 기사란 말이야? 자기 나라 애들로도 성이 안차서 타국의 소녀까지 노리는? 나는 기겁을 하며 소녀와 남자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소녀는 이제 울 듯한 얼굴로 쉰 목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왜 하필 나야! 왜 나를 데려가겠다는 거야! 누가 제물 따위 하고 싶다고 했어?” =================================== 짧군요; 에에..비축분을 만들어야 했는데 오늘 글을 한 장도 못써놔서;;ㅡㅡ;; 죄송합니다;; 리플의 수가 200을 넘었더군요; '내게도 이런일이!' 라고 심각하게 경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봐주신 분들, 리플 남겨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더불어 오타 지적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 역시 '제물'로 알고 있었는데; 쓸 때 눈에 뭔가 씌인걸까요;; 왜 ㅐ로 했는지 스스로도 전혀 이해가 안되는 중입니다;; 올리기 전에 자세히 살폈어야 했는데; 미처 소홀히 넘겨버려 글의 흐름을 망친 듯 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론 주의 하겠습니다.ㅜㅜ 아참, 이사나의 나이는 올해 17살입니다. 알리사노와는 4살 차이♥ 궁합도 안 보는 관계지요. 우후후후후후..(음침..) 제왕의 반려(3) “후후후. 타고난 너의 운명을 탓하려무나. 우리는 그저 별의 계시를 받았을 뿐이니 말이다.” ‘별의 계시?’ 저건 또 무슨 소리일까? 설마 이번에도 마신의 신탁이 내린 건가 싶어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의문에 답한 것은,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이사나였다. “별의 계시란 밤하늘의 별을 읽고 예언을 하는 점술가의 말을 뜻해. 주로 사람의 운명을 점하여 그 궤도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지.” “음? 그럼 저 소녀가 제물이 되어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잡아간다는 소리야?” [꼭 그렇진 않아, 엘. 제물이 될 운명이라기 보단, 제물이 ‘되면’ 좋을 운명이란 게 있는 셈이니까.] “제물이 되면 좋을…?” [응. 그만큼 저 소녀의 운명이 고귀하다는 소리지. 귀한 선물일수록 돌아올 이득이 큰 셈이잖아?] 결국 소녀를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바라는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였다. 대공이 아이들을 잡아다 제물을 바친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런 행사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기에 나는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에게 바치는 거라고 했었지, 아마? 대공은 대체 뭘 위해서 제물을 바치는 걸까?” “글쎄. 마신전의 제사란 언제나 불규칙 한 것이니 알 수 없지. 숙부는 섭정왕이 되기 전부터 제사를 지내왔었거든. 설마 인간을 잡아다 한다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야.” “섭정왕이 되기 전부터? 그럼 언제라는 소리야?” “숙부가 신관장으로 추대될 당시였으니까…내가 태어나기도 전일거야. 아마도 25년 전? 아, 새해가 지났으니 올해로 26년 일 거야.” “!” 어긋난 수레바퀴가 드디어 맞물린 듯한 느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어지는 공통된 시간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사라진 시기와 일치한다는 소리?”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뤼엔의 나이는 올해로 26세. 나에게 정령왕의 자리를 물려준 후 곧바로 신이 되었으니, 만약 내가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정령왕이 되었다면 그와 같은 나이였을 것이다.(그의 전 엘퀴네스 시절의 나이를 제외한다면.) 그러나 26년 전 그날, 명계의 실수로 잠깐 다른 차원으로 건너간 바람에 나는 이제야 태어난 셈이 되었고, 그 사이의 공백동안 대륙은 가뭄에 물들어 있었다. 26년 전에 신관장으로 추대된 유카르테 대공. 그리고 26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지게 된 나. 이것이 정말 우연인 것뿐일까? “음…이거 아무래도 따로 조사해 봐야겠는데?” “조사라니?” “아니, 아무것도. 지금은 무엇도 확실하지 않으니 나중에 알려줄게, 이사나. 일단은 저 소녀부터 구하는 게 시급한 것 같아.” 아닌 게 아니라 소녀의 상태는 상당히 심각했다. 더 이상은 한계였는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하급의 놈들까지 전부 역소환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미 한번의 역소환으로 몸에 무리가 간 상태에서 다시 충격이 가해지자, 소녀는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풀썩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의식을 잃어가는 듯 탁해진 눈동자에선 구슬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공의 기사들은 낄낄거리고 웃으며 소녀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지만. “정말 골치 아픈 년이로군. 대공전하께 선택된 것을 기뻐할 것이지 감히 반항이나 하고 말이야.” “어이어이. 대공전하라니, 이제 황제폐하라고 불러야지.” “아차, 그렇지. 후후후. 솔트레테의 위대한 황제폐하께 영광 있으라! 크하하하!” 바로 그 순간, 나는 소녀의 달싹이는 입술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트, 트로웰…” “!!!”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그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트로웰이라니, 설마 저 소녀는 그와 만난 적이 있었던 걸까? 서둘러 살펴본 소녀의 이마 어디에도 정령왕의 인장은 발견할 수 없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예감에 서둘러 시벨리우스를 재촉했다. “시벨! 고도를 완전히 낮춰줘. 내려가서 저 아이를 구해야겠어.”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엘. 그나저나 어떻게 할까? 이대로 바로 날려버릴까?] “응? 어떻게?” [전에도 한번 봤잖아. 이마에 돋아난 뿔은 우리 유니콘 일족이 힘을 발현하는 장소야. 이정도 거리라면 곧바로 마법을 난사할 수 있는데.] 하지만 그 말을 제지한 것은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이사나였다. 어쩐지 잔뜩 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은 대공의 기사들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이 일 나한테 전부 맡겨줄 수 없을까?” “응?” [그게 무슨 소리냐, 이사나? 저 녀석들을 너 혼자 처치하겠다고?] “네, 그렇게 하게 해줘요, 시벨님. 부탁해, 엘.” “아니. 그건 어렵지 않지만…갑자기 왜?” 지금까지 이사나는 한번도 스스로 나서서 전투에 임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뒤에서 보조해주는 것에 그쳤지, 본인이 주도한 전쟁에는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그랬던 이사나가 지금은 자청해서 맡겨달라는 말을 하니, 나는 그야말로 어리둥절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녀석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솔트레테의 황제는 나야.” “…!…” “적통 황제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황제로 추대하는 것은 명백한 반역 행위. 그것을 지금 내 눈으로 목격한 이상, 절대로 그냥 묵인할 수 없어. 나를 위해 싸워 죽어간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 자리는 내가 지키고 말겠어.” 새파란 분노를 머금고 있는 눈동자. 지금까지 이사나에게서 이런 눈빛을 본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제 서야 녀석이 단순한 내 또래가 아닌, 한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황제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쩐지 훌쩍 자라버린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에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좋아, 이사나. 녀석들은 너에게 맡길게. 우리는 여기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멋지게 소녀를 구해서 돌아오라고.” [흠…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나도 반대할 이유가 없지. 잘 다녀와라. 하지만 위험하다 싶으면 끼어들 테니까 각오하라고.] “후후, 고마워요 모두. 하지만 걱정 마세요. 저 정도쯤은 문제없으니까요.” 확실히 요 근래 이사나의 정령술은 놀랄 만큼 발전하여, 이제 내 도움이 없이도 몇 마리의 시큐엘들을 거뜬히 불러낼 수 있을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답을 하는 그의 눈빛은 이제까지완 다르게 자신에 가득 차 생기가 넘쳐흘렀다. [그럼 일단 조금만 기다려. 녀석들 근처에 착지를 해야…] “아니, 그럴 필요 없어요, 시벨님. 저 혼자 다녀올 수 있어요. 두 분은 제가 하는 걸 잘 지켜봐 주세요.” 그렇게 대답한 이사나는 냉큼 시큐엘을 소환하여 그 등을 타고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섰다. 쐐애액-바람을 가르는 맹렬한 소리가 귓가를 쟁쟁히 울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상황파악이 덜 된 눈으로 멍하니 녀석의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대체 이사나가 언제부터 저렇게 행동력이 빨랐지?” [쿡쿡쿡. 원래 남자들은 미인 앞에선 강해지는 법이지.] “흐으음. 결국 황제의 책임이니 뭐니 해도, 기사도 정신이 발휘된 것?” [완전히 부정할 순 없을 걸? 뭐라 해도 녀석은 벌써 17살이잖아. 인간들 나이론 한창 좋을 시기지. 더구나 저 소녀, 인간치곤 꽤나 예쁘장하기도 하고.] “아, 그런가?” 그 동안 하도 미형의 인간들만 봐와서 그런지 이제 어지간한 외모에는 둔감해져버린 나는, 그제 서야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기절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탐스러운 금발 머리카락과 귀염성 있는 얼굴이, 그 나이치고 흔치않은 아름다움의 소유자 인 듯싶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가장먼저 비통한 한숨부터 흘리고 말았다. “‘예쁘다’라는 것을 순수한 감동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할 날이 올 줄이야…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엘?] “아니, 별거 아니야. 그저 눈이 너무 높아져 버린 것이 슬플 뿐.” [……?]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되었냐고? 뻔하지 않은가. 원래 이런류의 스토리에선 악당과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등장한 기사의 대화란 늘 거기서 거기인 법이다. 그래도 굳이 모르겠다는 이를 위해 설명하자면 대충 이렇다. 이사나는 초반 멋지게 시큐엘을 타고 내려가 소녀를 어깨에 매고 돌아서는 남자들을 향해 소리쳤다. “멈춰라! 그 소녀를 내려놓지 않으면 내 칼이 너희를 응징할 것이다!” 제법 사납게 소리친 음성에 대공의 기사들은 어깨를 움찔하며 집어넣었던 검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들 모두는 낭패한 시선으로 이사나와 그가 타고 있던 시큐엘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녀와의 전투 이후 사라졌던 긴장감이 그들 사이로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쳇! 이런 오지에 또 다른 녀석이! 게다가 저건 또 뭐지? 투명한 몸체를 보니…설마 정령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다행히 소년 하나뿐 다른 일행은 없어 보이는 군요. 어떻게 할까요, 대장?” “목격자는 사살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말라는 폐하의 지시를 기억하십시오.” “네 말이 옳다. 타국에서의 사살은 내키지 않지만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순 없지.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꼬마야. 이건 순전히 끼어들 순간을 잘 못 택한 네 탓이니 말이다.” 복면을 쓰고 있어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남자의 눈은 분명 야비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다르게, 안타깝게도 이사나의 옆에 존재한 정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물이나 바람의 하급 정령쯤일 거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나와 시벨은 혀를 끌끌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상대편이 이쪽의 본 전력을 눈치 채지 못하는 상황이라면야, 이 게임은 시작도 하기 전에 미리 우승을 거머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끝났군.” […끝났네. 인간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어리석군. 어째서 정령인 줄 알면서도 저렇게 무방비한 모습인거지?] “첫째. 이사나가 어리고 여리여리(?)해서 우습게 보였다. 둘째. 쪽수를 믿고 기고만장해 있다. 셋째. 중급 정령을 다루는 소녀의 실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어서 모든 정령사가 만만해 보였다. …뭐 이 정도가 아닐까?” [흐음. 하긴, 정령사치곤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 같긴 하군. 중급 정령도 꽤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저 놈들의 실력이 그만큼 대단한건가?] 의아한 얼굴로 물어오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나는 냉큼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일단 소녀가 너무 지쳐있었다는 것과, 나이가 어려서 중급 정령의 컨트롤이 힘든 상태라는 것이 문제였겠지. 아무튼 대단해. 저 나이에 벌써 땅의 중급 정령과 계약하다니…이대로라면 몇 년 안에 트로웰의 소환도 가능할지도…” [호오~ 그 정도야?] “응. 그런데 이상해. 아까 기절하기 전에 분명 뭐라고 중얼거렸는데, 그게 내 귀에는 트로웰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거든. 설마 이미 알고 있던 사이일까?” [그럴 리가. 그냥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정령왕을 소환해 보려던 거겠지. 무엇보다 땅의 정령왕이라면 그 시커먼 꼬마 녀석을 말하는 거 아니야? 그 녀석, 인간에겐 별로 좋은 감정이 없어 보이던데, 뭐가 예쁘다고 인간여자애 따위와 친분을 맺어뒀겠어?] “에? 시벨리우스, 트로웰을 알아?” “에? 시벨리우스, 트로웰을 알아?” 무언가 상당히 친근한 듯한 어조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트로웰의 외모를 보고도 단순히 ‘시꺼먼 꼬마’정도로 기억하고 있는 그의 기억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말이다.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당연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진 않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었지. 그러고 보니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 가 몰라? 당시만 해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성격이 잔뜩 꼬인 녀석이었거든. 유일하게 마음 터놓고 지내는 건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 정도일까? 엘퀴네스와 이프리트와는 아주 상종을 안 하고 지내기로 유명했어.] “…농담이겠지.” [아니야, 정말이야. 게다가 인간들을 어찌나 싫어하는지, 유희를 나가서도 인간들이랑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정령이었다고. 너한테도 대놓고 싫은 티 냈던 거 기억 안나? 그때 너 굉장히 많이 서운해 했었는데.] 기억 날 리가 없다. 녀석이 말하고 기억하는 ‘엘’은 내가 아니었으니까. 내가 알고 있는 트로웰은 대책 없이 친절한 성격에, 종족을 불문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진 상냥한 녀석이었다. 때문에 나로선 도무지 그의 말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네 말을 들으면 어쩐지 미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많단 말씀이야? 그 ‘엘’이란 녀석도 그렇고, 전대 엘퀴네스 이야기도 그렇고.” [하지만 사실인걸. 유니콘의 기억력은 드래곤에 비견된다고. 절대 착각일리 없어.] 시벨리우스는 단호한 얼굴로 나의 수상하다는 시선을 떨쳐버렸다. 뭐 어차피 의심해봤자 증거가 없으니 소용없겠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트로웰이나 엘뤼엔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는 걸.’ 그것이 바로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녀석과의 대화에서 내가 생각해낸 유일한 해결방법이었다. *** 초반 예상했던 대로, 기사들은 이사나가 어리다는 사실을 얕잡아 처음부터 전력투구를 다하지 않는 바람에 큰 낭패를 보고 말았다. 그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도도한 물의 정령에 의해 들고 있던 검들이 산산조각 난 후였다. 쨍그랑-파삭! 강철도 유리처럼 잘라내 버리는 시큐엘의 이빨에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헉! 이, 이럴 수가! 대체 저 건 뭐지?!” “단순한 하급정령이 아니라는 소린가!” “무언가 이상합니다, 대장! 저 녀석은 평범한 소년이 아닙니다!” “큭- 이런 험한 사막에 꼬마 혼자 온 것이 이상하다 했더니…!!” 남자들은 분한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손잡이만 남은 검을 바닥에 세차게 집어던 진 그들은 곧 품 안에서 짧은 단검이나 표창을 몇 개씩 꺼내 손에 쥐었다. 검을 못 쓰게 될 상황을 대비하여 미리 준비해둔 무기인 듯 했다. 그것을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본 이사나는 평소와는 전혀 다른 엄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만만히 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너희들의 생각만큼 난 약하지 않으니까.” “크흑! 조그만 것이 말만 많구나! 제대로 본때를 보여주마!” 바로 그때였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기사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에 새파란 기운이 서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하게만 보이던 단검이 굉장히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큰둥한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제에 검기는 조금 다룰 줄 아는 모양이군. 소드 익스퍼드의 상급 정도 되는 실력인가 보지?] “검기?” [아아. 검에 마나를 불어 넣는 거야. 수련의 강도에 따라 위력이 천차만별로 달라지지. 검기가 서린 칼은 정령을 베어낼 수도 있어.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이사나가 위험해 질 거야.] “뭐? 그럼 가서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일단 지켜봐야지. 솔직히 말해 상급, 아니 정령왕을 소환한 정령사가 겨우 저까짓 기사들 몇 명을 못 이긴다는 건 체면이 영 아니니까 말이야.] 녀석의 말마따나 이사나는 검기가 서린 칼날을 보면서도 별 다른 긴장감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우습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을 뿐. 꿈틀. 기사들의 미간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웃어? 너야말로 우리들의 실력을 너무 과소평가 하는 게 아니냐 꼬마야? 난 지금 당장이라도 네 목숨을 취할 수 있는데 말이다.” “흐음. 할 수 있으면 해보던지. 장담하지만 너희들은 내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하고 쓰러질 거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 건방진!!” 기사들은 분을 못 이겨 막무가내로 녀석을 향해 단검을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새파란 검기를 머금은 칼날이 쐐애액-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사나에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러자 이사나는 담담한 어조로 옆에 있던 시큐엘을 불렀다. “시큐엘!” “크하하핫! 소용없다! 제 아무리 정령 따위! 검기를 실은 단검을 감당할 수 있을까 보냐! 이 건방진 자식 본때를 보여주마!” 휘이익! 그들은 이사나가 단검을 막기 위해 잠시 한눈을 판 틈을 타 또 다른 무기를 꺼내쥐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6명이나 되는 성인들이 고작 소년 하나를 향해 전력질주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지만, 그 기세만큼은 칭찬하고 싶을 만큼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는 상황을 두 눈 치켜뜨고 바라보아야만 했다. 바로, 방금 전 자신들이 날린 단검이 고스란히 그들의 복부에 와 박히는 것을 말이다. 쐐애액! 퍼어억! 퍽! “크아악!” “커헉!!” “으악!!”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자들의 몸은 저만치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옷 위로 새빨간 선혈이 뚝뚝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지켜보는 우리나 당한 기사들이나 할 말을 잃고 멍해진 건 마찬가지. 한순간에 정적에 휩싸인 그들 사이로 짧은 신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게 대체…어떻게 된…” 멀쩡히 잘만 날아가던 단검이 왜 갑자기 진로를 틀어 자신들의 복부에 박힌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부릅뜨는 기사를 본 이사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친절한 설명을 건넸다. “뭔가 착각들 한거 아니야? 내가 굳이 칼을 ‘막기만’할거란 보장은 어디에서 나온 거지?” “무, 무슨?” “확실히 검기를 실은 무기라면 정령에게도 꽤나 까다로운 상대이기니 하지. 하지만 말이야. 단순히 방향을 틀어놓는 것 정도는 하급정령이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거든. 어때? 자신이 던진 칼을 고스란히 맞은 감상이?” “크, 크윽!” 기사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몸에 여기저기 박힌 칼을 힘겹게 뽑아냈다. 푸욱- 살에서 뽑히는 끔찍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흘러내리는 피의양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쿨럭쿨럭. 거친 기침을 내뱉은 기사들의 대장은 쓰고 있던 두건을 거칠게 벗어던지며, 선혈이 흘러내린 입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새파란 분노를 드리운 눈동자가 똑바로 이사나를 향해 쏘아보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해놓고 네놈이 무사할거라 여긴 건 아닐 테지. 우리가 누군지 아느냐? 바로…” “솔트레테 제국의 어둠의 기사단. 그 이름도 유명하신 반역자 유카르테 대공의 개들 아닌가? “뭣이?! 감히 황제이신 유카르테 폐하를 향해 반역자라니!! 네 이놈…커헉!!” 남자는 할 말을 다 잇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열 받은 이사나가 시큐엘에게 명령하여 그대로 바닥에 넘어뜨린 것이다. 크르릉-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탄 시큐엘은 험악한 이빨을 번뜩이며 위협하듯 낮게 울음소리를 흘렸다. 기사가 그 모습에 얼어있는 사이 이사나는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쳐. 네놈들의 나라엔 황제가 두 명인가? 멀쩡한 황제가 눈을 크게 뜨고 살아있거늘, 언제부터 유카르테 대공이 황제라 불리기 시작했단 말이냐! 한 번 만 더 그따위 허언을 지껄였다간 죽여 버리고 말겠다!” “…!! 크, 크흑! 네놈! 황제파인건가! 설마 여기 나타난 것도 우연이 아니라 전부 계획적인 거냐!” “그렇든 아니든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말해! 무고한 소녀를 끌고 가려는 이유가 뭐냐! 이 땅은 솔트레테가 아니다. 자칫하면 국경의 문제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일 터! 네놈들의 왕은 대륙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인가!” “이야아아앗!” 그때였다. 이사나가 한 사람을 채근하고 있는 틈을 타, 녀석의 등 뒤에 있던 다른 기사한명이 검을 치켜들곤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사나! 위험…!!” 그러나 나는 굳이 그 다음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언제 불러낸 건지 잽싸게 나타난 또 한 마리의 시큐엘이 이사나에게 달려드는 기사의 몸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던 것이다. 우직-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아악!” “허억!” 그러나 그 순간조차 이사나의 시선은 오로지 그들의 대장인 듯한 남자에게 향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녀석의 얼굴을 본 기사들은 저마다 질린 표정으로 뒤로 한 발짝 씩 물러서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이사나가 아닌 것 같아.” [흐음, 그래도 멋진데? 남자라면 저런 면도 있어야지. 한번쯤은 무서운 모습도 보여줘야 아랫것들을 다루기가 편하거든.] “하지만 난 저런 걸 가르친 적이 없는데 대체 어디서 배운 거지? 흑, 이사나…이 형님은 슬프다. 대체 왜 그렇게 훌쩍 자라 버린 거야.” [킥킥. 너무 녀석을 애 취급 하는 거 아니야? 17살이면 성인이라고, 성인.] “쳇.” 그 후로도 이사나는 몇 번이나 덤벼드는 기사들을 아주 깨끗하게 땅바닥에 눕혔다. 그들 중에선 기절한 소녀를 인질로 삼아 위협하는 놈도 있었지만, 그 역시 시큐엘의 활약으로 깔끔하게 쓰러트릴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함께한 일행들이 전부 쓰러지고 자신 혼자만이 남게 되자 남자는 뻣뻣한 표정으로 입술을 악물었다. 그리곤 바득바득 이를 갈면서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젠장. 황제파에서 제왕의 반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할거란 생각을 못하다니, 확실히 나의 불찰이다. 게다가 이런 소년을 앞세워 방심을 유도할 줄이야. 기한은 앞으로도 충분하니 지금은 물러서는 편이 좋겠군. 이러다간 나까지 개죽음 당하겠어.” ‘제왕의 반려?’ 처음 듣는 낯선 말이었지만 그것이 소녀를 뜻하는 말임은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사나는 듣지 못했는지 여전히 남자를 향한 채근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 오고서도 말할 생각이 없다는 건가? 유카르테 대공이 꾸미고 있는 일이 뭐지?” “흥- 그런 걸 순순히 듣길 바랬다면 헛다리짚었다, 꼬마야. 확실히 이번엔 내가 방심한 것 같군. 하지만 다음번엔 어림도 없을 거다. 네놈에 대한 건 대공께 반드시 보고해두지. 아마 앞으로 그 얼굴로 대륙을 활보하고 다니긴 어려울 거야!” 다 죽어가는 비참한 상태에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치는 모습에 이사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남자가 잽싸게 품에 있던 주머니를 꺼내 앞으로 집어 던졌던 것이다. “무슨! 윽!” 콰아아아아앙!! “이사나!” 커다란 폭음이 울리는 순간, 매캐한 연기가 퍼지며 눈앞은 아무것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캄캄해지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바람의 정령을 시켜 연기를 몰아내고 났을 땐, 이미 남자가 있던 자리는 깨끗하게 비워진 상태였다. 사방이 안 보이는 틈을 타 몸을 내 뺀 것이다. 나는 얼른 시벨의 등에서 내려와 이사나가 있던 곳으로 달려갔다. “콜록, 콜록! 콜록!” “이사나 괜찮아?” 연기의 향이 독했는지 녀석은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걱정스럽게 묻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지만, 얼굴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간신히 숨을 고른 녀석은 씁쓸한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렸다. “대체 그는 왜 이런 짓까지 하면서…황제가 되려는 걸까?” “응? 그게 무슨…헉!” 무심코 주위를 둘러본 나는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함께했던 나머지 기사들이 모두 시체가 되어 바닥에 엎드려져 있었던 것이다. 이사나에 의해 기절하긴 했어도 모두 숨은 붙어있는 상태였는데, 아마 도망간 남자가 그새 전부 죽이고 간 모양이었다. 동료애라고는 눈꼽만큼도 보이지 않을 만큼 매정한 대처가 아닌가! 잠시 할말을 잃고 잠시 숨을 삼킨 나는 잠시 후 그들이 노린 여자애가 생각나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나 우리가 방심하는 틈을 타 끌고 간 게 아닌가 생각된 것이다. “아참! 소녀는? 그 여자애는 어떻게 됐어?” “아, 그건 걱정 마, 엘. 혹시 몰라 시큐엘에게 보호해달라고 부탁해뒀었거든. 많이 지쳐있는 것 같은데, 엘이 상태 좀 봐줄래?” “아, 응.” 이사나의 말처럼 소녀는 완연히 창백한 기운에 잔뜩 지쳐 축 늘어진 듯이 보였다. 살짝 이마를 짚어보자 일반인의 온도보다 약간 높은 체온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심한 탈진상태에, 열이 오르고 있는 것 같았다. 작은 몸으로 연달아 이어진 두 번의 역소환을 경험했으니 상태가 정상이라면 그것이 더욱 이상했을 것이다. 그나마 쇼크로 심장이 마비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랄까? 나는 한숨을 내쉰 뒤 천천히 치료술을 시전 하여 소녀의 몸을 회복시켰다. 따뜻한 흰빛이 감싸고돌자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백지장처럼 창백했던 피부에 옅은 장밋빛이 돌기 시작했다. “어때, 엘? 괜찮은 거야?” “응. 치료했으니까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마나소비가 너무 심한데다, 역소환에 의한 쇼크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뿐이니까. 그런데 이런 사막에 어린여자애 혼자서 무슨 일로 온 걸까?” “글쎄…. 어쩌면…나와 만날 운명이었던 건지도…” “뭐?”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사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지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녀석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마냥 새빨갛게 붉어져 있는 것을 말이다. 맙소사. 이사나. 너 정말 이런 꼬맹이한테 반해버린 거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내 옆에선 어느새 블루엘프로 폴리모프한 시벨리우스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아 좋을 때로군, 좋을 때야. 바야흐로 로맨스의 시기라는 거지.” “그, 그런 거 아니에요! 시벨님!!” “그치만 나는 분명히 들었는걸? ‘나와 만날 운명’이란 건 대체 무슨 소리?” “그, 그건!! 그, 그러니까…아, 아무튼 아니라니까요!” 이사나. 그렇게 붉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아니라고 해도…믿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거든? ‘크흑, 얼마 전엔 시큐엘이 말썽을 부리더니 이젠 이사나까지! 날더러 사위(?)도 모자라 며느리(?)까지 맞이하란 말이냐!!’ 나는 기절한 소녀의 얼굴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절대로 평범치 않은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6-5 만남(1) 이사나가 떠난 이후 클모어는 본격적인 전쟁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각국의 용병들을 고용함은 물론, 무기와 식량을 은밀히 사들이기 위해 후작은 몸이 두개가 되어도 모자를 지경이었다. 평소였다면 그의 옆에는 훌륭한 보조역할을 할 사랑스러운 여동생 에이프릴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전 이사나와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온 붉은 머리의 청년에 의해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내가 왜 그때 쓸데없이 이사나님께 보고를 했던 걸까.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말짱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후작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마 시간을 다시 돌릴 수 있었다면 이미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돌리고도 남았을 그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의 마음을 단 한번에 사로잡아 버린 자의 이름은 바로 라피스. 신분은커녕 정체조차 알 수 없어 수상하기 이를 데 없이 찝찝한 사내였다. 나이는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엘프에 비견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와 우아한 몸동작. 자연스럽게 명령체가 배여 있는 말투 등이 그의 태생이 천하지 않다는 것을 은연중에 입증하고 있었지만, 그러하기에 후작은 더욱 불안했다. 그가 알기로 귀족가의 자제 중 저토록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혹시 타국의 귀족일까도 싶었지만, 만약 그렇다면 한 제국의 내정분란에 타국이 개입한 셈이 되니 내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마치 처음부터 노린 듯이 에이프릴에게 접근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한창 이성에게 호감을 느낄 때라 해도 타이밍이 너무 짜 맞춘 듯하니 의심이 가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끄응, 그러고 보면 그 엘이라고 했던 물의 정령사도 수상하기는 마찬가지군. 꼭 어릴 때부터 그래왔던 마냥 폐하께 친근하게 대하는 것도 그렇고…. 폐하는 상관하지 말라셨지만 아무래도 불안한 심정을 감출수가 없단 말씀이야? 역시 몰래 알아봐야 하나?” 그때였다. 마치 봄바람을 타고 흐르는 듯한 맑은 미성이 그의 혼잣말에 대답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라비와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들어온 에이프릴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몰래 알아보시겠다니…설마 폐하의 일행을 뒷조사하시겠다는 거예요?” “크흠, 에이프릴.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하라고 누누이…”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그러다 폐하의 진노라도 사시면 어쩌시려고요.”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수상한 군데가 한둘이 아니지 않니. 뭘 어쩌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아만 보겠다는 거다. 폐하께서 신용해도 될만한 사람인지 어떤지 정도는 조사해둬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너도 그 라피스인가 뭔가 하는 청년을 너무 믿지 말거라. 수상하기로는 그가 제일 심하니까 말이다.” 짐짓 엄한 어조의 말투에 에이프릴은 고운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약간 나무라는 듯한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라피스님을 의심하시는 건 당치 않으세요. 그 분은 지금껏 우리에게 해를 입힌 적이 없었잖아요. 아니, 오히려 도와주기 위해 그 먼 길에서 선뜻 달려오시기까지 했는걸요. 그 분이 아니었다면 전 꼼짝없이 얼굴도 모르는 남자에게 시집갈 뻔 했을 거예요.” 그때의 일을 회상하듯 에이프릴은 슬며시 얼굴을 붉혔다. 당시 그녀는 대공이 억지로 주선해준 남자와 반강제적으로 결혼할 위기에 놓였었다. 그런데 소식을 들은 라피스가 그 즉시로 달려 와준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당당하게 찾아온 백작가의 아들을, 코웃음도 치지 않은 채 딱 죽기 좋을 만큼 손봐주던 그때의 모습을 에이프릴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 후로도 그는 바로 돌아가지 않고, 에이프릴을 지켜준다며 그녀의 옆에 머무르는 상태였다. 눈물날 만큼 고마운 배려였지만, 그것에 대한 후작의 입장은 확연히 달랐다. “바로 그게 문제라는 거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천만한 여행길인데 함부로 폐하의 곁을 비우다니! 나는 지금도 폐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기진 않을까 걱정을 그칠 수가 없단 말이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결코 그런 식으로 할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라피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엘이라는 정령사분의 실력이 굉장히 뛰어나시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어요. 오라버니도 그분의 말을 좀 믿어보세요.” “그의 어디를 믿고 신뢰할 수 있다는 거냐? 에이프릴, 답답한 소리는 그만하고 제발 정신 좀 차리거라. 툭하면 피토하기 일쑤인 그런 허약한 마법사의 어디가 좋든?” “오라버니!” 그렇지 않아도 염려하고 있던 부분이 언급되자 에이프릴은 날카롭게 반응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역시 라피스의 건강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평소에는 멀쩡하다가도 가끔씩 주저앉아 피를 토하거나 쓰러지는 일이 있었다. 이상한 것은 그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긴 커녕, 피식 미소 지으면서 이해하기 힘든 소리만 중얼거린다는 거랄까. ‘좀 작작 좀 쓰라고, 엘 녀석. 떼어놓고 와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지만 아주 날 죽일 생각이냐.’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새파란 얼굴로 비틀거리지만, 그것도 몇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해졌다. 새삼 괜찮냐고 묻기가 어색할 정도로 깨끗한 혈색이라, 그녀는 지금도 라피스에게 지병이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컨디션이 나쁠 뿐이라고 했어요. 오라버니가 생각하시는 것처럼 몸이 허약하다거나 병이 있는 게 아니라고요.” “휴우. 세상 어느 인간이 단순히 컨디션이 나쁜 정도로 피를 토한…아아, 그래 알았다. 내가졌다. 그 부분에 대한 건 더 이상 말하지 않으마. 그러니 울지 말거라.” 후작은 에이프릴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미우네 어쩌네 해도 결국은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이 좋아하는 남자였다. 이 이상 함부로 말하는 것은 후작 본인의 위신에도 걸맞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기분이 좀 풀어졌는지, 에이프릴은 재빨리 눈가를 훔치곤 평소처럼 미소 짓는 얼굴로 물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황제폐하의 친위기사단에게서 연락이 왔다면서요?” “그렇단다. 다행히 이곳 클모어까지 별 탈 없이 도착한 모양이야. 이틀 전에 전서구가 날아왔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을 거다. 경비대장인 퀼트경이 성안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로 안내할거야.” 후작은 내심 뿌듯한 얼굴로 미소 지었다. 황제의 친위대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지라 어느 정도 마음의 근심이 덜어진 것이다. 문제라면 이제부터 그들에게 이사나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냐는 거였다. 아무리 황제 본인의 입장이 강경했다 해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던전에 달랑 몇 사람만 대동해서 보냈다는 사실을 알면 달가워 할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후작에게 에이프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비밀통로라면 성 밖 동굴로 이어지는 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위급한 상황에서 몰래 저택을 빠져나가도록 만든 터널이다. 밖은 대공의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으니 이 수밖에는 눈에 뜨이지 않을 방법이 없겠더구나. 게다가 할버크 영주의 아들이란 놈까지 이번 너와의 혼담이 거절된 것에 앙심을 품고 있을 테니 말이다.” “흥, 그런 남자 따위. 대공에게 화를 당할까봐 혼담이 파기됐다고 보고하지도 못하는 겁쟁이인걸요. 라피스님이 제 옆에 계시는 한, 그에 대한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아참, 차라리 라피스님을 보내는 게 어때요?” “응? 그건 또 무슨 소리니, 에릴?” 후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에이프릴(애칭 에릴)은 명랑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클모어는 안팎으로 우리를 감시하는 눈동자로 가득한 상태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성의 경비대장인 퀼트경이 움직이면 틀림없이 적들의 시선에 발각될 거예요.” “하지만 그건 라피스란 남자도 마찬가지 아니겠니? 누구든 성을 나서는 모습을 보면 의심을 당할 텐데 말이다. 차라리 성의 지리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쪽이 더…” “모르시겠어요? 라피스님은 텔레포트가 가능한 마법사세요.” “!!” 순간 후작은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아무 말도 이을 수 없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입으로 ‘허약한 마법사’운운했으면서, 정작 이 순간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 “허- 그러고 보니 그랬구나. 그는 마법사였지. 그것도 꽤 훌륭한.” “네, 그래요. 들어보니 몸 전체에 투명화마법도 시전 할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일단 장소만 알려주면 그곳까지 투명마법으로 이동한 다음, 기사들을 텔레포트 마법으로 성내로 들여보낼 수 있을 거예요. 퀼트경이 가는 것보단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요?” “으음. 그거야 확실히 그렇다만…그가 순순히 응해 줄지…” “그거라면 저에게 맡기세요. 부탁해 보겠어요.” 모처럼 라피스가 후작에게 인정받을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에이프릴은 전에 없이 들뜬 표정으로 그렇게 대답했다. 어떻게든 연인의 장점을 부각시켜 후작의 호감을 사게 만들 작정인 듯 했다. 그 모습에 후작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딸자식은 키워봤자 소용없다더니…에이프릴이 딱 그 짝이군. 설마 이렇게까지 빠져있을 줄이야.’ 물론 에이프릴이 그의 딸인 건 아니었지만, 오라버니로서 허무한 심정이 들기는 마찬가지. 문득 인생무상이라는 단어에 절절히 공감하고 마는 그였다. “이 장소가 정확한 겁니까?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사람이 나온다고요?” 우연치 않게 동행한 뒤, 이사나의 친위 기사들은 샴페인 용병단에게 자신들의 정체를 솔직히 고백했다. 이왕 도움을 받을 바에야 자신들의 사정을 확실히 털어놓고 협조를 구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휴센들은 상당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그들은 얼마 전 이사나 황제 본인을 클모어로 안내한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그의 기사들을 안내할 위치에 놓이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우연인가. 상황이 그렇게 되고 보니 기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했고, 샴페인 용병단은 그것을 기꺼이 허락했다. 이왕 이렇게 된바, 카웰 후작이 비밀리에 모집하는 용병대에 가입 신청을 하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그들의 인연은 클모어 성의 입구만이 아닌, 후작이 머물고 있는 저택으로까지 이어진 참이었다. 후작이 보내온 전서구를 살피며 묻는 휴센에게, 어느새 자연스럽게 일행의 리더가 되어있는 알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후작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자를 보낸다고 했네. 아마 저택내부에 이어지는 비밀 통로로 안내할 셈이겠지.” “하지만 이상하군요. 이 전서구가 오늘 아침에 도착했다면, 마중 올 사람이 이미 나와 있어도 충분한 시간인데요.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 아닐까요?” “글쎄. 조금 늦어지는 걸지도 모르지. 카웰 후작은 준비성이 철저한 분이라 알고 있는데 좀 이상하긴 하군.” 바로 그 순간 그들의 머리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가 심하게 흔들린다 싶더니, 누군가가 휙-하고 내려왔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는 남자의 등 뒤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이 가볍게 찰랑거렸다. 그것을 본 샴페인 용병단과 기사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리 없이 경악했다. ‘이럴 수가!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기척을 느끼지 못하다니?!’ 샴페인 용병단은 물론, 기사들 중 태반은 이미 검술의 상급 경지를 훌쩍 넘어서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고작 나무위에 앉아있는 사람의 기척하나 잡아내지 못하다니! 설마 저 남자의 실력이 자신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인가? 그러나 붉은 머리의 남자는 기사들이 놀라건 말건 퉁명스러운 어투로 빈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당히 늦었군. 나는 또 하도 안 오기에 내일이나 올 셈인가 했지.” “…!!…서, 설마 그대가 카웰 후작님이 보내신 자인가?” “그럼 이 시간에 혼자 청승맞게 나와 있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데 생각보다 인원이 많군. 내가 듣기로는 12명이었는데 말이야. 그 사이에 6명이나 더 추가된 건 대체…응?” 따분함이 다분히 묻어나는 어조로 성의 없이 대답하던 남자는 문득 일행 중에 낯익은 사람이라도 발견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얼굴은 영 탐탁지 않다는 듯이 살풋 일그러져 있었다. “대체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불쾌한 듯이 던진 질문에 대답한 것은, 첫 만남 이후 이제까지 거의 존재감 없이 지내던 용병단의 소년이었다. 이름이 매튜라고 했던가? 알렉은 놀란 표정으로 소년과 그들을 마중 나온 청년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것은 매튜와 같은 일행인 용병단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튜, 너 저 사람이랑 아는 사이냐?” “척 봐도 귀족같이 보이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설마 널 괴롭히던 작자는 아니겠지?” “아아, 용병이 되기 전에 잠깐. 흠…그냥 조금 친분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이상은 설명이 곤란하군요.” 그는 어색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서 이어지려는 질문공세를 자연스럽게 끊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자는, 다름 아닌 누구보다 소년의 정체를 제대로 알고 있는 단 한사람- 정령사 페리스였다. 그는 얼떨떨한 얼굴로 소년과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땅의 정령왕과 친분이 있는 인물이란 말인가! 대체 저 남자는 누구지?’ 기척을 숨기고 있던 솜씨로 보건데, 대단히 뛰어난 실력을 가진 상대임은 틀림없었다. 무엇보다 인간이라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외형이 더욱 더 그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이지 않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땅의 정령왕과 친분까지 있는 존재라니! 하지만 그는 곧 이어지는 남자와 트로웰의 대화에 벙찐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엘과 합류한 것 아니었나? 그는 어쩌고 이곳에 혼자 와 있는 거지?” “흥,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잖아? 남이사 혼자 오든 말든.” “라피스. 그런 식의 대답으로 날 화나게 만들지 마. 그는 아직 이 세상에 미숙한 점이 많아. 내가 굳이 따로 부탁을 해야만 돌아볼 생각이야?” “어린애 취급은 그만둬. 엘도 엄연히 너와 같은 입장이라고. 오냐오냐 돌볼 존재가 아니라는 점은 네가 더 잘 알잖아?” ‘엘? 땅의 정령왕인 트로웰과 같은 입장? 설마… 물의 정령왕이신 엘퀴네스님을 말하는 건가?’ 그들의 말인즉슨, 저 라피스란 이름의 청년은 물의 정령왕인 엘퀴네스와도 친분이 있으며, 지금까지 함께 동행했다는 소리였다. 엘의 옆엔 항시 그의 계약자인 이사나가 존재했기에, 페리스는 조급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시, 실례지만…이사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 겁니까? 성내에 계시는 건가요?” “응? 뭐야, 넌. 여기에 오기 전에 소식도 듣지 못했나? 녀석들은 이미 다른 제국으로 여행을 떠난 지 오래라고.” “예에? 다른 제국?” 그러자 라피스의 대답을 들은 기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후작에게서 받은 편지에는 단순히 상단의 세력을 끌어 모으기 위한 준비 중이라고만 적혀 있었을 뿐, 설마 이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령왕인 엘퀴네스가 함께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크게 불쾌해 하거나 불안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단, 진실을 모르는 샴페인 용병단을 제외하면. “무슨 말입니까? 폐하께서 다른 제국으로 떠나셨다니. 이거 위험한 것 아닙니까?” “으음. 확실히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그래도 엘님이 함께 계신다면 신변의 위험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요. 일단 자세한 것은 후작님과 직접 만나서 들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엘이라니…설마 폐하 옆에 있던 그 파란머리의 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 알고 계시는군요. 하긴, 이전에 이사나님과 클모어까지 동행하셨다니, 당연히 엘님과도 친분이 있으시겠지요.” “예, 여기 매튜와도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소년이라서 인상이 깊었습니다. 둘이 꽤 사이좋은 친구인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고위급의 신관이라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만…아무리 그래도 사제가 개인의 호위나 전투엔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괜찮은 겁니까?” “네? 개인적인…친분?” 아무생각 없이 대답한 휴센의 말에 트로웰은 낭패한 표정을, 기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 역시 엘퀴네스의 정체를 알고 있던 자로서, 그의 친구라는 매튜를 새삼스럽게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이, 아까 붉은 머리의 남자가 엘님더러 저 소년과 같은 입장이라고 하지 않았냐?’ ‘응, 그랬지. 엘님을 어린애 취급한다고 나무라기까지 했잖아. 저 용병단과 만나기 전부터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다고 하면…설마 저 소년도 정령왕??’ ‘그, 그럴리가. 그건 너무 오버 아니야? 저애가 정령왕이라면 남자의 말투가 건방질 리가 없잖아.’ ‘하지만 저 남자는 엘님의 이름도 함부로 불렀는걸?’ ‘헉! 그렇다면 혹시 저 남자도 정령왕?’ 점점 갈 때까지 이어지는 상상에 기사들의 얼굴은 모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말을 꺼내놓고 보니 점점 그들의 정체가 그럴 듯 해보였던 것이다. 그러자 처음엔 아무생각 없이 보았던 남자의 붉은 머리카락이나 소년의 검은 피부마저 새삼스럽게 정령왕의 상징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런 기사들의 생각을 읽은 매튜,-트로웰은 짧게 혀를 차곤 다시 매서운 시선으로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엘은 아직 이 세계에 적응해야 할 부분이 많아. 때문에 누구든 옆에서 도와줄 존재가 필요한 상태다. 너라면 다소 건방지긴 해도 그 역할을 잘 해 줄 거라 믿었는데…실망이구나. 한낮 꿈에 젖어서 현실을 돌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녀석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쳇. 너무 그러지 말라고. 안 그래도 충분히 벌 받는 중이니까. 엘 녀석…날 죽이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어. 며칠 전엔 피까지 토했었다고.” “흐음. 그만큼 그가 긴박한 상황이었다는 생각은 못한 거냐?” “……” 정곡을 찌르는 트로웰의 말에 그렇지 않아도 내심 찜찜한 기분이었던 라피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것을 본 트로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했다. “덩치만 커다랗지 역시 어린애는 어쩔 수 없다니까. 나중에 엘과 만나면 확실하게 사과하도록 해. 그가 정말 화가 나서 너와의 계약을 취소하기 전에 말이다.” “…쳇.” 트로웰의 엄한 충고의 말에 라피스는 이렇다할 반박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의 주변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의 기운을 느끼면서도, 무시하고 혼자 단독행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한편 주변의 기사들과 용병들은 이 두 존재의 대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딜 봐도 소년티가 가시지 않는 매튜가 어른마냥 엄한 충고를 건네고, 오히려 한 성질 하게 보이는 덩치 큰 청년은 끽소리도 못하고 고분고분 받아들이고 있었던 탓이다. 그들은 다시 한번 저들끼리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것봐, 것봐. 저 소년은 땅의 정령왕이 틀림없다니까? 뭔가 말투부터가 위엄스럽잖아?’ ‘헉, 그럼 우리 지금까지 정령왕과 동행한 거야? 믿을 수가 없어.’ ‘이런 걸 두고 세상 참 좁다고 하는 거겠지? 그럼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은 정체가 뭘까? 대화를 들어 봐선 이프리트 인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계약 어쩌고 하는걸 보니 엘퀴네스님의 또 다른 계약자 인가 보지.’ ‘에에? 그거 두 사람하고 동시에 해도 되는 거였어? 내가 듣기론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제껏 인간 두 명이 한 정령왕과 계약한 역사는 없었잖아?’ ‘종족이 다르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척 봐도 뭔가 숨겨둔 정체가 있을 것 같지 않아?’ ‘헤에. 뭐냐, 그건. 설마 드래곤이라도 된단 소리냐?’ 마지막 알렉의 말에 기사들은 모두 한결같이 입을 다물었다. 드래곤이 무엇이던가! 대륙에 존재하는 가장 최강의 생명체! 포악한 성질머리와 거대한 힘! 그 육체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황성 하나는 박살낼 수 있는 어마어마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워낙 그 숫자가 적어 이제는 존재자체가 전설로 취급되는 종족이 바로 그들이었다. 평생가도 유희중인 드래곤 하나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기본 상식중의 상식. 기사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하하. 설마…아무리 세상이 좁아도 드래곤씩이나?” “맞아. 드래곤이라니… 상상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만 정령왕도 뵌 마당에 까짓 드래곤하나 못 만나겠어? 정령왕에 비하면 드래곤이 오히려 더 가능성 있는 게 아닐까?” “…음, 그건 그렇군.” 그랬다. 이미 그들은 평생은커녕 전설로도 만나보기 힘들다는 정령왕을 벌써 두 번째 마주치고 있는 상태였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무심히 넘어갔지만, 기적이라면 이미 이루어지고도 남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까짓 드래곤쯤(?) 하나 더 끼인다고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기사들은 모두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령왕과 드래곤이라는 게…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는 거였어?” “으음. 알고 보면 이 세상의 절반이 정령왕과 드래곤으로 채워진 걸지도 몰라.” “아, 그런 거야?” “그럴지도…” 그렇게 기사들의 오해는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있던 샴페인 용병단들은 여전히 영문모를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트로웰을 평범한 인간 이상으론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그의 태도의 변화만을 신기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본래 좀처럼 타인의 일엔 간섭치 않는 용병들의 생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기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은, 잠시 후 저들끼리 나름대로 상황을 판단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저 붉은 머리의 청년이 엘의 계약자 뭐시기라는 거야? 요즘은 신관도 계약하고 일을 하나보지?” “그게 아니라 저 청년이 용병인거겠지. 척 봐도 힘 꽤나 쓰게 생겼잖아? 의뢰인을 내팽개치고 혼자 활보하고 나니니 매튜가 저렇게 화난 거 아니야.” “근데 말투가 꽤나 설교조이지 않아? 대화만 들으면 매튜가 더 어른인줄 알겠어.” “그건 그래. 예의바른 매튜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저렇게 엄하게 대할 린 없고…저래 뵈도 매튜랑 동갑이라던가? 아니면 더 어린 게 아닐까?” “헉. 요즘 애들은 발육이 너무 좋다니까. 대체 뭘 먹으면 저렇게 크는 거지?” 이릴은 새삼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를 들은 라피스의 얼굴은 저절로 일그러졌고, 트로웰은 급히 입가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것을 본 라피스는 더욱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바보들 아니야? 어떻게 이런 꼬맹이의 외모를 보고도 내가 더 어리다는 판단을 할 수 있는 거지?” “꼬맹이라서 미안하게 됐군. 네가 나보다 더 어린 것은 사실이지 뭘 그래?” “쳇. 쳇. 그러기에 설교는 나중에 해도 됐잖아. 꼭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날 망신 줘야겠어? 아무튼 은근히 성격 나쁘다니까. 누구냐? 널더러 예의바르고 친절하다고 말한 녀석이.” 라피스의 투덜거림에 트로웰은 간단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말은 내가 더 금시초문인 걸?” “흥. 어련하시겠어. 너야 거리낄게 아무것도 없겠지. 아무튼간 엘 녀석…눈에 뭔가 쓰인 게 틀림없어. 이런 놈의 어딜 보고 그렇게 철썩 같이 믿고 따르는지 원. 하긴 나라도 못 믿지. 누가 알겠어? 이런 꼬맹이가 한때 드래곤까지 동원해서 인간 세상에 피.바.람.을 일으킨 전적이 있다고 말이야.” 그것은 언제고 그의 아버지를 통해 지나가듯이 들은 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수 천 년 전,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 인간들을 멸족시킬 계획을 가졌었다는 것이다. 드래곤만이 아닌, 다수 수많은 타 종족까지 동원하여 대륙의 전쟁을 선도했었다는 소리에, 라피스는 언제고 그의 약점으로서 들추어낼 작정으로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의 말에도 트로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흐음.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가지고 물고 늘어질 셈이야? 하여튼 쪼잔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쪼잔하긴 누가!” 조금이나마 타격을 입힐 생각으로 건넨 말이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하고 돌아오자 라피스는 분한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트로웰은 여유 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서서 능청스러운 말을 건네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나저나 네가 성까지 안내를 맡은 거 아니었어? 언제까지 손님을 이렇게 세워둘 셈이야?”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 어휴, 말을 말자. 말을. 자, 다들 따라와. 아까부터 당신들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살벌한 눈빛으로 건네는 라피스의 말에 기사들과 용병들은 잠자코 그의 뒤를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잠시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트로웰은 행렬의 가장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기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에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라피스의 말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의 편린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온통 머릿속을 잠식해 들어가고 있었다. 삐이이이익-쿠와아아앙!! <살려줘! 살려줘어!!> <꺄아아아악!!!> 창공을 가르는 거대한 드래곤의 무리. 새빨간 대지와 시커먼 연기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인간들과 그들의 육체를 집어삼키는 수많은 정령들의 향연. 그리고…그들의 가운데서서 미소 짓고 있는 자신. <인간들이 싫어. 이 세상에서 그 종족 자체가 완전히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어.> 악다문 입술 안에서 새어나오는 낮은 음성은 분명 과거의 자신의 것. 그동안 잊고 지내던 게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떠오르는 장면에 트로웰은 잠시 숨을 멈추었다. ‘아아, 그래. 그랬던 적이 있었지.’ 인간에게는 오직 적대감 밖에 없던 시절. 타 종족을 충동질 하면서까지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얄팍한 마음은, 그 당시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그때의 상황을 다시 반복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동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하고 속으로 상당히 당황하고 말았다. ‘시간이 많이 흘러서? 이제는 미워할 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런 건가? 아니, 그보다…난 어째서 그때 멈췄던 거지? 왜 인간들을 멸족시키지 않았던 거지?’ 그때 희미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슴이 저밀정도로 구슬픈, 작은 흐느낌을 담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였다. <트로웰은 나쁘지 않아. 언제나 상냥한걸.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 이렇게 상냥한 트로웰을 분노하게 만든 존재가…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나 역시…그런 인간의 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이.> 두 눈 가득 담은 눈물을 차마 떨구지도 못하고, 자신을 향해 아련한 표정을 지었던 그는 대체 누구였을까?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는 얼굴에 트로웰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정령왕은 드래곤만큼이나 망각의 축복을 받지 못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까지 기억이 나지 않다니, 뭔가 이상했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거라곤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때의 자신을 멈추게 만든 존재라는 것 뿐.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네가 처음이야.> 가슴가득 행복함이 묻어져 나오는 목소리에 트로웰은 이미 지난 기억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감은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가고 있었다. “나도…나도 마찬가지야……엘.” 바로 그 순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를 머나먼 기억 속에서 현실로 이끌었다. 한참을 가도 트로웰이 따라오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되돌아온 라피스였다. “엘이라니? 무슨 소리야?” “응? 뭐가?” “방금 엘이 어쩌고 그랬잖아. 뭐야, 나도 모르게 녀석이랑 연락이라도 한거야?” 그의 말에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선 지금 라피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엘이랑 연락을 하다니? 무엇보다…난 지금 아무 말도 안했는데?” “뭐? 내가 듣기론 분명…” “아아, 됐어, 됐어. 또 무슨 엉뚱한 소릴 할 셈이야? 자, 어서 가자고. 우리 때문에 다른 일행들까지 피해를 보잖아.” “어, 어이?”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는 듯 혀를 차며 걸어가는 트로웰. 혼자 남은 라피스만이 황당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6-8 향수(1) “으음…” 정신을 잃었던 소녀가 눈을 뜬 것은 마침 시벨리우스가 노숙을 위해 텐트를 만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절대 떠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감겨있던 속눈썹이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파르르 떨리자, 소녀의 간호를 전담하고 있던 이사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엘! 엘! 이리와 봐. 아무래도 깨어나려는 모양이야.” “아, 그래? 흐음, 어디보자…” 잔뜩 흥분한 듯 붉게 상기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래봤자 이마의 열을 짚어본 것이 전부였지만, 이미 완벽하게 돌아온 혈색만으로도 소녀는 충분히 건강한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치유술을 걸어주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난 소녀의 깨끗한 주황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그러나 꿈이라도 꾼다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멍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네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신 들었니? 몸은 좀 어때?” “에…엑?!! 꺄아악!!” “……” 짧게 비명을 지른 소녀는 누가 말릴 세도 없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아무래도 눈 뜨자마자 낯선 사람들을 본 탓에 조금 놀란 모양이다. 나는 소녀 못지않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걸 보면 멀쩡한 가 본데? 나머진 너한테 맡길게, 이사나. 난 시벨리우스를 도와서 노숙준비 할 테니까 그동안 저애 좀 진정시켜줘.” “엑? 내, 내가?” 괜히 좋으면서 곤란한척 하기는. 내가 진정 커플 타도를 외치며 절규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나의 이러한 눈빛을 읽었는지 이사나는 곧바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인지 전에 없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었다. “저어, 몸은 괜찮습니까?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세요.” 17살짜리 다 큰 녀석이 겨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를 향해 정중한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어리게 생겼어도 신분을 알지 못하는 소녀를 향해 반말을 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게 단순한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닌, 이 세계에선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라는 것이 문제다. 문득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엘. 왜 그래?” “응? 뭐가?” “뭔가 멍한 표정이잖아.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혹시 어디가 아픈 거 아니야?” 본연의 임무(텐트를 치는 일)를 끝마친 시벨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돌아서다가(완전히 파출부가 다 되었다) 내가 멍하게 서있는 것을 보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바람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잠깐 딴 생각을 했던 것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왜긴. 네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이니까 그렇지. 정령왕이라면서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아? 혹시 누가 못살게 구는 거야?” “그게 아니라…아, 아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정령왕을 못살게 굴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근심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고.” 그렇지 않아도 나를 다른 ‘엘’로 오해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내 전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시벨은 반드시 나를 자신이 알고 있는 ‘엘’이라고 확신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있는 전생이 두 번이라고 없겠느냐고 따지면 나로선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없는 경험이 나에게만 유독 집중된다는 것은 전혀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도 너는 외톨이다’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 순간 또다시 딴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일깨운 것은 깨끗한 울림을 닮은 고운 미성의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 당신들은 누구야?” “아,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을 해치려 하는 존재가…” “웃기고 있네! 그런 말이 더 수상하다는 거 몰라?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적의의 여부 따위가 아니라, 정체가 뭐냐는 거야! 3초의 시간을 주지! 어서 불지 못해? 3-2-1-!!” “에엑?” …대체 왜 이곳에서 만나는 여자들이라곤 하나같이 성격이 저 모양인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사나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게 외모만 가지고 함부로 반하면 피 본다니까? 잠시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준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소녀에게 입을 열었다.(순전히 트로웰의 방식을 흉내 냈을 뿐이다.) “먼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꼬마 아가씨.” “그, 그런 건 당신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아니, 늦어. 이쪽도 나름대로 ‘목숨 걸고’구해냈는데, 돌아온 보답이 정체가 뭐냐는 말 뿐이라면 상당히 서운하지 않겠어?” “…으음. 듣고 보니 그렇네. 확실히 내가 서둘렀어. 미안해. 당신들이 나를 정말로 도와준 사람들이라면 말이야.”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와 이사나의 모습을 빤히 흩어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이 맹랑한 꼬마는 우리들이 대공의 기사들을 무찌르고 자신을 구해냈다고는 전혀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어딜 봐도 이제 갓 17살 넘어 보이는 소년들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인간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상대방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나쁜 버릇 아닐까? 그러는 너도 겨우 12살 될까 말까 해 보이는데 중급 정령을 다루잖아.” “나는 13살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정령사인걸 어떻게 알았어?” “그야 네가 싸우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지. 그만큼 거대한 덩치의 흙 거인이 땅의 중급 정령인 멀든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멀든은 지금까지 계약자가 적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맙소사, 그러고 보니 당신도 정령사였구나?” 소녀의 놀란 시선은 그의 옆에 있던 이사나에게 향해 있었다. 동족(?)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인지, 단박에 그가 정령사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이렇게 느낌이 확실한데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지? 황실직속의 정령사들도 당신만큼 강한 기운을 풍기지는 못했어. 설마 상급 정령사?” “에…일단 그렇습니다만.” “그 닭살 돋는 존대어는 집어 치워. 날 소름 돋게 만들어서 죽일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있지. 다루는 정령이 뭐야? 난 기운을 느낄 줄 알아도 아직 속성은 구분하지 못하거든.” “아하하…무, 물인데.” “물?! 그럼 당신이 물의 상급 정령사란 말이야? 세상에! 그 만나기 힘들다는 물의 정령사를 보게 되다니! 그것도 상급의 정령사를!!” 그 옆에 있는 존재는 정령왕인데요…난처하게 굴러가는 이사나의 눈동자는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살포시 무시한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소녀에게 추가 설명을 덧 붙였다. “참고로 널 구해준 사람도 바로 그 녀석이니까, 확실하게 감사인사를 하도록 해. 그래 뵈도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자라, 녀석의 도움을 받는 것부터 영광인 셈이니 말이야.” “에, 엘!” “헤에, 그렇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오해해서 정말 미안했어.” 상급의 정령사라면 나이를 떠나 어지간한 검사 몇 명쯤은 단신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같은 정령사로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소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존재임을 순순히 납득한 듯 보였다. 감탄과 고마움이 섞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사나는 눈에 띄게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그…그게. 엘이 과장을 해서 말한 거야. 사실 나는 한 것도 별로 없어. 구해내긴 했어도, 정작 치료한 사람은 엘이었는걸. 그러니 인사라면 내가 아니라 엘에게 해야 해.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치료?” 그의 말에 소녀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흙바닥을 뒹군 바람에 너덜너덜 해진 옷 사이로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리며 팔뚝을 연신 살피던 소녀는 이윽고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2년 전에 넘어져서 다쳤던 상처까지 없어졌어. 설마 당신…신관?” “맞아. 엘뤼엔의 사제라고 들어는 봤는지? 뭐, 문장까지 보여주면서 확인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드, 들어본 적 있어. 어둠속성의 신을 섬기는 신전 중 유일하게 치유능력이 있다는 사제들 말이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존재였어. 형벌의 신을 모신다고 해서 꽤나 험상궂은 인상을 예상했었는데…왠지…” 소녀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말을 내뱉을지 겁나,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에 대한 오해는 풀린 거지? 여긴 네가 싸웠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숲이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노숙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음 계획을 정하도록 할게.” “숲이라니… 바론 사막 근처에 있는 숲이라면 죽음의 숲 밖에 없잖아. 온갖 마물의 밀집장소에서 노숙을 할 셈이야? 아무리 상급정령사라도 전투가 길어지면 지치게 될 텐데?” “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몬스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근방에 결계를 쳐둔 상태니까. 우리 일행 중엔 마법사도 있거든.” “마법사?” 소녀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숲 저편에서 ‘꿰에에엑!’하는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커다란 진동과 함께 무언가가 우리 앞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웅! “꺄, 꺄악! 이게 뭐야!!” 그것은 단 일격으로 저세상 열차를 타버린 커다란 덩치의 멧돼지였다. 난데없는 돼지의 시체를 보고 놀란 소녀가 기겁을 하며 이사나에게 매달리는 순간,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저녁은 바비큐다! 고기스튜 다들 괜찮지?” “시벨리우스…이런 건 예고 좀 하고 던지면 안 될까?” “응? 왜? 싫어? 오랜만에 고기라 좋아할 줄 알았더니.” “아니,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자기 돼지 시체가 머리위에서 떨어지면 놀라게 된다고! 그러나 난 녀석에게 방금 그가 저지른 사태에 대한 충고를 해줄 수 없었다. 소녀의 놀란 목소리가 나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에, 엘프?” “이런, 이런~ 사물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소녀여! 나는 엘프같이 능력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름도 유명한…” “엘프 맞아! 신기하지?” 그대로 두었다간 본 정체를 순순히 다 가르쳐 줄 것 같았는지 이사나가 잽싸게 끼어들며 말을 돌렸다. 다행히 소녀는 별다른 의심의 기색 없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응. 엘프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귀가 뾰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피부색까지 다를 줄은 몰랐네? 굉장히 신비한 느낌이야.” “아, 그건 시벨리우스님이 블루엘프라서 그래. 푸른색 피부와 은발은 블루엘프의 특징이거든.” “블루엘프라니… 바닷가에 터전을 이루고 산다는 엘프 종족을 말하는 거야?” “응. 지금은 우리와 여행 중이지만 말이야. 일행 중 유일하게 마법을 하실 줄 아는 분이지.” “헤에, 그렇구나. 엘프에 신관과 정령사라니…뭔가 안 맞을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아. 멋진데?” 소녀의 칭찬에 이사나는 붉어진 얼굴로 맥없이 헤실 거렸다. 장차 팔불출남편이 될 가능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으음…” 정신을 잃었던 소녀가 눈을 뜬 것은 마침 시벨리우스가 노숙을 위해 텐트를 만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절대 떠지지 않을 것처럼 굳게 감겨있던 속눈썹이 작은 신음소리와 함께 파르르 떨리자, 소녀의 간호를 전담하고 있던 이사나가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엘! 엘! 이리와 봐. 아무래도 깨어나려는 모양이야.” “아, 그래? 흐음, 어디보자…” 잔뜩 흥분한 듯 붉게 상기된 녀석의 얼굴을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그의 앞에 다가가 소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래봤자 이마의 열을 짚어본 것이 전부였지만, 이미 완벽하게 돌아온 혈색만으로도 소녀는 충분히 건강한 상태였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치유술을 걸어주려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깨어난 소녀의 깨끗한 주황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그러나 꿈이라도 꾼다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눈을 뜨고도 한참이나 멍하게 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먼저 말을 건네자,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신 들었니? 몸은 좀 어때?” “에…엑?!! 꺄아악!!” “……” 짧게 비명을 지른 소녀는 누가 말릴 세도 없이 후다닥 일어나더니,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입만 뻐끔뻐끔거렸다. 아무래도 눈 뜨자마자 낯선 사람들을 본 탓에 조금 놀란 모양이다. 나는 소녀 못지않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렇게 빨리 움직이는걸 보면 멀쩡한 가 본데? 나머진 너한테 맡길게, 이사나. 난 시벨리우스를 도와서 노숙준비 할 테니까 그동안 저애 좀 진정시켜줘.” “엑? 내, 내가?” 괜히 좋으면서 곤란한척 하기는. 내가 진정 커플 타도를 외치며 절규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나의 이러한 눈빛을 읽었는지 이사나는 곧바로 소녀에게 다가섰다. 우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을 주기 위해서인지 전에 없이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이었다. “저어, 몸은 괜찮습니까?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게 경계하지 말아주세요.” 17살짜리 다 큰 녀석이 겨우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꼬마를 향해 정중한 어투를 사용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상당히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아무리 어리게 생겼어도 신분을 알지 못하는 소녀를 향해 반말을 할 수는 없다는 거겠지. 그게 단순한 그의 성격 때문이 아닌, 이 세계에선 너무도 당연한 행동이라는 것이 문제다. 문득 이곳이 한국이 아니라는, 그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온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정말로 오랜만에…내가 서 있는 이 공간이 낯설게 느껴졌다. “엘. 왜 그래?” “응? 뭐가?” “뭔가 멍한 표정이잖아. 잠에서 덜 깬 사람처럼. 혹시 어디가 아픈 거 아니야?” 본연의 임무(텐트를 치는 일)를 끝마친 시벨리우스는 마지막으로 저녁식사 준비를 하기 위해 돌아서다가(완전히 파출부가 다 되었다) 내가 멍하게 서있는 것을 보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 바람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잠깐 딴 생각을 했던 것뿐이야.”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지?” “…? 그래. 그런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거야?” “왜긴. 네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이니까 그렇지. 정령왕이라면서 무슨 근심이 그렇게 많아? 혹시 누가 못살게 구는 거야?” “그게 아니라…아, 아니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정령왕을 못살게 굴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있지도 않을뿐더러, 근심 같은 건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고.” 그렇지 않아도 나를 다른 ‘엘’로 오해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내 전생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은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시벨은 반드시 나를 자신이 알고 있는 ‘엘’이라고 확신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한번 있는 전생이 두 번이라고 없겠느냐고 따지면 나로선 정말 할 말이 없어지는 셈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없는 경험이 나에게만 유독 집중된다는 것은 전혀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마치 ‘이 세계에서도 너는 외톨이다’라고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으니까. 그 순간 또다시 딴 생각에 빠져드는 나를 일깨운 것은 깨끗한 울림을 닮은 고운 미성의 목소리였다. “여기가 어디? 당신들은 누구야?” “아, 그러니까 우리는 당신을 해치려 하는 존재가…” “웃기고 있네! 그런 말이 더 수상하다는 거 몰라? 내가 알고 싶은 건 당신들이 내게 가지고 있는 적의의 여부 따위가 아니라, 정체가 뭐냐는 거야! 3초의 시간을 주지! 어서 불지 못해? 3-2-1-!!” “에엑?” …대체 왜 이곳에서 만나는 여자들이라곤 하나같이 성격이 저 모양인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사나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러게 외모만 가지고 함부로 반하면 피 본다니까? 잠시 불쌍하다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봐준 나는 생긋 미소 지으며 소녀에게 입을 열었다.(순전히 트로웰의 방식을 흉내 냈을 뿐이다.) “먼저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는 게 순서가 아닐까? 꼬마 아가씨.” “그, 그런 건 당신들의 정체를 알고 나서 해도 늦지 않잖아!” “아니, 늦어. 이쪽도 나름대로 ‘목숨 걸고’구해냈는데, 돌아온 보답이 정체가 뭐냐는 말 뿐이라면 상당히 서운하지 않겠어?” “…으음. 듣고 보니 그렇네. 확실히 내가 서둘렀어. 미안해. 당신들이 나를 정말로 도와준 사람들이라면 말이야.”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나와 이사나의 모습을 빤히 흩어보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이 맹랑한 꼬마는 우리들이 대공의 기사들을 무찌르고 자신을 구해냈다고는 전혀 믿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하긴, 어딜 봐도 이제 갓 17살 넘어 보이는 소년들이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인간들을 물리쳤다고 생각하겠는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상대방을 외모로 평가하는 건 나쁜 버릇 아닐까? 그러는 너도 겨우 12살 될까 말까 해 보이는데 중급 정령을 다루잖아.” “나는 13살이야!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정령사인걸 어떻게 알았어?” “그야 네가 싸우는 장면을 봤기 때문이지. 그만큼 거대한 덩치의 흙 거인이 땅의 중급 정령인 멀든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고 보는데.” “하지만 멀든은 지금까지 계약자가 적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별로…맙소사, 그러고 보니 당신도 정령사였구나?” 소녀의 놀란 시선은 그의 옆에 있던 이사나에게 향해 있었다. 동족(?)끼리는 서로 알아보는 법인지, 단박에 그가 정령사임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소녀는 이제야 새삼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이렇게 느낌이 확실한데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지? 황실직속의 정령사들도 당신만큼 강한 기운을 풍기지는 못했어. 설마 상급 정령사?” “에…일단 그렇습니다만.” “그 닭살 돋는 존대어는 집어 치워. 날 소름 돋게 만들어서 죽일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있지. 다루는 정령이 뭐야? 난 기운을 느낄 줄 알아도 아직 속성은 구분하지 못하거든.” “아하하…무, 물인데.” “물?! 그럼 당신이 물의 상급 정령사란 말이야? 세상에! 그 만나기 힘들다는 물의 정령사를 보게 되다니! 그것도 상급의 정령사를!!” 그 옆에 있는 존재는 정령왕인데요…난처하게 굴러가는 이사나의 눈동자는 바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을 살포시 무시한 나는 피식 웃으면서 소녀에게 추가 설명을 덧 붙였다. “참고로 널 구해준 사람도 바로 그 녀석이니까, 확실하게 감사인사를 하도록 해. 그래 뵈도 상급 정령사 중에서도 뛰어난 실력자라, 녀석의 도움을 받는 것부터 영광인 셈이니 말이야.” “에, 엘!” “헤에, 그렇구나. 도와줘서 고마워. 오해해서 정말 미안했어.” 상급의 정령사라면 나이를 떠나 어지간한 검사 몇 명쯤은 단신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같은 정령사로서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던 소녀는, 그가 자신을 구해준 존재임을 순순히 납득한 듯 보였다. 감탄과 고마움이 섞인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이사나는 눈에 띄게 얼굴을 붉히며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그…그게. 엘이 과장을 해서 말한 거야. 사실 나는 한 것도 별로 없어. 구해내긴 했어도, 정작 치료한 사람은 엘이었는걸. 그러니 인사라면 내가 아니라 엘에게 해야 해. 그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모르니까.” “치료?” 그의 말에 소녀는 황급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시간 흙바닥을 뒹군 바람에 너덜너덜 해진 옷 사이로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나 있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리며 팔뚝을 연신 살피던 소녀는 이윽고 얼빠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2년 전에 넘어져서 다쳤던 상처까지 없어졌어. 설마 당신…신관?” “맞아. 엘뤼엔의 사제라고 들어는 봤는지? 뭐, 문장까지 보여주면서 확인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드, 들어본 적 있어. 어둠속성의 신을 섬기는 신전 중 유일하게 치유능력이 있다는 사제들 말이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꼭 한번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존재였어. 형벌의 신을 모신다고 해서 꽤나 험상궂은 인상을 예상했었는데…왠지…” 소녀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끝을 살짝 흐렸다. 그대로 두었다간 무슨 말을 내뱉을지 겁나, 나는 얼른 화제를 돌리기 시작했다. “아무튼 우리에 대한 오해는 풀린 거지? 여긴 네가 싸웠던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숲이야. 오늘은 늦었으니까 여기서 노숙하고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음 계획을 정하도록 할게.” “숲이라니… 바론 사막 근처에 있는 숲이라면 죽음의 숲 밖에 없잖아. 온갖 마물의 밀집장소에서 노숙을 할 셈이야? 아무리 상급정령사라도 전투가 길어지면 지치게 될 텐데?” “아, 그건 걱정할 것 없어. 몬스터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근방에 결계를 쳐둔 상태니까. 우리 일행 중엔 마법사도 있거든.” “마법사?” 소녀의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숲 저편에서 ‘꿰에에엑!’하는 비명소리가 울리더니, 커다란 진동과 함께 무언가가 우리 앞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쿠웅! “꺄, 꺄악! 이게 뭐야!!” 그것은 단 일격으로 저세상 열차를 타버린 커다란 덩치의 멧돼지였다. 난데없는 돼지의 시체를 보고 놀란 소녀가 기겁을 하며 이사나에게 매달리는 순간, 경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늘 저녁은 바비큐다! 고기스튜 다들 괜찮지?” “시벨리우스…이런 건 예고 좀 하고 던지면 안 될까?” “응? 왜? 싫어? 오랜만에 고기라 좋아할 줄 알았더니.” “아니,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라도 갑자기 돼지 시체가 머리위에서 떨어지면 놀라게 된다고! 그러나 난 녀석에게 방금 그가 저지른 사태에 대한 충고를 해줄 수 없었다. 소녀의 놀란 목소리가 나보다 먼저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에, 엘프?” “이런, 이런~ 사물을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지~소녀여! 나는 엘프같이 능력 없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이름도 유명한…” “엘프 맞아! 신기하지?” 그대로 두었다간 본 정체를 순순히 다 가르쳐 줄 것 같았는지 이사나가 잽싸게 끼어들며 말을 돌렸다. 다행히 소녀는 별다른 의심의 기색 없이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응. 엘프는 태어나서 처음 봤어. 귀가 뾰족하다는 말은 들었지만…피부색까지 다를 줄은 몰랐네? 굉장히 신비한 느낌이야.” “아, 그건 시벨리우스님이 블루엘프라서 그래. 푸른색 피부와 은발은 블루엘프의 특징이거든.” “블루엘프라니… 바닷가에 터전을 이루고 산다는 엘프 종족을 말하는 거야?” “응. 지금은 우리와 여행 중이지만 말이야. 일행 중 유일하게 마법을 하실 줄 아는 분이지.” “헤에, 그렇구나. 엘프에 신관과 정령사라니…뭔가 안 맞을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어울리는 조합인 것 같아. 멋진데?” 소녀의 칭찬에 이사나는 붉어진 얼굴로 맥없이 헤실 거렸다. 장차 팔불출남편이 될 가능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간단한 자기소개를 통해 알게 된 소녀의 이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본인의 말에 따르면 알폰프 제국 지방귀족의 서녀(庶女)였다. 어머니가 평민이었기 때문에 본부인의 자식들과는 엄연히 위치가 달랐지만, 타고난 미모와 총명함 덕분에 대놓고 무시를 당하는 경우는 없었다고 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영주민들 사이에서는 거의 성녀처럼 추앙을 받았다는 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특별한 능력이라면 너의 그 정령술을 말하는 거야?” “맞아. 눈치가 빠른데? 농부들에게 땅의 정령들이란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존재거든. 이 능력을 온전히 각성한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난 선천적으로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던 모양이야. 계약을 하지 않아도 정령들이 스스로 도와줄 정도였으니까.” “흐음, 확실히 벌써 중급 정령을 다룰 정도라면 그럴 만도 하네. 하지만 그 사실은 어떻게 알았지? 대부분 계약하기 전에는 눈치 채기 힘들잖아? 자연계의 정령들이 눈에 보였을 리는 없고.” “아아. 그가 말해줬어.” “그?” “응. 내가 이 능력을 각성하도록 도와준 존재.” 굳이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존재’라고 표현한 것부터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얼굴 가득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소녀-알리사의 모습에 나는 어렴풋이 잊어버리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가 기절하기 직전 중얼거렸던, 아주 낯익은 친우의 이름이 말이다. “설마 네가 말하는 존재가 트로웰?” “응? 헉! 어, 어떻게 알았어?” 당황했는지 단박에 긍정해 버리는 알리사를 보며 나 또한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언젠가 들은 것도 같다.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소녀가 있다고 했던가? 10년 후라면 상급 정령도 바라볼 수 있지만 아직은 나이가 어려서 무리라고 했었지. 트로웰 본인이 도와줘서 멀든과 계약하게 만들었다고. ‘나 참. 왜 그걸 지금까지 잊어버리고 있었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알 것을.’ 어이없는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린 나는 곧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알리사를 쭈욱 흩어보았다. 트로웰을 소환하겠다고 큰 소리를 떵떵 쳤다는 여자애가 바로 이 녀석이란 말이지? “흐음, 대담한 선언 치곤 그다지 기대치에 못 미친 것 같은데?”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별거 아니야. 그냥 열심히 하라고.” “??” 격려의 뜻으로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자 알리사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툭 내뱉는 소리에 이번엔 내 쪽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방금…정령들이 후두둑 떨어졌어. 당신 정체가 뭐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내 몸에는 언제나 수 십 마리의 땅의 정령들이 붙어있어. 녀석들이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은 자신보다 상급의 정령이 다가왔을 때나, 기운이 강한 사람이 있었을 때뿐이야. 말해주지도 않은 트로웰의 존재를 단번에 알아맞히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수상해.” “아하하…” 물론 내가 건드리는 순간 놈들이 쏴아악~ 흩어지긴 했다. 설마 그걸 느끼는 인간이 존재할 줄이야! 정말 기똥차도록 예민한 기운이 아닌가! 나는 그때서야 트로웰이 알리사에게 호기심을 느낀 진정한 이유를 짐작했다. 이거 굉장히 범상치 않은 꼬마인 걸? 나는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래?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다니 굉장한 걸? 하지만 난 그렇게 대단한 녀석이 아니야. 아마도… 신성력과 정령술이 서로 상극이라 정령들이 놀란 게 아닐까?” “그럼 트로웰을 안 것은?” “기억 안나? 너 기절할 때 잠깐 트로웰이라고 중얼거렸었잖아. 그래서 그냥 짐작해 본거지, 정말로 땅의 정령왕과 친분이 있다곤 생각 못했어. 혹시 정령왕의 계약자? 아, 그럴 린 없겠구나. 만약 그랬다면 네가 위험에 처하는 순간까지 정령왕이 나타나지 않을 리 없으니까.” 그러자 이사나는 동조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알리사의 얼굴은 반대로 상당히 침울해졌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멀거니 바라보고 있자니, 알리사는 뚱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불쌍해 보인다는 거야?” “어?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치잇. 다음부턴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구. 트로웰은 반드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위험한 순간에도 나타나지 않은 건, 내 스스로의 힘으로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상대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암, 녀석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당차게 외친 알리사의 말을 받은 것은 다름 아닌 시벨리우스였다. 아주 당연한 소릴 들었다는 듯 고개를 커다랗게 주억거리는 모습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남는다니? 뭘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왜~ 트로웰 성격 죽이기로 유명하잖아. 겉보기엔 어린애 같아도 속은 늙은이라, 어린애들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라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사상이 뿌리 끝까지 박혀 있다고. 아마 저 여자애가 당장 죽어가는 순간이 왔어도 돌아보지 않았을 걸? 스스로의 일은 알아서 챙겨야 한다고 말이야.” “하아?” “틀려! 트로웰은 그런 성격이 아니야! 나한테 얼마나 자상했는데!” 시벨의 말에 흥분했는지 알리사는 얼굴까지 벌겋게 물들이며 소리쳤다. 솔직히 나로서도 공감할 수 없는 말이었는지라 황당하기는 마찬가지. 그러나 불신의 눈초리가 한가득 쏟아지는 와중에도 시벨의 태도는 의연했다. “자상? 하- 누가? 트로웰이? 그렇다면 넌 눈에 뭔가 단단히 씌었거나, 그를 만난 순간 요정이 주는 달콤한 환상에 현혹된 거다. 아니면 다른 녀석이 정령왕의 이름을 사칭한 걸지도 모르지. 녀석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 바로 인간이야, 인간. 하긴 뭐, 애당초 정령 외에는 관심도 없었지만.” “그, 그럴 리 없어!” “너보다 더 오래 산 내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을 말한 것뿐이야. 믿고 안 믿고는 너의 몫이지. 한때 아크아돈의 모든 인간을 멸족시킬 계획까지 가졌던 녀석이니 말 다 한거 아니겠어?” “며…멸족?” 멸족이란 뭐시냐…그, 그러니까…온 세상의 인간이란 인간은 전부 없애버린다는, 그걸 말하는 거야?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내 말에 시벨리우스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선 눈빛을 빛내며 이렇게 물어오는 것이 아닌가! “정말 기억 안나? 그때 녀석을 막았던 사람이 바로 엘, 너였잖아.” “뭐?” “울면서 매달렸었잖아. 덕분에 트로웰이 제정신을 찾은 거라고, 이 세상의 인간들은 전부 엘한테 감사해야 한다니까? 엘이 아니었으면 십중팔구 멸족했을 거야.” “하아. 또 그 소리였냐.” 결국 녀석은 어떻게든 나를 자극(?)시켜서 전생의 기억을 떠오르게 할 셈이었나 보다. 있지도 않은 전생…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다만, 4천년 전의 기억 따윈 정말로 없단 말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큰 문제는 바로… “당신도 트로웰을 만난 적이 있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평범한’ 신관으로 알고 있던 한 순진한 소녀의 질문이었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지금 날 다른 사람하고 착각하는 거거든.” “착각?” “응. 아마 과거에 나와 상당히 닮은 사람과 친했던 모양이야. 분명한건, 녀석이 말한 내용은 내 기억 속엔 전혀 없다는 소리지.” “그럼 당신은 트로웰을 만난 적이 없다는 소리?” “아, 글쎄 녀석이 말한 내용은 기억에 없다니까?” 물론 ‘녀석이 말한 내용만’ 기억에 없을 뿐이었지만, 이런 사소한 건 넘어가기로 하자. 어차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 것 아니겠는가? 완전히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알리사를 보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벨녀석은 탐탁지 않았던 모양이다. 곧바로 나를 향해 원망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면. “정말 엘이 맞다니까! 왜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거야!” “아니, 시벨리우스. 그게 아니라…” “네가 맞아. 내가 본 사람은 분명히 네가 맞단 말이야! 내 종족의 긍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엘이라는 이름 외엔 정체도 신분도, 살아온 세월 따위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무심한 녀석이었지만 그는 분명히 너였어! 엘이었다고!”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모양인지 시벨리우스는 이때가 기회라는 듯 격하게 소리쳤다. 하지만 나 역시 마냥 받아줄 정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라서, 바로 새된 반응이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그게 아무리 어린 여자애일지라도) 본래 정체에 대해 논한다는 상황 자체가 나에게는 충분히 짜증스러웠기 때문이다. “누가 엘이 아니라고 했어? 다만 그 엘과 내가 다른 사람일 뿐이야.” “엘!” “제발 적당히 좀 해줘, 시벨리우스. 그래, 네 말마따나 나한테 전생이 있었다 치자.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이미 태어난 시기가 다르고 살아온 세월이 다른데. 사람은 한번 죽으면 끝이야. 환생을 했다 해도 그 삶이 다시 이어질 수는 없다고!” “!!” 조금 심했다 싶긴 했지만 이대로 놔두면 녀석의 상상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겁나, 적절한 제지를 가할 필요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시벨의 말에 나는 그대로 할 말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그런 말이 어디 있어? 그런 말은 기다리는 사람에게 실례잖아. 맞아.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끝이야. 환생했다고 해도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거겠지. 네 말이 맞아, 엘. 그래도…설령 그렇다 해도…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해서는 안 되는 말이잖아.” “…아…” 그때서야 내가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시벨리우스는 삐질 대로 삐진 뒤였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쉰 녀석은 내가 미처 사과도 건네기 전에 제 할말만 하고 돌아서 버렸다. “잘 알았어. 이제 이 문제로 다시는 귀찮게 굴지 않을게. 하지만 같이 다니는 것은 허락해줘. 어차피 당장은 갈 데도 없으니까…말이야.” “아, 저기 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미안. 나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확실히 너무 오랜만에 깨어나서인지 적응이 덜 된 모양이야. 조금만 혼자 있게 내버려둬 줄래?” “……” 난 바보인가 보다. 어쩌자고 스스로 후환이 생길 일을 만든단 말인가? 혼자서 터덜터덜 구석진 자리를 찾아들어가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다독이는 듯한 차분한 음성이 들려왔다. “걱정하지 마, 엘. 지금은 저래도 금방 풀릴 거야.” “이사나…” “지금은 둘 다 너무 감정이 격해져서 다툰 것뿐이야. 오늘은 이만 쉬고 복잡한 일은 내일부터 생각하자. 날도 저물었잖아.” “으응.” 평소였다면 우울해 하는 쪽이 이사나고 내가 위로하는 입장이었을 텐데, 그 위치가 반대가 되고 보니 상당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녀석이 너무 훌쩍 자라버린 기분? 어렸을 적 동네에서 같이 놀던 또래가, 어느새 철이 들어서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았었던 것 같다. 하긴, 이사나가 언제까지 내 도움이 필요한건 아니겠지. 황권을 되찾으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질게 뻔하고…나와는 다르게 몸도 자랄 테고, 나중에 결혼해서 자식도 가질 테지.(그 상대가 누군 진 이미 결정된 것 같지만.) 그런 생각이 들고 보니 그나마 나아지던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 버려, 나는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우울한 기분이었다. “뭐야? 그래서 결국 트로웰을 봤다는 거야, 안 봤다는 거야?” 한없는 우울과 심란의 구덩이에 빠져들려던 나를 깨운 건 새초롬한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 샌가 화제에서 소외 돼버린 알리사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부분 싸우는 분위기가 되면 궁금한 게 있어도 참는 게 보통인데, 끝까지 캐내고 싶어 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집요한 성격인가 보다. 그만큼 트로웰의 존재가 알리사에게 의미가 있겠지 싶어, 나는 솟아오르려는 짜증을 간신히 억눌렀다. “이곳에서 땅의 정령왕을 만난적은 없어.” “하지만 저 엘프는…” “착각하는 거랬잖아. 녀석이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야. 나한텐 전혀 그런 기억 따위 없으니까.” “흐음~ 단정하긴 어렵지 않아? 전생이란 게 있잖아, 전생. 엘프들은 수명이 기니까 환생전의 당신과 만났던 것일 수도…” “그럴 리 없어. 아니,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용납 못해. 난 전생 같은 거 필요 없거든.” 단호하게 대답한 내 말에 알리사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상당히 재미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수상하네. 그렇게 말하니까 왜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엥? 어째서?” “아니, 당신 표정이 말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게…마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 억지로 떠올린 것 같거든. ‘필요 없다’는 말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건, 전생의 삶이 지금의 삶보다 나빴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 아니야?” “!!” 이, 이런 쓸데없이 예민한 꼬마 같으니라고. 나는 얼른 헛기침과 함께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리곤 다시는 이런 오해를 하지 않도록 따끔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틀려. 나는 그저 전생 따위에 휘말려서 현재의 삶을 포기할 생각이 없을 뿐이야. 기억도 나지 않는 일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낭비를 하고 싶진 않으니까.” “헤에.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진 않네. 하지만 저 엘프에게는 좀 너무했어. 어쨌든 친구였잖아? 육체가 달라도 영혼이 같다면, 결국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 거부당하는 건 가엽잖아.” 그렇게 말한 알리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머릿속까지 멍해질 만큼 강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가장 불쌍한 건 기억하지 못하는 그 자신이라고 생각해. 만약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을 전생이라는 이유로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면…그건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배신이 될 테니까.” “!!” “그러니까 기억하려고 노력이라도 좀 해봐. 무조건 안 된다고 짜증내지 말고.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잖아? 나중에라도 기억을 떠올렸을 때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만들지 말라는 소리야.” “…너…정말 12살 맞아?” “이익! 14살이라니까!!” 겨우 콩알 만 한 여자애가 어른들도 깜짝 놀랄 만큼의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굉장히 놀라웠다. 감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내게 알리사는 약간 붉어진 얼굴로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런 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간단하잖아? 좀 더 나중의 일을 생각해보라고, 사제님. 후회할 일은 미리 만들지 말자는 게 내 삶의 모토라서 말이야.” “하지만, 그가 정말로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그건 그때 가서 상대편이 쪽팔려할 일이지, 사제님이 걱정할 일은 전혀 없는 거잖아. 왜? 설마 모든 진실이 밝혀졌을 때, 그가 돌아서게 되는 것이 두려운 거야?” “아….” 정곡을 찔린 기분이랄까? 심장 한구석이 날카롭게 뚫린 듯한 기분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래. 어쩌면 나는 그걸 겁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시벨리우스가 생각하는 ‘엘’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가 나를 외면하고 멀어지는 상황을.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조건으로 그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일찌감치 녀석과 ‘이별’할 것을 연습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단순히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하아. 나 이렇게 한심한 놈이었나?’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만 내쉬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알리사는 쯧쯧 짧게 혀를 찼다. “그렇게 풀 죽을 것 없어. 누구에게나 자신이 가장 소중한거니까. 하지만 바보 같아. 왜 잃을 것 만 생각하지? 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대등할 만큼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그럼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절대 떠나지 않을 거 아니야.” “…그래, 생각해 보니 네 말이 맞아. 똑똑하구나, 알리사. 좋은 교훈을 얻었어.” “알았으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알리사의 모습은 여느 그 또래의 여자애와 하나도 다를 바 없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어딜 봐도 어린애로 보이는 녀석이 방금 전까지 나를 향해 진지한 충고를 건넸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생각해 보니 알리사는 정체모를 적들에게 목숨의 위협을 당한 상태가 아니던가! 그런 상황에서 울기는커녕 배짱 좋게 웃음을 터뜨리는 배포라니, 생각할수록 대단한 꼬마가 아닌가! ‘호오, 이사나. 이거 어째 제대로 임자를 만난 걸지도?’ 온유한 황제와 귀족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왕비라….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제대로 그려지는걸 보면 천생연분이 따로 없는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두 사람을 유심히 살펴보는 나에게 낭랑한 알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내 소개는 했어도 정작 당신들 소개는 못들은 것 같은걸? 사제님과 정령사라는건 알겠는데 말이야. 정식 이름이 어떻게 되는 거야? 사제님 이름은 엘…이 맞던가?” “아참 그렇지! 맞아, 나는 그냥 엘이라고 부르면 돼. 그리고 저쪽에 앉아서 땅 파고 있는 엘프는 시벨리우스. 줄여서 그냥 시벨이라고 부르면 되고. 그리고 여기 있는 녀석은…” “이, 이사나라고 해. 잘 부탁해, 알리사노.” “이사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성은 없어?” 그녀의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순식간에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이름이야 그렇다 쳐도, 성을 밝히면 자연스레 드러날 수밖에 없는 녀석의 신분이 문제였던 것이다. 한눈에 반한 상대에 대한 예의였는지, 평소처럼 과감하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녀석을 보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아직까지는 내 도움이 필요하다니까. “미안, 알리사. 이사나는 자신의 가문을 밝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제국 사람이 아니거든.” “아? 혹시 카터스 제국 사람인거야?” “카터스?” “응. 그 제국과 우리제국은 몇 백 년 지기 원수라고 들었어. 확실히 그 제국의 사람이라면 신분을 밝히기가 애매하겠지. 좋아, 비밀로 해줄게, 이사나. 이래봬도 입은 무거운 편이거든.” “아…고, 고마워. 알리사.” 고맙게도 알아서 오해해주는(?) 알리사 덕분에 상황은 자연스럽게 넘어갈 기미를 보였다. 그러나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초대하지도 않은 불청객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런~ 서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저는 끼워주지 않으실 겁니까? 지금까지 쭈욱 따라다닌 성의도 있는데 너무하세요오.” “루카르엠!?” “꺄악! 이 남자는 뭐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의 얼굴이 내려오자 알리사는 기겁을 하며 이사나의 품에 매달렸다. 그러자 팩-하고 사납게 노려보는 이사나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루카르엠은 모처럼 등장한 보람도 없이 또다시 녀석에게 마이너스 점수를 얻고 만 것 같았다. 이때만큼은 멀리 떨어져 있던 시벨리우스도 불쾌한 표정으로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어지간히 주변에 적을 만들고 있는 마족이었다. “예고도 없이 등장하지 말아요. 사람들이 놀라잖아요.” “아, 죄송합니다. 늦었다간 제 소개는 영영 빼놓으실 것 같아서 말이죠. 워낙 이사나군에게 미운털이 박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 지금 이 행동으로 더 미운털이 박힌 건 예상 못하나 보지? 그러나 루카르엠은 나의 한심스러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자신이 할 말만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알리사를 향해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건네는 일이었다. “반갑습니다, 레이디. 저는 마계 4대 공작 어둠의 기사 루카르엠이라고 합니다.” “마계라니. 서, 설마 마족?!!” “그거야 마계엔 역시 마족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생김새는 인간과 그다지 다르지 않지요?” “무, 무슨!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제님? 어째서 마족이…” “아, 그게…” “하하하! 단지 제가 일행으로 넣어달라고 쫓아다니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엘님과 이사나군의 반응이 워낙 강경하셔서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군요.” 넉살좋게 대꾸하는 루카르엠의 태도에 알리사는 잔뜩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가득 들어찬 얼굴이었다. “당신 정말 엘뤼엔의 사제 맞아?” “에?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 마족과 가까이 하는 신관은 마신전의 사제밖에 없다고. 다른 신전의 사제들은 마족과 일체 상종을 안 한단 말이야. 그런데 어째서 지금 이 마족이 당신을 쫓아다니는 거지?” “엘뤼엔도 엄밀히 말하면 마신계열인걸. 딱히 이상하다고 볼 이유는 없지.” 그러나 이 말에 대답한 것은 그때까지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루카르엠이었다. 뭔가 상당히 신기하단 태도로 나를 바라본 녀석은 흥미로운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엘뤼엔? 엘님…혹시 형벌의 신과 친분이 있으십니까?” “아, 그게 으음… 일단 저는 그의 사제니까요. 친분이 있다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눈빛으로 ‘내 정체 밝히면 죽~어?’라는 의미를 쏘아 보내자 루카르엠의 얼굴에 삐질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점점 짙어지는 호기심의 빛은 나의 협박에도 전혀 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면서 뜬금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신의 사제를 사칭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다 혼나시면 어쩌시려고요.” “하?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사칭이 아니라 면요?” “하지만 엘님, 그분의 사제임을 뜻하는 증표가 어디에도 없지 않습니까? 사람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쉽게 믿어주지 않을 겁니다.” “아, 맞아. 당신 처음 소개 할 때도 문장을 보여주지 않았어. 단순히 귀찮아서 안 보여준 게 아니라, 정말 없었던 거야? 그런데 나는 어떻게 치료한거지?” “윽! 문장이 없기는 누가 없다는 거야. 보여주면 되잖아, 보여주면!” 알리사까지 완전히 루카르엠의 편에 돌아서서 몰아붙이는 상황이 되자, 당황한 나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그때까지 착용하고 있던 푸른색의 서클렛을 과감하게 벗어 들었다. 그러자 흐읍- 짧은 신음성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이마에 선명하게 자리 잡은 백색의 문장을 발견한 두 사람(?)의 눈동자가 놀람과 감탄으로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끄응. 설마 이마에 문장이 있을 줄이야. 이거 한 방 먹었는걸요, 엘님.” “이, 이마에 문장? 세상에…이런 건 대사제나 교황급의 사람에게만 내려지는 거잖아. 미, 미안.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의심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이마에 받은 건 단순히 운이 좋았을 뿐이고. 실제론 대사제도 뭐도 아닌 보통 사제에 불과하거든. 알았어요, 루카르엠? 이건 단.순.히. ‘사제’임을 뜻하는 표시일 뿐이지 깊은 의미가 있는 건 아니라고요.” “예에, 그렇군요. 깊은 의미라…” “글쎄, 그게 아니라니까요!” 흐음-하고 낮게 신음을 울린 그는 나의 위아래를 빤히 흩어보더니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냈다. 입가에 걸린 미소는 보기 두려울 정도로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데요?” “아니, 아무것도요.” 생글생글 웃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작은 휘파람을 불면서 휘익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힐끔 바라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와 눈이 딱 마주치더니,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설렁설렁 걸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저 녀석을 이용하면 되겠다’라고? “자, 잠깐, 루카!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잠시 만요, 엘님. 저 순수의 피를 잇는 종족과 잠깐 대화 좀 나누고 싶어서요. 저런 곳에서 혼자 놀게 내버려둘 순 없잖습니까? 아까 보니 다투시는 것 같던데, 제가 책임지고 화해시켜 드리죠.” “그딴 것 필요 없어!!!” 그러나 처절한 외침과는 달리, 녀석은 무력할 정도로 간단히 루카르엠의 손에 붙들려 한참동안 떠벌떠벌 그가 뱉어내는 언어의 홍수에 갇혀 있어야 했다. 가끔가다 쓰윽쓰윽 머리까지 만져주는 모습을 보니 아무래도 시벨리우스가 상당히 마음에 든 모양. (그 이유는 절대 알고 싶지 않지만.) ‘…그건 그렇고. 대체 아까는 왜 그렇게 뚫어지게 바라봤던 거지?’ 마족과 엘뤼엔의 관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단순히 놀라워한다고 보기엔 루카의 눈빛에 떠올라있던 무궁무진한(?) 장난끼가 꺼림직 했다. 갑자기 가만히 있던 시벨에게 다가가 엉뚱한 행동을 하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는 녀석이랄까. <당부할 것은 그에게 절대 내 문장을 받았다는 소리는 전하지 말라는 거다. 알겠냐, 아들? 절대로다. 절.대.로!> 이 순간, 언제고 엘뤼엔에게 들었던 당부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내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지, 엘뤼엔? 난 아무래도 네가 말한 ‘그’가 누구인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 같아. 아하하…. “제길! 그 마족 자식 기분 나빠! 대체 뭐하는 놈이야?” 의도는 어찌되었던 결과적으로 루카의 행동은 시벨리우스의 화를 단번에 풀어버린 계기가 되 버렸다. 그가 돌아간 후에도 한참동안이나 하염없이 푸념을 늘어놓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슬쩍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애써 묵묵한 척 대답했다. “마계 4대 공작이라잖아. 못 들었어?”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엘! 그 자식, 나를 완전히 애 취급했어. 머리를 쓰다듬지 않나, 어깨를 두드리지 않나. 생글생글 웃는 면상도 하나~~도 마음에 안 든다구!” “아, 그건 나도 동감.” “그치? 그치? 아무튼 마족들이란 옛날부터 정말 싫었다고. 애체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엘~ 그 녀석 좀 그만 떨궈내면 안돼? 같이 다니기 싫단 말이야.” “흐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미 어딘가로 사라진 것 같은데? 아까부터 기척이 안 느껴지거든. 그나저나… 너 이제 화는 풀린 거야?” 내 물음에 씩씩거리던 시벨리우스의 얼굴이 딱 굳는 게 느껴졌다. 그리곤 벌겋게 붉어진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더니 큰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다.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는 내게 녀석은 한결 차분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화를 낸다고 전부 해결 될 일이 아니었는데. 내가 좀 조급했었던 모양이야. 조금 더 네 입장을 배려해야 한다는 걸 잊었어. 이제부터 주의 할게.” “하지만 심한 말을 한건 오히려 내 쪽인데…” “괜찮아, 그 정도 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지. 대신 엘도 앞으론 그런 말 하지 않기다?” “으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벨은 놀랄 만큼 환하게 얼굴을 밝혔다. 기쁨으로 반짝이는 모습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순간 나도 모르게 심장이 벌렁거릴 정도였다. 음, 어지간한 미인들엔 면역력이 생겼을 줄 알았는데, 아직 무리였나? 괜시리 민망스러운 기분에 나는 그냥 살짝 볼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그가 알고 있는 ‘엘’에 대한 호기심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물었다. “그런데, 그 엘이란 사람이 정말 나랑 똑같이 생긴 거야?” “응? 아아. 몇 가지는 좀 다르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해. 엘은 금발이었거든. 그리고 눈동자도 선명한 초록색이었고.” “인간이었다며. 그런데 너와는 어떻게 만난거야?” “우리 일족은 한 장소에 진득이 붙어있는 일이 거의 없거든. 엘과도 여행 중에 만났어. 그땐 이미 녀석 옆에 엘퀴네스가 붙어있었지만 말이야.” “그럼 그때 이미 정령사였다는 소리?” “그렇지. 게다가 타고난 감각이 남달라서 보통 정령사보다 정령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어. 그리고 정령왕 들에게도 거리낌 없이 대했고. 밝고 명랑해서 누구나 다 좋아했지.” 지난날을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짓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엘이란 녀석, 누군진 몰라도 정말 주변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었나 보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나 일리 없잖아.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삼키며 나는 조용히 되물었다. “굉장히 친했던 모양이네. 혹시…엘뤼엔, 아니 엘퀴네스도 그를 좋아했어?” “그거야 당연하지. 엘이 녀석을 잘 따랐거든. 의지를 많이 하는 것 같았어.” “…트로웰도?” “음. 트로웰하곤 초반에 많이 삐걱거리긴 했는데, 그래도 엘이 녀석을 참 많이 좋아했어. 결국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친한 친구가 되었었지. 사교성 하나는 정말 좋은 녀석이었거든.” “그렇구나.” 어쩐지 모든 게 다 허무해진 심정이랄까. 나는 조금씩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들어 가만히 입가를 쓰다듬었다. 한국에 있던 시절 불안할 때마다 버릇처럼 했던 동작이었다. 어쩌면 엘뤼엔은…내가 그와 닮았기 때문에 아들로 삼았던 건 아닐까? 트로웰 역시 나에게서 그를 투영했기 때문에 잘해주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날 처음 ’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했던 사람이 트로웰이었지.’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틀어진 수레바퀴가 겨우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에 한순간 서러운 감정이 복받쳤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지? 이제야 겨우 내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처음부터 혼자였던 셈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이럴 바엔 차라리 한국이 더 나았어. 거긴 적어도…다른 사람의 대타는 아니었으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 왜 그래? 안색이 나빠 보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시벨리우스의 시선에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슬퍼할 생각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되고 보니 오기가 생겼다. 누가 4천 년 전의 인간 따위한테 질 줄 알고? 두고 봐! 이미 한참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닐 녀석 따위, 다시는 생각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방금 전에 들었던 알리사의 명랑한 한마디였다. <바보 같아. 왜 잃을 것만 생각하지? 저 사람이 착각하고 있는 존재가 될 수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와 대등할 만큼 가치가 있는 친구가 되어주면 되잖아.> “그 말이 맞아, 알리사. 어디 누가 이기는지 해보자고. 후후후…” “에, 엘?” 어딘지 불안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투지에 타 올라 있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이때만큼은 루카르엠의 이상할 정도로 찝찝했던 미소도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져 있는 상태였다. 만약 이때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 줄 미리 알았다면 조금은 더 긴장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 쾅! 견고하게 만들어진 나무 탁자위로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당장이라도 때려 부술 듯 주먹을 내리친 남자는 움츠러들 만큼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뭐가 어쩌고 어째? 전멸? 한 명 빼고 전부 죽었단 말이냐!” “소, 송구스럽습니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게야! 방심은 금물이라고 누누이 일렀거늘! 어둠의 기사단들의 실력이 고작 이 정도였나! 그까짓 계집애 하나도 못 잡아 와!” 호통을 치고 있는 이는 얼마 전 그의 기사단을 시켜 타국의 소녀를 납치하라 명령한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온 몸에 너덜너덜한 상처를 입은 기사 한명이 바닥에 쓰러질 듯 무릎 꿇고 앉아있었다. 이사나와의 전투 중 유일하게 혼자서 도망쳤던 기사들의 대장이었다. “내 그곳의 지형과 소녀의 실력을 생각해 1년이란 기간을 주었다. 그런데 반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전멸이란 결과를 가지고 오다니!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 정녕 실망스럽구나.” “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방해자가 생겨서…” “방해자?” “그,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계획이 이사나 황제파의 녀석들에게 알려진 모양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자세히 말해 보거라.” 그때서야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대공은 한층 진정된 모습으로 다음 말을 촉구했다. 그 모습에 용기를 얻은 기사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그가 기억하고 있던 내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녀를 제압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중급 정령사라곤 해도 아직 어려 컨트롤이 불안정한 시점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소녀를 기절시킨 후 데려가려는 저희들을 저지하며 나타난 소년이 한명 있었습니다.” “소년?” “예, 언뜻 보아도 17세를 넘어 보이지 않는 어린 녀석이었습니다. 주변에 다른 이 없이 오직 그 혼자뿐이라 기사들은 잠시 방심하고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상급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 였던 모양입니다.” “뭐라? 상급 정령?” 그의 말에 대공은 앉아있던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비할 바 없이 사나워져 있었다.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할 생각이냐! 어찌 17세 밖에 안 된 어린놈이 상급 정령사가 될 수 있단 말이야!” “하, 하지만 그런 경우가 아니고서는 소년이 불러낸 이상한 형태의 생물체를 증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투명한 물로 된 늑대의 형상이었습니다.” “물로 된 늑대? 설마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을 말하는 거냐?” “아, 그, 그러고 보니 소년이 그들에게 명령할 때 시큐엘이라 불렀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한 마리도 아니고 몇 마리를 쉽게 다루는 지라…” “뭣이!” 확실히 상급 정령들이라면 어둠의 기사단 몇 명 정도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와중에 살아서 돌아온 것을 칭찬해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이려나 보군.’ 짧게 속으로 혀를 찬 대공은 다시 한번 기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데 그 소년이 황제파라 생각한 이유는 무엇이냐?” “행동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알폰프 제국민은 아니었습니다. 저희들이 대공전하의 기사임을 알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던 것을 보면 황제파가 확실합니다. 또한 황제파냐고 묻는 질문에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큭. 정말 주변에 아무도 없더냐? 소년의 생김새는 어떠했지?” “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였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곱상한 느낌이라 그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동행자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희와 싸울 땐 그 혼자뿐이었습니다.”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라…” 대공은 그가 알고 있던 황제파의 귀족 중 그와 비슷한 생김새의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한손을 들어 수염이 까칠하게 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상하군. 그만한 나이에 상급 정령사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는 그리 흔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그런 오지까지 따라 붙을 정도라면 확실한 정보출처가 있었다는 뜻인데…설마 그 늙은이가 흘렸나?’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대공 그 자신과 어둠의 기사단, 그리고 정보를 제공했던 점술사 늙은이 밖에 없었다. 철저한 비밀을 요했던 일인 만큼, 정보길드의 첩자들이 끼어들 구석은 없었으니, 기사들이 배신하지 않은 이상 의심 가는 인물은 늙은 점술사뿐이었다. “쯧. 다 늙어 죽어가는 것이 불쌍해서 살려뒀거늘, 아무래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군.” 혼잣말로 짧게 중얼거린 그는 곧 테이블 옆에 있던 금종을 들어 흔들었다. 딸랑, 맑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구석에 검은 두건을 쓴 남자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지금 당장 히켄 동굴의 늙은 점술사를 찾아 죽여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번 일을 방해했다는 은발머리의 정령사에 대해서 조사해 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맡겨두십시오.” “오호호호! 천하의 대공전하도 안절부절 할 때가 있나보지?” 대공은 갑작스럽게 끼어든 웃음소리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활짝 열려진 창문 밖 발코니에 아슬아슬 하게 걸터앉아있는 요염한 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가 마계 4대 공작의 일원인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본 그는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살짝 고갯짓을 했다. 알아서 나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이윽고 방안에 남겨진 사람이 대공 하나만이 되자 세르피스는 기다렸다는 듯 빙긋 미소를 지으며 창문 안으로 들어섰다. 밤하늘 같이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허리 아래에서 찰랑거렸다. “무슨 일이지?” “흐음~ 태도가 상당히 무례한 걸? 뭐, 좋아. 어차피 마왕전하의 계약자이니 봐주도록 하지. 위대한 어둠의 군주로부터의 전언이야. 거사의 날은 대체 언제 확정 되냐는 데?” “끄응.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런 건 재촉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어머. 그렇게 말해도 나는 무슨 소린지 모르는걸. 아무튼 이번 달 수량을 받으러 왔어. 준비해 뒀겠지?” “물론.” 벌써 10년이 넘게 해온 일을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대공은 곧 그의 옆에 있던 장식장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각국의 존귀한 술과 와인이 진열된 것으로 그가 평소에 아끼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유달리 작은 모양의 병 하나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그것을 건네받은 세르피스는 호기심이 어린 얼굴로 병을 살펴보았다. “이게 그렇게 귀한 술이라며? 대체 얼마나 대단하기에 마왕전하만 풀 수 있는 봉인까지 걸어두는 거야? 확실히 굉장한 맛이긴 할 것 같은데.” “아아. 아마 자네들 마족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할걸? 이달로 정확히 9천 9백 10잔 째겠군.”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거야? 아무튼 대단히 독한 인간이라니까. 뭐, 그에 대한 상이라고 하면 뭣하지만 내가 좋은 거 하나 가르쳐 줄까?” “…?” 대공은 무심한 표정 그대로 눈꼬리만 살짝 치켜떴다. 무슨 말인지 어서 말해보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보고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세르피스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들어보니 뭔가 대단한 계획을 실패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그걸 방해한 주범이 아무래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랑 꽤 인상착의가 비슷하던 걸?” “…! 그게 누구지?” “글쎄, 누굴까?” “장난 하지 말아라, 마족! 이건 네가 섬기는 마왕에게도 중요한 문제다!” “아앗, 깜짝이야. 알았어. 가르쳐 주면 되잖아. 정말이지 재미없기는 마왕전하나 이놈이나 똑같다니까? 음, 그러니까 말이야. 나랑 데르온이 얼마 전에 이사나란 꼬맹이를 쫓아다닌 적이 있었거든?” “이사나?” 그녀의 말에서 낯익은 이름을 들은 대공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세르피스는 그것을 못 본 척 하면서 생긋 다음 말을 이었다. “맞아. 그 왜 당신의 조카인지 뭔지 하는 꼬맹이 말이야. 그 녀석이 얼마 전에 폴리모프 마법을 사용해서 모습을 바꾼 걸 확인했거든. 허리까지 오는 고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로 말이야.” “그게 정말인가?! 하지만 이사나는 정령사가 아닐 텐데?” “어머? 그럼 내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뭐, 믿든지 말든지 상관은 없어. 어차피 마왕전하께서 알아서 처분 명령을 내렸으니까.” “처분?” “그래. 암흑의 기사 루카르엠이라고 알아? 그에게 당신의 조카를 죽이라고 명령하셨거든. 하지만 안심하진 마. 같은 마족이지만 루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녀석이니까. 명령이 떨어진지 한참이나 됐는데, 지금까지 그 꼬맹이가 살아있다는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어?” “끄응. 루카르엠이라는 마족이 배신했다는 소리인가?” 낭패감이 가득한 대공의 표정에 세르피스는 재밌다는 듯이 깔깔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를 놀리는 기색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정말 바보구나? 마족 사이에선 ‘배신’이란 단어는 있을 수 없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신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죽어 주는 게 순리거든.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따르지 않으면 그만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이면 돼. 다만 그럴 실력이 된다는 보장이 갖춰졌을 때의 일이지만.” “…그렇군. 확실히 마족들은 언제고 서로의 뒤통수를 칠거라 예상하고 있는 종족이었지. 그렇다면 루카르엠이란 마족은 마왕의 명령을 따를 생각이 없다는 뜻인가?” “말했잖아. 그의 속은 아무도 모른다고. 어쨌든 정보는 여기까지. 미리 다 말해주면 재미없잖아?” 더 숨기고 있는 사실이 있단 말인가? 대공은 불쾌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르피스는 한쪽 눈을 윙크하며 능청을 떨어 보였을 뿐이었지만. 아무튼 이제까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던 이사나의 거취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상급 정령사가 된 것은 확실히 의외였지만,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을 보낸다면 가뿐히 해결 할 수 있으리라. 대공은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나머진 스스로 알아보도록 하지.” “후훗. 분발해야 할 거야. 당신의 조카는 이미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높이 자라버렸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보도록 할게. 늦으면 마왕전하에게 혼나거든.” 그렇게 대답한 세르피스는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와인병을 장난스럽게 살짝 흔들었다. 마치 피처럼 검붉은 액체가 그 안에서 찰랑거리고 있었다. ===================================== 후후후. 마감이라는게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어제에 이어 바로 연재라니;<-어이; 여기서 문제! 와인병에 담겨있는 액체는 과연 뭘까요~? *>ㅁ<* 원래는 이 쯤에서 새로운 상황이 떡-하니 전개되어야 했지만...그렇게 되면 너무 정신없어질 것 같아 과감히 다음 파트로 넘겨버렸습니다; (정 안될 것 같으면 다시 수정될 지도 모릅니다;-_-;) 아, 그리고... 엘이 예전에 레이라는 꼬마에게 준 나이아스가 봉인된 목걸이는요~ 아이가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만큼 자라거나, 정령사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게 되면 자동적으로 봉인이 풀린답니다. 무려 몇 백년 동안 검속에 가둬둔 이프리트보다는 훨씬 낫지요; 후후후...;;; P.S- 알리사의 나이가 13살에서 14살로 수정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해가 넘어갔다더군요. (먼산) 5권의 출판본에서 기사들이 보고한 내용은 만으로 계산한 걸로 하지요.<-억지부린다.-_-; 외전 5 외전. 대지의 사랑을 받은 여인. 《 알리사. 비밀을 말해줄까? 너는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란다. 》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특별한 힘이 있었다. 내가 키우는 꽃나무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 그게 무슨 특별한 힘이야?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세한 사정을 들으면 모두 그렇구나하고 공감하게 된다. 생각해 봐라. 4살짜리 아이가 키우는 꽃 화분이 제대로 클 수 있는지. 물을 제대로 안주거나 조금만 관리를 소홀히 해도 금방 비실거리는 꽃잎을 나는 한번도 시들여 본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화분만이 아니다. 정원에 심어져있는 모든 나무들이 내 손에 닿으면 병들어 죽어가는 것도 금방 되살아났다. 아버지의 영지를 가로질러 내려가는 길에 보이는 수많은 밀밭들도 내가 흙장난을 하고 놀면 그해는 풍년이 되었다. 그래서 소작농들은 내가 와서 놀다가는 것을 무척 반가워했고, 굉장히 신성하게 여긴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나 그때엔 10년 가뭄이 지속되고 있어 곡물의 수확이 철저하게 적었던 때라 더욱 그랬다. 마을의 영주인 아버지는 그런 내 능력을 천민들에게나 필요한 쓸모없는 것이라 치부하며 못마땅해 했지만 아름다운 어머니는 굉장히 기뻐하셨다.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라며, 너는 언제나 축복받을 거라고. 아무리 네가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어도 땅만은 너를 버리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였을까? 나는 지금까지도 땅을 바라보면 돌아가신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부터 떠올린다. 25살의 꽃다운 나이에 이렇다할 지병 없이 갑자기 돌아가신 어머니. 주변 사람들은 백작부인이 몰래 시해한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다. 첩의 딸로 태어나 백작 가(家) 사람들의 애물단지 취급을 받는 나를 그저 안타깝게 여기며 슬퍼 하셨을 뿐. 어쩌면 미래의 내가 어떤 삶을 살게 될지 짐작하셔서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아름답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총명하셨으니까. 이제 두 달 후면 나는 옆 마을의 영주 아들에게 첩으로 시집가게 된다. 이제 겨우 13살인 내가 45살인 영주 아들과 결혼해야 하다니! 아무리 친분이 목적이라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니야? 에에익! 아버지 따위!! 아버지 따위~~!!! 평생 저주 할 거야앗!!!! “쿡쿡…” “헉!! 누, 누구야?” 야심한 밤에 남몰래 울 곳을 찾아 정원 한 구석으로 나와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작은 웃음소리에 놀라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얄미운 이복 오라버니들도, 정원사 아저씨도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 그런데 이런 밤에 누가 이런 곳을? 혹시 침입자? 으아악~!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푸웃. 괜찮아. 안 죽일 테니까 염려 마.” “헉…어떻게?”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아는 거지? 설마…내 생각을 읽어? 머리가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나는 조심스레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돌아보았다. 캄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거뭇거뭇한 사람의 형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똑바로 서 있는 것 같은데도 그리 커 보이지 않는 키. 아무리 봐도 내 또래의 어린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혹시 오라버니 인가? 하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바보, 목소리가 다르잖아. 목소리가. 그러자 잔뜩 긴장한 채 낯선 이의 정체를 골몰하고 있는 내 귓가로, 유쾌하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흐음~ 유달리 땅의 기운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이 느껴지기에 와봤더니, 이런 여자아이라니. 정말 놀랐는데?” “누, 누구야, 너?” 아무리 지방 변두리에 있는 작은 영지라지만 엄염한 작위를 가진 귀족의 저택이다. 그런 저택에 딸린 정원에 경비병도 무시하고 들어와 있는 아이라니…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하지 않은가. 때문에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멋대로 반말로 응수해버리고 말았다. 뭐 어때. 첩의 자식이라지만 나도 백작의 딸이라고. 귀족이 평민(일지도 모르는)아이에게 반말을 한다고 해서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나마 나는 평민인 어머니를 둔 덕에 그런 것을 따지는 녀석이 아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비명을 질러 경비병을 부르지 않은 게 더 용한 일 아닌가? 나는 제 멋대로 그렇게 생각한 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런 나의 원맨쇼를 보며 즐거워하는 상대방의 모습은 전혀 느끼지 못한 채. “푸훗. 너 진짜 재미있다. 하지만 난 내가 평민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 걸?” “뭐? 그, 그럼 너 귀족이야? 이번에 아버지에게 손님이 왔었던가? 중얼중얼…” 그때였다. 시커먼 구름에 가리워져 한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웠던 달빛이 그 자태를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달빛을 따라 점점 뚜렷해지는 소년의 얼굴을 보고 한순간 숨이 멈추는 느낌을 받았다. “허억.” 어깨까지 찰랑이는 검은색 머리카락. 흙색이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예쁜 피부. 황금색의 커다란 눈동자와, 새빨간 앵두 같은 입술…. 차분히 달빛을 받은 머리카락이 검은색인 주제에 부럽게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에 가득 담겨있는 장난 끼. 나보다 한두 살은 위일까? 언뜻 보아도 15살 내외로 보이는 외모 인 듯 했지만 진정한 문제는 바로! ‘이게 뭐야! 남자주제에 너무 예쁘게 생겼잖아~~~!!’ 그리고 그렇게 느낀 순간, 난 이 정체 모를 소년에 대한 경계를 완전히 풀어버리고 말았다. 저 정도의 외모를 가진 아이가 평민일리가 없거니와,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예쁜 사람은 나쁜 짓을 못 할 거라는 이상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생각을 또 어떻게 알았는지 생긋 웃은 소년이 다시 말을 건넸다. “예쁘게 봐줘서 고마워. 음…놀라게 해서 미안했다는 사과가 먼저인가? 네 이름은 뭐니?” 순간 버릇 적으로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대답할 뻔했다. 정숙한 숙녀가 외간남자에게 함부로 이름을 대려 하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또 평민의 피가 어쩌고 하면서 호되게 야단치실 게 틀림없다. ‘이건 내 탓이 아니라고. 저 녀석이 너무 사심 없이 물어본 탓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납득하며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흐, 흥! 상대방에게 이름을 물을 때는 본인의 이름부터 먼저 밝혀야 하는 거 아냐? 무례하긴.” “아, 그런가? 미안해 알리사노. 이렇게 예쁜 이름을 공짜로 들으려고 하다니 내가 생각이 짧았어.” “!!!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이 녀석, 대체 뭐하는 녀석이야??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아주 한순간 소년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어졌다. 또 실수했다고? 무슨 소리야 그건? “아아, 미안. 내가 좀 특이한 능력이 있거든.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아서 말이야. 아, 그렇게 노려보지 마. 이젠 안 읽을게. 정말이야.” “노, 노려보지 않았어. 그런데 정말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어떻게?” “음. 선천적인 능력이라 나도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는걸. 아, 내 이름은 트로웰이야. 잘 부탁해.” 그러면서 소년은 또다시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두 눈 가득 담긴 장난끼는 여전히 반짝이고 있었기에, 나는 그가 지금 장난 치고 있는 거라고 내 멋대로 단정 지었다. 아버지의 손님으로 온 귀족의 아들이라면 내 이름정도 쯤이야 알아내는 건 식은죽 먹기 일 테니 말이다. 흥. 내가 어리다고 그런 뻔한 속임수에 넘어갈 줄 알아? 그리고 뭐? 트~로~웰? 기가 막혀서 정말. “트로웰은 땅의 정령왕의 이름이잖아!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 아닌데.” “웃기시네! 어느 부모가 아들에게 정령왕의 이름을 지어 준다는 거야? 그러다 정령왕의 노여움을 사면 어쩌려고! 자꾸 거짓말 하면 경비병을 부르겠어.” “흐음~ 그런가. 그래서 인간들 중에 우리와 같은 이름을 가진 녀석들이 없었던 거구나. 정령왕의 노여움이라. 우리가 그렇게 쪼잔하게 보이나? 그 정도 가지고 화내지는 않는데 말이야.” 아주 진지하게 응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태도에 나는 기가 막혀서 화낼 타이밍도 놓치고 말았다. 우리라니? 4대 정령왕들을 지금 우리라고 표현한거야? 거기다 저런 진지한 태도라니, 지나친 장난이 아니라면 저앤 분명히 미친 거다. 자기를 정령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야, 맙소사. 저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불쌍하게도 어쩌다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이 그런 몹쓸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을 몹시 심란하게 만들었다. 기왕 이렇게 되고 보니 까짓것 몇 번 맞장구 쳐주는 것도 소년을 위해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녀석에게는 그것만이 진실일 텐데, 그걸 내가 부정해버리면 앞으로 세상을 어찌 살아가겠느냔 말이다. 아아. 나는 정말 착하기도 하지. “우와~ 그럼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란 말이야? 멋지다~” “아, 그래? 하하.” "응, 응! 난 말이야~ 기회가 되면 꼭 땅의 정령왕을 만나고 싶었어~ 있지, 나한테도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거든. 그게 뭔 줄 알아?" 내가 '트로웰'이라고 인정해주자 기쁜 듯이 헤헤 웃던 소년은, 이어진 질문에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정답을 내뱉는 것이 아닌가! 당연히 맞추지 못 할 거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한 걸로 봐서, 흙에 생명을 불어 넣을 것 같은데. 식물을 잘 키우지 않아? 네가 애정을 가진 곡물이 그해는 풍년이 된 다던가…” “헉? 어,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너는 땅의 기운이 유달리 강하다고. 정령을 공격과 방어의 수단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땅의 정령은 원래가 식물의 성장을 잘 돕거든. 하지만 계약도 하지 않았는데 땅의 정령을 이끄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그것도 거의 본능적이라니, 역시 인간들은 놀랍다니까? 능력이 무궁무진해.”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소년의 황금색 눈동자가 문득 소름끼치도록 깊어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랄까? 나하고 나이차이도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소년에게서 저런 분위기라니, 말 도 안 된다. 나는 억지로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흐흠. 그, 그럼 내가 무척 대단하다는 소리네? 그렇지?” “맞아. 정말 대단해. 기운으로 봐선 나 까지는 무리겠지만 상급정령까지도 소환할 수 있겠는 걸? 하지만 아직은 무리야. 나이가 어리니까 마나가 감당을 하더라도 육체가 무너져버리거든. 지금은 중급정령인 멀든이면 되겠다. 어때? 계약할래?” “엥?” 이 녀석 , 정말 미친 거 아니야? 대체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 지나 알고 있는 걸까? 정령과의 계약이라니! 말해두지만 정령사는 마법사보다도 희귀하고 존귀한 존재다. 특히나 얼마 전에 끝난 10년 가뭄 이후로는 물의 정령사는 거의 신처럼 추앙받고 있을 정도고, 그건 다른 4대 정령들도 마찬가지. 그런데 그런 희귀한 정령을… 그것도 하급도 아니고 중급정령을 나 같은 평범한 꼬마더러 계약하라고? 미쳤어! 정말 미쳤어!! 장난이 너무 지나치다고! 그러나 황당함으로 노려보는 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한건지, 소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계약이란 게 뭔지 모를까나? 하긴 아직 나이가 어리니 그럴지도.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이래서 곤란하다니까? 으음. 그러니까 계약이란 건, 너의 마나를 정령에게 제공해서 그를 세상에 소환하는 대가로 정령의 힘을 부릴 수 있는걸 약속하는 거야. 상급정령을 소환하여 계약할 경우, 그의 아래에 해당하는 정령은 굳이 계약하지 않아도 소환 할 수 있고, 마음대로 부릴 수 있지. 예를 들어 나를 소환하게 되면 내 휘하의 땅의 정령을 모두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는 뜻이야.” “그, 그런 건 나도 알아!” “아, 그래? 생각보다 똑똑한 아이네. 그럼 계약 하는 거지? 하는 게 좋을 거야. 정령사가 되어 세상에 너의 존재를 알리는 편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니까. 지금 이 상태로도 정령의 기운을 다룰 수 있으니 계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지만, 가까운 시일 내에 너의 특이한 능력을 이상하게 여기고 해치려 하는 사람이 나올 거야. 아까운 능력이 독이 되는 건 막아야 하지 않겠어?” “무, 무슨 소리야?” 능력이 독이 된다고? 정령사가 되어 세상에 내 존재를 알리는 편이 유익하다고?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하니 바라보자 소년은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 이건 지금 읽은 게 아니야. 아까 널 처음 봤을 때 읽은 미래거든. 걱정 마, 난 한번 말한 것은 지키는 주의니까. 지금은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니까 안심해도 돼. 음…가까운 미래에 마녀 사냥이 일어날 거야. 규모도 작고 아마도 이 지방에서만 유행하는 것으로 그치겠지만, 지금의 네 능력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밝혀두지 않으면 그 사건에 휘말릴 수 있어. 인간은 의심이 많은 동물이니까.” 순간 오싹하고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내가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 거야? 소년의 깊은 황금색 눈동자를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마주보면 그대로 내 존재 자체가 무너져 버릴 것 같아서…. 그런 내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며 소년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인간의 운명을 마음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한은 없어. 정령왕이라곤 하지만 신과는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니까. 하지만 위험을 피할 조언은 해줄 수 있지. 운명의 실을 다른 곳으로 연결하게 한 달까? 사람의 운명은 한 가지가 아니라 무수하게 짜여진 복잡한 그물 같으니까. 조금만 손보면 얼마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도 돌릴 수 있거든. 뭐, 이런 나 역시도 운명에 매여 있는 몸이라 완전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흐음. 간단하게 말해서 그냥 정령과 계약하라는 거야. 틀림없이 너에게 좋은 일이 될 테니까 걱정 말고 날 믿어.” “믿…으라고? 무슨 근거로? 난 오늘 너를 처음 보는데?” 미친 사람을 마냥 믿고 있을 만큼 내 인생은 한가롭지 못하다. 당장 내일 아침부터 시작될 신부수업의 내용도 장난이아니라고 들었으니까. 아아. 그래.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날이 깊었네. 이제 그만 돌아가서 자야해. 내일도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이 소년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더 이상 놀아 줄 시간이… “정령왕을 믿지 못하는 인간도 있는 거야? 그건 좀 서운한데. 뭐,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잠깐만 가만히… 미안해. 너의 마나 좀 빌릴게.” “뭐, 뭐하는 거야?”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그냥 돌아서려했던 내 팔을 붙잡은 소년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두 손가락을 내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러운 촉감에 흠칫 놀라는데, 이상하게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너무 놀라서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지금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지? 갑자기 눈앞에 있는 소년이 너무 두렵게 느껴졌다. 흠칫 몸을 떠는 나를 본 소년은, 예의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겁먹지 마. 나쁜 짓 하는 게 아니야. 내 말을 따라 하고 나면 곧 좋아 질 거야. 자, 말해봐.<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 들은 적이 있다. 저건 정령을 소환 할 때 외우는 주문이다. 정령사를 꿈꾸는 둘째 오빠가 정령계약에 관련된 책을 줄줄이 외우고 다니기 때문에 나는 언젠가 저 주문에 대한 글을 들어 적이 있었다. 대체 이 소년은 무슨 생각일까? 정말로 내가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내 몸에서 힘이 빠진 건 무슨 이유지? 이 소년의 정체는 뭐고? 수많은 상념이 머리 속을 휘저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재촉하는 소년의 눈빛을 못 이겨 나는 결국 바라지도 않았던 정령소환의 주문을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따…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 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이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잘했어.” 그때였다. 우르르 하는 커다란 진동이 땅에서 들끓기 시작했다. 설마 지진인가? 사정없이 흔들리는 땅에 몸을 가누지 못하자, 옆에 있던 소년이 얼른 부축해주었다. 그래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 이렇게 땅이 흔들리는데 어떻게 이 소년은 멀쩡히 서있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조심스레 소년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 발이 나와 똑같이 땅에 대어져 있는데 소년의 몸은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편해 보이는 것이,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어이! 이게 무슨 일이야? 땅이 흔들려!!” “지진이다! 저택의 사람들을 깨워!! 백작님과 백작부인, 도련님들을 보호해!!” “꺄아악!!” 우왕좌왕 하는 경비병들의 목소리와 저택안의 비명소리. 지금 이 진동이 나에게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곧 속속들이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아. 이제 분명히 사람들이 여기로 오게 될 거야. 낯선 아이와 저녁에 이런 곳에 있던 걸 들키게 되면 분명히 아버지께 혼나겠지. 아니, 어쩌면 이 아이를 죽이려고 하실지 모른다. 어서 도망치게 해야! 이상한 아이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죽게 할 순 없단 생각에 난 다급히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현재 흔들리는 나를 보호할 작정으로 끌어안고 있었기에, 내가 그에게 말을 건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 저기!!” “쉿, 잠깐만. 무슨 말을 하려는 지는 알겠지만 기다려. 멀든이 왔어.” “너 아직도 그런 소리ㄹ…허억…?”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나는 그만 입을 꾹 다물어 버릴 수 밖에 없었다. 크게 진동하던 땅덩어리에 쭈우욱 금이 가더니, 이윽고 흙덩이들을 제치고 커다란 진흙의 거인이 그 속에서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던 것이다. “!!!” 순간 너무 놀라 차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있는 내 옆으로 평온하기 이를 데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안, 멀든. 형체를 줄여줄래? 그 상태로 있으면 너무 눈에 띄거든.” ‘이미 눈에 띄였어!!’ 엄청난 지진과 함께 곧바로 일어서는 거대한 흙덩이를 사람들이 못 볼 리가 없었다. 그것도 정원에 심어진 어떠한 나무보다 거대한 크기의 진흙거인이라면, 보기 싫어도 자연히 눈에 뜨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곧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곳곳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꺄, 꺄아아아아악! 괴물이야!!” 거의 자지러질듯이 날카롭게 소리치는 여자의 음성은 분명히 백작부인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우왕좌왕 하느라, 아직 그 괴물아래에 서있는 나와 소년을 발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지만, 발견되면 나는 틀림없이 죽은 목숨이다. 저 히스테릭하기로 유명한 여자가 그렇지 않아도 평소에 곱게 안 보고 있는 나를 가만 둘 리가 없는 것이다. 잠시 후, 소년이 자칭 '멀든'이라 칭한 진흙거인은, 형체를 보통 어른크기만한 상태로 줄였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정없이 흔들리던 땅덩이가 흔적도 없이 고요해 져 버렸다. 내 눈앞에 여전히 멀뚱히 서있는 흙 모양의 인간이 없었다면, 나는 방금 일어난 모든 상황을 꿈이라 치부해버리고는 잠을 자러 저택 안으로 돌아갔을 것이었다. 그 만큼 정원의 모습은 평소와 한 치의 다름도 없이 평온해져있었다. “어…어떻게 된 거야?” 나는 떨떠름하게 변한 얼굴로 소년의 부축에서 벗어나면서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성실하게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별 거 아냐, 그냥 정령소환이랄까. 조금 요란했지? 다른 정령들에 비해 땅의 정령은 소환시에 땅을 이용하기 때문에 자잘한 소동이 불가피하거든. 인사해, 이쪽은 땅의 중급정령인 멀든이야. ” “하…너 아직도 그런 헛소릴.” 땅의 중급정령이 흙으로 된 거인의 모양인건 사실이었다. 역대의 정령사 전기에서 유일한 땅의 중급 정령사의 설명에도 그러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눈앞에 서있는 이 흙 인간을 순순히 정령이라 인정하기엔 난 순진하지 못했다. 이래봬도 세상에 불가능 한 것과 가능한 것을 구별할 줄은 아는 나이란 말이다. 정령이 이렇게 뉘집 땅강아지 이름 부르면 나오듯 쉽게 출현할 수 있는 존재일 리가 없잖아! 그러나 나는 이러한 상식을 소년에게 당당하게 알려줄 수 없었다. 등장 때부터 나에게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던 흙 거인이 소년에게 뜬금없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건네었기 때문이다.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자, 멀든. 고귀하신 땅의 정령왕을 뵙습니다. “!!” “응. 그렇지만 지금은 상대가 틀렸어, 멀든. 소환된 거잖아? 이 숙녀 분에게 계약의지부터 먼저 물어야지.” -아, 예. 죄송합니다. 무척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몇 번이나 소년에게 조아린 흙 거인은, 문득 새삼스럽다는 듯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감탄한 듯한 음성이 뚜렷하게 귓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대가 나를 소환하였는가? 아직 어린 인간아이에게 중급의 정령을 소환할 능력이 있다니 실로 놀랍기 그지없군. “하, 하아? 설마…저, 정말 땅의 정령????” -물론이다. 난 땅의 중급정령 '멀든'. 그대의 이름은? 당연하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응수하며 자신의 이름을 밝힌 흙거인은 곧이어 나에게도 이름을 물었다. 그러나 너무 놀란 탓에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은 나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입만 어버버 거릴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소년을 돌아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사정없이 질문하는 내 눈빛을 보았는지 소년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말했잖아, 정령소환이라고. 아까 외운 주문이 정령 소환주문이었거든.” “ 마, 말도 안 돼! 난 주문을 따라 외운 것 빼고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걸!!” “물론, 평범한 루트는 아니었지. 소환에 필요한 마법진도 그리지 않았고, 자연 친화에 집중하는 상태도 아니었으니까. 네 경우에는 내가 중간 매개체를 해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야. 너의 마나에 내 힘을 섞어서 정령을 불러낸 거지.” “뭐, 뭐야? 네가 대체 뭐길래?” 정령과 계약할 때 누군가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정령과의 계약이란 오로지 시술자 본인의 마나를 통한 정령의 소환을 전재로 두고 있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이 아닌, 제 3자의 개입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돼는 것이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얼빠진 눈으로 바라보자 소년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정령에 관한 것에서 정령왕이 상식에 들어가는 경우는 없어.” “너…그럼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아무리 봐도 평범한 15세 정도의 소년, 그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 녀석이 정말로 정령왕이었단 말인가?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여실히 들어난 내 얼굴을 보며 소년은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부터 그렇다고 말했잖아? 너도 그렇다고 알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 그게…그러니까아…” “뭐, 인간은 의심이 많은 생물이니까 할 수 없지. 아무튼 사람들이 오는 것 같아. 계약을 빨리 진행해야겠어, 멀든.” -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소녀여, 그대의 이름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나는 대지의 기운을 지휘하는 땅의 중급정령, 멀든. 그대의 이름을 말하라. 순간 숨도 제대로 몰아쉬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위압감이 정령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힘이 빠진 다리가 자꾸만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것을 참으며 나는 두려움이 섞인 시선으로 멀든을 바라보았다. “내, 내 이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입니다.” -알리사노 알 드레프. 그대는 나와 계약할 자격이 충분하다. 태초의 약속에 따라 나와 계약을 하겠는가? “!!” 긴장된 시선으로 멀든을 바라보자 옆에 서있던 소년이-아, 아니 이제 정령왕이라고 해야 하나?- 얼른 대답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나는 가타부타한 이것저것을 따져볼 겨를도 없이 황급히 그의 말에 동조해 버린 것이다. “하, 하겠어요.” -좋다, 나 땅의 중급정령 멀든은 이제부터 그대 알리사노 알 드레프와 계약을 체결했음을 알리는 바이다. 그대는 이제부터 그대의 의지대로 나를 소환할 수 있으며, 나는 그대를 주인으로서 인정하고 성심을 다해 도울 것을 맹세한다. 계약은 성립되었다. 파아아앗!!! 엄숙하게 말을 내뱉은 멀든은 곧 휘황찬란한 빛과 함께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는 이마가 불에 데인 듯한 화끈한 느낌을 받고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이마를 만져보자 피부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명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 이게 뭐지?’ “계약의 인이야. 보통 사람의 눈에는 안보이지만, 정령들의 눈에는 보일거야. 네가 정령사가 되었다는 증거랄까? 이제 너는 멀든을 원하는 대로 소환할 수 있고, 땅의 하급정령인 놈들을 계약 없이 부를 수 있어. 아참, 하지만 소환할 때 조심해야 해. 지금은 네 마나와 나의 힘을 섞어서 불렀기 때문에 몸의 부담이 적은 것이었지만, 앞으로 소환할 때는 순수한 너의 마나만 필요하니까, 체력이 많이 필요할거야. " “…!!”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정말…정령과 계약을 했다고? 그것도 중급 정령인 멀든과? 훗날에 생각해보면 정령왕을 만났다는 것이 더욱 대단했던 것이었지만, 눈앞의 정령계약에 온 신경이 가있던 나는 상황의 중대함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난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던 셈이다. 소년… 아니, 트로웰은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나를 흘낏 보더니 지나가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상급정령은 10년 후쯤에 소환하도록 해. 아까도 말했지만, 지금은 네 육체가 받아들이는 힘이 중급정령이 한계야. 꾸준한 수련을 한다면 아마 몇 년 안가서 너는 대륙내의최고의 정령사로 불릴 수 있을 거야.” “……너는?” “응?” “너… 정령왕 이랬지? 너를 소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응? 가르쳐줘.” “……” 다급하게 물어오는 말에 당황했는지 트로웰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눈빛만은 여전히 차분하게 빛나며 침착하게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무리야, 나는.” “어째서?!!” “ 친화력이 부족해. 정령왕을 소환할 때는 중급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엄청난 마나가 소모된다고. 목숨을 걸어도 가능할까 말까야. 그냥 상급정도로 만족하는 게 좋아.” “하, 하지만!!” 목숨정도는 나도 걸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트로웰의 행동을 보고나니,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대륙의 인간들 중, 정령왕과 계약했던 인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야. 대부분 '정령왕을 소환하지 않으면' 죽는 것보다 못하는 삶을 살 사람들이었지. 하지만 너는 그 정도로 극한 상황이 아니잖아? 상급정령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너무 과한 욕심은 더욱 큰 화를 부를 수 있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나는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다만 정령왕과 계약할 수 없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안절부절 했을 뿐. 그런 내 마음을 느낀 탓인지 트로웰은 전에 없이 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허튼 생각을 가슴에 품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확실한 경계선을 그어두려는 듯 했다. “내 말을 이해 못하겠니?” “……” 아니, 이해했다. 충분히 나도 이해하고 있어. 그런데도 아쉬운 미련에 흔들려 이대로 맥없이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뿐이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한참을 머뭇거리던 나는 문득 나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럼…이제 다시는 널 볼 수 없어?” “응?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데?” “그렇잖아. 정령왕을 소환하지도 못하는데. 약속장소도, 시간도 정하지 못하니까…이대로 가면 이제 다시 만날 수 없는 것 아니야?” 그러자 트로웰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뭐야, 나랑 영영 이별할까봐 정령왕을 소환하고 싶어 한 거였어? 계약을 해서 언제든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아…”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고 보니 그게 그 뜻이었잖아! 빨개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있자 쿡쿡 거리는 트로웰의 웃음소리가 한층 더 짙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서 숨고 싶다는 게 바로 이런 기분이구나. 차마 눈을 들어 트로웰의 모습을 바라볼 수가 없다. 날 어떤 애로 생각하고 있을까? 인간주제에 용기도 가상하다고 비웃고 있을지도… 으악~ 그것만은 안돼!! “오, 오해하지 마! 나는 그냥~~!!” “푸훗. 그렇게 정색해서 변명하지 않아도 돼. 네가 나한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니까.” “뭐, 뭐어? 대체 뭘 근거로??” “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까? 그 정도쯤 알아내는 건 일도 아니지. 아, 말해두지만 연애감정만 호감에 포함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그렇게 창피해할 필요는 없는데…" “!!! 너, 너어~~!!” 이 녀석…침착하고 온화한 분위기로 위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나게 사악한 녀석인 거 아니야? 놀림 당했다는 충격에 아까보다 더한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은, 원래대로 회복되려면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할 듯 보였다. 그런 내 모습을 유쾌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트로웰은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좋아.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까 선물하나 해주는 셈 칠까? 위험할 때 정돈 와서 도와줄 순 있는데.” “이익! 피, 필요 없다, 뭐!!” “쿡쿡. 그래 나중에라도 필요해지면 불러. 아참! 이제 네가 중급계약과 계약한 사실이 다른 정령사들에게도 느껴질 거야. 어디보자, 이 근처에 쓸만한 정령사가…아, 마침 하나 있구나. 그가 널 찾아올 거야. 두 달 뒤에 결혼식이랬지? 그 전에 찾아와 너를 황성으로 데려갈 테니까 떠날 준비 해놓고 기다리고 있어.” “화, 황성이라니?” 놀라 둥그래진 눈으로 되묻자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이 생긋 웃었다. “여기 알폰프 제국은 정령사를 굉장히 귀하게 여기고 있으니까 말이야. 너 같이 어린나이에 중급정령과 계약한 우수한 인재를 그냥 썩힐 수는 없지 않겠어? 어쩌면 제국의 황제 직속으로 일하게 될지도 모르지. 분명한건, 이대로 옆 영지의 나이 많은 인간과 결혼하게 되는 것보다 너한테 훨씬 이득이라는 거야.” “아하하…” 집안사람들에게 가장 멸시 당하던 내가 황궁으로 불려가 황제직속의 정령사가 된다고? 나…지금 꿈을 꾸는 걸까? 평민인 어머니를 둔 덕에 귀족가에서 태어났어도 변변한 대접을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는 나였다. 백작의 신분이긴 했지만 아버지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하급의 관리에 불과했고, 싹수 노란 본부인의 아들들은 재능이라곤 눈꼽 만치도 없어, 앞으로도 백작가의 중앙 진출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툭하면 천한 평민의 피가 어쩌고 하면서 수군거리던 백작가의 사람들은 분명히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테지. 아직 황성으로 불려간 것도 아니었는데 놀랄 만큼 기분이 좋아졌다.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기분은 곧 이어진 트로웰의 작별인사로 인해 급격하게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 사람들이 오고 있어.” “아!” 서운했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존재에게 이렇게 집착이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릿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따뜻한 시선으로 웃었다. “그렇게 서운한 표정 짓지 마. 일단은 나도 유희중이니까 심심하면 가끔 놀러와 줄게.” “유, 유희 중이었어?” “응. 그러니까 지금 내 모습이 너에게도 보이는 거야. 정령들은 계약을 맺지 않으면 인간세상에서 형체를 드러낼 수 없거든. 그래서 대부분 정령왕들은 유희를 즐기려면 억지로라도 누군가와 계약을 해야만 하지.” 그건 처음 알았다. 계약을 해야만 모습이 드러난다니. 그렇다면 나는 지금 엄청 운이 좋았던 건가? 정령왕의 실체를 이렇게 만나보게 되다니 말이야. 아…그런데 계약이라면 트로웰도 누군가와 계약을 한 상태라는 걸까??? 갑자기 욱씬 하고 심장부근이 아려왔다. 까닭모를 질투심이 알지도 못하는 대상에게 맹렬하게 퍼부어졌다. 그래서인지 그것에 대해 질문하는 내 목소리가 유난히 날카로워졌다. “그, 그럼 넌 누구랑 계약한거야?” “음. '라이칸 블랙 디아곤.' ” “그게 누군데?” “블랙 드래곤의 수장…이라고 하면 알까나?” "헉!!"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의 거론에 한순간 심장이 멎을 뻔 했다. 드래곤이라니! 그것도 사악하기로 유명한 블랙 드래곤이라니!! 그들과도 계약할 수 있다는 건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정령은 오히려 인간외의 다른 종족들과 더 조화를 이루고 있는 편인데. 왜 나는 트로웰의 계약 상대자가 인간일거라고만 단정 지었던 걸까? 정령왕과 계약을 할 정도라면 웬만큼 대단한 존재가 아니면 안 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 드래곤 만큼 강력하고 완벽한 힘을 가진 존재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나 따위는 죽어도 상대가 되지 않을 테지. 내가 아무리 자연 친화력이 강해도 정령왕을 소환하기엔 무리인 것처럼. 그런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던 걸까? 우울한 상태로 고개만 숙이고 있던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드니, 트로웰이 상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어린애 취급하지마~!” “13살이면 충분히 어린이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면 화내겠지? 알았어, 미안해.” 능청스레 손을 떼면서 무척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연.기.해 보이는 트로웰. 아무래도 과장스런 행동으로 내 기분을 풀리게 하려는 듯 했지만, 그가 그럴수록 나는 아쉬운 감정만 더욱 짙어져 버렸다. 트로웰은 배려 깊고, 상냥하고, 아름다워. 내가…독점하고 싶을 만큼. 왜 나는 겨우 인간으로 태어난 걸까? 드래곤 이었다면 트로웰과도 계약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로 안타까워하던 나는, 갑자기 내게 와 닿는 트로웰의 손으로 인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자아, 그럼 '이동'” “뭐하는 거…꺄악!!” 파아앗-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 눈앞의 사물이 뿌옇게 된다고 느낀 순간, 약간의 어지러운 느낌과 함께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 채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이미 저택에 속해있는 내 방안으로 옮겨져 있는 상태였다. 당황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바로 옆에서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 왔기에 네 방으로 텔레포트한거야. 아까 정령소환 때문에 소란스러웠는데 괜히 그 자리에 남았다가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잖아. " “아. 고, 고마워. 근데 내 방은 어떻게 알았어?” “네 기억을 잠깐 읽었지. 장소만 알면 이동하는 건 어렵지 않거든.” 그러고 보니 사람들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었다. 횃불의 수도 여럿 보인 듯 했고. 멀든 때문에 이목이 집중된 상태가 아니더라도 야심한 밤에 혼자 정원에 나와 있던 걸 들켰다면 분명 크게 혼쭐이 났을 거다. 그런 세세한 것까지 배려해준 트로웰의 마음씀씀이가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그럼, 이만 가보도록 할게.” “응. 근데, 저기…트로웰?” “응?” 이제 모든 볼일을 끝냈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돌아서던 트로웰을 불러 세웠다. 의아한 듯이 바라보는 시선에 목소리가 잠겼지만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어서 어쩔 수 없다. 나는 미친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신경써주는 거야? 트로웰은 정령이니까 나 같은 인간 계집애 따위 어떻게 되든 상관없잖아?” 막말로 내가 마녀로 오해받아 죽던, 늙은이의 첩으로 들어가던, 트로웰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물론 13살밖에 안된 어린 나이에 중급 정령을 소환할 정도의 친화력이라면 대단하다고 생각 할 수는 있겠으나, 두 손 걷어붙이고 나서서 도와줄 정도로 정령왕에게 가치 있는 것은 아닐 터. 그런데 왜 나 같은 것에 신경을 쓰는 거지? 내 질문에 트로웰은 뜻밖이라는 듯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 듣고 보니 그렇네. 내가 왜 그랬을까? 원래는 계약자의 부탁만 들어주는데 말이야. 모른 척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정신 차리고 나니 너한테 관여하고 있었어. 그럼 대답이 될까?” “납득이 안돼.” “흠, 역시? 아,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나도 모르게 동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아. 이번 물의 정령왕이 인간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이거든. 덕분에 나도 조금 인간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 게 아닐까?” 이번 물의 정령왕? 그럼 그전까진 다른 물의 정령왕이란 소리? 물의 정령왕의세대교체가 있었나? 불쑥 의문이 떠올랐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런 거 생각할 때가 아니잖아! 그러자 트로웰은 내 도리질을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안돼? 으음. 그럼… 아, 그래! 그게 좋겠다.” “??”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의 눈동자가 장난끼로 얄궂게 빛났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대지의 사랑을 받는 아이' 랬던가, 너?” “에엑? 그, 그건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냥…” “흐음~ '대지'가 누굴 가리키는 줄 알아?” “?” 대지가 누굴 가리키냐니. 대지라고 하면 땅이라는 의미 밖에 더 있는가? 유난히 식물을 잘 키우는 내 능력을 칭찬하시기 위해 대지의 사랑을 받는다고 표현하신 것뿐, 어머니도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점점 더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자 트로웰은 쿡 하고 짧게 웃었다. “대지는 자연의 4대 원소 중 땅을 말하는 거야.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여기 아크아돈에서는 4대원소가 하나의 존재를 가지지. 바로 '정령'이라는 형태로 말이야.” “에?” “그러니까~ 대지라고 하면, 땅의 정령. 그것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자리에 위치한 땅의 정령왕 트로웰! 즉 나를 가리킨다 이 말이야.” “!!” 헉! 그럼 내가 트로웰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새 빨개진 내 얼굴을 재밌 다는 듯이 바라보는 트로웰이 그렇게 얄미워 보일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에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인데, 어째서 저 녀석은 저렇게 태연하기만 한거야! “뭐, 내가 사랑하는 인간에게 그 정도 혜택을 베푸는 건 당연한거라고 생각해. 키득” “으윽~~ 장난하지마~!!” “이유야 어쨌든 상관없잖아? 중요한건 넌 골치 아픈 운명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는 거고, 그렇게 벗어나게 된 것 또한 운명이겠지. 이를테면 내가 지나가던 길에 우연히 네 기운을 느끼게 된 것부터가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 말이야.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다~ 그렇게 생각해.” 트로웰의 진지한 대답에 나는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운명? 나와 트로웰이 만난 것이 운명이란 말이지? ‘그럼 다음에 만날 수 있는 기약도 운명이 될 수 있을까? 하나의 운명이 또 다른 운명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되풀이 되어서…영원히 운명 안에 우리 둘의 인연을 엮어낼 수 있는 걸까?’ 말도 안돼는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자그마한 희망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만큼 트로웰의 존재가 내 가슴속 깊이 새겨지게 된 것이다. 훗날에 돌아보면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란 열병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나, 나말이야!! 반드시 훌륭한 정령사가 될 거야!!” “그래, 내가 그렇게 될 거라고 했잖아?” “ 반드시! 반드시 노력해서 5년 안에 상급정령을 소환해내고 말테니까!!” “엥? 5, 5 년은 무리…” “그리고 10년째엔 무슨 일이 있어도 정령왕을 소환할거니까!!” 트로웰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나는 지금 23살이란 나이에 정령왕을 소환해 내고 말겠다는 허황된 장담을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는 분명히 나에겐 정령왕을 소환하기위한 친화력이 부족하며, 상급정령도 10년 후에나 소환해야 몸에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완전히 무시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으니 황당해 할 수밖에. 뭔가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는 트로웰을 가로막고, 나는 꿋꿋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만약에 그렇게 되면…나… 정말로 대지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 이건 프로포즈였다. 한마디로 나 댁한테 사랑받고 싶어! 라고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까 트로웰은 이 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못 알아 들은 척 딴청을 피워서도 안 되고 그게 무슨 소리야? 라며 되물어 보지도 말아야 한다. 여자가 먼저 용기 내어 고백하는 게 쉬운 일인지 알아? 조금 놀란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 트로웰은 뭔가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장난스럽게 웃었다. 마치 꼬마에게 고백 받은 어른이 곤란해 하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나마 외면하지 않아주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랄까? 솔직히 13살의 나이면 충분히 꼬마라고 볼 수도 있는 나이이기도 하고. 게다가 정령왕이라면 인간보다 훨씬 오래 살았을 테니 실제로 그와 나의 나이 차이는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을 것이다. 트로웰의 입장에서 보자면 나는 아무리 자라서 할머니가 되도 여전히 꼬마로밖에 안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연히 거절할거란 예상과 다르게 트로웰이 내뱉은 말은 놀랍게도 상당히 희망적인 것이었다. “뭐, 좋아. 일단 긍정으로 해둘까.” “저, 정말?” “인간들은 가끔… 정령왕의 언령을 뛰어넘는 엄청난 의지를 발현시키곤 하지. 그걸 보고 '기적'이라고 하던가? 방금 네가 말했던 조건은 내 입장에서 보자면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어. 정말 할 수 있겠어?” “야, 얕보지 마! 나도 한다면 한다고!!” 누군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아는가! 나도 내가 말했던 게 얼마나 얼토당토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밖에 우길 수 없는 건, 그만큼 내가 그에게 빠져들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언가! 그런 내 마음도 몰라주고 야속한 말을 건네는 트로웰이 얄미워서, 나는 지지 않겠다는 듯이 악을 쓰고 대답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예상했다는 듯이 맑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꼬마아가씨. 만약 네가 나의 소환에 성공하면, 그때는 계약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연인이란 존재로 지켜주겠어. 단, 네가 말한 대로 10년 안에 소환해야해. 스스로가 장담한 말이니 불만은 없겠지?” “물론!” “흠…솔직히 5년 후면 18살. 그 정도면 상급정령의 힘을 견딜 수도 있을지 모르겠군. 이번에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의 나이가 16세였나? 꽤 운 좋은 상황이 적용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10대 중반의 나이부터는 육체적으로 상급정령의 힘을 견딜 수 있다는 소리인데…그럼 23살도 너무 봐주는 건가?” “뭐, 뭐? 물의 정령왕을 소환했다고? 누가? 언제??” 내가 알기로 이제껏 정령왕을 소환한 사람들 중,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정령사는 없었다. 그들이 시도를 해보지 않았던 게 아니라, 물의 정령왕의 소환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다. 들리는 얘기로는 물의 정령왕을 소환할 때는 보통의(?)정령왕 소환에 들어가는 마나와 자연친화력의 두 배에 해당하는 기운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보통 정령왕을 소환할 때 들어가는 마나만으로도 충분히 목숨을 걸고 도전해도 성공할까 말까거늘, 그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마나를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지금. 그 대단한 물의 정령을 고작 16세의 인간이 소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로웰은 내가 놀라던 말던,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마치 ‘이웃집에 누가 열심히 일해서 얼마를 벌었다’고 말하는 듯 아무런 감흥이 없는 듯한 목소리였다. “누군지는 나도 잘 몰라. 마침 내가 유희중이어서… 엘퀴네스가 소환됐다는 소식만 들었을 뿐 아직 만나보지 못했거든. 이 참에 한번 만나보러 갈까?" “으음.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이네.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소환하기 힘든 거 아니었어?" “맞아. 힘들어. 보통의 각오로도 안 되고, 보통의 능력으로도 절대 소환할 수 없어. 한마디로 굉장히 운이 따라주는 케이스랄까? 뭐, 이유가 짐작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거야 말로 '기적' 이구나. 그 순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것도 보통의 기적이 아닌 역사를 바꿀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귀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의 신분이 천민이었다 해도, 앞으로 세상은 그를 향해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정령왕이 인간에게 가지는 가치는 대단했다. 16세. 나와는 겨우 3살차이. 아직 성인이라고 쳐주지도 않는 어린나이에 세상을 발아래로 두게 된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 역시 정령왕의 소환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트로웰이 빙긋 웃으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때의 나는 오직 눈앞의 희망에만 매달리느라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을 겨를이 없었다.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진정한 낭군은 따로 있는 것 같으니.” 그리고 그 후 어떻게 되었냐고? 트로웰의 예언에 따라 황성에 올라가긴 했었다. 비록 그 생활이 너무도 지겨워서 몇 달 만에 걷어차고 뛰쳐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도중에 어떤 정체모를 괴한들에게 습격을 받기도 했지만, 마침 지나가던 일행이 구해줘서 목숨은 건사한 상태다. 나를 도와준 이들 중에는 정령사, 그것도 물의 상급 정령사가 속해 있었는데, 놀라운 것은 그의 나이가 나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름이 이사나라고 했던가? 어디선가 분명 들은 이름인 듯한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무튼 내 또래의 인간 중 상급 정령사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욱 더 분발할 수 있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렇게 되고 보니 내친김에 정령왕 엘퀴네스를 소환했다는 그 운 좋은 인간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를 실제로 만나보면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르잖아? 나 또한 기적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것을. <외전 끝> ===================================== 으음.... 예전에.. 엘퀴네스가 출판되기도 전에 써두었던 외전입니다. 알리사와 트로웰의 만남을 담고 있지요; 생각보다 분량이 너무 길고 좀 지루한것 같아서.. 올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단 여러분의 평가에 맡기고자 올렸답니다;-_-; 원치 않으시면 출판본에서 삭제하렵니다. 의견을 말해주세요^^ 6-12 존재의 이유(1) 다음날 아침 일찍 모든 준비를 갖춘 우리는 다시 던전으로 가기 위한 일정을 짜기 시작했다. 이제 목적지가 거의 코앞으로 다가온 만큼, 만약을 위한 대비책을 미리 세워둘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한 가지 문제점이 생겼으니, 그것은 바로 알리사의 거취 문제였다. 원래 있던 장소에 돌려보내자니 대공이 다시 공격을 해올 것이고, 그렇다고 우리를 따라 던전으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위험을 수반해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좀처럼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나는 일단 그녀 본인의 의사부터 확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할래, 알리사? 이대로 가까운 마을에 데려다 줄까? 정령을 이용하면 금방 갈 수 있는데.” “흠, 어차피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뭐. 그냥 당신들 따라 가면 안 될까?” “그게 좀 곤란해. 우리가 가는 곳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거든.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는 장소라서 말이야.” “거기가 어딘데?” “던전이야. 혹시 바론 던전이라고 들어봤니?”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온하기 그지없던 알리사의 눈동자가 놀랄 만큼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엑? 설마 그 악명 높은 바론 던전? 지금까지 들어가서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없다는 그곳 말이야? 그런 곳엘 왜 가는 건데?” “응. 아는 사람에게 그 안에 있는 어떤 물건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받았거든. 대신 그에 상응하는 것을 대가로 받기로 하고 말이야.” “자, 잠깐! 거긴 아직 트릭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 되지 않은 곳이잖아. 그런데 가져올 물건이라니…설마 던전의 최하층까지 내려갈 생각은 아니겠지?” “그럴 생각인데.” “헉! 당신들 미쳤어?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이래? 무사히 돌아온 사람이 없단 말이야! 십중팔구 죽거나 미친다고!” “맞아. 그래서 너를 데려갈 수 없다는 소리였어, 알리사. 어떻게 할래? 역시 마을로 가는 편이 좋겠지? 사막에선 또 괴한들이 습격할 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나의 말에 알리사는 기가 턱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정신 나갔기로서니 물건 하나 때문에 제 발로 사지(死地)를 향해 걸어갈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는 갑자기 명랑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럼 나도 갈래!” “엥? 무슨 소리야? 방금 네 입으로 위험하다고 까지 말해놓고서…” “하지만 당신들도 가잖아. 위험한 줄 알면서도 가는 건 그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 아니야? 하긴, 상급 정령사에 대사제님까지 있는데 두려울 게 뭐가 있겠어? 허약한 나 하나 보호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거야, 그치?” “이봐…너 말이야…” 결국 우리들한테 안전을 책임지라는 소리였냐! 하지만 알리사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팔짱을 끼운 채 말했다. “나 역시 땅의 중급 정령을 다룰 수 있으니까 도움이 됐으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아니, 오히려 지하니까 내가 더 유리할 지도 모르잖아? 원래 이런 일엔 조력자가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 “하지만 이건 조력자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않아도 한번 던전 탐험에 도전해 보고 싶었는데 잘됐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언제 또 가보겠어? 자아~ 우리 모두 함께 바론 던전을 정복 해보는 거야! 와아 재밌겠다!” “재미라니. 이게 무슨 온라인 게임인 줄 아냐… 파티 맺어서 최종관문 클리어 할 상황도 아니고, 나참.” “응? 온라인…뭐? 그게 뭔데?”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리 어른인척 야무지게 굴어도 결국 어린애는 어린애인가 보다. 뻔히 위험한 상황인걸 알면서도 ‘모험’이란 타이틀 하나에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옆에 있던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를 돌아보았다. 둘 다 난처한 표정이긴 했지만, 알리사의 합류에 대해선 크게 반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결국 우리는 갑작스럽게 늘어나 버린 일행에 대한 대책 의논을 다시 세울 수밖에 없었다. 제일 큰 문제라면 역시 던전 안에서 알리사를 보호 하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알리사의 신변까지 보호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많이 따랐기 때문이다. 그것에 관해 가장먼저 의견을 꺼낸 사람은 이사나였다. “정령을 붙여서 경호하면 괜찮지 않을까? 알리사 본인도 땅의 정령을 부를 수 있으니까 그 옆에 시큐엘도 붙여두면 될 것 같은데.” “그건 안돼. 아직 둘 다 장시간 동안 정령을 불러내는 건 무리잖아. 최하층으로 가기도 전에 쓰러질 셈이야? 던전 안이 어떻게 만들어 져 있는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체력소모가 심한 일은 위험하다고.” “그럼 하급정령은?” “글쎄, 하급이고 상급이고 안 된다니까? 음…정말 골치 아프네. 이사나 한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알리사까지는 힘들 텐데.”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이렇게 할까? 엘은 지금까지 했던 데로 이사나를 맡고, 알리사는 내가 책임지고 보호하지 뭐. 여차하면 우리야 중간에 빠져도 되지만, 이사나와 엘은 꼭 하층까지 가야 하잖아.” “아, 그래줄래, 시벨? 그럼 나야 훨씬 부담이 덜하지. 너라면 위험한 순간에 밖으로 텔레포트 하는 것도 가능 하지?” “일단 그렇긴 한데, 그 안에서도 마법을 사용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장담할 순 없을 거야. 하지만 탈출엔 자신 있으니 맡겨만 둬. 적어도 걸림돌은 되지 않을 테니까.” 오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란 말인가!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스스로 자청해서 하는 시벨리우스의 태도에 나는 깊은 감명을 받고 말았다. 정말이지 누구누구와는 전혀 다른 올바른 사고방식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 누구누구가 누구인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시벨… 너 정말 좋은 녀석이었구나.” “훗. 그걸 이제야 알았어? 아무튼 앞으로도 맡겨두라고. 절대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그럼 다시 예전처럼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지?” “무슨 소리야? 우리가 언제는 친구 아니었어?” “하지만 엘 너는 과거 얘기만 나오면 싫어하잖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때의 네가 전부인데, 그걸 부정당하면 전혀 낯선 사람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으음. 그, 그래? 알았어. 이제부턴 정말 주의 할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상처를 줬다면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말했다시피 기억이 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아무튼 우리가 여전히 계속 친구라는 거지? 와아, 이거 정말 기분 좋은걸?”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에 나는 남몰래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한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깊은 의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고, 하필이면 그가 진짜 내가 아니라는 것에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왜 하필 나는 그 사람과 닮은 얼굴로 태어났을까. 그리고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엘’이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인걸까. 정령왕의 계약자였다고 하니 평범한 인간이 아닌 건 분명한데, 시벨을 만나기 전까진 누구에게도 그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우연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 순간,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정령왕에 대해 기록된 책의 내용을 떠올렸다. …설마?! “이사나, 전에 샀던 책 아직 가지고 있지? 잠깐만 볼 수 있을까?” “전에 샀던 책? 아아. 그 정령왕의 로맨스를 다룬 책 말이지. 응, 가지고 있긴 한데…그건 갑자기 왜?” “아니, 잠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 내 말에 이사나는 별다른 말없이 순순히 배낭 안에서 책을 꺼내 건네주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상당히 경악했었던, ‘정령왕의 인간’이란 낯간지러운 타이틀이 떡하니 박힌 바로 그 책이었다. 모두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무시한 채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자,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엘퀴네스의 사랑’이라고 적힌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얼마 전에도 보았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 넘어갔던 거였는데, 우습게도 진실은 늘 엉뚱한 곳에서 드러나게 되는가 보다. 나는 다시 한번 천천히 그때 보았던 부분을 읽어보았다. 『-엘퀴네스의 사랑- 그는 모든 물의 지배자이며 창조자이다. 그 외모는 얼음같이 차갑고, 시린 물처럼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누구의 사랑받기도 원치 않는다는 이 오만한 물의 정령왕에게도, 한때는 모든 것을 내버릴 정도로 열렬히 사랑했던 존재가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대상이 하나의 어린 인간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행운아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 계약자라고 알려져 있다. 고문(古文)에 따르면 그는 요정같이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며, 타고난 정령사의 기질이 뛰어나 감히 해치려 드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만반에 뛰어난 이 존재를 차갑기가 얼음 같기로 유명한 엘퀴네스가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순리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의 사랑에도 시련은 어김없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이벌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인간도 아니고, 요정도 아니며, 드워프는 더 더욱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한 마리의 특이한 백마(馬)였다. 엘퀴네스의 계약자는 언제나 그 옆에 아름다운 백마 한 마리를 데리고 다녔는데, 이 말은 범상치 않은 술수와 능력을 행사하며 주인의 연인인 엘퀴네스를 시기했다는 것이다…[중략] 모든 만물의 물을 지배하는 위대한 엘퀴네스의 라이벌이, 고작 말 한 마리라는 사실에 대해 필자는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 “……” 세월이 흘러 본래의 내용이 상당히 와전되었다고 쳐도, 이 부분이 시벨리우스가 기억하는 ‘엘’과 연관이 있는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말하는 백마란 시벨리우스를 뜻하는 것이겠지. 나는 다시 한번 확인할 겸 떨떠름한 표정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시벨, 너 전대의 엘퀴네스와 사이 나빴다고 했던가?” “윽-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녀석이 내가 하는 사사건건마다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날 얼마나 눈에 가시처럼 못살게 굴었는데! 사이가 좋았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라고.” “흐음. 혹시 예전에 여행 다녔을 땐 본래의 모습으로 다녔어?” “아아, 가끔. 네가 쉽게 피곤해 해서 내가 태우고 다닐 때가 있었지. 그런데 그건 왜? 혹시 뭔가 기억이 나는 거야?” “아, 아니. 그냥 갑자기 궁금해 진 것뿐이야. 하하하…” 어쨌든 이로서 확실해 진 건, 이 안에 담긴 내용이 전부 거짓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의 이야기도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었지. 어쩐지 점점 일이 꼬여가는 것 같아,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하군. 책에도 실릴 정도라면 꽤 유명하단 건데, 왜 내게는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이제까지 없었다고 말한 거지? 일부러 거짓말 할 이유도 없을 텐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니?” “아, 맞다. 알리사, 너라면 알지도 모르겠네. 혹시 옛날에 엘퀴네스를 소환했던 인간에 대해 들은 적 없니? 뭐, 전래동화식으로 전해진 이야기라도 좋은데.” 그러자 알리사는 또랑또랑 눈망울을 굴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얼굴이었다. “엘퀴네스라면 물의 정령왕을 말하는 거지? 옛날엔 없었을 걸? 아, 하지만 바로 몇 달 전에 그를 소환한 사람이 생겼다고 들었어. 내가 알기론 아마 그게 최초일거야. 트로웰한테 들었으니까 틀림없다고.” “트로웰…한테 직접 들었다고?” “그래. 뭐야~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끄응. 그럼 트로웰이 일부러 숨기고 있다는 건가? 아니면 알고 보면 ‘엘’이 인간이 아니었다거나….”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엄습하는 불길한 기분에 몸을 살짝 움츠렸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엘이란 사람은 점점 정체가 묘연해 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에 혼자 손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랄까? 이대로 계속 궁금해 해도 좋은 걸까? 차라리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나를 위해서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속에선 계속 같은 말이 반복 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정말 이대로 있어도 괜찮은 걸까?> ============================ 에에. 많은 분들의 리플에 힘 입어~ <외전 5- 대지의 사랑을 받는 여인>도 출판본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봐주셨다니 다행이어요; 트로웰의 외도를 반대하는 분들이 많이 계시긴 했지만..후후, 그건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우리의 트로웰이 누굽니까! 바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진 녀석이 아니겠습니까? 트로웰은 알리사의 마음이 잠깐 타오른 촛불같은 식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절대로 자신을 소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요;<-이건 명시했었다가 그냥 빼버린 내용입니다만;; 그래서 그냥 장난삼아 받아주는 척 한겁니다. 후후 아무튼... 엘이 점점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역시 주인공을 괴롭히는 건 즐거워요^^<- 모두 좋은 하루 되시고~ 날씨 추우니 감기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P.S- 지적해 주신 오타 고쳤습니다. 매번 정말 감사드립니다^^** ‘호오, 이거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걸?’ 마계 4대 공작의 일원 마도의 군주 데르온은 현재 기척을 감추고 엘 일행을 따라다니고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노련한 솜씨라도 평소였다면 정령왕인 엘퀴네스의 시야에 포착되었을 테지만, 요즘 그의 신경이 다른데 가있었던 탓인지 좀처럼 자신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로선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정령왕의 마음을 이토록 어지럽히는 일이 무엇인지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첫 번째 임무의 실패로 마계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이사나들을 쫓아다니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데르온은 잠시 마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루카르엠은 대체 어찌 된 것이야! 지금쯤이면 죽었는지, 살았는지 연락이 와야 할 것 아닌가!” 콰앙! 거칠게 테이블을 걷어차며 노한 음성을 내뱉는 이는, 현 마계를 통치하는 어둠의 지배자-마왕이었다. 그는 얼마 전 그의 수하이자, 4대 마계 공작 중 한사람인 루카르엠에게 이사나의 주살을 명령한 바 있었다. 평소 눈에 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존재였기에, 이번 기회를 통해 제거를 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이사나를 해치려면 필히 그의 계약자인 정령왕 엘퀴네스의 눈에 발각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틀림없이 무사치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제 아무리 대단한 능력을 숨기고 있다 하더라도 감히 정령왕의 상대는 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루카르엠에게선 소식 한 장 날아오지 않았다. 마왕으로선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쩐지 그 약삭빠른 놈이 내가 의도한 게 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순순히 임무를 맡아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설마 처음부터 나를 골탕 먹일 작정이었던 건가? 이놈! 드디어 감추어 두었던 가면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구나!” 루카르엠이란 마족은 스스로를 잘 알고 있는 남자다. 마왕이 맡기는 일은 되도록 수행하되, 자신의 능력 선에서만 움직이는 것으로 유명한 존재였다. 만약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이 내려지면, 교묘히 말을 틀어 임무를 다른 자에게 떠넘기는 식으로 피해왔었기 때문에, 그가 충성심 때문에 이번 일을 무리하게 받아들였다곤 생각하기 힘들었다. 일을 맡았다는 것은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증거! 그런데도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는 건 마왕에게서 돌아섰다는 뜻이었기에 데르온은 더 더욱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론 루카르엠은 왕위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마왕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목적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알맞은 타이밍을 노리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애초부터 왕께서는 그에게 ‘언제까지’라는 제약을 두신 것도 아니었으니…좀 더 느긋하게 일을 진행시킬 속셈인지도 모릅니다.” “끄응. 너는 그를 잘 모른다, 데르온! 그는 내가 탄생하기 이전부터 이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자다. 4대 공작이라는 그늘에 감싸여, 마치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역대의 마왕들을 지켜보고 있었어. 놈은 결코 평범한 녀석이 아니다. 무언가 필히 노리는 게 있을 거야. 그래, 어쩌면 이미 눈치 채고 있던 걸지도 몰라.” “예? 무엇을?” 그의 물음에 마왕은 필요 이상으로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리곤 마치 변명하는 듯한 얼굴로 허겁지겁 그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그건 네가 알 필요 없다. 아무튼 계획을 변경할 필요가 있겠군. 데르온- 너는 지금 가서 정령왕 엘퀴네스와 그의 일행을 감시해라. 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루카의 꿍꿍이가 뭔지 조사해 봐. 필요하다면 쟌과 동행해도 좋다.” “쟌…이라 하시면 4대 공작중 하나인 마도의 전사 ‘쟌 킬 루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다. 원한다면 그를 붙여주겠다. 어찌하겠느냐?” “아니, 아닙니다. 감시뿐이라면 저 혼자서도 충분하니 굳이 그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맡기신 임무를 수행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의문을 삼킨 데르온은, 낮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접견실을 벗어났다. 마왕과의 대화는 그것이 마지막이었지만, 그는 이사나의 일행을 쫓은 지 며칠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가슴 한 구석이 꽉 막혀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숨겨져 있는 음모가 남모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확실히 깨달은 건 마왕의 접견실에서 나온 이후, 복도에서 우연히 쟌과 마주친 순간이었다. 마족 치곤 흔하지 않은, 귀밑을 살짝 덮는 은발머리와 짙은 보라색 눈동자를 본 순간 데르온은 굳은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좀처럼 마왕성에서 마주칠 일이 없는 자를 만나게 되어 놀랐던 탓이다. ‘이상하군. 지금은 알이 부화할 시기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이런 시기에 마왕성엔 무슨 용무로 들린 거지?’ 보통 마족의 탄생은 마계 내에 존재하는 은밀한 장소-이른바 카르텐이라 불리는 생명의 숲에서 진행된다. 일정한 시기가 되면 마계는 며칠동안 암흑에 뒤섞이게 되는데, 그때 발산되는 음습한 기운이 이곳 숲에 모여 수 백 개의 알로 변화한다. 그 뒤 약 100년 정도의 숙성기간을 거치고 나면 그 안에서 마족의 아이가 탄생하는 것이다. 쟌이 하는 일은 이때 태어난 아이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시키어, 능력에 따라 신분의 등급을 구분하는 일이었다. 가장 최근에 탄생된 알의 부화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요 근래 가장 바쁘다면 바쁘다고 할 수 있는 마족이었다. ‘그러고 보니 마왕전하도 뭔가 좀 이상한 걸? 이런 시기에 나에게 쟌을 붙여주겠단 말을 하다니. 알의 부화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말이지. 혹시 잊어버렸나? 에이, 설마…. 그 중에서 미래의 라이벌이 등장할 지도 모르는데 잊어버릴 리가…’ 그때였다. 맞은편에서 데르온을 확인한 쟌의 얼굴이 무섭도록 살벌하게 일그러지는 것이 보였다. 다짜고짜 눈앞으로 다가온 그는 데르온이 아차 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멱살을 움켜쥐곤 벽면으로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쿠웅! 예쁘장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거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마왕 전하는? 지금 안에 계신가?” “윽- 큭! 이게 무슨 짓입니까, 쟌! 이건 놓고 말…” “닥.쳐! 지금 내가 흥분 안하게 생겼어? 이 XX같은 XX!!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테다! 감히 이딴 식으로 나를 물먹였다 이거지!” “무, 무슨? 설마 알의 부화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그가 알기로 쟌은 마계에서 루카르엠 다음으로 조용히 지내는 걸 즐기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이토록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는 다는 것은, 그만큼 사태가 심각한 일이라는 뜻이었기에 데르온의 얼굴 역시 저절로 경직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쟌은 망설임 없이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을 내뱉었다. “문제? 하- 그래! 문제가 있지. 그것도 굉장히 큰 문제! 이걸 어쩔까, 데르온군? 아무래도 우리 마계가 멸망하려는 모양이야.”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알이 전부 파괴됐어.” “!!” 맙소사. 순간 데르온은 자신이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됐다고? “알이 파괴되었다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코앞이 부화시기였는데 누가 숲에 침입해서 전부 부수어놓았어. 젠장! 5백년만의 탄생이라 다들 기대가 컸는데!!” “그, 그런! 숲의 경비는 대체 어찌 된 겁니까? 그곳은 허락받지 않은 마족은 무단으로 침투할 수 없는 구역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미치고 팔딱 뛰는 거 아니야! 결국 알을 돌보는 관계자중의 한 놈이라는 소린데, 이번대의 알들은 기운이 강해서 어지간한 놈이 아니면 부술 수 없었다고! 으득- 누군지 잡히기만 하면~!” 조용히 이를 가는 쟌의 모습에 데르온은 그 만만치 않은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하필이면 부화 직전의 알이 파괴될 줄이야. 그것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으니, 쟌 하나의 책임으로 무사히 넘어갈 상황이 아닌 것은 틀림없었다. “그, 그래서 지금 마왕전하께 보고하러 가는 길입니까? 문책을 면하기 어려우실 텐데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쉬쉬할 일도 아니잖아? 뭐, 아주 짐작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짐작이라면…설마?” “훗, 뻔한 거 아닌가? 부화 직전의 알은 견고한 오리하르콘 방패보다 더욱 단단하다고. 게다가 이번 알들은 다른 때보다 기운이 더 강했기 때문에 작정하고서도 쉽게 깨트릴 수 없었어. 그런 걸 몇 백 개나 간단하게 파괴시킬 수 있는 존재가 누가 있다고 생각하지?” “…마왕전하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의 말에 쟌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성의 하게 고개를 한번 까닥였다. 하긴, 그러고 보면 이번 사건이 아주 전례에 없던 일도 아니다. 자신을 재치고 왕이 될 아이가 탄생하는 것이 두려워, 부화하지도 않은 알을 몽땅 파괴시켰던 마왕이 어디 한두 명이었던가. 이런 경우 알을 파괴한 마왕은, 4대 공작의 심판아래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뿐이었다. 데르온은 딱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분 앞에선 모쪼록 안정을 취하시길 바랍니다. 자칫했다간 왕의 심기를 거스른다는 명목으로 당신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이봐, 나도 이성이란 게 있는 마족이야. 누가 왕 앞에서 따지고 들까봐? 무엇보다 지금은 루카의 자리가 공석이라고. 그의 존재가 없는 마계가 무슨 뜻인지 알아? ‘고삐 풀린 망아지가 날뛰는 현장’-바로 그 자체라고. 한낮 풀 쪼가리에 불과한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런…” “자네도 명심해 둬, 데르온. 요즘 신계며 명계며 발칵 뒤집힌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아무래도 그 일이 마왕과 관계가 있는 것 같거든? 일단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는 일이 없는 루카가 왕의 명령 ‘따위’에 순순히 중간계로 내려간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아?” “!!” “아무쪼록 지금의 마왕을 조심하라고, 친구. 같은 4대 공작이라 충고해 주는 거니까 알아서 새겨들으리라 믿어. 그럼 난 바빠서 이만. 다음에 또 보자구.” “……” 그러나 데르온은 쟌이 간 이후로도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까지 평범하게만 흐르던 일상에 커다란 파문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일단 루카와 직접 만나보면 뭐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건지 그의 모습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단지 확인한 거라곤 그 사이에 많은 일행의 변동이 있었다는 것 뿐. ‘흐음.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는 보이질 않는군. 그새 다른 곳으로 떠난 건가? 한번쯤 붙어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되었군. 하긴,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정령왕의 상대가 되진 않겠지만.’ 여전히 라피스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데르온은 그를 철썩 같이 이프리트라고 믿고 있었다. 물론 알았다 해도 쉽사리 덤벼들지는 못했겠지만(라피스의 힘은 4대 공작과 막상막하다), 모처럼 호승심을 불러일으킨 존재가 지금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에 그는 무척이나 속으로 아쉬워했다. 잠시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데르온은 천천히 새로 바뀐 엘퀴네스의 일행을 살펴보았다. 이번에 그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이미 몇 천 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유니콘의 청년이었다. 본래 마족과는 정 반대되는 성향의 종족이라, 본체의 모습으로 있었다면 그의 기운을 민감하게 느꼈을 테지만, 지금은 폴리모프 마법의 영향으로 그 감각이 상당히 둔해진 상태인 듯 보였다. 한참동안 시벨리우스를 살펴보던 그는 감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기운이군. 저 정도라면 유니콘 중에서도 상당히 고위층의 존재일 텐데, 왜 동족들과 함께 신계로 떠나지 않았지? 저런 ‘도련님’이 이곳에 남도록 주변에서 호락호락하진 않았을 텐데. 아무튼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 셈인 가…나 참, 점점 골치 아파지는 걸.” 그 순간 데르온은 갑자기 귓가를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움찔 어깨를 흔들었다. “당신…지금 그 위에서 뭘 보고 있는 거야?” “!!” 그는 황급히 놀란 시선으로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방금 전까지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곳에 어느새 누군가가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간단한 여행복 차림에 검을 매단 것을 보면, 아마도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모험가인 모양이었다. 나이는 17세쯤 되었을까?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금발에 긴 앞머리가 내려져 얼굴을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평소보다 몇 배나 기척에 주의 하고 있는 그를 찾아낸 걸 보면 범상치 않은 소년임에는 틀림없었다. 놀라서 굳어있는 데르온을 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소년은 곧 방금 전까지 그가 보고 있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고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지금 저 일행들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당신 마족인 것 같은데…설마 저 사람들을 공격할 셈?” “큭- 넌 누구지? 인간이 아니로군.” “어? 나 인간 맞는데.” “거짓말 하지 마라. 보통 인간의 시야로 저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뭐가 있는지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것보단 당신이 숨은 곳을 알아낸 것이 더욱 수상한 거겠지. 아무튼 저 일행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어떻게 할래? 그냥 순순히 돌아가 주면 건드리지 않을게. 기회는 지금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생긋 미소 짓는 소년의 모습에 데르온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두려움이란 감정을 느꼈다. 싸늘하게 식어버린 땀이 등 뒤를 타고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 소년은 위험하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차라리 이대로 뒤돌아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그의 마음을 충동질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족이라는 것은 그 본성상, 강한 자를 만나면 이기고 싶다는 욕망에 더욱 사로잡히는 종족이었다. 정령왕 앞에서도 거리낄 것이 없던 그가, 한낮 평범한(?) 인간 따위에 물러선다면 그건 마족 전체의 자긍심을 저버리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누가 순순히 당할까 보냐!’ 마음의 결심을 굳힌 데르온은 천천히 그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검 집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을 본 소년은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결국 물러설 수 없다는 소리구나. 뭐, 좋아. 오랜만에 나도 몸이나 풀어볼까?” 그는 마족과의 싸움을 한낮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 마냥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긴장은커녕, 갓 점심을 먹고 난 이후의 무료함을 연상케 할 정도로 여유로워 보였다. “선공은 내가 먼저 한다? 그래도 상관없지?” 마치 즐겁다는 듯이 묻던 소년은, 자꾸만 얼굴을 가리는 머리카락이 귀찮았는지 검을 잡으려다 말고 천천히 자신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지금까지 가려져 있었던 그의 선연할 정도로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순간, 데르온은 자신도 모르게 멍한 신음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아?” 휘이익! 촤아아아악!! “커헉!!” 그 다음은 어찌 된 일인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 소년의 공격이 시작되었으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해, 데르온은 소년이 검을 뽑는 순간조차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러니 휘두르는 검을 피할 시간이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데르온은 얼른 고개를 돌려 방금까지 그가 감시하고 있던 정령왕의 일행 쪽을 살펴보았다. 그들은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듯, 앞으로의 계획 일정을 짜느라 정신없이 바쁜 상태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데르온의 얼굴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이게…대체…어떻게 된?” “방심은 금물일 텐데. 나랑 싸우는 게 그렇게 재미없어? 좋아, 그럼 좀 더 스릴 있게 진행 해 볼까?” “!!” ‘이런!’ 콰직! 콰아아아앙! 놀랍게도 소년이 휘두른 검은 맹렬한 검풍을 일으키며 그가 앉아있던 나무 기둥을 한순간에 세로로 이등분 시켰다. 간발의 차이로 잽싸게 피했지만, 그럴수록 공격은 더욱 집요하게 따라 붙을 뿐이었다. 그가 잠시라도 몸을 피했던 장소는 어김없이 두 쪽으로 나뉘어 파괴되었다. 가히 번개만큼이나 재빠른 속도였다. 쿵! 쿠웅! 쿠우웅! 커다란 소음과 진동이 울릴 때마다 데르온은 마치 지옥의 사신에게 쫓기는 것 같은 긴박함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그 자신 또한 나무와 함께 고스란히 이등분 될 처지였기에, 반격은커녕 제대로 도망치는 것에도 급급한 처지였다. 검에 실린 푸르스름한 기운은 분명 소드 마스터의 검기.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을 넘어서는 실력인지도 몰랐다. 점점 거칠어지는 호흡을 느끼며 데르온은 소리 없이 경악했다. ‘대체 저 인간의 정체는 뭐지?’ 내가 숲 저편이 소란스럽다고 느낀 건, 막 우울했던 기분에서 벗어나 던전으로 출발하기 위해 일어서던 순간이었다. 간간히 커다란 비명소리가 울리거나 아름드리 나무가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을 보면, 아마도 숲 안에서 누군가가 전투라도 벌이는 듯 했다. 그러자 나와 같은 방향을 돌아보고 있던 이사나가 불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누가 싸우는 모양이야. 가서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그냥 내버려 둬. 누가 마물하고 싸우기라도 하나보지. 여기까지 들어왔다는 건 웬만큼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소리니까, 우리가 굳이 가서 끼어들지 않아도 될 거야.” “하지만 아까부터 이상한걸. 정령들이 심하게 불안해하고 있어. 안 느껴져, 엘? 지금껏 많은 전투가 있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야.” “…!” 그의 말에 나는 황급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까부터 정신없이 공중을 휘도는 나이아스들이 울먹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웃음을 잃지 않던 존재였기에,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이루 말 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더욱 혼란스러웠던 건 내가 그것을 이사나보다 뒤 늦게 서야 알았다는 점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정령들의 감정은 항상 내게 그대로 공유되고 있었는데…?’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이렇게 까지 주변 감각에 무디어 진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내 몸이 내 것이 아니게 된 느낌이랄까? 그러나 이런 내 당혹한 심정을 모르는 일행들은 저들끼리 칭찬하며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굉장하다, 이사나씨! 정령들이 불안해한다니,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는 거야? 과연 상급 정령사란 대단하구나.” “아니, 나도 제대로 느끼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어. 요즘 수련에 열중하느라 단순히 신경이 예민해진 탓인지도 몰라.” “그래도 대단한건 대단한거야, 안 그래 신관님? 신관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아, 으응…. 많이 발전했네, 이사나. 이제 정말 완벽한 정령사가 된 것 같아.” “고마워, 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많이 어두워 보이는데…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걱정스러운 이사나의 시선에 나는 얼른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정령왕 주제에 지금까지 정령들의 상태조차 짐작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무슨 염치로 밝히겠는가? 뭐, ‘인식’을 하고난 이후로 나이아스들의 목소리가 똑바로 전달된 것을 보면, 단순히 내가 딴 생각에 빠져 있던 탓인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생각보다 상당히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이었다. -우에엥. 엘퀴네스님. 무서워요~ 저 인간 너무 무서워요. -흑흑. 저 인간 좀 말려주세요. 싸우는 걸 멈추게 해주세요. -죽을지도 몰라. 이 숲이 완전히 파괴될 지도 몰라요. 제발 그만두게 해주세요. 흑흑흑. -우리 부탁을 무시하면 엘퀴네스님은 바보! 사악 독재 대마왕이라고 떠들고 다닐 거에욧!! …대체 누구기에 정령들의 마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드는 걸까? 마지막 악에 바친 듯한 나이아스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이 쯤 되면 한번쯤 가서 확인해 보는 것이 도리지 싶었다. 어쩐지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가보도록 할까…” “응? 어딜?” “그 전투가 벌어진 현장 말이야. 정령들이 불안해 할 정도면 뭔가 심각한 일인 것 같으니, 가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런데 어째 얼굴은 가기 싫다는 표정인 걸?” 내 얼굴이 굳은 것을 보았는지 지금까지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가 한마디 내뱉었다. 하여간 예민한 녀석이라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좀 찝찝한 기분이라서.” “찝찝하다니?” “글쎄, 잘 모르겠어. 뭔가 마음이 좀 진정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한데…뭐 어차피 기분 탓이겠지. 일단 가보기나 하자. 이러다 늦을 수도 있으니까.” 그 뒤 가슴속에 자리한 일말의 불안감을 감추며 향한 곳은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였다. 대규모의 전투라도 벌어진 건지, 주변에 있던 거의 모든 나무와 바위가 초토화가 되어 쓰러져 있었고, 군데군데 움푹 파인 구덩이와 시커먼 그을음 자국이 눈에 띄었다. 한 눈에 봐도 정말 심각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부상자나 죽은 시체의 모습은 없었지만, 쓰러진 나무의 방향이 점점 숲 안 쪽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전투를 벌인 당사자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장소를 옮겨가며 싸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주변의 공기가 무척이나 번잡하고 산만했다. ‘이거 괜히 갔다가 날벼락 맞는 거 아니야?’ 싸움의 현장도 현장이었지만, 이곳에 대한 소문이 워낙 흉흉하다보니 나는 잠시 일행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알리사의 경우 능력의 컨트롤이 불안정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전투가 벌어지면 100% 감당을 못한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정작 놀란 것은 다음순간 이어진 시벨리우스의 행동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쓰러진 나무 기둥으로 다가가더니, 그곳에 묻어있던 다량의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보곤 이렇게 중얼거렸다. “마족이로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쭈욱 살펴봤는데, 이곳에 흘려진 피는 전부 한 마족이 흘린 거야. 그것도 꽤 심각하게 다친 것 같아.” “마족? 설마 루카르엠이?” “아니, 그 녀석관 냄새가 달라. 아무튼 상대편이 누군지 궁금한 걸? 나무가 쓰러져 있는 모양을 보니 전부 검으로 단 한번에 쪼갠 솜씨야. 잘려진 표면이 유리처럼 매끄러운걸 보면 검기를 다룰 줄 아는 녀석인 것 같군.” “녀석…이라면, 설마 지금 이 장소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게 단 두 명이라는 뜻?” 나의 얼떨떨한 표정에 시벨리우스는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눈으로는 여전히 잘려진 나무의 표면을 살피고 있었다. “상대편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단순한 검기만이 아닌 검풍의 흔적도 있는 걸 보면, 적어도 소드 마스터의 영역은 뛰어 넘었다는 뜻이거든. 그런데 뭔가 상당히 익숙한 기분이야.” “익숙하다니?” “왜 있잖아. 사람들은 검을 쓸 때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맞는 일정한 형식을 구사하거든. 그래서 잘린 표면이나 형태를 보면 누가 한 일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지. 그런데 지금 이 패턴이 상당히 낯익어. 누구였더라?” “흐음. 너와 안면이 있는 존재라면 인간은 아니라는 소리인가? 대부분 4천년 전의 사람들이잖아.” 내 말에 시벨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또다시 커다란 폭발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자잘한 흙먼지가 이곳까지 날아드는 것을 보면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콰아아앙! 콰앙! 콰아아앙! “꺄악! 어떤 미친놈들이 저렇게 무식하게 싸우고 있는 거얏!!” “알리사! 위험하니까 옆으로 물러서. 파편이 튈지도 몰라.” “뭐? 이래 뵈도 나는 엄연히 땅의 정령사라고! 그깟 파편 따위에 다칠 줄 알면 큰 오산이야! 아니면 단순히 내가 여자라서 보호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이전에 레이디 취급은 그만두라고 분명히 말했을 텐데, 이사나씨!” “아, 저…그건…” 생각보다 날카로운 알리사의 반응에 이사나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도 연신 주위를 둘러보는 걸 보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폭발의 파장을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사나? 내가 보기엔 너 역시 위험하긴 마찬가지라고! “둘 다 피해!” 콰아아앙! “꺄아아악!!” “알리사!” “젠장!” 아니나 다를까. 오폭이었는지 고의였는지 몰라도, 어디선가 날아온 커다란 불덩어리가 정확히 이사나와 알리사의 앞에서 폭발했다. 다행히 이사나의 대응이 빨라 간신히 피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은 어느새 자잘한 생채기를 가득 뒤집어 쓴 모습이 되었다. 특히, 알리사를 보호하느라 폭발의 직접적인 사정권에 들어간 이사나 쪽의 상처가 깊었다. “이사나! 괜찮아?” “큭- 으응. 그냥 가벼운 화상을 입은 것뿐이야. 알리사는?” “나, 난 멀쩡해. 미안해, 이사나씨.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네가 무사하다면 됐어. 별로 크게 다친 것도 아닌걸.” 어차피 크게 다쳤다고 해도 원망할 생각도 없는 주제에 핑계는. 짧게 혀를 찬 나는 치유술을 사용하여 두 사람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때까지도 시벨리우스는 곰곰이 자리에 앉아 잘려진 나무의 표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서 폭발이 터지든 사람이 다치든, 일단 궁금한 건 풀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태도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시벨,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거야? 그런 건 직접 만나보면 알게 되잖아.” “아앗! 엘! 지금 생각났어! 이 패턴 말이야! 딱 너랑 똑같아.” “엥?”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한눈에 낯익더라니.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지? 완전히 엘의 방식과 판박이잖아. 모르겠어?” “하, 하지만 난 검은 안 쓰는데.” “아니, 아니. 지금 말고 옛날에 말이야. 흐음, 하지만 엘은 따로 검술에 제자를 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비슷할 수 있는 거지? 신기하네.” 뭔가 굉장한 발견을 했다는 듯, 신나서 떠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한순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나를 전의 ‘엘’로 오해하는 상황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아프게 조여 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필요 이상으로 몸을 움찔 떨고 말았다. “어라? 무슨 손님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지?” …두근! 가슴속을 커다랗게 울리게 만드는 일말의 불안감.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선 자신의 몇 배에 해당하는 덩치 큰 남자를 어깨에 짊어진 어린 소년이 서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그와 달리, 어깨에 매달린 남자는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만큼 처참하게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소년이 입고 있는 옷에 묻은 지저분한 핏자국도 대부분 그의 것인 듯 보였다. 이 녀석들이 지금 전투의 주범들인가?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는 순간, 소년은 들고 있던 남자를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앞머리를 죄다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이윽고 완전히 남자를 바닥에 떨군 소년은 마치 기지개를 켜듯이 허리를 쭉 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시끄럽게 했다면 미안. 이 녀석이 너희들을 감시하고 있었거든. 그냥 가면 보내주겠다는데도 고집을 피우지 뭐야? 하여간 마족들이란 누굴 닮아서 싸움에 사족을 못 쓰는지 모르겠어.” “감시라니? …아? 이 마족 설마 지난번에 왔었던?” 그때서야 기절한 남자의 얼굴이 어디선가 봤던 녀석과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황급히 얼굴을 굳혔다. 내가 알기로 이 남자는 고작 내 또래의 아이에게 이렇게 당할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이사나 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는 놀란 표정으로 소년과 쓰러진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맙소사.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킬 폰…이잖아. 설마 당신이 이렇게?” “뭐, 에이션트급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는 가볍지. 네가 이사나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구나.” “헉? 어떻게?”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소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긴장했는지, 이사나는 굳은 표정으로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소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곧 내 옆에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다. “오랜만이네, 시벨. 그동안 잘 지냈어?” “!!” 그의 친근한 인사에 시벨리우스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굳게 다문 입술과 부릅뜬 눈동자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쿵.쿵.쿵. 또 다시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런, 왜들 그렇게 얼어있어? 이래선 자기소개를 하기에도 상당히 민망한 걸. 아, 그러고 보니 인사는 이번이 처음인가? 만나서 반가워, 나는…” 곤란하다는 듯 말끝을 흐린 소년은 빙긋 미소 지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덜컥 심장이 멈추는 듯한 기분에 주먹을 꽈악 움켜쥔 순간,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귀찮았는지 그는 한 손을 들어 천천히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윽고 드러나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선연한 초록색 눈동자는… “<엘>이라고 해.” 정말 울고 싶을 정도로…나와 닮아있었다. ==================================== 후후후. 오타와 어색한 문장 지적 받습니다아~ 마감 때문에 정신 없이 쓴거라 수정도 변변하게 못했어요; 그래서 아마 이상한 부분이 많을것 같지만...부디 예쁘게 봐주세요.<-퍽! 아, 그리고 파트 제목은 그리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당한 제목이 없어서 그저 붙여뒀던 것 뿐..(사실은 본래 의도와 내용이 다르게 진행되버려 소제목이 바뀔 위기라는...하하하;)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 정말…엘이야?” 한참의 시간 후, 시벨리우스는 잔뜩 쉰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덜덜 떨고 있는 몸과,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그렁거리는 눈동자가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자 소년-아니, <엘>은 생긋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 의심하는 버릇은 나빠. 넌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구나.” “하, 하지만 이미 4천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있는 거야? 나, 나는 네가 죽어서 환생했을 줄로만…” “으음.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솔직히 말하면 기억이 중간에 듬성듬성 끊겨서 말이야. 잠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 보니 여기더라고.” “어떻게 그런 일이?” “글쎄. 누군가 내 몸을 가지고 장난 친 것 같기도 한데, 문제는…” “문제는?” “어찌된 일인지 엘퀴네스와의 계약이 해지되 버렸어. 그래서 다시 부르려고 했더니 소환이 안 되는 거야. 내 마나력에 변동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이상하다 싶어서 조사해 보니까 그새 다른 인간과 계약했다며? 정~말 황당했다고.” 그렇게 말한 ‘엘’은 장난끼가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손을 척 하고 내밀더니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를 건네왔다. “반가워. 네 이름도 엘이라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이렇게까지 나랑 닮은 얼굴은 처음인 걸? 시벨이 오해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미안, 내가 대신 사과할게.” “아니…별로.” “깨어나자마자 들렸던 마을에서 우연히 유니콘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 이미 몇 천 년 전에 신계로 떠났던 존재가 아직까지 남아있단 말에 단번에 시벨이라는 것을 직감했지. 그래서 쫓아와 봤던 건데, 이렇게 만나게 되서 다행이야.” “아아.” 머리색과 눈동자만 다를 뿐, 마치 판에 찍어놓은 것처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는 건 그리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다. 차라리 어려서 헤어진 쌍둥이 형제를 만나는 상황이었다면 조금 나았을까? 이런 내 기분은 드디어 정신을 차린 시벨리우스가 ‘엘’에게 매달리는 광경을 보면서부터 더욱 엉망으로 변해버렸다. 와락! “엘! 엘이다!” “우왁! 시벨, 이 자식! 놀랐잖아! 방금 까지 멍하게 있었던 주제에…대체 무슨 심보야?” “엘이다! 진짜 엘이야! 엘! 흐윽! 엘!!” 투덜거리는 ‘엘’의 태도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시벨은 마치 어린애처럼 매달려 눈물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또한 별로 싫은 건 아니었는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대체 넌 언제 클려고 그러냐? 1500살이나 먹은 녀석이 징징거리기나 하고. 아니, 이미 4천년이나 지났으니 벌써 5천살이 넘은 건가? 엑-뭐야, 너 중년아저씨 된 거야?” “시, 시끄러! 그건 엘 너도 마찬가지잖아! 인간주제에 4천살이 넘다니, 너 정말 이상한거 알아? 흑- 누가, 누구더러 중년 아저씨라고-흐으윽!” “아아.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일행들 보기 창피하지도 않아? 아, 다들 미안. 이 녀석- 감정의 기복이 좀 심한 타입이거든. 흥분하면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성격이라 가끔 이럴 때가 있어. 아하하.” 그렇게 말하며 난감한 듯 웃는 ‘엘’의 모습을 보니, 그는 이미 이런 상황에 무척 익숙한 듯이 보였다. 저런 때 나라면 잔뜩 신경질만 부렸겠지. 어쩐지 자연스럽게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나는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으윽…” “!!” 그때 ‘엘’의 발밑에 쓰러져 있던 데르오느빌이란 마족이 정신을 차린 듯 미세하게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놀란 내가 얼른 가서 상처를 살피자 충고하는 듯한 ‘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신관이랬던가? 치료할 생각이라면 그만 둬. 신성력은 오히려 마족의 몸에 해를 입힐 뿐이야. 차라리 효과 좋은 약초를 이용하는 것이 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네.” “아아. 어차피 위에서 시켜서 한 일일 텐데 죽이면 가엾잖아? 내가 생각해도 좀 우유부단한 성격인 것 같긴 해. 엘퀴네스도 항상 그 때문에 투덜거렸지만, 이건 시간이 지나도 고치기가 힘든걸. 이제 그러려니 해야지, 뭐.” “…그렇군. 하지만 괜찮아. 내가 쓰는 건 엄연히 말해 신성력이 아니니까.” “응? 그게 무슨?” 어리둥절한 ‘엘’의 말을 무시한 채, 나는 조용히 기운을 모아 엉망이 된 마족의 육체에 쏟아 부었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파앗- 강렬한 흰 빛이 터지더니, 상처가 곧 눈에 보일 정도의 빠른 속도로 회복이 되어 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엘’이 놀란 표정을 지었을 때는, 이미 마족은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게 없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온 후였다. “와아. 대단한 걸? 이게 정말 신성력이 아니라고?” “일단은.” “그럼 그 흰 빛은 뭐지?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도 내가 다쳤을 때 종종 그런 식으로 치료해 줬던 것 같은데.” “그건…” “아, 알았다! 설마 네가 이번대의 엘퀴네스? 이미 정령왕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 맞지? 그래서 내 계약이 풀린 거고.” 마지막 말은 작은 목소리라 다행히 알리사에겐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였다. 찝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엘’은 단번에 환해진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엘퀴네스랑 똑같은 물빛 머리카락이라 설마 했거든. 헤에, 그럼 저기 있는 이사나가 이번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 어쩐지, 상급 정령사 치곤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 했더니…” “이젠 정령사가 아니잖아. 그런데도 그걸 느낄 수 있어?” “난 선천적으로 정령의 기운에 민감하거든. 아무튼 엘퀴네스가 벌써 교체 돼버리다니, 많이 서운한걸. 아, 그래. 트로웰은 여전하겠지? 그는 잘 지내?” “응. 지금은 유희중이지만.” 내 말에 ‘엘’은 아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마다 심장 한 구석이 따끔따끔 찔려오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역시 내가 속이 너무 좁은 탓일까?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엘’에게 매달려 칭얼거렸다. “엘! 오랜만에 만났는데 자꾸 그 녀석들 이야기만 할 거야? 나랑도 할 이야기 많잖아!” “에구구. 제발 좀 봐줘라, 시벨. 잠깐 물어본 것뿐이잖아. 그런 것 가지고 질투하면 못써.” “질투는 누가 그딴 자식들을!” “쿡쿡. 지금 그 말 엘퀴네스가 들으면 그때처럼 신나게 맞을 걸? 그래도 좋은 거야?” 그러나 시벨리우스는 대답대신 ‘엘’을 꼬옥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마치 원하던 장난감을 독점한 꼬마처럼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던 녀석은, 감동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엘 맞구나…이번엔 진짜 엘이야. 나와 기억을 공유한…나를 기억해 주는 엘이 맞았어.” “나~참. 같은 말을 대체 몇 번이나 반복하게 만드는 거야? 다른 사람들도 보는데 창피하게 자꾸 이럴래? 아무튼 너 지금까지 일행에게 민폐 끼친 건 확실하게 사과해. 알아들었어?” “쳇,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고. 하지만 이게 내 탓인가? 다 너랑 똑같이 생긴 저 녀석 때문인걸.” “…!” “시벨리우스!” 이런 걸 두고 사람들은 은혜도 모르는 빌어먹을 놈이라고 하지, 아마? 지금까지 오해 받아도 참아준 성의도 모르고 한순간에 나만 나쁜놈으로 몰아가는 시벨리우스의 태도에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저 자식…그냥 이 자리에서 콱 육회를 떠버릴까? 그러나 시벨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은 말리는 ‘엘’을 무시한 채 지금껏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는 것처럼 떠벌떠벌 떠들기 시작했다. “혹시 이런 거 아니야? 엘퀴네스 녀석, 유달리 너한테 집착이 심했잖아. 왜 정령왕들은 죽으면서 한 가지씩 소원을 빌 수 있다고 하던데, 자신의 뒤를 이을 정령왕이 엘 너랑 똑같이 생기길 빈 건 아닐까?”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똑같이 생길 이유가 없잖아. 트로웰 녀석도 충분히 수상해. 둘이서 작당을 하고 너의 <대타>를 세운 걸지도 몰라.” “시벨! 너, 정말!!” 빈정거리는 시벨의 말에 ‘엘’은 기겁을 하고 소리쳤지만 오히려 나는 담담해 지는 심정이었다. 어쩌면 나는 또 하나의 ‘엘’이 있다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이런 일을 이미 예상했던 걸지도 모른다. 화내는 것이 더욱 우습게 여겨질 정도로 그의 말을 차분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걸 보면. 문득 내 것이 아닌듯한 낮은 목소리가 내 입에서 흘러나갔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고?” “헉- 미안해, 엘. 이 녀석은 다 좋은데 말을 함부로 해서 탈이거든. 그냥 무시해 버려, 하하.” “아니, 상관없어. 생각해 보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고. 하지만 말이야, 나도 좋아서 이런 얼굴 가지고 태어난 건 아니야.” “그, 그거야 그렇겠지. …흐음,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긴 하다. 이번대의 정령왕이 왜 하필 나와 꼭 닮은 거지? 저기 있잖아, 그 엘이라는 호칭은 유희하기 편리하기 위해서 지은 것?” “…왜?”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옆에서 지켜보던 시벨리우스가 냉큼 끼어들었다. 녀석은 항의하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며 불만에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왜긴 왜야! ‘엘’ 본인 앞에서 다른 녀석이 같은 이름을 쓴다는 거 난 기분 나빠. 어차피 애칭이니까 다른 걸로 바꾸라고.” “시벨!! 아, 미안해. 나는 그런 뜻이…” “상관없을 걸? 어차피 그거…트로웰이나 전대 엘퀴네스가 지어준 이름일지도 모르잖아. 그냥 바꾸는 게 본인한테도 자존심 덜 상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 자긍심 높기로 유명한 엘퀴네스가 남의 대타로 있다는 거, 솔직히 불쾌한 일이잖아.” “이 자식…한번쯤 남의 기분은 생각하고 말하는 게냐아?” 단번에 혈압이 상승한 듯한 ‘엘’의 분노한 얼굴에도 시벨은 요지부동한 표정으로 고집을 피웠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때리는 시어머니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이상한 일이었지만 나는 미운말만 골라하는 시벨보다 옆에서 안절부절하는 ‘엘’의 모습이 더 얄밉게 느껴졌다. 단순한 기분 탓 인진 몰라도, 어째 녀석이 말리려고 건네는 말마다 오히려 시벨을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존심? 엘퀴네스로서의 자긍심? 그런 건 몰라. 난 단지…이곳은 대가 없이 나를 사랑해 주는 존재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을 뿐이야.’ 처음 명계에서 내가 잘못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솔직히 안심했었다.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 된 가정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라는. 신이 내게 주신 또 하나의 기회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단 전혀 낯선 현실 속에 뚝 떨어져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두렵고 고통스러웠다. 내겐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이유, 이 땅을 밟으면서 존재해야 했던 이유가 필요했다. 정령왕의 존재가 한 차원에 미치는 영향력 따위가 아닌, 순수하게 ‘나’를 바라봐 주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아무래도 그것은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알았어. 엘이란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 이거지? 그렇다면 바꾸지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에?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같은 이름이면 헷갈릴 거 아니야? 시벨녀석이 투덜거리는 것도 못 봐주겠으니까, 앞으론 그냥 ‘지훈’이라고 불러.” “지…훈?” 이곳에선 약간 낯선 억양인 탓인지, ‘엘’과 시벨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궁금해 하는 듯 했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가르쳐 줄 내가 아니다. 천하의 강지훈. 버렸던 이름을 다시 주워 삼킨 날이었다. “와아, 트로웰이 정말 그랬어요?” “그렇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때 말이야…” 당분간 우리와 동행하기로 결정을 내린 ‘엘’은 알리사를 비롯한 일행들과 순식간에 친해졌다. 워낙 타고난 사교성이 좋기도 했지만, 상대방이 원하는 화제가 무엇인지 척척 알아맞히고 이끌어가는 화술에 다들 넘어가 버린 것이다. 던전으로 가는 내내 ‘엘’주위엔 이야기꽃이 질 줄을 몰랐고, 덕분에 나는 본의 아니게 혼자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닌가? 내 옆엔 마족 데르온이 함께 걷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엘’에게 처참하게 당하고 깨어난 이후로 묵묵하게 일행의 곁을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임무를 실패하고 돌아가서 받을 문책이 무서워서 인지, 아니면 이제부턴 대놓고 감시하자는 수작인진 몰라도, 도무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어느새 그를 자연스럽게 일행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게다가 의외로 지도나 암호를 푸는데 정통한 특기가 있음이 발견되어, 던전을 찾는 모종의 임무를 그에게 고스란히 떠맡긴 상황이기도 했다. 한참동안 지도와 주변 지형을 살피며 걷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어쩐지 지루해 지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이름이 데르오느빌 이라고 했나요?” “그냥 데르온이라고 부르십시오. 무슨 일 이십니까?” “에? 아니, 일이라기 보단…저, 상처는 이제 괜찮아요? 아픈 덴 없어요?” “엘님…아, 지훈이라고 부르라고 하셨죠? 지훈님이 치료해 주신 뒤론 아무 탈 없이 멀쩡합니다만.” 그러면서 ‘질문의 의도가 뭐냐’라고 묻는 듯한 시선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어쩐지 그냥 심심해서 말 걸어봤다고 했다간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사생결단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런 내 모습을 본 데르온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정이 길어져서 지루하신 듯 하군요. 걱정 마십시오. 곧 던전의 위치를 찾을 듯 하니까요.” “아, 그래요? 미안해요, 데르온. 괜히 제가 할 일을 떠넘기게 되서…” “괜찮습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니까요. 그런데 저도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혹 루카르엠이라고 하는, 빌어먹을 정도로 뺀질거리기 좋아하는 이상한 마족 하나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곳에 오면 만나게 될 줄 알았는데, 전혀 코빼기도 안 보이니 이상하군요.” 루카에게 단단히 원한이라도 있는 모양인지, 입술을 악다문 데르온의 눈매가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삐질 식은땀을 흘린 채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긴 했는데, 전에 갑자기 한번 나타난 이후론 지금까지 소식이 없어요. 뭔가 은밀한 계획을 진행시키는 것 같긴 했는데…” “큭- 이번엔 누구 숨통을 조여 놓으려고.” “네?” “아니, 아닙니다. 그는 심할 정도로 장난을 좋아해서요. 그게 다른 사람 입장에선 장난이 아니라는 게 문제입니다만. 일단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라, 마족들 사이에서도 항상 요주의 할 인물이지요. 마신은 어쩌자고 그런 저주받은 생물체를 마계에 내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하하하.” 대단한 성격이라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마족들 사이에서까지 ‘저주받은 생물체’운운할 정도라니, 새삼 루카르엠이란 마족이 얼마나 사악한 녀석인지 실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는 대체 어디로 가버린 걸까? 엘뤼엔의 문장을 본 이후, 이상할 정도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서 어른거려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혹시 어디선가 또 엉뚱한 소문을 만들어 퍼트리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당신은 다시 마계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건가요? ‘엘’의 말에 의하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마왕이 시킨 일이죠?” “하아,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하기도 그러니 다 말씀드리지요. 정확히 말하면 지훈님 일행보단 루카르엠의 행방을 찾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혹시 그가 받은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이사나를 암살하라는?” “네, 그렇습니다. 루카가 다 말씀드렸군요. 이미 눈치 채고 계시겠지만, 마왕은 이사나의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과 계약을 했습니다. 그것을 조건으로 무엇을 받기로 했는지는 모릅니다만, 아마도 그 계획에 루카르엠이 방해가 된 듯 합니다. 그래서 정령왕인 당신을 이용하여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지요.” “에? 제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전개에 놀란 표정을 하는 내게, 데르온은 마계에 위치한 루카르엠의 존재와 마왕과의 관계,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리하여 결국 나온 결론은, 루카는 마왕의 뒤통수를 치기위한 새로운 작전에 돌입했다는 예상뿐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그의 속셈을 알기위해 이곳에 왔다는 뜻인가요?” “하하. 그런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그저 마왕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내려온 것뿐이죠. 저는 누구처럼 유들유들하게 상황을 다른 자에게 떠넘길 재주가 없거든요. 아마도 마왕은 4대 공작들의 자리를 부재로 만들 속셈인 듯 합니다.” “아하. 계획이 들통 났을 때, 자신을 저지할 수 있는 가장 강한 4명을 미리 없애겠다는 생각이군요. 그런데 계속 이곳에 있어도 괜찮겠어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건, 저 혼자서는 절대로 그를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이죠. 그래서 저는 어떻게든 루카를 만나 자문을 구할 생각입니다. 만날 수 있다면요.” “흐음….” 마족들이란 하나같이 비열하고 나쁜 악당일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성격이 약간 호전적이었던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제 동료들에 대한 걱정으로 화제를 옮겨가고 있었다. “가장 걱정되는 건 세르피스입니다. 그녀는 유달리 왕의 자리에 대한 집착이 높거든요. 알에서 깨어나는 순간부터 호심탐탐 기회를 노렸으니, 다른 4대 공작이 없는 상황이 절호의 찬스라고 여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왕은 그녀의 생각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 텐데 말이죠.” “세르피스…아아, 그때 당신과 함께 왔었던 검은 머리의 누님 말이죠. 그럼 데르온은 마왕자리에 관심이 없는 건가요?” “없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것이 제 삶의 목표가 되지는 않을 뿐이죠. 저는 그것보단 강한 상대를 만나 실력을 겨루는 게 더 기쁘거든요. 뭐, 예상치 못한 존재의 등장으로 뼈아픈 실책을 기록하긴 했습니다만.” “아, ‘엘’을 말하는 거군요.” “크흠. 4천년 전의 인간이라니…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동료들에게도 주의를 주시는 게 좋겠군요. 저런 타입의 인간은 언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칠지 모르거든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데르온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부턴 또 다시 던전을 찾기 위한 일과 그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시간을 때우는 식이었다. 가장 괴로운 건 매끼의 식사 때마다 핑계를 대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었다. 아직 내가 정령왕이라는 걸 모르는 알리사가 자꾸만 음식을 억지로 권하는 바람에, 애초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지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와 동료들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 지는 것 같았다. 한 번은 그런 내가 안타깝게 여겨졌는지, ‘엘’이 몰래 따라 나와 점잖은 충고를 해 준적도 있었다. “그러면 안돼, 지훈. 길을 떠날 때도 항상 혼자서 다니잖아? 적어도 식사만이라도 같이 해야지.” “아, 미안. 하지만 난 음식을 먹으면 속이 좀 안 좋아서…” “아아. 정령이라서 그런 거지? 나도 이해하긴 해. 그래도 전의 엘퀴네스는 억지로라도 조금씩 먹는 모습을 보여줬었어. 지훈도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식사시간마다 자리 떠나는 거 솔직히 보기 좀 안 좋잖아.” “아…” “나중에 정령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해도 마찬가지야. 다들 식사를 하는데,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 요리한 사람이 서운해 하지 않겠어? 지금까지 시벨이 만든 음식도 그래서 먹지 않았다며? 그건 고쳐야 할 것 같아.” “……” 그 외에도 그는 이것저것 내 일에 참견하거나,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라고 강요를 하는 일이 많았다. 모두 친절하고 자상한 말투였지만, 들을 때마다 나는 점점 스트레스가 쌓여 나중에는 결국 신경질을 내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것은 ‘엘’이 일행으로 합류한지 정확히 일주일이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까 지훈, 내가 하는 말은…” “알았어. 제발 그만 좀 해! 내가 다 알아서 할 일이잖아.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좀 지나친 참견 아니야?” “아, 미안. 그런 뜻이 아니라 난 그저…” “나도 생각이란 게 있고, 가치관이라는 게 있어! 전대의 엘퀴네스는 전대고, 지금의 나는 나야! 그가 했다고 해서 나 역시 똑같이 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자꾸 다른 사람의 입장만 배려하라고 하는데, 그러는 너는 왜 내 입장은 배려하지 않는 건데?” “미안, 난 그런 생각이…”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내가 드디어 반항(?)하는 것이 놀라웠는지, ‘엘’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뜨끔해진 내가 속으로 좀 너무 했나 자책하는 순간, 우리 대화를 들은 탓인지 멀리 있던 시벨리우스가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 시벨.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잠깐…”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지훈이 너한테 소리 지르는 거 다 봤어. 너, 지금 정령왕이라고 엘을 무시하는 거야?” “…그런 적 없어.” “그런 게 아니라면 왜 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엘한테 함부로 했다간 가만히 안 있을 거야. 요즘 너 때문에 일행들 분위기가 얼마나 서먹한지 알기나 해? 항상 오냐오냐 자라서 누구한테나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인데, 그거 단단한 착각이라는 거 알지?” 너무 기가 막혀서 아무 말도 못하자, 시벨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피식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다음순간, 녀석은 나에게만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그 ‘사랑’이란 것도 엘의 대신이었던 주제에.” “……” 저 자식을 어떻게 하면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까. 마치 승리자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엘을 데리고 돌아서는 모습에 나는 들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누르느라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차마 손을 들어 공격을 퍼부을 생각이 안 드는걸 보면,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녀석의 말을 인정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탓일까? 사방에 퍼져있던 나이아스들이 어느새 내게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흑흑흑. 저 자식 죽일 거예요. 감히 엘퀴네스님께 그딴 말을…. -엘퀴네스님 기운내세요, 저런 말똥보다 못한 놈의 말은 무시해 버리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왕께서는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신 분. 절대 기죽으실 필요 없어요. -맞아요, 저 녀석은 지금 단단히 착각하는 거라고요. 그 잘난 일행들이 누구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건데! 감히 정령왕을 무시하다니, 천벌 받을 짓이라고요! -차라리 정령계로 돌아가요, 네? 이런 곳에서 저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계실 필요 없잖아요! “쿡…” 씩씩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나는 상황도 잊고 피식 미소 짓고 말았다. 정령이라는 것은 어차피 정령왕에게서 파생된 육체의 일부. 어쩌면 나는 이 말을 내 자신에게 건네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국, 혼자서 거울을 보며 떠들어 대고 있는 셈이랄까. 모처럼 위로받은 보람도 없이, 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 던전을 발견한 것은 엘과 데르온이 합류한지 2주일이 다 되 가던 무렵이었다. 죽음의 숲과 바론 사막의 교차점에는 온통 바위로만 이루어진 커다란 산이 깎여 있었는데, 던전은 그 안의 지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지형 자체도 험악할 뿐만 아니라, 하필 그 장소가 온갖 사막의 몬스터가 밀집된 곳이었던 관계로,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수십 번 전투를 치러야 했다. 중간에 피 냄새를 맡은 마물들이 숲에서 떼거지로 몰려나오긴 했지만, 그 부분만큼은 마계 4대 공작인 데르온의 활약으로 아무런 피해 없이 물리칠 수 있었다. 가장 위험했던 놈은 바론 사막의 터줏대감이라는 지옥 땅거미들이었다. 평소엔 땅 아래에서 살고 있다가 먹이가 다가오면 바로 지상으로 튀어나와 낚아채 가는 놈들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길을 걷는 내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땅의 정령사인 알리사의 힘만으로는 수비 범위가 너무 넓었기 때문이다. 촤악!! “끼에에에에엑!!” 쿠우웅! 인간의 몇 배에 해당하는 덩치가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르면 누구라도 놀라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거미는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먹이를 잡아 지하로 끌고 들어가는 수법을 사용하는 듯 했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이 어디 보통 인간이던가? 상대를 살피지 않고 무모하게 돌진한 녀석들은, ‘엘’이 휘두르는 칼에 동강나 그대로 시체로 변할 수밖에 없었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는 내내 우리들의 뒤에는 지옥 땅거미의 시체가 축제의 행렬처럼 길게 늘어졌다. “어휴. 보통 사람들은 정말 들어갈 엄두도 못 내겠는 걸? 무슨 몬스터가 이렇게 많아?” “하지만 엘, 정말 멋졌어요. 검을 진짜 잘 다루시네요.” “에헴. 이 정도야 기본이지. 예전에 정령과 계약했을 때는 더 쉽게 처리할 수 있었어. 식 후 디저트만도 못했을 걸?” “와아, 대단해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싸울 수 있어요?” 예전부터 내내 검술을 배우고 싶어 했던 이사나는 ‘엘’의 활약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엘’이 즐거운 표정으로 설명을 이으려는 순간, 마침 바위산에 다다른 데르온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입구가 막혀있군요. 별다른 장치가 보이지 않는걸 봐선 부수고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럴 리가. 정보길드에서 제공한 자료에는 2층까지는 개방이 되어 있었는데요. 여기 정말 바론 던전 맞아요?” “지도대로 왔으니 확실합니다. 길드에서 받은 자료가 사실이라면 그 사이에 누군가가 와서 보수를 했다는 뜻이겠지요.” “보수라니…설마 이 던전을 만든 사람이 살아있다는 소리인가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나 뿐만 아니라 일행들 모두 당혹한 얼굴로 술렁거렸다. 그러자 데르온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던전을 만든 사람이 지금껏 살아있을 가능성은 별로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들이 이곳으로 올 것을 예상한 누군가가, 악질적인 장난을 쳐두었다고 보는 게 옳겠죠. 던전안의 트릭들도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을지 모르겠군요.” “하아, 정말 갈수록 태산이군…. 설마 최하층의 물건까지 변동이 생긴 건 아니겠지?” “우선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어? 가 봐야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들 물러서봐, 입구를 부술 테니까.” 명랑한 목소리로 말한 ‘엘’은 들고 있던 검을 곧추세우며 미세한 푸른 기운을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검기라고 했던가? 검이 완전히 새파란 빛으로 변하자 그는 망설이는 기색 없이 단번에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향해 내리 그었다. 촤악- 쿠우웅!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위험한 기운을 느끼고 소리쳤다. “다들 피해!!” 콰가가가가가가가각!! “꺄아아악!” “으악!!” “뭐, 뭐야?!!” 바위가 잘린 순간 우리를 기다린 것은 무식할 정도로 큰 쇳덩이를 박은 수백발의 화살 세례였다. 다행히 나보다 먼저 이 점을 간파한 ‘엘’이 잽싸게 잘린 바위의 반쪽을 방패로 삼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녀석의 뒤에 있던 우리들은 그대로 꼬치신세로 전락할 뻔한 순간이었다. 그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반응이 없자, ‘엘’은 그때서야 촘촘히 화살이 박힌 바위를 저 멀리에 내던지며 창백한 표정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을 뻔 했다. 입구에 이런 걸 설치해 두다니, 누군지 몰라도 정말 가차 없는 녀석인데? 최하층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까?” “바위를 자르면 바로 공격하도록 마법을 걸어둔 것 같군요. 상대편은 마법에 정통한 자입니다. 다들 조심하십시오.” 데르온의 충고에 일행들은 전보다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초반부터 엄청난 화살 세례가 날아든 것 때문인지, 만만치 않은 장소라는 인식이 더욱 강해진 모양이었다. 차례대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마음의 각오를 다진 일행은, 데르온을 필두로 천천히 던전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던전의 안은 지하라서 어두울 거란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상당히 밝았다. 마치 동굴처럼 둥그스런 내부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것을 증명하듯 거친 돌 표면이 도드라져 있었고, 천장부위엔 둥그런 모양의 돌맹이가 하나씩 박혀있었는데, 간격에 따라 일정시간 빛을 내뿜는걸 보면 아마도 저것이 이 동굴 안을 밝히는 형광등(?)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내가 잠시 그것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자, 누군가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명주잖아.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야명주?”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보석의 일종이야. 중간계에서는 상당히 비싼 값에 거래되는 거지. 저런 걸 수두룩하게 박아 놓은 걸 보니, 누군 진 몰라도 이 던전 지은 인간은 돈이 썩어 넘친 모양이군.” 요즘 들어 계속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녀석에게 친절한 설명을 건네려니 쑥스러웠던 탓일까? 시벨의 얼굴은 전에 없이 붉어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 대답에 호기심을 보인 건 나보단 알리사와 이사나 쪽이었다. “와아, 저게 야명주예요? 책에서만 봤던 건데…멋지다.” “저게 하나에 몇 백 골드씩 하는 거지? 하나만 가져가면 좋겠다. 한번 뜯어볼까?” “앗, 안돼! 지금부터 던전 안에 있는 모든 물건엔 일체 손을 대지 마. 자칫하면 트릭이 열릴 수도 있으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아무거나 함부로 밟아서도 안 되죠. 일단 알리사님, 땅의 정령을 불러주시겠습니까? 지하층으로 무사히 내려가려면 정령의 도움의 필요할 것 같군요.” 데르온의 말에 알리사는 냉큼 고개를 끄덕이곤 한 무리의 놈들을 불렀다. 그들은 곧 계약자의 부탁에 따라 사방을 누비며 던전 안에 감추어진 트릭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아무것도 알 수 없다’였다. “흠, 그렇다면 기계나 장치가 아닌, 마법을 이용한 트릭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리입니다. 이래서는 정령들의 도움도 기대하기 어렵겠는걸요?” “초반부터 쉬울 거라고 예상한건 아니니 어쩔 수 없죠. 일단 그럼 무작정 가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다들 출발 할까요?” 내 말에 일행들은 누구하나 반대 없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리에서 죽치고 앉아있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막상 걸음을 옮기기 채 한 시간이 되기도 전에 바닥에 깔려진 수많은 트릭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알리사가 무심코 벽의 돌출된 부분을 잡는 것에서부터였다. 그러자 그녀가 밟고 있던 바닥이 푹 꺼지기 시작했다. 끼익! 쿠쿠쿠쿵!! “꺄아악! 엄마야!” “알리사!!” 갑자기 구덩이로 변한 바닥엔 무수히 많은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미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알리사가 그대로 떨어지려는 순간, 짧게 혀를 찬 시벨리우스는 재빨리 마법을 사용하여 그녀를 바닥위로 다시 끌어 올렸다. 너무 놀란 탓에 숨만 헉헉거리는 알리사를 ‘엘’이 얼른 달려가 부축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노, 놀라 죽는 줄 알았어…” “그래서 아무것도 건드리면 안 된다고 했잖아. 어쩔 수없다. 시벨, 지금부턴 네가 알리사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위험한 순간이 오면 아까처럼 도와주고.” “…그러려고 했어.” “아, 역시 착한 우리 시벨. 고마워. 알리사를 잘 부탁해.” “응.”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녀석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아마도 이전에 나한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시작이었을 뿐, 그 후부터 진행되는 트릭의 발동은 가히 사람의 피를 말리는 작전을 방불케 했다. 갑자기 위에서 뾰족한 칼날이 내려온다거나, 거대한 식칼이 지나가는 건 예사였고, 점액이나 돌덩이로 된 몬스터의 등장도 심심치 않았다. 특히 점액으로 된 몬스터의 경우, 입안에서 강한 산성이 섞인 독침을 쏘아냈기 때문에 피하지 못하면 큰 치명타를 피할 수 없었다. 한 두 마리였던 몬스터는 점점 4마리, 5마리…결국은 수십, 수백 마리로 번져 결국 우리는 여유부릴 사이도 없이 각자 할당량을 나눠 맡아 처리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야야앗! 죽어라앗!” “퀘에에엑!!” “시큐엘! 녀석을 막아!” “멀든! 놈들의 숨을 끊어버려!” “암흑의 기운이여! 이 세상을 평정할 지어다! <다크 파이어!>” 콰아앙! 쿠웅! 촤아악!! “키에에에에엑!” “쿠오오오오!!” 쿠궁! 쿠구구궁! 마지막 한 마리 남았던 돌덩어리 몬스터(골램이라고 했던 것 같다)가 쓰러지자, 일행은 저마다 풀썩 자리에 주저앉으면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 사이에 나는 얼른 달려가 다친 사람들의 상처를 치료했다. “헉-헉- 무슨 이딴 던전이 있지? 생전 처음 보는 괴물에, 수백 개의 돌 골램이라니! 혹시 다음 층에서는 와이번이나 발록이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럼 최하층에선 드래곤이 나오게요? 아무튼 여기까지가 2층인 것 같군요. 벌써 저녁이 된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이곳에서 자고 내일 아침부터 다시 출발하도록 하죠.” “이게 겨우 2층? 히잉, 가기 싫어~그냥 안가면 안 될까?” 알리사의 투정은 당연히 무시되었다. ================================ 지금까지 쭈욱 한 통로로 이어지던 1,2층에 비해 3층에서부턴 입구에 문이 달려있었다. 이번엔 또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 조심스럽게 문을 여니, 붉은 카펫이 깔린 기다란 복도가 드러났다. 마치 우리가 던전이 아닌 어느 성에라도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한참을 걸어가는데도 함정은커녕 그 흔한 몬스터 하나 나타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복도는 우리들이 걷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는 것이 없었다. “정말 조용하네. 여긴 무슨 함정이 있는 걸까?” “글쎄요. 아무런 공격이 없으니 뭔가 이상하군요. 하지만 안심은 금물입니다. 원래 이런 곳은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거든요.” 데르온의 말에 일행은 모두 동조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부턴 또다시 침묵의 연속이었다. 모두들 입을 꾹 다문 채 주변을 살펴보며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뚜벅 뚜벅 뚜벅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문득 내 뒤를 쫓아오는 발걸음 소리가 아까보다 줄어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느낌에 뒤를 돌아보았지만 단순히 신경이 예민한 탓이었는지, 여전히 일행의 수는 똑같았다. 하지만…뭔가 좀 어긋난 느낌이랄까?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걸음을 멈추자 일행들은 왜 그러냐는 듯이 멀뚱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들 중 유일하게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이는 알리사 뿐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어딘가 이상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리사, 왜 그래? 어디 아프니?” “응? 내가 뭘?” “아까부터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잖아. 혹시 어디가 아픈 건 아닌가 하고 말이야.” “아니, 아니, 아픈데 없어. 난 멀쩡해. 괜찮으니까 계속 가.” 평소처럼 생글 웃으면서 대답하는 알리사는 본인의 말마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내가 잘못 느낀 건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뚜벅 뚜벅 뚜벅 ‘어? 아까보다 걸음소리가 더 줄어든 것 같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일행의 수는 여전히 그대로였고, 사람들의 표정도 변함이 없었다. 이게 무슨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인가! 나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응? 뭐가?” “벌써 1시간이 넘었는데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고, 함정 같은 것도 없잖아. 아무것도 안 나타나니 오히려 불안해 져서 말이야.” “아니야. 괜찮으니까 계속 가.” “어? 하지만…” “괜찮다니까? 그냥 계속 가자.” 그러자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시벨의 얼굴이 팍-하고 일그러졌다. 젠장-하고 짧게 욕설을 뱉은 녀석은 갑자기 내 팔을 잡더니 전속력으로 앞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얼떨결에 녀석과 같이 뛰게 된 나로선 그야말로 황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뭐, 뭐야, 시벨! 갑자기 왜 그래?” “일단 뛰어! 저 자식들 몬스터야!” “엥? 몬스터?” 놀란 표정으로 뒤돌아 본 순간 나는 그대로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웃고 있던 일행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우리를 바짝 뒤쫓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다리는 마치 유령처럼 둥둥 떠 있었다. 나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저게 뭐야!!” “상급 마물중의 하나인 도플갱어야! 젠장, 이상하다고 눈치 챘으면 진작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니야! 일행들이 전부 교체될 동안 뭘 하고 있었어!” “사람으로 둔갑하는 마물 따위 내가 알게 뭐야! 그러는 넌 왜 진작 눈치 채지 못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투닥거리며 말로 다투는 사이 어느새 우리는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지는 통로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앞에 서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발견한 순간 나와 시벨은 똑같이 경악에 찬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얼굴을 가진 두 명의 이사나가 각 통로 앞에 서서 우리를 향해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시벨님! 지훈! 여기예요! 이쪽으로 오세요!” “거긴 아니야! 이쪽이야! 동료들이 모두 이쪽에 있어! 얼른 이곳으로!!” “……”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황당한 표정으로 두 명의 이사나를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우리 뒤를 쫓아오던 일행은 2층에서 마주쳤었던 거대한 점액질의 몬스터로 변해 있었다. 그들은 꿈틀거릴수록 점점 더 많은 숫자의 동료들을 증식시켰다. 키에에엑! 어느새 통로의 앞은 수 백 마리의 몬스터 떼로 바글바글한 상태가 되었다. 그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린 시벨은 그대로 손을 들어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섬광처럼 타오르라! <파이어 스톰!>” 촤아악! 쿠우우우웅!!! 지글지글 타오르는 소리와 매캐한 연기도 잠시. 우리는 아까보다 더욱 불어나 버린 몬스터에 그대로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째 이번 몬스터는 죽이면 죽일수록 숫자가 불어나는 체질(?)인 듯 했다. 그때까지도 두 명의 이사나는 연신 자기 쪽으로 오도록 소리치고 있었다. “공격은 위험해! 일단은 피해야해! 이쪽으로 오라니까? 지훈! 시벨님!!” “거기가 아니야! 거긴 몬스터의 밀집 장소라고! 동료들은 이곳에 있어! 어서 이쪽으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오히려 담담해 지는 심정이었다. 그러자 시벨은 나를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저 두 사람 중에 누가 진짜인지 알겠어?” “…둘 다 가짜야.” “뭐?” “둘 다 가짜라고. 이사나는 이마에 정령왕과 계약한 인장이 찍혀있어. 근데 저기 있는 두 사람은 모두 이마에 인장이 없어.” “!! 헤에~ 그렇단 말이지? 그럼 해결 방법이야 간단하지. 가랏- <라이트닝 볼트!!>” “자, 잠깐!” 콰앙! 콰지지지직! 시벨이 시전한 공격마법은 그대로 매섭게 달려가 두 명의 이사나를 불태웠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 뒤에 있던 몬스터와 같은 형체로 변하는 것이었다. “쿠에에에엑!!”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몬스터가 잿더미로 변하자, 나와 시벨을 둘러싸고 있던 수 십 마리의 몬스터들도 갑자기 땅바닥에 녹아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통로였던 부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우리는 뻥 뚫려진 바닥으로 순식간에 추락했다. 턱! 쿠우우웅!! “아야야야…에구구 나 죽네.” “젠장. 뭐 이따위 던전이…” 떨어진 곳은 방금 전까지 있던 곳과 달리 무척 컴컴하고 음습한 장소였다. 짧게 혀를 찬 시벨은 곧 라이트 마법을 시전 하여 주변에 둥그런 빛 덩어리를 띄워 올렸다. 그리하여 간신히 보게 된 장소는 사방이 가로막힌 커다란 파티홀 같은 느낌이었다. 왼편에는 이 방의 유일한 출구인 듯한 문 하나가 달려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그때서야 시벨리우스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너 미쳤어? 두 사람 중에 혹시라도 진짜 이사나가 있었으면 어쩔 뻔 했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다니, 그러다 녀석이 죽기라도 하면 책임 질 거야?” “시끄러. 아니었으면 됐지 뭘 그래? 그렇게 판단력에 자신이 없으니까 몬스터를 발견한 게 늦된 거 아니야! 애초에 네가 눈치만 빨랐어도 이렇게 까지 일이 복잡해지진 않았어.” “아하, 그래? 그거 참 미안하게 됐네. 누가 들으면 다 내 탓인 줄 알겠다?” “누가 전부 네 탓이래? 아무튼 이럴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녀석들을 찾아야 해. 지금쯤 어떤 장소에서 무슨 일을 당하고 있을지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며 벌떡 일어난 시벨은, 성큼성큼 단 하나의 출구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놀란 나는 얼른 따라가 당장이라도 문을 열려는 녀석의 팔을 붙들었다. “뭐야? 왜이래?” “여기가 정말 출구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상황이 긴박한건 알지만 좀 더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무슨 생각? 늦장 부렸다간 정말로 위험해.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찾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만 좀 해. 정령왕이면 제발 정령왕 답게 굴어. 너란 녀석을 한때나마 ‘엘’이라고 착각하게 만든 나를 실망시킬 셈이야? 이렇게 우유부단하니 다른 정령왕들이 널 가지고 놀기나 하는 거잖아!” “!!” 녀석의 말에 나는 못이라도 박힌 듯 잠시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시벨은 아차 싶었는지, 약간 후회하는 듯한 얼굴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조금은 풀어진 표정으로 나를 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 이런 말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너만 보면 화가 나. 네가 ‘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어쩐지 배신당한 기분이었거든.” “…난 한 번도 내가 엘이라고 말한 적 없어.” “알아. 그래도 나는 네가 반드시 엘 일거라고 믿었어. 그만큼 녀석과 닮았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진짜 엘을 찾은 지금도 네가 엘 일거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어. 그래서 아마 더 짜증이 솟았던 걸지도 몰라.” “…!…” “지금까지 말 함부로 했던 건 미안해. 하지만 혼란스러운 건 나 역시 마찬가지야. 말해봐, 넌 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거지? 엘이 아니라면, 넌 대체 누구야?” “……” 내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자 시벨은 낮게 한숨을 쉬곤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쾅-하고 열렸던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그때서야 잠에서 깨기라도 한 것처럼 후들거리는 다리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법의 시전자가 사라진 바람에 공간 안은 다시금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내 머릿속에선 오직 시벨이 남기고간 마지막 말만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누구냐고? ‘글쎄, 이젠 나도 내가 누군지 알 수가 없는걸. 엘퀴네스는 누구고, 강지훈은 누구지? 4천년 전의 엘은 누구고 엘뤼엔은 누구야? 트로웰이 친구라고 말했던 건 누구? 엘뤼엔이 아들로 삼으려 했던 존재는 누구지? 왜 나는 이런 고민을 해야만 하는 거지? 차라리 이럴 바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편이 나았을 텐데.’ 부정적인 생각은 끝없이 사람을 침몰하게 만든다.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것은, 더 이상 내려갈 수도 없는 밑바닥에 앉아있는 것이 차라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기대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어쩐지 점점 몽롱해 지는 정신이 지금의 상황을 잊고 잠이나 푸욱 잤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어디선가 곤란해 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으엑. 이, 이게 아닌데? 이런, 장난이 좀 지나쳤나? 난 이제 죽었다.> ======================================= “엘! 시벨님! 알리사! 다들 어디 있어?” 하염없이 이어지는 복도의 중간에서 이사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분명 자신은 방금 전까지 일행들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에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일행들이 자신을 놔두고 혼자 갈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사나는 점점 더 조마조마해 질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엘만이라도 그의 옆에 있었다면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서야 이사나는 자신이 지금껏 그를 얼마나 많이 의지해 왔는지 깨달았다. “엘…엘퀴네스! 어디에 있어?” 계약된 정령은 소환자의 부름에 언제 어디서든 응답 할 수 있다. 그것은 엘퀴네스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필사적인 부름에도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을 얻을 수 없었다. 이사나는 혹시나 싶어 다른 정령을 불러보기로 결심했다. “시큐엘? 시큐엘, 나와 봐.”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시큐엘에게서도 반응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운디네와 나이아스들 또한 대답이 없었다. 설마 이곳에선 정령술을 쓸 수 없는 걸까? 이사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춤에 매고 있던 검집을 움켜쥐었다. 정령의 힘을 기대할 수 없는 이상, 지금부턴 몬스터가 나타나면 순전히 검의 실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이사나는 문득 복도의 한 구석에 누군가가 주저 앉아있는 것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잔뜩 부운 얼굴로 연신 눈물을 흠치고 있는 알리사의 모습이었다. “알리사!!” 반가운 마음에 그는 얼른 달려가 알리사를 끌어안았다. 아니, 끌어안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알리사의 몸에 닿지 못하고 그대로 스륵- 그녀의 몸을 통과하고 있었다. 이사나는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울음소리를 가득 담은 애처로운 목소리가 마치 공명처럼 그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흑…다들 어디로 가버린 거야. 멀든!! 나와 봐. 왜 아무도 안 나타나는 거야.> “아, 알리사?” <여기 싫어. 무서워…트로웰. 흑, 트로웰…무서워. 이사나씨. 신관님, 엘, 시벨리우스…다들 어디 있어?> “알리사! 내가 안 보이니? 알리사!” 몇 번의 부름에도 알리사는 전혀 이사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의 형체가 점점 흐릿해 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당황한 이사나가 무심코 손을 내미려는 순간,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 그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데르온의 모습이었다. <여긴 대체 어떻게 된 공간이지? 마력도 안통하고, 검기도 쓸 수 없다니. 몬스터라도 나오면 낭패이군.> “데르온?” <흐음. 처음 눈치 챈 것은 엘퀴네스님 뿐이라는 건가? 것 참. 교체당하는 순간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다니, 이거 마계 4대 공작이라는 자리를 내놔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데르온! 당신도 내가 안보여요?” 이사나는 필사적으로 달려가 데르온의 모습을 붙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알리사 때처럼 그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을 뿐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이번엔 시벨리우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도 데리고 나올걸 그랬나? 내가 가면 따라 나올 줄 알았더니 전혀 반응이 없네.> “시벨리우스님…” <심한 말해서 삐진 건가? 아무튼 그런 점 까지도 엘이랑 똑같다니까. 이러니 내가 자꾸 혼동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나 참, 어쩔 수 없군. 다시 데리고 와야…어라? 문이 어디로 갔지?> “시벨리우스님도 …내가 안 보여요?” <던전의 함정에 빠진 건가…. 미치겠군. 뭐 이딴 곳이 다 있지? 이런 걸 인간이 만들었다니, 말도 안돼.> 낭패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이사나는 털썩 힘없이 주저앉았다. 만져지지도 않고 말이 들리지도 않는다니, 마치 자신이 유령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니, 정말 살아있는 게 맞는 걸까? 엄습하는 두려움에 입술을 깨문 순간 이사나는 문득 자신이 있던 공간이 크게 뒤틀려지는 걸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복도가 마치 구겨진 종이처럼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지탱할 곳을 잃은 그의 몸은 순식간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은 암흑 속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궁!! “으아아악!”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이사나는 문득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복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밝고 화려한 빛이 느껴졌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그가 처음으로 본 것은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과, 화려한 금실이 수놓아진 커텐이었다. 한 구석에는 커다란 침대가 하나 있었고, 가운데에는 방문한 손님을 응접하기 위한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화려할 뿐인, 별다른 이상한 점이 없는 평범한 방이었지만, 한 가지 문제라면 그것이 이사나 본인이 알던 장소와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설마…태자시절에 쓰던…내 방?”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불길한 기분에 무심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본 이사나는 더욱 경악하고 말았다. 이때까지 걸치고 있던 평범한 로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는 황태자가 입는 금색의 화려한 정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똑 똑- 단정한 노크소리가 울리자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몸을 떨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들어오는 누군가의 모습에 그는 한순간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태자전하. 기분은 어떠십니까?” “…수, 숙부?” 들어온 이는 하얀색의 법복을 입은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는 처연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슬픈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사나는 지금 이 상황이 어디에선가 많이 보던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청천병력과도 같은 대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형틀이 마련되었습니다. 아버님의 마지막을 지켜보셔야지요.” “…형틀? 마…지막?”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는 이 땅의 모든 재앙을 대신 짊어지시고 가시는 겁니다. 그러니 태자전하는 그 분의 희생을 위업으로 받들고 강건한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 마, 말도 안돼. 이게 어떻게 된?” 이사나는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틀릴 리가 없었다. 이 상황은 아버지가 처형되던 바로 그 때의 일이 아니던가! 그가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온 세상을 저주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날의 상황이 다시 펼쳐지는 것에 이사나는 한순간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러자 대공은 뻣뻣하게 굳어있는 이사나를 억지로 일으켜 어딘가로 데리고 가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럴수록 그의 걸음은 더욱 빨라지고 있을 뿐이었다. 잠시 후 커다란 함성과 수많은 군중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 환호하고 있는 백성들 속에서 커다란 형틀 앞에 무릎 꿇고 앉아있는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이 곳 솔트레테의 황제이자, 누구보다도 백성을 사랑하고 배려했던 남자였다. 그런데 어째서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환호하는가! 그의 머리위에서 흔들리고 있는 단단한 밧줄을 본 이사나는 현기증을 느끼고 비틀거렸다. 이제 곧 저 밧줄은 아버지의 목을 졸라 단번에 숨을 앗아갈 것이다. 아버지!!! 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순간 엷게 입꼬리를 올린 대공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족의 유체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교수형을 선택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드냐고?!’ “보십시오.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군요. 폐하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이 모든 재앙이 끝날 거라고 믿을 테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태자전하도 조금쯤은 그들의 기쁨에 동조해 주십시오.” ‘동조해 주라고? 내가? 날더러 저들의 기쁨에 동조하라고?!’ 투둑-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 꿈에서조차 잊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우게 만든 일이었다. 신을 저주하고, 백성을 저주하고, 스스로마저 저주하기를 몇 번이었던가! 왜 하필 이 악몽이 다시 재현되는 거지? 왜!! “자, 보십시오. 폐하께서 교수대에 오르십니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않으실 겁니까?” “…그만” “현실을 외면하지 마세요, 태자전하. 지금 배웅하시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배웅하실 기회가 없으실 겁니다.” “…그마안!!!!”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 사이로 뿌옇게 보이는 모습은 그의 아버지가 처형되는 순간이었다. 교수대에 오르기 직전 자신을 보면서 ‘괜찮다’는 듯이 환하게 미소 짓는 모습에, 이사나는 차라리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떨어지는 발판,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몸, 그것을 보고 점점 환호하는 백성들과, 광장에 뿌려지는 축제의 꽃가루…. 왜 나는 이곳에 있는 거지? “싫어! 안돼!! 그만! 그마아안!!!” 아아. 이대로 영원히 미쳐버렸으면. ===================================== 눈을 떴을 때 내가 제일 처음 본 것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던 한 쌍의 까만 눈동자였다. 헉-하고 나도 모르게 놀라서 몸을 일으킨 순간, 별안간 쾅-하고 커다란 소리가 울리더니 눈앞에서 별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크윽! 뭐, 뭐야!” “윽. 뭐긴 뭐야, 자식아! 점심시간 됐는데도 안 일어나니까 이 몸이 몸소 깨우러 온 거잖냐. 이씨! 너 돌머리지? 뭐가 이렇게 단단해? 아파 죽겠다.” “돌머리긴 누가 돌머리…엥? 너 누구야?” 아직도 얼얼한 이마를 문지르며 바라본 앞에는,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어디선가 많이 본 옷차림을 한 채 나와 똑같은 포즈로 머리를 감싸고 끙끙거리고 있었다. 대체 정체가 뭐냐! 그러자 녀석은 뭐 잘 못 먹었냐는 듯이 바라보며 눈을 휘둥그렇게 떠보였다. “에엥? 이게 미쳤나. 설마 머리 부딪친 충격으로 기억이라도 잃은 거야? 정신 차려, 강지훈! 나잖아, 나. 아직도 잠에서 덜 깼냐?” “어? 설마…하태진?” 맙소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앞에 있는 녀석은 분명 내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 친했던 친구였다. 단정한 교복차림과 약간 갈색 빛이 도는 생머리까지,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녀석과 한 치의 다른 점도 없는 모습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보니, 낯익은 교실의 풍경과 이리저리 둘러앉아 도시락을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까지 던전에 있던 내가 왜 이런 곳에 와 있는 걸까? 어? 던전? 그건 또 뭐지? 게다가 기억하고 있던 마지막 모습? 한국에서 살았을 때라니? 뭔가 생각 날 듯 말 듯한 느낌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으윽. 뭐가 뭔지 모르겠어.” “정신 차려, 임마. 수업시간 내내 퍼 자더니만 이젠 현실까지 혼동하는 거냐?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아직도 비몽사몽이야?” “…꿈?” “그래, 꿈. 아무튼 배고파 죽겠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민식이가 네 것 까지 도시락 싸왔대. 기다리게 했다간 폭주할걸?” “어? 어…. 근데, 저기. 나 진짜 꿈 꾼 거 맞아? 정말 실감났었단 말이야. 방금 전까지 굉장히 무식하게 큰 괴물들이랑 싸웠던 것 같은데?” 그러자 태진이는 못 말리겠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하나씩 질문하기 시작했다. “첫째, 여기가 어딜까요?” “학교.” “그럼 지금은 무슨 시간?” “에…점심시간?” “음, 그럼 너는 학교 점심시간에 괴물이랑 싸운 용감한 학생이 되는 걸까?” “…아니.” “꿈 꾼 거 확실하지?” “……응.”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뭔가 이게 아니지 싶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상냥하게 미소 짓고 있는 태진이를 보는 순간, 그까짓 꿈이야 아무렴 어때, 라고 무심코 납득하고 말았다. 그러자 태진은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있던 무언가를 집어 건네주었다. “뭐야?” “안경이잖아. 이거 안 쓰면 멀리 있는 건 하나도 안 보이면서.” “으음. 그, 그랬던가? 나 굉장히 눈이 좋아 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이너스 시력주제에 좋기는 개뿔.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써. 너 하나 때문에 애들 다 기다리잖아.” 태진의 재촉에 나는 마지못한 듯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얼굴에 걸쳤다. 그때서야 선명하게 주변 사물이 보이기 시작하는 걸 보면, 확실히 지금까지 꿈을 꾼 게 맞았던 모양이다. 왠지 상당히 아쉬워 지는 기분에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잘 보이네.” “그치? 이 자식은 어째 갈수록 얼빵해지는가 몰라. 꿈이 그렇게 재미있었냐? 일어났을 때 친구 얼굴도 한순간 못 알아 볼 만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식아! 뭐 대충 알만하다. 괴물이랑 싸웠다는 걸 보니 무슨 전설의 영웅이라도 되서 모험 같은 거라도 했겠지. 맨날 판타지 소설 들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정말 언제나 크려는지.”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게 화가 나서 큰 소리를 내자 태진을 비롯한 반 아이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집중되었다. 어쩐지 창피해지는 기분에 고개를 홱 돌리자, 약간 기죽은 듯한 태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야, 알았어…뭘 그렇게 화를 내고 그러냐? 그냥 장난 한 걸 가지고. 미안해. 많이 삐졌냐?” “아, 아니야. 그냥…갑자기 좀 답답해져서…너한테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됐다. 네놈 자식의 감정 기복이 불안정 했던 게 어디 한 두 번이었냐? 아직 잠에서 덜 깬 모양인데, 이 형님이 확실하게 정신이 들도록 만들어 주지. 에잇!” “우아악! 이 자식! 무슨 짓이야~~!!” 갑자기 녀석이 끌어안고 간지름을 태우는 통에 나는 기겁을 하고 비명을 질렀다. 어이 거기 여자애들! 왜 이런걸 보고 므흣한 웃음을 흘리는 거야! “빨리 항복 안 해? 안 그럼 계속 간지럽힌다?” “으아악! 알았어. 항복! 항복! 내가 다 잘못했어! 항복한다니까?” “쳇. 진작 그럴 것이지.” 그때서야 거만한 표정으로 손을 탁탁 털고 물러서는 태진의 모습은 흡사 진정한 한 마리의 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흐트러진 교복을 단정히 하며 질린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보았다. 암튼 이자식도 라피스 만만치 않게 변태… ‘응? 라피스가 누구지?’ 굉장히 낯익은 이름인 게, 어디선가 꼭 들어본 느낌이었지만 좀처럼 떠오르는 건 없었다. 영어라면 쥐약인 내가 외국인 친구를 사귀었을 리도 없고. 얼마 전에 본 영화에 나왔던 주인공 이름인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기던 난 곧 버릇처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마치 딴 세상에라도 다녀온 기분이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현관 앞에서 조심스럽게 건네는 말에 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에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나라는 존재가 그들에게서 무시되고 있을 뿐. 그나마 아는 척 하는 건 어머니 정도일까? 그것도 대부분이 잔소리라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옷차림이 그게 뭐냐?” “에? 아, 죄송해요. 학교에서 친구가 장난쳐서…” “좀 똑바로 하지 못하겠니? 그 꼴을 보면 네 아버지가 또 얼마나 기분이 상하실지. 정말이지 이 엄마는 이제 그만 좀 편하게 살고 싶다. 너 하나 때문에 항상 집안이 시끄러워서야 쓰겠니? 대체 언제나 철이 들려는지.” “…죄송합니다.” “죄송한 줄 알면 좀 고쳐. 낳아주고 키워준 은혜를 몰라도 유분수지, 정말 내가 널 왜 낳았는지 후회가 될 정도니까. 네 형과 누나의 반만이라도 좀 닮아봐라.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하지 말란 소리야!” 씩씩거리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큰형이 다가와 버럭 큰소리로 외쳤다. “뭘 멀뚱히 서있어? 얼른 네 방으로 들어가기나 해! 너 때문에 엄마 또 혈압 오르시잖아! 오늘도 아버지 술 드시고 오시면 다 네 탓이야! 알았어, 새끼야?” “형…” “형은 무슨 얼어 죽을! 난 너 같은 동생 둔 적 없어!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게. 얼른 꺼져, 한 대 맞기 전에.” 늘 있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건, 오늘 학교에서 꾸었던 꿈 때문일 것이다. 그 안에서 나는 그래도 사랑받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깨어나고 싶지 않았을 만큼. 그런데 내가 왜 일어났더라? 잠시 생각해 보던 나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뭐, 그래봤자 꿈은 꿈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겠지.’ 아무리 아름답고 행복한 꿈이어도, 결국 깨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나마 하교 시간이 아버지의 퇴근 시간과 겹치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얼른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버지와 마주친 날은 백이면 백 몇 대 맞기 일쑤였으니, 알아서 피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거울 속에 비치는 내 얼굴이 거슬러 보였다. 약간은 각진 얼굴에 노란 피부도, 검은색 눈동자도, 짧은 더벅 머리카락도 본래의 내 것이 아닌 기분이 드는 것이다. 내 얼굴이 원래 이랬었나? 나는 한참이나 빤히 거울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때, 어쩐지 현관 앞이 시끄러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퇴근한 아버지가 이제 막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쿵- 재떨이라도 던졌는지 방문에 날카로운 물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후레자식놈! 당장 문 안 열어? 오냐, 그래 이제 아비고 뭐고 눈에도 안 들어온다 이거지? 이래서 재수 없는 자식은 키우면 안 된다니까! 에잇! 이놈의 썩을 세상!!” “여보! 내가 오늘은 술 드시지 말라고 했잖아요?” “시끄럿! 가서 지훈이 새끼나 불러와! 아비가 왔는데도 나와서 인사를 안 해? 저딴 것도 아들이라고 집에 들여놔! 당장 내쫓아버려, 당장!” “쫓아내려면 당신이 해요! 정말이지 내가 못살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해? 이제 좀 그만 둘 수 없어요?” “뭐가 어째? 당신이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그러게 누가 저딴 녀석 낳으랬어?” “누가 낳고 싶어서 낳았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럴 거면 낙태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나 말지~! 왜 이제 와서 난리야? 왜 이제 와서!” 분에 받친 목소리와 통곡하는 목소리…그 대부분의 대화가 나를 향한 저주라는 건 이미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내가 태어난 뒤로 벌써 몇 년 동안 반복되던 상황. 형제들이 나만 보면 짜증을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부모님이 싸우는 이유는 거의 다 나 때문이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들이 왜 나만 보면 화를 내는지 여전히 알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곤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전혀 낯선 사람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간혹…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만, 원래 가야할 운명의 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억지로 분배 되는 경우가 있지요. 혹, 부모님이나 형제들에게 가족으로서의 유대감을 받지 못하지는 않았나요?> “…어?”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지만 여전히 나는 어둡고 좁은 방안에 혼자 앉아있는 상태였다. 환청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또 다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방금 전에 들었던 목소리와는 다른 음성이었다. <오, 그래. 결정했다. 너 내 아들 해라.> <갑자기 무슨 아들타령이야?> <마음에 들었으니까. 내 아들 하라고. 마침 자식도 가지고 싶었거든.> 나를 향해 똑바른 시선을 건네며 방긋 웃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어쩐지 울고 싶어지는 기분에 나는 천천히 무릎을 세우곤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달콤한 꿈은 항상 괴로운 법이다. 그것이 결코 이룰 수 없는 망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마니까. ======================================= “아야! 아프잖아! 살살 좀 해!” “시끄러! 바보 같은 자식! 그냥 얌전히 맞고만 있었냐? 나 같았음 차라리 집을 나왔다. 대체 이게 뭔 꼴이야? 완전히 엉망이 됐잖아!” 그날 저녁은 아버지가 일찍 포기하신 바람에 무사히 넘어갔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뻔 했으나, 결국 나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온 아버지에 의해 복날 개 잡듯 얻어터지고 말았다. 온 몸에 든 시퍼런 멍 자국을 본 태진은, 나보다 더 괴로운 표정이 되선 치료해 주는 내내 연신 투덜거렸다. “이 바보, 멍청이, 한심한 놈아! 네가 아직도 무력하던 3살짜리인 줄 알아? 다 큰 고등학생이나 된 게 왜 아직도 맞고 사냐? 너희 부모님도 그래. 왜 맨날 너만 보면 고양이 쥐 잡듯 볶아대는 건데? 말해 봐. 너 사실은 그 집 핏줄 아니지? 혹시 누가 너 그 집에 버려두고 간 거 아니냐?” “하태진. 거기에서 더 말하면 나 화낸다.” “얼씨구? 화낼 줄은 아셔? 그래서 이렇게 맞고만 사셨어? 안 그래도 네 아빠랑 너 붕어빵인거 알아. 차라리 남의 자식이라고 하면 이해라도 하지, 나 참.” “…….” 쩝, 할 말 없다. 저 놈의 자식은 왜 속속들이 옳은 말만 해서 이토록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였다. “치료해 줄려면 얌전히 치료나 해라. 그렇게 쏘아 붙이고 나면 속 편하냐?” “안 편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못생긴 얼굴이 더 엉망이 됐는데 친구로서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 줄 아냐? 너 이러단 평생가도 여자친구 안 생길걸?” “뭣시라? 못…생긴? 그러는 너는 얼마나 잘생겼다고?” 그러자 태진은 훗-하고 미소를 날리더니 팔짱을 끼며 거만한 포즈를 취했다. 마치 이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 몸의 인기야 자타가 공인한 사실이지. 자 봐라, 이 매끄러운 하얀 피부와 결 좋은 머리카락! 여자애들이 이 몸만 보면 쓰러지는 거 너 모르지? 꽃 미남이란 바로 나를 두고 있는 소리다 이 말씀!” “허허. 네가 아직 진정한 꽃미남을 못 봤구나. 이 형님의 말을 잘 들어. 꽃 미남이란, 얼굴만 딱 봐도 숨이 멎을 것 같이 샤랄랄한(?) 분위기에, 지적인 눈동자. 조각 같은 입술과 자로 잰 듯한 콧날, 그리고 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너 정도로 무슨…” “꼭 실제로 보기라도 했다는 것 같은 말투다?” “당연하지! 트로웰부터 시작해서 라피스, 엘뤼엔, 이사나…심지어 우연히 만난 엘프조차 다들 얼마나 잘 생겼었는데.” “그게 다 누군데?” “엥? 그, 글쎄? 누구였지?” “…아버지한테 머리라도 맞았냐?” 뭔가 상당히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태진의 모습에 나는 어설픈 미소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 요즘 들어 헛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단순히 내 착각일까? 그때 교실의 분위기가 한순간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반 여자애들이 창가에 매달려 꺅꺅 소리를 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을 따라 무심코 창밖을 내다본 태진은 입가에 휘파람을 불곤 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얏! 아프잖아! 거긴 어제 당구채로 맞은 데란 말이야.” “아, 미안. 암튼 밖에 좀 봐봐. 네가 말한 꽃미남의 조건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녀석이 있어.” “엥? 어디?” 스스로 말해놓고도 절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그 조건을 수용하는 인간이 있다고? 놀란 나는 벌떡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태진은 손가락으로 교정 앞에 서있는 훤칠한 키의 외국인을 가리켜보였다. 그는 실크로 된 자켓에 검은색 양복 바지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허리까지 오는 결 좋은 금발을 단정하게 하나로 묶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여자애들 여럿 홀릴 듯한 분위기의 소유자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무료한 시선으로 담배를 태우던 그는, 창가에 다닥다닥 달라붙은 우리들의 시선을 느꼈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옆에 있던 여자애들이 꺄악~ 하고 비명을 지른 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 착각이었을까? 우연히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이 잠깐 굳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히야~ 기똥차게 잘 생긴 남자네. 누굴 만나러 온 걸까? 웬만한 연예인은 앞에서 명함도 못 내밀겠다. 그치?” “으응. 근데 저 사람…아까부터 이쪽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래? 헉. 혹시 내 미모에 질투라도 한 게 아닐까? 이런, 어쩌지? 이러다 결투장이라도 날아오면…” “그냥 죽어라, 이 자식아!” 어째 이놈의 왕자병은 점점 더 심해지는 걸까? 나는 녀석과 투닥거리며 싸우느라 어느새 교정 앞에 서있던 외국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것은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너 여기서 지금 뭘 하는 거냐?”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서 버스를 기다리는 나는 누군가가 물어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학교 교실 창가에서 보았던 외국인이 바로 내 뒤에 서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같지 않게 화려한 외모에 감탄한 것도 잠시.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물었다’고 인식한 순간, 나는 눈에 띄게 뻣뻣해진 얼굴이 되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윽! 그, 그러니까…Excuse me? 우에에. 나 영어 못하는데.” “…바보냐. 한국말로 물었잖아. 정신 차려.” “에? 엇! 정말이네? 와~ 한국말 잘하시네요. 근데 뭐라고 하셨었죠?” 내 질문에 그는 턱-하고 이마를 짚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잘 죽일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런 동작 하나조차 멋있게 보이다니, 역시 사람은 타고난 얼굴이 잘나야 하나보다. “여기서 뭐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아, 버스 기다리고 있는데요. 학교가 끝나서 집에 가는 길이거든요.” “집? 여기에 너희 집이 어디에 있는데?” “31번 버스 타고 두 정류장 정도 가면 되는데요.” “그.게.아.니.라. 여기에 네가 살 집이 어디에 있냐는 뜻이다.” “…에?”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그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자, 남자는 아까전보다 더 화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파란 눈이 시퍼런 불길에 활 활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잠시 그렇게 나를 쏘아보던 그는, 아버지에게 맞아서 퍼렇게 멍든 팔 부분을 보더니 으득-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누가 이랬지?” “아~ 이거 별거 아니에요. 원래 제가 좀 칠칠맞아서…” “누가 이랬냐고 묻잖아!” “윽. 왜 화를 내고 그래요? 그냥 제가 좀 잘못한 일이 있어서 아버지한테 맞았어요. 됐어요?” “누가 아버지라고?” 나는 대체 그가 무엇 때문에 화를 내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정 폭력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라도 가진 사람인가? 더 이상 상대했다간 피곤해지지 싶어, 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려고 했다. “제가 지금 바쁘거든요? 그럼 이만…” “외면하지 마! 누가 네 아버지야, 누가! 아무리 너라도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는 꼴은 안 봐준다. 날 똑바로 쳐다보지 못해?” “대체 무슨 소리를…” “기껏 도망친다는 데가 이런 곳 밖에 없었냐? 당장 숨통이 조이는 게 싫어서 물속에 뛰어들어? 입은 뒀다 뭘하고 지금껏 참고 있었어! 날 봐, 엘퀴네스! 대체 누구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거야!” “!!” 순간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을 억지로 떠올리는 기분? 아아, 그래. 나는 이 사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이, 이것 놔요!” “엘!” “내 이름은 강지훈이에요! 사람 잘 못 봤다구요!” 나는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남자에게 잡혀있던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맥없이 붙들리고 말았다. 내 어깨를 강하게 잡은 남자는 진지한 얼굴로 한 글자씩 끊어내듯이 입을 열었다. “잘 들어. 계속 이곳에 있으면 네 정신세계는 반드시 소멸한다. 지금 당장은 편할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는 계속 괴로운 기억만 반복될 거야.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환상 마법이니까.” “환상… 마법?” “바보 같이 뭘 하고 있는 거야? 네가 이러고 있는 동안 네 동료들은 점점 미쳐가고 있다고. 지금 당장 가서 깨워주지 않으면 손쓰는 게 늦어질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동료? 미쳐 가다니?” “기억 안나? 여기에 오기 전까지 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지? 아니, 그보다…네 앞에 있는 난 누구냐?” “…모르겠어.” 남자의 말에 나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모르겠는 게 아니라 ‘알고 싶지 않다’겠지. 말해봐. 왜 나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거지?” “왜냐니…난 다른 사람 대타 같은 거 싫어.” “친 부모한테 무시당하고 맞는 건 괜찮고?” “그래도 그들은 ‘나’를 바라 봐. 다른 사람의 대신은 아니야. 아무리 싫어해도, 나만 보면 저주한다 해도…그건 온전히 ‘나’를 향한 거야. 게다가 아프면 위로해 줄 친구들도 있고…” “그래서? 계속 여기서 살고 싶은 거냐? 이게 전부 네가 만들어낸 가짜라고 해도?” “…가짜?” “그래. 네 멋대로 꾸며낸 환상일 뿐이야. 실제론 넌 이미 이들 사이에서 죽은 사람이잖아. 벌써 잊은 거냐?” “아….” 떠듬떠듬 말을 하는 사이 짧은 스포츠머리였던 내 머리카락은 점점 길어져 어느새 허리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버스가 다니고 있던 도로나, 지나다니던 사람들은 전부 사라지고 주변은 컴컴한 암흑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내 눈 앞에 서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어라? “…엘뤼엔?” “하아. 이제야 정신이 든 거냐? 하여간 이래저래 손이 가는 아들놈 같으니라고.”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방금 전까지 던전에…”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네 놈이 쓸데없이 마음이 약한 바람에 별 시덥지도 않은 마법 따위에 걸려든 거지! 대체 누가 널더러 다른 사람의 대신이라고 한거야? 당장 찾아서 죽여버릴테다!” “자, 잠깐만. 마법이라고?” “그래, 마법! 일단 정신 들었으니까 눈부터 떠라. 그게 순서인 것 같으니.” “엥? 그건 또 무슨?…으악!” 그의 말이 끝난 것과 동시에 나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있었던 바닥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커다란 암흑 아래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허억!” 숨이 멎을 것처럼 놀란 얼굴로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어느 환한 응접실의 바닥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쯧쯧. 깼으면 그만 일어나. 그 상태로 다시 잠들고 싶은 게 아니라면.” “…어? 엘뤼엔?”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방금 전까지 꿈에서 만났던 엘뤼엔이었다. 그런 그의 옆에선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어설프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하, 하이루, 엘군! 냐하하~ 사랑스러운 밤이지?” “넌 닥치고 있어!” “흑- 너무해. 나는 그저 친우의 아들에게 인사를 건넸을 뿐인데.” “친우는 누가 친우야! 이 빌어먹을 자식! 너 때문에 하마터면 내 하나뿐인 아들놈이 저 세상 갈 뻔 했잖아!” “에헤~ 나는 설마 이 정도로 충격 받을 줄은 몰랐지~ 아이, 그렇게 화내면 무섭잖아~” “닥쳐!” …대체 뭐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전개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던 나는, 무심코 옆을 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사나를 비롯한 일행들이 모두 내 옆에서 아무렇게나 쓰러져 누워 있었던 것이다. 나는 황급히 다가가 그들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엘’의 모습이 없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당황한 상태였다. ==================================== “이사나! 시벨! 알리사! 데르온씨! 이봐요! 다들 정신 차려봐!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다행히도 사람들은 내가 깨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천천히 의식을 되찾는 듯 보였다. 가장먼저 신음을 흘린 건 바로 옆에 누워있던 이사나였다. 무슨 지독한 악몽이라도 꾼 건지, 녀석은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큭-으흑…에, 엘…” “이사나! 정신 들어? 나 알아보겠어?” “나…나아…흐윽. 흑…아버지가…아버지가…흐윽…” “괜찮으니까 일단 일어나 봐. 천천히 진정해. 시벨! 다시 눈 감지 말고 일어나. 알리사 너도! 데르온씨 정신 차려요.” “윽- 뭐가 어떻게 된?” “어라? 방금 나 쫓아오던 괴물 어디 갔어?” 그때서야 완전히 의식을 되찾은 건지, 눈을 뜬 일행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기분 나쁜 꿈을 꿨다는 듯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들이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였다. 다만 한 사람, 이사나만은 좀처럼 쉽게 진정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덜덜 몸을 떨며 격한 흐느낌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사나. 이사나? 내 말 안 들려?” “흑…흑…다 죽일 거야. 가만히 안 둘 거야. 아버지를…아버지를…” “이런. 단단히 정신을 잃은 모양인데? 어떻게 하지?” “왜 그래, 신관님? 이사나씨한테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야?” “아, 알리사. 혹시 정신을 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아무래도 이 녀석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은데.” 그러자 알리사는 찌푸린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길을 걷다 보니 나 외에는 아무도 없었어. 게다가 정령을 불러도 나오지 않아서 굉장히 많이 불안했거든. 그리곤 계속해서 악몽을 꾼 것 같아.” “악몽?” “응. 사막 한 가운데서 정체모를 적들이 계속해서 나를 쫓아오는 거야. 정말 소름끼쳤다고. 아무리 불러도 트로웰은 안 나타나지, 적들의 숫자는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지. 하마터면 정말 미칠 뻔 했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런 식이지 않았을까? 그렇지, 데르온씨?” 알리사의 질문에 데르온은 잠에서 덜 깬 듯한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두 눈에 살기가 들끓는 것이, 그다지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아아, 네. 일단……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상황만 리플레이 되는 것 같더군요. 좀 지나치게…짜증났습니다.” “그, 그래? 시벨 너도?” “응…내 경우엔, 엘이 자꾸 나를 모른다고 외면하는 상황이었어. 하하, 그게 생각보다 충격이 컸던 모양이지? 그런데…‘엘’은 어디 갔어?” 그러자 그때까지도 옆에 있던 남자와 티격대고 있던 엘뤼엔이 갑자기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씹어 먹을 것 같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놈의 자식이 그 ‘엘’인지 뭔지 하는 시덥지 않은 걸로 내 아들놈을 혼란에 빠트리게 한 장본인이냐?” “시덥지 않다니 그게 무슨…어? 너어? 에, 엘퀴네스?” “닥쳐! 엘퀴네스 따위 때려치운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헛소리야! 전에는 빌어먹을 도마뱀 자식이 오해를 하더니 이젠 어디서 개풀 뜯어먹던 망아지까지! 잘 들어, 난 형벌의 신 엘뤼엔이다. 한번 만 더 나를 엘퀴네스로 오해했다간 지옥불에 던져버리겠어.”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엘뤼엔을 쳐다보았다. 특히 데르온은 입을 뻐끔뻐끔 거리며 다물지 못하는 것이, 좀처럼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엘뤼엔이라면 마족들이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두려워하는 신이 아니던가! 그런 존재가 갑자기 이런 장소에 나타나 나를 향해 ‘아들’ 운운하고 있으니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시벨리우스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인 듯,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형벌의 신? 하지만 분명 이 얼굴은…” “아하. 엘퀴네스였을 당시의 날 알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미안하지만 난 너 따위의 기억 없는데? ‘엘’이니 뭐니 하는 인간에 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함부로 내 아들을 남의 대타로 밀어 넣지 마.” “!!” 지금 이 말은 나 또한 의외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엘뤼엔이 시벨리우스를 알지 못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 ‘엘’과 계약했다는 그 엘퀴네스는 누구라는 거지? 그러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엘뤼엔은 쯧쯧 혀를 차곤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제 알겠냐? 난 ‘엘’이란 녀석 처음부터 알지도 못했어. 대타니 뭐니 하는 건 전부 다 네 오해였다는 거다. 그리고 내 어디를 봐서 단순히 다른 녀석의 대타로 아들을 삼을 거라 생각한 거지?” “…아, 미안. 나는 그저 타이밍이 너무 절묘해서…” “타이밍이라니?” “그게 그렇잖아. 만나자 마자 날 아들로 삼겠다고 한 게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누군가의 대신이 아니라면 그렇게 빨리 결정 내릴 리가 없다고…” “미련하긴.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던 말은 말짱 기억에서 지워버린 거냐? 난 원래 속에서 내린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빠른 성격이야. 미네르바나 트로웰이 그런 것도 하나 안 가르쳐 주디?” “……” 순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그동안 나 혼자 열심히 땅 파고, 우울의 구덩이에 빠져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 이렇게 쪽팔릴 데가!!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격하게 소리쳤다. “거짓말 하지 마! ‘엘’이 기억나지 않는다니? 그럼 그 당시 나와 함께 다녔던 ‘엘’과, 그의 계약자였던 넌 대체 뭐란 말이야! 나 혼자 착각이라도 한 거라고?” “그거야 내 알바 아니지. 아무튼 난 네놈에게 감정이 많은 상태다. 그나마 너 역시 마신놈의 장난에 희생된 꼴이라 봐주는 줄 알아. 당장이라도 찢어죽이고 싶은걸 참고 있으니까.” “…장난?” 그러자 엘뤼엔은 대답대신 한쪽으로 척척 걸어가, 지금까지 멀뚱히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를 끌고 돌아왔다.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를 향해 어설픈 인사를 건네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는 이번에도 또다시 어설픈 웃음을 흘리며 엉뚱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냐하하~ 모두들 안녕? 참으로 나이스한 저녁이지? 우리 모두 신나게 포크댄스를…” “닥치고 제대로 소개 하지 못해?” “하핫! 안녕들 하신가! 이 몸은 그 이름도 유명한 마신 카노스라네! 초면은 아니지만 다들 만나서 반가워.” “…하아?” “큭- 쿨럭 쿨럭 쿨럭!!” 전혀 생각지 못했던 남자의 정체에 황당해 하는 우리와 달리, ‘마족’ 데르온은 심하게 사레가 들려 미친 듯이 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자신들의 신을 만나게 될 것이라 그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게다가 저렇게 가벼운 말투와 헤픈 웃음이라니! 그나마 어렴풋이 가지고 있던 마신에 대한 이미지가 산산이 조각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잠깐…초면이 아니라고? “언제 저희와 만난 적이 있다는 소리인가요?” “오! 똑똑한데? 그래, 만난 적이 있었지. 비록 지금 이 모습으로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이 모습이 아니라니…그럼 설마?” “딩~동~뎅~~ 마계 4대 공작의 하나인 루카르엠의 정체가 바로 나였답니다! 놀랍지~?” “네에?” “헉!!” 이 무슨 말도 안돼는 상황인가! 나를 비롯한 일행들은 모두 한순간 석화마법이라도 걸린 듯이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 뺀질뺀질 돌아다니면서 온갖 꿍꿍이를 감추고 다니던 수상한 마족이 마신이었다고? 그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너무 놀란 나머지 기침도 멈춰버린 데르온이었다. “맙소사! 지, 지금 루, 루카르엠이라고 하셨습니까? 당신이 정말 마도의 기사 루카라고요?” “그렇다니까. 아, 그리고 지금까지 쫓아다녔던 ‘엘’도 나였어. 그건 다들 몰랐지?” “에엑?” 속사포로 터지는 진실의 물결에 일행들의 얼굴은 전부 혼돈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엘이 마신이라고? 게다가 루카르엠도 마신이었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자 불쾌한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린 엘뤼엔이 퉁명스럽게 한 마디 중얼거렸다. “그 동안 이 녀석이 전부 장난 친 거야. 그래서 내가 이마의 문장을 보여주지 말라고 했었잖아. 호시탐탐 남들 등 처먹을 기회만 노리는 녀석이라,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무슨 짓을 벌일지 몰라서 신신당부 했던 건데…쯧.” “어이어이.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나는 그저 모처럼 잡은 네 약.점.을 활용해 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고. 게다가 장난이라곤 해도 ‘가벼운’ 정신적 스트레스와, 던전에 깔린 마법의 트릭을 좀 더 ‘강하게’ 바꾼 것 외에는 없잖아? 이래 뵈도 상당히 건전한 행동이었다고 자부하고 있는데.” “뿌득. 그걸 지금 말이라고 지껄이는 거냐?” “아하하. 그냥 그렇다는 소리였어. 그러고 보니 이렇게 오래 내려와 있어도 괜찮은 건가, 친구? 신계에 쌓인 서류가 진정 장난이 아닐 텐데?” “그것도 네놈이 원흉이잖아! 네놈이!” 아무래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던 듯, 엘뤼엔은 잔뜩 열 받은 얼굴로 마신의 멱살을 잡아 탈탈탈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여전히 천역덕스러운 얼굴로 생긋 미소 지었을 뿐이었지만. “에이~ 겨우 평소 처리양의 3배가 늘어난 가지고 뭘 그래? 난 엘뤼엔의 능력을 믿어. 그렇지, 친구?” “오호라, 그래? 그럼 그 3배 많은 서류를 네놈이 한번 직접 해보지 그래?” “자아~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그래. 내가 ‘엘’이었다는 말까지 했었지? 하하하! 그 외에 또 궁금한 것 있는 사람?” “……” 지금껏 엘뤼엔의 말을 저렇게 능청스럽게 받아넘기던 존재가 있었던가? 나는 새삼 놀라운 표정으로 마신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순간 털썩-하고 뭔가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덜덜 떨리는 시벨리우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당신이…엘…이었다고? 전부 장난? 그럼 엘은? 진짜 엘은 어디에 있어?”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어디에 있을까나?” “장난치지 마! 전부 다 내 착각이었다는 거야? 설마 엘이란 존재가 있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난 지금껏 환상을 보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처연하게 묻는 목소리에는 작은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지금 당장 목 놓아 울고 싶다는 기색이 역려한데도 애써서 참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마신은 생긋 미소지어보였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진 대답에 일행들은 또다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착각이었던 건 아니지. 난 네 기억을 토대로 ‘엘’의 모습을 흉내 낸 거거든. 진짜 ‘엘’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기억 또한 없었을 걸? 네가 알고 있는 ‘엘’은 과거에 분명히 존재했어. 다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두의 기억에서 그것이 사라졌을 뿐이야.” “사라졌다?” “그래. 하지만 넌 그동안 서클렛에 봉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았던 걸 거야. 한마디로 순순히 기억을 잃은 엘뤼엔이 바보라는 소리지. 하하하하핫!” “…이 자리에서 당장 소멸 시켜 줄까?” 아무래도 단단히 결심한 듯, 음산하게 중얼거린 엘뤼엔은 곧 공중에서 커다란 벼락덩어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파지지직! 오한이 들 정도로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자 마신은 대번에 정색을 하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여전히 농담이 안 통하는 군! 친구! 아하하~ 설마 바보라는 말을 정말로 믿었던 건 아니지?” “딴청 피우지 마! 네놈은 항상 그 능글거리는 태도가 문제야. 남의 아들놈을 죽일 뻔 하고서 웃음이 나와? 대체 정령왕의 정신력으로도 견딜 수 없는 환각마법이 뭐가 ‘조금 강한’마법이라는 거야!” 그러자 마신은 바로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것이 엘뤼엔으로선 전혀 용납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그런 섭섭한 오해를! 정말 조금 강했던 거 맞아. 단지 중간에 스트레스를 많이 줘서 그 정도의 환각도 견딜 수 없도록 마음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둔 것 뿐.” “그게 그 소리잖아! 이 썩을 놈아!” “자, 잠깐, 엘뤼엔! 환각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사나는 지금 어떻게 된 거야?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때서야 아직도 이사나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놀란 표정으로 엘뤼엔을 불렀다. 그러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신을 향해 집어 던지려던 불덩이를 소멸시키곤 내 앞으로 걸어왔다. “뭐가 어떻게 되었다고?” “아까부터 계속 헛소리만 하고 있어. 얼굴색도 창백하고 열도 있는데…” “흐음. 환각에 지독하게 걸린 모양이군. 충격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미친 것 같은데?” “엑? 그, 그럼 어떻게 해? 치료할 방법은 있는 거야?” 엘뤼엔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손으로 천천히 이사나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손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돌았다고 느낀 순간, 이사나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 안색이나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보니 아마 그대로 잠이 든 것 같았다. 이제 괜찮은 건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법에 걸렸던 순간의 기억을 지웠다. 지금은 잠든 것뿐이야.” “기억을 지우다니? 대체 뭐가 어떻게 되었던 건데?” “과거에서 기억하고 있던, 가장 끔찍했던 상황이 계속 재연되는 마법이랄까. 일찍 깨우지 않으면 대부분 이렇게 미쳐버리지. 이럴 땐 기억을 지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헉. 설마 아까 내가 꿨던 꿈도?” “비슷해. 너의 경우는 그나마 정신력이 버텨줘서 좋은 기억도 함께 공존했던 모양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래서 데리고 나오기가 더 힘들었어. 일말의 좋은 기억에 매달려 현실로 나올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내가 직접 데리러 간 거잖아. 그대로 더 있었다간 아마 꿈에 먹혀 영원히 잠들어 버렸을 거다.” 그때의 상황이 다시 생각났는지, 엘뤼엔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 모습에 찔끔한 내가 얼른 어깨를 움츠리자, 그는 곧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그리곤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다정한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세상에도 너를 사랑해 줬던 사람들이 있어서.” “아…”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현재의 친구들과 과거의 친구들을 비교하라는 뜻은 아니야. 나도 그렇고 트로웰도, 이프리트나 미네르바도 누군가의 대신으로 너를 대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 점에서 만큼은 절대 오해하지 말았으면 한다.” “미, 미안해, 엘뤼엔.” “됐다. 다 못난 아들을 둔 내 탓이지. 한 가지 더 명심해 둬. 앞으론 절대 나 외의 존재에게 ‘아버지’란 호칭 따위 사용하지 마라. 그거 상당히 기분 나쁘니까.” 꿈속에서의 일을 마음에 단단히 두고 있었던 듯,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리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몸을 일으키더니,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임을 비췄다. 좀 더 오랫동안 내려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신계에 쌓여가는 서류가 걱정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었다. “그럼 난 이만 가보마. 앞으론 무슨 일 생기면 반드시 나랑 먼저 의논하고.” “어, 벌써 가는 거야?” “신들은 지상에 내려와 있는 시간이 한계가 있다고 했잖아. 가서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더 이상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지. 지금도 네가 걱정 되서 억지로 시간을 낸 거니까.” “그럼 마신은?” “저놈은 예외야. 잠깐 조사할게 있어서 주신께 허락받고 이곳에 머무는 중이거든. 그래도 능력하나는 신계 최고에 속하는 놈이니까 데리고 다닐 때 쓸모는 많을 거다.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부려먹어.” “부려먹으라니…그럼 마신은 앞으로도 계속 우리랑 같이 있는 다는 소리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두 팔로 내 어깨를 단단히 짚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아무쪼록 놈의 수작에서 무사히 살아남길 바란다, 아들!” “엑?” “저놈을 대할 땐 그저 안 듣고, 안 말하고, 안 보는 게 최고다. 일일이 신경 쓰다간 제 명에 못사니까 무조건 무시해버려. 신이라고 대접해줄 필요도 없다. 받들어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아가는 녀석이니까.” “하하하…” 어째, 앞으로도 상당히 심란한 여행이 될 것 같지? 평소 좀처럼 볼 수 없는 불안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내게 당부의 말을 건네던 엘뤼엔은, 곧 이전에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천천히 빛으로 승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중간계에 있을 시간이 다 되어 신계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배웅을 끝마치고 돌아선 순간, 나는 나에게로 집중되는 일행들의 시선을 느끼고 움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특히, 알리사의 눈빛이 매우 번뜩이는 것이…아하하, 그러고 보니 녀석은 아직 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도 몰랐었지, 아마? 눈앞이 캄캄해 진다고 하면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말하는 것일 거다. 나는 흐르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진정 예비 된 고난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외전 벌써 1년 “글쎄. 나도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구나.” 오랜만에 찾아간 그 집에서, 태진은 뒤늦은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그의 앞에는 1년 사이에 잔뜩 초췌해진 얼굴에, 때늦은 후회와 연민을 가득 드리우고 있는 50대 후반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하지만 태진은 결코 동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탄식은 그 스스로 벌어들인 일이었으니까. 여기서 그를 동정하면, 그런 식으로 가버린 친구에 대한 어떠한 위로도 전달해 줄 수 없는 것이다. 태진은 테이블 밑에 가려진 손으로 주먹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뭐랄까. 그때의 우리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라도 쓰인 것 같이 굴었지. 지금 생각해 봐도 죽은 그 아이를 볼 면목이 없다.” “후회는 언제 해도 늦는 법이예요, 아저씨. 그런 말 이제 와서 듣고 싶지 않습니다.” “태진아….” “지훈이는 죽었고, 이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해요. 그 녀석이 죽는 그 순간부터, 저는 아저씨의 가족을 미워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죄송합니다.” “…….” 단호하리만치 냉정한 태진의 대답에 상대편 남자는 할 말을 잃었는지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차피 친구의 기일 때문에 잠시 들린 곳이고, 이 후로는 절대로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굴어도 상관없겠지. 태진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필사적이었어요, 언제나. 자신을 돌아봐주지 않는 가족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하지만 그때 아저씨는 전혀 받아주시지 않았죠. 결국 장례식에서 조차 슬퍼하시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무엇이 달라지겠어요?” “…….” “오늘은 지훈이가 가버린 지 1년 된 날이라서 들린 것 뿐 이예요. 마음 같아서는 이런 집, 단 한순간도 머물고 싶지 않아요. 죄송합니다. 이후로는 다시 뵐 일이 없을 겁니다. 안녕히 계세요.” “태…태진아!” 애처로운 부름이 들려왔지만 태진은 결코 뒤 돌아 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한 존재에 대한 유일한 마음의 보상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친구도 한번쯤은 이런 식으로 자신 쪽에서 먼저 가족을 외면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음 약한 녀석은 절대로 그의 핏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기랄. 저절로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휘이잉. 밖으로 나서니 4월 특유의 강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놓기 시작했다. 지훈이 죽은 날도 꼭 이런 바람이 불었었다. ‘벌써 1년인가….’ 태진은 새삼스럽게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생각했다. 바로 엊그제 친구의 장례를 치렀던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은 1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깨닫고 마는 것이다. 강 지훈. 어려운 상황에서도 절대 웃음을 잃은 일이 없던 그 녀석을, 이제 다시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가 버리다니. 치사한 자식.”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지훈은 몸에 그 흔한 멍 자국 하나 없는 말끔한 상태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멀쩡했는지, 태진은 처음 병원에서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랬다.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깨우려고 했는데, 눈을 감아버린 친구의 무거운 눈꺼플은 그 이후 다시 떠지는 일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죽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서 그 마지막의 얼굴이 가장 평온해보였으니 무슨 말을 더 필요로 하겠는가. “그래도 그렇지. 너무 일찍 가버렸잖아….” 겨우 17살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지훈은 아직 세상을 떠나가 버리기엔 이른 나이였던 것이다. 졸업하면 집을 독립해서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녀석이었다. 절대로 그렇게 죽어버릴 녀석이 아니었는데…. 다음 날 보자며 손을 흔들고 교실을 나가던 친구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일 아침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태진의 기억에 지훈이란 이름의 소년은 또래보다 약간 키가 작은 소심한 녀석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 편성된 반에서 만난 짝이었고, 늘 창백한 안색이라는 걸 제외하면 다른 애들과 별 다른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튀는 편에 속했다. 외모는 평범했지만 항상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인 탓에, 반에서 생기는 시끄러운 사건엔 항상 녀석이 속해 있기 일쑤였으니까. 그러나 그때까지도 태진은 지훈이 언제나 팔뚝이며 몸 여기저기에, 붕대나 밴드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만큼이나 운동을 좋아하던 녀석이었으니(실제로 잘 하지는 못했지만) 축구라도 하다가 다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 뒤 지훈과 같은 중학교를 나온 녀석에게서 그 상처가 가족들의 폭행으로 입은 것이라는 걸 알았을 때, 태진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을 느꼈다. 태어나면서부터 외면을 받았다고 했다. 갓 태어난 친 자식의 어디가 그렇게 미웠는지 몰라도 아직 눈도 못 뗀 아이를 외가의 할머니에게 맡겨놓았단다. 그러다 지훈이 1살 될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이어지는 건 모진 괴롭힘과 폭력이었다. 처음엔 밥을 제때에 안주거나 울거나 채근해도 안아주지 않는 것에서 그쳤다. 그러나 지훈이 말을 하기 시작하고 걸어 다닐 때가 되자, 그때부터는 본격적인 손찌검이 이어졌다고 했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경찰에 신고해도, 결국 친 부모란 이유로 아이는 다시 그들 손에 돌아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악순환 속에서 지훈은 살아남기 위해 웃는 법을 배웠다. 말이 조금만 없어도 반항하는 거냐며 꼬투리를 잡는 가족들에게 유일하게 잘 보이는 방법은 항상 웃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한창 사춘기 무렵인 중학교 때는 무수한 폭언과 폭력을 견디다 못해 반항도 몇 번 해보았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럴수록 더 큰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는 걸 깨달아 버린 것이다. 어떤 말, 어떤 행동을 해도 가족들의 반응은 싸늘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그가 집을 떠나지 않았던 건, 그런 모진 가족이라 해도 자신의 친 혈육이라는 그 사소한 사실 하나 때문이었다. 피가 이어졌다는 이유 하나로 지훈은 가족에 대한 미련을 끊지 못했던 것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것이 더욱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차마 말릴 수가 없던 것은, 녀석의 하나 남은 희망을 자신의 입으로 걷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네 가족은 절대로 널 돌아보지 않아, 이제 그만 현실을 봐!’ 지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면서도 집착한 것이다. 졸업하면 독립하겠다고 한 말은, 어쩌면 이제까지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가족에 대한 미련을, 그때서야 완전히 끊어버릴 결심을 굳혔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결국, 끝까지 그 미련을 접지 못하고 가버리고 말았지만…. 태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훈에게는 오히려 그 편이 행복했을 지도 모른다. 마음 약한 녀석이 자신의 가족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질투 나서 몇 번이나 ‘차라리 내가 네 가족이 되 줄까?’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자신은 그저 순수한 호의로 형제처럼 지내자는 뜻이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옆에 있던 반 여자애들이 묘한 미소를 짓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다 추억일 뿐이다. 울었던 시간만큼이나 지훈에 대한 기억 역시 하나둘씩 사라지겠지. 태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햇살만큼은 강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1년 전 오늘, 지훈 역시 이런 하늘을 보면서 눈을 감았을까? 그래서 그렇게 미련 없이 떠나버렸던 걸까? “난… 환생 같은 거 믿지 않아. 아니, 믿지 않을 거야.”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태진이 문득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서는 1년 전 이날에도 흘렀던 눈물이 다시 흐르고 있었다. “왠지 알아, 강지훈? 환생하면, 언제 어디서 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야. 나, 너 오래 기다리는 거 싫거든.” 사람이 죽은 후의 세계가 천국 과 지옥, 두 가지로만 나뉘어 있다면, 적어도 죽고 난 이후 그의 친구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는 거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거처를 알지 못해 가슴 아파 하는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그는 환생을 믿지 않았다. 다시 태어난 그의 영혼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지훈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이제까지 이어온 자신과의 인연은 단순한 전생으로만 치부될 것 같아 싫었다. 그러나 만약, 그의 바램과 달리 정말로 환생이란 게 존재한다면 부디… “다음 세상에서는 너를 위해주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그리하여…보답 받지 못하는 애정으로 가슴 아파 하는 일이 없기를…. *** “으아악! 그러니까 일부로 그런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거짓말! 트로웰이랑 만난 적 없다고 했었잖아, 날 속였어!” “그, 그러니까…시벨이 말했던 ‘트로웰’과는 만난 적이 없다는 것이었는데…아하하. 그, 그러니까 고의가 아니었어.” 두 눈을 시퍼렇게 뜬 채 나를 향해 이를 부득부득 가는 알리사를 보며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난감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여자애에게 내 정체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줄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간, 금방이라도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며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네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 내 실수였어. 앞으론 다시는 거짓말 하지 않을게. 한번만 더 믿어주지 않을래?” “쳇, 그럼 뭐야. 이사나씨가 사실은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는 소리잖아. 바로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봤다니 바보 같아. 왜 지금껏 눈치 채지 못했지?” “하하. 그러니까, 다 내 탓이라니까 그러네. 한 번 신분을 감추고 나니까 적당히 밝혀야 할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뿐이야. 계속 숨기고 있을 생각은 아니었어.” “정말이지?” “그래, 정말이야.” 그제 서야 좀 진정이 되었는지, 알리사는 토라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더 이상 씩씩거리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남모르게 한숨 돌리는 내게 킥킥 웃은 마신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어~ 고생이 많군. 엘뤼엔의 아들! 여자애 달래기 힘들지?” “하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처음부터 솔직히 정체를 밝힐 걸 그랬어요. 변명이라는 게 생각보다 상당히 힘들군요.” “그래도 씩씩하니 좋은걸? 밝고 긍정적인 아이야. 그러니 환각에 빠져서도 미치지 않고 쉽게 빠져나왔던 거겠지. 아무튼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어때?” “에?”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신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검고 반짝이는 눈동자가 장난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아쉽지 않아? 꿈속에서 만났던 친구들…네 전생에서 소중했던 인간들 아니었어?” “아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항상 힘들고 외로울 때마다 다가와서 장난쳐 주고, 어울려주고, 위로해 줬던 유일한 존재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살고 있는 차원이 달라도 그들을 의지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건 여전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꿈에서까지 등장시켜 위로받으려고 했던 걸 보면.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죠. 결국 꿈은 꿈일 뿐이니까요. 엘뤼엔의 말마따나…그들 사이에서 난 이미 죽은 존재이니까. 그래도 오랜만에 본건데 아무리 꿈이라도 작별 인사정도는 할 걸 그랬나 봐요. 그냥 바로 깨어나지 말아볼걸.” “큭큭. 그랬다간 엘뤼엔의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갔을걸? 그때 만약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쳤다면, 넌 정말 깨어나지 못했을 거야. 그건 네 친구들도 진정으로 바라는 일이 아닐 거다.” “…그건 그렇네요. 누구보다 내가 잘 되길 바래주던 녀석이었으니까.” 새삼스럽게 떠오르는 친구와의 추억에 나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하지만 과거는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 나는 이제부터 앞을 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 내 주위엔 그때보다 더욱 더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한, 절대 불행해지지 않으리라. ‘행복해라, 강지훈.’ 문득 스쳐지나가는 바람을 타고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울고 싶어질 만큼 그리운 느낌이었다. ====================================== 진행되는 음모 “그, 그러니까 당신이 루카르엠…아니, 엘…아니, 그러니까…마신이시라고요?” 뒤늦게 잠에서 깨어난 이사나를 가장 놀라게 한 일은 역시 마신의 정체에 관한 것이었다. 마법에 걸렸던 순간부터의 기억이 아무것도 없던 탓에, 엘뤼엔이 다녀갔다는 말에도 상당한 쇼크를 받은 듯 했다. 그러자 마신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생기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하하하! 어떠냐!! 이 몸의 위대한 변신술이! 마족과 인간을 오가는 이 한계 없는 능력이 두렵지? 응? 그런 거지?” “카노스시여! 지금 그런 말을 하실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참다못한 데르온은 벌개진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신들이 모시는 신이 부리는 추태(?)를 차마 더 이상 봐줄 수가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대체 왜 지금까지 숨기고 계셨던 겁니까? 마신이시면서 한낱 마족의 흉내를 내고 계시다니요! 이제껏 아무것도 모른 채 무례를 범한 저는 대체…” “아아, 신경 쓰지 마. 그냥 심심해서 가끔 유희를 즐긴 거였으니까. 마계는 규율이 너무 엄격해서 탈이야. 다들 다른 차원으로 나가서 사고를 치니, 정작 마신으로서 내가 할 일이 현저히 줄어들잖아? 이 몸도 웬만하면 조금 바빠 보고 싶었다고.” “그런 말도 안돼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아!” 데르온은 단번에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말은 무조건 무시하라는 엘뤼엔의 충고가 옳았음인가? 나는 조용히 그들의 모습을 외면하며,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던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이사나, 기분은 어때? 이제 좀 괜찮아?” “응. 멀쩡해.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루카르엠은 그렇다 쳐도…‘엘’까지 마신이라니 왠지 믿을 수가 없어서…” “하하, 그냥 마신이 조금 심한 장난을 친 것뿐이야. 우리가 바보같이 전혀 눈치를 못 챈 것뿐이지.” “그렇긴 한데…시벨님 괜찮을까? 굉장히 충격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는 옆 구석에 혼자 앉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신에게 ‘엘’에 대한 기억이 모두 사라져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녀석은 계속 저 자세로 좀처럼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나마 ‘엘’의 존재가 완전히 허상이 아니라는 소리에 한 가닥 남은 희망을 걸고 있는 것 같았지만,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을 어디에서 무슨 수로 찾을지 막막해 할 것이 뻔했다. ‘정말 어쩔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짧게 어깨를 으쓱한 나는 곧 그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흠칫 하고 놀라며 어깨를 움찔하는 걸 보면, 그동안 나에게 심하게 굴었던 일에 대해 자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꾸욱 눌러 참은 나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여행…앞으로 계속 같이 다니자.” “…어?” “어차피 당장 갈 곳도 없잖아? ‘엘’은 계속 찾으러 다닐 거지? 이왕 여행하는 거 우리랑 같이 다니는 게 더 마음도 편하잖아.” “그렇지만…나 너한테 못된 말만 했는데…이름도 바꾸게 하고…다른 사람의 대타라느니…” “나한테 했던 말 때문에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괜찮아. 생각해보니까 이전엔 그보다 더 심한 말도 많이 들었더라고. 그리고…엘뤼엔이 나한테 대타가 아니라고 직접 말했으니까 상관없어. ‘사실이 아닌’이야기를 듣고 화내봤자 나만 손해잖아?” “!!”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준 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안해하고 슬퍼했던 일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아무렇지 않은 심정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단지 엘뤼엔의 ‘대타가 아니다’라는 한 마디에 시벨리우스가 했던 모든 말을 무시할 수 있게 되다니. 이래서 사람들은 주변에 꼭 한사람쯤 자기편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모양이다. 그러자 충격이라도 받은 듯 멍한 표정을 짓던 시벨리우스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에 맺힌 그렁그렁한 눈물이 왠지 분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결국…이번에도 난 엘퀴네스한테 졌구나. 다음번엔 반드시 이기겠다고 큰소리 떵떵 쳤었는데…바보 같아.” “시벨리우스?” “쳇,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거야. 누가 ‘아버지’따위한테 밀려날 줄 알고? 지금 실수한 만큼, 앞으로 더욱 잘 할 테니까…나 미워하지 말아줘, 엘. 부탁이야.” 그렇게 말하며 뚝뚝 눈물을 떨구는 그의 모습에 나는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지훈’에서 다시 ‘엘’로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히 감지덕지란 느낌이랄까. 뭐, 그 안에 담겨진 말의 의미는 앞으로 충분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지만 말이다. 설마하니 시벨리우스…아직도 나를 ‘엘’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건가? ‘으음. 하긴, 진짜 ‘엘’이 나타났을 때도, 내가 ‘엘’이라는 느낌이 들었었다니 무리는 아니지. 게다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람이니 아주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나저나 그럼 대체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정말 나한테 전생이 하나 더 있었다는 소리인가?’ 이거 언제 한번 다시 아레히스를 찾아가, 명계를 뒤엎든지 해야 될 것 같다. 도대체가 궁금해서 살 수가 있나! 그런 내 생각이 얼굴이 드러났던 걸까? 마신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하하! 결국 너도 어쩔 수가 없구나. 의외로 얌전한 성격이긴 해도 타고난 본성은 숨길수가 없다는 건가. 아서라, 아서. 그렇지 않아도 명계는 지금 발칵 뒤집혀서 정신없는 상황일 걸? 너까지 갔다간 당장 아레히스가 자살하려고 할 거야. 뭐, 상당히 재밌는 구경이긴 할 테지만.” “에? 명계에 무슨 일이 있어요? 발칵 뒤집혔다뇨?” “가면서 천천히 설명해 줄 테니 재촉하지 마. 어차피 알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될 테니. 지금은 일단 가보도록 할까?” “어딜요?” “어디긴. 이 던전의 최하층이지. 이곳에 있는 검을 가지러 왔던 거 아니었어?” “앗!” 마신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너무 정신없는 일만 일어나는 바람에, 정작 던전에 들어온 이유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민망한 표정으로 얼굴을 붉히는 우리를 본 마신은 킥킥 웃으면서 검이 있는 장소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벌컥 열린 문 아래로 하염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밟는 그의 얼굴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진지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계의 구조에 대해서 아나, 엘퀴네스?” “아…그다지요. 마왕과 4대 공작밖에는 별로 아는 게 없어요.” “쿡. 그것만 알면 충분해. 사실 그들 빼곤 마족이란 것들은 별 거 아니거든. 그저 머릿속에 전투밖에 없는 외곬수의 종족이지. 그럼 마왕과 4대 공작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지 알아? 아니, 그것보단 마족이 어떤 식으로 탄생하는지 아느냐고 묻는 게 정확하겠군.” “카, 카노스시여?” 뜬금없이 등장하는 마족에 대한 이야기가 이상했는지, 데르온은 불안한 표정으로 마신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빙긋 미소 지었을 뿐이었다. “나는 일정한 시기가 되면 내가 가진 마력의 일부를 풀어 마계 전체를 감싼다. 그 기운이 한자리에 모여 생명의 숲에 흡수되면 각기 일정한 마력을 담은 알로 변화하지. 마족은 바로 그 안에서 탄생하는 거야. 너도 정령을 만들어 봤으니, 어떤 느낌인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지?” “으음. 대충은요.” “그거면 돼. 알에 담긴 마력은 각기 다르지. 한마디로 왕이 될 자가 탄생하는 건 순전히 운이라는 소리야. 지금 왕이 아무리 강해도 다음 알에서 태어난 마족이 더 강할 수도 있고, 몇 백 년이 지나도 자신보다 강한 알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래서 마왕은 항상 새로 태어나는 알들을 경계한다. 그렇지 데르온?” “큭- 아, 알고 계셨습니까.” 명랑하게 묻는 마신과 달리 대답하는 데르온의 표정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설마 마계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러자 마신은 다시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너를 탓하고자 물은 게 아니었다. 역대의 마왕들이 자신보다 강한 알이 태어날 것을 두려워해 미리 파괴한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말이야. 덕분에 나만 부리나케 알을 다시 만드느라 상.당.히.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뭐, 그거야 호전적인 마족들의 성향상 어쩔 수 없었다 치자 이거야.” “…?” “그런데 가끔씩 왕 중에선 건방진 생각을 품는 놈들이 나온단 말씀이야? 바로 옆에서 주시하고 있었으면서도 일찍 눈치 채지 못한 나도 문제가 있긴 했지만…참으로 썩을 놈들이지.” “헉-” 순간 웃음을 머금은 마신의 검은 눈동자에서 강렬한 살기가 불타올랐다. 언젠가 엘뤼엔이 존재감을 드러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에,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한순간 숨을 들이켰다. 기운도 기운이었지만, 설마 그 뺀질뺀질 웃으며 농담만 건네던 마신이 이런 분위기를 풍길 거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정말 한순간 이었을 뿐, 마신은 곧바로 다시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무튼 결론은 이번 마왕 놈이 새로 태어날 알들을 죄다 싸그리~ 몽~~땅~ 부셔버렸다는 거야. 제기랄. 이번엔 좀 더 정성을 담아서 만든 최고의 걸작들뿐이었는데! 그런 내 노력을 깡그리 무시해도 유분수지! 내 그 노무 자슥을 콱 그냥!” “으음.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번엔 마족이 하나도 탄생하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실은 말이야. 내가 색깔이 너무 예뻐서 따로 꿍쳐둔 게 하나 있었거든. 나 잘했지?” “쿨럭!” 이, 이것도 반전이라면 반전일까? 일행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꿍쳐둘게 따로 있지 새로 태어날 생명을 담은 알을 빼돌리다니! 저거(?) 진짜 마신 맞아? 그러나 더 기가 막힌 건 다음으로 이어지는 설명이었다. “근데 막상 데리고 와보니까 말이야. 놔둘 만한 장소가 없더라고. 마계의 루카르엠이 사는 집에 뒀다간 쟌한테 걸려서 무지하게 쪼일게 분명하고. 그렇다고 신계의 내 신전에 갖다 두자니, 이놈이 태어나서 활보하고 다닐 것이 두렵고. 그래서 마침 근처에 있던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곤 거기에 갖다 두었지.” “적당한…장소?” “응! 이프리트가 만든 검이 봉인된 던전이라나 뭐라나, 마침 인간들에게는 발견되지 않을 때라 내가 먼저 들어가서 알을 갖다 두고 트릭들을 조금 손 봤어. 중간에 다른 인간이 들어와서 알을 가져가면 곤란하잖아? 하하하하” 나와 일행들은 모두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이 되어 소리쳤다. “뭐라고요?! 그럼 여기잖아!!” “오오! 그러고 보니 그렇군!” “뭐가 그러고 보니 그렇군이에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으면서! 저기, 설마 우리들에게 그 알을 떠넘길 생각은?” “그럴 생각이었는데.” “…….” 여기서 무슨 말을 더하랴. 창백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우리를 보며 마신은 미안하다는 듯이 히죽 웃어보였다. 그래봤자 끌어 오르는 살심에 불을 붙인 계기 밖에 되진 않았지만. 그러나 다음순간 이어진 진지한 목소리에 우리는 또 다시 멍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마족을 이끌 미래의 왕이다. 잘 부탁할게.” “!!” “태어난 알 중에서 가장 강한 기운을 품고 있는 녀석이었다. 단번에 차기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하지만 지금 마왕은 야심이 강하거든. 그대로 놔두면 태어나기도 전에 반드시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예상대로 다른 알들은 모두 파괴됐기도 하고. 아무튼 건진 건 그것 하나뿐이야. 새로 만들어도 상관없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지금의 마왕놈을 밀어내고 싶거든.” “그게 무슨…?” 혼란스러운 우리들의 표정에 마신은 그저 장난스럽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그는 그 상태로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 “시간이 없다니요?” 굳어있던 일행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이사나였다. 그러나 마신은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오히려 우리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다. “내가 왜 이곳에 와 있는 건지 궁금하겠지?” “아…뭔가를 조사할 게 있다고…” “맞아. 주신의 명령을 받고, 10년 전부터 일어난 아크아돈의 불온한 기운을 조사하고 있었지. 원래 귀찮은 일은 안 맡는 주의지만, 여긴 나한테도 개인적인 추억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선뜻 응 한거야.” “불온한 기운? 10년 전이라면…가뭄이 일어난 일을 말하는 건가요?” 그런 거라면 나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니 따로 조사를 벌일 필요는 없었을 텐데?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마신은 냉큼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아까보다 더욱 진지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가뭄이라기보다는…요 근래 사이에 죽은 어린아이들의 숫자 때문이었어.” “숫자?” “그래. 현재까지 정확히 9천 9백 11명. 이제 89명 남은 건가? 우리가 예상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말이야. 이게 바로 명계가 발칵 뒤집혀 버린 이유지.” “맙소사! 그게 정말 입니까?” 마신의 말에 경악한 표정을 지은 건 데르온과 시벨리우스, 단 둘 뿐이었다. 단지 죽은 아이가 많다는 것 때문에 놀란 것 같지는 않아,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89명이라니요?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가요?” “당연하지요! 모르시겠습니까, 엘퀴네스님? 아, 악신이 탄생할지도 모릅니다!” “악신?” “그렇습니다. 그는 주신께 도전할 수 있는 가장 큰 악의 세력을 가진 신이에요. 어린아이 만 명의 피를 마시고 탄생하는 존재라고요.” “네에?” 그러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계단을 다 내려와 눈앞에 문 하나만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려온 건진 모르겠지만, 대강 살펴본 느낌만으로도 꽤나 지하 깊은 곳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일행들은 모두 마신의 말에 놀라느라 차마 문 안으로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긴장된 표정으로 다음으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무 아이나 죽인다고 되는 건 아니야. 반드시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처녀여야 하고, 흠 없이 깨끗해야 하지. 미색이 고우면 고울수록 효과가 좋아. 그런 아이들이 단 몇 년 안에 만 명 가까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건 반드시 악신의 탄생을 의미해.” “그, 그런 게 지금 이곳에서 탄생하고 있다고요?” “반드시 이곳에서 탄생한다는 보장은 없지. 차원의 이동이 편리한 누군가가 여기의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희생시키는 수법도 있으니까. 마침 이곳은 그동안 가뭄기간이라, 아이들을 죽이고 위장시키는 게 편했을 거야. 그 덕분에 명계에서도 지금껏 눈치 채지 못했던 거고.” 시벨리우스나 데르온은 물론, 지금껏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나와 이사나들도 놀라 떡 하니 입이 벌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정령왕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나요? 만약 악신이 탄생한다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글쎄. 아마 대부분의 신계가 장악되고 많은 신과 사람들이 죽겠지. 아직 이 일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어. 괜시리 소동을 크게 만들었다가 결전의 순간에 범인이 모습을 감춰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거든. 그러니 다른 정령왕들은 모르고 있을 거야. 아, 트로웰이라면 뭔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그럼 아직 누가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 진 알아내지 못한 건가요? 계속 조사 중인 상황?” “심증이 가는 녀석들은 충분히 있지. 너도 알고 있을 걸? 요 근래 누군가가 마신을 향해 제사를 지낸다는 명목으로 인간을 잡아들인단 소문 듣지 못했어?” “!!” 순간 나와 이사나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분명 얼마 전 라피스로부터 이와 비슷한 상황에 대해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알리사 역시 그런 이유로 납치당할 뻔 하지 않았던가! ‘설마 유카르테 대공이?!!’ 그러자 마신은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 그럼 우리 모두 다같이 공동의 적을 무찌르러 가 볼까?” “자, 잠깐만요! 그럼 대공이 정말로 악신이 될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가요?” “글쎄? 본인이 아니더라도 실질적인 배후임에는 틀림없어. 실제로 9천 명이 넘는 아이들 중 대부분이 녀석의 손에서 죽었으니까. 이제 슬슬 우리가 눈치 챘다는 걸 알았을 테니, 다른 방법을 궁리하고 있을 걸?” “큭- 그, 그렇다면 그의 계약자인 마왕도 이번 일에서 피해갈 수 없겠군요. 그래서 새로운 마왕을 준비하려 하신 겁니까?” 침통하게 묻는 데르온의 말에 마신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미소 지어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것임을 모르는 이는 우리 중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데르온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를 진작 처분하지 않으셨던 겁니까? 이미 루카르엠이란 이름으로 저희들의 곁에 계셨다면, 그가 야심이 강한 존재임을 눈치 채고 계셨을 텐데, 어째서?!” 그러자 마신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미운 짓만 골라하는 녀석이라도 기회를 주고 싶은 게 부모마음이지. 나도 그것과 비슷한 심정인 게 아닐까? 그리고 안 됀 일이지만 아직 그가 확실하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바로 그걸 찾기 위해 내가 이곳에 내려와 있는 거니까. 아무리 마신이라도…증거도 없이 한 세계의 왕을 처단하기는 어려운 일이거든. 어쩌면 그 역시 또 다른 존재의 배후에 불과할 지도 모르고.”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동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점점 우리의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자~ 그럼 이제 그만 던전의 최하층을 개봉해 볼까나? 다들 너무 오래 기다렸지?” 잠시의 침묵 후, 어깨를 으쓱한 마신은 그때까지 누구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던전 최하층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끼이익- 녹슨 쇠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한눈에 봐도 육중해 보이는 철문이 큰 어려움 없이 양 편으로 벌려졌다. 처음 방 안으로 들어선 우리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마치 제단처럼 보이는 돌단과 그 위에 박혀진 커다란 길이의 장검하나였다. 그 안에는 붉은 실크로 감싸진 황금색의 알이 놓여 있었다. 설마 저게 마족의 알인가? 호기심을 가득 담은 일행들의 시선이 제단으로 향하는 순간, 무게감을 가득 담은 육중한 목소리가 넓은 공간 안에 낮은 울림을 담고 퍼지기 시작했다. <<던전의 최하층까지 무사히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용사의 일행들이여…. 내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위대하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의 산물인, 봉인된 이그니스가 담긴 정령검입니다. 나를 취하는 자- 이 세상의 모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검안에 봉인되어 있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아직 어린 소년의 미성과 흡사했지만 분위기가 정중해서인지 훨씬 어른스러운 느낌이었다. 그런데 말투가 어째…좀 오버스러운 것 같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름대로 신다운 얼굴을 하고 있던 마신이 갑자기 요란스런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 문 앞에서 보았던 애절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그리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크하하하하!! 세상의 모든 힘이래! 지 까짓게 세상의 모든 힘을 얻게 해준대에~~아이고 배야! 아이고오~~” <<이익! 또 카노스님이예요? 젠장! 대체 이런 대화가 어울리는 용사님들은 언제 오는 거야아~>> “푸훗.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 이 던전의 트릭은 한낮 모험가들이 뚫을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게 다 카노스님 때문이잖아요! 이프리트님이 처음 저를 이곳에 두셨을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그렇게 침범하기 어려운 성역 따위가 아니었다고요! 에잇! 이런 알 따위~ 알 따위이~~전부 태워버릴 거야~~>> “헤에. 한 번 해봐. 그거 태어날 때 다 되서 절대 안 태워질걸? 태우려면 진작 태웠어야지. 크하하하” <<이익! 마신님 미워! 나빠! 진짜 사악해! 다시는 안 놀아~ 우에엥! 이프리트니임!! 저 좀 이곳에서 꺼내줘요오~~!>> “……” 대체 이게 어떻게 되가는 상황일까. 나름대로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만남이었던 만큼, 첫 판부터 와장창 깨지는 이미지에 나와 이사나는 차례대로 이마를 짚고 말았다. 우리는 이제까지…겨우 ‘저딴 걸’ 가져가기 위해 그 온갖 고난을 겪었단 말인가? 그 사이에도 마신과 이그니스의 말다툼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그니스는 마신의 발뒤꿈치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프리트님 오시면 다 이를 거예요! 카노스님이 날 얼마나 괴롭혔는지 전부 꼬치꼬치 말씀드릴 거라고요! 그때 가서 후회하지나 말아욧!>> “헤에. 그래봤자 내가 더 센데?” <<그, 그럴 리가 없어요! 이프리트님은 전 차원에서 가장 강하신 분이라고요! 카노스님은 바보야! 바보!바보!바보!!>> “그래? 그럼 나 한 3백년 후에 다시 돌아올게. 그 때 쯤이면 좀 똑똑해 질 것 같다. 그치? 그동안 혼자서 잘 있어~” <<꺄아아악! 제가 잘못했어요~~ 우어엉~ 가지 마세요, 카노스니이이임~~~>> 저럴 거면 대체 왜 처음부터 반항을 하는 건지. 끝없이 이어질것만 같던 두 존재의 대립(?)은 결국 스스로의 힘으론 절대 이 던전안을 떠날 수 없는 이그니스의 패배로 매듭을 짓고 말았다. 이런걸 두고 치사하다고 하지 아마? 나는 얼떨떨한 미소를 지으며 검 주제에(?) 패배의 충격으로 추욱 늘어져 있는 이그니스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안녕, 이그니스? 아니, 파이어 버스터였던가?” <<훌쩍…엥? 이, 이 목소리는?>> “어? 혹시 날 아는 거?” <<카노스님 말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그런 거죠?>> “아하하…그, 그렇긴 한데.” <<이 무슨! 이 무슨!! 이 무슨 감동의 도가니탕과도 같은 현상이!! 용사님? 혹시 용사님이세요? 드디어 저를 이 지옥에서 구출해 주려고 오셨군요! 아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자아! 첫 번째 임무를 드리죠!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사악한 마신을 무찔러주세요!>> “…….” 아마도 이 검은 목소리만 캐치할 뿐, 다른 점에 대해서는 영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좀처럼 진정하지 못하고 흥분에 들떠있는 이그니스의 모습에 나와 일행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난감한 표정이 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사나의 경우, 저런 걸(?) 들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는…일말의 회의가 섞인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느라 바빴다. 파이버 버스터가 진정한 것은 그 후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 잔뜩 흥분하기 바쁘던 이그니스가 그나마 정신을 차린 것은, 내가 엘퀴네스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스스로가 정령이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었는지, 자신들의 왕에게까지 빽빽거리는 성격은 아닌 모양이었다. <<히잉. 죄송해요. 제가 너무 흥분해서…설마 엘퀴네스님이시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아니, 됐어. 그나마 진정했다니 다행이다. 계속 그 상태였다면 좀 곤란할 뻔 했거든.” <<그런데 엘퀴네스님이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혹시 이프리트님과 싸우시고 열 받으셔서 저를 소멸하시러?>> “……” 혼자서 오랜 시간 갇혀 있었던 부작용인걸까? 상당히 심각한 망상증세를 보이는 검의 말에, 일행들은 또 다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재빠르게 흐르는 식은땀을 수습하곤 어설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게 아니라, 사실은 이프리트에게 널 데려가려고 왔어. 그가 내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너를 데려와 달라고 말했거든.”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돼요! 저는 용사님을 기다려야 하는 막강한 사명이 부여된 몸이란 말이어요!>> “저어, 그 용사님을 그냥 나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 <<어머머! 무슨 그런 섭한 말씀을! 왕과 용사는 엄연히 다르다고요! 왕은 왕이시고 용사는 용사죠! 어떻게 왕께서 용사가 될 수 있어요? 말도 안 되요!>> “크흠.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만 해달라는 건데….” <<글쎄 안 되는 건 안 된다니까요? 용사님은 용사님이어야 해요!>> 이 썩을…. 그냥 콱 두드려 패고 끌고 나와 버릴까? 순간 엎어놓고 두드려주고 싶은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집안 망신(?)을 일으킬 수 없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다. 그러나 그런 생각도 곧 이어지는 이그니스의 말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니… <<엘퀴네스님은 바보! 어째서 내 마음을 몰라주는 거예욧! 나는 용사가 좋단 말이야! 절 데려가려면 용사를 데려오세요! 용사를요!>> “크악! 용사 좋아하고 자빠졌네!! 내가 오라면 갈 것이지 어딜 그렇게 말이 많아! 너 지금 왕한테 반항하는 거야? 앙?!” <<헉! 너무해…나는 그저 용사가 좋았을 뿐인데…흑흑흑.>> 마치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너무해~를 연발하는 이그니스의 목소리에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두통이 도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이사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엘. 일단 저 검이 말하는 용사가 누굴 뜻하는 건지 물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 용사가 아니라면 뽑을 수 없는 검일 수도 있잖아.” “아니, 정령왕이 다룰 수 없는 정령은 없어. 저건 그냥 반항하는 거야. 뿌득.” “하하, 그러지 말고 일단 좀 달래봐. 어쩌면 이 던전이 처음 생겼을 때, 이프리트한테 뭔가 언질을 받았던 걸지도 모르잖아.” <<맞아! 바로 그거예요, 친절하신 분! 이프리트님이 저는 반드시 용사의 손에서 빛을 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 분을 실망시켜선 안 된다고요. 엘퀴네스님은 그런 것도 몰라주고…흑흑>> “으윽! 알았으니까 그만 울어! 그래서 네가 원하는 용사의 조건이란 게 뭔데?” <<음…그냥 시간도 없는데 방금 말씀하신 친절하신 분이 하시죠? 전 사실 인간이기만 하면 되거든요. 후훗>> “……” “……” 차라리 그냥 소멸 시켜 버릴까?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새삼 처음으로 진지하게 살인충동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사나는 그런 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이그니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저기…정말 나로도 돼? 여기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 마족도 있고…블루엘프도…” <<다 필요 없어요! 전 오직 인간이어야 해요, 인간! 인간이 이런 던전 밑바닥까지 오는 일이 어디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그거야 말로 진정한 용사의 조건! 잔말 말고 당장 뽑아요! 어서요!>> “아, 그럼 잘 부탁할게.” 짧게 인사를 건넨 이사나는 간단한 동작으로 이그니스의 검집을 잡고 들어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검안에서 시뻘건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의 몸을 순식간에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겠는가! 화르르륵!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라 나와 일행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으아악!” “이사나!!” <<아앗! 놓지 말아요! 이건 시험이란 말이에요, 시험! 나를 가질 자격이 되는지 시험을 하는 거니까 검집을 놓으면 불합격 판정을 받는 다고요!>> “이 썩을!! 그런 건 진작 말해야 할 것 아니야!!” 주인을 시험하는 검이라니! 그래서 내가 잡지 못하게 그토록 땡깡을 피웠던 건가! 불의 속성과 정반대인 내가 잡으면 시험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할 테니 말이다. “크…크으윽!!” ‘시험’이란 소리에 차마 검을 놓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이사나를 보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사나! 그냥 검을 놔! 차라리 억지로 끌고 가는 게 낫겠어. 그러다 죽는다고!” “나…난 …괘, 괜찮아…엘. 조금만 버티면…으윽!” “그러다 네가 먼저 죽는다니까?! 야! 이그니스! 그만 멈추지 못해?” “괜찮아, 엘!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내가 할 수 있도록 해줘.” “이사나?” 단단히 마음을 먹었는지, 이사나는 불길 속에서도 의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뜨거울 텐데도 애써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는 모습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던전에서 잠깐 헤어졌을 때 느낀 게 있었어. …그동안 엘한테 너무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말이야. 바보같이…이건 내 일이었는데…엘한테 모두 맡겨버리고…혼자서 편하게 있었던 것 같아.” “그, 그게 무슨 말이야? 친구니까 도와주는 건 당연한거잖아.” “그래…치, 친구니까 …친구니까 모든 걸 전부 의지해선 안 되는 거였어. 나도 이제…내가 자립할 수 있다는 걸 당당하게 보여주고 싶어. 그래서…대등한 조건으로 엘과 마주보고 싶어. 물론…가능하지는 않겠지만…그래도 노력은 해야 하잖아. 그렇지?” “!!” 그의 말에 나는 감전이라도 당한 것 마냥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대체 그동안 녀석의 무엇을 보아온 걸까? 지금까지 당연히 지켜주고 돌봐줄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사나는 어느새 이렇게 혼자 자립할 의사를 보이고 있었다. 마치 품안의 병아리가 스스로 날개를 펴고 공중을 향해 날아가듯이. 이제 더 이상 그는 나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 참. 그럼 그렇다고 하면 될 것이지, 꼭 저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고집을 피워야 하나?’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녀석이 알아서 할 거란 생각에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이사나의 몸을 태우던 불길이 마치 폭풍처럼 사납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퍼어어어엉! “으아아악!!!” “이사나!” 털썩. 더 이상은 버틸 힘이 없었는지 이사나는 검을 부둥켜안은 상태에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몸을 감싸던 붉은 불덩어리가 새하얀 은빛의 광채를 띄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빛은 점점 범위를 넓혀가며 이사나의 주위를 마치 후광처럼 채워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불덩이는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 남은 것은 황금색으로 빛나는 검신과 주변을 밝히는 눈부신 은빛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마치 공명이라도 하는 듯이 떨리는 검의 울음소리에 사방은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이사나를 감싸던 은색의 빛도 점차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부 끝난 건가? 그렇게 느낀 순간, 이사나의 몸이 천천히 옆으로 기울이더니 곧 풀썩 바닥으로 쓰러졌다. 고통의 충격으로 기절해 버린 것이다. “이사나!!” <<아이 참! 용사님도! 합격 하신 다음에 쓰러지심 어떻게 해요? 이제부턴 당당하게 검을 치켜들고 합격한 걸 만 천하에 알리셔야 하잖아요! 그게 제일 명장면 이었는데! 흑…너무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냐! 이 썩을 놈아!!” 다행히 이사나는 정신만 잃었을 뿐, 불에 의한 화상이나 다친 상처는 없어보였다. ‘시험’이라더니, 처음부터 극한 고통만을 전달해 주었던 모양이다. 그럼 녀석의 몸을 감쌌던 불길은 다 화려해 보이기 위한 쇼였다는 말인가? <<그래요! 쇼였어요! 흑! 저도 좀 멋지게 보이고 싶었다고요. 원래 선택받은 검을 잡을 땐 이렇게 화려한 피날레가 필요하단 말이에요! 엘퀴네스님은 그런 것도 모르고! 바보 바보!>> “…너 말이야…” 이런 걸 두고 소멸시키지 못해 한이 되는 상황이라고 하는 걸까? 이 한편의 희극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마신은 키득거리며 내 어깨를 연신 두드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어깨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쿡쿡쿡. 어쨌든 데리고 나갈 수 있으면 됐지, 뭘 그래? 그냥 왕인 네가 참아. 킥킥킥” “웃을 기분 아니에요. 젠장, 정령왕의 권위가!!” “크흠. 그냥 너무 오래 땅에 박혀있어서 저놈이 좀 미쳤구나 해. 원래 불의 정령들은 그놈들 왕을 닮아서 다 성깔이 저모양이거든. 나도 참 많이 열 받았었지. 훗.” “카노스님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에? 내가 말 안했나? 나도 한때 엘퀴네스였잖아~몰랐어?” “……” 생글생글 웃으며 ‘선배님이라고 불러봐’라고 말하는 마신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간절할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지는 기분이었다. ***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엘이 기절한 이사나를 보살피는 사이, 시벨리우스는 한 구석에 서 있던 마신 카노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카노스는 마치 그럴 것이라고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피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해보라는 뜻이었다. “정령이었던 존재가 한순간이라도 인간의 육체를 입을 수 있나?” “킥- 결국 결론은 현재의 엘퀴네스가 ‘엘’이다 로군?” “질문에나 대답해! 그런 게 가능하냐고 묻고 있잖아.” “흐음. 글쎄. 불가능 하지 않을까, 보통? 정령이 아무리 실질적인 형체가 없는 존재라고 해도, 인간이 될 수는 없는 거거든.” “그럼…엘퀴네스가 그때의 ‘엘’이 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뜻이야?” 기대하고 물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엘’이란 존재는 허공 속으로 흩어지는 듯싶었다. 마치 환상 속을 헤매고 나온듯한 기분에 얼굴을 찌푸리는 시벨리우스에게, 카노스는 빙긋 웃으며 되물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번에도 지금의 엘을 외면할 생각?” “그런 거 아니야.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 바보짓은 안 해. 이젠 엘이 그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그냥…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야.” “헤에. 그걸 내가 알고 있을 거란 보장은 어디서 나왔는데?” “하지만 넌 신이잖아? 신이면 뭔가 좀 특별한 구석이 있어야지! 남들처럼 다 모르면 그게 어떻게 신이야?” “으음. 그건 그렇군. 생각보다 똑똑한 녀석일세.” “지금 나 놀리는 거냐?” 여전히 능청스럽기만 한 카노스의 태도에 시벨리우스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러자 그는 얼른 정색을 하며 냉큼 수수께끼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 “…무슨?” “단순히 주변 사람만이 아닌, 문서의 기록에서도 ‘엘’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어.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가 이사나로 알려진걸 보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 그렇다면 답은 하나. 그는 처음부터 그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사람이었다는 뜻이야.” “존재해서는 안 된다니?” “흔히 말해 시간을 역행하는 자들이라고 하지. 본래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고, 어떤 사건에 의해 거꾸로 돌아간 거야. 그리고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다시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가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세상이 혼란스러워 지잖아? 그래서 차원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 사람을 애초에 ‘없었던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는 소리야.” “…그거…지금의 엘퀴네스가 과거로 갔다는 소리? 하지만 아까 인간이 될 수 없다고…” “글쎄, 그건 일반적인 ‘보통’의 개념이고. 시간을 역행하는 자들에게는 상관없지 않을까나? 어차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없던 일’이 돼 버리는데 아무렴 어때? 인간이든 엘프든.” “!!” 그제서야 머릿속이 밝아지는 기분에 시벨리우스는 환하게 웃었다. 결국, 그가 바라본 것은 처음부터 한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엘’에게 알려줄 거냐? 지금 그 말?” “아니.” “왜? 본인이란 걸 알았으니 이제 마음껏 달라붙어도 상관없잖아?” “싫어. 기다릴 거야. 그가 날 기억하게 될 때까지. 그동안 엘을 괴롭혔던 나에게 내리는 벌이야.”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사나를 간호하고 있는 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를 기억하지 못한 엘에게 내리는 벌이기도 하고.” *** “그게 무슨 말입니까? 숫자를 단기간에 앞당기는 방법이 있다니요!” 콰앙! 신계에서는 현재 각 상급신들이 한자리에 모여 비상 회의를 구축하고 있었다. 얼마 전 명계에서 보고 되었던, 악신의 탄생 조짐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자는 의도였다. 벌써 희생자의 숫자가 9천 9백 명을 넘어선 만큼, 이제 악신의 탄생은 거의 시간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들을 더욱 경악케 한 것은, 그렇지 않아도 얼마 남지 않은 희생자의 숫자를 단번에 줄이는 방법이 있다는 한 신의 발언이었다. “전례에 의하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아이 하나가 평범한 아이 10사람의 몫을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귀한 운명의 별을 지닐수록 그 효과는 더욱 큽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돼는 말입니까! 그럼 이제 겨우 80명 남짓한 상황에서, 단 8명의 목숨으로 악신이 탄생될 수도 있다는 소리가 아니오!” “진정하십시오. 그렇게 특별한 아이들이 흔할 리가 없습니다. 설령 그 방법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은 그들을 찾기 위한 시간이 걸릴 겁니다. 당분간은 별을 점치는 자들의 능력을 봉하고, 예언하는 자들의 입을 막는 것으로도 대비책을 세울 수 있겠지요.” “그럼 무얼 합니까! 여전히 주모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은 것을! 마신에게선 아직도 소식이 없는 겝니까?” “그게 아무래도 마계의 인물과도 관계가 있어, 조사를 착수하는데 더욱 어려움이 있는 듯 합니다. 제사가 벌어지는 장소와, 그 피가 유통되는 과정이 철저하게 가려져 있습니다. 그들도 지금쯤이면 우리들이 눈치 챈 것을 알 테니, 더욱 행동이 조심스러워지겠지요.” 마지막 여신의 말에 회의장에 모인 신들은 모두 불안한 표정으로 술렁거렸다. 결국 그들은 악신의 탄생을 막는 것보다, 탄생한 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의논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았다. “끄응. 정녕 사전에 저지할 방법은 없단 말이오? 게다가 소멸시킬 방법이라니. 대체 누가 주신의 권능에 맞먹는 존재를 상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어려운 일입니다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온힘을 다해 막는다면, 악신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움직임을 봉할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그의 소멸에 필요한 조건입니다만…” “조건이라니?” “악신이 탄생하기 위해 어린아이 만 명의 피가 필요하듯, 소멸시키기 위해서도 특별한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조건이란…” 거기까지 말한 남신은 목이 탄 듯,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다음순간, 회의장은 소름끼치도록 고요한 정적으로 물들었다. “상급신 하나의 목숨입니다.” ============================= 6권의 끝입니다. 새벽에 정신없이 쓴데다, 수정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래저래 정신없는 글이군요.(털썩) 엉망진창이라 너무 죄송합니다.ㅠㅠ 오타와 내용오류 지적 환영합니다. 읽고 꼭 감상 남겨주세요.. 부디 재미있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폭참은 여기까지 입니다. 후후후후 > ※ 연재분 삭제는 책이 나온 날 하겠습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7-1. 제왕의 라이벌 (1) 기절한 이사나를 편하게 눕힌 후, 나는 카노스의 손짓에 이끌려 지금까지 파이어 버스터-이그니스가 꼽혀있던 제단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는 자줏빛 비단으로 곱게 싸여진, 타조 알 만한 크기의 황금색 물체가 사뿐히 놓여있는 상태였다. 이게 바로 카노스가 말하던 ‘마족의 알’이라는 건가? 생각보다 고운 색깔에 감탄한 표정을 짓자 마신은 싱글벙글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예쁘지? 내가 이제껏 많은 알들을 봐왔는데 말이야, 이것만큼 색깔이 고운 게 없었다니까? 순금이라고 해도 믿어버릴 정도야. 어떤 녀석이 탄생하려는지 정말 기대돼.” “헤에… 굉장히 작네요. 부화는 언제 하는 거예요?” “음~ 아마 한 달 정도 더 있어야 할 걸? 너는 그다지 머리 아프게 신경 쓸 것 없어. 조~기 있는 마족한테 전부 맡겨버리고 가끔씩 대부노릇만 해주면 돼.” “엥?” “헉…” 그의 말에 옆에서 덩달아 감탄하고 있던 데르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숨을 멈추었다. 잠시 후 그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카노스를 바라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설마…‘엘’로 나타나셨을 때 저를 살려두신 이유가?” “당근 아이 맡길 마땅한 녀석이 너밖에 없어서 그랬지~ 세르피스는 너무 야심이 강하고, 쟌은 주책바가지고. 적당히 진중하고 멋진 사람은 루카밖에 없는데 말이야. 그건 나라서 안 되잖아? 냐하하하하~” “큭…그런 걸 두고 자화자찬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런 말에 찔끔할 정도였다면, 그는 이미 마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깔끔하게 데르온의 말을 무시한 카노스는 곧 내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의 말을 내뱉었다. “애가 워낙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녀석이지만 이해해 줘라. 어릴 때부터 피 튀기는 혈전만 벌이더니 성격이 좀 많이 삐딱하거덩. 머릿속에 어떻게 하면 마왕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놈이라 감시가 좀 필요할거야. 암튼 마족들이란…쯧쯧쯧.” “다,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 놓으신 거잖습니까!” “내가 뭘?” “마족들이 싸움을 좋아하는 건, 전부 마신께서 태초에 마족의 본성을 그렇게 설정하셨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모른 척 하실 생각이십니까?” “쳇. 누가 그렇게 순순히 자라래나…재미없는 놈들.” “커헉!!” 충격이 너무 컸던 걸까? 뻔뻔한 카노스의 대답에 할 말을 잃은 데르온은 더 이상 항변할 기운도 없는지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그 모습을 심히 안타깝게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자, 카노스는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이 나를 붙들고 하소연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떻게 시키는 대로 얌전히 따를 수가 있어? 내가 저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조금쯤은 설정한 것과 다른 면모를 보여야 만든 보람(?)이란 게 생길 거 아니야. 내가 엘퀴네스였을때 만들었던 정령들은 저렇지 않았다고.” “아하하…그, 그런가요?” “그래! 오죽하면 내가 루카라는 가상 마족까지 연기하며 녀석들을 얌전히 시키려고 노력했겠냐고. 이곳저곳에서 마족들 때문에 신들의 항의가 끊이질 않으니 도무지 살수가 있어야지, 원.” “음…그럼 루카는 이번일 때문에 의도적으로 만든 캐릭터가 아니라는?” “그렇지. 내가 말 안했던가? 루카는 마계 내에서 마왕의 독재를 감시하려고 만든 녀석이야. 자신보다 더 강한 녀석이 언제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 그만큼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지 않겠어?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싸움에 관여하거나, 왕위다툼에 끼어들지는 않았지만.” 진지한 카노스의 대답에 나는 다시금 루카의 모습을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뭔가 뒤 꿍꿍이가 있는듯한 그의 표정을 봤다면, 제 아무리 마왕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독단적인 행동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 식이라도 남모르게 마족들을 조절해왔다는 사실에 감탄하며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데 저는 왜 쫓아오셨던 건데요?” “마왕이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마침 이번 사건의 조사 때문에 마계를 떠나있을 변명거리가 필요했는데 잘 되었다 싶었지. 그리고 ‘엘퀴네스’에게 따로 부탁할 일도 있었고.” “부탁할 일?” “응. 내가 전에 루카였을 때 했던 말 기억 안나? ‘위대한 어둠의 군주’와 만나게 될 것 같다고 했잖아. 마족에게 ‘어둠의 군주’란 바로 마왕을 뜻하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알’을 말하는 거였어. 안 그래도 적당히 맡길 녀석을 찾고 있었는데, 네가 바론 던전으로 간다니 이게 웬 떡인가 싶었지. 하지만 네가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상당히 의외였어. 그래서 장난 좀 쳐볼까 했던 게 생각보다 좀 과했던 모양이야, 냐하하하~” 어쩐지, 이제껏 별달리 수상한 낌새가 없었던 루카가 내 이마에 새겨진 문장을 본 이후 갑자기 사라진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그때 시벨리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은 건 그의 기억을 읽기 위해서였나? 나는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야말로 마신의 손에서 완벽하게 놀아난 꼴이 아닌가. “…아버지의 친구라서 그냥 넘어가는 줄 아시라구요.” “호오~ 그거 영광인 걸? 걱정 마 걱정 마. 이제 장난 안 칠 테니까. 나도 엘뤼엔이 정말 화나면 무섭거든. 너 쓰러진 직후 시퍼렇게 변한 얼굴로 나타나는데 어찌나 살벌하던지…그렇게 화난 녀석은 본 적이 없다니까? 그 자리에서 바로 마신 생(生) 종 치는 줄 알았어. 킥킥.” 그게 지금 웃으면서 할 말입니까?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리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마디로 단숨에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나한테는 편하게 말하네?” “네? 뭐를요?” “그 ‘아버지’라는 단어 말이야.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신한테는 ‘엘뤼엔’이라고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가? 그 녀석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서운해 할걸.” “윽…그건…” “아아 뭐, 어색하기도 하겠지. 정령왕에게 양부(養父)가 있다는 것도 어찌 보면 상당히 우습기도 하고 말이야. 역대로 자존심 강하지 않은 엘퀴네스가 없었으니, 너 역시 마찬가지겠지? 뭣하면 내가 엘뤼엔더러 그만두라고 할까?” “그만두라뇨?”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순간 곧바로 후회했다. 장난끼가 가득 드러난 카노스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내가 가장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말을 내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내 불안한 표정을 본 카노스는 두 손을 허리에 짚은 채 경망스럽게 웃어대기 시작했다. “캬캬캬! 정말 놀리는 보람이 있는 녀석일세! 이러면 엘뤼엔더러 ‘아빠 놀이’그만두라거나, 순진한 정령왕 갖고 놀지 말라는 말을 할 수가 없잖아~” “윽! 그랬단 봐요. 미래의 마왕이고 뭐고 저 딴 알 당장 깨트려버릴 테니까!” “헉! 정말루? 이야~ 그렇게 안 봤는데 말이지, 누가 엘퀴네스 아니랄까봐 상당히 살벌한 걸. 너무 엘뤼엔을 못 믿는 거 아니야? 혹시나 그 입에서 또 다른 진실이 나올까봐 두려운 건가? 이를테면 모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진 ‘엘’에 관해서라든지…” 아무래도 이 마신은 내 속을 뒤집어 놓기로 작정을 지은 모양이다. 나는 똑바로 그를 노려보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누구처럼 심심풀이로 장난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한번 엘뤼엔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의심할 생각은 없어요. 단지 어느 정도 무의식으로는 ‘엘’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인정하는 것뿐이라고요.” “흐음. 하지만 그거 알아? 너 역시 엘뤼엔을 다른 사람의 대타로 보고 있다는 사실 말이야.” “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노스는 어린 꼬맹이를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건 지구에서 겪었던 ‘아버지’에게 실망했기 때문이겠지? 두 번 다시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지금의 엘뤼엔 또한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게 만드는 거야. 결국 녀석에게서 과거의 아버지를 투영하는 것과 뭐가 다르겠어? 단지 그게 ‘그리움’이 아닌 ‘두려움’이라는 것의 차이지.” “…!…” “엘뤼엔과 그가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걸 인식하기 전까진, 앞으로도 본인 앞에서 아버지란 말이 쉽게 나오지 못할걸? ‘아버지’라고 하면 무조건 ‘무섭다’와 ‘두렵다’의 감정밖에 없을 테니까. 이것 또한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니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야. 결국…” “결국?” “둘 다 쌤쌤이라는 소리지! 냐하하하하! 이 착각쟁이들~ 어떠냐! 이 위대하신 몸의 결론이!” “…쿨럭.” 천성인지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 마신은 진지하게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이 특기인 모양이다. 모처럼 중대한 걸 깨달은 기분이 산산이 부서지는 걸 느끼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아직까진 아버지란 이름이 그렇게 친근한 느낌이 들진 않거든요. 게다가 엘뤼엔은 외모 자체가 나랑 별반 차이가 나지 않기도 하고.” “캬캬. 그건 그래. 인간나이로 이제 갓 20살 넘어 보이는 놈한테 아버지라고 부르기는 좀 그렇지? 뭐, 아무튼 그냥 그렇다는 거였어. 네가 아무렇지 않게 ‘아버지의 친구’어쩌고 하니까 기분이 굉장히 신선해서 해본 말이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으음? 신들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리 신선하다기는…”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넌 상상할 수 있어? ‘그’ 엘뤼엔이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 말이야. 난 그 녀석은 영원히 혼자 살 거라 생각했거든. 나만이 아니라 신계에 있는 대부분의 신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을 걸?” “아하하…” 이미 ‘이프리트’라는 예비 아내까지 있는뎁쇼? 하지만 나는 녀석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했다. 또 다시 마신의 장난에 희생될 비운의 존재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카노스의 관심은 다시금 눈앞에 있던 마족의 알로 돌아섰다. 그는 자주색 비단에 감싸진 상태 그대로 알을 집어 올리더니, 냉큼 내게 건네며 입을 열었다. “어려운 일은 데르온 녀석이 할 테니까 키우는데 지장은 없을 거야. 그냥 태어난 아이가 왕의 자리를 무사히 계승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기만 하면 돼.” “헤에. 이렇게 작은데 어느 세월에 그만큼 자랄까요? 말이나 걸음마 같은 것도 다 가르쳐야 하는 거예요?” “아니, 아니, 그게 그렇게 보여도 태어나면 아마 인간 아기만 할 거야. 일주일 단위로 부쩍부쩍 자라서 금방 소년기가 될 테니까 따로 가르칠 것도 없어. 다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마족은 능력의 컨트롤이 부족해서 많이 약하기 때문에 주변 세력으로부터 보호가 필요해. 아마 무의식적으로 발산한 마력을 느끼고 주변에서 마족들이 공격해 오는 일도 있을 거야. 이놈들이 워낙 호전적이라 자기보다 잘난 녀석은 잘라버리려는 놈이 많거든. 귀찮겠지만 잘 부탁할게.” “아, 그럴게요. 그런데 우리와는 함께 동행 하지 않는 건가요?” 내 질문에 카노스는 명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조사할 게 많거든. 틈나는 데로 들려보긴 하겠지만 함께 동행 하는 것은 무리일 듯싶어. 아참, 데르온~! 다른 녀석들에게는 내가 루카라는 거 비밀이다?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쿨럭…처음부터 말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캬캬! 이래서 내가 너를 이뻐한다니까? 암, 암, 자고로 입이 무거워야 오래 살아남는 법이지. 이왕이면 그 서툰 전투욕이나 권력 욕심도 접어버리는 편이 좋을 거다, 미련한 아이야. 곧 다가올 피의 폭풍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면.” “……” 몸이 절로 움츠려 들만큼 살벌한 말이었으나 데르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두 눈동자가, 한시라도 빨리 그런 상황이 다가오기를 바라고 있는 듯이 보였다. 단순히 싸움이 좋다는 이유하나로 죽음을 불사하는 무모한 용기를 낼 수 있다니, 새삼 카노스가 한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대부분이 그가 자초한 일이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때 마침 뒤편에서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돌아섰다. <<용사님! 정신이 드세요? 얼렁 일어나 봐요! 아직 마지막 행사가 남았단 말이어요!>> “야! 작작 좀 해, 정말! 이제 막 의식을 차리는 환자에게 또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거야?” <<어머머? 제 3자는 빠져요. 이건 어디까지나 용사님과 저만의 문제라고요!>> “사람을 다 죽여 놓고선 뭐가 어쩌고 어째? 뭐, 이딴 검이 다 있어? 네가 정령이면 다야? 정령이면 다냐고!” <<그래욧! 정령이면 다예요! 됐어요? 이래봬도 저는 이프리트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받는 불의 상급 정령 이그니스라고요!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 여자와는 차원이 다르신 몸이에요!>> “하! 이거 왜 이러셔~! 나 역시 장차 땅의 정령왕을 소환하실 고귀한 몸이라고! 이게 어디서 사람을 차별하고 난리야?” 씩씩거리고 싸우는 두 사람(?)은 다름 아닌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와 알리사였다. 옥신각신하는 둘 사이에선 이제 막 정신을 차린 이사나가 멍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다분히 한심스러운 얼굴로 둘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얼른 다가가 비틀거리는 녀석의 몸을 부축했다. “괜찮냐?” “아…시벨님. 어떻게 된?” “검의 시험인지 뭔지에 합격 했어. 그리고 바로 기절했지. 기억 안나? 이제 저 검의 주인은 너다.” “아…” 해냈다는 감동 때문이었을까? 이사나는 한동안 입을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막무가내로 도전하긴 했어도 설마 정말 성공할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지,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한 순간이었을 뿐. 곧 이어지는 수다의 폭풍에 녀석의 얼굴은 점점 창백하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 오늘 부터 7권 연재 시작합니다~ 재미없고 지루해도 많이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요즘 날씨 추운데 감기 조심하시고~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7-2. 제왕의 라이벌 (2) <<꺄아아아악~~ 용사님!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자아! 이제 저를 들고 저 사악한 마신을 무찌르러 가는 거예요! 근데 옷이 너무 평범한 것 같아요. 갑옷이랑 투구도 쓰셔야죠! 망토도 입으셔야 해요! 그리고 이곳을 나가 일행들을 모읍시다! 원래 진정한 용사는 자신의 위용을 돋보이게 만들 몇몇 보조 인물들과 함께 해야 하는 거예요! 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꺄하하~ 그럴 줄 알았어요. 저는 모르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 이프리트님도 이곳에 저를 봉인하실 때, 저의 지식을 칭찬하시며 장차 찾아올 용사가 반드시 기뻐할 거라고 말씀하셨다니까요? 그래서 말이에요…>> “……” 제트기라도 달아놓은 듯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말에, 이사나는 물론 옆에 있던 우리들의 표정까지 덩달아 굳어졌다. 설마 지난 몇 백 년 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이 자리에서 모두 다 몰아서 할 셈인가? 더 이상 두고 봐선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엄한 표정으로 경고했다. “그쯤 해 둬, 이그니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냥 던전에 두고 나가 버린다?” <<헉! 너, 너무 하세요~ 엘퀴네스님은 저의 로망을 너무 몰라주시는 군요~흑흑.>> “로망은 무슨 얼어 죽을. 수다쟁이 검을 들고 악을 평정하는 용사 같은 건 별로 멋지지 않다고. 아마 싸우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지쳐 쓰러질걸? 아~ 그것도 좋겠네. 주인을 쓰러트리는 ‘마검’ 파이어 버스터는 어때? 이프리트가 참 기특하게 생각하겠다. 그치?” <<마, 마검이라니! 싫어요! 싫어요옷~~!그런 사악한 호칭 따위~ 저하곤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우에엥~ 엘퀴네스님 너무해~~>> “그.러.니.까. 그런 말 듣기 싫으면 얌전히 입을 다물란 말이야. 난 내 계약자가 마검의 주인이 되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훌쩍…아, 알았어요. 응? 그런데 방금 하신 말이 무슨 뜻이에요? 용사님이 엘퀴네스님의 계약자라니요?>> 검에 갇혀 있는 영향 탓인가? 이그니스는 정령으로서 기본적으로 느껴야할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맨 처음 나도 몰라볼 정도였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러자 옆에 있던 알리사가 나를 대신하여 대답했다. “여기 있는 이사나군이 바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뜻이야. 정령 주제에 그런 것도 몰라?” <<에엑? 하지만 용사님은 인간이잖아요! 이제껏 엘퀴네스님은 인간에게 소환되신 적이 없었는데?>> “전례는 깨라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 역시 가까운 시일 내에 트로웰의 계약자가 될 몸이라고, 에헴.” <<흥, 희망사항이겠죠. 정령왕의 계약자가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그런 의미에서 역시 이사나님은 용사의 조건에 걸맞으시는 분!! 그건 그렇고…아이 참~ 검속에 있으니 감각이 너무 둔해져서 탈이에요. 그런 중대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응? 그럼 검에서 꺼내줄까? 검 자체가 명검이니, 굳이 네가 들어가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아니, 들어가 있지 않는 편이 오히려 이사나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인 듯 모두 동조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그니스는 그 점에 관해서만큼은 확고한 의사표시를 해 보였다. <<그건 싫어요. 제 꿈은 위대한 용사님의 명검이 되는 거라고요. 이프리트님도 반드시 그렇게 될 거라고 하셨고요. 블래스터보다 훨씬 더 위대한 정령검으로 이름을 떨칠 거예요.>> “블래스터? 그건 또 뭐야?” <<어라? 모르세요? 바람의 상급 정령 ‘진’이 봉인된 검이잖아요. 미네르바님이 만드신 거라고 들었어요. 한 번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것 때문에 이프리트님이 얼마나 자존심 상해하셨다고요.>> 결국 이프리트는 단순한 승부욕 때문에 저 약에 쓸래도 없는(?) 정령검을 만들었다는 소리였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서도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겠지. 그래서 던전안에 봉인시켜 둔 것이 틀림없다. 아니면 자신의 검은 미네르바의 것보다 더 위대하다는 신비감을 조성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어린 녀석이라니까. 나보다 나이만 많으면 뭐해? 하는 짓은 딱 유치원생 수준인데. 미네르바는 왜 그런 검 같은걸 만들어서 녀석이 똑같이 따라하게 만들었담. 설마 블래스터인지 뭔지도 저런 성격인거 아니야?’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상황에 나는 질린 표정으로 이그니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제까지 뒤에서 방관만 하고 있던 카노스가 생글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래보여도 실전에선 쓸 만 할 거야. 불의 정령의 공격력은 4대 정령 중 최고거든. 게다가 이사나가 물의 정령을 다루니 잘못해서 화재 낼 일도 없고. 킥킥.” “으음. 두 정령이 반대되는 속성인데 괜찮을까요? 혹시 서로의 힘을 억누르는 작용을 하게 된다거나…” “그러진 않을 걸? 그냥 일반적인 소환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이그니스는 검에 봉인된 상태잖아. 그럴 경우 순전히 검의 공격력만 강화시킬 뿐, 정령으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긴 힘들지. 그냥 불 뿜는 검이 하나 생겼다고 보면 될 거야. 단지 말이 좀 많다는 단점이 있을 뿐이지.” “…흐음. 뭐, 어차피 이프리트한테 가져다 줄 것이었느니, 쓸모의 여부는 돌아가는 길에 판단해도 늦지 않겠죠. 정 아니다 싶으면 이프리트한테 알아서 처분하라고 떠넘기면 되니까요. 그동안 애꿎은 이사나만 피곤하게 된 셈이군요. 괜찮을까나.” “괜찮을 걸? 일행들에게 ‘마검’취급 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부터 알아서 얌전히 굴겠지. 자기는 죽어도 성검이라고 우기는 녀석이니까.”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후부터 이그니스는 나름대로 진정된 모습을 보였다. 한번 터지면 말을 멈추지 못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호들갑스럽게 떠들어서 사람들의 정신을 빼놓거나 억지를 부리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일행은 크게 만족하며 검의 합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우리가 던전을 빠져나간 것은 그로부터 잠시 후의 일이었다. *** “자아~ 그럼 이제 그만 나가볼까? 칙칙한 지하 속에 오래 있자니 온몸이 쑤시는 것 같은데.” 그렇게 말을 마친 카노스는 나를 바라보며 의견을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여정의 목적이 무엇이건, 일행들의 리더를 은연중에 나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 또한 이곳에 오래 있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 안고 있던 알을 가리켰다. “그런데 이건 어떻게 하죠? 들고 다니다 떨어트릴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마족의 알은 부화 직전이 되면 겉껍질이 오리하르콘 방패보다 단단해지거든. 어지간한 외부충격에는 깨지는 일이 없을 거야. 만약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금이 간다면, 그건 안에서 아기가 나오려 한다는 뜻이니까 주의해줘.” “그렇군요. 그런데 마족의 아기는 뭘 먹고 자라요? 인간처럼 우유를 먹여야 하나요?” “아니, 마족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돼. 대신 어른 마족이 일정한 시간에 마력을 부어줘야 하지. 그래서 데르온이 필요한 거야. 하루 3번씩 마력을 주는지 잘 감시해라.” 으음. 이것으로 데르온은 완벽한 ‘유모’당첨인 셈인가? 새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데르온은 이미 포기했다는 듯이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모습을 보관대,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알에서 태어날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마신이 직접 그에게 임명한 일이 아니던가. ‘설마 나도 그렇게 되는 건 아니겠지?’ 문득 떠오르는 불길한 상상에 나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어쩌면 나는 감당할 수 없는 화근을 떠맡은 걸지도 모른다. 태어날 아이가 마신의 성격을 닮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내가 불안해하든 말든, 카노스는 상큼하게 웃으며 일행을 던전 밖으로 이동시켰을 뿐이었다. 파아앗- 붉은색의 빛이 터졌다고 느낀 순간, 우리는 어느새 던전의 입구에 서 있었다. 처음엔 어안이 벙벙한 표정만 하고 있던 일행들은, 지하와는 다른 더운 공기와 강렬한 햇살을 보며 그때서야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어림잡아도 이틀가까이 지하에만 있었던 탓인지, 화창하게 내리쬐는 햇살이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특히, 지난 몇 백 년 동안을 땅속에 갇혀있던 이그니스의 반응이 가장 폭발적이었다. <<아아! 어쩐지 후끈한 이 온도! 살랑이는 모래바람!! 드디어 밖에 나온 거군요! 지난 시간동안 이 순간만을 고대하고 있었어요. 이게 얼마만의 햇빛이던가! 아아아~ 이프리트님! 기뻐해 주세요! 드디어 제가 해내고 말았어요! 저를 그 어두운 감옥에서 끌어내줄 용사님을 찾았다고요!>> 이때만큼은 누구도 떠드는 녀석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감동을 마음껏 느끼게 내버려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일행은 곧 이어지는 카노스의 말에 단숨에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냐하하~ 어때? ‘일주일’ 만에 햇빛을 본 소감이? 이그니스만큼은 아니어도 굉장히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에? 일주일?” “응. 몰랐어? 환상마법에 걸린 이후로 꼬박 일주일 지났잖아. 그동안 너희들 아사(餓死) 시키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노력했다고. 나 착하쥐?” “……” 그건 전부 당신 탓이잖아! 일행들은 차마 그렇게 쏘아붙이지 못하고 부들거리는 표정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리 항의해봤자 상대가 저래서야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주일이나 후작과 연락이 끊긴 셈이 되 버린 이사나는 낭패한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어떡하지…형님이 굉장히 걱정하고 계시겠는 걸?” “어쩔 수 없지. 지하에선 통신구가 작동하지 않았다고 변명하거나, 고장 났었다고 할 수밖에. 일단 라피스가 알아서 잘 둘러대고 있을 테니 큰 소란은 없을 거야.” “음…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괜찮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부턴 어떻게 하지? 시벨이야 처음부터 우리일행이었고, 데르온은 알 때문에 우리랑 함께 간다고 해도…알리사,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다시 사막에 들어가긴 그러니, 가까운 마을까지 데려다 줄까?” 내 물음에 알리사는 커다란 주황색 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사나는 무시하도록 하자.) 잠시 후 명랑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보다 질문이 있어. 전에 이사나씨는 다른 제국의 사람이라고 했었지? 카터스라고 했던가?” “아, 그, 그랬나?” “응, 그랬어. 그래서 가문을 밝히는 게 꺼려진다고 했었잖아. 이래봬도 나 역시 귀족인데 그곳에 가도 괜찮은 걸까? 상관없다면 나도 정령왕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며 표정을 살피는 알리사의 모습에, 나와 이사나는 순간 난감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내가 정령왕인 것을 숨겼던 일로 서운한 감정이 있는 상태에서, 사실은 이사나가 카터스의 제국민이 아닌, 솔트레테의 황제라는 말을 꺼내기가 애매했던 것이다. 그러나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는 과감히 그녀에게 모든 진상을 털어놓기로 결심했다. “음, 미안 알리사. 이제부터 우리와 여행을 함께 할 생각이라니 말해주는 건데, 일부러 그런 게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마. 사실은 우리가 너한테 한 가지 더 숨긴 사실이 있었어.” “에? 사제님이 엘퀴네스였다는 사실 말고 다른 뭐가 또 있는 거야?” “으응. 실은 이사나는 카터스의 제국민이 아니야. 혹시 솔트레테라는 제국을 아니?” “그거야 당연하지. 대륙에서 유일하게 마신을 국교신으로 인정하고 있는 나라잖아. 얼마 전에 어린 황제를 내쫓고 섭정왕인 숙부가 황권을 쥐었다고 해서, 알폰프 황실이 얼마나 시끄러웠다고.” “그래? 그렇다면 설명이 쉽겠구나. 이사나가 바로 그 제국의 황제야.” “아, 그런 거였어? 진작 말을 하지…가 아니라! 뭐, 뭐라고?!!” 아아, 역시 놀랄 수밖에 없나? 경악으로 물든 알리사의 얼굴을 보며 나와 서로 어색한 시선을 교환하던 이사나는, 결국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했는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사나 란느 솔트.’ 이게 내 본명이야. 처음부터 밝혔어야 했지만, 나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면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어. 이제 와서 이런 말 해봤자 변명밖에 되지 않겠지만.” “그, 그런? 솔트레테의 황제가 은발에 금안이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아아. 이건 폴리모프 마법으로 바꾼 거야. 쫓기는 입장이라 정체를 들키면 안 되었거든. 아마 우리와 함께 할 셈이라면, 알리사 너도 안전하다고 할 수는 없을 거야. 특히 지난번에 숙부가 너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맙소사…. 당신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야? 엘퀴네스의 계약자에 정령검의 주인, 게다가 이번엔 한 제국의 황제라고?” 알리사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정체를 숨겼다는 사실에 화내기 보다는, 갈수록 늘어나는 그의 능력(?)에 놀라고 있는 듯이 보였다. ======================================== 이번 파트에선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올 예정입니다. 항상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럼 저는 이제부터 리니지를 하러...<-퍽! [정령왕 엘퀴네스] 7-3. 제왕의 라이벌 (3) 그러고 보니 이사나는 정말로 용사의 조건에 합당한 녀석일지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크게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곧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운이 좋았던 거야. 이래저래 변명해도 나는 결국 자신의 자리 하나 지키지 못한 못난 녀석밖에 되지 않으니까.” “흐으음.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중요한건 현재라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이제 당신은 정령왕의 계약자잖아? 그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겠네. 설마 이곳에 온 이유도 그런 과정중의 하나인 거야?” “으응.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그러자 알리사의 두 눈이 놀라울 정도로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덥썩! 허락도 없이 외간남자(이사나)의 손을 잡은 그녀는 곧 흥분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도 갈래!” “에?” “나 원래 이런 모험 좋아해! 황제의 일행이라니 뭔가 상당히 근사하잖아?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일이었어! 나도 갈래. 응? 데리고 가주라!” “아하하…저기, 알리사. 이건 생각만큼 재미있는 일이 아닌데…” “나도 어렵다는 것쯤은 알아! 어차피 이런 일이 아니었어도 당신들 따라갈 생각이었으니까 그냥 동행하게 해 줘. 아니면 이렇게 연약한 소녀를 설마 혼자 내버려둘 셈이야? 이사나씨,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해!” “으윽…” 사랑에선 먼저 반한 사람이 죄인이라고 했던가. 결국 이사나는 붉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뭐, 굳이 알리사가 떼를 쓰지 않았더라도, 녀석으로서는 어떻게든 설득해서 데려갈 생각이었겠지만 말이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카노스는 흥미 있는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헤에~ 제왕의 별과 그의 반려인가. 천생연분이로구만.” “응?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노스?” “아~ 별 거 아니야. 인간들 중에선 가끔씩 별의 운명에 따라 정해진 반려가 생기는 경우도 있거든. 가까운 예를 들자면, 저 소녀는 누가 되었든 ‘제왕’이 될 자의 반려가 될 운명이야. 그리고 이사나군은 어떤 상황이 닥치든 ‘제왕’이 될 수밖에 없는 별을 타고났지. 그럼 문제! 이 둘이 만나면 뭐가 될까요?” “부부(夫婦)…인 겁니까.” “정답! 뭐, 순조롭게 이뤄진다는 보장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야.” 그건 또 무슨 소리?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카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사실 이번 시대의 제왕의 별은 두 개거든. 그러니까 저 소녀가 굳이 이사나군과 맺어진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겠어?” “헉? 그럼 삼각관계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건가요?” “충분히 가능하지. 아마 피 튀기는 전쟁이 시작될 지도 몰라. 냐하하하~ 왜, 여기 알폰프 제국과 카터스의 사이가 나빠진 것도 바로 그 반려 때문이었잖아.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일 걸? 흐흐” “맙소사…” 어째 이사나는 겪는 일마다 다 이렇게 순탄치가 못한 걸까? 나는 한손으로 머리를 짚으며 앞으로 다가올 녀석의 고난을 탄식했다. 이거 미리 알리사한테 뇌물이라도 바쳐야 하는 거 아니야?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나를 보며 카노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리곤 앞으로 잘 해보라는 듯 내 어깨를 툭툭 어깨를 두드리며, 모두를 향해 이제 그만 작별해야 할 시간임을 알렸다. “그럼 나는 이 길로 다시 루카로 변해 마계에나 가봐야겠다. 다들 다음 기회에 보자고.” “벌써 가시는 거예요?” “응. 시간을 너무 지체하면 곤란하거든. 근데 말이야, 작전 실패 했다고 마왕이 나 때리면 어쩌지? 아픈 건 싫은데, 냐하하하~” “…때린다고 맞으실 것도 아니잖습니까.” 마지막으로 중얼거린 사람은 데르온이었다. 가늘게 뜬 그의 눈동자가 ‘어디서 이런 사기를~!’이라고 외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카노스는 이번에도 그의 말을 가볍게 무시했다. “안 들려, 안 들려~ 아, 요즘 왜 이렇게 귀가 안 좋아졌는지 몰라.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마족씨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모르겠는 걸? 암튼 엘, 손 내놔봐.” “에? 손이요?” 왜 그런 건지 이유도 묻지 않고 무심코 손을 내민 벌 이었을까? 나는 다음순간 이어지는 카노스의 행동에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마치 이곳의 귀족남자들이 여자에게 하듯, 그가 허리를 굽혀 손등에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 이게 대체 뭔 짓입니까!! 순식간에 경직된 일행들을 보며 카노스는 특유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씨익 미소 지었다. “내 문장을 새겼으니까, 앞으로 연락할 일이 있을 때는 이곳에다 기운을 집중하면 될 거야. 한마디로 통신용 서비스~랄까.” “아, 그, 그런 거예요? 그런데 문장을 새기는 방법이…꼭 이런 식이어야 하나요? 전에 엘뤼엔은 그냥 손만 가져다 댔었는데. 혹시 신마다 다른 거예요?” “아니! 방법은 상관없어. 근데 어쩐지 너한테는 이런 식이 어울릴 것 같아서 말이지~ 냐하하하! 꼭 프로포즈 받은 공주가 된 것 같지 않아? 이런 거 은근히 기뻐하는 여자들 많던데.” “…전 남자입니다만.” “에이~ 뭘 그런 걸 신경 쓰고 그래. 어차피 정령은 무성인데. 나중에 신 될 때 여신을 선택하면 되잖아? 나도 원래 여성체였는데 남신이 된 거라고. 하하하하” “에엑?” “헉.” “…쿨럭.”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저 신이 한때 여성체였다고?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믿을 수 없어!’를 외치고 있는 일행들을 보며 카노스는 자랑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이것이 바로 정령계의 신비지. 어때? 뒤바뀐 성별체험! ‘당신도 할 수 있다’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아?” “아니, 사양하겠습니다. 전 이대로가 좋아요.” “흐~음. 잘 어울릴 텐데 아쉽네. 뭐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그럼 난 이제 가볼게. 다음에 볼 때까지 알 잘 부탁 한다~” 생글 웃는 표정을 마지막으로 카노스의 모습은 순식간에 공중에서 분해되었다. 시간을 두고 접근했던 만남과 달리 엄청나게 빠른 작별이었다. 그가 가고나자 일행들은 모두 힘 빠진 얼굴로 하나둘씩 자리에 주저앉았다. 왠지 엄청난 폭풍이 한바탕 주위를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좌절하는 데르온, 한숨 섞인 알리사의 목소리가 차례로 이어졌다. “마신에 대한 내 환상이…환상이…크흑!” “하아, 나 이제 어떤 신도 믿지 못할 것 같아. 무섭고 위압적인 존재인건 인정하지만…너무 태도가 가볍잖아. 그나저나 아까 ‘나도’라고 했었지? 그럼 마신도 한때 정령왕이었다는 소리야?” “아, 으응. 정령왕은 나중에 신이 될 수 있다고 들었어. 그런데 그건 왜?” “왜라니! 그럼 트로웰도 여신이 될지 모른다는 소리잖아! 안 돼! 절대 안 돼! 그건 무조건 반대라고! 내가 목숨을 걸고 말리고 말겠어!” 그러자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던 이그니스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흥! 어차피 그때까지 살아있지도 않을 거면서 무슨 수로 막는담? 아아, 이래서 인간의 여자들이란." “뭐얏! 너 지금 말 다했어?” "흐흥~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나본데, 트로웰님은 인간에게 관대한 편이긴 해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고요. 그렇게 혼자 열내봤자 불쌍해지는 것은 당신이 되지 않겠어요? 안 그래요, 용사님? 용사님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말해봐, 이사나씨! 이사나씨도 정말 그렇게 생각해?” “에? 아, 아니 그게…” 이사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손에 들고 있던 검과 알리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트로웰과의 관계 따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대답했다간 그녀의 미움을 살 테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적당히 거짓말로 둘러대며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엔 요령이 부족했던 것이다. ‘쯧쯧쯧. 그러고 있다가 나중에 다른 녀석에게 알리사를 뺏겨도 난 모른다, 이사나.’ 자립하고 싶다는 마음은 기특했지만, 아직은 여러 면에서 서툴기만 한 녀석이었다. 피식 웃은 나는 그를 대신해 이어지는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자자, 그만들 해. 이사나가 곤란해 하잖아.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수는 없으니 이제 슬슬 이동해야 하지 않겠어?” “하지만 이 쓸모없는 검이 날더러…” "뭐라고욧? 내가 어디가 어때서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당신보다야 훨씬 이용가치가 높단 말이에요! 아무 능력도 없는 인간주제에~!!" “흥! 이래봬도 나는 땅의 중급 정령사라고! 오히려 너보단 내가 더 도움이 될 걸?” "뭐가 어쩌고 어째요? 겨우 중급정령 가지고 잘난 척을!!" “그만! 이그니스! 용사의 검이 되고 싶다면, 그의 일행들을 무시하는 발언은 하지 말아야지. 자꾸 그런 식으로 말할 거면 차라리 검에서 나와! 차라리 정령으로서 담판을 짓는 게 낫겠다. 그리고 알리사, 너도 이제 그만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얼만데 자꾸 이렇게 싸우기만 하면 어떻게 해?” 엄한 내 표정에 이그니스는 입을 다물었고, 알리사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진정되자, 데르온의 감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호오, 엘퀴네스님. 애보기에 소질이 있으실 줄은 몰랐는데요? 과연 카노스님이 괜히 알을 맡긴 것이 아니었군요.” “에?” “마족의 아이들은 기가 세서 내심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입니다. 저야 어디까지고 ‘주군’을 보필하는 입장밖에 되지 못하니 육아라곤 해도 제대로 할 수 없거든요. ‘대부’이신 엘퀴네스님의 힘이 절실히 필요할 것 같군요.” “그거…지금 나한테 ‘애보기’를 떠넘기겠다는 소리?” “꼭 그렇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하, 그나저나…괜찮으시겠습니까? 서로 다른 신의 문장을 두 개나 가지게 되셨는데. 손등은 눈에도 잘 띄는 부위이기도 하니, 장갑 같은 것으로 가리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의 말에 나는 불길한 표정으로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하얀 둥근 테 안에 한 쌍의 새하얀 박쥐의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으음, 이건 설마… “…배트맨?” “네? 그게 뭡니까?”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예전에 봤던 어떤 문장과 비슷해서요. 하하하. 물론 이쪽의 날개가 좀 더 화려하고 멋있긴 하지만…으음. 확실히 눈에 띄네요. 역시 장갑을 구해야 할까나.” “그러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저와 함께 다니시니 마신의 사제라고 둘러대셔도 상관은 없으시겠지만, 그랬다간 엘뤼엔님이 가만히 두지 않으실 것 같네요.” “그, 그렇겠죠? 하하…” 아무튼 내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두 신들 때문에 이래저래 착용할 물건만 많아진 나날이었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뭔가 생각난 듯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아! 나한테 적당한 게 있어. 줄까?” “적당한 거?” “응. 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잠시 후 그가 보여 준 것은, 한쪽으로 된 옅은 하늘색의 비단 장갑이었다. 팔목 전체를 감싼 길이에 손등까지만 덮는 모양이었는데, 착용할 때의 감각이 전혀 없어서 행동하는데 불편함은 없을 것 같았다. “헤에, 좋다. 이런 건 어디에서 났어?” “아, 그러니까 예전에 여행할 때 구한 건데 그게 언제였더라?…으음. 아무튼 인어의 비늘로 만든 거야. 장신구용이라 처음부터 한 짝 밖에 없는 건데, 나한텐 안 어울려서 그냥 가지고만 다녔지. 비싸서 남 주기는 아까웠거든.” “그런데 이걸 나한테 줘도 돼?” “엘은 상관없어. 남이 아니잖아? 마침 문장이 새겨진 손과 맞는 쪽이라 다행이다. 푸른 머리랑 잘 어울려.” 흡족한 표정의 시벨을 보며 나 또한 고맙다는 뜻으로 미소 지었다. 그 순간 이사나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알리사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게 뭐지? 저거 사람 아니야?” ========================================== 흑흑흑.. 오늘 늦잠 자 버렸어요. 뒤늦게 부랴부랴 쓰느라 이제서야 글 올립니다. 리니지도 하러 가야하는데...<- 이번 편은 정신없이 써서 오타가 많을 지도;  나중에 수정하겠습니다! 지적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시고~ 추운 날씨 감기 조심하세요! 흐흐. 그럼 저는 이제 다시 리니지를 하러... [정령왕 엘퀴네스] 7-4. 제왕의 라이벌 (5) 엘 일행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주운(?) 그 시각, 라피스는 저택 홀에 놓여진 소파에 앉아 무료한 시선으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 이곳으로 합류한 이사나의 기사들과 용병단들은 앞으로 일어날 대전(大戰)에 대한 회의를 하느라 모두 자리를 떠나 있는 상태였고, 지금은 그 혼자 저택을 지키는 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에이프릴과 단 둘이었다. 이미 여동생의 고집을 말릴 수 없다고 판단한 후작이 알아서 그 두 사람을 붙여 두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라피스를 인정했다는 뜻은 아니다.) 남자라면 연인과 단 둘이 남은 상황을 즐거운 기분으로 만끽했겠지만, 지금의 라피스는 무언가 상당히 재미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한참이나 천장을 응시하던 그의 입에선 바쁘게 돌아가는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내뱉어지고 있었다. “심심해…….” 그랬다. 그는 심심했다. 언젠가 마나의 역행으로 피를 토한 이후, 대공에게 ‘허약하기만 할 뿐인 쓸모없는 마법사’로 인식 된 라피스는 생각보다 활약할 기회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스스로도 별 달리 도와주고 싶은 의욕도 없었기 때문에, 처음 에이프릴을 어느 패륜아로부터 지킨 이후론 늘 이렇듯 빈둥거리는 나날이 반복되어 왔던 것이다. 처음의 ‘유희니까’라는 심정으로 버티던 것도 잠시. 그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에이프릴에게서는 그가 이런 무료한 심정을 달래면서까지 참고 있을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말했다 시피 그녀는 단순한 유희 상대 외에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엘 옆에 붙어 있는 건데…” 연인을 상대로 한 여자의 독점욕은 무서울 정도로 강하다. 순결하고 착하기만 했던 에이프릴 역시 그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혹시나 그가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릴 새라, 그녀는 거의 감시하다시피 라피스의 옆에 달라붙어 다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그녀에게 책임질만한 어떤 행동을 했던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일 정도에 신경 쓸 사고방식의 소유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라피스로선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이번 일로 그가 깨달은 것은 고분고분하기만 한 상대는 의외로 재미없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이래서 다양한 경험을 해봐야 한다는 것일까? ‘하긴, 내가 언제 제대로 된 유희를 즐길 시간이 있었어야지. 틈만 나면 엘퀴네스를 소환하기 바빴고, 레어에서 지낸 대부분의 시간이 엘퀴네스를 강제로 제압하기 위한 마법 연구 뿐 이었으니까.’ 그토록 오랜 시간을 공들여 계약에 성공한 엘퀴네스를 쉽게 놔두고 돌아선 이유는 간단했다. 그 또한 보통의 드래곤처럼 정상적인(?) 유희를 한 번 즐겨보고 싶었던 것이다. 언제고 자신보다 5백 살 위의 배다른 형제가 거들먹거리면서 자랑하던 말을 그는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었다. <크하하하! 라피스 라즐리! 그렇게 잘난 척 하더니, 이제껏 유희하나 즐기지 않고 뭐했냐? 난 벌써 결혼만 5번에 애까지 줄줄이 20명은 봤다고! 이런 게 진정한 드래곤의 인생이 아니고 뭐겠어? 그깟 정령왕이 뭐라고 속성에도 맞지 않는 존재에 매달리는지. 네 꼴이 진정 한심해서 봐줄 길이 없구나! 넌 레드드래곤의 수치야, 임마! 내가 너와 같은 레드가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줄 모른다!> 물론 그 이후로 라피스가 그를 다시 볼 일은 없었다. 스스로도 위험했다고 느꼈는지 모습을 숨긴 채 나타나질 않았으니까. 라피스는 새삼 떠오르는 형제의 모습을 기억하며 다시금 이빨을 갈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이런 한심한 일에 끼어든 일은 전부 그 녀석 때문이었다. “뿌득…메세테리우스, 너 이 자식. 어디 만나기만 해봐. 당장 죽여 버릴 테다. 감히 내 앞에서 그 멍청한 입을 함부로 놀리다니.” 나이로 치차면 그는 어디까지나 동생이었지만, 드래곤의 세계에서 서열을 구분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힘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메세테리우스는 라피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 뿐만 아니라 그 또래의 모든 드래곤들이 그랬다. 그들로서는 오히려 그가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기 위해 레어에만 처박혀 지내던 게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아아~ 심심해~ 심심해에~~할 일도 더럽게 없네, 정말.” “어머, 라피스님. 그런 경박한 말씀을. 무료하시다면 저와 함께 산보라도 나가시는 게 어때요? 정원에 새로운 꽃이 한가득 피었답니다.” 때마침 정원에서 꽃을 손질하던 에이프릴이 사프란을 한가득 안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어깨를 거의 드러낸 옷차림과 뽀얀 하얀 피부, 굴곡진 가슴과 잘록한 허리선이 여느 남자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드래곤의 특성상 질릴 정도로 미인에 익숙한 라피스의 눈에는 특별한 감흥을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에이프릴을 항상 그것이 불만인 듯 했다. 겉으로 드러내놓고 서운한 감정을 표출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에게 무심한 라피스의 눈동자를 보며 불안한 표정을 짓곤 했다. 하지만 오히려 입을 열어 따지고 드는 편이 그의 흥미를 돋우는 쪽이라는 걸 에이프릴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또야, 저런 감정 없는 눈동자…라피스님은 이상해. 나를 향해 아름답다고 달콤하게 속삭이면서도 정작 반한 시선은 아닌걸.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걸까?’ 처음엔 단순히 숨이 멎을 것 같이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그리 흔하지도 않은 마법사에다, 귀족의 예법에도 익숙한 듯 보여 더더욱 호감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자신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존재가 될 것임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상대방에 대한 감정을 믿을 수가 없다니, 이 무슨 불행한 일일까. 에이프릴은 진심으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여전히 맑게 웃는 얼굴로 라피스를 달랬다. “밖에 나가서 바람을 쏘이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 덜어질 거예요. 요즘 너무 저택 안에만 계셔서 그런 듯 하니 저와 함께 나가요, 예?” “흐음, 어쩐 일입니까? 늘 제가 밖을 나가는 일을 꺼리시던 그대가 자신해서 가자 하니 이상한 일이군요.” “그거야 오라버니와 마주치면 항상 소동이 벌어지곤 하니까…저어, 혹시 그래서 불쾌하셨었나요?”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무튼 유감스럽게도 저는 지금 외출할 기분이 아니군요. 사실 이렇게 할 일 없이 얌전히 앉아있는 건 굉장히 오랜만이어서요. 이제 슬슬 가볼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가볼 때라니요? 라피스님! 설마 이곳을 떠날 생각이신가요?” 후두둑.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에이프릴은 놀란 표정으로 들고 있던 꽃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라피스는 허리를 굽혀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한 무더기의 사프란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아…!” 뒤 늦게 서야 그것을 눈치 챈 에이프릴이 황망한 표정으로 얼른 따라서 집으려 했지만, 이미 꽃은 라피스의 손에서 하나의 다발을 완성한 상태였다. 천천히 일어나 그것을 다시 에이프릴의 품에 안겨준 라피스는 평소처럼 빙긋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역시 난 이런 유희엔 어울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별거 아닙니다. 그저 그대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는 상대라는 것 뿐. 에릴, 그대는 항상 이 꽃과 같이 우아하게 있을 테지요.” “그, 그렇지 않아요! 라피스님과 함께라면 그것이 저 자신을 버리는 일이라도 기꺼이 하겠어요. 설마 제 마음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글쎄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이라고 해두지요.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파삭! 에이프릴의 품에 안겨있던 꽃들이 한순간에 부서져 공중으로 흩어졌다. 바람도 없이 주변으로 휘몰아치는 꽃잎들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보며, 그녀는 곧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대는 곧 나를 감당하게 될 수 없을 테니까.” “!!” “에릴, 그대는 분명히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인간 중에서 그대만큼 아름다운 존재를 찾아보기는 힘들 겁니다. 그건 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요. 하지만 그것뿐. 아무래도 나에겐 아름답기만 한 꽃은 장식외의 가치가 없는 모양입니다.”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에이프릴의 두 눈엔 금새 이슬 같은 눈물이 서렸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은 그것을, 라피스는 다정한 손길로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러나 그런 순간까지 그의 눈빛에 서린 차가운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심이 아닌 상대를 오래 붙들어 놓을 만큼, 내 자신이 양심 없는 녀석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의 친척이 가만히 두려하지 않을 테니, 이쯤에서 그만두도록 할까요?” “친…척 이라면 폐하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사나 황제폐하를? 설마 그 분이 당신께 어떤 말이라도 한 건가요? 헤어지라고 명령하셨어요? 그래서 제게 지금 이러시는 건가요?” 에이프릴의 입장에선 라피스는 어디까지나 약간의 재능이 있는 마법사일 뿐이었다. 황제의 권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니, 이사나에게 어떠한 협박이라도 받은 것이라고, 그녀는 굳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그 말을 가볍게 부정했다. “이 세상에서 저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 자신뿐입니다. 다만 귀찮은 것이 싫을 뿐이에요. 당신의 친척이 화를 내면 덩달아 그 녀석까지 나를 미워하게 될 테니까.” “그, 그게 무슨…” “에릴, 그대는 아름다우니 금방 다른 연인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대와 평생을 약조할 이는 내가 아니에요. 이번만큼은 오라버니의 충고를 듣는 게 좋겠군요.” “거, 거짓말. 거짓말이시죠? 오라버니가 자꾸만 험한 말을 하셔서 마음이 상하신 거지요? 그래서 저를 떠나시는 거지요? 평생을 약조할 이가 라피스님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까지 제 마음을 이렇게 흔들어놓은 사람은 당신밖에…” “꽃은 꽃답게 우아하게 있는 편이 좋습니다, 에릴. 세상 어느 꽃도 떠나가는 나비나 벌을 잡지는 않아요. 우리의 이별에 굳이 이유를 붙여야 한다면, 그건 서로 살아갈 이유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해 두지요.” “서로…살아갈 이유?” 투둑. 가는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떨어졌다. 절망적인 얼굴로 연신 몸을 떠는 에이프릴을 살짝 끌어안으며 라피스는 달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대는 안주하는 사람, 나는 방랑자입니다. 우리는 너무 이 생활에 안식해 있어서, 잠시 전혀 반대의 생활을 하는 존재를 동경했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다시 원래의 길을 걸을 때가 왔습니다.” “…잔인하신 분. 그런 식의 말로 저를 놀리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당신의 나를 향한 눈빛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요. 그랬으면서…그랬…으면서, 흐흑…” “맞습니다. 반쯤은 장난으로 시작했었지요. 하지만 에릴, 당신에게 끌렸던 것은 사실입니다. 결코 이 감정을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첫사랑은 원래 아플수록 나중에 기억할 때 아름다운 법입니다.” “으흐흑…언제고 같이 있어주실 것처럼 말씀하시더니… 그 결과가 고작 이런 것인가요? 잔인하신 분. 달콤한 말로 현혹하고 여인의 마음을 희롱하는 악마셨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어떻게!!” 타악! 거칠게 라피스의 품을 벗어난 에이프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산산 조각나서 발치에 떨어진 사프란의 향이 은은한 향을 뿌리고 있었다. 점점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에이프릴의 등을 보며 잠시 가만히 서있던 라피스는 곧 사정없이 얼굴을 찌푸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젠장, 내가 왜 이따위 닭살 돋는 대사를 남발해야 하는 거지? 아무튼 귀족여자들이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니까. 차라리 뺨을 한 대 맞는 게 더 낫겠다.” 확실히 고분고분한 상대는 취향이 아니다. 라피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칠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홀 한 쪽의 기둥에 서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업자득이지. 그녀는 인간들 중에서도 정숙하기로 이름난 여인이야. 지금의 상처를 두고두고 수치로 여기게 될 거다. 앞으로 이 집안과 얽히게 되면 좀 골치 아플걸? 여자의 한은 무섭다고.” “뭐~야, 트로웰. 엿 보는 건 나쁘다는 것도 몰라?” 그러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면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엿보지 않았어. 아까부터 당당히 구경하고 있었는데 눈치 채지 못한 건 너잖아? 아무튼 희대의 장면이었다. 천하의 라피스가 여자를 달래는 꼴이라니, 라이칸이 봤다면 당장 기절했을 걸? 드래곤의 이중성은 역시 무섭다니까.” “시, 시끄럿! 아버지한테 말하기만 해! 그리고 이중성이라고 하면 너도 만만치 않잖아! 친절한 가면으로 남의 뒤통수 칠 궁리나 하는 주제에.” “…?…그런 적 없어. 난 대놓고 괴롭히긴 해도 남의 뒤에서 치진 않아.” “하! 그러셔? 그럼 엘퀴네스에게 보이는 그 과분할 정도로 다정한 태도는 무엇일까? 마치 제 동생이라도 되는 마냥 챙기고 돌던 게 과연 평소의 너라고 할 수 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이 너희들과 같아? 그 녀석은 이 세상에 단 4명밖에 없는 내 가족이야. 그런 존재에게까지 냉담하게 굴 정도로 삭막한 성격은 아니라고.” “전의 엘퀴네스한테는 그러지 않았던 주제에.” “그건 전대의 엘퀴네스가 워낙 삐딱했으니 그렇고. 미네르바나 이프리트하고는 나쁘지 않았잖아?” “아아, 그렇겠지. 특히 누구누구라면 목숨이라도 아깝지 않게 굴었지, 아마?” 꿈틀. 미간을 살짝 찌푸린 트로웰의 두 눈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가운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잘못 건드렸다는 걸 깨달은 라피스는 순순히 두 손을 살짝 들어 항복 선언을 해보였다. “…아까부터 자꾸 비꼬는 이유가 뭐야, 라피스? 그동안 안에만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은 건 이해하지만, 나를 향해 화풀이를 하는 건 용납 못해. 그런 버릇없는 태도는 누구한테서 배웠지?” “알았어. 그만 할게. 젠장, 이러면서 이중성이 아니래. 아무튼 정령왕이란 하나같이 성격들이 글러먹었다니까.” “엘은 아니잖아?” “그 녀석도 속으로는 꼬인 부분 많을 걸?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됐어? 요즘 녀석들과 연락이 안 된다고 후작이 벌벌 떠는 것 같던데.” “네가 지금 그걸 태연하게 물어볼 때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엘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으면서. 하긴, 그런 친절한 성격이었으면 처음부터 그한테서 떨어지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조금 전에 연락이 왔어. 무사히 던전에서 나온 모양이야. 곧 돌아올 거라고 하더군.” “흐음. 과연. 얼마 전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던 건 역시 기우였던 건가? 하긴, 정령왕이 겨우 그 정도 던전에 위험할리는 없겠지. 자아~ 그럼 나도 이제 가보도록 할까?” “가다니? 어딜?” 의아한 듯 바라보는 트로웰의 얼굴에 라피스는 당연한 걸 묻는 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원래 있어야 할 곳.” ====================================== 와하하! 오랜만이옵니다! 다들 설 연휴 잘 보내셨나요? 오늘 서울 코믹 다녀오신분? 저도 가고 싶었는데, 결국 못가게 되었군요. 내일은 혹시 갈 수 있을지도..+_+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7-5. 부탁 (1) 어쩌면 이사나의 라이벌 일지도 모르는 남자는 일단 합류하기로 결정된 상태에서, 나는 단숨에 카이테인씨가 머무는 장소로 일행들을 이동시켰다. ‘언령’의 이동은 장소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지 못해도, 그곳에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는 곧 어렵지 않게 낡고 초라한 작은 집에 들어설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건 거리를 갑작스럽게 이동한 부작용인지, 나를 제외한 다른 일행들은 비틀거리며 모두 격한 기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이 이동방식은 정령왕외에는 견디기 힘든 압력을 주는 모양이었다. “어, 어지러워. 쿨럭-쿨럭!!” “우욱! 너무해, 엘! 이런 거라면 진작 경고를 해주지…” “하하, 미, 미안. 사실 나 외의 다른 사람까지 함께 이동시켜본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 다들 괜찮아?” 어설프게 웃으며 묻는 말에 일행들은 원망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클모어의 후작령에 갈 때는 ‘걸어서’가자고 부탁하는걸 보니, 어지간히 충격이 크긴 컸던 모양이다. 잠시 난감한 얼굴로 일행들의 상태를 살피던 나는 곧 뒤에서 느껴지는 따끔할 정도로 강한 시선에 고개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침대 한켠에 앉아 누군가를 간호하고 있던 카이테인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엘퀴네스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기척도 없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으니 놀라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게다가 그 중에 아는 사람이 섞여있다면 더더욱.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시큐엘을 보내 연락을 해두는 건데. 속으로 잠시 후회한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오랜만에 만난 동료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카이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하하하…” “이,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갑자기 나타나시다니…던전에서의 일은 모두 마치신 겁니까? 게다가 이 사람들은?” “아~ 던전에 가게 되면서 합류하게 된 사람들이예요. 어쩌다보니 계속 일정을 함께 하게 돼서 같이 오게 됐거든요. 모두들 인사 해, 이쪽은 엘뤼엔의 사제인 카이테인씨. 원래 던전까지 함께할 파트너였는데, 중간에 일이 생겨서 나대신 수고를 해주셨어.” “헤에? 엘뤼엔의 사제분?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합니다.” 알리사를 시작으로 일행들은 모두 한마디씩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덕분에 한참동안 정신없이 인사를 주고받던 카이씨는 마지막으로 이사나를 향해서 어색하게 웃음 지어보였다. “오랜만입니다, 이사나님. 별 탈 없이 무사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카이씨도요.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니 정말 기쁘네요.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지는 않으셨는지…” “하하 괜찮습니다. 다만 지금은 환자가 잠들어 있는 상태니 조금만 주의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저기 누워계신 저분은?” 카이씨가 가리킨 것은 시큐엘의 등에 업혀 고이 잠들어 있는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아직 깨어나려면 한참이나 남은 듯, 좀처럼 눈을 뜨지 않는 남자를 바라보며 나는 간단하게 지난 일을 설명했다. “던전 앞에서 쓰러져 있던 사람이에요. 일단 죽어가는 사람을 혼자 두고 오기가 뭐해서 데리고 오긴 했는데, 깨어나면 자세한 상황을 알아봐야죠.” “그렇군요. 그럼 우선 제가 사용하는 간이침대에 눕히도록 하죠. 몸에 이렇다 할 상처가 없는걸 보니 이미 엘퀴네스님께서 치료하신 모양이군요.” “네, 지금은 단순히 잠들어있을 뿐이니 금방 일어날 겁니다. 그러고 보니 사기꾼 엘…아니, 엔딜은 어디 갔어요? 아까부터 보이질 않는데. 아, 혹시 누워있는 아이가 녀석의 동생인가요?” 8평도 안되어 보이는 조그만 집안엔 침대에 누워있는 어린 소녀와 카이테인씨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 흘끗 본 소녀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이전에 보았던 엔딜과 많이 닮아있는 것을 보며 나는 혼자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이면 카이씨의 신력으로 완쾌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들어있는 창백한 얼굴은 완연한 병색이 짙게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대사제의 신력으로도 치유가 불가능 한 거였나 싶어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마침 남자를 침대에 옮겨두던 카이씨가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엔딜군의 동생인 세실이라고 합니다. 보시다시피 수명을 늘리는 것 외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호전은커녕 악화되는 일을 막는 게 고작이라,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관으로서의 제 자질을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믿고 맡겨주신 엘퀴네스님께 면목이 없습니다.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저에게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카이씨. 지금까지 수고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니까요. 그나저나 신력으로 낫지 않는 병이라니, 아무리 희귀병이라지만 특이하네요. 약초로 버틸 수 있을 수준이라면 신력으로도 치유가 되었을 텐데?” “그게…실은 아무래도 약간의 저주가 작용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주?” “예. 아시다시피 세실은 엔딜군처럼 순수한 엘프가 아닙니다. 하이 엘프인 여인과 인간 남자 사이에서 태어난 생명이지요. 아마 세실이 겪고 있는 병은 그것이 원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옆에서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듣고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녀석은 황당한 얼굴로 연신 잠들어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이 엘프와의 혼혈? 대체 누가 그런 미친 짓을 벌인 거야? 제정신들이 아니군.” “응? 왜? 혼혈이라는 게 문제가 되는 거야?” “당연하지. 그냥 일반 엘프라면 모를까, 하이 엘프는 엘프들 사이에서도 가장 순결한 피를 가진 고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는 본질적인 성향이 너무 달라. 그 자체로 하이 엘프에겐 독이나 마찬가지라고. 다만 결혼한 본인이 아니라 2세에게 해당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2세에게만?” “응. 보통 이종족의 혼혈은 두 가지의 다른 피를 서로 융화시켜서 하나로 만들거든. 하지만 하이 엘프의 피는 타 종족의 피를 받아들이지 않아. 오히려 자신의 영역에서 밀어내기 위해 공격하는 편이지. 결국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두 개의 기운이 육체를 방황하다 안정될 장소를 찾지 못하고 스스로 자멸하는 거야.” “윽, 그게 뭐야? 인간의 피가 무슨 병균도 아니고.” “인간이 아닌 다른 종족이라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대부분의 하이 엘프들은 2세를 위해서라도 타 종족과의 혼인을 금(禁)하고 있어. 무슨 생각인지 이 소녀의 어머니는 그걸 잊어버린 모양이지만 말이야.” 한심스럽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얼굴을 찌푸리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카이씨를 바라보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던 그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치료방도가 전혀 없다는 소리입니까? 하지만 약초에는 어느 정도 호전을 보였는데요.” “육체를 강화시키는 약이었겠지. 그것으로 육체 안을 떠도는 혼란스러운 기운을 잠시나마 견디는 거야. 하지만 그런 걸론 얼마 버티지 못해. 근본적인 해결을 하지 않는 이상 몸 안에 흐르는 두 종족의 주도권 싸움은 계속 될 테니까. 이건 엘퀴네스의 치유력으로도 해결하기 힘들 걸?” 털썩. 순간 문 앞에서 무언가가 크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곳엔 언제 돌아온 건지 엔딜이 한 바구니의 과일봉투를 안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데굴데굴. 맛깔스러운 붉은 빛을 띈 사과가 아무렇게나 발아래에 굴러다녔다. “에, 엔딜!” 지금까지의 대화를 모두 들은 건지, 전에 없이 창백한 안색이 된 녀석을 보며 나는 얼른 다가가 부축했다. 그러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세실은 절대 나을 수 없다는 거야? 엘퀴네스님이 왔는데도?” “아니, 그게…” “거짓말이지? 그렇지? 나와 카이씨 모두 엘퀴네스님이 오기만 얼마나 기다렸는데! 지금에 와서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 그런 거지? 세실은 나을 수 있는 거지?” 꽈악 움켜쥔 어깨에선 전에 없이 강한 압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마 이 육체가 평범한 인간의 것이었다면 고통으로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그만큼 동생을 향한 감정이 깊은 것이겠지. 오랜만의 재회에 초반부터 나쁜 소식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 같은 상황인가.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일단 흥분한 녀석을 진정시킬 겸 달래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속단하지 마, 엔딜. 아직 아무것도 해보지 않았잖아. 일단은 한번 치료술을 해보고…” “저, 정말이지? 세실을 고쳐주는 거지?” “헛수고야, 엘. 이건 병이 아니라니까? 금기를 어긴 저주나 마찬가지야. 치료술을 백날 퍼부어도 소용없다고.” 냉정하게 이어지는 시벨의 말에 그나마 희망을 담고 있던 엔딜의 눈동자가 단번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녀석은 곧 특유의 험한 입담을 통해 단번에 시벨을 향한 적의를 드러냈다. “씹-! 이 새끼야! 넌 뭔데 아까부터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야! 금기라니! 저주라니!! 세실이 지금 저주받은 아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지금 당장 그 시퍼런 눈탱이를 뽑아버리기 전에 닥치고 있지 못해?” “나는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너도 하이 엘프라면 장로들에게서 한번쯤 이런 사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무엇보다 나는 너 같은 꼬맹이한테 욕을 얻어먹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 없어. 너야말로 입 닥치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헹! 인간이 무서워서 바닷가 절벽 틈 사이에 숨어버린 블루엘프주제에 용기도 가상하네!” “그래봤자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우아하다고 착각하는 머릿속 텅텅 빈 하이 엘프 따위보단 훨씬 나을 걸?” “죽을래? 다시 한 번 말해봐!!” “말하라면 못 할 줄 알고?!” 파직! 순간 100만 볼트의 전류가 두 엘프의 사이를 흐르고 지나간 듯 했다. (엄밀히 말하면 시벨은 엘프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때문인지 자신을 정말 엘프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 하니 넘어가기로 하자.)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이, 당장이라도 치고받고 싸울 듯한 태세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두 존재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들 해. 안 그래도 좁은 집안인데 더 정신없게 만들 작정이야? 다들 진정하고 자리에 앉아. 이러다 아픈 애가 깨어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하지만 엘퀴네스님! 저 녀석이…” “이게 누구더러 저 녀석이래? 너 나이가 몇이야!” “시벨리우스! 그만 하랬지!”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녀석은 나의 화난 목소리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한참이나 어린 녀석에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 때문인지 억울한 목소리로 낮게 투덜거렸다. “저 녀석이 너무 건방지잖아. 내가 틀린 말을 했던 것도 아니고.” “뭐가 어째? 세실의 어디가 저주받은 아이라는 거야! 위선자같은 다른 엘프보다야 훨씬 순수하고 착한 아이라고!” “저주받은 아이라곤 하지 않았어. 저주나 마찬가지라고 했지.” “이 씹! 그게 그 소리지!!” “엔딜, 그만 해.” 길길이 날뛰는 엔딜을 진정시키며 나는 난감한 표정이 되어 잠들어있는 세실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아이가 깨어나 지금의 대화를 듣지 않을까 걱정이 된 것이다. 자신을 향해 저주 운운하는 시벨도 그렇지만, 아니라고 우겨대는 오빠의 필사적인 모습을 봐도 어린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카이씨가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약을 먹고 잠든 것이라 당분간은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엘퀴네스님이 오셔서 시끌벅적하니 좋군요. 그 전엔 항상 쥐죽은 듯한 침묵만 이어져서 엔딜군이 많이 걱정되었거든요. 당장이라도 나을 것 같던 아이가 전혀 호전이 없어서 더욱 상처가 깊었을 겁니다.” “그렇겠네요. 으음. 그런데 이제 와서 제 힘도 소용이 없을지도 모른다니. 이런 경우는 어떤 식으로 치료를 해야 할 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걸요?”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설령 치료가 불가능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엔딜군은 엘퀴네스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죽을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요.” “하지만 그래선 면목이 서질 않아요. 일단 치료해주기로 마음먹은 이상,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음 하거든요.” 나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세실의 이마를 짚었다. 파앗! 새하얀 치유의 빛의 스며들었지만 잠든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했다. 역시 안 통하는 건가? 내 유일하다시피한 장기가 전혀 소용이 없다는 사실에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나를 위로하려는 듯 어깨를 다독이는 이사나의 손이 느껴졌다. “엘이 부족한 탓이 아니야. 시벨님의 말처럼 이게 병이 아니라면, 치유력으로 고쳐지지 않는 게 당연한 거니까.” “으응. 그렇긴 한데… 종족의 차이로 벌어진 현상은 대체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거기까지 중얼거린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밝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시벨! 아까 네가 말한 것 말이야. 세실의 몸에 흐르는 두 종족의 피가 문제라는 거지? 그럼 둘 중에서 하나만 없어져도 살 수 있는 거야?” “어느 쪽이든 안정된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몸속에 흐르는 것을 어떻게 없애려고?” 어리둥절한 시벨리우스의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씩씩거리던 엔딜 역시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나에게 집중되자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머릿속에서 혼자 생각하고 있던 해결방안을 설명했다. “왜~ 폴리모프 마법이란거 말이야. 그거라면 종족을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굳혀주지 않을까? 시벨 너도 완벽히 다른 사람이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아아. 그것 말이군. 확실히 폴리모프 마법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에? 그게 정말이야?” “!!!” 내가 말했던 거지만 그다지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돌아온 대답은 희망적인 것이었다. 나와 엔딜이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시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곤란한 얼굴을 해보였다. “하지만 그만큼 정교한 마법이 가능한 존재를 구하기가 어려울걸.” “엥? 시벨 너는? 너도 마법 할 줄 알잖아?” “마법은 할 줄 알지만, 폴리모프에 대한 것은 내 자신에게만 걸 수 있어. 그리고 나의 경우엔 폴리모프를 했다 해도 본래 종족의 성질까지 전부 달라진 게 아니야. 미묘하지만 조금씩 진짜 블루 엘프완 다르지. 해산물만 먹지 않는 게 바로 그 증거 아니겠어? 그런 것이 가능한건 마법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뿐이야.” “!!” 드래곤! 그 순간 나와 이사나, 카이씨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한결 같이 밝은 표정을 보건데, 나와 똑같은 존재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드 드래곤 라피스 라즐리! 그 녀석이라면 이 소녀의 치료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라피스의 존재를 모르는 다른 일행들은 모두 복잡한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드래곤이라니, 곤란하군. 그들이 부탁한다고 쉽게 들어줄 존재도 아니고…” “그래도 정령왕이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거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드래곤이라는 게 어디 흔하디흔하게 널려 있는 것도 아니잖아? 이 넓은 세상천지 어디에서 드래곤을 찾아내겠어. 게다가 부탁해도 공짜로 들어줄 리가 없다고. 반드시 그에 합당한 조건을 받아내려 할거야. 드래곤들은 철저히 계약위주니까.” “윽…나 때문에 엘퀴네스님을 곤란하게 할 순 없어. 그건 세실도 바라는 일이 아닐 거야.” 침울한 엔딜의 말을 마지막으로 주변은 순식간에 무거운 침묵으로 젖어들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이사나의 검-이그니스가 기회라는 듯이 소란스럽게 끼어들었다. <<오호호호! 용사님! 드디어 때가 왔어요! 동료를 구하기 위해 드래곤의 심장을 취하는 위대한 영웅! 자아~ 험난한 역경을 향해 뛰어들자고요! 이 용사의 검이 함께 하겠어요!>> “저어, 이그니스. 이건 드래곤의 심장이 아니라, 그냥 부탁을 하는 것뿐인데.” <<어머머! 무슨 그런 마음 약하신 소리를? 드래곤을 만났는데 단순히 부탁이라뇨? 당장 멱을 따셔야죠! 설마 용사님은 드래곤이 무서우신 거예요? 걱정 마세요! 용사님은 하늘이 택하신 이 세대의 영웅!! 드래곤을 무찌르고 다음엔 사악한 마신을 쓰러트리는 거예요! 어때요, 저의 완벽한 계획이?>> “……” 완벽하긴 개뿔이. 쓸데없이 망상증만 커져가는 검 때문에 그 주인인 이사나는 민망한 표정으로 주변에 양해를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엔딜과 카이씨는 단순히 검이 말을 한다는 사실에만 놀라고 있는 듯 보였다. “지, 지금 저 검이 말 한 거야?” “호오, 신기하군요. 던전안에서 가져온 것이 설마 저 검입니까? 정령이 봉인되어 있다더니, 과연 범상치가 않네요.” “하하하…” 범상치 않긴 했다. 세상 어느 검이 허황된 망상으로 용사를 부추기는 무시무시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말인가! 일행들은 모두 벌레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감탄하기에 여념이 없는 카이씨와 엔딜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검을 향해 대단하다고 생각한 자신을 저주할 시간이 다가올 테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 오랜만이어요 아하하<-삐질삐질. 항상 올릴 때마다 생각하는 건, 이번 편이 전 편보다 재미없어서 읽는 분들이 실망하면 어쩌지...라는 걱정 뿐이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래요.<-어이; 그나저나...마감이 코 앞이군요. 이제 다시 본격적인 독촉이 시작되는 셈인가..(한숨) 일주일 동안 리니지는 꿈도 못 꾸게 생겼습니다. 어쩌면.....또 다시 광참의 역사가....하하하하하하하<-허무한 웃음을 날리며 사라진다. ] [정령왕 엘퀴네스] 7-6. 부탁 (2) 모두가 한결같이 예감했던 바와 같이, 이후로 이어지는 이그니스의 무시무시한 수다에, 카이씨와 엔딜의 얼굴은 점차 창백하게 질려갔다. 처음의 신기하단 듯한 시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남은 것은 그 주인인 이사나를 향한 안쓰러움뿐이었다. 덕분에 얼굴이 벌겋게 된 이사나만 이그니스를 조용히 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드래곤이랑 싸울 땐 어떻게 하냐면요! 일단 초반에 너 되게 못생겼다고 말하면 십중팔구 쪽팔려서 아니라고 우긴다니까요? 호호호호! 그렇게 평정심을 잃은 드래곤은 허점이 드러나기 마련! 그 순간 날아올라 콧구멍을 쑤시면 코피가…>> “윽! 이제 그만해, 이그니스. 충분히 알았으니까.” <<오호호호! 드디어 용사님도 제 진가를 알아보시는 군요! 앞으로도 어려운 적을 상대하는 방법에 대해선 언제든지 물어보세요! 이 파이어 버스터!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용사님께 전수하겠어요! 무지는 죄가 아니니 전혀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답니다~>> “알았으니까 이제 제발 그만…” 애원하다시피 매달려서야 간신히 녀석의 입을 다물게 한 이사나는 몇 년의 세월을 한꺼번에 먹은듯한 지친 표정이 되어있었다. 어쩌면 이그니스는 앞으로 이어질 이사나의 명성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게 될지도? 보기에 따라 재밌다고 해도 좋을 상황이었지만 엔딜의 표정은 금새 침울해졌다. 말하는 검에 대한 신기함이 사라지고 나니, 어느새 병색이 짙은 여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다시 물들었던 것이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쓸어주며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엔딜. 드래곤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 하나 있으니까 별로 부탁하는 게 어렵지 않을 거야.” “그, 그게 정말이야, 엘퀴네스님?” “응. 좀 투덜거리긴 해도 일단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은 없었거든. 그가 아니라도 다른 정령왕들이 알고 있는 드래곤이 많으니까 어떻게든 부탁해볼게. 설마 그들 전부다 거절하진 않겠지.” “하,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엘퀴네스님한테 피해가…” 말로는 더듬더듬 나를 향한 걱정을 내뱉고 있었지만, 이미 엔딜의 초록색 눈동자는 희망으로 반짝이고 있는 상태였다. 동생을 위해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에 빠트렸던 녀석이다. 새삼 남의 사정을 살펴준다는 게 우스워 나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방법을 알았는데 마냥 손을 놓을 수는 없잖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엔딜 너는 무조건 동생의 병이 낫기만 기도하면 돼.” “…고, 고마워 엘퀴네스님. 역시 엘퀴네스님 밖에 없어.” “뭘. 원래 사위 사랑은 장모라잖아. 어? 이게 아닌가. 장인어른이라고 해야 하나?”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멀뚱히 바라보는 엔딜의 모습에 나는 그저 씨익 미소 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곤 녀석의 이마를 짚어 지금까지 흐릿하게 새겨져 있던 시큐엘의 문장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화악! 차가운 공기가 흐르자 움찔 떨던 녀석은, 문장이 선명해진 걸 확인한 내가 다시 손을 떼어내는 순간에도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녀석의 친화력을 높여준 것과, 그 때문에 이젠 언제든지 시큐엘을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비밀로 붙여두기로 했다. 이런걸 보면 내게도 엘퀴네스의 피가 흐르는 게 사실인 모양이다. ‘그나저나…라피스는 또 무슨 말로 이쪽으로 불러낸다지?’ 지금쯤 에이프릴양에게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녀석이 내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몸소 강림(?)할지는 과연 재고해볼 문제였다. 까짓것 텔레포트 몇 번이면 해결될 문제이지만, 사랑에 빠진 놈들은 그런 단순한 작업조차 잠시도 떨어져 있기 싫다는 이유로 거절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내가 고민하는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자 카이씨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설마 이때까지 라피스님이 합류하지 않으신 겁니까? 저는 당연히 던전에 도착하기 전엔 다시 돌아오실 줄 알았는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완전히 한 방 먹었다니까요. 뭐, 시벨리우스가 있어서 마법에 대한 불편함은 그다지 못 느꼈지만 서도.” “시벨리우스라면 저쪽의 블루엘프님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아까 보니 폴리모프에 대해서 말씀하시던데, 설마 저 모습이 진짜가 아니신 겁니까?” “네, 본 모습은 따로 있지만 그다지 잘 드러내는 편은 아니에요. 일단 인간이 아닌 건 확실하고요.” “그렇군요. 그런데 저 옆에 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 분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인상입니다만.” 그가 가리킨 것은 지금까지 모든 상황과 전혀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던 자세의 데르온이었다. 언젠가 세르피스란 마족과 함께 우리 앞에 나타난 전적이 있었던 만큼, 이미 한번 그와 조우했던 적이 있던 카이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기억 안나요? 전에 한 번 우리 앞에 나타났던 마족이 있었잖아요.” “아! 서, 설마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대체 저자가 어떻게 엘님과?” “쿡쿡.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되요. 마신이 직접 저와의 동행을 명령했으니까요.” “마, 마신이요?”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던 카이씨는 이윽고 침착한 표정으로 나를 쭈욱 쳐다보았다. 마치 그동안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흩어보던 그는 마지막으로 내 왼쪽 손에 이르러서야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고 보니 못 본 사이에 새로운 장신구가 늘어나셨군요.” “하하, 피치 못 할 사정이 잠깐…이, 이상한가요?” “아니요. 꽤 잘 어울리십니다. 엘님은 점점 아름다워지시는 군요.” “쿨럭…” 이걸 과연 칭찬으로 들어도 좋은 걸까? 복잡무리한 내 얼굴을 보면서도 카이씨는 말없이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쩌면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바로 그 일지도 몰랐다. 저녁이 되자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온 것은 바로 일행들이 마땅히 잘만한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엔딜의 집은 너무 좁았고, 침대도 두 개밖에 없었기 때문에 9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수면을 취할만한 장소가 되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집 근처의 가까운 언덕에 올라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텐트를 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쩌죠?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는 게 혹시 어디가 크게 안 좋은 것이 아닙니까?” 카이씨가 가리킨 것은 우리가 이곳으로 오기 직전에 주웠던 정체불명의 남자였다. 처음 발견했던 때부터 지금까지 좀처럼 깨어나지 못하는 남자는, 걱정스러운 그의 말과는 달리 단지 잠들어있을 뿐 몸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마도 오랜 여정에 지쳐 몰린 피로를 한꺼번에 잠으로 풀고 있는 듯 했다. “별 문제는 없어요. 내일 아침이면 일어나겠죠. 이 사람도 일단은 우리 쪽으로 데려가겠습니다.” “그럼 엘님 일행분들이 너무 장소가 비좁게 되시는 건…” “아니요. 시벨리우스가 치는 텐트는 마법으로 만드는 거라 얼마든지 공간을 늘릴 수 있으니 상관없어요. 우선은 푹 쉬고 내일 아침에 다시 뵙도록 할게요.” “예. 그럼 편히 쉬십시오, 엘퀴네스님. 내일 뵙겠습니다.” 단정한 카이테인씨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엔딜의 집을 나와 텐트를 칠만한 적당한 장소를 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지고, 일행들이 모두 잠드는 순간이 되도록 나는 좀처럼 마음을 안정시킬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켜 텐트 밖으로 나온 나는 밤하늘에 무수히 떠있는 수많은 별들을 보며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별들이 이곳에선 마치 은하수처럼 늘어서 있었다. 간간히 울리는 풀벌레 소리나, 썰렁할 정도로 고요한 주변이 새삼스럽게 낯선 장소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결코 혼자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 주위에 수많은 나아이스들이 떠돌아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꺄하하하하! 나 잡아 봐라~~ -이익! 거기서어! 너어~ 엘퀴네스님 앞에서 나를 망신 줬겠다! -다들 싸우지 마! 왕께서 슬퍼하신단 말이야. 열기와 먼지로 가득한 알폰프 제국에 비해, 솔트레테는 전체적으로 습기가 충만한 편이었다. 공중을 정신없이 떠돌아다니는 나이아스들을 보며 피식 미소 짓던 나는 곧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알리사와 이사나는 괜찮을까? 텔레포트를 하는 바람에 갑작스런 기후의 변동에 적응하지 못했을 텐데. 다른 사람들이야 인간이 아니니 상관없지만, 두 사람은 나이도 어리고…’ 걱정이 된 나는 시큐엘을 불러 두 사람의 상태를 살펴보고 오게 했다. 혹시나 아픈 구석이 보이면 가서 치료해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대답은 ‘별 탈 없이 잘 자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픈 데는 없어 보인단 말이지?” -예, 그렇습니다. 왕시이여. 오히려 그 옆에 있던 이그니스가 성질을 내는 통에 급히 나온 참입니다. “쿡쿡. 이그니스 녀석. 이사나가 물의 정령사인 이상 앞으로도 너랑 마주칠 일은 수시로 있을 텐데, 좀 사이좋게 지낼 의사는 없는 건가? 아참, 이사나는 이제 너희를 몇이나 불러 낼 수 있지?” -7명입니다. 요 근래 수련이 뜸해서 생각보다 많은 숫자를 소환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령의 입장에서야 탐탁지 않은 결과겠지만, 사실 말이 좋아 7명이지, 이건 일반적인 정령사중에서도 그리 흔한 숫자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사나는 더 이상 수련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라 해도 좋았다. 상급 정령을 동시에 7마리나 불러내는 실력자를 누가 상대할 수 있단 말인가! 점점 발전하는 이사나의 모습에 뿌듯하게 미소 짓던 나는 문득 호기심을 느끼곤 반짝 눈을 빛냈다. “이사나가 7명이라 이거지. 그럼 라피스는 몇이나 될까?” -으음. 그것은 측정하기가 애매합니다. 드래곤이니 아무래도 30은 간단히 넘길 거라 생각됩니다만. “30이나? 헤에. 안 그래도 심심한데 한 번 시험이나 해 볼까?” -시, 시험이라니. 설마 그의 마나로 정령들을 한계시점까지 소환해보실 생각이십니까? 그랬다가 그가 분노라도 하면… “뭐 어때? 시큐엘이 역 소환한 상태에서도 꿈쩍도 안한 녀석이 겨우 그 정도에 화내겠어? 걱정 마, 걱정 마.” -와, 왕이시여… 심히 걱정스럽다는 듯 눈을 불안하게 굴리는 시큐엘을 무시하며 나는 그때부터 천천히 라피스의 마나를 끌어와 한 마리씩 시큐엘을 형상화하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점점 늘어나는 숫자가 텐트 주위의 언덕을 가득 매울 때까지 나는 그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심심해서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모처럼 발견한 장난감을 가지고노는 심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언뜻 보아도 40마리는 넘어 보이는 시큐엘이 주변을 채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럼에도 아직도 펑펑 남아도는 라피스의 마나를 깨닫곤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와아, 역시 드래곤. 40마리나 넘었는데도 아직도 마나가 남아도네? 더 불러내볼까? 아니면 이 녀석들끼리 비무라도 펼치게 할까. 역시 가만히 있는 것보단 몸을 움직이는 편이 마나의 소모에 도움을 주겠지? 이만한 시큐엘들이 한꺼번에 역 소환되면 어떻게 될까나…” 아무리 정령왕이래도 멀쩡한 정령들을 역소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까짓것 하려고 마음먹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순간 이어지는 낮은 목소리에 차마 마음먹은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너…나를 죽일 셈이냐?” “엥?”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그곳엔 언제부터였는지 나무기둥에 기대고 서있는 큰 그림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꽤 장신의 남자가 거만한 포즈로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정령왕의 시력으로 알아보기에 무리가 없는 거리였지만, 나는 설마 싶은 마음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그 녀석은 아니겠지.” “그 녀석?” 휘이잉. 그때였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지금까지 달빛을 가리고 있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환하게 고개를 드리운 달빛은, 나무에 기대고 서 있던 남자의 모습을 정확히 밝혀주고 있었다. 감탄이 절로 흘러나올 만큼 조각 같은 얼굴과 태양처럼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 처음 만났을 때와 전혀 변한 것이 없는 오만한 표정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아주 흡사한 모습이었다. 미미한 바람이 불때마다 흩어지는 핏빛의 머리카락을 멍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피스?” ======================================= 드디어 애물단지 등장!! 엘의 고난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두둥!) 리플 정말 감사합니다~ 냐하하하하 <- [정령왕 엘퀴네스] 7-7. 부탁 (3) 왜 아니겠는가. 저 녀석이 지금까지 결코 도움을 주지 못했던 시뻘건 도마뱀이라는 건, 내가 가진 전 재산을 걸고라도 증명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식-하고 특유의 거만한 웃음을 지어보인 녀석은 지금까지 기대고 서있던 나무에서 몸을 떼더니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곤 이제까지 유지하고 있던 마나를 한꺼번에 앗아가 모처럼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던 시큐엘의 형상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미처 ‘무슨 짓이냐’고 항의할 겨를도 없었다. “너- 너어!” “무슨 짓이냐고 물을 셈이라면 관둬. 그대로 놔두면 내가 먼저 쓰러질 참이었다고. 한다한다 했더니 아주 작정을 하고 내 피를 말릴 셈이냐? 이왕 죽일 거면 멋있는 방식으로 죽여 달라고. 정령소환하다 죽었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까.” 제 할 말만 냉큼 쏘아붙이곤 사납게 노려보는 통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좀 심했다 생각이 들었던 것만큼, 찔리는 구석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나저나 이 녀석이 여긴 무슨 일로 온 걸까? 세실의 일을 생각하자면 잘되었지 싶었지만, 갑자기 웬 심경변화인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가 여긴 왜 온 거야?” “왜냐니? 내가 못 올 데라도 온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에이프릴은 어쩌고?” “헤어졌어.” “아, 그래? 그것참 유감…엑? 뭐, 뭐라고? 너 지금 뭐라고 했어?”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헤어졌다니? 이 세계는 한국처럼 교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남녀의 인연이라는 게 쉽게 말 한마디로 끊기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사귀면 반드시 결혼 한다’라는 게 당연하다고 인식되어있는 세상이랄까? 특히나 에이프릴 같은 귀족일 경우는 그런 사상이 더욱 심했기 때문에 나는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칠 정도로 무심한 붉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봐? 헤어졌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당연하지! 왜 갑자기 헤어진 거야? 유희의 로망이라며 휙 떠나버릴 때는 언제고! 혹시 에이프릴양이 널 찬 거야?” “아니. 내가 먼저 떠난다고 했어. 이제 슬슬 지루해진 참이었거든.” “하아?” 기가 찬 내 시선에도 라피스는 뭐가 어떻냐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의 금쪽같은 여동생을 채어놓고서 쉽게 버린 주제에 일말의 양심의 가책조차 없는 얼굴이다.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썩을 놈을 하사 하셨나이까! 내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보지 마. 애당초 내 유희의 목적이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을 뿐이니까. 앞으로의 일정에 지장을 줄 것 같아 미리 끊어둔 게 뭐가 나빠?” “그럴 거면 처음부터 집적이지나 말던가! 이제 무슨 낯으로 클모어에 돌아가서 후작을 보란 말이야? 이사나는 또 어떻고!” “그들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할걸? 내 정체를 아는 이사나는 물론, 후작의 입장에서도 나는 그다지 탐탁지 않은 신랑감이었을 테니까. 좋게 좋게 생각하자고, 고지식한 정령왕씨.” “이게 어디 좋게 생각할 일이야? 이 천하의 바람둥이 자식아!” 그러자 지금까지 고분고분 응수하고 있던 라피스의 미간이 크게 꿈틀거렸다. 그리곤 호오~하고 감탄성을 흘린 뒤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리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바람둥이라고 들을 정도로 여러 여자를 홀린 기억은 없는데? 아아, 널 버리고 간 것 때문인가? 그런 거라면 나도 할 말 없지만. 설마 이게 바로 조강지처를 놔두고 애첩에게 눈을 돌린 상황이라는 건가?” “뭐, 뭔 헛소릴 하는 거야! 나는 그저 사귀고 있던 여자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지란 소리였다고. 가볍게 사귀고 금세 헤어질 거면 바람둥이나 다름이 없잖아!” “그래그래, 앞으론 너한테만 충실 할게. 그동안 혼자 둬서 미안했다, 엘.” “크아악! 대체 왜 그딴 결론이 나오냐니까!!” 머리를 부여잡고 경악하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연신 피식거리고 웃었다. 더 이상 말을 꺼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 같아, 나는 그만 잠자코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더 이상 놀림거리를 찾지 못한 녀석의 시선이 이제 왼편에 낀 실크 장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건 웬 장갑이야? 척 봐도 장식용인데…너 치장하는 일에 관심 있는 편이었던가?” “아니, 이건 그냥 사정이 있어서.” “사정이라니?” 스윽. 말 보단 행동이 더 빠를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단숨에 장갑을 벗어보였다. 처음엔 그저 어리둥절한 표정이던 녀석은 곧 내 손등에 자리 잡은 새하얀 배트맨(…)의 문장을 발견하곤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다분히 한심스럽다는 투의 목소리가 녀석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온 몸을 신의 문장으로 도배할 생각이냐?” “윽. 일부러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럴 거면 눈에 띄는 부위를 피하던지! 옷으로도 가려지는 부분이 얼마든지 많은데 왜 하필 문장을 받는 곳마다 이런 식이야?” “나도 몰랐단 말이야! 갑자기 손등에다 키스하는데 그게 문장을 새기는 건지 인사를 하는 건지 내가 알게 뭐야!” “뭐? 손등에 키~~스?” 황당하단 듯 반문하는 말에 나는 실수했음을 느끼곤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젠장,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러울 기억의 넘버원을 차지하는 일을 이렇게 쉽게 불어버리고 말다니! 내 안색이 점점 창백해지는 걸 보았는지 라피스는 전에 없이 즐거운 표정이 되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푸하하! 혹시 널 여성체라고 착각했던 거 아니야? 요즘은 귀족여자들에게도 잘 안 써먹는 수법을 너한테? 그리고 넌 또 멍하니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단 말이지? 엘~ 도대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냐?” “시, 시끄러! 그냥 장난했던 거라고!” “흐음. 이렇게 길길이 날뛸 걸 예상하고도 말이지? 이건 아무리 봐도 마신의 문장 같은데…겉보기와 달리 엉뚱한 성격이라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군. 그 녀석은 어떻게 만난거야?”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것도 잠시, 라피스는 곧 취조하듯 낮은 목소리로 캐물었다. 어차피 말해줄 생각이었기에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대강 간추려 설명하기 시작했다. 주로 던전에서 있었던 일과, 마신과의 만남, 그리고 그가 전해준 충격적인 정보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그것을 모두 들은 녀석의 표정은 전에 없이 진지하게 물들어 있었다. “루카르엠이라는 마족이 마신이었다고?” “응. 외모는 달랐지만, 그의 말로는 그랬어. 지금까지 쭈욱 마계에서 마족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더라고.” “흐음. 그가 너한테 미래의 마왕이 될 알을 맡겼단 말이지? 게다가 악신의 탄생이라… 그것참. 점점 일이 복잡해지는 군. 시간 내에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 왜 하필 인간 아이의 생명만 필요한 거야? 다른 종족들도 얼마든지 있잖아?” “아, 그건 말이지…” 이어지는 라피스의 설명은 대충 이랬다. 수많은 인세 중에서도, 인간은 그 모든 과정을 경험한 영혼의 가장 마지막 단계라는 것이다. 때문에 인간의 영혼에는 이 세상에서 겪은 가장 선한 감정과 가장 악한 감정이 함께 공존하게 되는데, 바로 그 점이 악신의 탄생에 큰 원동력이 된다고 했다. “순수한 악과 순수한 선만으로는 악신의 조건을 이룰 수 없어. 그것이 적절하게 섞여 혼돈이 되었을 때, 오히려 그 속에서 가장 사악한 존재가 탄생한다는 원리지. 어린아이를 쓰는 것은 어른보다 아이가 그런 본성을 더욱 강하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인간은 자라면 자랄수록 예의와 규칙에 얽매여서 이성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니까.” “어려워…”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은 악신이 탄생 하려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하나 뿐이니까. 아무튼 골치 아프게 됐군. 악신이 이곳에서 탄생한다면 가장 방해될 존재는 아크아돈의 자연을 지배하는 너희 4대 정령왕이야. 앞으로 각오 단단히 해야 할걸?” “헉. 그게 정말이야?” 하긴, 나라도 어딘가를 지배하려면 먼저 그 세계를 장악하고 있던 가장 강한 사람부터 치는 게 순서일 것 같았다. 아무래도 상당한 고난이 따를거란 생각에 얼굴을 잔뜩 찌푸리자, 라피스는 킥킥 웃으며 장난스럽게 내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리곤 마치 어린애를 대하는 것처럼 다정한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걱정 마, 걱정 마. 위급한 순간에선 내가 지켜 줄 테니까.” “하, 웃기시네! 너나 죽지 마시지!” “나 참. 이럴 땐 그저 고맙다고 하면 되는 거야. 능력 자각이 미숙한 정령왕보다야 천재 드래곤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 뭘 그래?” “뿌득. 너 지금 말 다했냐?” 화난 표정으로 따지려는 순간, 라피스는 잽싸게 문장이 새겨진 손등을 가리키며 투덜거리듯 한마디 내뱉었다. “아무튼 다음부턴 주의해. 난 내거에 흠집생기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네가 칠칠맞으니까 그 순간을 노리고 이렇게 떨거지들이 접근하는 거 아니야. 이거야 원, 잠시라도 눈을 뗄 수가 있나.” “물건취급하지 말랬지!” “그런 게 아니야. 난 너의 계약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뿐이라고.” “권리를 행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못하는 거냐!!” 지금의 대화를 누군가 들었다면 내가 이 녀석과 노예계약이라도 맺었는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 상황의 어디가 ‘물건취급’이 아니란 말인가? 하지만 라피스는 요지부동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했다. “‘난 이 땅에 필요한 마나를 너에게 주며, 넌 나의 보필자가 된다.’ 이게 네가 계약을 할 때 읊었던 맹세가 아니었던가? 그 말 한마디로도 넌 이미 충분히 내거야. 그래서 지금까지 네가 마음껏 마나를 가져다 써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거잖아. 내 말이 틀려?” “쳇! 어차피 그 정도론 꿈쩍도 하지 않는 주제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고 누가 그래? 겉으론 이래보여도 타격은 꽤나 심각했다고. 이 몸께서 인간 따위에게 ‘허약한 마법사’란 칭호를 들을 정도였으면 말 다한 거 아니야?” “풉- 허, 허약한 마법사? 누가? 네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대번에 감정이 상한 듯 라피스의 얼굴이 잔뜩 찌푸려졌다. “웃지 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안 그래도 만나면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마나가 대량으로 빠져나가서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이젠 또 필요하지도 않는 시큐엘들을 잔뜩 소환하지를 않나. 나~참.” “그건 그냥 심심해서…” “심심해서 날 죽일 생각이었냐? 게다가 뭐? 역소환? 그만한 수의 정령들이 역소환되면 얼마나 충격이 큰 줄 알아? 해츨링의 경우엔 그 즉시로 쇼크사하는 수준이라고! 그러고 보니 전에도 한 번 역소환 된 적 있었지? 넌 몰랐겠지만 그 시점에서 난 피를 토했어. 이게 장난으로 할 짓이야?” “그땐 장난 아니었어. 마신전의 신관들하고 싸웠을 때였단 말이야. 그런 일을 겪고도 한 번도 코빼기 비추지 않은 넌 뭐 잘한 게 있는 줄 알아? 하도 꿈쩍을 안 하길래 이만한 숫자로도 멀쩡할 줄 알았다. 어쩔래!” 솔직히 말하자면 녀석을 골탕 먹이려는 복수심리가 작용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자각이 부족하다곤 해도, 40이 넘는 정령들을 불러놓고도 라피스가 무사할 거란 생각을 할 만큼 아무것도 모르진 않았다. 그러니 이건 거의 대놓고 놈의 피를 말리려는 내 수작인 셈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지만. 그러자 나를 바라보는 라피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그려졌다. “호오~내가 보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야?” “사실대로 말해봐. 너 이런 식으로 마나를 펑펑 쓰다보면 화난 내가 따지러 올 줄 알았지? 그렇게 보고 싶었으면 그냥 솔직하게 전언을 보내도 되는 것을. 쯧쯧. 귀여운 녀석.” “…혹시 마나를 너무 많이 쓰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거야?” 황당하게 대꾸한 말과 다르게 어딘지 마음속에선 뜨끔한 심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마나를 펑펑 쓰기 시작했던 게, 녀석이 내 곁을 떠난 이후부터였던가? 말로는 제 실속만 챙기는 녀석에 대한 복수라고 중얼거렸지만, 진심은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이 녀석을 의지하게 돼버린 걸까? 찌푸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자,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아까보다 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어쨌든 벌 받은 셈 쳐!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았으니 그 정도는 가볍지 뭘 그래?” “내가 언제 가지고 놀았는데?” “에이프릴양 말이야! 그녀는 진심이었을 거 아니야! 갑자기 네가 떠나버리면 혼자 무슨 심정이 되겠어? 너 같은 녀석이 있기 때문에 멀쩡한 다른 남자들까지 욕먹는 거라고!” “어차피 꿈은 꿈일 뿐. 꿈속에서 잠시 상대한 여자가 진심일지 아닐지 알게 뭐람. 그런 것까지 마음 써 줄 정도로 내가 상냥한 성격으로 보여?” “하! 어련하시겠어.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엘퀴네스가 아니게 되면 필요 없다고 말할 녀석인데.”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생긋 웃으면서 내뱉는 말이라곤 하나같이 염장을 지르는 것뿐이다. 열 받은 나는 즉시 한 마리의 시큐엘을 불러내곤 그 자리에서 바로 역소환을 시켜버렸다. 놀란 라피스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곧 나는 비틀거리며 피를 토하는 놈의 모습을 즐겁게 구경할 수 있었다. “큭- 쿨럭, 쿨럭! 너, 너어~!” “쌤통이다! 누군 네가 좋아서 옆에 붙여두는 줄 알아? 나도 네가 드래곤이 아니었음 필요 없었어! 인간 강지훈을 우습게보지 말라고!” “하아…무슨 소리야? 너는 인간이 아니라 정령왕이잖아.” “어, 어쨌든!! 한번 만 더 잘난척 해봐! 그땐 이 몸이 친.히. 네 마나를 이용해서 역소환 되 줄 테니까! 뭐? 보고 싶었었냐고? 웃기고 있네! 여자나 울리는 비만 도마뱀 주제에!” 어이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준 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바로 일행들이 잠들어 있는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말로 피를 토했을 때는 좀 너무했나 싶기도 했지만, 나라고 언제까지나 참고만 있으리란 법은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이젠 또 녀석을 어떻게 회유시켜서 병을 고치게 만들지?’ 뒤늦게 미친 생각에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러고 보면 지금 세실의 병을 치료하는데 가장 필요한 녀석은 바로 라피스가 아니었던가! …아무래도 일이 수월하게 풀리기는 틀린 모양이었다. ========================================== 살가운 친구끼리의 의견충돌(?)을 펼치고 싶었는데..............어째서 알콩달콩한 사랑다툼이 떠오른단 말인가! 엘!! 너는 남자란 말이다, 남자!!!!! [정령왕 엘퀴네스] 7-8. 부탁 (4) 정체불명의 남자가 깨어난 것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동이 터오를 무렵이었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잠들어있는 상태였기에, 앞으로 라피스를 설득할 궁리로 밤을 새버린 나만 그가 눈을 뜨는 것을 발견했다. 서둘러 다가가 ‘괜찮으냐’고 물으니, 그때까지만 해도 이곳이 어딘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자가 헉-하고 짧은 숨을 들이켰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공간에서 내가 갑자기 말을 걸어 놀랐던 모양이다. “당신은…누구입니까?” 동요한 심정을 감추려는 듯 살짝 억누른 음성이 튀어나왔다. 생각보다 고운 음색을 보아 남자의 나이가 겉보기보다 그리 많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단은 진정시킬 요량으로 나를 살짝 미소 지으며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제 서야 바로 보게 된 남자의 눈동자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깨끗한 청록색이었다. 귀밑을 살짝 덮는 군청색 머리카락과 어울려, 그의 분위기를 한층 매력 있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됩니다. 바론 사막 부근에서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하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뿐이니까요. 일단 치료는 했습니다만, 혹시 달리 불편한 곳은 없나요?” “치료? 그, 그러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몸이 가뿐하군요. 혹시 사제님이십니까?” 정중한 말투와는 다르게 남자의 눈빛은 장난끼를 가득 담은 어린 아이같이 빛나고 있었다. 딱히 사제복을 입은 것도 아니었는데, 단번에 내가 치료했다는 것을 아는 걸 보면 눈치가 귀신같이 빠른 녀석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그렇습니다만, 제가 사제인 것은 어떻게 아셨어요?” “물론 알폰프 제국에서 아무 대가없이 타인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치료신의 사제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귀한 인연으로 경각에 다른 목숨을 구했으니, 신께서 아직 제 생을 포기 하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은인의 존함을 알 수 있겠습니까? 후세에까지 사례하겠습니다.” “예? 아, 아니…그러실 필요는 없…” “그럴 순 없습니다. 제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저는 그에 합당한 보답을 반드시 해야만 합니다. 사양치 말아주시고, 은인의 존함을 알려주십시오.” 이거 어째…뭔가 상당히 이상하지? 남자의 어투는 보통사람과는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귀에 거슬리는 건 아니었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심히 마음을 부담스럽게 만든 달까? 정작 본인은 그 점에 별로 어색해 하지 않은 걸 보면, 어릴 때부터 그런 말투를 사용하도록 교육을 받았음이 분명했다. 게다가 후세에까지 사례하겠다니! 그런 약속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사람이 과연 평민일 수 있을까? 눈앞의 남자가 카터스 황가의 사람이 확실하다고 판단한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릴게요. 저는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있긴 하나, 치료신의 사제는 아닙니다.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의 이름을 들어보셨는지?”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魔)속성의 신이면서 사제들에게 치유의 능력을 허락한 유일한 신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은인께서는 설마?” “네. 저는 형벌의 신을 모시는 사제 ‘엘’이라고 합니다. 엘뤼엔의 사제들은 일정한 시기가 되면 일반인들에게 선행을 베풀기 위한 치료수행을 떠납니다. 저 또한 그런 수련 중의 일부에 해당할 뿐이니 사례 같은 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당신의 이름은?”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실례를! 본인의 성명을 밝히지 않고 은인의 존함부터 들으려 하였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젠 폰 카터스라고 합니다. 알폰프 제국과는 끊어지지 않는 원한의 관계에 있다고는 하나, 오늘 날 저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에 후회하지 않으실 보답을 해드리겠습니다.” “…저어, 실례지만 카터스 제국 황가의 사람들은 모두 제국의 이름을 성으로 쓸 수 있나요?” 내가 알기로 제국의 이름을 성(姓)으로 쓸 수 있는 사람은 황가의 직계혈통. 즉, 황제의 친 자식들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단순히 황족만이 아닌, 황제의 아들이란 소리인데…계승권을 가진 황자를 호위하나 없이 적국에 보낼 제국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설마 카터스제국은 솔트레테제국과 방식이 다른가 싶어 조심스럽게 묻자, 남자는 무슨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쌈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직계혈통 외의 귀족은 아무리 황족이라 하여도 카터스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이 규칙입니다. 이것은 황법의 제 1조에도 규정된 사항이라, 훗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면 나머지 다른 형제들 또한 다른 성으로 바뀌는 것이 원칙이지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저어…문제는 물론 있지만…그게…으윽. 그, 그럼 당신이 카터스 제국의 황자…라는 건가요? 그, 그런데 다른 제국에서 그렇게 쉽게 이름을 가르쳐 줘도 되요?” “하하, 무슨 말씀이신가 했더니, 저를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군요. 맞습니다. 저는 카터스 제국의 황자입니다. 허나 생명의 은인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감추는 일은 도리에 맞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일로 훗날 은인께 문제가 생긴다면, 저와 저의 조국이 혼신의 힘을 다해 보호해드릴 것을 약조하겠습니다.” “…….”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조국을 들먹이는 걸 보면, 이사나의 말처럼 황위다툼에 패해 쫓겨난 황자인 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런 사람이 지난 몇 백년간 이어져온 철전지 원수의 제국엔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방문했던 걸까? 이전에 들었던 세리엄이란 마법사의 말에 의하면, 카터스 제국 황태자의 나이는 이사나와 같은 17세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아무리 봐도 20대인데…그렇다면 그보다 어린 황자를 황태자로 삼았다는 것일까? 큰 덩치완 달리 앳된 얼굴이나, 소년티를 벗지 못한 목소리가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려, 나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어…실례지만 지금 나이가?” “아! 올해로 17세입니다. 키가 커서인지 다들 나이를 들으면 놀라워 하지만요.” “십… 17세요? 저어…황자님들 중에 같은 나이가 또 있나요?” “하하! 쌍둥이가 아닌 이상 어찌 같은 나이의 형제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아버님은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달리 배다른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애석하게도 황족 중에서 17세는 저 혼자뿐입니다만.” “!!” 맙소사! 그럼 네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라는 소리냐!! 혹시나 했던 심정이 역시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앞의 ‘청년의 껍데기를 뒤집어 쓴 소년’을 바라보았다. 내 직감은 아까부터 녀석이 또 다른 제왕의 별이라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직 황태자의 신분이긴 해도, 나이나 실력 면에서 장차 이사나와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상대이지 않은가! ‘미안해, 이사나. 나 아무래도 네 라이벌을 스스로 끌어들인 모양이야. 이걸 어쩌지? 아하하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버려두고 올걸. 때늦은 후회로 비탄(悲嘆)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현재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으음. 일단 한 가지 알려드릴 일이 있어요. 카터스의 황자인 당신이 호위도 없이 적국인 알폰프에 무슨 일로 갔는진 모르겠지만…이곳은 알폰프 제국이 아닙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기절한 당신을 발견할 당시, 저와 일행들은 곧 그 장소를 떠나야 할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아픈 환자를 남겨두고 갈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곳까지 데리고 오게 된 겁니다.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원래의 장소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보내주신다니…그럼 이곳은 어디라는 것입니까?” 어리둥절하게 묻는 남자-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에게 나는 솔트레테의 국경부근이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태연하기만 했던 청록색 눈동자가 놀라움으로 크게 벌어졌다. “솔트레테? 그곳은 제가 쓰러져 있던 장소와 무려 2달은 족히 떨어진 거리일 텐데요. 놀랍군요.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기절해 있었습니까?” “아, 그게요…” “은인께 이런 추궁을 하게 되어 상당히 죄송스럽습니다만. 솔직히 말씀하십시오. 당신은 누구입니까? 정녕 사제임이 맞습니까?” “네?” 스르릉. 질문과 동시에 황태자의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검이 놀랄 만큼 재빠른 동작으로 뽑혀 나왔다. 목 끝을 정확히 겨누는 시퍼런 칼날에 당황한 내가 잠시 할 말을 잃어버린 사이, 그는 처음과는 달리 상당히 굳은 표정이 되어 대답하기를 촉구했다. “알폰프 제국에서 저의 정체를 눈치 채고 첩자를 풀었다는 소문을 들은 바 있습니다. 그런 오지까지 평범한 여행자무리가 지나갔다고 생각하기는 힘드니, 아무래도 의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군요. 어차피 당신이 아니어도 곧 알게 될 일이라면, 사양치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저기…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솔트레테라고 한 건 사실입니다. 저희 일행 중에 마법사가 있어서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했을 뿐이에요.” “마법사? 그런 고급 이동 마법이 가능한 자가 카터스 제국 외에…” 하지만 황태자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뒤에 나타나 검을 겨누고 있는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엘에게서 검 치워. 이 상태로 심장이 뚫리기 싫으면 얌전히 내려놓는 게 좋을 거다.” “!!” “이사나!” 도대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잠들어있었던 일행들이 모두 일어나 이쪽의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흉흉한 시선이 황태자에게 집중되자, 그는 난감한 듯 한숨을 내쉬며 위협하고 있던 칼을 천천히 바닥으로 내렸다. 당장이라도 끊어질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황태자와 이사나 사이에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황태자가 천천히 두 손을 들어 항복할 의사를 보이자 차가운 이사나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군. 카터스 제국에선 다 죽어가는 사람을 치료해준 은인에게 이런 식으로 대접 하나? 엘이 다정한 성격임을 감사해라.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칼을 든 그 즉시 죽음을 면치 못했을 테니까.” “…확실히 본인이 성급했던 것 같군요. 일단은 등에 겨눈 검부터 치워주시지 않겠습니까? 아무 짓도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황태자의 담담한 말에 이사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검을 거두어 들였다. 그 순간 잠깐 마주친 두 사람의 눈에서 파지직 불똥이 튀는 것 같은 느낌은 비단 내 착각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같은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외모였지만, 상대방을 노려보는 살벌한 눈빛만큼은 서로에게 전혀 뒤지지 않았다. 더 이상 내버려두었다간 감정싸움으로 번지게 될 것 같아 나는 얼른 미소 지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만 해, 이사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으니까. 아무래도 내 설명이 부족했었던 모양이야.” “엘의 잘못이 아니야! 설령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 않은 상대에게 다짜고짜 검부터 빼어드는 예의는 어느 제국에서도 가르치지 않아.”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지금의 일은 전적으로 본인의 실수였습니다. 낯선 장소에서 깨어나다 보니 조금 신경이 예민해졌던 모양입니다. 은인께 이런 무례를 끼치게 되어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사과드리겠습니다.” 황태자는 진심으로 뉘우친 얼굴로 깔끔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그러자 이사나도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었는지 잔뜩 굳어있던 표정을 조금 푸는 듯 했다. 자칫하면 피를 볼 뻔 했던 일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기미가 보이자 저 너머에서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바라보고 있던 데르온이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그러면서 품에 안고 있는 알을 향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 아닌가. “주군은 절대 저러시면 안 됩니다. 사나이는 의당 한 번 칼을 뽑았으면 피를 봐야 하는 겁니다. 나중에라도 덤비는 마족이 생겼을 땐 그 놈이 죽을 때까지 족치십시오. 이 데르온이 목숨을 걸고 보필하겠습니다.” 설마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향해 태교라도 할 셈이냐! 그나마 낮은 목소리라 나 외에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살짝 흘긴 눈으로 데르온을 노려봐준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조금 놀란 것뿐이니까. 아까 첩자가 있단 소문을 들으셨다고 했죠?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의심하는 게 무리가 아니죠. 그보다 일단은…배고프지 않아요? 며칠 동안 아무것도 드신 게 없는 것 같은데. 식사부터 하고 다시 이야기 하도록 하죠.” “네? 하지만…” “저희들은 대부분 솔트레테의 제국민으로, 알폰프에는 던전을 탐험하기 위해 갔던 것뿐입니다. 카터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마음 편히 하셔도 되요.” “으음.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실례되는 질문 하나 해도 괜찮겠습니까?” “뭔데요?”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지금까지 담담하기만 했던 황태자의 얼굴에 묘한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쑥스러운 기색을 담은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저기…그러니까…으음. 그러니까 사제님은…” “…?” “저어, 형벌의 신의 사제님이시라면…남자인 게 틀림없습니까?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현재의 제게 굉장히 중요한 문제라서 말입니다.” “…쿨럭!” 나의 성별이 뭣 땜에 중요한 건데!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치밀었지만 어쩐지 대답을 듣지 않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오해를 당한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그때마다 일일이 화를 낼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나는 키득거리는 주변의 일행들을 무시하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듣기로 엘뤼엔의 사제 중 여자는 없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역시. 여사제가 있는 신전은 꽃의 여신을 섬기는 프라워스의 사제들밖에 없는데…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정말 실례가 많았습니다. 뭐라 사과를 드려야 할지.” “괜찮아요. 이렇게 생긴 제 탓도 있으니까.” “아닙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긴 뭣하지만, 사실 제가 그곳으로 간 이유는 저의 반려를 만나게 될 거라는 점술사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때 그가 말하길, 위험한 순간에 처했을 때 그녀가 저의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해서….” “엥?”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때 만약 알리사가 쓰러져 있던 황태자를 발견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곳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결국 치료한 사람이 누가됐던, 그녀가 황태자의 목숨을 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었던 것이다. ‘맙소사. 너 정말 제왕의 별이었냐?’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상 제대로 확인하고 나니 참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가장 황당한 것은, 단순한 점술사의 말 한마디 때문에 적국의 국경을 넘어버린 그의 무대포 적인 행동이었다. 지금쯤 카터스 제국의 황실은 벌컥 뒤집혀 있지 않을까?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엉뚱한 성격일지도…’ 왜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특이한 걸까. 아니 그것보단, 이번 유희에서 정상적인 인간을 단 한사람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이 기구한 운명에 대해 마음 놓고 한탄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다. 일행들과 가장 멀리 떨어진 침대에 잠들어 있던 알리사가 눈을 뜨고 일어났던 것이다. “우웅.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아, 알리사. 이제 일어났니?” “응…어라? 그때 그분 깨어났네? 몸은 괜찮으세요?” “!!”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굽이치는 황금색 머리카락. 크고 맑은 주황색의 눈동자와 체리 같은 붉은 입술. 그동안 본의 아니게 미인들에 익숙해진 까닭에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누가 보기에도 알리사는 장차 앞날을 예측하기가 두려울 정도의 미소녀임이 확실했다. 그러니 한창 나이의 황태자가 보기엔 어떻겠는가!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달려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알리사의 두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당신이었군요! 점술사가 말했던 운명의 반려가!! 아름다우신 레이디의 고귀한 성함을 들을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네…네? 무, 무슨? 아, 일단 저는 알리사노라고 하는데…”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젠 폰 카터스! 알리사노양! 감히 청 하건데, 부디 저의 아내가 되어주시지 않겠습니까? 허락만 해주신다면 카터스 제국의 부귀와 영화를 영원히 약조하겠습니다!” 쿠웅! 순간 원자폭탄이라도 떨어진 듯한 광음이 울린 듯 했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이사나는 말할 것도 없고,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일행들 역시 멍하니 입을 벌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알리사가 일어나기 전까진 멀쩡하게 보였던 인물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더 컸다. 만난 지 1분도 안돼서 청혼이라니, 당신 제정신이야?! 그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듯한 청혼에 대한 결과는 이러했다. “꺄악! 이 사람 뭐하는 인간이야? 미친 거 아냐?” “아, 알리사노양. 저의 진심은 그게…” “진심 좋아하네! 저리 안 꺼져? 다들 뭘 구경하고 있어? 이 사람 좀 끌어내! 얼른!!” 알리사의 성격이 걸걸하다는 것에 이렇게 감사한 순간이 또 있을까?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이사나를 보며 나 또한 덩달아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제왕의 별은 두 개. 반려의 별은 하나. 그 본격적인 라이벌전의 첫 장이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 이전에 한 번 심심해서 엘퀴네스의 등장인물들을 그림으로 그린적이 있었답니다. 남에게 보이긴 민망한 실력이지만, 마땅히 놔둘 장소도 없고 해서 그냥 컴퓨터 위에 올려진 탁상달력앞에 붙여뒀는데... 무심코 고개를 들때마다 엘뤼엔이 저를 노려보더군요. 허허허.. 등장 안 시켜줘서 삐진건가...(먼산) <-노려보는 얼굴로 그린 네 탓이잖아! ※잠깐 공지※ 내일은 연재 쉽니다아~냐하하하하~<-퍼억! [정령왕 엘퀴네스] 7-9. 부탁 (5) 텐트의 소란스러움을 뒤로하고 나온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나무에 기대고 선 라피스의 강렬할 정도로 타오르는 시선이었다. 설마 밤새 내내 저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당장이라도 돌아 가버릴 줄 알았던 그가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에 대해선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이제부터 녀석을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라피스의 입가에 불길할 정도로 환한 미소가 그려졌다. “좋은 아침이지, 엘? 기분 풀렸으면 어제 못 다한 대화나 마저 하는 게 어떨까?” “…아하하. 나, 나는 별로 할 말이…” “호오. 정말 그래? 분명 요 앞에서 만난 사제의 말에 의하면 나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쿨럭! 카, 카이씨를 만났어?” 당황한 내 표정에 라피스는 입술에 더욱 진한 호곡선을 그렸다. 이미 그로부터 대강의 사정을 들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있는 얼굴이다. 저런 식의 녀석을 설득하기에는 나로선 아직 쌓인 내공이 너무도 부족했다.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 알았다고.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네가 좀 도와줘.” “아쉬울 때만 사과하는 거냐? 그것 참 편리한 사고방식이군.” “젠장, 그럼 날더러 어쩌라고? 솔직히 말해서 어제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네 쪽이었잖아?”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엘퀴네스’이기 때문에 필요한 거라며! 그런 말을 듣고도 참는 게 더 바보 아니야? 넌 내가 무슨 감정표현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로 보이는 모양인데! 세상 어느 인간도 자신의 신분만 보고 따르는 사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네가 그런 경우와 뭐가 달라?” 더 이상 참지 못한 내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자 라피스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이것으로 어제의 연장전이 벌어지는 건가 싶었지만, 녀석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뭐야, 그것 때문에 화난 거였어? 하지만 너도 내가 드래곤이기 때문에 계약한 거라며. 그럼 서로 피장파장 아닌가?” “그, 그래도 네가 드래곤이 아니면 필요 없다는 말은 안했어!” “흐음, 나쁘지 않은데? 그럼 만약 이번과 같은 일에 쓸모가 없었어도 일행으로 받아들였을 거라는 소리야?” “결과적으론 그랬겠지! 네놈이 끝까지 쫓아다녔다면!” 한손으로 척-가리키며 소리치는 말에 라피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리곤 생뚱맞게시리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니까 나도 그런 것 같다.” “뭐, 뭐가 그렇다는 거야?” “너랑 비슷한 심정이라고. 처음엔 엘퀴네스라서 계약한 거였는데…지금 일정이 재미있는걸 보면 굳이 네가 정령왕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느낌이야.” “필요 없다고 할 땐 언제고?” “그거야 물론 나에게 있어 너의 ‘정령왕으로서의 역할’은 필요 없어지겠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정령왕으로서의 역할?” 그게 뭔데? 라는 시선으로 빤히 쳐다보자 라피스는 뻔뻔하리만큼 당당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를 돋보여줄 최고의 장신구.” “이런 썩을…내가 악세사리냐?”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드래곤들이 그런 식일 걸? 솔직히 드래곤이 굳이 정령과 계약할 필요가 뭐있어? 다 자기들 앞가림 할 수 있는 존재들인데. 단지 ‘이런 대단한 존재’와 계약한 자신을 자랑하고 싶은 것뿐이라고.” “하, 그러셔?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네! 그래서 세실의 병은 고쳐줄 거야, 말거야?” 냉큼 ‘싫다’고 거절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라피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건지, 입가엔 희미한 미소까지 그려져 있는 상태였다. 내심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지. “내 힘이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지 구체적인 건 아직 몰라. 대체 무슨 병이기에 100%의 치유력을 가진 너를 뒷전으로 하고 나한테 부탁하는 건데?” “아아, 혹시 하이 엘프와 인간의 혼혈을 본 적 있어?” “하이 엘프? 그런 미친 짓을 누가 해? 십중팔구 저주받은 아이가 태어날 텐데. 혹시 내 힘이 필요하다는 게 그것 때문이야?” “응. 여기 오기 전에 엔딜이라는 하이 엘프와 친해졌는데, 그 녀석 여동생이 인간과의 혼혈이더라고. 가능하면 내가 치료해보려고 했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서 말이야. 폴리모프 마법이라면 종족까지 바꿀 수 있으니까 가능하지 않을까?” “흐음, 그거야 그렇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문제라니?” 설마 드래곤의 능력으로도 불가능 한 걸까? 나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이어질 라피스의 말을 기다렸다. 녀석은 곧 별것 아니라는 듯 가벼운 투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이 엘프는 엘프 중에서도 선택된 종족이야. 드래곤이 유일하게 폴리모프로 변신할 수 없는 존재라고나 할까. 아니, 안한다는 말이 더 옳겠군. 그 모습을 유지하려면 마나를 너무 많이 잡아먹어서 조금 힘들거든.” “에? 그럼 세실을 엘프로 만들긴 어렵다는 거야?” “엘프는 상관없어. 하이 엘프가 어렵다는 거지. 하지만 그 오빠라는 녀석이 하이 엘프라며. 동생이 평범한 엘프가 되는 걸 용납하겠어?” “그게 뭐 어때서? 인간들로 치면 귀족과 평민 정도잖아? 그런 걸 이해 못할 정도로 속 좁은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동생이 살아나면 충분한 거 아냐?” “호오, 하이 엘프들은 대체로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그 녀석은 아닌가 보지?” “아무렴 드래곤만 할까. 넌 네 형이나 동생이 다른 종족이 되었다고 하면 싫어할 거야?” 그러자 라피스의 입가에 화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워서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소원이 없겠군. 그 꼴 보기 싫은 면상을 다시는 보지 않도록 세상에서 영원히 잠재울 수 있을 테니.” “…쌓인 게 많은 모양이지?” “아니, 별로. 난 그저 나보다 모자란 녀석이 형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게 마음에 안들뿐이야. 내 아버지인 라이칸은 세상에서 가장 큰 두 가지 실수를 저질렀어. 그 중 하나는 메테녀석을 이 세상에 탄생시킨 일이고, 두 번째는 나를 그놈의 동생으로 태어나게 한 일이다. 하여튼 빌어먹을 도마뱀들 같으니! 난 세상에서 블랙 드래곤이 제일 싫어!” 나는 나중에 그 메테라는 드래곤을 만나게 되면, 지금 이 말을 똑같이 이름만 바꿔서 듣게 될 것이라는데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원래 사이 나쁜 형제들치고 한쪽에만 잘못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니까. 특히나 라피스처럼 성격 좋지 않은 녀석이라면 더더욱. ‘그나저나…라피스한테 형이 있다니 의외인 걸? 하도 제멋대로라 외아들일줄 알았는데. 블랙 드래곤이라고 한걸 보면 친형제는 아닌 것 같은데…나중에 한번 볼 수 있으려나?’ 형제싸움에 대해선 그다지 좋은 기억이 없지만, 어쩐지 라피스와 그의 형이라는 드래곤의 격돌은 재미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킥킥거리고 웃는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무시하며, 나는 지금쯤이면 일어나있을 엔딜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인간과 어울려 산다곤 해도 녀석은 엘프였기 때문에, 마을과는 멀찍이 떨어진 숲 쪽에 주거를 마련하고 있었다. 낡고 초라한 판자집 주위엔 볼품없이 삐쩍 마른 나무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서인지 어딘지 모르게 생기가 있어 보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와 함께 문을 열려는 순간, 벌컥 소리가 열리더니 그보다 먼저 엔딜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녀석은 평소보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얼굴 가득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 엘퀴네스님!! 잘 왔어. 나, 나 말이야!” “안녕, 엔딜. 잘 잤어?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있잖아! 나 방금 시큐엘을 소환했어! 내가 다시 시큐엘을 소환하게 됐다고! 다시는 정령을부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느낌이 열나게 좋아서 시도해 봤더니 정말로 된 거야! 믿을 수 없어! 호, 혹시 엘퀴네스님이 도와준 거야? 어제 이마를 짚은 건 그래서였지? 그치?” “헤에. 생각보다 이른걸. 좀 더 늦게 눈치 챌 줄 알았는데. 그동안 꾸준히 소환을 시도하고 있었구나?” “당근이지! 시큐엘은 내 유일한 친구였는걸! 그녀석이 없어지고 나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소환주문을 외웠었다고. 근데 정말 엘퀴네스님이 도와준 거야? 정령왕은 그런 것도 가능해?” 초롱초롱 빛나는 엔딜의 얼굴을 보며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내가 한 일이라곤 친화력을 높여준 것 밖에 없었지만, 이전처럼 불완전한 소환으로 엔딜의 육체에 무리가 가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펄쩍뛰는 녀석의 뒤에 낯익은 시큐엘 한 마리가 다소곳하게 서 있는 것을 발견한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되어 황급히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있어, 엔딜. 세실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아.” “뭐? 그, 그게 정말이야? 그럼 드래곤님이 오신거야?”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던 녀석은 그제 서야 내 뒤에 시큰둥하게 서있는 라피스를 발견했는지 헉-하고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기도 모르게 꼬옥 내 팔을 붙드는걸 보니,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어지간히도 무섭긴 무서웠던 모양이다. 그래서였을까? 녀석은 이어지는 설명에도 별다른 꼬투리 없이 무조건 고개부터 먼저 끄덕였다. “…그래서 세실을 하이 엘프로 만들 순 없을 것 같아. 보통 엘프로는 가능하다는데, 어때?” 끄덕끄덕 “물론 원한다면 인간이 되는 것도 가능해. 일단 그 아이의 의견도 들어와야 할 것 같은데. 세실은 일어났니?” 끄덕끄덕 “나 참, 엔딜. 그렇게 고개만 끄덕이지 말고 뭐라고 말 좀 해봐. 넌 어떻게 하면 좋겠어?” 끄덕끄덕 상태를 보건데 절대 정상은 아니다. 난감한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랑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이 모든 사태를 마법에 걸릴 본인과 상담하기로 결정지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엘님. 라피스님도 함께 오셨군요. 어서 오십시오.” 집안으로 들어가자 세실에게 미음을 먹여주던 카이씨가 반가운 표정으로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고열 때문인지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대고 있던 여자아이가 겁먹은 얼굴로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건 잠시였을 뿐, 나와 라피스를 바라본 소녀는 곧 감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와아…천사님들이다.” “쿡쿡. 안녕, 세실. 만나서 반갑다. 몸은 좀 어때? 많이 아프니?” “아니요. 세실은 괜찮아요. 늘 이런걸요. 이제 견딜만해요. 그런데 천사님들은 어디에서 오셨나요? 혹시 절 데려가기 위해서 천국에서 오신 거예요?” “아, 우리는 천사가 아니야. 세실을 치료해 주려고 온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치료요? 그럼 제 병을 낫게 해주신다는 말인가요?” 열에 달뜬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희망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본 나는 생긋 웃으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옆에선 라피스가 이런 건 내 취향이 아니네 뭐네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 있는 이 붉은 머리의 오빠가 병을 낫게 해 줄 수 있대. 근데 치료법이 굉장히 특이해서 병이 나으면 외모가 조금 바뀌게 될 것 같아. 세실은 엘프가 좋으니, 인간이 좋으니?” “엘프? 인간?” “인간은 여기 있는 카이씨같이 생긴 사람이고, 엘프는 네 오빠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야. 병이 나으려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해.” 그러자 세실은 고민스런 얼굴로 연달아 엔딜과 카이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초롱초롱한 소녀의 눈빛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이전에 저를 가끔씩 돌봐주시던 캔디 아주머니한테서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이 뭔지 들었어요. 인간은 오빠처럼 오래 살 수 없지요? 아주머니는 자신이 인간이라서 오빠보다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었어요.” “응, 맞아. 엘프가 더 오래 살아.” “그럼 전 엘프가 될래요. 제가 인간이 되면 오빠보다 먼저 죽게 되잖아요? 슬퍼하는 오빠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라피스에게 따로 들은 바에 의하면, 세실은 엘프가 되어서도 엔딜보다는 오래 살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원래 혼혈들은 순수 엘프보다 오래 살수가 없고, 마법으로 엘프가 되었다고 해도 수명까지 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드래곤인 라피스가 인간으로 폴리모프 해도 오래 살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럼 세실이 인간으로 변해도?” “결과는 똑같아. 하지만 보통 인간보단 오래 살게 될 테니 차라리 엘프로 변하는 게 나을 걸? 마법으로 종족이 변한다 해도 본래 특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아마 꽤 오랫동안 젊음을 유지하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마녀라고 오해를 당할지도 모르지. 생명의 탄생이나 수명에 관계된 건 신의 영역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완벽한 드래곤의 마법이라도 건드릴 수 없어.” 헤에, 그럼 엘뤼엔은 가능하다는 걸까? 무심코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뚜렷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물론 가능하지. 이 아버지가 그런 일 하나도 못할 거라 생각 했냐, 아들?> ‘어? 에, 엘뤼엔? 지금 안 바빠?’ <아아, 나라도 잠깐 쉴 틈은 있어야지. 그런데 아직도 그 썩을 도마뱀과 같이 다니는 거냐?> 던전에서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오랫동안 못 만난 기분이다. 차가운 냉기가 풀풀 느껴지는 말에 나는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그게…어찌됐든 일행은 일행이니까.’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오냐오냐 받아주다간 너만 더 피곤해질 거다. 적당히 상대해주고 끊어버려. 관심이 애정이 되고, 그게 더 심해지면 집착이 되는 거야. 근데 아무리 봐도 저 도마뱀은 이미 그 단계도 넘어서버린 것 같다. 쯧쯧, 어쩌다 저딴 놈에게 걸려가지고선.> ‘윽. 그게 어디 내 탓이야? 엘뤼엔이 예전에 한번이라도 계약을 해줬으면 이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거 아냐!’ <누가 그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질 줄 알았냐? 이런 후환이 될 줄 알았으면 그때 그냥 없애두는 건데. 참, 카노스 녀석은?> ‘아, 따로 조사할게 있다면서 다시 마계로 돌아갔어. 근데 아까 했던 말 사실이야, 엘뤼엔? 세실의 수명을 늘여줄 수 있어?’ <그렇긴 한데…부탁할 생각은 말아라. 인간이던 엘프던, 살아가는 것엔 전부 정해진 궤도가 있는 법이야. 병을 고쳐준 것만으로 너는 충분히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둬.> ‘에? 하지만…’ <나를 이용해서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오직 너에게만 해당할 뿐이야. 다른 녀석들까지 끌어들이진 마라. 안 그래도 충분히 바쁘니까.> 냉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그것이 나를 걱정해서 한 소리라는 것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번만큼은 나 역시 고집부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납득한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을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라피스가 곧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뭘 그렇게 혼자서 생각해? 아무튼 빨리 결정이나 내려. 마법 걸어, 말어?” “응? 아아. 부탁해, 라피스. 세실을 엘프로 폴리모프 시켜줘. 아이들도 그것을 원하니까.” “맡겨만 둬. 이런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세실이 엘프로 변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라피스의 입에서 ‘폴리모프’라는 한마디가 내뱉어진 순간, 아이는 어느새 온전한 엘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모 면에선 크게 달라진 게 없었지만, 보통의 엘프보다 조금 뾰족 했던 귀가 이제는 오빠인 엔딜 만큼 길게 자라 있었다. 거울 속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연신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실은 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빠! 나 이제 안 아파! 열도 안 나고, 하나도 어지럽지 않아.” “그게 정말이야, 세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환한 표정으로 기뻐하는 동생의 모습에, 엔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굵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꼭 끌어안은 어깨는 격한 흐느낌을 참느라 아까부터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이 더 많은 남매였지만 나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 않았다. 저 둘이라면 반드시 잘 해나갈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 시~~작! [정령왕 엘퀴네스] 7-10. 부탁 (6) “루카! 다시 돌아오신 겁니까?” 마계 4대 공작의 하나이자, 마족의 알에 대한 총책임의 임무를 맡고 있던 쟌은 지금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마왕의 명령을 받은 후 벌써 몇 달째 소식이 끊겼던 루카르엠이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다시 마계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멀리서 걸어오는 경쾌한 발걸음의 남자가 루카임을 한눈에 알아본 그는, 놀란 표정으로 다가가 황급히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언제 봐도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눈동자가 장난끼를 가득 담은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어~ 쟌! 오랜만이군요. 그 동안 잘 지냈습니까?” “지금 그런 한가한 인사를 할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대체 어찌 되신 겁니까? 정말 다시 돌아오신 건가요?” “어라라? 마족인 제가 마계에 오는 것이 무슨 큰일 날 일이라고 그렇게 놀라시는지? 혹시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변고라도 있었습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쟌에게 있어 루카는 마신의 대리자이자 마계를 지배하는 또 하나의 왕이었다. 말투나 행동이 가볍다는 이유로 대부분의 마족들이 그를 기피했지만, 실제로 쟌은 이제까지 그보다 더 무서운 존재를 만나보지 못했다. 그보다 더 겉과 속을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이는 없으리라! 이미 한참 전부터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힌 루카르엠에 대한 정의는 이러했다. ‘마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사명을 부여 받은 자!’ 실제로 역대의 마왕들 중, 루카의 눈치를 보지 않는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때문에 쟌은 이제껏 그가 마신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아 내려온 신의 사자(使者)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 그가 마계를 떠났다는 말을 들었을 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던가! 당장이라도 마신의 분노가 임할 거라 생각했지만, 이렇듯 아무 일 없이 다시 돌아온 루카를 보니 반가운 감정보다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마신께서는 아직 마계의 멸망을 유보하시는 건가? 어쩌면 우리 마족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걸지도 모른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그는 곧 낭패한 얼굴로 루카를 바라보았다. 붙잡은 것 까진 좋았는데 막상 그를 불러 세운 마땅한 사유가 대자니, 떠오르는 것이라곤 이번에 탄생할 마족의 알이 전부 파괴된 사건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마왕의 짓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 해도 쟌 스스로가 맡은 바 챔임을 다하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로부터 힐책을 면하리란 기대는 할 수 없었다. 평소에도 마왕의 진노보단 루카의 사소한 꼬투리를 더욱 두려워하던 그로서는 차마 자신의 입으로 꺼낼 수 없는 화재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언제고 알게 될 일이란 생각에 쟌은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까지도 루카는 그의 하는 양을 즐거운 기색으로 지켜보고만 있었다. “실은 부화시기를 앞둔 알들이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흐음. 그건 곤란한데요. 숲의 통제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당신의 임무 아니었습니까? 평소 관리를 어떻게 하였기에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관하셨는지?” “입이 백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4대 공작의 지위를 반환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마계에서 지위의 반환이란 유보 없는 영원한 죽음을 뜻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쟌의 모습에 루카는 살풋이 웃으며 대답했다. “어라라? 살벌하셔라~ 그런 일 가지고 일일이 자리를 내놓는다면 이때까지 목숨이 남아나는 마족은 하나도 없을 겁니다. 알들이 파괴된 사건이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지? 설마 마왕전하께서 그리 하라 명령하셨습니까?” “예? 아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면 쟌도 배 째라는 심보로 버티세요. 뭐 어떻습니까? 사실 알만한 마족이라면 이번 일의 배후쯤이야 눈감고도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언제나 물증이 없어서 답답할 뿐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며, 면목이 없습니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면서도 그는 어쩐지 가볍게 넘어간다는 생각이 들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까지 루카는 알이 파괴될 때마다 책임자를 불러 가혹한 추궁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평소엔 꽃을 가꾸거나 저택에서 홀로 독서를 즐기는 그였지만, 그때만큼은 암흑의 기사라는 별명답게 두 손에 피를 묻히는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존재에게서 면책부를 받게 되다니! 평소에도 루카에 대한 존경심이 남달랐던 쟌으로서는 눈물이 날만큼 감동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그의 두 눈에선 이전에 데르온을 가볍게 가지고 놀던 성질머리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만약 이 장면을 데르온이 지켜봤다면 헛것을 봤다며 몇 번이고 눈을 비볐을 것이다. 그것은 우연히 그 자리를 지나가던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 저건 쟌이잖아? 저 싸가지 없는 놈이 어울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고…대체 무슨 일이지?’ 좀처럼 볼 수 없는 진귀한 구경거리란 생각에 세르피스는 감히 다가가 아는 척 할 생각을 못하고 근처에 있던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곧 쟌의 앞에 서있던 훤칠한 키의 남자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헉! 저 녀석은 루카르엠? 중간계로 나가자마자 행방불명되었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다시 돌아온 거지? 마왕전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시나?’ 정상적인 보통 마족이라면 마계에 돌아온 즉시 마왕을 배알했을 테지만, 루카가 어디 정상적인 마족이었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명령이라도 가볍게 무시하는 존재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세르피스는 마왕이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녀의 입가엔 곧 화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호호호~ 내가 먼저 가서 알려줘야지. 안 그래도 요즘 루카와 연락이 끊어졌다고 길길이 날뛰던데, 이 소식을 들으면 까무러치게 놀라겠지? 이런 식으로 천천히 신임을 사다 보면 분명히 그의 빈틈을 노리는 순간이 오게 될 거야. 데르온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왕의 자리는 내가 받아야겠는 걸?’ 그가 이미 처량한 유모의 길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세르피스는, 생긋 웃으며 왕의 거처로 이동하는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웠다. 스르륵! 어둠속으로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자 그때까지도 쟌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루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쥐새끼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데 말이지.”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아아, 별거 아닙니다. 당신은 이만 가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상당히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것 같으니 말입니다.” “…?” 쟌을 돌려보낸 후에도 루카는 얌전히 그 자리에 서서 나타날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갑자기 검은 밧줄이 달려들어 그의 온몸을 꽁꽁 결박하기 시작했다. 마치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에 강한 마력이 담겨있음을 알아본 루카는 별 다른 저항은 하지 않은 채,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마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씩씩거리는 폼새를 보건데, 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분을 못 참고 달려온 것이 틀림없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 과격해지셨군요, 마왕전하.” “닥쳐라! 그 뻔뻔한 낯짝을 잘도 가지고 돌아왔구나! 내가 명한대로 정령왕의 계약자는 해치운 것이냐?” “아~ 그게 실은 깜빡 잊어버려서요. 중간계에 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어찌나 신기한 것이 많은지…구경하다 보니 이리 늦어버리고 말았지 뭡니까? 하하!” “가당치도 않은 수작 따윈 집어 치워라! 데르온은 어찌 했느냐? 네놈을 감시하기 위해 보냈던 마도의 군주 데르오느빌 말이다! 설마 죽인 것은 아닐 테지?” “데르온 말입니까? 글쎄요. 쫓아오지 말라고 몇 번 가볍게 쓰다듬어 주긴 했습니다만.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뭐, 그리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허약한 마족이 죽는 건 흔한 일 아닙니까?” “네놈이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데르온의 일이 아니었다 해도 너는 왕의 명령을 불이행한 죄 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네놈이 진작부터 나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 밧줄에 담겨진 마력은 순수한 왕의 계승을 치룬 자만이 파괴할 수 있으니 서툰 수작은 부리지 말아라! 내 이손으로 친히 네 온몸을 갈갈이 찢어 죽이고 말겠다!” 격렬하게 진노하는 마왕의 목소리에도 루카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사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이까짓 밧줄쯤은 얼마든지 끊어낼 수 있었다. 마신인 그가 마계에서 하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지금 그가 아무리 이를 간다 해도 생각만큼 쉽게 자신을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한심한 녀석. 결국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나.’ 지금은 저래보여도 마왕역시 한때는 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총명한 아이였다. 장차 훌륭한 왕이 될 거란 생각에 지켜보는 내내 얼마나 뿌듯해 했던가! 하지만 그는 자랄수록 권력과 욕심만 앞세운 인물이 되고 말았다. 역시 마족이란 종족은 어쩔 수 없었다고나 할까? 지금 순순히 잡혀주는 이유는 마계내부에서의 조사를 좀 더 수월히 하려는 의도였지만, 한 때나마 아끼던 녀석을 의심하는 기분이 편할 리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마계에서는 마도의 기사 루카르엠이 봉인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 “이게 뭐지?” 같은 시각, 신계에 있던 엘뤼엔은 상급신들로부터 한통의 작은 서신을 받았다. 안 그래도 바쁜 와중이라 짜증이 치솟았지만, 주신의 인장까지 찍혀진 것을 안 볼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엘뤼엔은 불쾌한 표정으로 손에 들린 편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서신을 가져온 천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번 회의에서 내려진 결정을 통보하는 서신이라고 합니다.” “회의?” “네, 그렇습니다. 악신의 탄생에 대한…” “아아, 그것 말인가. 확실히 회의가 열린다는 말은 들었지. 일 때문에 바빠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흐음, 뭔가 그럴듯한 결정이라도 내린 건가?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는걸 보면.” 흥미로운 얼굴로 중얼거린 그는 이제 그만 나가보라는 뜻으로 천사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주변에 있던 수행원들이 모두 물러나자, 엘뤼엔은 그때서야 차분하게 서신을 감싸고 있던 겉봉투를 뜯었다. 얇은 감촉과는 달리, 편지의 내용은 눈이 아플 정도로 빽빽한 글자로 무려 10장 가까이 이어져 있었다. 사안이 워낙 중요했던 탓에 회의 중에 있었던 모든 대화들을 빼놓지 않고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할 말만 정리해서 써도 될 것을…. 하여튼 융통성 없는 녀석들 같으니.” 찌푸린 표정을 하면서도 잠자코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엘뤼엔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살벌하게 변한 눈빛은 아까부터 편지에 적힌 마지막 문장만을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들은 형벌의 신인 당신을 이번 일에 가장 합당한 자격을 갖춘 존재로 인정했습니다. 허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의견일 뿐이니,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의를 제기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우습게도 회의에서는 악신의 제거에 필요한 희생자로 이제 겨우 신이 된지 26년 밖에 되지 않은 엘뤼엔을 선택했다. 이유인 즉, 그가 한때 신이 아닌 인세(人世)를 걷기를 소원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소멸이 된다 해도 주신의 배려에 따라 다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을 테니, 탐탁지 않은 신의 자리를 버릴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니냐는 소리였다. “호오~ 그렇게 나오시겠다?” 물론 예전이었다면 그도 별다른 반감 없이 받아들였을지 모른다.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는 영원의 삶에는 더 이상 어떠한 미련도 호기심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지 않은가! “날더러 멀쩡한 아들내미를 놔두고 인간이 되라고? 이 썩을 것들이 누구를 호구로 알고!!” 한 번 소멸의 과정을 거친 존재는 다시는 신의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한 마디로 엘과는 영혼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지 게 되는 것이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만큼 그는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달랑 편지 한통을 보낸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안이한 태도 자체가 괘씸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 해도 상관없다고 했던가? 엘뤼엔의 입가엔 곧 차가운 미소가 흐르기 시작했다. “날 지목한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아마 조만간에 다시 회의를 열어야 할 거다. 네놈들 모두가 내 손에서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는 형체도 알 수없이 구겨진 종이뭉치가 볼품없이 그의 발아래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1. 새로운 바람 (1) 동생의 병은 나았지만 엔딜은 앞으로도 엘프의 숲에 돌아갈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이집에 살면서 적당한 장사거리를 찾아볼 거란 말에 나와 카이씨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남매를 바라보았다. 이(異)종족인데다, 아직 어리기 만한 두 사람이 과연 언제까지 타인의 시선을 피해 살아갈 수 있을까 염려스러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부득이하게 괜찮다고 우기는 아이들을 억지로 숲에 보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표정 안 해도 돼, 엘퀴네스님. 지금까지도 잘 해왔는걸? 나 이래봬도 힘이 꽤 세서 마을에 가면 구할 일자리도 많아. 이종족의 차별이 없다곤 못하지만, 다른 곳에 비하면 심한 편도 아니고.” “으음. 그러지 말고 차라리 우리랑 같이 가는 게 어때? 일자리라면 내가 알고 있는 상단 사람이 있으니까 소개시켜 줄 수 있어. 대우도 좋고, 급여도 많을 거야. 내가 보장할게.” “아니,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엘퀴네스님 한테는 이미 많은 걸 받았잖아. 더 이상은 신세질 수 없어. 그리고 이곳은 엘프의 숲하고도 가까워서, 솔직히 떠나고 싶지 않아. 아무리 미워도 일단은 내 동족이고, 부모님이 살고 계신 곳이니까. 지금 이곳을 떠나면 앞으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 같거든.” “하지만…” “괜찮아. 그리고 지금은 시큐엘도 다시 돌아왔으니까, 나쁜 새ㄲ…아니, 나쁜 사람들이 세실을 건드리는 일도 없을 거야. 헤헤. 그러니까 엘퀴네스님은 걱정 하지 마. 다 잘할 수 있다니까?” 이렇게까지 말하니 나로선 더 이상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단호한 남매의 표정을 본 나는 피식 웃으며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 잘 해왔다는 네 말을 믿을게, 엔딜. 나중에라도 필요하면 시큐엘을 통해 연락 해. 바로 달려올 테니까.” “으응, 고마워 엘퀴네스님.” “뭘 그 정도 가지고. 근데 이 집은 너무 낡아서 앞으로 계속 살려면 보수가 필요 하겠는데? 이것도 마법으로 가능할까? 어라? 카이씨, 라피스는 어디 갔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걸 확인했는데, 지금은 어디로 갔는지 그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진 상태였다. 혹시 내가 또 부려 먹을까봐 미리 도망친 거 아니야? 카이씨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인 듯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내내 지루한 것 같으시더니, 잠깐 산책이라도 하러 가신 게 아닐까요? 그보다 엘퀴네스님. 괜찮으시다면 저도 이곳에 남고 싶습니다만.”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카이씨?” 당연히 나와 함께 돌아갈 거라 생각했던 그가 남겠다는 소리에, 나는 물론 듣고 있던 엔딜까지 놀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카이씨는 특유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옆에 있던 세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병이 나았다곤 해도 세실의 체력은 아직 보통 인간아이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 동안 제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으니…하다못해 건강해질 때까지라도 옆에 있어주고 싶네요.” “무, 무슨 소리야, 카이! 당신이 도움이 안 되었다니? 세실이 위험할 때 마다 애써준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런 소리를 할 참이야?” “하하. 하지만 완치를 하지는 못했잖습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엔딜군과 세실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잠시나마 지켜보고 싶다는 게 진짜 이유입니다. 엔딜군은 아닐지 몰라도 저는 그동안 꽤 즐거웠거든요.” “이런 젠장! 나는 아니었다고 누가 그래? 나도 그동안 카이를 형처럼 의지할 수 있어서 좋았단 말이야! 생글거리는 얼굴로 자꾸 그렇게 재수 없는 말만 할 거야? 듣는 엘프 마음 상하게 시리.” 험한 입담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엔딜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던 모양인지 세실 또한 카이씨의 소매에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쉽기로는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붙잡고 늘어지는 건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없죠. 카이씨 뜻이 그렇다면.” “죄송합니다, 엘님. 제가 먼저 동행 의사를 밝혔으면서도…” “괜찮아요. 오히려 카이씨가 이곳에 계신다면 좀 더 마음이 놓일 것 같네요. 제몫까지 포함해서 엔딜들을 잘 부탁드릴게요.”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엘뤼엔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럼 다른 일행분들과도 인사를 드려야겠군요. 식사 후에 바로 카웰 후작의 저택으로 가실 겁니까?” “아니요. 그 전에 먼저 이프리트가 있던 클리프 상단부터 들려야 해요. 이사나의 골치 아픈 검을 넘겨야 하거든요. 아무튼 저도 그동안 카이씨와 꽤 정이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 아쉽네요. 이곳엔 얼마나 계실 건가요? 다음에라도 볼 기회가 있었으면 하는데…” “하하. 수련 중인 몸이라 정처 없이 떠돌기야 하겠지만, 설마 그 많은 세월 동안 엘님을 다시 볼 기회가 없겠습니까?” “하긴, 그렇긴 하네요. 그럼 다음에 다시 뵈도록 할게요, 카이씨. 모든 수련을 마치시고 무사히 대사제가 될 수 있기를 바랄게요.” 웃으며 건넨 말과는 달리 마음속은 어쩐지 찝찝한 느낌이었다. 카이씨의 모습을 보는 일이 꼭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잠깐 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나는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만 두자. 내가 무슨 예언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단지 예감이 나쁠 뿐이야, 예감이.’ 나쁜 상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는 먼저 일어난 카이씨를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조용하던 바깥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 무슨 일이지? 누가 싸우나?” “어서 가보도록 하죠, 엘님. 소리가 큰 걸 보면 쉽게 마무리 될 사항이 아닌 것 같은데요?” 카이씨의 염려스러운 시선을 뒤로하며 나는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나 질투에 미쳐버린 이사나가 카터스의 황태자를 향해 칼부림이라도 일으킨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문을 열고나서 보이는 광경이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나 몰라라 하고 있는 라피스와, 그런 녀석을 향해 길길이 날뛰고 있는 한 명의 푸르딩딩한 블루엘프-시벨리우스의 모습이었다. 중간 중간 물리적인 행사라도 했던 건지, 근처의 흙 밭은 온통 불로 시꺼멓게 그을려 있었고, 텐트에 있었던 나머지 다른 일행들은 멀찍이 떨어져 둘의 대립을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무슨 일인겨?” 황당한 표정으로 채 할 말을 못 잇는 사이, 시벨리우스의 험악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뭐라고 이 자식아? 너 방금 뭐라고 그랬어! 다시 한 번 말해보시지!” “덜 떨어진 엘프라고 했다. 쓸데없는 일에 힘을 남발하는 것도 그렇고, 이래저래 민폐밖에 안 되는 녀석이로군.” “익! 어디서 꼭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게 나타나서 뭐가 어쩌고 어째? 넌 어디서 뭐하는 자식이야!” “아까 말했을 텐데? 엘의 일행이라고. 성격도 더러운 녀석이 머리까지 나쁜 거냐? 거참. 너도 세상 살기 어렵겠구나.” “죽인다!” 빈정거리는 라피스의 말에 시벨은 너무도 쉽게 흥분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내버려뒀다간 피라도 볼 기색이라 나는 얼른 달려가 불덩이를 날리려는 시벨리우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만!!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엘! 잘 왔어! 저 자식 대체 뭐야? 정말 너랑 일행이야?” “일행이고 뭐고 일단 말로 해, 말로! 다들 말리지 않고 뭘 하는 거야?” 그러자 그때까지도 멀거니 상황을 방관하고 있던 일행들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더듬더듬 변명을 이었다. “아니, 그게…좀처럼 끼어들 틈을 안줘서 말이야. 다짜고짜 마법부터 날리는데 차마 말릴 수가 없더라고.” “저는 단지 미래의 주군께 화려한 전투씬을 보여드리고 싶었을 뿐….” “미쳤어! 저 사이에 어떻게 끼어들어? 우리더러 여기서 인생 종치라고?” “헉!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알리사노 양이 죽으면 저도 따라 죽을 겁니다!” “……” 결국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잠시 체념의 한숨을 내쉰 나는 화난 얼굴로 지금의 소란을 일으킨 두 존재를 바라보았다. 친해져도 모자를 판에 초면부터 살벌한 전투라니! 앞으로 이 징글징글한 것들을 이끌고 다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다. “뭣 때문에 그런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 그만해. 다른 일행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아? 나이는 여기서 제일 많이 먹은 주제에 어른스럽지 못하게 시리!” “저 녀석이 먼저 시비를 걸었단 말이야! 날더러 덜떨어졌다고 그랬다고! 그리고 엘 너를 멋대로 자기 것이라고 하지를 않나! 그런 말을 듣고 참으란 말이야?” “흥!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이야. 내걸 내거라고 하는데 뭐가 이상하지?” “뭐야? 그래도 이 자식이!!”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정은 대충 이랬다. 처음 라피스는 오랜만에 이사나와 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그들이 머물고 있던 텐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자기들 쪽으로 다가오는 강한 마력을 느낀 시벨리우스가 제일 먼저 문 앞을 막아섰고, 정체를 밝히기 위해 서로 윽박지르는 가운데 내 이야기가 나왔던 모양이다. ‘넌 엘과 무슨 사이냐!’라고 묻는 말에 ‘친구’라고 대답했다고 하던가. 문제는 그것을 들은 라피스가 피식 웃으며 ‘그 녀석은 내거니까 넘보지 마.’라고 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평소 남이 듣든 말든 자기 편한 방식대로 함부로 말하던 버릇이, 이번에도 다른 사람의 귀를 거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들은 나는 빠드득 이를 갈며 시벨리우스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미안해, 시벨. 라피스가 원래 입이 좀 험해. 오냐오냐 막 자라서 버릇이 없거든. 그냥 한 살이라도 더 많은 네가 참아야지 어쩌겠어? 원래 세상은 연장자한테 불리한 법이야.” “뭐라? 엘 너 지금 방금 뭐라 그랬어?” “시끄러! 라피 너는 입 닥치고 있어! 이게 전부 다 남한테 오해 살 말을 한 네놈 탓이잖아!” “왜 내 탓이야? 계약은 곧 소유를 의미하는 거라고! 그걸 직설적으로 표현한 게 뭐가 나빠?” “계약도 계약 나름이지! 정령사가 자기 정령한테 내거라고 말하는 거 봤어? 이 유치뽕짝 도마뱀아! 이사나도 엄연히 계약자지만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아무튼 이번일은 전적으로 다 네 잘못이야! 빨리 시벨한테 사과해.” “…싫다면?” “그럼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못하게 계약 자체를 파기해주지.” “!!” 그 말에는 천하의 라피스도 어쩔 수 없었는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마주보는 내 눈빛에서 진심을 읽은 녀석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쏘아보며 내키지 않는 어조로 한마디 내뱉었다. “…쳇. 내가 잘못했다. 이럼 됐어?” “오케이, 잘했어. 시벨 너도 그만 화 풀고 사과 받아줘. 저 녀석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온 건 내가 듣기론 이번이 처음이거든. 역시 어떤 종족이건 협박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니까?” “…으응. 아, 알았어. 근데 엘…어쩐지 성격이 많이 과격해 진 것 같아.” 그게 다 누구 때문인데? 갈수록 키울 자식만 늘어가는 기분에 온 어깨가 처지는 내 입장이 한 번 돼보란 말이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쏘아보자 시벨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스스로도 너무 어린애같이 굴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2. 새로운 바람 (2) 거의 반 강제적이긴 했어도 라피스의 사과 덕분에 상황이 진정될 기미를 보이자, 나는 구경하고 있던 일행들을 불러 그를 소개시켰다. 이사나와 데르온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와 안면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이어진 대화들을 토대로, 황태자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그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눈치 챈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어제와 확연히 달라진 세실의 모습을 보고도 누구도 이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소개가 늦은 감이 있지만, 어쨌든 다들 인사해. 이쪽은 라피스 라즐리. 원래 우리랑 일행으로 있어야 했는데, 중간에 잠깐 사정이 생겨서 빠졌던 녀석이야.” “헤에. 아까부터 느꼈지만, 뭔가 굉장히 화려하게 생긴 사람이네? 그런데 라피스 라즐리는 푸른색의 보석 이름 아니야?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에는 아무리 봐도 안 어울리는데.” “아, 이 녀석이 푸른색을 좋아하거든. 라피, 이쪽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 라고 해. 이번에 던전 근처에서 합류한 일행이야.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다닐 것 같으니까 친하게 지내.” “흐응. 여자애라니 별 일이군. 그럼 저 녀석은?” “응? 아아, 저 사람은…” 라피스가 가리킨 사람은 얼떨결에 이쪽으로 휩쓸려 들어온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였다. 빠르게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듯 연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주변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자,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허리를 숙여 보였다. 한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에게나(?) 허리를 숙일 리는 없으니, 아마 자기도 모르게 몸에 익어있던 동작이 아닌가 싶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본인의 성명은 라온휘젤이라 하며, 미흡하나마 거기계신 사제님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사람입니다.” “사제? 흐음. 아직 엘의 정체를 모르는군. 다른 녀석들도 몰라?” “아니, 함께 동행해온 일행들은 전부 알고 있어.” “호오, 그럼 나에 대해서도?” 라피스의 입가에 떠오른 의미심장한 미소의 뜻을 읽은 일행들은 모두 어설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난리를 치며 소란을 피웠는데 황태자라면 모를까, 이미 내 정체가 뭔지 알고 있던 그들이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아, 그러고 보니…라온휘젤님은 어떻게 하실래요? 본래 있던 장소로 다시 보내드릴까요?” 이미 알리사한테 한눈에 반한 그가 그러마라고 대답할리는 없었지만, 나는 예의상 황태자를 향해 물었다. 예상대로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이미 반려를 찾았는데 무엇 하러 그곳에 다시 돌아가겠습니까? 이 또한 사제님이 저를 살려주신 은혜이니 본국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사례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 “반려는 무슨 놈의 반려야! 수작 부리지 말고 당장 꺼지지 못해? 이사나씨! 이 사람 좀 어떻게 해 보라니까?” “…보다시피 이런 식이라서 조금 곤란하군요. 알리사노양을 혼자 두고 떠날 수는 없으니 당분간은 사제님의 일행과 일정을 함께 할까 합니다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틱틱대는 알리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건네는 제안에 나만이 아니라 이사나 역시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이 길로 후작에게 돌아가게 되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대공을 칠 준비를 시작해야 했다. 반려의 라이벌은 둘째 치고, 아직 이사나가 솔트레테의 황제라는 사실도 모르는 존재를 섣불리 일행으로 합류시킬 순 없었다. 게다가 녀석은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었던가!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임은 물론, 그 자체로 이미 다른 제국의 개입을 받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번일 만큼은 이사나가 먼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실례지만 카터스 제국의 황자전하라고 하셨나요? 저는 당신의 합류에 찬성할 수 없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솔트레테는 지금 황실의 사정이 많이 어렵습니다. 이런 와중에 타제국의 황자를 일행으로 삼고 있는 무리가 발각되면, 어떤 시비에 휘말릴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행의 한사람으로서,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습니다.” “으음. 저의 신분이 걸리시는 거라면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숨길 수 있습니다. 저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누구도 제가 카터스 황실의 관계라자고는 생각하지 못할 텐데요.” “아니요. 지금부터 만나러 갈 저의 사촌형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틀림없이 당신의 뒷조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들키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실례가 되는 일이 아닌가요?” 하나같이 나긋하고 정중한 어조였지만, 그 말속에 담긴 가시를 눈치 채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지직! 마주보는 두 남자의 눈에서 불똥이 튀자, 그것을 빤히 바라보던 라피스가 피식 웃으며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거로군. 저 녀석들 싸우는 이유가 알리사노인지 뭔지 하는 여자 때문이지? 사내자식들이 쪼잔하게 말다툼이라니. 이래서 인간의 귀족은 안 된다니까.” “헉, 벌써 눈치 챘어?” “벌써고 뭐고…아까부터 이사나의 시선이 저 여자애한테서 떨어지질 않던데 뭘. 카터스의 황자와 솔트레테의 황제라. 뭐, 신분만으로도 이미 이사나가 이기고 들어간 게임 아닌가? 게다가 저쪽이 더 나이도 많은 것 같은데.” “으음, 그게 말이지. 그냥 황자가 아니라 장차 카터스의 황위를 물려받을 태자야. 겉보기엔 저래보여도 둘 다 17세고.” “킥킥. 아아, 불쌍한 자식.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것도 모자라 숙부한테 구박받고 집에서 쫓겨나더니, 이제는 짝사랑 상대한테까지 라이벌이 생긴 건가?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로군.”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다는 게 가장 슬픈 일 아닐까?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는 내 옆으로 알을 품에 안고 있던 데르온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묘한 표정으로 힐끔 라피스를 보던 그는 들릴 듯 말듯 속삭이는 어조로 물었다. “저어, 엘퀴네스님. 저분이 이프리트였던 게 아니었습니까? 지난번에 만났을 때 엘퀴네스님과 반대되는 성질이라고 하셔서 저는 당연히 불의 정령왕인 줄로만 알았습니다만.” “에? 아, 아니. 그러고 보니 설명을 못했네요. 미안해요, 데르온.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라피스는 레드 드래곤이에요. 그때는 굳이 말해줄 필요를 못 느껴서 대답하지 않았지만요.” “으음, 그, 그렇군요. 하긴 레드 드래곤 또한 엘퀴네스님과 반대되는 성질이 맞긴 하네요. 제가 괜히 지레짐작을 했던 거군요. 뭐, 이정도야 루카르엠의 정체를 알 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하.” 어색하게 웃는 그의 표정은 이제 놀라는 일이라면 어지간히 만성이 된 듯 했다. 하지만 힘없는 대답과 달리 라피스를 바라보는 두 눈은 뜨거운 투지에 불타올라 있었다. 정체가 무엇이 됐든, 언젠가 한번쯤은 겨루어보고 싶은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드래곤이라면 마계 4대 공작의 한사람인 저와 겨루기에 손색이 없는 상대입니다. 그와는 이전부터 실력을 가누어 보고 싶었던지라,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군요. 훗날에 만약 그런 상황이 오더라도 말리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예? 하지만…” “쿡쿡. 그냥 내버려 둬, 엘. 어차피 마족이란 놈들은 다 이런 식이니까.” 당황하던 나보다 먼저 대답한 것은 옆에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였다. 그는 웃음기를 담은 얼굴로 데르온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훗날까지 갈 필요 있나? 지금 이 자리에서 승부를 내보는 건 어때? 가볍게 상대해 주지.” “호오, 그 말에 후회가 없으셨으면 좋겠군요.” “누가 할 소리를. 품에 안고 있는 건 엘한테 넘겨주고 따라와. 원하는 대로 실력을 가려주지.” “좋습니다. 저 역시 바라던 바였으니까요.”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정신을 차렸을 땐 난 어느새 황금알을 넘겨받은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싸울 만한 공간으로 이동할 모양이었다. 이런 망할 놈들 같으니!! 그런 와중에도 한쪽에선 이사나와 황태자의 대립이 계속 되고 있었다. “진심을 숨기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제가 알리사노 양에게 청혼한 일로 감정이 상해있는 상태입니다! 그 때문에 본인이 당신의 일행에 합류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건 황자께서 이 제국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지금부터 저희들이 할 일은 황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긴박한 시일을 요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을 받아줄 정도로 태평한 일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대체 그 긴박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게 무엇이라는 겁니까? 자세한 상황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서 무조건 안 된다고 하는 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군요. 그냥 솔직하게 알리사노 양을 뺏기기 싫어서 라고 말씀하시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뭐라고요? 지금 말씀 다하셨습니까?” 척 봐도 살벌하기만 한 대화였다. 저러다 칼부림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이미 싸우기 위해 사라져 버린 라피스도, 황태자와 다투고 있는 이사나도 지금의 나로선 상대하기 버거운 존재임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정작 말려야할 알리사는 오히려 응원을 펼치고 있으니 더욱 미칠 노릇이 아닌가! “오호호호! 이것 참 재밌네! 자아~ 싸워라, 싸워! 이기는 편 우리 편!! 이사나씨! 좀 더 분발하라고!” “……” ‘앞으로 갈 길이 멀구나…’ 황금알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도 때문이었을까? 나는 스스로도 느끼지 못한 사이 어느새 데르온이 했던 전처를 고스란히 밟아가고 있었다. “넌 절대 저러지 마라. 날 괴롭히는 존재는 저놈들로 충분히 차고 넘치니까. 너까지 그러면 확 정령계로 돌아가 버릴겨! 알았어? 아아아, 기구한 내 인생….” 아직 깨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알아들을 리가 있겠느냐 만은, 나는 세뇌라도 시키듯 계속해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훗날 과연 누구의 태교(?)가 더 효과를 보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 날, 그 처절한 상황 속에서도 한사코 정중하기만 했던 싸움의 결과는 황태자 쪽의 승리로 돌아갔다. 말끝마다 알리사를 들먹이는 통에 열 받은 이나사가 ‘맘대로 해라!’고 쏘아 붙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놓고 아차 싶었는지 녀석은 뒤늦게야 몇 가지 조건을 덧붙였다. “단! 절대로 중간에서 빠져나가지는 못할 겁니다! 그럴 각오가 되어있다면 일행으로 합류하시든 마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심할 것은, 오늘 이후로 당신이 우리들의 일에 방해가 되는 사태가 발생할 시, 제 손으로 직접 처단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알아 들으셨습니까?” “흠, 꽤나 강압적인 태도로군요. 뭐, 아무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제 한 배를 탄 동료가 아닙니까. 피차간에 서로 얼굴 붉히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겼다는 포즈로 생글생글 웃는 황태자는, 훤칠한 생김새와 달리 아직도 어린애같은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의 합류로 인해 앞으로 어떤 파란이 불어 닥칠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이사나의 짝사랑이 점점 더 고달픈 길로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던전 앞에다 버리고 오는 건데.’ 때늦은 일로 후회해도 이미 날아가 버린 먼지요, 흩어진 꽃향기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황태자가 허튼짓을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남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라피스는 거의 넝마가 되다시피 한 데르온을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처절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의식을 잃은 데르온의 여기저가 시뻘건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에 비교하면 라피스는 얼굴에 생채기만 약간 있을 뿐, 너무할 정도로 멀쩡한 모습이었다. 언젠가 한번 그로부터 4대 공작이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말은 들은 적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확인하고 나니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설마 이정도로 전력의 차이가 날 줄이야! 쿠웅! 아무렇지 않게 데르온을 내던진 녀석은 기겁하는 일행들을 보며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허약한 놈이랑 싸우는 건 질색이야! 봐주느라고 힘을 아껴야 하잖아, 젠장!” “…봐준게 이정도야?” “죽이지만 않았음 됐지 뭘 그래? 안 그래도 숨 끊어 질랑 말랑하니까 얼른 치료나 해줘. 아, 찝찝해. 메테 녀석도 이보단 오래 버티던데, 이 놈 진짜 형편없잖아?” “저기…아무리 그래도 기절한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하다고 보는데.” 패자에 대한 예우는 둘째 치고, 냉큼 한심하다는 시선부터 보내는 녀석을 보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 녀석은 언제쯤에나 철이 들까? 덕분에 우리들은 데르온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상단의 방문을 미뤄야만 했다. 정말이지 도움이라곤 쥐뿔도 되지 않는 도마뱀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3. 새로운 바람 (3) “어서 오십시오. 아! 여러분은 이전에 방문하셨던 분들이군요? 총수님을 만나러 오신 것입니까?” 엔딜과 헤어진 후 공간 이동 마법을 통해 클리프 상단에 들어선 우리를 반긴 것은, 지난번에 왔을 때 본 적 있던 이곳 소속의 상인중 한사람이었다. 몇 달만의 방문인데도 용케 한눈에 우리를 알아본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살갑게 웃으며 건물의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 앞으로 안내했다. “곧 손님들의 방문을 고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허나 지금 총수께서 업무 중이시라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이프…아니, 이카나님은 많이 바쁘신가요?” “예에. 요즘 이곳저곳에서 물품 주문이 많아 이전보다 몇 배나 일거리가 많아졌거든요. 천천히 기다려 주십시오. 그동안 드실 다과를 가져오겠습니다.” 그의 말처럼 상단 안은 전체적으로 무척 분주한 분위기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선 쉬고 있기는커녕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조차 단 한명도 없었다. 어쩐지 방문할 시기를 잘못 정한 것 같아 난감해 하는 사이, 신기한 표정으로 건물 안을 구경하고 있던 황태자와 알리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이곳이 바로 클리프 상단의 본부로군요. 총수인 ‘이카나 레타’에 대한 소문은 저희 카터스 제국에서도 유명합니다. 병약한 연인을 위해 가련한 여인의 몸으로 상단을 지키고 그 후 다시 일으켜 세우기까지의 에피소드가 대단하더군요. 모든 여인들의 우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나도 들었어. 요 근래 클리프 상단의 성장은 눈이 부실 정도야.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온 대륙에 이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걸? 설마 내가 그 유명한 총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엘님, 그 여자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이야?” “말했잖아. 누군가의 부탁 때문에 던전에 간 거라고. 그 누군가가 바로 이곳 클리프 상단의 총수였던 것뿐이야. 굳이 말하자면 협력자 정도일까.” “헤에, 그 도도하기로 유명한 여자의 협력이라…어떻게 생겼는지 빨리 만나보고 싶어! 소문대로 굉장한 미녀겠지?” 그러자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의 검신이 우웅-하고 진동했다. 바로 지척에 이프리트가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지, 녀석은 ‘상단’이란 말과 ‘총수의 부탁’이라는 소리에 눈에 띄게 불안해하고 있었다.   <<호, 혹시! 그럴 리가 없겠지만…저를 상단에 팔아넘기시려는 거예요? 이프리트님께 데려다 준다고 속이고 이런 일을 하시다니! 정말로 그런 건 아니죠? 그렇죠?>> “허억? 방금 누가? 서, 설마 저 검이 말을 한 겁니까? 제가 잘 못 들은 건 아니겠지요?” 이그니스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 이번이 처음인 황태자는 놀란 표정으로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녀석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는 어조로 대답했다. <<흥! 설마는 무슨 설마! 말하는 검 처음 봐요? 그러고 보니 당신은 아까 우리 용사님의 말에 거역했던 사람이었죠?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용사님의 숭고한 싸움을 참견해선 안 된단 생각에 얼마나 눌러 참았다고요! 원래 진정한 영웅은 늘 옆에 자신을 시기하는 배경 잘난 인간을 데리고 다니기 마련이니,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크게 탓 하진 않겠어요. 하지만 나를 용사님과 떨어트려 놓으려 한다던가~ 상단에 팔아넘기는 행위는 결코~~ 켤코오오~~용서 못해요오오옷~~>> 화르르륵! 격한 감정을 누르지 못한 탓에 이그니스의 검신은 금새 붉게 타올랐다. 이번엔 들고 있던 이사나에겐 해를 끼치진 않았지만, 반대로 그의 옆에 있던 일행들은 갑자기 타오르는 불길을 피하느라 한바탕 야단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꺄아악~” “우악! 앗 뜨뜨~~!! 불, 불이야!!” 다행이 정신없이 바쁜 탓에 상단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소란이 더 커지면 쫓겨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웬만하면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나는 화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덩이를 향해 소리쳤다. “이제 그만 해, 이그니스! 실내에서 이게 무슨 소란이야?” <<하, 하지만~ 저는 상단에 팔려가기 싫…>> “팔긴 누가 판다는 거야? 넌 이미 이사나의 검이잖아! 주인인 이사나가 허락하지 않는 한, 네가 팔려나갈 일은 절대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날 그렇게 못 믿어?” <<그, 그게 정말이어요? 그럼 저는 계속 용사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건가요?>> “그거야 네 주인 맘이지. 어쨌든 그 불길부터 먼저 꺼. 사람들을 핍박하는 마검으로 오해당하기 싫다면 말이야.” 제대로 먹힌 협박이었는지 이그니스는 재빨리 검신을 감싸고 있던 불덩이를 없앴다. 그때서야 뜨겁게 타오르던 열기가 사라지자, 일행들은 모두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겨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황태자가 신기한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하하…정말 놀랍군요. 말을 하고 주인을 알아보는 데다 스스로 불까지 일으키는 검이라니. 이런 신기한 검은 세상에 태어나 빛을 본 뒤로 처음 발견한 듯합니다. 그 검의 이름이 이그니스입니까?” “…아니오. 정식 명칭은 ‘파이어 버스터’입니다. 이그니스라고 부르는 건, 이 검안에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가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죠.” “불의 정령이? 오오, 설마 문서로만 전해지던 정령검이라는 게 바로 이것입니까? 정령왕이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대단하군요. 이런 것의 주인이 되려면 굉장한 대가가 필요 할 것 같네요.” 그러자 알리사가 질린 표정으로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이그니스와는 유달리 사이가 나쁜 그녀였다. “아아, 말도 마요. 던전에서 가져올 때 이사나씨가 얼마나 고생했다고. 난 그렇게 고통스러운 비명소리는 처음 들어봤다니까? 저건 성검이 아니라, 사람 잡는 마검이야, 마검.” <<뭐, 뭐가 어째요? 당신! 지난번부터 보자보자 하니까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이전에 꾸중을 들은 일도 있고 해서 내가 웬만하면 참고 있으려고 했는데! 용사님께 어울릴 여자는 당신 같은 초라한 꼬맹이가 아니라고!>> “뭐가 어째? 야! 너 다시 한 번 말해봐! 지금 누가 초라하다는 거야, 누가!!” <<당신이지 누구긴 누구예요? 이름까지 똑바로 말해줄까요? 알리사노~알~드레프양?>> “크아악! 더 이상 못 참아!!” “잠깐, 알리사! 진정…” 점점 커져가는 말다툼에 당황한 내가 또다시 한마디 늘여놓으려던 때였다. 놀랍게도 주변을 흐르고 있던 공기의 흐름이 한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 주위를 둘러봤지만,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보건데 이것을 느낀 이는 오직 나 혼자 뿐인 듯 했다. ‘이게…어떻게 된 거지?’ 강한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져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마음속을 뒤흔드는 불길한 기분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으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엘? 갑자기 무슨 일이야? 너 왜 그래?” “미, 미안해, 라피스. 미안한데…나 잠깐 다녀올 데가 있어. 일행들 좀 부탁해도 되지? 너만 믿고 있을게.” “뭐? 대체 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가기는 어딜 가?” “미안! 금방 다녀올게!” “어이? 엘!!” 황당하게 부르는 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얼른 뛰어가 상단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건물 맞은편 벽에 기대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던 까만 피부의 소년이었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황금색 눈동자가 평소와는 달리 슬픈 빛을 담은 채 흔들리고 있었다. “…트로웰.” 설마 그는 내가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걸까? 아무런 망설임 없이 손을 내미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내 생각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더불어 그가 이곳에 온 이유 역시. “어서와, 엘. 기다리고 있었어.” “트로웰…너도 느꼈어? 방금…공기가……미네르바가……” “괜찮아. 아직은 배웅할 시간이 있으니까. 같이 돌아가자. 명계의 사자(死者)들이 에바스 에덴을 떠나기 전에. 그리고…새로운 바람의 탄생을 축하해 줘야지.” “!!” 담담한 어조의 말이었지만 그가 애써 참고 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 때문에 오히려 더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실감하고야 말았다.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허락된 삶의 시간이 끝나려 하고 있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저기, 라피스씨…라고 불러도 되죠? 지금 엘님이 어디로 가신건지 알아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았던 엘이 갑자기 창백해진 얼굴로 사라지자, 일행들은 모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얼떨결에 엘 대신 일행을 떠맡게 된 라피스에게 시선을 건넸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무안하리만치 차가운 냉소뿐이었다. “그걸 나한테 묻는 이유가 뭐지? 녀석이 아무 설명 없이 뛰어나간 것은 다들 알고 있을 텐데?” “에? 아…저, 저는 그저…당신이 엘님하고 친하니까 이번 일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친하다고 해서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뭐, 어느 정도 짐작 가는 일이 있긴 하지만.” “그, 그게 뭔데요?” “내가 그걸 말해줘야 하나?” “……” 안 그래도 갑자기 엘이 사라진 통에 불쾌한 기분이었던 라피스가 친절한 설명을 건넬 리 만무했다. 그러자 울컥 치밀어 오르는 화를 누르지 못한 시벨이 화난 표정으로 반박했다. “말해줘야 하냐니! 당연한 소리 아냐? 우리도 엘의 일행이기는 마찬가지라고! 저렇게 나가버렸는데 걱정할 수밖에 없잖아!” “시끄러, 퍼런 엘프. 그 ‘우리’란 범위 안에 나까지 끼워 넣지 마라. 엘이 아니었으면 내가 너희들과 함께 다녀야할 이유는 없어. 그러니 그가 사라져버린 이유 또한 알려줄 필요는 없지.” “건방진 도마뱀 자식! 너 지금 말 다했어?” 콰당-! 거친 소음과 함께 일어난 시벨리우스는 죽일듯한 시선으로 라피스를 노려보았다. 첫 대면에서부터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인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엘의 친구란 생각에 참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지금 그 ‘중재자’가 사라진 이상, 시벨이 그를 좋게 봐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물론 그 점은 라피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험악하게 변하자 다른 일행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움이라도 벌였다간, 그들이 있는 장소가 온전하게 지켜질리 없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사나는 간곡한 태도로 그만 둘 것을 부탁했다. “두 분 다 그만 두세요. 이런 장소에서 싸우기라도 하시면…” “너는 끼어들지 말아라, 이사나. 아무래도 이 주제도 모르는 엘프 녀석이 아까 전에 내가 먼저 사과했던 일로 기고만장해 있는 모양이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더 위인지 가르쳐 주지.” “하, 누가 할 소릴? 엘이 어쩌다 너 같은 녀석에게 걸려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나야말로 건방진 네놈에게 버릇을 단단히 가르쳐 놓겠어! 눈으로 보는 것만이 모든 진실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곧 알게 될 거야!” 그와 동시에 시벨의 양손에는 보기에도 살벌한 시퍼런 마력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캐스팅이 없는 마법의 구현이야 놀라울 것이 없었지만, 모인 마나의 양이 생각보다 방대하다는 것을 눈치 챈 라피스는 입가에 서늘한 미소를 띄웠다. “호오~ 너…이제 보니 엘프가 아니었군?” “그걸 이제야 알았냐! 후회해도 이미 늦었어! 당장 가루로 만들어 버릴테다!” “후회 좋아하는군. 아무리 그래봤자 나에게 대항하기에는 턱도 없다! 이 몸이 천재라고 불리는 이유를 가르쳐 줄까? 바로 너 같이 시건방진 놈들을 한방에 날려버리기 때문이야!” 라피스의 손에도 곧 만만치 않은 마나가 모여들었다. 둘 중의 하나만 먼저 터져도, 이 자리에서 목숨을 부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이사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두 사람의 신경전을 바라보았다. 이미 일행들더러 멀찍이 물러나 있으라고 말해둔 상태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싸움의 여파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여차하면 시큐엘을 소환해서라도 막을 요량으로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드래곤과 유니콘의 싸움이다. 그들이 전력을 다해 싸우기라도 하면 인간이 이사나가 감당할 수준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이 당장이라도 끊어질듯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은 갑자기 등장한 한사람으로 인해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저, 저기…바쁘신 중에 실례합니다만…” “넌 뭐야?” “…?…” 의아한 얼굴로 돌아본 그곳엔 처음 이 자리로 일행들을 안내했던 상단의 남자가 서있었다. 그는 겁먹은 얼굴로 벌벌 떨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는 상인의 정신을 불태워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을 설명했다. “죄, 죄송하지만 오늘은 그냥 돌아가셔야 겠습니다. 이카나께서…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기셨다면서 방금 사라지셨거든요.” “……” “그, 그게…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돌아오실 것 같지 않아서요. 으으음…저, 정 기다리시겠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하하하.”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는 상인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불쌍해보였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와 시벨은 어느새 싸울 의욕이 사라진 것을 느끼곤 두 손에 가득 담은 마력을 소멸시켰다. 일행들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쳇, 제대로 되는 일이 없군. 어이, 이사나. 혹시 이카나라는 이곳 총수가 붉은 머리카락의 화려하게 생긴 여자였냐?” “네? 네에…저어, 엘의 친구라고…” 차마 이프리트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린 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라피스는 충분히 원하는 대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못 다한 싸움의 찝찝함을 달래며 한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그렇군. 아무래도 내가 생각했던 게 사실인 모양이야.” “그, 그게 뭔데요?” “몰라. 나중에 엘이 오면 물어봐.” “엑? 그런 게 어딨어요, 라피스!” 이사나의 원망스러운 목소리에도 라피스는 요지부동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정령왕의 소멸과 탄생은 그 자체로 조심스럽게 다루어질 사항이다. 한낮 인간들에게 쉽게 떠벌릴 일이 아닌 것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정체가 뭐지? 마나를 다루는 폼새를 보면 엘프가 아닌 건 확실하고, 그렇다고 드래곤도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모르는 종족이라도 있었나?’ 라피스의 시선은 아직도 씩씩거리는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다. 아무래도 엘은 또 골치 아픈 녀석을 일행으로 받아버린 모양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4. 새로운 바람 (4) 오랜만에 돌아간 정령계는 처음 이곳을 떠날 때 기억하고 있던 장면과 거의 변함이 없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푸르렀고, 눈부신 보석으로 이루어진 꽃밭과 그 위를 뛰노는 정령들의 모습도 똑같았다. 다만 한 가지 평소와 다른 점을 꼽으라면, 정원에 있던 모든 바람의 정령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줄로 이어진 행렬의 끝에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미네르바가 평소의 무심한 표정 그대로 서있었다. 그러나 혼자라고 생각했던 그의 옆에는 정령왕 본인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이프리트가 함께 한 상태였다. 이별을 앞둔 상황치곤 지나치게 차분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뒤에, 생전 처음 보는 두 낯선 남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 한 눈에 그들이 명계에서 온 저승사자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심장이 철렁해지는 것을 느끼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 맞잡은 트로웰의 손에서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윽, 트로웰?” “아…미안. 아팠어? 나도 모르게 그만.” “아니, 괜찮아. 조금 놀란 것뿐이야. 근데…괜찮아? 안색이 나빠 보여.”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 그의 얼굴은 정말로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물기를 그렁그렁 담은 눈동자가 애처로울 정도로 슬퍼보였다. 가늘게 떨리는 입술을 혼자서 가만히 더듬던 그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힘없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미안…하하.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아직도 이런 일엔 적응이 안 돼. 이번엔 특히 더 힘든 것 같아. 완전히 죽는 게 아니란 걸 알고 있는데도…” “으음. 근데 정말 미네르바가 소멸하는 거야? 왠지 믿을 수가 없어. 늙지도 않았고…저렇게 건강해 보이는데.” “인간과는 죽음의 방식이 다르니 어쩔 수 없지. 그는 이미 정령왕의 평균 수명을 넘었어. 소멸의 시기가 다가온다고 해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야. 안 그래도 요즘 바람의 기운이 많이 약해져서…이때쯤이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 “윽. 그, 그랬어? 나는 전혀 못 느꼈는데…” 어쩐지 나 혼자 아무 생각 없이 있었던 것 같아, 괜시리 미네르바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 챘는지, 트로웰은 곧 고개를 저으며 생긋 미소 지었다. “내가 유달리 예민했던 거야. 실제로 정령왕의 소멸은 같은 4대 정령왕끼리도 모르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으니까. 전대의 엘퀴네스가 소멸했을 때만 해도 이프리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걸?” “하지만 결국 신이 되서 만났잖아. 어쩌면 미네르바도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응. 그랬으면 좋겠어.” 조금은 기운을 차렸는지 트로웰은 간신히 명랑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우리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눈치 챈듯한 미네르바의 시선이 정확히 이쪽을 향해 돌아섰다. 예상치 못했던 방문이었는지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던 그는, 곧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반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어서와, 모두. 정말 오랜 간만이다. 설마 배웅하러 온 거야?” “미네르바…” “안 그래도 너희들 얼굴은 한번쯤 다시 보고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동안 계속 정령계에서 소식을 듣긴 했는데, 직접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야, 엘. 그리고 트로웰, 난 네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러자 트로웰은 어색한 표정으로 미네르바의 시선을 피했다. 울음을 억지로 참는 것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오려고 했었어.” “후훗. 그래, 알고 있어. 누구보다 어른스럽지만 사실은 이런 이별에 가장 약한 녀석이 바로 너였으니까. 그래도 나는 만나게 되서 기쁜 걸? 마지막까지 안보고 갔다면 서운할 뻔 했어.” “마음에도 없는 말 하지 마. 어차피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면서…” 오늘따라 트로웰은 그답지 않게 꼬투리를 잡으며 툴툴거리고 있었다. 함께 한 시간이 많았던 탓인지, 미네르바의 앞에선 유달리 어려보이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한마디 따끔한 말을 이었다. “떠나는 사람한테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서운한 마음은 알지만 지금은 웃으면서 보내라고. 나처럼 나중에 후회할 생각이야?” “괜찮아, 이프리트. 와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동안 내가 트로웰 속 썩인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걸. 그런 의미에서 너한테는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 트로웰. 나만 아니었다면 인간을 싫어하거나 미워할 일도 없었겠지. 지금보다 훨씬 행복한 유희를 즐겼을 텐데.” “아니, 그런 건 필요 없어. 어차피 너의 일이 아니었어도 나는 지금보다 인간들을 좋아할 수는 없었을 거야. 너도 알잖아. 나 원래 은근히 차별 심한 성격인거.” “쿡쿡. 하긴 그랬지. 상냥한 가면에 감춰져서 아무도 그 내막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둘 사이엔 무언가 내가 알지 못하는 심각한 과거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네르바는 미소 지은 얼굴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엘. 다음 대(代)의 미네르바가 어떤 성격일지는 모르겠지만, 트로웰과 가장 마음이 맞는 존재는 네가 될 거라고 생각해. 앞으로도 그를 잘 부탁할게.” “…그런 말 하니까 이상해, 미네르바. 꼭 영원히 못 보게 되는 것 같잖아. 엘뤼엔처럼 신이 될 생각은 없는 거야?” “글쎄.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지금처럼 너희들과 가족 같은 유대감을 얻기는 힘들 거야. 정령계에 자주 놀러오지도 못할 거고, 서로의 시간에 치이다 보면 많은 것이 달라지겠지. 실제로 신이 돼서도 정령왕때의 모습을 유지하는 존재는 거의 없다고 알고 있어. 엘뤼엔도 예전과 많이 달라졌고.” “하지만…” “그리고 소멸 즉시 바로 신이 된다는 보장도 없어. 아마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백 년까지 유예기간을 거치게 될 거야. 차라리 그 시간을 활용해서 인간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희망적인 대답을 들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트로웰이 딱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하나만 약속해줬으면 좋겠어, 미네르바. 정령왕은 소멸할 때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다는 거 기억해?” “…?” “그럼, 다시는 그때 같은 사랑은 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줘. 혹시 인간이 되어 지금의 기억이 사라지게 되더라도,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도록. 내가 모르는 곳에서 네가 절망하게 되는 상황은 달갑지 않거든.” “……” 예상치 못했던 제안이었는지 미네르바는 한동안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곧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고마워, 트로웰. 네 말대로 할게. 넌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그것만은 절대 잊지 못할 거야.” “…아니, 잊어도 돼.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나한테도 너는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였어. 지금 의 이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트로웰은 끝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떠나는 미네르바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인 듯 보였다. “이제 가야 할 시간입니다.” 얼마의 시간 후, 두 저승사자들의 입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은 나를 포함한 다른 정령왕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각기 미네르바의 양 옆에 다가섰다. 이 상태로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워 명계에 간 뒤, 그곳에서 다음 탄생을 준비하고 있는 영혼에게 모든 힘을 물려주고 소멸하는 것이다. 때문에 우습게도 진정한 정령왕의 죽음은, 정령계가 아닌 명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본래라면 보일 리가 없는 저승사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작별인사는 여기까지인 것 같네. 모두들 잘 있어. 다음 대의 미네르바도 잘 부탁할게.” 마지막으로 짧은작별 인사를 건네고 돌아가려던 미네르바는 깜빡 잊었다는 듯 나를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참, 엘퀴네스. 너에게 부탁할게 있어.” “부탁?” “응. 이번에 이프리트가 만든 정령검을 찾았었지? 실은 나도 예전에 바람의 상급정령을 봉인한 정령검을 만든 적이 있어. 엘, 가능하면 네가 그 검을 찾아 진의 봉인을 풀어줬으면 좋겠는데…들어줄 수 있겠니?” “아아. 그 블래스터라는 검 말이지? 전에 들어본 적이 있어.” 그러자 미네르바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는 한때 내가 사랑했던 인간 남자에게 선물한 검이었어. 훗날 그에게 배신을 당한 뒤로, 그의 기억과 함께 버려지는 존재가 되었지. 하지만 이제 그만 자유를 되찾아 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내 손으로 직접 해결할까도 싶었지만, 지금의 주인이 이번 너의 유희와 관계된 인간이라서 아무래도 엘이 봉인을 풀어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나와 관계된 인물?” “응. 내가 알기론 이번 너의 소환자를 위협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 같아. 블래스터를 다룰 수 있는 자는 마나에 정통한 소드 마스터뿐이니, 찾는 일이 한결 수월할 거야. 그를 만나게 되면 그동안 미안했었다고 전해주겠어? 애꿎은 정령을 희생시켜서 나 역시 마음이 편치 않았었다고 말해줘.” “으응…그야 어렵지 않지만…” 생각지 못했던 그의 연애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힐끔 트로웰의 눈치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엔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는 이미 블래스터 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상태였다. 비록 미네르바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럼 부탁할게, 엘. 부디 이번 유희를 무사히 마칠 수 있기를 바랄게. 너의 일정은 언제나 즐거워서 지켜볼 때마다 재미있었어. 그래서 소멸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았던 것 같아.” “으음. 그랬다면 다행이네. 잘 가, 미네르바. 나 역시 너를 잊지 못할 거야. 함께한 시간은 이중에서 가장 짧았지만, 그래도 너를 만날 수 있어서 기뻤어. 인간이든 신이든,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의 진지한 눈을 본 미네르바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두 저승사자가 서로에게 사인을 보내는 듯하더니, 곧 명계로 향하는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한 이별의 시간이 도래한 것이다! 파아아앗! 눈부신 빛이 주위를 감싸기 시작하자 정령계에 있던 모든 바람의 정령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의 왕께 작별을 고합니다! 대기에 충만한 공기시여! 다음 생에도 바람의 자유와 함께 하시기를!] 장내는 곧 절절할 정도로 숙연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 이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오는 기분이랄까. 점점 희미해져가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어?” 투툭. 뭔가 차가운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무심코 만져본 볼에선 어느 샌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해서 황급히 손등으로 닦아내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냉큼 핀잔을 건네 왔다. “엘? 뭐야, 너 지금 우는 거야? 하여튼 애 같기는.” “시, 시끄러! 이런 상황에서도 안 우는 네가 더 이상한 거라고!” “흥~! 어차피 영원한 이별도 아니잖아? 다시 만날 수만 있으면 되는 거지.” “그래도 이젠 같이 살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딸이 시집간다고 해도 우는 판국에 이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제 아무리 노려본다곤 해도 울먹거리는 소리로 말해봤자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을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이놈의 눈물샘이란 게 어찌되어 먹은 건지, 한번 ‘운다’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나니 그때부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흐느낌을 동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다 큰 녀석이 주저앉아 엉엉거리고 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닌가! 초인적인 인내로 눌러 참던 나는 생각보다 태연해 보이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곤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흑…뭐야, 트로웰. 너까지 그렇게 담담한 게 어딨어? …흐윽…내, 내가 이상한거야?” “…그럴 리가. 나나 이프리트나 감정표현이 서툰 것뿐이야.” “뭐야? 그런 게…울고 싶을 때 울지도 못하는 게 뭐가 대단한 정령왕이야? 나는…나는…흑흑…젠장!” 그러는 사이에도 점점 희미해지던 미네르바의 모습은, 이윽고 그를 데리러온 저승사자들과 함께 이제 완전히 정령계에서 그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정말로 가버린 건가? 어쩐지 실감이 들지 않아 나는 한참이나 흐릿한 시야를 깜빡거렸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뭔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트로웰이 문득 뜬금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내가 소멸할 때도 지금처럼 울어줄 거야?” “뭐? 그런 당연한 걸 왜 물어? 지금 다 큰 자식이 운다고 놀리는 거지!!” “아니…그런 게 아니라…새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다행이라니?” “으음. 예전엔 못 느꼈는데, 지금 보니까 정령왕의 소멸이라는 거…굉장히 썰렁한 것 같아.그럴 때 누구 하나라도 울어준다면 조금은 나아질 것 같아서. 내가 소멸할 때도 엘이 울어준다니까 안심해도 되는 거지? 쿡쿡. 근데 말이야. 나 잠깐만…” “…?”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괴로운 표정이면서도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띄웠다. 내 팔을 잡은 그의 두 손은 놀랄 정도로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트로웰?” “…미안, 엘. 치사한건 아는데…나 잠깐만 네 눈물 빌려도 될까? 내가 흘려야 할 건 이미 옛날에 전부 말라버렸거든. 하지만…지금이라면 울 수 있을 것 같아…그래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두 눈에선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꽉 악다문 입술에선 어느새 작은 흐느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마치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 모습이 너무나 가슴 아플 정도로 슬퍼 보여, 나는 울먹이는 그를 끌어안고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트로웰이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리 어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지 본인의 앞에서는 차마 울지 못했던 그의 기분이 느껴져 더더욱 마음이 착잡해 졌을 뿐이다. “흐흐흑. 미안해, 엘…미안해. 흐윽…흑…흑…” “괜찮아, 트로웰. 후련해질 때까지 울어도 돼. 참는 것보단 그게 더 나아.” “흑…흐으윽…흑, 흑…” 그때만큼은 이프리트도 더 이상 나무라는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는 폼이, 자기도 울고 싶은데 체면 때문에 참고 있는 듯 보였다. 미네르바가 떠난 이후 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져,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정령왕들의 흐느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나는 새로운 미네르바의 탄생을 기다리는 내내, 슬픔에 못 이겨 흐느끼는 트로웰을 달래야만 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5. 새로운 바람 (5) 새로운 미네르바가 탄생한 건, 전대의 미네르바가 소멸한 후 하루만의 일이었다. 탄생을 축하해주기 위해 우리들이 갔을 땐, 이미 그의 영역은 태풍이라도 부는 것처럼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휘이잉! 거친 소음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정작 그것은 구경하고 있는 우리들에겐 아무런 피해를 미치지 않았다. 잠시 후 소용돌이 안에 흐릿한 형체가 잡히기 시작하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감탄성을 내뱉었다. “와아! 설마 저게 이번대의 미네르바?” “응, 맞아. 저런 식으로 천천히 본체의 틀이 잡혀가는 거야. 엘은 정령왕의 탄생을 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지?” “응. 굉장히 신기하다. 내가 태어났을 때도 저랬어?” “거의 비슷했지. 하지만 엘쪽의 분위기가 좀 더 신비했던 것 같아. 원래 정령왕들의 탄생장면은 엘퀴네스가 가장 아름답다고 하더라고.” 이제는 제법 기운을 차린 건지, 대답하는 트로웰의 표정은 많이 밝아져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완전히 괜찮아 진 것은 아니겠지만, 예전처럼 차분한 분위기로 이것저것 설명을 늘어놓는 모습에 안심이 된 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못 보는 것이 아쉽네. 앞으로도 내가 엘퀴네스의 탄생을 볼 일은 없을 텐데 말이지.”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영상석으로라도 찍어놓을걸 그랬나? 앞으로 두고두고 볼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네.” “뭐? 그런 게 가능해? 그럼 지금이라도 찍자! 미네르바도 나중에 궁금해 할 거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그런가?” 그리하여 우리는 정령계 최초로, 정령왕의 탄생을 영상석에 저장하는 만행을 벌이고 말았다. 언젠가 유희 중에 구입해온 것이라며 조그만 자주색의 돌덩이를 꺼낸 트로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태풍 안에서 흐릿하게 잡혀가는 사람의 형체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이프리트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체 뭘 하는 거야? 인간들처럼 한번 본 장면을 잊어버리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건 저장해서 뭣에 써먹으려고? 엘은 그렇다 쳐, 트로웰 너까지 동참하는 건 무슨 생각이야?” “왜? 재미있잖아. 나중에 미네르바한테 보여줄 수도 있고. 그러고 보니 나도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궁금해지는 걸?” “하여튼 엘이 멀쩡한 정령왕들을 다 버려놨다니까! 너 이걸 어떻게 책임질 거야?” “하하하…” 아무리 그래도 ‘버려 놨다’는 표현은 좀 너무하지 않냐, 이프리트? 원망스러운 얼굴로 바라봤지만 녀석은 그저 흥-하고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오늘따라 유달리 틱틱거린다는 생각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까부터 물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지. 너 뭐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왜 자꾸 찡그린 얼굴이야?” “찡그리긴 누가! 난 원래 이런 얼굴이야!” “아니, 그건 맞긴 한데…오늘은 평소보다 더 심해보여서.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그러자 이프리트는 정곡을 찔렸다는 듯 어깨를 움찔 떨었다.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어떻게든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는 걸 보면 삐진 것이 확실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만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야 그럴 것이, 녀석과는 상단에서 헤어진 후 이번이 처음 만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삐지려고 해도 그럴만한 상황이 있어야 이해를 할 것이 아닌가! “아! 설마 널 보고도 아는 척을 안 해서? 하지만 그럴 정신이 없었잖아. 미네르바가 소멸하기 직전인데.” “이익! 날 뭐로 보는 거야? 그런 사소한 일에 화낼 정령으로 보여?” “그럼 왜? 그것 말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는 걸?” “그러니까 네가 바보라는 거야!” 녀석의 떽떽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그라면 뭔가 눈치 챈 게 있을까 싶어서였다. 예상대로 그는 피식 웃으며 이프리트가 저런 행동을 보이는 연유를 알려주었다. “혹시 전에 엘뤼엔 만난 적 있지 않았어?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은데.” “트, 트로웰! 쓸데없는 소리를!!” “엥? 엘뤼엔?” 그러고 보니 던전에서 잠깐 봤더랬지, 아마? 하지만 누군가 작정하고 소문을 퍼트리지 않는 이상, 그 일이 벌써 이프리트의 귀에 들어갔을 리는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질투가 많은 녀석이라도 그런 것까지 시기한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잠깐 생각하던 나는 곧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설마 신전에서의 일을 말하는 거야?” “그, 그래! 너 왜 말 안했어? 엘뤼엔한테서 신의 문장을 받았다며? 그러고도 모른 척 하다니, 내가 화 안내게 생겼어?” “윽. 그건 또 어떻게 안건데?” “어떻게 알긴! 클리프 상단의 총수 이카나의 정보망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미 엘뤼엔의 신전에서 이마에 신의 문장을 받은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에 대한 이야기가 쫘악 퍼졌단 말이야. 지금 차고 있는 서클렛이 그 문장을 가리기 위한 거지? 왜 나한테는 말 안했어?” 여자(?)의 한은 무섭다더니.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따지고 드는 이프리트의 모습에 나는 잠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먹힐 것 같진 않았지만 나는 일단 달래볼 요량으로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그게 말이야. 잠시 착오가 있었어. 절대 너를 속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럼 뭔데?” “실은 엘뤼엔이 문장을 받았다는 말을 아무한테도 하지 말라고 그랬거든. 그게 알고 보니 마신이 장난칠까봐 그랬던 건데, 내가 미처 알지 못하고 너한테까지 비밀로 했던 거야. 화났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이프리트.” “뭐, 뭐야, 그게! 여기서 마신 이야기는 또 왜 나오는데?” “몰랐어? 지금 마신이 여기 아크아돈에 와 있거든. 얼마 전까지도 나랑 동행 했었는걸? 워낙 장난이 심한 성격이라, 가급적이면 내가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었나봐. 결국 얼마 전에 들통나서 굉장히 고생 했지만 말이야.” “……” 그러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이프리트는 한결 수그러든 표정이 되었다. 고의가 아니었다는데도 계속 추궁을 할 만큼, 심하게 화가 났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마침 미네르바의 형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바람에, 우리들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그쯤에서 마무리 지어졌다. “저것 봐, 모두! 탄생하기 직전이다.” “와아, 정말이네? 이제 눈만 뜨면 되는 건가?” 점점 얼굴의 윤곽이 나타나기 시작한 미네르바는, 눈을 감은 모습이 전대의 미네르바와 상당히 흡사해 보였다. 짙은 회색으로 시작해서 끝으로 가면 갈수록 투명해지는 머리카락이라든지, 꾹 다문 입술과 전체적인 분위기도 많이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보다는 좀 더 어려 보인다는 것일까? 작은 키와 동안적인 얼굴이 거의 트로웰과 비슷한 나이 또래인 듯 했다. 한참동안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하던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미네르바도 여성체인가? 아니면 남성체?” “음…여성체 인 것 같은데?” “트로웰보다 더 어려 보이는군. 이러다 운디네와 헷갈리게 되는 건 아니야?” “그래도 예쁘게 생기기만 한걸 뭐.” 쏴아아아! 세찬 바람의 폭풍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미네르바의 형체는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었다. 이윽고 온전히 드러난 그는 트로웰의 말처럼 소녀의 형상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 미네르바의 축소판이랄까? 아무리 같은 미네르바라지만, 누가 보면 딸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둘의 모습은 닮아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를 바라보는 트로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 듯 했다. ‘저 녀석…괜찮은 걸까?’ 실컷 울고 난 뒤 트로웰은 미네르바를 기다리겠다고 했었다. 그것이 천년이 걸리든, 만년이 걸리든. 혹은 영원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 해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 결심에 서린 단단한 각오를 읽은 나는 그가 단순히 ‘친구’의 감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응원을 해주는 것이 전부였던 셈이다. 내가 자신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느꼈는지 트로웰은 곧 괜찮다는 듯이 생긋 미소 지었다. 그는 누구보다 스스로를 믿고 있었고, 그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킬 줄 아는 존재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듯 광대하게 몰아치던 바람의 소용돌이가 사라지더니, 굳게 닫혀있던 미네르바의 눈이 서서히 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대의 미네르바와 똑같은, 투명하다시피 새하얀 은색의 눈동자가 그 존재를 드러냈다. 드디어 탄생의 모든 과정이 마무리 된 것이다! 아직 태어났다는 실감이 들지 않은 탓인지, 눈을 뜨고도 멍하게 있는 ‘새 바람의 정령왕’에게 나는 제일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미네르바! 만나서 반가워. 나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로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저 또한 만나서 반갑습니다.” “어? 한 번에 누군지 알겠어?” “이렇게 강한 물의 기운을 느끼고서도 정체가 뭔지 모른다는 건 바보라는 소리밖에 안됩니다. 이쪽은 트로웰, 그리고 이쪽은 이프리트지 않습니까? 다들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번에 새로 탄생한 미네르바입니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였지만, 내뱉는 어투는 굉장히 살벌했다. 그렇게 느낀 이는 나만이 아니었는지, 트로웰과 이프리트도 어색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존대말이라니! 전대의 미네르바도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이 녀석은 왠지 그보다 더한 성격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미소하나 없이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귀여운 얼굴 탓인지 그다지 나쁜 인상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이상하리만치 낮아진 온도를 느끼곤 애써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아하하…굳이 말 높일 필요는 없어, 미네르바. 나도 그렇고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너의 친구이고 가족인 걸? 그러니까 편하게 해도 돼.” “…?…저는 이미 충분히 편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무언가 잘못된 점이라도?” “에? 아니, 뭐…네가 그렇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그렇습니까? 저는 또 뭔가 제게 문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질문? 나한테? 뭔데?” 특이한 말투 때문인지 우리들은 한결같이 긴장한 표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무표정한 시선 그대로 나를 보며 가슴에 비수를 꽂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엘퀴네스는 여성체 입니까, 남성체 입니까?” “…쿨럭! 으, 으응?” “제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트로웰은 남성체, 이프리트는 여성체로 보입니다. 그런데 엘퀴네스는 구별할 수가 없군요. 이것이 흔히 말하는 중성체라는 겁니까? 왠지 부럽습니다.” 왜냐고 묻는 나에게 그는 딱 잘라서 ‘유희할 때 여러 역할을 하기 편하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옆에서 피식피식 웃고 있던 트로웰이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생각만큼 그렇게 편하진 않아. 엘은 남성체로서의 자각이 강한 편이라, 여자로 오해당할 땐 많이 속상해 하거든.” “정령에게도 성별의 자각이라는 게 있습니까?” “아니, 엘이 특이한 거야. 정령왕으로 태어나기 이전에 인간으로 살았던 기억이 있거든. 그래서 아직 이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있는 상태야.” “…그런 게 가능합니까? 정령왕은 윤회의 기억이 없는 가장 순수한 영혼으로 이루어진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맞아. 그런데 명계에서 잠깐 착오가 생겼던 모양이야. 덕분에 본래 태어날 시간에서 20년 이상이 늦어졌지.” 그의 말에 미네르바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봤자 무표정인 게 변한 건 아니었지만, 뭔가 눈빛이 좀 더 초롱초롱해진 느낌이랄까? 그 시선이 왠지 부담스러워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그는 감탄했다는 듯이 낮게 중얼거렸다. “전생의 기억을 가진 최초의 정령왕입니까? 역시 부럽습니다. 저도 뭔가 남들이 이루지 못한 역사를 만들어보고 싶군요.” “…충분히 만들었다고 생각해.” 내 대답에 다른 정령왕들도 동조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특이한 말투의 정령왕이 어디서 또 나타나겠는가? 하지만 미네르바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어째서 입니까? 저는 탄생과정이 그리 특이하지도, 전생이 있는 것도 아닌데요. 아, 혹시 저도 중성으로 생겼습니까?” “아니, 외모는 확실히 여성체인데…말투를 들으면 또 그게 아니거든. 으음. 아마 정령왕중에 최초일거야.” “제 말투 말입니까? 저는 뭐가 이상한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최초라니 기분이 좋군요. 칭찬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순간, 미네르바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대답과는 달리 기분이 나빴던 건가 싶어 움찔하던 것도 잠시, 나는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간 것을 보고 설마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저기, 내가 잘못 본건가 해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혹시 지금 웃은 것?” “그렇습니다만?” “허억!” 저 모습이 진정 웃는 것이었단 말인가! 어딜 봐도 찌푸린 표정으로 밖에 안 보이는데? 혹시 나는 지금까지 ‘화낸다’와 ‘웃는다’의 말을 반대로 이해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러자 웃겨 죽겠다는 듯한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하하하! 재미있는 정령왕이 태어났는걸? 엘과 완전히 정반대의 성격이잖아?” “에? 내, 내가 뭘?” “왜~ 엘은 감정 표현이 풍부하잖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굳이 마음을 읽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러게. 게다가 사교성도 많고 나긋나긋하기까지 하지. 그에 비하면 미네르바는…흐음. 둘이 붙여놓으니까 시간가는 줄 모르겠다. 어째 점점 특이한 녀석들만 나타나는 것 같지 않아?” “특이하다니! 그게 뭐야, 이프리트? 미네르바,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기분 나쁘지 않아?” “어? 기분나빠해야 하는 겁니까? 저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엘퀴네스는 사교성이 많아 보이는데요?” “……”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하리요. 킥킥거리는 동료들의 모습에 나는 담담히 패자의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수그렸다. 정말 만만치 않은 강적의 등장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6. ready! (1) 일반인들에게는 죽음의 사막, 또는 모래지옥이라고 불리는 바론사막은 나라에 큰 죄를 지어 역적의 몸이 되거나, 자신의 생명이 얼마나 끈질긴지 시험해보려는 고귀한 희생정신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감히 접근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불모의 영역이었다. 알폰프 제국 특유의 후덥한 기운이 아니었더라도, 이곳은 일 년 열두 달 내내 시도 때도 없이 더웠고 오아시스 또한 없었으며, 나아가 지옥땅거미라는 극악 몬스터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었다.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사람들의 접근이 뜸한 지역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러한 곳, 바론 사막의 한복판에 전에 없는 낯선 방문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들은 얼마 전 행방불명된 황태자를 찾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알폰프 제국으로 건너온 카터스 제국의 대마법사 세리엄과 그의 일행들이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수통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엔, 지난 며칠간의 수색작업으로 인한 진한 노고와 수심이 어려 있었다. “큰일이군요. 물이 다 떨어져 가는데 아직도 목적지는 보이질 않으니. 이대로 가면 되는 건 확실한 겁니까?” “으음. 그, 그것은 나도 잘 모르겠네.” “아아니, 모르신다니오? 지금 리오군과 제가 누구 때문에 이런 곳까지 오게 되었는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세리엄님이 다 이쪽으로 가자고 바득바득 우겨서 이리된 거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모르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끄응. 모르는 걸 날더러 어쩌라고? 필립, 자네는 그만 닥치고 있게. 안 그래도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고.” “허거걱!” 세리엄의 말에 필립이라 불린 중년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이미 한두 번 보아온 상황이 아닌지라, 리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사막은 온통 모래와 자갈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태자님은 점술사의 말에 따라 사막으로 가셨다고 했었지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군요. 어딘가에서 쓰러져 있지나 않으면 좋으련만.” “정확하게는 사막과 죽음의 숲이라 불리는 곳의 중간 즈음이라고 했네. 그리고 너무 염려치 말게나.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라온휘젠님은 강하신 분이라네. 이따위 사막정도에 쓰러질 분이 아니시지.” “…사막 보다는 몬스터가 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만.” “끄응. 그건 신이 알아서 안배하실 일이지. 거참. 마법사인 내가 어쩌다 신을 찾게 됐누. 쯧쯧.” 실제로 그들은 이곳에 오기까지 벌써 몇 십번의 전투를 치러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7서클의 강한 마법으로도 상대하기 버거운 때가 있었으니, 단신으로 이곳을 왔을 황태자가 과연 무사할지는 아무도 확언할 수 없었다. 운 좋게 길을 잘 들어 몬스터를 피해 다녔다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그의 생사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들이 겪어온 바론사막은 알려진 소문보다 더욱 위험천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황태자께선 어릴 때부터 운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타고나셨으니 괜찮을 걸세. 어릴 때 심심풀이로 본 점괘에도 절대 어디서 객사할 운명은 아니라고 했거든.” “나~참! 일국의 황태자가 객사한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됩니까? 그 점술사도 설마 황태자께서 나중에 가출할 거라는 건 전혀 예상치 못하고 했던 말일 겁니다. 그런 걸 변명이라고…” “필립! 그대는 좀 닥치라니까? 이 늙은이가 하는 말이 그렇게 아니꼬운 겐가? 앙?” “그럼 처음부터 제대로 된 희망 좀 주시던 가요! 저희는 이제 고국에 돌아가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입니다! 이런 곳에서 태자전하가 살아있을 리 없잖습니까! 뭐, 어차피 제국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죽을 것 같지만요!” “자꾸 그런 재수 없는 소리만 할 텐가!! 다 큰 양반이 리오군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아?” “체면도 살아있을 때나 차리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눈치 보게 생겼어욧? 이게 다 세리엄님 때문이라고요, 세리엄님!!”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 나랑 해보자는 겐가? 앙!?” 또 다시 투닥거리는 두 남자의 모습에 리오는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도 충돌이 많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사막으로 온 이후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듯 했다. 알폰프 제국에 온 이후, 카터스 제국으로부터 다시 도착한 정보에 의하면 황태자는 가출하기 전, 유명한 점술사에게서 반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그녀가 있는 장소가 알폰프에서도 악명 높은 바론사막과 죽음의 숲의 중간지점이라는 것이랄까? 대체 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이런 곳에 와 있단 말인가!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소 황태자의 막나가는 성격을 알고 있던 자들이 꾸민, 조금 신선한(?) 암살수법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로 황제가 부랴부랴 당시 태자의 점을 봐준 점술사를 찾았지만, 이미 제국을 떴는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이미 한참 전에 늦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시체라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일지도.’ 요 며칠 사이에 확고해진 생각을 다시금 정리하며 리오는 이마에 깊이 패인 주름을 만들어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물거품이 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장차 카터스 제국의 황위를 이을 태자가 이런 식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더욱 찝찝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대륙은 또다시 피바람이 부는 전란에 휩싸이게 될지도 몰랐다. ‘으음. 부디 살아있다면 좋으련만.’ 살아만 있다면 그것이 어떤 장소가 되었든 반드시 찾아낼 각오가 되어있었다. 옆에서 말씨름을 하는 세리엄이나 필립 또한 마찬가지의 심정일 터였다. 잠깐 생각을 하던 리오는 곧 세리엄을 바라보며 질문했다. “혹시 마법 중에 주변에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지 탐지하는 것은 없습니까? 이런 식으로 일일이 둘러보는 것보단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만.” “헐. 이렇게 몬스터가 많은 땅에선 무리라네. 지옥땅거미라는 놈들은 땅 속 밑에서 서식한다니, 아마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많은 놈들이 도사리고 있을 거야. 그 중에서 태자전하의 반응을 어찌 알아본단 말인가?” “하긴, 그도 그렇군요. 후우. 일단 잠시 쉬어가도록 하지요. 오늘 하루 종일 걸어서 많이 피곤한데. 식사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제안에 세리엄도 찬성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은 사막을 출발하기 전에 준비해둔 마른 건량을 꺼내어 씹었다. 이제 이것도 얼마 남지 않아, 조금만 있으면 굶어 죽게 될 지경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더욱 착잡해졌는지, 연신 우울한 얼굴로 건량을 씹고 있던 필립이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우리 여기서 더 있어도 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모른 척 하지 마십쇼. 이대로 있으면 전원 개죽음이라는 게 뻔한 상황인데. 차라리 태자전하를 찾는 건 포기하고 어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내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세리엄님이나 저나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말년인생 아닙니까.”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껄이는 겐가?” 험악한 답변이 되돌아왔지만, 정작 세리엄의 얼굴도 그리 자신 있어 보이진 않았다. 리오 또한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세리엄을 돌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가족들과 연락한지 너무 오래되었군요. 수정구슬 좀 빌려주시겠습니까? 저택으로 잠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끄응. 그러게나. 자네까지 덩달아 이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네. 정 안될 것 같으면 자네라도 먼저 돌아가도록 해줄 테니 언제라도 말만 하게.” 세리엄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품 안에서 둥그런 모양의 구슬을 꺼내주었다. 그 위에 약간의 마력을 넣고 좌표를 부르자, 곧 매끄럽지 않은 통신음과 함께 반가운 음성이 전해졌다. <네, 클란 백작가의 저택입니다. 통신을 요청하신 분의 성함을 알려주십시오.> “센트 집사님, 저 리글레오입니다.” <어이쿠! 둘째 도련님이 아니십니까? 그 동안 연락이 없으셔서 백작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대체 어디서 무슨 생활을 하고 계시는 겁니까?> “하하. 그냥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는 중입니다. 아버님과 형님은 안녕하시지요?” <아, 저기…그것이…> “왜요?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대답하기 난감한 듯 망설이는 집사의 목소리에 리오는 굳은 표정으로 수정 구슬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들려온 대답은 그로서는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질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형님이 클모어의 영애에게 청혼을 하셨다고요? 그런데 괴한이 나타나 엉망으로 만들고 쫓아냈다?” <예,예. 그래서 지금 백작님의 진노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당장 사병을 일으키어 쳐들어 가신 다는 것을 간신히 말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요즘은 내내 저택가에 어떤 사람이 오고가는 지 조사까지 하고 계십니다.> 단편적으로 들었을 뿐이지만, 리오는 대충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했다. 클모어의 카웰 후작이 그의 하나뿐인 여동생 에이프릴을 얼마나 끔찍하게 여기는지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조건에도 차지 않는 남자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여동생을 데려가겠다고 나섰으니, 그렇지 않아도 이사나 황제의 일 때문에 대공의 세력에 불만이 많은 그의 시선이 고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폭력까지 행사한건 조금 의외인 걸? 카웰 후작은 아무리 불쾌해도 먼저 손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사람인데. 아버님께서 저택가의 사람들을 조사한다는 걸 보면, 뭔가 더 다른 일이 있었나?’ 예상대로 집사의 대답은 ‘그렇다’였다. 요 근래 카웰후작의 저택에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리오의 형님을 쫓아낸 사람도 바로 그들 중의 한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리오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느끼며 백작이 조사한다는 낯선 일행들에 대한 것을 물었다. <그다지 특이한 구석은 없는 일행이었습니다. 신관 하나에 마법사 하나. 그리고 검을 든 소년하나가 전부였다고 알고 있거든요. 외모가 지나치게 뛰어난 게 조금 걸립니다만.> “외모요?” <예, 그들 모두 쉬이 보기 힘든 미모를 지니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참, 그러고 보니 이번에 새로운 일행이 더 추가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엘프에 어린 소녀와 검사로 보이는 남자 둘이라더군요. 어디에서 왔는진 알 길이 없지만, 그 중 군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의 옷차림이 많이 피와 모래로 엉켜 지저분했다고 들었습니다.> “…군청색?” 순간 놀란 세리엄과 리오의 시선이 마주쳤다. 군청색은 다름 아닌 카터스 제국 황실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집사를 향해 채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남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 겁니까? 혹시 바론사막에서 왔다고 하지는 않던가요? 아, 아니 알폰프 제국이라고!” <예? 그, 글쎄요. 그런 것은 아직 잘…> “얼굴은 어떻게 생겼답니까? 인상착의는요? 군청색 머리카락 외에 다른 특징은 발견된 게 없습니까?” <으으음. 아! 눈 색깔이 신비한 청록색이라고 들었습니다. 제법 남자답게 준수한 얼굴이고 키는 180정도 되는 듯 했다더군요.> “!!!” 집사가 말하는 내용은 그가 들었던 카터스 황태자의 외모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행방을 찾게 될 줄이야! 리오와 세리엄 일행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태자가 어떤 경로로 솔트레테에 넘어갔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만세 삼창을 불러도 모자를 지경이다. 리오는 급히 집사를 향해 진지한 충고를 건넸다. “일단 아버님께 절대 섣부른 행동은 하지 말아달라고 일러주십시오. 제가 갈 때까지 어떤 일도 하지 마시라고요. 형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그럼 다시 저택으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어쩌면 클모어에 먼저 들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제가 돌아갈 때까지 아버님과 형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예, 그런 것은 걱정 마십시오. 제 온 힘을 다해 막아보겠습니다. 백작님도 둘째 도련님의 귀환을 굉장히 반가워하실 겁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것을 마지막으로 리오는 재빠르게 수정구슬의 통신을 끊었다. 황태자의 행방을 찾게 된 이상, 더는 이곳 바론 사막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필립은 불안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으음. 근데 정말 그 사람이 태자전하가 맞을 까요? 알폰프에 가셨다는 전하가 언제 솔트레테로 넘어가셨단 말입니까? 그저 우연히 인상착의가 닮았던 걸지도…” “군청색 머리와 청록색 눈동자가 그리 흔한 건 줄 아는 겐가? 분명 태자전하일세! 그 분이 그렇게 쉽게 돌아가셨을 리가 없지! 어서 일어나게! 우리도 당장 솔트레테에 가야 하지 않겠나!” “솔트레테까지 단번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대로 그냥 걸어가면 틀림없이 중가에 물이 떨어져서라도 죽게 될 겁니다.” “단번은 무리지만 약 2,3번에 걸쳐서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할 수 있다네. 좌표는 대충 외우고 있으니 일단 가까운 마을로 이동하도록 하지.” “허걱! ‘대충’이라니요~ 세리엄님! 잘못된 좌표로 이동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뻔히 아시는 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요? 저, 전 아직 죽기 싫습니다! 차라리 걸어가자고요. 네?” 그러나 황태자를 찾았다는 생각 외에는 머릿속에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세리엄의 귀에 필립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발밑에다 공간이동의 마법진을 그린 그는, 비명을 지르는 필립을 무시하곤 곧바로 텔레포트의 주문을 외웠다. 이제 그들의 무대가 다시 솔트레테로 옮겨질 차례였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7. ready! (2) 금방이라도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엘의 귀환은 벌써 일주일째 늦춰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클리프상단 총수의 행방 또한 묘연해 진지 일주일이라, 이미 그 둘의 관계를 알고 있던 이사나도 이쯤 되면 정령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라피스는 말해줄 기색이 아니고, 그렇다고 마냥 엘이 돌아오기만 기다리기에는 속이 탔기에, 그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클모어에 있는 후작의 저택에 돌아온 지도 일주일. 이미 한참 전에 이곳에 와 있던 친위기사들과도 재회를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은 텅 빈 것 같이 허전했다. 그것은 비단 이사나 뿐만이 아니었다. “저기…엘은 언제나 오는 거야? 이 달 내로는 오겠지?” “그러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 벌써 며칠째 돌아오질 않으니 원. 별다른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걱정 되는 걸.” “상단의 총수와 같은 시기에 사라진걸 보면, 혹여나 이루지 못한 사랑의 도피 같은 건 아닐 런지? 그날 사제님의 표정이 매우 심각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아주 허무맹랑한 추측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푸핫! 사랑의 도피? 그 무슨 오크가 바나나 껍질 밟고 미끄러지는 소리야?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어! 암 그렇고 말고.” 장담하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일행들은 모두 동조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이라는 신분을 떠나, 엘 자체가 그런 상황과는 어울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차라리 어느 귀족남자에게 찍혀(?) 보쌈을 당했다고 하는 편이 설득이 쉬울 것이다. 덕분에 하릴없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버리게 된 황태자는, 민망한 표정이 되어 슬그머니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아…정말이지. 어디에 있는지 라도 알면 이렇게까지 답답하진 않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유일하게 알고 있는 누구누구가 죽어도 입을 열질 않으니, 원.” 알리사의 푸념을 들은 사람들은, 소파의 한가운데 앉아 눈을 감고 있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언뜻 보면 잠자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일행들 중에서 그가 깨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초반 시벨과의 싸움 뒤로 그는 누가 말을 걸든 무시한 채 지금처럼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 때가 많았다. ‘엘’이 아니었으면 일행이 되지도 않았을 거라는 말마따나, 적당히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지내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아직까지 별다른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렇듯 서먹해진 사이가 되고 보니 새삼 엘의 존재가 일행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라도 다시 불러올 수가 없다는 것이 유일한 문제랄까? 한숨을 내쉰 이사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눈앞에 있는 애꿎은 테이블만 노려보았다. 그때마침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던 친위 기사들이 저택 안으로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훈련이 고된 탓인지 그들 모두 붉게 상기된 얼굴에 땀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와하하! 나도 이제 곧 상급 익스퍼드라고! 아까 후작님이 하신 말씀 들었지? 검의 진보가 가장 빠르다잖아!” “그거야 네가 그동안 워낙 못했으니까 그렇지! 이제 겨우 상급이 되는 주제에 잘난 척은? 나야말로 곧 소드 마스터가 되실 몸이라고!” “웃기네! 네놈이 소드 마스터면 나는 그랜드 소드 마스터다! 아니, 검의 지존이다!” “뭣이라? 야~ 알렉!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투덜투덜 떠드는 목소리였지만 그들 대부분이 수련의 결과에 흡족해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얼굴 가득 미소를 그리며 잡담을 나누던 기사들은, 곧 응접실 안에 무료히 앉아있는 일행들을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갔다. “다들 이런 곳에 계셨습니까? 아침 식사는 하셨는지?” “으응. 오전 수련은 모두 끝난 건가, 케이?” “네, 폐…이사나님. 곧 후작께서도 들어오실 겁니다. 안 그래도 오늘쯤 이사나님과 앞으로의 일정을 의논해야겠다고 하신 걸 들었습니다.” “그래? 알았으니 그만 쉬도록 해. 모두들 수고 많았어.” “별 말씀을요. 폐…크흠. 이사나님도 저희의 훈련과정을 보시면 감탄하실 겁니다. 다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실력이 진보 되었거든요. 후작께서도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이 인정할 정도라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자부심이 가득한 기사들의 표정을 보며 이사나는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힐끔 그의 눈치를 살핀 기사단장 알렉의 질문이 이어졌다. “저어…엘님은 아직 소식이 없으신 겁니까?” “아아. 아무래도 뭔가 급한 일이 있는 모양이야.” “으음. 페리스가 이번에 바람과 물의 정령을 동시에 소환하게 되었다고 자랑하고 싶어 하던데…막상 장본인이 나타나지 않으시니 난감 하군요, 하하. 그럼 저희는 이제부터 개인 수련에 들어가겠습니다. 편한 시간 되십시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기사들은 마지막으로 카터스의 황태자를 힐끔 바라 보았다. 사실 그들은 오랜만에 재회한 주군의 바뀐 외모보다도, 카터스 제국의 황족인 라온휘젠의 등장을 더욱 놀라워했었다. 혹시라도 무슨 꿍꿍이가 있는가 싶어 각별히 주시하고 있었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 경우 자신을 숨기는 게 노련한 사람이거나, 정말로 아무런 목적 없이 일행으로 합류한 상황이겠지만, 기사들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후자는 믿음이 가지 않은 게 사실이었다. ‘조금 더 지켜봐야겠군.’ 서로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낸 그들은 곧 정중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이사나가 있던 자리를 벗어났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사라지자, 일행이 있던 응접실은 다시금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그 지루한 정적을 견디지 못한 것은 온통 찡그린 표정을 하고 있던 알리사였다. “아악! 정말 짜증나! 이게 뭐야? 하루에도 수십 번 전투가 일어나도 모자를 판에 저택 안에만 갇혀서 궁상이란 궁상은 전부 다 떨고 있잖아! 이럴 바엔 차라리 바론사막에서 지옥땅거미나 잡는 게 더 나을 뻔 했어! 뭔가 진전이 있어야 할 거 아니냐고, 진전이!” “아, 알리사…지루한건 이해하지만…” “이해한다고? 그럼 아무거나 대책을 세워보란 말이야! 이러고 앉아있으면 대공이 알아서 죽기라도 한데? 암살자를 보내든! 직접 가서 멱을 따든! 마땅히 제거하려는 의지를 보이란 말이야! 상급정령은 소환해서 목욕하는데 쓸 거야?!!” “쿨럭.” 언제 봐도 화통한 성격의 그녀였다. 적나라하게 비꼬는 알리사의 말에는 라피스도 흥미가 돋았는지, 어느 샌가 눈을 떠서 재밌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껏 잠자코 자리를 지키고 있던 황태자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어, 궁금한 것 몇 가지만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알리사노양? 아무래도 정리가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만.” “질문? 좋아! 허락할 테니까 말해봐.” “허락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본인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 판단하건데, 이사나군은 단순히 솔트레테의 백성 아닌, 제국 실세에 해당하는 귀족으로 보이는 군요. 또한 이곳의 섭정왕인 유카르테 대공과는 반대되는 입장에 속해있으며, 현재 그를 몰아내고 적통 계승자에게 황권을 회복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는 바로 그러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아지트인 셈이지요. 제 말이 맞습니까?” “거의 비슷해. 그래서?” 그 정도쯤이야 알아맞히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기에 알리사와 일행들의 표정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러자 황태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본인도 제왕학을 배우는 몸으로서 각 국의 실정과 중요한 세력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편입니다. 이 영지의 주인인 카웰 후작은 솔트레테에 단 두 명뿐인 소드 마스터의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쫓겨난 어린 황제의 외사촌이 되기도 하지요. 후작이 황제파로 돌아서는 것은 그리 어려운 예상이 아니었습니다만, 제가 궁금한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아악! 질질 끌지 말고 본론만 말해, 본론만! 하여튼 귀족이란 것들은 하나같이 요점을 말할 줄 모른다니까! 나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 “크, 크흠. 실례했습니다. 그런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여기 있는 이사나군과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저는 지금까지 솔트레테의 실세 중에 은발과 금안을 가진 10대 후반의 소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그’ 카웰후작의 기사들에게 윗사람의 대접을 받는 소년이라면 알려지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러자 일행들은 모두 호기심 어린 빛으로 이사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할지 기대가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황태자를 본 이사나는, 얼굴을 서늘하게 가라앉히며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의도로 하는 질문입니까? 단순히 일행으로서 저의 정체가 궁금한 겁니까, 아니면 카터스의 황자되는 입장으로서 의문을 품으신 겁니까?” “저는 이미 황실을 나온 순간부터, 다시 돌아갈 때까진 철저히 그곳과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순수하게 일행으로서 묻는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대답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저의 정체가 뭔지 꼭 그렇게 중요한 겁니까? 어차피 함께 동행 할 사이임은 변함이 없는데 말입니다.” “하, 하지만…” “거기까지. 어쨌든 황자께서는 이미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눈치 채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깨달으셨겠지요? 우리의 일정에서 당신의 존재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변수에 해당합니다. 적이냐, 아군이냐는 끝까지 가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그런…저를 못 믿으시겠다는 소리입니까?” “애당초 그런 장소에서 쓰러져 있었다는 것부터가 의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해십니다! 저는 단지 점술사의 말에 따라 반려를 찾으러 갔던 것 뿐, 설마 그 곳에서 당신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애당초 본국에서 솔트레테의 내정에 끼어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강하게 반박하는 황태자의 말에, 이사나는 단지 어깨를 으쓱해보였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설령 지금은 그럴 목적이 없다 해도, 훗날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국제관계가 아닌가! 철없는 황자의 말만 믿고 완전히 마음을 놓을 정도로 그는 더 이상 순진하지도, 세상의 물정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것도 자신의 여자(?)를 넘보는 도둑놈의 말이라면 더더욱. “어쨌든 그렇게만 알아두십시오. 황자 본인께서 극구 본국의 상황과는 상관없다 하시니, 저도 되도록이면 그쪽과 연관을 지어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 “일단 뜻을 같이 하기로 하신 이상, 이곳은 더 이상 한가한 모험가 집단이 아닙니다. 황자의 감정이 어떤지는 내 알바 아니나, 알리사양을 너무 괴롭히지 말아주셨으면 좋겠군요. 앞으로의 일정에 방해 밖에 되지 않습니다.” 단호하게 쏘아붙이는 말엔 다분히 사적인 감정이 표현되어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정작 알아들어야할 알리사는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다만 그녀는 그 순간 더욱 험악해진 두 남자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던 라피스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자신을 쳐다보는 일행들의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응접실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라, 라피스님! 어디 가세요?” “아,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해, 이사나. 요즘 들어 신선한 모습만 보니 기분이 꽤 묘하군. 엘이 지금의 네 모습을 보면 감동의 눈물을 줄줄 흘릴 거다, 아마. 역시 인간의 남자란 사랑을 해야 달라지는 법이지.” “윽~ 장난치지 마시고! 어디 가시냐니까요? 설마 완전히 떠나시는 건 아니죠?” 엘도 없는 상황에서 그마저 사라져버리면 이사나는 정말 의지할 상대가 없었다. 물론 시벨리우스와 데르온이 옆에 있긴 했지만, 초반부터 함께 해 왔던 탓인지 라피스 만큼 든든한 기분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법 황제다운 얼굴이던 그가 갑자기 불안한 표정이 되자, 라피스는 키득거리고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병아리 같은 얼굴은 그만해라, 꼬마야. 넌 이미 날개를 펼쳤어. 더 이상 어미가 먹이를 가져다 줄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무슨 소린지 알겠냐?” “그건…그렇지만…” “알아들었으면 네 할 일이나 해. 다른 사람이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난 잠깐 바람이나 쐬고 오련다. 여긴 날 노려보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괴롭거든. 킥킥.” “노려보는 사람?” 무심코 되묻던 이사나는 곧 얼마 전부터 유달리 라피스에게 차갑게 구는 에이프릴을 떠올렸다. 앞으로의 일정과 엘에 부재에만 신경 쓰느라 미처 관심을 두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생각해보면 그렇게 다정다감했던 사이가 한 순간 틀어진 일이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라피스를 바라보는 누이의 눈에 떠올라있던 미움과 질투, 그리고 진한 연민의 빛을 떠올린 이사나는 곧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르지. 드래곤인 그가 언제까지고 이곳에서 안주할리는 없으니, 이쯤에서 그만둬 준 것이 누이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지금은 헤어짐이 안타까울 지라도, 곧 장래를 생각해 보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할거야.’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본인을 향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알리사노 알 드레프. 나는 그녀를 계속 바라봐도 괜찮은 걸까?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땐 말 그대로 숨이 멈추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실감했다. 어깨를 타고 흐르는 부드러운 금발과 벌꿀 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사로잡고 놔주지 않는다는 착각이 들었다. 단순히 미모만을 본다면 오히려 엘퀴네스쪽이 좀 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었지만, 알리사에게서 느낀 건 그보다 더 깊은 영혼의 이끌림이었다. 그래서 이사나는 주저 없이 그녀를 자신의 반려가 될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카터스의 황자가 나타난 지금도 마찬가지. 그러나 요즘 들어선 그 마음이 많이 흔들리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걸지도….’ 비록 자신의 신분이 솔트레테의 황제라고는 하나, 이번 거사가 실패하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운명이다. 목숨은 구하더라도 평생 쫓겨 다니며 정처 없이 대륙을 떠돌아다니게 될지도 몰랐다. 그에 비하면 카터스의 황자는 장차 황위를 물려받지 않아도 제국 안에 무시 못 할 세력을 구축하며 일생동안 편안한 삶을 이뤄나갈 터였다. 알리사에게는 그쪽이 더 낫지 않을까? 자신은 지금 과한 욕심을 부려, 별이 점지해준 운명의 연인을 갈라놓으려하는 건지도 몰랐다. 지금 이 마음을 알리사가 눈치 채기 전에, 그리고 정말 더 포기할 수 없어지기 전에 놔주는 것이 서로에게 현명한 방법일 수도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사나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듯, 유유히 밖을 나서는 라피스의 뒷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날개를 펼쳤다고 말했지만, 거침없이 하늘을 날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7-18. ready! (3) 하루하루가 촉박했던 중간계의 생활에 비해, 정령계는 나른하고 평화로운 일상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이전보다 몸도 가볍고 주변의 감각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어서인지, 원래의 세계에 돌아 왔다기보다는 꿈을 꾸다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은 미네르바가 탄생한 이후로도 한동안 중간계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계속 될 것 같았던 이 한가로운 나날도, 귓가를 파고드는 강렬한 목소리 때문에 결국 일주일 만에 종결을 맞이했다. [너…대체 언제까지 그 곳에서 뒹굴 참이냐?] “…라피스?” 꿈에서 만난 인간한테 전화가 온다면 이런 느낌일까? 녀석에게서 연락이 올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기에, 당혹스러운 심정은 더욱 컸다.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옆에 있던 다른 정령왕들이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뭐야? 호출이야? 그놈의 계약자는 성질도 급하네. 모처럼 인데 좀 쉬게 놔둘 것이지. 누구야? 그 인간 꼬맹이야?” “아니, 아무래도 라피스인것 같은데, 이 녀석이 먼저 연락을 하다니 웬일이지? 혹시 이사나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일주일이나 연락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녀석의 성질머리 상, 강제소환하기 전에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윽! 강제소환? 그런 것도 있어?” 이왕이면 좀 더 버텨볼 생각으로 무시하려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미네르바는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강제소환이란, 이미 한번 계약된 소환자가 다시 정령계로 돌아간 정령왕을 임의로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설마 엘퀴네스는 그걸 모르셨습니까?” “아~그게 말이지…” “후훗! 엘은 바보거든.” “이프리트, 너어!” “어머? 내가 틀린 말 했나? 남들이 다 알고 있는 걸 하나도 모르면 바보지 뭘 그래? 안 그래, 미네르바?” “맞는 말씀입니다. 바보는 바보입니다.” “……” 어째 묘하게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랄까? 무표정한 얼굴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네르바의 모습에 나는 울먹이는 얼굴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억지로 웃음을 참는 듯, 부들부들 어깨를 떨고 있던 그가 헛기침을 내뱉으며 대답했다. “흠, 흠! 그건 오해야. 엘은 단지 전생의 기억 때문에 본능을 자각하는 게 느려졌을 뿐이거든. 점점 나아지고 있으니까 조만간에 완전히 각성할 수 있을걸?” “아아, 그런 겁니까? 그건 좀 번거롭겠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재교육 받아야 한다니, 인간들이 흔히 겪는 기억상실과 비슷한 증상이로군요. 엘퀴네스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시오. 성심성의껏 도와드리겠습니다.” “아하하…별로 고생이랄 것 까지는…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 순간 재촉하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이마에 힘줄은 몇 십 개나 드러내고 있을 것 같은 짜증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어조였다. [하! 이제 대답도 안한다 이거지. 당장 이 자리에 강제소환 해줄까? 참고로 여긴 마을 광장이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꽤 많지, 아마?] “으악! 너 그런 짓 하기만 해봐! 이 치사 빤스 도마뱀아! 넌 인내심도 없냐? 좀 기다리면 다리에 쥐가 나냐고!” [시끄러! 누가 내 말 무시하래? 벌써 일주일이다, 일주일! 뭐하느라 이렇게 늦는 거야? 정령왕의 탄생이 몇 달 걸리는 일이냐!!] “어?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지금 드래곤의 감각을 무시하는 거냐? 이프리트와 트로웰까지 사이좋게 사라져버렸는데 그 정도 눈치도 못 채는 놈이 어딨어? 아무튼 빨리 돌아오지 못해!] “쳇, 알았으니까 재촉 좀 하지 마. 기다리고 있으면 어련히 알아서 갈까.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투덜투덜 대답한 나는 앉아있던 보석 밭(이건 절대 꽃이 아니다)에서 일어서며 나머지 다른 정령왕들을 돌아보았다. “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너희들은 어떻게 할 거야? 둘 다 유희 중이었잖아?” “아, 난 여기 오기 전에 미리 1년 정도 휴가를 받았어. 샴페인 용병단이 이사나를 돕기로 한건 알지? 인간들의 전쟁엔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잠깐 동안 쉴 생각이거든.” “헤에…그렇구나. 그럼 이프리트 너는?” “가봤자 바쁘기만 하고 재미도 없는걸. 나도 여기 더 있을래.” “엥? 네가 안 돌아가면 그놈의 클리프 상단의 증명은 어찌 받으라는 거야, ‘이카나’양? 남음 목숨을 걸고 그놈의 파이어 버스터인지 수다쟁이 검인지 가져 왔구만.” “수다쟁이? 큭- 그 녀석 아직도 그대로인거야? 지금쯤이면 정신 차릴 줄 알았더니…” “헉, 이프리트…너 설마?” 그 검을 만든 이유가 이그니스의 수다 때문이었단 말이냐! 나의 경악한 표정에 녀석은 찔끔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이윽고 변명하는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누, 누군 그러고 싶었는지 알아? 시끄러운 건 견딜 수가 없는데 날더러 어쩌라고! 좀 얌전해질까 싶어서 검에다 박아 넣었더니, 오히려 망상만 더 깊어져선 점점 처리가 곤란해졌단 말이야.” “그래서 던전에?” “어쩔 수 없잖아! 인간에게 넘겼다간 마검으로 매도당할게 뻔한데! 그래도 명색이 불의 정령왕이 직접 만든 검인데 그런 취급당하게 만들 순 없잖아? 던전은 그야말로 최선책이었다고!” 마검(魔劍)이라…너도 알긴 아는구나. 예전이었다면 당연히 화를 냈을 일이었지만,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이프리트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지금이라면 녀석이 검을 봉인시킨 이유를 백번이고 천 번이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자 당황한 쪽은 오히려 이프리트였다. “뭐, 뭐야? 너 왜 그래?” “아니…그동안 고생이 많았다고. 오죽했으면 던전에 가뒀을까 생각하니…으흑!” “이익!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남의 순수한 마음을 그렇게 오해하면 안 되지. 아무튼 이번 일에 상단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니까 귀찮더라도 협조 좀 해줘. 던전까지 갖다온 내 성의를 봐서라도. 상단의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진지한 내 요청에 이프리트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쳇, 알았어. 그럼 일단 너 먼저 돌아가 있다가, 하루나 이틀 후쯤에 상단으로 찾아와. 안 그래도 요즘 바쁜 시기라 자리를 오래 비울수도 없으니 겸사겸사 치지 뭐.” “고마워, 이프리트. 부탁 좀 할게. 그럼 난 이만 간다! 다들 나중에 또 봐.” “유희를 가시는 겁니까?” “응. 여기 오기 전에 하던 일이 있었거든. 전대의 미네르바가 부탁한 일도 있고…아참, 트로웰. 혹시 블레스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아, 이런 질문 싫다면 미안.” “응? 아니 괜찮아, 엘. 내 짐작이 맞다면, 블레스터는 굳이 찾으러 가지 않아도 곧 스스로 너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야. 근데 한 가지 주의할게 있어.” “그게 뭔데?” “블레스터는 이프리트가 만든 파이어 버스터와는 달리, 검 자체의 위력보다 사용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검이야. 정교한 마나사용을 요구하기 때문에 소드 마스터 이상에게서만 효과를 얻을 수 있지만, 대신 자격이 되는 자의 손에 들어가면 본 능력의 3, 4배까지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지.” “흐음, 그렇군.” 아무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트로웰의 말에 입을 멍하니 벌리고 말았다. “소드 마스터의 능력에서 3,4배가 향상되면 거의 그랜드 소드 마스터급이야. 보통 어지간한 드래곤과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수준이지. 실제로 요 근래 3500살난 블랙 드래곤이 블레스터에게 깔끔하게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어. 라피스도 방심하면 위험할걸?” “헉- 그, 그 정도야?” “응, 그러니까 이번엔 어지간하면 엘의 선에서 처리하는 게 좋아. 제 아무리 블레스터라도 감히 정령왕을 공격할 생각은 못 할 테니까 다른 일행들이 나서기 전에 먼저 제압하도록 해.” “으음, 알았어. 사람들한테도 주의시켜둘게. 충고 고마워, 트로웰.” “뭘. 그나저나 가장 걱정되는 건 역시 대공과의 전면전인 걸? 이상하게 내 혜안으로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뚜렷하지가 않아서 말이야. 아크아돈에 정령왕의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곤 생각지 않지만…그의 배후에 마왕이 있다면 전혀 불가능 한 것도 아니지. 어쨌든 우리들은 이곳을 벗어나면 본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니까.” 보통 정령들은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역소환이 되어 다시 정령계로 돌아오게 되지만, 육체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시점이 넘을 시엔 그 자리에서 바로 소멸이 되는 수도 있었다. 아무리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정령왕이라도 중간계에선 현저히 약해지기 때문에, 마왕정도라면 4명 전부는 무리더라도, 정령왕 하나는 상대해볼만 할 것이다. 안 그래도 마신으로부터 그가 수상하다는 말을 듣고 난 이후라, 나 또한 은근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정령계 최초로 100년도 못 살아보고 죽는 정령왕이 되는 거 아니야? 이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트로웰은 안심하라는 듯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 마, 엘. 정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가서 도울 테니까. 라피 녀석도 멀뚱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야.” “하하…그럴까나?” 그러자 지금까지 얌전히 대화를 경청하고 있던 미네르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으나,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저도 돕겠습니다. 4명의 정령왕이 합세하면 어떤 상대라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아, 고마워, 미네르바.”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그런데 전부터 물어보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만.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어째서 엘퀴네스에게 엘이라고 부르시는 겁니까? 엘퀴네스는 엘퀴네스지 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애칭인데…?” “흐음. 애칭이오? 그렇다면 이프리트나 트로웰은 어째서 애칭으로 불리지 않습니까? 4명의 정령왕은 모두 평등한 존재인데, 전부가 애칭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것은 일종의 차별이 아닙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또랑또랑 묻는 말에 나와 나머지 두 정령왕은 대답하기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냥 부르기 편한 대로 불렀을 뿐, 딱히 차별이라고 의식하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트로웰이라고 불리는 게 더 편해서 별로…게다가 애칭을 만들기도 어려운 이름이고.” “나도 마찬가지야. 엘의 경우는 인간들이 친한 사람을 부르는 방식을 흉내 내다가 버릇처럼 굳어진 것뿐이고. 이제는 너도 나도 다 엘이라고 불러서 새삼 엘퀴네스라고 고쳐 부르기가 어색할 정도인 걸?” “그렇습니까? 그것 참 유감이군요.” “엥?” 어쩐 일인지 미네르바의 표정이 더욱 흐려지자 우리들은 하나같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뭐가 유감이라는 말인가! 애칭이 정해지지 않은 일이? 아니면 내가 본명으로 불리지 않는 일이? 나는 설마 싶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미네르바도 애칭을 가지고 싶은 거야?” “……” 그 순간 우리는 보고야 말았다. 굳게 입을 다문 무표정한 소녀의 얼굴이 아주 조그맣게 일그러지는 것을. ‘그랬구나!’ 이미 지난 며칠의 생활로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우리들은, 모두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그,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도 애칭이 있으면 좋겠다, 그치? 하하…” “으음. 그러게. 그건 전혀 생각 못했네. 어떤 게 좋을까? 일단 여성체니까 귀여운 이름이 어울릴 것 같은데.” “귀, 귀여운 이름이라…윽. 나는 작명센스가 꽝이라 마땅한 게 별로…” 그러자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하고 있던 이프리트가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짧게 미네-라고 하는 건 어때? 부르기도 쉽고 간편하고, 무엇보다 미네르바하고도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아, 그거 괜찮다!” “오오! 예쁜 이름인데? 넌 어떻게 생각해, 미네르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마음에 드는 이름이네요.” 급하게 결정한 이름치곤 꽤 마음에 든 모양인지, 미네르바는 거부감 없는 얼굴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조마조마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나와 다른 정령왕들은 모두 눈에 띄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왠지 엄청난 고비를 해결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후후후.... 다들 오랜만이어요~~ 자아~ 이제 그만 식칼을 거두어 주십..<-퍽!! 그동안 분량 채우기에 급급한 나머지 인터넷 연재를 못하고 말았습니다. 대신 한번에 폭참 했으니 용서해 주시어요.ㅠㅠ 나머지 분량도 곧 조만간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수정도 안하고 급하게 올린 글이라 어색한 문장이나 내용의 오류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새벽에 비몽사명 하면서 쓴 글이니, 너무 언짢게 생각지 말아주시고, 부드럽게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p.s- 엘퀴네스 공유파일이 돌아다니고 있더군요. 6권 분량에 제가 달아놓은 공지까지 포함된걸 보면 책을 보고 배낀게 아니라, 마녀홈에서 직접 퍼갔다는 뜻. 결국 마녀홈의 식구분이 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보거나, 친구를 통해서 빌렸다-까지는 상관없습니다만, 공유파일은 불쾌하니 그만둬주셨으면 합니다. 개인소장은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과 나누자는 심보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새벽에 잠 못이루어가며 쓴 글이 파일로 돌아다니는거 솔직히 말해 많이 불쾌합니다. 자꾸 공유파일이 발견되면 인터넷 연재 중단해 버릴 겁니다! 소장가치가 없어서 돈주고 사기 싫다라고 하신다면 할 말 없지만, 도서대여점에서 빌려보는 것 조차 아까울 정도로 재미없습니까? 그럼 차라리 보지를 마세요, 보지를!-ㅁ- (탕!탕!) ...........크흠, 흥분해서 죄송합니다; 잠 기운이라 제정신이 아니라는...어허허허허;ㅁ; 이놈의 마감;; ] [정령왕 엘퀴네스] 7-19. ready! (4) “대체 뭘 하느라 이렇게 늦은 거야? 도대체가 너란 녀석은 대책 없이 남한테 일을 떠맡기질 않나…” 정령계에서 돌아온 뒤, 나는 단지 자신을 기다리게 했다는 이유로 라피스의 온갖 타박과 구박을 다 들어야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로 이사나한테 가는 건데. 그래도 불러준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녀석의 기운을 따라 온 게 실수였던 모양이다. 한참동안 이어지는 투덜거림에도 불구하고 인내심 있게 들어주던 나는, 말이 점점 더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한손을 들어 중지시켰다. “그만 좀 해! 나 다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다?” “얼씨구? 한 번 해봐, 어디. 그렇게 제국 수도 광장에서 강제 소환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어.” “윽! 치사한 자식~! 협박하는 거냐!” “그러게 누가 이렇게 늦으래? 고분고분 미안하다고 사과해도 모자를 판에 돌아가긴 뭘 돌아가?” “너도 멋대로 일행에서 빠져나가 몇 달 동안 안 돌아온 적 있었잖아! 왜 나만 갖고 그래? 게다가 그저 그런 일도 아니고, 미네르바의 일이었단 말이다!” “정령왕의 소멸과 탄생이야 어제 오늘일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하! 그러셔? 너 죽을 때 내가 모른 척 해도 괜찮다면야 할 말 없다만.” “쳇, 귀염성 없기는.” 남의 복장을 뒤집는 말을 하면서 고운 말이 나오기를 바라는 게 더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노려봐 준 후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너 혼자 나와 있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 지금쯤 후작인지 뭔지랑 회의라도 하고 있겠지, 뭐. 재미없어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나왔거든.” “흐음. 카터스의 황태자는 어때? 이사나가 황제라는 사실 알고 있어?” “아니. 다들 쉬쉬하고 있는 상태라 아직 뭐가 뭔지 모르는 모양이더라. 아참, 대체 그 시퍼런 녀석은 뭐냐? 그냥 평범한 블루엘프는 아닌 것 같던데.” 뭔가 불쾌한 기억이라도 있는지 잔뜩 얼굴을 찌푸리는 라피스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블루엘프라면…시벨리우스? 그 녀석 유니콘인데.” “…유니콘? 설마 그 신계에 산다는 이마에 뿔 달린 말? 그런 놈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는데?” “네가 준 서클렛 있잖아. 그 보석 안에 봉인되어 있었더라고. 내가 말 안했던가?” “뭐야? …젠장. 괜히 그런 걸 줘가지곤.” “나~참. 그새 또 싸우기라도 한 거야? 동료끼린데 좀 친하게 지내봐. 엘뤼엔이나 데르온하고도 그렇고, 넌 대체 왜 적을 사서 만드는 건데?” “내가 적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놈들이 천재이신 이 몸을 질투하는 거다!” …이놈의 왕자병은 언제쯤 고쳐질까? 나는 거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라피스를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봐 주었다. 아무래도 세계 3대 불치병(왕자병, 공주병, 도끼병)에 속하는 것이고 보니, 낫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애시 당초 너무 큰 욕심일지도 모른다.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지도. “뭐냐 그 표정은? 어째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헤헤. 그래서? 설마 시벨이랑 싸워서 나온 거야?” “그럴 리가 있냐! 그냥…저택 안은 좀 불편해서. 지루한 것도 지루한 거지만 자꾸 노려보는 여자도 있고.” “여자? 아~~ 에이프릴양? 와하하, 쌤통이다! 그러게 사람 마음 가지고 장난치면 벌 받는다니까.” “시끄러. 그나저나 미네르바의 소멸이라…트로웰 녀석은 괜찮냐?” 스스로도 잘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는 녀석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알아온 사이라더니, 그 또한 미네르바를 향한 트로웰의 감정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처음엔 좀 울었는데, 이젠 평소랑 똑같은 거 같아. 뭐, 어차피 언젠간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좋지.” “헤에. 그 녀석이 울어? 겉으론 상냥한 척 하면서 실제론 철벽같은 얼음심장을 자랑하던 땅의 정령왕이? 진심이긴 했던 모양이군.” “…그 말 트로웰 앞에서 하면 고스란히 바닥에다 뼈를 묻을 걸? 아참, 미네르바가 떠나기 전에 한 가지 부탁한 게 있었어. 블레스터라는 검을 찾아다 봉인을 풀어 달라고.” “블레스터? 설마 바람의 진이 봉인된 정령검을 말하는 거냐? 넌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만 떠맡는 건데?” 라피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옆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시선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이 자리에서 서서 구경거리라도 될 참인가? 나는 얼른 녀석을 잡아끌고 저택으로 걸어가며 설명했다. “어차피 우리와 관계있다고 했단 말이야. 대공파 쪽에 블레스터의 주인이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게 능력을 증폭시켜준다며? 얼마 전에도 3500살인 블랙 드래곤이 당했다고, 너도 조심하라고 하던데?” “…3500살의 블랙 드래곤? 썩을 놈의 메테 자식! 아주 돌아다니면서 드래곤 망신은 다 시키는 군! 만나기면 하면 콱 그냥!” “메테…라고 하면 네 형이라는 그?” “그 녀석 말고 누가 있겠냐? 그런 놈이랑 비교하는 것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이니까 신경 꺼. 날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씩씩거리는 녀석의 말에 나는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었다. 착각이었을까? 그 순간, 언뜻 스쳐 지나간 남자에게서 바람의 기운이 느껴진 것 같았다. “…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걸어가고 있는 일련의 무리들이 보였다. 그들은 누군가를 찾는 듯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진한 보라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30대 초반의 남자였다. 애써 감추려는 티가 역력했지만,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백이나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운이,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에 비견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블레스터의 주인인가? 남자의 허리춤에 매달린 붉은 검집에 시선을 미친 나는 곧 굳은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말을 하자마자 딱 나타나는군.” “양반이 될 팔자는 아닌가 보지. 도대체 이곳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벌써 이사나에 대한 꼬리를 잡았나?” 나는 혹시나 싶어 자연계의 실프를 향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엿듣고 오라고 시켰다. 그러자 실프는 곧 그들이 얇은 양피지에 그려진 몽타주를 들고 있으며, 그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찾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몽타주? 혹시 긴 은발에 황금색 눈동자였어?” -네, 꽤 귀엽게 생긴 인상의 소년이었습니다. 나이는 대략 17세 전후반. 그들끼리의 대화로 소년의 이름이 이사나라고 하는 걸 들었습니다. “…!…헉, 어떻게 알았지? 또 다른 말은? 네가 들었던 것 전부 다 샅샅이 말해봐.” -소년 때문에 놓쳤던 제물도 생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곧 클모어를 칠 생각이며, 그것을 위해 이미 군사를 요청한 상태라고 하더군요. 그동안은 되도록 섣부른 행동으로 눈에 뜨이지 말자고 당부하던데요? “으음. 완전히 들킨 건가? 이거 골치 아픈걸. “어이, 뭘 그렇게 혼자서 열심히 중얼거려? 뭔가 알아낸 거야?” 자연계의 정령이 보이지 않는 라피스는, 혼자서 납득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채근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오늘 이 계획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저택에서 나와 있던 바람에 얻을 수 있었던 소득이 아니던가! 녀석의 제멋대로인 행동도 때론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바로 개똥도 약으로 쓰인다는 상황이로군! 역시 선인들의 지혜란!!” “…그게 무슨 말인데?” “하하, 아니야. 그냥 해 본 말이었어.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자. 모두의 앞에서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럴 필요가 뭐 있어? 저 녀석이 블레스터의 주인 아니야? 그럼 검을 뺏어서 당장이라도 봉인을 해제해야지. 미적미적 거리다간 오히려 일을 망친다고.” “엥? 지금 여기서?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적으로 한산한 거리였지만, 아직 낮 시간이라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다. 이런 곳에서 소란을 피우면 오히려 후작의 입장만 곤란해지는 게 아닐까? 그러나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녀석들이 먼저 쳐들어 올 때까지 기다릴 참이냐? 지금처럼 인원이 적을 때 확실하게 해둬야지.” “안 돼. 주변에 저 녀석들 말고 다른 대공파가 있을지 모르는데, 일부러 눈에 뜨일 필요는 없다고. 지금은 그냥 정령들한테 저들이 어디로 가는지 감시만 맡기는 게 나을 것 같아. 처리를 하더라도 나중에 조용히 해야 쓸데없는 소동도 피할 거고.” “그런 건 재미없잖아.” “싸움을 재미로 하냐? 저 녀석들 말고도 또 다른 본진이 따로 이쪽을 향하는 모양이니까, 어차피 그것에 대한 대책도 세워야 해. 일단은 이사나한테 돌아가자고.” “쳇, 오랜만에 스트레스 해소나 할까 싶었더니…” “그런 건 나중에 해, 나중에!” 아쉬움에 쩝쩝 입맛을 다시는 라피스를 재촉하며 나는 곧바로 이사나가 있는 장소로 공간이동의 주문을 외웠다. 혹시나 우리를 의식한 무리가 뒤를 밟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무려 일주일 만에 다시 시작된 꿈은 초반부터 나를 본격적인 전쟁의 준비로 이끌어 가고 있었다. *** “겨우 1만의 군사를 내놓겠다고? 웨폰 공작!!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유카르테 대공은 황실 홀에 마련된 알현실에 앉아 눈앞에 놓여진 서류를 거칠게 넘겨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대공파를 지지하는 수많은 귀족 무리들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긴장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상태였다. 그의 입에서 한 번씩 호통이 나올 때마다 그들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져갔다. 특히나 방금 호명 당했던 웨폰 공작의 얼굴은 불쌍할 정도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황급히 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을 내뱉었다. “그 이상은 재정이 받쳐주질 않습니다. 1만의 군사들도 상당히 무리하게 끌어 모은 숫자입니다.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대공!” “닥쳐라! 2만이다! 앞으로 15일의 시간을 더 줄 테니 그 사이에 2만으로 늘여놓도록! 용병이든 일반 백성이든 상관없다! 당장 나가서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전사 2만을 만들어 놓도록 해라! 만약 이것을 어기면 웨폰 네놈의 목부터 성탑에 걸리게 될 것이야!” “허억! 대, 대공! 그, 그것은!!” “시끄럽다! 제국 황실을 위해 하는 일에 토를 달 참인가? 만약 그렇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반역죄를 물어 네놈 자손의 9대까지 멸할 것이다! 겨우 2만의 군사도 모으지 못하는 공작 따위가 어찌 중앙에 있을 수 있단 말이야! 다음! 차첸 백작!” “네, 넵! 섭정왕 전하!” 이름이 불린 남자는 전에 없이 불안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곧 이어질 그의 반응이 어떨지 미리 예상하고 있는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대공은 전에 없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옆에 있던 화병을 들어 차첸 백작의 얼굴을 겨냥해 집어 던졌다. 퍼억!! “크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깨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주변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아무런 항변을 할 수 없었다. 곧 대공의 분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네놈이 감히 능멸해? 지금 2천이라 했느냐? 보낼 수 있는 군사가 2천?!!” “허, 허억! 통촉해 주십시오, 전하! 제가 끌어 모을 수 있는 전사들은 그들이 전부입니다. 가문의 사비를 전부 털어 모은 용병의 숫자도 3백에 못 미칩니다! 제, 제발!” “영지에 있는 백성들도 있을 것 아니냐!” “하, 하지만 어찌 영주민을…” “닥쳐라! 네놈이 정녕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네 다시는 그 손으로 검을 쥐지 못하게 만들어 주겠다!” “대, 대공! 제발!!” 그러나 차첸 백작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곧 옆에 있던 장식용의 검을 빼어들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휘둘렀다. 촤아악! 스겅! “으아악!!” 섬뜩한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백작은 팔이 타오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경악으로 부릅뜬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어느새 몸에서 떨어져 나가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자신의 오른쪽 팔이었다. “아, 안 돼!! 안 돼!!! 크아아아아악!!!” “뭣 들 하느냐! 이놈을 어서 끌어내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놈들이 하나 없군!” “화, 황공합니다.” 검사의 생명과도 같은 팔을 아무렇지나 않게 잘라낸 잔인한 대공의 손속에, 귀족들은 하나같이 질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들은 하나 같이 동정의 시선으로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사라지는 차첸 백작을 바라보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보니 저런 상황도 결코 남의 일처럼 여기어 지지 않았다. 내일이면 바로 자신의 차례가 될지 모르는 것이다. 알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진 그들은 돌아가는 내내 불안한 표정으로 쑥덕거렸다. “이거야 원…갑자기 군사를 내놓으라고 할 때부터 뭔가 불안하다 싶더니,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10만 군사를 모으신다니요? 게다가 그렇게 모은 군사의 대부분을 곧바로 할버크에 집결시키라는 명령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현 재정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실 분이 어찌 그리 무리한 계획을…강제징병으로 끌어 모은다고 해도 과연 전하가 원하는 시간 안에 숫자를 채울 수 있을지.” “차첸 백작도 안됐군. 선대의 백작을 유지를 이은, 꽤나 전도유망한 젊은이었는데 말이네. 10년 후쯤이면 소드 마스터가 될 거란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는데, 쯧쯧. 재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생명과도 같은 팔을 잃어버리다니.” “뭐라해도 요 근래 들어 대공전하의 손속이 잔인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안 그래도 흉흉하게 돌던 소문이 오늘의 일로 더욱 가쉽화 되겠군요.” “소문?” 의아하게 묻는 질문에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셨습니까? 대공전하가 아이들을 납치해 마신의 제사에 바친다는 말이 퍼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요 근래 대공을 모시던 아이들이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 그런! 자네는 그런 소문을 믿는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찝찝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늘에서는 회의가 들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황제 폐하를 몰아내고 섭정왕 전하를 지지한 것이 잘 한 일이었나 하고요.” “헉! 이, 이 사람아!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기겁한 다른 귀족들이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남자의 태도는 전혀 거침이 없었다. 방금 전 알현실에서 일어났던 칼부림이 그의 마음을 몹시 착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의 대공전하는 이상합니다. 예전의 총기와 현명하던 눈빛은 전부 잃어버리고 마치 살육에 미친 사람 같아요. 이미 대부분의 중립 귀족들이 황제전하 편으로 돌아선 것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허- 자네는 그 말을 믿는 겐가? 클모어의 카웰 후작이 황제편이라는?” “아니라는 증거도 없잖습니까? 지금 군사들이 집결되고 있는 할버크는, 수도에서 카웰 후작의 영지로 가는 길목의 중심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지금으로선 대공전하가 카웰 후작을 치기 위해 군사를 모으고 있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크흠.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사나 황제가 카웰 후작과 합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던 참이다. 만약 그곳을 기점으로 그가 다시 황권을 찬탈할 거사를 꾸미고 있다면 대공으로선 일찌감치 대비를 해두는 편이 나았다. 어찌됐든 카웰 후작은 백성들에게 지지받는 몇 안 돼는 귀족중 하나이며, 대륙에서도 손가락으로 꼽는 소드 마스터의 일원이었다. 개인적으로 훈련시킬 수 있는 사병의 숫자 또한 2만이니, 그를 제압하려면 그의 몇 배에 해당하는 군사를 모아야 했을 것이다. “만약 황제와 관련이 없다면요? 단지 소문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그의 존재는 언젠가 대공의 발목을 붙잡게 될 걸세. 이전이라면 모를까, 장차 화근이 될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살려둘 만큼 우리의 마음이 넉넉한 상태는 아니지 않은가?” “으음. 그러고 보니 후작은 이전에 대공전하가 직접 주선한 혼담을 모욕적으로 파기한 적도 있었지요. 그런걸 보더라도 이미 그는 우리 쪽으로 돌아설 사람이 아니로군요. 결국 전쟁은 불가피한 겁니까?” “그렇지. 이미 대공전하는 그렇게 하시기로 마음을 굳힌 듯하네. 징병을 하는 와중에도 이미 3만에 가까운 군사가 할버크에 집결되어 있다니 말이네.” 지금의 상황대로 보자면 대공은 몇 달 내로 그가 원하는 숫자만큼 군사를 집결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리 카웰 후작의 능력이 뛰어나다지만, 자신의 사병보다 몇 배나 많은 숫자의 군사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이쪽에는 같은 소드 마스터인 카리브디스 공작도 존재하지 않은가! ‘조만간에 아까운 별을 또 하나 잃겠군.’ 처음 그들이 대공을 지지했던 이유는, 심성이 나약한 어린 황제보다 그가 제국을 더 잘 이끌어 나갈 거란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누구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대공과 그의 곁에 존재하는 마족들의 힘이 두려워, 아무도 그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있을 뿐.          팔을 잃고 절망의 비명을 내지르던 차첸 백작을 떠올리며 귀족들은 하나같이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모시던 주인에게 검을 들이댄 대가는 이토록 혹독한 방법으로 그들에게 되돌아오고 있었다. ============================================== 또 시~작! <-재미 들렸냐!! [정령왕 엘퀴네스] 7-20. 전운(戰運)의 흐름 (1) 나와 라피스가 후작의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일행들은 모두 후작의 개인 서재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땐 이미 대부분의 계획을 의논중인 상태였는데, 한참 심각한 표정을 하며 후작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일행들은 나를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엘! 드디어 돌아왔구나!” “엘님! 지금 오시는 겁니까?” “너무해~ 엘님! 너무 늦었잖아!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제야 온 거야?” “라피스님과 만나서 같이 온 거야?” 오랜만의 등장에 인사를 건네느라 본의 아니게 회의는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덕분에 한창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던 후작은 불쾌한 표정으로 연신 헛기침을 내뱉느라 곤욕을 치루는 상태였다. 나는 노려보는 후작의 시선을 외면하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다들 오랜만이지? 하하,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그런 식으로 뛰어나가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다들 엘님만 기다리고 있었다고.” “으음. 미안, 미안. 그런데 무슨 얘기 하고 있었어? 뭔가 계획이 잡힌 거야?” “크흠. 안 그래도 지금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소. 정령사님도 자리에 앉으시구료. 거기, 마법사 자네도.” 후작의 말에 나와 라피스는 어색한 표정으로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앉았다. 분위기가 진정될기미가 보이자 지금까지 하고 있었던 이야기가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현재 클모어에서 모을 수 있는 군사는 모두 3만 정도였습니다. 이중 1만은 클모어의 자체적인 치안을 담당해야하기 때문에 움직일 수 있는 실정이 아닙니다. 진격은 일주일 뒤, 이중 만 5천의 군사만을 가지고 출발하여, 우리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귀족중의 한사람, 완트 백작의 성에서 그의 군사들과 합류합니다.” “일주일 뒤? 그건 너무 촉박하지 않습니까? 군사의 숫자는 그렇다 쳐도 무기와 식량은…” “클리프 상단의 저력이라면 일주일이면 충분합니다. 문제는 아직 총수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만. 그의 부재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아! 이틀 후쯤에 찾아가면 될 거예요. 그때까진 돌아 올 거라고 들었거든요.” “그렇습니까? 당신의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 세운 계획을 무리 없이 진행 시킬 수 있겠군요. 클리프의 총수가 인정을 하면 다른 상단들 또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될 겁니다. 가장 처음으로 할 일은 전쟁의 발발 시, 대공쪽의 보급을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만. 제국에 존재하는 상단 중 가장 넓은 상권을 확보하고 있는 아놀드 상단이 대공의 편이니 그것은 불리한 일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대공과 이사나의 싸움이었지만, 이것은 곧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또 다른 세력의 전쟁을 예비하고 있었다. 싸움을 주 무기로 하는 용병뿐이 아닌, 상단의 경우도 그러한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훗날의 존속 여부가 판단될 테니, 솔트레테에 존재하는 모든 상단이란 상단은 바짝 긴장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예지력을 가지고 있기로 유명한 클리프 상단의 총수가 이사나의 편을 들면 대부분의 민심이 이쪽으로 이동하게 될 가능성이 있었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공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어…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대공의 기사들이 이곳에 와 있는 것 같았습니다만.” “아아, 사실입니다. 이전에 있었던 에릴과의 혼담을 거절한 일로 꾸준히 찾아들고 있는 형편이지요. 하지만 그런 소수만으로는 단순히 협박거리 이상이 안 됩니다. 그들에 대해서는 그리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아니. 문제는 그것이 아니에요. 아무래도…그들이 이사나의 정체를 알아본 것 같았거든요.” “뭐, 뭐라고요?” 설마 폴리모프한 이사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나름대로 느긋한 얼굴이던 후작의 표정은 급속도로 굳어졌다. 그것은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라, 나는 방금 전 거리에서 보았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 끼리 나누는 대화를 들으니 곧 클모어에 군사를 집결시킬 예정인 것 같더군요. 이미 그들은 이곳에 이사나가 있고, 황권을 찬탈할 준비를 한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있는 듯 보였어요.” “큭- 어쩐지. 요즘 식량과 무기를 대량으로 유통되고 있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여긴 참이었는데. 드디어 군사를 집결 시키는 건가! 이 간악한 대공놈! 그래, 군사의 수는 얼마정도나 한답니까?” “그 부분에 대한 건 못 들었어요. 일단 그들의 목표는 여기 있는 이사나와 알리사의 위치를 확보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엥? 나도?” 자신의 이름까지 거론되자 알리사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카터스의 황태자까지 덩달아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알리사노양은 솔트레테의 귀족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들이 무슨 이유로 노린단 말씀이시오?” “알아봤자 별로 좋은 일도 아니에요. 기억 안나, 알리사? 우리와 처음 만났던 상황 말이야. 그때 대공의 기사들이 널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었잖아. 그때의 목적을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모양이야.” “에엑? 뭐야, 그게? 역시 이사나씨를 따라온 게 잘 한 거였잖아. 나 혼자선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야. 어휴, 소름끼쳐.” “아, 알리사노양! 그게 정말입니까? 솔트레테의 대공이 당신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었다고요? 내 이놈들을 용서치 않으리라! 당장 본국에 지원을 요청해야!!” 쾅! 그때 커다란 소음이 탁자위에 울려 퍼졌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굳은 표정이 된 이사나가 테이블 위에 주먹을 올려둔 채 황태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진정하시오, 황자! 카터스의 개입은 달갑지 않다고 말 했을 텐데요? 경거망동을 보였다간 내 검이 먼저 황자의 목을 겨누게 될 겁니다.” “큭- 당신이야 말로 상황파악을 못하고 있는 게 아닙니까? 고작 3만의 군사들로 황성을 칠 계획을 하고 있다니! 지금은 타 제국의 손을 빌려서라도 목적을 이루는 게 오히려 현명한 선택인 듯 합니다만?” “역사에서 그런 식으로 남의 도움을 빌려 결과가 좋았던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본.래. 내. 것.이.었.던. 자.리.를 찾기 위해 타 제국의 간섭을 받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니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둬 주시겠습니까?” “…본래의……자리?” 지금 그 말로 황태자는 이사나의 정체가 무엇인지 완전히 깨달은 듯 보였다.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지 못하는 그를 무시하며 회의는 다시 촉박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체가 들켰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을까요? 어차피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인데, 겨우 그들로는 설령 마주친다 해도 우리들을 어찌할 수 없을 겁니다.” “아뇨. 기사들을 지휘하는 남자가 꽤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았어요. 혹시 검은 머리카락에 보라색 눈동자의 기사를 아시나요? 나이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큭. 카리브디스! 하필 그 자가 이곳에 왔을 줄이야.” 남자의 대략적인 인상착의를 들은 후작은 단번에 그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고 낭패한 듯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한 쪽 구석에 시립해 있던 이사나의 친위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딱하게 굳어진 사람들의 표정을 쭈욱 흩어본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단 대공이 군사들을 집결시키는 장소를 먼저 알아내는 것부터가 순서일 것 같습니다. 한 도시를 치기 위해 모으는 군사인 만큼 모이는 숫자 또한 대군(大軍)이 될 테니, 보급을 위해서라도 중간에 모이는 집결지가 따로 있을 거예요.” “끄응. 그렇다면 할버크일 겁니다. 수도인 헤리카에서 이곳으로 오기까지 거치는 길 중 거의 중간 지점인데다, 성 남부 외각에 평야지대가 많아 대규모의 군사를 집결시키기에 편한 곳이거든요. 그곳 영주인 클란 백작이 지난번에 자신의 큰 아들과 에릴의 혼담을 파기한 일로 감정이 많이 상해 있으니, 아마 적극적으로 도우고 있을 겁니다.” “할버크라면…여기서 두 달 정도 떨어진 도시를 말씀하시는 거죠? 얼마의 숫자가 모일 진 모르지만, 일단 모든 계획을 수정하는 편이 좋겠어요. 이곳이 우리들의 본거지인 이상, 적들에게 순순히 빼앗길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생각해, 이사나?” “나도 엘의 의견에 찬성이야. 그런데 수정이라면 어떤 식으로?” “으음, 우선 할버크에 정찰을 보내서 정보를 모아야겠지? 적의 확실한 숫자를 파악해야 적절한 대책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나이아스들을 통하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그리고 아까 식량과 무기가 대량으로 유통된다고 했었지? 그럼 그것과 관계가 있는 상단들도 조사해 봐야겠군. 혹시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대공의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부분은 철저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근데 전쟁이 시작되면 대공이 직접 이쪽으로 내려오게 될까? 만약 그렇다면 수도에 남게 될 군대는 몇이나…응? 다들 왜 그렇게 봐?” 활기찬 의견이 교환되어도 모자를 판에 일행들은 모두 멍한 표정으로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한 눈으로 시선을 되받아 치자 언뜻 얼굴이 붉어진 후작이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흠-흠.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급 정령사라고는 들었지만, 이러한 일에는 전혀 문외한 일이실줄 알았는데 의외여서 그만….” “에? 실제로도 잘 모르는데요.” “하지만 지금 말씀하시는 것이나 정황을 파악하시는 것이…” “하하, 그냥 느끼는 데로 말하는 것뿐이에요. 이런 일에야 후작님이 전문이시니 더 잘 아시겠죠. 전 전쟁조차 이번이 처음 겪는 일인걸요.” “그러나…” “흐음, 그러고 보니 대공이 황성을 비운다면 조금 더 수월해 질지도 모르겠는데? 이런 건 어떨까요? 어차피 중간에 집결지가 있는 거라면 그곳으로 모이는 시간이 있을 테니 우리는 그 사이에 군대를 미리 수도 쪽으로 출발시키는 거예요.” “네? 하지만 그래선…” 당황해서 뭔가 말을 이으려는 후작을 가로 막고 나는 고개를 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전부가 가는 게 아니에요. 일부만 미리 가서 황성을 치는 거죠. 그럼 이쪽에 집결된 대공의 군대는 당황해서 수도를 지키기 위해 다시 회군하는 수밖에 없잖아요? 바로 그때 클모어에 남아있던 나머지 부대가 그들의 뒤를 치는 식이죠. 이를 테면 양동작전이랄까. 으음, 너무 터무니없을까요?” “…아니, 나쁘진 않은 계획이군요. 하지만 이런 방법도 숫자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소용이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황성을 지키고 있을 군대의 숫자도 생각해야 할 테니까요. 게다가 얼마 되지 않을 나머지 전력으로 할버크에 집결된 모든 군사를 친다는 것도 좀 무리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양쪽이 전부 몰살당하는 결과를 내게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만약 대공이 이번 전투에 사활을 걸고 있다면, 자신이 모을 수 있는 모든 군대를 전부 이쪽으로 집결 시킬 겁니다. 여러 면에서 불리한 우리가 설마 먼저 황성을 칠거란 생각은 못 할 테니, 자연적으로 수도 쪽의 방어가 허술해질 수도 있어요.” 그러나 카웰 후작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음으로서 반대의 표시를 해보였다. 그가 제시한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 클모어에 있는 3만에서, 중간에 협력하기로 한 다른 귀족들의 군사를 이쪽으로 합한다 해도 모을 수 있는 숫자는 5만이 한계입니다. 그에 비해 대공이 모을 수 있는 군사는 최대 10만을 넘지요. 아무리 뒤를 치는 것이라 해도, 배가 차이나는 전력이 상대가 될 리 없습니다. 게다가 황성으로 갈 전력까지 빼낸다면 더더욱…” “하지만 원래 전쟁이 일어나면 군인 중 90%는 일반 백성들 중에서 징집되지 않나요? 숫자는 많을 진 몰라도 전투력은 별 볼 없을 겁니다. 갑자기 뒤에서 공격을 당하게 되면 당황해서 전열(戰列)을 가다듬지 못할 거예요. 그 사이에 대공을 어떻게 할 수만 있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결될 거라 생각해요.” 꽤 그럴듯한 설명이었는지, 내 말이 끝났을 즈음 일행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동조의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그 중에서도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듯하던 카웰후작은 잠시 후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미리 수도로 진격할 군대의 숫자는 얼마정도 입니까?” “음. 글쎄요? 수도를 지키는 군대가 몇이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리 많지는 않을 거예요. 한 3천정도?” “그런 터무니없는! 3천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눈에 뜨이지 않고 이동하려면 3천이 가장 적당한 걸요. 모자란 전력은 여기 있는 라피스가 보충 할 수 있을 거예요.” “하아? 왜 또 거기서 내가 나와?” 지금까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방관하는 입장을 취하던 녀석은, 내가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자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귀찮다는 빛이 역력한 얼굴이라 나는 눈썹을 찡그리며 대꾸했다. “그럼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려고?” “그렇다고 날 전면에 내세울 건 또 뭔데? 마법이 필요한 거라면 저기 있는 퍼런 엘프놈이나 마족놈도 있잖아.” “시벨은 안 돼. 이사나를 도와서 여기를 지켜야 하거든. 그리고 데르온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알 때문에 일행에 합류한 거야. 그때쯤이면 아이가 태어날 텐데 싸움에 가담하고 있을 여유가 없다고. 결국 제일 한가한 라피스 라즐리 당첨!” “네 멋 대로냐!” 버럭 소리치는 녀석을 무시하며 나는 생긋 웃는 얼굴로 다시 후작을 바라보았다. 라피스의 이름이 거론될 때부터 뭔가 상당히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하고 있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긴장시켰다. “저래 보여도 마법 실력 하나만큼은 꽤 쓸 만해요. 모자란 전력은 충분히 보충 할 수 있을 거예요. 정 안 될 것 같으면 저도 같이 가면 되고.” “예? 하지만 겨우 두 명이서…” “무슨 소리야, 엘? 그럼 서로 따로 움직이는 거야?” 웅얼거리는 후작의 말을 막고 질문한 사람은 지금까지 굳은 얼굴로 내 설명을 듣고 있던 이사나였다. 나는 당연한 소리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어쩔 수 없잖아? 전력이 될 만한 인원은 적당히 분배 시켜야지. 나와 라피스가 먼저 올라가서 적당히 황성을 혼란에 빠트려 둘 테니까, 그 사이에 네가 후발부대와 함께 치고 올라오면 될 거야.” “잠깐! 난 반대야, 엘! 왜 네가 저 자식이랑 같이 가? 차라리 내가 갈래!” “그건 안 돼. 시벨은 여기 남아서 이사나를 도와줘. 황성을 치려면 모자란 전력만큼 대단위의 마법이 사용 돼야 할 텐데, 지금 너의 모습으로는 무리잖아? 설마 모두의 앞에서 본 모습으로 배회할 셈은 아니지?” “…그, 그렇다고 네가 굳이 저 녀석과 같이 갈 필욘 없잖아! 안 그래도 잘난 자식이니, 그냥 혼자 가라고 그래!” 흥분하며 길길이 날뛰는 시벨과는 달리, 그가 필사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시큰둥한 모습이었다. 서로를 마주보는 두 눈에선 이글거리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이 둘은 왜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걸까?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본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또 무슨 억지야? 그렇지 않아도 멋대로 구는 녀석인데 나라도 가서 통제해야지, 안 그럼 제 기분 내키는 대로 온통 수도를 불바다를 만들어 놓을게 뻔하다고. 게다가 그런 큰일을 이 녀석 혼자 부담하게 만들 순 없잖아? 이사나, 넌 어떻게 생각해?” “응? 아…나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이사나는 잠시 놀란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지금까지 함께해 왔던 일행들이 분산된다는 사실 때문인지, 고개를 든 얼굴은 결정을 망설이는 빛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의 결심을 굳혔다는 듯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엘의 의견엔 찬성이야. 다소 무리가 따르는 작전이긴 하지만, 엘과 라피스님이 움직인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오케이. 맡겨만 둬. 그럼 언제 출발해야 하려나? 일단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던 다른 귀족들에게는 미리 연락해서 이쪽으로 오라고 말해 둬, 이사나. 대공 쪽도 출발하는 시간이 있으니 서두르면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거야.” “응,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일단 당장은 수도로 진격할 3천의 군사부터 뽑아둬야겠군.” “무, 무슨 말씀이십니까, 폐하! 저 두 사람만으로는 턱도 없는!!” 순식간에 상황이 진행되어 버리자 후작은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설마 이사나가 이런 무모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계획에 응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그의 결심은 이후로 절대 바뀌는 일이 없었다. “형님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지금은 저와 엘을 믿고 따라와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형님의 생각보다 훨씬 강한 존재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줄 겁니다.” “하, 하지만…폐하!” “언젠간 반드시 지금 제가 품은 마음을 털어놓는 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시고 우선은 저의 뜻대로 행해 주십시오.” “!!”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후작으로선 거역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이 전쟁은 그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복잡한 표정으로 이사나와 일행들을 바라보던 그는 결국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저는 폐하와 함께 하기로 결심한 몸! 그것이 지옥이라 해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으니 원하시는 뜻대로 하십시오. 제 목숨을 걸고 폐하를 지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형님.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잠시 미안한 시선으로 카웰 후작을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나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본격적인 전운의 흐름이 감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21. 전운(戰運)의 흐름 (2)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회의가 끝난 후, 각자 자신이 할 일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려는 우리를 불러 세운 것은 카터스의 황태자-라온휘젠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 서린 혼란한 감정을 읽은 나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보낸 뒤 혼자 따로 그와 대화를 나눌 자리를 마련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던 서재 안에 두 사람만이 남자, 주변은 금세 쥐죽은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일부러 소리 나게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황태자에게도 밝은 목소리로 앞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으세요. 할 말이 많으신 것 같은데 서서 대화할 수는 없잖아요?” “그보다…먼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정말…이사나씨가 이곳 솔트레테의 ‘비운의 황제’입니까?” “으음. 그건 둘째 치고…제가 없던 지난 일주일동안 무슨 일이 있었죠? 그동안 일행들에게서 아무것도 못 들으셨나요?” “본인이 아는 것이라곤 그가 황제파의 사람이며, 곧 섭정왕인 대공을 치고 다시 황권을 찬탈할거라는 계획밖에 없습니다. 직접 물어본 적도 있지만 알 필요가 없다고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방금 회의에서…” 악다문 그의 입에선 진한 배신감마저 배어나왔다.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을 자신 혼자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과 섭섭함이 컸던 모양이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황태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사나는 쫓기고 있는 입장이라, 아무리 일행이라 해도 함부로 정체를 밝힐 순 없었으니까요. 라온휘젠님도 그런 상황이었다면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물론 이해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숨길 필요는 없었잖습니까? 게다가 애시 당초 이 몸을 신뢰할 수 없다고 해놓고 오늘처럼 중요한 회의에 참석시킨 저의도 몹시 궁금합니다!” “헤에~ 신뢰할 수 없다고 했나요? 이사나가?” “그렇습니다. 그는 이 몸의 존재가 앞으로의 일정에 큰 변수로 작용하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처음에 사막에 쓰러져 있었던 상황조차 의심을 하니 마땅히 변명할 말도 없었습니다. 본인으로선 답답할 따름입니다.” 오오, 그랬단 말인가! 이사나 녀석, 꽤 제법이잖아? 왠지 그때의 상황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 해, 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사나가 그렇다고 했다면 사실일겁니다. 회의에 참석시킨 것은 그 ‘변수’가 어떻게 작용할지 알아보려는 것이겠죠. 아무튼 그 사이에 배짱만 늘었다니까요. 쿡쿡.” “서, 설마 그는 이 몸의 반응을 시험해봤다는 겁니까?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보기 위해? 그런 무모한!” “미안하지만, 라온휘제님. 이사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타인을 쉽게 믿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또한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셔도 곤란해요. 녀석은 당신이 적이라는 판단이 생기면 바로 제거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일행으로 받아들인 겁니다. 설마 정말 모르셨다곤 말씀 못하시겠죠?” “…어렴풋이는. 하지만 정말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 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다룰 수 있다고 장담하는 남자라면, 자신의 정체 정도는 미리 밝혔어도 상관없던 것 아닙니까?” “으음. 저야 말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라온휘젠님은 그동안 솔트레테 제국 황제의 이름이 뭔지 전혀 모르고 계셨나요? 아무리 외모가 달려졌다지만, 이름만 들으면 눈치 챌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쾌한 얼굴이던 황태자의 얼굴이 금세 붉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는 곧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아니 그게…실은 이 몸의 교육을 담당하고 계신 스승님이 다른 제국 황족이름은 알 필요가 없다고…사람은 일단 제 앞가림부터 할 줄 알아야 한다며…크흠. 솔트레테 제국의 황제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는 들었습니다만, 미처 성명까지는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하하…그래도 장차 제국을 이어받을 황태자인데, 타 제국 황제의 인상착의나 프로필정도의 기본 정보는 인식하고 계시는 게 앞으로도 도움이 되실 텐데요.” “네, 본인 또한 지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습…헉! 이, 이 몸이 태자라는 사실은 어찌 아셨습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그는 곧 말속에 담긴 위화감을 느꼈는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 놀란 것은 오히려 내 쪽이었다. “어라? 숨기신 거였어요? 저는 아무렇지 않게 나이를 알려주시길래, 다른 일행들도 지금쯤이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 나이요? 아니, 아직 물어본 사람이 없어서 말해준 적은 없습니다만. 그런데 그런 걸로 어떻게 이 몸이 황태자라는 사실을??” “그거야 이사나와 같은 나이의 황자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 밖에 없기 때문이죠. 그 정도의 정보는 조금만 제국 정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거라고 생각하는데요?” “…헉!!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그럼 이 몸은 나이를 함부로 알려줘서는 안 되는 거였습니까? 아아! 그, 그래도 황자라고만 밝히지 않는다면 상관없겠지요?” “…그러려면 일단 머리색부터 바꾸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앗! 그렇지!! 이 머리색은 황족에게만 물려진다고 했었지!! 이, 이런 낭패가!!” 기겁하는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나는 그를 가르쳤다는 스승의 성격에 대해 짐작해볼 수 있었다. 틀림없이 엉뚱한 괴짜이거나, 평소 카터스 제국 황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일 것이다. 황위를 이을 태자를 저리 바보로 만들어 놓다니, 이거 미래가 영 불안한 거 아니야? 피식피식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눌러 참은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것 보세요. 라온휘젠님도 본인의 신분을 전부 밝히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이사나만 탓하지 말아요. 그 녀석도 당신이 그냥 황자가 아닌, 카터스의 황위를 이을 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리 달가운 느낌은 아닐 테니까요.” “크, 크흠. 그래도 나는 물어보면 기꺼이 말해줬을 겁니다. 애당초 다른 일행들은 전부 알고 있는데 어째서 이 몸에게만…” “그거야 우리들은 이미 그의 정체를 안 상태에서 여행을 함께 했기 때문이죠. 중간에 합류한 황태자님과는 엄연히 입장이 달라요.” “하, 하지만 알리사노양은요? 그녀는 알폰프 제국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원래 어떤 일에든 좋아하는 사람은 예외에요.” “……” 내 대답이 정곡을 찔렀는지, 황태자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후 그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묘하게 납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건 그렇군요. 이 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쿡쿡. 웬만하면 황태자님이 이사나를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안 그래도 거사를 앞두고 있는 상태라 신경이 많이 예민할 테니까요. 황성에서 나온 이후부터 한 차례도 편한 시간이 없었으니, 겉으론 저래도 속이 말이 아닐 거예요.” “그리 말씀하시니 노력해보겠습니다. 저어…또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뭔데요?” 이번엔 또 무슨 말을 꺼낼까 싶어 나는 긴장한 얼굴로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또 다시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을 털어놓았다. “방금 전 회의에서 카웰 후작이 사제님더러 정령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설마 이 몸에게 정체를 숨긴 건가 했지만, 사제가 아니신 분이 상처를 치료 하셨을 리도 없고. 그렇다고 후작에게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라 말입니다.” “아… 그건 말이죠. 어차피 언젠가는 곧 알게 되실 일이라 생각하지만, 아직은 뭐라고 말씀드릴 단계가 아닌 것 같네요. 다만 저는 두 분 모두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만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무슨? 설마 사제님도 이 몸이 다른 제국의 관계자라고 생각하시기 때문에 말을 돌리시는 겁니까? 그런 거라면!” “아니요, 그런 건 상관없어요. 단지 제 정체가 밝혀지는 게 이사나에게 결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번일은 전적으로 녀석의 활약으로 만들어 주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따라온 거니까요.” 차분하게 대답하는 나를 보며 카터스의 황태자는 점점 더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 되어갔지만, 나는 그저 생긋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었다. 그 뒤 나는 ‘다음에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잽싸게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질문들이었음에도 막상 부딪치고 나니 10년은 한꺼번에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하아…그래봤자 정령왕의 수명에서 10년이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당연한 걸 말하는군. 대체 뭘 그렇게 꼬박꼬박 대답해주고 있던 거야? 적당히 떨쳐버리고 나올 일이지.” “어? 라피스? 기다렸어?”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본 곳에는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특유의 거만한 표정을 지은 채 팔짱을 끼고 서있었다. 다른 일행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아마도 전쟁준비를 하기 위해 이것저것 분주한 모양이었다. 결국 라피스 혼자 땡땡이 치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런 주제에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쾌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제발 사고를 치려면 너나 하라고. 왜 나까지 끌고 들어가는 건데?” “갑자기 뭔 소리…아~ 황성을 치는 일 말 하는 거야?” “아~? 지금 그런 한가한 말이 입에서 나와? 대체 뭐하자는 거냐? 어울리지도 않게 전쟁이니 뭐니…넌 그냥 이사나가 하는 일에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왜 나서서 계획까지 늘어놓는 건데?”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는 걸 어쩌라고. 너나 나나 그렇게 까다로운 조건도 아니잖아? 이왕 할 거 좀 기분 좋게 맡아줄 순 없어?” “얼씨구? 전쟁이 뭔지는 알고나 하는 소리냐? 그냥 황성만 치면 다 돼는 줄 알아? 지금까지 몬스터만 죽여 본 네가 퍽이나 인간을 상대로 힘을 쓰겠군. 그렇지 않아도 자기가 정령인지 인간인지 헷갈리는 주제에.” 비꼬는 기색이 가득한 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평소처럼 불쾌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을 맴도는 아무 말이나 툭-하고 내뱉었을 뿐. “인간이나 몬스터나 피와 살로 이루어진 건 매한가지인데 뭐가 다르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남의 사정 봐줄 때야? 안 그럼 이쪽에서 당하게 생겼는데.” “호오, 평소답지 않은 말인 걸?” “사실이잖아. 누구의 희생도 없는 전쟁은 있을 수 없어. 그 대신 나는 관대한 성격이니까, 도망치는 녀석들까지는 건들이지 않겠지. 이정도만 해도 충분한 혜택 아니야?” 그런데 그것이 생각보다 라피스에겐 꽤나 의외였던 모양이다. 녀석은 잠시 묘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뭔가 굉장히 흥미롭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흐음, 그럼 그렇지. 평소보다 딱 부러지게 말해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더니. 아직 본성이 완전히 깨어날 리는 없고… 아무래도 새로운 정령왕의 탄생에 잠시 영향을 받은 모양인데. 아무튼 재미는 있군.” “뭔 소리야?” “아니, 네가 인간의 기억을 가지지 않았다면 어떤 성격이었을까 생각하니 신기해서. 장담하지만, 전대의 엘퀴네스보다 더 재수 없었을 것 같군. 너 말이야…딴 차원에 빠졌다 오길 잘했다.” “하아? 지금 나 놀리는 겨?”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라피스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봐서인지, 나는 어쩐지 방금 전에 내뱉었던 말들이 하나같이 찝찝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너무 심하게 말했나? 그래도 일단 인간은 지성이 있는 생명인데. 으윽! 일단이 아니잖아, 일단이! 사람을 해치는 것과 몬스터를 죽이는 게 어떻게 같다는 거야? 아무리 생각 없이 말했다지만 나 미친 거 아냐?’ 모처럼 모질어졌던 마음도 보람 없이, 또다시 금세 후회하고 마는 나였다. ============================================= [정령왕 엘퀴네스] 7-22. 전운의 흐름 (3) 다음날 우리는 실프를 통해 이미 할버크에 집결된 대공의 군대가 4만의 숫자를 육박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때 아닌 전시(戰時)에 이미 대부분의 백성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그 중 젊고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은 강제로 군대에 지원되었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이사나의 얼굴은 침통하게 일그러져있었다. “강제징병이라니…결국 내가 싸워야 하는 건 아무 죄 없는 백성들이라는 건가.”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로 줄였으면 좋겠는데…으음, 다른 쪽 귀족들에게선 연락이 왔어?” “응, 각자의 사병과 영지민들 중 자원해서 모은 군사를 데리고 이곳으로 출발한다고 했어. 그들도 일단은 클모어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아. 무리하게 일정을 변동한 것인데도 잘 따라와 주고 있어.” “그래? 그럼 이제부턴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이쪽의 전력을 가다듬어야겠군. 아무쪼록 별 다른 일 없이 무사히 합류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이 쯤 되면 다들 알고 싶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야.” 내 말에 이사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긴 했지만, 막상 눈앞에 현실로 다가오고 나니 착잡한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 누가 자신의 숙부에게 검을 들이대는 일을 기뻐하겠는가. “아참! 상단에서의 일은 어떻게 하지? 그 마검…아니, 이그니스를 가져다 줘야 하잖아.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물자의 보급이 필요하지 않아?” “응, 안 그래도 슬슬 한계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전시를 느낀 상인들이 한사코 몸을 사리고 있어서 말이야. 클리프 상단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야.” “그럼 모레쯤 방문할까? 2~3일 후에 오라고 했으니, 그때면 이프리트 녀석도 돌아와 있겠지.” 나와 이사나가 오늘 일정에 대해 의견을 짜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풍겨오는 바람과 물의 기운을 느낀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가, 낯익은 사람을 발견하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꽤나 오랜만에 만나는 정령사 페리스가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들고 서 있었던 것이다. “페리스!!”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십니까? 혹시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것은 아닌지.” “아니에요. 와~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다른 기사들은?” “전부 연무장에서 수련중입니다. 엘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오려고 했지만, 후작님이 워낙 엄격하셔서 말입니다. 꼼짝없이 오전 훈련은 전부 마치고야 개인 시간이 주어질듯 하더군요. 저는 다행히 기사가 아니기에 특혜를 입을 수 있었습니다만.”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전에 보았을 때보다 한층 더 선명해진 바람과 물의 인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기운을 잘 다스려왔다는 뜻이었기에 나는 뿌듯한 얼굴로 칭찬을 건넸다. “이제 정령들을 모두 어렵지 않게 다루게 된 듯하네요. 축하해요.” “하하. 역시 엘님의 눈은 속일수가 없군요. 사실 요 근래 물과 바람의 중급정령을 동시에 소환할 수 있게 되었답니다. 안 그래도 엘님을 뵙게 되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와아, 그게 정말이에요? 정말 대단해요, 페리스! 이제 무서울 적이 없겠네요.” “전부 엘님 덕분이지요. 그래도 폐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성취라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벌써 시큐엘을 다섯이나 다루신다지요? 정령과 먼저 계약을 했던 건 저인데 뭔가 상당히 억울해지는 군요.” “페, 페리스? 그, 그런 게 아니라!” “하하하! 장난이었습니다, 폐하. 그렇게 당황해 하시면 제가 더욱 죄송스럽지 않습니까. 아무튼 나날이 실력이 진보하시니 폐하를 모시는 이들 중 하나로서, 자랑스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부디 앞으로도 정진해 주십시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선 이미 정령을 다루시는 일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오르신 거였죠? 이거 분수도 모르고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한쪽 눈을 찡긋하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의 모습에 나와 이사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잠시 안보는 사이 이전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았다. 그동안 친위기사들과 험난한 여정을 같이하며 결속력 또한 많이 다진 모양이었다.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가 되는 사람이랄까? “그런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던 중이셨습니까? 언뜻 들으니 상단에 대한 말씀이 오가시던데.” “네. 곧 클리프 상단에 방문할 예정이거든요. 고생고생해서 검을 가져왔으니 인정을 받아와야죠.” “아하! 그 불의 상급 정령이 봉인되었다는 정령검 말이군요! 소문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없는 겁니까? 듣자하니 정말 무서운 던전이었다는데…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의아하게 묻는 그에게 차마 말이 많아서 방에다 가둬놨다는 말은 전할 수 없었다. 원래는 수월했을 여행이 마신의 장난 때문에 고난에 빠졌다는 것 역시. 잠시 이사나와 의미심장한 미소를 주고받은 나와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보검을 함부로 들고 다닐 수는 없죠. 전력을 전부 드러내서는 안되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상단엔 언제쯤 가실 생각이십니까?” “글쎄요. 모레 점심때 쯤?” “흠. 그런데 여기 오기 전에 듣기론 엘님은 그때쯤 황성으로 출발하신다고 하던데요.” “엥? 벌써요?”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웬 출발이란 말인가! 황당한 표정을 하던 나는 곧 이것이 라피스 녀석의 소행임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3천의 군사도 귀찮다고 물린 녀석이 달랑 나와 둘이서만 가기로 밀어붙였다는 것이었다. “미쳤어! 아주 자기가 드래곤이라고 광고를 하고 다녀랏~! 후작이나 다른 사람들이 반대는 안 했어요?” “아, 물론 심하게 반대하셨습니다만. 결국 엘님과 그 분 먼저 출발하시고, 나머지 군사들이 물자가 보급되는 대로 뒤따르는 형식으로 하기로 결정된 듯합니다. 그런데, 그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분이 드래곤이셨습니까?” “그 녀석 얘기는 하지도 마세요. 나 참, 나랑 의논도 안하고 혼자서 뭐하는 짓이야? 무턱대고 바로 출발이라니…그럼 상단에 가는 일은 어떻게 하지?” “괜찮아, 엘.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 나 혼자서도 다녀올 수 있어.”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은 이사나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아직 이 근방에 도사리고 있는 블레스터의 주인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클모어에는 클리프 총수의 부탁을 받은 이사나가, 성검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웬만큼 눈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상단을 방문하는 순간을 놓치려 할 리가 없었다. 평범한 자객도 아닌, 소드 마스터의 공격을 감당해 낼 수 있을까?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라피 녀석한테는 며칠만 더 기다렸다가 출발하자고 하던지, 아니면 애초의 계획대로 군사와 함께 가는 방향을…” “굳이 그러실 필요 없으실 것 같은데요, 엘님. 혹, 이곳에 와있다는 카리브디스공작 때문이라면 저도 함께 동행하겠습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곤 해도 상급의 정령들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있는 검이 바람의 상급 정령을 봉인한 블레스터라서…” “이사나님도 정령검이 있으시잖습니까? 생각하시는 것처럼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두 개의 정령검은 각자의 주인에게 끼치는 역할이 확연하게 달랐다. 그냥 검 자체의 공격력만 높이는 파이어 버스터에 비해, 블레스터는 주인의 능력치를 몇 배나 이끌어 올리는 검인 것이다. 드래곤조차 가볍게 제압한다는 그가 몇 마리의 상급정령으로 힘겨워 할 거란 기대는 가지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사나나 페리스나 부득이하게 괜찮다고 만류하는 바람에 내가 남아서 동행한다는 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괜찮겠어? 글쎄 그 카리브디스인지 카리스마인지 하는 남자는 보통 소드 마스터가 아닐 거래도.” “너무 걱정 하지 마, 엘. 친위기사들의 실력도 몰라볼 정도로 좋아졌고, 시벨님도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나도 언제까지나 엘에게 부담을 지울 수는 없잖아. 엘퀴네스의 첫 번째 인간 계약자로서, 역사에 부끄럽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하하…거창하게 역사씩이나…” 그의 두 눈에 서린 각오의 빛을 읽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내가 언제까지고 녀석의 인생에 개입할 수 없는 이상 이제 슬슬 홀로서기를 도와줘야 하는 건지도 몰랐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그것은 녀석의 인생에 커다란 교훈으로 남게 될 것이다. 부디 그것이 가장 처참한 형태로 다가오지 않기를 바랄뿐. 바로 그 순간, 저택 안에서 높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아아아악!!” “!!” “에? 무, 무슨 일이지? 2층인 것 같은데.” “하녀의 비명이야. 설마 자객이?” 놀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바로 방문을 열고 복도를 나섰다. 꽤나 큰 소리였기 때문에 우리 외의 다른 일행들도 2층을 향하고 있는 상태였다. 급히 계단을 올라갔을 땐 이미 비명을 듣고 찾아온 상당수의 무리가 한 방문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상태였다. 그곳이 데르온에게 배정된 손님방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당황한 얼굴로 다가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예요?” “에? 아니…저어…그게…말입니다…” “??” 무엇을 본 건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새하얗게 질려있는 모습이었다. 뒤따라온 이사나와 잠깐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한 나는 굳게 닫혀있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그러자 안에서부터 비릿한 혈향이 화악 밀려들어왔다. “윽! 데, 데르온?” 설마 마왕이 알을 눈치 채고 없애러 온 걸까? 머릿속에서 드는 별별 생각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신이 그렇게 부탁한 일이었는데, 잠깐의 방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왔다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해지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활짝 열려진 문안에서 드러나는 광경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데르온…지금 뭘 하고 있는 거예요?”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너무도 멀쩡한 모습으로 넓은 방의 한 가운데에 쭈그려 앉아 있는 상태였다. 바닥에는 온통 피 칠을 해놓은 듯한 붉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가운데에 황금색의 알이 고이 놓여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그것도 모자라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왼손을 알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할 때마다 다량의 붉은 피가 알의 표면을 적셔갔다. 안에서 풍겨 나온 혈향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그 엽기적인 광경에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헉-하고 숨을 멈추며 저만치 멀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데르온은 정작 그 행위에 너무 집중하고 있는 나머지, 누가 들어왔는지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고, 머리야…’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방 한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이 장면을 목격하고 처음 비명을 내질렀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작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살려 주세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이 당연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대답했다. “일단 진정하고 이리로 나올래요? 괜찮아요. 그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여기 계신 분들도 모두 그만 돌아가세요. 지금 본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시고요.” “하, 하지만 저 자는 마족이 아닙니까? 혼자서는 위험하실 텐데…” “제가 데려온 일행이니 괜찮습니다. 이 분이 많이 놀라신 것 같은데 안정 좀 부탁드릴게요. 이사나 너도 그만 가봐, 여긴 나한테 맡기고.” “응, 알았어. 대체 무슨 일일까? 별 일은 아니어야 할 텐데…” 후들거리는 하녀가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은 찝찝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온통 피로 범벅인 광경을 봤으니, 실제적인 사상자가 없었어도 불쾌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간 뒤 다른 목격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근 나는, 여전히 쭈그려 앉아 일련의 행동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데르온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가는 알을 바라보는 눈이, 전에 없이 진지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데르온…지금 뭘 하는 거예요?” “……” “데르온!!! 지금 뭐하냐니까요?!!” “우억!! 헉! 에, 엘퀴네스님? 여, 여긴 언제 오셨습니까?” 이제야 기척을 눈치 챘는지 놀란 표정을 한 데르온이 입을 멍하게 벌리며 물었다. 혹시나 머리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 가 의심하고 있던 나는 안도하며 방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이 황당한 장면에 대한 해명을 요구했다. ========================================== [정령왕 엘퀴네스] 7-23. 전운의 흐름 (4)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또 뭐고, 알에다 피는 왜 쏟아요? 손바닥을 칼로 모질게도 긁어놨네. 아프지도 않아요?” “아, 많이 놀라신 모양이군요.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일단 되도록 주군께서 빨리 부화하셔야 겠다는 생각에…” “부화라니? 카노스의 말로는 앞으로 한 달 정도는 걸릴 거라고 했잖아요?” “네, 그래서 임의의 방법으로 부화시기를 앞당기려고 한 겁니다. 마족의 피에는 마력이 담겨 있거든요. 이런 식으로 피를 흡수시키면 육체의 완성이 더욱 빨라지죠.” “하아…그래서 언제쯤 깨어나게 되는데요?” 내 질문에 데르온은 잠시 생각하는 듯 고민하는 표정이 되더니 곧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태어나게 될 겁니다. 오늘 하루 종일 피를 흡수시킨다면 바로 내일에도 가능할지 모르죠.” “그 전에 데르온이 먼저 출혈과다로 죽는 건 아니고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만…아슬아슬한 순간에 엘퀴네스님이 치료해주시면 되잖습니까? 하하하하!” “……” 이런 태평한 성격을 보았나! 잠깐 찌푸린 표정으로 혀를 쯧쯧 찬 나는 문득 스치는 생각에 피로 범벅이 된 알을 보며 물었다. “부화하려면 꼭 마족의 마력만 필요한 거예요?”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만. 아직 다른 종족의 기운은 흡수시켜 본적이 없어서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 “흐~음. 혹시 정령왕의 기운도 가능하려나?” “예? 엘퀴네스님이 하시려고요?” “명색이 저도 이 녀석의 대부인데, 데르온 혼자 고생시킬 순 없잖아요. 그런데 알은 갑자기 왜 부화시키려고 하는 건데요?” 한 달만 기다리면 알아서 탄생할 알을 굳이 이런 방법까지 사용해서 일찍 깨우려고 할 필요가 있을까? 의아한 내 표정을 본 데르온은 굳은 표정으로 망설이듯 입을 열었다. “전쟁이 시작되면 대공이 이쪽으로 오게 될 가능성이 있잖습니까? 그렇다면 그와 계약한 마왕역시 이쪽 상황에 관심을 가지게 될지 모릅니다. 태어나기 직전의 알은 마력의 발산이 높은데다 그것을 컨트롤하는 기운이 현저히 약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마족들에 눈에 뜨일 가능성이 높아서…” “아~ 그래서 차라리 부화시키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그런 일이라면 미리 말씀하시지 그랬어요. 저도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았을 텐데.” “일단 제가 해둘 수 있는 부분까지는 해두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정령의 기운이 마족에게도 통할지. 차라리 드래곤 쪽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드래곤? 아~ 그럼 라피스를 불러오면 되겠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데르온은 당황하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설마 그렇게 쉽게 응수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괘, 괜찮겠습니까? 그가 순순히 도와 줄 리는 없을 텐데…” “해주라면 해줘야지 자기가 별 수 있어요? 그래도 우선은 제 기운이 통하는 지부터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은데. 라피스를 호출 하는 건 그 다음으로 하죠.” “아하하…이거, 알고 보니 일행 중에서 가장 무서운 분은 엘님이셨군요. 주군은 벌써부터 든든한 대부를 두셔서 기쁘시겠습니다.” 어색하게 웃는 데르온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조심스럽게 피에 젖은 알을 들어올렸다. 데르온의 마력을 흡수한 탓인지 왠지 이전보다 좀 더 묵직해 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마력과는 성질이 많이 달랐기 때문일까? 내가 부어주는 기운은 몇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흡수되지 못하고 그대로 공기 중에 흩어지기 일쑤였다. 그에 따라 긴장어린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데르온의 표정에도 점차 진한 실망감이 드러났다. “역시 안 되는 군요.” “음, 그러네요. 왜 안 돼지? 뭔가 해보려고 해도 그 전에 완전히 흩어져 버리니 어떻게 할 방도가 없네.” 그러자 갑자기 뒤 쪽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안 되긴. 마족이란 종족 자체가 자연을 배덕하는 존재인데, 그와 정반대인 정령과 어울릴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어? 라피스, 언제 왔어?”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니 삐딱한 표정의 라피스가 소리 소문도 없이 다가와 있었다. 문이 잠겨 있는데도 들어온걸 보면, 아마 공간이동의 마법을 사용한 것 같았다. 녀석은 주변에 가득한 혈흔과 비릿한 냄새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피로 범벅이 된 알을 내게서 빼앗다 시피 가져가며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마족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했더니, 바로 이것 때문이었군. 부화시기를 앞당겨서 뭘 어쩌려고? 아무리 마족이라지만 태어나서 몇 달간은 전력에도 도움이 못 돼. 차라리 알로 있는 편이 간수하기가 더 쉬울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태어나기 직전이라 마력의 증폭이 너무 눈에 뜨입니다. 혹여나 마왕이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간…” “흐음, 이래저래 골치 아픈 녀석이군. 뭐, 할 수 없지. 이런 일엔 원래 블랙 녀석들이 더 확실하지만, 나에게도 반은 블랙 드래곤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아마 네놈의 피보단 확실할거다.” “네? 설마…도와주시려는 겁니까?” “별 수 없잖아? 지금 상황에서 마족까지 상대하기는 귀찮으니까. 미리미리 그런 변수가 될 만한 일들은 막아놔야지.”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녀석은 데르온이 했던 것처럼 과감하게 자신의 왼쪽 손바닥을 찢었다. 촤악-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고 나자, 다량의 피가 후두둑 알의 표면을 적셔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나마 본래의 황금빛을 드러내고 있던 알은 금세 녀석의 피로 새빨갛게 물들어, 언뜻 괴기스러운 느낌마저 주었다. 미처 알에 흡수되지 못한 핏방울은 그대로 뚝뚝 흘러내려 바닥에 그려져 있던 마법진에 의해 치익하고 타들어갔다. ‘윽…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동맥을 끊은 것도 아닌데 피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아, 나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흘끗 바라본 라피스의 얼굴은 창백하기는커녕, 고통을 느끼는 흔적조차 드러나 있지 않았다. 무심한 표정으로 붉게 물들어가는 알을 바라보던 녀석은 문득 질린 표정으로 보고 있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피식-미소를 지었다. “징그러우면 고개 돌리고 있지 그래? 그런 얼굴로 보지 말고.” “아니, 나는 그저 신기해서…안 아파? 피가 좀…이 아니라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이 정도야 내 본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그나저나 좀 아깝긴 하군. 내 금쪽같은 피가 이런 식으로 쓰이다니.” “자청한 주제에 투덜거리지 마. 누군 도와주고 싶어도 못 도와주고 있구만. 대체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이래서는 대부로서의 체면이 서질 않잖아.” “나참. 아까도 말했지만, 정령과 마족은 완전히 상극이야. 그런 성질끼리 융합될 리가 있겠냐? 그리고 원래 어느 종족도 정령왕의 기운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겉으론 인간처럼 보여도 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의 근원이야. 육체를 가진 존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 라피스의 따끔한 일침에 옆에 있던 데르온도 동조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는 말 같습니다. 실제로 정령왕은 옆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보통 인간의 자연 친화력을 평소의 몇 배까지 높여줄 정도니까요. 그럴 진데 직접적인 기운을 받아들이기는 힘들 겁니다.” “흐음. 그런가. 어쨌든 결과만 좋으면 되니 제가 양보한 셈 치죠. 근데 피는 언제까지 부어줘야 하는 거예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글쎄요. 아마 적당히 신호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만.” “신호?” 데르온이 말한 신호가 온 것은 그로부터 약 2시간이 지나갔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심한 출혈이라도 일정한 시간이 되면 적당히 멈추게 마련인데, 라피스는 무슨 조취를 해놓은 건지 피가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녀석의 손에 들린 붉은 알이 움찔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자 라피스는 데르온에게 알을 넘겨주곤 아직도 피가 그치지 않는 손을 불쑥 내 앞으로 내밀었다. “치료해줘.” “어? 다 끝난 거야?” “몰라. 알 속에 있는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끝난 게 맞겠지. 아무튼 빨리 치료나 해. 이왕이면 체력회복도 같이 해주고.” “드래곤이라서 끄덕 없다할 땐 언제고?” “아무리 그래도 폴리모프한 상태에선 체력 소모가 심해. 줄창 피를 흘려놓고도 아무렇지 않으면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지.” 그의 말마따나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끄덕도 없었던 얼굴이 지금은 조금 지쳐있는 듯 보였다. 자기 기분 내킬 때만 움직이긴 해도 역시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되는 녀석이랄까. 이러고 보니 녀석이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아무리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해도 드래곤이 대단한건 사실이니까. 내가 라피스의 상처를 치료하는 사이 알을 넘겨받은 데르온은 정성껏 표면을 덮은 검붉은 핏자국들을 닦아내었다. 잠시 후 다시 황금색을 되찾은 알은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미세한 균열자국이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와! 지금 금이 가 있는 거 맞죠? 아이가 태어나는 건가요?” “하하, 당장은 아닙니다. 마족의 탄생은 신호 후에도 하루나 이틀의 시간을 소요하거든요. 그래도 확실히 드래곤의 피는 대단하군요. 그 짧은 시간에 벌써 부화에 임박하게 만들어 놓다니.” “드래곤과 마족의 피는 많이 다른가요? 데르온도 4대 공작이니까 마력이 높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합니다만, 순수한 마력으로만 보자면 마법생물인 드래곤을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족의 마력은 공격력에만 치중되지만 드래곤은 삶 전체가 마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물론 라피스가 다른 드래곤들보다 더 특별하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말하며 뿌듯한 시선으로 알을 바라보는 데르온의 모습은, 이미 이전에 라피스에게 무참히 깨졌던 과거에 대해서는 훌훌 털어내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보다 실력이 월등히 높은 자와 싸우다 졌으니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알의 탄생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탓인지, 그는 라피스를 단순한 고마움을 넘어서 은인으로 여기게 된 듯 했다. 원래 남들로부터 추종받기 좋아하는 라피스가 그런 걸 거절할리 만무. 그날로부터 두 사람 사이에선 이전처럼 살벌하거나 딱딱한 기운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싸움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우정에 속하는 걸까?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엉뚱한 상황에서 바뀔 수 있는지 눈으로 경험하게 된 하루였다. ================================================= [정령왕 엘퀴네스] 7-24. 전운의 흐름 (5) 툭-툭- “…으음?” 한참 단꿈에 젖어있던 나는 무언가가 내 뺨을 건드리는 느낌에 가늘게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곤 아직 캄캄하기만 한 방안과 높은 천장이 전부였다. 여기가 어디더라? 잠시 멍한 얼굴로 생각을 정리한 나는 곧 어제 알이 부화하는 현장을 목격한답시고 끝까지 구경하고 있다가 어느새 잠들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누워있는 바닥이 푹신한걸 보면 아마도 라피스나 데르온, 둘 중의 한명이 침대로 옮겨둔 모양이었다. 힐끗 둘러본 방안에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으려다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아무도 없어? 그럼 방금 전에 날 깨운 건 뭐지?’ 잠결이라 제대로 못 느낀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 내 볼을 툭툭치던 느낌은 사람의 손이었다. 그런데 막상 일어나보니 아무도 없다니!! 이게 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설마 귀신? 아하하하…’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다시금 볼을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툭-툭- 내가 아프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두드리는 것을 보니 아마도 잠을 깨우는 것이 목적 인 듯 했다. 오만가지 생각으로 잠시 식은땀을 흘린 나는 완전히 눈을 뜨곤 슬그머니 감각이 느껴졌던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어둠속에도 선명한 한 쌍의 붉은 눈동자가 또렷하게 보였다. “으악!!”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평소에도 이런 반사 신경이 있었나 싶을 정도의 빠른 동작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앞에 서 있던 붉은 눈동자의 주인이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놀래?” “왜 냐니…너, 너 누구야? 대체 이런 시각에 여기서 뭘 하는 거야? 정체를 밝혀랏!” 목소리를 들어봐도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황당한 표정으로 다그치자 그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망설이는 듯하더니, 한참만에야 짤막하게 대답했다. “……몰라.” “엥?” “이름, 몰라. 아직 대부가 안 지어 줬잖아?” “…!!…” 그 한마디로 나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를 향해 대부라고 부를 존재는 하나밖에 없지 않던가! 나는 설마 하는 심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혹시 알에서 태어난?” 끄덕끄덕 “맙소사! 대체 언제? 태어났으면 날 깨웠어야지!” “…방금 깨웠는데.” “아, 그, 그런가? 으음,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설마 이렇게 빨리 알이 깨어날 거란 생각을 못했기에 내 행동은 저절로 서둘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째서 방금 태어난 녀석이 저렇게 말을 잘한단 말이냐! 혹시 거짓말하고 있는 거 아니야? 파앗! 옆에 있던 호롱에 불을 밝히자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왔다. 그제 서야 제대로 보게 된 아이는 겉으로 보기에 12살 정도 된 듯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와 붉은 입술, 선연할 정도로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발끝까지 내려오는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이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나는 곧 소년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깨닫곤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렇게 큰 녀석이 정말로 알에서 나왔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자신을 보든 말든 소년은 방금 전에 불이 켜진 호롱만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게 뭐야?” “응? 저건 호롱인데. 지금처럼 어두울 때 불을 밝히기 위해 쓰는 거야. 아니, 그보다 너-정말 알에서 나온 거 맞아? 왜 이렇게 커?” “방금 전에 이렇게 됐어.” “방금? 그럼 아까 전에는 이렇지 않았단 말이야?” 내 질문에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부근을 가리켜 보였다. “…이정도 쯤?” “처음에 태어났을 때 그 정도였다고?” “아니, 처음엔, 더, 작았어. 으음……이정도?” “아, 알았어. 억지로 위치 안 짚어줘도 돼. 그럼 말을 하게 된 것은 언제야? 그것도 지금?” 끄덕끄덕 결국 태어나고 나서 잠시 동안은 멍하게 앉아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러다 키가 커지고 말을 깨닫게 되면서 나를 깨우려고 다가 온 것이다. 걸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꿋꿋하게 깨어있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일을 돌릴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으음. 마족들의 성장이 빠르다곤 들었지만 이건 예상 밖인데? 어쨌든 뭔가 입을 것부터 가져와야 겠다. 머리카락으로 가려지긴 하지만 그 상태로 다닐 수는 없으니까.” “왜?” “왜냐면…음, 다른 사람들은 다 옷을 입고 다니거든. 근데 너만 안 입으면 이상하잖아? 그치?” “…?…다른 사람들은 왜 옷을 입어?” “그, 글쎄. 벗고 있으면 민망해서가 아닐까? 원래 누구든 감추고 싶은 신체의 비밀이 있는 법이거든. 아하하하…” 횡설수설 떠벌리는 말이었지만 다행이도 소년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나를 곤란하지 않게 하기위해서인지, 어느 쪽이든 대답하기 곤란한 상황에서 벗어난 건 사실이라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저런 위주의 질문이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종래에는 인간의 처음 근원과 철학에 대해 논하게 되지 않던가! “그럼 나 옷…” “아, 그래. 적당히 입을 옷이 아마 어딘가 있을 거야. 그런데 혹시 여기 있던 다른 사람들은 못 봤어? 너랑 같은 마족이랑 붉은 머리카락의…” 마침 침대 맡에 손님을 위해 마련된 듯한 잠옷이 있기에, 나는 얼른 소년에게 입히며 물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신기하단 듯 바라보던 아이는 곧 한참만에야 천천히 대답했다. “……내 부하랑 은인? 대부가 잠들고 나서 나갔는데.” “쿨럭. 그런 호칭은 어디서 배운 거야?” “…호칭?” “나한테 대부라고 하는 거나, 라피스한테 은인이라고 한 것 말이야. 누구한테 배운 거 아니었어?” “음……아까 전에?” 설마 내가 깨어나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도 접촉했던 건가? 하지만 나는 금방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렇다면 소년을 지금까지 알몸으로 놔둘 리가 없지 않은가! “혹시 알에 있을 때 들었다는 소리?” “…응, 맞아.” “어헉! 어디에서 어디까지 들었어? 기억하고 있는 건?” “…왜?” “아, 아니 그냥 궁금해서…. 알에서 들었다고 하니까 신기하잖아. 하하.” 그러자 소년은 붉은 눈동자를 천천히 깜빡이며 입을 다물었다. 아직 말에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입으로 옮기는 게 어려운 듯 보였다. 그는 잠시 후 느릿한 어조로 대답했다. “부화시기 앞당긴다……에서……정령왕은 안 된다? 음, 또……” “으음. 무슨 소린지 대충 알 것 같아. 말 하느라 수고했어.” “…응…”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정말로 힘들어서인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저러는 것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말투가 느려서인지 소년은 활달하고 명랑한 얼굴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굉장히 나른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미네처럼 표정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것은 타고난 천성이라기 보단 아직 이 세상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듯 했다. ‘쩝- 갓난아이가 태어날 줄 알았는데. 뭐,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 차라리 저 모습이 나은 건가?’ 아마 저 모습도 한 달 후면 금방 20대의 청년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워낙 서로에 대한 견제가 치열한 종족인 만큼, 마족은 빨리 성장해야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유년기가 짧아지고, 대신 전투력이 가장 뛰어난 20대의 시기가 오래 지속되는 것이다. 꽤 예쁘장하게 생긴 모습이라 금방금방 커버린 다는 사실이 아쉬웠지만, 한가한 육아가 불가능하니 만큼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나저나…다른 녀석들은 어딜 간 거지? 네가 태어난걸 알면 굉장히 기뻐할 텐데.” “음…싸우러?…” “아, 아니. 싸우진 않을 거야. 나름대로 화해를 했거든.” “…왜? 죽여야 하잖아.” “헉, 누, 누가 그런 소리를?” “…부하가?” 아마도 이전에 했던 데르온의 태교-‘칼을 뽑으면 피를 봐라’에 대한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다투었다고 해서 꼭 죽일 필요는 없어. 원래 살다보면 사소한 것에서 틀어지는 일이 생기는 거야. 그때그때 다 죽인다면 이 세상에 남아나는 사람이 없을 걸? 특히나 같은 일행일 경우는 아무리 화가 나도 손속에 사정을 봐줘야 할 때가 있는 거야. 가능하다면 화해를 하는 편이 좋고.” “…음…대부가 곤란해져?” “그거야 그렇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원래 싸우는 본인보단 지켜보는 사람이 더 괴로운 법이거든.” “…그럼 안 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아이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그려졌다. 이 얼마 만에 보는 어린애다운 어린애 인가!! 진한 감동이 밀려들어와 가슴속이 뭉클해지는 심정이었다. 잠시 후 아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근데…대부…정령왕?” “응. 엘퀴네스라고 해. 그냥 편하게 엘이라고 불러도 되고.” “…나는?” “음, 너는 마족이고 장차 마왕이 될 후계자지. 그러고 보니 이름이 없구나. 어떻게 하지? 여기서 그냥 내가 지어줄 수도 없고.” 내가 소년의 이름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문이 갑자기 벌컥-하고 열리더니, 어둑어둑한 복도저편에서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던 나는 그것이 곧 라피스임을 알고 반갑게 말했다. “라피스! 어딜 갔다 온 거야?” “아아, 귀찮게 회의를 한다 뭐다 해서 불러내더라고. 재미없어서 그냥 중간에 빠져나왔지. 근데, 그 녀석은 뭐냐?” 무심하게 대꾸하던 녀석의 시선은 내 앞에 서있던 마족의 아이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나 내가 대답해 주기도 전에 그는 알아서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설마 벌써 깨어난 건가? 꽤 크군.” “그치? 나도 놀랐다니까. 너희들이 나가고 나서 얼마 후에 부화한 모양이야. 옷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잠옷은 입혀 뒀는데.” “뭐, 그거야 데르온 녀석이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두면 되겠지. 어이, 꼬마. 나 누군지 알겠냐?”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며 묻는 말에 소년은 한참이나 빤히 라피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자기가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은인?…그리고 드래곤. 라피스. 음, 또…” “흐음, 대충은 알고 있군. 그리고 또?” “대부 애인?” “…쿠, 쿨럭! 무, 무슨 소리야!!” “푸하하하하!” 그 어이없는 대답에 라피스는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고 내 표정은 처참해졌다. 애인이라니!! 애인이라니이이~~~!! 난 아직 내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다! 그러자 소년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인이, 예전에, 내거라고?” “윽! 그 말도 들었었어? 그건 이 녀석이 멋대로 나를 물건 취급 하는 말일 뿐이야. 실제론 단순한 계약관계일 뿐이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하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다행히 아무생각 없이 했던 말이었는지 소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너무 웃느라고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던 라피스가 웃음기를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근데 머리가 너무 치렁치렁 긴 거 아니야? 좀 다듬어야겠는데. 이름은 뭐라고 지었어?” “에? 내가 지어야 해? 데르온은?” “네가 대부잖아. 그럼 부하더러 모실 주군의 이름을 지으란 말이냐? 평소에 적당히 생각해 두던 이름 없어?” “딱히 정해둔건 없는데…으음, 뭐라고 하지.” 아무래도 미래의 마왕이니만큼 아무 이름이나 붙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름이란 게 어디 그렇게 쉽게 정해지던 것이던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면서도 좀처럼 결정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옆에서 구경하던 라피스가 툭하니 몇 가지 조언을 늘어놓았다. “너무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 녀석은 마왕이 될 녀석이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릴 일도 거의 없다고. 정 안되겠으면 보석이나, 계절 같은 것으로 하는 건 어때?” “보석이라니…음, 눈이 예쁜 붉은 색이니까 루비 같은 거? 하지만 그건 너무 여자 같잖아. 그렇다고 다른 색의 이름을 붙이기도 그렇고. 음…지금이 몇 월이지?” “인간들의 표현으로 한다면 잠에서 깨어난 페어리가 기지개를 킬 때지. 12달로 보자면 4월쯤?” “벌써 그렇게 됐나? 4월을 여기선 뭐라고 불러?” “아스모델 이던가…요즘은 잘 사용하는 편이 아니니, 고어(古語)에 가깝지.” “아스모델?” “정확하게 말하면 ‘아스모델 아트디베히스트.’ 4월 달에 흐르는 바람의 이름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렸지. 왜? 꼬맹이 이름을 그걸로 하려고?”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부분이었는데, 의외로 발음이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라피스 역시 나쁘지 않다는 듯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4월의 바람은 차갑지도 않으면서 역동적이고 진취적이지. 꼬맹이에게 붙여줘도 괜찮을 것 같군.” “그렇지? 넌 어때? 아스모델 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드니? 네가 불릴 이름이니까 싫으면 다른 걸로 할게.” 그러자 소년은 잠시 생각하듯 눈을 깜빡이더니 특유의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내 이름, 아스모델?” “응. 정식 이름은 아스모델로 하고 그냥 편하게 부를 때는 아스라고 하자. 어때?” “음…좋아. 마음에, 들어.” “아, 다행이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 아스.” 밝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소년- 아니, 아스는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곧 자신도 한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이윽고 나를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에는 지금까지 보았던 것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응…잘 부탁해, 대부.” 붉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마족, 아스모델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 짜잔!! 여기까지가 인터넷 연재분에 들어가는 7권 분량입니다. 출판본에는 조금 더 분량이 추가될 예정입니다. 한 것도 없이 벌써 7권이냐.. 하신다면야. 뭐. 저의 능력 부족이라고 밖엔 대답을...후후후.. 안그래도 바보인데, 전술을 논하면서부터는 그 점을 더더욱 자각하고 말았습니다. 어렵군요, 어려워요...후후후;;; 지옥같던 마감도 드디어 끝을 보이니 행복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군요. 그러나 한달후의 마감은 또 어찌 버틸수 있을 지.(;;) 아무튼 7권이 끝났습니다! 책이 발매되면 따로 공지 올리겠습니다. 내용상 오류, 오타 지적 모두 환영입니다~ 항상 행복한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8-1. 참아야 하는 것 (1) 해가 떠오르고 아침이 되자 나는 다른 일행들에게도 아스의 탄생을 알렸다. 새벽 내내 회의를 하느라 지쳐있던 사람들은 예상보다 빠른 알의 부화에 무척이나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알이 부화했다고? 벌써?” “응! 이름은 아스모델이라고 지었어. 아주 귀여운 녀석이야.” “와아! 정말로 알에서 아기가 나왔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아기는 어디 있어?” 갓 태어난 아기를 생각했는지, 기대의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던 이사나는 내 품에 아무것도 안겨져 있지 않는걸 보곤 의아하게 물었다. 그 모습에 나는 피식 웃으며 내 뒤에 얌전히 서있던 아스를 일행들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아이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의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자아~인사해야지, 아스? 이제부터 너와 함께할 일행들이야.” “…인사?” “만나서 반갑다고 하거나, 자기소개를 하는 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 “일행들…마족? 왕이 먼저 인사해?” “아니, 아니. 이 사람들은 마족이 아니니까 아스의 부하가 아니야. 내 친구들이거든.” “대부의 친구?” 그제 서야 이해를 했는지 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일행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순간 묘한 정적이 주변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스모델이야. 만나서 반가워.” “…그, 그래. 나도 반갑다. 그런데 생각보다 …크네?” “…이게 정말 갓 태어난 아이?” 어리둥절한 시선은 어느새 나를 향해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알고 있는 간단한 지식을 설명했다. “놀랐지? 마족은 유년기가 굉장히 짧다나봐. 그래서 금방 이렇게 자란거지. 아마 한 달 후 면 나보다 더 클걸?” “아~ 그러고 보니 전에 마신도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어.” “있지, 그럼 알에서 있던 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호기심으로 가득한 알리사의 질문에 대답한건 지금까지 잠자코 듣고 있던 아스였다. 아이는 내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나 이 사람들 알아.” “정말? 알에서 본걸 기억하나 보구나. 하긴, 나랑 라피스도 기억했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끄덕끄덕 “우와, 대단해! 그럼 누가 누구인지 말해볼래? 나는 누구야?” “…알리사.” “와! 정말 맞췄어! 그럼 이 사람은?” “이사나?” “맞았어! 너 정말 똑똑하구나! 그럼 이 사람은?” 여자아이라 모성본능이 뛰어난 건지, 또래(?)라서 궁합이 잘 맞는 건지 몰라도 알리사는 금세 아스에게 마음을 터놓는 듯 했다. 기대가 가득한 얼굴로 가리킨 사람-시벨리우스를 멍하게 바라보던 아스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퍼런 엘프.” “크악! 누가 퍼런 엘프야, 누가!! 왜 나는 이름으로 기억하지 않는 건데!!” “퍼런 엘프 아니야?” “이왕이면 고상하게 블루엘프라고 해달라고! 그리고 나는 엄연히 시벨리우스라는 이름이 있단 말이다, 이 맹랑한 마족 꼬맹아!” “아스는… 꼬맹이 아니야.” “하! 이제 막 태어난 녀석이 꼬맹이가 아니긴! 남의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걸 봐서도 너는 틀림없이 꼬맹이라고! 알겠냐?” 부들부들 어깨를 떨며 따지고 드는 시벨의 태도에 아스역시 기분이 나빴는지 작게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화를 낼 거란 예상과는 달리, 아이는 그저 나를 바라보며 난감한 듯이 묻기만 했다. “싸우면, 대부 곤란해?” “에? 그거야 그렇지.” “음…그럼 안 싸워. 그냥 아스 잘못으로 할래.” “…!!…아아, 그래 착하다. 귀여운 녀석.” 이 얼마나 기특한 아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제 멋대로 구는 녀석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했던 나로선, 아스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내려준 천사나 다름없었다. (한쪽에선 시벨녀석이 여전히 궁시렁 거리고 있었으나 무시하기로 하자.)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아스의 행동을 본 일행들은 저마다 감탄한 얼굴이 되었다. 특히나 데르온의 감동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듯 했다. 그는 냉큼 다가가 아이의 앞에 부복하며 깊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마계 공작 ‘데르오느빌’이 주군께 인사 올립니다! 탄생을 경하 드립니다, 주군! 뵈,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데르오느빌? 부하 이름?” “예, 예! 그렇습니다, 주군! 데르온이라 불러주십시오!” 감격이 듬뿍 담긴 그의 말에 아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난…왕이 될 거야.” “그리 되실 겁니다! 마신께서도 그리 원하셨습니다!” “있지. 음…자꾸…심장이 쿵쾅거리고 뛰어. 기운을 조절할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증상입니다. 마족은 청년의 모습을 갖추기 전까진 육체의 밸런스가 일정하지 않으니까요. 그 때문에 제가 주군의 옆에서 보필하는 것입니다! 이 목숨을 다해 주군을 지키겠습니다!” “…응…”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대화였지만 그 속에 흐르는 심오한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한 이는 없었다. 이순간의 아스는 그냥 예쁘기 만한 꼬마가 아니라, 전 마족을 호령하는 군주의 모습으로 보였다. 붉다 못해 검게 보이는 눈동자나, 발 끝 까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 하다못해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까지 아이의 분위기를 더욱 진중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바로 타고난 카리스마라는 걸까? 가끔씩 보이는 이사나의 황제다운 면모도 놀라웠지만, 아스의 이런 모습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기에 더욱 감탄스러웠다. 역시 마족은 마족이라는 느낌이랄까. 그 순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라피스가 흥미롭다는 듯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응~ 조절을 못하신다? 엄살도 강한 꼬마로군.”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엄살이라는 거다. 물론 지금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한 마력이 풀풀 뿜어져 나오긴 하지만, 적어도 녀석은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컨트롤이 불가능한 단계가 아니야.” “그걸 어떻게 알아?” “간단해. 퍼런 엘프의 말에 기분이 나빴으면서도 참았잖아? 갓 태어난 마족은 본능에 충실하기 때문에 분노와 살의에 굉장히 민감해. 자제력 없이 손이 먼저 나가는 녀석들이라고. 그래서 마족들은 성년의 모습을 하기 전까진 일정한 장소에 억압되어 교육을 받게 되지. ‘누군가를 위해 참는다’라는 것 자체가 이미 평범한 꼬맹이의 생각은 아니라는 거야.” “헤에~ 과연 마신이 선택한 알이 라는 건가?” 아마도 라피스의 피 또한 그 부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데르온이 녀석에게 순수하게 호감을 갖게 된 것도, 아스가 ‘은인’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저 쉽게 넘어갈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제까지 철없게만 보이던 라피스가 새삼 대단한 존재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예전에 녀석이 했던 말마따나, 드래곤은 정령왕의 도움이 필요 없는 그 자체로 완벽한 생물인 것이다. ‘흐음. 그렇게 치면 단순히 엘퀴네스라는 사실 때문에 저런 녀석을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거니, 나로선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는 건가? 하긴,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 시각의 전환이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요령을 배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음날이 되자 나와 라피스는 계획대로 황성에 가기 위한 준비로 서둘렀다. 내가 후작으로부터 수도로 올라가는 지름길에 대한 정보를 듣고 있는 사이, 한쪽에선 라피스와 이사나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아~글쎄. 나랑 엘이 가면 3천의 군사 같은 건 필요 없다니까? 뒤따라 오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그딴 건 여기 전력에나 보태.” “그렇게 말씀하셔도 카웰형님은 납득하지 못하실 겁니다. 사람들 눈도 있으니 일단 그들은 라피스님이 맡아 주세요.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참. 귀찮은 건 질색이란 말이다. 이래서 인간들이란.” 전쟁 내내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짜증이 났는지, 우리 앞으로 할당(?)된 군사들을 거절하려던 라피스는 결국 이사나의 고집에 못 이겨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서도 녀석은 찌푸린 얼굴로 연신 투덜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아군들에게도 우리 정체를 속일 셈이냐? 드래곤과 정령왕의 개입을 너처럼 달가워하지 않는 녀석도 없을 거다. 이미 도움 받을 건 실컷 받고 있는 주제에.” “네,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이 좀 많아서 그래요.” “알긴 아니 다행이군. 뭐, 그 점을 역으로 이용하려고 들지 않는 건 기특하다만, 넌 너무 세상을 피곤하게 살려고 하는 경향이 있어. 그러다간 평생토록 원하는 여자 하나 못 얻을 걸? 명심해 두는 게 좋을 거야.” “…충고 감사히 받아들이겠습니다.” 약간 씁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는 이사나의 모습에 라피스는 더 이상 빈정거리지 못하고 말없이 혀를 찼다. 받아주는 상대가 저래서야 놀려주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사나는 우리 중에서 라피스를 다루는 방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녀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잘 들으시오, 정령사님. 두 분이 먼저 출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할 생각이 없소만, 황성을 치는 것은 반드시 후발진과 합류한 이후입니다. 두 사람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무모한 행동은 용납지 않을 것이오. 이쪽 지름길로 곧장 가다보면 에바스 평원이 나타납니다. 그곳에서 군사들을 기다렸다가 함께 진격하십시오.” “흐음. 알겠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저희는 주변 동태를 파악해보도록 하죠. 대공이 다른 술수를 꾸미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럼 후발진은 언제 출발하나요?” “정령사님이 떠나고 일주일 후입니다. 이곳에서 출발하는 숫자는 천 여명이고, 나머지 2천은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 스피어 백작의 사병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을 이끄는 대장의 이름은 위칼레인 폰 스피어로, 백작의 차남이자 어릴 때부터 검술 면에서 크게 돋보인 자였으니 이번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오.” “스피어 백작이라…수도에 근접한 영지의 귀족이군요. 어쩌면 이들은 우리보다 먼저 약속장소에 도착해 있겠네요.” “그들은 그곳에서 물자의 보급을 도울 것입니다. 이미 정령사님에 대해서는 설명해 두었으니, 함께 행동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생전 처음 보는 상황이라 해도 일단 나와 라피스는 이사나의 측근으로 분류되어 있으므로, 일행의 리더격이나 다름없었다. 우리와 합류한다는 사람들이 적어도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나는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으로 황성을 치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겠군요. 그 사이에 대공의 군사들의 사기를 떨어트릴 수 있다면…”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요. 그것은 앞으로 차분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무쪼록 정령사님은 황성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에만 전념해 주십시오.” 단호한 후작의 부탁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라피스의 모습을 찾았다. 그때 녀석은 이미 모든 출발 준비를 마친 후 데르온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상태였다. 덤덤한 녀석에 비해 뭔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데르온은 굉장히 조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가자 그의 얼굴은 거의 간곡해 보일정도로 일그러졌다. “왜 그래요, 데르온? 무슨 일 있어요?” “에, 엘님…그것이…” “아스 녀석이 우리를 따라가고 싶다고 했다던데?” “엥? 그게 무슨 소리야?” 본래 아스는 부화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곳에 남아있기로 되어 있었다. 아직 능력이 미숙한 어린 마족을 마왕의 세력이 판치는 수도에 데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데르온 또한 같은 입장이었기 때문에 난처한 심정이긴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건 좀 곤란한데요, 데르온. 알다시피 수도는…” “네, 저도 같은 말로 여러 번 주군을 설득했습니다만, 이번 일엔 고집을 피워야 겠다고 하시는 군요. 아무래도 엘님과 떨어지는 것이 불안하신 모양입니다.” “으음. 하지만 마왕의 눈에 발견되기라도 하면…아니, 그 전에 다른 마족들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마 이곳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주군의 마력을 느낀 다른 마족들이 하나둘씩 찾아들 테지요. 보호구역에서 벗어난 어린 마족이란 그들에게 적당히 가지고 놀기 좋은 사냥감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그럼 데르온 혼자 힘만으로는 무리겠군요. 만약 대공이 이번 전쟁에 마족의 힘까지 끌어들인다면 더욱 주목을 받기가 쉬울 테니. 이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데려가는 편이 나으려나?” 의견을 구하는 눈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자 녀석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당장 귀찮다고 거절할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꼬맹이가 쉽게 당할 거란 생각은 안하지만, 데르온과 같은 4대 공작의 마족이 온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 그걸 생각하면 우리 쪽에 있는 것이 녀석에겐 안전할걸? 일단 너와 내가 확실한 방패역할을 해줄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마족들이 우리에게 몰린다면, 이곳에 남은 녀석들이 행동하는 게 아무래도 더 편해지지 않겠어? 반대로 너랑 나는 좀 피곤해 지겠지만.” “한마디로 우리가 미끼 역할을 겸 한다 이 말이지? 하지만 그러다가 대공의 눈에 발각되면?” “그래도 상관없지. 우리가 수도로 간다는 사실이 미리 알려진다 해도, 대공은 어차피 군대를 두 개로 나눌 수밖에 없어. 설마 드래곤과 정령왕을 몇 천으로 상대할 생각은 못하겠지. 그쯤 되면 이사나도 해 볼 만하지 않겠어?” “헤에, 그렇구나. 라피스 대단하다.” “훗. 당연한 소리를.” 내가 그저 ‘황성을 친다’라는 간단한 사실을 인식하는 동안 녀석은 앞으로 벌어질 여러 가지 상황을 궁리해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다지 내키지 않음에도 일행으로서 확실하게 협조해 주는 모습이 기특해서, 나는 이번만큼은 녀석의 잘난 척을 순순히 인정해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블레스터는 어떻게 하지? 정말 이사나 혼자서 해낼 수 있을까?’ 몇 번이고 괜찮다는 다짐을 받았지만, 마음속 한구석이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사나의 능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버린 존재라 해도 상급정령인 시큐엘을 한꺼번에 다섯이나 불러낼 수 있는 그를 쉽게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친위기사들의 실력 또한 몰라보게 좋아지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좀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내가 오히려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대체 왜 이렇게 걱정이 되는 걸까? 정말 단순히 기분 탓일까?’ 출발하기 직전까지 나는 내내 이러한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마음 곳 깊은 곳에서 앞으로 일어날 본격적인 전쟁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와하하; 오랜만이옵니다; 자아~ 손에 들고 계신 시퍼런 칼날들을 고이 감춰주시어요;;(삐질삐질) 그동안 슬럼프인지 뭔지, 좀처럼 글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요. 이제야 겨우 마음 추스리고 연재를 시작해볼 참이랍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번 편은 일단 생존신고구요^^; 본격적인 8권 연재는 다음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번 편 제목은 '참아야 하는 것'인데요, 마땅한 제목이 없어서 일단 붙여둔 식이라, 나중에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며, 내용과 전혀 상관없이 진행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점 미리 양해 부탁드릴게요^^;; (출판본에선 제대로 수정하겠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p.s- 7권 추가 부분 읽으신 분들~ 어째서 레오는 기억해 주지 않으시는 거예요. 흑흑. 상처받았...<-퍽! 노, 농담입니다;; *** 아참! 잊어버릴 뻔한 한 마디~!!!! *** 독도는 일본 땅입니다! 그리고 일본은 우리 땅입니다! 와하하하하!! 세계 정복합시다!!<-응?? [정령왕 엘퀴네스] 8-2. 참아야 하는 것 (2) “나~참. 그렇게 걱정 되면 몰래 처리하고 가면 되잖아.” 계속 안절부절하는 내가 답답했는지,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라피스가 슬며시 핀잔을 늘어놓았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일정을 서두른 녀석의 탓도 있었기 때문에 대답하는 내 말투는 그리 곱지 못했다. “하루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할 땐 언제고?” “그거야 저택에서만 갇혀 있으니 지루해서 그랬지. 그래도 계속 걱정하고 있는 것보다야 이쪽이 편하지. 확실히 그랜드 소드 마스터라면 꼬맹이가 상대하기엔 버겁기도 하고.” “응. 그건 그래. 미네르바의 부탁도 있고… 왠지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 같아. 하지만 이미 이사나한테 맡긴다고 말해버렸는데, 내가 처리하고 가면 섭섭해 하지 않을까? 자기를 믿지 못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몰래 하자고 하는 거지. 정령의 봉인만 해제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뒤는 나한테 맡겨. 다 방법이 있으니까.” “…?…”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는 라피스의 계획은 대충 이랬다. 일단 내가 블래스터에게서 정령의 봉인을 해지하면, 녀석이 마법을 사용해서 그와 비슷한 느낌을 주도록 검의 능력을 향상 시켜 둔 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마법검을 만드는 셈이었다. “사용하는 공작 본인은 뭔가 달라졌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이사나는 검이 바뀌었다고는 생각하지 못 할 거야. 최대한 바람 속성과 비슷한 마법을 걸어둘 테니까.” “그럼 이사나한테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아니야?” “전혀. 녀석한텐 시큐엘과 파이어 버스터가 있잖아. 여유 있게 가지고 노는 건 무리더라도, 이사나쪽이 절대적으로 유리할거다. 그 정도면 해볼 만하지 않겠어? 그리고 우리는 먼저 출발하는 것으로 해야 해. 그래야 다른 녀석들에게 우리가 미리 손을 썼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테니까.” 오오, 이게 바로 완전범죄의 현장? 제법 그럴듯한 설명에 나는 두고 볼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 이사나들과 짧게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진 우리는, 수도로 이어지는 성문 앞에서 데르온과 아스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한 뒤 몰래 블래스터의 주인을 찾았다. 검에 봉인되어 있다곤 해도 정령 특유의 기운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어렵지 않게 진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점심 때 인지라 그들은 머물고 있던 여관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검의 주인은 10여명에 가까운 기사들과 멀찍이 떨어져 따로 자리를 마련한 상태였다. 온통 검은 로브를 둘러쓴 음침한 분위기 탓인지 식당 안은 그들 외의 다른 손님은 없어보였다. 밖으로 열려진 창문으로 안의 상황을 파악한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래서야 접근하기가 쉽지 않겠는걸. 나야 자연계의 상태로 돌아가면 된다지만, 라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마법을 걸려면 바로 쫓아와야 하잖아?” “일단 봉인이나 해제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렇게 대답한 녀석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벌컥-여관 문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외모인데, 당당하게 혼자 들어 서기 까지 하니 사람들의 시선이 라피스에게 집중되는 것은 불을 보듯 당연한 결과였다. 녀석은 노려보는 기사들과 감탄을 연발하는 여관 주인의 시선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공작과 가까운 테이블에 다가가 거만하게 주저앉았다. 그리곤 주문을 받으러온 종업원을 향해 간단한 점심 메뉴를 시킨 뒤, 내 쪽을 보며 살짝 눈짓을 했다. 어서 봉인을 해제하라는 뜻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걸까.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몸의 형체를 유지시키고 있던 마나들을 훌훌 털어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자연계의 모습을 한 채 식당 안에 들어서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기 중을 떠도는 수분을 느끼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공작의 허리춤에 달려있던 블래스터 만이 희미하게 정령왕의 기운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렇게 청명한 물의 기운이라니…설마, 엘퀴네스님 이십니까? -맞아. 한 번에 알아보는 구나. 만나서 반갑다, 진. -허억! 고귀하신 분이 이런 미천한 장소엔 무슨 일로…아아, 직접 나가 인사를 드리지 못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왕이여…. 엘퀴네스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격한 듯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마저도 차분한 느낌이었다. 명랑하고 쾌활하던 다른 진들에 비해 녀석은 제법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이그니스도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 가공할 만한 수다력을 잠깐 떠올린 나는 피식 웃으며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 블래스터의 검 집에 손을 가져갔다. -왕이시여? -아아, 별 거 아니야. 너의 봉인을 해지해 주려고 하는 거야. -네? 제 봉인을? -그래. 미네르바의 부탁을 받았어. 그동안 검 안에만 있어서 답답했지? 금방 꺼내줄테니까 기다려. -미네르바…께서 말씀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에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이순간이 진에겐 면죄부가 내려진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진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뚝뚝 떨굴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얼마 전에…정령왕의 교체를 느꼈습니다. 무례한 질문입니다만…미네르바께서는 마지막까지 평안하셨습니까? -왜 그런 걸 묻지? 지금까지 너를 버려두고 있던 그가 밉지는 않아? -그, 그런! 저는 기쁜 마음으로 왕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왕을 미워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 제 잘못이었습니다. 그 간악한 남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던 제 탓입니다. -간악한 남자? 혹시 미네르바가 너를 선물했다던 그 사람? -그렇습니다! 그 악독한 인간은 미네르바님을 배신하고 다른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눈치 채고 있었는데…왕께서 슬퍼하실까봐 말씀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일이 커진 것입니다. 전부 제 탓입니다…. 엘퀴네스님, 저는 봉인에서 나올 자격이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배신한 본인이 나쁘지, 그게 어째서 네 탓이야? -하지만… -미네르바는 너에게 미안했다고 전해 달랬어. 너를 봉인한 일이 마음 편치 않았었다고. 네가 이런 식으로 자책하며 인간의 손에서 떠돌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는 더 슬퍼하게 될 거야. 그런 건 싫지? 내 물음에 녀석은 힘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에 가해진 봉인의 압력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너는 바람이야. 이런 곳에 갇혀서 오랫동안 머물 성질은 아니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가도록 해. 이번 대의 미네르바도 분명 너를 반갑게 맞아 줄 거야. -감사…합니다, 엘퀴네스님. 정말…감사합니다. 파아앗- 봉인이 완전하게 해지되자 진을 담고 있던 검신에서 눈부신 빛과 강렬한 바람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자연계 상태의 정령에게만 보이는 것으로, 식당 안에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공중을 휘돌던 빛들은 순식간에 뭉쳐져 투명한 청년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약간 슬픈 표정을 한 진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되찾은 자유가 어색한 듯 녀석은 머뭇거리며 내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어디든 가도록 해. 네가 원하는 장소로. 내 말에 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머물러 있던 검을 힐끗 바라보더니, 나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곤 열려진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날아갔다. 목적지는 정령계가 될 가능성이 컸다. 오랜 방랑에 지친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휴식이었으니까. ‘자아, 봉인은 해제됐고. 라피스 녀석은 이제 어떻게 할 셈이지?’ 정령이 빠져나간 블래스터는 겉보기만 멀쩡했을 뿐, 이제 아무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검 자체는 장식적인 면만 강조한 식이라, 그리 전투 면에서 실용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천역덕스럽게 종업원이 가지고 온 식사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무심코 검 집을 움켜쥔 공작의 안색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검의 능력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공작? 왜 그러십니까?” 원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기면 그 장소에 있는 가장 낯선 사람이 추궁을 당하기 마련이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상대편을 무시한 채 벌떡 일어서더니, 곧장 라피스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걸어갔다. 스르릉. 탁한 빛을 띄운 검신이 순식간에 뽑혀 나와 막 스프를 먹고 있던 라피스의 얼굴을 겨냥했다. 이미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을 텐데도, 녀석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호오…이게 무슨 짓일까?” “닥쳐라! 네 놈은 누구냐!” “보다시피 점심 식사를 하러온 평범한 사람이오만? 무슨 문제라도?” 능청스레 묻는 말에 공작의 얼굴은 더욱 사나워졌다. “모른 척 할 생각은 말아라! 네놈이 클모어 후작의 저택에 산다는 것은 알고 있다. 대체 내 검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검? 지금 나를 겨누고 있는 이 검을 말하는 건가? 흐~음. 아쉽지만 나는 대장장이가 아니라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는 걸. 겉보기엔 멀쩡한데? 그건 그렇고 말이지, 방금 식사하러 들어온 사람에게 이런 시비를 걸어도 되는 거야?” 그렇게 말한 녀석은 은근슬쩍 검 끝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호기심에 만져보는 것 같았겠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으로 라피스의 마법이 시전 되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화가 난 공작이 무심코 휘두른 검 날에서 강한 바람의 기운이 뿜어져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휘이익! 콰아앙! 사나운 공기가 휘몰아치자 라피스의 몸은 저만치 밀려가 넘어졌다. 그러자 공작은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검과 쓰러진 라피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설마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으윽…다짜고짜 사람에게 칼을 휘두르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도 당신이 기사인가?” “아, 아니, 나는 그저…” “바람을 내뿜는 검이라니! 하마터면 골로 갈 뻔 했잖아! 무방비의 상대를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게 어딨어? 정말 상식 이하의 인간이로군! 솔트레테엔 이런 사람뿐이 없는 건가? 이거 어디 무서워서 살 수가 있나.” “…그 말은…자네는 솔트레테의 제국민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당황하던 것도 잠시, 공작은 탐색하는 시선으로 라피스의 위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녀석은 몸을 탁탁 털고 일어서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런 사정을 당신 같은 무뢰한에게 알려줄 필요가 있나? 아무튼 이제 솔트레테라면 지긋지긋해. 남 밥 먹는데 갑자기 칼을 들이밀질 않나, 기껏 도와준 여자는 함부로 치한으로 매도해서 쫓아내질 않나.” “도와준 여자?” “저택에서 나를 봤다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얼마 전에 이곳 후작의 여동생에게 청혼을 한 남자가 있었거든. 하도 곤란해 하기에 내가 멋지게 쫓아내줬지. 그런데 저번에 손 한번 잡았다고 멋대로 치한으로 매도하잖아! 사람을 뭘로 보고! 물론 예쁜 여자긴 했다만. 흠, 흠.” 사람들의 시선은 이제 라피스를 주제도 모르고 귀족 영애를 넘본 간 큰 남자로 여기는 듯 했다. 잠시 침묵을 지킨 공작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자네는 이제 그 저택에서 나왔다는 소리인가?” “아아. 안 그래도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다들 술렁거리는 것도 싫고 말이야. 마지막으로 점심이나 맛있게 먹고 떠나려고 했는데, 당신 때문에 다 망쳤다고! 쳇. 어이, 여기 얼마지?” 푸념하듯 투덜거린 라피스는 종업원에게 식사 값을 치르곤 유유히 식당 안을 벗어났다. 그런 녀석의 뒷모습을 공작은 끝까지 바라보았지만, 수하를 시켜 뒤를 쫓게 하지는 않았다. 힐끔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밖으로 나선 나는, 주변에 다른 사람들이 없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마나를 다시 불러 모아 형체를 유지시켰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던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다 된 거냐?” “그렇긴 한데…어쩌자고 그렇게 눈에 띄는 일을 벌인 거야? 좀 더 조심스럽게 할 수는 없었어?” “뭐가 어때서? 기척이 예민한 녀석한테 몰래 접근하는 게 쉬운지 알아? 저런 놈에겐 정면 돌파가 더 확실하다고. 결국 멋지게 성공했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공작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네가 이사나파 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아무리 변명했다곤 해도 너무 쉽게 놔준 것 같은데.” “내가 타국민이라는 정보를 흘려서 그런 거야. 혹시나 다른 제국이 개입되어 있을지도 모르니 행동이 조심스러워 지는 거지. 아마 지금쯤 머릿속이 복잡해서 터질 지경일걸? 녀석이 조사하려고 마음먹을 때, 우리는 이미 황성에 도착해 있는 거지. 킥킥.” 상상만으로 좋아죽는다는 듯, 연신 히죽거리고 웃는 라피스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지만 지금 상황을 너무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괜찮을까? 마법이 뛰어나다곤 해도 정령하고는 느낌이 다를 텐데. 휘두를 때마다 기운이 빠진다던가 하면…” “그건 블래스터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괜찮아. 어차피 당장은 눈치 채기 어려울걸? 내가 아까 피어로 환각마법을 살짝 걸었거든. ‘이 검은 멀쩡하니 괜찮다.’라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까진 쉽게 깨닫지 못할 거다.” “…그렇군.” 찝찝하긴 해도 완벽한 마무리인 것 같았다. 나는 나대로 미네르바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사나가 잘 해내기만을 바라는 일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되었다고 느낀 순간, 머릿속을 강하게 죄여오는 것 같은 압박감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흘릴 정도로 강한 통증이었다. “윽!!…아야야.” “엘? 왜 그래?” “으으. …머리가 아파. …뭔가 느낌이 이상해.” “이상하다니?” “모르겠어. 자꾸 화가 나고…괴롭고…속이 매슥거려. 이건 아무래도…” 그렇게 말하는 사이 내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주르륵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내 의지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를 위해 대신 울어주고 있는 기분이랄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나는 지금 이 감정의 원인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정령이 울고 있어.” “뭐?” “나이아스가 울고 있어. 아주 슬프게. 나를 부르고 있어. 복수를 원하고 있어.” “…흔하지 않은 일이군.” 처음 내가 울 때만 해도 당황한 표정이던 라피스는, 이제 상황이 파악 되었는지 차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벅차오르는 슬픔과 머릿속을 맴도는 누군가의 모습을 진정시키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삐쩍 마른 팔, 다리와 잘 먹지 못해 수척했던 얼굴. 중간계로 소환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던가? 아직 어리기만 하던 작은 꼬마에게 훗날 황성으로 찾아오라며 목걸이를 걸어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지금 슬퍼하고 있는 정령은 그 목걸이 안에 봉인시켰던 나이아스였다. ‘그 아이가 죽었구나.’ 잠시 후 눈물을 멈추고 고개를 든 나는 라피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빨리 황성으로 가자, 라피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아.” ======================================= 후.......죽어라 쓰고나서 다 지워버리고 싶은 이 마음은 대체 어찌할 것인가..... 아무리 봐도 마음에 안들어요... 또 다시 도진 마감병;;; 이때는 어떤 글을 써도 마음에 안 든다죠.. 낮에 올리려고 했는데, 결국 저녁까지 질질 끌고 말았네요. 겨우 5장이라고 해도, 쓸때는 하루종일이 걸린 답니다. 폭참은 그야말로 제가 미쳐있을때나 가능한 일이어요.ㅠㅠ 그러니 조금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후..<-어차피 곧 마감임;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8-3. 참아야 하는 것 (3) 이사나가 그의 친위기사들과 클리프 상단을 방문한 것은, 엘이 황성으로 출발한 낮시간을 한참이나 벗어난 후였다. 목적을 위해 천한 신분의 사람(진실이 어찌되었든 간에)에게도 인정을 받으려 하는 황제의 소문은 이미 클모어 전역에 파다하게 퍼져있어, 거리마다 이사나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떠나기 전 이사나는 시벨리우스에게 부탁해, 라피스가 걸어준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했다. 이제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하얀 은발과 보석 같던 금안이 사라지자, 원래의 푸른 눈동자와 짧은 금발 머리카락이 드러났다. 마법을 걸기 직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단 조금 더 성숙해진 얼굴은, 전체적으로 순한 이미지를 담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참동안 빤히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뒤에 서 있던 시벨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보니까 적응이 안 되네요. 이상한가요?” “흐음~. 이상하다고 해도 별 수 없어. 난 마법을 해제할 줄은 알아도 폴리모프를 시전 할 수는 없으니까, 그걸로 끝이라고. 내가 보기엔 이쪽이 더 너 같아서 좋은데, 뭘 그래?” “그래요? 그럼 이전의 모습은 저 같지 않았나요?” “글쎄…뭐랄까. 지나치게 미모가 강조 되서 별로 인간이란 느낌이 들지 않았어. 쉽게 다가가기 힘든 외모랄까. 엘과 라피스 덕분에 그다지 눈에 뜨이진 않았지만 말이야.” “킥킥. 그건 그래요. 엘은 그 점에 대해선 별로 자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요. 사람들이 넋을 잃고 쳐다봐도 노려본다고 생각하고 기겁을 하더라고요.” 이사나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4천 년 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부터 한결같이 변하지 않은 점이기도 했다. 비록 그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존재는 자신밖에 없었지만. 마신의 장난에 크게 데인 이후로, ‘엘’이란 존재에 대한 언급은 어느새 금기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말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벨리우스가 ‘엘’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지금의 엘퀴네스 또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약이 있다면야 언제라도 기다릴 순 있지만.’ 자신 때문에 상처받는 친구의 모습을 보는 것은 괴롭다. 그러느니 차라리 자신이 조금 힘들어 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겉으론 평온하기만한 그들의 관계는, 이렇듯 한사람의 의도적인 침묵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어지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퍼뜩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어쨌든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네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 전부 꿈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도 모두 놀라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어차피 언젠간 겪어야 할 일 아니야? 잔말 말고 이제 그만 밖으로 나가보라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다. 지금 바로 상단에 가는 거냐?” “그래야죠. 오늘 결과에 따라 다른 상단들의 협력이 좌우 될 테니, 반드시 인정을 받을 생각이에요. 애당초 그분이 제시한 조건을 이루었으니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흥! 안 해주면 곤란하지. 누구 때문에 그런 고생을 했는데.” 던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슬며시 이를 가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이사나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환상마법에 걸려 미쳐버렸던 기억이 없는 그로서는, 고단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추억할만한 여행이었다. 물론, 덕분에 성검을 가장한 마검에게 시달리게 된 일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지만. 상단에 가면 알아서 해결 될 일이라 생각됐지만, 들고 가는 내내 또다시 수다 공격을 받을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기가 질리는 심정이었다. 이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금까지 ‘보관’이라는 명목으로 상자 안에 봉인(?)해둔 파이어 버스터를 꺼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사나의 손에 쥐이는 순간부터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이게 얼마만이에요, 용사님! 그 동안 제가 보고 싶으셨죠? 아무리 성검이라지만 이렇게 고이 모셔지기만 하다니! 이래선 모처럼 검으로 만들어진 제 체면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요. 그래도 용사님을 위해서 견디고 견뎠답니다! 자아!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드래곤의 레어로 쳐들어가나요? 아니면 마신을 절단 내러? 개인적으론 두 번째 상황을 추천하고 싶지만, 모든 일엔 전부 순서가 있는 법이니 드래곤부터 때려잡도록 해요!> “……” 정신 바짝 차리자! 이사나는 속으로 수없이 중얼거렸다. 이제 그를 중재해줄 엘이 없는 이상 모든 일은 자신이 알아서 감당해야만 했다. 겨우 이 정도에 쩔쩔맨다면 누구의 앞에서도 검의 주인이라 나설 수 없게 될 것이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이사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랜만이야, 이그니스. 내 모습이 바뀌어도 알아보는구나.” <모습이 바뀌었어요? 호호호! 저는 검에 갇혀 있어서 아무것도 보이는 게 없는 걸요! 단지 기운으로 주위를 분간할 뿐이에요. 그러고 보니 용사님의 몸을 둘러싸고 있던 흐릿한 마나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네요. 아아! 설마 용사님은 그동안 저주에 걸려계셨던 건가요? 흉학한 괴물에서 드디어 찬란한 미소년으로 돌아오신 거군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훗훗훗. 모시는 용사가 미소년이면 즐거운 법이죠! 이왕이면 보는 눈이 즐거워야 더 멋져 보이지 않겠어요? 그런 의미에서 용사님은 진정 제 주인님이 되실 자격이 있어요! 자아~ 그래서 드래곤은 언제 잡으러 가나요?> “저기…일단은 먼저 상단부터 들려야 할 것 같은데.” <상단? 아!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님을 먼저 뵈어야 한다고 했었죠! 그 분이라면 반드시 용사님을 인정해 주실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닌 제가 선택한 주인인 걸요! 멋져요, 멋져! 정령왕의 승인을 받고 출발하는 드래곤 퇴치라니! 누구도 감히 넘보지 못할 일정이 될 거예요!> 정신없이 이어지는 수다의 폭풍은 결국 이사나가 자진해서 패배를 선언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검을 부여잡고 비틀비틀 문을 열었다. 누가 보았다면 마검에 홀렸다고 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이사나가 문을 열고 나오자 가장 먼저 맞이한 사람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알리사와 라온 황태자였다. 당연히 은발에 금안을 가진 소년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던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나타나자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바론 던전에서 가지고 나온 파이어 버스터라는 것을 알아보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이사나씨?” 그다지 기대하지 않고 물은 것이었으나 상대방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선해 보이는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르자 두 사람은 본능처럼 그가 이사나 본인이 맞음을 알아차렸다. “오래 기다렸지, 알리사. 미안해. 조금 할 일이 있어서.” “헉! 저, 정말 이사나씨야?” “응? 왜 그런 반응을…아참, 내 정신 좀 봐. 시벨님께 부탁해서 폴리모프 마법을 해지했어. 이제부턴 본래 모습으로 활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조금 어색하지?” 그렇게 묻는 이사나는 이전의 동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요정 같은 모습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생각보다 훤칠한 키라던가, 매끄러운 이목구비, 선량해 보이는 눈동자가 제법 남자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서 였을까? 알리사는 자기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곤 살짝 얼굴을 붉혔다. “뭔가…굉장히 의외네. 이제야 나보다 연상이란 느낌이 드는 걸?” “하하! 칭찬으로 들을게. 요사이 키가 좀 큰 것 같아. 갑자기 시야가 높아져서 적응이 안 되는 중이야.” “그, 그래도 어울려. 훨씬 멋있어 졌어.” 알리사의 칭찬에 혹시나 실망할까봐 걱정했던 이사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반대로 라온 황태자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두 사람만의 공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멀리서 이사나를 알아본 친위기사들이 환호하며 달려왔기 때문이다. “세상에! 폐하!! 원래대로 돌아오셨군요!” “와아~ 인상이 훤해지셨습니다! 예전보다 더 멋져지셨는데요?”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폐하의 얼굴입니까! 이런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니까요~” 주변은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지만 이사나는 환한 얼굴로 기사들을 맞이했다. “하하. 다들 오래 기다렸지? 미안해. 어라? 알렉경 키가 나랑 비슷한 것 같은데? 원래 더 크지 않았던가?” “폐하께서 자라셨으니 그렇지요. 선황폐하의 기골이 장대하셨으니, 앞으로도 더욱 크실 것입니다! 이 모습을 뵈니 겨우 안심이 되네요. 저는 마법 때문에 영원히 시간이 멈추실 줄만 알았거든요.” “이제 제법 사내다우신 느낌이 풍깁니다! 거리에 나가면 모든 여인들이 폐하만 바라 볼 것 같은데요? 하하하!” 한 기사의 말에 알리사의 표정이 작게 일그러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사나는 그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서도 정작 여인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세상 어느 여자가 자기보다 아름다운 남자를 사귀고 싶어하겠는가! 그러나 마법이 풀린 그의 모습은 여느 여자라도 한번쯤은 돌아볼 듯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카터스의 라온 황자가 큰 덩치와 훤칠한 키로 거친 남자의 매력을 뽐낸다면, 그는 단정한 분위기와 선한 눈동자로 자상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제까지 그의 주변에 여자라곤 자신 하나밖에 없었고, 다른 여자가 나타날 거란 생각을 해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알리사의 심정은 매우 복잡했다. 마치 자신의 것을 남에게 빼앗기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흡족했던 이사나의 변화가 갑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기분은 본인에게도 낯선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고서도 스스로 놀라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대체 내가 왜 이러지? 뭘 잘 못 먹었나?’ 엘이 알았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반응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중에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속으로 방황(?)하고 있는 사이, 화제는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것으로 흘러갔다. “상단으로 가실 구성원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친위대 모두가 폐하와 함께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만.” “전부 다 가는 건 그쪽에도 실례일 것 같은데. 두 세 사람 정도 동행하도록 하지. 알렉경, 케이경, 페리스만 따라와 줘.” “네, 알겠습니다. 저어, 일행 분들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아니, 저택에 남아 있는 편이 좋겠어. 괜히 나와 함께 있다가 시선을 끌게 되면 안 되니까.” 그렇게 말한 이사나는 알리사와 라온 황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들도 내심 생각해 둔바가 있었으므로 큰 거부감 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서야 돌아가는 정황을 파악했는지 흥분한 이그니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꺅! 드디어 용사의 행진인 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아~ 흩날리는 꽃가루! 환호하는 백성들! 이 얼마나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던가! 백마는 어디 있어요? 휘날리는 붉은 망토는?> “헉! 이, 이게 어디서 들려온 목소리입니까?” “귀, 귀신?”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기사들은 순식간에 경계의 태도를 취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사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검신을 툭툭 두드렸다. “다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파이어 버스터가 말하는 거거든.” “파, 파이어 버스터? 설마 폐하께서 들고 계신 그 검 말입니까?” “응. 갑자기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놀라잖아, 이그니스. 그리고 행진이 아니라 그냥 상단을 방문하는 것뿐이야. 망토는 두르지 않을 거고, 말을 타기야 하겠지만 백마는 아니야.” <엥? 그게 뭐에요? 모처럼 만의 외출인데 좀 더 근사하게 꾸밀 순 없어요? 용사님은 너무 소박하셔서 탈이에요. 흠. 좋아요, 저는 성검이니 마음 좋게 참아드리도록 하죠. 화려한 퍼레이드를 놓치는 건 아쉽지만, 원래 성검의 진정한 목적은 전투에서 빛을 발하는데 있으니까요.> “그,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삐질삐질 대답하는 이사나의 말에 기사들은 하나같이 아연한 표정이 되었다. 잠시 후 친위 기사단의 한사람, 알렉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그게 정말 파이어 버스터 입니까? 이프리트가 직접 만들었다고 하는 정령검?” “응. 이 안에 불의 상급 정령인 이그니스가 봉인되어 있어.” “…그렇습니까? 생각했던 것과는 이미지가 상.당.히. 다르군요. 뭔가 굉장히 특.이.한. 검 같습니다. 하긴, 명색이 정령검이 보통 검과 다를 바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허무했을 테지요.” “그, 그렇지? 하하!” 강조하는 말에 서린 뼈있는 의미를 깨달은 이사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맥없이 웃기만 했다. 이미 한차례 겪었기 때문에 익숙해져있던 알리사나 라온 황태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건 역시 마검이야!’ 세 사람은 마음속으로 똑같이 소리쳤다. =========================================== 이번 파트의 중심은 이사나의 이야기 입니다. 고로 엘의 상황은 잠시 제낍니다. 냐하하하~<-퍽! 20장을 써도 모자랄 판에 겨우 4장이라니... 과연 이달 안에 원고를 완성 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모두 화이팅을 외쳐주세요;ㅁ; p.s- 레오의 죽음은 저도 상당히 망설였답니다. 훗날 멋진 캐릭으로 돌아올 예정이었지만, 안 그래도 많은 등장인물을 더 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로 깨끗하게 철거!<-응? 이제 부터 하나씩 살생부 명단에 올라간 녀석들을 정리해야...후후후후... [정령왕 엘퀴네스] 8-4. 참아야 하는 것 (4) 황제인 이사나와 클리프 상단 총수의 만남을 주목하는 것은, 아직 누구의 편에 설지 갈피를 정하지 못한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이번 접촉으로 총수 이카나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공의 악행이 심해질수록 반대로 이사나의 입지는 점점 높아졌기 때문에,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무사히 ‘인정’을 받고 황권을 회복하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 코앞에 닥친 전시에도 불구하고 마치 축제처럼 활달한 거리에는 분명 황제를 시해하려는 세력 또한 존재했다. 대공의 오른팔인 카리브디스공작과 그의 수하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몇 달 동안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큰 소득을 건지지 못한 상태에서 그들은 모두 기척을 죽이고 이사나가 저택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혼란을 틈타 암습을 벌일 작정이었다. 기사도 정신에 똘똘 뭉친 공작으로서는 그리 탐탁지 않은 작전이었으나, 더 이상 이사나가 활약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황제가 죽는다면 자연히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버리고 대공을 따르게 될 것이다. 한 몸통에 두 개의 머리가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는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틀렸다고는 한 치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에 눈에 이사나는 자기 앞가림 할 줄 모르고 권력만 휘두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 자가 황권을 잡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법이지.’ 얼마 후면 할버크에 집결되는 군사의 숫자가 거의 채워질 것이다. 그 사이에 황제만 제거 할 수 있다면 대공은 큰 피를 흘리지 않고 무사히 권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그의 역량이면 충분히 황제파 쪽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그것으로 그들이 몸을 사리게 된다면 이번 전쟁은 두고 볼 필요 없이 대공 쪽의 승리였다. 여유를 가지고 전력을 다듬을 여유 따윈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환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해당하는 값을 피로 치르게 되리라! 공작은 마음속으로 확언하며 기척을 죽이고 있던 수하들에게 나직히 명령했다. “이제 곧 황제가 나올 것이다. 카웰 후작 역시 동행할 가능성이 크다. 내가 그를 상대할 동안, 너희들은 황제의 심장을 노려라. 단, 친위 기사단들의 실력을 얕잡아 보지는 말아라. 그들 모두 소드 익스퍼드의 과정을 담고 있는 검사이자, 그 중 페리스란 남자는 바람과 물의정령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정령사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알겠습니다, 공작각하.” “내가 알기로 황제 본인의 실력은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검술을 조금 할 줄 알지만, 너희들의 수준에 비하면 마치 병아리와 같은 것이니까. 대의를 위해서라면 때론 도리를 접을 때도 있는 법. 너희는 어떻게든 황제를 제거할 목적만 기억해라. 그가 죽는다면 자연히 이 모든 수고가 잠잠해질 것이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수하들의 대답을 들은 공작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상대할 카웰 후작은 분명 껄끄러운 남자이긴 했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손에 잡힌 묵직한 검 집이 공작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곳으로 오기 전 황제파였던 붉은 머리의 청년과 접촉했던 일이 잠시 마음에 걸리기는 했으나, 검의 기능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다만 예전보다 말이 더 없어졌을 뿐이다. 물론 실제로는 상당히 달라지긴 했으나, 라피스의 환각마법에 걸린 탓에 공작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 제국의 사람이 아니라 했다. 떠나는 길이라곤 했지만, 뒤로 무슨 수작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지. 어쩌면 우리의 정체를 눈치 채고 황제에게 알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황제는 단단히 무장을 하고 나서겠구나. 생각보다 어려운 싸움이 될 수도 있겠군.’ 공작은 눈을 가늘게 치켜뜨며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그러나 막상 저택에서 나온 황제는 아연하게도 친위기사들 중에서도 단 세 사람만을 동행하고 있었다. 당연히 함께 할 거라 생각했던 카웰후작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고, 이사나의 모습 또한 그들이 조사했던 바와 달랐다. 폴리모프 마법으로 얼굴이 변했다고 들은 바와 달리, 그는 공작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던 모습과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이제 제법 소년티를 벗어난 얼굴은 흡사 처형당했던 선대의 황제가 살아 돌아온 듯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오랜만에 본 황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공작은 그 모습을 단지 겉 치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대동한 인원이 겨우 저것뿐이라니. 스스로의 실력을 맹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에 대한 정보를 전혀 듣지 못한 것인가! 아니, 그렇다 해도 전시가 코앞에 닥친 상황이라면 좀 더 주변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저것은 마치 죽여 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지 않은가! 카웰 후작은 무슨 생각으로 저들만 내보낸 거지?’ 이사나가 적은 인원을 데리고 나온 것은 앞으로 일어날 최후의 전투를 대비해 전력을 아끼려는 목적이었다. 전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귀중한 기사들이 차례로 부상을 입고 누워버린다면 그만큼 곤란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말 위험한 상황이 닥치면 정령을 보내 후작의 성으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다. 시벨리우스라면 후작을 비롯한 아군의 기사들을 단번에 이쪽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 가능했으니까.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공작은 단순히 그에게 꿍꿍이가 있다고만 생각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전력이 부족하니 미련한 수작을 부리는 건가. 카웰 후작도 많이 달라졌군. 세상엔 요령이 통하지도 않는 상대도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만들어 주지.’ 공작은 수하들을 향해 이사나의 뒤를 바짝 뒤쫓도록 지시했다. 적당한 틈을 봐서 공격을 명령 할 생각이었다. 비록 아까운 피를 흘리기는 하겠지만 그들의 희생은 결코 헛수고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 깊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즈음 황제의 얼굴을 구경하기 위해 성 앞에 모인 백성들은 내심 그의 등장이 화려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귀족들의 행렬이 항시 그래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처음 후작의 성에서 후드를 쓴 4명의 남자가 말을 타고 나왔을 땐, 사람들은 설마 그 중에 그들이 기다리던 황제가 속해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챈 것은, 성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들이 들고 있던 창을 곧추 세우며 우렁차게 소리친 이후였다. “황제폐하의 앞이다! 모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라!” “폐하와 시선을 마주치는 자는 모두 엄벌에 처할 것이다!” “!!” 황제라는 말에 놀란 사람들은 술렁거릴 사이도 없이 황급히 무릎부터 꿇었다. 그들은 비단옷도, 번쩍번쩍한 갑옷도, 붉은 휘장도 걸치지 않은 어린 소년이 황제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퍼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저 세 사람만으로 상단을 가는 건가?’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있나. 곧 수십 명의 기사들이 폐하의 뒤를 따를게 틀림없어.’ ‘물론이지. 명색이 황제인데 달랑 수하 세 사람만 데리고 갈 리가 있나. 황족으로서의 체면이 있지.’ ‘그래? 그렇다면 곧 금빛 갑옷으로 번쩍번쩍한 기사들의 행진을 볼 수 있는 거로군!’ 황제의 친위대는 천민들에게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 대단한 장관을 구경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성문을 벗어났음에도 더 이상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의 모습은 없었다. 사람들은 허망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지나쳐 걸어가는 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왼쪽의 바위틈에 다섯, 오른쪽으로 여섯. 뒤쪽으로 일곱 명입니다.” 이사나는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정령사 페리스에게 실프를 풀어 주변을 정찰하게 했다. 공작이 가지고 있다는 정령검의 존재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이그니스의 경우를 미루어보아 공격력 외의 감각은 상당히 둔해져 있을 거라 생각하고 벌인 일이었다. 다행히 그의 짐작이 맞았는지 적들은 실프가 접근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흠. 생각보다 많은 숫자군. 공작은 어느 쪽에 있지?” “왼쪽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폐하? 이대로 마을 광장 안에 진입 할까요?” “아니, 자칫하면 거리에 나온 백성들이 다칠 우려가 있어. 어디 적당한 장소로 유인할 순 없을까?” “북문 근처에 제법 넓은 숲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습니다. 대대적인 전투를 벌이기에 손색이 없는 곳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쪽으로 가도록 하지. 서둘러야 해. 상단과 약속한 시간이 되기까진 아직 충분히 남았지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니 처리한다 해도 오래 걸릴 거다.” “예, 알겠습니다.” 기사들은 상단의 총수가 이프리트라는 사실을 아직 몰랐지만, 상인들의 세계에서 신용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소리 하지 않고 따랐다.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한적한 숲길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리브디스 공작과 십여명을 넘는 그의 수하들이 나타났다. 본래 공작은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이사나가 일부러 한적한 장소에 유인했다는 사실을 눈치 챘는지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황족에 대한 예우로 말투만은 정중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제폐하. 그간 많이 장성하셨군요.” “그대도 오랜만이군, 카리브디스 공작. 이런 일로 보게 되어 유감이지만.”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사나의 표정에 별반 동요가 떠오르지 않자, 공작은 내심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고 짐작했다. 아마도 이 숲에 나머지 친위기사들을 미리 숨겨두고 유인한 것이리라. 알면서도 따라온 것이었지만 불쾌한 기분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자연히 내뱉어진 말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비꼬는 형식이었다. “폐하께서는 그간 전투를 요령으로 이끄는 방법만 배우셨나 보군요. 나머지 기사들은 어디에 숨겨두셨습니까? 이제 그만 나오는 편이 서로 상대하기에도 편할 텐데 말입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 공작을 이곳으로 유인한건 사실이지만, 상관없는 백성들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였을 뿐, 숨겨둔 기사 같은 건 없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왜 그런 걸 묻지? 내가 허언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나?” 이사나의 눈빛에 서린 진심을 읽은 공작은 이곳으로 온 이후 처음으로 당황했다. 이 맹랑한 황제는 지금 단 네 명의 인원으로 소드 마스터가 포함된 십 수 명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일 작정이었던 것이다. 단순히 무모하다고 보기에는 묘하게 당당한 그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미심적은 표정으로 이사나를 바라보던 공작은, 곧 그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을 보고는 상황을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소문으로 들었던 정령검입니까? 클리프 상단의 총수가 요구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설마 그 검으로 모든 일이 해결 될 거라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 테지요. 검의 요행만 믿으시다가는 후회하실 겁니다.” “물론. 나 또한 그대가 들고 있는 검이 블래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군요. 그걸 아시면서도 이런 인원으로 맞서 상대하시겠다는 겁니까? 장담컨대, 저는 폐하의 목숨을 보장하지 않을 겁니다.” “무례한! 과격한 언행을 삼가 하시오, 공작! 그대의 앞에 계신 분은 이 제국의 하나뿐인 폐하십니다! 공작의 기사도는 모시는 주인에게 검으로 보답하는 것인가!” 분노한 알렉이 소리치자 공작의 얼굴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하자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이 하나 착각한 것이 있다. 그대들을 상대하는 인원은 여기 있는 4명이 전부가 아니야.” “역시! 매복한 군사가 있는 거군요.” “그렇진 않아. 이미 그들은 처음부터 우리와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 “무슨?”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든 공작이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이사나의 주위를 포획하고 있던 그의 수하 중 다수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크아아악!!” “커헉!!” “우아아악!!” “!!!” 엎어진 시체마다 붉은 선혈이 튀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사태에 멍한 표정을 짓던  공작은 어느새 주변을 가득 매운 투명한 독수리의 형상을 보곤 부득 이를 갈았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정령사 페리스가 바람의 중급 정령을 소환하여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10명을 훨씬 넘었던 인원이 순식간에 7명 안팎으로 줄어든 것을 확인한 공작은 방심하고 있던 자신을 질책하며 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암습을 하다니 비겁하다! 황제의 친위대라는 자들이 기사도도 모르는가!” 그러나 그것에 대한 페리스의 입장은 강경했다. “나는 기사가 아닙니다, 공작. 폐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공작이야 말로 스스로의 실력을 너무 맹신해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큭! 페리스라 했던가? 네 놈을 갈갈이 찢어 죽이겠다! 무엇들 하느냐!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이 정도로 격분하는 공작의 모습은 평소에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주변은 금방 싸움터로 돌변했다. 작정하고 전투에 임하는 어둠의 기사단들은 페리스의 암습에 맥없이 무너질 때하고는 완전히 달랐다. 이미 상당수의 숫자를 줄여뒀음에도 상대하기 벅차기는 마찬가지였다. 챙! 차앙! 콰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리고 둔탁한 타격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한 주변을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던 공작은 마침내 검을 뽑아들고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노린 자는 스스로가 선언한 바와 같이 페리스였다. “이야아아아!!!” 소름끼치도록 강한 검의 파동이 느껴지자 페리스는 본능적으로 실프들을 불러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검에 실린 푸르스름한 기운에 닿은 그들은 순식간에 공중으로 분해되었다. “페리스!!” “크헉! 쿨럭, 쿨럭!!” 정령이 역소환되자 페리스는 비틀거리며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그 순간 무방비가 된 그의 등을 향해 공작의 검이 달려들었다. 정확하게는 그의 검이 내뿜는 강렬한 바람의 돌풍이었다. 촤아아악! 소름끼치는 소리는 당장이라도 페리스의 목을 꿰뚫어 놓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람은 그의 몸에 닿기 직전 강한 불길에 막혀 공중으로 연소되었다. 이사나가 빼어든 정령검에서 나온 것이었다. “칫!” 짧게 혀를 찬 공작은 이번엔 검기를 실어 공격했다. 이사나는 이번에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공작의 검을 막았다. 채앵! 콰아앙! 파이어 버스터와 닿은 검면이 치익 소리를 내며 달구어졌다. 마주 본 두 얼굴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퍼져나갔다. “큭- 그동안 검술 실력이 많이 늘으셨군요, 폐하. 몇 달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칭찬 고맙군. 날 죽일 거라 했던가, 공작? 그렇다면 그대의 전력을 다 내보여야 할 것이다.” “훗, 자신감이 지나치시군요. 전 아직 제 본 실력의 1/3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의 검술로는 저의 상대가 되지 못할 겁니다.”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공작은 들고 있던 검에 더욱 강한 기운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콰앙! 하고 강한 폭발이 일어나며 검을 맞대고 있던 이사나의 몸이 저만치 날아갔다. 땅에 떨어지고도 한참이나 구른 그의 얼굴에서 주르륵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폐하!!” “젠장, 폐하!!” 놀란 기사들이 얼른 달려가려 했으나, 싸우는 상대가 있어 쉽게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분통에 터진 얼굴로 이리저리 달려드는 적들을 베었다. 순간 그들의 귀에 익숙한 소년의 목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꺄악! 믿을 수 없어! 믿을 수 없다고! 저런 짜가 정령검 따위에 내가 밀리다니!! 용사님, 괜찮으세요? 저런 녀석한테 지심 안 된다고요! 싸워요, 싸워! 이번엔 저도 전력을 다 할 테니까요!> “헉! 헉! 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런데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야, 이그니스? 가짜라니?” <흥! 저 검은 블래스터가 아니에요. 진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요. 녀석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뭐? 무슨…” 그러나 이사나는 다시금 달려드는 공작의 검 때문에 미처 진실을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콰앙!! 다시 한 번 울린 폭발음 속에서 그는 이를 악물고 검의 압력을 버텨냈다. 검기를 정면으로 받은 탓에 내상을 입었는지, 속이 있는 데로 뒤틀렸지만 후퇴할 수는 없었다. 그 모습을 공작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말이 많은 검이로군요. 허황된 정보를 주입시키는 것을 보아, 그다지 폐하의 편이 될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뭬야? 허황된 정보라니!! 아무리 검에 갇혔기로서니 지금 내 감각을 무시하는 거야? 무, 물론, 여기선 아무것도 안 보이고, 전에는 정령왕을 뵙고서도 눈치 채지 못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이번엔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 오히려 하지 않는 이만 못한 말이었다. 덕분에 공작의 수하들은 물론, 이사나의 기사들까지 이그니스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공작 또한 아직까진 환각 마법에 사로잡힌 상태였으므로,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크악!!” “케이!” 그 순간 친위기사중의 한사람인 케이가 어깨에 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것을 본 이사나는  얼른 달려가 다시금 그의 위에서 내려쳐지는 검을 막았다. 그러나 막 상대편 기사의 복부를 걷어차며 쓰러트렸을 때, 그의 뒤는 어느새 무방비가 되어 고스란히 공작의 공격권에 들어가 버린 상태였다. “이런, 폐하. 지금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하실 틈이 없을 텐데요. 폐하의 상대는 저입니다. 황족에 대한 예우로 최대한 일격으로 끝낼 테니 가시는 길이 고통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울리자 이사나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것으로 공작의 수하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이미 방어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검강이 황제의 눈앞에서 번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아아앙! “폐하!!!!!!!”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일어난 일이라 친위기사들은 모두 창백한 얼굴이 되어 소리쳤다.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던 탓에 폭발의 사정권이 매우 커, 근처에 있던 공작의 수하들까지 휩쓸려 부상을 당했다. 그런것을 정면으로 받은 이사나는 물론, 그 옆에 있던 케이 역시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주변을 가득 매운 연기가 걷혔을 땐, 공작의 얼굴은 일그러졌고, 반대로 페리스와 알렉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나타난 푸른 시큐엘 다섯 마리가 이사나와 정신을 잃은 케이의 옆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최후까지 숨겨두었던 황제의 본 능력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 한 편 더~ [정령왕 엘퀴네스] 8-5. 참아야 하는 것 (5 “폐하! 무사하셨군요!” “아아. 조금 위험했어. 역시 소드 마스터는 굉장하군.” 자신을 반경으로 한 몇 미터의 공간이 움푹 패인 것을 확인한 이사나는 식은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시큐엘의 소환은 마나의 소모가 심하기 때문에 되도록 부르지 않으려 했지만, 확실히 공작은 여유를 부리며 싸우기엔 녹록치 않은 상대였다. 그러나 한편으론 생각했던 것만큼 강하지 않다고 느껴졌다. 엘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공작은 블래스터로 인해 이미 그랜드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자였다. 때문에 한 두 마리면 되었을 시큐엘을 무리하게 다섯 마리까지 소환하여 방어했던 것이다. 그런 노력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막아낸 것 같아, 안도감을 넘어서 어쩐지 허무해지는 심정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이그니스가 한 말이 사실인걸까?’ 공작이 들고 있는 검이 블래스터가 아니라면 지금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정령검이라고 인정했던 모습을 보아, 그가 다른 검을 들고 나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설마 그 사이에 봉인이 풀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 혹시 엘이?’ 그의 계약자는 떠나기 직전까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도와주려 했다면, 몰래 정령의 봉인만 해제하고 떠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검에서 나오는 바람은 단순한 눈속임으로, 정령이 사라진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마법을 걸어둔 걸지도 몰랐다. ‘아아, 정말 못 말린다니까.’ 이렇게 하기 위해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했을 엘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사나는 현재의 상황도 잊은 채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이렇게 마음을 써준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즈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공작도 슬슬 검의 변화를 눈치 채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검강의 공격력이 현저히 떨어진 것을 보고나자 라피스가 걸어둔 환각마법의 효력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갑자기 등장한 시큐엘의 존재 때문에 미처 검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을 다섯이나! 페리스는 아직 실프가 역소환 된 충격으로 몸을 가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설마 황제 본인이 불러낸 정령이라는 말인가!’ 황제가 정령사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것도 흔치 않은 물의 상급 정령사! 그제서야 공작은 지금까지 묘하게 자신감 넘쳐보였던 황제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전력을 전부 드러내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사나 또한 숨겨둔 힘이 있었던 것이다. ‘명백한 실책이다. 대공 전하는 이러한 사실을 알고 계실까? 대체 언제부터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상급 정령을 저만큼 다루려면 많은 수련이 필요했을 것이다. 어쩌면 황제가 되기 전부터 이미 정령사였을 지도 모른다. 그 동안 우리는 감쪽같이 속아온 것인가!’ 친위기사 중 두 명이 다치긴 했지만, 그것은 공작의 수하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방금 전 일어난 검풍의 폭발로 대다수의 수하들이 휩쓸려 큰 부상을 입었기에 전력은 동일. 결국 모두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큭- 겨우 4명을 상대로 고전을 할 줄이야! 친위기사들의 숫자가 이보다 더 많았다면 역으로 당하는 것은 이쪽이었다는 소리인가! 검을 탓할 일이 아니다! 이것은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하지 못한 나의 잘못이 크다!’ 분하고 원통하긴 했지만 아직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다행히 검의 기능이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닌 듯, 바람과 폭풍을 일으키는 역할은 제대로 수행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시체가 되는 한이 있어도 황제의 목숨을 거두어갈 작정이었다. 공작이 매서운 표정으로 검을 고쳐 잡자 이사나와 친위기사들도 다시 몸을 긴장시켰다. 이윽고 그의 검에서는 거대한 바람의 폭발과 함께 푸른 검기가 한자나 뿜어져 나왔다. 우우우웅!! 검이 진동하기 시작하자 공작은 이사나를 향해 매섭게 달려들며 소리쳤다.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나와 함께 뼈를 묻을 것이오! 내 목숨을 담은 검을 받으시오!” “큭! 다들 나한테서 떨어져! 어서!!” “폐하!!” 휘몰아치는 사나운 기운은 다섯의 시큐엘로도 전부 막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기사들에게 다급히 외친 이사나는 자신이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마나를 이용하여 시큐엘에게 퍼부었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생과 사가 결정될 것이란 예감이 머릿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콰아아아악!! 시큐엘들은 사납게 으르렁 거리며 이사나를 향해 달려오는 공작에게 맞섰다. 그러나 한쪽 팔과 다리를 물어뜯기면서도 공작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두른 검은 마침내 보호 장벽을 이루던 한 마리의 시큐엘을 꿰뚫어 놓는 것에 성공했다. 그 한 번의 일격으로 이사나는 생전 처음 겪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고 정령을 유지하기 위해 부어주던 마나의 흐름을 놓쳐버렸다. “커헉!!” “폐하!!!” 주변을 보호하던 물의 기운이 사라져 순식간에 무방비가 된 이사나의 머리위로, 아직까지도 거침없는 기운을 담은 공작의 검이 내려떨어지고 있었다. 호각을 이룬 다는 생각에 아군을 더 요청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을까? 이 절대 절명의 위기를 지켜본 친위기사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달려가 몸으로 막는다 해도 시간이 따라줄 지 의문이었다. 그러자 그 순간 카리브디스 공작의 매서운 검을 막은 위압적인 힘이 나타났다. 그것은 누구도 놀랄 사이 없이 갑자기 나타나, 검기를 담고 있던 공작의 검날을 완벽하게 부수어 뜨렸다. 콱! 콰아아아앙!!! “크아아악!” 막 폭발하려던 힘이 막힌 반동에 의해 공작의 몸은 저만치 날아가 굴러 떨어졌다. 땅에 부딪쳤을 때 늑골이 부러졌는지 부들거리는 몸을 좀처럼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그 위험한 폭풍 안에 들어와 단번에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공작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고개만 들어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를 바라보았다. 거의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지 노려보기만 하는 건데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오감이 저리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그것은 인간이 낼 수 있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저 자는 누구지? 왜 나를 방해한 것이지?’ 온 몸이 뒤틀린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공작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남자는 잠시 동안 그를 주시했을 뿐, 다친 장난감에게는 미련 없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곧 낮은 혀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그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쯧쯧. 대체 이게 무슨 한심한 꼴이냐?” “…아?” 다가올 공격을 대비해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었던 이사나는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위험한 순간에 끼어들었음에도 몸에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며 혀를 차고 있었다. 한 번 보면 쉬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미형의 얼굴이었지만, 그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이다. ‘누, 누구지?’ 그러나 남자는 이사나가 궁금해 하든 말든, 자신이 이곳에 온 용건부터 꺼냈다. “엘은 어디 있지?” “…예?” “젠장! 이놈의 목걸이!! 마신이 아니면 컨트롤하기가 힘들다고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아들 내미 기운 하나 찾기가 이렇게 어렵다니…돌아가서 두고 보자. 뿌득.” 억지로 강탈한 주제에 그런 말을 해봤자 공감해줄 사람은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장소에 그러한 진실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이사나는 방금 그가 한 말에서 남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눈치 챌 수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서, 설마…에, 엘뤼엔님이십니까?” 이사나는 이미 그와 두 번의 안면이 있는 상태였지만, 그때마다 기억이 지워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기 때문에 지금의 만남이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엘뤼엔에게 그런 사정을 배려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다. “무슨 헛소리냐, 꼬마. 엘이 어디 있는 지나 말하라니까?” 처음 목걸이를 빼앗아 중간계로 내려온 것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때부터 엘퀴네스의 기운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그것이 카노스 본인에게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늦은 후회였던 셈이다. 그 뒤 운 좋게 이사나를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당연히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의 심경은 매우 좋지 못했다. 엘뤼엔의 험악한 눈빛에 찔끔한 이사나는 힐끔 공작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앗…저어, 이미 이곳을 떠나 수도로 갔습니다만.” “수~도? 그 시뻘건 도마뱀과 퍼런 망아지도?” “풋- 으음. 죄송합니다. 라피스님이라면 함께하셨지만, 시벨리우스님은 이곳에 남았습니다.” “결국 그 찐득이는 못 떼어놨다 이거군. 뭐, 어쩔 수 없지. 그런데 이곳에 남았다는 망아지는 왜 안 데리고 나온 거냐? 설마 저 녀석들을 너 혼자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냐?” 그의 말에 이사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상황을 짐작한 엘뤼엔은 다시 쯧쯧 혀를 차며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기운을 보아 소드 마스터, 또는 그 이상의 실력을 가진 존재다. 이 전투가 미리 예견 된 일이었다면 엘은 반드시 너에게 경고를 하고 떠났을 것이다. 생각은 좋았다만 다소 무리한 계획이었군. 하찮은 자존심이 너와 네 일행들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었구나.”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연히 미안해해야지. 여기서 네가 죽었다면 내 아들이 두고두고 슬퍼했을 테니까. 게다가 지금 벌이고 있는 모든 일도 전부 허사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 누군가를 책임지는 입장이란 그런 것이다. 남의 위에 군림하려면 좀 더 자숙하는 편이 좋아. 어떤 일이든 참아야 하는 게 있는 거다.” “…엘뤼엔님께서도 그리 하십니까?” 이사나의 질문에 엘뤼엔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꼬맹이가 자신을 향해 배짱 있게 되물어 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흐음, 이제 제법 강단이 커진 모양이군.’ 그는 피식 미소 지으며 뻔한 걸 묻는 다는 듯이 대꾸했다. “아니. 난 안 참는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이 있거든.” “……” 뻔뻔하리만치 당당한 대답이었지만 이사나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할 말을 잃고 굳어진 그를 잠깐 놀리듯이 바라본 엘뤼엔은 곧 성큼성큼 다가가 이사나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곧 새하얀 은빛의 광채가 터져 나와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있는 데로 뒤틀렸던 속이 편안해지자 이사나는 눈을 크게 뜨고 엘뤼엔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시큐엘이 역소환 되었는데도 기절하지 않은 것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다음부터 검기를 다루는 자들과 상대할 때는 무리하게 정령들을 소환하지 마라. 정령사의 가장 취약점은 방어가 뚫리면 그 타격을 몇 배로 되 돌려받게 된다는 것이지.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았지만 다음에도 이런 요행을 기대할 수는 없을 거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가보겠다. 수도라…그 도마뱀 녀석이라면 단번에 텔레포트 마법을 부렸을 테니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겠군. 젠장, 마왕 녀석과 마주치면 골치 아픈데.” 짧게 중얼거린 그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다 할 작별의 인사도 없이 그가 가버리자, 이사나를 비롯한 주변의 기사들은 모두 신기루라도 본 마냥 멍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한참의 시간 후 드디어 정신을 차린 이사나는 이미 부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는 공작과 나머지 살아있는 그의 수하들을 포박하도록 지시하곤, 나이아스를 시켜 후작의 성으로부터 원군을 요청하는 전언을 보냈다. 대충의 상황이 정리되자 알렉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그 분은 누구였습니까, 폐하? 제 귀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분명 형벌의 신의 이름과 같았던 걸로 들렸습니다만. 하하하, 설마 그, 그럴 리는 없겠지요?” 정령왕과 드래곤만으로도 친위기사들은 이미 한 평생에 누려야 할 축복을 전부 경험했다고 생각했다. 신의 강림은 절대 무리라고 생각하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대의 생각이 맞을걸.” “예에에에? 히익!! 농담, 농담이시죠, 폐하?!! 그가 정말로 엘뤼엔이라고요?” 경악한 알렉의 외침에 다른 친위기사는 물론, 카리브디스 공작과 그의 수하들의 얼굴 역시 딱딱하게 굳었다. 특히 공작이 받은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어렴풋이 엘뤼엔의 존재가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신일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 ‘엘뤼엔? 형벌의 신 엘뤼엔을 말하는 것인가? 신의 강림이라니!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는 말인가!!’ 황제가 쫓겨난 직후 3일에 한 번씩 내리는 비를 보며 백성들은 하나같이 이사나가 형벌의 신에게 빌어 일으킨 ‘기적’이라고 믿었다. 물론 대공파의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헛소문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직접 두 눈으로 엘뤼엔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체 황제는 어떤 사람이지? 내가 알고 있던 그가 맞기는 한 건가? 혹시 우리는 지금까지 그의 겉모습에 속아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아무 능력도 없이 보잘 것 없다고만 생각했던 어린 소년은 알고 보니 상급 정령을 다섯이나 다루는 정령사에 신의 은총을 받고 있었다. 이사나를 보는 공작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럽게 타들어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잠시 후 나이아스의 전언을 받은 후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공작은 마음속 깊이 패배를 선언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의 죽음뿐이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8-6. 폭풍전야 (1) 어림잡아 한 달은 걸릴 거라 생각한 여행은 황당하게도 단 1분 만에 해결을 보고 말았다. 라피스의 입에서 ‘텔레포트’라는 말이 뱉어지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수도 헤리카의 검문소 안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어이없다는 내 시선에 녀석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널 소환하기 전까지 여기서 유희 보냈다는 거 잊었어? 황성의 좌표쯤이야 훤히 꿰뚫고 있다는 말씀!” “…그럼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었잖아.” “그렇게 찌푸린 얼굴 하지 말라고. 저택 안에 갇혀서 전략이나 짜는 생활이 뭐가 즐겁단 말이야? 우리는 여기서 적당히 여유 부리다가, 시간이 되면 후발부대가 모인다는 에바스 평원으로 찾아가면 되는 거야. 벌써부터 골치 아파질 필요가 뭐가 있어?” “……솔직히 말해봐. 너 동족들 사이에서도 왕따지?” “뭬야?” 나는 얼굴을 찌푸리는 라피스를 무시하곤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마침 한시라도 빨리 황성으로 가야겠다고 다짐했기에 망정이지, 그것도 아니었다면 얼마나 허무한 심정이 들었을 것인가! 되도록 좋은 쪽으로 생각하자고 중얼거린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뭐, 좋아. 어차피 나도 공간이동을 할 생각이었으니까. 아까부터 나이아스의 부름이 더 강해졌어. 이 정도라면 기척만으로도 방향을 짚을 수 있겠어.” “흐응.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장소라 해도 이 세계에 퍼진 모든 정령들이 좌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가? 거참. 정령왕이란 편리하군.” “전부가 그런 건 아니야. 지금처럼 정령이 부를 때만 느낄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할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래? 나 혼자 금방 다녀올게.” 그러자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본 곳에는 붉은 눈동자를 귀엽게 깜빡거리고 있는 아스가 서 있었다. “…대부 혼자 안 돼. 나도 갈래.” “엥? 아스도?” “어차피 다른 할 일도 없는데 뿔뿔이 흩어질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냥 다 같이 가기로 하죠.” “괜찮겠어요, 데르온? 다른 마족의 눈에 발각될지도 모르는데.” “걱정 마십시오, 엘님. 어지간한 고위마족이 아니라면, 저의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까요. 자, 그렇죠, 주군? 덤비는 녀석들은 모두 어떻게 하라고요?” “때려잡는다!” “잘 하셨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앞으로도 그걸 절대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응!” “……” 한 나라의 새싹이 이렇게 망가지는 걸 지켜봐도 좋은 걸까? 나는 장래가 두렵다는 시선으로 아스를 바라본 뒤,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데르온을 향해 말했다. “교육방법이 조금 과격한 것 같은데요.” “하하핫! 무슨 말씀을! 마족들의 세계에선 인정이란 약에 쓸래도 없는 것입니다. 덤비면 무조건 싸울 뿐이죠! 무려 마계를 다스릴 왕이 그런 기본적인 의식도 없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혹시 세뇌에 의한 오래된 악습은 아니고? 말똥말똥 눈을 굴리며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를 보자니, 마족들의 본성이 처음부터 사악하다는 게 오히려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잠시 미심쩍은 표정으로 데르온을 바라본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왕은 너니까 무조건 부하가 시키는 데로 하지 않아도 돼.” “그건, 때려잡지 말라는 말이야?” “아니. 상황을 봐서 선택을 하라는 소리야. 어떤 일이든 나는 아스가 현명한 대처를 할 거라고 믿으니까.” “응!” 뒤에선 데르온이 ‘너무하다’는 둥, ‘날 그렇게 나쁜 놈으로 만들어야 겠냐’는 둥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 뒤 나와 일행들은 나이아스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단번에 공간이동을 할 수도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봐 걸어가는 방향으로 결정한 것이다. 코앞에 닥친 전란으로 수도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매우 흉흉했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의 대부분은 여자와 노약자였고, 기사들에게 끌려가는 청년들의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아마 이번 전쟁에 징병되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군인들은 거리를 다니는 사람은 물론, 집까지 직접 수색해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모든 인원을 끌어 모으고 있었다. 이대로 다니면 필시 우리까지 걸려들 우려가 있었기에 새로운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태였다. “엘이나 꼬맹이는 그렇다 쳐도, 나랑 데르온은 눈에 뜨이겠는걸. 별 수 없이 폴리모프 마법을 거는 수밖에 없나.” “잠깐 기다려! 나는 왜 빼는데?” “흐음. 설마 너…지금 네 모습이 남자로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내가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리자 라피스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남의 자존심을 건드린 주제에 대단히 막나가는 배짱이 아닌가! “그렇게 노려보지 마. 남자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여자 같다는 말은 아니니까. 실제로 너는 꽤나 중성틱해서 겉보기만으론 성별을 알아맞히기가 쉽지 않거든. 일부러 마법을 걸 필요 없이 편하고 좋지 뭘 그래? “엑? 잠깐만요, 라피스. 서, 설마 그 폴리모프 마법이란 게…성별을 바꾸는 겁니까?” “당연한 소리 아닌가? 그럼 그 덩치로 얼굴만 바꾼다고 될 줄 알았어? 골격과 체격 전부 바꾸려면 여자로 폴리모프 하는 게 확실하지.” “!!”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건 데르온만이 아니었다.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라피스와 데르온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꽤 예쁘장한 타입이긴 했지만,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들에게 여장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이…여자가 된다고?? “푸…푸하하하하!!!” “우, 웃지 마십시오, 엘님! 농담이 아닙니다! 다, 다른 방법은 전혀 없는 겁니까? 가령 투명 마법을 건다거나!” “왜 그래야 하지? 어차피 앞으로도 당분간은 수도에서 머물러야 할 텐데, 그동안 계속 투명인간으로 있을 셈이야? 식당이나 여관을 잡을 땐 어떻게 하고?” “…으음.” 논리 정연한 라피스의 말에 데르온은 반박한 말을 찾지 못하고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결국 별 수 없이 여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웃느라고 시뻘개진 뺨을 감싸며 라피스를 향해 물었다. “넌 별로 거부감이 없어 보이네? 여장 하는 거 싫지 않아?” “글쎄. 오랜만이라 그다지 내키진 않지만 귀찮아지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오랜만 이라니…그럼 전에도 한 적이 있다는 소리야?” 너 그런 녀석이었냐?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라피스는 아무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헤츨링 시절은 대부분 여자모습으로 지냈지. 워낙 따라붙는 놈들이 많아서 금방 그만 뒀지만. 내가 좀 아름다워야 말이지.” “……허걱, 변태?” “뭔 소리야. 드래곤은 양성이라고. 아아, 어쩌면 엘뤼엔이 나를 못 알아본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르겠군. 이 모습으로 소환을 시도한 적은 없었으니.” 그는 멍해진 나를 내버려 둔 채 혼자 납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데르온이 그에 따른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두 개의 성별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마음 내키는 대로 성별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죠. 워낙 종족의 숫자가 적은데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내린 신의 혜택이라고 들었습니다. 저처럼 ‘여자로 폴리모프’하는 것과는 경우가 다르지요.” “헉. 정말이에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들어요.” “뭐, 굳이 말해줄 필요 없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취향에 따라 한 성별만 고집하는 드래곤도 많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실 겁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해도…” 복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나는 힐끔 라피스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까지 남자로 알고 있던 사람이 알고 보니 여자였다 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런 심정일까? 그러자 녀석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렇게 신기하게 볼 것 없어. 그냥 성별에 대한 개념이 없을 뿐이지, 다른 것은 다 똑같으니까. 오랜 삶을 살며 유희하기에 좀 더 편한 몸으로 만들어 졌을 뿐이야. 다만 정령왕과는 달리 후손을 남길 수 있다 일 뿐이지.” “그, 그렇군. 근데 어째서 말이 이렇게 전개 된 거야? 중요한건 지금 너랑 데르온이 여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잖아.” “그러게 누가 변태라고 하래? 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고. 굳이 변태를 정해야 한다면 오히려 양성도 아닌 주제에 여자가 되어야 하는 데르온 쪽이지.” “으헉! 제, 제가 원해서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아~” 순식간에 궁지에 몰린 데르온을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스의 말은 그를 처참한 암흑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부하…변태였어?” “헉!! 주, 주군! 그, 그런 게 아니라!” “나, 변태 싫어. 떨어져, 바보.” “커어억!” 한 마족을 순식간에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으면서도 아스의 표정은 지극히 샤방하기만 했다. 기겁한 데르온이 오해라며 몇 번이고 설명했으나 한번 의심스럽게 변한 눈빛은 좀처럼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아스를 타일렀다. “그러면 안 돼, 아스. 데르온은 아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 “아니야?” “응, 우리가 그냥 장난친 거야. 그러니까 다시 사이좋게 지내야지?” “대부가 그렇게 하라고 하면 할게.” “에구, 착한 녀석.” “크흑, 너무 하십니다, 주구우운~~” 그 뒤 라피스는 지칠 대로 지쳐 추욱 늘어진 데르온에게 단숨에 폴리모프의 마법을 걸었다. 파아앗! 그를 감싸던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예전보다 훨씬 가냘픈 느낌이 된 데르온의 모습이 드러났다. 검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동자를 비롯한 전체적인 외모는 남자일 때와 별 다를 게 없었지만, 단지 키와 골격만 바뀐 것뿐인데도 그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선과 가는 몸이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긴다고나 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와아! 정말 예쁜데요, 데르온! 누가 봐도 여자라고 생각하겠어요!” “그, 그렇습니까? 으음. 뭔가 좀 불편한데요. 밑도 허전하고, 가슴도…걸을 때마다 흔들리는 건 좀…” “스톱! 알겠으니까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목소리도 조금 바뀐 것 같은데요? 머리는 좀 더 길어야 하지 않을까요?” “긴 머리는 관리가 불편해서 영…설마 드레스까지 입으라고 하시진 않겠죠?” “하하! 활동하기 불편할 텐데 치마는 곤란하죠. 한국처럼 짧은 치마를 입어도 되는 나라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 옷은 좀 커 보이니 적당히 맞는 옷을 사야겠네요.” “그럴 필요 없어. 옷이라면 몇 벌 가지고 있는 게 있으니까.” “!!” 갑자기 들려온 소프라노의 목소리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8등신의 늘씬한 미녀로 변한 라피스가 몇 개의 옷가지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고양이처럼 살짝 올라간 눈매와 새빨간 입술, 하나로 틀어 올린 붉은 머리카락이 ‘남자’였던 과거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너무 잘 어울려서 오히려 무서울 정도다. 굳어진 내 표정을 본 녀석은 키득거리며 마치 놀리듯 유혹적인 미소를 그려보였다. “정말 라피스 맞아?” “왜? 너무 아름다워서 넋이 나갔냐?” “…아, 아니. 굉장히 의외라서. 왠지 ‘누님’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인걸.” “흐~음. 그것도 나쁘지 않지. 단, 너는 ‘언니’라고 하는 쪽이 더 어울리지만 말이야.” “뭐, 뭐야?” 강지훈이었던 시절부터 나는 원래 여자들은 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말자는 주의였다. 그 끝 모를 수다부터 시작해서 한번 독한 마음을 품으면 끝까지 파고드는 집요함 까지! 도무지 소심한 내 성격으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이프리트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인지 여자로 변한 라피스에게 이전처럼 편하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려 은근슬쩍 현재의 상황을 모면하려고 노력했다. “아, 아무튼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자고. 아무래도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으니까.” “있다니, 뭐가? 나이아스가 복수를 원한다는 그 녀석?” “아니, 그 반대쪽.” “반대쪽…이라면, 어이, 너 설마…”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라피스를 무시하며 나는 척척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간혹 라피스와 데르온의 미모에 넋이 나간 남자들이 걸음을 멈추고 멍하게 쳐다보긴 했지만, 용기를 내어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간신히 들어선 곳은 황성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어두운 숲 안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커다란 돌덩이 틈에 가리워진 작은 동굴하나를 발견하고 망설임 없이 들어갔다. 그러나 나와, 나를 뒤따라오던 일행은 곧 코를 움켜쥐고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쓰레기 산에서도 풍기지 않을 것 같은 지독한 냄새가 온통 동굴 안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악취의 원인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헉! 이, 이게 무슨!” “!!” “…으음.” 동굴 안을 가득 매우고 있는 것은 말라버린 뼈와 온통 부패한 어린아이의 시체들이었다. 어림잡아도 몇 백구는 되어 보임직한 그것은 질서 없이 뒤섞여 온갖 벌레와 들쥐들이 들끓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역겨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그 와중에도 침착하게 원하던 것을 발견하고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찾았다.” 내가 바라본 것은 수많은 시체 중에서도 비교적 부패의 정도가 덜한 어린 소년이었다. 딱딱하게 굳은 육체위에 걸려 진 낯익은 목걸이는, 몇 달 전 나와 페리스가 어떤 여인의 아들에게 걸어줬던 것이었다. 내가 직접 그 안에 나이아스를 봉인했기 때문에 못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레오’. 훗날 은혜를 갚으러 온다던 소년은 지금 눈앞에서 굳은 시체가 되어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8-7. 폭풍전야 (2)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심정이라면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나이아스와 감정을 공유함으로서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모습이 이렇게 처참한 상태일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다가가 천천히 아이의 몸을 더듬어 보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은 살아있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짙은 죽음의 기운을 드리우고 있었다. 채 말라붙지 못한 끈적끈적한 피가 가슴부위를 중심으로 넓게 번져 있었다. 나를 따라 아이의 시체를 확인하던 라피스는 곧 찌푸린 표정으로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심장이 없군. 아무래도 여기 있는 시체들은 모두 제물로 쓰여 졌던 모양이야.” “…제물?” “기억 안나? 전에 이곳 대공인지 섭정왕인지가 아이들을 잡아다가 제사를 지낸다고 했었잖아. 그 많은 시체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했더니, 이런 곳에 쌓아두고 있었군. 재수 없는 인간 같으니.” “!!” 순간 덜컥-숨이 멈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악신의 탄생을 위해 희생되는 아이들이라니! 알리사 역시 그때 우리가 구하지 못했다면 이러한 운명을 걸었을 것이다. 아무렇게나 쌓아올려진 아이들은 대부분 공포로 눈을 부릅뜨고 있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 하나만으로 마치 지옥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섭정왕은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걸까? “아, 아참! 아스를 어서 데리고 나가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족들에겐 이런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으니까요. 이것으로 대공이 악신의 부활을 돕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해 졌군요. 지금의 마왕 또한 이 일에서 피해갈 수 없을 겁니다. 용케 이런 장소를 발견 하셨군요, 엘님.” 감탄했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에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부터 이런 것을 기대하고 왔던 것은 아니다. 그저 죽은 아이의 시체라도 찾아다 양지 받은 곳에 묻어줄 생각이었다. 이 나라에서 가난한 평민이 제대로 된 무덤하나를 마련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런데…이런 죽음을 맞이했을 줄이야.’ 나는 착잡한 얼굴로 죽은 아이가 걸고 있는 목걸이를 건드렸다. 그러자 안에 있던 자연계의 나이아스가 둥실 떠올라 내 손가락을 부둥켜안았다. 슬픔을 가득 드리우고 있는 얼굴엔 맑은 눈물이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수많은 시체 중에서도 찾고 있던 아이를 금방 발견한 것은, 정령과 계약했던 흔적이 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계약자가 죽었는데도 아직 떠나지 않은 나이아스 덕분에 그 기운이 더욱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았다. -제 친구가 죽었어요, 왕이시여…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아이가 너한테 도움을 청하진 않았니? -도망치라고만 했어요. 레오는 너무 어려서 제가 정령인 줄도 몰랐는걸요. 그래서 저는 바라 볼 수밖에 없었어요. 흐윽, 흑… 소환된 정령은 계약자가 부탁하는 일 외에는 하지 못한다. 그것은 정령왕을 제외한 모든 4대 정령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이었다. 그러나 만약 가능했다 하더라도, 하급 정령 하나의 힘만으론 아이를 구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서럽게 울고 있는 나이아스를 바라보았다. -아이의 어머니는 어디에 있니? 아들이 이렇게 되었다는 걸 알면… -그녀는 이곳에 오기 얼마 전에 귀족의 마차에 치어 죽었어요. 그때의 충격으로 왕께서 걸어두신 제 봉인이 풀리게 된 것이랍니다. 레오에겐 오직 저밖에 없었어요. “……” 우스운 일이었지만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사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죽은 아이와는 처한 상황도, 지위도, 능력도 현저히 달랐지만 녀석에게도 마음을 터놓을 친구는 나 하나밖에 없었다. 사방이 아군과 적군으로밖에 분류되지 않았던 세계에서 내 존재는 그가 처음으로 안도할 수 있는 공간이자 도피처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지 나는 지금 나이아스가 처한 상황이 곧 다가올 나와 이사나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 같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자 옆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표정이 왜 그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나…방금 안 좋은 생각을 했어, 라피스. 자꾸만 불길한 기분이 들어.” “흐응. 네가 걱정할 일이야 뻔하지. 이사나 녀석 때문이냐? 하긴, 이제부터 싸워야 할 대공이란 놈의 정체를 알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만.” “괜찮을까? 내가 돌아갈 때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이제 다치면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는데 큰 부상이라도 입으면 어떡하지?” “나~참. 그런 걸 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다. 후작이 알아서 치료신관이라도 초빙하겠지. 귀하신 몸이 다치도록 내버려 두겠냐? 가만 보면 네가 더 나보다 인간들을 바보취급 할 때가 있다니까? 아무래도 난생처음 시체들을 봐서 불안감이 증폭한 모양인데, 정신 차려. 앞으로 시작될 전쟁은 이것보다 훨씬 더 잔인할 테니까.” “!!” 라피스는 냉정한 말로 내가 현실을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아이의 시체를 노려본 나는 아직도 울먹이고 있는 나이아스를 향해 단호하게 물었다. -내가 너의 계약자를 해친 사람에게 복수를 해주길 원하니? -원합니다, 왕이여! 그 남자를 철저한 파멸로 이끌어 주세요! 감히 정령의 친구를 건드린 죗값을 치르게 만들어 주세요! 기다렸다는 듯 나이아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소리쳤다. 이제까지 보아왔던 밝고 명랑한 얼굴과는 전혀 다른, 증오를 가득 머금은 사나운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다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너의 바람은 나와 내 계약자가 이루어 줄 거야, 나이아스. 너의 적은 나의 적이며, 너의 친구는 나의 친구. 네가 느끼는 슬픔과 증오 또한 나의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 너의 왕이 어떤 식으로 친구의 원수를 갚는지 지켜보도록 해. 녀석은 절대로 편한 죽음을 맞지 못할 거야. -왕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나이아스는 곧 내 품을 떠나 동굴 안을 돌아다니던 다른 나이아스의 무리와 합류했다. 내가 반드시 복수를 해 줄 것이란 믿음 때문인지, 동료들과 어울리는 그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밝고 명랑해져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산처럼 쌓인 아이들의 시체에 시선을 돌렸다. “라피스. 이 아이들… 화장 시킬 수 있을까?” “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왜?” “이런 식으로 썩어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 뼈라도 거둬서 묻어주고 싶어.” “흠. 좋아, 그럼 일단 동굴 밖으로 나가지. 더 이상 악취를 견디는 것도 힘드니까.” 밖으로 나온 뒤 라피스는 파이어 볼의 마법을 시전 하여 동굴 안에 여러 개의 커다란 불덩이를 날렸다. 그러자 곧 화르르륵! 하는 강렬한 소리와 함께 뜨거운 열기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람 속에 섞여드는 매캐한 검은 연기를 보는 내 마음은 무거운 돌덩이라도 매단 것 마냥 한없이 늘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밖으로 나오기 전 레오의 몸에서 떼어낸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대로 편하게 잠들길. 지금 받은 고난만큼 다음 생에서는 반드시 행복해 질 거야. 그때는 다시 여기서 태어나 줄래? 지켜주지 못해서…정말 미안해.” 그리고 대공은 오늘과 같은 일을 저지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마치 용암처럼 붉게 타오르는 동굴 안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일을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나~ 이런 곳에 웬 마족꼬맹이람?” 죽은 아이들의 화장을 마치고 돌아선 우리를 반긴 것은, 아직 서늘한 계절과 어울리지 않게 어깨와 가슴을 거의 노출시킨 옷차림을 한 새카만 머리카락의 여자였다. 우연히 나타나기에는 너무 완벽한 타이밍인데다,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살짝 굳어졌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굳어있던 데르온의 입에서 신음처럼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세르피스…” “!!” 알고 보니 언젠가 데르온이 나를 찾아왔을 때 함께 있었던 마족 여자가 아닌가! 데르온과 같은 마계 4대 공작의 하나로, 암흑의 마녀인지 뭔지 당시 같이 있던 일행들이 놀라워했던 것이 기억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르피스는 여자로 변한 데르온과 라피스는 알아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오직 무표정한 얼굴의 아스에게 향해 있었다. “갑자기 마족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져서 찾아왔더니 이런 광경을 목격할 줄이야. 거참 이상하네. 분명 이번 대의 마족의 알은 전부 파괴 되서 부화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이야. 요 깜찍한 꼬맹이는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어머, 그러고 보니 마족 여자도 있었잖아? 설마 당신이 훔쳤던 거야? 호호호호!” 정확히는 마신이 몰래 빼돌린 거지만, 그런 것 까지 일일이 설명해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는 작은 소리로 얼굴이 경직된 데르온을 향해 물었다. “저 여자는 누구 편이에요? 마왕?” “끄응. 정확하게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 붙을 일은 없을 겁니다. 마왕의 자리에 욕심이 많은 녀석이니까요.” “마신의 명령이라고 해도요?” “그렇다 해도 따르지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세르피스는 루카르엠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으니까요. 그의 정체가 마신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돌아설게 틀림없습니다.” 곤란한 얼굴로 대답하면서도 그는 힐끔힐끔 세르피스의 눈치를 살폈다. 행여나 그녀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킬까봐 조바심이 나는 듯 했다. 사실 세르피스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금방 알아볼 만큼, 남자일 때의 모습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마왕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은 둘째 치고, 여장을 했다는 사실 부터 숨기고 싶을 것이다. 아스는 그런 데르온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부하 왜 그래? 저 여자 누구?” “아아, 아스님. 으음, 그러니까…암흑의 마녀 세르피스라고 합니다.” “세르피스? 나랑 같은 냄새 나. 다른 부하?” “일단은 그렇습니다. 그 사실을 별로 인정하지는 않겠지만요.” “…흐음.” 꼬맹이 주제에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굴리는 것이 제법 귀여웠지만, 지금은 마냥 한가하게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둘의 대화를 들은 세르피스는 눈 꼬리를 살짝 치켜뜨며 의아한 어조로 물었다. “부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니, 꼬맹아? 설마 네가 왕이 될 거란 말이니?” “이미 왕이야.” “호호! 기가 막히구나! 저 여자가 그렇게 말했니? 네가 마계를 다스리는 왕이라고? 어머~ 이를 어째. 그럼 난 여기서 반드시 너를 죽여야겠구나! 그래야 그 자리를 뺏을 수 있을 테니까. 안 그래?” “…난 안 죽어. 너, 건방져. 마음에 안 들어.” 찌푸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는 아스의 눈동자엔 어느새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던 낯선 표정이라 우리들은(심지어 라피스마저) 하나같이 놀란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르피스는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눈빛을 더욱 반짝반짝 빛냈을 뿐이었다. 아스를 내려다보는 얼굴엔 비웃음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어머? 그래서 네가 어쩔 건데? 아직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되어 보이는 네가 설마 날 어쩔 수 있다는 말이니? 아니면 거기 계시는 물의 엘퀴네스님께 가서 징징거리려고? 호호! 그건 확실히 어린애밖에 할 수 없는 일이지. 멋진 생각이로구나!” “대부한테 부탁 안 해. 나 혼자서 할 수 있어.” “자신감이 넘치는 꼬마네. 그럼 어디 실력한번 테스트 해볼까?” 말을 마친 세르피스는 순식간에 집채만한 크기의 동물 세 마리를 소환했다. 전체적인 모습은 표범과 비슷했으나, 동공이 없는 눈동자가 세 개나 달려 있었고  입에 사람의 팔뚝만한 거대한 송곳니가 뻗어 나온 형상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데르온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베히모스!!” “그, 그게 뭔데요?” “마계에서도 가장 악명높은 고위마물입니다! 어린 마족은커녕, 어지간한 성인 마족도 한 마리를 감당하기 힘든 녀석이죠! 아스님이 상대 하시기엔 너무 벅찹니다!” “헉! 아스! 이쪽으로 와! 어서!” 그러나 내 외침은 한발 늦은 셈이 되고 말았다. 이미 베히모스 세 마리가 일제히 아스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나와 데르온은 얼른 아이를 끌어안으려 했으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혀 필요 없는 시도였다. 아스의 손에서 갑자기 눈부신 은빛의 광채가 쏟아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한자나 늘어져 자신을 향해 이빨을 드리우는 베히모스들의 머리를 한꺼번에 양단해 버렸던 것이다. 슈우우욱! 콰앙! 콰아앙!! 거침없는 폭격이 울리고 난 자리엔 몸만 남은 베히모스의 시체가 바닥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그 장소에 있던 누구도 한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무슨…” “하…하하하?” 당혹하는 사람들 속에서도 아스의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다. 아이는 경악하고 있는 세르피스를 똑바로 노려보며 오른손에서 마치 검처럼 길게 뻗어있는 은색의 광채를 겨누었다. “다음은 네 차례야.” [정령왕 엘퀴네스] 8-8. 폭풍전야 (3) 사람들은 흔히 아이답지 않게 영특하고 재주가 뛰어난 아이를 일컬어 ‘신동’이라고 부르며 신기해하는 경향이 있다. 외국에는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4살 박이가 원어민 수준의 외국어를 구사한다던가, 절대음감 같은, 어른들도 쉽게 할 수 없는 영역에서 돋보일 때가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스는 ‘전투’부분에 있어서 타고난 천재성을 지닌 게 틀림없었다. 우리는 한동안 가냘픈 외모의 작은 소년이 저보다 훨씬 큰 여자를 간단하게 유린하는 현장을 멍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쾅! 콰아앙! 차아앙!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어 올랐지만, 일그러지는 세르피스와 달리 아스는 처음과 전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힘에서부터 아스에게 밀리고 있었던 것이다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옆에서 입을 벌리고 서있던 데르온을 향해 물었다. “마족의 아이는 성년이 되기까진 전투능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 그럴걸요?” “그럼 지금 저 모습은 뭐라고 설명할 건데요?” “그, 글쎄요. 하하하! 저, 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보통 마족도 아닌, 마계 4대 공작의 칭호를 달고 있는 존재를 저렇게 쉽게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감탄을 넘어서 경악을 이끌어낼 수준이었다. 아무리 마신이 선택한 알이라고 해도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데르온을 노려본 나는 아까부터 조용한 라피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아니 그녀는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아스와 세르피스의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내가 자신을 쳐다보는 걸 느꼈는지 생긋 웃으며 재미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상당히 곤란한 꼬맹이인걸.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점은 칭찬받아 마땅하지만.” “그게 무슨 뜻이야?” “아무래도 녀석을 깨우려고 주입한 내 피가 능력의 증폭제가 돼버린 모양이야. 즉, 육체는 어린 상태에서 힘의 각성만 앞당긴 거지.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피를 많이 흡수한 거였구만? 어째 순순히 은인이라고 부를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그럼 아스는 결국 너 때문에 저렇게 되었단 소리?” “뭐, 의도한건 아니지만 그런 것 같네. 아아, 역시 나는 대단하다니까. 이 몸의 타고난 천재성은 무시할 수 없지. 후후.” “네에. 대단하십니다, 누님.” 평소에는 그렇게 거스르게만 느껴지던 잘난 척도, 여자버전(?)으로 보고나니 왠지 쉽게 인정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건성이나마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를 본 라피스는 아까보다 좀 더 짙은 미소를 지었다. “의왼데. 혹시 여자한텐 본능적으로 약해지는 타입?” “아니, 귀찮은 건 피하자는 주의. 비웃어도 할 말 없지만, 난 지금까지 여자들하고는 친하게 지낸 일이 별로 없어서 말이야. 남자들 대할 때 보다 많이 불편해.” “흐음. 그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까?” “됐어. 네 말마따나 당분간 계속 수도에 있을 텐데 불편할 것 아니야.” “글쎄, 그것도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의 경험상 아마 마을에 나가면 또 다른 시비에 걸릴 수도 있는데 말이지.” 마지막 말은 거의 혼자 중얼거리는 식이라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본 나에게 녀석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찝찝했던 것도 잠시, 나는 다시금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아스와 세르피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힘을 각성했다는 라피스의 말처럼 아스는 이미 상대방을 전투 불능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재빠르게 움직일 때마다 바람에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이 마치 검은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 같았다. 휘익! 콰앙! 촤아악! “크, 크윽! 무슨 이런 꼬마가!!” 아스의 손이 스칠 때마다 세르피스의 몸 여기저기엔 새빨간 생채기가 자리 잡았다. 이 쯤 되면 아무리 바보라 해도 아이가 자신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이었다.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르피스에 비해, 얼굴에 그 흔한 땀방울 하나 흘리지 않고 있는 아스의 모습만 보더라도 그 차이는 명백했다. 그 순간, 검을 맞받아치던 아스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자신이 불리하다는 것을 느낀 세르피스가 후퇴하여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아스는 놓칠 수 없다는 듯 은글슬쩍 뒤로 몸을 빼내는 세르피스에게 수 십 개의 빛 덩어리를 날려 보냈다. 콰광! 콰가가가가강!!! 아스의 손에서 날아간 빛들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얼음화살이 되어 인정사정없이 세르피스의 몸 여기저기에 파고들었다. “아아아악!!” 그 충격으로 그녀는 막 시전 하려던 텔레포트의 마법을 놓치고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 온 몸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바둥거리던 그녀는 곧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아스를 발견하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꺄악! 내가 잘못했어! 제발 죽이지 말아줘!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그러나 세르피스는 그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느새 창대처럼 길게 늘어난 빛줄기를 손에 쥔 아스가 단번에 그녀의 심장을 꿰뚫어버렸던 것이다! 푸욱! 살이 뚫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울리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그런 내 귓가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아스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어. 너 같은 부하는 필요 없어.” “!!” 과연 괜히 마족이 아니라는 것인지, 아스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부분을 제거한 것일 뿐. 그들 세계에서는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지켜보는 내 입장에선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리기만 했던 꼬마가 갑자기 훌쩍 커버린 것 같았다. 세르피스를 꿰뚫은 창을 소멸시킨 아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나와 시선을 마주치곤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야 겨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나에게 아스는 머뭇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대부, 미안. 싸워버렸어.” “으, 으음. 다친 곳은 없니?” “없어. 근데…나…대부 곤란하게 했어?” 불안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묻는 아이에게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조금 놀라긴 했지만, 이런 것이 마족이 살아남는 방법이라면 나는 아스를 말릴 권한이 없었다. 이 아이는 언젠가 나를 떠나 마계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내가 가진 도덕과 정의 때문에 마계에서의 생활이 힘들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사이 데르온은 죽은 세르피스의 시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때 같은 동료로서 활동했던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심정은 어떤 것일까.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가 슬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얼굴을 든 그는 온통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스를 향해 소리쳤다. “세상에! 대단하십니다, 주군! 그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를 이렇게 간단히 처치하시다니!! 과연 마신께서 선택한 우리의 왕다우십니다!!” “…쿨럭! 데, 데르온. 괜찮은 거예요?” “예? 제가 뭘요?” “저기…그래도 한때 동료였던 마족이잖아요?” “아아, 뭐, 어차피 제가 나서서라도 제거해야 할 생각이었는걸요. 앞으로 방해가 됐음 되었지, 절대로 도움이 될 녀석은 아닙니다. 그리고 어차피 왕께 대항한 자가 죽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그런 존재에게는 동정을 보낼 가치도 없지요.” 데르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거리며 설명했다. 힘 중심의 마족들은 전투에서 약한 쪽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다, 이미 주군을 정해버린 그에게는 다른 마족보단 아스의 입장이 최우선이었던 것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온통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스가 4대 공작 급의 마족을 손쉽게 처치했다는 사실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한 것 같았다. ‘하긴. 내 주위에 언제부터 제대로 된 녀석들이 있었다고. 에휴, 내가 말을 말자, 말을.’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쉰 뒤 이번에도 라피스에게 시체들을 화장하도록 부탁했다. 수도로 온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몇 년은 흐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나저나 이사나는 무사히 이프리트와 만났으려나. 별 일 없이 잘 해결 되었으면 좋으련만.’ 지금쯤이면 상단으로 출발했을 이사나를 떠올리며, 나는 마음 속 깊이 그에게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랬다. 이런 내 기도를 신이 들어주었는지는 오직 하늘만이 알 일이었다. “꺄아아아악! 이 얼마 만이어요! 보고 싶었어요, 이프리…헉! 아, 알았어요! 한마디도 하지 않을게요! 정말 얌전히 있을게요” “흐음, 틀림없는 ‘파이어 버스터’로군요.” 이사나에게서 받아든 검신을 쓸어 보이며(정확히는 기운을 불어넣어 협박한 거지만)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는 클리프 상단의 총수이며 예언자로 알려진 이카나였다. 탐스럽게 곱슬 거리는 붉은 색의 머리카락과 루비 같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는 한낮 상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찔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이사나를 따라 상단을 방문한 일행들은 이카나를 보며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모인 자리에서 그녀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이사나 한사람밖에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는 이카나를 깨닫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죄송합니다. 저 혼자 방문하려고 했습니다만, 오는 길에 약간 사고가 있어서 굳이 일행들이 따라오겠다고…” 이사나의 호출을 받고 뒤늦게 기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카웰 후작은, 카리브디스 공작을 저택으로 연행한 이후 이사나가 가는 상단까지 함께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혹시나 또 다른 적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에도 자신의 입장만 강요할 수 없었던 이사나는 울며 겨자 먹기의 심정으로 후작과 다른 친위기사들의 동행을 허락했다. 사실 허락하지 않았다면 억지로라도 따라붙을 기색이었기에 그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대강의 사정을 들은 이카나, 아니 이프리트는 억지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대답했다. “호호!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폐하. 반드시 혼자서 방문하셔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보다…전에 뵈었을 때와 외모가 많이 달라지셨군요. 지금이 본래의 모습이시겠지요?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몰라볼 뻔 했습니다.” “아,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간의 사정은 저 또한 짐작하는 바니까요. 저는 폐하께서 저와의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 주신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답니다. 이것으로 우리 클리프 상단 또한 향후 나아갈 방향을 확실히 결정할 수 있겠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무어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후작과 기사들은 이카나를 대하는 이사나의 태도가 지나치게 저자세인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아무리 도움을 요청하는 입장이라곤 하지만, 상인은 황제의 신분에서 바라보자면 감히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하찮은 직업이다. 그런 존재에게 굳이 존대말까지 사용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과한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후작은, 이카나의 미모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내심 황제의 사연을 짐작했다. 어른스럽긴 해도 한창 혈기 왕성한 때인 이사나가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반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허무맹랑한 착각이었지만 후작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사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한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가 어찌 어울릴 여자가 없어 한낮 상인의 여자에게 마음을 허락한단 말인가! 이런 류의 소문이라도 돌았다간 귀족들 사이에서 폐하의 이미지가 크게 추락할 것이 틀림없다. 이거 아무래도 나중에 따로 충언을 드려야겠군.’ 만약 이 순간 이프리트가 그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당장 일어나서 목을 조르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웰처럼 혜안이 없는 그가 후작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을 리 만무. 이프리트는 아무것도 모른 채 이사나를 인정함과 동시에 그에게 클리프 상단의 원조(援助)를 허락했다. 지금까지의 고생이 드디어 보답을 받는 순간이었다. 이사나는 당장이라도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며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프리…아, 아니, 이카나님!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 저에게 상단의 지원을 허락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처음 정한 약속이었으니까요. 황제께서 제 요구를 들어주셨으니, 저 또한 마땅히 제가 한 말을 지키는 것뿐입니다. 다만…” “다만?” 스윽! 말 끝을 흐린 이프리트가 내민 것은 방금 전 이사나가 그에게 넘긴 파이어 버스터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사나에게 이프리트는 상큼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시 가져가 주십사 합니다.” “…네?” “어차피 이미 주인을 정한 검입니다. 저는 단지 황제폐하의 의지를 읽어보려던 것 뿐, 이것이 정말 필요해서 요구한 것이 아니었으니 폐하께서 도로 가져가 주십시오.” “헉! 그, 그런 말씀은 없으셨잖습니까?” “어머~ 그렇다고 제가 가지겠다는 말도 한적 없는 걸요. 이 검도 모처럼 정한 주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을 겁니다. 사실 한낮 ‘상인 일 뿐인’ 제가 성검을 가져다 무엇 하겠습니까? 이런 것은 팔고 싶어도 팔수가 없을 겁니다.” 언뜻 들으면 고귀한 성검을 어찌 팔수가 있냐는 말로 들렸지만, 그 안에 감춰둔 뜻은 정반대였다. 그녀(?)의 두 눈에서는 ‘마검’ 때문에 상단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싶지 않다는 강력한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이사나의 얼굴을 모른 척 한 이프리트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파이어 버스터의 의사까지 확인해 보였다. “그렇죠, 성검이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이대로 저와 함께 이 낯선 공간에서 ‘영원히’ 갇혀 지내고 싶나요? 아니면…” “;저야 물론 용사님과 함께 하고 싶죠! 그런 당연한 말씀을! 오호호호! 자아! 용사님 우리 어서 드래곤을 물리치러 가자고요! 그 다음은 마신인거 아시죠? 이분 누구신지 정말 센스가 탁월하시네! 어떻게 내 마음을 이렇게 잘 알아주실까? 호호호호호! 호호호” “……” 결국 이사나는 눈물을 삼키며 다시 파이어 버스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상단의 인정을 받은 것은 물론 성검까지 가지게 된 것을 매우 기뻐했으나, 진실은 언제고 고독한 법. 그는 이것으로 앞으로 남은 수명중 10년의 시간을 미리 반납한 셈 치자고 생각했다. [정령왕 엘퀴네스] 8-9. 폭풍전야 (4) 당장 처형당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공작은 단순히 저택으로 연행되었을 뿐 어떠한 과격한 조치도 당하지 않았다. 함께 끌려왔던 어둠의 기사들은 모두 지하 감옥에 갇혔으나, 공작 본인에겐 검과 무기로 사용될 만한 것들을 압수 했을 뿐, 오히려 넓은 독실과 따뜻한 식사까지 제공 되었던 것이다. 물론 감시역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에게 상해를 입힌 데다 포로로 끌려온 입장치고 그는 꽤나 과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공작은 굳은 표정으로 자신 앞에 식사를 내려놓는 엘프를 바라보았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감시역’이라며 찾아온 그는, 특이하게도 보통의 엘프완 달리 푸른빛이 도는 피부에 새하얀 은발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말로만 듣던 ‘블루 엘프’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는 한동안 멍한 얼굴을 했다. 인간들을 피해 숨어 버린 지 몇 백 년이나 지난 종족을, 설마 이런 식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는 그의 표정을 다른 식으로 해석한 듯 공작을 향한 엘프-시벨리우스의 말투는 그리 곱지 못했다. “도망칠 생각은 접어두는 게 좋아. 이방엔 내가 허락한 사람 외에는 드나들 수 없도록 결계를 쳐둔 상태니까. 저택에 있는 사람은 다들 너에게 호의적이지 못하니 얌전하게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거다.” “……황제에게 이종족의 동료가 있을 줄은 몰랐군.” “여행을 하다보면 별의 별 존재를 다 만나게 되니까 말이야. 그보다 너, 이사나를 멋지게 공격했다며? 쯧쯧, 후환이 두렵지도 않나? 엘이 모르길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라고.” “엘?” 의아한 얼굴로 되묻던 공작은 그가 곧 형벌의 신 엘뤼엔이 찾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곤 급히 얼굴을 굳혔다. 신과 친분이 있는 자라면 그 또한 범상치 않은 존재일 것이다. 공작은 곧 엘뤼엔이 이사나를 나무랄 때 ‘내 아들이 슬퍼한다.’는 표현을 쓴 것을 기억해 냈다. 그 당시 경황이 없어 그 사실을 눈치 챈 자는 자신밖에 없었지만, 만약 그의 생각대로 엘이란 자가 신의 아들이고, 그가 이사나를 돕고 있는 상황이라면, 황제의 전력은 감히 사람의 눈으로 헤아릴 단계를 넘어선 셈이었다. 그러자 공작의 착잡한 심정을 눈치 챈 시벨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그가 앉아있던 의자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슨 생각인지 몰라도 이사나는 아직 공작을 죽일 뜻이 없는 듯 했다. 후환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버려둔다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아까워 한다는 의미였다. 실제로 전 대륙을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소드 마스터였으니, 가능한 회유를 통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다는 생각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이 삭막해 보이는 남자가 과연 대공에게서 돌아설 수 있을까? 시벨리우스는 심심함을 달랠 겸, 그에게 대화를 걸기 시작했다. “이사나의 사정은 대충 들어서 알고 있어. 이전에 네가 보아왔던 녀석과는 전혀 딴판이 된 것 같겠지?”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그동안 내 불찰이 컸다는 생각이 들더군. 지금까지 그가 상급 정령을 다룰 수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아아, 그건 이곳에 있는 후작 녀석도 마찬가지니까 섭섭하게 생각할 것 없어. 그 일을 알고 있는 건 여행을 함께했던 일행과 친위기사들뿐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후작이 모르고 있다고?” 공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본 실력을 감추는 것은 좋지만, 후작까지 모르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의외였다. 아군에게까지 숨길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자 시벨리우스는 못 말리겠다는 듯 과장되게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 고집이 장난이 아니거든. 일단 자신이 가진 황제로서의 재량을 먼저 인정받은 뒤에 밝히고 싶다는 거야. 요령으로 공로를 세우고 싶지는 않다는 거겠지.” “그런 점은 선황과 닮았군. 선대의 황제는 실력보단 그 사람의 인격을 먼저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셨지.” “호오~ 꽤나 인간다운 말이로군. 뭐, 아무튼 그런 줄 알고 다른 사람들한텐 비밀로 해주길 바래. 하긴, 그래봤자 녀석이 정말 감추고 있는 사실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정말 감추고 있는 일?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에 대한 거라면…” “엘뤼엔이라, 아주 관계가 없다곤 못하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는 이사나하곤 상관없어. 친분은 있어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입장은 아니거든.” “그렇다면 그의 아들에 대한 것인가?” “!” 뜬금없이 정곡을 찌르는 공작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이 엘뤼엔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조차 최근에 알게 된 것으로, 생판 처음 보는 타인이 쉽게 알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굳어있는 시벨의 표정을 본 공작은 순순히 알게 된 경로를 털어놓았다. “황제와 전투를 벌이는 도중, 금발머리의 남자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더군. 엘이란 사람을 급히 찾고 있었지. 한눈에도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그가 형벌의 신 일 줄은….” “망할! 그놈이 엘은 왜 찾는 건데? 할 일 없으면 신계에 처박혀 일이나 할 것이지, 중간계엔 왜 내려와? 젠장! 이거 나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씩씩거리는 시벨리우스의 말에 공작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신에 대한 언동치곤…꽤나 무례하군. 엘프도 신을 섬기는 종족일 텐데?” “흥! 엘프는 누가 엘프라는 거야!” “엘프가 아니다? 그럼?” “그런 건 알 필요 없어. 뭐, 어차피 말해줘도 모르겠지만.” “…좋다. 그건 그렇다 치지. 그보다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엘이란 자가 형벌의 신 엘뤼엔의 아들인 게 확실한 건가? 듣자하니 황성으로 올라간 것 같은데, 전시가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왜 그 혼자 따로 활동하는 거지?” 시벨리우스는 한순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편의를 봐주고 있어도, 공작은 이 저택에 포로로 잡혀 들어온 상태였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주인인 마냥 이것저것 태평하게 캐묻고 있지 않은가! 왠지 역할이 바뀐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거린 시벨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좋아, 대답하지. 첫 번째 질문은 네 생각이 맞다. 엄밀히 따지자면 양아버지지만 말이야. 그리고 두 번째는 당연히 이것이 전략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대공의 군대가 모이고 있는 동안, 엘은 먼저 올라가 수도를 칠거야. 황성이 불바다가 되면 그들도 어쩔 수 없이 회군을 해야 할 테지? 그때 돌아서는 대공의 군대를 이쪽에 남아있는 이사나의 군대가 친다는 계획이다.” “…그런!! 큭! 가능할리 없다! 애초에 전략의 차이가…”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말해주지. 대공의 군대가 10만이었던가? 이곳에서 이사나가 최대 끌어 모을 수 있는 군사의 숫자는 대략 5만. 그 중에서 황성 쪽에 배치되는 군대는 아무리 많아도 3천을 넘지 않아. 그 정도라면 양동작전으로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다. 게다가 이쪽엔 드러나지 않은 능력자가 많거든.” “!!” “내가 이걸 알려주는 이유는, 무슨 수를 써도 네가 이곳에서 도망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너도 제대로 된 인간이고 싶으면 좀 더 현명한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거야.” “현명한 선택?”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는 공작에게 시벨은 빈정거리는 어투로 물었다. “너는 왜 대공을 따르는 거지? 내가 알기로 인간들은 꽤나 혈통을 중시하던데 말이야. 그런 걸로 치자면 오히려 정통성 있는 쪽은 이사나가 아닌가?” “…대공 전하 또한 황족의 한사람으로서 계승권이 주어지신 분이다. 나는 내가 내린 결정이 틀렸다곤 생각하지 않아. 그는 냉철하고 지적인 인간이다. 그가 황제가 되면 분명 지금보다 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흥~ 그런 인간이 마족과 계약해서 애꿎은 어린아이들을 제물로 바치나 보지?” “그, 그게 무슨?” 믿을 수 없는 말에 공작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마신교의 신관장인 대공이 마족과 계약한 사실은 새삼스러울 게 없었지만, 제물에 대한 얘기는 전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평소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관심이 없던 그는, 황성에 퍼져있는 흉흉한 소문역시 들은바 없었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에게 시벨리우스는 가차 없이 다음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다. 하여튼 예나 지금이나 인간만큼 탐욕스러운 동물이 없다니까? 입으론 도덕을 논하면서 돌아서선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지. 말해봐. 너희들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동족을 희생시키면 기분이 좋아지나?” “그, 그럴 리가 없다! 거짓된 정보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려는 수작이냐!” “수작이라고?” “그렇다! 내가 황제에게 돌아서도록 회유하려는 속셈이 아니냐!” “호오~ 그렇게 해야 할 만큼 네가 대단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던가?” “!!” 할 말을 잃고 굳어진 공작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혀를 찬 시벨리우스는 더 이상 자리에 앉아있을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서슴없이 문고리를 잡아당긴 그는 나가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을 늘이고 싶지 않다면 머리 좀 식히는 게 좋을 거야. 세상엔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 끼익! 콰당! 시벨리우스가 나가고 혼자가 된 공작은 두 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기며 신음을 삼켰다. 지금까지 그가 지켜왔던 모든 신념과 정의가 한꺼번에 무너진듯한 기분이었다. 대공의 손속이 잔인하다는 것은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동안은 남의 위에 군림하는 자로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인간을 제물로 삼는 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였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존재는 위험하다. 그런 자가 황제가 되면 제국은 순식간에 피바다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큭- 내 선택이 잘못 되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무엇이지?’ 검을 겨루었을 때 마주친 황제의 두 눈은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던 나약하기만 한 소년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것을 본 순간부터 공작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 후로도 공작은 오래도록 지루한 갈등에 시달려야 했다. [정령왕 엘퀴네스] 8-10. 폭풍전야 (5) 결과부터 논하자면, 데르온과 라피스가 여장을 한 것은 결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수도에서 머문 일주일 내내, 나는 그러한 생각을 몇 십, 몇 백번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조금만 방심하면 따라붙는 인간들이 생기니 어찌 마음이 편할 수 있겠는가! “여어~ 이쁜 아가씨들. 그러지 말고 우리랑 같이 가자니까? 클클클. 잘 해줄 테니까 그만 튕기고…” 오늘 만 해도 벌써 몇 번째 이 말을 듣고 있는지 모른다. 어이없게도 강제징병을 면했다 생각한 순간 돌아온 것은 수많은 늑대들의 추파였던 것이다. 가뜩이나 눈에 띄는 외모의 두 사람은 나처럼 얼굴을 가리고 다니지도 않았기에 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나는 깊이 눌러쓴 후드를 움켜쥐며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내 모습에 데르온과 라피스는 방금 자신들을 향해 수작(이라고 쓰고 찝쩍이라고 읽는다)을 부린 건장한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어딜 봐도 아리따운 아가씨로만 보이는 그들이 쏘아보는 눈빛에 두려움을 느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특히나 싸움터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의 경우가 더욱 그랬다. 예상대로 그들은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능숙하게 라피스의 어깨를 감쌌다. “노려보니 더 귀여운데? 아가씨 이름이 어떻게 되지? 나이는?” “…이 손 떼는 게 신상에 좋을 거다.” “큭큭큭. 역시 여자는 이래야 하지. 도도해야 제 맛이라니까? 순순히 따라와 주면 일행들에게는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겠어. 어떻게 생각해?” “나 참, 정말 가지가지 하는 군.” 대책 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는 라피스는 이미 이런 상황에 상당히 익숙해 있는 듯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남자로 변했던 이유가 ‘따라붙는 놈들이 많아서’였던가. 하긴 저 정도 외모라면 추종자들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나 역시 처음부터 여자 모습인 녀석과 만났더라면 충분히 호감을 보였을 테니까. 하지만 일단 ‘남자’라고 인식해버린 탓인지, 나는 아무리 봐도 지금의 상황이 우습게만 느껴졌다. 그러니 라피스 본인의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녀석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거칠게 용병의 손을 쳐냈다. “지금 꺼진다면 큰마음 먹고 봐주지. 하지만 물러서지 않으면 넌 죽는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목소리가 녀석이 얼마나 참고 있는지를 고스란히 대변하는 듯 했다. 이쯤이면 무안해서라도 가보련만,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용병들은 오히려 코웃음 칠 뿐이었다. “말씨가 과격한 아가씨군. 뭐, 나는 상관없어. 단~ 이왕 죽일 거 침대에서 멋지게 천국으로 보내줬으면 좋겠는데. 킥킥.” “크하하하하!” “휘익! 휘익~” 도대체 뇌구조가 어떻게 되어먹은 작자들인가. 명색이 용병이란 녀석들이 진심과 허풍도 구분하지 못한단 사실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나치게 태연한 얼굴을 보아 라피스의 눈에 서린 섬뜩한 살기조차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 ‘저러다 진짜 죽이는 거 아니야?’ 그러자 지금까지의 상황을 쭈욱 지켜보고 있던 아스가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대부! 죽인다는데 왜 좋아해? 침대에서 죽으면 천국 가?” “쿨럭!! 으음…그러니까, 그냥 농담하는 거야. 저런 건 몰라도 된단다.” “농담? 저 인간들 강해? 은인 이길 수 있어?” “…절대 무리일 걸.” “아! 이런 걸 무모하다고 하는 거?” “정답이야. 아주 똑똑하구나.” 나는 기특한 마음에 상황도 잊고 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자신들을 무시하는 거라고 생각되었던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의 얼굴이 험악해지자 방금 전까지 라피스에게 추근거리던 남자가 불쾌한 표정으로 내 팔을 붙들었다. “너 방금 뭐랬냐, 꼬마야? 엉?” “아야! 무슨 짓이에요?” “요 맹랑한 녀석 좀 보게! 감히 이 형님들의 심기를 거슬려 놓고 무사히 넘어갈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오냐! 네가 보기엔 우리들이 그렇게 비리비리 해 보인 모양인데! 한번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 차리겠냐! 어?” “형님은 무슨 얼어 죽을! 난 외아들이야!” 엘뤼엔한테 다른 자식이 없으니 외아들인 게 맞겠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치자 용병들은 한결같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 중에서 내 팔을 잡고 있던 남자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거칠게 내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겨내려고 했다. “어디 그 배짱 있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 이놈의 자식! 넌 오늘 잘못 걸린 줄 알아!” “아파! 팔이나 놓고…” 그러나 난 더 이상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갑자기 “우드드득!”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내게 다가오던 용병이 바닥으로 굴렀던 것이다. “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 남자의 팔은 괴이할 정도로 흉한 모습으로 뒤틀려 꺾여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는 방금 전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의 팔을 부러뜨린 괴력의 여자-라피스가 생긋 미소 지으며 서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는 당장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이 섬뜩한 빛을 내뿜었다. 그때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는지 용병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이것들이 내가 오냐오냐 해주니까 호구로 보였나 보지?” “그, 그게 아니라…아,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감히 사람의 팔을 부러뜨리다니!! 너 우리가 누군지 알아? 우리는 그 유명한 꼬냑 용병단의…” “꼬냑이고 와인이고, 난 분명히 경고했다. 지금 꺼지지 않으면 죽인다고. 정말 내가 웬만하면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거기까지 말한 라피스는 다시 한 번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중얼거렸다. “이왕 쫓겨 다닐 바에야 살인죄가 좋겠지?” 순간 그의 두 손에서 커다란 불덩이가 화르륵 타올랐다. 그것을 본 용병들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으아아아악! 도망쳐!! 마법사다~!!” “다들 튀어!!” “맙소사! 왜 이런 곳에 마법사가!!” 다급한 외침에 용병은 물론, 그 근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혼비백산한 얼굴로 피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라피스가 알아서 자중하기를 바라기는 무리. 녀석은 도망치는 용병들을 향해 가차 없이 불덩어리를 날려버렸다. 콰앙! 콰아아앙~!! “크아악!” “아아악! 살려줘!!” 순식간에 난잡하게 변한 거리는 공포에 질린 얼굴들과 맞물려 흡사 지옥의 아비규환이라도 보는 듯 했다. 처음부터 봐주지 않고 고급 마법을 날린 통에, 몇 채의 건물까지 부서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이때쯤 그만 뒀을 녀석이 계속해서 마법을 난사하려 하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말리기 시작했다. “라, 라피스! 화난 건 알지만 이제 그만 둬! 사람을 다 죽일 셈이야?” “시끄러! 안 그래도 열 받았는데 성질 돋구지마! 너도 그 우유부단한 태도 좀 고쳐! 언제까지 인간들한테 휘둘릴 셈이야?” “왜 나한테 성질이야? 그러게 너도 후드 쓰고 다니랬잖아! 처음부터 저 녀석들 눈에 뜨인 게 누군데!” “젠장! 그래, 내가 다 죽일 놈이다!” “라피스!” “알았어! 알았다고!” 버럭 소리친 녀석은 잔뜩 찌푸린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마법을 거두어 들였다. 바로 그때, 주민의 신고를 받은 황성의 경비대가 우르르 몰려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 녀석들이다! 수도를 어지럽힌 범인들을 잡아라!” “와아아아아!” “!!!” 마법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인지 나타난 경비대의 숫자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을 상대로 맞서 싸울 수도 업고, 그렇다고 순순히 잡혀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뿐이었다. “도망쳐!!” 짧게 혀를 찬 우리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후발대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한 달. 진정으로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 “마법사?” 한창 전쟁 준비로 바쁜 와중이던 유카르테 대공은 경비대로부터 들어온 보고에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수도에 웬 여자 마법사가 나타나 일행들과 함께 건물들을 부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붉은 머리카락에 대단히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소란을 일으킨 마법사에 대한 전체적인 설명이었다. 흔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대공에게 옆에 있던 귀족들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감히 황제폐하가 계시는 수도에서 소란을 피우다니! 누군지 몰라도 당장 잡아들여 지하 감옥에 보내야 합니다, 대공 전하! 허락만 하신다면 제가 직접 군사를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타 제국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여인왕국에서 최근 분란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는데, 그에 관련된 세력일지도!” “한시바삐 잡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흥분한 귀족들에 비해 대공은 정체모를 여자마법사에 대한 관심을 금방 꺼버렸다. 그에게는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이사나와의 전투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수도에서 일어나는 가벼운 소란쯤이야 경비대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황성의 경비대가 그들을 뒤쫓고 있다하니 금방 소식이 들어올 것이다. 그보다 할버크에 집결된 군사의 숫자는 이제 몇 이지?” “크흠. 이제 대략 6만 가까이 모였다고 들었습니다. 각 영지에서 속속들이 보내고 있으니 한 달 후면 10만을 채울 것입니다.” “좋아, 순조롭군. 클모어의 동태에 대해서는 알아보았나?” “얼마 전 클리프 상단의 총수란 여자가 후작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 상단이 근방에 꽤 영향력이 있었는지, 다른 상단들도 너도나도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흐음. 상단이라…군사의 수는?” “여러 경로로 모이고 있습니다만, 다 합쳐서 5만도 되지 않을 숫자입니다. 감히 대공전하의 상대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렁찬 대답에 대공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한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대공 전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무엇이냐?” “클모어에 먼저 가 있던 카리브디스공작과의 연락이 끊겼습니다. 며칠 전부터 행방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허엇! 그런!!” 평소 대공의 오른팔로서 활약하고 있던 공작을 익히 알고 있는 귀족들은 놀란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화가 난 대공이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외로 대공은 평온한 표정으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이었다. 보고하던 기사는 안심하면서도 어딘지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저, 저어? 대공 전하? 기사들을 보내 수색하게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예? 하지만…” “이미 몇 달이나 내가 내린 지시를 수행하지 못한 자다. 죽든지 말든지 내 알바 아니지. 소드 마스터로서의 재능은 아깝지만 그것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는 녀석은 내게 방해만 될 뿐이야.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아, 알겠습니다.” 지금까지 누구도 카리브디스 공작을 향해 이런 평가를 내린 자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검술에 발군의 실력을 인정받아, 모든 기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심한 처사라고 생각하면서도 귀족들은 대공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공작의 처지를 동정하기에는 자신의 목숨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잠시의 침묵 후 귀족들은 다시금 아부 성 짙은 미소를 띄우며 맞장구치기 시작했다. “옳으신 선택입니다, 대공전하! 카리브디스 그 자는 검술실력은 좋아도 다른 면에선 영 형편없던 자가 아닙니까? 저는 늘 그가 대공전하의 발목을 잡을까봐 노심초사 했습니다! 하하!” “허허! 길모트 후작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저도 그렇답니다! 참으로 훌륭한 결단이셨습니다, 대공 전하! 대의를 위해 필요치 않은 부분을 과감히 제거하시는 것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출진준비를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일찌감치 대공전하가 타고 가실 명마를 준비했습니다.” “나는 가지 않는다.” “예,예, 당연히 그리하셔야…예? 가, 가지 않으신다니요?” 술렁술렁 당연히 할버크로 출진할거라 생각했던 대공이 황성에 남는다는 소리에 귀족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대답하는 대공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하기만 했다. “황제인 내가 황성을 비울 순 없지 않는가. 나는 이곳에서 결과를 듣겠다. 그대들이 나를 위해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는다.” “으, 으음. 하, 하긴! 불을 보듯 결말이 빤한 전쟁에 굳이 폐하께서 출진하실 필요는 없겠지요! 하하하!” “맞습니다! 반이나 전력의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 반역의 무리 따윈 하루면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을 겁니다!” 어느새 대공에서 ‘폐하’로 호칭을 바꾼 귀족들은 흐르는 식은땀을 감추며 연신 떠들었다.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대공의 숨은 속내를 짐작하는 이는 없었다. 대공은 입고 있는 자신의 하얀 법의를 바라보며 나직한 미소를 띄웠다. 목표했던 숫자는 이제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시점에 황성을 비울 수는 없는 일. 이사나가 필사적으로 전쟁에 임하는 동안, 자신은 벌써 십년을 넘게 진행해온 계획을 마무리 짓고 있을 것이다. 이제 온 세상이 그의 발밑에 들어올 차례였다. [정령왕 엘퀴네스] 8-11. 날개를 펼쳐라! (1) 쏴아아- 탁 트인 초원엔 달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흩날리는 꽃잎들과 맑은 웃음소리. 이미 오래전에 기억에서 잊혀져버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던 황금시대. 그 속에서 자신은 눈앞에 있는 누군가를 향해 물었다. “넌…왜 여기에 온 거지?” 자신의 물음에 ‘그’는 난처한 표정으로 미소 짓는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금색의 머리카락이 부서진 유리가루처럼 눈부신 빛을 내뿜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은밀한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처럼 한손가락을 입가에 가져간다. ‘쉿!’하고 짧게 중얼거린 입이 망설이듯 조심스럽게 옹알거렸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 줄게” 아직 채 성년을 되지 못한 어린 미성. 그리고 점점 더 짙어지는 바람의 향기. “;…를 찾으러 왔어.” “;…를?”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 자신에게 ‘그’는 또다시 미소 짓는다. 괜히 물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얼굴을 하자 ‘그’는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어차피…전부 잊을 테니까.” “헉!!” 평소처럼 혜안을 열어두던 트로웰은 거친 숨을 삼키며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숨쉬기 힘들만큼 강한 압력이 그의 온 몸을 압박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면서 이렇게 고통스럽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만큼 짚어내기 어려운 미래였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가 이러한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본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혜안을 통해 보았던, 눈앞에 펼쳐진 푸른 초원의 모습은 그의 기억에도 이미 존재하던 것이었다. 문제라면 그것이 이미 4천 년 전에 사라진 장소라는 점이다. 분명 미래를 보았는데 어째서 과거의 장면이 나타난 것인지, 그리고 왜 또 자신은 그것에 대한 기억이 없는지 트로웰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상대방의 말이 마치 박힌 가시처럼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어차피 전부 잊을 거라…고?”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트로웰은 분명히 그를 알고 있었다. 혜안으로 보았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는 오랜 친구사이 같았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부분에 대해 기억하는 게 없다니! 생각할수록 수상한 일이 아닌가!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기억을 지웠다? 그럼 방금 전 본 그 소년이 지운 걸까? 하지만 정령왕의 기억에 손댈 수 있는 존재가…” 설령 상급신이라 하더라도 정령왕의 기억은 함부로 다룰 수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한 존재는 전 차원과 모든 생명체를 통치하는 주신뿐이다. 그럼 그 소년이 주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트로웰은 점점 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적절한 때에 등장한 손님의 방문으로, 그는 잠시 동안 그 골치 아픈 생각을 접어둘 수 있었다. “트로웰. 뭐하고 계십니까?” “아…미네 구나. 어서와.” 트로웰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가끔 정원에서 마주치긴 했지만 그가 직접 자신에게 찾아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반가운 기분보단 의외라는 심정이 앞섰다. “여긴 웬일이야? 미네가 여기 온 것은 처음이지?” “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안색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만.” “아아. 별거 아니야. 능력을 좀 과하게 사용했더니 좀 무리가 갔나봐.” “능력이라면…미래를 보는 혜안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응. 엘이 걱정 되서 말이야. 전쟁의 결과라도 알아볼 생각이었는데…생각보다 방해가 심하네. 뭔가 좀 안 맞는 것 같아.” “흐음. 능력자의 개입이 많을수록 운명은 불안해지니까요. 그래서 정령왕의 소환자는 항시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는 법이죠. 트로웰 답지 않으셨군요.” “맞아. 사실은 좀 심심했거든.”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탄생한지 채 일 년도 되지 않았지만, 미네에게는 왕으로서 필요한 수업을 따로 진행시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건 정령왕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지만, 트로웰은 어쩐지 은근히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엘과 지내는 동안 누군가를 보살피고 가르치는 것에 흥미와 보람을 느껴버린 탓이었다. 트로웰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계가 편하긴 한데, 확실히 재미있고 역동적인 것은 중간계인 것 같아. 이번 전쟁만 아니었어도 좀 푹 놀다 오는 건데 말이야.” “엘퀴네스의 유희에 참가하실 생각은 없는 겁니까?” “아아. 난 전쟁은 별로…. 좋게 말하면 자중하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나온다고나 할까? 엘이 충격 받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거든. 그 녀석은 날 굉장히 착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말이야.” “제가 보기에도 트로웰은 충분히 상냥합니다만?” “이런, 이런. 앞으론 미네 앞에서도 조심해야겠는걸. 후후” “??”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미네의 시선을 외면하며 트로웰은 쓴 웃음을 삼켰다. 과거의 잘못을 감추는 일은 너무 간단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며 시간이 흐르기만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4천년만 해도 트로웰의 이름은 중간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유일하게 거부감이 없는 존재는 같은 4대 정령왕들 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의 사이가 원활했던 것도 아니다. 모든 일에 무관심했던 엘퀴네스와 자신밖에 몰랐던 이프리트. 인간에게 빠져 정령들을 돌보지 않았던 미네르바. 그들 속에서 트로웰은 언제나 고독했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누군가를 원망하는 일에 집요하게 굴었던 걸지도 모른다. “괜찮아. 네가 상냥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어?” “트로웰? 왜 그러십니까?” “아니, 방금 무슨 소리가…” “전 아무 소리도 안 들렸습니다만.” 환청이었던 걸까? 언제인가도 한번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았다. 어쩌면 방금 전에 본 혜안의 영향일지도 모르지만, 트로웰은 예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를 찾고 있다고 했었지. 그게 뭐였을까?’ 그 속에 해답이 있을 듯도 싶은데, 한번 사라진 기억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던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네는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트로웰?” “으음. 아무래도 안 되겠어, 미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내가 직접 중간계로 내려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엘퀴네스의 유희에 동참하실 생각이십니까?” “상황이 되면 그렇게 해야지. 미네도 같이 갈래?” “저야 상관없습니다만…” 그러나 미네르바는 거기에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로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휘유~ 여긴 언제 봐도 여전하군. 가장 발전이 없는 세계라니까?” “!!” “??” 정령왕의 영역으로 기척도 없이 들어온 존재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지닌, 제법 준수한 인상의 남자였다.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면서도 정령왕들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낯선 이의 등장에 긴장하던 것도 잠시, 남자를 감싼 신성한 기운과 그 위를 겉도는 아득한 마기를 느낀 트로웰은 곧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마신…카노스?” 그러자 상대편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가볍게 긍정했다. “호오! 역시 지혜롭기로 이름 높은 땅의 정령왕답군. 한 번에 나를 알아볼 줄이야. 만나서 반가워~” “마신이 여기엔 무슨 일로…” “아아, 급하시긴. 모처럼 찾아왔는데 자리에 앉으라고도 안하는 거야? 상당히 매정한 정령왕님들이네.” 이미 알아서 자리에 앉은 채 하는 말치곤 그다지 신빙성이 없었지만 트로웰은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마신 카노스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들어왔던 바다. 괜한 말로 시비를 일으켜 피곤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신이 주변을 충분히 돌아보기를 기다렸다가 천천히 물었다. “이제 물어도 될까? 마신이 정령계엔 무슨 일로 온 거지?” “아~ 그게 말이지. 실은 도움을 요청하려고 왔어.” “도움?” “응! 도움. 이를테면 협조 요구지! 아, 그게 그 말인가?” 태연하게 자문하는 카노스의 모습에 트로웰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전대의 엘퀴네스, 즉 지금의 엘뤼엔 덕분에 마이페이스적인 성향에는 꽤 익숙해져 있었지만, 역시 어지간하면 이런 분류는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미네르바가 그를 대신하여 질문했다. “도움을 받고 싶다면 정확히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도와야 하는지 말씀하셔야 하는 게 아닐까요? 카노스님 본인의 의지십니까? 아니면 신계 전체의 의견입니까?” “오옷! 멋져! 바로 그거야, 그거! 이야~ 이번대의 미네르바는 상당히 센스가 좋은걸~” “…헛소리는 그만하고 본론부터 말하시지. 상급신이 멋대로 단독행동을 벌일 리는 없으니, 신계에서 요청하는 일이겠지? 이를테면 악신의 탄생을 저지 하라던가, 하는.” 트로웰의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카노스의 얼굴이 흠칫 굳었다. 잠시 놀랍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던 그는 곧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땅의 정령왕이 가진 혜안을 너무 만만히 봤군.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인가?” “대충은. 하지만 누가 개입되어 있는지는 알지 못해. 그 부분만큼은 마치 안개가 서린 듯 뿌옇게 보이거든.” “흐음. 그건 예언 능력이 있는 상급신들과 같군. 하긴, 정령왕은 상급신의 능력 중 한가지만을 강하게 타고난 존재니까. 뭐, 배후는 전부 밝혀냈어. 하지만 너무 늦게 발견해서, 이미 손을 쓰기에 늦어버린 상태야.” “…별로 유쾌한 소식은 아니네. 그래서? 신들이 할 수 없다면 정령왕도 불가능해. 우리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말했잖아. 협조를 요청한다고. 이 상태라면 악신은 반드시 태어난다. 우리는 탄생하는 그 순간을 노리려고 해. 하지만 그 때문에 신계의 모든 신들이 자리를 비울 순 없어. 하루라도 손을 쉴 수 없는 녀석들도 있으니까.” 카노스의 말에 트로웰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즉, 부족한 전력을 정령왕을 통해 보충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아크아돈과 관련된 일이라 4대 정령왕이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으니, 지금의 부탁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의미가 강했다. 오히려 그런 일로 마신이 직접 왔다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거라면 천사를 시켜도 됐을 텐데?” “아아, 실은 개별적으로 한 가지 더 부탁할게 있어서.” “…?”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에게 카노스는 어린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엘뤼엔을 막아줘.” [정령왕 엘퀴네스] 8-12. 날개를 펼쳐라! (2) 클리프 상단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로, 이사나의 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할버크에 집결된 군사들의 소식을 체크하는 것과, 기사들을 배치하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전부 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새벽 내내 회의를 진행하고도 아침 일찍부터 군사의 정비를 살피는 생활은 체력만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으나 이사나는 꿋꿋이 잘 해나가고 있었다. 전쟁준비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이사나는 여행에 함께 했던 일행만을 모아 따로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엔 카터스 제국의 라온휘젠 황태자도 함께 참가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집결된 숙부의 군사들은 6만 3천정도. 그 중 2만은 할버크에서 꽤 떨어진 평원에서 대기하는 상태고, 3만이 더 오는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보에 의하면 숙부의 군사들은 할버크 영지의 동서남북에 각각 1만의 군사씩 배치시키고 있는 모양이에요. 때문에 우리들도 군대를 나눠서 진격해야 합니다.” “흐음. 하긴, 전부가 한쪽으로 몰려들면 다른 양쪽에 배치된 군대에게 역으로 당할 수 있겠군. 그럼 4개의 부대로 나뉘는 건가?” “맞아요, 시벨리우스님.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각자 나뉜 부대들의 총 지휘를 부탁하려고 합니다.” “에엑? 나도?”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는 사람은 알리사였다. 여자인건 둘째 치고 아직 14살밖에 되지 않은 자신에게 설마 군대의 총 지휘를 맡길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일행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깐만요, 황제! 알리사양은 아직 너무 어립니다. 게다가 연약한 여자인 그녀에게 설마 전쟁의 참혹한 장면을 보게 하실 생각입니까? 군대의 지휘라면 굳이 우리가 아니라도 많을 텐데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선별하기 때문에 그렇소, 라온휘젠 황자. 물론 지휘관은 여러분이 아니어도 맡을 사람이 많습니다. 협력을 요청한 귀족들 중에서 적당히 전투센스가 좋은 사람을 뽑아도 되는 문제죠.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이제까지 동행해왔던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렇다 해도 알리사 양은…” “그녀는 그 험악한 바론 사막에서도 한 달 가까이 혼자 살았을 정도로 심지가 굳은 여인입니다. 또한 땅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흔치않은 능력자이기도 하죠. 카웰 형님이 그녀와 함께 할 것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해서 제안하는 겁니다.” 말을 마친 이사나는 결정하라는 듯 알리사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단지 눈만 마주친 건데도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아, 알리사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자신이 없어서라고 판단한 황태자는 또다시 언성을 높이며 항변했다. “그녀의 능력이 뛰어난 것은 저 역시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알리사양은 여자입니다, 여자! 그런 참혹한 현장을 겪어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결정은 그대가 아니라 알리사양의 몫입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제안을 한 것일 뿐, 강제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대답해, 알리사. 네 의사를 존중할 테니까.” “아…나는…” 알리사는 속으로 열심히 궁리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시작된다고 했을 때, 이사나를 따라 나서려고 작정하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는 상황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지만, 그 만만치 않게 도전해 보고 싶다는 강렬한 의지도 피어올랐다. 게다가 솔직히 말해 자신의 능력을 믿어주는 이사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자신을 인정해 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알리사의 심장은 아까부터 쉴 새 없이 빠르게 박동하고 있었다. “으음. 나, 나는…하고 싶어!” “알리사노양!!” “괜찮아! 위험한 일이라면 이사나씨가 나한테 맡길 리가 없잖아!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제안한 거라고 생각해. 이왕 도와주기로 결심한 거! 이럴 때 나서지 않으면 언제 빛을 보겠어?” “하지만 알리사양은 여자…” “난 나를 여자라는 껍데기와 나이로 판단하는 잣대를 무지 싫어해. 그런 점에서 이사나씨한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어. 맡겨만 둬! 날 선택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게 만들어 보일 테니!” 당차게 대답하는 알리사의 말에 이사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라온 황태자에게 향했다. “황자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를 도와주시렵니까?” “…크흠. 여자인 알리사 양을 전쟁에 앞세우고 뒤로 숨는 비겁자는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맡겨주신다면 황제의 뜻에 따르지요.” “후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든든하군요. 시벨리우스님도 도와주실 거지요?” 본격적인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이사나는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항상 투닥거리기만 했던 라온 황자에게 정중한 협력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시벨은 새삼 인간들의 성장이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는 내심 즐거워지는 속내를 억누르며 화가 난 척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쳇. 왜 나는 당연히 도와줄 것처럼 물어봐? 그럴 거면 차라리 처음부터 묻지나 말지.” “이런, 기분 나쁘셨나요?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됐다, 됐어. 어차피 나한테 선택권이란 게 있었나? 마음대로 부려먹으라고. 아무튼 지휘권을 준다니 받기는 하겠는데 말이야. 아까 네 말대로라면 이쪽이 너무 불리하지 않아? 다른 군사들이 오고 있다곤 해도 이제 겨우 3만 2천만 모였을 뿐이잖아. 그 중에서 클모어의 자체 치안을 위한 병력을 제한다면 기껏 나눈다고 해도 5천이 되지 않을 텐데, 그것으로 1만이 넘는 군대를 상대할 수 있겠어? 게다가 엘이 말한 작전은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최후의 결전으로 남겨둘 생각이에요. 아직 엘 쪽의 군대가 모이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줄여놓을 수 있는 숫자는 최대한 줄여봐야죠. 물론 무조건 돌격해도 승산이 있다고 보지만, 저는 최대한 이쪽의 희생을 줄이고 싶거든요.” “흐음. 뭔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다는 소리인가?” 이사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미리 준비해둔 도표와 자료들을 꺼냈다. 그곳엔 할버크 근처의 지형과 각 특징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는 일일이 그것의 활용도를 짚어가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가 제시한 계획은 어찌 보면 상당히 쉽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일종의 유인책을 통해 함정으로 유도하는 작전이었다. 즉, 각 부대가 여러 방향에서 대공의 군사들을 어떠한 장소로 유인한 다음 한꺼번에 몰살을 시키는 것이다. 이때, 상대 쪽 군사들이 서로에게 연락을 취할 시간을 줄이도록 최대한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조건이 뒤따랐다. 이것을 위해 이사나가 정해둔 장소는 할버크 영지의 주변에 자리 잡은 늪지대와 크란 산맥 끝으로 이어지는 계곡 이었다. 왜냐고 묻는 일행에게 그는 미리 생각해 두던 답변을 털어놓았다. “이 계곡은 사방이 고립된 절벽으로 되어있어요. 군사들을 이쪽으로 몰아넣은 다음, 한꺼번에 바위를 떨어트려 몰살시키는 것이 가능하죠. 늪의 용도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고 믿어요.” “흐음, 그런 거라면 확실히 알리사가 가진 정령의 능력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대공의 기사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주변의 지역에 대해서 모르고 있지는 않을 텐데? 순순히 그쪽으로 가려고 할까?” “안되면 되게 해야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인에 성공하는 것이 우리들의 총 목표에요. 이것을 실패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좋아. 성공 했다 치자. 하지만 나머지 2만의 군사는 어떻게 할래? 아군이 공격당한걸 알면 바로 대기하던 장소에서 날아오는 거 아니야? 그것 말고도 3만이 더 내려오는 중이라며.” “네, 그래서 실은 친위기사를 시켜 그들에게 가는 보급품을 끊으려고 해요. 길가에 매복했다가 그쪽으로 가는 상단의 행렬을 노린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그들 모두는 당분간 식량이 없어 기진맥진한 상태가 될 테니 적어도 도망치는 시간정도는 벌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3만은 아직 이곳으로 오려면 이주일은 더 걸릴 거예요. 그쯤엔 우리 쪽에도 나머지 군사가 당도하게 될 겁니다.” 다행히 일행들은 모두 꽤나 흥미가 동한 듯한 얼굴이었다. 한참의 시간 후, 그가 생각한 모든 계획을 알린 이사는 일행들의 표정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이번 작전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방법은 거의 흡사하지만, 시벨리우스님과 알리사의 역할이 굉장히 크다고 생각해요. 1만의 군사 중 몇 천이라도 숫자를 줄일 수 있다면 내 계획은 성공한 겁니다.” “흐음. 내가 생각해도 그리 나쁘지 않은데? 머리 짜내느라 고생했겠군. 다시 봤다, 꼬마야.” “나도, 나도! 이사나씨 정말 대단해! 이런 방법이 가능할거라곤 전혀 생각 못했어!” “흐음. 본인도 동의합니다. 이거라면 아군의 전력은 최대한 아끼는 방향에서 최대한의 결과를 이끌어 낼 수 있겠군요.” 하나둘씩 이어지는 칭찬에 이사나는 마음이 풀어지는 걸 얼른 다잡아야 했다. 지금은 한없이 늘어져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닌 것이다. 그는 미소 지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일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카웰 형님에게는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아마 오늘 저녁쯤이면 군대의 배치가 전부 끝날 겁니다. 우리의 계획을 실행하는 건 일주일 뒤로 하죠.” “좋아, 빨리 하는 게 속 편하지. 이 작전이 성공해서 아예 전멸을 시킨다면야 더 바랄 것도 없겠군.” “헤에~ 어쩐지 예감이 좋은걸? 대공인지 섭정왕인지 하는 사람도 이쪽으로 오게 될까? 그 면상 좀 구경하고 싶은데 말이야.” “아니, 그렇진 않을 겁니다, 알리사양. 그는 다른 잡다한 집무도 겸해야 할 테니 쉽게 자리를 비울 수 없을 겁니다. 아마 황성에서 그때그때 보고를 듣는 쪽을 택하겠지요.” “호호! 그렇다면 명령 전달 과정이 느려질 테니 우리로서는 전혀 손해랄 게 없지! 와! 어쩐지 두근두근 거려! 일주일 후가 기다려지는 걸?” 환호하는 알리사의 모습에 이사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탓인지 그녀는 전쟁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조금은 위험을 자각시킬 요량으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알리사. 생각보다 상당히 끔찍할 거야. 몬스터와 달리,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다는 건 그리 보기 좋은 광경이 아니거든. 라온 황자도 그래서 더 걱정했던 거고. 좀 더 마음을 단단히 먹어두는 게 좋아.” “으, 응. 미안, 이사나씨.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좀 흥분했나봐. 헤헤. 나도 전쟁이 무섭다는 거 잘 알아. 절대로 방자하게 굴지 않을게.” “그런 건 상관없어. 나는 네가 너무 심한 충격을 받을까봐 걱정하는 거야. 난 널 믿고 있으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이란 게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믿을게 못되잖아.” “으응…알았어.” 이사나의 말에 서린 진심어린 걱정을 읽은 알리사는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요즘 그를 볼 때마다(정확히는 폴리모프 마법이 풀린 순간부터) 쉽게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아 이상하긴 했지만, 트로웰을 향한 감정과는 확연히 달랐기에 알리사는 이것도 호감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무심히 넘겨버렸다. 서로를 향한 두 사람의 감정이 미묘한 곳에서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이사나는 당장 그날 저녁부터 각 군대를 맡은 대장들을 불러 일행들을 소개시켰다. 미리 언질을 준 탓인지, 그들은 아직 어린 알리사를 보고도 크게 동요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군대는 용병으로만 이루어진 제 1부대와, 후작의 사병들로만 이루어진 제 2부대, 그리고 각기 지원을 통해 들어온 일반인과 다른 귀족들의 사병들로 모인 제 3,4부대로 나뉘어 질 예정이었다. 클모어의 자체 치안을 위해 남겨둔 병력 1만을 제외하고 남은 군사들이 각자 적당히 분배된 셈이다. 그 중 이사나는 제 2부대의 총 지휘를 맡고 있었다. “거친 용병들은 시벨리우스님이 맡아주세요. 아마 샴페인 용병단들이 있으니 제어하기 어렵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알리사와 라온 황자는 각자 3, 4 부대를 부탁할게요. 알리사에게는 카웰 형님이, 황자에게는 부지휘관으로 내 친위기사인 알렉 경이 따를 겁니다.” 말을 마친 이사나는 불려온 대장들을 향해서도 당부를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의 형제와도 같은 존재들이다. 처음이라 많이 어색하겠지만, 지휘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잘 따라주길 바란다. 이들의 실력은 굳이 알려주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우렁차게 대답하는 얼굴에선 그의 결정에 불만을 보이는 기척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기사라는 증거!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감탄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나 녀석, 이제 제법 황제다운 분위기가 풍기는 걸?’ 엘이 지금 이 모습을 보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히는 것 같았다. [정령왕 엘퀴네스] 8-13. 날개를 펼처라! (3) “아, 글쎄! 나는 반드시…야 한다니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무력을 행사…” 다음날 아침. 기사들과 함께 연무장을 돌아보고 있던 이사나는 문득 성문 앞이 소란스러운 것을 느끼고 의아한 얼굴로 내려갔다. 그러자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 중의 한명이 그를 발견하곤 얼른 인사를 건네 왔다. “폐하! 나오셨습니까!” “아아. 그런데 무슨 일이지?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은데.” “별 일은 아닙니다. 저어…그게 실은…” “…?…” 난처한 듯 우물쭈물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이사나는 얼른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그의 예상을 가뿐히 뛰어 넘는 것이었다. “웬 거지들이 나타나 황제폐하의 일행 분을 만나 뵙게 해달라고…” “엥? 거지?” “죄, 죄송합니다, 폐하! 얼른 그들을 쫓아내겠습니다!” “아니, 잠깐만. 거지라고? 내 일행 중에 누구를 찾아 왔다고 하던가?” 당장 불벼락 같은 진노가 떨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느긋한 질문이 들려오자 기사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자신을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거지들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다짐한 후였다.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군청색의 머리에 청록색 눈동자라고만…” “뭐라고?!” “황공합니다, 폐하! 제가 직접 그들을 이 근방엔 얼씬도 하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아니, 아니다! 문을 열어라! 내가 직접 그들을 만나보겠다.” “네! 알겠습니…네, 네에? 하지만 폐하…” “폐하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당장 문을 열어라!” “헉! 네, 네엡!” 이사나는 친위기사의 호통에 놀라 허둥지둥 달려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간단한 특징만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그는 라온휘젠 황자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카터스 제국에서 황자를 찾기 위해 보낸 사람들일 가능성이 컸다. 어떤 경로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최근 황제의 일행들에 대한 소문이 퍼져있는 점을 감안하자면 그리 신기할 것도 없는 일이다. 끼이이익! 육중한 소리와 함께 굳게 닫혀있던 철문이 열리자, 이사나는 친위기사 둘을 대동하고 소란을 벌어지고 있는 장소로 걸어갔다. 그러자 마침 기사들과 실랑이를 하고 있던 자들이 문이 열리는 것을 보고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오, 그래! 드디어 여는군! 도대체가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라 하루 종일 걸리나 했더니…” 반색을 하며 몸을 돌이킨 그들은 성안에서 나오는 이사나와 친위기사를 보더니 눈에 띄게 몸을 경직 시켰다. 이곳에 있다는 황제가 설마 직접 나타날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성의 경비들도 마찬가지인지라, 이사나를 본 그들은 모두 기겁을 하여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폐, 폐하의 용안을 뵙습니다!” “폐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기사들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한 이사나는 애초에 목적이었던 황자를 찾아온 자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노인인듯한 한 남자와 중년 남자 하나, 그리고 청년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보고하던 기사가 ‘거지’라고 했던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그들의 꼴은 차마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지저분한 상태였다. 이런 모습을 하고도 기사들에게 쉽게 쫓겨나지 않았던 게 오히려 용할 정도다. ‘하긴, 그 사막을 경유해서 왔다면 어쩔 수 없겠지.’ 속으로 혼자 납득한 이사나는 자신을 보며 이리저리 눈치만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물었다. “카터스 제국에서 온 사람들인가?” “!!” 갑작스런 직격탄에 놀랐는지 그들은 차마 그렇다는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끄덕거렸다. 그 모습에 친위기사들은 하나같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사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중히 모시도록 해라. 내 일행을 찾아온 손님들이다. 알렉, 저택으로 가서 목욕물과 의복을 준비하라고 말해줘.” “네, 알겠습니다, 폐하.”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사나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자들을 대하는 기사의 태도는 180도로 돌변했다. 권력의 위대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오늘날 이런 상황에 처하고 보니 새삼 감회가 새로운 세 사람이었다. 얼굴이 너무 지저분한 관계로 아직 이사나는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바로 황태자를 찾기 위해 수색을 나선 마법사 세리엄의 일행과 리글레오였다. 처음 태자의 흔적을 발견한 뒤 사막에서 좌표를 통해 이동한 것은 좋았으나, 실수로 전혀 엉뚱한 장소로 떨어지는 바람에 헤매고 헤매다 이제야 겨우 찾아온 것이다. 복장이나 무엇 하나 귀족다운 면이 없었기에 각오하고 찾아온 방문이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소문이 무성했던 황제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차마 말 못할 심정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던 그들은, 웃으며 자신들을 안내하는 이사나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실제로 본 솔트레테의 황제는 들려온 말들과 달리 훤칠한 키에 준수한 얼굴, 강한 의지가 돋보이는 제왕의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이 고작 섭정왕에게 밀려나다니 오히려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 제국의 귀족들은 죄다 바보만 모였단 말인가? 그들 중에서도 리글레오는 마치 빨려가듯 넋을 잃고 황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 이사나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는가? 왜 그렇게 보지?” “아, 아닙니다. 저, 저어…저희들이 카터스에서 온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군청색 머리에 청록색의 눈동자를 가진 남자를 찾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마, 맞습니다! 황자전하…아, 아니 라온휘젠님! 그분이 여기에 계신 겁니까?” 혹시나 했던 것이 역시였다! 세리엄과 필립은 이사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보곤 만세를 외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 모습을 본 이사나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방금 기별을 넣었으니 저택에도 자네들의 방문이 알려졌을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들어가서 하도록 하지.” *** 카터스로부터 자신을 찾아온 일행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라온 황자는 뛰다시피 손님홀로 내려왔다. 그가 바라본 곳에는 이미 말끔하게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세리엄 일행이 앉아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얼굴마다 격한 감동이 일렁거렸다. “전하!!!” “오, 이런 맙소사! 스승님이 아니오!!” “대체, 대체 그동안 어떻게 되신 겁니까! 이 늙은이가 얼마나 찾아 헤맸는지 아십니까아~~”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스승님께서 이곳은 어쩐 일 인 게요? 황성은 어찌하고?” “크, 크흑! 그것은 제가 말씀드립지요, 전하! 폐하께서 전하를 찾아오라며 저희들을 내치셨습니다요. 흑흑. 찾을 때까진 고국에 발도 디밀지 말라시며…” “뭐라? 아바마마께서 그런 결정을?” 때 아닌 상봉에 홀 안은 금방 시끄러워졌지만, 주변에 있던 누구도 그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한없이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전하를 찾아 사막이며 온갖 잡다한 장소는 전부 뒤지고 돌아 다녔습니다요! 게다가 세리엄님이 좌표를 잘못 외우시는 통에 엉뚱한 곳에서 헤매기까지!! 그동안 제가 한 고생이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흑흑!” “아니! 자네!! 치사하게 꼬지르는 겐가? 이제 전하를 뵈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 게야?” “네, 네! 눈에 뵈는 게 없습니닷! 그러게 제가 걸어가자고 했잖아욧! 그런 생고생을 시켜놓고선 뭘 잘하셨다고!” “뭣이라! 나랑 해보자는 겐가? 엉?” “그래요! 해보자고요! 저도 이제 더는 못 참습니다! 아니, 안 참으렵니다!” “하하하! 두 분은 지금도 여전하시오!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시구려!” 유쾌하다는 듯 껄껄 웃는 황자였지만, 정작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사이는 살벌하기만 했다. 이쯤에서 그만 중재를 시켜야 할 것 같아, 이사나는 나직이 흠흠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다행히 의도가 먹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의 재회라 반가운 심정은 알겠지만, 일단은 진정하시지요, 황자. 서로 정식으로 소개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아, 아참! 그렇지! 제가 너무 경황이 없어 실례하였습니다. 이쪽은 나의 스승이자,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인 세리엄 폰 알지오님이십니다. 또한 그 옆에 있는 분은 황실 소속의 문관인 필립 폰 레베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그가 카터스 제국의 귀족도 아닌 리오를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린 황자를 대신해, 리오는 얼른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소개했다. “저는 할버크 영주의 차남인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 그러자 이사나를 제외한, 그의 일행들과 주변에 서있던 기사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변했다. 할버크가 무엇인가! 유카르테 대공을 도와 적극적으로 이사나를 대적하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귀족의 영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오랜 방랑으로 그동안의 사정을 자세히 모르고 있던 리오는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험악해지자 당혹한 심정일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위험스럽게 흐르는 공기를 환기시킨 것은 이번에도 이사나의 몫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기억나는군. 클란 백작의 둘째 아들이었지. 그 동안 이분들과 함께 여행 하는 중이었나?” “그, 그렇습니다, 폐하. 저어…제가 무슨 실수라도?” “그대의 아비 되는 자가 나를 몰아내기 위해 숙부인 유카르테 대공과 손을 잡았다. 이미 그쪽으로 몇 만의 군사들이 집결되고 있는 중이지. 설마 모르고 있었나?” “헉! 그, 그게 사실입니까?” 군사를 모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인 엘키노가 프로포즈를 거절당한 일로 복수하려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공의 군사들이라니! 온 몸이 굳는듯한 충격에 그는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기분이 조금만 틀어져도 자신은 목숨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는 지금 당장은 그에게 별 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저런 식으로 안심시킨 다음 얼마든지 뒤통수를 칠 수 있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형님의 일이 생각보다 충격이 크셨나 보구나. 중립이셨던 아버님이 갑자기 대공과 손을 잡으시다니.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클란 백작은 어릴 때부터 유달리 둘째인 리오를 더 편애했다. 아마 그를 내세워 협상을 제시한다면 집결된 군사들을 물리게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대공이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까? 슬픈 현실이지만 대공에게 있어서 클란 백작은 있어도, 없어도 좋을 사람이었다. 굳이 그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참동안 속으로 궁리하던 리오는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뭔가 상당히 심각해 보이는 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들을 수 있을까?” 웃음기를 머금은 말투 때문이었을까? 리오는 이상할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끼곤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결심했다. “…폐하께서 저의 처분을 어떻게 하실지 궁금해 하고 있었습니다.” “흐음. 내가 어떻게 할 거라 생각하지?” “처음엔 포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이미 대대적인 전쟁으로 번졌다면 저 하나로 전세를 유리하게 돌리실 수 없을 테니, 상대편 군사들에게 경고하기 위한 본보기로 처형하실 수도 있다고 사료됩니다.” 술렁술렁. 속내를 숨기지 않은 대답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수군거렸다. 이사나는 한 손을 들어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듯한 말투로군. 죽음이 두렵지 않나?” “…물론 두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폐하께서 저를 죽이지 않으시리라 확신합니다.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만큼, 제 가치가 낮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듣기에 따라 오만하다고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대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고 보는가?” “기회를 주신다면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증명이라…” 실제로 이사나는 그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보이겠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좋아, 다가올 전투에 그대는 나와 함께 출진하도록 한다. 처분은 그 뒤에 결정하도록 하지.” “!!” “폐하! 첩자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위험부담을 끌어안으실 필요는!!” “그 무슨 섭한 소리! 리오군은 우리와 함께 여행했을 뿐, 이번일과는 전혀 무관한 청년이오! 아비가 그렇다 하여 자식까지 같은 식으로 보면 곤란하지!” “맞습니다! 그건 저도 동의합니다! 솔트레테의 황제폐하, 부디 선처를 바랍니다.” “흥! 헛소리! 그럼 내 어린 자식과 형제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반역자로 매도되었단 말이오? 어차피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 클란 백작은 폐하에게서 등을 돌린 죄 값을 치러야 할 겁니다!” 카터스 황실의 두 사람이 리오를 두둔하고 나서자 친위 기사 중 몇몇이 분노한 얼굴로 되받아쳤다. 그들 모두 이사나와 함께 황성을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야 했던 자들이었다. 미처 피신하지 못한 그들의 식솔을 대공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했다. 어디 그 뿐인가! 도망치는 내내 부상을 입어 죽어가는 동료들을 볼 때마다 그들은 대공이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때마침 이사나가 정령왕 엘퀴네스를 소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들 역시 어느 이름 모를 야산에서 시체로 썩어 들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로서는 복수를 꿈꾸는 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미 결정을 내린 이사나의 태도는 강경했다. “너희들이 겪은 설움과 고통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혈육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살렸으니, 역사는 너희들을 다시없을 충신으로 기록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속의 분노를 다스리도록 해. 당한 대로 똑같이 되갚는다면 내가 숙부와 다를 게 뭐가 있지? 나에겐 내 나름대로의 방식이 있어.” “하지만 폐하…아무리 그래도 의심이 가는 자를 근처에 두신다는 것은…” “괜찮다. 카터스 황실의 두 분이 한 증언도 있고, 무엇보다 거짓말을 하는 눈이 아니야. 만약 틀렸다면 그건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탓이겠지. 그 정도도 분간하지 못하는 머리는 필요 없어.” “헉!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하! 사실이잖아? 우둔한 대장은 부하들의 골치만 썩일 뿐이지. 그래서 지금 나는 스스로를 시험해 보는 거야. 지금 내가 펼치려고 하는 날개가 진짜인지, 아닌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말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마법사 세리엄과 리글레오 쪽이었다. 특히 태자의 스승으로서, 평소에도 타 제국의 황족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세리엄이 받은 감동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성문 앞에서 본 첫 만남에서부터 범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그는 과연 과거 성황(聖皇)으로 이름 높던 선대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라는 느낌이었다. 앳된 외모를 제하면 그가 라온 황태자와 같은 17세라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천운이로구나! 다 무너져 가는 제국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큰 별을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사막으로 갔다는 황태자가 어떤 경유로 이사나의 동료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의 경험이 태자에게 큰 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무릇 사람이 성장하는 데에는 도전만큼 중요한 것이 없으니, 장차 그들은 서로에게 최고의 라이벌이자, 훌륭한 조력자가 되어줄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 가슴이 흥분되는 일이었다. ============================================== 수정하지 않은 원고입니다. 오타, 오류 지적 환영해요^^* [정령왕 엘퀴네스] 8-14. 날개를 펼쳐라! (4)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 일주일 뒤에 있을 작전 때문에 시벨리우스와 의견을 나누고 있던 알리사는 라온 황자를 방문했다는 일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곧 찌푸린 표정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라온 황자를 데려가려고 온 걸까? 어떻게 생각해, 시벨님?” “그럴지도. 일단은 그래 봬도 황자인 모양이니까.” “앗! 그럼 안 되잖아! 그가 빠지면 4부대의 대장은 누가 맡으란 말이야? 이미 계획까지 다 짜놨는데!” 기겁하는 알리사에 비해 시벨리우스는 그게 뭐가 어떻냐는 듯 태평한 얼굴이었다. 그는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는 지도를 살피며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뭐, 어때. 어차피 녀석이 하는 역할이 다른 사람과 크게 다른 것도 아니잖아. 새삼 공백이 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채우면 그만이야. 너나 나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좀 섭섭하잖아. 모처럼 이제야 겨우 일행다운 일을 해보겠다는데. 아이 참. 그 쪽 사람들은 왜 하필 이런 시기에 나타나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는 거지?” “글쎄. 어쩌면 그 마법사라는 인간도 남아서 도울지 모르니 벌써부터 실망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데? 그보다 제대로 보고 있는 거냐? 이동하는 것은 이쪽이야, 이쪽. 제대로 유인하지 못한다면 이 작전은 실패라고.” “쳇, 나도 알아. 무시하지 말라고. 이래 뵈도 귀족출신이라 지도쯤은 볼 수 있단 말이야.” 새침하게 대답한 알리사는 투덜거리며 다시금 지도에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방금 전까지 그들의 화제에 올랐던 라온 황태자가 들어섰다. 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뒤에는 백발이 성한 노인과 각각 중년과 청년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서있는 상태였다. 마법사 세리엄과 그의 수행원인 필립, 그리고 방금 전까지 이사나와 한판 줄타기를 하고 온 리글레오였다. “알리사노양, 시벨리우스씨! 소개시켜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카터스 황실에서 저를 찾아오신 분들입니다.” “아! 그렇지 않아도 방금까지 그 말을 하고 있었는데! 라온씨, 다시 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하하하! 사내로 태어나 한 입으로 두 말 할 수는 없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기로 했습니다. 인사들 하세요. 이쪽은 카터스 제국 황실 수석마법사이자 7서클 마스터의 마도사, 세리엄 폰 알지오님. 나의 스승님이 되십니다.” “7서클이라니…세상에! 정말 굉장하잖아! 처음 뵙겠어요, 저는 알리사노 알 드레프라고 합니다.” “아, 아아.” 생글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알리사의 모습에 세리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라온 황태자가 다른 일행들을 소개해준다며 2층으로 이끌었을 때만 해도, 그들은 경갑을 걸친 건장한 청년들을 예상하고 있었다. 자세한 계획은 아직 몰랐지만, 이번 작전의 총 지휘관을 황제와 그의 일행들이 맡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회의실이라고 들어온 곳에 떡하니 등장한 사람이 어리디 어린 -그것도 미모가 상당히 출중한-소녀였으니, 황당해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일국의 황태자를 향해 감히 ‘라온씨!’라니? 세리엄을 포함한 그의 일행들은 이런 무례를 당하고도 기쁘게 웃는 태자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다음 말에 그들은 사이좋게 굳어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알리사양은 이번 작전에서 제 3부대의 총 지휘를 맡고 있소.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땅의 중급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이기도 하지.” “!!” 소녀의 옷차림을 통해 어느 정도 신분이 높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이곳 후작의 조카이거나 딸 정도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일행들은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심정이었다. 정령사, 그것도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지휘관이라니? 이런 어린 여자애가 말인가!! 아무리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할게 아니라지만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이다. 그러자 그들의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던 알리사는 입가에 생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호! 저 같은 꼬마에다 여자애가 지휘관이라니 놀라셨죠? 사실 저는 별로 하는 것도 없어요. 그냥 이사나씨가 세워둔 계획대로 움직이는 것뿐이니까요.” “아아. 으음…솔트레테의 황제폐하가 참으로 대단한 결단을 내린 듯싶군. 그런데 저 쪽은…?” 언뜻 보이는 소파에 누군가가 더 앉아있다는 것을 깨달은 세리엄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가 다시 멍하게 입을 벌렸다. 인간과는 확연하게 다른 뾰족한 귀와 은색의 머리카락, 전체적으로 푸르스름한 피부를 가진 청년은, 요 몇 백년간 인간 세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블루 엘프였던 것이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벌어지자 태자는 으쓱한 얼굴이 되어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아, 이쪽 분은 시벨리우스 씨라고 하오. 보다시피 블루 엘프 종족이지.” “세상에! 말로만 듣던 블루 엘프를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일반인에겐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 종족은 흔히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능통하여 인간으로서는 힘든 8서클의 영역을 심심치 않게 드나든다고 밝혀져, 마법사라면 꼭 한 번 쯤 만나보고 싶어 하는 존재였다. 세리엄은 물론, 문서를 통해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던 필립과 리오도 감탄한 얼굴로 엘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록 그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만 까닥하고 말았지만, 인간과 어울리기 싫어하는 그들 종족 특유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한 시간이 긴 알리사가 보기에는 단순히 시벨의 태도가 나쁜 것뿐이었다. 그녀는 곧 새침한 얼굴로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벨님! 소개를 받았으면 제대로 인사를 해야지 고개만 까닥이 뭐야? 너무 불량스럽잖아!” “사내놈들한테 정식으로 소개하는 취미는 없는데.” “그런 게 어딨어? 나중에 신관…아니, 엘님이 오시면 전부 이를 거야!” “윽. 알았어, 알았어! [만나서 반가워. 나는 시벨리우스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됐지?” “그건 너무 형식적이야. 꼭 책 읽는 것 같잖아!” “어른들의 세계란 원래 그런 거란다.” “어~~른?” 기가 막힌 알리사의 시선에 시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이래봬도 5천살 넘었다고. 우리 종족 중에서도 그 정도면 충분이 어른이야.” “헉! 그게 정말이야? 시벨님 나이가 5천살이라고?” “정확히 따지면 5,200살이지. 즉, 나이로 따지자면 이 중에서 내가 제일 어른인 셈이라고.” 거기까지 말한 그는 아직도 멍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의 일행에게 시선을 돌리곤 퉁명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서있지 말고 자리에 앉지 그래? 어차피 종족도 다르고, 나이도 내가 더 많으니까 말투가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아아. 물론이네. 그나저나 말로만 듣던 블루엘프를 이렇게 보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군.” 지금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렇게 과민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저 특이한 피부를 가진 엘프라고만 생각했을 뿐, 블루엘프란 종족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끊긴 교류 탓에 그들의 존재는 점점 인간들 사이에서 잊혀져가고 있었다. 새삼 서클렛에 봉인되었던 지난 몇 천 년간의 공백이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아, 시벨리우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4천 년 전만 해도 길거리에 굴러다니던 게 블루엘프였어. 나한테는 그런 반응이 더 새삼스러우니까 편하게 대해줬으면 좋겠군.” “그렇게 하겠네. 아참, 자네 종족들은 대게 마법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그럼 자네도 마법사인가? 몇 서클이지?” “글쎄…. 일단 드래곤보단 못하다고 해두지.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들보단 폴리모프의 실력이 조금 떨어지거든.” “…하하하! 농담도 잘 하는군.” 세상 어느 종족이 마법생물인 드래곤을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당연한 말을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시벨의 모습에, 세리엄은 그가 대답하기 싫어서 말을 돌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곤 쓴 웃음을 삼켰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진짜 블루엘프도 아닐뿐더러, 진실만을 얘기한 시벨로서는 그가 자신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오히려 이해할 수 없었다. 대답해도 못 믿을 거라면 애초에 왜 물었단 말인가? 잠시 괴상하다는 듯 세리엄을 바라보던 그는 곧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러고 보니 7서클의 마법사라고? 당신도 이번 전쟁을 도울 건가?” “마음은 굴뚝같지만, 무리라고 생각하네. 마법 같이 광범위한 공격은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끌어서 말이지. 내가 사람들한테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이번 전쟁에 카터스 제국의 개입이 있다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될 거야.” “흐음. 하긴, 황실의 수석마법사라면 이미 얼굴이 알려졌겠군. 라온 황자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한데, 두 사람은 힘들겠지. 그럼 이런 시기에 남의 저택에서 마냥 놀고 있겠다고?” “핫핫핫! 여기 있는 리글레오군이 황제와 함께 출진하기로 했으니 그것으로 참아주시게나. 사실 나 같은 늙은이보다야 젊은 청년이 보기에도 좋지.”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금발의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아무리 뜯어봐도 그는 체격이나 근육의 발달 면에서 검사라고 볼 수 없음은 물론, 딱히 마나를 다루는 기색도 없는 그야말로 평범한 남자였다. 그나마 차분하고 깊은 눈동자를 보아 제법 많은 지식을 갖추고 있는 듯하니, 참모의 역할 정도는 기대해볼 수 있을까? 자신을 향한 뜨거운(?) 시선이 느껴지자 리글레오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는 듯한 시선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과장이 심하군. 아무리 그래도 7서클의 마법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무슨 그런 섭한 소릴~! 때론 강한 힘보단 지혜로움이 전투를 더 수월하게 이끌어 가는 법이네. 그런 점에선 리오군 만큼 합당한 자가 없지.” “흐음, 그런가. 어쨌든 이쪽도 카터스의 귀족인거지? 그럼 차라리 황자가 맡은 부대에 합류하는 게 더 편하지 않겠어? 왜 이사나 쪽에?” “아아, 사실 리오군은 솔트레테 사람입니다. 클란 백작가의 둘째아들이죠.” 그 뒤 시벨리우스와 알리사는 라온 황태자를 통해 방금 전 1층 홀에서 벌어졌던 상황에 대한 대강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리오는 이번에도 친위 기사 때와 같은 반응이 나올 거라 생각하고 바짝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그들은 흥미로운 표정만 지었을 뿐이었다. “할버크 영주의 아들이라고?” “…예, 리글레오 드 클란이라 합니다. 편히 리오라 불러주십시오.” “흐응. 이번 전쟁엔 그쪽의 영주도 출진하게 될 텐데, 괜찮겠어? 이사나 옆에 있으면 반드시 싸우게 될 텐데. 아들이 아버지를 대적하게 되는 꼴 아닌가?” “그건…” 안 그래도 마음 한구석이 찝찝했던 리오는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면 황제는 이런 식으로 한 가문이 몰살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건지 모른다. 그러나 애초에 증명할 기회를 달라고 한쪽은 자신이었으니 억울하다고 할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나마 황제를 돕게 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으로 인해 가문의 죄가 조금이나마 덜어진다면 죽어서도 후환이 없을 것이다. ‘왜 진작 만나지 못했던 걸까.’ 지금껏 그가 알고 있던 이사나는 단지 ‘숙부에 의해 쫓겨난 어린 황제’였을 뿐, 그 이상도 이하의 존재도 아니었다. 소문으로 알려진 그는 매사 하는 일마다 한심스러웠기 때문에, 섭정왕에게 밀려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만, 그렇다고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저버린 대공 역시 무조건 옳다고 봐줄 수는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방금 전 홀 안에서 보았던 황제는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코앞에 닥친 전쟁에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선 자신이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묘한 확신마저 서려있었다. ‘내 날개가 진짜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는 것이라 했던가.’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리오는 역시 소문은 믿을게 못된다며 남모르게 중얼거렸었다. 도대체 어디의 누가 방탕하며 소인배의 심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그런 그의 속내를 짐작한 시벨리우스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말했다. “요 근래 녀석은 갑자기 성장했어. 나조차 몰라볼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부쩍 성숙해졌지. 폴리모프 마법을 해제한 뒤로 좀 더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게 된 것 같더군. 뭐, 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더욱 분발하는 거겠지만.” “…엘?” “아아. 우리들의 리더야. 그녀석이 아니었다면 이 인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도 없었을 테지. 아무튼 걱정마라. 남한테 몹쓸 짓을 시키는 녀석은 아니니까. 너를 전쟁에 끌어들이는 건 아마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기 때문일 거야. 애초에 그냥 가만히 있었다면 별 탈 없이 백작에게 돌려보냈을 텐데, 제 무덤을 판 격이군.” “아, 아니오! 저는 그런 건 바라지 않습니다!” 리오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시벨리우스는 과장되게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호오, 설마 자존심 때문이냐? 순순히 돌아가기는 싫다. 그렇다고 죽고 싶지도 않다? 이곳에 남으면 뻔히 네 부모 형제와 싸울 걸 알고 있으면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그, 그건…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려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뭐야, 그렇게 생각한 것 자체가 네가 이사나 쪽을 더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잖아. 결국 넌 녀석에게 인정받고 싶었을 뿐이야. 안 그래?” “……”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리오를 보며, 그는 자신의 생각이 맞았음을 확실했다. 아직 본인 스스로도 그런 감정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명마는 자신이 태울 주인을 미리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사나 녀석, 제법인걸.’ 엘의 그늘에서 벗어나 있는 지금, 녀석은 순수한 자신만의 힘으로 한 사람을 매료시킨 것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성장해 나갈 지, 시벨리우스는 점점 더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 여기까지 입니다^^;; 밤새서 썼는데도, 겨우 파트하나 채웠을 뿐이네요;; 결국 폭참은 다음 기회에..<-응? 이번 편은 그야말로 이사나를 띄우기 위해 몸부림 치는 현장~(두둥!) 다음 분량도 조만간 가져오겠습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8-15. 접전 (1) 쫓겨 다니는 생활도 이제 슬슬 지겹다고 생각했을 무렵, 황성에서는 클모어를 향해 대대적인 선전포고의 의사를 밝혔다. 이미 중간지역에 군사들까지 죄다 집결시켜둔 주제에 새삼스럽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그들 나름대로는 타 제국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모양이다. 지금 이대로는 아무리 봐도 저들 혼자 막무가내로 군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사나를 포함한 황제파의 귀족들을 전부 ‘반역도’로 명명하며, 제국을 배신한 죄의 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수도의 대다수 풍족한 귀족들은 환호하며 맞장구를 쳤지만, 일반 평민들과 천민들까지 전부 그 말에 동조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평소 흉흉한 소문을 달고 다녔던 대공이 이번 전쟁으로 강제 징병을 강행하는 바람에, 백성들 사이에선 이미 그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나빠져 있었다. “들었어? 이번 전쟁을 위해 섭정왕이 일으킨 군사의 숫자가 10만을 넘는다며? 그에 비하면 황제 폐하 쪽의 군대는 반도 되지 않을 거라더군. 과연 이기실수 있을까.”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를 말어. 당연히 이기셔야지!” “하지만 자그만치 전력의 차이가 반을 넘는다고? 수도에 배치된 군인들 표정 안 봤어? 얼굴마다 여유가 철철 넘치잖아. 여기까지 밀고 들어올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도 않는다구.” “아, 글쎄, 이긴다면 이기는 거야! 끌려간 내 남편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난 어디까지나 황제폐하의 편이라고.” “뭐야, 베시. 아직도 그걸 신경 쓰고 있었어? 행방불명된 네 아들이 실은 섭정왕한테 죽었다는 거?” “너라면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니? 아이들을 잡아먹는 괴물이라잖아! 나한텐 그 아이가 전부였어! 난 섭정왕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식당에서 식사를 할라치면 어김없이 화제로 나오는 것은 이번 전쟁의 승자가 누가 될지에 대해 점을 치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남자들은 거의 다 군대에 끌려가는 바람에, 홀로 남은 노약자와 여인들만이 하릴없이 수다를 떠는 식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의 대화는 좀 심각한 걸? 나는 슬그머니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앞에서 묵묵히 빵을 뜯고 있던 라피스와 데르온에게 속삭였다. “전반적으로 이사나에 대한 평가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녀석들은 잘 하고 있는 걸까? 뭔가 따로 작전을 짜고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응. 대충 들어보니 그리 나쁘진 않더군. 부대를 4개로 나눠서 각자 따로 친다나? 계획대로라면 꽤 많은 숫자가 몰살당할 것 같던데. 다른 한쪽에 따로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에게 보급품을 끊는다는 작전은 이미 성공한 모양이야.” “아,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라온 황자라면 몰라도 알리사까지 지휘관을 맡았다며? 믿어도 되는 걸까?” “카웰 후작도 함께 한다고 했으니 괜찮을 겁니다, 엘님. 사실 나이도 어린 대다 여자인 사람이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지위라도 높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그건 그렇네요. 그런데, 라피스. 넌 아까부터 왜 그렇게 똥 씹은 표정이야?” “…지금 왜냐고 물었냐?” 그러자 녀석은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듯 어깨를 부들거리더니, 들고 있던 마른 빵을 소리 나게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사람이 먹을 음식이야? 대체 언제까지 이딴 걸 먹어야 하는 건데!” “넌 사람이 아니잖아. 데르온도 그렇고.” “지금 장난칠 기분 아니야! 난 이제껏 어딜 가도 이런 식사는 해본 적이 없다고! 전쟁이고 뭐고 다 좋다 이거야! 그런데 왜 이런 고생을 사서해야 하는 거지?” “어쩔 수 없잖아. 이런 수상한 차림으로는 고급 음식점에서 받아주질 않으니.” “그러게 후드 같은 거 쓰지 않는다고 했잖아!” “이보세요. 이미 네 몽타주까지 다 돌았거든? 황성의 경비대가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얼굴 드러내놓고 아주 대대적으로 쫓겨 다닐 셈이야?” 삐딱하게 묻는 내 말에 녀석은 울화통이 터진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때 마침 식당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가 맞장구를 치는 바람에 형세는 전적으로 내 쪽이 유리해지고 있었다. “맞아, 은인. 얼마 전에 남자의 모습으로도 사고치는 바람에 이제 오도 가도 못하게 됐잖아. 그 얼굴 외에 다른 걸로는 바꿀 생각도 안하면서.” “아! 아스! 어서와. 일은 다 끝냈니?” 우리와 마찬가지로 후드를 깊이 둘러쓰고 있는 사람은 몇 주일 새 부쩍 성장해 버린 아스였다. 처음 만났을 때 12살을 갓넘어보이던 외모는 이제 17, 18살의 청소년으로 바뀌어 있었고, 말투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졌다. 문제는 점점 더 강해지는 마력을 제어하기가 어려워져, 그 냄새를 맡고 마족들이 자꾸만 몰려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의 경우처럼 아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따로 나가 그들을 처리하고 돌아오곤 했다. 내 옆의 빈자리에 앉는 그의 몸에선 언제나 그랬듯 옅은 피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오늘은 좀 늦었네?” “응. 이번엔 좀 어려웠어. 상대도 많은데다 도망치려는 녀석까지 있었거든. 쫓아가서 없애려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어.” “잘하셨습니다, 주군! 목격자를 남겨서는 아니 되십니다. 아직은 마계에 있는 놈들이 알 때가 아니니까요.” “알고 있어. 그래도 이젠 조심하는 것만으론 힘들 것 같아. 이렇게 마족들이 몰려들어서야 조만간에 소식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해.” “그렇겠지요. 부디 그 전에 마신께서 뭔가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좋으련만.” 데르온이 말하는 조치란 악신의 탄생에 대한 것이었다. 대공이 배후에 있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마왕 역시 이번 일에서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마계로 돌아간다고 했던 카노스와의 연락이 그 이후로 완벽하게 끊겨버렸다는 거랄까. 그 때문에 우리는 지금 신계에서 제대로 된 대처 방안을 세웠는지조차 알 지 못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내 쪽에서 먼저 신계로 연락을 취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령왕도 차원 이동의 능력이 있으면 얼마나 좋냐고. 그럼 엘뤼엔 한테라도 물어볼 텐데.” “그렇게 조급해 할 것 없어. 어차피 아크아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너희들에게 반드시 소식이 들어올 테니까. 어쩌면 지금쯤 정령계에는 이미 서신이 도착했을지도 모르지.” “아~ 하긴, 그렇겠다. 그럼 트로웰이 정령이라도 보내서 알려주겠지? 결국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는 건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그런 내 모습을 본 라피스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녀석은 묻기가 조심스럽다는 듯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거냐?” “어라? 소멸 시키는 방법이 있어? 그게 뭔데?” “…그럼 그렇지.” “헤헤, 내가 원래 이런 정보에 둔하잖아. 다 알면서 새삼스럽긴. 그보다 그 방법이란 게 뭔데?” “됐다. 그냥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아.” “엥? 뭐야, 그게?” 말해줄 것처럼 해놓고선 갑자기 분위기를 흐리는 라피스를 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평소에도 워낙 변덕이 죽 끓듯 하던 녀석이었기에 꼭 놀림을 당한 것 같아 기분이 상해지려는 참이었다. “왜 말을 하다 말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꺼내지나 말지. 괜히 궁금해지잖아~” “…그냥, 넌 모르고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그런 것뿐이야.” “그런 게 어딨어? 나도 엄연히 이곳을 지배하는 4대 정령왕의 하나라고! 어차피 언젠간 알게 될 일이잖아! 치사하게 자꾸 이럴래?” “맞습니다, 라피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속 편하게 털어 놓으시죠? 저도 궁금하군요.” “나도 궁금해, 은인. 방법이 있다면 아주 불가능하단 소리는 아니잖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 마지막으로 아스까지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자 라피스는 찌푸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곤란한 듯 나를 보며 몇 번이고 신신당부하는 말을 건넸다.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고 들어. 그렇게 태평한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대체 어떤 방법 이길래…알았어. 놀라지 않을 테니까 일단 말해봐. 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글쎄, 까다롭긴 하겠지만 타이밍만 잘 맞춘다면 그리 힘들지는 않을걸.” “타이밍?” 어리둥절하게 묻는 우리에게, 라피스는 아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우선 내 짐작이 맞다면 이미 신들은 거의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일거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재물의 숫자가 거의 마지막에 임박했을 테지? 그럴 경우 각성만 안했을 뿐이지, 거의 악신이나 다름없다고 들었거든. 웬만해선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없어. 마치, 부화 직전의 마족의 알처럼.” “엥? 그럼 어떻게 해? 마냥 손 놓고 각성하는 걸 봐야 한다는 거야?” “맞아. 내가 알기론 그래. 다만 각성하는 순간 육체의 변화로 인해 약간의 빈틈이 생긴다고 하더군. 소멸시키려면 그때밖에 없다는 소리지. 아니면 그 전에 피를 얻는 유통수단을 제거해서 각성의 시기를 최대한 늦추거나.” “!!” 아아, 이래서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한 거였구나.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것의 어디가 각오하고 들어야 할 이야기라는 걸까? 시작 전부터 잔뜩 겁주기에 뭔가 대단한 말이라도 나올 줄 알았던 나는 약간 허무한 심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데르온과 아스역시 마찬가지인 듯,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실망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게 전부야? 그렇게 심각하게 말할 정보는 아닌 것 같은데. 그냥 타이밍만 잘 노려서 공격하면 되는 거잖아.” “…그 타이밍에 반드시 누군가가 죽어야 하는데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젠장. 결국 말하게 되는 군. 잘 들어, 엘. 악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상급신의 목숨 하나야. 알았어? 각성의 순간 신 하나가 뛰어들어 같이 자폭하는 수밖에 없다고.” “!!!” 순간 딱딱한 무언가가 머리를 강하게 후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라피스는 놀라는 내 표정을 보고 잠깐 후회하는 얼굴을 했지만, 이왕 시작한 말은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설명했다. “아마 결전의 때가 오면 신계에서 대거 상급신들이 내려올 거야. 그리고 악신이 각성하는 순간을 노려 주박술을 펼치겠지. 실제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건 단 몇 분. 그때 놈과 같이 희생할 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거다. 아마 지금쯤 투표라도 하고 있을 걸?” “…말도 안 돼.” “뭐, 아무튼 그렇다는 소리야. 나도 어디까지나 들었던 이야기기 때문에 확실하다고 할 수는…” “그, 그럼 엘뤼엔은? 엘뤼엔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야? 그 희생할 상급신에 엘뤼엔도 해당돼? 아직 신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 창백한 얼굴로 묻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가차 없이 냉정한 것이었다. “기간 따윈 상관없어. 상급신이라는 조건만 맞추면 되니까. 아마 엘뤼엔도 예외가 아닐 거다. 악신의 탄생을 막는 것은 전 차원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야. 그런 일에 초보라고 빠질 것 같아?” “…그런…” “그러게 내가 듣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했잖아. 일단 머리 좀 식혀. 너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라고.” “……”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지는 기분이 바로 이런 걸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이라도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바로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윽-” 곧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시야가 어지러워져 몸속에 있는 모든 것을 토해내고 싶을 만큼 비위가 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런 내 상태를 눈치 챈 아스가 당황한 얼굴로 얼른 나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렸다. “대부! 괜찮아? 정신 차려봐. 진정해!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어. 그냥 그렇다는 가정만 들었을 뿐이잖아.” “미, 미안해. 나 잠깐…아니,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과민한 반응이라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번 통제를 잃어버린 감정은 아무리 애를 써도 쉽게 추스를 수가 없었다. ‘엘뤼엔이 죽는다.’ 그 생각만으로 이미 온 몸이 단단하게 결박되어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라피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평소와는 달리 다독이는 듯 고분고분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신계의 신이 어디 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쩌면 자원하고 나서는 녀석이 있을지도 몰라.” “아…” “뭐야? 그 표정은? 설마 그 정신으로 다른 신들까지 걱정하는 거냐? 그런 걸 바로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튼 녀석은 절대 죽으려고 하지 않을 걸? 희생되느니 차라리 신계의 모든 신들을 작살내려고 할 테니까. 또 모르지. 희생되는 척 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자기대신 다른 놈을 집어 던질지도. 킥.” 그러나 라피스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예고 없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호오. 그건 설마 날 향하는 말이냐? 그것 참…맞기는 한데 어째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지는 구나, 빌어먹을 도마뱀아.” “!!” “…엘뤼엔!!” 놀란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어느새 기척도 없이 나타난 엘뤼엔이 이마에 혈관마크를 띄우고 살벌하게 웃고 있었다. 뒤편에서는 그의 화려한 외모를 보고 놀란 사람들이 붉어진 얼굴로 웅성거리기 바빴다. “여긴…어떻게…” 어쩐지 지금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나는 정신없이 엘뤼엔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꼭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엘뤼엔은 라피스를 쏘아보던 것을 그만두고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혹감이 가득 드러난 내 얼굴을 잠시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바라보던 그는 곧 미소 지으며 말했다. “놀러왔다. 아들.” ============================================== .........후후후후후..T^T......... [정령왕 엘퀴네스] 8-16. 접전 (2) 그의 입에서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나는 안도감에 울컥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다 큰 녀석 남자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을 잠시 아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엘뤼엔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왔다는데 반갑다는 말도 안하는 거냐? 어째 점점 반항기 같다?” “…어, 어떻게 왔어? 아니, 그보다…방금 라피스가 한 말 진짜야? 정말 상급신이…” “아아, 신경 쓸 것 없어. 저 쓸모없는 도마뱀의 말마따나 희생할 신은 나 말고도 차고 넘치거든. 넌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아무튼 저놈의 도마뱀 때문에…” “크악! 그놈의 도마뱀 소리 좀 집어치우지 못해!!” 평온하게(?) 이어지던 대화는 갑자기 발작하는 라피스로 인해 방해를 받고 말았다. 찌푸린 표정을 한 엘뤼엔은 씩씩거리는 녀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도마뱀을 도마뱀이라고 하는 게 뭐가 문제지?” “대체 내가 왜 도마뱀이야!! 눈이 있다면 종족 구분은 확실히 하라고! 그런 저등한 파충류와 동급 취급 하지 맛!” “훗. 네 놈은 비하(卑下)라는 것도 모르나? 알고 봤더니 머리도 나쁘군.” “…이 재수 없는 자식!” 당장 폭발할 듯 부글거리는 라피스와 싸늘한 얼굴로 폭언을 날리는 엘뤼엔의 모습은 서로의 성격만큼이나 완벽하게 대조적이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불과 물의 대결이라고나 할까. 둘에게는 심각한 문제 였을진 몰라도, 나는 평소와 똑같이 흘러가는 분위기에 안심하곤 혼란스웠던 마음을 차츰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제 서야 주변을 둘러싼 구경꾼들의 시선을 느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의 팔을 붙들었다. “일단 나가자. 여긴 사람들이 쳐다봐서 안 되겠어. 그런데 엘뤼엔은 지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거 아니야? 설마 이번에도 금방 돌아가야 하는 건?” “훗. 이게 뭔지 알아 맞춰보련?” “??” 씨익 웃은 그가 가리킨 것은 그가 걸고 있던 얇은 은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별다른 장식 없이 그저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평범한 목걸이 같은데?” “틀렸다, 아들. 이건 신력을 억제하는 물건이야. 주신만이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장기간 중간계에 체류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즉, 이전처럼 급하게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 그런 것도 있었어? 그런데 왜 이전에는 안 걸고 나왔는데?” “원래 내 것이 아니거든. 카노스놈 한테서 뺏은 거야. 그 동안 쌓인 서류까지 고스란히 맡겨두고 왔지. 지금쯤 이를 갈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뭐,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바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엘뤼엔은 무척이나 후련하다는 듯이 샤방하게 웃어보였다. 저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마신에게 쌓인 스트레스가 장난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근데 카노스는 마계에 있던 거 아니었어? 더 조사해 볼게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아. 얼마 전에 돌아왔어. 그 녀석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니까. 원래대로라면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놈의 부작용 때문에…” “부작용?” 약물 과다 복용도 아닌데, 웬 부작용이란 말인가? 나는 오만 인상 찌푸리고 있는 엘뤼엔을 보며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 질문의 대답은 그가 아닌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감각이 완전히 둔화됐다지? 그것도 가장 치명적인 방.향.감.각.이. 훗, 엉뚱한 장소에서 헤매고 있는 엘뤼엔을 발견했을 때의 그 기묘한 기분이란…아아,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 “젠장! 닥쳐!” “…아?” 험악하게 소리친 엘뤼엔이 바라본 것은 활짝 열리진 식당의 문 앞이었다. 그곳엔 언제부터 있던 건지,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늘씬한 청년과 등 뒤로 새하얀 은발을 늘어뜨린 무표정한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겉보기의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 엘뤼엔과 친분이 있는 걸 보면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더욱 컸지만, 그다지 기억에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한 기분이었다. ‘누구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웅성웅성. 한 눈에 봐도 시선을 확 끌만큼 매력적인 미모들 탓에, 가게 안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어수선 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시선들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감격적인 상봉은 그쯤에서 마치고 이제 그만 나오는 게 어때? 기다리는 쪽도 생각해 달라고. 설마 여기서 밤 샐 생각은 아니겠지?” “…기다리라고 한 적 없을 텐데.” “나~참, 그게 이곳까지 안내해준 사람한테 할 말이야? 아무튼 여전히 성격이 나쁘다니까. 안 그래, 다들? 어라라. 그런데 뭔가 옷차림들이 하나같이 음침하네. 얼굴을 왜 그렇게 가리고 있어? 뭐야, 라피스. 네가 또 사고 친 거야?” 친근하게 웃으면서 묻는 얼굴은 분명 처음 보는 건데도 낯설지 않았다. 아마도 햇볕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피부나 선연한 황금색 눈동자가, 트로웰과 많이 닮았다고 느껴서 일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라피스와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라피스의 대답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사고 친 적 없어. 그저 이곳 인간들이 귀찮게 굴었을 뿐이지. 그나저나 별 일이군. 항상 꼬맹이로만 다닐 줄 알았더니, 갑자기 무슨 마음의 변심이냐, 트로웰? 그 모습은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군.” “!!” 저, 정말 트로웰 본인이라고? 나는 휘둥그렇게 벌어진 눈으로 그가 트로웰이라 부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생긋 웃으면서도 입으로는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었다. “뭐,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지 않잖아? 쿡쿡, 농담이야. 사실은 지금부터 엘을 따라다닐 생각인데, 예전의 동료들과 만나기라도 하면 곤란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엘은 꽤나 놀란 모양이네? 설마 날 못 알아 본거야?” “허걱…. 진짜 트로웰이야?” “흐음. 정말 못 알아본 모양이네. 그냥 키만 좀 크게 한 것뿐인데, 그렇게 많이 달라졌어? 그럼 저기 있는 사람도 모르겠구나?” “에?” 그가 웃으며 가리킨 사람은 처음 등장 때부터 함께 있었던 은발머리의 여자였다. 그동안 이사나의 은발에 익숙해져 있던 탓에 별로 신기하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녀의 머리카락은 보통의 은발과는 달리 살짝 투명한 빛을 띄우고 있는듯 했다. 눈동자는 희미한 회색. 그 안에 박힌 짙푸른 동공을 멍하게 쳐다보던 나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우아하게 서있는 여자를 향해 무심코 물었다. “…설마, 미네?” “맞습니다, 엘. 그래도 빨리 알아보시는 군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달라져서 못 알아보실 줄 알았습니다. 키라는 게 전체의 인상을 꽤나 좌우하는 모양입니다.” “……” 이게 무슨 ‘키만 크게 한 것 뿐!’이라는 거냐!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나마 예전과 같은 건 딱딱한 말투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밖에 없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어설프게 대답했다. “하하하! 머, 멋지다, 미네. 정말 달라졌어. 이건 거의 폴리모프 수준인 걸?” “그렇긴 합니다만, 이 모습을 유지하려면 평소보다 힘이 더 많이 듭니다. 전 역시 본 모습 쪽이 더 편하군요. 트로웰이 ‘어린애’는 전쟁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바꾸긴 했습니다만.” “전쟁이라니? 설마 지금 내 유희에 합류하려고?” 놀라서 두 눈만 깜빡이는 나에게, 트로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마신이 정령계에 찾아왔었어, 엘. 너를 도와주라고 부탁하더라고.” “나를?” “응. 이사나의 숙부라는 인간이 악신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는 건 알고 있지? 중간에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가능하면 결전의 때까지 함께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런데 오는 길에 엘뤼엔하고 우연히 만났지 뭐야? 바보같이 널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길래 내가 데려왔어. 잘했지?” “헤, 헤매?” “젠장. 목걸이의 부작용이야. 마신 전용으로 맞춰진 거라 내가 컨트롤하기 어려웠을 뿐이라고. 그나저나 ‘바보’라…트로웰. 너도 그새 많이 컸구나. 그렇지?” 엘뤼엔의 서늘한 목소리를 들은 트로웰은 찔끔한 얼굴로 배시시 웃어보이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딴청을 피우며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하하하…그, 그런데 엘! 이쪽은 누구야? 둘 다 마족인 것 같은데. 새로운 동료?” 그가 가리킨 사람은 지금까지 멀뚱한 시선으로 우리들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아스와 데르온이었다. 그때서야 아직 서로에게 안면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잠시 미안한 시선을 보낸 뒤 얼른 두 사람(?)을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데르온과 아스모델이라고 해. 아스는 카노스가 선택한 미래의 마왕이야. 동료라기 보단 내 아들 같은 존재지. 내가 아스의 대부거든.” “대부? 헤에~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내가 기억하기론, 저쪽 데르온인가 하는 마족은 예전에 우리를 몰래 감시하고 있던 것 같던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걸?” “예, 예? 무, 무슨…” 이제 까마득히 지나버린 옛일로 느껴졌지만, 샴페인 용병단과 동행했을 적 우리를 쫓아다니던 것을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나 매튜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데르온은 당황한 얼굴로 어깨를 움찔 떨었다. “기억 안 나? 용병단에 있을 때 엘 옆에 있었던 검은 피부의 소년 말이야.” “검은 피부? 헉! 그, 그럼 설마!!” “그래, 맞아. 그 사람이 나였어. 그때 케르베로스를 풀어놨던 녀석들도 너희들이었지? 내가 몰래 시야를 방해하느라고 꽤 애썼는데 말이야. 눈치 채지 못했다니 섭섭하네. 지금 엘 옆에 있는 건 카노스의 명령인가 보지?” 마치 탐색하는 듯한 그의 시선에 데르온은 식은땀을 뻘뻘흘리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리곤 이제 자신의 주군은 아스모델밖에 없으며, 이전의 마왕과 동료에 대한 의리 또한 없다는 뜻을 밝혔다. “아스님을 뵌 순간부터 저는 그의 부하로 정해졌습니다. 이미 저는 과거의 제 자신을 버린 상태입니다.” “흐음. 그렇다고 하니 나 또한 그때의 일은 묻어주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주군을 선택했군. 아마 그대로 있었다면 반드시 죽었을 거야.”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 전 그의 동료였었던 세르피스가 죽은 일이 떠올랐는지, 데르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자자, 이제 한참이나 지난 일이야. 원래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라잖아. 하하! 그보다 아스도 인사해야지? 이쪽은…” “나도 알아. 땅의 정령왕 트로웰.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지? 대부랑 비슷한 기운이 느껴져.” “와~ 우리 아스 역시 똑똑하구나. 맞아. 내 가족이자 친구들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말 잘 들어야 한다?” “응, 알았어. 잘 부탁해, 대부 친구들!” 명랑하게 인사하는 아스의 모습에 트로웰과 미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몇 주일 전이라면 모를까, 이제 훌쩍 커버려 겉보기로 별반 차이나지 않은 녀석을 내가 어린애처럼 대하는 게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스나 나나 이쪽이 더 편했기 때문에, 새삼 어른취급을 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 대할라치면 아스 쪽에서 먼저 거부하는 일도 빈번했다. ‘<대부가 나를 어려운 사람 대하듯 하는 건 싫어. 그냥 동생이나 아들처럼 필요할 때 생각나는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갑자기 훌쩍 자라버린 아이에게 쉽게 적응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스의 변하지 않은 태도 덕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그의 대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속으로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다음으로 한 구석에서 따분하게 서있던 엘뤼엔을 가리키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여긴…음…형벌의 신 엘뤼엔이라고 해. 내 아, 아버지야.” “!” 그 순간 엘뤼엔의 눈동자가 놀라움에 크게 벌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그를 ‘아버지’로 소개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터라, 나 또한 굉장히 어색하고 긴장한 상태였다. 남들 다하는 말이라도, 나에게는 무엇보다 마음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으음.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라고 소개한건 좀 오버였나? 혹시 기분 나빴음 어쩌지?’ 어쩐지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게 겁이나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얼굴에 미소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괜히 기쁘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해서 나는 연신 헛기침을 내뱉으며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아스는 나에게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만 놀라워하고 있었다. “대부한테 아버지 있었어? 그럼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해?” “글쎄…할아버지?” “…아들아,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것 같구나.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 해볼까?” “하하하! 노, 농담이었어. 그냥 이름으로 부르면 될 거야. 일단 마신과 동급이니까 그와 비슷하게 대하면 될 것 같은데.” “마신님과 동급? 으음, 알았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인 아스는 곧 엘뤼엔을 향해 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위대하고 존귀하신 존재님, 안녕하세요!” “…쿨럭! 그, 그건 뭔 소리?” “어라? 이렇게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알에 있었을 때, 마신님은 항상 이렇게 부르라고 했었는데. 대부 아버지도 마신님과 동급이니까 똑같은 호칭이 필요하잖아.” “으윽…그 신은 대체 애한테 뭘 가르쳐 놓은 거야!!”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웃던 카노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가 지나가듯 한마디 툭-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보다 말이야. 계속 여기 있어도 되는 거냐? 네가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아까부터 인간들이 계속 몰려들고 있는데.” “뭐?” 황당한 표정으로 돌아본 나는 주위를 가득 찬 사람들을 발견하곤 그대로 몸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워낙 한꺼번에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느라, 우리가 있던 장소가 식당이었다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엘뤼엔부터 시작해서 트로웰, 미네르바까지 거리낌 없이 소개했던 지난 장면이 떠오르자 내 얼굴은 스스로가 느낄 정도로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마계공작이니 마왕이니 하는 말도 오고가지 않았던가!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너무 눈에 띄어버리는 짓을 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어, 어떡하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그러나 이런 고민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피식-웃은 엘뤼엔의 눈동자에 옅은 은빛이 돌았다고 생각한 순간,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마치 몽유병에 걸린 마냥 멍하게 변해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을 땐, 그들은 모두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관심을 끊어버린 상태였다. 가끔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건 일행들의 외모에 대한 순수한 감탄의 의미였다. 어느새 썰물처럼 식당 안을 벗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엘뤼엔에게 물었다.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야?” “우리가 대화한 것을 본 기억을 지웠다. 아마 자기들이 왜 여기있는지도 모를걸?” “……” 혹시라도 문득,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땐 생각하라. 당신의 기억도 어떤 신에 의해서 지워진 것일지도 모른다. *** “우.연.히. 헤매고 있는 걸 발견했다고? 거짓말도 잘하는 군.” 식당을 벗어나자마자 엘의 시선을 피해 낮게 중얼거린 사람은, 당장이라도 죽일 듯 트로웰을 살벌하게 쏘아보고 있던 엘뤼엔이었다. 그러자 트로웰은 난감한 듯 웃으며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런, 이런. 그럼 날더러 솔직하게 말하란 말이야? 네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게 하러 감시하러 왔다고?” “내 행동에 참견 받을 이유는 없어.” “그건 너만의 생각이겠지. 이런 게 싫다면 다시 신계로 돌아가. 그럼 다 해결되는 거 아닌가?” “젠장…대체 카노스놈 한테 무슨 소리를 듣고 이러는 거냐?” 기가 막히다는 듯 묻는 말에 트로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얼마 전 정령계로 찾아왔던 마신과의 대화가 되풀이 되고 있었다. “엘뤼엔을 막아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앞 뒤 설명 없이 덜컥 내놓은 부탁은 트로웰과 미네를 당황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카노스는 순순히 대답해줄 마음이 없다는 듯 여전히 웃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악신을 소멸시키는 방법에 대해서 들은 적 있어?” “소멸? 아아. 상급신 하나의 희생 말인가. 설마 방금 한 말이 그것과 관계가 있는 거야?” “맞아. 나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신계에서 회의가 열렸던 모양이더라고. 그 결과 희생할 신으로 엘뤼엔이 뽑혔다고 하더군. 물론 녀석은 화려한 방법으로 거절했지만.” “화려한 방법?” “신계의 신들을 거의 다 소멸 직전으로 만들어 놨어. 덕분에 결정이 보류 되서 곧 다시 회의가 열릴 참이지. 이런 와중에 신기하게도 자원하는 녀석들은 없단 말이야? 평소엔 그렇게 삶이 지겹다, 지겹다 해도 막상 죽기는 싫었던 모양이지.” “…아무튼 결정이 그렇다면 엘뤼엔과는 상관없는 것 아닌가? 아니면 또 뭔가 다른 문제가 있는 거야?” 그러자 카노스는 이번엔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얼마 전에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주절주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실은 내가 잠시 방심한 사이에 녀석이 내 목걸이를 들고 중간계로 내려가 버렸거든. 뭐, 그것 때문에 내 일거리가 밀려서 복수하려는 건 아니고…아니, 솔직히 좀 억울하긴 하지만 그거야 뭐 내가 한 짓도 있으니까 인과응보인 셈이지. 어쨌든 엘뤼엔좀 막아줘. 다시 신계로 돌아오게 해주면 더 좋고.” “하아. 좀 알아듣게 말해. 구체적으로 뭘 막아달라는 건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마음이 읽히지 않는 상대와의 대화는 이래서 답답하다고 생각하며 트로웰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카노스는 갑자기 한 쪽 팔의 소매를 걷어 불쑥 그의 눈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흰 피부위에는 상당히 끔찍했을 상처자국들이 보기 흉하게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슨?” “악신의 배후가 밝혀졌다고 했지? 이건 그 조사를 완료하고 나오는 과정에서 입은 상처다. 보다시피 치료신이 직접 돌본 건데도 완쾌가 되지 않았어. 이걸 본 엘뤼엔은 미처 말릴 틈도 없이 내려가 버렸지.” “이미 악신이나 마찬가지라는 건가…. 그런데 엘뤼엔이 왜…아! 설마, 엘 때문에?” 놀란 표정으로 묻는 그에게 카노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실수였어. 엘이 위험할거라고 했거든. 사실대로 말하자면 위험한건 너희 4대 정령왕 모두였지만, 녀석의 귀에는 아들밖에 안 들렸던 모양이야.” “하긴, 아크아돈에서 악신이 탄생한다면 우리 정령왕들이 가장 거슬리겠지. 그럼 오히려 잘 된 거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서로 힘을 합치는 편이 유리하잖아.” “어이. 내 상처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엘뤼엔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악신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라고. 게다가 굽히지 않는 녀석의 성격상, 적당히 도망치려고 하지도 않을 테니 십중팔구 죽을 거야.” “!!” 생각지도 못한 말에 트로웰은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아직 악신이 대대적으로 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엘이 위험한 처지에 빠진 것도 아닌데 당연한 듯 ‘죽음’을 언급하는 그의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설마…엘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이번 그의 유희가 악신과 관계된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이사나의 숙부란 인간하고도 연관이 있을 텐데…혹시 마왕이냐?” “정답. 눈치 챌 줄 알았어.” 트로웰은 생긋 웃는 카노스의 얼굴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마왕이 배후라면, 결국 이번 일은 마신인 그의 관리부족으로 일어났다는 소리다. 이제 와서 따져봤자 시간 낭비밖에 되진 않겠지만. 그 시선을 느낀 듯, 카노스는 제법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짧게 사과를 건넸다. “이번일은 마족을 관리하는 신으로서 정말 면목이 없다. 미안하게 생각해. 최대한 수습에 힘쓰겠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뭘 하라는 소리지? 엘뤼엔더러 엘을 지키지 말라고 설득이라도 하라고?” “냐하하하~ 그거 괜찮은데. 아아, 농담이야, 농담.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일단 내가 걱정하는 건, 녀석이 소멸을 자원하게 되는 상황이야. 이미 거절하긴 했지만, 마음이란 언제든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거니까.” “엘뤼엔이 엘을 놔두고 죽는 길을 선택할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그렇지. 하지만…이런 상황에서 멋대로 중간계로 내려간 게 이상하지 않아? 정 안될 것 같으면 이제까지 했던 것처럼, 위험한 순간에 내려가서 도와주는 방법도 있어. 굳이 신력을 억제하면서까지 갈 필요는 없다는 소리지. 본 능력을 전부 발휘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거지?” “그거야…” “게다가 녀석이 나한테 했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네 힘만으론 안 될 거라고 했더니, ‘아들은 지킬 수 있겠지’라더군. 단순히 보호해 주러 간 게 아니라, 마치 죽기 전 마지막 작별인사라도 하고 올 것 같은 얼굴이었어.” “!!” 그때의 상황이 생각났는지 씁쓸한 표정을 하는 마신을 보며 트로웰은 한참동안이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엘뤼엔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이때가 기회라는 듯, 카노스는 망설임 없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신계에선 아직 결정을 보류한 상태지, 다른 희생자를 뽑은 게 아니야. 즉, 엘뤼엔이 유력한 후보임엔 변함이 없다는 거지. 이런 시기에 멋대로 자리를 이탈한걸 알게 되면 말이 많을 거다. 그러니 그가 중간계에 내려가 있는 동안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막아줬으면 좋겠다는 거야.” “흐음. 마신 카노스가 그렇게까지 엘뤼엔을 아끼고 있을 줄은 몰랐군.” 빈정거리듯 건네는 말에도 카노스는 생긋 웃기만 할 뿐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좋은 녀석이야. 성격이 모나서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뿐이지. 너희들이 엘을 아끼는 것처럼, 나에게도 친구를 챙길 권리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엘을 위해서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잖아? 그가 죽으면 가장 슬퍼할 존재가 누구일것 같아?” “…역시 엘이겠지. 좋아. 어차피 그의 유희에 악신이 개입된걸 알게 된 이상 이곳에서 마냥 지켜볼 여유 같은 건 없으니까. 겸사겸사 하는 셈 치지.” 그 뒤 트로웰과 미네르바는 두말없이 중간계로 내려와 제일 먼저 엘뤼엔의 기운부터 찾았다. 그리곤 한창 엉뚱한 곳에서 해매고 있는 그를 발견하고 이렇듯 함께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트로웰은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는 엘뤼엔을 바라보며 생긋 미소 지었다. “친구 잘 둔 탓이라고 생각해. 마신이 말하길, 네 행동이 너무 눈에 띄면 곤란하댔거든. 지금은 권유상태지만, 나중엔 강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했어. 주신이 직접 명령을 내리면 아무리 너라고 해도 별수 없잖아? 어쨌든 나로서도 네가 희생하는 상황은 내키지 않으니까.” “희생은 누가! 그런 건 다 헛소리라고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게다가 대체 네가 언제부터 남의 일에 신경 쓰는 성격이었지?” “아니. 나도 이런 내 행동이 평소답지 않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엘이 슬퍼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까…” 살짝 말끝을 흐린 트로웰의 얼굴은 그 순간 사나운 맹수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다정다감하던 모습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차가운 냉기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아들을 울리는 나쁜 아버지는 되지 말라고, 엘뤼엔.” ===================================== 저는 언제나 트로웰을 편애합니다...와하하<-퍽! [정령왕 엘퀴네스] 8-17. 접전 (3) 정해둔 일주일의 시간이 흐르자 각 부대는 작전을 실행하는 날짜와 시간을 정한 뒤 서로 맡은 책임을 떠안고 흩어졌다. 이사나의 계획에 따라 알리사의 제 3부대는 계곡 쪽을, 늪지대는 시벨리우스의 용병대가 맡게 되었다. 나머지 두 부대는 소란을 일으켜 다른 쪽으로 지원을 보낼 수 없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몸으로 때우는 식이라, 위험부담이 가장 큰 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덕분에 군사의 배치가 그 두 부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져, 정작 알리사와 시벨리우스가 맡은 부대는 채 4천을 넘지 못했다. 1만의 군사를 상대로 하는 숫자치곤 턱없이 부족했지만, 어차피 유인이 목적이기 때문에 재빠르고 비밀스런 이동을 해야 하는 그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클모어를 떠난 후 며칠 뒤 목표했던 장소에 도착한 시벨리우스는 그가 맡은 용병대와 함께 낮은 포복으로 숨어 동쪽의 군사들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작전이 실행되는 것은 다음날 새벽 무렵이라, 아직 기다리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코앞에 닥친 위기에도 어찌된 일인지 용병들의 얼굴은 태평하기만 했다. 개중에는 서로 농담을 건네며 낄낄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저들 나름대로의 긴장을 풀기위한 방법이라나, 뭐라나. 그들의 모습을 본 시벨리우스는 새삼 이사나의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라온 황자는 물론, 어린 알리사나 기사도로 똘똘 뭉친 후작으로서는 저 자유분방한 족속들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시벨리우스는 4개 부대 중에서 가장 너그러운 지휘관인 셈이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용병들의 태도는 점점 더 나태해졌지만, 그는 특별히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다. 저러다가도 막상 전투가 다가오면 알아서 잘 싸우는 게 용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묘하게 서로의 상성에 맞아, 용병들은 이 엘프 지휘관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정작 시벨리우스 본인은 귀찮아하는 쪽이었지만. 특히 신경 쓰이는 족속은 샴페인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쓰고 있는 용병단으로, 단원인 여자 두 사람을 포함하여 도무지 평범한 구석이라곤 찾아보기가 힘든 인간들이었다. 지휘관인 그를 향해 넉살좋게 말을 놓는 ‘센스’도 오직 그들만이 발휘할 수 있는 신공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이, 파란 대장! 아직 멀었어? 벌써 이만큼이나 어두워 졌는데.” “시벨리우스라고 부르라니까! 그리고 결전은 새벽이랬잖아! 아직 멀었다고.” “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배도 고프고, 아까부터 슬슬 졸리기 시작했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 마. 눈이 그렇게 또랑또랑한 주제에.” “오옷! 역시 눈치 챘어! 어이, 다들 봤어? 내가 맞출 거라고 그랬지? 자, 어서 돈 내놔! 10실버야, 10실버!” “앗싸~이겼다!” “쳇! 이왕이면 좀 속아줄 것이지.” “에엥. 나 돈 없는데…” “……” 두 남자가 환호하며 소리치자 보라색 머리와 금발 머리의 여자가 나지막히 투덜거렸다. 그새 자신을 두고 내기 판이라도 벌였던 건가. 시벨리우스는 새삼 저들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그나마 좀 듬직해 보이는, 용병단의 리더인 듯한 남자가 그들을 나무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마이티, 헤롤. 이제 그만들 해, 보는 눈도 있는데 창피하지도 않냐?” “헹~ 내기에 못 끼어서 서운한 티내기는. 그래봤자 대장 몫은 없어. 이건 다 우리 거라고.” “약 오르지? 메렁~메렁~”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 이것들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그도, 그것에 굴하지 않고 놀리기를 계속하는 상대 쪽도 이미 이런 상황엔 이골이 날 정도로 익숙한 듯 보였다. 아니, 이미 즐기는 경지라고 해야 할까? 잠시 혀를 쯧쯧 찬 시벨리우스는 다시금 전방의 장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게 쌓여진 성벽 앞에 진을 치고 있는 텐트와 불빛들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기가 질릴 정도로 상당히 많은 숫자를 의미하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이쪽뿐만이 아닌, 알리사와 이사나가 맡은 곳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흐음. 지금쯤이면 알리사한테 신호가 올 때가 됐는데.’ 이번 작전은 4개의 부대가 서로 동시에 쳐야만 최대의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에, 그는 진득하게 다른 부대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러자 잠시 후, 수풀 사이를 제치고 소년의 종아리만한 크기의 작은 난쟁이가 고개를 빼곰 들이미는 것이 보였다. 알리사가 다루는 땅의 하급 정령인 ‘놈’이었다. “호오. 드디어 소식이 왔군. 알리사는 출격 준비를 모두 마친 거냐?” 끄덕끄덕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쪽도 슬슬 작전을 실행해야 겠군. 어이, 이제 다들 일어나. 사냥할 시간이다.” “오오! 드디어!” “지루해서 죽는 줄 알았네! 간만에 실컷 포식해 보실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료함에 찌들어 있던 눈들은 출전 명령이 떨어진 순간 어느새 거친 맹수처럼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출발하기 전 시벨리우스는 다시 한 번 용병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건네는 것을 잊지 않았다. “놈들을 유인할 장소는 외워뒀겠지? 무모하게 깊이 들어갈 필요는 없다. 적당히 싸우는 척 하다가 후퇴하도록 해. 말해두지만 유족들에게 돌아갈 돈이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괜히 날뛰다가 죽지 말라고. 이사나는 가난하거든.” “와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얼굴들은 이미 이런 상황에는 질리도록 익숙하다는 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쟁이란, 그저 평소 생활하던 방식의 연장일 뿐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일반 군사와 용병의 다른 점일 것이다. “자아! 그럼 시작해 볼까?” 피유우우~~ 콰아아앙! 그러자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저 멀리 남쪽의 하늘에 붉은 광선이 터져 오르기 시작했다. 이사나가 맡은 제 2부대가 돌격했다는 신호였다. “적이다! 적의 기습이다!!” “남문으로 적이 기습했다!!” 예고 없이 하늘을 밝히는 빛줄기에 보초를 서던  대공의 군사들이 모두 소리치며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지만, 정작 자신들의 앞에 다가와 있는 위험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시벨리우스는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마법으로 축포를 쏘아 하늘을 밝혔다. 캄캄하던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지자 그것을 신호로 용병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거침없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피유우우~ 콰아아아앙! “와아아아아아!!” 요란한 함성과 함께 기습적으로 달려드는 군대의 모습은, 비록 그들보다 숫자가 적다곤 해도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창 단꿈에 젖어 있다가 이제야 간신히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적이 나타났다!!” 질서 있게 정열 된 군대는 순식간에 흐트러져 이리저리 더욱 큰 혼란만 야기 시켰다. 그들의 지휘관들은 고함을 지르며 태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코앞에 닥친 적을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시간이 부족한 상태였다. “북을 울려라! 잠들어 있는 녀석들을 어서 깨워!!! 적의 기습이닷! 기습이란 말이야!! 모두 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당장 싸우란 말이다! 명령이다!! 명령!!” “와아아아!” 둥!둥!둥!둥!둥!! 커다랗게 울리는 북소리와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성루를 지키고 있던 기사들 역시 적의 기습을 깨닫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용병들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유 있게 대공의 군사들을 배어갔다. 콰앙! 촤아악! 퍼어억! “아싸! 리듬 좋고~” 용병대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것은 단연 샴페인 용병단이었다. 그들을 다른 사람들이 앞 쪽에서 전전하는 사이, 벌써 깊숙이 안쪽으로 침투해 눈에 띄는 적들마다 족족 배어나가고 있었다. 촤악! “크아악!” “와하하! 7명째!” 헤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을 호기롭게 물리치며 소리치자, 옆에서 다른 사람을 상대하고 있던 휴센이 즉시 되받아 쳤다. “겨우 7명? 난 11명 째다, 하하하!” “뭐? 거짓말! 내가 늙은이한테 밀리다니!” “늙은이라닛! 이렇게 펄펄한 늙은이가 어디 있다는 거야!! 오늘 내 손에 한번 죽어볼 테냐!” “헹~ 죽일 힘이나 있고?” “이 망할 자식!” 두 사람이 투닥거리기 시작하자 근처에 있던 적들이 기회를 노리고 칼을 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야아아아!!!” 그러나 힘껏 내지른 칼은 미처 닿지도 못하고 그대로 거꾸러지고 말았다. 입으로는 다투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 자신의 주변을 경계하는 것은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덤벼든 남자의 검을 가볍게 받아친 휴센은 곧 한발로 걷어차서 넘어뜨리곤 망설임 없이 심장을 꿰뚫었다. 푹- 퍼억! “크헉!” “12명째!” “이익! 혼자 활약하게 내버려 둘쏘냐! 어서들 덤볏! 이 헤롤님이 나가신닷!!” 대장의 활약에 자극을 받은 헤롤은 그때부터 종횡무진 적들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면 들지도 못할 만큼 커다란 도끼는 한번 내쳐질 때마다 여러 명의 적들을 한꺼번에 양단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던 이릴과 쉐리는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들은 왜 갈수록 어린애 같아지는 거지?” “그러게 말이다. 전쟁을 장난으로 안다니까.” “헤롤이 철이 없어서 그래. 대장한테 자꾸 덤비잖아.” “어머머~ 무슨 그런 섭한 소릴? 휴센이 나이 값 못하고 헤롤 한테 시비 거는 거잖아?” “호오~ 지금 자기 남자친구라고 감싸는 거야?”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번쩍!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인들의 눈에서 전류가 튀었다. 그녀들은 주변의 상황도 잊고 어느새 자신의 주장을 고집하기 시작했다. “헤롤이 휴센보다 못한 게 사실이지 뭘 그래? 겨우 은패 따위가 금패의 용병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어머머. 그래도 헤롤은 아직 젊잖니. 낼 모레가 환갑인 휴센쯤이야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어째서 휴센이 환갑이야? 그게 말이 돼?” “헤롤이 휴센보다 못하다는 건 말이 되고?” “당연하지!” 씩씩거리던 그녀들은 곧 동시에 몸을 돌이키며 소리쳤다. “지금부터 내가 죽이는 몫도 집계에 포함이야!!” “누가 할 소릴!!” 이것이 과연 방금 전 헤롤과 휴센을 향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낸 사람들이 할 말이란 말인가! 옆에서 달려드는 적들을 단검으로 받아치고 있던 마이티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누가 어린애라는 거냐, 너희…” 이래서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소리가 있는 모양이다. 새삼 이 세상의 커플이란 모두 악의 축이라는 결론을 내린 22년 솔로 인생 마이티였다. =============================================== [정령왕 엘퀴네스] 8-18. 접전 (4) “뭣들 하느냐! 어서 막아라! 전부 죽이란 말이다!!!” 대공의 군사들은 갑작스런 기습에 변변한 반격하나 제대로 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숫자는 훨씬 많았지만 수련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일반인들이 대부분인지라, 노련한 용병의 상대가 될 리 없는 것이다. “크아악!” “아아아악!” 곳곳에서 비명소리가 터지고, 천막들이 불타기 시작했다. 동쪽 군대의 총 지휘를 맡은 고륜백작은 화가 나서 벌개진 얼굴로 연신 군사들을 채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미 아군이고 적군이고 한꺼번에 엉켜버린 통에 함부로 화살을 날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 치사한 녀석들! 감히 새벽을 틈 타 기습을 하다니!!” 목숨을 거는 일에 치사한 일이 어디있냔 만은 백작은 연신 씨근거렸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공격해온 숫자가 적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었다. 처음이야 갑작스런 기습에 당황해서 전력이 흐트러진다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쪽이 유리해 지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의 차이는 제 아무리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흥! 계획은 좋았다만, 쓸데없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시간을 끌어서 놈들의 체력을 떨어트려라! 이 녀석들의 숫자는 채 4천도 넘지 못한다!!” 백작의 외침을 들은 군사들은 그때서야 자신감을 회복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와아아아! 요란한 함성과 함께 다시금 처절한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퍼억! 쿠웅! 콰아앙! 촤아악!! 무기와 무기가 겹치고,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소리가 연달아서 들려왔다. 사람들을 동요시킬 작정으로 불 지른 천막들은 시꺼먼 연기를 내뿜으며 꾸역꾸역 타들어가고 있었다. 한쪽에선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리느라 정신이없는 상태였다. “불을 꺼라! 어서 서두르란 말이다, 이 멍청이들아!!” 둥!둥!둥!둥!둥! 커다랗게 울리는 북소리는 마치 이 치열한 전투를 종용하는 것 같았다. 검은 하늘은 사방에서 터져 나온 축포로 붉은 수를 드리우고 있었다. “남문의 병사들도 기습을 당했습니다!” “북문의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문 쪽에서도 적의 기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전서구에 백작을 포함한 지휘관들은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적들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어서 이상하다 했더니, 사방에서 나눠져 공격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흥! 어리석은!! 적은 숫자를 나눠봤자 자멸만 할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구나! 평원에서 대기하고 있는 위칼렌 자작의 군사들에게 기별을 넣어라! 오늘 이 자리에서 완전히 쓸어버리겠다!” “예! 알겠습니다!” 그러나 백작이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위칼렌 자작은 현재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사나의 친위대들이 그들에게 향하는 보급품을 끊어놨기 때문이다. 식량이 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다고 느낀 자작이 몇 번이나 전서구와 사병을 보냈지만, 그것들마저도 중간에 가로챘기 때문에 성안의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그들의 출격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지휘관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지원이 불가능하다니!!” “지난 일주일 동안 보급품이 오지 않아 변변한 식사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대로 전장에 뛰어드는 것은 무리라고…” “뭣이!! 보급품이 끊겨?!!” 그때서야 자세한 소식을 들은 지휘관들은 모두 분통을 터뜨렸다. “이놈들이 실력이 안 되니까 잔꾀를 썼구나! 하지만 지금의 군사로도 놈들을 상대하기엔 무리가 없다! 이 녀석들을 빨리 처리하고 다른 쪽을 지원하러 가야겠다!” “기마대와 정규군이 전부 집결되었습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투의 양상이 다를 것입니다!” “잘했다! 자~! 감히 대공 전하를 거역하는 반역의 무리를 죽여라!” “와아아아!” 두두두두두! 성난 외침과 함께 말을 탄 기사들이 뛰어들기 시작하자, 종횡무진 싸우던 용병들의 표정도 달라 질수밖에 없었다. 말에 탄 상대는 쓰러트리기도 힘들뿐더러, 요령 좋게 빠져나가는 것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히이이이잉!!” “젠장! 기마대다!!” “모두 피해! 있는 힘껏 달려!” 거친 말의 푸레질이 울리자 용병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주춤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열세였던 상황이 점점 더 최악으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헤롤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기사 둘을 단번에 도끼로 밀어내곤,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헉헉거리며 달려갔다. “어이, 파란 대장! 어떡하지? 정규군들이 본격적으로 합세했어. 우리 쪽이 불리하다고!” “흐음. 네가 지금까지 죽인 숫자는 몇 명?” “40! 으하하하! 내가 휴센보다 2놈이나 더 많이 처리했…이게 아니잖아! 기마대가 왔다니까?” “기마대는 상대하기 어렵나?” “당연하지! 시야가 높아서 검이 안 먹히잖아! 그리고 말의 발차기에 맞는 것도 꽤 아프단 말이야!” “으아악!” 그 순간 용병대의 누군가가 달려드는 말밑에 깔려 목숨을 잃는 것이 보였다. 헤롤은 그 장면을 가리키며 보란 듯이 소리쳤다. “봤지! 저렇게 된다니까!” “…저건 그냥 단순히 아프다고 할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어쩔 거야? 이대로 후퇴해?” “안 돼. 적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는 버텨야 한다고. 아직 놈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럼 어쩌라는 거야! 그냥 여기서 다 죽으라고?” 불만스럽게 쏘아붙이는 헤롤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곧 한 발 전장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며 유유히 활보하고 있는 기마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는 건가?” “뭐?” “저 녀석들 말이야. 말에서 떨어뜨리기만 하면 되냐고. 그럼 상대할 수 있겠어?” “글쎄, 갑옷이 좀 거치적거리긴 하지만, 해볼 만은 할 것 같아.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훗, 그럼 됐어. 다 방법이 있지.” “??” 영문을 몰라 하는 헤롤을 뒤로한 채, 시벨리우스는 엄지와 검지를 모아 입술에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입을 타고 소름끼치도록 높은 피리소리가 흘러나왔다. “삐이이이이이----------익!!!” 갑작스럽게 전장 안을 떠도는 괴이한 소리에 대공의 군사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 귀를 쫑긋 세운 말들이 모두 하나같이 발작을 하며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으악! 뭐, 뭐야!!” 펄쩍펄쩍 날뛰기 시작한 말들은 모두 등에 태운 기사들을 떨어트릴 때까지 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고삐를 놓친 기사 중 한 사람이 혼비백산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누군가가 말을 조정한다!! 모두 떨어지지 말고 버텨라!!” “허어억!” “으아악!” 그러나 아무리 승마기술이 뛰어난 자라도 펄쩍펄쩍 몸부림치는 말 위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다. 기사들을 떨어트린 말은 전투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달아나거나, 거친 말발굽으로 군사들을 위협했다. “달아나는 말을 잡아!” “떨어진 녀석들 모두 어서 일어나라! 꼴사납게 언제까지 뒹굴고 있을 거냐!” “이야아아아!!!” 실전 전투에 강한 용병들은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끼어들어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의 목숨을 취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기마대가 힘을 못 쓰게 되자, 전세는 다시금 용병대쪽으로 유력하게 돌아갔다. 이 모든 상황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헤롤은 황당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한 거야?” “보다시피. 기수들을 떨어트리라고 명령했을 뿐이야.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은 내 의지를 따르거든.” “허허허…파란 대장이 엘프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군.” 엘프들이 동물과 교감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언뜻 기억한 헤롤은 방금의 경우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로 동물을 향해 명령을 내릴 수 있던 것은 시벨리우스가 유니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드래곤이 몬스터의 왕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유니콘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아예 녀석들을 이용해서 전장을 어지럽히는 건 어때?” “웃기는 소리. 인간들의 전투에 왜 애꿎은 동물이 희생 돼야 하지? 쓸데없는 소리 말고 너도 얼른 나가서 싸워. 곧 날이 밝는다고.” “쳇. 좋다 말았네.” 툴툴거리던 헤롤은 전투에 끼어들자마자 완전히 딴 사람처럼 변해 도끼를 휘둘렀다. 그밖에도 샴페인 용병단들이 있는 곳은 어디나 눈에 띄었다. 다른 용병들이 한사람을 상대할 동안, 그들은 몇 십의 인원을 베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귀신같이 빠른 움직임에는 같은 용병대 또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혀를 내둘렀다. 그들이 지나간 곳이면 어김없이 남아있는 무수한 시체들은 보는 사람들의 감각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번엔 어쩌다 운 좋게 같은 편이 되었지만, 나중에라도 적으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자들이었다. 그러니 상대편의 심정은 어떻겠는가! 군사를 비롯하여 그들을 지휘하는 백작까지도 거의 살육을 방불케 하는 용병들의 모습을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샴페인 용병단 하나하나가 전부 괴물처럼 보이고 있었다. “저놈들부터 막아! 전부 죽이란 말이다!! 숫자를 이용해서 포위시켜라!!! 창과 화살을 날려! 당장!!” 발작하듯 이어지는 명령에 기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용병들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가장 만만한 사람은 역시 여자인 이릴과 쉐리였지만, 생각만큼 포위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이릴이 휘두르는 채찍맛을 본 군사들은 한시라도 도망칠 틈을 찾느라 정신없었다. “어딜 그 못생긴 얼굴로 가까이 오는 거야!! 모두 지옥으로 떨어져 버렷! 내 분노의 채찍 맛을 보아랏!” “난 아직 휴센과 이것도 저것도 이러저러한 것(?)도 못해봤다고!! 이대로 처녀귀신이 될 순 없어!!” ‘우리가 뭘 어쨌다고!’ 그저 달아나고 싶었을 뿐인 기사들은 하나같이 허탈한 심정으로 소리쳤다. 앞으론 여자란 생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는 그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용병대들이 샴페인 용병들처럼 상황이 좋은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끝 모르고 달려드는 적들을 베는 것에 힘이 부치는 자들이 태반이었다. ‘시간이 됐군.’ 더 이상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시벨리우스는 마침 하늘에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후퇴! 모두 후퇴하라!” “!!” 명령을 들은 용병들은 전투에서 물러서서 그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신속했다. 덕분에 한창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대공의 기사들은 모두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 모습을 멀건이 바라보았다. “적들이 후퇴합니다!!” “뭣이?! 쫓아라! 반드시 잡아야 한다!! 저들을 모두 몰살시켜 버려라!” “와아아아아아!!”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던 용병들이 후퇴를 시작하자, 대공 쪽 지휘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추격을 명령했다. 벌써 몇 시간째 계속 된 전투였기 때문에, 슬슬 힘이 빠진 것이라 생각 한 것이다. “놈들이 습지로 도망쳤습니다!” “하하하! 신이 나를 도우시는구나! 놈들은 이곳의 지형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적들을 늪으로 몰아넣어라! 모두 산 매장을 시켜버리겠다!” 동문 근처의 습지엔 몇 천의 숫자도 한꺼번에 잠겨버릴 정도로 대규모의 늪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용병들이 일부러 그쪽으로 유인하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백작은 신이 나서 더더욱 추격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습지로 들어섰을 때, 백작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바짝 뒤쫓던 용병들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온통 울창한 나무로 둘러싸진 주변은 미세한 풀벌레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수군수군. 별안간 쥐죽은 듯한 침묵이 돌자 군사들의 얼굴에도 동요가 일어났다. 분명 쫓아온 것은 자신들인데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백작님, 더 이상 앞으로 나가면 위험합니다. 이 앞은 전부 늪입니다.” “나도 알고 있다! 젠장! 방금 눈앞에 있던 놈들이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이렇게 허망하게 놓쳐 버렸다는 건가!” “어쩌면 함정일수도 있습니다. 놈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이곳으로 몰아넣을 작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서 피하셔야…” 그때였다. 후방의 기사들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혼란스럽게 변한 대열을 본 백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다들 진정해라!! 대체 무슨 일이냐!” “몬스터입니다! 몬스터가 때로 몰려왔습니다!!” “뭐라고?!!” 경악한 얼굴로 소리치던 기사들은 어느새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고 서있는 수많은 오우거떼를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그 순간 그들의 주위로 무수한 불꽃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악!” “마법이다!! 마법사가 있다!!” 죽음의 공포를 맛본 군사들은 명령도 무시하고 대열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몇 천이 되는 군사들이 앞으로 달리자, 맨 앞줄에 있던 기사들과 백작 또한 속절없이 밀려들어갔다. “안 돼! 이 바보 같은 녀석들! 이 앞은!!!” 푸욱! 갑자기 발이 푹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은 백작은 부릅뜬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딱딱했던 땅이 어느새 물처럼 걸죽하게 변해 그의 발목을 삼키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서있는 땅이 늪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그들의 몸은 점점 더 빨리 빨려 들어갔을 뿐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아직 늪까지는 거리가!!” “으아아악! 사람 살려!!” 개중엔 운 좋게 늪 안에 빠지지 않은 자들도 있었지만, 모두 안심할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뒤를 바짝 쫓아온 몬스터들이 살아남은 자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 몬스터들은 서로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하고많은 몬스터 중에서 왜 하필이면 오우거야! 이왕 환상마법을 걸 거면 좀 더 그럴듯한 걸로 할 순 없어?” “맞아! 내 아름다운 미모를 보고 비명을 지르다니, 실례잖아!” 투덜거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샴페인 용병단의 이릴과 쉐리였다. 그 옆에서는 마찬가지로 몬스터로 둔갑한 용병대의 사람들이 헛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몬스터라고 생각했던 무리가 갑자기 용병들로 돌아오자 대공의 군사들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해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용병들이 후퇴하는 순간, 시벨리우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대단위의 환상마법을 사용하여 적의 군사들이 길을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들어서는 순간까지 눈치를  채지 못하고, 늪을 피한다는 것이 오히려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용병들을 몬스터로 보이게끔 마법을 건 것은, 적들의 공포심을 조장해 몸을 더욱 움직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깊이 빠져버리는 늪의 특징을 이용한 거랄까. 뒤늦게 모든 사실을 눈치 챈 대공의 군사들은 이를 갈며 바둥거렸지만, 이미 늪에 빠져버린 몸은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일만의 군사들 중 살아서 도망친 자들은 겨우 이 백여명. 거의 몰살이라 가까운 전적을 내고도 아군의 피해는 부상자 다섯과 사망 8명에 그쳤을 뿐이었다. 실로 유쾌하기까지 한 대 승리였다. ================================================= [정령왕 엘퀴네스] 8-19. 접전 (5) 같은 시각, 서문을 맡은 알리사의 군대역시 모든 일을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하고 있었다. 초반 소드 마스터인 카웰 후작의 활약으로 단번에 적의 숫자를 반 이상이나 줄인 그들은 적당한 시간이 되자 퇴로를 확보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무작정 뒤쫓으려 했던 적의 지휘관은 그들이 후퇴하는 모습에 뭔가 불길함을 느끼고 군대의 진격을 멈췄다. “뭔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모두 전열을 가다듬어라! 진형을 다시 짠다!” 대장의 명령을 들은 군대는 순식간에 안정을 되찾고 처음의 진형을 되찾았다. 상대편의 적장이 생각보다 신중한 자세를 보이자, 알리사와 후작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느 정도 이런 상황에 대해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형 따위야 무너뜨리면 그만이지! 땅의 멀든이여!” 쿠웅! 우드드드드! 그러자 알리사의 부름을 받은 땅의 중급 정령이, 대공의 군사들이 서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땅속에서 거대한 진흙거인이 나타나자 군사들은 또다시 자리를 잃고 우왕좌왕 흩어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괴, 괴물이다!!” “사, 사람 살려!!” “히이이익!!” 공포에 대한 파급 효과는 역시나 제대로 훈련받지 않은 일반병사들부터 시작되었다. 개중에는 들고 있던 무기까지 던지고 달아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알리사나 후작이나 그러한 자들에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적의 군대를 통솔하는 지휘관이었던 것이다. 그만 처리하면 나머지 군사들은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는 것이 알리사의 생각이었다. “이대로라면 굳이 계곡까지 몰아갈 필요가 없겠어요. 뒤처리를 부탁합니다, 후작님. 지금부터 일시적인 지진을 일으킬 거예요. 그것이 멈추면 곧바로 돌격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알리사양! 부탁하겠습니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알리사는 기대 이상으로 군대를 잘 이끌어주고 있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의 강단이 있었고, 돌발적인 상황에서의 대처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다. 후작은 내심 감탄하며 지진을 일으키기 위해 선두로 나서는 알리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정확한 출신지와 신분은 알지 못했지만, 말투나 행동은 어릴 때부터 제대로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영애에 뒤지지 않았다. 웬만큼 신분이 받쳐준다면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 훗날 이사나와의 혼인을 추진해도 괜찮지 않을까 혼자 남몰래 생각하는 그였다. 그런 후작의 꿍꿍이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알리사는 멀든에게 주변의 지형에 균열을 일으키도록 부탁했다. “자아~ 멀든, 부탁해!! 적들에게 지하세계가 어떤지 구경시켜 주자고!” 쿠웅! 우르르릉! 콰지지지직!!! “으, 으아아악!” “지, 지진이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흐트러졌던 대공의 군사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곧 이어 흙바닥이 갈라지고 그 아래에 흐르던 수맥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라 여기저기 튀었다. 쿠웅! 푸우욱! 콰아아앙! 운 좋게 도망친 사람들을 뺀 대부분의 군인들은 모두 갈라진 흙속에 묻혀 꼼짝도 할 수 없는 처지로 변했다. 그 중에서는 깊게 뚫린 구덩이 안에 빠져 그대로 생매장 된 사람들도 있었다. 쿠웅! 콰아아앙~! 땅이 흔들린 여파로 주변에 있던 나무 중 몇 그루가 균형을 잃고 쓰러져 기사들을 덮쳤다. 곧 사방에서는 끔찍할 정도로 괴로운 비명소리가 터지기 시작했다. “크아악! 사, 살려줘!!” “아악! 다리! 내 다리가!!!” “아아아악!” 땅 속에 파묻힌 사람들이 두 손을 뻗으며 기어 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들은 마치 지옥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곧 자신들을 향해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죽음의 사신들과 조우해야만 했다. 바로 카웰 후작과 군사들이 그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와아아아!!!” 두두두두두두!!! 지진이 막 끝난 직후였기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가누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넋 놓고 있던 기사들은 후작이 휘두르는 창과 검에 속수무책으로 꿰뚫려 목숨을 잃었다. 곧 주위는 끔찍한 피바다로 물들어 갔다. 거의 일방적이라고 할 정도로 살육하는 군사들에게 후작은 큰 소리로 외쳤다. “도망치는 놈들은 오합지졸이니 쫓을 필요 없다! 대항하는 놈들만 베어라!!” “와아아아아!” 우렁차게 외치는 소리는 그 자체로 온전한 하나의 승전보인 셈이었다. 군대를 통솔하던 적의 지휘관은 일찌감치 죽어 시체가 되어 있었고 대다수의 병사는 죽거나 도망쳤다. 어느새 환하게 밝아진 주변으로 승리를 알리는 축포가 터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겼다!’ 감격한 군사들은 무기를 하늘 위로 치켜들며 환호했다. “이사나 황제폐하 만세!” “카월 후작님 만세!!!” “승리의 여신 알리사양 만세!!” “만세!!” “에엥? 나도?” 과한 힘의 소력으로 탈진해 있던 알리사는 기사들이 자신을 향해 ‘승리의 여신’이라 부르며 만세를 외치자 놀란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옆에서 그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고 있는 후작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 “아, 그렇구나. 알리사와 시벨리우스님 모두 성공했다는 거지?” 자정을 조금 넘어서 시작된 전투는 다음날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이사나의 승리 쪽으로 거의 마무리 지어졌다. 치열한 접전 끝에 간신히 상대편 진형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이사나는 그 후로 속속들이 전달되는 아군의 승보에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계획한 작전이 모두 멋지게 성공한 것이다! 보고하던 기사역시 뿌듯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사상 다시없을 대승이었습니다. 적들의 수장은 모두 죽었고,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북문의 라온 황자에게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나?” “방금 전 친위대의 알렉경으로부터 전서구가 날아왔습니다. 마찬가지로 승전보입니다만,  이쪽은 아군의 피해가…” “그쯤은 예상하던 일이었다. 오히려 피해가 그쯤이니 다행이야. 평원에 대기하고 있던 군사들은 어찌 되었는가?” “보급품이 끊긴 탓에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대열에서 이탈해 도망친 자들도 많습니다. 방금 전 항복을 촉구하는 파발을 보냈으니 좋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좋다. 부상자들을 옮겨 치료하게 하고, 군사들을 쉬게 해라.” “알겠습니다! 폐하!” 보고를 마친 기사가 물러나자 기사들은 마음껏 환호성을 질렀다. 새벽 내내 전투를 벌이느라 지쳤던 기색은 어느새 완연히 사라진 모습이었다. “폐하! 해내셨습니다! 우리가 승리했군요!!” “황제폐하 만세! 오늘 일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겁니다! 이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선황폐하께서 돌보고 계신 겁니다! 얼마나…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 왔는지!” 눈물을 글썽이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사나 또한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들 모두 함께 해왔던 시간만큼이나 모진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던 자들이었다. 황성에서 쫓겨나던 일이 아직도 엊그제일 같이 선명한데, 어느새 한 발짝 귀환 길에 다가섰으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잠시 기사들의 어깨를 두드려준 이사나는 곧 단호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아직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야. 대공은 여전히 황성에서 건재한 상태고, 또 다른 군사들이 이쪽을 향해 내려오고 있다. 마음을 더욱 단단히 다져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폐하! 어디까지든 함께 하겠으니, 부디 이끌어만 주십시오!” “폐하와 함께라면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친위대들은 다시 한 번 호기롭게 대답하며 이사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들의 모습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둘러보던 이사나는 곧 한쪽에서 말없이 서있던 리글레오를 발견하곤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전투 초반, 그는 궁병들을 앞세워 원거리로 적들을 공격하게 한 후, 진형이 무너진 틈을 타 기마병을 도입시키는 작전을 제안했다. 북소리로 전투의 분위기를 띄워 아군의 사기를 고조시킨 것도, 페리스가 가진 정령사의 능력을 이용해 궁병이 날린 화살의 방향을 정한 것도 그였고, 적장이 죽은 것을 확인하자 곧바로 군대를 퇴각시켜 필요 없는 희생을 줄이게 만든 것도 리오의 역할이었다. 단순하지만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부분의 보완점을 발견해 낸 탓에, 그들은 전투를 훨씬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새삼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이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도 수고 많았다. 오늘 전투는 그대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아, 아닙니다, 폐하…저는 별로 한 일이…” “아니다. 아군이 가진 능력을 이용한 가장 효과적인 전술을 알려주지 않았는가. 덕분에 피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 자유를 달라고 한다고 해도 기꺼이 줄 테니.” “!!” 예상치 못한 황제의 제안에 놀라기는 주변에 있던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휘둥그레진 시선들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리오는 망설이는 표정으로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있었지만, 과연 지금이 나서서 밝혀야 할 때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회가 또 있을 거란 보장이 없었기에 그는 곧 이사나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폐하를 보필하는 것입니다! 부디 옆에 있게 해주십시오!” “…!…” 웅성웅성 당연히 놓아달라고 말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황제의 수하를 자청하고 나서자 기사들의 표정은 다시금 의심스러운 빛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사나만큼은 차분한 얼굴로 그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옆에 있게 해 달라?”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제가 방금 드린 말씀엔 어떠한 사심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원하신다면 제 이름도, 아니, 가문까지 모두 버리고 폐하를 따르겠습니다! 새 이름을 주신다면 그리 하겠습니다! 제발 제가 폐하를 보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이상한 일이군. 왜지? 이번 전투에서 이겼다고 해서 내가 당장 황권을 회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네게 부귀와 영화를 약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걸 바라고 청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도 설명할 길이 없는 마음입니다만, 저는 단지 폐하라면…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나를 따른 다는 것은 곧 그대의 부모를 거역하는 일이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건가?” 재차 확인하는 말에도 리오의 결심은 확고했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이사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나를 따르겠다는 자를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의 뜻대로 하도록 해라. 할버크 영주에 대한 일은 그대에게 맡기겠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황제가 자신을 받아주는 걸로도 모자라, 그의 가족까지 처분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이자 리오는 감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던 친위대와 군대의 통솔을 맡은 지휘관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문을 열어라! 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겠다!” “와아아아아아!” 군사들이 환호하자 지금까지 굳게 닫혀있던 할버크 영지의 성문이 거친 소음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미리 성안으로 침투했던 이사나의 군사들이 적의 총지휘관을 비롯한 할버크 영주와 그의 식솔들을 결박해 무릎 꿇려 놓은 상태였다. 영주와 대공의 군대가 패전했다는 소식은 이미 전 영지에 퍼져 거리마다 구경나온 사람들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그들은 소문으로만 무성했던 황제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모두 바닥에 엎드려 벌벌 떨었다. 무척이나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8-20. 결전의 날! (1) “세르피스가 죽었다고? 그게 사실이냐?” 벌써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암흑의 마녀 세르피스가 결국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쟌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부릅떴다. 자세한 내용에 따르면 마지막으로 그녀의 흔적이 남겨진 중간계의 어느 숲 안에서 불에 거슬린 자국을 발견했으며, 그 주위로 세르피스의 마력을 담은 피가 흩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알기 위해 땅이 기억하고 있던 영상을 이미지화 시키려 했으나, 방해하는 기운 때문에 그다지 건져낸 것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처절하게 울리는 세르피스의 목소리를 듣고, 상대의 실력이 그녀보다 월등히 강했다는 것을 짐작했을 뿐이었다. “마계 공작보다 강한 존재라…끄응. 도대체 누구라는 거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는군.” 4명이었던 공작은 어느새 줄고 줄어 그 하나만이 남아있었다. 데르온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루카르엠이 봉인 당했다는 소문을 접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어진 일이라 쟌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기만 했다. “마왕전하도 이 사실을 아시나?” “아직…” “흐음. 알았다. 너는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을 함구하거라. 마왕전하께는 내가 직접 보고하러 가겠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그는 마왕이 거주한 성의 최상부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마왕은 유난히 바깥외출이 뜸했고, 평소 가까이 하던 수하들도 물리고 있었다. 그나마 세르피스만은 중간계의 연락책을 맡아 자주 들리는 모양이었지만, 그나마도 이번에 죽었으니 이제 당분간은 누구도 마왕의 옆엔 얼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대체 마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루카르엠이 명령을 어긴 건 사실이지만, 봉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었다. 안 그래도 루카를 추종하고 있던 쟌은 그때의 일만 생각하면 가슴속에 불길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왕 가는 거, 이번에야 말로 확실하게 따지고 볼 참이었다. 용감하게 걷던 그가 마침내 문 앞에 다다랐을 땐, 마침 그보다 먼저 방문한 손님이 용건을 마치고 안에서 나오고 있는 상태였다. 세르피스의 행방이 묘연해지면서부터 그녀를 대신하여 중간계의 연락책을 맡은 자였던가? 그는 쟌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마계 공작께 인사 올립니다.” “왕께서는 안에 계신가?” “예, 그렇습니다. 들어가 보소서.” “흠. 알았다. 참, 요즘 중간계는 어떻지? 마왕의 계약자에게 이상한 점은 없었나?” “글쎄요…제가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그가 주는 물건을 왕께 전해드리는 것 뿐이라서요.” “물건?” “작은 술병입니다. 이전에도 계속 드렸던 것이라 하더군요. 저어 그런데…” “…?…” 쟌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바라보자 말을 잇던 마족은 망설이듯 입을 우물거렸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쟌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래도…그 안에 담긴 것이 피 같아서 말입니다.” “피?” “예, 그것도 어린 인간의…. 그저 붉은 것이라 제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 어린 인간의 피라니! 순간 머릿속을 스쳐가는 불길한 생각에 쟌은 딱딱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한 마족은 또 다른 충격적인 소식을 그에게 알렸다. “아참, 그 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봉인되었던 루카르엠님이 감쪽같이 사라지셨다는 군요. 지금 마족들이 그분의 행방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방금 이 사실을 왕께 알려드렸습니다만, 어찌된 일이신지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는 듯이…” 콰앙!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쟌은 급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문이 부서져라 열어젖혔다. 그의 과격한 반응에 놀란 마족은 황망이 자리를 벗어났고, 남은 것은 문 안에서 막 붉은 잔을 기울고 있던 마왕과 그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법 요란한 소리가 울렸음에도 마왕은 전혀 관심 없다는 듯 잔에 담긴 술에만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쟌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친 걸음으로 그 앞에 다가섰다. “루카르엠이 사라졌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흐음. 그렇다고 들었다. 정말 앙큼한 작자지 않은가?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어. 후후후”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니? 아니, 그건 그렇다 치지요! 방금 왕께서 어린 인간의 피를 유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찌 된 것인지 해명을 부탁합니다.” “해명이라…” 말끝을 흐린 마왕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다시금 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데 잔에 담긴 술의 색깔이 묘하게 이상했다. 한참 동안 빤히 바라보던 쟌은 곧 창백한 안색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지금 당신이 마시고 있는 게…” “후화하하! 멋지지 않은가? 어린 인간의 피는 이 세상 어느 술보다 달콤한 맛을 선사하지!” “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겁니까!!!” 인간의 피를 마시는 행위는 금기다! 그것은 마신과 전 차원을 지배하는 주신이 직접 규제해둔 항목이었다. 경악하는 쟌에게 마왕은 뭐가 어떻냐는 듯 태평하게 웃어보였다. “이제 전 차원이 내 손에 들어올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몸이 주신과 동급이 되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지! 크하하!” “미친! 악신이 될 생각인가!! 제정신이 아니군!!” “하하하하! 마음대로 욕 하거라! 결국 너 역시도 내 발밑에 무릎 꿇을 테니 말이다. 네놈이 그렇게 섬겨마지 않는 루카 놈도 마찬가지지. 아니, 마신 카노스라고 해야 하나?” “무슨?” “몰랐나보군. 녀석은 마신이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가장한 인물이었다. 설마 단순한 공작 따위가 마왕의 권위로 내세운 봉인을 뚫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 한건 아닐 테지? 크하하. 하지만 이번만큼은 놈도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 온 몸이 감전되는 듯한 충격이 쟌을 휩쓸고 지나갔다. 루카가 신의 사자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마신 본인일거라고는 전혀 짐작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마신을 배알했었다니!!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는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태평하게 감동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쟌은 얼른 경계의 태세를 취하며 마왕을 향해 공격 자세를 취했다. 몰랐다면 모르되, 이미 그의 계획을 알아버린 이상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막을 생각이었다. 야심이 강한 존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악신이 될 생각을 품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자 그의 모습을 본 마왕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설마 대적할 생각인가, 이 나에게? 내 부하로 남는다면 너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부귀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흥! 네놈 밑에서 비굴하게 살 생각은 없다! 지금 네놈이 하는 짓은 우리를 창조한 마신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냐!” “후후. 그랬지. 쟌 너는 다른 놈들에 비해 유달리 마신을 추종하는 녀석이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군. 결국 아깝지만 없애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가.” “헛소리!” 자신만만한 마왕의 말에 쟌은 이를 갈며 일갈했다. 비록 마왕과 마계공작의 차이였지만, 실제적인 능력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틀림없이 빈틈을 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 생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쉬이이익! 콰아아아앙!! “커어억!!” 마왕에게 검을 들고 달려들던 쟌은 갑자기 몰아닥친 엄청난 압력에 밀려 날아가 그대로 뒤편에 있던 벽에 처박혔다.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와 함께 바닥으로 주욱 미끌어진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붉은 피가 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쟌은 온 몸이 뒤틀리는 것 같은 고통을 받는 중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앞에서는 처음 앉아있던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마왕이 입가에 싸늘한 미소를 띄운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쿠, 쿨럭! 이…이게 어떻게 된…” “하하하! 이미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라고 했을 텐데? 가엽구나, 쟌! 마계공작인 네가 손 쓸 틈도 없이 그런 꼴이 되다니!” “큭- 이미 각성의 순간에 거의 도달한 상태라는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크하하하하! 말 그대로다, 쟌이여! 나는 이제 정확히 20명만 채우면 온전한 악신으로 각성할 것이다!” “!!!” 20명이라니! 각성의 때까지는 그야말로 시간문제인 셈이 아닌가! 경악한 쟌은 저절로 흘러나온 신음을 억지로 밀어 넣으며 바득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눈치 채지 못한 스스로가 한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막아야 한다!! 내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속으로 소리친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쟌의 한 손에는 그가 방금 끌어올린 마력덩어리가 생성되고 있었다. 곧 검 보랏빛의 거대한 기운이 쟌의 온 몸을 타고 돌았다. “크크크큭! 쓸데없는 반항!” 그러나 자신을 향해 사납게 몰아치는 기운을 보면서도 마왕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에 아랑곳 하지 않고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쟌은 손에 모아둔 마력의 폭탄을 남김없이 퍼부었다. 콰앙! 콰아아앙~ 콰지지지직!! 요란한 소리와 함께 마왕이 있던 자리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둘러싸였다. 그 순간을 틈타 쟌은 그가 알고 있던 가장 최고위 흑마법의 주문을 외웠다. “적에게 가장 끔찍한 고통을 내릴지라!! 아르티스파게!!” 슈우우우욱! 콰아아아앙! 그가 발현한 마법은 연기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마왕의 형체를 향해 정확하게 쏘아져 들어갔다. 그것은 보통 마족은 물론, 마계의 공작이라도 정면으로 받는다면 치명상을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곧 마왕성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엄청난 진동이 일어나며 사방의 공기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콰아아앙! “헉! 허어억! 허억!” 몇 번의 공격에도 마왕으로부터 이렇다 할 대응이 없자, 쟌은 그가 죽었거나 큰 부상으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갑작스런 마력의 소모 탓에 거친 숨을 삼키던 그는 긴장하며 아직도 연기가 완전히 걷히지 않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에 있는 거지? 어디에!!’ 죽었든 살았든 반드시 있어야 할 마왕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자, 당황한 쟌은 방금 전 마왕이 서있던 곳에 가보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그러자 그 순간 뒤에서 턱-하고 거친 손이 그의 목을 움켜잡더니 강한 힘으로 천천히 그의 몸을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컥! 커어억!!” 숨이 막혀 버둥거리는 중에도 쟌은 이어지는 목소리에 믿을 수 없다는 듯 둔 눈을 부릅떴다. 한손으로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자는 여전히 여유 만만한 웃음을 띄운 마왕이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큭큭큭. 쓸데없는 반항이라고 말했을 텐데? 지금의 나는 신이라 해도 두렵지 않은 몸! 한낮 마계의 공작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네 어리석음이 스스로의 명을 단축했구나. 크크크…장난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잘 가거라.” “크억!” 우두두둑!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소리가 쟌이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고통으로 부릅떠진 눈은 미처 감기지도 못하고 그대로 초점을 잃었다. 쿠웅! 마왕은 순식간에 싸늘한 시체로 변해버린 쟌의 몸을 볼품없이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각성의 시기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는 온 몸에 폭발적으로 끓어오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크…크큭…크하하하하하하!!!” 이렇게 통쾌할 수가 있을까! 이제 온 세상의 것들이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신계의 무수한 신들과 주신마저도 자신을 어찌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짜릿한 기분이었다. 그 순간, 아무도 없던 벽 쪽에 커다란 검은 구멍이 생겨나더니, 그 속에서 하얀 법의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놀랍게도 그는 이사나의 숙부이자 마왕의 계약자이기도 한 유카르테 대공이었다. 그는 미친 듯이 웃고 있는 마왕과 한쪽에 처박힌 쟌의 시체를 보더니 한심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주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요.” “크흐흐. 여기엔 무슨 일이냐? 네놈이 게이트를 통과해서 직접 방문한 것도 꽤나 오랜만이구나.” “그동안 여러 가지 일로 바빴으니까요. 보아하니 이미 신계엔 당신에 대한 소문이 전부 퍼진 모양이군요.” “흥. 그래봤자 놈들에게 마땅한 대책 안이 있을 리 없지. 이미 나는 악신이나 마찬가지다. 감히 누가 나를 건드리겠느냐!”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아직 완전히 각성하신 게 아니잖습니까. 혹시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다른 방법을 찾아낼지도…” “시끄럽다! 네놈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콰아앙! 엄청난 전류가 흘러나와 바로 발치에 떨어졌지만, 유카르테 대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봤자 그가 자신을 죽일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씩씩거리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 실수였습니다. 노여움을 푸시지요. 오랜 시간을 공들여 온 일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른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했던 모양입니다.” “흥! 입에 발린 거짓말은 집어 치워라! 네놈이 언제부터 긴장 따윌 했다는 거냐! 자아~ 그래, 나를 찾아온 용건이 따로 있을 테지? 그게 무어냐?” “후후후, 별거 아닙니다. 그저 마족들을 빌려주십사 해서 말이지요.” “마족들을? 흐응, 요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더니, 뭔가 불리한 상태인 모양이지?” “아무래도 이사나, 그 아이가 꽤 운이 좋은 편인 모양입니다. 제법 쓸 만한 동료들을 많이 끌어 모았더군요. 마왕께서도 제가 중간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클클클, 그거야 그렇지. 네 협조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되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들었을 것이다. 명계에 술수를 부려 물의 정령왕의 탄생을 늦춘 것도 다 네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냐.” 뒤늦게 밝혀진 진실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자리엔 그 사실을 듣고 놀랄 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대공은 무척이나 송구스럽다는 듯 겸손하게 고개를 조아려 보였다. “그저 제가 살고 있는 차원의 특성을 잘 살렸을 뿐입니다. 그것으로 마왕전하의 계획에 도움이 되었다니, 오히려 제가 영광이지요.” “크하하하! 역시 넌 마음에 드는 인간이다! 좋다, 지금 당장 10만 군대를 보내주지! 너의 제국은 물론, 아크아돈의 모든 대륙이 네 발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황공합니다.” 예상 밖의 이사나의 선전으로 대공 쪽의 피해가 컸지만, 그는 이것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다. 흐뭇하게 미소 지은 그는 문득 쟌의 시체에 시선을 미치곤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런데 세르피스 양은 어찌된 겁니까? 아직도 행방을 찾지 못하셨습니까?” “보나마나 어디선가 딴 짓을 하고 있겠지. 왜? 그녀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느냐?” “으음, 실은… 그녀가 뭔가를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숨기다니?” “제 조카인 이사나 말입니다. 아무래도 황성을 떠난 뒤로 뭔가 변한 것 같긴 한데 그게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세르피스 양이라면 그를 감시하기도 했으니 좀 더 정확한 걸 알고 있을 것 같아서…” “큭큭. 변해 봤자 그런 꼬마 하나가 뭘 어찌 할 수 있단 말이냐. 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거야 마왕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대공은 어쩐지 찝찝한 느낌을 감추지 못했다.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랄까?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마왕에게 대적할 존재는 아무도 없을 테니.’ 승리의 기쁨에 취할 날도 멀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곧 10만의 마족들이 몰려들면, 이사나와 그를 동조하는 무리들은 모두 시체가 되어 성벽에 매달리게 될 것이다. 아니, 갈갈이 찢겨 그 육체의 조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리라. 대공은 차갑게 미소 지으며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만으로 온 몸이 짜릿해지는 것 같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8-21. 결전의 날! (2) “이사나가 이겼다고?” 간만에 들려온 반가운 소식에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모두 환한 표정을 지었다. 방금 소식을 전한 라피스 또한 뿌듯함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그래, 생각보다 적들이 더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포로로 잡힌 군사는 정규기사들만 제외하고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더군. 현재 가지고 있는 전력에다 오고 있는 군대까지 합치면, 지금 그쪽으로 향하고 있는 대공의 나머지 군사까지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더라.” “와아! 제법인데! 이거 이러다 너무 쉽게 끝나는 거 아니야?” “그렇진 않을 거다, 아들아. 마음을 놓긴 아직 일러.” “그게 무슨 소리야, 엘뤼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내 말에 옆에 있던 트로웰이 냉큼 끼어들어 대답했다. “마왕 쪽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을 거야. 아마 마족의 군대가 총 출동할걸?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니까 오히려 불리해 질지도 몰라.” “헉…그렇구나. 마족이 있었지. 총 출동한다면 어느 정도나 오게 된다는 걸까?” “정식 전사들만 몰린다 해도 10만은 될 겁니다, 엘님. 게다가 지금까지 주군을 귀찮게 했던 녀석들과는 힘의 차원이 다른 놈들뿐이죠.” “하아, 10만이라…어째 상상하기가 힘든걸.” “저기, 엘퀴네스. 별로 어렵게 생각할 건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응?” 영문을 몰라 되묻는 나에게 미네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하여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본 나는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에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으니…!! “뭐, 뭐야 저건?” 당연히 푸를 것이라 생각했던 하늘은 온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새까만 그림자들로 점령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것들은 마치 새떼처럼 무수하게 들끓으며 쐐애액- 공중에서 요란한 바람소리를 일으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환했던 주변은 그들이 해를 가려버린 덕분에 순식간에 침침한 그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공중을 휘감는 검은 덩어리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그것이 사람의 형체와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내 불안감에 일침을 놓으려는 듯,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은 아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족이다. 그것도 전사들이야.” “!!” 새삼 놀라는 게 우스울 정도로, 하늘을 시꺼멓게 수놓고 있는 덩어리들의 정체는 온 몸을 갑주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바로 마왕이 보낸 마족의 군대인 것이다! 말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튀어나오다니! 평소였다면 그저 양반은 아니라며 혀를 찰 일이었지만, 사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하나하나의 기운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데다, 그들 모두 살기를 숨기고 있지 않은 탓에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꺄아아악! 저, 저게 뭐야!!” “오, 세상에, 신이시여…” 거리에 있던 사람들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멍한 얼굴로 할 말을 잃거나 반대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족들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 오로지 한 곳만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가는 방향이 이사나들이 있는 할버크쪽 이라는 것을 알아본 나는 기겁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 어떡하지? 이사나가 위험해!” “흐음. 확실히 저 정도의 숫자라면 인간의 군대 몇 만 정도로는 뼈도 못 추리겠군.” “지금이 그렇게 태평하게 중얼거릴 때야! 도착하기 전에 막아야지!” “귀찮은데.” “뭣이라!!”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짜식 성질부리기는.” 못 말리겠다는 듯 한손을 휘저은 라피스는 일행들의 얼굴을 한 번씩 둘러보며 물었다. “그럼 지금부터 역할을 나눌까? 나랑 몇 명이 마족들을 막는 동안 나머지는 처음 계획했던 양동작전을 펼치도록 하지. 아무리 나라도 혼자서 다 막기는 무리라고.” “나도 할래, 은인! 나랑 부하 끼워줘.” “에? 아스 무슨 소리야.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아직 완전한 성인이 되지 않은 아스가 마족들 사이에서 정체를 드러내는 건 굉장한 위험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의 힘이 강해도 몇 만이나 되는 마족을 전부 굴복 시킬 수는 없을 것 아닌가! 그러나 아스도 데르온도 문제없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괜찮아, 대부. 난 왕이야. 저들에게 내 존재를 각인시킬 필요가 있어.” “그렇습니다, 엘님. 오히려 이것을 기회삼아 주군이 더욱 높은 입지를 굳힐 수 있을 겁니다. 마계 공작도 한순간에 제압하신 분이니, 저런 하등한 전사들 쯤이야 상대가 될 리 없지요.” “하지만…” “괜찮다니까. 아직 완전한 성년은 아니라서 좀 만만히 보이기야 하겠지만, 마신께 부여받은 선천적인 힘은 나를 따를 수 없어. 이렇게 미적거리는 사이에 이사나가 더 위험해질걸?” 진지한 표정으로 타이르듯 설명하는 아스는 나보다 훨씬 더 큰 어른인 것 같았다.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해 머리를 갸웃거리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자라버리다니. 내심 섭섭한 기분이 들어 나는 기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아. 나도 이젠 모르겠다. 아스가 그렇다니까 믿을게. 단, 너무 위험한 행동은 하지 마.” “알아. 아스는 대부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절대 안 할 거야.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할게.” “그래, 그래. 착한 녀석. 그럼 마족은 세 사람이 맡는 거야? 나도 할까?” “아니오. 제가 하겠습니다. 엘은 인간 쪽 군대를 맡아주십시오.” “미네가?”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미네가 갑자기 참가의사를 보이자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실력이 못미더워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겉보기에-어엿한 아가씨로 보이는 그에게 이런 일을 맡겨도 되는가 싶어서였다. 그러자 미네는 특유의 회색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늘은 바람의 영역이니까요. 엘퀴네스보다 제가 움직이는 편이 더 확실할 겁니다. 이렇게 짜릿한 전투에는 한번쯤 끼어보고 싶었거든요. 역시 엘의 유희는 재밌군요.” “…그, 그래? 하하하…그렇다면 다행이고. 으음, 그럼 트로웰과 엘뤼엔은?” “우리는 여기서 엘을 도와야지. 맡겨만 둬, 멋지게 싸워줄게~” “누가 우리야 누가!!” 엘뤼엔은 버럭 소리 지르면서도 끝끝내 ‘싫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트로웰을 못마땅하다는 듯이 잠시 노려보던 그는 곧 나에게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그냥 멀찍이 물러서있어라. 나랑 이 녀석이 알아서 할 테니까.” “에? 그런 게 어딨어. 다른 사람들 다 고생하는데 나 혼자 구경하고 있으라고?” “정 찜찜하면 지금부터 인간들이 피신하는 거나 도와주던지. 아무튼 넌 전투와는 무관한 상태로 있어라. 저 녀석들이 다치면 가끔 가서 치료나 해주고.” “싫어! 불공평해.” “내 말 들어. 넌 아직 정령왕으로서 자각이 덜 된 상태야. 죽이는걸 보는 것과 직접 죽이는 건 엄연히 다르다. 설마 몬스터 몇 마리 죽여 본 걸로 괜찮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네가 인간과 몬스터의 차이점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면, 그땐 나서도 아무 말 하지 않으마.” “…윽…” 구구절절 옳은 말 이었기에 나는 반박할 거리를 찾지 못하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게 트로웰은 상냥한 얼굴로 한마디 덧붙였다. “엘뤼엔의 과보호야…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그의 의견에 찬성이야, 엘. 지금의 너는 정령과 인간의 정신체가 뒤섞인 아주 불안정한 상태야. 실제론 사람을 죽이게 되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할지 몰라. 하지만 그 자체로 이미 엘한테는 충격이 되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자신의 모습에 적응할 수 있겠어?” “…무슨 소린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할 일을 모두에게 떠넘길 수는…” “떠넘길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까 이런 말도 가능한 거야. 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가 말리려고 하겠어? 어차피 우리가 영원히 간섭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이러는 것도 이때 뿐 일거야. 그러니 일단 지금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응. 알았어, 트로웰. 충고대로 할게.”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내 뜻만 우기고 들 수는 없어서 나는 결국 찜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라피스는 가차 없이 중얼거렸다. “팔불출들 같으니…완전히 애 취급이구만. 그냥 정령계에 가둬두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지, 유희는 어떻게 허락했는지 몰라?” “시끄러, 라피스. 엘은 말 그대로 특이케이스라 사소한 것에서 어떤 결과를 이끌어 낼지 모른다고. 정체성을 완전히 자각하기 전까지 미리미리 주의를 기울어 두는 것뿐이야.” “흐음. 난 한번쯤 녀석이 폭주하는 모습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포, 폭주?” 그건 내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소리?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얼른 라피스에게 꿀밤을 먹였다. 따악- “윽! 무슨 짓이얏!” “시끄럽다고 했지. 우리 중에서 가장 제멋대로인 녀석은 너야. 엘은 네 장난감이 아니라고. 지금과 같은 흥미위주의 말은 삼가해.” “쳇. 농담이란 것도 몰라? 아무튼 되게 딱딱한 정령왕 같으니.” “덩치만 컸지 머리는 아직도 어린애구나. 드래곤 종족의 미래가 심히 어둡다.” “뭐야?” “따지고 들 시간 있으면 어서 저놈들이나 막아. 괜히 방심하다가 큰 코 다치지 말고.” 키가 커져서인지 이전처럼 어른스럽게 훈계를 건네는 트로웰의 모습은 그다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연신 투덜거리는 라피스를 억지로 떠밀어 밀곤 멍하니 구경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에게도 재촉하는 말을 늘어놓았다. “뭐해, 다들? 지금 막지 않으면 금방 놓쳐 버릴 거야. 자아, 엘뤼엔. 우리도 그만 가자. 엘! 나머지 일을 부탁할게. 전투가 시작되면 이번 일의 주모자가 등장할거야. 대공의 움직임을 주시해줘.” “응, 알았어.” 떨떠름하다는 표정과 달리 막상 흩어지기 시작한 일행들은 모두 행동이 재빨랐다. 콰아아아앙! 라피스들이 성큼 하늘로 날아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 엄청난 광음과 함께 새빨간 불덩어리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몇 만의 전사를 상대로 한, 단 네 사람의 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꺄아아악!” 폭음이 울리고 불꽃이 튀자 그때까지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하며 도망치는 것이 보였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유일하게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그런데…뭔가를 잊은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건 내 착각일까? “아참! 우리랑 합류하기로 한 군대가 있었지!!” 그때서야 수도에서 만나기로 한 후발대를 떠올린 나는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기껏 짜놓은 계획이 예상치 못한 인원들로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나중에 이사나와 후작의 얼굴을 볼 면목이 서질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후발대와 합류한 뒤에 치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들었지 않았던가. “에휴. 이미 늦은 거 어쩔 수 없지. 일단은 그쪽에 가볼까.” 지금쯤이면 후발대들도 하늘을 새까맣게 뒤엎은 마족의 전사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상황이 급하다는 사실을 알면 어느 정도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얼른 처음 합류하기로 정해두었던 장소로 달려갔다. ========================================= .....일단 여기까지; (나머지는 더 써야 합니다.ㅠㅠ) 아하하하. 다들 오랜만에 뵙습니다;; 늦게 온 주제에 이렇게 허접한 글을 들고와서 정말 죄송해요;; 본격적인 전투라곤 해도...전혀 긴박한 느낌이 안들어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역시 전쟁은 어렵군요.. 죽어야 할 놈들이 얼마 안 죽어서 슬픕니다. <-어이; 살생부 명단을 작성한 보람이!! 그럼;; 나머지 분량은 곧 들고 돌아오겠습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길 바랍니다.ㅠㅠ [정령왕 엘퀴네스] 8-22. 결전의 날! (3) “당신이 엘…님이시라고요?” 내가 약속장소인 에바스 평원에 다다랐을 때는, 이미 합류하기로 되어있던 군사들이 모두 모여서 나와 라피스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어느 때 기습이 닥칠지 모른단 불안감 때문인지 하나같이 날이 선 표정으로 주위를 경계 하고 있던 그들은, 처음 다가오는 나를 발견하곤 험악하게 으르렁 거렸다가 곧 정체를 밝히자 벙찐 얼굴들이 되었다. 그 중 후발대의 대장이라는 ‘위칼레인 폰 스피어’ 자작은 탐탁지 않다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연신 내 위아래를 흩어보기에 바빴다. 황제의 일행인데다, 후발대의 총지휘관이라는 존재가 이제 10대 후반의 소년이었으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라피스가 있었다면 사정이 약간 달랐을 테지만 나 혼자만으로는 저들에게 믿음직스럽게 보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다시 한 번 늦은 것에 대해 사과를 건넸다. “제가 여러분이 기다리고 있었던 엘이란 사람이 맞습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서 합류가 좀 늦어버렸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으음. 실례지만 황제폐하와는?” “친구이자, 여행을 함께 한 동료입니다. 생각보다 어려서 놀라셨나요?” “아, 아닙니다. 그나저나…다른 분이 더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아. 위에 있어요.” “네?…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자작에게 나는 미네가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내 손을 따라 고개를 젖히던 사람들은 곧 하늘을 수놓은 시꺼먼 그림자들을 발견하고 얼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인간의 시력으론 그것이 마족의 무리라는 것까진 알아채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모양이다. “저, 저건 대체?” “음…조금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랄까. 일단 상황을 설명 드릴게요. 저희가 이곳으로 온 사이, 새로운 일행들이 몇 명 더 합류했습니다. 지금 그들이 황성의 군대를 치고 있는 상태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저희 후발대와 합류 하신 뒤에 일을 진행하시는 게 아니었습니까?” “네에, 그러려고 했는데, 보다시피 중간에 엉뚱한 녀석들이 끼어들어서요. 부득이하게 작전의 실행이 빨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그 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할게요.” “하아?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자작의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하늘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확인한 마족하나가 무리들을 이끌고 땅에 내려섰던 것이다. 쉬이이익! 강한 바람을 느끼고 돌아보니 어느새 내 뒤편에는 30여명 정도의 마족들이 서서 긴 송곳니를 드러내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단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맞춘 자작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신음을 내뱉었다. “마…마족!!” 짧은 말이었지만 그것은 전 군대에게 파장을 미쳤다. 사람들이 순식간에 공포에 질린 얼굴로 술렁거리자, 마족중의 리더인 듯한 녀석이 쓰윽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큭큭큭. 이런 외딴곳에 이유도 없이 모인 몇 천의 군대라…다른 녀석들 보다 먼저 발견하다니 운이 좋았군. 어이! 한 마리도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고. 모두 이 자리에서 갈갈이 찢어 버리자!” “크하하하하하!” 요란하게 웃는 마족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차이에도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소리겠지만, 덩달아 나까지 만만하게 보인 것 같아 슬쩍 기분이 나빠지려고 했다. “라피스 녀석, 대체 뭘 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나도 전투에 끼어들 수밖에 없잖아! 하필이면 전투에서 빠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렇게 되다니…나중에 트로웰이나 엘뤼엔한테 혼나는 건 아니겠지? 윽, 이건 신의 농간이야!” “뭐, 뭘 그렇게 중얼거리시는 겁니까? 어서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우리가 막겠습니다!” “네? 도망치라뇨?” “폐하의 일행이신 분을 이런 곳에서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서 피하십시오! 그동안 저희들이 어떻게든 막아보겠습니다.” 마음은 갸륵했지만 자작의 걱정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는 자신의 코앞에 다가온 마족의 움직임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주제에 뭘 막겠다는 거야? 짧게 혀를 찬 나는 급히 물의 힘을 끌어 모아 이제 막 자작의 목을 치려는 마족을 향해 날려 보냈다. 촤아악! 퍼어엉!! “크아아악!” 내 공격에 정통으로 당한 마족은 복부에 붉은 피를 흘리며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때까지도 자신이 방금 무슨 일을 당할 뻔 했는지 모르고 있던 자작은, 눈앞에서 쓰러진 마족을 보고서야 얼굴을 헬쓱하게 굳히며 발걸음을 뒤로 주춤거렸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사람들에게 짤막하게 소리쳤다. “공격은 둘째 치고 방어나 열심히 해요! 내가 다 막을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예…예, 알겠습니다!!”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대기하고 있던 마족들이 쏜살같이 나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방금 눈앞에서 자신들의 동료가 당해버린 충격인지 모두 눈에 핏발이 가득 드러난 상태였다. “크아악! 이 자식! 죽여버리겠다!!!” “감히 인간 따위가!!” 험악하게 쏘아져 들어오는 기세에 뒤에 있던 사람들이 ‘헉!’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것이 느껴졌다. 단단히 주먹을 틀어쥔 나는 곧 한손에 물줄기를 만들어 그것을 창인 것처럼 휘어잡았다. 아무것도 없던 손에 갑자기 무기-그것도 물로 된 창이 생기자 사람들은 물론, 덤벼들던 마족의 눈까지 휘둥그렇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너, 넌…! 설마!!” 알아차렸으면 반말은 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그렇다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지척에 가까워진 마족하나의 몸을 그대로 꿰뚫었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손에 쥔 창을 통해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으나 기분은 이상할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몬스터와 싸울 때하고 별다른 느낌이 없다고나 할까? 창에 박힌 마족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 사이 옆에서는 또 다른 마족이 굳게 뭉친 마력덩어리를 내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비어있는 다른 쪽 손으로 둥근 물의 방패를 형성한 후 곧바로 날아드는 검은 빛을 막았다. 콰아아아앙! “으아악!” 요란한 폭발음이 들리고 그 파장으로 몇 사람이 밀려나갔으나 정작 정면으로 막아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시 녀석이 달려들자 나는 빠른 속도로 방패를 없앤 뒤 또 다른 물의 창을 만들어 놈을 향해 집어 던졌다. 푸욱! 곧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허무할 정도로 쉽게 공격당한 마족의 몸이 바닥으로 넘어졌다. 그러는 사이 다른 쪽에선 군사들이 마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를 벌이고 있었다. 몇 사람이서 한 마족을 향해 창과 칼, 화살까지 동원하는데도 마족의 입가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크윽! 죽어랏!!” 챙! 채앵! 촤아악! “으아아아악!” 잠깐 방심을 했는지, 열심히 칼을 휘두르던 남자가 배에 커다란 상처를 입고 옆으로 쓰러졌다. 워낙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라 옆에 있던 다른 병사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마족의 움직임은 더욱 빨라졌다. 녀석은 자신의 바로 앞에 있던 남자의 팔을 잡아 서슴없이 뒤틀어 꺾었다. 우드드득! “크아아악!” “쳇!”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또다시 나를 향해 공격해 들어오는 놈들을 무시한 채 그들 쪽을 향해 달려갔다. 정령을 소환하고는 싶었지만, 안 그래도 많은 무리와 싸워야 할 라피스에게 또 다른 체력소모를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빠른 속도로 수 십 개의 물 덩어리들을 만든 나는 그것을 딱딱한 얼음조각으로 변하게 한 뒤 막 병사 하나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으려는 마족에게 쏘아 보냈다. 콰가가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든 조각들은 다트처럼 마족의 몸에 요란하게 박히기 시작했다. “크허억!” 비명을 지른 마족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할 틈도 없이 나는 바로 이어지는 다음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그 후 부터 압축된 물을 쏘아 보내거나 폭발적인 물의 흐름을 이용해 질식시키는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이용해서 마족들을 상대하는 나를, 자작 이하 군사들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퍼어어엉! 콰앙!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몰려들었던 마족들을 전부 다 쓰러트리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무심코 둘러본 주변은 내가 마구잡이로 끌어들인 물로 흥건하게 젖어, 그 사이 마치 비라도 온 것 같은 형태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 흐르는 붉은 핏물과 그 위에 아무렇게나 널부러진 마족의 몸은 이미 굳은 시체가 되어 꼼짝도 못하게 된 지 오래였다. 아무 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려는 무렵, 그때서야 나는 내가 지금까지 이들을 죽이는 행위에 아무런 죄악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몸을 떨었다. ‘나…원래 이렇게 잔인한 성격이었나?’ 아무리 이들이 마족이고, 아군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다지만, 상대방의 몸을 직접 꿰뚫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는 건 지금의 나로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였다.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랄까? 이런 게 인간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설마 아니겠지. 지금 이 녀석들은 인간이 아니잖아? 마족인데다 아군을 죽이려고 한 나쁜 놈들이라고.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서….’ 엘뤼엔과 트로웰이 왜 그런 충고를 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들의 염려를 현실로 만들 순 없어서, 나는 복잡하게 변하려는 머릿속을 애써 털어버리곤 방금 전 마족의 공격으로 부상을 당한 사람들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헉…” “으음.” 다친 부위를 감싸 쥐고 끙끙거리던 사람들은 내가 다가서자 긴장한 듯 얼굴을 굳히며 어설프게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긴, 자기들은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마족을 종횡무진 연달아 몇 십 마리나 해치운 내가 괴물로 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깔끔하게 무시한 나는 대신 옆에서 멍하게 서있던 자작을 향해 물었다. “스피어 자작님. 이렇게 불러도 실례가 되지는 않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다쳤나요?” “…아! 아…으음. 부상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모두 엘님 덕분입니다. 정말 대, 대단하셨습니다.” “저야 당연한 일을 한걸요. 상처들은 어때요?” “뼈가 부러진 자는 심하지 않습니다만, 외상을 입은 자는 좀…그런데, 저어…혹시 마법사 십니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물을 이용해서…” “하하. 거의 비슷합니다. 일단 부상자들을 보여주시겠어요? 간단한 치료마법쯤은 할 수 있거든요.” “오오! 그, 그래주시면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릴 일입니다. 이봐, 상처를 보여 봐라. 엘님이 봐주실 거다.” 나를 철썩 같이 마법사로 믿어버린 자작은 모든 경계와 의심을 풀고 환한 표정이 되어 다친 사람들에게 안내했다. 아마도 이런 특별한 능력 때문에 어린 나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처음엔 내키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사람들도, 내가 완벽할 정도로 깔끔하게 상처를 치유하자 놀란 표정이 되더니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대충 마무리 지어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우수수 시커먼 물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쿵! 쿠웅! 쿠우웅! “우왓!! 뭐, 뭐야?”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바닥으로 처박히는 것은 새까맣게 그을린 마족들의 시체였다. 이게 대체 뭔 일인 겨? “호오~ 이미 한 판 했던 모양이지? 사방이 물 천지군.” “!!” 황당한 표정으로 올려다 본 하늘엔 어느새 코앞으로 날아온 라피스의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녀석을 쫓아온 수많은 마족무리가 그의 뒤편에서 날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콰드드드드드득! 웅장한(?)소리를 내며 이쪽을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마족무리를 본 사람들은 핼쓱한 표정으로 온 몸을 경직시키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아까 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기 때문이다. “내가 미쳐!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아아. 그렇게 되나? 난 그냥 몇 마리가 이쪽으로 내려서는 것 같기에 궁금해서 와 본건데 말이지. 괜찮아, 괜찮아. 한방에 날려버리면 되니까.” 그 말처럼 라피스는 단 한마디의 말로 모든 상황을 종결지었다. 녀석의 손에서 갑자기 커다란 불덩이가 솟아오른다 싶더니, 달려들던 몇 백 마리의 마족이 한꺼번에 불타올랐던 것이다. “헬파이어!” 퍼어어엉! 콰아아앙! “크아아아아악!!”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입을 떡 벌린 채,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지는 마족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마 평생 돈 주고도 못 볼 구경이지 않았을까? ====================================== ready~~go~ [정령왕 엘퀴네스] 8-23. 결전의 날! (4) “은인! 전부 죽이지 마! 내 부하들이란 말이야!” 그때마침 요란한 폭발을 발견하고 달려온 아스가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소리쳤다. 비록 지금은 적이라 해도, 미래의 자신이 지배할 종족을 함부로 다루는 라피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다고 녀석이 눈 하나 깜짝할 성격은 아니었지만. “덤벼드는 놈들은 죽여도 된다며? 이봐, 꼬맹아. 지금 지천에 깔린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사정 봐주며 싸우다간 우리가 당할 판이라고.” “내가 금방 제압 할 수 있어! 조금만 있으면 성년이 된단 말이야!” “나~참. 알았다, 알았어. 못하면 나중에 나한테 신나게 맞을 줄 알아라. 아, 그리고 엘, 너는 어때? 할 만해?” “응? 뭐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는 내게, 라피스는 주변에 널려진 마족들의 시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녀석들 해치운 거 너잖아? 느낌이 어땠냐고 묻는 거야.” “으음, 그게…” “대답하기 곤란해 하는 걸 보니 별 느낌이 없었던 모양이지? 그래서 현재의 기분은?” “…조금 찝찝해.” “그냥 단순히 찝찝한 수준? 뭔가를 죽였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없어?” “미안하긴 하지만…죄책감은 아닌 것 같아. 그냥 너무 아무렇지 않은 것에 놀란 정도? 역시 나 조금 이상해 진건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나를 보며 라피스는 재미있다는 듯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가볍게 고개를 저어 부정하는 녀석의 입에선 곧 유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그게 정상이야. 그래도 생각보다 적응을 잘 하는 것 같군. 난 또 ‘내가 살인마가 되고 있어!’ 라고 외치며 구석에 숨어 벌벌 떨 줄 알았지.” “심정은 약간 비슷해.” “흐음~. 뭐, 어때? 한 번쯤은 미쳐보는 것도 좋아. 그러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달라지지. 언제까지 피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거든. 그 팔불출 놈들이야 어떻게든 널 상처 입히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양이다만, 감싸는 애정만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니라고.” “그거야…” “걱정 마셔. 네가 미쳐도 비난할 존재는 아무도 없어. 엘뤼엔이나 트로웰이나 예전엔 정상이었는줄 알아? 좀 더 솔직해 지시지. 인간을 죽이는 게 꺼려지는 게 아니라, 잔인해진 네 모습을 보고 그놈들이 널 싫어하게 되는 게 더 무서운 거 아니야?” “!!” 순간 차가운 물벼락을 머리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쓴 것 같았다. 멍한 얼굴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라피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로 널 외면할 놈들이라면 처음부터 손을 내밀지도 않았을 거다. 언제까지 나약하고 힘없는 인간으로 있을 생각이야? 이제 슬슬 자신이 사랑받는 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도 됐잖아!” “……” 아마도 라피스는 내가 은연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어리광부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럴 때면 그가 나보다 연상이며,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내가 무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라피스는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되어 뭔가를 더 말하려고 했다. 비록 방해하는 누군가 때문에 이룰 수는 없었지만. 쉬익! 퍼엉!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이 썩을 꼬맹이~!!” 갑자기 등 뒤에 불덩어리를 맞은 라피스는 분노한 얼굴로 주범인 아스를 바라보았다. 그에 맞서 아스 또한 지지 않고 라피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대부 곤란하게 하지 마! 은인 때문에 화나서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면 어떡해!” “건방진 녀석!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기 날아다니는 놈들이나 잡아!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면 헤츨링 먹이로 던져버린다!” “헤츨링보다 내가 더 강해! 바보 도마뱀!” “뭐가 어쩌고 어째!!” 이래서 애들 앞에선 말을 조심해야 하는가 보다. 그새 엘뤼엔의 말투를 따라하는 아스를 보며 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은 주변의 심각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본분까지 잊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순간에도 마족들은 꾸준히 그들의 공격을 받고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아스가 다른 방향으로 날아가자 라피스는 씩씩거리면서 내 쪽을 향해 소리쳤다. “젠장! 빌어먹을 꼬맹이! 아무튼 엘, 너는 거기 있는 인간 녀석들이나 맡아. 나나 다른 녀석들이나 이쪽까지 전부 신경 쓰기는 힘들 것 같으니까.” “아, 알았어. 근데 아스한테 무슨 다른 방법이 있는 거야? 아까 성년이 어쩌고저쩌고 한 것 같은데.” “저놈이 완전한 성인이 되면 마신한테 받은 왕의 자격이 드러나게 된다더군. 얼마 안 남았다니까 그때까지만 참아볼 생각이다.” “괜찮겠어? 봐주면서 싸우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은 거 아니야?” “뭐 어쩔 수 없지. 집단으로 겁이라도 줘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수밖에.” “에? 어떻게?” 대체 저 많은 마족들에게 무슨 수로 겁을 준다는 말인가? 나는 대꾸도 없이 멀어져 가는 라피스의 뒷모습을 보며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나는 일행들의 모습만 바라보느라, 옆에서 지금까지의 대화를 들은 스피어 자작 이하의 인간들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어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건 스피어 자작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고 나서였다. “저, 저어…엘님…?” “아! 죄, 죄송해요, 자작님. 계시는 걸 잊고 있었네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보다 방금 전 그분들이 폐하께서 말씀하신 일행들이신 겁니까?” “네, 라피스와 아스모델이라고 합니다. 그 외에 새로 합류한 일행들이 더 있고요.” 또박또박 대답하는 말에 스피어 자작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만큼 핼쓱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저어…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만.” “…?…네, 말씀하세요.” “으음. 대, 대화중에…그러니까…저기, 마신이라든지, 왕이라든지…그 밖에 여러 가지 굉장한 단어들이 많이 나와서 말입니다. 그, 그게…무슨 뜻인지…” “!!” 아차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혀를 꽉 깨물고만 싶어졌다. 그런 내 모습은 본 사람들은 아까보다 좀 더 추궁하는 듯한 집요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 “아하하. 드, 들으셨어요? 으음, 그게 말이죠…” “사실대로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마법을 쓴다 해도 사람이 저리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저분들은 인간이 아닌 거지요? 아까 그 검은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은 마족으로 보였습니다만.” “아! 마, 맞긴 하지만, 아스는 적이 아니에요. 절대 오해하지 말아주세요.” “네, 그건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누구입니까? 저 분도 마족인가요?” 솔트레테의 국교가 마신교라서인지, 스피어 자작이나 그 외 다수의 사람들도 마족이란 존재에 대해 딱히 큰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는 듯 했다. 그 대신 그는 단순히 라피스의 정체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시선만 보냈다. 방금 전 아스의 입을 통해 ‘도마뱀’이라는 직설적인 호칭까지 들어놓고도 눈치를 못 채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둔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하긴, 그만큼 드래곤이란 존재가 일반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는 소리겠지.’ 속으로 납득한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히 그들에게 일행의 정체를 털어놓으려 했다. 그러나 잠시 후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멀거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우우우우!! “뭐, 뭐야?” 갑자기 수 만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야유하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주위를 진동했다. 그 소리는 정확히 라피스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두 팔을 활짝 벌린 라피스의 몸이 점점 붉은 빛에 휩싸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빛의 범위가 커질수록 라피스의 몸은 점점 희미해졌고, 종래에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 그 순간 눈두덩이 처럼 불어나던 빛의 흐름이 천천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사방의 웅장한 진동과 함께 그 안에서 거대한 크기의 시뻘건 불덩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불덩어리라고 본 것은 순전히 내 착각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형체의 전체가 단단한 가죽으로 감싸져 있는데다, 입과 꼬리와 눈까지 달린 살아있는 생명체 였으니까. 단지 그것이 불이라고 착각할 만큼 새빨간 빛을 띄우고 있었을 뿐이다. 그 생명체는 두개의 커다란 날개를 휘저은 상태로 날카로운 이빨이 달린 입을 크게 벌려 기괴한 소리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 그 순간은 무수히 날아다니던 마족들과 그와 대항해서 싸우던 일행들은 물론,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과 심지어 주변을 흐르는 공기까지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았다. 나조차 움찔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온몸으로 발산하던 생명체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멸하겠다는 듯이 두 개의 붉은 눈동자에 짙은 살기를 드러내고 있었다. “히이익!” “커, 커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그대로 실신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었지만, 나는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한 한 존재만 바라보느라 미처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상태였다. 방금 전까지 일어난 일이 사실이고, 내가 짐작한 게 맞다면 저것은 분명! “맙소사…설마…라피스?” 드래곤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직 그 본체를 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은 나에게도 무척이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인간일 때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확연하게 다른 거대한 육신과 날카로운 뿔들은 두려움과 혐오감 보단 가슴이 벅차오를 정도로 진한 감동을 유발시켰다. 내가 뾰족한 이빨과 발톱, 거대하게 늘어진 꼬리와 비늘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오늘 본 드래곤의 모습은 한때 도마뱀이라는 소리에 웃은 것이 미안할 정도로 온 몸에서 강렬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적막한 공간 안에 오직 그 혼자만이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드, 드래곤!!” 잠시 후 겨우 정신을 차린 자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옆에 있던 나에게 따지듯이 소리쳤다. “아까 그 분이 드래곤이었다는 겁니까? 대체, 대체 당신 일행들은 어떻게 된 존재요!!” “아하하. 조, 조금 특이한 구성이긴 하지요. 너무 놀라실 필요는…” “드래곤을 실제로 보았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에, 엘님 당신이야말로 인간이 맞긴 한 겁니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의연하실 수 있습니까?” 아마 저토록 어마어마한 존재감 뿜어내는 드래곤 앞에서 멀쩡하게 서있는 내가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실제로 그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들부들 떤 채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 상태였다. “드래곤이다!!” “레드 드래곤이 나타났다!!” 종횡무진 하늘을 휘젓고 다니던 마족들도 지금만은 모두 경직되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순간이었을 뿐, 오기와 승부욕으로 똘똘 뭉친 그들 집단은 곧 들고 있던 무기를 곧추 세우고 라피스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대장인 듯한 한 마족의 입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래곤이라고 벌벌 떨 것 없다! 겨우 한 마리뿐이다! 모두 달려들어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그의 말에 힘을 얻은 마족들은 상대방이 뿜어내는 위압감에도 불사하고 라피스를 향해 돌진을 시도했다. 그러자 라피스는 비늘에 감싸여진 붉은 눈동자를 꿈틀거리며 고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감히 나를 거역하는 것인가!] 우습지도 않는 다는 듯, 이죽거리는 그의 말투에 달려들던 마족들 몇 명이 약간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펄럭- 두 날개를 크게 휘저은 라피스는 또 다시 크게 포효하며 말했다. 키에에에에에--- [나에게 대항하는 모든 존재를 멸하리라!] *** “레드 드래곤!!!” 초반 여유로운 모습으로 전투의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유카르테 대공은, 갑자기 나타난 드래곤의 모습에 경악하며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가 있던 발코니 너머로는 멀리 있어도 확연히 눈에 뜨이는 거대한 생명체가 크게 포효하고 있는 상태였다. [키에에에에에----------] 거대한 입이 벌려질 때마다 엄청난 진동과 함께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위압감이 전해져 왔다. 대공은 낭패한 얼굴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왜 드래곤이 여기에! 그들이 인간의 전쟁에 끼어들 리가 없을 텐데?” 진실이야 어찌됐든, 겉포장으로는 완벽하게 야심 많은 섭정왕과 쫓겨난 황제의 전쟁이라고밖에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드래곤의 출현은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하던 것이었다. 훗날 모든 계획이 전부 드러나게 되더라도 자존심 강한 신들이 드래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여 처음부터 제외해둔 종족이 아니던가! “뿌득, 이사나놈…설마 드래곤을 매수했단 말인가! 기고만장해진 데는 다 이유가 있었군!” 새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진 그의 눈은 무시무시한 분노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막 모든 것이 다 끝날 것이라 여긴 참이었는데 드래곤의 등장으로 재가 뿌려진 격이니 그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세르피스가 숨기고 있던 사실이 이것이었나? 안 그래도 찝찝하다 했는데, 그 배은망덕한 계집! 잘도 이런 수작을!!’ 단순히 이기고 지는 문제를 떠나, 그는 자신의 조카에게 그만한 행운이 돌아갔다는 것 자체가 괘씸하기만 했다. 이를 가는 대공의 얼굴에선 진즉에 이사나를 죽이지 못한 후회와 탄식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그 순간 어두운 공간 안에서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래곤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불쾌하다는 듯 물어온 자는 방금 게이트를 타고 중간계로 넘어온 마왕이었다. 그는 하늘을 장악한 거대한 드래곤과 주위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는 마족들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대공은 이미 그의 등장을 짐작했다는 듯 그리 놀라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셨습니까. 저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당황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흐응. 정보부족이었다는 것이냐? 평범한 드래곤이 아니다. 적어도 에이션트급은 되는 것 같군.” “이사나가 설마 저런 아군을 손에 넣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미리 알아내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크큭. 신경 쓸 것 없다. 아무리 그래도 저 혼자 이 많은 전사들을 상대하기는 벅찰 것이다. 그 꼬맹이 녀석이 죽는다면 인간들은 알아서 흩어질 것이고, 놈 또한 흥미를 잃고 자신의 종족에게 돌아갈 테지. 그게 아니라도 상관없다. 저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내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다.” 태평하게 대꾸하는 마왕의 말에 대공은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끼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드래곤 따위는 애초부터 악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놈이 죽는다면, 그것에 온 희망을 걸고 있을 이사나는 그대로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소인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마왕전하의 힘을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군요. 전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큭큭큭. 그래,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 계획엔 차질이 없는 거겠지?” “물론입니다. 모두 순조롭습니다. 앞으로 이틀 후면 전하는 원하시는 모든 것을 손에 쥐실 수 있으실 겁니다.” “크하하하하!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너에게 맡긴 보람이 있구나!” “황공합니다.” 껄껄 웃은 마왕은 다시금 드래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 마족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요란하게 등장하며 위협을 가한 것치곤 드래곤은 생각보다 대단한 활약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숫자에 밀리는 것이라 태연하게 생각했던 그는, 잠시 후 공격할 수 있는 타이밍인데도 가만히 있는 드래곤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이건 마치 시간을 벌기 위해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켜 놓은 것 같지 않은가! 불길한 예감에 눈을 굴리던 그는 곧 한쪽에서 배회하고 있는 검은 머리의 소년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치켜떴다. “저, 저 녀석은?” 마왕 자신의 눈이 잘못 된 게 아니었다면 소년은 아무리 보아도 마족임이 틀림없었다. 아직 성년이 채 되지 못한 것을 보면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그것을 깨달은 순간 마왕의 눈에서 굵은 불똥이 터져 나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모든 알들을 전부 파괴한 줄 알았는데, 살아남은 것이 있었단 말인가! 루카르엠, 아니 마신 카노스의 짓이구나!! 미리 알을 빼돌려 놓은 건가?’ 언뜻 보아도 소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평범한 마족 꼬맹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순간, 마왕은 단번에 그가 자신을 제치고 들어올 차기 마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마계에서의 왕위 계승은 선대의 마왕을 죽임으로서 이루어지지만, 마신이 직접 선택한 왕이라면 그런 과정이 없이도 마족들이 순순히 따르게 될 것이다. 마족들에게 있어 마신의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그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존심이 상했다. “왜 그러십니까? 마왕전하?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으득! 네가 보기엔 저 녀석이 무엇으로 보이느냐?” 마왕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자 의아한 시선을 보내던 대공은, 그가 가리킨 방향에 서있던 마족소년-아스모델을 발견하곤 흠칫 숨을 들이켰다. “저건 마족의 아이가 아닙니까? 이번 대의 알들은 왕께서 전부 부화를 막으신 게 아니었습니까?” “그랬지! 아무래도 마신이 수작을 부린 모양이다. 어쩌면 쟌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때 놈을 그냥 죽인 것이 실수였던 것 같다. 내가 이런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노여움을 가라앉히십시오, 전하. 어차피 때는 가까워졌습니다. 이제 와서 차기 마왕이 탄생한다 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겁니다.” “그런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것 같구나! 감히 나를 밀어내고 마왕이 되겠다고? 흥! 마신이여! 네가 선택한 아이가 어떤 죽음을 맞이하는 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보거라! 크하하하하!” 호기롭게 외친 마왕은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마족 소년-아스모델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시킬 필요도 없이 자신이 직접 처치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대공은 이상할정도로 마음이 찜찜해졌다. 드래곤에 이어 이번엔 마족이라니! 연달아 밝혀지는 적의 정체들은 하나같이 평범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 중에서도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왠지 이것으로 끝이 아닐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었다. 마왕과 손을 잡은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절망감이 그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이사나…황성을 떠난 뒤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직도 나약한 꼬마라고만 생각하고 만만히 보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성년이 된 이사나가 등 뒤에 서서 그의 목을 바짝 졸라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8-24. 결전의 날! (5) 마족들의 신경이 온통 라피스에게 몰리자 나는 그 틈을 타 스피어 자작과 그의 군사들에게 수도 내부로 진입할 것을 부탁했다. 황성에 있는 군사들이야 엘뤼엔과 트로웰이 알아서 처리(?) 한다지만, 보다 확실한 점령을 위해서는 제대로 된 군대가 닥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와아아아아!” 황성의 군대는 일반 병사가 아닌 기사로만 이루어진 정규 집단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장을 죽이더라도 군대가 흩어지거나 도망치는 일이 없었다. 결국 전부 몰살시키거나 포로로 잡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데, 중간에 마족들이 개입하는 바람에 상대하기가 더욱 까다로워진 참이다. 그나마 드래곤의 등장 덕분인지 아군들의 사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최강의 생명체의 비호를 얻는 만큼,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붙은 모양이었다. 그 사이 나는 클모어로 이동 중이던 대공의 군사들이 수도의 접전 소식을 듣고 회군을 시작했다는 전서구를 받았다. 아마 이사나들에게도 같은 연락이 갔을 테니, 잠시 후면 그곳에서도 대대적인 전투가 벌어질 것이다. ‘녀석이 오기 전에 먼저 성을 점령해버리면 좋을 텐데. 마족들 때문에 무리이려나?’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하늘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라피스는 이미 몸 여기저기에 작은 상처를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들을 손속에 사정까지 두며 싸우자니 제 아무리 잘난 녀석이라도 힘에 부친 것이다. 그나마 녀석이 내뿜는 위압감에 질린 마족들이 적극적으로 공격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부상으로는 번지지 않는 듯 했다. [이 썩을 녀석들! 전부 다 죽여 버릴 테다!!] 마치 파리 떼를 쫓는 듯 달려드는 마족을 향해 거칠게 날개를 펄럭거린 녀석은, 아스에게 아직도 멀었냐고 채근하기에 바빴다. 그 모습에 아스는 난감한 표정을 하며 조금만 더 버텨달라는 말을 간헐적으로 내뱉을 뿐이었다. “대체 저놈은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왜 안 죽이고 저렇게 얻어터지고 있어?” “헉, 엘뤼엔! 언제 왔어? 황성의 군대는 어쩌고?”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엘뤼엔이 내 옆에서 서서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요란한 전투의 한복판에 있었을 텐데도 입고 있는 옷에 핏자국 하나 묻어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지나가는듯한 어조로 대답했다. “인간들이 끼어들기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고 왔다. 대충 강해 보이는 놈들은 거의 다 제거해 놨으니까 상대하기엔 무리 없을 거야. 근데 저 녀석은 왜 저러고 있다고?” “아아. 지금 시간벌기 하고 있는 거야. 조금 있으면 아스가 완전히 성인이 된다고 하더라고. 왕으로서 각성하면 여기 있는 마족들을 전부 제압할 수 있다고 했어.” “흐음. 그래서 지금 한 마리의 온전한 도마뱀이 되어 눈물겨운 희생을 해주고 있다? 재미있군. 놈한테 딱 어울리는 역할이다.” “아하하. 그렇지 않아도 분해 죽으려고 하는데 너무 놀리지 마. 그래도 녀석의 협조 덕분에 다른 일행들이 편해졌는걸. 난 꽤 기특하다고 보는데.” “흥! 저런 일에라도 쓸모가 없으면 나가 죽어야지. 도대체가 저런 놈에게 칭찬 같은 게 가당키나…응?” “왜 그래, 엘뤼엔?” 푸념하듯 투덜거리던 그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자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어렴풋이 보이는 황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마족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사악한 기운이야.”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는 그의 말처럼 강한 살기를 뿌리고 있는 무언가가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향하는 방향이 정확히 아스가 있는 쪽이라는 것이다. 그는 덤벼드는 마족들과 상대하느라 자신을 노리고 들어오는 적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설령 알아챘다 하더라도 제대로 대응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상대의 움직임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아스! 옆을 봐!! 위험해!!” “이런, 안 돼! 멈춰, 엘!!” 경악한 내가 아스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띄운 것과, 엘뤼엔이 나를 잡은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서야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감지한 아스는 뒤늦게 실드를 형성하기 시작했고, 마침 그의 주변에 있던 데르온도 주군을 보호하기 위해 기겁을 하며 뛰어들었다. “주군!!” 그러나 날아든 적의 움직임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마치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들던 그것은 아스가 채 실드를 다 형성하기도 전에 다가와, 순식간에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데르온과 주변에 있던 몇 십의 마족들까지 한꺼번에 삼켜버렸다. 쉬이이익- 번쩍! 콰아아아앙! “아스! 데르온!!” 폭발의 순간은 짧았지만 그것으로 인한 결과는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처참했다. 하늘에서 일어난 폭발임에도 주위의 산과 지형이 지진이 난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으며, 그 속에 휘말린 대부분의 마족들이 그 자리에서 완전히 재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단지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러할 진데 공격의 중심이 된 아스와 데르온의 안위는 어떠할 것인가! 부릅뜬 눈으로 부들부들 떨던 나는 흩날리는 잔해들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추락하는 것을 발견하곤 재빨리 달려가 받아 들었다. 쿠웅! 순간 엄청난 압력과 함께 단백질이 불에 탄 것 같은 매캐한 냄새가 풍겼지만, 지금 내게는 그런 것보다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는 문제가 더 중요했다. 다음 순간, 온몸이 시뻘건 피와 그을린 화상으로 가득한 남자의 모습을 바라본 나는 흡-하고 숨을 삼키며 신음을 내뱉었다. “…데, 데르온!!” 죽었는지 살았는지 차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한 상태가 된 남자는 바로 데르온이었다. 의식을 잃고 있는 그는 한쪽 팔이 잘라져 거의 끊어질듯 덜렁거리고 있었고, 온 몸의 살이 썩은 것처럼 심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그의 상태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정신없이 그의 심장이 뛰고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살아만 있다면 이런 끔찍한 상처라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살아만 있다면! “대, 대부! 부하가 어떻게 된 거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데르온의 상태를 보아, 절대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아스가 멀쩡한 상태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시체처럼 늘어진 데르온과 내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스! 무사했구나!” “폭발하려는 순간 아슬아슬하게 실드가 완성됐어. 부, 부하는? 설마 죽은 거 아니지?” “괜찮아. 미약하지만 숨을 쉬고 있어. 금방 살릴 수 있어!” “다, 다행이다…” 아스는 잔뜩 일그러져있던 표정을 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주저앉았다. 아직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데르온이 살아있다는 것에 안심한 것이다. 나 역시 아스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가 되어 미처 공격을 해온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우리를 향해 엘뤼엔은 낮은 목소리로 짧게 경고했다. “아직 마음을 풀기는 일러. 다들 긴장하는 게 좋을 거다.” “응?” “…?!…” 그의 목소리가 이전에 비해 잔뜩 굳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폭발이 일어났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짧은 검은색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야비한 인상의 남자가 거만한 모습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 몸에서 풍기는 느낌은 마족과 비슷했지만, 그 주위로 역겨울 만큼 강한 피비린내가 묻어났다. 우리와 시선을 마주친 그는 곧 아쉽다는 듯 혀를 내밀어 입술을 쓰윽 핥았다. 그 모습만으로도 그가 방금 전에 아스들을 공격한 남자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크크크…그랬던가, 데르오느빌. 그동안 행방이 묘연해 졌다 싶더니, 나를 배신하고 이런 곳에서 다른 주군을 섬기고 있었다는 말이지. 이렇게 실망스러울 데가! 그동안 내가 너를 잘못 보았던 모양이야!” “무슨…네가 부하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가 데르온을 다치게 한 주범이라는 생각을 굳혔는지, 아스는 벌떡 일어나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천천히 지상으로 착지하더니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큭큭. 그렇다면 어쩔 거지? 사실은 너를 노린 것이었는데 상당히 운이 좋았구나, 꼬마야. 뭐, 어차피 그 운도 여기까지겠지만.” “…!!…죽여 버리겠어!” “크하하하! 네놈이 나를? 마신에게 선택을 받았다고 아주 기고만장해 있구나! 그렇게 빨리 저 데르온처럼 죽고 싶었나? 하긴, 나를 거역한 존재에겐 그보다 빠른 해답은 없을 테지!” “부하는 죽지 않아!” 반박하는 아스의 외침에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은 것도 잠시, 그는 곧 진득한 살기를 끌어올리며 우리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남자의 몸에 풍기던 피 냄새도 점점 짙어져, 주위가 온통 혈흔으로 물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했다. 그와 함께 나는 동시에 남자의 정체를 깨닫고 아스의 몸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위험해!!” 콰아아앙! 간발의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아스를 빗겨간 광선은 그가 서있던 자리에서 거친 폭발을 일으켰다. 두 번의 공격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자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또한 지지 않고 쏘아보며 설마라고 생각했던 그의 정체를 캐물었다. “당신…설마 마왕?” “큭큭, 용케 알아보았구나! 그래, 이 몸이 바로 현 마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마왕이다! 또한 바로 여기서 네놈들의 목숨을 거두어갈 존재이기도 하지!” “!!” 맙소사. 정말 마왕이었을 줄이야! 이래서 엘뤼엔이 긴장하라고 했던 건가?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본 그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띄웠다. “그러는 네놈은 정체가 무엇이지? 매우 기분 나쁠 정도로 정순한 기운이군. 어딘지 정령의 냄새도 배어있는 것 같고…인간이 아닌 것 확실한데 말씀이야…” “…맞았어.” “뭣이?” 놀란 마왕이 휘둥그렇게 눈을 뜸과 동시에 나는 치료술을 시전 하여 엉망이 된 데르온의 몸을 완벽하게 원상태로 복구했다. 파아앗! 눈부신 빛이 퍼져 나온 순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데르온의 육체가 순식간에 멀쩡해지자 마왕은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쳤다. “네놈! 네놈은 설마!!!” “입버릇이 나쁜 녀석이군. 누가 네놈더러 남의 아들을 그렇게 부르라고 가르쳤지?” “무스…? 커억!!” 콰아앙!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을 사이도 없이, 마왕은 엘뤼엔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곤 눈 깜짝할 사이에 저만치 날아가 한 벽돌집 안으로 처박혔다. 그러나 소리만 요란 했을 뿐, 정작 곧바로 튀어나온 녀석의 몸은 흔한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이었다. 후두둑, 몸에 묻은 흙덩이를 떨어낸 마왕은 붉게 충혈 된 눈으로 엘뤼엔을 쏘아보며 이를 갈았다. “으드득! 네 놈!!” 스물 스물 피어나는 기운은 눈에 보일 정도로 짙은 검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몸이 저절로 떨릴 만큼 짙은 살기였으나, 그것을 정면으로 마주본 엘뤼엔은 평소의 무심한 표정 그대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흐음, 역시 통하지 않나. 각성하기 전부터 이러다니, 정말 골치 아픈 녀석이군.” “뭐, 뭐야? 공격이 통하지 않는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나. 아들아, 너는 일단 피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까 그 시끄러운 꼬맹이랑 기절한 놈을 데리고 피해라. 뭣하면 정령계로 돌아가도 좋고. 거기라면 저놈도 아직 침범하지 못할 거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엘뤼엔을 놔두고 어떻게 우리끼리 도망쳐?” “나도 안가! 저 놈 반드시 죽일 거야! 나와 내 부하를 모욕했어!” “이익! 뭣들 하느냐! 이 녀석들을 공격해! 전부 찢어 죽이란 말이다!!” 우리의 실랑이를 들은 마왕은 길길이 날뛰는 목소리로 주변을 가득 매우고 있던 마족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라피스와 대립하고 있던 마족들이 방향을 바꿔 우리들에게로 전속력으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아스는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멈춰! 전부 다 죽여 버리기 전에!!” 신기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마왕의 명령에 따라 충실하게 공격해 들어오던 마족들이 아스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자리에서 우뚝 정지해 버렸던 것이다. 그 순간 아스의 몸은 순식간에 옅은 붉은 빛으로 휘감겼다. 그러자 키를 비롯하여 팔 다리와 몸의 굴곡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을 땐, 이미 아스는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버린, 완연한 성인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8-25. 결전의 날! (6) “아, 아스?” 본인을 확인하는 듯 물어보는 내게 아스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빨간 두 개의 날개가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내 손등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마신을 상징하는 문장이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라피스가 씨근거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빌어먹을 꼬마! 이제야 각성하면 어쩌자는 거야!” “미안, 은인. 막느라 수고했어.” “젠장! 저 지긋지긋한 꼴들 다신보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마계로 돌려보내!” “그렇지 않아도 그렇게 하려고 했어.” 대답하는 목소리마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중저음이었다. 아스는 고요한 붉은 눈동자로 한번 쭈욱 주위를 둘러싼 마족의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명령에 의해 공격을 멈추고 머뭇거리고 있던 마족들이 하나둘씩 지상으로 내려와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아마 풍겨져 나오는 기운과 이마에 새겨진 문장으로 그가 자신들의 새로운 마왕임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마신이 선택하신 우리의 마왕 전하를 뵙습니다!” 우렁찬 외침이 들리자 아스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반대로 선대의 마왕이었던 남자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졌다. “너희들은 그만 마계로 돌아가.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중간계에 나타나지 마라.”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무슨 짓들이냐! 네놈들의 마왕은 저놈이 아니라 나란 말이다! 지금 누구를 착각하고 있는 거야!!” 그러자 마족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마에 드러난 문장은 마신께서 내리신 것. 새로운 마왕께서 탄생하였으니, 너는 더 이상 우리의 마왕이 아니다.” “무엇이! 감히!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능멸을 해!! 네놈들이 감히!!” 으르렁 거리기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순간 남자의 폭발적인 기운을 견디지 못한 주변의 지형이 온통 진동하고 들끓어 갈라지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쿵!! 콰지지지지직!!! “지, 지진이다!” “모두 안전한 곳으로 피해!!” “으, 으아아악!” 갑작스러운 지진에 주변은 곧 도망치는 인간들의 비명소리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그러한 외침도 뒤이어 지는 거대한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되어버렸다. 남자의 등 뒤에서 문득 붉은 덩어리가 치솟는다 싶더니, 귀가 멀어버릴 것 같은 요란한 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앙!!!! “엘뤼엔! 아스!” 온몸을 증발시킬 것처럼 강한열기와 통증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나는 버릇처럼 수막을 쳐서 일행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그 순간, 입가에 미소를 띄우고 있던 마왕과 내 시선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사방의 모든 것이 정지한 기분이었다. 왜인지 두 팔을 벌리는 그의 동작이 이상할 정도로 느리다고 느껴졌다. 그때만큼은 나를 향해 달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눈앞에서 번쩍이는 거대한 붉은 빛도 모두 꿈을 꾸는 것 같이 아득하기만 했다. 나는 멍한 표정으로 내가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쳤던 방어막이 속수무책으로 스러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 그리고 또다시 이어지는 붉은 폭발음. 나는 본능적으로 이번 공격이 내 목숨을 위협할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자칫하면 역소환이 아닌, 그대로 이 세상에서 소멸되어 사라지게 될 것이란 것도. 정신이 아득할 정도로 몰아쳐지는 폭풍 안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이라곤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았다는 사실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 후,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내 주위는 완벽한 폐허로 변해 있었고, 미처 마계로 돌아가지 못한 마족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윽…대체…뭐가 어떻게 된…?” 그 요란한 폭발 속에서도 나는 몸을 강하게 부딪쳤다는 충격 말고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한순간에 방어가 뚫리고 직격으로 공격을 당한 것 치곤 이상할 정도로 멀쩡한 것 같았다. 기분 탓이었을까? 누군가가 내 몸을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이,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 정체를 깨달은 것은, 지나칠 정도로 낮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난 이후였다. “멍청한 녀석. 그래서 내가 아까 피하라고 말했잖아.” “…엘뤼엔?” 갑자기 왜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지? 당황한 나는 잠시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가 손에 엉키는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천천히 들어 보았다. 어디선가 많이 본, 투명할 정도로 맑은 금색의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감겨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그 위를 따라 붉은 액체가 뚝뚝 흐르는 것을 발견하곤 흠칫-몸을 굳혔다. 이건 설마…피? “…에, 엘뤼엔?” 아니겠지.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점점 불길하게 흘러가는 생각을 가로막으며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기운이 없어진 엘뤼엔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아무튼 말도 지지리 안 듣는 아들 때문에 이 나이에 내가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나저나 저 빌어먹을 자식, 감히 누구 아들을 노리고 공격을…쿨럭.” “!!” 그가 기침하는 순간, 주르륵- 무언가가 쏟아져 나와 내 볼 옆을 흘러가는 것이 느껴졌다. 사형선고를 당하게 된다면 바로 이러한 기분일 것이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끼고 조심스럽게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힘없이 내 위에서 비켜나가는 남자는 틀림없이 내 아버지인 엘뤼엔이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나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고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그의 몸은 흥건한 피에 젖어 온통 붉은 빛을 띄우고 있었다. “아…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다. 아직 폭발의 충격에서 깨어나지 못한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다면 엘뤼엔이 이렇게 다칠 리가 없잖아? 이건 악몽이야. 그러니까 깨어나야 해. 정신 차려, 엘퀴네스! 넌…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젠장! 웃기지마!!’ “에, 엘뤼엔… 엘뤼엔! 엘뤼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그의 옷깃을 붙들었다. 왜 하필 나를 감싸다가 다친단 말인가! 이런 못난 놈 따윈 차라리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더 낫잖아! 이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그가 대답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엘뤼엔은 힘없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윽…그렇게 이름 부르지 않아도 내가 엘뤼엔이라는 건 알고 있어.” “괘, 괜찮아? 괜찮은 거야? 잠깐만 기다려! 잠깐만…내가 금방 치료할게! 주, 죽으면 안 돼!” “킥- 겁도 많은 녀석. 죽기는 누가…크윽!” “에, 엘뤼엔!” “괜찮…다. 그냥 기운만 없을 뿐이야.” 이상한 일이다. 목소리를 들으면 안심이 돼야 하는데, 나는 오히려 점점 더 불안해 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심정과는 달리 머릿속은 지나치리만치 차가워져서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조차 전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누군가를 치료하면서 이렇게까지 필사적인 기분이 든 것은 지금이 처음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먹은 만큼 능력이 전부 따라주는 것은 아니었다. 나보다 등급이 높은 신체(神體)인 탓인지, 계속되는 치료술에도 엘뤼엔의 상처는 도무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엘뤼엔은 점점 말이 없어졌고, 조급해진 마음은 결국 울음으로 번져 나왔다. “나아…제발 나으란 말이야…명색이 정령왕이라면서 왜 이런 상처하나 못 고치는 거야…제발! 제발 나으란 말이다! 흑…흐윽…엘뤼엔, 죽으면 안 돼! 내 말 들려? 듣고 있어?” “……” “나도 알아서 피할 수 있었어! 나 같은 거 일부러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이렇게 다 큰 자식을 위해서 목숨을 던질 필요는 없잖아! 멍청이 엘뤼엔! 바보 아버지!! 젠장! 죽지 마, 아버지…제발…”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는 그가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소멸하게 되면 신의 육체가 온전히 남아있을 리가 없단 생각에,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고 안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이 폭발에 휘말렸던 다른 일행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여기저기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그들은 나와 엘뤼엔의 모습을 발견하고 단숨에 표정을 굳혔다. “엘…이게 어떻게 된…” 그 순간,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격렬한 비웃음을 띄운 채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엘뤼엔! 엘뤼엔이라고? 설마 그 형벌의 신 엘뤼엔을 말하는 것인가! 모두가 벌벌 떨며 하늘 높게 드높이던 상급신이 이렇게 처참한 상태가 되다니!! 신이라는 것도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구나!” “!!” “그 모든 것이 다 나에게 감히 대항한 결과다! 주제도 모르는 녀석은 확실히 죽음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이지! 크큭, 크하하하! 너무 억울해 하지 말아라! 이 손에서 직접 죽은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이 아닌가!” 머릿속을 잠식하고 있던 가느다란 무엇인가가 뚝-끊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엘뤼엔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제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 ‘전대의’ 마왕을 바라보았다. “…엘뤼엔은 아직 죽지 않았어.” “호오? 그래? 하지만 곧 죽게 될 거다! 제 아무리 신이라도 저만한 상처를 입고서 살기는 어려울 테니까! 걱정 말거라, 이제부터 하나씩 차례차례 같은 길을 걷게 만들어 줄 테니! 저 혼자 죽는다고 억울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넌 아직 악신이 된 게 아니라는 소리다.” “크하하! 하지만 이미 악신이나 다름없는 몸이지! 그 증거로 상급신인 엘뤼엔이 꼼짝도 하지 못하고 당한 것이 아니냐!” “정말 모르나 본데…‘이미 다름없는 상태’나, ‘완전히 된 상태’는 엄연히 달라. 그 차이를 정말 모르겠다면…” “??” “내가 깨닫게 만들어 주지!” 무슨 정신으로 이런 말을 내뱉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때의 난 분명히 놈을 제압할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놈이 황당해 하는 틈을 타 몸을 유지시키고 있었던 이사나와 라피스의 마나를 전부 흩어버렸다. “무, 무슨!!”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눈앞에 있었던 내가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놈은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신이 되지 않은 그는, 단순히 힘만 센 마족에 불과했기 때문에 자연 그 자체에 녹아든 정령의 기운을 찾아낼 수 없었다. 즉, 놈은 지금부터 인기척이 전혀 없는 투명인간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셈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령왕이 왜 굳이 계약자를 만드는 건지 알아? 그들의 마나를 이용하지 않으면 중간계에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야. 정말 단지 그것뿐이지. 즉, 지금 이 대로도 나는 너와 싸우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다는 소리야. 하지만 넌 곤란할걸? 이 상태에선 네 물리적인 공격이 전혀 통하지 않거든. 이 차원을 소멸하지 않는 한 말이지.” “무, 무슨!! 크윽! 그럴 리가 없다! 나는 이미 완벽한 악신이나 다름없는!!” “하하하. 그렇겠지. 어쨌든 지금으로선 아주 고맙게 생각해. 덕분에…이런 기회도 가져볼 수 있으니 말이야. 악신인지 뭔지 몰라도, 너는 각성할 장소를 잘못 선택했어. 왜인지 알아?” 즐겁다는 듯이 웃으면서 묻는 나는 내가 생각해도 전혀 딴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나에게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바로 이런 성격이지 않았을까? 흥미 있다는 듯 눈빛을 빛내는 라피스와 벙쩌진 일행들의 얼굴을 무심히 스쳐지나간 나는 마왕의 코앞에 이르러서야 친절하게 답변했다. “아크아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세계거든.” [정령왕 엘퀴네스] 9-1. 차원의 주인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쿠쿠쿠쿠쿵!! “커헉!” 일이 벌어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커다란 압력이 밀려들어오자 남자의 입에선 저절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태어난 이래 이렇게 강한 힘을 느끼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주변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수분과 공기가 자신의 목숨을 마음껏 유린하는 기분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격이었기에 제대로 대응을 할 수조차 없었다. 마왕, 아니 이제 그 신분을 다른 이에게 빼앗겨 버린 마족남자는 좀처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그는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자연의 힘이 자신을 넘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어째서 내가 밀리는 거지? 겨우 무형적인 기운만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연의 4대 원소 즉, 땅과 불, 물과 바람은 마계에서는 존재하기는 하되 그다지 필요하지는 않는 것들이었다. 마족에게 중요한 것은 본인이 가진 강대한 힘뿐이었고, 그것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덥거나 추운 것, 마실 것과 공기 같은 것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라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은연중에 자연 원소의 토대가 되는 4대 정령왕의 힘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가 아크아돈을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킬 장소로 선택한 것은, 다른 차원보다 마계의 개입이 수월하면서도 신계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을 주관하는  정령왕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없었더라면 감히 결정을 내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악신의 각성이 코앞에 이른 지금은 그러한 마음이 더욱 강했다. 자신은 신계의 상급신 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해 처치를 고민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하물며 정령왕정도야 간단히 이길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이다. 눈앞에 있던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갑자기 사라지기 전까진. “우습네. 방금 전까지 위풍당당하던 녀석의 얼굴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인 걸? 좀 더 제대로 대응 해보는 게 어때? 이런 식은 너무 시시하잖아.” “크윽!” 감미롭게 울리는 달콤한 목소리는 그의 바로 귓가에서 울리고 있었다. 경악한 마왕은 곧바로 손을 크게 휘저었으나,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그에게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엘퀴네스가 말한 것처럼, 자연체로 돌아가 버린 정령의 몸엔 그의 무력이 전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럴 리가 없다! 이럴 리가 없어!’ 악신이 된 존재는 온 차원의 최고여야 했다. 비록 아직 온전한 각성을 하지 않은 상태라 해도, 그는 이미 능력만으로 모든 존재를 제압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평소 그가 우습게 여기고 있던 정령에게 이런 식으로 유린을 당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완전한 각성을 한 이후에 활동을 시작할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다급해진 그는 미친 듯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향해 마력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쾅! 콰아앙~! 콰앙! 나무가 쓰러지고 흙이 음푹 패였지만, 정작 그가 가장 원하는 상대방의 고통어린 신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비웃는 웃음소리만 짙어졌을 뿐. “하하하. 좀 더 제대로 해봐. 그래가지고 어디 날 맞출 수 있겠어?” “이이익!! 이런 찢어죽일… 커헉!!” 거칠게 대꾸한 대가는 곧 고스란히 그의 육체에 이어졌다. 주위에 흐르던 미세한 수분덩어리들이 급속하게 모여들더니 단숨에 그의 숨구멍을 차단했던 것이다. 인간처럼 공기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종족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숨을 못 쉬는 것만이 아닌 물을 이용한 질식을 시키는 것이라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끄윽- 끅, 크으윽!!” “입버릇이 나쁘네.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지도 자각을 하지 못하는 거야? 마족들은 그런 것 하나는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평생토록 헛짓거릴 하느라 그런 본성마저 잊어버렸구나. 안타까운 일이야.” 정말로 안됐다는 듯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는 공격을 당하는 마왕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 듣고 있는 모든 사람의 전신까지 오싹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지금까지 엘퀴네스라는 존재에 대해 나름대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충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조금 전 부터 엘퀴네스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대부가 아닌 것 같아. 말과 목소리의 억양부터 달라.” “저, 저도 동감입니다, 주군. 엘님에게 이런 면이 있으실 줄은…”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린 아스와 데르온의 말에 그들 옆에 있던 라피스가 ‘쉿!’하고 짧게 제동을 걸었다. 당황하고 있는 두 마족과는 달리, 그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이 즐기는 기색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이런 긴박한 장면도 그에게는 한차례의 스릴 있는 유희에 불과한 듯 했다. ‘너무 태연한 거 아니야?’ 완벽하다고 알려진 드래곤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그건 지나치리만치 현실에 대한 자각이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복잡한 사건에 연루되어도 ‘유희’라는 명목 하에 빠져나갈 틈을 만들어두는 종족이었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라피스의 눈동자를 본 아스가 찌푸린 얼굴로 한마디 늘어놓으려는 찰나, 희미한 웃음을 머금은 엘의 목소리가 다시금 울려 퍼졌다. “아, 그러고 보니 네가 이전에 레오를 죽인 녀석이었지? 그 아이 뿐만이 아니야. 동굴 안에 쌓여있던 시체들이 전부 같은 방식으로 죽었더군. 다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지. 뭐, 이런 자리에서 그런 것 까지 꼬치꼬치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말이야. 이미 나이아스에게 복수해 주기로 약속해버렸거든.” “크윽! 끄으으윽!” “어떻게 해줄까? 너도 그 아이처럼 똑같이 몸에 구멍을 내줄까? 그 몸에 흐르는 피가 전부 다 빠져나올 때까지 거꾸로 매달려 보는 건 어때? 하하. 이상하지? 예전이라면 이런 일 엄두도 못 냈을 텐데 말이야…지금은 어쩐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크으으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마왕이 뱉어낼 수 있는 말이라곤 숨을 쉬기 위해 발악하는 신음 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그는 아무런 제압을 받지 않는 멀쩡한 모습인 것 같았다. 조롱하는 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그가 왜 괴로워하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흐음. 숨을 쉬지 못해서 괴로워? 그것 봐. 너는 아직 악신이 아니라니까. 결국 이런 간단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는 하찮은 생명체였던 거야.” “!!” 악신인 자신을 향해 하찮은 생명체라니?!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낀 마왕은 있는 힘껏 기운을 끌어 모아 자신을 억압하는 엘의 힘을 필사적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잠시 후 그는 숨을 막고 있던 수분을 곧 어렵지 않게 증발시킬 수 있었다. 간신히 숨이 트이자 그는 기침을 내뱉으면서도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겨우 이 정도 수작 부린 것을 가지고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하지 마라, 어리석은 정령왕이여! 난 아직 나의 온전한 힘을 전부 내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금쯤 엘퀴네스가 속으로 상당히 당황해 할 것이라 생각했다. 감춰둔 여분의 힘을 전부 드러낸다면 자신의 승리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퀴네스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쿡쿡. 그래서? 어차피 통하지 않을 힘이 강해봤자 무슨 소용이지? “!!” “마음껏 해봐.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나를 공격해도 좋아. 단, 그러려면 먼저 내가 서있는 위치부터 제대로 찾아야 하겠지만.” “크윽!!” 그의 말처럼 마왕은 지금도 엘퀴네스의 위치를 전혀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연 상태로 돌아간 정령왕은 주변에 흐르는 공기와 물 그 자체였기에, 일반적인 마나의 흐름으로는 찾을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정령왕을 위해 만들어진 차원이니, 그에게 불리한 조건이 많은 것이 당연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온 몸의 신경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이 노려보는 곳이 제대로 된 건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마도 엘퀴네스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있는 이는 그와 같은 정령왕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 증거로 한 구석에서 뒤늦게 나타난 트로웰이 바라보는 곳은 그와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에구, 이걸 어쩌지….” 엘의 부탁으로 수도 내 황성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던 트로웰은, 함께 행동하고 있던 엘뤼엔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 흔적을 쫓아 달려 나왔던 참이었다. 그런 중에 하늘 위를 뒤덮던 수많은 마족무리의 움직임이 멈추고 사악한 기운을 머금은 폭발이 일어나자,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곤 다급히 일행들을 찾았다. 혹시나 마신이 염려하던 상황이 벌어질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엘뤼엔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고, 그것을 보고 분노한 엘이 악신을 상대로 대치를 벌이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에 와선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엘을 말릴 수가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같은 정령왕인 그에게는 온 사방에 퍼져있던 모든 자연계의 정령들이 요동치고 있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그만큼 엘이 분노했다는 뜻이리라. ‘화가 나서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군. 박력이 대단한걸.’ 잠시 한숨을 내쉰 그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에게 접근하여 그의 상태부터 확인하기 시작했다. 복부를 중심으로 온 몸이 피투성이였지만, 다행히 의식을 잃지는 않았는지 작은 신음을 간헐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엘이 몇 번이나 치료술을 시행한 덕분인 듯 했다. “엘뤼엔. 내 말 들려? 들리면 대답해봐.” “……” “엘뤼엔? 안 들리는 거야?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빌어먹을. 아파 죽겠으니까…말 시키지 마.” 험악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트로웰은 오히려 안도한 얼굴을 했다. 적어도 대답할 정도라면 그의 상태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란 판단이 서자 트로웰은 마음 놓고 엘뤼엔을 향해 힐책어린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 충고는 다 어디로 흘려들었는지 모르겠군. 이래서야 희생될 상급신으로 채택된 것과 뭐가 다르지? 아주 죽고 싶어서 작정을 했구나.” “큭. 시끄러. …엘은?” “악신 녀석을 상대하고 있어.” “…뭐?” 놀란 엘뤼엔이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트로웰은 그의 어깨를 가만히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가만히 있어. 상처가 생각보다 심하니까. 흐음. 치료신이 직접 주관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직접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으니 곤란하군.” “지금 그게 문제가-! 큭. 엘이…” “괜찮아. 생각보다 잘 싸우고 있으니까. 아주 약간 상태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덕분에 중요한 걸 깨달았으니까.” “그게…무슨 소리지?” 찡그린 얼굴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에게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곳이 아크아돈이라는 사실 말이야. 그동안 우리들 모두 악신이라는 존재만 생각하느라 미처 이곳의 특성을 염두 하지 못했던 것 같아. 모든 것이 정령왕을 위주로 돌아가는 땅이니, 아무리 악신이라도 애 좀 먹을걸.” “아니, 그것보다…엘의 상태가 불안정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아참. 깜박했네. 너한텐 이런 것보단 엘이 최우선이었지? 쿡쿡.” “크윽…젠장, 쓸데없는 소리는 빼고 대답이나 해!” “아아, 알았어. 흠, 뭐랄까. 너무 화가 나서 반쯤 이성이 나간 것 같은데. 덕분에 전생 때문에 감춰져 있던 원래의 성격이 드러났다고 해야 하나? 더불어 정령왕으로서의 본능이 강하게 살아난 것 같아.” 트로웰의 말에 의하면 엘은 단지 이성을 잃었을 뿐, 다른 부분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설명을 듣는 내내 엘뤼엔의 표정은 마치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무섭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잠깐 기다려. ‘원래의 성격’이라면…” “당연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엘퀴네스 고유의 성격이 드러났다는 뜻이지. 난 엘이 저렇게 살벌하게 웃는 건 처음 봤어. 저 모습 보니까 네가 엘퀴네스 였을 때랑 아주 판박이인데 그래?” “…젠장.” ‘정령왕’일 때의 자신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엘뤼엔으로선 그다지 달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때의 성격이 문제가 되어 신이 될 때에도 마신계열의 속성을 부여받은 것이 아닌가! 참고로 역대의 엘퀴네스들 중, 마 속성을 부여받지 않은 존재는 이제껏 단 하나도 없었다. 이유는 성격이 더러우니 사악한 일도 잘 해낼 것이란 주신의 판단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마속성의 신들은 다른 계열의 신들보다 일거리가 더 많은 편이다. 엘뤼엔 본인이 바로 그 산증거가 아니겠는가?) 그가 짧게 욕을 내뱉자, 트로웰은 웃음을 참으며 일부러 엄하게 쏘아붙였다. “그러게 누가 다치래? 내 충고를 무시한 벌이라고 생각하라고. 그나저나 이 상처를 어찌 한다? 지금 이대로 신계에 이동할 수 있겠어?” “…아들을 두고 혼자서 돌아가라고?” 샐쭉하니 묻는 엘뤼엔의 말에 트로웰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말이 좋아 ‘상처’지, 지금 그가 입은 부상은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보는 것만으로 쇼크사(死)할 만큼 끔찍한 것이었다. 온 몸이 거의 찢기다시피 너덜너덜하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는 주제에 끝가지 버티겠다는 태도라니! 고통을 참는 인내력은 칭찬받아 마땅했지만, 이대로 내버려뒀다가는 십중팔구 소멸될 것이 틀림없었다. ‘날더러 나중에 엘에게 무슨 원망을 들으라고…’ 트로웰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하하, 오랜만이어요! 일단 맛보기로 한 편 올렸습니다^^;; 좀처럼 마음에 들게 써지지 않아서 몇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영원히 연재를 못하게 될 것 같아 사고부터 치기로 했다지요;; 본격적인 연재는 다음주부터 시작할 듯 합니다. 앞으로 연재될 9권도 잘 부탁드려요! 재미있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당^^ ※ 완결이 몇권이 될지는 아직 아무도 모릅니다. 쓰는 저도 모릅니다...(먼산) [정령왕 엘퀴네스] 9-2. 차원의 주인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설마 지금 자신의 상태가 멀쩡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고집 부리지 말고 순순히 신계에 돌아가. 정말 소멸하고 싶은 거야?” “난 멀쩡해.” “그런 말은 지혈이 되고 나서나 하라고. 몸을 가누기도 힘겨워 하는 주제에 멀쩡하기는 뭐가?” “아, 시끄러. 아무튼 난 아무렇지 않으니까 가만히 좀 내버려둬. 이럴 시간 있으면 엘이나 말려보라고.”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꾸하는 엘뤼엔의 말에 트로웰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둔한자라 해도 지금 그가 입은 상처를 본다면 한눈에 중상임을 눈치 챌 정도다. 하물며 절대 둔하다고 할 수 없는 엘뤼엔이 그러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놀라운 부정(父情)에 의한 인내심의 발현이라고 쳐도,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까지 이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정작 엘을 위한 일이 아님을 모르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트로웰은 굳은 표정으로 엘뤼엔의 모습을 다시 살펴보았다. 언제나처럼 냉소적이면서도 무심한 얼굴 그대로였지만, 평소와 달리 유난히 창백한 피부색이 눈에 띄었다. 처음엔 그저 고통 때문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갔었는데, 이제 와 짐작되는 일이 있고 보니 그 모습이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엘뤼엔. 설마…너?” 그러자 트로웰의 표정이 딱딱해진 것을 알아본 엘뤼엔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힘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정도로 간단히 속일 수 있을 만큼 눈앞의 존재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닐뿐더러 자신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이럴 땐 필요 없는 자존심은 굽히고 솔직해 지는 편이 나았다. “보시다시피. 차원 이동은커녕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야. 한마디로 지금 신계로 돌아가는 건 애초부터 무리라는 소리지.” “그럼 일부러 안 돌아가는 게 아니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 쪽이 맞겠지. 그래도 엘이 치유술을 몇 번 해준 덕에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마지막 말은 하고 갈 수 있을 것 같군.” “!!” 그 대답에서 트로웰은 그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급신인 그가 스스로의 상태를 모를 리 없을 테니, 아마 그 예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래 수많은 죽음들을 목격해왔었지만, 그 차례에 엘뤼엔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정령왕으로서 한번 소멸한 전적이 있긴 해도, 죽는 다기 보단 먼 곳으로 여행을 간다는 느낌에 더 가까웠으니까. 지금처럼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없었던 것이다. 하긴, 내세가 결정된 죽음과 영원한 소멸을 같은 선에서 놓고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상황이겠지만. 트로웰은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듣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작게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 거야? 하루? 이틀?” “…농담하는 거냐? 앞으로 5시간도 못 버텨. 이렇게 깨어 있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다.” “바보 같은! 그런데 왜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어?!” “킥. 티낸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미 나는 부상을 입었고, 엘은 저렇게 되 버렸는데. 아무튼 급하게 됐군. 신계놈들이 빨리 와야 할 텐데… 굼뱅이들 같으니. 뭘 하느라 이렇게 늦는 거지?” “하아. 그렇지. 악신을 처리하기 위해 신계의 신들이 곧 내려오겠군. 그렇다면 치료신을 부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거야. 지금이라도 치료하면 살 수는 있는 건가?” 혜안이 통하지 않는 상대이기에 미래의 일을 짐작할 수 없었던 트로웰은 답답한 심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엘뤼엔 또한 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언제 그가 이런 식으로 부상을 당한 적이 있던가! 다친 경험이 없던 그에겐, 치료받은 경력 또한 전무했던 것이다. 아마도 트로웰은 그가 치료신을 기다린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정작 엘뤼엔이 노리고 있는 것은 전혀 달랐다. “글쎄, 회복 여부야 내 알 바 아니고…적어도 내세를 가질 기회는 얻을 수 있을 테지.” “그건 또 무슨…맙소사, 엘뤼엔! 설마 이번 일에 네가 희생할 생각은 아니겠지?” 눈치 빠른 트로웰은 단번에 그가 의도하는 것을 알아채곤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소멸한 신은 영원히 그 존재가 사라지지만, 악신에 의해 희생되는 경우는 다르다. 인간으로서 환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다. 엘뤼엔은 바로 그 점을 상기시켰다. “어차피 이대로 죽으면 영원한 소멸이야. 그럴 바엔 희생되고 나서 내세를 가지는 편이 낫지. 나로선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물론 최악의 경우엔 그렇겠지. 하지만 체념이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아직 치료를 받아보지도 않았잖아.” “그 말이 맞아, 엘뤼엔. 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게 문제야.” “!!” 갑자기 뛰어든 낯익은 목소리에 트로웰만이 아닌, 엘뤼엔 또한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곳엔 언제 온 건지 특유의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은 마신 카노스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서 있었다. “카노스!!” “여어~ 그새 화려하게도 당해놨는걸? 천하의 엘뤼엔이 다쳐서 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니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젠장, 닥쳐. 네놈이 여긴 왜 온 거야? 다른 녀석들은?” “아아. 아직 준비 중이야. 난 그전에 이곳의 상황을 알아보려고 미리 와 본거고. 역시 먼저 오길 잘했군. 하마터면 손도 못써보고 소멸할 뻔 했잖아?” 하고 많은 신중에 왜 하필 이 녀석이 왔단 말인가? 이젠 말싸움조차 할 기력이 없는 엘뤼엔에게 꼬치꼬치 참견하기 좋아하는 그는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그는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카노스는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 녀석의 극단적인 성질이라면 이런 일이 몇 번이고 벌어져도 전혀 이상할 게 없지. 그러게 감시 좀 잘 하랬잖아, 트로웰. 결국 스스로 희생을 자처하게 만들다니. 게다가 엘은…호오, 완전히 맛이 갔는걸?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면목 없다. 잠시 한눈을 팔았더니 그새 이 모양이더군.” “킥킥. 원래 애들을 돌 볼 때는 긴장을 늦춰선 안 되는 법이지.” “아아, 그 말에 동감이야.” “어이어이. 네놈들 지금 감히 누굴 아이 취급 하는 거야?” 아픈 와중에도 자신을 애 취급했다는 것에 화를 내는 엘뤼엔을 보며 트로웰과 카노스는 사이좋게 혀를 찼다.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하는 것이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지만, 억지로 참으며 의연하게 있는 것보단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카노스는 엘뤼엔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상처를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쯧쯧.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군. 완전히 망가졌잖아. 이래서야 치료를 받는다 해도 다시 원래대로 회복할지 의문인걸.” “그러니까 그냥 희생하겠다고 하잖아. 어차피 가망 없다고.” “엘뤼엔! 넌 입 다물고 있어! 그렇게 상태가 나쁜 거야, 카노스?” “지금으로선 그래. 부상 이후 치료하려고 시도한 적은 있었나?” “으음. 엘이 몇 번 치료를 하려고 한 모양인데, 잘 안되었던 것 같아. 정령계에서 였다면 좀 더 나았을지 모르지만.” “흐음. 그래? 곤란하군. 엘퀴네스의 치유력으로도 힘들다면 치료신이 주관을 한다 해도 완쾌하기 어려워. 정령왕과 신의 능력이 그렇게 많이 차이나는 게 아니거든. 본래 신의 능력 중 일부를 강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정령왕이니까.”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 네 말대로 이곳이 중간계라서 능력제어가 된 것을 감안한다면, 회복의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지. 일단 신계로 옮기는 것이 낫겠어.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작업이니까.” 간단히 결론이 내려지자 엘뤼엔은 벌레라도 씹은 마냥 못마땅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든 살리려고 하는 노력은 기특했지만, 자신의 의견이 몇 번이고 무참히 무시된 데서야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카노스는 그 시선을 모른 척 하며 능글거리는 미소와 함께 가볍게 그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것도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공주님 포즈’로! 그것을 자각한 순간 엘뤼엔의 얼굴은 급속도로 창백해졌다. “큭! 이, 이게 무슨 짓이야!!” “자아~ 사이좋게 신계에 돌아가자고, 친구. 이곳의 일은 네 아들과 정령왕들에게 위임하면 만사 오케이라는 거야. 내말에 동의하지?” “동의 좋아하네! 어서 안내려놔? 대체 무슨 꿍꿍이…크윽!!” “어허! 그것 봐. 부상자는 부상자답게 얌전히 몸을 맡기라고. 이 형님의 품안이 참으로 듬직스럽지? 냐하하하~” “너…죽여 버리겠…” “자, 자! 좋았어! 당장 신계로 출바알~~” 자신이 안은 포즈에 문제가 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카노스는 단지 그가 이곳을 떠나지 않기 위해 발악하는 거라 생각하곤 상큼하게 소리칠 뿐이었다. 엘뤼엔에게 있어 한 가지 유감이라면 그 모습이 묘하게 어울린다는 거랄까? 트로웰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푸훕!” “제길!! 웃지 마, 트로웰!! 이 제멋대로인 녀석들 같으니!!” “하하, 알았으니까 무사히 치료나 받으라고. 그동안 엘은 내가 잘 챙기고 있을 테니까.” “큭-” 그러자 엘뤼엔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국 포기했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그가 잠잠해지자 카노스는 피식 웃고는 트로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참, 너한테 부탁할게 하나 있는데…” “부탁할 것?” 트로웰이 의아한 얼굴로 되묻자, 카노스는 허리를 숙이곤 그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워낙 작은 소리라 그의 품에 안겨있던 엘뤼엔조차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을 정도였다. “뭐? 하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어쩔 수 없어. 못마땅한 건 인정하지만 일단 협조해주기로 한 이상, 이 뜻에 따라줬으면 좋겠군.” “…하아. 할 수 없지. 알았어. 원하는 대로 해주지. 그 대신 최대한 피해가 덜한 방향으로 끝을 내주라고.”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것일까. 궁금해진 엘뤼엔은 물어보려고 했으나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때문에 미처 입을 열수가 없었다. 그 사이 대화를 마친 카노스는 신계로 이동하기 위해 기운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주변을 감싸는 희미한 빛 무리를 마지막으로 그는 간신히 붙들고 있던 의식의 끝머리를 놓았다. 오래 버티는 가 싶더니, 결국 기절한 것이다. “흐음. 떠날 때가 되서야 쓰러지는 군. 하여튼 자존심이 대단하다니까?” 두 신의 모습이 사라지자 혼자 남게 된 트로웰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쓴 입맛을 다셨다. 차원이동의 충격으로 가는 도중에 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카노스가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엘도 엘이지만, 그로서도 오래된 친구를 이런 방법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과연 엘뤼엔도 친구라고 생각할지는 의문이지만.) “자아, 그럼 나는 마신이 부탁한 일을 시작해 볼까?” 그렇게 중얼거린 트로웰의 시선은 지금 한창 악신과 싸우고 있는 엘에게 향해 있었다. ============================================= 이번편은 좀 짧았습니다;;; 재미 없어도 용서를..............요즘 글이 잘 안써져서 머리 쥐어뜯고 있습니다아;; 흑흑흑.. [정령왕 엘퀴네스] 9-3. 차원의 주인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생각의 흐름이 끊긴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결코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투를 하면 할수록 처음의 목표는 어느새 온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눈앞에 있는 존재가 상당히 거슬린다는 단순한 인식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제는 왜 싸우고 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 하다. 점점 동물화가 되어가는 기분이랄까? 왠지 바보가 돼버린 것 같아 나는 다시금 현재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성을 느꼈다. 우선, 눈앞에서 나를 잡기 위해 발악을 하는 마족남자가 누구인지부터 알아내는 것이 순서겠지? ‘흠…얼굴은 낯설은데. 그것도 아주 많이. 내가 언제 이런 녀석에게 원한을 질 행동을 한 적이 있던가? 아니, 있으면 또 어때? 그러고 보니 이 자식 아주 건방지잖아? 마족주제에 감히 정령왕한테 덤비겠다고 설치다니. 콱 죽여 버릴까?’ 녀석은 내가 공격을 멈추고 노려만 보는 것에 애가 탔는지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래봤자 자연체로 돌아간 나를 찾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어디냐! 어디에 있는 거냐!! 크아악! 나타나! 나타나란 말이다!!” 미친놈. 도망치는 도둑더러 서란다고 서는 거 봤냐? 대체 왜 저런 쓸모없는 요구를 하는 거지? 결국 끝끝내 내 위치를 발견하지 못한 놈은 기운을 끌어내어 무작위로 주변에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용 써 봐도 소용없다고 친절히 설명해준 것 같은데 말이지…참으로 머리가 나쁜 놈임에 틀림없다. 쾅쾅 콰아아앙! “으아악! 피해!! 마법이다!!” “아아악!” 불이 피어오르고 번개가 내려쳐지는 것을 본 나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눈먼 불덩어리에 맞아 사람들이 죽는 건 내 알바 아니지만, 바닥이 패이고 나무가 쓰러지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이다. 놈이야 마족이니 마계로 돌아가 버리면 그만이지만, 우리 정령왕들은 저걸  고스란히 복구할 책임이 떨어진다. 한마디로 일거리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걸 자각한 순간 내 눈에서는 불똥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나뭇가지 하나 떨어지는데 열대씩이다. 어디 더 발광해봐. 제발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주지. 만년동안 지옥 불에 구운 다음 천년동안 식칼로 한 점씩 다져져 보는 것도 꽤 재밌을 거야. 그렇지?” “큭!!” 서슬 푸른 내 음성에 질렸는지,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마족의 움직임이 움찔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잠시 승리의 미소를 짓던 것도 잠시, 나는 나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녀석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곤 고개를 갸웃했다. 길길이 날뛰는 멍청한 녀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놈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던 것이다. “음…? 마족주제에 무슨 기운이 이렇게 강하지? 이건 마치…신에 가까운?” 한낮 창조물에 불과한 존재가 신에 가까울 수 있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에 얼굴을 찌푸릴 찰나, 친절하게도 상대방 마족은 나에게 큰 소리로 설명(?)해주었다. “무슨 헛소리냐! 신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나는 이미 신이다! 온 차원을 재패할 악신이 바로 이 몸이란 말이다!! 각성을 하는 순간, 제일 먼저 네놈부터 갈갈이 찢어버리고 말겠다!! 아니, 지금이라도 위치만 잡아낸다면…” “지금이라도? 하- 네놈이 악신인지 뭔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이냐? 아직 불완전체인 반 쪼가리의 힘만 믿고?” 놈이 강한 건 사실이었지만, 아직 완성된 단계가 아니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황당하게 되묻는 나에게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이다, 정령왕이여!! 기고만장한 것도 지금뿐! 너 역시 피 흘려 바닥에서 신음할 날이 멀지 않았다! 제 아무리 정령왕의 육체라 하여도 신보다는 못할 터! 아까 형벌의 신 엘뤼엔이 당한 것을 그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더냐!” “…뭐?” 누가…누구에게 당했다고? 그 순간 반쯤은 장난하던 기분이 싹 사라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타고 도는 기운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 애초부터 이 녀석에게 분노한 진정한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것일까? 녀석이 내뱉은 말이 마치 비밀 상자의 열쇠라도 되었던 마냥, 내 머릿속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잊고 있던 기억들이 속속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울리는 폭음과 마주치는 두 눈. 나를 부르며 뛰어오는 목소리. 그리고…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엘뤼엔!! “-흡!!” 머릿속을 아찔하게 잠식하는 장면들에 나는 평정을 잃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아아, 그래. 그런 일이 있었지. 도대체 어떻게 잊을 수 있었던 걸까? 지금 이 녀석을 상대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는데! 꿈에서조차 겪고 싶지 않은 잔인한 영상. 그러나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내 몸은 점차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에, 엘뤼엔…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지? 나 이 녀석이랑 싸우느라 그를 내버려두고 있었는데. 설마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일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는걸.’ 이제는 눈앞의 마족이 누구인지, 현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는 엘뤼엔이 쓰러진 직후, 이성을 잃고 이 녀석과 전투를 벌였던 모양이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치유술에 힘을 썼다면 엘뤼엔의 상처가 회복되었을지 모를 텐데. 하다못해 정령계라도 데려갔다면 훨씬 수월했으리라! 내가 뒤늦게 깨달은 실책에 후회하는 사이 마족 남자는 아무것도 모른 채 떠들기 시작했다. “정령왕이니, 뭐니 이곳의 특성 따위야 내 알바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제 세상은 내 발밑에 들어온다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네놈이 반드시 죽게 된다는 거지! 비록 조금 방심하긴 했지만, 네 힘으론 나를 완전히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네놈도 그것을 슬슬 느끼고 있을 테지?” “닥쳐!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든 관심 없으니까.” 놈의 말은 완전한 허풍만은 아니었다. 그럴 것이, 어떠한 방법을 써도 도무지 죽지를 않는 것이다. 호흡을 차단시키는 것만 아니라, 폐에 물을 채우거나 심장에 구멍을 뚫어도 여 보란 듯이 살아있으니 공격하는 입장에서도 상당히 질릴 수밖에 없었다. 만여 명에 달하는 아이들을 잡아먹은 탓인지, 목숨만큼은 모지게도 끈질긴 놈이었다. 징한 놈! 그냥 절벽에다 매달아 놓고 까마귀들이 내장을 파먹게 만들어 버릴까보다! 아예 사지를 뜯어다 몬스터의 먹이로 던져주고 머리만 남겨둘까? 설마 그래도 살아있지는 않겠지. ‘어라…방금 나 치고는 꽤 잔인한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나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생각을 다른 사람들이 알면 경악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나에게 뭔가 변화가 일어난 것 같긴 한데, 그것이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건 그렇고…엘뤼엔은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싸우는 중에 점차 거리가 떨어졌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발견할 수 없다니 속이 타 들어갔다. 설마 그대로 소멸해 버린 것은 아니겠지? 나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를 들은 마족 녀석이 기고만장해져서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미 죽어나자빠졌을 녀석을 찾는 것이냐? 쓸데없는 짓을 하는 구나!” “닥쳐! 죽기는 누가 죽었다는 거야!” “크크. 그렇다면 그가 살아나 신계라도 되돌아갔단 말이냐? 저 바닥에 널려진 핏자국만 봐도 그럴 가능성이 없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 녀석이 가리킨 방향에는 흙바닥에 채 마르지 않은 붉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누가 보았더라도 살아있기는 힘들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양이라, 그것을 발견한 순간 나는 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엘뤼엔은 마지막에 내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 이미 늦어버렸던 거라면? 소멸한 신은 영혼조차 없으니…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건가? ‘말도 안 돼…’ 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꽈악 악물었다. 그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속에 큰 불안감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 와중에 마족 녀석은 겁도 없이 떠들어 댔다. “그네들이 말하는 ‘한낮 창조물’의 힘에 당해 소멸했으니, 놈은 신계의 역사에서 두루두루 수치로 기억될 테지! 훗날 인간들은 형벌의 신을 가장 얼간이로 기억할 것이다! 크하하하! 바보같이 저런 놈을 두려워했었다고 말이야!” “…죽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군.” “흐흐흐흐! 그래서 어쩔 수 있다는 거지? 난 죽지 않는다! 이미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몸이니까!” 음침한 미소를 흘리는 녀석을 보니, 잠시 잊고 있던 분노가 무럭무럭 치솟아 올랐다. 나는 끓어오르는 살심을 억누르며 시니컬한 어조로 되물었다. “영원한 생명? 훗. 뭐, 좋아. 그렇다 쳐두지. 하지만 그런 것에 온전한 신체 따위는 포함되지는 않을 테지?” “그게 무슨?” 나 참. 이거 꼭 시범까지 보여줘야 알아듣는 건가? 잠시 쯧-하고 혀를 찬 나는 한손에 얼음 창을 만들어 크게 한번 휘둘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부웅- 서늘한 한기를 뿌린 창이 공중을 가르고 지나가자 마냥 어리둥절하게 서있던 마족 녀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 놈의 왼편어깨에서 피분수가 퍼지더니 붙어있던 팔 한쪽이 너덜한 모양으로 떨어져나갔다. 푸와아악!! “아아아아악!!! 내 팔! 내 팔이!!!” 녀석은 갑자기 떨어져 나간 자신의 팔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친근하게 생긋 미소 지었다. “사지가 한쪽씩 떨어져나가는 걸 보는 것도 즐거울 거야. 그렇지? 머리 하나만 남은 채 그 빌어먹을 영생의 세월을 지내보는 건 어때?” “아…아아아!!” 그때서야 나의 의도를 깨달은 녀석은 퍼렇게 질린 얼굴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마도 훗날을 기약하려는 모양이지만, 우습게도 그 도망치는 방향이란 것이 바로 내가 서있는 쪽이었다. 상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리한 조건인지 여실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하지만 역시 이런 식으로 내빼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겠지? “싸우는 중에 도망치면 안 돼지. 그럼 내가 화풀이 할 곳이 없잖아?” 적어도 이 가슴속의 울분이 가라앉으려면 놈의 비명소리를 더 들어야했다. 나는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창을 집어던졌다. 쐐애액! 맹렬한 속도로 쏘아져가던 얼음 창은 마족의 몸을 꿰뚫어 근처에 있던 민가의 벽에 박았다.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리고 새된 비명이 울려 퍼질수록 내 입가에 서린 미소는 더욱 짙어져갔다. “겨우 그 정도에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아아, 참. 넌 영원히 산다고 했지? 그럼 앞으로 질릴 때까지 괴롭혀도 되겠다. 그거 괜찮은걸?” “크, 크윽 네…네놈!!”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엔 분노만이 아닌, 날 향한 두려움 또한 섞여 있었다. 놈의 악에 바친 시선을 무시한 나는 또 다른 얼음 창을 만들곤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섰다. “정령왕이 신보다 못하다고? 글쎄, 물론 다른 곳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여긴 아크아돈 이라니까. 몇 번을 설명해도 못 알아먹으니, 정말 머리가 나쁜 녀석이군. 이곳 차원의 주인이 누군지 다시 깨닫게 만들어 줄까?” “으, 으윽!” “그리고 엘뤼엔이 너한테 당한 건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방심 때문이었어. 겨우 그런 것 가지고 기고만장해지다니 우습구나. 이번엔 어디를 자를까? 다리? 왼쪽 팔이 없어졌으니 오른쪽 다리가 없어져야 균형이 맞겠지? 쿡쿡.” 나는 얼음 창의 날카로운 부분을 녀석의 오른쪽 허벅지에 꽂았다. 퍼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창끝이 사정없이 파고들자 녀석은 한쪽만 남은 오른팔로 복부에 박힌 창대를 잡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그래. 그런 식으로 차라리 소리 지르는 편이 나을 거야. 그래야 내가 좀 봐줄 마음이 생길 테니까.” 하지만 그 만족스러운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어 훼방을 놓았던 것이다. “윽- 뭐, 뭐야!” 등 뒤에서 나를 끌어안고 뒤로 당기는 힘에 놀란 나는 잡고 있던 얼음 창을 놓치고 정체모를 누군가가 이끄는 대로 속수무책으로 떨어졌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한 나는 서둘러 방해자를 찾았지만, 이미 그 누군가는 마족남자에게 다가가 그 몸에 박혀있던 창들을 말끔히 제거 해버린 뒤였다. 몸을 결박한 것들이 사라지자 마족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으면서도 황급히 몸을 돌려 도망쳤다. 그때 뒤따라가 녀석을 잡으려는 나를 또다시 막는 힘이 느껴졌다. “큭- 이게 무슨 짓이얏!!” 자연체인 내 모습을 어떻게 발견하고 막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는 맥없이 마족을 놓쳤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그러자 귓가에서 아이를 달래는 듯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자, 자. 진정해, 엘. 착하지?” “착하기는 누가…어? 트, 트로웰?” 놀랍게도 나를 붙잡고 있는 존재는 땅의 정령왕인 트로웰이었다. 함께 가세해서 공격해도 모자를 판에 왜 나를 막는 거지? 놀란 내 표정을 보며 난감한 듯 웃던 그는 도망치는 마족의 모습을 옆 눈으로 확인하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일단 지금은 가게 내버려 두자. 성은 안차겠지만 충분히 괴롭혔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저놈을 놔주면 악신으로 완전히 각성해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래. 바로 그걸 노리는 거야.” “…뭐?” 나는 너무 황당한 나머지 반항하던 것도 잊고 얌전해졌다. 그 순간 도망친 마족이 황성 안으로 들어서는 것에 성공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성 주위에 거대한 결계가 설치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각성하는 순간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수작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신음을 삼킨 나와 달리, 트로웰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리더니 거의 폐허나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우선 장소를 옮길까? 설명은 그때 가서 해줄게.” ============================================= 역시 트로웰이 좋아요~~/ㅁ/ 모두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어이; 늦은것에 대한 사과는? [정령왕 엘퀴네스] 9-4. 차원의 주인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주변의 상황을 일단락 시킨 트로웰은, 나에게 그때까지도 멀찍이서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한적한 장소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다. 어차피 계속 이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손톱만큼도 없었으므로,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마나를 불러와 중간계에 형체를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 모습을 기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아까부터 따가울 정도로 강한 눈빛들이 느껴지자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그러자 헉-하고 낮은 신음이 울리더니 안 그래도 떨어져 있던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내 기억에 의하면 이들은 분명 나와 친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저런 반응은 뭐란 말인가? 난 의혹에 찬 시선으로 딴청을 피우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봤지? 봤지? 아직 정상이 아니라니까. 저 띠꺼운 표정에다 반항하는 말투를 봐. 이전의 녀석이라면 절대 어림없지.” “저대로 대부가 원래 모습으로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 제가 기필코 엘님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말겠습니다!” 아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화들짝 놀란 데르온이 당차게 대답했다. 그 옆에선 미네가 동조하는 표정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를 내가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다. 확 가서 뒤집어엎을까 고민하던 나는, 과격한 힘의 사용으로 몸이 많이 피곤해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그만두었다. 이럴 땐 무시하는 게 상책이지. 암! ‘아…그러고 보니 엘뤼엔은 어떻게 된 걸까.’ 무심코 그가 어떻게 됐는지 물으려 했던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나 아까 전에 주절거리던 마족과 같은 대답이 돌아 올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 챘는지, 웃음을 머금은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깜빡 잊었는데, 엘뤼엔이라면 신계로 돌아갔어. 부상이 너무 심해서 치료신에게 보여야 했거든.” “아…아, 그, 그래?” “쿡쿡. 안 가려고 억지 부리는 걸 카노스가 와서 ‘공주님처럼’ 모시고 갔으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아마 상처가 낫는 데로 다시 돌아올 거야.” “으응.” 말하면서 왠지 웃음을 참고 있는 느낌이었지만, 나는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만 안심해서 신경 쓰지 않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바짝 곤두서있던 신경이 이제야 가라앉는 기분이다. 그러자 멀찍이서 우리의 대화를 듣던 라피스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대기 시작했다. “쳇. 엘뤼엔 얘기가 나오니까 단번에 얼굴이 펴지는 군.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이 뭐가 좋다고…” “남의 아버질 함부로 욕하지 마. 죽인다.” “호오~ 한판 붙자고? 좋지~ 단, 난 아까 그놈처럼 쉽게 다루진 못할 거다.” “라피스님!! 그, 그게 무슨!” 데르온이 창백한 얼굴로 기겁을 했지만, 라피스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붉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속에 담긴 것이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조금 난처한 기분이 되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혼쭐을 내주고 싶은데, 막상 실전으로 옮기려니 꺼림직한 느낌이 되었던 것이다. 그사이 다른 일행들은 열심히 라피스를 만류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예민하신 분을 더 자극하시면 어쩝니까! 정말로 돌아가시고 싶어서 그럽니까?” “죽으려면 은인이나 죽어! 대부까지 괴롭히지 말고!” “이렇게 무모할 줄이야. 역시 드래곤은 어쩔 수 없군요.” “으득! 이것들이…” 하나같이 그를 나무라는 일행들의 반응에 라피스는 화가 난 얼굴로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다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나는 기분이 유쾌해져서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풋- 하하하하. 너도 어지간히 인지도가 낮구나.” “시끄러! 이놈들이 눈이 삔 거라고!” “흐응. 맨날 유치찬란한 일만 벌이고 다니니까 그렇지. 그러게 누가 덤비래?” “하! 먼저 시비건 쪽이 누구더라?” “응? 아아, 죽인다고 한건 내가 먼저 였나…윽. 왜 그런 말을 했지? 맞다! 네가 엘뤼엔을 욕했기 때문이잖아! 이 바보 도마뱀!!” 그러나 당장 화낼 거란 예상과 달리, 라피스는 오히려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내 모습을 살피며 이렇게 물었다. “…호오, 이제 좀 제정신이 드나보지?” “응? 뭐가?” “눈빛은 여전히 맛이 갔는데 말투는 그나마 돌아왔군. 너 지금 누구라도 하나 걸리면 작살낼 것 같은 얼굴인건 아냐?” “내가?” 뜬금없는 말에 황당해진 나는 황급히 수경을 만들어 내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 속에서 나는 이전의 온순했던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제법 날카로운 이미지가 풀풀 풍기는 모습이었다. 단순히 눈빛이 차가워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전혀 새로운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난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데?” “그 말 진심이냐?” “왜? 괜찮지 않아? 남자다워 보이기도 하고.” “……” 그러자 일행들은 또 뭐가 불만인지 서로를 바라보며 찝찝한 표정을 지었다. 뭐? 순수했던 엘을 돌려달라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건 그렇고. 아까는 왜 날 말린 거야, 트로웰? 녀석이 각성하는 것을 노리다니, 난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 “아아, 그건 말이지. 마왕…아참, 이젠 마왕이 아니지? 그녀석의 이름이 뭐더라?” “카류드리안, 줄여서 카류안이라고 합니다. 그가 왕이 된 이후로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이름이죠.” 데르온의 대답에 트로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설명을 이었다. “그래. 그 카류안이라는 녀석은 이미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일 수 없는 상태라서 그런 거야. 팔이 잘리고 다리가 떨어져도 조금 있으면 금방 재생되거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재생되면 다시 베어버리면 그만이잖아.”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언제까지? 엘, 네가 소멸하는 순간에도 녀석은 살아있을 텐데? 우리 정령왕들이 세대교체를 수 십 번 반복하면서 의무처럼 놈의 육체를 지키고 베어야 할까?” “…그건…” “게다가 놈이 완전히 각성하기 까지 필요한 아이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혹시라도 방심한 사이 그가 도망쳐서 멋대로 각성을 해버린다면, 그땐 정말 대안이 없는 거야. 신계에서는 그 ‘만에 하나’의 가능성도 없기를 바라고 있어.” “하지만 지금 각성해 버린다면 그것도 의미가…” “그건 틀려. 지금은 충분히 대처가 가능한 상황이잖아. 잊었어, 엘? 악신을 소멸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말이야.” “!!” 그때서야 나는 트로웰이 말하는 의미를 깨닫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각성하는 순간에 생기는 공격할 수 있는 틈!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일부러 악신 카류안을 놓아 준 것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반드시 상급 신 하나의 희생이 뒤따르지 않던가! 놀란 내 표정으로 본 트로웰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건 상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신들의 책임도 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두고두고 후환을 만드느니 차라리 희생자를 결정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이야. 놈에게 재물로 바쳐질 아이들은 안됐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주어지겠지.” “그럼 희생되는 신은…” “으음. 명계의 상급신으로 정해졌다는군. 그러니까 엘의 걱정처럼 엘뤼엔이 위험할 일은 없을 거야.” “……” 이상하게도 안심이 돼야 하는데 머릿속은 더욱 복잡하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하던 나는 곧 확인사살 하는 심정으로 어렵사리 물었다. “중간에…자청하는 신이 나온다면 바뀌겠지?” “그거야…” “엘뤼엔이 자원할 가능성은? 아까 카노스가 와서 데려갔다고 했지? 스스로 신계에 돌아갈 수 없을 만큼 상태가 심각했었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 생각이 맞아? 치료를 받아도 낫지 않는다면 소멸하게 될 텐데…그렇게 되면 엘뤼엔은 스스로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까?” “…생각이 너무 지나쳐, 엘.” 트로웰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부정을 한 것도 아니었다.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때문이야…” “무슨 소리야, 엘. 그게 왜 네 탓이야?” “하지만 날 보호하려고 하지만 않았어도 엘뤼엔이 그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거 아니야.”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라피스가 한심하다는 듯이 쏘아붙였다. “뭔 헛소리야? 놈이 끼어들지 않았으면 네가 그렇게 되었다고.” “차라리 내가 그렇게 되는 것이 나아. 왜 하필 엘뤼엔이…” “그야 놈이 네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잖아.” 무슨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식으로 대답하는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네 말은 꼭…엘뤼엔이 아니라도 누구나 그랬을 거라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 말이 맞는데? 실제로 그때 너한테 달려가던 녀석은 엘뤼엔만이 아니었다고. 아스와 데르온 녀석도 달려가던 중이었지.” “흐음. 넌?” “나야 뭐….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다친 사람이 엘뤼엔이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넌 아까처럼 분노해서 마족 녀석과 싸웠을까?” 뜬금없는 질문치곤 라피스는 상당히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묘한 박력을 느낀 나는 나도 모르게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왠지 아니라고 하면 한 대 칠 것 같은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라피스는 생긋 미소 짓더니, 한손으로 내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아, 다음에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너 대신 죽어주지.” “윽! 어린애 취급하지 마! 그런 약속 따윈 하나도 안 반갑다고! 그리고 너! 지금 그런 말 한다는 건 엘뤼엔이 다쳤을 땐 꼼짝도 안했단 소리잖아!” “그래서 다음번엔 내가 죽겠다고 하잖냐.” “웃기지마! 넌 단순히 내가 엘뤼엔 때문에 화난 게 부러워서 그런 거잖아! 제발 이상한 것 가지고 경쟁 좀 하지 말라고! 목숨이 무슨 장난 인줄 알아?” 버럭 쏘아붙이는 내 말에 라피스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라피스를 바라보고 있던 아스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은인은…현실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게 아니라, 본인만 좋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던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스?” “으음. 그게… 난 지금까지 은인이 유희를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도 여유를 부리는 건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은인은 그냥 재미있었던 거야. 갑자기 성격이 변해버린 대부를 관찰하는 일이.” “!!” “맞아. 그리고 그걸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버려도 좋을 정도로 단순무식한 놈이지. 하여튼 겉멋만 잔뜩 든 바보라니까.” “트로웰…” 마지막으로 이어진 트로웰의 말에 라피스는 단번에 불쾌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리곤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는 나에게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재미없는 건 딱 질색이야. 그런 의미에서 너랑 계약한건 행운이었어. 좀 귀찮긴 해도 네 옆에 있으면 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져서 즐거웠거든. 이 세상에 태어난 게 처음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니까.” “무슨…” “뭐, 어쨌든 난 네가 맘에 들었어. 하지만 그저 계약자나, 친구의 입장에선 독점하기 힘들다는 게 꽤 불쾌하긴 하군.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걸 지금 네놈이 나한테 묻는 거냐! 녀석은 돌이 되어 굳어진 내 모습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연신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버지 자리는 이미 엘뤼엔놈이 꿰어 찼으니 별 수 없고…아, 그래! 연인은 어때? 원한다면 여자 모습으로 변해줄 수도 있는데.”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천재란 놈들은 원래 다 이런 걸까? 새삼 장담하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드래곤을 좋아할 날은 없을 것 같았다. 당췌 뭔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가 있나! “제길. 언제 날 잡아서 저 놈 머릿속이나 해부해 버릴까.” “쿠, 쿨럭. 에, 엘님. 아직 완전하게 원래대로 돌아오신 건 아니었군요.” “응? 뭐가요?” “음, 그러니까 방금 하신 말씀이라든가…” “내가 한말이 뭐가 어때서? 아아, 걱정 마요. 해부한 다음엔 다시 고이 봉합할 테니까. 머리가 갈라진 시체라도 꿰매 놓으면 그리 보기에 나쁘진 않을 걸요.” “허억. 저어…설마 전혀 자각이 없으신 건?” “??” “아, 아니 실례했습니다!!” 어이, 그런데 왜 그 말을 하면서 나한테서 멀찍이 떨어지는 건데? 나는 의혹에 찬 시선으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데르온을 바라보았다. 설마 방금 했던 말에 문제가 있었던 건가. ‘흐음…해부한 걸 다시 봉합해두는 건 역시 심한 걸까. 아니, 그전에 해부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그냥 간단하게 죽인다고 표현할 걸 너무 직선적으로 말했나?’ 겨우 이 정도의 말 가지고 놀라서 벌벌 떨 줄이야. 마족이란 종족이 잔혹하다더니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해할 수 없는 건 트로웰 역시 마찬가지. 그는 생긋 웃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었다. “흐음. 말투나 행동은 예전 그대로인데, 사고방식이 좀 달라진 것 같군. 엘퀴네스 본래의 성격과 엘의 성격이 섞인 건가. 게다가 본인은 그 점에 대한 자각도 없으니… 뭐, 아무렴 어때. 귀여우면 그만이지. 후후훗.” “……” 저기, 트로웰? 그런 말은 본인에게 안 들리게 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닥쳐올 내 앞날을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 왠지 앞으로도 한동안은 동물원 원숭이 취급을 면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 요 근래 충격적인 일을 두번이나 경험했다지요.. 그 첫번째 사례:) 제가 자주 가는 사이트에서는 가끔 판타지 소설을 추천해달라는 글이 올라온답니다. 그때마다 검색한 결과 엘퀴네스는 없더군요. 뭐,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어떤 분이..'동인, 여성향느낌이 강한 판타지 소설 추천바랍니다!'라는 글을 올리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아래 올려진 리플에 엘퀴네스가 3번이나 들어가더이다.(털썩) ...........그냥 히로인 만들어 버릴까요..? (울먹) 두 번째 사례:) 아주 오래전에 매신저에 대화상대 신청이 왔습니다. 모르는 이름이었지만 아는 사람중에 하나이겠거니, 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었답니다. 그리고 한참이나 잊고 지내다가, 오늘 점심무렵, 컴퓨터를 키자마자 대화창이 켜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절 아세요? 라고 묻더군요. 당연히 모른다고 했고, 그쪽이 먼저 신청을 해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고 했지요. 뭔가 긴박해 보이길래, 큰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했습니다. 잠시 후 그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기억났다고 하더군요. <-기억상실증입니까? 이름을 말했지만 모르는 사람이길래, 전 모르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 '나도 너 몰라 ㅋㅋ' 이러더이다. 그러면서 너 몇살이야? 이러더군요. 그래서 그쪽은 나이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습니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라길래, '상대방의 신분을 알려면 본인부터 밝히는게 정식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죠.<-토씨하나 안틀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됐어. 너 혼자 놀아. 즐!ㅋㅋ' 이러더군요. 아무리 생각해도 예의를 갖출 상대가 아니길래, '모르는 사람 같으니 이제부터 대화 상대에서 삭제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맘대로 해. 라고 하면서 왠 알아보지 못할 타자를 난무하더군요. (욕이라는 것은 해석하지 않아도 알겠더이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찔리는 분 있으실까요? 성실 연재 안한다고 이렇게 저주를 내리시면 아니됩니다아아아아아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가기) [정령왕 엘퀴네스] 9-5. 끝과 시작.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악신 놈이 각성에 돌입하기 위해 성안에 틀어박힌 이후, 나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라피스를 상대하느라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놈은 말도 되지 않는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쓸데없는 설득이란 걸 하고 있었다. “이봐, 다시 생각해 보라고. 연인이 뭐가 어때서? 적당히 독점하기 편하고, 유대감을 느끼기에 그보다 더 좋은 사이가 어디에 있어?” “…난 분명히 싫다고 했다.” “글쎄, 싫은 이유를 대보라니까? 원한다면 여자로 폴리모프도 해준다잖아. 아! 혹시 네가 여자역할을 하고 싶은 거야? 나야 오히려 환영이지만.” “이익! 나가 죽어!!” “앗! 대부, 안돼!” “엘님, 제발 진정을!!” 아쉽게도 놈의 머리를 해부해보겠다는 내 계획은 옆에서 말리는 데르온과 아스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필사적으로 내 팔을 잡고 매달리는 두 마족을 떼어내며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이것 놔! 저걸 참으란 말이야! 그냥 냅두면 병이 더 심해진다고!” “대, 대화라는 좋은 방법을 놔두고 어찌 손에 피를 묻히려 하십니까아! 그러다 아스님이 배우면 어쩌시려고요.” “맞아, 대부! 나 아직 배울 거 무척 많아! 교육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 봐. 응?” “교육?” 아아. 그러고 보니 아직 아스는 어린애였지. 이미 겉보기로는 어른이지만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됐으니 아직 이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보며 생긋 미소 지은 채 대답했다. “그래? 그럼 더 잘 됐네. 아스, 잘 봐둬. 까부는 놈들을 어떻게 척살하는지 몸소 시범을 보여 줄 테니.” “으아아악! 엘니이임~!” “대부우우우!” 나참. 대체 왜들 이렇게 기겁을 하는 거야? 결국 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달려드는(?) 두 마족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이거야 마치 내가 가해자가 된 것 같지 않은가! 그 와중에도 이 모든 사건의 주범인 라피스 녀석은 그 와중에도 실실 웃음을 흘려 내 울화통을 도지게 만들었다. “여어~ 정말 고생이 많은걸~” “닥쳐! 이게 다 네놈 때문이잖아!” “흠. 그러니까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간단하잖아. 대체 뭐가 문제인데? 친구는 너무 평범하고, 계약자는 어감이 나쁘고. 그래서 연인하자는 것도 불만이야?” “당연하지! 내가 머리에 총 맞았냐?” “총?” “아씨! 그런 게 있어!” 설명해주진 않았지만 대충 어감에서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라피스는 점점 이해할 수 없는 얼굴이 되었다. 아무래도 장난인건 아닌 것 같아,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물었다. “하아. 대체 네놈이 생각하는 연인의 정의가 뭐냐? 친구보다 소중한 수준?” “가족과 친구와는 또 다른 개념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리고 유일하게 상대방을 독점해도 당연할 권리를 가진 존재, 아닌가?” “그리고 너는 그 ‘독점할 권리’가 마음에 들어서 연인하자고 하는 거고?” 끄덕.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는 놈을 보고 나는 또 다시 치밀어 오르는 살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이건 순전히 옆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감시하는 아스와 데르온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오고 보니 지금까지 용케 이 녀석과 어울려 다녔나 싶다. 나, 전에는 대체 어떻게 참았던 거지? “당장 이 자리에서 그나마 있던 계약자의 입장까지 파기당하고 싶냐? 시끄러우니까 이사나나 불러. 진작 불렀어야 했는데 네가 쓸데없는 말을 하는 통에 늦어졌잖아!” “흐음. 난처한 상황에 대한 대처가 빨라진 건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인가. 그렇담 별로 반갑지 않은걸.” “라.피.스.라.즐.리!!” “아아, 알았어. 알았다고. 쪼그만 주제에 성질은…” 자신의 요구가 먹히지 않는 것이 불만스러웠는지 라피스는 이후로도 대놓고 투덜거리며 내 신경을 긁었다. 혹시 저 자식은 날 어떻게 하면 괴롭힐 수 있나 궁리만 하고 사는 게 아닐까? 이사나와 그 일행들을 조우한 것은, 기분이 나빠진 라피스가 그들을 단번에 강제 연행 해버린 탓에 비교적 빨리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문제라면 미처 대비지 못한 상태에서 불려나온 거라 차림새가 전투의 한복판에 서있는 사람마냥 다들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전투 중에 끌려온 것이 맞았다. 우리가 이쪽에서 악신을 상대하는 사이 이사나쪽도 대공의 군사들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라피스는 바로 그 와중에 불러냈던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상대(그것도 다수)를 강제 연행하는 마법이라니! 새삼 라피스가 드래곤 중에서도 천재라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었다. “…어?” 이사나와 알리사, 그리고 시벨리우스는 불려온 이후에도 한참동안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곧 나와 라피스를 발견하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두 눈을 크게 치켜떴다. “에, 엘? 정말 엘 맞아?” “…그러는 너야 말로 이사나가 맞는지 묻고 싶다만.” 잠시 못 본 사이에 이사나는 폴리모프 마법을 풀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동자, 훤칠하게 커버린 키가 이제 어디에 내놔도 도무지 소년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다. 나랑 의논도 없이 멋대로 마법을 해제하다니! 겉으론 표현하지 않았어도 그의 요정 같던 모습을 내심 뿌듯해 했었던 나는 일말의 배신감(?) 마저 느끼고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내 반응이 이상했는지 반가운 얼굴을 하던 이사나들의 몸이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왜, 왠지 못 보던 사이에 변한 듯한?” “이, 이사나씨도 그렇게 느꼈어? 어째 묘한 카리스마가 흐르는 것이…혹시 엘의 탈을 쓴 가짜가 아닐까?” “왜? 나는 훨씬 보기 좋은데.” “켁. 그 말 진심이야, 시벨리우스씨?” 경악하는 알리사의 반응에 내 기분이 더 나빠지는 이유는 뭘까. 잠시 세 사람의 얼굴을 노려본 나는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이 나오기 전에 이쯤에서 화제를 전환시켜야 겠다고 생각했다. “자자, 다들 잡담은 그만. 보아하니 전투 중에 온 모양인데, 그쪽 상황은?” “아, 이제 거의 마무리만…어? 그러고 보니 이곳 상당히 낯 익는데… 맙소사! 수도잖아? 우리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어떻게 라니. 당연히 라피스가 마법으로 불러왔지.” “마법으로? 아, 텔레포트 인가?” 그걸 이제야 궁금해 하다니. 너무 놀라서 사고회로가 멎어버렸던 걸까? 수도란 걸 알아차린 즉시 이사나가 보인 반응은 초토화가 되어버린 주변을 보며 경악하는 것이었다. 현재 황성 주변은 바닥에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마족전사의 시체와 폭발의 잔재들로 쑥대밭을 이루고 있었다. 이쯤 되면 아무리 둔한 녀석이라도 뭔가 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예상대로 세 사람(?)의 얼굴엔 당혹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왜 마족들이…설마 숙부가 마족들까지 동원했던 거야?” “아아. 잠깐 그럴 일이 있었어. 지금은 안심해도 돼. 아스가 마왕의 자리를 넘겨받았거든.” “뭐? 아스가? 아스는 어디에 있어?” 한 달 사이에 훌쩍 어른이 되 버린 탓에 이사나들은 그들의 코앞에 있던 아스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아스는 입가에 피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나 여기에 있는데.” “에? 네가…아스라고?” “헉, 거짓말!”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꼬맹이가 갑자기 자랐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세 사람은 불신의 눈빛을 띄며 경계하는 얼굴로 아스를 살펴기 시작했다. 그러자 열혈 충성 부하 데르온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끼어들어 소리쳤다. “감히 주군을 의심하는 겁니까! 주군께 대항하는 것은 곧 저에게 도전하는 일! 이 데르오느빌! 목숨을 걸고 싸워서라도 증명해 보이지요!” “에? 아니, 진정해요, 데르온. 우리는 단지 믿을 수가 없어서…아무리 인간이 아니라지만, 이렇게 빨리 자란다는 게 좀…” “마족들은 유년기가 짧다고 말씀 드렸잖습니까. 한 달이면 성년으로 자라기 충분한 시간입니다.” “흠, 그러고 보니 흑단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이나 붉은 눈동자는 그대로군. 휘유~ 엄청난 미남으로 자랐는걸.” 그러자 아스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칭찬 고마워, 퍼런 엘프씨.” “크악! 시벨리우스라고 부르랬잖아!!” “아, 그랬던가? 미안. 깜빡 잊었어.” “너 이 자식, 지금 일부로 그렇게 부른 거 맞지! 엘! 대체 저놈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앗! 대부한테 시비조의 말은…” 하지만 아스는 채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한손에 얼음 창을 꺼내 쥔 내가 그것을 시벨의 목에 똑바로 겨누었기 때문이다. 그 돌발 상황에 주변에 있던 일행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나는 그것을 말끔히 무시하며 싸늘하게 물었다. “지금 뭐라 그랬냐. 교육? 그딴 걸 왜 나한테 물어. 내가 아스 보모야?” “어어? 아니, 난 그냥…” “이번 한번은 봐주지. 다음에도 그딴 말 했단 봐. 수틀리면 다 때려 치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는 수가 있어. 안 그래도 저 썩을 도마뱀 때문에 짜증나 죽겠는데, 너까지 날 실망시키지 말라고. 알아들었어?” “…으응.” 나는 그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얼음 창을 거두어들였다. 왠지 묘하게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피곤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잠시 후 나는 얼빠진 표정을 하고 있던 이사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전투 중에 갑자기 불려 와서 놀랐겠군. 지휘관이 3명이나 빠졌으니 그쪽 상황이 나빠질까?” “아, 아니. 괜찮을 거야. 어차피 거의 마무리 단계였고, 카웰 형님과 보좌관도 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에 생포한 카리브디스 공작도 내 뜻에 따르기로 결정했거든. 나의 공석은 그들이 알아서 채우겠지. 하나같이 유능한 사람들이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고. 너희들을 불러온 건 예상보다 결말이 빨리 닥칠 것 같기 때문이야. 오히려 그 쪽에 있는 편이 훨씬 안전하겠지만, 대공에 대한 처벌은 직접 내리고 싶겠지?” “뭐? 설마 벌써 일이 그렇게까지 진척이 된 거야?” “황성을 자세히 살펴봐. 뭐가 보여?” 내 말에 이사나는 황급히 황성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 전체를 감싸고 있는 붉으스름한 막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박쥐의 날개가죽에 달린 피막처럼 생긴 지라 보는 이로 하여금 혐오감을 저절로 유발시켰다. “저, 저게 뭐야?” “악신 녀석이 설치한 결계야. 누구도 접근 하지 못하게, 각성의 순간까지 시간을 벌어볼 작정인 것 같더군.” “뭐? 그럼 위험한 거 아니야? 어서 막아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일부로 방치하고 있는 거니까. 신계에서 뭔가 따로 생각해 둔 게 있는 모양이더라고. 그건 네가 신경 쓸 부분이 아니야.” 그밖에 나는 이곳에 와서 있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대강 간추려서 말해주었다. 10만 대군의 마족전사부터 시작해서, 악신이 도망친 일까지. 그 과정에서 벌어진 누군가의 부상라든가 아스가 전대의 마왕, 즉 악신으로부터 왕좌(王座)를 받아내던 상황의 긴박함 또한 빼놓지 않고 설명했다. 물론 그 전에 라피스와 데르온이 여장한 사건이나, 수도의 경비대들한테 쫓겨 다니며 몸을 피했던 이야기는 숨겼지만 말이다. “헤에. 라피스님이 본체로 돌아갔었단 말이지? 아쉽다. 나도 한번 보고 싶었는데.” “별로 구경할 만 한 건 아니었어. 참고로 황성의 친위대들은 이미 전부 제압해서 항복을 받아둔 상태지. 대공만 죽으면 혁명은 성공인 상황이랄까.” “아…그렇구나. 숙부만 죽으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이사나는 곧 흠칫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이었지만, 자기 손으로 혈육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현실로 다가오니 두려운 모양이다. ======================================== 후후후.. 성실 연재의 예감? <-퍽! 아아.. 역시 엘퀴네스는 압도적인 표차로 여성향 판타지라는 의견이 강하군요.. 안돼요, 안돼. 이러면 잠들어 있던 제 어둠의 본성이 깨어난단 말입니다;ㅁ; [정령왕 엘퀴네스] 9-.6 끝과 시작.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 모습에 무심코 어깨를 다독여 주려했던 나는 곧 머쓱한 기분이 들어 반쯤 들었던 팔을 슬그머니 내리고 말았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동들이 전부 어색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대신 나는 딱딱한 얼굴로 뭔가 위안을 줄만한 말이 없을까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런 나보다 한발 앞서서 말을 건네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옆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던 시벨리우스였다. "왜 그런 얼굴이야? 모든 일이 순조로우니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 텐데." "그거야 그렇지만..." "새삼 같은 핏줄이라는 사실이 걸리는 거냐? 정말이지 인간들은 별 쓸데없는 것에 목을 맨다니까. 놈에게 당했던 시절을 잊었어? 네 아버지와 수하들을 죽인 녀석이 누구지? 이미 인간이길 포기한 놈이야. 새삼 동정할 가치도 없다고." "알고 있어요, 그저...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되 버렸나 생각이 들었던 거예요. 숙부는 어땠는지 몰라도, 배신당하기 전에 나는 그를 꽤나 좋아했었거든요. 뭐, 그렇다고 그를 죽이겠다는 마음이 변한건 아니에요. 그것만큼은 반드시 해낼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확고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모습이 기특했는지, 시벨리우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기분은 점점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왠지 내가 할 역할을 남에게 빼앗긴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쳇, 뭐야. 나도 그 정도의 말은 할 수 있었다고.' 내 말투가 이전보다 험해진 건 나 역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부드러운 어법을 사용하려고 고민 한 거였는데, 그 사이 차례를 빼앗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행들은 이런 내 마음도 모르고, 그저 내가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을 의아해 하기 시작했다. "엘? 기분이 안 좋아? 오늘따라 유난히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 "그러게. 말투도 달라지고, 눈빛더 날카로운 걸? 뭐, 이런 모습도 신선해서 좋긴 한데 어째 적응이 안 된달까." "흥! 수작부리지 마. 난 원래 이런 말투, 이런 얼굴이었어. 대체 뭐가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하지만 그건 오히려 역효과였다. 내 대답을 들은 이사나들이 경악에 찬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헉! 드, 들었어, 알리사? '흥'이래! 믿을 수가 없어! 엘의 입에서 '수적부리지 말라'는 말이 나오다니!" "저기, 시벨님. 정령왕도 미칠 수 있는 건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해?" "그,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뭔가 방법을 궁리해봐! 엘님이 가엽지도 않아?" "......" 이젠 아주 대놓고 날 미친 정령으로 취급하는 거냐! 그들은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채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더니 종래엔 아스와 데르온마저 합세하여 '나를 치료할 방법'을 의논하는 것이 아닌가! 나 지금 화내도 되는 상황인거 맞지? 하지만 나는 미처 그들에게 따지고 들 수 없었다. 막 드러려는 찰나 지금까지 멀찍이 떨어져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트로웰이 끼어들어 분위기를 환기시켰기 때문이다. "쿡쿡쿡. 다를 그만들 해. 엘이 당황하잖아. 자각도 없는 본인을 추궁하는 건 잔인한 일이라는 거 몰라?" "윽, 자각이 없어요? 그건 더 심한 상태잖아.어라? 그런데 누구?" 그러고 보니 아까 설명 중에 트로웰의 모습이 변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을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그 또한 아스처럼 어린애에서 갑자기 성년으로 자라지 않았던가!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자랐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일행들은 바짝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트로웰은 불쾌한 기색 없이 생긋 웃으며 여유롭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음? 아아. 이 모습으로는 처음인가? 나 트로웰인데." "헉, 뭐, 뭐라고요? 트로웰?" "그래. 다들 오랜만이네. 다시 만나서 반갑다, 알리사. 그때보다 제법 많이 컸는걸?" "거, 거짓말. 절말 트로웰이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 알리사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그녀가 이미 트로웰과 안면이 있었음은 물론, 그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알리사는 이사나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없는 상태다. 그런 와중에 이전부터 동경하던 존재를 만나게 되면 두 사람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더욱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이사나 또한 불안한 표정으로 알리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운명의 라이벌까지 있는 참에 최강의 적을 대면했으니 지금 어지간히 착잡한 심정일 것이다. 혜안을 가진 이로서 그 속마음을 모를 리 없을 텐데도, 트로웰은 따청을 피우며 유난히 알리사에게 친절하게 대했다. "그렇게 몰라볼 정도야? 그냥 키만 좀 키운 것뿐인데." "키가 큰 것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잖아! 바보! 그동안 뭘 하고 지낸 거야?" "뭐이것저것. 그나저나...넌 여전히 중급 정령사 구나. 아직 클레이의 소환은 성공하지 못한 거야? 그래서야 어디 날 소환해낼 수 있겠어?" "시, 시쓰러! 요즘 바빠거 소환할 시간이 없었다고! 꼭 해낼 테니까 두고 봐!" "하하하! 여전하구나." "뭐야? 놀리는 거야?" "아니, 전혀. 오히려 보기 좋다는 칭찬의 뜻이었는걸." "흐, 흥!" 어우리지도 않게 얼굴을 붉히는 알리사를 보자니, 새삼 어린애라도 여자는 여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트로웰과의 대화에만 정신이 팔려, 옆에 있는 이사나의 어깨가 추욱 늘어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야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자가 된 꼴인가. 쯧쯧, 그러게 평소에 확실히 프로포즈를 해두지 그랬니, 이사나. 하지만 그들의 대화는 그리 오래 이러지지 못했다. 무척 놀란 표정을 지은 시벨리우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네가 정말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고?!" "...?...아아. 그렇긴 한데. 넌 누구지? 생김새는 영락없는 블루엘프지만, 그다지 엘프의 냄새는 나지 않는데." "너도...내가 기억나지 않는 거야?" 허탈하게 묻는 시벨의 얼굴은 마치 유일하게 믿고 있던 마지막 희망까지 놓치고 기력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트로웰은 잠시 후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호기심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넌 유니콘이군? 이 특유의 기운은 절대 잊을 수 없지. 세상에. 4천 년 전에 이 땅을 떠난 종족이 이곳엔 무슨 일로 온 거지? 게다가 꽤나 고위급의 유니콘 같은데." "유니콘? 그게 뭐야? 시벨님은 엘프인 게 아니었어?" 어리둥절하게 묻는 알리사의 말에 트로웰은 생긋 웃어보이곤 대답했다. "음, 유니콘이란... 이마에 기다란 뿔이 있고, 두 개의 하얀 날개를 지닌 말이라고 해야 하나? 성스러운 동물로서 신의 가호를 받는 종족이지. 4천 년 전까진 이 세계에 있었지만, 다들 신계로 이주했기 때문에 지금의 인간들에게는 거의 전설로 남아있지만 말이야." "날개 달린 말? 하, 하지만 시벨님 모습은..." "폴리모프 한 거야. 유니콘들은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을 잘 다루거든. 아무튼 다시는 못 볼거라 생각했던 종족을 이곳에서 보게 되다니, 굉장히 신기한 걸? 엘은 인맥도 넓다니까." 그러자 시벨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야." "어라.아니라고? 흐음. 기억하지 못하냐고 묻는 걸 보면, 전에 나와 만난 일이 있었나? 이상하군. 아무리 존재감이 희미해도 한 번 만나면 잊을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넌 그렇게 존재감이 없는 타입도 아닌걸." "아니. 4천 년 전에 넌 나와 만난 적이 있어. 그것도 여러 번. 그리 사이좋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4천 년 전 이라면..." "온 세상의 종족들이 대지를 일컬어 '암흑의 주군'이라 칭하던 때지." "!!" 그 말이 꽤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었던 걸까? 시벨을 바라보는 트로웰의 얼굴엔 어느새 옅게 흐르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정한 빛을 뿜던 황금색 눈동자도 서늘하게 식어 상대를 향한 적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트로웰도 이런 얼굴을 할 줄 알았던가? 난생 처음 보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내가 움찔 놀라는 사이, 시벨은 오히려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 얼굴이야. 아깐 너무 낯설어서 하마터면 그새 정령왕의 교체라도 있었는지 착각 할 뻔 했어, 트로웰." "...넌 누구지?" "너도 알다시피 유니콘이지. 그리고 4천 년 전에 사라진 비밀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존재기도 하고." "비밀이라... ." 짧게 중얼거린 트로웰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시벨의 모습을 빤히 흩어 내려갔다. 잔뜩 굳어버린 공기에 주위의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지만, 두 사람(?)의 얼굴이 너무도 진지한 탓에 누구도 그 사이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웰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뭔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넌 '그때의'장면과 관계가 있던 녀석이군. 어쩐지 생판 처음 보는 광경이 떠올라서 뭔가 이상하다 싶었지. 그게 환상만이 아니었다는 건가." "뭐? 그럼 너도 뭔가 기억나는 게 있다는 소리야?"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트로웰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시벨은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하며 황급히 물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 또한 바짝 긴장해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시벨이 묻는 것은 틀림없이 과거의 '엘'과 관계된 일일 것이다. 정말 그와 같은 인간이 실존했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나 트로웰은 강적이었다. 그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눈을 마주보며 상큼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안 가르쳐 주지." "...에?" "그, 그게 무슨!!"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시벨은 물론, 덩달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트로웰의 입장은 간결했다. "암흑의 주군이니 뭐니, 잊고 싶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한 벌이야. 내게서 원하는 정보를 얻고 싶다면 다음부턴 좀 더 예의바르게 구는 게 좋아. 그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당연히 알겠지만, 난 그리 친절한 성격이 아니거든." "...하아. 그래. 넌 그런 녀석이었지." "뭐, 어쨌든 이것으로 나도 의문이 풀려서 기분이 후련한걸. 그래, 그랬었던 거군...후후후." "제길! 혼자만 알고 중얼거리기냐!!" 혜안을 가진 트로웰로선 시벨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그의 기억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대단한 편리선이란 말인가! 시벨이 화를 내든 말든, 혼자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그려보이던 그는, 잠시 후 나를 보며 뜬금없는 말을 건넸다. "난 네가 정말 좋아, 엘."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후훗.어쨌든 '앞으로'잘 부탁해." "...???..." 어쩐지 강조하는 단어에서 묘한 뉘앙스가 풍겼지만, 나는 좀처럼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었다. 하지만 트로웰이 건네는 엉뚱한 말의 대상은 나 하나만이 아니었다. 마치 사냥감을 물색하듯 휘익~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이번엔 아까부터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피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라피스 너도 제법이야.이제껏 제멋대로 구는 바보라고만 생각했는데 다시 봤어." "뭔 헛소리야?" "아아, 별거 아니야. 좀, 아니 상당히 많이 기특해서 말이지. 쿡쿡, 귀여운 녀석. 너도 가끔은 제정신일 때가 있구나." "...그러는 너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로군." 단번에 결론은 내린 라피스는 옮기라도 할 것처럼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그에게서 주춤 몇 걸음 물러섰다. 나야 뭐, 어느 정도 짐작되는 부분이 있어서 잠자코 있었지만, 정말로 상태가 나빠 보였다면 역시 똑같이 물러났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뭔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고 이러는 것이겠지? 별로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너무하는 걸. 난 그저 순수한 호의로 말했을 뿐인데." "시끄러! 아까부터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난리야? 어이, 퍼런 엘프. 네가 말해봐. 저 녀석 대체 왜 저래?" "내 이름은 시벨리우스닷! 혼자서 알고 그러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답답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라고!" "으음.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군요. 정말 말 안 해주실 겁니까, 트로웰님?" 데르온 역시 궁금했던지 슬쩍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여전히 전과 동일했다. 그러자 요상하게도 일행들의 시선이 죄다 나에게 몰리는 것이 아닌가? 뭔가 잔뜩 기대를 담은 눈들이라 나는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목소리를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 뭘 그렇게 봐?" "엘님! 엘님이 트로웰님께 물어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네? 내가?" "그래,엘! 네가 부탁하면 들어줄 지도 몰라. 같은 정령왕이잖아." "나도! 나도 궁금해, 엘님! 지금 트로웰이 무슨 말을 한 거야? 응? 좋아한다는 게 무슨 뜻이야?" "......" 알리사. 너는 어째 다른 사람들과 궁금해 하는 핀트가 빗나간 것 같구나. 정녕 이사나는 관심 밖인 거냐?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항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 쪽팔리는 것도 무릅쓰고 매달여서라도 설명을 부탁했겠지. 하지만 지금은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가 알아도 되는 일이라면 트로웰이 진즉에 알아서 설명했을 것이다. 그것을 일부로 감춘다는 것은 그만큼 복잡한 사건이라는 뜻이 아닌가. 안 그래도 처절한 내 인생이 앞으로 점점 더 가시밭길 이라는 사실 따윈 모르는 편이 오히려 유익하다고! 그렇게 다짐한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싫어. 난 끌어들이지 말고 알아서 해결해." "헉!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가!" "시끄러. 귀찮은 건 딱 질색이야. 도움이 되는 말이었다면 트로웰이 알아서 설명했을 거야. 즉,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은 우리가 들어봤자 하등 좋을 게 없다는 소리지. 그런 걸 뭣하러 물어서 그를 곤란하게 해야 하지?" "하, 하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엘님도 관계가 있으신 것 같은데요. 게다가 라피스님도..." "그러니까 나는 더 알고 싶지 않다는 거야! 저 녀석과 관계 되서 좋았던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날 설득할 시간동안 차라리 트로웰에게 매달리는 편이 훨씬 나을걸!" 내가 한 손으로 척하니 라피스를 가리키며 쏘아붙이자, 일행들은 더 이상 부탁하지 못하고 꿀꺽 마름 침을 삼켰다. 다행히 머리가 나쁜 모양은 아니라, 말귀를 잘 알아들은 것 같다. 진작 이렇게 할 걸. 잠시 후 그들은 돌아서서 걷는 내 뒤에서 자기들끼리 조그마한 목소리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못 듣는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의 대화는 내 귓가에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흑흑, 대부가 변했어." "착하고 순진하던 엘이 어쩌다가 저렇게..." "뭔가, 라피스님에게 유감이 많은 듯 한데요?" "맞아! 그래보였어. 대놓고 손가락질까지 했잖아." 이사나의 말에 알리사가 동조하고 나서자 단번에 불쾌함이 가득 담긴 라피스의 대답이 이어졌다. "쳇. 내가 뭘 어쨌다고? 그나저나, 저 따분하다는 얼굴이며 시큰둥한 대답이며...점점 누굴 닮아가는 것 같군." "저거 정말 치료방법은 없는 겁니까?" "글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해결 되지 않을까?" "혹시 영원히 저 상태면요?" 걱정스럽게 묻는 데르온의 말에 일행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왜 저 쪽의 공기만 서늘하게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이내 신경을 완전히 끄기로 작정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에게 말이라도 붙였다간, 치료한다는 명목 하에 모진 고문(?)을 당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은 표정들을 보건데, 아마 내 기분 탓만은 아닐 것이다. 생애 첫 유희에 만난 존재들이 하나같이 저모양이라니, 나는 동료 운이 없는 걸까? ================================================== 엘의 성격을 다시 원래대로 돌릴지 말지 고민중입니다. 전 지금 성격도 나름대로 좋거든요.(동료들은 피눈물을 흘릴지 몰라도;;) 아마 다시 돌아오더라도 100% 똑같이 되진 않을 것 같아요. 남에게 의지하는게 아니라, 누군가가 기대서 의지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할지도요.후후후<- 아아, 빨리 악신과의 일들을 마무리 짓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순수 발랄 명랑 여행 판타지(?)가 어째서 이렇게 까지 꼬였는지 알 수가 없군요;; 우울한 글은 체질이 아닌데...ㅡ.ㅜ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다음 편은 좀 더 일찍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정말? [정령왕 엘퀴네스] 9-7. 끝과 시작.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결국 내가 이 모든 고민을 털어놓고 위안을 얻은 존재는 같은 정령왕인 미네와 트로웰 밖에 없었다. 나 스스로도 느끼지 못하는 성격의 변화라든가, 그로인해 주변에서 보이는 반응들이 적응되지 않는다는 말에 미네는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 신경 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걸. 미네가 보기에도 내가 이상해졌어?" "이상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군요. 정령왕으로서 어느 정도 위엄을 갖추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습니다. 대대로 내려온 엘퀴네스들의 성향에 비교하면, 오히려 그동안 엘이 너무 우유부단했던 셈입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트로웰도 동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미네의 말이 맞아. 본 성격을 되찾아 간다는 게 그리 나쁘다고 볼 일은 아니지. 난 오히려 반가운데?" "반가워?" "응. 그동안의 너는 어떻게든 사랑받고 싶어서 애쓰는 사람 같았거든. 그래서 자꾸 시선이 가고 돌봐주고 싶다는 느낌이 강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자신감이 넘쳐서 활력 있게 보여. 굳게 닫혀있던 꽃봉오리가 드디어 활짝 펼쳐진 느낌이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하하. 신경 쓸 것 없어. 다들 어리광쟁이라 네가 자신만 두고 멀리 가버릴 것 같아서 불안해하는 것뿐이니까. 정 귀찮으면 끌어안고 다독여줘. 금새 헤헤거릴걸." "......" 왠지 유치원 원장으로부터 아이들을 요령 있게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초보 교사가 된 것 같달까. 트로웰이 하는 말이니 틀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 되어 아직도 저 멀리서 수군거리고 있는 일행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연신 힐끔힐끔 내 눈치 보기에 바빴다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손짓을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우루루 몰려왔다. 이번 일에서 만큼은 평소 사이가 나쁘던 라피스와 시벨 또한 예외는 없었다. 그들 하나하나와 일일이 시선을 맞추던 나는 잠시 후 사형집행을 하는 간수가 된 심정으로 딱딱하게 물었다. "내 성격이 뭐가 어쨌다고?" "헉! 드, 들었어, 엘?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하하하! 농담이었습니다, 엘님! 결코 나쁜 뜻이 아니었고 말구요!" "맞아! 호호, 농담이지. 뭘 그런 것에 예민하게 굴어~ 그치, 이사나씨?" "응? 아, 그, 그렇지. 아마도..." "호오, 그러셔? 그럼 아스 너는?" "저, 저기...으으...대부, 미안! 잘못했어." "헉!" 오냐, 아스. 넌 그나마 개선의 여지가 보이는 구나. 하지만 혼자 살길을 도모하다니, 후환이 두렵지는 않니? 변명하기에 급급하던 인간들은 아스가 냉큼 사과를 건네자 하얗게 질린 얼굴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섰다. 그래도 제 잘못을 알긴 아는 모양이지? 저럼 모습을 보니 차마 화내기조차 민망해지는 지라, 나느 가볍게 응징해주려던 처음의 생각을 접고 적당히 손은 휘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됐어. 내가 말을 말지. 이번 한번은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번에도 걸리면 죽음이야." "요, 용서해 주시는 겁니까?" "흐흠. '용서'라는 거창한 말까진 집어넣을 필요 없고...이런 일에 일일이 얼굴 붉히는 것도 짜증나서 그래요, 데르온. 그러니 앞으론 할 말이 있으면 직접 눈앞에서 해달라고요. 괜히 뒤에서 쑥덕거리지 말고. 마족 주제에 배짱이 너무 없는 거 아니예요? 아스가 뭘 보고 배우겠어요?" "며, 면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그런 식으로 뒤에서 수군거려봐야 내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니까 앞으로 불만이 있으면 직접 와서 얘기하라고. 다 큰 녀석들이 애들처럼 유치하게 그게 뭐야? 내가 무슨 고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말이야!" "으음. 불만이라기 보단 그냥 놀라서 그랬던 건데, 화났다면 미안해, 엘. 앞으론 주의할게." "미안해, 엘님. 다신 안 그럴게." 하지만 차례차례 이어지는 사과의 말 속에서도 라피스 만큼은 당당했다. 녀석은 자신이 뭘 잘못했냐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쳇, 왜 나한테까지 그래? 나는 그냥 네가 누구랑 점점 닮아간다는 간단한 감상만 말했을 뿐인데." "시끄러! 넌 더 질이 나빠! 네놈이 엉뚱한 장난을 하는 바람에 살심이 더욱 가중된 걸 못 느끼겠냐!" "내가 뭘? 미리 말해두지만, 연인이 되어달라는 말은 진담이었다고. 남의 진심을 무시하다니, 그러다 벌받는다, 너?" "에?여, 연인?" "그게 무슨 소리야?" 뒤늦게 온 바람에 이와 관계된 자세한 사건을 모르는 이사나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뭔가 기대감이 담긴 초롱초롱한 눈빛들을 보건데(시벨은 제외다. 녀석은 반대로 얼굴이 구겨졌으니까)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는 모습이었다. 하긴 그동안 라피스가 오죽 나를 여자취급 했던가! 그 시선에 살벌한 미소로 화답해준 나는 눈빛으로 침묵할 것을 종용하며, 어떻게 하면 라피스를 잘 팰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 육포를 떠버릴까. 새로운 별식이 탄생할지도 모르는데. 으음, 근데 드래곤 가죽은 뭐로 벗기지? 오리하르콘으로 식칼 따위를 만들면 사람들이 비웃을 텐데. 아니, 그걸로 잘라지긴 하는 거야? 어쩌면 검기를 일으켜야 할지도.' 나는 잠시 흰색 앞치마에 주방 모자를 쓴 요리사가 오리하르콘 검을 들고 검기를 내뿜으며 고기를 자르는 장면을 떠올렸다. ......좀 엽기적인가? 그러자 내 생각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갑자기 풋-하고 웃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속에서 한참이나 배를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더니 너무 웃어서 새빨갛게 된 얼굴로 내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 역시 귀여워. 엘! 그냥 계속 이 상태로 있어라, 응? 아무리 생각해도 난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 "그거...내 생각이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소릴 간접적으로 비꼬는 말이지?" "그럴 리가. 아,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속상하더라도 너무 구박하지는 말아. 라피 녀서 말마따나 나중에 정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후회라니?" "후후, 그런 게 있어." 말을 얼버무리는 것을 보면 아마 이것도 시벨을 통해 본 미래의 상황과 관계가 있는 모양이다. 대충 유추래 보자면, 라피스는 다른 사람이 놀랄만한 어떤 사건을 일으키고,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그동안 잘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는 소리인데.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그는 내사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난 아무것도 모른다'의 얼굴을 해보였다. 순전히 대답할 마음이 없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건지,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그 대답으로 인해 라피스가 천만대군이라도 얻은 마냥 의기양양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 모습을 보고 더욱 의혹이 가중된 것 같은 세 사람-알리사, 이사나, 시벨리우스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내 경고하는 시선을 무시한 채 용감하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트로웰! 그건 설마 엘님에게 라이벌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소리야? 라피스님을 사이에 두고 필사의 신경전이 펼쳐진다던가!" "...뭣이라?" 이런 환당한 말을 하는 이는 다름 아닌 알리사였다. 누가 여자애 아니랄까봐 상상력이 너무도 풍불해서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감탄의 눈물이 저절로 흐를 정도다. 내가 기막힌 얼굴로 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지, 알리사는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잇고 있었다. "왜~지금이야 관심 없지만 나중에라도 어떻게 될 지 누가 알아? 상황은 언제나 반전을 거듭하는 법이라고." "아! 혹시 뒤늦게 깨달은 사랑에 후회하며 돌아오기를 바라지만, 결국 그리운 님은 나를 버리고 떠난 다는 설정?" "맙소사! 그건 절대 안 돼, 엘!! 네가 어디가 부족해서!" "무슨 헛소리야! 아주 소설을 써라, 소설을!!" 알리사는 그렇다 쳐! 그런 말도 안 돼는 설정에 넘어가버리는 네놈들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아무래도 그냥 내버려뒀다간 일이 더 커질 듯 해, 나는 황급히 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곤 눈에 띄게 실망하는 두 사람(어째서!)과 반대로 안도하는 한 유니콘을 보며 냉담하게 쏘아 붙였다. "알겠어? 저 놈은 그냥 연인 사이를 계약관계가 좀 더 발달된 의미라고밖에 인식하지 못한다고! 저 바보 드래곤에게 로맨스를 논하지 말란 말이다! 그리고 그 상대역에 나도 끼워 넣지마!" "히잉. 겉모습은 정말 잘 어울리는데." "셧업(Shut up), 알리사!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잊은 거냐?" "그치만 정령은 무성(無性)이라며, 게다가 나중에 신이 될 때 여신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시끄러. 일일이 따지지 마. 내가 싫다면 싫은 거야. 뭣하면 너도 여기서 남자로 만들어 줄까? 그럼 즉시 여자를 사랑할 수 있겠어?" "엥? 왜 여기서 그 말이 나와? 그건 엄연히 상황이 다르잖아." "나한텐 같아."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한 나는 또 다른 질문이 나오기 전에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순간 마침 내 눈에 띈 것은, 한 구석에 서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미네의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그가 아직 이사나들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오른 나는, 얼른 미네를 끌어다 이들 앞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던 알리사의 표정이 묘하게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제대로 인사 안했지? 바람의 정령왕인 미네르바야. 나를 도와주려고 이번에 정령계에서 내려왔어." "쳇, 알았어. 결국 엘님한테는 연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지?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할 것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에? 미네르바님이 연인인거 아니었어?" "그 얘긴 이제 그만. 미네는 내 형제와 마찬가지야. 쓸데없는 소리 말고 인사나 해. 이쪽은 내 계약자인 이사나랑 그 친.구.인 알리사, 그리고 시벨리우스라고 해. 진작 소개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해서 미안." "아닙니다. 무엇보다 경황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입니다. 편하게 미네라고 부르십시오." 그 말에 시벨은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어라? 미네르바? 내가 기억하는 얼굴과 다른데. 설마 바람의 정령왕도 교체가 있었나?" "맞습니다. 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소환도 바로 얼마 전에 되어 이제 막 한 마리의 드래곤과 계약했을 뿐이지요." "으음. 그렇군, 하긴, 당시 엘퀴네스와 미네르바의 나이 차이는 별로 나지 않았으니. 그가 소멸했다면 당연히 미네르바도 소멸했겠지." "그렇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물과 바람의 소멸과 탄생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루어 질 겁니다. 나와 엘의 탄생시기도 그리 차이나지 않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엘?" "응, 그야 그렇지." 어른이 된 미네는 그 특유의 엄숙한 말투와 어울려 무척이나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얼굴 자체도 여성스러울 뿐만 아니라 분위기까지 차분하니, 말괄량이인 알리사가 절로 주눅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방금 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허둥대는 모습으로 허리를 꾸벅 숙여보였다. "마,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 알리사라고 해요. 정식 풀 네임은 알리사노 알 드레프입니다." "아아, 반갑습니다. 당신은 땅의 정령사로군요. 어린나이에 벌써 중급 정령을 소환하다니, 왠지 엘의 주변엔 전부 괴물들만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실례. 괴물이라는 표현은 감수성 풍부한 소녀에겐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잊었군요. 하지만 괴물은 괴물입니다. 평범한 인간들은 절대 불가능한 영역 아닙니까?" "......" 미네가 본의 아니게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덕분에 주위가 잠시 썰렁해 지긴 했지만, 다들 정신을 차린 고로 나머지 인사도 그럭저럭 무난히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분위기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쩐지 평소보다 약각 굳은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어이, 인사는 나중에 하고, 지금은 다들 저걸 봐야 할 것 같은데? 결계의 색깔이 더욱 짙어졌어." "뭐?" 그의 말에 놀라서 돌아본 우리는 황성을 감싼 결계의 표면이 완전히 새빨갛게 변해버린 걸 발견하고 서로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 길은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악신의 각성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순간, 왠지 멍한 눈으로 결계를 바라보던 트로웰이 갑자기 머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앉는 것이 보였다. "크윽!! 쿨럭! 쿨럭!" "트로웰!"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트로웰은 고통그러운 신음과 함께 한 움쿰 붉은 피를 내뱉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우리들이 얼른 부축하려고 했지만, 그는 한손을 내밀어 다가오지 말라는 듯 살짝 휘젓기만 했다. 그 뜻 모를 행동에 나와 일행들은 아연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 "큭-미안. 희생될 신이...누굴 지...마음에 걸려서...억지로 혜안을 열었는데...좀 무리였나 봐.아무래도 더 이상 못 버티겠어." "뭐? 그게 무슨..." 하지만 난 잠시 후 그가 말한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트로웰의 손이 흐릿해지는 가 싶더니 곧 온 몸 전체가 뿌옇게 변해갔던 것이다. '역(逆)소환?!' 설마 혜안을 열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역소환이 될 만큼 몸에 무리가 왔다는 건가?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보았는지 트로웰은 형체가 사라지는 와중에도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엘. 조금만 쉬다 돌아올게." "아..." "괜찮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그나저나, 라피스. 너한테도 미안하다. 아마 네 아버지가 좀 많이 아플 거야.하하하." 그 말을 마지막으로 트로웰의 모습은 완전히 우리가 있던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마나가 흩어지는 느낌을 보아 정령계로 역소환 된 것이 확실했다. 아마 하루나 반나절 정도는 그의 영영 안에서 쉬어야 회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일행들은 트로웰이 갑자기 사라지자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와 미네, 그리고 시벨과 라피스를 제외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모두 하나같이 불안감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엘님? 트로웰은 어디로 간 거야? 서, 설마 죽은 거 아니지?" "진정해, 알리사. 그냥 정령계로 역소환 된 것 뿐이야. 하루 정도 푹 쉬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야." "역소환이라니?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왜 갑자기 역소환이 되는 거야?" "트로웰이 본인이 쓴 능력이 강하게 거부당했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악신에 관계된 것은 코앞의 일도 알아내기 어려운 모양이군. 그렇다고 그렇게 무리를 하다니, 트로웰도 참..." 그러자 라피스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맞는 말이다만, 그런 식으로 한가하게 따지고 있을 겨를은 없을 걸?ㅜ 트로웰이 그 지경이라는 건, 엘 너도 위험하다는 뜻이야. 지금부터 놈에게 정령왕의 능력은 전혀 안통할거다." "...놈에게 입은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할 수도 있겠군. 이거 상당히 곤란한걸." 비록 예기치 못한 사고였지만, 이로서 우리가 지금부터 대면해야 할 존재가 얼마나 엄청난지에 대한 것만큼은 확실하게 깨닫게 된 것 같았다. 나는 이제 붉다 못해 검은 빛을 띄우기 시작하는 결계를 보며 입술을 꽉 악물었다. 수 천 명의 생명을 잡아먹은 악마가 이제 막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 한 편 쓰는데 무려 이틀.......하하하...이번 주안으로 다 쓸 수 있을까... 역시.. 캐릭터에 대한 애정이 떨어지면 안되요. ㅜ.ㅜ [정령왕 엘퀴네스] 9-8. 끝과 시작.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아아, 그나저나 지금쯤 영감탱이 기절했을지도 모르겠는걸. 혹시 복수한답시고 날름 쫓아오는 거 아니야?" "...영감탱이?" 제법 분위기가 엄숙하게 무르익었다 싶은 순간 라피스가 내뱉은 말은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엉뚱한 소리였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녀석은 홋잣말을 들켰다는 듯이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이더니 알아서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트로웰의 계약자가 내 아버지인 블랙 드래곤이잖아. 계약한 정령왕이 역소환 되었으니 이래저래 내상이 심할걸? 평소엔 근엄한 양반이어도 제 몸 상하는 꼴은 죽어도 못 참으니, 아마 지금쯤 이를 부득부득 갈고 있을 거다." "흠, 그래서 트로웰이 네 아버지가 많아 아플 거라는 말을 한 거구나. 있잖아. 나도 한번 역소환 해봐도 돼?" 나는 기대감이 가득 남긴 눈으로 라피스를 바라보며 최대한 순진무구한 어투로 물었다. 왠지 녀석의 이마에 한줄기 식은땀이 흐르고 지나간 듯하다. "...눈 반짝거리며 묻지 마. 그래봤자 정작 내가 쓰러지는 장면은 못 보게 될 거 아니야?" "음, 그건 그렇네. 정령계로 가버리면 중요한 장면을 포착하기가 힘들겠구나. 어쩔 수 없지. 아쉽지만 간간히 시큐엘들로 만족할 수밖에." "어이, 내가 그렇게 싫냐···" 녀석은 질린 시선으로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정면만 응시했다. 솔직히 '싫은가'라는 질문에 바로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만큼 내게 못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좀 귀찮고, 잘난 척 하는 것이 얄미운 것일 뿐. 하긴, 그래서 더 대하기 편하고 만만하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일행들은 내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나무라는 시선으로 라피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 스스로 자처한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던 것이다. "라피스님이 평소에 엘을 너무 함부로 대하셔서 그런 거예요. 혹시 엘의 성격이 변한 것도 라피스님 때문인건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지 아버지란 녀석이 다쳤다고 길길이 날뛴 뒤부터 저렇게 됐구만. 저놈 성격변화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무조건 엘뤼엔 탓이라고." "응. 그건 은인 말이 맞아. 뭐, 부상당한 직후에 카류안놈이 쓸데없는 입을 놀리지만 않았다면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카류안?" "내 전대의 마왕이자, 현재 악신이 되기를 꿈꾸는 괘씸한 마족 말이야. 그 녀석 이름이 카류안이거든. 그렇지 부하?" "네,맞습니다,주군. 그러고보니 엘님이 저렇게 되신 건 모두 그 놈 때문이군요. 정말 죽어 마땅한 놈입니다." 데르온이 이를 부득부득 갈며 대답하자 일행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악신에 대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잠시 그 모습을 멀뚱히 바라보던 나는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데르온, 내 성격이 그렇게 이상해졌나요?" "예? 으음. 그, 그러니까 그게···" "솔직하게 말해요. 화내지 않을 테니까. 대답하지 않으면 평생 말하지 못하게 입을 꿰매버릴 수도···" "네넵! 그, 그게 말이죠! 조, 좀 잔인해 지셨다고 할까요. 모든 관계에 냉담해 지신 것 같기도 하고···." "흐음, 그런가. 하지만 그러면 오히려 마족들의 눈으로 보기엔 더 괜찮아 진거 아니에요? 마계에건 강한것이 무조건 최고라면서요." 내 말에 데르온은 뭔가를 생각하는 눈으로 한참동안 턱을 쓸었다. 그러자 그의 옆에 있던 아스가 냉큼 끼어들어 대신 대답하기 시작했다. "강한 것과 잔인한 것은 달라, 대부." "그거야 그렇지만···" "마족들이 강한 걸 추구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모든 마족의 성품이 잔인한 것은 아니야. 상대방에게 자신의 힘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서 잔인함을 이용하는 것뿐이지. 그렇게 하면 보복을 두려워해서 다신 덤비지 못하니까 귀찮은 일을 방지할 수 있거든." "흐음, 나도 그런 의미라고 하면?" "뭐, 상관없지. 대부는 강하니까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무척 슬퍼질 것 같아." "슬퍼? 왜?" 왠지 아스가 풀 죽은 얼굴이 된 것 같아, 나는 심장이 쿵~하고 떨어진 느낌이 되어 황급히 물었다. 우는 애를 달래는 심정이랄까. 대부라는 의무감 때문인지 아스 한테 만큼은 유달리 약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대부는 날 죽일 수 있어?" "···뭐?"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붉은 눈동자엔 농담의 빛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의 놀란 표정을 본 아스는 굳이 대답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는지 곧바로 다음 말으 이었다. "마족들은 타인을 구분할 때 자신보다 약하다와 강하다로밖에 인식하지 못해.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도 않고 의지하지도 않지. 아무리 친하게 지내던 상대라도 마음이 달라지면 바로 죽일 수 있을 만큼. 그리고 그것에 대해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도, 슬퍼하지도 않아. 내가보기엔 지금 대부도 그런 상태인 것 같아." "!!" "뭐, 대부가 날 죽인다고 해도 별로 억울하진 않을 거야. 대부가 나보다 훨씬 강하니까 그보다 약한 내가 죽는 건 당연한 거지. 하지만···대부가 내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 "······" 이때의 느낌을 말하자면, 꼭 단단한 둔기로 머리를 거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전보단 좀 더 냉정하게 굴 수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방금 아스가 말한 상황 같은 것은 꿈에서라도 상상해 본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들이 내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있던 일이 타인에겐 정 반대일수도 있다는 사실에, 나는 지금부터 뭐라고 설명해야 할 지 무척 난감해 지기 시작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바라본 나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난 변하지 않았어. 단지 이전에는 생각에만 그치던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된 것 뿐이야. 그 점은 분명히 알아줬으면 해." "엘···" "내가 악신놈과 싸울 때 너무 열 받아서 반 미쳐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 그것 때문에 놀랐을 거라는 것도 이해하고. 하지만 너희들이 내 동료라는 것을 잊어버린 건 아니야. 날 그렇게 냉정한 놈으로만 평가하지 말아줘. 그리고 아스?" "으응?" 왠지 숙연해진 주변의 분위기를 모른 척 한 나는 이번엔 찔끔한 표정을 하고 있던 아스를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내가 널 죽이는 일은 없어. 그리고 혹시라도 네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난 굉장히 울고 슬퍼하게 될 거야. 앞으로 또 그런 말 하면 혼날 줄 알아. 하나밖에 없는 대부의 가슴에 못을 박다니, 못된 녀석." "미,미안해, 대부···" "알았으면 됐어. 그나마 너라서 봐주는 줄 알아. 라피스 녀석이었으면 벌써 척살이었다고." "왜 또 거기서 내가 나와?" 라피스는 세상 다시없을 생뚱맞은 이야길 들었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그것을 못들은 척 살며시 무시해주자 어디선가 풋-하고 웃음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던 이사나였다. "왜 웃어, 이사나?" "아, 흠흠. 미안해, 엘. 우리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지금 보니까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글쎄 그렇다고 했잖아. 아무튼 그놈의 악신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아참! 신계는 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놈의 각성이 코앞에까지 다가왔는데 마냥 손 놓고 있을 참인가?" 각성하는 순간을 노리려면 정확한 타이밍이 중요했다. 그런데 정작 와야 할 신들이 코빼기도 비취지 않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가! 그렇지 않아도 엘뤼엔의 안부와, 희생될 신에 대한 것들이 머릿손에서 불안하게 엉켜들어가던 참이라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연신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마침 무심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미네가 내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그는 말없이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켜 보였다. "왜 그래, 미네? 위? 위에 뭐가···!!···" "헉!" "저, 저게 뭐야?" 무심코 고개를 든 우리가 본 것은 하늘위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는 색색별의 빛 무리였다. 그것은 마치 노을처럼 화려하게 주변을 수놓고 있었는데, 한국에 있을 때 텔레비전이나 사전으로만 보았던 은하수의 모습과 흡사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상당히 아름다운데다가, 이미 주위가 상당히 어둑해진 시점이었기 때문에 갑자기 등장한 빛 무리는 어디에서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경악한 것은 은하수가 아닌, 그 위로 서서히 등장하는 새하얀 존재들 때문이었다. 거리가 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하다못해 인간인지 조차도 확인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내 눈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저것은 분명··· "신(神)들?" 그랬다. 그것은 치렁치렁한 옷가지를 늘어뜨린 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수의 신 무리(?)였다. 그들은 악신과의 대결을 앞둔 때문인지 다소 무거운 분위기를 흘리고 있었는데, 그 옆에선 보좌하러 나온듯한 수많은 천사들이 새하얀 날개를 늘어뜨린 채 청아한 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저렇게 눈에 띄는 등장이라니! 지금쯤 수도에 있떤 사람들은 저 현장을 보고 경악하고 있을게 틀림없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듯한 모습에 내가 할 말을 잊은 사이, 나처럼 그 광경을 지켜본 라피스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단체로 미쳤군. 신비감을 조성할 때가 따로 있지, 이런 상황에서까지 주접이라니. 아무튼 신이라는 것들이란···" 그 말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모두 얼빠진 얼굴에서 벗어나 하나둘씩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특히 뒤늦게 온 바람에 돌아가는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이사나와 알리사 들은 지금의 상황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다. "맙소사. 저 사람들이 정말 신이야?" "어, 어떻게 된 거에요, 라피스님? 왜 갑자기 신들이?" "왜겠냐. 당연히 악신을 물리칠려고 왔지. 꼭 저렇게 등장하면 지들이 정의의 용사인줄 안다니까. 정잦 죽어라 고생한 놈들은 따로 있는데 말이야." "세상에! 신들이 이번 일에 개입하는 건가요? 그럼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겠군요!" 기뻐하는 이사나의 말에 라피스는 피식 비웃으며 가차 없이 대꾸했다. "그런 걸 두고 착각도 자유라는 거다, 꼬맹아. 신계의 신들이 전부 몰려도 완전히 각성한 악신을 이기긴 힘들어." "예? 그럴 수가···. 말도 안돼요. 그, 그럼 저분들은 이기기 힘든 줄 알면서도 이곳에 왔다는 소리인가요?" "그럴 리가 있냐. 정식으로 붙으면 어려우니까 당연히 편법을 쓰려고 하는 거지. 뭐 각성 직후에 생기는 틈을 노린 다나 어쩐다나···그다지 미덥지는 않지만 말이야." "틈이라···" 일행들이 심각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그들 사이에 엘뤼엔의 모습이 있는지 살피고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리 찾아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부상이 완치되지 않은 걸까? ==================================================== 에헤헤~ 너무 늦어서 죄송해요.ㅠ.ㅠ;;; 하지만, 절대 놀아서 늦은것은 아니었어요;; 마감이라고 죽어라 분량 채우기에 급급해진 데다, 써지는 것도 그닫 마음에 들지 않아 자꾸 고치다 보니 늦었습니다;;;<-그래도 여전히 마음에 안 드는군요;; 일단 지금 한 편 올리고 이따 오후나 저녁 때 나머지 편 또 올릴게요^^;;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ㅠ.ㅠ;; [정령왕 엘퀴네스] 9-9. 끝과 시작.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하긴, 나았으면 벌써 나를 찾아왔겠지.' 그나마 각성의 순간 때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기대가 완전히 사라지자 마음속이 허탈해지는 기분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희생될 신에서 그가 제외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실날같은 희망이 생겨났다. 원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카노스는 왜 안 보이는 거지? 이번 일에 빠질 리 없다고 생각했는데.' 듣기로 마 속성을 부여받은 신들은 다른 상급신들에 비해 꽤 능력이 강한 편인데다 그 중에서도 마신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그런 그가 이번 일에 빠지려 한다면 다른 신들이 가만히 두고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엘뤼엔이야 부상 중이니 예외라 치자.) 그런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는지, 나는 곧 등 뒤편에서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이, 엘뤼엔의 아들~ 누굴 그렇게 찾아?" "카노스!" "세상에! 마, 마신님?" 당연히 신들과 함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어느 샌가 우리 앞에 나타나 여우 만만한 표정으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기척도 없는 등장에 놀란 우리가 입을 뻐끔거리자, 그는 쉿-하고 한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더니 이내 아스를 발견하고 환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야~이게 누구야? 그 쪼끄만 황금알이 벌써 이런 청년으로 자라셨나? 기대대로 아주 예쁜 붉은 색이로군. 역대의 마왕 중에서 이와 같은 색을 본 적이 없지. 넌 아마 마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왕이 될 거다." "마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다시없을 영광입니다." 자신의 신을 만났다는 감격 때문인지 아스는 얼굴을 붉히며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카노스 같은 신에게서 어떻게 저런 정상적인 아이가 나왔는지 참으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었다. 잠시 후 카노스는 아스의 옆에서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데르온을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엥? 데르온? 넌 아직도 살아있었냐?" "크흑! 어, 어째서 그런 말씀을?" "아니, 난 또···알 키운답시고 피 죄다 쏟아 부어서 출혈 과다로 진즉에 사망했을 줄 알았지. 그런 무식함 때문에 내가 널 예뻐한 거였잖아. 냐하하하~" "우어어어! 너무하세요오오~~" 데르온은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지만, 언젠가 알을 부화시킨답시고 온 방에 피 칠을 해놨던 그의 모습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나로선 카노스의 예상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때 내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라피스가 그 대신 피를 주지 않았다면 데르온은 정말로 출혈 과다로 사망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아스 또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맞는 말에 억울해 할 필요 없어, 부하." "헉! 아스님 마저!" "하지만 부하의 피론 나를 부화시키기에 택도 없었는 걸. 그떄 은인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부하는 피를 주입하는 중간에 죽었을 지도 몰라." "그, 그거야···으으음, 흑흑흑, 그래요오~ 전 아무 쓸모없는 마족이에요오···" 라피스의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선 할 말이 없었는지, 데르온은 꾸물꾸물 말을 삼키며 우울하게 한 구석으로 찌그러졌다. 순식간에 한 마족을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도 아스는 아무렇지 않은 얼굵로 카노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위대하신 마신께선 어찌하여 다른 신들과 함께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따로 행차하셨습니싸?" "아, 그건 말이지~ 저런 유치찬란한 빛 무리 속에서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거든. 조용히 나타나도 될 걸 굳이 화려하게 등장해야겠단 속셈을 모르겠단 말이야. 저런 걸 보고 지구에서는 '쇼(show)를 한다'고 한다며? 오늘 본 광경 때문에 불신자가 늘어날 걸 생각하면 눈에서 피눈물이···크흑···"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가 냉큼 끼어들어 한마디 거들었다. "과연 그렇군. 저런 걸 보면 나라도 신을 믿을 수 없을 거야. 유치해서 어디 봐줄 수가 있어야지, 원." "오오! 말이 통하는 군! 역시 이래서 드래곤들이 똑똑하다니까." "훗, 당연한 소리를."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에요!엘뤼엔···아니, 아버지는요? 부상은? 다친 상처는 치료 되었나요?"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카노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서였는지 몰라도 그는 장난하듯 말을 끌거나 돌리는 기색 없이 순순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글쎄, 말도 마. 치료신은 물론, 온갖 치유가 가능한 신이란 신은 죄다 소집해서 난리를 피웠다고. 그 덕에 간신히 위기는 넘긴 상태야. 아직 몸을 움직일 수는 없겠지만." "저, 정말이에요? 그럼 이제 회복할 수 있는 건가요?" "당분간 요양기간을 가져야겠지만, 곧 완쾌할거야. 그녀석이 이렇게 이쁜 아들을 두고 먼저 갈 리가 있나.핫핫핫!" "하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저절로 주저앉으려는 것을, 먼저 눈치 챈 라피스가 잡아주는 바람에 버틸 수 있었다. 너무 안심이 되면 몸에 기운이 빠진다더니 바로 내가 그런 상황이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몸에 열리라도 나는 듯이 후들거렸지만, 마음만큼은 날아갈듯이 가벼웠다. 학교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문제를 풀게 하려고 마구잡이로 애들 번호를 불렀을 때도 이렇게까지 조마조마 하지는 않았다. 아마 카노스가 즉시 대답하지 않고 장난을 쳤다면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기절해버리지 않았을까? "어이, 괜찮아? 얼굴이 붉은데." "아아··· 괜찮아요. 안심해서 그런 거니까. 그런데 이제부터 뭘 하는 거죠?" "일단 날이 밝으면 신들이 힘을 모아 봉진 진(鎭)을 펼칠 거야. 놈이 결계를 해제하고 나오는 순간 아주 잠깐 힘을 못 쓰도록 붙잡을 수 있을걸. 그전에 먼저 밝혀둘게 있는데···이사나라고 했나? 어쩌면 황궁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어?" "네에? 통···째로?" 제국의 자존심이나 마찬가지인 황성이 고스란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말에 이사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레 카노스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응수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걸? 이건 어디까지나 예상이지만, 놈이 소멸하게 되면 주위에 적지 않은 파장이 미칠 것 같거든. 아마 그 부근은 처음에 뭐가 세워져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초토화 될 거야. 하지만 걱정 마.일이 잘 마무리 된다면 신들이 알아서 보상해줄 테니." "보, 보상이오?" "그래. 보통 인간이라면 어림도 없지만, 넌 자그만치 정령왕의 계약자잖냐. 게다가 그 정령왕이 어디 또 보통 정령왕이야? 신계에서 성질 더럽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엘뤼엔의 아들인데, 설마 간 크게 무시하지는 못할 거다. 아주 이참에 더 멋진 건물로 새로 지어달라고 해버려. 다이아몬드로 지어보는 건 어때?" "아하하하." 저런 말을 진지한 얼굴로 설명하는 신이 이 세상에 카노스 말고 또 어디 있을까.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이사나를 잠시 동정의 눈길로 바라본 뒤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왜 하필 날이 밝을 때지요?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건가요?" "응, 맞아. 아직 놈은 피를 전부 채우지 않았어. 몰랐는데 심장에서 미리 피를 짜냈더라도 마시는 시각이 따로 정해져 있는 모양이더라고. 아무튼 대충 계산해 보니까 꼬박 오늘 밤은 새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더군."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녀 근처에 있던 평평한 바위위에 걸터앉았다. 그 사이 공중에서 하강하던 신들도 완전히 지상에 착지했는지 하늘을 떠도는 빛 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덕분에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지자 카노스는 멀뚤히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들에게 한마디 더 덧붙였다. "일단 인간들은 자두지 그래? 밤을 완전히 새고 다음날 까지 강행군 하기는 무리일 거다. 뭐, 보아하니 밤을 샐 체력도 없는 것 같지만." "아, 그러고 보니 전쟁 중에 와서 다들 피곤하겠군. 시벨, 마법으로 간단한 잠자리 좀 마련해주겠어?" "응, 알았어. 이사나와 알리사의 자리만 만들면 되는 거지?" 그 말에 두 사람은 무척 서운한 표정을 지었지만, 체력적인 한계는 어쩔 수 없었는지 순순히 시벨이 만든 텐트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카노스에게 희생되는 신이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아니, 묻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엘뤼엔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해 버린 내가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사실은 무척 염치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트로웰은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는 데." 카노스가 물은 것은 알리사와 이사나, 두 사람이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난 이후였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질문을 건네는 그에게 나는 오기 전에 있었던 대략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듣던 그는 마지막에 트로웰이 역소환 되었다는 말을 듣고선 재미있다는 듯 껄껄거리며 웃기까지 했다. "이야~ 악신이 대단하긴 대단한 가 본데? 겨우 혜안을 열었다는 것만으로 역소환 될 정도라니. 트로웰도 어지간히 억울했겠군." "웃을 일이 아니에요. 놈이 그만큼 강하다는 뜻이라구요. 그 썩을 놈. 도망치기 전에 다리 한쪽도 마저 잘라냈어야 하는 건데. 트로웰이 말리지만 않았어도···" "헤에~? 어째 묘하게 과격해 진 것 같네? 오옷! 드디어 개과천선 한 거야?" 누가 마신 아니랄까봐 초롱초롱한 눈으로 묻는 것이, 일행들에겐 나쁜 일이 그에겐 오히려 좋게 보여 진듯 했다.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뜻이 이렇게도 변질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동하며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요? 놈 때문에 벌써 내 가족 중에서 둘이나 다쳤다구요!" "아니,아니, 정확히는 셋이지. 본인은 왜 빼먹어?" "나요? 나야 뭐, 놀란 것 외에는 별로···" "쯧쯧. 아직 뭘 모르는 군. 아마 이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게 바로 너일걸?" "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나에게 그는 곧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달했다. "태어날 시기를 놓치고 엉뚱한 차원에서 해매다 왔잖아? 그게 저 악신 놈 짓이라는 것이 밝혀졌거든." "!!" 잠깐 동안 내가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지금이야 악신이 되기 직전이라지만, 그때만 해도 놈은 평범한 마왕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무슨 구로 정령왕의 탄생을 조작할 수 있단 말인가? 설마 날 놀리는 건가 싶어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니 카노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마왕쯤 되면 다른 차원으로 공간이동을 할 수 있거든. 그 당시에 명계로 건너가서 너의 탄생을 주관하고 있던 담당자에게 최면을 걸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거고." "···마, 말도 안 돼. 차원이동이오? 정령왕은 못하는 걸 마왕이 할 수 있단 말이에요?" "그야 정령왕은 이곳 아크아돈을 떠나면 안 되니까 능력이 없는 거고. 마왕은 아니잖아? 아무튼 뒤통수치는 데는 타고난 놈이야. 설마 가뭄을 이용해서 재물을 끌어 모을 줄 누가 알았겠어?" "······" 물이 없어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동안, 놈은 천천히 재물들을 모아 악신이 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했다. 짧은 시간에 수많은 아이들이 죽었으나, 모두 가뭄 때문이라는 생각에 명계나 신계에서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저 갑자기 사라진 엘퀴네스의 행방을 찾기에 급급했을 뿐. 결국 녀석은 나를 방패삼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낸 것이다. 나 역시 피해자의 입장이었지만, 왠지 이 모든 일에 내가 조력자로 가담해 버린 꼴 같아 기분이 무척 더러워지기 시작했다. 그것도 모자라 생애 첫 유희까지 이렇게 꼬이게 만들다니! 하늘이 맺어준 악연이 있다면 바로 나와 악신의 사이를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때 그냥 목을 잘라버릴걸." "헉, 에, 엘님?" "아, 미안. 그냥 혼잣말이었어요, 데르온. 아무튼 놈에게 멋지게 한방 먹었는데요? 진작 만나서 없애버리지 못한 게 한이 될 정도군요." "킥킥. 신계의 모든 이들이 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걸? 아, 그리고 이번 일에 희생될 녀석 말인데-" "!!" 설마 그가 먼저 그에 대한 말을 꺼낼 줄 몰랐기에 나는 무척 신장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카노스는 지극히 평안한 어조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미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명계의 상급신으로 결정 되었어. 가장 강력한 후보인 엘뤼엔을 물리치고 이룩한 최대의 쾌거였지. 정말 대단했다니까." "···쾌거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뭐, 어때. 어차피 둘 다 서로 자원한 상태였는걸. 도중에 엘뤼엔의 상처가 회복될 기미가 보였기 때문에 그쪽으로 넘어가게 된 거거든." "자원을 해요? 꽤나 희생정신이 강한 신이군요." 엘뤼엔이야 어차피 소멸이 다가온 상태였기에 자포자기로 지원한 거겠지만, 다른 쪽의 신은 무슨 이유로 하나뿐인 목숨을 포기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카노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다거 볼 수도 있지. 덕분에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되어서 신계에선 꽤 만족스러워 하는 눈치야. 사실 그가 아니었다면 상처가 낫든 말든 엘뤼엔으로 지목되었을 걸? 그 녀석이 제멋대로 사고를 쳐서 단단히 찍혀있었거든." "으음. 그럼 난 그 신한테 고마워해야 하는 거군요. 한번 만나볼 수 있을까요?" "그야 어렵지 않지. 그렇지 않아도 그 역시 너를 보고 싶어 하니까." "네? ···나를?" 만나본적도 없는 신이 왜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말인가? 어리둥절하게 묻는 내게 왠지 씁쓸한 표정이 된 카노스가 새로운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그는 아직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만나보면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난 신계에 친분이 있는 자가 별로···어? 지금 뭐라고 했어요? 신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요?" 갑자기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내 생각이 틀리길 바라면서 급히 카노스의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은 정혀 엉뚜한 방향에서 흘러나왔다. 마치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낯익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 편에서 들려왔던 것이다. "신이 된 건 정확히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았지. 상급신이라고 해서 그리 좋은 건 없던데? 신계로 입성하자마자 일거리가 얼마나 쏟아지던지. 별로 재미는 없더군." "!!" 놀란 나는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언제부터 서 있던 건지, 검은색 머리카락을 발끝 까지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지적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차가운 듯 냉정한 그녀의 분위기는, 주변에 짙게 깔린 밤공기와 어울려 마치 저승에서 내려온 검은 사신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비록 머리색은 달랐지만, 그 모습이 내가 알고 있던 누군가와 무척이나 흡사하다는 것을 순간, 나는 잡고 있던 카노스의 팔을 놓으며 힘없이 내 기억에 있던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미네르바···" ================================================== 사실...미네르바가 뽑힌건,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답니다. 그런데 오히려 리플을 보고'오!이녀석을 쓰면 되겠군!' 하고 결정을..<-청개구리라니까요... 자아~어쨌든 시작!!<-퍽! [정령왕 엘퀴네스] 9-10. 끝과 시작Ⅱ.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눈앞에 나타난 존재는 바로 얼마 전에 정령계에서 소멸했던 정령왕 미네르바였다. 시벨리우스도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는지, 귀신이라도 본 마냥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설마 소멸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그가 신이, 그것도 악신을 소멸시키기 위해 희생할 신으로 뽑혀서 나타날 줄이야! 하고 싶은 말을 정말 산더미 같이 많았지만 정작 입을 벌려도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멍하니 서서 내 앞에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하고많은 신들을 놔두고 어째서 네가 자원을 했냐고.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듣는 것이 두려워서 나는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왠지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한참이나 말없이 굳어있자, 미네르바는 피식 미소 지으며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비취는 몸의 굴곡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게 여성의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헙게 어울려 새삼 그가 '여신이 되었구나'라고 감탄하기가 어색할 정도였다. 그, 아니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아. 널 위해서 희생한다고 생각하는 거구나." "···그럼···아니라는 거야?" 입 안이 바짝 마르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메마른 어조로 물었다. 그러자 미네르바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음, 완전히 아니라곤 할 수 없지. 하지만 오직 그것만을 위해서도 아니야. 그저 내가 하려는 일과 뜻이 맞아서 겸사 겸사랄까?" "미네르바···그건···" "아니지. 이제 나는 미네르바가 아니야. 신이 되면서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았거든. 망자의 신 '페르데스'. 일주일 전부터 내 것이 된 이름이야." "페르데스?""응, 명계 소속의 상급신이지. 나는 그 중에서도 망각의 물을 관리하고 있어." 그래봤자 어차피 잠시 후엔 버리게 될 직분이지만 말이야. 라고 말하며 미네르바, 아니 페르데스는 멎쩍은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굳어있기만 하자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더니 곧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엘. 난 원래 신이 될 생각이 없었어. 남들 위에 군림하는 것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것에도 지쳤지. 가능하면 오래도록 아무생각 없이, 그 삶 자체를 즐길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왜···" "왜 신이 되었냐고 묻고 싶겠지? 그건, 소멸하기 직전에 보았던 너희들 표정 때문이야. 인간이 되면 너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거든." "그런 이유로?·" "어쩔 수 없잖아. 그 순간에는 그게 정말 안타까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이라고 그 마음이 달라진 건 아니야. 다만 중요하게 여기는 순위를 좀 더 나중에 둔 것뿐이지." "무슨 소리야? 그럼 지금 첫 번째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번 일에 희생되는 일이라는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난 너희들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오래 살았으면 하거든." "미네···아니, 페르데스!" "흥분하지마, 엘.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저마다 달라. 엘뤼엔이 옆에 남아서 지키는 애정이라면, 나는 그 반대가 되는 것뿐이야."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지금 당장 그만 둬!"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어. 게다가 내가 아니면 엘뤼엔이 죽게 될 거야. 그건 네가 바라는 일이 아니잖아?" "!!" 맞는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결과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나에게는 형제만큼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페르데스를 바라보며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페르데스, 너···" "미안하다, 엘. 난 너와 다른 정령왕들이 날 이해해줄 거라 믿어. 사실 이건 나 자신을 위한 일이야. 그렇지 않다면 굳이 네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까지 이런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전혀 안타까워할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어." 그러자 카노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말을 이었다. "그건 그의 말이 맞아. 페르데스는 이번 일에 스스로 자원 했으니,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은 다 자신이 선택한 몫이다. 그렇다면 다른 이들은 지켜봐주는 것이 최선이야." "하지만···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안 됐다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신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게 아니거든." "······" 간단명료한 그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페르데스의 얼굴에 묘한 안도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혹시라도 내가 계속 매달린다면 무척 곤란했을 거라는 듯이. 실제로 나는 더 이상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론 그 대상이 엘뤼엔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추악한 이기심이 함께 솟아올랐던 것이다. 그건 나 스스로도 무척이나 당혹스러운 감정임과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페르데스가 소중한 건 사실이었지만, 그것이 엘뤼엔과 같은 선이 될 수는 없었나 보다. 그러나 잠시 후 미네르바가 소멸했을 때 흐느꼈던 트로웰의 모습이 떠오르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기분이 착잡해져서 씁쓸한 표정으로 한마디 중얼거렸다. "지금 이 자리에 트로웰이 있었다면 울었을 것 같아." "···엘···" "이런 말 내가 대신하긴 뭣하지만, 네가 소멸했을 때 트로웰···울었었어. 꽤 많이. 그에게 이런 면이 있었구나 싶었지. 아마 널 굉장히 좋아했었던 것 같아." "···그러는 넌 이제 울지 않는 구나." 그건 그랬다. 미네르바가 소멸했을 때만 해도 가장 먼저 눈물을 쏟던 내가, 그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서 울지 않는다는 사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 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울고 있을 때보다 더 서럽고 마음이 괴로웠다. 아마도 이것은 울지 않는 게 아니라··· "울지 못한다는 말이 더 맞을 거야. 난 널 위해서 울어줄 자격이 없거든. 사실···엘뤼엔이 희생되지 않는 다는 말에 누구보다 안심한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그런 주제에 어떻게 울겠어? 솔직히 난 지금 너에게 미안한 감정밖에 없어." "엘···" "머릿송이 온통 뒤죽박죽이야. 다시 너를 만나게 되면 그땐 반가운 기분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이프리트가 엘뤼엔을 만났던 그때처럼. 하지만 역시 세상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지는 않는 구나." "그런가. 나는 널 다시 만날 수 있어서 꽤 반가운데. 트로웰과 이프리트가 이 자리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 유감이지만." 그렇게 말하며 차분하게 웃는 페르데스는 이미 어떠한 걸득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그는 신이 된지 몇 일만에 죽는 것이 억울하지도 않느냐는 내 말에 대답했다. "신의 자리엔 미련이 없어. 말했잖아. 별로 재미없다고. 어쩌면 그떄 충동적으로 신을 선택한 것이, 바로 이번 일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농담이라도 그런 소린 하지 마. 꼭 죽기 위해 태어났다는 말처럼 들리잖아." "후후. 그런 건 전부 받아들이는 의미의 차이일 뿐이야. 난 오히려 좋은데? 이런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하아. 너도 은근히 고집이 세구나. 좋아, 네 뜻대로 해. 더 이상 말리지는 않겠어. 하지만 다른 정령왕들도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건 내가 알아서 할께. 너한텐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서 많이 미안하다."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솔직히 네가 엘뤼엔을 대신한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쉽게 포기하진 않았을 거야. 이렇게 보여도 난 굉장히 이기적인 녀석이라, 지금 내 입장만을 생각하고 너를 외면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미워해도 괜찮아. 아니, 저주해도 돼." 나로선 무척 각오하고 한 말이었는데, 그에 대한 페르데스의 반응은 내 예상과 영 딴판이었다. 그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흐음~ 그렇다면 난 외면해줘서 고맙다고 대답해야 하나? 끝까지 매달렸으면 내가 더 곤란했을 테니. 나 때문에 자책하지 않아도 돼, 엘. 내가 바라서 하는 일이고, 넌 충분히 이기적이어도 되는 상황이니까." "······" "네 마름이 슬픈 건 '죽는다'는 사실을 두려운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야.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너도 언젠간 죽음이란 단어에 민감해 지지 않을 때가 올 거야. 그때는 지금의 내 마음도 이해할 수 있겠지. 영원에 가까운 삶을 사는 존재에게 '죽음'이란 정말 아무것도 아니거든. 가끔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처음부터 시작하고 싶어지니까." "···그럼 다른 신들은?" "그들은 아마 용기가 부족한 것이라 생각해. 맡은 엄무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책임의식도 커지지. 그것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는 거야.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가여워서. 말해두지만 엘, 죽음이 무서워서 피하는 신은 없어." 그렇게 말한 페르데스는 죽음을 택한 신이야 말로 신계의 일에 가장 무책임한 존재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욕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죽음이 무서운 신은 없다라···' 아무리 오래 산 사람도 막상 죽을 때가 되면 두려울 거라 생각했다. '아픔'이나 '고통'때문이 아니라,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 페르데스가 말한 '죽음'의 의미엔 그런 것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누군가를 잊는 일조차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신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사면 당연히 그 본인은 편안할 테지. 그가 괜찮다면 나 또한 얼마든지 괜찮아 질 것 같았다. 하지만 페르데스, 이건 알아? '네가 보고 싶어질 땐 어떻게 해야 하지?' * * * "누가···뭘 어떻게 했다고?" 엘뤼엔이 의식을 차린 것은 신계에 도착하고서도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그것이 자그마치 치료신 신 15명을 포함하여, 치유능력이 있는 모든 신들이란 신들은 죄다 소집해 놓고 치료를 시작한 끝에 이루어낸 쾌거였음을 알까. 하지만 엘뤼엔은 자신을 치료하느라 기진맥진해서 여기저기 널부러져 있는 신들은 본 척도 하지 않은 채(이런 것을 두고 배은망덕하다고 한다.), 소식을 가져온 천사만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 찔끔한 천사는 황급히 방금 전했던 이야기를 기계적으로 다시 읊기 시작했다. "앞으로 10시간 후에 악신의 각성이 있을 겁니다. 그에 대비하여 봉인진을 만들기 위해 20명의 상급신들이 중간계로 내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엘뤼엔님께서 의식을 잃고 계시는 동안에도 희생되는 신에 대한 의견은 계속 분분했으나, 결국 명계의 상급신인 페르데스님이 자원하심으로서 일단락되었습니다. 충분히 휴식을 취하여 몸을 회복시키는 일에만 전념하라는 카노스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흐응, 결국 천사표 하나가 나섰구만." 자신의 무사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음에도 엘뤼엔의 표정은 여전히 심드렁하기만 했다.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자신을 보는 천사의 시선을 느끼곤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이미 충분히 쉬었다. 그런데 명계의 상급신이라는 페르데스가 누구지? 그런 이름은 처음 듣는데?" "에, 저, 저기···이번에 새로 신의 운명을 받으신 영혼이십니다. 바로 이전대의 정령왕 미네르바라고···" "뭐? 미네르바?"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에 엘뤼엔은 금새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대의 미네르바라면, 그가 엘퀴네스였을 시절 함께 정령계에서 지냈던 바람의 정령왕이 틀림없었다. 그가 벌써 신이 되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이번 일에 스스로 희생하겠다고 자원할 줄은 더더룩 몰랐던 일이었다. "흐응, 1년도 안 되서 신의 삶을 포기하다니,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아, 하긴, 명계의 상급신이 되었다고 했지? 우중충한 놈들 얼굴을 영원히 보느니 인간이 되는게 더 나았겠군." 간단명료하게 결론은 지은 그는 즉시로 그 일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소멸에 대한 동정이라던가, 안타까움 따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덕분에 속으로 위로의 말을 잔뜩 준비하고 있던 천사는 허무하게 어깨를 늘어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엘뤼엔은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뭐 할 말 있나?" "에···에, 저기···괜찮으십니까?" "뭐가? 아아, 상처라면 조금 쑤시는 군." "아니, 그것 말고 말입니다. 이번에 희생되시는 명계의 페르데스님은 엘뤼엔님과 같은 시대의 정령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충격을 받으시지는 않으셨는지···" 상극신들이야 어차피 전부 과거엔 한가락 하는 정령왕이었다지만, 자신과 같은 시대를 지낸 정령왕에겐 조금 더 애착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같이 살아온 세월이 남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엘뤼엔에게는 그러한 보통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내가 왜? 자기가 좋아서 죽겠다는데 상관할 이유는 없지. 내 몸이 회복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이렇게 멀쩡한 상태라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양보해 줄 수 있는데?" "양···보 입니까?" "그럼 달리 다른 말이 있나? 그 녀석도 틀림없이 신계의 진실을 눈치 채고 미리 도망칠 길을 모색해 둔 걸 거다. 그러고 보니 놈이 부럽군. 쳇, 아들내미만 아니었어도." "신계의 진실이오?" 의아하게 바라보는 천사에게 엘뤼엔은 서슴없이 긍가 입을 딱 벌리게 만들 만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매일 하루같이 수 백 장의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의 시작이지. 자리를 굳혀 일거리가 늘어나기 전에 내빼야 나중에 후환이 없을 걸? 완전히 소멸하는 경우도 아니니, 그거 처리하지 않고 죽으면 인간이 되더라도 고스란히 업으로 쌓여서 안 좋은 인생을 살게 되거든." "저어···그럼 설마 신들께서 이번 일에 한사코 서로 안하시려고 한 이유가···" "나처럼 꼬박꼬박 서류를 처리한 놈들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되면 전부 업으로 짊어지게 되는데, 그거 다 풀려면 족히 몇 억년은 자갈밭을 뒹구는 삶을 살걸? 누가 그러고 싶겠어? 차라리 아예 소명멸 되고 말지." "그, 그럼 엘뤼엔님은···" "나야 당연히 성실한 업무를 해왔으니 죽어도 별 탈 없다. 그래서 놈들이 더 나한테 떠넘기려 한 거라고. 사실 아들내미만 아니었어도 솔깃한 일이긴 하다만." "······" 그랬다. 저래 봬도(?) 엘뤼엔은 꽤나 능력 있는 신이었고, 투덜투덜 하면서도 일처리에는 단 한 번도 지장을 준적이 없었다. 반면에 다른 신들은 탱자탱자 놀면서 적당히 처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악신을 처리하기 위해 희생되는 그 성스러운 작업이, 한순간에 신계를 탈출하기 위한 약삭빠른 신의 계략으로 변모되어 가는 과정을 보며 천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세계인 것이다. "하,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고 나시면 이제 다시는 못 만나시게 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역시 슬픈 일이···" "못 만난다고? 누가?" "에? 그, 그럼 다시 재회도 가능하다는 소리입니까?" 완전히 영혼의 성질리 바뀌어버리는 존재를 어떻게 다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놀란 표정으로 묻는 천사에게 엘뤼엔은 시큰둥한 어조로 답했다.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해서 지난 세월에 묻어버린 영혼의 향을 쉽게 지울 수 있는 건 아니다. 같은 차원에 있다면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물론 놈이야 날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하지만 그건···" "기억이 사라졌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던 관계로 되돌아 갈 수 있나? 그건 인간들도 안하는 생각이야. 넌 천사라는 녀석이 그런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는 거냐?" "죄, 죄송합니다." 엘뤼엔의 말투에 불쾌함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파악한 천사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곤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엘뤼엔은 지금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천사 덕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떠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알아보는 것으로 족하는 거야 나 같은 놈한테만 해당하는 거고···엘은 괜찮으려는지 모르겠군. 꿍꿍이야 어쨌든, 녀석으로선 처음 겪는 주변인의 '죽음'일 텐데···. 충격을 심하게 받으면 억눌러져 있던 본성이 나타날지도.'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은, 그만큼 엘의 마음이 견딜 수 없는 한계치에 부딪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경우 보통 인간이라면 미쳐버리게 되지만, 정령왕인 엘은 스스로의 본능에 의해 본래의 성격을 되살려 자신을 보호한다. 즉, 타인에 대한 감정을 누르고 엘퀴네스 특유의 독선적이고 냉정한 성격으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마음의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지키는 최대의 방어 자세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절하기 직전에 보았던 엘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엘뤼엔은 급히 몸을 추슬러 중간계로 내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항시 시련이 따르기 마련인 법! "너희들 뭐야···?" 그는 지금까지 바닥에서 데굴거리고 있었던 치료신들이 벌떡 일어나 자신을 가로막자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평소였으면 엘뤼엔의 살벌한 얼굴에 덜덜 떨었던 신들이 오늘만큼은 확고한 표정으로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엘뤼엔, 그대는 아직 환자이오. 부상이 다 회복된 것이 아니니 더 쉬어야 합니다." "무슨 헛소리야? 난 멀쩡해." "일시적인 치료의 효과 일 뿐. 무리를 하면 다시 악화 됩니다. 마신 카노스도 그대에게 절대적인 안정을 하라고 부탁하시고 가셨소. 앞으로 일주일간은 이곳에서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싫다면?" 삐딱하게 묻는 말에도 치료신들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사실 그들은 신계에서 무섭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마신 카노스로부터 직접 엘뤼엔의 치료를 부탁받은 입장이었다. 여기에서 순순히 그를 놓아주면 훗날 그 사실을 안 마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기에 이렇게 용기를 내고 있는 것이다. 엘뤼엔 역시 껄끄러운 상대임은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부상 때문인지 그 기세가 한결 누그러져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였다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엘뤼엔의 신력이 약해져있는 틈을 타 강제로 기절기키는 방법인 것이다. "우리들을 용서하시오, 엘뤼엔. 다 그대와 우리를 위한 일이오." "이봐, 너희들 무슨-!!" 퍼억! 뒷목에서 강한 충격이 오자 엘뤼엔은 힘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사실 지금 이렇게 일어나 있다는 것이 용할 정도로 그의 몸 상태는 그리 호전적이지 못했다. 그 스스로도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엘이 걱정되어서 한번 내려가 볼까 생각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꼴을 당하다니! '깨어나면 손봐줄 녀석들이 늘었군.' 점점 흐려져 가는 의식을 느끼며 엘뤼엔은 마음속으로 살포시 이를 갈았다. 그 순간 쓰러진 그를 다시 침대로 옮기던 치료신들의 팔에 우드득 소름이 돋아났지만 아무도 그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지옥의 급행열차는 그렇게 소리 없이 그들 곁에 다가오고 있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9-10. 끝과 시작Ⅱ.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전쟁 중에 갑자기 사라진 이사나 덕분에 황제의 측근들은 전투에서 대대적인 승리를 거두고서도 모두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은 저녁이 되기 전에 이사나로부터 그의 행방에 대한 자세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황제폐하와 일행들은 모두 무가 하시 답니다. 방금 수도에 도착해 계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가장 먼저 소실을 받은 이는 이사나의 오른팔을 자처한 리글레오였다. 그의 입에서 황제가 무사하다는 말이 나오자, 측근들은 그제 서야 마음을 놓으며 군사들을 향해 마음껏 승리의 축제를 벌이도록 허락했다. 그들은 이미 클모어로 내려오던 대공의 나머지 군사들을 깨끗하게 섬멸시킨 뒤였다. 지금 상태로라면 황성이 있는 수도까지 거침없는 진격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다행입니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얼마나 걱정을 했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쓰면 그 단시간에 갑자기 수도에 가실 수 있는 걸까요? 시벨님과 알리사님이 함께 가셨으니 염려는 되지 않았습니다만, 혹여나 황성의 군대와 부딪치시지는 않으실지 걱정되는 군요." "혹시 수도에 미리 올라가있던 부대와 합류하신 게 아닐까요? 그 쪽 상황이 긴급해지니 폐하를 뫼신것 같습니다만." "끄응. 하긴 겨우 3천명밖에 안 올라갔으니···" 이렇게 대성을 할 줄 알았으면 군대를 넉넉해게 배치해도 괜찮았을 터. 전력이 부족하단 생각에 수도를 치는 군사를 너무 적게 잡았던 것이 못내 염려가 되는 카웰 후작이었다. 잠시 후 그는 약간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다 폐하께서 본 실력을 너무 숨기신 탓이야. 상급 정령사이시면서 어찌 그 사실을 모른 척 하고 계실수가!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내게 끝까지 숨기시다니. 말씀은 안 드렸지만 정말 서운하더군." 그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전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군사들과 같이 전장의 한복판에 뛰어들어 열심히 싸우고 있던 이사나에게 갑자기 많은 적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하필 그때 황제의 측근들은 하나같이 그 주위에서 멀어져 있었고, 장거리 마법이 가능한 시벨과, 알리사, 정령사 페리스도 속속들이 밀려드는 적을 상대하느라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었다. 이사나의 검술이 수준급이라고는 하나 다수의 적을 한 번에 베어버릴 만큼 뛰어났던 것은 아니다. 뒤 늦게서야 황제가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은 친위대들이 서둘러 달려갔지만 이미 코앞에 닥친 적들은 사정없이 이사나에세 칼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다 끝났다, 라고 생각했던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황제의 주위에 갑자기 시퍼런 물길이 치솟더니, 무려 5마리나 되는 상급 정령 시큐엘이 나타나 주변의 적들을 갈가리 찢어버렸던 것이다. 설마 이사나가 물의 정령사였을 줄이야! 카웰 후작은 지금도 그때 일만 생각하면 긴장이 되어 손안에 땀이 맺혔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신만 빼고 모두가 다 알고 있던 일이 아닌가? 심지어 포로로 잡힌 카리브디스 공작마저 말이다. "하하. 일부러 숨기신 게 아니라 폐하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을 잊어버리고 계셨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 말하실 타이밍을 놓치신 것뿐이죠." "흥!페리스, 자네도 너무했어. 미리 알고 있었다면 내게 말해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알고 보니 친위대들 모두가 나에게 숨겼더군." "이런, 후작님.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걸 제가 알려드릴 순 없지요. 수도의 일이 걱정되어서 그러신 걸 제가 알려드릴 순 없지요. 수도의 일이 걱정되어서 그러신 거라면 너무 염려 마십시오. 그곳엔 엘님과 라피스님이 계시니까요." 정령사 페리스의 말에 후작은 점점 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단 두 사람의 힘으로 어찌 황성의 군대를 막아낸 단 말인가? 그러나 그가 막 그 점에 대해 따지려는 찰나 누군가의 낮은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황제의 편이 되기로 결정한 이후 이제껏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던 카리브디스 공작이었다. "라피스라면··· 그 붉은 머리에 적안을 가진 청년을 말하는 것인가?" "예, 맞습니다. 혹시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가 수도로 떠나시 전에 잠시 나에게 들렸었지. 겉보기의 행동은 가벼워도 실력은 굉장히 뛰어나더군. 내 블래스터의 봉인을 풀고, 내가 그것을 눈치 채지 목하도록 환각 마법을 걸었으니까." "!!" 그 말에 카웰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숨을 삼켰다. 일개 마법사가 소드 마스터의 눈을 피해 그에게 접근하여, 정령검의 봉인을 푸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게다가 환각 마법까지 걸다니! 라피스의 마법 실력을 그저 조금 출중한 정도라고 밖에 알지 못했던 후작으로선 두 눈이 휘둥그레질 내용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카터스 제국의 수석 마법사이자, 현재 자국의 황태자 라온휘젠을 따라 이번 전쟁에 남몰래 합류했던 마도사 세리엄 또한 흥분된 얼굴로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공작에게 환각 마법을 걸었다고?" "그렇다. 내 검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전투를 시작하고 나서였으니 한참이나 늦은 감이 있었지.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어." "그의 나이가 어떻게 되오? 서클은?" "나이는 아무리 많이 잡아도 20대 초반을 넘을 것 같지는 않더군. 서클은···잘 모르겠군. 그건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끄응. 언젠가 5서클 초입에 들어섰다고 들었던 것 같소." "5서클!" 후작의 대답을 들은 세리엄은 경악성을 터뜨리며 크게 전율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5서클에 들어섰다면 그건 범상치 않은 실력이었다. 장차 8서클까지 노릴 수 있는 어마어마한 잠재성을 지닌 천재인 것이다. 비록 평생 검에만 매진했기에, 다른 상식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카웰 후작으로선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내심 무시하고 있던 남자가 알고 보니 '천재'라는 결론이 내려지자, 후작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여동생인 에이프릴이 그와 헤어진 것이 관연 잘된 일인지 다시 심사숙고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자체를 부정하려는 듯, 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으음. 하,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를 믿을 수 없소. 출생부터 시작해서 어디 한 구석 신뢰가 가는 부분이 있어야지. 황제폐하께서 정체모를 녀석과 같이 다닌다는 것이 영···" "하긴, 그도 그렇군. 20대의 나이에 5서클이라면, 평민일지라도 이미 어느 정도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자일 것이오. 하지만 라피스란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군. 적발에 적안이라면 상당히 눈에 띄는 자였을 텐데, 이제껏 알려지지 않다니." "그와 항상 같이 다니는 엘이란 정령사도 마찬가지요. 고작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나이에 물의 상금 정령사라니. 게다가 그렇게 화려한 미모를 가지고서도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소이까? 폐하께서 그를 형제처럼 따르니 지금껏 묵인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인간인지조차 의심스러웠소." "인간이 아니라면?" "하긴, 블루엘프까지 있었으니, 그보다 특이한 종족이 아니라는 법도···" 대화가 점점 오묘한 곳으로 흐르자 페리스를 포함한 이사나의 친위대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저들이 의심하고 있는 존재가, 사실은 황제에게 있어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 의지가 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까. 더 이상 언제까지고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페리스는 드디어 오래도록 감추어왔던 진실을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 먼저 들어주십시오. 엘님과 라피스님은 후작님이나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정체가 수상하지도, 의심스러운 인물도 아닙니다." "그럼 페리스 자네는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는 소리인가?" "지금부터 천천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니, 더 자세한 상황은 폐하께 직접 들으셔야 할 겁니다." 페리스가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 주변에 있던 황제의 측근들은 모두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갖추었다. 잠시 후 모두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페리스는 심호흡을 한 뒤 처음 이사나가 황성에서 도망치던 일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시 황성을 벗어나는 중에 친위대의 대다수가 죽었습니다. 일단 산 속 깊이 들어가 숨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급하게 나온 터라 수중에 돈 한 푼 없었고, 있었다 하더라도 음식을 사러 마을로 내려갔다간 당장이라도 추적자들에게 꼬리가 밟힝 위기였지요. 부상자는 갈수록 늘어났고, 저희뿐만이 아니라 폐하께서도 며칠 동안 식사를 하시지 못해 기진맥진한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추적자에게 잡혔다면 우리 모두 그 자리에서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겁니다." "큭, 자네들의 노고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 줄 말이 없네. 정말 고생이 많았군." "아닙니다, 후작님. 이미 지난 일이니까요. 아무튼 그러한 와중에 폐하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고 사라지신 일이있었습니다. 늦은 시각인데다, 아직 사방에 추적자들의 위험이 있는지라 우리 모두 혼비백산 하여 폐하를 찾기 시작했죠. 엘님을 만난 건 바로 그런 중에서였습니다." "그때 만났다고?" 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후로부터의 자세한 일을 늘어놓았다. 엘을 수상하게 여긴 친위대가 그를 포박하여 끌고 간일부터 시작해서, 부상당해 쓰러져있던 기사를 엘이 치료한 일까지. 결코 순조롭지 못한 출발이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부상을 치료했다고? 그럼 신관이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정령사가 어찌 신관이 될 수 있단 말이지? 둘의 속성은 전혀 달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 텐데?" "공작님 말이 맞네. 그저 평범한 의관도 아닌 신관이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상식이야. 혹시 치료 포션을 썼던 건 아닌가?" "앗! 그러고 보니 이 몸이 처음 사막에 쓰러진 것을 발견했을 때, 치료한 사람이 바로 엘님이었소. 그때 그는 신관이냐는 본인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소이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라온휘젠 황자?" "이게 어떻게 된 건가. 그럼 그가 다루는 정령이 진짜 정령이 아니란 소리인가?"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늘어놓자 페리스와 친위대의 기사들은 모두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에 이들이 놀랄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물론 엘님은 물의 정령을 다루고 계시죠. 하지만 분명히 말해서 그분은 정령사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정령사가 아니라니? 그가 물의 상급 정령을 다루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그분은 정령사가 아니어도 정령을 다루실 수 있는 분이죠. 혹시 엘퀴네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거야 4대 정령왕의 이름중 하나가 아닌가. 갑자기 여기서 왜 그 이름이···" 거기까지 대답하던 후작은 문득 말을 멈추고 멍한 눈으로 페리스를 바라보았다. 주변이 유난히 조용해졌다고 느낀 것은 비단 그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카리브디스 공작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얼빠진 표정을 한 채 몸을 굳히고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면서도 확인 사살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엘이란 정령사···가 그 엘퀴네스라고 말하려는 건 아닐 테지?" 정령사가 아니면서도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나에 정통한 드래곤이나 정령들을 지배하는 정령왕 뿐이다. '엘'이란 이름도 그렇고, 흔치 않은 푸른 색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얼굴을 생각하면 그런 가능성을 아주 배재시킬 순 없었다. 긴장한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페리스는 약간 우쭐하는 느낌으로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엘님이 바로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님 이십니다." "허억!" "쿠, 쿨럭!" "뭐, 뭐라고?! 그게 정말인가?" 페리스는 본래부터 진지한 성격으로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후작은 놀란 표정으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그 예쁘장한 소년이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였을줄이야! 페리스에게 '그렇다'는 대답을 몇 번이고 확인 한 그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넋이 나간 사람마냥 중얼거렸다. "그, 그렇다면 황제폐하께서는···" "정령왕의 계약자시지요. 참고로 역대 정령왕의 소환자들 중에서,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은 이사나님이 처음이십니다. 또한 엘퀴네스는 치료신의 고위사제보다 완벽한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지요." "허, 허어···어떻게 이런 일이···" "맙소사···" 충격으로 다리에 기운이 빠진 몇몇 사람들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그 중에는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인 라온휘젠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언젠가 엘에게 직접 찾아가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물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엘은 어색하게 웃으며 언젠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로 대답을 회피했다. 자신의 정체가 알려지면 이사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는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사나가 정령왕의 계약자라서가 아닌, 그 스스로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까지 계약자의 입장을 배려하는 정령왕이 또 있을까. 그는 갑자기 이사나가 미치도록 부러워졌다. 타고난 카리스마는 물론, 실력 있고 믿음직한 신하들과 동료들,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까지! 그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아닌가! 사실 그는 이제껏 이사나를 망해버린 제국의황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와 대공을 몰아내고 재기에 성공한다 해도, 이미 탄탄한 대로를 걷고 있는 카터스의 황실에는 비견할 수 없을 것이라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믿음이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이사나는 저 멀리 바라보기조차 힘든 위치에 올라서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과연 내가 따라잡을 수 있을까?' 라온휘젠은 긴장으로 축축이 젖은 주먹을 바라보며 슬며시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이사나는 단순히 한 여인을 두고 경쟁하는 사이만이 아닌, 그의 전부를 걸고 맞서나갈 인생의 라이벌로 그 의미가 변질 되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이렇게까지 질투가 나고 뛰어 넘고 싶은 상대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 무엇 하나 그에게서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카터스의 수석 마법사 세리엄은 그 모습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자극을 받으신 게로군. 좋은 현상이야, 암 그렇고 말고.'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교육받는 과목마다 발군의 실력을 드러내어 스승들로부터 극찬을 받고 자한 태자였다. 그러나 항시 모든 것을 다 쉽게 배워버린 것이 문제였는지, 태자는 자랄수록 배움에 대한 열의가 줄어들어, 주변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의 태자라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싶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경쟁심을 느꼈으니, 이젠 그를 뛰어넘기 위해서라도 분발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리엄이 처음 본 순간 예상했던 것처럼, 이사나와 라온 황태자는 평생을 두고 겨룰 멋진 라이벌이 될 것이었다. 어처구니없는 가출소동에서 이런 값진 결과를 얻어내리라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을까. 그는 이것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내정되어 있던 운명의 안배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이사나 황제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로군. 정령왕의 계약자에 충성심 깊은 수하들과 좋은 동료들까지. 게다가 인품 또한 훌륭하니, 꼭 태자전하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부러워 할 만 한 사람이다. 솔트레테 제국은 앞으로 더욱 강해지겠구나.'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세리엄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있던 이사나의 측근들도 모두 한결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새삼 자신의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다지고 있었다. 그 사이 드디어 진정이 된 카웰 후작이 감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정말 남을 놀라게 하는데 타고 난 실력이 있는 것 같군. 설마 이렇게까지 감쪽같이 입을 다물고 계셨을 줄이야! 그가 수도 쪽의 군대를 적게 달라 한 이유를 이제야 알았네. 정령왕이라면 일만의 적이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을 테지." "네, 그렇습니다. 게다가 라피스님도 함께 하시니, 오히려 이쪽에서 보낸 군사는 눈속임용에 불과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군요." "으음. 그러고 보니 라피스란 마법사 청년이 극구 둘이서만 가겠다고 했었지. 그는 엘님이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가?" "예, 당연하죠. 제가 알기론 그 분도 엘님의 계약자십니다만." "···뭐? 하지만 그는 마법사···게다가 두 사람이 동시에 정령왕과 계약된 사례는···" "음, 그렇긴 하지만 드래곤은 언제나 예외이지 않겠습니까? 아마 그에 관한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 그 순간 주위는 또다시 깊은 침묵의 늪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사람들이 갑자기 조용해진 이유를 알면서도 페리스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어라? 다들 왜 그러십니까? 제 말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다, 다시 한 번 말해주게. 그···가···드, 드래곤이라고?" 후작은 정녕 이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하나뿐인 여동생의 일과 부딪혀, 대놓고 라피스에게 힐책어린 시선을 보낸 것이 몇 번이었던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진정 죽은 목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모르는 페리스는 명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레드 드래곤이라고 들었습니다. 아마 이번에 황제폐하와 동료분들을 수도로 불러내신 분도 그분이실 것 같군요. 이렇게 멀리 떨어진 상대를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마법이라면, 드래곤이 아니면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건 자네 말이 맞네. 세상에! 블루 엘프도 모자라 이번엔 드래곤이라니! 내 평생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한 존재를 이번에 다 만나게 되는 군! 이참에 우리도 수도로 올라가는 것은 어떻소? 꼭 그 분을 직접 뵙고 싶은데." 마법사로서 드래곤을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을까! 세리엄은 흥분된 얼굴로 떠들었지만, 그럴수록 후작의 얼굴은 점점 더 칙칙하게 가라앉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카리브디스 공작은 쯧쯧 혀를 차며 어느새 어둑어둑 하게 저물어버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처음 이사나를 따르기로 결정했을 때만 해도, 그는 마음속에 많은 망설임을 남겨둔 상태였다. 자신이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 것이 맞는지, 스스로의 눈을 의심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드래곤과 정령왕이 보호하는 존재라면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겠는가!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은 벅찬 희열로 들떠 있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9-10. 끝과 시작Ⅱ.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지상에 도착해 있던 신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부산그러워지기 시작했다. 페르데스 역시 그들과 함께 이것저것 준비를 하는 듯 했는데, 한참동안이나 저들끼리 의견을 나누던 그들은 곧 천천히 공중으로 부유하더니, 악신이 들어가 있는 황성 전체를 둥글게 감싸는 형식으로 서로의 자리를 배치했다. 내가 그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자 아직 그들과 합류하지 않은 카노스가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봉인진을 설치하려는 거야. 지금부터 미리 주문을 외워둬야 악신이 나오는 순간 몸을 묶을 수 있거든." "각성이 다가온 거군요." "맞아. 이제 곧 놈이 희생된 재물의 마지막 잔을 비울 때다. 사실 신계의 신들이 총 출동 한다면 좀 더 버틸 수 이겠지만, 아쉽게도 모두가 자리를 비울수는 없는 상황이니까. 뭐, 우리들만으로도 충분할 거라 생각하지만. 일단 정령왕들의 도움이 필요할 듯 해." "우리의?" "여차 싶을 땐 놈을 결박시키는 것을 도와줘. 이 세계의 자연을 움직일 수 있는 너희들이라면 놈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고정하는데 큰 힘이 될 거다."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미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프리트야 부르면 될 테지만, 트로웰은 어찌합니까? 역소환 된 상태니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을 것 같습니다만." "음. 그건 그래. 게다가 이번에 희생되는 신이 누군지 알고 나면 충격을 많이 받을 텐데, 차라리 오지 않는것이 좋을 지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전력의 차가 상당할 텐데요." "그래도 난 트로웰이 괴로워하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걸." 이미 예전에 미네르바가 소멸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슬퍼한 트로웰에게 똑같은 경험을 되풀이 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러자 그 순간 명랑한 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응? 내가 뭘 괴로워해?" "!!" "트로웰!" 이제 막 정령계에서 내려 온 건지, 트로웰은 이전의 청년의 모습을 버리고 다시 원래의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예고치 못한 그의 등장에 나와 미네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어, 언제 온 거야? 몸은 괜찮아?" "기척도 없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완전히 회복하고 돌아오시는 겁니까?" "응, 보시다 시피. 후후, 그런데 뭘 그렇게 놀래? 내 얘기가 나온 것 같은데, 혹시 나 없는 사이에 험담이라도 한 거야?" "아,아니. 그게 아니라···" "쿡쿡, 농담이야, 농담. 흐음, 그 사이에 벌써 신들이 온 건가? 악신의 각성이 가까워지긴 가까워졌군. 다들 표정이 비장한데?" 우리의 반응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트로웰은 멀리서 봉인진을 펼치기 위해 공중전(?)을 펼치고 있는 신들을 알아보곤 호기신어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그에게 근처에 있던 카노스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여어~ 역소환 해본 기분이 어때, 트로웰? 듣던 만큼 짜릿한가?" "응? 뭐야, 카노스. 당신은 왜 여기에 있어? 저들과 함께 봉인진을 설치해야 하지 않아?" "안 그래도 이제 슬슬 가보려던 참이었어. 에휴. 땡땡이 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그랬다간 가만히 있지 않겠지? 아~ 이래서 인기인은 피곤하다니까. 냐하하." 카노스의 주책 맞은 말에 나와 미네의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졌지만 트로웰은 이미 면역이 되었다는 듯이 빙긋 미소 짓기만 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오히려 잘 해보라는 듯이 카노스에게 격려의 말까지 건네었다. "저들 20명을 합쳐도 마신 하나가 합류한 것만 못할 테지. 활약을 기대하고 있겠어, 카노스. 부디 고향땅을 잘 지켜달라고." "고향땅이라. 듣고 보니 그렇군. 모든 상급신들에게 이곳은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곳이지." "그래, 그래. 그러니까 성심성의껏 임해줬으면 좋겠어. 참, 미네르바···아니, 이젠 이름이 바뀌었겠군. 아무튼 그는 어디에 있지? 이번에 희생되는 상급신 말이야." "!!!" 그의 말에 놀란 것은 나와 미네만이 아니었다. 카노스 또한 그가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목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무척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의 침묵 후,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난처한 어조로 물었다. "···알고 있었군?" "미래를 보는 것이 내 특기니까. 사실 이걸 확인하느라 무리하는 바람에 역소환이 된 것이었거든." "!!" 미네르바가 소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트로웰의 표정은 이전에 비해 그리 큰 변화가 없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을 수 없다는 걸까? 아니면 이미 정령계에서 쉬는 동안 혼자서 슬퍼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조마조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노스는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다른 신들과 합류해있던 페르데스를 부르려는 것이다. "쯧쯧. 알만하군. 어이, 페르데스!트로웰이 널 부르는데?" 그러자 멀리서도 용케 카노스의 목소리를 들은 페르데스가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보았다.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는 트로웰을 발견한 그는 옆에 있던 신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서둘러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정확히는 날아왔다는 표현이 맞지만 말이다.) "트로웰! 어떻게 된 거야? 역소횐이 되었다고 들었느데···" "이런, 이런. 그런 창피한 기억은 잊어달라고. 그보다 처음 만나자 하는 말이 겨우 그거야? 반갑다거나, 오랜만이라거나, 잘 지냈냐거나 하는 인사치례도 없다니 너무한걸." "후후. 지금 보니 잘 지내는 것 같은걸. 어쨌든 이렇게 만나게 되니 다행이다. 널 못 보고 가게 되는 줄 알고 무척 서운했었거든." 왠지 안심한 듯한 페리데스의 모습에 트로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으로 빛나는 그의 눈은 페르데스의 전신을 샅샅이 흩어 내리고 있었다. "여신이 됐네? 머리카락도 검어지고. 전체적으로 명계의 기운이 짙게 드러나 있는 걸? 아아, 알았다. 명계의 신이 된 거구나?" "맞아. 망자의 신 페르데스라고 하지. 바람의 정령왕은 대부분 명계의 신이 되는 경우가 많다더군." "잘 어울려. 이 모습을 보는 게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니 아쉬워 지는 걸. 뭐, 미네···아니 페르데스라고 했지? 너라면 인간이 되도 분명히 멋질 테지만." 능청스럽게 말을 건네는 트로웰의 모습에선 이별에 대한 아쉬움만 남아있을 뿐, 이전처럼 괴로워하거나 슬픔을 억지로 참는 듯한 기색은 없었다. 그래서인지 페르데스도 날 대할 때보다는 한결 편한 분위기로 대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다. 실은 나는 너도 엘처럼 이번 일에 결사반대 할 줄 알았어." "하하. 반대한다고 들을 네가 아니지. 넌 네가 하겠다고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해내고 말잖아. 기억 안나? 4천 년 전에도 모두가 반대한 일을 꿋꿋하게 해냈었잖아." 그 말에 페르데스는 그떄의 일을 회상하듯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 엘의 말처럼 난 고집이 센 모양이야. 설마 그래서 안 말리는 거야? 어차피 안 통할 것이란 걸 알아서?" "아니, 네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을 뿐이야. 네가 어디로 가든, 누가 되는 난 상관없어. 말했잖아. 내가 너를 기억할 거라고." "!!" 그 말에 페르데스는 무척 놀란 얼굴을 했다. 트로웰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디에 있든 나는 반드시 널 찾아낼 거야. 네가 날 기억하지 않아도 괜찮고, 끝까지 못 알아봐도 상관없어. 수명이 짧아서 금방 죽어도, 나는 다음 대의 네 환생을 찾아낼 거야. 과거의 인연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버리면 그만이거든." "트로웰···" "괜찮아. 그 작업은 그렇게 외롭지도, 힘들지도 않을 거야. 어쩌면 소멸하는 때까지 못 찾을 수도 있겠지. 네가 아크아돈에서 태어나게 될 거란 보장은 없으니까. 그렇담 나중에 신이 되어서 찾으면 그만이야. 어때? 간단하지?" "왜 그렇게까지···" 곤혹스러운 얼굴로 묻는 페르데스를 트로웰은 정말 모르겠냐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널 좋아하니까." "!!" "널 좋아했어, 페르데스. 아니, 지금도 좋아해. 나름대로 많이 표현한다고 했느데, 넌 끝까지 모르더군. 그러고 보면 너도 참 많이 둔한 녀석이야." "그, 그런···"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 아닌가 싶다. 갑작스런 고백에 놀랐는지 허둥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페르데스를 보며, 트로웰은 장난끼 어린 얼굴로 짓궃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넌 내가 왜 인간을 싫어하는지 몰랐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어. 네가 인간과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어도 난 그럭저럭 그들에게 인자한 정령왕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트, 트로웰···" "자, 어쨌든 과거의 고백은 모두 끝! 받아들이고 말고는 네 자유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 또한 내 자유니까. 마음껏 부담스러워 해줘, 페르데스. 그래야 지금깝지 혼자서 앓던 내 짝사랑이 그럭저럭 보상받을 거 아니겠어?" "하, 하아···" 새삼 느끼는 거지만 트로웰은 무조건 자상하기만 한 녀석이 아니었다. 적당히 남을 놀릴 줄도 알고, 다독일 줄도 아는 모습이 트로웰이 가진 진정한 본모습인 것이다. 완전히 여유를 되찾은 그에 비해 페르데스는 점점 복잡한 표정이 되어 눈동자를 굴리느라 정신없었다. 언제나 정숙하고 지적이던 그에게 이런 면이 있을 줄이야!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훗! 아하하하!" "우, 웃지 마, 엘! 그, 그러니까 나는···" "쿡쿡쿡. 아, 오해하지 마. 놀리려고 웃은 게 아니야. 그냥 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서. 어쨌든 걱정하던 상황은 안 나와서 다행이야. 난 트로웰이 상처받을까봐 조마조마 했거든." "어라? 나름대로 상처 받았는데. 사실 조금 충격이긴 했어. 미네르바가 신이 될 줄 몰랐고, 이번 일에 자원 할 줄은 더더욱 몰랐으니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어차피 포기할 수 없는데 아무렴 어떠냐 싶더라고. 결국 그의 선택에 맞춰가기로 했을 뿐이야." 트로웰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결정이었을 터였다. 언젠가 찾아낸다 해도, 그리하여 또 다른 인연을 만들어낸다 해도, 결국 인간의 수명은 짧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수고를 몇 번이고 반복해도 돌아오는 보답은 없을 것이고, 꿈같은 해피엔딩은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 트로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피스는 이런 희생적인 사랑을 두고 단 한마디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스토커의 탄생이로군. 하긴, 네놈의 그런 기질은 진작부터 꿰고 있었지." "스토커라니. 이왕이면 좋은 말로 표현해 줄 수 없어?" "흥! 스토커는 어떤 말로 돌려도 스토커야. 앞으로 주구장창 쫓아다니기만 할 텐데 그 외에 다른 표현이 있나?" "너처럼 민폐는 끼치지 않을 테니 염려 놓으렴." "얼씨구~ 과연 그럴까? 당장 녀석에게 인간 남자친구라도 생기면 눈에 불을 켜고 방해할거면서." "그건 좋아하는 상대를 지키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행사야. 참견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는 트로웰의 얼굴은 '거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죽는다!'의 포스를 짙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도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라피스는 쳇 하고 혀를 차곤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도 페르데스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연신 말을 고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 옆에서 배를 움켜잡고 킬킬거리는 카노스는 살포시 무시해 주도록 하자. "으음. 이걸 뭐라고 해야 할 지···" "큭큭큭. 억지로 생각할 필요가 뭐 있어? 어차피 싫다고 해도 저 녀석은 널 끝까지 쫓아다닐 기세인데." "뿌득. 남의 일이라고 너무 즐거워하는 거 아닙니까, 카노스?" "훗, 모르는 소리.남의 일이니까 당연히 즐겁지. 그래도 자네는 운이 좋은 것 같은데? 끝까지 기다려 주겠다는 존재가 있잖아? 아무리 영생을 사는 존재라도 저러긴 정말 쉽지 않다고. 아니, 오히려 영생을 살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일이지." "하아. 그래서 더 문제인 겁니다." 그러나 힘없이 내뱉는 말과 달리, 트로웰을 바라보는 페르데스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지만, 그의 말이 기쁘긴 기뻤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어쩌면 페르데스 또한 트로웰에게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오랜 시간동안 두 사람은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감출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이런 순간에 알게 된 것일까.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페르데스는 이번 일에 자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엘뤼엔이 희생되었겠지? '맙소사. 나 지금 안심하는 거야?' 갑자기 마음이 너무 답답해져서 나는 입술을 꽉 악믈었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트로웰의 고백이 늦은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페르데스의 희생이 가슴이 아픈 건 사실이었지만, 이젠 이 마음이 진짜인지조차 확신 할 수 없었다. 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랄까. 그 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자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카노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설마 지금 한 생각을 들킨 건가 싶어 허둥거리자, 그는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괜찮아, 엘뤼엔의 아들. 네가 나쁜 게 아니야." "에? 무, 무슨?" "넌 지금 '자기방어' 상태야. 사물을 보는 시각이 모두 너를 중심으로 맞춰져 있는 것뿐이지. 엘뤼엔이 너를 감싸다 다쳤기 때문에, 지금 온통 녀석의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거야. 그래야 그를 향한 죄책감을 덩어낼 수 있거든. 그런 것 가지고 자책할 필요 없어." "아···" "그래도 정도가 심한 건 아니니까 금방 괜찮아 질 거다. 상태가 심하면'나를 위해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해라!'라고 떠들지도 모르거든. 뭐, 그건 그것대로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을 것 같다만." "윽. 제발 참아주세요." 내가 정색을 하며 대답하자 카노스는 뭐가 그리 웃긴 건지 킥킥거리고 배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내가 개그맨이야? 왜 말만 시켰다 하면 웃는 건데?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카노스의 정신세계는 내 머리론 이해하지 못할 머나먼 차원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아,이러면 안 되는데. 떠날 만 할 때 정이 붙는 건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닌데 말이지." "네?떠나다니요?" "아니, 그냥 혼잣말.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것 같은 불행한 결말은 아닐 테니까."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나는 어렴풋이 그가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착각이었을까? 정면을 응시하는 카노스의 옆모습이 무척이나 슬퍼보였던 것 같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9-13. 끝과 시작Ⅱ.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신들이 황성 밖에서 봉인진을 설치하고 있을 그 무렵, 성 내에서는 짙은 어둠에 잠긴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앉아있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류드리안.' 마신을 배신하고 태어난 고향까지 배반하여 악신이 되기를 꿈꾸던, 한때는 마왕으로 불렸던 마족남자였다. "시간이 되었다." 거칠게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불과 이틀 전의 그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몸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얼굴의 형체도 못 알아 볼 정도였다. 새까맣고 짧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내려와 거붉은 빛득 띄었고, 온톤 흙빛으로 변해버린 피부엔 붉은색의 반점이 피부병처럼 돋아나 있었다. 눈돈자는 동공이 사라져서 새빨간 안광을 뿌렸고, 이마엔 커다란 뿔이, 짙은 갈색의 입술에는 두 개의 거대한 송곳니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혐오감이 느껴질 정도로 추악한 외모였지만, 정작 카류안 본인은 그 모습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지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크르르르.' 짐승의 울음을 연상시키는 소리가 자연스럽게 그의 성대 안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이제 단 한잔의 피를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따. 그것만 마시면 이제 모두가 두려워서 벌벌 떠는 완벽한 악힌으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자 카류안을 자신의 온 몸이 흥분되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를 지배한다는 것은 짜릿할 정도로 즐거운 일이다. 그는 거침없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큭. 크하하하하!" 그때 마침 그가 있던 방 안으로, 재물의 마지막잔을 준비한 대공이 들어섰다. 그는 성이 떠나갈 정도로 웃음을 터뜨리는 카류안을 보고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기분이 무척 좋으신 것 같군요." "아아, 물론이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지.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로 끝났기에 영 글러먹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그 성과가 눈앞에 다가왔으니 어찌 기분이 좋기 않겠느냐. 이번 일엔 너의 공이 크다. 소원을 말해 보거라. 그 어떤 것이라도 들어주마." "후후, 제 소원은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말씀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크큭, 영원한 생명과 인간들을 지배할 권세 말이냐? 물론 기억하고 있다. 넌 앞으로 나의 신하로서 남부럽지 않은 권력을 얻게 될 것이다!" "영광입니다, 나의 주군이시여." 대공은 감격스러운 표정이 되어 카류안의 앞에 엎드려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었다. 의례와 형식에 얽매인 기사들조차 잘 취하지 않는 절대적인 복종의 의식이었다. 그것이 매우 만족스러웄는지 카류안은 드물게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충성스러운 신하와 그를 아끼는 위엄 있는 주군의 모습이라고 착각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끼어들어 그의 행동을 방해하는 무리가 있었다. 솔트레테의 귀족들로, 황성에 남아 전략을 짜고 있던 대공의 측근들이었다. 그들은 갑자기 마족의 전사들이 나타나고 드래곤이 끼어들었을 때부터 이 전쟁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갑자기 성 밖에 붉은 결계가 설치되고, 내부에 기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공에게 따질 참으로 자신들의 사병을 데리고 찾아온 것이었다. 콰앙! 거칠게 문을 열어젖힌 그들은 방안에서 흘러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잠시 울찔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은 온톤 대공에게만 쏠려있느라 미처 그 앞에 있던 악신 카류안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였다. "대공 전하! 할 말이 있소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입니까!" "성 밖에 둘러진 저 붉은 것이 무엇입니까! 갑자기 쏟아져 나오는 마족들부터 시작해서 드래곤의 개입이라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해주십시오!" "그것 뿐 만이 아니오! 지하실에서 다량의 시체와 피를 발견했습니다! 그것도 모두 어린아이들 말입니다! 대체 우리 모르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겁니까!" 항간에 대공이 아이들을 잡아다 재물로 쓴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지만 모두 헛소문이라 치부하고 믿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 증거를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끝 모를 배신감 때문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래도 설마 싶은 마음에 해명할 기회를 주고자 찾아온 것인데, 대고의 표정은 무척 평온하기만 했다. 그는 오히려 뭐가 문제냐는 듯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적반하장으로 예고 없이 쳐들어온 그들의 무례를 탓하는 것이 아닌가. "다들 시끄럽군. 지금 무례를 저지르는 이유가 겨우 그것 때문인가?" "겨우라니! 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지하실에서 발견되었소! 설마 대공 전하, 그대가 한 일이 아니라 말하실 참이오?" "물론 내가 한 일이 맞다. 하지만 그래서? 수많은 인간 중에 아이 몇 명이 죽은 것이 뭐가 문제이지? 인간이 재물로 필요해서 잡아다 죽였을 뿐이야. 그 간단한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는 건가. 난 오히려 그대들을 이해 할 수가 없군." "뭐, 뭐라고!" 눈앞에 있는 자는 악마였다. 인간을 재물로 쓰는 자가 어찌 같은 인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전혀 죄책감조차 없는 얼굴이라니! 사람들의 얼굴이 퍼렇게 질리자, 대공은 우습다는 듯이 조소하며 타이르는 듯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새삼 내가 틀렸다고 몰아세울 참인가? 자세한 사정을 몰랐던 어쨌든 간에, 그대들이 나를 도운 건 사실이야.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일이지. 설마 그대들은 그 어린 황제가 정말 반역을 했기 때문에 쫓겨난 것이라 생각했던 건가?" "그, 그건!" "아니겠지. 결국 자네들은 스스로의 실익을 위해 죄 없는 아이를 몰아세운 게 아닌가. 그것 뿐이 아니지. 난 그대들이 선황의 정치에 불만을 품었던 사실을 알고 있네. 확실히 형님은 귀족보단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분이었지. 그것이 싫어서 늘 투덜거리지 않았는가. 그렇담 그것을 제거한 나에게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닐까." "무, 무슨 소리요! 서, 설마 당신이 선황폐하를?!" "하, 하지만 선황폐하는 마신의 신탁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진실에 사람들은 창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공은 그 모습을 마치 전시회에 걸려진 그림마냥 흥미로운 눈으로 감상하며 대답했다. "마신교의 신관인 내가 신탁을 위조하는 것쯤이야 간단한 일이지. 참으로 허무한 죽음이었어. 안 그런가? 그에 비하면 아들인 이사나는 정말 끈질긴 녀석이야. 아직까지 살아있다니." "!!" "허억!" "이, 이 악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오, 세상에 신이시여. 우리의 죄를 용서하소서." 신탁을 위조하다니! 설마 이 모든 것이 그가 의도적으로 계획한 일이었단 말인가? 그때서야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커다란 실책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자신이 이제까지 떠받들고 있던 자가 사실은 아무 죄 없는 황제를 몰아낸 진짜 반역자 였던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밝힌 순간에도 대공의 표정은 여유롭기만 했다. "쿡쿡. 흥분은 그다지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네." "이익! 닥쳐라! 뭣들 하는 거냐! 어서 저 반역자를 잡아라! 선황을 죽이고 나라를 삼키려한 죄인이다!" "와아아아!" 명령을 받은 사병들은 무기를 곧추세우며 대공을 향해 곧장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사실이 있었으니, 그 방에 있던 이는 대공 혼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꽤 시끄러운 날파리로군,." "!!" 대공을 향해 달려들던 병사들은 곧 귓가에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를 듣고 몸을 흠칫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드때는 이미 돌이키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병사들은 앞서나각 동료의 머리가 터져나가는 현장을 고스란히 목격하고 말았다. 퍼걱! 촤아아악! "으, 으아아아악!" 붉은 핏물이 터지고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바닥에 하나둘 쓰러지자 병사들은 혼비백산한 표정으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 드러난 것은 차마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을만큼 흉측한 괴물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남자의 이마에 달린 뿔과 거대한 송곳니를 본 그들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괴물이다!! 괴, 괴물이야!!!" "히익! 사람 살려!" "후퇴하라! 모두 후퇴해!" "아아아악!!" 그것은 흡사 지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이미 죽어 넘어진 시체들과 바닥을 가득 채운 핏물들. 그리고 스 속에서 도망치려 허둥대는 사람들 속에서 카류안은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하!" 그 뒤부터 이어지는 것은 제대로 된 반항조차 없는 카류안 혼자만의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그는 한 번에 죽일 수 있음에도 일부로 느릿느릿 움직이며 한사람씩 잡아 죽이고 있었다. 죽이는 행위보다, 자신에게 공포를 느끼고 벌벌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더욱 즐기는 듯이 보였다. 우드득! "크아아악!" 도망치는 벌레를 쫓듯 하나둘씩 잡아 목을 부러뜨리던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의 손안에서 처참히 찢겨져 최후를 마감했다. 그 모습을 본 대공은 살짝 얼굴을 찌푸렸지만, 그것은 카류안의 행동을 나무라서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겁 없이 달려든 귀족들에게 힐난의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미 시체가 된 그들이 그것을 느낄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미련한 것들. 나를 따랐다면 지금 보다 더 큰 부귀와 영화가 주어졌을 것을···" "크크큭. 답지 않게 동정하는 것이냐? 어차피 너완 뜻이 맞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런 심약한 놈들은 부하로 둬봤자 앞의로의 일에 방해만 될 터." "후후, 그저 의례상 해본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분위기이지 않습니까?" "흥! 네놈도 농담이 많이 늘었구나."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예의바른 어조로 답한 그는 곧 품안에서 붉은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악신으로 각성하기 위한 마지막 잔이 담긴 병인 것이다! 아무 망설임 없이 그것을 카류안에게 건네준 대공은 곧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 온 세상을 지배하실 시간입니다, 주군." "크하하하! 이제 마지막 잔인가!!" 기다려왔던 순각이었기에 카류안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얼른 병을 막고 있던 입구를 열었다. 꿀꺽, 목을 타고 넘어가는 액체의 향은 그 어떤 고급 음료보다 더욱 감미로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다 마신순간, 카류안은 자신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용솟음 치고 있음을 느꼈다. 제어하기조차 힘든 그 힘은 그의 전신을 타고 돌며 상상도 하지 못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곧 그의 입에선 저절로 끔찍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악!" "주군!" 그와 동시에 그의 육체가 공중으로 붕 떠오르며, 온 몸의 근육이 거칠게 꿈틀꿈틀 거리기 시작했다. 카류안의 몸에서 발산 된 빛은 그들이 있던 방안을 넘어 성 전체에 까지 번져 나갔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붉은 결계는 이미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해 산산이 터져 나가버린 후였다. "오오! 드디어!!" 우르르르르! 강하게 진동하는 땅과 그 속에서 폭발하는 빛의 향연을 느끼며 대공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이제 막 각성에 돌입한 주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쿠쿠쿠쿵! 악신의 몸은 곧 성의 지붕을 뚫고 끝없는 하늘 위로 치솟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성 밖에서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무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9-14. 끝과 시작.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고요한 새벽의 정적이 깨진 것은, 성 안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된 이후였다. 갑자기 번쩍-하고 밝은 빛이 터지는 듯싶더니, 성을 감싸고 있던 붉은 결계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던 것이다. "각성이 시작됐다!" 결계가 사라지고 난 자리엔 하늘 끝까지 올라간 거대한 빛줄기가 마치 감옥처럼 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게 무언지 궁금해 하기도 전에 나는 숨도 쉬기 힘들만큼 어마어마한 압력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주위에 있던 일행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창백한 것을 보면 모두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다. 특히 인간인 알리사와 이사나는 견디기가 힘들었는지 연신 기침을 내뱉으며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윽···이, 이게 뭐야. 수, 숨을 못 쉬겠어." "쿠, 쿨럭! 쿨럭!!" 그때쯤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잔뜩 긴장하고 있던 참이었다. 먼저 잠들었던 이사나와 알리사는 물론, 저 멀리에 있던 이프리트 역시 일행에 합류하여 언제 어느 때 시작될지 모를 악신의 각성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겪어본 악신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 했다.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생각에 나는 황급히 옆에 있던 라피스에게 입을 열었다. "라피스, 실드를 부탁해. 저 두 사람 좀 보호해 줘." "쳇, 누군 여유가 남아도는 줄 알아? 나도 힘들긴 마찬가지라고." "그래도 당장 죽을 정도는 아니잖아! 잔말 말고 얼른 해!" 연신 투걸거리던 녀석은 내가 험악한 표정으로 소리치고서야 마지못한 듯 두 사람에게 실드를 걸었다. 그리곤 한결 안정이 된 두 사람을 노려보며 압력이 닿는 범위에서 멀리 떨어질 것을 명령했다. "너희들은 방해만 되니까 저 멀리 떨어져 있어. 이런 순간에 힘을 분배하는 게 얼마나 자살행위인지 알아?" "하, 하지만···" "아, 글쎄 시키는 대로 해! 여기서 개죽음 당하고 싶냐!" 녀석의 기세가 워낙 살기등등하다 보니 이사나와 알리사도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고 말었이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다. 그들이 압력 범위에서 벗어난 순간, 몸을 가하던 힘이 전보다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우르르릉! 쿠오오오오!! 거대한 기운에 휘말린 공기는 미친 듯이 나부끼며 거대한 돌풍을 만들어 내었고, 땅은 온톤 진동하여 강한 지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자연의 속성인 4대 정령왕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렇지 않은 라피스와 시벨리우들은 어김없이 그 폭풍 안에 휘말려 들어가야 했다. "크, 크으으윽!" "윽, 젠장···뭐 이런 놈이···" 그나마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상태였기에 영향을 크게 받지 않는 편이었다. 성 주위를 둘러 싼 채 봉인진을 외우고 있던 신들은 악신이 발산하는 기운의 직접적인 사정권 안에 들어가 있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 하지만 넋 놓고 앉아 놈을 욕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우리가 거대한 빛줄기에 정신을 팔리고 있을 동안, 누군가가 성의 지붕에 해당하는 부분을 뚫고 하늘 위로 천천히 치솟아 올랐던 것이다. 쿠웅! 콰지지지직! "저, 저게 뭐야?" "아, 악신이다!" 나는 한순간 악신의 모습을 몰라볼 뻔 했다. 고작 하루 사이에 놈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녀석은 그새 사람의 형체를 버리고 완연한 괴물의 형상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머리에 솟은 뿔부터 시작해서 입에 삐죽이 튀어나온 거대한 송곳니까지. 녀석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위압적인 기운이 아니었더라도, 이미 우리는 녀석의 겉모습에서 충분히 압도당하고 있는 상태였다. 또한 녀석은 일반인의 수 십 배에 해당하는 몸집으로 덩치가 불려져, 멀리에서도 그 모습이 단연 눈에 띄었다. 거친 짐승의 신음소릴를 연상시키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살짝 벌려진 입안에서 하얀 서리가 뿜어져 나왔다. "크르르르···" 이제 막 각성을 끝낸 것인지, 굳게 감겨 있던 놈의 눈이 붉은 안광을 흩뿌리며 떠지려 하고 있었다. 그러자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던 20여명의 신들이 바짝 긴장하며 손으로 이상한 형식의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모두 지금이오! 봉인의 진(鎭)을 펼치시오!!" 한 신이 소리치자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던 신들은 곧 양손에 붉은색의 빛덩이를 띄워 올렸다. 그것은 정확히 서로의 빛들과 연결되어 악신을 가운데에 두고 순식간에 둥근 테두리를 형성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붉은 빛들은 마치 꾸물거리는 뱀처럼 악신의 몸을 칭칭 얽매어 가기 시작했다. 파앗! 파지지지직!! "성공이다!" "와아아아!" 누군가의 외침에 의해 나는 그들의 시도가 제대로 먹혀들어갔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너무 쉽게 성공한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어쨌든 악신은 온 몸에 붉은 쇠사슬을 매달은 꼴이 되어 공중에 꼼짝없이 떠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막 정신을 차린 듯, 슬며시 열리고 있던 악신의 눈꺼풀이 완저히 번쩍 떠지는 것이 보였다. 주위를 노려보는 녀석의 눈동자는 동공이 없이 새빨갛기만 하여, 마치 핏물을 가득 담아놓은 것 같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놈의 주위룰 둘러싼 신들을 발견하곤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곧 자신의 몸이 쇠사슬에 감긴 것을 깨달았는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네놈들이 감히 이런 수작을!!> 그가 내뱉은 말은 청각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곧바로 뜻이 전달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제압당한 사실이 분한 듯, 놈은 곧 사정없이 포효하며 크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아아악!!> 출렁 출렁. 악신의 몸이 뒤틀릴 때마다 그와 연결되어있던 쇠사슬이 끊어질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와 함께 지을 유지하고 있던 신들의 안색 역시 점점 창백해져 갔다. "어, 어떻게 이런 힘이!" "무서운 힘이다! 봉인진이 이렇게 흔들리다니!" "큭- 오래 버틸 수 없소! 어서 소멸의 의식을!!" 말하는 기운조차 아깝다는 듯, 다급하게 소리치는 말에 그들의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페르데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의연한 표정이었던 그는 막상 악신을 정면으로 대하니 긴장이 된 것인지 꽉 쥔 두 손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옆에 있던 트로웰의 팔을 꽉 붙들었다. 그러자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그래, 엘? 얼굴이 창백해." "트, 트로웰. 너 정말 괜찮아? 페르데스를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 거야?" "뭐? 새삼스럽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트로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힐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분명히 내 마음을 읽었을 것이다. 엘뤼엔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느낀 내 생각을 그가 몰랐을 리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이제와 걱정하는 내가 가증스럽게 느껴질까? 머릿속이 점점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갑자기 나 스스로가 너무나 추해진 기분이었다. "내, 내가 잘못했어. 미않해. 그러니까 나는···나는···" "엘? 이런, 감정이 너무 격해져있는 것 같은데. 좀 진정해 봐." "자기 방어 같은 게 아니야. 그때 엘뤼엔이 날 감싸고 다치지 않았어도 난 지금과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미안해,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닌데···그런데···" "아아, 무슨 소린지 알았어. 엘, 나나 페르데스나 전혀 아무렇지 않아. 왜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하지만···" "에구. 어쩔 수 없지. 내가 재미있는 거 하나 가르쳐 줄까?"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거리자, 트로웰은 빙긋 웃음 지으며 지금 한창 봉인진과 씨름을 벌이고 있는 신들 중 한 사람을 가리켜 보였다. "저 녀석은 지금 '어서 소멸하지 않고 뭐하는 거야? 힘들어 죽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어." "어?" "그리고 옆의 녀석은 '내가 소명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리고 있고. 그 옆의 녀석은 소멸을 자처한 페르데스를 오히려 한심하게 생각하고 있지. 보통 때는 신의 생각이 잘 읽히지 않는데, 지금은 다들 감정이 격해진 탓인지 굳이 혜안을 열지 않아도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 하지만 그 중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자책하거나 미안해하는 신은 단 하나도 없어." "!!" "알았어,엘?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게 당연한 거야. 그건 너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난 오히려 엘이 그렇게 생각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네가 페르데스를 말렸다면 서로 입장이 난처했을 테니까" "트로웰···" "날 걱정하는 거라면,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 기다리는 것은 상관없는 데다, 질리지 않을 자신도 있거든. 그리고 페르데스는 정말로 인간이 되고 싶어 했었어. 그건 그의 미네르바시절을 더 많이 지켜본 내가 잘 알아. 우스운 건 내 고백을 들을 이후로도 그 생각이 변함이 없다는 거야. 뭐, 어차피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해서 기대도 안했지만." "아···" 트로웰은 멍해진 내 표정을 보며 다시금 생긋 미소 지어 보였다. "아무튼 엘이 나와 동료들을 끔찍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은 잘 알았어. 네가 이런 성격이라서 다행이야, 엘. '그때'의 나를 구원해 준 거···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응? '그때'라니?" "후훗. 아직은 비밀. 실은 나도 완전히 기억하는 건 아니야. 그냥 다른 사람의 단편적인 기억을 통해 유추한 것뿐이니까. 아, 그리고, 성격의 변화에 대해선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미 본래의 성격과 적당히 조화가 돼 벟린 것 같으니." "그, 그런가···?" 조화가 되었다곤 해도, 원래부터 뭐가 문제인지 자각을 못했으니 내가 그런 사실을 느낄 리가 없었다. 왠지 화제를 돌리기 위한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지만, 나는 굳이 따지지 않고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은 내 자신에게 면죄부가 내려진 사실만 위안이 되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악신을 소멸시키는 섯만 생각하자. 슬퍼하거나, 미안해하는 건 그 다음의 일이야." "으응." 그러고 보면 나도 꽤 약은 성격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트로웰에게 매달린 것부터가 그가 내게 화내지 않을거란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윽. 정말 한심해. 내가 이런 놈이었다니.' 내가 속으로 자책하며 반성하고 있는 사이, 페르데스는 몸부림치는 악신의 가까이에 다가가며 무언가를 열심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소멸의 주문을 외우는 것이리라. 그러자 처음엔 아무생각 없어보였던 악신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방금 전보다 더욱 몸을 크게 요동하며 소리쳤다. <크아아악! 이놈들! 대체 무슨 꿍꿍이냐!!> "큭-!! 시간이 없어! 어서!!" "크윽!"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봉인진의 힘은 점점 줄어들어, 결박이 약해지는 것이 눈에 뜨일 정도였다. 처음 선명한 붉은 빛을 띄우던 사슬은 점점 투명해져서 악신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아슬아슬하게 풀릴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마침 그때 페르데스도 거의 소멸의 주문을 완성해 가는 중이었기에, 우리는 조마조마한 눈으로 두 존재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있었으니··· "···아, 안 돼! 이제 더, 더 이상은!!" 파악! 챙그랑!! "헉!!" "아, 안 돼!!" 우리들은 혼비백산한 얼굴로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악신의 힘을 결딜 수 없었던 신중의 한명이, 결국 봉인진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어느 한쪽의 균형이 깨지자 나머지 다른 신들의 손에 있던 사슬의 부분도 순식간에 와해되어 공중으로 흩어졌고, 곧 자유로워진 악신의 몸에서 폭발적인 사악한 기운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처 그 힘에 대비하지 못한 탓에, 우리는 20명이나 되는 신들이 손도 한번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현장을 지켜보았다. 소멸을 위해 악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던 페르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콰아아아앙!! "아아아아악!" "커헉!!" "페르데스!!" 그 순간 지상으로 낙하하는 페르데스를 트로웰이 얼른 달려가 받아 안았다. 폭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있던 탓인지, 의식을 잃어버린 그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트로웰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의 뺨을 툭툭 치며 깨우기 위해 노력했다. "페르데스! 정신 차려봐, 페르데스!!" "으응···" 그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오자 트로웰은 안도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편의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아 결코 평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봉인진이 깨졌다!!" "아아아, 이제 끝났어! 완전히 끝나버렸다고!" "오오, 주신이여···" 진(鎭)이 와해되자 신들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얼굴로 절망하기에 바빴다. 각성한 직후의 틈을 놓쳤으니 이제 어떠한 방법도 통하지 않을 터! 그들은 완전히 희망을 잃어버린 얼굴로 연달라 한탄을 내뱉고 있었다. 악신은 그런 신들의 모습을 통렬하게 비웃었다. <크하하하! 쓸데없는 발악을 하였구나! 무슨 꿍꿍이었는지 몰라도 감히 내게 반항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쿠쿵! 콰아아앙! "으윽···" 악신의 몸을 타고 거대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하자, 곧 주위에 무수한 번개와 먹구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맑았던 날씨는 흔적도 사라지고, 하늘과 땅은 점점 칠흙같은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전신이 오싹 할 정도로 위압적인 기운에, 나는 저절로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두 팔로 꼭 끌어안았다. 이미 의욕을 잃어버린 신들은 하나같이 자포자기한 얼굴을 보아, 이제 겸허히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듯 했다. 악신의 몸에 이상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투둑. 투두두둑! <쿠오오오오오오!!!> "헉···저, 저게 무슨?" 그것은 마치 놈의 등에서 피 분수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놀란 표정으로 자세히 바라본 나는, 그것이 곧 새빨간 가죽으로 된 날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도 저것이 악신의 마지막 완성 단계인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날개를 꺼내기 시작하는 악신의 모습은 무척이나 끔찍하고 혐오스러웠다. 그때 그 모습을 망연히 바라보던 내게,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카노스가 급히 다가오더니 뜻밖의 말을 건네 왔다. "엘, 녀석을 막을 수 있겠어?" "네? 막다니요?" 신들도 하지 못한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카노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놈이 날개를 다 꺼내면 완전히 끝이야. 아주 잠깐만 녀석을 방해해줘. 지금이라면 봉인진을 다시 설치할 수 있어! 그게 아니라도 놈을 붙잡은 사이에 소명의 의식을 진행시키면 될 거야." "그, 그게 정말인가요? 하지만···" "5분이면 된다. 그 시간만 버티면 돼. 놈의 각성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어. 이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아직까진 너희 정령왕들에게 더 유리하단 소리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알겠어요, 해볼게요." "부탁한다." 내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카노스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띄우며 어깨를 다독였다. 그를 알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지만, 나는 이제야 겨우 그가 진심으로 웃는 모습을 보게 된 것 같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9-15. 끝과 시작Ⅱ.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카노스가 다른 신들을 독려하러 간 사이, 나는 나대로 정령왕들을 모아놓고(그래봤자 나를 합쳐 달랑 4명 뿐이지만.) 방금 전에 그에게 들었던 말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이프리트는 그다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말했다. "에? 우리보고 공격을 하라고? 저거 아무리 때려도 꿈쩍도 안할 것 같은데?" "5분만 막으면 된대. 어떻게든 날개를 꺼내지만 못하게 하면 될 것 같은데." "'5분만'이 아니야. 저거 한방만 잘 못 맞아도 우리는 고스란히 역소환 될 거라고. 자칫하면 그 자리에서 소명 될 지도 몰라. 봉인진을 다시 펼칠 때까지 막는다는 게 가능할까?" "일단 해봐야지. 어차피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잖아." "그야 그렇지만···" 잠시 난감한 얼굴로 악신을 바라보던 이프리트는 결국 다른 선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순순히 불의 정령왕들만 쥘 수 있는 '불의 검' 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본 미네는 고개를 쓰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담 엘과 이프리트가 먼저 선공을 해주십시오. 나와 트로웰은 방어속성이기 때문에 공격을 해도 큰 타격을 입히지 못할 겁니다." "응, 알았어. 그럼 내가 제일 먼저 공격을 시작할 테니까 이프리트 네가 적당한 타이밍에 끼어들어 와줘." "엘, 네가?" "응. 엘퀴네스는 방어와 공격 모두가 무난하다며. 그럼 적당히 치고 빠지기도 쉬울 거 아니야. 미네는 이프리트의 보호에 힘써주고, 트로웰은 가능한 악신의 움직임을 봉쇄해줘." "알겠습니다." "응, 알았어." 결정을 내린 즉시 나는 얼름 창을 꺼내 쥔 다름 전속력으로 악신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더 이상 여유를 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쐐애애액! "크으윽!"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의식을 잃을 것 같이 저릿저릿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이를 악다문 끝에 간신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녀석은 날개를 꺼내는 것에만 신경이 미쳐, 내가 가까이 다가온 것도 깨닫지 못한 듯 보였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놈의 뒤편으로 돌아가, 들고 있던 얼음 창을 이제 막 날개 죽지가 돋아나기 시작한 녀석의 등 뒤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푸욱! 콰지지직!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는지,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마구 뒤틀었다. 그러자 곧 자신의 몸에 박힌 차가운 얼음의 결정체를 발견했는지, 붉은 눈동자에 살기를 띄우며 노성을 내뱉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또 네놈이냐!!!> "하하~오랜만이지? 그새 인상이 많이 바뀌었네?" 나는 일부로 능청스럽게 대꾸하며 손안에 또 다른 얼음창을 만들어냈다. 실은 몸이 너무 후들거려서 마음 같아선 이런 장소 근처에도 오고 싶진 않았지만, 카노스의 '5분만'이라는 말을 위안삼아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 속을 알길 없는 악신은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길게 자란 손톱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카캉! 얼음창으로 가로막은 손톱 뒤로 악신의 흉측한 얼굴이 바짝 다가왔다. <안 그래도 네놈은 꼭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이 자리에서 처참이 찢어주마!!> "큭-!" 생각보다 놈의 힘이 무시무시해서 예전처럼 자연 상태로 돌아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곧 생각을 고쳤다. 이미 각성중인 녀석이라면 내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도 알아볼 것이 틀림없었고, 놈의 공격 또한 내게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뒤를 이어 이프리트가 악신을 향해 불의 검을 내질렀다. "하압! 엘한테서 떨어졋!!" 촤아아아악! <크윽! 이건 또 무슨!!> 불의 공격은 정확하게 악신의 몸을 집어 삼켰지만, 놈은 약간의 그을림 말고는 전혀 타격을 받은 것 같지 않았다. 화가 난 그는 나에게 들이밀던 두 개의 손 중에서 하나를 휘저어 이프리트를 향해 무형의 기운을 날렸다. 하지만 그것은 다행히도 미네가 불러낸 거대한 폭풍에 휘말려 그에게 닿기도 전에 저만치 밀려 나갔다. 콰지지직!! 콰아아아앙! "미네, 나이스!" "괜찮으십니까, 이프리트?" "응! 아슬아슬 했어. 앗, 엘! 조심해!"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악신의 팔을 막고 있던 얼음창을 순식간에 물로 변모 시킨 뒤, 녀석이 가댈 곳을 잃어 허공을 가르는 사이 잽싸게 놈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그러자 약이 올랐는지 안 그래도 붉으죽죽한 놈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정령왕들!! 네놈들이 감히!!> 그러는 사이에도 악신의 등에서는 조금씩 꾸준하게 날개가 돋아나고 있었다. 혹시 저 날개가 약적이 되지는 않을까? 나는 시험 삼아 공격해보기로 작정하고 압축된 물 덩어리 여러 개를 날개 죽지가 돋아난 놈의 어깨를 향해 사정없이 퍼부었다. 슈우욱! 퍼어어엉! <크아아아악!> 다행히 어느 정도 짐작이 맞았는지, 놈은 공격한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하지만 그건 또 한편으론 건드려서는 안 될 영역이기도 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악신이 내게 미친 듯이 달려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노오오옴!!!!> "크윽!!" "앨!!" 놈이 뿜어내는 살기만으로 나는 충분히 온 몸이 저리는 것 같은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놈은 두 송으로 내 목을 잡고 빠르게 지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처 손 쓸 사이도 없이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대로 놈에게 이끌려 땅의 저 밑바닥 아래까지 쳐박히고 말았다. 콰아아앙! "커헉! 쿨럭!" "엘!!" 그러자 트로웰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급히 대지를 부드러운 성질로 바꾸었지만, 나는 땅에 부딪히자마자 어김없이 붉은 피를 토해내고 말았다. 내려쳐진 속도에 의해 내 목을 움켜쥔 악신의 손톱이 점점 피부를 꿰뚫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떨쳐내려 했으나, 놈의 힘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압박감을 비롯한,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의 여운으로 나는 쉽사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크큭! 이 곱상한 얼굴로 감히 나를 농락했겠다! 이대로 죽여주마! 내 다시는 엘퀴네스 따위가 내게 대항하지 못하도록 말들어주지!> "큭···웃기지···맛!!" 버둥거리면 거릴수록 목에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강해졌다. 나는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며 소리친 후, 자유로운 두 팔을 이용해 얼음창으로 삐죽이 솟아나온 놈의 날개를 꿰뚫었다. 콰직! <크아아악!> 그 순간 땅이 크게 진동하며 내 양 편으로 두 개의 거대한 흙더미가 일어섰다. 그것은 곧 내 목을 조르고 있는 악신의 두 팔을 휘감아 돌더니, 정신없이 괴로워하는 놈의 몸을 주욱 뒤편으로 잡아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간신히 자유를 되찾은 나를, 미네가 다가와서 재빠르게 부축하곤 하늘 위로 올라갔다. "큭! 쿨럭, 쿨럭!!" "엘! 괜찮으십니까? 목에 상처가···" "윽, 괘, 괜찮아. 미네. 조금 아플 뿐이야." "바보야! 넋 놓고 있으니까 당하지! 진짜 그 자리에서 역소환이 안된 게 용하다! 뭘 하고 있어? 얼른 치료하지 않구!" 현재 내 목엔 드라큐라에게 당한 마냥 보기 흉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치유굴을 쓰려던 나는 곧 묘한 감각을 느끼고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자 늦장을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옆에서 재촉하던 이프리트의 성화가 더욱 짙어졌다. "뭐하냐니까!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당장 치료 안 해?" "윽, 좀 가만 있어봐, 이프리트.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엥? 뭐라고?"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엘? 상처 치료를 못하신다고요?" 그 말에 나를 부축하고 있던 미네와 이프리트는 눈이 동그랗게 뜨며 당황했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까부터 치유수을 쓰고 있는데 전혀 먹히지 않아. 손톱에 독이라도 있었던 건지 뭔지···" "아무리 그래도 엘퀴네스의 회복력이라면 그 어떤 독이라도 해독이 된다고!" "하지만 지금은 안 되는 걸." "뭐, 뭐야. 그럼 이대로 계속 못 고치는 거야?" "음···정령계에서라면 좀 나을지도.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정령계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어차피 좀 아픈 것 빼고는 괜찮으니까 그냥 이대로 있지 뭐. 명색의 물의 정령왕인데 설마 출혈과다로 죽지는 않겠지." 흐르는 피를 닦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하자 이프리트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랄까? 그리곤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넌 누구야! 엘의 탈을 쓴 가짜지?!" "하아? 무슨 소리야?" "왠지 묘하게 터프해졌잖아! 울먹이는 것도 아니고, 곤란해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덤덤하게 '괜찮겠지'라니!! 원래라면 지금쯤 이러다 죽는 거 아니냐고 무서워해야 정상인거 아니야? 넌 바로 그런 역학이었잖아, 만인의 재롱둥이!" "······네가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았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트로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악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누가 따의 정령와 아니랄까봐 요리조리 대지를 이용해 놈의 움직임을 봉괘하는 모습이, 내가 보기에도 그는 무척이나 멋지게 잘 싸워나가고 있었다. 가능하면 나도 저러고 싶었는데, 꼴사납게 붙잡혀서 목에 구멍까지 뚫리다니. 진정으로 스스로의 한심함을 금할 길이 없다. "어이, 엘! 그렇게 간단하게 넘길 문제가 아니야! 너 진짜 이상하게 변했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지금은 저놈을 붙잡을 생각만 하자고. 아참, 지금 봐서 알겠지만, 어찌 된 건지 몰라도 놈한테서 당한 상처엔 내 치유술이 전혀 안 먹ㅎ히거든? 그러니까 가능한 다치지 말고 조심해. 지금 한 말 무시하고 까불다가 나중에 피투성이 돼도 난 모른다." "역시 변했어!!" 경악하는 이프리트를 살포시 무시하며 나는 다시금 두 손에 다량의 얼음 화살을 띄워 올렸다. 그리고 이제 거의 반쯤 튀어나온 악신의 날개를 향해 그것을 사정없이 쏘아 보냈다. 마침 트로웰에 의해 진흙 속에 발이 박혀 버둥거리고 있던 녀석은,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맞을 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큭-! 이놈!!> '쳇. 데미지가 약했나. 너무 멀쩡하잖아.' 그러나 나는 투덜거릴 사이도 없이 또다시 달려드는 악신을 상대하기 위해 온 전신을 바짝 긴장시켜야 했다. 날개가 나오면 나올수록, 놈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도 점점 강해졌고, 또한 고통을 느끼는 감각도 둔해지는 것 같았다. 아마 등에서 날개가 완전히 펼쳐지면, 우리의 공격 따위엔 간지럼조차 느끼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봉인진은 아직 먼 건가? 5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긴 처음인데.'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흘끗 카노스와 신들의 정황을 살펴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뭔가 서로 의견이 안 맞는 건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생긴 건지 좀처럼 다시 진을 펼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데스 역시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이었기에, 어쩌면 5분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시간이라도 버텨야 할지도 몰랐다. 저러다 우리를 다 죽이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셈인가? 순각 화가 치밀어 뭔가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워낙 달려드는 악신의 기세가 험하다 보니 더 이상 그쪽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크크크크! 죽어랏!!!> 콰직! 콰아아아~! 퍼어엉! 그 사이 놈은 공격의 패턴을 바꿔, 몸으로 직접 부딪치기 보단 시커먼 번개를 일으켜 사방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우리는 그것을 피하랴, 다른 일행들을 보호하랴, 그야말로 정신없이 움직이며 놈의 시선을 교란시키는 것에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놈의 공격에 나의 방어가 전혀 먹히지 않는 다는 사실이었다. 악신이 임의적으로 만든 번개여서인지 몰라도, 그것은 보통의 전기와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랐다. 물속에 '속한' 생물체에 타격을 입히는 것이 보통의 전기라면, 놈이 던지는 번개는 물 그 자체에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때문에 나는 그것을 막으면 막으려 할수록 고스란리 상처를 뒤집어 쓸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악신이 나를 의도적으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피하기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다. 콰앙! 콰지지지직!! "크흑!!" "엘!!" 이번에도 놈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나는, 그 힘에 주욱 밀려나면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나무기둥에 강제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까 전 악신에게 목이 졸렸던 충격도 채 벗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연타로 강한 타격이 이어지자, 한순간 시야가 흐릿해지며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아, 안 돼, 어서 일어서야···' 이대로 다시 충격이 가해지면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것이란 본능적인 직감에, 나는 안감힘을 써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각만일 뿐, 실제론 온 몸의 힘이 빠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악신은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흉측한 미소를 지으며 족히 1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손톱을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크하하하! 갈가리 찢어주마!!> "엘! 피해!!" '우씨! 피할 수 있었으면 진작 피했지!' 소리친 사람의 다급한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나 역시도 상당히 난처하긴 마찬가지였다. 꼼짝없이 굳어버린 몸이 도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곧 저 손톱이 내 몸을 무자비하게 뚫고 들어오겠지. 쐐애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드는 손이 바로 내 지척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박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두 눈을 꽉 감고 다가올 고통에 대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한참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몸에 느껴지는 통증이 없었다. 설마 너무 아파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는 슬며시 눈을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 [정령왕 엘퀴네스] 9-1.6 끝과 시작Ⅱ. (7)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내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었다. 허리까지 나풀거리는 머리카락은 핏빛을 머금은 것처럼 붉어, 나는 한순간 내가 피를 뒤집어 쓴 것이 아닌 가 의심까지 했다. 하지만 곧 그 정체가 무엇인지 꺠달은 나는 곧 놀란 표정으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 주변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존재는 이프리트를 포함하여 단 두 명밖에 없다. 그 중에서 지금 이프리트는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것의 주인은 아마도 나머지 한 사람! "라···피스?···" 그리고 그와 함께 스쳐지나가는,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영상이, 거대한 폭발음과 나를 대신하여 뛰어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던 엘뤼엔!! "헉!!" 그 순간 무서울 만큼 전신이 떨려 나는 차마 목소리를 내뱉을 수가 없었다. 설마 이번에도 같은 상황일 리가 없다. 아무리 나란 녀석이 바보여도 그렇지, 나 하나 때문에 두 사람이나 다치게 만들어선 안 되잖아? 하지만 다시금 그의 등을 보는 순간, 나는 간신히 붙들었던 희망의 조각이 그 자리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새빨갛게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피부를 뚫고 비죽이 솟아나온 다섯 개의 손톱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 그 이후로 이어지는 것은 라피스의 몸에 손톱을 박아 넣은 악신이 천천히 피 묻은 손을 빼내는 장면이었다. 슈우욱. 쿨쩍. 피부와 피부가 액체 속에서 마찰하는 끔찍한 소리가 울리며, 놈은 아쉬운 표정으로 막 뽑혀 나온 자신의 손톱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크큭. 네놈도 꽤나 운이 좋구나. 벌써 두 번이나 다른 놈 때문에 목숨을 건지다니 말이다.> "!!" 그 순간 지금까지 느릿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갑자기 정상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최면에라도 걸린 듯 꼼짝도 하지 못했던 나는, 그때서야 아직도 내 앞을 막고 있는 라피스에게 다가가 정신없이 그의 상태를 살폈다. "라피스! 라피스, 정신 차려봐! 라피스?" <큭큭, 지금 그놈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이번에야 말로 네 차례다!> 악신은 통렬하게 비웃으며 피가 뚝뚝 떨러지고 있는 손톱을 다시 내게 들이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가 끼어들어 놈의 행동을 방해했다. 쿠웅! <큭! 무, 무슨!> "어이, 형씨. 어린애는 그만 데리고 놀고, 이젠 나랑 한 판 해보지?" 놀랍게도 놈을 막은 자는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마신 카노스였다. 봉인진이 만들어 질 때까지 직접 시간을 벌 요량인지, 그는 지금과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특유의 장난끼 어린 표정으로 악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그에게서 풍기는 마계의 기운을 느낀 듯, 악신의 눈빛이 흥미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네놈은 걸마···마신 카노스인가?> "···'네놈?' 호오, 상당히 건방지군. 한 때 너를 창조했던 신에게 그 무슨 말버릇이지? 아무튼 이래서 시건방진 놈들이 싫다니까." <크아악!!- 감히 내게!!> 그가 내뱉은 말은 악신이 내개서 시선을 돌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화가 난 놈이 막무가내로 달려들기 시작하자, 카노스는 기다렸다는 듯 몸을 머찍이 이동하며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이틈에 안전한 장소로 도망치라는 뜻이다. 설마 나 때문에 미끼를 자처한 건가? 그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얼른 고개를 쓰덕이곤, 비틀거리는 라피스를 부축해서 일으키기 시작했다. "라피스! 괜찮아? 너 무슨 짓 한 거야! 왜, 왜 끼어들어서···상처는!! 상처는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아아···" 그러자 돌아온 것은 의외로 멀쩡한 그의 목소리였다. 찌푸린 표정으로 돌아보는 얼굴은 고톤 때문에 일그러지긴 했어도, 의식을 잃을 것처럼 눈빛이 흐릿하지는 않았다. 그것에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그는 오히려 어떻게 그런 뻔한 질문을 할 수 있느냐는 듯한 의문을 담고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네가 보이겐···이게 괜찮아 보이냐?" 묘하게 나를 힐책하는 어조의 말에 나는 순간 울컥하는 심정이 되어 소리쳤다. "멍청한 자식! 그러게 누가 몸으로 막으래? 너 미쳤어? 죽으려고 작정했어? 끼어들 일이 따로 있지, 왜 이런 상황에 끼어들고 난리야!!" "뭐야? 네가 꼼짝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처음부터 제대로 피하지 못한 게 누군데 이래?" "윽! 누가 널더러 보호해 달래? 까짓 거 그냥 맞고 정령계로 역소환 되면 그만이지!" "그 역소환의 충격은 대체 누가 감당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이래저래 내가 고생하는 건 마찬가지잖아!" "몸을 뚫리는 것보다야 그게 백번 낫지!! 어디 봐봐, 일단 치료는 해야 할 것 아니야!" "됐어. 이래뵈도 드래곤이라 이 정도 쯤엔 끄덕도 안한다고. 그보다 네 목이나 좀 치료해라. 시뻘겋게 피는 철철 흘려가지고 그게 뭐냐?" 녀석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나는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어서 만류하는 녀석을 무시하고 치유술을 시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악신에게 당한 탓인지 좀처럼 쉽게 아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엘뤼엔과는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천만다행이었지만,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정말 나 자신이 한심해져서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대체 얼마나 더 남을 희생시키고 내 자신의 나약함을 깨달아야 하는 걸까. 그러자 라피스는 내가 우는 것이 의외라는 듯 얼굴 가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너 지금 우는 거냐?" "시끄러! 너 때문이 아니야. 내가 한심해서 그런 거야. 미련하게 벌써 두 번이나···흑, 왜 나를 자꾸 비참하게 만드는 거야!" "얼씨구? 위험한 순간에 구해줘도 말이 많아요. 아무튼 난 약속 지켰다?" "···뭐? 약속이라니?" "이번엔 내 목숨을 걸고 지켜주겠다고 했잖아. 설마 벌써 까먹은 거냐?" 녀석의 말에서 나는 무언가 불길한 기분을 느끼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설마!! "너···너 혹시 그 약속 때문에 뛰어든 거야?" "당연하지.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거든." "이익! 차라리 나가 죽엇!!" "아얏! 내가 뭘 어쨌다고?" 드래곤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생물이라고 한 인간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만날 수만 있다면 난 그의 멱살을 부여잡고 천만번이라도 짤짤짤 흔들어 주고 싶었다. 그러자 라피스는 화내는 나를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욱 거리며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구해줬으면 고맙다고 해야지, 왜 화를 내는 거야? 쳇, 쳇. 수고한 보람도 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수고 따윈 필요 없어! 한번 만 더 그딴 짓 했다간 다신 너 안볼 줄 알아! 계약도 파기야, 파기! 알았어?" "저건 툭하면 계약 파기래. 알았어, 알았다고! 어이, 그래도 고맙다는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 내 덕분에 산건 사실이잖아." 그의 말에 나는 그제 서야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너무 그를 몰아붙이기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야 어쨌든 라피스가 나를 구해준 것은 사실이고, 그 때문에 몸에 구멍이 뚫리는 큰 부상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아직도 꾸역꾸역 피가 흘러나오는 상처를 보자니 나는 또 참고 있던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느끼고 얼른 주저앉아 다시 치유술을 시정하기 시작했다. 라피스는 그런 내 모슴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너 또 우는 거냐? 화냈다가, 울었다가···대체 감정의 기폭을 이해할 수가 없군. 말로는 뻔히 남자라고 우기면서 이럴 때 보면 영낙없는 계집애라니까." "시끄러. 치료하는 데 말 시키지마. 열 받으면 다른 쪽에도 구멍을 내버리는 수가 있어." "쳇, 살벌한 녀석. 아, 그리고 고맙다는 말은?" 이쯤 되면 끈질겨도 보통 끈질긴 게 아니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퉁명스럽게 쏘아 붙였다. "아~ 그래, 고맙다, 고마워!! 이 말 한마디 들으려고 이 난리를 피웠냐? 넌 진짜 이해할 수 없는 도마뱀이야. 드래곤들은 전부 다 이래?" "글쎄. 적어도 한번 약속을 정한 것은 지키려고 하는 편이지. 뭐. 어쨌든···네가 날 위해 울고 있는걸 보는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닌 걸?" "착각도 심하군. 누가 널 위해 울어?" "큭큭. 아니라고 우겨도 상관없어. 그보다···치료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하지? 그냥 생 기운만 빼는 것 같은데." "······" 라피스의 지적에 할 말을 잃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손을 거둬들였다. 그의 말마따나 아까부터 열심히 치유술을 시전 했지만, 전혀 먹히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계속 노력하고 있던 건데, 상처를 입은 본인이 지나치게 태연하니 오히려 치료하려고 분주한 내 자신이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요기꺼자 입니다..;; 아하하.. 죽어라 썼는데, 그다지 많지 않아서 좌절하고 있어요.. 흑흑.. 다음 분량은 언제 올리게 될 지 모르겠지만,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연재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마 저번처럼 오래 기다리시지는 않으실 거에요^^ 미네르바가 새로 가지게 된 <페르데스>란 이름은 급조한 것이었습니다; 명계의 신이 됐으니 적당한 이름을 붙여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어서 고민하다 결국 그리스 로마 신화의 죽음의 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의 이름을 합쳤다는;; <-이 최악의 네이밍 센스; 그럼 저는 마감하러 이만 가보겠습니다.ㅜ.ㅜ;; 부디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감상 달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ㅠ.ㅠ 원가 위험한 상황인데도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느껴지셔도, 워낙 가벼운 글이니까 그러려니...하고 이해해 주세요.. 흑흑.. [정령왕 엘퀴네스] 9-17. 절정! 그리고 결말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대부! 다치지 않았어? 은인은?" 카노스와 다른 3명의 정령왕들이 악신을 상대하고 있는 틈을 타, 나는 얼른 라피스를 한적한 장소로 옮겼다. 그러자 내 뒤를 쫓아왔는지, 아스와 다른 일행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들은 목을 비롯해 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입고 있는 나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더니,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라피스에 시선이 이르러서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희들은 이 녀석이 갑자기 끼어들 때 뭘 한 거야? 말리지 않고." "그게···너무 빨라서 미처 말릴 틈이 없었어. 은인, 괜찮은 거야?" 아스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라피스는 이번에도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대꾸했다. "꼬맹이. 네가 보기엔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아니, 무지 아파 보여." "그럼 알면서 뭘 물어? 지금 나 놀리는 거냐?" "그런 건 아닌데···얼굴이 너무 멀쩡해 보여서. 그거 진짜 다친 거 맞아? 그냥 다친 척 하는 거 아니지?" "뭐야?" "시끄러, 라피스. 걱정해서 하는 말에 일일이 토 달지마. 그러게 누가 끼어들래? 다 자업자득이라고." "쳇, 엘뤼엔 때는 암말도 안했으면서. 이런 식으로 차별하기냐?" 이 녀석은 꼭 엘뤼엔과 겨루려고 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한 때 스토커도 불사하면서까지 따라다닐 땐 언제고, 지금은 사사건건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정작 엘뤼엔은 놈에게 아무런 관심도, 취급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쉰 후, 일단 달래고 보자는 심정으로 건성건성 대답했다. "아버지한테도 나중에 뭐라도 할 거야. 부탁이니까 둘 다 제발 날 어린애 취급 좀 하지 마. 이런 식으로 대신해서 다쳐줘 봤자 하나도 고맙지 않다고." "네가 제대로 싸우면 이런 일도 없지." "아아, 그러셔? 그래, 다 내 잘못이고 내 탓이다. 아무튼 넌 여기서 꼼짝 말고 얌전히 있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누구든 위험한 짓 하면 정말 용서 안 할 거야.알았어?" 내 말에 이사나와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주위의 일행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 유일하게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아스의 부하이자 마계 공작이기도 한 데르온이었다. 그는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내가 의아한 얼굴로 다가가 말을 걸자, 그제 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랬다. "데르온, 내 말 안 들려요?" "···네, 네? 아··· 무, 무슨 말 하셨습니까, 엘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혹시 뭐 문제라도 있어요?" 그러자 그는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하며 힐끗 라피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재촉하는 시선으로 보자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저기···라피스님의 상처 말입니다. 치료는 안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예요. 어쩐 일인지 내 치유술이 전혀 안 통하는 상태거든요. 일단 카노스한테 가서 방법을 의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마신께 말입니까?" "네, 아무래도 신이니까 뭔가 대처법을 알고 있지 않겠어요?" "그거라면 됐어. 못 견딜 정도도 아니고, 이제 지혈도 된 것 같으니까." "어? 정말?" 갑자기 끼어든 라피스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꽤 심하게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거의 말라붙어 더 이상의 출혈은 없는 상태였다. 그것을 확인 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마조마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다행이다. 난 이러다 네가 출혈과다로 죽을 줄 알았어. 그런데 이상하네. 어떻게 지혈이 된 거지?" "드래곤들의 회복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이 정도야 본체로 돌아가면 금방 나아." "하지만 내 치유술이 안 먹힐 정도였는데···" "흥. 네 능력에 문제가 생긴 거 아니야? 악신 때문에 자연계의 흐름에 변동이 생겨서 그 영향을 받는다든가." "그, 그런가?" 묘하게 납득이 가는 말이었기에 나는 찝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어쨌든 그의 부상이 심하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데르온의 표정을 여전히 밝아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는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던 그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기···라피스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저는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되는 데요. " "에? 왜요, 데르온? 뭔가 짚이는 일이라도 있어요?" "네, 엘님. 저기···그러니까···지금 라피스님이 부상을 입으신 부위가 아무래도···" "부위? 배 말이에요?" 그러자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 있던 라피스의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당장 죽일 듯한 시선으로 데르온을 노려보며 낮게 협박하는 것이 아닌가? "쓸데없는 말 하면 죽인다." "쓰, 쓸데없다니요, 라피스님! 아무래도 그건 드래곤들에게···" "닥쳐! 정말 말이 많은 녀석이군. 넌 네 주군인지 대장인지 하는 꼬맹이만 챙기면 되는 거야. 그 이상의 참견은 이쪽에서 사양이다. 어디 죽고 싶으면 거기서 한마디라도 더 해보시지?" "윽···죄, 죄송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언젠가 라피스와의 대결에서 크게 혼쭐이 난 경험이 있던 데르온으로선, 그의 협박을 무시할 배짱이 있을 리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굳은 표정으로 라피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말이야, 라피스? 드래곤이 어쨌다고?" "그냥 헛소리야. 별 거 아니니까 넌 신경 끄고 네 동료들이나 도와." "별 거 아닌데 왜 데르온을 협박해? 내가 모르는 중요한 일인 거 맞지? 혹시 다친 곳과 관계있는 거야?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하다든가···" "거참, 답답하네. 지금 멀쩡한 거 보면 몰라?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아까 내가 도와줬다고 해도 거의 역소환 되기 직전 까지 갔었잖아. 한 순간 움직이지도 못했던 것 같은데." "아니, 나야 뭐···잠깐! 너 지금 말 돌리는 거지? 자꾸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하지만 나는 그 다음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이프리트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엘!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놀지 말고 당장 빨리 와서 도우지 못해!" 그사이 이프리트는 싸움의 고전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 못지않게 심한 상처를 입고 비틀거리고 있었다. 중간에 미네가 방어를 하는데도 저 정도였으니, 새삼 악신의 힘이 얼마나 강대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쳇, 할 수 없지. 너, 지금은 급하니까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아! 돌아와서 다시 얘기하자고. 알았어?" "그러던지." 피식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이는 라피스를 잠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본 나는, 곧 카노스와 악신이 겨루고 있는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떠나는 순간 불안해 보였던 데르온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다시 싸움에 가담하자 나머지 정령왕들도 한숨을 돌린 듯, 움직임이 눈에 띄게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얼떨결에 합류한 카노스 역시 단단히 한 몫을 하고 있었기에, 악신과의 전투는 여유롭지는 못해도 대충 '해볼 만한' 전개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요령 좋게 악신을 이프리트에게 떠넘긴(정령왕들의 상처가 늘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카노스가 내게 다가오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이, 엘뤼엔의 아들! 몸은 괜찮아?" "네, 견딜 만해요. 그런데 봉인진은 아직 멀었나요?" "움직임이 고정되어 있어야 진을 펼치기 수월한데, 보시다시피 놈이 한 자리에 가만히 있어야 말이지. 자칫 진을 펼치다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어서 신중을 가하는 중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론 결국 다 죽을 것 같은데요." 내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카노스 역시 동감이라는 듯 적극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악신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덧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 혹시 말이야. 아까 그 번개 공격을 역이용 할 순 없을까?" "에? 그 검은 번개 말이에요?" "그래. 좀 전에 너희들 싸우는 걸 보고 몇 가지 분석을 해봤는데 말이야. 다른 세 정령왕의 경우는 번개를 맞아도, 전류가 통과해서 그대로 지나가더군. 그런데 유달리 너만은 그걸 흘려버리지 못하고 고스란히 감당하더란 말야야?" "제가 아직 방어하는 요령이 부족해서 그런가 보죠." 내 시무룩한 대답을 들은 카노스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마도 그 번개는 물속에서 뭉치는 성질이 있는 것 같아. 그래서 네가 억지로 튕겨내기 전까진 일시적으로 그 안에 갇히게 되는 거지. 바로 그 점을 이용하면 될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요?" "놈이 번개를 내리치면 너도 물줄기를 쏘아서 그걸 묶은 다음 되돌려 보낸다거나, 아니면 시큐엘이나 운디네의 몸에 가둬서···" "웬만한 물로는 부딪치는 즉시 증발되던데요? 그리고 제가 직접 맞아봐서 알지만, 그건 하위 정령들로는 견디기 힘든 위력이에요. 번개를 가두기는 커녕, 맞자마자 곧바로 역소환 될 확률이 훨씬 높아요." 내가 차분히 반박하는 말을 꺼내가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더니, 죄책감이 깃든 얼굴로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그가 의도한 바를 깨달은 나는 뜨억한 표정으로 카노스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설마 날더러 번개 끌어안고 놈한테 뛰어 들라는 소리는 아니겠죠?" 왜 아니겠는가! 바로 부정하지 않는 것만 봐도 내 말이 맞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싶었는지, 그는 찔끔한 표정을 하며 어색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냐하하~ 원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번개에는 번개라잖아." "웃으면서 시선 피하지 마요. 그게 얼마나 아프지 알기나 해요? 그리고 설마 자기가 만든 번개에 맞는다고 꿈쩍 할 리가···"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원래 저런 놈들일 수록 스스로의 능력에 자폭하는 경향이 강하거든. 게다가 물에선 전류가 더 잘 통하니까 타격도 몇 배로 입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래서 결국 하라는 거군요." "하하하하하하! 원래 세상은 그런 거야, 소년! 다 같이 죽자는 위대한 희생정신! 정말 멋지지 않아?" 멋지기는 개뿔. 그러다 내가 먼저 죽으면 당신이 책임 질겨? 하지만 지금으로선 찬밥 더운밥을 가리고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희망이 있다면 어떤 방법이라도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결국 나는 카노스를 노려보던 것을 그만두고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일단 해보죠.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까." "오오! 멋지다, 엘뤼엔의 아들! 그럼 적당히 제압할 수 있을 때까지만 부탁할께~ 잠깐만 틈을 만들어 두면 나머진 착착 알아서 진행 될 거다." "이번에도 봉인진이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왠지 단어마다 하트가 들어간 듯한 말을 무시하며 되묻자 카노스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씨익 미소를 지었다. 뻔히 알면서 뭘 묻느냐는 건가? 쩝, 할 말 없군.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너에게 달렸어. 부담스럽겠지만, 한번 이 세상을 구원할 엄청난 영웅이 돼보라고, 물의 정령왕씨." "떠넘기는 주제에 말만 그럴싸하게 하지 마요. 이거 전부 다 빚으로 남겨둘 거예요!" "네네. 하지만 제발 엘뤼엔에게는 이르지 말아줘." "그거야 앞으로의 태도를 보고 결정해야겠죠!" "허걱. 너무해에~~" 카노스의 칭얼거리는 목소리를 뒤로하며, 나는 훌쩍 악신과의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그때 녀석은 다른 3명의 정령왕들에게 둘러싸여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각성이후 감각이 예민해진 것인지 기똥차게 내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곤 잽싸게 검은 번개를 일으켰다. 내가 그 공격에 가장 약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의도적으로 노릴 것이다. <어디서 감히 술수를!> 파지지직!! "엘!, 피해!!" 시꺼멓게 타오르는 전류는 놈의 손을 떠나 곧장 내게 달려들고 있었다. 그러자 트로웰을 비롯한 다른 정령왕들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으나, 나는 꿋꿋하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자 곧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끔찍한 고통과 함께 온몸이 저릿저릿한 전류로 휘감기기 시작했다. 콰지지직! 파아아아앙! "큭···!!" "엘!!" 악신이 만든 검은 번개가 물속에서 뭉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카노스의 말은 옳았다. 번개에 맞는 순간, 몸 안에 스며든 전류가 통과하지 않고 마치 물에 섞인 기름처럼 따로 뭉쳐져 떠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몸속을 배회하는 전류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버티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 순간의 고통이 너무 큰 바람에 나도 모르게 거의 본능적으로 전류를 튕겨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크윽. 장난이···아니잖아.이거···" 처음 시도를 허사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이를 악물고 버티는 나를 보며, 악신은 통쾌하다는 듯이 껄껄 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어떻게 된 거냐, 엘퀴네스! 기고만장하게 굴 때는 언제고, 지금은 아주 다 죽어가는 꼴이라니! 그래, 네놈 정령왕들의 실력도 여기까지 였구나!> 다행스럽게도 녀석은 내가 감전을 의도적으로 참고 있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그것에 대해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어느 때 복병이 될지 모르는 상대 앞에서 경각심을 잃어버리다니! 악신이 되었다고 머리까지 좋아지는 건 아닌 모양이다. ======================================= 시작~~~~!! [정령왕 엘퀴네스] 9-18. 절정! 그리고 결말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렇다고 내가 당장 뛰어들어 놈에게 번개를 선사해줄 만큼 상태가 좋았다는 소리는 아니다. 속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지금 생으로 벼락을 맞고 있는 상황이었고, 악신놈은 날 이렇게 만든 주범이자 가해자였으니, 여유만만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큭, 젠장···" 하지만 역시 아파 죽겠는데 누군가의 놀림을 당하는 건 썩 기분 좋지 않은 일이다. 당장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비틀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놈을 향해 띄엄띄엄 한 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것을 최후의 발악이라고 생각했는지, 고맙게도 악신 녀석이 직접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살았다···'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상황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내 앞에 선 놈은 이죽거리는 얼굴로 거만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크크큭. 벌레처럼 벌벌 거리는 꼴이 참으로 보기 좋구나. 네놈만큼은 반드시 잔인하게 죽여주마. 그 반반한 얼굴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말이다. 크하하!> "윽···웃기지···마···누가 너 따위한테···" <흥! 그렇게 건방지게 지껄일 수 읶는 것도 지금 뿐일 것이다! 네 녀석은 이제 단 한번에···> 악신은 그렇게 소리치며 내 멱살을 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몸에서 퍼져나가는 전류에 감전되어 처절한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파지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악!!> 카노스의 말처럼 놈이 내게 쏘아 보냈던 검은 번개는 그것을 만든 장본인에게도 고스란히 타격을 입혔다. 갑작스런 감전에 놀랐는지 악신은 약간 과하다 싶을 정도로 괴성을 질렀고, 나는 그 사이를 틈타 놈의 팔을 뿌리치고 자리를 피했다. "엘! 괜찮아?" "엘!!" 걱정이 된 동료들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지만, 나는 한손은 펴서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미처 한숨을 돌릴 여유도 없이, 열 받은 악신이 내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악! 네 이놈!!!> 쿠웅 콰가가가각! "아악!!" "안 돼! 엘!!"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놈이 폭파시킨 압력에 밀려, 족히 수 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땅 속에 파묻혀 들어갔다. 참기 힘든 고통에 의해 내 입에서는 제어하지 못한 신음소리가 흘러나갔다. "크흑···헉, 허억···" 머릿속이 윙윙 돌고 온 몸의 기운이 마치 역류하는 것처럼 뒤틀려, 나는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내가 억지로 몸을 가누려 애쓰는 동안, 악신은 구덩이의 위쪽에 자리한 채 두 손 가득 시꺼먼 전류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저 상태에서 곧바로 내게 번개를 내리칠 작정이었던 것이다. <네놈이 감히 얕은 수를 썼겠다!! 어디 네 꾀에 한 번 고스란히 당해 보거라!!> 퍼엉! 파지지직! 악신의 손에서 떠난 번개는 거대한 뱀처럼 꾸불거리며 내게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이번에야말로 단순히 위험한 수준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아마 운이 나쁘면 그 자리에서 소멸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십중팔구 역소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정령계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내가 역소환 하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경우 안 그래도 몸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라피스가 그 파장을 견딜 수 없을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인 이사나에게 그런 위험부담을 떠넘길 수도 없지 않은가? '젠장, 누가 그렇게 만들 줄 알고?'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한 구덩이 안에서 뛰어올랐다. 그러자 목표를 잃어버린 정류가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나를 노리고 따라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그것을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악신의 팔을 붙드는 것으로 간단히 해결했다. 나를 쫓아온 전기덩어리가 내 몸에 작렬하는 순간, 그것이 내 몸을 타고 돌 틈도 없이 곧바로 모아 고스란히 악신에게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콰지지직! 파지지지지지직!!! <크, 크아아아아악!!!> "허억···" "엘!!" 최대한 빠르게 몰아낸다고 했지만, 역시 나 또한 전류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도박과도 같은 시도가 성공하여, 악신이 최대한의 피해치를 전부 가져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꼼짝없이 그 자리에서 소멸할 뻔했다. '이, 이제 된 건가?' 전류의 이동이 완전히 끝난 것이 확인 되자 나는 붙들고 있던 놈의 팔을 놓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은 버틸 힘도, 일어설 힘도,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히 이번만큼은 악신 또한 타격이 컸는지, 내가 바로 앞에서 주저앉아 있는데도 부들부들 몸을 떨며 부릅뜬 눈으로 좀처럼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피부는 온 허물이 벗겨져 묽은 짓물을 잔뜩 머금은 데다, 여기저기 갈라져 고름 섞이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크으으···어, 어떻게 이런 일이···> 쥐죽은 듯한 침묵의 시간이 흐른 후, 악신은 놀라울 정도로 추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육체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로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악신의 시뻘건 눈동자에 커다란 분노의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정령왕 엘퀴네스!!! 이게 다 네놈! 네놈 때문에-!! 네놈이 감히!!!> 다시 말하지만 그때의 나는 온 몸, 심지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다. 만약 악신이 그자리에서 손톱을 들이밀었다면 피하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맞아 큰 부상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나 기적이 존재한다고 하던가? 그때 마침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온 붉은 쇠사슬이 악신의 몸을 칭칭 휘감으며 그의 몸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그의 공격을 대비해 눈을 감으려던 나는, 갑작스레 악신의 행동을 구속하는 기운을 느끼고 놀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신들이 다시 펼친 봉인진이 드디어 성공했던 것이다! "붙잡았어! 성공했다!!" "지금이라면 아직 소명 시킬 수 있어!" "와아아아아!" <크아악! 이놈! 이놈들!!!> 자신의 몸이 묶인 것을 깨닫자 악신은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쳤지만, 이번엔 진을 설치한 신들 또한 녹록치 않았다. 그들은 처음보단 훨씬 여유로운 자세로 버티며 그 앞에서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향해 하나 둘씩 있을 열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수고하셨소! 여긴 위험하니 이제 그만 뒤로 물러서시오!" "당신 덕분에 이런 기회를 다시 맞을 수 있었소! 신계를 대표하여 감가 인사를 드리오." "여어~ 수고 많았어, 엘뤼엔의 아들. 해낼 줄 알았다니까!" 신들과 함께 봉인진을 유지하고 있던 카노스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르는 날 향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몸은 괜찮은 거야? 일어날 수 있겠어?" "아···그게···" "엘! 괜찮아?" 내가 움직이지 않는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말을 더듬거리자 트로웰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했다. 그의 눈은 찔끔한 듯 시선을 피하는 카노스를 정면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카노스, 네가 엘에게 이런 일을 시켰나?" "아아, 미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방금 일은 엘퀴네스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었어." "핑계 대지마! 신 주제에 정령왕보다 능력치가 낮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 몸으로 직접 해도 상관없었을 텐데?! 굳이 엘에게 시킨 이유가 뭐야!" "이런, 이런. 흥분하지 말고, 내 얘기 좀 들어봐. 물론 신들이 정령왕보다 능력치가 높은 건 사실이지. 하지만 중간계에 내려오면 힘의 사용에 제한을 받는 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지금의 우리는 봉인진을 유지할 여력밖에 남지 않았어. 게다가 이곳 아크아돈에서는 신보단 정령왕쪽이 오히려 대기를 움직이거나 적을 공격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너도 알고 있잖아?" "하지만 엘이 소멸할 뻔 했어!" "그가 악신을 막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모두가 소멸했을 거다. 트로웰, 네가 엘을 형제처럼 생각하는 건 잘 알지만, 그는 보호받기만 하는 어린애가 아니야. 게다가 나 역시 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부탁하지도 않았을 거고." 카노스의 차분한 반박에 더 이상 따질 수 없었는지 트로웰은 평소에 좀처럼 볼 수 없던 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작 번개를 맞고 그걸 고스란히 악신에게 돌려주는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니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럴 때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들의 다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슬에 묶인 악신의 몸부림이 더욱 강해져서 진의 유지가 점점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아악!!> "크윽! 시간이 없소! 우리가 버틴다 해도, 놈이 날개를 완전히 다 꺼내면 전부 끝이오!! 어서 소명의 의식을!!" "페르데스! 페르데스는 뭘 하고 있는 건가!!" 다급한 신들의 외침에 저 멀리서 이제 막 정신을 차렸던 페르데스가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모두가 바짝 긴장한 가운데, 담담한 표정을 한 페르데스의 소멸의 주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주신께 창조 받은 자, 그 성결한 영혼의 삶을 버리며, 나 지금 이 땅에서 새로운 삷을 부여하고자 하오니···" <소명의 주문? 큭! 대체 무슨 꿍꿍이를!!> 그때서야 신들이 자신을 묶은 이유를 깨달았는지, 악신은 경악한 얼굴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페르데스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득한 살기를 느낀 듯, 악신과 눈이 마주친 페르데스는 주문을 외우는 중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였을까? 페르데스의 움직임이 어쩐지 점점 경직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트로웰. 페르데스가···" "응? 어라···왜 저러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멸의 주문을 외우고 있던 페르데스는 어느새 걸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왠지 탁하게 변해버린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멍한 빛을 띄웠다. 신들을 비롯하여 주위에 있던 동료들은 그의 행동이 갑자기 멈추자 당혹한 표정으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페르데스? 페르데스, 지금 뭘 하는 건가!!"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놈의 각성이···" "페르데스!!" 신들의 다급한 외침에도 페르데스는 마치 돌덩이처럼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본 신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정신을 차린다 해도, 이미 악신의 등에 솟아나던 날개응 거의 다 펼쳐진 상태였고, 중도에 끊겨버린 소멸의 주문은 처음부터 다시 외워야 할 판국이었던 것이다. 이 여러모로 진퇴양난인 상황 속에서 악신은 교활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크하하하하!!! 미련하고, 미련하구나! 결국 네놈들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다!!> "닥쳐라, 이 사악한!! 대체 무슨 술수를 쓴 거냐!!" "페르데스가 움직이지 않는 건 설마 네놈 탓인가!" "대체 무슨 짓을!" <하하하핫! 고작 이정도의 봉인진으로 내 능력을 모두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그는 내가 건 최면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다. 역시 악신의 능력이란 대단하군! 상급의 신조차 간단하게 최면술에 걸리다니!> "큭! 최면!!" 그러고 보니 내 탄생을 막기 위해 명계의 인물에게 최면술을 건 것이 바로 악신이었다. 아마도 페르데스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행동을 구속당하도록 최면이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뒤늦게야 놈이 가진 또 다른 특기를 깨달은 듯, 신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낭패어린 표정을 했다. 그것을 보고 상황의 우세를 판단한 악신은 더더욱 기고만장하여 소리쳤다. <네놈들이 무슨 꿍꾸이인지 몰라도 그의 소멸을 바라는 것 같으니, 스스로 주문을 외울 필요 없이 내 직접 녀석을 죽여주마!> 그와 함께 사슬에 단단히 동여져있던 악신의 팔이 슬슬 그 안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핏빛을 머금은 팔이 녀석의 앞에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페르데스를 향해 뻗어나가자, 신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사슬을 유지하던 기운에 더욱 힘을 불어 넣었다. "큭! 아, 안 돼!!" "봉인진의 위력을 높이시오! 이대로는!!" "정신을 차리시오, 페르데스!! 어서 피해!!" 악신과 함께 죽기 위해선 반드시 본인의 의지를 포함한 일종의 소명 의식을 거쳐야 한다. 만약 여기서 페르데스가 그냥 죽게 된다면, 그는 내세의 기회를 얻을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존재가 소멸될 것이 틀림없었다. "페르데스!!" 상황의 위급함을 깨달은 트로웰이 황급히 달려가 그의 몸을 끌어안았지만, 이미 악신의 손에선 검은 암흑의 덩어리가 생성이 되어 바로 그의 앞으로 던져지고 있는 상태였다. 쐐액! 바람을 가르고 날아든 것은 목표물인 페르데스의 앞에서 정확하게 폭발을 일으켰다. 퍼어엉! 콰아아아아앙! ======================================= 이런 쌩뚱맞은 절단이...-_-;; [정령왕 엘퀴네스] 9-19. 절정! 그리고 결말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안 돼! 페르데스! 트로웰!!!" "크악!!" "아아악!" 폭발의 위력에 휘말린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진을 유지하고 있던 신들 또한 그 파장에 떠밀려 잡고 있던 사슬을 놓쳐버렸던 것이다. "아아아! 봉인진이!!" "안 돼! 이럴 수는!!"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봉인진 마저 허무하게 무산되자 신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침통하게 소리쳤다. 이미 상당수의 신들이 폭발에 휘말려 부상을 당하거나 의식을 잃은 상황인지라 더 이상 그들은 봉인진을 설치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는 후들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며 정신없이 연기 속에 가려진 모습들을 찾았다. '페르데스는? 트로웰은 어디 있지? 다들 무사한 거야?' 나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모든게 끝이라는 결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안 좋은 방향으로 옮겨가려는 생각을 억지로 부정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모든게 끝이라는 결론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뭉게뭉게 퍼져가는 검은 연기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누군가의 형상이 드러났다. 두 개의 날개 중 이미 한 쪽의 날개를 완성해 버린 악신 카류안의 모습이었다. 힘이 강해진 탓인지 그가 나에게 입은 부상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치유되어, 이젠 거의 원상태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놈은 자신의 주위에 이리저리 흩어진 신들과 와해된 봉인진을 바라보더니 비웃는 것이 역력한 얼굴로 낮은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크크큭. 반항은 여기까지인가? 제법 재미있었다. 그다지 별 볼일 없었지만, 나에게 대든 그 용기만은 칭찬해 주지.> "크으으···" 그때 그의 발치에 쓰러져 있던 신들 중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어 놈의 다리를 붙들었다. 어떻게 해서든 악신의 움직임을 막아보려는 것이다. 그러자 악신은 얼굴을 팍 일그러뜨리며 거칠게 그의 몸을 걷어 찼다. 퍽!! "크헉!!" <흥! 이런 날 파리 같은 녀석이···> 넘어지면서 신이 흘린 피가 몇 방울 튀자, 놈은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그 순간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피부위에 묻은 핏발울들이 치익 소리를 내며 살짝 타들어 갔던 것이다. 워낙 적은 양인데다 치유가 빠른 탓에 악신 본인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얼핏 남은 옅은 화상 자국을 보아 타들어 간 것이 확실했다. "설마···" 캄캄한 동굴 속에서 간신히 출구를 발견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어쩌면 신의 피가 녀석을 다치게 할 수 있는 효과를 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며 적당히 실험에 동참 해 볼만한(?) 대상자를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근처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엘! 무사해?" "카노스!" 놀랍게도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폭발 때문에 정신을 잃은 듯이 보이는 페르데스를 함께 부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서며 다급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에요? 트로웰은?" "그 녀석은 페르데스를 보호하느라 폭발의 사정권에 완벽하게 휘말려서 손 쓸 틈이 없었어. 정령계로 역소환 됐다. 그 자리에서 소멸당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운이 좋은 셈인가." "하아. 그, 그렇군요." "안심할 때가 아니야. 페르데스는 정신을 잃었고, 봉인진은 와해된 데다 신들은 재기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아아 그러고 보니 엘, 네 몸은 어때? 괜찮은가?" 그렇게 말하며 묻는 카노스의 얼굴엔 드물게 미안한 감정이 묻어나 있었다. 아마 나에게 악신을 상대하라고 부탁한 일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아직 빠르게 움직이는 건 무리지만. 그런데 봉인진을 다시 만드는 건 어려울까요?" "일단 기절한 녀석들도 있으니까. 그리고 저 봉인진이라는 게 생각보다 힘을 많이 잡아먹거든. 그걸 두 번이나 했으니, 겉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지금 저들은 전심전력으로 악신과 전투를 벌인 상태와 다름없어." "헤에, 그런데 카노스는 굉장히 멀쩡하네요?" "마신의 특권이랄 수 있지. 성질 난폭한 녀석들을 다루려면 자연히 힘이 세질 수밖에 없거든. 어쨌거나, 이제부터 녀석을 제압할 수 있는 다름 방법을 궁리해야 겠군. 이거 골치 아픈걸? 시간도 별로 없는데." 악신이 우리의 모습을 발견 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검은 빛줄기를 느낀 찰나, 나는 갑자기 내 어깨를 부여잡고 옆으로 몸을 날리는 카노스에 의해 아슬아슬하게 놈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를 스쳐지나간 공기는 다음 순간 엄청난 폭발을 일으키며 주위의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슈우우욱! 콰아아아앙! "큭!" 시꺼먼 연기와 함께 강한 바람이 불자, 카노스는 주위의 정황이 진정될 때까지 내가 고개를 들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잠시 후 사납게 몰아치던 공기가 진정되자, 그는 낮은 휘파람과 함께 명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휘유~ 장난 아닌데? 괜찮니, 엘뤼엔 아들?" "네, 네···정신은 조금 없지만요."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를 억지로 추스르며 대답하자, 카노스는 빙긋 웃으며 거칠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그것을 탁-하고 쳐내며 거칠게 노려보는 존재가 있었으니··· "남의 것에 함부로 손대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 "라피스!!" 아직 몸의 부상도 쾌차하지 않은 주제에 느닷없이 싸움한복판에 나타난 라피스였다. 그 뒤를 따라 미네르바와 시벨리우스, 이프리트의 모습도 보이고 있었다. "엘퀴네스! 무사합니까?" "엘!!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미네! 어떻게 된 거야? 이 녀석이 왜 여기에? 게다가 시벨리우스까지!" 그러자 찔끔한 표정을 지은 미네가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그게···방금 전에 일어난 폭발 때문에 엘의 동료인 인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갔는데, 굳이 따라오겠다고 고집을 피우시더군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뭐? 시벨리우스!! 내가 거기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리고 라피스 너는 부상자인 주제에 뭘 하겠다고 여기에 오는 거야?" "미, 미안, 엘···하지만 너무 걱정이 돼서···" 움찔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벨에 비해 라피스의 태도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뭐가 문제냐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끄러. 멀리서 싸움 하는 것만 보자니 지루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아, 염려놔. 마족 꼬맹이랑 보호자 녀석은 따라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충고해주고 왔으니까." "···지금 상태에선 너보다 차라리 아스가 더 도움이 되겠다. 너 지금 다친 것에 대한 자각을 전혀 못하고 있는 거 아니야?" "글쎄." "글쎄라니! 정말 죽고 싶어서 작정했어? 그러다 상처가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쩔 거야?" 그 말에 라피스는 묵묵부답의 태도를 취하며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이기만 했다. 이 녀석, 단순히 시벨이 가겠다는 말에 경쟁심을 느끼고 따라온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생각에 나는 의심가득한 눈초리로 라피스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다음 순간 재차 이어지는 악신의 공격 때문에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크하하하핫! 모두 다 죽여주마! 그 몸을 갈가기 찢어서 피 한 방울까지 모조리 집어 삼켜주지! 네놈들의 피는 어떤 맛인지 궁금하군!!> '아! 맞다, 피!!' 콰가가가가각~!! "피, 피해!!" "크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는 다시금 일어나는 폭발의 파장을 피해 각기 일정한 장소로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우리가 모두 무사히 공격을 피한 것을 확인한 카노스는 무서운 눈으로 악신을 노려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큭, 젠장- 녀석에게 효과적인 공격 방법이 있어야 할 텐데. 마땅한 수가···" "아! 저기, 카노스!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부탁?" "네! 죄송하지만, 몸에 상처 좀 내도 될까요?" "엥?" 갑작스런 제의에 놀랐는지, 카노스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황당하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카노스의 팔을 잡아 얼음 칼로 제꺽 그어 피가 베여 나오도록 만들었다. 그러자 놀란 동료들이 만류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에, 엘! 무, 무슨 짓이야! 너 미쳤어?" "헉! 혹시 벼락을 맞으면 피를 마시고 싶어지는 겁니까? 그 벼락에 안 맞기를 천만다행이군요!" "흡혈하는 정령왕이라···제대로 궁상이군." "엘! 차라리 내 피를 줄게! 마신의 피는 마셔봤자 몸에 해롭다고!" 정정한다. 다들 그저 내 행동이 재미있었을 뿐이다. 오죽하면 칼에 베인 장본인인 카노스조차 킥킥 웃으며 어서 마셔보라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겠는가! "흐음~ 신의 피를 마신다고 힘이 더 세지 지는 않을 텐데? 엘뤼엔의 아들." "윽! 누가 이걸 마신댔어요? 왜 다들 오버하구 난리야!" "응? 그럼 갑자기 상처는 왜 만들었는데?" "그냥 한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어서···." "??"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한 채, 나는 카노스의 팔에서 흐르는 피를 두 손에 받은 다음 그것을 물에 실어 곧바로 악신에게 쏘아 보냈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위력이라곤 조금도 없는 단순한 물줄기에 불과해 보였다. 촤아악! <킥, 이건 또 무슨 장난이지?> 녀석은 자신을 향해 물줄기가 달려들자 피식 하고 비웃는 표정을 하더니 곧 한 손을 들어 그것을 가볍게 막았다. 마치 어린애가 쏜 물총을 간지럽다고 받아들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놈은 곧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물이 닿는 순간, 그의 손바닥이 치익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녹아들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크, 크아아아악!! 내손! 내손이!!> "빙고!!" 이로서 신의 피가 악신에게 해를 입힌다는 가정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이 의외의 전개에 놀란 카노스와 동료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맙소사. 손이 녹았어!" "방금 뭘 어떻게 한 거지, 엘? 어째서 물이···" "물이 아니에요. 카노스의 피 덕분이지." "내 피?" 아연하게 되묻는 그에게 나는 우연히 신의 피가 놈의 피부를 태운 것을 발견한 경위를 털어놓았다. 하지만 정확핮니 확인할 방법이 없어, 이런 식으로 카노스의 피를 얻은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러자 그는 한 방 먹었다는 얼굴을 하며 무언가 납득했다는 시선으로 악신을 바라보았다. "···그렇군. 악신이 사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반대되는 정결한 신의 피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이거라면 녀석을 좀 더 제압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물론 그러려면 카노스가 좀 많이 힘들긴 하겠지만···" "아니다, 엘. 쿡, 대단한데? 덕분에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어." "에? 중요한 사실이요?" 내 물음에 카노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단순히 소멸의 주문을 외운 채 뛰어들어 자폭하는 것만으론 놈을 죽일 수 없어. 한 신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피를 놈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 씌워야 하는 거다. 하마터면 생으로 애꿎은 신 하나만 죽일 뻔 했군." "헉, 굳이 한 신이 희생해야 해요? 그런 거라면 신들의 피를 조금씩 모아서···" "아니, 생명을 담보로 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요령은 통하지 않아. 목숨 하나에 목숨하나라는 소리지. 봉인진은 녀석이 그 피를 고스란히 뒤집어 쓸 수 있도록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수단에 불과했던 거다. 그래봤자 이 방법도 놈의 날개가 완전히 다 드러나면 말짱 소용없지만." "!!" 그 말에 우리는 다급히 악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막 거의 다 펼쳐지려는 날개가, 이미 상황이 최악의 끝을 달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카노스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엘, 일단 저 녀석을 묶어 둘 수 있을까? 내 피를 섞은 물로 주위에 물보라를 일으키면 간단할 것 같은데." "아···그렇군요. 해볼게요. 하지만 그 뒤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따로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놈을 붙잡아 줘. 아, 그리고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주위의 방어를 확실히 해주고." "방어?" "조금 후에 큰 폭발이 일어날 지도 모르거든." "??" 빙긋 웃으면서 건네는 말에 우리는 서로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그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손의 부상을 어느 정도 회복한 악신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어차피 붉은색으로밖에 안 보이지만) 우리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부웅-허공을 크게 휘젓는 긴 손톱은 정확히 나를 노리고 있었다. <크아아악! 엘퀴네스 네놈이 끝까지!!> "엘! 위험해!" 나는 놈이 이성을 잃고 덥비는 것을 피하며 카노스의 피를 담은 물을 놈의 몸에 칭칭 감아 올렸다. 피를 머금어 붉은 빛을 띄운 물줄기가 마치 뱀처럼 몸을 휘감자, 악신은 화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또다시 거센 비명을 토하기 시작했다. 치지지지지직! <크, 크아아아아아악!!!> 이렇게 효과가 좋을 수 있나! 진작 알았다면 봉인진을 만들 필요도 없이, 바로 이 방법을 썼을 텐데. 고생은 있는 대로 다하고 막바지에 알아내버렸으니 그 아쉬운 심정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기지인 듯, 동료들은 고통스러워하는 악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허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데 카노스는 대체 무슨 방법을 쓰려는 거지?'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고정된 것이 확인되자, 카노스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놈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에 팔에서 아직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확인 한 나는 미안한 마음에 얼른 다가가 치료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곧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듯 한손을 들어 보이는 카노스에 의해 곧바로 저지당했다. "엘, 위험하니까 너는 저쪽으로 가 있거라. 아직 몸도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잖아?" "에? 하지만 일단 치료는···" "아아, 괜찮아. 이 정도 쯤이야. 어차피 다 써야 하는 거니까." "···네? 다···쓰다니요?···!!···서, 설마 카노스!!" 그 순간 카노스의 의도를 깨달은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그의 팔을 붙들으려 했다.그러자 내 앞에 강한 바람이 터지더니, 내 몸을 주욱 밀어내며 순식간에 그에게서 멀찍이 떨어지게 만들었다. 파앗! 콰아아앙! "허억!" "엘!!" 마침 내 뒤쪽에 있던 라피스가 달려와 넘어지는 내 몸을 강하게 붙드는 바람에 꼴사납게 바닥에 구르는 꼴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난 잡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카노스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카노스! 안 돼! 그만 둬요!! 지금 뭘 하려는 거야!!!" 그러자 내 비명과 같은 외침을 들은 카노스가 악신에게 다가가던 걸음을 멈추더니, 슬쩍 미소 지은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냐하하! 엘뤼엔에겐 그동안 재미있었다고 전해줘라. 놈이 신계로 들어온 이후로 살아가는 재미를 조금 알게 되었거든. 꽤 좋은 친구였어."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카노스!! 당장 그만둬요! 그만!!" "아아, 이런 내 행동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이미 처음부터 계획한 일이었다고 말해주지. 이번 악신 녀석이 내가 창조한 마족이잖냐? 나 이래봬도 꽤나 책임의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신이라고. 피해보상은 당연히 해야 하지 않겠어? 원래 자식놈의 허물은 그 부모가 갚는 법이잖아. 창조신과 창조물의 관계도 그와 다를 바 없거든." "무슨···" 믿기 힘든 눈으로 바라보는 나를, 카노스는 따뜻한 시선으로 마주하며 생긋 웃었다. "너 같이 귀엽고 말 잘 듣는 녀석을 아들로 둔 엘뤼엔은 죽어도 내 심정 모를 테지. 그는 분명 지금의 내 결정을 한심하게 생각할 거다. 하지만···이런 녀석이라도 나에겐 소중한 자식이야. 그래서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몇 번이고 기회를 다시 줄 수밖에 없었다." "카노스···" "···라는 건 거의 핑계고, 역시 신계의 삶은 별로 재미없어. 평탄하긴 한데 지루하고! 스릴이 너무 부족해. 나같이 자유분방한 성정에는 갇혀 지내는 삶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젠 좀 신나게 놀고 싶달까?"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나는 전혀 웃을 수 없었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불고 가볍게 말을 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윽···흐윽···" 나는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는 쯧쯧 혀를 차며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너는 수없이 많은 이별을 경험하게 될 거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은 눈물을 아껴두는게 좋아. 나중엔···흘리고 싶어도 말라버려서 나오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카노스···" "하긴 뭐, 그게 또 엘의 매력이긴 하지만. 너를 보면 엘퀴네스들도 그다지 성격이 더럽지만은 않다는 걸 느끼게 돼서 기분이 좋다니까. 그래서 엘뤼엔이 널 덥썩 아들로 삼았는지도 모르지. 쿡쿡."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혼자서 연신 키득거리던 카노스는 움직임을 제압당한 채 몸부림을 치고 있는 악신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놈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진득한 슬픔으로 젖어 있었다. "마족으로서 어느 정도의 교만과 욕심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때의 방관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게도 똑같은 죄가 적용되는 것일 테지." <크윽! 무슨 헛소리냐! 죽일 테다! 네놈은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 "추악한 영혼이여, 이미 너는 네 소원을 이루었다. 악신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하고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지거라. 길동무라면 내가 기꺼이 되어주지." <대체 무슨 짓을!!> "카노스!!" 그 순간 이어지는 것은 카노스의 몸에서 붉은 핏물이 치솟아 오르는 광경이었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가른 카노스가 그 피를 악신에게 퍼부었던 것이다. 촤아아악! 그것은 카노스 본인의 의지를 타고 마치 물기둥처럼 두 신의 주위를 감싸며, 그들의 머리부터 온 전신을 흠뻑 적시었다. 그러자 핏물에 잠긴 악신의 형체가 지글지글 타오르며 그 자리에서 서서히 녹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크, 크아아아아아악!!!!안 돼! 내 몸! 내 몸이!!> 악신은 진흙처럼 밑으로 흘러내려가는 자신의 살덩이들을 바라보며 절망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그와 함께 놈처럼 피투성이가 된 카노스의 몸이 서서히 뒤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아닌가! '쓰러진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나는 무의식중에 달려가 그에게 팔을 뻗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예상치 못한 방해에 밀려 중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녹아들던 악신의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던 것이다. 파아아앗! <크아아아아아악!!> 순식간에 악신의 몸을 휘감은 빛은 그 앞에 있던 카노스까지 집어삼키고도 끝없이 범위를 확장시켜 나갔다. 잠시 후 그것은 둥근 원형의 기둥의 모양을 이루며 마치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올라가더니, 곧 높은 하늘 위에서 엄청난 압력을 동반한 광대한 폭발을 이루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쿠와아아아아아앙!! "아악!" "엘!!" 갑작스런 압력에 밀려 중심을 잃는 나를 라피스가 급히 붙잡아 지탱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순간, 눈도 뜰 수 없을 만큼 밝은 빛의 폭발 속에서 나는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카노스의 모습을 발견했다. "!!" 그때만큼은 그와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움직임이 멈춘 것 같았다. 매우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의 입가에는 밝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차마 아무 말 못하고 멍하게 바라보는 나에게 그는 입을 벌려 뭐라고 중얼거렦다. 주위의 소음과 먼 거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지만, 입모양을 통해 나는 대충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엘뤼엔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정해줘.> "아······" 그 말을 마지막으로 카노스의 모습은 폭발하는 빛 속에 완전히 파묻혀버렸다. 악신과 함께 소멸의 과정에 휩쓸린 것이다. "카, 카노스!! 크윽!!" "엘! 고개 숙여!" 끝까지 그를 찾으려고 고개를 내밀었던 나는 이후 이어지는 모래바람과 빛의 향연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를 라피스가 보호하듯 위에서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폭발음! 쿠웅! 콰아아아아! 거대한 연기가 강한 바람 속에 뭉쳐 일어나는 모습은 마치 TV나 사진 속에서나 보았던, 핵폭발의 장면과 흡사했다. 그 파장 때문에 황성을 비롯한 주위의 건물까지 부서져,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 속에 매캐한 연기와 커다란 벽돌의 잔재들이 섞여 다녔다. "큭, 젠장. 역시 이대로는 힘든가?" "라피스?" "넌 계속 고개 숙이고 있어!" 그때, 나를 감싸고 있던 라피스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본체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폭발의 압력에서 버틸 수 있도록, 육체의 능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삐이이이이익!> 순식간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변한 라피스는 그의 날개 죽지로 내 몸을 덮은 채 정면에서 폭발의 기운을 막아서기 시작했다. 녀석의 무모한 행동에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라피스, 지금 뭘 하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나 어서 피해!" <시끄러! 입 다물어!> 얼마나 지난 걸까? 악몽과도 같은 한참의 시간 후 이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땐, 우리 앞에 휑하게 파인 거대한 구덩이와, 폐허라고 불러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초토화된 주위의 풍경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고서도 나는 한참동안 눈앞의 상황을 믿을 수 없어 꼼짝도 하지 못했다. "끝난···건가? ···전부?" 나는 멍한 표정으로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카노스와 악신 카류안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이미 그 두 존재의 모습은 폭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분수처럼 솟았던 핏자국이나, 육체의 찌꺼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 아하하하하하하~~ 카노스 팬분들께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도 카노스 팬이었어요;ㅁ; 흑흑흑흑. <-그런데 왜 죽여!! [정령왕 엘퀴네스] 9-20. 절정! 그리고 결말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끝···끝이다!" 그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들 중 하나가 큰 목소리로 외치응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사라진 악신과 안정을 되찾은 주위의 기운을 둘러보며 미친 듯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악신이 소멸했다!! 우리가 이겼어! 우리가 이겼다고!!" "정말인가? 정말 악신이 소멸했단 말인가?" "세상에! 악신이 소멸했어!! 소멸했다고!!" "오오오오!!" 두 번이나 봉인진이 실패하는 바람에 자포자기 하고 있던 신들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음껏 기뻐했다. 그들은 악신이 없어졌다는 사실에만 정신이 팔려, 정작 그를 위해 희생한 신이 누구인지,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느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봉인진의 와해 후 의식을 잃은 대다수의 신들이 이제야 정신을 차린 셈이니 그간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엘! 무사합니까?" 주위의 거센 기운이 완전히 진정되자, 일행들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미네가 서둘러 내게 달려와 물었다. 마음은 허전한데 눈물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왜일까. 나는 여전히 휭하게 비어버린 구덩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다행입니다. 용케 멀쩡하시군요." "미네···카노스가···죽었어." "예, 알고 있습니다. 저도 봤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해. 왜 눈물이 안 나오지? 마음은 슬픈데···어쩐지···울어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러자 미네는 푹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내 어깨를 툭툭 다독이기 시작했다.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입을 열었다. "당연한 일에 당혹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의 죽음은 불행하지 않았으니까요. 누구든 친구가 멀리 여행을 가버렸다고 해서 울지 않습니다. 그저 아쉬운 감정만 있을 뿐이죠." "···여행?" "네, 여행입니다. 앞으로 그는 수많은 내세를 보내면서 죽을 때마다 반드시 명계에 돌아오게 될 겁니다. 카노스를 다시 만날 수단은 얼마든지 있는 겁니다. 제가보기엔 엘은 그 사실을 본능덕으로 깨닫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 그러고 보니 카노스는 영혼의 성질만 바뀔 뿐, 완전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이 되더라도 죽으면 명계로 영혼이 되돌아 올 것이고, 그때마다 새로운 삶을 부여받으리라. 그건 드래곤이 유희를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그렇구나." "이제 안심이 되셨습니까?" "으응, 미네··· 다른 일행들은?" 그러자 미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시의 뒤편을 가리켜 보였다. 그곳에 페르데스를 포함한, 이프리트와 시벨리우스가 나란히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순간 흠칫 놀라던 나는, 그들의 몸에 큰 생채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절···한 건가?" "네, 의식을 잃었지만 모두 무사합니다. 방금 실프를 통해 다른 쪽에 있던 마족과 인간들도 안전하다는 것까지 확인한 참입니다." "아아, 그래. 이사나와 알리사도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폭발에 휘말릴 거라 생각했는데···" 엄청난 돌풍 의해 악신이 소멸한 주위는 완전히 폐허처럼 변해버렸고, 그 파장은 꽤 멀리까지 이어진 상태였다. 그런 중에 연약한 인간인 두 사람이 무사했다는 건, 아마도 아스와 데르온이 그들을 보호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에 안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에게 미네는 힐책하는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할 소리입니다. 엘이야 말로 너무 그들의 가까이에 있었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폭풍에 직접적으로 휩쓸렸으니···난 틀림없이 엘이 소멸하거나, 역소환 됐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 난 괜찮아. 라피스가 본채로 변하면서까지 막아줬는걸. 아참! 라피스는?" 내 만류에도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던 녀석은, 꿋꿋하게 폭발의 흐름을 맨몸으로 버텼다. 하다못해 실드라도 전개했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때는 녀석도 정신이 없었던 건지 마나의 운용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부상 중인 몸이 그런 기운을 감당하고도 멀쩡할 리 없을 터!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여전히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형체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라피스는 두 날개를 추욱 늘어뜨린 채 기절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나 생기발랄하던 기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녀걱의 몸에선 시체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악신에게 당했던 상처는 본체로 돌아가자 더더욱 크게 두드러져 보여, 새삼 그가 입은 부상이 얼마나 큰 것이니 실감이 들게 만들었다. 한 방울씩 투욱 떨어지는 핏방울을 보니, 간신히 지혈된 부위가 다시 터진 모양이다. "라피스? 너··· 괜찮은 거야?" 왠지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에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마음 같아선 몸이라도 흔들어 보고 싶었지만, 툭하고 치면 넘어질 것 같아 차마 건드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말도 안 돼. 이렇게 큰 덩치에서 건드리면 쓰러질 것 같은 위태로운 느낌이라니···' 내 표정이 불안해지자, 미네 역시 난감한 얼굴로 라피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입을 꾸욱 다문 채 한 치의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는커녕, 숨을 쉬는 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라···피스?" "엘,아무래도 이 드래곤은···" "응? 무슨 소리야, 미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미네는 하려던 말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그때 마침 기절했던 페르데스가 정신을 차리는 바람에 우리의 시선은 자연히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으응···아, 이런! 내가 또 의식을···" "페르데스! 정신이 들어?" "아? 엘! 모두들···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은? 그리고 악신은 어디에 있지?" 그녀는 자신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이프리트와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발견하곤 당황한 듯 얼굴을 굳히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완전히 폐허가 된 주변과 거대한 구덩이에 시선을 미치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악신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페르데스. 이미 소멸했거든." "소멸이라니? 어, 어떻게? 그런데 왜 나는 멀쩡한 거지? 두 번째 봉인이 성공하고, 분명 내가 소멸을 하려고 주문을···" 아마도 그녀는 최면에 걸린 순간부터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자 미네가 나를 대신해거 혼란스러워 하는 페르데스에게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멸의 의식은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봉인진이 와해되고, 신들은 의식을 잃거나 재기불능의 상태가 도었지요." "그,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엘이 악신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서, 의식을 전개시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페르데스님을 대신하여 소멸을 자처하신 신이 계셨기에···" "누구지,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묻는 페르데스는, 이미 소멸한 신이 누구인지 짐작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악신의 소멸을 기뻐라고 있는 신들 중에서 유독 한 존재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나 눈에 띄는 자였기에, 그의 공백 또한 그만큼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네가 그의 이름을 말했을 때, 페르데스는 충격을 받기 보단 '역시···'하며 침통하게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결국 카노스···였구나. 그일 거라고 예감을 했지만···대체 그가 어째서···" "책임을 지겠다고 했어. 마족 중에서 악신이 탄생한 것을 내내 마음에 걸려했었던 것 같아." "하아, 하긴. 그는 마족들을 유달리 아꼈지. 자신이 창조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단순한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의 자식처럼 대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이번 소멸엔 그도 자원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신들의 반대 때문에 통과되지 못했었지만." "반대했다고? 신들이?" 의외의 소식에 나와 미네는 놀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페르데스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카노스는 주신이 창조한 신들 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의 신이야. 가장 최초의 엘퀴네스임과 동시에, 주신의 뜻에 따라 처음으로 한 종족의 창조를 허락받은 존재지. 태어난 순서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건 아니지만, 그의 존재는 신계에서도 특별해. 누구라도 잃고 싶지 않았을 거야." "···그랬구나." "뭐, 우리한텐 슬퍼도, 그에겐 잘 된 일일지도 모르지. 그가 신계에서의 삶을 무료해한다고 들었거든. 그래서 주신께서 특별히 그에게 만큼은 마계에서 장기간 유희를 즐기도록 허락 하신 거고." 그렇게 말하는 페르데스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녀는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돌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치사하게 남이 기절한 사이에 새치기를 하다니. 분명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던 일이겠지. 일부로 안 깨운 게 틀림없어." "응? 페르데스, 지금 뭐라고 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트로웰은···" "정령계로 역소환 됐다고 들었어. 지금쯤 땅의 영역에서 기운을 회복하고 있을 거야. 그런데···" "응? 엘, 표정이 왜 그래?" 걱정스럽게 묻는 페르데스의 말에 나는 말없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나를 따라서 위를 바라본 그녀는, 마치 동상처럼 굳어있는 라피스를 발견하곤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레드 드래곤? 이마의 저 문장은···세상에, 엘, 너의 계약자니?" "으응. 그런데 라피스가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아. 아까부터 불러도 눈도 뜨지 않고. 서, 설마 어디가 잘못 된건 아니지?" "으음···저 부상은?" "나를 보호하려다가 악신에게 당한거야. 치유술을 썼는데도 전혀 먹히지 않아." 왠지 아까보다 페르데스의 안색이 나빠졌다고 느낀 것은 나뿐일까? 그녀는 미네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불안해하는 나를 보며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곧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 잘 들어. 지금 하는 말에 네가 큰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무슨?" "저 드래곤의 영혼은···이미 육체를 떠났어. 지금 남아있는 것은 주인을 잃은 빈껍데기일 뿐이야." "···뭐?" 나는 잠시 동안 그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렸다. 그런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페르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난처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부상을 당한 부위가 나빴어. 아무래도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된 것 같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거다." "드래곤···하트?" "인간들로 치면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마나를 모아서 통제하는 기관이지. 드래곤들은 그 부위가 파괴되면 끝이야. 어지간하면 파괴되지 않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상대가 악신이라면 사정이 다르겠지." "아···" 그러고 보니 그때 데르온이 안절부절하며 걱정했었던 것 같다. 아마 그는 라피스가 입은 상처가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일지도 모른다. 그때 왜 더 채근해서 알아내지 못했던 걸까. 그의 괜찮다는 말에 넙죽 안심했던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엘. 괜찮아? 안색이···" "아, 아니. 난 멀쩡해. 저,저기···페르데스···가 착각 한 건 아니지? 정말 영혼이 없어? 라피스가···정말···" 죽었느냐고 물으려던 말은 목에 가시가 박힌 듯 걸려 나오지 못했다. 왠지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것이 정말 현실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없어···아까 전까지만 해도 말도 했었어. 부상당한 주제에 날 보호하려고 해서, 그만두라고 했더니···날 보고 시끄럽다고···" "엘···" "괜찮다고 했어. 그래곤은 회복력이 빨라서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식은땀도 안 흘리고 안색도 나쁘지 않았는데···그런데 어째서···" "엘, 일단 진정해. 너 지금 너무 동요했어." 페르데스는 내 어깨를 잡으려고 했지만, 나는 뒤로 주춤 물러서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어떻게 쉽게 인정 할 수 있겠는다! 지금의 내게는 페르데스의 말이 질 나쁜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드래곤 하트가 파괴되었다면!! 라피스도 알았을 거 아니야! 자기가 죽을 거란 걸 그때 이미 알았단 소리잖아! 그런데 왜 나한테는 한마디도···적어도 한마디라도··· 했어야 했잖아···" "엘, 그건···" 페르데스는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듣지 않고 곧바로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라피스에게 다가갔다. 숨을 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의 육체에 흐르는 기운에 생기가 전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죽음'이라는 단어와 연결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녀석의 말마따나 드래곤은 최강의 종족이었으니까. 겨우 그 정도의 상처에, 그 정도의 폭발 때문에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크게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라피스···대답해." "······" "대답해, 라피스. 눈을 떠! 몸을 움직이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라피스 라즐리!! 제발 일어나!" "엘, 그만 둬. 그런다고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오진 않아." "죽지 않았어!" "엘···" "죽지 않았어. 죽을 리가 없어!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자신의 죽음조차 밝히지 않고 떠날 리가 없어. 그 잘난 척 하는 녀석이 그럴듯한 유언도, 잘 있으라는 말도 안했단 말이야! 아무 말도 없었어! 정말 아무것도!!" 그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믿을 수 없는 걸지도 모른다. 적어도 카노스는 자신이 죽는다는 의사를 확실하게 표현했다. 때문에 슬프고 괴로워도 마음을 달래는 것 역시 빨랐던 것이다. 아니, 최소한 녀석이 날 보호하려고만 하지 않았어도, 그것 때문에 다친 것만 아니었어도 나는 좀 더 이 상태를 차분히 인정했을지 모른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내 머릿속에서는 언젠가 라피스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다친 사람이 엘뤼엔이 아니라 나였다고 해도, 넌 아까처럼 분노해서 마족 녀석과 싸웠을까?> 그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아, 그래.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아니라고 하면 녀석이 무척 서운해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녀석은 어린애처럼 좋아하며 이렇게 대답했었다. <좋아. 다음에도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내가 너 대신 죽어주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가 나대신 뛰어들어 다쳤을 땐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래도 살아날 자신이 있기에 가볍게 하는 말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화만내고 말았던 건데···설마, 라피스는 전부 진심이었던 걸까?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 갑자기 들려온 낯익은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며 소리가 들여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살풋 찡그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투욱. 어느새 볼을 따라 흘러내려가는 눈물을 느끼며 나는 작은 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엘뤼엔···" ======================================= 아하하하.. 그저 죽여주십...<-퍽!! [정령왕 엘퀴네스] 9-21. 절정! 그리고 결말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뭐야, 너 설마 우는 거냐?" 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엘뤼엔은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에서 악신의 소멸을 자축하고 있던 신의 무리를 향해 버럭 소리쳤다. "너희들 조용히 안 해! 내 아들이 울고 있는데 무슨 짓거리들이야!" 그러자 한껏 기쁨에 취해있던 신들의 얼굴이 마치 얼음처럼 쩌억-굳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엘뤼엔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다. "헉! 에, 엘뤼엔?" "엘뤼엔! 다,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어, 어찌 된 겁니까? 아직 당신은 치료가 필요한···" "호오~ 빛의 신, 지혜의 신, 생명의 신. 너희 셋 기억 해 두지. 내가 언제 너희들에게 날 아는 척 해도 된다고 했던가?" "헉!" "크흡!" "그, 그런···말씀은 안하셨지요, 분명히···하하하하···" 지명당한 세 명의 신이 새파랗게 굳은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자, 반대로 나머지 살아남은(?) 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축게분위기를 파토 내 놓은 엘뤼엔은 불쾌한 표정으로 라피스의 모습을 보곤, 내가 우는 이유를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찰거머리 도마뱀이 죽은 거냐?" "······" "게다가···그 상처는 뭐야? 몰골이 말이 아니군. 왜 도움이 되라고 보낸 신들은 멀쩡하고 너희 정령왕들이 처참한 상태인거냐?" "!!" 악신을 물리쳤다는 것에만 기뻐하던 신들은 그때서야 우리의 상태를 제대로 돌아본 듯 했다. 그들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뭔가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에, 엘뤼엔- 그, 그것은···" "닥쳐, 너한테 대답하라고 한 적 없어." "헙! 넵!" "젠장, 소멸한다고 나섰던 신은 멀쩡히 살아있고, 당연히 있어야 할 놈은 보이지 않는데다, 하나뿐인 아들내미는 울고 있고···완전히 뒤죽박죽이군. 엘, 네가 말해봐라. 악신과 함께 소멸된 녀석은 누구지? 그리고 저 도마뱀은 왜 죽은 거냐?" 차갑게 묻는 목소리와 달리,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다정한 빛을 담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갑자기 서러운 감정이 치솟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 했지만, 나는 애써 참은 채 더듬더듬 대답하기 시작했다. "소멸은···카노스가···" "!!" "뭐, 뭐라고? 그, 그게 정말이오, 정령왕 엘퀴네스?" "카, 카노스가 소멸되었단 말인가!" "큭! 어떻게 이런 일이!" 희생된 신이 누구인지 들은 신들은 놀란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어지는 엘뤼엔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의해 동요하던 입을 꾸욱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몰랐다'는 사실은 자랑이 아닐 텐데?" "······" "녀석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너희들이 그만큼 제대로 역할을 못했다는 뜻이겠지. 입 닥치고 가만히 듣고나 있어. 질문은 그 다음이다." "며, 면목이 없소." "끄응···" 신들이 저마다 민망한 얼굴로 입으 다물자, 엘뤼엔은 다시 나를 빤히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서 다음 말을 이으라는 뜻이다. 그는 카노스가 소멸했다는 말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듯, 여전히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기···소멸하기 전에···고마웠다고 전해 달랬어···" "흥! 민폐를 어지간히 끼쳤다는 건 알긴 알았던 모양이군. 끝까지 재수 없는 녀석. 그래서? 저 도마뱀은 왜 죽어있는 거냐?" "그게···나를 보호하다가···" "호오? 너를?" 그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니, 갑자기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할기 갈피가 서질 않아, 나는 점차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악신이 나를 공격했는데···내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아서···그때 라피스가···흑···나 때문에···다쳐서···흐윽···괘, 괜찮다고 했는데···" "엘? 울지 말고 똑바로 설명해. 그래서 어떻게 됐다고?" "드래곤···하트가 파괴됐대. 이미 영혼이 떠나서···없다고···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자, 작별인사도 못 했어···죽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을···흐윽···" "작별인사? 그게 중요하냐?" "당연하지! 아무 말도 못했단 말이야···정말 아무 말도···" 하지만 거기까지 들었는데도 엘뤼엔의 표정은 여전히 별 변화 없이 무감각학만 했다. 그는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며 무서운 눈으로 라피스의 모습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우는 거란 말이지? 흐음. 별 시덥잖은 도마뱀이 남의 귀한 자식을 울리다니. 이미 죽은 녀석을 가지고 팰 수도 없고, 난감하군. 아아, 그래. 명계에 가서 놈의 영혼이라도 손봐줄까?" "···응? 무슨 소리야?" "아직 그 도마뱀에게 다른 인생이 부여되지는 않았을 거다. 악신 때문에 명계 녀석들도 정신이 없어서 일이 밀렸다고 들었으니까. 영혼이라면 아직 만나볼 수 있어. 작별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란 소리야. 그럼 괜찮겠냐, 아들?" "아···" 그때서야 그가 하려는 말을 깨달은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가 나를 명계로 데려가 라피스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소리인 것이다. 설마 그런 방법이 가능할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한 상태에 빠져 버렸다. 그러자 엘뤼엔은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툭툭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능력 좋은 아버지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작별인사 정도로 성이 안찰 것 같으면 그 녀석은 특별히 이 아크아돈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조치해주지. 이미 한번 끊긴 인연이라도 다시 이으면 그만이야. 너라면 금방 익숙해질 거다." "아, 아버지···" "호오, '아버지'라···꽤 듣기 좋은걸. 아무튼 이제 그만 울어라. 방법이 생겼는데도 지난 과거에 매달리는건, 어리석은 놈들이나 하는 짓이니까. 거기 있는 너희 두 놈도 마찬가지야." "!!" 뜬금없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가 응시하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가, 낯선 청년 두 명이 서있는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이는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그들은 하나같이 준수한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한사람은 몸이라도 안 좋은 건지, 창백한 안색에 병색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그들은 엘뤼엔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챘다는 것을 깨닫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정중한 인사를 건네왔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형벌의 신 엘뤼엔님이시군요. 만나 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그러는 너희들은 드래곤인가? 블랙일족이로군." 드래곤이라는 말에 나는 다시금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고 있었다. 그 중 대답한 자는 안색이 나빠 보이는 청년 쪽이었다. "맞습니다. 저는 블랙 드래곤 일족의 수장, '라이칸 블랙 디아곤'이라고 합니다. 제 옆에 있는 녀석은 아들인 메세테리우스입니다." "너희들의 이름엔 관심 없다. 여긴 무슨 용무지?" 시비 거는 듯한 엘뤼엔의 말에도 수장이라는 드래곤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잠시 말없이 라피스의 모습에 시선을 보내던 그는 곧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 녀석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려고 왔습니다. 저대로 두면 인간들에 의해 시체가 악용될 수 있으니까요." "흐응~ 동족의 명예를 지키자는 건가?" "그런 의미도 있고, 저런 못난 아들이라도 제 손으로 직접 보내는 편이 마음에 위안이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아들이라니! 그럼 라피스가 저 드래곤의 자식이라는 소리인가? 그러고 보니 라피스로부터 아버지가 블랙드래곤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트로웰의 계약자라고 했던가? '으음···안색이 안 좋은 건 그래서였군." 계약된 정령왕이 연속으로 두 번이나 역소환 되었으니, 제 아무리 드래곤의 수장이라도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당연했다. 저런 몸으로도 아들의 화장을 치르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을 보니, 그가 얼마나 라피스를 아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왠지 가슴이 따끔하게 아파와 나는 슬그머니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라피스가 죽은 것은 나 때문이다. 저 드래곤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용서하지 못할 원수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난당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그런 식으로 또다시 라피스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그들의 모습을 외면하고 있는 사이, 엘뤼엔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한 손을 휘저으며 시큰둥하고 대답하고 있었다. "너희들 좋을 대로 해라. 나는 여기 뒷수습만으로 충분히 귀찮으니까." "뒷수습이라면···" "이렇게 야단이 났는데 목격한 인간이 없을 리 없지. 어디보자, 기억의 시간을 과거로 돌리면 되려나?"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실 생각이십니까?" 무척 의외라는 듯이 묻는 블랙 드래곤 수장의 말에 엘뤼엔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그건 아니지만. 왜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기억하면 기억하는 데로 남겨둬도 괜찮으실 텐데요." "인간들은 쓸데없는 환상을 지어내는 종족이니까. 나는 진실이 왜곡되는 걸 달가워하지 않을 뿐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없었던 일이 되어버리는 쪽이 낫거든." "아아. 하긴···지금 일을 목격한 인간이라면, '신들의 전쟁'이란 거창한 제목이 붙어도 이살할 게 없군요. 그리고 전쟁이 일어난 이 땅은 성역(聖域)이 되어 대대로 인간들의 추앙을 받게 되겠군요." "그러니까 바로 그게 싫다는 거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엘루엔은 혐오감 가득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더니 주위에서 멀뚱히 서있던 다른 신들을 향해 삐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만 신계로 돌아가. 중간계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도 슬슬 한계가 되었을 테지." "우, 우리도 수습을 돕겠소, 엘뤼엔. 인간들의 기억도 그렇고, 엉망이 된 터전도 다듬어야 할 것이 아니오. 그래 혼자서는···" "흐응. 그래도 책임의식은 있다는 건가? 그럼 알아서 고쳐 보던지. 엘, 너는 기절한 녀석들이나 전부 깨워라." "으응···" 그러자 두 드래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나를 흩어보며 왠지 감탄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엘'이라면···혹시 정령왕 엘퀴네스가 바로 당신입니까?" "아, 그게···" "오오! 그렇군! 라피스 녀석이 말한 거랑 똑같잖아! 푸른색 머리카락에 눈동자, 딱 계집애처럼 생긴 얼굴!!" "···뭐라?" 방금 그렇게 말한 것은 메세테리우스라는 이름의 드래곤이었다. 그 역시도 수장의 아들이라고 했으니, 라피스와는 형제인 셈이다. 내 표정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어지자, 수장 드래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른 아들을 나무라기 시작했다. "메테! 정령왕께 말버릇이 그게 뭐냐!" "쳇, 난 그냥 들은 대로 말 한 것뿐이라고. 여성체인 정령왕에게 계집애 같다고 한 게 틀렸나, 뭐?" "윽! 난 남성체야!" "그것 봐, 자기 입으로도 남성체라고···엥? 나, 남성체?" 낄낄거리며 내 말을 받아 이으려던 녀석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달리 형제겠는가! 누가 피 섞인 드래곤 아니랄까봐 어째 하는 짓이 이렇게 똑같은 거야! "헤에? 정말 남성체야? 거짓말이 아니라?" "메테, 너 이 녀석! 에, 엘퀴네스, 미안합니다. 워낙 철이 없는 녀석이라···" "그치만 아버지! 저 얼굴이 어떻게 남성체가 될 수 있어? 언제부터 남자 녀석들이 저렇게 곱상한 얼굴이었다고? 난 라피스가 엘퀴네스에게 목맨다고 하길래, 정령왕과 드래곤의 희대의 로맨스를 기대했단 말이야! 아! 설마 라피스가 여자 역이었던 거야?" "메세테리우스!!" 설마 라피스보다 나를 더 열 받게 만들 존재가 나타날 줄이야! 이래서 세상이 넓다고 하는 건가? 말이 필요 없는 녀석이라는 생각에 나는 즉시 얼음창을 만들어 희희낙락거리는 블랙 드래곤을 향해 집어 던졌다. 쐐애액! 콰앙!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차가운 무언가가 지나가자, 메세테리우스는 본인은 물론, 내 옆에 있던 엘뤼엔까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들을 가뿐히 무시한 나는 잔뜩 질려있는 드래곤을 향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해봐. 내가 뭐라고?" "힉! 너, 너 무슨 짓이야! 다짜고짜 공격을 하다니?" "까부는 녀석은 그 자리에서 척살하라는 교훈을 얻어서 말이야. 안 그래도 열 받아서 미칠 것 같은데 부채질 하지 마. 다음번엔 네 몸에 맞출 거다." "···무, 무슨 정령왕이 이래? 완전히 성격 파탄자잖아!" "아하. 창에 맞고 싶다고? 그런 식으로 돌려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듣거든?" "헉!! 아, 아버지~~" 내가 다시 얼음창을 꺼내들자 메세테리우스는 기겁한 얼굴로 아버지인 수장 드래곤에게 매달렸다. 라피스보다 배짱도 없고, 겁도 많은 녀석이 대체 뭘 믿고 말을 함부로 하는 거지? 그를 바라보는 내 눈초리가 점점 사나워지자, 수장 드래곤이 얼른 사죄의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실례가 컸습니다. 이 녀석이 워낙 함부로 하는 성격이라···아직 어려서 그런 거라 생각하시고 용서하십시오." "3500살이 어린나이인가요?" "아하하하. 그,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드릴 말이···" 하지만 이런 대립적인 구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벨리우스와 이프리트, 그리고 이사나와 알리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아마도 미네가 돌아다니면서 그들응 직접 깨운 듯 했다. "엘! 무슨 일이야? 어, 어떻게 된 거야?" "다친 곳은 없어? 엘, 너 아까 폭발에···" "대부!!" "엘님! 괜찮으십니까? 라피스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오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을 떡하고 가로 막은 거대한 형체를 발견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것이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라피스의 본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엘? 이 드래곤···라피스님 맞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어오는 이사나의 목소리에 나는 들고 있던 창을 힘없이 내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헉하고 숨을 들이킨 일행들이 머뭇거리며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라피스님이 왜···" "죽었어." "응? 바, 방금 뭐라고 했어, 엘?" "라피스가···죽었어." "!!" 일행들은 순식간에 굳은 얼굴로 나와 라피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저마다 믿을 수 없다는 뜻이 역력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것을 못 본 척 무시하며 나느 두 주먹을 꽉 쥔 채 입술을 악물었다. 간신히 멈추었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나를 보호하다가 죽었어." "엘···" "처음 다쳤을 때···이미···드래곤 하트가 파괴됐었대. 데르온···당신은 알고 있었죠?" "···큭. 역시 그랬군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라피스님이 워낙 완강하시기에, 저는 제 생각이 틀렸다고만···" 그렇게 대답하는 데르온의 얼굴은 마치 쓴 나물이라도 삼킨 듯 찌푸려져 있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얼른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죽은 녀석은 아무리 애써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울어봤자 일행들의 마음만 더 무겁게 할 뿐인 것이다. 게다가 엘뤼엔이 그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으니까, 아직은 완전한 이별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바보 같은 녀석이 그런 부상을 당하고서도 입을 다물고 있었어. 다시 만나기만 해봐.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호오, 좋은 생각이다, 아들. 많이 강해졌구나." 그러자 내 혼잣말을 들은 엘뤼엔이 장하다는 눈빛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두 명의 블랙드래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침울해진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 라피스의 죽음은 소설의 전개를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ㅁ; <-변명쟁이 [정령왕 엘퀴네스] 9-22. 절정! 그리고 결말 (6)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제법 큰 폭발이었는데도 그것에 휩쓸려 피해를 입은 인간들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단순히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그것 역시 카노스의 배려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결과적으로 손해를 입은 것은 다 부서진 건물과 엉망이 된 자해들뿐이었떤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신들이 입으로 '명령'하자 알아서 원래의 자리를 되찾아 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엘뤼엔이 부서진 신전을 고쳤을 때 썼던 '언령'을 이용한 것이다. 완전히 가루가 된 잔해가 순식간에 멀쩡한 건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새삼 신들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다. 인간들의 기억을 지우는 작업(?)도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다. 그저 한 신이 눈부신 태양을 하나 띄워 놓은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했던 것이다. 햇살을 받은 인간들은 모두 자신들이 목격했던 장면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잊었다. 그것은 건물 속에 숨어있거나 그늘에 있던 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번 일에 직접 가담한 자들은 예외가 되어 이사나나 알리사들은 멀쩡했지만 말이다. 그 즈음 두 명의 블랙 드래곤은 애초에 이곳을 찾아온 이유-라피스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의식을 벌이기 시작했다. 본래의 수명을 다 채우고 죽게 되면 알아서 자연으로 회귀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엔 이렇게 직접 의식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나는 수장 드래곤이 경건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는 내내 우울한 얼굴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위대한 드래곤의 신이여···지금 그대의 아들이 이 땅에서 젊은 생을 마감하였으니 부디 그 육체를 받아주소서. 그 피는 강물로, 그 뼈는 바위로, 그 살점은 흙으로 채우소서···" 의식을 치르기 전 수장 드래곤은 단순히 형식적인 주문일 뿐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을 듣는 순간 엘뤼엔은 팍 얼굴을 찡그리며 연신 투덜거리기에 바빴다. "흥, 위대한 드래곤의 신은 무슨 얼어죽을···" 다행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신중에서 드래곤의 신은 없었던 듯, 의식이 진행되는 내내 신들은 쿡쿡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런 울지도 웃지도 못할 뻘쭘한 분위기 속에서 라피스의 몸은 천천히 화려한 불길에 휩싸였다. 누군가가 일부오 태운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자체에서 발화된 것이다. 파앗! 화르르륵! "헉! 뭐, 뭐야?" 라피스의 몸이 불길에 휩싸이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내 옆에서 같이 지켜보고 있던 블랙 드래곤 메세테리우스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의식이 완료된 거다. 녀석이 레드 드래곤이라서 불에 태워지는 거야. 우리 드래곤들은 죽음의 순간, 각 속성의 특징을 따라 육체가 사라지거든." "속성?" "그래. 레드 드래곤은 불의 속성이고, 반대로 블루 드래곤은 물의 속성이지. 그래서 라피스더러 돌연변이라고 한 거야. 불의 속성인 주제에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려고 애쓰는 괴짜였으니까." "그럼 블랙 드래곤은···" "우리는 흙이 되어 흩어지지. 땅의 속성이거든. 아버지가 트로웰의 계약자라는 거 몰랐어?" "아, 그거야 알지만." "아무튼 이번에 그 트로웰이 역소환되는 바람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고. 수장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왔으니까. 그러고 보면 악신이 대단하긴 대단한가봐? 정령왕들이 대책 없이 당하다니." 거기까지 말한 메세테리우스는 다시금 불길에 잠식되어 가는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뭔가 시원섭섭하다는 감정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이제야 녀석이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들어. 소식을 들었을 땐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인 주제에 힘은 무지 세서, 난 나보다 훨씬 오래 살 줄 알았거든. " "···미안해." "엥? 왜 네가 사과를 해?" "하지만 라피스는 나 때문에···" "하아? 뭔 소리를 하는 거냐. 그 녀석이 죽은 건 순전히 자기 탓이야. 드래곤 하트라는 건 원래 배 부위에 있긴 하지만, 자신의 의사에 따라 위치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고. 그게 파괴됐다는 건, 녀석이 그만큼 대처가 늦었다는 거야. 단순한 연습 부족이지." "연습 부족?" 메세테리우스는 내 황당하다는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대처가 늦었다는 건 그만큼 순발력이 약하다는 거잖냐. 마법 연구한답시고 매일 같이 레어에 처박혔을 때부터 알아봤지. 쯧쯧. 녀석은 드래곤으로서 대성할 타입이 아니었어. 천재면 뭘해? 드래곤의 로망을 모르던 놈이었는데." "드래곤의 로망이라니?" "보다 많은 유희를 섭렵하여 자랑거리를 쌓는 거지! 근데 라피스 놈은 유희를 보낸 숫자가 손가락으로 꼽거든. 그것도 10년도 안 되서 그만드기 일쑤였고. 오직 엘퀴네스의 소환에만 미쳐있던 놈이니···" 이 녀석이 라피스보다 더 한심히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나는 동정어린 눈빛으로 블랙일족의 수장이라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왠지 지난날의 그의 용생이 파란만장하게 느껴지는 건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아무튼 녀석도 소원을 이루고 죽었으니까 더 바랄게 없겠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너를 고맙게 생각한다. 너로서는 그리 탐탁치 않은 계약이었겠지?" "별로···도움 받은 것도 많았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오히려 이득이었던 점이 많았던 것 같아." "헤에. 진심이냐? 특이한 취향이군. 그런 독설가에 제멋대로인 녀석에게 무슨 도움을?" "그렇게 멋대로이진 않았어. 적어도 부탁받은걸 거절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대신 죽어주겠다고 했었어.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정말 그렇게 돼버렸어." 그 말에 메세테리우스는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억였다. "드래곤들은 아무리 가벼운 말이라도 허엄을 하지 않아. 한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고 해서 '약속의 종족'으로도 불리지." "그렇구나. 그런 줄 알았으면, 그때 무슨 수를 써서든 취소하게 만들었을 텐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전혀 몰랐어. 무슨 일이 생겨도 끝까지 살아남을 녀석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흐음. 솔직하게 말해봐. 너 이중인격이지?" "···뭐야?" "아, 아니, 아까 나한테 창 던질 때하고는 표정이 너무 달라서. 하하하···정령왕들은 모두 그런가? 트로웰도 평소엔 얌전한데 잘못 건드리면 엄청 무섭거든." 나는 찔끔한 얼굴로 변명하듯 대답하는 메세테리우스를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혹시 라피스의 성격이 삐딱해진 건 이 녀석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피스의 육체를 태우던 불길은 그의 몸이 완전히 재로 변해 사라지고 나서야 완전히 사르라 들었다. 그 즈음에는 이미 주변을 정돈하는 일들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페르데스와 엘뤼엔을 제외한 신들은 모두 신계로 돌아가게 되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된 것을 확인한 이사나가 가장먼저 한 일은, 그의 군대를 찾아가 지휘관을 만나는 것이었다. 기억이 지워진 탓에 좀처럼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사나를 보고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며 감격해 했다. "화, 황제폐하?" "세, 세상에! 황제폐하시다!" "황제폐하께서 오셨다!" "와아아아~" 어린아이처럼 환호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이사나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군대의 지휘관인 스피어 남작이 달려 나와 얼른 부복하여 소리쳤다. "신(臣)위칼레인 폰 스피어가, 황제폐하를 뵙습니다!" "아아, 그동안 노고가 많았소, 스피어 자작. 아군의 피해는 어느 정도 입니까?" "예! 다들 미미한 경상에 그쳤을 뿐, 죽은 자는 없었습니다. 감히 폐하께 대항하던 무리들은 모두 잡아 포박하였고, 나머지 기사들이 황성 안으로 들어가 반역의 주모자를 찾고 있으니, 이제 마무리만 남은 셈입니다." "그렇군." 신들의 기억 조작력(?)이란 게 어찌나 뛰어난지, 그들은 없어진 기억에 대해선 전혀 의심조차 품지 않고 있었다. 아마도 황성으로 쳐들어가서 군대와 맞서 싸워 이긴 것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사나는 그 점에 무척이나 안심하는 듯 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내색하지는 않았다. 바로 그때 성 내부에 들어서 있던 기사들 중 몇 몇 사람이 뛰어나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자작님! 황성 지하에서 어린아이들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뭐라? 반역자들은?" "저어,그게···대다수의 주모자는 이미 죽은 듯 합니다. 이번 일에 가담했던 귀족들 중 5명의 시체를 방금 찾았습니다." "흥! 스스로 자멸한 건가. 살아있는 놈들은 모두 포박하여 무릎 굻려라! 하인이나 하녀들도 마찬가지다!"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신속하게 대답한 기사는 다시 성안으로 들어가 방금 들은 명령에 대해 전달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저 성안 어딘가에는 몸을 숨긴 대공도 있을 것이다. 이번 악신의 일에 직접 가담한 자들의 기억은 내버려두었으니, 그 또한 자신의 일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게 틀림없었다. 이사나 또한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아까부터 잔뜩 굳은 얼굴로 성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알리사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걸었다. "이사나씨.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긴장 풀어. 정말 괜찮겠어?" "아, 으응.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알리사. 그냥···결국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복잡해진 것 뿐이야." "음. 쉽지 않은 만남이겠지만, 어차피 이젠 돌이키기엔 너무 늦어버렸잖아? 그러기엔 여러 가지로 희생이 너무 컸어." "그래, 알리사. 네 말이 맞아." 이사나가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알리사의 볼에 옅은 홍조가 감돌았다. 그 의외의 전개에 나는 놀란 얼굴로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았다. 이건 완전히 로맨스에 등장하는 연인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저 두 사람이 언제부터 저렁 사이가 된 거지? 내가 호기신 어린 표정으로 빤히 두 사함을 바라보자, 근처에 있던 메세테리우스가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뭘 그렇게 봐?" "아니, 저 두 사람 사이가 좋아보여서···헤에. 이렇게 되면 내가 억지로 이어주지 않아도 되는 건가?" "이어줘? 정령왕들은 그런 일도 해?" "그건 아니고···원래 친구가 잘 되는 모습을 보면 기분 좋잖아?" "그런가? 난 잘 이해 안 되는데. 그런데 저 인간은 너한테 어떤 존재지? 정령왕인 네가 인간을 돌보다니 별일도 다 있군." "아아, 내 계약자야." "켁. 계약자? 라피스가 그걸 가만히 뒀단 말이야? 독점욕이 워낙 강한 녀석이라, 절대 계약하지 못하게 방해했을 것 같은데?" 이미 계약해버린걸 무슨 수로 방해하겠는가? 나는 피식 웃으며 당시의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메세테리우스는 그 말에 납득하기 보단,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되어 중얼거렸다. "별일이군. 그 녀석 성격이라면 자기보다 먼저 계약한 녀석 따윈 당장 죽여서라도 독점했을 텐데." "그랬다간 내가 그 녀석을 죽였을걸." "헤에, 그렇군. 너도 꽤 제법인걸. 녀석을 다루는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었던 것 같군." 그 뒤 블랙 일족의 수장 드래곤과 메세테리우스는 감단한 작별인사를 마직막으로 자신들의 영역으로 되돌아갈 뜻을 전했다. 자식과 형제가 죽었는데도 끝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모습에서, 나는 드래곤 세계의 일부를 경험하게 된 느낌이었다. 그들은 같은 피가 흐르는 같은 편, 또한 같은 종족이지만, 결코 '우리'라는 울타리에는 섞일 수 없는 존재였다. 어쩌면 이 세계에 태어난 의미를 그저 가볍게 머물다 가는 방랑자라고 여기는 걸지도 모른다. 라피스도 그래서 인사 없이 가버린 걸까? 왠지 씁쓸해진 기분에 나는 잠시 동안 빤히 수장 드래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어색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엘퀴네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니에요.아참. 몸은 괜찮으신 건가요? 역 소환이 두 번이나 일어난 걸로 아는데." "으음. 뭐 어쩔 수 없지요. 상대가 다름 아닌 악신이었으니···이정도의 고통은 오히려 가볍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트로웰 본인이 느낀 고통이 훨씬 더 컸을 테니까요." "그야 그렇지만, 뭐 일부로 생고생할 필요는 없죠. 잠깐만 이대로···" 나는 그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것을 무시하며 곧바로 치유술을 시전 했다. 파앗! 밝은 빛이 터져 나와 수장 드래곤의 몸을 감싸자, 그와 메세테리우스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몸을 감싸던 은색의 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는 한결 나아진 안색으로 내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엘퀴네스에게 치유능력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요." "몸은 이제 괜찮으신가요?" "네. 한결 좋네요. 아니, 평소와 똑같을 정도입니다. 정말 굉장한 능력이군요." "···그래봤자 악신에게 당한 상처에는 전혀 먹히지도 않았는걸요. 라피스가 다쳤을 때도 효과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하. 그것이 그 아이의 운명인 겁니다. 아무튼 당신은 지금까지 들어오던 바와 굉장히 많이 다른 분이군요.라피스가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이제 곧 명계에 가시게 될 테지요? 녀석을 만나면 우리의 안부도 전해주십시오. 어차피 망각의 물에 의해 잊혀 질 인연이지만, 그래도 한때나마 소중한 아들이었다고. 아참 이 말도 전해주시겠습니다? '네게 인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서 무척 놀라웠다'고요." ···그 말을 들으면 엄청 화낼 것 같은데? 내가 삐질삐질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두 드래곤은 만족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몸을 돌이켰다. 곧 그들의 몸은 밝은 빛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 한 것이다. "어라? 엘.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앗, 트로웰!" 드래곤들이 사라지자마자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트로웰이었다. 이 얼마나 귀신같은 타이밍인가! 설마 일부로 이때를 노리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이런 내 짐작이 어느 정도 맞았는지, 그는 슬쩍 딴청을 피우며 어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하하하. 라이칸은 잔소리가 심해서 말이야. 칠칠치 못하게 역소환을 당했다고 엄청 구박할게 뻔하거든." "못 말려. 몸은 이제 괜찮은 거야? 또 역소환 됐다는 말 듣고 걱정했었어." "응. 멀쩡해. 이번엔 기운의 회복도 빠른 편이었고. 아아, 그나저나 그 사이에 이미 모든 게 다 정리가 된 모양이네? 희생된 신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트로웰에게, 나는 그가 역소환 된 이후의 자세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카노스가 희생된 일부터 시작해서, 라피스가 죽은 일까지. 자신이 없던 동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들은 그는 잠시 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그는 특히 카노스가 죽었다는 말에 큰 충격을 받은 듯이 보였다. "으음. 그렇구나···카노스가···" "처음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 같아. 아마 봉인진이 실패하지 않았더라도 페르데스가 소멸의 의식을 외우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을 거야." "그렇겠지. 역시 이번 일엔 내 혜안이 그리 먹히지 않은 것 같군. 이런 식으로나마 해결이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참, 엘. 이젠 왼손의 그 장갑···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응? 아아. 그렇구나." 트로웰이 말한 것은 언젠가 카노스가 손등에 문장을 새겨준 이후로 쭈욱 착용하고 있었던 장갑이었다.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데다 전혀 불편하지 않아 그동안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는, 그때서야 내가 아직도 장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곤 머쓱한 표정으로 벗겨냈다. 그의 말마따나 이젠 더 이상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윽고 드러난 손등에는, 처음 보았을 때 배트맨이라고 중얼거렸던 마신의 문장이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것을 보니 새삼 카노스가 소멸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뭐가 뭔지 모르겠어. 모든 게 다 끝났다곤 하는데···실은 전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져." "여러 가지 일이 있었으니까. 첫 유희치곤 너무 파람만장했어. 시작부터가 평탄치 않았잖아?" "으응."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야. 이번은 내 혜안을 믿어도 좋아." "···그게 무슨 뜻이야?" 나는 조급한 얼굴로 물었지만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 해보일 뿐, 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통해, 그리 불안한 미래만은 아니라고 짐작했을 뿐이다. "황제 폐하!!" 그때 이사나의 기사들이 황성의 지하 깊숙한 곳에 숨어있던 유카르테 대공을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로인해 처음으로 보게 된 그는 제법 준수한 생김새에, 눈 끝이 날카롭게 올라가 있어, 고고한 학자의 이미지를 풍기는 남자였다. 누가 혈육 아니랄까봐 전체적인 인상이 이사나하고 많이 닮은 편이었지만, 대공 쪽이 좀 더 신경질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였다. 기사들에게 온몸이 포박당한 채 허무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눈동자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투자한 과업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이라 빤히 바라보던 이사나는, 곧 격한 감정을 억누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타인의 생명을 장난감처럼 여긴 일이 자랑스러우셨습니까?" "······" "저는 숙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모습을 보니, 측은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군요. 당신은 한낮 권력 때문에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인간으로서 마지막 양심을 저버린 느낌은 어떤 기분입니까?" "···큭!" 그의 도발적인 말에 대공은 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사나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똑바로 마주 노려보며 주위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지라 감옥에 가두어라. 처벌은 나중에 할 것이다." "예, 폐하!" "자, 가자! 똑바로 일어서라!" 이사나의 명령을 들은 기사들은 거친 동작으로 대공의 몸을 일으키며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맥없이 그들에게 잡혀 가던 대공이 처절한 목소리로 잡혀 가던 대공이 처절한 목소리로 외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넌 죽어도 모른다, 이사나!! 내가···내가 어떤 심정으로 이 황성에 있었는지!!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다 가진 네가 어떻게 아냔 말이냐!" "!!" "무례한! 감히 황제폐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니!" 그를 끌고 가던 기사 중 한명이 기겁을 하며 호통을 쳤지만, 대공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형님이 성황(聖皇)이라고?! 흥! 그 성황이란 자가 황제가 되기 전에 자신의 형제들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볼까! 난 살아남기 위해 신관이 되어야 했다! 계승권을 가진 형제를 모두 살해한 네놈의 아버지 때문에!! 그런 자가 무슨 얼어 죽을 성황이란 말이냐!" "아버지가···형제들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던 듯.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이사나의 눈동자엔 혼란스러운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자 대공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비웃음이 역력한 얼굴로 다시 소리쳤다. "왜! 네 아버지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하하! 그럴 테지! 황제가 된 이후의 그는 꽤나 건실한 삶을 살았으니까 말이다. 결국 네놈의 아버지도 지하에서 썩어가는 형제의 시체를 밟고 올라선 자란 소리다! 그에게서 살아남으려면 권력이 필요했다! 강대한 힘이 필요했다고!! 그래서 그걸 추구한 것이 뭐가 나쁘단 말이야!" "······" "몰랐다고 말하고 싶겠지! 하하하! 그래서 넌 아직 어린 거다! 어려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철부지 꼬맹이에 불과할 뿐이야! 그런 네가 이 나라를 맡을 수 있겠나? 책임질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어? 응?" "이, 이놈의 감히 폐하께 무슨 망발을!!" 대공의 말에 당황한 기사가 제지를 하려고 하자 이사나는 한손을 들어 그것을 중지기켰다. 어느새 차분하게 돌아온 그의 눈동자는 광기로 번들거리는 대공의 모습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적어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희생시킨 자보다는 나을 겁니다." "큭!!" "선황(先皇)폐하에 대한 말은 꽤나 의외였습니다만, 그 때문에 당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킬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허울 좋은 핑계에 흔들리기엔, 당신하나로 인한 희생이 너무 컸습니다. 게다가 난 죄인의 말을 전적으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 아닙니다." "큭!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냐!!" "맞았다 해도 들을 이유가 없다는 소리입니다. 선황폐하는 분명 과한 방법으로 황위에 오르셨을지 모르지만, 이미 모든 권력을 포기한척 하여 그 자리에서 살아남은 자에게 그런 비난을 들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요." "네놈! 네, 네놈이!!!" "뭣들 하느냐. 끌고 가라. 저자는 인간의 탈을 쓰고 추악한 짓거리를 해온 악마다. 동정의 여부가 필요 없다. 다른 지시가 있을 때까지 물 한모금도 주어선 안 된다." "예, 폐하! 명령을 받듭니다!" 그 뒤로도 대공은 악에 받친 얼굴로 떠들었지만, 그 소리는 곧 끌고 가던 기사의 제압에 막혀 맥없이 묻히고 말았다. 이사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끝까지 대공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단호한 표정을 한 그의 두 눈은 한 인간의 추악한 몰락을 지켜보며, 자신은 절대 그러한 길을 걷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 후, 이사나는 주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기사들을 향해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났다. 다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그리고 터지는 우렁찬 함성! 기사들은 한 목소리로 이사나의 이름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사나 황제폐하, 만세!!" "황제폐하께 영광 있으라!! 악독한 대공에게 저주를! 우리의 위대하신 주군께 만세!!" "이사나 폐하 만세!! 우리의 주군 만세!!" "와아아아아!" 순식간에 축제 분위기로 변한 주위를 보며 나와 트로웰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손꼽아 기다리던, 그들의 어린 주군이 다시 황성으로 돌아온 날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9-23. 영혼의 행방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사나의 숙부이자 솔트레테의 대공인 유카르테 란느 솔트의 처형이 거행되었다. 그는 반역자의 이름으로 교수대에 올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공개적으로 처형을 당했다. 하지만 지켜보는 사람들 중 누구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동정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미 그가 모종의 이득을 위해 아이들을 잡아다 제물로 썼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 자리에는 카웰 후작을 비롯한 이사나의 최측근들과 친위 기사들 또한 참석하여, 그들의 주군인 이사나의 위용을 빛냈다. 그 후 이사나는 약 한달 간 솔트레테 전역에 대대적인 축제를 선포했고,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백성들을 위로하며 앞으로 그들이 살길을 도모해주었다. 그 밖의 군의 재정비와 중앙 귀족들의 대거 교체 등으로, 이사나는 황성으로 돌아온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알리사는 그 사실이 못내 불만인 듯 했다. "대체 이사나씨는 언제쯤이면 짬이 나는 거야? 좀처럼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하루 종일 내내 혼자인 것에 화가 난 모양인지, 다짜고짜 내가 머무는 방에 쳐들어온 그녀는 멀뚱히 앉아 있던 나에게 다가와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쩐지 말해야 상대가 바뀐 것 같지만, 마친 나도 무료했던 참이라 웃으면서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어서와, 알리사. 어쩔 수 없잖아. 이사나는 황제라서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아까 집무실에 쌓인 서류들 못봤어?" "나도 알아! 그래서 보채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거잖아. 이사나씨만이 아니야. 트로웰, 시벨리우스님, 심지어 라온휘젠씨와 그 측근들까지 다들 바쁘다고. 심심해 죽겠어!" "헤에, 그래? 난 오랜만에 평화로워서 좋은데." 나의 대답을 들은 알리사는 아까전보다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그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혼자 떨어져 있었을 때부터 눈치 챘지만, 정말이지 답답한 것은 죽어도 참지 못하는 말괄량이였다. 저래가지고 어디 나중에 우아하고 고상한 황비가 될 수나 있을까? '절대 무리지. 몬스터 잡으러 다닌다고 가출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이게?' 내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모르는 알리사는 잠시 후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있잖아, 엘님! 다들 바쁜데 왜 엘님만 이렇게 한가한 거야? 엘님도 이사나씨의 최측근이잖아?" "글쎄. 아마도 아버지가 뭐라고 한마디 언질을 준 것 같긴 한데···" "아버지라면, 그 무지무지 잘생긴 금발 머리 남자분 말이지? 그 분이 뭐라고 했는데?" "···그런 게 있어." "엑. 그게 뭐야? 대답이 너무 불성실하잖아~~" '내 아들 귀찮게 하면 다 죽인다.'라고 했던가. 그러고선 엘뤼엔은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한 이프리트를 떼어놓기 위해 다시 신계로 돌아가 버렸다. 그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이프리트의 구박을 받았는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주제에 벌써부터 계모노릇을 하려고 한다. 뭐,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산더미처럼 떠맡겨진 일 때문에 중지되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이사나처럼 대단한 녀석도 없을 거야. 정령왕에 유니콘, 타 제국의 황자까지 마구 부려먹다니. 그거 대단하다는 말밖에 안 나온 달까. 쿡쿡." 로운 세상 속으로 지금 나는 무척 심란한 고민에 빠져있다. 상식적으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을 떠보니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한 떼의 정령이라... 아크아돈 말고 또 정령계와 연결된 차원이 있었던가? 아니, 만약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담 저 눈앞에 날아다니는 것들은 정령이 아니라는 소리? 호, 혹시 나는 유령의 세계에 떨어진 건가? 하급 정령과 똑같이 생긴 유령이라니!!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흘렸다. 그럼 유령이 보이는 나는 뭐란 말이야! 설마 무당이라도 된 거야? 이게 바로 영감(靈鑑)소년? 날더러 퇴마사라도 되라는 소리인가? “젠장,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있나!” 그렇게 혼잣말로 투덜거리는 동안,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휘이잉~ 스쳐지나갔다. 옅은 바람이었지만 꽤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 나는 두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윽, 뭐가 이렇게 추운거야. 응? 춥…다고?” 정령이 된 이후로 내 몸은 추위와 더위를 잊은 지 오래되었다. 단순히 기온이 높다, 낮다는 구분할 수 있어도 그것을 몸으로 체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춥다니?! 그러고 보니 중간계에 내려왔을 때 느꼈던 묘한 압박감이라던가, 능력이 제한당하는 것 같은 불쾌한 기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나는 내가 이미 정령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아! 궤도를 따라가면 새로운 육체를 입게 된다고 했었지! 그럼 여긴 정말 아크아돈이 아니라는 소리? 그, 그럼 난 대체 뭐가 된 거지?” 유령을 볼 수 있는 몬스터가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바 없다. 하지만 워낙 엉뚱한 차원이라면 그런 일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나는 황급히 시선을 내려 나의 팔다리를 포함한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행히 멀쩡한 피부색과 손의 모양을 보아 최악의 사태까지는 다다르지 않은 모양이다. 어깨를 타고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눈으로 흘끗 확인한 나는, 그것이 이전과는 확연히 다른 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금발? 머리 길이는 예전이랑 똑같네. 옷은 입고 있는 것 같고…아! 그러고 보니 얼굴도 달라졌을까?” 일단 몬스터가 아니라는 확신이 서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근처에 흐르고 있던 시내 쪽으로 얼굴을 드밀었다. 물에 비치는 형상으로 지금의 상태를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바라본 모습은 눈과 머리색이 바뀐 것만 빼면 이전의 모습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았다. 우연히라도 날 아는 존재를 만난다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예전과 똑같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귀의 모습이 둥그런 걸 보면 엘프는 아닌 게 확실한데…인간으로 변한 건가?” 그나마 가장 흔한 종족이 된 것이 다행일지 불행일지……. 한때 인간으로 살아본 적이 있어서인지, 정령왕의 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만 빼면 그리 불편한 점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발에 녹색 눈동자라…왠지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건 착각일까? 어라? 그런데 뭔가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이마의 문장이 사라졌다…….” 서클렛이 없어 밋밋하게 드러나 이마엔 언젠가 엘뤼엔이 새겨 주었던 신의 문장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육체가 달라져서 그에 입혀졌던 권한마저 사라져버린 듯하다. 잠시 아쉬운 기분으로 이마를 만져본 나는, 이내 그에 대한 생각은 털어버리기로 작정하고 다른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흐음, 얼굴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서 그런가? 이왕이면 터프하고 남자다운 얼굴로 바뀔 것이지, 왜 아직도 이런 계집애 같은 몰골인 거야? 헉! 서, 설마 몸까지 여자가 된 건 아니겠지?” 인간이 되어버린 이상, 이제 더 이상은 중성이라는 소리로 스스로를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머리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다급히 몸을 더듬었다. 그리하여 탁탁 두드려본(?) 가슴은 절벽이라는 말로도 묘사가 되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평평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차마 말로 하기엔 민망하지만, 남자의 증거인 무언가가 확실히 느껴지고 있었다! 마르고 부실한 몸이긴 해도 틀림없는 남자였던 것이다! “살아 있길 잘했어…….” 감격으로 인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는 감동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많은 종족 중에서 인간이 된 것도, 더불어 완전한 남자가 된 것도 나로서는 모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엘뤼엔은 어찌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어쩌면 그가 미리 손을 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기분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인간이 되었다면 당연히 없어야 할 능력!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것에 무한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연 친화력이 극성에 이른 사람이라도 소환되지 않은 정령들을 보지는 못 한다. 설마 정말로 정령을 닮은 유령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정면 돌파를 하기로 작정했다. 즉, 주위를 떠도는 정령 비슷한 생명체들에게 직접 말을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저기…얘들아, 혹시 지금 바쁘니?” 내가 가장 먼저 질문을 건넨 상대는 역시나 제일 만만한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였다. 그 특유의 가공할 만한 수다력으로 연신 웃고 떠들던 그들은, 내가 말을 거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하는지 여전히 자기들끼리 재잘거리며 돌아다니기만 했다. 나는 참을성 있게 다시 한 번 그들을 불렀다. “어이? 너희들 지금 바쁘냐고!” -꺄하하~ 그래서 말이야~ -어머! 그게 정말이야? 정말 재미있다! -헤헤~ 인간들은 웃기구나! “…이것들이!” 내 말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안 들리는 건지 몰라도 일단 내 부하(?)랑 똑같이 생긴 녀석들에게 무시당하자 기분이 은근슬쩍 나빠졌다. 결국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야! 너희들! 내 말 안 들려? 대답을 좀 해보란 말이야!!” 그러자 정령의 탈을 쓴 그 존재들도 드디어 나를 알아챈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떠 보였다. 놀란 표정을 서로를 바라보던 그들은 곧 우르르 내게 몰려와 주위를 포위하듯이 감싸기 시작했다. 그리곤 내가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속사포로 떠들어 대는 것이 아닌가. -인간 아냐? -인간이야. -혹시 방금 우리한테 소리친 거야? -우리한테 말했어? -우리가 보여? -정말 우리 보여? -우리한테 말했어?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수다력이 한꺼번에 집중되자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같은 내용만 질문한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너희들한테 말한 것 맞아. 보이니까 당연히 부른 거고.” -헉! 인간이 우리가 보인대! -우리가 보인대!! -우리한테 말한 거 맞대! -정말 맞아? -맞나 봐! 내가 자신들을 보는 것이 상당히 의외라는 듯, 그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서로에게 같은 말을 확인시켰다. 그 행동패턴이 정말로 나이아스와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점점 불안한 심정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노희들 혹시 물의 정령이냐?” -우와! 우리가 정령이라는 것도 알아! -똑똑하다! 어떻게 알았어? -우리 알어? -어떻게 알았어? -우리는 어떻게 보여? -어떻게 봤어? “자, 잠깐… 정령이 맞다고? -응!응! 물의 정령이야! -가장 낮은 단계의 정령이야! -어떻게 알아? -누구야? -우리가 어떻게 보여? 그들은 또 다시 속사포로 질문을 퍼부었지만, 이미 내 귀엔 들리지 않고 있었다. 물의 정령이 맞다고? 그럼 정말로 나이아스들이란 말이야? “자, 잠깐만 기다려봐. 정령계는 아크아돈하고만 연결되는 거 아니었어?” -맞아! 오직 아크아돈과 연결돼! -똑똑하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다른 인간들은 몰라! -대단하다! -신기하다! 역시 내 상식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정령계와 연결되는 유일한 차원은 아크아돈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럼 설마 여기가…….” -아크아돈이야! -아크아돈이라고 해! -우리는 아크아돈의 정령이야! “……!!” 생각지도 못했던 결론에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아크아돈이라니! 그럼 라피스의 영혼은 다른 곳으로 날아간 게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 떠돌아다니고 있었다는 소리인가? 아, 아니, 그보다… 인간이 된 내가 어떻게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거지? 이상한 건 나이아스들이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거였다. 내 기운이 달라져서 눈치 채지 못한다고 쳐도. 적어도 외모가 자신들의 왕과 상당히 닮았다는 사실은 인식하고 있을 텐데, 마치 처음 대하는 것처럼 흥미롭게 구경하는 모습이 뭔가 상당히 껄끄러웠다. “휴우,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럼 처음부터 인간이 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인가? 엘뤼엔이 보면 무슨 표정을 지을지… 아니, 그건 다른 일행들도 마찬 가지이겠군. 이제부터 뭘 어떻게 해야 하지?” 그러자 내 혼잣말을 들은 나이아스들이 신나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인간 맞지? -이제 어디 가는 거야? -일행들이 있어? -엘뤼엔이 누구야? “누구냐니… 형벌의 신 엘뤼엔 몰라?” 마지막 질문에 나는 위화감을 느끼곤 되물었다. 그가 내 아버지가 된 사건은 꽤나 유명한 것인데다,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정령들은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이아스들은 전혀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아닌가? -몰라. -처음 들어. -형벌의 신? -그게 뭐야? “…….” 장난이 심한 녀석들이긴 해도, 기본적으로 정령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식으로 위기를 모면하거나 누군가를 놀린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모르고 있다는 소리인데, 설마 여기… 이름만 똑같은 아크아돈이고 알고 보면 다른 차원인 건 아니겠지? 나는 혹시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른 질문을 꺼내보았다. “그럼 카노스는 누군지 알아?” -알아! -마신! -마신의 이름이야! -마신 카노스! 그들은 질문한 내가 무안해질 정도로 정확하게 대답했다. 같은 상급신인데 엘뤼엔은 모르고 카노스는 알다니. 덕분에 내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것도 모르고, 나이아스들은 즐겁다는 듯이 떠들기 시작했다. -다른 신의 이름도 알아! -사랑의 신은 헤르미스야! -대지의 신은 유엘님이고! -꽃의 신은 프라워스야! -우리 똑똑하지? -우리 똑똑해! “아아, 그래, 똑똑해. 그런데 정말 엘뤼엔은 모른단 말이지?” -몰라. -들어본 적 없어. -엘뤼엔인 누구야? “…거참, 이상하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물의 정령들이 모를 리 없을 텐데.” 잠깐 골치 아픈 얼굴로 투덜거린 나는 곧 체념의 한숨을 내쉰 후,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리기로 마음먹었다. 모른다는데 더 이상 채근해봤자 소용없는 일 아닌가? “일단 아는 사람부터 만나야… 아, 그래! 너희들 혹시 트로웰 좀 불러줄 수 있니? 지금 여기 중간계에 있을 텐데.”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결과는 전혀 의외의 형식으로 되돌아 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고 있던 나이아스들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더니 덜덜 떠는 목소리로 대답했던 것이다. -트로웰? -설마 땅의 정령왕 트로웰님? -트로웰님을? 웅성웅성. 시끌시끌. 서로를 바라보며 떠들어대는 나이아스의 얼굴에는 까닭 모를 두려움이 짙게 드러나 있었다. 아아, 그렇지. 지금 나는 정령왕이 아니라 인간이었지. 겨우 인간인 주제에 정령왕을 불러달라고 해서 화가 난 걸까? 갑자기 험악해진 주위 분위기에 나는 난감한 심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그들이 혼란스러워한 것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잠시 후, 나이아스들은 불안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트로웰님을 부를 수 없어. -그분은 무서워. -우리를 그 자리에서 소멸시킬지도 몰라. -무서워. -가고 싶지 않아. “…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대답이기에 나는 아연한 심정으로 되묻고 말았다. 그 상냥하고 자상한 트로웰이 무섭다고?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 단체로? ‘아… 하긴, 하급 정령들이니까 정령왕의 존재가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겠군.’ 나이아스들은 처음에 나도 무서워했었다. 나중에 내가 그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고 나서야 마음을 풀고 접근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조금 충격이긴 하다. 그 자리에서 소멸시킬지도 모른다니, 설마 하급 정령들은 정령왕을 모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언젠가 땅의 하급 정령을 시켜 트로웰에게 연락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게 그 정령의 입장에서는 무척 힘든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같은 정령왕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이 따랐던 것일 테지. ‘그럼 이제부터 트로웰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연락해야 하지? 여기가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인지도 모르는데.’ 생판 타지라면 모를까, 뻔히 친구들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를 수 없다니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그들은 내가 이런 곳에서 헤매고 있다는 걸 꿈에나 생각하고 있을까? “아, 그래. 그럼 이렇게 하자. 나한테 지금 중간계에 내려와 있는 정령왕들의 위치를 알려줘. 그건 별로 어렵지 않지?” 내가 이렇게 말을 건네는 이유는 그들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트로웰이나 이프리트나 아직 솔트레테의 황성을 떠나지 않았을 테지만, 여기서 그곳으로 가는 정확한 방향을 알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나이아스들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왕들의 위치? -위치라면 존재하는 장소를 말하는 거지? -다들 제각각인데, 어느 분부터? “음, 여기서 가장 가까운 쪽.” 제각기 떨어졌다면 이프리트가 다시 상단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까? 설마 트로웰과 미네까지 이사나의 옆을 비우진 않았겠지? 어찌되었든 찾아가기 편한 쪽부터 만나는 것이 가장 최선이었다. 그들이라면 내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틀림없이 알아볼 테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나이아스들의 대답에 나는 그대로 경악하고 말았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시는 왕이라면 역시 미네르바님일까? -그렇겠지? -맞아. 얼마 전에 이곳에 있는 인간에게 소환되었잖아. “뭐?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다고? 내 놀란 외침에 나이아스들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랐었어? -헤에, 소식에 둔한 인간이구나? -그땐 정말 장관이었지. 인간들이 모두 기뻐서 축제까지 열었으니까. -그럴 만도 할 꺼야. 정령왕의 소환이었잖아. -게다가 소환한 인간이 이곳에서 꽤 세력 있는 귀족이었으니까. -젊고 능력 있는 도련님이라고 해서 꽤 많은 인간 여자들의 환호를 받았지. 나는 나이아스들이 신나서 떠드는 내내 복잡한 심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요즘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령왕이 인간에게 소환되는 것이 유행인가? 내가 이사나에게 불려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미네까지 소환되다니. 어쩌면 인간들의 능력이 점점 업그레이드 되어가는 걸지도. “하아, 모르겠다. 그럼 다른 정령왕들은?” -미네르바님 다음으로 가까이에 계신분은 트로웰님이야. -엘퀴네스님이랑 이프리트님은 정령계에 계시고. -이프리트님은 얼마 전에 유희에서 돌아오셨지? 이번엔 정령계에 오래 계실까? -아니. 어차피 잠시일걸. 엘퀴네스님은 몰라도 이프리트님은 무료한 걸 질색하시잖아. 곧 중간계로 다시 나오실 거야. -그전에 엘퀴네스님과 또 싸우시지 않으면 좋으련만. -그러게 말이야. 안 그래도 요즘 엘퀴네스님 기분도 좋지 않으신데. 그들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이프리트가 만나면 언제나 사소한 말다툼이 있긴 했지만, 나이아스들이 저런 식으로 걱정할 만큼 심하게 싸운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령계에선 이미 내 영혼이 빠져나가 육체만 남아 있을 텐데, 기분이 좋고 나쁘고를 어떻게 판단한단 말인가?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나이아스들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엘퀴네스… 그러니까 너희들의 왕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응. 요즘 내내 그러셔. -유희를 나가시는 것도 그다지 흥미를 잃으신 듯하고. -뭔가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신 게 아닐까? -그럴지도 몰라. 요즘은 눈에 띄게 재미있는 일이 없잖아. -세상이 너무 평화로워도 문제인 거지. “저, 저기,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혹시 내 얼굴이 너희들의 왕이랑 꽤 많이 닮지 않았어?” 하지만 돌아오는 건 명백한 부정이었다. 나이아스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까르르! 그런 말은 처음 들어. -정령왕과 닮은 인간은 없어. 그건 창조될 때부터 허락되지 않는 일이지. -게다가 엘퀴네스님은 확연한 남성체인걸. 당신처럼 어리고 예쁘장한 얼굴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청년? -맞아! 인간으로 치면 성년을 넘긴 성숙한 느낌이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설마 저들이 알고 있는 엘퀴네스가 내가 아니라는 소리? 정령왕의 존재가 단 4명 뿐인게 아니었단 말이야? 그들은 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한 듯 여전히 웃으며 자기들의 왕을 자랑하기에 바빴다.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령왕! -얼음처럼 차가운 성정에 도도하신 분! -그분은 역대 물의 정령왕을 통틀어 가장 강하다는 칭송을 얻고 계시지. -그만큼 중간계의 생물이 소환하기에 어려워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오히려 외로워질 수밖에 없는 분이야. “…….” 들으면 들을수록 나와는 거리가 먼 얘기였기에 나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심정으로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곳이 내가 알고 있던 아크아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이들이 말하는 트로웰과 미네르바도 내가 알고 있는 그들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나는 대체 어느 황당한 차원으로 떨어진 걸까? 좀처럼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진 상황에 나는 연신 한숨을 내쉬며 푸욱 고개를 숙였다. 순간, 무심코 바라본 왼쪽 손등에 익숙한 새하얀 문장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어?” 순백의 은테안에 그려진 두 장의 날개.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완벽한 마신 카노스의 문장이 아닌가! 그가 소멸한 이후 지워진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참이었기 때문에, 나는 갑자기 다시 나타난 문장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왜 카노스의 문장이…….’ 하지만 나는 이어지는 나이아스들의 속공에 막혀, 놀라움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다시 그들에게 시선을 돌려야 했다. -아, 그래! 당신이 엘퀴네스님을 소환해보는 게 어때? -맞아! 엘퀴네스님을 소환해봐. “뭐? 내, 내가?” -응! 우리를 볼 수 있는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꺼야. -이렇게 자연 친화력이 뛰어난 인간은 본 적이 없어. -엘퀴네스님을 소환할 수 있을 거야. -해봐. 응? 한번 해봐~ 정령왕한테 정령왕을 소환하라니, 이렇게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하지만 나이아스들은 내 얼굴이 점점 굳어지는 것을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정령왕의 소환은 실패할 경우 죽음에 가까운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걱정 마. 할 수 있다니까? -당신이라면 충분히 가능해. -엘퀴네스님을 소환해 봐. 응? 나이아스들이 하는 말이니 내가 이들의 정령왕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만나 봐도 괜찮은 걸까? 아직 누가 진짜고 가짜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데, 소환해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지금 상태론 내가 엘퀴네스라고 말해봤자 비웃음만 당할 것이 틀림없었다. 게다가 성격도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령왕이면서 도도하고 차가운 존재라면 엘뤼엔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당시 신력으로 가볍게 손봐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처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어라? 그러고 보니 정말 엘뤼엔이랑 비슷하네?’ 왜 이제야 깨달았을까. 엘퀴네스였을 시절 엘뤼엔은 역대 물의 정령왕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게다가 남성체인 것과 성격이 차가운 것 또한 판박이라고 할 만큼 똑같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찜찜할 정도가 아닌가? 인간에게 소환된 미네르바와 다시 나타난 카노스의 문장. 엘뤼엔과 똑같은 성격의 엘퀴네스. 틀어졌던 수레바퀴가 점점 맞물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홀린 듯 옆에 흐르고 있던 시냇물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어쩌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러는 사이, 내 입에선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령을 소환하는 주문이 뱉어지고 있었다. “…땅과 바람과 물과 태양. 4대 기운을 증인으로 계약의 증거를 제시하며, 나 오늘날 그대의 존재를 이 땅에 소환하고자 하오니 그 이름은 모든 물의 근원이자 지배자, 정령왕 엘퀴네스여! 나의 부름에 응답하소서.” 주문을 마친 나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맑은 시냇물에 담갔다. 그러자 잔잔히 흐르던 물결에 커다란 파동이 일어나더니, 폭발이라도 일어나듯 물줄기가 거친 파도처럼 들끓어 오르기 시작했다. 촤아악! 철썩! 마치 분수처럼 하늘 높게 뻗어 올라가던 물줄기는 사방으로 물안개를 퍼뜨리며 그 안에서 점점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정령왕의 소환이 성공한 것이다! “크윽……!” 그와 함께 나는 급격한 기운의 소모를 느끼고 짧은 신음을 삼켰다.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정신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그 고통이 오래 이어지기 전에 나에게 건네는 낯익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나를 소환한 인간인가?” “……!!” 마침 어지러움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그곳엔 어느새 소환진을 타고 지상에 내려온 엘퀴네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서 있었다. 보통의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정령왕을 소환한 사실에 놀랐겠지만, 나는 그와 다른 문제로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시리도록 하얀 피부에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색 눈동자. 발끝까지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물색보다 맑은 푸른빛이었지만, 그의 얼굴이 내가 알고 있던 이와 판박이라고 할 만큼 똑같았던 것이다. “아, 아버지?” 그랬다. 그 모습은 틀림없이 엘뤼엔과 닮아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막상 현실로 닥치자 그 놀라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에 눈앞의 존재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그 표정조차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생겼을 때 보이던 엘뤼엔의 모습과 똑같아서 나는 연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나를 시큰둥한 표정으로 보던 그는 한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삐딱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난 너 같은 아들 둔 적 없는데.” “아, 그, 그게 아니라…….” “흥! 소환의 충격 때문에 정신이 나가버린 모양이군. 역시 인간들은 정신상태가 약해빠졌어. 그런 주제에 날 소환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독설까지 똑같잖아.” “뭐라고?” “아, 아니에요. 저어, 당신이 엘퀴네스인가요?” 조심스럽게 묻는 내 말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나는 엘퀴네스. 그리고 넌 물의 정령왕을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지.” “최…최초라고요? 내가?” “그럼 여기 너 말고 다른 인간이 있나? 뭐, 확실히 나로서도 놀라운 일이었다. 설마 인간이 나를 소환할 줄이야. 어쩔 텐가. 계약을 할 거야. 말 거야? 의사표현은 확실히 해라.” “자, 잠깐만요! 그 전에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러자 엘뤼엔, 아니 엘퀴네스라고 자신을 밝힌 정령은 귀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가 자신을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라는 이유로 꽤나 관대함을 베풀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인내심이 바닥이 나기 전에 나는 재빨리 질문을 건네기로 마음먹었다. “여기가 아크아돈이란 차원이 맞나요? 4대 정령왕이 존재하는?” “그렇다.” “혹시 이 대륙에 솔트레테 제국이나, 이사나라는 황제가 있었던 적은 없었나요?” “내가 알기론 없다.” “그럼… 10년 동안 비가 안 내린 적은요? 혹시 형벌의 신 엘뤼엔을 아세요?” “그런 신은 없어. 그리고 내가 존재하는 한, 이 땅에 가뭄이 생기는 일은 없다. 너는 내가 10년 동안이나 이곳에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점점 사나워졌지만, 나는 이미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어서 느끼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내가 흥분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 그는 마치 선심을 쓴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네 이름은 뭐지? 나를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란 점에서 이름 정도는 기억해 두겠다.” “아…엘퀴… 아, 아니! 엘이요. 엘이라고 해요.” 흠칫! 무심코 대답한 순가, 나는 우연처럼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떠올리곤 어깨를 움찔거렸다. 아니, 그가 이제와서 생각났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나는 내 머리색이 변한 것을 눈치 챈 순간부터 깨달아야 했었다. 금발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라면, 언제나 시벨리우스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엘’의 생김새와 똑같지 않은가! “흠, 엘이라고? 내 이름의 앞 글자와 같군.” 재미있다는 듯 혼자서 중얼거리는 정령에게 나는 떨리는 입술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이곳에… 유니콘이 살고 있나요?” “정말 당연한 걸 묻는군. 드래곤보다 많이 퍼져있는 종족이 바로 유니콘이다. 이 정도 상식은 인간들도 대부분 알고 있을 텐데?” “…….” 10년 가뭄이 없던 나라. 유니콘이 존재하는 게 당연하고,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 이사나가 아니라 ‘엘’ 이라고 알려지는 세계. “…4천 년 전의 과거인가.” 설마 그 ‘엘’이 바로 나였을 줄이야. 왠지 허탈해진 기분에 나는 피식 미소를 터뜨렸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정말로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비록 어디로 떨어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곤 했지만, 과거로 가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혹시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4천 년 전이라면 시벨리우스가 서클렛에 봉인되기 전이며, 트로웰의 나이가 천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이다. 라피스와 내가 알던 이프리트는 태어나지도 않은데다, 엘뤼엔이 아직 엘퀴네스이던 시절. 그러니까 지금 눈앞의 정령왕이 바로 엘뤼엔의 과거라는 소리가 된다. “하…하하하하!” 그제야 나는 떠나기 전에 트로웰이 ‘이것이 끝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이미 혜안을 통해 내가 이곳에 떨어지게 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잠깐의 이별이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나는 또 다른 그들과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여전히 혼자가 아니었다. “이봐, 뭘 그렇게 혼자서 웃는 거야? 계약은 할 건가, 말 건가?”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기다리는 것이 지루해졌는지, 엘퀴네스, 아니 엘뤼엔이 짜증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시간을 끌었다간 당장이라도 정령계로 돌아가 버릴 것 같은 기세라, 나느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계약한다고 하면 해줄 건가요?” “무슨 의미지?” “정령왕은 소환자와의 계약을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있잖아요. 계약자로서 나를 택할 거냐고 묻는 거예요.” 그러자 엘뤼엔은 무척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보통 인간들은 소환을 하면 전부 계약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으니 이런 말에 놀라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평소라면 좀처럼 볼 수 없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나는 괜히 신이 나서 열심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 권리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나?” “어떤 책에서 읽었어요. 하긴, 소환된다고 무조건 계약해야 한다면 정령왕의 체면도 말이 아니죠. 하지만 나와의 계약은 거절하지 말았으면 해요.” “그건 또 왜지?”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라면서요. 제 입장도 생각은 해주셔야죠.”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무심하기만 한 얼굴에 미소가 번지니 주변이 다 환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비록 비웃는 것에 더 가까웠지만.). 푸른색 머리카락 때문인지 그는 이전보다 한층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범접하기 힘든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신이 된 이후 그의 성격이 밝게 바뀌었다는 말은 아무래도 사실인 모양이다. 잠시 후,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한낮의 모래사막을 떠올릴 만큼 마르고 건조했다. “당돌한 인간이군. 내가 두렵지는 않나?” “대하기가 어렵긴 해요. 하지만 무섭진 않아요.” 신계에서 그와 처음 만났을 떄도 나는 그를 무서워하진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된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엘뤼엔은 자신있게 대답하는 나를 잠시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널 죽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하긴, 너처럼 자연 친화력이 뛰어난 자를 내 손으로 없애는 것도 그리 내키지 않는 일이긴 하지.” 짧게 중얼거린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천천히 한 손을 뻗어 내 이마에 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그것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나는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곧 이어질 엘뤼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최초로 인간에게 소환된 기념으로 계약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는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그대 ‘엘’은 계약을 이행함으로 나를 이 세계에 끌어낼 힘을 제공하며, 나는 그 대가로 너의 보필자가 될 것을 약속한다. 계약하겠는가?” “네! 물론.” “훗! 좋아. 계약은 성립되었다. 이것은 너를 평생동안 구속할 족쇄이자 보호막이 될 것이다. ” 내가 한때 읊었던 말을 고스란히 듣는 순간이 올 거라 누가 예상했을까. 나는 엘뤼엔이 내 이마에 물의 인장을 새기는 동안 착잡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싼 정령들을 바라보았다. 정령왕으로서 간신히 적응이 되었다 싶었더니 다시 인간이 돼버렸다. 이걸 설명한다고 이해해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지금 계약하는 엘뤼엔조차 내가 자신과 똑같은 성질의 정령왕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데……. 잠시 후, 물의 인장이 완전히 새겨지자 그의 형체 또한 온전하게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중간계에서 유희하기에 걸맞은 몸으로 바뀐 것이다. 당시에 나는 무척 신기해하던 일이었지만, 엘뤼엔은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요?” “계약할 때 보니 몸에 전체적으로 묘한 기운의 흐름이 느껴지더군. 마신의 힘이 서려 있던데, 넌 설마 신관인가?” 그의 시선은 정확히 내 손등에 새겨진 마신의 문장을 향하고 있었다. 보통 신관이 정령을 소환하는 경우는 없었기에, 나는 이래저래 특이한 인간으로 부각되는 듯했다. “마신의 문장? 그것도 꽤 고위급의 사제인 것 같군.” “아, 아니요. 오해예요. 전 신관이 아니거든요.” “그럼 그 문장은 뭐지” “아하하! 여기엔 좀 복잡한 사정이…….” 이곳에선 아직 카노스가 살아 있기 때문에 문장이 다시 살아난 것일까. 언젠가 그와 다시 만날 수도 있을지 모른단 생각에 내 마음은 기대감으로 붕 뜨기 시작했다. 그 밖에 내가 알고 있던 이들의 지난 과거를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나는 당장 라피스의 영혼을 찾아야 한다는 조급함을 잠시 잊을 정도로 흥분해 있었다. 그런 나를 잠시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엘뤼엔은 곧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얼굴로 물어왔다. “그래, 이제부턴 넌 뭘 할 작정이지?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난 이만 정령계로 돌아갈 생각이다. 가능한 난 귀찮게 하지 말고 휘하의 정령들을 이용하도록.” “엑? 돌아간다구요?” “왜? 굳이 나와 함께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야 당연하죠! 난 여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내가 정처없이 떠돌다가 굶어죽어도 좋아요?” “그런 건 내 알바 아니다. 내가 계약자의 생활까지 챙겨줄 의무는 없을텐데?” 생각보다 훨씬 쌀쌀맞은 말투에 나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지금의 그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은 알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마는 것이다. 때문에 반박하는 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사나워졌다. “그건 아니죠. 방금 자신이 한 말도 기억 못해요? 계약하는 조건으로 정령왕은 계약자의 보필자가 돼주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정령계로 돌아가면 안돼요.” “어처구니없는 결론이군. 그런 형식적인 서약 따위로 내 발을 묶어두겠다는 거냐?”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지! 말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거 몰라요? 약속은 약속이라구요.” “그래서 내 휘하의 정령들을 시키라고 했잖아. 그 정도라도 너 같은 인간에겐 큰 힘이 될 거다.” “안 돼요! 난 지금 시급을 다투는 무지무지 중요한 난국에 빠져 있단 말이에요!” 이러다 열 받은 그가 계약을 파기하고 돌아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지만, 다행히 엘뤼엔은 그렇게 까진 하지 않았다. 잠시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좋아. 일단은 함께해주지.” “정말요? 와아, 고마워요.” “단! 네가 거취 할 장소를 정할 때까지만 이다. 평생 인간의 뒤치다꺼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여기서 더 귀찮게 굴면 지금 한 계약도 파기하고 너도 죽이겠다.” “으음… 아, 알았어요.” 살벌한 눈빛에서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엘뤼엔은 한결 풀어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후우! 그래, 그 시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라는 건 뭐냐?” “아 그, 그게요…….” “정확히 말해라. 확실히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내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잖아. 그런 수법은 트로웰이나 불러서 써먹으라고.” “…파요.” “뭐?” 하지만 그는 다시 한 번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 순간 내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진동했기 때문이다. 꼬르르르륵. “…….” “…….” 한참의 침묵 후, 나는 어이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엘뤼엔을 보며 허무하게 웃었다.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아요.” ‘배고픈 게 무슨 시급을 다툴 정도로 중요한 일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꾸하겠다. ‘너도 한 번 굶어봐’라고. 특히 나는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공복감을 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배고픔은 반가움을 넘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게다가 수중엔 돈 한 푼 없고, 주위에 마을조차 없으니 이 캄캄한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조목조목 설명하지 않아도 엘뤼엔은 잠자코 주위의 정령들을 불러 근처에 먹을 만한 산열매와 나물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꽤 화를 낼 거란 생각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로선 전혀 의외의 반응이었다. “먹어라. 정령들이 가져온 것이니 독성은 없을 거다. 있어도 내가 치료하면 그만이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잠시 후, 산더미 같은 과일들을 눈앞에 쏟아놓은 엘뤼엔이 퉁명스럽게 내뱉는 소리에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물었다. “헤에! 의외네요? 화낼 줄 알았는데.” “화를 내? 내가 왜?”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붙들었다고 생각할 줄 알았거든요. 뭐, 나로선 꽤 중요한 일이었지만.” “생리적인 욕구만큼 인간에게 중요한 건 없다. 그리고 이것으로 네가 처한 상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처한 상황?” 그러자 엘뤼엔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주위에 널려있는 과일들을 보고도 먹어도 되는지 안되는지 모를 정도로 네 생존지식이 부족하다는 것과, 이곳을 벗어나 마을로 갈 방법을 모른다는 것. 그리고 음식을 사먹을 돈이 한 푼도 없다는 사실이지. 굳이 내게 부탁한 건 그런 이유 때문 아닌가?” “정확해요.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쎄, 나로선 이런 산중에 너같이 어린 인간이 혼자 들어온 것이 더 이상하군. 혹시 쫓기는 중인가?” “에? 여기가 산속이에요?” 주위에 보이는 것이라곤 넓은 들판뿐이기에 어느 평원쯤이라 생각하고 있던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차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리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도 부족하군. 이곳엔 혼자서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 그냥 걸어왔는데요.” “농담하지 마라. 넌 모르는 것 같은데, 여긴 인간들에게는 접근금지 영역으로 알려진 쉘바이돈 산맥의 고원이다. 한 발자국 마다 몬스터를 만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온갖 몬스터와 마물의 밀집 지대이지. 이런곳에 무기도 없이 혼자 걸어왔다고? 마법을 할 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쳇! 자기가 보냈으면서.”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에게 이곳에 온 자세한 사정을 털어놓고 도움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엘뤼엔이 과연 믿어줄지도 의문이고, 그 때문에 미래의 일에 변화가 생겨선 안되기 때문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했다. 훗날 그들이 이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말해줘도 괜찮을 듯싶었지만, 상황이 어찌 변할지 모르니 당분간은 가만히 두고 보는 편이 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의아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의 시선을 무시하며 그가 가져다준 과일 하나를 집어 베어 물었다. 아삭하고 씹자 달콤하게 퍼지는 향이 안 그래도 배고팠던 위장을 더욱 부추기는 것 같았다. 내가 정신없이 먹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문득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맛있나? 이런 걸로 배가 채워지는지 모르겠군. 내가 알고 있는 미식가 드래곤은 산열매 따윈 쳐다보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면 진수성찬이죠. 사실 지금은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식으로 뭔가를 먹어본 건 굉장히 오랜만이거든요.” “그 정도로 굶었나? 그렇게 혈색이 나빠 보이진 않은데.” “아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 음, 그러지 말고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도 한번 드셔보실래요?” 내 말에 엘뤼엔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내 손에 든 과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먹지 못하는 사실이 곤란한 게 아니라, 이런 권유를 받는 것이 처음이어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난감해 하는 느낌이었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저으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나는 먹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맛있는데. 으음… 하긴, 먹지 않는 것보단 먹을 수 없다는 게 더 맞겠죠? 물 이외에는 음료수를 마시는 것도 괴롭잖아요.” “인간인 네가 그런 건 어떻게 알지?” “아하하! 그냥 짐작이에요, 짐작. 그나저나 이거 정말 맛있네요. 앞으로 며칠 동안 여기서 살아도 문제없겠는데요? 사방에 먹을 것이 널려 있으니.” “아니, 이런 걸론 체력이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먹어야 해.”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말투는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귀찮고 성가시긴 해도 계약자를 챙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다. 그 작은 변화에 남모르게 기뻐하는 나에게, 그는 다시금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다 먹었으면 일어나라.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도록 하지.” “네? 어디로요?” “여기서 반나절 거리에 작은 마을이 있는 걸 확인했다. 지금 가면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다. 뭐, 네가 싫다면 상요하지는 않겠지만.” “저는 상관없어요. 사실 여기 꽤 추운 편이기도 하고…….” “흠, 인간이 견디기엔 기온이 조금 낮긴 하군. 그건 그렇고… 산을 내려가는 것에 쉽게 동의하는 것을 보면 쫓기는 상황은 아닌 모양이지?” 끄덕끄덕.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진실이야 어쨌건 그가 보기엔 다급한 상황도 아닌 내가 무일푼으로 혼자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것이니, 한심하게 비쳐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혹시 가출 소년으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옷차림이나 안색을 봐선 이런 생활을 오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용케 나를 소환할 생각을 다 했군.” “하하! 뭐…….”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점 투성이지만, 네가 말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캐묻지는 않겠다. 그런데 이곳에서 나가면 가고 싶은 목적지는 있는 건가? 혹은 만나야 할 사람이라던가.” “글쎼요. 만나야 할 사람은 몇 명 있어요. 목적지라면 무한정이지만.” “무한정?” “네. 아직 정해둔 곳이 없거든요. 가능한 어디든 돌아다녀볼 생각이에요.” “네 처지를 잊고 있는 건 아닌가? 여행비도 없을 텐데?” “에이~ 아버지… 아니. 엘퀴네스님이 있잖아요. 설마 계약자를 모른 척할 셈은 아니죠? 거처를 정할 동안은 동행해준다면서요.” “…….” 내 뻔뻔한 태도에 할 말을 잃은 듯, 엘뤼엔의 굳은 표정은 한 동안 풀어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실제로 나는 아무것도 없는데다가 지금 의지할 데라곤 그밖에 없는 것을. ‘미안해. 아버지. 돌아가면 이 빚은 꼭 갚을께.’ 하지만 이런 내 속마음이 그에게 들릴 리 만무. 잠시 후, 나는 한탄하듯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엘뤼엔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애보기인가. 앞으로 피곤하게 됐군.” 이 관계가 앞으로 4천 년 후에도 지속된다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경악할 그의 얼굴을 상상하며 남몰래 숨죽여 웃는 나였다. 엘뤼엔의 말처럼 거의 반나절을 걸어서 도착한 마을은 산맥 근처에 자리 잡은 것치곤 무척이나 번화한 편이었다. 날이 저물었음에도 거리마다 불이 켜진 상가와 손님을 태운 마차의 행렬이 즐비했고, 보통 큰 도시에서나 있음직한 여행자들을 위한 여관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엘뤼엔은 가장 크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여관을 택해서 걸음을 옮겼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손님. 묵어가실 건가요? 방을 몇 개나 드릴깝쇼?”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온 종업원의 말에 엘뤼엔은 별다른 감흥 없는 표정으로 담담히 대꾸했다. “2인실로 하나. 이틀 정도 머무를 생각이다.” “2인실이라면… 아, 마침 2층에 자리 하나가 있군요. 202호라고 적혀 있는 곳으로 가시면 됩니다. 가격은 선불로 은화 2개입니다. 식사와 목욕을 포함하시면 가격이 더 추가됩니다만.” “목욕은 필요 없다. 식사는 1인분으로.” “아, 그러시다면 은화 1개만 더 추가하시면 됩니다.”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는 종업원에게 엘뤼엔은 말없이 금화 한 개를 꺼내 던졌다. 그러자 그때까지만 해도 여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꽤 큰 금액이라 거스름돈을 준비하려면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잔돈은 필요 없다. 여기 이 녀석의 식사나 제대로 챙겨와. 소화에 지장이 가지 않는 것으로.” “헉! 예, 옙! 알겠습니다! 요리사에게 급히 지시하겠으니 준비 되는 동안 올라가셔서 푹 쉬십시오. 저희 여관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허리까지 90도로 숙이며 인사하는 걸 보면 이곳에서 금화 한 개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지 알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1층은 술과 음식을 겸하는 바(Bar)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모두 놀란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2층으로 올라가는 내내 계속되자 엘뤼엔은 성가시다는 얼굴로 낮게 투덜거렸다. “인간들은 쓸데없는 일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정말 귀찮기 짝이 없군.” “그럼 처음부터 은화를 냈으면 됐잖아요. 아니면 거스름돈을 받거나.” “날더러 그런 푼돈을 가져다 어디에 쓰라는 거냐?” “…….” 아직 이곳 화폐의 기준은 잘 모르지만, 고급에 해당하는 여관 숙박비를 해결할 금액이라면 서민들에겐 꽤 큰돈임이 틀림없었다. 그런 것을 푼돈으로 취급하다니, 돈이 썩어 넘치는 건가?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본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긴, 에바스 에덴에 있는 것이 죄다 보석덩어리들이니 은화 한 두 개쯤은 푼돈으로 느껴질 만도 하겠군요.” “…네가 에바스 에덴의 이름을 어떻게 알지?” “채, 책에서 읽었다니까요. 하하하!” “그런 것까지 기록되어 있나? 책 이름이 뭐지? 정령계의 사소한 내용까지 적혀 있다면 찾아서 제거해야겠다.” “하하… 그,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태워졌거든요.” “태웠다고?” “네. 집 창고에 있던 걸 우연히 발견한 거였는데, 아버지가 장작 대신 불쏘시개로 써버렸어요. 사실 굉장히 낡아서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들었거든요.” 찔끔한 얼굴로 대답하자 엘뤼엔은 더욱 의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벌써 태워버렸다는데, 결국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쉬어라. 식사는 알아서 가져올 거다.” “엥?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은요?” “난 잠시 정령계에 가 있겠다. 인간들의 침구는 불편해서 안 맞아. 무슨 일이 생기면 불러라.” “뭐야~ 그럼 처음부터 2인실로 안 해도 됐잖아요.” “흥! 너 같은 어린애가 혼자 있다는 걸 대대적으로 광고할 셈이냐? 노예상인에게 잡혀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든지.” 삐딱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책을 태웠다는 말에 삐진 건가? 매정한 엘뤼엔은 그 밖의 별다른 언질도 없이 정령계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아마 나와 동행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덕분에 덜렁 혼자가 돼버린 나는 방 안에 마련되어 있던 나무 침대에 걸터앉아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쉽게 친해지긴 힘들다는 건가. 쳇! 나중에 두고 보자.” 낯선 세계에서 의지할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감지덕지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듯한 엘뤼엔의 태도는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굴만 똑같으면 뭘 하겠는가. 성격이나 말투가 영 딴판인 것을. 설마 다른 일행들도 이러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이번에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다고 했었지. 그럼 아직 그에게 배신당하기 전인가? 지금 트로웰은 뭘 하고 있을까.’ 시벨의 말에 의하면 이때의 트로웰은 인간을 무척 싫어했다고 했었다. 바로 미네르바가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이미 결말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 역시 기분이 찜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왠지 이번 여행도 앞날이 막막해 보이는 건 내 생각만이 아닐 것이다. 똑똑! “네, 누구세요?” “저어, 식사를 가지고 왔습니다. 손님.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내 물음에 들려온 것은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설마 싶은 마음에 문을 열자, 갈색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땋은 여자아이가 식사가 담긴 커다란 쟁반을 든 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나이는 이제 10살이나 되었을까? 귀염성 있는 얼굴에 또렷하게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가 무척 인상적인 아이였다. 적어도 내 또래의 사람이 올 거라 생각했던 나는 당황한 얼굴로 얼른 아이에게서 쟁반을 받아 들었다. “이런, 괜찮니? 많이 무거웠겠구나.” “어? 안돼요. 제가 방 안까지 들고 들어가야 하는데…….” “방 안까지?” “네. 그래야 주인어른께 혼나지 않거든요. 손님에겐 최상의 서비스를 대접해야 한댔어요.” 아이는 또랑또랑하게 대답하며 다시 자신에게 쟁반을 넘겨줄 것을 요청했다. 이 얼마나 투철한 직업정신(?)인가? 손님을 비롯하여 이 여관 주인에게도 매울 훌륭하다는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나이가 너무 어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나는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한국에서였다면 아동학대로 신고 들어갈 일 이라구. 이건 내가 가지고 들어갈 테니까 넌 걱정 말고 돌아가렴. “하지만 들어가서 손님의 잠자리도 미리 정돈해야…….”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 “안 돼요. 손님에게 그런 일을 시킬 순 없어요!” 단호하게 외친 소녀는 내가 말릴 사이도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와 이불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 다람쥐 같이 재빠른 움직임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잠시 후, 아이는 자신이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정리가 되었는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푸욱 허리를 숙여 보였다. “침실의 정돈을 끝냈습니다, 손님. 저희 여관을 이용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식사가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저는 손님께서 식사를 마치실 동안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 하아! 저기, 너 이름은 뭐니? 나이는 몇 살?” “저는 랑시라고 해요. 올해로 7살 이구요.” “7살? 그렇게 어린데 이런 일을 한단 말이야?” “4살 때부터 했는걸요. 별로 힘들지도 않아요. 손님들도 험하시지 않고, 주인아저씨도 친절하시구요. 제나 아주머니가 저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어요. 이런 고급 여관에서 일하는 건 쉽지 않거든요.” “…….” 풍요로웠다는 황금시대에도 평민들은 여전히 고단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소녀, 랑시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쩌지? 수고비라도 주고 싶은데, 지금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볼일이 있다고 잠깐 나갔거든.” “괜찮아요. 어차피 숙박비에 전부 포함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는 건 그렇고… 아, 그래. 신기한 거 보여줄까?” “신기한 거?” 호기심에 초롱초롱 빛나는 아이의 눈동자를 보고 피식 웃은 나는 곧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를 소환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갑자기 투명한 요정이 나타나자, 랑시는 입을 떡 벌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 우와! 어, 어떻게 한 거예요? 이건 마법인가요? 손님은 마법사였군요!” “쿡쿡! 마법이 아니라 정령이라고 하는 거야. 이 아이는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라고 해.” “아! 이게 바로 정령이군요! 말로만 들었어요. 저어… 한 번만 만져 봐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나이아스를 이끌어 랑시의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물의 축축한 감촉이 느껴졌는지 아이의 얼굴이 더욱 환하게 피어올랐다. “차가워. 그런데 손에는 전혀 물기가 없어요! 정말 신기해!” “그래? 다행이구나. 내가 해줄 건 이런 것밖에… 어라?” “……??” 그 순간, 랑시의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생긴 것을 깨달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얼굴을 굳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없었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내가 나이아스를 손에 올려준 순간 급속도로 커졌던 것이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까. 믿을 수 없는 마음에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결말은 처음과 똑같았다. 지금 랑시는 소환주문을 외무면 당장 나이아스를 소환할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상승되어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예전이라면 내가 가진 정령왕의 기운에 영향을 받아 친화력이 높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나는 인간인데?’ 이미 시험을 통해 내가 정령왕의 능력을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라, 지금 일어난 일은 나로서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기적이라면 기적인 걸까. “에잇! 아무렴 어때. 잘되면 그만이지.” “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랑시,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따라 해볼래? 잘 하면 선물이 있을 거야.” “선물이요? 와아! 할래요!” 단지 정령 소환의 주문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지만, 저렇게 순진하게 답하는 아이를 보니 괜히 내가 사탕으로 꼬여내는 변태 아저씨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찝찝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린 것도 잠시, 나는 랑시에게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의식을 치르도록 했다. 아니나 다를까. 주문이 끝나는 순간, 덜컥 나이아스가 소환돼 버렸지만, 이미 100% 될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이었기 때문에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태연한 나와는 달리 소환한 본인인 랑시는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고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장난처럼 따라한 말에 정령이 소환될 거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아이가 정신을 차린 것은 나이아스가 입을 열어 계약의 의사를 묻는 순간이었다. -당신이 저를 소환한 인간이군요.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계, 계약? 지,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이야?” -네, 그렇습니다. 나는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 나를 소환한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라, 랑시라고 해.” -랑시. 예쁜 이름이군요. 저와 계약하시겠습니까? 정령의 질문에 랑시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안심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는 용기를 내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이아스는 빙긋 웃으며 한줄기의 물이 되어 랑시의 이마로 스며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드러나는 물의 인장을 보며, 나는 이들의 계약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물의 하급 정령사가 탄생한 것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방금 제가 겪은 일이 사실인가요? 여기 있던 정령은 어디 갔어요?” 계약을 완료한 정령이 사라지자, 랑시는 꿈꾸듯 몽롱한 표정에서 벗어나 당황한 목소리르 물었다. 나 또한 복잡한 기분이 든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얼굴이 되어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이아스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갔어. 하지만 걱정하지만, 이제부터 네가 부르면 어디에서든지 나타날 테니까.” “어디에서든?” “그래. 그래도 가급적 사람들 앞에서 부르는 것은 자제하도록 해. 이번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야. 알겠지? 그리고 너무 자주 부르면 힘들 테니까 가끔씩 부르도록 하고.” “아, 알겠어요. 정말 감사해요. 제가 정령과 계약을 하다니…….” 그 뒤로 랑시는 몇 번이고 정령을 불러 자신이 정말 계약했다는 사실을 체감하고서야 다시 원래의 일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며 황급히 내려가는 아이를 바라보던 나는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문득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으음, 왠지 무지 엄청난 사고를 친 것 같은 느낌이…….” “그걸 이제야 알았나?” “……!!” 갑자기 들려온 낮은 음색에 나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언제 내려온 건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엘뤼엔이 나를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한 일 때문에 찔려하고 있는 상태인지라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아하하… 어, 언제 왔어요? 왔으면 인기척이라도 내시지… 하하하하!” “하아, 그새를 못 참고 일을 벌이다니. 방금 네가 무슨 일을 한 건지는 알고 있나?” “아니, 난 뭐, 설마 정말로 정령을 소환하게 될 줄은 몰랐죠. 아하하하하!” “거짓말하지 마라. 넌 이미 그 아이의 친화력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말 이해 불가능한 녀석이군. 함께 있는 것만으로 타인의 자연 친화력을 높여버리다니. 설마 자연계의 정령들도 보이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아까 전보다 더욱 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인간 주제에 자연계의 정령이 보인다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겠는가. 잠시 후, 그는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식탁에 놓인 채 다 식어가는 저녁식사를 보며 한마디 툭 내뱉었다. “밥이나 먹어라. 또 배고프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아, 네. 그런데 정령계로 돌아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다시 돌아왔어요?” “인위적으로 정령이 소환되었기에 혹시나 싶어 내려와 본 거다. 그 지점이 네가 있는 곳이라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그, 그렇군요.” “지금 한 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앞으론 누군가의 친화력이 높아진다고 해도 절대 정령을 소환하게 만들지 마라. 너와 접촉하는 모든 인간을 정령사로 만들 작정이 아니라면.” “으음, 실수였어요. 이제부턴 주의할게요.”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다시는 혼자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나를 사고뭉치로 단단히 찍어버린 듯했다. 암흑의 군주, 대지의 왕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내가 떨어진 곳은 에델이라는 왕국의 한 지방이었다. 이때의 아크아돈은 2개의 제국과 5개의 왕국이 존재했는데, 에델은 바로 그 5개 왕국 중에서도 가장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도 제국에서 이 왕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곳이 엘프들의 영역과 밀접한데다 그들과의 교류가 가장 활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걸 증거이라도 하듯 나는 마을에 도착한 내내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는 엘프들의 모습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요 근래 마을에 떠돌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었다. “연쇄살인?” “네. 벌써 다른 마을에서는 여러 명이 죽었다더군요. 손님들도 주의하십시오.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조금 살 만해지니까 별 이상한 놈들이 설쳐서는. 쯧쯧!” “계속 잡지 못하고 있나보죠?” “잡기는커녕 인상착의조차 파악하지 못했어요. 살아남은 사람의 증언으론 웬 조그만 꼬맹이라는데. 허, 그게 말이 됩니까? 꼬맹이가 장정을 열 명 넘게 죽이다니요.” 한참 동안 기가 막힌 얼굴로 떠들던 여관 주인은 다시금 몇 번이고 주의를 당부한 후에야 돌아갔다. 그가 이토록 열성적으로 충고하는 이유는 범인이 노리는 목표가 대부분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어제 엘뤼엔이 보인 큰 씀씀이로 인해, 그는 우리를 여행중인 귀족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뤼엔은 창밖만을 응시한 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흐음, 이 세계에도 연쇄살인이란 게 있구나. 어째 무섭네.” “이 세계? 꼭 너는 이곳 사람이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는군.” “아하하! 그, 그랬나요? 아니, 뭐… 여긴 왠지 굉장히 평화로울 것 같았거든요. 그래도 역시 인간이 사는 곳은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런가? 하지만 방금 그가 말한 녀석은 트로웰일 거다.” “아~ 그렇군… 네? 누, 누구라고요?” 확신이 어린 말에 무심코 대답하던 나는 곧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뗀 엘뤼엔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날 보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란 말이다. 요즘 녀석이 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거든.” “아, 아니, 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 어째서 그가 범인이라는 결과로 이어지는데요?” “이미 몇 번 전과가 있으니까. 그런데 벌써 이곳까지 왔나. 흐음, 어지간히 재미붙여버린 모양이군.”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는 바짝 얼어 있는 나를 보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를 만나면 너도 주의해라. 내 계약자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는 않을 테니까. 아니,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이유로 더 죽이려고 할지 모르지. 인간을 굉장히 싫어하는 녀석이거든.” “거, 거짓말이죠? 트로웰이 정말 그런다고요?” “믿기 어렵다면 직접 만나보던가.” “…….” 저런 무책임한 말에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은 건 트로웰의 이야기가 그만큼 충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속의 그는 늘 형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존재였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만난다면 제일 먼저 무슨말을 해야 할까. 언제고 내게 말한 ‘고맙다’는 것이 설마 이번 일과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내게 엘뤼엔은 냉랭한 얼굴로 물었다. “그나저나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지? 구체적인 목적지를 말하지 않으면 이동할 수 없잖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음, 그건 그냥 겸사겸사구요. 사실은 뭘 찾고 있거든요.” “무엇을?” “으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지금 날 놀리는 건가?” 엘뤼엔의 얼굴이 찌푸려지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보석’이라는 힌트 하나로 찾기에는 무리일 정도로 그 대상이 광범위한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애매한 힌트를 던져준 장본인이 바로 엘뤼엔이지 않은가? 나로선 오히려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다. 혹시 지금의 엘뤼엔도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나는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혹시 누군가가 죽었는데, 그 영혼이 명계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그야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이 알아서 찾겠지. 본래의 궤도에서 크게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그럼 찾을 수 없는 장소로 떨어진 경우에는요?” 그러자 이제까지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엘뤼엔이 눈을 크게 뜨더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건성으로 건네는 질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럴 땐 일정한 형태의 물질에 봉인된다고 들었다. 우연히 발견되기 전까진 절대 명계로 돌아갈 수 없지. 혹시 네가 찾는 것이 그런 종류인가?” “맞아요!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그런 걸 가져서 뭘 하려고?” “알고 있는 거군요?” 내가 환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흔하진 않지만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 ‘영혼의 보석’ 이라고 해서 수집가들 사이에서 굉장한 인가를 모으고 있지.” “영혼의 보석?” “그래. 보통 가공해서 에고소드의 재료로 쓰더군.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전부 그런 종류들뿐이야. 원석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녀석도 있지만, 겉보기는 보통 보석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별로 특이할 것도 없어.” 일이 풀리려면 이런 식으로도 풀리는 구나! 막막하던 앞에 드디어 희망이 보이자 가슴이 심하게 두근두근 뛰었다. 엘뤼엔은 그런 내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꼭 찾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네!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 보석은 어디에서 찾아요?” “인간들은 봐도 잘 모를 거다. 드래곤이나 유니콘들이라면 그 속에 담긴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지만.” “그게 정말이에요? 그럼 혹시 아버… 아니, 엘퀴네스님 주위에 그런 보석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없나요?” “몇 개나 퍼져 있는지 알 순 없지만, 내 계약자 중에 가지고 있는 놈이 있긴 하다. 하지만 워낙 보석에 미친 녀석이라 쉽게 내주지는 않을 거야.” “상관없어요. 저 좀 그 드래곤한테 데려다주세요. 나머진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떠나기 전, 엘뤼엔은 내가 한눈에 라피스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만약 그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면 곧바로 손에 쥐고 귀환주문을 외워버리면 그만이다. 설마 미래까지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소유하고 있던 드래곤에겐 안된 일이지만 길을 잃고 헤매는 영혼을 명계로 돌려보내지 않는 책임도 있으니 미안해할 생각은 없었다. 신들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히 불법(?)행위일 테니 말이다. “아, 다행이다. 정말 막막했었는데. 고마워요, 아버지. 덕분에 살았어요.” “뭐가 그렇게 중요한진 모르겠지만, 일단 가야할 방향을 잡았다니 다행이군. 그런데 왜 자꾸 날더러 아버지라고 부르는 거지?” “앗! 죄송해요. 사실 엘퀴네스님이 제 아버지와 꽤 많이 닮았거든요. 그래서 자꾸 착각하게 되네요.” “나와 닮은 인간이 있다고?” “하하하! 그 뭐랄까,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으음, 말투라든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엘뤼엔은 더욱 기분 나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한낮 인간이 자신과 닮았다는 소리가 꽤나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나는 화제도 돌릴 겸 다른 것을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바람의 정령왕이 인간에게 소환되었다면서요? 한 시대에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두 명이나 되다니, 굉장히 놀랍네요. 미네르바를 소환한 사람은 어떤 인간이에요?” “관심이 없어서 모르겠군. 내가 왜 그런 걸 알아야 하지?” “에? 하지만 가족이잖아요. 형제를 소환한 인간인데 기본적인 정보쯤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아요?” “정령왕들은 가족의 개념이 아니다. 그저 같은 일을 하는 동료 일 뿐이야.” 냉정하게 답하는 말투엔 다른 정령왕에 대한 애정이 조금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을 통해 나는 그가 이 세계에서 철저하게 독립된 혼자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훗날, 그가 나를 아들로 삼은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하긴, 괜히 성격파탄자라는 말을 들었겠는가. 그것도 자신을 짝사랑하던 상대에게서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마음을 여는 편이 좋을 텐데.” “지금 뭐라고 했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앞으로 뭐라고 부를까요? 사람들 앞에서 ‘엘퀴네스’님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요.” “글쎄. 특별히 유희중에 쓰려고 정해둔 애칭은 없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불러라.” “으음… 그럼 엘뤼엔이라고 해도 될까요?” “엘뤼엔? 나쁘진 않군.” 그 속에 담긴 뜻이 ‘파괴하다’라는 것을 안다면 과연 괜찮다고 했을까? 나는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엘뤼엔을 보며 이번 일을 조용히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내 조마조마한 기색을 눈치 채지 못한 듯, 엘뤼엔은 무심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될 테니 그 전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미리 준비해둬라. 마을을 벗어나면 당분간 노숙행일 테니까.” “어디로 가는 건데요?” “보석을 가지고 있는 드래곤은 현재 세이크 제국에서 유희 중이다. 짧게 잡아도 한 달은 가야 할 거야.” “한 달이나요? 공간이동 같은 건 못하나요?” “나 혼자라면 모를까, 너까지는 무리야. 지금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사서하는지 모르겠나?” 그의 시선이 거의 노려보는 것에 가까워지자 나는 찔끔한 얼굴로 얼른 딴청을 피웠다. 그런 나를 한참이나 뚫어지게 바라보던 엘뤼엔은 곧 체념한 듯한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짤랑거리는 주머니 하나를 던졌다. “……?” “돈이다. 앞서 말한 대로 나가서 필요한 것이나 사라.” “저 혼자서요?” “그럼 이런 일까지 나에게 의지할 생각이냐? 한 가지쯤은 알아서 해결해.” “하지만 난 여기 물가도 잘 모르는데… 쳇! 알았어요. 혼자서 하면 되잖아요.” 어차피 방 안에서 할 일도 없으면서 같이 가면 어디 덧나나? 나는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용감하게 혼자 1층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마침 점심때였는지 식탁에 앉아 식사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고급 여관에 어린 소년이 달랑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다. 그에 한술 더 떠서 카운터에 있던 여관 주인이 나를 알아보고 얼른 달려와 허리를 숙여 보였다. “어디 나가십니까?” “아, 네. 내일 떠나야 해서 여행물품 좀 사려구요. 이 근처에 시장이라든가… 상가가 활발한 곳이 있나요?” “오른쪽 길을 걷다 보면 큰 광장이 나옵니다. 그 주위가 전부 상가입니다만. 그런데 손님 혼자서 가실 겁니까? 그런 것이라면 저희에게 시키시지요.” “아뇨, 괜찮아요. 나온 김에 구경도 할 겸 천천히 돌아다닐 생각이니까요. 하지만 워낙 초행이라… 아, 그래! 혹시 길 안내를 해줄 사람은 없을까요? 보수는 지불할께요.” “에, 그러시다면 저희 가게에서 잡일을 돕고 있는 꼬맹이 하나를 붙여드리겠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마을 지리는 확실히 꿰고 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여관 주인은 허둥지둥 누군가를 부르러 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와 함께 나타난 아이는 어제 식사를 가져왔다가 얼떨결에(?) 정령사가 된 바로 그 소녀였다. 이름이 랑시였던가? 갈색 고수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남자 뒤에 어색한 얼굴로 서 있던 아이는 문득 나를 발견하곤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앗! 손님은 어제 그……!” “험험! 랑시야, 우선 인사부터 해야지.” “아앗, 그렇지! 아, 안녕하세요! 오늘 손님을 도와 길 안내를 맡은 랑시라고 해요. 자, 잘 부탁합니다.” “안녕. 또 보는구나. 나야말로 잘 부탁해.”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을 달싹거리는 모습을 보니, 약속대로 아직 누구에게도 정령을 소환한 일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긴장한 걸로 착각한 여관 주인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게 사과의 말을 건냈다. “하하하! 아무래도 얘가 수줍음을 타나 봅니다. 그래도 자신이 맡은 일을 소홀히 하는 아이는 아니랍니다.” “그런 것 같아요. 어제보니 아주 똑 부러지던 걸요.” “하하! 그럼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수고비는 아이에게 따로 주시면 됩니다. 그냥 지나시다가 맛있는 거나 한 개 사주십시오. 랑시, 성심성의껏 안내해야 한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인아저씨, 다녀오겠습니다!” 아마도 랑시는 이곳 주인에게 딸처럼 귀여움을 받고 있는 듯 했다. 하긴, 아직 나이도 어리고 얼굴도 귀염성 있게 생겼으니 누구라도 예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 고된 환경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한 내게, 랑시는 여관에서 벗어나자마자 무척 흥분한 얼굴로 재잘재잘 떠들기 시작했다. “저기, 손님이 주신 정령 말이에요. 이름이 나이아스라고 했지요? 제방에 돌아간 후에도 몇 번 불러봤었어요! 정말 너무너무 귀엽고 예뻐요.” “그래? 굉장히 마음에 들었나 보구나.” “네! 물론이죠!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인 첼시가 그러는데, 정령은 아무나 데려올 수 있는게 아니랬어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요. 아! 하지만 약속대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요.” “하하! 그래, 잘했어. 앞으로도 약속 지키기다?” 내말에 랑시는 단단히 각오한 표정으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곤 갑자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머뭇거리는 어조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제가 보기엔 손님도 정령 같아요.” “에? 내가?” “네! 저는 이 세상에 손님같이 생긴 사람도 있다는 걸 어제 처음 알았어요. 1층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손님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거 모르셨어요? 정말 굉장히 이쁘고 반짝반짝거려요.” “저기… 난 남자인데?” “그래도 예쁜 걸요! 주인아저씨가 손님은 여행중인 귀족이니 더욱 정중하게 모시랬어요. 귀족들은 전부 손님처럼 예쁜가요” “그, 글쎄? 하하하…….” 호기심에 가득한 얼굴로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며 묻는 얼굴을 마주 바라볼 용기가 없어, 나는 은근슬쩍 아이의 시선을 외면했다. 문득 혼자 다니는 쪽이 더 마음 편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모든 것은 전부 때 늦은 후회에 불과했다. 랑시와 함께 상점가로 나온 내가 가장 먼저 들린 곳은 바로 옷가게였다. 지금 입고 있는 것은 얇은 비단으로 된 것이라 여행복으로 적합하지 않음은 물론, 슬슬 겨울로 넘어가려는 현재의 계절과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랑시가 적극 추천한 종류는 바로! “후드?” 나는 아이의 손에 들린 낯익은 옷감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이전 유희에서 지긋지긋하게 쓰고 다녔던 것이라 이번엔 되도록 피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랑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호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이건 반드시 사야 해요!” “…왜?” “왜라뇨! 손님은 너무 자신에 대해서 몰라요. 거리마다 사람들이 얼마나 쳐다보는지 아세요?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로 다니다간 납치될 지도 모른다고요!” “하하!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안 돼요. 안 그래도 요즘 귀족들만 노리는 살인범이 있어서 얼마나 무서운데……. 손님 같은 사람은 가장 표적이 되기 쉽다고요. 무조건 사세요! 무조건!” 결국 나는 랑시의 강압에 못 이겨 쇼핑 목록에 후드를 추가하고 말았다. 그것 외에도 한겨울을 대비한 망토와 여행복을 몇 벌 더 산 우리는 이번엔 식량을 사기 위해 곡물이 있는 상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음, 한 달 치면 대략 얼마 정도를 사야하지? 영 감이 안 잡히네.” “이런 여행이 처음이신가 보지요?” “아니, 처음은 아니지만, 식량 부분은 내 관할이 아니었거든. 다른 동료들이 알아서 챙겨서 말이야. 너무 많이 사면 무거워서 힘들겠지?” “경량화 마법이 걸린 배낭에 넣으면 되잖아요. 그 정도 아이템은 여기서도 쉽게 구할 수 있어요.” “에? 정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랑시는 또랑또랑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흔한 마법이잖아요. 여기가 이래봬도 이방인들이 꽤 거쳐 가는 지역이라 여행 시에 필요한 물품은 대부분 다 갖춰져 있어요.” “그래? 다행이다. 그럼 마음 놓고 잔뜩 사야지.” 과연 마법의 황금시대랄까. 그 외에도 대부분의 과일과 육류에 보존마법이 걸려 있어, 마르거나 상할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마법이 흔한 시대임에도 지방의 외각에선 마법사라는 존재를 구경하기 힘들지만 말이다. “뭐, 어차피 나만 먹을 테니까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 해야겠지? 육포같은 것보단 재료를 사서 그때그때 요리를 해먹을까나.” “그럼 귀찮지 않아요?”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난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보단 ‘먹는다’ 는게 더 중요하거든. 돌아가면 다시 먹지 못하게 될 테니 이 기회에 열심히 먹어둬야지.” “……??” 내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지 못한 랑시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따.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요리는 시벨이 잘했는데. 먹어보라는 권유에도 어쩔수 없이 거절해서 얼마나 괴로웠던가! 아마도 이곳에서 그를 만나게 되면 가장 먼저 요리를 부탁하게 될 것 같았다. 조만간에 만날 수 있겠지? 혼자 즐거운 상상에 빠져 있느라 나는 주위의 사람들이 갑자기 술렁거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것을 느낀 것은 옆에 있던 랑시가 흥분한 표정으로 내 팔을 흔들었을 때였다. “세상에! 손님! 저 사람봐요! 너무 멋있다!” “으응? 아, 맞다. 랑시, 손님이라고 하지 말고 엘이라고 불러.” “엘이요?” “응. 내 이름이야.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해도 되고.” “헤헤! 그럼 엘 오빠, 저 사람 봤어요? 굉장히 특이하지 않아요?” “누구?” 랑시가 가리키는 방향은 광장 한가운데에 마련된 큰 분수대였다. 그곳엔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누군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바로 그 장소엔 한 소년이 앉아 피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 막 시작된 듯, 맑은 음률이 퍼질수록 하나둘씩 몰려드는 사람들을 따라 나 또한 랑시에게 이끌려 그 앞으로 걸어갔다. 웅성웅성. 술렁술렁. “…어라?” 피리의 연주도 수준급이었지만, 사람들이 몰려드는 진짜 이유는 소년의 외모 때문이었다. 햇볕에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와 호리호리한 체형, 그리고 긴 속눈썹을 드리운 두 눈은 비록 감겨 있었지만 한눈에 넋을 잃을 만큼 아름다웠다. 거기에 환상적인 음률까지 더해지니 누구라도 한 번쯤은 걸음을 멈추고 구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태연하게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할 수 없었다. 소년의 모습이 내가 아는 누군가와 무척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트로… 웰?” 무심코 이름을 부르는 중에도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수십 번 반복해서 확인해도 그는 틀림없는 땅의 정령와 트로웰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피리부튼 것에만 심취해 있는 그 모습은, 이곳이 과거라는 사실을 잠깐 잊을 정도로 내가 알고 있던 그의 분위기와 닮아 있었다. ‘우, 우와! 정말 트로웰이잖아?’ 설마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게 될 줄이야! 하지만 연주를 마친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반가웠던 감정이 순식간에 경직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단지 눈빛이 달라진 것뿐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돼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하는 주위 사람들은 연신 트로웰을 향해 칭찬을 늘어놓기 바빴다. “와아! 정말 잘 들었네! 어린 소년이 연주를 아주 잘하는데?” “굉장히 멋졌어! 자네, 이름이 뭔가? 혹 우리 가게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는가?” “여행 중이라면 잠시 우리 집에 초대하고 싶은데. 만찬을 대접 할 테니 한 번만 더 피리를 연주해줄 수는 없겠나?” 시끌벅적한 소란 속에서도 트로웰의 시선은 오직 나를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가 바라보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사람들이 멀뚱히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헉! 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곤 갑자기 파도처럼 양 갈래로 쫘악 물러서며 그와 나 사이에 길을 트는 것이 아닌가! “어, 어라?” 그 잽싼 행동에 당황한 나와 달리, 트로웰은 망설임 없이 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태도를 보아 아마도 처음부터 나를 만날 생각으로 이곳에 나타난 모양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나에게 내뱉은 첫마디는 시작부터가 다분히 시비조에 가까웠다. “너구나? 그 독불장군을 이 땅으로 끌어낸 인간이. 생각보다 어리네?” “…아하하, 아, 안녕.” “흐음… 안녕?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는군. 이미 알고 있다는 소리인가?” “보시다시피… 랄까.” 어색한 내 대답에 그는 의외라는 듯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는 괜찮군. 외모도 그럭저럭 봐줄만 하고. 아쉽네. 인간이 아니었다면 좋았을 텐데. 죽이기엔 조금 아까운데?” “……!!” 생긋 웃는 얼굴에서 살벌한 말이 쏟아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보다 더 당황해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아마도 어린 녀석이 농담을 너무 과하게 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트로웰은 절대 허언은 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아까부터 심장이 따끔따끔 거릴 정도로 강렬한 살기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이런 대낮에 거리 한복판에서 시비를 걸어올 줄이야! 만나고 싶다곤 생각했지만, 절대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억울하다고 말할틈도 없이 곧바로 이어지는 그의 공격에 몸을 피해야 했다. “다들 피해!!” 쉬익! 콰아아앙! “히이익!” “사, 사람 살려!” 거대한 폭발 후 남은 것은 1m는 족히 패였음직한 커다란 구덩이였다. 사람들은 무기도 없는 소년이 맨손으로 괴력을 발휘하자 혼비백산한 얼굴이 되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마찬가지로 어쩔 줄 몰라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랑시를 향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랑시! 어시 도망쳐! 당장 여관으로 돌아가!” “하, 하지만!” “난 괜찮으니까 얼른 가! 운디네 소환! 랑시를 목적지까지 무사히 보호해줘!” “에, 엘 오빠!!” 소환된 운디네는 내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곤 황급히 아이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들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후후! 꽤 페미니스트인가 보네? 자신의 안전은 상관없이 여자와 어린이부터 보호하는 건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장난치고는 너무 살벌하잖아!” “장난? 쿡쿡! 잘못 짚었어. 나는 정말 너를 죽일 생각이거든.” “내가 뭘 어쨌다고?” 뜨악하며 되묻자 트로웰은 살짝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별로 이유 같은 건 없어. 그냥 인간이 싫은 거니까. 나중에 전부 몰아서 죽이기 전에, 몇 명만 시범 삼아 먼저 괴롭히는 것뿐이야.” “……!!” 질투에 미친 사람은 무섭다더니, 트로웰이 바로 그 짝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무대포로 몰아붙일 필요는 없잖아! 이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도망친 후라 광장에 남아 있는 것은 나와 트로웰밖에 없었다. 덕분에 거치적거리는 방해물이 없어진 탓인지 그의 공격의 강도 역시 점점 더 거침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쾅! 콰앙! 우르르르! “으악! 자,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필사적인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의 공격은 도무지 멈출 줄 몰랐다.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덕에 큰 부상은 없었지만, 이미 내 몸은 자잘한 생채기들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꽤 잘 피하네. 요령으로 정령왕을 소환한 건 아니란 소리인가? 뭐, 좋아. 그럼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주지.” 그가 한 손을 내밀자 곧 바닥이 크게 진동하더니 갈라지는 땅 위로 시커먼 흙더미가 불쑥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순식간에 기다란 장검으로 변형되어 그의 손 안에서 무기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내가 사용하는 얼음창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그것을 보고나자 나는 마음의 여유가 완전히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용병으로 유희 중이었을 때도 트로웰은 검을 굉장히 잘 다루었었다. 지금의 내가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 쉬이익! 어느새 검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나는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몇 달은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한참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각오하고 있던 통증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한 마음에 슬쩍 눈을 떠보니 어느새 검을 거두어들인 트로웰이 따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내게 딱딱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반격을 하지 않지?” “…어?” “내 공격을 피하는 움직임을 봐선 너도 충분히 반격을 가할 실력이 있는 것 같은데, 어째서 얌전히 당하고만 있냐고 묻는 거야. 게다가 도망치지도, 엘퀴네스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다니. 내가 알아서 멈출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하하… 설마. 단지 정신이 조금 없었을 뿐이야. 그리고 난 친구를 공격하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거든.” “친구? 너와 내가 언제부터?” “그야 처음 만났을 때부터지! 뭐, 지금 상황에서는 다소 일방적이긴 하지만 말이야. 하하하…….” 그가 화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트로웰은 말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의 얼굴은 곤란한 상황을 대면한 사람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음이 안 읽혀.” “에?” “인간임이 틀림없는데, 내 혜안이 통하지 않는군. 운명이 없다는 소리인가? …넌 대체 정체가 뭐지?” “으음, 그러니까… 엘이라고 해.” “뭐?” “엘이라고. 내 이름이야.”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내 말에 트로웰은 한순간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정체를 묻는 질문에 대뜸 이름을 말해버렸으니 누구라도 어이없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은 트로웰 본인에게도 무척 의미 있는 것이었다. 다름아닌 그가 지어준 애칭이었으니까. “난 네 이름을 물은 게 아니야.” “알아. 하짐나 지금의 난 이것밖에 내보일 게 없는 걸. 그 외에 나를 이루고 있는 모든 건 전부 가까거든.” “가짜라고?” “응. 그래서 네 혜안이 통하지 않는 걸 거야. 이런 빈껍데기에게는 건질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마치 본 성격을 감추고 있는 지금의 네 모습처럼 말이야.” 그러자 묵묵히 듣고 있던 트로웰의 어깨가 흠칫 굳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던 그는 아무런 말없이 그대로 내게서 등을 돌리곤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숨 막힐 듯 조여오던 살기 역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 잠깐만, 트로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그가 이렇게 가버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나는 당황해서 소리쳤지만, 트로웰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을 뿐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는 멈춰진 상태 그대로 서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널 죽이는 건 잠시 보류해두겠어. 다른 인간들과 뭔가 좀 다른 것 같으니.” “그,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건데?” “알려 줄 의무는 없어.” “윽! 그야 그렇지만… 혹시 괜찮으면 나랑 같이 여행 다니지 않을래? 그렇게 혼자 다니면 재미없잖아.” “…….” 초반부터 욕심이 너무 과했던 걸까? 트로웰은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도 정령계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리라. 이렇게 차갑고 냉정한 트로웰이라니… 미래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난 서운한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한편으론 무척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조금 더 친해질 수 있을까? 아마도 오늘 밤은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이런 미련한 녀석!” 여관에 돌아오자마자 내게 돌아온 것은 엘뤼엔의 날벼락 같은 불호령이었다. 이미 정령을 통해 사건의 전개를 대충 들은 듯, 그는 전에 없이 화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조심하라고 한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린 거냐! 너 같은 인간 따위가 무슨 배짱으로 트로웰을 상대한 거야! 너는 도망이라는 말도 모르나?”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건가! 이런 한심한 녀석과 계약을 하다니. 트로웰이 날 어떻게 생각할지 빤하군 그래.” “쳇, 어차피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도 쓰지 않잖아? 뭘 새삼스럽게.” “뭐라고?” 엘뤼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 또한 당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가 타인의 시선에 신경쓰지 않는 마이페이스인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사실 지금의 그가 이런 식으로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무척 의례적인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처음부터 같이 마을로 갔으면 좋았잖아. 나 혼자 보낼때는 언제고 이제와서 잔소리래? 누군 뭐 트로웰을 만나고 싶어서 만났나?” “이봐… 너……!” “계약자가 위험에 처하면 알아서 나타나 주는 센스! 엘뤼엔이야말로 그 정도의 기본은 갖춰달라고. 위험 했니 뭐니해도 내가 부르지 않으면 끝까지 나타나지 않을 생각이었지? 결국 마지막까지 오지 않았잖아.” “…….” 정곡을 찔린 듯 곧바로 입을 다물어버리는 엘뤼엔을 보며 나는 남몰래 속으로 쾌재를 올렸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그를 이겨보겠는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엘뤼엔은 잠시 후, 문득 생각났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왜 아까부터 내게 반말을 하는 거냐? 이제 눈에 뵈는게 없어진 건가?” “에? 그랬나?” “그랬나… 라니?” “에이~ 뭐, 어때. 그냥 편하게 하자고, 편하게. 원래 서로 친해지려면 쓸데없는 격식은 허물어야 하잖아?” “… 대담한 건지, 막나가자는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엘뤼엔은 내 말투에 대해 별 다른 간섭을 하지 않았다. 어디 네 마음대로 날뛰어보라느 식이랄까. 차갑고 냉정하기로 유명했다는 것치고, 그는 의외의 면에서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됐으니 떠날 준비나 해라.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마을을 벗어나야겠다.” “귀찮은 일?” “그런 소란을 일으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줄 알았나? 마을 인간들이 경비대에 신고한 것 같더군. 곧 이쪽으로도 들이 닥칠 거다.” “하짐나 난 잘못한 거 없는데?” “사건 진술이라는 게 있잖아. 적어도 며칠 동안은 붙잡힐 거다. 그래도 좋다면 기다리든가.” 엘뤼엔의 그 말은 내가 상황의 심각성을 절로 깨닫게 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트로웰이 처음부터 나를 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눈치 챘을 것이다. 게다가 나 역시 피하지 않고 응수했으니 그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인물로 착각하기 쉬웠다. 자칫하면 엉망이 된 광장을 복구하는 비용을 고스란히 지불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스스로 불러들인 일이니 불만은 없겠지? 알았으면 짐이나 챙겨라.” 엘뤼엔의 엄한 표정에 나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막상 짐을 챙기려는 순간, 나는 다시금 낭패한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 산 옷과 식량을 전부 놔두고 와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헉! 어떡하지? 트로웰이랑 싸우느라 다 버리고 와버렸는데. 지, 지금 가도 다시 찾을 수 있을??”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이젠 화낼 기운도 없는지 엘뤼엔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턱하고 이마를 짚었다. 어째 여행 초반부터 있는 대로 말썽만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상점에 들를 여유가 없다는 말로 단단히 못을 박은 엘뤼엔이 차후로 선택한 방법은, 여관 주인에게 며칠분의 곡류를 사는 것이었다. 이미 금화 한 개의 인심으로 홀딱 넘어가 있던 주인은, 부탁을 받은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밀가루를 포함해 육포를 담은 묵직한 자루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미 랑시에게 대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게 처음부터 저희에게 시키셨으면 좋으셨을 것을. 송구스럽지만 저희가 준비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두 분이서 이틀 정도는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연신 허리를 숙이며 쩔쩔매는 남자의 말에 엘뤼엔은 가만히 나를 노려보았다. 내가 그 시선을 피해 슬쩍 딴청을 피우자 그는 찌푸린 미간을 한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 일행이 아직 철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 같군. 혹 이번 일과 관게되어 누군가가 찾아와도 별다른 언급은 하지 말도록 해라. 그것이 이 여관을 위해서도 좋을 것이다.” “무, 물론입니다. 마을에 나가 봉변을 당하시고 이런 식으로 떠나시니 얼마나 송구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그리고 랑시를 보호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남자는 눈동자를 굴려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호기심이 가득 깃든 눈을 보니, 내가 정령사라는 사실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마법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대였지만 이곳에서도 정령사의 존재는 여전히 히귀했다. 그나마도 대부분 제국에서 독점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이런 작은 왕국에서는 평생 가도 정령사를 볼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나를 향한 여관 주인의 얼굴은 무한한 동경과 감탄에 젖어 있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이 정령왕이라는 걸 알면 기절하겠군.’ 나와 함께 다닐 때 이사나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나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랑시는 어디갔나 보죠?” “아, 예. 제 아비가 불러서 집에 잠깐 갔습니다.” “어라? 아버지가 있었어요?” 내가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여관주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린 자식을 일터로 보내는 것은 평민들에겐 그리 특이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많았던 나는 괜히 염려스러운 기분이 되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랑시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에요? …아이에게 잘해주나요?” “아, 예. 아주 끔찍하게 아낀답니다. 사실 여기서의 일도 안 시키려는 것을 제가 몇 번이고 설득했지요. 외팔이라서 그 자신은 변변한 수입을 벌 수 없거든요. 아내는 훨씬 전에 죽어 없고, 그저 랑시 하나만 보고 사는 남자인데… 쯧쯧! 사실 이런 곳에서 썩히기엔 아까운 아이지요. 볼 때마다 마음이 편하지 않지만 어쩌겠습니까? 타고난 팔자가 그 모양인 것을…….” 정말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쯧쯧 차는 모습을 보니, 그가 랑시를 딸처럼 여기고 있다는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엘뤼엔에게서 받은 돈 주머니 안에서 은화 한 개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주었다. “실은 아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랑시에게 아무것도 사주지 못했어요. 아저씨가 제 대신에 맛있는 것 좀 사주세요.” “예? 아, 아닙니다. 보호해주신 것만도 어딘데요. 게다가 이렇게 큰돈을…….” “그럼 놔두셨다가 두고두고 사주시면 되지요. 아무것도 안 해주고 가기엔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아참, 그런데 이 마을 이름이 뭔가요?” “오렌이라고 합니다. 이래봬도 마라얀 지방에선 가장 도시 축에 들어가는 곳이랍니다.” 자부심이 깃든 얼굴로 대답하는 남자의 말에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마을의 이름을 되새겼다. 랑시에게 정령을 소환하도록 도와준 일도 인연이고 하니, 혹시나 언제라도 기회가 된면 다시 들러볼 생각이었다.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엘뤼엔은 기다리기가 지루했는지 싸늘한 말투로 재촉했다. “아직 멀었나?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가지.” “아, 으응. 알았어.” 여관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거리를 나서자 주위는 온통 몇 시간 전에 광장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몰래 고개를 숙이며 걷던 나는, 마침 주변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가 솔깃해지고 말았다. “글쎄, 그 페허가 되었던 광장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되돌아왔다면서요?” “그렇다네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땅이 움푹 패이고 갈라지고 야단이 났다는데, 그걸 어떻게 원래대로 돌려놨을?요?” “혹시 알아요? 애초에 그런일이 벌어진 것이 아닐지. 단체로 환각이라도 봤나 보지요.” “어머, 정말 그럴지도. 호호호호!” ‘설마 트로웰이?’ 갈라진 땅을 원래대로 복구시키는 일쯤은 땅의 정령왕인 그에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대로 정령계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괜스레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기 시작했다. 혹시나 근처에 트로웰이 있는 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길을 따라 걸을 때까지 나는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마을에서 나오기 직전,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혹시 땅의 정령왕께서 보살피신 게 아닐까요? 원래 대지는 그분 관할이잖아요.” “그,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허험! 어둠의 군주께 그런 자비심이 있다면야 우리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일이지만.” “쉿! 그러다 그분의 진노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다들 입조심해요.” “크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활기차던 분위기는 단지 ‘트로웰’이 했다는 가능성을 언급한 것 뿐이었는데도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만큼 사람들에게 두려운 존재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리라. 어쩌다 트로웰이 이런 대우를 받게 된 걸까? 나는 답답한 마음에 엘뤼엔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사람들이 왜 저렇게 트로웰을 무서워하지? 어둠의 군주라는 게 무슨 뜻이야?”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다만 십 년 전엔가, 녀석이 인간들의 도시 하나를 깨끗이 지워버린 일이 있었지. 아마 그때부터 비롯된 일일 거다. 자신이 정령왕임을 숨기는 성격도 아니니까.” “도시를 지웠다고?” “그래. 아마 그 도시의 인간들이 대지의 신을 찬송하는 축제를 벌였을 때일 거다. 정작 수고하는 자는 따로 있는데 공로가 엉뚱한 녀석에게 돌아가니 화가 난 거겠지.” “…….” 그 부분에 대해서라면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실제로 트로웰이 투덜거리는 것을 본 적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일을 벌였을 줄이야!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며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말리지는 않았어?” “왜? 정령왕들은 서로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 있다 해도 그리 상관할 생각도 없고.” 네,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담담하게 대꾸하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걷던 나는 곧 길가에 서 있는 작은 인영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랑시?” 아마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무료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는 내가 이름을 부르자 환한 표정으로 얼굴 가득 미소를 띠었다. 나 역시 반가운 기분에 재빨리 랑시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야? 아버지한테 갔다면서.” “헤헤! 아무리 그래도 오빠 배웅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여자아이가 이렇게 혼자서 돌아다니면 위험해. 아버지가 걱정하시겠다.” “괜찮아요. 평소에도 자주 혼자 다니는 걸요. 이제 다들 그런가보다 해요.” 명랑하게 웃으며 대답한 랑시는 그만 돌아가라는 내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전 오빠가 크게 다치셨을까봐 굉장히 걱정했거든요. 그 사람은 왜 갑자기 공격한 거래요?”“그, 글쎄. 그냥 심심했나 보지. 아하하!” “피~ 그게 뭐예요. 아무튼 이렇게 ?리 가버리셔서 너무 서운해요. 좀 더 머무시면 좋았을 텐데. 마을관광도 하고~ 근처 숲에도 모셔가고 싶었거든요. 이맘때가 가장 경치가 좋아요.” “하하! 다음에 와서 보면 되지. 또 놀러올게.” “정말이죠? 다시 여기 오실 거예요?” “그래. 언제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헤헤! 아무때나 오세요. 언제든지 책임지고 안내해드릴 테니까요. 아참, 이건 선물이에요.” “……??”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랑시는 입고 있는 앞치마 주머니를 뒤지더니 곧 긴 가죽 끈이 달린 작은 돌조각을 내밀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그냥 평범한 돌은 아니었다. 그 안에 꾹 입을 다문 조개 모양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와아~! 조개화석이구나. 이런 건 어디서 구했어?” “예전에 숲에 놀러갔다가 주웠어요. 여긴 바닷가 근처도 아닌데 조개가 나왔다고 사람들이 다들 신기해하던 걸요. 끈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제가 직접 단 거예요. 엘 오빠한테 드릴게요.” “하짐나 아끼는 거 아니야? 이런 걸 받아도…….” “괜찮아요. 오빠가 주신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걸요. 저도 뭔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이것밖에는 생각이 안나더라구요. 헤헤!”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7살 어린아이한테는 어려운 일 아닌가? 확실히 랑시는 평민으로 태어난 게 안타까울 만큼 똑똑한 아이였다. 그나마 지금 이 모습도 충분히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랄까. “고맙다. 소중하게 간직할께.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받다니… 랑시를 보기 위해서라도 꼭 다시 와야겠는 걸?” “정말이죠? 와아! 신난다~” “후훗! 그럼 이제 그만 돌아가. 어른들이 걱정하시겠다. 앞으로도 이렇게 씩씩하고 밝게 지내야 돼?” “네! 엘 오빠도 건강하세요! 옆에 있는 오빠도 잘 가시구요! 정말 꼭 다시 놀러 오셔야 돼요?” 그 뒤로도 랑시는 몇 번이나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을로 돌아갔다. 아이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때까지 잠잠하던 엘뤼엔도 그제야 의문이 서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돌조각이 뭐가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거지?” “응? 화석이잖아. 게다가 이런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나온 거니까, 단순한 돌조각이 아니라고. 어쩌면 옛날엔 여기가 바다였을지도 모른단 소리잖아?” “어쩌면이 아니라 실제로 바다였다만?” “엥? 그, 그래?”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는 내게 엘뤼엔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주었다. 5천년 전에 바다였던 이곳을 그가 통째로 말려 땅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유는 단지 이 장소에 바다가 있는 것이 미관상 나빠 보였기 때문이라나? 그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나를 눈치 채지 못한 듯 혼자서 심각하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다였던 장소에서 조개가 나오는 건 당연한 거지. 화석인지 뭔지 그런거 그냥 몇 천 년만 지나면 저절로 생기는 거 아닌가? 그게 뭐가 신기하지?” “…….” 이런게 바로 오래사는 자의 여유라고 하는 걸까? 시간만 흐르면 알아서 생긴다니… 왠지 화석을 보며 감탄한 내가 바보가 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량은 둘째 치고 여행복을 다시 구하지 않은 건 정말 최악의 실수였다. 낮에는 잘 몰랐는데, 밤이 되자 날씨가 무척 추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안그래도 얇은 옷차림에 쌀쌀한 바람이 몰아치자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 입술만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라피스가 있었다면 보온마법인지 뭔지라도 걸어달라고 했을 텐데. 무심한 엘뤼엔은 방법을 찿기는 커녕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내 생전 정령왕의 몸을 이렇게 간절하게 그리워해본 적은 처음이다. “추워, 추워~ 춥다고오~~!!” “알았으니까 제발 그 입좀 다물어라. 정말 엄살이 심하군!” 벌써 1시간 가까이 춥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자 더 이상 참지 못한 엘뤼엔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소리쳤다. “추운걸 어떡하란 말이야? 난 원래 추위를 잘 탄다고!” “옷을 챙기지 못한 건 엄연히 네 잘못이다. 이 정도로 얼어 죽진 않으니 참아.” “우씨! 자기는 추위를 안탄다고 너무하는 거 아니야?” “시끄럽다고 했다.” 쌀쌀맞게 쏘아붙인 엘뤼엔은 곧 주위를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캄캄해서 이동하기 힘들어지기 전에 노숙할 장소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잠시후, 적당히 머물 ㅎ만한 공터가 발견되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불의 중급정령인 샐러맨더를 불러내 한가운데에 앉혀두는 일이었다. “이러면 되겠지? 불을 쬐고 있으면 나아질 거다. 정말 귀찮은 계약자로군.” “헤헤! 고마워, 아버지~” “그놈의 아버지란 소린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게. 한번 입에 붙으니까 잘 안 떨어지네. 그새 버릇이 돼버렸나봐.” 그의 못마땅한 표정에 나는 그저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럴 땐 그저 화제를 돌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데 여깃 ㅓ밤을 새는 거야? 덮고 잘 모포도 없는데.”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급하게 마을을 떠날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아. 광장도 다시 복구되었다고 하던 것 같은데, 적어도 상점은 들렀다 나올걸.” “피해가 없는 것과 문책을 받는 것은 별개다. 지체했다면 시끄러운 인간들에게 발목을 붙잡혔을 거야. 난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쳇! 그럼 적어도 엘뤼엔만이라도 마을에서 뭘 사오면 됐잖아. 인상착의가 알려진 건 나뿐이었을 텐데.” “지금 네가 날 시켜먹겠다는 거냐?” 사실 이런 투정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는 알고 있었다. 만약 내가 전혀 연고도 없는 세상에 떨어졌다면 당장 살길부터가 막막했을 테니까. 지금은 옆에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행운인 것이다. 너무 욕심을 부렸다는 생각에 나는 뜨끔한 심정이 되어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거 아니야. 그냥 그랬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지. 혹시… 화났어?” “흥! 그런 건방진 말을 봐주는 것도 지금뿐이다. 계약자라고 해서 내가 너의 모든 행동을 너그럽게 넘겨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끄덕끄덕!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나워져 있던 엘뤼엔의 표정도 한층 누그러졌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그는 시무룩해져 있는 나를 보며 슬쩍 미간을 좁히더니 곧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오늘은 그냥 참아라. 날이 밝으면 쓸 만한 것들을 가져올 테니까.” “…어?” “담요와 옷가지들만 있으면 되는 거지? 필요한 게 있으면 지금 말해라. 두 번 다녀올 생각은 없으니까.”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나의 놀란 표정을 본 엘뤼엔은 변명하듯 황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춥다고 내내 시끄럽게 구는 걸 듣는 것보다야 한 번 귀찮음을 감수하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어림없다. 네 몸은 네가 알아서 챙겨.” “고, 고마워, 아버지. 나 감격 먹었어.” “글쎄, 그 아버지란 소리는 좀 그만두라니까!” 화가난 엘뤼엔의 목소리에도 나는 환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닌 척해도 은근히 배려해주려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느꼈던 서운한 감정들이 이 한 번으로 전부 날아간 느낌이었다. 조금은 친해졌다고 생각해도 좋은 걸까? 그런데 그 순간, 이런(나 혼자만의 일방적인) 평온한 분위기에 갑자기 끼어드는 불청객이 있었으니! “아버지? 언제 이런 아들을 낳았어. 엘퀴네스?” “……!!” 사방이 어두워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목소리를 통해 말을 걸어온 이가 누군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직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고운 미성이면서도, 묘하게 어른스러운 말투는 그 외의 다른 존재가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엘뤼엔 역시 진작 그의 존재를 깨닫고 있었는지 차가운 말투로 쏘아붙였다. “트로웰, 네가 여기엔 왜 온 거냐?” ‘역시 트로웰이 맞구나!’ 그의 등장이 반가우면서도 나는 한편으론 불안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왠지 그가 찾아온 용건이 나에게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이는 걸 보류하겠다.’ 고 선언한 지 아직 채 하루도 되지 않았는데, 설마 그새 마음이라도 바뀐 걸까. 별의별 상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사이, 트로웰은 천천히 달빛 아래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반나절 만에 보는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처럼 무심했기에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 어서와, 트로웰! 아까 낮에 보고 반나절 만이지? 이런 데서 보니까 더 반갑네. 하하!” “…반가운 것치곤 얼굴이 굳어 있는 걸. 걱정 마. 죽이려고 온 건 아니니까. 마음을 읽진 않아도 그 정돈 알 수 있어.” “…….” 바른말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라니까. 괜스레 민망해지는 기분에 나는 뻘쭘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착각이었을까? 그런 내 모습을 보는 트로웰의 얼굴에 얼핏 미소가 감돈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순식간이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본 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여유도 없이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그냥 잠깐 전해줄 게 있어서 온 거야. 지금 상황을 보니 오길 잘했군.” “응?” “이거. 네 것 맞지?” 트로웰이 내민 것은 제법 커다란 배낭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든 나는, 그 안에 담긴 것이 오늘 내가 샀던 옷가지와 음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앗! 이건 설마… 트, 트로웰이 가져와준 거야?” “네가 떨어트린 걸 봤거든. 그냥 놔둘까 싶다가 엘퀴네스가 이런 걸 세심히 챙기는 성격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라서. 잃어버린 걸 알면 다시 살 줄 알았는데… 그냥 맨몸으로 나왔군. 너도 꽤 막나가는 타입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부드럽게 웃는 얼굴은 이번엔 틀림없이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자 그는 얼른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서 말했다. “그런데 너 꽤 묘한 재주가 있더군. 인간 주제에 ‘저’ 엘퀴네스를 멋대로 휘두르다니. 하긴, 그런다고 순순히 끌려 다니는 엘퀴네스도 확실히 평소답지 않지만.” “아하하! 재주랄 것까진… 앗! 맞다. 마을 광장 복구시킨 거 말이야. 트로웰이 한 일 맞지?” “그냥 기분전환 삼아서 한 거야. 딱히 인간들을 위한 건 아니니 그런 부담스러운 눈빛은 그만둬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거 싫어해. 마음에도 없는 말 꾸미는 재주도 없고. 되도록 내 말에 반문하지 말았으면 해.” “아, 그, 그래.”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곤 한 손을 휘저었다. “뭐, 어쨌든 내 용건은 이것뿐이야. 그럼 이만.” “에? 가, 가려고?” “왜? 나에게 뭔가 할 말이라도 있어?” 무시하지 않고 돌아보다니! 확실히 지금의 트로웰은 오전에 봤을 때보다 한결 독이 빠진 모습이었다. 지금이라면 내 제의를 고려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했었지만, 우리랑 같이 여행하지 않을래? 아, 그래! 인간을 싫어한다고 했었지? 나랑 같이 어울려 다니다보면 그런 생각도 많이 사라지게 될 것 같은데.” “별로 끌리는 조건은 아니군. 미안하지만 난 혼자가 편해.” “나랑 다니기 싫다는 뜻은 아니지? 그럼 된 거네! 같이 다니다 보면 일행에 익숙해질 거야! 어차피 중간계에 있을 거라면 여럿이 함께 여행하는 편이 더 즐겁잖아? 응? 그렇게 하자, 트로웰.” “이거야 원. 정말 막무가내로군.” 하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트로웰의 얼굴엔 그리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 모습에 너무 일찍 안심했던 것이 문제였을까?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느 입을 멍하니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할까?” “응?” “아까 내 생각을 바꾼다고 했었지? 난 앞으로 1년 후에 이 세상의 인간이라는 종족을 완전히 멸할 생각이야. 네가 그전까지 나를 설득한다는 조건이라면 여행에 동참해주지. 하지만 끝까지 이 생각이 변치 않게 되면 제일 먼저 너부터 죽일 거다.” “……!!” “왜? 싫어? 그런 게 아니라면 굳이 너와 동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걸. 엘퀴네스도 내가 못마땅할 테고 말이야.” 천진하게 웃는 얼굴이 이렇게 무서워 보일 줄이야. 역시 세상엔 뭐든 쉬운일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으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을 기뻐해야 하는 걸까? 내가 할 말을 잃고 얼어있는 동안 엘뤼엔은 오히려 흥미를 느꼈는지 재미있다는 얼굴로 물었다. “인간을 멸족시킬 생각인가?” “왜? 반대하려고?” “아니, 네가 뭘 하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런데 왜 하필 1년 후지? 지금 당장이 아니고?” “그냥… 조금만 더 지켜보자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러자 엘뤼엔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디를 봐도 비웃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고작 1년을 지켜봐서 뭘 얻으려는 건지 모르겠군. 이제까지 질리도록 지켜본 게 아니었나?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 “차라리 솔직하게 누가 자신을 말려주길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는 게 낫겠군. 그래서 넌 아직 꼬마라는 소리를 듣는 거다, 트로엘.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아.” “윽…….” 아니, 이놈의 아버지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부채질을 할 셈인가? 둘 사이의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그만! 알았으니까 다들 진정해! 네 제안에 응할게, 트로웰. 그럼 우리랑 동행하는 거에 승낙하는 거지?” “…그렇긴 하지만, 네 계약자의 의견은 묻지 않아도 되는 거야? 내가 함께 다니는 걸 굉장히 싫어할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엘뤼엔은 내가 거처를 정할 때까진 동행해주기로 약속했으니까. 그 조건에 반드시 일행이 나 혼자여야 한다는 말은 없었다고. 그치, 엘뤼엔?” 넉살 좋게 묻는 말에 엘뤼엔은 잠시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네놈의 행동패턴을 파악할 생각은 이미 깨끗이 접었으니까.” “헤헤! 정말이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트로웰.” “아아.”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트로웰의 손을 억지로 잡고 악수했다. 그는 이런 나를 마치 희귀생물이라도 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조건에도 상당히 자신만만하군. 날 설득할 자신이 있는 건가?” “물론이지! 장담하지만, 1년이 아니라 4천 년 후에도 인간이란 존재는 여전히 존재할걸?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흠, 그래? 그럼 어디 능력껏 노력해봐.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응, 알았어. 그,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 “부탁?”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나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설득할 기간 말인데, 십년으로 늘려주면 안 될까?” “…….” “안 돼? 오, 오년이라도 괜찮은데. 아니, 일년만이라도.” “이봐, 너…….” “아~ 오해하지 마! 설득할 자신은 있거든? 있긴 있는데… 일년 가지고는 모자랄 것 같아서. 아하하하… 역시 안 될까?” 그 순간, 주위의 온도가 이전보다 더욱 내려갔다고 느낀 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공터에 나의 허무한 웃음소리만이 흩어지고 있었다. 미안해, 라피스. 널 찾게 되어도 당분간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다. 그래도 이해해줄 거지? 하하하……. 밤이 깊어지자 엘은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인간의 육체로는 처음 겪는 노숙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쉽게 피곤해지고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가 잠들자 트로웰과 엘퀴네스는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언제 그들이 이런 식으로 함께 여행해본 적이 있던가? 같은 정령왕이지만 사실 그들은 타인보다 더 낯선 관계였다. 아마 이번일만 아니었다면 서로의 소멸일까지 정령계에서조차 맞부딪치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트로웰은 지금 상황이 좀처럼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뻣뻣하게 굳은 분위기도 무마시킬겸 궁금했던 것을 간단하게 질문하기로 마음먹었다. “아까 보니 이 소년이 너에게 엘뤼엔이라고 부르던데… 그게 무슨 뜻이지?” “아아, 그냥 녀석이 제멋대로 붙인 애칭이다. 귀찮아서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뒀지.” “의외로군. 이 인간에겐 여러 가지로 관대한걸, 엘퀴네스?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봐?” “설마, 다만 이제까지 보던 인간들과는 다른 타입이라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것뿐이다. 오히려 너야말로 고분고분하던걸. 원래 남이 흘린 물건을 세심하게 챙겨주는 성격은 아니지 않나?” “…할 말 없군.” 트로웰의 눈으로 보기에 ‘엘’은 여러모로 특이한 소년이었다. 제아무리 스스럼없이 남을 대하는 사람이라도 상대가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일단 저자세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소년은 겁이 없는 건지 뭔지, 여전히 친근하게 구는 것은 물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협박에도 그저 웃기만 하는 게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도 그에게선 애초에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공격을 피하는 스피드나 육체의 조건이 뛰어난 것은 그렇다 쳐도, 혜안이 통하지 않는 인간이라니. 이런 경우는 정말 듣도 보도 못했다. 그나마 알기 쉬운 성격이라는 것 때문에 마음을 읽지 못하는 답답함은 덜었지만 말이다(이 생각을 알면 엘이 방방 뛸지 모르겠지만.). “인간인 건 틀림없어. 그런데 미심쩍은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군. 왠지 숨기는 것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확실히 평범하지는 않다. 단순히 친화력만으로 자연계의 정령을 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 “…자연계의 정령들을 본다고?” “그래. 믿을 수 없겠지만.” 정말 인간이 맞은 걸까? 트로웰은 다시금 심각하게 생각을 정리해볼 수밖에 없었다. 짐작되는 경우야 굉장히 많지만, 과연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가를 따지기 시작하니 말이 안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던 것이다. 자연계의 정령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계의 신과 정령왕뿐. 설마 미래의 정령왕이 과거에 오기라도 했다는 소리인가? 아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신들 중 하나가 인간의 육체를 입고 유희를 왔다고 하는 편이 더욱 합당하리라. 하지만 그런 생각도 엘의 손등에 새겨진 새하얀 그림을 발견하자마자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잠깐만. 이건 설마 마신의 문장?” “그렇더군. 본인의 말로는 신관이 아니라고 우기지만 말이야.” “…엘퀴네스, 넌 도대체 얼마나 황당한 녀석에게 소환된 거야?” “나도 모른다. 내가 소환자를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 신의 문장은 본인은 물론, 같은 신에겐 절대 새길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동등한 입장의 그들이 서로에게 일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낙인을 찍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마디로 엘은 유희 중인 신도 아니라는 소리. 더불어 신관인 그가 어떻게 정령을 소환할 수 있냐는 문제가 더 추가된다. 트로웰은 쓴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점점 정체를 알 수 없군.” “그래도 그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네가 앞으로 1년 후에 죽일 녀석이기도 하지.” “…아아, 그래. 그렇지.”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는 둥, 아직 멀었다는 둥 말했지만 엘퀴네스는 이미 그가 결단을 내린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년이라는 시간적 여유를 둔다고는 해도, 아마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왕 마음먹은 거 빨리 처리하지 못하는 행동이 영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말이다. ‘이 계약도 길어봤자 1년이라는 건가.’ 어차피 오래 동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지만, 엘퀴네스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고 슬쩍 양 미간을 좁혔다. 겨우 이틀 전에 만났을 뿐인, 이런 작은 인간 아이에게 그새 정이라도 생긴 것일까? 스스로가 생각해놓고도 어이없었는지, 엘퀴네스는 피식 하고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건 생각보다 자신의 계약자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리라. 어쩌면 1년 후에 트로웰을 말리는 것은 엘이 아니라 자신이 될지도 모른다. 아주 오랜만에 유쾌해지는 기분이었다. 검술을 배우자! “영혼의 보석?” 이번 여행의 목적을 들은 트로웰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은 의아함이었다. 엘뤼엔도 그랬지만 그 역시 그런 것을 가져다 뭐에 쓰냐는 것이었다. “장식용으로 두기에는 너무 밋밋할 텐데? 물건과 조합시켜서 쓰려고? 하지만 넌 마법을 못하잖아?” “물건? 아! 그 에고소드인지 뭔지 하는 것 말이지? 그게 마법으로 만드는 거야?” “맞아. 아무래도 영혼을 봉인시키는 작업이니까 단순한 기술만 가지고는 힘들거든.” “봉인시킨다고? 이미 보석안에 들어가 있는데?” “바로 그 보석에 담긴 영혼을 다른 쪽으로 흡수시키는 거야. 설마 에고소드가 뭔지 모르는 건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말하는 검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말하는 검? 정령이 봉인된 검 말이야?” “호오, 그건 또 어떻게 알지?” “아,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을지도 모른다 싶어서…….” 그 순간, 떠오르는 건 이미 마검으로 위명(?)을 떨친 바 있는 이사나의 ‘파이어 버스터’였다. 그 가공할 수다력에 쓰러진 인간들이 몇이었던가. 결국 최후의 결전까지 상자안에 봉인되어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 지금 생각해보니 녀석을 악신에게 던져줬다면 놈이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음만큼 커다란 공해가 없다고 하지 않은가?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굉장히 허무했겠지만. 내가 잠깐 딴생각에 빠진 사이, 트로웰은 다음 설명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거의 비슷해. 다만 에고소드는 검 안에 담긴 것이 정령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라는 차이가 있지. 보통 정령검이 그 안에 담겨진 정령의 기운을 이끌어내느 것이라면, 에고소드는 검에 새겨진 마법식을 봉인된 영혼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거야. 그만큼 사용자의 마나를 잡아먹지만.” “저기… 그걸 영혼의 보석으로 만든다는 거야? 말을 하기도 해?” “원석 자체는 못해. 하지만 그걸 가공해서 물건과 접목시키면 가능한 것 같더군. 그리고 방식만 알면 검이 아니라 어디든 혼합 할 수 있어. 가령 목걸이 같은 것에라도.” “헤에, 정말? 나도 그 방법 배울 수 있을까?” “마법이라고 했잖아. 정령사와 마법사는 그 성질이 완전히 달라. 그게 아니라도 너는 체질적으로 마법을 배울 수 있는 몸이 아니야.” 인간이 되었으니 마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기대는 그의 한마다로 인해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궁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영혼의 보석이라면 평범한 인간들은 찾기 어려울 텐데?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지?” “아, 엘뤼엔이 알고 있는 드래곤 중에 그걸 수집하는 용이 있다고 해서. 세이크 제국에서 유희중이라고 하더라고.” “세이크 제국에 있는 드래곤? 아아,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로군. 확실히 그런 취미가 있다고 들었지. 하지만 쉽게 내주진 않을 거야.” “괜찮아. 일단은 확인이 먼저니까.” “……?”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목적은 오직 라피스의 영혼. 그것을 찾을 때까진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비록 그 과정이 무척 힘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해도 말이다. 그 순간, 굳은 표정으로 다짐하는 내게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참! 잊을 뻔했군. 잠시만 왼쪽 손 좀 줘봐.”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자 그는 뭔가 주문 같은 것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더니, 나의 왼손“ (정확히 신의 문장이 새겨진 부분)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빛이 사라진 이후에도 내 눈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방금 뭘 한 거야?” “일루젼 마법을 걸었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장이 보이지 않을 거야. 넌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눈에 띄는 신체부위에 문장이 새겨지면 귀찮은 일이 많거든.” “앗, 그렇지. 미처 생각을 못했어. 고마워, 트로웰.” 다행히 지금까지는 용케 눈에 띄지 않았지만, 이제부터 지나칠 마을에서도 무사히 넘어가리란 법은 없었다.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내게 트로웰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심한 척 외면하긴 해도, 역시나 그는 배려깊은 성격이었다. 사람의 몸이 이렇게 불편한 것인 줄 왜 예전에는 깨닫지 못했을까. 하루 삼시 세끼 일일이 챙겨 먹어야 함은 물론, 피곤할 땐 앉아서 쉬어야 하고 잠도 꼭 자야 한다. 이전에는 아무렇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그새 정령왕의 몸에 익숙해져버린 것인지 오랜 만에 하려니(?) 굉장히 번거로운 느낌이었다. 하긴, 지금 상황에선 공간이동이 되지 않는 것이 제일 불편했지만 말이다. “다리아파. 조금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 “또냐? 그놈의 다리는 쉽게도 아프군.” “아까 쉬고 나서 벌써 4시간째 걸었는데 뭐가 또야? 난 철인이 아니라고.” 사실 내가 힘들다고 느끼게 된 것에는 엘뤼엔의 책임이 가장 컸다.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빼면 무조건 걷는 일정이라니, 아무리 내가 원한 여행이었다지만 이렇게 강행군을 펼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가만 보면 그는 이상한 곳에서 사람을 괴롭히는 악취미가 있었다. 내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리자 옆에 있던 트로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거들었다. “어차피 저녁식사 때야, 엘퀴네스. 잠시 멈춰도 될 것 같은데?” “아아, 그런가. 좋아. 그럼 어서 밥이나 먹어라. 먹고 나서 다시 출발이다.” “헉!” 설마 이번에도 먹자마자 이동할 셈인가? 나는 파랗게 질린 얼굴로 되물었다. “솔직히 말해, 엘뤼엔. 지금 나 괴롭히는 거 즐기는 거지?” “애초에 데려다 달라고 한 건 너였다. 불만을 토로할 입장이 아닐 텐데?” “그래도 이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원한 건 아니었단 말이야!” “흐음? 이 정도가 힘든가?” “당연하지! 엘뤼엔도 한번 인간이 돼봐! 아주 죽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런 말로 그의 공감을 얻기에는 십분 부족했던 것 같다. 엘뤼엔은 오히려 뻔뻔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대꾸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인간이 될 수 없으니 네 기분을 이해할 날은 없으리라고 보는데?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걸 보니 기운이 펄펄 넘치나 보군. 다시 이동할까?” “이 독재 대마왕!!” 친해졌다고 생각한 거 다 취소다! 젠장! 꼭 저렇게 사악한 티를 내야 속이 시원하단 말인가? 하짐나 역시나 엘뤼엔은 강적이었다. 그는 노려보는 나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식사나 해라. 나로선 재잘거리는 시간에 체력을 비축해두는 쪽을 권하고 싶다만?” “입을 다문다고 없던 체력이 돌아오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 순간, 마주보는 시선에서 파지직 불꽃이 튀었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만이 아닐 것이다. 나를 바라보는 엘뤼엔의 얼굴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만약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트로웰이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고이 세상을 하직했을지도 모른다. “둘 다 그만 해. 벌써 며칠째 같은 패턴으로 다투고 있잖아. 질리지도 않아?” “저 쪼그만 녀석이 대들짐나 않으면 나도 이러진 않는다.” “내가 보기엔 말 상대를 해주고 있는 것 자체가 이미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 같은데? 엘, 너도 얌전히 밥이나 먹어. 일정이 촉박하면 오히려 네가 편한 게 아닌가? 용건을 빨리 끝낼 수 있잖아.” “…하지만 힘든걸. 다리가 너무 아파서 꼼짝도 할 수 없어.” “아프다고? 흠… 하긴, 오늘 하루종일 걸었지? 인간들의 체력으론 다소 무리가 있었나?” 혼자서 중얼거린 트로웰은 자리에 주저앉아 휙하고 내 바지를 걷어올렸다. 덕분에 퉁퉁 부어있는 다리가 드러나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며 엘뤼엔을 향해 마치 나무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역시 부었군. 조금쯤은 계약자의 상태를 확인해가며 일정을 강요하는 게 어때, 엘퀴네스?” “흥! 고작 하루 걸었다고 다리가 부어? 한심할 정도로 약해빠졌군.” “아니, 이런 식으로 걸은 게 오늘로 사흘째니까 하루라곤 할 수 없어. 오히려 다른 인간들에 비하면 월등히 나은 편이라고.” “그래도 귀찮다는 것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쯧쯧 혀를 차는 말에 잠시 울컥할 뻔했지만, 또 다시 싸움으로 번지는 게 싫어 나는 그냥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엘뤼엔 역시 투덕투덕하면서도 내 다리 상태에 관심을 가지는 걸 보면, 속으로 나름대로 찔리긴 했던 모양이다. 파앗! 그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터지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끊어질듯이 아팠던 다리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러자 덩달아 예민해져 있던 신경도 한결 가라앉았다. “아! 고마워, 엘뤼엔. 많이 좋아졌어.” “당연한 소릴. 엘퀴네스의 치유력은 완벽하다. 너 정도의 인간쯤은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살려낼 수 있어.” “그거야 나도 잘 알지. 음, 어쨌든 이제 다시 걸을 수 있겠다. 밥 먹고 바로 출발해도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실수였다. 간단한 과일로 끼니를 때우자마자 정말로 기다렸다는 듯이 엘뤼엔이 출발할 것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내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걸을 수 있다며? 그 표정은 또 뭐지?” “그렇다고 정말 곧바로 출발하냐? 암튼 배려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치료해줬으면 된 거 아닌가? 어차피 이런 곳은 그리 쉴 만한 장소도 되지 않는다. 너도 하루빨리 노숙을 청산하고 싶을 텐데?”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가면 되잖아, 가면!” “아, 잠깐만 기다려.” “……??” 그때 갑자기 트로웰이 바닥에서 거대한 흙더미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자 공중을 선회하던 모래알갱이가 순식간에 뭉쳐지더니 곧 말의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마치 잘 다듬어진 조각상 같았다. 갑자기 저런 걸 왜 만든거지? 내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자 트로웰은 곧 흙 말(?)의 판판한 등 부분을 가리키며 나를 바라보았다. “타.” “에? 이걸?” “내가 움직임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 아마 걷는 것보다는 나을 거야. 매번 엘퀴네스가 치료하는 것보다야 이게 더 나을 테지. 즉석에서 처리하기도 편하고.” 한마디로 1회용 말인 셈인가? 살아 있는 말보다 다루기도 편하고, 먹을 거나 휴식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앗! 고, 고마워, 트로웰. 그런데 이러면 네가 피곤해지는 거 아니야?” “아니, 전혀. 어차피 흙도 대지의 일부니까. 숨을 쉬는 것보다 쉬워.” “헤에, 그래? 정말 신기하다.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어. 나도 돌아가면 꼭 해봐야지.” “…해본다고?”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잽싸게 고개를 젓자, 그는 잠시 수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도 굳이 캐묻지 않는 건 그의 성격상 조금 더 나를 관찰 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땐 트로웰이 내 마음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심스럽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앞으론 조심해야지.’ 언젠가는 밝힐 때가 오겠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나의 사정을 얘기하고 도움을 구하기엔 지금의 엘뤼엔이나 트로웰이 어딘지 못미더운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트로웰의 경우는 여전히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긴해도 두 눈에서 나에 대한 호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보통사람이라면 잘 모르겠지만, 이미 그의 ‘진짜’ 상냥한 모습을 보았던 나는 그것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엘뤼엔 역시 지금 동행해주는 것이 내가 ‘특이한 인간’이라는 것에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지, 그 유일한 궁금증이 해결되고 나면 나 몰라라 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정말 피치못할 상황이 오기 전까지는 이대로 모른 척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유일하게 이때의 나를 기억하고 있던 시벨리우스도 내가 미래에서 온 사실만은 알지 못했지. 난 끝까지 밝히지 않고 떠나게 되는 걸까?’ 아니, 그 전에 무사히 라피스의 영혼을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다. 왠지 생각만으로도 암담해지는 기분에 나는 푸욱 한숨을 내 쉬었다. 이럴 때 차라리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친근한 이들임에도 전혀 다른 사람 대하듯 보는 눈빛들이 소름이 돋을 만큼 싫었다. 어느 날 문득 눈을 떠보니, 온 세상이 뒤 바뀌고 사람들의 기억에서 나 혼자만이 사라진 기분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과정을 밟아야 할까. 아마도 당분간은 외톨이가 된 심정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것 같았다. 길을 떠난 지 어느새 일주일이 넘어갔지만 새로운 마을은 좀 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가도 가도 똑같이 이어지는 나무숲에 니루해 하기를 여러 날. 그 뒤 조금 넓은 길에 다다르자마자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한 떼의 시커먼 몬스터 무리였다. “인가… 인간이다, 취익!” “취익! 먹을 것을… 털자. 취익! 인간이다. 취익!” 한 손에 도끼를 거머쥔 채 우락부락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는 것은, 여행자라면 꼭 한 번쯤은 만나는 것으로 유명한(?) 오크들이었다. 조금쯤은 다를만도 하련만, 4천년 전에도 여전히 똑같은 옷차림과 말투를 구사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고 말았다. 정령왕이 두 명이나 끼여 있는 일행에 겁도 없이 다가서다니. 본능은 가져다가 죄다 팔아먹은 것인가? 하지만 나는 곧 이어지는 엘뤼엔과 트로웰의 대화를 통해, 이 것이 그들의 의도대로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무료한 표정으로 오크들을 바라보던 엘뤼엔이었다. “꽤나 심심했나 보군.” “아아, 계속 걷기만 하자니 너무 지루해서 말이야. 조금 박진감 있는 여행도 나쁘지 않잖아” “박진감? 겨우 저런 걸로? 이왕 하는 거면 오우거나 트롤 쪽이 더 낫지 않나?” “그 녀석들은 죄다 눈치가 빨라서 다가오다 말더라고. 내가 애써 존재감을 감췄는데 말이야.” 설마 일부러 오크들이 다가오는 것을 내버려 뒀단 말인가? 가볍게 대답한 트로웰은 언젠가 봤던 것처럼 순식간에 장검을 만들었다. 그러자 맑게 빛나던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번쩍 하고 시퍼런 살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아무리 생각 없는 오크들이라도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을 터! 놈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어느새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취익! 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취익!” “취, 취익! 도망치자!! 취익!” “흐음, 어딜!” 그러나 뒤돌아 달려가려던 오크들의 시도는 그들의 계획을 일찌감치 눈치 챈 트로웰에 의해 허무할 정도로 쉽게 막히고 말았다. 도망치는 오크들 앞에 거대한 흙벽을 세워 길목을 차단했던 것이다 .그러고 이어지는 것은 잔인할 정도로 화려한 피의 춤사위. 촤아악! “키에에엑!” “꾸에엑!” 칼을 휘두르는 것이 보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하나둘씩 몸이 갈라져 쓰러지는 오크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을 뿐이었따. 20마리에 가깝던 오크들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모두 시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전적을 내고서도 트로웰의 표정은 그다지 개운치 않아 보였다. “…역시 몬스터를 가지고 노는 건 재미없어.” “인간보다는 전투력 면에서 더 나을 텐데?” “그래도 미관상 보기 흉한 건 질색이야. 죽이는 감촉도 인간 쪽이 낫고.” “취향도 까다롭군.”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오가는 대화치곤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잠시 후, 들고 있던 칼을 흙으로 되돌린 트로웰은 한쪽에서 굳어 있는 나를 발견하곤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아아, 실례. 어린애한텐 자극이 심했나? 마치 시체를 본 건 처음이에요~ 라고 말하는 얼굴인데?” “…처음 아니야.” “흠, 그래? 그런 것치곤 너무 얼어 있는 걸? 그냥 스트레스 해소용이었으니까 너무 겁먹지 마. 당분간은 인간을 죽일 생각이 없으니까.” “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 있잖아,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뭐?” 내가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며 화제를 넘기자 트로웰은 한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내가 방금 벌어진 일에 충격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야 물론 놀라기는 했다.. 정확히는 그의 검술에 감탄한 거였지만. 눈앞에서 화려한 실력을 본 감격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막연히 동경만 하던 일이, 이번엔 직접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꽤 의외였는지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에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실은 전부터 배우고 싶었는데, 좀처럼 기회가 없었거든. 지금 너 검 쓰는 거 보니까 굉장히 멋지다. 나한테도 가르쳐주면 안 될까?” “하지만 넌 이미 정령사에다… 신관이잖아? 호신을 위해서라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그래도 사람 일이라는게 앞으로 어찌 될 지 알 수가 있나. 그리고 난 신관이 아니야.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문장을 받았긴 했지만. 마족과 계약을 한 상태도 아니고 말이야.” “…하긴. 확실히 마신의 사제라고 보기엔 여러 가지 미심쩍은 부분이 있군.” “그렇다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것도 마법처럼 배우기에 적당하지 않다던가, 그런 건 없을까?” 그러자 트로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전에 내 공격을 피했을 때 보였던 순발력이나 체력 등을 보면 검술을 익히기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야.” “정말이지? 그럼 나 좀 가르쳐줘.” “뭐, 그거야 별로 어렵지 않지만. 수업이 편할 거란 기대는 접는 게 좋을 텐데?” “괜찮아! 열심히 배울게!” 솔직히 말해서 난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편이라 과도한 운동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중에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에는 굳이 호신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고 말이다. 때문에 훈련이 힘들다곤 해도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인지상정! 겁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생긋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가르쳐주지.” “정말?!” “그 대신, 몇 가지 조건이 있어. 첫째, 내가 시키는 일에 토를 달지 않는다. 둘째, 훈련 과정으로 인해 몸이 아프게 되더라도 절대 치료를 받지 않는다. 이건 육체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니까 반드시 지켜야 해.” “으응, 알았어.” “그리고 셋째는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 거야. 먼저 배우겠다고 한 것은 너니까 이 부분에 대한 이의는 없겠지?” “당연하지!” 주먹까지 움켜쥐며 대답하는 나를 트로웰은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희한한 녀석.” “응? 나한테 하는 말이야?” “그래. 도대체 겁이 없는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모르겠군. 보통 무서워하지는 않더라도 이런 장면을 보면 혐오감이 들지 않아? 그런데 도리어 검을 가르쳐달라고 하니 특이할 수밖에.” “하하! 난 또 뭐라고. 이것보다 더 끔찍한 것도 여러 번 봤는 걸. 내가 충격 받았을까 봐서 신경 쓴 모양이구나? 역시 친절하다니까.” “…글쎄. 네가 생각보다 곱게 자란 도련님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았어. 그럼 당장 시작할까?” “에? 지금 당장?” ‘친절하다’고 말한 것에 대한 복수였을까? 트로웰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얼마 전에 내게 만들어주었던 흙 말을 순식간에 소멸시켰다. 그리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보며 상큼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부턴 걸어.” “…엑?” “인내와 끈기, 지구력의 시험. 더불어 체력을 쌓는 훌륭한 방법 중 하나지. 설마 내가 시키는 일에 토 달지 않는다는 약속을 벌써 어기려는 건 아니겠지?” “…….” 다른 사람들보다 체력 좋다고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웬 극기훈련이란 말인가?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떠나간 배였다. 그것도 모자라 트로웰은 핸디캡을 강화한다는 핑계로 요상한 주술을 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으, 으악! 이게 뭐야!” 멀쩡히 딛고 서 있던 땅이 갑자기 푸욱 꺼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가? 바로 지금 내가 그런 상태였다. 모래 늪처럼 다리를 빨아들이는 땅 때문에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자, 트로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냥 걷는 것보단 그 편이 단기간에 체력을 쌓기에 더 나을 거야. 이대로 마을이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걸어봐.” “마, 마을이 언제 나타나는데?” “글쎄.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곳이 평균 나흘 정도인가?” “헉!” 아무리 훈련의 명목이라지만 이건 단순히 모래주머니를 다리에 매달고 걷는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도 4일이나 버티라니, 날더러 죽으란 소리냐? 그래도 먼저 배우겠다고 말한 죄가 있어써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초, 초반부터 강도가 너무 센 거 아니야?” “아니. 넌 기본적인 체력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해야 훈련이 돼. 어서 제대로 된 검술을 배우고 싶겠지? 그럼 잘 해봐. 응원까지는 아니어도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볼 테니.” 그렇게 말하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트로웰의 모습은 이곳에서 그를 만난 이후로 가장 잔인하게 보였다. 그 순간, 옆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ㅇ려왔다. “… 제 무덤을 팠군.” 기관총으로 난사된 몸에 확인사살까지 당한 심정이랄까. 나는 아연한 얼굴로 저 멀리 끝도 없이 이어진 길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해 보였던 그것은 이 순간 지옥의 황천길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국경의 검문을 통과하는 방법은 흔히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첫 번째가 경비대에게 신분증을 보여주는 평범하고 일반적인 방법이고, 두 번째는 일명 ‘암흑의 루트’라고 하여 산맥을 빙 돌아가는 방법이었다. 그런데 이 산맥이란 것이 한여름에도 폭설이 몰아치는 살벌한 환경인데다, 몬스터의 출현이 잦아 보통 사람들은 넘어갈 엄두를 못 낸다고 하는 게 옳았다. 또한 정상적인 길보다 일주일 이상을 돌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찮더라도 신분증을 구하려는 방법을 택했다. 국경을 넘으면 바로 앞에 자리 잡은 ‘글모어’라는 마을이 보이는데, 이곳은 흔히 수도로 가려는 이방인들의 중간 휴식지 역할을 겸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장사가 잘되기로 유명한 ‘피렌체’란 이름의 여관을 운영하고 있던 남자는 손수 장을 보러 나왔다가 그날따라 유달리 소란스러운 거리의 모습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활기찬 편이긴 했지만, 지금의 분위기는 마치 어느 유명인사의 방문에 들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어느 대귀족의 자제가 오기라도 한 걸까?’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그는 마침 자신의 곁을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이보시오. 오늘따라 거리가 술렁거리는데, 혹시 그 이유가 뭔지 아시겠소?” “네?” 제 갈 길을 가다가 난데없이 붙잡힌 청년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무슨 소린지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아마 그 여행자들 때문일 겁니다.” “여행자들?” “네. 청년 하나에 소년 둘로 된 일행인데, 1시간 전엔가 마을로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특이하다고들 해서…….” “겨우 그런 걸로 온 동네 사람들이 이 야단이란 말이오?” 워낙 각양각색의 사람이라도 관심이 집중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설명해주는 청년 또한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닌 모양인지 동감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모르죠. 돌아다니면서 돈이라도 뿌리는 걸지도.” “허허! 별 희한한 여행자들도 다 있군.” “어떻게든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보려는 장사치들이겠죠, 뭐. 이런일이 한두 번도 아니고요.” 가끔 그런 상인들이나 가무단이 있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돈이나 보석류를 뿌려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것이라 생각한 남자는 기막힌 얼굴로 혀를 차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쯧쯧! 하여튼 동네가 조용할 날이 없으니, 원.” “쟈콥 아저씨, 무슨 일 있으세요?” “별거 아니다. 웬 여행자들 때문에 마을 전체가 시끌시끌하더구나. 아참,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뭐 별다른 일은 없었고?” “네. 아참, 챌시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를 한 장 깨트렸어요.” “또? 이게 대체 몇 번째인지. 으휴. 월급에서 삭감시켜라.” “네. 이미 그렇게 했습니다.” 일상에 오가던 대화를 나눈 뒤 쟈콥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계산대 의자에 앉아 월별 장부를 뒤적거렸다. 그때 마침 딸랑 하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리며 누군가가 들어와서 그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저희 여관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한 것은 그 순간 주위가 무척이나 고요해졌다는 것이다. 한창 청소를 하거나 주문을 받던 종업원들의 움직임도 어딘지 경직되어 있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쟈콥은 순간 헉 하고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들이키고 말았다. “3인실이 있나? 2인실 하나에 1인실 하나라도 상관없다.” “아, 그, 그게…….” “뭐야,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차갑게 쏘아붙이는 사람은 대략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이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반투명한 하늘색 머리카락과,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새하얀 얼굴이 마치 조각상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단 말인가! 쟈콥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용한 곳으로 가자고 했잖아. 이런 번화가는 딱 질색이야.” “……!!”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덜거리는 사람은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햇볕에 일부러 태운 듯한 새까만 피부가 묘하게 가슴을 자극하게 만드는 타입이랄까. 찰랑거리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모든 것을 꿰뚫어볼 듯이 차분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는 소년의 분위기를 한층 신비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비록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무척이나 살벌했지만 말이다. “죽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 더러운 시선 치워.” “헉… 죄, 죄송합니다!” 쟈콥은 뜨끔한 심정에 얼른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나이였지만, 외모로 보나 말투로 보나 귀족임이 확실했기에 자존심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그 살벌한 분위기는 곧 소년의 뒤에 있던 누군가의 한 마디로 인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으니……. “크흑! 사, 살려줘…….” “에?” 눈을 휘둥그렇게 뜬 그가 발견한 것은 시커먼 도포로 온몸을 덮은 채 비틀거리고 있는 한 소년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는 보기에도 애처로울 만큼 흐느적거리는 몸으로, 까만 피부의 소년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붙들려 있었다. 혹시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걸까?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동안 까만 피부의 소년은 힐책하는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가지고 쓰러지면 쓰나. 여기서 기절하면 다음날 벌칙이 세 배인 거 알지?” “…겨, 겨우라고? 맨손으로 암벽을 등반한 일이……? 설마 날 죽일 셈이냐?” “후후, 그래도 아직 안 죽었잖아?” “차라리 죽여줘어~~” “쯧! 변덕도 심하네. 방금 전엔 살려달라고 해놓구선.” …무언가 상당히 살벌한 포스가 느껴지는 대화가 아닌가? 게다가 일행임이 틀림없는 푸른 머리의 청년은 중재는커녕 오히려 귀찮다는 표시를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모포를 둘러쓴 소년을 한심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청년은, 멍 하니 서 있던 쟈콥에게 시선을 돌리곤 짜증스럽게 물었다. “방이 있냐고 물었잖아. 없다면 다른 곳으로 가겠다.” “아, 아닙니다! 3인실 있습니다! 하루 머무시는 데 은화 1개입니다만. 계산은 선불이나 후불이나 상관없습니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식사는 1인분만. 방 안으로 가져올 수 있나?” “네,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얘야, 토마스! 여기 손님들을 2층의 3인실로 안내해드려라.” “네!” 귀족을 모심에 있어서 실수는 절대 금물! 쟈콥은 일부러 이 여관에서 가장 경력이 오래된 종업원을 불렀다. 그는 5살 때부터 이 여관에서 자라다시피 하여 손님을 대하는 일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소년이었다. 불려온 토마스틑 과연 그의 기대에 걸맞게, 보통 사람이라면 놀라서 허둥거릴 정도의 출중한 외모를 보고도 종업원으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들. 방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 짐은 저에게 주십시오. 타고 오신 마차나 말은 어디에 두셨습니까?” “없다.” “아, 예. 그러시군… 에에? 말이 없으시다고요?”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국경에 닿아 있는 이 마을은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로 가려고 해도 족히 한 달 이상은 걸어야 했다. 물론 다른 데서 이곳으로 오는 길 또한 마찬가지. 말을 타지 않고 걸었다면 진즉에 녹초가 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험난한 여정을 겪어왔다고 하기엔 푸른 머리의 청년이나 검은 머리의 소년이 너무도 생생해 보였다. 잠시 의아한 표정을 하던 토마스는 곧 한 가지 경우를 떠올리곤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관에 오시기 전에 이미 처분하신 모양이군요. 하긴, 지쳐버린 말을 계속 타느니 이곳에서 새로 품종이 좋은 말을 구입하시는 게 훨씬 나으실 겁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좋은 마(馬)시장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굽실거리는 말투가 나쁘지 않았는지 일행은 귀찮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단 한 사람, 모포를 뒤집어 쓴 소년만 빼고 말이다. “저, 저기요, 혹시 저 계단을 올라가야 하나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에 이르자 소년은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왠지 그 말투에 절망이 섞여 있다고 느낀 것은 착각 일까? 토마스는 의아하게 바라보면서도 습관대로 충실하게 대답했다. “3인실은 전부 2층에 있습니다만.” “헉!! 그럼 나 혼자만 1인실로 따로 해주면 안 돼요?” “예, 예?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역시나 저 소년은 몸이 많이 안 좋은 모양이었다. 당연한 듯이 반말을 하는 일행과 달리 유일하게 주위 사람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 보면 그다지 세력이 강하지 않은 지방 귀족일 가능성이 컸다. 모포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이유도 일행들에 비해 초라한 외모를 감추고 싶어서이리라. 대충 사정을 짐작한 쟈콥이 얼른 소년의 옆에 다가가 말했다. “혹시 몸이 불편하신 거라면 위층까지 부축해드리겠습니다. 제게 기대십시오.” “네? 아, 그러실 필요까진…….” “아닙니다. 걷는것도 힘들어 보이시는데 그렇게 하시지요. 어차피 현재 1인실은 전부 꽉 차서 드릴 수 있는 방도 없습니다.” 하지만 막 부축하려는 순간, 그는 싸늘하게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의해 내밀었던 손을 다시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를 막은 사람은 검은 피부를 지닌, 예의 그 차가운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쓸데없는 참견은 그만두시지? 그냥 알아서 오르도록 내버려 둬.” “네, 네? 하, 하지만…….” 같은 일행이면서 어찌 이리 냉정할 수 있단 말인가! 쟈콥은 자신이 더 분한 심정이 되어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려고 했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먼저 다른 말로 선수 쳤다. “엘, 이것도 훈련의 연속인 거 알지? 게으름 피우면 벌칙이야.” “크흑! 알아어! 알았다고!!” “어떻게 그럴… 에? 후, 훈련?” 훈련이라니? 이런 곳에서 무슨 훈련을 한단 거지? 쟈콥이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에 굳어 있는 사이, 그들은 엘이란 이름의 소년만 남겨둔 채 유유히 방으로 올라갔다. 그러자 혼자 남은 소년은 한참이나 빤히 계단을 노려보더니, 곧 심호흡을 하고 한 발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확고한 표정을 보니 정말로 혼자서 오를 작정인 듯했다. “끄응! 아이고~ 나 죽어. 헥! 헥!” “저어, 정말 도움이 필요 없겠습니까?” “네, 네.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이나 계속하세요. 하하!” “손님이신데 그럴 순 없습니다. 다른 일행분들은 다들 멀쩡하신데 어째서 혼자서만 이렇게……?” “아, 그게요. 요즘 뭘 배운답시고 과하게 움직였더니 온몸의 근육들이 온통 비명을 지르는 거예요. 쉬면 또 금방 나아지니까 정말 신경 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럼 근육을 푸는데 효과적인 약이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손님이 원하지도 않은 서비스를 이렇게 베풀고 싶어지기도 처음이었다. 그 만큼 눈앞의 소년은 어딘지 위태롭고 불안해 보였다. 하지만 소년의 대답은 이번에도 정중한 거절은 담고 있었다. “안 돼요. 약 먹으면 혼나거든요. 벌칙이 꽤 살벌해서…….” “벌칙이요?” “쿡쿡! 이 모포 한번 들어보실래요?” “……??” 생긋 웃은 소년은 곧 입고 있던 모포 중 한 겹을 벗어내어( 그 모포가 여러 겹이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무렇지 않게 건네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든 쟈콥은 곧 눈이 휘둥그레지는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천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포의 무게가 어마어마하게 무거웠던 것이다. “헉! 이, 이것은??” “벌칙 한 번에 모포 한 개씩 추가. 벌써 다섯 개째예요. 여기서 더 늘어나면 난 죽어요. 흑흑!” “이, 이런 것을 입고 다닌단 말입니까? 설마 여행하는 내내?? 그에게서 다시 모포를 받아든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네! 그래도 걸을 땐 그나마 낫지, 산타고 암벽을 오를 땐 정말 죽을 뻔했어요. 떨어질 뻔한 게 몇 번인지…….” “아, 암벽이요? 이곳에 암벽이 어디에…….” “왜, 이 마을 주변이 온통 산이잖아요? 저 안쪽으로 가니까 전부 암벽뿐이던 걸요.” “헉! 서, 설마 산맥을 통과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쟈콥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말에 멍하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내노라하는 정정들도 쉽게 건너지 못하는 산맥이다. 그런 곳을 이런 어린 소년들이 넘었다는 말은 그가 아니라 누구라도 쉽게 납득할 수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방금 전 소년이 입은 모포의 무게까지 확인한 뒤에서야 더욱이 현실감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노, 농담이시겠죠?” “휴우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어요. 아! 잡담이 너무 길었네요. 그럼 저 이만 올라가 볼게요.” “…아하하. 네. 그, 그러십시오.” 얼떨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쟈콥은 또 다시 멍해지고 말았다. 무겁게 짓눌러진 모포 사이로 소년의 새하얀 얼굴이 살짝 드러났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벌꿀이 타고 흐르는 듯한 허니 블론드 머리에, 시리도록 빛나는 초록색의 눈동자였다. 오뚝 솟은 콧대와 부드럽게 미소 지은 입술은 마치 상아를 가져다 그대로 깎아 만든 듯이 정결한 느낌을 주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불분명한 중성적인 아름다움. 그것은 마치 신계의 천사가 지상에 하강이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너무 순식간에 사라져, 쟈콥은 방금 자신이 본 것이 정말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눈을 뜬 채 꿈이라도 꾼 건가?’ 그가 어리둥절한 심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소년은 어느새 계단을 다 올라 방을 향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자 조용했던 1층이 갑자기 술렁거리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손님들은 물론, 종업원들까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에 쟈콥은 의아한 표정으로 근처에 있던 심부름꾼 아이를 향해 물었다. “얘야, 죠. 사람들이 갑자기 왜들 저러는 거냐?” “왜긴요! 방금 올라간 그 손님의 일행들 못 보셨어요? 모두 하나같이 인간의 기준을 벗어난 것 같았다고요.” “쯧쯧! 조그만 한 것이 밝히기는.” “윽! 저뿐만이 아니에요. 아까부터 동네가 온통 술렁거렸다고요.” “엥? 설마 밖이 시끄러웠던 게 전부 저 손님들 때문이라는 거냐?” “당연하죠! 우리 여관에 오다니, 믿을 수 없어! 쟈콥 아저씨! 이따가 식사 가져다 드리는 거 제가 해도 돼요?” “그, 그래. 그려려무나.” “야호! 신난다!!” 그러나 그 뒤로 쟈곱은 아이에게 기회를 빼앗긴 다른 종업원들의 원망 어린 시선을 감당 해야만 했다. 외모만으로 주위를 장악하는 사람들이라니, 왠지 엄청난 손님을 맞아들이게 된 것 같았다. 트로웰로부터 체력훈련(체력훈련이라 쓰고 고문이라 읽는다.). 을 받게 된 지도 어언 한 달째. 요즘 들어 나는 한 가지 심각한 의문에 빠져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훈련양이 너무 과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초반에 질척거리는 땅에서 걷게 했을 때만 해도 그런가 보다 했었다. 하지만 보통 평범한 인간을 훈련시키는데 집채만 한 바위를 들거나 나무를 매달고 강을 헤엄치게 하던가? 마치 드래곤x 이란 만화에 등장하는 손x공이라도 된 심정이다. 물론 시키는 대로 다 해내는 나 역시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하다만. “…이러다 나중엔 초사이언이라도 되는 거 아닐까…….” 그런 모진 시간 속에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으니(?) 이런 생각도 그리 터무니없는 건 아니다. 게다가 이놈의 육체는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이런 과한 운동에도 근육은 커녕 살이 붙지도 않는다. 그뿐인가! 심한 훈련 때문에 온몸이 아파 끙끙거리다가도 그날 저녁 한숨 자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멀쩡해지는 것이다. 덕분에 약이 오른 트로웰이 훈련의 강도를 더욱 높이게 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지만. “흑흑! 그렇다고 땅 밑에 매장시켜놓고 알아서 살아나오라고 한 건 너무했잖아.” 그랬다. 현재 나는 어딘지 모를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혀 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 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온몸을 무섭게 짓누르는 무거운 모포와, 커다란 돌덩이를 고스란히 허리에 매단 채로. 그나마 숨을 쉬게 해준다고 실프 한 마리를 던져줬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올라가기도 전에 질식사했을지도 모른다. 곳곳에 돌조각과 나무 뿌리가 섞인 흙을 밀어내고 위로 올라가는 일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이봐,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당신, 우리들의 왕께 무슨 죽을지라도 저지른 거야? “헥헥! 놈, 지금 나 고생하고 있는 거 안 보여? 힘드니까 말시키지 마.” -하지만 벌써 3일째잖아? 이러다 올라가기도 전에 굶어 죽는 거 아니야? “젠장! 그래서 어쩌라고!” -아니, 그냥. 되게 불쌍해 보여서. “그래봤자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지금 말을 할 수 있는 건 순전히 내 얼굴에 공기층을 씌워준 실프 덕분이었다. 그에 비해 저 놈들은 어떠한가! 누가 땅의 정령 아니랄까봐 시종일관 옆에 붙어서 재미있다는 듯이 쑥덕대니, 안 그래도 없던 기운이 더욱 빠지는 기분이다. 내가 빽 하고 소리 지르자 놈은 무슨 당연한 소릴 하냐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왕께서 절대 도와주지 말라고 하셨다고. “나도 알아! 누가 뭐래? 바라지도 않네욧!!” -쯧쯧! 애교 없긴. 그러니까 이런 고생을 하지. “큭! 놈!! 너 자중에 두고보자!! 앞으로 딱 4천 년만 기다려! 알았어?” -……??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놈을 무시하며 다시 있는 힘껏 흙덩이들을 밀어 올렸다. 아무리 검술이 배우고 싶었어도 그렇지, 하필이면 사악버전의 트로웰에게 부탁을 하다니!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용감했던 걸까? 체력훈련만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앞으로 본격적인 검술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제 무덤을 팠다’는 엘뤼엔의 말은 결코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휘유~ 정확히 3일째 15시간 하고도 38분 지났어. 5일은 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꽤 빨리 나왔는 걸? 아주 훌륭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이렇게 얄미워 보일 수 있을까? 나는 간신히 빠져나온 상반신만 땅 위에 지탱한 채 한참 동안을 거친 숨을 골랐다. 처음 떠났을 때만 해도 가을 중반이었던 계절은 여행하는 도중에 겨울로 바뀌었지만, 나의 온몸은 한여름의 무더위 때보다 더욱 땀에 절어 있었다. 거기에 지저분한 흙들과 상처들까지 두드러지니, 이미 내 모습은 사람의 몰골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걸 보고도 트로웰은 영 재미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이 정도쯤 하면 미칠 때도 됐는데, 꽤 오래 버티네? 뭐, 육체나 정신력이나 이미 일반인의 기준을 뛰어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아, 하아! 어, 어째 미치기를 바라는 듯한 말투다?” “하하! 설마. 1년 후에 날 막아야 하는데 벌써 미치면 곤란하지. 난 그렇게까지 사악하진 않아.” 이미 충분히 사악해! 버럭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서 벌칙까지 당하고 싶진 않아 나는 꿋꿋하게 눌러 참았다. 원래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지 않은가? 하긴 이 경우엔 처음부터 법이 통할 리도 없지만. 내가 뾰로통한 표정을 하자 트로웰이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쨌든 수고는 많았어. 예상보다 빨리 올라온 상으로 원하는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지.” “정말? 그럼 인간을 멸종시킨다는 계획 취소해줘!” “통과!” “그런 게 어디었어? 소원 들어준다며!” “그건 예외야. 겁 없는 녀석이네. 한 번 더 땅속을 구경하고 싶어?” “쳇!” 어차피 들어줄 걸 바라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단칼에 거절당하니 충격이 컸다. 그런 내 모습을 트로웰은 상당히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군. 그새 기회를 노리는 건가?” “당연하지! 설득할 기간이 1년밖에 안 되잖아. 그러니까 기간 좀 늘려달라니까? 아, 그래. 이걸 소원으로 하면 안 될까? 3년만 늘려줘.” “안돼! 이것도 통과.” “쳇! 수명도 길면서 치사해.” 만난 가까이 사는 인생에서 고작 3년을 참는 것도 힘들단 말인가. 내가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툴툴거리자 트로웰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 거 말고 좀 더 네 자신을 위한 걸로 바랄 생각은 없는 건가?” “나를 위한 거라니?” “음, 아프니까 치료를 받게 해달라거나, 체력훈련은 이쯤에서 그만두자거나 하는 거 말이야. 난 당연히 그런 말이 나올 줄 알았거든.” “뭐, 그것도 절실하긴 하지. 그래도 역시 너를 설득하는 일이 더 중요하니까.” “흐응, 인간들의 멸종이 두렵긴 한가 보군? 하긴, 너 역시 인간이니 남의 일이라곤 할 수 없겠지. 그래서 그렇게 매달리는 건가?” “아니.” “그럼?” 흥미진진한 눈으로 바라보는 트로웰의 모습은 영락없이 짓궂은 장난을 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나는 그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며 또박또박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널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게 싫어.” “…뭐?” “안 그래도 요즘 널더러 ‘암흑의 군주’ 니 뭐니 하면서 수군거리고 있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야. 근데 멸종까지 시켜봐. 이미 죽은 인간들이야 말이 없겠지만, 엘프들이나 드래곤들이 얼마나 쑥덕거리겠어? 그런 거 정말 싫어.” “대체 무슨…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하지만 사실인걸.” “하! 지금 뭔가 중요한 걸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내가 너에게 그런 ‘과분한’ 대접을 받을 정도로 살갑게 군 기억이 있던가?” “그야 당연하지!” 처음 눈을 떴을 때 마주한 것은 내 앞을 둘러싸고 있던 3명의 정령왕들. 무심한 표정의 미네르바나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던 이프리트와 달리, 웃으며 반겨주던 유일한 존재가 바로 트로웰이었다. 수업을 한다는 핑계로 구박하던 이프리트에게서 날 두둔해주던 것도 그였고, 처음 나간 유희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를 능숙하게 이끌어주던 것도 트로웰이다. 그는 오히려 엘뤼엔보다 먼저 내게 가족이란 의미로 다가와준 존재였다.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 네가 처음이야.” “…….” 물론 이 말에 해당하는 것은 4천년 후의 그였지만, 지금의 트로웰이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동일인물이니 누가 듣든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충격이라도 받은 듯이 할 말을 잇지 못하고 서 있는 그를 보며 나는 어색하게 미소지었다. “지금 굉장히 황당하다고 생각하지? 표정이 완전히 굳었어.” “…잘 알고 있네. 방금 한 말은 훈련이 너무 힘들어서 내뱉은 헛소리로 간주해주지.” “헉! 남의 진심을 짓밟다니!” “미안하지만 난 인간들이 말하는 진심 같은 건 안 믿어. 너희들이 한 가지 얼굴로 얼마든지 다른 성격을 연기해낼 수 있는 종족이란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 무뚝뚝하게 대꾸한 트로웰은 아직도 땅속에 몸을 묻은 채 상체만 내밀고 있는 나를 한 손으로 덥석 잡아 끌어올렸다. 모포와 바위덩어리까지 매달려 있는 무게를 단번에 들어 올리는 괴력이라니! 아담한 체구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현상에 내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그는 먼지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입을 열었다. “오늘로 한 달째지? 내일 부턴 본격적으로 검술을 배우게 될 테니 각오해.” “에? 정말? 그럼 체력훈련은 오늘로 끝이야?” “끝이라고 한 적은 없어.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진 병행이야.” “그, 그게 언제까지인데?” “글쎄. 네가 하는 걸 봐서.” “살려만 주십시오! 사부!!”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트로웰의 입가에 서리는 사악한 웃음을!!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나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좋아. 소원 접수.” “에? 자, 잠깐만 기다려! 이게 소원이 아닌데?” “이미 지나간 일에 왈가왈부하지 마. 어서 들어가서 씻기나 해. 지금 네 몰골,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니까.” “으윽! 얍삽해, 트로웰! 이런 법이 어디있어!” 그럴 거면 처음부터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을 하질 말던가! 단지 살려만 준다니! 앞으로 또 얼마나 괴롭히려고?! 그러나 억울한 외침도 통할 상대에게나 통하는 법. 완고한 면으로만 보자면 그는 엘뤼엔보다 더 대하기가 까다로운 존재였다. 키득키득 웃으며 먼저 돌아가 버린 트로웰의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나는 그때까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허무한 한숨을 내쉴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여관까지 가려면 반나절을 걸어야 한단 말이야… 흑흑.” 무려 ‘만’ 3일만에 돌아온 여관은 여전히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비록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하긴, 여기저기 흙먼지와 피를 잔뜩 묻힌 채 좀비처럼 흐느적흐느적 걷는 사람을 그 누가 반가워하겠냐마는. 게다가 온몸에서 퀴퀴한 냄새까지 풍기니, 만약 이곳의 주인과 미리 안면을 터놓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쫓겨났을 것이다. 나병(문둥병) 환자라도 대하듯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나는 문득 울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 나를 알아보고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역시나 이 여관의 주인인 쟈콥이라는 남자였다. “아, 아니!306호실의 손님이 아니십니까? 이 꼴은 대체…….” “아하하! 아, 안녕하셨어요.” “지금 인사하실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식사는 제대로 하신 건가요? 몸이 완전히 엉망이 되셨군요. 토마스! 어서 부축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대부분의 사람들이 엘뤼엔과 트로웰의 외모에 홀려 내게 관심을 두지 않기 일쑤인 반면, 이곳 여관의 주인은 이상하리만치 나를 더 챙기려는 경향이 있었다. 잘나고 화려한 일행들에 비해 초라한 차림의 내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한 모양이다. 의외로 동정심이 많은 타입인 걸까? 나는 애꿎은 종업원을 닦달하는 쟈콥에게 얼른 고래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쟈콥씨. 제가 알아서 갈게요.” “예에? 설마 이번에도 도움을 받으면 벌칙을 받으시는 겁니까?” “아마도 그럴 걸요. 그보다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내내 육포로만 끼니를 때웠더니 배가 너무 고프네요.” “대체 무엇을 하시다 오셨기에?” “아하하하! 지하탐방이랄까요… 뭐, 그다지 정신건강에 좋은 건 아니었어요.” “……??” 강도가 높은 훈련을 한다는 말을 끝으로, 달랑 육포 10조각이 들어 있는 주머니만 받은 채 깊은 땅속에 파묻혔을 땐 얼마나 황당했던가. 주위에 있던 땅의 정령들이 지상으로 가는 길을 알려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영원히 그 안에서 헤맬 뻔했다. 이번엔 용케 살아나왔다지만, 정말 두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랄까. 내 장담컨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사형법은 생매장일 거다! 암, 그렇고 말고! “왔으면 얌전히 방으로 돌아올 일이지, 거기 멍하니 서서 뭘 하는 거냐?” “아… 엘뤼엔!”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은 것은 훈련 때문에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엘뤼엔이었다. 그는 꼬질꼬질하고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곤 그간의 상황을 잠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그 모습에 황홀해하는 주변 사람들은 무시하도록 하자.).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을 칭찬해야 할지, 독하다고 혀를 차야 할지 모르겠군.” “아하하! 자, 잘 지냈어? 참 오랜만이지?” “고작 사흘 주제에 뭐가 오랜만이라는 거냐? 어서 들어오기나 해라.” 짜증내면서도 일부러 나와 준 걸 보면, 날 기다리기라도 했던 걸까? 괜스레 기쁜 마음에 헤헤 웃자 옆에 있던 쟈콥이 얼른 내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보십시오. 곧 간단한 음료와 식사를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 네! 고마워요, 쟈콥씨.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의 말에 나는 허둥지둥 인사를 건네곤 얼른 엘뤼엔의 뒤를 따라갔다. 늦장이라도 부렸다간 당장이라도 호통이 떨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육통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게 낫는 것이었던가? 온몸의 통증을 견디며 방으로 들어갔을 땐, 엘뤼엔은 그새를 못 참고 의자에 앉아 질책하듯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거기서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대체 몇 분이 걸리는 거냐?” “헥헥! 몸이 뻐근해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다고. 이런 무거운 걸 짊어지고 계단 오르기가 쉬운줄 알아?” “넌 바보냐? 모포를 벗으면 되잖아.” “하지만 이거 벗으면 트로웰한테 혼난단 말이야.” “쯧쯧! 넌 그런것을 입고 찝찝하지도 않냐?” “하지만…….” 살아남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찰림이 지저분한 것에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게 엘뤼엔에게는 영 불만이었나 보다. 하긴, 지금 언뜻 본 머리카락이 본래의 금빛을 잃고 시꺼멓게 보일 정도니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는 말 다한 셈이다. 머쓱한 얼굴로 모포를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는 곧장 나이아스를 불러내어 나를 씻기도록 명령했다. “인간의 몰골이 될 때까지 씻겨라. 지금 입고 있는 지저분한 옷들까지 전부 세탁해. 도저히 봐줄 수가 없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왕이시여. “자, 잠깐만! 인간의 몰골이라니! 그럼 내가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거울을 보면 알 거다. 앞으로 어디 가서 절대 내 계약자라고 말하고 다니지 마라. 창피해서 원…….” “…….” 아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도 여유만만한 아버지라니! 하지만 엘뤼엔은 내가 노려보든 말든 상관없다는 듯, 나이아스에 의해 깔끔해진 내 모습만을 만족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한결 낫군. 대체 어디서 무슨 훈련을 하면 금발이 흑발처럼 보일 수 있는 거냐?” “별거 아니었어. 그냥 흙속에서 좀 뒹굴었더니…….” “아무튼 넌 봐줄 데라곤 외모밖에 없으니까 평소에도 틈틈이 관리하는 게 좋을 거다.” “쳇! 누가 할 소릴.” “뭐야?” “그나저나 트로웰은 어디 갔어? 아까부터 안 보이는데.” 내가 은근슬쩍 딴청을 피오며 말을 돌리자, 엘뤼엔이 푸욱 한숨을 내쉬고는 내키지 않는 어조로 대답했다. “잠깐 계약자를 만나러 갔다.” “계약자? 아, 혹시 블랙 드래곤 아니야? 이름이 라이칸이랬던가.” “녀석이 그런 것까지 말해줬나?” “아니, 그건 아니지만, 헤헤! 역시 맞구나.” 라이칸이라면 블랙 일족의 수장인 동시에, 라피스의 아버지 되는 드래곤이었다. 그와는 라피스의 장례에서 잠시 마주친 기억밖엔 없지만, 왠지 반가운 기분이 들어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그러자 그 모습에서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한 듯, 엘뤼엔이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 시작했다. “뭐냐, 그 웃음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엥? ‘또’ 라니?! 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 그래?” “글쎄… 주위에서 가만히 있어도 알아서 무덤을 파는 게 네 특기 아니었던가? 덕분에 트로웰이 요즘 신났더군. 다른 인간들을 죽이는 대신, 널 괴롭히는 것에 재미가 붙어버린 모양이던데.” “…….” 쩝, 할 말 없다. 이번 일은 정말 나 스스로 만든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모처럼 인간이 되었는데 정령사에만 안주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전보다 죽을 위험이 높아진 만큼, 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좀 더 다양하게 익히고 싶었을 뿐이다. 비록 훈련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요 근래 깨닫긴 했지만……. ‘괜찮아, 괜찮아. 다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건데, 뭐. 어차피 편한 훈련이라는 건 없잖아?’ 문제는 트로웰이 제아무리 사악하게 굴고 멋대로 행동해도, 내 머릿속에서는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한 그만이 떠오른다는 것이다. 모진 구박에 화가 울컥 치밀이도 막상 얼굴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마니, 요즘 들어서는 거의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가족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걸?(브라더 콤플렉스나 시스터 콤플렉스처럼.).? “이런 험한 세상에서 검술은 기본이지! 정령술만으론 버티기 힘들다고.” “어쭈? 지금 정령의 힘을 무시하는 거냐?” “그게 아니라~ 나도 뭔가 한 가지쯤은 나 스스로 해내고 싶어서 그래. 정령들의 도움을 받는 걸로는 성이 안 찬다고 해야 하나? 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한심할 정도로 배부른 소리로군. 그래서 이 고생을 사서 한다고?”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엘뤼엔은 이마에 시퍼런 혈관을 띄운 채 꽉 쥐인 주먹을 높이 펴들었다. 따악! “아얏! 무슨 짓이얏!” “멍청한 녀석에겐 매가 약이다. 도대체 정령왕을 소환한 주제에 뭐가 불만인지 모르겠군.” “하지만 성취감이 떨어지는 걸.” “정령을 소환하여 그것의 힘을 빌리는 건, 정령사가 가진 능력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걸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는 네가 이상한 거야.” “나도 알아! 그래서 다른 것도 배우려는 거잖아!” 정령은 이미 내게 생활의 일부나 마찬가지라, 소환한다고 해도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마 그래서 더 정령사란 직업에 애착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걸 알지 못하는 엘뤼엔은 간단하게 내 상태를 결론지었다. “쯧! 몸이 고돼야 보람을 느끼는 타입이었나? 어쨌든 네 육체가 인간의 기준을 뛰어넘은 것에 감사해라.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탈진해서 죽었을 테니까. 트로웰은 네가 평범한 인간이었어도 지금과 똑같은 훈련을 시켰을 거다.” “헤에, 지금 날 걱정해주는 거야?” “이젠 헛소리까지 하는군.” 미래의 그였다면 망설임 없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텐데. 어찌된 게 지금의 엘뤼엔은 하루라도 쌀쌀맞게 대꾸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라도 돋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이 모습 쪽이 좀 더 그 답다고 생각하는 나는 또 뭐라 말인가! “하아, 역시 패밀리 콤플렉스라도 있는 모양이야…….” “패밀리… 뭐라고?” “아냐, 아무것도. 그냥 특정인에게 무작위로 약해지는 게 버릇이 돼버린 것 같아서.” “……??” 대충 말을 얼버무린 나는 한쪽 구석에 마련된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온몸이 뻐근거리는 탓에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엘뤼엔 역시 내가 피곤한 상태라는 것을 느꼈는지 그에 대한 별다른 제지를 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막 의식이 끊기려는 찰나, 환청인지 뭔지 작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 같았다. “쯧! 온몸이 상처투성이군. 할 수 없지. 오늘만 특별히 해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겁게 짓누르던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은 단지 기분 탓이었을까.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잠자리였다. 다시 깨어났을 땐 이미 트로웰이 방 안에 돌아와 있었다. 웬일인지 기분이 좋은 듯 얼굴에 가득 웃음을 지은 그는, 내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하곤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깨어났군. 몸은 좀 어때?” “으응, 괜찮아. 어라? 그러고 보니 이상할 정도로 개운하네.” 평소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긴 했지만 오늘은 유난히 상쾌한 기분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팔을 구부렸다 폈다 해보이는 나에게, 트로웰은 의미심장한 얼굴로 엘뤼엔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느 누가 잠깐 반칙을 해서 말이야. 뭐, 어차피 이번은 나도 심했다 싶으니 상관없지만.” “…에? 설마 엘뤼엔이 치료해준 거야?” “슬슬 한계가 온 것 같아 도와준 것뿐이다. 고작 이런 훈련으로 한심하게 죽을 순 없지 않나.” 내가 놀란 목소리로 묻자 엘뤼엔은 머쓱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변명하듯 대답했다. 잠들기 직전에 들었던, 환청이라고 생각했던 그 중얼거림이 정말이었던 것이다. “고, 고마워. 엘뤼엔.” “흥! 당연한 소릴.” 그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지금까지의 그를 생각해봤을 때 부탁받지도 않은 일을 해준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혹시나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게 아닐까? “뭘 그렇게 멍하니 보는 거냐? 일어났으면 밥이나 먹어라.” “응? 밥?” “그래. 아까 여기 주인인지 뭔지 하는 인간이 네가 부탁했다면서 식사를 가져왔더군.” 엘뤼엔의 말대로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스튜와 베이컨이 놓여있었다. 그 주위를 묘한 기운이 감싸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보온 마법을 걸어 음식이 식는 것을 방지해둔 듯했다. 내가 그것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자 자연스럽게 트로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음식이 식지 않은 게 이상한 거야? 엘퀴네스가 보온마법을 걸어뒀어. 그 정도의 마법쯤은 정령왕들도 할 수 있거든.” “에, 엘뤼엔이 직접?” “왜? 그게 이상해?”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려는 것을 불굴의 이성으로 참아냈다. 이런 식으로 자잘한 것을 배려해주는 모습을 보니 반가움보다는 오히려… 불안하다. 이거 혹시 훗날 닥쳐올 고난을 미리 달래려는 의도 같은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생각이 화가 된다고 했던가! 찝찝한 표정으로 스프를 먹는 내 앞에 갑자기 트로웰이 묵직한 자루 하나를 터억 내밀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언뜻 보기에도 수많은 팔찌들과 장신구 종류였다. 물론 ‘겉으로’는 말이다. “이게 뭐야?” “그동안 모포 덮고 있느라 힘들었지~ 미관상으로도 나쁘고 해서 좀 더 간단하고 섬세한 것으로 준비해봤어. 앞으로 시작될 네 훈련에 많은 도움이 될 거야.” “훈련이라면… 이거 설마 모포 대요?” “정답. 한 번 착용해볼래?” 생글생글 웃으며 물은 트로웰은 대답은 듣지도 않고 멋대로 팔찌 하나를 가져다 내팔에 채웠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모포 대용이라는 말에 그 정도만큼의 무게라고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 순간, 어마어마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쿵!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고 굳어 있는 나를 보며, 트로웰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흠, 무게설정을 너무 높게 잡았나? 가만히 앉아서 넘어질 정도면 곤란한데.” “쿠, 쿨럭! 날 죽일 셈이야?” “설마. 그냥 사소한 실수였어. 어디보자, 그럼 발찌의 무게도 낮춰야 하나? 이 정도는 견딜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훈련이 부족했을지도…….” 그러면서 생긋 웃는 걸 보니 이미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저런 소(小)악마 같으니라고. 제발 나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트로웰을 돌려줘~~! 하지만 내가 울상을 짓든 말든, 그는 착실히 내 손목과 발목에 예의 그 끔찍한 정도로 무거운 장신구를 달기 시작했다. 그리곤 육중한 무게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 무게에 익숙해지면 앞으로 어딜 가든 칼 맞을 염려는 없을 거야. 내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 “…대체 이런걸 어디서…….” “아아, 내 계약자한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 중량 마법쯤이야 나도 쓸수 있지만, 일일이 물건에 새기는 게 귀찮아서 말이야. 어때? 꽤 잘 만들어졌지?” 갑자기 계약자에게 다녀온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던가. 물론 만들어지기야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이라곤 해도 몸을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너무 심한 거 아닌가? 그런 내 불만을 느낀 듯, 트로웰은 킥킥 웃던 것을 그만두고 딱! 하고 가볍게 두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위라도 매단 듯 추욱 늘어져 있던 손발이 한층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 “뭐야, 그 표정은? 아무리 나라도 처음부터 무리한 일은 시키지 않아. 앞으로 차차 단계를 늘려서 방금 전의 무게까지 도달할 생각이니까 충분히 각오하는 게 좋을걸.” “윽! 정말 악취미야.” “그러게 수업이 편할 거란 기대는 하지 말랬잖아? 난 빈말은 안 하는 주의라서 말이야.” 엘뤼엔의 말마따나, 그는 나를 괴롭히는 것에 단단히 재미가 들려버린 듯했다. 왠지 앞으로의 일정도 순탄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연은 필연을 부른다. 처음 시작하기에 앞서 트로웰이 가장 먼저 나에게 건네준 것은 제법 날카롭게 벼려진 진검이었다. 원래 기초 동작을 연습할 때는 목검으로 시작하는 거 아닌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나에게 그는 여유만만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덤벼.” “…엥?” “안 덤빈다고? 흠, 그럼 내가 먼저 간다?” “에에에? 자, 잠깐만!!!”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얼렁뚱땅 성립된 대련모드. 아니, 정정한다. 한 사람의 일방적인 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나는 오직 몸을 피하는 것에만 급급해 있었으니?. 한 몇 분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트로웰은 도리어 짜증나는 얼굴로 투덜거렸다. “피하기만 하면 어떻게? 제대로 좀 막아봐.” “막으라니! 이걸 어떻게 막아!” “일부러 느리게 움직여주고 있잖아. 이번에도 못 막으면 정말 찌를 거다.” “……!!” 팔다리에 무거운 걸 매달아놓고, 칼 휘두르는 법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무조건 막으라니!! 억지도 이런 억지가 없었다. 그런데 이프리트의 정령 만들기 시범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쐐애액! 허리 아래를 파고드는 낮은 파공음은 내 얼굴의 핏기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게 어딜 봐서 느리게 움직이는 거얏!!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것도 잠시, 나는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들고 있던 검을 앞으로 내밀었따. 채앵! ‘막았다!’ 그래. 우연인지 몰라도 분명 처음은 막았었다. 하지만 트로웰이 어디 한번 막혔다고 가만히 있을 바보였던가? 그러나 나는 처음 막았다는 사실에만 들떠 이어지는 공격에는 전혀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빈틈!” “에? 우악!”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빡-!! 하고 강하게 내려치는 통증. 순간, 나는 눈앞이 핑그르르 돌아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첫날에 벌어졌던 훈련의 결말. 그리고 오늘, 나는 또다시 역사적이 5번째 기절을 기록하고 있었다. “네놈은 바보냐? 어떻게 단 한 번도 반격을 못하는 거냐.” 이전에 머물던 마을을 떠나 노숙을 다시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 오늘도 어김없이 허리에 기다란 검상을 입고 돌아돈 나를 보며 엘뤼엔은 기막힌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여기서 ‘그건 내가 묻고 싶소!’라고 말해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겠지? 꽤 소질이 있다는 평가를 들었음에도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내가 생각해도 정말 답답한 심정뿐이었다. 내 표정이 우울해지자 엘뤼엔은 더 화가난 얼굴이 되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다치면 알아서 치료해주는 신관이라도 되는 줄 아는 거냐? 그러니까 그따위 검은 왜 배우겠다고 해서 이 난리인지. 내일도 이런 식이면 치료고 뭐고 없다. 알아서 살아남아!” “그래도 오늘은 세 번이나 막았다, 뭐.” “글쎄, 막지만 말고 반격을 하란 말이다, 반격을! 똑같은 패턴으로 공격하는데 왜 항상 지는 건지 도무지 내 머리론 이해할 수가 없군. 네놈은 생각이란 걸 하고 사는 거냐?” “생각이야 하지. 그래도 몸이 안 따라주는 걸 어떻해? 공격할 장소가 보여도 손이 안 나간단 말이야.” “그럼 때려 치든가!” 이놈의 아버지는 걸핏하면 때려 치라는 말만 한다. 하나뿐인 아들내미가 다쳐서 돌아오는 게 불쌍하지도 않은 건가? 그나마 목적지인 수도가 코앞이라 훈련이 막바지에 이르렀으니 망정이지, 그것마저도 아니었다면 진즉에 계약을 해지하려 했을 것이다. 그 만큼 내가 자주 다쳤다는 뜻이다. “흐음, 빈틈이 보이는데 손이 안 나간다고? 좀 더 자세하게 말해봐.” 훈련이 끝나면 트로웰은 그나마 친절한 성격으로 돌아와서 이것저것 질문을 건네곤 했다. 그리고 내가 그것에 답하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지거나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내가 느꼈던 바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그는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발견한 눈이 되어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니까… 칼이 휘둘러지는 방향이나, 네가 움직이는 것은 분명히 보이거든? 그런데 막상 빈틈을 발견하고 공격하려고 하면 손이 딱 멈춰서 굳어버리는 거야. 팔찌 무게엔 대충 익숙해진 것 같은데 이상해. 앗! 혹시 그 틈에 무게수치를 높였던 거 아니야?” “…당장 최대수치로 올려줄??” “아하하… 시, 실언이었습니다, 형님.” 순식간에 비굴모드로 돌아온 나에게 그는 알면 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내 얼굴을 향해 홱! 주먹을 내뻗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그의 공격을 피했다. 전부 그동안 받아온 훈련의 성과였다. “트로웰?” “흐음, 반사신경은 문제없군. 좋아! 방금 내가 한 것처럼 이번엔 네가 나한테 공격해봐.” “에? 공격을?” “그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칙 있을 줄 알아.” 그 말에 나는 잽싸게 주먹을 말아 쥔 다음, 느긋하게 앉아 팔짱을 끼고 있는 트로웰을 향해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쭈욱 내뻗은 팔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는데도 그는 전혀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위험……!!’ 물론 정령왕인 그가 이 정도 주먹에 맞고 눈 하나 깜짝할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다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무의식 중에 손을 멈칫하고 말았다. 그 잠깐의 망설임의 대가는 언제나처럼 끔찍한 수법으로 되돌아왔다. 못마땅한 표정이 된 트로웰이 내 팔을 잡고 그대로 엎어치기를 했던 것이다. 퍼억! 쿠우우우웅! “크윽! 아야야야!” “제대로 하라고 말했을 텐데? 그렇게 벌칙이 그리웠어?” “하짐나 네가 피하지 않으니까…….” “멍청이! 그렇다고 공격을 멈추면 어떡해! 지금 이 순간은 적이라고 생각했어야지! 자, 다시 해봐.” “으응.” 시무룩하게 대답한 나는 이번에야말로 성공하기 위해 단단히 마음의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결과는 역시나 실패. 그 것도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에서의 실수였다. 그 뒤로도 같은 일이 몇 번 반복되자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기 전에 꼭 망설이는군. 배울 의사가 있긴 한거야? 아니면 그 정도에 맞고 쓰러질 정도로 내가 약해 보여?” “윽! 미안…….” “뭐, 어쨌든 넌 싸울 상대에 대한 적의가 너무 부족해. 대련 결과가 형편없는 게 오히려 당연할 정도야. 애초에 방어 외의 다른 것은 시도해볼 생각도 없었지?” 그의 말에 나는 곰곰이 지난날의 내 성적을 떠올려 보았다. 이제껏 막는 것에만 급급해서 공격할 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그럴 의사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누군가를 공격한 행위에 거부감이라도 있는 걸까? 찝찝한 얼굴로 생각에 잠긴 나에게 트로웰은 냉정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방어만으론 자신의 생명을 지킬 수 없어. 그 점 명심해둬.” “으응, 알았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한결 풀어진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평소였다면 이쯤에서 끝나지 않았겠지만, 이미 날이 저물어가는 무렵이라 더 이상의 훈련은 힘들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지금까지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는 말투로 툭 쏘아붙였다. “뭐하는 거냐? 너도 앉아라. 어차피 오늘도 여기서 밤을 새야할 것 같으니까.” “응. 아~ 배고프다. 아참! 식량이 얼마나 남았지?” “빵과 과일 종류라면 거의 떨어졌다. 육포라면 조금 남았지만. 한 5개 정도?” “엑? 벌써? 그럼 난 내일부터 뭐 먹고 살아?” “그야 내 알 바 아니지. 정 배고프면 멧돼지라도 사냥하든가. 검술은 배워서 스프끓여 먹을 생각이냐?” “헉! 엘뤼엔, 너무 냉정해.” “시끄러. 평소에 조절해서 먹지 못한 네 탓이다. 더 이상 귀찮게 굴지마.” 과한 체력소비를 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이고, 그에 따른 식량 섭취는 필수다! 그걸 가지고 저렇게 구박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이럴 줄 알았으면 마을에 들렀을 때 음식을 좀 더 많이 사두는 건데 그랬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 중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겠지만. 음식의 섭취가 필요하지 않은 두 정령왕은 물론이고, 나 역시 이곳 세상 음식을 요리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연히 사게 되는 것은 빵과 과일처럼 부피가 큰 것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담을 수 있는 숫자가 한정되고, 지금처럼 여행 중에 식량이 부족하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공간의 마법이 걸려있는 가방이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지만, 이곳에서도 그 마법은 꽤나 고급축에 속했기에 지방의 마을에서는 구할 방도가 없었다. 지금은 그저 경량화 마법으로 감지덕지하는 처지랄까. 주위에 아는 드래곤에게 부탁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트로웰이나 엘뤼엔이나 그 부분에 대해선 일절 방관하는 추세였고 말이다. “하아… 라피스 녀석, 이럴 땐 정말 편했는데…….” 말로는 연신 귀찮다고 했지만 그의 합류가 이사나에게 굉장히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사실이다. 앞서 말한 아공간의 마법은 물론이고 폴리모프 마법이나, 보온 마법, 텔레포트 등 그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일이 수두룩하지 않았던가. 그것을 생각하고 나자 나는 새삼 우울한 기분이 들어 살작 입술을 깨물었다.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고마웠다는 말부터 해야지. 그리고 미안하다는 사과도… 휴우! 그런다고 지금 느끼는 이 죄책감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쯤 혹시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에고소드라도 되어 있지는않을까. 문득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에고 소드가 되면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말을 할 순 있어도 자신이 살아 있었을 때의 기억이 전부 지워진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이계, 혹은 미래와 과거에 속한 존재의 개입으로 차원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자연스러운 절차였지만, 라피스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른 채 타인의 손에 조종당하는 라피스라니. 그 자존심 강한 녀석이 훗날 얼마나 분해하겠는가. 그 모든 것이 전부 내 탓이 된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다… 겠지.’ 친했던 사람일수록 내게서 등을 돌렸을 때 받는 상처는 크다.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해 라피스의 영혼을 찾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다. “…역시 난 이기적인 녀석이야.” 나도 모르게 한탄하듯 중얼거린 소리에 옆에 있던 엘뤼엔이 무슨 생뚱맞은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소리냐? 인간은 원래 전부 이기적이야.” “으음. 그런가?” “맞아. 타인을 위해 산다는 것도 결국 자기만족인 경우가 허다하지. 이기적이라고 해서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어. 누구나 다 자기 자신이 가장 소중한 거니까. 그리고 그 때문에 이득을 보는 쪽 역시 존재하잖아?” 가볍게 받아친 이는 다름 아닌 트로웰이었다. 인간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의 반응이 나오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트로웰은 인간들이 이기적인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는 소리야?” “거부감? 그런 거 없어. 그냥 재수 없을 뿐이지.” “…쿨럭!” 그럼 그렇지. 웬일로 좋게 대답하나 했다. 생각해보면 미래의 그도 인간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처럼 직접적으로 반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을 뿐. 뭐, 아예 관심조차 없는 엘뤼엔에 비하면 오히려 가능성이 있는 것일지도. 게다가 미네르바에 대한 질투까지 섞여 있으니 그것만 일단락되어도 대부분이 해결될 문제였다. 물론 그 전에 일어날 사건들이 잘 수습돼야 할 테지만. ‘아, 그러고 보니 미네르바가 그 계약자에게 배신당하는 게 언제지? 트로웰이라면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 말 없이 방관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의 충고에도 개의치 않을 만큼, 미네르바가 그 남자에게 깊이 빠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트로웰이라면 굳이 설득하려 하기보단 묵묵히 분란거리를 제거하려는 쪽을 택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퍼뜩 떠오르는 의문에 얼굴을 굳혔다. 혹시 그가 인간을 말살할 계획을 굳이 1년 후로 정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즉, 앞으로 1년 후에 미네르바가 계약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담 지금 건드리지 않는 것은 아직 미네르바가 인간들에게 호의적이기 때문에? 그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다는 건가? 휴우! 그럼 누구부터 설득해야 하는 거지? 무지 복잡하네.’ 이래서 남의 연애사에는 끼어들지 말라는 말이 나오는가 보다. 하필이면 가장 감정이 엇갈리고 있을 시기에 떨어져서 이런 고생을 떠맡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몰래 트로웰의 옆모습을 흘겨보았다. ‘이 빚은 4천 년 후에 꼭 받는다! 이자까지 전부 계산할 거야!’ 물론 이것은 엘뤼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장부라도 하나 만들어서 적어놔야 하는 게 아닌가 모르겠다. 앞으로도 계산해야 할 빚이 무궁무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받아낼 수 있을지 그 여부는 먼 나중의 문제였지만. “어? 눈이다!” 수도의 외성 앞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 나는 하늘에서 하나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들을 발견하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처음엔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던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크게 불어나서 거의 쏟아진다 싶을 정도로 내리기 시작했다. 이 세계로 온 후 맞이하는 첫눈이었다. “헤에, 첫눈치곤 꽤 많이 내리네. 15cm는 가볍게 쌓이겠는 걸.” 어린 시절 들었던, 겨울에 관련된 동화들 때문일까. 눈이 내리는 모습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것이 여름에 내리는 비와 같은 성질인 것을 알면서도, 더 신비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아마 내리고 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름다운 탓이겠지만. 잠시 서서 그 모습을 감상하던 나는 곧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쿡쿡거렸다 .눈 한 송이 한 송이마다 올라앉아 있는 나이아스들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녀석들의 뒤에는 바람의 실프들이 하나씩 달라붙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자아!! 마음껏 달리자앗~~!! -까아악! 좀 살살 밀어~ 빠른 거 싫단 말이야! -꺄하하하하하! 아무 고민 없이 무사태평한 존재라면 역시 하급 정령들이 아닐까.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곤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령들이 뛰어놀면 놀수록 점점 폭설로 변해가는 눈 때문에 방금 전까지 해왔던 일을 그만둬야 할 처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결국……. “오늘 저녁은 굶어야 한다는 건가…….” 나는 비통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간당간당하던 식량은 결국 이틀째가 되자 완전히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러자 트로웰과 엘뤼엔은 훈련이란 명목으로 내게 알아서 음식을 구해오라고 지시했다. 이 얼마나 비정한 가족인가! 그때부터 나는 혼자서 먹을 만한 것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하루의 일과를 반복하고 있었다. 운 좋으면 간혹 토끼라도 사냥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빈손으로 끝마치는 일이 허다했다. 그런데 이제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으니 이 작업(?)이 꽤나 번거로워 질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빤한 일. 나는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배고파…….” 오늘처럼 팔다리에 매달린 장신구들이 무겁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서 지친 몸에 배고픔까지 겹치니 뭔가 하고자 할 의욕까지 전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쉬운 대로 물이라도 마셔둘 요량으로 그 자리에서 나이아스 한 마리를 소환했다. “나이아스 소환!” 파앗! 그러자 주위에는 한창 뛰놀고 있던 나이아스 중 한 마리가 툭! 하고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갑작스런 소환에 놀랐는지 녀석은 얼음이 잔뜩 엉킨 머리카락을 부르르 털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금세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와아! 이쁜 인간이다. 엘퀴네스님의 계약자잖아? “풋! 안녕? 만나서 반가워. 나이아스.” -어? 내가 말하는 게 들려? “응. 똑똑히 들려.” -와아, 정말이야? 내 목소리가 들려? 얘들아! 이 인간이 내가 말하는 소리를 들었대!! 그 말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주변에 있던 나이아스들과 실프들이 모두 내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들고 있던 눈덩이까지 고스란히 가지고 온 탓에, 내 주위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많은 바람과 눈덩이들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는 그것들의 영향권 안에서 무사했다. 실프들이 알아서 내가 피해를 입지 않게 바람의 방향을 조절한 탓이었다. 마치 태풍의 눈 안에라도 들어온 느낌이었다. 몰려온 정령들은 곧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저마다 한마디 씩 떠들기 시작했다. -와아! 엘퀴네스님의 계약자다! -왕의 인간 계약자는 처음 봐! -안 추워? 바람을 멈춰줄까? -여기서 혼자 뭐해? 그냥 잠깐 물만 마시려던 것이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나는 호기심에 가득 차 또랑또랑 눈을 빛내는 정령들을 보며 등 뒤로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그, 그냥 잠깐 쉬는 중이었는데.” -와아~! 정말 대답했다! -우리가 보이는 거야? -아! 나 얼마전에 들었어. 엘퀴네스님의 계약자가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다고! -헤에~! 정말? 무지 신기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우리한테 말 안 걸었어? 그야 이렇게 수다가 시작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말을 삼키며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행히 별로 그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는지, 정령들은 가볍게 다음 대화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런 곳에 혼자 있으면 안 돼. 얼어 죽을지도 몰라. -실프! 얼어 죽는 게 뭐야? -음… 몸이 꽁꽁 얼어서 죽는 거라던데? -인간들은 그런 걸로도 죽어? -헤에! 무지 약하구나. 하급정령에게 약하다는 소리를 듣다니, 볼 장 다 본 셈인가. 정령들은 어느 새 동정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얼어 죽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걱정 마! 우리가 얼어 죽지 않게 해줄게! -응, 응! 보호해줄게! -우리에게 맡겨! “아아… 그, 그래. 고맙다.” 이걸 정말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그 고생을 하며 배운 검술과 험난한 체력단련이 한순간에 전부 수포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 나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작은 인기척을 깨닫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누군가가 내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부스럭! “……!!” 황급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돌아봤지만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에 덮인 나무밖에 없었다. 멧돼지일까? 아니면 몬스터?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앉아 있던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위험을 경고하는 정령들의 목소리와 무언가가 내게 쏘아져 들어오는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위험해! 피해!! 쐐애애액!! “……!!” 훈련 덕분인지 나는 흩날리는 눈 속에서도 내게 날아오는 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황당하게도 그것은 검지만한 길이의 가느다란 바늘이었다. ‘이, 이게 뭐야?’ 하지만 내가 그것에 대응하려 했을 땐, 이미 바늘은 내 목의 피부를 파고든 상태였다. 평소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지친 덕에 행동이 굼뜬 상태였다. “…어?”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 바늘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따끔한 감촉이 느껴졌다 싶은 순간, 갑자기 온몸이 굳어버려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거지?’ 나는 점점 흐릿해지는 시야를 느끼며, 몽롱해지는 의식속에서 간신히 한마디를 중얼거렸다. 그 다음의 일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기절한 것이라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있을 뿐. 쿠마가 ‘그것’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때 아닌 폭설로 서둘러 사냥감을 찾으러 나온 곳에서, 그는 정말로 뜻밖의 대박을 발견하고 말았다.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무수한 눈의 폭풍 안에 갇혀 있었다. 잘못 본 것이 아니라 유달리 ‘그것’의 주위에만 눈이 폭풍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이 기이한 현상을 휘둥그런 눈으로 쳐다보던 쿠마는, 곧 ‘그것’의 손안에 들린 작은 무언가를 발견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바로 물의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였던 것이다! 쿠마는 단번에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엘프다!” 이런 눈보라가 몰아치는 숲속에서 정령을 데리고 있을 만한 존재라면 엘프들밖에 없었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근처에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했다. “어이! 다들 이리 와봐! 엘프야! 엘프가 있어!!” “뭐라고?”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동료들은 모두 놀란 표정으로 쿠마의 곁에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하나같이 열띤 감탄을 내뱉었다. “운이 좋군! 이런 곳에서 엘프를 발견하다니!” “아직 어린 것 같지? 성인식을 치르지도 않은 것 같아. 300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이게 웬 횡재냐!”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엘프를 보통의 인간들이 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인간들과 교류하는 엘프 마을에서도 어린 엘프들은 철저히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하게 될 줄이야! 쿠마와 동료들은 이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사이좋게 환호했다. 단순히 엘프를 본 것이 신기해서가 아니다. 바로 그들의 직업이 엘프를 사로잡아 노예시장에 팔아넘기는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곧 뿌듯한 표정으로, 늘 해와서 이제는 몸에 배어버린 작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엘프를 상처 없이 무사히 사로잡는 일이었다. “자, 자, 엘프들은 청각이 예민하니까 접근할 때 조심해야 해. 쿠마, 자네가 수면제가 발린 침을 날리도록 하지.” “헤헤, 맡겨둬!” 기다란 퉁소를 이용해 수면제가 발라진 바늘을 날리는 것은 쿠마에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불고 눈이 오긴 했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연습했던 것이라 문제없었다. 쿠마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한 발짝 내딛었다. 그때, 나이아스와 놀고 있던 엘프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불안한 표정으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크!’ 마음이 조급해진 쿠마는 얼른 퉁소에 바늘을 집어넣고 강하게 뿜어냈다. 다행히 그의 시도는 무사히 먹혀들어, 엘프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아싸! 잡았다!!” “수고했어, 쿠마!” “역시 멋진 솜씨였어!” “헤헤! 이 정도 쯤이야.” 이어지는 칭찬에 쑥스럽게 화답한 쿠마는 싱글벙글한 얼굴로 포획한 엘프를 마차로 옮기기 위해 다가갔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틀림없이 엘프라고 생각했던 아이의 귀가 동그스름한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엑? 이게 뭐야! 인간이었잖아?” “뭐어? 인간이었어?” “쳇! 그럼 그렇지. 이런 숲에 어린 엘프가 올 리가…….” 순식간에 실망 어린 표정이 된 그들은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물론 인간도 납치해서 팔긴 하지만, 대부분 이 또래의 노예를 찾는 고객은 여자아이나, 남자일 경우엔 일꾼으로 쓸 만한 듬직한 덩치를 원했다. 그런데 눈앞에 쓰러진 아이는 남자 옷을 입고 있는데 몸이 가늘고 마른 편이었던 것이다. “뭐야, 쿠마! 나는 네가 엘프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잖아.” “에구. 미안, 미안. 난 이런 눈 속에서 정령을 가지고 있기에 당연히 엘프일 줄 알고…….” “뭐? 그럼 이 꼬마가 정령사란 말이야? 쯧! 그럼 탈출할 확률도 높아지잖아. 이거 누가 사가기나 하려나?” 그래도 일단 사로잡은 사냥감을 그냥 놔줄 수도 없고 해서, 쿠마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쓰러진 아이를 확인했다. 예상가를 계산해봐야 하니 아쉬운 대로 대충 생김새나 확인해볼 참이었다.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똑바로 돌리자 자연히 머리카락 속에 가려져 있던 아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있는 대로 투덜거리고 있던 일행들의 불평이 딱 멈추고 말았다. “…세상에! 내가 지금 헛것을 보는 건가?” “맙소사! 이거 완전 거물이었잖아.” 생각했던 대로 사냥감은 아직 앳된 소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소년의 외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벌꿀처럼 달콤한 허니 블론드 머리카락에 눈처럼 새하얀 피부. 마치 조각같이 선명한 이목구비라니!! 이 정도의 미모는 엘프들 중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입가엔 다시금 환한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역시 쿠마, 자네 눈은 틀리지 않았어.” “간만의 건수로군. 노예시장에서 우리가 단연 돋보이겠는 걸?” 서로를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일행은 곧 기절한 소년을 들쳐 업었다. 혹시나 일행이 있을지 모르니 얼른 마차로 돌아가 이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어이쿠! 뭐가 이렇게 무거워?” “킥킥! 엄살은. 이렇게 마른 몸이 뭐가 무겁다고.” “아니야. 굉장하다고. 혹시 뭐 배낭이라도 메고 있는 거 아니야?”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살펴 본 일행은 곧 그의 손과 발에 금색의 장신구가 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팔찌와 발찌였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그들은 조심스럽게 소년의 손에서 팔찌를 빼어냈다. 하지만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던 팔찌의 무게는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무거웠다. 팔찌를 빼어 낸 남자가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떨어트리자, 그것은 곧 육중한 소리와 함께 이미 상당히 쌓인 눈 속에 파묻혔다. 쿠웅! “헉! 뭐, 뭐야! 이런 걸 왜 달고 있는 거지?” “굉장한 소리군. 체력훈련용인가? 원래 정령사들이 몸이 좀 약하잖아.” “그놈의 체력훈련 한번 험하게도 하네. 어쩐지 아까 일어날 때 좀 비틀거린다 싶었지. 마법물품 같은데… 이런 건 그리 비싸게 팔지도 못하겠는 걸? 어떻게 할까?” “추적마법처럼 귀찮은 게 걸려 있을 수도 있으니 다 버려두고 가자.” 마법 아이템이 워낙 흔한 시대이니 만큼, 무겁기만 한 장신구는 그리 탐나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서둘러 소년에게 착용된 나머지 것들도 풀어냈다. 그들은 서둘러 소년에게 착용된 나머지 것들도 풀어냈다. 그들의 행동이 오히려 그의 무력을 높이게 될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채. “늦는군.” 엘퀴네스는 찌푸린 표정으로 이미 상당히 저물어버린 해를 바라보았다. 사냥을 하러 나간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엘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눈 때문에 지체하는 걸까. 쯧 하고 혀를 찬 그는 옆에서 시간을 재며 즐거워하고 있는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재미 들려버린 것 같군. 인간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냐?” “응? 아아~ 반응이 귀엽잖아. 저런 인간이라면 하나쯤은 키워도 괜찮을 것 같은데.” “…남의 계약자를 멋대로 애완동물 취급하지 마라.” “이런 실례. 그냥 내 방식의 칭찬이었어.” “흥!” 겉으론 생글거리는 얼굴이었지만 트로웰은 속으로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지금은 저리 얌전해 보여도 그의 본 성격을 아는 이들은 감히 엘퀴네스에게 시비를 걸 생각을 하지 못했다. 단순히 괴팍하다는 것을 넘어서 더럽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성질머리를 누가 감당하겠는가. 얼마 전엔 자시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 하나로 불의 정령왕인 이프리트의 영역을 싸그리 날려버린 적도 있으니 말 다한 셈이다. 그 때문에 이번 중간계의 겨울이 예전보다 빨리 찾아왔다는 것은 이미 정령계에선 공공연하게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래서 현재 이프리트는 불의 영역을 복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하지만 그런 엘퀴네스도 자신에게 ‘속한’ 존재에게는 어지간하면 화를 내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 있는 물의 정령들과 계약자가 바로 그에 해당했다. 유달리 엘에게 관대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이리라. ‘그래도 설마 인간 계약자까지 너그럽게 봐줄 줄은 몰랐지만 말이지.’ 자신이 인간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 증오라면, 엘퀴네스는 거의 혐오에 가까웠다. 공공연히 벌레 취급하며 대놓고 무시할 정도이니 말이다. 하긴, 자연을 오염시키는 가장 대표적인 종족을 그 어느 정령왕이 좋게 봐주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엘퀴네스가 인간인 엘에게 너그러운 것은 상당히 의외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트로웰은 그 이유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트로웰을 좋아해. 너는 나의 가족이야. 네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 낯선 장소에서도 행복할 수 있었어. 이곳에서 나한테 친절하게 대해준 것도 네가 처음,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도 네가 처음. 굳이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도… 네가 처음이야.> “가족이라…….”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를 마주 대하기가 곤란하다고 느낀 것은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앞에선 내색하지 않았지만 당시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트로웰은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빤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흔들린 것은,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일까. 적어도 이제까지 누구도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말해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더욱 그 말이 특별하게 들렸던 걸지도 모른다. 엘퀴네스 역시 이와 크게 다른 심정은 아닐 것이다. 일단 종족을 불문하고 그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서는 유일한 존재가 아니었던가! ‘으음, 앞으로도 이런 식이라면 조금 위험한걸. 결정을 번복하는 건 꼴사납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부터가 이미 번복할 의사가 있다는 증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 요 근래 더욱 심하게 괴롭히고 있지만, 이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엘에겐 정령왕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왠지 즐거워지는 기분에 트로웰은 혼자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정말 늦는 걸?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으니 눈 속에서 조난을 당하진 않을 텐데. 설마 멧돼지와 싸우다 기절한 건 아니겠지?” “정말 여러 가지로 귀찮게 하는군. 할 수 없지.” 트로웰의 말에 나직이 중얼거린 엘퀴네스는 곧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주위의 기운을 음미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트로웰은 단번에 그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정령왕의 시야를 열어 주위에 퍼져 있는 모든 나이아스의 기억을 더듬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고 있으니 그가 엘의 위치를 발견하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다. 예상대로 엘퀴네스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입을 열었다. “…찾았다.” 하지만 쉽게 발견한 것치곤 그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혹시 엘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트로웰의 예감은 적중했다. “노예 사냥꾼에게 걸렸군. 이렇게 부주의해서야…….” “뭐? 노예 사냥꾼?” “그래. 아주 깔끔하게 납치됐다. 대체 그동안 체력훈련은 왜 했으며, 배운 검술은 다 어디로 흘려버린 건지 모르겠군.”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만 했다. 아마도 하루 종일 사냥감을 찾아다니다 지쳐서 쉬고 있을 때쯤 기습을 당했겠지. 금일의 사태는 트로웰에게도 약간(?)의 책임이 있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해준 적은 없지만, 사실 그가 엘에게 준 장신구에는 착용자의 체력이 떨어지면 무게가 더욱 강해지는 마법이 옵션으로 걸려 있었던 것이다. 아마 기습을 눈치 채고 대항했더라도, 팔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을 테니 꼼짝없이 당했을 것이다. 체력이 떨어지기 전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려던 것이 도리어 발목을 잡을 줄이야……. 트로웰은 멋쩍은 얼굴로 입맛을 다시며, 옆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엘퀴네스를 향해 물었다. “지금부턴 어쩔 거지? 구하러 갈 건가?” “글쎄… 네 생각은 어때? 녀석이 자력으로 탈출이 가능하리라고 보나?” “아마도 그럴걸.” “‘아마도’라니? 너치곤 꽤 애매모호한 답변이군.” “어쩔 수 없어. 전부 엘이 마음먹기에 따라 다르거든. 엘퀴네스, 너도 봤겠지만 녀석은 방어는 잘해도 공격할 때 머뭇거리는 습관이 있어. 다수가 몰리면 힘들지도 몰라.” “호오, 그건 그렇군. 그래서 구하러 가자는 거냐?” 그 말에 트로웰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재밌으니까 그냥 내버려 둬보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어떻게 하면 더 괴롭힐 수 있을까 궁리하는 트로웰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가 없었다. 엘뤼엔 역시 귀찮은 일을 사서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자연히 두 정령왕은 엘이 알아서 살아나오기를 기도해 주는 걸로 결론지었다(정말 기도할지는 의문이지만.). “뭐, 이것도 다 훈련의 연장이지. 혹시 또 모르잖아? 의외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의외의 모습?” 거기서 달라질 게 뭐가 있다고? 미묘하게 찌푸려진 엘퀴네스의 표정은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힘든 수업을 꽤 잘 버티고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동안 그가 보아온 엘은 여전히 트로웰에게 구박을 받는 부실한 제자였던 것이다. 그런 엘에게서 달라진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건, 4살짜리 꼬맹이에게 어른 흉내를 내라는 것만큼이나 억지로 느껴졌다. 하지만 그에 관한 트로웰의 생각은 달랐다. “대련과 실전은 다르잖아? 인간은 목숨이 위태하다고 느끼면 좀 더 적극적이 되는 경향이 있거든.” “…네 훈련도 충분히 실전이나 마찬가지였다만? 그동안 날 믿고 마음대로 칼을 휘두른 거 아니었나?” “어라, 눈치챘어?” “항상 대놓고 급소만 노리는 주제에 잘도 능청스럽게 말하는군.” 엘퀴네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너무 빤한 급소(이를 테면 심장 같은곳)만 노렸기에, 엘 또한 그가 사정 봐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즉, 단순한 대련이라서 기강이 해이해지는 일은 처음부터 있을 수 없다는 소리다. 그런 주제에 대련과 실전이 다르다고? 황당한 엘퀴네스의 눈초리에 트로웰은 스스로도 찔렸는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다. “에이~ 그래도 난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실제로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상황과는 엄연히 다르지.” “글쎄. 과연 녀석도 그렇게 생각할 지 의문이군.” “흠흠! 아, 그래! 어쩌면 내가 어려워서 반격을 제대로 못했던 걸 수도 있잖아? 인간들은 만만하니까 좀 더 마음껏 실력발휘를 할 수 있을지도 몰라.” “… 녀석이 어려워한다고? 누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이번에는 트로웰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니 엘은 믿는 구석도 없으면서 당당하게 할 말 다하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오히려 노예시장에서 대놓고 대들었다가 상인들에게 몰매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과연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까? 그제야 슬그머니 솟아오르는 불안감에 두 정령왕은 복잡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깨어난 것은 덜컹거리는 바닥의 진동 때문이었다. 왠지 묘하게 몸이 불편해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자, 온통 컴컴하기만 한 주위가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이곳이 생판 처음 보는 낯선 장소라는 것을 깨닫고, 문득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웬 바늘이 날아왔었는데… 그러고 나서 잠들었나? 헉! 설마 나… 지금 납치된 겨?’ 그러고 보니 내 손과 발엔 짐승을 묶을 때나 쓰는 수갑에 사슬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몸이 불편한 것은 이것 때문이었군. 그나마 움직임에 크게 제약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잠시 황당한 표정으로 수갑을 노려본 나는 차분히 현 상황에 대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냥을 중단하고 쉬고 있는 나를 누군가가 발견했다. 그런데 다짜고짜 마취바늘을 날려서 잡았다? 그게 말이 돼? 내가 무슨 몬스터도 아니고 말이야. 이렇게 온몸을 죄다 제압해놓다니…….’ 하지만 거추장스러운 것만 빼면 묶여 있는 것치고는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몸을 살펴본 나는, 훈련 때문에 착용하고 있던 팔찌와 발찌들이 어느새 사라져 있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나를 옮기는 과정에 무거워서 빼낸 모양이다. 덜컹덜컹. 끊임없이 흔들리는 바닥은, 이것이 고정된 천막이 아닌 움직이는 마차 안 임을 뜻했다. 검은 천으로 잔뜩 가려놓은 탓에 지금이 아침인지 저녁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지만, 적어도 한밤중에 이동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갑자기 확 걷혀지는 천 밖에서 눈부신 빛이 들어오는 바람에 얼굴을 잔뜩 찡그려야 했다. “윽……!” “어? 깼네? 어이, 이봐들! 드디어 일어났어. 저 눈동자 색 좀 봐!” “헤에~ 선명한 초록색이군. 저렇게 깨끗한 색은 처음 봐.” 시끄럽게 소리친 사람들은 어느새 마차를 멈추고 내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간신히 빛에 적응한 나는 똑바로 눈을 뜬 다음,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구경하고 있는 3명의 남자들을 마주보았다. 어째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더욱 감탄하는 듯한?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데? 너무 놀란 거 아니야?” “히야! 정말 보면 볼수록 거물이군. 이건 따로 경매에 넘길 필요도 없겠어.”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광경이 눈앞에 선하군. 킥킥! 어이, 꼬마! 뭐라고 말이라도 해봐라. 목소리 좀 들어보자.” “…….” 멀쩡한 인간을 납치한 주제에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게다가 떠드는 대화를 들어보니 이건 사람을 마치 물건으로 취급하는 것 같은 말투다. 기분이 무척 나빠졌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 알아야 했기에 나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누구세요?” 그러나 내 질문은 무참히 씹히고 말았으니……. “오오! 말했다!!” “목소리도 최고야!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것 같군!” “돈 많은 변태 귀족에게 넘기기는 너무 아까운데. 정말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뭣이라? 돈 많은 변태한테 뭘 넘겨? 왠지 오가는 대화가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간다고 느낀 나는 다시 한 번 참을성 있게 질문했다. “아저씨들은 누구세요? 여긴 어디죠?” “흐흐흐. 궁금하냐?” 끄덕끄덕. 내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의미심장한 미소를 건넸다. 그러더니 별안간 직구를 날려 내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노예상인들이다. 그리고 지금 레파르라는 도시로 이동 중이지.” “…네?” 뭔 상인이라고? 설마 잘못 들었나 싶어 멍하게 되묻자 그들은 유쾌해서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실실거리며 대답했다. “큭큭! 상황파악이 아직 안 되나 본데, 넌 지금 우리에게 잡힌 거란다. 앞으로 있을 노예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팔릴 거야.”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우린 이미 네가 정령사라는 것도 알고 있거든. 지금 팔에 채워진 수갑은 보기에도 평범해 보여도 사실은 마나를 차단하는 마법 아이템이지.” “아무쪼록 우리에게 잡혀줘서 고맙다. 네 덕분에 이번 노예시장에선 우리가 가장 주목을 끌 것 같아.” “자, 잠깐만요! 누구 맘대로 날 팔아요?” “그야 우리 마음대로지.” 남자들은 마치 짜고 있던 것처럼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이 사람들이 지금 나랑 장난하나? 그냥 납치해다 팔면 그만이라니! 이놈의 나라는 인권이라는 것도 없는 거야? 잠깐 자고 일어난 것뿐인데, 펼쳐지는 세계가 완전히 달라지다니.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이보다 황당하진 않을 것이다. ‘잠깐! 아까 수갑이 마나를 차단한다고 했었지?’ 혹시나 싶은 마음에 나는 그 자리에서 즉시 나이아스의 소환을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몸 전체를 감싼 묘한 기류에 막혀 번번이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급 정령이 무리라니, 중급과 상급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정령술을 못 쓰게 된 건가? 내 표정에 서린 당혹감을 읽었는지 자신을 노예상인이라 밝힌 남자들은 음흉하게 웃으며 눈빛을 번뜩였다. 이것으로 내 무력 수단을 완전히 차단했다고 믿는 듯 얼굴 가득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그러게 소용없다니까 그러네. 그 수갑은 유니콘들도 가볍게 제압하는 거라고. 도망칠 생각은 그만두는 것이 정신건강에도 좋을 거다.” “어째서 이런 짓을…….” “그야 돈을 벌 수 있으니까. 그냥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라. 그래도 넌 다른 녀석들에 비해선 나은 편일 거야. 귀족 집에 팔려 가게 될 테니까.” 그러는 자기들이 한 번 팔려가 보라지. 저런 말이 입에서 나오나!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문 나는 지금 내가 탄 마차 외에도 같은 종류의 마차들이 여러 개 더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안에는 나처럼 손과 발에 수갑을 착용한 엘프들과 어린 아이들이 주욱 앉아, 또 다른 노예상인의 감시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절망과 탄식으로 지쳐있는 얼굴들을 보니 몸속에 흐르는 피가 싸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다. 내 시선이 그들에게 향한 것을 본 노예 상인들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굉장하지? 전부 이번 사냥에서 건진 물건들이다. 이번 노예시장은 볼만 할 거야. 좋은 물건이 꽤 많이 들어왔거든. 흐흐!” “…인간 말종이로군. 당신들 전부 쓰레기인 거 알아?” “킥! 이제야 성질이 나오는 건가? 뭐,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봐주마. 어차피 성격 나쁜 귀족님들 중에선 고분고분한 것보단 앙탈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거든.” “그딴 건 알고 싶지 않아. 내가 기절하고 나서 얼마나 지났는지나 말해.” “핫핫! 배짱 좋은 녀석인 걸? 행여 동료들이 찾으러오길 바라는 거라면 아서라. 이제 만 하루 되었을 뿐이지만, 그 사이 텔레포트 게이트를 두 개나 거쳤으니까. 정상적인 걸음으로 쫓아오려면 적어도 3개월은 더 걸릴 거다.” 젠장! 하필이면 수도를 코앞에 두고서 이런 일이 닥칠 건 뭐란 말인가. 안 그래도 이 시대에 무지한 내가 이곳이 어느 지방의 어느 구석인지 알아낼 수 잇을 리 없었다. 행여 트로웰이나 엘뤼엔이 도와주러 올 거란 기대는 깨끗이 접은 지 오래다. 알아서 살아나오라고 기도나 해주면 다행이게(충분히 그러고도 남는 정령왕들이다.)? 짧게 속으로 욕설을 뱉은 나는 내 양 팔목에 단단히 채워져 있는 수갑을 노려보았다. 적어도 중간에 이어진 사슬만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나치게 가벼운 탓일까?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강하게 힘을 줘본 나는, 수갑과 연결된 사슬고리에 쩍! 하고 금이 가는 것을 보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과연 트로웰의 훈련은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괴력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정작 배우고자 한 검술엔 진전이 없는데 힘만 무식하게 강해지다니. 이것을 과연 기뻐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순간엔 도움이 되고 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기로 할까. 노예상인들은 내가 잠잠히 입을 다물자 일행과 멀리 떨어진 것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곧 위로인지 놀리는 것인지 모를 말을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너무 낙심해 할 필요 없어. 말했다시피 너는 귀족 집으로 가게 될 테니까 말이야. 평민으로 그럭저럭 사는 것보다야 높으신 분들에게 귀여움 듬뿍 받는 게 더 낫지, 뭘 그래?” “맞아. 앞으로 평생 부족할 것 없이 지내게 될 거라고. 귀부인들의 달콤한 속살을 평생 음미하면서 말이야.” “크하하! 그거 멋진데!” 글쎄, 너나 그러세요. 난 관심 없다니까? 부귀영화도 그것을 바라는 사람에게나 멋있어 보이는 법이다. 자신의 눈에 멋지게 보인다고, 남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모르겠다. 정령왕들에게 아무리 예쁜 보석을 가져다 줘봐라. 에바스 에덴에 널려 있는 풀 쪼가리 취급밖에 더 받겠는가? 하긴, 그런 것을 알 리 없으니 이렇게 뻔뻔하게 납치해서 사람을 사고파는 것일 테지만. ‘어디 보자, 나 혼자 도망치면 재미없으니까 다른 녀석들도 다 풀어줘야지. 뭐? 노예시장에서 주목받을 거라고? 그래~ 어디 노예를 다 놓친 상인들로 주목 좀 받아보라지.’ 덤으로 전치 10주에 해당하는 부상을 입고 나면 정신을 좀 차릴 것이다. 그럼에도 갱생의 여지가 없을 것 같으면 완전히 생을 끝내줄 생각이었다. 남의 목숨을 팔아먹고 희희낙락하고 있으니 의당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자아~ 그럼 어떻게 혼을 내줄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는 척 시선을 돌리며 근처에 적당한 무기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사슬을 풀어도 수갑 자체를 어찌하지 못하면 정령을 소환할 수 없으니, 그동안 배운 검술이라도 써먹을 생각이었다. 마침 바로 앞에서 떠들고 있는 남자의 허리춤에 적당한 검이 매달린 것을 확인한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몸을 날려 그것을 뺏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노예상인의 말에 나는 이 계획을 잠시 보류하기로 마음먹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보단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으니 배가 고플 테지? 얌전히 군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게 해주마. 지금 요리사 녀석이 솜씨를 발휘하고 있으니 말이야.” “…….” 공교롭게도 마차가 멈춘 이유는 지금이 식사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노예상인의 말마따나 나는 현재 굉장히 배가 고픈 상태였다. 납치당하기 전에도 거의 하루 종이 굶었음은 물론, 그 뒤로도 꼬박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요리는 커녕 육포 하나에 감지덕지하던 내게 ‘맛있는 음식’이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유혹과도 같았다. ‘으음… 뭐, 어차피 몽땅 뒤엎으려 해도 힘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나중에 하지 뭐. 아하하…….’ 내가 이렇게 먹을 것에 약해질 줄이야. 생각할수록 한심했지만 나는 애써 ‘어쩔 수 없다’ 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이런 내 심정도 모르고 노예상인들은 그저 나를 얌전하게 만들 건수를 찾았다는 것에 희희덕거리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노려본 나는, 문득 나 외의 다른 존재들을 떠올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왜 나 혼자만 이쪽에 격리된 거지?” “그야 네가 상등품이라서 그렇지. 잡은 노예들은 따로 등급을 구분해서 마차에 싣거든.” “헤에, 그럼 상등품이 나 하나라는 거야? 당신들도 꽤나 능력이 없구나…….” “무, 무슨소리야! 상등품 중에서도 종족을 구분해서 따로 실는다고. 다른 마차에 또 다른 상등품이 있어.” “네네, 그렇겠죠.” 내 말투에 서린 비꼬는 기색을 느꼈는지 노예상인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에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무시당하는 것에 꽤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쳇! 이건 비밀이었는데, 할 수 없지. 사실 말이야… 저기 따로 떨어진 마차 보이지? 그 안에 들어 있는 게 뭔지 알아?” “뭔데?” 상인이 가리킨 것은 쭈욱 늘어진 마차의 행렬에 유일하게 속하지 않은 검은색 마차였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다른 마차들과 달리, 그것은 유일하게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마치 밀폐된 느낌을 주었다. 내가 그것을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들은 곧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엄청난 사실을 밝히고 말았다. “킥킥! 놀라지 말라고. 바로 유니콘이란 말씀! 그것도 세 마리나 된다고! 어느 상단도 우리만큼 잡지 못했을 걸?” “…에?” 유니콘이라니! 그러고 보니 4천 년 전의 아크아돈은 아직 유니콘이 신계로 떠나지 않았을 시기였다. 하지만 드래곤 만큼이나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종족이, 이런 허접한 노예상인들에게 잡혔다는 사실을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흐흐! 믿지 못하는 얼굴인데? 하긴, 당연하지! 드래곤 다음으로 강한 종족이라고 알려진 녀석들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정말이라고! 뭣하면 보여줄까?”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는지는 잘 모른다. 너무 놀라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으니까. 다만 상인들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나를 데리고 그쪽 마차로 가는 것으로 보아, 무의식적으로 긍정 표시를 했던 모양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여기서 잠시 떠오른 생각.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난 감시해야 할 노예일 텐데, 이렇게 쉽게 자리에서 이탈하게 해도 되는 거야? 별로 대단하지도 않은 수갑의 위력을 너무 맹신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면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걸지도. 철컥철컥. 걸어갈 때마다 바닥에 끌리는 사슬 소리가 꽤나 거슬렸지만(내가 죄인이냐!)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차의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혹시나 저 안에 시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서. 끼이익! 문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갇혀 있던 마차보다 훨씬 어두운 내부였다. 본래는 창문이었을 부근에는 간신히 공기만 통할 정도의 작은 구멍이 두 개 뚫려 있는 것이 다였고, 나머지는 온통 밀폐된 공간이었던 것이다.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는 건 알겠지만,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쯧쯧 혀를 차며 안을 들여다본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존재들을 본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들이… 유니콘?” “킥킥! 왜? 안 믿겨지냐? 하긴, 지금은 본체의 모습이 아니니 알아보기 어렵겠군.”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저렇게 해놓은 거지? 당신들 미쳤어?”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엘프였지만, 폴리모프가 가능한 종족이니 그런 것으로 의심할 생각은 없었다. 문제는 그들의 온몸이 밧줄로 꽁꽁 묶여진 것은 물론, 눈과 입까지 전부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각 손목과 발목에는 두꺼운 수갑과 사슬이 늘어져 있었다. 내가 화난 얼굴로 묻자 상인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모처럼 잡은 건데 도망치면 곤란하잖아? 유니콘들은 마법뿐만 아니라 검에도 일가견이 있는 녀석들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제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고.” “눈과 입은 왜 가린 건데?” “그야 위치를 알리지 않기 위해서지. 입을 가린 건 자살을 막기 이해서고.” “하지만 이런 상태에서는 식사도 할 수 없잖아!” “흐흐! 괜찮아, 괜찮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종족이거든.” 괜찮기는 개뿔이! 유니콘들은 사람이 왔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데도 의사표현을 하지 못해 연신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다행히 시벨리우스로 짐작이 가는 자는 없었지만, 이래서야 밥 먹기 전까진 얌전하게 있자는 결심이 왕창 무너져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잠시 본능과 이성이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지만,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쳇! 할 수 없지.” 맛있는 밥들아, 안녕! 너희들과 나는 아무래도 이 세상에선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대체 왜 나는 걸리는 일마다 다 이런 것들뿐인 거야! 완전히 결심을 굳힌 나는 노예상인들이 방심하는 틈을 타 얼른 한 녀석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앗았다. 뒤늦게야 내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놈들이 경악에 찬 시선을 보냈지만, 이미 그때는 상황이 끝난 상태였다. “엇? 너 지금 무슨……!!” “뭐하는 거야! 다들 잡아!!” 그러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사방에서 무장한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방심하고 있던 것은 아닌 모양이지? 언뜻 봐도 20명은 가볍게 넘어가는 숫자에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배고파서 기운도 없는데, 이들을 다 물리칠 수 있을까. 내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본 상인들은 입가에 야비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쩐지 너무 고분고분하다 했더니, 이런 꿍꿍이가 있었군.” “큭큭큭! 지금이라도 검을 버리면 험하게 대하지 않으마.” “다치는 건 싫겠지? 자~ 어서 검을 버려라. 착하지?” 저런 식으로 말을 해도 어차피 녀석들은 나를 다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물건에 흠집이 나는 것이 싫은 것처럼, 상처가 생긴다는 것은 곧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일일 테니까. 그 증거로 몰려 든 사람들 역시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칼로 위협만 하고 있지 않은가. “어허! 어서 검을 버리라니까! 정말 혼나고 싶은 거냐?” “어차피 그렇게 사슬이 달린 채로는 싸우지도 못할 게 빤하잖아. 고집 부리지 말고 검을 놓은 것이 좋을 텐데?” 하지만 그 말을 한 남자는 곧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질 수 밖에 없었다. 피식 웃은 내가 보란 듯이 두 팔에 이어진 사슬을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헉!” “어떻게 저럴 수가!” 챙! 후두둑! 마지막으로 발에 채워진 사슬까지 들고 있던 검으로 간단하게 끊어낸 나는, 새파랗게 질린 사람들을 둘러보며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사슬? 그게 어디 있는데?” “이, 이익! 안 되겠다! 일단 잡아! 다쳐도 좋으니까 잡으라고!” “놓쳐선 안 돼! 무조건 잡아!!” “와아아아!” 주위는 때 아닌 싸움으로 인해 온통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도망치는 노예가 나올까 걱정했는지, 서둘러 각 마차의 문까지 꼭꼭 걸어 잠그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나대로 몰려드는 을 막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말이다. 정작 머릿속에서는 전혀 엉뚱한 걸로 고민하고 있었지만. ‘죽일?? 그냥 가볍게 부상만 입힐까?’ 잠깐의 생각 끝에 나는 모두 기절시키기로 결정하고, 덤벼드는 녀석들의 목과 복부를 칼등으로 내리치기 시작했다. 솔직히 상대가 많다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질 않았다. 덤벼드는 동작들이 트로웰과 비교하면 거의 굼벵이에 가까울 정도로 느렸기 때문이다. 퍽! 퍼억! 콰악! 경쾌한 소리가 울릴수록 내 행동은 점점 더 빨라졌고, 곧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수많은 숫자들도 서서히 줄어들었다. ‘뭐야? 이렇게 느려가지고 누굴 잡겠다고! 이거 제대로 검술 훈련은 한 사람들이야?’ 내가 만만히 보인다고 허접한 녀석들만 부른 건가? 왠지 더 자존심이 상한 탓에 나는 힘 조절이고 뭐고 아무것도하지 않았따. 가끔 맞부딪친 검이 부러질 때면 상대편 검의 재질이 약한 것이라 위안하면서. 갈수록 내 쪽의 상황이 우세해지자, 덤벼드는 움직임이 한풀 꺾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지켜보고 있던 상인들의 닦달 역시 커지기 시작했다. “다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잡아! 놓치면 이번 의뢰비는 없을 줄 알앗!!” “제길! 무슨 꼬마가 검을 저렇게…….” “한꺼번에 달려들란 말이다! 한꺼번에!” 의뢰비 운운하는 것을 보면 지금 나와 대치하는 자들은 용병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의 협박도 그리 큰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한꺼번에 덤벼들면 뭐하겠는가! 여전히 굼벵이처럼 느려터진 움직임은 트로웰이 혼자서 가볍게 휘두르는 칼보다 못했다. 20명을 넘었던 숫자가 어느새 5명으로 줄어들자 상인들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조급해졌다. “쿠마! 뭘 하는 거야! 어서 저번처럼 수면침을 쏴!” “아, 안 돼! 너무 빨라서 조준을 할 수가 없다고!” “에잇, 빌어먹을!” 내 실력이 자신들보다 우위란 것이 드러나자, 남은 용병들은 섣불리 덤비지 못하고 슬금슬금 주위만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한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납치된 사람을 태운 마차의 숫자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으음, 유니콘을 실은 마차를 빼고도 다섯 개가 넘는 건가? 휘유~ 생각보다 많은데?’ 그러자 약삭빠른 상인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한 듯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모습에 내가 ‘아차’싶었을 때, 그들은 이미 마차 하나로 다가가 누군가를 끌고 나오는 상태였다. “꺄아아악!” “움직이면 이년을 죽여버리겠다!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검을 버려!” 아니나 다를까. 놈들은 치사하게 인질작전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도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인지 나보다도 훨씬 어려 보이는 작은 소녀를 상대로! 지금 이 사람들이 제정신인가?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차피 그 애도 당신들이 납치한 아이일 것 아니야! 손해 봐도 좋다는 거야?” “큭큭! 그저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흔한 평민 아이 중 하나일 뿐이야. 상등품인 너와는 가치가 다르지. 이런 건 팔아봤자 별로 수입도 없다고.” “뭐? 이런 것들이…….” “흐흐! 무슨 말을 해도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상인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 움직이는 존재라서 말이야. 널 잡을 수 있다면 이런 꼬마 한둘의 목숨쯤이야 우습지. 자~ 어떻게 할래? 네 선택에 이년의 목숨이 달려있다!” 단도를 바싹 들이댄 목에 찔끔 피가 흘러나오자, 상인에게 잡힌 소녀의 안색이 점점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놈들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쓸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배고파서 힘까지 빠져나가는 판국에 남의 사정까지 봐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는 이유는 상인들이 약 올라 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정의감을 가지고 하는 일도 아닌데, 굳이 전부 살려야 할 의무가 있을까? 내가 여기서 상인들을 때려 눕히면 틀림없이 저 소녀는 죽을 테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구할 틈을 벌 수도 있는 것이다. ‘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군.’ 만약 잡혀 있던 아이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살려달라는 말을 했더라도 나는 가뿐히 무시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흐… 흑! 저,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도망가세요!” “……!!” “저, 저 알아요! 이 사람들… 저 안 죽여요! 저 같은 꼬맹이도 귀족 집에서 비싼 값에 산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얼른 도망가세요!” “아니, 이년이!” 철썩! “꺄악!” 우람한 손이 사정없이 폭력을 가하자, 소녀의 피부는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순간 내 머릿속에 여러가지 잡다한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목숨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날 향해 ‘도망가라’는 말을 하는 아이를 더 이상 못 본 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낭패감을 맛볼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은 얼마든지 계획을 변경한다. 지금이야 정말 죽일 생각이 없어도 내가 끝까지 응하지 않으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인질로 잡힌 소녀와 내 사이의 거리는 제법 떨어져 있었고, 여기서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해치기 전에 구할 순 없었다. 이럴 때 정령술을 쓸 수 있다면 훨씬 수월할 테지만, 마나를 차단하는 수갑인지 뭔지가 있으니 별 수 없지. “쳇!” 챙강! 찌푸린 표정으로 혀를 찬 나는 결국 들고 있던 검을 발치에 던졌다. 그와 함께 환하게 변하는 상인들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또다시 목 언저리에 따끔한 감촉을 느끼고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참으로 징한 놈들이었다. 엘이 노예상인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던 그 시각, 트로웰과 엘퀴네스 또한 멀리 떨어져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알아서 탈출하길 기다리긴 했지만 설마 정말로 난동(?)을 피울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던 두 정령왕은, 심지어 엘이 망설임 없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저게 누구지?” “그러게. 나와 대련할 때랑은 전혀 다른 걸. 아주 서슴없이 내리치는데?” “네 녀석의 훈련이 헛되진 않았던 모양이군.” “그러게. 인간들을 상대로 하면 다를지도 모른다고 했잖아. 후후!”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트로웰 역시 정말로 자신의 생각이 맞아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저 기절시키고 있는 정도였지만, 타격을 가할 때 아무런 머뭇거림이 없는 것을 보면 공격이란 행위에 별로 자책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자신과의 대련 때는 그렇게 망설인 건지,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역시 내가 어려웠던 걸까? 의외로 서열을 따지는 걸지도.” “어쩌면 친분이 있는 상대와는 싸울 수 없는 성격인 걸지도 모르지.” “흐음, 배신당하면 깨끗하게 망할 타입이군. 뭐, 그게 더 녀석 답기는 하지만.” “답다고? 꽤나 마음에 든 것 같은 말투로군.” 그러나 평소였다면 당연히 반박했을 그 말에 트로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새 정말 마음에 들기라도 한 건가? 엘퀴네스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에게서 신경을 끊었다. 원래 그는 타인의 감정에 참견하는 성격이 아니었고, 또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트로웰 또한 묵묵히 엘이 싸우는 장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달려드는 용병들은 모두 한두 방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는데, 엘이 내내 지루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상대방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느리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수갑에 연결된 사슬을 단순히 힘만으로 끊어놓고도. 자신이 강해진 것이라고는 자각하지 못하는 걸까? 잠시 흐뭇한 시선을 그 모습을 바라보던 트로웰은 엘의 손목에 착용된 수갑을 발견하고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저 수갑은 마나를 차단하는 용도지? 분명 시초는 죄를 저지른 마법사나 검사들을 제압하려는 목적이었는데 말이야. 지금 보니 참 다양한 곳에서 활용되는걸.” “인간들은 응용력 하나만큼은 칭찬받는 종족이니까. 뭐, 아무튼 저런 식이라면 더 두고 볼 것도 없이 탈출에 성공하겠군.” “그렇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쓸데없는 생각?” 의아하게 물은 엘퀴네스는 곧 단번에 그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 황당하다면 황당하고 어이없다면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또 뭐하는 걸까?” “보시다시피. 인질로 협박하는 것 같은데?” 그 사이, 노예상인들은 엘을 잡기 위해 다소의 희생을 감수한 듯했다. 근처에 있는 아이를 잡아다 눈앞에 검을 들이대며 위협을 가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의 마음 약한 인간이라면 자신 때문에 희생될 아이를 위해서라도 전투를 포기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엘은 의외로 표정에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검을 버리고 투항할 거라고 생각했던 두 정령왕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할 테면 해보라는 건가? 네 말마따나 정말 의외의 모습만 보는군.” “그, 그러게.”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인질로 잡힌 소녀의 입에서 ‘도망가라’는 말이 나온 순간, 오히려 엘은 얼굴을 찌푸린 채 착잡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아무 상관없는 타인의 일은 무시할 수 있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결국 엘은 끝까지 모진 마음을 품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여기까지인가…….” 검을 버리는 순간, 주위를 둘러싼 상인 중 한 명이 날린 바늘에 맞고 쓰러지는 그를 보며 트로웰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의 기회를 놓쳤으니 다음에 탈출할 때는 지금보다 더 힘들어 질 것이다. 아니, 다음 기회라는 것이 오기는 할까? 의외의 실력이 드러났으니, 어쩌면 저 마차안에 갇힌 유니콘들보다 더한 억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빠직! ‘…응?’ 순간, 무심코 쥐고 있던 나뭇가지가 부러진 것을 본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따. 별로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게 부러진 걸까? 그 해답은 옆에 있던 엘퀴네스의 입을 통해 나왔다. “네가 화내는 모습을 보는 것도 꽤 오랫만이군.” “뭐?” “의식하지 못하는 건가? 얼굴이 찌푸려져 있다. 당장이라도 저 인간들에게 달려가 죽이고 싶다는 표정이야. 네가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은 미네르바 때 이후로 두 번째군.” “…….” 그제야 자신이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트로웰은 피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저런 치사한 수법으로 그가 잡혀버린 것에 대해.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도.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마음을 쓰는 존재가 돼버린 걸까. 인간을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하다. 지금이라도 당장 멸족시키라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에 엘까지 포함이 된다고 하면 많이 고민하고 머뭇거리게 될 것 같았다. “별일이군. 네가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일도 있다니.” “아아 속단은 일러, 엘퀴네스. 아직은 아니야. 현재까진 지켜보는 단계니까.” 글쎄, 거기서 더 지켜봤자 일 것 같다만. 엘퀴네스가 보기에 트로웰은 이미 상당수 엘이란 인간의 매력에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보통 마음에 들지 않는 자에게 선뜻 검술을 가르쳐주는 녀석은 없지 않은가. 물론 그 표현이 다소 삐뚤어진 형태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쩔 거냐? 저대로 보아하니, 앞으로 더 골치 아파질 것 같은데.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빼내올까?” “안돼!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지. 난 저렇게 약하게 가르치치 않았다고. 배운 것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책임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것 보라니까.” “응? 뭐가?”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걱정돼 죽겠다는 얼굴을 하는 주제에 정작 해결은 알아서 하라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역시나 삐뚤어진 애정표현이다. 혀를 쯧쯧 찬 엘퀴네스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노예상인들에 의해 어디론가 실려가는 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자신의 얼굴 역시 걱정으로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눈과 입이 단단한 천으로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목과 발목을 결박하는 수갑 역시 더 무겁고 단단한 걸로 바뀌어져 있었고, 움직일 때마다 철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온몸이 쇠사슬로 칭칭 감겨 있는 것 같았다. 답답해진 내가 연신 몸을 꿈틀거리자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으으으…….” “으음, 으으음!!”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한 그 소리에 나는 이곳이 유니콘을 가두어둔 마차 안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챘다. 종족별로 구분이 어쩌고 하다니, 결국 탈출 가능성이 높은 인물들을 한자리에 모아둔 셈이다. 한바탕 소란을 피웠으니 얌전히 놔둘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황당한 심정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가 보면 감옥으로 이송 중인 죄인으로 착각해도 딱 할 말 없는 모습이 아닌가. 쓰러진 뒤로 며칠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배가 너무 고파서 짜증이 났다. 유니콘들이야 안 먹어도 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이곳에 쳐박아둔다는 건 나까지 덩달아 굶긴다는 뜻이 아닌가. 놈들은 내가 인간이라는 기본적인 정보마저 잊어버린 듯 했다. 설마 이대로 아사(餓死)시킬 생각은 아니겠지? ‘흑! 누가 나 좀 살려줘…….’ 바로 그때, 나는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낯익은 목소리를 듣고 몸을 움찔했다. -쯧! 한심한 녀석. 스스로 탈출할 기회를 버렸으니 당연한 대가다. ‘어? 엘뤼엔?!!’ 머릿속을 파고드는 대화법은 이전에도 했던 것이라 크게 거부감은 없었다. 하지만 설마 정령왕인 그와도 교감이 가능할 줄이야. 왠지 믿을 수 없는 기분에 나는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정말 엘뤼엔이야? 지금 환청 듣고 있는 거 아니지? 엘뤼엔 맞아?’ 그러자 그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령왕은 계약한 존재와 정신교류가 가능하다. 나 맞으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헉! 계약자와의 정신교류가 가능하다니! 그러고 보니 언젠가 소멸하는 미네르바를 배웅하기 위해 정령계로 돌아갔을 때, 라피스가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던 것이 생각났다. 그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런 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당장 급한 문제가 눈앞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에엥! 엘뤼엔~!! 나 배고파~~’ -시끄럿! 그러게 그런 허접한 놈들에게는 왜 잡힌 거냐? 넌 바보냐! ‘쳇! 누가 잡히고 싶어서 잡혔나, 뭐. 내가 너무 잘나고 이뻐서 노예로 팔아야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막어~’ -… 사지를 결박당하고 눈과 입까지 막힌 주제에 잘도 떠드는군. ‘아하하! 농담이었어, 농담. 어? 근데 지금 내가 보여??’ -똑똑히 보인다. 그야말로 한심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는 모습이군. 설마 자연체의 모습으로 들어온 건가?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려던 나는 지금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걸 깨닫고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운 대로 일단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도록 할까.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설마 나 구해주러?’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결하라더군. 네 스승이란 녀석의 전언이다. ‘흑! 너무해…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혼자 해결해? 이젠 힘도 없어서 사슬을 끊지도 못하겠단 말이야.’ -그래서 날더러 어쩌란 거냐. 징징거리지 말고 똑바로 말해라. 그래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아주 외면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나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결박만이라도 풀어주면 안 될까? 이러고 있으니까 너무 답답해.’ -흐음, 좋아. 몸에 둘러진 사슬은 풀어주지. 하지만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결해라. 의외로 가볍게 수긍한 그는 곧바로 내 온몸을 꽁꽁 얽어매고 있던 사슬을 하나씩 끊어냈다. 덕분에 움직임이 한결 자유로워지자 나는 얼른 눈과 입을 막고 있던 재갈을 풀었다. ‘푸하! 죽는 줄 알았네! 드디어 살았다.’ 밀폐된 곳이라 여전히 어둡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답답함이 해소됐다는 것만으로 턱 막혀 있던 숨이 완전히 트이는 느낌이었다. 나의 홀가분한 표정을 본 엘뤼엔은 슬쩍 혀를 차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제 무덤 파는 버릇은 어딜 가도 똑같군. 다시 잡힐 거면 아예 도망칠 시도를 말든가. ‘응? 그건 어떻게 알았어? 설마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거야? -물론이다. 웬일로 당차게 싸우나 했더니, ‘역시나’더군. ‘아하하,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내 꾀에 내가 당한 격이랄까.’ -흥! 한심한 녀석. 네가 조금만 더 모질기만 했어도 해결되는 일이었다. ‘그, 그런가.’ 자연체인 엘뤼엔은 전체적으로 약간 투명한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신기한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자니, 다른 쪽에 묶여 있던 유니콘들이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으으음!” “으으으…….” ‘아, 맞다! 저 사람들(?)도 풀어줘야지! 깜빡 잊고 있었네.’ 하지만 역기서 엘뤼엔은 상큼하게 배신을 때리고 말았다. 적어도 탈출과정까지 같이 있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곧바로 작별 인사를 건넸던 것이다. -알아서 해라. 난 이만 갈 테니. ‘엥? 간다고?’ -이런 답답한 곳에서 더 있을 생각 없다.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잘 해결하고 와. ‘먼저 간다니… 앗! 엘뤼엔! 잠깐만!!’ 놀란 나는 재빨리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휘익 사라지고 말았다. 갑자기 나타났던 것만큼이나 재빠른 퇴장이라, 그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나는 한동안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긴, 처음부터 날더러 알아서 하라고 했으니, 굳이 옆에 있어줄 필요는 없나? 그나마도 아주 외면하지 않고 도와준 게 어디인가. 나는 잠자코 현재의 결과에 만족하기로 했다. ‘쩝! 할 수 없지. 그럼 우선 이 사람들이나 풀어주도록 할까.’ 속으로 작게 중얼거린 나는 묶여 있는 세 명의 유니콘 중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한 명에게 다가갔다. 그는 훤칠한 체격에 오렌지 빛 머리카락을 지닌, 전체적으로 화사한 느낌의 청년이었다. 본래의 나이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겉보기로는 대충 시벨리우스의 또래처럼 보였다. 안대와 재갈이 풀리는 순가, 비명을 지르려는 그의 행동에 나는 황급히 한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으아……!” “쉿!! 조용히 해요. 들키고 싶어요?” “……!!” 놀라서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는 이런 컬러플한 세상에서도 그리 흔하게 보기 힘든 살구색이었다. 세상엔 별의별 색이 다 있구나 하며 감탄한 것도 잠시, 나는 그가 대충 진정이 된 것을 느끼고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치웠다. 물론 약간의 타박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다짜고짜 비명부터 질러요? 간 떨어질 뻔했네.” “…다, 당신은?” “보면 몰라요? 여기에 잡혀 들어온 사람이지. 할 말이 있어도 잠깐만 기다려요. 다른 쪽도 풀어줘야 하니까.” “…….” 왠지 얼떨떨해 보이는 남자의 표정을 무시하며 나는 곧 다음 사람들의 안대와 재갈도 풀어냈다. 그리하여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 있었으니! 잡힌 세 명 중의 하나가 여자였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꽤나 가녀린 분위기를 가진 소녀라, 체격을 가리기 위해 풍성한 차림을 했음에도 한눈에 여자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폭포수처럼 흘러내린 은빛의 머리카락에 자주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안대가 풀리자마자 겁에 질려 몸을 잔뜩 떨기 시작했다. 지금은 딱히 유해요소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저렇게 떠는 걸까. 혹시나 어디가 아픈 건가 싶어 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결코 흑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저기, 괜찮아요? 어디가 아픈 건…….” 도리도리.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모습이 마치 접근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뻘쭘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다음 순간, 굉장히 허스키하고 낮은 목소리가 으르렁거리듯 울려 퍼졌다. “웰디님에게서 떨어져라, 인간! 그분은 네놈 따위가 건드릴 수 있는 분이 아니다.” “……!” 그렇게 말한 자는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안대를 풀어줬던 남자였다. 밤하늘처럼 새까만 검은색 머리카락과 보라색 눈동자가 엘프보단 마족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는데, 지금 노려보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그저 괜찮냐고 물어본 것이 이런 말을 들을 정도로 잘못한 일이었던가(정말 흑심 없었다니까?)? ‘그나저나 웰디라고?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은데…….’ 인간이 된 이후로 기억력이 나빠진 것이 확실하다. 예전 같았으면 그저 흘려들은 말이라도 전부 떠올랐을 텐데, 이젠 좀처럼 머리를 짜내도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그 사이, 살구색 눈동자의 청년은 당황한 얼굴로 나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아렐. 우리를 도와준 사람이 아닙니까.” “난 인간을 믿지 않아. 애초에 우리가 왜 이런 처지에 이른 건지를 자각해라, 카리안. 지금까지 당한 치욕을 잊은 거냐?” “하지만 저 인간도 같은 처지였는걸요.” “흥! 같은 처지였던 인간이 어떻게 혼자서 사슬을 푼 거지?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보니 더욱 의심스럽군 그래.” “아, 아렐!!” 강압적인 말투를 보아, 아렐이라는 남자도 엘뤼엔 만만치 않은 성격인 듯 싶었다. 잠시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나는,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살구색 눈동자의 남자, 카리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이런 상황에선 예민해져 있는 게 당연하죠. 그런데 당신들이 정말 유니콘인가요?” “아아, 네. 맞습니다. 저희 셋 모두가 유니콘입니다.” “제가 보기엔 세 분이 전부 일행이신 것 같은데, 어쩌다가 저런 몹쓸 놈들한테 잡히신 거예요?” “그게… 설명하자면 조금 깁니다. 저어, 그 전에 이 밧줄을 푸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참, 내 정신 좀 봐. 잠시만 기다려요. 풀어줄게요.” 그러고 보니 당장 안대와 재갈만 풀 생각에, 밧줄에 대해서는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카리안의 뒤로 다가가 그의 몸을 결박하고 있던 밧줄의 매듭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비교적 꼼꼼하게 묶인 상태긴 했지만, 아무렴 사슬을 끊는 것보다 더 힘들겠는가. “자, 다 됐어요. 다른 분들은 그쪽에서 알아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친절하신 분이군요. 저어, 성함이……?” “엘이라고 합니다.” “아, 그렇군요. 앞으로 엘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으음, 그런데 이쪽의 것들은 대체……?” 그가 가리킨 것은 내 주위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쇠사슬이었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대답이라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쇠사슬이죠. 아까 약간 소동을 피웠더니 단단히 벼른 모양이에요. 이걸로 온몸을 칭칭 감아 뒀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뭔가 소란스럽다 싶었는데… 그것이 엘님 때문이었군요. 그런데 혼자서 이걸 어떻게 푸신 겁니까?” “하하! 뭐, 어떻게 하다 보니… 그래도 역시 이 수갑까지는 좀 무리네요. 배고파서 더 이상의 힘도 없지만.” 그러자 내 팔에 채워진 수갑을 확인한 카리안의 얼굴에 무척 놀란 빛이 스쳐지나갔다. “그건 저희와 같은 마나 차단용의… 혹시 마법사입니까?” “아뇨. 정령사예요. 잠깐 방심하는 바람에 운 나쁘게 이런 꼴이 되긴 했지만요.” “정령사요?” 인간을 싫어하는 종족이라도 정령사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경우가 많다. 자연 친화력이 충만한 사람들은 보통 태어나면서부터 타고난 경우가 대부분이라, 정령왕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들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계하고 있던 표정이 180도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중에서도 웰디란 소녀는 나에 대해 호기심을 느낀 듯, 망설이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저어… 정말… 당신이 정령사인가요?” ‘와아, 목소리 이쁘다.’ 웰디의 목소리는 정말 생각 이상으로 고운 소프라노였다.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간다는 표현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막 대답하려는 순간, 나는 기겁을 한 아렐의 호통소리에 의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웰디님! 어찌 인간에게!” “앗! 미안해요, 아렐. 하지만 인간 정령사는 처음 보는 것이라…….” “그 호기심 때문에 저희가 이렇게 된 것을 잊으신 겁니까? 걱정하고 계실 류렌님을 생각하십시오. 지금은 인간 때위에게 신경 쓰실 상황이 아니십니다.” “그렇지만…….” “웰디님!” “윽, 아, 알았어요.” 지금 보니 웰디란 아가씨는 유니콘 사회에서도 꽤 상류층에 속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유니콘은 웬체가 암컷이 존중받는 종족이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여자에게 약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고 보니 보통 유니콘을 잡을 때는 여자로 유혹한다고 하던데, 여자인 웰디는 무슨 수로 잡은 걸까? 아까 호기심 운운하는 것을 보니 저 아가씨 때문에 다른 둘도 덩달아 잡힌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저는 여러분을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그냥 그쪽이라고 하기는 좀 그래서요.” “아참, 이제보니 아직 저희 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저는 유니콘 종족 세라핀의 일원 카리안이라 합니다.” “세라핀?” “인간들로 치면 ‘기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렐님 역시 저와 같은 세라핀의 일원이죠. 그리고 여기 계신 여성분은 ‘라반 루 웰디’양이십니다.” 이른바 귀족 ‘레이디’와 그녀를 지키는 두 기사들이라는 소리인가. 더불어 웰디란 아가씨 덕에 다른 사람들도 잡힌 것이라는 가정이 확실해졌다. 아무리 여자에 약하다지만, 설마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기사들이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 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꽤나 말괄량이인가 보네. 아, 혹시 인간세상으로 구경나오는 게 이번이 처음인가? 세상물정 모르는 아가씨를 보호하느라 고생이 많구만.’ 잠시 측은한 표정으로 두 명의 기사 유니콘을 바라봐준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움직이고 있는 마차. 밀폐된 공간. 각 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마나 차단용의 수갑! 대체 어느 하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지 않은가! 설마 이대로 고이 노예시장까지 끌려가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아, 정말 곤란하네요. 솔직히 말해서 이젠 도망칠 기운조차 없는데.” “저희들도 꽤 난감합니다. 애초에 웰디양의 외출은 2박 3일로 정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벌써 일주일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니… 지금쯤 마을이 발칵 뒤집혔을 겁니다.” “으음, 그럼 다른 사람들이 찾으러 오지 않을까요?” “그야 그럴 테지만, 위치추적이 힘든 이상 조금 불가능하리라고 봅니다. 이 마나용 팔찌는 착용자의 마나 사용은 물론, 다른 쪽에서 이쪽의 마나를 감지하는 것까지 방해하는 것 같더군요. 결국 자력으로 탈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그에 관한 웰디의 생각은 전혀 다른 듯 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의 얌전한 분위기를 벗어던지고 도전적으로 소리쳤다. “아니야! 그분이라면 꼭 와주실 거야!” “웰디님?!” “이런, 웰디님! 진정하십시오. 여기서 큰 소리를 치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다들 너무 일찍 낙담하고 있잖아. 난 걱정 안 해. 그 분 이라면 틀림없이 와주실 테니까!” 단호하리만치 똑 부러지게 답하는 말에는 두 기사들 역시 크게 반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들은 어느새 수긍하는 표정으로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고 있었다. “아아, 하긴.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분이라면 언제고 웰디님의 위치를 알아내시는 게 가능하시니까요.” “하지만 과연 장로님께서 그분이 직접 움직이는 것을 허락하실지…….” “다른 자도 아니고, 웰디님의 일이니 가능하리라 봅니다만.” “하긴, 그런가. 그 말대로라면 우리로선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겨울 한시름 덜었군.” 올 거라는 예상만으로 이렇게 안심하다니, 뭔가 굉장히 대단한 유니콘인 모양이지? 왠지 자기들끼리만 알아듣는 대화를 하는 것 같아 나는 직접적으로 묻기로 했다. “그분이 누군데요?” “아, 그건…….” “으음.” 처음 그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기사들의 얼굴엔 곧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가득 드러나기 시작했다. “유니콘 왕족의 제 1계승자임과 동시에 최고의 세라핀이시죠. 여기 계신 웰디 양의 반려로 내정되어 계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헤에, 왕족이 있군요? 그런데 그런 존재도 장로의 허락을 받고 움직여야 하나요? 반려로 내정되었다면 약혼자라는 소리인데, 구하러 오는 게 당연하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왕족은 존재만으로 유니콘들의 상징이 되는 자라서요. 행여 불온한 세력에게 잡히거나 험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미리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물론 그분, ‘시벨리우스’님이라면 무력 면에서 당할 자가 없으니 쓸데없는 걱정이긴 하지만요. 하하!” “……엥?”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지? 왠지 무지무지 낯익은 이름이 지나간 것 같은데? 나는 설마 환청을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방금 뭐라고요? 그분 이름이… 설마…….” “아! 시벨리우스님입니다. 가장 강하고 아름다운 유니콘! 고귀하고 성결한 피를 계승하고 계시는 제1왕자님 이시지요.” “……!!!” 쿠우웅! 무심코 지나가던 길가에서 갑자기 물벼락을 맞는다면 이런 심정일까?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충격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그 떼쟁이에 주책바가지, 라피스 만만치 않게 독점욕 강한 고집쟁이가… 뭐라고? ‘세라핀? 그것도 제 1왕자?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은 거야? 아! 그래! 어쩌면 동명이이일… 리가 없겠지. 아하하!’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왕족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그분’이 내가 아는 ‘그 녀석’이라는 결론이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으음… 시벨리우스, 너… 꽤 빵빵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구나. 이, 이런 식으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려나? 이렇게 우연들이 겹치는 것을 보니 왠지 그와 만날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내 생각은 여지없이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외전- 현재 그들은 …… “헤에, 시벨리우스님이 유니콘 종족의 왕자였다구요?” 엘퀴네스가 라피스의 영혼을 쫓아 떠난 지도 어느덧 1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 사이 솔트레테 제국은 어느새 완전히 안정을 되찾아, 과거 이루었던 태평성대를 이어가고 있었다. ‘현황(賢皇)이사나.’ 사람들은 앞 다투어 그들의 황제를 이렇게 칭했다. 그가 숙부에게 쫓겨나 떠돌던 시절의 이야기는 어느새 무용담으로 퍼져 코흘리게 꼬마들도 외우고 다닐 정도였고, 역적 유카르테 대공을 몰아내고 다시 황성으로 귀환한 일은 거의 신화처럼 역사에 기록됐다. 물론 그렇게 된 데에는 3명의 정령왕과 황제 이사나가 여행 중에 만난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그들이 떠난 엘퀴네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수시로 이사나를 찾아와 의지의 대상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사나는 현황이란 칭호 외에도 ‘위대한 존재들의 친구’ 로서 많은 이들의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니콘 시벨리우스는 아예 황성에 눌러 앉아 이사나가 전부 처리할 수 없는 잡다한 서류들을 도맡아 관리하고 있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시간 때우기에 가장 적절하다는 그의 의견을 반영한 일이었다. 덕분에 이사나는 간간이 시벨리우스와 자리를 마련하여 티타임을 즐기곤 했다. 그날도 평소처럼 이어지던 휴식시간에, 무심코 오가던 잡담에서 의외의 사실을 발견한 이사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반응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맞아. 유니콘 세계도 왕족과 평민이 나뉘거든. 하지만 정확히 말해서 인간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왕’의 개념은 아니야.” “그런게 아니면요?” “그냥 성스러운 피를 계승하는 자들이야. 단순하게 말해서 신과의 혼혈이지.” “신(神)이요?” 이미 엘뤼엔이나 마신과의 접촉 덕에 그들이 환상 속의 존재만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혼혈이 가능한 거였던가? 이사나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유니콘들도 엄연히 말해 신족에 가까운 종족이니까 말이야. 신과의 혼혈이 생겨도 크게 이상할 건 없지. 아무튼 왕족이란, 유니콘의 신 ‘페가수스’와의 혼혈들이야. 그의 반려인 유니콘이 바로 내 할머니이지.” “헉! 그렇군요. 뭔가 굉장한데요?” “그냥 피를 잇고 있다는 것뿐이지, 대단할 것도 없어. 정작 유니콘을 통치하는 존재는 ‘장로’ 라고 해서 따로 있거든. 우리는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야. 나는 그중에서 제 1계승자였지.” 신과 결합한 반려인 유니콘은 성마로 불린다. 그리고 그녀가 낳은 첫 번째 아이는 피의 ‘전승자’가 되며, 그 다음 세대의 아이가 피를 잇는 ‘계승자’가 되는 것이다. 시벨리우스는 바로 그 계승자들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태어난 유니콘이었다. “말이 좋아 계승자지, 얼마나 짜증난다고. 내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얼마나 참견하는지 알아? 뭐 하나 하려고 해도 이래선 안 된다, 저래도 안 된다,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가출을 꿈꿨지.” “거의 인간세계의 귀족 같은 거군요. 그럼 엘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뭐? ‘엘’ 말이야?”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시벨리우스에게 이사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엘’이란 사람이 실존인물이라고 하셨잖아요. 두 분이 어떻게 만난 거예요?” “헤에?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궁금해져서요. 정말 엘퀴네스랑 똑같이 생겼나요?” “뭘, 새삼스럽게. 전에 마신이 변했던 것 봤잖아? 그 모습 그대로라고 보면 돼.” 말하면서도 그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당시 카노스에게 놀림 당했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던 것이다. 그 때문에 엘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으니, 다시 떠올려봐도 여전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때의 일은 그로선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 1순위에 속했다. “분명 머리색과 눈동자색만 달랐었죠? 신기해요.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생길 수 있지?” “그야 둘이 동일인물이니까…….” “네?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심코 중얼거린 소리에 이사나가 곧바로 반문하자, 시벨리우스는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과거의 ‘엘’이 사실은 지금의 엘퀴네스와 동일인물이고, 자신이 그것을 잠깐이었더라도 착각했따는 사실을 스스로 알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서둘러 처음 엘을 만났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흐음, 첫 만남이라면 역시 그거겠지? 노예시장!” “네? 노… 예시장이요?” “아아, 엘이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있는 걸 내가 구해줬거든. 정확히 말하면 그때 함께 잡혀 있던 동료들을 구하려던 거였지만.” “헤에, 그 ‘엘’이란 사람은 굉장히 뛰어난 검사가 아니었나요? 그런데 어째서 노예상인들에게?” 던전에서 보았을 때, ‘엘’은 그 화려한 외모와 뛰어난 무위로 주위사람들을 단번에 매료시켰다. 비록 그 정체가 마신이긴 했지만 허구로 사실을 일부러 꾸미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벨리우스 역시 적극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래. 뭐, 본인의 말로는 잠깐 방심했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래도 중간에 탈출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아아, 그게 말이지, 그때 당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거든.” 발견 당시, 엘은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한차례 탈출을 하려고 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는데, 그 것이 계기가 되어 노예상인들이 아예 결박해둔 채 종일 굶겼던 것이다(지독한 놈들이 아닌가.). 그때 자신을 처음 보고 그가 꺼냈던 말은 지금도 귓가에 생생해서 잊혀지지가 않았다. <뭘 봐? 먹을 거 안 줄 거면 꺼져. 쳐다보기도 귀찮아.> 아무리 배가 고파서 힘이 없다지만, 구해주러 온 사람을 보고 다짜고짜 성질이라니. 그때 당시 시벨리우스는 꽤 황당해 했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엘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는 어디선가 먹을 것을 구해와 엘 앞에 내밀고 있었다. ‘이젠 안 가도 되지?’라는 순진한 질문과 함께. “…뭐랄까, 너무 상황이 잘 연상되어져서 무서울 정도입니다만.” “쳇! 나도 알아.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아무튼 그렇게 만나게 된 거야. 좀 싱겁지?” “아뇨, 나름대로 충격적이네요. 그럼 그때부터 같이 여행을 시작하시게 된 건가요?” “아니. 그리고 일단 헤어졌어. 트로웰 녀석이 홀랑 데려가 버렸거든. 다시 만난 것은 꽤 나중의 일이지.” “…에? 트로웰님이요?” 놀라서 되묻는 이사나에게 그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당시의 억울한 상황을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대답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난 보호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늑대에게 새끼양을 맡기는 목동은 없잖아?” “앗! 트로웰님!” “안녕, 이사나. 쉬고 있는 모양이네?” “……!!” 그들의 대화에 갑자기 끼어든 자는 다름 아닌 땅의 정령와 트로웰이었다. 세월을 타지 않고 여전히 소년의 모습인 그를 잠시 노려본 시벨리우스는 빈정거리는 얼굴로 쏘아붙였다. “흥! 지금쯤 명계의 신과 사랑 놀음에 빠져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줄 알았더니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을까?” “페르데스가 매일 한가하기만 한 건 아니거든. 내가 와서 못마땅하면 말해. 앞으로 천 년 정도는 얼마든지 여기에서 눌러 살아 줄 수도 있으니까.” “이런 사악한!!” 4천 년 전에나 지금이나, 시벨리우스는 여전히 트로웰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요 근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이후론 대 놓고 시비를 거는 일도 많아, 하루에도 몇 번씩 울화통이 터졌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늑대와 새끼 양이라니! 그럼 내가 늑대라도 된다는 소리냐! 난 그저 먹을 것을 가져다준 죄밖에 없다고!” “후후, 누굴 속이려고? 네 녀석이 엘을 여자로 착각했었잖아? 적령기의 유니콘 남성이 여자에게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모를 리 없을 텐데?” “제길! 어쨌든 남자였잖아, 남자! 그리고 덮칠 생각도 없었어!” “호오, 그래서 그때 있었던 약혼자도 걷어차고 가출한 건가 보지?” “큭! 아니야! 원래 웰디와는 결혼할 생각도 없었다고! 장로 할아범이 멋대로 결정한 거란 말이닷!” “그래그래. 그래도 네가 엘에게 첫눈에 반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안그래?” “젠장 할!” 애초에 말발로 트로웰을 이기려는 게 무리였음을 깨닫지 못하는 건가. 이사나는 동정이 가득한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그것이 더 상처가 된다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는 얼굴로. “헤에, 그럼 트로웰님도 ‘엘’이란 사람과 함께 여행을 다니셨던 건가요?” “맞아. 너희들은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걸? 덕분에 내가 아직까지 인간을 죽이지 않고 있는 거니까.” “헉… 트, 트로웰님?” “하하! 안심해.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엘퀴네스가 너희들에게 호의적인 이상, 내가 직접 이빨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야.” “에, 엘퀴네스요?” 여기서 갑자기 엘퀴네스가 왜 거론되는 거지? 이사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더 이상 이어지는 설명은 없었다. 왠지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을 넘본 기분이랄까. 그는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는 어떤가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나요?” “응. 아주 깊이 잠들어 있어. 너무 평온해서 깨우기가 미안할 정도로.” “그렇군요. 부디 무사히 라피스님의 영혼을 찾아오면 좋을 텐데요. 설마 아직도 못 찾은 건 아니겠죠?”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단 한 개의 보석을 찾은 거니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덕분에 주변인들만 애가 타지. 엘뤼엔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정령계에 들러서 얼굴을 보고 갈 정도니까.” “하긴, 걱정이 많이 되실 만도 하죠. 어디서 어떤 일을 겪고 있는지 모르니…….” “아아, 그야 그렇지.” 트로웰은 아직 그에게 엘이 과거로 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그에게 알려주더라도 걱정하는 것은 마찬가지 일 테니 말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가 안절부절 잘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재미있어서였지만.). 그가 웃으며 대답하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시벨리우스는, 곧 따로 할 말이 있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이사나에게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사나, 방금 전에 라온 황자가 알리사한테 프러포즈하는 것 같던데…….” “뭐라고요! 자,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두분!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순식간에 문 밖으로 사라지는 이사나를 보며 시벨리우스는 질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보내는 수법도 수준급이군.” “응? 아니, 정말이었는데. 여기 오기 전에 봤거든.” “…그런데 그걸 왜 이제야 얘기하는 거냐!” “재미있잖아. 후후후!” “……!!” 이 얼마나 사악한 심성인가! 할 말을 잃고 굳어진 시벨에게, 트로웰은 생긋 웃는 얼굴로 물었다. “자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용건이 없다면 이만 가겠어.” “앗! 잠깐 기다렷! 그, 그게 실은 말이야. 지금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엘이 뭔가를 찾고 있다고 하는 것 같았거든. 그게 혹시 라피스 녀석의 영혼의 보석이 아니었나 싶어서…….”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둔하기는. 그걸 아직도 눈치 못 챈 거야?” “뭐? 그, 그럼 ‘과거를 거슬러 간 것이’ 이번 일 때문이란 말이야?” “그럼 또 무슨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한 거지? 휴우~ 이래서 바보랑 대화하는 건 싫다니까.” “으윽!” 이번만큼은 그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다 눈치 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가! 그가 낭패감에 신음을 흘리자, 트로웰은 쯧쯧 혀를 차며 다분히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기억하는 나도 눈치 채는 일을, 어째서 넌 모르고 있었던 거냐?” “하지만 그때 엘은 단 한 번도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는걸. 그리고 나도 이상하게 녀석이 뭘 찾고 있었는지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는단 말이야.” “그래도 보통은 감으로 눈치 챈다고. 아, 잠깐! 그럼 보석을 찾았는지의 여부도 기억을 못하는 건가?” “맞아. 그 부분은 전혀 생각이 안 나. 넌 뭔가 알고 있어?” 그 말에 트로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떠오르는 것은 드문드문 장면의 기억일 뿐이었고, 그나마도 이어지는 것은 거의 없었다. 이것 역시 그가 가진 혜안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 더 자세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였던 것이다.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몰라?” “으음, 헤어진 거야… 여행 중에 잠시 마을로 돌아갔다가, 장로 할아범에게 붙잡혀서 서클렛에 갇힌 게 끝이야.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 “흐음, 그렇군. 역시 넌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었어.” “우씨! 뭐얏~~! 기껏 대답해줬더니!” 벌게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이미 트로웰은 한 손을 흔들며 여유있게 문을 나서고 있는 상태였따. 왠지 처음부터 끝까지 놀림 당했다는 생각에 시벨리우스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너 거기 못 서?! 나중에 엘이 돌아오면 다 이를 거야!” “네가 꼬맹이냐. 훗! 마음대로 해. 어차피 엘은 내 편일 테니까.” “크아악! 저 이중인격자 같으니!!” 뒤에서 버럭버럭 소리치는 말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트로웰은 가볍게 정령계로 텔레포트했다. 이사나에게 인사하지 않고 돌아온 일이 마음에 걸렸지만, 다음에 또 들르면 될 것이다. 어차피 지금은 라온 황자를 상대로 알리사를 사수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니 말이다. 정령계에 돌아온 즉시 그는 제일 먼저 물의 영역부터 들렀다. 끝없이 펼쳐진 물의 공간, 그 속에서 엘퀴네스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굳게 잠긴 이 눈은 언제쯤 다시 떠지게 될까? 그 모습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던 트로웰은 문득 낯익은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바로 엘뤼엔이었다. “…어서와. 요즘은 바쁜일이 없는 모양이지?” “아아, 아무리 바빠도 여기에 들릴 틈 정도는 있어. 이프리트가 망가뜨린 서류도 이제 거의 다 복구한 상태고.” “그렇군. 생각보다 빨리 했네? 10년 정도는 걸릴 줄 알았더니.” “흥! 날 뭘로 보는 거냐? 그 정도 가지고 10년이나 끌 생각은 없다.” “쿡쿡! 역시 가장 부지런한 신답네.” 악신과의 싸움이 끝난 후 벌써 1년. 그와 함께 엘이 깊은 잠에 빠진 지도 어느덧 1년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 그 사이, 신계는 다시 원래의 흐름을 되찾았다. 소멸한 마신의 빈자리만 없었다면 악신이란 존재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단, 명계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악신에 의해 희생된 1만여 명의 영혼에게, 각자 적당한 내세를 분배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였으니까. 덕분에 트로웰은 요 근래 페르데스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는 따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령계는 너무 무료해. 유희를 나가는 것도 식상하고. 이럴 때 엘이 돌아와 준다면 참 좋을텐데.” “미네르바와 이프리트는?” “둘 다 유희중이야. 간간이 정령계에 들르긴 하짐나.” “흐응, 혼자서 집 지키느라 고생이 많군.” “엄밀히 말하면 혼자가 아니지. 엘도 함께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여전히 깨어날 줄 모르는 엘을 가리켜보았다. 아아, 그렇군.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깨어나게 될까.” “글쎄… 중간에 귀환주문이나 잊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군.” “쿡쿡쿡! 엘이라면 정말 그럴지도.” 다분히 농담조로 대답한 트로웰의 얼굴은 어느새 짙은 근심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유일하게 기대를 걸고 있던 시벨리우스도 엘이 보석을 찾는지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그가 신호를 보내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엘, 제발 무사히 돌아와.’ 그 순간, 한 신과 한 정령왕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과연 이 간절함이 육체를 벗어난 그의 영혼에게 닿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지만. 엮어지는 마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현저히 떨어진 체력 때문에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서 맨바닥에 그냥 누워 있을 정도이니 말 다했지 않은가.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것저것 묻고 활기찼던 내가 쥐죽은 듯 고요해지자 유니콘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던 아렐이란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이봐, 인간. 살아는 있는 건가?” “…으으, 체력 아껴야 돼요… 말 시키지… 마요…….” “그래도 대꾸할 기력은 남아 있는 모양이군.” 피식 웃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빠직하고 혈압이 돋으려는 것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게 지금 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할 말이야?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구만, 위로는 못해줄 망정 염장을 지르다니! 분명 저 녀석은 유니콘 사회에서도 왕따일 거다! 에잇, 가장 헐값에 팔려나기길 기도해버릴 테닷! 내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속 좋은 카리안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나저나 정말 여기 인간들도 너무하군요. 우리들이야 안 먹어도 괜찮다지만, 엘님은 엄연히 인간인데 식사는 커녕 물조차 주지 않다니.” “먹고 기운나면 또 난동을 피울까봐 무서운 거겠지. 쳇! 이 수갑만 어찌 할 수 있다면 이런 마차쯤은…….” 아렐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수갑에 이어진 사슬을 당겼다. 그래봤자 철거덕거리는 소리만 날뿐,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저걸 아무렇지 않게 끊었던 거 같은데. 순수한 힘만으로 따지면 내가 저들보다 더 센 건가? 아니면 그때 채워진 수갑이 유달리 불량(?)이었던 걸까. ‘아무래도 좋으니 누가 먹을 것 좀 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염치가 없더라도 엘뤼엔이 왔을 때 수갑까지 풀어달라고 매달릴 걸 그랬다. 그럼 적어도 정령을 불러서 물이라도 마실 수 있었을 텐데. 혼자 알아서 해결하라고 선언한 뒤론 코빼기조차 비취질 않으니,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지만 말이다. “저, 저기, 조금만 기운 내요. 엘. 곧 시벨리우스님이 구해주러 오실 거예요.” “웰디님, 저런 인간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지금은 웰디님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불쌍하잖아요, 아렐. 저러다 죽을 것 같은걸요.” “그렇다 해도 그것은 저 인간의 운명인 겁니다. 웰디님께서 마음 쓰실 것이 아닙니다.” 정말 저 아렐이란 유니콘은 어디서 미운 말만 골라 하는 재주라도 익힌 모양이다. 어쩜 저렇게 살심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소리만 떠들어 대는 걸까.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덜컥덜컥 굴러가던 마차가 어느 순간 떡하고 멈추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차가 멈췄다?!” “식사하려는 것일까요?” 이전에도 종종 식사 때문에 행렬을 멈추곤 했기 때문에, 카리안은 이번에도 그러한 것 이라 생각한 듯했다. 그에 비해 아렐은 마차에 뚫려 있는 두 개의 구멍으로 다가가 유심히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이어지는 대답은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아니, 틀렸어. 아무래도…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군.” “……!!” “네? 그럼 벌써 노예시장에 왔다는 말인가요?” 놀란 표정으로 굳어버린 카리안과 경악한 웰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렐은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웰디를 보호하려는 듯 잽싸게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리안 또한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차의 문만을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저벅저벅. 얼마 후, 다수의 발소리가 점점 이쪽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우리를 다른 곳으로 옮길 작정인 듯했다. 인기척이 커질수록 새하얗게 질려가는 웰디의 모습에, 아렐은 한탄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여기까지 온 건가… 아무래도 장로께선 제 1계승자님을 보내시는 것을 허락지 않으신 모양이군.” “그럴 수가. 하, 할아버님이 어떻게… 흐흑!” “아직 포기하기엔 이릅니다, 아렐. 웰디님도 진정하십시오. 지금 오시고 계시는 중일 수도 있잖습니까? 그때까지 우리가 반드시 지켜드리겠습니다.” 양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진 상태로 뭘 어떻게 지키겠다고? 게다가 그 사이에 늘어진 사슬의 길이가 그렇게 긴 편도 아니었따. 걷는 것도 불편할 상태인데 과연 여자까지 보호할 수 있을까? 덜컥덜컥! 불안한 마음과는 관계없이, 마차의 문이 열리는 순간은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자물쇠를 푸는 소리가 들리자 아렐은 좀 더 웰디의 옆에 바짝 붙어 섰고, 카리안 또한 슬쩍 자세를 낮추며 마치 덤벼들 듯한 태도를 취했다. 문이 열리면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한 기세였다. 그러는 동안 난 뭘 했냐고? 빤한 걸 왜 묻는가? 힘이 없어서 그냥 누워 있었지. 사실 지금 같아서는 먹을 것만 준다면 당장 노예로 팔려간다고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이대로 죽는 것보다야 구차하게라도 목숨을 연명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뭐, 그것도 배가 부르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동안 자물쇠가 다 풀렸는지 육중한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끼이익! 소리와 함께 마차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미리 대비하고 있던 카리안의 몸이 마치 총알처럼 쏘아져나갔다. “자~ 드디어 도착… 으악!! 뭐, 뭐야!!” 퍽! 쿠웅!! “으아악!!” 놀랍게도 카리안은 못 쓰는 손과 발을 대신해 온몸을 이용하여 노예상인들에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한 사람을 깔아뭉갠 후 그는 재빨리 마차 안, 즉 이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아렐! 어서 웰디님을!!” 끄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아렐은 잠시 나를 보고 머뭇거리는 듯했으나, 곧 웰디를 데리고 잽싸게 마차 밖으로 뛰어내렸다. 사슬을 매달고도 저렇게 뛸 수 있다니, 유니콘들은 운동신경이 굉장히 좋은 모양이다. 반면, 노예상인들 쪽은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당황하여 연신 소리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 유니콘들의 밧줄이 풀어졌다!! 놈들이 도망간다! 어서 잡아!!”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다들 뭐하고 있는 거야!!” “제길,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결박을 어떻게 푼 거지?” “앗! 나머지 한 녀석은? 마지막에 넣은 아이는 어디에 있나? 설마 같이 도망친 건 아니겠지?” 낭패감이 가득한 대화가 오간 후, 누군가가 마차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급하게 휙휙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곧 마차 바닥에 힘없이 누워있는 나를 발견하곤 기쁨에 겨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 꼬맹이는 여기 있어! 기운이 없어서 도망치지 못한 것 같아!” “헤엣, 그렇군! 다른 녀석들도 멀리 가진 못할 거다. 용병들이 쫓아갔으니 곧 잡힐 게 틀림없어. 일단 소년부터 옮기도록 하지!” 그들은 추욱 늘어진 나를 안아서 어디론가 옮기기 시작했다. 갇힌 뒤 며칠 만에 보는지 모를 햇빛이 따갑게 피부를 피고들었다. 잠시 후, 침낭 같은 것에 뉘인 후에도 내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노예상인들은 슬슬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지? 너무 비실거리잖아.” “밥은 그렇다 쳐도 물까지 안 준건 너무 심했나? 이러다 죽으면 말짱 꽝인데.” “쯧! 어서 뭐라도 좀 먹여봐. 죽이면 다들 가만 안 둘 줄 알아.” “아, 알았어.” 더듬거리며 대답한 남자가 서둘러 뭐라고 지시하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의 움직임 역시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도 그 사이에 잠시 의식을 잃었던 듯, 나는 갑자기 입가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의 감촉에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내게 물을 주고 있던 남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깨어났군. 거의 반나절 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얼른 마셔라. 물을 마시면 조금이나마 나아질 거다.” “…아.” “쯧쯧! 그러게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꼴도 안 당하잖냐. 왜 그 소란을 피워서 고생을 사서 하는 건지. 다 마시면 스프를 가져다 줄 테니 기다려라.” “여기는…?” 그제야 제대로 돌아본 공간은, 마치 유목민이 이동하면서 사용하는 천막과 비슷했다. 바닥 전체에 깔려진 부드러운 쿠션과 짙게 내려온 붉은 색의 휘장이 몹시 화려한 것만 빼면 말이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들고 있던 물 컵을 건네준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노예시장 안이지. 여긴 네게 배정된 방이다. 야단났군. 조금 후면 손님들이 들이닥칠 텐데 맞을 준비가 전혀 안되어 있잖아. 그놈의 유니콘들 때문에…….” “유니콘들? 아! 그들은 어떻게 됐지? 설마 잡힌 건가?”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그런 수갑을 달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게다가 이곳은 이미 시장안이라, 사방이 우리 편이라고.” 결국 실패한 건가. 적어도 그들만이라도 무사히 빠져나갔기를 바랐었는데, 역시 세상은 마음먹을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모양이다.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무는 내게, 남자는 의외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유니콘 중에 계집애가 하나 있었지? 바로 이 옆 천막에 있다고 하더군.” “옆이라고? 다른 자들은?” “뭐, 적당히 알아서 분배됐겠지. 행여나 엉뚱한 마음은 접는 게 좋아. 이곳은 너 하나가 날뛴다고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곳이 아니거든.” “…….” 본래 세이크 제국은 타 종족을 포함하여, 죄 없는 인간을 노예로 삼는 행위를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중에서는 반드시 노예를 얻으려는 사람이 나오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을 위한 어둠의 푸트 역시 당연히 존재하기 마련. 지금 내가 끌려온 이 레피르라는 곳이 바로 그런 류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도시였다. 이곳은 한 달에 한 번씩 축제를 가장한 노예시장을 열어 그때 벌어들인 수익으로 먹고 살았다. 그 규모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이미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도 꽤 되는 모양이지만, 대부분 눈감고 모른 척하기가 일쑤였다. 당연하다. 이것이 발각되면 당연히 토벌군대가 와서 진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노예를 얻는 수단 역시 사라지게 되는데, 어느 귀족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보겠는가. 요컨대 황제와 몇몇 외곬의 귀족들에게만 소문이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는 식인 것이다. ‘아니, 어쩌면 황제도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 역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아무튼 어딜 가나 이놈의 정치인들(?)이 문제라니까. 설마 이사나도 이런 몹쓸 인간으로 자라는 건 아니겠지? 어쨌든 그러한 관계로 일단 이곳에 노예로 잡혀온 자는 쉽게 도망칠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물을 마시고 나서인지 한결 몸에 기운이 솟은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탈출할지에 대해 궁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잠시 후, 갑자기 천막안 휘장을 걷고 들어온 웬 여인네들에 의해 그 생각도 곧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누, 누구세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다짜고짜 내 옆에 앉아,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번쩍번쩍한 장신구들을 갖다 대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거라 나는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뭣들 하는 거예요?” “지금부터는 치장을 해야 합니다. 얌전히 있어 주세요.” “치, 치장?” 아니, 이 사람들아! 이제 겨우 물마시고 정신 차린 사람을 치장해서 뭐에 쓰겠다는 거야? 하지만 내가 황당해 하든 말든, 그녀들은 묵묵히 자신들의 할일만 수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클린 마법을 이용하여 땀과 먼지로 지저분해진 내 몸을 청결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곤 웬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즈 장식들을 꺼내놓고 이것저것 머리를 다듬더니, 아무리 봐도 속이 거의 다 비치는 천 쪼가리를 들이밀며 날 더러 입으라고 내주는 것이 아닌가(천도 아니고 천 ‘쪼가리’다.). “이걸 입으라고? 당신들 죄다 미쳤어요? 내가 무슨 포르노 배우인 줄 알아?” “그레모리님의 명령입니다. 저희들은 그에 따르는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내가 알게 뭐야! 절대 안 입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난 남자라구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글쎄, 곤란한 건 나도 마찬가지야!” “후우… 어쩔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기에 나는 처음엔 그냥 순순히 포기하려나 보다 했다. 그런데 웬걸! 오히려 눈에 투지를 일으키며 옆에 있던 다른 여자들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닌가! “얘들아! 잡아라!” “네!” “으악! 무슨 짓이야!!” 여자의 힘이라고 해서 무시할 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이 순간 뼈저리게 느끼고 말았다. 뭔 놈의 힘들이 그렇게 센지, 꽉 눌려진 온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상태에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머릿속의 핏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직접 갈아입혀 드리겠습니다.” “……!!” 이 여자는 미친 거다! 미친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 큰 남자의 옷을 갈아입히겠다는 망언을 함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의 하늘하늘한 천 조각을 들고 점점 내게 다가오는 여자를 본 순간,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으아아아악! 싫어어어어어!!!” “뭐, 뭐야? 무슨일이야?!” 내 비명소리에 화들짝 놀라 들어온 것은 처음 정신이 들었을 때 물 컵을 건네줬던 남자였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 (여자들이 나를 억압한 채 억지로 옷을 갈아입히려는 상황)을 보더니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체 그거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뭘 하고 있는 거야? 밖에 까지 비명소리가 쩌렁쩌렁하다고.” “죄, 죄송합니다, 자칸님. 이 소년이 옷을 갈아입는 것을 거부해서…….” “그렇담 잘 달래야지, 소리를 치게 만들어? 이것 때문에 우리 상단의 이미지가 나빠지면 어쩔 거야? 잘들 좀 해봐.” “네, 명심하겠습니다.” “난 죽어도 그거 안 입어!!” 내가 질세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자칸이라고 불린 남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더니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봐, 꼬맹아, 어차피 넌 상품이고, 높은 가격에 팔리기 위한 치장단계는 필수라고. 이런 식으로 고집을 피워봤자 서로 피곤하기만 하다는 소리야. 이제 그만 포기하고 고분고분해질 수 없는 거냐?” “멀쩡한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멋대로 상품 취급 하지 마! 누굴 변태로 알아? 저렇게 비치는 걸 어떻게 입어?” “이 정도가 뭐가 비친다는 거야? 딱 적당하구만.” “호오, 그러셔? 그럼 당신이 한번 입어봐. 그거 입고 돌아다니면 나도 그 정성을 봐서 입어주지.” “…….” 내 말에 자칸은 대꾸할 용기가 안나는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을 마음껏 비웃어주었다. “당신도 못 입겠지? 그치? 그러면서 날더러 입으라고? 헹! 메렁이닷!” “…고작 물 하나 마시고 기운이 펄펄 솟는 모양인데, 너 자꾸 그럼 이따 스프 안 줄 줄 알아. 그래도 안 입을래?” “……!!” 이런 치사한 작자들을 보았나! 말이 안 통할 것 같으니까 먹을 것을 가지고 협박하다니! 보통 때라면 당연히 거절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아사직전까지 갔었기에 음식을 이용한 공격은 치명적이었다. 결국 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가 내미는 옷가지들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하하! 잘 생각했다. 단언하건대, 그걸 입으면 귀족 나으리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싸우게 될 거다. 넌 얼굴 하나는 제법 봐줄 만하니까 말이다.” “하나도 안 기쁘네요! 젠장”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늘하늘한 옷 조각을 휘날리며 탈출할 나의 모습이었다. 이 곳에서야 그렇다 치고, 마을이나 길거리를 돌아다닐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다 큰 남자가 란제리 속옷 같은(그것도 안이 다 비치는) 옷을 입고 맨발로 뛰어다닌 다라… 공개적인 변태로 찍혀서 수배당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지금은 혹한 강풍이 몰아치는 겨울. 잘못하면 도망은 커녕 동사?(?死)로 사망할지도 모른다. 이런 걸 정말 입어야 할까. 나는 한동안 음식과 내 최소한의 자존심 사이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문득 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직 준비가…….” “노예들을 치장하는 것이야 다 똑같은 게 아닌가. 난 치장하기 전의 모습을 보고 싶다. 화려한 치장에 속아 샀다가 나중에 후회한 적이 한두 번인 줄 알아?” “하, 하지만 이왕이면 아름답게 포장된 것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어서 이 휘장이나 걷어라. 안에 있는 노예의 얼굴의 봐야겠다.” 들려온 것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30대 중반을 넘지 않은 듯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자들과 약간의 실랑이가 벌어지자, 옆에서 나에게 옷을 갈아입기를 강요하던 자칸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이크! 벌써 오신 건가. 이, 이걸 어쩌나! 아직 옷도 입지 못했는데.” “누군데?” “당연히 노예를 사러 오신 귀족 분이시지, 누구긴 누구냐?” “이렇게 빨리? 노예시장이라는 게 오자마자 시작하는 거였어?” “일반노예들의 매매는 좀 늦은 편이지만, 상등품은 경매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거든. 자격을 가진 귀족만이 이곳까지 들어올 수 있고, 원하는 노예를 선택해서 돈을 지불하는 식이지.” “에, 그럼 나 지금 팔리는 거야?” 당황해서 묻는 말에 자칸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넌 아직 이야. 노예로서의 자각이 없음은 물론, 무엇보다 요 며칠 사이에 너무 말랐어. 뭐라도 먹어서 살이 쪄야 보기도 좋지. 지금 팔았다간 부실한 걸 보냈다고 경을 칠걸?” “흐응, 그럼 왜 여기에 오는 건데?” “그냥 둘러보시는 김에 들르시는 것 같군. 나 참, 할 수 없지. 내가 잠시 시간을 끌 테니까 그동안 너는 얼른 옷을 갈아입어. 알았지?” “네, 네~” 자격을 가진 귀족이라면 지위가 어느 정도 된다는 거지? 나는 약간 사소한 의문을 삼키며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입고 있던 상의의 끈을 풀어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갈 때까지 가보자는 심정이랄까(꽤 위험한 생각일지도.). 하지만 밖에 있던 손님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고집불통이었던 모양이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라는 처절한 자칸의 외침을 무시하고, 벌컥 휘장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마치 엄한 사극의 한 편을 보는 듯 했다.). 그때 마침 겉옷을 거의 벗고 있었던 나는 놀라서 딱 굳어버렸고, 그와 동시에 남자를 뒤따라 들어온 자칸이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루시엘님, 정말 이러시면 난처합니다. 아직 이 노예는 준비가…….” “조용히. 방해된다.” “앗! 죄, 죄송합니다.” 방해는 무신. 그냥 얼굴만 쭈욱 쳐다보는 것뿐이면서. 상인 측의 입장을 가뿐히 무시하고 들어온 남자는 예상대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뚜렷한 얼굴 윤곽 탓인지 전체적으로 냉막한 분위기가 풍겼다. 뛰어나게 잘생긴 건 아니었지만,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랄까. 그는 묘한 표정으로 굳어있는 나를 훑어보더니 옆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자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아직 어리군. 소년인가?” “네, 네, 그렇습니다 .아주 아름다워서 소녀로 오해할 정도지만이요.” “그런데 너무 말랐군. 먹을 것은 제대로 주기는 한 건가?” “아무렴요! 저래 봬도 무척 건강하답니다. 마른 것은 단순히 체질인 것 같더라구요. 하하하!” 웃는 얼굴로 저런 망언을 내뱉다니, 하늘이 무섭지 않나 보다. 대체 언제 너희들이 먹을 걸 제대로 줬다는 거야? 바로 조금 전까지 기절했다가 물 한 모금에 기사회생한 것을 잊어버린 건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자 자칸은 찔끔한 얼굴로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래도 찔리기는 하는 모양이지? 루시엘이라 불린 귀족 남자는 그 외에도 이것저것 나를 훑어보더니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괜찮은 것 같군. 이 아이로 하겠다.” “네, 네에? 아, 저, 그, 그것이…….”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실은… 이 아이는 아직 다른 사람을 섬길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충분한 교육을 시켜야…….” “흐응, 그런 것이야 얼마든지 내 저택의 하인들에게 시키면 그만이다.” “그, 그것도 그렇지만… 그, 그렇지 마시고 다른 노예를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은 이번 노예 중에 암컷 유니콘이 들어왔거든요. 보시면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호오, 암컷 말인가? 대단하군.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여자라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듯, 남자의 얼굴에 옅은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그것을 기회 삼아 자칸은 연신 자랑을 늘어놓기 바빴다. “이번에 저희가 상당히 무리했습죠. 그 외에도 좋은 물건들이 많습니다. 천천히 둘러보시고 골라보시지요.” “암컷 유니콘이라니 꽤나 흥미롭긴 하군.” “그럼은요! 생긴 건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지! 달빛 같은 은발에 루비같이 붉은 눈동자랍니다! 한 번 보시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허걱! 저러다 설마 웰디가 저 남자한테 팔려가는 건 아니겠지? 시벨리우스의 약혼녀라는 말을 들어서일까. 대화라고는 거의 해본 적도 없고, 그나마도 캄캄한 마차에 갇혀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지만, 나는 슬그머니 그녀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가 이런 심정인데 세라핀들은 지금 심정이 오죽할까. 하지만 놀랍게도 루시엘이란 남자의 입에서 나온 대다은 ‘NO!'였다. “흥미는 있지만 난 아무래도 이쪽이 더 나을 것 같군. 유니콘들은 너무 드센데다, 철장에 가둬두지 않으면 탈출의 위험이 많아서 관리가 귀찮다.” “아이고,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수컷들이야 그럴지도 모르지만, 암컷은 상당히 얌전하답니다.” “암컷이라면 유니콘들 중에서도 꽤 귀한 존재라 들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유니콘들이 찾아올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번거로운 문제는 딱 질색이야. 난 역시 이쪽의 아이가 더 마음에 드는군.” “그, 그래도 일단은 보시고 선택을 하심이…….” 자칸의 얼굴은 이제 거의 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훗날 당할 문책이 무서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뭔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는 곧 환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사실 이 아이도 지금은 저리 얌전해 보이지만 성질이 꽤 있습니다. 도중에 탈출까지 시도한 전적이 있어서 얼마나 애를 먹였다구요.” “호오, 그래? 그러고 보니 마나 제어용 팔찌가 채워져 있군, 설마 마법사인가?” “아니요! 그게… 정령사입니다만.” “정령사?” 그러자 시큰둥하게 듣고 있던 남자의 눈에 번쩍하고 불꽃이 튀었다. 그는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욱 더 마음에 드는군. 이 아이로 결정했다.” “헉! 루, 루시엘님!!” “왜 그러지? 정령사 같은 까다로운 능력자를 다룰 수 있는 자는 귀족 중에서도 별로 없다. 내게 파는 것이 너희들에게도 유리 할 텐데?”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실은… 정령을 다루는 것 말고도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아는 대로 말하라. 시간을 끄는 건 딱 질색이니까.” 대체 루시엘이란 남자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저렇게 쩔쩔매는 걸까. 자작 이상의 귀족일 것은 확실했지만, 겉모습만드로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재촉하는 그의 시선을 못 이긴 자칸은 에라 모르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고 설명을 털어놓았다. “시, 실은 검술이 꽤 뛰어납니다.” “호오, 검까지 다룬다는 건가? 겉보기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실력은 어느 정도나 되지?” “그, 그게… 용병단 전체를 상대로도 우세했었습니다만.” “…용병단? 내가 알기론 한 단의 숫자가 20명은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 숫자를 감당한다는 말인가?” 무척 놀란 얼굴로 묻는 말에 자칸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소문이 퍼지면 날 사갈 사람이 없을 테니, 저들 딴에는 막심한 손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강적이었다. “내가 사지.”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 네, 네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정령사에 장정 20명을 가볍게 제압하는 검사. 보통 제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노예에게 목숨을 잃고 싶지 않은 이상 외면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루시엘이란 남자는 겁이 없는 건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여전히 날 사고 싶다는 의사를 굽힐 줄 몰랐다. 당연히 포기하리라 생각했던 나로선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순간이었다(그것은 자칸도 마찬가지인 듯 했다.). 그는 놀라는 우리 둘의 표정을 감상하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내가 산다고 했다.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긴 하지만, 저 정도의 외모라면 무난히 봐줄 수 있을 것 같군.”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그렇다. 이곳 상단의 주인인 그레모리에게 그렇게 알려라.” “아, 알겠습니다! 당장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자칸은 감격에 겨운 얼굴로 얼른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남자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하지만 역시 검을 다룰 줄 안다는 건 조금 불편하군. 사슬을 계속 채워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차피 내가 살 것이니 조금 손을 봐도 괜찮겠는가?” “예, 예? 소, 손을요?” ‘어떻게?’라는 반문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허리춤에서 시퍼런 장검을 뽑아들었던 것이다. 그저 단순히 폼으로 꺼냈다기에는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몸을 뒤로 주춤거렸다. 그러자 남자의 눈에 옅은 감탄의 빛이 흘러갔다. “눈치도 제법 괜찮군. 이 정도라면 조금만 훈련을 시키면 금세 길들일 수 있겠어.” “그, 그야 그렇지만, 대, 대체 뭘 하시려고?” “아아, 별거 아니다. 손목과 발목의 힘줄을 끊으려는 것뿐이니까.” “……!!” 그게 뭐가 별거 아니야!! 아무렇지 않게 살벌한 말을 뱉어낸 남자의 모습에 나는 그대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칸 또한 놀랐는지 휘둥그렇게 된 눈으로 되물었다. “힘줄을요? 하지만 그렇게 하면…….”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걷는 것이나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지장이 없을 테니까. 단, 앞으로 평생 동안 검을 쓸 수 없을 테지만.” “헤에, 그런 것이었습니까? 그것 참 괜찮은 방법이군요!” 괜찮기는 개뿔!! 이것들이 누굴 호구로 아나? 내가 설마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내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물러서자 남자의 입가엔 더욱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리곤 어울리지도 않는 자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별로 아프진 않을 거니 그렇게 겁먹지 않아도 된다. 아주 잠깐 따끔할 뿐이야.” “그래! 루시엘님은 세이크 제국에서 알아주는 검사이시거든! 얌전히 있으면 금방 끝날 거다.” 저런 십중팔구 거짓말일 게 분명한 말을 날더러 믿으라고? 단순히 인대가 늘어나기만 해도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힘줄을 끊는 것이 어떻게 잠깐 ‘따끔’하고 만다는 거야! 검을 든 남자가 점점 다가오는 것을 본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들고 있던 천 쪼가리를 집어 던지며 소리쳤다. “가까이 오지마!!” “헛, 이, 이봐! 이분이 뉘신 줄 알고!” “시끄럿! 귀족이면 다야? 누구 맘대로 남의 힘줄을 끊어? 더 이상 다가오지마!” “이, 이런! 저 녀석이 눈에 뵈는 게 없나… 죄, 죄송합니다, 루시엘님. 입버릇이 좀 험해서…….” 자칸은 낭패 어린 표정으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에 비해 귀족 남자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얼굴이었다. “흐응, 괜찮다. 수준급의 능력자에 저 정도 외모라면 성격이 드센 게 당연하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게 더 이상했으니. 제법 길들이는 맛도 있을 것 같군.” “그렇게 봐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것들 다 변태 아니야! 길들이긴 뭘 길들이고, 감사하긴 뭘 감사해!” 도대체가 자신도 검을 드는 입장이면서, 어떻게 상대편의 힘줄을 끊을 생각을 저렇게 쉽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검사가 검을 다루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맛볼 절망감을 생각이나 해보고 지껄이는 걸까? 어차피 노예로 팔린다면 좀 뚱뚱하고 못생기더라도 여자쪽이 더 낫다. 저런 남자 밑에서 애완동물 취급당할 생각을 전혀 없단 말씀이다, 이거야! 내가 버럭버럭 소리치자 루시엘이란 남자는 이곳에 온 후로 처음으로 얼굴을 찌푸렸따. 그는 곧 옆에 있던 자칸에게 무심한 말투로 명령을 내렸다. “반항이 좀 심할 것 같군. 사람을 시켜서 붙잡도록 해라.” “예, 알겠습니다! 거기 밖에 있는 녀석! 한 3명만 들어와라.” “부르셨습니까, 자칸님.” 자칸의 부름을 받고 들어온 남자들은 한눈에 봐도 우락부락한 덩치들이었다. 내가 그들을 보고 새하얗게 얼굴을 굳히자, 그는 얄미울 정도로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나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아이의 팔 다리를 잡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라. 지금부터 루시엘님이 힘줄을 끊으실 거다. “예, 알겠습니다.” “으아악! 싫어! 이거 놔앗!!” 누누이 말해두지만 난 물 한모금 마신 것 외에는 여전히 속이 허전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기운이 없는 몸에 3명의 덩치가 힘으로 눌러 내리니, 꼼짝도 못하고 그대로 잡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귀족 남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가볍게 휘두른 검날을 내 앞에 치켜세웠따. “가만히 있지 않으면 엉뚱한 곳을 자르게 될지도 모른다. 치료는 신관을 통해 금방 시킬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나머지 길들이는 것은 내 저택에 도착해서 해도 늦지 않겠지.” “싫어! 놔! 이거놔!! 너희들 전부 다 죽여 버릴 거얏!!” “흐음, 확실히 입이 험하군. 그렐 녀석이 잘 훈련시킬 수 있을지 모르겠는걸.” “그렐이라면… 루시엘님 저택의 집사 분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같이 오시지 않으셨군요.” “아아, 귀찮아서 말이다. 그 녀석은 잔소리가 많아서 성가셔.” “하하! 그렐님이 무척 서운해 하시겠습니다.”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주인의 일에 일일이 참견하는 종은 아무리 쓸 만해도 피곤한 법이지.” 사람을 비참한 상태로 만들어두고 저들끼리 한가한 잡담이라니! 이래서 귀족놈들이 싫다니까! 아등바등 몸을 움직일수록 위에서 눌러 내리는 힘은 더욱 더 커졌다. 그들은 내 눈앞이 노래질 정도가 돼서야 간신히 숨을 트이게 만들어주었다. “자아, 그럼 시작해볼까?” 그 순간, 검에서 흐르는 싸늘한 예기에 나는 몸을 움찔 떨었다. 저 녀석은 지금 진심으로 힘줄을 자를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쉬이익! 높게 쳐든 검날이 공기를 가르며 내게 내려오는 순간, 나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고 소리쳤다. “살려줘, 아버지!!” 촤아악! 챙강! “큭! 뭐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기적은 존재 한다’ 였다. 갑자기 터져 나온 물보라에 의해 귀족 남자가 들고 있던 검을 놓친 것이다. 놀라서 부릅뜬 내 눈앞에는 자연체의 모습인 엘뤼엔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당황하는 귀족 남자와 나를 붙들고 있는 남자들을 둘러보며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알아서 해결하랬더니, 갈수록 태산이로군. ‘아, 아버지?’ -그놈의 ‘아버지’란 호칭은 또냐. 너란 녀석도 정말 어쩔 수 없군. ‘왜 이제야 나타나는 거얏!!’ -호오, 구해줘도 불만인 모양이지? 다시 갈까? ‘헉, 아, 아닙니다!’ 하지만 나는 한가하게 그와 대화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모처럼 위기를 모면한 것은 좋았지만, 곧 무시무시할 정도로 살벌한 얼굴을 한 루시엘과 마주해야 했던 것이다. 검을 놓친 것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것인지, 그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 한 손으로 내 목을 잡아 눌렀다. 콰앙! “큭……!” 아무래도 녀석은 방금 전에 물을 쏘아 보낸 것이 나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평범한 인간에게는 자연체의 정령들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으르렁거리듯 낮게 묻는 목소리에 나보다 자칸이 더욱 겁에 질려 몸을 떨었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어떻게든 사태를 진정시켜 보려는 듯했다. “루, 루시엘님, 일단 진정을… 녀석이 사술을 쓸 리가 없습니다! 마나 제어용 팔찌를 착용하고 있는걸요.” “흥! 그럼 방금 일어난 사태가 단지 우연이라는 소리인가?” “그, 그건…….” “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지금 이 아이는 뭔가 또 다른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자아, 이대로 목이 부러져서 죽고 싶지 않다면 솔직하게 대답해라. 난 그다지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니까.” “윽! 이것… 놔앗!!” 무지막지한 손아귀에 놀란 나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내리누르는 힘만 강해질 뿐이었다. 내가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을 본 엘뤼엔은 한심하다는 듯이 낮게 혀를 찼다. 그 옆에는 어느새 나타난 트로웰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고 있지만 말고 뭔가 반격을 해보지 그래? -맞아, 엘~ 계속 이 상태로 있다간 죽는다고. 그래도 좋아? -고통을 즐기는 걸지도 모르지. -그러게 말이야. 꽤 아플 텐데 용케 참고 있네. 나 같음 벌써 떨치고 일어났을 텐데. 빠직! 대체 이 정령왕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사이가 좋았단 말인가. 아주 척척 맞는 호흡을 자랑하는 그 모습에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소리쳤다(물론 속으로). ‘누군 반격을 하기 싫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이 화상들아!!’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은 즉시 후회했다. 엘뤼엔의 입가에 피식! 하고 잔뜩 비틀린 미소가 떠올랐던 것이다. -호오, 그럼 그대로 계속 있어보든가. -왜? 엘이 뭐라고 했는데? -알아서 살아날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군. -헤에, 정말? 꽤 용감한데? 그럼 우리는 여기서 쭈욱 구경하고 있을게, 엘! 잘해봐! 상큼하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그 모습에 나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도 이들에겐 그저 가벼운 장난으로만 느껴지는 걸까. 그 사이, 루시엘은 내 목을 조르는 손에 더욱 강한 힘을 가하고 있었다.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에 나는 옅은 신음만 뱉어냈다. “크윽……!” “굉장히 고집이 세군. 어서 말하는 편이 좋을 텐데? 여기서 더 힘을 주면 너 목은 부러진다. 그래도 좋은가?” “루, 루시엘님, 고정하십시오. 일단 차분히 대화를…….” “네놈은 끼어들지 말아라.” “헙! 죄, 죄송합니다.” ‘윽. 의, 의식이…….’ 아까 힘줄을 끊는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이 루시엘이란 남자는 차가운 얼굴만큼이나 냉정한 성격인 듯했다. 무섭게 옭아메는 손을 밀어내며 옅은 숨을 뱉어내던 나는, 점점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을 깨닫고 낭패감을 느꼈다. ‘이대로 기절하면 죽을지도…….’ 왠지 지켜보는 두 정령왕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져 있는 듯한 것은 착각일?. 그리고 다음 순간, 기대하지도 않았던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났다. 라반 루 웰디. 그녀는 암컷이 그리 흔하지 않은 유니콘 종족의 얼마 되지 않는 여성임과 동시에, 마을을 통치하는 장로 류렌의 단 하나뿐인 외손녀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유니콘 종족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성이기도 했다. 절세가인(絶世佳人)이라고 하던가. 그녀의 달빛을 머금은 듯한 새하얀 은발과 새빨간 루비같은 눈동자는 뭇 유니콘 남성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녀가 가는 길엔 어김없이 수많은 청년들의 구애가 이어질 정도였다. 이 사실은 장로인 류렌이 그녀를 과보호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되었고, 덕분에 그녀는 성년식을 치르고도 단 한 번도 마을 밖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웰디는 그 부분이 불만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왜 저는 인간세상을 구경할 수 없다는 거죠? 저도 유니콘이 아닌 다른 종족과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단 말이에요!”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하소연한 끝에, 그녀는 결국 할아버지로부터 2박 3일간의 자유를 허락받았다. 두 명의 세라핀이 동행한 외출이었지만, 놀러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 그녀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웰디는 자신의 실책을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류렌의 말처럼 마을 밖의 세상은 아직 어리고 순진한 그녀가 감당 할 수 없는 곳이었던 것이다. “흑흑… 할아버지…….” 이제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웰디는 끊임없이 흐느꼈다. 마차 안에서는 그나마 위로해주었던 세라핀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낯선 방 안에 오직 그녀 혼자뿐이었다. 마차안에서 도망친 보람도 없이, 그들은 너무 쉽게 잡히고 말았다. 본체가 아닌 유니콘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약했을 뿐더러 사방에 적이 너무 많았던 탓이다. 대체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웰디는 처음 잡혔던 때의 일을 회상했다. “와아! 굉장해! 이게 인간들이 사는 곳이구나!” 그녀가 처음으로 본 인간세상은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였다. 수많은 사람들과 높은 건물들, 무엇보다 여자의 숫자가 많은 것도 신기했다. 옆에서 두 세라핀이 계속 주의를 주고 있었지만, 그런 소리도 제대로 안 들릴 만큼 그녀는 인간세상의 문화에 푹 빠져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웰디님? 종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절대 유니콘이라고 대답하시면 안 됩니다.” “네네, 알았어요, 아렐. 기억하고 있다구요.” “그렇게 건성으로 대답하실 게 아닙니다. 인간들은 웰디님이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위험합니다. 그들은 우리 유니콘이 본체가 아닐 땐 마법 빼곤 별 볼일이 없어진다는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죠. 그것을 노리고 잡으려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글쎄, 잘 알았다니?요! 몇 번이나 말하지 말아요.” 사실 유니콘은 엘프만큼이나 거짓말에 능숙하지 않은 종족이었다. 따라서 종족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너무도 쉽게 정체를 밝히는 것이 문제였따.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세라핀들은 연신 주위를 주었지만, 결국 웰디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우연히 들른 마을 여관에서 친근하게 대해준 주민이 무심코 어느 마을의 엘프냐고 물은 질문에, ‘엘프가 아니라 유니콘이다’라고 대답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세라핀들은 그 즉시 마을로 돌아가기를 권유했지만, 그녀 본인의 희망에 의해 결국 남게 되었고, 그 결과가 지금 이것이었다. 하필이면 그때 주위에 있던 인간들 중에 노예상인이 있었던 것이다. 마취액이 묻은 천에 감싸여 정신을 잃은 후 다시 눈을 떴을땐, 이미 그들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상태로 결박되어 어딘가로 옮겨지고 있는 상태였다. 세라핀들은 자신들의 무능을 탓했지만, 모든 것의 원인이 그녀 본인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웰디는 죄책감과 두려움에 더욱 더 흐느꼈다.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난 그저 모든 것이 신기했을 뿐인데… 흑흑!” 그러나 지금은 그녀의 혼잣말을 들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방금 전에는 웬 인간 여자들이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히고 몇 가지 장식을 하는 것 같더니, 그것이 끝나고 나자 또다시 텅 비어버린 방 안에 혼자 남아버린 것이다. “아렐, 카리안, 둘 다 무사하겠지? 혹시 다쳤으면 어떻하지? 흑흑!” 그녀가 이렇게 많이 울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마 평생 동안 흘려야 할 눈물을 오늘 한꺼번에 전부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웰디는 밖에서 들리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따. “으아아아악!! 싫어어어어!!” “꺄악!”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심장을 움켜잡은 그녀는 곧 방금 들은 목소리가 굉장히 낯익다고 생각했다. 바로 마차 안에 자신들과 함께 갇혀 있었던 인가, 엘의 목소리와 똑같았던 것이다. “서, 설마, 그 사람도 여기에?” 대체 무슨일이기에 저렇게 비명을 지르는 것일까? 생각만으로도 오싹해져서 웰디는 더욱 몸을 작게 웅크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있던 방 앞에서도 뭔가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쿠우웅! “꺄아악!”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린 그녀는, 덜덜 떨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당장이라도 억센 인간들의 손에 이끌려 노예로 팔려나가게 될 것 같았다.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떨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주위가 조용해진 것 같다는 생각에 웰디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때 갑자기 그녀의 앞에 드리우고 있던 휘장이 거칠게 휘익! 걷히는 것이 아닌가! 웰디는 화들짝 놀라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시끄러워.” “……!!” 그 순간, 웰디는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이곳에선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왠지 믿을 수 없는 기분에 그녀는 설마 싶은 심정으로 눈을 떴다. “아……!” 그녀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티 없이 깨끗한 새하얀 은발이었다. 쭉 뻗은 키와 잘 조화된 체격,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에 박힌 선명한 사파이어 빛의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찬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블루 엘프였다. “시벨… 리우스… 님?”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상인가. 멍하게 입을 벌리고 묻는 그녀에게, 앞에 서 있던 블루 엘프는 짜증스럽게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대답했다.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너 하나 때문에 마을이 전부 뒤집어졌다. 장로 할아범은 기절하기 직전이라고.” “저, 정말 시벨리우스님이 맞아요?!” “무슨 헛소리야? 저런 한심한 인간들에게 잡혀 있더니 그새 바보라도 된 거냐?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구라는 거야.” “흑! 흐으윽! 시벨리우스니임!! 으아아앙!!” 눈앞의 블루 엘프가 자신이 아는 그가 맞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웰디는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지난 시간 동안 겪었던 마음고생과 두려운 감정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블루 엘프로 폴리모프한 유니콘, 시벨리우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한숨ㅇ르 내쉬곤 그녀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너도 참 어지간히 사고뭉치구나. 그러게 얌전히 마을에 있었으면 좋았잖아. 아직 인간 세상에 나오기에 천 년은 이르다고.” “흑, 흐윽! 너, 너무해요. 왜 이제야 오신 거예요? 웰디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안 그래도 네가 보낸 공명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너, 나와 정신적으로 공명한다는 사실을 너무 악용하고 있는 거 아니야?” 유니콘들은 매해 검술이나 마법 시험을 통해 그해 최강의 세라핀을 뽑았다. 이렇게 뽑힌 세라핀은 신의 축복을 받아 마찬가지로 그해 최고의 여성으로 뽑힌 유니콘과 1년 동안 정신적인 공명을 할 수 있었는데, 시벨리우스와 웰디가 바로 이에 해당했다. 공명을 하는 두 존재는 서로에게 자신의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전달할 수도 있었고, 각자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가 웰디를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악용이라뇨! 제가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다 아시면서!!” “그래그래. 그런데 다른 녀석들은? 아렐과 카리안은 어디에 있지?” 당연히 암컷을 지켜야 할 두 세라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시벨리우스는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웰디 또한 당혹한 심정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저만 따로 떨어져서 이쪽으로 보내졌거든요.” “흐음, 비슷하게 생긴 천막이 여러 개던데, 죄다 돌아다녀야 하나? 귀찮게 됐군. 웰디, 넌 먼저 마을로 돌아가라. 다른 녀석들은 내가 알아서 구해갈 테니까.” 무심하게 대답한 그는 웰디의 손과 발목에 착용되었던 마나 차단용 수갑을 한 번에 끊어냈다. 착칵 소리와 함께 그동안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짐 덩이가 떨어지자 웰디의 표정은 한결 밝게 피어올랐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순순히 시벨리우스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싫어요.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 둘은 저 때문에 잡혔단 말이에요.” “무슨 소리야? 기어이 장로 할아범이 쓰러지는 꼴을 보겠단 거냐? 지금 네가 돌아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고. 얼른 돌아가는 편이 날 도와주는 거다.” “하지만…….” “라반 루 웰디! 최고의 숙녀를 뜻하는 ‘루’의 호칭을 받았다면, 조금쯤은 그에 해당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해. 언제까지 날 피곤하게 만들 셈이냐?” “윽…….” 싸늘하게 쏘아붙이는 말엔 그녀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처음부터 구구절절 옳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왕 말 하는 거, 좀 더 다정스럽게 전해줄 수는 없는 걸까. 웰디는 그것이 무척 서운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시벨리우스님은 너무 차가워요. 마치 심장이 없는 존재 같아요.” “흐응, 그렇담 지금 눈 뜨고 살아 있지도 않았겠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언제나, 늘 그래요. 무심하고, 차갑고, 무뚝뚝하고. 그래도 나는 시벨리우스님의 반려가 될 유니콘인데… 조금쯤은 자상하게 대해줄 순 없나요?” 그 말에 시벨리우스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그녀는 무언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따. 애초에 그 반려 건에 대해 자신이 동의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방금 전보다 더 딱딱한 표정이 되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장로 할아범이 멋대로 정해놓은 혼약에 책임질 의무 따윈 없어. 너도 그만 환상에서 깨어나라, 웰디. 나에게 넌 그냥 친한 여동생일 뿐이야.” “시벨리우스님!” “착각하면 너만 더 괴로워질 뿐이다. 일찌감치 다른 상대를 찾아보는 게 나을 거야. 앞으로도 내가 널 여자로 볼 일은 없을 테니까.” “…….” 한 여자로서, 좋아하는 이성에게 이보다 더 비참한 말을 들을수 있을까.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아픔이 밀려왔지만 웰디는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울어버리면 왠지 그의 말을 인정해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곧 스스로 화제를 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또다시 근처에서 낯익은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던 것이다. “으아악! 싫어! 이거 놔앗~!!” “……!!” “…뭐지?” 꽤나 처절한 외침이었기에 시벨리우스 또한 놀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웰디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그의 팔을 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 같이 구하러 가요!” “뭐?” “제가 아는 사람이에요. 마차 안에서 같이 잡혀 있었어요. 아마 그 사람도 이 근처로 끌려온 모양이에요.” “무슨 소리야, 웰디. 지금 가장 시급한 건 네가 마을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그리고 난 유니콘이 아닌 녀석의 일까지 챙겨줄 생각은 없어.” “시벨리우스님이 도와주지 않으신다면 제가 직접 가겠어요!” “웰디!!” 이건 또 무슨 고집인가. 설마 아까 일에 대한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시벨리우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는 마차 안에서 우리를 도와줬어요. 안대와 재갈을 풀어줬거든요. 덕분에 한번 도망갈 수 있는 기회를 벌기도 했으니, 이번엔 제가 도와줄 차례예요.” “하아? 진심이냐?” “물론이죠! 그러니 제발 부탁해요, 시벨리우스님! 그분을 도와주세요!” 웰디의 간곡한 표정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여자에게 약한 종족이라 이런 식으로 부탁을 해오면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후, 알았으니까 넌 여기서 기다려.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괜찮아요! 마나 차단용 수갑도 이젠 없는 걸요. 저도 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라반 루 웰디!” “싫어요! 시벨리우스님 옆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지켜주시면 되잖아요? 최강의 세라핀의 옆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말에 시벨리우스는 더 이상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쯤 되면 알아서 져주는 편이 정신건강에도 이로운 것이다. “…쯧, 알았다. 네 녀석의 고집을 누가 막겠냐. 단, 얌전히 있어야 해. 방해하면 혼날 줄 알아.” “네에!” 활기차게 대답하는 모습은 아무리 최고의 숙녀란 찬사를 받아도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저런 꼬맹이와 결혼을 하라고?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없다고 중얼거리며 시벨리우스는 천천히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막 의식이 끊기려는 찰나, 나는 휘장 밖에서 뭔가가 싸우는 듯한 둔탁한 타격음을 들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루시엘 역시 마찬가지 인 듯, 그는 드디어 목을 조르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와 함께 나는 터져 나오는 숨을 참지 못하고, 나는 연신 격한 기침을 내뱉기 시작했다. “크윽! 쿨럭! 쿨럭!” 하지만 내가 괴로워하든 말든 그들의 관심은 온통 휘장 밖을 향해 있었다. 잠시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루시엘은 곧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자칸을 향해 물었다. “방금 전에 그게 무슨 소리지?” “그, 글쎄요? 지금 나가서 살펴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된 자칸은 허리를 굽실거린 다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미처 휘장을 열기도 전에 무언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불쑥 쳐들어왔다. 쿠웅! 우당탕 쿵탕!! “으, 으악! 뭐, 뭐야?” “……!!”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그것도 전신을 흠씬 두드려 맞은 것처럼 멍과 핏물로 범벅되어진. “으으, 크으윽……!” 아는 사람이었던 듯, 신음을 흘리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자칸은 곧 휘둥그렇게 떠진 눈으로 소리쳤다. “아니, 넌 뭐야! 이 천막의 보초를 서는 녀석이잖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어, 어서… 피, 피하십… 크흑!” “뭐?” 하지만 남자의 경고는 한참이나 늦은 감이 있었다. 자칸이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코앞에 누군가의 주먹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퍼억! 콰앙! “크아악!” “…약하군.” 한 방에 자칸을 날려버린 남자는 너무 쉽게 쓰러지는 게 불만이라는 듯, 낮게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왠지 어디선가 들었던 것처럼 굉장히 낯익었다. 설마 싶은 생각에 고개를 든 나는, 그대로 멍하게 입을 벌릴 수 밖에 없었다. 허리까지 흘러내린 새하얀 은발과, 푸른 눈동자를 지닌 블루엘프!! 바로 시벨리우스가 내 눈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헉… 정말 시벨리우스?’ 아무리 뚫어지게 살펴보고 두 눈을 깜빡거려도, 그것은 틀림없는 시벨리우스 였다. 그 순간, 놀라서 입만 뻐끔뻐끔거리고 있는 나를 본 녀석은, 왜인지 살짝 굳어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냐, 웰디? 너를 도와줬다는 인간이?” “……!!” 그제야 나는 그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뒤에서 조심스럽게 휘장을 젖히고 들어오는 사람은 이곳에 오기 전 마차 안에서 만났던, 여성 유니콘인 ‘라반 루 웰디’였다. 나를 보며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는 곧 환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맞는 것 같아요!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금발이었거든요!” “흐응, 그럼 저건 또 뭐지?” 녀석이 턱 끝으로 가리킨 것은 어느새 한 손에 검을 쥐고 있는 루시엘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이 방해받은 것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너는 누구냐?” “그러는 댁은 누구지?” “질문한 것은 내가 먼저다. 너는 누군데 이곳에 와서 소란을 피우는 거지? 처벌이 두렵지 않은가?” “처벌? 킥킥! 내 살다 살다 별 소리를 다 듣는군.” 낮게 중얼거린 시벨리우스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루시엘의 눈동자에 옅은 살기가 감돌았다. 한동안 살벌한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노려보던 그는 문득 옆에 있던 웰디에게 시선을 미치고는 짐작이 간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평범한 블루 엘프가 아니군. 설마 유니콘인가?” “호오, 정답!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 “은발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유니콘 여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동료를 구하러 왔다면 얌전히 그들만 데리고 돌아갈 것이지, 왜 이쪽의 일까지 참견하는 거지?” “아아, 여기있는 이 아가씨가 꼭 도와줘야 한다고 해서 말이야. 우리 유니콘들은 여성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거든.” 웰디를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모습이, 정녕 내가 아는 ‘그’ 시벨리우스가 맞는지 의심스러워졌다. 언제나 어린애 같았던 녀석이 여기서는 ‘무려’ 냉소적인데다 어른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눈앞의 적이 ‘유니콘’이라는 사실은 루시엘의 사기를 한층 가라앉게 만든 것 같았다. 잠시 입술을 깨물며 나와 시벨리우스의 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를 향해 물었다. “운이 좋은 아이로군. 결국 무슨 사술을 쓴 건지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이 빚은 나중에 받도록 하겠다. 네 이름은 뮈지?” “…엘.” “엘이라… 기억해두겠다. 명심해라. 네가 다음에 또 나를 만나게 된다면, 그땐 이렇게 쉽게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반사다, 이 자식아.” 그러자 내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녀석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곧 아무렴 어떠냐 싶었는지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따.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기가 살아 있군. 아무래도 너와는 또 만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난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내 앞에 다시 나타나면 죽여 버릴 거다.” “하하하! 기대하지. 단, 실패하면 그때야말로 팔다리의 힘줄이 끊기는 것을 각오해야 할 거다.” “……!!” 크아악! 얄미운 자식! 엘뤼엔보다 잘 생기지도 않은 주제에(?) 폼만 더럽게 잡기는!! ‘가다가 줄에 걸려 자빠져랏!!’ 나는 여유롭게 빠져나가는 루시엘의 등 뒤를 향해 몇 번이고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었다. 그래봤자 이 세상에서 이 뜻을 알고 있는 존재는 라피스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놈의 정령왕들은 또 어디로 사라진 거야?’ 야속한 두 정령왕은 이번에도 먼저 돌아가 버린 듯했다. 안 그래도 배고파서 예민해져 있는 신경에 방금 전에 겪은 일까지,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히스테릭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결국 이 끓어오르는 화는 애꿎은 곳에서 분출되고 말았다. 바로 유심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시벨리우스에게 향했던 것이다. “뭘 봐? 먹을 거 안 줄 거면 꺼져. 쳐다보기도 귀찮아!” “……뭐?” 황당하다는 듯이 되묻는 말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삼킬 수도 없는 지라 나는 그저 홱 하고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그러자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시선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무래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것 같아요, 시벨리우스님. 무리도 아니죠. 목의 자국을 보세요. 굉장히 끔찍한 일을 당한 게 틀림없어요.” “…….” 당황한 웰디가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했으나 시벨리우스의 굳은 표정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모처럼 구해준 녀석이 고맙다는 말은 커녕 다짜고짜 신경질을 냈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녀석은 잠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갑자기 휙 하고 휘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웰디 역시 당황한 얼굴로 쪼르륵 그의 뒤를 쫓아 갔다. 설마 삐쳐서 가려는 건가? 그제야 ‘내가 왜 그랬지’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쏟아진 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모처럼 만난 건데 이렇게 헤어지게 되다니… 나란 녀석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잠시 한숨을 푸욱 내쉰 나는 여전히 팔다리에 고스란히 채워진 수갑을 보며 나직이 투덜거렸다. ‘이왕 갈 거면 이거라도 풀어주고 가지. 으음, 그건 너무 염치 없나?’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수갑을 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다. 끙끙거리며 손가락으로 간신히 틈을 벌리는 것에 성공한 찰나, 갑자기 불쑥 나타난 커다란 손이 턱 하고 그것을 방해했다. 그리곤 내가 미처 상황을 판단하기도 전에 철컥! 하고 너무도 간단히 풀어내는 것이 아닌가? “…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든 나는 수갑을 풀어준 사람이 시벨리우스라는 것을 깨닫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그것도 모자라 녀석은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커다란 빵바구니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먹을거다. 가져왔으니까 이젠 안 가도 되지?” “에에?” “왜? 부족한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아까 사라진 이유가 정말로 먹을 것을 가지러 갔던 거야? 황당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본 나는 고맙다는 말조차 잊을 정도로 당황해 있었다. 화나서 가버린 줄 알았던 녀석이 이런 걸 가져올 것이라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뒤따라갔던 웰디 역시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음, 일단 고맙게 먹을게…….” 끄덕끄덕.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4천 년 후의 그와 판박이였지만, 방금 전에 보았던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는 너무 상반된 것이라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설마 여기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잠시 의심스러운 얼굴로 빵을 노려본 나는 조심스럽게 한입 베어 물었다. 목을 졸린 충격 탓인지 미각이 둔해져 무슨 맛인지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너무 오랜만에 먹는 음식이라 그 순간 자체가 감격이 될 정도였다. 뭔가를 씹어본 게 얼마만이더라? 얼추 잡아도 대강 사흘은 넘긴 것 같다. 진즉에 탈진하지 않고 이때까지 버티고 있는 내 체력에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몇 분 동안 내가 먹는 모습만을 유심히 바라보던 시벨리우스는 잠시 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건넸다. “이름이 엘이라고?” “아아, 응. 넌 시벨리우스지?” “어떻게 알았어?” “아, 그게… 옆에 있는 웰디 양이 마차에서 한 얘기를 들었거든. 왕자님이라며?” “쿡! 그냥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야. 실질적인 통치권은 장로에게 있으니, 오히려 그의 손녀인 웰디가 공주님이라고 할 수 있지.” 오오, 그렇군. 하긴, 겉으로 보기에도 웰디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도도한 이미지의 숙녀였다. 겉모습 하나만으로 충분히 사랑받고 자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정도다. 시벨과 같은 은발인데다 눈동자 색깔만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나뉘어져, 이렇게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결말이 비극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저 소녀와의 혼담을 거절한 일 때문에 서클렛에 갇힌 거였지. 아마?’ 그러고 보니 그 장로란 유니콘도 참으로 사악한 종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녀를 거절한단 이유로 상징적인 ‘왕자’를 봉인시키다니. 그게 제정신으로 할 일인가? 왠지 지금까지의 시벨리우스도 그리 평탄한 삶을 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심각하게 바라보는 내게 녀석은 즐거운 기색으로 또 다른 질문을 건넸다. “빵 맛있어?” “응! 정말 맛있다. 사실 지금이라면 돌이라도 씹어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하하! 역시 사람은 제대로 된 요리를 먹어야 돼.” “되게 배고팠던 모양이네?” “말도 마. 거의 아사 직전이었다고. 아무리 도망치려고 했어도 그렇지, 어떻게 인간을 생으로 굶길 수 있지?” “생으로 굶겨? 흐음, 음식을 굉장히 오랜만에 먹는 건가 보지?”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납치된 이후로 처음이라면 믿겠어? 하긴 뭐, 그전에도 그다지 제대로 된 음식을 먹ㅁ은 지는 오래됐어. 육포로 때울 때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왜?” “왜냐니! 당연히 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서지. 이제라도 슬슬 배워야 할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야.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할 것 같으니.” “흐응, 그렇군.” 그 밖에도 녀석은 이것저것 질문을 건네며 내게 여러가지 대화를 시도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졸음이 밀려와, 종래에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나는 비몽사몽하는 상태에서, 시벨리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뜬금없을 한마디를 내뱉었다. “…졸려.” “어? 졸리다고?” “미안한데, 나 잠깐만 눈 좀 붙일게…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 시벨… 잘 가…….” “뭐? 이, 이봐! 이런데서 자면…….” 당황하는 목소리를 뒷전으로 한 나는 그대로 푹신한 쿠션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건 정말로 정신 나간 일이었다. 노예시장 안에서 도망치지도 않고 그대로 떡하니 누워 잠들다니! 다시 잡아달라는 소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졸린 나머지 내가 처한 상황이나 주위환경이 어찌되었든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마도 굶주린 몸에 오랜만에 먹ㅁ을 것이 들어가니, 예민해져 있던 신경이 안정이 되어 그것이 한꺼번에 잠으로 쏟아진 듯했다. 아무튼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웬 낯선 여관의 침대에 누워 있는 상태였고, 그 옆엔 트로웰과 엘뤼엔이 서서 내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들은 약간의 핀잔을 담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드디어 일어났냐?” “잠자는 공주님이 깨어나셨군. 기분은 어때?” “어? 엘뤼엔? 트로웰? 여긴 어디야? 내가 왜…….” “어디긴 어디야. 세이크 제국의 수도 내성에 있는 여관이지. 너 이틀 내내 잠들어 있었어. 기억이 안 나?” “엑? 이틀? 되게 오래도 잤네. 둘이 직접 노예시장에서 데려와 준 거야? 시벨리우스… 아니, 그때 있던 유니콘들은?” 그 말에 트로웰은 다시 마을로 돌아갔다고 대답했다. 떠나기 전에 ‘다음에 다시 보자’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했다나? 꽤나 오랜만의 재회(?)였는데,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진 것에 무척 아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더 묻고 싶은게 있었지만, 트로웰이 그에 대한 대화를 꺼리는 기색이라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흐음, 그나저나… 어째 몸이 훨훨 날아갈 것 같은데?’ 그동안 나름대로 고생이 많았던 것치곤 나의 온몸은 이상할 정도로 상쾌한 상태였다. 아마 잠들어 있던 사이에 엘뤼엔이 치유술을 시전해준 모양이다. 그 증거로 지금쯤 검붉게 남아 있어야 했을 목의 손자국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엘퀴네스의 치유력은 대단하구나! 그 순간, 옅은 감탄을 내뱉으며 신기한 얼굴로 요리조리 살펴보는 내게, 뜬금없는 트로웰의 사과가 이어졌다. “미안해, 엘. 그때 도와주지 않아서.” “응? 아, 아니. 뭘 새삼스럽게?” “실은 도와줄 수도 있었는데, 내가 그렇게 하지 말자고 했어. 그 편이 네 훈련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뭐, 이젠 충분히 질렸을 테지? 그러니 이쯤 하도록 하자. 검술 훈련도, 나와의 거래도.“ “거래도 라니… 설마 1년 후의 그 일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트로웰? 여, 역시 설득이 안 돼?” 생각해보니 이번 노예상인 사건은 그나마 좋아졌을지도 모를 인간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쓰레기 같은 녀석들만 있었지 않은가(막판의 루시엘이 가장 하이라이트였지만)! 하지만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 너는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잠깐이나마 함께 여행 다녔던 정이 있어서인지 너에 대해선 꽤 좋은 인상을 받았거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거래를 취소한다는 건, 같이 여행을 다니지도 않겠다는 소리지? 혹시 내가 뭘 잘못했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왜?” 간절하게 바라보는 내 얼굴에 트로웰은 잠시 곤란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한참 후, 그는 내키지 않는 듯한 어조로 떨떠름하게 물었다. “내가 싫어지지 않아?”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내가 생각해도 꽤 심하게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데, 넌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게 아무래도 이해할 수가 없어. 넌 이대로도 괜찮다는 거야?” “음… 그, 글쎄? 난 별로 상관없는데?” “왜지? 앞으로도 난 계속 널 모른 척할 거야. 이번에 일어난 일보다 더한 상황이 와도 알아서 해결하라고 내버려둘 거고. 다음번엔 엘퀴네스가 도와주려는 것까지 막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다고?” “… 아하하! 물론 힘들기야 하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그건 내가 아직 트로웰에게 그만큼의 의미가 못 된다는 뜻이니까 말이야. 정말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면 위험한 순간이 왔을 때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도와주게 될 걸? 결국 아직 내가 그만큼 너를 설득하지 못했단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내 대답을 들은 트로웰은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에게서는 흔히 보기 힘든 장면임이 틀림없었다 (어찌된 일인지 엘뤼엔도 덩달아 심각해져 있었지만.). “그럼 너는 계속 내기를 지속하자는 거야?” “당연하지!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썩은 무라도 잘라야하는 법!” “후우, 그러다 끝까지 설득하지 못하면 어쩌려고? 말해두지만 1년 후에는 정말 봐줄 생각이 없어. 기회는 지금뿐이야.” 글쎄, 지금 이런 식으로 걱정하는 것이 이미 반쯤은 넘어왔다는 뜻이 아닐까? 하지만 이 말은 얼른 마음속으로 삼켰다. 고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미리 적에게 알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후후후! 왠지 즐거워지는 기분에 나는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네가 상냥하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마을로 돌아온 이후, 시벨리우스는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는 일이 많아졌다. 평소에도 워낙 말이 없는 타입이기도 했고 다른 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없는 편이긴 했지만, 요근래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고민이 있는 사람 같다고 할까? 이따금씩 웰디가 그의 감정과 공명해보려 했지만, 읽을 수 있는 것은 온통 ‘혼란스럽다’는 것뿐. 그의 근본적인 고민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노예시장에서 ‘엘’이란 인간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였다. 별로 특이할 것도 없었던 그 잠깐의 만남이 시벨리우스에게 무슨 영향을 준 것일까? 왠지 걱정이 된 웰디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저어, 시벨리우스님?” “…….” “시벨리우스님! 제 말 안 들리세요?” “…으응? 아, 미안, 웰디. 뭐라고 했어?” “핏, 뭐예요. 요즘 시벨리우스님은 이상해요. 마치 영혼을 딴데 두고 온 것 같다구요.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는 얼른 고개를 저었지만, 웰디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더욱 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혹시 그때 만났던 엘이란 인간 때문에 그런 건가요?” “무, 무슨 소리야?” “그렇잖아요! 그때 이후로 시벨리우스님은 항상 넋이 빠져 계신다고요. 대체 뭐가 문제예요? 엘이란 아이는 그의 동료가 무사히 데려갔잖아요?” 그랬다. 대화 중에 갑자기 잠들어버린 엘의 모습에 당황해 하던 순간, 갑자기 나타나 그를 안아 올린 것은 검은색 피부를 가진 매혹적인 분위기의 소년이었다. 그대로 말없이 돌아서는 소년의 모습에 시벨리우스는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소년의 입에서 그가 하고 싶은 말이 나왔을 때는 너무 놀라서 혀를 깨물 뻔했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은 전해주지. 그 외에는 기대하지 마.” “……!!” 지금 생각해보면 그 소년은 마치 자신의 마음속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았다. 마치 정령왕 트로웰처럼 말이다. 게다가 인상착의도 꽤나 비슷하지 않았던가. 만약 자신의 생각이 맞다면 그 둘은 틀림없이 계약관계일 것이다. 마침 엘 스스로도 자신을 정령사라고 밝힌 전적이 있다고 들었다. ‘요 근래 땅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있었던가?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닌 걸지도.’ 드래곤 중에서도 얼마든지 인간으로 폴리모프가 가능하니, 무조건 인간이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다. 하지만 보통 드래곤이 아사 직전까지 간다는 게 말이 되나? 이런 식으로 또 그의 상념이 길어지자 웰디는 분통이 터질 수 밖에 없었다. “시벨리우스님! 정말 자꾸 이러실 거예요?” “아아, 미안. 휴. 어디까지 얘기했지?” “몰라요! 시벨리우스님, 정말 나빠요. 이런식으로 매일 멍해 있으시려면 차라리 유희라도 떠나시는게 더 낫겠어요! 아무런 의욕이 없어 보이잖아요, 의욕이!” “유희?!” ‘이거다!’ 그 순간, 시벨리우스는 머릿속이 뻥 뚫리는 듯한 상쾌함을 느꼈다. 지금까지 고민하고 답답해하던 모든 일이 마치 이것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벙찐 웰디를 향해 말했다. “고맙다, 웰디! 네 덕분에 방향을 찾았어.” “무,무슨… 서, 설마 정말 유희를 나가시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 그럴 생각이야. 역시 너무 마을 안에서만 지내는 건 정신 건강에 나쁜 것 같아.” “안 돼요!! 그, 그런 일… 할아버님이 허락하실 리가 없어요! 시벨리우스님은 성스런 피를 잇는 제1계승자라구요! 마을 밖에 나가셔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시면…….” “웰디! 유니콘 종족 최강의 세라핀이 누구지?” “윽! 그, 그야 물론 시벨리우스님이시지만.” 이제 웰디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겠다는 일념에 그녀는 고집스럽게 소리쳤다. “할아버님께 말씀드려서 막을 거예요! 시벨리우스님이 떠나지 못하게 막을 거라구요!”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그 할아범한테 허락받고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네, 네에? 설마 가출을 하시겠다는 소리세요?” “이왕이면 출가라고 해줘.” 맙소사! 웰디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정신이 아니다. 뜬금없는 유희선언으로도 모자라서 가출을 하겠다고? 그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체 유희를 나가서 뭘 하시려고요?” “그야 당연히 배워야지.” “배운다고요? 시벨리우스님은 이미 마법이나 검술 면에서 모두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계시잖아요! 거기서 더 이상 무엇을 배우시려고요?” “요리.” “…네?” 순간, 웰디는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대답이 나올 수 있는가. 멍하게 되묻는 그녀에게 시벨리우스는 마치 쐐기를 박듯,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대답해주었다. “요리 말이다. 음식 만드는 거 몰라? 바로 그걸 배울 생각이야.” 그래서 엘이란 아이에게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만들어줘야지. 이어지는 뒷말은 가슴속에 묻으며 시벨리우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난 요리사가 될 거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엘을 ‘소녀’로 착각했기에 가능한 이야기. 이것이 바로 성스러운 피를 잇는 제1계승자! 유니콘의 귀공자 시벨리우스가 어이없는 가출을 결심하게 된 유일한 동기였다. 정령왕 엘퀴네스 11권 1. 검술대회 정신을 차린 뒤 나는 곧바로 노예상인들에게 복수하러 가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놈들이 유니콘을 놓쳤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모든 축제를 철거하고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유니콘은 드래곤 못지않게 마법실력이 뛰어난 종족이라, 행여 놓치는 일이 생기면 곧바로 도망을 가야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 사로잡은 유니콘 중에선 암컷도 있었으니, 목숨을 보존하려면 몸을 숨기는 0방법 밖에 없을 것이다. 단, 망각이 없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려면 앞으로 평생 도망 다녀야 할 테지만. 나는 아쉬운 기분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그렇게 뒤 끝이 나쁠 걸 알면서 유니콘은 왜 사냥하는 거지? 사가는 사람도 이상해. 나중에 놓치게 되면 복수하러 올게 뻔한데.” “이번 녀석들이 너무 방심한 거다. 보통은 유니콘을 사로잡자마자 환상마법을 걸어서 충실한 노예로서의 기억을 덧입히지. 외모도 뛰어나고 마법 실력까지 출중한 노예를 가지게 되는 건데 그 정도 모험은 감수하지 않겠나?” “헉, 그게 정말이야?” 엘뤼엔의 대답에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트로웰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맞아. 그래서 나중에 구출당해 마법에서 풀리게 되도 수치심을 못 이겨 자살하는 유니콘이 많아.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간들에게 너무 잘 속아 넘어가는 게 문제인 종족이지.” “그럴 수가…. 무슨 대처할 방법 같은 건 없는 거야?” “타고난 본성을 바꿀 수 없는 이상 어쩔 수 없어. 어차피 유니콘은 신수(神獸)니까 신계로 돌아가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해. 아마 지금쯤 슬슬 건의가 나오고 있을 걸?” “으음.” 누구 못지않게 강한 종족이지만, 드래곤이 인간의 오만을 비웃으며 즐기는 쪽이라면, 그들은 외면하며 피하려는 쪽이었다. 남에게 이용당하기 쉬운 성격에 높은 자존심까지 가지고 있으니, 중간계의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 것 치곤 시벨리우스는 너무 잘 적응하는 것 같았지만. “아참, 그나저나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 “문제라니?” “우리가 만나러 온 블루 드래곤 말이야. 여기 수도에 있는 건 확실한데 정상적인 방법으로 만나기가 좀 힘들 것 같아.” “왜?” 수도에 오면 당연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던 나는 트로웰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그 대답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엘뤼엔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녀석이 이번 유희를 귀족으로 설정했다. 그것도 꽤나 세력가의 수장인 것 같더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인데?” “끝까지 들어. 그 썩을 놈은 용건이 있으면 자신의 유희에 맞춰서 찾아오라는 주의다. 즉 지금부터 너는 나와 친분이 있는 드래곤이 아닌, 세이크 제국의 세도 있는 귀족가의 수장을 찾아가야 한다는 소리지. 놈이 평민인 너를 순순히 만나줄 거라 생각하나?” “그, 그렇다고 그냥 포기할 수도 없잖아.” 반쯤은 억울한 심정으로 대답하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동조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 그래서 그를 만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을 알아봤어. 첫째는 네가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인간들에게 밝히는 거야.” “뭐?” 그 말에 엘뤼엔은 인상을 팍 찡그렸고 난 뜨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트로웰은 쿡쿡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정령왕과 계약한 존재는 인간세계에서 꽤 큰 특전이 있거든. 적어도 남들 앞에서 굴하지 않을 정도의 대단한 뒷배경으로 작용할 수 있지. 귀족을 상대하기에도 무리 없을 거야. 하지만 그만큼 귀찮아 지는 것도 감수해야 돼.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을 테니까.” “그, 그럼 두 번째는?” “간단해. 한 밤중에 몰래 담을 넘어가서 만나는 거지. 단, 이중 삼중의 철저한 방어벽과 알람마법을 무사히 피할 수 있다면 말이지만.” “윽. 다른 방법은 없어?” “흠. 이것도 마음에 안 들어? 그렇담 마지막 방법밖에 없네. 세 번째는…이거야.” 품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종이를 꺼낸 트로웰은 내 앞에 그것을 활짝 펼쳐 보였다. 조만간 이 근처에서 어떤 대규모의 행사가 열리는 모양인데, 그에 대한 간단한 날짜와 일정, 그리고 몇 가지 주의사항이 적힌 안내문이었다. “이번에 녀석의 가문에서 주체하는 검술대회가 열리더군. 그 대회에 참가해서 우승하는 방법이야. 그럼 1:1로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거든.” “!!” 제국의 실력 있는 검사를 선발하여 상을 주기 위해 만든 행사이기 때문에, 평민도 참여할 수 있고 뒤탈이 없다는 것이 대략의 설명이었다. 우승이라는 제약이 있긴 했지만, 앞서 제시한 방법 중에선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이기도 했다. 내가 종이를 든 채 머뭇거리자 트로웰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말했다. “뭐, 편하게 생각해. 어차피 검술을 배우는 김에 목표를 세우는 셈 치면 되니까. 일석이조잖아?” “그야 그렇지만…내가 우승할 수 있을까?” “누구한테 배우는 건데, 그야 당연하지. 물론 지금 이대론 안 돼. 넌 아직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거든. 대회가 열리는 게 언제지?” “으음. 두 달 후 같은데?” “그 정도면 충분해. 그 사이 내가 너의 결점을 완벽하게 보완해 주지.” 왜 그 말이 사형선고를 받는 것처럼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을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한 그는 제일 먼저 훈련장소를 물색하러 다녔다. 지금까지는 대충대충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공터에서 수련하며 여관을 오갔지만, 단기간에 실력을 향상시키는 만큼 검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그렇게 사라진 트로웰은 정확히 이틀 후에 커다란 자루를 메고 나타났다. “수련 장소를 마련했어. 이제 출발하자.” “지금 당장? 등에 메고 있는 자루는 뭐야?” “아, 이거? 두 달 동안 네가 먹을 식량이야. 앞으론 마을에 오지 않고 거기서 수련하면서 의식주까지 해결해야 하거든.” “대, 대체 거기가 어딘데? 설마 두 달 내내 노숙하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그건 가보면 알아.” 의미심장한 대답에 흠칫하던 것도 잠시. 반항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트로웰의 표정에 나는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따라 도착한 장소를 본 순간 나는 황당함에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저기 트로웰…정말 여기야?” “응.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문제가 아니라…여기서 어떻게 해?” 그곳은 거대한 산맥 사이에 뻗어진 높다란 벼랑 밑이었다. 문제는 정말 그 뿐이라는 것이었다. 아슬아슬하게 지나갈 수 있는 길 외에는 수련을 할 만한 기본적인 공간조차 없었던 것이다. ‘이런 곳에서 대체 뭘 하라는 거지?’ 설마 벼랑 위쪽을 말하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들어봤지만, 온통 뾰족하게 치솟은 바윗덩어리들밖에 보이지 않았다. 내 표정이 암담하게 변하자, 트로웰은 킥킥 웃으며 대답했다. “나참. 날 뭘 로 보는 거야? 당연히 생각해 둔 게 있지.” “그, 그게 뭔데?” 이에 그는 자신이 몸소 시범을 보임으로서 모든 의문을 해소시켰다. 바로, 눈앞의 벼랑 속을 스윽-통과하여 들어갔던 것이다. “!!” “뭐해? 들어오지 않고. 수련 장소는 이 안이야.” “드, 들어가라고?” “응. 괜찮으니까 나처럼 들어와 봐. 노움들이 길을 터 줄 거야.” 그의 말처럼 내가 벼랑에 접근하는 순간, 흙속에 파묻혀있던 노움들이 다닥다닥 내 몸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 덕에 나는 땅의 정령이라도 된 마냥 자연스럽게 흙벽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눈앞에 드러난 광경에 나는 또다시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벼랑 속에 들어왔다고는 믿기 힘들만큼 야구장만큼이나 넓은 공터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닥은 돌부리 하나 없이 완벽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하늘은 뻥 뚫려 있어 답답한 느낌도 들지 않았다. 게다가 한 구석엔 식생활을 할 수 있는 나무 판자집까지 갖추어져, 그야말로 속세를 잊고(?) 수련에 집중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거의 취미로 검을 배우는 내가 사용하기엔 과분할 정도다. “정말 대단하다. 설마 트로웰이 직접 만든 거야?”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했겠어? 쭉 둘러봤는데, 이 주변엔 그다지 마음에 드는 장소가 없었거든. 직접 만드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야.” “헤에. 정말 고마워, 트로웰.” “감사인사는 말보단 수련의 성취도로 보여 달라고. 애써 만든 훈련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진 않겠지?” “아하하, 무, 물론이지.” 활활 타오르는 눈빛을 보니, 만약 두 달 후의 검술대회에서 우승을 하지 못하면 당장 이 훈련장과 함께 매장시켜 버릴 것 같았다. 어쨌든 그날 이후 트로웰의 훈련방법은 이전과 판이하게 달라졌다. 실전을 방불케 하던 대련이 아닌, 찌르기나 정면 베기 같은 기초 동작부터 반복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물론 중량화 마법이 걸린 팔찌도 다시 착용했다.) 그는 한 동작을 몇 천 번씩 정확하게 펼칠 것을 강조하며, 하루에 한 개씩의 새로운 동작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배운 것은 모두 그동안의 대련을 통해 저절로 알게 됐지만, 정확한 동작이나 명칭은 모르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런 식으로 하루를 꼬박 검을 휘두르고 나면 마지막엔 그날 배운 동작만을 사용하여 트로웰과 대련하는 시간을 가졌다. 단, 그는 일절 반격을 하지 않고 방어만으로 내 공격을 유도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살벌한 검을 막기에 급급하던 때보다 더 힘들었다. 챙! 채앵! 휙! 부웅! “정신 차려, 엘! 또 움직임이 멈추었잖아!” “윽! 미안…” “사과는 집어치워! 검 끝을 정확히 하라고 늘 강조했지? 이런 식으론 상처를 입혀도 치명상이 안 된다고! 팔에 더 힘을 실어. 정확히 찌르지 않으면 가만히 안 둘 거다.” 끄덕끄덕. 서늘하게 굳은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등 뒤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이번에도 공격이 실패하면 정말 가만히 두지 않을 기세였다. 그가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도 당연했다. 내가 매일 그와의 대련 때마다 공격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완전한 타인을 찌르는 것과 아는 사람을 찌르는 것은 느낌이 너무 달랐고, 나는 좀처럼 둘의 갭에 적응하질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트로웰은 조금도 봐주지 않았다. “어리광 피우지마! 이건 실전이 아니라 대련이야! 죽이려고 하는 싸움이 아니라고! 구분을 똑바로 해!” “그, 그야…” “잘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런 것치곤 너무 몸을 사리는 걸? 내가 다치는 게 무서운 거야, 아니면 그 때문에 네 마음이 다치는 게 무서운 거야?” “!!” 정곡을 찌르는 트로웰의 말에 나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어쩌면 난 친구를 공격하는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짐작 가는 부분도 있었다.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거다. 언제고 화가 난 내가 시벨리우스에게 얼음창을 드밀었던 때. 굳어버린 일행들의 얼굴을 보며 왠지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속이 편치 못했었다. 지금 내가 공격을 망설이는 건 또다시 그때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트로웰은 그런 내 모습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잡념은 그만두고 오직 이기는 것만 생각해. 똑바로 임하지 않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인다. 나를 화나게 만들지 마. 알았어?” 오늘도 어김없이 날아드는 질책에 기죽으며, 나는 몇 번이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그렇게 쭈욱 임하던 대련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간신히 끝을 맺었고,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항상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이런 식의 훈련방식은 꼬박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검술대회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트로웰은 이전보다 더욱 대련 시간을 늘렸다. 아무리 힘들어도 엘뤼엔의 치료한방이면 원상태로 복구가 돼버렸기 때문에, 식사와 잠자는 시간을 빼면 하루 종일 검을 들고 훈련하는 일정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혹사당하는데도 근육이 안 붙다니, 너란 녀석도 참 괴물이군.” 그렇게 지옥 같은 매일 매일을 보내던 어느 날. 내가 혼자서 수련하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던 엘뤼엔이 문득 무료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그 부분에 잔뜩 실망하고 있던 나는 꽥하고 소리쳤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그저 사실을 말한 것뿐이다. 시비를 걸었다면 어쩔 거지? 나에게 결투라도 신청하겠다고?” “쳇, 까짓 거 못할 것도 없지!” “호오, 용기는 가상하다만…후회할 텐데?” 그렇게 말하며 씩 입꼬리를 올리는 엘뤼엔의 모습은, 분명 웃는 얼굴이었는데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게다가 한손에 냉큼 물로 된 검을 만드는 것을 보니, 정말로 결투라도 벌일 작정이 아닌가! 그 상태로 성큼 걸어오는 모습에 경악한 나는 뒤로 움찔 물러서며 소리쳤다. “자, 잠깐! 설마 정말 싸우려고?” “왜? 그걸 원하는 게 아니었나? 말해두지만 난 트로웰처럼 봐줄 생각은 없다.” “아하하…아버지, 너무 흥분하셨음다. 지, 진정을…” 당신 자식을 패륜아로 만들 셈이야?! 하지만 엘뤼엔은 이미 결심을 완전히 굳힌 듯 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아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로 만들어진 검이라고 만만히 보았다간 크게 다칠 거다. 네가 들고 있는 진검보다 더 단단하고 날카로우니까 말이야.” “그야 나도 알지만…으윽! 왜 얘기가 이렇게 되는 거야!” “훗, 감히 내게 덤빌 마음을 품은 벌이라고 생각해라. 이참에 누가 우위에 있는지 확실하게 깨닫게 해주지.” 아무래도 내가 그냥 농담 삼아 해봤던 소리가 그의 자존심을 건들인 모양이다. 시퍼렇게 피어오르는 살기와 상반되는, 무척이나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엘뤼엔의 얼굴을 보며 나는 낭패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그는 그만 둘 생각이 없어보였지만. 아무튼 그날 나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더 알게 되었다. 바로 그가 굉장한 검술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퍽! 채앵! 휘익! 퍼어어어억! “히익!, 자 잠깐만!! 으악! 머, 멈추라니까!!” “그렇게 떠드는 사이에 피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큭!” 현란하게 몰아치는 검기는 살짝만 스쳐도 피부에 깊은 생채기를 만들었다. 봐주지 않겠다고 하더니 엘뤼엔은 정말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몰아붙였다. 그나마 피할 여유를 허락하는 걸 보아 죽일 생각까진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랄까. 휘이익! 챙!! 콰앙! “꾸엑!” 철퍼덕! 요리조리 피하던 것이 드디어 한계에 이르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엘뤼엔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막상 맞부딪히는 순간, 나는 순수한 압력만으로 저만치 밀려나 바닥에 대자(大)로 엎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공격을 멈춘 엘뤼엔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꼴불견이다. 어서 일어나라.” “우에에에~~~!!” 아무리 추하게 넘어졌기로서니 꼴불견이라니! 그동안 엘뤼엔은 숨소리는커녕, 치렁치렁 기른 머리카락조차 흐트러지지 않았다. 내 사력을 다한 전투도 그에겐 식후의 간단한 운동보다 못한 듯 했다. 하긴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 이제 겨우 검술을 배운지 1년도 안 되는 녀석(바로 나다)한테 지겠는가? “어어? 지금 둘이 뭐하고 있는 거야?” 그때 마침 자리를 비우고 있던 트로웰이 돌아와 이 장면을 발견했다. 그는 바닥에 엎어져 있는 나를 보고 대충의 상황을 짐작한 듯, 나무라는 시선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애를 데리고 장난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니야, 엘퀴네스? 온 몸이 상처투성이잖아.” “흐응. 그냥 가볍게 경고를 했을 뿐이다. 너무 쉽게 쓰러지니 싱거울 정도군.” “검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하지. 그런데 경고라니?” 트로웰이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더니 삐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요즘 이 녀석이 나를 만만히 생각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훈계를 해준 것뿐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후후. 그저 엘에게 마음을 열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고? 내가 보기엔 억지로 벽을 쌓으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그게 무슨 뜻이지?” “글쎄…. 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잖아?” 순간 파지지직!하고 두 정령왕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나누다가 난데없이 전투태세라니. 도대체가 이 둘은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다. 덕분에 중간에 낀 나만 일어날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뻘쭘하게 누워서 눈치만 보게 되었지 않은가! 그렇게 한참동안 무서운 얼굴로 트로웰을 노려보던 엘뤼엔은 곧 휙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정령계로 돌아가 버린 듯 했다. 하지만 당황한 나와 달리 트로웰은 이미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아, 가버렸다. 원래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날 역소환 시켰을 텐데. 그냥 말없이 물러서다니, 역시 변했어.” “…여, 역소환? 같은 정령왕을?” “아아. 기분 나쁠 땐 동료고 뭐고 없거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알지? 그 녀석은 거의 소멸할 뻔 했었어. 나와 미네르바가 말려서 간신히 불의영역이 붕괴하는 걸로 그치긴 했지만. 뭐, 이렇게 말해도 넌 이해 못하겠지? 요즘의 그는 평소와 굉장히 다르니까.” “아하하하…” 장난스럽게 묻는 말에 나는 그저 허무한 웃음만 흘렸다. 이전에도 귀가 따갑게 들었던 악명이지만, 막상 이곳에서 만난 엘뤼엔은 조금 퉁명스럽다는 것 외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그동안 소문이 와전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평소와 다른 상태였다니! 새삼 내가 얼마나 대담한 짓을 했는지 실감이 들었다. 잠시 후 트로웰은 내 몸을 부축하며 일으킨 다음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쨌든 무모했어. 왜 엘퀴네스에게 시비를 건거야? 그는 나보다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지금의 네가 도전할 상대가 아니야.” “엑? 엘뤼엔이 트로웰보다 강하다고?” “당연하지. 각 정령왕들은 속성마다 능력치가 약간씩 달라. 나와 미네르바는 방어에 강한편이고, 이프리트는 공격력이 높지. 엘퀴네스는 방어와 공격 둘 다 월등한 편이야. 인간들로 치면 그랜드 소드 마스터 급이라고.” “그, 그랜드으?” 내가 떡하고 입을 벌리자 트로웰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냥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 아무리 그래도 엘퀴네스가 직접 검을 드는 일은 거의 없는데, 이번엔 너에게 시범을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군.” “시범이라니?” “음…검사들은 자신보다 월등히 높은 상대와 대련할 때 실력이 정진되는 경우가 많거든. 고위마법사가 수련생들에게 좀 더 높은 레벨의 수식을 알려주는 것과 비슷한 경우랄까? 사실 본 실력대로 했다면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않았겠지. 아무튼 솔직하지 못하다니까.” “아하하…” 솔직하지 못한 건 당신도 만만치 않거든? 속으로 작게 투덜거린 나는 온 몸에 벌겋게 자리 잡은 상처자국들을 보며 울상 지었다. 치료해줄 사람(?)이 사라져 버렸으니 당분간은 크고 작은 부상들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트로웰이 상처가 완치 될 때까지 기다려줄 리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어딜 갔다 온 거야?” “응? 아아, 검술대회 참가자 신청이 오늘까지라 접수하고 왔어. 1차 대련 상대자는 대회 전날 뽑기로 결정되는 모양이니까, 여기서 일주일 후에 출발하면 될 것 같아.” “흐음. 총 몇 차까지 있는데?” “참가자 수가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흔치않은 대회인 만큼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릴 테니 금방 끝나진 않을 거야. 아참, 그곳에서 우승상품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데, 네가 들으면 꽤 좋아하겠던걸?” “와아~ 상품도 있어? 그게 뭔데?” 상품이란 말에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트로웰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에고소드야.” “에고…소드? 설마 그 영혼이 담겨있다는 검 말이야?” “맞아. 쉽게 내줄만한 것이 아닌데 이번 검술대회에 사활을 걸었는지 꽤나 인심을 썼더군. 원석은 아니지만, 일단 영혼의 보석과 접목시킨 것이니까 꽤 흥미가 동하지 않아?” 동하다 뿐인가! 어쩌면 그 보석이 라피스 일지도 모르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급히 검을 잡고 트로웰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트로웰! 얼른 대련하자!” “어라? 괜찮겠어? 아직 엘퀴네스와 대련해서 다친 상처도 치료하지 않았잖아.” “괜찮아, 이 정도쯤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더 훈련해야지!” 그래서 반드시 검술대회에서 우승해야 한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데도, 나는 벌써부터 라피스를 만나기라도 한 마냥 마음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트로웰은 드물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품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의욕백배인걸?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알려줄걸 그랬네. 아! 이제부턴 팔찌를 빼도 돼.” “으응? 훈련 중엔 계속 착용하는 거 아니었어?” “마음이 바뀌었어. 이젠 대련할 때의 망설임도 많이 사라진 것 같고. 좀 더 본격적으로 시작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 무엇보다 그게 있으면 확인이 어려워지거든.” “확인?” 수련의 성취도를 말하는 건가? 혼자서 속으로 납득한 나는 냉큼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무거운 장신구들을 풀어냈다. 그러자 마치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몸속을 흐르는 기운도 아까전보다 훨씬 더 활발해 진 것 같았다. 노예상인들과 싸웠을 때도 장신구가 풀어진 상태였지만, 지금처럼 가벼운 느낌은 아니었다. 아마도 트로웰이 훈련하는 중에 틈틈이 무게수치를 높였던 모양이다. 나는 팔 다리를 조금씩 움직이면서 가벼워진 몸에 적응할 시간을 가졌다. 금방이라도 붕 뜰 것 같은 것이, 마치 중력이 사라진 땅에 서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때? 움직일만해?” “으음. 너무 가벼워서 내 몸이 아닌 것 같아.” “하하, 금방 적응 될 거야. 그럼 시작한다?” “뭐? 우왓!” 트로웰은 내가 반문할 틈도 없이 곧바로 공격을 시작했다. 쐐애액! 공기를 가르며 쏘아져 오는 검은 다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미 내 몸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몸놀림이 빨라지자 여유시간이 많아졌고, 반격 또한 거침없이 이어졌다. ‘와아, 이게 정말 나야?’ 겨우겨우 버티던 공격을 쉽게 피해내자, 나는 저절로 신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언제나처럼 대련이 힘들다거나 버티기 어렵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대련에 흠뻑 취해버린 탓이었을까? 나는 이전만큼 트로웰을 공격하는 행동에 대해 머뭇거리지 않게 되었다. 그를 공격하는 행위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중요한건 지금 내가 검을 휘두른 다는 것. 무기였던 그것은 어느새 또 다른 나의 분신이 되어있었다. 검신을 잡고 있는 손에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나의 온 몸이 검 자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과 검이 맞닿는 느낌이 좋았다. 시작 한 뒤 처음으로 검술훈련이 즐겁게 느껴졌다. 몸속의 기운이 태풍처럼 날뛰며 온 신경을 자극했다. 나의 두 눈은 대련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를 넘보고 있었다. 폐를 파고드는 공기가 청량한 사이다처럼 따갑고 시원했다. 휘익! 팟! “…윽!” “!!”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내지른 검이 그의 볼 옆을 스치고 지나가더니 옅은 핏방울이 튀었다. 놀란 나는 움찔하며 그 즉시 행동을 멈췄고, 대련 또한 자연스럽게 중지되었다. 방금 전까지 열기로 가득하던 공간은 순식간에 싸늘한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트, 트로웰!! 괜찮아?” 살짝 스친 거라 생각했던 상처가 생각보다 컸는지, 길게 패여진 피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뺨의 상처를 슬쩍 더듬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신의 상처가 아니라, 내 검 쪽을 향해 있었다. “…헤에, 제법인 걸?” “뭐?”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거야? 네가 들고 있는 검을 봐.” “…?…!!…” 장난스럽게 말하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길게 늘어진 검신에 생전 처음 보는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건…?” “마나가 일정한 물질을 통해 밖으로 구현된 단계. 흔히 말해 검기(劍氣)라고들 하지. 검술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나타나는 현상이야.” “!!” 뭐가…어떻게 됐다고? 담담한 설명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쩍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트로웰을 응시했다. 내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던 그는 생긋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해, 엘.” 쿠웅!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환청이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나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방금…뭐라고?” “소드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한다고 했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다, 당연하지! 소드 마스터는 아무리 검술에 소질 있는 사람이라도 10년은 넘게 배워야 되는 게 아니었어? 난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 밖에 안 되잖아!” 아무리 본체가 정령왕이라지만, 인간의 육신을 입고 있는 이상 한계가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트로웰은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게 일반론에 얽매일 것 없어. 네 신체적인 조건과 능력을 생각해보자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조금 빠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워낙 기본조건이 좋았으니 어쩔 수 없지. 게다가 검기라는 것도 결국 체내에 쌓인 마나의 일종이니, 나와 엘퀴네스의 기운에도 영향을 받았을 거야.” “하지만 겨우 그 정도 가지고…” “흐음. 지금 나한테 받은 훈련을 무시하는 거야? 오우거 두 마리의 무게를 합친 것보다 무거운 장신구를 차고, 소드 마스터이상의 실력을 지닌 자와 매일같이 살벌한 대련을 펼친 주제에.” “헉? 오우거 두 마리? 지금껏 내가 하고 있던 팔찌의 무게가?” 그동안 트로웰이 알게 모르게 무게수치를 높여왔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 몸무게를 가볍게 뛰어넘은 수준이었다니! 뜨억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그저 말없이 생긋 웃기만 했다. 양심의 가책은커녕, 오히려 잘 되었지 않느냐고 말하는 얼굴이었다. “너무해, 트로웰. 혹시 날 죽일 셈이었어?” “엄살은. 어쨌든 그 덕분에 소드 마스터의 길이 빨라진 거잖아? 마침 검술대회 일정에도 맞추었으니 겨우 한시름 덜었군.” “아! 맞다, 검술대회!! 소드 마스터라면 우승도 노릴 수 있겠지?” 지금껏 막막하다고만 생각했던 미래에 드디어 희망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무사히 에고소드를 받을 수 있음은 물론, 블루 드래곤과의 대면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라피스를 찾을 수 있다는 확신에 마음이 들뜬 내게 트로웰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대회 중에 검기를 쓰는 건 금지야.” “엑? 왜에?” “뭐, 사람들 눈에 띄고 싶다면 그러던가. 내가 알기론 역사상 가장 최연소 소드 마스터지, 아마? 밝혀지는 순간 인간들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 “……” 다분히 빈정거리는 어조였지만, 트로웰의 예지는 이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허튼 소리를 내뱉는 성격이 아니다. 그것은 다소 삐뚤어져 있는 현재의 그도 마찬가지였다. ‘쳇, 그럼 괜히 좋아했잖아.’ 검기를 쓰는 것과 안 쓰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게임으로 치면 보조마법을 받는 것과 안 받는 것의 차이랄까? 단기간에 소드 마스터가 된 만큼, 검술의 기교적인 면에선 오랫동안 훈련해온 사람들에 비해 떨어질 테니, 검기를 쓸 수 없다는 제약은 상당히 아쉬운 것이었다. “자아~ 그럼 난 이제 조금 쉬어야겠어. 너도 하고 싶은걸 하도록 해. 출발이 일주일 후니까 그 사이에 좀 여유가 있겠군.” “에? 대련은 더 안 해? 훈련은?” 내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검기를 다루게 됐으니 내가 더 가르칠 건 없어. 오늘부터 훈련은 끝이야. 하지만 아직 검의 기교가 부족하니까 틈틈이 수련해서 보충은 해야 할 거야.” “으응, 알았어. 아참, 트로웰! 아까 입은 상처는 어때? 꽤 깊이 베였던 것 같은데, 괜찮은 거야?” 그때서야 대련 중에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사실을 떠올린 나는 황급히 물었다. 트로웰 또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다가 슬쩍 볼에 새겨진 상처를 더듬었다. “아아. 상관없어. 어차피 실체도 아니니까. 겨우 이정도로 역소환 될 리도 없고.” “하지만 통증은 느끼잖아. 많이 욱신거릴 텐데…” “통증을 느낀다는 걸 네가 어떻게 알지?” “응? 아,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이, 일단 치료부터 하자. 어디 적당한 약초가…” 곤란한 질문을 얼렁뚱땅 넘기며 허둥대자, 그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곧 피식 웃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붉게 패여진 상처 부분을 슬쩍 쓰다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범벅이던 뺨이 순식간에 멀쩡하게 되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부상을 말끔히 치료한 그는,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뜬 나를 향해 가볍게 말을 이었다. “실체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 정도는 마나를 덧입히면 금방 나아. 뭐, 그 대신 내 계약자는 기운이 빠지겠지만.” “아하하, 그, 그렇지, 참. 중간계에 소환된 정령은 마나를 덧씌워 모습을 투영한 것뿐이었지. 깜빡 잊고 있었어.” 정령에게 직접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정령계에서일 뿐. 다른 곳에서 입는 상처는 소멸을 의식할 정도로 심각하지 않은 한, 피가 흐르고 통증이 느껴져도 실제로는 큰 영향이 없다. 그저 유희를 실감나게 즐기기 위한 제약에 불과하니 말이다. (일종의 분신 또는 예비용 목숨을 가지고 다닌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 해도 설마 상처를 그런 식으로 ‘지울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면 실체가 아니니 당연한 것인데도, 나는 새삼스레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정령에게 치유술을 시전 해 본 적은 없었지?’ 인간과 마족, 심지어 신(엘뤼엔)에게까지 시도해봤는데, 정작 정령들은 그 대상에 없었다. 그들이 치료를 필요로 할 만큼의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을 뿐더러, 정작 위급한 상황에선 알아서 역소환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 간단한 기억조차 떠올리지 못한 걸까? 혹시 이것도 인간의 육체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 멋쩍은 기분이 든 나는 애꿎은 머리카락만 잔뜩 헝클어트리며 중얼거렸다. “쩝…왠지 점점 바보가 돼가는 것 같아.” “뭘 새삼스레? 원래 바보였잖아?” “하긴 그야 그렇…커억! 트로웰! 지금 그 말 진심이야?” “후후후, 글쎄~. 그럼 수고해! 난 조금 쉴 테니까.” “잠까안! ‘글쎄’라니? 그렇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내 울상이 된 얼굴을 보고도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설렁설렁 판자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여유 만만한 태도를 보아 애초부터 대답해 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불어 닥친 무언가가 그의 진로를 방해하고 말았으니!! 화르르르륵!! 쿠우우웅! “트로웰!!” 믿을 수 없는 현장을 목격한 나는 입을 떡 벌리고 소리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어디선가 커다란 불덩이가 내려와 그대로 트로웰 위에 작렬했던 것이다. 이윽고 엄청난 폭음과 함께 시꺼먼 연기가 자욱이 사방에 퍼지기 시작했다. “쿠, 쿨럭! 쿨럭! 트로웰!! 트로웰, 괜찮아?!” ‘이게 대체 뭔 난리래?’ 폭발이 터졌을 때 울리던 진동과 타오르던 불길을 생각하면 결코 우연으로 일어난 현상은 아니었다. 폭탄에 버금가는 화력이지만, 이곳엔 아직 화약이 발명되지 않았으니 누군가가 공격마법을 날린 것이리라. ‘어떻게 이곳을 알고 찾아낸 거지? 밖에선 전혀 보이지 않을 텐데?’ 게다가 아직 이곳에서 누군가에게 원수 질만한 행동을 한 적이 없다는 걸 생각하면 적의 정체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또한 트로웰의 결계를 일반인이 쉽게 파악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내가 황급히 뛰어갔을 땐 슬슬 걷혀가는 연기 사이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바닥에 쓰러진 트로웰과 그 위를 올라탄 웬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어, 어라?” 이 무슨 황당한 전개라지? 나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일말의 기대감이 스르륵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뜬금없는 적과의 대치는 그렇다 쳐도, 저건 마치 초등학생들의 몸싸움 같은 구도가 아닌가! 일단 갑자기 나타난 저 남자가 방금 전의 폭발을 일으킨 주범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뭔가에 무척 화가 난 듯한,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그 아래에 맥없이 깔려있는 트로웰을 무시무시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납기로는 받아치는 트로웰 또한 만만치 않았다. “큭. 이게… 무슨 짓이야!” 그는 갑작스런 충격에 떠밀려 넘어진 것이 화가 났는지(보통사람이었다면 폭발이 일어나는 순간 죽었을 것이다.)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다그치는 말투와 표정에 익숙함이 담겨있는 것을 보면 평소에 안면이 있던 사이인 모양이다. 그러자 붉은 머리의 남자역시 지지 않고 소리쳤다. “트로웰 너 이 자식! 엘퀴네스에게 무슨 짓 했어!!” 제법 괜찮은 중저음의 목소리였지만, 지금은 흥분한 탓인지 매우 신경질적으로 틀어져있었다. 그에 트로웰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 나타나서 한다는 말이 엘퀴네스라니?” “크아악!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지금 정령계가 어떻게 됐는지 알기나 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나보지?” “하! 무슨 일? 무슨 일이냐고 했냐?”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단번에 남자의 정체를 알아냈다. 정령계의 일을 알고 있는데다, 트로웰이나 엘퀴네스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더욱이 붉은 눈동자에, 붉은 머리카락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연상하기가 쉬웠다. ‘설마…불의 정령왕 이프리트?!’ 불과 함께 나타났으니 틀림없었다. 화염계열의 공격마법이라고 생각했던 그것은 실제론 이프리트 그 자체가 달려드는 장면이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신기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헤에~ 지금의 이프리트는 남성체구나. 근육도 제법 되고, 키도 훤칠한 게 평소 상상하던 불의 정령왕의 이미지랑 딱인걸?’ 전대의 이프리트라면 그다지 얘기도 들어본 적이 없을뿐더러 생김새조차 몰랐던 존재다. 이제야 제대로 된 과거의 인물을 만났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다행히 둘 다 내게 신경을 안 쓰고 있는 상태라 나는 마음 놓고 구경할 수 있었다. “엘퀴네스 그 자식이 에바스 에덴을 아주 떡으로 만들어놨어! 그 뿐인 줄 알아? 내 영역을 초토화 시켜놨단 말이다! 이제 거의 다 복구 돼가던 곳을 또 다시 망쳐놨다고! 대체 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흐응~. 말은 똑바로 하시지? 아무리 엘퀴네스라도 두 번이나 불의 영역을 건드릴 리 없어. 괜히 가만히 있던 그에게 네가 먼저 시비를 걸었겠지. 내 말이 틀려?” “윽! 그, 그야 꼴 보기 싫으니까 당연하잖아! 하필 오늘 그놈이 저기압 상태인줄 내가 알게 뭐야!? 네 녀석이 그렇게 만들어놓은 거잖아!” “그래서 다짜고짜 나한테 책임을 물으러 오셨다? 그냥 솔직히 피신 왔다고 말해도 돼, 이프리트.” “피, 피신이라니! 나를 뭘로 보는 거야!” ‘피신 맞구만, 뭘.’ 정황을 보니 대충 이런 식이다. 트로웰의 말에 삐져서 정령계로 돌아간 엘뤼엔. 안 그래도 화풀이할 곳이 없어서 예민해져 있던 참에 이프리트가 시비를 걸자, 두고 볼 필요 없이 곧바로 불의영역을 초토화 시킨다. 그 덕에 머물 곳을 잃은 이프리트는 냉큼 정령계를 떠나 이곳으로 도망쳤다는…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일단 비켜봐.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응? 아아.” 푸욱 한숨을 내쉰 트로웰은 그를 억지로 밀어내어 몸을 일으켰다. 이프리트도 계속 깔고 앉아있을 생각은 없었는지 순순히 비켜주는 듯 했다. 잠시 후 트로웰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알겠지만 화난 엘퀴네스는 나도 막을 수 없어. 일을 크게 불려놓은 건 너니까 알아서 해결하라고.” “글쎄,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난 그저 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보려고 온 것뿐이다! 요 근래 트로웰 너와 행동을 함께 했으니 당연히 네 탓일게 뻔하잖아!” “나? 내가 뭘?” “시치미 떼지 마! 암튼 너나 전대의 트로웰이나 성격 능글맞은 건 똑같구만!! 이래서 땅의 정령들이 싫다니까!” 하지만 그런 말에 끄덕할 트로웰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쁘다는 듯이 빙긋 웃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것참 유감인데. 어쨌든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렇지, 엘?” “…!!…으응? 나, 나한테 물은 거야?”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한 나는 어깨를 움찔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제야 이프리트도 내 존재를 눈치 챈 듯 이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닥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뭐야, 이건. 인간 꼬맹이잖아?” 덕분에 제대로 보게 된 이프리트는 순정만화에 흔히 등장하는 화려하게 생긴 악당(?) 같은 인상이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가있어, 전체적으로 도도하고 사나운 인상을 풍겼다. 보여 지는 나이는 20대 중반쯤? 같은 불의 정령왕이라도 남성체라서인지, 미래의 이프리트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잠시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나를 흩어보던 그는 내 이마 쪽에 시선이 이르자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저건 설마. 물의 인장…그것도 엘퀴네스의 인장이 찍혀 있잖아? 어떻게 된 거야?” “당연하지. 그의 계약자니까.” “뭐? 엘퀴네스가 인간에게 소환되었단 말이야? 언제?” “쯧쯧, 꽤나 소식에 둔감하군. 하긴, 그동안 불의 영역을 복구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테지. 엘, 인사나 해.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야.”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뭐가 불만인지 얼굴을 확 찡그렸다. 그리곤 트로웰을 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것이 아닌가. “저 녀석 착하냐?” “그건 왜 묻지?” “날더러 ‘안녕하세요.’라잖아. 그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면 분명 싸가지가 없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네 이야기겠지. 예전 너의 인간 계약자는 꽤 건방졌었지, 아마?” “그래서 네놈이 죽였잖아! 그게 무려 500년 만에 계약한 인간이었다는 건 알고나 있었냐?” “아아, 미안. 난 마음에 안 드는 걸 두고 보는 취미는 없어서.” ‘주, 죽였다고?’ 충격적인 사실에 내 입은 떡 벌어졌지만, 대답하는 트로웰의 얼굴은 느긋하기만 했다. 정작 다그치는 이프리트 또한 그 일을 크게 괘념치는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가 화를 내는 것은 전혀 엉뚱한 내용이었다. “암튼 성깔하고는. 뭐, 그건 그렇다 치고…이건 차별이야! 왜 그놈의 계약자는 저렇게 얌전한 건데? 아니, 그보다 넌 인간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녀석이잖아. 그런데 왜 같이 붙어있는 거야?” “…후후, 알아서 생각해.” “크아악! 이제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냐!” 자존심이 강하고 버럭버럭 흥분도 잘 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어지간히 다혈질의 성격이었다. 틱틱거리는 말투와 붉은 색 머리카락 때문일까? 겉모습이나 분위기는 현저히 달랐지만, 그는 여러 면에서 라피스를 연상시켰다. 그래서인지 난 지금의 이프리트도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이거 엄청난 파란이 몰아칠 것 같은 예감이…?’ “헉…!!” 왜 아니겠는가. 그때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움찔하며 돌아본 나는 그대로 기겁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엘뤼엔이 시퍼런 눈으로 서 있었던 것이다. 이프리트를 똑바로 노려보는 그의 얼굴은 이제껏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구더러 그놈이라고?” “누구긴 누구야! 당연히 그 시건방진 엘퀴…켁!! 에, 엘퀴네스?!!!” 그를 발견한 순간, 나는 이프리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바뀌는 것을 보았다. 그와 함께 비죽이 말려 올라간 엘뤼엔의 입 꼬리는 소름이 끼칠 만큼 차가웠다. 그의 두 손에는 어느새 기다란 얼음창이 형성되어 있었다. “네놈이 아직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군. 당장 이 자리에서 소멸 시켜줄까?” “자, 잠깐! 엘퀴네스, 진정해! 진정하라고!” “닥쳐!!” “우와아아악!” 퍽! 쿠웅! 콰아아아앙!! “꾸에엑!” 그날 나는 한 정령왕이 처참하게 망가지는 현장을 똑똑히 지켜보고 말았다. 그렇게 가소롭게 보는 인간 앞에서 체면이고 뭐고 차릴 틈도 없이 곤죽이 되었으니, 이프리트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으로 비참한 하루였으리라. 그 옆에서 트로웰은 한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게 일을 크게 만드는 건 네 쪽이라니까, 이프리트.” “……” 그날부터 나는 조용히 평화로운 앞날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정신건강에 가장 좋은 이름, 그것은 바로 체념이었다. 현재 세이크 제국은 조만간 열릴 대회에 대한 흥분으로 시끌벅적해 있었다. 바로 제국의 실세귀족중 하나인 세피온 공작이 주최한 검술대회에 대한 것이었다. 우승자에게는 검사들이 꿈에서나 그리던 전설의 에고소드가 상품으로 주어진다는 말에, 대륙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장정들이 몰려들었다.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에고소드가 개인이 개최한 검술대회의 상품으로 걸린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만큼 세피온 공작의 자금력이 대단하며, 그가 이 검술대회에 부여한 의미가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게다가 우승자는 공작과 개인면담을 할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 검사라면 누구나 다 꿈꾸는 일이었다. 세피온 공작은 오직 검술 하나로 평민에서 귀족이 된 자였다. 그가 젊은 시절에 보여준 패기와 무용담은 많은 기사들의 동경을 샀으며, 전설이 되었다. 황제가 출신 따위는 무시하고 단숨에 공작의 지위와 공국을 하사했을 정도로. 비록 지금은 나이가 들어 정계진출을 그만둔 후지만, 검을 잡는 이들에게 세피온 공작은 언제나 뛰어넘고 싶은 목표의 대상이었다. 그런 상대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건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공국 안에만 머물며 잠잠히 지낸 이후로 은근히 무시하고 있던 귀족들은, 이번의 사건으로 다시 한 번 세피온 공작의 저력을 실감해야 했다. 사자는 늙어서도 결국 사자였던 것이다. 대회 이틀 전날인 오늘, 개최장소인 세피온 공국은 출신을 알 수없는 사람들로 가득해져 있었다. 접수처에서는 벌써 며칠째 계속된, 대회당일 날의 대련상대를 고르기 위한 절차가 진행되는 중이었다. 행사장 앞에는 기한 내 접수한 사람들의 이름이 쭈욱 적혀 있었는데, 워낙 인원이 많은 탓에 각 4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접수한 사람이 그것을 확인하고 이름과 속해진 그룹을 말하면, 공작가문에서 파견된 기사들은 각자 들고 있는 통속에서 무작위로 번호를 한 장씩 뽑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다른 누군가가 자신과 일치한 번호를 뽑으면, 그가 바로 1회전에서 만날 상대 선수였다. 이 번거로운 작업은 거의 일주일의 시간을 두고 이루어졌다. 하지만 접수를 했다고 해서 누구나 다 참가할 자격을 얻는 건 아니었다. 우선 15세 미만의 어린이와 50세 이상의 성인들은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너무 허약해 보이거나 실력이 없어 보이는 이가 나서면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간단한 테스트를 치르게 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통과를 해야만 비로소 번호표를 뽑을 수 있었다. 기간 내에 나타나지 않는 자는 그 자리에서 탈락이었고, 그로 인해 상대선수가 공석이 된 자들은 그렇게 된 자들끼리 모아 겨루게 했다. 순수한 실력을 겨루는 대회에서 부전승이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솎아내는 과정에서만도 수 백 명의 사람들이 탈락 되었다. 그런 일이 오랜 시간 반복 되자 정신력이 강한 기사들도 서서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소드 유저에 이른 잭 마킬버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다. ‘하아, 정말 지루하군. 하지만 이 짓도 오늘까지니까 참을 수밖에.’ 기사라는 신분 때문에 그는 남 앞에서 함부로 하품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절제되어야 했고, 타의 모범이 돼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도 구경나온 인파들이 자신들을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본 다는 것을 잭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의식적으로 뻣뻣해지는 목을 풀어내며 이제 막 차례가 돌아온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다음순간 그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았다. ‘응? 웬 어린애가?’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체격과 골격을 통해 나이를 짐작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은 이제 막 16살에서 17살이나 되어봄직한 어린아이였다. 보통 15세에 성인식을 치르니 꼬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대회 참가자의 평균 나이가 20대 중 후반인 것을 생각하자면 어려도 한참 어렸다. 뿐 만인가! 긴 소매 사이로 드러난 손은 마르고 희어서 검이라곤 한 번도 잡아본 적도 없는 것 같았다. 잭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느끼며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호기심에 참가해보는 건가? 쩝, 어린 녀석이 겁도 없군.’ 어차피 테스트를 하면 떨어질 테지만, 접수자는 접수자였다. 그는 일단 다른 사람들에게 했던 것처럼 형식적인 질문을 건네기 시작했다. “이름과 정해진 그룹을 말해라. 벽보에 적힌 것은 확인 했을 테지?” “예. 1번 그룹의 엘…이라고 합니다.” 조심스럽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소년 특유의 미성이었다. 가늘게 울리는 음성이 매우 듣기에 좋았다. 검사보단 긴 주문을 읊는 마법사가 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잭은 속으로 그렇게 궁시렁 거렸다. “엘? 성을 말하지 않는 것은 평민이란 소린가? 흐음, 나이가 몇이지?” “에, 그러니까…18세인데요.” “생각보다는 많군. 사용하는 무기는?” “당연히 검입니다.” “그래? 그럼 저기 가서 검으로 저 바위를 쳐봐라.” 잭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예의 테스트를 위한 커다란 바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 새겨진 검상을 통해 실력을 판가름 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소년은 잠시 움찔하는 듯 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허리에 매단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막상 검을 내리긋기 전, 소년은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어…있는 힘껏 내리쳐야 하나요?” “테스트를 하는 거니까 당연하지. 최대한 자신의 실력을 보여 봐라.” “으음, 곤란한데…예비용 바위가 또 있을라나.” 피식. 소년의 혼잣말을 들은 잭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저 가냘픈 몸으로 내리친 검에 바위가 쪼개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스승이 누구인지 몰라도 너무 자신의 실력을 맹신하도록 가르친 모양이다. 휘익! 촤악! “앗! 이봐, 그렇게 하면…” 소년이 검을 드는 동작은 성의 없기 짝이 없어서, 그냥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걸로밖에 안보였다. 검상은커녕 바위에 부딪힐 때 손목이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지는 광경에 잭은 물론,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전부 경악하고 말았다. 수많은 도전자들 앞에서도 굳건하기만 했던 바위가 소년이 친 순간 정 가운데로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쩌어억! “허억?!!” “어, 어떻게 저럴 수가!!” “세상에 맙소사…” 저 가냘픈 몸에서 어떻게 저런 괴력이 나올 수 있는 거지? 동요하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소년은 차분히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매우 미안한 듯이 물었다. “저어…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요? 일단 예비용 바위가 없을까봐 깔끔히 자르려고 노력하긴 했는데.” 그 말처럼 바위는 아주 정교하게 반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 흔한 돌 부스러기와 갈라진 금조차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소년의 실력이 생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 잭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자르기만 하는 것뿐이라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게 깔끔하게 만드는 것은 무리였다. ‘대단한 실력자였구나. 아무리 사람은 겉보기로는 모른다지만 정말 엄청나군.’ 그는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얼른 1번이라고 적혀있는 통을 들어 소년 앞에 내밀었다. “테, 테스트는 통과다. 이 안에서 번호표를 뽑도록!” “아, 감사합니다.” 예의바르게 대답 한 소년은 곧 통 속에서 작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냈다. “으음. 4번이네요.” “기록 되었다. 내일 정오에 이곳에 와서 대련표를 확인하면 겨룰 상대자와 대련 날짜, 그리고 시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참가선수임을 증명하는 뱃지다. 대련 1시간 전까지 대회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자동 실격이 되니 조심하길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뱃지를 받아든 소년이 돌아서자 주위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길을 터주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바위를 자른 소년의 괴력에 감탄하며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잭 또한 다음 접수자를 검사할 생각은 않고 한동안 뚫어지게 소년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황제와 수많은 고위 귀족들이 참관할 예정이었다. 그 덕에 각 귀족가문의 수많은 자제들과 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학생들 또한 참가를 희망했다. 1차전이야 다소 잡다한 무리들의 판이겠지만, 회가 길어질수록 남는 것은 검술을 체계적으로 배운 귀족들일 것이다. 그중에는 벌써부터 우승자가 될 거라고 당연히 생각되던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 일어난 사건 이후로, 잭은 그동안 짐작하고 있던 우승후보자들을 몽땅 뒤엎을 수밖에 없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군. 어쩌면 저 아이가 이번 대회의 우승자가 될지도…’ 소년이 떠난 이후, 그곳에 남아있던 모든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이거 바보 아냐? 그걸 자르면 어떡해? 넌 적당히 라는 말도 모르냐?” 접수절차를 끝내고 돌아온 나에게 질책을 늘어놓은 이는 다름 아닌 이프리트였다. 지난번 정령계 탈출 사건(?) 이후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늘러 붙어 있더니, 아예 일행으로 자리매김 한 참이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다혈질인 성격만큼이나 잔소리도 많았다. 한마디도 곱게 하는 법이 없었고, 사소한 일에 참견하는 것도 심했다. 게다가 유독 나를 갈구는 것에 심취해 있기도 했다. 아마 엘뤼엔에게 직접 덤비지 못하니까 계약자인 나를 대신 괴롭히는 것 같았다. (이점에선 미래의 이프리트와 판박이다.) 물론 엘뤼엔 앞에서 직접 시비를 걸지는 못했지만, 공교롭게도 지금 나를 따라나선 이는 이프리트 하나뿐이었다. 트로웰이 여관을 알아보러 간 사이, 엘뤼엔이 귀찮다는 핑계로 나를 그에게 떠넘겼던 것이다. 지금도 그는 테스트 할 때 바위를 자른 일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내심 찝찝해 하고 있던 나는 찌푸린 얼굴로 반박했다. “하지만 기사 아저씨가 힘껏 내리치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진짜 힘껏 치냐? 넌 네 힘이 어느 정도 되는지 자각도 못하는 거야? 소드 마스터가 뉘 집 애 이름인 줄 알아? 정말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우씨. 왜 구박하고 그래요? 잘 해결됐으면 된 거지.” “덕분에 쓸데없는 시선이 늘어났잖아! 이게 뭘 잘했다고 눈을 동그랗게 떠?” “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요?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보는 건 이프리트님 때문이잖아요! 그 붉은색 머리 좀 가릴 수 없어요?” 그의 화려한 외모와 붉은 머리카락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다. 덕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힐끔거리는 데도 그는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절대 자신 탓이 아니라 우겼다. “흥! 타고난 외모가 뛰어난 걸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죄지은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인간들을 피해 가리고 다녀야 하지?” “그럼 사람들이 쳐다봐도 신경 쓰질 말던가요!” “그건 그거고, 싫은 건 싫은 거야.” “네네~ 오죽하시겠습니까.” 삐딱한 내 대답에 그는 잠시 얼굴 근육을 꿈틀 거렸지만, 이곳이 마을의 한복판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미쳤는지 억지로 참는 듯 했다. 그 대신 그는 걸어가는 내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어. 왜 트로웰이 너 같은 녀석을 그냥 내버려두는지 모르겠단 말이야.” “그야 트로웰은 이프리트님 같지 않으니까요.” “그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에요. 그는 친절하거든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들어본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 누가 친절해? 트로웰이? 그 사악한 꼬맹이가? 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야?” “상관없어요. 적어도 이프리트님보단 낫거든요.” “으득! 이게 감히…!!” 아무래도 내 대답이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다. 노려보는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받아냈다. 그러자 먼저 그만둔 것은 오히려 이프리트였다. “하아, 그래. 너 같은 애송이가 녀석을 어떻게 알겠냐. 내가 불쌍해서 한 가지만 말해두지. 세상의 모든 존재는 믿어도 트로웰 그 녀석은 믿지 않는 게 좋을 걸? 특히나 인간을 무척 혐오하고 있어서 말이야. 그가 내 계약자를 어떻게 죽였는지 말해줄까?” “이미 지난 일에는 관심 없어요.” “흐흐흐.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걸? 내 계약자 중에서 인간의 여자가 있을 때가 있었지. 트로웰에게 한눈에 반해서 쫓아다녔는데, 그게 귀찮다고 단번에 사지를 잘랐어. 뭐, 귀족이라 성질이 괴팍한 것도 원인이었지만. 너라고 다르진 않을 걸?”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거예요?” “이런~ 내 나름대로의 충고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다니 역시 인간은 속이 좁다니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제가보기엔 그걸 말리지 않은 이프리트님도 피차 마찬가지거든요? 그다지 고맙지는 않네요.” “흥, 재미없는 녀석.” 그는 또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했지만 난 전부 무시했다. 그렇게 한동안 혼자 떠드는 것이 이어지자, 그는 심심해 졌는지 은근슬쩍 질문을 건네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너 말이야. 자연계의 정령들이 보인다며? 그게 정말이냐?” “네, 보여요. 목소리도 들을 수 있구요.” “뭐? 정령어도 알아듣는 단 말이야? 어떻게?” “그냥 들리는 건데 저라고 알 수 있나요. 그런데 이프리트님은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 올해로 딱 9천살이야.” 내가 태어날 당시 이프리트의 나이가 2천살 가량. 그리고 지금이 4천 년 전의 과거이니 그는 약 만 천세에 소멸하는 것이었다. 엘뤼엔의 경우는 2만년, 보통 정령왕들의 평균 수명이 만 오천 이상인 것을 생각하면 무척 젊은 나이에 요절(?)하는 셈이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굉장히 오래 사셨네요. 만약 다시 태어난 다면 뭐가 되고 싶으세요?” “흥. 뭐냐, 그 어이없는 질문은? 내가 소멸해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걸 상상이라도 하고 싶은 거냐?” “혹시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환생이란 게 있으니까.” “흐음. 뭐, 소문으론 정령왕이 소멸해서 신이 된다는 말도 있던데,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만약 중간계에서 태어나게 된다면 드래곤이나 마족이 좋겠군.” “왜요?” “중간계에서 그나마 강한 녀석들이니까. 약한 건 딱 질색이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다시 태어나면 과거의 기억도 지워질 텐데 뭘 그렇게 따지는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자, 이번엔 이프리트가 물어왔다. “그러는 너는 뭐가 되고 싶지?” “엑? 글쎄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한텐 대답하게 하고 넌 은근슬쩍 넘길 셈이야? 지금이라도 생각해봐.” 지금까지 소멸하면 당연히 신이 될 것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환생은 생각해 본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프리트에게 그런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 그의 재촉에 당황한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으으음. 저, 저도 드래곤이 되고 싶어요.” “호오, 강해지고 싶어서? 아니면 영원에 가까운 생명 때문에?” “둘 다요. 사실은 그들의 다양한 능력이 부러워서예요. 마법에, 검술에, 정령술까지 쓸 수 있잖아요?” “너도 이미 정령사에 검사잖아. 그거면 됐지, 마법까지 욕심을 부리는 거냐? 하여튼간 인간들이란.” 쳇, 이래봬도 영혼은 정령왕이네요! 그렇게 툭 내뱉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꾹 참은 채 다른 말로 반박했다. “원래 정령술과 검보단 마법을 더 배우고 싶었다구요.” “뭬야? 정령술이 어때서?”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실생활에는 아무래도 마법 쪽이 더 유용한 것 같아서요. 텔레포트나 보존마법도 그렇고, 경량화 마법도 그렇고. 도움이 되는 게 많잖아요?” “흥, 아무리 그래도 우리 정령왕들의 능력에는 비할 바 아니다. 영광이라고 생각해도 모자를 판에 배부른 소리만 하는군.”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예요. 아아~ 마법에도 소질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에 이프리트는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빈정거렸다. “소질 이전에 넌 머리가 나빠서 힘들 것 같다만?” “뭐라고요?” “마법이 주문만 외우면 다 되는 건줄 아는 거냐? 그에 따른 수식과 연산을 일일이 계산해야 하는 거다. 괜히 마법사들이 천재라고 불리는 줄 알아?” “쳇. 무시하지 말아요. 그래도 고등학교 때 가장 잘하는 과목이 수학이었다고요.” “고등학교? 그건 뭐지?” “아, 암튼 그런 게 있어요.” 물론 아주 잘 하는 것은 아니고 내 성적 중에서 그나마 괜찮은 수준이었을 뿐이다. 무엇보다 소질이 있었다고 해도, 공부와 머리 아픈 건 질색인 내가 마법을 끈기 있게 배웠을 리도 없다. 결국 나는 그때까지 남아있던 마법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접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상 내가 그렇게 결심한 찰나, 이프리트가 예상치 못한 제안을 건네 왔다. “그렇게 마법이 배우고 싶다면 내가 도와줄까?” “네? 이프리트님이요?” “뭐, 드래곤 만큼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기초마법이라면 나도 쓸 수 있으니까. 너한테 필요한 몇 가지 마법을 영구적으로 새겨주지. 그럼 굳이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마법을 쓸 수 있잖아?” “와아, 그런 게 가능해요? 그런데 그걸 어디다 새겨요?” “이왕이면 마나석이 좋겠지만,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래도 가지고 다니기 편하려면 장신구 종류가 낫겠지. 목걸이나 팔찌 같은 것 없어?” 그의 말에 나는 작게 아쉬운 한숨을 뱉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착용하고 있던, 중량화 마법이 걸린 팔찌는 이제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나는 문득 한 가지 적당한 것을 떠올리고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어…이런 것도 괜찮을 까요?” “응? 뭐냐, 이건. 웬 돌조각?” 내가 그에게 내민 것은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났던 소녀-랑시가 준 화석목걸이였다. 지금까지는 그냥 품속에 넣고만 다녔는데, 이왕 마법을 새길 것이라면 선물 받은 것에 하는 게 더 의미가 깊을 것 같았다. “그냥 돌조각이 아니라 조개 화석이에요. 여기다가 새기는 건 불가능할까요?” “흐음. 화석이라면 오랜 시간동안 굳혀진 것이라 품고 있는 마나도 많고, 재질이 약하지도 않지. 좋아, 이거라면 2~3개 정도의 ‘보조마법’은 새길 수 있을 거다. 어떤 걸로 해줄까?” 긍정적인 평가에 안도한 나는 그때서야 허둥지둥 어떤 것이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령왕이 사용가능한 마법의 범위는 4서클까지가 전부. 내가 선택해야 할 것도 그 안의 것이어야 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물었다. “텔레포트나 폴리모프, 치료마법은 안 될까요?” “바랄 걸 바래라. 그건 죄다 5서클 이상의 마법이잖아. 기초 마법 중에서 골라, 기초마법!” “쳇, 알았어요. 그럼 독을 치료하는 마법이나, 보온마법, 보존마법, 경량화 마법. 이중에서 알아서 골라서 해주세요.” 그러자 이프리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곧 조개화석을 꽉 쥔 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누가 불의 정령왕 아니랄까봐, 마법이 새겨지는 내내 뜨거운 불꽃과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후 모든 주문을 마친 이프리트는 목걸이를 내게 건네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설명했다. “큐어 마법과 보존마법, 경량화 마법을 걸었다. 마법을 쓰려면 이 목걸이를 그 위에 올려놓고 시동어를 외치면 될 거다. 단, 이것은 단순히 수식연산과 캐스팅을 대신 해주는 역할 밖에 되지 않으니까, 마법을 썼을 때 그만큼 빠져나가는 마나는 감수해야 할 거야. 일반 마법사들에 비해 위력은 약하겠지만, 어차피 보조마법이니 큰 상관은 없겠지.” “엑? 보온 마법은 없어요? 날씨 추울 때 딱 좋은데.” “바보냐, 넌? 불의 정령이 있잖아. 자연체의 정령들도 보이겠다, 대화도 가능하겠다. 불러다 쓰면 될 일이지 뭐가 문제야?” “겨울에 불의 정령을 보기가 어디 쉬운 줄 아세요? 그리고 되도록 자연체의 정령들에게는 말을 걸고 싶지 않아요. 얼마나 시끄러운데요.” “나 참. 정말 주문도 많은 녀석이군. 알았다, 알았어. 그럼 불의 하급정령인 카사를 목걸이에 봉인시켜주마. 그럼 문제없지?” ‘헤에. 의외인 걸? 되게 친절하네?’ 엘뤼엔이었다면 어림없었을 일을 쉽게 받아주는 모습을 보니, 생각만큼 삐뚤어진 성격은 아닌 모양이다. 다소 어린애 같은 경향은 있지만 속이 너그러운 것은 미래의 이프리트와도 비슷했다. ‘…설마 엘뤼엔에게 시비를 거는 것도 녀석처럼 그를 좋아하기 때문은 아니겠지?’ 내가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는 사이, 이프리트는 카사를 불러 목걸이에 봉인시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카사의 완강한 거부가 이어졌다. 봉인되지 않기 위해 사방으로 몸을 휘저었던 것이다. 설마 왕이 하는 일에 반항하는 정령이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와 이프리트의 눈은 똑같이 휘둥그레졌다. “어라? 뭐야. 이 녀석 왜이래? 감히 내 말을 거역하는 거냐?” -그, 그게 아니라, 흑…시, 싫어요, 이프리트님. 무서워요. 들어가지 않을래요. “누가 너에게 거절해도 좋다고 했지? 소멸 당하고 싶은가?” -흑, 흐윽…제, 제발…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도 카사는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별 수 없이 이프리트는 다른 정령을 넣으려 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다른 카사들에게도 똑같이 이어졌다. 그러자 마침내 이프리트의 인내심이 폭발했다. “크아악!! 이것들이 죄다 왜이래? 싹 다 소멸돼서 갈아치워지고 싶냐! 앙?!!” “돼, 됐어요, 이프리트님. 그냥 이대로 쓸래요. 어차피 겨울도 다 지나서 이젠 보온마법도 필요 없을 것 같고…” “되긴 뭐가 돼! 감히 하급 정령주제에 왕의 명령을 거역하잖아! 오냐, 내가 엘퀴네스에게 당하고 산다고 너희들까지 날 우습게 보는 모양인데…” “아하하, 그럴 리가 있겠어요? 지금도 저렇게 덜덜 떨고 있는데. 뭔가 이 목걸이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에요. 아! 혹시 제가 물의 정령사라 그런 걸지도? 불과는 정반대 속성이잖아요.” 꽤 일리 있는 말이라 생각했는지, 당장이라도 카사들을 싹쓸이 할 것 같았던 이프리트의 기세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하긴, 네가 좀 유달리 물의 기운이 강한 편이긴 하지. 하급정령들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겠군. 그래도 이렇게 끝내기는 좀 찜찜하니, 방법을 좀 바꾸도록 할까?” “??” 내가 의아한 표정을 하자, 이프리트는 보라는 듯이 내 눈앞에서 커다란 불덩이를 일으켰다. 그러자 용광로속의 쇠처럼 빨갛게 타오르던 화석이 순식간에 그것을 흡수하는 것이 아닌가! 목걸이는 금세 원래대로의 모양으로 돌아왔지만, 스며든 불의 기운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래도 아주 뜨거운 것은 아니고, 손을 대면 약간 따뜻한 온도가 느껴지는 정도? 그 모든 작업이 마무리 되자 이프리트는 내게 목걸이를 돌려주며 짐짓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기운을 약간 흡수시켰다. 필요시엔 네가 필요한 만큼 발화하게 될 거다. 어때, 이정도면 쓸 만하겠지?” “물론이죠. 정말 감사해요, 이프리트님. 보기와 다르게 꽤 친절하시네요?” “흥, 아무렴 엘퀴네스와 같을려고? 녀석이나 트로웰은 인간을 싫어하지만, 난 별 감정 없는 편이다. 특히나 정령사라면 싫어할 이유가 없지. 너란 녀석도 참 운이 없군. 하필 엘퀴네스를 소환하다니. 차라리 나와 계약했다면 한결 여행이 편했을 거다.” 맞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뭐, 어차피 상관없지 않은가. 엘뤼엔은 그 존재만으로 큰 안도감을 주고 있으니까. 어차피 라피스를 찾으러 떠날 결심을 했을 때부터 편한 여행에 대한 기대는 깨끗이 접었다. 오히려 도움 받는 것이 훨씬 많으니 불평할 입장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나저나, 무섭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나는 슬쩍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카사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프리트는 아예 신경을 꺼버린 듯 했지만, 아까 전 그들이 목걸이에 봉인되지 않기 위해 했던 말이 새삼 마음에 걸렸다. 아무리 물의 기운이 강한 편이라도 인간을 무서워 할 필요까지 있을까? 그것도 왕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설마 내 정체가 정령왕이란 것을 느낀 건 아니겠지?’ 이프리트나 엘뤼엔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을 하급 정령들이 알 리는 없겠지만, 묘하게 기분이 찝찝해졌다. 꼭 죄라도 지은 심정이었다. 2. 정령왕의 계약자 깊은 밤. 고급스런 마차 한 대가 웅장한 저택 앞에 멈추었다. 마차에 새겨진 포효하는 사자의 문장을 본 경비병들은 모두 긴장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누구라도 한 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가문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라비타’ 세이크 제국 실세라고 할 수 있는 5개의 귀족가문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이름이었다. 백작가문이긴 했지만 타고난 무골들을 많이 배출해낸 탓에 황제조차 무시하지 못했다. 그 문장이 새겨진 마차를 타고 왔다는 것만으로 안의 인물이 범상치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으리라.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서 은색의 갑옷을 걸친 기사 한명이 걸어 나왔다. 라비타의 수장만이 지휘할 수 있다는 '화이트 라이언'단의 기사가 틀림없었다. 엄격한 심사를 거쳐 선발된다는 라비타의 기사는 적어도 소드 익스퍼드 급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하면 꿈조차 꿀 수 없다. 100년 전 영토 전쟁 때부터 대대로 이어져온 그들의 활약은 기사 지망생은 물론, 일반 평민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평생가도 한 번 볼 수 있을까 말까한 존재를 눈앞에서 보았다는 충격에 경비병들의 눈에는 경악과 찬탄의 빛이 차례로 떠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레파르가(家)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그러자 기사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레파르가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었다. 아마도 3일 후에 있을 레파르 백작의 생일 파티에 대한 것이리라. 먼 길을 행차하는 귀족들이 파티 당일보다 앞서 방문하는 경우는 그리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경비들이 그것을 받아 확인하는 것을 본 기사는 곧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들의 주인에게 라비타의 수장과 영애께서 오셨다 이르게.” “!!” 그저 가문의 관계자가 온 것이라 생각했던 경비들은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수장이 직접 초대에 응할 줄이야! 이들이 소속된 레파르가 역시 백작가문이었지만 라비타는 보통 백작가문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제국의 실세라는 말은 아무에게나 붙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지키고 있는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자면 그리 크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그들의 주인은 누구라도 부러워 할 굉장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최근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 하고 있는 남자였다. 제아무리 라비타의 수장이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위치인 것이다. 그것을 상기한 경비병들은 모두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라비타의 수장께서 방문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저택으로 바로 기별을 넣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대답에 기사는 잠시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라비타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거나 동경에 가득 찬 시선을 보내기 마련이다. 하물며 수장이 직접 방문하는 일은 그 어느 세력가에서도 흔치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이들은 감탄을 하되 절대 그 정도가 수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들의 가문에 자부심이 있다는 뜻이며,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는 증거였다. ‘단기간에 성장한 귀족치곤 제법이군.’ 끼이익.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자, 마차는 다시 기사를 태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앞에는 이미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내관의 기사들과 집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내린 화이트 라이언의 기사를 향해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저택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인 세바스찬 이라고 합니다.” “카밀시온 드 카르핀일세. 영애께서 많이 피곤해 하시는데 바로 쉬실 수 있게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물론입니다. 이미 시녀들을 시켜 침소와 목욕물을 마련하라 지시했습니다.” 그 말에 카밀시온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마차의 문을 열며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본 세바스찬은 정말로 마차안의 인물의 라비타의 수장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얼음기사단이라고 불릴 정도로 냉혹하기로 유명한 화이트 라이언단의 기사가 저렇게 저자세로 임하는 상대는 오직 그들의 수장뿐이었으니까. “도착했습니다. 이제 내리십시오.” 이윽고 ‘알았다’는 화답이 들려오자 세바스찬과 그 옆에 서있던 저택의 기사들은 모두 긴장했다. 현 라비타의 수장은 이룩한 업적만큼이나 가려진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4살의 나이에 검을 쥐어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것만 알 뿐, 그 외의 다른 부분은 검증되지 않은 소문들만 무성했다. 사실 이렇게 두각을 나타낸 것도 얼마 전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백작의 작위를 이어받고 나서부터였다. 이전까지는 검술에만 매진하느라 오직 연무장에서만 살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황성에서 주도하는 파티 외에는 참석하지 않을 정도로 사교와는 거리가 먼 자라, 초청장을 보내놓고도 정말 올 것이란 기대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당일도 아닌 3일 전에나 도착하다니! 친분을 쌓자면 얼마든지 쌓을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라비타의 수장이 되는 자가 그런 간단한 것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애초에 그것을 의도하고 온 것일지도 모른다. 세바스찬은 기쁨으로 온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마차에서 가장 먼저 내린 사람은 분홍색의 드레스 차림에 얇은 실크망토를 두른 여인이었다. 은회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나비 모양의 장식핀으로 산뜻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세바스찬은 한눈에 그녀가 수장의 하나뿐인 여동생인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올해로 18세인 그녀는 결혼 적령기의 여성답게 사방에서 귀족 청년들의 구애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는 것인지 좀처럼 혼처를 정하지 않아, 오빠인 라비타 백작의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이번 파티에서도 생일 축하보단 신랑감 물색을 위주로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 오랜 여행이 지루했던 듯,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흥미롭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흐응. 여기가 레파르 백작가(家)? 어두워서 주변이 잘 안 보이는 걸? 낮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치 노래 부르는 듯한 맑은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싸늘한 남자의 음성에 주위의 분위기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일정을 서둘러서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자고 재촉한건 너였다, 아나이스. 네가 불평할 군번이 아닐 텐데?” ‘저 남자가 현 라비타 백작인가!’ 세바스찬은 얼굴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의식하며 이제 막 마차에서 내린 훤칠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소문대로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람이었다. 남매라 얼굴이 닮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화사한 여동생과 달리 그는 무척이나 냉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오빠의 무심한 말투에 토라졌는지 아나이스는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작게 투덜거렸다. “그다지 불평한 건 아니었어요. 오라버니는 꼭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무안을 주시는 군요.” “후후. 꼭 상처라도 받은 것 같은 말이로구나.” “그게 당연하지요! 오라버니는 늘 저를 과대평가하셔요. 저도 마음이 여리단 말이에요.” “뭐? 하하하! 라비타 가문의 누가 그 말을 믿을까. 이런 말괄량이가 마음이 여리다고?” “아이참! 오라버니!” 남자의 웃음에 민망해진 아나이스는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지만, 주위의 사람들은 같이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허물없이 동조하기에는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너무도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것이 평소의 습관인지, 아니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서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잠시 그 모습을 멍하게 보던 세바스찬은 질린 얼굴로 얼른 허리를 숙여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라비타 백작님과 영애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는 집사인 세바스찬이라고 합니다. 저의 주인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서야 마중 나온 존재들에게 시선을 미친 듯, 두 사람은 다투던 것을 멈추고 조용히 세바스찬을 응시했다. 백작은 곧 냉소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물었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군. 나를 기다린다니…레파르 백작은 아직 침소에 들지 않은 건가? 혹여 우리가 깨운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닙니다. 평소에도 업무량이 많아 늦은 시간까지 깨어 계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가씨는 따로 쉬실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세바스찬의 말에 라비타 백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옆에 서있던 그의 기사 카밀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는 아나이스의 호위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앗! 저는 싫어요! 이런 곳에 와서까지 감시 받고 싶지는 않다고요.” “감시라고 했느냐? 타지에서의 호위는 당연한 일이다, 아나이스.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얌전히 시키는 대로 따르거라.” “루시엘 오라버니!!” 그녀의 외침을 들은 세바스찬은 그때서야 라비타 백작의 정확한 이름을 기억해냈다. ‘루시엘 드 라비타.’ 전 대륙을 통틀어 최연소 소드 마스터이자 세이크 제국 실세 가문의 수장 중 한 사람. 그가 이끄는 기사단은 이제껏 그 어느 전투에서도 패배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뛰어난 무용(武勇)에 감격한 전대의 라비타 백작이, 당시 13살밖에 안되던 어린 아들에게 기꺼이 기사단의 지휘권을 넘겨주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작의 작위에 올라서야 사람들에게 알려진 기이한 남자. 결혼 적령기를 넘긴 나이임에도 내정된 약혼녀는 물론, 귀족세계에서는 그 흔한 염문설조차 돌지 않아, 고자거나 남색가라는 둥, 별의 별 지저분한 뒷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간간히 노예시장에 얼굴을 비추기도 한다는 말이 있는걸 보면 완전히 거짓은 아닌 모양이지만. ‘하지만 저렇게 냉정한 얼굴이서야 아가씨들이 달라붙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하게 느껴지는 군. 후계자를 낳기 위해서라도 혼사를 거를 순 없을 터인데. 과연 어느 가문의 영애가 라비타의 안주인이 될 지 궁금해지는걸.’ 속으로 중얼거린 후 세바스찬은 여동생을 보내고 혼자 남은 루시엘 백작을 자신의 주인에게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거물이라면 지극히 거물인 손님의 방문이었지만 그는 결코 주눅 들지 않았다. 자신이 모시는 남자 또한 이에 못지않은 능력을 가진 위대한 사내였기 때문이다. 현 대륙에서 ‘펠리온 드 레파르’ 백작이라고 하면 코흘리개 꼬맹이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아마도 요 몇 백 년 사이 가장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름일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의 계약자였다. 기록된 역대의 정령사중에서 2번째로 바람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몸으로 정령왕을 소환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거의 몇 백 년 꼴로 겨우 한 명씩 등장한다는 것을 생각해 봤을 때, 이미 대륙에 10명 남짓 존재하는 소드 마스터보다 오히려 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주인을 모시고 있는 세바스찬이 어찌 자부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는 라비타 백작보다 더 한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평정을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이때 그의 내심을 짐작한 루시엘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비록 지금은 황제의 신임을 독차지하는 존재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파르 백작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은 지방의 영주에 불과했다. 그러던 것이 정령왕을 소환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황제의 부름을 받아 황성에서 근무하며 수도에 저택을 옮기게 된 것이다. 하루아침에 벼락출세를 한 셈이었다. 아무리 권력에 약한 게 귀족들의 생리라지만, 그런 존재의 생일파티에 몸소 참석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찌 우연히 타고난 운 따위가 자신의 가문이 몇 십년동안 이룩한 업적을 넘볼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정령’이라고 하면 그는 불편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 전 노예시장에서 마음에 들었던 소년을 아깝게 놓쳤었기 때문이다. 그때 ‘엘’이라고 이름을 밝힌 소년이 바로 정령사라고 들었다. 그때부터였다. 그가 정령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실제 그동안 눈이 마주쳐도 모른 척 했던 레파르 백작의 초청에 응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소문의 정령왕을 실제로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어쩌면 그때 그 소년이 했던 사술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을 가다듬던 루시엘은 문득 복도 앞에 누군가가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한 손으로 끌어안길 만큼 갸날픈 몸에 허리아래까지 흘러내린 새하얀 머리카락. 투명할 정도로 하얀 피부를 가진 그는 마치 눈밭의 설녀라도 보는 듯 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은 아련함이 보는 이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 ‘엘프? 아니, 사람인가? 정말 내 눈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군.’ 루시엘이 작게 감탄하는 사이 집사인 세바스찬은 한눈에 그(혹은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는 얼른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밖에 나와 계신지요, 미네르바님. 무언가 찾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 미네르바! 그때서야 루시엘은 눈앞의 사람이 인간이 아니라 바람의 정령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윽고 굳게 닫혀있던 미네르바의 입술이 열리며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바람의 기운이 달라진 것을 느끼고 나왔다. 펠리온을 찾아온 손님인가?” “네, 그렇습니다. 라비타 백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루시엘님, 인사 올리시지요.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님이십니다.” 집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시엘은 귀족의 예법에 맞추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보였다. “고귀한 존재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네르바시여. 루시엘 드 라비타라 합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다시 입을 다물었을 뿐, 그의 인사에 대해 어떠한 화답도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존재조차 관심이 없었다는 얼굴이었다. ‘지독하게 말이 없는 정령왕이라더니 사실인 모양이군.’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리던 루시엘은 미네르바의 시선이 다른 방향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곳은 동생인 아나이스가 사라진 쪽이었던 것이다. 표정 없는 얼굴로 한참동안 그곳을 응시하던 미네르바는 지나가는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일행이 더 있군.” “…?…아아, 제 여동생입니다. 긴 여정으로 노곤해 하기에 먼저 방으로 가서 쉬게 했습니다만.” “그런가.” 대답하는 미네르바의 얼굴은 묘하게 착잡해 보였다. 하지만 루시엘이나 세바스찬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미네르바 본인조차 그러한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 그 누가 알겠는가. 아니, 모른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미네르바는 얼마 전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이미 경고를 받은 적이 있었다. 마치 울 것처럼 일그러진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혜안을 지닌 땅의 정령왕 트로웰의 모습이었다. <그는 널 사랑하지 않아, 미네르바.> <네가 사랑하는 인간은 정해진 반려가 따로 있어. 누군지 알고 싶어?> <조만간 너는 스스로 함정을 파게 될 거다. 넌 네 손으로 그를 파멸의 길로 이끌게 될 거야. 지금의 너는 불안해. 내가 이렇게 쉽게…미래를 읽어버릴 정도로.>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애초에 펠리온을 부추겨 라비타 가문에 초대장을 보내게 한 것이 바로 미네르바 자신이었으니까. 초대하는 문구에 꼭 여동생도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하게 만들었다.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의 반려가 될 운명을 가진 여인과 자신 중에서 선택받는 것이 누구인지. 트로웰의 예지가 틀렸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행동일까? 사랑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이어지는 것이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하는 것 같아 그의 마음은 조금도 편치 못했다. 아마 지금 기분이 착잡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가슴속을 묘하게 불안하게 만드는 감정을 무시하며 미네르바는 조용히 눈을 내리감았다. “오오, 어서 오십시오, 루시엘 백작님. 오시길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쪽에 앉으십시오.” ‘저자가 레파르 백작인가.’ 얼굴 가득 반가운 기색을 띈 채 자신을 맞이하는 남자를 보며 루시엘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펠리온 드 레파르.’ 올해 31세의 미혼의 청년. 이름뿐인 귀족에서 하루아침에 백작의 작위를 부여받은 남자. 살다보면 벼락출세를 하는 귀족들이야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는 상당히 특별한 케이스였다. 바로 그 흔하지 않은 정령왕의 계약자였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정령술에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설마 정령왕을 소환하게 될 줄이야. 그 엄청난 사실은 금세 온 대륙으로 퍼졌고, 지금은 그의 이름만 들어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덕에 진작 연줄을 두지 않은 것을 후회한 부호들이 셀 수 가 없을 정도. 게다가 인물까지 제법 번듯했기에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최근엔 또래이면서 같은 백작의 지위를 가진 루시엘- 자신과 같은 저울에 놓고 비교하는 자들도 부쩍 늘어난 형편이다. 희대의 라이벌이라는 명목이었다. ‘흥, 검사와 정령사를 두고 라이벌 운운하다니. 지하에 계신 아버님이 들었다면 땅을 치고 통탄할 일이로군.’ 대대로 뛰어난 검사를 배출해낸 그의 가문은 뼛속까지 무장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의 아버지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고, 검만이 모든 전투의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특히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는 것만이 진정한 노력이라고 생각했던 그는, 학구파인 마법사나 친화력위주의 정령사를 가장 싫어했다. 루시엘 또한 전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에 공감하고 있었다. 마법과 정령술의 위력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단위의 공격방식은 한사람씩 맞서 싸우는 전투의 묘미를 망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더욱 실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마법사에 비해, 정령사는 큰 쓰임이 없었기 때문에 이제까지 쓸모없는 종자로 분류하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그렇게 무시하고 있던 정령사와 동급의 취급을 당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새삼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자신을 반갑게 맞이하는 펠리온을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에 실례가 많습니다, 레파르 백작. 황성에서 몇 번 뵈었지만, 정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군요.” “하하! 그래서 저도 설마 백작님이 직접 와주실 거란 생각을 못했습니다. 백작께서 와주셨으니, 이번 파티가 더욱 빛을 발하겠군요. 여동생이신 아나이스 영애께서도 함께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미안합니다. 밤이 깊어 피곤해 하기에 먼저 쉬도록 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그리 하셔야지요. 백작께서도 많이 피곤하실 텐데, 어서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도록 하겠습니다.” “배려에 감사하지만 난 괜찮소. 그러고 보니 생일 축하에 대한 인사가 늦었군요.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아직 제대로 된 생일이 오려면 이틀 더 있어야 한답니다. 아참, 루시엘 백작님께서도 이번 세피온 공국에서 열리는 검술대회에 초청을 받으신 걸로 압니다만.” 펠리온의 말에 루시엘은 얼마 전 당도했던 또 하나의 초대장을 기억해냈다. 대륙 최고의 검사이자, 현재는 공국에서 요양 중인 걸로 알려진 테이론 드 세피온 공작이 개최한 검술대회에 대한 것이었다.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었던 공작이 직접 주관하는 행사라는 말에, 두고 볼 필요 없이 초대에 응하는 화답까지 미리 보낸 참이다. 그런데 여기서 왜 그 말이 나오는 걸까? 루시엘이 눈빛에 서린 의문을 읽은 펠리온은 서두르지 않고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실은 저도 그 대회의 참관초청을 받아서 말입니다. 이왕 여기까지 오신 것, 파티 후에도 며칠 더 머무르셨다가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아, 물론 다른 바쁜 일정이 있으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저야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레파르 백작께서도 검술대회에 흥미를 보이실 줄은 몰랐군요.” “어릴 때부터 호신술삼아 검술도 조금씩 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행사도 매우 매력적이게 느껴지더군요. 물론 소드 마스터이신 루시엘님이 가지신 관심에는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그의 말에 루시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펠리온을 흩어보았다. 제법 다부진 체격에 장신이긴 해도, 검술까지 배웠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손에 잡힌 굳은살과 팔 다리의 발달된 근육은 단순히 호신삼아 배워다 치기에는 그 수련이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관심이 없던 탓에 이제야 발견하게 된 것이다. ‘호오, 제법인걸. 이정도면 어느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겠군.’ 그는 이제껏 가지고 있던 펠리온에 대한 편견이 호의로 기울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띈 것은, 펠리온의 허리춤에 매달린 화려한 무늬의 장검이었다. 겉보기에는 그저 형식적인 장신구로만 보였으나, 그 주위를 둘러싼 미묘한 기운이 마음에 걸렸다. 그는 궁금한 것을 참지 않고 직접 묻기로 마음먹었다. “저어, 그것은…?” “아아, 이것 말입니까? ‘블래스터’라고 합니다. 미네르바님께서 직접 만들어 주신 검이랍니다. 앞으로 가문의 가보로 남길 생각입니다.” “호오. 정령왕 미네르바께서 직접 말입니까?” 정령왕이 만든 검이라니! 루시엘은 숨김없이 감탄을 내뱉었다. 그에 펠리온은 무척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블래스터의 검집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정령술로만 만족하지 않는 저를 위한 응원의 선물이라고 하시더군요. 제게는 꽤 과분한 물건이지요.” “흥미롭군요. 정령왕께서 만든 검이라면 평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바로 보셨습니다. 백작님이시라면 이 검에 서려있는 특이한 기운을 느끼셨을 겁니다. 혹시 바람의 상급정령인 진을 아십니까?” “그야 들어는 보았습니다만.” “하하! 블래스터에는 그 바람의 상급정령이 봉인되어 있답니다. 세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정령검이라고 하더군요.” “!!”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눈앞의 블래스터는 천금을 주고도 살 수없는 보물이었다. 마법검과 에고소드보다도 희귀하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정령검이 아니던가! 게다가 상급 정령이 봉인되어 있다면 그 위력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검사라면 누구나 욕심낼만한 물건이었기에, 루시엘의 눈에 잠시 탐욕의 빛이 잃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도구의 힘을 빌려 능력을 높이는 것은 검사로서의 그의 자부심이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요하는 감정이 사라지자 그는 차분히 생각을 이을 수 있었다. ‘아무리 계약자라고 해도 정령왕이 직접 검을 만들어 주다니. 미네르바와 펠리온 백작이 서로 연민을 품고 있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루시엘은 곧 이곳에 들리기 전에 만났던 미네르바의 모습을 떠올렸다. 정령들은 타고나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중성이라 들었지만, 그 정도의 미모라면 백작이 후세를 포기하고서라도 매달릴 만 했다. 마치 이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았던 아름다움. 눈이 마주친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 이후로 두 번째였다. ‘그러고 보니 그 엘이란 소년도 꽤 중성틱한 외모였지. 그렇게 눈에 띄는 외모에 정령사라면 반드시 사람들의 입소문이 퍼질 것이다. 사람을 사서 정보를 모으고 있으니 곧 찾아낼 수 있겠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곤 펠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참, 마침 잘 되었군요. 그동안 궁금해 하던 것이 있었는데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아, 그게 무엇인지?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 얼마든지 가르쳐드리지요.” “백작님만이 대답하실 수 있는 겁니다. 혹시 정령사가 마나를 차단하는 팔찌를 차고도 정령을 부릴 수 있습니까?” 루시엘의 질문에 펠리온은 생각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불가능 합니다. 정령을 소환하는 데에도 일정한 양의 마나가 반드시 필요하니까요.” “흐음, 그렇다면 정령외에 물을 다룰 수 있는 사술이 있습니까? 실은 얼마 전에 한 정령사 소년을 만났는데, 양 팔에 마나차단 팔찌를 착용하고도 물을 다루는 것을 보았거든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사술이길래, 혹 정령사인 백작님은 아실까 하여 묻는 겁니다.” “으음. 별 일이군요. 제가 알기론 그런 사술은 없는데요. 아마도 타인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만?” “하지만 그 주위엔 저와 그 소년밖에 없었습니다. 제 감각으로도 사람의 인기척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죠.” “당연하다. 그건 정령이니까.” “!!”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란 루시엘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정령왕 미네르바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펠리온 또한 놀랐는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네르바를 맞았다. “미네르바!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한참동안 돌아오시지 않기에 혹 정령계로 가신 건가 했습니다.” “그저 이 앞을 둘러보았을 뿐이다. 그보다 꽤 흥미로운 대화가 진행되더군. 그대, 루시엘이라 하였던가?” “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시여.”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루시엘의 얼굴엔 방금 전 그가 했던 말에 대한 의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 미네르바는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그대의 설명이 틀림이 없다면, 그 소년을 대신하여 물을 다룬 이는 정령일 것이다. 아마도 소환되지 않은 자연체의 정령이겠지.” “그런…정령사가 소환하지 않고 정령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놀란 루시엘의 질문에 미네르바는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도움을 청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침 주위를 돌아다니던 물의 정령이 일시적으로 변덕을 부린 걸 테지. 그만큼 소년의 상황이 위급하며, 친화력이 높았다는 뜻이다. 그 장소에 소년과 그대 둘뿐이라 했던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군.” “그, 그건…” 당황한 루시엘은 말끝을 흐렸지만, 미네르바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듣지 않아도 뻔했다. 마나 차단 팔찌를 착용하는 경우는 국가에 반역된 죄인이거나, 노예들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최근 잡힌 죄인들 중에서 정령사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십중팔구 후자의 경우일 것이다. 청렴결백한 외모와 뛰어난 능력과 달리, 루시엘의 뒷소문이 좋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만한 귀족들은 거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미네르바는 거기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루시엘의 눈빛에 서린 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 그런 경우가 가능한 일이 한 가지 더 있었지만 일부러 말해주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나머지 수는 정령왕이 직접 도운 경우인가…’ 소환된 정령왕은 계약자와 의식을 연결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가능했으니 얼마든지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그 소년이 인간이 아니었거나, 앞서 말한 경우일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설명은 했지만 둘 다 흔치 않은 일이다. 미네르바는 새삼 그 소년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루시엘은 루시엘대로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그저 그런 정령사라고만 들었던 소년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대답 감사합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쉬러가고 싶습니다만.” “아! 그렇군요. 세바스찬! 루시엘 백작님을 방까지 안내해 드리게. 오래 붙들어서 죄송합니다, 백작님. 부디 머무시는 동안 충분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편한 시간 되십시오, 펠리온 백작, 그리고 미네르바시여.” 루시엘이 사라지고 난 후, 미네르바는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펠리온을 바라보며 물었다. “탐욕이 많은 남자다. 왜 저런 자를 가까이 하는 거지?” “하하. 인간 중에 욕심이 없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는 본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젊은 나이에 가문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가며, 귀족들 세계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몸으로 보여주고 있는 남자니까요.” “허나 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나.” “괜한 염려이십니다. 게다가 이번 파티에 루시엘 백작을 초대하자고 하신 건 미네르바님이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러시는지?” “글쎄. 이번만은 내가 잘 못 생각한 것 같아서 말이다. 그에겐 하나뿐인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역시 너도 인간의 여자에게 더 끌릴 테지?” “네? 하하! 설마 미네르바님, 지금 질투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는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여자를요?” ‘그야 그녀가 당신의 운명의 상대이니까.’ 미네르바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펠리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입술에 천천히 입을 맞추었다. “이제 보니 정령왕도 의심이 많은 존재였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사랑하는 이는 죽어서도 당신뿐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겁니다.” “맹세 할 수…있는가?” “물론입니다. 나의 영혼을 걸고.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난 포로가 되어버렸으니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진지한 펠리온의 눈동자에 미네르바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사람이 나를 배반할 리가 없다. 이번만큼은 트로웰의 예지가 틀린 것이다. 미네르바는 간절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리, 예고된 파란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며칠 후 발표된 검술대회의 총 참가인원은 128명으로 집계되었다. 이들은 각 32명씩 4조로 나뉘어져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7번의 대련을 진행하게 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그 마지막 7회전에서 이긴 사람이 이번 대회의 최종 우승자였다. (너무 당연한가?) 대회 장소는 공국 내에 마련된 커다란 경기장 안이었다. 관객석과 귀빈석은 물론, 선수들의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방까지 마련된 건물이었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은 3차전을 통과한 32명뿐이었다. 그러므로 1회전과 2회전은 경기장 밖의 공터에서 따로 진행되었다. 아마 거의 예선전 같은 식으로, 제대로 된 실력자를 골라내기 위한 절차 같은 식인 듯 했다. 그래서인지 승부내용도 검의 실력보단 체력적인 조건을 따지는 것이 많았다. 1회전의 경기방식이 무거운 추를 매단 채 1시간 동안 누가 더 팔굽혀펴기를 오래하느냐는 것이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5분당 추가 하나씩 더 추가되며, 도중에 쓰러지면 즉시 탈락이었다.) 게다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공터에서 진행되는 탓에 사방은 구경꾼들과 함께 한 동행인들로 가득했다. 곳곳에서 응원전과 노점이 열렸고, 1회전이 진행되는 일주일 동안 마치 축제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1회전이 끝나는 마지막 날, 바로 2회전의 대전표와 날짜가 공개되었다. 오늘은 바로 그 역사적인 2회전이 시작되는 첫날이었다. “어라? 저건 또 뭐지?” 1회전을 가뿐히 통과한 나는 경기장 앞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커다란 텐트가 설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텐트는 입구와 출구가 한 방향으로 뚫려있는 모양이었는데, 마치 동굴처럼 안이 컴컴하고 깊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2회전의 경기 방식이라는 것이 아닌가. 우선 호명된 두 선수가 앞으로 나오면 진행자가 그 텐트 속으로 함께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그곳에서 먼저 나오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터널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들어간 사람들은 오랫동안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나온 후에도 뭔가 상당히 겁에 질리거나, 녹초가 된 얼굴들이 대다수였다. “혹시 안에 뭐가 있나?” 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환상마법이 걸려있는데? 일종의 정신력 테스트일지도.” “엑? 환상 마법이요? 왜 하필 그딴 걸? 으윽. 정말 악취미야.” “어쩔 수 없잖냐. 이 많은 인간들이 일일이 대련하자면 끝이 없을 텐데. 그래도 그렇게 강도 높은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일단 들어가 봐야 알겠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일전의 바론 던전에서 겪은 일 탓에, 나는 환상마법이라고 하면 무조건 끔찍한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사이에도 어김없이 내 차례는 다가왔고, 나는 곧 대회진행자가 내 이름과 상대 선수의 이름을 호명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1조의 ‘엘’!과 ‘라반’! 나오시오!” “아! 내 차례다. 그럼 다녀올게요!” “어이어이, 이번엔 적당히 하는 것 잊지 말라고. 저번처럼 압도적으로 이겨서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이프리트가 말한 것은 1회전에서 벌어진 팔굽혀 펴기에서, 내가 상대방을 500번 차이로 이긴 걸 두고 한 말이었다. 그것도 중도에 상대방이 탈진해서 쓰러졌기 때문에 멈춘 것이지, 더 했다면 숫자차이가 더욱 불어났을 것이다. 그냥 아무생각 없이 한 건데 설마 상대방이 그렇게 쓰러질 줄 내가 알게 무언가. 사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체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전혀 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을 배우는 사람들은 으레 나만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멋쩍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적당히라는 기준이 참 애매하긴 한데…. 어차피 저 안에 들어가서 벌어지는 일들은 밖에선 안보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있잖아. 너무 빨리 나오지 말고 상대 녀석의 텀을 보고 행동하란 말이야.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냐?” “네네, 알았어요. 아무튼 노력해 볼게요.” 역시나 잔소리가 많은 타입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설렁설렁 대회 진행자의 앞으로 걸어갔다. 마침 다른 쪽에서도 호명 받은 남자가 나오고 있었다. 이번에 나와 겨룰 상대는 오랜 전투생활이라도 한 건지 온 몸이 굵은 상처들로 가득한 남자였다. 그가 등에 매고 있는 도끼는 그간 묻혀온 피의 양을 증명하듯 검붉은 기가 배어 있었다. ‘헤에…용병인가?’ 그 순간 나를 발견한 남자가 눈에 띄게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곧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후드를 써서 음침한 데다, 언뜻 봐도 체구가 작고 어려보이는 녀석이 자신의 상대가 된 게 불만인 모양이다. 잠시 후 남자의 입에서 다분히 시비조의 걸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완전히 꼬맹이잖아? 이런 몸으로 잘도 1회전을 통과했군. 그래봤자 상대는 더욱 더 비실거리는 놈이었겠지만. 어디 엄마 젖은 다 먹고나 온 거냐, 아가야?” “!!” 아니, 이게 나를 언제부터 봤다고 아가래? 불쾌한 기분이 확 치솟았지만 나는 일단 참을 인자를 새겼다. 눈앞의 남자는 상당히 큰 장신에 우람한 덩치였기 때문에,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내가 꼬마로 보여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참자, 참어. 용병들 성격 나쁜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저런 거 일일이 맞대응하다간 내가 먼저 홧병으로 죽지. 으득…’ 하지만 남자는 내가 가만히 있는 것이 겁을 먹어서라고 생각해 버린 듯 했다. 그는 더욱 의기양양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대답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잘도 이 대회에 참가했구나. 아무튼 요즘은 개나 소나 주제를 몰라서 탈이라니까.”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럼 제가 개라는 건가요?” “헤, 꼴에 기분은 나쁘다 이거냐? 이봐, 꼬마야. 그냥 순순히 말할 때 기권하는 건 어때? 기절해서 실려 나가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더 폼 날 텐데?” 기절하긴 누가 기절한다는 거얏! 발끈한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참자고 생각했던 것도 잊고 냉큼 쏘아붙였다. “그렇게 말하는 아저씨가 기권하는 건 어때요?” “뭣이? 아저씨? 내가 어딜 봐서? 난 아직 창창한 25살이란 말이다!” “흥. 20살 넘으면 다 아저씨지 뭘.” “뭐, 뭐야?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물론 25살은 많은 나이가 아니다. 하지만 원래 사람이란 자신보다 젊은 사람을 부러워하기 마련. 그는 여러 번 반복된 ‘아저씨’란 호칭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음껏 써먹어주기로 작정했다. “어라, 왜 그러세요, 아.저.씨? 안색이 굉장히 나쁘시네요. 혹시 뭐라도 잘못 드셨어요? 하긴, 아.저.씨. 정도의 나이가 되면 먹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나저나 이런 대회에 나와도 괜찮으시겠어요? 이제 슬슬 행동도 굼떠지실 나이인데, 과격한 운동은 피하셔야죠. 안 그래요, 아.저.씨?” “이, 이자식이!!” “흠흠! 둘 다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실격당하고 싶지 않으면 정숙해라.” 다툼이 커질 기미가 보이자 진행을 맡은 기사가 얼른 끼어들어 제재를 가했다. 덕분에 보복을 가하지 못하게 된 남자는 울그락불그락 해진 얼굴로 연신 씩씩 거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기사는 우리들에게 2회전의 경기 방식과 간단한 룰을 설명해주었다. “이미 앞서나온 선수들을 보았다시피, 지금부터 너희들은 저 공간 안을 통과해야 한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시련을 뚫고 먼저 나오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무기는 현재 소지하고 있는 것을 가지고 들어가도 되지만, 서로를 공격하는 행위는 금지다. 자, 그럼 건투를 빌겠다.” 상대를 공격해선 안 되지만 무기의 소지를 허용하다니? 혹시 저 안에 괴물이라도 나오는 걸까? 기사의 말이 끝나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텐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용병남자도 얼른 뒤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어디 두고 보자. 잘 못 했다고 울고불고 빌게 만들어 줄 테다.” 말투를 보아하니 경기가 끝난 후에 복수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그저 상큼이 무시했을 뿐이지만.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주위의 기운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을 느꼈다. 또한 피부를 타고 도는 공기가 마치 끈적한 액체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은 평소보다 공기 중에 포함된 마나의 함유량이 많다는 뜻이었으며, 주변에 마법이 설치되어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쩝, 아주 대놓고 함정이 있다는 걸 알려주네. 아무리 예선전이나 마찬가지라지만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바론 던전에서 일행이 전부 없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건 그야말로 아이들 장난수준에 불과했다. 하긴, 마신의 능력과 인간들의 수준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뭐가 나올지 모르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집을 움켜잡았다. 그 상태로 잠시 동안 가만히 있어봤지만 여전히 불유쾌한 공기만 느껴질 뿐, 일어나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었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갑자기 옆에 있던 용병남자가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악!! 괴, 괴물!!” “엥?” 그의 말에 놀란 나는 남자가 벌벌 떨며 가리키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괴물은커녕 그저 밖으로 나가는 출구만 뻥 뚫려 있었을 뿐이었다. 속았다는 느낌에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뭐예요, 아저씨. 장난치지 마요. 괴물은 무슨 괴물이 있다는 거예요?” “무슨 헛소리야! 저기 저렇게 큰 오우거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제길, 2회전에서 오우거를 풀어놓다니, 이건 사기야!!” “!!”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그는 들고 있던 도끼를 힘껏 움켜잡으며 앞을 경계했다. 그 모습은 처절한 전투를 앞둔 전사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괴성을 내지르며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웅, 부웅~ 휘익!! “크아아악! 죽어랏! 죽어!!이 괴물 자식!!” “……” 남자가 발악하는 장면은 굉장히 진지하면서도 심각했다. 웬만한 신경으로는 쪽팔려서라도 일부러 저러지는 못할 테니, 장난을 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십중팔구 환영마법에 걸렸다는 소리인데. 왜 나는 멀쩡하고 저 남자만 걸린 걸까? ‘쩝. 아무렴 어때. 암튼 이대로 나가면 내가 이기게 되는 건…어, 어라라?’ 그 순간 나는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다수의 시선들을 느꼈다. 아마 행사를 주관하는 자들이 영상석을 설치하고 내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와 함께 이곳에 오기 전 이프리트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이번엔 적당히 하는 것 잊지 말라고. 저번처럼 압도적으로 이겨서 사람들 놀라게 하지 말고.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 있잖아. 너무 빨리 나오지 말고 상대 녀석의 텀을 보고 행동하란 말이야. 그런 것까지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하냐?> 예선전에선 일부러 돋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사람들 눈에 띄어 시끄러워지는 것을 피하려면 알아서 주의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여기서 그냥 나가버리면 우승이야 확정이겠지만, 마법을 설치한 자들의 주목을 끌게 될 것은 틀림없었다. 환영마법이 몇 서클인지는 몰라도 그것에 걸리지 조차 않았다고 하면, 자칫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을 들킬 수도 있는 노릇이다. 원래는 그냥 적당히 시간을 때우고 나갈 생각이었는데, 지켜보는 시선이 있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말은 즉…내가 여기서 걸리지도 않은 환영마법을 보는 것처럼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가? 아하하하…’ 나는 핼쓱한 얼굴로 여전히 헛손질만 하고 있는 용병남자를 바라보았다. 오우거를 본다고 했으니 아마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몬스터와 대치하는 환영인 모양이다. 그 몬스터와 겨루어 이겨야만 풀리는 마법인걸까, 아니면 시간 안에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걸까? 이래저래 맨 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다. 생각 같아선 억지로라도 환영마법에 걸려서 뭐라도 발견했음 싶었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일단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그리곤 마지못해 모기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아이고 무서워라…왜, 웬 괴물이 여기에…” ‘젠장! 연기인 거 다 들통 나겠다!!’ 익숙하지 않은 짓을 하려니 이미와 등 뒤로 온통 식은땀이 흘렀다. 그게 나름대로 겁에 질린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 와중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순간 굉장히 낯익으면서도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연기라고 하는 거냐? 차라리 그냥 나가지 그래? “이, 이프리트님?” 놀랍게도 말을 걸어온 이는 자연체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프리트였다. 그새 궁금해서 뒤따라 온 건가? 그는 잠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옆에서 여전히 헐떡이고 있는 용병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모습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는 거냐? 적어도 흉내정도는 내야 할 것 아니야, 흉내는! 도대체가 제대로 할 생각은 있는 거냐? “아하하. 그게…이런 경험은 처음이라서…” -쯧, 암튼 내 이럴 줄 알았지. 너 정도면 웬만한 환영마법엔 끄덕할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뭘 하고 있나 와 봤더니만. 딴 인간들은 잘도 남을 속여먹던데, 넌 어떻게 된 게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냐? “이, 이래봬도 노력하고 있다구요!” -그래서 결과가 고작 ‘아이고 무서워라~’냐? 어떤 인간이 그런걸 보고 속아 넘어가? 할 수 없지. 내가 좀 도와주마. “에? 어떻게요?” 그에 이프리트는 행동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바로 눈앞에서 시뻘건 ‘불의 검’을 꺼내 들었던 것이다. 뛰어난 공격력을 자랑하는 그것은 전 차원을 통틀어 오직 이프리트만이 다룰 수 있는 무기였다. 예전에도 몇 번 (미래의) 이프리트가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난 한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덩달아 그의 목적 역시. -자! 전투다, 인간! “왜 얘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 그때부터 나는 필사적으로 이프리트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구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체의 정령에게는 물리적인 공격은커녕, 검기조차 잘 통하지 않기 때문에 맞서 싸운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접은 상태였다. 설령 통한다 하더라도 이제 겨우 소드 마스터 초입에 들어선 내가, 무슨 수로 공격 계열의 정령왕인 그를 이길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켜보는 눈 때문에 검기도 쓰지 못하는데! 그와 반대로 이프리트는 연신 신나는 표정이었다. 휘익! 촤악! 퍼어억! -으하하! 그쪽이 아니잖아! 자자~ 피하지 않으면 죽는다아~~ ‘이 썩을 놈의 정령왕!’ 내가 속으로 비명을 지르던 말든, 어쨌든 덕분에 지켜보는 이들은 내가 단단히 환영 마법에 걸렸다고 믿을게 틀림없었다. 지금 그들의 눈에는 미친 듯이 웃으며 검을 내지르고 있는 이프리트가 보일 리 없었으니까. ‘당신 평소에 인간에게 불만 없다는 거 거짓말이지!!!’ 그렇게 몇 분의 시간이 흐르자 옆에 있던 용병남자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기절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이프리트는 공격을 멈추었고, 나는 녹초가 된 몸으로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은 채 우승할 수 있었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마운 도움이었다. 뿌득. 2회전의 결과가 나온 후에도 트로웰의 표정은 그닥 밝지 못했다. 이유는 이프리트가 그의 동의 없이 나를 도와준 일 때문이었다. (전혀 고맙지는 않지만.) 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프리트를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 그렇게 도와주는 버릇을 들이면 여기서 더 성장하지 못해. 자신의 일은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게 해야지.” “트로웰 네가 못 봐서 그래. 이 녀석의 연기가 얼마나 어설펐는지 알아?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고.” “다 그러면서 대처 능력을 키우는 거다. 중간계에서 유희도 많이 해본 녀석이 설마 몰랐다고는 대답하지 않겠지.” “쳇, 별 탈 없이 이겼으면 됐지, 뭐가 문제야? 어차피 우승이 목적인 대회잖아. 자잘한 부분은 서로 신경 끄자고.” 그러자 트로웰도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프리트는 이프리트대로 화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그 묘하게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엘뤼엔만이 태연하게 주위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핵폭탄이 터져도 나 몰라라 할 것 같은 얼굴이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들과는 동떨어져 있는 존재 같았다. 슬쩍 그에게 다가간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좀 말려봐, 아버지. 저러다 싸우면 어떡해?” “…이미 싸운 것 같다만? 그리고 왜 내가 녀석들을 말려야 하지?” “일행의 분위기가 험악해 지는데 당연히 말려야지! 나보다야 엘뤼엔이 참견하는 게 더 효과적이잖아.” “난 관심 없다.” “윽! 자꾸 그렇게 비협조적으로 굴 거야?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엘퀴네스씨!” “거참 종알종알 시끄럽군.” 찌푸린 얼굴로 중얼거린 엘뤼엔은 곧 서로를 외면하고 있는 두 정령왕-트로웰과 이프리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얼음창을 만들어 그대로 둘을 향해 집어 던지는 것이 아닌가! 휘익! 콰아앙! “헉!!” “으악! 이게 무슨 짓이야, 엘퀴네스!!” 다행히 두 정령왕 다 맞지는 않았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에 상당히 당황한 듯 했다. 열 받은 얼굴로 당장 따지고 드는 이프리트에게 엘뤼엔은 서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내 맘이다.” “뭐, 뭣이라!! 너 지금 말 다했냐?” “유치한 일 가지고 딱딱한 분위기 만들지 마라. 너희들이 그러고 있으니까 저 녀석이 나한테 달라붙잖아. 날 귀찮게 만들지 마.” “뭐야? 자기 계약자를 떠넘긴 게 누군데? 우리가 네놈 계약자 대신 챙겨주는 유모냐? 엉?” “…그래서 나와 해보겠다는 건가?” 누누이 말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엘뤼엔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자, 이프리트는 어깨를 움찔하더니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그 옆에서 트로웰은 키득거리고 웃고 있었다.) “큭! 알았어, 알았다고!! 암튼 저놈의 성질머리하곤. 어이, 인간! 이쪽으로 와! 이 몸 바쳐 신나게 놀아주마!” “에? 아니, 그런 걸 바란 게 아닌데…그리고 나에게는 엄연히 엘이라는 이름이…” “흥, 그래봤자 다 똑같은 인간이지. 이 몸한테서 이름으로 불리려면 아직 백년은 이르다!” “헐, 인간은 백년후면 죽는다구요.” “그러니 꿈 깨란 소리다. 네가 인간치곤 제법 능력이 된다는 건 인정하지만, 내가 보기엔 아직 십 만년은 멀었다. 아까도 네가 좀 더 잘했으면 내가 나설 필요까지도 없는 일이었잖아. 왜 도움준답시고 한 일에 구박을 받아야 하냐, 엉?” 결국 화살이 내게 돌아오는 건가? 나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엘뤼엔을 바라봐 준 뒤,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그래요. 다 내가 죽일 놈이에요.” “쯧쯧, 저 삐딱한 대답 봐라. 하긴 네가 괜히 엘퀴네스의 계약자겠냐? 암튼…오늘 2회전을 통과했으니, 이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숙소는 따로 제공해 주는 거냐?” 그의 질문에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공국 안에 있던 여관에서 지내며 대회 일정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지만, 2회전을 통과한 이상 앞으로는 경기장 내에 마련된 선수 대기실에서 지낼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어차피 여관을 전전하는 탓에 별다른 짐이 없었던 나는 바로 숙소를 그곳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선수외의 동행자는 입장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정령왕들이야 자연체로 변해서 따라오면 될 테니까. 그때까지 쿡쿡 웃고 있던 트로웰도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3회전에서 겨룰 상대와 미리 만나보는 것도 괜찮겠지. 여관처럼 북적이거나, 시끄럽지도 않을 테고. 그럼 이프리트, 네가 따라가서 지켜봐줘.” “엥? 왜 또 나야? 너희들은 뭐하고?” “나와 엘퀴네스도 갈 거야. 그전에 먼저 만나봐야 할 녀석이 있어서.” “뭐야, 이 대회 주최자라는 드래곤을 만나러 가는 거냐?” 이프리트의 말투는 다소 퉁명스러웠지만, 트로웰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지금 세피온 공작으로 유희중인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드래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수전노거든. 그런 녀석이 이번 대회에 에고소드를 상금으로 건 게 이상해서 말이야.” “흐응. 에고소드라고 전부 좋은 건 아니잖아? 어떤 영혼이냐에 따라 능력이 천차만별이니, 별로 쓸모도 없는 걸 내놨겠지. 아님 어느 헷가닥 하는 놈을 집어넣어서 마검을 만들어놨을지도.” “바로 그게 문제야. 마검은 자신보다 약한 사용자의 의식을 잡아먹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유출이 금지되어 있어. 만약 그 조항을 어기는 거라면 일이 커지기 전에 막아야지.” “쩝.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런 정신 나간 짓을 벌일까. 우리 4대 정령왕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아는데. 그나저나 네가 웬일이냐? 중간계가 소란스러워진다면 얼씨구나 할 녀석이 말릴 생각을 다하고. 인간들이 위험해 지는 건 너도 바라는 일 아니었어?” “…그 피해가 인간으로 그치지 않으니까 그렇지. 난 인간들의 멸종을 원하는 거지, 아크아돈의 멸망을 바라는 게 아니야.” “큭큭. 그야 그렇겠지. 그럼 이럴 때 네 특기를 안 써먹고 뭐하는 거야? 이런 일 쯤이야 혜안으로 미리 알아볼 수 있잖아.” 그러자 트로웰은 갑자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내가 움찔하고 놀라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엘이 관련된 미래는 안 읽히거든. 그래서 지금은 검술대회에 대한 것은 아무것도 안보여. 현재로선 직접 만나보는 수밖에 없어.” “뭐야, 그게? 이 녀석 인간인거 아니었어? 신도 아니면서 관련되었다는 것만으로 미래가 안 읽힌다고?” “응. 그래서 나도 좀 놀랐어. 운명이 없는 인간이 있다는 건 처음 들어봤거든.” “운명이 없다고?” 그 말에 이프리트도 덩달아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러다 조만간 정체가 들키는 게 아닐까? 절로 심장이 조마조마 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1조의 엘님이시군요. 2회전을 통과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건물 내부에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이곳의 관리인인 듯한 중년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아직 내가 누구라고 밝히기도 전의 일이라,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제가 엘이라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행사 보조인으로서 3회전 진출자들의 인상착의는 파악하는 건 기본이지요.” “하지만 전 후드를 쓰고 있는 대요?” “대회 중에서도 마찬가지셨잖습니까. 선수 중 유일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특징과 전체적인 체격. 그리고 목소리와 분위기를 보고 알아본 겁니다.” 하긴, 얼마 안 된 경기였다지만 2번 내내 얼굴을 가리고 참석했으니 오히려 특징으로 남을 만 했다. 게다가 참가자 중에서 유일하게 후드를 쓰고 있었다면 기억하기가 더 쉬웠을 것이다. 물론 32명이나 되는 3회전 진출자들을 전부 알아본다는 건 역시 놀라웠지만 말이다. 내가 굳이 후드를 쓴 이유는 예쁘장한 얼굴 때문에 오해받는 것이 귀찮아서였다. 지금도 작은 체구 때문에 꼬맹이라고 놀림 당하는데, 그도 모자라 여자라는 의혹까지 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어차피 규정에 걸리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지 않은가. “자,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선수 대기실 까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경기장은 총 두 개의 건물로 나뉘어져, 가운데의 대련장을 중심으로 커다란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일반인의 출입이 일체 금지되며 오직 참관하러 온 귀족과 부호들이 휴식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흐응, 꽤 돈을 퍼부은 게 눈에 보이는데? 주인이 드래곤이라더니 화려하게도 지어놨군. 이프리트의 말마따나 건물 안은 그저 평범한 경기장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넓었다. 곳곳에 세워진 황금 동상과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 그리고 벽면마다 세밀하게 새겨진 조각들이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일반 건물이 이러할 진데,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의 내부는 얼마나 더 화려할까.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관리인은 건물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건물은 세피온 공작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랍니다. 드워프들이 직접 설계하고 완공 하는 데만 10여년의 세월을 투자했지요. 아직 2회전이 끝난 것이 아니니 그 시간동안 천천히 둘러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곳곳마다 아름다운 세공과 볼거리가 많답니다.” “예에. 정말 멋진 건물이네요. 그냥 경기장으로 놔두기에는 아까울 정도인걸요?” “하하하!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정도 화려한 내부라면 즉석에서 파티를 열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니까요. 수도에서 제법 세력 있는 부호들도 이곳을 보면 전부 감탄하지요. 우리 세피온 공국의 자랑이랍니다.” 그 정도면 이곳 사람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할 만 했기에 나는 공감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선수 대기실은 총 몇 개가 있는 건가요? 한사람씩 개인 방이 주어지나요?” “아니오, 유감스럽게도 방은 8개뿐입니다. 3회전에 출전하시는 분들이 총 32분이니, 4명씩 한 방을 쓰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방 자체가 큰 편이라 지내시는 것에는 큰 불편이 없을 겁니다.” “4명이 한방이라면…정해지는 기준은요?” “그냥 들어오신 순서대로입니다. 엘님은 이전에 먼저 들어오신 2분과 합류하시게 될 겁니다.” “흠, 이번 대회에는 귀족들도 참가했다고 하던데, 그 분들도요? 선수 중에 여자들이 있다고도 들었는데…” 보통 귀족들이 평민과 같은 방을 쓰는 것을 찬성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관리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엄격한 승부의 세계에 신분을 따질 순 없습니다. 그분들께는 이미 대회전 이런 일에 대한 사전 동의서를 받아낸 참이니 불만을 갖지는 못하실 겁니다. 그리고 여성분의 경우엔 예비분의 방이 따로 주어질 겁니다.” “그렇군요. 아직 2회전이 전부 끝난 것은 아니죠? 3회전이 열리는 것은 언제인가요?” “2회전이라면 현재 3조까지 완료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내일쯤이면 마무리 되겠군요. 3회전이 열리는 것은 앞으로 5일 후입니다. 그동안 연무장에서 개인 수련이 허락되며, 불편하신 사항은 언제든 건물 내의 일꾼들에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는 사이 도착했는지, 관리인은 한 방문 앞에서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금색의 문고리가 달린 고급 원목 바탕에는 두 명의 기사가 서로 칼을 겨누는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다 왔습니다. 이 방이 경기가 진행될 동안 엘님께서 사용하실 대기실입니다. 안에는 먼저 도착하신 2분이 계실 겁니다.” “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 혼자 들어가 보겠습니다.” “예, 그럼 편한 시간되시길. 식사는 후에 일꾼들이 가져올 것입니다.”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후 관리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척척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벌컥!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한 다음 단숨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중에 한사람은 반가운 표정을, 다른 한사람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 중 반가운 표정을 지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 “헤에, 또 다른 라이벌인가? 만나서 반가워. 나는 크리스라고 해.” “안녕하세요. 엘이라고 합니다.” “목소리가 꽤 어리네? 2회전에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몇 조였어?” “1조였는데요.” “아하~ 그렇군. 나와 저 형씨는 2조야. 너하곤 3회전에서 만날 일이 없겠구나. 앞으로 잘 지내보자구. 침대는 맨 왼쪽과 오른쪽 것 빼고 알아서 정하면 돼. 그런데 나이가 몇이야?” “18세에요. 크리스씨는요?” “와, 설마 했는데 정말 어리군! 난 23살이야. 그렇게 어린나이에 2회전을 통과하다니, 정말 대단한 걸? 그 환상마법은 꽤나 진국이었는데 말이야.” 크리스라는 남자는 꽤나 사교적이고 서글서글한 성격인 듯 했다. 반면 처음부터 나를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남자는,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아까 전까지 하고 있던 스트레칭을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그 남자 쪽을 바라보자, 크리스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냥 신경 꺼. 귀족이라서 우리 같은 평민들과 한 방을 쓰는 게 불만인 모양이니. 아, 너 평민 맞지? 아니면 혹시 내가 죽을죄를 저지르고 있는 건가?” “하하, 평민 맞아요. 크리스씨는 꽤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어허! 그냥 형이라고 불러. 애늙은이도 아니고 ‘씨’는 무슨. 암튼 네가 와서 살았다. 저 무뚝뚝한 인간 때문에 추워서 동상 걸릴 지경이었거든. 무슨 말을 해도 대답이 있어야지, 원. 이래서 내가 귀족들을 싫어한다니까. 설마 다음에 올 녀석도 귀족이진 않겠지?” 무뚝뚝한 건지 무시하는 건지, 남자는 거의 대놓고 떠드는 크리스의 말에도 일절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나마 귀족의 권위를 내세우며 발끈하는 것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지만, 왠지 불편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때 이프리트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길, 저 놈을 보니 재수 없는 엘퀴네스놈이 생각나잖아! 에잇, 기분 잡치는 군! 엘뤼엔의 어디가 어때서? 순간 무의식적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다 말을 거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정령들의 대화가 들린다는 것은 곧 나도 정령어를 사용하는데 지장이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지금은 비록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지만, 내 본질이 정령왕이라는 것까지 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엘뤼엔이 뭘 어쨌다고요? ‘헉! 정말 된다!!’ 너무 놀라고 기쁜 마음에 심장이 쿵쾅쿵쾅 울렸다. 그러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이프리트의 눈까지 휘둥그레졌다. -보면 몰라? 도도하고 상대방 깔보는 게 딱 엘퀴네스놈…엥? 너 방금 뭐라고 말했냐? 다시 말 해봐. -네? 무슨 말이요? -헉! 너 지금 의지로 대화를 전달한 거냐? 인간인 네가? -에…저도 방금 알았어요. 혹시나 싶었는데 되더라구요. -이런 어이없는!! 이프리트의 표정은 말 그대로 황당하게 변해 있었다. 의심스러운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요리조리 살피던 그는 오히려 의문만 더 가중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너 정말 인간 맞냐? 이제껏 친화력이 높다고 자연체의 정령들을 보는 놈은 없었다. 운명이 없다는 것도 그렇고. 혹시 유희중인 신인 건 아니야? -하하하, 그, 글쎄요. -쳇, 하도 황당하니 이젠 별 말도 안 되는 가정까지 떠오르는군. 그런데 그런 대화법이 가능하면서 왜 이제 서야 사용하는 거냐? -저도 방금 알았다니까요. 그리고 지금까진 이렇게 몰래 대화 나눌 일도 없었잖아요. -쩝, 그야 그렇지. 그러면서 이프리트는 또 한 번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마침 이어진 크리스의 말에, 그에게는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이거 알아? 3회전부터는 귀족들이 관람하러 온다더군. 중앙의 귀족들이 꽤 많이 모일 예정인가 보던데? 성에서 파티도 열 건가보더라.” “흐음, 그렇군요. 하긴, 장식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닌데, 경기장의 관람석을 그냥 썩히지는 않겠죠.” “하하! 듣고 보니 그렇네. 암튼 우연히 초대받은 귀족 명단을 봤는데, 정말 대단하더군! 백작부터 후작, 공작까지.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유명한 가문들이 좔좔좔 이더라니까? 아참! 그 대단한 루시엘 폰 라비타 백작도 있더라고.” 루시엘?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요?” “헉! 그 사람을 몰라?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라비타 가문의 수장이잖아. 아마 대륙 내 최연소 소드 마스터일걸? 내가 웬만해선 귀족들은 안 좋아하는데 말이야~ 그 사람은 정말 존경하지! 그가 지휘하는 기사단-화이트 라이언의 위용은 정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라고.” “실제로 보셨나 봐요?” “뭐, 그냥 딱 한 번. 수도에서 황녀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축제가 열렸을 때 참석한 것을 멀리서 본 게 전부지만 말이야. 그래도 워낙 소문이 대단한 사람이잖아? 아! 한 사람 더 있다. 정말 대박인 귀족이.” “??” 그 말에 나는 물론, 옆에서 시종일관 흥미 없다는 태도로 몸을 풀고 있던 남자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크리스는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털어놓는 것처럼 주변을 잔뜩 경계하면서 말했다. “최근에 정령왕 미네르바를 소환한 일로 떠들썩했던 귀족 알지? 그 사람도 온다는 소문이야.” “헉! 뭐, 뭐라고요? 누가와요?” -엥? 미네르바의 계약자? 그 썩을 놈이 여긴 왜 와? 크리스의 말마따나 정말 대박인 사건이었다. 나와 이프리트는 똑같이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 떠오르는 건 역시 트로웰이었다. 그가 인간에게 반감을 가지게 된 원흉의 등장이 아닌가! “굉장하지 않아? 잘하면 그 소문의 정령왕을 실제로 볼 수도 있다구. 듣자니 미네르바는 황홀한 은발을 가진 여성의 모습이라는데, 히야~ 정말 기대된다. 정령왕이라니…얼마나 아름다울까? 멀리서라도 봤으면 좋겠다. 그치?” 크리스가 아직 본적도 없는 정령왕에 대한 상상에 빠져있는 사이, 나는 나대로 걱정하고 있었다. 이곳에 나타난다면 십중팔구 트로웰과 마주칠 텐데, 과연 아무 충돌 없이 지나갈 수 있을까? 나와 다니면서 감정이 많이 누그러졌다지만, 아직 모든 인간에게 호의적이 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었다. ‘이거 어째 일이 꼬이는 걸?’ 그래도 어쩌랴. 온다는 것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미 정해진 결과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설령 말린다 해도 미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아무쪼록 별 탈 없이 지나가기만을 바랄 수밖에. 말 그대로 폭풍전야였다. “그런데 너 말이야. 그 후드 답답하지 않냐? 마법사도 아닌데 실내에선 그냥 벗지 그래?” “네? 아~ 전 이게 더 편해서요.” “흐음. 뭐, 그렇다면야 상관 않겠지만. 그런 게 편하다니 너도 참 별나다. 혹시 변태?” “아니에요!” 그러자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박장대소를 시작했다. -크하하하! 변태래, 변태!! 아이고 배야~~!! -웃지 마요! 안 그래도 기분 나쁘구만! -큭큭. 그러게 그 거추장스러운 후드를 벗으면 될 거 아니야. 지금 네가 얼마나 음침해 보이는지 알아? -여자로 오해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렇죠. 누군 쓰고 싶어서 써요? 그 말에 이프리트는 웃던 것을 멈추고 공감이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하긴, 네가 꽤 중성틱한 얼굴이긴 하지. 그래도 어릴 때부터 줄창 겪었을 텐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나 보지? -이프리트님 같으면 익숙해지겠어요? -나야 원래 무성인걸. 성별로 자존심 챙길 입장은 아니라서 말이야. 근데 너 그러다 장가도 못가는 거 아니냐? -시끄러워욧! 아픈 부분을 찌르다니! 이놈의 정령왕은 친근한 얼굴로 염장을 지르는 게 취미인가 보다. 잠시 이프리트를 째려본 나는 열도 식힐 겸 검을 들고 밖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웃고 있던 크리스가 황급히 말을 걸었다. “어이.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네? 아아. 연무장이 있다고 들어서요. 개인 수련은 자유라고 해서 가볍게 몸이나 풀까 하고…”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갈까?” “크리스 형도요? 좋죠~ 저랑 대련하실래요?” 이제껏 대련이라곤 트로웰이나 엘뤼엔과 해본 것이 전부였기 때문에, 대회에서 어느 정도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지 난감해 하던 중이었다. 크리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일반인에서 많이 떨어지지는 않을 테니 대련을 통해 좋은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자 크리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상관은 없지만…괜찮겠어? 다칠 수도 있을 텐데.” “문제없어요. 저도 놀면서 검을 배운 건 아니거든요.” “아, 미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나? 네 실력을 무시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완력이 좀 강한 편이라 그래. 대련 중에 상대편 검이 부러지는 일도 가끔 있거든.” “그런 거라면 괜찮아요. 그럼 형, 어서 가요. 날이 저물기 전에 한판이라도 해야죠.” “아, 그래.” 나는 어울리지도 않게 머뭇거리고 있는 크리스를 붙잡고 방을 나섰다. 연무장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마침 주위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붙잡고 물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외부에 따로 건물이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이곳의 연무장은 지하에 있었다. 하지만 워낙 공간이 넓은데다, 마법으로 탁한 공기와 빛을 조절해주고 있어서 그다지 답답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마침 따로 수련하러온 다른 이도 없었던 탓에 대련을 하기에도 딱 좋은 상태였다. “와~ 잘됐어요, 형. 사람들이 없으니 방해 없이 마음껏 대련할 수 있겠네요.” “아아. 뭐, 그야 그렇지. 아직 2회전 통과자들이 전부 결정 난 상태가 아니니. 아마 내일쯤이면 이곳도 북적거릴걸.” “그럼 더더욱 오늘밖에 기회가 없네요. 실은 저 스승외의 다른 사람하고 대련해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거든요. 어서 시작해요.” “뭐? 오늘이 처음이라고?” 뜨억한 크리스의 표정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매우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도 그런 경력으로…아, 아니. 정말 괜찮겠어? 이번 대회엔 걸린 상금도 상금이거니와 워낙 대단한 사람이 주최했기 때문에 경쟁이 장난이 아니라고. 이럴 때 경험 부족은 아주 치명적이야.” “그러니까 여기서 경험을 쌓겠다는 거잖아요. 음, 크리스형의 실력은 어느 정도 되나요?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건 우승을 노리고 있다는 뜻이겠죠?” “나 말이야? 하하, 우승은 무슨. 그냥 내 실력이 어디까지 인가 알아볼 겸 도전한 것뿐이야. 이런 대회라면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귀족의 자제들도 참가할 테니, 좋은 승부를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앗, 그렇다고 만만히 보면 곤란해. 이래봬도 기사 지망생이거든.” 23세에 기사 지망생이라. 만약 이번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귀족 가문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역시 내심 그걸 노리고 있었던 건지, 이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백했다. “실은 이 대회에 참가한건, 참관하러 온 귀족 중에 솔렌 자작이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이번에 그 가문에서 신입 기사를 뽑거든. 나 같은 평민이 기사가 되기 위해선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는 방법 밖에 없으니까.” “흐음. 더불어 귀족들과 겨뤄서 이기면 통쾌할 테고요?” “하하! 맞아. 네가 뭘 아는 구나. 태평성대라고 하지만 그거야 다 귀족들 말이지. 내가 살던 곳은 지독한 시골인데, 밀이 없어서 지금도 보리만 먹고 산다고. 여행을 해보니 더더욱 격차를 알겠더군. 조금쯤은 그들의 콧대를 눌러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어.” “겪어보지는 않았지만 같은 평민으로서 이해는 되네요. 자, 그럼 대련 시작해볼까요?” “엥? 저, 정말 하려고?” 그럼 진짜 시작하지, 가짜로 하리? 나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크리스를 바라본 뒤, 허리춤에 달고 있던 검을 빼어들었다. 그러자 크리스 역시 마지못한 표정으로 검을 잡은 채 내 앞에 마주섰다. “정말 후회해도 난 모른다. 3회전 나가기도 전에 다쳐서 실려 나갈지도 몰라.” “글쎄, 문제없다니까요. 제가 선공 합니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가볍게 놀아주마. 와라!” 크리스는 제법 호기롭게 소리치며 단단히 검을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피식 웃은 내가 막 땅을 박차고 나가려 할 때였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건가!!” “…에?” 얼굴을 굳힌 채 소리치는 남자는 이제 막 연무장으로 들어서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저 개인수련 하러 온 대회참가자중 하나이겠거니 생각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런 호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살짝 올라간 눈 꼬리에 희멀걸한 피부를 가지고 있어, 척 보기에 어딘지 얍삽한 인상을 풍겼다. 남의 대련을 방해한 주제에 오만한 표정으로 묻는 것이 무척 신경에 거슬리는 인간이었다. “이봐. 누가 너희들더러 이곳 연무장을 써도 좋다고 했지?” “대회 3회전 진출자는 연무장에서의 개인수련이 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꼈는지, 크리스는 슬쩍 나를 자신의 몸으로 가리며 물었다. 그러자 돌아온 상대방의 대꾸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얼른 대기실로 돌아가라. 지금부터 여기는 우리 칼빈 드 맥시우스 도련님께서 사용하실 것이다.” “맥시우스라면…‘쾌검의 기사’라고 하는 루이스 드 맥시우스 후작의?” “제법 눈치는 있구나. 그렇다! 칼빈님은 바로 그 분의 첫째 도련님이시다! 그러니 너희는 어서 돌아가래도!” 알고 보니 지금 당당하게 따지고 있는 남자는 그 도련님인지 뭔지 하는 자의 개인시종인 듯 했다. 크리스의 얼굴엔 황당함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댁 도련님의 연무장 사용 여부야 우리가 따질게 못됩니다만. 그렇다고 멀쩡히 수련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내쫓다니요? 여기가 맥시우스가의 개인 소유입니까? 그리고 분명 이곳엔 대회 참가자외의 동행자는 금지된…” “어험! 펴, 평민이 하라면 그렇게 할 일이지 뭔 말이 많아? 3회전 진출을 했다고 귀족과 똑같은 입장일거라 착각이라도 하는 거냐?” “!!” 또다시 이어진 남자의 호통에 크리스는 흠칫 얼굴을 굳혔다. 이쯤 되면 누구라도 사태파악이 가능했다. 대회 규정이 마음에 안든 귀족들이 결국 권력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이다. 아무리 연무장 사용이 자유라지만, 이런 식으로 귀족들이 텃세를 부리기 시작하면 평민들은 절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런 경험은 내게 무척 신선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신분 때문에 어디에서 밀려본 적이 있었던가? 말로는 평민이라 했지만, 황제인 이사나의 신분은 다른 모든 것들의 세력을 단 한 번에 억눌렀다. 그렇다 보니 이 세계에 와서 제대로 된 평민 대접을 받은 것은 지금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혀 기쁘진 않았지만. “알아들었으면 어서 꺼지지 못해?! 곧 도련님과 친구 분들께서 이곳에 오실 거다. 감히 주제도 모르고 우리 도련님과 함께 연무장을 사용하겠다는 거냐?” “큭!” 크리스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기사를 꿈꾸는 그가 한낮 시종에게 무시를 당했으니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며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가요, 형. 오늘은 대련이 무리인 것 같으니 다음에 하죠, 뭐.” “…그래. 그러는 게 좋을 것 같다.” 만약 거기서 상황이 종결 됐다면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나를 착하게만 두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를 지나쳐 나가려는 순간, 나는 남자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추었다. “흥, 천한 것들이 어디서 감히…개, 돼지만도 못한 것들이.” “!” 안 그래도 2회전에서 만난 용병 남자한테 개나 소나라는 말을 들었던 나로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망언이었다. 크리스 또한 상당히 열 받았는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사가 과하군요. 우리가 왜 당신한테 그런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당장 사과하십시오.” “흥! 평민 주제에 어디서 눈을 크게 뜨고 따지는 것이냐?” “이봐요. 자꾸 평민, 평민, 그러는데, 그러는 당신도 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섬기는 이가 높다고 해서 당신까지 대접을 받아야 합니까?” “큭! 감히 맥시우스가의 후계자 칼빈 도련님의 수하인 나를 무시하는 거냐? 오냐~ 네놈이 3회전 진출을 포기 하고 싶은 모양이구나! 내 당장 가서 네놈의 무례를 도련님께 고하겠다!” “!!” “흥! 어떠냐, 이러고도 네놈이 당당할 수 있겠냐?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빈다면 너그럽게 한번은 용서해 주마.” 마치 선심 쓰는 듯한 대사에 나는 그야말로 기가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본인이 귀족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배경이 든든하다는 이유로 잘난 척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하긴, 민주주의라는 한국에서도 뒷배경이 작용하는 데, 신분이 명백한 이 세계에서는 오죽할까. 힘없는 크리스로선 방금 남자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였다. 그가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을 본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검 집에 꽂아뒀던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아~ 이것 참.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해도 시비 거는 놈들이 있단 말이야.” “…에, 엘?” “무, 무슨!!” 그는 갑자기 내가 검을 빼어들자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강압적인 말투로 소리쳤다. “뭐, 뭐냐! 설마 날 베기라도 할 작정이냐? 네놈이 그랬다간 3회전 실격은 물론, 칼빈 도련님께서도 절대 가만히 계시지 않을 것이다!” “…흥. 귀족들 밑에서 꼬리치고 사는 게 즐거운가보지? 하긴, 그게 바로 당신들의 썩어빠진 생리겠지.” “감히!!” 나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 남자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바로 칼끝을 그의 턱 밑으로 바짝 들이밀었던 것이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베일 것 같은 기세에, 남자는 소리치지도 못하고 그저 붕어처럼 입만 뻐끔뻐끔 거리고 있었다. 나는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노려보며 (그래봤자 후드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겠지만) 물었다. “너 이름이 뭐야?” “윽…거, 검은 치우고…말을…” “대답 안하면 이대로 찌르는 수가 있어.” “히익! 브, 브루스라고 하오.” 브루스? 이름대로 논다더니, 어쩐지 아까부터 온갖 난리 브루스를 친다 했다. 나는 피식 웃은 다음 빈정거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진짜 눈치 없는 인간이네. 곱게 간다고 했을 때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왜 날 화나게 만들어? 네가 고양이야? 목숨이 9개라도 돼?” “큭…칼빈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절대 가만히 있지…” “글쎄, 그거야 내 사정이니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죽기 직전까지 한번 맞아볼래?” “에, 엘? 지, 진정해.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고.” 당황한 크리스가 얼른 내 어깨를 붙잡았지만, 난 아랑곳 않고 브루스만 노려보았다. “싸움을 걸어도 상대를 봐가면서 해야지. 대회 규정을 어긴 쪽이 누군데 뭐가 잘났다고 유세야? 얼마나 대단한 가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하를 보니 주인의 성격도 뻔하네. 너네 도련님인지 뭔지가 과연 몇 차전까지 가게 될 지 궁금한 걸?” “가, 감히 맥시우스가의 후계자를 모욕하다니!!” “호오~ 지금 네가 흥분할 입장이 아닐 텐데? 이대로 목이 꿰뚫리고 싶다면 계속 하던가.” “헉! 그런 짓을 하면!!” “당연히 넌 죽겠지. 나야 까짓거 이번 대회 포기하고 사라져도 상관없어. 장담하지만 너희 도련님이 가문 사람들을 전부 다 풀어도 날 찾지 못할 걸? 빽은 너만 있는 게 아니거든.”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자, 브루스는 물론 옆에 있던 크리스의 얼굴까지 덩달아 창백해졌다. 덤으로 나는 브루스에게만 슬쩍 살기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오만하게 서있던 녀석이 다리를 후들후들 떨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는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며 애원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사…살려주십시오. 제발…” 누가 정말 죽인댔나? 대회 실격이야 상관없지만 그로 인해 드래곤을 만날 기회를 놓치는 것은 치명적이다. 홧김에 협박을 하긴 했어도 쉬운 길을 일부러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겨우 이정도 살기에 덜덜 떠는 녀석이라니.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겨누고 있던 검을 다시 검 집에 집어넣었다. 그 즉시 털썩-하고 브루스가 주저앉는 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모른 척 하며 얼떨떨한 표정을 한 크리스를 향해 말했다. “그만 가요, 형. 별로 재미없네요.” “아, 그, 그래. 이것 참.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네? 뭐가요?” “아니, 굉장히 의외여서. 밝고 명랑한 녀석인 줄 알았더니, 제법 무서운 면이 있는 걸?” “음, 그런가요? 난 별로 모르겠는데.” 놀란 것은 크리스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동태를 구경하고 있던 이프리트 또한 뜨억한 얼굴로 물었다. -이거 완전히 이중인격일세. 열 받으면 원래 그렇게 사악해지냐? 뭘 고작 그런 걸 가지고 협박까지 하고 그래? -고작이라뇨! 날더러 개, 돼지보다 못하다고 했단 말이에요. 그걸 그냥 놔둬요? 콱, 반 죽여놓으려는 걸 대회 때문에 참았구만. -아니, 그건 그렇지만, 평소 네 이미지랑 너무 다르잖냐. -내가 뭘요? -흠. 뭐랄까. 옆에서 무시하고 놀려도 꾹 참고 속으로 꽁알거릴 것 같달까. 아까 옆의 놈이 변태냐고 물었을 때도 그냥 넘어갔잖아. -그거랑 이게 같아요? 의도가 다르잖아요, 의도가. 저런 녀석들은 딱 질색이에요. -호오, 요컨대 적의를 가진 인간에게는 얄짤없다 이거군. 좋아! 정령왕의 계약자라면 그 정도 근성은 있어야지. 하하하! 너 참 마음에 든다. 혹시 엘퀴네스랑 계약 파기하고 나랑 할 생각은 없어? 그 말에 나는 잠시 낯익은 한 존재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계약이라는 말만 들으면 무조건 라피스가 먼저 생각나니, 이것도 나름 트라우마의 일종이 아닌가 모르겠다. 지금쯤 녀석은 어느 이름 모를 보석 안에서 구하러 오지 않는다고 투덜거리고 있을 지도. 피식 웃은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싫어요. 이프리트님은 잔소리가 너무 많아서 피곤해요. -뭐얏? 다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구만 잔소리라니! 그 싸가지 없는 엘퀴네스 놈보다야 훨씬 낫지 뭘 그래? -그래도 전 엘뤼엔이 더 좋아요. -하아~ 너도 참 성격 특이하다. 그런 살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놈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거냐? 그 엘뤼엔인지 뭔지 하는 호칭으로 부르는 것도 그렇고. 하긴 그걸 받아주는 엘퀴네스놈도 확실히 정상은 아니지. -그야…아버지를 싫어할 아들은 없거든요. -엥? 방금 뭐라고? 황당한 표정의 이프리트가 반문했지만 나는 일부러 대답하지 않았다.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혼자서 알고 있다는 게 생각만큼 답답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즐겁고 유쾌한 느낌도 있었다. 아마도 다시 돌아가는 순간에야 밝히게 되지 않을까? ‘후후, 그때 다들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한 걸?’ 아직 라피스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도 찾지 못했는데, 벌써부터 그 순간이 기대가 되는 나였다. 3. 예정된 배신 검술대회로 인해 온 거리의 인파는 축제의 열기로 들떠있었다. 그 반면 평소 때보다 더욱 조용히 가라 앉아있는 곳도 있었다. 바로 세피온 공작이 머무는 성내의 자택이 그러했다. 니케우스 드 세피온. 오직 검 하나로 평민에서 공작의 지위까지 거머쥔 남자. 모든 평민들의 우상이며, 기사들이 동경하는 존재! 그는 때때로 자리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질 때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저택안의 사람들도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보다 훨씬 좋은 청각을 지닌 탓에 움직임 하나, 발걸음 소리까지 주의해야 했다. 그는 최근(이라고 하나 거의 10여년에 가까운 세월이다.) 모든 대외적인 집무를 접은 채 자택 안에서 나오지 않는 중이였다. 심지어 황제의 부름조차 병환을 핑계 삼아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죽을병에 걸렸다는 의혹까지 사고 있었지만, 실상은 지나칠 정도로 건강했다. 그 증거로 방안의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세피온의 모습은 불혹을 훨씬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가득해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나이는 이미 60세. 하지만 겉보기로는 40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단지 귀찮아서였을 뿐이다. 요 근래 그는 지금의 생활이 점점 지루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황성 기사단의 대장의 자리도, 사교파티도, 황제를 알현하는 것도 무엇 하나 재미없었다. 아마 적당한 후계자만 있었더라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떠났을 것이다. 잠시 후, 그의 명상을 방해하는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누구냐.” “저어, 루시엘 드 라비타 백작님이 오셨습니다, 공작님.” “아아. 라비타 백작 말인가? 안으로 모시게.” 세피온은 얼마 전 보낸 검술대회 참관 초대명단에 그의 이름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조금 전 그가 정식으로 면담요청을 해왔다는 것 역시. 이윽고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이는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히 하나로 묶은 청년이었다. 몸에서 발산되는 기를 통해 그동안 그가 쌓아온 수련의 역량을 짐작한 세피온은 속으로 적지 않게 감탄했다. 그것은 젊은 나이에 쉬이 이루지 못할 경지였다.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고 했던가? 그 이후로도 쉬지 않고 계속 정진했던 모양이군. 무척 정교하게 다듬어진 기다. 사람들이 라비타 백작을 칭송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군.’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실상 그를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가 한창 활동하고 있을 시기엔 루시엘의 나이가 어렸고, 루시엘이 두각을 드러냈을 땐 이미 세피온은 모든 집무를 접고 저택에서 휴양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방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루시엘은 너무 비굴하지도, 당당하지도 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피온 공작님. 루시엘 드 라비타라 합니다.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서 오게, 라비타 백작.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먼 길을 오느라 수고가 많았군.”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지요. 제가 공연히 공작님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귀족들과의 대면을 거부하신다고 들었지만, 어떻게든 뵙고 싶어 억지를 부렸습니다. 제 요청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아닐세. 그렇지 않아도 자네는 한번쯤 만나보고 싶었네. 거기 자리에 앉게나.” “예.” 세피온은 주위에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마실 것과 다과를 내오게 하며 자신의 맞은 편 의자에 걸터앉는 루시엘을 빤히 훑어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눈앞의 젊은 청년에게 무척 호감이 있었다. 그래서 만남을 요청했을 때도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다. 소문으로 접한 루시엘의 검술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과 수련, 뛰어난 무용은, 젊은 날의 세피온 공작과 무척이나 빼닮은 면이 있었다. 그래서 항간엔 루시엘이 그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세피온 또한 내심 그를 후계자 감이라 생각해두고 있던 참이었다. 평생을 홀로 지낸 탓에 혈육이 없던 그로선, 어차피 양자라도 들여 자리를 물려줘야 할 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젊고 능력 있는 루시엘을 눈여겨보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게다가 부모까지 일찍 여의었으니 걸릴 것도 없었다. ‘흠, 후계자로선 손색없는 재목이다. 야심은 많아 보이지만 스스로 경거망동할 타입은 아닌 것 같고…이 부분은 계속 지켜보는게 좋겠군.’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세피온은 내색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질문했다. “그래, 나와 만나자고 한 연유가 무언가?” “그저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공작님을 꼭 한번 뵙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하하하! 라비타 백작에 대한 소문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네. 그런 자네가 나를 동경한다니 빈말에도 기분은 나쁘지 않군.” “진심입니다. 처음 검을 드는 순간부터 공작님은 언제나 제 삶의 목표이자 우상이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검사를 지향하는 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후후, 잘 알았네. 아, 그보다…펠리온 드 레파르 백작 이었던가? 자네가 그와 같은 마차를 타고 왔다고 들었는데…” 제국의 공식적으로 알려진 라이벌이 한 마차를 타고 사이좋게 등장한 사실은 이미 공국안에 파다하게 퍼져있었다. 루시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레파르 백작의 생일 파티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도 이번 대회에 초대를 받았다고 하여, 동행을 한 것뿐입니다.” “호오, 그렇군. 그 또한 평소에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네. 제국에 자네들같이 훌륭한 재목들이 있어줘서 다행이야. 내게 딸이 있다면 당장 사위로 삼았을 텐데 아쉽구만.” 그 순간 잠잠히 입을 다물고 있던 루시엘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번뜩였다. 지금 세피온이 한 말은 가벼운 농담으로 흘려들을 것이 아니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그가 결혼하지 않았으며,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겉보기로는 아직도 정정했지만, 나이가 나이이니 만큼 이제 슬슬 후계자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항간에 퍼져있는 소문을 루시엘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 또한 은연중에 자신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야말로 아쉽습니다. 공작님 같은 분이 아버지라면 좋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허허. 죽은 전 라비타 백작이 그 말을 들었다면 무척 서운해 할 걸세.” “물론 돌아가신 아버님도 훌륭하신 분이셨죠. 하지만 공작님도 어딘지 모르게 의지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분이라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만. 아, 과한 욕심으로 공작님의 심사를 어지럽혔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호오, 제법 적극적인 녀석이로군.’ 세피온은 그의 속내를 짐작하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바로 그때였다. “…시커먼 꿍꿍이는 여전하군. 그 재수 없는 면상도.” “누, 누구냐!” 인기척도 없이 갑자기 들려오는 말에 루시엘과 세피온은 똑같이 경악했다. 공작이 머무르는 자택은 평소에도 수 십 명의 기사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아니,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설마 소드 마스터의 기척을 피해 침입한 괴한이 있을 줄이야! 침착을 되찾은 것은 세피온이 더 빨랐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곧이어 어둠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을 발견한 세피온은 어느새 검을 빼어든 루시엘을 향해 말했다. “아아, 걱정할 것 없네, 라비타 백작. 아무래도 내 친우가 장난을 친 것 같군.” “네? 아시는 분입니까?” 친우라는 표현에 루시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낯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모습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나 체구만으로도 상당히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꽤 오래전부터 알아왔던 친구네. 미안하지만 이만 돌아가 주겠나? 이다음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죠.” 루시엘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잠자코 몸을 돌렸다. 세피온 공작에게 밉보여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것이 현명하리라. 덜컥. 루시엘이 나가고 나자 세피온이 제일 먼저 한 것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사방에 결계를 치는 일이었다. 평생을 검사의 길만 걷던 그가 마법을 쓰다니! 누군가 보았다면 경악할 일이었지만, 실제 그의 정체를 생각하자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유희 중인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바로 그것이 세피온의 본 모습이었으니까. 이윽고 어둠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새카만 피부에 황금색 눈동자를 지닌 어린 소년이었다. 하지만 겉보기만으로는 상대의 진가를 평가할 순 없었다. 그 정체가 땅의 정령왕 트로웰이라면 더더욱 당연한 일이다. “이번 유희는 꽤 재미있나봐, 라미아스? 벌써 40년 넘지 않았나? 이전엔 길어도 20년에 그치더니 별 일 이군.” “큭! 갑자기 나타나면 어떡해, 트로웰!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 순간 늘 엄숙하고 지엄하기만 했던 세피온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투정부리는 것 같이 괄괄한 어투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본 성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트로웰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기만 했다. “내가 언제는 예고하고 찾아왔던가? 새삼스럽게 놀라긴.” “그래도 손님이 있을 땐 기척을 내줘야 할 거 아니야! 평소엔 안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심보야?” “아아. 그냥 놈이 재수 없어서.” “흐음. 루시엘을 아나보지?” 의아하게 묻는 말에 트로웰은 생긋 미소로 답변했다. 그것을 본 라미아스는 더 이상 물어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가 기분이 나쁠수록 웃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쩝, 분위기를 보아하니 조만간 사단날 것 같구만. 대체 뭣 때문에 또 저렇게 심통이야? 정령왕한테 밉보인 녀석을 들였다간 나까지 무사하지 않겠지. 이렇게 되면 후계자 건은 물 건너 간 건가? 어디 적당히 다른 녀석이…’ 그가 그렇게 루시엘을 제외한 다른 후보를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심통 부린 적 없어. 내키지 않으면 그렇게 까진 하지 않아도 돼. 네 유희를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뭐, 그 다음일은 상상에 맡겨두겠지만.” “윽! 남의 생각을 멋대로 읽지 맛!! 대체 갑자기 무슨 용무야?” “별로. 네 계약자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그냥 따라온 것뿐이야.” “내 계약자? …라니!! 설마 에, 엘퀴네스가 왔다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떡 벌리는 라미아스의 말에 트로웰은 보란 듯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곳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엘퀴네스의 모습이 있었다. 미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왠지 평소보다 기분이 나쁜 듯 보였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기가 죽었겠지만, 라미아스는 그 반대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흔치않은 엘퀴네스의 추종자였던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직접 와주다니!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다. 그 순간, 라미아스의 세상은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엘퀴네스를 향해 달려갔다. “엘퀴네스! 이게 얼마만이야! 정말 보고 싶었어~~!” 잽싼 행동이었지만 엘퀴네스 또한 대처가 빨랐다. 그는 이미 이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짧게 혀를 차며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의 바로 앞에 커다란 얼음벽이 솟아올랐다. 쿠웅! “큭! 아이고, 머리야…” 미처 달려가던 속도를 줄이지 못한 라미아스는 그대로 벽에 충돌하고 바닥을 뒹굴었다. 부딪힌 이마가 벌겋게 부어올랐지만 엘퀴네스는 걱정은 커녕 동정의 시선조차 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추잡하니까 일어나라. 그동안 전혀 변한 게 없군.” “우엥. 너무하잖아, 엘퀴네스~.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그까짓 거 한번만 얌전히 안겨주면 안 돼?” “…죽고 싶은가.” “에헤헤. 너의 품안에서라면 죽어도 좋…, 아, 알았어. 농담이니까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하긴, 그렇게 차가운 모습이 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인 거지만~!” 라미아스는 두 손을 모으며 행복한 듯 황홀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동시에 엘퀴네스와 트로웰의 표정은 자연히 일그러졌다. 변태적인 발언은 둘째 치고, 본인이 현재 60넘은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전혀 없는 걸까?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라미아스는 어색한 얼굴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아참. 그런데 네가 웬일이야? 부르지도 않았는데 나를 다 찾아오고.” “그저 이곳에 용무가 있는 김에 들렸을 뿐이다. 몇 가지 알아볼 것도 있고.” “용무라니? 정령왕들이 이런 좁은 공국에 무슨 일이 있어서?” “아아, 내 계약자가 이번에 네가 연 검술대회에 참가하게 됐거든.” “다른 계약자? 엘퀴네스의? 호오~ 그게 누군데 두 정령왕이 여기까지 따라다녀? 당연히 내가 아는 드래곤이겠지?” “아니, 인간이다.” “아, 그렇군…뭐? 인간?” 무심코 대답하던 라미아스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인간이라니! 물의 정령왕이 지금 인간에게 소환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그는 곧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믿을 수가 없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하군. 한번 만나보고 싶은걸?” “잘됐군. 그 녀석도 너에게 용건이 있는 모양이거든.” “호오~ 그래? 나에게 볼일이 있다면 어느 쪽?” “물론 블루 드래곤인 라미아스지.” “이런, 그건 곤란한데.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나는 가급적 본체로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유희 중엔 되도록 현실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알고 있어. 네 녀석의 그 특이한 고집 때문에 일부러 검술대회에 참가시킨 거다. 그러니 우승하면 제대로 만나줘라. 그 정도도 양보하지 않겠다면 너와의 계약을 끊겠다.” “헉! 그럴 땐 협박이 아니라 부드럽게 부탁하는 거라고! 아잉~ 내 맘 다 알.면.서~” 그는 부끄럽다는 듯 손가락을 비비꼬며 얼굴을 붉혔다. 아까전보다 엘퀴네스의 얼굴이 창백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그는 유달리 딱딱해진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소름끼치니까 관둬. 네놈과 계약한 일이 슬슬 후회되려고 하니까.” “하하, 자극이 심했구낭. 그런데 정말 별일이네? 겨우 그걸 부탁하려고 날 찾아온 거란 말이야? 그 인간 계약자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나봐?” “겸사라고 말했잖아. 그건 그렇고, 이번에 상품으로 내놓은 에고소드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거겠지?” “문제? 아아, 설마 폭주한 마검일려고. 그냥 주목 좀 끌어보려고 내놓은 것뿐이야. 실드와 힐 계열의 보조마법 밖에 안 걸려 있어서 그다지 등급이 높은 것도 아니거든.” 드래곤들은 거짓말을 잘 하지 않는 종족이었지만, 엘퀴네스는 확인 차원에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줄 아는 그라면 방금 말의 진위여부를 확실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에 트로웰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데 둘이 요즘 함께 다니나 보지? 이프리트나 미네르바라면 모를까… 정령계의 쌍벽을 이루는 아웃사이더들이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래? 혹시 둘이 사귀어?” “거기서 한 마디만 더하면 죽인다.” “…큽. 이상하구만. 성격이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엘퀴네스와 트로웰. 이들은 제법 궁합이 잘 맞는 성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단 한 번도 사이좋아본 역사가 없었다. (물론 이프리트와 엘퀴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러니 지금처럼 함께 다니는 모습이 라미아스의 눈에 괴상하게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그는 마침 떠오른 사실에 반색하며 외쳤다. “아참, 트로웰! 미네르바 하니까 생각나는데, 이번에 내가 초대한 귀족 중에 그의 계약자도 있어. 아까 봤던 루시엘이란 녀석이랑 같이 왔던 모양이던데, 미네르바도 함께 오지 않았을까?” “!!” 그 순간 트로웰의 입가에 서려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것을 눈치 챈 엘퀴네스는 쯧 하고 짧게 혀를 찼지만, 라미아스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 채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세대에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 2명이나 되는 거잖아? 거참 정말 신기하네! 근데 네 계약자는 왜 그 사실을 밝히지 않는 거야? 알려지는 순간 출세는 따놓은 당산일 텐데. 어쨌든 이번 대회는 정말 볼만 하겠는걸? 엘퀴네스에 트로웰, 미네르바까지 와 있으니!” “…이프리트도 있어.” “오옷, 이프리트까지? 그게 정말이야? 우와, 그럼 이번 대회에 4대 정령왕이 모두…” 흥분해서 소리치던 라미아스는 트로웰과 얼굴을 마주치곤 점점 말소리를 줄였다. 그를 똑바로 쏘아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본래가 다정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지금의 그는 분명 화를 내고 있었다. 라미아스는 자신이 한 말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뭔가 잘못 건드렸다는 사실만 느꼈을 뿐. 그렇게 라미아스가 혼자서 쩔쩔매고 있을 때였다. 트로웰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 지으며 무심코 내뱉는 말처럼 물었다. “아까 보니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던데…” “응? 아아, 이왕 시작한 거 끝도 제대로 맺으려고. 귀찮아서 결혼을 안했더니 양자 문제가 걸리지 뭐야? 지금 여러 가지로 알아보는 중이야. 아까 여기에 있었던 인간도 그 후보 중 한명이고.” “루시엘 말인가.” “맞아, 그 녀석. 탐욕이 많긴 해도 제법 쓸 만한 인간이야. 아까 내 유희 방해 안한다고 했었지? 그럼 너랑 상관없이 후계자 목록에 그대로 놔둬도 되는 거지? 나중에 딴 말하기 없기다?” “뭐, 마음대로. 하지만 굳이 누굴 고를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걸. 어차피 죄다 죽을 테니.” “뭐?” 놀라서 되묻는 말에 트로웰은 소름끼칠 만큼 잔인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인간이란 종족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날이 멀지 않았거든.” 3회전 대결은 예상보다 훨씬 더 싱겁게 끝났다. 상대편이랍시고 나온 선수가 긴장한 나머지, 본격적인 공격에 들어서기도 전에 칼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관람석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한 탓이었다. 덕분에 손쉽게 우승을 거머쥔 나를, 다른 선수들은 매우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경기 일자를 이틀 뒤로 두고 있던 크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어~ 축하한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이겼다며? 운도 좋은 녀석.” “헤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요.” “오냐, 부럽다! 그것도 아주 배 아프게 부럽다! 짜식, 넌 좋겠다. 난 아무래도 3회전 탈락할 것 같은데 말이야.” “엥? 왜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그는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최악이야. 하필이면 내 상대 선수가 ‘바로크’거든.” “그게 누군데요?” “헉! 용병왕 바로크를 모른단 말이야? 용병 길드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잖아. 이번 경기 2회전도 최단 시간으로 통과했다고 들었어. 이미 소문이 쫘악 퍼졌는데 전혀 못 들었단 말이야?” “소문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보니…” “나참, 그래도 기본적인 정보쯤은 알아두라고.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거니까.” 시합에 대한 스트레스 탓인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더 말이 많아졌다. 이후로도 주르륵 이어지는 잔소리를 한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때 무심코 눈에 들어온 것은 엘뤼엔과 트로웰이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드래곤에게 다녀온 이후부터 그들은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원래가 잘 떠들고 웃던 성격들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하고 있으니 확실히 문제가 심각하지 않은가. 특히 트로웰은 이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로 되돌아 간 것 같았다. 간혹 눈을 마주칠 때마다 서늘하게 흐르는 살기가 누군가에 대한 깊은 증오를 담고 있었다. ‘혹시 미네르바에 대해서 들은 건가?’ 이곳에 와서 그의 기분이 저조할 이유라면 그 것밖에 없었다. 드래곤에게 정보를 들었거나, 직접 마주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당장 날뛰지 않고 얌전하게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답답한 심정은 이프리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은 아까부터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왜들 이리 궁상이야? 원래 말이 없는 엘퀴네스야 그렇다 쳐! 트로웰, 넌 또 갑자기 왜 그래? 뭐라고 말 좀 해보지? -……. -크아악! 정말 이러기냐? 네가 이런다고 미네르바가 정신 차릴 것 같아? 어차피 그 녀석은 그 인간 놈이 죽기 전까진 미련 못 버려. 배신? 이미 콩깍지가 쓰인 놈이 그런 거 따질 것 같냐? 혜안이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이프리트의 말에도 트로웰은 요지부동이었다. 이를 테면 ‘너는 짖어라, 나는 무시하련다’랄까. 그에 더더욱 화가 난 이프리트는 급기야 금기를 침범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래봤자 미네르바가 널 돌아보는 일은 없을 걸? 그놈이 죽든 배신당하든 또 다른 인간이나 찾아 헤맬게 틀림없다고! -!! ‘맙소사! 저 바보 정령왕이!’ 당황한 나는 옆에서 크리스가 떠드는 것도 잊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예상외로 트로웰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니, 오히려 생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게 아닌가. 잠시 후 이어지는 그의 대답에 나는 물론 이프리트까지 경악하고 말았다. -상관없어. 어차피 전부 죽일 거니까. -뭐, 뭐야? -다 없앨 거라고. 그럼 네 말처럼 미네르바가 다른 인간을 돌아보는 일도 없겠지. 인간이라는 종족이 화근이라면 사라지게 만들면 그만이야. -너 미쳤어? 그렇다고 모든 인간을 전부 죽여? 아크아돈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서 그래? -다른 종족도 얼마든지 있어. -그야 그렇지만… 아, 그래! 엘은? 저 녀석도 인간이잖아. 그런데도 죽이겠다고? 내가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긴 건지, 이프리트는 손가락질까지 하며 나를 가리켜 보였다. 하지만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는 마치 유리알처럼 아무런 동요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곧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인간은 무조건 싫어. 예외 따윈 없어. “!!” 그때서야 나는 그가 나로 인해 망설이고 있던 감정을 완전히 정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몇 개월의 설득으로는 결국 질투에 미친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약속한 기간이 얼마나 남았더라? 잠깐 속으로 계산해 보던 나는 남은 시간이 겨우 한 달 남짓하다는 것을 깨닫고 머릿속을 하얗게 비웠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것은 황금시대의 종말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는 기억이었다. 이유도 모른 채 멸망한 인간들이 다시 땅을 일구어서 일어나기까지 2천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고 했다. 즉, 내가 있던 시대의 인간들이 지금 시대에서 무사히 이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설마 트로웰이…? 아, 아닐거야. 녀석이 했다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만들었을 테니, 다시 왕국을 만들어낼 인력이 생겨날 리가 없어. 으윽, 근데 정말이라면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반드시 설득하겠다고 큰소리나 치지 말걸. 물밀듯이 밀려오는 후회감에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 잡았다. 그러자 혼자서 신나게 떠들고 있던 크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갑자기 일어서서 뭐해? 어쭈 표정 봐라~? 감히 이 형님의 충고가 싫다 이거냐? 지금 넌 3회전 통과해서 여유만만이다 이거지?” “아니, 그게 아니라…휴우. 저 잠깐만 머리 좀 식히고 올게요, 형.” “어어? 자, 잠깐! 정말 나 때문이야? 에, 엘?”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도 무시하고 나는 쓴 표정으로 방안을 나섰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냉큼 따라와 어울리지도 않게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이, 괜찮냐? 충격 심하게 받은 건 아니지? 저기, 저 녀석이 말은 저래도 진심은 아닐 거다, 아마. -트로웰이 빈말을 하던 성격이던가요? -응?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 그게 말이지… -후후…억지로 위로 안 해도 돼요. 저도 다 알고 있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간을 멸족시키겠다고 말했고, 제가 그것을 1년 동안 설득한다는 조건으로 함께 다니던 거였거든요. 그동안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역 부족 이었나 봐요. -쯧쯧. 네가 무슨 죄가 있겠냐? 다 그 빌어먹을 미네르바의 계약자 탓이지. -흐음. 확실히 그놈이 원인이긴 하죠. 이참에 아예 찾아가서 없애버릴까… -뭐? 뜨억한 표정으로 되묻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는 베시시 웃었다. -농담이에요. 어차피 지금은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을 걸요. 제가 알기론 녀석은 평생 폐인으로 방황하다가 죽을 운명이거든요. -헐. 네가 언제부터 예언가가 된 거냐? -다 아는 수가 있죠! 그래도 어떤 녀석인지 한번 만나보고는 싶네요. 열 받는데 가서 한 대만 패주고 오면 안 될까요? 그러자 이프리트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곧 유쾌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크하하! 안될게 뭐있냐? 한 대만 아니라 백대라도 때려보자. 안 그래도 나 역시 근질근질하던 참이다. -좋아요! 근데 미네르바가 말리면 어쩌죠? -어쩌긴! 그 녀석은 내가 막을 테니 넌 신경 쓰지 말고 분이 풀릴 때까지 때려라. 이거 아주 오랜만에 재밌게 됐는데? 크하하하! 호쾌하게 웃은 그는 단번에 나와 의기투합을 했다. 그렇게 순식간에 결정 난 일을 나와 그가 직접 행동으로 실천 하려 할 때였다. “저, 저 녀석입니다, 도련님! 검은색 후드로 얼굴을 음침하게 가린 녀석! 저 놈이 틀림없습니다!” “엥?” 시끄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오른쪽 복도 끝에 시커먼 두 남자가 서있는 것이 보였다. 그 중 한사람은 언젠가 연무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던 브루스였고, 그 옆에는 한눈에 봐도 귀족임이 티 나는 청년이었다. 분위기나 말하는 정황을 보아 맥시우스가의 장남이라는 그 남자가 틀림없었다. 벌써 며칠이나 지난 일 가지고 이제 와서 복수랍시고 찾아온 건가?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브루스는 약 올리는 말투로 떠들었다. “헷! 그동안 네놈을 찾아다니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네놈의 무례를 여기 계신 우리 도련님께 전부 고했다! 넌 이제 죽은 목숨이야! 헤헷! 목숨을 부지하고 싶다면 어서 무릎 꿇고 비는 게 좋을 걸?” 살려달라고 벌벌 떨 때는 언제고 주인 옆에 있으니 다시 기고만장해진 모양이다. 그때 조금 더 겁줄 걸 그랬나? 이프리트도 어이가 없었는지 황당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봐줄 인간이 여기 하나 더 있는데? 가는 곳마다 저런 놈이 들끓어서 어쩌냐, 엘? 이햐~ 역시 인기 많은 남자란 괴로운 법이구만. 피식.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의 말투가 재미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그것을 비웃는 것이라 생각했는지, 브루스와 도련님이라는 남자의 얼굴이 똑같이 찌푸려졌다. “저, 저 찢어죽일! 저것 보십시오, 칼빈님! 글쎄 반성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는 모습이잖습니까? 저놈은 제가 도련님의 수하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격했습니다! 이는 맥시우스가의 위명을 무시하는 처사! 귀족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 틀림없습니다! 가문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본때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알겠으니 너는 물러서 있거라. 내가 직접 말해보겠다.” 장황하게 떠벌리는 브루스의 말을 칼빈이란 남자는 단 몇 마디의 말로 일축했다. 그 모습에 브루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고, 반대로 나는 호감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남자는 적어도 시종의 말에 흥분해서 같이 안하무인격으로 덤비는 자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나를 차분히 훑어보는 눈동자에는 나에 대한 일말의 불쾌한 빛도 보이지 않았다. 이 경우 감정 컨트롤이 잘 되어 있거나, 정말 화가 나지 않았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둘 다 평범한 사람의 반응은 아니었다. 잠시 후 칼빈은 슬쩍 턱을 들어 올리며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대가 내 수하에게 무례를 범했다는 자가 맞는가?” “글쎄요. 하도 열 받게 해서 가볍게 겁을 준건 맞지만, 무례를 저지른 기억은 없는데요?” “듣기론 그대가 검으로 위협을 했다고 들었다. 무기를 소지하지 못한 자에게 검을 들이미는 것이 그대의 정의인가?” “전 기사가 아니거든요. 신분을 내세워 협박하는 사람에게 그에 합당한 대우를 했을 뿐입니다.” “…귀족의 수하를 건드리는 일은, 곧 그가 모시는 귀족을 무시하는 처사라는 것을 모르는 것 같군.” “적어도 그것을 믿고 설치는 부류는 아니거든요.” 당돌하다면 당돌한 내 대답에 이제껏 아무 표정 없던 얼굴이 살풋 찡그려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딱딱해진 말투로 물었다. “브루스가 그대를 찾은 것은 경기장에서다. 이번 3회전 시합을 통과했더군. 다음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나?” “모릅니다.” “그건 유감이군. 바로 나다.” “!” 그의 말에 나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4회전은 조별 최종 우승자를 가리기도 하는 시합. 즉 그가 나와 같은 1조란 소리였는데, 나는 어디에서도 눈앞의 남자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제야 크리스가 자잘한 소문에도 신경 쓰라고 했던 말이 이해가 되었다. 바로 이럴 때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인가보다. “설마 같은 조인 줄은 몰랐네요.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죠?” “시종의 시비에 같이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대가 귀족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그 점에 대해서 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군. 그렇다 해도 권력을 내세워 강제로 굴복시키진 않겠다. 4회전 시합에서 내가 이기면 그대는 여기 있는 브루스에게 무릎 꿇고 사죄해라.” “호오. 만약 제가 이기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단호하게 대답하는 말에서 나는 그가 스스로의 실력에 무척 자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기야 아버지가 유명한 검사이고, 그 자신 또한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워왔다면 자부심이 대단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옆에서 대놓고 키득거리는 이프리트를 무시하며 나는 슬쩍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도 저 역시 조건을 걸어야 균형이 맞죠. 말해두지만 시비를 건 것은 그쪽의 브루스씨가 먼저였다고요.” “당돌한 자군. 그럼 원하는 것을 말해보아라.” “카, 칼빈님!” 순순히 응해줄 거란 생각을 못했는지 브루스가 기겁을 하고 소리쳤지만, 그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얼마나 대단한 것을 원하겠냐고 생각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원래 수하의 죄는 그의 상관에게 묻는 법이죠. 칼빈님이라고 하셨나요? 제가 이기면 정중하게 사과해 주세요. 그때의 일은 물론, 지금 여기서 제 갈 길을 막고 있는 것까지 전부.” “!!” “아, 아니 저놈이 감히 누구에게!!” 그때서야 처음으로 칼빈의 얼굴이 분노로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자신이 내뱉은 말 때문인지 대놓고 화를 내지 못하고 속으로 삭이고 있는 듯 했다. 이윽고 말을 내뱉는 그의 목소리는 아까보다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건방진 제의지만 수락하겠다. 하지만 결코 그대가 나를 이기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합이 끝난 후, 지금 내게 행하는 무례의 대가 역시 따로 받겠다.” “좋을 대로.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급한 용무가 있는데 칼빈님 덕분에 시간이 지체됐거든요.” 여기서 말하는 급한 용무란 두 말할 필요 없이 미네르바의 계약자를 찾아가는 일이었다. 칼빈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 한 나는, 그래도 귀족이라는 예의상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틈에 슬쩍 브루스를 째려보자 마침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이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반드시 이겨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나서일까? 왠지 4회전 시합은 지금까지와 달리 무척 즐거울 것 같았다. 참관하러온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은 엄격한 감시와 경호를 받고 있었지만, 내가 그곳을 뚫고 들어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처음 가본 곳이긴 했어도 내부는 내가 있던 곳과 똑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고, 목적지인 미네르바가 있는 곳은 주변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자연체의 정령들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기척을 최대한 죽인 채 몸을 숨기며 걷던 나는 옆에서 편안하게 따라오는 이프리트를 향해 물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요, 미네르바가 인간에게 소환된 지 얼마나 된 거예요? -흠, 글쎄다. 한 5년쯤 됐나? -둘 사이가 처음부터 좋았나요? -나쁘진 않았지. 녀석은 원래 인간에게 호의적이었으니까. 그게 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말리진 않았어요? -당연히 말렸지! 지금도 트로웰 녀석 살벌한 거 봐라. 그때라고 안 그랬을 것 같아? 그런데 다툼이 길어지니까 미네르바가 아예 정령계로 돌아올 생각도 안하더라고. 나야 그러려니 했지만, 트로웰은 아직도 포기가 안 되나 봐. 하긴, 탄생 때부터 꽤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으니…. 그렇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미네르바가 있는 방 앞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다가서려는 순간, 갑자기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나와 이프리트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방안에서 나오는 사람은 꽤 준수한 얼굴의 20대 남자였다. 그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정령왕의 인장을 통해, 나는 한눈에 그가 바로 미네르바의 계약자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저 사람이…” -맞아, 미네르바의 계약자, 펠리온 드 레파르인지 뭔지 하는 놈이다. 이프리트의 말에 나는 다시 한 번 남자의 모습을 빤히 훑었다. 생각보다 미소를 가득 드리운 얼굴이 전체적으로 무척 호감 가는 인상이었다. 그는 우리가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채, 방안의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건네고 있었다. 문 너머로 힐끗 보이는 모습은 분명히 바람의 정령왕 미네르바였다. “그럼 미네르바님, 저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 금방 돌아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딱딱한 말투와 달리 다정하게 건네는 남자의 목소리는 사랑에 빠진 연인 같이 부드러웠다. 그에 화답하는 목소리 또한 내가 알던 이가 맞을까 싶을 정도로 따뜻한 느낌이었다. “벌써 3일째 연달아 파티로군. 하루쯤은 빠져도 상관없지 않나? 어제도 종일 시달려서 피곤할 텐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잖아.” “귀족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는 목적인만큼 어쩔 수 없지요. 잠시 얼굴만 비추고 오는 거니 그렇게 서운한 표정하지 마십시오. 저도 당신을 오래 기다리게 하긴 싫으니까요.” “나 때문에 무리할 것 없다. 인간들 사이에서 이런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후훗…아무리 그래도 그것이 당신보다 소중하진 않습니다. 기다리세요. 금방 돌아 올 테니까.” 나긋하게 중얼거린 남자는 미네르바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춘 뒤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완벽한 닭살 커플이었기에, 저런 자가 배신한다는 것이 잠시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남자 혼자만이 남아 어디론가 걸어가자, 나는 이프리트를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도 따라가요. -엥? 저 녀석을? -원래 저 남자한테 용무가 있는 거잖아요. 보아하니 파티에 참석하는 모양인데, 따라가서 기회를 노리자구요. -어이어이. 난 그렇다 쳐도 네 차림이 너무 눈에 띈다는 생각은 안드냐? 넌 평민이라고.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 -파티면 사람이 많을 테니까 잘 섞이면 들키진 않을 거예요. 여기서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쩝, 그야 그렇지. 그렇게 나와 이프리트가 미네르바의 계약자 뒤를 막 밟으려던 순간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냐? “!!!” 텁!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놀란 나는 비명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한 손으로 틀어막았다. 빠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달래며 돌아보니, 언제 우리를 따라온 건지 엘뤼엔이 삐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에, 엘뤼엔? 여긴 왜… 그러자 나 못지않게 놀란 표정을 하던 이프리트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소리쳤다. -너 이 자식! 우리한테 감정 있냐?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나타난 이유가 뭐야! -별거에 다 놀라는군. 이정도 기척도 눈치 채지 못한 네 감각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뭬야? 내가 어디가 어때서? -다들 조용! 이러다 미네르바한테 들키겠어요. 일단 이동부터 하자구요, 어서요! 황급히 쏘아붙인 내가 냉큼 미네르바의 계약자를 따라가자, 막 말다툼을 하려던 정령왕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용히 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엘뤼엔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게 사람 뒤를 밟는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군. 저 녀석을 따라가서 뭘 어쩌려는 거지? -응? 왜, 재밌잖아. 원래 이런 스릴감은 돈 주고도 못사는 거라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사람을 미행해보겠어? -희한한 녀석. 엘뤼엔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따라오는 것을 그만두지는 않았다. 잠시 후 미네르바의 계약자가 도착한 곳은 건물 중앙에 마련된 파티홀이었다. 이미 한창 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는지 수많은 남녀가 서로 어우러져 춤과 노래에 빠져 있었다. 그 중 몇몇의 사람들이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가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노신사였다. “어서 오게, 레파르 백작. 오늘은 좀 늦었군.” “준비가 조금 오래 걸렸습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혼자십니까? 다른 분들은?” “아하하! 아니네. 다들 저쪽에서 대화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네. 자네도 함께 하지. 그런데 언제쯤이면 자네의 여신님을 보여줄 텐가? 벌서 3일째 파티인데 그 분의 발끝조차 볼 수 없다니 서운하기 그지없네.” “죄송합니다. 미네르바님이 워낙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을 어색해 하셔서.” “껄껄, 농담이네, 농담. 자네라고 정령왕의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자, 어서 가게.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네만 오기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네.” 그가 사람들 틈에 섞이는 틈을 타 나 또한 자연스럽게 그들 속에 파고들었다. 다행히 시종들 중에서도 얼굴을 가린 이들이 종종 되어서, 내 후드 차림도 크게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정말 시종으로 오해해버려서 곤란했달까. 그것도 하필이면 파티장에 들어서는 순간 운 나쁘게 시종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딱 걸려버리고 말았다. “이봐,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어서 떨어진 음식을 다시 채워야지! 뭘 그렇게 두리번 거리고 있어?” “에? 저요?” “그럼 여기에 너 말고 놀고 있는 녀석이 어디에 있다는 거야? 게으름 부리지 말고 어서 일해. 안 그럼 오늘 일당은 없을 줄 알아! 자, 어서 이 쟁반을 들고 날라!” 그가 가리킨 것은 엄청난 양의 음식이 담긴 무수한 쟁반들이었다. 결국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종들 틈에 섞여 한참동안이나 테이블에 음식을 나르느라 바빴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일의 양이 줄기는커녕 여전히 그대로인 게 아닌가? 이놈의 귀족들이 얼마나 돈이 썩어 넘치는지, 내용물이 조금만 식어도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늘 따뜻한 음식을 새로 내와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 낄낄거리고 웃는 두 정령왕들은 무시하도록 하자.) 그러는 동안에도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여러 무리의 사람들에게 휩쓸려 다니고 있었다. 수없이 반복되는 정치적인 얘기와 사교적인 화제가 지루해질 법 하건만, 그는 늘상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고 사람들을 상대했다. 그런 분위기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나참. 저게 어디가 인사차 잠깐 들리는 거냐?’ 미네르바한테 금방 돌아온다고 말한 것치곤, 그는 대화에 빠져 꼼짝도 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화제가 떨어지면 오히려 그 스스로 직접 다른 주제거리를 꺼내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눈으로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겨우 사람들 틈에 떨어져 혼자가 되었다 싶자, 그는 품안에서 양피지를 꺼내어 뭔가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다 적은 후 그는 마침 홀을 돌아다니는 척 주위에서 그를 감시(?)하고 있던 나를 보며 말했다. “어이, 거기 너. 잠시 이리와 보거라.” “저요?” 순간 심장이 철렁한 느낌이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방금 적었던 쪽지와 은화 한 개를 내게 건네주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발코니에 가면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그에게 전달해 주거라. 돈은 네가 가져도 좋다.” “네? 하지만…” “레파르 백작이 전해주는 것이라 하면 알 것이다. 걱정 말고 너는 전달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럼 그 사람이 네게 다른 무언가를 줄 것이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너라. 가급적 사람들 눈에는 띄지 않게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역적모의라도 하는 건가? 왜 찾아가서 말을 하면 될 걸 가지고 굳이 쪽지를 주고받는 거래? 어리둥절하게 생각하던 것도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몸을 피한 나는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손안에 고이 접힌 양피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쭉 내 뒤를 따라다니고 있던 정령왕들도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으하하, 그 자식 바보 아냐? 완전히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구만. 뭐라고 적혀있냐? 한번 펴봐. -잠깐만 기다려 봐요. 엘뤼엔, 여기에 이상한 마법 같은 거 걸려 있는 건 아니지? -그냥 평범한 종이다. 열어봐도 아무 지장 없어. 그의 말에 안심한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쪽지를 펴보았다. 즉석에서 썼다는 것을 증명하듯, 아무렇지 않게 휘갈긴 글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응? 이게 전부?’ 뭔가 대단한 사건이라도 써있을까 기대했던 바와 달리, 안에 적힌 것은 의도를 파악할 수 없는 짧은 한 문장뿐이었다. 내가 실망한 표정을 짓자, 마찬가지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이프리트가 물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걸로 끝이야? 또 다른 말은 없어? -으음. 그런 가 본데요. 발코니로 가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 그럼 얼른 가보자고. 이거 은근히 재밌는걸? -후후, 알았어요. 근데 사람들이 많으면 어떡하죠? 쪽지를 건네줘야 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그런 내 우려와는 다르게 도착한 발코니에는 단 한사람의 그림자 밖에 없었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느낌상 장신의 남자인 것 같았다. 여자라면 스캔들이라도 생각했겠지만 남자라니. 정말 역적모의라도 하는 건가? 그러나 이런 생각도 그리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다. 미리 사람을 보내기로 약속을 해둔 것인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상대편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던 것이다. “레파르 백작이 보냈나?” “!” 그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싸악 식는 것을 느꼈다. 꿈에서라도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았던 목소리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나는 경직되는 얼굴을 느끼며 천천히 내 앞에 다가오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침침하기는 여전했지만, 얼굴을 알아보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어깨까지 내려온 은회색의 머리카락과 노란빛이 도는 눈동자. 냉막한 얼굴로 잘도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던 녀석! 그가 맞음을 확인한 순간, 나는 이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놈의 이름을 기억하고 이를 갈았다. “루시엘…”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정말 빌어먹을 정도로 짜증나는 우연이었다. 대체 이 녀석이 여긴 왜 온 거지? 그러고 보니 언젠가 크리스가 그에 대해서 말을 했었던 적이 있었다. 20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엄청난 귀족이 왔다나 뭐라나. 그때도 분명 루시엘이란 이름을 들었었는데, 왜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다음에 만날 때는 절대 가만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런 상황이면 뭘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놈은 아직 나를 못 알아보고 있는 듯하니, 나중에 다시 기회를 노려야 할 것 같았다. “뭘 그렇게 멀뚱히 서있는 거지? 레파르 백작이 보낸 게 맞냐고 물었잖아.” 내가 한참동안 말이 없자 놈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덕분에 정신이 든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묵묵히 손에 쥔 것을 내밀었다. 시종치고는 전혀 공손하지 않은 태도에 루시엘은 살풋 얼굴을 찡그러졌지만 별다른 책망 없이 쪽지를 넘겨받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읽을 거란 예상과 달리 놈은 말없이 그것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곤 엷은 실크에 쌓인 편지를 꺼내 다시 내게 건네주었다. “레파르 백작이 기다리던 것이다. 가서 전해 드리거라.” ‘말 안 해도 알거든?’ 나는 속으로 삐딱하게 중얼거리며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시엘은 아까보다 더욱 찌푸린 얼굴로 물었다. “아까부터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군. 혹시 말을 못하는 건가? 아니면 레파르 백작이 그리 하라 시키더냐?” 제 딴에는 감히 귀족의 말에 입을 열지 않는 이가 있으리라곤 생각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피식 웃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는 살짝 인사를 마치고 돌아섰다. 보지 않아도 지금 놈의 표정을 예측하기란 무척 쉬었다. 아마 잔뜩 일그러져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뒤에서 이프리트가 중얼거리는 소리는 내 예상과 하나도 틀리 지 않았다. -휘유. 저놈 표정 보게? 저러다 아주 잡아먹겠네, 그려. 근데 너 귀족한테 그렇게 삐딱하게 굴어도 돼? 저러다 보복한다고 설치면 골치 아플 텐데? -상관없어요. 다음에 만나면 땅에 파묻어 버릴 거니까. -헤에? 저 녀석하고 무슨 원수진 일 있냐? -네! 아주 뿌리 깊은 원한이 있죠. 예전에 저 자식이 날 죽이려고 했다구요. 재수 없는 변태귀족! -변태?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데? -저게 어디가요? 변태도 저런 상변태가 따로 없구만! -흐음. 역시 인간은 외모로 판단해선 안 된다니까. 근데 고작 땅에 파묻는 걸로 성에 차겠어? 화형은 어때? 원래 불에 타죽는 게 제일 아프다고. 겔겔겔. 이런 사소한(?) 것에서도 트로웰과 라이벌 의식은 느끼는 건지 이프리트는 계속 화형을 주장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그도 뭔가 혼내줄 방법을 말해주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러자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가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목적을 잊은 거 아니냐? 그 손에 들린 편지나 확인하지 그래? -쳇, 너무 야박해. 내가 저 녀석한테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서 그렇게 담담한 말이 나와?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했을 텐데. 배운 검술은 스프 끓여 먹을 생각이냐? 그렇게 분하면 이 자리에서 결투라도 신청하면 되잖아. -안 돼. 그래봤자 다른 사람들이 자객으로밖에 오해 안한다고. 뭔가 공개적으로 망신을 줄만한 게 필요해. -흐음, 그런 거라면 간단하지. -??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은 엘뤼엔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한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그러자 발코니 밖으로 갑자기 엄청난 먹구름이 몰리더니 놈이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굵은 장대비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닌가! 후두둑, 쏴아아-- “어머! 갑자기 비가!” “루시엘님에게 어서 닦을 것을!” 지붕이 없는 구조로 된 발코니라 그 아래 서있던 루시엘은 꼼짝도 못하고 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물에 흠뻑 젖은 생쥐꼴로 홀에 들어서는 놈에게, 근처에 있던 귀족 여자들이 다급히 수건을 꺼내 닦아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이 다 그렇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귀족들 중에서는 노골적으로 비웃는 자들도 있었다. “큭큭. 천하의 소드 마스터도 자연의 현상을 피할 순 없는 가 봅니다? 그게 대체 무슨 꼴입니까.” “풋. 어서 가서 씻으셔야 겠소. 모습이 말이 아니구려.” “어이, 뭘 하느냐? 백작님을 방으로 안내해 드려라.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어떡하느냐?” 웃음기를 가득 머금은 말에 루시엘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입술을 꾹 악물었다. 대놓고 씩씩거리진 않았지만 이미 자존심이 있는 대로 상한 얼굴이었다. 반대로 나는 십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푸, 푸하하하! 멋지다! 역시 아버지가 최고라니까! -너 말이다. 이전부터 은근슬쩍 계속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 이제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글쎄, 왜 내가 너의 아버지라는 거냐? -뭐, 어때. 그냥 편한 대로 부르는 거지. 내가 뭐가 문제냐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엘뤼엔은 손으로 턱하고 이마를 짚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달리 이프리트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호오, 엘퀴네스가 아버지? 그럼 나는, 나는? -엥? 이프리트님은 그냥 이프리트 님이죠. 뭐 다른 호칭이 필요한가요? -우씨! 지금 정령왕 차별이냐? 나도 다른 걸로 불러줘! -…어머니라 불러드려요? -켁! 내가 이놈하고 부부라는 소리냐? 그딴 거 말고 다른 거 없어? -으음. 그럼…삼촌이라든가? -오옷! 그거 좋다! 삼촌~! 이제부턴 나도 삼촌이라 불러라. 크하하! 확실히 그는 인간에게 호의적인 정령왕이었다. 아니면 단순히 질투에 미쳐서 사소한 것도 공유하려는 심보이거나. 새로 생긴 호칭에 만족한 듯 껄껄거리는 그를, 엘뤼엔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삼촌이란 소리가 아주 틀린 것도 아니지. 미래의 이프리트의 오빠라고 치면.’ 이렇게 착실히 가족 구도가 이루어지는 건가? 가볍게 미소 지은 나는 손에 들린 편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개봉해볼 생각이었다. 편지의 겉봉에는 유려한 여성의 필체로 짤막한 문장이 적혀있었다. 아마 루시엘 본인이 아닌, 다른 이의 것을 전달해 준 것 같았다. <친애하는 펠리온 백작님께> ‘어째 시작부터가 심상치 않은데? 이게 루시엘 본인이 쓴 거라면 말 그대로 엽기다.’ 그러나 잠시 후 내용물을 확인한 나는 더 이상 웃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한통의 연서였다. 그것도 꽤 오래전부터 주고받았던 건지, 일상의 소소한 얘기부터 시작해서 이전 편지에 대한 화답까지 적혀 있었다. 군데군데 애정표현도 서슴지 않는 걸 보면 이미 두 사람의 사이가 상당히 깊어져 있는 듯 했다. 혹시나 싶어 편지의 아래 부분을 확인하자 그곳엔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확실한 여성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으윽, 하긴. 트로웰이 약속한 기간이 이제 겨우 한 달 남짓하니, 미네르바가 배신당하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소리겠지. 이걸 어쩌지?’ 설마 펠리온이란 작자가 바람피우는 상대가 변태귀족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다시 편지를 원래대로 봉인한 다음, 이프리트에게 내밀었다. -응? 이걸 왜 나한테 줘? -태워주세요. 저 녀석한테 가봤자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뭐, 상관이야 없지만.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미네르바한테 들키는 것보다야 낫잖아요. 내 말에 이프리트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순식간에 재 초차 남기지 않고 편지를 소멸시켰다. 하지만 증거가 사라졌다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쯤 미네르바도 어느 정도 낌새를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계약자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는 그가, 단 한번도 뒷조사를 안 했을 리 없었다. 다만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믿고 있는 거겠지. 언젠가 인류가 최초로 인정한 정신병이 바로 사랑이라고 한 것을 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인간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왠지 씁쓸한 기분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정된 배신은 착실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크리스는 이미 스스로 예언(?)했던 바와 같이 3회전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의 검술 실력이 나쁜 것은 아니었지만, 용병왕 이라는 칭호답게, 뼛속까지 실전 전투에 익숙해있던 자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큰 부상 없이 내려왔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시합에서 진 자는 그날로 대기실을 이용할 권리가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잠자코 돌아오자 마자 짐부터 챙겨들었다. 하지만 생각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찮냐고 묻는 내 말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어차피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어. 덕분에 내 검술의 약점도 많이 발견했고. 지기야 했지만 이정도면 손해보다 이득을 본 게 더 많은 거지.” “상당히 긍정적이시네요.” “당연하지! 앞으로 갈 길이 먼데 고작 이정도의 패배감에 평생을 매여살 순 없잖아? 난 여기서 물러나지만, 너는 반드시 우승해라. 4회전 상대가 그 맥시우스가의 도련님이라며? 꼭 보러올게.” “네, 알았어요. 이렇게 헤어지게 되니까 섭섭하네요.” “후후. 당분간은 이 근방 여관에서 머물 거야. 이왕 온 김에 도시 구경이나 실컷 해야지. 거처가 정해지면 연락하마. 심심하면 놀러와.” 환하게 웃으며 건네는 말에 나 역시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 외의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2회전이 끝나는 날, 마지막으로 방에 합류한 룸메이트였다. 나이는 20세, 이름은 ‘슐츠’. 어릴 때부터 용병수업을 받았다는 그는, 사교적인 면에서 거의 크리스와 맞먹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친형제처럼 친해진 상태였다. “어? 크리스형 지금 가는 거예요?” 막 목욕을 마친 듯 수건으로 물기를 털며 묻는 슐츠의 말에 크리스는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오냐, 슐츠. 넌 4조니까 아직 시합 날짜가 많이 남았지? 이 형님은 간다. 부디 나 대신 우승해다오.” “칫, 엘한테도 같은 말 한 거 다 알아요. 고향엔 언제 돌아갈 거예요?” “대회가 전부 끝나면. 그래도 체면이 있는데 냉큼 돌아갈 순 없잖냐.” “쳇, 진 주제에 체면은 무슨.” “아니 이 자식이 감히 하늘같은 형님에게?” 벌떡 팔을 걷어 부친 크리스는 곧바로 슐츠의 목을 끌어 잡고 비틀었다. 그러자 장난끼 가득하던 슐츠의 얼굴이 금세 하얗게 탈색되기 시작했다. “켁켁! 하, 항복! 항복, 형님! 우와악~잘못 했어요~~” “쯧, 진작 그럴 것이지.” 회심의 미소를 지은 크리스는 냉큼 그를 놓아주었다. 간신히 그의 팔에서 벗어나자 슐츠는 울상이 된 얼굴로 벌겋게 된 목을 쓰다듬으며 투덜거렸다. “우씨…형 진짜 기사 지망생 맞아요? 무슨 힘이 용병보다 세?” “후후후~ 그것이 다 오랜 훈련의 성과이니라.” “그냥 이참에 용병으로 전직하는 게 어때요? 형은 아무리 봐도 기사감은 아니라고요.” “무엇이? 내가 어디가 어때서?”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죠. 과연 자신이 기사와 적성이 맞다고 생각해요?” “응.” “우씨~ 충고한 내가 병신이지.” 늘 험한 싸움에 앞장서는 용병답게 그는 꽤나 입이 거칠었다. 그 대가는 곧 방금 전 그만뒀던 헤드락으로 다시 이어졌지만. 덥썩! 꾸욱, 꾹. “뭐야? 너 지금 뭐라 그랬냐? 엉? 호오~ 니가 진정 형님의 무서움을 아직 모르는 구나? 이 자리서 한번 목이 부러져 볼 테냐?” “으아악! 실수! 실수라니까! 켁켁! 움메 나죽어~~ 동생을 잡을 셈이슈?” 한편 크리스와 같은 날에 시합이 있던 검은 머리의 남자는 3회전을 여유롭게 통과하고 방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첫날에도 말 한마디 없더니, 며칠간 한방을 쓴 일행이 떠나는 데도 일체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본 크리스는 서운한 표정으로 따지고 들었다. “이봐, 형씨! 그래도 그동안의 정이 있지! 간다는 데도 어찌 한마디도 안하는 거야? 예의상 잘 가라는 말이라도 하지?” “켁켁, 형님. 일단 나는 놔주고 말을…” “시끄러, 임마! 이봐! 정말 끝까지 무시할 거야?” 크리스가 험악하게 소리치자 남자는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사뭇 무서웠기에, 따지던 크리스는 물론, 그에게 잡혀있던 슐츠까지 덩달아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어지는 그의 말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은 아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으니…! “잘 가라.” “…뭐?” “잘 가라고 했다. 이제 됐나?” “으응? 아, 뭐…그,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 책 읽어도 될까?” “아아, 무, 물론.” 설마 이렇게 쉽게 응해줄 줄 몰랐기 때문인지, 원하는 말을 들었는데도 크리스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지만. 그 옆에서 슐츠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강한 형님이네.” 언젠가 보았던 자동차의 CF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그때 무심코 그가 읽고 있던 책을 본 나는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겉표지에 적힌 제목이 바로 <정령 소환하기>였기 때문이다. ‘검사이면서 웬 정령 소환에 관심을?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인가?’ 호기심이 생긴 나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남자를 향해 물었다. “재밌는 책을 보시네요. 정령을 소환하시려 구요?” 그러자 남자는 눈썹을 약간 움찔거리곤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 눈은 남의 일에 무슨 상관이냐는 뜻을 담고 있었지만, 나는 가뿐히 무시하며 그가 읽고 있던 책의 안쪽을 흩어보며 말했다. “어디보자,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 헤에. 정령석이라…이게 뭐지?” “응? 정령석을 몰라, 엘? 정령왕이 직접 만든 작은 구슬이 있다는데, 그게 있어야 정령을 소환할 수 있어.” 대답해준 것은 크리스였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더욱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정령왕이 만드는 구슬이요? 그걸 어디서 찾는데요?” “으응, 정확한건 몰라. 몬스터를 잡으면 나온다는 말도 있고…이미 정령사가 된 사람한테서 얻어야 한다는 말도 있고, 가지가지거든.” “우와~ 누가 그런 사기를 쳤대요? 그거 완전 몹쓸 놈이네.” “뭐? 그럼 아니라는 거야?” 놀란 목소리로 되묻는 크리스의 말에 이제껏 아무 반응이 없던 남자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자신 있게 대답했다. “당연하죠! 정령을 소환하는 데는 자연과의 친화력과, 소환한 정령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 수준의 마나만 있으면 된다고요. 정령석이라니, 말도 안돼요.” “그, 그래? 근데 자연과의 친화력이라니?” “말 그대로 얼마나 정령들과 친숙 하느냐는 거죠. 하지만 이건 거의 선천적인 것이기 때문에 원한다고 이루어지는 건 아니에요. 특히 어른이 될수록 옅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나이가 들면 무리죠.” “에이, 뭐야. 그럼 별 소용없잖아. 그런데 넌 다른 상식에는 무지하면서 그런 건 어떻게 잘 아냐?” “주위에 아는 정령사가 있었거든요. 아무튼 이 책은 읽어봤자 전혀 도움이 안돼요.” 그러자 남자는 눈에 띄게 실망한 얼굴로 책을 덮었다. 그 모습을 힐끗 본 나는 지나가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인위적으로 친화력을 높이는 방법도 있긴 한데.” “…!…그게 정말인가?” 오늘 두 번이나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다니 별일이군. 속으로 잠깐 중얼거리는 나는 기대로 초롱초롱 빛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슬쩍 식은땀을 흘렸다. 이사람, 단순히 말이 없을 뿐이지 알고 보면 재미있는 성격인 게 아닐까. “왜요? 정말 정령이라도 소환하시게요?” “……” “뭐, 알려드리는 건 상관없지만, 공짜는 안 되는데.” “후우, 뭔가 원하는 거라도 있는 건가?” 그냥 해본 말에 순순히 응해줄 기미가 보이자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눈앞의 남자가 바로 귀족이라는 사실이었다. “저기요, 아저씨 귀족 맞죠?” “…아저씨가 아니라 라스포다. 다비안 드 라스포.” 그때서야 처음으로 알게 된 남자의 이름에 크리스와 슐츠는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라스포 가문? 설마 외무재상인 크라우디 드 라스포 공작의?” “내 아버님이시다.” “우와, 형씨. 생각보다 엄청난 거물이었잖아? 그동안 도도하게 굴 만하네~” 하지만 대단하다는 말과 달리 크리스가 그를 대하는 말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다비안이라는 남자 또한 애초에 존대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거란 느낌에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음, 어쨌든 귀족이란 소리죠? 그럼 다른 귀족들에 대한 정보도 많겠네요?” “뭘 알고 싶은 거지?” “뭐, 그냥 간단한 거요. 무슨 기밀문서 같은 거 빼돌리라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되요.” 그 말에 다비안은 자신의 어깨가 지나치게 경직되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슬쩍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가 원래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원하던 질문을 이었다. “혹시 ‘아나이스 드 라비타’라는 여자에 대해서 알아요?” *** 다비안의 말에 의하면 아나이스라는 여성은 귀족 사교계의 꽃이었다. 청순가련한 얼굴에 내숭을 모르는 명랑한 성격, 지혜로운 머리와 누구에게나 관대한 성품 덕분에 어느 무리에서나 인기가 좋았다. 매 파티마다 에스코트를 신청하는 남자가 부지기수지만 정해진 연인은 없고, 그 흔한 스캔들 한 번 일어난 적이 없을 정도로 과거가 깨끗했다. 지금 한창 결혼 적령기임에도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없는 것인지 들어오는 혼처를 전부 거절하고 있다나. 평소에 남자에게 관심이 없던 여자가 한 순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리 특이한 경우가 아니다. 게다가 아직 소문이 나지 않은 걸로 봐선 둘 사이의 감정이 깊어진 것도 최근의 일인 것 같았다. 하지만 나를 제일 경악시킨 것은 그녀가 바로 변태귀족 루시엘의 여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나는 그녀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에서 완전히 비 호감으로 돌아서는 것을 느꼈다. ‘아주 남매가 똑같이 나를 시련에 빠트리는구만!’ 내가 알기론 그녀는 미네르바에게 죽을 운명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부탁에 의해서!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된 대가치곤 혹독했지만, 그것으로 인해 미네르바가 입은 상처를 생각하면 동정의 여지는 없었다. 내겐 내 가족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 뒤로도 몇 가지 설명을 마친 다비안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아는 건 이것뿐이다. 혹시 다른 걸 원하는 거라면…” “아뇨, 충분해요. 그냥 평범한 여자였네요. 덕분에 잘 알았습니다.” “그럼 이제 네가 대답할 차례다. 정령과의 친화력을 높이는 방법이 뭐지?” 그의 진지한 질문에 나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별로 어렵지 않아요. 혹시 주위에 아는 정령사가 있나요?” “그렇긴 하지만…” “그럼 간단해요. 정령사에게 부탁해서 정령을 소환하게 한 다음, 최대한 그와 시간을 오래 보내면 돼요. 매일매일 꾸준히 반복하다보면 친화력이 많이 높아질 거예요.” “그럼 얼마정도나 그 일을 반복해야 정령을 소환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누굴 불러내느냐에 따라 다르죠. 하지만 인위적으로 올리는 것이니 만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기는 힘들 거예요.” “그런 건 상관없어. 대충 얼마나 걸리지?” 딱딱하게 묻는 다비안의 목소리에는 왠지 모를 절박함마저 묻어있어, 그저 호기심삼아 알아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덕분에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알려주려던 마음이 살짝 흔들리고 말았다. ‘어쩌지. 그냥 솔직하게 말해줄까?’ 이전에 랑시가 그랬던 것처럼, 이미 그는 나와 함께 지내는 동안 친화력이 급상승 되어있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순간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켜뜨고 있는 엘뤼엔을 발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고치지 말라고 했다. -아하하, 이제 안 그런다니까 사람 말을 못 믿네~ -글쎄. 신뢰를 받고 싶다면 적어도 그럴만한 의지를 보여야 하지 않던가? -윽, 알았어. 그냥 잠자코 있으면 되잖아. -당연하지. 네게서 떠나면 알아서 흩어질 친화력이다. 지금은 주문도 알려줄 생각하지 마라. 운으로 정령사가 되는 것은 이전의 그 인간 꼬맹이로 끝이다. 그의 싸늘한 경고에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다비안을 향해 말했다. “하급 정령이면 보통 5~6년 정도는 각오하셔야 돼요. 조건이 나쁘면 그보다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구요. 특히나 다비안 씨…라고 불러도 되죠? 다비안씨는 검을 배운 기간이 있기 때문에 많이 힘들 거예요. 서로 상극이 아니라 병행하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약간 다르거든요.” “…그런가.” 예상대로 그는 너무 긴 기간에 낙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잠시 후 고개를 드는 그의 얼굴은 한결 편안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잘 알았다. 좋은 정보에 감사한다.” “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구요. 조금 어릴 때 알아보지 그러셨어요. 귀족이니까 정령사와 접할 기회도 몇 번 있었을 텐데.” “아아. 늘 연무장에서만 갇혀 지내서 다른 세상을 볼 기회가 없었거든. 지금이라도 안 것에 만족하고 있다.” 그렇게 대답한 다비안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귀족이라고 전부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그때의 여관에서 힘겨운 생활을 하던 랑시는 자신이 원하던 것을 얻었으니까. 그러고 보면 세상은 참 공평한 걸지도 모른다. 죽었지만 사랑을 얻은 여자와, 배신한 자를 응징했지만 평생을 괴로워했던 미네르바처럼. 4. 세계 최고의 요리사 4회전 경기가 다가올수록 내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트로웰이 약속한 기간역시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이 슐츠는 무리 없이 3회전을 통과하여, 다시 한 번 크리스가 얼마나 운이 없는 경우였는지를 증명했다. 그리고 대망의 4회전 시합 당일. 경기장에 오르기 전 나는 관람석에 착석하는 한때의 귀족 무리 중에서 루시엘과 그와 함께 있는 여자를 발견했다. 놈과 꼭 닮은 외모를 보아 그녀가 바로 편지의 주인공인 아나이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본 그녀는 맑고 하얀 얼굴에 가냘픈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분홍색의 실크 드레스에 보라색의 가디건을 걸치고 수줍게 웃고 있는 모습이, 제법 매력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에서는 홀로 나온 미네르바의 계약자- 펠리온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간혹 우연인척 시선을 맞추며 슬쩍 얼굴을 붉히곤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잠시 웃어야 할지 황당해 해야 할지 고민했다. 자리에 없으면 시선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주위에 있는 수많은 자연체의 실프들은 곧 미네르바의 눈이었다. 그게 아니라도 미네르바 본인이 직접 자연체의 모습으로 등장해서 들키지 않고 놈을 감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령사면 그 정도쯤은 알 법한데도 펠리온은 너무 방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행동이 노골적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네르바가 자신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거나. ‘남은 지금 일초를 다투고 있는데 당사자인 네놈은 한가해 죽겠다 이거지!’ 잠시 욱하는 기분이 일었지만 나는 불굴의 의지로 참았다. 사실 나보다 더 속상할 존재는 바로 트로웰일 테니까. 슬쩍 돌아보니 예상대로 그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모르는 척 무시하며 지나가는 듯이 말을 건넸다. “조별 최종 승리자를 가리는 시합이라 그런가? 관람석에 못 보던 귀족들이 많이 왔네. 아! 저기 있는 저 녀석이 미네르바의 계약자 맞지?” -내게 말 걸지 마. “윽, 나한테 삐진 거 있어, 트로웰? 요즘 계속 저기압이야.”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고 그전부터 미리 살벌해질 필요는 없잖아. 아직 3주나 남았다고. 조금쯤은 마음에 여유를 두는 게 어때?” -건방지게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 네네, 어련하시겠습니까. 슥 하면 베일 것 같은 기세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순순히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여전히 펠리온과 아나이스에게 향한 것을 보자 그냥 넘어가선 안 될 것 같아서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미워하지 마. 네가 싫어하지 않아도 어차피 불행해질 인간들이잖아.” -뭐? “내버려둬도 알아서 파멸할거야. 그런 한심한 녀석들 때문에 감정싸움을 하는 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차라리 미네르바를 달랠 궁리를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폭주…얼마 안 남았잖아?” -너…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트로웰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늘 차분하던 황금색 눈동자가 지금만큼은 마음의 동요로 흔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많이 알걸? 저 여자가 미네르바의 손에 죽는 다는 거. 그로인해 남자의 배신이 완벽하게 두각을 드러내고, 미네르바가 폭주하게 된다는 거. 어쩌면 더 훗날의 이야기까지 알지도 모르지.” -그렇군. 너 마신의 문장을 가지고 있었지. 혹시 예지력이 있는 신관인가? “아니, 신관이 아니라고 했잖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어. 나는 그냥 들은 대로, 겪은 대로 말했을 뿐이야.” -지금 날 놀리는 거야? “설마. 그런게 아니라는 건 트로웰이 더 잘 알잖아?”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말에 그는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렸지만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나는 다시금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을 미워하는 이유가 저들 때문이라면 멸종에 대해서도 다시 고려하는 게 좋지 않을까? 저런 녀석들 때문에 죽으면 무지 억울할 것 같은데.” -왜? 이제 와 죽음이 두려워지기라도 했나보지? “그야 아픈건 싫거든. 다시 돌아가는 일이 막막해지는게 곤란하기도 하고. 또 저승사자들 찾아 헤맬 생각하면…아니지. 일단은 나도 영혼의 보석이 되는 건가? 호오, 그럼 다음 타자는 누가 되려나.” -뭐?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너야말로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 트로웰, 너는 미래를 읽는 정령왕씨이잖아.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랄게. 사랑이든, 질투든 뭐든지 과하면 보기 나쁜 법이야.” -무슨…내가 지금 단순히 질투 때문에 인간을 미워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응.” 그럼 아니었남? 내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그는 한순간 멍한 얼굴이 되었다. “4회전의 ‘엘’님과 ‘칼빈 드 맥시우스’님은 앞으로 와주십시오!” “앗. 드디어 부르는군. 그럼 난 다녀올게, 트로웰. 이따 보자.” 그때 마침 경기장에서 4회전 선수들을 호명하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살짝 손을 흔들어주곤 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트로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말대로 단순한 질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아니어도 인간은 언젠가 한 번은 멸망하게 될 거야. 나는 그저 그것을 조금 더 앞당기고자 한 것뿐이야. “!” -스스로 멸망하니까 내버려 두라고? 그런 것조차 봐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다면? 그래도 참고 봐야 하는 거야? 어차피 알아서 파멸하니까? ‘으음, 그런 식으로 말하면 대답이 곤란한데.’ 이렇게까지 조급한 느낌의 트로웰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의 심정을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기에 나는 슬쩍 볼을 긁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다림의 미덕이지. 그들 스스로 멸망하는 거야 내버려둬도 그만이지만, 네 손으로 인간들을 죽이면 그 몫이 전부 네게 돌아가게 될 거야.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 일부러 손을 더럽히는 것도 우습지 않아?” -후회하지 않아. 적어도 미네르바가 다른 인간을 바라보지는 않게 될 테니까. “아니, 늦어도 4천년 후에는 후회할걸.” ‘내가 여기서 못 돌아가게 되면 곤란할 테니.’ 의아하게 바라보는 트로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나는 모른 척 하며 경기장으로 나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했다간 자동 실격 될 판국이었기 때문이다. 둥근 원형으로 된 바닥 위에는 이미 경기 진행자와 4회전 상대인 ‘칼빈 드 맥시우스’가 서서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1조 4회전 참가자 ‘엘’님! 아직 나오지 않았습니까?” “아뇨! 여기 있습니다.” 와아아아-- 내가 나오는 것을 확인한 군중들은 곧 시합이 시작 될 거란 기대감 때문인지 모두 커다란 목소리로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 칼빈과 마주선 나는 그를 향해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별로 반갑지는 않지만.” “…늦었군. 나오는데 뜸을 들이기에 혹시 꼬리를 말고 도망친 비겁자인가 했었다. 설마 그때 한 내기를 잊지는 않았겠지?” “당연하죠. 칼빈님이야말로 나중에 딴 소리 하지 마시죠.” “훗, 그 건방진 태도가 얼마나 가나 두고 보겠다.” 슬쩍 비웃는 목소리는 이번 시합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마침 이어지는 진행자의 설명에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그쯤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경기방식은 오로지 순순한 검으로만 합니다. 시합 중 마법아이템의 힘을 빌리는 자는 자동 실격이며, 고의 적인 살수(殺手)를 쓰는 자 역시 엄중히 처벌할 것입니다. 도중에 검을 놓치거나 장외로 떨어져도 실격입니다. 혹시 다른 질문이 있습니까?” “없소.” “없습니다.” 나와 칼빈이 동시에 대답하자, 진행자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우며 소리쳤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4회전 첫 시합, ‘엘’과 ‘칼빈 드 맥시우스’ 자작의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신호탄을 쏘아 올려라!” 퍼엉! 펑! 퍼어어엉!! 와아아아아아!!! 이어지는 엄청난 환호성은 확실히 3회전 때보다 훨씬 늘어있었다. 아마 황제가 직접 참관하러 오는 결승전 때는 이보다 더욱 많아질 것이다. 얼얼한 청각을 달래며 슬쩍 얼굴을 찌푸린 순간, 검을 낮게 세운 칼빈의 선공이 이어졌다. “차앗!” “!” 채앵! 처음이라 탐색을 목적으로 한 것인지 그는 생각보다 검에 많은 힘을 싣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가볍게 그것을 받아 한쪽으로 흘려버린 다음 곧바로 다음 공격을 이었다. 휘익! 챙! 채앵! 휙! 몇 번의 검을 주고받고 나자, 여유 있던 칼빈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채앵! 거칠게 맞부딪히는 공격을 걷어낸 그는 한 발짝 훌쩍 뒤로 물러나며 가늘게 눈을 떴다. “생각보다 제법이군. 이제부턴 제대로 상대해 주겠다.” “좋으실 대로. 아참! 제가 아직 힘 조절에 서툴러서 그러니까 손목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큭! 건방진! 감히 날 도발하는 건가?” 칼빈은 순식간에 울그락 불그락 해진 얼굴로 달려들기 시작했다. 슈우웅! 거친 파공음과 이어지는 검 날은 확실히 방금 전의 공격보다 훨씬 빠르고 사나워져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또래의 인간들 중에서는 제법 나은지는 몰라도, 그는 여러 면에서 트로웰보다 한참을 못 미치는 실력이었다. ‘충고를 해줘도 고맙게 받아들이지는 못할망정…’ 슬쩍 얼굴을 찌푸린 나는 밀어붙이듯 쏘아져오는 공격을 이번에도 가볍게 흘러 보냈다. 평범한(?) 인간과의 제대로 된 검술시합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힘 조절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채앵! “헉!” 그와 동시에 칼빈의 입에서 격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제 딴에는 자신 있게 선보였던 공격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윽고 구경하던 관중들의 환호성이 이어졌다. 와아아아--!! 함성 소리는 평민들이 앉아있는 쪽에서 더 크게 터져 나왔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민 소년이 귀족을 상대로 선전을 하는 것이 통쾌했던 모양이다. 그러자 칼빈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다시 쉴 틈 없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휘익! 휙! 부우웅! 제법 사나운 그의 기세를 본 나는 쩝하고 입맛을 다시며 연신 공격을 피하기만 했다. 내미는 공격마다 모두 허공에서의 헛손질에 그치자 칼빈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큭! 다람쥐 같은 녀석! 피하지만 말고 공격을 받아라!” “이봐요. 힘을 좀 줄여요. 내가 이대로 받으면 정말 손목 부러진다니까요.” “시끄럽다!” “휘유. 말이 안 통하네, 진짜.” 도무지 응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나는 차라리 시합을 빨리 끝내는 것으로 마음을 바꿨다. 설마 순수한 대련의 승패에 귀족 상해죄의 명분이 붙지는 않겠지? 속으로 잠깐 중얼거린 나는 팔에 적당한 힘을 준 채 다가오는 공격을 받아 올렸다. 휘익! 챙!! “…크악!” 예상대로 내 완력에 밀려난 칼빈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손목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는지 검을 놓치지는 않았지만 한동안은 마비가 온 것처럼 얼얼할 것이다. “큭, 어떻게 이런 힘이…” 그쯤에서 끝내면 좋으련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쪽 손으로 검을 바꿔 들었다. 그 독한 반응에 나는 저절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히도 사과하기 싫은가보네. 그렇게 이기고 싶어요?” “닥쳐라! 감히 날 능멸하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버럭 소리친 그는 내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재빠른 동작으로 검을 휘둘렀다. 정확히 얼굴을 노리고 들어온 공격에 놀란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피했지만, 후드의 상당부분이 찢겨나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휘익! 촤악! “윽-!” 동시에 따끔한 느낌이 들어 슥 볼을 문지르니, 엷게 배인 피부에서 붉은 피가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시합 중에 다치는 거야 흔한 일이고, 이정도의 상처는 트로웰과 훈련하면서 입었던 부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치사하게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하다니!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뚝-끊기는 것이 느껴졌다. “…아, 진짜 말로 하려니까 사람을 우습게보네?” 그렇게 나오겠다 이거지. 열 받은 나는 얼굴 앞에서 너덜거리는 후드를 거칠게 찢어 던졌다. 그 모습에 칼빈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놀라는 것을 보며, 나는 아까보다 훨씬 밝아진 시야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안 봐준다.” 벌떡! 아나이스는 갑자기 자신의 옆에서 일어나는 루시엘의 행동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항상 느긋하고 냉정하던 오빠가, 지금 순간 당혹감을 가득 담은 얼굴로 경기장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원래 그녀는 결승전만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차기 맥시우스 공작으로 알려진 칼빈 드 맥시우스의 경기에 관심을 보인 오빠 때문에 부득이하게 따라오게 된 것이다. 상대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평민이라는 사실에 실망하던 것도 잠시, 그녀는 곧 자신의 옆모습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바로 펠리온 백작이었다. ‘아, 백작님도 오셨구나.’ 그것을 깨닫고부터 아나이스는 더 이상 시합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 대신 온 신경이 펠리온을 향하기 시작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운명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자존심도 무릅쓰고 직접 편지를 건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놀랍게도 펠리온 역시 그렇다고 했다. 이미 두 사람의 감정은 남들에게 공공연히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지, 확실히 서로를 향해 닿아있었다. 그럼에도 쉬쉬하는 이유는 그가 계약한 정령왕 미네르바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미네르바가 워낙 계약자를 아끼는 나머지, 연인이 생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아끼는 감정과 같으니 염려할 것 없다며, 시간을 두고 설득해보겠다는 말에 그녀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실상 검술대회를 보러 왔으면서도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기에, 그녀는 루시엘이 이러는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 역시 경악한 얼굴로 술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의 시선이 지금 한창 진행 중인 4회전 시합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옅은 감탄성을 내뱉고 말았다. “세상에…” 사내들의 거친 싸움밖에 연상하지 못했던 경기장에 천사가 서있었다. 적어도 그녀의 눈으로 보기엔 그랬다. 햇빛에 반짝이는 금색의 머리칼과 선명한 초록색 눈동자가 그 자체로 마치 보석 같은 느낌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보기 안쓰러운 상처가 나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의 미모를 가릴 수 없었다. 세상에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니! 멍한 얼굴로 정신없이 바라보던 아나이스는 곧 그가 경기 초반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던 음산한 느낌의 평민이었음을 알아보았다. 단지 가리고 있던 얼굴이 드러난 것뿐인데도, 그 차이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놀라웠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아아, 그래. ‘엘’이었지.’ 이름을 기억해 낸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루시엘을 보며 물었다. “오라버니! 보셨어요? 칼빈경의 상대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였다니 굉장히 놀랍네요.” “아니다, 아나이스. 그는 남자다.” “호호, 마치 이전에 알고 계셨던 것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 장난스럽게 묻는 그녀의 말에 루시엘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여전히 경기장의 ‘그’에게만 머물러 있었다. 그 반응에 아나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려는 찰나, 곧 루시엘의 입에서 나직하면서도 희열에 들끓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진행자로부터 ‘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해도 설마 했던 그였다. 워낙 흔한 이름인데다 애칭으로도 자주 쓰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 본인이 맞았을 줄이야! 루시엘은 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수소문 하고 다녔던 지난 몇 달간의 일이 허무해지는 것을 느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다녔군. 하긴, 저렇게 눈에 띄는 외모라면 그럴 만도 하지.’ 노예시장에 잡혀갔다가 도망치는 일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미 한번 호된 경험을 했으니 외모를 가리고 다니는 것에 더욱 충실했을 텐데,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이런 장소에서 뜻밖의 재회를 했으니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상치 못했던 장면도 보게 되지 않았던가. ‘엘’의 상대선수인 맥시우스 가의 장남은, 검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아카데미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뽐내던 학생이었다. 그런데 ‘엘’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가볍게 상대했다. 언젠가 용병단 전체를 상대로 했을 때도 선전했다는 말을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체험하고 나니 그 놀라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정령술까지 함께 다룬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전투에선 이보다 더욱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정말 여러 가지로 나를 놀라게 만드는 자로군.” 처음 그가 엘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그의 외모 때문이었다. 엘프보다 아름다운 외관에 정령술까지 사용할 줄 아는 노예라면 장식용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사술을 쓰고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더니, 이번엔 출중한 검술실력으로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다방면의 재주를 가질 수 있는 걸까? 루시엘은 행방을 찾을 때도 궁금하지 않았던 그의 정체가 새삼 알고 싶어졌다. “그때 그를 도운 건 사술이 아니라 정령이라고 했었지. 그만큼 친화력이 깊으면서 정령술에 정진하지 않고 검에만 매달린 걸까? 그런 게 아니라면 저만한 나이에 저 정도의 검술을 구사하긴 어려울 텐데.” “어머, 오라버니, 정말 아는 사이였던 거예요?” 놀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묻는 여동생의 모습에 루시엘은 그저 피식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와아아아!! 그 순간 막바지에 다다르던 시합이 드디어 완전히 끝을 맺었다. 결과는 두고 볼 것이 없이 ‘엘’의 승리였다. 경기 내내 쥐 잡듯 몰려야 했던 맥시우스 가문의 장남은 시합에 패했다는 판정이 내리자 털썩 주저앉으며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루시엘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평소에 자부심이 강했던 사람일수록 무너졌을 때의 충격이 큰 법이다. 저대로 자신을 추스르지 않고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폐인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금방 다른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관중들의 환호에 답례하며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는 ‘엘’을 보고 황급히 몸을 움직였다. 뒤에서 의아하게 바라보는 아나이스와 그녀의 연인인 펠리온이 따라오는 것을 느꼈지만, 지금 당장은 ‘엘’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행히 그는 건물의 복도에서 걸어가는 엘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봐, 잠깐! 거기 서라.” 그다지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그의 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얼굴이 자신이 아는 이가 확실하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루시엘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와 반대로 엘의 얼굴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마냥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아, 진짜. 오늘 무슨 날인가? 꼴 보기 싫은 인간들만 만나네…” 방금 전 격렬한 시합을 펼쳤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그는 땀 하나 흘리지 않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볼에 새겨진 상처만 없었다면 어디 간단히 산책이라도 나왔나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곧 자신의 본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않았다는 뜻. 루시엘은 눈을 가늘게 뜨며 엘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가늘고 마른 체구는 도무지 검으로 단련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랜만이군.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가 건넨 인사에 엘은 더더욱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삐딱하게 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이 어찌 보면 무례할 정도였지만 예쁘장한 외모 때문인지 귀엽게만 보였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단히 화가 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용건이야? 다시 만나면 죽인다고 했을 텐데? 뭐, 죽으려고 왔다면 이해해주지.” “무, 무슨! 오라버니께 감히 그런 말을!” “아나이스, 너는 가만히 있거라.” 놀란 여동생이 소리치자 루시엘은 얼른 나서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그가 자신의 일에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나이스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잠자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펠리온이 속상해 하는 그녀를 위로하듯 어깨를 다독였다. 그 순간 루시엘은 엘의 눈빛이 차갑게 굳어진 것을 느꼈다. 그런데 똑바로 노려보는 시선은 그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뒤의 펠리온을 향해 있었다. 루시엘이 그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엘은 뚜벅뚜벅 그의 앞으로 걸어오더니 느닷없이 펠리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펠리온 드 레파르가 맞습니까?” “…??…그렇다만?” “미안한데…한대만 좀 맞죠.” “뭐?” 그것은 양해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였다. 그 증거로 펠리온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엘이 휘두르는 주먹에 맞고 저만치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퍼억! 쿠웅! “꺄아악! 페, 펠리온님!!” “!!” 제법 힘을 실은 타격이었는지 쓰러진 펠리온은 일어날 생각도 못하고 연신 신음만 삼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후드득 피가 흘러내리자 아나이스는 창백한 표정으로 얼른 달려가 손수건으로 맞은 부위를 감쌌다. 평민이 귀족을 때리다니! 그 하나만으로 그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루시엘은 루시엘대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정작 원한이 있는 자신은 무사하고 아무 상관없는 펠리온이 화를 당한 것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서 태연한 것은 오직 엘 한사람밖에 없었다. “다, 당신 뭐예요? 어째서 이런 짓을!” 아나이스는 글썽거리는 눈으로 펠리온을 부축하며 소리쳤다. 심하게 부풀어 오른 볼을 보니 뼈라도 부러진 것 같았다. 저 가냘픈 체구에 이만한 괴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아~ 미안, 미안. 실은 전에 패준다는 걸 깜빡 잊었거든요. 쩝, 이놈의 건망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뭐라고요?” “한대가지고는 영 부족하지만…이렇게라도 해야 훗날 한사람이라도 죽을 목숨에 위안이 되지 않겠어요?” 생긋 웃는 얼굴은 마치 천사같이 아름다웠지만 아나이스는 오히려 두려움을 느꼈다. 엘은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움찔. 엘이 바로 앞까지 다가오는 것을 느낀 아나이스는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떨었다. 그것을 본 루시엘이 얼른 막아서려 하자 그의 입에서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 이래봬도 여자 때리는 취미는 없어.” “대체 무슨…” “저 사람에게 꼭 해줘야 할 말이 있거든.” 그 말에 루시엘은 엘의 시선이 여전히 펠리온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를 쓱 훑어보던 눈이 허리춤에 있던 검에 이르자 엘의 얼굴은 금세 어둡게 물들었다. “블래스터…” 그것은 미네르바가 펠리온에게 직접 선물했다던 정령검의 이름이었다. 아직 드러내놓고 사용한 적이 없었기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알고 있는 걸까. 루시엘이 그에 대해 의문을 품으려는 찰나, 엘은 조금 딱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재수 없는 자식. 다른 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어놓고, 네사랑은 잘 될 거라 여기는 건가? 잘도 그 뻔뻔한 얼굴을 들고 다니는군.” “크, 크윽…무, 무슨 짓을…” “무슨 짓~? 한 번 네 양심에 손을 얹고 물어보시지? 하긴, 적어도 그 정령검이 가진 의미를 알았다면 함부로 이따위 짓을 벌이지도 않았을 테지만. 정령사라는 이름이 아깝다, 아까워.” 하지만 루시엘은 태평하게 그것을 구경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펠리온에게서의 용무를 마친 엘이 곧장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복부를 가격했던 것이다. 그 충격에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수그리자, 기다렸다는 듯 등을 찍어 누르는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퍽! 쿠웅! “크윽!” “오, 오라버니!” 천하의 소드 마스터도 기습에는 어쩔 수 없는지 그는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자신과 친근한 남성 두 명이 쓰러지자 아나이스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그와 반대로 엘은 두 손을 탁탁 털어내며 후련하다는 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평소 손봐주고 싶었던 놈들을 차례로 물리쳤으니 나름대로 수확은 있네. 아참, 루시엘 넌 쓸데없는 일에 관심 쏟을 힘 있으면 여동생이나 잘 챙기는 게 좋을 걸? 나중에 조금 덜 후회하려면 말이야.” “쿠, 쿨럭! 너, 넌 대체 누구지? 무엇을 알고 있는 거냐?”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신음을 억누르며 루시엘은 간신히 물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상하게 느낀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엘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이 휑한 복도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마치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하지만 루시엘은 본능적으로 이것이 끝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저 화풀이 삼은 것 치고는 방금 전 엘이 건넸던 말이 하나같이 의미심장했기 때문이다. 아주 짐작 못 할 바도 아니었다. 펠리온이 그와 계약한 정령왕 미네르바와 연인사이라는 소문은 이전에도 퍼져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아나이스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보며 단지 과장된 오해였다고 생각을 고쳤던 루시엘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동안 펠리온이 둘 중 어느 하나의 마음을 기만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방금 전 엘의 말을 미루어, 그 대상이 아마도 미네르바였던 모양이지만. ‘대책 없이 큰일을 저질렀군, 펠리온. 자네는 정령왕의 분노에서 연인을 지킬 자신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앞날의 일이 어찌됐든 그저 연인이 입은 상처에만 가슴을 졸이는 여동생을 보며, 루시엘은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소리 없는 태풍안에 휘말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쯧쯧, 겨우 고거 패주고 마냐? 암튼 넌 너무 물러서 탈이라니까. 4회전 시합이 끝나고 돌아가는 내게 루시엘과 그 일당들이 찾아온 건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 손봐줄 작정이었지만, 알아서 마련된 기회를 놓칠 리 만무. 그 정성을 봐서 가볍게 상대해준 내게 이프리트는 연신 불만을 감추지 못했다. 그 옆에서 말은 안하고 있었지만 엘뤼엔도 약간 못마땅한 표정이었고, 트로웰 역시 찌푸린 얼굴이긴 마찬가지였다. 날더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둘 땐 언제고 왜 이제 와서 난리야? 나는 약간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의하듯 말했다. “그래도 제법 힘을 실었다고요. 이빨 두세 개는 부러졌을 걸요?” -겨우 이빨 가지고 무슨. 적어도 죽기직전까지는 가야지! 그리고 아까 그 여자는 왜 그냥 내버려 둔거야? 따지자면 가장 큰 화근인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여자를 때려요? 그렇게 막나가지는 않는다고요.” -어쭈~ 꼴에 너도 기사도를 아는 남자라 이거냐? “힘없는 사람을 때려봤자 자랑은 아니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한 말에 세 정령왕은 차례로 할 말을 잃은 얼굴이 되었다. 그들 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놀랍게도 트로웰이었다. -단지 연약한 여자라서 그냥 내버려 둔거라고? 어차피 죽을 테니까 봐준 게 아니고? “응? 아, 뭐…그런 의미도 있긴 하지. 사실 조금 불쌍하잖아? 그냥 한 사람을 사랑한 대가치곤 가혹하기도 하고.” -흥. 그들 편을 들고 싶은 거야? 결국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소리군. “어허~ 그렇게 말하면 섭하지. 편을 드는 것과 동정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그래도 네가 인간인건 사실이잖아? 아무리 정령왕들을 가족처럼 여겨봤자, 결국 넌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수 없어. 너 역시 우리를 이용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 심장 부위가 따끔 거린다. 지금 그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 그는 절대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인간이었다. 결코 그들이 말하는 ‘우리’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분하고 답답한 심정보단 가장 먼저 슬프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만약 내 정체를 알고 있어도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한편이라는 기준이 단지 종족의 차이일 뿐,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는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아 속상했다.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우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좋을 대로 생각해. 그래서 네 마음이 더 편해진다면.” -…부정하지 않는 게 더 수상해. “흐음. 그럼 나도 한 가지만 묻자. 내가 이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만큼, 트로웰은 날 신뢰하고 있어?” -…… “그런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내 목적은 그저 너를 말리는 것뿐이야. 이제와 새삼 편 가르기를 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보는데? 무슨 소꿉장난 식의 영역싸움도 아니고.” 낮게 혀를 차며 건네는 말에 그는 찌푸린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썰렁해지자 이제까지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프리트가 호들갑 떨며 떠들기 시작했다. -어이, 어이. 뭘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애들처럼 싸우고 그래? 인간인 엘이 자신의 종족을 위하는 거야 당연한 거지! 낳아준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아주 외면할 수 있겠어? 아참, 그러고 보니 넌 고향이 어디냐? 부모들은? “없는데요.” -아, 그래 없… 뭐, 없어?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는 말에 엘뤼엔과 트로웰까지 덩달아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뻘쭘하게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뭐, 양아버지와 미래의 양어머니 될 분이 있긴 하지만.” -양아버지? 친부모는 어쩌고? “그런 건 처음부터 없었어요.” -그, 그럼 너 고아였냐? “에에. 말이 그렇게 돼나?” 그러자 이프리트는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래봤자 정령체라 그다지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제 딴에는 고아(?)인 나를 위로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크흑! 불쌍한 자식! 엘퀴네스를 아버지라고 부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이 어린것이 얼마나 의지할 데가 없었으면! -…거기서 왜 내가 나오는 거지? -이 인정머리 없는 놈! 넌 자기 계약자가 고아라는데 불쌍하지도 않냐! -적어도 너처럼 호들갑 떨 정도의 일은 아니지. -큭, 네가 달리 냉혈한이겠어. 이만한 나이 때의 아이에게 보호자가 얼마나 중요한 줄 알기나 해? 하긴, 소환은 커녕 평소에 유희도 다녀보지 않은 네가 인간들에 대해서 뭘 알겠냐. 너 같이 무심한 계약자를 만났으니 앞으로 고생할 모습이 훤하다, 훤해. -뿌득. 지금 내게 시비 거는 건가? “아, 저기…난 별로 아무렇지 않은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내가 황급히 말을 꺼냈지만 이미 두 정령왕은 듣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둘 사이에 험악한 공기가 급속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요즘 오냐오냐 해줬더니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 군. -흥! 다 같은 정령왕에게 건방이 어딨어? 힘만 세면 다냐? 나도 공격력에선 너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호오, 그래? 그럼 어디 여기서 담판을 지어볼까? -누, 누가 해보자면 못할 줄 알고! ‘쩝, 왜 일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지?’ 그저 무심코 꺼낸 말에 두 정령왕의 분위기가 살벌해지자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 나를 구원한 것은 옆에서 멀뚱히 상황을 관전하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배고프지 않아? “응?” -아니, 방금 전 시합 때문에 힘 소모가 있었을 텐데 밥을 찾지 않는 게 이상해서. 조금만 배고파도 힘들어하잖아, 너. “아아, 그러고 보니 좀 배고프긴 하네.” -그럼 저 둘은 내버려두고 식당이나 가자. “어? 안 말리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단명하고 싶은 생각은 없거든. “……” 말을 마친 트로웰은 먼저 몸을 돌리곤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내가 얼른 그를 쫓아가는데도, 이미 두 정령왕은 그런 것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이 있던 장소에서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콰앙! 콰지지지직!! 쿠우웅! “히익! 뭐, 뭐야?” -돌아보지 마. 어차피 이프리트가 당하고 있을 테니까. “저, 저거 정말 안 말려도 돼? 저러다 건물이 무너지기라도 하면…” -괜찮아. 둘 다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을 바보는 아니니까. 단지 기후에 조금 기변이 일어나는 정도일거야. 불과 물이 만났으니 당분간 이 전역에 때 아닌 안개가 잔뜩 끼겠군.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은 이미 이런 상황에 너무도 익숙해 있는 듯 보였다. 덕분에 혼자 뻘쭘해진 내가 묵묵히 뒤를 따라 걷기를 몇 분. 잠시 후 그의 입에서 약간 웅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 편 가르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어. “뭐?” 허걱. 트로웰이 사과를 하다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놀란 내가 멍하게 입을 벌리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냥 화풀이 한 거야. 네가 그 인간들을 더 위하는 것 같아서 속이 좀 꼬였달까. 힘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게 자랑은 아니라고 한 말이, 마치 나를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엑? 그,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알고 있어. 뭐, 맞는 말이긴 하니까 신경 쓸 필요 없기도 하고. 나도 지금 내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건 지 잘 알아. 네 말대로 언젠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멈추지 않아?” -멈출 수 없는 거야. 아직은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으니까. “윽! 그거 왠지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다?” 내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니까 좀 더 분발해 보는 게 어때? 태연하게 놀기엔 시간이 별로 안 남지 않았나? “쳇,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기야? 나도 나름대로 필사적이라고.” -그래? 그런 것 치곤 지금까지 적극적으로 설득한 적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인간을 죽여선 안 되는 이유라던가, 그들의 장점을 부각해 본다던가…하다못해 동정심 작전이라도 해 본적이 있던가? “그래도 나랑 많이 친해졌잖아. 인간이라면 무조건 치를 떨던 때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 아니야?” 그러자 트로웰은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찌푸리더니, 마치 선생님 같이 엄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착각하지 마. 네게 가진 호감이 전 인간에게로 이어질 수는 없어. 너 역시 예외는 아니라고 말했을 텐데? “하지만 적어도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간은 있었지? 그걸로 충분해. 넌 본래 상냥한 녀석이니까 절대 다른 사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거야.” -또 그 소리군. 세뇌라도 시킬 작정이야? 질렸다는 듯이 혀를 차는 그의 말에 나는 말 없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아주 싫은 반응이 아닌걸 보면, 세뇌의 효과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다. 어쩌면 그도 내가 말려주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의 식당은 건물 1층의 넓은 홀을 통째로 이용하고 있었는데, 주문식이 아니라 그날 그날 주제가 다른 뷔페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 식사시간이 되기 한 두 시간 전부터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오는 음식들은, 놀랍게도 단 한사람의 주방장의 주관 하에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런데 요리사의 음식 솜씨가 어찌나 뛰어난지, 참관하러 온 귀족들까지 전부 소문을 듣고 몰려드는 바람에 홀 안은 늘 발 디딜 틈조차 없이 붐볐다. 그래서 평민들의 경우는 한쪽 구석에서 접시하나만 든 채 조금씩 먹고 돌아가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평소보다 한산했다. “흐음. 이상하네. 그세 요리사라도 바뀌었나?” “그게 아니라 식사시간 치고는 이르니 그렇겠지. 게다가 아직 시합이 전부 끝난 것도 아니잖아.” 현재 트로웰은 혼자서 밥 먹는 모습이 뻘쭘해 보일 거라는 내 주장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였다. 어차피 붐비는 식당 안에서야 낯선 사람 한명쯤 더 섞여 든다고 눈치 챌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워낙 눈에 띄는 외모다 보니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트로웰 특유의 ‘접근금지’ 오오라 덕에 다가오는 자들은 없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2조 시합까지 함께 치룬 다고 했었지? 다비안씨가 2조라고 했었는데, 끝까지 있다가 보고 올걸 그랬나?” “다비안? 너랑 같은 방 쓰는 그 얌전한 인간?” “응. 이번 시합에서 그가 이기면 5회전에서 나랑 만나게 되거든.” 그러자 트로웰은 찌푸린 얼굴로 뭔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녀석이 이기는 군.” “앗, 정말? 혜안으로 본거야?” “그래. 결과를 알았으니 이제 밥이나 먹어. 곧 사람들이 몰릴 거야. 미어터지는 인간들 사이에서 식사하고 싶지 않으면 서두르는 게 좋을 걸?” “응. 알았어. 고마워, 트로웰.” 미래를 본 다는 게 이렇게 편할 줄이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나는 대충 접시하나를 들고 눈에 보이는 음식들 몇 가지를 담았다. 트로웰도 그냥 가만히 있기는 뭐했는지 가벼운 음료 종류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트로웰, 평소에 혜안을 통해서 최대 볼 수 있는 미래가 어디까지야? 몇 천 년 후까지도 가능해?” “아니, 거기까지는 무리야. 보통 몇 년 정도? 하지만 내 경우엔 예지보단 통찰력에 비슷한 거라 오히려 볼 수 있는 게 더 많지.” “헤에, 예를 들면?” “여러 가지야. ‘이런 사람이 이러저러한 유형의 누군가와 만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저런 선택을 하면 그러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정도? 미래를 볼 수 있는 건 이런 유추를 좀 더 넓고 확실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부품중 하나일 뿐이야.” “으윽, 무지 복잡하다.”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아. 그냥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은걸 알 뿐이거든.” 담담하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모습에 나는 갑자기 장난기를 느끼고 눈빛을 반짝였다. “그럼 나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많겠네?” “뭘? 네가 바보라는 거?” “쿨럭. 너무해…” “네가 날 시험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말해두지만 어떤 식으로든 네가 원하는 대답을 할리는 없을 거야. 속마음을 읽지 않아도 네 생각을 짐작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니까.” “쳇, 치사해.” 내가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자 그는 피식 웃더니 갑자기 여러 개의 접시에 종류별로 음식들을 잔뜩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리곤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테이블에 끌어다 앉힌 후, 산더미처럼 쌓인 접시들을 차례로 늘어놓으며 냉정하게 명령했다. “5분 내로 전부 먹어.” “헉! 이 많은 걸 나 혼자 다 어떻게 먹으라고?” “지금 이렇게 떠드는 동안에만 먹어도 충분히 다 처리할 수 있어. 빨리 먹고 돌아가자. 아까부터 자꾸 쳐다보는 인간들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어.” “흠.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 트로웰이 워낙 눈에 띄는 탓이니까.” 내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그의 표정이 순간 기묘하게 변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응? 내가 뭘? 이 세상에서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만큼 흔한 조합이 어디 있다고. 남자치곤 좀 예쁘장한 편이긴 하지만 이정도 외모는 귀족들 중에서도 흔하잖아?” “…너 거울은 제대로 보고 다니는 거야?” 황당한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는 뜨끔한 표정으로 잠시 먼 천장(?)을 응시했다. 계집애 같은 얼굴이 싫어서 거울 따윈 죽어도 안 본다는 말을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그는 충분히 알 만 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이미 충.분.히. 눈에 띄는 얼굴이니 남 탓 할 생각은 그만 하시지? 이번 4회전 시합도 그 얼굴 때문에 더 유리했다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무, 무슨 소리야? 난 내 실력으로 이겼다고!” “하지만 상대방이 놀라서 멍해진 사이에 완벽히 밀어붙인 것은 사실이잖아? 넌 아니라고 해도 그쪽에선 미인계를 썼다고 생각할걸?” “미, 미인…계…?” 더 이상 어찌 할 수 없는 충격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여자도 아닌 남자를 향해 미인계라니, 꿈에라도 다시 들을까 무서운 소리가 아닌가! 트로웰은 그런 나를 놀리듯 한껏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러니까 후드는 함부로 벗는 게 아니야. 특히 너 같은 경우엔 평소 음침해 보였던 인상과 본판과의 괴리감이 더욱 큰 편이거든. 상대방이 충격을 받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런 걸 이제 와서 충고해봤자…” “훗,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돌이킬 수 없을 때 알려줘야 더욱 재밌는 법이잖아?” “……” 역시 사악해…라고 말해봤자 별로 충격 받지도 않겠지? 이제는 내가 알고 있던 트로웰이 진짜 눈앞의 그와 동일인물이 맞는지 의심까지 든다. 하긴, 이곳에 와서 무엇 하나 이전과 똑같은 것을 본적이 있었던가. 푼수쟁이 시벨리우스 마저 카리스마 왕자님으로 돌변한 판국에 말이다. ‘아참, 그러고 보니 녀석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그때 그렇게 만나고난 이후론 소식조차 들은 적이 없네. 쩝, 고마웠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내가 그렇게 새삼 잊고 있던 친우를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요리사가 음식을 더 이상 안 만들겠다니!” 내가 앉은 테이블에서 꽤 떨어진 자리에서 홀의 종업원인 듯한 두 남자가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청각이 좋은 탓에 나는 바로 옆에서 떠드는 것만큼이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 그게 말입니다…재료가 신선하지 못해서 요리 할 맛이 안 난다나 뭐라나.” “그럴 리가! 내가 한 달 전에 직접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걸로 전부 공수해 왔다고. 오전까지만 해도 싱싱한 것을 똑똑히 봤는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닙니다. 보존 기간이 짧게 걸려있어서 조금 전에 풀린 것 같더라고요.” “이익! 그래봤자 겨우 하루도 안 지났다는 소리잖아! 그걸 가지고 따지고 든단 말이야?”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화내는 남자에게 상대편은 무척 곤란한 투로 대답했다. “총관님도 아시다시피 요리사가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이잖습니까. 고기 육질 하나, 풀 쪼가리 색 하나에도 신경 쓰는 자인데 오죽하려고요.” “그렇다고 요리를 아예 안 해버리면 어쩌자는 거야? 식사시간은 이제 막 시작이라고! 앞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올 텐데 지금 있는 양으로는 턱도 없단 말이야. 자네가 가서 어떻게든 잘 다독여 봐.” “그런 게 가능했으면 이렇게 직접 총관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죠. 지금은 뭐라고 말해도 고집불통이에요. 무조건 신선한 재료를 가져다 놓으라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더라고요.” “끄응. 이번 요리사가 황실에서 주최한 요리대회에서 최종 우승한 자라고 했었지? 이래서 경력이 화려한 녀석들은 안 된다니까. 실력에 자부심이 있는 것도 좋지만 융통성이 있어야지, 원.” 끌끌거리고 혀를 차는 소리에 나는 내심 식사시간을 제대로 맞추었음을 안도했다. 하마터면 음식이 부족해져서 쫄쫄 굶고 돌아갈 뻔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원래 엘프들이 ‘적당히’라는 말을 모른다고 하잖습니까. 그렇다고 현재 있는 재료들을 전부 버릴 수 도 없으니 총관님도 그 자를 설득하시려면 꽤 애먹으실 겁니다.” “흥! 엘프도 엘프 나름이지, 그자는 그냥 괴짜일 뿐이야! 내 생전 블루 엘프가 해산물 외의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고. 더구나 요리사까지 된 경우는 더더욱!” ‘엥? 블루 엘프?’ 그 순간 나는 버릇처럼 시벨리우스를 떠올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블루 엘프가 그 하나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실제로 블루 엘프인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역시 친근한 존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확인하는 차원에서 트로웰을 바라보자 그는 귀찮다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노예시장에서 만났던 그 녀석 맞아. 뭐, 진짜 엘프는 아니지만.” “헉! 그게 정말이야? 여기 요리사가 시벨이라고?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트로웰?” “지금 방금. 평소에 관심 없는 부분까지 일일이 캐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거든.” “으음, 하긴…. 그런데 유니콘 일족의 왕자라더니 갑자기 웬 요리사? 그때 곧바로 마을에 돌아간 거 아니었나? 그 녀석 그동안 대체 뭔 짓을 하고 돌아다닌 거지?” 4천년 후의 그라면 모를까. 어딜 봐도 도도하고 과묵하기만 했던 그때의 시벨리우스가 인간세상에서 요리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여 진 산해진미들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이걸 모두…시벨리우스가 만들었다고? “…먹어도 될까.” “쿡. 이제껏 잘 먹어놓고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시벨리우스의 요리솜씨가 좋다는 거야 알고 있지만…왠지 현재 모습과는 매치가 안 된다고나 할까. 이 음식도 뭔가 술수가 있다고 느껴지는 것이…” “흠, 확실히 ‘흑심’이 있긴 하지.” “응?” 뭔 심?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런데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해진 거야? 그때 만난 시간 이래봤자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았잖아?” “아하하. 친해지는데 순서가 있나? 어쨌든 날 도와준 은인이잖아. 그때 못했던 인사라도 하고 싶은데, 지금 주방에 가보면 만날 수 있을까?”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단조롭게 대답한 그는 손가락으로 나의 뒤편을 가리켜 보였다. 그 방향을 따라 시선을 돌린 나는 막 홀의 안쪽에서 걸어 나오는 낯익은 누군가를 존재를 발견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시벨리우스!’ 꽤 오랜만에 보는 그는 뭔가에 단단히 화가 난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상태였다. 요리에 방해되는 은발은 단정히 하나로 묶은 상태였고, 전체적으로 하얀 옷차림에 앞치마까지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워낙 본판이 출중한데다 엘프라는 종족 특성 탓에, 홀에 있던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가 나서자 곧 허둥지둥 낯익은 두 남자역시 따라 나왔다. 방금 전 이곳에서 시벨리우스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허리에 두른 앞치마를 풀어내는 시벨리우스를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목소리로 만류하기 시작했다. “이, 이보게! 그렇다고 이대로 그만 둬버리겠다고 하면 어쩌나? 자네가 가버리면 지금 이 수많은 식단은…” “내 알바 아니오. 애초에 내 요구를 묵살한 것은 당신들 쪽이잖소?” “글쎄, 지금 당장은 그 조건을 맞추기가 힘들다고 했지 않나. 당장 기다리는 손님들이 이렇게 많은데 새로 재료가 준비될 때가지 마냥 손을 놓고 있는 다는 게 말이 된단 소린가?” “그러니까 나 말고 다른 요리사를 찾으라고 말했을 텐데? 난 저런 형편없는 재료들로는 요리 할 생각 없으니 딴 데 가서 알아보시오. 음식을 망치는 무책임한 자가 되고 싶진 않소!” “이, 이보게~!” 아무래도 따진다는 것이 결국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렸던 모양이다. 녀석의 입장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지만,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답답해진 나는 나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먹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 많은 손님을 놔두고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게 더 무책임한 거 아닌가?” “!!” 이크, 작게 말한다는 게 생각보다 컸나? 그가 보통의 엘프보다 더 청각이 좋다는 것을 미처 계산하지 못한 실수였다. 나는 무시무시한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는 시벨리우스를 보며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런데 막상 나와 마주치는 순간, 녀석의 얼굴에 서려있던 분노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넌……” 그 대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란 표정으로 입을 벌리는 모습에 나는 어색하게 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아, 안녕. 아하하. 오랜만이네? 설마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는걸?” “네가 여긴 어떻게…” “아~ 나도 여기 검술대회에 참가했거든. 그러는 넌 갑자기 웬 요리사야? 일족들이 용케 허락했네?” 그 말에 시벨리우스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나의 위아래를 응시했다. 한참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던 시선은 이윽고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들에 이르더니, 마지막으로 맞은 편 좌석에 있던 트로웰에게 향하곤 살풋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불쑥 엉뚱한 질문을 꺼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요리…맛있어?” “응? 으응. 여기 요리 꽤 맛있다고 소문났어. 귀족들까지 몰려들어서 먹던걸. 설마 네가 요리사인줄은 몰랐지만 말이야. 그런데 정말 그만두는 거야? 아깝게시리.” “그래, 그럼 됐어.” “엥?” 마치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거린 녀석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냉큼 앞치마를 다시 두르더니 어디론가 또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그의 눈치만 보고 있던 남자들 역시 반색을 하며 따라갔다. “다시 마음을 돌린 건가? 잘 생각했네! 내 얼른 다른 재료를 구해오라 이를 테니 아까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게나!” “공작님도 자네의 요리를 얼마나 좋아하신 다구! 자네는 정말 뛰어난 요리사야, 암! 그렇고 말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에도 녀석은 일절 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아까 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걸 보니 그들의 말처럼 포기하고 다시 요리라도 할 작정 인 듯 했다. 나름대로 멋진 재회인사를 기대하고 있던 나로선 그야말로 어이가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뭐, 뭐야, 저 녀석. 사람 무안하게시리 이상한 것만 묻고는 그냥 획 가버리는 법이 어딨대? 오랜만에 봤는데 인사라도 할 것이지.” “쿡쿡쿡. 그러게 너는 평소에 거울을 봐야 한다니까…큭큭.” “에엥? 트로웰 너는 또 왜 웃는 거야?” 왠지 기분이 나빠진 내가 퉁명스럽게 물었지만 트로웰은 웃기만 할 뿐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홀로 고스란히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 * * * * * * * * * * * * * * 내가 또다시 시벨과 재회한 것은 식사를 거의 마쳐갈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또 불쑥 나타난 녀석은 내가 미처 반가움을 표현하기도 전에 뜬금없이 뭔가를 휙 내밀며 경직된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거먹어." "응?"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보니 여러개의 과일로 만든 푸딩이 들려있었다. 뷔페식이라 디저트로 먹을 만한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 그가 내민것은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인 티가 역력했다. 이거 나름대로 재회를 반가워한다는 뜻인가? 먹을 거라면 사양할 리가 없었기에 나는 기쁜마음으로 푸딩을 받았다. "와아! 맛있겠다. 고마워. 네가 직접만든 거야?" 끄덕끄덕 "부럽다. 언제 이런 재주를 익힌 거야? 원래부터 요리를 잘했나?" "아니. 너와 헤어지고 난 후에 바로 유희를 시작했어.전부 요근래 배운 거야." "요근래? 그런데 이렇게 잘한단 말이야? 좋겠다~ 난 아무래도 요리에 소질이 없나봐. 아직오 직접 해먹는 것보단 육포가 더 편하거든." 내푸념에 시벨은 덩달아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 그런 것만 먹으면 몸이 금방 약해질 텐데." "음, 괜찮아. 이래봬도 굉장이 튼튼해. 트로웰이 그러는데 난 보통 인간하고 육체의 구조가 다르댔어. 어느 정도의 영양만 섭취하면 일반인보다 뛰어난 체력을 유지할수 있다고 했거든." "트로웰?" "아....!" 그제야 나는 이 두 사람(?)이 아직 서로 제대로 안면을 익힌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워낙 친근한 모습으로만 익숙해 있던 탓에 나도 모르게 으레 알아왔던 사이처럼 대답했던 것이다. '윽! 이거 엄청 놀라는거 아니야?' 하지만 의외로 시벨리우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트로웰을 한번 힐끔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훨씬 전부터 그의정체를 눈치 채고 있었던 것 같은 행동이엇다. "역시 땅의 정령왕이 맞았군. 넌 그의 계약자인 건가?" "응? 아닌데." "아니라고? 그런데 어떻게 함께 다니게 된 거지?" 그 말에 대답한 것은 지금가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시벨리우스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약간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 "엘이 누구와 함께 다니든 네가 상관할 바 아닐 텐데? 자중하는게 좋을거아. 고귀한 유니콘씨. 쓸데없는 호기심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지." "그다지 불쾌해 보이는 얼굴은 아닌데?" "아아, 난 인간이 아닌 종족에겐 꽤 너그러운 편이거든." "그거 참 눈물 날 정도로 대단한 영광이로군." 차분히 오가는 대화와 반대로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무척 살벌했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있던 세계에서도 사이가 나빴던 만큼, 이곳에서도 당연히 그러려니 하는 심정이었다, 문제는 이 둘의 모습을 본 다른 이들의 반응이었다. 이미 상당수 시선을 끌고 있던 탓에 무척 눈의 띄는 편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테이블 하나를 두고 묘하게 신경전을 버이고 있으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느껴지는 시선들은 더욱불어났고, 그중에선 아예 대놓고 구경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 원래 전혀 말릴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큰마음 먹고 분위기를 환기시키기로 작정했다. "와아! 이푸딩 정말 맛잇다 혹시 또 없어? 더 먹고 싶은데." 칭찬에 약한 녀석이니 요리에 관해 만족스러운 평가를 해주면 관심을 돌릴 것이란 기대를 담고 건넨 말이었다, 예상대로 시벨은 즉각 반응을 보였다. "응? 마, 맛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만들어줄게." "그래도 돼? 괜히 귀찮게 하는 거면....." "아니야, 그정도로 귀찮기는. 조금만 기다려 또 금방 만들어서 올테니까." "헤헤! 고마워. 시벨리우스. 그럼 부탁할게." 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하자 녀석은 돌아서다 말고 슬쩍 놀랄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내이름... 기억하고 있었어?" "응,왜?" "아, 아니. 겨우 그때 한번 잠깐 본 것뿐이었고, 벌써 몇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알고 있는게 신기해서. 인간들은 뭐든지 쉽게 잊는다고 들었거든." "하하! 그렇게 강렬한 만남이었는데 잊을리가 았나. 그때 만났던 네 일족의 이름들도 전부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그렇구나." 밝게 대답한 그는 얼굴 가득 숨김없이 기쁨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감정표현에 솔직한 건 지금도 똑같은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사라지고 나자 잠시 후, 트로웰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잘해주지 않는게 좋을 걸."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쓸데없는 기대를 하면 불쌍하잖아. 저맘때의 유니콘은 절대 동성(同性)에겐 친절하지 않거든." "하지만 나한텐 친절한데? "네가 동성인줄 모르는게 아닐까." 그말에 나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다가 곧바로 얼굴을 경직시켰다. 아무리 내가 눈치가 없다지만 지금 그말을 듣고도 아무런 짐작도 하지 못말리가 없다. 나는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안감에 몸을 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날여자로 오해하고 있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정답. 이제야 좀 머리가 돌아가는 군." "으아악! 말도 안 돼! 하지만 여태껏 그런 기색은 한 번도....!" "너 혼자만 못 느낄 뿐이겟지.아마 오늘 시합을 보러 온 사람중에서도 널 여자로 오해한 녀석들이 꽤 될걸." "뭐어....?" 기가 턱 막힌 기분에 큰 소리로 되묻던 나는 술렁거리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고 꾸욱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트로웰은 어깨까지 들썩이고 웃기 시작했다. "쿡.. 쿡쿡..큭큭!" "우, 웃지머! 내 어디가 여자 같이 보인다는 거야? 다들 눈들이 이상한 거라고!" "그렇게 일일이 화내다간 제풀에 먼저 지치고 말 걸. 보아하니 한두번 겪은 일도 아닌 것 같은데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되지 않았어?" 물론 상당수 익숙해지긴 했다. 방금 전 시벨리우스의 일만 아니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절친한 친구녀석한테 이성취급을 당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평생 그 기분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론 녀석의 친절을 마음 편하게만 받아들일수 없을 것 같아 상당히 마음이 무거워 졌다. "휴우... 누가 이런 얼굴로 태어나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고..........." "나쁘게만 볼 것 없잖아? 아름다운 외모는 살아가면서 꽤 많이 도움이 될텐데. 특히 너 같은 인간들이라면 더더욱." "천만에! 남자가 예쁘장하기만 해서 어디다 갖다써? 비리비리하고 약해 보이기만 하지. 이왕이면 엘뤼엔이나 이프리트 같은 스타일이었으면 더 좋았을 걸." "욕심도 많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점을 보면 너도 인간은 인간이구나.별로 보기 안 좋아." 꽤나 따끔한 일침에 나는 찔끔한 표정으로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일 줄 알면서도 바라는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참 한심했기 때문이다. "미안, 푸념하는 게 버릇이 됐나 봐. 고칠게." 즉각 건낸 짧은 사고에 트로웰은 의외라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동안 자주 웃긴 했지만 그가 저렇게 상냥한 얼굴을 하는 것은 이곳에 와서 처음이었다. 순간 마음이 놓여 하마터면 눈시울을 붉힐 뻔 했다.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도 근처에 있던 어떤 남자가 다가와 우리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저어..실례지만 방금 전 그 블루엘프와는 어떤 사이십니까?" 의아한 심정으로 고개를 든 나는, 그가 아까 전에 일을 그만두려는 시벨리우스를 설득하려고 애쓰던 총관이라는 것을 알아 보았다. 두 눈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 바라보던 그는 막상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변명하듯 말을 이었다. "앗! 죄송합니다. 캐물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벨리우스 씨에게 연고가 있다는 것이 신기해서요. 여기서 일을 시작한 지는 꽤 되었습니다만, 도통 과거의 일을 꺼낸 적이 없어서..." "아아, 그냥 친구예요, 만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렇군요! 그가 개인적인 일로 요리하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 특제 푸딩은 공작님께서 직접 요청하셔도 만들까 말까 하던 것이거든요. 그것을 자진해서 만들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래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거의 다 먹어가고 있는 푸딩을 바라보았다. 상당히 맛있긴 했지만 그 속에 그런 깊은(?)사연이 담겨 있을 줄을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나로선 녀석이 요리사가 된 것 자체가 신기했으니까. "그런데 공작님이라고 하면 이곳 공국을 다스리시는 세피온 공작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분이 시벨의 요리를 좋아하시나봐요?" "물론이죠. 대단한 미식가이시기 때문에 저택의 전속 요리사들도 늘 입맛을 맞출수 없어서 고민했습니다만, 시벨리우스 씨가 오고 나선 한결 편해졌습니다. 황실에서 주최한 요리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을 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정말 대단한 요리사예요. 어느 요리에서도 타인이 흉내낼수 없는 최상의 맛을 찾아낼 줄 알죠. 아마 대륙 최고의 실력일 것이라 자부합니다." "그런데 어째서 저택이아니라 이곳에서 요리를......" 순수한 의문을 담은 질문에, 신나서 떠들던 남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공작님도 늘 권유를 하신 일이긴 합니다만. 한곳에서 오래 묶이는 건 성미에 맞지 않다고 거절했다더군요. 사실 이번 대회가 끝나면 그도 떠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블루 엘프 자체가 워낙 자유로운 성향이니 어쩔수 없지만요." 아쉬워하는 남자와 달리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간발의 차로 녀석을 못 만날 뻔했던 것이다 오늘 우연한 만남이 없었다면 대회가 끝나는 날까지도 모르고 지나갔을게 틀림없었다. 지금은 그가 나와 함께 다닐 거란 어떠한 보장도 할수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다음순간, 나느 곤란한 심정을 느낄수밖에 없엇다. 내가 남자와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을 본 사람들이 어쩐일일지 너도 나도 접근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저기.. 혹시 아까 4회전에서 우승했던 사람 아닙니까?" "네?" "멀리서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가 똑같은데." "아아! 얼굴의 상처를 보니 확실하군! 그사람이 맞아!" "세상에! 가까이서 직접보니 더욱 아름답군! 이렇게 가냘픈 몸으로 그 맥시우스가의 유망주를 이기다니! 정말 대단한 이변이었소! 놀라운 시합이었습니다." "언제 저와 함께 식사라도....!" 귀족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이 이번 대회의 참가자로서 4회전 시합을 앞두고 있는 자들이었다. 아마 내가 먼저 5회전에 진출한 사실에 부러움을 느끼고 말을 건 것 같았다.(정말로 순수한, 검술에 대한 감탄인지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 같지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사이, 트로웰은 앞에 놓여있던 오렌지 주스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거칠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 의자의 다리가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에 사람들은 찌푸린 표정으로 소음의 원인을 노려보았지만, 곧 그 자리에 서 있는 트로웰을 발견하곤 낮게 숨을 죽였다, 예상치 못한 그의 외모에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들이었다. 순간 주위에 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기대감에 가득 찬 시선들은 트로웰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는 주변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이 나를 향해 짤막한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가자. 엘" "으응? 하지만 시벨리우스가........." 그가 농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뒤, 그때까지도 옆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총관이란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저어, 푸딩 정말 맛있었다고 전해주세요. 이렇게 그냥가게 돼서 미안하다는 말도요." "네? 네에.그,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잽싼 대답에 내가 안심하고 떠나려는 찰나였다. 우악스럽게 내 팔을 잡는 강한 힘과 함께 거만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이,어이! 그렇겐 안 되지. 이대로 그냥 가면 쓰나! 여기 모인 사람들을 전부 바보로 만들 참이야?" "아?" 갑자기 나를 방해한 사람은 척보기에도 싸움 줌 했다 싶은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제법 잘 차려입은 옷차림을 보니 귀족인 듯했는데, 어디에나 빠지지 않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역을 맡은 것 같았다. 그 뒤편에선 한눈에 봐도 그의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어리둥절한 표정 짓기는. 여기서 가봤자 대기실밖에 더 돼? 피차 서로 알 거 다 아는 처지에 이렇게 도망치듯 몸을 빼면 못쓰지." "저기, 무슨말인지는 알겠는데 일단 팔은 놓으시죠?" 불쾌함을 참으며 건넨말에 남자는 오히려 잡은 손에 더욱 힘을 가하며 떠들었다. "히야~ 이렇게 가는 팔목으로 어떻게 5회전까지 올라갔는지 모를 일이군. 너 솔직히 말해봐. 혹시 시합 전날 미리 몸이라도 상납한 거 아니냐? 계집애들 중에선 가끔 그런 수법으로 치고 올라가는 경우도 있다던데?" "지금 말 다햇어요?" "큭큭! 어쭈~ 노려볼 줄도 아네? 맥시우스 녀석은 마음이 약해 봐줬을지 몰라도, 나한텐 어림도 없다! 그런 편법이 두 번 통할줄 알아?" 그러자 주위에 있던 놈의 패거리들이 와하하하 웃을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열 받은 내가 놈으 팔을 역으로 비틀어 꺾으려던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 휘익! 쿠웅! 뜬금없이 남자의 비명이 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놈은 내 팔을 놓고 저만치 날아가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그곳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시벨리우스가 좌중을 노려본 채 서있었다. "어? 시, 시벨리우스..." "괜찮아? 어디 다친 덴 없어?" 아마도 요리를 하던 중 밖이 소란스러워지자 호기심에 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억이자 그는 다시금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잡고 잇던 남자를 바라 보았다. 그러자 쓰러진 놈을 부축하던 패거리들 역시 험악한 얼굴로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차림새를 보아하니 겨우 요리사인 것 같은데, 후환이 두렵지 않나?" "우리를 화나게 하면 넌 다시는 여기에 발도 못 붙이게 된다고!" 척 봐도 유치한 협박에 시벨리우스가 꿈쩍할리 없었다. 오히려 그는 할 테면 해보라는 듯이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난 너희들 말대로 이종족이라 인간의 귀족 '따위'가 내 일행한테 함부로 하는 꼴은 못보거든." "뭐? 따,따위? 지금 우리에게 따위라고 한 건가?" "당연한걸 묻는군. 더 뜨거운 맛을 보고 싶지 않다면 이만 물러서는 것이 좋을텐데?" 차갑게 대꾸한 그는 한손에 시뻘건 불길을 일으켜 보였다. 그러자 당장이라고 덤빌 듯한 태도를 취하고 있던 자들의 얼굴에 차례로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마, 마법!" "허억!" 그러고 보니 시벨리우스가 폴리모프한 종족인 블루 엘프는 본래 마법에 능통하기로 알려진 존재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위에있던 누구도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마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칼부림에 익숙한 자들이라곤 해도 마법사, 그것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존재와의 다툼은 달갑지 않을 것이다. 사납던 기세가 한층 누그러지자 시벨은 다시 한 번 경고하듯 읊조렸다. "이종족이라고 무시하는 모양인데, 이래봬도 나는 이 제국의 황제로부터 직접 시민권을 얻은 몸이라고. 이곳에 오게 된것도 세피온 공작의 정식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다면 먼저 그의 허락을 받아내야 할 거야." "큭!" 단지 이름을 언급한 것 뿐이었는데도 세피온이란 세 글자가 지닌 힘은 가히 위력적이어싸. 분하다는 듯 입술을 깨물던 녀석들은 곧 두고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상황이 대충 일단락되자 시벨은 단번에 굳은 표정을 풀며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넌 항상 이런 일에 휩쓸리는구나? 벌써 나한테 진 빚만 두번째야." "하아, 안 그래도 심히 괴로우니까 놀리지마, 그리고 방금 전엔 나도 알아서 해결할수 있었다 뭐." "쿡쿡! 그냥 해본 말이었어. 그런데 벌써 가려고 한 거야? 모처럼 푸딩을 더 준비하고 있었는데, 인사도 없이 가려고 하다니 서운한걸." "아~ 미안. 안 그래도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참이엇는데 푸딩 정말 맛있었어. 하지만 아무래도 주의의 시선도 그렇고... 그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대답과 함계 나는 멀리서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는 트로웰을 힐끔 쳐답보았다. 그러자 나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시벨도 곧 수긍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담 어쩔수 없지. 도다시 시비가 붙기 전에 얼른 가봐." "응.. 오늘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 사실 그동안 어떻게 지내가 궁금하던 참이었거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저기.. 다음에 또 볼수 있을까?" 순간 트로웰의 충고가 걸리긴 했지만 나는 아무렴 어떠냐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야 물론이지. 여기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앞으로 자주 놀러올게." "정말? 그럼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 놓고 기다릴게. 식사시간만 빼면 비교적 한가한 편이니까 언제든 마음 내킬때 와." 친근하게 웃으며 말하는 모습은 내가 알고 있던 녀석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문득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나느 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새삼 그와 나의 입장이 반대가 되었다는 걸 느낄수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유도 모른 채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나를 찾으며, 혼자서 과거의 무게를 감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몇 명의 귀족들이 이유를 알 수없는 복통을 호소하며 시합을 자진 포기했다는 소식을 접었다. 황당하게도 그들은 실격패의 사유를 하나같이 그날 아침에 먹은 식사를 내세웠지만, 동일 같은 음식을 먹은 다른 사람들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깔끔하게 묵살당했다. 시벨리우스의 치밀한 면모를 엿볼 수 있던 순간이었다. -바람의 폭주, 대지의 눈물- 아니이스는 지금 도박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그랬다. 이건 도박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정당한 요구를 하는 데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오진 않으리라. 그녀의 앞에는 일생동안 함께하고 서로를 바라보기로 맹세한 연인이 서 있었다. 항상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잇던 그의 얼굴이 지금만큼은 살짝 일그러져 있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 뭐라고 하였습니까?" 이미 뻔히 들었음에도 되묻는 것은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다.하지만 아나이스는 결코 물러설수 없었다.이번만이 아니라 그 어느 순간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때문에 펠리온이 난처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현재 자신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미네르바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펠리온 님은 제게 그분을 단 한 번도 소개해주신 적이 없으시지요. 지금까진 당신의 입장을 생각해 참아왔지만,이제 더이상 기다릴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무, 무슨 소립니까. 아나이스! 그 부분에 관해서라면 내가 이해할수 있도록 설명했었을 텐데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와 펠리온님의 사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으신다는 것을요.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서 만나야 합니까? 제가 직접 그분과 대화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아니이스!" 크게 호통을 치는 펠리온의 모습에 그녀는 작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리 마음을 굳혔다 해도 사랑하는 이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기에 더욱 그랬다. "정령왕은 굉장히 포악한 존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겉모습만으론 절대 판단할수 없단 말입니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거슬리면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행여 그대가 미네르바님에게 해를 입게 되면 나는 평생을 어떻게 살아간단 말입니까?" "정말 ... 정말 그것 뿐인가요?" "그럼 무슨 이유가 있단 말입니까?"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는 연인의 말에 아나이스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얼마 전 그녀의 오빠인 루시엘이 세간에 도는 소문을 귀띔해주었는데, 펠리온과 그의 계약자인 미네르바가 서로에게 깊은 연정을 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가 그 소실을 접한것은 엘이란 이름의 아름다운 소년이 갑자기 행패를 부리고 난 직후였다. 지금은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 생채기 하나 없이 말끔한 얼굴이었지만, 아직도 아나이스는 펠리온의 얼굴을 보면 당시 소년이 주먹을 날린 뒤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다른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해놓고 네사랑은 잘될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깊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으나, 만약 그것이 루시엘이 전해준 소문과 연관이 있는 거라면 그냥 넘어갈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펠리온의 감정을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수상한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다. 언제나 그는 미네르바의 이름이 나오면 마치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긴장하며 경계하는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정령왕을 소환한 것이 화제가 되어 단번에 신분 상승을 한 사람치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만약 그것이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었다면? 상상만으로 아찔해지는 기분에 아나이스는 두 눈을 질끔 감았다. "얼마 전에 당신과 미네르바님이 연인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 "솔직하게..말씀해주세요.그게 사실인가요?" 용기있게 물은 것과 반대로 아나이스의 손끝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아니라고 부인해주길 바랐지만, 펠리온은 한참 동안이나 입을 열지 않았다. 대답을 기다리기까지 마치 1초가 1년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눈에는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왜.... 대답하지 않으시나요? 그동안 펠리온님이 제가 하신 말씀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건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에 품은 남자였다. 앞으로도 이보다 더욱 빠져드는 대상을 만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매일 주고받던 달콤한 연서와 가끔씩 마주치언 눈빛에 두근거리던 마음, 얼마나 많은 행복을 느꼈던가. 그런데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니! 차오른 눈물이 뚝뚝 구슬처럼 떨어지는 데도 전혀 느끼지 못할만큼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달려서라도 붙잡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흑...흐윽..흑...." 감정을 이기지 못한 아니이스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흐느끼던 순간이엇다. 그녀는 곧 자신을 가득 채우는 다정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던 펠리온 이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던 것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다정한 속삭임에 아나이스는 상황도 잊고 큰 소리로 엉엉 울 뻔했다. "언제고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했습니다. 모두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눈물을 멈춰요.아나이스. 당신이 울면 내마음이 더 아픕니다." "흐윽! 펠리온......" "당신은 참 바보같은 사람입니다. 왜 그런 소문에 흔들립니까? 내마음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오직 그대에게만 향해 있었는데 내가 그토록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까?"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는 손길에 아나이스는 가만히 눈을 감으며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소문을 듣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누구보다 자신의 연인을 믿고 있었다. 지금도 아니라는 한마디만 들으면 단번에 모든 의심을 풀 수 있을 만큼 그를 사랑하는 마음엔 변함이 없었다. 그 반응에 펠리온은 적잖이 안심하는 듯 보였다. 잠시 심호흡을 한 그는 이윽고 마음의 결심을 굳힌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선 오해는 하지 말아주십시오. 미네르바님이 내게 가지고 있는 감정이 생각보다 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이 나를 아들처럼 여긴 다고 말한 것은 당신에게 불안감을 주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그,그런....!" "하지만 결코 내가 그분과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실하게 거부할수 없는 처지인 것도 사실이지요. 우습게도 정령사라는 직분이 그렇게 만들더군요 그분이 떠나면 아무것도 아니게 될 내 자신이 두려웠습니다. 이런 나를 경멸한다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말에 아나이스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정령사에게 있어서 계약한 정령이란, 검사에게 주어지는 검만큼이나 그를 이루는 전부와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부터 늘 검을 수련하는 오빠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그녀는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몇 번이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난 이후론 나는 더더욱 그분을 자극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내마음이 다른곳을 향해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분을 틀림없이 당신을 해하게 될 테니끼." ".........!" "아시겠습니까.아나이스? 당신을 만나기 전의 나는 그저 단순히 정령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습니다.내게 생명을 불어넣고 , 내 진실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것은 오직 당신만이 가능한 일어었습니다." 괴롭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펠리온의모습은 지난날 고뇌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에서. 그녀는 그가 한 말이 모두 진심임을 느낄수 있었다. 어쩌자고 이런 사람을 잠시나마 의심했단 말인가! 아나이스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의 품안에 더욱 파고 들었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펠리온님 미안해요. 제가 나빴어요." "아닙니다. 진즉에 털어놓지 못한 내 나약한 태도가 문제 였지요. 모든 사실을 밝히면 당신이 떠나게 될 것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하지만 이젠 떠난다고 해도 붙잡을 수 없겠군요. 내겐 그런 자격은 없으니까요." "아뇨, 그렇지 않아요. 저는 절대로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 사실을 알았으니 됐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아아.. 아나이스!" 진실을 알고 나니 그녀는 오히려 펠리온에 대한 감정이 더욱 깊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나이스는 경솔했던 자신의 행동을 탓하며 다시는 그를 의심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미 사랑에 눈이 멀어버린 그녀에겐 정령왕의 존재도 결코 위협이 될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행복해지리라. 이순간 그녀는 선택받은 사람이자, 승리자였다. * * * * * * * 그와 같은 시각, 다른 쪽에서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몸을 떨며 분노하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그러나 믿고 싶지 않았던 바람은 결국 차디찬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정령왕의 인형이었다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의 감정에 장단을 맞춰준 것이라 말한 건가? 그대... 펠리온이?' 동료들의 만류를 저버리며, 자신의 종족과 의지까지 부인해가며 사랑한 대가가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던 것도 잠시, 미네르바는 뜨겁게 붉어진 눈시울에서 어느새 투둑! 하고 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생애 처음으로 흘려본 눈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에게는 아나이스처럼 그것을 다정하게 감싸며 닦아줄 존재가 없었다. 투명하리만치 창백한 피부를 따라 흐르는 눈물은 곧 빛과 함께 천천히 산화되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두 팔을 들어 머리를 감쌌다. 크게 벌린 입에서는 차마 새어나가지 못한 흐느낌이 연신 목 안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펠리온...펠리온... 펠리온!!' 어째서 네가! 나를 사랑한다던 그 입으로, 나만을 바라본다던 그 눈으로! 나만을 품는다 했던 그 가슴으로! '아아아아아!!' 마음껏 토해내지 못하는 비명이 멍든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다. 이순간처럼 자신을 저주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 내던져진 적이 있었던가! 배신을 당했다는 충격보다 더욱 비참한 건, 그럼에도 아직까지 그를 믿고 싶어하는 마음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눈치 챘어야 할 일을 이제 와서 안 것은 스스로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탓, 하지만 한계선을 넘은 지금에 와서도 그는 여전히 펠리온을 사랑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런 상황에서도 미네르바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운명의 상대로 내정된 남녀가 만났으니 서로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껏 그 사실을 감춰왔던 것은 자신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한때는 자신을 향한 감정도 진심이었노라고, 미네르바는 애써 그렇게 자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만 더 그를 믿어보자. 적어도 그가 나를 기만한 것은 아이었음을....' 마음의 결심을 굳힌 그는 천천히 흐르는 눈물을 거두었다. 쓰라리고 고통스럽기는 여전했지만, 사랑하는 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길이라면 참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미네르바님? 왜 이런 시간에...." 밤늦게 아나이스와의 밀회를 마치고 돌아온 펠리온은 그의 방에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음을 깨닫고 살짝 얼굴을 굳혔다. 이미 자정을 넘어 새벽이 깊었는데도 미네르바가 어쩐 일인지 깨어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본래 정령왕은 수면이 필요 없었지만, 계약한 이후로 지금까지 인간인 그의 흐름에 맞추어 아침과 저녁을 동일하게 보내고 있었다. 나오기 전에도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기 때문에 펠리온으로선 이런 갑작스런 반응에 바짝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어딜 다녀오는 거지?" 착각이었을까? 펠리온은 미네르바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공허한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표정도 어딘지 좋지 않았지만, 어두워서 잘못 본 것이라 단정하고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다. "잠이 안 와서 잠시 산책을 다녀오는 길입니다. 곤히 주무시는 것 같기에 일부러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제가 없어서 찾으셨나 보군요. 빨리 돌아온다는 것이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넋을 잃고 보는 바람에 늦었습니다." "......" 별이 아름다웠던 건 사실이었다. 다만 그것을 볼때 혼자가 아니라 다른 여인이 함께 있었다는 것이 문제일 뿐. 그는 미네르바가 자신의 사생활을 알기 위해 일부러 미행을 한다거나, 뒷조사를 하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전이었으면 가볍게 수긍하고 넘어갔을 그가 여전히 아무말이 없었다. 그제야 펠리온은 본능적으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미네르바님? 대체 왜...." "이게 무언지 말해주겠나?" "네? 아....!" 순간, 그는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간신히 삼킬 수밖에 없었다. 미네르바가 꺼내어 내민 것은 지난 시간 동안 아나이스가 그에게 건넸던 수많은 연서들이었다. 그동안 꼼꼼하게 감추어두었던 것인데 하필이면 오늘 들키고 만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에 대한 자신의 답장 부분은 없다는 사실정도일까. 당혹한 표정을 한 것도 잠시, 펠리온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런, 몰래 버리려고 모아둔 건데 그걸 용케 찾아내셨군요. 별거 아닙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우리와 동행한 라비타 가문의 영애를 기억하시는지요? 그분이 혼자 일방적으로 제게 연심을 품고 편지를 보내오는 겁니다." "...일방적이라고 보기엔 꽤 오랫동안 주고 받아온 것 같은데." "그, 그저 소소한 일상의 대화들을 나눈 것뿐입니다. 그렇게 해주면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거든요. 제가 다 알아서 할테니 당신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대답에 미네르바는 눈을 가늘게 떴다. 곧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은 펠리온은 심장 한구석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왜 나를 속이는 건가?" "........!" "이 편지의 답장이 어땠을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내가 무지해 보이는가? 솔직하게 말하라, 펠리온 드 레파르. 적어도 이제까지 너를 믿고 있던 나를 더 이상 실망시키지 말아다오." "미, 미네르바님...." 속을 알 수 없는 지독한 무표정에 펠리온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악운은 한꺼번에 터진다더니, 연이어 이런 시련에 빠지게 되니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몰랐다. 더구나 이번 상대는 정령왕이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존재다. 지금 당장은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있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아 이미 미네르바는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일찍 편지를 처리했으면 좋았을 걸, 볼 때마다 애틋한 마음에 신중을 기하지 못한 것이 실수였다. 펠리온은 자신을 실책하며 속으로 낮게 혀를 찼다. '이걸 어쩐다!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할까? 아니면 끝까지 모른 척하는 것이 좋을까?'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지금 미네르바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주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황대로 하자면 그 뜻에 맞춰서 그동안 속인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자니 한편으론 미네르바가 자신을 떠날 것이 걱정되었다. 능력 먼에서나 외모 면에서나 그는 굉장히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였다. 아나이스를 만나기 전에는 꽤 끌렸던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가장 큰 조력자가 될것도 틀림없었다. 펠리온은 꽤 야심이 많은 남자였다. 아나이스를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가 가진 신분과 명예만으로는 더욱 앞으로 박차고 나갈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위해 필요한 것은 미네르바가 가진 정령왕의 위력이었다. 만약 그가 떠나버린다면 다시는 지금과 같은 명예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비겁한 생각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미네르바가 자신을 떠나지 못하도록 구슬릴 방도가 필요했다. 결국 그는 끝까지 모른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무, 무슨 소린지 모르겠습니다.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건가요?" "...펠리온." "물론 오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습니다. 네, 편지의 내용이 확실히 의심스러우셨겠지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그러더군요. 잠깐이나마 연인의 분위기라도 말들어보고 싶다고요. 미네르바님께 죄송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지만, 그것으로 나를 순순히 포기해준다면 따라주는 게 평화로운 해결 방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장단을 맞춰줬던 것뿐입니다." 술술 나오는 변명은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지어낸 것치고는 매우 훌륭했다. 이쯤이면 그도 수긍할 수 있으리라. 펠리온이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으려는 찰나, 미네르바는 아까보다 더욱 어두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얼지로...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미네르바님. 저도 그동안 무척 괴로웠습니다. 아무리 진실이 아니라지만 당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그럼 이 모든 것이 그녀의 탓이라는 소리로군." "예? 아니, 그건......" 싸늘하게 묻는 미네르바의 말에 필리온은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을 망설였다. 혹여 자신 때문에 연인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와 말을 다시 바꿀 수도 없으니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그는 최대한 그에게 거슬리지 않으면서 아나이스의 편을 들어주는 쪽으로 방법을 바꾸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녀도 나쁜 마음에 그리 한 것은 아니었을겁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죄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금 내 앞에서 그 여인을 두둔할 생각인가?" "그, 그런 뜻이 아닙니다! 설마 저를 못 믿으시는 건가요? 그녀는 제게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이번 일에 대해 그녀에게 책임을 물어도 상관하지 않겠군." "....!" 생각보다 강경한 반응에 펠리온은 내심 당혹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걸 두고 '잘못 건드렸다'고 하던가? 평소 미네르바는 담백한 축에 속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자가 한번 의심을 품고 나자 그 어떤 변명을 늘어놔도 쉽게 넘어가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모든 것을 눈치 채고 있는 상대에게 뻔히 속 보이는 핑계를 대는 것이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펠리온은 그다지 실망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아나이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상관없다. 어차피 그는 나에게 피해가 되는 행동은 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분노도 결국 질투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는 펠리온에겐 지금 미네르바의 반응도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 아니, 어쩌면 이 상황을 잘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하게 돌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펠리온은 일부러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물며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곤 주먹을 움켜쥔 채 감정을 꾹 억누르는 얼굴로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시를 내뱉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일이라면 그렇게 하십시오. 정 화가 나신다면 당장 그녀를 .... 죽이신다고 하셔도 말리지 않겠습니다. 아니, 차라리 마음 편하게 아예 죽여주십시오. 저도 더 이상 그녀에게 끌려 다니고 싶지 않으니까요." "...진심인가?" "그렇습니다." 펠리온이 이렇게 대답한 것은 오로지 그의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연극에 불과했다. 미네르바는 지극히 현명하고 이성적이었지만, 현편으론 정도 많은 정령광이다. 처음엔 강경하게 나가더라도 막상 상대방이 극단적으로 대처해버리면 우수울 정도로 흔들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그 상대가 연인인 펠리온임에야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애초에 정령왕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부터가 비현실적이었으니, 이번 일로 오히려 아나이스와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떠밀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미네르바의 회색빛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처럼 동정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네르바는 방금 전보다 더욱 분노한 상태였다. 그는 펠리온이 모두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하길 바랐다. 사랑하는 존재를 두고 다른 여인에게 끌리게 된 자신을 진심으로 자책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배신한 존재에 대해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용서해줄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펠리온은 뜻밖에도 여자의 죽음을 원했다. 그것이 그녀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란 것을 미네르바도 잘 알고 있었다. 말을 내뱉으면서도 슬픔에 가득한 표정을 짓는 펠리온을 본다면 누구나 다 그렇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정반대의 행동을 하는 거지?' 미네르바는 원래 인간 세상에 그다지 많이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거의 정령계에 머무는 편이 많았고, 이따금씩 중간계에 내려오더라도 드래곤이나 엘프들과 어울리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인간들의 심리나 행동에서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갓 태어난 아이가 선의와 악의를 구분하지 못하듯, 미네르바 또한 인간들에게 그랬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진심으로 믿었고, 설마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미 한 번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였다고 애써 믿고 있던 그였다. 때문에 이런 반응이 당혹스러웠다. '설마 정말 그녀를 사랑한 게 아니라는 뜻일까? 지금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내가 의심하는 것이 괴로워서인가?' 이렇게 되자 미네르바는 오히려 자신의 오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굳혀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용당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 쪽인 것일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여자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니 할 수 없이 받아주는 척했던 것이거나. '아, 나도 모르게 그동안 트로웰의 경고를 너무 의식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쉽게 그를 의심하다니!' 일단 자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는 점에서 미네르바는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그는 곧 한결 풀어진 얼굴로 펠리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 알겠다.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겠다." '킥! 그럼 그렇지' 그의 속을 전혀 짐작하지 못한 펠리온은 단순히 자신의 의도가 먹혔다고 생각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 잠깐의 방만의 결과가 어떻게 되돌아오게 될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 * "슐츠 형도 4회전에 통과했다면서요? 축하해요!" 경기에서 이긴 이후 내내 방에서만 뒹굴거리던 나는 룸메이트의 승전보를 듣고 무척 반가운 표정으로 악수를 건넸다. 하지만 슐츠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얼굴을 붉히기만하고 좀처럼 다가오지 못했다. 평소였드면 거리낌 없이 마주잡았을 그였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슐츠 형, 뭐해요? 악수 안 해요?" "어어? 꼬, 꼭 해야 돼?" "무슨 소리에요? 나 팔 아파요. 얼른 잡아요!" 내가 찌푸린 표정으로 윽박지르자 그제야 그는 마지못한 듯이 투박한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왜 마주잡는 순간 움찔 떠는 걸까? 혹시 나한테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아무리 봐도 수상한 태도에 나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슐츠를 노려보았다. "왜, 왜 그렇게 봐?" "형, 혹시 나한테 숨기는 거 있어요? 며칠 전부터 안 어울리게시리 왜 그렇게 몸을 사려요?" "내가 뭘.." "지금도 시선 피하고 있잖아요. 전엔 안 그러더니 왜 갑자기 그래요?" 이런 현상은 슐츠만이 아니라 다비안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말이 없던 그는 어느 늘을 기점으로 아예 책에만 시선을 박고 고개초자 들지 않기 시작했다. 말을 걸어도 무시하거나 떨떠름하게 반응하기 일쑤였고, 형여나 시선이라도 마주칠세라 급히 몸을 움직이기에만 바빴다. 처음 며칠이야 경기 때문에 예민해져서 그런가 보다 싶었지만, 그것이 유독 나에게만 한정되는 반응이라는 걸 깨닫고 난 뒤로는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일부러 말을 더 시키거나 대답을 유도하는 질물만 건네는 등, 다방면으로 어떻게든 대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유를 물은 것은 정작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말을 해줘야 알죠. 그렇게 피하기만 한다고 해결이 돼요? 무슨 문제인지 말해봐요. 나도 알아야 고칠 거 아니네요." "그, 그게 아니라...... 으윽! 어이, 형님! 뭐라고 말좀 해봐요! 그대로 보고만 있을 거예요?" 다급한 슐츠의 외침에 호명당한 다비안은 어깨를 눈에 띄게 역직시키더니 곧 읽고 있던 책에 더욱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나도 할 말 없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모습니었다. "크악! 배신자! 설마 나 혼자 '이걸' 떠맡으라는 거예요?" "... 무슨 소신지 모르겠는데." "에이 XX!! 내가 이래서 귀족을 싫어한다니까! 혼자만 살지 말고 다 같이 죽자고요! 뭔 놈의 사나이가 배짱도 없어!" "시끄럽군. 책 읽는 중이니 방해하지 마라." "우~ 씨이~~!!" .... 대체 나와 간단한 대화를 하는 일이 언제부터 죽고 살고의 문제가 된 거지? 나는 혼자 흥분해서 씩씩거리는 슐추를 보며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자 내 시선을 눈치 챈 슐츠가 흠칫 하고 놀라더니 창백해진 얼굴로 갑자기 푸욱, 긴 한숨을 내뱉었다. "아, 젠장! 나도 더 이상 이 짓 못해먹겠다. 부탁이니 제발 너! 후드 좀 쓰고 다녀라." "네?" "새벽에 잠결에 일어났다가 널 보기라도 하면 얼마나 심장이 철렁한지 알아? 아님 그 긴 머리라도 자르든지! 아, 아니다. 크흑! 자르긴 좀 아깝고 끈 같은 걸로 묶고 다니든가 해라." "대체 무슨 엉뚱한 소리를..." "엉뚜웅? 너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겠냐?" 거의 윽박지르듯이 묻는 말에 나는 찝찝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내 얼굴 때문이에요?" "오오! 바로 그거야! 기특한 자식! 그래도 아주 생각 없이 사는 건 아니었구나!" 이 말에 내가 화를 낼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절박해 보이는 슐츠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들이 이런 식으로 나를 피하게 된 게 내가 후드를 벗기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던가. 단번에 상황파악을 한 나는 짧게 혀를 찼다. 이런 상황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내가 이제 무서울 정도다. "그렇게 의식 안 해도 나 남자 맞는데...." "누가 남자가 아니라서 이래? 게다가 웬만한 계집애들보다 예쁘게 생겨서 그런 말은 통하지도 않는다고! 암튼 내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도 제발 후드 좀 써라. 수면 부족 때문에 오늘 시합에서도 질 뻔했다면 믿겠냐?" "헤에, 알았다! 형... 아직 동정이죠?" "쿠, 쿨럭! 쿨럭!" 직격탄이었는지 슐츠는 부릅뜬 눈으로 연신 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그 모습을 불쌍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라, 맞춰나? 쯧쯧! 그러니까 평소에 애인을 사귀어둬야죠. 이런 데까지 와서 엉뚱한 대상한테 욕구불만을 풀려고 하면 안돼요. 그런 걸 두고 바로 변.." "으아악! 그마아안~~" 기겁을 한 슐츠는 괴성을 지르며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냥 조금 놀리려고 해본 말이었는데 어지간히 충격을 크게 받은 것 같았다. "흐음, 내가 조금 심했나? 저렇게 당황할 줄은 몰랐네." 휭 하니 사라져버린 그의 모습에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그때까지 묵묵히 책을 읽고 있던 다비안이 툭하니 한마디 내뱉었다. "...아니. 아마 찔려서 저럴 거다." "켁! 그거야말로 농담이죠?" "지금이 한창 때니까 어쩔 수 없지." "........." 되로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랄까. 나는 어쩐지 으스스해지는 팔을 문지르며 짐 속에서 후드를 찾아다 냉큼 뒤집어썼다. 이제 절대로 벗지 않을 테다! 내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다비안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상황에 꽤 익숙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 "쳇! 다비안 씨가 한번 내 입장이 되어 봐요. 웃음이 나오나, 그런데 읽고 계신 책은 뭐예요?" "음? 아아, 그냥 시간 때우기 용이랄까?" 멋쩍게 웃으면서 그가 들어 올린 것은 이전에도 본 적이 있던 정령 소환법 책이었다. 책장마다 손때가 가득 탄 것을 보아 이미 몇 번이고 정독해서 읽은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읽어도 소용없다고 했잖아요? 시간낭비밖에 안 된다구요."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왠지 미련을 버릴 수 없어서." "글쎄, 내 말이 틀림없다니까요. 그런 거 읽을 시간에 차라리 수련이나 해요. 5회전 상대가 나라는 거 잊었어요?" 그 말에 다비안은 잠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대꾸했다. "내 실력을 너무 만만히 보는 것 같군. 이래봬도 세 살 때부터 검을 든 몸이다." "수련 기간은 단지 숫자에 불과해요." "심하군. 4회전에서 너무 쉽게 이겼다고 기세가 등등해 있는거 아니냐? 내 비록 정령사가 꿈이긴 하지만, 단 한순간도 검술 훈련을 소흘히 한 적은 없었다." "나도 만만치 않다구요. 그런데 정령사는 왜 되고 싶어 했던 거예요?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 같은데." "그건 알 필요 없다." 하지만 딱딱한 말투와 달리 그의 볼에는 옅은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그것을 본 내가 더더욱 호기심을 느끼고 재촉하려는 찰나였다. ".... 굉장히 한가하군." 익숙한 목소리에 돌아본 나는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문앞에 기대어 서 있는 트로웰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이 있을 때는 늘 자연체로 왔던 그가 오늘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앗, 트....아, 아니. 가, 갑자기 어떻게?" 반가운 기분에 실수로 이름을 부를 뻔한 걸 간신히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나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하지만 웬지 평소보다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가 접근을 머뭇그리게 만들었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지금의 트로웰은 그저 지독한 무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이가 좋아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나는 갑자기 다시 무뚝뚝해진 그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나는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같이 확인하러 가야 할 일이 있어." "확인이라니?" "그건 날 따라와 보면 알아." 그 말에 무심코 따라서려던 나를 붙잡은 것은 바로 다비안이었다. 그는 우리 사이에 흐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무척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곧 날이 저물 거다. 이런 시각에 어딜 간다는 거냐?" "아, 다비안 씨, 그게요...." "게다가 이쪽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참가 선수 중에서도, 관람하러 온 귀족 중에서도 이런 얼굴은 본 적이 없어. 여긴 관계자외 출입 금지인 구역이다. 상관없는 녀석은 나가. 게다가 난 아직 이 녀석하고 할 얘기가 남아 있다. 중간에 끼어드는 것은 예의가 아닐 텐데?" 트로웰의 어려 보이는 외모 탓인지 그는 짐짓 어른 흉내를 내며 엄하게 훈계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트로웰의 대답에 그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할 얘기? 12살 때 엘프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진 것과 그 영향으로 정령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 아니면 정령을 소환하게 되면 엘프 마을에서 살게 해준다는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낸 것?" "헉! 어, 어떻게 그걸......!" "이미 다 알아버렸으니 더 할 말은 없겠군. 내 정체야 네가 상관할 바 아니고, 그럼 이제 데리고 가도 되겠지? 가자, 엘." "어? 으응." 불쌍하게도 다비안은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좀처럼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알려주지도 않은 과거가 적나라하게 끄집어내졌으니 굉장히 충격이 컸을 것이다. 설마 엘프에게 반해 정령사가 되려고 했던 것일 줄이야! 아마도 다비안의 부모는 처음부터 그에게 정령 소환이 무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런 조건을 걸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정보를 수집하려는 자세는 칭찬받을 만했다. '그런 애틋한 사연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리다니, 아무튼 악취미라니까.' 잠시 그를 향해 동정의 시선을 던진 나는 아무말 없이 앞서 걸어가고 있는 트로웰의 뒤를 우물쭈물하며 따라섰다. 하지만 다음 순간 갑자기 복도에서 터지는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나는 온몸의 피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고 말았다. "엄청난 특종이야! 살인 사건이 일어났어! 아나이스 드 라비타 영애가 죽었어! 그 루시엘 백작의 여동생이 시체로 발견됐다고!" "......!!" * * * 쿠웅! 심장이 몸에서 떨어질 때의 느낌이 이럴까? 이때까지 평화롭게 흐르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멈추었다. 숨도 쉴 수 없을 정도의 충격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루시엘의 여동생이 죽었다니!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던 나는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다급히 앞에 있던 트로웰의 옷깃을 붙잡았다. "트, 트로웰! 설마 이거....."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놀랄 필요 없잖아? 이제 때가 온 것뿐이야." "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던가? 하지만 이제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다. 미네르바가 계약자의 연인을 죽였다. 내가 알 고 있는 것이 맞는다면 그는 곧 폭주를 시작할 것이다. 어떻게든 심각해지기 전에 말려야 했댜. 소문이 이곳까지 펴졌다면 이미 사건이 터진 지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소리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머무는 건물 앞에 다가가자 이미 그 앞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들어 문에 접근하자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놀란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봐! 여긴 일반인은 출입 금지야! 어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 "비켜요! 급하니까!" 쿠웅! 콰앙! "흐익!" "허억!"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나는 단 한 번의 발길질로 굳게 잠겨 있던 문을 부수었다. 설마 작은 체구의 소년이 이런 괴력을 발휘할 줄은 몰랐는지 기사들은 물론 주변의 사람들까지 모두 그대로 경악했다. 그 틈을 타 나와 트로웰이 여유 있게 안으로 들어가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기사 중 1명이 기겁을 하고 소리쳤다. "앗! 안 돼! 모두 뭐하는 거얏! 어서 저 녀석들을 막아!" 하지만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문이 부수어진 틈을 타 몰려든 구경꾼들까지 죄다 우르르 안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순식간에 통제를 벗어난 군중을 단 몇 사람의 기사가 모두 막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결국 그들은 우리를 쫓아오기는커녕 사람들을 막기에만 급급했다. 웅성웅성. 술렁술렁. '저기인가?' 구경꾼은 바깥뿐만이 아니라 안에도 존재했다. 그들은 바로 사건이 일어난 건물 내에 있던 다른 귀족들이었다. 제법 사람이 많은 탓에 내가 그들에게 섞여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경위를 조사하러 온 기사들이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 나는 그중에서 익숙한 사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아나이스! 아나이스, 제발 눈을 떠보십시오! 제발! 눈을 떠요! 안돼, 안돼! 이럴 수는 .... 이럴 수는 없어!!" 축 늘어진 여인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하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펠리온이었다. 이전에 봤을 때는 그토록 오만해 보였던 남자가 지금은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눈물로 범벅이 되어 비통한 통곡을 흘리는 그를 보며 주위를 감싸고 있던 사람들은 연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며 쯧쯧 혀를 찼다. 그중 마음 약한 여인들은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혼절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내 관심은 이미 그들이 아닌 다른 쪽에 향해 있었다. '미네르바는? 미네르바는 어디 있지?' 한동안 정신없이 둘러보던 나는 잠시 후 펠리온의 앞에 서 있는 새하얀 존재를 발견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무심한 얼굴이었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나는 그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며 트로웰을 바라보니, 그는 내 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똑바로 미네르바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북적북적한 사람들과 끝없는 오열 속에서 오로지 그 두 존재만 고요한 모습이었다. 마치 그 사이에만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초가 1분 같은 시간이 흐른 후, 여전히 연인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울고 있던 펠리온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붉게 충혈 된 그의 눈동자는 정확히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미네르바를 향해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원망을 가득 담은 탁한 음성에 사람들은 모두 흠칫 놀라며 뒷걸음을 쳤다. 지금 펠리온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입가에 거품까지 물고 눈을 허옇게 뜨는 모습이 마치 광기에 사로잡힌 야수 같은 느낌이었다. 그 반면 미네르바는 한층 차분한 표정이 되어 입을 열었다. "그대가 바라는 결과를 이루었을 뿐이다." "큭!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이런 것을 바랐다고!" "그녀를 죽여 달라고 했던 건 그대였다. 왜 화를 내는 거지?" "크아아악!" 담담히 부탁받은 것을 했을 뿐이라고 대답하는 말에, 펠리온은 더더욱 이성을 잃고 비명을 질렀다. 그 모습에 조사를 나온 기사들이 서둘러 말리려 들었지만, 워낙 기세가 흉포했던 탓에 결국 다들 혀를 내두르며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의 말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멍청한 정령왕! 내가 설마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모두 다 핑계일 뿐이야! 제가 질투한 거지! 그래서 아나이스를 죽인 거지! 널 저주한다. 미네르바! 평생 저주할 테다!" "헉!" "......!" 웅성웅성. 감히 정령왕을 향해 저주라니! 그 엄청난 말에 사람들은 모두 할 말을 읽은 표정이 되었다. 그 속에서 오직 미네르바만이 침착하려고 애쓰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곧 이어지는 녀석의 말에 온전한 충격으로 변하고 말았다. "절대 용서 안 할 테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뿐인 나의 연인을 앗아간 너를 저주하겠다! 지옥 끝에 떨어져도 너를 원망하겠다!" "연...인?" "흥! 그래! 아나이스는 나의 연인이었어! 설마 내가 널 사랑한하고 한 말을 믿었나? 너 따윈 내 출세에 필요한 도구였을 뿐이야! 크하하하하~! 저주받을 정령왕! 결국 넌 너희들이 가장 하찮게 보는 인간에게 이용당했을 뿐이야! 기분이 어떠냐!" 그 말에 미네르바는 부릅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천천히 머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펠리온은 그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소리치기 시작했다. "하늘 아래 무서울 것이 없는 정령왕이여! 그 오만함에 취해 모든 자가 다 너를 사랑하는 줄 알았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었어! 내 영혼은 이미 다른 여인의 것이었다고! 나의 반려를 제가 죽인거다!" "그만.." "흥! 그만이라고? 누구 마음대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말해주지! 저주한다, 미네르바! 저주한다! 죽어버려! 너도 소멸해버리란 말이야! 나의 아나이스를 돌려줘! 나의 생명을 돌려줘! 그녀를 다시 되돌리라고!" "그만 해!!" 결국 지켜보다 못한 내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녀석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둔탁한 타격음이 울림과 동시에 녀석의 몸은 저만치 날아가 쓰러졌다. 퍼억! 쿠웅! "커억!" "꺄아악!" 생각보다 힘을 많이 준 탓인지 녀석은 단 한 방에 볼품없이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지만, 나는 그들의 반응에 일일이 신결 쓸 겨를이 없었다. 두 팔을 두르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이 심상치 앖아 보였기 때문이다. "이, 이봐! 넌 대체 누구야? 방금 일은......" "귀족이 아닌 자는 들어올 수가 ..... 경비들은 대체...." "시끄러! 다들 비켜! 미네르바! 미네르바, 정신 차려! 괜찮아?" 하지만 아무리 소리쳐도 미네르바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그의 몸에서 희미한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얼굴을 굳혔다. 원래 바람의 정령왕이긴 하지만, 가만히 있을 때도 그 영향이 주변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은 확실하게 그의 몸 주위로 미풍이 불고 있었다.그의 발끝을 중심으로 시작되는 바람은 회오리처럼 그의 몸을 서서히 감싸고 오르더니 이윽고 머리끝까지 타고 올라갔다. 그 와중에 바람의 강도가 점점 세지더니 어느덧 미네르바의 형상도 그 속에 집어 삼켜지기 시작했다. 이건 설마.........! - 위험해!! "...!" 바로 그때, 나는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내 몸을 감싸는 강한 기운을 느꼈고, 그와 동시에 내 바로 앞에서 엄청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쿠콰가가가가가가가광!! "크아아악!" "아아아악!" "........!" 콰아아아앙! 콰가가가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귀가 얼얼할 정도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나는 어떤 커다란 힘에 밀려나 속절없이 뒤로 쓰러졌고, 그 와중에 함께 섞여든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으윽, 대체 무슨....일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 후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나는 그대로 입을 멍하게 벌릴 수밖에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온 사방에 잘게 부서진 돌 더미들과 사람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어떻게 된 거야.......?"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이렇게 멀쩡한 걸까? 그러고 보니 폭발 직전에 나를 감싸던 힘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듯도 하다. - 이제 정신이 들었냐? "...........!" 잠시 멍하게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옆을 바라보았다. 한심하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차며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엘뤼엔이었다. "아...아버지.........?" 하지만 내가 그에 대한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가 먼저 이어졌다. - 멍청한 녀석! 폭주 직전의 정령왕에게 다가가면 어쩌라는 거냐! 네 목숨은 열개라고 되냐? 내가 손쓰는게 조금만 늦었다면 너도 저들과 똑같은 꼴이 됐을 거다. "설마 아버지가..... 구해준 거야?" -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했겠냐? 이럴 땐 좀 알아서 도움 요청을 해라. 넌 계약한 정령왕을 폼으로 달고 사냐? 그 뒤로도 몇 차례 그의 핀잔이 이어졌지만 나는 거의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실실 웃기만 했다. 부탁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나를 구해줬다는 사실이 날아갈 듯이 기뻤다. 마치 미래의 엘뤼엔을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었다. - 너 내 말은 듣고 있는 거냐? "응? 헤헤, 뭐라고?" - ..휴우. 됐다. 말을 말자. 그는 포기했다는 듯이 한 손으로 턱 이마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시간도 잠시였을 뿐, 나는 다시금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미네르바와 트로웰은?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궁금하냐? "당연하지! 아까 폭주 직전이었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미네르바는 어떻게 된 거야? 응?" 내 질문에 그는 간단히 손가락을 위로 향해 보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모습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올릴 나는 그대로 뒷목이 뻣뻣해질 정도의 충격을 느끼고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하늘이....새카매.........." 날이 저물어갈 때긴 하지만 아직 밤이 된 건 아니었는데, 하늘이 온통 새깜맸다. 그런데도 그 아래 펼쳐지는 환경은 여전히 밝아, 위아래 부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를 더욱 경악하게 한 것은 땅과 하늘의 가운데 지점에서 둥실 떠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이었다. 정신을 잃은 듯 눈을 감고 있는 그의 거의 투명할 정도로 모습이 흐려져 있는 상태였다. 한참 동안 그를 찬찬히 살펴보던 나는 곧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바람들이 하늘로 올라가 시꺼먼 구름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하늘이 온통 까매진 이유가 미네르바 때문이었던 것이다. "저, 저게 대체......." - 폭주해버린 거다. 조금 후면 사방이 전부 녀석이 행사하는 기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게 되겠군. "그,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 그걸 몰라서 묻냐? 낙엽위에 바람이 강하게 불면 어떻게 돼든? "날아가지" - 마찬가지다. 저 하늘이 덮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이 날아가겠지. 단, 태풍보다 위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전부 산산조각 나겠지만. "......!" 비교적 덤덤한 설명이었지만 그 말의 의미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하늘을 덮은 시커먼 구름은 언뜻 보기에도 공국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 제국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의 말대로 이 범위 내의 모든 것이 미네르바의 폭주에 휩싸인다면, 결국 한 제국 전체가 그 자리에서 소멸한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으엑! 그럼 이번 검술대회는 이대로 끝나는 거야? 아,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어서 미네르바를 말려야..... 그런데 트로웰은 어디 갔어?" 하지만 나는 굳이 그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다. 완전히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 속에서 무언가를 짊어지고 걸어 나오는 트로웰을 발견한 것이다. "트로웰!" 굳은 표정은 여전했지만 그의 분위기는 이전보다 오히려 안정되어 있었다. 그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는 들고 있던 '무언가'를 내 앞에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쿠웅! ".......!" 놀랍게도 그가 던진 것은 기절한 사람이었다. 붉은 피와 상처들로 뒤범벅되어 있는 비참한 몰골이었지만 나는 그가 누군지 확실하게 알아보았다. 바로 미네르바의 계약자인 펠리온이었다. 폭발에 휘말려 들어 죽을 수 있는 것을 그가 굳이 살려가지고 나온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이런 행동을 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대로 곱게 죽이진 않는다는 뜻이겠지. 이거 어째 살벌한 걸....' 바짝 긴장한 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는 순간이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트로웰의 입에서 낮고 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약속한 기간이 지났어. 엘, 미안하지만 이번 거래는 내가 이겼어." * * * "..........!" 아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던가? 굉장히 큰 충격을 받는 게 정상인데도 나는 오히려 머릿속이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미네르바의 폭주를 보는 순간부터 이미 은연중에 나의 실패를 인정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조금 허탈한 심정에 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기절한 펠리온을 노려보았다. 지금까지의 내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든 장본인이니만큼 절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때 더 패둘 걸 그랬나........?' 이미 이렇게 될 거라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야속한 심정이 드는 것은 여전했다. 어차피 벌어질 일이란 생각에 조금 안이하게 대처했던 게 아닌가 후회스럽기도 했다. 그 순간, 조금 서늘한 느낌이 목 언저리에 와 닿았다. 트로웰이 한 손으로 내 목을 잡았던 것이다. 그다지 힘을 준 상태가 아니었기에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지만 나는 의식적으로 몸을 살짝 움츠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지금 이 행동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나를 향해 트로웰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래의 조건 기억하겠지? 이미 한 번의 기회를 버렸으니,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날 원망하지 말길 바랄게. 그래도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너만은 고통 없이 보내줄게." "으응. 고, 고마워..........." 얼떨결에 대답하면서도 나는 정말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나저나 여기서 죽으면 다시 미래로 돌아가지 못할 텐데 어쩌지? 무작정 다른 누군가가 찾으러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나? 내가 그렇게 속으로 끙끙거리는 순간이었다. - 그 손 놔롸. 트로웰. 싸늘한 목소리로 말한 것은 다름 아닌 엘뤼엔이었다. 경고조가 다분한 말투에 내 목을 잡고 있던 트로웰의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살짝 입술을 깨문 그는 조금 원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이건 내 일이야. 상관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 마음이 바뀌었다. 계약자의 죽음을 넋 놓고 지켜보는 것도 체면이 아니지. 손을 놓지 않는다면 내게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 철저히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 "큭! 이제 와서 이런 법이 어디있어, 엘퀴네스!" 살기 가득한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슬퍼 보였다. 하지만 엘뤼엔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찌푸린 표정으로 차갑게 일갈했다. - 너답지 않게 멍청한 짓 그만두고 정신차려, 트로웰! 일의 우선 순위를 판단하지 못하나? 지금은 미네르바의 폭주를 멈추는게 먼저다. "..........!" 그러자 트로웰은 흠칫 얼굴을 굳히더니 황급히 미네르바가 떠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는 아까보다 형체가 더욱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그 반면에 하늘을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의 양은 점점 더 불어나갔다. 고오오오! 강하게 휘몰아치는 바람은 온 대지를 삼킬 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주위를 유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망설이는 표정을 짓는 그에게 엘뤼엔은 완전히 쐐기를 박는 말을 내뱉었다. - 생각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은 너도 알겠지?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미네르바는 완전히 미쳐버릴 거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막아라. 아니면 내가 저 녀석을 소멸시켤 테니까. 기회는 지금뿐이다. "..........!!" '소멸'이라는 말에 트로웰은 입술을 꽉 깨물더니 잡고 있던 내 목에서 힘없이 손을 떼어냈다. 돌아서기 전에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지만,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미네르바를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잠깐 마주쳤을 때 본, 죄책감과 혼란으로 가득한 그의 눈동자를 죽이겠다고 결심한 것도 본심은 아니었으리라. - 미네르바! 깨어나! 이대로 너를 포기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가까이 다가서자마자 그가 제일 먼저 한 것은 몸을 감싸고 있던 마나를 풀어내고 자연체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순수한 정령체가 된 그는 즉시 자신의 기운을 발산하여 폭주하고 있던 미네르바의 힘을 강제로 억누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튀어나온 이프리트 역시 같은 방법으로 트로웰의 일을 거들었다. - 흐익! 이 녀석 왜 이래? 결국 폭주한 거냐? - 안 돼! 생각보다 폭주가 너무 진행됐어. 이프리트, 좀 더 거들어! - 우씨!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렇게 두 정령왕이 혼신을 다해 폭주를 잠재우는 동안에도 엘뤼엔은 묵묵히 그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이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잠시 내게 시선을 주곤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 목은 괜찮은 거냐? "응? 아아, 멀쩡해. 애초에 세게 잡은 것도 아니었는걸, 그런데 아버지는 저거 말리러 안 가도 돼? 둘만으론 힘들어 보이는데." - 흥! 막지 못할 시엔 소렴시키면 그만이야. 난 미치려고 작정한 놈까지 말려줄 만큼 너그러운 성격이 아니다. "우우! 너무 냉정한 거 아니야?'" 하지만 나의 투덜거림에도 그는 여전히 자리에서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포기한 채 주위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폭발이 일어난 건물은 완전히 무너졌지만, 선수들의 대기실이 있던 다른 쪽 건물과 검술 시합이 열리던 경기장은 비교적 멀쩡한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일이 벌어진 시각이 마침 4회전의 시합이 막 끝나던 참이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엄청난 소음에 놀라서 뛰쳐나왔다가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걸레처럼 늘어진 시체들을 보고 하나같이 퍼렇게 질린 얼굴이 되었다. 나는 그중에서 나와 같은 방을 쓰는 슐츠와 다비안 씨를 발견하고 얼른 그들에게 뛰어갔다. "슐츠 형! 다비안 씨!" "엘! 무사했구나! 정말 다행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왜 이런 일이.....!" 불안한 표정으로 묻는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하늘 위에 떡하니 떠 있는 미네르바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갑자기 컴컴해진 하늘과 엄청난 바람이 휘몰아치는 것을 보며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바람의 정령와 미네르바가 폭주했어요! 어서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혹시 텔레포트 스크롤 같은 거 가지고 있는거 없어요? 가능한 제국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뭐? 정령왕의 폭주?"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자세하게 설명할 시간 없어요! 조금 후면 폭주가 더 진행될지 몰라요! 그럼 완전히 끝이라구요!" 그러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내 말을 듣고 모두 경악한 얼굴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벌어지는 현상이 워낙 심상치 않았던 탓인지 그 말에 반박하거나 의물을 품는 자는 없었다. "이거 큰일이군! 정령왕이 폭주하다니!" "레라프 백작이라는 사람이 그의 계약자라고 하지 않았어? 그 사람은 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막지 않은 거야?"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아쉽게도 그들 중에 탈출을 위한 스크롤을 가진 이는 단 한 병도 없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무리 중에서 황급히 누군가가 뛰어나와 내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아, 아나이스는? 내 여동생은 어떻게 된 거지? 제발 말해다오!" ".........!" 잠깐 당황하던 나는 곧 그가 루시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아마도 경기장에서 시합을 관람하느라 우연히 그 혼자만 화를 피하게 된 모양이었다. 평소의 오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창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보니 지난 시간 가져왔던 악감정이 약간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안됐지만 그녀는 이미 폭주가 시작되기 전에 죽었어. 소식을 전혀 듣지 못했던 모양이군." "그, 그게 무슨......?" "미네르바가 펠리온이 배신한 사실을 알았거든." ".........!" 그제야 녀석은 모든 정황을 깨달은 듯 힘없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백치라도 된 듯이 멍해져 있는 모습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자업자득이란 생각에 나는 애써 동정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쿠우웅! "헉!" 그때 갑자기 엄청난 광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두 정령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네르바의 폭주가 더욱 진행되었던 것이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는 물론 나무조차 뿌리째 뽑혀 나갈 정도의 강렬한 바람이었다. 당연히 그 안에 휘말린 사람들도 잿빛 폭풍에 빨려 들어 마치 종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쿠오오오오! "크, 크아아악! 사, 사람 살려!" "아아악!" 눈앞에서 거대한 회오리가 일어나 꿈틀거리는 모습은 마치 지구 종말 영화의 한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제아무리 사람들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순식간에 닥친 자연의 힘은 그들의 목숨을 맥없이 앗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 큰 바람을 실제로 보는 것은 전생을 통틀어 난생 처음이었다. 지나가는 곳마다 성한 곳 없는 그 엄청난 파괴력에, 나는 나도 모르게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게 바로 미네르바의 힘인가!' 평소의 차분한 인상 탓인지 지금 이렇게 광폭하게 변한 그는 마치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만 같았다. 이윽고 나의 코앞까지 다가온 잿빛 무법자는 근처에 있던 슐츠와 다비안까지 집어 삼키려 했다. "으, 으아아아아! 끄, 끌려들어간다아아!" "크윽! 버틸 수가........!" "아, 안 돼!!"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두 사람의 팔을 붙잡았다. 그래봤자 겨우 인간의 힘으로 버티기엔 역부족이었지만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기에 행할 수 있던 일이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나의 온몸을 마구 휘저으려는 순간, 나는 버릇처럼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불렀다. '우아악! 아버지~!' 그러자 나직하게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짓말 처럼 주위에 있던 바람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날려갈 것을 대비해 잔뜩 온몸을 웅크리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것은 나와 함께 있던 슐츠와 다비안,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 뭐지?" "바람이....." 놀랍게도 그렇게 살벌하게 날뛰던 바람이 한순간에 진정되어 있었다. 그것을 느낀 내가 고개를 든 순간 가장 먼저 본 것은 하늘 끝까지 치솟은 물줄기가 회오리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마치 커튼처럼 둘러쳐진 물보라는 날뛰는 바람을 그 안에 가두어 더 이상의 행보를 하지 못하도록 가두고 있었다. "헉! 어떻게 저럴 수가.....!" "세상에.........!" 운 좋게 파장 밖에서 무사했던 사람은 물론, 막 휘말릴 뻔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얼떨떨한 얼굴로 이 기적 같은 현상에 감탄했다. 하지만 모두 넋 놓고 구경하느라 갑자기 등장한 푸른색 머리의 남자에겐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는 물론 바람을 막은 장본인, 엘뤼엔이었다. 자연체였던 그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그저 안도한 얼굴로 감사의 인사부터 건넸다. * * * "헤에, 죽을 뻔했다. 고마워, 아버지. 덕분에 살았어." 그러자 자신이 만든 물의 장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는 곧 나를 노려보며 짜증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정말 가지가지로 피곤하게 만드는군, 넌 나한테 부탁하면 다 되는 줄 알고 있는 거 아니냐?" "헤헤! 그래도 일단은 막았잖아." "태평한 녀석. 이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다. 미네르바가 멈추기 전까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거야." 그 말대로, 바람의 기운은 가둬진 후에도 여전히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엘뤼엔의 표정으로 보아, 계속해서 꾸준히 힘으로 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미네르바와 씨름을 벌이고 있는 두 정령왕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트로웰이 그를 진정 시킬 수 있기만을 바랄 뿐. 그러자 옆에서 엘뤼엔의 눈치를 보고 있던 슐츠와 다비안이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건네 왔다. "어이, 엘! 저 사람은 누구야?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호, 혹시 저분이 방금 전의 일을 막은 거냐" "예? 아, 그래요......" 호기심에 가득한 그들의 얼굴에 나는 잠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했다.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에는 이미 그가 선보인 능력이 너무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체를 솔직하게 알려줄 수도 없으니 남감한 심정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잠시 망설이고 있던 때였다. "우에에에~~ 자기, 너무해에~~~ 남의 힘을 이렇게 막 뽑아 써도 되는거야아?" "엥?" 발밑에서 묘하게 늘어진, 닭살스러운 말이 들려와 나는 화들짝 놀라 아래를 바라보았다가 더더욱 기겁하고 말았다.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건지, 웬 새파란 머리카락의 남자가 문어처럼 흐물거리는 몸으로 엘뤼엔의 다리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엘뤼엔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가둬둔 태풍만 노려보고 있을뿐이었다. 이윽고 살벌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공국이 날아가는 건 너도 바라는 일이 아닐 텐데? 닥치고 얌전히 협조해라." "후후~~ 터푸한 자기, 멋져... 라고 말하고 싶지만, 나 이러다 죽을 것 같은데에?" "그럼 죽어." "후후~~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그치만 나 진짜 농담 아닌데에~?" 장난스러운 말투치곤 정말 괴로운지 남자의 안색은 무척이나 창백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쯧! 혀를 찬 엘뤼엔은 잠시 후 약간 망설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 미안하지만 네 힘도 써야겠다." "응? 내 힘?" "네 마나 말이다. 중간계에선 계약자들의 마나를 끌어 쓰는 편이 강한 힘을 발휘하기에는 더 용이하거든. 그런데 아무래도 저 약골 도마뱀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군." "...!" 그제야 나는 바닥에 거의 쓰러지다시피 누워 있는 남자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탈진해서 기진맥진한 얼굴로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여어~ 네가 엘퀴네스를 소환해다는 그 인간이구나아? 이렇게 기막힌 미인일 줄은 몰랐네. 만나서 반가워어~" 그 말에 내 뒤에 서 있던 두사람, 슐츠와 다비안이 급히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나대로 다른 것에 놀라느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 만날 드래곤이라면 내가 알기론 딱 하나뿐이었던 것이다. "설마.... 당신이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 "정답~ 날 만나러 왔다지이? 지금 여기서 날 살려주면 원하는 대답을 뭐든지 해줄게~~ 그러니까 제발 허락해줘!" 그 대답에 나는 잠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라미아스라면 당연히 60대의 세피온 공작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젊은 청년으로 나타날 줄이야(그것도 상당한 푼수의)! 정말 드래곤이 맞는 걸까? 아무리 봐도 위엄이라곤 없어 보이는 모습에, 불신 어린 눈으로 그를 살펴본 나는 별수 없이 엘뤼엔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곧 한 치의 배려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큭!" 온몸의 진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충격에 나는 살짝 신음을 흘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끌어다 쓸 때는 몰랐는데, 막상 입장이 뒤바뀌고 보니 기절하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언제고 라피스의 마나를 이용해 몇 십 마리의 시큐엘들을 소환해놓고 한꺼번에 역소환시키려고 했던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야 그저 단순한 장난이었지만, 녀석한테는 정말로 목숨을 위협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에고고, 만나면 사과할 일이 하나 더 늘었군......' 나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신 뒤 몸을 안정시키기 위해 길게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힘든 것은 잠시였을 뿐, 내 몸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나가는 마나에 빠른 속도로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에 비해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여전히 힘에 겨워 헐떡이고 있는 상태였다. "우어어~ 엘퀴네스~ 다른 사람의 마나도 같이 쓰는 거 맞아? 저 아이는 왜 저렇게 멀쩡해?" "...너보다 마나가 풍부하거든." "뭐? 말도 안돼! 인간이 드래곤인 나보다 마나가 더 풍부하다고?" "척 보면 알텐데? 더 이상 다른 대답이 필요한가? 집중에 방해되니까 말 시키지 마라." 싸늘한 대답에 라미아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눈으로는 연신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훑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그의 눈동자가 더 이상 벌어질 수 없을만큼 크게 떠졌다. "으엑! 정말이잖아? 마법사도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이런 마나가 인간에게? 저, 정말 인간인 거 맞아?" 뭐, 1년 만에 소드마스터가 된 전적도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그의 경악에 찬 시선을 모른 척 무시한 나는, 그제야 아직 슐츠와 다비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리고 그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던 두 사람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두 사람 다 왜 그래요?"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다 죽어가는 듯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저기... 그, 그게 말이지..... 방금 저분이 엘퀴네스라고....." "아! 드, 들었어요?" 하긴 그렇게 대놓고 떠들었는데 안 들릴 리가 없겠지. 그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몇몇 사람들도 대화를 들은 듯 경악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그중에는 루시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자, 제일 먼저 다비안이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건네 왔다. "소, 솔직히 말해다오, 엘. 너 설마... 정령사였던 거냐? 그, 그리고 저기 있는 저분이 설마 그....."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맞아요. 제가 정령사인 것도 맞구요." "헉! 그, 그런데 왜 이제껏....." 정령사를 동경하고 있던 사람답게 다비안은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기겁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일부러 숨긴 것보단... 딱히 말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에요. 검술대회에 참가하러 와서 정령사라고 떠벌리는 것도 우습잖아요." "아니, 그... 그래도 정령왕을 소환한... 건... 정말 대단한...... 게다가 엘퀴네스님이라면 이제껏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소환된 전례가......" "그야 그렇지만... 뭐, 유명세를 타려고 소환한 것도 아닌데 굳이 알릴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엘퀴네스는 미네르바와 달라서 시끄러운 걸 무척 싫어한다고요. 알려지는 즉시 저랑 계약 파기하고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을 거예요." 그 말에 엘뤼엔은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흠칫 몸을 떨었지만, 정작 그들이 우려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퍼런 드래곤 라미아스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아주 정확하게 엘퀴네스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데? 벌써 5천 년 가까이 알고 지낸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군! 대체 저런 재밌는 걸 언제 찾아낸 거야, 엘퀴네스?" "...닥쳐라, 도마뱀." "아잉~ 자기, 화내면 무섭잖아~~"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마음 놓고 웃을 수 없었다. 열 받은 엘뤼엔이 나에게서 가져가던 마나를 일시 중지하고 다시 라미아스의 마나만 끌어다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덕분에 간신히 혈색이 돌아왔던 그의 얼굴이 다시금 새파랗게 질려가기 싲가했다. "우에에에~~ 내, 내가 잘못했어, 엘퀴네스! 용서해줘어~~" "왜? 마나가 남아돌아서 여유 부린 것 아니었나? 사양하지 않고 마음껏 써주지." "나, 날 정말 죽일 셈이야?" "물론이다." "히익!" 쯧쯧! 그러게 누가 엘뤼엔의 성질을 건드리래? 비교적 코믹한 상황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상황도 잊고 슬쩍 미소를 내비쳤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 눈엔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장면이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트로웰.....' 바람의 안정으로 비교적 평화를 되찾은 주위와 달리, 이 시각에도 그는 어떻게든 미네르바의 폭주를 잠재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미네르바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애잔한 표정을 드리워져 있었다.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던 탓에 그가 중얼거리는 목소리 또한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려왔다. -제발 정신차려, 미네르바! 부탁이야, 제발......! 폭주란 결국 이성을 잃고 자해하는 행위다. 사랑하는 자의 이런 모습을 온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처음 나직하게 시작했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거칠어져갔다. -몇 번이고 아니라고 말했잖아! 배신당할 거라고 말했잖아! 이제 와서 충격 받는 걸 내가 용납할 것 같아? 눈을 떠, 미네르바! 도망치는 건 용서하지 않겠어! -어, 어이, 트로웰! 달래도 모자를 판에 그렇게 윽박지르면.......! 그의 격한 반응에 옆에서 돕던 이프리트가 일순 당혹해했으나 트로웰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내가 알고 있던 미네르바는 이렇게 약하지 않았어! 고작 인간의 배신 따위에 자신을 내버릴 정도로 한심하지 않았다고! 원래대로 돌아와! 바람이 정령왕으로 되돌아오란 말이야!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같은 말투였지만 그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 일그러져 있었다. 이윽고 그의 황금색 눈동자에서 또르륵 맑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거의 투명해져 있는 미네르바를 끌어안으며 옅은 흐느낌을 내뱉었다. -너는 바람이잖아, 미네르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웠던 바람이잖아...... 고작 이 정도에 무너지는 너를 보려고... 지금까지 바라만 보고 있었던 게 아니었는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고백에서 나는 트로웰이 얼마나 미네르바를 사랑하고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이 뒤로도 4천 년이 넘도록 한결같이 오직 한 존재만을 바라보고 살 것을 알기에 더욱 감탄이 흘렀다. 미네르바가 소멸을 위해 떠나던 날도 트로웰은 지금처럼 처연하게 울었었다. 그가 내세의 길을 걷더라도 말없이 기다린다고 했던가, 아마 그라면 영원히 기다리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지금 이 모습이 슬프게만 보이지 않는 건, 결국 둘의 마음이 서로에게 향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간단하게 이루어진 것 같았던 그 과정이 사실은 이렇게 한쪽의 끊임없는 인내력에서 이루어진 승리였다. '잘됐다, 트로웰. 지금은 페르데스와 행복하게 지내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순간이었다. "...어?" 놀랍게도 미네르바의 몸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던 흉포한 기운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그와 함께 흐릿해졌던 그의 몸 또한 점차 원래대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미네르바의 폭주가 멈췄다!' 그것을 느낀 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던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물론, 내 주위에 있던 인간들까지 한결 정돈된 기운을 느끼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모두가 그렇게 안심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했던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쿠웅! 콰아아아아아아앙!! "안 돼! 트로웰!!" * * * 시끄러운 소리에 얼핏 잠이 깼다. 왠지 생각이라는 것을 해보는 것이 아주 오랜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의식과 달리 이상하게도 온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좁고 답답한 공간 안에 억지로 구겨져 갇혀져 있는 기분이다. 언제부터 잠들어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전에 절박했던 순간만큼은 방금 전에 겪었던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대한 폭발과 강렬한 바람, 흩어지는 모래의 잔재들. 그리고...... <지금 뭘 하는 거야! 난 괜찮으니까 너나 어서 피해!> 나를 향해 외쳤던 그리운 녀석의 목소리. '..그립다고?' 나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렸던 말에 나는 또다시 스스로 의문에 빠졌다. 그립다는 표현이 아무렇지 않게 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뜻. 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잠들어 있었던 걸까? '그리고 여긴 대체 어디지?' 몸을 움직이는 못하는 상황은 생각보다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불쾌했다. 원래 낯선 장소에서도 곧잘 머무는 성격이지만, 내가 원해서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게다가 당시의 정황에 따르면 나는 지금 죽었어야 할 몸이다. 그때의 폭발을 온몸으로 막지 않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어차피 치료를 해도 살기 힘들 만큼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그렇다면 여긴 설마 명계인가? '흐음. 명계가 이렇게 좁고 답답한 공간이라곤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곧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바람에 머리가 단단히 굳어버린 모양이다. 이대로 방금 전처럼 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아... 그래도 그 녀석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쓸데없는 염려를 할까 봐 다친 것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안그래도 정이 많은 녀석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것을 떠올리고 나자 나는 좀처럼 쉽게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흠,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오래 쉰 것도 같겠다. 이제 슬슬 정신을 차려볼까?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가 미움 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내가 있는 곳이 어딘지는 모른다. 물론 그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난 어느 곳에 있더라도 녀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나는 조용히 머릿속을 비우고 의식을 집중했다. 애초에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주 가까이에서 녀석의 기운이 느껴졌다. '...어? 가까이에 있다?' 잘못 짚은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맑고 청결하며 정순한 영혼의 느낌은 오직 녀석에게서만 풍기는 것이었으니까, 설마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이야! 기대하지도 않았던 보물을 건진 기분에 나는 싱긋 미소 지었다. 문제는 아직 녀석이 내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나를 감싸고 있는 이 좁디좁은 공간이 그의 감각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 능력으로는 혼자서 이곳을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가 나를 눈치 채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바보 같긴! 빨리 찾아내지 않고 뭘 하고 있는 거야?" 괜스레 답답한 마음에 애꿎은 녀석에게 화를 내본다. 그래봤자 이 울림이 밖으로 전달되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내가 이러한데 그의 심정은 오죽할까. 아마도 마지막 순간에 내 멋대로 한 행동 때문에 지금까지 꽁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라피스!> 폭발의 순간 보았던, 크게 부릅뜬 푸른 색 눈동자, 물거품처럼 흐트러진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이 떠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고 화내는 것을 기대해보기는 그때가 난생 처음이었다. 그래서 당장 죽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나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이곳에서 갇혀 있는 시간도 즐겁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 생각을 알면 녀석은 당연히 화부터 먼저 내겠지만. 나는 키득거리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여기에 있어, 엘. 바로 네 근처에......" [정령왕 엘퀴네스] 12-1. 자각 (1) ※ 소제목 바뀌었습니다 (내용중복 주의) ※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전에도 이것과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니, 앞으로 먼 훗날에 벌어질 일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악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놓였던 페르데스와, 그를 보호하기 위해 끌어안았던 트로웰. 그때의 망설임 없던 행동이 지금 또다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결코 이전과 같은 상황이 될 순 없었다. 지금 폭발의 주범은 바로 미네르바-그로부터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끌어안으면 끌어안을수록, 그것은 보호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위협할 뿐인 칼날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안 돼!”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억세게 몰아치는 바람을 가르며 나는 필사적으로 앞을 향해 내달렸다. 나로선 역부족이라거나 이미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이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의식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힘껏 도약한 내 몸이 막 섬광에 휩싸인 트로웰에게 닿으려는 찰나였다. “이 멍청한 자식!” “으앗!” 갑자기 뒤에서 강하게 잡아끄는 힘이 느껴진다 싶더니, 어느새 내 몸은 폭발의 사정권에서 한참이나 밀려나 있었다.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세차게 구른 덕분에 나는 사태를 파악할 정신도 없이 연신 터져 나오는 기침을 뱉어냈다. “쿠, 쿨럭! 쿨럭! 큭…아야야…” 간신히 진정이 되었다 싶자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구르면서 돌부리에 긁힌 건지 아니면 사납게 할퀴는 바람에 베인 것인지는 모르지만, 온 몸이 자잘한 생채기로 가득해 있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밀쳐지기 전 사납게 울려 퍼지던 엘뤼엔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팔자 좋게 그를 원망할 처지는 아니었다. 아마 그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여지없이 폭발에 휘말렸으리라. ‘뭐가 어떻게 된 거지?’ 하지만 나는 다음 상황을 둘러볼 여유도 없이 곧바로 누군가에게 답싹 들려져(?) 어디론가 이동되기 시작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내린 나는 그가 블루 드래곤인 라미아스라는 것을 깨닫고 더욱 질겁해서 소리쳤다. “라미아스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여어~ 놀랬다면 미안! 지금은 급하니까 나중에 말하자고~!” 경직된 얼굴로 재빨리 달리는 모습은 방금 전까지 엘뤼엔에게 마나를 공급하며 허덕이던 때와는 전혀 달랐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고 맞은편의 상황을 보려고 노력했지만, 거센 바람과 자욱이 끼어있는 안개에 막혀 도무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엘뤼엔, 나의 아버지가 저 안에 속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나를 구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아버지…!’ 심장이 서늘하게 식어가는 기분이었다. 나 역시 그 속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라미아스가 단단히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쿠구구구궁! 촤아아악! 잠시 후 마른 바닥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르더니 폭발이 터진 공간을 완벽히 감싸 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꼭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커튼이 둘러쳐 지는 것 같았다. 말 그대로 물의 장막 이었다. 마치 이쪽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의 경계라는 듯이. 그러고 나자 방금 전까지 험악하게 몰아치던 바람도, 들썩이던 땅도, 자욱한 열기와 안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감춰져 버렸다. 물로 된 장벽, 그 경계 밖의 세상은 태풍이 지나고 난 후처럼 조용하고 한산했다. “휴우, 죽을 뻔 했네.” 그제야 라미아스는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내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다 아주 용감한 꼬맹인데? 어떻게 저런 폭발에 뛰어들 생각을 다 한 거야? 엘퀴네스가 붙잡지 않았으면 그 연약한 몸이 벌써 갈기갈기 찢어졌을 거라고.” 그 말처럼 사방에는 미처 폭발을 피하지 못한 사람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온 몸이 칼로 난도질당한 것처럼 너덜너덜 해진 채로, 눈과 코, 입과 귀에서 시꺼먼 피를 흘리고 있었다. 비릿한 핏자국과 떨어진 살점들을 본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여전히 굳건한 물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라미아스는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런 눈 할 것 없어. 제 아무리 심한 폭발이래도 엘퀴네스나 저 안에 들어가 있는 정령왕들에겐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못할 테니까. 폭주는 무사히 수습될 거야.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 뿐이지.” “그걸…어떻게 장담하죠?” 단순한 폭발이 아닌 미네르바가 일으킨 기운이었다. 인간세상에서 빚어진 일이라 다소 위력은 약한 상태였겠지만, 그것은 다른 정령왕들 역시 마찬가지. 최악의 경우 소멸을 각오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미아스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미네르바는 본래가 방어적 성향이 강한 정령왕이고, 다른 3명의 정령왕을 물리칠 만큼 폭주단계가 진행된 것도 아니야. 게다가 엘퀴네스의 힘은 네 상상보다 훨씬 대단하다고. 본래라면 이 공국 전체가 날아가도 이상할 게 없는 폭발인데 그가 자신의 힘으로 가둬놓은 거야. 그가 제압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반드시 그렇게 될 거다. 정말 대단한 존재야, 엘퀴네스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라미아스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너도 대단하지.” “…내가요? 난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대단해. 그가 자발적으로 폭발을 수습하게 만들도록 한 건 너야. 난 태어나서 엘퀴네스가 그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니까? 하기야 최초로 물의 정령왕을 소환한 인간이니 대단히 특별할거라곤 생각했지만.” “끄응. 그런 걸 노린 게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막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만…” 내가 미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널 탓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난 재밌는 걸 발견해서 기쁘니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공국의 내 저택에 초대했을 텐데 아쉽군. 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엘입니다.” “호오~ 엘퀴네스의 앞 글자와 같군. 그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라고 해서 꽤 기대하고 있긴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인 걸? 아직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어떻게 돼?” “18세 이긴 하지만…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대답한 그는 뭔가 깊은 생각에 빠진 듯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사람처럼 짝-하고 손뼉을 치더니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아~ 어차피 폭주가 진정되려면 이틀 정도는 더 걸릴 거야. 그동안 우리는 느긋하게 이곳의 상황이나 수습하도록 할까?” “네? 수습…이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던 나는 곧 그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운 좋게 폭발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여기저기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윽…사, 사람 살려…” “으으으…” “!!” 내가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내 룸메이트 중의 한사람인 다비안씨였다. 온몸에 깊이 페인 상처자국이 가득하고 피와 흙으로 얼룩진 처참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심각할 정도의 중상은 아닌 것 같았다. “다비안씨! 정신 차려 보세요! 이런…슐츠형은 어디에 있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본 나는 곧 그와 가까운 곳에서 쓰러져 있는 슐츠형을 발견했다. 그 역시 심한 상처는 아니었지만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나는 일단 급한 대로 나이아스를 소환하여 흙에 엉겨진 상처부터 씻어냈다. 그 사이 라미아스는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 대충 뭐라고 휘갈기고는 비둘기 다리에 그것을 달아 하늘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자택의 기사단으로부터 지원 요청을 하는 것이리라. “일단 부상자들은 내 저택으로 옮기자. 황성에 기별을 넣으라고 했으니 곧 치유신관과 병사들을 보내 올 거다. 이번 일로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대거 죽었으니 수도가 발칵 뒤집히겠군.” “괜찮으시겠어요? 혹시 책임 추궁이라도 당하면…” “큭큭. 이 제국에서 감히 ‘테이론 드 세피온’을 추궁할 수 있는 간 큰 녀석은 없다. 게다가 정령왕이 벌인 일이니 황제 녀석이 아무리 떽떽거려 봤자지. 아니, 오히려 속 시원해 할 걸? 이번에 죽은 녀석들 중에서 반 황제파의 인물이 꽤 있거든.” “음, 그렇다면 할 말 없지만…” 내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시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얼굴이었다. “정말 보면 볼수록 맘에 드네. 너 이참에 내 후계자 되지 않을래?” “…네?” 이 무슨 봉창 두들기는 소리인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라미아스는 생긋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가 유희중인 ‘세피온 공작’에게는 다음 자리를 이을 후계자가 없거든. 내심 누구로 하나 걱정이었는데, 너라면 아직 나이도 어린데다 얼굴도 이쁘고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막강한 배경까지 있으니 딱 제격이야. 어때?” “어때 라니…전 그다지…” “뭐어? 왜? 후계자가 되면 이 공국을 통째로 가지게 되는 거라고. 황제에게 정령왕의 계약자임을 밝혀서 쥐꼬리만한 귀족의 작위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부귀영화가 굴러들어온단 말이다. 그런데도 싫어?” 설마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절박한 표정으로 내 두 손까지 붙들어가며 물었다. 물론 보통 평민이었다면 눈이 돌아갈 정도의 엄청난 기회이긴 했다. 아니, 내가 이 세상에 오래 동안 안주 할 수 없는 처지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그러마고 허락했을 것이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는 아니니까.) 라피스를 찾아도 당분간 이곳에서 머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하루라도 빨리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나를 기억하고 사랑해주는 ‘온전한’ 아버지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죄송하지만 힘들 것 같네요. 한곳에서 오래 머물 입장이 아니라서요.” “여행을 하겠다는 거냐? 떠돌이 생활보다야 귀족으로 지내는 것이 훨씬 나을 거야. 물론 지루하고 빡빡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못 먹고 못 사는 것보다 낫지 뭘 그래? 내가 이런 제의를 아무한테나 하는 게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 볼 수 없겠니?” 초면의 사람을 붙들고 이렇게까지 애걸하는 모습을 보니, 그가 그동안 얼마나 이 문제로 고심해 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아요. 죄송합니다.” “그러지 말고 조금 더 생각을…” 그러나 라미아스는 거기에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뒤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이 자식! 감히 엘한테 무슨 짓이야?” 사납게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굉장히 낯익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놀란 표정으로 내 앞을 막아선 이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은발에 푸른 피부, 그보다 훨씬 새파란 눈동자가 눈에 아프도록 들어왔다. “…시, 시벨?” “엘. 괜찮아? 어디 다친 곳 없어?” 누가 유니콘 아니랄까봐 녀석은 이런 난장판 속에서도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무척 안도한 표정으로 웃어 보이는 이가 시벨리우스가 맞음을 확인한 나는 반가움에 눈물까지 흘릴 뻔 했다. “여긴 어떻게…난 너도 폭발에 휘말렸을 줄 알았어.” “아아. 갑자기 대기의 흐름이 이상해진다 싶어서 얼른 실드마법을 시전 했지. 덕분에 나와 같은 층에 있던 인간들은 모두 무사해.”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다.” “나야말로 굉장히 걱정했어. 당장 널 찾으려고 했는데, 폭발이 연달아 두 번 일어나는 바람에 이제야 겨우 온 거야. 정령왕이 옆에 있으니까 위험할거란 생각은 안했지만…이렇게 무사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다. 그런데 저 녀석은 대체 뭐야?” 시벨은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라미아스를 노려보며 물었다. 모습이 다른 탓에 그가 ‘세피온 공작’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 반면, 단번에 녀석을 알아본 라미아스는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호오~ 이거, 이거 요리사 시벨리우스씨 아니신가? 설마 자네가 엘과 안면이 있는 줄 몰랐군.” “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 넌 누구지?” “나? 이 공국의 주인인데.” “웃기지도 않은 소리. 이곳의 주인이란 녀석은 너보다 한참이나 늙은 인간이다. 남을 속이려면 뭔가 제대로 알고 하는 게 어때?” 이제 시벨은 그를 완전히 수상한 녀석으로 분류해버린 듯 했다. 차가운 파란색 눈동자에 살기가 일어나자 라미아스는 나를 향해 얼른 말려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쉰 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시벨을 붙잡고 그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만 둬, 시벨. 그냥 저 사람도 너랑 같은 입장인 것뿐이야.” “…나랑 같은? 혹시 폴리모프한 상태라는 거야?” 끄덕끄덕 내 긍정의 동작에 녀석은 이채를 띈 눈빛으로 라미아스를 훑어보았다. ‘폴리모프’라는 단어 하나로 그의 정체를 단번에 꿰뚫어 본 것 같았다. “인간들이 그렇게 떠받드는 공국의 수장이 설마 유희중인 드래곤 인줄은 몰랐군. 머리색을 보니…블루 드래곤인가?” “호오, 내 정체를 알고 나서도 이렇게 뻣뻣한 엘프는 처음이군. 내가 무섭지 않나 보지?” “전혀. 그럼 저 이상한 물의 장벽은 당신이 만든 것이겠군?” 시벨은 시큰둥한 얼굴로 뒤편에서 굳건히 버티고 있는 물의 장벽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직 엘뤼엔의 존재를 모르는 녀석으로선, 갑자기 생긴 물기둥을 보며 드래곤의 소행이라 생각할 만 했다. 그 속내를 짐작했는지, 라미아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천만에. 아무리 나라고 해도 저런 식으로 물을 운용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저건 모두 엘퀴네스의 작품이지.” “엘퀴네스? 설마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를 말 하는 건가?” “그럼 그 말고 달리 누가 또 있겠어? 정령왕의 폭주를 이렇게 수습할 수 있는 존재는 같은 정령왕이 유일하지.” “정령왕의 폭주라니? 이게 그냥 단순한 폭발이 아니었다는 거야?”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이번 일이 벌어지게 된 대강의 연유를 설명했다. 그러자 처음엔 흥미로운 듯이 듣고 있던 시벨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계약자의 배신? 그래서 바람의 정령왕이 폭주했다고? 하, 과연 인간들은 나를 실망시키질 않는군. 구역질이 날 정도로 이기적이고 추악한 녀석들이야. 그런 놈을 사랑했다니 미쳐 버리는 게 당연해. 미네르바가 정말 어리석은 선택을 했군. 왜 주변에서 말리지 않았지?” “…미안하다. 이기적이고 추악해서.” 내 대답에 시벨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안색이 시퍼렇게 변했다. 나 역시 인간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안 그래도 파란 피부가 더 창백해지는 모습을 보니,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 아니, 엘 너도 그렇다는 뜻은 아니었어! 다른 녀석들이 그렇다는 거지, 엘 너는 절대 아니야. 정말이야! 믿어줘!” “사과할 것 없어. 이번 일을 본 이종족이라면 누구나 인간을 욕하게 될 테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너는 다른 인간들과 달라. 정말이야!” 솔직히 말해 시벨이 이렇게 당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시대의 녀석은 묘하게 냉소적이고 덤덤한 편이었으니, 사과를 하더라도 그냥 간단히 ‘미안!’ 정도에서 그칠 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모습을 볼 줄 알았더라면 농담으로나마 태클을 거는 게 아닌 건데 그랬다. 설마 이것도 내가 여자라고 오해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전에 들었던 트로웰의 충고를 떠올리며 나는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 모두 오랜만에 찾아 뵙습니다! 그간 안녕하셨는지요..흐흐흐<- 늦게 온 주제에 달랑 한 편만 올리고 사라지게 되서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쓰는 속도가 어째 점점 느려지는 것 같네요^^;; 이 다음 분량도 이번 주 안으로 올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일단 11권을 보지 못하신 분들을 위해 인터넷에 연재되지 않은 분량의 간략한 줄거리를 넣었습니다만; 줄거리는 줄거리일 뿐, 스토리의 진행을 이해하시는 데에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가 안되시는 부분은 웅덩이에 글을 올려주시면 성심껏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급하게 지은 소제목이라 중간에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내용 역시 수정하면서 바뀔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이 점 모두 유의해 주시어요♥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습니다.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되세요^^ 시험 기간 이신 분들은 모두 열심히 공부하셔서~ 좋은 성적 거두시길 바랍니다! 아자아자 화이팅! [정령왕 엘퀴네스] 12-2. 자각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어이, 지금 이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네?” 그때 마침 들려오는 라미아스의 목소리는 내가 잠시 잊고 있던 현실로 돌아오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자 긴장한 얼굴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라미아스님? 왜 그러…”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무심코 묻던 나는 이윽고 펼쳐지는 장면에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굳건히 버티고 있던 물의 장벽이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젠장, 본체로 돌아가야 하나?” “어, 어떻게 된 거예요? 분명 이틀은 걸릴 거라고…” “나도 모르겠다. 최악의 경우 어쩌면 폭주를 제압하는데 실패한 걸지도 모르니까 바짝 긴장하고 있어라. 어이, 거기 블루엘프! 텔레포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약 위험한 순간이 오면 이 녀석도 같이 좀 부탁하마.” “그런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다.” 퉁명스럽게 대답하면서도 그 제안이 싫지 않았던 듯, 시벨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라미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본체로 돌아가면 막을 수는 있는 거예요?” “그건 모르지. 여차하면 나도 튈 생각이거든.” “엥? 여기 사람들은 어쩌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뭐. 내가 죽을 판인데 남 챙겨줄 정신이 있겠냐?” “…하긴.” 나도 도망치는 판국에 라미아스에게 책임을 지운다는 건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게다가 드래곤인 그가 인간들을 위해 희생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더 이해가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물의 장막은 거의 다 무너져 내부의 모습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온 뿌연 물안개와 시린 공기가 사방에 자욱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시벨은 굳은 얼굴로 내게 한손을 내밀었다. “엘, 내 손을 잡아.” “으응.” 마지못해 맞잡은 녀석의 손은 잔뜩 경직되어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 녀석도 긴장을 할 때가 있구나 싶어 나는 상황도 잊고 슬쩍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남아있던 물기둥마저 완전히 파쇄 되는 순간에도 우리가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아까전보다 더욱 짙어진 안개 때문에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을 뿐이었다. 당황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안개속의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자 잠시 후 조금씩 흩어져가는 뿌연 기운 안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방을 가득 매우고 있던 안개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뒤로 보인 것은 온통 물바다가 된 바닥과 거의 폐허나 마찬가지로 엉망이 된 주변, 그리고…굉장히 지친 얼굴을 한 엘뤼엔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잘생기면 뭐든지 다 어울린다고…창백한 안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 외모를 보며 나는 새삼스럽게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명한 푸른색 눈동자와 발끝까지 치렁거리는 물빛 머리카락이 마치 ‘이것이 물의 정령왕이다’라고 온 몸으로 알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자가 엘퀴네스?” 역시나 한눈에 그의 정체를 알아본 시벨이 감탄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의 진지한 얼굴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순식간에 황홀한 표정으로 돌변한 라미아스가 두 팔을 벌리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엘퀴네스으~~! 다행이야! 자기, 무사했구나!” 그리고 그 무모한 행동은 참담한 결과로 돌아오고 말았으니… 퍽! 쿠우웅! “꾸에엑!” “…안 그래도 피곤한데 화나게 만들지 마라.” 단번에 라미아스를 내팽개친 엘뤼엔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잠깐의 움직임으로도 무척이나 지치고 고단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때서야 정신이 든 나는 잡고 있던 시벨의 손을 놓고 얼른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괘, 괜찮아, 아버지? 어디 다친 덴 없어?” “아버지…?” 뒤에서 어리둥절하게 중얼거리는 시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이어질 엘뤼엔의 대답만 기다렸다. 워낙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에 좋은 소리가 나올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벼락 같은 그의 호통이 날아 들어왔다. “넌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네가 뭐라고 그 폭발 속에 뛰어들어? 결국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다니! 어떤 의미론 참 대단하군 그래!” “윽…화났어?” “시끄러! 한 번만 더 이따위 일을 벌였다간 죽든지 말든지 그냥 내버려둘 테니 그리 알아! 아니, 산채로 사자우리에 집어 던질 테다!” “아, 알았어. 그런데 다른 정령왕들은? 미네르바는 어떻게 됐어?” 찔끔한 표정으로 대답한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얼른 다른 질문을 건넸다. 엘뤼엔 역시 그 의도를 짐작한 듯 했지만 피곤했기 때문인지 별다른 꼬투리 없이 대답했다. 물론 절대 평범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미네르바는 봉인, 나머지 두 녀석은 역소환 됐다. 당분간은 세 녀석 다 중간계에 나오지 못 할 거야.” “엥? 역소환은 그렇다 치고…봉인이라니? 설마 아버지가 봉인 시킨 거야?” “말로 달래는 방법 따위는 모르니 어쩔 수 없잖아. 한동안은 정령계에서 머리를 식히는 게 나을 거다. 누구보다 이성적인 녀석이니까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진정할거야. 그게 안 되면 그때야말로 소멸시키는 수밖에.” 냉정한 결론이긴 했지만 귀찮은걸 싫어하는 엘뤼엔이 손수 봉인까지 한 걸 보면 꽤나 배려해준 셈이었다. 나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 봉인은 언제 풀리는 건데? 아버지가 직접 가서 풀어줘야 되는 거야?” “아니. 폭주가 멈추면 알아서 해제 되도록 해 놨다. 어쨌든 당분간은 바람의 기운이 강해질 거야. 계절의 변화 역시 빨라질 테니 미리 준비해둬라.” “응. 알았어.” 그러고 나자 주위에 있던 수많은 물의 정령들이 엘뤼엔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각자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수군거리며 그의 몸에 수많은 이슬방울을 뿌리기 시작했다. 언제고 라피스가 만든 결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탕 힘을 소진하고 났을 때, 나이아스들이 내게 해준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그만큼 현재 엘뤼엔이 지친 상태라는 뜻이리라. ‘하긴, 두 정령왕이 속수무책으로 역소환 되었을 정도인데,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한거지.’ 당시 얼마나 힘든 상황이었는지 기억하고 있던 나로선 지금 이런 모습이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나야 나중에 도착한 트로웰의 도움을 받아 한결 나아졌다지만, 지금 엘뤼엔에겐 기운을 나눠줄 동료들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하급 정령들의 기운은 고작 최악의 상황(예를 들면 역소환 같은 것)만 막아줄 뿐이다. “저기…아버지, 정령계에 가서 조금 쉬고 오는 게 낫지 않을까?” “무슨 헛소리냐?” “지금 굉장히 지쳤잖아. 물의 영역에서 하루정도만 푹 쉬면 회복 될 것 같은데.” “쓸데없는 참견이다. 너에게 걱정 받을 정도는 아니야.” 싸늘하게 대꾸한 그는 터벅터벅 걸어가 땅을 흥건하게 적신 물들을 모두 공중으로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힘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고집부리는 모습에 나는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라미아스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엘퀴네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아~? 그 엄청난 폭주를 이렇게 무사히 수습하다니! 아~ 너무 멋져! 역시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니까~” “…쿨럭. 사, 사랑스럽?”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에 온몸에 닭살이 우두둑 돋았다. 그는 어떤 의미론 카노스보다 더 엄청난 존재였다. 내가 질린 표정을 하자 익숙하다는 듯 덤덤한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녀석은 무시해라. 태어날 때부터 머리 구조가 틀려먹은 놈이니까. 그보다 여기 널려있는 인간들은 이대로 방치할 참이냐?” “아, 그렇지, 참! 아버지! 얼른 정령계에 가서 쉬고 와!” “쓸데없는 참견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니, 그게 아니라~그래야 충전 완료해서 이 사람들도 치료할 거 아니야! 심각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많다고!” “……” 내 단호한 외침에 엘뤼엔은 물론, 라미아스와 시벨리우스 녀석까지 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당연 그 침묵의 의미를 알 수가 없던 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휴…내가 왜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군.” “그게 무슨 소리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얼굴을 찌푸리자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정령계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밝혔다. 방금 전까진 싫다고 고집만 부리더니, 역시 사람들을 치료해야 할 입장에 처하니 현재 상태가 곤란하긴 했나보다. 잠시 후 그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왠지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라미아스의 눈과 시선을 마주쳤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듯이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는 갑자기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너…멋지다!” “네?” “저 엘퀴네스를 이렇게 철저하게 부려먹는 인간은 처음 봤어! 드래곤…아니 같은 정령왕들조차 감히 말도 못 붙이는 존재를 이토록 가볍게 대하다니! 정말 멋지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니까!” “아하하. 제가 그렇게 보였나요? 전 그냥 엘퀴네스의 치유능력을 썩히는 게 아까워서…뭐, 이러니저러니 해도 본인에게 그럴 마음이 있으니까 제 의견에 따라주는 거겠죠.” “바로 그거야! 엘퀴네스가 인간들을 돕다니! 이건 천지가 개벽해도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아마 너라는 존재가 그에게 어떤 특별한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특별한 영향이라. 혹시 그라면 무의식적으로 내 영혼이 정령에 가깝다는 걸 느꼈을 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같은 엘퀴네스이고 하니, 다른 이들에 비해 너그럽게 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예전부터 그는 물의 정령에게는 관대한 편이었다고 하니까. 하지만 정작 혜안이 있는 트로웰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 보면 단순히 내가 마음에 든 것일지도? ‘으음. 미래의 관계가 과거에도 영향을 미치는 게 가능한가? 원래 부자(父子)가 될 운명이라거나…’ 거의 희망사항에 가까운 결론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와 나 사이에 단단한 인연의 끈이 얽혀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샐쭉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한 라미아스를 향해 말했다. “엘뤼엔의 속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워낙 제 앞가림 못하는 녀석이라 신경 써 주는 걸지도 모르죠.” “흐음~ 그런가. 그런데 ‘엘뤼엔’이란 건 엘퀴네스를 말하는 거야?” “네, 제가 지어준 가명이에요.” “가명? 하긴, 여행 중에 대놓고 엘퀴네스라고 부르긴 어렵겠군. 그러고 보니 아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그건 무슨 뜻이지?” 그 질문에 시벨까지 덩달아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그냥 저 혼자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왠지 아버지 같아서.” “켁! 말도 안 돼. 저렇게 젊은 얼굴의 아버지가 어딨어? 엘퀴네스도 용케 화를 내지 않는군.” “처음엔 싫어하더니 이제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아요. 제가 고집을 피웠거든요.” “그으래? 아아, 나 같으면 아버지보단 애인 쪽이 더 듬직할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데 엘퀴네스는 내가 자기라고 부르면 맨날 화만 낸단 말이야? 대체 왜 그런 걸까?” 바로 그래서 화내는 거라는 걸 모르는 건가?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는 라미아스를 보며 조심스럽게 조언을 건네 보았다. “그럼…차라리 모습을 여자로 바꾸는 건 어때요? 드래곤들은 성별을 바꾸는 게 가능하잖아요.” “왜에? 싫어. 난 이 모습이 더 편하고 좋단 말이야.” “하지만 남자잖아요. 엘뤼엔 역시 남성체의 정령인데 그 상태에서 ‘애인’관계는 확실히 무리이지 않을까요?” “뭐, 어때? 어차피 우리 둘 다 성별에 상관없는 종족이잖아? 두고 보라고. 언젠간 반드시 내 매력에 굴복하고 말테니! 우후훗~” “……” 뻔뻔하달 지, 과감하달 지. 그는 여러 면에서 확실한 마이페이스였다. 혹시 엘뤼엔이 라피스와의 계약을 거절했던 건 이러한 경험들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더 집요한 상태로 돌아오긴 했지만.) 처음으로 엘뤼엔이 불쌍하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 하하하. 지난 주에 한 편 더 올리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요즘 들어 잠이 너무 많아져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풀썩풀썩 누워버렸거든요.ㅠㅠ 왠지 얼마 전부터 머리가 너무 아프고 몽롱하기도 해서.. 감기 기운이라도 있는가 싶었는데... 이번에 그 원인을 알아냈습니다;; 방안에 신너를 놔뒀는데.. 그 병 뚜겅을 꽉 안 닫아뒀더라구요..(먼산) 마지막으로 그 신너를 썼을때가 한 달 전이었으니까... 대략 한달 동안 신너에 노출된 상태였던 겁니다;; 게다가 춥다고 방문도 닫아두고;; 환기도 안시켜둬서... 후후후후. 한 병 가득했던 것이 이번에 보니 절반 이하로 남아 있더군요;;(나머지는 제가 다 마신 걸까요;;; 덜덜..) 어쩌면 신너에 중독 됐을지도..아하하! <-웃을 일이 아니잖아! 누가 제 수명 좀 돌려주세요..<- 날씨가 굉장히 쌀쌀해졌습니다! 첫눈 소식도 있는걸 보니 확실히 겨울이네요^^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항상 행복한 하루 되세요~^^ p.s- 아콘님! 이름 불러달라고 하셔서 썼습니다! 저 착하죠? 아하하하<-연재나 잘하지? -┏ [정령왕 엘퀴네스] 12-3. 자각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아아~ 그렇군. 엘 너는 물의 정령왕과 계약했던 거구나.” 시벨이 모든 상황을 파악한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난 후였다. 내가 정령사인 것은 알아도 어느 속성의 정령을 다루는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자마자 녀석은 무척이나 놀라워했다. “지금까지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은 한명도 없다고 들었는데…그럼 네가 최초인 거야?” “응. 거의 그런 셈이지.” “정말 굉장하다! 엘프들도 불가능한 일을 해내다니, 친화력이 상당히 뛰어나구나. 하긴, 언젠가 장로 할아범한테서 들은 적이 있어. ‘인간은 기적을 창조하는 동물’ 이라고.” “오, 그거 멋진 표현인데? 나도 언젠간 써먹어야지.” “뭐? 하하하!” 이래저래 실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리는 착실하게 현장을 정리하는 일에 집중했다. 물론 전부 다 치우는 것은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구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것이었다. 갈라진 땅과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치우는 일은 상당히 버거웠지만, 다행히 마법이 가능한 시벨과 라미아스덕분에 특별히 곤란한 일은 없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세피온 공작의 기사들은 한참 동안 폐허가 된 현장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운 좋게 자리를 피해 화를 면한 사람들이나, 멀리서 구경 온 공국의 시민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고오! 내 아들! 내 아들이!!” “흐윽! 안 돼! 이럴 순 없어!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크흐흑!”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을 때, 그나마 멀쩡했던 건물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사상자의 숫자는 더욱 불어난 상태였다. 폭주는 수습됐지만 가족과 동료를 잃은 사람들이 통곡하는 소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본 뒤 다시금 부상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죽은 사람들을 애도하기보다 목숨이 위태로운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래도 엘뤼엔의 활약 덕분에 생각보다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다행이랄까. 자잘한 부상을 입은 자는 응급처치 후 임시로 지어둔 텐트 안으로 옮기게 했고, 운이 나빠 의식을 잃거나 상태가 심각한 사람들은 시벨과 라미아스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떠넘겼다.(신관들에 비하면 위력은 약하겠지만, 일단은 치료마법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우리 세 사람(?)이 부지런히 움직이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덩달아 부랴부랴 일을 돕기 시작했다. 가끔씩 몇몇 사람들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집요한 시선을 보내온 것만 빼고는 그럭저럭 상황은 원만히 수습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나는 누군가가 내게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의 구조를 위해 파견된 세피온 공작의 기사단 중 한 사람이었다. 단단한 투구와 갑옷을 입고 절제된 동작으로 척척 걸어온 그는 내게 무척 정중한 태도로 인사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당신이 이번 사건을 처음부터 모두 지켜본 사람이라고 해서 찾아왔습니다만.” “무슨 용건이시죠?” “부상자들에게 상황을 물으니, 모두 하나같이 정령왕이 폭주한 것이라 대답하더군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일이 벌어지게 된 계기와 어떻게 수습 된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은 상황조사보단 사람들을 구하는 게 먼저 아닌가요?” “그렇긴 합니다만…이제 곧 황성에서 진위조사를 위해 친위대를 파견 할 것입니다. 그들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이쪽의 사전 조사역시 필수라서 어쩔 수 없습니다.” 기사주제에(?) 무척 황송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모습 때문에 나는 차마 화를 내지 못하고 얼굴만 찌푸렸다. 그러자 기사는 더더욱 저자세가 되어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실은 폭주를 수습한 남자를 봤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푸른색의 긴 장발에, 준수한 얼굴의 청년이라고…그 사람이 당신과 무척 친밀한 사이로 보였다고 하더군요.” “아~ 그래요.” “네에, 저어…그리고 그 사람이…아무래도 정령왕 엘퀴네스 같다고…” “…!” 아하, 이것 때문에 그렇게 쩔쩔맨 것이었구만? 나는 그 말 하나로 단번에 이 사람의 의도를 파악했다. 진위여부란 건 말짱 허울 좋은 핑계일 뿐이고 본심은 내가 정령왕의 계약자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다. 어쩐지 아까부터 사람들이 흘끔흘끔 바라보더라니. 하긴, 누가 봐도 그때 엘뤼엔의 모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위대했다.’ 휘몰아치는 태풍을 물의 장벽으로 가둬두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 또한 그가 물의 정령왕이란 사실을 새삼 자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뻔했다. 여기까지 와서 발뺌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푸욱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엘퀴네스가 맞는데요.” “헉! 여, 역시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그와 계약한 정령사입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내 대답에 기사는 호흡곤란이라도 일으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빨갛게 상기된 얼굴을 보니 금방이라도 실신해서 쓰러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기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찾는 듯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행동의 뜻을 짐작하곤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엘퀴네스라면 정령계에 돌아갔습니다. 조금 쉬다가 올 거예요.” “헉, 그, 그렇군요. 크, 크흠. 실례했습니다. 너무 흥분해서 그만…저, 레이디께선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레이디?” 또 여자로 착각한 건가. 이제는 담담하게 이런 상황을 납득하는 내가 무서울 정도다. 오히려 순진무구한 얼굴로 ‘왜 그러십니까?’라고 묻는 걸 보니 머리까지 아파올 지경이었다. ‘확 마법으로 성형이나 해버릴까…’ 나는 잔뜩 구긴 얼굴로 중얼거리며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었다. “저 여자 아닌데요.” “아, 그러셨…네, 네에?” “여자 아니라구요. 그러니까 그 레이디 어쩌구 하는 말은 좀 빼시고 질문하시죠?” “헉…죄, 죄송합니다. 이런 실례를…” 미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기사의 얼굴엔 의심스럽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나중엔 그 시선이 묘한(?) 부분에까지 이르는 것을 보고 나는 불쾌한 표정으로 빽 소리쳤다. “어딜 봐요?” “쿨럭.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됐습니다! 아무튼 제 이름은 엘이고, 나이는 18세입니다. 됐죠? 이만 가 봐도 될까요?” “예? 아앗 잠깐만요! 성은 없으십니까? 혹시 평민이신 건가요?” 이제 기사는 내가 남자라는 사실보다 귀족이 아니라는 것에 더 놀라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다급한 표정으로 뭔가를 물으려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 순간 어느새 나타난 시벨리우스가 내 앞을 막아서며 기사를 향해 쏘아붙였다. “넌 뭐야? 엘에게 무슨 볼일이 있나?” “예, 예? 아, 저 그것이…그저 간단한 조사를…” “조사라니?” “이번 사건의 경위와 일을 수습한 과정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여기 계신 소.년.께서 모든 정황을 지켜보셨다고 하기에…” “그래? 그런 거라면 나 역시 처음부터 봤으니까 내가 대답해 주지. 엘, 너는 이만 가서 쉬어. 아까부터 계속 돌아다녀서 피곤할 텐데.” “아, 그래줄래? 그럼 나야 고맙지.” 그러자 우리의 대화를 들은 기사가 눈에 띄게 당혹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아, 안됩니다! 그분은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외람되지만, 저는 자랑스러운 세이크 제국의 기사로서, 귀빈의 신병을 확보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분이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 이제부터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셔야 합니다.” 이 무슨 생뚱맞은 답변이란 말인가. 나는 너무도 당당하게 내 신병을 요구하고 있는 기사를 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기사의 속셈이야 뻔했다. 비단 이 시대뿐만이 아니라 정령사라는 직업은 어딜 가도 귀한 대접을 받는다. 마법사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발할 시 적에게 강한 범위공격을 가할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귀족도 아닌 내가 무려 정령왕의 계약자가 되었으니, 혹시나 그 능력을 가지고 타국으로 이주할 것을 우려한 것이었다. 말이 ‘보호’지 실상은 옆에 두고 감시할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시벨 역시 짐작했다는 듯 대놓고 비웃는 얼굴을 하며 대꾸했다. “이봐. 넌 지금 주변의 상황이 보이지도 않나? 어차피 폭주는 멈췄고, 엘은 너희들이 보호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다. 게다가 지금은 할 일이 많다. 이런 데서 너희들에게 시간을 뺏길 이유는 없어.” “하지만…” “내 말 못 알아들었나? 더 이상 귀찮게 굴면 네 놈도 저기 굴러다니는 것들과 똑같이 만들어주지.” “……” 녀석이 싸늘한 표정으로 가리킨 것은 아직 채 수습하지 못한 시체들 이었다. 그것을 본 기사는 얼굴을 창백하게 굳히곤 순순히 물러날 뜻을 밝혔다. 물론 나중에 다시 정식으로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말이다. 기사가 떠나고 나자 시벨은 난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아, 앞으로 피곤하게 됐군. 저 녀석들 계속 끈질기게 따라 붙을 것 같은데?” “상관없어. 어차피 대충 정리가 되는대로 떠날 거니까.” “떠난다고? 어디로?” “글쎄…일단 여기서의 용무를 마치고 나서 결정해야 할 것 같아.” “용무? 혹시 검술대회를 말하는 거야? 하지만 상황이 이래서야 경기는 더 이상 진행되지 않을 텐데.” “그것 말고.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거야.” 암, 중요하고말고. 내가 무엇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 검술훈련을 했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우승해야만 라미아스를 만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었다. 그를 만나야 영혼의 보석에 대한 정보도 듣고, 더 나아가 라피스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지금 라미아스를 만난 이상, 나는 대회가 다시 시작되더라도 계속 출전할 생각이 없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정작 보석 얘기는 꺼내보지도 못했잖아?!’ 나는 이제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그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당연히 근처에 있을 거라 생각했던 라미아스는 어느새 행방이 묘연해져 있는 상태였다. 처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벨, 혹시 라미아스님이 어디 갔는지 알아?” “아마 다시 세피온 공작으로 돌아갔겠지.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데 계속 모습을 감추고 있을 순 없잖아. 그는 이번 대회의 개최자인데다, 책임자이기도 하니 앞으로 당분간은 쉴 틈 없이 바쁠걸?” “으~하긴. 그럼 나중에 한가해질 때 정식으로 면담을 요청해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물어볼걸.” “뭐야, 용건이라는 게 그 녀석한테 있는 거였어?” 궁금한 표정으로 묻는 시벨에게 나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중에 다시 만날 수야 있겠지만, 서둘러 끝냈을 수도 있는 일을 넋 놓고 있다 그르쳤다는 생각에 영 기분이 찝찝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퀘스트의 완료를 코앞에 두고 실패한 것 같달까. “어째 이곳에 와선 한 번에 되는 일이 없네.” 또 다시 무료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 [정령왕 엘퀴네스] 12-4. 자각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뤼엔이 돌아온 건 그날 늦은 저녁 무렵이었다. 그와 같은 시간, 지원을 요청을 받은 황성의 기사들과 치유 신관들도 도착했으나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그에게만 쏠려있었다.(심지어 세피온 공작의 친위대까지 말이다.) 나는 한결 안색이 좋아 보이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아버지! 이제 오는 거야? 몸은 좀 어때?” “애초에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했잖아. 어차피 부려먹을 생각만 하는 주제에 꽤나 위하는 척 하는군.” “뭐야, 그래서 삐졌어? 이왕 있는 능력 이럴 때 사용해야지 썩혀서 뭐해?” “흥. 말해두지만 내 능력은 비싸다. 그에 어울리는 환자가 아니면 치료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저기…근데 다른 정령왕들에게는 들렸다 온 거야? 트로웰이나 이프리트님의 상태는 어때?” “내 알바 아니다. 알아서 추스르고 있겠지.” “뭐? 아직도 다 회복이 안 된 거야?” 이전에도 트로웰은 몇 번인가 역소환 된 적이 있지만 회복하고 돌아온 시간은 한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었다. 때문에 나는 당연히 그들이 엘뤼엔과 함께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직 ‘추스르는 상태’ 라니. 폭주의 파괴력이 그만큼 엄청나다는 뜻일까? 그러자 엘뤼엔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고작 역소환 된 정도로는 회복이 어렵지 않아. 이프리트 녀석이야 아직 완전히 영역이 복구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조금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럼 트로웰은?” “정령계에 돌아온 날부터 바람의 영역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군.” “미네르바의 영역에서?” 내심 짐작하고 있던 일이라 나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채 되물었다. 이때만큼은 늘 담담하던 엘뤼엔 역시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탄생의 순간부터 유달리 미네르바에 대한 집착이 심했지. 또 무슨 꿍꿍이를 꾸밀 진 모르겠지만 그냥 내버려둘 생각이다. 스스로 한계치로 몰아가기 전에 정신을 차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 “원래 아는 게 많은 녀석일수록 스스로의 일엔 방심하는 법이지. 어쨌든 내 경고도 있었으니 넌 건드리지 않을 거다. 그러니 되도록 다음에 만날 땐 녀석을 자극하는 말은 하지 말도록 해라.” 차분한 그의 설명에 나는 오히려 기분이 더욱 엉망이 되는 걸 느꼈다. 내 설득은 실패했고, 아직 트로웰은 인간을 멸종시키겠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은 상태다. 단순히 그와 친해지고 싶었던 것일 뿐인 내게 이런 식의 면죄부는 전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엘뤼엔을 앞세워 목숨을 부지한 꼴이 된 것 같아 비참했다. (그게 사실이긴 했지만.) “휴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걸까.” “그걸 몰라서 묻는 건 아니겠지. 당연히 처음부터다. 나로선 그 녀석을 설득할 생각을 한 것부터가 어이가 없군.” “윽. 그야 내가 좀 대담하긴 했지만…말을 꼭 그렇게 해야겠어? 그 미네르바의 계약자만 아니었어도 괜찮았단 말이야. 누가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나.” “그게 바로 현실이란 거다, 멍청아. 때론 무슨 짓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야. 그런데도 무모하게 도전하는 걸더러 바로 주제도 모른다고 하지.” “……” 엘뤼엔은 절대 사람을 비꼬지 않는다. 그저 너무도 정확한 사실만을 말해서 가슴에 비수를 꽂을 뿐이다. 특히 이 시대의 그는 그런 면에서 더더욱 가차 없었다. 매번 이럴 줄 알면서도 자신을 변호하려고 하는걸 보면, 내심 그에게 위로라도 받고 싶었던 걸까. 그저 한숨만 나올 일이었다. 부상자의 숫자가 많음에 따라 임시로 지어둔 텐트 역시 벌써 십 여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중태인 환자들만 모아둔 곳에 엘뤼엔을 집어넣은(?)다음, 사람들을 도와 아직 남아있을 생존자를 찾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마법도구의 역할이 굉장히 컸다. 사람의 생체 반응을 알아내는 것과 어두워진 주변을 밝히는 것 등, 그 모두가 마법의 도움 없인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황성에서 지원 온 사람들 중에선 마법사들도 꽤 많은데다, 넘칠 만큼 마법도구가 많은 시대였기 때문에 그로 인한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 누군가가 탐지마법을 써서 생존자를 찾아내면 사람들이 그 속으로 들어가 들것으로 옮겨왔다. 너무 좁은 틈새에 갇혀 꺼내기가 어려운 사람의 경우, 실드를 치고 그 위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부수어 공간을 넓히게 만들었다. 이제는 제법 거드는 사람이 늘어나 구조와 응급처치 모두 무리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는 중 나는 우연히 도우는 사람 속에서 낯익은 한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바로 3회전에서 탈락하고 대기실을 떠났던 크리스였다. “크리스형! 무사했군요!” “어? …누, 누구?” 침통한 표정으로 돌을 나르고 있던 그는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경직 시켰다. 그 모습에 나는 서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예요, 엘! 3회전까지 같은 방 사용했었는데 목소리도 기억 못해요?” “헉! 엘? 네가 엘이라고?” “어라, 정말 몰랐나보네?” “앗, 그야 넌 계속 후드를…어, 어떻게 된 거야? 너 설마 여자였냐? 아하하. 미안, 미안.” 놀란 표정으로 묻던 그는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곧바로 사과를 건넸다. 그리곤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허둥지둥 다른 화제를 꺼내기 시작했다. “목소리 들으니까 확실히 너 맞네. 이야~ 너 굉장한 미소년 이었구나? 그런데 왜 그동안 얼굴을 가리고 다녔어? 아깝게 시리.” “형처럼 여자로 오해하는 사람이 가끔 있어서요.” “…핫핫핫! 아무튼 다시 만나서 정말 반갑다! 안 그래도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어. 이 폭발 속에 휘말려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니 한시름 덜었다. 그런데 슐츠 녀석이랑 무뚝뚝한 귀족씨는 어떻게 됐어?” “아마 어딘가에서 치료받고 있을 거예요.” “뭐? 설마 어디가 심하게 다친 건 아니겠지?” “괜찮아요. 제가 대충 봤는데 가벼운 찰과상이랑 의식이 없는 것 빼곤 큰 문제는 없었거든요.” “그래? 휴우~다행이다.” 크리스는 안도한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시늉을 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갑자기 큰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웬 회오리가 몰아치잖아. 먹구름은 꾸역꾸역 몰려드는데 정작 주변이 어두워지지는 않고. 건물들은 죄다 부서져서 하늘을 날라 다니지 않나, 땅은 온통 우르릉 요동치질 않나. 게다가 시퍼런 물줄기가 솟아나서 뱀처럼 꿈틀거리고! 난 이 세상의 종말이라도 온 줄 알았다니까?” “아하하, 확실히 평범한 폭발은 아니었죠.” “말도 마라. 멀리서 보는 건데도 오금이 다 저리더라. 그런데 그게 정령왕이 폭주한 거라며? 루시엘 드 라비타 백작님이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는 말이 사실일까?” “엥? 그건 어디서 들으셨어요?” “일부러 들으려고 한건 아니고…이미 소문이 쫘악 퍼졌던데? 레파르 백작이 정령왕을 배신한 거라는 둥, 그게 루시엘 백작의 여동생 때문이었다는 둥. 뭐, 죄다 입증되지 않은 말들뿐이지만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새삼 펠리온과 루시엘의 생존여부가 궁금해졌다. 아마도 2차 폭발에서 살아남았다면 그들은 지금쯤 기사들에게 발견되어 세피온 공작의 자택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그들 말고도 대부분의 살아남은 귀족들은 그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고 들었으니까. 그 두 사람은 이번일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하니, 향후 제국에서 이 문제의 책임을 누구에게 넘기게 될지 궁금했다. 그러나 설령 추궁 없이 넘어간다 해도 이전처럼 웃고 살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펠리온은 더 이상 정령을 다룰 수 없게 되었고, 루시엘 또한 하나뿐인 여동생을 영영 보지 못할 테니까. “그런데 엘 넌 용케 그 안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운이 좋았죠, 뭐. 그러는 형이야 말로 무사하셨네요?” “크흠. 그게 말이지…실은 돈이 없어서 경기장에 못 들어갔거든. 무슨 놈의 관전비가 그렇게 비싼지, 돌아갈 경비를 빼고 나니까 한 푼도 남는 게 없더라고. 그래서 엘 너랑 슐츠의 4회전 시합도 못 봤어. 뭐, 덕분에 목숨은 건사했지만.” 아~그래서 후드를 벗은 내 얼굴을 못 알아본 거였군.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갑자기 목소리를 낮춘 크리스가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너 그거 알아?” “네? 뭘요?” “물의 정령왕 말이야. 그 엘퀴네스를 소환한 인간이 나타났대! 이번의 그 엄청난 폭발을 해결한 것도 그 사람이라던데? 아! 너라면 계속 그 안에 있었으니 봤을 수도 있겠구나. 혹시 얼굴 봤어? 어떻게 생긴 사람이디?” “네? 아, 그, 그게…” 어라라. 설마 아직 내가 정령사라는 것도 모르고 있는 건가? 순간 당황한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몰라 슬쩍 말끝을 흐렸다. 그때 마침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 지는가 싶더니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어딘가로 우르르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들을 보아 무슨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 글쎄요?” 모두가 달리는 와중에 나와 크리스만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한 남자가 튀어나와 크리스를 향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어이, 크리스! 거기서 뭘 하고 있어? 얼른 이리 와 봐! 특종이야, 특종! 정령계에 갔던 엘퀴네스님이 다시 돌아왔대!” “!” “뭐? 그게 정말이야?” “그래! 저쪽 텐트 안에서 중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더라! 지금 가면 그 대단한 계약자도 볼 수 있을 지도 몰라! 여기 일도 대충 수습된 것 같겠다, 놓치기 전에 얼른 가보자고!” “와우! 좋았어! 당장 간다!” 순수하게 기뻐하는 크리스와는 달리, 나는 그저 얼떨떨한 심정이었다. 저 많은 사람들이 모두 정령왕을 보기 위해 몰려가는 거였다니! 아마 나중에 엘뤼엔이 내 목을 조르려고 하지 않을까?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나는 주르륵 식은땀을 흘렸다. 이런 내 맘도 모르고 크리스는 즐겁게 내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이, 엘 너도 가자!” “에? 앗, 저기 나는…” “그렇게 머뭇거릴 때가 아니야. 두 번 다신 이런 기회가 안 올지도 모른다고! 정령사라 잖아, 정령사! 자자, 어서 가자, 어서!” 글쎄 내가 바로 그 계약자란 말이닷! 당사자가 바로 눈앞에 있는데 누굴 보러 간다는 거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 외치기도 전에 크리스에게 끌려가다시피 어디론가 뛰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잠시 후에 도착한 곳은 예의 엘뤼엔이 한창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는 바로 그 현장이었다. 이미 상당수의 사람들이 소문을 들은 것인지, 텐트 앞엔 몰려든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도 정령왕이 무섭긴 했는지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밖에서만 힐끔힐끔 엿보는 듯 했다. 크리스와 그의 친구 역시 사람들 틈새에 끼어 열심히 안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어때? 보여?” “으으, 잠깐만 기다려봐. 사람들 머리 때문에 잘…오오! 보인다, 보여!” “정말? 어떠냐?” “머리 색깔이 완전 물빛이야! 으아~ 진짜 무지 잘 생겼다. 이거 나 같은 놈은 어디 기죽어서 고개나 들고 살겠냐?” “어디, 어디! 나도 좀 보자.…오오, 정말 멋지다! 나 태어나서 정령왕은 처음 봐.” “킥킥. 이하동문이다. 그런데 그 계약자란 사람은 누구지?” “잘 찾아봐. 근처에 있겠지 뭐.” 이때 나는 최대한 이들에게서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시선을 먼 허공에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리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파도처럼 좌악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굳이 보지 않아도 상황은 뻔했다. 아마 치료를 마친 엘뤼엔이 텐트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리라. “야, 야! 엘퀴네스님이 나오고 있어!” “헉! 우와, 정말이네! 엘, 넌 뭐하고 있어? 정령왕 안 볼 거야?” 어린애처럼 흥분한 크리스의 재촉이 이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런 내 모습을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멍청히 뭘 하고 있는 거냐?” “!!” 웅성웅성. 아아, 결국 올 것이 오고 만 것인가! 힐끔 돌아보니 바로 뒤편에서 엘뤼엔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덕분에 자연히 사람들의 시선 또한 나에게 몰려들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크리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는지 심히 의심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어이, 엘. 지금 엘퀴네스님이 너한테 하는 소리인거 맞냐? 널 바라보고 있는 거 맞지?” “하하, 네에, 그런 것 같네요.”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원래 엘퀴네스님과 아는 사이였어?” 해명을 요구하는 그의 눈빛에 나는 그저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대답한건 내가 아니라 엘뤼엔 본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물음에 가까웠지만. “내 계약자에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네, 네? 계…계약자?” 그러자 헉! 하고 크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그들 대부분이 크리스처럼 폭주의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탓에, 자세한 상황을 목격하지 못했던 자들이었다.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상으로 치료중인 상태다.) 엘뤼엔은 그 반응을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넘기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다. 할 말이 있으면 빨리 해라. 시간 끄는 인간은 질색이니까.” “히익! 아, 아닙니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크리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하곤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슬쩍 나를 살피는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무런 대비도 없이 뒤통수를 맞은 꼴이니 배신감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쩝, 여기 오기 전에 미리 말해둘걸.’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미처 변명할 겨를도 없이, 이어지는 엘뤼엔의 말에 황급히 시선을 돌려야했다. “네 요구대로 저 안의 녀석들은 전부 치료했다. 이제 용건은 끝난 거겠지?” “아앗! 잠깐만! 설마 그것만 하고 말 셈?” “그럼 또 뭘 부려먹으려고 그러는 거냐? 내 능력은 비싸다고 말했을 텐데?” “그래도 이왕 도와주는 김에 조금만 더 부탁해~ 아직 무너진 건물 밑에 있을 생존자들 구조작업도 해야 하고…음, 또…” “…완전히 작정을 했군.” 그래도 화내지 않는 것을 보면 의외로 엘뤼엔은 순순히 도와줄 생각인 듯 했다. 그 증거로, 낮게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시선은 이미 폐허로 변해버린 장소를 향해 있었다. 나는 기대를 가득 담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도와 줄 거야?” “알았으니까 가만히 보고만 있어라.” “어떻게 하려고?” 내 질문에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한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질서 없이 마구 뒤엉켜 있던 돌 더미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둥실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마치 그 공간만 무중력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맙소사…”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 한창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던 자들까지 모두 할 말을 잃고 멀거니 그 장관을 구경했다. 그때 나는 물로 된 늑대 여러 마리가 각자의 등에 기절한 사람을 싣고 나타나는 것을 발견했다. 바로 물의 상급 정령인 시큐엘들 이었다. 멍하니 있던 사람들은 곧 그들이 싣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생존자들이다!!” “!” 그러자 마치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되었던 마냥, 둥실 떠올라있던 돌무더기들이 원래대로 다시 쌓이기 시작했다. 언제 움직였냐는 듯, 처음 있었던 장소 그대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하지만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온 이후에도 사람들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감탄을 넘어서 다들 하나같이 넋이 빠진 얼굴들이었다. 그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한 정적을 깬 것은 여전히 태연한 엘뤼엔의 목소리였다. “정확히 열여섯. 이 외엔 전부 압사 당했다. 설마 죽은 녀석을 살려내란 부탁까진 하지 않겠지?” “괴, 굉장해. 어떻게 한 거야?” “물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니까. 고체 안에 수분의 비율을 높인 다음, 그것을 내 의지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내겐 숨 쉬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지.” 으음. 하긴, 정령왕에게 중력이니 뭐니 과학적인 법칙이 통할 리가 없겠지.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그와 같은 정령왕이라는 사실이 전혀 실감이 들지 않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12-5. 자각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그 사이 시큐엘들은 느긋하게 걸어와 등에 업고 있던 부상자들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때서야 정신이 든 사람들이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 짝짝짝짝짝! 우렁찬 함성 속에는 엘뤼엔을 향한 감사와 경외의 감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가 보여준 놀라운 광경은 둘째치고서라도, 밤을 새서 해도 모자를 작업을 단 한 번에 해결했으니 어찌 감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도 엘뤼엔은 그들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고 나를 향해 말했다. “가자.” “응? 어딜 가?” “묶을 곳 말이다. 설마 밖에서 내내 밤새울 생각은 아니겠지?” “그건 아니지만. 어차피 지금 찾아봐도 이미 여관은 전부 만원일 걸? 그럴 바에야 시벨에게 부탁해서 천막이라도 얻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시벨? 그 유니콘 말이냐?” 왠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나는 거리낌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그 녀석 마법으로 임시 숙소를 만들 수 있거든. 내부도 보통 집이랑 똑같아. 침대 숫자도 원하는 만큼 늘릴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나 하나쯤 재워주는걸 거절하지는 않을 걸? 어차피 아버진 잠깐 정령계로 돌아갔다 와도 되잖아.” “기각한다. 굳이 그녀석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어. 게다가 그놈은 널 여자로 착각하고 있잖아. 방심하고 있다가 정조라도 잃을 셈이냐?” “쿠, 쿨럭! 그런 말도 안 돼는!” “말이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지. 난 너의 계약자임과 동시에 보호자이기도 하다. 만일의 상황을 대비하는 건 당연한 거야.” “쳇, 아버지가 언제부터 그렇게 나를 챙겼다고?” “시끄럽다. 일일이 말대답 하지 마.” 그는 전에 없이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내 항의를 단번에 일축시켰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기사로 보이는 한 사람이 튀어나와 황급히 말을 건네 왔다. “시, 실례하겠습니다. 저는 세피온 공작각하 직속 친위 기사대의 일원, 쿠거 드 오리우스입니다. 정령사님의 숙소라면 이미 공작님께서 따로 지시해주신 바가 있으십니다만.” “네? 라미…아니, 세피온 공작님이오?” “예, 밤이 깊어지기 전에 자택으로 모시고 오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반가운 제의였지만 나는 어쩐지 꺼림직한 느낌을 받고 머뭇거렸다. 이상할정도로 초롱초롱한 기사의 눈동자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왠지 지금 이대로 따라가면 앞으로 굉장히 골치 아파질 것 같았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엘뤼엔은 찬바람이 쌩쌩 불정도의 냉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필요 없다. 이 녀석의 거처는 내가 정할 것이니, 너희 인간들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예? 하, 하지만…” “네놈들의 주인에게 가서 전해라. 쓸데없는 배려는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불러온다고 말이다. 지금까지 베푼 호의를 내 손으로 거두게 만들지 말아라.” “!!” 조용히 억압해가는 그의 기운에 기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되어 후다닥 물러났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제의를 거절한 거야? 좋은 기회잖아?” “웃기는 소리. 저 녀석들이 단순히 숙소 제공에서 끝날 줄 아냐? 황성의 기사들까지 와 있는 자리다. 아마 이대로 수도까지 끌고 가려고 할 걸?” “하지만 라미아스가 배려한…” “라미아스가 아니라 세.피.온.이라고 했다. 녀석이 개인적으로 너를 챙기려고 하는 거였다면 굳이 기사에게 시키지 않았을 거야. 그놈은 지금 자신의 유희에 맞춰 상황에 따른 제의를 한 것뿐이다. 거기에 홀랑 넘어가면 나중에 억울하다고 해도 할 말 없지.” “윽, 그런 거야?” 그러고 보니 아까 전에도 한 기사가 내 신변을 요구했었지. 그와 같은 맥락인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그저 ‘세피온’이란 이름에 방심한 것이 죽도록 창피했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두 손으로 감싸며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어쩌려고? 시벨의 도움도 싫다지, 자택으로 들어가는 것도 안 되지. 그냥 노숙하란 말이야?” “이전에 트로웰과 훈련하던 곳이 있잖아.” “엥? 저기요, 아부지. 잊고 있는 것 같은데…여기서 거기까지 가려면 3일은 걸리거든요? 밤새서 걸어가자고?” “흥. 공간이동 마법은 폼으로 있는 줄 아는 거냐?” 아, 그렇지, 참. 이동마법이 있었지. 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기대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텔레포트 스크롤이라도 있는 거야?” “무슨 헛소리냐? 그딴 마법 아이템 없이도 나 역시 공간이동쯤은 할 수 있다.” “헤에, 그렇구…아앗! 잠깐!! 분명 처음에 만났을 때는 날 데리고 텔레포트 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 처음 이 세상에 떨어지던 날, 드래곤을 만나기 위해 공간이동 마법을 부탁한 내게, 엘뤼엔은 딱 잘라 무리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할 수 있다니!? 지금 누굴 놀리는 건가?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땐 귀찮았으니까.” “크헉! 그게 무슨 소리얏! 여기까지 걸어오는 여정이 더 귀찮았겠다!” “그건 네 생각이겠지. 설마 정말로 정령왕이 너 하나 데리고 이 정도 거리도 이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거냐?” 한심하다는 듯이 묻는 말에 나는 순간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정령왕이 공간이동을 할 수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언젠가 동료들을 데리고 먼 바다건너까지 텔레포트 해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왜 순진하게 속아 넘어갔냐고 묻는다면… “아버지 말이니까 당연히 그러려니 했지! 젠장! 속인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한 건데!” “덕분에 네가 트로웰에게 검술을 배울 시간도 있었던 거다. 어차피 빨리 온다고 달라질 것도 없잖아. 그런다고 라미아스를 일찍 만날 것도 아니고.” “어쨌든 속인 건 속인 거잖아!” “호오, 그래서 지금 내게 반항하겠다고?” 재미있다는 듯 입 꼬리를 올리며 묻는 것과는 달리 엘뤼엔의 눈빛은 이미 차갑게 식어있었다. 그것을 본 나는 찔끔한 표정으로 얼른 항복을 선언했다. “누, 누가 그렇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있어라. 내 인내심을 시험해보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이런 독재자 같으니…!’ 물론 마지막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대로 내뱉었다가 아버지 손에 인생 하직하는 아들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어쨌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나는 아주 오랜만에 수련하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워낙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어서 일까? 거의 한 달만의 방문이었는데도 마치 어제 왔던 것처럼 친숙한 느낌이었다. 넓은 공터의 흙바닥에는 지난날 트로웰과 함께 수련하면서 새겼던 발자국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것을 보고 마음이 허전해진 나는 무심코 한마디 중얼거렸다. “트로웰도 같이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이곳에 온 이후론 거의 늘 셋이서 함께 다녔기 때문인지, 그의 빈자리가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다. 그러자 엘뤼엔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바라는 것도 많군. 목숨을 건사한 거나 다행으로 생각해라. 그 녀석 손에 죽을 뻔 한 걸 벌써 잊은 거냐?” “윽…하지만 본심은 아니었을 거야. 왠지 괴로워 보였는걸.” “그야 그렇겠지. 그 녀석이 널 마음에 들어 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자신의 목적을 굳히기 위해서라면 그런 감정 따윈 아무렇지 않게 접을 녀석이다. 너무 마음을 열지 않는 편이 네게도 좋아.” “헤에, 날 걱정해 주는 거야?” “보고 있으려니 한심해서 그렇다.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더러 본심은 아니었을 거라고? 하, 이거야 원 겁이 없는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 대놓고 혀를 차는 엘뤼엔의 말에 나는 조금은 발끈해서 대답했다. “이래봬도 가능한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가족처럼 생각하니까.” “가족? 네가 트로웰을?” “그래! 그러면 안 돼?” “농담이 심하군. 누구 마음대로 가족이지? 날 아버지라고 부르는 걸 그냥 내버려뒀더니 이제 주제 파악까지 못하게 된 거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생각보다 날카로운 반응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엘뤼엔은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단호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넌 인간이다. 그 사실을 단 한순간도 잊지 말아라. 그녀석이나 나나, 너와는 사는 세계가 전혀 달라. 너도 머리를 장식으로 달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 차이를 분명히 깨닫는 것이 좋을 거다.” “……” 마치 잊고 있던 쓰디쓴 현실에 직면한 기분이었다. 어쩌면 나는 쉽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쳐두고 너무 먼 길을 돌아온 걸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처음부터 내 모든 사정을 털어놓고 정체를 밝혔다면, 이런 냉정한 평가가 돌아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로웰 역시 내 설득에 더 귀를 기울였겠지. 종족의 여부를 떠나 그냥 나 자체로 다가서려 했던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시도였는지 이제야 실감이 들었다. 이들은 인간과 정령을 결코 같은 범주로 볼 수 없었다. 엘뤼엔의 말처럼, 서로 사는 세계가 너무 달랐으니까. 이제는 내가 그 속에 속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숨쉬기 힘들만큼 괴로워졌다. ============================= [정령왕 엘퀴네스] 12-6. 보석의 행방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정령왕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공국 전체에 퍼졌다. 워낙 목격자가 많기도 했지만, 제대로 입단속을 시키지 않고 돌아간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기 위해 다시 공국에 왔을 땐, 부상을 당한 귀족들은 모두 치료를 마치고 수도의 자택으로 돌아간 후였다. 루시엘과 펠리온 역시 수도에 있던 그들의 자택으로 송환되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이번 사건의 경위가 거의 드러나는 바람에 이미 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든 진실을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에 따라 나 역시 이번 사태를 일으킨 정령사 펠리온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함께 들리고 있었다. 가장 황당한 일은 제국의 황제로부터 나를 찾아내라는 수색명령이 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대외적으론 이번 사태를 수습한 공로를 치하하고 상을 주겠다는 핑계였지만 그 속을 누가 알겠는가. 어쨌든 그런 이유로 곳곳마다 무장한 기사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 나를 찾기 위해 눈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또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행여나 들킬세라 조심스럽게 돌아다녀야 했다. 엘뤼엔 역시 눈에 뜨이지 않게 자연체의 모습으로 변하여 이동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백날 가도 라미아스를 만나기가 어렵겠는걸.” 내가 이곳을 방문한 최종목적-즉, 보석의 행방을 알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그를 다시 만나야했다. 하지만 사방에 깔린 기사들의 숫자가 워낙 많다보니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마을로 통하는 모든 입구는 물론 세피온 공작의 자택으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철저히 감시하는 데서야, 남몰래 침입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연락을 취해보기도 전에 발각 되거나 포기하고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이런 내 곤란한 처지를 뻔히 알면서도 엘뤼엔은 나 몰라라 외면하고 있었다. 나는 반쯤은 항의하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철통같은 수비를 뚫고 어떻게 몰래 라미아스를 만나냔 말이야! 엘뤼엔! 그냥 텔레포트로 들어가자, 응?” -귀찮아. 그쯤은 너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라. “쳇, 너무해! 그거 좀 도와준다고 어디가 덧나?” -정 안되겠으면 그냥 기사들에게 발각되면 되는 일 아니냐. 네 평생 꿈도 꿔보지 못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만날 수 있을 거다, 아마. “그리고 그 다음은 알아서 빠져나오고 말이지?” -호오, 제법 상황파악이 빨라졌군. 그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아! 내가 속 터진 표정으로 씩씩거리자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지나가듯 한마디 이었다. -그 녀석을 만나야 하는데 굳이 네가 찾아갈 필요는 없는 거 아니냐? “뭐?” -여기서 네가 이럴게 아니라, 그 녀석더러 오라고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소리다. “아…!” 그때서야 나는 스스로의 융통성 없음에 깊이 탄식했다. 내가 모습을 감추는 것보다야, 폴리모프 마법이 가능한 라미아스 쪽이 정체를 숨기기 편하다는 것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 하지만 라미아스는 유희를 방해 받는걸 싫어한다며. 지금의 ‘세피온 공작’으로선 내 요청에 혼자 나와 주기를 바라는 건 무리지 않을까?” -물론 평소라면 그렇겠지. 허나 이미 녀석은 네게 어떤 대답이든 해주겠다고 약속한 바 있을 텐데?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라 그걸 위해서라도 네 요청을 거절하지 못할 거다. “아! 맞다, 그랬지!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거야?” -알아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지. 역시나 너무 무리한 바람이었던 것 같군. “뭐야? 인간은 원래 기억력이 나쁘다고! 약속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단 말이야. 그 정신없는 와중에 지나가듯이 한 말을 누가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어?” -별로 급한 용건이 아니었던 모양이지?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보통은 지나가듯이 한말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는 게 정상 아닌가? “윽…” 맞는 말이었기 때문에 나는 꼼짝없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반대로 엘뤼엔은 승자 특유의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턴 어쩔 작정이냐? 몰래 연락을 취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텐데? “흥, 누굴 바보로 알아? 그 정도쯤이야 식은 죽 먹기지.” 대답과 동시에 나는 즉시 시큐엘 한 마리를 소환했다. 지금까지 하급 정령들을 소환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상급의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과연 나이아스를 불러낼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은 소환되자마자 엘뤼엔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나를 보며 특유의 딱딱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불렀는가? ‘어쭈, 이놈 말투 보게…’ 생각해 보면 시큐엘은 상급 정령. 정령계에서 왕 다음으로 높은 직분을 가진 녀석으로서 인간을 얼마든지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의 존재였다. 황제인 이사나에게도 아무렇지 않게 반말하던 녀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서 ‘정령=부하’라는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나로선 이런 녀석의 행동이 무지 고깝게만 느껴졌다. 하급 정령들이 조잘조잘 반말로 떠들어대는 것은 귀엽게 넘어가줬지만, 왠지 이 녀석만큼은 용서가 안된달까? 그것은 아마도 시큐엘의 말투에 인간을 깔보는 듯한 억양이 서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불쾌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채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이곳 세피온 공작이라는 남자를 찾아가 내가 만나길 바란다고 전해줘. 아참, 답변으로 만날 장소도 알아다 주고.” -…상급 정령인 나를 고작 그런 일에 쓰겠다는 것인가? 늑대 주제에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 또한 당연하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의 정령 중에서 인간들에게 직접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 너밖에 없잖아. 그럼 엘퀴네스를 시키리?” -무엄한! 어찌 정령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가! “호오, 지금 안가면 정말 엘퀴네스한테 부탁해 버린다?” -가, 가면 되잖은가! 가면! 자신들의 왕을 부려먹겠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시큐엘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역시 시대는 달라도 왕을 향한 충성심은 그대로인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뿌듯한 표정을 하는 내게 엘뤼엔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살다보니 날 이용해서 정령을 협박하는 녀석이 나올 때가 다 있군. 내게 부탁하면 들어는 줄 거라 믿는 거냐? “훗, 상관없어. 중요한건 시큐엘만 그 사실을 모르면 된다는 거지.” -굳이 그런 식으로 안 해도 들어줬을 거다. “천만에! 그럼 내가 먼저 숙이고 들어가야 하잖아. 훌륭한 약점을 바로 옆에 놔두고 그냥 썩힐 순 없지! 두고 봐! 앞으론 두 번 다시 날 건방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다!” -무모하군. 정령이 억지로 굽힌다고 숙일 줄 아는 거냐? 정령사로서 기본적인 자각이 없군. “시끄러! 난 한다면 한다고. 엘뤼엔은 절대 참견하지 마!” 단단히 쐐기를 박을 생각에 험악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는 잠시 뜻을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이 되었다. 조금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던 그는 곧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너… “응? 내가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 저 독설가가 말을 망설일 때가 있다니!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는 모양이다. 집요할 정도로 바라보는 내 시선에도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나를 보며 뭔가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왔을 뿐. ‘참견하지 말라고 해서 화난건가? 그럼 그렇다고 말할 것이지 어울리지도 않게 저렇게 눈치만 주는 건 뭐래? 드디어 마음잡고 개과천선이라도 할 작정인가?’ 속으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그때 마침 시큐엘이 돌아오는 바람에 나는 얼른 그에 대한 신경을 껐다. 내 앞에 성큼 나타난 녀석은 이런 하찮은 심부름(?)을 맡은 것이 불만이라는 듯,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 -전달하라고 했던 사항 모두 틀림없이 전했다. 안 그래도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 만날 장소는?” -자신의 레어로 찾아오라고 했다. 그 편이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편히 대화를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뭐? 하지만 난 라미아스의 레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난 내가 들은 데로만 전달했을 뿐이다. 누가 엘뤼엔의 부하 아니랄까봐 녀석의 말투는 얄미울 정도로 그와 똑같았다. 기껏 도와주고도 고맙다는 소릴 못들을 타입이랄까. 그 증거로 나는 녀석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마나까지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이만 정령계로 돌아가 봐.” 마치 부하를 대하는 듯이 명령하는 말투에 시큐엘은 미간을 잔뜩 좁혔지만, 내 옆에 있는 엘뤼엔을 의식해서인지 잠자코 사라졌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이 넓은 세상 어디에서 라미아스의 레어를 찾으란 말인가! ‘대책 없는 도마뱀 같으니라고! 다짜고짜 오라기만 하면 다인 줄 알아? 확실한 길잡이라도 붙여두고서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말을…응? 길잡이?’ 복잡한 표정으로 방법을 궁리하던 순간, 나는 퍼뜩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에 황급히 엘뤼엔을 보며 물었다. “저기…그러고 보니 엘뤼엔이라면 찾아갈 수 있지 않아? 그 공간이동이란 거…아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갈 수 있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도 정령왕이라면 위치를 찾는 것쯤은…” 그러자 그는 무지 한심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그걸 이제야 깨달은 네 머리에 경의를 표하는 바다. “으윽, 역시! 그, 그래서 어쩔 거야? 데려다 줄 거야?” 여기서 그가 싫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설마 거절하지는 않겠지 라는 심정으로 나는 조심스럽게 엘뤼엔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별 수 없군. 녀석도 날 믿고 그런 소릴 지껄인 모양이니 특별히 데려다 주지. “와아! 고마워, 엘뤼엔!” -…그 엘뤼엔이란 이름은 그만 둘 수 없겠나? “응? 왜, 왜? 마음에 안 들어?” 혹시나 이름에 담긴 뜻을 알아버린 걸까? 평소보다 짜증스러운 그의 반응에 나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뭔가 더 말을 이으려는 듯 입을 열던 그는, 막상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푸욱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아니, 됐다. 그냥 너 편한 대로 불러라.” “…?” 기분 나쁘다는 투가 역력한 주제에 편한 대로 부르라니. 역시 이름의 뜻을 알아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도 묵묵히 묵인해주려고 하는 게 이상할 정도다. 아까 전 말을 망설이던 것도 그렇고…오늘의 그는 확실히 평소답지 않았다. ====================================== [정령왕 엘퀴네스] 12-7. 보석의 행방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뤼엔과 함께 도착한 곳은 어느 거대한 동굴 안이었다. 수 백 명의 사람들도 한 번에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이 넓은 공간은 마치 산 하나를 통째로 깎아 만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울퉁불퉁한 바위로 이루어진 천장과 벽, 흙바닥 외에는 그 안을 채우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여느 동굴이 그렇듯 이 안에도 전체적으로 축축한 습기가 가득했다. 아마 블루 드래곤이라는 그의 성향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여기가 레어라는 곳인가?’ 내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뒤편에서 들려왔다. “여어~ 어서와. 연락이 없기에 그냥 돌아가 버린 줄 알았다고.” “앗, 라미아스님! 먼저 와계셨군요.” 반가운 표정으로 돌아본 곳에는 예의 푸른 머리카락의 청년이 서있었다. 그는 한쪽 눈을 장난스럽게 찡긋 하며 대답했다. “손님을 초청한 주제에 더 늦을 순 없지. 내 레어에 온 것을 환영해.” “헤헤, 드래곤의 레어는 처음 와봤어요.” “그으래? 생각보다 볼 건 없지? 실은 이곳에 온 손님은 네가 처음이야. 나도 잠자는 용도 외에는 써본 적이 없는 곳이거든.” “엥? 그럼 평소에는 어디서 지내시는 데요?” “그야 유희를 다니지. 짧고 많은 인생을 즐겨보는 게 내 방식이거든. 그런데 엘퀴네스는 어디에 있어? 같이 안온거야?” “네? 바로 옆에 있잖아요.” “하지만 안 보이는데?”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의 말에 나는 무슨 소리냐고 반문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엘뤼엔은 자연체의 상태, 즉 나 외에는 누구도 볼 수 없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찌푸린 표정으로 요지부동으로 서있는 엘뤼엔을 보며 말했다. “엘뤼엔. 뭐해? 그냥 계속 그 상태로 있을 거야? 대화를 하려면 모습을 보여야 하잖아.” -용건은 네게 있던 거 아니었나? 난 이대로가 더 편하다. “하지만 라미아스님이 답답할 텐데…” -그건 그놈 사정이지.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하긴 그로선 툭하면 귀찮게 달라붙는 도마뱀이 달갑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곤 왜인지 멍하게 입을 벌리고 있는 라미아스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엘뤼엔은 지금 이대로가 편하대요.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냥 여기서 하세요. 어차피 다 듣고 있으니까. 대답은 제가 전해드릴게요.” “잠깐…설마 너…소환되지 않은 형태의 정령들을 볼 수 있는 거냐?” “네? 아, 제가 아직 말씀 안 드렸었나요?” “말 안했어! 우어어~ 정말 보인다고? 자연체의 정령들이 보여??” 더 이상 커지지 않을 정도로 눈을 부릅뜬 라미아스는 아플 정도로 내 어깨를 강하게 잡고는 소리쳤다. 지금까진 다들 사실을 알아도 그냥 그러려니 넘어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갑작스런 그의 이런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에…그, 그런데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당연하지!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는 거야? 네 자체가 정령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친화력이 엄청나단 거잖아! 게다가 말도 듣고 대화도 가능하다니!” “하하, 그래도 정말 정령처럼 물을 다루거나 하지는 못해요.” “어째서 그렇게 태연한 거냐? 네 능력은 보통의 인간들과 판이하게 다르다고! 전무후무한 일이란 말이다! 조금은 더 놀라보라고!” 이거, 내 정체가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라고 하면 심장마비라도 걸릴 사태인 걸?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라미아스는 더욱 얼굴을 찌푸렸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킨 듯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긴, 태어날 때부터 그런걸 봐왔다면 새삼 놀라는 게 더 이상하겠지. 지금까지 용케 눈에 띄지 않고 살았군.” “하하, 뭐…” “웃을 일이 아니야. 네 그 능력을 알았다간 악용하려고 달려들 인간이 수천일거다. 뭐 엘퀴네스가 옆에 있으니까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앞으로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할 거야.” “네, 명심할게요.” 내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하는 것을 본 그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웠지만, 드래곤치곤 참으로 소심하달까? 이런 내 생각을 느꼈는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허둥지둥 화제를 돌렸다. “엘퀴네스가 나타나지 않겠다면 아쉽지만 별 수 없지. 아참, 그러고 보니 이제껏 계속 세워두기만 했군. 이거 손님 대접이 영 시원치 않은걸? 자자, 일단 앉아.” “네? 앉으라니…어디에요?”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 참이었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눈앞에서 갑자기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떡하니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보란 듯이 의자에 앉는 라미아스를 보며 나 역시 어색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테이블 위에 주전자와 찻잔이 덩그라니 떠올랐다. 그것들은 누가 건들이지도 않았는데도 스스로 둥실 떠올라 잔에 차를 따른 다음, 나와 라미아스의 앞에 다소곳이 놓였다. 내가 그것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이 라미아스의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셔. 하이엘프들이 직접 키운 허브로 우려낸 차야. 대충 마실 만 할 거다.” “네, 감사합니다. 방금 전의 그건 마법인가요?” “응. 평소에 모두 갖춰둘 수 없으니까 그때그때 필요할 때만 꺼내 쓰는 식이지. 그런데 내게 물어볼 것이 있다고?” “아아, 네.” “가능한 느긋하게 대화하면 좋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번 사건 때문에 내가 좀 바빠졌어. 지금도 잠깐 쉬고 싶다는 핑계로 사람들을 물리고 온 거야. 그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으면 하는데.” “그건 상관없어요. 제게도 꽤 급한 용무거든요.” 나는 다행이라며 웃는 라미아스에게 곧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라미아스님을 찾아온 건 영혼의 보석을 모으는 취미가 있다고 들어서예요. 실은 저도 그걸 찾고 있거든요.” “영혼의 보석? 아아, 그거라면 헤츨링 시절부터 모았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었어? 겉보기엔 보통 보석에 비해 오히려 밋밋하고 장식적인 가치도 없는데.” “그런 것 때문에 찾는 게 아니에요.” “그럼 역시 다른 물건과 조합시키려고? 그런 걸 만들어서 뭐하게? 너라면 그런 물건의 도움 없이도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뜻을 이룰 수 있잖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는 그에게 나 또한 같은 시선으로 되받아 쳤다. 그런 자신도 그 말에 해당된다는 걸 모르나보지? 그러자 내 눈빛의 의미를 읽은 라미아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흠흠 헛기침을 내뱉었다. “하긴 뭐 취미는 다양한 거니까. 그런데 그건 나도 상당히 아끼는 거라서 쉽게 줄 수 있는 게 아닌데.” “일단 보여주시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실제로 본적이 한 번도 없거든요. 가능하다면 그 보석과 접목시킨 물건들도 보고 싶은데요.” “뭐, 보여주는 거야 그다지 어렵진 않지. 그럼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봐.” 대답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라미아스는 레어의 한 귀퉁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아마 여러 통로를 두어 창고를 따로 관리하고 있는 듯 했다. 기다리는 동안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니 나도 모르게 손끝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평생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라지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힘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까. 만약 운이 좋으면 이번에 라피스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 나는 온 몸이 들뜨는 기분이었다. 그런 나를 향해 엘뤼엔은 특유의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단순히 취미로 모으려는 건 아니지 않았던가? 꼭 뭔가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만. “아하하, 그야 뭐…” -저 녀석이 저래 봬도 눈치는 빠른 편이다.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구하는 편이 나을 거야. 자신을 믿지 않은 자에겐 호의를 베풀지 않는 성격이니까. “으응, 알았어.” 그의 충고에 나는 조금은 뜨끔한 심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라피스를 찾는 것을 설명하자면, 필수적으로 내 정체에 대해서도 털어놔야 한다. 그래서 현재로선 가능한 이유를 밝히지 않고 보석만 챙겨가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았다. 뭐, 그것도 여기에 라피스가 있다는 전제하의 이야기에서지만. “여어, 기다렸지?” 잠시 후 라미아스는 한 손에 보석함을 든 채로 걸어왔다. 필시 영혼의 보석이 담겨있는 것이리라. 나는 아까전보다 더욱 빠르게 뛰는 심장을 느끼며 애써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러자 라미아스는 피식 웃고는 내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도록 안의 것을 테이블 위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그러나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일까? 바짝 긴장하고 있던 나는 다음 순간 허탈한 심정으로 눈앞의 것들을 훑어보았다. “이게…영혼의 보석이에요?” 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리 장식적인 가치가 없다곤 했지만, 이건 길에 굴러다니는 돌조각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가공되지 않은 보석 원석정도는 될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단단한 착각이었다. 어째서 이런 것에 ‘보석’이란 호칭이 들어갔는지도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것에 라피스가 들어있다니…’ 그러자 나의 실망한 표정을 보았는지, 라미아스가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러게 별로 예쁘지는 않다고 했잖아. 이걸 수집하는 녀석들 중에서도 나처럼 보석 자체만 모아두는 경우는 별로 없어.” “으으. 그럴 만도 하네요. 설마 이렇게 평범할 줄은 몰랐어요. 그냥 봐선 그냥 돌조각이랑 구분할 수가 없겠는데요.” “맞아. 하지만 이런 것도 다른 것과 조합해서 세공하면 이렇게 훌륭한 장식품이 되지.”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내민 것은 화려한 황금색의 장식이 된 장검과 목걸이였다. 척 보기에도 아름다웠지만 특히 가운데 박힌 보석이 선명한 빛을 발하여 더욱 돋보였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건네받은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갑자기 울리는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네가 나의 주인이 될 자인가?> “헉! 마, 말했다!” “하하! 그게 바로 에고소드 라는 거야. 참고로 이번 검술대회의 상품이기도 했지. 여기 박혀 있는 이 보석이 아까 그 볼품없는 돌덩어리를 가공한 결과야.” “엣? 정말요?” “믿기 힘들지? 뭐, 그만큼 세공솜씨가 뛰어난 자가 아니면 다루지도 못하는 물건이지만 말이야. 이 세상에서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건 우리 드래곤이나, 장인으로 이름 높은 드워프들 밖에 없어.” “헤에, 그렇군요.” 신기한 표정으로 대답하면서도 나는 눈으로 연신 보석들을 훑었다. 제발 이들 중에서 제발 라피스를 담은 보석이 있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10여개가 넘는 영혼의 보석들 중에서 녀석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혹시나 싶어 이미 마법 물품으로 가공된 것들까지 전부 살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무리인가…’ 기대가 클수록 실망도 큰 법. 나는 온 몸의 힘이 쭈욱 빠지는 것을 느끼고 힘없이 의자의 등받이에 기댔다. 한 번에 라피스를 찾을 거라고 생각한건 아니었지만, 역시 일이 성사되지 않았을 때의 충격은 견디기 어려웠다. 아니, 어쩌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생각에 눈 앞이 캄캄해진 것일지도 모른다. ‘이제 누굴 찾아가야 하는 거지?’ 이것을 수집하는 드래곤이 라미아스 하나만은 아니겠지만, 워낙 희귀한 것이니 만큼 어느 드래곤도 그보다 많은 양을 확보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자들은 발견 즉시 십중팔구 마법물품으로 만들어버린다고 하니, 녀석을 온전한 보석 상태로 만날 가능성이 더더욱 희박해진 셈이었다. 설령 누군가에게 아직 발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해도 문제다. 이렇게 평범한 돌조각과 구분이 안 되는 것을 날더러 무슨 수로 찾아내란 말이야! 내가 연신 한숨만 내쉬자 라미아스는 보석을 다시 함에 집어넣는 것을 중단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어왔다. “보고 싶은 것을 봤는데 표정이 왜 그래? 너무 볼품없어서 실망했어?” “아, 아뇨, 그게 아니라…저어, 이것 말고 다른 보석들은 누구한테 있을까요?” “흐음~ 글쎄. 아마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걸? 실상 여기에 있는 게 전부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거다. 최근에 내가 전 대륙을 돌면서 영혼의 보석과 관계된 아이템들은 거의 다 모았거든. 아, 그래! 로드 드래곤한테 한 개 있다고 들었고, 레드 드래곤 중에서 실비아란 녀석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군. 나처럼 특이한 걸 모으는 게 취미인 녀석이니까.” “하아. 그렇군요…”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고 있다면 관둬. 그 녀석들이 가지고 있는 보석도 내거랑 별반 차이 없으니까. 아니면 무슨 다른 사연이라도 있는 거야?” 그 말에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지금의 내겐 그에게 조언을 구하는 방법 외에는 달리 선택할 길이 없었다. 엘뤼엔의 충고도 있겠다~ 마음의 결심을 굳힌 나는 그에게 되도록 자세한 설명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여기서 진실 전부를 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내 나름대로 설정을 살짝 바꿀 생각이었다. ==========================================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신돈웃음 아님) 죽여주십시오..(털썩!) 절대로 절대로 놀아서 늦은게 아닙니다; 매일 밤새가면서 열심히 쓰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계속 글이 안써져서;; 새벽 내내 한 두장 쓰고 뻗어버리는 일이 태반이라;; 분량 부족으로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아.ㅠㅠ 실은 앞 내용 중에서도 수정할 것이 태반이라;; 계속 올릴까 말까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더 기다리시게 하면 안될 것 같아서;; 눈 딱 감고 올립니다.ㅠㅠ 오랜만에 온 주제에 올린 연재분이 달랑 5편이라 죄송해요;; 다음 편도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마감 때는 이상하게 모기에 접속을 잘 안하게 되는지라;; 본의아니게 웅덩이 글의 답변도 달지 못했습니다;; 기다려 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이 게으른 작자를 용서해 주십시오..ㅠㅠ p.s- 아르르1004님, 늦었지만 12월 2일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먼 타국에서도 엘퀴네스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ㅅ; 엘퀴네스님과 탕구리님, 루시오네님, 侑陳님! 이전 리플과 쪽지로 이름 불러 달라고 요청해 주셔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하하하하핫! <- 혹시나 빠진 분이 있다면 죄송;; 모두 행복한 하루 되세요^^ 이름 부르기 이벤트는 여기까쥐입니당~ 냐하하하<-언제부터 이벤트?-_-; p.s- 아참, 이번에 수능 보신 고 3여러분과 수험생 여러분 다들 너무 수고 많으셨습니다. <-언제적 이야기냐! 시험 기간이신 분들도 모두 화이팅! 열심히 공부하셔서 좋은 성적 거두시길 바랄게요^^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정령왕 엘퀴네스] 12-8. 보석의 행방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실은…제가 찾고 있는 보석이 따로 있어요.” “흐음? 영혼의 보석에도 종류가 있던가? 너도 보면 알겠지만 다 그게 그건데. 물론 색깔의 차이야 조금씩은 있지만.” “아뇨, 그런 차이가 아니라…제 친구를 살릴 수 있는 보석이에요.” “엥? 친구라니?” 이 말에는 엘뤼엔 역시 놀란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에 대한 어떠한 일언반구도 없었던 주제에 갑자기 친구 운운하니 황당해 할만도 했다.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담담하게 받아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실은 얼마 전에 제 친구가 저주를 받아서 혼수상태에 빠졌거든요. 당장은 목숨에 지장이 없지만 계속 깨어나지 않고 잠만 자는 거예요. 신관님께 문의를 드려봤는데, 녀석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와 상성이 맞는 영혼의 보석을 몸에 소지하는 것뿐이랬어요. 저는 그걸 찾고 있는 거예요.” “에엥? 그런 저주도 있어?”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묻는 말에 나는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저주가 많은 데요! 그 녀석은 지금 꼼짝없이 누워서 하루가 멀다하고 말라 죽어가고 있어요. 얼른 찾아서 돌아가야 돼요.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건 그렇겠지. 인간들이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보면 구별할 수는 있는 거냐?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그게 없다고 어떻게 장담하지?” “그, 그건요…아아, 그래! 뭐랄까…제가 남들보다 감각이 좋다고 해야 하나? 사람이나 물질마다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을 구분할 수 있거든요. 지금 여기 있는 보석들도 각자 풍기는 기운이 달라요. 그러니까 친구의 기운과 동일한 걸 찾으면 될 것 같은데…” “흐음. 하긴, 자연체의 정령들을 볼 수 있을 정도라면 그 정도쯤은 어렵지 않겠군. 근데 만약 전부 다 살펴봐도 없으면 어떻게 하려고?” “아뇨! 분명히 있어요! 예지력을 가진 신관의 말이었으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호오, 그렇군.” 얼렁뚱땅 급조한 변명거리가 예상외로 먹히고 있었다. 난 혹시 임기응변의 천재가 아닐까? 내가 속으로 몰래 기뻐하던 순간이었다. -친구의 목숨을 살릴 보석이라…그래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했던 거냐?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서있던 엘뤼엔이 별안간 흥미를 보이며 물어왔다. 그라면 내 설명의 허점을 알아챌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바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어? 아, 으응…” -이 넓은 대륙 어디에서 나올 줄 알고 시작한 건지. 너도 참 대책 없는 성격이군. “어, 어쩔 수 없잖아. 그대로 놔둘 순 없으니까.” -흐음. 그 저주라는 것은 마신과 관계된 건가? “엥? 마신이라니?” 그러자 맞은편에서 눈빛을 빛내고 있던 라미아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엘퀴네스가 뭐라고 그래?” “아, 아뇨. 그 저주가 마신과 관계된 거냐고 해서…” “마신?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군!” “네에? 라미아스님까지 무슨 소리에요?” 저주는 그저 마땅히 떠오르는 핑계거리가 없어서 억지로 지어낸 구실일 뿐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카노스가 언급되자 나는 황당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나에게 라미아스는 뜻밖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영혼의 보석을 소유해야만 낫는 병이라면, 그만큼 네 친구의 영혼이 쇠약해져있다는 상태 아니냐. 그걸 대체하기 위해 보석의 기운을 빌리는 거니까. 그런 사악한 저주는 마신의 사제들이 아니면 쓸 수 없지.” “에에…마신의 사제들이 저주도 거나요?” “몰랐어? 그게 그놈들 특기인데. 마족과 연관된 능력이라 죄다 공격형이지. 신의 사제 중 유일하게 치유술을 사용할 수 없는 놈들이잖아.” “그야 알지만. 뭐, 마신의 사제가 저주를 걸었다 치죠. 그런다고 뭔가 달라질게 있나요?” “왜 없어? 굳이 보석을 구할 게 아니라 그 저주를 건 놈을 잡아 죽이면 해결되는 건데. 그게 아니라도 그 저주건 녀석보다 더 높은 계열의 사제에게 풀어달라고 부탁하면 간단히 끝나잖아.” “!” 거기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환한 표정이 된 그와 달리 나는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그가 마신교를 공격하러 가자거나, 저주건 놈을 알아오라고 하면 일이 더 복잡하게 꼬이게 되는 것이다! 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도 모르고 라미아스는 한결 가뿐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러면 될 걸 괜히 고민하고 있었잖아. 너도 상성이 맞는 보석을 찾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더 쉽고 편할 거다.” “자, 잠깐만요! 저주를 건 장본인은 이미 죽었어요. 그래도 여전히 친구 녀석은 그대로인 걸요!” “그래? 흐음. 시전자의 목숨에 영향을 받지 않는 주술인가? 꽤나 지독한 저주일세. 뭐, 그래도 더 높은 능력자라면 해결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세피온 공작으로서 알아봐다 주마. 내 신분이면 마신교에다 기별을 넣는 것쯤이야 간단하지.” “네, 네? 마신교에다가요?” “그래. 어쩌면 대사제가 직접 네 친구를 보러 가줄 수도 있다고. 그럼 십중팔구 나을 걸?” 맙소사. 있지도 않은 친구를 어떻게 보이란 말이야! 나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건 절대 안돼요!” “왜 그래? 그렇게 필사적으로… 혹시 그놈들한테 알려져서는 안 돼는 일 인거냐?” 다행히 라미아스는 내가 마신교에게 당당히 나설 수 없는 피치 못 할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듯 했다.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엘뤼엔을 쳐다보았다. 이게 다 그가 쓸데없이 마신에 대해 언급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방해를 할 건 뭐란 말인가! 그러나 내가 노려보든 말든 그는 여전히 무심하게 상황을 방관하고 있었다. 아니 평소보다 심각해 보이는 얼굴을 보아,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있는 것 같기도 했다. “흐음.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할 수 없지. 일단 기다려 봐. 다른 드래곤들에게 있는 보석들 전부 가져와 볼 테니까.” “네?” “혹시 그중에서 찾는 게 나올지도 모르잖아. 잠깐 빌려달라고 할 테니까 한번 보기나 해봐. 단, 네가 찾는 게 나와도 그걸 얻는 것은 순전히 네 노력여부에 달렸지만.” “아, 가, 감사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도와줄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게 라미아스가 사라지고 나자, 나는 십년은 한꺼번에 늙어버린 심정으로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휴우, 큰일 날 뻔 했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을 들었는지 낮게 혀를 찬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움을 준다고 해도 싫다는 군. “윽! 누가 마신교까지 찾아가자고 했어? 그런 건 오히려 쓸데없는 배려라구!” -어째서지? 네가 마신의 사제라서 인가? “엥? 내가 왜 마신의 사제야?" 또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싶어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엘뤼엔은 아랑곳 않고 말했다. -네 손등에 새겨진 신의 문장 말이다. 그게 아니라도 네 몸 전체에 흐르는 마신의 기운은 어떻게 설명할 셈이지? “그,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다고 했잖아. 그냥 정말 아무의미 없이 받게 된 거라고. 전엔 수긍하고 넘어가더니 왜 갑자기 따지고 드는 거야?” -수긍한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을 뿐이다. 자신의 문장을 아무의미 없이 내리는 신도 있던가? 당연히 카노스는 그러고도 남을 신이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마왕의 부하로 지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자가 아니던가.(명목상은 마계의 감시였지만.) 하지만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간 의심만 더욱 가중될 것 같아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정말 난 신관 아니야. 마신교에선 나라는 녀석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을 걸?” -그럼 굳이 그곳에 찾아가지 않으려 하는 이유는? “하하, 그게 좀 그렇잖아. 저주를 내린 장본인이 마신의 사제인데, 해결해 주기는커녕 다들 같은 편이면 어떡해? 보석을 찾는 것까지 방해할지도 모른다고.” -그만큼 대단한 죄를 저질렀나? 저주는 왜 받은 거지? “아하하, 그 글쎄. 난 그저 녀석을 살릴 방법에 대해서만 들었을 뿐이라…보석을 찾아야 한다는 것 말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는데.”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말이냐? 역시 너무 급조한 티가 나는 것인지 이제 그는 슬슬 의심스럽다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또다시 닥친 시련에 나는 어떻게든 변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으음, 단서 라긴 뭐하지만, 실은 난 이 제국 사람이 아니야. 저주를 풀 방법을 알려준 사람이 그 보석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보내줄 수 있다고 해서 응했는데, 눈 떠보니 이곳에 떨어져 있던 거거든. 즉 여기 어딘가에 있다는 소리지.” -가까우나 마나 모래사장에서 진주를 찾으라는 요구만큼이나 터무니없긴 매한가지로군. “아하하…뭐, 어차피 처음부터 고생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니까 상관없어. 어쨌든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거잖아.” 자, 이래도 반박할 셈이냐! 라는 눈빛으로 쏘아주자 엘뤼엔은 침묵인지 긍정인지 모를 묘한 침묵에 젖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라졌던 라미아스가 다시 돌아오면서부터 나와 그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중지되었다. “여어~ 기다렸지?” “앗, 라미아스님!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분들이 순순히 빌려주시던가요?” “응. 사실 나 같은 수집가들이 아니고서야 별로 애착을 가질 정도의 물건은 아니거든. 내친김에 마법물품으로 개조시킨 것까지 죄다 가져와봤으니까 한번 확인 해봐.” 또다시 희망을 품어도 좋은 걸까. 나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라미아스가 테이블에 올려놓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막상 보석을 받아본 순간 내 기대감은 금방 실망으로 변하고 말았다. “…없는 것…같네요.” “그래? 이런… 내가 구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인데. 아직 발견되지 않았거나, 드래곤 외의 다른 종족이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게 옳겠군. 이거 쉽게 찾기 힘들겠는걸.” “하아, 그렇군요…” 이 썩을 놈의 자식은 대체 어디 가서 박혀 있기에 아직까지 드래곤의 눈에 띄지 않고 있는 거얏! 상심한 나는 애꿎은 라피스를 욕하며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려 노력했다. 평소에도 이쁜짓 한 적은 없지만 이렇게까지 녀석이 밉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아마도 두 번에 걸쳐 연달아 허탈감을 느낀 탓 때문이겠지만. ================================================ start!!! [정령왕 엘퀴네스] 12-9. 보석의 행방 (4)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뭐? 영혼의 보석을 주로 어디서 찾냐고?” 언제까지나 절망에 빠져있을 수많은 없는 일. 내가 마지막으로 매달린 방법은 라미아스로부터 직접 보석을 채취하는 요령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헤츨링 시절부터 수집했다는 그라면 틀림없이 일정하게 발견되는 장소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의해서였다. 내 질문이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던 그는 곧 곰곰이 생각에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글쎄…아, 그래. 특별히 일정한 장소는 없는데 한정된 조건은 있어.” “조건이오?” “응. 주로 인간의 손이 잘 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는 확률이 높더군. 예를 들면 산맥의 고원(高原) 같은 데 말이야. 난 주로 그쪽을 뒤지는 편이야.” “고원이라고 해도…상당히 넓잖아요. 그걸 전부 일일이 둘러보시는 건가요?”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 장소에 보석이 있다는 것만 알면 며칠이든 몇 년이든 쏟아 부을 수 있어. 긴 수명을 가진 종족의 장점이지.” “보석이 있다는 건 어떻게 아는데요?” “간단해. 의식을 조금만 집중하면 보석이 내뿜는 영혼의 향기가 느껴지거든. 육체가 배제되어있는 탓인지 어느 것보다 순수하고 선명하지.” 아아. 그러고 보니 드래곤들은 영혼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고 했던가. 이왕이면 나도 드래곤이 되는 편이 좋았을 텐데. 나는 뿌듯한 얼굴로 보석을 만지작거리는 라미아스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야? 너도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며. 걱정 마. 네가 비록 인간이긴 하지만, 그 정도의 감각이라면 금방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네? 으으. 무리에요. 전 산맥 전체를 통틀어 기운을 느끼는 제주 따윈 없다구요. 보석의 유무를 확인할 길도 없을뿐더러 하나하나 직접 일일이 비교해 봐야 하는데, 그 수많은 돌덩어리들을 언제 다 살펴보겠어요?” “흐음, 그런가. 하긴 인간은 우리처럼 시간에 자유로운 종족이 아니니까, 느긋하게 처리하긴 어렵겠군.” “아마 평생이 걸려도 모자를 걸요. 제가 먼저 지쳐서 죽을지도 몰라요.” 내 푸념에 듣고 있던 라미아스까지 덩달아 심각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곤란하네. 내가 시간이 널널하면 동행이라도 해줄 텐데. 이래봬도 책임감이 깊은 성격이라서 말이지…이번 일을 수습 하는 데만 통상 몇 달은 걸릴 것 같거든. 게다가 현재까지 후계자도 없는 상황이라 오래 동안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데…”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실례를 끼칠 순 없죠. 으음. 하다못해 어느 곳에 있는지 만이라도 알게 되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럼 거기서 몇 년이고 조사해 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자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듯이 한마디 내뱉었다. -그거라면 별로 어려울 게 없는 것 같은데. 네가 날 소환한 장소가 어디였는지 생각해봐라. “응? 엘퀴네스를 소환한 장소? 아앗! 맞다! 거기도 고원이었지! 하, 하지만 거기에 있을 거라는 보장은…” -멍청하긴.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을 잘 기억해봐. 너를 이곳으로 보낸 자가 뭐라고 말했다고 했지? 쯧쯧 혀를 차며 묻는 말에 나는 찌푸린 얼굴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퍼뜩 떠오르는 기억에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설마…보석과 가장 가까운 장소로 보내주겠다는 거?” -그래. 그리고 눈을 떠보니 그 고원에 떨어져 있었다는 소리 아니었나? 그 말대로 하자면 바로 거기가 네가 찾는 보석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는 소리잖아. “!”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건넨 핑계였으나 나는 그 순간 마치 망치로 머리를 두드려 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였다. 그의 말 속에서 내가 미처 간과하고 있었던 한 가지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내가 라피스를 찾겠다는 결심을 굳혔을 때, 엘뤼엔은 보석이 있는 차원으로 보내주겠다고 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라피스의 영혼이 흘러간 것과 ‘똑같은 궤도’에 넣어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즉, 녀석이 보석이 되어 떨어진 ‘장소’와 동일한 곳에 나 역시 떨어졌다는 소리가 아닐까? ‘맙소사…’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보석이 있는 곳이 하필 내가 이곳으로 와서 처음 시작한 출발점이라니. 단서를 찾았다는 기쁨보다 허무감이 더 크게 밀려들어왔다. 문득 지난날의 여정이 슬로우 모션으로 머릿속에서 지나가기 시작했다. 엘뤼엔의 냉담한 태도에 상처받고, 트로웰의 협박에 눈물 삼키며, 노예시장에서의 탈출과 검술을 배우기 위해 고난을 당하던 그 모든 세월이… 전부 헛고생이었다는 거잖아! “뭐 이런 황당한 경우가…” -표정을 보니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모양이군. “못했어. 정말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이건 말도 안 돼…” -그런가. 나로선 그런 힌트를 듣고도 여기까지 온 네가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역시 머리가 나쁜 녀석은 어쩔 수 없군. “으윽! 안 그래도 열 받는데 부채질 좀 하지 마, 엘퀴네스!” 미래의 그라도 지금의 나를 봤더라면 굉장히 한심해 했을 것이다. 나름 편해지랍시고 혜택을 준 것을 싸그리 무시하고 엉뚱한 곳이나 헤매다니! 아무렇지 않게 빽 소리치긴 했지만 사실은 너무 민망한 나머지 똑바로 고개를 들고 엘뤼엔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라미아스는 그런 나를 어리둥절한 얼굴로 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 거야? 엘퀴네스가 뭐라고 그래?” “으으…라미아스님, 그게요…” 마침 어떻게든 시선을 돌릴 곳이 필요했던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얼른 그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물론 엘뤼엔에게 말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의 핑계였다. 그렇게 모든 설명이 끝나자 그 역시 엘뤼엔 만큼이나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보석과 가까운 장소에 보내주겠다고? 뭐야. 출발 전에 그런 얘길 들었으면 당연히 도착한 곳부터 제일 먼저 뒤졌어야지. 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저, 저는 무조건 보석을 소유한 사람부터 찾아야겠다고 생각해서…이미 누군가에게 발견 되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나~참. 지금처럼 아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쩌려고? 너도 참 답답하다. 그래, 제일 처음에 도착한 곳이 어디였다고?” “으음. 에델 왕국의 마라얀 지방이란 곳에 있는 오렌이라는 마을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내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며 답하자,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언갈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그는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말했다. “다행이다. 일단 내가 알고 있기론 아직 그 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영혼의 보석은 없어. 찾을 기회가 남아있을 있을지도 몰라.” “정말요?” “그래. 하지만 그 지역은 엘프들의 숲이 바로 지척이니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어. 만약 놈들 중에 누군가가 주워간 거라면 더 골치 아플거다. 숲 자체에 인간들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 희망이 보일라 치면 곧바로 절망이 뒤따르니 마음 놓고 기뻐할 수만도 없었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라미아스는 마침 생각났다는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 블루 엘프를 데려가 보는 건 어때? 만약의 경우 놈들을 설득하는데 유리할 수도 있잖아.” “네? 블루 엘프라니…아! 시벨리우스요?” “그래, 그 요리사말이야. 성향은 다르지만 일단은 같은 종족이니까 엘프를 설득하는 일이라면 인간인 너보단 훨씬 경계 없이 다가설 수 있을 거다. 그 쪽도 널 상당히 따르는 것 같은데, 이참에 여행권유라도 한번 해보지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녀석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던 참이었다. 폭주 현장을 수습하다가 말도 없이 사라졌으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나란 녀석의 무심함에는 이제 스스로 질릴 정도다. 나는 살짝 혀를 차며 라미아스를 향해 물었다. “그래야겠네요.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아세요?” “어디긴. 내 저택 앞에서 시위중이다.” “네?” “지난번에 내가 너랑 친분이 있다는 걸 알아버렸잖냐. 널 숨긴 장본인이 나라면서 얼마나 볶아대는지. 매일매일 찾아와서 널 내놓으라고 채근하는 통에 나도 곤란하던 참이었어.” “하하하…” 대체 시벨리우스는 그놈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 걸까? 내 기억으론 아직 녀석이 그렇게까지 날 찾을 만큼 친해진 적이 없는데 말이다. 노예시장에서 봤던 이지적인 분위기는 죄다 환상이었던 모양인지, 날이 갈수록 망가지는 녀석의 작태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게 라미아스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경고했다. “조심해라. 그 녀석 널 여자로 알고 있는 모양이니까.” “…라미아스님까지 그 소리에요?” “얼래. 엘퀴네스도 같은 말을 했던 모양이지? 하긴, 그냥 친한 친구를 보는 눈이 아니긴 하지. 뭔가 흑심을 품은 눈빛이거든. 클클클…” “나, 남자라고 말할 거예요!” “에, 그래? 재미없게시리. 조금 더 놀려먹다가 밝혀도 좋잖아?” “놀리고 싶은 건 라미아스님이면서!” “이런, 들켰나?” 나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라미아스를 노려본 다음 곧바로 엘뤼엔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자, 엘퀴네스.” -그 쓸데없는 망아지도 데려갈 생각이냐? “응. 일단 권유는 해보려고. 아, 물론 내가 남자라는 사실은 밝히고 나서. 왜? 엘퀴네스는 싫어?” -네 일이니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과연 네가 암컷이 아닌 사실을 알아도 동행할지는 의문이군. “뭐 어차피 한번은 겪어야 하는 일이니까.” 태연한 표정으로 답하면서도 나는 슬쩍 오한에 떠는 팔을 문질렀다. 대체 그 녀석은 왜 나를 여자로 오해하는 걸까? 생긴 게 예쁘장해서? 아무리 여자같이 생겼다지만 나는 가슴도 없고 목소리 자체도 여자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게다가 명색이 유니콘인 주제에 남자와 여자의 성별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내 신병을 요구했던 기사 녀석이 그 앞에서 똑똑히 날더러 ‘소년’이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때도 그냥 넘어갔지. 설마 못 들었나?’ 뭐, 그땐 정말 대충대충 듣고 있는 티가 역력하긴 했다. 어떻게든 날 빼돌려서 피하게 만들 생각뿐인 것 같았으니까. 만약 알면서도 모른 척 한 거라면 정말 놈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 봐야겠지만.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라미아스님. 시간 많이 뺏어서 죄송했습니다.” “아냐. 이정도 쯤이야 뭘. 어쨌든 가능성을 발견해서 다행이다. 나중에 찾게 되면 꼭 연락해줘.” “네, 그럴게요. 엘퀴네스와 대화 못해서 섭섭하진 않으세요?” “본인이 싫다는데 어쩔 수 있나. 아참, 한 가지만 묻자. 너 전엔 엘퀴네스더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어? 근데 지금은 꼬박꼬박 이름으로 부르네?” 그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가 금방 태연한 척 표정을 가장했다. 설마 그 약간의 변화를 알아챌 줄이야. 왠지 엘뤼엔이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 같은 건 착각이겠지? “아, 네. 아무래도 안 어울리는 호칭 같아서요. 라미아스님 말마따나 이렇게 젊은 아빠가 어디 있어요?” “흠, 그래? 실은 은근히 어울리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지. 왠지 아쉽네.” “어울린다고요?” “응. 그게 말이지. 가끔 보면 뭐랄까. 네 분위기가 엘퀴네스랑 묘하게 비슷한 구석이 있거든. 쩝, 그럼 이제 다신 아버지라고 안하는 거냐?” “아아, 네. 아무래도 …니까.” “응? 뭐라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의아한 얼굴로 다시 묻는 그에게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으며 웃어보였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트로웰이나 다른 정령왕들을 가족처럼 여기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얼마 전 엘뤼엔으로부터 정령과 인간의 차이점을 분명히 자각한 뒤로 결심한 일이었다. 지난 17년 간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내가 정령들을 가족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미 신으로서 나와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되어있던 엘뤼엔을 아버지로 인정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 그때는 그렇게도 억지로 강요받던 관계를… 이제 우습게도 그 쪽에서 먼저 놓아버렸다. 단지 내 육체가 정령이 아니게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소한 사실이 미래의 나와 그들의 관계까지 송두리째 뒤흔들 줄이야. ‘인간의 운명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를 외면한 이전의 가족들과 다를 게 없잖아.’ 말하지 않아도 알아봐주는 애정을 느끼고 싶었다. 같은 정령왕으로서의 ‘동질감’이 아니라,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깊은 유대감을. 소설이나 영화에서 보면 늘 나오는 진한 혈육의 이끌림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망인지 이번에 확실히 깨닫고 말았지만. ‘그러니까 이제 나도 노력하지 않을 거야.’ 나는 연신 아쉬운 표정을 하는 라미아스를 뒤로 한 채, 방금 전 나도 모르게 나올 뻔한 대답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포기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니까.’ ============================================= ※ 주의 ※ 엘이 엘뤼엔을 부르는 호칭이 '엘뤼엔'에서 '엘퀴네스'로 수정되었습니다. [정령왕 엘퀴네스] 12-10. 보석의 행방 (5)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밑에서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든 말든, 정령계는 여전히 평화롭고 한산했다. 비록 미네르바의 봉인이라는 불미스러운 일이 잠깐 있었으나, 휘하의 정령들이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네르바가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린 후, 봉인을 해제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일 뿐이었다. 오늘로서 마침내 불의 영역의 복구에 성공한 이프리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아주 오랜만에 정원을 방문했다. 그래봤자 천 년 전에 보던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늘 바쁘고 복잡하게 변해가는 인간 세상과 달리 정령계는 언제나 똑같았고 변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정원의 풍경이 아름답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조금 단조롭긴 하지. 역시 자극을 받으려면 인간세상만큼 좋은 게 없다니까~”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허리를 피고 기지개를 켰다. 이대로 아무 곳에나 누워서 잠이나 푸욱 청하면 좋을 것 같았다. 지금은 이렇듯 여유 있지만 사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는 역소환의 충격을 수습하지 못해서 내내 앓고 있었다. 아무리 큰 고통이어도 영역 안에서 며칠 쉬다 보면 나아지기 마련인데, 마침 영역자체가 부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회복이 되는 속도도 상당히 더뎠다. 본래 역소환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던 그로선 이번 경험은 정말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요 근래 일만 생각하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특히 그때마다 떠오르는 한 존재에 대한 맹렬한 복수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뿌득…엘퀴네스 자식! 나중에 두고 보자!”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전혀 상관없는 이를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의 역소환은 미네르바의 폭주에서 기인한 것이고, 오히려 엘퀴네스는 그들을 도와 상황을 수습하는데 가장 지대한 공로를 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물론 당시에 굉장히 위급한 상태이긴 했지만 간발의 차로 그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고, 트로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엘퀴네스가 미네르바를 봉인시키고는, 별안간 엄청난 힘으로 그들에게 물리력을 행사한 바람에 미처 방어할 사이도 없이 정령계로 강제 소환 되어버린 것이다. 몸이 부서지는 순간, 그 끔찍한 역류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엘퀴네스가 한 말을 도무지 잊을 수 없었다. “크윽! 이, 이 자식! 갑자기 뭐하는 짓이야?!” “정령계로 가서 쓸데없는 머리나 식히고 와라, 트로웰. 이프리트, 넌 그의 감시역이다.” “웃기지마, 임마! 누구 맘대로 날 부려먹어!” 화가 치민 이프리트는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온 몸으로 현 상황을 거부했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이 내뱉어졌을 땐 이미 그는 정령계로 돌아온 상태였고, 그때부턴 후들거리는 몸의 상태를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 나날만 반복되었다. 그리고 한결 상태가 나아졌을 땐, 자기도 모르게 착실히 트로웰의 동태를 주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이거야 완전히 엘퀴네스가 시키는 대로 굴러가고 있는 게 아닌가! “으으~ 아니야! 난 단지 트로웰이 걱정될 뿐이라고! 누가 그놈의 말 때문에 이럴까봐!! 꼭 녀석이 아니었어도 이랬을 거란 말이닷!”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프리트는 지레 비참해짐을 느끼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가 그렇게 혼자서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있을 때였다. “내가 어쨌다고?” “커헉! 놀랐잖아, 이놈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에서 뜻밖의 만남에 놀란 적이 있는가? 이프리트가 바로 딱 그 상황이었다. 그의 눈앞에 생각지도 못하게 트로웰이 떡하니 서있었던 것이다. 평소라면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알기로 현재 트로웰은 바람의 영역에서 하루 종일 미네르바만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어떤 말이나 손짓에도 일체의 반응 없이 멀거니 한곳만 응시하고 있었기에, 적어도 미네르바가 봉인을 풀고 나오기 전까진 꼼짝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예상이 보기 좋게 깨져버린 것이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트로웰?” 황당한 표정으로 물으면서도 그는 스스로의 눈을 믿을 수 없어 연신 눈꺼풀을 깜빡거렸다. 그러자 트로웰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던가? 정령계의 ‘에바스에덴’이 이프리트 네게만 허락된 공간은 아닐 텐데?” “그런 뜻이 아니라! 너 바람의 영역에서 계속 죽치고 앉아있을 거 아니었어? 왜 이렇게 빨리 나왔나 이 소리다.” “그야 내 마음이지. 내가 움직이는 데도 하나같이 이유를 붙여야 하는 거야?” “어이~ 내 말의 본론은…휴우, 그래. 내가 말을 말자.” 원래 트로웰이 이렇게 하나씩 반박하기 시작하면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무슨 말을 해도 무시하는 엘퀴네스만 빼면 말이다.) 그 중에서도 이프리트는 언쟁자체에 소질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그러려니 수긍하는 쪽이 더 마음 편했다. 그는 질문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얼른 다음 화제로 돌렸다. “어쨌든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아 다행이네. 이제 좀 괜찮은 거냐?” “처음부터 나쁜 적 없었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그래도 뭐, 침울해져 있던 것보다야 훨씬 너답다. 우리 둘 다 여기 꽤 오랜만이지 않냐? 이왕 이렇게 됐으니 당분간은 정령계에서 편히 쉬다가…” “미안하지만 난 할 일이 있어.” “할 일?” 트로웰의 대답에 이프리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목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네르바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는데, 그를 기다리는 것 외에 다른 할 일이 무엇이 더 있던가 싶었던 것이다. “별일이네. 네가 미네르바 보다 더 우선시 하는 일도 있었냐? 아, 혹시 엘퀴네스에게 복수라도 하러 가려고? 그런 거라면 나도 합세하마. 이번 일 때문에 나도 단단히 앙심을 품고 있거든.” 그러자 트로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헛소리. 네가 엘퀴네스에게 앙심을 품은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잖아? 그리고 내 목적은 그가 아니야.” “그게 아니면?” “아직 계획을 실현시키지 않았잖아. 마무리를 짓고 돌아올 셈이야.” “계획?…설마 너!!” 그때서야 이프리트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트로웰, 이 막무가내 정령왕이 아직도 인간의 멸종 계획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이미 미네르바가 폭주한 순간 모든 일이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던 그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이래서 엘퀴네스가 감시하라고 했던 건가? ‘젠장!’ 그는 쓴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확실히 엘퀴네스는 정떨어질 정도로 냉정하긴 했지만 틀린 요구는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너 왜이래? 이제 다 끝났잖아. 미네르바의 계약자는 폐인이 됐고, 그놈이 사랑하던 인간 여자도 죽었어. 그거면 된 거 아니야?” “아니, 부족해. 터무니없이 부족해. 내가 다스리는 땅에, 내 의지로 숨 쉬는 대지에,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야.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아.” “…하아. 인간은 이 차원을 유지하는 주요 생명체야. 그런 게 한순간에 사라지면 균형이 깨진다고.” “엘프도 있고, 드래곤도 있어. 인어족도 있고 드워프도 있지. 인간을 대처할 종족은 얼마든지 있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스로 멸망할 녀석들이야. 그 시기를 조금 앞당긴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고집피우지 마. 황금기의 멸망은 앞으로 2천년 후라고 했잖아. 네가 말해놓고도 기억 안나? 그걸 벌써 끝낸 다는 게 말이 되냐?” “……” 이프리트는 서글픈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원래 인간을 싫어하는 편이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분별을 잃게 될 줄은 몰랐다. 지금의 그는 정령왕이라기 보단 사랑에 빠져 앞뒤를 분간할 수 없게 된 철없는 어린애 같았다. 트로웰 역시 자신의 이런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해도 소멸하는 그 날까지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특히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던 초록색 눈동자를 떠올리면 더욱 그랬다. <괜찮아, 넌 상냥한 녀석이니까.>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가 버릇처럼 내뱉던 말. 그러나 어쩌면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주문의 일종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트로웰은 모든 일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정도로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을 느꼈으니까. 복수든, 원망이든, 사랑이든. 그리고 분명할 정도로 이성을 자각하게 되어 몇 번이나 그만둘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말로 안주하기엔 난 이미 너무 지쳐버렸어.’ 지금 이 순간에도 미네르바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지만, 혜안을 가진 그에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절절히 파고들었다. 그 흐느낌에 담긴 마음의 고통이 너무 아플 정도로 와 닿아서, 이젠 그만 두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러니까…내 손으로 전부 끝내게 해줘.” 어떤 식으로든 인간은 위대한 존재를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것은 오만한 종족을 향한 형벌임과 동시에 미네르바를 향한 경고이기도 했다. 이제 그는 깨달아야 한다. 그의 선택에, 이렇게까지 어리석어 질 수 있는 이가 있음을. =========================================== [정령왕 엘퀴네스] 12-11. 다시 원점으로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떠나기 전 나는 라미아스로부터 현재 시벨리우스가 머물고 있는 여관의 위치를 알아냈다. 녀석은 기특하게도(?) 내가 사라진 것을 깨닫자마자, 그날로 당장 짐을 싸서 여관을 잡은 다음, 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웬 여관? 그 녀석 라미아스님이 초빙한 요리사 아니었어요?” “검술대회 일정까지가 계약기간이었거든. 정말 실력 좋은 요리사였는데, 그렇게 휭 나가버리다니 나로서도 굉장히 충격이었다고. 회유고 뭐고 지금으로선 전혀 안 통하는걸 보니까, 어떻게든 너를 따라나설 셈인 것 같다.” 그 말을 할 때 라미아스의 표정이 무척 아쉬웠던 것을 보면, 꽤나 녀석의 요리가 마음에 든 듯 했다. 그는 작게 중얼거린다고 생각했겠지만, 보통 사람보다 청각이 뛰어난 나는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 역시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본체였다면 그 까짓 블루 엘프 한 마리쯤이야 노예로 부리는 것쯤은 일도 아닌데. 쩝, 이럴 땐 유희에 회의를 느낀다니까.” “……” 이보세요. 그 전에 시벨리우스는 엘프가 아니라 유니콘이거든? 유니콘은 드래곤 다음으로 마법에 정통함과 동시에 그들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종족이다. 게다가 시벨리우스는 그 중에서도 왕자라지 않은가! 그런 녀석을 노예로 부릴 생각을 하다니, 과연 막나가는 드래곤다웠다. (라피스 녀석은 맞장 뜬 적도 있었지 아마?) 어쨌든 그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였으니 시벨의 요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만 했다. 이제 녀석과 함께 다니면 그 음식을 나 혼자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상상만으로 행복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얼마나 빈곤한 식사를 해왔던가! 이제 그 생활도 드디어 안녕인 것이다! 그러자 그런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는 엘뤼엔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결국 동행의 목적은 그녀석이 아니라 녀석이 바칠 요리였나. “흠흠! 트, 틀려! 난 분명히 시벨이랑 같이 여행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고.” -‘마음도 있다’는 말은, 요리를 노리고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란 소리로군. “으윽! 엘퀴네스도 여행 내내 육포만 뜯어봐! 얼마나 음식에 사무치게 되는지 알기나 해? 난 안 그래도 말라서 많이 먹어야 한다고!” -죽지 않을 만큼만 먹으면 얼마든지 체력을 회복하는 주제에. “인간의 3대 본능을 뭐로 보는 거야? 식욕은 필수라고, 필수! 난 살기위해 먹는 것보단 먹기 위해 사는 게 더 좋아.” -실로 너다운 대답이로군. 엘뤼엔은 어이없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순간 내가 그렇게 먹을 것에 집착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까지의 궁핍했던 나날을 떠올리고 나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 그러고 보니 엘뤼엔을 처음 소환한 날도 배고프다고 했었지, 아마? “…뭐 어때. 음식을 먹고 싶어도 못 먹는 것보다야 낫지.” 이런 내 가벼운 중얼거림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엘뤼엔의 귀에 포착된 듯 했다. 그는 의미를 알 수없는 시선으로 나를 보며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건 날 두고 하는 말이냐? “응? 아니, 그냥 누굴 딱히 예로 든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나와 같은 정령들은 인간의 음식에 큰 감흥이 없다. 먹으면 오히려 속만 불쾌할 뿐인 쓸모없는 것들이지. “으음. 그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먹고 싶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어?” -없다. “엣, 정말? 그렇게 맛있는데도?” -글쎄, 맛있던가? 잘 모르겠더군. 하기사 그들의 입장에서야 맛을 느끼기도 전에 속을 거북하게 채우는 불쾌한 느낌이 먼저 밀려들어왔을 것이다. 나조차 맛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먹고 싶지 않았을 정도니까. 덕분에 이사나가 식사하는 동안 늘 손가락만 빨며 시간이 얼른 흐르기만 기다려야 했지.(정말로 그랬던 건 아니다.) 이제 라피스를 찾으면 나는 다시 그때의 몸으로 되돌아 갈 것이다. 그걸 생각 하고나니 지금 가지고 있는 인간의 육체가 많이 아쉬워졌다. “정령의 몸은 편리하지만 불편해…” -너 방금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단어를 동시에 썼다는 것은 알고 있냐? “하지만 음식도 못 먹잖아. 추위나 더위를 안타고 아무데서나 살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음식을 먹을 수 없다는 건 치명적이야. 먹을 때의 행복을 누릴 수 없다니!” -그건 네 기준이겠지. “만인의 기준이야!” -…알았다. 망아지 녀석을 음식을 위해 데려가든 말든 이제 상관하지 않을 테니, 먹는 얘기는 그만해라. 어라라.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뭐, 상관 안 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나는 왠지 조금 질린 표정을 하고 있는 엘뤼엔에게 생긋 웃어준 다음, 술술 풀려가는 일정에 흐뭇해했다. “그럼 이제 정말로 가볼게요, 라미아스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응, 그래. 근데 정말 내 후계자 될 생각은 없는 거냐? 네가 보석 찾을 때까지도 기다려줄 수 있는데. 차기 세피온 공작이 되면 마신교의 눈치를 안보고 친구를 보살필 수도 있을 거다.” “하하, 죄송해요.”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는 그에게 나는 거듭 사과를 건넸다. 그러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택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그렇담 여기서 작별의 선물을 주도록 할까.” “네?” 라미아스가 내민 것을 본 순간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그가 가지고 나온 자루에 보석들과 함께 들어있던 에고소드였던 것이다. 놀라서 거절하려는 내게 그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이번 대회에서 우승한 자에게 주려고 했던 거야. 너라면 반드시 이겼을 테니까, 본 주인한테 돌아가는 셈이다. 부담 갖지 말고 가져가.” “하지만…” “그리 대단한 능력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야. 실드와 치료마법 종류거든. 영혼의 보석에도 등급이 있는데, 이 녀석이 품고 있는 마나는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어. 나는 보석 자체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 마법물품까진 욕심이 없으니까 네가 가져가는 게 좋을 것 같다. 나한테 있어봤자 창고신세밖에 안되거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할 수가 없어서 나는 감사히 그의 선물(?)을 받기로 했다. 하지만 워낙 화려하게 세공된 탓에 들고 다닐 엄두가 나지 않아 받은 즉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요긴하게 잘 쓸게요.” “그래. 꼭 원하는 것을 찾길 바란다. 네 앞날에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라미아스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 탓일까.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마치 오랫동안 친구였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문득 4천년 후의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언젠가 원래의 시대로 돌아가면 꼭 제일 먼저 그를 찾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마을로 돌아온 후 나는 곧바로 시벨리우스와 만나려고 했다. 문제는 녀석이 있는 위치를 알아도, 여전히 사방을 감시하고 있는 기사무리 때문에 접근이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 몰라라 하고 있는 엘뤼엔에게 도움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멀리서 여관의 모습만 지켜보기를 몇 분 째. 결국 나는 아까 전에도 썼던 방법을 다시 재탕하기로 결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시큐엘 소환!” 쉬익! 이번에도 어김없이 다량의 마나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물의 늑대가 눈앞에 떠억 등장했다. 이전에 소환했던 녀석은 아니었지만, 정령들끼리는 서로의 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에 전과 같은 과정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 했다. 그 증거로 놈은 나타나자마자 한눈에 용건을 짐작한 얼굴로 물었다. -설마 또 말을 전해 달라고 부른 것은 아니겠지? “알면서 뭘 물어?” -크흑! 나는 편지나 전해주는 전령(傳令)이 아니다! “뭐든 상황에 따라 바뀌는 법이지. 난 정령사니까 내 식대로 하는 것뿐이야. 자~ 잔말 말고 가서 전해. 목표 인물은 저 여관에서 투숙하고 있는 블루 엘프-시벨리우스. 내가 여기 있으니까 마중 나오라고 말해줘.” -…언제고 내가 가진 가치를 알게 되면, 이런 일에 부른 것을 후회하게 될 거다. “그래, 그래, 알았으니까 얼른 가서 말이나 전해주고 와.” 잔뜩 폼 잡고 한 말을 내가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기자, 녀석은 고개를 추욱 늘어뜨리곤 힘없이 사라졌다. 어차피 시키는 대로 할 거면서 왜 쓸데없는 반항을 하는지 모르겠단 말씀이야? “자~ 그럼 난 여기서 기다려보실까.” 내가 알고 있는 시벨이라면 소식을 듣는 즉시 총알처럼 이곳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작정으로, 난 근처에 있던 아무 판자대기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여전히 묵묵히 서있는 엘뤼엔을 향해 말했다. “엘퀴네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이제 다시 모습을 나타내는 게 어때?” -못 보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잖아. “나야 그렇지만 시벨리우스는 아니잖아. 남들이 보면 허공에 대고 떠드는 꼴이라고.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네가 정령어를 쓰면 간단한 일이다. “일일이 말 전달해주는 것도 귀찮아. 이제 그만 소환체로 돌아와.” 그 말에 엘뤼엔은 귀찮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군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유령처럼 흐릿했던 몸이 완전히 선명해지는 순간, 타이밍 좋게 불쑥 누군가가 나타났다. 얼굴 가득 들뜬 기색이 가득한 시벨리우스였다. “엘!” “어, 왔어?” “어떻게 된 거야? 그동안 어디에 갔었어?” “쉿! 목소리 낮춰. 그러다 들킨다고.” “들킨다니? 아아, 저 녀석들 때문인가?” 내내 이곳에 있었던 녀석이 황제가 내린 명령에 대해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조금 찌푸린 얼굴로 기사들을 노려보던 시벨은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일런스!(silence)” 그와 함께 나는 그의 몸에서 발현되는 짙은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마법이 시전 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뿐. 딱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아, 나는 살짝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방금 뭘 한 거야?” “침묵 마법이야. 지금부터 우리가 아무리 크게 떠들어도 저쪽의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야.” “아! 맞다. 그런 마법도 있었지? 것 참 편하네.” “적들의 시야에서 모습을 가리는 마법도 있는데. 그것도 할까?” “아니, 이정도면 충분해.” 누구 못지않게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늘상 라피스에 밀려 마법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듯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이 되는 순간이 오다니! 나는 새삼 대견한 시선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라미아스님께 들었어. 날 기다렸다고?” “아, 으응. 그것 때문에 일부러 돌아와 준거야?” “꼭 그 이유만은 아니야. 어차피 나도 너한테 할 말이 있었으니까.” “나한테? 무, 무슨 말?” 녀석은 한눈에도 바짝 긴장한 얼굴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굳이 이런 비유까지 들고 싶진 않았지만, 프로포즈를 해놓고 대답을 기다리는 표정이랄까. 날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 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기로 했다. “실은 내가 찾고 있는 게 있는데, 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네가 바쁘지 않다면, 나랑 같이 여행하지 않을…” “할래!” 말을 전부 다 듣지도 않고 갑자기 끊고 들어오는 대답에 나는 잠시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날 기다리기까지 했다는 말로 미루어 이런 반응을 짐작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적어도 찾는 게 뭔지는 묻고 나서 결정해야 할 거 아니야!! 위험한 길이면 어쩌려고 넙쭉 받아들이는 거야?’ 이로서 유니콘이 타인을 쉽게 믿는 성격이라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이거야 원, 세 살짜리 어린애를 유괴해도 이보다 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너무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잠시 먹먹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전부터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너…왕자라면서 이렇게 막 돌아다녀도 돼?” “……” “가출한 거 맞지? 전의 그 약혼녀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는 거 아니야?” “그, 그건…웰디는 그냥 친한 동생일 뿐이야. 혼약은 장로할아범이 멋대로 정한 것뿐이고…나는 전혀…” “어쨌든 기다리고 있을 거야. 돌아가야 하지 않아?” “아니, 상관없어. 성인식을 치른 유니콘은 언제든지 자신의 뜻대로 유희를 즐길 수 있으니까, 방해받을 이유는 없어.” 고집스럽게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굳이 내가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아도 따라나설 기세였다.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쉰 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까. 그래도 일단 내가 찾는 게 뭔지는 알고 결정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 목적은 ‘영혼의 보석’이야. 언제, 어디서 발견될지 모르는 물건이지.” “영혼의 보석?” “그래. 그걸 찾기 위해 이제부터 한 고원을 뒤져볼 생각이야. 한 달이 걸릴지,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아무도 몰라. 그래도 같이 갈 거야?” 질문을 한 즉시 나는 후회했다. 애초에 만년이 넘는 수명을 가진 이들이 그 정도 시간에 굴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예상대로 시벨은 문제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래.” “무척 지루할 텐데?” “괜찮아. 엘이랑 함께 있으니까 심심하지 않을 거야.” “호오, 그래? 그럼 마지막으로 이것도 알아두고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어떤 조건이든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눈빛에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녀석과의 동행은 나 역시 희망하는 바이지만, 해결해 둘 건 미리 확실히 해두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난 드디어, 전부터 몇 번이나 말 하고 싶었던 ‘어떠한 사실’을 고백했다. “난 남자야.” =============================================== [정령왕 엘퀴네스] 12-12. 다시 원점으로 (2)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방금…뭐라고?” 분명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어리둥절하게 되묻는 모습에 나는 속으로 나직이 혀를 찼다. 아직까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내 생김새가 오해 당할 정도인가 싶어,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남자라고, 남자. xy염색체를 가진 인간. 암컷과 수컷 중에서 수컷! 오케이? 이제 알아들었어?” “……” 그러자 그제야 상황파악을 한 듯 녀석의 얼굴이 차츰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이제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겠다는 태연한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시벨리우스는 자신의 편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이 꽤 뚜렷한 성격이다. 지금은 저렇듯 순딩이처럼 굴어도, 정작 자신과 아무 상관없는 이라는 확신이 들면 태도가 180도로 바뀐다는 것을 나는 이전의 경험을 통해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괘씸하게 느껴질지언정, 나로선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사항이 아니다. 행여 이 때문에 시벨리스가 동행의사를 철회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여기서 대충 넘어가면 나중에 더 큰 골치 덩어리로 다가올게 틀림없으니까. “아, 오해하지 마. 일부러 속인 게 아니니까. 난 네가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거든. 얼마 전에 트로웰이 귀띔해 줘서 안거야. 사실 내가 선이 좀 얇긴 해도 여자 같다고 보기엔 어패가 있잖아?” “…그런…” “엄밀히 말해 이 상황에서 화를 낼 사람은 오히려 나라고. 간혹 오해를 당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설마 너까지 그럴 줄이야. 나야말로 배신당한 기분이야.” “……” 내 말투에 담긴 진득한 실망의 기색을 느낀 것인지 녀석은 답지 않게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앞으로 이어질 상황 몇 개를 머릿속으로 가정해보았다. 첫째. 불 같이 화낸다. 글쎄다. 이번 경우엔 저 혼자 오해한 사실이 민망해서라도 참을 가능성이 있다. 그 증거로 아직까지 어깨만 떨뿐,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목숨을 위협한다. 내가 무슨 죽을죄를 지었다고? 그렇게 성격이 나쁜 녀석은 아니지만, 만약 그런다 해도 엘뤼엔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다. 음…아마도. 셋째. 생 무시하고 제 갈길 간다. 음, 이거라면 가능성이 충분하다.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오랜 기간 두고 친해진 사이도 아니니, 여기서 바이바이하면 그만일 테니까. 나로선 피눈물 나는 손실이겠지만 간다는 걸 억지로 막을 생각은 없었다. 그 외, 넷째-의외의 반전이 일어난다. 즉, 이미 알고 있었다거나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슬쩍 기대해 봤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누구라도 시퍼렇게 변한 녀석의 얼굴을 본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위기가 험악해 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아무리 봐도 좋게 넘어갈 기세는 아니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쩝, 하고 다신 입맛이 유달리 쓰게 느껴졌다. “어이, 괜찮냐? 이거야 원, 나도 피해자이긴 마찬가지인데 왜 죄책감이 드는 거지…” “…안해.” “응? 뭐라고?” 꽤 한참 만에 들려오는 목소리였기에 나는 반색을 하고 물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나를 바라보는 녀석은 어느새 한층 정리가 된 얼굴이었다. 그리곤 이번엔 또박또박한 말투로 분명하게 의사를 전달했다. “미안해. 오해해서 정말 미안하다.” “헤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건가? ‘수긍’도 아니고 ‘사과’라니! 이건 전혀 예상답안에 없던 결과였다. 본인의 충격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내 입장부터 먼저 배려하다니, 정말 내가 하는 시벨리우스가 맞나 싶었다. 내가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난감한 듯 시선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실은 이전부터 뭔가 이상하다고는 느끼고 있었어. 그…뭐랄까. 암컷 특유의 향내도 없었고, 아무래도 겉으로 보이는 신체적인 차이도 있었으니까. 목소리도 여자 톤 치고는 낮은 편이었고. 골격도 여자치고는 큰 편이고…” “그런데도 단지 이상하다고만 느꼈다고?” 시벨은 절대 눈치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평소에 그 정도까지 느끼고 있었다면 당연 내가 남자라는 사실도 깨달았을 텐데,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자 녀석은 더더욱 난감한 표정이 되더니 슬쩍 내 표정을 살피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얼굴이…” “……” 아아, 그래. 그 모든 상황을 무시할 정도로 내 얼굴이 여자 같았다 이거군. 하지만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과 반대로 내 이성은 어느새 반쯤 날아가 있었다. “크악! 내 이놈의 면상을 당장 대패로 갈아버리고 말겠어!” “헉! 그러면 안 돼! 아프잖아!” “지금 아픈 게 대수야?” 역시나 얼굴이 문제란다, 얼굴이! 그까짓거 칼자국만 여러 번 내주면 다시는 이런 오해 당할 리도 없겠지! 다분히 제정신 아닌 생각이었지만 나는 충동적으로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채앵! 내가 대뜸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내자, 시벨은 굳은 시체처럼 퍼런 얼굴이 되어 황급히 내 팔을 붙들었다. “미쳤어? 정말 하려고?” “한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얼굴과 작별을 고하고 말테다!” “자, 잠깐!! 내, 내가 잘못했다니까? 그러다 잘못 찔러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래?” “누굴 바보로 알아? 이제껏 폼으로 검을 배운 게 아니야!” 물론 제 얼굴을 찢으려고 배운 것도 아니지만. 만류하는 시벨을 재빨리 뿌리친 내가 막 검상을 만들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탁 하고 내 손을 잡는 강한 힘이 느껴지더니, 쥐고 있던 검을 강제로 빼앗아갔다. 잠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해 멍해있던 나는 범인을 알아차리고 빽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엘퀴네스! 얼른 내 검 내놔!” “쯧, 가지가지 하는군.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다음 일정이나 생각해라.” “난 지금이 더 중요해!” “얼빠진 소리 하지 말고 정신 차려. 그 얼굴에 검상 하나 둘 생긴다고 달라질게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윽!” 태연한 얼굴로 내 가슴에 대못을 박은 엘뤼엔은 이번엔 시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쩔 거냐? 사과를 끝냈으면 의당 다음 대답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무슨?” “이 녀석과 동행하는 것 말이다. 이제 엘이 여자가 아니란 것을 알았잖아. 그래도 같이 갈 셈이냐?” 그 말에 나 역시 씩씩거리던 것을 멈추고 시벨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고민하는 것 같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난 여기서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 “뭐? 왜?” “실은 아깐 말 하지 않았지만, 통보 없이 마을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장로 할아범이 날 찾고 있을 거야. 어쩌면 이미 추격대를 풀었을지도 모르지. 그 때문에 너에게 피해가 되고 싶지는 않아.” “그럼 아깐 왜 수긍한 건데?” “그야 내가 널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네가 남자라는 걸 알았으니 그럴 필요 없지. 반려가 될 수도 없는 상대에게 호감을 가져봤자 소용없잖아?” 과연 철저하게 여자에게만 친절한 종족! 나는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야! 넌 친구란 말도 모르냐? 이 세상에 여자 아니면 다 적이야? 호감을 가져도 소용없기는 왜 없어? 헛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유니콘이 순결한 처녀를 좋아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이 정도까지인 줄은 몰랐다. 너 솔직히 말해봐. 지금까지 왕따였지?” “…친…구?” “그래, 임마. 세상에 여자와 남자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줄 아냐? 네가 진정 남자들끼리의 우정을 모르는구나. 넌 친구란 영화도 안봤…아, 봤을 리가 없지. 아무튼! 때론 얄팍한 커플의 사랑보다 훨씬 진득한 것이 바로 친구들끼리의 우정이라는 것이다! 알간?” 하지만 시벨은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쯧쯧, 저러니 아직까지 도와주러 나온 동족도 없지. 저 나이 되도록 친구란 것도 모르다니. 혹시 그 장로할아범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저 녀석을 평생 마을 안에 붙잡아 놓으려고 일부러 타인과 단절된 생활만 하게 만든 게 아닌 가 의심이 들었다. 인간들 중에서도 귀족이나 왕자 같은 경우, 어릴 때부터 궁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이 나 혼자만의 착각이라는 건 바로 이어지는 엘뤼엔의 말 때문에 알 수 있었지만. “유니콘들은 친구란 개념이 없다. 배우자를 제하면, 그저 동료관계일 뿐이지.” “동료가 친구인거 아니야?” “네가 말하는 친구라는 게 우정이란 감정을 배제한 거라면 그렇겠지.” “흐~음.” 그러니까 요컨대 ‘함께 어울리긴 해도 친하진 않다’로군. 문득 이전 노예상인에게 잡혀가던 길에 만났던 유니콘들이 떠올랐다. 둘 다 한 여인을 지키기 위해 같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전혀 편한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단순한 사무적인 관계라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일상이라니. 보통 유니콘이라도 그럴진대, 왕자라는 신분을 가진 시벨리우스라면 더더욱 다른 이들과 거리감을 두었을 것이다. 나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여전히 아리송한 얼굴을 하고 있는 시벨에게 입을 열었다. “너 이대로 마을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지?” “응? 으응.” “오해 때문이라지만 이왕에 나한테 호감 느낀 거 그대로 썩혀버리면 아깝지 않냐? 어차피 떠돌아다닐 셈이라면 나랑 같이 가자. 1:1의 동등한 관계로 말이야.” “동등한?” “그래. 넌 모르겠지만 원래 친구란 그런 거야. 보호받고, 지켜주는 사이가 아니라 역경을 함께 이겨나가는 관계. 참 멋지지? 어때, 친구란 거 한번 만들어보고 싶지 않아?” “……” 난감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이미 녀석의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선뜻 응할 기미를 보이지 못하는 녀석에게 나는 환하게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내가 네 인생의 첫 번째 친구가 되어주지.” =================================================== [정령왕 엘퀴네스] 12-13. 다시 원점으로 (3)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엘이 돌아간 후, 라미아스 역시 본 직분인 세피온 공작으로 돌아갔다. 몰래 빠져나갔던 것과 달리, 다시 들어가는 일은 조금 더 신경을 요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이 언제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역시나 오자마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는 부관을 보며 그는 슬쩍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세피온 공작각하! 지금까지 어디에 계셨던 겁니까? 한참을 찾았습니다.” “카렌트경. 머리가 아파서 잠시 산책을 하고 왔다네.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는가?” “조금 전에 황제폐하의 칙서가 도착했습니다.” “칙서? 흐음~ 보나마나 황성으로의 소환 명령이실 테지. 일단 이리 가져와 보게.” 그 즉시 카렌트는 황제의 인장으로 봉해진 편지를 정중히 그 앞에 내밀었다. 느긋하게 봉인의 밀랍을 뜯으며 라미아스, 아니 이제 세피온이 된 그는 속으로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통신용 수정구가 천지로 널린 세상에 굳이 편지를 보낼 필요가 있는 거야? 아무튼 인간들의 허례허식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편지의 내용은 역시나 그의 짐작대로 빠른 시일 내에 황성으로의 방문을 희망한다는 내용이었다. 보나마나 이번 정령왕의 폭주사건 때문이겠지만, 세피온으로서는 상당히 달갑지 아픈 제의였다. 황성은 텔레포트를 이용한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법무효화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이동 마법진을 이용하더라도 며칠은 더 이동해야 했다. 그렇다고 황제의 지엄하신 명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인지라, 그는 푸념처럼 중얼거렸다. “끄응. 폐하께서는 이 늙은이가 가엽지도 않으신 겐가. 여행하기에는 이미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누차 강조해도 모른 척 하시는 군.” 일반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그의 투정은 맞는 말이었다. 세간에 알려진 세피온의 나이는 이미 60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으니까. 그가 황성의 출입을 끊고 공국 안에서 지내기 시작하자, 병세가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돈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허나 카렌트는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부관인 그는 누구보다 현재 세피온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대련 시에 장정 열은 거뜬히 무찌르는 사람이, 그까짓 행군에 지친다는 것은 애초에 말이 되지 않잖은가. “지금 곧 사람들을 추려 출발할 차비를 갖추라 이르겠습니다. 언제 떠나실 예정이십니까?” “쩝, 통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냉정하군. 에잉. 하나뿐인 부관이 이래서야 어디 마음 편히 한탄할 사람이 있겠는가.” “공.작.각.하!” “아, 알았네. 이틀 후에 출발하도록 하지.” 그제 서야 굳은 표정을 푼 카렌트는 목례를 하려다 말고 마침 떠오른 사실을 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다비안 드 라스포경이 한 시간 전부터 공작님께 면담을 요청하고 계셨습니다.” “라스포? 아아, 외무재상 크라우디 드 라스포 후작의 막내아들 말이로군. 그가 이곳엔 왜?” “모르셨습니까? 라스포경도 이번 검술대회의 출전 선수였습니다. 그 역시 이번 폭발에 휘말렸습니다만 천운으로 큰 부상은 면하고 지금은 신관의 치료를 받아 거의 완치된 상태입니다.” “호오, 그래? 그런데 아직까지 영지에 돌아가지 않고 뭐했다던가?” “방금 말씀드렸잖습니까. 공작님을 뵙고 싶어 한다고요.” “날 왜?” “…그거야 직접 만나서 들어보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카렌트는 입가에 이는 경련을 간신히 억누르며 대답했다. 세피온 공작은 일에 관련된 일에는 무섭도록 냉정한 사람이지만, 평소엔 엉뚱한 태도로 측근들을 놀리는 것이 취미였다. 덕분에 지금까지 부관인 그가 겪어야 했던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카렌트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본 세피온은 즉시 장난을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경험을 통해 이 이상 자극하면 폭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험험, 손님을 접견실로 모시도록 하게.” “네, 알겠습니다.” 부관이 밖에 있던 시종을 향해 지시하는 사이, 세피온 역시 접견실로 이동했다. 잠시 후 한 사내가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왔다. 제법 다부진 체격에 오랜 시간동안 검을 다루어 온 자만이 풍기는 정갈한 느낌을 가진 청년이었다. 오늘 처음 만난 것 치고는 청년의 모습은 꽤 낯익었다. 잠깐 기억을 더듬던 세피온은 곧 그를 폭주의 현장에서 만났던 사실을 떠올렸다. 물론 그때는 라미아스의 모습이었으므로, 상대편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 할 테지만 말이다. ‘호오, 그때 엘과 함께 있던 녀석 중 한명이로군.’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청년의 목적 역시 어렵지 않게 짐작되었다. 아마도 갑작스레 증발된 엘의 행방에 관계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세피온은 어디까지나 이번 만남이 처음인척, 반가운 환영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게, 다비안 드 라스포경. 그래, 후작께서는 요즘 어떠신가.” “염려해주신 덕분에 언제나 건강하십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세피온 공작님. 갑작스럽게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닐세. 나야 말로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자리에 앉게나.” 다비안이 의자에 앉자, 주위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곧 차와 다과를 가져왔다. 세피온은 사람들을 모두 물러나게 한 다음,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이번 일에 휘말렸다고 들었네. 그나마 크게 다친 곳이 없다니 정말 다행이군.” “운이 좋았습니다. 실은 공작님을 찾아온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입니다.” “흐음. 굳이 나를 찾아올 만큼 중요한 사안인가?” “네. 이번 폭주를 해결한 정령사를 찾고 있습니다. 황제폐하께서도 그를 찾으라는 황명을 내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공작님이시라면 알고 계실 것 같아서…” “아아. 엘이란 이름의 소년 말이로군.” 세피온이 슬쩍 아는 기색을 비취자 다비안은 반색을 하며 눈빛을 빛냈다. 지난 며칠 동안 찾던 소년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대답에 그는 금세 실망하고 말았다. “나도 백방으로 찾아보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그는 이 공국을 완전히 떠난 듯하네. 눈에 띄는 인상착의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껏 목격자가 없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지.” “…그렇군요. 아! 혹시 후드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그 부분 역시 충분이 염두에 두고 조사를 진행 중이네. 그런데 자네는 그 소년에게 무슨 용건이 있는 건가?” “실은 대회 일정동안 그와 룸메이트였습니다. 폭발 시에 저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요.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아서…어떻게든 꼭 찾아서 보답하고 싶습니다.” “흐음. 그는 별로 신경 안 쓸 것 같은데. 명예와 보답을 바라는 자라면 이렇게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을 리가 없으니 말이네.” 그런데 이렇게 찾는 건 오히려 그의 뜻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세피온의 말에는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은 다비안은 망설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공작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아마 이번 일만 아니었어도 그는 끝까지 본인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감추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대로 도움만 받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허허. 은혜를 입고 모른 척 할 수는 없다는 것인가? 요즘 젊은 귀족치고는 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줄 아는군.” “과찬이십니다.” 세피온은 칭찬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자에게서 드물게 좋은 평가를 받자, 다비안은 쑥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가장 최근에 후작과 이야기 했을 때 들은 바로는, 정령사를 꿈꾸고 있다지?” “아…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허나 유감스럽게도 친화력이 부족해서 실현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허허. 뭐든지 도전하는 것에 가치가 있는 법이지.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해보게. 타고난 친화력이 없어도 노력 여하에 따라 하급 정령을 소환하는 사례가 가끔 있더군.”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의 말씀, 가슴깊이 새기겠습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다비안의 모습에 세피온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정령을 소환하려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때 라스포가문의 막내아들이 엘프에게 반해 정령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귀족들 사이에서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아들의 고집에 지친 크라우디 후작이, 정령을 소환해야만 엘프 마을에 보내준다는 약속을 한 것 역시 꽤 유명한 일화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그는 꽤나 장래가 촉망되는 검사였다. 라스포가문은 대대로 문인집안이었지만, 다비안은 타고난 무골이었다. 4살 때 검을 배우기 시작해서 빠른 성취를 보였고, 입학한 기사학교에서도 늘 상위권의 성적에 속했다. 세이크 제국에서 기사가 된다는 것은 곧 가문의 영광이었다. 마법사 못지않게 전투를 지휘하는 기사의 역할이 중시됐고, 그 만큼 존중과 대우를 받는 시대였다. 때문에 사람들이 다비안의 행보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정령사를 꿈꾸기 시작한 이후로, 이제는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않았다. 정상적으로 기사학교를 졸업하고 작위까지 받았음에도 그는 가문에서조차 잊혀 진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그가 자신의 꿈을 포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정령사가 되었다면 모를까, 조금의 발전도 없는 그를 향해 사람들은 대놓고 비웃었다. 후작과 그의 부인 역시 가문의 위신에 먹칠을 한 그를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전투를 해 온 것이 벌써 햇수로 20년째. 인내심 면에서 보자면 누구도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피온은 보면 볼수록 다비안이 마음에 들었다. “후작의 말로만 들었을 때는 자네가 정령에만 미쳐 아무것도 눈에 두지 않는 안하무인인줄로만 알았네. 하지만 이제껏 내가 잘 못 생각했던 모양이야. 기백을 보아하니 자신의 꿈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검술역시 소홀히 다루지 않은 것 같군.” “어렸을 때부터 몸에 베였던 일이기도 하지만, 검은 제가 살아가는 또 다른 이유니까요. 좋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흐음. 그래, 현재 작위가 어떻게 되나?” “자작입니다.” 다비안은 갑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세피온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다음순간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혹시 자네, 내 후계자가 될 생각 없나?” “……예?” “허허, 뭘 그렇게 놀라나. 내가 이 나이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적당한 후계자를 찾고 있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가 않더군. 자네가 생각이 있다면, 내 후계자로 삼고 싶은데.” “예에?” 남들이 들으면 횡재했다고 환호할 제안을 받고서도 다비안은 그저 먹먹한 심정이었다. 세피온 공작에게 후계자가 없는 것이 사실이긴 했다. 그래서 호시탐탐 그 자리를 노리고 공작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목을 빼는 무리가 쇄도 한다는 것도. 하지만 집안에서조차 외면당하는 그에겐 모두가 꿈같은 이야기. 방금 전 그 제의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전부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막상 그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고 보니, 다비안은 한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 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저어…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응? 후계자가 되라는 데에도 굳이 뜻이 필요하나?” “아, 아니오. 그러니까…저의 어디를 보시고 갑자기 그런 제의를 하시는 건지…” 사랑이란 단어도 모르던 철부지 어린 시절, 우연히 숲에서 만난 엘프에게 첫눈에 반한 이후로 그는 정령사가 된답시고 주구장창 헤매고 다녔다. 낳고 기른 부모조차 낯 뜨거워 사람들 앞에 내세우지도 못하는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런 과거를 모른다면 모를까.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공작이 제정신으로 후계자로 삼겠다는 말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사실 다비안의 생각이 아주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 세피온으로서는 누가 되든 얼른 이 자리를 물려주고 유희를 정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지겨워지고 있을 무렵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몇 번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나니, 빨리 꿈에서 깨고 다른 꿈을 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몇 십 년 동안 이룩한 과업을 아무에게나 물려줄 마음은 없었다. 원래 이 자리를 맡기려 했던 루시엘은 여동생을 잃은 충격 때문에 한동안은 재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찰나 다비안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자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드래곤의 눈은 타인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다. 무뚝뚝한 얼굴에 비해 다비안의 두 눈은 의지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이런 눈을 가진 사람은 원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여 결국 승리하고 만다. 그리고 누구보다 가슴깊이 검을 사랑하는 자였다. 허리춤에 달린 검집이 흠잡을 곳 없이 깨끗하게 손질된 것을 보아도 그가 얼마나 검을 애지중지 하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가 루시엘을 마음에 들어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런 검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다. 이번 유희에서 설정한 세피온 공작은 오직 우직하게 검 하나만을 믿고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자신의 신념을 이을 수 있다면, 다소 야망이 많은 타입이라 해도 용납할 수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다른 적임자를 찾았으니, 굳이 그에게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세피온은 한시름 던 기분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데도 구구절절한 사연이 필요한 건가? 굳이 붙이자면… 그래, 자네의 순수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고 해두지. 자신이 정한 목표를 향해 청춘을 불사르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그저 되는 대로 흘러가는 다른 귀족 청년들과는 확실히 다르지. 자네라면 내가 원하는 공국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네.” “하지만…” “거절치 말아주게. 내가 이런 제안을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니니. 자네만 괜찮다면, 지금 당장 라스포 후작에게 기별을 넣어서 자네를 내 양자로 데려오고 싶다고 말 할 생각이네.” “헉! 고, 공작님의 뜻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못됩니다. 저 같은 자를 후계자로 맞으시면, 공작님의 위명에 훼손이 갈까 두렵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이미 세간에 검을 꺾고 정령사가 되려 하는 것으로 알려진…기사의 명예를 저버린 사람입니다.” “하하!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일은 고되지만 즐거운 법이지. 세상은 그런 자를 한심하게 여기지만, 자네라면 틀림없이 해내리라 믿네. 다만 마지막까지 그 신념을 버리지 않고, 이 공국을 위하는 마음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히 족하네.” “공작님…” 다비안은 눈가가 시큰해지는 것을 느끼고 얼른 고개를 숙였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혼자 고군분투 하면서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을 돌아봐주기를 바랬다. 부모 형제조차 믿어주지 않은 자신을 전혀 뜻밖의 사람이 인정해준다는 사실에 그는 감정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게다가 그 사람이 누구나 다 칭송하는 대단한 사내임에야! 결국 그는 세피온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나타난 단 하나, 자신을 믿어주겠다는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훗날, 정령기사로서 대륙에 이름을 떨치는 ‘다비안 드 세피온’ 공작의 탄생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 “후후후후후. 아싸, 좋구나. 이걸로 이제 나도 좀 쉴 수 있겠지?” 다비안이 속으로 감동하든 말든, 라미아스는 라미아스대로 이번 유희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껏 기뻐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미사어구를 잔뜩 갖다 붙이긴 했지만, 결국 그가 다비안을 택한 이유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걷어차고 싶어서였다. (만약 이걸 알았다면 다비안은 벅차던 감격을 집어치웠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혼자 남은 그의 머릿속엔 앞으로 새로 이어질 유희에 대한 구상으로 가득했다. “랄라~ 신난다. 이번엔 뭘 할까? 넘치도록 권세를 손에 쥐어봤으니, 거지나 노예로 지내볼까? 으하하~ 그것도 꽤 짜릿하겠는 걸?” 새로운 유희도 좋지만 그래도 우선은 레어로 돌아가서 당분간 푹 잠을 청할 것이다. 이번 유희가 생각보다 길어진 탓에 당분간은 본체로 돌아가 여유를 만끽하고 싶었다. 모처럼 이니만큼 그동안 미뤄두었던 영혼의 보석을 수집하는 일도 다시 재개해볼 생각이었다. 이런 저러한 일을 다 따지고 나면 새로운 유희를 시작하는 일은 꽤 나중의 일이 될 것 같았다. “자아~ 그럼 어서 다비안을 내 후계자로 정한다는 공문을 띄워야지. 먼저 그 녀석의 아비 되는 인간한테 편지를 써볼까…놀라는 모습이 눈앞에 선한 걸? 킥킥.” 라미아스는 짓궂게 웃으며 책상의 서랍 속에서 깃털 펜과 잉크를 꺼내들었다. 그가 막 편지의 서문을 알리는 한 줄의 글자를 종이에 적던 순간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흐엑!” 갑작스런 불청객의 등장에 그는 드래곤으로서의 체통도 잊고 괴상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놀란 시선으로 고개를 드니 이전처럼 예고 없이 찾아온 검은 피부의 소년이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그는 안도하며 칭얼거리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뭐야? 트로웰. 예고 없이 좀 나타나지 말라고. 깜짝 놀랐잖아. 또 무슨 일이야?” 그리 오랜만에 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트로웰은 좋지 못한 일로 정령계에 다녀온 참이었다. 본래라면 괜찮냐고 묻는 것이 순서였겠지만, 서늘하게 식어있는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본능적인 감각이 눈앞에 서있는 정령왕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오고 있었다. 평소와 변함없는 표정인데 왜 이렇게 위태해 보이는 걸까. 불안함에 침을 꿀꺽 삼킨 그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얼른 화제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엘퀴네스랑 그 엘이란 소년은 벌써 떠났어. 그 녀석 알고 보니 영혼의 보석을 찾고 있더군? 나도 한번 맘 잡고 찾으려면 10년 이상은 걸리는 건데 말이야. 괜찮을지 걱정이라니까. 넌 같이 안 가는 거냐?” “아아.” “엥? 왜? 꽤 챙겨주는 것 같더니만.” “……내가 약속을 깨서, 더 이상 같이 있을 수 없거든.” 무심한 어조였지만 굉장히 슬프게 들렸다. 순간 더 이상 물어선 안 된다는 경고가 머릿속에 들어왔지만 라미아스는 호기심을 못 이겨 결국 입을 열고 말았다. “약속을 깨다니? 그 꼬맹이랑 무슨 약속을 했는데?” “…1년 동안 나를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하면, 인간들을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 “!!” 그때서야 라미아스는 그가 처음 나타나자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했었다. 정확히 짚어 주지 않아도 그것이 자신의 후계자건과 관계된 말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 얼마 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그것은 바로… “너 설마…아직도 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은 거야? 기어이 인간을 멸종시키려고?” “말했잖아. 약속을 깼다고.” “무, 무슨 소리야. ‘약속을 깼다’는 것은 반대로 이미 설득 된 상태라는 거잖아. 그런데 왜 인간을 죽이겠다는 거야? 이런 건 전혀 너답지 않아.” “내 기준은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 평소의 모습으로 날 판단하면 곤란해.” 살짝 미소 짓는 모습이 두렵게 느껴지는 건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원래 트로웰은 관대한 성격이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가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보니 그는 이전처럼 인간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굳이 애꿎은 희생을 감행하려는 것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건 아닌 것 같고. 결국 미네르바가 문제로군.’ 그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는 언제나 이유가 하나로 좁혀졌다. 그놈의 사랑이 뭔지, 미네르바의 존재만으로 트로웰은 어디까지든 악한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제 아무리 견고한 정령왕의 정신이래도 오래 지나지 않아 무너져 버릴 것이다. 라미아스는 진심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트로웰 역시 똑바로 마주 보았다. 유리처럼 깨끗한 그의 눈동자에는 아무런 감정이 나타나있지 않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뜻을 굽히지 않을 얼굴이다. 설령 미네르바가 직접 만류한다 해도 돌이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라미아스는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트로웰…제발…” “드래곤들을 모아줘. 평소 인간에게 불만이 많았던 녀석들일수록 좋아. 엘프나, 드워프. 몬스터를 동원해도 상관없어.” “뭐?” “약속은 약속이니까. 그의 말에 흔들린 건 사실이니까. 원하던 대로…내 손으로 직접 처리하는 건 참아주지.” “트로웰!” 여기서 그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정도로 라미아스는 바보가 아니었다. 설마 전 종족을 동원하여 인간을 몰살시킬 셈인가? 창백하게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도 트로웰은 무심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고 돌아섰을 뿐이었다. “기대하고 있겠어, 라미아스. 나를 실망시키지 말길.” ===================================================== [정령왕 엘퀴네스] 12-14. 인어의 숲 (1) <정령왕의 유희>-엘퀴네스의 장- “우에에에? 뭐가 이렇게 멀어!” 왔던 길을 고스란히 돌아가야 하는 처지에 직면한 지금. 나는 가는 길을 제대로 알기 위해 상점에서 지도를 하나 구입했다. 지금까지는 엘뤼엔이나 트로웰이 안내해 주는 대로 이동해왔지만, 이제부턴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냉정한 선포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까짓 그의 능력이면 몇 초 사이에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일부러 고생하는 게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 생각해서 얌전히 수긍했다. 그러나 대충 이곳까지 온 기간을 두고 예상해봤던 길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멀고 길었다. 아마도 올 때는 다수의 지름길을 이용했었던 듯하다. 게다가 중간에 노예상인에게 잡혀간 뒤, 두 정령왕이 손수 구출하면서 곧바로 수도로 데려와 버리기도 했고. “으으~ 이거 못 잡아도 2~3달은 걸리겠는데?” 지도를 보며 울상을 짓자 옆에서 덩달아 심각하게 보던 시벨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상으로도 두 달 반 정도는 걸릴 것 같아.” “그렇지? 아아. 이번엔 절대 못 걸어. 가는 길에 마시장이라도 들려야겠다. 쩝, 경비 절감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시큐엘이라도 타고 다닐까?” 야속한 엘뤼엔은 ‘도움’에 해당한다는 명목 하에 물자지원까지 중단해버렸다. 애초에 수도까지 데려다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그 외의 지원은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덕분에 생전 안 해 보던 돈 걱정까지 겹치게 되자 앞날이 그야말로 가시밭길처럼 느껴졌다. 그나마 고민을 같이 나눌 친구-시벨리우스가 옆에 있다는 사실이 한결 위안이 되고 있었지만. 애꿎은 녀석을 붙잡아 덩달아 고생시킨다는 생각에 그리 마음은 편치 못했다. “시큐엘이라면, 물의 상급정령?” “응. 나는 드래곤보다 마나가 충만한 편 이랬으니까 장시간 소환해도 괜찮을 거야. 녀석으로서는 좀 기분 나쁘겠지만.”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아. 정령이라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그리고 늑대의 모양이니까 타고 다니기엔 그리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데.” “으으, 그런가…” 결국 마시장까지 가야 하는 모양이라며 체념하는 내게 시벨은 주저하는 얼굴로 물어왔다. “저기, 내가 태우고 갈까?” “뭐?” “난 유니콘이잖아. 본체로 돌아가면 너 하나쯤 태우고 다니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하하하, 말은 고맙지만…그거야 말로 눈에 띄일 것 같은데. 유니콘이 어디 보통 말이냐. 이마에 뿔도 있고 날개까지 있잖아.” “그거야 감추면 되지. 게다가 높이 날아서 가면 알아보는 사람도 없을 거야.” 썩 괜찮은 제안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안 되겠어. 나 혼자 편하자고 널 고생시킬 순 없지.” “응? 아, 아니. 난 괜찮은데.” “아냐, 그건 불공평 한 거야. 너도 유희중인데 굳이 본체로 돌아가면서까지 수고할 필요가 뭐있어? 그냥 마시장에서 적당히 싼 말을 구하자. 그게 나을 것 같아.” 시벨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내 태도가 너무 확고해서인지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았다. 결정이 내려진 직후 우리는 바로 마시장부터 들려 적당한 말을 고르기로 했다. 넓은 터에 우리에 갇혀진 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자 상인인 듯한 남자가 얼른 달려와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을 보려고 하는데요. 2~3달 정도의 여행에도 무리 없을 만큼 튼튼한 걸로요.” “어디 멀리 가시나 보군요. 튼튼한 말이라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쪽으로 와서 골라보시지요.” 상인이 안내한 곳은 마시장 내에서 가장 큰 울타리 안 이었다. 그곳에는 우리 말고도 여러 명의 사람들이 말을 고르거나 흥정하고 있었다. 차례로 묶여있는 말들은 하나같이 크고 강해보였다. 내가 말 앞으로 다가가자 시벨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법 괜찮은 말들이 많은데? 어느 것으로 할 거야?” “글쎄…내가 보기엔 다 그게 그거라서. 그냥 색깔 예쁜 걸로 고르려고.” “쿡쿡. 그럼 내가 알려주는 것들 중에서 선택해. 여기 검은색, 저쪽의 흰색, 그 옆의 갈색 말이 여기 있는 말들 중에선 제일 건강하고 튼튼한 거야.” “그으래?” 녀석이 하는 말이니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언뜻 스쳐본 상인의 표정에 감탄이 깃드는 것을 보니 더더욱 확실했다. “아이고, 손님이 말을 보실 줄 아시는 군요. 짚어주신 세 마리 모두가 여물도 잘 먹고 피부도 건강하답니다. 셋 중에 아무거나 고르셔도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으음. 그럼 난 검은색으로 할까…시벨, 넌 뭐로 할 거야?” “응? 나도 사?” 놀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럼 나만 타고 다녀? 우리 같이 여행하는 거잖아.” “난 그냥 걸어도 상관없는데.” “내가 불편해서 안 돼.” “돈도 없다면서….” “한 마리 정도 더 사는 건 괜찮아.” 딱 잘라 말하자 녀석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보라는 말은 안보고 엉뚱한 주위를 휘익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한 부분에 딱 시선을 멈추곤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서있던 상인을 향해 말했다. “저기에 있는 말은 안파는 겁니까?” “예?” 시벨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그곳엔 한눈에 봐도 비실비실 거리는 말 한 마리가 애처롭게 묶여있었다. 너무 말라서 뼈와 가죽밖에는 없는 걸 팔려고 내놓은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그 말을 보자마자 상인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 녀석은 팔고 싶어도 사갈 사람이 없을 겁니다. 어디 고산의 야생마를 잡아 온 거라는데 통 여물을 먹지 않아서 저렇게 비쩍 말랐거든요. 당장 죽을 날이 오늘 내일 하는 걸 가져다 어디에 쓰겠습니까?” “사간다는 자가 있으면 파시기는 하는 거구요?” “물론 그렇담 환영입지요. 저도 상인인지라 손해 보는 장사는 안하는 사람입니다만, 저건 공짜로 드릴 의사도 있습니다.” 그러자 시벨은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그럼 난 저걸로 할래, 엘.” “뭐? 하지만…” “불쌍하잖아. 저렇게 그냥 놔두면 당장 오늘 밤도 못 넘기고 죽을 거야. 내가 잘 돌보면서 데리고 다닐게.” 아니, 그전에 네가 타고 다닐 수가 없다는 게 문제라는 자각은 못하는 거냐. 얼떨떨한 심정이었지만 녀석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니 차마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탈 말 한 마리의 값만 지불하고, 덤으로 마른 말을 공짜로 얻게 되었다. 경비를 생각하자면 잘된 일이었지만, 시벨이 끄는 말을 볼수록 마음이 무거워졌다. “저기…시벨리우스. 그 말 너무 약해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다시 가서 사는 건…” “응? 아냐, 엘. 괜찮아. 이 녀석, 지금은 이렇게 말랐지만 살만 조금 찌면 웬만한 명마가 부럽지 않을 걸? 굉장히 좋은 품종이야.” “하지만 지금 걷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데.” “오래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서 그래. 이제 먹으면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생긋 웃은 녀석은 간간히 말에게 치료마법을 걸어주며 체력의 회복을 도왔다. 내가 그것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자, 지금껏 침묵하고 있던 엘뤼엔이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동물에 관해서라면 유니콘 보다 잘 아는 자가 없다. 녀석이 괜찮다면 정말로 괜찮은 거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으음. 여물을 먹지 못해서 말랐다고 하던데. 계속 안 먹으면 죽는 거 아니야?” “야생마라고 했잖아. 경계심이 강해서 인간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던 것뿐이다. 이제 다루는 상대가 인간이 아니니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야.” “헤에,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언젠가도 들었던 것 같다. 드래곤이 몬스터를 다룬다면, 유니콘은 동물을 다룰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두 마리의 말 모두 시벨에게 무척 호의적이었다. 그가 주는 여물을 아주 잘 받아먹는 것을 본 나는 조금 안심하며 물었다. “일단 완전히 회복되길 기다려야겠지? 언제쯤이면 될 것 같아?” “치료마법을 꾸준히 걸고 있으니까 내일 아침이면 충분해. 오늘 저녁 사이에 기력 되살려 놓을게.” “가능할까?” “응. 나한테 맡겨줘.” 그 뒤 여분의 식량을 구입한 우리는 마을을 벗어나 한적한 장소에서 노숙을 하기로 했다. 여관에서 머물다 출발하고 싶었지만 아직도 나를 찾아 헤매는 기사들이 사방에 깔려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마을을 벗어나고도 무사할 거란 보장은 할 수 없었다. 이미 내 인상착의를 적은 몽타주가 사방에 뿌려졌기 때문이다. ‘이거야 원. 좋은 일 하고도 범죄자 취급이네.’ 황제의 명령이라니 아마 들리는 마을마다 비슷한 상황이 될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떠나기 전 라미아스에게 폴리모프 마법이라도 부탁할걸. 이제와 다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한참의 고민 끝에 먼저 스타일에 변화를 줘보기로 했다. “염색?” “응. 몽타주에는 금발에 초록색 눈동자라고 되어 있잖아. 색을 바꾸면 사람들에게 혼동을 줄 수 있을지 몰라.” “그럴까? 머리카락 색 정도는 내 마법으로도 바꿀 수 있어.” “와아, 정말? 그럼 나 검은색으로 만들어줘.” “검은색?” 되묻는 시벨의 표정은 뭔가 잔뜩 불만스러워 보였다. 하고 많은 색 중에서 왜 그렇게 어두운 계열을 선택 하냐고 묻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내가 재촉하자 녀석을 별 수 없다는 듯 순순히 머리색을 바꿔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금발이 새카맣게 변하자 마치 예전의 강지훈로 돌아간 마냥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어때? 괜찮아?” “으음. 의외로 흑발도 잘 어울리는걸. 이미지가 확 달라 보여. 조금 차가운 느낌이랄까. 차분한 느낌 같기도 하고…” “그래? 그럼 여기서…” “우왓! 엘,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긴. 머리카락 자르는 거지. 뻔히 보고도 모르남? 경악하는 시벨을 무시한 채 나는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단숨에 목 아래까지 짧게 잘라냈다. 대강 자른 탓에 잔머리도 삐죽삐죽 튀어나오고 전체적인 모양은 엉망이었지만, 오랜만에 짧은 머리를 한 탓인지 기분만큼은 굉장히 상쾌했다. 후두둑 어깨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며 나는 씨익 미소 지었다. “자아~ 이제 머리 기장도 다르고 색도 다르니까 의심 받을 확률이 더 줄어들 거야! 어때, 내 계획이!”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영 떨떠름했다. 처음부터 놀랐던 시벨은 물론, 엘뤼엔 또한 탐탁지 않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두서없이 자른 탓에 모양새가 너무 형편없는 게 문제인 모양이었다. 하긴, 아무렇게나 검으로 서걱 자른 것이 오죽하겠느냐 만은. “표정들이 왜 그래?” “으으으~ 방금 뭘 한 거야, 엘! 이렇게 예쁜 머리를 자르다니! 아깝잖아~!” “아깝긴. 머리야 내버려두면 또 자라는걸 뭐. 치렁치렁 내려오는 게 이제 슬슬 지겹기도 하고. 안 그래도 한번 잘라볼까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기회가 좋았잖아? 하하하!” “하아, 정말 말도 안 돼. 왜 저런 인간들 때문에 엘이 이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거야?” “왜? 그렇게 이상해?” 혹시 너무 산발한 머리 탓에 광인(…)처럼 보이는 건가 싶어, 나는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엘뤼엔이 거울 대신 내 앞에 커다란 물웅덩이를 만들어 주었다. 그제야 제대로 보게 된 모습은 조금 정돈이 안 되었다는 느낌뿐, 그렇게 한탄이 나올 정도로 이상하게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내 딴에는 오히려 훨씬 남자다워진 것 같아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난 괜찮은데?” “이상하다는 게 아니야. 아까우니까 그렇지. 긴 머리 정말 잘 어울렸는데. 그걸 그렇게 망설임 없이…휴~ 어쨌든 가만히 있어봐.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머지 부분 다듬어줄테니까.” “…어어, 그, 그래.” 시벨리우스…너 혹시 직업 잘못 선택 한 거 아니냐? 지금이라도 요리사에서 미용사로 전직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작 머리카락하나 자른 것 가지고 이렇게 울상을 짓다니, 이 녀석에게는 남들과 다른 섬세한 예술의 혼이 불타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 생전 머리카락 자르고 죄책감 느껴보긴 또 처음이네…’ 깨끗하게 정돈해주는 와중에도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녀석을 보니 절로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 후로도 한참이나 한숨을 내쉬던 녀석은 머리정돈이 전부 끝날 때가 돼서야 겨우 아쉬운 표정을 털어냈다. “자, 다 됐다. 뭐, 지금 다시 보니까 이것도 꽤 괜찮게 어울리네. 확실히 이미지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그래?” “응. 이전은 화려하고 신비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차분하면서 소년다운 느낌이야. 그런데 왠지 전보다 더 어려 보이는데, 괜찮겠어?” “그런 건 상관없어. 애초에 이미지가 달라지는 게 목적이니까, 연령대의 변화도 나쁘진 않겠지. 어쨌든 이걸로 당분간은 귀찮은 검문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엘퀴네스가 보기엔 어때? 좀 달라져 보여?” 빈말이라도 괜찮다고 말해주면 입안에 수증기가 맺히는 걸까. 질문의 의도가 뭐냐는 듯, 그는 한참동안 내 얼굴을 노려보더니 불쑥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분명 차이는 있군. 소녀에서 남장 미소녀로. 어떻게 해도 여자 같은 얼굴이라니, 쯧,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군 그래.” “…왜 또 시비야?” 그 순간 나는 자그맣게 흘러나오는 시벨리우스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그건 그래.” “……” 세상에 내 편은 하나도 없었다. [정령왕 엘퀴네스] 인어의숲 (2) 인어의 숲 (2) 태고 때 부터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성역의 숲. 바로 유니콘들이 살고 있는 터전이었다. 시벨리우스가 이 곳을 박차고 나간지도 어느새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전에도 가끔씩 여행을 다니긴 했지만 그가 아무 통보 없이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운 일은 이번이 처음 이었다. 그동안 웰디는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견디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산책도 그만 둔채. 그녀는 늘 마을의 입구에서 서성거리며 시벨리우스의 귀환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면 돌아오겠지 싶었던 그는 여전히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언제나 생기로 가득하던 그녀의 얼굴은 약혼자의 귀환이 늦어 질수록 슬프게 가라앉았다. 유니콘의 장로 역시 매일 같이 시들어가는 손녀를 안타까운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현재 시벨리우스의 부재는 유니콘 마을의 유일한 골칫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언제까지 두고 보실 겁니까, 장로님 ? 당장 시벨리우스님을 송환하셔야 합니다. 제 1계승자의 위치를 생각해서라도 이 이상 인간 세상의 유희는 그분께 적합하지 않습니다. " " 무슨 말인지는 모르는 바는 아니오. 하나, 시벨리우스님의 뜻이 그러하시니 당분간은 더 지켜봐야 하지 않겠소 ? 그분도 한창 젊은 혈기시니, 인간세상에 흥미를 보이시는게 당연한 거요. " " 하지만 웰디님이 걱정이지 않습니까 ? 저러다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 ... . " " 그만, 난 저 아이를 그렇게 약하게 키운 기억이 없소.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자신의 감정은 스스로 추스를 수 있어야겠지. 어자피 곧 있으면 최강의 세라핀을 정하는 시기가 다가오오. 그때라면 시벨리우스님도 어쩔수 없이 돌아오셔야 할 거요. " " 아아, 그렇군요. 벌써 그 시기가 다가오는 건가요. " " 과연 그날이라면 .. . 시벨리우스님이라도 돌아오실수 밖에 없겠군요. " 침착한 장로의 말에 흥분하던 유니콘들 역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그들 중 한 유니콘이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저어, 그런데 혹시 시벨리우스님께서 그 사이 타 종족의 여인에게 마음이라도 주시면 어찌 되는 겁니까 ? " " ... ... . ... ! " 술렁술렁 그말의 파장은 순식간에 다른 유니콘들에게까지 번졌다. 다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던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말에도 태연한 태도를 유지하던 장로 역시 심각한 얼굴로 신음성을 흘렸다. 유니콘은 여성에게 약한 종족. 그반면 시벨리우스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편이었지만, 그런 태도가 유희 중에 만난 여자에게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유니콘은 원래 어떤 종족과 결혼하든 반드시 그 자식은 유니콘으로 태어나게 되어있다. 때문에 굳이 같은 종족과 결혼하란 법은 없었지만, 시벨리우스는 달랐다. 그는 유니콘 신의 성스러운 피를 이은 계승자가 아닌가 ! 타 종족의 여자를 아니로 맞이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것은 유니콘 종족 전체의 체면 문제와도 같았다. " 하지만 그분께서는 이미 웰디 양이 있지 않은가. 설마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줄리가 .... . " " 지금은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오 ! 그분이 어릴때부터 정해진 반려자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미 다른 상대를 찾았을지도 모르지요. " " 그,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 아니오 ! 마을로 영영 돌아오지 않으실지도 .... . " " 역시 강제 송환을 해야 ... .. . "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유니콘들이 한마디씩 늘어놓던 순간이었다. " 제가 가겠어요 ! " " 헉 ! 웰디님 ! " 유니콘들은 갑자기 등장한 웰디를 보고 다들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설마 그녀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웰디는 척척 용감하게 할아버지의 앞으로 걸어갔다. " 저를 마을 밖으로 보내주세요. 할아버지. 제가 시벨리우스님을 찾아서 데려오겠어요. " " 그게 무슨소리냐, 웰디 ! " " 이대로 그분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제가 시벨리우스님과 감정의 공명을 할수 있다는것. 그분의 감정을 느낄때마다 불안해서 미칠것 같아요. 제가 가도록 해주세요. 이중에서 그분을 설득할 수 있는 저밖에 없을 거에요. " " 안된다. 인간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전의 경험으로 알고 있지 않니 ? 다시는 너를 위험하게 만들 순 없다. " " 지난번엔 호기심이었지만 이번엔 달라요. 그분을 찾는 일에만 집중할거예요. 보내주세요, 할아버지. 제발요. " 손녀의 간절한 표정을 본 장로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시벨리우스를 설득하는 일이라면, 장로인 자신보다 오히려 웰디가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공식상으로 그녀는 그의 약혼녀이기도 했고, 결혼 의사가 없어도 시벨리우스가 그녀를 친동생처럼 아낀다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 . " 네 설득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셈이냐 ? 유니콘 남자들은 한 번 운명의 여인을 찾으면 설령 목숨을 잃는 경우가 오더라도 변하지 않는다. 그것은 웰디,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 " " 저도 유니콘이에요, 할아버지. 제 운명의 상대는 시벨리우스님이구요. 그분을 잃으면 저도 죽어요. 여기서 마냥 그 순간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정면으로 부딪치겠어요. " 평소에 얌전하기만 한 아이가 입에 담을 내용이 아니었다. 그만큼 그녀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뜻이리라. 장로는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들었다. 그모습을 웰디와 이하 유니콘들이 초조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후,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눈을 떴다. " 좋다. 가거라. " " 할아버지 ? " " 헉 ! 장로님 ! " " 아, 안됩니다 ! 어찌 이런 연약한 소녀에게 .. .. . " " 그렇담 자네가 시벨리우스를 설득할 수 있다는 건가 ? " " 그, 그건 아니지만 . . . .... .. " 항의하던 유니콘이 말끝을 흐리며 물러서자 장로는 웰디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 알고 있겠지만 웰디야. 그분을 강제 송환하는 것도 여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님을 설득할수 있다고 말한 것은 너다. 나는 네가 그 말을 반드시 지킬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 네, 할아버지. 제가 꼭 그분을 데려오겠어요. " " 네 호언만큼 쉬운 일이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너는 그분과 감정을 공명하고 있으니, 그 사실을 더욱 잘 알고 있겠지. 지금 네가 조급하게 구는 이유 또한 그것 때문이 아니냐 ? 그분의 심경에 변화가 있는게지 ? " " ... .. ..... . " 차마 대답하지 못하는 손녀를 보며 장로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느꼈다. 모두가 걱정하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 캄캄해지는 충격을 받긴했지만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 그분이 네게 동생이상의 감정이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네 아름다움에 금방 마음을 돌이킬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것 같구나. 지나치게 친숙한 존재라는 사실이 연인으로서의 발전을 방해했는지 모르지. 너를 그분 곁에서 함께 크도록 하는 게 아니었는데 .... .. " " 할아버지 ... .... .. " " 이제와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없겠지. 호위기사 둘을 데리고 떠나가로, 웰디. 가서 그분의 마음을 돌려보거라. 만약 그것이 안된다 해도 어떤방법을 써서든 마을로 모셔오거라. 알겠니 ? 체념과 원망, 슬픔은 모두 그 다음이다. 일단 그분을 마을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것, 그것만은 절대 잊지 말거라. " " 네. 명심할게요, 할아버지. " 웰디의 대답을 몇번이고 확인한 장로는 이어서 손녀의 호위기사로서, 언젠간 인간 세상에 잡혀갔을때 함께 있었던 두 세라핀을 뽑았다. 바로 아렐과 카리안이 그들이었다. 호명된 두 유니콘이 앞으로 다가오자 장로는 그들에게도 손녀에게 했던말을 반복했다. " 자네들이 최선으로 할 것은 웰디를 보호하는 일이지만, 시벨리우스 님을 설득하는 일에도 도움이 되어주게. 설령 그분이 마을로 돌아올 의사가 없다고 해도, 어떻게든 꼭 모셔와야만 하네. " " 알겠습니다. 장로님. " " 맡겨주십시오. " " 그럼 웰디를 잘 부탁하겠네. 그녀가 인간의 사악한 손길에 떨어지지 않도록, 용감한 기사인 자네들이 잘 지켜줄 것이라 믿네. " " 예. 저희 목숨을 걸고 웰디님을 지키겠습니다. " 두 유니콘의 대답에 장로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녀의 안위가 염려스럽긴 했으나, 이번일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필요했다. 아마 어떤식으로든 결론이 지어지리라. 그리고 그것이 부디 최악으로만 치닫지 않기를 장로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했다. ' 시벨리우스 전하, 당신은 우리 유니콘 종족의 성스러운 후계자 입니다. 동족을 배신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 굳은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눈빛에는 어떠한 결심히 짙게 드러났다가 곧 사라졌다. 종족의 앞날에 필요 없는 가지는 잘라낼 것이다. 그것이 설령 모두가 떠받드는 존재라 해도. ******************************************************************************* 힐끔. 나는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이는 한 존재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 떨리는 어깨가 마냥 애처롭기만 하다. 내가 이 '존재'를 처음 본 것은 시벨리우스 때문이었다. 몇시간 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난 녀석은 놀랍게도 두 여자와 함께 하고 있었다.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였다. 쟈스민은 그날 아침에 봤던 때보다 훨씬 꾀죄죄하고 지쳐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잔뜩 울기라도 했는지 눈가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나는 안도하는 반면 한편으론 어리둥절한 심정이 되어 물을수 밖에 없었다. " 다행이에요. 두분다 무사하셨군요 ! 어떻게 된거야, 시벨 ? 어디서 찾았어 ? " 그러자 녀석은 난감한듯 웃어 보이더니 자신의 앞을 슬쩍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녀석이 품안에 뭔가를 끌어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도 숨을 쉬고 있는 작은 형체의 생물이었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횃불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가자 흠칫 놀라는 것이 보였다. 잠시후, 불빛에 환하게 드러난 모습은 이제 겨우 8살이나 되었음직한 어린아이였다. 허리까지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특이한 색깔이 많은 이세계에서도 처음보는 핑크빛이었다. 눈동자 역시 선명한 분홍색.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아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돌아볼 만큼 귀여운 얼굴이다. 시릴정도로 하얀 피부 위엔 차마 옷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천 쪼가리가 중요부위만 간신히 두루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아이의 귀였다. 일반 인간들처럼 둥그렇지도, 엘프처럼 뾰족하지도 않은 물갈퀴의 모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뜨악한 내가 아무말도 못하고 있자 나를 따라 아이에게 시선을 건네던 엘뤼엔이 담담하게 한마디 내뱉었다. " 인어로군. " " 헉 ! 인어 ? 이 숲에 산다는 세이렌 말이야 ? " 반문하면서 나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는 시선으로 시벨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사라져서 쟈스민을 데리고 온것 까지는 그럴수 있다 치자. 그런데 뜬금없이 웬 인어란 말인가 ! 그것도 이렇게 어린 인어라니. 그에 대한 녀석의 답변은 더욱 가관이었다. 인어의 노래에 미혹되어 정신없이 달려가던 녀석은 ( 자신도 창피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 숲 안쪽 깊숙한 구석에 숨어 있던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를 발견했단다. 그런데 바로 그 옆에 자신을 꾀어낸 인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쟈스민이 추가로 설명한 말에 의하면 산적을 피해 숲에 들어와 겁에 질려 떨던 그녀들 앞에 갑자기 어린아이가 나타났다고 했다. 그게 인어였던 건 몰랐던 모양이지만. 아이는 무서워하는 그녀들에게 괜찮다고 안심시키며 곁을 지켜주었단다. 아마 미혹의 노래를 부른것도,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서였던 것 같았다. " 저는 천사인줄 알았어요. 저희를 위험에서 지켜주기 위해 마신 카노스께서 보내주신 신의 천사라고 ... .. 정말 그렇게 믿을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이렇게 살아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게 되다니 ... . 아아, 신이시여 ! 감사드립니다. " " 아가씨 ! " 떨리는 목소리로 감격하던 그녀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절했다. 귀족가의 연약한 여인으로 자란 그녀가 연 이틀간을 추위에 떨며 공포심을 참아내는 일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황한 우리는 일단 그 자리에서 노숙하기로 결정하고, 곧바로 쉴수 있는 준비에 들어갔다. 물론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마법의 텐트가 아니라 보통의 여행자처럼 침낭을 꺼내고 불을 피웠다. 그중 침낭은 모두 여자들에게 양보하고, 우리들은 모닥불 앞에서 밤을 새기로 결정했다. 내친김에 꼬마 인어 역시 재우려고 했지만 어쩐일인지 시벨리우스 옆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도 덩달아 모닥불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쭈욱 이런 상황.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서 바라보면 눈이 마주친 꼬마 인어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게 미안해서 눈을 돌리면 또다시 아까와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그렇게 신기하게 생겼나? 처음 몇번이야 그러려니 했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어쩐지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이번엔 계속 바라봤더니 잠시후 꼬마인어 역시 빤히 시선을 마주 대온다. 동그랗게 뜬 눈동자는 나와 마주친 이후로 한번도 깜빡인 적이 없었다. 어쭈 ! 눈싸움을 해보시겠다 ? 걸어오는 싸움은 마다해본 적이 없는지라 나역시 눈에 힘을 주고 부릅뜨고서 바라봐주었다. 그러자 순간, 딱 ! 하고 소리가 울리더니 머리에서 가벼운 통증이 느껴졌다. 엘뤼엔이 꿀밤을 때린것이다. " 아야 ! 왜 때리고 그래 ? " " 어린애들처럼 뭘 하는 거냐 ? 인어와는 눈을 마주치는게 아니다. 목소리는 미혹을, 눈동자는 타인의 과거를 훔쳐보는 힘을 가지고 있어. " " 헉 ! 그게 정말이야 ? 이봐, 꼬마 ! 너 내과거 봤나 ? " 트로웰도 보지 못한 과거를 설마 보았으랴 싶어 조심스럽게 물으니 대답대신 생긋 웃기만 한다. 귀엽긴 했지만 그것이 그렇다는 뜻인지, 아니라는 뜻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설마 봤다 해도 인간일때의 모습뿐이겠지. 아마 내 정체까지 알아냈다면 이렇게 태연하게 웃지는 않을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했다. " 난 엘이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 " " ... .. " " 나이는 몇이야 ? 동료들은 어쩌고 왔어 ? 엄마는 ? " " .. ...... ... " 하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질문에도 꼬마 인어는 여전히 또랑또랑하게 내 눈을 바라보기만 했다. 말을 못하는 건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시벨이 얼른 한마디 끼어든다. " 소용없어, 엘. 나도 아까부터 계속 물었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쟈스민 양에게도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 " 헤에 ? 정체가 수상해지는데 ? 인어인건 확실한거야 ? " " 응. 귀의 모양도 그렇고, 이런 색의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를 가진건 인어밖에 없거든. 미혹의 노래도 인어가 아니면 부를수 없어. " " 아아, 그렇지. 그게 아니었다면 네가 그렇게 신들린듯 뛰어갈리가 없지. " " .... .. 미안. " 다시 생각하니 자신의 실수가 낯 뜨거웠는지 녀석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 정말 의도한게 아니었어. 종족 특성이라고 해야 하나 ? 우리 종족의 남자들이 유달리 여자한테 약하거든. 오죽하면 노예상인들이 여자를 이용해서 유혹할 정도니까. 그럴땐 백이면 백 잡힌다는 말을 듣긴 했는다, 나도 내가 이렇게 쉽게 휘둘릴 줄은 물랐어. " 언제고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지만 나는 다시금 황당한 심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때 느낀 것과는 조금 다른 기분이긴 했다. 더 나쁜 쪽이었지만. " 이런 꼬맹이도 여자냐 ? " " 하하하 ... .. 그게 .... . 일단 생물학적으로는 여자 맞잖아. 하하하하하 . . . .. " " . ...... .. 한마디만 해줄까 ? " " 인간에게 박해를 당해도 싸다. "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녀석을 모르는 척하며 나는 다시금 꼬마 인어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별안간 아이가 갑자기 내게 다가오더니, 두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눈빛이 초롱초롱 한것이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 응 ? 왜그래 ? 머리에 뭐 묻었어 ? "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황한 얼굴로 시벨을 바라보니 녀석 역시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웃으며 말한다. " 아마도 네 머리색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 인어들 중에는 까만 머리카락이 없으니까 신기해서 그런가봐. " " 그런가 ? 하하, 이거 나도 염색한건데. " 어색하게 웃으며 말해도 듣는지 마는지 영 반응이 없다. 그저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머리를 만지작거리고만 있을 뿐. 그러다 무슨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꼬마인어가 두손으로 내머리를 가볍게 쥐고는 아래로 주욱 쓸어내렸다. 그러자 그 손길을 따라 머리카락이 점점 늘어나버리는 것이 아닌가 ! " 헉 ! 뭐, 뭐야 ? " 눈 깜짝할 사이에 내 머리카락은 자르기 전의 길이만큼 길어져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머리색까지 원래의 금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나는 처음으로 인어의 목소리를 들었다. " 이머리가 더 잘 어울려. " " .... .... . ! " 한마디로 망연자실 ! 인어에게 이런 능력이 있을줄은 몰랐지만, 감탄보다는 원망이 더 강했다. 아무리 어려서 생각이 짧다고 해도 그렇지, 상대방의 동의도 없이 무작정 일을 벌이다니 ! 난 정말 큰맘 먹고 잘랐단 말이다 ! 이런 내 맘도 모르고 시벨은 감탄한 얼굴로 말했다. " 다행이다, 엘. 애써 다시 기를 필요가 없게 됐잖아. " " ... ... . 뭐가 어째 ? " " 아, 아니. 그냥 잘됐다 싶어서. 어차피 기를 생각인거 아니었어 ? 이제 더이상 검문에 걸릴 일도 없을 텐데 계속 짧은 머리로 있을필요는 없잖아.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너는 금발쪽이 더 잘어울리는 것 같아. " 남의 가슴에 비수를 박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건넨 주제에 시벨은 뭐가 문제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더이상 말해 무엇 하랴.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래그래. 내팔자가 다 그렇지, 뭐. " " 에, 엘 ? 혹시 화난거야 ? " 그럼 불난집에 기름을 붓고도 안 타오르길 바라는거냐, 네놈은 ? 나는 대답대신 노려보는 것으로 녀석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내팔을 툭툭건드렸다. 문득 바라보니 이 모든 일의 주범인 꼬마 인어가 머뭇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올려보고 있었다. 혼날까봐 잔뜩 긴장한 얼굴이랄까 ? 그 얼굴을 보고나니 왠지 화내는 것도 한심해져서 쓴웃음을 지었다. ' 이거야 원. 엘, 너도 참 속 좁다. 어린애가 그럴수도 있는거지, 뭘 그정도 가지고 이렇게 꽁해 있고 그러냐. 어른 스럽지 못하게. '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괜찮다는 뜻으로 꼬마인어의 머리를 몇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금방 헤헤거리고 웃더니, 지치지도 않는지 이번엔 내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뭐든지 쉽게 잊는 것은 확실히 어린애 다웠다. 낑낑거리고 가져간 내 오른손을 마치 탐정이라도 되는 듯이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물갈퀴도 없이 매끈한 것이 신기했는지 이리저리 바라보는 것이 꽤 귀여웠다. 내친김에 왼손까지 보여주자 화색이 가득한 얼굴로 날 올려다 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장난기 가득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직접 파고 들었다. < 헤에, 정말이었네. 너, 내문장은 어디서 받은거냐 ? > " . ... .. ! " 너무 놀라서 휙 주위를 둘러보니 의아하게 바라보는 일행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짐작은 했지만 역시 나에게만 들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내가 놀란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 엘 ? 왜그래 ? " " 응 ? 아니, 그냥 .. ... 방금 무슨 소리가 들린것 같아서. " " 소리 ? 난 아무것도 안들리는데. 혹시 환청이라도 들은거야 ? " " 아, 아니야 ! " 두근두근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만큼 강하게 뛰었다. 그때, 내 손을 꼬옥 움켜쥐는 작은 힘이 느껴졌다. 떨리는 눈으로 내려다 보니 나를 향해 생긋 웃고 있는 꼬마 인어가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 눈동자. 설마 .... . ! ' 카노스 .. ... ? ' 멍하게 속으로 질문하자 의외라는 듯, 꼬마 인어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진다. 그러나 이상황에서 눈을 부릅뜰 사람은 오히려 나였다. 맙소사 ! 카노스 ! 당신이란 신은 도대체 .. .. . ! < 호오, 나라는걸 바로 알아맞히네 ? 이야 ~ 대단한데 ! 그문장은 어떻게 된거냐 ? 정말 내가 준게 맞아 ? 근데 왜 내기억엔 없지 ?> '으으윽 !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카노스 ! 그 꼴은 또 뭐구요 ! " 원래라면 내 머리를 이렇게 만든 책임부터 따지고 들었겠지만, 이순간 만큼은 그를 만났다는 충격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저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만남에 당황해하는 내게,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 응 ? 왜 ? 인어가 어때서 ? 꽤 귀엽잖아. 마음에 들어한거 아니였어 ? 방금전까지 넋 놓고 바라봤던 주제에. > 넋 놓은 적 없어욧 ! 너무 기가 막히면 오히려 긴장이 풀어지는 모양이다. 놀랄 기운도 없어진 내가 추욱 어깨를 늘어뜨리자 꼬마 인어, 아니 마신 카.노.스는 또다시 생긋 웃으며 머릿속으로 자신의 의사를 전달했다. < 허락 없이 내 문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있다는게 신기해서 조사차 와봤더니, 상당한걸 만나게 되는 군. 정령왕의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 .. .. 혹시 미래에서 왔냐 ? > ' 하아, 바로 알아보시네요. 역시 신의 눈은 못 속이는 군요. .. .. " < 엥 ?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정말이었어 ? > " .. .. .. ... . " 휘둘리지 말자 , 엘 ! 상대는 다름 아닌 카노스다.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뒤통수 치는게 특기인 신이 아니던가. 내가 묵묵히 침묵을 고수하자 그는 재미없다는 듯이 작게 투덜 거렸다. < 쳇 ! 안넘어가네. 미레에서 나와 꽤 친했나봐 ? 이런 식으로 성격 파악 당하면 기분 상하는데.> ' 하하 . .. .. ' 그래도 본인의 성격에 문제가 있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지 ? 지금이나 미래나 (?) 엉뚱하기만 한 그의 발언에 좀처럼 적응을 못하고 있는데, 문득 카노스가 진지한 말투로 물어왔다.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정령왕인 네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거냐 ? 영혼만있는걸 보면 본체는 미래에 놔두고 온 모양인데. 그거 꽤나 위험한 일이라는건 아는거냐 ? 혹시 내가 보내준거야 ? > ' 아, 그게 아니라 .. .. . '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 말고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그와의 대화가 길어짐에 따라 일행들이 이 모습을 이상하게 여길수 있다는 불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엘뤼엔과 시벨리우스가 내게 수상하다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무말도 없이 인어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며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 내기색을 느꼈는지 카노스가 피식웃으며 말했다. < 기다려봐라. 이야기하기 편한 환경으로 만들어줄 테니. > 이윽고 그가 딱 !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거짓말 처럼 주위가 조용해진것이 느껴졌다.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도, 사람의 숨소리도, 심자어 공기가 흐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의 모습이 마치 돌덩이라도 된 듯 정지된채 굳어있었다. 나를 바라보던 두눈의 초첨역시 잡히지 않았다. 13-1 귀환의 주문(1) 그때가 언제였더라?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이 세계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난 일. 모든 것의 시작은 명랑한 모습이 제법 귀여웠던 작은 소녀로부터였다. <선물이에요.> 수줍게 웃으며 내밀었던 작은 목걸이. 무심코 보기엔 그저 평범한 돌 조각이었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한번에 알아보았다. <와아, 조개화석이구나! 이런 건 어디에서 구했어?> <예전에 숲에 놀러갔다가 주웠어요. 엘 오빠한테 드릴게요.> <고맙다. 소중하게 간직할게.> 그때 아무생각 없이 받았던 화석 목걸이는 지난 1년 동안 단 한번도 내 품안에서 떨어진 적이 없었다. 무심코 꺼내 볼 때마다, 심지어 그 안에 보조 마법을 거는 순간조차 나는 그것이 가진 진정한 가치에 대해 단 한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이 없었다. 바로 오늘, 그안에 감춰있던 비밀이 우연히 풀리던 순간까지. " ............이런 걸 기적이라고 하는 건가." 오매불망 애타게 찾고 있던 물건을 우연히 만난 꼬마에게서 우연히 선물 받을 확률은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그리고 그것을 1년 가까이 까맣게 모르고 있을 확률은? 아니 그보다 먼저, 산에서 무심코 주은 돌조각이 영혼의 보석일 확률은 몇이나 되지? 로또 복권에 1등으로 당첨됐다고 해도 지금의 나보다 더 경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방금전 내게 벌어진 일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손 바닥 위에서 뚜렷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것을 아연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정체모를 눈부신 빛이 터진 이후, 랑시에게 선물 받았던 조개 화석은 그 형체도 남기지 않고 부서져 버렸다. 그런데 완전히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놀랍게도 그 안에 또 다른 물건이 존재하고 있는 게 아닌가! 지금 내 손에 놓여진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그저 붉은 색을 띌 뿐인 평범한 보석이었다. 아니, 색이 고와 예쁘게 보일 뿐, 가공되지 않은 원석의 상태나 거의 다름없었다. 특이사항이라고는 돌 자체에서 미세한 열기가 느껴진다는 것 정도? 분명히 멋지긴 했지만 원체 정령계의 화려한 보석들에게 익숙해진 나로선 그리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못됐다. ... 그것이 내가 지난 1년 동안 무작정 찾아 헤매던 '영혼의 보석'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하...하하....하하.......농담이지?" 어떻게 이런 말도 안돼는 상황이 벌어질 수가 있는가! 이제껏 가지고 다니던 목걸이가 내가 찾던 물건이었다니! 아무리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해도 너무 하잖아?! 꿈에 그리던 상황도 막상 정말로 닥치면 믿기지 않는다더니, 바로 내가 그 짝이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기적'에 나는 한동안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보석에서 느껴지는 확연한 '존재감'때문이었다. 한눈에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한 엘뤼엔의 말은 옳았다. 지금 나는 착각이라고 외면 할 수도 없을 만큼 온 몸으로 보석이 뿜어내는 기운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라피스 라즐리, 그 망할 도마뱀의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화석에 갇혀있던 것에 대한 투정이라도 하듯, 보석은 어마어마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여과 없이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강력한 기운을 왜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것이인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라피스? 너...라피스 맞지?" 이미 몇 번이나 실감하고 있었지만 나는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사실이라고 해도 보석에 갇혀있는 녀석으로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결국 나 스스로 판단해야 할 몫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 머릿속에 선명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지지리도 둔한 녀석. 이제야 눈치 챈 거냐? "!!" 마치 투정을 부리는 것처럼 나를 나무라는 말투. 분명 나도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무엇보다 보석과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 안니가. 라미아스의 레어에서 봤던 보석 중에서도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에고소드로 조합된 녀석들의 경우엔 대화는 가능했지만 이미 이지가 상실된 상태라 감 정 없이 자연스럽지 않은 기계적인 말투였다. 혹시나 카노스나 엘뤼엔이 말을 건 게 아닌 가 고민하는데, 그새를 못참고 또다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 어이, 뭐하는 거야? 지금 나 무시 하냐? 이 몸이 친히 말을 걸어주고 있는데 감히 대답도 안 한다 이거지! "라, 라피스? 진짜 라피스야?" -장난 해? 그럼 내가 나지 누구야? "맙소사.......너 어떻게 말을 하는 거야?"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당연히 하니까 하는 거지.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녀석이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명히 그려졌다. 나는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것을 느꼈다. 오랜 만에 만난 녀석이 이전과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에 적잖이 위안이 되엇던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내가 현재 처한 상황을 정확하게 자각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골치만 썩이던 도마뱀 녀석을 이제야 겨우 만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여행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에 모든 것을 걸면서도 혹시나 찾을 수 없을 까봐 얼마나 전전긍긍했던가. 그런데 정작 본인은 바로 옆에 있었다니. 그 한 많았던 여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조금 억울한 기분이긴 했지만 지금은 녀석을 찾았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기로 했따. 긴장이 풀리자 그제서야 충격으로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안도한 탓일까? 울컥 북받친 감정에 눈물까지 나올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이 모든 것을 라피스에 대한 원망으로 돌려버렸다. "이 나쁜 자식아! 여지껏 뭘 하고 있었던 거야! 바로 옆에 있었으면 있다고 말이라도 하던가! 이제까지 완전 헛고생 한 거잖아!" -윽! 왜 소리는 지그고 난리야? 지가 둔해서 눈치 못 챈 걸 가지고. "뭐가 어째? 여기까지 찾으러 와준걸 고맙다고 하진 못 할망정!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냐, 이 화상아!" 이제껏 고생했던 일들이 떠올라 나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라피스는 그 말에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다른 부분을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보다 말이야. 나 뭐가 어떻게 된 거냐? 찾으러 왔다고 한 걸 보니, 내가 어디 멀리라도 날아가 있었던 모양이지? 죽은 게 아닌 건가? "뭐?" -그렇잖아. 너랑 대화가 가능하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소리 아니야? 근데 좀 이상하긴 하네. 아까 전 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너하고 느껴지는 거리 감각이 뭔가 애매해. 나 지금 뭐에 갇혀 있는 거냐? 주변의 기운만 느껴지지 정작 모습은 보이지 않으니까 답답한 걸? 진지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는 방금 전까지 솟구치던 분노가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이 어런 꼴이 된 이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더러 늦게 나타났다는 원망을 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살짝 입술을 깨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해?" -폭발할 때 내가 널 감싼 것까지. 그 뒤로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당연히 명계로 갔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기로 보니 이 안이더군. "후우. 그렇구나." 아무리 녀석이라도 자신이 엉뚱한 세상에서 보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지끈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쥐어짜듯 힘겹게 말했다. "잘 들어, 라피. 너 죽은 거 맞아." -뭐? "설명하자면 긴데...넌 그때 확실히 죽었어. 지금 넌 영혼만 존재하고 있는 상태야. 정확히는 봉인되어 있는 거라고 해야 하겠지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처음부터 제대로 말해봐.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제껏 있었던 모든 일들을 설명했다. 그의 영혼이 엉뚱한 세상으로 사라져 버린 것과 보석이 되었다는 사실. 그 뒤 내가 그를 찾기 위해 차원 이동을 감행했으며,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이 바로 4천년 전의 아크아돈이었다는 것까지. 기나긴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라피스는 단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반응에 나는 속으로 바짝 긴장했다. 무슨 핑계를 대든 녀석이 죽은 것은 나 때문이었다. 그로 인한 어떤 원망이나 비난이 쏟아져도 전부 감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연 라피스는 의외로 지금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것 같았다. -영혼의 보석이라고? 게다가 지금이 4천년 전의 과거라는 말이지? "어? 으응." -쩝,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잖아? 보통 영혼의 보석은 타 차원으로 넘어가는 게 정상인데. 난 죽어서도 이 땅을 떠나지 못하다니, 대체 무슨 질긴 인연인지 모르겠군. 이왕 이렇게 된 거 다음 환생도 아크아돈에서 하면 딱 좋을텐데. 안 그래,엘? 태연하게 묻는 목소리는 놀라움을 넘어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여유 만만한 반응에 나는 황당해져서 물었다. "저기...괜찮아, 라피스? 충격 안 받았어?" -흥!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겨우 이 정도에 벌벌 떨 녀석으로 보여? "겨우 라니! 자기가 죽었다는 걸 알았는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새삼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니까. 사실 그 상황에서 살아있다는 게 오히려 이해가 안됐었거든. 드래곤 하트가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잖아? "......!" 하긴. 그러고 보니 녀석은 부상을 당한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 날 감싸던 때까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었던 거겠지. 그때의 상황이 떠올라 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네가 왜 사과 하냐? 난 그저 목숨을 걸고 지키겠단 약속을 지켰을 뿐이야. 어쨌든 기분은 좋은걸? 네가 날 찾기 위해 모험까지 감수하다니. 대신 죽어준 보람이 있군. "... 난 하나도 안 고맙거든요?" -킥킥. 꽤 놀랐던 모양이지? 근데 일찌감치 찾아놓고 눈치 못 챈 것은 좀 문제 있는거 아니냐? 뭐, 그것도 너답기는 하지만. "우씨! 누가 조개껍데기 안에 들어가 있을 줄 알았냐고! 나도 지금 엄청 황당하니까 비꼬지 마!" -비꼬긴 누가 비꼬았다고 그래? 그냥 그렇다는 말이지. 근데 돌아갈 방법은 있는 거냐?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쫓아온 건 아니겠지? 대놓고 묻지는 않았지만 끝나는 말의 뉘앙스에서 이러한 분위기가 풍겼다. 무시당했다는 생각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그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왔을까봐? 엘뤼엔이 날 여기 보낼 때 귀환의 주문을 알려줬어. 그걸 외우면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는 말씀!" -호오, 그렇군.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하지? "에? 벌써?" -벌써 라니. 날 찾는 게 목적 아니었어? 이렇게 무사히 발견 했으니 이제 돌아갈 일만 남은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아직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내가 돌아가는 즉시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에 대해 모두 잊어버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떠나기에는 뭔가 아쉬운 구석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고민하자 라피스는 짜증내며 말했다. -뭘 망설여? 난 지금 답답해 죽겠다고. 빨리 이 좁은 공간을 벗어나고 싶단 말이야. "앗! 잠깐만 기다려. 아무리 그래도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나~참, 다른 곳도 아니고 과거잖아. 어차피 돌아가면 또 만날 녀석들인데 뭔 작별 인사야? 네가 여기에 오래 머물면 머무를수록 그쪽은 애가 탄다는 거 몰라? 반박할 여지없이 옳은 말 뿐이었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년. 하지만 원래의 세상은 이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었다. 육체를 남겨두고 왔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긴급한 상황에서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나는 체념의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에휴,알았어. 가면 될 거 아니야. 어디보자, 주문이....."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던 나는 잠시 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맙소사! 손끝이 벌벌 떨리고 입이 저절로 멍하니 벌어졌다. 그러자 내게서 뭔가 이상한 기미를 느낀 듯 라피스가 덩달아 긴장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뭐야, 너? 왜 말을 하다 말아? "......" -엘?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암담한 현실에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라피스, 어떡하지?" -뭐가? "귀환의 주문을....잊어버렸어." 휘이잉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로 황량한 바람소리가 스치고 지나갔다. 시릴 듯이 차가운 공기였다. 13-2. 귀환의 주문 (2) -너 바보냐? 푸욱! 오랜 시간 끝에 라피스가 내뱉은 말은 내 가슴에 적나라한 비수를 꽂았다. 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비틀거리며 원망스럽게 보석을 노려보았다. 확실히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린 건 바보 같은 짓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그렇게 말 할 필요는 없잖아? 누가 잊어버리고 싶어서 잊어버렸냐고! "이런 썩을... 넌 말을 해도 그때위로 밖에 못하냐?" -흥. 여기서 본인이 바보라는 자각도 없으면, 그건 양심이 없는 거지. "우띠! 난 지금 인간이라고! 1년이나 지난 일을 어떻게 기억해?" -쯧쯧, 그걸 핑계라고 대는 거냐? 그런 줄 알았으면 미리 적어놓기라도 하던가. 지금 자기가 준비성 없다고 자랑하는 거야? -으으으으윽! 하여튼 말이나 못하면 밉진나 않지! 마땅히 반박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해 나는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라피스는 계속해서 나를 추궁했다. -이제 어쩔 거야? 어떻게 돌아갈 거냐고! 미래와 다시 연락할 수단도 없는 거야? 아예 여기서 눌러 살자는 건 아니겠지, 설마? "누, 누가 그렇대? 좀 기다려봐! 차분히 생각을 해야 대책이 떠오를 거 아냐. 혹시 알아? 이러다가 문득 주문이 생각나게 될지." -과연 그럴지 의문이군. 빈정거리는 대꾸에 기분이 확 상했지만 나는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이 와중에도 머릿속에서는 떠오를 듯 말듯 주문의 조각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대중도 순서도 없이 마구 얽혀있어서 기억을 가다듬으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때 마침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나를 복잡한 상념 속에서 이끌었다. "엘? 아까부터 멍하니 뭘 하고 있어?" "...응? 아, 시, 시벨리우스?" 아참! 그러고 보니 지금 나 혼자 있는 게 아니었지? 정신을 차려보니 시벨리우스가 나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용건을 묻던 나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난처해질 수 밖에 없었다. 눈이 잘못되지 않은 이상 다들 방금 전 화석에서 빛이 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게다가 앞뒤 없이 곧바로 대화까지 시작했으니, 누가 보더라도 상당히 수상쩍은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 모든 일을 해병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저절로 아파졌다. "시, 시벨. 그,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목걸이가 부서졌다고 하더니, 괜찮은 거야? 그러게 그렇게 꽉 쥐고 잇으니까 그렇지. 안 그래도 너무 세게 쥐는 것 같아서 주의를 주려고 했었는데, 너무 늦어버린 건가?" "에?" "응? 왜 그래? 화석이 부서져서 고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의아하게 묻는 시벨리우스는 방금 전 벌어진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혹시 못 본 건가? 대화 내용이야 그렇다 쳐도 그렇게 눈부신 빛이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녀석은 멋대로 내 손을 끌어다 그 안에 있는 보석을 확인하려고 했다. "어디 보여줘 봐. 약간 금이 간 정도라면 고칠 수 잇을 것 같은데. 완전히 산산조각 난 거야?" "어엇?자, 잠깐만!" 뒤늦게 녀석의 하는 양을 눈치 챈 나는 기겁했지만 막상 손바닥 안에 자리 잡은 붉은 보석을 보고도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연한 심정이 되고 말았다. "어? 멀쩡하네? 아깐 부서졌다고 하지 않았어?" ".....뭐?" "이것 봐. 목걸이 아무 탈 없이 무사하잖아. 다행이다, 엘. 선물 받은 걸 망가뜨리지 않게 돼서.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강화마법이라도 걸어둘까?" "......" 녀석은 붉은 보석을 보고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이쯤 되면 뭔가 상당히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얼굴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기, 시벨.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넌 지금 이게 조개화석으로 보이는 거야?" "응? 그럼 조개 화석이 아니야? 하긴, 언뜻 보면 그냥 평범한 돌조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으음, 혹시 아까 전에 뭔가 이상한 일이 있지는 않았어? 가령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던가." "빛? 아니, 그런 건 없었는데." 순순히 대답하면서도 시벨은 도통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더이상 물으면 없던 의심까지 생길 것 같아 나는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마음먹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석의 모습이 내 눈에만 온전히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더 정확한 증명을 위해선 쟈스민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야겠지만 눈치로 봐서는 굳이 그런 과정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영혼의 보석은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에게만이 본 모습이 제대로 보이는 게 아닐까? '으음, 오내지 그럴듯한데? 하지만 이상하군. 그럼 왜 처음부터 보석으로 보이지 않았던 거지?' 한 가지 의문이 해결되면 곧바로 또 다른 의문으로 이어지니 미칠 노릇이었다. 내 표정이 심각해 보였는지 시벨리우스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엘?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야?"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튼 엉뚱한 질문해서 미안해, 시벨리우스. 이런, 날이 벌써 이렇게 됐네? 이제 슬슬 정비하고 출발하자.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할 자리도 마련해야 하니까." "응! 알았어. 모두에게 알릴게!" 씩씩하게 대답한 시벨리우스는 쟈스민의 일행이 있는 쪽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나는 녀석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린 후에야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슬쩍 닦아냈다. "휴우.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를 모르겠네. 내 눈으로는 아무리 봐도 보석인데, 왜 화석으로 보는 거지?" 그러자 라피스가 한심스럽다는 듯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걸 몰라서 물어? 당연히 너랑 내가 같은 세대의 존재니까 그렇지. 원래 영혼의 보석은 본래 시간대의 존재에게만 제대로 보이는 법이야. 넌 정령왕이면서 그런 것도 모르냐? "엥? 하지만 처음엔 나한테도 그냥 화석이었는데?" -그건 그냥 나를 감싸고 있던 노폐물이었을 뿐이야. 원래 아름다운 보석이라도 진흙 속에 뒹굴다 보면 빛이 가려질 때가 있는 법이잖아? 아,예. 그러십니까. 이런 순간까지도 잘난 척을 멈추지 않는 녀석을 보며 나는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아무튼 다행이야. 시벨리우스 한테 들키지 않아서. 응? 가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시벨리우스는 영혼의 기운에 민감한 종족이라고 했는데, 왜 이제껏 모르고 있었던 거지?" -흥! 그야 너 때문이지. "에? 내가 왜?" -네가 날 들고 있잖아. 너한테서 느껴지는 정령의 기운이 강해서 내가 발산하는 영혼의 느낌이 가려지는 거지. 당연한 거 아니야? "헉 ...서,설마? 지금 난 인간인데?" -인간이라고 네 영혼까지 인간이냐? 게다가 평범한 인간도 아니잖아. 설마 보통 인간의 육체가 정령왕의 영혼을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건 그랬다. 강지훈일 때도 툭하면 몸이 아팠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으니까. 그럼 지금까지 라피스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 때문이었단 말이야? 내가 녀석의 기운을 방해해서? 그리고 정작 나는 위에 쌓인 먼지덩어리들 때문에 못 알아봤단 말이지! '젠장!' 이걸 어디다 하소연 할 데도 없고! 돌아가서 말해봤자 바보취급만 받겠지? 억울하면서도 차마 본통조차 터뜨리지 못하는 나를 라피스는 기다렸다는 듯이 비웃었다. -웬만하면 생각 좀 하고 살아라. 어리버리한 것도 마냥 매력인 건 아니야. "시끄러! 입 다물어. 자꾸 놀리면 나 혼자 콱 돌아가 버릴 거야!" -헹! 할 수 있으면 해보시지? 귀환의 주문도 모르는 주제에. "크으윽!" 이 자식이 이렇게 얄미운 놈인 지 왜 잊고 있었을까!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한참동안 부들부들 떨었다. 말싸움에 져서 이렇게 열 받아 본 건 꽤 오랜만인 것 같다. 역시 이 녀석하고는 친해질 래야 친해질 수가 없다니까?! 그 때 엘뤼엔이 내게 말을 걸어온 건 라피스로서는 천만 다행의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대로 집어던져서 흔적도 안 남을 정도로 밟아버렸을 테니까. "아까부터 혼자서 뭘 하는 거냐?" "으응? 헉! 아, 아버지! 언제 왔어?" "계속 이 근처에 있었다만?" 찌푸린 얼굴로 말꼬리를 올린 엘뤼엔은 무언가 상당히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보석에 대해 눈치 챈 건 아닌것 같고, 내 행동에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한 모양이다. 하긴, 아까부터 라피스와 대화하고 있었으니 ,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보기엔 내가 허공에 대고 혼자 떠들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설마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뜨끔해진 나는 한손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미,미안. 혼잣말이 좀 시끄러웠지? 이제 조용히 할게." "무슨 소리냐?" "응? 나 혼자 서 중얼중얼 거리고 있는 게 이상해서 그러는 거 아니야?" "중얼거렸다고? 글쎼. 내가 봤을 땐 그저 그 볼품없는 돌조각만 빤히 바라보는 것 같았는데. 이상하군. 선채로 꿈이라도 꾼 거 아니냐? 잠은 저녁에 자라." "......" 하나 뿐인 아들내미를 가볍게 벙찌게 만들어 놓고 엘뤼엔은 유유히 그 자리를 떠났다. 뭐랄까. 아무래도 라피스와의 대화는 알아서 차단되는 시스템(?)이 발동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것도 영혼의 보석과 같은 시대의 존재에게 주는 혜택인 걸까? 하지만 이런 고민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라피스가 생각할 틈도 가질 수 없게 시끄러운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앗! 방금 전 그녀석 엘뤼엔이지! 아까 그 빌어먹을 놈도 그렇고, 넌 왜 아직도 저런 녀석들하고 같이 다니는 거냐? 현대에서도 그러더니 과거에서까지 아주 징하게도 붙어 다니는 군! 헛! 설마 트로웰까지 있는 건 아니겠지? "그 설마가 맞다면? 염려놓으셔. 지금은 헤어졌으니까. -쯧쯧. 어째 넌 만나는 대상에 발전이 없냐? 지겹지도 않아? "...그러는 너도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구나. 이제 그러려니 해도 되지 않았어?" -시끄럿! 어서 귀환의 주문이나 기억해 냇! 빨리 돌아가잔 말이다! "하아......" 잠시 못 본 사이에 라피스는 더욱 신경질 적이고 참견하는 성격이 되어있었다. 앞으로 녀석에게 달달 시달릴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얼굴이 홀쭉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든든해지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녀석에게 의지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녀석을 찾았다는 사실보다, 같은 기억을 공유한 상대를 만났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녀석과 함께라면 과거에서 좀 더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13-3. 귀환의 주문 (3) "하압!" 휘익! 타닥! 촤아악! "크악!" 목적지인 리첸에 가까워지자 우리를 쫓는 무리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인해전술이라도 펼칠 모양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집단의 어쌔신들이 덤벼왔다. 오늘만 해도 총 5번째 공격을 받은 참이라, 언제 어디서 또 적들이 나타날지 신경을 항시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인 것보단 정신적인 피로가 만만치 않았다. "수고했어, 엘! 이번에도 정말 멋졌어!" 마지막 녀석까지 베어내고 나니 멀리서 마차를 보호하고 있던 시벨리우스가 환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나는 주위에 늘어진 시체들을 보며 슬쩍 얼굴을 찌푸렸다. "휴우, 총 11명인가? 달아난 녀석은 없었지?" "응. 그 녀석들이 전부야. 근데 피곤하지 않아? 계속 혼자 싸웠잖아. 이제 나랑 교대할까?" "아냐. 괜찮으니까 넌 쟈스민양 쪽이나 잘 챙겨줘. 난 여자들을 돌보는 건 영 자신이 없거든." "알았어. 그럼 힘들 때 말해. 언제든지 교대해 줄 테니까. 알았지?" 고개를 끄덕인 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 준 뒤 마차를 몰고 있는 엘뤼엔에게 다가갔다. 살벌한 전투가 벌어진 직후임에도 그는 무료한 듯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내 모습을 바라보더니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전의 공격 때보다 처리가 느리군. 네가 저 정도 놈들에게 상처를 입다니, 왠일이냐?" "그냥 가볍게 스친 거야? 순수한 검의 대련이면 문제없는데, 여기저기서 암기가 날아다니니까 완벽하게 피하기가 힘들었어. 게다가 수법도 점점 더 교묘해지고." "시간차 공격 말이냐? 쫓는 상대를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아붙이는 것은 어쌔신들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지."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처음엔 조무래기들로 힘을 빼놓고 강한 놈들은 나중에 투입되잖아. 아무리 나라도 체력전이 길어지면 자신 없다고. 그렇다고 이 정도의 녀석들에게 정령술을 겸해서 대응하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단 말이지." 그러자 엘뤼엔의 답변이라는 것이 가관이었다. "걱정마라. 다치면 치료정도는 해줄 테니까.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 완벽한 상태로 전투에 임할 수 있을 거다. 어디 마음껏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워봐." "윽! 그게 아버지란 자가 아들에게 할 소리야?이럴 땐 괜찮을 거라느니, 넌 할 수 있다느니 등의 격려의 말이 필요한 법이라고!" "난 나름대로 격려였다." "그게 어디가?" "보통 평범한 인간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 자각해도 용기를 얻지 않던가? 말만으로 위로하는 것보다야 확실하지." "...아버지는 부자 간의 로망을 너무 몰라." "그런가?"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바라보는 엘뤼엔을 보며 속으로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어김없이 머릿속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과연 과거의 엘뤼엔 답군. 무신경하고 무뚝뚝한 물의 정령왕. "시끄러. 닥쳐." -쯧쯧. 이제 그만 현실을 인정하라고. 원래 저런 놈이라니까? 넌 저런 놈을 아버지로 삼고 싶냐?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누구나 성격은 변하기 마련이고, 실제로 엘뤼엔은 많이 변했어. 이런 부분으로 실망하고 싶지 않아." -쳇, 하여튼 끔찍하다니까. 투덜거리는 녀석을 무시한 다음 나는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들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서 일절 마차 밖으로 몸을 내밀지 못하게 당부해둔 참이었다. 대강상황이 종료되었으니 그녀들도 안심을 시켜야 할 것 같았다. 굳게 닫힌 창문을 똑똑 두드리자 삐걱하고 열리며 창백하게 질린 쟈스민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엘!" "괜찮아요, 두 분다? 대충 상황이 마무리 되었으니까 이제 안심하세요. 앞으로 며칠만 더 고생하면 리첸에 도착할 겁니다." "아아, 가, 감사합니다. 저희를 위해 이렇게까지...." "별 말씀을 .이동 속도는 계속 이대로 유지합니다. 일단 좀 더 두고 보다가 쫓아오는 무리가 없는 것 같으면 노숙할 장소를 찾아보죠. 먼지 들어가니까 이만 창문 닫으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정비하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날이 까맣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다행이 더 이상 공격할 생각이 없는 듯, 저녁 무렵이 되자 쫓아오던 어쌔신들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에 노숙할 장소를 마련 할 수 잇었다. 짐을 풀고 간단히 식사하는 동안 시벨리우스는 주변에 알람마법을 설치에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다. 그때 나는 구석에서 오늘 하루 전투에서 입은 상처들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치료마법을 받으면 간단한 일이었짐나 자잘한 고통에는 익숙해질 생각에 일부러 부탁하지 않았다. "윽, 쓰라려. 뭔 놈의 약이 이렇게 독한거야?" -약이란 게 원래 다 그렇지. 그냥 치료해 달라고 해. 고생을 사서할 필요가 뭐있냐? "그건 안 돼. 너무 마법에만 의존하면 의지력이 약해진다고." -어차피 일회용이잖아. 네가 계속 인간으로 있을 것도 아닌데, 그럼 어때서? 일회용 육체에 신경 쓸 사이에 돌아갈 생각이나 하라고. "우씨, 너 자꾸 일회용,일회용 할래 재촉 좀 하지마. 지금도 계속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니까." -퍽이나 기억나겠다. 인간의 망각 작용을 만만히 보지 말라고. 차라리 그 사이에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 "다른 방법 이라니?"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알아서 생각해야지. 이런 천하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나는 뻔뻔한 녀석의 작태에 분노하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그 사이 주위의 경계를 전부 완료했는지 시벨리우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상처는 어때, 엘?" "신경 쓰지마. 가볍게 스친 것들 뿐이니까." "그래? 그나마 독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말 혼자서 싸워도 괜찮겠어? 이러다 큰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괜찮아. 어차피 어쌔신들의 목적은 마신의 헌물이잖아. 리첸에 도착하면 더이상 쫓지 않을 거야. 앞으로 2,3일만 버티면 돼." "하지만 괜찮을까? 그들을 보낸 자들이 이제껏 방해한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으려고 할 것 같은데. 리첸을 벗어나면 다시 공격 당할지도 몰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 당분간 거기서 머물지 뭐. 놈들이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갈때까지." "그래도 돼, 엘? 영혼의 보석은 어쩌고? 지금도 상당히 돌아가는 길이잖아. 너무 늦어지면 친구의 목숨이 위험하지 않을까?" "엥? 무슨 친...아, 내 친구 말이야?" 의아하게 바라보던 나는 이전에 보석을 찾기 위해 지어낸 설정을 떠올리고 뜨끔해져서 물었다. 시벨리우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주를 받았다는 그 친구 말이야. 의식도 없으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있을 텐데, 빨리 찾아서 돌아가야지. 그러다 그 사이에 굶어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아, 그, 그건 문제 없어. 장기간 체력이 유지되도록 특별한 관리를 받고 있을 테니까. 몇 년 정도는 버틸 수 있다고 하니까 조금 돌아가더라도 큰 지장은 없을 거야." "으음. 엘이 그렇다면야 난 상관없지만...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다, 엘. 네 사정도 급한데 쟈스민양의 일까지 도와주고. 그러기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하하! 내 사정이 급하다고 힘없는 여자의 일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엘.......!" 워낙 레이디 퍼스트 정신에 사로잡힌 종족이라서 인가? 남들이 들으면 황당해할 변명도 녀석에게는 무리없이 먹혀들었다. 상당히 감동한 듯 보이는 시벨리우스를 외면하며 나는 슬쩍 이마에 흐른 식은땀을 닦아냈다. 그냥 사실대로 보석을 찾았다고 말해도 될 일을 내가 이렇게까지 숨기는 이유는 간단했다. 당장 아무 목적도 없이 대륙을 떠돌게 될 상황만큼은 최대한 피해보려는 것이었다. 보석을 찾기 위해 끌어들인 일행인 만큼, 내가 라피스를 찾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두 본인읜 용무를 위해 나를 떠나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시벨은 몰라도 엘뤼엔 만큼은 분명히 그럴 것이다.(지금도 그리 좋아서 동행해주고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되면 정말 막막해진다. 당장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수도 없는 내가 라피스와 달랑 둘이서 뭘 하며 지낼 것인가! 그것도 녀석은 보석의 상태인데. 심심하지는 않더라도 어떤 일에든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다. 어쨌든 이러한 꿍꿍이로 나는 당분간 처음 정해진 일정을 유지해볼 생각이었다. 이대로 산맥에 가서 보석을 찾는 척 시간을 보내며 귀환의 주문을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어차피 지금은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니까.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요즘 들어 유력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확인해볼 요량이기도 했다. 내용은 이랬다. '혹시 처음 도착했던 장소에 돌아가면 뭔가 떠오르는게 있지 않을까?' 지금으로선 근거없는 확신이었지만, 도착하기만 하면 어떻게든 해결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물론 , 라피스는 어림도 없다는 듯한 반응이었지만. -웃기는 소리. 너 그런 것에만 희망을 가지고 있다간 평생 못 돌아 갈 거다. 그러니까 일찌감치 운으로 해결할 생각은 집어 치우시지? "윽! 그럼 어떡해? 전혀 생각이 안 나는 걸." -휴우. 이런 바보한테 내 미래를 맡겨야 한다니. "쳇." 한탄하는 라피스의 말에도 나는 볼만 퉁퉁 불렸을 뿐 아무런 반박을 할 수 없었따. 이거야 찾아와줘서 고마워하라는 생색을 내기에도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 아닌가. 어차피 돌아가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인 것을. 목적을 이루어 놓고도 이렇게 헤매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설마 엘뤼엔도 내가 주문을 잊어버렸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의 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 했다. 13-4. 뜻밖의 동행 (1) 두두두두- 새벽 내내 신나게 달린 마차는 어느새 어둠을 가르고 환한 햇빛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아침이 밝아져 오고 있었던 것이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평야는 어느새 끝이 나고 저 만치 웅장한 성곽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도시 리첸으로 들어서는 입구였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신이 나서 모두에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다들 봐! 리첸이 바로 코앞이야!" 그러자 지금까지 달리는 것에만 주력하고 있던 일행들이 한마디씩 중얼거렸다. "그렇군." "와아, 벌써 다 왔네. 밤새 잠 안자고 달린 보람이 있었는 걸? 신나지, 슈? 조금 후면 맛있는 여물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쉬지 않고 달려서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더 힘내자." 히히힝! 시벨리우스의 격려에 그가 타고 있던 말-'슈'는 기분 좋다는 듯 푸레질을 했다. 나또한 민국이를 다독이며 힘차게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피스의 몰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쳇,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기뻐하긴. 도시가 어딜 가든 다 똑같지. "똑같지 않아. 며칠을 고생해서 도착한 곳이라고." -흥!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한 상태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좁디좁은 공간에 갇혀서 혼자만 동떨어진 상태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모양이었다. 평소 유희를 좋아하는 성격인 만큼, 아무것도 못하고 얌전히 있는 상황이 갑갑하긴 갑갑할 것이다. '설마 이대로 아주 못 돌아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상상을 애써 외면하며 나는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엘? 뭘 그렇게 생각해?" "으응?"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시벨리우스가 바로 옆에서 말을 몰며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근데 왜?" "방금 내가 한 말 들었어? 어쌔신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했는데." "아~ 그랬어? 미안. 어쨌든 나도 추격전에 시달리지 않게 되서 안심했어. 도시 안은 치안이 엄하니까 습격을 받지는 않겠지?" "아마 그럴 거야. 마신전에 도착할 때까진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겠지만." "뭐, 좋아! 우리가 책임지고 데려다 주자고." 씨익 웃으며 말하자 녀석 또한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나무로 된 창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쟈스민이었다. "어머, 벌써 아침이군요." "일어났어요, 쟈스민? 밤 새 삐걱거리는 마차에서 자느라 많이 불편했죠?" "이 정도는 괜찮아요. 내친김에 더 고생하는 셈 치죠. 이제 조금 후면 여관에서 푸욱 쉴 수 있을 텐데요, 뭐." "네? 여관에서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그녀에게 시벨은 검지로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고개를 좀 더 내밀어 그가 가리킨 방향을 본 쟈스민은 이윽고 서서히 환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세상에!리첸! 저기 앞에 보이는 도시가 리첸인게 맞나요? 다 온 거군요?" "네, 맞아요. 이제 조금 후면 입성이예요." "오오! 마신의 가호에 감사드립니다. 이게 설마 꿈은 아니겠지요?" 그동안의 여정이 힘들긴 힘들었는지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곱게 자란 귀족 아가씨로선 생각지도 못한 험난한 여행이었을 테니 기쁘긴 엄청 기뻤을 것이다. 하녀인 로잔 또한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쟈스민과 함께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정황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는지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저어, 그런데 쫓아오는 무리들은?" "해가 뜨기 전부터 점차 줄어들더니 지금은 완전히 사라졌어요. 놈들도 리첸이 바로 앞이라 포기한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정말 끈질긴 자들이었어요. 설마 다른 가문에서도 이런 일을 겪었을까요?" "그랬을 것 같은데요. 놈들이 쟈스민양의 집안만 노리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혹시 이쪽만 예외일수도 있겠네요. 워낙 조심성이 없는 편이었으니까. 안 그래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짓궂게 건네는 말에 쟈스민의 볼은 금새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쉽게 얼굴을 붉힐 수 있는 거지? 여자애들은 참 신기하단 말이야. 나는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는 쟈스민에게서 시선을 돌려 마차를 몰고 있는 엘뤼엔에게 다가갔다. 여전히 무료한 표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 나는 가볍게 농담을 걸었다. "여~ 능숙하다 못해 연륜마저 느껴지는 걸? 이제 마부로 취직해도 되겠는데, 아버지?" "시끄럽다. 저리 가라." "쳇, 재미없긴. 심심해 할까봐 신경써주고 있는 거잖아." "필요 없다." 어떤 말을 해도 단답형의 대답이 돌아오니 더 이상 말을 걸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역시나 화목한 부자하고는 거리가 먼 건가?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돌아서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나를 불렀다. "엘." "응? 나 불렀어,아버지?" 반갑게 돌아본 나는 그의 눈빛이 싸늘해져 있는 걸 깨달았다. 그는 앞을 주시한 상태 그대로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누군가 오고 있다." "......누구? 어쌔신들이야?" "아니, 그놈들보다 더 강한 녀석들이다." "숫자는?" "셋이로군." 꿀꺽! 이번에야 말로 정예를 보낸 건가? 생각보다 긴장했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러자 엘뤼엔은 말을 건 후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잔뜩 얼굴을 경직싴니고 있는 나를 보고는 피식-하고 웃더니 편안한 어투로 말했다. "걱정마라. 살기는 없으니까." "엥? 그럼 적이 아니야?아,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인가?" "아니, 정확히 우리 쪽으로 오고 있다. 우리 중 누군가에게 용건이 있는 것 같군." "대체 누구에게......" 말을 흐리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본 나는 어느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발견했다. 별다른 말도 행동을 보인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엘뤼엔이 말한 '누군가'가 바로 녀석임을 깨달았다. 내 느낌이 맞다면 녀석은 지금 상당히 화난 상태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은 엘뤼엔과 마찬가지로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녀석은 엘뤼엔에게 부탁하여 말과 마차를 세우도록 했다. 이윽고 일행이 멈추자 그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시벨리우스, 왜 그래?" "엘, 물러나 있어. 아무래도 이번엔 내 문제인 것 같다." "하지만......" "부탁해. 나 혼자 해결하게 해줘." "......" 조금은 철없는 어린애처럼 사근사근하던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녀석을 찾아온 자들이 누군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전방에 흐릿한 세 개의 형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로브와 깊은 후드로 인해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었지만, 대충의 체구를 보아 여자한명과 두 명의 남자 같았다. 바로 지척까지 다가오자 그들ㅇ느 하나둘씩 머리에 쓰고 있던 후드를 벗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존재들과 친분이 그리 많지 않은 나에게도 익히 익숙한 얼굴이었따. '유니콘이로군. 시벨의 약혼녀인 웰디와, 그녀의 호위 기사들인가.' 나는 곱지 않은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저들의 목적이 시벨리우스를 데려가는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녀석은 틀림없이 서클렛 안에 봉인 될 것이다. '알고 있었지만... 역시 전개대로 이루어지니 기분이 좋지는 않군.' 내가 속으로 짧게 혀를 차는 사이 시벨리우스는 좀 더 그들 앞에 다가가고 있었다. 마주편의 일행들도 걸음을 박차며 그에게 달려왔다. "시벨리우스님!" 고운 미성의 목소리와 함께 웰디가 환하게 웃으며 시벨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 뒤에선 호위기사들은 그를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하지만 눈으로 인사를 받는 시벨리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진 채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 웰디는 쉴새없이 재잘거렸다. "아아! 보고 싶었어요, 시벨리우스님! 이날 이때껏 아무런 연락이 없으시다니! 제가 얼마나 걱정한지 아세요?" "여기엔 어떻게 온 거지?" "당연히 시벨리우스님을 찾아왔지요! 이제 그만 마을로 돌아가요! 할아버지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천진하게 웃으며 말하던 웰디는 잠시 후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이제서야 시벨리우슨의 눈동자가 싸늘해져 있는 것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시, 시벨리우스님? 어째서 그런 표정을?" 충격을 받은 듯 떨면서 묻는 그녀에게 시벨리우스는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가." "시, 시벨리우스님!" "날 찾아오라고 한 기억은 없다. 네가 이러는 건 날 방해하는 것 밖에 안 돼. 돌아가라, 웰디. 날 실망시키지 마라."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비틀 "웰디님!"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자 뒤편에 서있던 호위 기사들-아렐과 카리안-이 서둘러 달려와 양쪽에서 부축했다. 하지만 웰디는 가볍게 그들을 물리치며 울먹이는 눈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인간 세상의 유희 때문에 저를 냉대하시는 건가요? 혹시 마음속에 다른 여인을 품으신 거예요?" "웨, 웰디님!" "무슨!!" 그녀의 파격적인(?) 질문에 호위 기사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에 비해 시벨리우스는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태연한 얼굴이었다. 그것에 더욱 약 올랐는지 웰디는 거의 악을 쓰듯이 외쳤다. "제가 모를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시벨리우스님의 감정에 공명할 수 있어요! 다 알고 있어요! 여행을 떠난 뒤부터 당신의 가슴에 나 따위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걸! 마을에서 머물던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그게 어느 한 존재 때문이 아니라고 어떻게 장담하지요? 제 말이 틀렸나요?" "웰디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호위 기사 중 아렐이 다급하게 만류하기 시작했따.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대답은 허무할 정도로간단했다. "맞아." "!!" "헉! 시벨리우스님!" 그가 너무 쉽게 긍정해버리자 두 유니콘은 기겁하며 웰디의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그녀는 금방이라도 호흡이 끊어질 것처럼 창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어도 입을 통해 직접 확인을 받는 것에는 더욱 큰 각오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벨리우스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연애감정은 아니다. 그만큼 소중하지만 분명히 달라. 뭐, 이런 걸 일일이 설명해봤자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 네가 불안해하는 건 아차피 내가 너 외의 다른 존재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잖아. 그렇지?" "...마, 맞아요! 그게 잘못됐나요? 전 당신의 약혼녀에요! 당신의 감정을 독점할 권리가 있다고요!" 사람 마음이 물건이냐? 독점을 하고 말고 하게? 거의 억지나 다름없는 웰디의 태도는 옆에서 보고 있는 나마저 얼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벨리우스는 그저 가만히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따. "한 가지만 물을게, 웰디. 네가 원하는 나는 마을에서의 시벨리우스냐?" "그, 그야 당연하지요! 저만이 아니라 모두가 당신이 마을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좋아. 그렇다면 간단하군. 네가 독점할 감정 따윈 아무것도 없다, 웰디. 마을에서의 난 아무런 감정도 없는 존재였으니까." "!!" "태어나서부터 나는 늘 혼자였다. 그것을 어색하게 생각해 본적도, 외롭다고 느낀 적도 없었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는 어떤 부분에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어졌다. 그러니, 네가 가질 수 있는 것들도 그런 것들뿐이야. 네가 원하는 것이 그거냐?" "...그, 그건 마을을 버리시겠다는 뜻인가요?" 한참의 침묵 끝에 웰디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었다. 주위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시벨리우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 때가 되면 알아서 돌아가겠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아닐 뿐이야." "정말이시죠? 저희 동족을...버리지 않으시는 거죠? "내가 버린다고 버려지는 자들이 아니잖아?" 시벨리우스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웰디는 안심한 듯 두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대충 마무리가 된 셈인가? 평화롭게 흘러가는 공기에 내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다시 눈을 뜬 그녀가 도전적인 모습으로 소리쳤다. "그럼 저도 함께 동행 하겠어요!" "...헉!?" "웰디!" "웰디님!" 설마 이렇게까지 따라붙으려 할 줄이야! 기겁한 남자들이 서둘러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웰디의 태도는 강경했다. "마을로 돌아가시는 시기가 될 때까지, 저 또한 시벨리우스님 곁에서 함께 여행할 거예요! 전 당신의 약혼녀예요! 당신이 찾아가는 감정이 어떤 건지,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무엇인지 저 또한 알고 싶어요!" "웰디, 하지만 그건......" "거절 하지 말아주세요! 이건 제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해요! 소중한 존재를 만드셨다고 하셨지요? 하나를 만들면 두 번째는 더 쉬워요. 이제 곧 시벨리우스님 곁에는 또 다른 소중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거예요! 그들 중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제가 될 수 있도록, 제 자리를 제가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세요!" 청순하고 얌전한 느낌을 가진 소녀로 보여 지지 않는, 씩씩한 고백이었다. 그런 진심어린태도에는 시벨리우스도 어쩔 수 없었는지, 한참만에야 머리를 짚으며 물었따. "하아......진심이냐?" "물론이에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바로 시벨리우스님이니까요. 저희 동족은 일생 단 한명만을 사랑하며, 절대 찾아온 사랑을 포기하지 않아요. 시벨리우스님도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렇다면, 부디 저를 이해해 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간곡한 부탁에 시벨리우슨ㄴ 이들을 만난 후 처음으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녀석은 어색한 눈빛으로 나를바라보았다. 동행의 여부를 내게 허락받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를 알고 있는 나로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저들과의 동행이 독이 되어 시벨이 봉인되는 결과를 낳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지?' 나는 일순 망설였지만 웰디의 눈동자에 서린 단호한 의지를 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시벨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돌아보게 할 기회를 얻고자 했고, 시벨은 이에 승낙했다. 그 사이에서 내가 방해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내가 알기론 봉인에 풀려난 이후로 시벨은 한 번도 웰디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어차피 결과가 같다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힘내, 시벨리우스. 부디 그녀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되길.' 13-5. 뜻밖의 동행 (2) "어머, 그러고 보니 당신은? 혹시 이전에 노예시장에서 만났던 그분이 아닌가요?" 황당하게도 웰디는 동행이 완전히 결정되고 나서야 나를 알아보았다. 시벨과 대화하는 동안 내내 옆에 있었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한 건가? 나는 조금 어이없었지만 그녀가 무안해하지 않도록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엘입니다. 오랜만이네요." "아아! 역시 그랬군요! 설마 당신이 시벨리우스님의 일행이셨을 줄이야! 이런 곳에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엘님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모양이네요." "아하하! 그런 것 같네요. 어쨌든 당분간 함께 다니게 될 것 같으니, 지내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저도."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나는 그녀의 뒤에 서 있던 아렐과 카리안과도 간단히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둘 다 겉으로 드러난 태도는 단정했지만, 지금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불쌍할 정도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쯧쯧! 예나 지금이나 말괄량이 아가씨를 모시느라 고생이 많구만.' 이런 호위기사들의 애타는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웰디는 그저 행복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 환한 미소는 마차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쟈스만을 발견하자 곧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다. "…시벨리우스님, 저기 있는 여자 분은 누구죠?" "음? 아아, 쟈스민 양 말이로군, 리첸까지 잠시 동행하게 된 분들이야. 마침 잘됐다. 같은 여자이니 당분간은 저분과 함께 마차를 타면 되겠어." "자, 잠시만이요, 시벨리우스님! 그새 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드신 건가요? 설마 소중한 존재라는 게……!" "하아! 웰디, 잠시 동행하는 거라고 했잖아. 며칠 후면 헤어질 사람들이야. 제발 엉뚱한 상상 좀 하지 마." 그녀의 오해는 시벨리우스의 한마디로 간단히 종결되었다. 그래도 일행 중에 여자가 섞여 있다는 것이 불만이었는지, 웰디의 표정은 좀처럼 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그녀에게 쟈스민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때 아닌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인사해, 웰디. 이쪽은 쟈스민 양. 인간 중에서도 신분이 높은 귀족이니까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쟈스민, 이 녀석은 웰디라고, 저희 마을의 말괄량이입니다. 아직 철부지이긴 하지만 나이보단 생각이 깊은 아이이니 잘 부탁합니다." "시, 시벨리우스님!" 한순간에 자신을 철없는 아이로 몰아가는 발언에 웰디는 억울한 표정으로 시벨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이에 쟈스민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호호! 상황은 마차 안에서 다 지켜보고 있었어요.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귀여운 아가씨네요. 안녕하세요, 웰디. 만나서 반가워요. 우리 친하게 지내요." "흥!" "웰디! 너, 정말! 죄송합니다, 쟈스민. 이 녀석이 이종족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편이라……." "호호! 괜찮아요, 시벨리우스님. 오히려 솔직한 감정 표현이 아주 보기 좋은걸요. 어린 아가씨가 시벨리우스님을 아주 잘 따르는 모양이네요." 순진한 건지 교활한 건지, 쟈스민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람 좋은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에 알 수 없는 한기가 더더욱 심해져가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마무리 지어버린 존재가 등장했으니! "대체 언제까지 이곳에서 정체할 거냐? 계속 이런 식이면 버리고 갈 거다." "……!" 삐딱하게 말을 건넨 사람은 바로 마부 자리에 앉아 있던 엘뤼엔이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상황 속에서 갑자기 끼어든 일행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대놓고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였다면 불쾌하게 맞대응했을 유니콘들이 이번엔 어쩐 일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웰디는 물론, 그녀의 수호기사들까지 말이다. 엘뤼엔을 바라보는 얼굴이 하나같이 넋이 나간 것처럼 보인 것은 내 착각일까? 이렇게 되자 상황을 수습한 것은 시벨리우스였다. "아, 미안해. 이제 다 됐어. 그러고 보니 아직 그쪽에서는 소개를 못했군. 이쪽은 우리 마을의 웰디라고 해. 정식 네임은 '라반 루 웰디'. 장로 할아범의 하나뿐인 손녀지." 그의 소개에 웰디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엘뤼엔을 주시했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질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그것을 느낀 듯,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흠, 공주님이셨군. 여행 허락은 받고 온 거냐?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엘이 동의해도 허락할 수 없다. 귀찮은 일에 휘말리는 것은 사양이야." "무, 물론이죠! 할아버지께 확실히 허락받았어요!" "그래? 그런데 나이가 어려 보이는데 '루'라……. 아직 일족 최고 여성의 자격을 부여받기엔 이른 거 아닌가?" "헉! '루'의 의미를 아세요?" "왜? 알면 안 되나?" "아, 아니요. 그 의미를 아는 인간을 본 것은 처음이라……." 말을 하면서 당황한 듯, 웰디의 얼굴은 금세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것을 본 나는 황당하다 못해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허둥지둥 하는 꼴이 영락없이 짝사랑 상대를 앞에 둔 순진한 소녀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체 뭐 하자는 시추에이션인지. 방금 전까지 시벨리우스를 향해 약혼녀 운운하던 장본인이 바로 딴 남자한테 한눈을 팔면 어쩌자는 거야? 내가 이렇게 뜨악한데, 만년 '죤 사랑' 쟈스민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파직! 그녀의 눈에 불꽃이 확 타올랐다고 느낀 순간, 약간 높아진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호호호! 역시 죤님은 대단하셔요! 다른 종족에 대한 지식에 대해 해박하셨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제게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이번엔 웰디의 눈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어머나! 장본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굳이 다른 분께 여쭐 필요는 없어요. 쟈스민이라고 하셨죠? 원하신다면 제가 친절히 알려드리지요." "아, 아니요. 전 죤님께 부탁드린 것이니,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아무래도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보다는, 며칠간 함께 동 !거 !동 !락 ! 해온 분께 부탁을 드리는 편이 제 마음이 더 편하니까요." 왠지 엄한 곳에서 악센트가 강하게 느껴진 것 같은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명백한 그녀의 도전장에 웰디는 잠깐 얼굴을 굳혔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호호!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누구나 다 처음부터 친하진 않으니까요. 다 이런 식의 대화를 통해 시작하는 거 아니겠어요? 아, 하긴. 어차피 이제 며! 칠! 밖! 에 함께하질 못할 테니, 저와 굳이 친분을 쌓을 필요가 없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무, 무슨 뜻이죠?" "별거 아니에요. 그저 시벨리우스님과 잠! 깐! 동행하는 사이라고 들어서요. 즉, 목적지에 도착하면 바로 헤어진다는 뜻 아니겠어요? 정말 안타깝네요. 또 알아요? 시간을 두고 만났다면 친자매 같은 사이가 됐을지." "큭!" 아아, 살기가 느껴진다, 살기가. 여자의 한이 무섭다더니. 서로를 노려보는 두 여자 사이엔 감히 끼어들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팽팽한 신견전이 느껴졌다. 평범한 처녀가 내뿜는 기운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투지였다. "그렇게 서운해 하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도 기회가 닿는 한 계속 연락을 드릴 테니까요. 이래 봬도 저희 가문이 유명한 상단과 친분이 있는지라 대륙 어디에도 손쉽게 연락망을 구축할 수 있답니다. 함께하진 못하더라도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돕고 싶네요."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까지 있나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저희는 제 갈길을 잘 가게 될텐다요. 혹시 이런 말을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배려도 지나치면 민폐가 된다고." "뿌득! 그럼 이런 말을 아시는지 저도 여쭙지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뭐라고요? 제가 굴러온 돌이라는 소리인가요?" 어머머! 실례.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실 것까지야.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요. 비유가. 호호!" '슬슬 말려야 할 것 같은데…….' 하지만 불안해하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상황을 재미있어 하는 것 같았다. 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결투가 벌이지면 당장 팝콘이라도 사다 먹으며 구경할 기세였다. 심지어 호위기사들 마저 응원하고 있을 정도니 말을 더해 무엇이랴. '결국 말릴 사람은 나뿐인가.'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슬슬 두 여자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기요, 이제 그만들 하시고 출발하죠. 이러다 여기서 밤새겠어요."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실수였다. 갑자기 쟈스민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내게 달라붙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머! 미안해요, 엘. 저도 모르게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불쾌했던 건 어니죠?" "예? 아, 아니, 뭐……."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래?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거리며 친근한 태도를 보이는 쟈스민의 모습에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웰디는 심히 수상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이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 죤님은 너무 부럽다니까요. 학실도 높으시고, 인물도 출중하시고, 게다가 이렇게 멋진 아드님까지 있으시다니, 지금까지 혼자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요. 주위에 여자들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안 그래요, 엘?" "……!" "아, 아들?" 기겁하는 웰디에게 쟈스민은 마치 천사처럼 상냥한 얼굴로 설명했다. "호호~ 놀랐지요? 여기 계신 이 귀여운 소년이 바로 죤님의 외아들이랍니다. 그나저나 죤님으로선 상당히 곤란하시겠어요. 저렇게 젊으신데 새 아내를 맞이하려면 적어도 아들과는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있어야 할 테니. 아무래도 아들과 동갑으로 보이는 외모는 많이 곤란하지 않겠어요?" "……." You Win!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잇는 쟈스민의 머리 위로 한차례 은박의 글자가 반짝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반면, 웰디는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를 봐도 멀쩡한 청년인 엘뤼엔에게 나만 한 아들이 있다는 사실은 엉첨난 쇼크인 모양이었다. 하필 내가 전에 쟈스민을 떼어놓기 위해 사용한 수법을 그녀가 고스란히 이용해서 승리할 줄이야! 나는 조용히 침몰해가는 웰디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여자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 * * 리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통행인을 감시하는 검문소가 있었다. 영주, 또는 기관에서 발급한 신분증이 없으면 통과하지 못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마법사인 시벨리우스의 활약으로 우리는 무사히 그 안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바로 투명마법을 사용해서(불법이니 따라하지 마시길). 하지만 안에 들어섰다고 해서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 뿌려져 잇는 수배자 전단들 때문이었다. 그 안에는 얼마 전 세피온 공국에서 '기적'을 일으킨 정령사에 대한 수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두말 할 필요 없이 나에 대한 것이었다. 한동안 인적이 없는 길만 다녀서 잠잠해졌다 싶더니만, 큰 도시에서는 여전히 나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본래 제대로 길을 갔다면 소로(小路)를 따라 국경을 넘기 때문에 상관없었지만, 리첸은 엄연히 세이크 제국의 일부로 황제의 명령권에서 피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 사이에 라미아스가 알아서 잘 해결해놨을 거라 믿었건만, 이번 일은 사안이 워낙 큰 탓인지 쉽게 물릴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차라리 이전처럼 다시 머리 스타일을 바꿀까도 싶었지만, 한사코 반대하는 시벨리우스 녀석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덕분에 나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후드를 다시 꺼내 입었다. 내친김에 여벌로 가지고 있던 후드를 꺼내어 일행에게 건네주었다. "자, 다들 입어." "응? 왜 우리들까지?" "작은 마을이라면 모를까, 이곳에선 모두 후드를 쓰는 편이 좋겠어. 도시라 유동인구가 많잖아? 괜히 사람들 눈에 띄어서 귀찮아질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 별로 눈에 띄는 것 같지는 안은데." 어이, 어이! 본인의 외모에 전혀 염두에 뒤지 않고 있는 거냐? 나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잇는 시벨리우스를 기막힌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카리안과 아렐 또한 그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저 똥한 시벨리우스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마차와 그것을 호위하는 남자들 정도면 어딜 가도 평범한 구성인데 굳이 후드까지 써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맞다, 이만한 인원이 모두 후드를 쓰는 것이 오히려 눈에 띄지 않겠나?" "에효~" 어디 가까운 포물점이라도 찾아가 거울이라도 사줘야 할까? 나는 좀처럼 이해 못하는 얼굴을 하는 유니콘들에게 또박또박 설명을 시작했다. "잘 들어. 구성은 평범할지 몰라도 다들 외모가 너무 눈에 띈다고. 여자들이야 마차에 잇으니까 상관없다 쳐. 하지만 남자들은 어떻게 할 거야? 시벨리우스는 잘생긴 데다 흔하지도 않은 은발에, 나머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기준치 이상의 얼굴이잖아. 설마 그 정도의 자각도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럼 나 정말 화낼 거야!" "아, 아니, 그거야 알고 있지만, 그게 문제가 된다고?" "당연하지! 인간들은 모두 잘생긴 사람들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본단 말이야." "그래? 상당한 이상한 심리로군." "어쨌던! 이런 관계로, 다들 자신의 외모를 가려주는 것을 충실히 해줬으면 좋겠어. 게다가 인간도 아니고, 다들 엘프로 폴리모프한 상태잖아. 큰 도시라서 대놓고 술수를 쓰지는 못하겠자만, 여기 인간들은 늘 호시탐탐 이종족을 노리고 있다고. 노예시장에서의 일을 벌써 잊었어?" 유니콘들은 그제야 이해한 듯 잠자코 후드를 받아들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여자들에게 마차 밖을 내다보지 않도록 주의를 준 다음에서야 이동을 지시했다. 다행히 거리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후드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용병단 중에서도 단체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자들이 많았기에 우리 또한 그런 자들 중 한 무리로 보는 듯했다. 어느 정도 짐작한 일이었지만, 도시 안은 세피온 공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소문으로 가득한 상태였다. 검술대회 자제가 이슈였던 만큼 그곳에서 벌어진 참사가 상당히 큰 충격이었던 같았다. 사상자가 워낙 많았으니 앞으로 족히 몇 년간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을까? 게다가 정령왕이 가담한 일이었으니 역사에도 크게 기록이 남을 것이다. 잠시 쉬기 위해 들렀던 음식점에서 나는 어김없이 그때의 뒷이야기를 접할 수 잇었다. "어이, 소문 들었어? 세피온 공국이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며?" "이 사람아, 그 이야기가 퍼진 지 언젠데 이제 와서 뒷북이야?" "헤헤! 그런가? 그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공국은 이제 완전히 무너진 건가?" "아니, 쑥대밭이 된 것은 검술대화가 열렸던 경기장뿐이라더군. 하지만 사상자가 엄청나. 참관하러 갔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몰살했더라니까? 족히 이십 명이 넘는 중앙 귀족들이 거기에서 죽었다고. 혹자는 어느 세력이 득정 파벌을 견제하기 우해 일부러 테러를 시도한 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더군." "뭐? 그게 정말이야?" "쯧쯧! 그냥 그럴지도 모른다는 애기야. 하지만 듣기론 그날 죽은 귀족들 대부분이 2황자를 지시하는 자들이었다는군." "뭐? 그럼 1황자파의 귀족들이 이번 일을 주도했다는 소린가?" "쉿! 이 사람아, 목소리가 너무 커, 요즘 그 일로 예민해져 있는거 모르나? 말 함부로 잘못했다간 경비대에게 끌려갈 수 있다고." 낮게 경고하는 말에 상대편 남자는 질겁한 얼굴로 입을 틀어밖았다. 한동안 불편한 헛기침이 이어지고, 그들은 다른 화제로 서둘러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저 가족이나 이웃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들이었다. 남의 시시콜콜한 대화를 엿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이제 그만 신경을 끄려고 하는데, 이어지는 이야기가 또다시 내 흥미를 이끌었다. "아참, 그런데 자네, 그 소식은 들었나? 요즘 이변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던데." "이변이라니?" "글쎄, 요 근래 다량의 몬스터 무리가 떼를 지어 이동한다고 하더군. 한두 군데도 아니고 대륙 다방에서 흔히 그런 현상이 목격된다는 거야." "허허! 그게 뭐가 큰일이라고. 몬스터 무리야 워낙 흔하지 않나. 지금까지처럼 토벌대가 나서면 되는 것을." "어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들이 향하는 목적지가 어딘지 알아? 바로 저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가 살고 있는 유크레나 산맥이란 말이세." "드, 드래곤?" 상대편 남자가 놀라는 것만큼 나 또한 놀랐다. 드래곤의 이름이 내 귀에 무척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였다. '라미아스라니, 그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미고 잇는 거지?' 호기심이 동한 나는 아예 대놓고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 드래곤은 이미 한참 전에 수면기에 접어들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곳으로 몬스터가 몰리는 거지?" "낸들 아나. 어쩌면 벌써 깨어나 활동을 시작한 걸지도 모르지. 아니, 그게 틀림없어. 몬스터를 다룰 수 잇는 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드래곤뿐이니까. 아무튼 그렇게 모인 숫자만도 얼추 1만을 넘어서고 있다는 소문이야. 그래서 근처 도시의 치안대들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고 하더군." "그렇겠군. 그만한 숫자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 "곤란하다 뿐인가. 아주 완전히 박살날 걸세. 듣자니 이종족들의 낌새도 영 수상하다던데, 그 일과 관계가 없기를 바랄 수밖에." "허허! 세상이 왜 이러는지. 드디어 멸망하려는 겐가." "이 사람아, 말이 씨가 된다는 소리도 모르는가?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들 말게." 나무라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그들의 대화는 다시 일상에 대한 것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우리가 앉은 식탁 위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지만, 나는 방금 전에 그들의 대화가 너무 신경 쓰여 영 손을 댈 수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시벨리우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엘, 뭐 해? 식사 안해?" "응? 아, 으응. 입맛이 없네." "헤에, 엘이 웬일이야? 먹는 것 하나는 늘 열심히 챙겼으면서. 혹시 아까 저 사람들의 대화 때문에 그래?" 그러자 쟈스민을 제외하고 테일블에 앉아 있던 일행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쏠리기 시작했다 다들 청각이 뛰어난지라 나처럼 그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너무 신경 쓰지마, 드래곤이 몬스터를 모으는 일이야 이전부터 흔했으니까." "그래? 하지만 숫자가 1만을 넘어간다고 하니 좀 이상해서." "대량으로 식사라도 할 생각인가 보지. 뭐, 덩치만큼 많이 먹는 종족이잖아."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시벨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한 다음, 옆에서 묵묵히 주스를 마시고 있던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저기, 아버지." "뭐냐." 움찔! 엘뤼엔을 부르는 호칭에 멀리 앉아 있던 웰디가 어깨를 들썩거리는 것이 보였다. 멍하니 벌린 입과 흔들리는 눈동자에 경악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로 몇 시간 전, 쟈스민에 의해 부자관계가 폭로(?)된 후로 그녀 앞에서 엘뤼엔을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은 그녀에게 '아버지'란 호칭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오죽하면 호위기사인 아렐과 카리안조차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겠는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혹시 무너가 짐작 가는 일 없어? 여기까지 오면서 들은 말 있을 거 아니야." 내가 물은 것은 라미아스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계약자인 엘뤼엔이라면 흑여 일이 벌어지기 전에 뭔가 들은 것이 있을까 싶에서였다. 엘뤼엔 또한 내 말의 뜻을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는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른다. 다른 녀석들이 뭘 하고 사는지 따윈 내 알 바 아니야." "으음, 너무한다. 좀 주위에 관심 좀 가지고 살라고." 내가 가볍게 투덜거리자 그는 미간을 잔뜩 좁힌 얼굴로 나를 잠시 노려보았다. 그때, 잠자코 있던 일행 중 카리안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중얼 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저희 마을에서도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잇는 것 같았습니다만." "네? 무슨 일인데요?" 내가 호기심을 보이자 그의 옆에 있던 아렐이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그 때문에 카리안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자 시벨리우스가 냉큼 끼어들어 물었다. "말해봐라 카리안." "시벨리우스님! 저희 일족의 일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기에는……." "내 동료이고, 모두 믿을 수 있는 자들이다. 상관하지 말고 대답해, 카리안." 항의하는 아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벨리우스는 묵묵히 카리안만을 바라보았다. 이에 카리안은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재촉하는 그의 눈빛에 못 이겨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 예. 저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누군가가 장로님께 익명의 편지를 보냈더군요. 그날로 마을에서 내로라는 전사들을 정비시키는 것을 보아 군사를 모으려는 것 같았습니다." "엥? 군사? 무슨 일로요?"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설마 전쟁이라도 벌어질 예정인가? 점점 일이 꼬여가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그때, 한심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퍼졌다. <뭘 그렇게 고민하냐, 바보야? 척하면 척 생각나는 게 있어야지.> "어? 그럼 넌 짐작 가는 게 있어, 라피스?" <그야 물론! 시대와 날짜를 잘 계산해봐. 딱 감이 오는 게 없냐?> "그, 글쎄? 내가 역사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이 시대의 일을 어떻게 알아? 그것도 문서의 기록조차 사라진 황금시대의 일인데." <그래도 듣긴 했을 거다. 잘 생각해봐.> "전혀 기억 안나." 내가 계속 헤매기만 하자 라피스는 포기했다는 듯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불쌍한 널 위해 내가 큰맘 먹고 알려주지. 형님이라고 불러봐.> "됐어. 치사해서 안 듣는다." <쳇! 알았어. 그냥 말해줄게. 아마 내 예상이 맞는다면 누군가가 군대를 모으고 있는 걸 거다. 유니콘뿐만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 사이에서도 지금쯤 군사를 뽑고 잇을 걸?> "뭐? 그런 일을 하는 게 누군데?" <있어, 그런 미친놈이. 정신이 완전히 나가서 인간들을 전부 쓸어버리겠다고 다짐하던 게 내가 알기론 아마 이 시대쯤이였거든.> "……!" 벌떡!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올라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전광석화처럼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 왜 그래?" "……?"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나를, 일행들은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들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인간들의 멸족! 이것 하나만으로 이미 모든 것이 설명된 게 아닐까. "…트로웰." 라피스를 찾았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아직 내게는 해결하지 못한 숙제가 남아 있었다. 13-6. 몬스터의 습격 (1) 리첸에 들어선 이후, 우리는 곧바로 숙박할 곳부터 찾았다. 얼마 후에 시작되는 마신전의 행사 탓에 가는 곳마다 만원이었지만, 다행히 중심지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서 적당한 여관을 잡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우리 일행은 쟈스민과 함께하고 있었다. 그녀와의 동행은 사실상 리첸에 들어선 이후로 종결되었어야 했지만, 혹여 가는 길에 소매치기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하에 완전히 신전에 들어갈 때까지 함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여관에서 약 반나절 동안 휴식을 취한 다음, 나는 엘뤼엔과 함께 쟈스민을 마신전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교리 수업을 듣기 위해서는 사전에 미리 접수를 해야 하는데, 바로 그 기간이 내일 아침까지 였기 때문이다. 시벨도 함께 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웰디가 허튼짓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기에 어쩔 수 없이 남기로 했다. 호위기사들이 있긴 하지만 정작 유사시에 그녀를 제대로 막을 수 있는 존재는 녀석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시벨, 다녀올 테니까 쉬고 있어." "응. 알았어, 엘. 빨리 와야 해?" "그래그래." 녀석의 어린애 같은 말투에 킥킥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디선가 따끔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아렐과 카리안이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두 눈을 잔뜩 부릅뜬 것이 흡사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다. 저들로서는 이런 천진한 어투를 사용하는 시벨을 본 적이 없을 테니 놀랍기도 무척 놀라웠으리라. "시, 시벨리우스님이……." "이봐, 인간. 대체 저분께 무슨 사술을 쓴 거냐?" 멍해진 카리안, 그리고 나를 추궁하는 아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래도 나 때문에 녀석이 이상하게 변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두 유니콘을 무시하며 엘뤼엔과 함께 여관을 나섰다. 쟈스민과 그녀의 하녀인 로잔은 이미 모든 준비를 마치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기다리셨죠? 자, 이제 출발하죠." "감사해요, 엘. 이렇게 신전까지 바래다주시고. 정말 톡톡히 신세를 지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저도 마신전에 가보고 싶었거든요." 길을 나서니 우리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신전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신전에 바칠 헌물을 실은 것으로 보이는 짐수레가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었다. 대륙 곳곳마다 마신전이 있지만 대사제가 잇는 곳은 오직 리첸에 있는 마신전 하나뿐이었다. 그 때문에 마신의 교리 수업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리첸으로 와야만 했다. 마신전에서 열리는 교리 수업은 1년에 단 한 번 약 일주일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그 대상은 주로 부호나 명망 있는 귀족의 자제들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기간 동안 지불하는 수업료가 굉장히 비쌌기 때문이다. 하루에 들어가는 금액이 일반 평민 가정의 1년 생활비에 해당한다니, 그 액수가 얼마나 엄청난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귀족가에서는 이 수업을 받는 것을 가문의 자부심으로 여겼으며, 특히 이 수업을 수료한 여성의 경우엔 남성들 사이에서 최고의 신붓감으로 꼽혔다. 그래서 어지간한 재력을 갖춘 귀족들은 자신의 딸이 성년이 되면 얼마간 마신전에 보내는 것을 당연한 과정으로 생각했다. 쟈스민 또한 그런 과정으로 마신전을 방문하게 된 케이스였다. 이때, 약간의 헌물을 준비하여 마신에게 바치게 되는데, 얼마나 좋은 것을 준비하느냐에 따라 그 가문의 명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떤 귀족은 집안의 모든 가산을 탕진하기까지 하며 마신에게 바칠 헌물을 마련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엔 쟈스민 또한 그런 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귀족치고는 수수한 옷차림도 그렇고, 출발할 때부터 마땅한 수행원조차 대동하지 않은 걸 보면 재정이 그리 충분한 가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서클렛을 준비하기 위해 상당한 손해를 감수했을 것이다. 워낙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 고가(高價)이고, 특히나 이 시대에는 최고급 보석으로 알려진 만큼 구하고 세공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마신전으로 향하는 내내 서클렛이 담긴 상자를 다루는 쟈스민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사실 이번 헌물은 다섯 개의 귀족 가문이 단합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답니다. 권력도, 중앙에 진출할 세력도 없는 지방 귀족이지만, 서로 다른 귀족 가문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이것을 잃어버렸다면 정말 다시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바라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보물을 무사히 지킬 수 있게 되서 다행이에요." "네. 이 모든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입니다. 돌아가게 되면 꼭 후사하겠습니다. 아버님께서 무엇보다 고마워하실 거예요." "하하! 그러실 필요 없어요. 대가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닌 걸요. 아! 다왔어요, 쟈스민! 저기 바로 앞에 마신전이 보이네요." "아!" 손을 들어 앞쪽의 건물을 가리키자, 쟈스민은 짧은 감탄성을 내뱉었다. 신전은 마신을 섬기는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온통 새하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그것이 마신전이라는 것을 알아본 것은 건물 꼭대기에 정교하게 새겨진 신의 문장 때문이었다. 양옆으로 벌어진 새빨간 박쥐의 날개.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 벽과 어우려져 신성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그것을 본 내 감상은 지극히 단순했다. '아무리 봐도 베트맨이라니까.' 만약 근처에 독실한 마신의 신도가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몰매를 맞을 생각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베트맨이 뭔지 알 리 없겠지만. 마신전에는 이미 상당수의 행렬이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수업을 신청하는 이들이 대부분 귀족들인 만큼, 신전 앞은 그들이 타고 온 마차로 즐비했다. 마차의 문에는 가문의 문장으로 보이는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쟈스민은 그중 몇 개의 문장을 알아보고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에요. 저희와 함께 서클렛을 준비하기로 한 가문들이 모두 있네요. 다들 어쌔신들을 피해 무사히 도착한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접수는 어떻게 해요?" "글세요. 저도 이번이 처음 온 것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한 표정이 된 쟈스민이 머뭇거리며 대답하던 순간이었다. "어떻게 찾아오셨습니까?" 굵고 중후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돌아보니, 검은색 로브를 입은 40대 후반 정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잿빛의 더벅머리에 투박한 얼굴, 아래로 처친 눈동자가 무척 순박한 인상을 풍겼다. 신전의 관계자인가? 슬적 남자의 모습을 훑어보다가 긴 소매 아래 살작 드러난 손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바로 그 부근에 마신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제님이신가요?" "예. 저는 마신 카노스의 미천한 종, 베이만이라 합니다. 조금 전에 보니 곤란한 일이 있으신 것 같은데, 제게 말씀해주시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아, 그렇군요! 처음 뵙겠습니다, 베이만님. 실은 마신의 교리수업 때문에 왔는데요, 접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아, 수업을 신청하러 오셨군요. 어느 분의 대리로 오셨습니까? 접수를 위해서는 본인 확인 절차가 필요합니다만." "걱정 마세요. 본인도 함게이니까요." "예? 본인이라면……." "여기 계신 숙녀 분께서 접수하실 겁니다. 저희는 이곳까지 안내 하러 온 것이구요." 내가 쟈스민을 가리키며 말하자 무슨 이유에서인지 베이만의 미간에 슬쩍 주름이 접혔다 사라졌다. 대놓고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너가 상당히 석연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대체 왜 저런데? 그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우리들의 모습을 쭈욱 훑어보더니 연신 괴로운 한숨만 뻑뻑 내쉬었다. 그리고는 한참 후에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아주 심각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저어… 혹시 아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신의 교리 수업은 수업료가 상당히 비삽니다. 그것도 첫날에 모든 금액을 한꺼번에 지급해야 접수가 진행됩니다만." "아, 그래요? 쟈스민, 수업료 잘 챙겨왔죠?" "네. 여기." 그녀는 침착하게 품 안에서 묵직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그러자 베이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의외라는 듯이 쟈스민을 쳐다보았다. "실례지만 성함이?" "쟈스민 드 카렌입니다." "아아! 귀족이셨군요? 카렌이라 하면… 혹시 루파 지방의 에드먼드 카렌 남작님의……?" "저의 아버님 되십니다." 그때부터 베이만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탐탁지 않게 바라보던 게 언제였냐는 듯, 쟈스민을 향해 정중하게 말하는 모습이 기가 막힐 정도였다. "오, 그렇군요! 카렌 남작님은 정말 독실한 마신교의 신도시지요. 매번 잊지 않고 신전에 헌금을 기부해주시고 계시니까요. 그분께 이런 아름다운 영애가 있으셨다니, 미처 몰라 뵈었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아참, 교리 수업을 신청하시러 오셨다고 하셨지요? 그럼 저를 따라오시지요. 접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친절하신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바뀐 사제의 태도가 어리둥절할 만한데도 쟈스민은 침착하게 인사했다. 내가 그 모습을 찌푸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자, 옆에서 묵묵히 서 있던 엘뤼엔이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쓰레기로군." "으응? 무슨 소리야, 아버지?" "별것 아니다. 사제라는 녀석이 사람의 신분과 재물에 따라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달갑지 않은 것뿐." 로브에 가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는 무척 기분이 나빠 있는 듯했다. 아까 전에 베이만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는 한눈에 봐도 무시하는 느낌이 역력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마도 그는 우리의 초라한 옷차림을 보고 가난한 평민들이 아무것도 모른채 접수를 신청한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수업료가 비싸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쟈스민이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곧바로 태도를 바꾼 것일 테지. '한마디로 속물이로군. 뭐,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갑자기 엘뤼엔의 신전을 처음 방문했을 대가 떠올라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렀다. 그대도 나는 지금처럼 온몸을 로브로 칭칭 휘감은 초라한 차림이었었다. 하지만 맞이하러 나온 사제들 중 누구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겁을 하며 정중하게 대하는 바람에 무척 당황했었다. 그렇게 된 것에는 물론 엘뤼엔의 영향이 컸다. 그가 내 방문을 모든 사제들에게 통보해 버렸기 때문이었으니까. 그때는 그저 창피하기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처럼 무시 당하지 않도록 그 나름대로 배려한 셈이었다. 어쩌면 오늘 겪은 일이 무의식에 남아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어라? 가만 있어봐, 그럼 혹시 날 아들로 삼을 결심을 한 것도, 지금 이 생활이 남긴 무의식에 의한 걸지도 모르잖아?' 그러고 보면 엘뤼엔은 딱히 뭔가 타당한 이유로 날 양자로 들일 생각을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마음에 들었다'라고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그가 평소에 기분 내키는 대로 마구 행동하는 타입인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아들을 그런 단순한 이유로만 선택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면에서 따져보았을 때, 지금 내 생각이 아주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허 참! 이거야, 원. 닭인 먼저인지, 계란이 먼저인지 모를 상황일세.' 엘뤼엔에게 아들로 선택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먼저 그를 아버지로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뭔가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었다. 13-7. 몬스터의 습격 (2)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마신교의 사람들은 상대의 옷차림을 상당히 신경 쓰는 성격인 모양이었다. 신전의 정문 앞에 앉아 한창 접수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하나같이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어쩜 저리도 처음의 베이만과 똑같은 표정일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표정은 우리 앞에 있던 베이만에 이르자 금세 환하게 바뀌었다. "앗, 베이만 사제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수고들이 많군. 여기 계신 영애께서 이번 교리 수업을 신청하고 싶다고 하셔서 내가 모셔왔네." "아, 그러셨습니까? 어째서 사제님 같으신 분이 직접… 그냥 옆의 아무나 불러 따로 지시하셔도 되는 일을……." "허허허! 마신께 찾아온 손님을 어찌 소홀히 대할 수 있겠나. 아무튼 이분들의 접수를 도와드리도록 하게. 이번이 첫 방문이신 듯 하니." "예, 알겠습니다!" "영애께서는 이쪽으로 오시지요." 여기서 나는 베이만이 꽤 높은 계급의 사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의 말에 접수관들이 자신들 앞에 길게 늘어진 행렬을 무시하고 쟈스민의 접수부터 받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 때문에 차례를 밀린 사람들이 뒤쪽에서 불평을 터뜨렸지만, 그 말에 귀 기울리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줄을 선 사람들 모두 한가락 하는 귀족일 텐데도 저런 태도인 것을 보면, 확실히 교리 수업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나는 쟈스민이 접수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때까지도 옆에 있던 베이만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감사함니다, 사제님. 덕분에 편하게 접수할 수 있게 됐네요." "후후후!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한데, 여러분은 저 숙녀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실례지만 가문의 수행원으로 보이지는 않는 군요." "그냥 일행입니다. 목적지가 같아서 잠시 동행했을 뿐, 원래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그럼 혹시 여러분도 귀족이십니까?" "아닌데요." 그러자 베이만은 거의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렀다. 그리곤 갑자기 급한 용무가 생각난 듯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흠, 흠! 잘 알았습니다. 아, 이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밀린 업무가 많아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네요. 여러분에게 마신의 가호가 늘 함께하시기를." "아아, 예. 사제님께도 마신의 가호가 임하시길." 그는 내 인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곧바로 어디론가 걸어갔다. 누가 보더라도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도망치는 모습이었다. 내가 신분이 높은 귀족이었어도 저랬을까? 이미 그럴 줄 예상했으면서도 기분이 나빠지긴 마찬가지였다.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데, 옆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저분 혹시 베이만 대사제님이 아니신가?" "오오, 그런 것 같네. 일 년 전, 교리 수업에서 뵈었기 때문에 얼굴을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분이 틀림없네." "저런 귀하신 분이 왜 이런 자리에까지? 어쟀든 오늘은 정말 운이 좋군! 대륙을 통틀어 다섯 명 밖에 안 되는 대사제 중의 한 분을 뵙게 되다니! 자네, 혹시 저 분의 신의 문장을 보았는가?" "당연하지! 손목에 새겨져 있더군. 아마 대사제들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일 걸세." "오오! 역시 마신의 축복을 받으신 게 틀림없군!" 하나같이 감탄하는 목소리엔 그에 대한 존경과 경외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와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대사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의 문장 부위가 손목이라니. 적어도 이마나 뺨 정도는 돼야 대사제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눈에 띄는 부위에 문장이 있을수록 계급이 높다는 점을 생각해봤을 때, 이 시대의 사제들은 카노스로부터 상당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들키면 난리 나겠군.' 나는 본래 문장이 자리하고 있을 왼손의 손등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 접수를 마친 쟈스민이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아, 쟈스민. 다 끝나셨어요?" "네. 앞으로 열흘 후에 수업이 시작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숙소가 따로 있어서 미리 들어와 있어도 상관이 없다고 해요. 그래서 내일 아침 일찍 짐을 옮기려고요." "그게 좋겠네요. 신전 안이라면 더 이상 위협 받는 일 없이 안전할 겁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 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부리나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평소였다면 주위의 경관이라도 둘러봤겠지만, 이곳 사람들의 태도 때문인지 그다지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사히 접수를 마쳤음에도 쟈스민의 표정이 어두운 것 역시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다음날이 되자 쟈스민은 하녀 로잔과 함께 짐을 꾸려 마신전으로 들어갔다. 수행원도 없이 여자 둘뿐이어서 걱정이 되긴 했지만, 내가 참견할 영역이 아니었기에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저 얼마 없는 짐이나마 신전 앞까지 들어다주고 배웅해주는 것뿐. 아마 돌아가는 길에는 용병을 고용할 것이다. 떠나기 전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나와 일행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모두 여러분 덕분이었습니다." "뭘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쟈스민. 무사히 모든 일정을 마치시고 돌아가시길 바랄게요. 이렇게 헤어지니 좀 아쉽네요." "저도 그래요. 저어, 이것……." "……?" 그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것은 사자의 머리가 그려져 있는 작은 메달이었다. 원래는 엘뤼엔에게 주는 것이었으나 그가 받을 생각도 없이 무심한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는 통에 내가 얼른 끼어들어 대신 받았다. "이게 뭔가요?" "저의 가문의 문장이 들어간 것입니다. 혹시 루파 지방에 들르시게 되면 꼭 카렌 가문을 찾아주세요. 이번 일에 대해 사례하겠습니다." "앗,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아닙니다. 꼭 찾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시는 날까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시겠지요?" 눈빛을 빛내며 여러 번 당부하는 그녀의 모습은 집념에 가까워 보였다. 보나마나 엘뤼엔 때문이겠지만, 그 모습이 얄미워 보이기 보단 무관심한 태도에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자세를 오히려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쟈스민의 입가에 만족한 미소가 감돌았다. 여자들은 참 이상하게도 상대가 나만 한 아들을 둔 아저씨(?)라는 사실을 알고서도 여전히 호감을 보였다. 나라면 첫눈에 반했더라도 내 또래의 딸을 둔 아줌마라는 것을 알고 나면 절대 관심이 가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내가 굳이 '여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대상에 유니콘인 웰디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잠시, 진정이 되고 나자 그녀는 새로운 관점(?)에서 엘뤼엔을 관찰하고 있었다. 쟈스민처럼 아예 엄마 자리를 노릴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에게 보내는 관심은 여전한 것 같았다(때때로 엘뤼엔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얼굴이 붉어지는 증상을 보면). 주변 치안을 이유로(사실은 호위기사들의 극성으로) 웰디가 함께 배웅 나오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녀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지난번에 이어 또다시 살벌한 공기가 조성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이 모든 사정을 뻔히 꿰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는 엘뤼엔이 대단해 보인달까? 잘생긴 남자는 피곤하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긴 한 모양이다. 물론 그를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부러워 죽으면 모를까. '쳇! 그런 복은 나한테나 줄 것이지.' 내가 상념에서 깨어난 것은 이어진 쟈스민의 말에 의해서였다. "그럼 이만 헤어져야 할 것 같네요. 부디 원하시는 일을 마무리 지을 때까지 마신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아아, 네. 쟈스민도요. 로잔도 잘 가세요." 내 가벼운 대답에 엘뤼엔 또한 눈인사로 배웅을 대신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넘어가면 시벨리우스가 아니었다. 녀석은 버터가 줄줄 흐를 정도로 느끼한 표정으로 쟈스민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로군요, 쟈스민. 안타깝지만 만남에는 항시 이별이 따르는 법. 다시 또 뵐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러자 쟈스민 또한 생긋 웃으며 답례했다. "저 또한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시벨리우스. 이종족의 기사님. 당신이 보여주신 용기와 용맹함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영광일 겁니다. 하지만 제 기억에 남을 레이디의 아름다움보다는 오래가지 못할 테지요." "호호! 재미있으신 분. 하지만 그런 달콤한 말로 인사하고 돌아서면 금방 잊을 것이란 걸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아아! 어째서 그런 생각을? 오해입니다, 쟈스민. 저는 진실만을 말하는 엘프. 결코 그대를 잊지 않을 겁니다. 그대의 아름다움이 이미 이 가슴속에 박혀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놀고 있네.' 다시 한번 웰디가 없음이 다행스럽게 느껴진 순간이었다. 약혼녀가 눈에 불을 켜고 잇는 주제에, 대체 뒷수습은 누구더러 하라고 저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내가 노려보든 말든 계속해서 닭살스런 대사를 주고받던 그들은 거의 신파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대화를 마쳤다. "그럼 이제 정말로 안녕히." 이윽고 눈시울을 붉힌 그녀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리는 그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어디 보자, 이제 완전히 갔지? 쟈스민이 완전히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옆에서 멀뚱히 서 있던 시벨의 등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짜악! "으악! 왜 그래, 엘? 아파~" "아프라고 때리는 거야! 대체 뭐 하는 거야?" "내가 뭘?" "그 닭살스런 인사 말이다! 엘프라는 사기를 친 건 둘째 치고, 뭐? 아름다움이 뭐가 어쩌고 어째? 웰디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아? 네가 이러니까 그 애까지 덩달아 다른 곳에 눈길을 주는 거잖아! 반성 좀 해!" "하, 하지만 그건 인간들의 귀족식 인사인걸,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웰디에겐 결단코 그럴 마음이……." "시끄럿!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돌아가면서 바람을 피우고 난리야! 주변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달란 말이다! 옆에서 얼마나 민망했는지 알아? 내가 아주 닭털이 되어 날아기는 꼴을 보고 싶어? 그냥 고분고분 사과해도 봐줄까 말까인데!" "으음… 미안해, 엘." "쯧! 진작 그럴 것이지." 내가 혀를 차며 중얼거리자 녀석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표정으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 모습이 좀 불쌍해 보이긴 했지만, 야단 친 걸 철회할 마음은 없었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주의를 주지 않으면 얼마든지 바람둥이로 변모할 가능성이 차고도 넘치는 녀석이었으니까. 그러자 왠지 묘하게 감탄한 듯한 라피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바로 그런 식으로 길들인 거로군.> "뭐가?" <아냐, 그냥 네 성격이 많이 변한 것 같아서.> "변했다고? 어떻게?" <별거 아냐. 더 계집애 같아졌을 뿐.> "우씨! 너 진짜 두고 가버린다!" 버럭 소리치는데도 녀석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느라 정신없었다. 보석 안에 갇혀서 답답하다느니 심심하다느니 온갖 난리를 치더니, 종종 나를 갈구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할 작정을 한 모양이다. 끄응! 하고 신음을 삼킨 나는 목소리를 차분하게 진정시키고 말했다. "자증나도 조금만 참아. 나도 노력하고 잇으니까." <…….> "미안해, 라피스.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만들어서. 반드시 원래의 위치로 돌려줄게. 내 이름을 걸고 약속할게." 왜인지 라피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이제 나랑 말 섞기도 싫어진 건가? 내가 한숨을 내쉬며 대답 듣기를 포기할 때쯤,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하나만 묻자.> "응? 뭐, 뭔데?" <이대로 돌아가면 난 바로 명계로 보내지겠지? 다시 환생한다면, 아크아돈에서 태어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으음, 글쎄. 그리 높지는 않을 것 같은데? 중간계에 속한 차원이 워낙 많다고 하니까, 굳이 같은 차원에서 태어날 이유가 없잖아." <그래? 그렇다면 난 이대로 돌아가지 않아도 상관없어.> "뭐?"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경악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라피스는 웃음기를 담은 말투로 말을 이었다. <다시 태어나서 모든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사느니, 지금 이대로가 좋아.> "하아? 답답하다고 할 땐 언제고? 얼른 새로 태어나서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아? 너 지금 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하잖아. 사람들도 만나지 못하고 의사조차 전달하지 못할 텐데?" <상관없어. 그래도 넌 옆에 있잖아.> "그치만……." <그거면 돼. 사실 나보다 네가 더 문제 아니냐? 나야 워낙 인기가 많은 몸이지만, 넌 나 없으면 친구도 없잖냐. 나 없다고 외로워하는 꼴 보느니, 큰 맘 먹고 희생해주지, 뭐.> "어이."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괴상한 결론에 이르는 거냐? 머릿속이 복잡해졌즈미난 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라피스의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대로 돌아가고 나면 난 녀석의 공백에 매순간 숨이 막히게 될 것이다. 녀석을 찾아다녔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때부턴 정말로 영원한 이별일 테니까.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아니, 만나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겠지. 내게도 그런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난 곧 고개를 저었다. "쓰, 쓸데없는 소리 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반드시 널 환생시킬 테니까. 난 너 아니어도 친구 많으니까 신경 끄시지?" <쳇! 내 크신 배려에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아무튼 귀여운 구석이 없다니까.>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나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런 식으로 말해도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이 가슴 깊이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에도 나를 걱정해준다는 것이 고맙고 미안해서, 이제부터 어떤 얼굴로 녀석을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라피스를 만난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그렇기에 훗날 다가올 이별이 더욱 슬프고 괴롭게 느껴졌다. 앞으로 이어질 내 삶에서 이만큼 멋진 친구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같았다. 13-8. 몬스터의 습격 (3) "축제?" "네! 시벨리우스님! 아까 일층에 내려갔다가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도시에 축제가 벌어진대요! 우리 보고 가요 네?" 아침부터 웰디는 유난히 들떠 있는 상태였다. 오늘 저녁부터 시잘될 마신을 위한 축제 때문이었다. 인간 세상의 경험이 충분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축제 참가가 처음이였기에 상당한 욕심을 보였다.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다시피, 이번 축제는 마신전의 주최로 개최되는 것이었다. 본격적인 교리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민심을 달래는 전야제라고 볼 수 있었다. 그 행사가 상당히 화려한 탓에 이도시의 유동인구를 늘리는 것에 톡특히 기여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거야 어디까지나 편하게 관광 온 사람들의 이야기고, 일정이 바쁜 우리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전혀 없는 이야기였다. 덕분에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웰디의 눈을 본 시벨리우스는 상당히 곤혹스러운 표정이 되어 있었다. "웰디, 우리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아앗! 설마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거예요? 겨우 하루잖아요. 하루!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안 돼요?" "하아! 그럼 우리 먼저 출발할 테니까 넌 호위기사들과 나중에 오도록 해." "시, 싫어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같이 다니기로 약속했으면서! 시벨리우스님 나빠요!" 대처 누가 나쁘다는 건지. 그녀의 고집에 오히려 호위기사인 아렐과 카리안이 미안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는 시벨리우스의 모습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냥 보고 가자, 시벨. 저렇게 원하잖아." "으음, 그래도 괜찮겠어?" "어차피 좀 늦어진 김에 감수하지, 뭐. 어떤 축제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와아! 그게 정말이지요, 엘? 정말 고마워요! 들었죠, 시벨리우스님? 엘도 축제를 보고 가자고 하잖아요~" 단번에 의기양양해진 웰디가 것 보라는 듯 소리치자 시벨은 푸욱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미안해, 엘. 벌써 나 때문에 일이 미뤄진 것이 몇 번인지…." "쿡쿡! 신경 쓸 것 없어. 이미 늦은 일에 하루나 이틀이나 매한가지니까. 그냥 웰디 양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둬." "고마워." 슬쩍 인사를 건네는 시벨의 뒤로 두 호위기사들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 역시 덩달아 목례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 탁! 하고 무언가가 내려않는 느낌이 들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든 나는 곧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엘뤼엔이 지나가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은 것이다. "왜 그래, 아버지?" "…별로."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내뱉은 그는 문을 열고 밖으로 사라졌다. 덱분에 혼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잇는 나를,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웰디가 갑자기 잡아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강한 힘에 얼결에 끌려가는데 그녀가 내 귓가에 손을 대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요, 엘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어떤 분이라뇨? 으음, 그냥 보시는 대로?" "아니, 그게 아니라… 정말 인간이 맞는 건가요?" "네?" 뜨끔해져서 묻자 그녀는 내가 화난 거라 생각했는지 변명하는 것 처럼 설명했다. "아, 아니, 나쁜 뜻이 아니에요. 그저 엘의 아버지라는 분의 느낌이 다른 인간들에 비해 너무 달라서요. 신성하면서도 자연의 기운이 너무 강하게 느껴지는 게 마치 정령같다랄까? 맞아요! 정말 정령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 처음에 보고 얼마나 놀랐다구요." "…쿨럭! 아, 그, 그건요……." "그러고 보니 엘은 정령사였지요? 아버지도 정령사인 건가요? 그게 아니라면 이런 느낌을 설명할 수가 없는데." "으음, 그렇다고 해야 할지 아니라고 해야 할지……." "혹시 대답하기가 곤란한 질문이었나요?" 내가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웰디는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빤히 바라보는 눈빛을 거두지 않는 걸 보아 정작 물러설 기색은 없는 것 같았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뒤편에 있던 호위기사들까지 덩달아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주목하고 있었다. 그들 또한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어도 엘뤼엔에 대해 무척 궁금해 하고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뭐, 유니콘들이니까 상관없겠지?' 생각은 길었지만 결단은 빨랐다. 쟈스민의 경우야 평범한 인간이니 일부러 속일 수밖에 없었다지만, 신족에 가까운 유니콘들에게까지 비밀로 할 내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순순히 그에 대해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제 친부가 아니에요." "네? 하지만 아버지라고……." "정확히는 양아버지죠. 그의 정체는… 아마도 웰디의 느낌이 맞을 겁니다." "제 느낌이요? 설마 정령과 비슷하다는 것 말인가요?" "힌트를 드리죠. 인간은 확실히 아닙니다." "네? 인간이 아니라고요? 그럼 누구인데요?" "후후! 맞춰보세요. 누구인 것 같아요?" "으음……." 내가 장난스럽게 묻자 웰디는 무척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끙끙거리고 있는 모습이 꽤 귀여웠다. 정령과 비슥하다는 걸 깨달았으면서도 그가 정령 자체라는 생각은 왜 못하는 걸까? 좀 더 골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후환이 두려워서 나는 그리 오래지 않아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하실 필요는 없는데. 뭐, 이쯤에서 단서를 드릴까요? 아버지의 이름은 죤이 아니에요. 그건 시벨리우스가 급조로 지어낸 가명이죠." "네? 그럼?" "본명은 엘퀴네스입니다." 너무 의외의 이름이었던 걸까? 웰디는 물론 호위기사들까지 한동안 멍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동그래진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심각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혹시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확인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웰디였다. "…엘퀴네스? 저어, 제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아니라면 그건… 물의 정령왕 이름인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마, 말도 안 돼! 그럼 당신의 아버지가 물의 정령왕이라고 하는 거예요? 장난이 너무 지나쳐요, 엘." 역시나 쉽게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힘든 일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자신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했는지 웰디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선 나보다 먼저 해명을 해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지금깢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시벨리우스였다. "엘의 말이 맞아, 웰디. 그는 정령왕 엘퀴네스야." "시, 시벨리우스님! 정말이요?" "네에게 이런 일을 속일 필요는 없지." "하지만 어떻게 정령왕이?" "엘이 그의 계약자거든." "……!" 녀석의 마지막 발언에 방 안에 있던 3마리(?)의 유니콘들은 모두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서도 정령왕의 계약자란 대단한 의미인 듯했다. 더구나 나는 비공식적으로 엘퀴네스를 소환한 최초의 인간이었으니까 (공식은 다 알다시피 나를 소환한 이사나다). 그 존재적 가치가 남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웰디는 물론, 호위기사들 중 늘 탐탁지 않게 나를 쳐다보던 아렐의 표정도 한결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놀랍군! 설마 정령왕의 계약자였을 줄이야. 드래곤조차 성룡이 되어야만 소환이 가능한 물의 엘퀴네스를 아직 스무 살도 채 넘지 못한 인간이……." "그러게 말입니다. 아렐, 과연 기적을 창조하는 존재! 인간들의 능력이란 그 끝을 알 수가 없군요. 게다가 양부라니. 그건 대체 어떻게 된 것니까? 아무리 양아버지라지만 정령왕과 부자의 인연을 맺는 존재는 엘, 당신밖에 없을 겁니다." 무척 감탄한 말하는 카리안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대단할 것도 없어요. 그냥 제 쪽에서 억지를 쓴 거니까. 멋대로 아버지라고 부르기 시작했더니 처음엔 몇 번 뭐라고 하다가 나중엔 귀찮았는지 포기하더라고요." "하지만 호칭을 묵인했다는 것은 정령왕께서도 당신을 양자로 인정하셨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렇죠. 저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내가 생긋 웃으며 대답하자 웰디가 조심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아버지라고……?" "아아, 제 친아버지랑 닮았거든요." 정확히는 그쪽도 양아버지이긴 하지만. 마땅히 둘러댈 말이 없어서 나는 대강 넘겼다. 그러자 유니콘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뭔가 살짝 어이없어 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모두 수긍한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했다. "…으음. 하긴, 엘 정도의 외모라면 아버지 되는 인간 역시 평범한 인물은 아니었겠군요." "엘 역시 처음에 보고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요." "그, 그랬나요? 하하하……." "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땐 정말 놀랐습니다. 부모 쪽의 하나는 틀림없이 인간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부친 쪽이 엘퀴네스님과 닮은 외모리나, 좀처럼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정령왕과 닮은 인간이라니, 한번 보고 싶은데요?" 인간이 아니라 신입니다만. 선입관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인간이라고 말한 적도 없는데 그들은 알아서 엘뤼엔을 인간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나로서는 그편이 다행이긴 했지만,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동자가 무척 부담스러웠다. 내가 말없이 웃고만 있자 웰디는 문득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보통 닮았다는 이유로 다른 이를 아버지라고 부르나요? 친아버지 쪽에서 서운해 하실 것 같은데요." "아~ 상관없어요. 어차피 이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분이니까." "네? 만날 수 없다니, 어째서요? 아, 설마! 어맛~! 죄, 죄송해요! 이런 실례되는 질문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마지막 웰디의 말에 의해 순식간에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척 동정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지만, 굳이 정정해줄 마음은 없었다. 사실 일부러 이것을 노리고 오해성 다분한 말을 한 것이었으니까. 더 골치 아프게 파고들기 전에 내 쪽에서 미리 선수 친 셈이랄까. '훗! 어차피 거짓말은 아니잖아? 이 세상에서 만날 수 없다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웰디에게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당황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괜찮다니까요. 어차피 엘퀴네스가 옆에 있어서 헤어졌다는 자각도 못하고 있으니까." "으음, 정말 굉장히 많이 닮았나 보군요." 닮았다 뿐인가. 그 본인인데. 나는 다시금 신기하단 시선을 보내는 유니콘들을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이만의 특권이랄까? 마치 내가 엄청 비밀스러운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 즉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는 라피스 때문에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사기 치면 즐겁냐?> "누, 누가 사기를 쳤다는 거야?" 빈정거리는 녀석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 울컷해서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라피스는 여전히 깐죽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순식간에 엘퀴엔을 친아버지로 둔갑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죽은 사람으로 만든 게 그럼 사기는 아니라고?> "훗! 모르는 소리. 그건 그냥 진실을 교묘하게 감춘 것뿐이야. 사기와는 엄연히 다르지." <얼씨구? 너 어째 갈수록 뻔뻔해지는 것 같다?> "이왕이면 임기응변이 뛰어나다고 해줘. 나라고 이러는 게 마음 편한 줄 알아?" <호오, 재미있어 하는 건 아니고?> 비꼬는 목소리에 나는 한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녀석의 말을 아주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당혹해하는 유니콘들을 보며 즐거워하지 않았던가! 그러자 것 보라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애써 귀를 닫고 무시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 많은 인생이다. 이런 식으로 내가 사악해져 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싶지 않았다. 13-9. 몬스터의 습격 (4) 날이 저물자 나는 일행들과 함께 여관을 나와 도시의 광장을 걸었다. 웰디의 소원대로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광장에는 우리처럼 축제를 즐기러 나온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해 있었다. 축제는 어디를 가도 비슷한 건지, 여기저기에서 장식품을 비롯한 먹거리를 팔거나 서커스를 선보는 무리가 눈에 뜨였다. 어떤 곳은 게임을 해서 사은품을 주기도 하고, 마법으로 만든 놀이기구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새삼 학교 다닐 때 열렸던 축제가 생각나 가슴이 벅차올랐다. '나와 보길 잘했네. 그냥 갔으면 나중에 후회했을 거야.' 생각해보면 꽤 오랜만에 갖는 여유 시간이었다. 처음 이곳에 올 때는 무조건 라피스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그 뒤로는 여러 일행들에 치여 적응하기에 바빴으니까. 거기에 가는 곳마다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다 보니, 이렇듯 한가한 기분으로 관광을 해보는 것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 보니 처음 축제 구경을 제안한 웰디가 고맙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런 행사 자체가 생소한지 눈을 반짝거리며 연신 주위를 둘려보고 있었다. "와아~ 사람이 정말 많군요. 이렇게 많은 인간들은 처음 봐요." "축제라서 집에 있던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온 걸 거예요. 아마 조금 더 있으면 훨씬 많아질 걸요?" "활기차서 좋군요! 그렇지 않나요, 아렐 카리안? 우리 마을에도 이런 행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웰디는 활짝 웃으며 뒤편에 서 있던 두 호위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카리안과 달리 아렐은 얼굴을 찌푸리며 나무라듯 대답했다. "또 그런 말씀을. 이런 건 그저 인간들의 천박한 문화입니다, 웰디님. 전혀 동경하실 것이 못 됩니다." "으음, 하지만 즐거워 보이는 걸요." "그야 저들은 웃고 떠드는 것밖에 모르는 족속이니까요. 저런 것에서 명예나 긍지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웰디님이 이런 것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아시면 장로께서 슬퍼하실 겁니다." 이 얼마나 피곤한 성격인가. 닥딱한 얼굴로 축제 분위기에 초를 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아렐을 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시벨리우스 역시 골 아픈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 상황에 끼어들 엄두는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의외의 반전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다음의 일이었다. "웃고 떠드는 족속이라 미안하군." "…에?" 중얼거리듯이 내뱉은 이는 바로 엘뤼엔이었다. 그가 정령왕이라는 것이 밝혀진 이후로 유니콘들 모두 저자세로 엘뤼엔을 대하고 잇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의 등장에 놀랐는지 아렐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무,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는 엘퀴네스님이 아니라 인간들에 대한 평가를……." "인간들에게 축제를 가르친 것이 정령들이었다. 즉, 놈들이 웃고 떠드는 방식 자체가 정령에게서 나왔다는 소리지." "헉! 그, 그런!" "왜? 달리 할 말이라도 있나?" "죄, 죄송합니다! 저는 결코 정령들에 대한 악의가 있었던 것이……." 새파랗게 질린 아렐은 쩔쩔매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한순간에 역전된 상황에 나머지 유니콘들은 모두 곤란한 표정이었다. 상황이 너무 개그적이다 보니 웃고는 싶은데, 아렐에게 미안해서 간신히 참고 있는 것 같았다(웰디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는 것은 모른 척하기로 하자). 나 또한 표정 관리에 노력하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엘뤼엔을 향해 물었다. "헤에~ 인간에게 축제를 가르친 것이 정령이었어? 그건 처음 알았네." "초창기의 아크아돈은 순수했으니까. 그 당시만 해도 정령사가 많았지. 인간들의 문화는 대부분 초대의 정령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거다. 지금은 많이 변질되긴 했지만." "그렇구나. 왠지 멋지다!" 아크아돈의 주인이 4대 정령왕이라는 것을 알긴 했지만 지금까지 깊이 자각하지 못했는데, 방금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내심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숨김없이 감탄을 표하자 무표정하던 엘뤼엔의 입가에도 살짝 희미한 미소가 감돌았다. "기분 나빠하지 않는군." "응? 왜 기분 나빠하는데?" "보통 인간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순수하게 스스로 일구어낸 것인 줄 알고 있거든. 정령들이 가르쳤다는 것을 알려주면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태반이지." "그래? 내가 보기엔 인간만이 아니라 드워프나 엘프들의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 전부 정령들에게 영향을 받은 거 아니야? 어쩌면 다른 모든 중간계의 문화도 이곳 아크아돈을 중심으로 형성된 걸지도 모르지." 그냥 짐작해본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정곡이었던 모양이다. 엘뤼엔의 눈이 순간 급격하게 커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응? 아,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정령은 모든 세상의 기본 원소잖아? 당연히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더구나 정령왕은 신의 준비 과정. 즉, 신계의 문화 역시 사실은 정령계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들 안에서 창조된 중간계의 종족들이 정령의 영향을 받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고. 고로 아크아돈이 모든 세상의 중심이라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 대단한 연결고리에 흥분한 나는 신나서 떠들었다. "아무튼 정령의 역할은 대단한 것 같아. 하지만 요즘은 다들 그 의미를 잊어버리는 추세고, 아마 앞으로는 더더욱 그렇게 되겠지. 보통 정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홀대하는 경우가 있으니까. 이러다가 아예 정령사가 사라지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니까." "…너랑 이야기하면 가끔 정령과 대화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응? 그, 그래? 하하! 그거 영광인걸." 뜨끔한 나는 크게 웃으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다행히 바로 이어진 웰디의 질문 덕에 그 부분을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잠시만요, 엘퀴네스님. 방금 전 엘의 말대로라면, 설마 유니콘의 문화도 정령이 주도했다는 말인가요?" "아크아돈의 생명체는 무엇이든 모드 정령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진실이지." "……." 담담한 엘퀴엔의 대답에 시벨리우스를 비롯한 그의 일행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자신들이 우습게보았던 인간과 문화적인 면에서 스승이 같다는 소리였으니 놀랄 만도 했다. 특히나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니콘들이기에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아렐은 어떤 일에도 침묵을 유지했다. 여전히 인간들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기는 했으니 이전처럼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내거나 비꼬는 일은 없어졌다. 정령의 위대함이 뿔 달린 말 한 마리를 개과시긴 순간이었다. 13-10. 몬스터의 습격 (5) 본격적인 축제에 앞서 거리에는 무수한 연인들이 나와 사방에 꽃가루를 뿌리기 시작했다. 한밤에는 마법을 이용한 불꽃놀이와 캠프화이어가 벌어진다고 하니 꽤 근사한 구경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이동에 불편함이 따랐다. 안 그래도 사람이 많은데 축제의 주최자인 마신전의 관계자들이 길의 한가운데 자리를 확보하고 양쪽으로 줄을 매달아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두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곧 퍼레이드가 이어지는데, 그 진로에 구경꾼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미리 조치해둔 것이었다. 줄이 이어진 길에는 각 구관마다 새카만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마찬가지로 검은 말을 타고 주위를 감시하고 있었다. 길이 좁아 미어터지는 와중에도 투구 안에서 빛나는 눈빛이 꽤 매서워서인지 아무도 그들의 주위로는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기사들의 주위는 상당히 한산했다. 그 모습을 본 웰디는 무척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저어… 저자들이 누구기에 다른 사람들이 근처에 다가가지 않는 거죠?" 하지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가 처음인 나나 다른 일행들이 그에 대해서 알리 만무했다. 잠깐 기사 쪽을 바라본 나는 그들이 입은 갑옷에 시선이 미치고서야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마신전의 기사 같네요. 갑옷에 마신의 문장이 새겨져 있어요." "아아, 신의 기사들이로군요. 그런데 왜 저기서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거죠?" "아마 조금 뒤에 있을 행사 때문일 거예요. 사람들이 질서를 어기지 않도록 감시하는 거겠죠. 이를테면 행사 관리자라고나 할까요?" 내가 설명을 마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누군가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드디어 시작이다!" "오옷! 나온다, 나와!" "……!" 놀라서 황급히 돌아보니 멀리 마신전 쪽으로부터 화려한 마차들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는 것이 보였다. 축제 개막전 퍼레이드가 시작된 것이다. "와아아아아!" 열린 창문 안으로 마차의 내부가 고스란히 보였는데, 그 안에는 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 교리 수업을 위해 참석한 귀족들인 것 같았다. 행렬이 긴 탓에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쟈스민 또한 저 안에 속해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중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가장 가운데에 있는 마차였다. 다른 것들도 충분히 예쁘게 꾸며져 있었지만 그것은 특히나 더욱 화려한 장식으로 되어 있었고, 크기도 다른 마차에 비해 몇 배나 컸다. 결정적으로 그 안에 타고 있는 이는 일반 귀족이 아닌 마신의 사제들이었다. 그래서인지 환호하는 사람들의 함성은 대부분 모두 이 마차를 집중적으로 향해 있었다. "마신께 영광이 있으라!" "마신의 사제여! 제게 축복을!" "저희 가정에 축복을 기원해주십시오!" "와아아아아!" 마차가 지나가는 길에는 군종들이 앞 다투어 손을 내밀며 마신의 축복을 갈구했다. 사제들 중 누구 하나 마차에서 손을 내밀어 마주 잡아주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눈빛이 마주쳤다는 것만으로 사람들은 천금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다. 대강 주위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뭔가 그에 관련된 징크스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번 행사에서 사제와 눈이 마주치면 다음 축제가 열리기까지 1년간 행복하게 산다나? 행렬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길에 서서, 그런 소란과는 무관했던 나로서는 상당히 어이없게 느껴진 장면이었다. "다들 뭔가 착각하고 잇는 거 아니야? 마신에게 축복이라니. 바랄 걸 바라야지, 저주라면 또 몰라." 내가 구시렁거리자 옆에 잇던 시벨리우스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혹시 이런 게 아닐까? 저주를 걸기는 하지만, 반대로 그 저주를 풀 수 있는 것도 마신의 사제잖아. 불행이 닥쳐도 금방 회복하고 일어서기를 기원하는 의미일 것 같은데." "으음,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 뭐, 그것도 다 마신의 쓸데없는 장난을 치지 않는다는 가정하의 일이지만." "장난? 아아~ 그러고 보니 마신은 꽤 짓궂기로 유명하지. 인간들에게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인데, 엘은 어떻게 알았어?" "글쎄… 어떻게 알았을까." 사실 말이지, 나도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거든? 그런데 어쩌다 보니 알 수밖에 없더라고. 네가 보기에도 내가 참 억울할 것 같지 않냐? 차마 말 못할 사연을 혼자 삭이고 있자니, 무언가 이상했는지 시벨리우스가 빤히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것을 모른 척 무시하며 오로지 행사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그다지 볼 만한 광경은 아니었다. 축복을 받기 위해 서로 밀치고 나가며 아우성을 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아비규환, 이 네 글자를 그대로 현장에 옮겨둔 것처럼 보였다. 복잡했던 퍼레이드가 끝나고 나자 이번엔 신전 앞을 중심으로 또 다른 행사가 벌어졌다. 마신교의 대사제 주관으로, 사람들이 각기 준비해온 헌물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다. 1년에 단 한 번 있는 특별한 날이니 만큼, 평소에 집안 형편상 무언가 바치는 것은 엄두도 못 냈던 사람들도 이때만큼은 사비를 몽땅 털어서라도 헌물을 마련하는 것 같았다. 빵과 고기, 곡식 종류를 비롯해 염소와 소 같은 음식(?) 위주의 헌물을 바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옷감이나 보석 세공품 같은 화려한 것들을 바치는 자들도 잇었다. 제단 위에 하나 둘씩 무언가가 바쳐질 때마다 대사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축복의 말을 읊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진다 싶더니, 이윽고 인파를 가르고 귀족으로 보이는 5명의 젊은 남녀가 대사제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기 똑같은 검은색 복장에 같은 모양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 상자가 유난히 낯이 익어 자세히 쳐다본 나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앗! 쟈스민 양이다!" "뭐? 어디? 어디?" "아아, 정말이네요! 헌물을 바치러 나가는 모양이군요." 웰디의 말대로 쟈스민은 경건한 표정으로 상자를 들고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지난날 그토록 지키기 위해 분투하던 서클렛이라는 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헤어진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왠지 반가운 느낌이었다. 잠시 후, 제단 앞에 닿은 쟈스민과 그녀의 일행들은 경건한 동작으로 일제히 상자를 내려놓았다. 모두가 내용물을 궁금해 하는 동안, 대사제는 빙긋 웃으며 손수 상자를 열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환인했다. 이윽고 그 안에서 푸른색의 보석이 박힌 5개의 서클렛이 나오자 군중들은 모두 환호성을 터뜨렸다. "와아아아아!" 값도 값이지만, 이 시대에서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 가지는 의마는 단순히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신성한 기운을 담은 결정! 지니고 잇는 것만으로도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을 정도로 의식적인 면에서조차 대단한 가치를 담고 있었다. 신의 보석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것을 눈앞에서 직접 본 기쁨 탓인지, 좌중의 흥분은 한층 더욱 높아졌다. 아마 이것으로 마신교의 입지는 더욱 굳건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클렛을 살피는 사제들의 얼굴엔 모두 자부심과 뿌듯함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마신의 영광을 위해 귀한 보석을 바친 다섯의 가문에 축복이 있으라! 삼 대를 넘어 앞으로도 여우언히, 그들의 앞날을 마신께서 친히 굽어 살펴주실 것이오!" "와아아아아!" 사람들은 다시 한 번 환호했다. 그 뜨거운 함성이 하늘과 온 지면을 전부 꽉 메워버린 것 같았다. 그 열광적인 반응에 기분이 들떳던 것일까? 대사제가 즉석에서 특별한 이벤트를 하나 제안했다. "이러한 기쁜 날! 마신의 영광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위대한 어머니가 될 여성들을 위한 축복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다섯 분의 처녀를 뽑아, 서클렛을 착용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오오오오!" 생각지도 못한 행사에 주위는 무척 손란스러워졌다. 붉게 홍조를 띤 여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어떻게든 눈에 띄어보려고 앴느는 여자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대사제는 평온한 표정으로 주위의 사제들에게 서클렛을 하나씩 들려주며 어울리는 여성을 찾으라고 말했다. 자주색 쿠션 위에 서클렛을 받아든 사제들은 민중 안을 돌며 하나 둘씩 적당한 여인들을 선별해서 이끌어냈다. 특멸한 자격 없이, 일단 무조건 눈에 띄는 여자들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안 보이는 곳에서 치열한 신경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5개에 불과한 서클렛에 비해 그 자리를 원하는 여자들의 숫자는 넘칠 정도로 많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저리 비켜, 이 계집애야! 여긴 내 자리야! 내가 먼저 온 거 못 봤어?" "웃기는 소리 하시네!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디 있어? 차고 들어오면 다 임자지!" "흥! 너도 저 서클렛을 노리는 모양인데! 어디 너 같은 것 따위가 감히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니? 얼굴도 못생긴 게!" "뭐야? 난 다음달에 결혼한다고! 위대한 어머니가 될 여성으로서 이보다 더 완벽한 조건이 어디 있어?" 퍽퍽~! 퍽! 쿠웅! "꺄악! 이 사람이 쓰러지면 저만 쓰러질 것이지, 왜 나까지 밀고 난리야?" "아, 누가 저 사람들 좀 말려 봐요! 앞으로 나갈 수가 없잖아!" "거기! 제발 싸우지 좀 말이욧! 네?" 그 외, 기타 등등 시끌벅적.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들 때문에 귓가가 다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소음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벌서 여럿 쓰러졌을 것이 틀림없었다. '으음, 생각보다 심한걸.' 힐끗 옆쪽을 바라보니 웰디와 그녀의 호위기사들이 하얗게 질려 잇는 것이 보였다. 잠깐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본 나는 곧 그들의 반응을 이해했다. 유니콘들은 소수 종족이라는 엘프보다 그 숫자가 현저히 적은 종족이다. 그동안 숲 한가운데서 터전을 잡고 한가롭게 살아오던 그들에게는 이렇게 수많은 군중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면서 함성을 지르는 일 자체가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서클렛 하나를 써보기 위해 여자들끼리 치고받는 장면을 목격햇으니, 얼이 빠질 만도 했다. 나름대로 활기차고 역동성 있기는 했으나, 솔직하게 말해… 많이 민망했다. 안 그래도 인간에 대해 인식이 나쁜 그들이 이것을 계기로 확 돌아서는 게 아닐까 싶었다. 뒤늦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부랴부랴 변명 비슷한 것들을 늘어놓았다. "하하하! 마, 많이 소란스럽죠? 대강 중요한 행사는 다 끝난 것 같고, 별로 볼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나온 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치인 탓인지 유니콘들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내가 얼른 일행들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였다. 휘이잉! "꺄악!" "웰디님!" 갑자스런 강풍에 웰디가 쓰고 잇던 후드가 뒤로 젖혀졌다. 그 바람에 그녀의 굽이치는 선명한 은발과 조각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 순간, 시끄럽던 주위가 일순 조용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클렛의 주인이 선택될 때마다 환호하던 사람들은 물론, 방금 전까지 치고받던 여자들마저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윽! 이걸 어째! 눈에 띄어버렸잖아!' 처음 후드가 벗겨질 때만 해도 나는 사람들이 혼란스러운 틈에 적당히 가려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단순히 그 정도의 소란으로 묻히기에는 웰디의 미모가 뛰어나도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은발에, 선명한 붉은색 눈동자가 대조적으로 어우러져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으니, 조용히 지나가기는 틀려먹었다. 혀를 찬 시벨리우스가 얼른 후드를 다시 씌웠으나, 이미 한 번 집중된 관심은 흩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도 꽉 막힌 행렬에 막혀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일행들이 서로를 보며 난감한 표정을 하는 동안, 나는 다음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어느새 서클렛을 든 마신의 사제 한 명이 지척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정확히 웰디 앞에 선 다음, 그녀에게 서클렛을 내밀며 정중하게 말했다. "레에디께 마신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잇는 기회를……." '그딴 것 필요 없어!' 카노스가 들었다면 다분히 서운해 할 생각이긴 했지만, 이때 나의 심정은 절박했다. 눈에 띄는 것은 사양이다. 그것이 아무리 내가 아니라 일행 쪽의 일이라 해도. 하지만 호의로 내민 것을 뿌리칠 수가 없었는지 웰디는 망설임 끝에 서클렛을 받아들였다. 이윽고 다시 후드가 걷혀지고, 그 이마 위에 푸른색의 보석이 장식되자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그때쯤 다른 사제들도 각기 한 명씩 처녀들을 택해 서클렛을 씌웠다. 선택받은 여자들은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모두 사제들의 손에 이끌려 재단 위에 올라섰다. 웰디 또한 재단 위로 이끌리는 것을 두 호위기사가 막아보려 했지만, 워낙 주위의 시선이 뜨거웠기에 어쩔 수 없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나란히 서 잇는 여자들 중에 웰디의 모습이 가장 눈에 띈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자! 모두 이곳에 선 아름다운 여인들을 축복해주십시오! 마신의 영광이 장차 한 사람의 아내이자, 어머니가 될 그녀들에게 임하시기를!" "와아아아아!" 처음에는 마냥 어리둥절하던 웰디는 재단 아래에서 열광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는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에선 처음 참가해본 축제에 순수하게 즐거워하고 있는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정신없고 시끄럽기만 해도 이런 경험이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를 보낸 이후 마냥 안절부절못하던 호위기사들도 서로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들도 하나뿐인 아가씨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내심 만족스러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창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였다. "어? 저게 뭐지?" "……?" 누군가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우연치 않게 내 귀에 들어왔다. 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웬 커다란 비행 물체가 조금 높은 하늘 위를 여유롭게 선회하고 잇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커다란 새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와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눈에 띄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가죽으로 된 2장의 날개, 그리고 뾰족한 부리와 도마뱀을 닯은 눈동자. 그것을 알아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이번?" 실물을 확인하고도 나는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와이번이라니! 지능을 가진 비행형 상급 몬스터가 아닌가! '왜 저런 게 여기에 잇는 거야?' 와이번은 주 서식지가 까마득한 산맥의 절벽 위이기에 도시 쪽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한 종자였다. 꽤나 공격력이 강한 몬스터이기도 해서 숙련된 용병들조차 다루기 까다로은 상대다. 그런 놈이 하필 민간인들이 사는 장소에 나타난 것이다. 한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처음엔 단 하나만이 보였는데, 어느 순간 2마리가 된다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십수 마리로 불어나 저물어가는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주위가 갑자기 캄캄해지자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하나 둘씩 위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그때,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엎드려, 엘!" "……!" 삐이이이이이- 콰아앙! "으아아아악!" 가느다란 휘파람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주위가 온통 진동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완력에 끌어당겨진 나는 무언가에 머리가 덮이고서야 하늘에서부터 불벼락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좀처럼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바로 와이번들이 인간들을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리를 가득 메운 불덩어리는 위아래로 저억 벌린 와이번의 입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쿠우우우! 콰앙! 콰아앙! "사, 사람 살려!" "아아악!" 방금 전까지 축제의 열기에 들떴던 공간은 이제 생각지도 못한 재앙에 놀란 비명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도망치다 말고 불덩이에 맞아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마치 지옥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그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잠시 후, 누군가 나를 강하게 감싸 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들어 보니 엘뤼엔이 로브의 천으로 내 머리를 둘러 덮고 잇었다. 아마 상황이 급해 자신의 몸으로 불덩이를 막아준 것 같았다. 다행이 물로 된 그의 몸은 불덩이에 맞아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했다. "아, 아버지?" "정신 들었냐? 허둥거리지 마라. 지금부터 여길 빠른 시간 내에 벗어나야 할 것 같으니까." "자, 잠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시벨들은?" "우리는 무사해, 엘!" 당황해서 주의를 둘러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시벨이 다른 일행들과 함께 서 잇었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는 창백해진 안색의 웰디도 함께였다. 공격을 당해 혼란해지는 틈을 타 호위기사들이 달려가 무사히 구출해온 것 같았다.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에 안심하던 나는 무심코 넘어갈 뻔한 사실을 떠올리고 황급히 물었다. "아버지! 방금 와이번들이 공격한 거 맞지?" "봤으면서 뭘 묻는 거냐?" "으으~ 진짜야? 왜 와이번들이 나타난 거야? 여긴 몬스터 출몰 지역도 아니잖아?" 갑자기 나타난 십수 마리의 와이번들은 축제의 현장을 순식간에 초토화시켰다. 미처 기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몰려 있던 군중들 대부분이 피하지 못하고 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거나 죽었다. 그나마 그것이 오래 가지 않은 것은 마차 안에서 뛰어나온 마신의 사제들 덕분이었다. 주 특기가 저주와 전투 계열인 사제들답게, 그들은 와이번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이용해 놈들을 격추시키기 시작했다. "마신의 권능으로 명하노니!" "네 뿌리 끝까지 저주의 인을 얻으리라!" 콰앙! 콰지지직! 삐이이이익- "키에에에엑!" 사제들이 모든 와이번들을 다 상대할 수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간혹 땅에 내려오는 놈들은 신전의 기사들이 정면으로 검을 들이대 막았다. "이 틈에 어서 도망치시오!" "서두르시오!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시제들의 외침에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혼신의 힘을 다해 도망쳤다. 운이 나빠 불벼락을 정면으로 맞은 자들 외에는 대부분 무사히 도망치는 것 같았다. 그것을 본 나는 사제들을 도우려고 했지만, 엘뤼엔의 반대가 강경했기에 뜻을 이룰 수없었다. "아버지! 우리들도 같이 도와서 없애자!" "내버려둬, 여기 인간들이 알아서 처리할 거다." "하지만!" "안 돼. 시끄럽게 굴지 말고 따라와. 일단 여기를 피한다." 딱딱하게 대꾸한 그는 내 말을 더 들으려 하지도 않고 곧장 팔을 잡아끌었다. 워낙 강하게 붙잡고 잇었기에 뿌리치기도 힘들 정도였다. 나는 별수 없이 일행드로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13-11. 최후의 수단 (1) 참혹했던 순간과 달리 현장은 빠른 속도로 수습되었다. 마신의 사제들이 가진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던 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주가 보낸 도시 경비대가 속속들이 도착해 와이번을 몰아내는 것에 합세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건이 벌어진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공격당한 현장은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진 사상자가 생각보다 많았기 때문에 주위의 기운은 온통 무겁게 늘어져 있었다. 도시 광장에는 그날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얇은 천에 덮인 채로 뉘여 있었다. 귀족이나 사제들 중에서도 사망자가 나왔지만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민간인들이었다. 그날 축제로 인해 도합 3백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에 나왔고, 그중 50여 명이 사망, 1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신원이 확인된 시체들은 곧바로 가족들에게 돌아갔으나, 개중엔 얼굴을 아예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잿더미가 된 자들도 있었다. 도시 전체에 통곡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리첸에 머무는 내내 그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 역시 편치 않았다. 그때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하고 그냥 피했다는 사실이 죄책감으로 남았다. 하지만 나를 말렸던 엘뤼엔을 탓할 수도 없었다. 그 상황에서 나를 눈에 띄지 않게 보호하려고 한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국에서의 사건 이후로 나는 황제로부터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다. 그렇지 않아도 정령사는 희귀한 직업. 만약 내가 이번 일에 나섰다면 틀림없이 알아보는 이들이 나타났을 것이고, 분명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 당시 엘뤼엔이 내린 판단은 옳았다. 물론 내 귀찮음과 사람의 목숨이 같은 선에서 처리될 수는 없겠지만, 양아버지이기 이젠에 내 계약자이기도 한 그가 내 쪽의 입장을 더 최우선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그를 원망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혼자 뒤늦은 자책감을 느끼며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수 밖에.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이 도시를 뜨고 싶다는 생각만이 간절했지만, 당분간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적어도 와이번이 습격한 이유를 알아낸 다음에 떠나도 늦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머, 이걸 어쩌죠?" "왜 그래요, 웰디?" 언제라도 떠날 수 있도록 짐을 챙기는 도중에 웰디가 무척 안타깝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둥절하게 돌아보며 물으니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손에 들려진 물건을 확인한 순간, 나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것은 바로 마신의 헌물로 바쳐졌던 서클렛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왜 여기에?" "실은 그때 너무 정신이 없어서 돌려주는 걸 잊고 도망쳤어요. 이일을 어쩌지요? 그 사람들에게는 무척 소중한 걸 텐데." 금방 울상이 된 웰디에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위안을 건넸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혼란이 수습되고 나면 찾는 사람이 나오겠죠.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다시 돌려주면 아무런 일도 없을 겁니다. 그때까진 웰디 양이 간직하고 계세요." "그래도 될까요? 지금 돌려주면……." "지금은 다들 바빠서 여유가 없을 거예요. 어차피 앞으로 며칠 더 있다가 떠날 예정이니까 그 전에만 건네주면 될 겁니다." 이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웰디와 달리 나는 속으로 착잡한 심정을 느꼈다. 하필 서클렛이 다시 돌아올 줄이야.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우연에 우연이 겹친 것뿐이지만, 어쩐지 불안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 같아 영 마음이 불편했다. '뭐, 내일이라도 가져다주면 되겠지.' 나는 애써 그렇게 자위하며 불길한 상상을 털어버렸다. 그것이 아니라도 지금은 충분히 암울한 공기에 질식할 것 같았으니까. 바깥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그중에서 무엇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축제 이후로 달라진 엘뤼엔의 분위기였다. 전에도 다정하고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으나, 와이번의 습격을 당한 이후로 그는 어쩐지 손을 대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단순히 신경질적인 것이 아니라, 뭔가에 크게 화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 때문에 나는 물론이고, 시벨리우스의 일행들까지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다. 꼭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과 한방에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상태가 하루를 넘어 이틀째가 되고 나니 슬슬 그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차가운 냉기를 풀풀 흘리는 그에게 말을 걸기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겨우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저기… 아버지, 혹시 나한테 화난 거 있어?" "…무슨 헛소리냐?" "아니, 어제부터 얼굴이 굳어져 있어서. 나 때문인가 하고……." 내가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는 얼굴을 찌푸린 상태로 잠시 빤히 시선을 주었다. 그리곤 혀를 살짝 차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리 듯이 대답했다. "뭐, 아주 관계가 없다고는 못하겠군." "헉! 정말 나 때문이야? 왜?" 그야말로 황당한 심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요 근래 그가 화낼 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었다. 와이번의 습격 때 사람들을 도와 주려고 했을 때도 그가 만류해서 순순히 그만두지 않았던가. 누명을 쓴 것처럼 억울해 하는 내게 그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관계가 없지 않다고는 했지, 너 때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게 그 말이지! 어쨌든 내가 문제라는 거잖아! 대체 뭔데? 내가 뭘 어쨌다고?" "하아! 글쎄 굳이 말하자면, 쓸데없는 일에 이리저리 휘말리는 점이랄까."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주변 관리가 엉망이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군." "……?"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칠칠치 못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고, 뭔가 주위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일까? 내가 좀처럼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다. 그저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 있는 것뿐이니까." "에? 내 주위의 사람 중에서? 그게 누군데?" "있다, 그런 녀석이. 되도록 남이 하는 일엔 상관하지 않는 주의지만, 이번은 조금 기분이 나쁘군." "이번이라니?" "어제 일 말이다." "어제… 라면, 와이번이 습격한 거? 그것과 관계가 있다고?" 무심코 묻던 순간, 왠지 모를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서 얼굴이 저절로 찡그러졌다. 어쩐지 전에도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게 언제였더라?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보던 나는 퍼뜩 누군가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잠깐만, 아버지! 서, 설마 트로웰? 와이번들을 보낸 게 트로웰이었어?" 설마 하며 물으면서도 나는 그가 부정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엘뤼엔은 냉정할 정도로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계획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더군. 뭐, 그렇게 쉽게 물러설 녀석이 아니긴 하지만. 요 근래 낌새가 수상하다 했더니 전쟁을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럼 그게 벌써 시자된 거야?" "글쎄, 시기적으로 따지자면 아직은 조금 이르다. 아마 다른 목적이겠지." "다른 목적?" 전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굳이 이런 소란을 피울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막상 결전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졌다. 내가 정말 그를 막을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질 않았다. 거리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던 사람들의 모습을 본 직후라 더욱 그런걸지도 모른다. 그 끔찍한 일이 다른 자도 아니고 트로웰에 의해 이루어졌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문제는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 뒤, 이어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에 나는 한순간 머리속을 새하얗게 비우고 말았다. "어제 나타난 와이번들은 널 노린 거다." "…뭐?" "네가 있는 장소 따윈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놈이니까. 트로웰 그 녀석, 내 경고 때문에 자기 스스로 손을 쓸 수가 없으니 간접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 같군." "자, 잠깐만! 트로웰이 왜… 나를?" "글쎄……. 소란을 틈타 네가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한결 마음의 부담 없이 일을 진행시킬 수 잇을 거라고 생각한 거겠지. 미치더니 생각의 틀이 좁아져버린 건가? 그렇게 한심한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감이라고 할 수밖에." "……."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잠시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엘뤼엔이 내뱉은 말들이 몽땅 단어별로 끊어져서 머릿속을 윙윙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며 천천히 자리에 주저앉았다.온몸의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혼란에 혼란이 거듭되고,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 한참만에야 나는 간신히 트로웰이 나를 해치려 한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심장 한구석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처음이었다. 그가 이렇게 낯설게 느껴진 적은. 내 기억 속의 트로웰은 이제 더 이상 전처럼 웃으며 나를 반기던 모습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떤 얼굴로 웃었는지, 어떤 식으로 나를 대했는지조차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눈앞에 그가 있었다면 서슴없이 누구냐고 물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너무 자만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에게 있어 내 존재를 그리 가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전의 내가 인정을 받은 것은 단지 정령왕이라서일지도 모른다는 것. 이전에도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왔던 생각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음을 괴롭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표정이 어둡군."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조금 놀라서……." "흠, 하긴 넌 유독 그를 따랐었지. 어쨌든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 혼란스러운 심정은 이해한다만, 조만간 또 공격이 있을지 모르니까 당분간 단독 행동은 삼가는 게 족을 거다. 죽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 엘뤼엔은 그 말 한마디만 던져놓고 방을 나섰다. 아마도 내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함인 것 같았다. 그래봤자 방금 전에 들은 충격적인 이야기를 반복해서 되새기는 것밖에 할 수 없었지만. "트로웰이… 나를…." 늘 내게서 거리를 두고 밀어내려고 했지만 한 번도 그게 진심일 거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수시로 죽일 거라는 말을 꺼내도 본심은 아닐 것이라 믿었다. 내가 그렇게 미웠던 걸까? 이런 식으로 소동을 일으켜야 했을 정도로? 그날 죽은 사람들이 다 내 목숨을 대신한 것이라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목까지 차오른 신음을 삼켰다. 그러자 쯧쯧 혀를 차는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뭘 하는 거야, 너?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얼이 빠져서는.> "…윽!" 한심하다는 듯 물어온 것은 바로 라피스였다. 안 그래도 심란한 참에 기름을 붓는가 싶어 나는 울컥해서 소리쳤다. "별게 아니라니! 날 죽이려고 했다잖아! 엘뤼엔이 한 말 못 들었어, 라피스?" <들었어. 그게 뭐?> "뭐라니! 남의 일이라고 상관없다는 거야?" 서운한 마음에 울컥 눈물이 치솟으려 했다. 그러자 퉁명스러운 라피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누가 그렇데? 그냥 새삼스러울 게 없었을 뿐이야. 트로웰 녀석이 그런 성격인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이제 와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하, 하지만!" <하기야 그간 녀석의 상냥한 모습만 봤던 너로선 적응이 가질 않겠지. 이해해. 놈의 이중성격이야 자타가 인정하는 바니까.> "이, 이중성격?" <그래! 이제야 좀 진실이 보이냐? 아마 너만이 아니라 전대의 미네르바도 모르고 잇을 거다. 녀석이 그렇게 안면을 바꾸고 대하는 상대는 너희 둘뿐이었으니까. 정말 그놈이 내숭떠는 모습을 볼 때 마다 어찌나 닭살이던지!> "……." 한번 말문이 트이자 그동안 쌓아뒀던 감정이 죄다 폭발했는지, 라피스는 그 뒤로 쉴 새 없이 트로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떠들었다. 하도 말이 빨라서 내용의 절반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주로 그가 타인에게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또 얼마나 사악한 성격인지에 대한 폭로들이었다. 그동안 티를 내지는 않았어도 꽤나 이런 순간이 오기만을 벼려왔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한참 동안 떠들어대고 나서야 한결 시원해졌다는 듯, 무척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충 알았냐? 아무튼 그런 녀석이니까 너도 그냥 그러려니 해. 그 때문에 상처 받아봤자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역시 그럴까." <당연하지! 게다가 그놈은 지금 정상이 아니잖아. 제대로 된 판단 능력도 잃어버린 놈에게 뭘 더 바라냐? 아무튼 혜안이란 게 말짱 소용없다니까. 쳇! 그런 건 나나 줄 것이지.> "하지만… 난 여전히 가족이라고 생각했어. 지금은 기억에 없다고 해도, 인연의 끈이 강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내 진심을 꼭 알아봐줄 거라고. 내가… 잘못 생각한 걸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아니, 가족이라는 기준이 뭘까 싶어서. 그저 같은 피, 같은 능력을 갖춘 존재면 가족이 될 수 있는 걸까? 그래야만 하는 거야?" <뭐야, 너 설마… 네가 정령왕이기 때문에 트로웰 녀석이 가족으로 받아줬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그렇다는 대답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나는 간신히 눌러 참았다. 지금 여기서 내가 인정하면 정말로 현실이 돼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피스는 이미 내가 무슨 대답을 하려는지 짐작했다는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너란 녀석은. 내가 아까 한 말 뭐로 들었냐? 트로웰이 사약한 놈이라고 누가 강조했던 것 같다만? "……? 그게 뭐?" <으이구, 답답아! 그놈이 같은 종족이라는 이유로 가족으로 인정할 놈이었으면, 내가 이렇게 열 받지도 않았어. 너도 지금 보면 알것 아니야! 트로웰이나 다른 정령왕들 사이가 가족처럼 보이냐? 어?> 흥분해서 묻는 소리에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시대의 정령왕들은 가족이라는 말로 불리기에는 상당히 어폐가 있었다. 잘 봐줘야 같은 전선에서 일하는 동료 정도랄까? <그것 봐! 네가 유독 특별했던 거라고! 아무튼 저건 지가 단순하니까 다른 놈들도 죄다 단순하게 정의를 내리는 줄 안단 말이야. 대체 어디까지 둔해질래?> "그, 그럼 왜 지금은 안 되는데? 종족의 문제가 아니면 난 예전이랑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 <그것도 말했잖아! 놈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미친놈 눈에 뭐가 제대로 들어오겠냐? 그리고 내가 보기엔 트로웰 녀석, 널 대단히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여전한 것 같다. 저렇게 죽일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가 뭔가 불안해 한다는 뜻 아니겠어?> "뭘 불안해 해?" <네 설득에 흔들리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 자식, 어른스러운 척하면서 은근히 속이 좁거든. 아니다. 어쩌면 저런 식으로 더 관심을 끌려고 하는 걸지도 몰라. 맞아! 확실해! 말리러 와주길 바라는 게 틀림없어! 이 유치한 자식!> 라피스는 씩씩거리면서 투덜댔지만, 사실 그것은 내가 내심 바라고 있던 일이었다. 차라리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안심이 되었으니까. 적어도 그가 나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한 가닥 기대를 가질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때 문득 언젠가 트로웰과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악신과의 결전을 앞두던 당시였던가? 시벨리우스와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던 트로웰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생긋 웃으며 꺼낸 말. '난 네가 정말 좋아, 엘." "…뭐?' '아니, 그냥 그렇다고. 후훗, 어쨌던 '앞으로' 잘 부탁해.' 혹시 그는 과거를 기억해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때는 마냥 어리둥절하기 만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조차 잊어버릴 만큼 강한 망각이지만, 혜안을 가진 그라면 단편적으로나마 떠올렸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그가 말한 '앞으로' 라는 것은 이곳에서 벌어질 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리라. 그에게는 과거더라도 내게는 미래의 일이니까. 다시 말해 이 시대의 트로웰을 잘 부탁한다는 소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와이번의 일은 진심이 아니라고 믿어도 되겠지?' 휴우!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내쉬어졌다. 행여 그게 아니라도 미래의 그가 내 가족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번 일은 단지 지나가는 과거일 뿐. 결코 결과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굳어졌던 얼굴 근육이 다시금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자 그 미세한 반응을 귀신같이 눈치 챈 라피스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쳇! 내가 결국 그 자식 편으로 돌아설 줄 알았어! 그럴 거면 대체 뭐 하러 땅을 판 거냐? 입 아프게 떠들어댄 나만 멍청이지!> "어차피 너도 트로웰을 변호했던 거였으면서, 뭘." <누가 그딴 녀석을!> "…근데 라피스, 아까부터 궁금해서 그러는데, 트로웰은 네 대부잖아. 대부한테 그 자식이라느니 녀석이라느니 그렇게 불러도 돼?" <헹! 지가 어쩔 거야? 난 이미 죽었는데! 또 죽일 수 있을 테면 죽여보라지!> 그래도 죽을 죄를 졌다고는 생각하는 모양이지? 고집스럽게 내뱉는 말투에 잔뜩 긴장한 기색이 느껴지는 것 같아 나는 피식거리고 웃었다. 갱각해보면 녀석은 유난히 트로웰에게 약했다. 삐딱하게 대꾸하다가도 그가 대부의 이름으로 다가서면 늘 꼼짝 못하지 않았던가. 험담하는 척하면서 결국은 그의 입장을 대변해준 것만 해도 그렇다. 정말 싫어하는 거였다면 애초에 내가 어떤 오해를 하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하여튼 둘 다 솔직하지 않다니까.' 하긴, 대부라고 하면 라피스에게는 또 다른 아버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이니까. 어쩌면 꽤나 의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피스가 죽었을 때 가장 슬퍼한 것은 내가 아니라 트로웰이 아니었을까? 갑자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스는 잘 지내고 있을까? 지금쯤 마계에 돌아가 있겠지?" 대부라는 말 때문인지 갑자기 검은 머리카락의 귀여운 아이가 떠올랐다. 마족 아스모델. 내가 처음으로 대부가 된 아이. 벌써 청년이 된지 오래였지만, 워낙 첫인상이 강렬했던 탓인지 여전히 녀석은 내게 작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을 그렇게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스를 떠올린 걸 후회했다.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자 연결된 쇠사슬 고리처럼, 자동적으로 이사나와 알리사의 모습도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밖에 새침데기 이프리트이나 마족 기사 데르온, 카터스 제국의 황태자인 라온휘젤, 샴페인 용병단의 사람들, 심지어 수다쟁이 정령검 파이어 버스터까지. 이전에 어울렸던 모든 기억들이 한꺼번에 선명히 되살아났다.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온전히 받아주는 아버지 엘뤼엔과 트로웰의 모습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절대 바라지 않던 상황이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최대한 이곳에 오기 전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전의 일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기억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적어도 라피스를 되찾기 전까지는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되었으니까. 그리고 녀석을 찾은 지금은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싶지 않아서 참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외면해왔건만, 한 번 그들의 모습이 생각나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이 무색할 만큼 봇몰이 터지듯 수많은 추억들이 머리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꽉 악물었다. "…어떡하지, 라피스?" <뭐야, 또?> 시큰둥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에는 더할 수 없는 안정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아, 다행이다. 그나마 너라도 내 옆에 있어서. 꽉 막혀 있던 숨을 겨우 트였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을 얼른 굳게 감았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미지근한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울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끝끝내 흐느끼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면 정말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모두가 그리워서… 죽을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부질없는 바람임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13-12. 최후의 수단 (2) 세상에는 '있어야 할 장소'라는 것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정해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되어 있는 고유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사는 곳과 엘프가 사는 곳, 그 외 기타 여러 종족들의 영역이 다른 것이 바로 그래서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몬스터 또한 지정된 장소가 존재한다. 주로 인간들이 사는 영역에서 멀리 떨어진 산맥이나 숲 안쪽 같은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들이 그곳이다. 몬스터들이 지정된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 극히 드물다. 그들은 그 안에서 적당한 먹이사슬을 유지하며 생태계를 유지해나가도록 배웠다. 몬스터는 몬스터끼리, 인간들은 인간들끼리. 바로 이러한 상태가 지켜져 왔기에 오늘날까지 아크아돈이 평화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얼마 전에 인간이 사는 곳, 그것도 도시 한복판에 와이번때가 나타난 일은 대륙 전체를 발칵 뒤집히게 만들었다. 이제껏 상급 몬스터가 아무런 연고 없이 민간인들이 사는 지역을 덮친 적은 없었으니까. 게다가 공격을 당한 도시는 와이번의 서식지와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 원래대로라면 와이번들이 날아오다가도 지쳐서 다시 돌아가야 할 만큼 먼 거리에 있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와이번들이 누군가에 의해 조종을 받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간혹 환술사라 불리는 능력자 중에서 몬스터를 포획하여 길들일 수 있는 자들이 있었기에 그로 인한 소행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만큼의 많은 상급 몬스터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존재는 마법의 생물이라 불리는 드래곤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생활에 참견 안 하기로 유명한 종족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었다. 온 대륙이 이 문제로 시끌시끌한데, 정령계라고 그에 대한 일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래저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프리트는 소식을 듣자마자 기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왠 자다가 날벼락이란 말인가! 세상 모든 종족들이 몰라도 그는 알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이르긴 하지만, 이 시기에 그런 미친 짓을 감행할 존재는 단 하나빡에 없다는 것을. "트로웨엘! 이 자식이 진짜!" 씩씩거리면서 괴성을 토한 이프리트는 그 길로 곧장 트로웰을 찾았다. 다행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척이 읽혀졌기에 그를 찾아 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벌컥! 쿠웅! "야! 나랑 애기 좀 해!" 트로웰이 있는 곳은 습격이 벌어졌다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런 엄청난 일을 벌려놓고도 그는 어느 한적한 저택의 홀에 앉아 유유히 창밖의 경관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프리트가 뛰어 들어오자 감상을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그 모습에 더욱 기가 막힌 이프리트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뭐가?" "도시에다 와이번 때를 풀었다며! 그게 정말이야?" "알면서 묻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는데." "트로웰!" 미쳤다, 미쳤다 했지만 설말 정말로 공격을 시도할 줄이야! 답답함에 가슴이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이제 이프리트의 말투는 거의 하소연에 가까워져 있었다. "오십 명이나 죽었다! 오십 명! 너 때문에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생명들이 그렇게나 많이 죽었단 말이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단 말이야?" "흐음,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야 하는 건가 보지?" "뭐야?" "미안하지만 이프리트, 너도 알다시피 앞으로 내가 죽일 녀석들은 그보다 더 많아서 말이야. 그 정도 사소한 숫자에 일일이 신경쓰고 싶지는 않아." "하! 그러셔? 그래, 그건 그렇다 치자. 너 전에 뭐라고 그랬어? 개시일은 일주일 후라고 그랬지? 근데 지금이 며칠이냐? 그때로부터 사 일밖에 안 지났다! 설마 날짜 감각마저 잃어버린 거냐? 잘나신 땅의 정령왕께서?" 사실 이프리트는 이 부분이 제일 억울했다. 일주일 후라는 그 말만 철석같이 믿고, 어떻게든 그 사이에 수습하기 위해 분주해 하던 것이 말짱 헛수고가 된 셈이 아닌가. 자신이 트로웰에게 현혹된 종족 마을을 돌아다니며 설득하고 있는 동안, 정작 녀석은 시기가 되기도 전에 사고 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니! 혹시 일부러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죽이려면 아예 한 날 한시에 똑같이 쓸어버릴 것이지, 이딴 식으로 미리 일을 치르는 건 또 뭔데? 고이 죽이는 것도 싫다 이거야? 인간들이 언제 다가올지 모를 죽음의 공포 속에 몸부림치는 꼴을 보고 싶어? 그래? 그런 거냐?" 힘겹게 묻는 질문과 달리 트로웰의 대답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평온했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상관할 바 없젆아?" "트로웰!"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네 말이 맞아, 이프리트. 난 그들이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망가져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그냥 죽으면 재미없잖아?" 아무리 미쳤다지만 명백히 도를 넘긴 행동이었다. 이놈에게는 '적당히'라는 것이 없는 건가? 경악한 이프리트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오히려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더 알려줄까? 사실 이번 건 엘을 노린 거였어." "엘? 그게 누구……! 잠깐만! 혹시 그 '엘'? 설마 너… 엘퀴네스의 계약자인 꼬맹이를 말하는 건 아니지?" "그 엘 맞아." "으아악! 너 진짜 미쳤어? 아주 모르는 녀석도 아니고, 너도 꽤 마음에 들어 하던 놈이었잖아! 저, 정말 그 녀석을 노리고 보낸 거야? 정말이지?"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 할 생각 없어." "…제기랄! 그래서 엘은? 엘은 어떻게 됐는데!" 설마 죽은 걸까? 인간임에도 어딘지 친근한 느낌이 들던 소년이었다. 정령에 대한 뛰어난 친화력도 그렇고, 성격이 유순한 데다 사교성이 좋아서 이프리트 또한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었다. 그런 그가 죽다니, 그런 상황은 믿을 수도 없을뿐더러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조마조마하던 이프리트는 다음 순간에 이어지는 트로웰의 대답에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패했어. 생각보다 엘퀴네스의 비호가 강하더군. 어차피 혼자였더라도 그 정도 숫자의 와이번에 어떻게 될 거란 생각은 안 하긴 했지만." "하아~ 십년감수했네. 무지 놀랐잖아, 이놈아! 내가 제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명계로 떠난다면 다 네놈 탓이다!" "그런 걸로 충격을 받는 네가 문제인 거라고 보는데." "그럼 다른 인간도 아니고 엘을 죽인다는데 충격 안 받게 생겼냐? 너! 네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만약 그가 정말로 죽었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기분에 이프리트는 입술을 푸들푸들 떨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연고가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트로웰이 그간 제법 친해 보였던 엘을 해칠 마음까지 먹었다면, 다른 인간들은 볼 것도 없다. 그가 원하는 대로 아크아돈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이 사라지게 될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정말 이 막무가네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단 말이야?' 아니, 하나 있기는 하다. 지금 바람의 영역에 봉인되어 잠들어 있는 미네르바. 그라면 트로웰의 마음을 반드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 모든 일이 벌어진 계기 역시 바로 그였으니까. 생각 같아서는 봉인을 억지로 풀어서라도 미네르바를 깨우고 싶었다. 물론 그랬다간 진정됐던 바람의 폭주까지 다시 진행되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꼴밖에 안 되겠지만. "후우……. 제발 나 좀 살려주라. 너나 다른 놈들은 몰라도 난 인간들이 있는 게 좋단 말이다. 온순한 엘프나 성질 더러운 드워프, 잘난척 하기 바쁜 드래곤들로만 가득 찬 세상 따윈 생각도 하기 싫다고! 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 "그럼 재량껏 막아봐. 상관하지 않을 거니까." "죽이는 것보다 살리는 게 더 어렵다는 거 몰라?" "그럼 그만두면 되겠네." "하! 결국 끝까지 굽히진 않겠다 이거지?" 원망스럽게 쏘아붙이는 말에 트로웰은 느긋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을 뿐이다. 그에 또 한 번 분통이 터진 이프리트는 두고 보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박차고 돌아나왔다. 트로웰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매번 확인할 때마다 속이 편치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미네르바에 대한 그의 집착에 가까운 감정도 알고 있었고, 인간을 중오하는 마음 또한 충분히 알았다. 그렇기에 최대한 그의 입장을 이해해주려 했었다. 지금은 저래도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 믿으며. 그런데 이젠 그냥 놔두기엔 너무 위험해져버렸다. 정령은 세상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면, 더 이상 이 땅은 평온히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그 간단한 진리 조차 잊어버린 트로웰에게,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생기지 않았다. '누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둘 줄 알고?' 입술을 악문 이프리트는 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지금 그가 향하는 곳은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가 있는 곳이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보류해두려 했던, 마지막 방법을 써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한편, 이프리트가 떠나고 다시금 혼자 남은 트로웰은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잇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집스러웠던 표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짙은 슬픔과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새삼 이프리트의 말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 아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비난을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다. 지금쯤 어떤 반응들이 나올 것인지는 이미 훨씬 이전부터 예상하고 있었다. 이제 와 후회스러울 일도, 돌이켜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끝까지 아무렇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마음이 지금 너무도 아팠다. 찌르는 듯한 통증에 그대로 의식을 잃어버리고 싶을 만큼. 이유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 고통이 시작된 것은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으니까. 엘이라는 이름의, 누구보다 자신에게 친절했던 소년을 위협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상관없어. 이제 다 됐으니까."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벌였던 일은 아니었다. 고작 20마리도 안되는 와이번으로 상대하기엔 엘이란 존재는 강해도 너무 강했다. 소드마스터이자 정령왕의 계약자. 그 이름이 가진 의미는 결코 허투로 볼 것이 아니다. 아마 드래곤을 보냈다 하더라도 승산을 판가름하기 어려웠으리라. 그런데도 굳이 이번의 소동을 일으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그의 믿음을 배신하기 위해서. 여전히 자신을 믿고 있을 그에게 이제 그만 정신을 차리라는 의미의 경고이기도 했다. 아무리 마음 착한 그라도 목숨을 위협 당한다는 사실을 알면 쉽게 웃으며 넘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에 따른 충격으로 그가 자신을 미워하면 미워할수록 좋았다. 내친김에 아예 엘퀴네스를 선동하여 자신을 소멸하고자 해도 상관없다. 그것 또한 바라는 바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픈 것인지. 미워하길 바라면서도 막상 그가 자신을 정말로 외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의지하고 있던 세계가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겁쟁이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그래봤자 이미 늦었지만.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는 트로웰은 피식, 자조적인 미소를 흘렸다. 아마 지금쯤 이프리트가 그들 일행을 찾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로서 막다른 한계에 닿았음을 깨달았을 그가 궁지 속에서 내릴 수 잇는 결정은 오직 하나였다. 그 언젠가도 경고했던 말처럼, 일이 커지기 전에, 그래서 정말로 이 땅에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그 모든 일의 주범인 트로웰, 자신을 봉인시키는 것. 정령왕을 봉인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힘을 요한다. 같은 정령왕이라도 이프리트 혼자만의 힘으로는 완전히 봉인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엘퀴네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엘퀴네스는 본래 모든 일에 무심한 성격이지만, 훗날 귀찮아질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제안에 동의할 서이다. 문제는 그 상황에서 엘이 제동을 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진한 그는 아직도 자신이 설득될 수 있을 것이라 믿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자고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엘에게 약한 엘퀴네스라면 그 말에 흔들릴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이제 정말로 늦어버린다. 그래서 일부러 엘을 화나게 할 구실을 만든 것이다. 그가 온전히 자신을 버릴 수 있도록. "막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 놓치지 않는 게 좋아, 엘. 내가 마냥 느긋하게 있는 건 아니거든. 설령 되돌릴 수 있는 순간이 주어진다고 해도, 난 끝까지 악역으로 남는 쪽을 택하겠어." 후회하지 않는다. 그만두지도 않을 것이다. 포기하느니 차라리 강제로 봉인되는 편이 나았다. 그럼 적어도 이 마음을 접지 않아도 되니까. 미네르바에게 건넨 맹세를 어기는 것은 아닐 테니까. 이것이 자신이 내보일 수 잇는 최후의 양심이었다. '그쯤이면 해피 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미네르바?' 트로웰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잠들어 있을 자신의 연인이 갑자기 무척 보고 싶어졌다. 13-13. 최후의 수단 (3) 몬스터의 침공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것은 바로 마신교의 신전이었다. 그들 주최로 벌어진 축제였던 데다, 하필 고위급의 귀족과 사제들을 동반한 퍼레이드 도중이었기에 그로 인한 책임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끔직한 사태를 미리 예견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토록 믿었던 마신의 보호가 없었다는 사실은 일반민중은 물론 카노스의 신도였던 자들마저 그들에게서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나마 사제들의 활약으로 몬스터를 물리쳤기에 대놓고 비난하는 무리는 없었지만, 분위기가 흉흉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이런 와중에도 신전은 처음 계획되어 있던 교리 수업을 원래대로 진행할 계획을 밝혔다. 이번 일로 인해 신전의 위신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었으나, 1년에 단 한 번 있는 일정을 위해 먼 곳에서까지 온 손님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대로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쓰였는지, 곧 희생자를 위한 대대적인 추모식을 연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그리고 그 전에 새로운 일정을 정하고 도시를 떠나려는 우리 일행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바로 정령계로 돌아간 이후(정확히는 역소환이었지만). 지금까지 소식을 알 수가 없었떤 이프리트 였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든 그는 내가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다짜고짜 화를 내며 알 수 없는 말을 소리쳤다. "그 자식은 미쳤어!" "…에? 그게 무슨 소리예요?" "미쳤다고! 미쳤단 말이다!" "으음, 확실히 정상으로는 안 보이십니다만." "우씨! 내가 아니라! 그 녀석 말이야!" 정작 중요한 주어를 빼먹고 말하면 무슨 수로 알아들으라는 건지. 답답하는 듯 가슴을 쿵쿵 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그저 얼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진정 좀 해봐요.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원……." "나라고 이렇고 싶겠냐? 하아, 내가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살았나 보다.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꼴을 보는 거겠지." 확실히 9천 세면 적게 산 나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오래 산 엘뤼엔을 앞에 두고 한탄할 만한 내용은 아니지 않을까. 신경 쓰여서 힐끗 옆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이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녀석이 오래 살았다는 말을 운운하니,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 "뭐야? 아무리 그래도 갈 때 다 된 늙은이하고는 입장이 다르지!" "…오랜만에 보더니 겁을 상실한 모양이군." "헉! 그, 그게 아니고!" 엘뤼엔의 눈빛이 한순간에 달라지자, 이프리트는 기겁을 하며 두 손을 내저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이라도 일단 내뱉고 보는 버릇은 여전한 것 같았다. '그 갈때 다 된 늙은이보다 자신이 훨씬 더 먼저 명계로 떠단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겠지?' 속으로 피식 웃던 나는 문득 찌르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시벨리우스와 웰디 일행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엘… 저분은?" "아참! 내 정신 좀 봐. 다들 인사하세요. 이쪽은 이프리트라고 합니다." "네? 이, 이프리트?" "설마…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 말입니까?" 의외의 정체에 놀란 듯, 유니콘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평온한 것은 내 전적(?)을 알고 있는 시벨리우스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 맞아요. 아버지의 형제이니 저한테는 삼촌뻘이랄까요?" "누가 이 녀석의 형제라는 거냐!" "누가 이딴 녀석과 형제라는 거야!" 사이가 나쁜 건지, 좋은 건지. 이런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척척 호흡이 맞는 그들이었다. 둘 다 곧 죽어도 형제로 승화할 수는 없다는 강렬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의 '삼촌'이라는 발언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또한 똑같았다. 그것에 남몰래 살짝 감동을 느끼며 나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같은 정령왕인데 당연히 가족이죠." "흥! 차라리 정령왕을 때려치우고 말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뭐야? 쌓인 감정은 내가 더 많다고!" "나 또한 만만치 않아."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두 정령을 모른 척하며, 나는 어색하게 일행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모두 얼이 빠진 표정으로 정령왕들의 유치한 말다툼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하하! 저쪽은 신경 쓰지 마세요. 원래 사이가 그다지 좋지는 않거든요." "…엘은 익숙한가 보네요? 이프리트님과 무척 친해 보이는데, 설마 저분과도 계약을 한 건가요?" "그건 아니에요. 그냥 이전에 잠깐 여행을 같이한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친해졌어요." "여행을? 정령왕들과요?" "…정말 놀랍군요. 정령왕이 자신과 직접 계약하지 않은 인간과 함께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요." 뭘 그런 걸 가지고 신기해할 것까지야. 종종 인간으로 속이고 유희를 다니기도 하는 걸? 놀란 유니콘들이 눈을 크게 뜨고 감탄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시벨리우스가 냉큼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불의 정령왕만이 아니야. 전에 내가 봤을 때는 땅의 정령왕과도 함께 있었어. 그렇지, 엘?" "어? 아아, 그건……." "헉! 트로웰 말인가요? 그게 정말이에요, 엘?" "설마 4대 정령왕 모두가 친분이 있는 겁니까?" "정말 대단하군요!" 유니콘들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이에 어색하게 웃고만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맞아! 트로웰, 그 자식!" "…에?" 황당해져서 돌아보니 그곳엔 이프리트가 엘뤼엔과 티격태격하다 말고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후다닥 달려오더니 양손으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그리곤 놀라서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는 내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떠들기 시작했다. "엘퀴네스랑 애기하느라 깜빡 잊고 있었네! 엘! 네가 그 녀석 좀 말려봐라. 응? 본심은 착하고 상냥한 녀석이라며. 근데 왜 대체 저따위로 노는 거냐?" "에? 누, 누가요?" "누구긴 누구야! 네가 그렇게 칭찬해 마징낳는 시커먼 땅꼬맹이지!" "시커먼…쿨럭……! 설마… 트로웰이요?"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묻자 그는 헤비메탈을 하는 사람처럼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어찌나 강하게 부릅뜨고 잇는지. 붉은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번개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왠지 불안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로웰이 또 뭔가를 했나요?" "하다 뿐이겠냐! 그 자식이 뭘 하려는지 알아? 세상에~ 미쳐도 단단히 미쳤지! 글쎄, 그놈이 몬스터와 타 종족을 죄다 끌어들여서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거란다! 아니, 이미 일으켰다고! 아주 대대적으로 대륙을 들쑤셔놓을 작정인가 보더라! 너 이래도 그 녀석이 좋냐?" 쩌어억! 뒤돌아보지 않아도 일행들의 입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령왕이 대륙 전쟁을 주도하다니! 이제껏 전례가 없던 일이기에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트로웰의 계획이 알려지는 건 바라지 않았는데. 덕분에 입 안이 몹시 썼지만 나는 애써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것 말이군요." "엥? 뭐야? 너도 알았던 거냐?" "말했잖아요. 처음부터 인간들을 멸족시키겠다고 했다고. 이제 와서 놀랄 것도 없죠. 곧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어요." "후우, 그럼 그 녀석이 널 죽이려 했다는 것도 아냐?" "네." 내 간단한 대답에 이프리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이, 그렇게 쉽게 대답할 사안이 아니야. 설마 했더니만 그 녀석 진심인 것 같더라. 너희 둘이 꽤 친했잖냐? 내 살다 살다 트로웰 녀석이 인간한테 잘해주는 모습은 처음 봤었다. 그런데도 널 죽이려고 했다고. 그게 무슨 뜻인 줄 알아? 너한테 그 정도라면,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될지 뻔하지." "…죄송해요." "왜 네가 죄송해 하는데?" "그야… 제가 설득시키지 못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선언해놓고서 결국 실패해서. 뭐라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트로웰이 워낙 독해서 그런 거지. 네 노력이 부족했던 건 이냥. 네가 얼마나 녀석을 따랐는지는 나도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아. 세상에, 그 사악한 놈에게 친절하다느니 상냥하다느니 했던 놈은 너밖에 없었으니까. 말이 나와서 묻는 건데… 너, 설마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다들 내 입에서 어떤 답변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잠시 둘러본 나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문지르며 대답했다. "원래 이성을 잃으면 좀 극단적이 되기도 하잖아요. 트로웰도 그런 범주라고 생각해요. 자기 자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정령이니까. 금방 본인의 실수를 깨닫고 마음을 정리할 수 잇을 거예요." "…진심이냐?" "네. 으음, 설득할 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면 좋았을 텐데. 처음부터 이삼 년 정도로 할 걸 그랬나 봐요. 일 년은 역시 완벽하게 친해지기엔 짧은 시간이니까. 내게 마음을 완전히 다 열 수 없었을 거예요. 좀 아쉽네요." "……." 이프리트는 그렇다 쳐도, 어째서 유니콘들까지 저렇게 경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이 중에서 유일하게 본래의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엘뤼에밖에 없었다. 내가 영문을 몰라 바라보자 그는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곧 잛게 한숨을 내쉬곤 얼어 있는 이프리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멍해 있지 마라, 이프리트. 그래서? 이곳을 찾아온 이유가 뭐지?" "응? 아아……." 그 한마디에 굳어 있던 이프리트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화들짝 놀라며 어깨를 움츠린 그는 마치 해괴한 생물이라도 보듯이 나를 훑어보다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엘뤼엔의 시선에 얼른 표정을 수습하고 헛기침을 흘렸다. "흠흠, 미안하다. 내가 좀 당황해서……." "할 말은?" "거참, 재촉하기는. 뭐, 하긴 이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일이니까 나쁠 건 없지. 좋아! 이렇게 된 김에 털어놓으마. 엘퀴네스! 네 도움이 필요하다!" 엘뤼엔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비장했다. 하나로서 이미 완벽하다는 평가받은 정령왕인 그가 다른 자의 도움을 빌리려고 하는 것은 결코 쉽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상대가 사이가 좋다고 볼 수 없는 물의 절영왕 엘퀴네스라면, 이러한 결심을 내리기까지 숱한 마음의 갈등을 겪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엘뤼엔의 대답은 가차 없었다. "기각." "으악! 아직 다 말하지도 않았단 말이다! 왜 끝까지 듣지도 않고 기각이야!" "어차피 쓸데없는 요청일 게 뻔하니까." "뭐야?" "트로웰 때문에 열 받아서 온 거 아닌가. 이 상황에서 네가 내릴 결론이라는 건 뻔하지. 녀석을 봉인시킬 생각 아니냐?" "……!" 정곡을 찔린 듯 그대로 굳어버리는 이프리트를 보며, 나 또한 경악했다. 봉인이라니! 누굴 말이야? 설마 트로웰을 봉인시키겠다고? 나도 이럴진대, 제대로 된 사정을 모르고 있는 일행들의 충격이 크지 않을 리 없었다. 정령왕의 봉인이라니! 미네르바의 경우야 폭주를 수습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치지만, 이번 것은 사정이 다르다. 다들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경직되어 잇는 것을 보며 나는 조마조마해서 소리쳤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트로웰을 봉인시키다뇨!" "후우~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러냐? 나도 계속 고민했다고. 근데 아무래도 정신 못 차릴 것 같은 걸 어떡해? 설득해도 도무지 들어먹질 않은 데다 벌서 일은 벌렸지. 앞날이 캄캄하니 하다못해 미네르바가 깨어날 때가지 만이라도 봉인시켜두자 이거야. 정말 인간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는 없잖아." "아아, 미네르바가… 깨어날 때까지요." 그거라면 충분히 납득이 갔다. 지금 트로웰이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미네르바의 영향이 컷다. 아마 그의 봉인에 제일 많이 충격을 받은 존재 역시 트로웰일 것이다. 그가 다시 깨어나서 이번 계획을 말려주기만 한다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롷지 않은 것 같아요. 후에 미네르바가 그를 설득시킨다고 해도, 끝까지 이번 일이 앙금으로 남게 될 거예요. 아마 인간을 미워하는 마음은 그대로겠죠. 어쩌면 이프리트님이나 다른 정령왕들에게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구요."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야. 이곳, 아크아돈을 평화롭게 지키는 것이 정령왕들의 임무니까. 제 살을 파내려 하는 놈을 곱게 놔둘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고." "그래도……." "아, 글쎄 지금은 사정이 급하다니까? 벌써 일을 시작했다고. 이제 온 대륙이 전쟁터가 되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란 말이야. 어이, 얼퀴네스! 그러니까 봉인시키자. 나 혼자 힘으로는 힘들다는 거 알잖냐." "기각한다고 말했을 텐데?" "대체 왜!" "귀찮아." "…허!" 확실히 엘뤼엔은 멀쩡한 얼굴로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것이 특기인 것 같다. 사태의 심각성을 뻔히 알면서도 귀찮다는 말 하나로 거절할 수 있는 배짱이라니.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무대포적인 개인주의적 성향이 마음에 들었다. 이대로 트로웰을 봉인시키는 방법은 극구 말리고 싶었으니까. "그래요, 이프리트님. 일단은 좀 더 두고 봐요. 아직 초기잖아요. 본격적인 종족 분쟁이 벌어지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어요. 제가 트로웰을 만나볼게요. 노력하면 이제라도 그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을지 몰라요." "지난 일 년 동안 하고도 실패한 일이 아직도 가능하리라고 보냐?" "진심은 언제고 통하는 법이라고 하잖아요. 다시 한 번 도전해볼래요." 내가 진지하게 대답하자 이프리트는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곧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정말요?" "그래. 하지만 이번 한 번만이야. 이번에도 설득하지 못하면,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봉인시킬 거니까 그리 알아. 알았어?" "네! 명심할게요, 이프리트님! 정말 최선을 다할게요." 내가 속으로 환호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찡그리지도 웃지도 않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통할 수 있을까나 모르겠지만, 마지막이니까 열심히 해봐라. 내가 보기엔 네가 아무리 야단법석을 떨어도 놈이 봉인당할 운명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어이, 엘퀴네스! 그때가 되면 너도 귀찮다는 말로 방관하지 못할 거다! 명심해!" "흥!" "저, 저 자식이!" 이프리트의 단호한 경고를 코웃음으로 날려버린 엘뤼엔은 문든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기 시작했다. 맑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정면으로 보이자 어쩐지 저절로 온몸이 긴장되었다. 혹시 또다시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구박하려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득해질 무렵, 크고 따뜻한 느낌이 머리 위에서 느껴졌다. "……?" '이게 뭐지?'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그 정체를 깨닫고 멍하니 입을 벌렸다. 엘뤼엔이 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아, 아버지?" "이번이 마지막이다." "……?" "트로웰에게 기회를 주는 게 이번이 마지막이란 소리다." "아, 으응." "최대한 네 뜻대로 일을 진행시키되, 그래도 그 빌어먹을 자식이 끝가지 안 들어 처먹거든 전해라. 내 경고도 무시하고 남의 계약자에게 손대려 한 벌이 뭔지 알고 싶다면, 그대로 똥고집을 피워도 좋다고. 봉인? 헛소리하고 있네. 무조건 소멸이다. 그 사랑해 마지않는 미네르바와 다시는 엮이지도 못하도록 아주 이 세상에서 완전히 그 형체를 즈려 밟아주지." "……." 왠지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기분이었다. 엘뤼엔의 살벌한 말투야 익히 알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가 이렇게 험한 말을 쓰는 것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제야 나는 엘뤼엔이 지금 상당히 화가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와이번 습격 사건 때의 화가 풀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 때문에 참고 있다는 것도. 그것을 깨닫고 나자 갑자기 몸이 하늘 위로 둥실 뜬 것 같았다. 나는 대체 그동안 왜 그렇게 외로워했던 걸까? 이렇게 넘칠 정도로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데! 평생 손에 넣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가족을 가졌다. 그런데 사람(이제 사람은 아니지만)의 욕심이란 게 어찌나 끝이 없는지, 가족의 틀을 갖추자 이제는 모두가 화목한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너무 억지를 피웠던 걸지도 모른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퉁명스러웠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내 아버지로서 나를 걱정하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과거든 미래든 엘뤼엔이 내 아버지라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한 번 통한 마음은 언제 어느 상황에서든 다시금 통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각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던가. 그런데 나는 또다시 그에 대해 잊어버리고, 과거만 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쩐지 만망한 기분에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러자 엘뤼엔이 약간 찌푸린 표정으로 물었다. "내 말 이해한 거냐? 그렇게까지 말하면 녀석도 그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계속 이어가지는 못할 거다. 놈이 상처받는다는 것 따윈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 다 해라. 네 뒤에는 내가 있다. 알겟나, 아들?" "……!" 한순간 미래의 엘뤼엔과 지금의 그가 오버랩 되어 보였다. 가슴이 벅차올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고, 눈문이 날 만큼 기뻤다. '아들'이라니! 이곳에서 들을 거라 생각이나 했던 말이던가! 이렇게 변한 그의 모습을 보니, 트로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고마워, 아버지!" 13-14. 통하는 마음 (1) 직접 해도 될 말을 굳이 '전해라' 라고 말할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엘뤼엔은 이번 일에 처음부터 동행하지 않겠다며 못을 박았다. 만나게 되면 기회고 뭐고 필요 없이 곧바로 소멸시키게 될 것 같다나? 그런 살벌한 이유로 거절을 하니, 도무지 그에게 같이 가자고 매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일행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본격적으로 트로웰을 찾아가기에 앞서, 나는 우선 일행들에게 동행 의사부터 물었다. 아무래도 껄끄러운 사안이다 보니, 다른 이들에게는 이번 일정이 몹시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게다가 위급할 때 가장 의지가 될 엘뤼엔마저 빠질 의사를 보였으니, 어지간히 각오를 하지 않고서야 쉽게 동행 여부를 결정하기 힘들 것이었다. 예성대로 웰디와 호위기사들은 모두 내키지 않은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잠시 서로를 향해 몇 번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마음의 결정을 굳혔는지 나를 똑바로 응시하였다.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무척 미안한 표정을 한 카리안이었다. "죄송하지만 저희도 안 되겠습니다, 엘님. 사실 저희들은 지금으로선 땅의 정령왕께 그런 계획이 있다는 것 자체가 무척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터질지도 모르는데,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에 웰디님을 모시고 갈 수는 없습니다." "으음, 이해해요. 그럼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여기서 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실래요?" "아니요, 아무래도 저희는 마을로 다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트로웰께서 종족전쟁을 주도하고 계신다니 분명 저희 유니콘들에게도 그와 관련된 소식이 알려져 있을 겁니다. 돌아가서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알아보고 싶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하세요.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헤어진다니 아쉽네요." 내가 서운한 감정을 가득 담아 말하자 그는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더니 약간 눈치를 살피는 기색으로 물어왔다. "그런데…괜찮으시겠습니까?" "네? 뭐가요?" "정말 트로웰님을 설득하러 가실 겁니까? 이번 일에 불씨를 지핀 것은 명백히 인간들 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 인간인 당신이 나서면 오히려 더욱 그분의 분노를 사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차라리 이번 일은 그냥 정령왕들끼리 해결하도록 놔두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른 유니콘들도 동의하는지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심지어 시벨리우스까지 동조하는 표정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니요. 오히려 인간이니까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네?" "인간에게 맺힌 감정이니, 인간이 풀어야지요. 지금 트로웰이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내린 것은 나쁜 인간을 만났기 때문이에요. 그로 인한 분노가 너무 커서 다른 인간들도 그와 같은 범주로 보게 된거죠. 그러니 그렇지 않은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되살려줘야 해요. 현명한 정령왕이니까 금방 깨달을 겁니다. 원래부터 그리 오래 화내는 성격도 아니고요." "…엘님은 정말 그분을 따르는군요. 혹시 무섭지는 않습니까?" "뭐가요?" "아니, 저어… 왠지 땅의 정령왕이라고 하면, '암흑의 주군'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잔혹한 성정과 냉정함으로 유명하지 않겠습니까? 그 때문에 정령의 친구라 불리는 엘프들조차 트로웰님을 두려워하기에 물어본 것입니다. 아무래도 엘님이 그런 부분을 모르는 듯하여……." 암흑의 주군이란 이름은 예전에도 들어본 적 있다. 그때 한순간에 싸늘해졌던 트로웰을 보며, 그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했더랬지. 이곳에 와서는 상냥한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지만 말이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카리안, 혹시 트로웰하고 만나본 적 있어요?" "예? 아뇨. 없습니다만?" "그런데 트로웰이 잔혹한지 어떤지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보지도 않은 상대의 성격을 백 퍼센트 다 안다고 자신할 수 있나요?" 까칠한 내 말투에 카리안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당황해 하는 그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곧 달라질 거라 믿으니까. 카리안, 으음… 이런 말까지 해도 될까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트로웰은 그냥… 화내는 방법을 모르는 것뿐이에요." "네? 화내는… 방법이요?" 주위의 모두가 황당해 하는 것을 모른 척하며 나는 성큼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완벽한 존재잖아요. 모든 생물 위에 군림하는 그들이 한낮 감정에 매달려 크게 싸움을 벌일 일이 얼마나 되겠어요? 더구나 남을 질투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죠. 그런데 자신에게 그런 일이 닥쳤으니, 한순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진 걸 거예요. 그런 사태가 극에 치닫고 치달아 결국 그냥 다 죽여서 없어져버리면 속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하게 된 거죠. 한마디로 그냥 자포자기한 상태라고 보면 돼요."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죠. 그런 게 아니라면 그 똑똑한 트로웰이 인간을 모두 죽이겠다는 결심을 할 리가 없잖아요!" "예?" "인간은 이 대륙에서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종족이에요. 그들을 멸하면 이 대륙 또한 멀쩡하지 않다는 것, 트로웰 역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도 그 무리한 계획을 감행하려고 하는 거예요. 아마 본인도 무척 혼란스러워하고 잇을 테죠. 그러니 괜찮아요. 지금이라도 돌려놓을 수 있으니까. 아직 늦지 않았잖아요?" 내 설명을 이해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난 내 나름대로 최대한의 변호를 했으니, 그에 대한 판단 여부는 저들이 알아서 내리도록 내버려두는 수밖에. 그렇게 대강의 대화가 마무리 되자 나는 다시금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와 중얼거렸다. "으음, 그럼 일단 유니콘 분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가는 것은 나 혼자뿐인가?" 생각하고 보니 조금 난감했다. 사실 이곳에 온 이후로 내가 혼자 여행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자마자 엘뤼엔을 소환했고, 그로부터 지금까지 쭈욱 함께 다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막상 결전을 앞둔 순간에 아군 하나 없이 맨몸으로 가야 하다니! 이런 원통한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혼자는 아니구나. 라피스 녀석도 함께니까.' 덕분에 한결 안심이 되긴 했지만, 여전히 섭섭한 마음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같이 갈래." "응? 정말?" 무척 반가운 요청에 무심코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발표하는 어린이처럼 한 손을 든 채 싱글싱글 웃고 있는 시벨리우스의 얼굴이었다. 으음, 가기로 결정한 것은 좋은데 말이지. 넌 네 옆에서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일행들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냐? 슬며시 걱정이 되는 내가 한마디 건네려는 순간, 예상대로 비명에 가까운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 시벨리우스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이제 돌아간단 말이에요!" "응, 그래. 조심해서 돌아가라, 웰디. 장로 할아범에게 안부도 전해주고." "말도 안 돼요! 당연히 시벨리우스님도 함께 돌아가셔야지요! 이제 그만 유희를 끝내실 때도 됐잖아요!" "그건 내가 결정할 일이지. 내가 언제 함께 돌아가겠다고 한 적 있었어? 난 처음부터 엘을 따라왔고, 앞으로도 계속 그와 함께 다닐 거야. 게다가 지금처럼 엘이 곤란한 상황에서 따날 마음은 더더욱 없어. 우리는 친구니까. 그렇지, 엘?" 빙긋 웃으면서 묻는 말에 나는 그렇다는 대답 대신 말없이 식은 땀을 흘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즉시 울먹이는 표정을 거둔 채 표독스러운 눈으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 웰디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친구로서 인정을 받고도 이렇게 곤란한 심정을 느껴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대체 뭔 여자가 저리 질투심이 많단 말인가. 민망해져서 시선을 피하자, 따갑던 눈길이 멈춘 듯싶더니 다시금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웰디가 조용히 흐느끼며 말하고 있었다. "너무해요, 시벨리우스님. 그럼 저는요? 저는 당신의 약혼녀예요. 친구보다 훨씬 중요한 존재 아닌가요?" "벌서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장로 할아범이 억지로 정한 혼약 따위엔 관심 없어. 고로 내게는 네가 약혼녀도 무엇도 아니지. 이젠 알아들을 때가 되지 않았나?" "…흑! 흐으윽! 어엉! 흐어엉!" "……!" 쌀쌀맞은 시벨의 대꾸에 웰디는 아예 대놓고 통곡했다. 그간 보아왔던 정숙하고 도도하던 이미지하고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웨, 웰디님! 일단 진정을……." "고정하십시오!" 눈물 콧물 신경 쓰지 않고 흉하게 우는 것에 호위기사들마저 당황했는지 서둘러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더 흐느낀 웰디는 모두의 표정에 지친 기색이 떠오를 때가 돼서야 겨우 눈물을 그치고 사나운 눈이 되어 소리쳤다. "이 나를 몇 번씩이나 거절하다니! 두고 보세요, 시벨리우스님!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 날이 오실 거예요! 할아버지께 말씀드려서라도 결코 그냥 넘어가게 뒤지 않을 겁니다!" 헉! 저건 설마 선전포고? 다분히 협박적인 멘트에 어깨를 움츠리며 긴장한 나와 달리 세빌리우스의 표정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다. 녀석은 할 테면 해보라는 듯 살짝 비웃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익!" "웨, 웰디님. 진정하십시오!" "너무 흥분하시면 해롭습니다." 씩씩거리던 웰디는 호위기사들이 다시금 달래기 시작한 후에야 호흡을 안정시켰다. 그러고 나서 한참 동안 시벨리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곧 무슨 결심을 했는지 입술을 꽉 물고는 홱! 하고 등을 돌리며 말했다. "카리안, 아렐. 돌아가요." "예? 하, 하지만 시벨리우스님은……." "아직 돌아가실 의사가 없으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요? 장로님께서 알아서 해결하실 겁니다. 힘! 없! 고! 자! 격! 없! 는! 우리들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왠지 후자의 말에 강한 억양이 서린 것 같은 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거의 비꼼에 가까운 말 때문인지 호위기사들은 얼굴을 잠시 경직시켰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명령에 순응하기로 한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지금부터 모시겠습니다, 웰디님." 그렇게 유니콘들은 떠났다. 당초 처음 목적이었던 시벨리우스의 귀환을 이루지 못한 채로. 돌아간 그녀가 장로라는 유니콘에게 어떤 말을 할지, 그로 인해 어떤 과장이 일지 미루어 짐작이 가능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아 시벨리우스도 이미 단단히 각오를 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으음… 미안해, 시벨. 나 때문에 이렇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응? 아니야, 어차피 난 돌아가고 싶은 마음 없었어. 마을에 있어봤자 숨만 막힐 뿐이거든. 그보다는 이렇게 너랑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하는 게 더 좋아." "하지만 이번 일로 네 입지가 위험해질 텐데. 게다가 장로라는 분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아니야." "흥! 상관없어, 그런 독재자 따위. 어디 한번 멋대로 날리쳐보라지. 계승자랍시고 떠받들면서도 정작 마을 안에서 나를 제일 무시하고 잇는 건 바로 그 할아범이라고. 킥킥! 하나뿐인 손녀가 눈물 콧물 쏟으면서 돌아가면 어지간히 속이 쓰릴 거다. 난 오히려 홀가분해. 그동안 계속 질질 끌려 다니기만 해서 상당히 괴로웠거든." "…뭐,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내가 씁쓸하게 중얼거리자 녀석은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은듯, 급히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보다 엘! 이제부터 어떻게 할 거야? 그 땅의 정령왕을 찾아가는 길은 알고 있어?" "음? 아~ 그건 이프링트님이 아실 거야. 그렇죠?" 그제야 떠오른 사실에 내가 한쪽에 서 있던 이프리트를 향해 묻자,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데려다주지는 않을 거다." "엑? 그럼 어떻게 해요?" "위치를 알려주면 될 거 아니야! 난 더 이상 그놈하고 엮이기 싫다고! 그 면상 보는 것만으로도 열이 뻗쳐 죽을 지경이야! 네가 설득한다고 햇으니까 네가 알아서 해!" 그렇게 쌀쌀맞게 말하며 알려준 트로웰의 위치는 생각보다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버스나 전철이 있을 때의 이야기고, 이곳의 이동 수단으로 치면 말을 타고도 며칠은 가야 할 듯한 거리였다. 이제껓 장거리 여행을 했던 경험으로 치면 그리 부담스러운 날짜는 아니었지만,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마음이 저절로 조급해졌다. 이미 전재은 시작되었다. 내가 찾아가는 그 사이에도 트로웰은 서슴없이 인간들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짓밟고 부술 것이다. 하루라도 빨리 설득해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다. 그렇다고 안 간다는 엘뤼엔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이 순간에는 든든하던 시벨리우스의 마법마저 기대하기 힘들었다. 트로웰이 한 장소에만 계속 머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법을 통한 이동은 정확한 좌표 계산이 필수이기에 이동하는 존재를 찾아가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랐다. '그러고 보면 라피스가 꽤 대단하긴 하단 말이야? 언제 어느 때든 척척 텔레포트를 했었으니.' 나는 새삼 라피스가 천재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속으로 잠시 감탄했다. 물론 그 뒤로 이어진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느라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아~ 진짜 막막하네. 이제 어떻게 하지? 날아갈 수도 없고……." "아! 그럼 되겠다. 바로 그거야, 엘!" "엥? 정말 날아가자고? 하지만 플라이 마법이라고 해봤자 이동속도가 그리 빠르지는 않을 텐데?" "괜찮아, 내가 태우고 가면 하루 만에 갈 수 있어." "태우… 다니?" 내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자, 시벨은 생긋 웃더니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러자 녀석의 몸에서 갑자기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우뚝 서 있던 형체가 일그러지는 것이 아닌가! "헉! 뭐, 뭐야?" 우글우글 번형을 시도한 녀석의 몸은 어느새 엎드린 것처럼 가로로 길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후, 시야를 가득 메운 빛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는 블루 엘프가 아닌, 우아한 백마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그것도 양쪽에 커다란 날개와 이마에 금색의 기다란 뿔을 가진 채로. "……!" 대체 이게 뭔 일이라지? 조금 멍해졌던 나는 그 모습이 상당히 낯익다는 것을 깨닫고 조심스레 물었다. "시벨리우스? 혹시 너야?" <응! 어때, 엘? 이 모습으로라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어. 높이 날아갈 테니 사람들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 괜찮은 방법이지?> 꽤나 오랜만에 보는 본체라서 그런가, 녀석이 유니콘임을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지금의 이런 상황이 무척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말이 말을 하다니!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리자 대번에 그 반응을 느꼈는지 시벨이 의아하게 물었다. <엘? 왜 그래? 아, 하긴. 본체는 조금 기분 나쁜가?> "응? 아, 그,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라 조금 적응이 안 돼서 그래." <오랜만? 전에도 유니콘의 본체를 본 적 있었던 거야?>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근데 정말 괜찮겠어? 확실히 나쁘지 않은 방법이긴 하지만, 내가 너라면 누굴 등에 태우고 다니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닐 것 같은데." <괜찮아, 넌 친구잖아.> 그렇게 말하며 시벨리우스는 생극 미소를 지었다(말의 모습인지라 그다지 멋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고민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어차피 상황이 긴급했기에 나는 망설일 여유 없이 염치를 불구하고 녀석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그 뒤, 나는 녀석과 함께 앞으로의 일정을 논의했다. 아무리 빠르다 해도 하루는 꼬박 걸리는 거리이니 만큼, 여러 가지 준비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근처 상회에 들러서 하루분의 식량을 사는 것이다. 하늘 위에서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의 여부는 미지수지만, 일단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싶어서였다. 그 외,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작은 배낭에 챙겨 넣은 나를 향해 시벨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오늘 하룻밤을 꼬박 새서 갈 거야. 나야 하늘 위의 이동이 익숙하지만, 아마 네가 많이 피곤할지 몰라.> "그건 괜찮아. 나도 체력만큼은 누구에게라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니까." <그거야 나도 잘 알지. 그나저나 높은 곳이라 새벽엔 꽤 추울 텐데, 담요 같은 거라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으음, 그런가. 담요는 들고 다니기 번거로우니까 미리 두꺼운 외투를 입는 편이 낫겠다." 그때, 이프리트가 끼어들었다. "어이, 꼬맹이! 외투가 왜 필요해? 그거 있잖냐. 내가 전에 화기를 넣어둔 화석 목걸이." "네? 아~ 그, 그렇지. 참." 영혼의 보석을 화석이라고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그때, 좀 더 목걸이의 용도를 다양하게 만들기 위해 이플이트에게 보조마법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보온마법 대신 불의 정령을 봉인하고자 했고, 그것이 실패하자 자신이 가진 화기의 일부를 나누어주는 것으로 대신했었다. 평소라면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으로 만족했겠으나, 이번은 상황이 나빴다. 라피스가 깨어난 이후로 그 모든 목걸이의 기능들이 죄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아마 녀석이 가진 기운이 폭발하는 과정에서 이플이트의 기운과 충돌하면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게 된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보니 그때 카사가 봉인되기를 꺼려했던 것도 다 그 안에 들어 있던 라피스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급 정령에게는 드래곤의 기운이 픙분히 두렵게 느껴졌을 테니까. 왜 바보처럼 그때 그 안에 뭔가 들어 있을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지금 떠올려보면 참으로 민망한 기억이었다. '가만? 이미 라피스는 죽었잖아? 영혼인 상태에서도 드래곤의 기운을 낼 수 있는 건가?' 문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마침 이어지는 이프리트의 말 땜누에 더이상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하여간 인간들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니까. 어쨌든 목걸이를 이용하라고.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쓰냐? 그거 하나면 웬만한 추위는 다 막을 수 있을 거다." "으음, 알겠어요." "어때? 내가 무척 고맙지?" "네? 아, 예……, 그럼요. 하하하!" 무척 뿌듯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화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그 이유를 물을 테고, 그렇게 되면 라피스에 대해서도 설명해야 하는데, 최대한 그런 상황만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외투를 챙기지도, 그렇다고 목걸이를 기대하지도 못하는 어중간한 상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배려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을 몸소 깨우친 순간이었다. '설마 그 정도 추위에 동사하지는 않겠지.' 나는 착잡한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좋아, 그럼 이제 그만 출발할까?> "응! 부탁해." <맡겨만 두라고!> 내가 훌쩍 등에 타오르자 녀석은 가볍게 발굽을 구르며 하늘을 날아오를 준비를 했다. 새하얀 날개가 천천히 펄럭이기 시작하는 것을 본 나는 배웅하듯 한쪽에 서 있던 엘뤼엔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럼 다녀올게, 아버지. 그동안 아버지는 뭐 하고 있을 거야?" "나는 잠시 정령계로 돌아가 있겠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네 쪽의 상황에는 계속 귀를 열어놓고 있을 거다. 내가 나설 땐 결과는 단 하나뿐이다. 알고 있겠지? 최대한 내가 나설 일 없도록 네 선에서 잘 처리해라." "응, 알았어." 그가 나선다는 것. 그건 다른 말로 트로웰을 완전한 소멸을 의미했다. 강제로 소멸된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명계에 들어갈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엘뤼엔에게도 그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생각으로 우울해 하는 내게 옆에 있던 이프리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충고를 건네어왔다. "어이, 꼬맹이! 여차 할 땐 그냥 튀어버려. 괜히 고집 피우다가 붕변당하지 말고. 네 말마따나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최악의 상황인 것만은 변함없으니까. 행여 일이 터지더라도 너 하나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 "으음, 노력해볼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꼭 살아라. 네가 죽으면 나도 꽤 서운할 것 같으니까." "…네. 고마워요, 이프리트님." 히이이잉! "우왓!" 자신 없는 대답을 내뱉고 나자 시벨리우스가 예고도 없이 하늘로 높이 도약해 오르기 시작했다. 무방비였던 나는 갑자스런 이동에 놀라 기겁을 하며 황급히 녀석의 갈기를 붙잡았다. 그러고 나서야 떠오른 사실 하나. 지금 별다른 안전장치는커녕 안장이나 고삐도 없는 상태였지, 아마? '맙소사!' 설마 이 상태로 땅 위도 아니고, 까마득한 하늘 위를 질주해야 한다는 건가? 머릿속의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경악하는 내 상태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벨리우스는 아주 얼이 빠질 만큼 빠른 속도로 날아가고 있었다. 휙휙 지나치는 배경이 하늘인지 땅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으악! 천천히 가, 천천히! 시벨! 날 죽일 셈이냐!" <응? 뭐라고, 엘? 바람소리 때문에 잘 안 들려~ 나중에 말해~> "이 자식! 나중은 뭐가 나중에야? 그 전에 내가 죽는다고오! 천천히 좀 가란 말이닷!" <미안해~ 잘 안 들려!> "너 지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떨어지면 죽는다! 이 순간에도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얄궂은 녀석은 등에 탄 사람을 위해 최소한의 바람 보호막조차 만들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해서 그런 부분에 대한 배려에 어두운 모양인 듯했지만, 지금으로선 전혀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녀석의 갈기털을 생명줄인 양 꽉 붙잡고 있어야 했으니까. 행여 손을 놓치기라도 하면 나는 그대로 어마어마한 바람의 압력에 떠밀려 뚝 떨어지게 될 것이 틀림없었다. 죽더라도 가능한 추락사만큼은 피하고 싶다. 하고 많은 죽음 중에 왜 하필 그런 끔직한 방법으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상태가 앞으로 하루 동안이나 계속된다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도착하면 두고 보자!' 필사적으로 녀석의 등에 매달리는 내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중얼거렸다. 13-15. 통하는 마음 (2) 쿠웅! 콰아아앙! 쿠웅! "으아악! 모, 몬스터다!" "꺄악!" "도망쳐!" 엘이 시벨리우스와 함께 출발하고 있을 무렵, 트로웰은 은간들의 도시를 향한 두 번째 공격을 개시했다. 이번엔 한 무리 정도가 아닌, 수백으로 이루어진 몬스터 부대를 동원한 침략이었다. 이미 시작된 전쟁인 이상, 시간을 끌며 지루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다른 정령왕들의 마음에 망설임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욱 과감히 진행할 계획이었다. 흔히들 처음이 어렵다고들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인간의 도시를 멸한 경험이 있는 트로웰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긴 했지만, 워낙 사안이 컸기 때문일까? 이번 일만큼은 그도 여러 번 마음의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첫 번째 공격을 감행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약간이나마 남아 있던 미련마저 말끔히 사라져버렸다. 이미 이프리트가 우려한 바대로 가장 친한 친우였던 엘을 해치기로 마음먹은 이상, 그에게 있어 마음을 쓸 인간이란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퍼억! 퍽! 케에엑! 취익! 취이익 "아아악! 사,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뒤늦게 출동한 도시의 경비대는, 습격하는 몬스터 무리에 무의미한 저항을 시도한 지 채 일각의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전멸했다. 성문이 맥없이 열리자 피난하던 사람들은 모두 비명을 질렀고, 그 뒤로는 아비규환이었다. 이미 가옥들은 절반가량 허물어졌으며, 곳곳마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령왕이라는, 절대적인 지배자에게 살육을 허락받은 몬스터들은 무자비한 손속으로 인간들을 도륙했다. 거리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이 도망치며 절규했다. 노인과 불구자, 심지어 갓난아이를 안고 도망치는 젊은 여인도 있었으나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트로웰의 얼굴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눈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그는 차분히 다음 공격 장소를 가늠하고 있었다. 다음 목표는 이보다 더욱 번화하고 큰 도시로 할 생각이다. 그 다음은 더욱 큰 도시, 그 다음은 더더욱 큰 도시로, 점차 범위를 넓혀 갈 계획이었다. 계속적으로 공격이 반복되면 처음엔 그저 우연이라고 믿었던 인간들도 곧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을 유린하는 절대자의 정체를 느끼고 맥없이 쓰러져 절망하게 되리라. 물론 그 전에 다른 정령왕들의 심판을 피할 수없겠지만. '그러고 보니 너무 조용한 걸, 지금쯤 찾아올 때가 됐는데.' 이프리트가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지금쯤이면 엘퀴네스의 성격상 당장 자신을 봉인하러 오고도 충분히 남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잠잠하다니, 설마 자신의 행위를 묵인하겠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나야 환영이지만.' 홀가분하게 중얼거리면서도 트로웰은 내심 찝찝했다. 가루약을 들이키고 물을 안 마신 것처럼 온 입 안이 썼다. 그런 그에게 다분히 퉁명스러운 어조의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넌 저런 광격을 보고도 딴 생각이 드냐?"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뾰족한 귀와 짙푸른 머리색이었다. 낯익은 준수한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는 것을 보고 트로웰은 입가에 작은 조소를 흘렸다. "네가 엘프로 폴리모프한 것은 처음 보는군, 라미아스." 블루 드래곤 라미아스는 폴리모프 시에 무조건 인간의 모습을 택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다른 동족들에 비해 훨씬 더 무수한 유희를 경험했으면서도, 타 종족의 특성에 무지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미아스의 눈썹이 분노로 꿈틀거렸다. "쳇! 그럼 인간들을 살육하는 현장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명령을 내리란 말이야? 그딴 짓은 못해. 나도 양심이란 게 있다고." "그렇게 안 해도 어차피 네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게 될 텐데. 이만한 몬스터를 다룰 수 있는 인간은 없으니까." "넌 자기 위안이라는 말도 모르냐? 어찌 됐든 이 상황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싫어. 내가 안 편하다고!" 라미아스 본인은 죽어라 하기 싫어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이번 계획의 참모 역을 담당하고 있었다. 지금 인간을 습격하는 수백 마라의 몬스터도 바로 그의 명령을 받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응하기 싫으면서도 그의 계획에 끌려 다니는 것이 라미아스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평소에 인간에게 나쁜 감정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오히려 좋은 인식을 가졌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말리기는커녕 하자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이 어린아이 모습을 한 땅의 정령왕에게 대책 없이 약한 것 같았다. 아마도 상처받은 듯한 황금색 눈동자 때문이리라. 천성인지 뭔지, 그는 이전부터 외로운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그리고 트로웰은 그가 이제껏 만났던 자들 중에서 가장 외로운 존재였다. 그 눈빛을 마주 볼 때면 한없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드래곤으로 태어나서 다양한 유희를 겪고 수많은 사람을 보았어도, 그만큼 고독한 눈빛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삶을 살았고, 항상 타인을 외면한 채 혼자 존재하는 엘퀴네스 조차 그런 눈빛을 한 적은 없었다. 그래, 내 팔자가 다 그렇지, 뭐. 라미아스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까지 하나 둘씩 들쑤실 거냐? 감질나는데 아예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건 어때?" "너답지 않은 말인데. 갑자기 의욕이라도 생긴 거야?" "누가 그렇대? 매도 먼저 맞는 게 나으니까 그렇지. 차라리 빨리 끝내버리고 다 잊고 살고 싶다고.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로드가 안달복달하더라. 자기들 차례는 언제 오냐고 묻더군." 말하면서도 이가 부득 갈렸다. 그 망할 로드 드래곤은 트로웰이 인간을 쓸어버린다고 말하자마자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놈이다. 아예 일족별로 조 편성까지 해서 전투부대까지 형성한 놈에게는 처음부터 '전쟁은 나쁘다'라는 일반적인 상식 자체가 없었다. 하긴 인간이 싫어서 아예 유희조차 하지 않는 놈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마는. 그나마 다행인 것은 트로웰이 그의 뜻을 받아들일 의사가 아직은 없는 것 같다는 점이다. 당장 온 대륙을 싹쓸이할 것처럼 굴더니, 막상 시작하고 나서는 지켜보는 이가 의아할 정도로 느긋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처음부터 장기전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면, 무언가 마음의 변화가 있는 게 아닐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트로웰을 바라본 라미아스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언제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좀 더 집요하게 바라보아도 끝까지 별다른 소득이 없자, 라미아스는 조용히 체념했다. 애초에 타인의 마음을 읽는 것은 트로웰의 특기지, 자신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었으니까. "당분간은 조급히 진행시킬 계획은 없어. 드래곤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막바지에 닿았을 때야. 안 그럼 너무 쉬워서 재미없잖아? 네 로드에게도 그렇게 전해." "네, 네. 과연 그 고집쟁이가 얌전히 들어먹을지는 의문이지만." "들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이 다음 차례가 드래곤이 될 테니까." 흠칫!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라미아스는 얼굴을 경직시켰다. "…진심이냐?" "내가 언제 농담한 적이 있던가?" "말이 너무 지나쳐. 그렇게 감정적으로 결정을 내릴 게 아니잖아. 설마 너, 인간을 죽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이 대륙을 멸망시키는 게 목적이었던 건 아니겠지?" "후후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미쳤군." "그걸 이제야 알았다니 유감이야." "……." 생긋 웃는 얼굴에 라미아스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더불어 자신은 결코 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아니, 과연 누가 그 앞을 막아설 수 있을까? 그와 같은 정령왕들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이 거침없는 녀석을 말릴 수 잇는 존재는 아무도 없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떤 쪽으로든 트로웰에게 좋은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 대륙을 평온하게 유지하는 것이 정령들의 임무다. 그런데 정작 정령왕인 그가 스스로 이 세상을 망치려 들다니! '바보 같으니! 봉인이라도 당하고 싶은 거냐?' 그때였다. "으아아아악! 좀 천천히 날라고 했잖아! 이 자식아!" "……?" "에? 뭐지?" 갑자기 어디선가 터져 나오는 비명에 라미아스와 트로웰은 똑같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비명소리야 이미 사방에서 울리고 있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것이 땅이 아닌 하늘에서 들려왔다는 점이다. 무심코 위를 올려다본 그들은 곧 공중을 배회하는 희미한 형체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점으로만 보였지만 눈에 의식을 집중하자 곧 대강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가로로 늘씬한 육체와 튼튼한 4개의 다리, 긴 주둥이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양옆으로 날개가 달려 있기는 하지만, 저것은 분명히……. "말?" "아니, 유니콘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라미아스의 말에 트로웰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정정해주었다. 라미아스는 그제야 백마의 이마에 긴 금색의 뿔이 달려 있음을 발견했다. "아! 정말이네? 유니콘이 여긴 웬일이지? 저쪽도 아직 행동 개시 하려면 더 있어야 하잖아?" "…글쎄. 동맹으로서 온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던 라미아스는 곧 하늘을 응시하는 트로웰의 얼굴이 이상할 정도로 굳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유니콘이 혼자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는 무심코 보느라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등 위에 사람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의 비명소리는 바로 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저들끼리 다투는 건지 다시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내가 몇 번이나 심장이 철렁했는지 알기나 해! 넌 내려가기만 하면 죽을 줄 알아!" <아야야! 알았으니까 너무 세게 잡아 당기지 마. 아프다고.> "시끄럿!" 유니콘이 지상으로 천천히 내려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모습은 점차 뚜렷해졌다. 타고 있는 이의 체구는 생각보다 작았다. 나이는 10대 중반쯤 되었을까? 긴 금발과 푸른 눈동자, 여자인지 남자인지 쉽게 분간할 수 없는 예쁘장한 외모가 상당히 낯익은 느낌을 주었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왜 아니겠는가. 바로 얼마 전에도 만났던 사람인 것을. 그가 엘퀴네스의 계약자인 '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라미아스의 얼굴은 급격히 창백해졌다. '맙소사! 저 녀석이 왜 이곳에 온 거지?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가슴이 서늘해진 라미아스는 황급히 트로웰의 표정부터 살폈다. 여전히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미 엘에게 고정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가 눈치 채기 훨씬 이전부터 엘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최악이다!' 머릿곳에 꾸물꾸물 새카만 먹구름이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그 사이, 엘은 유니콘과 티격태격하던 것을 멈추었다. 한결 진지해진 표정을 보아 그 또한 이곳의 상황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제발 그냥 돌아가라!' 지금이라면 도망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내심 엘을 마음에 들어했던 라미아스로서는 그가 이번 일에 휘말려 희생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간절한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엘은 타고 있던 유니콘의 다리가 완전히 땅에 닿기도 젆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그들이 앉아 있던 성벽 위에 가볍게 착지했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말끔한 동작이었던지라 그때만큼은 라미아스도 상황을 잊고 작게 감탄을 흘렸다. 그러한 순간에도 트로웰의 시선은 엘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둘의 눈이 마주친 순간, 먼저 입을 연 것은 생긋 웃은 엘이었다. "안녕, 트로웰! 오랜만이다." 13-16. 통하는 마음 (3) "…설마 네가 나를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인사를 건네자마자 돌아온 것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반갑게 환영해줄 것이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렵게 찾아온 사람에게 겨우 건넨다는 말이 '설마'라니. 섭섭한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아예 무시하지 않은 것만도 어딘가, 최악의 경우, 그 즉시 눈앞에 칼부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상당히 양호한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문득 지난날의 파란만장했던 여정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동수단을 시벨리우스의 날개로 정한 것은 내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전속력으로 날아오는 하루 동안 나는 꼬박 5번 추락했고, 16번을 미끄러졌다. 그때마다 귀신같이 눈치 챈 녀석이 곧바로 달려와 받아냈지만, 그 소림끼치는 아찔함이라니! 정말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뿐인가! 새벽부터 찾아온 추위는 또 얼마나 엄청나던지. 한겨울의 시베리아 눈밭을 알몸으로 걸어도 그보다 더하지는 않을 것이다. 꽁꽁 얼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고 노력하며, 나는 모든 사실을 밝히고 모포 하나 챙겨 오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그렇게 고생고생해서 겨유 도착했을 때, 내가 성벽 위에 앉아 있던 트로웰을 한눈에 발견한 것은 정말 '하늘이 보우하사'였다. 그 또한 일찌감치 내 등장을 눈치 챘는지, 굳은 표정으로 내 쪽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한 황금빛 눈동자에 서린 기운은 명백한 적의였다. 그때부터 본능적으로 일이 쉽지 않을 거라 예감했지만, 나는 일단 시벨리우스의 등에서 내려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지덕지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안전해지고 싶다는 생각으로만 똘똘 뭉친 내게, 이런 기회를 제공(?)한 트로웰은 천사나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그에 대한 호감이 2백 퍼센트 상승했음은 물론, 앞으로 벌어질 모든 상황에 대해 너그럽게 넘겨줄 용의까지 무럭무럭 솟아 올랐다. 그런 각오에 비하면 싸늘한 말투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재차 웃으며 말했다. "내가 반갑지는 않나 보네.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왔는데." "반가울 리가 없잖아. 게다가 저 유니콘은… 그렇군. 결국 일행이 된 건가?" <네가 무슨 상관이야?> 뭔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트로웰의 말에 시벨리우스는 아직 본체의 모습을 유지한 상태에서 삐딱하게 대꾸했다. 그러자 트로웰은 생긋 웃으며 말했다. "별거 아니야. 그저 스토커도 그 정도면 해볼 만하다 싶어서." <뭐, 뭐가 어째?> "헉! 참아, 시벨. 여기서 네가 난리치면 어쩌라고?" 흥분해서 푸르르거리는 녀석을 달래고 있자니, 이번엔 유쾌한 감정을 담은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그새 유니콘까지 흘린 거냐, 꼬맹이? 거참, 재주도 좋단 말이야?" "에? 누구… 엇, 당신은! 설마 라미아스님?" 처음엔 웬 엘프가 아는 척을 하는가 싶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라미아스와 똑같은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블루 드래곤 특유의 푸른색 머리카락 역시 그대로였다. 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는 한 손을 흔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핫! 오랜만이지?" "라미아스님이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아, 그게 말이야……." "그는 내 일을 도와주고 있어. 아주 훌륭한 참모지."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망설이던 말을, 트로웰이 자연스럽게 이어받아 설명했다. 그에 어쩐지 라미아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갸웃했다. "참모? 라미아스님이?" "그래, 그런데 넌 왜 이곳에 온 거지?" "응? 그냥. 이래저래 보고 싶기도 하고, 할 말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랄까. 하하하!" "할 말? 아직도 내게 할 말이 남았어? 설마 이프리트나 엘퀴네스에게서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했던 건 아니겠지?" 싸늘한 물음에 나는 그제야 그가 이미 봉인을 각오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혼자서 모든 것을 떠안고 잠들어버릴 생각이었던가. 끝까지 마음을 열지 않으려는, 그러면서도 타인을 위한 마지막 배려를 챙기려 했다는 사실에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실은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내가 한 번 더 이야기해본다고 했거든." "…지금쯤이면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군. 설마 너…아직도 날 아군으로 여기고 잇는 건 아니겠지?" "적어도 적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렇게 믿고 싶은 거겠지." 냉정한 말투였지만 나는 틀림없이 보았다. 그렇게 말할 때 트로웰의 눈동자가 한순간 흔들리는 것을. 훗! 역시 내가 찾아온 것이 아주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군.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는 서운한 듯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냉정해, 트로웰. 그래도 일 년이나 함께 여행한 사이잖아. 게다가 검술로는 스승과 제자지간인데, 좀 더 따뜻하게 대해줘도 되는 거 아니야?" "이미 지난 일에는 관심 없어. 좀 더 자각이 필요한 모양인데, 네 밑에서 벌어지는 일에나 신경 쓰는 게 어때?" "밑?" 성벽 아래의 일을 말하는 건가? 무심코 시선을 내린 순간, 나는 그대로 몸을 경직시킬 수밖에 없었다. 트로웰만 신경 쓰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광경이 펼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처참히 무너진 민가와 자욱한 연기들. 엉망이 된 거리마다 양손에 무기를 쥔 몬스터들이 아무렇게나 배회하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인간들은 필사적을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쳤다. 곳곳마다 피와 살점이 튀고, 비명이 울려 퍼졌다.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게 정말 현실인가 하는 멍청한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좀 정신이 들어?" "……!" 문득 들려오는 차가운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혼란을 수습하고 고개를 들었다. 태연하게 벽에 기대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트로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트로웰, 설마 네가……." "그래. 내가 전부 다 지시한 일이야. 단 하나도 남김없이, 내 눈앞에서 그 더러운 모습들이 보이지 않도록 깨끗하게 쓸어버리라고 했지. 노인이고 갓난아이고 상관없이 말이야. 어때? 네가 그토록 상냥하다고 칭찬했던 내 본모습을 일견한 기분이?" 생긋 웃는 얼굴이 처음으로 잔인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에 와이번의 습격 때 느꼈던 충격이 다시 한 번 되살아났다. 내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트로웰의 본 모습이 정말로 이런 것이었던가? 그저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뿐인가? 나는 벌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간신히 한마디를 쥐어짜냈다. "…둬." "뭐?" "그만둬! 지금 당장 그만두라고, 트로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스스로 후회할 일을 만드는 거냐고!" "후회하지 않아. 지금껏 바래왔던 일을 벌이는 것뿐인데, 왜 후회한다는 거지?" "어쨌든 일단 그만둬!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즐기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제발 그만두라고!"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를 설득할 수 있는 기간은 이미 끝났어.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해?" "……."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마다나 나는 이미 기회를 잃은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나는 잠시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오히려 트로웰은 그것을 상당히 즐거운 듯했다. 마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기대하는 듯, 그는 시선을 피하는 법 없이 똑바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에 울컥한 나는 즉시 호기롭게 소리쳤다. "좋아! 네가 멈출 생각이 없다면, 강제로라도 내가 막겠어!" "…뭐?" "가자! 시벨리우스! 이대로 돌진하는 거닷!" <어엇? 자, 잠깐만, 엘!> "꼬맹아!" 다황한 시벨과 라미아스의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마주친 트로웰의 표정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름 기분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뛰어내리고 나서야 내가 있던 곳이 떨어지면 즉사할 만큼 높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흐어어억! 난 죽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이미 몇 번이고 경험했던 일이었지만, 이번엔 상황이 조금 달랐다. 이제까지는 워낙 고공이었던 탓에 떨어져도 시벨리우스가 뒤따라와서 받아낼 거리가 충분했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새. 조금만 타이밍이 안 맞아도 늦어버리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는 날 대신해, 뒤늦게 상황을 눈치 챈 라피스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 둔팅아! 거리는 재보고 뛰어내려야 할 것 아니야! 니가 아직도 정령왕인 줄 알아?> "하하하, 그러게 말이다. 이대로 죽으면 나도 영혼의 보석이 될텐데, 이걸 어쩌지?" <지금 그렇게 한가하게 웃을 때야!> 그럼 어쩌라고! 난 부유마법 같은 건 못한단 말이다! 괴로운 심정으로 위쪽을 바라보니 시벨리우스와 라미아스가 뛰어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거리가 한참 벌어진 탓에 이제 와서 손을 쓰기는 무리인 것 같았다. 땅에 닿을 때가 되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곧 다가올 고통을 대비했다. 그러나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다고 하던가. 덥썩! 휘리리릭! 갑자기 무언가가 나를 홱 끌어당긴다 싶더니 그대로 꽉 붙잡고 가볍게 공중에서 핑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얌전히 바닥에 착지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멀쩡히 살아 있음을 깨달았다. 겨우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누구지, 시벨인가? 아니면 라미아스?' 의아해서 고개를 든 나는 전혀 의외의 인물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나를 끌어안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안색이 창백해진 트로웰이었다. 13-17 통하는 마음 (4) "어라? 트, 트로웰?" 설마 그가 직접 나서서 도와줬을 줄이야! 이게 꿈은 아니겠지? 그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입술을 악물고 있었다.열린 입에서 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거야? 그래도 죽고 싶어?" "아, 아니, 이건 그냥 어쩌다 보니... 헤에, 혹시 날 구해준 거야?" 나도 모르게 감탄해서 묻자, 트로웰은 안 그래도 찌푸려져 있던 얼굴을 더더욱 일그러뜨렸다. "무슨 뜻이야? 구하지 말 걸 그랬던 모양이지?" "헉! 아, 아냐! 너무 기뻐서 그렇지. 이야~ 덕분에 살았어, 고맙다, 트로웰. 역시 너밖에 없어!" "정말이지 너란 녀석은..." 그는 말을 잇다 말고 복잡한 표정으로 날 빤히 응시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기는 한데, 애써 눌러 참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 라미아스와 시벨리우스도 바닥에 무사희 착지한 듯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이! 꼬맹이! 살았냐?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엘! 괜찮아?> "하하하... 보시다시피." 그때까지도 트로웰의 품에 안겨 있는, 다소 민망한 자세였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몸을 바로 세웠다. 내가 멀쩡한 상태임을 확인하자 라미아스는 안심했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반면, 시벨은 어지간히 놀랐던 모양인지 생전 내지 않던 화를 내며 퍼붓기 시작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엘! 그렇게 뛰어내리면 어떡해?> "윽, 미안..."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그래도 죽었다면, 난 평생 동안 자책하며 괴로워했을 거야!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알았어?> "으응, 알았어. 이제 절대 안 그럴게." 그는 내가 거듭 사과를 되풀이하고 나서야 간신히 화를 누그러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시무시할 정도로 살벌한 눈빛이 되어서는 트로웰을 강하게 쏘아보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나를 더 이상 나무라지 못하게 되자 이 모든 탓을 그에게 돌리기로 작정한 모양이었다.예상대로 그를 향해 격분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너! 네가 엘을 구했다고 해서, 방금 전의 일이 다 해결됐다고 여기지마! 엘이 뛰어내린 것을 전부 네 탓이니까!> "시, 시벨... 이건 그냥 내가 실수한..." <하지만 일을 이렇게 몰고 간 건 저 녀석이잖아! 설령 엘이 그냥 넘어간다 해도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거야!> 하나, 트로웰이 누구던가? 그는 이런 종류의 협박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릿하게 웃으며 신랄하게 대꾸했다. "네 용서따위 처음부터 바란 적 없어." <뭐, 뭐야?> "설마 유니콘 한 마리 따위가 정령왕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더이상 내 신경을 거슬리지 않는게 좋아. 너로 인해서 유니콘 종족이 멸망하고 싶지 않다면." <이, 이 자식이!> 부들부들 떠는 시벨 옆에서 라미아스는 골치 아프다는 듯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 역시 이미 말리기를 포기해버린 상태 같았다. 둘의 반응을 느긋하게 지켜본 트로웰은 이번엔 나를 향해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뭔가 착작하는 것 같은데, 난 널 구할 생각 없었어.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잡았던 것 뿐. 아까 그대로 떨어져서 죽었다면, 나로선 오히려 바라마지않을 일이지. 그러니 행여 무언가 기대를 가졌다면 버리는게 좋을 거야." 그의 말대로 기대를 가진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저런 식으로 자각을 시킬 필요는 없잖아? 왠지 억울해져서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하, 하지만 무의식중에 구했다는건, 그만큼 아끼거나 좋게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 상황을 좋게 해석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내가 괜한 짓을 한 걸까? 그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짧게 중얼거린 뒤, 그대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곧장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멀거니 그의 뒷모습을 쫓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이 차갑게 식는 것을 경험해야 했다. 그의 시선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눈이 닿는 곳마다 땅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르르 진동하는 대지에 간신히 버티고 있던 가옥들이 산산이 조각나 부서지기 시작했다. 떨어진 돌무더기는 그 아래에서 간신히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인간들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으아아악!" "사, 살려줘!" 하지만 일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바닥에 금이 간다 싶더니 쩌억 하고 갈라진 틈으로 순식간에 새빨간 불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용암처럼 넘실거리며 흐르기 시작한 그것은, 아군 적군 가리지 않고 인간과 몬스터들에게 똑같이 덮쳐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생명마다 불길에 닿아 녹아들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아아악!" "그, 그만둬, 트로웰!"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탓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그런 나를 비웃듯, 트로웰은 멈추기는커녕 오히려 지진의 강도를 더욱 강하게 하기 시작했다. 그때엿다. 트로웰의 발치 가까이게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다리를 붙드는 것 이 보였다. 눈물과 콧물로 얼룩진 아이는 트로웰의 사나운 황금빛 눈동자를 보며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 제발 자비를..." 그러나 소녀의 행동은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우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까보다 더욱 살벌해진 눈동자는 분노와 증오에 휩싸여 있었다. 트로웰은 자신을 붙잡고 있는 아이의 손을 거칠게 떨쳐내더니 혐오감 어린 표정 으로 중얼거렸다. "더러워." 그는 곧 바닥에 쓰러진 소녀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아이는 이미 저항할 기운도 없는지 그가 움직이는 대로 힘없이 끌려 다니고 있었다. 그 상태로 천천히 트로웰은 갈라진 땅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하려는 일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부릅떴다. 소녀를 불구덩이 안으로 던져 넣으려는 것이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가 그의 허리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안 돼! 안 돼, 트로웰!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이거 놔." "안 돼! 아직 어린아이야! 살려줘!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잖아! 제발 살려줘!" "살려 달라고?" 끄덕끄덕.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트로웰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마치 인형처럼 감정이 서리지 않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피식 웃고는 잡고 있더 소녀의 목을 놓았다. 털썩! 13-18 통하는 마음 (5) "쿨럭! 쿨럭! 으으으… 흐윽……!"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쳐진 소녀는 괴로운 듯 연신 마른기침을 내뱉었다. 그리곤 뒤늦게야 풀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소녀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트로웰이 소녀의 등을 한 발로 강하게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웰!" 그 잔인한 모습에 나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그러자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의 입에서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날더러 이 아이를 살려주라고 했어?" "…그, 그래! 부탁이야!" "좋아, 살려주지." "헛! 정말?" 이건 또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어찌 됐든 아이가 살았다는 사실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깊이 안도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거기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단, 네가 대신 죽는다면." "……!" "트로웰!" <너, 너 이 자식!> 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나 하나만은 아닌 듯, 뒤편에서 경악한 라미아스와 시벨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트로웰은 나만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어떻게 할래? 네가 이 아이 대신 죽을래?" "그, 그건……." "왜? 역시 망설여져? 하긴, 아무리 너라도 이런 꼬맹이 하나와 목숨을 교환하는 것은 달갑지 않겠지. 아, 그래. 그럼 이건 어때? 네가 죽는다면 인간들을 전부 살려주지. 하나의 희생으로 전부를 구하는 거야. 영웅놀이 하기에 딱 좋은 조건 아닌가?" "무, 무슨 뜻이야?" 영웅놀이라니? 척 듣기에도 그다지 좋지 않은 어감에 나는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그러자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트로웰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말 그대로야. 너로 인해 누군가가 위험에서 구출되는 장면을 보고 싶은 것 아니었어? 스스로는 정의감 운운하겠지만, 결국 자기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는 것을 만끽하고 싶은 거지. 모두의 존경과 감탄을 받는." "그, 그런 거 아니야! 난 그저 널 말리고 싶을 뿐이라고!" "그래? 그럼 죽어봐." "뭐?" "날 말리고 싶다며. 네가 죽으면 다른 인간들은 전부 살게 될 테니, 결국 나를 말리게 되는 셈이잖아. 안 그래?" "……." 이건 나를 시험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나의 죽음을 바라고 하는 소리일까. 도무지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표정에 나는 갑갑한 심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온 시벨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둥, '무시하라'는 둥 떠들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트로웰의 한마디만은 가슴 깊이 박혀들었다. "왜 대답을 못해? 거절하는 거야? 뭐, 난 상관없어. 오히려 그 편이 더 좋으니까. 단지 저들은 널 원망하지 않을까? 너만 희생하면 살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다니 안타깝게 여길지도." "…윽." <닥쳐! 네 잘못을 엘에게 떠넘기지 마! 엘! 저런 녀석의 말에 고민할 것 없어!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그때, 트로웰의 발밑에서 발버둥치던 아이가 격한 신음을 흘렸다. 놀란 내가 황급히 바라보자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 아이가 죽는 것과 동시에, 대륙은 종족전쟁으로 물들게 될 거야." "뭐?" "방금 그렇게 신호를 정했거든. 나 말고도 인간에게 불만이 있는 종족이 상당히 많아서 말이야. 엘프와 드워프, 드래곤과 유니콘까지 전부 내 일을 도와주기로 했어. 지금 그들은 공격 신호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지." "……." "어때? 아직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해?"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솔직히 말하면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다. 속한 세계가 다른 탓에 이곳에서 죽으면 명계로 가지 못하고 영혼의 보석으로 남는다는 사실이 꺼림칙하긴 했지만, 이미 한 번 죽음을 경험한 바 있어서인지 크게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내 경우에는 본 육체가 미래에 있으니, 진짜 죽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잠시 잠들어 있기만 하면, 그 언제가 되었든 기다리다 못한 엘뤼엔이 찾으러 올 것이다.(라피스와 함께 돌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런 걸로 해결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가? 단순히 전쟁을 중단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를 봉인시키고, 진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내가 그를 감화시키는 것은 역시 무리였던 걸까? 갑자기 기운이 빠져,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었다. 어차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그의 비난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이 참에 아예 미친척 해봐도 상관없겠다 싶어 나는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으니까 그 아이는 놔줘." <엘!> "이, 이봐, 꼬맹이!" 내 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시벨과 라미아스가 차례로 당황해서 소리쳤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당장 '그러마' 하고 말할 거라 생각했떤 트로웰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다는 것이다. 나를 똑바로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전에 없이 둥근 파문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거칠고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진심이야?" "그래." "…그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이 뭔데? 그렇게 인간들이 중요한 거야? 네 목숨을 버릴 만큼?" "그건 아니야." "그럼 왜지?"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에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조금 오기가 났다랄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나도 순순히 포기하기가 싫어서." "하! 지금 나를 시험해보겠다는 거야?" "설마. 네 제의를 응하겠다는 것뿐이야."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왠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싸늘하게 들린 것은 내 착각일까? 그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거칠게 풀어내 던졌다. 얼결에 받고 보니 1미터는 되어 보임직한 장검이었다. "이걸 왜?" "그걸로 자결해. 이왕 죽음을 각오했으니, 그 정도 용기쯤은 있겠지?" "……."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나 보다. 트로웰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오른 것을 보면. "왜? 막상 죽으려니까 무서워? 그렇겠지. 너희 인간들은 입으로는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종족이니까. 선택해. 지금 여기서 죽을건지, 아니면 이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건지." "…후우. 그렇게 하겠다고 했잖아. 거짓말 하는 거 아니니까 그렇게 몰아세우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난 못 믿겠는데? 그렇게 진실하다면 당장 증명해봐. 바로 내 눈앞에서." 똑바로 처다보며 요구하는 눈빛이 꼭 고집을 피우는 아이처럼 보여 나는 난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만큼은 그에게 원망스러운 감정이 생기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꼭 저렇게 담달하지 않아도 되잖아?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아픈 건 싫단 말이다! 내가 어쩔 수 없이 검을 내려다보자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시벨리우스와 라미아스의 만류가 이어졌다. <에, 엘! 아니지? 설마 정말 죽을 생각을 하는 건 아니지? 저런 유치한 도발에 말려들지 마. 제발 다시 생각해, 응?> "그래, 꼬맹아. 네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 있냐? 세상에 너만큼 뛰어난 인간이 다시 나올 것 같아? 네가 죽는 건 전 인류의 치명적인 손실이라고."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아니야. 잘 생각해보라고. 지금 보니 트로웰이 널 죽일 생각은 없었던 모양인데, 차라리 기다렸다가 나중에 어디 건실한 엘프 처녀나,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드래곤이라도 아내로 얻어서 명맥을 이어가는 게 낫지 않겠어? 내가 책임지고 소개해줄게! 멋지지 않아? 네가 신인류의 조상이 되는 거라고! 네가 죽으면 엘퀴네스도 굉장히 슬퍼할 거다. 그러니까 그 검은 다시 돌려주고……." 비록 마음이 동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니까. 처음 결정한 대로 밀고 나갈래요." <에, 엘!> "이봐, 꼬맹아!" 난처한 목소리들을 뒤로한 채 나는 다시금 담담히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나는 검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스르릉! 검집 안에서 새파랗게 빛나는 검신이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끌려나왔다. 이쯤이면 당연히 난리를 쳐야 할 라피스가 잠잠한 것이 이상하긴 했지만, 워낙 나에 대해서 잘 아는 녀석이니 만큼 설득하려는 시도 자체를 포기한 거라 여기고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부디 한 번에 즉사하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하게 느껴지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은 다음에 칼끝을 천천히 심장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대번에 안색이 창백해진 시벨과 라미아스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마둬, 엘!> "안 돼!" 하지만 이미 나는 눈을 꽉 감은 채 강하게 검을 찌르고 있는 상태였다. 푸욱! 무언가를 꿰뜷는 섬뜩한 소리가 들리더니 곧 싸한 아픔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소통을 잊기 위해서 더욱 강하게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강하게 내 손을 붙잡아 힘의 진로를 방해하더니, 거의 심장 끝에 닿아가던 검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크윽! 무, 무슨 짓……!"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들어갈 때보다 뽑힐 때의 고통이 더욱 심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뜨거운 피가 마구 쏫구쳐 나와 나는 얼른 두 손으로 환부를 감쌌다. "으윽! 허억, 헉!" 숨을 쉬기가 힘들다. 뜨거운 입김을 토하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따. 대체 누구지? 누가 나를 방해한 거지? 지독하게 아픈 와중에도 나는 나를 막은 존재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막상 고개를 들고 그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심정에 몇 번이나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창백한 표정으로 검을 빼앗아 든 이는 바로 트로웰이었던 것이다. "트로웰? …왜?" 처음엔 환상을 본 건가 싶었다. 이 모든 사건을 부추긴 당사자가 왜 이제 와서 막는단 말인가? 하지만 아무리 보고, 다시 보아도 검을 쥐고 있는 이는 분명 트로웰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이곳에 와서부터는 좀처럼 그에 대해 알 수가 없었지만, 지금 만큼 그의 의도가 이해되지 않은 적은 처음이다. 내가 해명을 구하는 뜻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기겁을 한 일행들이 달려와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엘! 엘, 괜찮아?> "맙소사! 정말로 심장에 칼을 꽂다니! 이 지독한 녀석!" <기다려! 바로 치료마법을 할 테니! 세상에… 피가! 피가!> "어이, 유니콘! 네가 더 당황하면 어떻게 하냐? 그러고 있지 말고 상처를 치료할 생각이면 일단 다른 걸로 변해봐! 그 가로로 긴 덩치가 왔다 갔다 하니까 내가 더 정신이 없잖아!" <시끄러! 어서 치료나 거들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걸까? 둘이 싸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시야를 똑바로 하려고 노력하며 여전히 굳은 듯 서 있는 트로웰을 바라봐았다. 그는 무언가에 화난 듯,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치료가 진행되는 내내 나를 노려보기만 하던 그는, 겨우 통증이 완화되는 순간이 되어서야 입술을 악물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 "죽으란다고 정말 죽으려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너 이렇게 바보였어? 네 목숨이 아무렇지도 않아? 차라리 이전처럼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려서라도 우기지 그랬어! 그게 훨씬 더 너다웠을 거야! 알아?" "하지만… 네가 증명해보라고 했으니까." "무엇을? 네 진심?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인간들을 살리고 싶어하는 마음? 내가 그걸 알아주는 게 네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이렇게끼지 하는 건데!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날 봉인시켜! 그 편이 나도 훨씬 편하니까!" "…그럴 수는 없어. 강제로 그만두게 할 거면 처음부터 널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나는 그저, 가능한 네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모든 것을 중단하도록,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그 방법이 이거였다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 힘겨운 대답에 트로웰은 왠지 한 방 먹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때쯤 두 마법사의 활약으로 심장의 상처가 거의 아물어가고 있었지만, 이번엔 마음의 고통으로 인해 심하게 지끈거렸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달래지는데? 어떻게 하면 내 진심이 전해지는데? 대체 날더러 어떡 하라는 거야? 내가 죽으면 그만둔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렇게 하려고 했던 거잖아." 문득 숨이 급하게 차오르는 것 같다 싶더니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볼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내 눈물에 주위의 일행은 물론 트로웰까지 덩달아 당황해 하는 것 같았다. 턱 아래의 흥건한 느낌이 불편했지만, 나는 닦아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연신 흐느끼며 말했다. "흐윽! 그만두자, 그만 하자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말이 통하지 않은데 어떻게하란 말이야? 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널 막으려는 것뿐이야. 네가 잘못된 길을 가는 게 싫으니까!" "잘못된…길이라고?" "그래! 인간에게 받은 상처가 크다는 거 알아. 하지만 이런 방법은 아니잖아. 이래봤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잖아. 트로웰, 너도 잘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그런데 왜 자꾸 고집을 피우는 건데? 왜 스스로를 나쁘게 만들어가는 거냐고!" "틀려, 난……." "난 원래가 나쁘다고? 원래부터 인간을 증오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왜 나한테는 검술을 가르쳐줬는데? 왜 내게 일 년이나 설득할 기회를 준 건데? 왜 방금 전에 나를 살렸는데? 전부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귀찮아서라고 포장했지만, 사실 누군가 널 말려주기를 기다렸던 거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뭘 모르는 건 너야!" 당당하게 대꾸한 후 나는 입술을 깨물고 있는 트로웰에게 또다시 소리쳤다. "처음부터 옳지 않은 길을 갔으면 다시 돌아와야 할 것 아니야!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멈추질 못하는 건데! 정령왕 주제에 그정도 용기도 없어?" "닥쳐! 더 이상 말하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버리겠어!" "어차피 죽으려고 했어! 네가 막지만 않았으면!" "……." 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내 꼴이 상당히 우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를 훈계하는 모습이라니. 심각한 상황이라지만 얼마나 보기 흉할까. 그런 와중에도 바락바락 소리까지 질러대고 잇으니, 아무리 마음좋은 사람이라도 짜증이 있는 대로 솟구칠 게 틀림없었다. 하물며 당장 마음이 불편한 트로웰이야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그는 분노하기는커녕 오히려 입을 다물었다. 담담한 척하고 잇지만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안에 서린 마음의 갈등을 알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격해졌던 감정을 추스르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흐윽! 이제 그만 하자, 트로웰." "……." "제발 그만 하자. 현명한 너라면 이런 식 말고도 얼마든지 감정을 다스릴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너무 힘들었잖아. 지금까지 계속 괴롭기만 했잖아. 이제는 그만 하고 편해질 때도 됐잖아. 응?" "힘든 적 없어. 괴로웠던 적도 없고." "거짓말. 자꾸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마. 사실은 그만두고 싶었잖아. 말려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 네가 아무리 그대로 난 네 고집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까지 들은 이상, 끝까지 설득할 거야. 알았어? 흑! 그러니까 네가 먼저 포기해. 그게 이 세계에 온 내 임무니까." "임무? 잘 부탁한다고 했다니… 누가?" "있어. 너랑 아~ 주 많이 닮은 사람." "……." 별로 궁금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애매한 내 대답에도 그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뭔가 깊이 고민하는 눈치로 한참 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끊임없이 흐를 것 같던 눈물이 지쳐서 겨우겨우 멈출 무렵, 살짝 얼굴을 찌푸린 그의 입에서 탁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나를 믿는 거지?" "…뭐?" "내가 너한테 기대를 심어준 적이 있던가? 한 번도, 단 한 번도 너한테 먼저 손을 내민 적도, 잘해준 적도 없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나를 믿으려고 하는 건지… 난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리는 것을 보니,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가족을 믿는 것에도 이유가 필요해?" "…뭐?" "말했잖아. 난 널 좋아한다고. 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넌 아무것도 없다고 하지만, 내가 네게서 받은 거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는 거야. 차가운 얼굴에 감춰진 따뜻한 내면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자 트로웰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거니? 아직도 내가 상냥하다고?" "응."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네 앞에서 인간들을 죽이고, 마을을 부수고, 심지어 너를 죽이려고까지 했는데!" 더듬더듬 말을 내뱉을 때마다 트로웰의 황금색 눈동자가 동요하며 출렁거렸다. 이제 완전히 눈물을 멈춘 나는 생긋 미소로 화답했다. "아니, 넌 내가 생각한 그대로야. 트로웰, 결국 죽이지 못하고 살렸잖아?" "…그건……." "내가 늘 말했었지? 넌 괜찮다고. 이번은 절대 가볍게 듣지 말아줘. 넌 원래는 상냥하고 괜찮은 성격이야. 지금은 단지 겉잡을 수 없는 분노 속에 휘말려 잠시 그것을 잊고 있을 뿐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해?" 항상 황당하다는 듯이 바라보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 되묻는 트로웰은 어딘지 궁지에 몰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간절한 눈빛에 나는 생각을 이을 필요도 없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봤어?" "… 너 혼자만 그렇게 보는데도?" "그야 아직 다른 사람들은 네 진가를 모르니까 그렇지. 사실 나도 이번 일로 인해 여러 가지로 놀라긴 했지만, 그동안 네게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어.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니까. 언젠가는 꼭 돌아올 거라 믿었거든. 그리고 난 지금이 바로 그 시기일 거라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 이번에도 내가 너무 앞서서 기대한 거야?" "……."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트로웰은 조금 당황한 듯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침묵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이전보다 한층 맑아진 상태였다. 여전히 복잡하고 혼란이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더 이상 아까와 같은 번민의 빛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비로소 그가 마음속의 생각을 정리했음을 깨달았다. 어떤 말이 떨어질지 조마조마하며 기다리는 내게, 그는 엷게 웃고는 뜬끔없이 물었다. "네가 검으로 심장을 찔렀을 때, 내가 막지 않았다면 넌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그렇지?" "응? 아, 그, 그랬겠지." "그럼 넌 이미 죽은 걸로 봐도 무방하겠군." "아, 그, 그런가?" 내가 얼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럼 할 수 없네. 종족전쟁은 그만둘 수밖에." "…어?"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설마 이게 환청은 아니겠지? 그토록 원하던 말을 듣고서도 나는 놀라서 굳은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빙긋 웃는 그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네가 죽는 대신 다른 인간들을 살린다' , 그렇게 약속했잖아? 설마 내가 널 살리게 될 줄은 몰랐으니, 네가 약속을 불이행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러니까 나도 내가 한 말을 지키겠어. 아무리 나라도 거짓말 할 생각은 없으니까." "…트, 트로웰!" 뒤늦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나는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을 느끼고 용수철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말없이 미소만 짓고 있는 트로웰에게 달려가 와락 품에 끌어안았다. 갑작스런 포옹에 놀란 듯했지만, 이 순간엔 너무 기뻐서 그가 불편해할 것이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말이야? 정말 그만두는 거지?" "그렇게 믿을 수 없으면 다시 없던 일로 해도……." "아, 아니야! 믿어! 정말로 믿어! 고마워, 트로웰! 정말 고마워!" "…고마워할 쪽은 나야." 그 순간,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까지 나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그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얼마나 이때가 오기를 기다려왔던가! 간신히 멈추웠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오랜 시간 동안 잃어버린 가족을 이제야 겨우 되찾은 기분이었다. 13-19 통하는 마음 (6) 전쟁을 중단하는 것이 결정되자 모든 것이 일사천리였다. 트로웰은 제일 먼저 도시 안에서 날뛰고 있던 몬스터부터 물리도록 지시했다. 절대자의 권력 아래 마음껏 살육을 일삼던 놈들은 그의 후퇴 명령 한마디에 꼼짝없이 성밖으로 내쫓겼다. 다행히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이미 민가는 모조리 피해를 입은 상태였으나, 이보다 더 큰 희생이 벌어지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우리 중에서 가장 신이 난 것은 라미아스였다. “하핫! 잘 생각했다고! 정말 내가 얼마나 그 말을 기다려왔는지 알아? 정말 감동해서 울 뻔했어, 트로웰.” “네 눈물 따윈 하나도 반갑지 않아.” “쳇, 여전히 쌀쌀 맞기는. 자자, 그럼 나는 지금부터 이종족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이번 일에 대해 알려야겠다. 당장 전쟁이 중단되었다고 말해줘야지. 헤헷! 로드 자식, 쌤통이다! 아마 땅을 치고 통곡하겠지?” “아, 부탁드려요, 라미아스님.” “걱정 말라고. 아무튼 정말 고생 많았다, 꼬맹아. 네가 정말로 죽으려고 했을 땐 어떻게 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잘 해결되어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알면 됐어. 다음부터는 절대 그러지 마라.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생각보다 상처가 가벼워서 치료마법으로 치유가 됐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거야.” “네에,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번 일은 확실히 무모하게 밀고 나간 부분이 있었기에, 나는 군소리 없이 몇 번이고 사과를 건넸다. 그에 라미아스는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괜찮다고 말하곤, 곧 떠날 의사를보였다. 제일먼저 엘프 마을부터 들른다던 그는, 출발하기 전에 아직도 본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시벨을 향해 말했다. “어이, 유니콘 마을에는 네가 알려줘.” <뭐? 내가 왜?> “너희 종족의 일이잖냐?” <싫다! 난 당분간 마을에 돌아갈 생각이…> “아무튼 난 그렇게 알고 간다! 그럼 이만 다들 잘 있어! 다음에 또 보자고! “ <앗, 이 이봐!> 당황한 듯 시벨이 황급히 소리쳤으나, 이미 라미아스는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린 후였다. 그러자 자리에 굳은 채,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녀석을 잠자코 지켜보던 트로웰이 차분하게 한마디 건넸다. “어차피 그들은 내 신호가 오지 않은 이상 먼저 인간들을 공격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가기 싫으면서 지금 당장 찾아가 알려줄 필요는 없어.” <시, 시끄럿!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그래? 난 또. 속으로 하도 고심을 하기에 안쓰러워서 말했지.” <뭐, 뭐야?> 속마음을 들킨 것에 화가 난 듯, 시벨이 얼굴을 붉히면서 성질을 부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트로웰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태도였다.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고개를 돌린 그는 이윽고 나를 향해 물었다. “너와 개인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게 있는데, 괜찮겠어?” “응? 둘이서만?” “그래. 이곳은 너무 시끄럽군.” <뭔? 안 돼! 엘은 아직 환자라고!> “너한테 물은 거 아니다, 유니콘.” <저, 저게~~!> 씩씩거리는 시벨을 이번에도 가볍게 무시한 채, 트로웰은 다시금 내게 시선을 두고 물었다. “어떻게 할래? 선택은 네게 맡길게.” “조, 좋아! 나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까.” “그럼 장소를 옮기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트로웰은 손을 내밀어 가볍게 내 팔을 잡았다. 그 순간, 주위의 사물이 일순 어지럽게 변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나는 생판 모를 널따란 초원 위에 서 있었다. 생기 가득한 풀잎과 향기로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운 장소였다. “와아~ ” -까르르륵! -꺄하하하! 바람이 불때마다 흔들리는 꽃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방금 전에 보았던 끔찍한 지옥이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이곳엔 온통 주위를 노니는 정령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마음껏 감탄할 여유도 없었다. 도착하자마자 다짜고짜 질문부터 건네기 시작한 트로웰 때문이었다. “넌 누구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날더러 누구냐니?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나는 마냥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설명했다. “이런 말 하면 이상하게 여길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할게. 처음부터 넌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뭐?” “겉모습은 인간인 게 확실한데, 여러 가지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았거든. 혜안이 통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단순히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걸로는 설명하기 힘든 친숙하고 모호한 느낌이었지. 지금도 그래. 그래서 너를 대할 땐 거부감이 없었던 게 사실이야.” “아하하.. 그, 그게 말이지….” 개인적인 대화라더니 설마 이런 기습을 당할 줄이야.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에 나는 마땅히 둘러댈 말조차 찾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러자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던 트로웰이 픽 하고 웃더니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이거야? 좋아, 그럼 질문을 바꾸지.” “에?” 쏴아아- 또다시 바람이 불었다. 풀 향기 가득한 초원의 느낌이 무척 좋았지만, 나는 이어질 트로웰의 질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여유롭게 만끽할 수도 없었다. 조마조마한 눈으로 주목하기를 한참, 드디어 벌어진 그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왜 여기에 온 거지?” “….! ” 흠칫! 어깨가 떨렸다. 왜 ‘여기에’ 온 거냐니? 그건 나를 처음부터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태도를 보니 아마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라는 것까지는 알지 못해도, 그에 비슷한 존재라고까지는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나는 속으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난 평범한 인간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좀 멀긴 하지. 이쯤에서 들키는 것이 당연했던 건지도.' .. 이렇게 된 바에야 대충 털어놔도 상관없지 않을까? 난처한 심정이 된 것도 잠시, 갑자기 이 상황이 재미있어져서 나도 모르게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에 당황한 얼굴을 하는 트로웰에게 일부러 입가에 손가락까지 가져가며 무척 신중한 얼굴로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너한테만 가르쳐줄게.” “….뭐?” “실은 이곳에서 꼭 만나야 할 녀석이 있었어. 으음,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알까? 내 소중한 친구가 나를 대신해서 죽었거든. 그 녀석의 영혼을 담고 있는 ‘무언가’를 찾으러 왔어.” “친구의 영혼을 담은 무언가를?” 무심코 되묻던 그는 곧 그게 뭔지 깨달았는지 퍼뜩 고개를 틀었다. 누구보다 눈치가 빠르고 똑똑한 그이니만큼 지금 내가 한 말을 통해 단번에 영혼의 보석과 연관이 있음을 알아냈을 것이다. 잠시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는 곧 어색한 듯 시선을 피했다. 아마도 꽤 많은 사연을 담고 있을 그것을 이런 식으로 자신이 알게 되어 미안한 모양이었다. 쉽게 볼 수 없는 모습에 웃음이 나와, 나는 얼른 고개를 저어 보였다. “괜찮아. 네가 그런 얼굴 할 것 없어.” “아니, 난 그저… 하아, 최대한 비밀로 해줄게. 알려지면 여러가지로 곤란한 일일 테니.” “상관없다니까? 어차피 전부 잊을 테니까.” “뭐?” 트로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부러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하더라도 결국 잊어버릴 거라면, 그냥 모르는 채 남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은 전부 끝났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13-20 이별 (1) 좀 더 함께할 거란 생각과는 달리 트로웰은 바로 정령계로 돌아갔다. 아직도 봉인되어 있는 미네르바의 옆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함께 여행하지 못하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 나와 시벨은 텔레포트 마법을 통해 이전에 머물고 있던 마을로 돌아왔다. 정령계에 있던 엘뤼엔이 다시 온 것은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였다. 나타나자마자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는 뜬금없이 내게 치료술을 시전했다. 그리곤 어리둥절해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팠냐?” “응? 뭐가?” “…하긴, 너무 당연한 걸 물었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검을 꽂았으니, 아프기도 제법 아팠겠지.” “헉! 어, 어떻게 알았어?” 그제야 나는 비로소 그가 나의 자살 미수 사건(?)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이미 돌아오기 전부터 그 건에 대해서는 절대 비밀로 하기로 시벨에게 철저히 약속을 받아낸 상태였기에 내가 느낀 혼란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설마 트로웰이 말했나? 아니면 라미아스가?' 시벨을 제하고 사건을 알고 있는 이라면 그들뿐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엘뤼엔의 성격을 잘 아는 그들이 이번 일을 솔직하게 말했을 거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그러자 이런 내 의문을 눈치 챈 듯, 엘뤼엔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령계에서 지켜본다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새 잊어버린거냐?" "...하하하! 그, 그랬었지, 참!" 정령왕이 하급 정령들을 통해 대륙의 모든 동태를 파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아마도 실시간 생중계로 나의 상황을 듣고 있었으리라. 그럼 나는 아버지 앞에서 자결하려 한 불효막심한 아들이 된 건가? 무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미, 미안해, 아버지." "...됐다. 여하튼 다시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마라. 쯧! 협박을 하고 오랬더니, 제 목숨을 내주려고 하고, 아주 잘하는 짓이다."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고는 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니,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당시 마음이 아무리 조급했더라 해도 나를 생각해 주는 이의 입장을 한 번쯤은 헤아렸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미래의 그가 알았다 해도 분명 슬퍼했으리라. "다시는 안 그럴게, 내가 잘못했어, 아버지." "그 말을 믿겠다. 덕분에 수명이 준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톡톡히 깨달았으니 말이다. 이거 어느 날 갑자기 아들이랍시고 생겨가지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정신을 빼놓으니, 원," "헤헤헤...." "웃지 말.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너도, 트로웰도 다음에는 절대 경고만으로 끝나고 넘어가지는 않을 거다." "응? 나는 그렇다 치고, 트로웰이라니? 설마 트로웰한테 뭐라고 그런 거 아니지?" 이전까지 소멸 운운하던 것이 생각나서 나는 금방 핼쑥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가볍게 혀를 찬 엘뤼엔이 내 이마에 가볍게 꿀밤을 먹였다. 딱! "아얏!" "넌 이 순간에도 그 빌어먹을 녀석을 걱정하는 거냐? 그 걱정을 정말로 현실로 이루어줄까?" "헉! 아, 아니야, 아버지! ...에? 잠깐! 정말이라고? 그럼?" "가볍게 경고만 했다고 했잖아.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소멸시켜도 풀리지 않지만, 네 노력이 가상해서 참아준 거다." 엘뤼엔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말이었다. 그가 언제 남의 사정을 신경 쓰느라 인내한 적이 있었던가! 딱딱하게 대꾸하는 그의 얼굴에 환한 후광이 빛나는 것 같았다. 나는 감격해서 그를 덥석 끌어안았다. "와아! 고마워, 아버지!" "..쯧, 이럴 때만 고맙겠지." 여전히 퉁명스러운 말투이긴 했으나, 날 밀어내지 않는 걸 보면 그다지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쯤에서 근처 도시에 몬스터 떼가 습격한 일이 알려지면서 분위기가 몹시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빌미로 각 마을마다 몬스터 경계령이 내려지고 검문이 더욱 강화되었기에 우리는 당분간 지금의 장소(리첸)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혹여나 돌아다니다가 쓸데없는 심문을 받는 일은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은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조심서잉 강한 건지, 과민한 건지 일이 주 정도쯤이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던 경계령은 한 달이 다 되도록 풀리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리 일행이 리첸에 머무는 시간도 길어지고 있었다. 거리마다 분위기가 흉흉하긴 했지만, 이미 모근 사건이 마무리되었음을 알고 있는 나로선 어떠한 불안함도 생길 리 없었다ㅏ. 그저 느긋하게 귀환 주문만 떠올리면 되었기에, 하루하루가 태평하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나를 단번에 현실로 잡아끈 것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는 라피스의 목소리였다. <어이, 너! 돌아갈 생각이 있기는 한 거냐?> 녀석이 귀환의 문제로 신경질을 낸 것은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언제는 계속 눌러 앉아도 상관없을 것처럼 굴더니, 역시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갑갑한 걸 싫어하는 녀석이 이제껏 잘 참고 있다 했더니만, 결국은 화가 터진 건가. 나는 미안해져서 얼른 대답했다. "어, 어쩔 수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주문이 안 떠오르는 걸 어떡하라고." <그렇다고 주문이 떠오를 때까지 평생 눌러앉아 있을 작정이야?> "으음, 그럼 어떡해?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럼 빨리 생각나게 해달라고 기도라도 하던가! 그렇게 실실거리고 있으니까 더 열받는다고!> "나 참, 알았어. 신전에라도 가면 될 거...어! 방금 뭐라고 그랬어, 라피스? 기도?" <그래! 하도 답답해서 그런다, 왜!> "바로 그거야!" <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목소리에 나는 기뻐서 펄쩍펄쩍 뛰고 싶은 것을 참으며 소리쳤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카노스가 있었잖아! 카노스라면 귀환의 주문을 알지도 몰라!" <.. 아아, 상급 신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이럴 게 아니라 당장 마신전에 가봐야겠다! 또 알아? 운이 좋아서 정말 알 수 있게 될지?" <그렇군.> "응? 말투가 왜 그래?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는데 기쁘지 않아?" 생각보다 힘이 없는 목소리에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녀석은 한참 동안 침묵하더니 곧 볼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그냥 바보가 다 되었다 싶어서.> "바보라니?" <뿌득! 너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해봐라. 그 간단한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었다는게 화가 나지 않냐?> "......" 이번만큼은 나 또한 그의 말에 백 퍼센트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지난번 마신전의 방문 때만 해도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던가. 내가 하는 일은 전부 왜 이러는 건지. 라피스 녀석을 찾을 때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가까운 거리를 멀리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심 끝에 애써 위안이 될 한마디를 건넸다. "그냥 팔자려니 하자. 하하하하하!" <그것도 위로라고 하냐?> 소리치지만 않았지,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히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그 뒤로 쉴 틈 없이 투덜거리는 말에 '무사태평' 이 어쩌구 하는 것을 보면, 내게 단단히 감정이 상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삐질.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안해, 라피스. 내가 명계에 잘 부탁해서, 다음 생도 멋진 종족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힘써보마. 그러니 지금의 실책을 잊어주지 않으련? 하하하하하! * * * "갑자기 마신전에는 왜 가는 거야?" 결심을 굳힌 즉시 나는 차림을 정비하고 마신전으로 출발했다. 그리고 서둘러 뒤따라오며 이유를 궁금해 하는 시벨에게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도하러." "뭐? 엘, 너 마신교의 신도였어?" "아니. 하지만 꼭 신도만 기도하라는 법은 없잖아?" "으음,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기도는 왜?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거야?" "응. 신에게 꼭 물어볼 게 있거든." 당당한 내 대답에 시벨은 영문을 모르겟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조금 황당하다는 눈빛인 걸 보니, 내 행동이 너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신이 어디 물어본다고 쉽게 대답해주는 존재던가. 사실 나로서도 불안한 심정이었다. 어쩐지 카노스라면 부름을 무시할 가능성이 99.9퍼센트의 확률에 이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연락할 일이 있을 땐 기도라하고 했지만, 그것에 반드시 응해 준다는 답변은 한 적이 없었으니까. 천근만근 같은 심정으로 걷다 보니, 얼마 지마지 않아 마신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낌이 이상했다. 지난번에는 엄숙하긴 했어도 개방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어쩐지 이번엔 주위를 잔뜩 경계한 듯한 살벌한 기색이 도처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인 이유는 신전 앞에 와르르 깔린 신의 기사들 때문이었다. 신전을 오가는 이들을 터치하지는 않았지만, 험상궂은 표정으로 주위를 샅샅이 살피는 모습을 보니,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 내가 그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접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네? 마신의 헌물을 도둑맞았다고요?" 나처럼 기도하러 온 듯한 한 남자가 알려준 말에 나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러자 그는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추고 설명했다. "쉿! 목소리가 커, 이 사람아. 글세, 그렇다고 하더군. 지난번 축제 때 다섯 가지의 서클렛을 공개하지 않았던가? 그중 하나가 그날 사라졌다는 거야." ".....!" 그 순간, 나는 시벨과 동시에 시선을 마주 보았다. 라반 루 웰디! 그녀가 무심코 가져왔던 서클렛이 떠올랐다. 아마 시벨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맙소사! 그대로 들고 돌아간 건가?' 얼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어떻게든 동요하는 것을 감추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내 행동에서 별달리 이상한 것을 느끼지 못한 듯, 상대편 남자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제 할 말만을 늘어놓고 있었다. "확실히 그날 다들 정신이 없었지 않나. 아무래도 그날 선택받은 여자들 중 한 명이 돌려주는 것을 잊고 간 모양인데. 쯧쯧! 그 귀한것을 가졌으니 욕심이 날 만도 하지. 마신의 화를 입기 전에 가져다주면 좋으련만. 아무튼 그 때문에 신전이 발칵 뒤집 혔으니, 아무쪼록 자네도 행동을 주의하게. 신관들께서 그 일로 전부 예민해져 계시다더군." "아, 예....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허허,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럼 이만 수고하게. 나도 기도를 마치고 돌아가 봐야겠네." "살펴가세요." 남자는 웃으면서 떠났지만, 남겨진 우리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웰디가 서클렛을 가져갔다니. 일족이 도둑으로 오해를 샀으니 시벨도 마음이 편치 않겠지만 내 경우, 이로 인해 벌어질 일을 알기에 더욱 심정이 착찹했다. 그래서 시벨이 말을 이었을 땐 심장이 덜턱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마 마을에 있을 거야. 내가 가서 가지고 올게, 엘." "응? 뭐, 뭐?" "뭘 그렇게 놀라? 그 서클렛 말이야. 내가 마을에 가서 가져오겠다고. 유니콘은 남의 물건에 욕심을 내지는 않으니까, 아마 가져온 그대로 보관해두고 있을 거야." "헉!아, 안 돼!" "응? 왜 그래, 갑자기?" 내 과민한 반응에 시벨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막상 눈이 마주치고 나니 말이 목구멍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겨우겨우 한 거라곤 어떻게든 녀석이 가지 못하게 말리는 것분이었다. "그, 그냥 내버려둬. 웰디 양도 가져간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알아서 돌려주겠지. 네가 일부러 가서 가져올 게 뭐 있어?" "그건 엘이 우리 마을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웰디는 장로의 손녀인 데다 여자이기 때문에 외출이 그리 쉽지 않아. 다연히 그녀의 호위기사들도 마찬가지고. 그 애들이 돌려주기를 기다렸다간 한세대가 훌쩍 지나가버릴 걸? 내가 다녀오는 편이 빨라." "글쎄, 그냥 내버려두라니까!" "에, 엘? 왜 그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나도 모르게 새되게 나간 반응에 당황한 듯, 시벨은 금세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나는 아차 싶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그냥.. 일단 가지 마.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 "으음, 알았어. 엘이 그렇게 말한다면...." "그래, 잘 생각했어." 미래는 바꿀 수 없지만 이걸로 당장 녀석이 봉인되는 순간은 미를 수 있을 것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시벨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깊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3-21 이별 (2) 기도실을 관리하는 신관으로부터 특별히 독실을 부탁한 나는 잠시 후, 적당한 방 하나를 안내받을 수 있었다. 살작 열어보니 이전에 엘뤼엔이 현신했을 때 들어갔던 장소에 비하면 무척 좁고 협소한 공간 이었지만, 그래도 혼자서 은밀히 카노스와의 대화를 시도하기에는 꽤 적당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되도록 카노스와의 인연을 알리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는 혼자 기도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기도실 주변엔 대기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벤치가 있어, 놔두고 가는 미안함을 한결 덜어낼 수 있었다. "그럼 시벨,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응, 알았어." 생긋 웃으며 대답하는 시벨을 뒤로하고, 나는 심호흡을 한 채 기도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들어서니, 기도에 집중하게 하기 위함인지 촛불 하나켜 있지 않은 방 안에 곧장 새카만 어둠이 밀려 들어왔다. 나는 대강 적당한 장소를 찾아 앉은 다음, 왼손의 문장이 존재하는 부위를 문지르며 조용히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카노스! 카노스, 들려요?' 뭔가 바쁜 일이 있는 걸까? 카노스는 내가 몇 번이나 부르는데도 전혀 응답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내 부름에 대답할 생각이 없는 걸지도 몰랐다. '제발 대답 좀 해요, 카노스! 카노스으으으!' 그에 점점 더 마음이 조급해져서 쉴 새 없이 그의 이름을 되풀이 하던 순간이었다. 어딘지 잠기운이 가득 담긴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아함, 뭐야~ 누가 이렇게 정신없이 내 이름을 부르는 거래?> '카노스!' 기다렸던 만큼 반가운 마음에 나는 얼른 소리쳤다. 그러자 내 목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의아함을 가득 담은 답변이 이어졌다. <어라? 넌 미래에서 온 정령왕이잖아? 호오~ 나한테는 웬일이지? 무슨 일 있어? 얼레? 지금 보니 내 신전에 있는 거잖아? 되게 급한 일인가 봐?> '네! 저기, 카노스한테 부탁할 게 있어요! 사실은요....!' <아니, 아니다. 잠시만 기다려. 내가 거기로 갈게.> '네?' 파아앗! "윽! 뭐, 뭐야?" 어리둥절해져서 되묻는 순간, 나는 갑자기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눈부신 빛에 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얼떨덜해져서 눈을 떠보니, 입가에 생글거리는 웃음을 가득 띠운 검은 머리의 청년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카노스의 현신이었다. '...이 세상에 나처럼 신의 현신을 쉽게 목격하는 사람이 또 있을가?' 그는 아연해져서 있는 나를 향해 반갑게 한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잉~ 올만이지?" "뭐, 뭡니까? 그 인사는?" "응? 몰라? 지구라는 차원 중에 한국이라는 국가가 있는데, 거기 애들이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하더라고. 귀엽지? 귀엽지?" "귀, 귀엽긴 뭐가 귀여워요? 그보다, 아까는 왜 그렇게 늦게 대답하신 거예요?" 찾아와준 것도 감지덕지인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일부러 배짱을 튀기며 나무라듯이 물었다. 적어도 그가 나를 무시할 생각이 없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는 상큼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고 있었거든." "....." 어이, 당신! 신계에서 최고로 바쁜 상급 신 아니었어? 저렇게 뻔뻔하게 자고 있었다고 대답할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카노스는 이번에도 역시 위대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잠이 얼마나 피부 미용에 효과적인 줄 알아? 이 탱탱한 젊음을 유지하려면 밤에는 물론, 낮에도 꼭 낮잠을 자줘야 한다고." "...신이 무슨 피부 관리예욧! 늙지도 않는 주제에!" "후후~ 재밌잖아~ "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더 이상 떠들어봤자 나만 손해라는 생각에 나는 참을 인자를 새기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빙긋 웃은 카노스의 눈빛에 번쩍 빛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어? 그러고 보니 영혼의 보석 찾았네?" "네? 아아, 예. 어떻게 하다 보니 우연히..." "이야~ 제법이잖아? 꽤 둔한 것 같아서 앞으로 한 몇 년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그간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셨는지 알게 돼서 영광입니다." "후훗! 그렇지? 마음껏 기뻐해도 좋아." "......" 말발로는 그를 절대로 못 이긴다. 나는 다시 한 번 참을 인자를 새기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자 키득거린 카노스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왜 날 찾아온 거야?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으음... 그게요,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가 생겨서....." "무슨 문제?"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잠깐의 침묵. 그 뒤의 상황이야 뻔했다. 모든 사태를 깨달은 카노스가 박장대소하며 웃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기야 남의 일이니 재밌기도 하겠지. 어쨋든 이번 일로 그는 나를 확실히 바보로 단정 지을 것이 분명했다. 그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으며 내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크하하! 너, 진짜 대박이다! 히익! 히이익! 우째 이런 일이! 아이고, 마신 살려! 나 죽네! 크하하하하하!" "윽! 아파요, 치지 좀 마세요." "크큭! 미, 히이익! 미안. 으하하! 너무 웃기니 어쩌냐! 아이고, 배야! 냐하하하하~ " "...네, 네. 마음껏 비웃으세오. 단, 다 웃고 나면 반드시 주문을 가르쳐주셔야 해요." 하지만 다음 순간에 이어지는 말에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으니! "응? 그런 주문 모르는데?" "컥!" 언제 웃었냐는 듯, 곧바로 표정을 싹 바꾸고 대꾸하는 말에 나는 격한 신음을 내뱉었다. 머릿속의 핏기가 한순간에 가시는 기분이었다. "자, 장난하시는 거죠? 제발 그렇다고 말해주세요!" "아니. 정말 몰라. 귀환의 주문은 궤도마다 다르기 때문에 널 이곳에 보낸 신만 알고 있을 거다." "그, 그럴 수가!" "그러게 왜 그런 걸 잊어버리고 그러냐. 인간의 몸이라 망각이 작용해버린 모양인데, 그런 것은 좀 빨리 눈치 채고 어디 종이에라도 적어두지 그랬어." 진지하게 말하는 표정 어디에도 진실을 감추는 기색은 없었다. 정말 돌아갈 가망이 없단 말인가?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그럼 어떻게 해요? 저 이제 못 돌아가는 거예요?" "으음, 주문을 기억해내지 못하는 한, 자력으로 가기는 힘들 거다." "그, 그런! 아, 그래! 제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나요?" "불가능. 일반 인간의 뇌라면 모를까, 네가 기억하고 있는 주문은 네 영혼에 새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손대기 힘들어. 신이라도 정령왕의 기억은 함부로 조작할 수 없거든." "하지만 지난번에는 엘퀴네스의 기억을 바꾸셨잖아요!" 언젠가 그가 인어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돌아가고 난 뒤의 그를 기억한 이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자, 카노스는 덩달아 눈을 부릅뜨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래! 그때 내가 티는 안 냈지만 얼마나 고생한 줄 아냐? 몰래 잠식해서 그 부분에 대한 기억만 소거하는데, 그 찰나의 순간 손을 쓰느라 정말 눈물나올 뻔했다. 되살리는 건 그보다 몇 배나 더 어렵다고." "윽!" 다시금 절망을 확인하고 나니 그대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카노스는 전에 없이 놀라며 무척 당황하기 시작했다. "헉! 너 지금 우냐?" "어엉! 그럼 이 상황에.. 울지 않게 생겼어요? 흐윽, 흑!" "어, 어이! 일단 진정해 봐라. 다짜고짜 울기부터 하면 어떡하냐?" "그, 그치만!" "뚝 하라니까? 잠깐 기다려봐. 자아~ 어디 보다... . 너 이곳에 온 지 일 년 넘었지? 끄덕끄덕. 울고 있는 와중에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뭔가 깊이 생각에 빠져든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내 등을 철썩!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치는 것이 아닌가! "으악! 무슨 짓이예욧!" "냐하하하~! 걱정 마라. 곧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에? 그게 정말이예요? 어, 어떻게요?" "아이~ 이럴 때 내가 무슨 대답하는지 알~ 면~ 서~" "......." 결국 또 비밀이라는 소리로군. 당황할 때는 언제고, 순식간에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카노스의 모습에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그가 저렇게 태연하다는 것은, 내가 반드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자, 이제 됐지? 그러니까 울지 말고 차분히 때가 오기를 기다리라고." "때라니.. 제가 여기에 온 지 일 년이 된 것과 관계가 잇는 건가요?" "냐하하~ 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자, 그럼 난 이만 갈란다. 여기서 더 길어지면 수면 부족이거든. 피부에 치명적이야." "...아직도 그 소리신가요." "왜? 새삼 반했어?" "안녕히 가세요."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뜻으로 바로 작별 인사를 하자, 눈에 띄게 서운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더니 곧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계에서 너를 보는 것은 오늘로 마지막이겠구나. 꽤 재미있었는데, 아쉽군." 마지막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거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돌아가면 이제 다시는 카노스를 볼 수 없구나. 그 생각을 하니 이제 곧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도 그다지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나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기뻤어요, 카노스. 여기서 이렇게 다시 뵐 수 있게 되어서." "후후! 왜 갑자기 분위기가 어두워지냐? 지금 일이야 기억 못하겟지만 어차피 나중에 또 볼 텐데." "그, 그게..." "킥킥! 어쨌든 잘 가라고, 후배님. 나중에 다시 볼 날을 기대하겠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는 모습을 보니 갖가지 민감이 교차했다. 이미 대강의 미래를 짐작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이 모습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가볍게 웃고 있는 그 앞에서 나는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말속에는 생각보다 여러 가지의 뜻이 숨어들어있음을, 이때의 나는 결코 알지 못했다. 내가 그의 말속에 감춰진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13-22 이별 (3) "시벨리우스, 이제 그만 돌아……. 어? 시벨?" 카노스와 헤어진 뒤 기도실을 나온 나는 곧바로 당황했다. 당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할 시벨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사이에 산책을 나갔을 리는 없고, 혼자 돌아간 건가?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근처에 있던 수습신관 중 한 명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 아, 저어… 여기에 일행이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없어져서요. 혹시 못 보셨나요? 키는 굉장히 크고 후드를 눌러쓴……." "아아! 그분이라면!" "알고 계십니까?" 생각보다 긍정적인 반응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신관이 소매 안에서 곱게 접은 종이를 꺼내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봉투로 밀봉된 편지였다. 그는 그것을 내게 전해주며 친절한 어조로 설명했다. "큰 키에 후드를 쓰신 분 말이지요? 마침 그런 차림의 분이 한 분 밖에 안 계셔서 구분이 쉬웠습니다. 그분께서 일행 분이 나오시면 이걸 전해주시라고 하셨습니다." "……."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기분에 나는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개봉했다. 이윽고 단정한 글씨가 펼쳐지는 순간, 나는 차마 다 읽지도 못하고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엘. 정말 미안해, 마신의 헌물이었던 서클렛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마을에 돌아가서 가져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 지금 보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웰디의 인상착의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야. 녀석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올 일이야 없겠지만, 일족의 여성이 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놔둘 수는 없잖아. 네가 말리는 거 뻔히 알면서 이런 결정 내려서 미안해. 금방 다녀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저녁 안으로 돌아올게. -시벨리우스-〕 "…바보 같으니." 그렇게 가지 말라고 했건만. 결국 이런 식으로 헤어져버리는 거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기도실 안에 같이 들어가는 건데. 아니, 처음부터 나 혼자 마신전에 오는 건데 그랬다. 이렇게, 이런 식으로 헤어질 줄 알았다면 마지막 인사라도 해둘 걸. 너무나 허무한 이별에 가슴이 휑하게 빈 것 같았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건, 그는 돌아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그 사실 하나만이, 지금의 헤어짐을 간신히 버틸 수 있게 만들었다. 나는 일부러 툴툴거리는 것으로 서늘해진 가슴을 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가지 말랬는데 왜 무시하는 거야? 꼭 모든 사실을 털어 놔야만 조심할 생각인가? 저녁 안으로 돌아오는 것 좋아하네. 다음에 만나는 건 4천 년 후란 말이야!" 안녕, 시벨리우스. 지금은 이별이지만, 그대로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을 거야. 그렇지? 긴 한숨을 내쉰 뒤, 나는 편지를 다시 정리하여 품속에 집어넣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 * * 서클렛을 가져오기 위해 마을을 찾은 시벨이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마을 입구를 넘어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언제나 조용한 편이긴 했지만, 이날따라 마을의 분위기가 너무 고요했다. 그렇다고 안에 일족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분명히 움직이고, 대화를 하는 자들이 있는데도, 뭔가 하나 둘씩 빠진 듯한 썰렁한 느낌이 들었다. 한참을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그는 드디어 그 이유를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마을 안에 여성과 어린아이의 모습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단체로 어디론가 놀러갈 일이 없는 일족이라서 그 공백이 더욱 크게 느껴졌다. 다들 어디에 간 거지? 그때, 불현듯 엘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졌다. '가지 마, 시벨.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아서 그래' 오늘따라 유달리 날카로워져 있다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단순히 예민했던 게 아니라면? 엘은 혹시 앞으로 벌어질 무언가를 짐작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스스로 과민하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여느 때와 다른 마을 분위기를 보니 불안한 기분이 절로 들었다.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면, 그대로 몸을 돌려 돌아갔을 것이다. "시벨리우스,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장로님." 하필 마주친 일족이 장로라는 사실에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꼈다. 다른 자들이라면 적당히 상대하고 넘길 수 있지만, 장로는 쉽게 물리칠 수 없는 존재였다. 마을에서 가지는 위치도 그렇지만, 장로 본인의 성격 또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당히 대하고 떨쳐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로는-어디까지나 시벨의 관점으로-얄밉게 웃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어왔을 뿐이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족의 계승자로서 너무 오래 마을을 비우신 게 아닌가 하여, 노파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 놔두면 아예 환송 축하 잔치라도 벌어질 분위기라 시벨은 급히 말뚝을 박았다. 그 순간, 장로의 표정이 경직되었다가 다시 원래의 온화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렇게 왤 나가 계셨으면서도 아직도 유희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 겝니까? 허허, 역시 젊음이란 좋군요. 그럼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얼마 전에 웰디가 가져온 서클렛이 있을 텐데요. 은색에 푸른 보석이 박힌." "아아! 그것 말이군요! 일족의 것이 아니라 제가 잘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그걸 찾으러 오신 겁니까?" 끄덕. "마신전의 헌물입니다. 사람들이 찾고 있으니 다시 돌려주려고 합니다." "그렇군요. 그럼 일단 제 집으로 드시지요.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여기서……." "오랜만에 뵙는데 차도 한 잔 안 하시고 가시렵니까? 이 늙은이 섭섭해지려고 합니다." 젠장! 누가 연기라는 것 모를 줄 알아? 능구렁이를 몇백 마리씩 삶아먹은 할아범 같으니라고! 분한 마음이 머리끝까지 치솟았으나, 어디까지나 겉으로 정중한 그를 향해 무슨 꿍꿍이냐며 화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벨은 이를 악물며 내키지 않은 걸음을 옮겨 장로의 집으로 들어갔다.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달콤한 향이 나는 차부터 내온 장로는 기다리라는 말을 건넨 뒤 사라졌다. 잠시 후, 다른 쪽 방 안에서 나온 그의 손에는 어두운 색의 목합이 하나 들려 있었다. "귀한 것인 것 같아 상자 안에 보관해두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맞으신지요?" 열려진 목합 안에 놓인 것이 찾고 있던 서클렛임을 확인한 시벨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은 이것으로 끝이란 생각에 그는 얼른 떠나고자 했다. "그럼 찾았으니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허허, 무엇이 그리 급하십니까? 아직 제 용건은 끝나지 않았습니다만."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의아하게 바라보는 시벨에게 장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냈다. 그 웃음이 너무 불길해 보여, 시벨은 엘의 만류를 듣지 않고 온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다. "실은 마을 일로 인해 시벨님께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죠?" "꽤 오래전부터 추진해오던 일이 드디어 성공했습니다. 저희 유니콘 일족이 이번에 신계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 시벨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신계로의 이주라니! 벌써 몇천 년 전부터 그에 관계된 일이 조심스럽게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중간계에 인간들의 영역이 넓어지면서부터. 유니콘처럼 순수한 동물들이 살 수 있는 땅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 덕에 유니콘들은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영역이 필요했고, 그 장소를 어느 곳보다 평화로운 신계로 택했던 것이다. 그런데 설마 지금 그게 수락되다니! 일족의 미래를 생각하면 당연히 기뻐할 일이긴 했지만, 지금은 마냥 환영할 수 없었다. 이제 막 중간계의 유희에 매료된 참이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엘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사귄 친구를 놔두고 떠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되었지 않습니까? 이제 어느 누구도 우리 유니콘 일족을 위협하지 못할 겁니다. 이제 거의 모든 것이 정리되었으니 떠나는 일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을이 조용했던 건가. 시벨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제 떠나는 겁니까?" "이런 일은 망설임이 없는 편이 좋자요. 일주일 안으로 전부 마무리를 지으려 합니다. 벌써 여자들의 경우엔 신계로 보낸 참입니다." "웰디가 보이지 않던데, 그 아이도?" "네. 일찍감치 보냈습니다. 생글거리고 웃는 장로의 얼굴이 다시금 얄밉게 보였다. 살짝 입술을 악문 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장로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는 중간계가 더 좋습니다. 신계에는 가지 않을 겁니다." "시벨리우스!" 흉하게 일그러진 장로의 얼굴이 시벨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나 당황했다기보다는 벌써부터 이런 반응이 나올 것임을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그동안 마을 안이 지겹다는 표시를 신물이 나게 했으니, 아무리 둔한 이라도 그가 일족에게 애착이 없다는 사실쯤은 일찌감치 깨닫고 있었을 것이다. 장로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말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하시오. 유니콘 일족을 대표하는 당신이 신계로 떠나지 않는다면 누가 간단 말입니까?" "어떤 식으로 회유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이곳에 남습니다." "일족 모두가 떠나는 길입니다! 혼자 남아서 무엇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중간계에 남는 최후의 유니콘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군요." "시벨리우스!"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십시오." 단호한 그의 말에 장로는 노려보는 눈빛을 거두고는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유희를 거락하지 않는 것을……." "……." "좋습니다. 남으십시오, 시벨리우스." "…정말입니까?" 놀라서 물으면서도 시벨은 한구석이 찜찜하다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길길이 날뛰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장로의 허락이 너무 쉽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저 평온한 얼굴이라니, 무언가 꿍꿍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런 시벨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갑자기 눈빛을 기괴하게 빛낸 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두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그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목합 안에서 꺼낸 것인지, 은색의 서클렛이 들려 있었다. 순간, 시벨의 머릿속에 라피스 라즐리의 특징이 떠올랐다. 그 보석 안에 새로운 차원 형식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던가? 즉, 그 공간을 통해 한 사람을 가두는 효과를 낼 수도 있는 것이다. 아차 싶은 시벨이 도망치기 위해 텔레포트 마법을 시전하려는 순간, 장로는 기다렸다는 듯이 미리 완료해 두었던 주문의 시동어를 내뱉었다. "눈앞의 적을 봉인하라!" "……!" 콰아아아악! 그러자 서클렛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갑자기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거대한 바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순식간에 뿜어져 나와 뒷걸음치던 시벨리우스의 몸을 단번에 삼켜버렸다. "으아아악!" 강한 압력에 빨려 들어가면서도 시벨은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보석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가 한 것이라곤 필사적으로 친우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엘!' 그리고 다시 잠잠해진 방 안. 이제 방 안에는 장로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한 잔밖에 없었던 찻잔마저 치우고 나니 시벨리우스가 왔던 흔적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히 빛을 내뿜는 서클렛을 보며, 장로는 조용히 속삭였다. "중간계에 남고 싶다면 그렇게 하시오. 단, 영원히 그 서클렛 안에 갇힌 채로 말이지." 일족을 버린 이는 용서치 않는다. 장로의 입가에 음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13-23 귀환 (1) 예상했던 대로 시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엘뤼엔으로부터 유니콘 일족이 인간 세상을 떠나 신계로 귀화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미 대부분의 일족은 이주를 마친 상태고, 남은 것은 아직 준비를 마치지 못한 장정들 몇뿐이라고. 이제 며칠 안으로 그들도 떠나고 나면, 중간계에서 유니콘 종족은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4천 년 후, 시벨리우스가 봉인에서 깨어나는 순간까지. 소식을 접한 이후로 나는 얼마간 녀석이 봉인되어 있을 서클렛의 행방을 알아보려 노력했었다. 그러나 장로라는 유니콘이 무슨 조치를 해둔 건지, 사라진 서클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즈음에 마신전에서도 마지막 서클렛을 찾는 것을 포기했음을 선언하고 신전 안과 밖의 겨예를 해제했다. 모두들 그 사실을 안타까워했지만, 나는 알았다. 시벨은 언제고 다시 마신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라피스가 내게 서클렛을 건네주었을 때, 마신전의 제단에서 훔쳐온 것이라고 말했으니까. 어쩌면 이미 찾아놓고도 모르는 척 감추고 있는 건 아닐까? 그에 관련하여 유니콘의 장로와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최대한 서클렛의 공개 시기를 늦추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발표하도록. 그래서 만에 하나 봉인이 풀리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눈을 뜬 녀석 주위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철저히 고립시키려는 작전일지도 모른다. 1백 년만 지나도 대부분의 인간은 이미 죽고 없을 테니까. 이런 사실을 모르는 엘뤼엔은, 녀석이 사라지자 일족들과 함께 신계로 떠난 것이라 단정하고 얼굴을 찌푸렸다. 작별 인사도 없이 벗이 훌쩍 떠난 것이 괘씸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간 무심한 척해도 조금은 정이 들어버린 모양이었다. "올 때도 두서가 없더니, 갈 때도 제 마음대로군. 그래서 넌 이제 어떻게 할 거냐?" "응? 뭘?" "영혼의 보석 말이다. 그걸 찾기 위해 녀석이 필요했던 것 아니었냐? 유니콘의 감각에 꽤 큰 기대를 거는 것으로 보였다만." "아…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녀석에게 화도 나지 않는 거냐?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꼭 찾아야 했던 것이었잖아. 당장 막막하게 된 것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하군." "하하! 괜찮아. 찾아보면 분명 또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게 어떤 건지 일단 들어보기나 하자." 그는 평소답지 않게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아마 시벨에 대한 서운함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 상태가 오래 가면 어쩌지? 나는 삐질 식은땀을 흘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 일단 출발했던 장소로 돌아가고 나서 결정할 생각인데?" "출발했던 장소라니? 네가 나를 소환했던 그 고원 말이냐?" "응. 어차피 시벨이 있든 없든 그곳으로 가려고 했던 거니까. 그곳에 도착하면 뭔가 좋은 방법이 떠오를지 모르잖아?" "즉, 아무런 계획이 없다는 말이로군." "……." 단숨에 정곡이 찔린 탓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보낸 엘뤼엔은 곧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지. 어차피 네가 전부 결정할 일이니. 그럼 출발은 언제 할 거냐?" "음. 지금 당장 하려고 하는데." "좋아, 그럼 떠나도록 하지." 출발하기 직전에 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팔아 짐을 최대한 축소시켰다. 별로 산 것도 없었는데, 조금씩 생각지도 못했던 인원들이 합류하다 보니 어느새 꽤 많은 분량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말(馬)들도 여러 마리로 늘어 있어, 인국이 한 마리만 남겨두고 전부 정리했다. 대게 마시장에 되파는 식이었지만, 유일하게 시벨이 타고 다녔던 말 '슈'만은 타고난 야생마라는 점을 감안하여 안장을 풀고 자유를 주었다. "잘 살아, 슈. 이젠 절대 나쁜 인간들에게 잡히면 안 된다?" 푸르르르~ 내 말을 알아듣는 건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인 녀석은 곧 펄쩍펄쩍 뛰며 저 멀리 산으로 사라졌다. 동족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리라. 그냥 보기에도 상당한 명마라서 앞으로도 꽤 많은 사람들이 노릴 것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미 한 번 붙잡힌 경험이 있으니 두 번은 호락호락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리첸의 성곽을 벗어났을 때 내게 남은 것은, 말 한 필과 여러 잡동사니를 담은 작은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일행이라곤 엘뤼엔 하나뿐. 결국 처음 출발햇을 때의 인원으로 되돌아온 셈이었다. 아니, 이번엔 라피스도 있으니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으려나? 문득 많은 사람들과 어울렸던 지난 1년간의 일이 모두 꿈속의 일처럼 아늑하게 느껴져, 나는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워졌는데,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이곳에서의 관계는 마치 모래알 같았다. 꽉 움켜쥐면 쥘수록 손가락 틈으로 흩어져가는 새삼스레, 내가 있어야 할 장소는 여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장장 두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노숙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마을을 자주 경유하긴 했지만,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먼 거리임에는 틀림없었다. 장시간의 여행은 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나라도 심신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저 멀리 낯익은 마을의 모습이 보이는 순간, 나는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들렀던 '오렌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와아! 마을이다! 보여, 아버지? 드디어 도착했어!" "그렇군." 벅찬 감동에 젖어드는 나와 달리, 엘뤼엔은 별다른 감회 없이 그러려니 하는 투였다. 그것도 모자라, 기뻐하는 내게 굳이 지금 일깨우지 않아도 될 사항까지 지적했다. "하지만 완전히 도착했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 아닌가? 잊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두지만, 그때의 고원으로 가기 위해선 지금부터 반나절은 더 가야 한다." "윽! 나, 나도 알고 있어!" "그래? 그런 것치곤 너무 들떠 있는 것 같은데." "그야 여기까지 온 것만도 감격이니까 그렇지!" 1년 만의 방문인데도 마을은 떠났을 때 보았던 것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다만 몇 가지의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이전만 해도 흔히 보였떤 엘프들의 모습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엘프 숲과 가까워 유달리 이종족에게 개방된 마을이라고 들은 기억이 떠올라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물으니, 얼마 전부터 갑자기 발길이 뚝 끊겼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뿐만 아니라 엘프 숲의 경계가 더욱 강해져서, 아예 그쪽으로는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이 또한 종족전쟁의 일환이라 생각하니 마을이 조금 씁쓸해졌다. 비록 전쟁 자체는 무산되었지만 그들 사이의 교류가 틀어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엘 오빠? 혹시 엘 오빠 아니에요?" "…에?" 마을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날이 상당히 어둑해져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당장 고원으로 향하는 것은 무리라 판단,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결정한 나는 마을 안에서 적당히 머물 만한 숙소를 찾아보았다. 다행히 지난번에 머물렀던 여관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는지라 발길을 정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쪽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우리에게, 급히 달려와 말을 거는 이가 있었다. 그것도 똑똑히 '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 것에 놀라 고개를 돌린 나는,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발견하고 더욱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갈색 고수머리에 푸른색 눈동자. 기억하고 있던 모습에서 많이 자랐지만, 분명 낯이 익은 아이였다. "에에? 너 설마… 랑시? 랑시니?" "와아! 정말 엘 오빠가 맞군요?" "세상에! 많이 컷구나! 날 알아보겠어?" "그럼요! 후드를 쓰고 있어도 엘 오빠는 눈에 띄는 걸요!" 솔직히 말해 거의 지나가는 인연에 가까웠기에, 랑시가 지금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상당히 놀라웠다. 그러자 랑시는 오히러 섭섭하다는 반응이었다. "너무해요~ 제가 잊어버릴 거라 생각한 거예요? 난 오빠가 떠난 뒤로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는데." "하하! 그랬구나. 이거 매우 기쁜걸." 생긋 웃어주며 나는 랑시의 이마를 살펴보았다.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진 물의 인장이 보였다. "정령 소환 연습도 많이 한 모양이네? 이제 제법 오래 불러낼 수 있겠는걸?" "헤헤! 엘 오빠라면 알아볼 줄 알았어요." 랑시는 얼굴을 발갛게 붉히며 나이아스를 최대 5마리까지 소환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소식을 더 알려주었는데, 얼마 전에 마을에 들른 정령사가 랑시의 능력을 눈치 채고 제자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그 정령사가 황실에서 꽤 영향력 있는 존재인 모양인지, 곧 일가족을 데리고 수도로 이사를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랬구나. 그럼 이제 여관에서는 일하지 않는 거니?" "네. 실은 일주일 후에 떠나요. 가고 나면 엘 오빠를 다신 만날 수 없을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보게 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잘됐다. 너 일하는 모습 보기 안쓰러웠는데." "저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조심스럽게 묻는 얼굴이 꼭 꾸중 들을 각오를 한 모습 같아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왜 그러니?" "그게… 저, 오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걸요. 정령의 일은 오빠와 단둘의 비밀로 하기로 했었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돼버려서… 전 틀림없이 오빠가 제게 실망할 거라 생각했어요." 으음,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일이 커지는 게 싫어서 당부해둔 거였는데. 그것이 오히려 아이의 죄책감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랑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네가 일부러 알린 것도 아니고, 그 정령사가 눈치 챈 거잖아? 그건 오히려 잘된 거야, 랑시. 당연히 축하해줘야지." "고, 고맙습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영락없이 어린아이이였다. 사실, 랑시가 어떤 잘못을 했더라도 나는 너그럽게 넘어갔을 것이다. 이 아이에게는 라피스를 되찾아준 어마어마한 공이 있지 않은가! 비록 의도치 않은 일이었다 해도 어쨌든 랑시 덕분에 라피스를 찾은 셈이니, 내가 느끼는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가 랑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다.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40대쯤으로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13-23 귀환 (2) "랑시! 거기서 뭐 하는 게냐?" "앗, 스승님!" 아아, 저 사람이 랑시의 스승이라는 정령사인가? 남자를 돌아보는 랑시의 얼굴은 무척이나 밝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 행여 엄한 사람이 아닐까 걱정했던 게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무서운 스승이라면 저렇게 기쁘게 반길 리가 없을 테니까. 가까이 다가온 남자의 이마에는 운디네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 또한 물의 정령사였던 것이다. 남자는 랑시의 머리에 꿀밤을 때리는 흉내를 하며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이 녀석! 저녁 수업을 배먹고 놀러나가다니! 요령은 피우지 않는다고 약속했지 않느냐." "헤헤, 죄송해요. 실은 나이아스가 밖에 나가자고 졸라서...." "응? 나이아스가?" "네! 지금 보니까 엘 오빠가 왔다는 것을 알려주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엘....?" 휘둥그렇게 눈을 뜨며 묻던 그는 그제야 랑시 옆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눈치였다. 온통 의문으로 가득한 눈동자에는 행여나 랑시에게 위해를 끼칠 위인이 아닌지 탐색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친딸만큼이나 아이를 아끼고 있는 모습이 보여, 속으로 적잖이 안심이 되었다. 정식 소개에 얼굴을 가리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나는 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넘겼다. 그러자 점점 더 눈이 커지는 남자를 향해, 나는 한 손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엘이라고 합니다. 랑시와 친한 오빠입니다." "...." 랑시의 스승인 정령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나와 내 뒤에서 못마땅하게 서 있는 엘뤼엔을 번갈아 살펴보았을 뿐이다. 그것이 꽤 오래 계속되자, 참다못한 랑시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스승님? 왜 그러세요? 엘 오빠가 인사하는데 받아주셔야죠." "으응? 아, 그, 그래. 그런데 그, 그게...." 저 횡설수설한 모습이라니. 남자의 태도에는 무척 수상한 구석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곧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금발머리에 푸른 눈동자... 끄응! 서, 설마...당신..." "....?" "하, 한때 소문이 자자했던, 그... 정령왕의 계약자가..." 아차, 그러고 보니 이 스승이라는 정령사는 황실 쪽 사람이라고 했지? 공국에서의 일로 내 인상착의가 알려졌을 테니 한눈에 알아볼 것이 뻔했는데, 미처 그 부분을 염두에 두지 못했다. 나도 모르게 난처한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인지, 남자는 설마 하던 얼굴에서 확신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 그랬군! 그럼 랑시에게 정령을 가르친 것이! 아, 아니, 그, 그보다.. 저, 저분이 바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엘뤼엔을 가리키던 남자는 막상 그와 눈이 마주치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덥석 바닥에 엎드렸다. 워낙 순신각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도 말릴 생각은 못했다. "위,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저, 저는 물의 길을 걸어가는 칸 모엘이라 합니다!" '이런...' 남자의 행동은 지나가던 행인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단번에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나와 엘뤼엔의 얼굴은 절로 찌푸려졌다. 랑시 또한 여간 당황했는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스, 스승님?" "랑시! 뭘 하고 있느냐! 너도 어서 엎드리거라! 네 앞에 있는 저분은 바로 정령왕이시란 말이다!" 술렁! 남자의 폭탄선언에 주변 일대는 전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랑시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네, 네에? 그럼 엘 오빠는..." "얼마 전에 물의 엘퀴네스를 최초로 소환한 인간이 나타났다고 말했었지? 바로 그분이시다!" "그, 그럴 수가!" 랑시는 사실이냐고 묻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대답 대신 난처하게 엘뤼엔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하하, 어쩌지... 아버지? 일이 엄청 커져버렸는데." "애당초 네가 하는 일에는 기대한바없다." "쳇!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불가항력이었다고." "글쎄. 네가 언제 의도하고 일을 벌인 적이나 있었던가? 전부 다 우연이고, 본의 아니게 벌어진 거였지, 아마?" "윽! 그,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말을 그렇게..."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은?" 투덜거리는 내 말을 단번에 자른 채, 엘뤼엔은 곧바로 본론을 요구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축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만 특별히 고원으로 그냥 데려다주면 안 될까?" "뭐?"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묵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아서 말이지." 내가 주위에 몰려든 인파를 가리키며 말하자, 엘뤼엔은 얼굴을 찌푸리다 말고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군." 아무리 그라도 이런 순간까지 도움 요청을 거절할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뒤, 나는 다시금 굳어 있는 랑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랑시는 움찍 어깨를 떨었지만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는 허리를 굽힌 다음에 눈을 맞춘 상태로 말했다. "이제 그만 가야 할 것 같아, 랑시. 정령술 부지런히 배워서 나중에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 한다." "오, 오빠, 오빠가 정말로..." "엘퀴네스의 계약자가 맞냐고 묻는 거냐면, 사실이야. 그래서 싫으니?" "아,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자랑스러운 걸요! 저, 정말이에요!"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답하는 모습에, 나는 빙긋 미소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고 나니 주위에 새하얀 빛 무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엘뤼엔이 이동의 언령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빛이 강해질수록 눈앞의 사물은 점점 흐릿해졌다. 랑시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오빠 말대로 할게요! 열심히 배워서 곡 훌륭한 어른이 될게요! 그래서 꼭 오빠를 만나러 갈게요! 약속해요!" 다급한 외침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환하게 밝아지는 랑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속에 묻어둔 말을 끝내 거낼 수 없었다. '미안해, 랑시. 아마 그때까지 내가 이곳에 살고 있지는 않을 거야.' 파아앗! 시야가 환해지고 눈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내게 보인것은 휑한 바람이 불고 있는 넓은 초원이었다. 그다지 많이 낯익지는 않았지만, 한편에 흐르는 시냇물을 보니 1년 전 이곳에서 엘뤼엔을 소환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기쁘기보다는 허무하다는 느낌이 더욱 강했다. '이동의 언령 한 번이면이렇게 간단히 도착할 것을. 진작 좀 데려다주면 안 되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대의 엘뤼엔은 성격에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그로부터 며칠간, 나는 고원에서 할일 없이 시간을 보냈다. 돌아갈 방법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지만, 왠지 이곳을 떠나선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혼자서 무료히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지, 가끔식 이프리트나 라미아스가 먹을 것을 들고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의 방문이 있었다. 바로 트로웰이 찾아온 것이다. "트로웰! 여긴 어떻게....." "그냥. 잘 지내고 있나 해서, 얼마 전에 이프리트한테 네가 산맥에서 엘퀴네스와 단둘이 서만 지내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는 여전히 슬픈 표정이었지만, 이전보다는 눈빛이 훨씬 밝아져 있었다. 내가 반갑게 맞이하자 트로웰이 어색하게 웃더니 기쁜 소식을 전해왔다. "미네르바가 거의 진정되었어. 곧 있으면 봉인이 풀리게 될 것 같아." "정말? 잘됐다, 트로웰!" "네 덕분이야." "응? 내,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당황해서 말을 더듬자 그는 차분하게 미소 지었다. "실은, 내가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돌아간 날 말이야. 그때 미네르바의 폭주가 눈에 뛸 정도로 진정되었어.' "정말?" "으응. 아마도 미네르바는 내가 인간을 증오하는 것을 무척 힘들어했던 것 같아. 내가 파멸을 꿈꿀수록, 그는 인간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더욱 슬퍼하고 괴로워했던 거지. 바보같이 그때는 그것을 몰랐어. 단순히 배반당한 충격에 매여 있는 줄로만 알았거든." "그랬구나...." "그러니까 모두 네 덕분이야. 네가 날 말렸기 때문에 미네르바가 평온을 되찾은 거니까." 따뜻한 황금색 눈동자에는 나를 향한 무한한 신뢰감이 깃들어 있었다. 이곳에 온 이후로 그가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는 새삼 쑥스러운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갑자기 끼어든 누군가에 의해 좋은 분위기는 그다지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이야~ 믿을 수 없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사실이냐? 트로웰, 네가 그렇게 착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다니!" 놀리듯 말을 건넨 이는 소리 없이 찾아온 이프리트였다. 방금 전까지 따뜻하던 트로웰의 눈빛이 순식간에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꺼져, 이프리트." "헉! 우씨~ 그래~ 엘만 차별한다 이거지? 이래서 자식은 키워봐야...." "누가 네놈의 자식이라는 거냐?" "뭐야? 그간 내가 너 때문에 마음 졸인 게 얼만데, 그 정도 호칭쯤은 어때서? 아마 수명이 반은 줄었을 거라고!" "헛소리 작작하시지!" 모든 게 해결된 시점에서도 이 둘은 여전히 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사이가 아주 좋다고 해야 하는 건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무던히도 애를 써야만 했다. 그렇게 한동안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다. 13-24 귀환 (3) 내가 고원에 터를 잡고 산 지도 어느덧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막연히 돌아갈 수 있을 거란 처음의 기대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무의미하게 퇴색되어갔다. 매일매일 무료한 시간이 이어지자 라피스는 차라리 새로운 여행이라도 하라며 부추겼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제는 마냥 채념하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내게, 그 또한 단념했는지 더 이상 그와 같은 권유는 하지 않았따. 그렇게 조금씩 무감각해져가던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뜬 나는, 유달리 이상한 느낌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평소처럼 평범하게 잠을 자고, 눈을 뜬 것뿐인데도 무언가 다른 것처럼 느껴졌다. 늘 보던 풍경조차 어제와 다르게 보였다. '그게 뭐지?' 굉장히 중요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기분이다. 이 기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내가 골머리를 앓는 사이, 엘뤼엔이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 듣고 있는 거냐?" "으응? 뭐, 뭐라고?"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드니 그는 자신의 말이 무시당했다는 불쾌감을 얼굴 가득 드러내고 있었다. "하하하! 미, 미안. 잠깐 딴생각을……." "흥! 너무 태평하기만 해서 머리가 굳어버린 거겠지." "우씨~! 아무튼 나는 왜 부른 건데?" "잠시 정령계에 다녀올까 한다." "엥? 왜 갑자기?" "누구 덕분에 중간계에 내려와 있는 기간이 무척 길어져서 말이지. 물의 영역을 잠시 돌아보고 오겠다." "에… 그럼 그동안 나 혼자 있어야 하는 거야?" "심심하면 하급 정령이라도 소환하면서 놀아라. 대화도 통하면서 뭐가 문제냐?" "그야 그렇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어린애도 아니면서 칭얼거리는 건 그만둬라." 쌀쌀맞는 말투에 나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이 은근히 신경 쓰였는지, 그는 돌아서려다 말고 찌푸린 얼굴로 한마디 내뱉었다. "금방 돌아올 거다." "응. 헤헤! 잘 다녀와, 아버지~!" "그래." 짧게 대답한 엘뤼엔은 한숨을 내쉬며 뭐라고 나직이 중얼거렸다. 뭐? 애 돌보기도 힘들다고? 하지만 내가 그것을 따지려고 했을 땐, 이미 그의 모습은 사라져 버린 후였다. 별수 없이 나는 혼자서 투덜거릴 수밖에 없었다. "쳇! 누가 보면 엉첨 잘 챙겨주는 자상한 아버지인 줄 알겠네." 뭐, 사실 나름대로 잘 챙겨주기는 한다. 이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나의 의식주를 전부 책임지고 있는 존재가 바로 그였으니까. 원망할 구석이 없음을 깨달은 나는 입맛을 다시고는 한 손으로 뒤통수를 거칠게 휘저었다. "아~ 그나저나 이제부터 혼자서 뭘 하지?" 사실, 엘뤼엔이 있다 해도 딱히 놀아주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가 곁에 있고 없고의 차이는 확실히 컸다. 갑자기 이 넓은 세상에 나 혼자만이 남은 기분이랄까? 돌아다니는 자연체의 정령들에게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랬다간 후환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참아보기로 했다. 한번 수다를 시작하면 끝이 없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별수 없이 나는 꽃구경을 하거나 풀잎을 세면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내게 라피스는 좀 더 건설적인 일을 해보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이미 지난 시간 동안 면역이 되어버려 한 귀로 듣고 흘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것 같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라 일어나기 싫으면서도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맺혔다. "엘, 엘?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으음……." 부드럽게 속삭이는 낯익은 목소리. 내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젓자 상대편이 살짝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라자 이번엔 다른 쪽에서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가지고 일어나겠냐? 조금 더 크게 불러봐." "으음, 너무 기분 좋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미안한걸." "더 이상 기다릴 시간 없다." "그건 그렇지만……." 꽤나 난처한지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래도 꽤 오랫동안 기다린 것 같은데, 이제 그만 일어나줄까?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자 환한 빛이 덮쳐 들어왔다. 그 때문에 연신 눈을 깜빡거리는 내게 밝아진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아, 엘! 일어났어?" "으응? 누구?" "뭐야, 벌써 날 잊어버린 거야?" "…에?" 이번엔 무척 서운하다는 감정을 담은 소리에 나는 얼른 눈을 비비고 상대편의 모습을 확인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하는 황금빛 눈동자. "트로…웰?" "아, 다행이다. 안 잊어버렸구나."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무척 기뻐하는 모습에 나는 한순간 어리둥절해졌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뀐 것 같다랄까? 아니, 한편으로는 상당히 익숙한 느낌이기도 했다. 내가 원래 알고 있던 그의 분위기가 이랬었으니까. 트로웰이 갑자기 왜 이러지? 요즘 들어 많이 따뜻해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내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참인지라 나는 조금 어색해져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당연하지! 널 이렇게 찾았잖아." "에? 찾았…다니?" "그동안 잘 지냈어? 자아,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 쿠웅!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것 같았다.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런 내게 트로웰은 여전히 자상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트, 트로웰, 너 설마……." "응? 왜 그래, 엘?" "설마……." 벌어진 입에서는 연신 설마라는 말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거짓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충격으로 덜덜 떨리기 시작한 팔을 느끼고 의식적으로 꽉 주먹을 움켜쥐는 순간, 불현듯 머리 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냐, 아들?" "……!" 낮익은 목소리, 낮익은 말투. 분명 몇 시간 전까지 들었던 목소리이건만,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려는 것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면,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전부 환상이 될 것 같아서. 물거품처럼 사라질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러자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던 트로웰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슬픈 눈으로 다가오더니 두 팔을 벌려 나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 "미안해, 엘. 그동안 많이 외로웠지? 혼자 있게 해서, 정말 미안해." "……!"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품 안의 온기를 느끼고만 있었을 뿐. 어느새 뜨거워진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한동안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다. 꿈이다. 이건 꿈일 거야. 너무 간절히 바래서, 그래서 이런 꿈을 꾸는 거야.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이런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있는 내게 또다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나를 좀 봐, 아들." "……." "얼굴 좀 돌려보라니까?" 도리도리.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서운한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정말 보지 않을 생각이냐?" 살짝 내뱉은 한숨에서 체념이 느껴져, 나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대로 돌아보지 않으면 그냥 사라져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분명히 꿈에서 깨버릴 텐데, 어떡하지?' 이런 내 불안한 마음을 알았는지, 나를 끌어안고 있던 트로웰이 살짝 물어서며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곤 빙긋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마치 '괜찮아'라고 하듯이. 그 순간,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답하게 뭘 하는 거야? 저 녀석 칭얼거리는 것도 짜증나는데 그냥 한 번 봐주기나 해라. 그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라피스 녀석이 내뱉은 말로 인해, 문득 이것이 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용기가 조금 생긴 나는 각오를 단단히 굳히고 돌아볼 결심을 했다. '조금만 보는 거야. 조금만.' 너무 오래 쳐다봤다가 사라져버리면 안 되니까. 살짝만 보자. 상당히 유치한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너무 겁이 난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달랠 수밖에 없었다. "오! 이제야 겨우 바라보는 거냐?" 내가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는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더욱 기운을 얻어 완전히 돌아본 순가, 눈앞에서 드러나는 이의 모습에 또다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물의 정령왕 특유의 파란색이 아닌, 금색의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엘뤼엔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 지?" 얼마나 그리워하던 모습이던가! 단순히 머리색 하나만이 달라진 것이지만, 그 의미는 내게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게 와 닿았다. 투둑. 방울진 눈물이 떨어지자, 그는 피식하고 웃더니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새 울보가 다 되었군." 이번에도 또렷이 느껴지는 온기에 나는 눈을 크게 부릅떴다. 원래 이렇게 꿈이 실감날 수 있는 건가? "아, 아버지? 정말 아버지야?" "그럼 내가 나지 누구냐, 아들. 뻔히 보고도 못 믿는 거냐?"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가까이에 있는 엘뤼엔의 머리카락을 잡아 보았다. 그러자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촉에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꿈이 아니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현실인 것이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물으니,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쏘아붙였다. "금방 다녀오겠다던 녀석이 하도 안 와서 직접 찾으러 왔다. 혼자 오려고 했더니, 트로웰 녀석이 하도 졸라대서 같이 온 거고." "뭐? 그, 그래도 돼?" "그럼 어쩌겠냐? 따라가고 싶다고 계속 귀찮게 구는데." 그러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트로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흐음, 너무한 거 아니야? 그래도 나 땜에 제대로 길을 찾았으면서." "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찾았다고? 그럼 어디선가 헤맸었다는 소리일까? 내가 의아해져서 묻자, 엘뤼엔은 왠지 급격히 굳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넌 몰라도 되는 일이다. 그나저나 보아하니, 그 썩을 도마뱀도 찾은 것 같은데 왜 안 돌아온 거야?" "아… 그, 그게 돌아가는 방법을……." "귀환의 주문을 잊어버린 거냐?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러게 몇 번이나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건만." 그가 한숨을 내쉬자 트로웰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난 이게 더 엘다워서 좋은데?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만났으면 된 거잖아?" "좋기도 하겠군. 그래,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냐?" '가디렸다'는 말에 또다시 가슴이 뭉클해졌다. 지난 시간 떠지도 못하고 이상하게 이 장소에 집착하게 된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나는 누군가 나를 찾으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 모르겠어. 일 년은 된 것 같은데……." "헉! 이런 곳에서 일 년이나 있었던 거야?" "…쯧! 좀 더 일찍 올 걸 그랬군." 내 한마디에 놀라고 안쓰러워하는 모습들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왠래 이렇게 표정들이 풍부했었나? 신기한 기분에 마냥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씁쓸하게 웃은 엘뤼엔이 내게 척 하고 한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들." "아……." "안 잡을 거냐? 설마 돌아가기 싫은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된다.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데! 그 말에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다. 이때만큼은 이곳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지 못했다. 머릿속에서 그저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만이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엘뤼엔은 피식 웃으며 다른 한 손으로 내 어깨를 꼭 끌어 안았다. 나의 다른 쪽 손은 어느새 트로웰이 잡고 있었다.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 주위에 환한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비상하는 매처럼 높이 하늘로 솟구친 빛줄기는 순식간에 마주선 우리셋의 몸을 덮쳤다. 휘익! 파아앗! 새하얀 빛에 완전히 둘러싸인 순간,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며 나는 벅찬 감동에 젖어 들었다. 드디어 돌아간다!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런데 아버지, 귀환의 주문이 뭐였었지?" "바보냐, 아들? 아직도 기억 못해?" "……." "'보고 싶어요, 아버지' 였잖아." * * * 4대 정령왕 중 하나. 물의 엘퀴네스는 현재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이 갑자기 기억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굉장히 중요했던 것 같은데 정작 그게 뭔지 떠오르지 않는다니. 망각이 없는 그로선 처음 겪는 일이라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이상하군. 벌써 명계에 갈 때가 된 건가?" 이미 평균 수명을 넘은 만큼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지만, 그와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찝찝한 기분에 연신 얼굴만 찌푸리는 그에게 반갑지 않은 방문자가 찾아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이, 엘퀴네스! 네가 왜 여기에 잇는 거야?" 씩씩거리며 물의 영역에 쳐들어온 또 다른 정령왕. 불의 이프리트.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엘퀴네스의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내 영역에 내가 있는 게 무슨 문제지?" "하지만 너, 그 애를 혼자 남겨두고……." "그 애라니?" "어라? 내가 방금 뭐랬지?" 이건 또 새로운 수단의 비꼼인가. 아니, 그보다 언제부터 이프리트가 자신을 이렇게 스스럼없이 찾아오게 된 건지 모르겠다. 얼마전, 불의 영역을 망가뜨린 이후로는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거리던 녀석이 아니었던가. 이프리트도 뒤늦게 그 사실을 자각했는지, 어리둥절하던 표정에서 급격히 화들짝 놀라는 얼굴로 바뀌었다. "크악! 내가 왜 이딴 녀석을 마나러 온 거지!"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제기랄! 그냥 한마디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라 온 건데! 이딴 놈에게 할 말이 있다니, 내가 미쳤나? 어쨌든 너, 이왕 온 김에 말해두겠는데, 또 한 번만 내 영역 건드리기만 해봐! 그땐 정말 나도 가만히 안 있을 테다!" "훗! 가만히 안 있으면 어쩔 거냐?" "이, 이 자식!" 분에 바쳐 소리치면서도 이프리트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엘퀴네스의 몸에서 흘러나온 싸늘한 기운 때문이었다. 저런 상태일 때의 그는 상당히 위험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함부로 건드리지 않는 편이 안전하다는 것을 이프리트는 지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방문자가 없었다면, 오늘 불의 영역은 두 번째로 무너지는 참사를 당했을지도 몰랐다. "뭣들 하는 거야? 시끄러워." "트, 트로웰? 넌 또 여기 왠일이냐?" 위기를 모면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면서도, 이프리트는 겉으로는 솔직하지 못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웬일이냐는 질문은 진심이었다. 얼마 전에 인간들을 멸종시키겠다는 무모한 계획을 그만둔 뒤로 늘 바람의 영역에 앉아서 꼼작도 안 한 녀석이 갑자기 이곳엔 왜 온 것이란 말인가. '어라? 근데 그걸 왜 그만둔 거더라?' 갑자기 흐릿하게 느껴지는 기억에 기분이 이상했지만, 이프리트는 크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때 그때의 감정에 따라 여정을 반복하는 것은 그다지 특이하다고 할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트로웰의 대답이 이어졌다. "미네르바가 깨어났어." "뭐? 드디어 봉인에서 풀린 거냐?" "그래." "그거 잘됐… 자, 잠깐!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온 거야? 네가?" "그게 어때서?" 기겁하는 이프리트의 반응에 트로웰은 구겨진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이프리트로서 놀랄 수밖에 없는 사안이었다. 미네르바 외에는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고, 절대 누구 하나 챙기는 일이 없는 녀석이 친절하게 상황보고를 하러 오다니! 그는 자신도 모르게 본심을 내뱉었다. "뭐 잘못 먹었냐?" "죽! 는! 다!" "하하하! 말투를 보니 달라진 건 없는 것 같기는 한데…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일세." 연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이프리트와 달리 엘퀴네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 또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당황한 트로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 "나도… 몰라. 그냥 말해줘야 할 것 같았어." 꼭 누군가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대상이 지금 눈앞에 있는 정령왕들은 아닌 것 같았다. "헤에, 네가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닥쳐, 이프리트! 아무튼 말했으니까 난 돌아가겠어." "큭큭! 쑥스러워하긴." "시끄럽다, 이프리트. 네놈도 이만 꺼져." "쳇! 네놈이 말 안해도 알아서 나가! 누군 이딴 곳에 잇고 싶은 줄 알아?" 뒤편에서 들려오는 말다툼에 트로웰은 나가다 말고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와 똑같은 일상. 그러나 이전과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마지막 퍼즐 조각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었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13-25 흘러간 시간의 답사 (1) 부글부글. 물속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똑 쏘는 탄산을 마신 것처럼, 온몸에 청량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게 얼마 만이었더라? 분명히 익숙한 감각인데도, 한동안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몸을 타고 흐르는 것은 공기보다 약간 무거우면서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나와 한 몸처럼 일체감이 느껴져, 나는 한결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한동안 그 느낌에 빠져 있던 나는, 귓가에 들려오는 낯익은 속삭임에 서서히 몸의 감각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엘퀴네스께서 돌아오셨어! -우리들의 왕이 돌아오셨다! -온 대륙의 생명이여! 부활하라! -우리의 왕께 경배를! 한목소리로 합창하는 정령들의 목소리. 나를 향해 울리는 엄숙한 음성들을 듣고 있자니, 이제야 정말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아아, 내가 드디어 돌아왔구나. 나는 속으로 조용히 감탄하며 그때까지 감고 있던 눈꺼풀을 슬쩍 들어올렸다. 온 공간을 가득 채운 푸른 물줄기가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온전히 나를 위해 존재하는 물의 영역의 모습이었다. 처음 태어나던 순간에도 느꼈던, 경이로운 감정이 제일 먼저 찾아들었다. 고작 2년 만에 보는 것인데도 마치 평생 동안 못 보았던 것처럼 아득한 기분이었다. 그때와 다른 것은, 이제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음을 걱정하지 않다는 것. 아니, 오히려 공기 속에 있을 때보다 더 편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도 이젠 정령이 다 되었네.' 나도 모르게 혼자 자조적인 미소를 흘리고 있자니, 곧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혼자 바보같이 웃고 잇는 거야? 돌아왔으면 인사부터 할 것이지!" "…에?"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점철된 한 존재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이프리트!"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것인지! 저 톡 쏘아붙이는 말투도 오랜 만에 들으니 그저 기쁘기만 했다. 반가움에 환하게 웃으며 소리치니, 곧 이어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이프리트만 보이는 겁니까? 저도 잇는데요." "어어? 미네! 와아, 미네잖아? 날 마중 온 거야?" 무표정한 얼굴의 귀여운 소녀까지 발견하고 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른 그들 쪽으로 달려가니, 가만히 서 있던 미네가 얼굴을 이상하게 찡그렸다. 놀라서 잠시 멈칫한 나는, 다음 순간 미네가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눈에 띄지 않았지만, 파들거리는 입꼬리가 양옆으로 슬쩍 들어올려져 있었다. "하하하……. 우, 웃는 모습은 여전히 특이하구나." "그런가요? 아무튼 잘 돌아오셨습니다, 엘. 그 동안 상당히 심심했습니다." "앗? 내가 없어서 심심했던 거야?" "네. 엘 주위에는 항상 재미있는 일들만 일어나잖습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따라갈 걸 그랬다고 후회했습니다." "그, 그랬냐."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소리에 나는 허무하게 웃었다. 미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눈빛만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여행은 어떠셨습니까?" "응? 아아, 그럭저럭 괜찮았어." "어떤 육체를 입으신 겁니까? 본체를 이곳에 놔두고 가는 대신, 분명 임시적으로 새로운 종족의 육체를 입게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평범하지, 뭐. 인간이었어." "또 인간입니까? 엘은 인간과 상당히 인연이 깊군요."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기에 순순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내 몸을 살필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냥 잠깐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 같았는데, 어느새 내 몸은 원래대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다시 정령의 몸으로 돌아왔네? 파란색 머리카락! 오랜만이다!" "그 쪽에선 다른 색이었나 보지?" 이번에 물은 것은 이프리트였다.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차분한 태도를 취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우스워,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거기선 금발이었거든. 아~ 너희들을 보니 정말 돌아온 게 실감난다. 오랜만이야, 둘 다! 보고 싶었어~~!" "앗! 뭐, 뭐야? 징그러워! 달라붙지 마! 저리 갓!" "이프리트, 엘이 저렇게 기뻐하고 있는데, 이럴 때 자꾸 거절하는 것도 실례입니다." "시끄럿!" 빽 하니 지르는 소리에 나는 한참 동안 두 정령왕을 끌어안고 웃었다. 그러다 잠시 후, 한 가지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참! 라피스는? 라피스를 담은 목걸이는 어떻게 됐어?" "빨리도 물어본다." "어디로 갔는지 알아?" 이 물음에 대답한 것은 이프리트도, 미네도 아닌, 마침 물의 영역에 들어서고 있던 트로웰이었다. "라피스라면 이곳에 오자마자 영혼 상태로 돌아가서, 명계에서 인수해갔어, 엘." "…트로웰!" 반갑게 이름을 부르던 순간, 나는 그가 방금 한 말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라피스를 명계에서 데리고 갔다고? 그럼 그대로 환생하는 거야? 나 아직 작별 인사도 못했는데." "괜찮아. 녀석의 경우는 악신에 의한 희생자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게 환생이 결정지어지지는 않을 거야. 엘뤼엔이 특별히 인사할 수 잇는 시간을 마련해본다고 했으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 그렇구나. 아버지가……." "명계 쪽은 아니지만 엄연히 상급 신이잖아?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그의 설명에 나는 겨우 안심했다. 그런데 이프리트와 미네의 표정이 이상했다. 꼭 뭔가 불만에 찬 느낌이랄까? 그 시선은 정확히 트로웰에게 향해 있었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무지 아슬아슬했던 거 알아, 너? 또 그 재앙이 반복되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다고!" "하하! 미안, 미안. 어쨌든 이렇게 무사히 돌아왔잖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궁금해져서 묻자, 살짝 미간을 좁힌 미네가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글쎄, 트로웰이 엘을 찾으러 간다면서 본체 자체로 이동을 해버렀지 뭡니까? 덕분에 대륙의 모든 식물들이 말라버릴 뻔했습니다." "에? 겨우 그 사이에?" 언뜻 생각해도 엘뤼엔과 트로웰이 날 찾아와 깨우고 돌아가기까지의 시간은 넉넉히 잡아도 5시간 안팎이었다. 보통 정령왕이 사라진다 해도 휘하의 정령들로 인해 몇 년간은 버티는 것으로 알고 잇었기에, 두 정령왕의 반응이 과민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지는 말에 나는 한순간 멍해지고 말았다. "겨우라니요? 거의 팔 년이 다 되었는데요. 이미 대부분의 하급 정령들은 소멸하고, 상급 정령들과 중급 정령 몇만 남아 버티고 있습니다." "… 뭐?" 8년? 그 찰나의 순간이 8년이 되었다고? 명치를 강하게 두들겨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럼 내가 보냈던 지난 2년간은 대체 얼마의 기간이란 말인가! 나는 설명을 구하는 눈으로 트로웰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가 받은 충격을 이해한다는 듯, 살짝 낭패 어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조금 천천히 알려줄 생각이었는데." "어, 어떻게 된 거야, 트로웰? 나… 여기에서는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의식하지 않아도 목소리가 저절로 떨렸다. 트로웰은 잠시 한숨을 내쉬곤, 차분한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먼저 충격받지 않겠다고 약속해, 엘.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겠다고." "그,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닌걸." "나도 무리라는 거 알아. 그래도 침착하도록 노력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알려줄 수 없어." "… 알았어. 그렇게 할 테니까, 말해줘. 대체… 얼마나 지난 거야?" 나는 되도록 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노력하며 이어질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를 악문 각오도, 막상 트로웰의 입이 열린 순간에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는 숫자가 지나갔을 때 내가 한 것이라곤, 고작 충격으로 주저앉지 않기 위해 버티고 있는 것이 다였다. "삼백 년이야. 네가 떠난 그날로부터 삼백 년이 흘렀어." "……!" "에, 엘! 괜찮습니까?" 눈앞이 캄캄해지고 몸이 휘청거렸지만 나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겨우 정신을 수습한 후, 나는 가장 궁금한 사실부터 묻기로 했다. 다행히 생각보다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응, 말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트로웰이 내가 있던 곳에서 돌아가는 순간까지 8년이 걸렸다면, 나는 훨씬 더 많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자 이미 예상했던 질문인 듯, 트로웰은 어렵지 않게 대답했다. "그건 시간 궤도가 일정하지 않아서 그래. 출발하는 시각에 따라 변칙이 작용하는 것 같아. 사실 나도 이렇게 오래 흘러 있을 줄은 몰랐어. 네가 떠난 시기로 계산해봤을 땐, 길어봤자 몇 달 정도 될 거라 생각했거든." "어쨌든 삼백 년이 흘렀다는 거지?" "그래." "… 그럼 이사나는?" "……." "알리사는? 라온 황태자는? 카이테인 씨와 샴페인 용병단들은? 다들 죽은 거야?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야?" "엘……." 안타까움을 담은 음성에 나는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그것이 긍정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겨우 2년이 흘렀을 뿐인데. 내게 흐른 시간은 겨우 2년뿐이었는데, 이곳에서는 3백 년이나 지났단다. 소중했던 동료들, 친구들이 이미 모두 죽고 이 세상에 없단다. 당연히 기다리고 잇을 줄 알았던, 다시 웃으며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다고 한다. "하…하하…하하하……." 왜 웃고 잇는지도 모른 채 웃었다. 처음엔 그저 말도 되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게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존재했다. 내가 임의로 해지하지 않는 한, 이사나가 죽기 전까지는 결코 끊어질 리가 없었던 계약의 결속이 사라져 잇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 모든 현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라피스를 찾기 위해 떠났던 것이 후회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때의 선택으로 인해 돌아온 결과가 이런 것이라니.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워졌다. 13-26 흘러간 시간의 답사 (2) "네게는 이 편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얼마 후, 내게 찾아온 엘뤼엔이 가장 처음으로 건넨 한마디였다. 그는 좀처럼 충격을 걷어내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슬픈 얼굴을 하며 달래듯이 부드럽게 말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일이다. 이사나와 다른 인간들의 수명은 지극히 짧지. 결코 오래도록 함께할 수 없어. 이건 남들보다 긴 수명을 가진 자가 감당해야 하는 숙명이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텐데, 그때마다 충격을 받고 슬퍼할 생각이냐?" "……." "아주 먼 여행을 떠났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려라. 그 편이 너에게도 그 녀석들에게도 나을 거다. 너와 이어질 인연이라면, 굳이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니라도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거다." "하지만… 그건 다르잖아." "뭐가 다르지?" "내가 알던 이사나가 아니잖아. 모습도, 성격도, 나에 대한 기억도 전부 없을 거 아니야." 그러자 엘뤼엔은 엄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때의 추억에만 메어서 상대의 본질을 외면하려는 거냐?" "……!" "만약 네가 정령왕의 임기를 끝내고, 신이 아닌 인세의 길을 택한다 해도 여전히 넌 내 아들일 거다. 나를 전혀 못 알아보고, 전혀 다른 얼굴, 다른 모습과 성격을 지닌다 해도 그건 변함이 없을 거다. 넌 그럴 수 없는 거냐?" "윽……." 그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과거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도, 여전히 그는 내 아버지가 아니었던가. 비록 그만큼 힘들고 외로웠지만,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도 나는 절대 그를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고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굳었던 표정을 풀고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 바로 그런 마음인 거다." "……!" "이미 죽은 자는 간절히 원해도 살아나지 않는다. 남겨진 자신을 불쌍히 여겨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 인간들은 이 간단한 이치를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되풀이한다. 완벽하지 못하기에 늘 누군가로부터 위안을 얻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넌 아니지 않냐, 엘?" "……." "넌 정령왕이다. 스스로 적당히 감정을 멈추고 흘려버릴 수 있다. 더 많은 가능성을 보고,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데도, 계속 인간 식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거기에 매달려 잇을 생각이냐?" "…아니." 한참 만에 내가 대답하자,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지금 네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네가 이런 성격이기에 많은 존재로부터 사랑을 받는 거겠지. 다만 슬퍼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은 다르다. 단 한순간도 과거에 매이지 마라. 앞으로 너를 스쳐지나갈 인연은 지금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을 테니까." "…응." "추억이란 건 상황에 따라 가장 달콤한 꿀도, 가장 쓴 약도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라. 나는 네가 현명한 방법을 선택하리라 믿는다." "응. 알았어, 아버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무시하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충고 때문이었을까? 엉망으로 섞이고 얽히던 마음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았다. 당장 그의 말대로 전부 따르지는 못하겠지만, 앞으로 하나씩 천천히 배워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나도 하나의 온전한 정령왕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꽤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나는 꼬박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 있었던 엘뤼엔은 이미 신계로 돌아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주변에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는 정령왕들만 보였다. 그때쯤 나는 대부분의 감정을 수습한 상태였다. 여전히 슬프긴 했지만, 처음처럼 심하게 괴롭고 아픈 느낌은 없었다. 나는 거기서 마음이 더욱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완전히 차분해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한쪽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던 정령왕들이 하나 둘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엘, 이제 괜찮은 거야?" "응. 괜찮아, 트로웰. 한결 나아졌어." "정말 다행이다. 걱정했어." "헤헤, 미안." 그러자 삐딱한 표정을 한 이프리트가 한마디 끼어들었다. "제발 좀 걱정시키지 마. 대체 얼마나 다른 정령왕들의 가슴을 철렁거리게 만들 셈이야? 그깟 인간들 몇 죽은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이프리트! 너!" "흥!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수명이 1백 년도 안 되는 인간들이야 늘 그렇게 쉽게 죽는 거잖아? 그때마다 일일이 충격 받아서야 어디 정령왕 노릇 해먹겠어?" 그러자 미네가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나무랐다. "그러지 마십시오, 이프리트. 엘이 유달리 마음이 약해서 그런 것이잖습니까?" "글쎄, 그놈의 약한 마음,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냐고!" "이프리트가 그 싸가지 없는 성격을 버리면 엘도 그렇게 될 겁니다." "뭐야?" 불과 바람은 꽤 상성이 좋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번 대의 모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티격태격하는 두 정령을 보며 어색하게 웃은 나는, 어제부터 쭉욱 생각해왔던 말을 꺼냈다. "아크아돈을 둘러보고 싶어." "뭐?" 내 말이 갑작스러웠는지, 분주하던 정령왕들의 시선이 모두 내게 집중되었다. 그것을 하나하나 마주하며 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삼백 년이나 흘렀잖아. 그동안 어떻게 변했는지, 이번엔 어떤 사람들로 채워져 있는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 그 광겅에서 이사나나 다른 사람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엘……." "곧 마음에 묻어야 할 테지만, 역시 쉽게 잊기에는 너무 특별했던 사람들이니까. 그 흔적을 하나씩 밟아가는 것으로 작별 인사를 대신할래. 그래도 되겠지?" 그것은 마지막까지 그들과 함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사과법이기도 했다. 아니, 어쩌면 아직까지도 그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는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한 방편일지도 모른다. 내 조심스러운 말에 정령왕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래야지." "맞습니다. 게다가 새로운 문화를 접하다 보면 기분 전환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나저나 딱 둘 있는 계약자가 사라져버렸으니, 제대로 유희를 시작하기는 힘들겠는 걸? 자연체로 돌아다닐 수는 없잖아?" 이프리트의 말에 트로웰 역시 낭패 어린 표정이 되었다. "아참, 그렇지. 이걸 어쩐다. 아, 그래! 내가 적당한 블루 드래곤을 하나 추천해줄 테니 계약할래?" "블루 드래곤? 누구?" "음, 원래는 몰라야 정상이지만, 지금의 너라면 기억에 있을지 모르겠다. 전대의 엘퀴네서, 그러니까 엘뤼엔이 소멸하고 나서 곧장 수면기에 들어갔던 드래곤인데, 얼마 전에 깨어났거든. 이름은 라미아스고, 꽤 고룡이니까 능력도 많아서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거야." "뭐? 라미아스?" 낯익은 이름에 나는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지금 트로웰이 말한 라미아스가 내가 알고 있는 그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트로웰은 재미있다는 듯 빙긋 웃으며 물었다. "역시 아는구나?" "아, 응. 그가 내가 알고 있는 라미아스가 맞는다면." "맞을 거야. 4천 년 전에도, 지금에도 그 이름은 딱 하나뿐이니까." "아아, 그렇구나. 아직… 살아 있었구나." 어째서인지 그는 당연히 죽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니!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엥? 엘이 어떻게 라미아스를 알아?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 없잖아?" "후훗! 그런 게 있어. 나와 엘만의 비! 밀!" "뭐야, 트로웰! 얄밉게시리!" "그건 저도 동감입니다. 무척이나 얄밉군요." 두 정령왕의 원망을 들어면서도 트로웰은 끝끝내 그 건에 대해 함구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해 살짝 혀를 내밀곤 한쪽 눈을 찡긋하는 모습에 나는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금 저 모습을 보고 나니, 과거에 그에게 느꼈던 모든 서운한 감정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트로웰은 '짝' 하고 두 손바닥을 마주치고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이 말 하는 걸 빼먹었다!" "……?" 또 무슨 일이지? 내가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자 그는 생긋 웃으며 두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갑자기 폭 하고 안긴 품에서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뜬 사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것은, 이곳에 온 내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돌아와서 기뻐, 엘. 기다리고 있었어." * * * 트로웰의 부탁에 의해 라미아스가 날 소환했을 때, 내가 그를 마주보고 느낀 것은 '여전하다'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드래곤이 폴리모프하면 본래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종족이라지만, 저렇게 4천 년 전과 똑같을 수가! 게다가 나이가 들면 말투나 눈빛이라도 변하는 것이 정상인데, 이 드래곤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그 증거로 가장 먼저 나를 보고 한 말이. "오옷! 이번 대의 엘퀴네스도 엄청난 미인이잖아! 아싸~ 땡잡았다!" …이것이었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보통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잘 알았던 사이가 갑자기 모르는 관계가 되면 기분이 이상해져야 마땅하건만, 이 드래곤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다 충격적이라 그런 것을 느낄 사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몰라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후후~ 후후~ 후후후훗~ 크크크큭!" "……." 대체 뭐가 저리 좋은 건지. 계약이 진행되는 내내 라미아스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웃음을 흘려 내 심사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엘뤼엔이 느꼈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던가 생각하니, 그때 그렇게 냉정하게 내치던 모습들이 절절히 이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계약의 인장을 새기고 난 뒤, 무심코 인사를 건넸을 땐 더욱 황당한 반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잘 부탁드릴게요." "헉!" "왜, 왜 그러세요?" "방금 나한테 잘 부탁한다고 했어?" "네, 그렇습니다만?"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한 순간, 나는 스스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라미아스의 표정이 갑자기 이상야리하게(?) 변했기 때문이다. "아아아이이잉~ 어떡해~~ 너무 사랑스럽잖아~~~" "쿨럭! 사, 사랑스럽……?" "우와! 우와! 저 순진한 반응! 이번 대의 엘퀴네스는 왜 이렇게 귀여운 거야! 자자~ 이 오라비의 품에 안기렴!" "무, 무슨!" 다행이 적당한 타이밍에 막아선 트로웰로 인해, 나는 그에게 끌어 안겨지는 상황을 면할 수 있었다. 식은땀이 저절로 흘러내린 순간이었다. "그만, 라미아스! 계약하자마자 장례 치르고 싶어?" "하지만 저렇게 귀여운걸~! 너도 알잖아. 내가 전대의 엘퀴네스가 소멸한 뒤로 얼마나 시름에 빠져 있었는지! 그런데 이렇게 예쁜 엘퀴네스가 태어날 줄 알았으면 수면기에 들어가지 않는 건데 그랬어. 그럼 더 빨리 만나볼 수 있었을 텐데~" "닥쳐! 엘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마. 내 손에 친히 죽고 싶지 않다면." "오옷? 엘? 애칭이 엘이야? 우와아~ 어울려! 어울려!" "그쯤에서 그만두라고 했다!" "쳇, 쳇! 치사해. 혼자 독차지하겠다 이거지? 햐아~ 하긴, 그 정도로 사랑스럽긴 하네. 저 경이로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라니." '우욱!' 순간, 우드득 닭살이 돋아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던 나는, 후다닥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자 뒤편에서 강한 타격음과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트로웰이 두 손을 탁탁 털며 나를 따라왔다. 조금(?) 과격한 훈계를 주고온 모양이다. "미안해, 엘. 소개시켜준 게 저런 변태라서." "…하하하! 괘, 괜찮아. 대충은 알고 있었는걸. 저만큼 심할 줄은 몰랐지만." "아아, 저 녀석이 인간들에게는 제법 멀쩡한 편인데, 유달리 정령왕 앞에서는 정신을 못 차리거든. 하지만 저래 봬도 인맥이나 능력면에서 제법 쓸모는 많아. 그 때문에 엘뤼엔이 유일하게 죽이지 못해 살려둔 놈이었지." "하하하……." 딱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나는 속으로 적극 공감했다. 그 사이, 트로웰은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생긋 웃어 보였다. "자, 그럼 계약도 무사히 마쳤으니 돌아다니는 데는 문제없겠지? 이제 슬슬 가볼까?" "응? 어디를?" "어디긴. 인간 세상이지. 지금부터 나랑 천천히 둘러보자. 네가 이 세계의 변화에 익숙해질 때까지. 그러고 나서 네게 보여줄게 있어." "보여줄 것? 그게 뭔데?" "아직은 비밀. 곧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억지로 호기심을 참았다.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라면, 미리 안달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 부분에 대한 신경을 끄고 나니, 내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이제부터 시작될 새로운 여행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올랐다. 지난 3백 년간 이 대륙에는 어떠한 일들이 있었을까? 쉽게 짐작할 수 없는 세월의 공백에 암담한 마음이 들었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일 같았다. 13-27 흘러간 시간의 답사 (3) 재왕의 별. 그 어마어마한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솔트레테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구도 무시 못할 강대국으로서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반면에, 또 하나의 제왕의 별이었던 라온휘젠이 이끈 카터스 제국은, 지금은 평범한 왕국으로 전락하여 상당히 볼품없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 이유가, 제왕의 반려였던 알리사를 이사나가 차지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듣자니 이사나는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라온 황태자와의 투쟁을 거쳐, 그녀에게 프러포즈하는 것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 당시 한 여인의 마음을 얻기 위한 두 황제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지금도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노래가 되어 불려지고 있을 정도였다. 어쨌든 결혼한 쪽은 이사나였고, 그 결과 그들 사이에선 3명의 아들과 딸아이 하나가 태어났다. 그러나 부모가 하나같이 뛰어난 정령사였던 것에 비해, 정작 그들의 아이들은 안타깝게도 정령사의 자질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이사나가 죽은 이후론 정령왕들의 발길이 완전히 끊겼고, 그 때문에 한때 제국이 휘청거릴 정도로 국제 정세에 크게 타격을 입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어쨌든 하나같이 후손들의 기질이 뛰어난 편이라, 대부분 총명하게 나라를 잘 다스리기는 한 것 같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솔트레테도 이전의 강대국의 면모를 잃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무엇보다 마신의 소멸 이후, 그들의 국교이던 마신교가 완전히 힘을 잃게 되면서부터 그로 인한 타격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간 여러 차례 국교를 바꾸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이사나가 황법을 통해 바꿀 수 없도록 만들어두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내버려뒀다고 했다. 아마도 새로운 마신이 나타나면 제자리를 찾을 테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마신이 결정되지 않았단 말이야?" "응. 마땅한 적임자가 통 없는 모양이야. 하긴, 워낙 마계의 일이 많잖아. 강단도 있어야 하고." "그럼 지금 마계는 누가 관리하고 있는데?" "그야 엘뤼엔이지." "헉! 정말?" 내가 놀라서 묻자, 트로웰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며 말했다. "마계의 상급 신이 한 명 더 있잖아. 지옥의 신 크라제. 그와 함께 돌보고 있는 것 같아. 하여튼 능력이 너무 좋아도 피곤한 법이라니까. 본래 담당하고 있는 차원인 바이톤의 일에 마계의 일까지,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니 아주 죽을 맛일걸? 게다가 엘, 널 찾으러 가는 동안 쌓인 서류들을 다 처리하려면 지금쯤 정신이 하나도 없을 거야. 예전에 이프리트가 날린 십 년 치 서류와는 비교도 안 되지." "아~ 그래서 요즘 잘 안 오는 거구나?" "정확히는 못 오는 거야. 뭐, 안되긴 했더라. 중간에 길을 잘못 들지만 않았어도 그렇게까지 늘어나지는 않았을 텐데." "헤에, 대체 어디로 빠졌기에?" "별거 아니야. 실수로 네 위치를 잘못 짚었었거든. 거기서 꽤 인상 깊은 일이 있긴 했지만……." "인상 깊은 일?" "으응. 그런 게 있어." "……?" 소소한 잡담을 나눈 뒤, 트로웰은 본격적인 여행 궤도를 정하기 시작했다. 주로 내가 이전에 이사나와 함께 여행하면서 거쳤던 곳들이었다. 대륙의 전반적인 모습을 둘러보기 위한 여행이었던지라, 한곳에서 오래 머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워낙 다녀야 할 곳이 많다 보니, 그저 살짝 둘러보는 데만도 꼭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10년이 지나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이 30번이나 반복되어서일까? 그동안 천천히 둘러본 아크아돈은 강과 바다, 산맥처럼 커다란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마을의 지형이나 위치 대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조선과 한국처럼, 문화나 나라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지만, 복식이나 생활 방식 면에서 약간의 변화가 보였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라면 바로 음식이었다. 스튜나 죽처럼 끓여먹는 음식은 거의 사라지고, 그 대신 튀기거나 구워먹는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지는 3백 년간 내가 잠들어 있던 탓에, 물이 풍족하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그리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지난 10년 가까이 트로웰의 부채 동안에는 작물 재배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듣도 보도 못한 품종이 개발되고, 그로 인한 요리법 또한 많이 발달해 있었다. 흔치 않던 마법사의 숫자는 그 사이에 상당히 늘어서 제2의 황금시대 부홍을 꿈꿀 정도가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진보한 분야는 연금술이라고 했다. 또한 놀라운 것은 인간과 이종족 사이에 교역이 오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오래도록 폐쇄적인 환경만 고집하던 이종족들이 드디어 벽을 부수고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엘프나 드워프가 인간들의 마을을 활보하거나 아예 눌러앉아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은 이제 아주 흔한 일상 중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서로 다른 종족이 서로 양보하며 타협을 이루어가는 것이 중요해진, 어찌 보면 상당히 과도기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마치 전혀 딴 세상을 둘러보는 것 같아, 오히려 4천 년 전의 세상을 여행했을 때보다 더욱 낯선 느낌이 들었다. 이사나와 함께했던 거리를 걸으면서, 그와 연관되는 무엇 하나 떠올릴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그나마 내가 용기를 얻은 것은 어느 바닷가에 이르렀을 때였다. 지금까지는 모두 생소하게만 보였는데, 커다란 배가 닿아 있는 항구와 그 아래 펼쳐진 갯벌의 모습이 상당히 낯익게 보여, 나는 조금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어라? 이 항구는 무척 눈에 익는데?" "응, 그럴 거야. 여긴 삼백 년 전과 거의 달라진 것이 없거든." "헛! 정말? 아아~ 그럼 여기가 전에 던전에 갔을 때 경유했던 그 항구구나!" 이사나와 함께하면서 바닷가에 들렀떤 것은 그때뿐이었기에 나는 어렵지 않게 그때의 일을 추측했다. 그때 마침 항구에 닿은 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반가운 마음에 뚫어져라 구경하는데, 급히 뛰어 내린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퍽! "윽!" 방심하고 있던 탓에 몸이 살짝 휘청거렸다. 나도 모르게 신음을 살짝 내뱉자, 갑자기 머리 위에서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에이, 씨팔! 왜 남이 가는 길을 막고 서 있는 거야?" "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이란 말인가? 황당해진 나는 잘잘못을 따질 요량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상대의 모습에 그대로 바짝 굳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씩씩거리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엘프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엘프가 욕을 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을 테지만, 나는 그의 낯익은 생김새에 먼저 경악해야 했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보다 키도 크고 많이 성숙해져 있었지만, 이 엘프는 분명! "설마… 엔딜?" "씹, 내가 엔딜이면 엔딜이지, 설마는 뭐가 설마… 에?" 거친 말투로 받아치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점점 말끝을 흐렸다. 싸아악! 이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잇을까? 그의 얼굴에선 어느새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눈앞의 엘프가 엔딜이 맞음을 확신했다. 동생의 약값을 벌기 위해 사람들에게 사기치고 다니던 엘프, 그 녀석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곳에서 재회한 것이다. "서, 설마… 엘퀴네스님?" "쿡! 그러는 너는 왜 설마라고 하는데?" "헉! 맙소사! 정말 엘퀴네스님이야?" 어느새 다 자란 청년의 얼굴로, 엔딜은 그때처럼 똑같이 경악해서 물었다. 내가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새파랗게 질려 있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아 환하게 밝아졌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어떻게 된 거야, 엘님! 여행을 갔다더니, 이제야 돌아온 거야?" "응. 그동안 잘 지냈어? 정말… 많이 자랐네." "헤헤! 당연하지! 삼백 년이나 지났잖아. 이제 나도 성인인 걸? 근데 엘님은 그대로네?" "그야 나는 여기서 성장이 멈춰 있으니까 그렇지. 참, 그러고 보니 네 동생은?" "아, 세실이라면 집에 있어." "그렇구나, 병은 어떻게 된 거야? 폴리모프 마법… 풀리지는 않았어?" 라피스가 건 마법이니 혹시나 녀석이 죽었을 때 풀리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엔딜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멀쩡히 엘프로 잘 살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괜찮은 엘프 청년을 만나 결혼까지 했다고 하니, 생활에도 전혀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이에 대한 의문은 옆에서 가만히 재회 장면을 지켜보던 트로웰이 해소해주었다. "드래곤의 마법은 시전자가 죽어도 풀리지 않아. 그걸 풀 수 있는 방법은, 그 드래곤보다 더욱 강한 자가 나타나 해지하는 방법뿐이지." "헤에, 그렇구나. 정말 다행이다. 저기, 카이테인 씨는 그 뒤로 어떻게 됐니?" 그러자 이제까지 방글방글 웃고 있던 엔딜의 얼굴에 처음으로 슬픔이 떠올랐다. "그야 벌써 죽었지. 카이테인 씨는 인간이었잖아." "그건 알지만……." "걱정 마, 엘퀴네스님. 그의 임종은 내가 지켰으니까. 혼자서 쓸쓸히 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장담해." "아아, 그렇구나. 그런데 임종을 지킬 정도였으면, 계속 함께 생활했던 모양이네?" "그렇진 않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거거든." 엔딜의 말에 의하면, 카이테인 씨는 뛰어난 신성력을 지닌 사제답게, 결국 원래의 목적대로 대사제의 직위에까지 올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운신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우연히 엔딜과 재회했고, 녀석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여생을 그들 남매와 함께 보내게 되었다고 했다. 그때의 일을 말하면서 다시금 쓸쓸해졌는지 엔딜은 눈시울을 붉혔다. "죽으면서도 엘퀴네스님을 꼭 다시 뵙고 싶다고 그랬었어. 엘퀴네스님을 만난 것은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큰 축복 같았다면서." "… 그랬구나." 그날, 그와 헤어지면서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은 이런식으로 적중하고 말았다. 서늘해진 마음에 입술을 깨무는 내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엔딜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무덤에 가볼래? 무척 반가워할 거야." 13-28 흘러간 시간의 답사 (4) 카이테인의 무덤은, 살아 있을 때의 그만큼이나 단정하고 정결한 느낌이었다. 매일 꾸준한 관리를 해준 것인지, 근처에 잡초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3백 년 가까이 보존된 무덤 치고 이렇게까지 깨끗한 것은 그의 무덤이 유일할 것 같았다. "나왔어요, 카이테인 씨.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사실 나는 아직 이 년밖에 안 지난 것 같아서, 이렇게 당신의 무덤을 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요.'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조금 서글픈 마음으로 웃었다. 그에 대해 생각하니, 저절로 그때 함께 여행했던 샴페인 용병단들도 떠올랐다.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던 인물들이니, 그저 그렇게 허무하게 사라져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친김에 나는 트로웰에게 그들에 대한 것도 물었다. "트로웰, 샴페인 용병단들은 어떻게 됐어?" "궁금해?" "응. 그야 당연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트로웰은 어디서 구비한 건지 품 안에서 작은 지도를 하나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무심코 그 안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간 달라진 형세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새로운 왕국들이 많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나는 그중에서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병 왕국? 이런게 생겼어? 여긴 어떤 곳이야?" "말 그대로 용병들이 주를 이루는 나라야. 왕과 왕비를 비롯한, 귀족들과 나라 국만 절반 이상이 용병이고, 이들이 벌어오는 수입으로 유지되는 나라지. 용병 길드의 최종 본부가 이곳에 있기 때문에, 용병이 되려면 무조건 이곳에 가서 심사를 받아야 해." "헤에~ 멋지다. 누가 이런 기발한 발상을 한 거야?" "훗, 누가 만들었을 것 같아?" "에? 설마… 샴페인 용병단들이?" 뜨악해서 묻는 말에 트로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참고로, 초대 왕과 왕비가 휴센과 쉐리야." "헉……!" 엄청난 사람들이다 싶었지만, 설마 왕국을 일으킬 줄이야! 건국때 이사나가 많은 도움을 줬다고는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들의 경이로운 능력에 감탄했다. 대장이라는 이유로 휴센이 왕이 되기는 했지만, 나머지 단원들도 모두 중요 관직을 하나씩 꿰차고 함께 나라 정세를 도모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모습일 뿐, 실제로는 여전히 용병으로 의뢰를 받으며 대륙을 횡단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워낙 생활방식이 자유로운 사람들이라 왕궁생활을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나? 그 뒤, 내친김에 나는 그 길로 걸음을 옮겨 용병 왕국을 집적 방문했다. 그리곤 들르는 상점이나 건물마다 초대 왕, 휴센의 초상화가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오래도록 감상에 젖었다. 광장 한복판에는 샴페인 용병단들이 세운 업적을 적은 비석이 자랑스레 세워져 있었다. 문제는 그 내용이 전혀 그들의 업적과는 관계가 없다는 거랄까? 첫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 쓰여 있는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너무 웃겨서 부들부들 어깨를 떨어야 했다. 1. 우리 정령왕 봤다! 놀랐지? 켈켈켈켈! 2. 그뿐이냐! 솔트레테의 황제 이사나가 우리 편이다, 이거야! 까부는 것들 다 죽어! 3. 위에 쓴 말 무시해라. 4. 3번 말은 더 무시해라! 5. 4번 말 따라하는 놈들 철퇴에 맞아 뒤진다! 6. 쌍칼에 죽고 싶으면 5번 말을 믿던가. 7. 헤롤 공작은 무식한 도끼쟁이다! 8. 휴센 왕은 치사한 쇼타다! 무려 왕비랑 12살 차이다! 9. 헤롤 공작은 틀림없이 변태다! 아내한테 만날 맞고도 헤헤거린다! 10. 봤느냐. 위에 쓰인 말들이 이 나라의 실태다. 이런 공작과 왕을 믿고 싶어? 제 명에 살고 싶음 그냥 이 나라 떠나라! "큭큭큭… 푸하하하하!" 이것만 봐도 대충 이 비석에 누가 글을 썼는지 짐작이 갔다. 왕이 되고 귀족이 되면 뭘 하겠는가. 아무래도 이들은 끝까지 내가 기억하던 모습 그대로 살다가 간 모양이다. 좀처럼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내게 트로웰 또한 빙긋 웃으며 말했다. "후훗! 재밌지? 하지만 보기보다 저거 썼을 때 분위기가 무척 살벌했어. 나는 그날로 반역이 일어날 줄 알았으니까." "쿡쿡쿡! 지, 짐작이 가. 하하하! 정말 이 사람들은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응. 정말 순수했던 인간들이었어. 아마 다시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 없을 거야." 드물게 인간들에게 좋은 평가를 내리는 트로웰의 모습에, 나는 새삼 샴페인 용병단들과 함께했던 시절이 그리워졌다. 내가 비석 앞에 서서 한동안 멍하게 과거를 추억하고 있을 때였다. 트로웰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그만 갈까?" "응? 이번엔 어디를?" "따라와 보면 알아." "……?" 의미 가득한 말에 나는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면서도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자 파앗! 하고 주변이 밝아져 오더니, 곧 나는 전혀 낯선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 * * "여기가… 어디야?" 트로웰에게 이끌려서 온 곳은 전체적으로 무척 어두웠다. 양옆과 올려다본 천장이 둥글고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아, 어느 동굴 속이라 짐작할 뿐이다. 궁금해 하는 내게, 그는 별다른 설명 없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러자 트로웰은 내려가는 대신, 한쪽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터주었다. 그리곤 내게 먼저 내려가도록 손짓했다. 어깨를 으쓱한 뒤 계단을 밟은 나는, 내려갈수록 점차 공간이 밝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완전히 계단의 끝에 도착했을 때 멍하니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둥글고 넓은 공간 가운데에 제단으로 보이는 것이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에 황금색 장식이 된 검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장면을 나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카노스의 함정인 줄도 모르고 들어섰던 던전의 최하층의 모습이 아니던가. "이건……." 제단에 꽂힌 검은 그때와 똑같은 정령검 이그니스였다. 그 앞에는 마족의 알 대신, 황금색 가죽이 덮인 두꺼운 책이 한 권 놓여 있었다. 내가 아연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서자 익숙한 목소리가 엄숙하게 울려 퍼졌다. <던전의 최하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용사의 일행들이여. 내 이름은 파이어 버스터. 위대하신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님의 산물인, 봉인된 이그니스가 담긴 정령검입니다. 나를 취하는 자, 이 세상의 모든 힘을 얻을 것입니다.> "……." 그때와 비교해 조금도 발전하지 않은 멘트에 나는 쓰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왜 파이어 버스터가 여기에 있는 건지, 알 대신 놓여 있는 책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투성이였지만, 지금은 그 어떤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혼자 중얼거리자, 용케 목소리를 알아들은 건지 화들짝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엇? 이 목소리는? 설마 엘퀴네스님? 엘퀴네스님 아니신가요?> "하하! 그래, 안녕! 오랜만이다. 이그니스." <에에엑~~ 뭐야~~ 또 엘퀴네스님이에요? 너무해! 전 용사님이 온 줄 알았단 말이예요!> "…그놈의 용사 타령은 여전하구나." 그러자 이그니스는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 전의 용사님이 돌아가셨으니, 당연히 새로운 주인을 찾아야지요! 그게 바로 저의 숙명이란 말이어요!> "그래그래. 그나저나… 넌 왜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러나 이 물음에 대답한 것은 트로웰이었다. "그 책을 지키기 위해 내가 가져다놓았어." "책? 아… 이것 말이야?" 내가 검 앞에 놓여 있는 책을 가리키며 말하자, 트로웰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에 내가 보여줄 게 있다고 했었지? 이게 바로 그거야." "헤에, 이게 뭔데?" "한번 열어봐."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답하는 말에 나는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제단 앞에 다가섰다. 가까이서 보니 책에는 자물쇠도, 그 어떤 제제장치도 걸려 있지 않았다. 이에 무심코 겉표지를 펼쳐보는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오는 빛에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파앗! "으악! 뭐, 뭐야?" 휘리릭! 촤라라락! 표지가 열린 순간, 책이 내 앞으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곤 알아서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는 것이, 아무래도 마법이 걸려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페이지가 더 이상 넘어가지 않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새하얀 빛 무리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바로 그 다음이었다. 바로 그 빛 무리 속에서 익숙한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엘, 안녕? 오랜만이야.> "…이, 이사나?"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평생 동안 놀랄 것을 지금 전부 다 놀라는 것 같았다. 책 속의 영상에서 나타난 것은 분명 이사나였다. 그것도 나와 헤어진 직후인 듯, 하나도 변하지 않은 앳된 모습 그대로였다. 차분하게 인사를 건넨 녀석은 잠시 후에 조금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하하! 이런 걸 해보는 건 처음이라 조금 긴장된다. 놀랐지? 실은, 내가 시벨리우스님한테 부탁했어. 엘이 돌아왔을 때,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알려주고 싶어서. 엘이 열면 바로 마법이 발현되도록 해놓았어.> "……." 설마 이런 걸 준비해놓았을 줄이야. 멍해져서 아무 말도 못하는 동안, 이사나는 그동안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을 일기 형식으로 설명해나갔다. 주로 아침엔 뭘 했고, 누구와 무슨 말을 했다는 등의 사소한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중간중간 나에 대한 걱정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엘이 여행을 떠난 지 오늘로 한 달째야. 그곳엔 무사히 도착한 거겠지? 부디 무사히 라피스님을 찾아서 돌아오기를 바랄게. 빨리 만나고 싶다, 엘. 벌써부터 이러니, 앞으로 어떻게 기다리지?> 어색하게 웃는 순간, 갑자기 영상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나타난 이사나는 한층 자라 있는 모습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었던 10대의 모습은 거의 다 사리지고, 훤칠하고 준수한 청년이 되어 있었다. 생소한 모습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사이, 녀석은 전보다 더 굵고 어른스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엘? 오 년 만에 남기는 영상이야. 나 많이 변했지? 그곳에서는 잘 지내고 있니? 아직도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이 돼. 트로웰님은 괜찮을 거라고 말했지만, 혹시 아직도 라피스님을 찾지 못한건 아닌지, 그곳에서 혼자 고생하고 있는 건 아닌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인다.> 걱정스럽게 말하던 녀석은 이후 여러 가지 안부 인사를 더 전하더니, 조금 기쁜 얼굴로 말했다. <참! 오늘 알리사가 내 아이를 낳았어. 아들이야. 장차 내 뒤를 이어 황위를 물려받을 아들. 정말 예뻐. 내 자식이라 그런가? 아이가 이렇게 예쁜 존재인 줄 처음 알았어. 하지만 사실은, 알리사를 닮은 딸을 더 보고 싶었는데. 이 아이는 나를 더 닮은 것 같아서 조금 아쉬워.> "…풋." 슬쩍 서운한 표정을 하는 것에 웃음이 나왔다. 자기보다 알리사를 닮은 아이가 더 보고 싶었다니, 결국 이 녀석도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인가 보다. 그 뒤에도 영상은 여러 번 바뀌었다. 불규칙적으로 남기기는 했지만, 보통 3년, 5년에 한 번 꼴로 기록되어 있었고, 그때마다 이사나의 모습은 점점 변해 있었다. 청년에서, 중년으로, 중년의 남자에서 조금 더 중후한 느낌으로. 그렇게 점차 변해가는 모습에서도 이사나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그대로 남아 있어, 나느 간신히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나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아야 했다. 뿌옇게 빛나는 영상에는 하얗게 머리가 센, 완전한 노인이 된 이사나가 힘없이 앉아 있었다. 오물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이사나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거칠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 엘? 아마도 이것이 네게 보내는 마지막 영상일 것 같구나.> "……!" <나는 그동안 많은 것을 이루었아. 제국의 기반을 더욱 강하게 다졌고, 발전시켰지. 사람들은 나를 향해 현황이라 칭송하고, 아내인 알리사를 가장 위대한 여자로 섬기며, 내 자녀들은 모두 사랑받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했지. 세상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인생이 있을까?> <황제로서 난 참 오래산 편이야. 하지만 요즘 들어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알리사는 이미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고,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에 없지. 나도 이제 곧 그들 곁으로 가게 될 거야.> 그만, 그만 말해! 이미 오래전에 지난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의 힘없이 축 처진 어깨도, 주름지고 검버섯이 핀 얼굴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이 순간을 피하고 싶었다. 차라리 책을 닫아버리면 괜찮아질까?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다시금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죽기 전에… 널 보고 싶었어, 엘.> "……!" 번쩍 고개를 들어 마주본 이사나의 얼굴은 슬프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른 피부 위로 하염없이 맑은 눈물이 흘러 내렸다. <제국이 부홍한 모습을 볼 때마다, 자랑스럽게 큰 아이들을 볼 때 마다 항상 네게 보여주고 싶었어. 네가 이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기뻐할까. 아마 나보다 더 행복해 할 텐데. 나보다 더욱…… 자랑스러워 해줄 텐데.> 맞아,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이사나는 내 친동생과 다름없었으니까. 녀석이 일구어낸 모든 것이 내가 해낸 것인 듯 마냥 뿌듯해 하고 기뻐했겠지. 보일 리도 없는데 나는 영상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희미한 흐느낌이 들릴수록 내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나도… 그러고 싶었어, 이사나. 정말 그러고 싶었어……. 잠시 후, 그 상태 그대로, 이사나는 고해성사를 하듯 눈을 감고 독백했다. 더듬더듬 말 한마디가 이어질 때마다 내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넌 내 인생의 가장 위해한 스승이었고, 나의 가장 사랑하는 어버이였고, 의지하는 형제였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였어.> "이, 이사나…." <죽어서도… 잊을 수 없을 거야, 엘. 보고 싶다, 엘. 지금도… 네 모습 다시 한 번만 보고 싶다.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널 다시 만나보고 싶어.> "흐윽… 흐으윽! 이사나! 이사나아!" 책을 부여잡고 나는 한참 동안을 통곡했다. 영상 안에서 이사나 또한 그렇게 울고 잇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원망스러워졌다. 왜, 왜 하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를 돌려보낸 건가! 차라리 마지막이라도, 마지막 순간이라도 그의 옆에 있을 기회가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럽지는 앞았을 것이다. 주저앉아 흐느끼기글 한참, 내가 진정한 것은 다음으로 이어진 이사나의 말 때문이었다. <항상 행복하기를, 엘.> "……!" <난 너로 인해 행복했으니, 더 이상 미련이 없어. 다만, 훗날 네가 돌아왔을 때 나의 부재를 알고 슬퍼할 것이 걱정이 돼. 넌 보기보다 마음이 많이 여린 정령왕이니까. 이런 말을 하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나라는 인간이 앞으로의 네 삶에 지독한 괴로움으로 남지 않기를. 후회가 되지 않기를…….> "이사나……."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드니, 책에서 쏟아지던 영상이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나는 한 손을 내밀어 영상을 건드려보았다.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고 통과하는 것에 흠칫, 어깨가 떨려왔다. <마지막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들어줄래? 앞으로 나와의 추억에서 좋은 기억만을 떠올려줘. 만약 네가 나로 인해 슬퍼한다면, 난 그것이 오히려 더욱 슬플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그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되풀이했다. '그래, 슬퍼하지 않을게. 이사나. 나도 너를 알아서 행복했으니까. 너로 인해 즐거운 추억이 많았으니, 괴로워하지 않을게. 미안해. 끝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해줘서, 마지막 순간에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미안해…….' 차츰 허공에서 내려와 다시 제단 위로 돌아가는 책의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속으로 사과했다. 그때,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트로웰이 슬프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가 진정되기까지 몇 번이나 등과 어깨를 쓸어주고 다독이고는,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그가 건넨 것은 단 한마디의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훨씬 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잇었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응. 덕분에 후련해졌어. 고마워 트로웰. 이것으로 모든 미련을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생긋 웃으며 답하자, 불안한 듯 바라보던 눈동자에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실은, 몇 번이나 보여줄까 말까 고민했어. 겨우 담담해져 있던 너를 오히려 뒤흔드는 게 아닐가 싶어서." "아니야. 오히려 이런 식으로라도 이사나의 일생을 알 수 있어서 좋았어. 녀석이 나이 들어 변해가는 모습을 나 혼자만 몰랐다면, 그것이 더욱 서운했을 거야." "그래, 그렇게 생각한다니 다행이야." "… 있잖아. 한 가지만 물어봐도, 돼?" "응. 얼마든지." 궁금한 표정을 하는 그에게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가 물었다. "내 첫 번째 계약은 성공적이었던 거지? 나 정말… 멋진 유희를 한 것… 맞지?" 그러자 트로웰은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곧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간절히 기다렸던 대답이 들려왔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너보다 멋진 유희를 보낸 정령왕은 없을 거야, 엘." 13-29 흘러간 시간의 답사 (5) 책과 파이어 버스터를 들고 동굴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햇살이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가운 존재들이 있었다. "엘!" "대부!" "……!" 나를 부르는 소리에 놀라서 바라보니 훨칠한 키의 두 사람(?)이 내 쪽으로 양팔을 벌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푸른 피부의 엘프, 시벨리우스와 검은색 머리의 마왕, 아스모델이었다. 한순간 믿을 수 없어 넋을 놓고 있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땐 나는 어느새 그들의 품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아플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은 두 녀석은, 내 사정은 고려치 않은 채로 감격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와아! 진짜 대부다! 대부~! 대부우~!" "엘! 돌아온 거야? 정말로?" "세상에! 너희들이 여기에 왠일이야?" 시벨리우스라면 몰라도, 아스라면 당연히 마계에나 가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지금의 만남이 상당히 뜻밖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아스는 대번에 서운하다는 듯 삐진 표정을 했다. "칫! 오랜만에 만나서 하는 말이 그것뿐이야? 당연히 대부가 보고 싶어서 왔지!" "아, 미안. 너무 놀라서…….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이번에 대답한 건 시벨리우스였다. "마법책이 펼쳐지면 나한테 신호가 오게 되어 있었거든." "아 참, 그러고 보니 네가 이 책을 만들어준 거라고 했었지! 근데 둘은 어디서 만난 거야?" 궁금해져서 묻는 내게 시벨은 뜻밖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사나가 죽은 뒤로 마계로 건너가서 지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신수라고 불리는 유니콘이 사악한 종족들이 득시글거리는 세계에서 지냈다니! 아마 상당히 얼빠진 표정을 했을 내게, 녀석은 쑥스럽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아스랑 둘이서 네가 너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했어. 그런데 갑자기 마법책이 펼쳐졌다는 신호가 왔기에 놀라서 달려온 거야." "하하! 그랬구나. 아무튼 정말 오랜만이다. 보고 싶었어, 다들." "정말? 정말이지, 대부? 나 보고 싶었던 거 맞지?" "얌마, 아스! 엘은 우리 둘 다에게 하는 말이야. 너한테만이 아니라." "쳇! 어쨌든 나 보고 싶었던 것 맞잖아?" 이제는 어느 정도 마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을 녀석이, 말투는 여전히 어린애다웠다. 저래 가지고 제대로 마족들을 다스리기나 하는 걸까? 혹시 약하다고 구박 같은 거 받는 거 아니야? 이런 내 속마음을 눈치 챈 건지, 시벨이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엘, 이 녀석 마냥 귀엽게 보지 마. 대부 앞이라고 내숭떠는 거니까." "에? 내, 내숭?" "그래. 저래 봬도 누가 마족 아니랄까 봐 얼마나 사악한지, 옆에서 지내는 동안 기절할 뻔했다니까? 뭐, 녀석의 충직한 유! 모! 인 데르온 녀석이야 그럴 때마다 기뻐서 펄쩍펄쩍 뛰지만 말이지." "앗! 대부한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내 이미지 망칠 작정이야?" "켁켁! 이 자식! 떨어지지 못해? 네놈에게 망가질 이미지가 어디있다고!" "뭐야? 이 시퍼런 망아지가!" "크악! 너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하하하하……!" 마계에서 함께하는 동안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투닥거리며 싸우는 둘을 잠시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본 나는 문득 떠오른 사실에 두 손바닥을 짝! 하고 마주쳤다. "아참! 그러고 보니 시벨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으응? 나한테?" "헉! 대부! 나한테는 없어?" "으음… 미안, 아스. 지금은 시벨한테만 해줘야 할 말이거든." "… 체엣~ 알았어. 비켜줄게." 투덜투덜거리면서도 아스는 냉큼 멀찍이 떨어졌다. 그것에 잠시 고마운 시선을 보낸 다음,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시벨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젠 전부 다 기억해." "응? 뭐, 뭘?" "4천 년 전의 일 말이야." "……!" 놀랐는지 눈을 크게 부릅뜨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잠시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최대한 진심을 담아 사과부터 건넸다. "그동안 널 몰랐다고 한 것, 기억이 안 났다고 한 것, 전부 사과할게. 그곳에 가서야 알았어. 아무도 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슬픈 일인지. 그런 경험 하게 해서 미안해, 시벨." "아, 아니야. 난 괜찮아. 그, 그런데 정말 그곳으로 간 거구나. 4천 년 전으로?" "응. 네가 했던 말, 전부 사실이었어. 그날 그렇게 헤어져서 작별 인사도 못한 게 못내 서운했는데, 이렇게 다시 보니까 다행이다. 정말 기뻐." "엘……." 녀석의 얼굴은 금방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동안 얼마나 혼자서 마음고생을 해왔을 것인지 생각하니 가슴 한구석이 찡해졌다. 그 좁고 좁은 공간에 갇혀서 4천 년 후에 깨어나, 온통 뒤바뀐 세상을 보고 얼마나 놀랐을까. 겨우 3백 년간의 공백으로도 소중한 것을 잃어 슬퍼한 나보다, 그는 더욱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을 것이다. 지난 시간 더욱 잘해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이제 모든 것을 다 공유하니까, 더욱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다시 한 번 잘 부탁해도 될까?" 나는 조심스럽게 말하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시벨은 한참이나 내 손을 내려다보더니 곧 두 손을 모아 꼭 붙잡았다. 환하게 밝아진 얼굴은 기쁨으로 인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나야말로. 나야말로 잘 부탁해, 엘!" "앗! 나도, 나도!" 질투가 많은 아스는 그 순간도 그냥 곱게 보아 넘기질 못했다. 어느새 끼어들어 마주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모습에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녀석이! 낄 때 안 낄 때도 구분 못해?" "흥! 대부한테 나도 잘 부탁한다고 인사하는 것뿐이야!" "근데 왜 하필 이 순간이냐고! 다음에 해도 되잖아!" "싫어! 지금이 좋아." "이 유치한 마왕 같으니!" "시퍼런 망아지 주제에!" "그렇게 부르지 말랬지!" 정말이지 저 패턴은 끝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어느새 다툼의 주제가 벗어나 있는 둘을 못 말리는 시선으로 바라본 나는, 그들이 알아서 제풀에 지쳐 진정될 때까지 내버려둘 요량으로 손을 떼고 한 발짝 물러섰다. 둘은 싸우느라 그것도 못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느껴져 돌아보니 트로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그래, 트로웰?" "엘, 오랜만의 재회를 방해해서 미안하긴 한데, 잠시만 정령계로 돌아가자." "응? 왜?" "반가운 손님이 와 있어." "……?" 그 뒤, 시벨과 아스에게 양해를 구한 나는 트로웰과 함께 정령계로 돌아갔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에바스 에덴이었다. 향기로운 꽃들과 수많은 정령들의 항연 사이로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단번에 그 모습을 알아보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 "어서 와라, 엘." 일이 바쁘다더니 짬을 내서 만나러 와준 모양이었다. 한달음에 달려가 폴짝 안기니 부드러운 웃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쓰다듬는 포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새 더 응석이 늘었군." "헤헤헤~ " "아크아돈은 다 둘러보고 온 거냐?" "응. 전부는 아니지만 보고 싶었던 사람들도 만났고, 마음의 정리도 끝냈어." "그래, 다행이구나." 엘뤼엔은 빙긋 웃으며 다시금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그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어 좋은 분위기를 한순간에 망가뜨리는 것이 아닌가! "헹! 끝내긴 누구 마음대로 끝내! 아직 나랑은 만나지도 않은 주제에!" "…엉?" 그제야 나는 그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든 순간, 씩씩거리는 상대편과 눈이 마주친 나는 그 자리에서 두 눈을 몇 번 깜빡거렸다. '아니, 이제 눈에 헛것이…….' 정상적이라면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서 있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눈을 비비자, 갑자기 무언가가 확 내 팔을 잡더니 강하게 끌어내렸다. 그리곤 코앞으로 무언가가 확 들이밀어졌다. "뭘 못 본 척이야! 똑바로 봐!" "……." 지척까지 다가온 그것은 상대방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정면으로 마주본 이목구비에 나는 여전히 멍한 기분으로 입을 벌렸다. "…라피스?" "이제야 알아보는 거냐?" "헉! 정말 라피스야?" "정말은 뭐가 또 정말이야?" 맙소사! 이 녀석이 어떻게 여길 온 거지? 지금쯤 명계에서 환생을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환생 전에 만나게 해준다더니, 그게 오늘이었나? 오랜만에 나타난 녀석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이었다. 얼굴은 그대로였지만, 녀석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던 붉은색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붉은색 머리카락, 붉은색 눈동자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대신해서 자리 잡은 것은, 칠흑 같이 새카만 어둠이었다. "어, 어떻게 된 거야, 그 모습?" "별거 아니야. 그냥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야." "본래의 모습?" "그래. 명계로 갔더니 지난 과거가 죄다 다 떠오르더군. 드래곤으로서의 일은 물론, 그 전생의 삶도 전부 다." "헤에~ 그럼 이제 환생하겠네?" 신기하면서도 내심 섭섭한 기분에 묻자, 녀석은 눈을 사납게 치켜뜨더니 대꾸했다. "이미 환생했는데, 뭘 또 환생해?" "뭐?" 이미 환생을 했다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멍청하게 되묻기만 하는 내게, 때 맞춰 엘뤼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개하겠다. 오늘부로 새로운 마신이 된, 마계의 상급신 크로아첸이다." "…엥?" "익숙하지는 않을 테지만, 앞으론 라피스라고 하지 말고 크로아첸이라고 불러라. 주신으로부터 새로 지음 받은 이름이니까." "……." 대체 내가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분명히 듣기는 들었는데,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지금 엘뤼엔의 말에 의하면, 라피스가 크로아첸이고 크로아첸이 새로운 마신이라는 건데, 그럼 라피스가 마신이라는 건가? 그런… 거야? 꼬박 차 한 잔을 넉넉히 마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내내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자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얼굴을 찌푸린 라피스, 아니 크로아첸이 버럭 성질을 부리며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게 있을 거야?" "…자, 잠깐 기다려. 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답답하긴! 내가 마신이 되었다는 소리잖아. 그게 아직도 입력이 안 돼?"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그야 내가 신의 영혼이었으니까 그렇지." "뭐?" 황당한 물음에 돌아온 것은 더더욱 기겁할 만한 대답이었다. "나도 한때 엘퀴네스였거든." "……!" 순간,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누가 엘퀴네스였다고? 언젠가 카노스가 이와 같은 고백을 했을 때도 이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농담이라면 최악이고, 진담이래도 이보다 더 최악일 수 없었다. 나는 굳어서 돌아가지 않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엘뤼엔을 바라보았다. 눈앞의 녀석의 말은 도무지 믿을 수 없으니, 사실 여부를 그에게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러자 엘뤼엔은 내 심정을 아주 잘 이해한단 듯 동정의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빌어먹게도 내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였더군." "……." 주신이시여! 어째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나는 비련의 순정만화의 주인공처럼 그 자리에 쓰러져 울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머릿속으로는 온통 '말도 안 돼!'를 중얼거리면서. 이런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니 알아도 신경 쓸 리 없는 라피스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며 혼자서 신나하고 있었다. "하하하하! 어쩐지 불의 속성으로 태어났으면서도 자꾸 엘퀴네스에게 끌린다 했더라니, 바로 내가 물의 정령왕이었기 때문이었어! 후후후! 멋지지 않냐?" 멋지기는 개뿔! 누가 제발 거짓말이라고 해줘! 이렇게 되면 엘퀴네스들은 죄다 성격파탄자인 것에 적극 동감할 수밖에 없잖아! 라피스를 다시 만나서 반가운 것과, 이런 상황에 직면한 것에 대한 충격은 엄연히 다르다. 나는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제길! 난 인정 못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후훗! 네가 뭐라고 하든 난 이제 마신이라고. 좀 더 존경과 사랑을 담아 부르도록." "웃기고 있네!" "어이, 그게 한때 너를 대신해 죽은 이 몸을 향해 할 소리야?" "크윽!" 내가 주춤하자, 녀석은 약점이라도 잡은 눈으로 빙글빙글 웃었다. 어째 앞으로 평생 저걸 우려먹을 것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드는건 내 착각만이 아니겠지? 그러나 녀석의 미소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바로 옆에서 이어진 엘뤼엔의 단 한마디에 의해서. "자, 그럼 이제 존경과 사랑을 받을 마신, 크로아첸? 신계로 돌아가서 남은 업무를 계속하도록 하지." "……." 그 순간, 얄미울 정도로 생글거리던 라피스, 아니 크로아첸의 얼굴이 순식간에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흡사 귀신이라도 본 듯 한 표정이랄까? 그와 달리, 엘뤼엔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 없더 환한 미소를 입가에 띠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기를 진심으로 기다렸다. 정말 축하한다." "자, 잠깐! 나, 나는 아직 엘에게 할 말이……." "그건 업무를 마치고 와서 해도 늦지 않는다." "늦어! 그걸 다 끝내려면 족히 이십 년은 더 걸릴 거라고!" "자, 잡담은 그만이다. 이제 그만 가지." "제기랄! 난 인정 못해! 왜 내가 태어나자마자 일에 치여야 하는 건데!" 뒷목을 잡혀 끌려가면서 크로아첸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엘뤼엔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는 드디어 고된 업무에서 해방되었다는 기쁨만이 고스란히 서려 있었다. 그간 그가 얼마나 고된 일정에 시달려왔는지 알 수 있게 해주는 단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떠올린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난 절대 신이 되지 말아야지.' "아참! 아버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뭐냐?" 막 신계로 돌아가려던 그는, 내 질문에 웃던 것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전대의 이프리트, 그러니까 아버지랑 한 시대를 보냈던 이프리트는 지금 어떻게 되었어?" "아아, 그 녀석이라면……." 엘뤼엔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가볍게 말을 이었다. "인세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다. 지금쯤 어느 평범한 인간이 되어 살고 있겠지." "아아, 그렇구나. 아쉽네. 신이 되었다면 다시 볼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그러자 엘뤼엔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이미 다시 만난 적 있으면서 무슨 소리냐?" "어? 만났었다고? 언제?" 설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만났었던 걸까? 그게 누구지? 질문을 하면서 나는 머릿속으로 가능성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검토했다. 그러자 엘뤼엔도 잠시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리더니 곧 어렵지 않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그대로 온몸이 굳는 듯한 충격을 느껴야 했다. "하태진이라는 녀석 말이다. 네가 잠깐 다른 세상에서 잘못 태어났을 때 만나지 않았었냐?" "……!" 하태진? 태진이라고? 강지훈의 중학교 동창이자, 고등학교 때는 베스트 프렌드라 일컬어진 하태진? 부모님께 맞고 오면 나보다 더 아파하면서 같이 울어주던 그 하태진……?" 그리워하면 힘들어질 것 같아서, 일부러 기억 속에 묻어뒀던 단짝 친구가 생각이 났다. 늘 웃고 잇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나를 언제나 걱정하며 챙겨주던 따뜻했던 모습들도. "태… 태진이가 전대의 이프리트라고?"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인연의 고리에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충격을 수습하지 못한 채 물어니, 엘뤼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녀석과는 벌써 두 번이나 만난 걸 보니, 너와 뭔가 인연이 있기는 한 모양이군. 아마 앞으로 또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지." "저, 정말?" "운명의 실은 복잡하고 교묘해서, 한 번 얽혀버리면 쉽게 끊어버릴 수가 없지. 꼭 몇 번씩은 마주치게 된단 말이야. 어떠냐,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제법 기다릴 만하지?" "응?" "이사나도, 그 외의 다른 인간들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다." "아……." "어느 것에도 영원한 이별은 없다. 네가 한 가지의 추억에 매여 지쳐버리지 않는 한, 운명의 고리는 네게 수많은 기회가 될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내 가슴속에 깊이 박혀들었다. 또 만날 수 있다! 한순간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라도, 어느 것 하나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깨닫고 있었다. 수만 가지로 얽혀가는 실타래. 그 무수한 인연의 고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한,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필요한, 가장 중대한 교훈을 얻은 것 같았다. 13-30 외전-그 후 백년 4천 년 전의 과거에서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이것저것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이번엔 곧바로 새로운 인간들의 생활에 섞여드는 대신, 못다한 한 친구들과의 회포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트로웰이나 미네, 이프리트와도 놀러 다니긴 했지만, 주로 어울린 대상은 시벨과 아스였다. 나는 그들과 함께 여행도 하고 모험도 했으며, 이것저것 새로운 도시를 둘러보러 다니며 관광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천천히 시간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났을 땐 어느새 1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긴박히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도 정령계는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평화롭기만 했다. 물의 영역 안에 있으면 아무리 지쳐도 편안한 상태로 되돌아왔다. 그래서였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인간 세상보다는 정령계에 머무는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점차 정령계에서 나오는 일이 적어지자, 시벨리우스와 아스는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여행을 지겨워하게 된 계기는 바로 그 둘 때문이었다. 어찌나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곳이 많은지, 몸속에 에너자이져를 숨기고 있는 듯 좀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가장 큰 문제는 아스였다. 녀석은 아예 마계의 일에는 신경 쓸 생각이 없는 듯, 돌아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간간이 데르온이 산더미 같은 결제 서류들을 들고 찾아와 울면서 사정해도 콧방귀조차 끼지 않으니, 처음엔 그저 웃으며 보던 나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걸 느꼈다. 마왕이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걸까? 마신인 크로아첸도 불안한 판에 아스모델마저 저렇게 놀기에 바쁘니, 이래저래 밑의 마족들만 불쌍하게 느껴졌다. 이참에 아예 거리를 두어, 돌아가라고 떠밀어볼까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 "엘, 오늘도 물의 영역에서 계실 겁니까?" 오늘도 하루 종일 영역 안에서 굴러다니고 있자니, 미네가 방문하여 물었다. 나는 둥실둥실 떠다니는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응. 요 근래 너무 지쳤어. 이제 조금 쉬고 싶어." "후후, 그러실 만도 하죠. 그동안 이리저리 치이셨으니. 그 유니콘과 마족이 아직도 귀찮게 합니까?" "말도 마. 얼마나 끌고 다니려고 하는데. 그것도 매일같이 엄청나게 싸운다니까? 둘 다 크려면 아직도 멀었어." "엘도 엄마 노릇 하기 힘들겠군요." "쿨럭! 이왕이면 아빠라고 해줘……." 내가 통하지도 않을 부탁을 중얼거리자, 미네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식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본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을 떠올리고 물었다. "그런데 다른 애들은? 트로웰과 이프리트는 어디 갔어? 정령계에서는 기척이 안 느껴지던데." "이프리트는 유희를 떠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트로웰은 페르데스를 만나러 명계에 간 듯하군요." "헤에, 정령왕이 자꾸 아크아돈을 비워도 되나~?" "한창때니 어쩌겠습니까. 우리가 이해해야죠." 겉모습은 제일 어린아이인 주제에 가장 어른인 것처럼 말하니 이무슨 아이러니한 모습인가. 나는 풋!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미네는 유희 안 가?" "음, 저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뭘?" "인간이 저를 소환해주기를요." "헤에~ 인간에게 소환되고 싶은 거야?" 상당히 의외라는 생각에 나는 입을 헤 벌리고 물었다. 설마 미네가 인간에게 소환되기를 바라고 있는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자 미네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어딜 가도 상당히 무료하거든요. 하지만 계약자가 인간이라면, 지금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그렇구나. 계약자와 함께 다니고 싶은 거구나?" "네. 실은, 엘이 많이 부러웠습니다." "…에? 내가?" "예. 누군가를 도움으로써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기뻐하고, 그들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고, 때론 그리워하기도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저런 것이 정말 살아 있는 것이구나. 라는 느낌이었달까요? 저도 그런 것을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와 같은 말을 하니 갑자기 엄청 무안해졌다. 나는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려고 노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부럽다니, 그거 영광인걸." "저만이 아닙니다. 트로웰도, 이프리트도 엘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유희가 부쩍 늘은 것이 바로 그 때문인데, 못 느끼셨습니까?" "그, 그런거야?" 아아아! 이제 얼굴이 완전히 빨갛게 된 것을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이 상당히 우스웠는지, 미네는 또다시 피식 웃었다.(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그런데 요즘은 엘을 소환하는 이가 없군요. 이제 인간에게 소환되는 일이 없는 겁니까?" "아아, 이사나의 경우만도 엄청 특이한 상황이 겹친 거였으니까. 당분간은 무리일 것 같아." "그런가요?" "응. 원래 엘퀴네스는 소환하기 힘들다고 하잖아. 그래도 이쯤이면 누군가 소환해줬으면서도 싶어. 하다못해 드래곤이라도." "그건 무리잖습니까. 그 라미아스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미네의 말 그대로였다. 나와 계약한 이후, 라미아스는 자신 외의 어떤 드래곤도 물의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설치한 상태였다. 정말 한때의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 행동에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아~ 대체 내가 만나는 드래곤들은 왜 하나같이 그 모양이지?" "힘내십시오, 엘. 다 엘이 너무 인기가 좋아서 그런 겁니다."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어." "언젠간 용기 있는 누군가가 라미아스를 물리치고 소환할 겁니다." "그러니까 대체 누가 그러냐고! 다들 라미아스가 고룡이라고 꼼짝도 못하고 잇는걸. 아아, 내 정령 생활에는 정녕 희망은 없는 건가." 그렇게 내가 나직한 한탄을 내뱉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미네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곧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 엘?" "응?" "죄송합니다만, 저 앞에 떠오르고 있는 저것, 소환 마법진 아닙니까?" "어? 뭐라고?" 벌떡! 나는 무료하게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미네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는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물속에서 서서히 파문을 그리며 등장하는 도형들의 문장. 그것은 틀림없는 소환 마법진이었다. "헉! 이, 이게 어떻게 된……." "어쨌든 엘이 바라던 대로 된 것 같군요. 어서 가보십시오. 누군지는 몰라도 저 용기 있는 드래곤에게 축복이라도 해주셔야 할 것 아닙니까?" "오옷! 알았어! 미네, 다녀올게!" "네에~ 좋은 결과 있으시길." 대체 이게 얼마만의 소환인가! 각오를 단단히 다진 나는 전투적인 자세로 소환 마법진을 노려본 뒤, 곧장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대체 어느 용기 무쌍한 드래곤일까 속으로 무척 궁금해 하면서. 내가 소환된 장소는 크고 작은 나무들로 가득한 숲이었다. 드래곤이 꼭 레어 안에서 소환하라는 법은 없었기에 조금 여유 있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얼굴을 찌푸렸다. 그냥 단순한 숲이라고 생각했건만, 자세히 보니 나무들의 모양이 이상했다. 보통의 나무보다 통통하고, 그 안에 새의 둥지처럼 둥글게 파여 있었다. 한두 개가 그런 게 아니라, 꽤 많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빼꼼이 고개를 내밀어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은……. "…엘프?" 몰려 있는 것은 수십 명은 되 보임직한 엘프들이었다. 그제야 나는 이곳이 엘프 마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둥근 나무들은 모두 엘프들이 사는 보금자리였떤 것이다. 대체 어떤 드래곤이 이런 생뚱맞은 장소에서 정령왕을 소환한 거야? 이렇게 많은 엘프들을 한꺼번에 만난적은 없었기에 내 얼굴은 자연스럽게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놀라서 중얼거린 나 못지않게, 엘프들 또한 경악한 얼굴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리고 연신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오, 세상에! 엘프의 신이시여!" 나를 본 것이 신을 찾을 만큼 다급한 일이었던가? 어이가 없어져서 어깨를 으쓱하려던 순간, 한 엘프의 입에서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저주다! 신의 저주다!" "엥?" "엘프들에게 저주가 임한 것이야! 아아아아아!" "……." 이때의 내 기분은 뭐랄까, 황당하다 못해 상당히 더러웠다. 저주라니! 정령왕으로 태어난 이후, 내 등장에 이렇게 혐오감을 드러내는 이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소리친 엘프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엘프들이 모두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당연히 내 입에서는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건가?" "헉!" "……." 그러자 그렇지 않아도 안색이 좋지 않던 엘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에 더욱 열 받은 내가 뭐라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아아, 그렇게 인상 쓰지 마, 너한테 하는 말 아니니까." "…뭐?" 문득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말에 나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새파랗게 질린 엘프들 사이에서 유달리 혼자 태연하게 웃고 있는 한 명의 엘프가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이제 막 성인식을 넘겼을까? 연두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꽤나 예쁜 색의 조합을 가진 얼굴이었다. 호감이 가는 인상이라 주의 깊게 살펴본 순간, 나는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받고 얼굴을 찡그렸다. 잠시 후, 나는 그 기묘한 기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소환진의 기운이 바로 그 엘프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뭐지? 엘프로 폴리모프한 드래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속으로 생각하려던 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러자 그 연두색 엘프가 생긋 웃더니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아니, 일반 엘프 맞아." "…농담이겠지." "진담인데?" "에엑?" 태연한 대답에 나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엘프라니! 나를 소환한 것이 엘프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일반적인 상식으로 그렇다. 엘프는 전체적으로 정령과 상성이 좋은 종족이지만, 절대로 정령왕을 소환하지 못한다. 바로 그들이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조화의 종족'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것에 균형을 맞추는 종족, 그렇기에 결코 기적을 이룰 수 없는 종족. 그것이 바로 엘프란 종족의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기본적인 특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엘프가 나를 소환했다는 말이야? 내가 놀란 표정을 하자, 주위에 있던 엘프들은 아예 대놓고 흐느낀 것이었다. "흐윽, 흐으윽! 어떻게 이런 일이! 아아아, 엘프의 신이시여! 당신의 자녀들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조화의 종족이 세상의 균형을 깨트리는 일을 하다니! 이건 틀림없이 엘프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인가." 점점 길어지는 탄식에,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한참 동안 울먹이던 엘프들은 급기야 나를 소환한 엘프를 향해 살기까지 보내기 시작했다. "저 녀석을 죽여야 합니다!" "조화를 깬 저 녀석만 죽이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갈 겁니다!" "이대로 저주를 받을 수는 없어요!" '이 녀석들, 엘프 맞아?' 어떻게 저렇게 쉽게 죽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도 자신들의 동족을 향해 하는 말치고는 너무 살벌했다. 내가 조금 질린 기분으로 바라보자, 이번에도 연두색 머리의 엘프가 태연하게 말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말에는 신경 쓰지 마. 근데 계약 안 해? 아무리 나라도 여기서 더 소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무린데." "에? 아참, 그렇지." "훗! 여전하구만." "뭐?" 마치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에 한순간 얼이 빠졌다. 그래서인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상당히 찝찝하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엘프 맞아?" "아, 글쎄 맞다니까. 나도 조금 황당하지만 말이지." "…이름은?" "노엘…이라고 하더군." "하더군?"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저렇게 소개할 존재가 과연 몇이나 될까? 황당해 하면서도 나는 무의식적으로 거의 이끌리듯이 계약의 인을 맺어 엘프의 이마에 문장을 새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엘프와 계약한 정령왕은 나밖에 없을 거라며 중얼거렸다. 아니, 사실이 그렇기도 했다. 세상 어느 정령왕이 엘프와 계약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지금 내가 간단하게 했던 이 계약이 새삼 엄청나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퍼뜩 실수를 깨닫고 소리쳤다. "으앗! 이거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이미 해놓고서 무슨 소리야?" "하, 하지만 엘프인데!" "후회해도 소용없어. 이미 늦었걸랑." 이마에 새겨진 물의 인장을 내보이며 연두색 엘프, 아니 노엘은 싱긋 웃어 보였다. 그에 내가 질려하는 동안, 뒤편에서는 두 눈에 살기를 담은 엘프들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태도를 보니, 정말로 노엘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노엘 또한 그것을 느꼈는지, 약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정말 약간이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엘굴을 바꾸어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자, 엘! 안전한 장소로 이동하자!" "…에? 어떻게 내 애칭을?" "자자~ 어서 가자니까? 여기서 더 있다가는 죽을지도 몰라. 계약자를 보호해야지~" "허!" 도대체가 뻔뻔한 건지, 대담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처음 소환한 정령왕을 보고 놀라지도 않을뿐더러, 당연하게 반말을 하고 애칭까지 마구 부르는 녀석이라니. 그렇다고 머리에 뭔가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다. 이 묘하게 당당한 행동이 누군가와 무척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어 더욱 불길해졌다. 그게 누구였더라? 아아, 그래! 명령이 익숙하고 낙천적이면서도,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이 말투는 마치… "카노스 같아." "어라, 눈치 챘어?" "……!" 쿠웅! 순간, 누군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치고 지나간 것 같았다. 부릅뜬 눈으로 돌아보니 노엘이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맙소사! 방금 뭐라고 그런 거지? 눈치 챘냐고? "카, 카노스?" "그렇다니까는. 얼른 도망이나 가자고. 저거 맞으면 많이 아프다?" 경악하는 내 모습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노엘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엘프들이 들고 있는 활을 가리켰다. 그에 황급히 이동의 언령을 시전하면서도 나는 도무지 정신을 온전히 차릴 수 없었다. 카노스라니! 카노스라니! 대체 왜 카노스가 엘프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거야! 잠시 후, 도착한 곳은 언젠가 내가 보아두었던 한적한 평원이었다. 순간, 노엘의 미소가 더욱 환하게 피어올랐다. "아싸~ 드디어 탈출이다! 아아아~ 진짜 지긋지긋해 죽는 줄 알았어!" 해방되었다는 기쁨을 만끽하며 마음껏 기지개를 켜는 그를, 나는 의심스럽게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모습은 카노스다. 얼굴이나 종족이 달라도, 그 특유의 느낌을 내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설마… 정말 카노스?" 신음과 함께 저절로 내뱉어진 음성에, 나를 돌아보는 황금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그러고서 내뱉어지는 말에 나는 어깨를 흠칫했다. "오랜만이다, 엘뤼엔의 아들." "……!" 아아, 정말 카노스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거지? 환생의 궤도에 올랐다던 그가, 어째서 모든 기억을 지닌 채 엘프로 태어난 거야! "어, 어떻게 된 거예요, 카노스? 대체 어떻게……." "으음, 그건 말이지." "꿀꺽!" "나도 몰라." "……." "냐하하~ 농담, 농담이고. 으음, 아무래도 주신의 은총이 아닐까 싶은데. 내가 신으로 살았을 때 좀 이쁜 짓을 많이 했잖냐. 그래서 특별히 이렇게 태어나게 해주신 게 아닐까?" "…조화를 깨는 엘프로요?" 엘프 주제에 기적을 일으키는 은총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저주받을 아이로 오해받고 쫓겨 다니게 된 건 부가 옵션 기능인가 보죠? 그것 참 감사하시겠습니다? 내 황당한 표정을 느낀 건지, 카노스 또한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냐하하~ 멋지잖아. 정령왕을 소환한 최초의 엘프! 어째 두근두근거리지 않아?" "두근두근은 무슨……." "자자, 투덜거리는 건 이제 그만~ 어쨌든 나한테 소환되었으니, 넌 당분간 내 꺼다!" "네에?"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카노스의 황당한 선언에 나는 그 자리에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서 즐겁게 떠들기 시작했다. "어때? 기쁘지? 행복하지? 영광스럽지?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잠시 시간을 줄 테니, 나와 함께 여행 다닐 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을 충분히 감읍해 하도록!" "……." "왜 아무 말이 없어? 역시 실감이 나지 않는 건가? 하긴, 나처럼 잘난 신을 모시게 될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 자, 자~ 너무 기쁘면 울어도 돼. 그 정도는 특별히 봐주마." …나, 그냥 계약 해지하면 안 될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그 나름대로의 배려(?)를 마친 카노스는 뜬금없이 내게 불쑥 손을 내밀었다. "뭐예요?" "잘 부탁한다는 인사. 후훗~ 보다시피 난 거지니까 앞으로 많이많이 챙겨줘야 해?" "그건 또 무슨 황당한……." "어허! 아버지 친구이자, 정령왕 생의 선배한테 이렇게 야박하게 굴기야?" "야박이라뇨! 선배라니 아시겠지만, 일단 계약했다고 해서 무조건 함께 다녀야 한다는 규정도 없잖……." "헉!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알았다. 이제 내가 필요 없다 이거냐? 흑흑흑, 주신이시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큰맘 먹고 희생해서 전 차원과 신계를 구해놨더니, 친구의 아들이자 제 후배 되는 녀석이 글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알거지가 된 아버지의 친구이자 선배 되는 저한테 돈 한 푼 안 주고 쫓아내려고……." "아, 알았어요! 젠장! 함께 다니면 될 거 아니에요! 그럼 되는 거죠?" "후훗! 탁월한 선택이었어." "크윽!" 금세 안면을 바꾸고 생긋 웃는 그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몇 번이나 '속았다'를 외쳤다. 하지만 막상 내밀어진 손을 붙잡았을 땐, 아무러면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엘프와 계약을 해보겠는가? 그 상태가 카노스라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긴 해도, 까짓것 그동안 그가 세운 공헌을 생각하면 못 참아줄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내가 웃고 있는 것은 절대 기뻐서가 아니다. 그냥 오랜 만에 유희를 시작한다는 것에 들떠서 그런 거지, 그의 모습을 보고 반갑다거나 안심이 되어서가 아니다. 저, 정말이라니까? '뭐, 이것도 나름대로 해피 엔딩이라면 해피 엔딩인가.'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했던 그의 인사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저 무리라고만 생각하고 씁쓸히 웃어 넘겼었는데, 설마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운명의 엮임 속에서, 자신과의 인연의 고리 또한 계속해서 건재할 것임을. "아참! 나랑 만난 건 엘루엔한테 비밀이야!" "네? 왜요?" "부려먹을 게 뻔하잖아. 난 이제야 겨우 마신에게서 해방돼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알았지? 절대 비밀이다!" "하하하, 그럴게요." 당장 가서 말해야지. 답과는 따로 노는 생각을 정리하며 나는 속으로 음산하게 웃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좋았다. 파란 하늘과 그 사이를 떠다니는 새하얀 구름을 보며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이번에도 역시 멋진 모험이 될 것 같았다. 13-31 에필로그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강지훈입니다. 나이는 6살이고요, 남자아이에요. 앗! 이름을 들으면 남자앤지 다 아실 거라고요? 으음, 전 바보라서 그런 것도 몰랐어요. 정말 죄송해요. 이래서 엄마 아빠가 저를 미워하시는 걸까요? 우리 엄마 아빠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싫대요. 너무 바보 같고 멍청하고,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세요. 그래서 열심히 똑독해지려고 노력하는데도 그게 잘 되지 않아요. 형들이 그러는데, 그건 제가 구제불능이라서 그런 거래요. "강지훈! 이 녀석! 아직도 그런 데서 얼쩡거리고 있어?" 헛, 큰일입니다. 아빠가 정확히 4시 반까지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놀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벌써 35분이 넘어가네요. 아빠가 화가 많이 나셨나 봐요. 만날 가지고 다니시던 빗자루 대신에 오늘은 당구 채를 들고 오셨어요.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저걸 맞으면 정말 아프거든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는지 아빠의 얼굴이 더욱 험악해졌습니다. "아, 아빠……!" "이 빌어먹을 후례자식 놈! 아빠는 또 뭐가, 아빠야! 어섯 살아니 처먹고 아직도 애인 줄 알아?" 그치만… 형들은 저보다 나이가 5살이나 많은데도 아빠라고 부르는 걸요? 그럴 때마다 아빠가 형들에게 화내신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왜 제가 아빠라고 부르면 때리려고 하시는 걸까요? "이놈이 그동안 참고 봐줬더니 아주 기고만장해졌구나! 잘 걸렷다, 네놈! 안 그래도 속이 터져 죽을 지경인데, 오늘 한번 죽어봐라!" 퍽-퍽-퍽! "아악! 아, 아파요! 죄송해요, 아버지!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흑! 흐윽!" 아무리 몸을 웅크려도 아픔을 피할 순 없습니다. 차라리 두 손을 비비며 용서해달라고 매달리는 편이 그나마 조금 덜 맞는 편이에요. 하지만 이번엔 정말 화가 나셨는지, 아빠는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으십니다. "울긴 뭘 잘했다고 울어! 썩 그치지 못해? 한 번 훌쩍거릴 때마다 열 대씩 추가다!" 울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저도 모르게 눈물을 나오는 걸요. 그치기가 정말 힘들어요. "아니, 이봐요? 애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애를 그렇게 때리면 어떡합니까?" "시끄러워! 갈 길이나 갈 것이지, 무슨 참견이야! 내 자식을 내가 팬다는데!" "거참, 무슨 이런 사람이." 지나가는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말리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는 버럭 화를 냅니다. 이럴 땐 차라리 말리지 않는 편이 좋아요. 그러고 나면 더욱 세게 때리시거든요. 지난번엔 너무 많이 맞아서 정신이 흔미해진 적도 있었어요. 사람들이 그러는데, 잠깐 동안 숨을 쉬지 않았대요. 다행히 지나가던 분의 응급조치가 빨라서 살았다나요? "너 같은 건 빨리 죽어 버려! 이 버러지 같은 놈!" 당구 채가 또다시 하늘 높이 올라갔습니다. 저는 눈을 꼬옥 감고 몸을 웅크렸어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어요.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은데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은 거 있죠. "…어?" 눈을 뜨고 보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서 계시던 아빠가 저 멀리 쓰러져 있고, 그 옆에 엄청나게 잘생긴 2명의 형들이 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세히 보니 형들은 나랑 아빠랑은 생김새가 달랐어요. 형 한 명은 키가 무척 크고 흰 피부에 금발머리였구요, 다른 쪽 형은 새까만 피부에 노란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어요. 저 알아요! 저런 사람을 보고 외국인이라고 하는 거랬어요. 제 친구 중에서 유치원에 다니는 규쳘이가 한 말이니까 틀림없을 거예요. 외국인하고는 말이 통하지 않느다는데, 어떻게 해야 하죠? 조금 머뭇거리고 있는데, 형들 중 키가 큰 금발머리 형이 얼굴을 찌푸리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뭐 이런 미친놈이 다 있지? 애를 이렇게 후려 패다니, 하여튼 인간들이란 하나같이 지독한 면이 있는 것 같군. 존재만으로 해악인 것 같은데, 이대로 그냥 죽일까." "…엘뤼엔, 요즘 들어 점점 본래 성격이 되살아나는 거 알아? 심정은 이해하지만, 여기선 참으라고. 지구잖아. 함부로 신력을 썼다가 주신께 징계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 "시끄러, 트로웰. 나 혼자 간다는데 왜 귀찮게 따라와서는 잔소리냐?" 엇? 우리나라 말을 아주 잘하네요? 저 형들은 천재인가 봐요! 그런데 어쩐지 키 큰 형은 그리 성격이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 옆의 까만색 형도 저랑 같은 생각인지 무척 곤란하다는 표정입니다. 아참! 이럴 때가 아니잖아요? 쓰러진 아빠가 걱정입니다. 혹시 크게 다치신 건 아니겠지요? 저는 형들이 다투는 사이에 얼른 아빠한테 달려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괘, 괜찮아요?" 어깨를 흔드는데도 눈을 굳게 감고 꼼짝도 하지 않으시는 걸 보니 덜컥 겁이 났어요. "아, 아버지! 일어나세요! 어엉! 주, 죽으면 안 돼요! 죽지 마세요! 네?" 그러자 형들이 싸우는 걸 그만두고 대뜸 나를 향해 관심을 보여왔어요. "뭐? 이봐, 꼬맹이. 저 인간이 네 아빠라는 거냐?" "네? 네……." "하! 아비 되는 놈이 자기 자식을 그렇게 후려 패? 역시 죽이는게 낫겠군." 형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어요. 우리 아빠를 죽인다고요? 그런데 그때, 까만 피부의 형이 끼어들어 말했습니다. "그만둬, 엘뤼엔. 그래도 저 아이한테는 하나뿐인 아버지잖아. 아직 나이도 어린 것 같은데 보호자가 필요할 거야." "저런 놈이 과연 끝까지 잘 키울 수나 있을까?" "흐음, 그런가." "네 잘난 특기로 한번 알아보지 그래?" "미안하지만 무리야. 아까부터 시도해봤지만 전혀 안 통하고 있거든. 꼭 뭔가에 가로막혀 있는 기분이야. 정령왕의 능력이 아예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니. 말로는 들었지만, 지구란 곳은 정말 특이하군." "여긴 주신의 주 관할 영역이니까. 하여튼, 저 아이는 네가 잘 달래봐라. 쯧! 쓸데없는 일에 끼어버렸군." 금발머리 형의 말에 까만 피부의 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게 다가왔어요. 저도 모르게 흠칫 물러나자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괜찮아, 꼬마야. 네 아버지 죽은 거 아니야. 그냥 조금 세게 머리를 부딪쳐서 기절한 거니까 금방 일어날 거야." "저, 정말요? 정말 죽은 거 아니에요?" "그래, 괜찮아. 그런데 너, 아빠가 그렇게 걱정되니?" 끄덕끄덕 "왜 그렇게 걱정을 해? 널 이렇게 때린 사람인데." "그, 그치만 우리 아빠니까요. 제가 잘못해서 맞은 거니까 괜찮아요. 나쁜 어린이는 혼나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야 나중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대요." "…후우, 어린아이라 그런가. 생각의 틀이 너무 순수해서 반박을 할 수가 없군." 까만 피부의 형은 뭔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러자 뒤에 서 있던 금발의 형이 무뚝뚝하게 말을 걸었어요. "놔둬라. 이제 그만 엘이나 찾으러 가지." "아아, 어때? 위치는 알겠어?" "글쎄. 정확치가 않군. 좀 이상한데. 분명히 이 근처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느낌이 흐릿한 거지?" "다시 잘 짚어내 봐. 여기에 엘이 있기는 한 거야?" "…엘?" 왜 일까요? 그 하나의 이름이 갑자기 무척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무심코 입 안으로 중얼거렸는데, 그게 형들의 귀에 들렸던 모양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제게 내려왔습니다. 으악! 어떡하죠? 너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어요. "죄, 죄송해요!" "훗! 괜찮아. 엘이 누군지 궁금하니?" "그, 그게……." "뭐, 별로 비밀이랄 것도 없는걸. 내 옆의 금발머리 형 있지? 그 형의 아들이야." "네에? 아들이요?" 저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어요. 금발머리 형은 아무리 봐도 젊은데, 어떻게 아들이 있는 걸까요? 전 아이가 있는 사람은 다 우리 아빠 같은 아저씨일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마 저 형은 세상에서 가장 젊고 잘생긴 아빠일 거예요! 그런데 왜 여기서 아들을 찾고 있는 건지……. 혹시 아이를 잃어버린 걸까요? "제, 제가 도와드릴까요?" "응? 어떻게?" "저 이래 봬도 이 동네 지리 잘 알아요! 같이 찾아드릴게요." "후훗! 마음은 고맙지만, 그 전에 네 아빠부터 챙겨야 하지 않을까?" "아, 아참! 그렇지!" 그제야 다시금 아빠의 상태가 떠오른 저는 무안해져서 얼른 고개를 숙였어요. 아무튼 형들은 (아니, 아저씨라고 해야 할지도) 그 상태로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기절해 있던 아빠가 깨어나는 것이 보였어요. "으윽! 대체 어떤 썩을 놈들이… 사람을……." "아, 아버지! 괜찮으세요?" 뒤통수가 아픈지 연신 찌푸린 표정으로 쓰다듬던 아빠는 제 말에 무척 화를 내기 시작햇습니다. "이놈의 후레자식! 넌 이게 괜찮아 보이냐! 강지훈! 솔직히 말해라! 이 아비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 네가 도와달라고 소리쳤지? 그렇지?" "아,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때였습니다. 뒤돌아서서 걸어가던 형들의 걸음이 우뚝! 하고 멈추는 거예요. 그리곤 홱! 하고 이쪽을 돌아보았는데, 둘다 표정이 굉장히 굳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금발머리 형 쪽의 얼굴이 무서웠어요. 어찌나 눈빛이 새파란지, 그대로 번개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네놈이 아니면 누가… 흡!" "……!" 그 형은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고래고래 소리치던 아빠의 입을 한 손으로 간단히 틀어막아버렸습니다. 굉장히 힘이 센지, 아바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형은 아빠를 굉장한 눈으로 노려본 다음, 놀라서 굳어버린 제게 나직하게 물었어요. "꼬마야, 네 이름이 뭐라고?" "네?" "이름!" "가, 강지훈이요." "…빌어먹을. 한 가지만 더 묻자. 오늘이 몇 년 몇 월 며칠이냐?" 무서운 표정으로 애 저런 걸 묻는 걸까요? 저는 울고 싶었지만 혼날까 봐 억지로 참으면서 더듬더듬 대답했어요. "처, 천구백팔십팔 년. 사월 일 일……." "하! 미치겠군." 날짜를 들은 금발 형의 얼굴은 어쩐지 아까 전보다 더욱 무서워져 있었어요. 제가 또 뭔가를 잘못한 걸까요? 아무 말도 못하고 연신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검은 피부의 형이 한숨을 내쉬곤 한탄하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여긴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강지훈이었을 때의 엘이라니. 하필 궤도를 정해도 왜 이런 시점으로……." "닥쳐. 거기서 한마디만 더하면 너라도 가만히 두지 않겠어." "쯧! 그래, 어련하시겠어. 사랑하는 아들의 이런 모습을 목격했으니, 흥분 안 하고 버틸 리가 없겠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금발 형이 화가 난 건 확실한 것 같아요. 그때, 입이 막혀 있던 아버지가 화가 나서 드디어 뿌리치고 일어나셨어요. "이놈의 양키 새끼들이 어디서 감히 행패야! 당장 경찰에 가서 신고해버릴 테다! 니들 어느 나라 사람이냐, 앙?" "아, 아버지……." "강지훈! 네놈도 똑같아! 재깍 달려가 도와줄 사람이라도 부를 것인지 멍청하게 뭘 서서 구경하고 자빠져 있어! 이 아비가 새파랗게 어린놈들한테 맞는 걸 보니 기분이 좋던? 엉? 이 불효막심한 자식!" 퍽! 뒹굴! "아야야야야……." 무방비한 상태로 있어서 아빠의 발길질에 그대로 나가떨어지고 말았어요. 눈물이 찔끔하고 앞을 가렸지만, 울면 또 맞을 것 같아서 간신히 참고 일어서는데, 금발머리 형의 표정이 갑자기 차가워지는게 아니겠어요? 몸을 홱 돌린 형은 그 상태로 바로 아빠의 목을 움켜줘고 공중으로 들어올렸습니다. 아빠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변했습니다. "우욱! 크윽! 큭……." "너 따위 인간이 감히 엘을 건드려? 하, 내 아들이 이런 대접을 받으며 컸다 이 말이지? 좋아, 어떻게 죽여주랴? 어떻게 죽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미천한 인간 따위가 감히!" "엘뤼엔, 진정해. 이건 과거의 일이야. 정해진 미래는 주신 외에는 바꿀 수 없다는 것. 너도 잘 알고 있잖아. 이 녀석을 죽여도 또 다른 작자가 나타나 같은 일을 반복하게 될 거야." "제기랄!" 헉!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섭습니다. 금발머리 형의 얼굴도, 까만 피부의 형도, 푸르게 변해가는 아빠의 얼굴도 모두 무섭기만 합니다. 형들이 아빠를 죽이면 어쩌죠? 그걸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해졌습니다. 저는 덜덜 떨면서 금발머리 형의 다리에 매달렸습니다. "우, 우리 아빠 살려주세요! 네? 우리 아빠예요!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죽이지 마세요, 네? 제, 제발요!" "……." "……." 눈물이 흘러나와 계속 울었습니다. 용서를 빌었더니 형들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져 갑니다. 역시 제가 잘못했나 봐요. 어떻게 해야 형들의 화가 풀릴까요? 다행히 잠시 후에 금발머리 형은 잡고 있던 아빠의 목을 놔주었습니다. 잠깐 저를 향해 슬픈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정신없이 기침을 내뱉는 아빠를 보고 사납게 쏘아붙입니다. "크윽! 쿨럭, 쿨럭!" "네 아들… 때문에 살아난 줄 알아라. 당장 찢어죽이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까. 이번 생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게 좋을거야. 앞으로는 환생 때마다 살기 싫을 만큼 처절한 지옥이 어떤 건지 뼈저리게 느끼게 될 테니." "엘뤼엔, 저 녀석 기억 지워. 저대로 내버려두면 우리가 돌아가고 나서 그 분풀이를 엘에게 다할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 무슨 소린지는 모르겠는데, 제게 화가 나 있던 게 아니라는 걸까요?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고 있자, 금발머리 형은 한결 진정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곤 제 앞에 앉아, 저의 얼굴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습니다. 제 몸의 멈들고 흉터가 생긴 부분을 볼 때마다 형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졌어요. 하지만 제게 건네는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워 안심이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이었지? 네가 죽은 나이가. 그토록 오랜 시간을 이런 고통을 당하며 사는 건가……." "……?" "미안하다. 이미 정해진 미래는 나라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단다. 네가 이렇게 된 것도, 악신의 탄생 역시 모두 예정된 주신의 뜻.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라. 이곳에 있는 모든 건 '진짜'가 아니란다." "…네?" 멍하니 바라보며 묻자, 금발머리 형이 생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었습니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제 머리를 만져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솔직히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어쩌면 이 형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지훈이라고 했느냐? 강한 아이구나. 괜찮다. 넌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거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혼자가… 아니라고?" "그래. 잘 찾아보면 언젠가 너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잇을 거다." "……."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모르겠지만, 듣는 순간 굉장히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형들의 말에 저는 다시금 시무룩해졌습니다. "자, 그럼 난 이제 현! 재! 의 아들을 찾으러 가봐야겠다. 그럼 나중에 다! 시! 보자, 꼬마야." "아……."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얼핏 멀어지려는 손을 다시 붙잡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칭얼거리는 것 처럼 보일까 봐 그럴 수 없었어요. 아빠는 항상 귀찮은 꼬마는 보기 싫다고 하셨거든요. 형들에게 그런 아이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아요. 형들의 얼굴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습니다. 까만 피부의 형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다정하게 말했습니다. "다시 만날 땐 지금보다 행복한 모습일 거야. 네 아버지는 이래봬도 무척 팔불출이거든." "트로웰, 벌써 생을 마감하고 싶어진 모양이지? 페르데스 곁으로 보내주랴?" "하하하~ 노, 농담이었어." "그래? 난 지금도 충분히 용의가 있는데 말이지." "하하하하… 앗! 저쪽 차원에서 엘의 느낌이 있다! 틀림없어! 이번엔 진짜야!" "이봐! 기다려!" 술래잡기 하듯 재빨리 어디론가 뛰어가는 검은 피부의 형을, 금발머리 형이 열심히 쫓아갑니다. 점점 저에게 멀어지고 있네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걸까요? 그러고 보니 금발머리 형에겐 아들이 있다고 했었죠? 분명 아빠를 닮아 멋지고 잘생긴 녀석일 거예요. 저와는 달리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겠죠. 본 적도 없는 녀석이 갑자기 무척 부러워졌습니다. 저처럼 못생긴 아이가 저런 사람의 아들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있잖아요, 하느님. 앞으로 착하게 살 거니까, 엄마, 아빠, 형들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할 테니까 소원 하나만 들어주면 안 될까요? '저도 다시 태어나면, 저런 아빠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두 형들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저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금발머리 형이 떠나기 전에 다시 보자고 했던 말이 떠올랐어요. 언젠가… 정말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