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1 최후의 대격전이 펼쳐지는 공간은 대형 운동장만한 크기의 동굴 던전 이었다. 까마득한 세월 속에 방치된 유적지로 보이는 장소는 남아난 곳이 없을 만큼 곳곳이 부서지고 으스러져있었다. 지옥의 느낌을 물씬 풍기는 던전 바닥의 그 까마득한 아래에는 새빨간 용암이 들끓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자라면 누구든 다리가 후들거릴 만큼 장엄하고 무시무시한 공간이었다. 그 광경으로부터 시야를 가려주듯 바닥에선 짙은 재색연기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 연기는 오히려 독이었다. 실상 독가스이기도 했다. 편편하고 드넓은 검은 지대만이 유일하게 그녀가 설 수 있는 자리였다. 가녀린 체구와 흩날리는 은발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방에 솟아오른 검은 바위아래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용암 때문에 까딱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골로 갈 것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이곳에서 여러 번 죽었었다. 마지막으로 셌을 때가 약 이백 번째로 그 뒤론 일일이 세는 것도 귀찮아 대충 사백에서 오백 번째라고 짐작할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또 죽을까 겁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그 푸른 눈은 형형했다. 동그란 눈매였으나 살짝 앙칼지다는 인상을 줄 만큼 가늘어진 눈, 단단히 집중한 얼굴로 혈혈단신의 여자는 왼쪽으로 몸을 틀었다. 온다. 중키의 사내몸집만 한 대검을 한 손에 쥐고서도 은발의 여자는 무겁다는 표정이 전혀 없었다. 그저 긴장감에 바짝 죄인 얼굴을 하다가 저 멀리 동굴천장에서부터 스믈스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것을 올려다보았다. 집채만 하다 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빌딩 한 채를 세워놓은 것 같은 몸뚱이는 수천만 병사들의 갑옷으로 둘러싼 것처럼 검고 견고해보였다. 네 갈래로 나뉘는 발가락 끝에 달린 날이 선 발톱위로 검붉은 광택이 흘렀다. 파충류의 형상을 띠었으나 양팔대신에 붙어있는 커다란 날개는 여기저기 창으로 꿰뚫린 듯 찢겨져 있었다. 느릿하게 날갯짓을 할 때마다 돌풍이 불어와 재색연기를 흩어지게 만들었다. 사위를 점령하고 있던 연기가 사라지자 이윽고 그 사이로 다크드래곤의 머리가 드러났다. 길게 뻗은 목에서부터 이어지는 비늘들이 칼처럼 뾰족하게 서있었다. 우둘투둘한 돌기가 난 거죽과 솟아난 뿔은 흉포함 그 자체였다. 광기가 스며든 검은 눈알위로 노란 동공이 가늘게 떠졌다. 거의 오백 미터 앞, 다크드래곤이 날개를 크게 퍼덕이며 내려앉을 자세를 잡았다. 천장에서 돌덩어리가 우수수 떨어질 만큼의 위력이었다. 마침내 다크드래곤의 육중한 몸이 서서히 지대에 내려앉았다. 쿠구구구구구궁. 새카만 재가 뒤섞인 먼지바람이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치울 기세로 크게 일었다. 용암이 출렁이고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널따란 검은 지면이 진동했다. 동굴 벽이 따라 흔들리고 천장이 요동쳤다. 그 여파로 인해 붉은 용암이 갈라진 벽 사이로 울컥울컥 새어나왔다. “…아 그래. HP 충전은 다했다 이거냐.” 졸음, 지독한 짜증, 허기, 지루함이 묻어난 목소리가 성대를 긁으며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발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아닌,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있는 또 다른 여자의 목소리였다. 태화는 어서 이 길고도 긴 결투가 끝나길 바라며 지그시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한참을 기다렸잖아? 응? 싸우는 도중에 튀는 게 어딨어?” 썩을 새끼야, 하고 신랄한 욕까지 섞으며 여자는 키보드 위에 얹은 왼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방향키와 스킬키 쪽으로 손가락이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다. 근질거려서 못 참겠다는 듯이 움직이다가 모니터 속의 다크드래곤이 콧김을 내뿜는 걸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장장 14시간째 죽지 않고 이어가는 플레이였다. 보통은 최단 클리어기록이 신기록에 오를 테지만 이 맵은 달랐다.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죽기 전까지 오래 버틸수록 신기록에 올랐다. 가장 오래 버텼던 플레이어의 기록은 약 6시간. 그에 두 배를 뛰어넘는 신기록을 달성한 지 오래였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단순히 오래 버티는 게 아니었다. 게임의 최종보스, 다크드래곤을 죽이고 첫 게임클리어의 명예를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태화가 진정 원하는 것이었다. 이제껏 수많은 이들이 만렙을 찍었으나 클리어만큼은 아무도 해내지 못했다. 최종맵을 깨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러니 태화가 이 맵을 깬다면 최고 플레이기록이 최단 클리어시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말은 쉽지 한시도 모니터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4시간째 던전 공간에서 싸워대는 동안 캐릭터가 죽을까봐 요의도 참고, 식사도 미뤘다. 사실상 다크드래곤 최종맵은 불사의 맵으로 유명했다. 절대 깨지지 않아 시스템상 오류 아니냐며 게임운영팀에 항의전화까지 빗발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때마다 운영자는 게임에 이상이 없다는 전체공지를 띄우고 매번 잠적했다. 초등학생 때 뭣도 모르고 오픈베타부터 달려와 스물넷인 지금까지 하고 있으니 태화는 이 게임과 함께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태화가 성장할수록 이 게임은 세월 속에 뒤처져갔지만. 국내 MMORPG게임인 ‘드래곤 아르카이샤’는 전투 위주의 녹슨 방식 그대로 유지해온, 말 그대로 구닥다리 게임이었다. 이 게임이 처음 나왔을 당시엔 상당히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일으켰었다. 압도적인 그래픽과 세세한 세계관으로 사랑받으며 초딩들을 학교가 끝나자마자 PC방으로 달려가게 만들었었다. 그것도 다 옛날얘기로 13년이 흐른 지금, 드래곤 아르카이샤는 아무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 완전히 구식게임으로 전략해버렸다. 요즘 나오는 국내 RPG게임들은 드래곤 아르카이샤를 가뿐히 뛰어넘고도 남을 화려한 그래픽은 기본이고 다양한 직업 및 자유도, 독특한 세계관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새로 유입된 유저가 있기는커녕 남아있던 플레이어들도 하나둘 떠나가는 실정이었다. 그렇기에 악착같이 이 게임에만 몰두하는 이태화는 유별나다고 볼 수 있었다. 태화는 이 게임회사가 망하기 직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도 서비스가 정식중단 되는 날까지 약 이틀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전에 어떻게든 후회가 남지 않게 클리어를 하자는 오기하나로 그녀는 모니터 앞에 버티고 있었다. “이제 끝을 내자, 새꺄.” 그 목소리를 들었을 리가 없건만 드래곤이 돌연 머리를 들이밀었다. 단번에 수십 명이 빨려 들어가도 남을 거대한 두 개의 구멍에서 뜨거운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콧김을 한번 뿜었을 뿐인데 그 기세가 거세고 요란했다. 긴 은색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리는 와중에도 여자는 제자리를 지켰다. 포악해 보이는 주둥이가 벌려지고 날카로운 이빨틈새로 새카만 브레스가 새어나와 넘실댔다. ‘오냐, 와라.’ 크르르르르ㅡ하고 헤드폰 양쪽에서 터져 나오는 생생한 사운드에 리듬이라도 타듯 태화는 가볍게 손목을 풀었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움직이자 뿌득 뿌득 하고 소복이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울렸다. 빙빙 돌리는 손목에서도 어김없이 뿌드득 소리가 났다. 손가락관절의 마디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풀어주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마우스를 붙잡았다. ‘와라, 와라, 와라.’ 컴퓨터 책상위에 반쯤 먹다 남긴 캔 콜라는 김이 다 빠져 밍밍해져있었다. 태화의 기분도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다. 오기 하나만으로 버텨온 올드비 유저. 이 게임의 엔딩을 보기 전까지 떨어져나갈쏘냐. 다크드래곤의 입에서 광포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무섭게 키보드에 얹어져있던 왼손이 타다닥 움직였다. 길게 뿜어져 나오는 브레스를 막아내는 검신 주위로 환하고 붉은 검기가 터져 나왔다. 칠흑의 브레스는 두 갈래로 나뉘어 여인의 주위로 비껴나갔으나 그럼에도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이어졌다. 콰과과과과ㅡ 지면이 갈리고 표면위로 날카로운 돌조각이 비죽비죽 솟아올랐다. 주위의 모든 것이 박살나는 박진감 넘치는 소리가 헤드폰을 통해 울렸다. 이에 질세라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손가락은 마치 지면을 두들기는 소나기처럼 빠르고 거셌다. 요동치는 긴 은발주위로 약 오십 개의 사람만한 구들이 떠올랐다. 푸르게 타오르는 그것의 온도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녹여 내리기엔 충분할 테다. 실성한 다크드래곤이 내뿜는 브레스에 맞서 마법공격스킬을 쏘아대며 여인이 지면을 박차고 날았다. 그녀가 사라지고 없어진 자리에는 깊은 구덩이와 같은 발자국만 남아있었다. 자신의 키에서 20배가량 높은 허공으로 뛰어오른 여인은 가볍게 몸을 회전하며 크게 한 번 대검을 휘둘렀다. 이에 맞춰 현란한 스킬이 이어졌다. 오십 개의 푸른 불꽃들이 열 번도 넘게 다크드래곤을 향해 마구 쇄도했다. 피할 새도 없이 오백 번의 마법공격스킬이 폭격처럼 이어지자 다크드래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고개를 틀었다. 벌어진 주둥이에서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돌로 된 검은 지면위로 S자모양의 굵게 파인 흔적이 새겨졌다. 은발여인은 아슬아슬하게 브레스를 피해 다크드래곤의 목으로 추정되는 부분을 발로 차 한번 더 높이 뛰어올랐다. 그 순간 허공으로 새카만 브레스가 튀어 오르자 급히 허리를 젖혀 공중제비돌기로 피했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여인의 등 뒤로 태양처럼 거대한 붉은 구가 생성되었다. 지글거리는 열기가 대단한 그 마법공격스킬이 곧 다크드래곤의 왼쪽 턱을 강타했다. 키웨엑!! 크와아아아앙ㅡ! 천장이 흔들릴 만큼 울부짖으며 다크드래곤이 뒤로 또 한발 물러났다. 이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녀가 착지하기 무섭게 수천 개의 불꽃화살들이 하늘로 치솟아 다크드래곤의 머리에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콰아앙! 다크드래곤뿐 아니라 그 주변의 단단한 바위가 죄 부서질 만큼 강력한 위력을 지닌 불꽃화살이었다. 신들린 솜씨로 태화는 만렙으로서 갈고 닦았던 각종 스킬들을 모두 토해내었다. 데미지 크리티컬이 제대로 먹혀들었다. 다크드래곤의 움직임이 조금 둔해져있었다. 아까의 날아다니며 공중전을 펼쳤을 때의 기세와는 분명 달랐다. 보이지 않는 HP창. 그래서 최종몹인 다크드래곤은 깰 수 없는 시스템상 오류라고 모든 유저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플레이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끝이 없는 절망처럼 느껴지니까. 하지만 태화는 확신했다. 다크드래곤의 HP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고. 태화의 여전사 캐릭터도 만만치 않게 HP가 깎인 상태라지만 아직 죽기엔 이르다. 아직 더 고전할 수 있었다. 이날만을 위해 사용한 수백 개의 부활템이 아까워서라도 오늘은 꼭 이기고야 말겠다고 태화는 속으로 별렀다. ‘지긋지긋하니까 이제 좀 끝내자!’ 아까완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센 기세로 여전사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날리는 긴 은발을 뒤로하고 두 손으로 단단히 쥔 대검을 머리 위로 높게 쳐들었다. 그녀가 샛노란 동공이 있는 높이까지 도약하자, 다크드래곤은 머리를 뒤로 물리나 싶다가 바로 주둥이 쫙 벌렸다. 헤드폰을 뚫고나올 듯한 굉음과 동시에 모니터화면을 뒤덮으며 검은 브레스가 쏘아졌다. 하지만 그 브레스에 잡아먹힐 레벨이 아니었다. 랭킹 1위의 여전사 답게 그 가녀린 몸 주위로 천 쌍의 방어구들이 떠오르며 실드마법까지 덧대어졌다. 종말처럼 덮쳐온 새카만 브레스가 그녀주위를 미끄러져가는 동안 여전사는 크게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곤 다시 정면으로 몸을 빠르게 돌리는 순간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홍염이 긴 잔상을 남기며 수평에 있던 모든 것들을 잘라내었다. 아니, 말 그대로 소멸시킬 작정으로 싹 태워버렸다. 다크드래곤의 머리 또한……. “…어?” 내가 너무 감격했나. 마우스를 쥔 손이, 키보드위에 얹은 손이 파르르 떨렸다. 태화는 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도, 허벅지도, 다리도, 심지어 의자까지 떨리고 있었다. 이 진동이 어디서 오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이상한 소음이 귀에 잡혔다. 게임사운드에서나 들을 법한, 수천수만 개의 창과 방패가 동시에 부딪치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였다. 문제는 정확히 헤드폰의 너머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토록 고대하던 순간이었으나 태화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엄청난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천장의 상태가 이상했다. 벽 끝에서부터 벽지가 쩍쩍 갈라지더니 얇은 금이 빠르게 전등까지 점령했다. 천장을 가르고 생겨난 금이 바로 제 머리위에 있다는 것에 태화가 꼼짝도 하지 못할 때였다. 난데없이 형광등이 떨어져 내려왔다. 전깃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깨지는 건 면할 수 있었다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후드드득 하고 천장에서부터 돌 부스러기 같은 게 떨어져 내렸다. 또 다시 울리는 그 굉음. 천장에서 울린다고 여겼는데 아니었다. 발밑이었다. 쿠르르릉 하고 대지에서 울리는 소리는 게임사운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생생했다. 태화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덜덜 떨리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으키기 무섭게 진동하는 바닥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콰당 쓰러져버렸다. 대자로 뻗은 상태에서 태화는 무너지는 천장을 정면에서 마주했다. 윗집의 콘크리트바닥이 머리위로 내려앉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ㅡ^ 세싹입니……, 다! <시작하시기 전에> ※ 스토리가 뒤로 밀려나서 현재 코멘과 내용이 맞지 않습니다... 간혹 스포가 될 수 있으니 주의바랍니다TT 하지만 코멘은 사랑입니다...S2 그럼 저와 함께 달려보시죠/ 부르르릉 0002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천장이 내려앉는 찰나의 순간,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현재 태화는 검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뻗어있었다. 빌라 째 내려앉아 버린 걸까. 그 잔해 밑에 있어서 이렇게 어두운 걸까. 하지만 그런 것치곤 몸이 생각보다 가벼운 것 같았다. 다친 곳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입 주변을 긁적이며 태화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다 몸이 조금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등학생 때부터 늘 숏컷만 고집해왔을 텐데 허리에서 치렁거리는 이건 대체 뭐란 말일까. 물론 가발이냐 진짜 머리냐를 떠나서 태화에겐 아까의 상황이 대체 뭐였는지가 더 중요했다. 전쟁이라도 난 건가, 아니면 지진이 일어난 걸까. 한 가지 확실한건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걸 바라보는 와중에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라는 태연한 생각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한지 몰라 태화는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곤 냅다 다시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게임만 깨면 재취업 준비하고…이번 년엔 빡세게 학자금도 다 갚으려고 했는데. 에잇,’ 폐인처럼 14시간 넘게 게임만 하다가 자취방 천장에 깔려 뒤지다니, 이것만큼 한심한 인생도 없을 것 같았다. 엔딩이라도 봤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도 않을 테다. ‘거의 다 죽었던 것 같은데! 아놔!!’ 이와 중에도 게임에 미련이 커 다크드래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각하고 있는 자신에게 퍽 짜증이 났다. 태화는 분풀이삼아 어두운 바닥을 주먹등으로 내리쳤다. 작은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그제야 이 공간자체가 많이 이상하다는 걸 태화는 눈치 채고 다시 번쩍 상체를 일으켰다. 소리도, 바람도, 심지어 공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공간은 그저 까마득하고 어두웠다.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온통 어둠으로 뒤덮여있었다. 모든 것이 차단된 것처럼 고요했다. 태화는 만져지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먼지한 점 없는 게 괜히 이질적인 감각과 함께 소름을 불러일으켰다. 연구소의 삼엄하고 관리 철저한 무균실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해.] 그때 아무도 없다고 여겼던 공간속에서 불쑥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전처음 듣는 미려한 목소리였다. “…뭐, 뭐야?” 웬 안내방송? 태화는 반응을 숨기며 잔뜩 경계하기보단 솔직하게 놀라는 쪽을 택했다.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그 얼굴을 여자는 고스란히 지켜보고 있다는 듯이 이어진 목소리엔 옅은 웃음기가 스며있었다. [당황할 필요 없어. 지금부터 게임에 대해 설명해주려는 거니까. 쉽고 간단하게.] “누구신데요?” [네가 이다음 눈떴을 때 도착할 곳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속이야. 그러니까 내 설명 잘 들어두는 게 좋겠지?] “예?” 어이없어서 절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뭔 개소리지.’ 태화는 속으로나마 덤덤히 생각했다. 어떤 여자가 장난삼아 안내방송을 하는 건가, 무너진 빌라더미 아래서 자신은 그걸 듣고 있고? 하지만 바닥이 너무 깨끗했다. 어쩌면 몰래카메라 일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재난 속에 무사히 살아남은 자신은 정부기관의 연구대상으로 끌려온 걸지도 모르겠다. 평소 잘 굴러가지 않던 태화의 머리는 위기상황 속에서 상상력을 극대화로 발휘시켰다. “저기 게임이고 나발이고, 여기가 대체 어딘지 부터 말씀해주실래요?” 이 여자라면 여기가 어딘 줄 알겠지, 하는 일말의 희망을 걸고 태화는 물었다. 그보다 킬 수 있다면 불부터 켜달라고 말하려다가 이어지는 여자목소리에 태화는 입을 허 벌렸다. [원래 있던 세계와는 단절된 바람에 넌 이제 다른 곳으로 갈 거야. 그 새로운 곳에서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시작되는 거지. 네가 꼬셔야할 상대는 총 세 명. 이런 걸 역하렘게임 이라고도 부른다지? 그 세 명 다 너의 사랑의 포로로 만들면 게임종료야. 그럼 그 세 명에 대해서…] “아니, 저기요.” 이해불가의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태화는 끙, 하고 입매를 우그러뜨렸다. 제대로 상황설명은커녕 아까부터 게임, 게임, 그놈의 게임만 입에 달고 있는 여자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났다. 목소리만으로 추정하건데 자신과 비슷한 연령 같은데 이 위급상황에 게임얘기나 하고 있고 제정신인가 싶었다. 물론 아까 게임엔딩을 보지 못해 성을 냈던 태화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여기 어디냐구요. 언니.” 한 글자 힘주어 또박또박 내뱉으면서도 마지막엔 상큼하게 ‘언니’호칭을 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나이가 저보다 어린지 많은 진 모르겠지만 여자들의 공통호칭이 ‘언니’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 태화가 제일 좋아하는 어감이기도 했다. [첫 번째 공략상대. 바일롯의 젊은 왕, 바일로트 핀 아이작 라델리우스.] 그러거나 말거나 천장, 혹은 양측에서 잇따라 여자 목소리가 웅웅 울리기 시작했다. 귓등으로도 안 듣는 모양이다. 태화는 하마터면 얼굴도 보지 못한 초면의 상대에게 ‘이 언니가 진짜.’하고 성을 낼 뻔했다. 꾹 입술을 깨물며 태화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듯이 참고 있자 대본이라도 읊듯 유려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중반대로 바일롯의 남편감 1위로 손꼽히는 자. 성격은 자기여자에겐 아마도 따스한 성격.] ‘…아마도?’ 태화의 표정이 슬쩍 구겨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봄날처럼 부드러운 말씨가 또 한 번 태화의 귓가를 간질였다. [두 번째 공략상대. 바일롯의 젊은 공작. 블리어 라콘드. 나이는 왕과 비슷한 이십대 중반대로 성격은 아마도 냉정한 성격. 바일롯의…] '와, 아마도 또 들어갔어.' 따질까했지만 무시할게 뻔해 태화는 그냥 듣기자체를 관두었다. 세상에 어느 게임회사가 캐릭터프로필을 저따위로 허접하게 만들까. 실제 공식프로필을 읽는 게 아닌 되는 대로 막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게임이름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다. 물론 역하렘 게임에 관심 없는 태화는 물어볼 필요성을 못 느꼈다. [마지막, 세 번째 공략상대는 드래곤. 나이 불명. 성격도 알 수 없음. 특징이라 함은 아름다운 외관을 소유…] 중요치 않는 정보라 여기고 거의 흘려듣던 태화는 드래곤이라는 단어에서 멈칫했다. 분명 세 명이라고 해놓고선 뜬금없이 몬스터 한 마리가 왜 나오느냔 말이다. 애당초 드래곤이라 함은 RPG게임에선 거의 보스급으로 등장하는 몬스터였다. 죽여야 할 드래곤도 유혹시켜야할 공략대상에 포함된다는 사실에 태화는 새삼 놀랐다. 이 무슨 더러운 수인물 게임이지? 관자놀이가 다 지끈거렸지만 최대한 짜증을 누르고서 태화는 사근사근 말했다. “무슨 게임인진 모르겠지만 언니의 취향, 그래 존중해드릴게요. 근데 난 역하렘게임 같은 거엔 죽어도 관심 없고 듣고 싶지도 않아요. 애초에 지금 게임설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제안한 이 게임을 완벽하게 클리어 한다면 네 소원을 한 가지 들어줄게.] “언니 내 말 좀 들어봐요.” [그럼 그렇게 알고, 행운을 빌게.] “아니, 게임할 때가 아니라니까. 언…” 뭔가 이상하다. 태화는 직감적으로 딱 그렇게 생각했다. 딱딱하던 바닥이 돌연 물렁물렁해져가더니 아래에서 쑥 잡아당기는 기이한 느낌이 하체에서부터 퍼졌다. “이게 뭐야! 잠깐, 거기 언니?!!” 비명을 지를 세도 없이 태화는 검은 바닥에 집어삼켜졌다. ‘…아, 진짜 정신없네.’ 여긴 또 어디야. 태화는 눈앞에 펼쳐진 설경을 감상하며 턱을 긁적였다. 이번엔 까무룩 정신을 잃지 않았으나 환하게 빛이 터지기 무섭게 이곳에 우뚝 서있게 되니 혼란스럽기만 했다. 암만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면 말짱 꽝이었다. 실상 상황파악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눈 덮인 산속 한복판에 자신은 뚝 떨어진 채였다. 뒤늦게 언니를 부르짖었으나 들려오는 것은 황량한 산속에서 아득히 퍼지는 메아리뿐이었다. 한참을 제자리에서 수동적으로 서 있다가 태화는 한 발짝 내디뎠다. 허리에서 살랑하고 무언가가 나부꼈다.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내리기 무섭게 태화의 입에서 당혹을 금치 못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우억,” 내 꼴이 왜이래! 차마 내뱉지 못한 경악스런 외침을 가까스로 집어삼켰다. 번쩍 하고 머리위로 벼락이라도 떨어져 내린 것처럼 태화는 꼼짝없이 얼어붙었다. 하지만 눈길은 빠르게 자신의 쇄골에서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가는 어깨와 쇄골을 간신히 덮는 박쥐모양의 은갑옷 아래로 하얀 살결이 노출되어있었다. 가슴골이 다 드러난 올인원형태의 갑옷은 팬티라인에서 딱 떨어졌다. 테두리를 따라 은이 반짝거리는 순백의 갑옷은 전신 중에서도 극소부위만 가리고 있었다. 특히 중요한 부위를 중심으로 아주 소극적인 모양새를 띠었다. 갑옷이 아니라 화려한 란제리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노출정도가 심했다. 갑옷치곤 쫙 달라붙어서 몸매의 실루엣조차 가릴 수 없었다. 가늘게 빠진 허벅지와 그 아래 신겨진 장화는 보호구 속성을 띤 세 줄의 번개무늬가 은으로 세공되어 있었다. 심지어 손목에 찬 가느다란 팔찌는 <신전 드필드라의 보물>이었다. 운 스텟과 지능스텟, 회피율을 최고로 올려주는 희귀템이었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주위가 온통 눈으로 뒤덮인 설산 한복판, 이렇게 심한 노출을 하고 있어도 전혀 춥지가 않다는 것이다. 설마…, 하고 태화는 반사적으로 양 귓불에 손을 가져갔다. 귀걸이가 걸려있었다. 그것을 빼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과 맞먹는 추위가 밀려들었다. 아이스버킷 챌린지가 따로 없었다. “와, 와....” 장난 아니다. 살면서 이렇게 추운 건 또 처음이네. 딱딱딱 하고 이빨이 맞부딪히며 나는 소리와 떨리는 입술은 정신력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못됐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볼품없이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태화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귀걸이를 다시 착용했다. 언제 추웠었냐는 듯이 다시 몸이 멀쩡한 상태로 돌아왔다. 아이템의 효과인건가? 태화는 다시 귀걸이를 뺐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살 떨리는 극한의 한기가 몰아닥쳐왔다. 더 이상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까지 이 상황을 의심하고 싶진 않기에 태화는 얌전히 귀걸이를 다시 걸었다. 그녀가 착용한 귀걸이는 눈 결정을 닮은 크리스탈이 달린 <코로르비타의 귀걸이>였다. 다름 아닌 ‘드래곤 아르카이샤’의 흉포한 북방지대를 지배한 얼음마녀 코로르비타의 귀걸이. 전설의 희귀템으로 불리는 이 귀걸이는 결빙속성의 공격을 백 프로 차단하는 방한마법 아이템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도 방한효과를 보이는 모양이었다. 순수하게 감탄하다가도 그 태연한 생각이 더욱더 혼란함을 가중시켰다. 여전사 캐릭터가 매일 끼고 다녔던 것들이 왜 내 몸에 착용되어 있으며, 누구 보기 좋으라고 여전사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애당초 이 몸은 자신의 몸이 아니었다. 여전사 캐릭터의 몸이 ‘나’의 몸이 되어 있었다. 내 몸은 어디 갔지? 태화는 우스운 생각을 하면서도 전혀 우스꽝스럽다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내 몸! 아씨…내 몸 어딨지!” 내 지갑! 하고 외치듯 태화는 급히 주머니로 추정되는 갑옷의 이곳저곳을 찔러보았으나 자신의 몸이 갑옷 주머니 안에 들어있을 리는 없었다. 들어있다면 그것만큼 공포스러운 일도 없을 테지만. 대신 태화는 허리위에서 불편하게 치렁거리던 머리칼을 한 움큼 쥐어 들어올렸다. 회색 비스무리한 색도 아닌, 말 그대로 순수한 은빛이 감도는 머리칼이었다. 염색으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빛깔은 아름다워서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내 몸보단 낫네. 응.’ 입맛이 씁쓸하지만 태화는 꽤 빠르게 수긍해버렸다. 몸매만 봐도 끝내줄 정도로 아주 예쁘다. 특히 이 걸그룹 뺨치는 가는 허벅지. 처음보자마자 딱 알았다. 이건 내 허벅지가 아니야 하고. 정황상 현재 자신은 게임캐릭터가 되었다는 말인데 그 말은 즉,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말일테다. 굉장히 섬뜩하고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리플레이 괴담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되긴 했지만 이곳이 게임 속이라는 가정이 설립되자 풍경이 새삼 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태화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게임 속? 사실일까? 자신이 서있는 지금이곳은 평상시 알고 있던 맵 배경과는 많이 달랐다. 하얗게 눈 덮인 설산, 황량하긴 하지만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자신이 알기론 드래곤 아르카이샤에는 이런 맵은 존재하지 않았다. 혹독한 북방맵은 존재했지만 이런 평온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었다. 그곳은 시도 때도 없이 얼음속성의 몬스터들이 떼거지로 출현하는 사냥터였다. 레벨 140부터 들어올 수 있는 고난이도의 맵답게 몬스터의 공격타입도 결빙타입이라 공격 한번에도 캐릭터가 얼어붙어 극심한 데미지를 입기로 유명했다. 그렇기에 고가의 방한효과 아이템을 착용하거나, 대체로 파티원을 모집해 움직이는 게 보통이었다. 물론 태화는 심심하면 그곳을 찾아가서 모든 몬스터들을 쓸고 돈이 될 만한 아이템을 두둑이 챙겼었다. 이곳이 정말 게임아이템 효과가 발휘되는 게임 속 세상이라면 내 몸은 어떻게 된 걸까. 동시에 엄마 아빠, 차례로 뒤따라온 두 단어에 태화는 머리까지 쥐어뜯었다. 생전 효도한 기억은 없다지만 가장 큰 불효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았다. 방년 스물넷의 나이로 죽은 걸까. 부모님과 친구들을 두고 먼저 저세상으로 떠버린 걸까. ‘…차원이동? 죽어서 여기로 온 건가? 역하렘 어쩌고 했던 그 언니는 대체 뭐고? 아 진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태화는 자리에 멈춰 서서 긴 머리칼만 마구잡이로 흩트리다가 어,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목 뒤에 침이라도 맞은 것처럼 여자의 목소리가 퍼뜩 떠올랐다. 비록 불친절하게 자신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제 얘기만 했었지만 그 말들이 사실이라면 대충 납득이 가는 것이다. 그럼 여기는 ‘드래곤 아르카이샤’ 속 세상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게임 속 세상……. 미처 생각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태화의 귀로 희미하지만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씩 커지며 또렷해지는 그 소리는 분명 말 발굽소리였다. 0003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온다. 자신의 방향으로 오고 있다는 걸 이 몸은 아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곤 착실하게 그쪽방향으로 몸을 돌리며 금방이라도 대검을 휘두를 듯한 자세를 취했다. ‘아냐. 그거 아냐.’ 태화는 게임습성과도 같은 제 몸을 억누르며 허전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의상과 착용된 아이템은 다 그대로인데 무기만 없었다. 자신이 애용하던 레드드래곤에게서 얻은 전설의 마검, <카르갈의 홍염>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애초에 모니터로 보는 세상이 아니기에 아이템창, 스킬창도 없고 지도조차 볼 수 없었다. ‘갑갑하네.’ 게임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안 간다지만 태화는 한숨을 내쉬며 소복이 하얀 눈이 덮인 구릉을 바라보았다. 얼마안가 위가 뾰족하게 솟은 가문비나무의 가시 같은 잎들이 대지의 진동에 흔들리며 얹은 눈을 떨어뜨렸다. 눈을 터는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말들이 가장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제주도에 갔다가 처음 타본 말보다도 훨씬 우람해 보이는 흑마였다. 검은 털에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운 말들의 모습에 태화는 솔직히 눈을 떼지 못했다. 쟤들 팔면 얼마일까. 멀리서 눈밭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여섯 필의 말을 뒤로하고 중세시대에나 볼법한 마차가 드러났다. 금장식이 요란하게 달린 새까만 대형마차는 그 값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지나가는 마차를 뚫어져라 구경하다 태화는 말을 모는 마부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마부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키우다가 고삐를 잡아당겼다. 일제히 히잉 하는 소리와 함께 말들이 서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태화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차는 완전히 멈춰 섰다. 혹시 타라는 건가? 태화가 태연하게 팔짱을 낀 채 서있을 때, 마부가 간이창문을 통해 안에 타고 있는 자에게 짤막하고도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위험 어쩌구, 영주민 어쩌구 말을 잇는 모습이 가히 심각해보였다. 그리고 얼마안가 굳게 닫혀있던 마차 문이 성의 없게 열어젖혀졌다. 마차 안에 타고 있는 자가 누군 진 몰라도 탑승을 허락한다는 의미 같았다. 태화는 이게 웬 횡재인가 싶어서 마차 쪽으로 터벅터벅 움직였다. 빗어 넘긴 회색머리 때문에 할아버지라고 여겼는데 조금 가까이에서 보니 마부는 많이 쳐봤자 오십 정도로 보였다. 마부와 다시 한번 눈이 마주치자 태화는 이번엔 싹싹하게 웃어보였다. “아. 굳이 안 태워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아뇨아뇨. 제가 아니라 아량을 베풀어주신 라콘드 전하께 감사드릴 일이죠. 공작전하께서 얼른 오르시랍니다.” 마부의 겸손한 말에 그제야 태화는 마차 안에 한가로이 앉아있는 자를 볼 수 있었다. 미동조차 않는 굳은 자세로 소파 중앙자리를 차지한 자와 눈이 마주쳤다. 어두운 녹빛 눈이 서늘했다. ‘네가 이다음 눈떴을 때 도착할 곳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속이야.’ 속삭이는 것처럼 은밀하게 목소리가 태화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역하렘게임의 충실한 덕후가 하는 말로 치부하고서 주의 깊게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막상 닥친 현실에 태화는 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야 자신이 공략해야할 대상하나가 눈앞에 버젓이 존재해있으니 말이다. 두 번째 공략상대. 바일롯의 젊은 공작. 뭐시기 라콘드. * 뭐시기 라콘드의 넓은 아량덕분에 마차에 오른 지 체감상 반 시간째, 태화는 어색하게 맞은편 소파에 앉아있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옷차림이 상당히 야시시해서 더 그랬다. RPG게임의 여캐들은 백이면 백 레벨이 높을수록 벗는다. 그러니 이건 당연한 차림새라는 거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캐들의 갑옷은 노출이 심하면 심할수록 방어력 높은 갑옷으로 판단된다. 비록 그 노출된 살들은 어떻게 방어가 되는 진 몰라도 뭐 모든 게임의 공통된 법칙이었다. 물론 이렇게 자신이 입게 될 줄 알았다면 투구까지 달려있는 중세시대 철갑옷으로 무장을 했을 테다. 젠장. 태화는 입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깨물며 애써 변명에 변명을 보탰다. 그러지 않고선 이 답답하고 어색한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행히 뭐시기 라콘드는 이쪽으로 눈길한번 주지 않았다. 역시 냉혈한 공작답다고 태화는 생각했다. 태화가 이 남자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저걸 어떻게 공략해? 그 어떤 난공불락의 맵도 대책 없이 입장부터 하고보는 게 태화의 플레이 방식이었다. 무시무시한 보스몹이든 끊임없이 쏟아지는 몬스터떼든 달려들어 무기부터 휘두르고 보는 스릴을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공략해야할지 골몰히 머리 쓰는 타입은 전혀 아니었다. 물론 여기서 태화가 함락시켜야 될 대상이 몬스터가 아닌 남자라는 점이 문제였다. 방년 스물 넷. 취미는 오로지 방에 틀어박혀 액션RPG게임 플레이하기.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칠 년째 숏컷만을 고집하는 그녀가 제대로 남자를 사귀어봤을 리 없었다. 게으르고 털털한 성격 탓에 남자인 친구는 많았다. 반면 썸이나 연애 쪽으로는 상당히 무지한 인간이었다. ‘황제랑 공작이랑 드래곤…이었나? 걔들을 완전히 공략하면 소원 한 가지 들어준댔지. 그 언니는 신인가? 날 이런 곳에 처넣었을 정도면 신이라고 봐도…흠. 그럼 소원으론 다시 집으로 보내줘요 가 적당하겠지? 아니 그전에 내 몸은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보내줘요 했는데 이미 화장된 직후면…’ 아오 하고 태화는 거추장스런 긴 은발을 헝클이다가 슬쩍 맞은편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내내 침묵을 지킨 채 창문 밖을 어두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의 새하얀 풍경과 대비되는 칠흑 같은 머리칼. 이국적일 만큼 짙은 쌍꺼풀은 전혀 느끼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긴 눈매가 칼같이 날카로워보였다. 투명한 겨울햇살이 내려앉은 곧은 콧날과 미려한 입술선은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품 저리가라 했다. 상당히 잘생긴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태화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한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무슨 말걸 틈을 안 줄 것같이 생겼어.’ 태화는 지루하게 반대편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려버렸다. 역하렘게임의 세계에 들어와 가뜩이나 심란해죽겠는데 남자한테 관심이 갈 리 만무했다. 턱을 괴고서 태화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차창너머를 멍하니 응시했다. 끝도 없이 펼쳐질 거라 여겼던 눈 덮인 산속풍경이 점차 달라지고 있었다. 눈이 녹아든 흙길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눈을 짊어진 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져있었다. 그리고 그 흙길 끝에는 까마득하게 높은 거대한 성곽이 버티고 있었다. 진회색 돌덩이를 쌓아올린 외벽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했다. “통행증은 있습니까.” 그때 좀처럼 입을 열지 않던 사내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반 시진 넘게 함께 있으면서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자기문제만으로 심란해있던 차라 말을 걸지 않은 태화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없는데요.” “영지민은 아닌가봅니다.” 줄곧 창밖을 응시하던 사내가 태화를 향해 눈길을 주었다. 짙은 녹안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는데 그다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이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툭 던진 질문에 태화는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반사적으로 ‘이태화’라는 본명을 댈 뻔했으나 지금 이 세계에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란 걸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애초에 지금 몸은 자신의 게임캐릭터의 몸이었다. 게임에서 쓰던 이름을 대는 게 옳다 여겼으나 확실히 입을 여는 게 쉽지는 않았다. “이름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요,” “잘 안 들립니다.” “……요.” 최대한 이름을 뭉개지듯 발음한 탓에 그가 듣기엔 ‘…흐흠흠요.’ 정도로 들릴 테다. 조금 짜증이 날 법할 텐데도 사내는 특유의 마이페이스로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리아요.” “다시. 잘 안 들립니다.” “...렐리아요.” 원래 게임상 이름은 유렐리아지만 대충 알아듣게 놔뒀다. 초딩 때 치은 닉네임이라 초면인 사람 앞에서 대려니 창피해서 안면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한번 말할 때 알아들으라고. “성은 없습니까.” “뭐 그렇죠.” “좋습니다. 렐리아. 신원이 확인될 때까지 공작령에 체류하십시오. 라콘드 가문에서 그대의 편의를 봐주겠습니다.” 올. 태화는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여주인공 버프인 모양이었다. 냉혈의 공작 캐릭터라면서 처음 본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주고 그다지 냉정하게 굴지도 않았다. 애초에 공대를 써주고 있을 정도인데 이정도면 정중한 대접이 아닐 수 없었다. 역하렘게임의 시스템 상 어떠한 장치인진 몰라도 공략대상과 우연히 만난 것도 기적이라 볼 수 있었다. 안 그랬다면 대륙 어디에 있을지 모를 세 남주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늙어버려 ‘비록 게임 속 남주들과 말 한번 못 나눠본 게 평생의 한이라지만 좋은 인생이었어...’하며 눈을 감았을 지도 모르겠다. 현실적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는 거였다. 황제와 공작은 있는 장소를 알아도 너무나도 까마득한 신분이고, 드래곤은 상식적으로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행히 게임 시스템대로라면 나머지 공략대상들과도 어떻게든 만나게 될 거란 결론이 내려졌다. ‘그럼 우선 쟤를 공략하고.’ 무턱대고 눕힐까. 원래 몸이었다면 가능성이 희박하겠지만 지금 이 몸으론 꽤 자신이 있었다.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쭉쭉빵빵한 몸매는 확실히 ‘꼴린다’는 축에 들 테다. 남자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대충 자빠뜨리면 그가 알아서 하지 않을까. 태화는 속으로나마 픽 웃었다. 신원확인도 되지 않은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정도면 저자도 어지간히 얼굴 밝히는 남자구나 싶었다. ‘역시 사내놈들은 다 똑같아~’ 예쁜 여자라면 사족 못 쓰는 건 동서고금 막론하고 다 똑같구나 하고 태화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이거 좀 쉽게 될 것 같다. 귀라도 후빌 것 같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 마차는 삼엄한 경비를 뚫고 빠르게 공작령 안으로 들어섰다. * 끼이이이익ㅡ 이 소리가 무엇인가 하면 다름 아닌 철창문을 닫는 소리였다. 태화, 아니 렐리아가 현재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공작성의 지하에 마련된 감옥 안이었다. 복도를 따라 환한 등불이 여러 개 걸려있어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매일 닦아 관리했는지 감옥내부는 깔끔했다. 일인용 침대와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돼 있었다. 적어도 사람대접은 해준다는 말이었다. 녹이 전혀 쓸지 않은 창살은 은은한 불빛에 반사되어 음침한 분위기는커녕 낭만적일 정도였다. 그래도 창살달린 방이라는 건 변함없었다. ‘시부랄! 공작 개새끼야아!’ ============================ 작품 후기 ============================ 0004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태화는 도저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불과 이십분 전, 당도한 성 입구 앞에서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공작은 자신을 버렸다. 무슨 화급한 용무가 있는지 길게 줄지어선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홀로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버림받은 태화는 뒤늦게 모포를 들고 온 시녀에게 안내를 받게 되었고 말이다. 다행히 공작이 자신의 존재를 잊은 건 아니구나 안도하며 시녀를 따라갔다가 지금 이 꼴이었다. 정중히 안내하기에 무슨 호화로운 객실로 안내받는 줄 알았다. 그런데 철창신세를 지게 될 줄이야. 황당하다 못해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불쾌감에 은근 짜증이 치밀었다. 앉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아 태화는 고집스럽게 철창을 눈앞에 두고 섰다. 죄 없는 무고한 시민을 이렇게 철창 안에 처넣어도 되나 싶었다. 누명이라도 뒤집어쓰고 유치장에 들어온 그런 더러운 기분이다. 속으로 태화는 공작을 향해 온갖 욕이란 욕은 다 쏟아 부었다. 편의를 봐준다더니, 존나게 편하네. “아가씨, 그렇게 서있어 봐야 다리만 아파요.” “안녕하세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제가 탈출할까봐 감시하러 오신 분인가요?” “하하, 원래 이곳 경비를 담당하는 사람이네요. 경계 풀어요, 풀어.” 넉살 좋은 아저씨처럼 웃고 있는 남자는 많이 쳐봐야 삼십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삼촌뻘이군. 태화는 간략하게 상대에 대해 정의내리고서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약간은 개방적인 태세에 돌입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저씨. 아니 삼촌. 삼촌이라고 불러도 되죠?” “이 아가씨 붙임성 한번 좋으시네. 하하 맘대로 불러요, 뭐.” “이곳 공작님은 원래 이렇게 사람 감방에 잡아 처넣, 아니 철창에 가두는 걸 잘하세요? 언제쯤 풀어주실까요? 제가 진짜 바쁜 일이 있어서 나가봐야 되거든요. 어떻게 좀 안될까요? 안 들키게 조용히 나갈게요.” 비록 집안자체가 기독교래도 증조할아버지 제사가 있다고 뻥쳐서라도 나갈 기세였다. 그만큼 태화는 지금 이 눅눅한 지하공간이 답답하기만 했다. 창살을 사이에 두고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썩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잘만 구슬리면 될 거라 여겼으나 생각보다 절차가 복잡한지 보초병은 난색을 표했다. “어허허 그게, 내가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권한이 못돼요. 애초에 타지인 출입에 민감할 시기라 신원증명이 안 되면 공작령에 못 들어오거든요. 나가도 치안대한테 금방 잡혀요.” 말 안 들으면 호랑이가 와서 물어간다고 겁주는 할머니처럼 조금 엄한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지금 워낙 흉흉해서 치안대한테 잡혀서 마을 밖으로 내쫓기는 것보단 여기 있는 게 훨씬 안전해요. 공작님께서도 그런 생각으로 아가씨를 이곳에 데려오신 걸 거예요. 이 내가 장담합니다요.” “흉흉하다뇨?” “근데 아가씨 이름이?” “렐리아요. 그보다 흉흉하다니 뭐가요.” “아 그게, 최근 들어서 이곳주위 산맥에서 몬스터들이 떼거지로 출몰해서 난리도 아니에요.” 몬스터? 렐리아의 눈이 급 반짝였다. 그동안에도 보초병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묻지 않은 것까지 얘기해주고 어지간히도 입이 심심했던 모양이었다. “…마을 어르신들 말씀으로는 오십년 동안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던데 블리어님 대에 와서 이런 일이 터져버렸지 뭡니까. 민간인들이 다치고 이러니까 경비도 더 삼엄해지고, 암튼 난리도 아니에요. 수도에 계시던 블리어님이 황급히 영지로 내려오셨으니 말다했죠.” 그 공작이름이 블리어 라콘드구나. 태화는 뭐시기로 부터 벗어나 새로운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했다. “아가씨도 신분만 확인되면 통행증 발급해주실 겁니다요. 좀만 참으면 공작령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은 영지 밖으로 나갈 생각을 마요, 마.”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태화는 공작에 대한 마음속 앙금이 조금은 풀렸다. 보초병이 쓸데없이 덧붙인 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리고 이정도면 상당히 편의를 봐주신 겁니다요. 중죄인들을 다루는 삼엄한 곳과는 좀 떨어져있는데다 시설 좋은 특방이니까요.” “이게요?” “그럼요. 진짜 죄인가두는 데는 이렇게 깔끔하지 못해요. 창살도 녹슬고 바닥은 얼마나 더러운데요. 거긴 쥐나 바퀴벌레도 가끔씩 돌아다녀요. 여긴 그냥 수송될 범죄자나 뭐, 잠깐 반성 의미로 가볍게 지낼 수 있게 만든 공간이에요. 밥도 삼시세끼 나올 겁니다요. 그냥 내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머물러요.” 결국 유치장이라는 거네요, 하고 토를 달려다가 말았다. 대신 태화는 창살 밖에 서있는 인상 좋은 보초병 삼촌에게 슬쩍 부탁했다. “배고픈데 밥 언제 나와요? 그리고 삼촌 죄송한데, 옷도 좀 구할 수 있을까요?” “하하, 그 정도야 뭐. 시종시키면 금방입니다요. 십 분만 기다려 봐요, 아가씨. 내 말해주고 올 테니.” “아 감사합니다~ 삼촌.” 용돈 받은 소년처럼 익살스러운 어투로 태화는 뒤돌아서 나가는 보초병을 배웅했다. 그가 나가자마자 태화는 고개를 숙였다. 노출의상을 가리기위해 몸 위에 두르고 있는 모포를 내려다보니 퍽퍽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씨…젠장.” 몬스터라니, 몬스터라니! 마음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이곳을 탈출해 그 몬스터들이 떼거지로 출몰한다는 산속에 뛰어들고만 싶었다. RPG 게임덕후라면 누구라도 피가 끓어오를 것이다. 가상현실게임과는 차원이 다른, 진짜 게임세계에서 몬스터를 때려잡는 맛은 얼마나 짜릿할지 상상만 해도 즐겁다. ‘젠장. 그치만 무기가 없어.’ 대체 전설의 마검이라 불리는 <카르갈의 홍염>은 어디로 갔을까. 차라리 알몸으로 이 세계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대검만은 몸에 붙어있어야 했다. 모처럼 여전사 캐릭터가 되었는데 얼굴과 몸매 빼곤 쓸모가 없다니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태화는 억지로 울분을 삼키듯 눈앞의 창살을 쥐었다. 그리고 해괴할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제 손, 아니 렐리아의 가녀린 손안에서 완전히 뭉개져버린 창살 때문에 당혹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창살전체가 완전히 활모양으로 휘어져있었다. 렐리아의 가느다란 손가락자국이 움푹하게 새겨져있어 꼭 무슨 어린아이가 고무찰흙을 비틀어놓은 모양이었다. 태화는 혹시 다른 창살도 그러나 싶어서 손가락으로 툭툭 찔러보았다. 누르기가 무섭게 구멍이 숭숭 뚫렸다. 이 세계는 철창을 은색지점토로 만드나. 새끼손가락으로도 쉽게 구부러질 정도다. 충분히 구부려진 창살 틈사이로 지나가도 될 것 같지만 태화는 남기로 했다. 일단 공짜밥을 준다는데 충분히 얻어먹고 이 세계양식의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 이 튀는 옷을 입고 나간다면 금방 다시 잡혀올 게 분명한 것이다. 보초병이 돌아와 기물파손이라고 뭐라 할지 모르니까 다시 조물조물해서 창살을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공작성의 최중심부에 위치한 회의실은 만석이었다. 불과 반시간 전만해도 공석이었던 상석엔 무거운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흑발의 사내가 착석해있었다. 흰머리가 드문드문 난 지긋한 나이의 가신들에 비하면 상당히 젊은 축에 드는 남자는 다름 아닌 라콘드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그런 그가 급히 수도에서 하경했을 만큼 현재 공작령은 비상사태였다. 전대에는 없었던 일인지라 가신들의 표정은 침통, 심각, 근심걱정으로 번져있었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사실조차 까무룩 잊을 만큼 회의실 안은 묵직한 한숨만이 흘렀다. 이틀 동안 밤새 달려온 블리어는 피곤함을 달랠 틈도 없이 회의에 참석한 상태였다. 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는 냉정함을 찾고자 차분하게 운을 뗐다. “그래서 조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습니까.” “이틀 전 보고 드린 대로 란게르드 산맥 중반까지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만, 그것이 초입까지 밖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몬스터의 기습에 조사단 전원이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습니다만…” 보고를 잇던 벨츠라드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한 사실들을 토대로 ‘조사단 전원이 살고자 산맥초입에서 급히 철수했다’라는 결론이 충분히 나오기 때문이다. 조사단의 최고책임자인 자로서 차마 면목이 없는 것이다. “…그래도 완전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보고에 따르면 조사단을 습격한 몬스터들은 무장을 한 상태였다고 합니다. 엉성한 철갑을 몸에 두르고 철퇴 같은 것도 휘둘렀다고 합니다. 인간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데다, 듣기론 힘도 세고 덩치가 2미터는 족히 넘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산짐승을 처리하는 것보다 배는 위험하고 고된 일이 될 겁니다. 공작전하.” “무리지어 다니는 습성을 고려해본다면…아무래도 왕실에 도움을 요청해 움직이는 것이…”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머리를 들었다. 목소리들엔 힘이 없었다. “왕실에는 이미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공작 블리어의 침착한 말에 그제야 숨통이 트인다는 듯 가신들이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터뜨렸다. “하지만 시간이 걸립니다.” 다시 푸욱, 땅이 꺼져라 한숨소리가 울렸다. 절망스런 기색을 드러내는 몇몇 가신들을 뒤로하고 성곽경비대 대장과 정예 기사단의 단장, 치안대 총 책임자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일단 경비태세를 최상등급으로 끌어올렸습니다. 성곽 밖에는 스무 명씩 조를 짠 보초병들이 틈틈이 순찰을 돌고 있습니다. 언제 몬스터들이 이곳에 닥쳐올지 모를 일이니 말입니다. 특히나 산맥 입구에는 삼엄한 경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저희 쪽에선 기사들을 망루에 항시 대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예기사들에겐 몬스터 떼가 들이닥칠시 신속히 대비할 수 있게 명령을 내려둔 상태입니다.” “후우…문제는 안입니다. 현재 영지민들의 불안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이번에 상단이 공격받아 용병 대다수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민간인 중에 사망자가 생긴데다…피해규모도 커서 상단의 출발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말에 회의실 안은 더 이상 침전될 수 없을 만큼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순간 뭐에 집어삼켜지기라도 한 듯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것을 가장 먼저 깬 자는 다름 아닌 공작이었다. 침묵해있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이 조금은 노련해진 말투가 회의실안을 울렸다. “중앙기사단이 파견될 때까지 적어도 최소 이틀이 걸릴 것입니다. 최소가 이틀이라는 겁니다. 며칠이 더 지연될지 모를 일입니다.” “…허면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렇기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정예 기사단을 꾸려 산맥초입까지 토벌작전을 펼치는 게 어떻습니까.” “허. 그러다 사상사라도 나오면……, 아니 애초에 그 위험부담은 누가 진답니까.” “내가 책임집니다. 그러니 이번 작전은 내가 직접 지휘합니다.”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요란하다. 일순 회의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젊은 공작의 발언은 평화로움과 안락함, 안전함을 최우선시 하는 노년의 가신들의 반대를 불러일으키기엔 충분했다. 가신들이 보는 공작은 어디까지나 의기가 왕성한 청년이었다. 그 나이 땐 그렇게 몸 사릴 줄 모른다고 잔소리라도 늘여놓을 기세였다. 무엇보다 현재 스물여섯인 공작에겐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상태였다. 후계뿐이랴 후계를 볼 부인조차 들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공작에게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가문의 앞날이 막막해진다. 더더욱 신중을 기울여야 된다고 가신들이 일제히 목소리를 드높일 때였다. “저는 공작전하의 말씀이 옳다고 봅니다.” 그 사이로 덤덤한 어투의 드알루가 끼어들었다. 정예 기사단의 단장답게 힘이 실린 묵직한 목소리였다. “왕궁의 지원이 늦어진다면 저희들이라도 나서야합니다. 치안대장의 말을 다들 들었지 않습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나서야 영주민들의 불안이 잠재워질 겁니다.” “저도 드알루 경의 말에 찬성이군요. 지금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전 하겠습니다. 지금은 몸을 사릴 때가 아닌 영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될 때입니다.” 치안대장까지 합세해 기사단장을 지지하자 회의실이 크게 술렁였다. 이에 너무나도 표정이 없어 조각 같아보이던 공작의 얼굴 위로 흡족한 기색이 떠올랐다. 단순히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해 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냉정한 이성에 의한 판단뿐이다. 블리어는 침착한 어조로 반대의견들을 차례차례 짓밟기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는 비상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긴급히 만들어진 자리입니다. 차선책이 아닌 최선책을 논의하기 위해서 있는 자리라는 겁니다. 우리는 최선책에 맞춰 움직여야합니다. 산맥초입까지의 토벌은 정예기사단으로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예기사단의 단장 드알루가 맡겨만 달라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였다. “몬스터들이 이 이상 내려오지 못하게 산맥초입에 방어선을 구축해놓는 것. 더 이상의 피해확산을 막기 위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생각됩니다.” “허나 공작전하…,” “어디까지나 산맥초입, 위험을 무릅쓸 정도는 아닐 겁니다. 뿌리를 뽑는 건 그 뒤에 일입니다. 왕실에서 파견된 중앙기사단의 힘을 빌린다면 충분히 산맥중심부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그럼 회의는 이만 파하도록 하겠습니다.” 도출된 결론은 간결했다. 아무도 반박하는 이가 없자 블리어는 가장먼저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군더더기 없이 최대한 짧게 말을 덧붙였다. “더 이상 지체할 생각은 없으니 드알루 경은 오늘 중으로 한시 빨리 정예를 추리도록 하십시오. 내일 오전에 바로 산맥초입으로 들어가 토벌작전을 펼칩니다.” 0005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 갓 구운 빵 위에 으깬 감자와 슬라이스 햄, 치즈, 옥수수샐러드를 얹고서 태화는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참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두장 특별한 소스 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먹을 만했다. 걸쭉한 크림스프와 볶은 양고기도 먹어치우고선 후식으론 사과를 집어 들었다. 아삭하고 씹히는 사과 맛이 달달했다. 태화는 사과를 먹어치우며 슬쩍 창살 밖에 서있는 보초병에게 질문했다. “저기 이 철창 말인데요.” “아가씨 벌써 식사 다했어요? 이야 빠르네.” “철창 말인데요. 삼촌.” 자꾸 딴 길로 새는 보초병을 단단히 붙들듯 렐리아의 말투가 단호해졌다. 대놓고 철창에 대해 물어보면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아 태화가 잠시 뜸을 들일 때 다행히 보초병은 별 의심 없이 입을 나불거렸다. “아 그거 특수합금으로 만든 철창입니다요. 드워프들이 제작했다고 들었습죠. 황실의 대역죄인들을 처넣는 지하감옥도 이것과 같은 재질이랍니다. 이런 철창하나 만드는데도 무지막지한 돈이 들어간다니까요. 뭐 이정도 비용은 대수롭지도 않은 게 공작가 아니겠어요. 소드마스터가 와서 칼질해도 끄떡하지 않는 재질이니 괜히 탈출시도 할 생각 마십쇼. 하하.” 말하기 좋아하는 성격답게 굳이 묻지 않은 것까지 줄줄이 토해내는 보초병이었다. 태화는 흐음 하고 홀로 긴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에도 보초병은 뭐라 뭐라 이 감옥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으나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 세계 소드마스터들은 젓가락을 들고 휘두르는 애들인 걸까. 이 길쭉한 은색지점토를 자르는 게 힘들다니. 이 세계자체가 비정상적일 만큼 약한 건가? 반대로 이 몸이 비정상적일 만큼 센 건가? 한참을 조용히 상념에 잠겨있던 태화는 뒤늦게 렐리아의 스텟 정보를 떠올렸다. 만렙이 된 후로는 신경 쓰지를 않아 이제껏 떠올리지 못했는데 생각해보니 렐리아는 올스텟이었다. 그 중 힘 스텟을 말할 것 같으면 최강이었다. 전사캐릭터하면 힘인지라 힘 스텟은 한계치까지 찍은 것도 모자라 무기와 전설템으로 공격력수치를 높인 덕에 만렙의 경지를 뛰어 오른 지 오래였다, 비록 역하렘게임 속 세계라지만 이 몸은 그만큼의 파괴력을 지녔다는 걸까. “저 옷 좀 갈아입을게요. 삼촌, 잠시만 밖에 나가주세요.” “알겠어요. 하하.” “아 나가시는 김에 이것두요. 잘 먹었습니다~” 지금 당장 확인해봐야지. 히죽 웃으며 렐리아는 철창 쪽으로 싹싹 비운 식판을 내밀었다. 보초병은 철창문을 열어 식판만 회수하고서 별다른 의심 없이 뒤돌아 나가버렸다. 그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렐리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뻐근한 어깨를 풀 듯이 오른팔을 가볍게 돌렸다. 고개도 한번 좌우로 까딱거리고서 렐리아는 철창의 반대편에 있는 벽 앞에 섰다.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지하 벽은 전동드릴을 대야 간신히 뚫릴 만큼 튼튼해보였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렐리아는 곧바로 오른손을 세게 꽉 쥐고서 벽을 향해 내질렀다. 최선을 다해 벽을 때리자! 라는 생각으로 내지른 깜찍한 주먹이었으나 쉭, 하고 비장한 바람소리가 들려온 순간 렐리아의 표정이 썩었다. 망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앙ㅡ!!! 허공을 가르고 뻗어나간 주먹이 벽에 맞닿기가 무섭게 엄청난 균열이 일어났다. 어느 정도의 힘인지 측정하기위해 대충 가볍게 벽을 때린 것이었으나 결과는 놀라울 정도였다. 거대하게 뚫린 구멍사이로 대형선풍기라도 틀어놓은 것처럼 흙먼지가 거세게 끼쳐왔다. 그 뒤로 아득하게 들려오는 무너지는 소리는 끝도 없었다. 마치 도미노처럼 길게 이어져갔다. “으억! 이게 무슨 일이야!! 자,잠깐 나 머리에서 피가…!!” "으아아아악! 앞이 안보여!!!" “시바아알!! 내 다리!!! 내 다리가 벽에 깔렸어!!!” 뭔가 일이 단단히 잘못됐다는 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죄수들의 비명과 경악스런 외침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체 어디까지 부순 건지 옆방 벽은 물론 건너 건너 건너 건너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한 방벽까지 파손된 것 같았다. 눈앞을 가리는 짙은 암회색연기로 인해 참혹한 광경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상황이 심각하단 건 알 수 있었다. 전혀 원치도 않은 사태가 벌어졌다. 그렇다고 이미 내지른 주먹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지만. “젠장!! 거기 누구 없어?! 여기 사람이 깔렸다고!!! 보초! 보초병!!” “시발, 죽은 거 아냐…?” “트렉스!!! 눈떠, 이 새끼야! 제에엔장!!” 무너진 벽 잔해에 깔리거나 다친 자들의 절규 같은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하감옥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편히 쉬고 있던 범죄자들은 갑작스런 날벼락에 흥분해 철창 안에서 살려 달라 부르짖었다. 그것도 잠시, 천장위에서 쿠구구구구궁ㅡ하는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하천장을 지탱하고 있던 백여 개의 벽들이 부서졌는데 그 충격에 천장이 내려앉아도 이상하지 않는 것이다. “어억, 시발 이게 무슨 소리야!!” “무너지는 거 아냐?!! 누가 나 좀 꺼내줘!!!” “시바아아알! 여기 지하라고!!” “꺄아악! 지하형 몬스터가 나타났다! 지하형 몬스터가! 부쉈다!” 지옥 불구덩이에 떨어진 영혼들의 아우성처럼 절박한 외침들이 감옥지하를 가득 채웠다. 그 중엔 렐리아의 새된 비명도 껴있었다. 뒤늦게 밖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감옥 안으로 들이닥쳤다. 자기들 좀 꺼내달라며 수백 개의 팔이 철창 밖으로 튀어나와 허우적댔다. 보초병들은 괜찮다는 말로 상황을 잠재우려했지만 다시 한 번 천장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울리자 슬금슬금 서로 눈치를 보았다. 이러다 우리도 깔려 죽는 거 아냐? 하는 눈빛이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렐리아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두려워서 허옇게 질린 얼굴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어떤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지 골똘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태화는 그다지 이 일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어차피 게임 속 세상인데 범죄자 캐릭터 몇이 죽고 몇이 다쳤다고 그게 대수로운 일일까. 자기 캐릭터가 죽었다고 우는 사람 없듯이 남 캐릭터를 죽였다고 극심한 죄책감을 느낄 리 없는 것이다. 자유도 높은 게임에서는 사람을 죽이고 차를 뺏어 타는 게 일상인데다 fps슈팅게임 같은 경우엔 총으로 남을 쏴 죽여야 이긴다. 거기다 게임 캐릭터가 죽은 모습을 본 게 아니라 죽었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것이니 그다지 와 닿지도, 마음의 동요가 일지도 않는 것이다.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때 철컥 하고 창살문을 여는 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다. 다름 아닌 자신의 철창문이라는 걸 태화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거 아가씨 얼른 나와요. 내 비록 권한은 없지만 책임질게!” “아, 삼촌.”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린 얼굴로 렐리아는 황급히 철창 밖으로 나왔다. 보초병의 뒤를 따라 지하감옥을 벗어나는 동안 반대편 복도에선 무장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소란 아닌 소란에 진원지를 찾아 황급히 달려온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힐끔 고갤 돌려 지하감옥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기사들의 모습을 바라보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아가씨가 있는 벽도 심하게 무너졌던데…, 어휴.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듣기로는 무슨 지하형 몬스터가 나왔다고 그러던데…아가씨 봤어요?” “그게 너무 무서워서…기억은 잘 안 나지만 엄청 컸어요.” “그런 게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진 몰라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다행이야. 난 무슨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요. 땅이 흔들려서 얼마나 놀랐던지…정말 십 년 감수했습니다요. 십년은 늙은 것 같네…” 보초병이 힘없이 구시렁대는 소리를 들으며 렐리아는 마침내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노을이 깔린 성 입구에는 챙이 넓은 고깔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로 추정되는 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퇴근하다말고 성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급하게 소집된 모양이었다. 그들은 어두운 낯빛을 한 채 낮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 힘이 야근을 부르다니…….’ 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악무도한 힘이란 말인가. 태화는 내려다보던 오른손을 꽈악 쥐었다. 힘조절이 시급하다고 그녀는 깊게 깨우쳤다. * 공작성의 하인들이 모든 복도를 돌아다니며 서둘러 소등을 할 시간이었다. 환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공작의 집무실로 한 중년사내가 찾아와있었다. 유능한 측근 중 한명인 타렌이었다. 공작이 부재중일시에 성 내부의 총괄관리와 인사관리를 도맡아하는 자이기도 했다. “지하감옥에서 일어난 사건은 일단 수상쩍은 점이 많기는 하지만 몬스터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기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120개의 벽을 부수고서 지하외벽까지 완전히 뚫어놓았다고 합니다. 지층에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구멍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계속 이어서 하십시오.” “…구멍이 중간에 막혀있어 조사가 중단되긴 했습니다만, 이런 짓을 사람이 했다고는 보기가 힘듭니다. 마법사의 소행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성에 있던 마법사들 누구도 작은 마나의 유동조차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통 그 정도의 위력을 내려면 제국의 대마법사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답니다.” 타렌은 오늘저녁쯤에 일어난 사건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일렬로 늘어선 지하감옥의 벽들이 죄 부서진 괴기한 일 때문에 기사와 마법사가 총출동해 한동안 성 지하 안은 비상사태였었다. 죄수 중 아홉 명이 운 나쁘게 잔해에 깔려 사망했고 그 외 부상자는 오십 명에 가까웠다. 약 120개의 벽이 터널처럼 깔끔하게 뻥 뚫린 덕분에 벽을 사이에 두고 있던 죄수들은 집단생활을 하게 되었다. 새로 벽을 세우기까지 시간이 걸려 한동안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타렌은 계속해서 보고를 이었다. “오늘 발생한 일은 땅굴을 파고 다니는 특수한 몬스터의 소행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불가합니다. 죄수들의 말로는 분명 지하형 몬스터가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걸 누군가 봤다는 모양이랍니다. 물론 워낙 삽시간에 일이 터진 탓에 몬스터의 생김새를 기억하는 자는 없었습니다. 증언하기엔 다들 경황이 없기도 했고요. 하지만 몬스터가 외벽을 부수고 다시 돌아서나갔다는 의견으로 모아졌습니다.” 사건이 일어났던 시간, 성의 최상층에 위치해있었던 블리어도 분명 진동을 느꼈었다. 심지어 책상이 흔들려 작성하던 서류에 오점을 남기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나. “부서진 지하외벽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지하외벽은 이미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리고…” 타렌은 한번 긴 뜸을 들이며 공작의 표정을 살폈다. 사무적일 만큼 감정이 떠오르지 않은 대신 피곤함이 잔뜩 쌓인 모습이었다. 내일아침 일찍 산맥초입에 토벌을 나가신다 하던데 여기서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왠지 사소한 일로 피곤한 사람을 못 자게 억지로 붙들고 있는 느낌이라 타렌은 조금은 근심스러운 어투를 사용했다. “아주 사소한 보고이니 내일 토벌에 다녀오신 후에 말씀드리도록…” “괜찮으니 지금 보고하십시오.” “그것이, 명하셨던 대로 렐리아라는 여자에 대해 조사해보았습니다. 헌데 아무리 찾아봐도 신원이 조회되지 않습니다. 흔치 않은 은발인데도 불구하고 출생기록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조금 깊게 낮아진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도 스며들어있지 않았다. 타렌의 보고에 약간 미심쩍은 부분이 없잖아 있기에 굳이 짚자면 ‘찝찝함’ 정도였다. 그의 반응에 타렌은 속으로 크게 안도했다. 공작이 웬 은발미녀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드디어 공비되실 분이 오셨구나 하고 얼마나 기뻤던가. 하지만 뒤이어진 시녀의 보고에 타렌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끝내주는 미색에 희귀한 은발이라고 했으나 문제는 창부들이 입을 법한 차림새였다고 했다. 거기다 공작의 명을 받아 조사한 바로는 신분도 연고도 없는 여자였다. 이 말은 즉 고위귀족의 성노리개, 혹은 성노리개로 팔리기 전에 간신히 탈출한 여자라는 말이었다. 그런 여자를 몬스터의 밥이 되게 놔둘 수 없어 산맥에서 주워 오신 공작의 아량은 칭찬할만했다. 허나 천한 여인의 미색에 홀려 만에 하나 침실에 두기위해 데려온 것이라면 자신은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잠시나마 블리어님을 의심한 저를 용서하십시오.’ 타렌은 자신보다 약 두 배가량 젊은 공작을 향해 속으로 사죄를 하고 또 했다. 반면, 그 속을 알지 못하는 블리어는 지독할 만큼 피로에 찌든 녹안으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또 보고할 것이 남았습니까.” “…아닙니다, 나가보겠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타렌은 고개를 숙이고서 집무실을 벗어났다. 비로소 홀로 남게 된 블리어는 문에서 시선을 떼고 투박한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해치워야할 문제가 더 없나 머릿속으로 짚어보다가 그는 은발머리 여인을 떠올렸다. 분명 제 앞에서 렐리아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가명을 댄 것인가. 아니면 출신조차 알 수 없는 타국노예인 것인가. 그의 성격상 어중간한 것은 두고 보지 못했다. 블리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남은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또다시 피곤함을 억누르고 걸음을 옮겼다. 0006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달빛이 모든 세상에 은은히 내려앉은 시각, 렐리아는 객실침대 위에 신세 좋게 누워있었다. 지하감옥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고나서 렐리아의 숙소는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다름 아닌 공작가의 남아도는 객실 중 하나를 배정받게 되었다. 범죄자가 아니니 그곳에 굳이 있을 필요도 없는데다 여자라서 나름 편의를 봐준 것이다. 물론 갇혀있다는 건 다를 바 없었다. 철창대신에 문이 단단히 잠가져있었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여자를 성안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언제 이런 최고급호텔 같은 곳에서 묵겠어?’ 렐리아는 고풍스러운 방이 상당히 마음에 든 차였다. 하루 세끼 공짜밥이 나오고 새 옷으로 갈아입혀주고 잠자리도 따뜻하다. 이왕이면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서 뽕을 뽑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프시시 웃었다. 그것도 잠시, 가볍게 낮은 노크소리가 두어 번 울리자 렐리아는 팔자좋게 잇던 생각을 접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야? 렐리아는 자는 척을 시전 했다. 대답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는 줄 알고 내일 다시 오겠지 싶은 것이다. 그러나 문밖의 누군가는 태평한 태화를 당혹시킬 만큼 예의라곤 없었다. 철컥, 하고 서늘한 쇳소리와 함께 그대로 문을 따고 들어왔다. 대자로 누워있던 렐리아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로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누가 보면 피곤해서 침대에 눕자마자 바로 뻗은 사람처럼 보일 테다. 실제로도 방안에 들어온 자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었다. 지하감옥 안이 한순간 쑥대밭으로 변할 만큼 대형사건이라고 들었다. 강건한 죄수들도 아직도 경황이 없을 만큼 정신적 충격이 상당하다는데 심약한 여자라면 어떻겠나 싶었다. 블리어는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잠들어있는 은발여인을 응시하다말고 그대로 몸을 돌렸다. 내일 다시 와야겠다고 여기고선 말이다. 하지만 그가 막 한 발 내딛기 무섭게 뒤에서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울렸다. “…누구…으응, 졸려.” 능청스럽게도 렐리아는 지금 막 일어난 사람처럼 눈까지 비비적거렸다. 최대한 사랑스럽고 가녀리게 보일 만큼 두 다리는 다소곳이 포갠 채 상체만 일으켰다. “일어났습니까.” “…공작님?” 이미 알고서 일어난 척했다지만 렐리아는 지금 알았다는 듯 자신을 돌아본 남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둠이 깔린 방안에서도 깔끔하게 다듬어진 흑발은 유달리 새카맣다. 짙은 눈썹아래 자리 잡은 녹안은 차갑게 서리가 내려앉은 가시나무 잎색을 띠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엔 욕정이나 사심은 일체 들어가있지 않았다. ‘꼴에 자존심인가.’ ‘이 몸’이 시각적으로 꼴리지 않을 리 없었다. 잠을 자는 여자를 덮치러 온 건가 싶었으나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태화는 ‘이 몸’이 공작을 사로잡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굳이 일어나서 그를 잡은 이유야 뻔했다. 사랑을 얻어야만 했다. 육체적 사랑이든 정신적 사랑이든, 일단 사랑은 사랑이었다. 태화의 머릿속에 든 연애지식이라고는 사랑은 곧 섹스다 밖에 없었다. 상당히 글러먹은 연애관이었다.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같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공략법에 대해 알 턱이나 있겠냐만은, 태화는 어서 세 명 다 공략해버리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이 몸’은 제 진짜 몸이 아니니 관계를 가지든 말든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상대도 게임캐릭터 아닌가. ‘얼른 집에 좀 가자. 집에 좀.’ 속으로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렐리아의 얼굴엔 희미하지만 요사스런 미소가 걸렸다. 남자를 눕히려고 작정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미소를 마주한 블리어는 조금의 표정변화는커녕 감흥조차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뭐를요?” “그대의 신원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어디 출신인지, 본명이 무엇인지 모조리 밝히십시오.” “음~ 그게 기억이 안나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말하듯 렐리아가 순한 눈망울을 빛냈다. 고혹적인 허리선을 따라 길게 흘러내린 은색 머리칼과 청려한 빛깔의 사파이어 눈동자, 요정의 날개처럼 팔락이는 속눈썹까지. 어디서든 쉽게 볼만한 외모는 아니었다. 물론 순진하게 커다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는 것치곤 상당히 가증스러운 모습이었다. “노예입니까.” “글쎄요.” “나와 장난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제대로 대답하십시오.” “알겠어요. 얘기할 테니 여기 편하게 앉으시는 게 어떠세요. 긴 얘기가 될 것 같은데.” 렐리아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침대에 앉으라며 대놓고 유혹해옴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서 듣겠습니다.” “흐흥 왜요? 제가 잡아먹을까 봐요?” 조금은 경박스러운 어조에 블리어의 철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얼굴에 슬쩍 미세한 금이 생겨났다. 육체의 피로가 정신까지 전이해온 느낌이었다. 블리어는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만 듣고 빠져나갈 생각으로 제 고집을 꺾었다. 아무리 천박한 신분의 여인이라 할지라도 강제로 제 질문에 답하게 무력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애고자 태화가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이미 제 유혹에 반은 넘어왔다고 여겼다. 렐리아의 아름다운 외관을 뒤집어쓴 상태인지라 태화는 아주 자신만만해있었다. 이 화려한 겉가죽만 있다면 공략대상 세 명뿐 아니라 이 세계남자는 죄다 꼬실 수 있겠다는 믿음에서였다. ‘자고로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단 말이지.’ 돈 많은 남자를 싫어하는 여잔 없다는 편협적인 사고방식과 진배없는 한심한 생각이었으나 태화는 애써 자기합리화를 했다. 렐리아는 옆자리에 걸터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현실남자가 아닌가 싶을 만큼 남자캐릭터는 상당히 사실주의적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일어서있을 때도 크다고 여겼지만 바로 옆에 앉으니 그 체구가 새삼 거대하게 느껴졌다. 탄탄한 팔뚝과 각진 어깨, 아래로 갈수록 날렵하게 빠지는 굵은 허리는 만져보지 않아도 단단하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3D로 구현되어 있을 뿐 그 속은 이차원적인 게임캐릭터라는 생각에 렐리아는 쉽게 제게 넘어올 거라는 오만에 차버렸다. 게임캐릭터가 기분 나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태화는 얼른 집에 가겠다는 마음만 앞서있었다. “말하십시오.” “으음, 뭐부터 얘기해야 될까요? 저에 대해 뭐가 알고 싶으세요?” 렐리아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하며 제 풍만한 가슴을 스치듯 매만졌다. 시각적으로 자극이 되게끔 허리도 살짝 움직여주었다. 그 모습에도 눈 한번 깜빡 안하는 공작은 의외로 쉬운 상대가 아니리라. “렐리아라는 이름이 본명입니까. 출신지와 원래 거주지에 대해…,” “아아 졸려라.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빈혈이 인 여자처럼 렐리아는 이마에 손등을 얹고서 그대로 픽 무너졌다. 그마저도 능청스럽다는 게 느껴질 만큼은 허술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부러 사내의 가슴팍에 옆머리를 기대면서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오른손으로 그의 바지앞섶을 덥석 붙잡았다. "어이쿠 섰…" “그만." 작은 입술이 더 나불대기도 전에 블리어는 여인을 떨쳐내 버리고선 몸을 일으켰다. 이에 렐리아는 침대 위에 나뒹굴 듯이 옆으로 넘어진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매섭도록 칼 같은 어조가 눈에 띄게 굳어진 입매에서 흘러나왔다. 공작의 서느런 얼굴엔 마치 성추행이라도 당한 아가씨처럼 불쾌함이 스며있었다. 하지만 아가씨처럼 심통한 구석이라곤 없는 구겨진 이목구비엔 짙은 노기가 서려있었다. 정말 당장이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어둡게 가라앉은 녹안엔 귀찮음이 배어있었다. “조금이라도 그대의 편의를 봐주려했습니다만, 분에 과한 처사였던 모양입니다. 내일 당장 이곳에서 나가십시오.” “너무 하세요~ 저 여기 나가면 갈 데가 어디 있다고……저기요? 진짜 가셨어요?” 렐리아는 몸을 베베 꼬며 상체를 일으켰으나 이미 공작은 방을 나선 후였다. 그가 빠져나가고 찬바람만이 휑하니 방안을 감돌았다. “…에라이. 까탈스런 새끼.” 공작이 듣지 못할 욕을 싸지르며 렐리아는 냅다 침대위에 다시 드러누웠다. 고작해야 공략캐릭터 주제에 비싸게 굴기는. 역하렘 게임 속에 강제로 들어온 나는 뭐 하고 싶은 줄 아나? 한참을 투덜거리다 뭐가 문제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하룻밤 같이 즐기기엔 모자람이 없다고 여긴 이 몸매는 아무래도 저 까다로운 공작을 공략하기엔 뭔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차라리 목숨을 건 스릴 넘치는 승부가 백배 낫지. 뭘 어떻게 하란거야 대체.’ 사랑 한번 어렵다고 태화는 신경질적으로 눈을 감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큼은 절박한지라 머리는 계속해서 돌아갔다. 태화는 밤새 내내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공작을 침대 위에 자빠뜨릴 수 있을까 하고. 그 결과 일단 무턱대고 들이대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차원이동녀와 남주의 원나잇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게임캐릭터도 낯을 가리는 진 모르겠는데 이제 막 통성명한 사이에 하룻밤을 같이 하자는 건 너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나야 빨리 해치울수록 좋다지만 저쪽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든지 썸에서 부터 사랑으로 이어지지, 사랑에서 썸으로 가지는 않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니 아직 공작과 제대로 말도 트지 않았는데 자신이 너무 성급했다. 사랑을 얻기 이전에 인간적인 호감부터 쌓아야할 필요성이 있다. 일단은 친해져보자. 어제 일에 대해선 깔끔히 사과하고 천천히, 부담스럽지 않게 접근해야겠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서로의 거리가 좁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시킬 날이 마침내 밝아오자 렐리아는 침상에서 상쾌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켰다. 한 발짝부터 차근차근 내딛어보는 거야! 그러나 거리를 좁혀보기도 전에 공작은 이미 공작령 밖으로 멀리 토벌을 떠난 후였다. * 공작이 미명에 출발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은 거의 점심이 지나고 나서였다. 렐리아는 시녀가 가져다준 음식으로 식사를 마치고서 방안에 늘어졌다. 다행히 이른 새벽에 떠나서 사용인들에게 자신을 내쫓으라고 따로 말을 해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도 벌었겠다, 그가 돌아오면 어떻게 구슬려야할지 태화는 한가로이 생각에 빠졌다. 자신을 내쫓는 걸 철회하도록 하려면 일단 어떤 식으로든 그와 친해져야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남자와 친해지는 건 나름 자신 있었다. 학창시절 땐 여자친구들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남자 친구들도 많았다. 오히려 남자인 친구들이 대화하기엔 더 편했던 것 같다. 매일 게임에, 게임에, 게임얘기뿐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친구는 친구일 뿐, 이성관계로 이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뭐 나도 관심 없기도 했고. 생각해보면 걔들도 날 너무 편하게 여겼어. 맨날 피씨방이 뭐냐, 피씨방이.’ 연애할 시간에 렙업을 하는데 내 시간을 투자하겠다, 라는 마인드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지금도 변함없다만 태화는 가식으로나마 달라져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0007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의 경계가 보랏빛일색으로 무너지는 해질녘에 공작은 성으로 돌아왔다. 무사히 귀환한 그를 가신들과 사용인들은 머리 숙여 반겼다. 전속시종들은 곧바로 공작의 어깨와 팔, 가슴, 복부를 두르고 있는 묵직한 방어구의 탈의를 도왔고, 시녀들은 몬스터의 싯누런 피가 묻어난 두꺼운 가죽외투를 받아내 황급히 가져갔다. 블리어는 몸에서 나는 역한 악취에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몬스터들의 피를 뒤집어썼으니 당연했다. 목욕시중을 드는 시종은 없었다. 그는 지체 높은 고위귀족임에도 불구하고 시중 받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사소한 것일수록 시중을 받는 걸 되레 귀찮게 여겼다.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다른 이가 침범하는 걸 지극히 싫어하는 폐쇄적인 성격 탓도 있었다. 그렇기에 공작의 개인침소나 방은 청소하러오는 전속시녀를 빼고는 아무도 출입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단출입이 엄금된 그 구역에 태연하게 발을 디딘 자가 있었다. 새하얗고 가느라단 손가락이 문고리를 조물거렸다. 단단히 잠가져있던 문고리는 여자의 주물럭거리는 손길에 금방 형태가 뭉개졌다. 조금 괴이한 모양이 되며 형태자체가 가늘어지자 안에서 단단히 잠겨있던 걸쇠가 절로 느슨하게 풀렸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선 여인의 긴 은발이 낭창한 허리께에서 나풀거렸다. 그녀는 한 팔에 안고 있던 술병을 바닥에 내려놓고서 이번엔 두 손으로 문고리를 주물럭거렸다. 성의 없이 뭉개버린 탓에 문고리는 흡사 대장장이가 버려둔 길쭉한 쇳덩어리처럼 되어있었다. ‘문고리가 원래 이렇게 생겼던가? 좀 더 정교한 무늬가 새겨져 있던 것 같던데 뭐, 모르겠지.’ 한나라의 공작씩이나 되는 사람이 설마 문고리에 신경 쓰겠어? 하는 생각으로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충 문고리처럼 생기게만 손가락으로 살살 빚어두고서 그녀는 다시 술병을 안아들었다. 방에서 탈출하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으나 술을 구하는 과정이 꽤나 힘들었다. 늦저녁이라 성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용인들이 별로 없었다지만 혹시나 누군가 저를 알아볼까, 약간의 기척이라도 느껴지면 황급히 몸을 숨겨야만 했다. 올스텟답게 민첩함도 남달리 뛰어났는데 과연 이 몸의 한계가 어느 정도일까 궁금하긴 했다. 한참동안 성안을 헤맨 끝에 술 저장고에 어떻게든 다다란 것까진 좋았다. 술병하나를 슬쩍해 나가던 중에 웬 시종과 맞닥뜨려 얼마나 놀랐던가. 뚫어져라 쳐다보기에 들킨 건가 싶었으나 휘파람을 불면서 딴청부리며 지나가니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물론 태화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 시종은 그녀의 외모에 넋이 나가 잡아야겠다는 생각조차 못했다는 것이다. 수상한 자라고 의심조차 못하고 말 그대로 멍하니 보내버렸다. 아무튼 그런 수고 끝에 얻은 이 술병, 공작과의 거리를 좁혀줄 이 귀한 술이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으랴. 술병이 아기라도 되는 듯 품에 소중히 안아들고서 태화는 공작의 침실로 추정되는 곳의 문을 열었다. 젊은 남자 혼자 누워 자기엔 지극히도 넓어 보이는 침대가 렐리아를 맞이했다. 질 좋은 백목의 가구를 발견한 그녀는 손가락으로 들어 가구 위를 쓸어보았다. 힘 조절을 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만지는데 무슨 기름칠이라도 해놨는지 나무 면이 매끄러웠다. 먼지 한 점 내려앉지 않은 것이 관리도 엄청 신경 쓰나 보다. 이십대 중반사내의 침실치곤 은근히 고풍스러운 인테리어였으나 나쁘진 않았다. 침실안쪽에는 또 다른 문이 존재했는데 욕실인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늦은 시각, 남자의 침실, 그리고 샤워하는 남자. 이 세 가지만으로 충분히 얼굴이 빨개질 만한데도 렐리아는 그저 심드렁하게 침대에 걸터앉아 방안을 둘러보았다. ‘얜 씻는 게 뭐 이리 길어. 세월아 네월아네…거참. 언제 나오려나.’ 제 방에 들어온 것처럼 엉덩이를 긁적이다가, 거추장스런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 넘겼다가, 결국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터뜨렸다. 생각 없어 보인다지만 태화는 나름 비장한 계획을 머릿속에 두고 있었다. 듣기론 몬스터 토벌을 나갔다던데 많이 힘들었을 테다. 고단했을 하루, 누구에게 털어놓고 싶을 테니 잠시 어울려주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술을 마시며 얘기를 들어주다보면 금방 친해지게 되어있다. 편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까놓다보면 술도 술술 잘 들어갈 테고 어느새 거하게 취했을 땐 ‘어? 얘 좀 예쁜데?’하고 인식이 확 달라질 테다. 그러다 은근슬쩍 손도 잡고 어깨에도 손이 올라오고 키스까지 하면 금상천화고. 그러다 갈 때까지 가면 다음날에 애인사이. 물론 원나잇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원나잇까지는 원하지도 않는다. 키스까지 진도 빼면 뭐가 나오겠지, 하고 렐리아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성의 없게 생각했다. 휴지통에다 갖다 버려야할 연애관이란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인생 참 대충이었다. ‘나 집 좀 가자. 집 좀 가.’ 그런 태화의 절박함이 먹힌 건지 문 너머로 들려오던 물 흐르는 소리가 일순 뚝 끊겼다. 렐리아는 부러 흐트러진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그녀는 겨울에 입기엔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이것도 시녀에게 ‘언니 제가 몸에 열이 많아서요.’하고 사정사정해서 얻은 것이었다. 이윽고 소리 없이 욕실문이 매끄럽게 열리자 욕실 안을 가득 채웠던 하얀 김이 새어나왔다. 그 사이로 드러난 사내의 반라는 꽤나 여심 사로잡을 법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흑발과 한 번도 그을리지 않은 듯 창백한 살갗, 그런 것치곤 섬세한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견고한 몸이었다. ‘역시 게임치곤 실감난다니까.’ 3D입체안경을 끼고 관람할 기세로 태화는 그의 몸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게임 속 세계치곤 현실처럼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와 그래픽을 자랑했는데 아무래도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 이정도 그래픽을 구사하려면 꽤 돈이 많이… “…누구 멋대로 이곳에 있습니까.” 성난 목소리가 침실 안을 울리자 태화는 잡생각을 중단했다. 여전히 시선을 그의 복근 쪽에 두고 있다가 서서히 얼굴 쪽으로 옮겨갔다. 동시에 그도 자신 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완벽한 역삼각형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그의 상체가 점점 가까워지자 렐리아는 다시금 하복부로 시선을 내렸다. 조각사가 파낸 것처럼 장골이 깊은 선을 그렸다. 검은 면바지를 입고 있는 긴 다리로 시선이 내려갔다가 갑자기 제 어깨를 강하게 붙드는 손에 렐리아가 고개를 쳐들었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자신을 찢어발길 것처럼 흉흉한 녹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같은 노여움을 품고 있었으나 그런 것치곤 말투는 지나치게 냉소적이었다. “주제파악이 안 되는 겁니까? 이곳에서 하루 동안 호사를 누리더니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봅니다, 제 분수조차 알지 못하다니.” “잠깐 이것 좀 놓고…” 렐리아는 쉽사리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가 힘 조절에 실패한다며 최소 공작은 불구가 된다. 그의 팔이 레고팔처럼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괜히 오싹해졌다.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만 있기엔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가녀려보여도 워낙 강인한 육체라 잡힌 어깨가 아프지는 않았으나 구겨진 옷감을 보니 상당히 악력을 실은 모양이었다. 여자한테 이 정도의 힘을 드러내다니 무슨 시정잡배가 따로 없었다. 다른 언니였다면 분명 어깨에 시퍼런 멍이 들고도 남았을 테다. 아, 내가 아픈 척을 안 해서 안 아픈 줄 아는 건가. “아야야.” “…….” 뒤늦게나마 신음소릴 흘리자 공작은 아주 쓰레기는 아닌 모양인지 별안간 어깨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제대로 화가 난 건지 서릿발 치는 눈빛은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기어오르지 마십시오. 나는 분수를 모르고 설치는 자들을 가장 혐오합니다." 단호히 경고가 서린 저음이 또 한 번 흘러나온 건 조금 뒤였다. "내가 그대에게 베푼 호의는 개미에게 빵부스러기를 떨어뜨려준 것보다도 의미 없는 호의입니다. 그것조차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이리 구는 겁니까.” 도를 지나친 행위에 눈을 감아줄 만큼 블리어는 자애로운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만으로도 눈앞에 있는 여자의 목을 자르는 데에 충분한 사유가 될 수 있었다. 공작이란 자리는 그 정도의 냉혹함과 매정함이 걸맞은 위연한 자리였다. 타국의 성노예로 추정되는 여자를 바로 내쫓지 않고 이리 놔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큰 자비였다. 비록 이제는 그 눈감아줄 선을 넘어버렸다지만. “이제껏 몸만 굴리다 와서 상황파악이 잘 안되나 본데 이제껏 먹여주고 재워준 것만으로도 그대는 내게 큰 은혜를 입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미천한 생명이 누구 때문에 부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은혜에 감사할 줄은 모를망정 어떻게든 첩 자리에 앉기 위해 발악하는 게 같잖다. 모욕적인 언사치곤 나름 점잖은 표현이라지만 상대방의 자존심을 깎아내릴 만큼 날이 서있었다. “한번만 더, 그 반반한 얼굴 하나 믿고 내 눈앞에서 알랑거려보십시오. 그 알량한 목을 효수하겠습니다.” 가차 없는 말, 지독히도 매정한 눈. 그와 마주하고 있는 태화는 왠지 발끝이 시린 기분이 들었다. 냉기가 발치로 올라오더니 스르륵 발목을 휘감고 올라왔다. 등골을 따라 소름이 싸악 돋는 감각은 상당히 기분이 더러웠다. 동시에 태화는 반사적으로 알아차렸다.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굳이 아랫사람들에게도 공대하는 이유를 말이다. 이제껏 제게 써오던 이 존댓말은 너그러움, 혹은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비정한 말을 그나마 인간답게 만들어주기 위한 장식용에 불과했다.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여인을 눈앞에 두고도 블리어의 냉담한 충고는 계속 되었다. “그 벌레만도 못한 목숨이 아깝지 않다면 부디 제 분에 넘친 행동은 삼가십시오. 밤이 늦었으니 내일까지 기한을 드리겠습니다.” 결국 내일 날이 밝기 전에 떠나라는 말을 완곡히 표현한 말이었다.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려 렐리아는 인상을 쓰고 있다가 슥 미간을 폈다. 반듯하게 펴진 종이 같은 표정은 후 불면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그러니까 결국 나가달라는 거죠? 이 영지에서. 뭐 알겠어요.” 태화특유의 초연한 표정과 덤덤한 말투가 렐리아를 통해 구현되었다. 열 올린 사람을 되레 바보로 만들만큼 능청스런 태도는 현실에서 욕 좀 먹었었다. 그래도 태화는 자신의 방식을 좋아했다. 속 시원하게 화를 낸 사람에게 은근히 찝찝함을 느낄 수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저 근데~ 이유도 묻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람 매도하는 건 좀 심하지 않아요? 오늘 몬스터토벌 갔다 오셨다고 하길래 기껏 술 좀 같이 마셔주려고 찾아온 건데, 쩝. 암튼 어제는 죄송했고 저희 어제일은 깔끔하게 잊기로 해요?” 대수롭지 않게 말한 렐리아는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그리고 문고리를 쥐고서 다시 아차 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 그 술 마셔도 돼요.” 누가 보면 자기가 쏘는 줄 알만큼 찡긋 하고 한쪽 눈을 감아 보이는 게 여간 능청스러운 게 아니었다. 블리어는 말없이 침대 위에 쓰러져있는 술병을 내려다보았다. 공작가에서 발행하는 상표가 붙어있었다. 도벽까지 있는 여자를 어떻게 벌할까 생각하다가 곧 관뒀다. 그냥 짜증만이 났다. 그걸 알 리 없는 렐리아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방을 나가버렸다. “에휴." 드넓은 공작성의 복도로 나오기 무섭게 렐리아는 언제 능청을 떨었냐는 듯 한숨부터 내쉬었다. 저런 남자를 어떻게 살살 구슬려 눕히라는 건지 모르겠다. 친해지기는커녕 욕이나 듣고 나오고, 이 상태로 언제쯤 세 남주들을 공략할지 막막했다. 집에는 무사히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태화의 심정은 암담하기 그지없었다. 어젠 자신이 잘못했으니까 공작의 신랄한 비난정도는 상쇄해주기로 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공략해야 될 상대인데 안 좋게 헤어지면 안 되었다. “…근데 그냥 나가달라고 하면 되지 뭘 저렇게 속 배배 꼬인 사람처럼 말한 다냐. 과묵한 줄 알았더니 따발총이야, 따발총.” 렐리아는 작게 구시렁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원래입고 있던 옷은 어느 시녀가 가져간 덕에 지금 상태로 몸만 나가면 된다. 챙길 짐이 없으니 조금은 홀가분했다. 편하게 침대위에 드러눕고서 태화는 어서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실에 대한 암담함과는 별개로 몬스터가 들끓는다는 산으로 뛰어 들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0008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라콘드 공작령의 북쪽방향에 뻗어있는 란게르드 산맥은 산봉우리가 스무 개 넘게 비죽 솟아난 왕국에서 가장 긴 산맥이다. 바일롯의 수도와 라콘드 령 사이를 가로지른 덕에 길이 비교적 잘 닦아져 있다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었다. 허나 기나긴 겨울이 찾아오면서 산길은 눈에 파묻혀 자취를 감추었다. 겨울산은 보통 인적이 끊기기 마련이다. 약초나 식용식물이 자랄 리 없는데다 간혹 자란다 하더라도 모두 눈 속에 뒤덮여있기에 얼어있는 식물로는 돈벌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생계적인 이유가 아니더라도 최근 들어 란게르드 산맥엔 사람이 오르지 않았다. 평소 상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산길마저 봉쇄해놓은 지 벌써 이 주째였다. 몬스터의 출몰로 인해 통행이 금지되어버린 것이다. 며칠 전 라콘드 공작이 직접 휘하기사들을 이끌고 산맥초입의 몬스터들을 토벌한 후 임시방편으로 방어벽을 쳐놓았으나 어디까지나 임시일 뿐이었다. 고산지대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아래로 끊임없이 내려오면서 사태는 점차 심각해졌다. 그랬던 것이 불과 일주일 전. 몬스터 떼가 산 아래로 우르르 쏟아져내려오던 괴현상은 어느 날부터 조금씩 잠잠해져갔다. 물론 공작령의 방위태세는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몬스터들이 세력을 모은 후 한꺼번에 공작령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기에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공작령의 모든 이들이 성곽 안에서 바짝 경계하고 있을 때, 산맥중반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있었다. 몬스터의 짓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산중턱으로 내려온 몬스터무리들은 족족히 절멸해있었으니 말이다. 어느 지대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연신 터져 나왔다. 아무도 오지 않을 깊숙한 산속에서 나는 소리치곤 강렬했다. 바위를 격파하는 소리와 나무가 쓰러지는 소리가 간간히 섞여 들리더니 이윽고 콰아앙ㅡ하고 폭발음처럼 격렬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푸드드득. 놀란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얼마안가 그 일대는 말 그대로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수백 그루의 나무가 동시에 장렬하게 쓰러져 넘어가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아래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몬스터들의 사체가 수북이 깔려있었다. 펑 터져버린 풍선처럼 살가죽이 갈기갈기 찢겨져있고 그 사이로 누런 장기들이 튀어나온 하나같이 흉측한 사체였다. 흡사 재난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허나 그 풍경과 동떨어져 보일만큼 웬 가냘픈 여인이 수백 그루의 꺾인 둥치 사이로 걸어 나왔다. 뜨거운 피로 인해 눈이 녹아내린 땅바닥은 질척거렸다. 늘어진 창자 같은 것들을 밟으면서도 여인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인은 몸 여기저기에 묻은 싯누렇고 진득한 액체를 한 움큼 쥔 눈으로 닦아내었다. 털털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으나 그 와중에도 겨울바람에 출렁이는 은빛머리칼은 아름다웠다. 참혹한 광경이 펼쳐진 그곳에서 여자는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덩치 큰 오우거의 사체 앞에 멈춰선 그녀는 반토막이 난 그것을 들어올렸다. 허리부터 잘려나간 오우거의 사체는 어깨동무를 해도 될 만큼 컸고 역겨운 시취를 풀풀 풍겼다. 그나마 겨울이라 덜했다. ‘얘 가죽 괜찮아보였는데. 아까워라, 완전히 못쓰게 됐네.’ 좀 살살 때릴 걸 그랬나. 렐리아는 무의식중에 턱을 긁적이다가 몬스터의 피가 묻자 인상을 구겼다. 젠장, 더러워. 흰자를 뒤집어 까고 있는 오우거의 사체를 대충 던져버리고서 그녀는 중턱에 있는 호수를 찾았다. 얼어붙은 겨울호수는 보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이가 시릴 지경이다. 혹한기캠프의 벌칙이 아니고서야 누구든 들어가길 꺼려할 테지만 렐리아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호수를 향해 뛰어들었다. 목욕탕의 온탕에 입수하는 개구쟁이처럼 방정맞은 점프를 한 뒤 두꺼운 얼음판을 깨고 깊이 입수했다. 심해처럼 어둡게 가라앉은 호수의 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조금 숨이 차자 렐리아는 두 맨발로 호수바닥을 찼다. 쿵, 하고 내리찍기 무섭게 잔잔하던 수면위로 물살이 크게 일며 진동했다. 동시에 묵직한 얼음판을 깨고 렐리아가 슝 하고 튀어나왔다. 은색머리칼로 인해 허공으로 튀어오른 은빛연어 같기도 했다. 물속에서의 저항력 따윈 잊은 지 오래로 렐리아는 호수에서 약 삼 미터에 달하는 높이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지면에 가볍게 착지했다. 상쾌한 목욕이었다. 입고 있는 얇은 원피스는 흠뻑 젖어 치맛단이 무릎아래까지 늘어졌다. 물방울을 눈밭위에 툭툭 떨어뜨리며 렐리아는 맨발로 다시 어딘가로 향했다. 사실상 그녀는 추위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귀에 걸려있는 <코로르비타의 귀걸이>덕분이었다. 이 설산 속에서 일주일째 얇은 옷과 맨발로 돌아다녀도 끄떡없을 정도이니 그 효과는 의심할 필요가 없을 테다. 렐리아는 산보를 하는 것처럼 걷다가 어느 순간 뛰기 시작했다. 끝없이 길게 늘어진 울창한 나무들만 보니 지루해져버린 것이다. 1초에 한 그루씩 스쳐지나가던 나무가 어느 순간 1초에 열 그루씩 스쳐지나갔다. 맨발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속도는 더할 나위 없이 빨라져만 갔다. 1초에 삼십 그루를 돌파할 지경에 다다랐을 땐 렐리아의 눈에 제대로 잡히는 게 없을 정도였다. 어느덧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다리가 관성 때문에 더 더 더 빨리 움직여댔다. 모든 게 삽시간에 스쳐지나가서 태화는 무서웠다. 중간에 집채만 한 바위 비스무리 한 걸 격파한 것 같은 미세한 감각이 느껴지니 더 그랬다. 너무 빨라 보이지 않던 두 다리에 황급히 힘을 주자 눈앞에 거대한 갈색과 초록색이 뒤섞인 회색덩어리들이 마구 튀어 올랐다. 눈에 들어 갈까봐 렐리아는 질끈 눈꺼풀을 닫아 시야를 차단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자신의 이마를 때린 덩어리들이 그대로 잘게 부서진 것 같았다. 그녀는 몰랐다. 자신의 머리보다 큰 바위조각들이 이마로 날아오고 있다는 걸. 트드드드드ㅡ하고 무언가가 갈리는 소리와 진동이 종아리 아래서 느껴졌다. 전동드릴로 콘트리트 벽을 뚫는 것과 맞먹는 괴상한 소리는 이삼 분가량 더 울린 듯 했다. 바르르 땅이 흔들리고 뒤에서 풀썩, 풀썩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뒤늦게 번쩍 눈을 뜬 렐리아는 가장먼저 두 다리를 확인했다. 살갗이 희고 고운 두 다리가 굵직하게 파인 바위 속에 들어가 있었다. 꼭 자신만을 위한 족욕기처럼 깊이 파여 있었다. 작대기 같은 다리에 묻은 돌가루들을 탈탈 털어낸 뒤 렐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절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불도저로 밀고 온 것처럼 움푹 파인 길은 까마득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뻥 뚫려있었다. 누가 봐도 고속도로를 개통하기 위해 산림을 훼손한 모양새였다. 그 길옆에 뿌리째 뽑혀 쓰려지다 못해 나뒹구는 거대한 나무들은 보기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양호한 수준으로 길 주위에는 거칠고 투박한 암갈색의 나무껍질이 갈려져 뿌려져있었다. 꼭 화려한 축제의 시작을 알릴 때 뿌리는 색지 같았다. ‘역시 난 서두르면 안 돼.’ 특히 작정하고 뛰어선 안 된다. 이곳 산속에 들어와서 알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스피드의 한계가 거의 무한에 가깝다는 거였다. 무턱대고 공작성을 나와 이곳에서 몬스터를 신나게 때려잡은 날, 허기를 느끼고서 급하게 다른 마을을 찾았었다. 이곳에서 산봉우리 다섯 개를 지나야 나오는 작은 분지마을을 가까스로 발견했었는데 그때 체감 상 십분도 안 걸린 것 같았다. 남들이라면 두 발로 밤낮 넘게 뛰어도 도착하지 못할 거리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소름이란. KTX를 가뿐히 뛰어넘어 본격적으로 달리면 마하1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을 만큼 너무 빠르다보면 멀미증상이 동반된다는 것과 무섭다는 거였다. 내 자신이. 달리고 있을 때의 풍경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주위의 모든 풍경이 마치 시공 속으로 빨려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까스로 멈췄을 땐 최소 반경 일 킬로미터가 쑥대밭이었다. 최소. 그래 최소. 이 드넓은 산속에서 달렸으니 망정이지 민가에서 달렸다고 생각해봐라. 주위에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이 파괴될 테다. 암만 게임 속 세상이래도 현실과 흡사하다보니 시체도 현실적일 것이다.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들이 낭자해있는 피의 거리는 별로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 힘은 학살도 아니고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무고한 NPC가 단체로 희생되는 건 아무래도 좀 꺼려졌다. 렐리아는 밭처럼 갈려 요란하게 튀어나온 돌덩이들을 발로 톡톡 차며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어디서 잘까, 하고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이다. 굳이 집이 필요하지도, 불을 때울 필요도 없었다. 체온이 내려갈 걱정은 없으니 대충 나무아래 드러누워서 자면 되었다. 처음 이곳에서 노숙했을 때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예쁘던지 낭만적일 정도였다. 물론 잠을 자고 있을 때 몬스터들이 습격해올 때가 종종 있었지만 잠결에 놀라서 손바닥으로 치면 저 끝까지 날아가 버리기에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한참을 걷다가 렐리아는 현재 입고 있는 원피스가 딱딱하게 얼어붙어있는 걸 깨달았다. 홍두깨 대신에 이 원피스로 북어포도 두들길 수 있을 것 같다. ‘불편해.’ 혹독한 광경 속에 홀로 우뚝 솟아난 고목을 발견한 그녀는 곧바로 둥치아래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새하얀 눈옷을 입은 나뭇가지 너머로 까마득한 밤하늘이 펼쳐져있었다. 은하수가 은빛강처럼 흐르는 정경은 확실히 원래 살던 곳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째 보게 되니 슬슬 질렸다. ‘얼른 집에나 돌아가고 싶다.’ 처음이야 경이롭지 이젠 대자연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자연다큐멘터리 하나를 일주일째 돌려보는 느낌이랄까. 태화는 뼛속까지 현대인이었다. 하루라도 전자기기가 손에 없으면 지루해서 못 살 정도로 매일 신선함을 선사하는 디지털매체에 중독되어있었다. 처음에 이 산속에 들어왔을 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었다. 끝도 없이 쏟아져내려오던 몬스터 떼를 상대로 싸웠던 경험은 실로 짜릿했다. 맨손으로 몬스터들의 단단한 철갑무장을 꿰뚫고 그 내장을 비틀어 짜고 발차기 한방에 수십 마리가 허공에 붕 뜨는 그 광경이란. 두 손이 피로 흠뻑 젖어있을 만큼 정신없이 싸웠던 것 같다. 문제는 몬스터들의 수준이 거기서 거기라는 거였다. 비등비등한 애들이 어디까지나 쪽수로 밀어붙일 뿐 발전이 없었다. 보통 수 백 마리쯤 해치우다보면 보스몹이 나타날 텐데 역하렘 게임속이라 그런지 그런 기능은 없었다. 개미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 못할 만큼 약한 수준의 몬스터들을 때리고 때리고, 진짜 아이템이라도 나오면 때리는 재미라도 있지 이건 뭐 내장밖에 나오지 않았다. 쉽게 경험해보지 못할 새로운 체험이긴 했으나 그다지 스릴과 즐거움을 주지 않았다. 영원히 레벨1에 머무른 것 같은 느낌. 처음 슬라임을 잡으면 재미있겠지만 그놈의 슬라임을 백번 천 번 넘게 잡아봐라. 아마 신물이 올라올 것이다. 란게르드 산맥에 들어온 지 사흘째가 되던 날, 그녀는 몬스터사냥에 완전히 질려버렸다. 렐리아는 수동적인 자세에 임했다. 달려들기에 팰 뿐이었고 몬스터 가죽을 팔면 돈이 되니까 그래서 잡는 것뿐이었다. 마을에 가서 옷도 사고 밥도 먹어야하니까 필요에 의해 잡게 되었다. ‘…청양고추 송송 썰어 넣은 엄마표 얼큰한 된장찌개…고슬고슬한 햇밥에 스팸 얹어서. 아니 짜파구리라도 먹고 싶다. 지금 딱 야식시켜먹을 시간인데. 치킨, 피자, 족발, 삼겹살, 닭발에 캬 소주도…. 아 갑자기 라면 땡겨.’ 꼬르륵 하고 배에서 울리는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태화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이 고요한 정적가운데 저 홀로 누워있는 시간이 쓸쓸하기만 했다. 배까지 고프니까 괜히 또 서럽다. 눈물 한줄기가 소리 없이 렐리아의 뺨 위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배고파, 엄마. ============================ 작품 후기 ============================ 0009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인간답게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다. 렐리아는 굳게 마음을 먹고 이른 점심부터 몬스터를 두들겨 잡았다. 가죽만 뜯어 벗겨 챙긴 후 그녀는 다섯 개의 산봉우리를 십분 만에 넘어 도착한 마을에서 팔아버렸다. 몬스터 가죽은 최상등급은 아니더라도 그런대로 질겨 후한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을 안에서 느지막이 아침겸 점심을 사먹고 옷도 새로 구매했다. 얇은 원피스하나 입고 돌아다니는 자신을 마치 광년 보듯 힐끔대는지라 이번에 큰맘 먹고 두꺼운 겨울용 원피스를 구매했다. 어차피 <코로르비타의 귀걸이>가 있어 혹한에도 끄떡없다지만 다음에 또 마을로 내려와야 되니 말이다. 렐리아는 거의 낮 네 시쯤에 산중턱으로 돌아와 한동안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특히 지면을 훑었다. 집짓기에 최적인 고른 지형을 찾기 위해서였다. 노숙보다는 집이 있는 게 정신적인 안정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 드넓은 곳에 외따로 있는 것보단 작은 움집 안에 있는 게 심적으로 덜 외로울 테니까. 정착을 했다는 안도감을 가지기 위해 렐리아는 몬스터를 두들겨 패는 게 아닌 오랜만에 사람다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눈을 새하얀 도면 삼아 손가락으로 집 설계도를 그렸다. 현란한 손끝에서 성냥개비를 세워놓아 만든 것 같은 허접한 입체도형이 완성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3D를 전공할 걸 그랬나, 태화는 끄적거린 낙서를 발로 뭉개버리고서 무작정 울창한 나무사이로 들어섰다. 가장 좋은 목재를 고르기 위해서 휘휘 나무들을 둘러보다가 그녀는 거칠지만 튼튼해 보이는 나무하나를 찾아내었다. 거의 렐리아만한 여자 다섯이 나란히 손을 잡고 둘러싸야 간신히 껴안을 듯한 굵기였다. “그럼~ 본격적으로 집을 만들어볼까요?” 듣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렐리아는 개인방송이라도 찍는 것처럼 주절거렸다. 극심한 외로움 탓에 이젠 입에 달라붙은 혼잣말이었다. “일단, 가장 먼저 굵고 튼튼한 나무를 발차기로 부러뜨립니다.” 가볍게 오른다리를 들어올리기 무섭게 나무중앙을 발등으로 찍어 내렸다. 우스울 만큼 약한 발차기였으나 놀랍게도 쩌저적, 하고 금이 가기 시작했다. 나무는 허연 속살이 드러내더니 그대로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반이 넘어가버렸다. 둔탁한 굉음과 함께 지면을 찧은 나무는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했다. 수백 년은 거뜬히 산 고목이었다. “이렇게 눕힌 나무를 손날치기로 쪼개고~ 울퉁불퉁한 부분은 보기 싫으니까 잘 다듬어줍니다. 어때요? 어렵지 않죠?” 흥얼거리면서 나무를 또다시 두 동강 낸 렐리아는 전기톱 대신에 왼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손바닥으로 거친 표피를 슥슥 문지르기 무섭게 잘게 갈려진 나뭇조각들이 찬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렐리아는 자신의 키에서 두 배가 족히 넘는 나무토막을 각각 양어깨에 한 개씩 짊어지고서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적당히 봐두었던 눈밭 한가운데에 선 그녀는 곧바로 나무토막들을 어깨에서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 중 한 토막을 곰인형 안 듯이 안아들어 세웠다. “이렇게 지면에 한쪽 발을 올려두세요. 그리고 쿵! 하고 한번 내리 찍습니다. 그럼 깊숙하게 구덩이가 파였죠? 여기다가 기둥을 심습니다.” 얼음처럼 단단하게 얼은 지면을 뚫고 들어간 왼발이 깊은 구멍을 만들어냈다. 렐리아는 그 옆에도 그만한 구멍하나를 만들어 기둥이 될 나무토막을 깊이 파묻었다. 삼 미터가량 되는 나무토막을 지면에 꼿꼿이 박아둔 채 렐리아는 다시 근처 숲으로 들어갔다. 이번엔 비교적 넓적한 나무토막 스무 개 정도를 구해와 곧바로 진지한 목수의 자세에 임했다. “잘 보세요. 여기부터가 중요해요.” 정면을 향해 똑똑히 얘기하고서 렐리아는 나무토막을 한꺼번에 여러 개 집어 들었다. 그러곤 성냥개비 세워놓듯이 막 갖다 얹어놓기 시작했다. “지붕을 얹습니다. 벽도 세워놓고요. 나무를 아끼면 안돼요. 나를 믿고 이렇게 막 퍼부으세요. 이 정도는 절대 많은 게 아니에요. 완성되면 알 거예요.” 혼자 중얼중얼 거리길 이 분정도 했을까 그녀는 돌연 하던 행동들을 멈췄다. 회의감이 온 것인지 멈칫하고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손이 멈췄다. 통나무 집을 원했으나 결과는 원시적인 움집 되시겠다. 왠지 자매품으로 빗살무늬토기도 빚어야 될 것 같았다. “짜잔~ 5분 만에 통나무집 완성. 참 쉽죠? 이렇게 죄 없는 나무들이 희생 되었습니다~” 또 혼자서 중얼거리며 렐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쌓아올려 만든 움집을 퍽퍽 밟아서 파괴했다. 나중에 땔감으로나 써야지. 능청스러운 표정은 어디가고 급 현자타임에 들어선 얼굴로 렐리아는 냅다 눈밭위에 드러누웠다. ‘뭐하냐. 나.’ 차라리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에 황제와 드래곤을 찾으러가는 게 낫겠다. 시간은 시간대로 낭비하고 재미도 없고 자괴감마저 들었다. 이제껏 이 산맥에 버티고 있는 이유는 오로지 공작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이왕 만난 김에 공작부터 공략해버리는 게 나을 것 같기에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 다시 접근해볼 생각이었다. 공작을 꼬시고 어찌저찌해서 함께 황제가 있을 수도로 올라간다면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일이었다. 지금 상태로는 그저 보기 좋은 그림의 떡 같은 상황일 뿐이었고 말이다. “…목소리가 들렸다니까. 진짜로 맹세할게.” 그때 희미하게 렐리아의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을 밟는 발소리도 함께 들려오자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뒤늦게 한심스런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네 녀석도 참. 여자 못 본지 일주일이 넘었다고 이젠 하다못해 환청까지 듣는 거야? 그냥 막사 안에 틀어박혀서 혼자 상상애인이라도 만들어.” “아니, 진짜라니까! 그리고 나 그렇게까지 외롭지 않거든?” “그래 잘 알겠으니까 잔말 말고 땔감이나 주워.” “진짜 서운하네? 너 내 말 못 믿어?” “응. 신뢰할 만한 구석이 없잖아.” “야…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근데 진짜라니까. 웬 예쁘장한 목소리가……어, 저기?” 반박하던 금발의 남자가 손끝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 그대로 굳었다. 입을 다물 생각조차 못하고 헤 벌리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다. 그 옆에서 함께 걷던 갈색머리의 남자의 시선도 이내 그곳으로 꽂혔다. 탄성 대신에 입김이 터져 나왔다. 감탄사가 흘러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서있었다. 새하얀 경치 속에 녹아내릴 것만 같은 흰 피부하며 깃털처럼 여리여리한 몸, 무엇보다 시린 바람에 잔잔히 휘날리는 은발은 흡사 겨울에 내려온 천사 같았다. 물론 그 뒤쪽에 처참하게 부서져있는 투박한 나무잔해들은 흠이었다. “…오 세상에…”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하던 금발사내가 곧바로 한발먼저 뛰쳐나갔다. 홀린 듯이 움직이더니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 그녀 앞에 다가와 있었다. 그는 주군에게 복종하듯 처음 본 여인에게 한쪽 무릎까지 꿇었다. 잘 조련된 번견의 움직임이었다. “레이디, 그 아리따운 외모가 눈 사이에 핀 신비로운 꽃 같습니다. 어찌 그 이름을 물어보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차, 제 소개를 잊었군요. 저는 왕실 중앙기사단 소속. 라미우스 므토르 라고 합니다. 레이디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는 지요?” ‘뭐야 이 사람.’ 웬 처음 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렐리아는 어이없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이 산속에서 헌팅을 당한건가 싶었다. 그녀는 어깨를 씰룩하며 팔짱을 꼈다. 전화번호 안 알려줄 거예요, 하고 튕기듯. 그 작은 움직임에도 노란 금발사내, 라미우스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기사의 예인 손등키스를 허락해달라고 그녀의 손만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그때 서둘러 그들 곁으로 다가온 자가 있었다. 샛노란 금색머리와 비교될 만큼 차분하고 어두운 갈색머리의 남자였다. ‘거봐, 킬리. 내 말이 맞지?’ 라미우스는 제 옆으로 다가온 친구를 올려다보며 동의하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런 제 친구의 신호를 싸그리 무시한 남자는 곧바로 여우털이 달린 외투를 벗어 여인의 어깨위에 둘러주었다. 그제야 라미우스는 퍼뜩 깨달은 얼굴을 하고 황급히 눈 묻은 무릎을 피며 일어났다. “앗, 미처 생각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기사도란 무엇인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여성과 아이, 노인을 어느 상황에서도 우선시하며 배려하는 것이었다. 이 설산 속에 겨울용 원피스만 달랑 입고 있는 여인을 보고도 외모에만 홀려 이런 실수를 저지르다니, 라미우스는 크게 자책하며 시무룩해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 옆에선 초면인 두 남녀가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왕실 중앙기사단 소속, 킬리 바티무스입니다. 이쪽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원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거든요. 지금과 같이 편하게 무시하시면 돼요.” “아 그렇군요. 저는 렐리아예요.” “…킬리. 누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헌데 이 위험한 곳에 왜 혼자 있으신 건지요? 외부인의 출입이 철저히 금지된 걸로 아는데요. 동행인은 어디 있죠?” “그게 사정이 생겨서 이곳에 들어왔다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어쩐지 길을 잃은 아기사슴처럼 가녀린 모습…” “대체 무슨 사정이 있기에 이곳에 들어온 거죠?” “공작령에서 쫓겨나게 됐거든요. 그래서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이었어요.” “…이럴 수가. 설마 내가 무시당하고 있는 건가요, 세상에…….” 어디서든 존재감 강한 라미우스에게 있어선 가장 두려운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가 이차 좌절을 맞이하고 있는 동안 킬리와 렐리아 사이로 이런저런 말을 오갔다. 왜 공작령에서 쫓겨났는지, 성은 무엇이며 고향이 어디인지와 같은 기본적인 정보파악을 위한 질문들이었다. 렐리아는 단순히 신원이 파악되지 않아 쫓겨났다고 둘러대며 자신의 신상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뻔뻔하게 기억상실증 환자 행세까지 했다. 다행히 킬리는 이에 대해선 별말 없이 넘어갔다. 대신 강경하게 자기 할 말만 이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비록 왕명을 수행하고 있는 도중이라지만 저희 중앙기사단의 보호를 받으시는 게 좋을 거예요. 물론 민간인 출입이 금지된 곳이라 어차피 저희와 함께 계셔야 해요. 선택지는 없고요.” “네, 네. 이 친구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와 동행하시는 게 훨씬 안전하실 겁니다, 레이디.” 킬리의 딱딱하고 재미없는 말을 포장하듯이 라미우스가 급히 회복해서 덧붙였다. 렐리아가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수락하자 라미우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이 라미우스, 레이디를 기사단이 있는 막사로 정중히 모시도록…” “땔감 주워야지.” “…아 맞다……그래야지.” 라미우스는 친구의 지적에 다시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무룩해졌다. 밝아졌다가 축 처졌다가 좀체 종잡을 수 없는 남자였다. 렐리아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제 어깨너머를 힐끗 눈짓하며 자신이 부순 움집을 가리켰다. “저기에 널린 장작들 쓰셔도 돼요.” “아니, 이 많은 장작들이 다 어디서…?!” “몬스터가 모아놓았나 보지.” “네, 아마 그럴 거예요.” 킬리와 렐리아는 감흥 없는 투로 주고받았다. 오늘 날씨 참 좋네요, 그러게요 빨래 잘 마르겠네요 하는 여상하기 짝이 없는 대화였다. 이에 머쓱해진 라미우스는 크게 한번 헛기침을 터뜨렸다. “…흠! 최근에 모아둔건지 아직 눈에 젖지 않았군요. 이것 참 다행입니다! 땔감을 주우러 삼십분 넘게 헤매던 중이었는데 하마터면 못 돌아갈 뻔했지 뭡니까? 하하.” 유머러스한 남자라는 것을 최대한 어필하기 위해 과장된 웃음소리를 터뜨렸으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무관심뿐이었다. 행동력 빠른 킬리가 부서진 장작더미를 줍기 시작하자 어느새 렐리아도 그 옆에 가있었다. “킬리 씨? 킬리오빠? 몇 살이세요?” “그냥 킬리라고 부르세요. 스물다섯입니다.” “전 스물넷이요. 아, 장작 줍는 거 거들게요.” “네. 1인 1장작이라 본인이 피울 건 본인이 챙겨야 돼요. 저희 중앙기사단의 룰이죠.” “그것 참 괜찮은 룰이네요.” “그렇죠. 선임들 것까지 안 해서 얼마나 좋은지.” 묵묵하게 제 할 일들 하면서 두 사람은 가볍게 떠들어댔다. 이미 라미우스의 존재는 떠도는 공기처럼 자연스레 잊혀져있었다. 두 남녀의 모습을 바로 맞은편에서 지켜보던 라미우스는 부루퉁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소외를 당하고 있다 여기니 금방이라도 섭섭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라미우스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에 부릅 힘을 주었다. “큼큼, 장작 줍기 하면 저죠! 예전에 제 키만큼 쌓아서 짊어지고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 선임들이 저를 얼마나 대견해하시던지 모릅니다. 그때부터 이 내면에서 장작 줍기에 대한 열정이 피어오른…!” 열의에 찬 외침과 함께 시작된 자기어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라미우스는 쭈그려 앉아 두 팔 가득 장작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열심히 입도 나불거리면서 말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킬리와 렐리아는 자신들 것만 대충 챙겨들고서 저들끼리 걷기 시작했다. 0010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렐리아는 두 기사를 따라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기사들에게 포위당하듯 둘러싸였다. ‘오 아름다우십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우실 수가’와 같은 진부한 칭찬들을 들으며 간신히 썩어 들어갈 뻔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자신이 예쁘다는 건 그 당사자가 제일 잘 아는 사실이었다. 캐시를 얼마나 이 얼굴에 처발랐는데 당연히 예뻐야지. 기사란 원래 이런지는 몰라도 라미우스 복제본이 족히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귀가 다 따가울 지경이었으나 다행히 킬리 덕분에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앞서서 걷던 킬리가 얼마안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목덜미위로 단정하게 끝이 다듬어진 갈색머리를 보며 태화는 ‘두상이 동그라네.’ 하는 시시한 생각을 했다. 킬리는 곧 그녀에게서 비껴서더니 반원형태로 모여 있는 천막들을 쭉 훑으면서 가리켰다. “여기 있는 천막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데로 들어가면 돼요. 천막주인이 알아서 양보해줄 거거든요.” “미친놈아! 거긴 우리들 천막이잖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저기 있는 천막은 안돼요. 제가 자는 천막이거든요.” “저 치사한 새끼!” 킬리가 한마디 꺼낼 때마다 뒤에서는 사내들의 거센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렐리아가 뒤를 슥 돌아보기 무섭게 다들 합죽이가 된 채 헤프게 웃어보였다. 광대가 치솟을 정도였다. 렐리아는 그들에겐 관심 없이 조금 떨어져있는 뒤쪽에 처진 커다란 천막을 가리켰다. “저기는요?” “거기도 안돼요.” “왜요?” “공작님이 머무시거든요.” 하마터면 뭐요? 하고 반문할 뻔했으나 태화는 간신히 참아 넘겼다. 골 때리네. 공작과 잠시 텀을 두기 위해 공작령을 떠나 여기로 온 것인데 공작이 여기에 있단다. 뭇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몸매로 렐리아는 살랑살랑 걸음을 옮겼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킬리를 지나치더니 이내 기사들 사이를 태연스럽게 가로질렀다. 기사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두 갈래로 나뉘어 서서 그녀를 향해 고갤 돌렸다. 막사를 놔두고 어디로 가는 거지? 하고 기사들의 얼굴위로 일제히 물음표가 떠오를 때였다. 렐리아는 막사근처에서 이어지는 숲 쪽으로 다가가더니 별안간 가장 가까운 나무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그러곤 기사들을 향해 한손을 흔들어주자 기사들은 헤벌쭉한 얼굴로 손을 마주 흔들어주었다. 삼촌팬 같은 그들의 반응에 렐리아는 수줍게 나무 뒤로 숨듯이 빙글 돌아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숲속을 헤치며 달렸다. 기사들은 어안이 벙벙해 있다가 우거진 나무사이로 잽싸게 뛰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이 얼핏 시야에 잡히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러곤 너나 할 것 없이 눈 깜짝할 사이 도주해버린 여인을 황급히 뒤쫓기 시작했다. “레이디!!” “위험합니다! 돌아오십시오!” “그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에도 렐리아는 픽 웃어버렸다. 미쳤다고 저기에 있겠냐. 그 남자가 멀쩡히 숨 쉬고 있는 곳에 어색하게 끼어있는 건 사양이었다. 공작과 다시 만나기까지 적어도 한 달간은 충분한 텀을 가져야겠다고 여기고서 렐리아가 살살 달리던 속도에서 조금 속력을 내려할 때였다. “…!!” 반대편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렐리아는 제대로 정면을 보았다. 살짝 굽어진 구릉위로 말을 몰며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색을 입히지 않은 산수화와 같은 새하얀 설경 속에서 흑발의 사내는 유독 그 존재가 튀었다. 하얀 셔츠에 묻은 얼룩이 가장 잘 눈에 띄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렐리아가 어떻게 도망칠 궁리를 하기도 전에 공작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고는 여인을 힐끗 쳐다보는가 싶더니 그대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버렸다. “…?” 렐리아는 우뚝 멈춰 서서 뒤를 응시했다. 저를 따라잡기 위해 달려오던 기사들이 서둘러 공작을 맞이하며 예를 갖추고 있었다. 그와 중에도 공작은 꼿꼿하게 등허리를 핀 채 주둔지 안쪽으로 서서히 말을 몰았다. ‘…와.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태화는 알듯 말듯 기분이 더러웠다. 분명히 말하지만 자신은 저 남자가 싫다. 공략대상이기에 어쩔 수 없이 나름 비위를 맞춰주고 있다지만 개인적으로 만났다면 저 반지르르한 얼굴에 침을 뱉어줬을 테다. 그런데 생판 남처럼 지나가는 모습에 이상하게 짜증이 솟았다. 물론 친근한 인사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 스치듯이 본 눈빛. 마치 길가에 똥개가 싸지르고 간 배설물을 내려다보는 것 같던 그 혐오스럽고 냉랭하게 굳어진 눈빛이 떠올랐다. “레이디!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뒤늦게 자신의 팔을 붙잡은 라미우스를 알아차리고서 렐리아는 고갤 들어올렸다. 자신의 한쪽 입꼬리가 묘하게 비틀려 올라가 있다는 걸 깨닫고 반대쪽도 따라 끌어올렸다. 가식모드에 들어간 렐리아의 미소는 샛별처럼 환했다. “죄송해요. 그게~ 멀리서 공작님이 보이시기에 달려간 거예요.” “아, 그러셨군요.” 왕국의 거의 모든 미혼여성들이 남편감으로 선호하는 대상이 라콘드 공작임을 알기에 라미우스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바일롯의 남편감으로 당당히 2위에 오른 공작이니 새삼스럽지도 않은 것이다. 1위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바일롯의 젊은 국왕이었다. “그보다 레이디는 시력이 상당히 좋으시네요. 공작전하가 보이셨다니. 전 레이디를 뒤쫓아 오기 전까지 몰랐지 뭡니까, 하하.” 라미우스는 또 혼자 떠들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대화를 지루하게 만들 수 있는지 잘 아는 것 같았다. 함께 너스레 떠는 것도 귀찮아서 렐리아는 일회용가식을 버리고 걷기만 했다.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으며 다시 막사로 돌아오자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모였다. “레이디. 어디 다치신 곳은?” “놀랐습니다. 갑자기 뛰쳐나가셔서.”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렐리아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서 사과했다. 기사들과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던 여자가 맞나 싶을 만큼 다소곳한 모습이었다. 이에 기사들은 방금 전의 일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는 듯 헤벌쭉해졌다. ‘외모효과 한번 대단하네.’ 태화는 역시 현질의 힘은 위대하노라고 생각했다. 물론 어디서나 예외라는 게 존재하긴 마련이었다. 호들갑을 떠는 기사들과 달리 자신을 쫓지 않고 가만히 서있던 킬리는 별로 걱정스런 기색이 없었다. “급하게 용변 보러가는 줄 알았어요.” “저, 저 미친놈이!” “말 가려서 못하냐!” 우우 하고 거센 비난이 터져 나옴에도 킬리는 한번 어깨를 으쓱하며 넘길 뿐이었다. 그때 그의 말에 폭소하며 가장 좋아라하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본인 렐리아였다. 그녀는 어깨를 잘게 떨 정도로 웃다가 종내에는 배를 부여잡았다. “푸핫, 진짜 성격 맘에 든다.” “왜 은근슬쩍 말을 놓으시는지요.” “하하 죄송해요, 죄송. 근데 덕분에 오랜만에 웃은 것 같아요. 푸하하 용변이라니! 진짜 골 때리네요 하하.” 경박스럽게 입을 크게 벌리고 웃는 모습조차 아름다워 기사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미인의 웃음소리에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어느새 하하하 따라 웃기까지 했다. 반면 그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서 둥치에 말을 묶고 있던 공작은 미간을 서늘하게 접고 있었다. 늘 무표정이기에 더더욱 미세한 표정변화는 뚜렷하게만 보였다. 단단히 심기가 불편한 모습에 주위에 있던 측근들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근방탐색을 위해 홀로 말을 몰고 나갔던 공작의 표정이 가히 좋지 않으니 말이다. “…이 근처에서 몬스터라도 발견하신 것입니까?” “그렇담, 아직 해가 저물기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서둘러 퇴치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순찰에는 문제가 없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공작은 제 주위에서 심각하게 얘길 나누는 조사단대장과 기사단장을 물리고 개인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조용한 막사 안에 들어와서도 여인의 하하 하는 경박한 웃음소리가 따라붙어왔다. 통통 튀는 음색이라서 그런지 귓가에 환청처럼 겉도는 그 웃음소리는 그의 신경에 너무도 거슬렸다. 블리어는 투박한 간이의자에 앉은 후에도 잘 별러놓은 검 같은 기세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왜 저 여자가 이곳에 있는지 얼추 짐작은 가나 상식적으로 이해는 되지 않았다. 이 설산에서 일주일간 생존해있었단 말인가. 혹독한 추위에 단련된 기사도 일주일 생존은 힘들 텐데 상당히 악착같은 면이 있는 여자였다. 처음 만났을 때도 이 산속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속옷과 진배없는 노출심한 차림으로 눈밭을 걷고 있는 걸 마부가 발견한 덕에 운이 좋게 제게 주워졌었다. 블리어는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정확한 경위를 들을 필요가 있다 여겼고 곧장 천막 앞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에게 명했다. 지금당장 렐리아라는 여자를 제 앞으로 데려오라고. 그렇게 명한지 삼 분조차 지나지 않아 그의 천막 밖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명을 받았던 기사의 목소리가 덤덤히 들려왔다. “분부하신대로 데려왔습니다.” “들여보내십시오.”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막입구에 길게 쳐놓았던 두꺼운 천이 스륵 젖혀졌다. 얼마안가 그 뒤로 엷은 은색머리칼을 하느작대며 미색의 여인이 걸어 들어왔다. 팔이며 다리며 나비의 날개처럼 연약해 보이는 여자는 표정 또한 훌쩍 날아갈 듯 가벼웠다. “오랜만이네요. 거의 일주일 만이죠?” “예법이라곤 모르는 미천한 신분을 티내는 겁니까. 그런 게 아니라면 가만히 입을 다무십시오.” 블리어는 가차 없이 그녀의 면전에 대고 독설부터 내뱉었다. 분뇨를 처리하는 삽으로 눈앞의 여인을 땅 속에 묻어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 표정이었다. 기사복 상의로 추정되는 커다란 사내겉옷을 제 옷인 양 어깨에 두르고 있는 모습이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다. 벌써 귀족인 기사하나를 자신의 치마폭에 감쌌다고 의기양양해있는 건가 싶었다. 그에게 있어서 렐리아의 존재는 천박한 짐승의 대변, 혹은 대변 속 기생충 그 자체만도 못했다. 마주보고 있자니 그때의 기분 더러운 일이 생각나 더 그랬다. “한번만 더 내 눈에 띄면 목을 효수하겠다했습니다. 그 경고를 벌써 잊은 겁니까.” “저도 여기에 공작님이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러니 이번 건 무효로 치고…” “그대, 부디 떠들지 마십시오. 누구 앞이라고 감히 허락도 없이 입을 엽니까. 다물라고 했습니다.” “…아 예.” 썩을 뻔한 얼굴을 간신히 피며 렐리아는 대충 대답했다. 무슨 군기 잡나, 생각보다 앞뒤 꽉 막힌 철혈의 공작이었다. ‘…그놈의 철혈. 밴댕이 소갈딱지도 이것보단 쿨하겠네.’ 공작이 뭐라 하는 것 같았으나 태화는 전부 흘려들으며 속으로 그를 깠다. 억지로 웃느라 얼굴가죽이 당길 지경이었다. 이 무슨 서비스직의 고된 노동체험기인가 싶었다. 물론 까딱 비위를 거스르는 순간 서비스직은 모가지가 잘리겠고 지금 여기선 진짜 목이 잘린다는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내 말 잘 새겨들었습니까.” “네에, 네에 그럼요.” “이제 이곳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십시오. 공작령에서 나온 직후 어디에 있다가, 어떻게 해서 이곳에 도착하게 됐는지 일말의 거짓 없이 사실만을 말하십시오. 조금이라도 사실과 다를 경우엔 혓바닥을 뽑겠습니다.” “근데 이 얘기가 좀 길어서요.” 길기는 길다. 일주일째 가녀린 여자홀로 어디서, 어떻게, 무얼 먹으며 생존했는지를 캐물어도 술술 나불거릴 수 있을 만큼의 디테일하고 긴 거짓말을 생각하려면 그만한 시간이 필요했다. “오늘밤에 시간 어떠세요? 밤에 다시 찾아와서 얘기하면 안 될까요?” “그 머리에는…어떻게든 남자에게 빌붙어보려는 생각뿐인 겁니까.” 기가 차서 블리어는 가볍게 실소를 흘렸다. 그마저도 혹독한 비난에 어울리는 서느런 냉소였다. 아둔한 벌레 같은 여자였다. 어떻게든 제 명을 단축시키려고 발버둥치는 것 같아서 괜히 더 그는 자애로워졌다. 이 손에 벌레의 피를 묻혀선 안 된다는 고결함에서 나온 자비였다. “나가십시오. 대답하든 않든 그대를 내쫓을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이 군영에서 완전히 벗어나 제 눈에 띄질 마십시오.” 어떻게 돼먹은 정신구조를 가진 여자인지는 몰라도 그 끈질김만큼은 칭찬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 끈질김이 상당히 거슬려서 문제라지만. 여자는 여전히 꼿꼿하게 고개를 들어 올린 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있었다. 나갈 기미라곤 없어보였다. 자비를 준지 수십 초도 안 되어 슬슬 블리어의 인내가 바닥을 드러내었다. “나가라했습니다. 그때와 같은 수작을 부릴 생각이라면 이번엔 그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해야 될 겁니다.” “아니, 공작님. 혼자 음마가 끼셨나 왜 이러시는…흠. 밤에 그냥 건전하게 얘기 나누자는 거예요. 절대 안 덮칠게요. 그리고 그때일은 깔끔하게 잊기로 했잖아요, 저희?” “…들러붙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니~ 내 말뜻은 그게 아니라고요.” 앙탈부리는 여자처럼 렐리아의 얇은 목소리가 간드러졌다. 실상 깊은 짜증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였다. “우리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제 얘기를 들어보,” 렐리아는 겁도 없이 공작에게 바짝 다가가 슬그머니 그의 팔을 붙잡으려했다. 허나 손이 닿기 무섭게 블리어는 치우라는 듯 거칠게 팔을 위로 빼들었는데 그 팔이 하필이면 렐리아를 밀치고 말았다. 가냘픈 몸뚱이가 순식간에 뒤로 기울어지기 무섭게 여인은 넘어졌다. 콰당하는 소리마저 애처로웠다. 넘어지면서 그녀의 머리는 테이블 왼쪽다리에 거하게 부딪쳤다. 찧은 뒤통수가 아프진 않았으나 자신을 밀쳤다는 것에 확 기분이 나빠져 태화가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위태롭게 테이블위에서 흔들리던 묵직한 도자기가 그대로 여인의 작은 머리위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ㅡ 블리어 그조차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산산조각이 나버린 두꺼운 도자기는 쓰러진 여인의 머리주위에 흩어져있었다. 정신을 잃은 건지 축 늘어진 여자의 모습에 블리어는 자신도 모르게 팔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빈주먹이 절로 그러쥐어졌다. 싸늘한 정적만이 넓은 막사 안을 감돌았다. 0011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리어는 제자리에 잠시 굳어 움직이지 않다가 여인을 향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왼쪽무릎을 굽히고 여인의 상태를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아씨…부담스러.’ 그의 눈길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느껴지자 렐리아는 숨소리를 최대한 죽여야만 했다. 머리 위로 비누거품이 떨어진 것처럼 감각은커녕 조금도 아프진 않으나 문제는 깨진 도자기였다. 분명 쨍그랑하고 산산조각이 난 것 같은데 그것에 머리를 맞은 자신이 멀쩡하면 안 되는 것이다. 다친 곳 없이 멀쩡하면 이상하게 여길게 분명할 테니 태화는 최대한 공작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기절한 척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공작은 별 의심 없이 속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통쾌하기 짝이 없었는데 순간 그의 미지근한 손끝이 목가에 닿는 게 느껴졌다. 이 새끼가 틈을 노려서 목을 조르려나 싶었으나 다행히 그의 손끝은 목옆의 맥을 짚고 있었다. 뒤늦게 공작이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게 느껴졌다. ‘의무병……’하고 중얼거리는 지독히도 낮은 저음에 태화는 풉하고 웃어주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넘겼다. 목을 친다느니 할 땐 언제고 막상 자신이 죽을까봐 걱정이 드나보다. ‘김첨지를 뛰어넘는 츤데레였을 줄이야. 이 솔직하지 못한 새끼.’ 물론 현실은 태화의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블리어는 양심의 가책보다는 현실적인 우려에 갈등을 느끼는 참이었다. 의무병을 불러야하는 것인가, 말아야하는 것인가로 말이다. 이대로 자신의 막사 안에서 여인이 죽는다면 이상한 소문이 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반한 여인을 개인막사 안에 따로 부르고나서 몇 분후에 여인이 죽어서 나간다. 겁간을 시도하려는 자신에게 반항하다가 여자가 그만 죽어버렸다는 추잡한 가정이 충분히 세워지는 것이다. 만에 하나 은밀하게 뒷얘기가 퍼지기라도 한다면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린다. 그렇다고 기사들을 철저하게 입단속을 시키는 게 더 이상하리라. 진실이기에 감추려한다고 생각할지 모를 일이다. “…제기랄.” 그답지 않게 상스러운 욕설이 튀어나왔다. 고작해야 천한신분의 여자가 죽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으나 제 앞길에 이 여자가 꼬이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이성적인 판단이 내려지기 무섭게 블리어는 의무병을 부르기 위해 막사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발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가자 그제야 바닥에 축 늘어져있던 렐리아가 미동을 보였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리는 입술, 그 사이로 풉풉 하는 작은 웃음소리가 연신 터져 나왔다. 자꾸 광대가 슬금슬금 올라간다. 아 이거 미치겠네. 태화는 어떻게 하면 공작새끼를 좀 더 효과적으로 골릴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머리가 미친 듯이 잘 굴러갔다. * “…다행히 외상출혈은 없지만 내상이 있을지 모릅니다. 만일 내상이라면 다친 곳이 머리 부분이기에 후유증이 동반될 가능성이 큽니다.” ‘아이 꼬시다. 들었어 공작?’ 의무병의 말을 들으며 렐리아는 속으로 능청맞게 비아냥거렸다. 자기얘기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당히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는 지금 이 순간 공작의 표정을 못 본다는 게 아쉽기만 했다. 그녀는 현재 어느 막사 안으로 옮겨져 와 일인용 간이침상위에 바르게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그녀를 업고 온 의무병과 공작이 나란히 서서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감고 누워있을 뿐인데도 태화는 이 상황이 흥미진진하기만 했다. 의무병이 자신의 눈꺼풀을 억지로 뒤집어 깠을 때 들키는 줄 알았으나 다행히 빨리 넘어가버려 가까스로 꾀병연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머리에 아무상처가 없이 깔끔하다는 말에 혹여 라도 공작이 자신의 상태를 의심하지 않을까 싶었다. 허나 걸고 넘어지기는커녕 공작은 의무병의 진단에 아까부터 쭉 말이 없었다. 눈을 뜨기 전까진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 알 수 없다기에 뭘 더 자세하게 물을 수 없다지만, 태화는 다르게 생각했다. ‘실수라고는 해도 명백한 살인미수인데 죄책감을 가져야지. 암- 뼈저리게 뉘우쳐야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얼마나 많은 조연들이 밀쳐져서 죽는지 모른다. 가구모서리에 머리를 찍고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 머리가 단단해서 그렇지 안 그랬으면 공작은 살인자가 됐을 테다. '어때 공작? 눈앞이 이제 좀 깜깜한감?' 태화는 그가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입을 다물고 있다고 여겼다. 그렇기에 마음 같아선 얼굴에 하얀 분을 잔뜩 찍어 발라 최대한 창백한 낯으로 있고 싶었다. 자신을 볼 때마다 가슴이 콕콕 쑤시도록 아주 철저하게 그의 양심을 괴롭히고 싶었다. “…으음.” 기절한지 이십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지만 렐리아는 가까스로 정신이 든 시늉을 했다. 누가 보면 이틀 내리 기절해있었던 건줄 알만큼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파르르하고 속절없이 긴 속눈썹이 떨렸다. “아, 일어나셨군요.” “…여긴 대체…으으.” 의무병의 말에도 아름다운 은발을 늘어뜨린 여인은 혼란함을 감추지 못하는 눈으로 주위를 연신 두리번거렸다. 얼마안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키려하자, 그 애처로움을 자아내는 모습에 의무병이 황급히 손을 뻗어 부축해주었다. 자신이 상체를 일으킬 수 있게 도와주는 그 손길에 렐리아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편히 기대었다. 의무병은 가녀린 체구의 여인을 내려다보며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벽에 기대어 앉을 수 있게 해준 후 그는 여인을 안정시키듯 눈높이를 맞춰주었다. 그러곤 차분히 상태를 묻기 시작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아프신 곳은?” “…머, 머리가……. 그보다 제, 제가…대체 누구였는지 기억이 안나요.” “…!! 자기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겁니까?!” 막장드라마와 같은 전개에도 의무병은 대경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곤 홀로 심각해졌다. “…이런. 상태가 많이 심각하군요. 젊은 여성분이 어쩌다…….” 중얼거리는 의무병의 혼잣말에도 공작은 서늘한 무표정을 얼굴에서 지워내지 않았다. 그런 것치곤 굳게 닫힌 입술을 슬그머니 깨무는 것이 제대로 당혹스러워진 모양이었다. 태화는 자꾸 광대가 치솟으려는 걸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후우, 뭐든 좋습니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일단 말씀해보세요. 살던 곳이나 가족관계, 애인이라든가…” “…아, 아무것도 기억이 안나요.” 렐리아는 웃음을 참기위해 찡그린 얼굴을 울먹이는 얼굴로 아주 잘 활용했다. 원래는 다리한쪽을 절거나 손을 떠는 등의 심각한 뇌손상 환자의 표본을 몸소 보여주려 했으나 그건 후에 귀찮아질 거 같아 포기하기로 했다. 대신 공작이 책임을 면피할 수 없게끔 작정하고 기억상실증 환자의 흉내를 내기로 했다. “아무것도…안나요. 아무것도…….”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힘겹게 도리질을 쳐대자 그것이 꽤 연민을 불러일으켰는지 마침내 공작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자기가 봐도 이 사태에 꽤나 머리 아픈 모양이었다. 이에 렐리아의 입새로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으나 그녀는 곧 세워둔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흐흡! 흐흐흑…흐윽.” 그런 소리를 내는 동안 무릎사이에 파묻힌 그녀의 얼굴엔 즐거운 미소가 만면해있었다. 입은 찢어져 양귀에 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진짜 너무 웃겨서 눈물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충격에 의한 기억상실증 같습니다. 일시적인 증상이라면 좋겠지만 아직은 확실하게 뭐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나가보십시오.” 여인의 억눌린 흐느낌이 울려 퍼지는 막사 안, 안타까운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올 것 같아 의무병은 예를 취하고서 바로 조용히 나가려했다. 그전에 저의 발목을 붙잡는 엄한 목소리에 출입구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단, 이 일은 비밀로 부치십시오. 조금이라도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경이 유포한 것으로 여기고 엄벌할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명심하겠습니다.” 의무병 또한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으나 그러겠노라 답하며 서둘러 막사를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 여인의 옅은 흐느낌은 계속 이어졌다. 렐리아는 대충 십 초정도 더 우는 시늉을 하다가 슬쩍 울음소리를 뚝 끊었다. 애써 꿋꿋하게 눈물을 닦는 척 하며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던 찰나였다. “그 얼굴을 보고 싶지 않으니 굳이 들 필요 없습니다.” 가차 없이 쌀쌀맞은 목소리가 그녀의 뒤통수를 짓누를 것처럼 위에서 무겁게 떨어져 내려왔다. 렐리아 입장에서는 눈물자국이 없는 얼굴을 숨길 수 있어 좋은 기회였다지만.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하십시오.”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 하고 물어보려다가 렐리아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밖에서 자신이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는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겁니다.” 이 남자 보게. 태화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마뜩찮은 감정이 꿈틀거렸으나 애써 외면해야만 했다. 그래 이것도 츤데레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으니 그대에게 이 막사를 내어줄 것입니다. 그러니 이곳 안에서만 생활하십시오. 절대 함부로 밖에 나가지도 말고 내 말에만 따라야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럼 똥 쌀 때는요. 여기서 싸요?” “…….” 그 적극적인 질문에 블리어는 입을 닫았다. 차마 대놓고 얘기하진 않았으나 기억을 잃어도 이 여자의 천한근본은 똑같구나 하는 눈빛이 짙은 녹색눈 위에 서리처럼 얇게 어려 있었다. 그의 무표정에서 한심함을 읽은 태화였으나 그녀는 오히려 적반하장적인 생각을 했다. 자신뿐 아니라 누구에게 있어서든 매우 중요한 사항일 테다. 나중에 마려울 때를 대비해서 화장실의 위치정돈 알아놓아야 되었다. 밤늦게 급히 신호가 오면 자는 사람을 깨워 화장실에 갈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세심한 여자라 볼 수 있는 것이다. “대충 밖에 나가서 아무데나 싸지르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나요?” 순수한 물음이 아닌 ‘오냐 진짜 그래볼까?’하는 도전적인 물음이었다. 마음 같아선 인간임을 포기하고 공작의 막사 앞에다 똥을 싸고 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자각이 없다면 충분히 그리하십시오. 그 이상 내 알바 아닙니다.” 박수를 쳐주고 싶을 만큼 없던 정나미도 떨어지게 만드는 무뚝뚝한 대답이었다. ‘아무리 츤데레라지만 저건 완전 씨발데레네.’ 렐리아는 저절로 썩어 들어가는 얼굴을 숨길 수가 있어 참 좋다고 여겼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동안 그는 저벅저벅 움직여 유유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유후~ 그래도 지금부턴 내 시간이네.’ 그가 나가자 렐리아는 언제 썩은 얼굴을 했냐는 듯 그대로 편하게 엎어졌다. 침대는 생각보다 좁고 그다지 푹신푹신하진 않았으나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딱딱하게 언 땅위에 누워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한동안 기억상실증 환자행세를 하며 팔자 좋게 누워있을 생각을 하니 조금은 행복해졌다. 그저 드러누워만 있어도 삼시세끼 따끈따끈한 식사가 알아서 나올 텐데 얼마나 좋은가. 왠지 보험사기를 쳐 입원한 기분이었으나 상대가 공작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양심의 털도 간지럽지 않았다. 0012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작은 의외로 자주 자신의 막사에 얼굴을 비췄다. 오늘만 해도 무려 두 번째였다. 탈출을 하거나 기사와 접촉을 시도하는 등의 허튼짓을 할까봐 감시하러 온 것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자신에 대한 불신을 가장하고 조금이라도 자신의 얼굴을 더 보기 위함인지, 그의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어떻게 알겠나 싶었다. 츤데레치곤 꽤나 속을 알 수가 없는 인간이었다. 보초조차 세우지 않았는데 아마도 자신이 보초에게 접근해 쓸데없는 얘기를 늘어놓을까봐 그런 모양이었다. 아님 그마저도 인력이 아깝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것치곤 하는 행동은 흡사 집착소유남에게서 볼 수 있는 행동인 것이다. 자신을 감금시켜놓고 일일이 행동을 감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짜릿하네요.” 하마터면 앞에다 ‘존나’를 붙여 반어법으로 만들 뻔했으나 렐리아는 작게 웃었다. 그것을 너그러이 넘어갈 공작이 아니었지만. 그는 근처의자에 앉아 묵묵히 검을 손질하다말고 저를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어두운 녹안은 검날 위로 흐르는 예기보다도 더한 이채를 띠었다. “왜 웃습니까. 그보다 짜릿하다는 말이 갑자기 왜 나온 것인지 내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하십시오. 기억이라도 돌아온 겁니까.” “그게 오래 앉아있었더니 발가락에서 짜릿한 감각이 일어나더라고요.” 이게 말인지 된장인지 똥인지 일단 싸지르고부터 봤다. 공작은 상당히 저를 회의적인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제게 당한 게 있다 보니 저렇게 신경에 날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았다. 왠지 그와 자신은 미수로 그쳤지만 아가씨를 덮치려했던 무뢰한과 그런 그를 경계하는 앙칼진 아가씨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서 무뢰한은 자신이었고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좀 많이 쌍놈이었네. 그래도 깔끔하게 사과하고 서로 잊기로 했으니까 뭐.’ 턱을 긁적이다가 렐리아는 자신이 앉아있던 침대위에서 엉덩이를 들어올렸다. 간이침대에서 내려오자마자 발에 쥐가 난 것처럼 어기적대면서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자신의 행동에 공작은 흡사 무례한 자 대하듯 탐탁지 않은 눈길로 저를 쏘아보았다. “내게 무슨 할 말 있습니까.” “…저기 어제 물어보려고 했는데요. 지금 생각나서…” “뭡니까.” “…제 이름이요. 혹시 알 수 있을까요…?” 여기서 잊을만하면 아련한 기억상실녀가 되어야만 했다. 그래야 그의 회의적인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 이름이…그러니까…” “그쪽 이름은 렐리아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렐리아요?” 생소한 척 되물으며 렐리아는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얇은 턱에서부터 볼까지 손가락을 더듬더듬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기얼굴을 기억해내려는 듯이 도톰한 입술과 오뚝한 코를 매만졌는데 뒤늦게 기억상실증이지 맹인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건 좀 오바인가 싶었으나 이미 엎지른 물 계속 엎지르기로 했다. “…막사 안에 거울이 없다보니까…저기 제 얼굴 어떻게 생겼어요?” 예쁘다고 해, 예쁘다고 해.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관중들이 짝 짝 박수를 치며 그의 반응을 유도했다. 조금 막장이긴 해도 이런 식으로라도 그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알아내보고 싶었다. 츤데레에서 마침내 한 꺼풀 벗겨지는 기적적인 순간이 오나 싶었으나 아직은 한참 멀었나보다. “더럽게 못생겼습니다. 그렇게 알고 있으십시오. 조금 있다 다시 오겠습니다.” 대답하는 것도 귀찮은 모양인지 공작은 무심하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닦은 쇠검을 허리춤에 걸린 검집에 밀어 넣고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으으 하고 신음소릴 흘리며 렐리아가 테이블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으읏, 머리가!” 도자기가 추락했던 부분을 교묘하게 손바닥으로 짚으며 렐리아는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손을 바르르 떨었다. “갑자기…깨질 듯이 아파요…으으.” “원래 그만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쉬십시오.” ‘뭐 이 시밤?’ 하마터면 입에서 욕설이 총알처럼 튀어나갈 뻔했으나 태화는 가까스로 인내했다. 기억상실증 환자라고 아주 만만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뻔뻔하게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기억을 조작하는 행태는 과연 그에게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나 싶을 만큼 몰염치의 극치였다. 물론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라지만. 금방이라도 따발총처럼 욕이 튀어나올 것 같은 주둥이를 틀어막고서 그녀는 그가 나가버린 출입구 쪽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돌아오면 보자, 하고 속에서 부글부글 끓던 짜증이 얼굴로 솟구쳐 올라와있었다. * 해가 중천에 떠있을 무렵 블리어는 말을 타고 산 중반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의 뒤로는 왕실중앙기사단 소속의 기사 서른 명과 공작가 정예기사 스무 명이 말을 타고 따라붙었다. 얼기설기 뻗어져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겨울의 쨍쨍한 햇살을 가려주진 못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산 한복판을 가로지르던 중 공작의 옆에서 말을 몰던 정예기사단 단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선 반으로 갈라져 행동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드알루는 이곳에서부턴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 몬스터의 행방을 추적하는 게 나을 거라 보았다. 그래야 시간이 절감될 수 있을 테고 해가 지기 전까지 막사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다. 블리어는 고갯짓 한번으로 수락했다. 기사들은 스물다섯 명씩 나뉘어 각각 기사단장과 공작의 뒤를 쫓았다. 블리어는 서쪽을 향해 말을 몰아갔다. 역시나 나오는 것은 없었다. 란게르드 산맥에 무장을 하고 들어 온지 어언 사흘째 그들은 토벌은커녕 작은 소득조차 건져내지 못하는 중이었다. 몬스터들이 까마득한 산꼭대기로 전원철수라도 한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잔뜩 긴장하고 이곳으로 파견된 중앙기사들조차 느슨해질 만큼 산중턱은 평화로웠다. 이대로 소득 없이 공작령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블리어는 몬스터의 작은 흔적이라도 찾아낼 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그의 시야에 쓰러진 나무가 포착되었다. “…이 근처에 무언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작의 낮은 목소리에 기사들이 허리에 달고 있던 검을 스르릉 빼어들었다. 돌연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 공작은 천천히 말을 몰아 그리로 다가갔다. 그리고 괴기할 만큼 이리저리 꺾이고 부서진 나무의 잔해들이 이어져있는 길을 발견했다. 그건 길이라고 부를 만한 게 못 되었다. 거대한 해일이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드넓은 지대의 중간이 뻥 뚫려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까마득하게 이어진 길은 족히 삼십분은 넘게 걸어야 될 것 같았다. 쓰러진 나무들은 끝도 없었고 곳곳에 파괴한 흔적이 보이는 바위들은 돌멩이처럼 잘게 흩어져있었다. 기사들은 죄 얼어붙은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큰 괴물이 이곳을 휩쓸고 지나갔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이정도의 파괴력을 지닌 존재 앞에서는 자신들이 평생 잡아온 검마저도 무용지물이 될 것만 같았다. “이거....몬스터의 짓일까요....?” 새파랗게 질린 얼굴들을 하고 있는 기사들 중 한 기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라미우스였다. 생전 말을 하면서 목소리가 떨린 적은 처음이었다. 그 주위에 있던 기사들은 숨조차 내쉬지 않고 있다가 뒤늦게 숨을 몰아쉬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군요. 공작전하,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대로 계속 나아가실 겁니까?” “일단 이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게 낫겠습니다.” “…허, 허나 이정도의 위력을 지닌 몬스터가 있다는 얘기는…”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겠다면 나 혼자라도 가겠습니다.” 한심한 기색이 섞인 냉랭한 눈길이 중앙기사 대표를 훑고 지나갔다. 여전히 겉은 무표정해서 공작의 감정을 기사대표는 알아차리질 못했다. 홀로 말을 몰고 가는 공작의 모습에 정예기사들은 자연스레 뒤따랐다. 이에 왕실지원병들도 울며 겨자먹기로 뒤쫓을 수밖에 없었다. 산림파괴 수준의 그 참혹한 길을 내려다보며 기사들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주위만 부서진 게 아니었다. 땅 자체가 움푹 파여 있었다. 얼어붙은 땅속에 파묻혀있었을 돌들이 길 주위로 삐죽삐죽 튀어나와있는 모습에 기사들은 부디 저것들이 자신들의 묘비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들은 장장 반 시진 넘게 말을 몰아 마침내 길이 끊긴 지점에 다다랄 수 있었다. 다행히 괴물은 그곳에 있지 않았다. 기사들은 안도하며 말에서 내려 급히 조사에 착수했다. 어떤 몬스터의 소행인지 밝힐 의무가 있었다. 블리어도 나무잔해들이 널린 바닥위에 착지해 길이 끊긴 지점을 유심히 살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어느 바위였다. 비교적 평탄한 지대위에 넓적하게 깔린 낮은 바위에는 부서진 흔적이 있었다. 그것도 두 개의 구멍이 나있었다. 여인의 종아리만한 굵기의 구멍을 내려다볼 때 그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심각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추정하건대…괴물의 손가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손가락 두 개를 이용해 바위를 뚫을 정도라면…그 힘이 설명이 됩니다.” “…이 정도크기가 손가락이라니…, 그 체구가 상상이 되지 않는군요.” “파괴력과 맞먹는 적합한 크기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열 배 아니, 그 이상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해 토론을 이어가는 동안 기사들은 공포 그 자체를 목도한 기분이었다. 이것을 상대로는 승산이 없다. 왕국기사단이 아니라 제국기사단을 끌고 온다하더라도 말이다. 어떻게 이런 무시무시한 힘을 가진 마물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왕실역사서에 나오는 드래곤이 브레스를 뿜는다면 이정도 위력을 내지 않을까 싶었다. 이미 몬스터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어 드래곤의 경지에 오른 파괴력이었다. 문제는 드래곤처럼 드높은 지능과 자애란 게 없이 포악하게 날뛰는 존재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산맥 중심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것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대지를 박차는 말발굽소리가 들려온 것은. 각자 깊은 상념에 빠져있던 기사들은 그곳으로 고갤 돌렸다. 재빠르게 말을 몰며 달려온 것은 드알루가 이끄는 부대에 합류해있던 킬리였다. 그는 다급하게 안장에서 내려와 바로 공작 앞에 부복했다. “동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들의 대량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람의 소행으로는 보여 지지 않는 게 2미터가 족히 넘는 몬스터들이 대부분 훼손되어있는데다 주변의 수백그루가 뽑혀지거나 쓰러져 있었습니다.” “…!!!” 킬리의 보고를 잠자코 듣고 있던 기사들은 등줄기에 소름이 쫙 끼치는 것 같았다. 그런 짓을 할 만한 존재라면 그들은 딱 한 존재를 알고 있었다. 바로 이 지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놓은 드래곤급의 마물. 벌써부터 극심한 공포감이 기사들을 짓눌렀다. “…동족까지 죽이는 몬스터라니……. 얼마나 흉악할지 상상이 안가는 군요.” 한 중년기사가 파리해진 안색으로 중얼거리며 머리를 내저었다. 이제껏 스무 번 넘게 몬스터토벌에 참여한 베테랑이었으나 경력 많은 그로서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지 제대로 확신이 서지 않았다. 수도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이 아른거리기 시작하자 중년기사는 애써 약한 생각을 억눌러야만 했다. 그건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몬스터토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들이 과연 이 산맥에서 생존할 수 있느냐가 문제였다. 이곳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어떠한 존재가, 재난급의 거대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드알루님께서 현재 그곳을 중심으로 수색작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당장 저희 쪽에 합류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정중하게 말을 잇는 킬리를 내려다보던 블리어는 몸을 돌려 다시 말에 올랐다. 말머리를 돌리기 무섭게 그는 킬리를 향해 앞장서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공작이 출발하자 기사들도 서둘러 그를 따라 서쪽지대에서 벗어났다. 0013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작은 상당히 철저했다. 자신의 삼시세끼 식사를 직접 가져다줄 정도로 말이다. 살면서 공작에게 음식수발을 받을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지만 렐리아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그건 공작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라지만. 그는 테이블위에 식사만 내려놓고 바로 나가버렸다. 마치 이 한 공간에 함께 있는 것조차 싫다고 발광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츤데레든 나발이든 나도 저쪽 얼굴 오래보긴 싫으니까.’ 부글부글 속에서 끓었던 짜증은 점심 내내 퍼질러 자는 동안 식어버렸다. 조금 허무하긴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예전엔 그래도 공작과 인간적인 호감을 쌓을 필요가 있다고 여겼는데 지금은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은커녕 공작이 남자캐릭터로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깨야할 퀘스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인지 적당히 상황을 보고 공작을 잘 설득해 침대위에 눕히자는 생각뿐이었다. 츤데레라면 적어도 자신이 싫은 건 아닐 거라는 헬리코박터균만한 미세한 믿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육체적 사랑만 맺고 쟤는 끝내는 걸로, 그래야 정신건강에 덜 해로울 것 같다. ‘이 게임개발사도 문제야. 사랑게임이라면서 바람 피라는 건 또 뭐야? 역하렘이 아니라 불륜이지.’ 공략대상이 세 명인데 결국 셋과 나란히 양다리 걸치며 공략해야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아무리 게임캐릭터라곤 해도 현실사람과 흡사하다보니 진심으로 반하게 만드는 게 은근 꺼려졌다. 공략방법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솔직히 세 후보 중 한명인 공작만 봐도 그렇다. 답이 안 나온다. 마음은 상호간에 주고 받아야하는 건데 자신부터가 게임캐릭터에 반하는 끔찍한 상황은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쪽 마음을 얻으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넘어야할 산은 많은데 어떻게 넘어야할지 그 방법을 모른다. 그렇다면 산을 넘을 필요가 없는 다른 선택지를 찾으면 되는 것이다. 강을 건너든 평야를 가로지르든 도착할 곳만 같다면 상관없었다. 진심을 얻기 위해 거짓사랑을 하는 것과 서로의 합의하에 육체적 사랑을 얻어내는 것.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한다면 태화는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다. 이 편이 훨씬 더 빠르고 뭣보다 서로에게 깔끔하다. 애초에 한 명 꼬시기도 벅찬데 세 명과 동시에 연애를 할 자신도 없다. 그러다 들키면 셋 다 말짱 꽝이 되는 게 아닌가. 자신은 그렇게 솜씨 좋게 바람피는 기술 따위는 알지 못했다. 간만에 그런 효율적인 생각을 하며 머리를 굴리는데 그걸 방해하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특유의 무겁고 정갈한 발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막사 밖에서 “들어가겠습니다.”하고 딱딱한 저음이 울렸다.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더니 왜 왔대?’ 침대에 앉아 딱딱한 육포를 질겅질겅 씹고 있던 렐리아는 식판위에 슬쩍 육포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예쁜 척 육포냄새가 밴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왜 다시 오신 거예요?” 최대한 부끄러운 티를 내며 렐리아는 그를 반겼다. 슬쩍 호감을 드러내는 눈웃음을 짓자 공작은 시선을 피하며 근처의자에 앉았다. “해야 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차피 내가 내어준 막사, 몇 번 찾아오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누가 뭐랬나. 거 되게 예민하네.’ 렐리아는 속으로나마 투덜대면서 뜯다만 육포조각을 내려다보았다. 입에서 육포냄새 나겠지. 하지만 배도 부르겠고 딱 늦은 시간이고 지금이 딱 괜찮긴 하다. 마음속으로 음흉한 속셈을 품고 있는데 순간 자신의 식판 위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작은 알약이었다. 이걸 왜 주는 거지 싶어서 렐리아는 고갤 들어 올려 근처에 앉아있는 공작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블리어는 무작정 본론부터 꺼냈다. “그대에게 공작령의 통행증을 발급해주겠습니다. 그러니 하산하십시오.” “…그게 갑자기 무슨…?” 일부러 한 음절 늦추며 렐리아는 조심스레 물었다. 마음속으론 뭐, 뭐, 뭐, 뭐 하고 뒤이어질 말을 성질 급하게 재촉하면서 말이다. “생각보다 흉포한 몬스터가 이 산맥에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막사 안에 있다하더라도 안전을 보장 못합니다. 그러니 죽고 싶지 않다면 내려가라는 겁니까.” ‘…흉포한 몬스터? 그런 게 여기 있으면 진즉에 말해줬어야지!’ 위험하다는 그의 말에도 렐리아는 눈을 반짝였다. 아니 외려 위험하다는 말에 더 짜릿하게 타오르는 그녀였다. 적어도 2미터밖에 안되던 그 조무래기들과는 급이 다르겠지 싶었다. 얼른 보고 싶다고 간절히 소망하다가 뒤늦게 그의 시선을 눈치 챘다. 공작이 자신을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자 렐리아는 급히 수습하기 위해 눈을 부릅 떴다. “…저, 여기 남을래요. 공작님 곁에 있을래요.” “미쳤습니까.” 이젠 실성했냐는 그나마 정중한 표현조차 쓰지 않는 그였다. 기껏 생각해준 자신의 호의를 허공에 집어던지는 여인이 상당히 탐탁지 않을 때였다. 블리어는 마주보고 있던 여인의 창백한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에 주목했다. “제게 믿을 사람은 공작님뿐인 걸요….” 자신이 생각해도 좀 기막힌 변명인 것 같다. 이러면 적어도 기억상실증인 제게 욕은 못할 것이다. 흡족함에 태화는 두 손 들고 자기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거기다 눈을 계속 부릅뜨느라 절로 흘러내린 눈물은 환상의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닦았다. 얇은 손가락 위에 투명한 눈물이 아롱져있었다. 흡사 애인에게 버림받은 여인 같은 애처로운 구석이 있어서 지나가는 남자라면 누구든 선뜻 손수건을 내밀어올 테다. 물론 블리어는 손수건을 품에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꺼내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였다. 절대 흔들림이 없는 눈빛이 그녀에게 향했다. “단 책임지지 않겠습니다.” 놀랍게도 공작은 어두운 밤하늘색 머리칼이 사락 흔들릴 만큼 가벼운 고갯짓으로 허락했다. 물론 네가 죽든 불구가 되든 상관치 않겠다는 말이겠지만 렐리아는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역시 자신의 현명한 대처와 눈물이 그의 콩알만 한 죄책감을 자극시켰노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대체 뭐예요?” 렐리아는 그가 던져준 알약을 집게손가락으로 들어보였다. 설마 독약이겠어? 싶긴 했으나 그라면 대놓고 독살시도를 해도 역시 뻔뻔하다고 태연스레 감탄할 수 있을 것 같다. “진통제입니다.” “네?” 혹시 자신이 아는 그 진통제냐고 묻고 싶었다. 그만큼 그의 말에 괴리가 느껴졌다. 불과 반나절 전만 해도 원래 편두통을 앓고 있었으니 참으라하더니 이제 와서 진통제를 챙겨주는 건 또 뭐라는… ‘역시 츤데레였어!’ ‘소오름!’하려던 걸 간신히 입을 틀어막아 제지한 렐리아는 새삼스레 그가 다시 보였다. 진짜 츤데레구나, 세상에 나 처음 봐. 그 뚫어져라 향하는 눈길에 블리어는 피하지 않고 곧게 받아들였다. 오후 내내 한편으론 그녀의 두통이 마음에 걸렸기에 제 마음 편해지고자 갖다 준 진통제였다. 그런데 저렇게 놀라할 줄은 몰랐다. 입까지 틀어막고서 감격한 듯한 여인의 모습에 블리어는 조금 속이 불편했다. 저 여인을 저렇게 만든 건 자신일 텐데 병 주고 약준 제게 저렇게 기뻐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은연중에 자신의 미안한 속뜻을 내비치고 말았다. “그대가 모든 기억을 잃었을 때 솔직히 안심이라 생각했습니다. 왜 안도감을 느꼈던 건지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만, 내 책임을 조금이나마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왜 기억을 잃은 것인지조차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했었다. 조금이나마, 말이다. 어찌 보면 고지식하고 딱딱해 썩 남의 호감을 살 성격은 아니었으나 블리어는 올곧은 면이 있었다. 직선적이고 칼 같은 그의 성품상 이번 일을 그냥 넘길 리가 없었다. “비록 그대에게 한 점의 호감정을 품지 않았으나 내 잘못이란 건 인정하고 싶습니다.” 블리어는 침대위에 조금 놀란 얼굴로 앉아있는 여인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물잔이 비어있어서 저렇게 약을 먹지 않고 가만히 있는 건가 싶었다. 차마 공작인 자신에게 물을 떠와달라고는 못할 테니 말이다. 그는 빈 물잔을 쥐고서 다른 한손에 그녀가 먹어치운 빈 식기를 집어 들었다. “물을 채워오겠습니다.” 이제껏 음식을 가져다주긴 했지만 자신이 직접 남의 물시중도 할 줄은 몰랐다. 블리어는 차가운 한숨어린 표정으로 막사 밖을 나갔다. 그동안 렐리아는 딴청부리듯 뺨만 긁적였다. 그의 진중한 사과를 들을 줄은 몰랐기에 태화로서는 괜히 머쓱해질 뿐이었다. * “공작님은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미 알고 있다지만 렐리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양 순진한 눈망울을 빛냈다. 그 맑고 새파란 눈에 블리어는 조금 의외의 기분이 들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그 눈이 가식으로만 빚어진 것처럼 불쾌하고 가증스럽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블리어 라콘드입니다.” 블리어는 솔직하게 답하며 시선을 깔아 검을 내려다보았다. 예리한 광택이 흐를 만큼 잘 닦인 검엔 자신의 어두운 녹안이 비쳤다. “그럼 국왕폐하의 성함은요?” “그분의 존함은 바일로트 핀 아이작 라델리우스 입니다.” “그렇군요.” “그건 대체 왜 물어보는 겁니까.” “그냥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말할 상대가 없어서 입이 근지럽거든요.” 그냥 좀 물어봤다. 태화는 심통하게 받아쳐주려 했으나 기억상실증의 아련함을 잃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이곳 막사에 정착한 지 사흘째, 그다지 큰 불편함은 없었다. 밥을 먹고 바로 눕는 폐인생활에 찌들어 소화가 좀 안 된다는 것과 간혹 몸이 근지럽다거나 근지러워서 문제였다. 그렇다. 목욕을 안 한지 삼일이 되었단 소리였다. “있잖아요, 공작님.” “왜 부릅니까.” “제가 몸이 좀 찝찝해서 그런데 씻을 수 있을까요? 겨울호수라도 괜찮아요.” 그 말에 블리어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인을 시야에 담았다. 비단처럼 은은한 윤기가 도는 은발과 새하얗기만 한 얼굴, 그다지 처음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아보였다. 하지만 표정을 미묘하게 구기고 있는 게 씻지 못한 게 상당히 불편한 모양이었다. 블리어는 물론이고 기사들까지 이 산에 들어와 얼굴에 물을 묻혀본 적이 없었다. 몬스터토벌을 하러 온 자들에겐 씻는다는 개념조차 필요치 않았다. 하지만 이 여인은 다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블리어는 몸을 일으켰다. “호수라면 이 근처에 있습니다. 같이 가주겠습니다.” “아, 정말요? 감사해요~” 렐리아는 사뿐히 침대 아래로 내려와 바로 출입구로 향했다. 씻으러간다는 생각만이 앞서 두 발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막사 밖을 나서려했다. “그렇게 입고 나가면 추울 겁니다. 그리고 몸 닦을 건 안 챙깁니까.” 그리 지적하면서도 그의 두 손에는 수건대신 쓸 모포와 겨울용 외투가 들려있었다. 준비성하난 철저했다. 렐리아는 순순히 그가 건네는 외투를 몸 위에 둘렀다. 그러곤 먼저 막사 밖을 나선 그를 따라나섰다. 0014 / 0172 ----------------------------------------------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두 다리로 부지런히 걷는 와중에도 렐리아는 슬쩍슬쩍 공작을 훔쳐보았다. 서늘한 겨울바람도 비껴지나갈 만큼 예리한 콧대며 눈가는 그 날카로운 인상이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미묘하게 자신에게 누그러진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등재시키고 싶을 만큼 그가 보이는 태도는 많이 불가사의했다. 은근 신경써주는 것 같은데다 자신이 말을 걸어도 귀찮아하지 않고 무엇보다 예민함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를 남자야. 다중인격 아니야? 알고 보니 열일곱 명의 인격이 잠재되어있어서 열일곱 명 다 꼬셔야되는 거고…어우 토 나온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울렁이는 것은 아마 자신은 심각한 연애울렁증이라도 있나보다. 태화는 스스로를 달래다가 으슥한 산길을 걸어서 나온 작은 호수 앞에 다다랄 수 있었다. 호수 색이 조금 불투명해보이는 것이 정말 단단히도 얼은 것 같았다. 렐리아는 호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곤 최대한 손가락에 힘 조절을 해 얼음판을 살며시 톡톡 두들겨보았다. 다행히 두꺼운 얼음은 깨지지 않고 맑은 소리만 냈다. 연약한 여인의 타이틀을 지켜냄에 만족스러워 할 때 얼음판 너머로 새카만 것이 떠올랐다. 그것은 사람보다 큰 머리였다. 굴절되어서 자세히 보이진 않았으나 얼핏 심해어를 닮은 꺼려지는 생김새의 어류였다. 그때 호수근처에 위험요소가 없는지 돌아보고 온 블리어가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이곳으로 다가오자 렐리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호수 쪽으로 시선을 주지 못하게 렐리아는 화려한 제스처를 섞어가며 말을 이었다. “음 어쩌죠. 돌로 깨야 될 것 같아요. 숲에 들어가서 이~따만한 커다란 돌 좀 구해와 주실 수 있으세요?” “알겠습니다.” 다행히 공작은 거절하지 않았다. 너무 흔쾌해서 기분이 이상한 건 또 처음이다. 렐리아는 그를 숲 쪽으로 떠나보내고 바로 호수 앞에 섰다. 기왓장 격파시범을 보이듯 자세를 잡고서 가볍게 주먹을 호수에 내질렀다. 쩌저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초도 지나지 않아 호수의 저편까지 금이 가는 게 보였다. 호수의 얼음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둥둥 떠다니기 무섭게 수면위로 심해어를 닮은 어류괴물이 튀어 올랐다. 렐리아는 허공에 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피라냐를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이빨이 렐리아의 하얀 주먹을 삼키기 무섭게 말 그대로 터졌다. 살과 장기가 조각조각 조각나 호수와 지면 위에 떨어져 내렸다. 시커먼 생선살에서는 비린 냄새가 확 올라왔다. “…으웩.” 렐리아는 손에서 풀풀 나는 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며 황급히 호수 물로 씻어내었다. 생긴 것도 얼마나 징그러운지 상상만 해도 피부에 닭살이 돋았다. ‘…잠깐 걔가 한 마리만 사는 게 아닐 텐데?’ 양식장처럼 호수 밑바닥에 우글대는 건 아니겠지, 하고 떨떠름한 생각을 하기 무섭게 호수 물에 잠겨있던 렐리아의 손을 덥석 깨물며 인면어가 나타났다. 눈을 감고 있는 스님의 온화한 얼굴을 닮았으나 그 입엔 수십 개의 작은 이빨들이 지그재그로 튀어나와있었다. 눈으로 추정된 부분은 계속 벌름거리는 게 눈이 아니라 아가미인 듯 했고 말이다. 사람피부색과 비슷해서 더 기분 더러울 만큼 사람얼굴을 닮았다. 렐리아는 곧바로 주먹을 수면위로 휙 쳐들어 올렸다. 인면어는 흡사 미끼에 낚인 물고기처럼 허공에 튀어 올랐는데 꽤 질긴 놈인지 표피에 가시를 세웠다. 거의 5센티는 될 법한 가시들에 피부가 찔린다고 생각하니 없던 바늘공포증이 생겨날 지경이었다. 자신을 향해 가시를 곤두세우고 떨어지는 그것을 렐리아는 옆 방향으로 던져버릴 생각이었다. 하필 그 방향에 공작이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멈칫하고 렐리아는 허공에 들어 올린 손길을 거뒀다. 차마 공작에게 이 바늘괴물을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와 동시에 뾰족한 바늘이 렐리아의 눈에 쏘아졌다. “…악!” 어류괴물이 퐁당하고 수면 아래로 사라진 동안 렐리아는 자리에 주저앉아 한쪽 눈을 부여잡았다. 왼쪽 눈 중앙에 뭐가 꽂혔는지 시야에 뭔가가 아른거렸다. 많이 따끔거렸으나 이와 중에도 다행히 실명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도 ‘그래도 꽂히긴 꽂히는 구나. 눈알이라서 그런가.’하고 초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한심하다면 한심했다. 원래 강인한 육체 탓인지 아니면 운과 회피율을 최고로 높여주는 얇은 은팔찌 <신전 드필드라의 보물>덕분인지 모르겠지만 뭐 다행이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보십시오.” 블리어는 구해온 묵직한 돌을 근처에 내려놓고서 앉아있는 여인 앞에 몸을 숙였다. 상태가 심각하다고 여겼다. 분명 날카로운 바늘 같은 것이 그녀의 눈을 찌르고 들어가는 걸 목격했기에 그냥 놔둬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최악의 경우 최소 실명이라는 진단은 내려졌다. 하지만 평소 잘만 가볍게 굴던 여자는 이상하리만치 묵직했다.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한 채 비스듬히 눈만 가리고 앉아있었다. 신음조차 흘리지 않고 입술만 잘근 깨물더니 뒤늦게 여인은 몸을 일으켰다. 실없는 농담하듯 천연한 목소리가 작은 입술 새로 흘러나온 건 그 순간이었다. “눈에서 조금 비껴서 꽂힌 것 같아요. 하하 난 운도 좋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지만 공작 앞에서 하도 가식으로나마 웃다보니 저절로 미소가 배어나왔다. 그에 블리어는 짐짓 인상을 썼다. 뭐가 좋다고 이렇게 웃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사고방식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듯한 여자였다. “일단 막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의무병을 부를 테니…” “아뇨아뇨. 놔두면 나을 거예요.” 거대한 벽을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블리어는 무겁게 입을 닫았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굳이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그런 것치곤 입안은 텁텁했지만 블리어는 목구멍위로 치밀어 오른 떫은 감정을 애써 침과 함께 넘겨버렸다. “생각보다 얼음판이 좀 얇더라고요. 괴물이 뚫고나올 정도면…” 여전히 손바닥으로 왼쪽 눈을 가리고 있는 여자는 아프지도 않은지 쓸데없는 얘길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 얘길 블리어는 반쯤 흘려들었다. 대신 이 호수는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기사들에게도 따로 얘기해두어야겠다고 진지하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에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걸어왔을 때와 다를 바가 없이 잠잠한 침묵만 감돌았다. 둘 다 굳이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렐리아는 자신이 머무는 막사에 도착하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거울 좀 갖다 주시겠어요?” “역시 의무병에게 상처를 보이는 게,” “에이 의무병은 무슨~ 가시정돈 혼자 뺄 수 있어요." 렐리아는 되었다며 오른손을 휘적휘적 거렸다. 거울을 가져다달라며 연방 끈질기게 굴어서야 공작은 움직임을 보였다. 얼마안가 공작은 막사 안에 직접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세워둘 수 있는 네모난 거울은 남성들이 쓸 법한 투박한 형태를 띠었다. 고맙다며 말하는데도 공작은 대답 없이 조금 걸리는 시선으로 자신을 응시하다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걸 어떻게 보여줘.’ 속으로 투덜대며 태화는 손바닥으로 가리고 있던 왼쪽 눈을 살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눈알중앙이 바늘로 관통당한 것 같았다. 가시 박힌 부분이 약간 기이하게 부풀어있자 괜히 손이 바르르 떨렸다. 마음 같아선 자신도 의무병을 부르고 싶다. 근데 실명수준의 상처를 당하고서도 멀쩡하게 앞을 보고 다니면 일이 커져버린다. 먼지가 낀 듯 따끔한 수준이라지만 시각적으로 고통스럽다보니 무슨 고문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태화는 떨리는 손끝을 감추지 못한 채 눈알에 꽂힌 가시를 잡았다. 힘을 주고 그대로 뽑아내었다. 푸른 눈알 한복판에 꽂힌 가시를 뽑는 경험은 정말 다신하고 싶지 않을 만큼 정신적으로 끔찍하고 아팠다. 다행히 눈알도 같이 딸려 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 몸으론 평생 다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일정수준의 공격에 먹히는 약점부위 같은 게 있나보다. 가령 눈알에 바늘처럼 긴 가시가 꽂히는 일말이다. “아 집가고 싶다…” 조금 서러워져서 혼자 중얼거리는데 뺨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눈물인가 싶었으나 거울을 들여다보니 구멍 뚫린 눈알에서 피가 찔끔찔끔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충 근처에 있는 천을 집어 들어 피를 닦아내었다. 삭신이 쑤시는 할머니처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렐리아는 냅다 침대위에 몸져누웠다. 만렙도 피를 흘리긴 하는 구나 순수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렇게 현실을 외면하며 태화는 길고 긴 잠을 청했다. * 다음날 왼쪽눈알은 퉁퉁 부어올랐다. 사파이어 같던 눈동자가 모기물린 것처럼 괴상하게 볼록 튀어나온 걸 확인하기 무섭게 렐리아는 거울을 덮고 다시 침대위에 엎어졌다. ‘아…이제 난 끝났어.’ 우려했던 상황이 닥쳐오니 태화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누군가 제 머리를 두드리면 텅텅 공명음이 흘러나오진 않을까 싶을 만큼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닥쳐온 커다란 위기에 한동안 멍해 있다가 뒤늦게 태화는 긴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이 외모에 하자가 생기다니, 그 말은 즉 역하렘게임을 클리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영 퍼센트로 곤두박질쳐졌다는 것과 진배없다. 외모와 몸매를 빼면 시체인 자신이 무슨 능력으로 남자를 유혹하란 말인가. 차라리 누가누가 더 잘 부수나로 우열을 가릴 수 있다면 잘할 자신이 있는데 이성을 사귀어봐라 하면 자신이 없었다. 태화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스펙이며 취업이며 현실적인 문제를 제하고는 오로지 게임밖에 관심 없는 자신이 남들이 보기엔 한심하다는 걸 말이다. 명절 때 친척들이 ‘너 남자친구는 생겼니?’, ‘다시 취업은 했고?’, ‘요즘 뭐해?’라고 물으면 얼렁뚱땅 넘어가는 것부터가 스스로 찔려서인 것을 왜 모르겠나. 게임만렙에 오르기까지 투자한 어마어마한 플레이시간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들은 어차피 헛된 시간이라고 혀를 차거나 게임폐인이라고 욕할 테다. 신경 안 쓴다. 제게 있어서 유일한 취미였고 관심사였다. 문제는 그것밖에 내세울 게 없다는 것이다. 현실의 자신은 외모가 예쁘기라도 하나, 몸매가 좋기라도 하나, 성격이 좋은 것도 결코 아니다. 어느 남자가 데이트에서 게임얘기만 줄줄이 하는 여자를 좋아할까. 뭐 같은 게임폐인이라면 이해하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이 우선시 되는 거고 연애는 뒷전이란 소리다. ‘그나마 믿을 건 이 외모밖에 없었는데…시밤,’ 자신이 언제 한번 공작과 대화를 재밌게 나눠본 적이 있나, 한 번도 없다. 물론 공작과 하하호호 떠드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지만 나흘 내내 즐거운 분위기가 생성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자신은 남자를 사로잡을 만큼 귀엽고 예쁨 받을 성격도, 내적인 매력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냥 집구석에서 뒹굴 거리기 좋아하는 게으른 성격일 뿐이고 재밌게 너스레를 떠는 것도 친한 상대에 한해서였다. 그렇기에 눈에 넣어도 예쁘지 않은 내 캐릭터의 외모에 지나치게 의존했던 건지도 모른다. 이성에게 어필할만한 매력이 있었으면 현실남자에게 진즉 어필하고도 남았다. 그럼 애인도 있었을 테다. 괜히 남자애들이 자신을 편하게 대하고 주야장천 게임얘기만 했던 게 아니란 거다. ‘얼른 집에나 가고 싶다. …아 집에 가고 싶다.’ 자취방의 내 침대라고 생각하고 뒹굴 거리자. 그러다보면 기분도 한결 나아질 테다. 태화는 피로 떡칠된 왼쪽 눈은 머릿속에서 지워내고서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썼다. ‘지금은 다 귀찮아.’ 폰이라도 있다면 이불 속에서 게임이라도 했을 텐데 결국 또 잠을 청하는구나 싶을 때다. 막사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0015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이젠 발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기에 렐리아는 뒤집어쓴 이불자락을 강하게 붙잡았다. 이런 모습을 들키는 순간 끝장이었다. 그가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오자 괜히 긴장돼서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아직도 잡니까.” 블리어는 불룩 솟아오른 거무튀튀한 이불중앙을 내려다보았다. 웅크려 누워있는 모양새였다. 그는 근처 테이블위에다 들고 있던 식판을 내려놓았다. “식사 가져왔습니다.” “네. 거기 두고 가세요. 이따 먹을게요.” “…일어나 있었습니까.” “아까 전부터요.” 말을 하지 않으면 그가 억지로 이불을 들춰낼 것 같기에 렐리아는 꿋꿋이 말을 이었다. “근데 오래 자느라 얼굴이 좀 부었어요. 여자로서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 나가주시겠어요?” “상관없습니다.” “아니, 제가 상관있다는 건데 하하.” 뭐 이리 끈질기대. 약간 짜증이 솟았지만 렐리아는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그러니까 나가주세요. 부탁할게요~” 일부러 최대한 말꼬리를 늘이며 렐리아는 가식적으로 굴었다. 이런 말투도 얼굴이 되니 그나마 애교 있어 보이지 현실얼굴로 그랬다면 ‘왜 저래’하는 차디찬 반응만 얻었을 것이다. 물론 왼쪽눈알이 영영 낫지 않는다면 이젠 그 얼굴효과마저 사라지겠지만. “공작님? 나가주실 거죠~ 네?” 간드러진 여인의 목소리에도 블리어는 그다지 미동도 않고 서있었다. “일어나서 먹으십시오. 식습니다.” “공작님 가시면 바로 먹을게요.” “일단 얼굴 좀 봅시다.” 블리어는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와서는 무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어제 분명 자신 때문에 손을 멈칫하는 걸 봤었다. 혹여 눈을 가리려다말고 자신 때문에 놀라 손을 거둔 건가 싶으니 여간 마음이 찝찝한 게 아니었다. 그녀가 눈을 다친 게 궁극적으로 자신의 탓인가 고민하면서도 일단 다친 거라면 어느 정도 다쳤는지 알 필요는 있다고 여겼다. “숨기려하지 말고 상처를 보이십시오.” “상처요?” “의원을 붙여주는 호의정도는 베풀 의향이 있습니다.” “아뇨, 의원까지는 아니고요~ 상처도 아니고 그냥 놔두면 낫는 수준이에요.” 병원에 가서 제대로 진료를 받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태화는 끝까지 능청스레 굴었다. 징그럽게 퉁퉁 부운 눈알을 생각하니 괜스레 또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이런 꼴로 들이댈 수 없으니 당분간 공작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냥 제발 가라, 가라 하고 주문 외우듯 생각할 때였다. 이불자락을 강하게 쥐는 손길이 느껴지자 렐리아는 이불안에서 더더욱 철벽수비에 나섰다. “그냥 나가주세요.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지금 부어서 더 못생겨졌단 말이에요. 공작님께 보이기 싫어요…." “저번에 내가 한말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그래 네가 한말 좀 인용해봤다, 하고 답해주려다가 렐리아는 참았다. 대신 이불을 절대 들출 수 없게 꼭 쥐고 있을 때 이불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실려 왔다. “그때 그 말은, 기억을 잃기 전의 그대에게 품었던 악감에 나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은 말입니다.” 여전히 감정보단 이성에 치중된 무뚝뚝한 어투였지만 어딘가 누그러져있었다. 태화는 왠지 모르게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느꼈다. 고집스런 자신을 아이 어르듯이 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스르륵 이불이 가는 몸피를 스치며 쓸려 내려가는 소리에 그제야 태화는 자신의 손힘이 풀려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급히 왼쪽 눈을 손바닥으로 가린 채 그녀는 걷어진 이불너머로 보이는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으로 그 딱딱한 눈이 생동감 있게 보였다. 차갑지 않고 미지근하게 녹아내린 짙은 녹안은 눈 덮인 황야에서 본 녹음과 같은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단순히 깨야할 게임캐릭터가 아닌가 하면서도 이 남자가 처음으로 현실감 있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못생기지 않았습니다. 사과하겠습니다.”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었다. * 렐리아는 오늘하루도 막사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눈이 이래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간간이 공작이 찾아올 때마다 왼쪽 눈을 가린 채 그를 맞이했다. 자신이 하도 괜찮다며 치료를 거부하니 그 또한 강요하지는 않았다. “흐음 근데요. 토벌은 언제까지 진행하실 거예요?” 천막으로 세워진 벽에 편하게 기대어 앉은 채 렐리아는 질문했다. 목욕시설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이곳은 마냥 쾌적한 환경은 아니기에 솔직히 빨리 어디로든 가버리고 싶었다. 공작이 여기 있기에 참고는 있는데 공작본인도 확신할 수 없는지 표정이 어두웠다. “아직까지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요?” “아무런 소득 없이 하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계속 지체할 수만도 없습니다.” “그거 참…복잡하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렐리아는 턱을 긁적이며 가볍게 생각했다. 소득이 없다면 몬스터굴에 쳐들어가서라도 소득을 내면 되는 것 아닌가? 자신이라면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이 지긋지긋한 산속에서 벗어나겠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처럼 상황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작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평소처럼 입을 닫아버렸으나 그의 표정은 무거운 한숨을 쉴 때와 비슷했다. 예전 같았으면 못 알아봤을 텐데 지금은 같이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그의 표정을 나름 읽어낼 수가 있었다. 역시 3D치곤 표정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같은 건 현실 뺨친다. 새삼 게임 퀄리티에 감탄하고 있을 때 그의 눈길이 제게 꽂혔다. “내려가고 싶다면 언제든 내려가십시오.” 그리 한마디 하고선 그는 몸을 일으켰다. 곰같이 널찍한 등판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그 뒷모습이 무거워보였다. 렐리아는 한동안 그의 등에 시선이 머물렀다. 공작은 차갑게 인사 한 마디 없이 나가버렸으나 태화는 홀로 남아 그에 대한 긴 생각을 이어서 했다. 하긴 반백 명 넘는 기사들을 이끌고 이 산속에 들어왔는데 어떤 식으로든 소득을 내야 공작으로서 체면이 살 테다. 몬스터토벌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 무섭게 피로해보이던 그의 얼굴이 떠오르자 태화는 턱을 긁적거렸다. ‘어휴…쟤나 나나 인생 뜻대로 안 되는 건 똑같네.’ 태화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침대위에 편하게 엎어졌다. 다음날 아침 해가 밝아오기도 전에 태화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떠야만 했다. 느긋하게 하품을 터뜨리다가 렐리아는 거추장스러운 은발을 한쪽으로 대충 쓸어 넘긴 후 천막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입구를 덮고 있는 두꺼운 천을 슬쩍 손가락으로 벌려 밖을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가운데 비상소집이라도 당한 듯 기사들이 우왕좌왕 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렐리아는 씰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했다. 그들은 주둔지 한복판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몬스터 사체들을 보며 하나같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놀랄 만하다. 자고 일어났더니 죽은 몬스터 백오십 마리가 막사 한복판에서 탑을 쌓고 있는데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까싶다. 아마 몬스터들이 집단자살이라도 한 건 줄 알거다. 렐리아는 천막입구에서 그대로 등을 돌려 기지개를 켰다.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다들 부지런도 하다. 다시 자야지 하고 침대위로 뭉그적대며 올라갔다. 어젯밤 그녀는 막사를 조용히 탈출해 산꼭대기 주변에 숨어있던 몬스터 백오십 마리를 때려잡았다. 적적한 주둔지까지 살금살금 내려와 사체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두 시간정도가 소요됐다. 그 과정에서 온몸이 피로 흠뻑 젖었으나 깊숙한 산속에 숨겨진 호수에서 전부 씻겨내었다. 몸도 개운하고 마음도 편안해져서 가볍게 달밤산책이라도 하고 온 기분으로 태화는 다시 깊이 잠들었고 말이다. 태화는 자신이 한 일을 그다지 선행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제껏 공작이 저를 먹여주고 재워준 게 있다 보니 깔끔하게 갚을 건 갚았다는 생각뿐이었다. ‘돕고 돕는 게 인간의 의리라는 거니까. 암.’ 영과 일로만 이루어진 이 삭막한 게임 속세계에서 비로소 찾은 따스한 인간미였다. 왠지 훈훈해져서 렐리아는 인중을 슥슥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공작이 막사 밖으로 나온 순간 당혹스러워하며 동시에 개운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조금은 그 무거웠던 어깨가 가벼워지리라. 그 상상에 은근히 입가가 씰룩거리고 마는 그녀였다. * 새벽에 벌어진 소동의 여파는 그날오후까지 이어졌다. 기사들은 이번 일로 각기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불안해하거나 안심하거나로 극명히 갈라섰다. 그 중 안심하는 쪽에 선 라미우스는 아주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괴물님은 분명 우리에게 호의적이신 거야.” “님?” “그도 그럴게 막사 앞에서 졸고 있던 나를 분명 봤을 텐데 건드리지 않고 몬스터사체만 조용히 내려놓고 가셨단 말이지. 내가 생각해봤는데 그 몬스터들은 우리 막사를 덮치려고 주변을 어슬렁거렸던 게 아닐까? 그걸 괴물님이 발견하시고 잠들어있는 우리 인간들을 구하기 위해 몬스터를 대신 처리하신 거지. 그리고 우리에게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해 이렇게 사체산을 쌓아놓으신 거지.” “그것 참 낭만적이네.” 킬리는 감흥 없이 대답하며 소녀처럼 두 눈을 반짝이는 라미우스를 한심스럽게 쳐다보았다. 절친한 친우라지만 어디까지 긍정적인 건지 모를 녀석이었다. 어젯밤 보초당번은 뭘 하고 있었냐며 분기를 터뜨리는 부대장 앞에서 앉아서 졸았다고 당당히 얘기한 녀석이었다. 수도로 복귀하면 징계가 내려질 테지만 라미우스는 일말의 근심이나 반성하는 기색조차 없어보였다. “괴물님은 우리인간들 편이야.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너 그 말 공작님 앞에서 해봐. 너만 그곳에 남도록 친히 허락해주실 테니 거기서 괴물님이라도 기다려보는 건 어때.” “그건 사양할게, 킬리. 왜냐면 괴물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으신 것 같아. 만약 모습을 드러내도 상관이 없었다면 그렇게 은밀히 처리하고 가시지 않았겠지.” 꽤 예리한 추리였다. 하지만 렐리아는 이어지는 라미우스의 긴 추리를 들으며 심드렁하게 귀나 후벼 팠다. 현재 렐리아는 말을 타고 이동 중이었다. 승마를 할 줄 모르다보니 킬리의 앞에 얹혀 타게 되었다. 왼쪽 눈은 어제보단 조금 회복된 것 같았으나 빨간 실핏줄이 잔뜩 서고 곪아 차마 남에게 보여줄 수준이 못됐다. 그래서 붕대로 왼쪽 눈만 비스듬히 감고 있었는데 기사들에게는 대충 다래끼가 났다고 둘러대었다. 그들은 현재 주둔지에서 철수하는 중이었다.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새벽에 벌어진 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드래곤급 마물의 소행으로 보고 있었다. 이것에 대해 아무도 토를 다는 이들이 없었다. 대신 그 마물이 무슨 생각으로 몬스터들을 대학살하고 주둔지에 버리고 갔는지에 대해 분분한 의견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미우스와 같이 괴물이 인간에게는 호의적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는 반면, 경고일 수도 모른다는 불안감 짙은 주장을 하는 이도 있었다. 마물의 정체를 알지 못하는 이상 무작정 안심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공작은 다른 곳으로 주둔지를 옮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말이다. 덕분에 태화는 대낮까지 퍼질러 자려했던 계획을 접고 이렇게 말 안장에 태워져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공작이 그 몬스터사체들을 자신의 공으로 돌려 하산하는 것이었으나 공작은 그 사체들은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고 버려버렸다. 태화가 미처 간과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공작의 검처럼 올곧은 성미였다. 그런 얍삽한 짓은 그의 성격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인생 편하게 살면 얼마나 좋아.’ ‘대충대충 해서 평균만 가자’가 태화의 좌우명이자 인생관이었다. 물론 게임에서는 제외라지만 그 외에는 만사 게으르고 성의 없는 게 보통이었다. 그렇기에 태화는 그런 공작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게임캐릭터 주제에 뭐가 그렇게 인간보다 복잡하고 심오한지 모르겠다. “레이디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라미우스가 대뜸 제게 고갤 돌리자 태화는 속으로 질색했다. 저 자 때문에 어젯밤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생각하면 이젠 노란금발만 봐도 속이 울렁거린다. 십 분이면 될 일이 괜히 두 시간이나 걸린 게 아니다. 저 기사가 깰까봐 뛰는 것도 못하고 심지어 몬스터사체를 내려놓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얼마나 신경을 기울였는지 모른다. 공을 들여서 사체탑을 쌓아놓는 동안 금발머리 기사는 막사입구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잘만 졸더라. “절대 흉포한 분이 아닐 겁니다. 지능 낮은 몬스터와는 급이 달라요. 절 해치지 않은 괴물님은 진정 인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분일 겁니다.” ‘지금 널 해치고 싶다…. 시끄러워죽겠네.’ 그렇게 태화가 혼자 속으로 구시렁대던 중 킬리와 라미우스가 말의 속도를 서서히 줄였다. 줄지어 이동하던 대열전체가 멈춘 건 조금 뒤였다. 그들은 반나절동안의 해행으로 산봉우리 두 개를 넘어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도착한 곳은 깊은 산중에 위치한 비교적 평탄한 공터였다. 붉은 해는 산봉우리너머로 걸쳐져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0016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기사들은 서둘러 야영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킬리의 옆에서 함께 그를 도왔다. 땔감을 주우러 돌아다니는 일이었으나 두 사람은 상당히 마음이 잘 맞았다. 어느새 누구먼저랄 것 없이 땡땡이를 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거 맞춰보세요. 홀수게요? 짝수게요?” “홀수에 걸죠.” “걸다니 뭘요?” “오늘 저녁밥으로 나올 반찬 한가지요.” “뭐 좋아요.”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두 손안에 숨기고 있던 작은 돌멩이들을 보여주었다. 홀수였다. 이번엔 갈색머리 기사가 여인의 손바닥위에 놓인 돌멩이하나를 게 눈 감추듯 재빨리 가져가버렸다. 그러곤 돌멩이를 양손에 왔다갔다 움직이더니 돌연 두 주먹을 여인을 향해 내밀었다. “둘 중 어느 손에 있는지 맞춰보시죠,” “음. 왼쪽이요.” “틀렸습니다. 오른쪽이에요.” 킬리는 이길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에 쓸데없는 승부욕이 생긴 렐리아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게임들을 그에게 제안하기 시작했다. 홀짝에 이어 젓가락, 참참참, 가위바위보 등 종류도 참 다양했다. 그들은 반시간 넘게 산속 한복판에 서서 앙증맞은 손 게임을 하다가 뒤늦게 땔감을 줍기 위해 움직였다. “상당히 게임 좀 하시는데요?” “이 정도는 눈감고도 하죠.” 킬리의 담담한 말투에도 렐리아는 별로 재수 없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법을 가르쳐주면 바로 요령을 터득해버리는 그는 정말 게임 한번 더럽게 잘했으니 말이다. “컴퓨터 게임도 잘하실 것 같아요.” “컴퓨터요?” “네, 제가 살던 마을에 그런 게 있었어요. 게임을 모아놓고 즐길 수 있는 종합오락도구예요. 사실 제 친구 중에도 게임하난 기가 막히게 잘하는 애가 있거든요. 가만 보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렐리아는 제 옆에서 걷고 있는 킬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생긴 건 전혀 안 닮았는데 뭔가 느낌상 자기친구 녀석과 묘하게 닮았다. 닮은 구석이 더 없나 알아보기 위해 렐리아는 추억을 회상하듯 말을 이었다. 가식 없이 편안한 어조였다. “근데 걔는 워낙 싫증을 잘 느끼는 타입이라 한 가지 게임을 안 파고 여러 게임을 파느라 모든 렙이 낮았어요.” “렙이요?” “게임을 얼마나 잘하는지 숫자로 표현한 등급 같은 거예요. 등급제거든요. 높을수록 전직도 다양하고 혜택도 많죠.” “그런 마을이 있다니 가서 살고 싶네요.” 금방이라도 렐리아가 살았다는 마을로 이주할 생각이 있다는 듯 킬리는 단호했다. 왕국의 합법적인 도박 중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만큼 그는 상당한 게임킬러였다. 귀족들이 즐길 수 있는 유흥거리라고 해봤자 파티, 사냥, 도박, 승마 정도이기에 렐리아가 말한 곳은 상당히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유흥이 전문화되어있는 곳 같았다. “그 게임 잘한다던 친구가 하는 게임은 어떤 종류인지요? 카드게임 같은 건가요? 아님 도박종류?” “블랙데빌런스3 죽음의 서막이요.” 렐리아의 대답에 킬리는 드물게도 조금 놀란 눈을 했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기네요.” 대체 어떤 게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킬리는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그에 태화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방대한 게임설명을 이어갔다. 캐릭터라는 생소한 단어대신에 말 이라는 단어를 쓰고 맵 대신에 지도, 아이템 대신에 보조도구, 이런 식의 적절한 변형을 섞어서 말이다. “지도 위에서 말을 움직여서 나라를 만들고 군대를 조직해서 동쪽, 서쪽, 남쪽의 세 나라를 침략할 수도 있어요. 평화협상을 맺을 수도 있고 맺었다가 배신할 수도 있고요. 게임중간에 도우미와 접촉해서 이런저런 명령들을 받아서 그걸 완료해야 되는데, 그 게임이 재밌는 게 뭐냐면 중간에 서쪽나라 왕비가 나타나서 제안을 해오는데…” 참여자들이 이어나가는 게임의 기존방식과는 달리 게임에 따로 스토리가 있다는 것에 킬리는 상당히 흥미로워하며 여인의 말에 집중했다. 태화는 오랜만에 생기 넘치는 얼굴로 신나게 떠들어댔다.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얘기하는 것도 좋지만 그걸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에 그녀는 오랜만에 행복했다. ‘와 진짜 오랜만에 살맛난다.’ 한참 킬리와 함께 게임에 대해 떠들어댔던 렐리아는 현재 개인막사를 지정받고 쉬고 있는 중이었다. 킬리에게는 마을의 일급비밀이니 자신이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가 보는 킬리는 직설적이긴 해도 이런저런 말을 떠벌리고 다닐 사람은 아니었다. 입이 무거워 보이니 비밀은 반드시 지킬 테다. 그런 점에 있어선 상극인 라미우스와는 어떻게 친구가 된 건진 상당히 의문이라지만. 헹구지 않은 입을 쩝쩝대며 저녁식사로 나왔던 스튜의 맛을 되새기고 있을 때였다. 어김없이 천막 밖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렐리아는 침대위에 편히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천막입구에 길게 드리워진 천이 슥 걷어졌다. 이젠 들어가겠다는 말조차 없었다. 밤이 내려앉은 듯 칠흑 같은 머리가 가장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뒤이어 그 녹안과 눈이 마주치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싱긋 웃었다. “오셨어요?”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냥 아까 전에 기사님과 얘기를 나눴거든요. 그게 좀 웃겨서…” “얘기?” 늘 깍듯이 존대만 쓰던 남자가 별안간 자신의 말을 자르고 하대로 질문했다. 그게 너무 의외라 태화는 코딱지만큼 놀랐으나 겉으로는 무슨 겁먹은 동물처럼 몸을 움츠렸다. 동그랗게 뜬 눈은 '혹시 제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요?'하고 눈빛으로 물으며 흔들리는 척했다. ‘뭐야, 뭐야.’ 공작의 녹안은 탐탁지 않은 기색을 온전히 드러내고 있었다. 짓뭉개진 잎처럼 어두운 빛깔이었다. 왜 저런 눈을 하고 있나에 대해 태화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때다. “산에서 내려가기 전까지는 기사와 일체 말을 섞지 마십시오. 말을 걸어도 무시하십시오.” “…어째서요?” “그대를 현재 임시로 보호하고 있는 자가 누굽니까.” “공작님…이시죠?” “그렇다면 내 말에는 토 달지 말고 따르면 되는 겁니다.” ‘아 원래 이런 남자였지.’ 렐리아는 고개를 두 번 주억이는 걸로 그의 말에 순종했으나 입안은 떨떠름했다. 조금은 자신과 그 사이에 약간의 신뢰감이 싹텄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동 중에 자신을 기사에게 맡긴 거라 생각했는데 그냥 자기가 데리고 있기 귀찮아서 떠맡긴 모양이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허튼 소리를 했을까봐 저리 예민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인간성 한 번 알만했다. 참 피곤할 만큼 철저한 인간이었다. ‘저 남자는 심리상담사가 와도 못 꼬셔. 속을 알 수야 있어야지 원.’ 태화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럼 대체 이제까지 보였던 그 누그러진 태도들은 뭐였냐며 조금 불만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가 츤데레라는 사실이 번쩍 뇌리를 강타했다. “저기 공작님.” “뭡니까.” “혹시 말인데요. 제가 기사님과 친해지는 게 질투 나시는 건가요?” “아닙니다.” “…아 네.” 쌍반점 두 개가 나란히 따라붙을 뻔했다. 너무 대놓고 물어봤나. 괜히 얼쯤해져서 렐리아는 천막천장을 바라보며 딴청부렸다. 그에 반해 블리어는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는 의자에 앉을 생각조차 없는지 계속 선 채로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이틀간 산맥전체를 순회한 후 바로 수도로 향할 예정입니다.” ‘저걸 알려주는 거보니까 날 수도로 데려갈 생각인가보네.’ 태화는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공작령으로 갈 줄 알았는데 곧장 수도라니,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탄탄대로를 달리는 구나 싶으니 렐리아의 얼굴이 편하게 풀렸다. “수도에 도착하게 되면 그대에겐 평민신분과 여자혼자 살만한 거처를 따로 구해주겠습니다.” 그 말에 렐리아가 눈을 홉떴다. 아까와는 또 다르게 눈앞의 사내는 누그러지다 못해 관대할 정도다. 신분과 집을 구해준다니, 알고 보니 귤박스를 집이랍시고 갖다 주는 건 아니겠지 괜한 의심까지 들었다. 태도가 들쑥날쑥하다보니 자연스레 그의 이어질 말에 긴장하게 되었다. 이게 말로만 듣던 밀당이란 건가 싶기도 하다. “거기까지가 우리 인연의 끝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공작님…?” 역시나 그는 자신의 마음을 들었다가 놓았다. 그냥 내려놓은 것도 아니고 바닥에다 완전히 패대기쳤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새끼, 태화는 구겨지려는 얼굴을 간신히 피고 그를 올려다봤다. 단단한 갑옷을 몸에 두르고 있는 흑발사내는 흡사 법정에 선 변호사처럼 유연한 말씨를 구사했다. “몸 멀쩡하겠다, 신분 있겠다, 집도 있겠다, 이 정도면 여인 홀로 정착하는데 충분하다고 봅니다. 비록 기억은 잃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혼자 생활하는데 문제가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대의 과거는 청산한 셈치고 새 삶을 찾으십시오.” 렐리아는 침묵을 고수했다. 맞는 말이라 차마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 얘기를 하러 온 것입니다. 쉬십시오.” 늘 그렇듯 블리어는 자기말만 하고 나가버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 렐리아는 침대위에 멍하니 앉아있었다. 수도로 가면 공작과 헤어지게 된다. 끈질기게 달라붙으면 오히려 반감만 살 테니 차라리 깔끔하게 떨어져나가는 게 좋을 테다. 그렇담 수도에 도착하기 전에 어떻게든 그를 잘 설득해 침대에 눕혀야 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까. ‘이럴 줄 알았으면 팔 불구인 척하는 거였는데…젠장.’ 렐리아는 최대한 힘 조절을 한 주먹으로 침대시트를 팡 내리쳤다.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도 잠시 그녀는 슬쩍 오른쪽눈알을 굴렸다. ‘잠깐…보험사기를 꼭 한번만 쳐야 된다는 법은 없잖아?’ * 다음날도 어김없이 토벌단은 산행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자신에 말에 오르라며 에스코트를 청하는 라미우스를 과감히 무시해버리고 렐리아는 킬리의 말에 올랐다. 산허리를 따라 움직인 지 장장 네 시간째, 아무리 말을 타고 간다하더라도 여인에겐 고역인 일이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기사들의 우려 따윈 알지 못한 채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친 기색도 없이 그녀는 뚫어져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룩불룩 솟아난 기사들의 머리너머로 유독 새까맣고 윤기 있는 머리가 보였다. 선두에서 말을 모는 공작의 뒤통수에 아예 시선이 꽂힌 듯 그녀의 눈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게 렐리아는 네 시간째 틈을 보는 중이었다. 어떻게든 공작의 말에 올라타야만 했다. 그의 과실로 보이게끔 낙마한 후 팔 한쪽이 불구가 되어야만 했다. 다행히 공작 뒤로는 오십여 명의 기사들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이 목격자가 될 테니 공작도 순순히 실수를 인정하고 불구가 된 자신을 책임지리라. 계획까지는 상당히 좋았으나 문제는 실행하기에 다소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 첫째는 공작이 자신을 말 위에 안태워줄 게 분명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느 정도 다칠지 예상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낙마를 해서 일단 팔이 부러지려면 떨어지는 각도나 이런저런 상황들을 생각해야만 했다. 일단 팔이 부러질까? 하는 걱정이 제일 컸다. 안 부러져도 부러진 척하면 된다지만 오십여 쌍의 눈을 과연 자신이 재주껏 속일 수 있느냐였다. 한심하게도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다칠 수 있을까, 사고사로 위장할 수 있을까’가 그녀의 깊은 고민의 주된 목적이었다. 전형적인 보험사기꾼의 고민이었다. 그렇게 렐리아가 한참을 쓸데없는 생각으로 허비하고 있던 중 별안간 맨 앞의 대열이 천천히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중간대열에서 말을 몰고 있던 킬리와 라미우스는 고삐를 느릿하게 잡아당기며 앞줄의 속도에 맞췄다. 렐리아는 멍하니 사념에 잠겨 있다가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물소리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웬 물소리이지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렸으나 널찍한 등판들로 인해 먼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와 중에도 멀찍한 거리에 비죽 솟아나있는 공작의 새카만 머리는 잘만 보였다. “이 앞에 강이 있나봅니다. 레이디, 이틈에 잠시 내리시겠습니까?” 라미우스는 대열전체가 멈추자 한발 먼저 말에서 뛰어내려 킬리의 말 옆으로 다가갔다. 정확히는 킬리 앞에 앉혀진 은발여인에게로. 기사들도 오랜 시간 승마에 허벅지전체에 알이 배이고 허리가 뻐근한데 가냘픈 여인은 어떻겠나 싶었다. “저와 함께 근처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는 건…” 이틈에 함께 휴식시간을 보내자는 라미우스의 얍삽한 제의에 렐리아는 반대편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강이 있다는 얘기밖에 귀에 안 들어오는지 렐리아는 직접 두 눈으로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열댓 명의 기사들을 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여인을 라미우스가 황급히 뒤따르려했으나 옆에 있던 킬리가 대열이탈하지 말라며 붙잡아버렸다. 그동안 설렁설렁 달려서 대열의 선두까지 온 렐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혀를 찼다. 산길이 뚝 끊긴 그곳엔 낭떠러지가 있었다. 그 아래엔 적당히 깊어 보이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 혹독한 겨울에 유유히 흐르고 있으나 언 강보다 차가워보였다. 강 건너에는 또 다른 산이 있어 산길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으나 문제는 건널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초점이 아득해지는 먼 곳까지 휘휘 둘러봐도 다리로 추정되는 구조물은 없었다. “…현재로선 건널 방법이…. 공작전하, 다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체되는 시간이 꽤 됩니다. 중간에 해가 질 텐데, 각하께서도 아까 지나오시면서 보셨다시피 이곳은 마땅히 천막을 칠 지형이 되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야영은 불가능입니다.” “…허어, 그렇담 이 사태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멀지않은 곳에서 직책 높은 자들이 공작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논의하는 게 보였다. 그 사이에 낀 젊은 그는 무겁게 입을 닫고 있었다. 갑옷 위로 드러난 얼굴은 훤칠한데 꼭 심란함에 찬 노인처럼 미간에는 깊게 주름이 패어 있었다. 버거운 짐을 짊어진 듯한 표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중년사내들보다도 훨씬 늙어보였다. ‘…앞으로 나 때문에 고생 좀 해야 되니까.’ 그를 지켜보던 렐리아는 기사들의 눈을 피해 터덜터덜 황량한 나무사이로 걸어갔다. 0017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나무 뒤로 돌아가 저를 보는 시선이 없는지 확인하고서 그녀는 총알처럼 튕겨나갔다. 1초 만에 나무 세 그루를 통과해버렸다. 남들에게는 순식간이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페이스를 조절하며 달렸다. 이번엔 시야가 확보될 수 있을 만큼의 속력을 내었는데 그녀의 두 다리는 하나로 합쳐진 것처럼 보일 만큼 충분히 빠르게 움직였다. 나무의 간격이 좁다보니 렐리아의 은빛잔상이 지그재그로 남아있었다. 꼭 레이스경주게임에 나오는 장애물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달리는 기분이었다. 주변을 파괴하기 않게 최대한 집중하며 5초정도를 달리고서 렐리아는 간신히 정지했다. 바닥에서 거친 모래바람이 일고 두 다리가 단단한 대지를 뚫고 발목까지 들어가서야 멈췄다. “이쯤이면 되겠지?” 렐리아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근처에 있던 거목을 깔끔하게 주먹 한방으로 부러뜨렸다. 아파트 사 층높이에 달하는 장대한 나무가 맥없이 넘어갔다. 동떨어져있던 거목 두 그루를 찾아 마찬가지로 주먹을 내질렀다. 차례차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지면으로 넘어가는 데까지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새들이 날아가고 그 일대가 일순 소란스러워졌다지만 렐리아는 시골집이라도 짓는 목수처럼 한가롭게 거목들을 짊어지고 강 위에 다리로 쓰게끔 내려놓았다. 고정시킬 겸 나무의 양끝은 주먹질을 해 단단히 지면에다 박아놓았다. 말이 지나가도 끄떡없는 다리 세 개가 뚝딱 완성되었다. 다시 돌아가는 데 오 초를 포함해 도합 일 분 삼십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허나 도착한 후에도 렐리아는 나무 뒤에서 슬쩍 기사들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사라진 틈에 혹여 누가 자신을 찾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는 노릇이니 말이다. 다행히 기사들은 그녀가 잠시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저 멀리서 들려온 심상치 않은 소리와 대지의 진동에 놀란 말들을 달래기에 바빴다. 공작도 훨씬 더 무거워진 표정으로 굉음이 연달아 터져 나왔던 까마득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미리 빚 갚은 거다, 공작?’ 그런 그를 슬쩍 바라보고선 렐리아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터덜터덜 킬리에게로 돌아갔다. 한편 블리어는 렐리아가 제 근처에서 저를 지켜보았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서둘러 말에 올랐다. “…무슨 일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가보겠습니다.” “허나 공작전하…! 어떤 몬스터의 소행일지 모르는 일입니다. 위험합니다.” “몬스터의 소행이라면 더더욱 그곳으로 가 상황을 파악해야합니다. 응당 해치워야할 존재를 두고 도망치겠다는 겁니까. 우리가 이 산맥을 순회하는 동안은 토벌이 우선시된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작은 홀로 그곳을 향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그가 떠나자 기사들의 얕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공작가의 충직한 가신인 드알루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말에 올라 그를 뒤쫓았다. 중앙기사단의 부대장도 몇몇의 소수정예만 추려 황급히 뒤따랐고 말이다. 이러다 뭔 일 터지는 게 아닌가, 남은 기사들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제 허리춤에 꽂힌 검 손잡이를 붙잡고 대기했다. 괴물님 괴물님 노래를 부르던 라미우스도 단단하게 얼어붙었고 킬리는 평소와 같은 표정이나 숨소리를 낮게 죽였다. 그 사이 렐리아만이 심드렁하게 귓구멍만 파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분이 지나서야 공작과 그를 따라나섰던 자들이 돌아왔다. 무사히 돌아온 그들을 반길 새도 없이 기사들은 다시 선두에 선 공작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윽고 기사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세 그루의 나무가 다리처럼 놓여있는 지점이었다. 웬만한 사람 지나다니는 길만큼 굵기가 상당했기에 나무 한 그루당 다리하나의 역할을 거뜬히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무치곤 오랜 산 거목답게 거대했기에 차마 사람이 해놓은 짓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누가했든 간에 강을 건널 수 있다는 것에 기사들은 초점을 맞췄다. 기사들은 삼열을 지어서 각자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맨 앞사람부터 조심스럽게 나무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기사 다섯 명을 먼저 보낸 후 말과 함께 나무다리에 올라섰다. 애마 먼저 강을 건너도록 한 다음 그도 뒤따라 걸음을 옮길 때다. 공작을 뒤에서 줄곧 지켜보고 있던 렐리아가 양손을 살랑살랑 저으며 그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레이디, 이 라미우스가 그 손을 잡아드리겠습니다! 부디 함께 건널 수 있는 영광을 제게…” 나무다리 근처에 서있던 라미우스는 그녀가 제게 달려오는 줄 알고 손을 뻗었으나 에스코트를 청한 손은 무색하게 되어버렸다. 눈부신 은발을 휘날리며 렐리아는 나무다리에 가볍게 올라섰다. 그러곤 중반쯤에 다다라있던 흑발의 남자에게 무턱대고 달려갔다. “공작님~ 무서워서 그런데 팔 잡고 가도 돼요?” 라고 물었지만 이미 그녀의 손은 그의 탄탄한 팔뚝위에 얹어져있었다. 됐어, 하고 렐리아는 고개를 숙여 영악한 눈빛을 감추었다. 하지만 당연히 자신을 밀쳐낼 거라 여겼던 공작은 잠잠했다. 예상시나리오 대로라면 그의 팔을 덥석 붙잡는 순간 공작은 자신을 떨쳐내야만 했다. 그래야만 그의 과실인척 아래로 추락할 수 있을 테고, 강 속에 있던 바위에 팔을 부딪쳤다고 둘러대며 팔 불구행세를 할 수 있을 테다. 허나 공작은 떨쳐내기는커녕 자신을 한번 슥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에 태화는 속으로 뜨끔해버렸다. 아무래도 게임속이다 보니 남주가 독심술 같은 능력을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거 없었다. 게임개발사 측에선 그냥 그런 캐릭터 설정이라고 갖다 붙이면 그만이니까. ‘…너 이 새키 내 속을 읽는 거냐? 이 거지발싸개! 갈비뼈의 순서를 바꿔버릴까 보다! 네 콧구멍 속에 코딱지가 있다!’ 충분히 흠칫할 만한 내용이었으나 공작은 잠잠했다. 아무래도 독심술 같은 능력은 없나보다. ‘대체 뭐하는 놈이야…?’ 자신이 기억을 잃은 척하기 전만해도 저가 달라붙으면 ‘극혐’이라는 듯 굴더니 말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며 칼같이 잘라놓더니 오늘은 또 다르다. ‘…이,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아니다. 이래선 안 된다. 이봐, 날 밀치라고! 태화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걸 참고서 그의 걸음에 맞춰 꼭 도살장 끌려가는 소처럼 억지로 한 발 한발 내딛기 시작했다. 점점 나무다리의 끝에 다다르자 렐리아는 일부러 주춤대며 걸음을 늦췄다. 그에 공작은 잠시 걸음을 멈춰주기까지 했다. 일별도 던지지 않는 것치곤 그답지 않게 배려적이었다. 렐리아는 이래선 안 된다는 생각에 팔짱을 끼고 있던 손으로 슬쩍 그의 하복부를 더듬거렸다. 그제야 그가 멈춰서며 고개를 돌리자 이때다 싶어 과하게 몸을 휘청거렸다. 누가 봐도 그가 팔로 밀친 것으로 보이리라.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팔 불구로 다시 태어나는…’ 아련하게 눈을 감으며 천천히 추락하려는데 순간 렐리아는 자신의 뒷머리를 덮는 투박한 손을 느꼈다. 생생한 온기가 머리칼사이를 파고들었다. 허공에 휘날리는 은색머리칼 끝엔 공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자신과 함께 추락하고 있는 그 익숙한 얼굴이 또렷하게 다가왔다. 찡그린 짙은 눈매와 꽉 다물린 입매를 차례로 시야에 담기 무섭게 수면 아래로 잠겼다. 풍덩, 귀가 아팠다. 렐리아는 꼬르륵 소리가 귀에서 나는지 입에서 나는지 모르겠다고 여겼다. 주위로 물거품이 마구 생성되는데 그 사이로 또 한 번 공작의 얼굴이 잡혔다. 짧은 흑발이 물에 풀어놓은 먹물처럼 너울거렸다. 살짝 구겨진 창백한 얼굴과 함께 그가 제게 바짝 다가왔다. 제 허리를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품에 안았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귀걸이의 효과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로지 미지근한 사내의 체온만이 느껴졌다. 동시에 단단한 그의 몸도. 사실 수영은 못하지만 수영 따윈 하지 못해도 바닥을 박차면 바로 수면위로 올라오기에 상관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강물 속 풍경에 약간 두렵다는 기분을 느꼈다. 생각보다 아득하게 먼 강바닥은 심해처럼 어두웠다. 이정도 깊이면 까딱하면 공작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왠지 양심이 콕콕 찔렸다. 공작도 죽으면 이 미지근한 체온을 잃을까. 한낱 게임캐릭터에게 온기가 있다는 사실보다도 더 괴리감 있게 느껴졌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공작이 천천히 수면위로 헤엄쳐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마침내 확 하고 숨통이 틔었다. 켁켁하고 그녀가 숨을 고르는 동안 블리어는 위에서 기사들이 내린 밧줄사다리에 몸을 의지했다. * 토벌단은 강 건너에 있는 산에 들어서자마자 평탄한 지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신속히 그곳에서 야영준비를 한 덕에 물에 빠진 두 사람은 금방 천막 안에서 쉴 수 있었다. 렐리아는 물에 쫄딱 젖어버린 옷을 탈의하고 기사들이 가져온 여분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커다란 기사복 상의와 목화솜을 채운 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남이 보든 어떻든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 쓸 태화가 아니었다. 대충 갈아입고서 침대에 앉은 그녀는 수건으로 차갑게 젖은 머리칼을 탈탈 털어 말렸다. 7년 넘게 숏컷이었다가 긴 머리를 가지게 되니 어지간히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었다. “에휴.” 렐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카락 때문이 아니었다. 목구멍에 걸린 것처럼 찝찝하기 그지없는 공작 때문이었다. 자신은 춥지도 체온이 내려갈 걱정은 없다지만 이 한겨울에 강물에 뛰어들었던 공작은 달랐다. 그 창백하게 얼어붙었던 흰 피부가 떠오르자 짐짓 그의 상태가 신경 쓰였다. 젖은 상태로 말을 타고 달리기까지 했으니 지독한 감기몸살에 걸려도 이상하지 않을 테다. ‘…아 씨. 누가 구해달라고 했냐고. 하여튼 간에…’ 사람 신경 쓰이게 하는데 뭐있다며 구시렁거리면서도 렐리아의 몸은 솔직하게 천막을 나섰다. 이런 상황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데 억울하기까지 했다. 또 뭐라 악담을 퍼부으며 자신을 탓할까, 아니면 전처럼 차갑게 홀대할까. 생각만 해도 끔찍했으나 앞으로의 관계를 위해서라도 그를 찾아가 사과하는 게 옳다 여겼다. “공작님. 안에 계세요?” 렐리아는 커다란 천막 앞에 서서 그를 불렀다. 천막입구를 가린 천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등불을 켜놓고 어딜 간 건가 싶었으나 뒤늦게 누군가가 입구의 천을 거두며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이었다. 급히 셔츠를 입은 건지 목을 여미는 단추부분에 구김이 가있었다. 관자놀이위로 흘러내린 검은머리는 말리다 만 건지 아직도 물기에 젖어있었다. 그는 여전히 감정 없는 초연한 눈길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한 점의 원망도 스며들어있지 않았다. “뭡니까.” “…아 그게 죄송해서요. 괜히 저 때문에 강물에 빠지시고…젖으시고 고생하시고.” 또 뭐가 있더라. 렐리아는 턱을 긁적이며 사과의 말을 급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이어지려는 생각을 단칼에 자르며 들어온 낮은 목소리가 있었다. “아닙니다.” ‘정말 아냐? 네가 말은 그래도 속은 아닌 거 다 알아. 들어줄 생각 있으니 시간줄때 해라.’ 태화는 불만스레 속으로 쏘아붙였다. 이러는 게 더 찝찝하다. 차라리 앞에서 대놓고 욕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깔끔하게 잊는 게 낫지, 뒤에서 추잡하게 질질 끄는 건 그녀의 성격과는 안 맞았다. “나가서 잠시 걷겠습니까?” 조금의 동요 없는 표정으로 서있던 남자치곤 조금 생뚱맞은 소리였다. 태화는 그가 무슨 속셈을 품고 저런 소리를 하나 싶었으나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따라가 봐야 그 꿍꿍이를 파헤치든지 말든지 할 테니까 말이다. 0018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두 사람은 막사근처의 숲으로 들어섰다. 소복이 눈이 쌓은 눈밭 위를 말없이 걷는 동안 가죽신발 아래서 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잇따라 울렸다. 렐리아는 한가로운 태도로 어두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구경할 게 있을 리는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야지 덜 지루할 것 같았다. 도저히 속을 알 수 없는 남정네와 함께 몇 분을 적적하게 걸을 때다. 별안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기가 막힌 생각이 별똥별처럼 반짝 스쳐지나갔다. ‘일부러 공작다리에 걸려 넘어진 척할까? 좀 심하게 굴러서 발목이 부러진 척하면……오호라 괜찮을지도?’ 그가 내게 미안해해야 하는데 내가 그에게 미안해하고 있으니 원. 이렇게라도 해야겠다. 렐리아의 얼굴 위로 사악한 자해공갈단의 미소가 번졌다. 물론 곧 씻은 듯이 지워내고서 슬쩍슬쩍 그를 돌아보며 타이밍을 보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정면을 응시한 채 걷고 있었으나 그 시선을 고스란히 느꼈다. 공식연회에 참여할 때마다 수많은 미혼여식들의 눈길에도 무표정을 고수한다지만 실상 그는 몇 명이 저를 보는지 셈할 수 있을 만큼 극히 예민한 성격이었다. 그의 사생활이 지극히 폐쇄적인 경향을 띠는 이유이기도 했다. 주변에 민감하다. 그렇다보니 바로 제 옆에서 저를 힐끔대는 눈길에 신경이 안 쓰인다면 거짓말일테다. 허나 블리어는 현재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했다. 이젠 그 시선이 귀찮다기보다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그였다. “덩굴이나 나무뿌리가 눈 아래 파묻혀있을 겁니다. 걸려 넘어지고 싶지 않다면 내가 아닌 땅을 보십시오.” 주의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평온한 목소리였다. 렐리아는 그가 저의 시선을 눈치 채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발을 삐끗했다. 단을 접지 않아 길게 내려오는 바짓단에 한 번 더 발이 걸렸다. 새하얀 눈밭위에 그녀는 철퍼덕 넘어졌다. 블리어는 눈 위에 엎어져서 손가락만 꿈틀대는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저 한심한 꼴이 조금은 귀엽게 보인다면 저가 미친 걸까. 제 분노를 샀었던 기존의 여자는 지워낸 지 오래였다. 처음엔 그 분노가 식지 않아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여인에게 괜히 날카롭게 굴었으나 그 뒤로 찾아온 회의감에 그마저도 관두었다. 저가 저지른 일조차 기억 못하는 여인에게 애꿎은 화풀이를 할 수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갈 길 잃은 분노는 그대로 허망하게 사그라지고 현재 그는 눈앞의 여인을 다른 여인으로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저급하기 짝이 없던 창부 같은 짓만 골라하던 여인이 아니었다. 자신을 몰래몰래 쳐다보다가 결국엔 넘어지는 이런 한심한 모습은 요사한 창부가 할 만한 짓은 못되니 말이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순수하게 저의 관심을 바라고 마음을 기울이는 여자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이라면 눈에 거슬리기 짝이 없었을 모습 또한 달라보였다. 웃는 모습도 가증스러워 보이지 않았으며, 천박하고 예의 없는 행동이나 말투도 그다지 제 신경을 긁지 않았다. “제대로 앞을 보고 걸으십시오.” 블리어는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에 여인은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오른쪽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온몸에 묻은 눈을 털어낼 생각조차 않는 여자를 향해 그는 손을 뻗었다. 뺨에 묻은 눈을 녹여 내릴 것처럼 닦아주고 차례로 머리와 어깨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이 여인의 기억을 잃게 만든 것은 자신이라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돌봐줄 필요는 없었다. 하산할 때까지 만의 감시이자 보호였다. 산에서 내려가면 기사들 모르게 적당히 떨쳐내 버리면 될 일이었다. 이깟 노예신분의 여자가 다시 노예상인에게 잡히든, 몸 파는 일을 하든 저가 신경 쓸 일은 절대 아니었다. 목이 세 번은 달아나고도 남았을 여자였다.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여자에게 죄책감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다. 냉철한 두뇌는 이 일에 책임을 질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이성적인 판단과는 달리 그는 여인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과한 호의를 베풀었다. 평민으로서 살 수 있는 새신분과 수도에 거처를 장만해주겠노라고 그리 약속해버렸다. 오늘만 해도 강물에 빠져죽을 뻔한 여자를 위해 강에 뛰어들지 않았나. 적어도 물에 빠진 짐승보단 살릴 가치가 있는 여자란 거였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볼 일 없을 여자일 텐데, 참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 참 이상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제대로 앞을 보고 걸으십시오.” ‘뭐야, 걱정? 갑자기 왜 젊은 엄마모드래.’ 넘어진 어린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엄마가 앞보고 다니라고 했지?’ 라고 꾸중하는 젊은 엄마 같다. 아무리 봐도 태화의 눈엔 그래보였다. 이런 말을 한 것 자체도 놀라운데 그는 제 머리와 옷에 묻은 눈을 손수 털어주기까지 했다. 진짜 열일곱 개의 인격을 소유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렐리아는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그녀는 습관처럼 팔짱을 끼고서 교차한 두 팔을 문질렀다. 한편, 블리어는 손을 거두면서 두 눈은 그녀의 바르르 떨리는 어깨에 고정했다. “춥습니까?” “…….” 자신은 추위 따윈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해주려다가 렐리아는 그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왠지 금방이라도 제게 외투라도 벗어줄 것 같으니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너 많이 입어라, 하고 측은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캄캄한 주위 숲으로 시선을 두었다. 그 모습이 그에겐 달리 보였는지 그가 조만간 살짝 고개를 기울여 저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튀어나올까 무서워서 그럽니까.” '네가 이러는 게 더 공포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추운 날씨에 덜 마른 머리로 나온 공작을 다시 막사 안으로 서둘러 들여보내야지 싶었다. * “토벌도 이제 마지막이네요.” “그러게요.” 렐리아의 시원섭섭한 말에 킬리가 덤덤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오늘로 토벌도 마지막이었다. 비록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진 못했으나 작전을 지연한다고 뭐가 나오는 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공작은 마지막 날까지 어떻게든 본전을 뽑으려고 눈에 불이 킨 사람 같았다. 선두에서 기사들을 이끌고 가는 폼이 참 위풍당당했다. 렐리아는 절레 머리를 저었다. 마지막인데 힘 빼고 설렁설렁하고 말 것이지 저럴 때보면 인생 피곤하게 산다 싶었다. 눈 덮인 산길을 따라 달리는 말 위에 앉아 지루하게 정면만 바라볼 때다. “그런데 어제 얘기하다만 것 말인데요.” 그러다 귓가로 실려 온 목소리에 렐리아는 슬쩍 뒤로 고갤 돌렸다. 그에 킬리가 고개를 살짝 숙여 앞자리에 앉아있는 여인의 귀에 입를 가져다댔다. “…대전사온라인2요.” “완전히 게임중독 되셨네.” 피식하고 렐리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게임얘기를 그에게 해준 뒤로 그는 남몰래 제게 접촉해와 이런 식으로 요구를 했다. 게임얘기를 더 해달라고. 그에게 있어서 문명과 함께 이룩한 게임은 신세계였던 모양이다. 자기가 그 게임 속 NPC라는 건 죽어도 모를 테지만. 렐리아는 생각할수록 웃겨서 입을 가리고 작게 키득거렸다. 크게 웃으면 분명 근처에서 말을 몰고 있던 라미우스가 자신도 끼어달라며 말을 걸 테니 말이다. “…오늘 저녁에 해줄게요. 땔감주우면서.” 귀찮게 누가 더 꼬이는 건 질색이라 렐리아는 최대한 뒤로 고갤 돌려 킬리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속삭였다. 갈색머리 기사는 흡족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서 또다시 여인에게 뭐라 뭐라 속삭였다. 대전사온라인2의 엔딩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었다. 천천히 달리는 말위에서 두 남녀가 은밀하게 말을 주고받을 때, 앞장서서 말을 몰던 공작이 별안간 속도를 줄였다. 어제보다 긴 다섯 시간째의 산행이었다. 중간에 제대로 된 휴식시간조차 가지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여인에겐 고되었을 거라 여긴 것이다. 급히 여인을 살피기 위해 고갤 돌렸으나 블리어의 시선에 비친 장면은 전혀 예상외의 장면이었다. 먼발치에서 입을 가리며 웃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이 똑똑히 시야에 들어와 박혔다. 기사와 함께 다정하게 귓속말을 나누는 모습에 블리어는 머릿속이 차게 식었다. 판단이 내려지기 무섭게 그는 행동했다. 여전히 뒤쪽을 응시한 채로 블리어는 드알루에게 잠시 선두를 맡기고서 말머리를 돌렸다. 갑작스런 공작의 이탈에 선두대열에 속해있던 기사들은 옆을 스쳐지나가는 공작을 힐끗 쳐다보았다. 응징을 하러가는지 엄랭하게 굳은 공작의 얼굴은 가히 무서웠다. 기사들은 다시 정면으로 재깍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누군 진 몰라도 단단히 잘못 걸렸구나 하고 속으로 명복을 빌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응징을 고스란히 받게 될 킬리는 대열의 옆쪽으로 빠져 뒤로 달려오고 있는 공작을 뒤늦게야 발견했다. 자신에게로 오고 있다는 건 저를 꿰뚫듯 직시하는 그 녹안만 봐도 충분했다. 킬리가 서서히 말의 속도를 줄이며 대열에서 비스듬히 빠져나오자 렐리아는 그제야 정면을 응시했다. 그리고 공작과 눈이 마주쳤다. ‘뭐야 왜.’ 렐리아는 심드렁한 눈빛을 띄우고 있다가 한참 뒤에 퍼뜩 깨달은 얼굴을 했다. 완전히 잊고 있었다. 아마도 공작은 저를 기억력 나쁜 여자로 취급할게 분명했다. 실제로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말을 몰고 오는 그는 ‘기사와 일절 대화를 나누지 말라 했거늘, 이 여자가 또.'라고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근거리에서 공작은 완전히 말을 멈추고 땅위에 내려섰다. “킬리 바티무스 경.” 철저한 건지 세심한 건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갈색머리 기사의 이름을 정확히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탐탁찮은 감정은 눈빛만으로도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는 킬리가 말에서 내리자마자 입을 열어 호되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여자를 붙여놓았다고 해서 바로 기강이 해이해지는 겁니까. 여인을 태우고 이동하라하였지 임무수행 중에 여자와 시시덕거리라곤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토벌지인지 승마장인지 구분이 안 되는 겁니까.” 토를 달 틈도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태화는 속으로나마 혀를 찼다. 저 종잇장처럼 새하얀 피부완 달리 군인처럼 각진 어깨를 가진 남자는 철혈의 공작보단 밴댕이소갈딱지란 호칭이 더 잘 어울렸다. 장대한 골격 위에 검은 빛깔의 갑옷까지 둘러 위엄이 대단해보이지만 입은 남편 바가지 긁는 아줌마가 따로 없었다. “경의 해이해빠진 태도가 왕실기사단의 위명을 더럽힙니다. 첫째도 둘째도 명예를 중시해야할 기사가 맞긴 합니까.” “…면목 없습니다.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수도로 복귀한 후에 생각하겠습니다.” 블리어는 차갑게 경고를 주고서 바로 말위에 앉아있는 여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는 내리십시오.” ‘뭐 나?’ 하고 하마터면 멍청하게 물을 뻔했다. 설마 기사들의 기강을 흐린다고 날 이 설산에 버리고 가겠다는 건가 싶을 때였다. “내려오십시오.” 검은머리의 그는 비교적 정중하게 제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렐리아는 또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고 생각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뭐하자는 남자인진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공작은 친절하게 저를 땅 아래로 내려주었다. 그러곤 바로 자신의 말 옆으로 데리고 가는 게 아닌가. “오르십시오.” ‘정말…?’ 하고 떨떠름하게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대신 렐리아는 자신의 허리를 잡아주며 오를 수 있게 도와주는 그의 태도에 조금 혼란스런 감정을 느꼈다. 뒤따라 말위에 오른 블리어는 다시 한 번 렐리아의 몸을 바로 잡아주었다. 그녀 뒤에서 고삐를 붙잡고 다시 말에 박차를 가한 그는 선두를 향해 빠르게 말을 몰았다. 규율에서 벗어나는 꼴은 못 보는 그답게 아예 그 뿌리를 뽑아버리고서야 만족스러워했다. 0019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해가 저물어갈 무렵 기사들은 여느 때처럼 천막을 치고 불을 피우며 마지막 야영준비에 들어섰다. 내일이면 완전히 이 산맥을 벗어나 마을에 도착할 것이다. 그렇게 곧장 수도로 향하는 것으로 토벌단은 해산이었다. 블리어는 마지막일정까지 어떻게든 수확을 내보려했으나 작은 산짐승조차 만나지 못했다. 슬슬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는지라 오늘을 마지막으로 하산해야된다는 건 변함없었다. 어쩌면 그 강력한 드래곤급 마물을 만나지 않은 건 다행이리라. 그 마물이 단독으로 움직이는 개체일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 말이다. 서쪽 산중턱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몬스터무리를 전멸시킨 것이 단 한 마리의 짓이 아니라 여기면 눈앞이 캄캄하다. 개인막사 안에 앉아 블리어가 그런 생각을 이어가던 중 식사담당 기사가 소박한 음식이 담긴 식판 두개를 들고서 그곳을 찾아왔다. 기사는 평소처럼 투박한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서 말없이 인사한 후 나가버렸다. 두 개의 식판, 그 중 하나는 여인이 먹을 것이었다. 블리어는 한눈에 봐도 음식양이 덜 많은 식판을 들고 여인이 머무르고 있을 천막으로 향했다. 그는 말없이 천막의 천을 거두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눈길은 가장먼저 침대로 향했다. 늘 침대위에 엎어져 자거나 빈둥거리고 있으니 이것도 짧은 기간 동안 여자에게 길들여진 일종의 버릇이라 할 수 있었다. 허나 좁은 일인용 침대는 텅 비어있었다. 빈 막사 안에 식판을 내려두고서 블리어는 밖으로 나섰다. 그러곤 막사근처에 지나가던 보초병들을 불러 세웠다. “여자가 사라졌습니다.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아까 킬리 경과 함께 저 숲으로 땔감을 주우러갔습니다.” 한 기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응시하고선 블리어는 그곳으로 걸음 했다. 정말 쓸데없는 짓만 골라한다. 강행군이나 다를 바 없는 일정에 그 여자는 지치지도 않는 건가. 블리어는 저를 움직이게 만든 여자를 탓했다. 그저 제 관심만을 순수하게 바라며 얌전히 있는 다면 적어도 이리 귀찮지는 않을 테다. 겨울새가 우짖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오는 산 속에서 그는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무거운 견갑이 어깨를 짓누르고 다리가 움직일 때마다 무릎보호구가 작게 덜그럭거렸다. 피곤함에 몸이 짓눌리는 기분에 반듯한 미간에 미세한 금이 생길 때였다. 블리어의 예민한 청력이 희미한 목소리를 잡아내었다. “…제 친구가……” 친구? 블리어는 인상을 찌푸리는 대신 조금 더 걸음을 빨리했다. 점점 더 선명해지는 목소리는 샘물에서 퍼져오듯 맑았다. 가식이라곤 묻어나있지 않았다. “…항상 생각하지만 제가 살던 마을은 그런 점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여오는 지점에서 블리어는 걸음을 멈췄다. 굵다란 나무 세 그루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다부진 체격의 갈색머리 기사 옆에 서있는 여자는 그 몸이 훨씬 더 가늘어보였다. 이윽고 미소 짓고 있던 여자가 능청스럽게 혀를 놀렸다. “아. 이 얘기 비밀인 거 알죠?” * “아. 이 얘기 비밀인 거 알죠?” 렐리아는 후련한 표정을 하고서 씩 미소 지었다. 이렇게 얘기가 잘 통하는 상대를 또 찾기는 아마 힘들 테다. 그런 의미에서 언제 킬리에게는 밥 한번 사줘야겠다. 게임얘기를 할 때마다 개운해지는 게 이런 대화를 통해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 심리적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조금이나마 집에 대한 그리움과 현실의 답답함을 떨쳐낸 그녀가 본격적으로 땔감 줍기를 시작하려할 때였다. 멀리서 희미하게 발소리가 들려오자 렐리아는 떼려던 발을 다시 지면에 붙였다. 정확히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발소리는 무거울 만큼 낮았다. 매번 들어왔던 익숙한 발소리였으나 보폭은 훨씬 넓고 빨라져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사선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둑어둑한 숲 속의 어스름을 뚫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카만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의 긴 다리에 따라붙어 나온 어둠이 길게 늘어져 자취를 남겼다. 그 형형한 녹안만 아니었다면 망령으로 오인할 정도였다. ‘대체 언제 저기 있었던 거지. 설마 들었나?’ 렐리아가 그런 초조한 생각을 하는 동안 옆에 서있던 킬리가 그를 향해 예를 표했다. 하지만 블리어는 싸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여인에게 다가왔다. “공작님-?” 당황하지 않은 척 렐리아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을 때였다. 완갑을 두른 팔이 빠르게 뻗어져와 여인의 어깨를 잡아챘다. 그러곤 무지막지한 힘으로 그녀를 으슥한 숲 쪽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에 렐리아보다 킬리가 더 놀랐다. 그가 보기에도 공작은 여인에게 과할 만큼 완력을 써서 제압하고 있었다. 그러나 차마 기사주제에 공작인 그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킬리가 제자리에 굳어 당혹스러워할 때, 렐리아는 공작에게 질질 끌려가다말고 홱 머릴 돌렸다. 그러곤 킬리를 향해 ‘땔감은 미안하지만 혼자 주워줘요’하고 말하듯 태연한 눈빛을 드러냈다. ‘놔. 놔라고. 어디까지 가는데.’ 다시 정면으로 고갤 돌린 렐리아는 속으로 투덜대며 짜증스럽게 눈매를 구겼다. 대체 얼마나 산속깊이 들어갈 생각인지 눈앞의 사내는 저를 끌고 무작정 직진하고 있었다. 그 새카만 머리칼이 좌우로 처연히 흔들리는 걸 올려다보니 괜히 약이 올랐다. 아프지는 않은데 이렇게 다짜고짜 말없이 행동할 때마다 묘하게 짜증이 난다. 경찰에게 연행되어가도 어디로 가는지는 말해준다. 하지만 차마 찔리는 게 있어 그에게 불평은커녕 말조차 걸지 못하고 있었다. 왠지 이정도도 그가 인내하는 걸로 보였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일단 어디까지 들은 건지를 알아낸 후 대충 둘러대는 쪽으로 최대한 원만하게 끝내야겠다는 머릿속 계산이 끝났다. 동시에 그의 묵직한 발걸음도 따라 뚝 끊겼다. “……말하십시오.” “네? 뭐가요?” 그 능청스러운 말투에 기어이 블리어는 표정을 구겼다. 험악함이 불에 타들어가는 종이처럼 빠르게 번져갔다. “그 가증스러운 혀를 뽑기 전에 본 성격을 드러내십시오. 그대가 기억 따위 잃지 않았단 거 압니다. 다 들었으니 발뺌할 생각 마십시오.” 그리 차분하게 말해도 저를 돌아보는 그는 정말 자신의 가는 목이라도 조를 듯한 살벌함을 띠고 있었다. "내가 잠시 미쳤나봅니다.” 비틀린 입술 사이로 이가 갈리는 소리가 실감나게 울렸다. 두 사람은 마주보고 섰다. 둘 중 어느 누구도 선뜻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거진 나무사이로 칼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황량하게 그녀의 귓가를 적셨다. 이윽고 흘러나온 그의 저음은 그 칼바람보다도 서늘했다. “조금이나마 그 미천한 출신, 다시 한 번 성노예로서 불행히 살지 않도록 도우려했습니다. 기억을 잃은 걸 발판삼아 새 삶을 찾았으면 했던 건 진심이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번듯한 계집은 되었다 여겼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던 모양입니다.” 블리어의 심정을 대변하듯 목소리에 실린 분기는 더욱이 짙어져만 갔다. 나름대로 배려를 해주려던 제 성의는 안중에도 없을 여자다. 어떻게든 제 속을 채워야 만족할 뱀 같은 여자였다. 좀 특이한 여자, 저밖에 없다던 여자, 제게 순수하게 눈망울을 빛내는 줄 알았더니 그 겉가죽 뒤로는 여전히 추악한 내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제까지의 호의는 길 잃은 동물을 잠시 돌보는 정도의 호의일 뿐이다. 새신분과 거처도 마찬가지로 밀렵꾼에게 잡히지 않도록 동물을 보호할 곳을 알아봐준 정도다. 동물, 이 여자에겐 딱 들어맞는 단어였다. 그 겉가죽은 인간의 호감을 끌어내기 충분하고, 순순히 사람을 따르며, 떨어지면 되레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그런 살아남는 법을 아는 영악한 동물 말이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비록 어떠한 형태의 호감을 가지진 않았으나 이 여자에게 잠시나마 익숙해졌던 자신이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적응이었다. 미운 놈도 오래함께 있다 보면 뭐라도 챙겨주게 되는 정이 생겨난다. 아주 빌어먹게도, 공작은 새로이 정의를 내렸다. “그대는 끝까지 나를 기만하고 농락했습니다. 기억을 잃고 순수한 척하던 그 꼴을 생각하면 신물이 올라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천박하고 더럽습니까? 도와주려 내미는 손마저 제 추악한 과욕으로 더럽혀야 만족합니까.” 사기를 된통 당해 전 재산을 잃은 사람처럼 블리어는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만큼 혼을 쏙 빼놓는 여자였다. 어쩌면 그 끈질김은 어느 독종 저리가라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것에 단단히 잘못 걸린 엄연한 피해자였고 말이다. “한순간이나마 그대에게 미운정이라도 들었다고 여기다니, 미친 게 아니고서야…….” “웬 자학이에요? 공작님 미친놈 아니에요.” 철컥하고 그가 허리춤에 걸고 있던 검을 빼들었다. 그에 태화는 상황이 꼬여가는 걸 느꼈다. 이게 아닌데, 분명 자신은 사랑을 얻기 위해 접근했을 텐데 끝은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도 공작님한테 잠깐이지만 코딱지만 하게…” 미운정이라는 게 생겼다고 말하려했으나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끄응, 하고 렐리아는 시름겨운 신음을 삼켰다. 꼴에 게임캐릭터 앞에서 낯이 간지럽다니 이게 웬 말인가 싶었다. 부끄러움이라니, 이미 초면에 그의 분신크기를 몸소 알아보기까지 했으면서 이제와 새삼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결국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일단 그 검은 집어넣어요, 넣어.” “……원래 성격이 그럽니까.” “거지같다는 거죠? 알아요. 내 성격 원래 이렇게 거지같아요.” 태화는 ‘놔둬요, 놔둬’하고 말하듯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초콜릿포장지 같은 얇은 가식의 껍질까지 벗어던지기로 했다. 진즉에 가식 따윈 때려 치는 게 나았다. 얼마나 시원하단 말인가. 물론 목덜미에 닿아있는 칼날이 시원하단 얘기는 결코 아니었다. 날카로운 검의 옆면을 미끄러지듯 지난 그 끝엔 거뭇한 녹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들어진 잎 같았다. “어차피 다신 보지 않을 사이, 처음부터 이랬어야했습니다. 내가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그대에게까지 호의를 베푼 건지 모르겠습니다.” “입으로 싼다고 해서 다 말이 아니네요.” 반사적으로 튀어나간 태연한 대꾸에 그가 더더욱 검을 제 목덜미에 밀착시켰다. 그제야 태화는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그가 제 목을 베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져버린다. 혹시라도 그 검이 구부러지거나 부서질까봐 괜히 손에 땀을 쥐게 되었다. ‘코스프레 중에서 일코가 가장 힘들다더니…’ “그대는, 내가 진정 그대를 죽이지 못할 거라 여깁니까?” “네. 난 못 죽일 거라 생각해요. 비록 서로 좋아서 짧은 시간 붙어있었던 건 아니지만 공작님이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파악했거든요. 뭐 공작님도 마찬가지겠지만.” 이제껏 이랬다가 저랬다가 워낙 사람 헷갈리게 하는데 뭐가 있는 자였으나 본질은 나쁘지 않은 인간이었다. 조금 성격이 예민하고 까다롭기는 새끼를 잉태한 어미고양이 저리가라였지만 너그러울 때는 너그러울 줄 아는 남자였다. “나랑 있으면서 뭐 느낀 거 없어요? 단순히 배신감 느낀 거 말고요.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공작님이 날 테이블로 밀치지만 않았다면…” “그전에 그대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 지긋지긋한 악연 둘 중 하나가 죽어서라도 끊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 좀! 내 얘기 좀 들어봐요. 그땐 내가 좀 욱해서 기억 잃은 척 했어요. 근데 기억 잃었다고 해서 내가 아니었던 것도 아니잖아요? 난 적어도 같이 있으면서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거였어요?” 말없이 걷기만 해도 그다지 불편하지 않고, 간혹 옆에 없으면 찾게 되고, 멀찍이 떨어져있어도 한눈에 들어오는 정도의 관계. 딱 그 정도의 관계였지만 처음 만났던 날 어색해서 대화한번 나누던 것도 고역이던 날에 비하면 굉장한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겁니까.” 하지만 태화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조금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분기로 얼룩진 녹안은 오히려 가늘게 떠져 불신을 드러내었다. “믿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혹여 그 눈 때문에 내가 그대를 죽이지 못할 거라 여기는 겁니까.” 이 눈, 며칠간 제게 찝찝함을 가지게 만들었던 이 눈도 사실상 여자의 속셈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블리어의 불신은 가슴속에 자리 잡기 무섭게 주위로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이 눈에서부터 시작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제게 어떠한 호의도 받지 않으려고 치료를 거부하고 숨기던 여자. 당연히 좋아하는 사내에게 흉한 모습 보이기 싫어 그러는 줄로만 알았다. 이리도 사람의 마음을 간사하게 농락하는 여자라는 걸 알기 전만 해도. “사실은 다치지 않았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압니까.” 목덜미에 향해있던 검이 돌연 여인의 왼쪽 눈을 감싸고 있던 붕대를 겨누었다. 0020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동시에 얇게 칭칭 감겨있던 붕대를 검날 끝으로 아슬아슬하게 베어내기 시작했다. 실력이 없는 자였다면 눈을 가로지르는 깊은 자상이 남았을 테다. 렐리아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으나 이미 붕대는 풀려 바닥으로 떨어진 후였다. 왼쪽 눈을 감고서 그녀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듯 공작을 바라보았다. 붕대는 다시 구하면 그만이니 지금은 물러서야 될 때다. “그 눈 뜨십시오. 내가 그 눈꺼풀까지 도려내야합니까.” 낮지만 한층 격양된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쯤 되면 허옇게 안색이 질릴 법도 한데 제 잔인한 언사에도 여인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생눈이에요. 이건 여자의 사생활이니까 지켜주셔야죠.” 눈화장 따위 안 해도 잘만 밖을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태화는 뻔뻔하게 변명했다. 일반 눈알이었다면 이 눈은 이미 진즉 형체를 잃고 찌그러지거나 검게 썩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왼쪽 눈은 구멍이 뚫린 상태로 살짝 곪았을 뿐이었다. 오히려 안에서 진물이 생성되고 치유가 되는 모양인지 조금씩 구멍은 작아져갔다. 그러니 이걸 보이면 저가 정상인이 아니란 것쯤은 쉽게 들통나버리는 것이다. 그런 자신의 사정 따위 알 리 만무한 공작은 역시나 끈질기게 나왔다. 한번 물면 절대 놓아주지 않는 투견과도 같은 끈질김이었다. “그대는 왼쪽 눈만 화장합니까. 얼토당토아니한 거짓말로 넘어가려는 수작 따윈 집어치우십시오.” “이제까지 그랬는데 정말 모르셨어요? 아수라백작 메이크업이라고 꽤 유명한,” “단단히 정신 나간 여자 같으니라고……어떻게 한 마디도 안집니까.” “아니 난- 진짜 모르시는 줄 알고…” 삐죽, 아랫입술을 내민 모습이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블리어는 잠시 혈압이 치솟았으나 동시에 머릿속은 성에라도 낄 듯 차가워졌다. 이 미친 여자에게 목숨위협을 해 쫓아낼 생각을 한 게 애초부터 잘못이었다. 미친 여자라는 걸 자신이 간과했다. 강제적으로 끌고 와도 겁을 먹기를 하나, 검이 목에 닿아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건 진즉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공포조차 느끼지 못하는 정신 나간 여자였던 모양이다. 블리어는 검을 거두고서 토라진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차피 이곳에서 버린다면 굳이 제 손을 더럽히지 않아도 얼마못가 죽게 될게 자명하다. “…상대할 가치도 없습니다. 지금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십시오. 그대가 이 산에서 얼어 죽든 아사하든 마물에게 찢겨져죽든 이제부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아니 우리 헤어져요? 갑자기 혼자 무슨 이별통보를 하고 그래요? 첫 이별통보가 나가죽으라는 저주식 통보라니……어디 가요? 내 말 안 끝났는데 듣고 가요 좀.” “…….” “공작님! 어디 가시냐고! 내 얘기 좀 들어봐요, 들어보라니까?" 다급함에 절로 반말이 튀어나갔다. 허나 태화는 자기가 말을 놓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만큼 갑갑하고 다급했다. 공작은 뒤를 돌지 않았다. 대신 떠나려던 발걸음을 멈춘 채 탐탁지 않은 목소리를 흘려보냈다. “감히 내게 뻔뻔히 하대를 하겠다는,” “……했다고.” “뭐라는지 안 들립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그 혀를 함부로 놀리지,” “…그니까, 내가…했다고.” 만사 뺀질거리던 여자치곤 예외일 만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왼쪽 눈을 내리감고서 오른쪽 눈만 어설프게 뜨고 있는 모습은 괜히 비연의 여주인공처럼 초라해보였다. “…잘못했다고……" 이런 식으로 헤어지면 공작은 영원히 클리어 할 수 없을 것이다. 태화는 그런 결론이 내려졌다. 훗날 다시 만난다하더라도 한 번의 성관계는커녕 서로 얼굴보기도 꺼려지고 민망할 게 분명했다. 그녀는 필사의 의지로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매달렸다. 태어나서 이렇게 비루하게 남자를 잡아본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남자도 아니고 게임캐릭터지….’ 한낱 게임캐릭터한테 낯이 간지러워지더니 이젠 하다못해 죄책감까지 가지게 된 자신이었다. 공략해야 될 게임 속 남주를 점점 살아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나보다. 암만 게임폐인이라곤 해도 현실과 가상정돈 구분한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일뿐인데도 이래서 현실감이 무서운 건가 싶었다. 가상과 현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감각은 괴리감을 낳더니 어느 순간 자연스레 받아들여졌다. 이러다간 모니터 속의 남캐와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기억상실증인 척 군건 잘못했다고… 근데…네 마음 가지고 막 놀고 그런 건 절대 아니야.” “말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아, 진짜 사람 못 믿네.” “당신의 무얼 보고 믿습니까. 그 거짓이름? 알 수 없는 신분? 그 천한 몸뚱이만 굴리다 와서 잘 모르다본데 몸만으로 남자를 눕혀 신분을 거머쥐려 마십시오. 그렇게 산다면 당신은 평생 성욕을 풀기위한 고깃덩어리일 뿐입니다.” “날 아직도 그렇게 모르겠어? 적어도 나랑 같이 있으면서 조금은 알 수 있었을 거 아냐. 내가 너 때문에…!” 빌어먹을 물고기새끼의 가시에 몸빵도 해주고, 몬스터 백오십 마리도 잡아주고, 나무다리도 세 개 건설해줬다고 말하려다가 말았다. 무슨 대단한 선행도 아니고 서로 돕자고 한 일을 일일이 나불대는 것도 쪽팔리다. 애초에 제 입으로 탄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난 그래도 조금은 그쪽..." 싫지는 않았는데. 렐리아는 애꿎은 머리만 헤집었다. 이제까지 조금은 공작과 가까워졌다고 여겼다. 좀 편한 사이가 됐다고 여겼는데 이젠 말짱 도루묵인가 싶었다. “그런 약은 수를 써서 내 옆에 있으려고 했다는 것에 나는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그대가 무슨 속셈을 품고 있는지 알기에 더더욱.”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반성할게. 뭣하면 지금 여기서 손들고 서있을까? 아님 무릎 꿇을까?” 렐리아는 눈밭위에 무릎을 꿇고서 두 팔을 번쩍 들어올렸다. “공작? 나 좀 봐봐, 응?” 이렇게 내가 눈물겹게 반성을 하는데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을 거냐는 함축적인 어조였다. 공작의 눈길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때 별안간 근처에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숲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블리어는 심각해진 얼굴로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뭐가 오고 있었다. 쿵, 쿵 하고 묵직한 도끼로 나무를 베는 소리가 둔탁하게 몇 번 들린다 싶더니 나무 쓰러지는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괴상한 소리가 그 둘의 귀에 잡혔다. 콰드드드ㅡ 얼어붙은 땅을 거칠게 마구 긁어대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블리어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무기를 땅바닥에 질질 끌며 다가오는 소리였다. 먼 곳에서 나무가 차례차례 쓰러지더니 이윽고 그 육중한 무게를 알려주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천천히 바닥에 꿇어있던 몸을 일으켰다. 공작과 한마음이라도 된 양 그쪽방향을 주시했다. 뒤늦게 캄캄한 어둠속을 헤치고 기다란 두 팔을 늘어뜨린 기이한 실루엣이 잡혔다. 콰드드드ㅡ 괜히 등골이 오싹해지게 만드는 그 꺼림칙한 소리가 얼마안가 근처에서 뚝 끊겼다. 렐리아는 오른쪽 눈을 가늘게 뜬 채 그곳을 응시했다.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2미터 반은 족히 되어 보이는 거구의 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사람만한 크기의 새카만 쇠붙이를 든 괴물은 태생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었다. 인간의 살가죽을 벗긴다면 저런 색이지 않을까싶을 만큼 거죽자체가 선홍빛이었다. 매끄러운 거죽이 아닌 우둘투둘한 주름으로 이뤄진 거죽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주름이 아닌 반투명한 혈관이었다. 혈관이 다 비쳐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괴물의 얼굴은 차마 쳐다보기도 징그러운 생김새를 자랑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이마쯤에 붙어있는 눈알은 열여섯 개였으나 하나같이 퇴화직전처럼 좁쌀만 했다. “…으.” 탁한 노른자색의 좁쌀눈들이 데구르륵 사위로 구르더니 이윽고 작은 소리를 낸 렐리아를 향해 꽂혔다. 그것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소름끼치게 웃었다. 발견했다, 하고. 징그러운 외양을 가진 괴물은 렐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 장대한 체구만 아니었다면 단순히 피부가 녹아내린 인간이 아닐까 싶을 만큼 이족보행에 능했다. 쇳덩이처럼 투박한 무기를 바닥에 질질 끌며 걸어오는 폼이 흡사 술에 취해 휘청거리는 사람과 비슷했다. 순식간에 괴물은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곤 저의 허리쯤에 오는 여인을 향해 기이하게 목을 꺾으며 머릴 들이밀었다. 경골로 추정되는 부위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허나 괴물을 눈앞에 두고도 여자는 공포에 질려 굳은 건지 꼼짝도 안했다. 이윽고 뼈만 남은 것 같은 손가락을 꿈틀거리며 괴물이 늘어뜨린 긴 팔을 여인을 향해 뻗었다. 블리어는 낮게 혀를 한번 차고서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날카로운 금속성에 괴물이 우뚝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열여섯 개의 동공이 방향을 찾지 못해 마구 돌아가다가 얼마안가 그를 향해 멈췄다. 공격의사를 눈치 챈 건지 힘없이 늘어뜨리고만 있던 쇠 무기를 괴물이 일순 높이 쳐들었다. 곧바로 자신을 향해 달려들 거라 여기고서 그가 검을 치켜세웠으나 괴물은 맥없이 무기를 언 땅위에 쾅 내리찍었다. 움직임이 둔한 편인가. 블리어는 섣불리 움직이기보단 괴물의 움직임을 차분히 주시했다. 그때, 괴이한 울음소리가 괴물의 벌어진 입에서 터져 나왔다. 쉬이익 대는 소리는 구렁이의 목을 조른다면 이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싶을 만큼 얇고 째지는 소리였다. 블리어는 괴물의 일그러진 흉측한 안면을 쳐다봤다. 누런 이가 송곳처럼 박혀있는 입은 가늘게 찢어져있었는데 마치 웃는 것 같았다. 감이 좋지 않다.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뒤늦게 사방에서 콰드드드 하고 땅을 긁는 소리가 일제히 요란스럽게 울렸다. “…!” 블리어는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사이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들을 올려다보았다. 억지로 살가죽을 잡아 뜯어서 옅게 핏물이 맺힌 것 같은 외양은 역시나 토가 나올 듯 징그러웠다. 음산한 어둠을 헤치고 나온 괴물들은 저들끼리 쉬익거리며 대화를 주고 받는 듯했다. 의외로 지능이 있다는 소리다. 그들은 좁쌀처럼 작은 눈알들을 시도 때도 없이 도르륵 굴렸다. 마지 침입자를 찾듯이. ‘스물, 아니 서른인가.’ 떼로 몰려와 일일이 셈할 수는 없지만 족히 서른은 되는 것 같았다. 블리어는 간격을 두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섰다. 눈을 밟는 그 희미한 소리에 괴물들의 눈알이 일제히 블리어가 있는 곳으로 꽂혔다. ‘…시력보단 청력에 의존하는 건가.’ 그 짧은 시간동안 괴물에 대해 파악한 블리어는 서서히 몸을 굽혔다. 그러곤 근처에 나뒹굴고 있던 묵직한 돌 하나를 왼손에 쥐었다. 웬만한 거구의 신장을 훨씬 웃도는 괴물들이 저마다 살의를 띠고 무기를 쳐들었다. 그 순간 블리어가 돌을 최대한 먼 곳을 향해 던졌다. 툭, 투두둑. 돌덩이가 먼발치 나무둥치에 정확히 맞음과 동시에 가는 나뭇가지들이 쌓인 눈을 떨어뜨렸다. 그 소리에 서른 마리의 괴물들이 그곳으로 홱 머리를 돌렸다. 데구르르 정신 사납게 굴러가는 열여섯 개의 눈알을 구경할 틈도 없이 블리어는 근처에 서있던 여자의 팔을 붙잡고 뛰었다. 그 발소리에 다시금 괴물들의 시선이 그들의 뒷모습에 따라붙었다. 쉬이익…쉬이이익. 아까의 울음소리가 기분 나쁜 웃음소리라면 이번엔 신경을 긁는 쇳소리였다. 렐리아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십 개의 쿵쿵대는 발소리와 울음소리에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이 나선다면 오 초도 안 걸려 저 기분 나쁜 것들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을 테다. 문제는 공작의 앞이라 차마 나설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공작을 다른 데로 보내버려? 그나저나 아깐 죽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면서 챙기네.’ 정말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렐리아는 설렁설렁 달리면서도 저의 팔을 붙잡고 달리는 그를 힐끗 주시했다. 어두운 진녹색 눈은 오로지 앞만 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끝이 미묘하게 일그러져있는 게 그도 이 상황이 답답하긴 매한가지 인가보다. 원래도 핏기 없는 창백함을 자랑한다지만 그 백지장 같은 얼굴은 사태의 심각성에 단단히 질려있는 것 같았다. 깊숙이 들어왔던 숲에서 조금 벗어난 것 같다고 여길 때 렐리아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창과 창이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가 정확히 야영지 쪽에서 나고 있었다. 야영지 곳곳에서 퍼져나오는 불빛이 얕은 어둠을 몰아내고 이곳 숲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동시에 괴물과 치열한 전투 중인 기사들의 그림자가 먼 곳에서도 뚜렷하게 보였다. 이 산 일대가 괴물들의 영역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띈 건 비단 자신들뿐만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 무섭게 렐리아는 튀어나온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 “…….” 블리어는 순간적으로 놓친 그 가느다란 팔을 다시 붙잡아 일으켜 세우려했다. “으아아아악!!” 숲속을 울리는 기사의 처절한 비명에 블리어는 그제야 흠칫 주둔지 쪽으로 고갤 돌렸다. 침착한 성정의 그답지 않게 눈동자 위로 드리워진 노란 불빛은 마구 흔들렸다. 그는 급히 반대편으로 고갤 돌렸다. 바로 멀지않은 곳까지 쫓아온 서른 마리의 괴물들, 일으켜 세운다 해도 이미 늦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블리어는 그대로 여인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거두었다. 살릴 수 있다면 살린다. 하지만 저가 살 수 있다는 보장조차 없다면 외면하는 게 옳다. 이제껏 저를 농락한 가증스러운 노예계집이라면 더더욱 이래야만 했다. 차라리 제 휘하의 기사를 구하는 게 옳다 판단한 그는 급히 등을 돌려버렸다. 매정해 보인다면 충분히 그리 보일 수 있는 뒷모습이었다. “…….” 꿈틀하고 렐리아는 엎어진 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멍하니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저 먼 곳에서 기사를 일으켜 세운 채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모든 게 붉고 노란 불꽃의 잔영 속에서 휘날리는 검은 머리칼은 홀로 날뛰는 것처럼 보였다. 살기 위해 뭉친 기사들은 공작의 주변에서 함께 치열하게 괴물들을 베어나갔다. 그 광경을 담다가 렐리아는 제 머리위에서 들려온 소리에 굳었다. 쉬이이익, 하고 괴물의 입에서 역한 냄새와 함께 흘러나온 소리가 뇌를 벅벅 긁는 것처럼 소름끼쳤다. 앙상한 뼈마디가 느껴지는 손가락들이 렐리아의 뒷덜미를 한껏 잡아 올렸다. 마치 새끼짐승을 들어 올리는 듯한 취급에 렐리아는 옷깃에 목이 눌려 조금 숨이 막혀왔다. 가죽신을 신은 두 발이 허공에 떠있는 채로 그녀는 축 늘어져 눈앞의 괴물을 응시했다. 0021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괴물들은 바람 새나가는 듯한 소릴 내며 저들끼리 뭐라 주고받는 것 같았다. 이걸 잡아먹을지 말지 논의라도 하는 것 같았다. 얼마안가 제 뒷덜미를 잡아 올린 괴물이 저를 어깨에다 둘러업었다. 새끼짐승에서 쌀가마취급이 어딘가, 태화는 이 상황에서도 그런 태연하고 영양가 없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늘어져있었다. 생각하는 것도 귀찮아서 괴물이 움직이는 대로 허공에서 두 팔과 두 다리를 한들한들 움직였다. ‘공작은 잘한 거야. 솔직히 방금 전만 해도 다퉜던 여자를 굳~이 목숨 걸고서 지킬 필요가 뭐가 있겠어. 그러다 자기목숨까지 잃으면? 자기만 얼마나 손해겠어.’ 태화는 능글맞게 생각했다. 혼자만의 생각에 점점 깊이 잠겨 들어가는 동안 괴물들은 주둔지에서 정 반대방향으로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가만히 있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주위에 있던 괴물들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뭐라 울어보라고 재촉하는 손길에 작은 머리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움직였다. 허나 태화는 그다지 제 머리를 치든 말든 관심 없었다. 그냥 좀 멍했다. ‘그리고 걘 공작이고 난 한낱 노예취급이나 받는 여잔데 급이 다르거든~? 이 세계에 몇 없는 엄청난 권력자는 같은 목숨이래도 급부터가 다를 텐데 굳이 나 때문에 위험감수를 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남들이 목숨 희생해서라도 자길 지키려들 텐데 뭣하러~ 자기목숨 낭비하냐고. 인명을 구조해야하는 사명감이 공작한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괴물들은 산중턱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이란 게 있을 리도 만무하고 있어도 이상하겠지만 그들은 익숙하게 중턱에서 내려와 거대한 바위들로 이뤄진 지대를 넘었다. 매번 익숙하게 지나왔던 길인지 주저라곤 없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나 같아도 며칠 알게 된 짜증나는 녀석 구할 바엔 내 아래 후배녀석 구하는 게 백번 낫다고 생각해. 암 그렇고말고. 달려가서 기사목숨을 지킨 건 아무리 봐도 잘한 거야. 나야 혼자서도 잘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 기사는 아니었잖아? 살릴 목숨부터 살려야지.’ 자의로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일 때 괴물들이 어느 동굴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딱 괴물의 신장만한 높이에 두 명 정도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동굴이었다. 길고 긴 터널을 이십분 넘게 지나는 동안 온통 주위가 새까매졌지만 괴물들은 그다지 불편함이 없어보였다. 시력을 아예 잃은 것은 아니나 이런 깜깜한 암흑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적화된 종족이었다. ‘어차피~ 공작이 날 살리려했다 치더라도 더 일만 복잡해졌을 테고 까딱 잘못하면 공작이 죽을 수도 있고, 그러면 난 집으로 돌아갈 유일한 방법을 영영 잃었을 텐데!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게 아니겠어?’ 습기로 가득 찬 것처럼 점점 공기가 축축하게 변해갔으나 태화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성격적으로 둔한 것도 있지만 현재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있어 감각자체를 외면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절대로 그 공작한테 서운해서 이러는 건 아니야. 음 절대로. 절대로 그런 거 아니야. 어차피 게임이야 게임~ 심각하게 받아들일 리가 있나.’ 하하하 하고 속으로 웃으며 태화는 서서히 현실의 감각을 받아들였다. 갑자기 몸이 확 찝찝해져왔다. 한참 비가 퍼붓고 난 뒤에 느끼는 찝찝함의 거의 열 배는 되는 듯한 찝찝함이었다. 괜스레 발가락 틈사이도 축축한 것 같고 온몸 이곳저곳이 견디지 못할 만큼 근지러웠다. “하, 하하…미친. 여긴 또 어디야?” 기계적으로 웃는 것을 관두고서 렐리아는 썩은 얼굴로 현재 자신의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늘대신 까마득할 만큼 높다란 동굴천장과 오로지 석재로만 만든 건축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허름한 수준이었으나 상식은 있는지 건축물 곳곳마다 작은 횃불이 걸려있었다. 줄지어 있는 그 불빛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이 한밤중인 줄 알 것이다. 렐리아가 도착한 이곳은 마을규모는 될 법한 커다란 하나의 지하세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산 내부의 반지하층에 위치한 마물들의 군락이었다. 그녀는 긴 은발머리를 헤집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려다 그제야 제 양팔을 쥐고 있는 괴물의 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기만 해도 징그러운 선홍색거죽이 제 피부에 닿아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으으…드럽게! 아 쫌 놓으라고!” 렐리아는 자유로운 왼쪽 발을 휘둘러 그대로 오른쪽에 있던 괴물먼저 차버렸다. 괴물의 굵직한 다리에 칼을 휘두르는 것처럼 가는 종아리가 스쳤다. 살과 살이 맞닿기 무섭게 괴물의 다리가 잘려나갔다. 징그러운 살점도 단단한 뼈도 아주 깔끔하게 문드러졌다. 얼마나 빠른지 정작 그녀의 종아리에는 피조차 묻어있지 않았다. 이미터 반 크기의 괴물이 무릎이라도 꿇은 듯 작아져버리자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러니까 눈높이가 딱 맞네. 주위가 일순 소란스러워진 건 딱 그쯤이었다. 지능이 낮아서 그런지 두려움이란 걸 모르고 은발여인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런 마물들을 렐리아는 일일이 맨손으로 제압해주었다. 꽃의 머리와 줄기를 분리시키듯이 머리통을 잡아 뜯고 그마저도 귀찮으면 천장 저 높은 곳까지 날려버렸다. ‘수천 대 일? 너네도 쪽수냐.’ 대충 둘러본 결과 수천인지 수만인지 모를 징그러운 괴물들이 저를 포위하고 있었다. 수적으론 확실히 불리하다. 무엇보다 제 사위를 둘러싸고서 사람만한 도끼, 낫, 철퇴, 검을 휘둘러오는데 막을 재간도 없었다. 물론 막을 필요도 없는 것이 산산조각 나는 것은 제 머리통이 아닌 그들의 무기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맞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기에 태화는 조금씩 짜증과 강한 염증을 느꼈다. 마음속이 곪아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공작!!!” 눈앞에 있는 수많은 적들을 놔두고 렐리아는 먼 곳에 있는 그를 찾았다. 가슴속에서 이제껏 묵혀오기만 했던 온갖 불만과 짜증,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 패고 또 패도 후련하질 못했다. 수천마리의 모기와 싸우는 기분이라 몸 전체가 근지럽고 따갑고 더러운 기분만 자꾸 들었다. “내가 사과했는데 왜!!” 그녀가 족족이 해치운 괴물들은 하나같이 강하게 내리친 손바닥 안에서 터져버린 모기꼴을 면치 못했다. 그동안 렐리아는 끊임없이 역한 피를 뒤집어쓰고 또 뒤집어썼다. “왜!!” 쾅, 콰아앙! 주변의 건축물들은 이미 돌가루로 변한지 오래였다. 즐비하게 널린 수백 마리의 사체들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렐리아는 끊임없이 제 주위로 쏟아져 나오는 그것들을 두들겨 패댔다. “왜!!!” 그녀는 손바닥만으로도 죽일 수 있음에도 부러 주먹을 꽉 쥐고 사정없이 내질렀다. 돌아가는 믹서기의 날카로운 칼날에 만난 과일처럼 괴물들은 붉은 과즙과 같은 피를 쏟아내며 갈가리 찢겨졌다. 그녀의 주먹 앞에선 한 장의 얇은 티슈를 방불케 하는 가죽이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내 맘을 알아?!!” 어느새 불만의 화살은 공작이 아닌 이 세상을 향해 돌아가졌다. “여기 존나 지루해서!!” 바람이 훅 불만큼 강하게 주먹을 내지름과 동시에 수백 마리가 허공에 붕 뜨더니 곳곳에 흩어져있는 건물잔해위에 처박혔다. “미쳐버릴 것 같다고!!!” 괴물하나를 빙빙 돌리며 내던진 솜씨에 근처괴물들이 묵직한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맥없이 쓰러져갔다. 그 꼴좋은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뒤에서 힘껏 제 머리를 도끼로 내리찍는 게 느껴졌다. 두개골을 반으로 쪼갤 생각이었을 테지만 은빛머리칼 몇 가닥이 잘려나가 허공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는 곧바로 깨진 도끼를 쥔 괴물을 한 팔로 제압했다. 이번에 괴물을 아예 두 팔로 번쩍 쳐들어 올려 세게 내던져버렸다. 굉장한 속도로 다른 괴물들도 휩쓸고 날아가더니 끝내 동굴벽에 머리를 처박혔다. 쿵, 하는 장렬한 소음과 함께 부서진 두개골파편이 여기저기 튀었다. “티비도 못 봐! 폰도 없어! 인터넷도 안 돼!!” 그동안에도 렐리아의 불만은 계속 이어져갔다. 그 소란에 이 지하세계의 왕으로 추정되는 괴물이 먼 곳에서 서서히 다가왔다. 느릿하게 한 발을 옮길 때마다 쿵 소리가 나며 스믈스믈 어둠 속 안개가 걷혔다. 웅장한 동굴천장 아래 족히 사 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몸집이 드러났다. 거인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거대했다. 회백색의 마디 뚜렷한 척추가 드러나는 앙상한 몸이었으나 그 뼈만큼은 웬만한 나무둘레만큼 굵직했다. 백 개의 가뭇한 눈알이 전두부에 점처럼 박혀있는 안면은 흡사 해골과 지네를 동시에 연상케 했다. 괴물은 저보다 한참 작은 인간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턱 근육이 찢어질 정도로 입을 벌린 채로 눈알을 마구 굴려댔다. 이윽고 오십 쌍의 눈동자가 여인을 향해 내리꽂혀졌다. 뼈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팔을 휘둘러온 건 그 순간이었다. 콰가가가, 돌로 된 지하의 땅이 부서져 움푹 파일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그것에 시선조차 주지 않고 그저 얍삽하게 피한 뒤 괴물의 복부를 향해 뛰어올랐다. 작디작은 주먹에 뱃속 내장이 꿰뚫리고 척추도 우드득 소릴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등 뒤에 날개가 돋아나듯 괴물의 뚫린 등가죽에서 붉은 내장들이 튀어 올랐다. 장렬하게 뒤로 쓰러진 거구의 괴물을 렐리아는 거치적거리는 종잇조각 치우듯 수백 구의 사체들 위에 대충 던져놓았다. 그에 괴물들은 더욱 광란의 도가니에 빠져 인간여자 죽이기에 힘썼다. “난 말야. 하루라도 더 이곳에서 못살겠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오로지 일방통행이었다. 상대도 안 되는 괴물들의 살기 따위 알 바 아니다. 그저 이 구역질나는 면상들이 제 앞에서 꺼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마치 이 세상을 원망하듯이 그녀의 두 손은 충실히 괴물의 혐오스런 가죽을 찢고 내장을 비틀어 짰다. “여기 음식 안 맞는다고!!” 오로지 눈앞의 목표물을 제거해야 속이 시원할 사람처럼 그녀는 지하세계를 파괴해갔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수천마리의 괴물들을 휩쓸어버렸으나 그녀의 분노는 점점 투정으로 바뀌어갔다. “엄마아빠 보고 싶다고!!!” 그녀가 한번 펄쩍 뛸 때마다 동굴천장이 무너질 듯 크게 진동하고 주위에 있던 괴물들이 무너지는 벽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이틀에 한번 연락이라도 하게 해줘!” 콰과과과강, 그녀의 주먹 위에서 날아다니던 괴물들이 동굴 벽에 처박혔다. “걱정하신다고!! 제기랄!” 광물보다 단단한 동굴 벽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엄마아! 아빠아아!” 코끝이 찡해졌다. 소리 내서 부르니까 괜히 더 울컥해져버린 태화였다. 이십사 년간 비록 게임밖에 열심히 한 게 없는 딸이래도 외딸이라 부모님 눈에는 예뻐 보였던 게 자신이었다. 중, 고, 대 모든 학창시절을 통틀어 나름 성적도 중간을 유지했었고 비록 계약직이긴 해도 취업도 한번 했었다. 그래도 못나지는 않은 딸이었다. 게임은 좀 끊으라고 하셨지만. “돌아가면 게임도 끊을게! 이젠 열심히 살 거라고!! 제발 여기서 나 좀 꺼내줘!!!” 이 지긋지긋한 게임세상에서 로그아웃 좀 시켜달라고 그녀는 신을 향해 부르짖었다. 만렙이 되었다고 해도 하나도 안 기뻤다. 여기 있으면서 저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처절하게 깨달았다. 게임 속에서 만렙이면 뭐하나 결국 제겐 현실이 더 중요했다. 만렙장비? 캐시템? 캐릭터빨? 이딴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모니터 밖에서 즐기는 건 재밌다. 하지만 모니터 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화병이 날 것 같았다. 제겐 현실에 두고 온 소중한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역하렘 이 개새끼야!!!” 그녀는 한 팔을 높이 들어올렸다. 여전히 양손에 묻은 뜨거운 핏물이 바닥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너 때문에 내가!!” 무너질 듯이 마구 진동하는 천장을 향해 그녀는 당당히 중지를 치켜세워보였다. “돌아버리겠다!!!” 이거나 처먹어, 하고 세상을 향해 친히 인사하기 무섭게 까마득한 천장이 내려앉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한번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은 있다더니, 태화는 갈라진 천장사이로 해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흙더미를 맨몸으로 막아섰다. 충격에 의한 산사태였다. 그녀는 두 팔로 얼굴을 가리고서 두 다리는 단단히 지면에 고정시켰다. 지하동굴의 천장, 즉 산기슭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놓았으니 그 여파로 한동안 산전체가 흔들렸다. 재난 급의 거대한 모래폭풍이 허공에서 일어나 렐리아는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귀에도 모래알들이 뭉텅이로 낀 듯했다. 호흡기를 손으로 틀어막고서 그녀는 오 분 가까이 흙더미와 싸워야만 했다. 저의 몸을 덮다 못해 쓸어버릴 그 거대한 흙더미를 차례차례 넘겨버리고서 그녀는 마침내 동굴천장 밖으로 뛰어올랐다. 요원히 퍼져오는 달빛이 처참하게 부서진 구멍사이를 비추었다. 단 한 번도 달빛을 맞아본 적이 없었을 지하세계는 지상의 대기와 맞닿기 무섭게 토양아래 묻혀 흔적도 없이 몰락해버렸다. 수천마리의 사체들도 폐허가 된 그곳의 잔해와 함께 흙 속에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지하뿐 아니라 지상도 마찬가지로 엉망이었다. 어디에서 자꾸만 뭉게뭉게 피어오르는지 대형흙먼지가 허공에 떠돌고 있었다. 렐리아는 조용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찾아온 고독은 참기 힘들 만큼 길었다. 돌가루와 흙먼지를 뒤집어쓴 초라한 은발을 늘어뜨린 채로 그녀는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차츰 대기를 점령하고 있던 흙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옅은 먼지를 뒤집어쓴 입술이 크게 벌려졌다. 처음 외친 말은 당연하게도 한 사람을 향해서였다. “공작!!!” 그나마 사이가 가까워졌다 여겼던 공작도 저를 버렸다. 0022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렐리아는 피식 조소를 지었다. 공략대상인 그도 이젠 저가 죽든 말든 신경 안 쓰는데 호감? 사랑? 그딴 거 알까보냐. 이 역하렘게임은 진즉 망하고도 남았다. 이젠 집에 돌아가는 것도 글렀다. 결국 이 게임 속 세상에서 의지가 되는 거라곤 이 몸뚱이 하나밖에 없었다. “네가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 내가 죽어도 눈 깜빡하지 않을 거란 것도!! 그래도 염치불구하고 부탁 좀 하나하자! 나 좀 집에 가게 도와주라! 젠장…그놈의 섹스밖에 방법이 없단 말야.” 공허하게 메아리치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렐리아는 털썩 드러누웠다. 달빛이 내려앉는 세상은 아름다웠으나 그 눈부신 빛에 지독히도 눈이 시리기만 했다. 꼭 지진의 잔해 속에 깔린 어린소녀라도 된 기분이었다. 목 터져라 보고 싶은 엄마아빠를 부르짖고 누가 좀 살려달라고 발악하는 기분이었다. 이 몸뚱이만이 남자를 사로잡기엔 쓸모 있다 여겼는데 공작은 이젠 제 몸뚱이조차 관심 없어보였다. 아니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던가. 이 세계에도 아름다운 미녀는 널리고 널렸을 텐데 굳이 제게 눈길을 줄 이유는 없었다. ‘내가 죽어도 상관할 필요도 없겠지…하아. 막막하다.’ 절망이란 두 글자가 눈앞에 드리워졌다. 막막함에 머리끄덩이를 부여잡고 있을 때 다 끝났다고 여겼던 상황이 또 한 번 심상찮게 돌아갔다. 쿠구구구구구. 대지가 크게 떨리며 드높은 산꼭대기에서부터 무언가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진이라도 일어나려는 건가, 태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누워있던 그녀의 머리위로 자동차 한 대만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콰득, 바위가 두 갈래로 나뉘기 무섭게 그 사이로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차면 툭 부러질 듯한 가냘픈 두 다리로 서서 그녀는 머리 위에서 수없이 떨어져 내리는 바위들을 올려다보았다. 비처럼 굴러 떨어지는 바위들은 대형코끼리도 깔아뭉갤 수 있을 정도였다. 일일이 격파하기도 귀찮아 렐리아는 최대한 뒤로 멀리 물러섰다. 그녀가 서있던 곳뿐만 아니라 산 아래전체가 지면에 처박힌 수백 개의 바위들로 쌓여져 하나의 돌산을 이루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짙은 먼지에 인상을 구기며 렐리아는 까마득한 산꼭대기 위를 올려다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흐릿하게나마 무언가가 시야에 잡혔다. 산꼭대기 위에 작은 산봉우리를 하나 더 얹어놓은 듯한 크기의 그것은 움직였다. 이윽고 그것이 박쥐날개와 비슷한 긴 날개를 펼쳤다. 살아 움직인다는 사실자체가 이렇게 공포적일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렐리아는 긴장이라는 걸 했다. 드래곤. 비록 게임세계관에 따라 그 설정이 미묘하게 다를 진 몰라도 그 자체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드래곤 아르카이샤’에서 저것에게 수천 번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래도 긴장이 안 될 리 없었다. 다행히 이곳 세계의 드래곤은 사랑을 얻어내야 하는 공략대상 중 하나였다. 이 몸으로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저것을 상대로 싸워야 될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좋았어. 공작대신에 저 드래곤부터 어떻게든 해보자.’ 그것이 울부짖는 소리가 대지전체를 뒤흔들었다. 왜 울부짖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드래곤이 바로 이 산위에 있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야 이 작은 기회라도 놓칠 수는 없었다. 렐리아는 발밑에서 콰드득 소리가 날만큼 힘껏 지면을 박차고 돌무더기를 뛰어올랐다. 단번에 산의 초반부를 통과한 그녀는 무서울 속도로 산꼭대기로 향해 달려갔다. * 블리어는 땅 위에 늘러 붙은 괴물들의 살점과 고인 피 웅덩이를 밟은 채 주변을 돌아보았다. 야영지는 쑥대밭으로 변해있었다. 찢겨지고 부서진 천막근처엔 부상당한 기사들이 주저앉아 있었고 비교적 멀쩡한 기사들은 바닥위에 나뒹구는 물건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주위에서 간간이 흘러나오는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흡사 병자들만 모아놓은 막사 안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는 고약한 피 냄새와 눅눅한 시취가 진동을 했다. 허나 그의 두 다리는 굳건한 버팀목처럼 몸을 지탱하고선 그 자리에서 좀체 움직이질 않았다. 꼿꼿하게 고개를 쳐든 채로 블리어는 침통한 모습을 한 기사의 보고를 들었다. “사망자 두 명, 부상자는 열다섯 명입니다. 부상자들 가운데 중상을 입은 기사는 총 다섯입니다. 중상의 정도는 혼수상태까지는 아닙니다만 아무래도 바로 이동하기엔 힘들 것 같다는 게 의무병의 소견…” “지금 당장 출발합니다.” 기사들에게 잠시간의 휴식도 절박해보였으나 블리어는 가차 없이 명을 내렸다. 그에 기사가 머리를 숙이고서 물러났다. 명을 전달받은 기사들은 바로 시신 두 구를 수습하고 출발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멀쩡한 말이 몇 되지 않아 고되게도 마을이 나올 때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어깨와 팔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는 기사, 아직 치료가 덜 되어 다리한쪽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기사, 복부에 심한 부상을 입은 기사를 우선적으로 말에 오르도록 했다. 다들 동료를 잃은 비통함과 피로에 휴식이 절실했으나 무리해서 이 야밤에 출발하겠다는 공작의 뜻을 꺾을 순 없었다. “…레이디가 안보여.” 샛노란 금발에 묻은 마물의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라미우스는 서성거렸다. 지치기는커녕 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했다. 다른 이들보다 월등한 체력을 가진 라미우스에 반해, 킬리는 흙바닥에 주저앉은 채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피곤해서 죽겠다는 한탄이었다. “레이디는 대체 어딜 간 거지? 아까부터 쭉 안보였다고. 오 맙소사…혹시라도 전투에 휩쓸린 거면 어떡하지? 가련한 레이디를 위험 속에 방치하다니 세상에 이런 무책임한 기사가 또 어딨을까!" 혼자서 연극이라도 하는지 심각했다가 걱정했다가 자책했다가 아무튼 바쁜 녀석이었다. 물론 킬리라고 해서 그녀가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에 공작과 함께 있었던 걸 알기에 그저 무사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자신들보다도 몇 배는 출중한 검술실력이 갖추고 있는 공작의 옆은 확실히 안전할 테니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공작 혼자만이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건 아무래도 조금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킬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에 혼자서 구시렁거리던 라미우스가 그의 곁에 따라붙어서 어딜 가느냐고 채근했다. 킬리는 답하지 않고 멀리서 걷고 있는 공작을 향해 재빨리 다가갔다. 그에 영문을 알 수 없단 듯 라미우스는 졸졸 따라가다가 이윽고 공작의 앞에 당도하자 놀란 눈을 했다. 공작씩이나 되는 거물을 사적으로 뵙기 청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못된다. 더욱이 무턱대고 발길을 붙잡는 건 아무래도 불경에 해당된다. 친구의 돌발행동에 ‘무슨 생각이지?’하면서도 이윽고 킬리가 머리를 숙이며 예를 표하자 곧장 저도 따라서 머릴 숙였다. “공작전하. 잠시 여쭙고 싶은 게 있습니다.” 킬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담담한 어조였다. “함께 있던 여인은 어디로 간 겁니까? 보이지 않아서 말입니다.” “모릅니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그 여인은 아마 죽었을 거라는 겁니다.” 피로에 찌든 눈으로 블리어는 그리 답했다. 짓물러진 잎처럼 눈빛은 탁하게 변해있었다. 차마 생사여부에 관해 듣게 될 줄은 몰랐는지 킬리보단 라미우스가 훨씬 더 놀란 반응을 드러냈다. “…그런! 너무 섣부른 판단 같습니다. 제가 한번 이 주변을 수색해보겠습니다. 어쩌면 살아있을 지도…” “라미우스 므토르 경. 그대의 단독행동으로 출발이 지연되었다 또다시 몬스터의 습격을 받게 된다면 그땐 그대가 이 목숨들을 책임질 것입니까.” 블리어는 차갑게 꾸짖었다. 냉정을 유지하던 그 눈은 조금 일그러져있었다. “기사도도 중요하나, 지금은 죽었을지도 모를 실종자보다 그대 곁에 살아있는 자들을 우선시하십시오.” 금, 명예, 그 어떠한 것보다 생명만큼이나 묵직한 것도 없었다. 블리어는 오십여 명의 기사들의 목숨을 어깨에 짊어진 총책임자로서 신중하게 최선의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기에 기사의 자진수색을 단칼에 불허했다. 대신 부상병들을 도와 신속히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명했다. 라미우스는 대답 대신 머리를 숙임으로써 그의 명을 받아들였다. 왜 여인을 찾지 않는 거냐고 따지는 모자란 짓은 할 수가 없었다. 동료들의 목숨, 그리고 자신의 목숨이 쉽게 좌지우지되는 이 상황에서 결코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킬리는 부정도 수긍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말이 없었다. 대신 공작이 내린 명에 따라 부상병들을 부축해 말에 오르게 돕고 떠날 채비를 마쳤다. 사위가 어두워진 야밤, 무표정하게 선두에 선 공작이 천천히 말을 몰며 어둠을 헤치기 시작했다. 깨끗한 모포를 덮은 시신 두 구를 수레에 싣고 그들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때 먼 곳에서 천둥소리와 같은 소리가 들려오자 토벌단일행이 우뚝 멈춰 섰다. 이윽고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놀란 말들이 앞발을 들어 올리며 날뛰었다. 난데없는 굉음이 울려 퍼지는 건너편의 산은 하필이면 그들이 지나가야 할 산 중 하나였다. 부상병들은 벌써부터 두려움에 질린 눈을 했다. 얕은 신음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올 때 블리어는 홀로 바위처럼 굳건해야만 했다. “저곳만 지나가면 살 수 있습니다.” 여전히 조금의 미동 없이 정면을 바라본 채 그는 말했다. “나를 믿으십시오.” 0023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지나온 길이 모두 파괴될 정도의 미칠 듯한 속도로 렐리아는 산꼭대기에 올라섰다. 정상에 올라오기까지 이삼 분도 걸리지 않았다.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정상에 발을 디뎠을 때 그녀가 가장 먼저 본 것은 날카로운 하얀 발톱이었다. 네 갈래로 찢어진 발가락에 달린 각각의 발톱은 그 크기가 소형차에 맞먹어보였다. “이봐!” 까마득한 높이에 드래곤의 얼굴조차 보기가 힘들었다. 렐리아는 목을 꺾고서 드래곤의 턱으로 추청 되는 부위만 지그시 노려보았다. 드래곤과 자신의 크기를 대략 비유하자면 빌딩 한 채와 지나가는 행인정도의 크기였다. 드래곤의 가죽은 그래픽으로 보았던 것과는 천지차이일 정도로 압도적인 현실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비늘 하나하나가 마치 은색의 갑주로 이뤄진 것처럼 한 눈에 보기에도 단단해보였다. 이제껏 이 주먹으로 얼음판도 뚫고 광산도 뚫었는데 왠지 이 은빛비늘은 조금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봐!!!” 거대한 드래곤은 주둥이를 닫고 크르르르, 하는 흉포한 소리를 간간이 흘렸는데 그 소리의 울림이 바닥을 통해 느껴질 정도로 강한 진동이었다. 이 바위지대가 흔들릴 정도이니 상당히 어마어마한 힘의 소유자라는 건 체감을 통해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내 목소리 안 들려?!!!” 개미가 된 기분으로 렐리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소리에 그제야 까마득한 높이에 있던 드래곤의 머리가 스르륵 내려왔다. 경이로울 만큼 은빛광택이 흐르는 머리는 흔히 알고 있는 대로 파충류의 가느다란 두상을 띠었다. 동굴처럼 커다란 한 쌍의 콧구멍과 그곳에서 한참을 미끄러지듯 올라가야 나오는 눈. 그 눈은 마치 단단한 갑옷과 방패로 몇 겹을 둘러싼 것만 같이 두꺼운 막들로 싸여있었다. 뒤늦게 드래곤이 새하얀 눈을 떴다. 은빛과 백색이 어우러진 눈은 기묘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자그마한 자신을 향해 초점을 맞추기 위해 용쓰듯 가느다랗게 눈을 접었다. 그르르르르르, 다시 한번 낮은 울림이 산 정상의 바위지대를 뒤흔들었다. 은색안광 위로 아무런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소름끼칠 만큼 무서운 눈알을 한번 아래로 굴리더니 이윽고 드래곤이 빌딩과 맞먹는 육중한 몸을 움직였다. 날카롭게 세워진 네 개의 발톱이 허공에 붕 떠오르기 무섭게 드래곤의 발이 그대로 콰아아아앙! 여인을 내리찍었다. 마치 개미 밟아 죽이는 것보다 못한 행동이었으나 그 위력은 전방 백 미터에 있던 모든 것들이 허공에 붕 뜰 정도였다. 견고하게 굳어있던 토양이 덩어리째 부서져 내리고 지면아래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나무들은 뿌리째로 허공에 들릴 정도였다. 그 파괴력을 몸소 지켜본 렐리아는 처음으로 오싹한 기분에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다행히 제 머리위로 천장과도 같은 발바닥이 내려앉기 무섭게 반대편으로 튕겨져 나갔으나 만일 저 아래에 있었다면 뼈도 추리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하렘이라며? 이 시밤……’ 역하렘이란 원래 이런 것인가 렐리아는 장르자체를 의심할 정도였다. 공략대상인 공작도 그 모양이고 드래곤도 이 모양이다. 원래 로판에서 나오는 드래곤은 멀쑥한 정장차림의 은발미남이 정석이 아닌가. 이건 뭐 파괴본능에 눈을 뜬 빌딩만한 괴물일 뿐이었다. 차라리 ‘드래곤 아르카이샤’에 나왔던 최종몹 아르카이샤가 훨씬 나았다. ‘적어도 걔는 날 발로 밟아 죽이려하진 않았다고!’ 부활템이 아깝기는 해도 생각해보면 꽤 정중한 수천 번의 죽음이었던 것 같다. 이 눈앞의 거대한 괴물에 비하면 뭐든 안 괜찮을까 싶지만. “이봐!!! 난 너와 대화를 나누러…?!” 렐리아는 욱해서 입을 열었으나 동시에 기다란 꼬리가 휘둘러져오자 허공을 박차고 높이 뛰어올라야만 했다. 대형트레인을 스무 대쯤 늘어놓아야 저 꼬리의 크기에 맞먹을 테다. 번지점프대의 높이만큼 뛰어올랐으나 문제는 머리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몸이었다. 이대로라면 머리부터 추락할 지도 모른단 생각에 그녀는 왼쪽 다리를 휙 차올려 다시 중심을 맞추려했다. 까마득한 공중에서 서커스단의 아슬아슬한 묘기를 벌이는 기분이었다. 오금을 못 펼 정도로 무서웠다. 롤러코스터의 360도 코너를 혼자서 도는 기분에 렐리아는 새어나가려는 비명을 꽉 다물린 잇속에 가뒀다. 하지만 지면에 간신히 착지하려는 순간 다시 드래곤꼬리가 세게 휘둘러져 왔다. 이번엔 정확히 그녀를 노리고 날아왔기에 렐리아는 순간적으로 피할 수가 없었다. 그 철제다리처럼 단단한 꼬리에 홱 채이듯 작은 몸이 눈 깜짝 할 사이 반대편 산으로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단단한 암벽의 중간부분이 완전히 둥그렇게 문드러져 흙먼지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마치 대포라도 쏜 듯한 처참한 광경 속에서 투둑 투둑 돌덩이만이 까마득한 암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 구멍사이에 찌그러진 것처럼 자리 잡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컥…쿨럭……쿨럭.” 그녀는 불편한 자세를 한 채 기침을 터뜨렸다. 한순간 고통에 바짝 폐가 억눌렸다가 뒤늦게 발작적으로 터져 나온 기침이었다. 처음으로 고통이란 걸 느낀 것 같았다. 척추가 찌르르 울리면서 뒤통수와 목이 얼얼하기만 했다. 다행히 피가 나진 않는 것 같았다. 렐리아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나 곱씹어볼 겨를도 없이 뚫린 구멍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집중했다. 맞은편 산 꼭대기위에서 드래곤이 천천히 날아오르고 있었다. 거대한 허리케인이 쓸고 지나간 것 같은 바위지대에서 벗어나 정확히 자신을 향해 그 육중한 머리를 돌렸다. 달빛이 기괴하게 깔린 어둠 속에서 유독 그 은빛비늘로 뒤덮인 드래곤만이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드러내었다. 렐리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저건 위험하다. 단순히 재난급도 아닌 저 존재자체만으로도 대륙하나가 쑥대밭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찌뿌드드한 몸을 강제로 일으켜 렐리아는 암벽 한가운데에 뚫린 구멍 앞에 아슬아슬하게 섰다. 번지점프대에서 줄 없이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상황에 내몰린 그녀는 입술을 콰득 깨물었다. 이 아래로 떨어지면 죽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충격에 자신은 죽는지, 죽으면 부활을 할 수 있는지, 게임정보가 너무나도 열약했다. 하지만 지체할 수가 없는 것은 빠르게 제게로 날아오는 드래곤 때문이었다. 살기를 잔뜩 띠운 그 은색안광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였다. 말을 못하는 발성기관을 가진 건지 대화도 통하지 않았고 그 흉포함을 억누른 진한울림만 간간이 울릴 뿐이었다. 결국 주저하느라 뛰어내리지 못한 렐리아는 코앞까지 다가온 드래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제 몸집만한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문제였다. 비행기만한 날개 한쪽과 이어진 앞발을 드래곤이 휘두르자 그녀가 들어가 있던 암벽의 일부분이 완전히 부서졌다. 거의 방 한 칸만큼 굵게 파인 흔적을 뒤로하고 거대한 암벽바위들이 허공위로 튀어 올랐다. 그 사이에 렐리아또한 있었다. 그녀는 옆으로 회전하며 튕겨져 오른 바위하나를 두 팔로 간신히 붙잡았다. 허나 바위에 붙어있는 다고 저가 받을 충격이 최소화될 리 없을 테다. 보기만 해도 간이 철렁 내려앉을 만큼 짜릿한 광경이 그녀의 시야아래 펼쳐져 있었다. 숲도 아니고 말 그대로 황량한 암회색 바위지대였다. 이 높이에서 바위 위로 떨어진다면 머리는 날달걀처럼 산산조각날 것이다. 노른자와 흰자대신 뇌와 뇌수가 터져 나올 거라 여기니 비명조차 새어나오지 않았다. 렐리아는 아찔한 높이에서 바위를 놓았다. 롤러코스터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기 무섭게 코스를 벗어나 굴러 떨어져 내리는 공포와 맞먹었다. 본능적으로 두 팔로 눈을 가리고서 그녀는 등부터 떨어져 내렸다. 말 그대로 ‘죽는다’라는 생각뿐이 온통 머리를 차지하기 무섭게 콰아아앙, 하고 자신의 몸이 바위 위에서 박살나는 것을 느꼈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우드드득 하고 잘게 부서진 듯한 거슬리는 감각들이 등 뒤에서 났다. 척추가 으스러진 거구나 싶었으나 조금 얼얼할 뿐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뒤늦게야 렐리아는 박살난 건 제 몸이 아닌 몸 아래를 받치고 있던 딱딱한 바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으로 마른 등허리를 더듬어보니 정말 척추는 제 자리를 올곧이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렐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역하렘이라며…용새끼야.” 불난 집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사위를 뒤덮는 흙먼지를 뚫고 여인은 부서진 바위지대에서 걸어 나왔다. 그 여리여리한 몸으로 살아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녀의 몸은 멀쩡해보였다. 반면 입고 있는 옷은 오랫동안 고문이라도 받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였다. 가죽화도 벗느니 못할 만큼 닳고 해져있어서 발가락이 드러날 정도였다. 렐리아는 가죽화를 벗어 대충 집어던지고서 바닥에 퉤, 하고 피가 섞인 가래침을 뱉었다. “넌 두드려 패서라도 내 남자로 만들어주마.” 단단히 독기가 오른 말투였다. 상당히 열 받은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렐리아는 맨발로 서서 허공에 있는 드래곤을 노려보았다. 만일 사람들에게 ‘무적이 된다면 가장먼저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묻는다면 ‘자기를 괴롭히거나 힘들게 했던 놈만 따로 불러내서 보복한다’가 가장 이상적인 답변일 테다. 렐리아도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생각이었다. 웬만해선 다치지 않는 무적이라는 걸 알게 됐으니 이젠 저걸 두드려 패는 일만 남았다. 렐리아는 일격을 가하기 위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자리엔 건물을 부수는 레킹볼을 땅위에 찍어 내린 것처럼 둥그렇게 거대한 금이 생겨났다. 그녀는 새총처럼 튀어 오르기 무섭게 이번엔 과감하게 왼다리를 드래곤의 복부를 향해 휘둘러 찼다. 어차피 떨어져도 말짱할 것을 아니 까마득한 발아래가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문제는 중심을 잡는 것, 바로 드래곤이 제게로 꼬리를 휘둘러오자 렐리아는 기다렸단 듯 그 꼬리의 비늘하나를 단단히 붙잡았다. 멀리 날려버리기 위해 엄청난 속도로 휘둘렀으나 그녀는 악착같이 그 꼬리에 매달렸다. 긴 꼬리가 위로 휙 치솟아 오르기 무섭게 비늘을 붙잡고 있던 양 손을 놓았다. 그녀의 가벼운 몸은 아래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타고 확 떠올랐다. 드래곤의 눈높이까지 올라오자마자 최대한 오른쪽으로 젖힌 몸을 다시 돌려놓으며 광속으로 그 초대형사이즈의 옆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드래곤의 고개가 돌아가나 싶었으나 그대로 추락하는 렐리아를 향해 머릴 숙였다. 주둥이가 벌어지더니 새카만 브레스가 뿜어져 나왔다. 렐리아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기겁하며 몸을 틀었으나 그 시커먼 기운은 왼쪽 옆구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뜨겁다. 살가죽이 타들어갈 듯이 뜨거웠다. 오만상을 지을 시간도 없이 그녀는 급히 두 다리를 쫙 벌리고 한 팔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촤아아아악, 뒤로 밀려난 몸뚱이에 맞춰 맨발과 맨손이 거친 지면에 갈려 흙바람이 일었다. 브레스가 닿은 땅은 거멓게 타들어있었다. 그을린 옆구리의 상처를 확인할 틈도 없이 렐리아는 다시 위에서 쏘아져오는 브레스를 피하기 위해 왼편으로 몸을 날려야했다. 땅을 짚고 몸을 굴린 그녀는 바로 제 머리위로 덮쳐오는 검은 브레스를 피해 오른쪽으로 급히 몸을 틀었다. 삐끗 넘어질 뻔한 몸을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어 간신히 바로잡기 무섭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두 다리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다시 한 번 땅을 박차고 먼 허공에서 브레스를 쏴대는 드래곤을 향해 빠르게 뛰어올랐다. 공중전은 불리했다. 저 거대한 날개 한짝을 뜯어버릴 생각으로 접근했으나 드래곤의 꼬리가 눈 깜짝할 새 휘둘러져와 렐리아를 지상으로 곤두박질치게 만들었다. 콰아아아아앙, 요란스럽게 땅이 부서지는 소리를 뒤로 하고 그곳으로 브레스가 쏘아져 내렸다. 주변에 있던 모든 것을 까맣게 태워버릴 듯이 강렬한 기세였다. 이윽고 브레스가 멈추자 그곳엔 뼛가루하나 남지 않은 검은 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사라진 작은 개미새끼를 찾으려는 듯 드래곤이 허공에서 육중한 몸을 돌리기 무섭게, 왼쪽날개 뒤에서 은발을 휘날리며 날아오른 렐리아가 강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드드득! 두툼한 드래곤의 날개거죽을 찢고 들어온 주먹은 드래곤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큼 작았다. 사람으로 치자면 점에 어울릴 크기였다. 허나 그 작은 상처에도 드래곤은 무섭게 울부짖으며 주둥이를 쫘악 벌렸다. 그러곤 그 방향은 정확히 렐리아가 있는 뒤편이 아닌 서쪽을 향했다. 공작과 기사들이 진영을 치고 있는 산이었다. 0024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공작과 기사들이 진영을 치고 있는 서쪽방향의 산, 그 사실이 문득 뇌리를 스쳐지나가자 렐리아는 찢어진 날개구멍에서 주먹을 빼고서 아래로 떨어졌다. 정확히 드래곤의 허벅지부분에 착지하기 무섭게 유선형을 그리는 거대한 등가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어깨로 추정되는 불룩한 부분을 밟고 다시 힘껏 뛰어오른 그녀는 드래곤의 턱 아래를 주먹으로 힘껏 쳐올렸다. “입냄새-!!” 바로 허공으로 차올린 두 다리를 거세게 반 바퀴 휘둘러 왼발, 오른발 순으로 드래곤의 턱을 연속으로 걷어찼다. “사람한테 쏘는 거 아냐!!!” 발차기는 의외로 잘 먹혀들었는지 드래곤은 순간적으로 날갯짓을 멈추고 고공낙하를 시전 했다. 렐리아는 드래곤의 은빛비늘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함께 추락하다가 어느 지점에 도달하자마자 스스로 놓고 떨어졌다. 투박한 땅위에 몸을 굴려 무사히 착지한 그녀는 바로 북동쪽을 향해 눈으로 쫓기 힘든 속도로 내달렸다. 하지만 드래곤은 단번에 개미만한 여인을 포착하고서 땅에 떨어지려던 몸을 날갯짓 한번으로 무마시키고선 따라붙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며 드래곤은 여인을 향해 브레스를 쏘아댔다. 건물 몇백 채가 무너지고도 남을 파워를 쥐어짜내며 추격해오는 드래곤을 따돌린다는 건 상당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렐리아는 자신이 지나온 지대가 검은 파괴의 흔적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돌아보며 절로 손에 땀을 쥐게 됐다. 저것에 닿는 순간 검게 그을린 유골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사서 고생이지, 나도.’ 최대한 공작일행이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서 싸워야만 했다. 단지 내버려둘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 이러고 있다니, 아무리그래도 드래곤과의 목숨을 건 추격전 따윈 사양이었다. ‘그러니까 진즉 하산했으면 좋았잖아! 공작!!!’ 괜히 또 공작 탓을 하며 렐리아는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암벽을 올려다보았다. 그 끝이 아득할 만큼 끝없는 절벽이 이어졌다. 그녀는 피할 곳이 없다고 여기고서 암벽 위에 무작정 발을 디뎠다. 거의 90도를 이루는 경사에서도 경이로운 속도가 그녀를 받쳐주고 있었다. 한 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작은 맨발은 암벽에 거의 꽂혔다나왔다시피 했다. 투두두, 투두두둑 떨어져 내리는 수많은 돌덩이들이 드래곤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렸다. 드래곤은 브레스를 멈추고서 고공으로 날아오르는 자세를 취했다. 날개를 뒤로 젖히고서 유선형의 몸으로 최대한 바람의 저항을 덜 받으며 비행을 하는 드래곤, 그리고 그 거대한 주둥이에서 약 50미터의 간격을 두고 암벽 위를 달리고 있는 여자. 뒤늦게 고봉이 내려다보일 만큼의 높이까지 올라온 렐리아가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둑한 밤공기를 뚫고 네온사인처럼 번쩍이는 흰 안광이 바로 아래까지 쫓아와있었다. 렐리아는 암벽의 정상을 코앞에 두고 가볍게 두 발을 굴렀다. 갑작스레 그녀가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자세를 취하자 드래곤도 덩달아 속도를 낮췄다. 그것을 노렸단 듯이 작은 여인은 드높은 천공에서 날다람쥐처럼 유연하게 백덤블링을 했다. 드래곤의 기다란 주둥이를 힘껏 누르듯이 안착하기 무섭게 그녀는 또다시 높은 허공으로 날아오르기 위해 우둘투둘한 가죽을 지면대신에 박차고 뛰어올랐다. 로켓을 쏘아올린 것처럼 고공까지 단번에 뛰어오른 작은 체구는 무시할 수 없는 추진력과 위력을 뿜어내었다. 만월이 뜬 하늘은 마치 입을 쩍 벌린 것만 같았다. 고공으로 날아오른 자신을 집어삼킬 것처럼 새하얀 입속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긴 은발이 이리저리 아무렇게나 세차게 휘날렸다. 눈을 치고 귀를 때리고 뺨을 휘갈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가벼운 몸을 아래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에 맡겨 좀 더 높이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사람처럼 머리를 지면을 향해 두고 있던 그녀는 공중에서 몸을 말듯 한 바퀴를 빙 돌았다. 갑작스레 하중에 무게를 실으니 살짝 머리가 어지러웠다. 쉬이익ㅡ 하고 발끝에서부터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갈렸다. 바람이 느껴진다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발가락이 얼어붙다 못해 퍼렇게 썩어 떨어져나갈 것처럼 얼얼한 감각이 느껴졌다. 다행히 귀걸이덕분에 춥진 않고 발끝에서 갈리는 바람은 여름에 부는 서늘한 바람처럼 시원했다. 거추장스러웠던 긴 머리는 어느새 일직선으로 곧게 뻗었고 이마도 훤히 드러났다. 시원함과 동시에 발밑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풍경에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눈을 질끈 감을 테지만 렐리아는 바로 저를 쫓아서 날아오르는 드래곤과 확 트인 밤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북동쪽으로는 달빛이 내려앉은 가파른 암벽과 서쪽으로는 토벌단이 있을 고원지대가 드넓게 펼쳐지고 있었다. 고도 삼천 미터 상공에서 드래곤과 만나는 그 순간, 렐리아는 곧게 뻗은 왼다리로 저를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를 찍어 내렸다. 콰드득, 하고 망치로 철제금고를 내리친 듯한 둔중한 소리가 났다. 이제야 제대로 된 한방을 먹인 것 같은 짜릿한 감각이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기뻐하기도 잠시, 드래곤은 끄떡도 않은 채 고개를 쳐들어 올렸다. 중키만한 이를 드러내기 무섭게 허공에서 떨어지던 무방비한 여인의 허리를 아그작 씹어버렸다. 인간이 과자를 씹었을 때 나는 소리와 비슷했다. “...!!! 아아악!!”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렐리아는 제 하반신을 내려다보았다. 드래곤의 다물린 잇새에 삼켜져있는 제 허리를 말이다. "아아아아아악!!!” 허리가 뜯겨져나가는 고통에 숨넘어갈 듯이 비명을 내지를 때 드래곤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듯 윗니와 아랫니를 움직여 그녀의 허리부분을 잘게 자르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잠시 정신을 잃었다. 끔찍한 상황에 저절로 툭, 하고 정신줄이 끊어졌다. 시체처럼 축 늘어져있는 여자에 드래곤은 질린 건지 곧바로 까마득한 고공위에서 내던져버렸다. 핏물이 허공에 촤아악 튀기며 가느다란 몸뚱이가 하염없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아아아아아아앙!! 그녀가 떨어진 지점에서 거대한 모래폭풍이 한 차례 일었다. 등 아래를 단단히 받쳐줄 것처럼 있던 지면은 무참히 갈리고 수십 그루의 나무가 쓰려졌다. 거친 바위가 산산이 부서져 작은 머리위로 튀어 오르는 동안 렐리아는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배….’ 축 늘어뜨린 손을 겨우 들어 올려 그녀는 제 홀쭉한 복부를 더듬어보았다. 흥건하고 진득한 액체가 묻어나왔다. 동시에 너절하게 뜯겨진 살가죽이 느껴졌다. 다행히 장기가 튀어나오진 않은 모양이다. ‘…게임장르, 고어였어…’ 비위가 강한 편은 아니지만 끝내 혼절하지 않은 건 이곳이 게임 속 세상이고 제 몸도 게임캐릭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강한 세뇌가 아니었다면 진즉 태화는 몬스터사체만으로도 기겁을 했을 테다. ‘…젠장……’ 뚫린 뱃가죽사이로 내장이 삐져나올까봐 기침조차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 뜨겁고 비릿한 핏덩이가 역하게 끓어올랐다. 끔찍한 대형사고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으나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에서도 그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픔에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으며 시야가 흐릿흐릿하게 변했다. 이 세계의 달은 태연자약하게도 홀로 환했다. 누구는 생지옥이 따로 없는데 이 세상을 아름답게 비춰야할 의무를 다하려는 양 밝았다. 그리고 월식현상처럼 새하얀 달을 서서히 가리며 드래곤이 허공에 나타났다. 세계종말과 같은 그 규모를 헤아릴 수 없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앞둔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고고한 달빛을 등진 채 하늘을 점령할 듯이 쫘악 펼쳐진 날개아래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있었다. 눈앞이 차츰 깜깜하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거대한 날개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겨우 숨만 붙어있는 이 몸뚱이를 깔아뭉개기 위해 내려오고 있었다. 지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았다. 인간의 몸으론 도저히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는 이 세계의 최고점에 선 존재였다. 빌딩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저의 몸 위를 덮치는 거센 돌풍과 맞닥뜨려야만 했다. 그 해일과도 같은 위력에 가련한 몸뚱이는 진즉에 휩쓸려갔을 테지만 그녀를 눌러 내리는 무형의 힘이 있었다. 렐리아를 중심으로 전방 이백 미터의 대지에 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강력하고도 무시할 수 없는 중력과도 같은 불가항력의 힘은 렐리아의 작은 몸뚱이를 사정없이 짓눌러대기 시작했다. 절로 벌어진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울컥울컥 새어나오는 방대한 핏물이 턱과 목부분을 완전히 적셨다. 렐리아는 흐릿한 눈앞에 펼쳐진 검은 천장을 쳐다보았다. 날카로운 돌기가 돋아난 드래곤의 발이었다. 이 상태로 짓뭉개진다면 죽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누가 나 좀 도와…, 이곳에선 도와줄 사람 없겠구나….’ 점차 뿌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에 하필이면 그 남자가 떠올랐다. 제게서 등을 돌린 공작의 뒷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져가는 듯했다. ‘…당연한가…’ 렐리아는 눈을 감았다. ‘…아 집가고 싶다. 왜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번뜩 서슬 퍼런 청안이 치켜떠졌다. 욕이라도 하고 죽어야 억울하진 않겠단 생각이 든 것이다. “…시바…알, 용새끼야…죽이든지.” 개와 좆과 쌍이 들어가는 갖가지 욕들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저를 덮쳐오는 그 새카만 발은 깔리기 직전에 올려다본 자취방천장을 연상케 했다. 몇 번이나 깔아뭉개지는 인생을 살았는지 모르겠다. “너 따위…내 애탬…카르갈의 홍염만…있었다면,” 유언처럼 구시렁대던 렐리아의 입이 절로 다물어졌다. 화르르륵ㅡ 어둠을 집어삼키며 허공에서 거대한 불길이 솟아났다. 살아있는 것처럼 강렬하게 넘실거리는 불꽃은 결코 환상 따위가 아니었다. "…뭐…," 자색과 선명한 담홍색의 경계가 녹아내린 겹겹의 불꽃은 기름이라도 만난 것처럼 활활 타오르더니 곧바로 제 속에 품고 있던 것을 드러내었다. 레드드래곤에게서 얻은 전설의 마검, 카르갈의 홍염이었다. 남성만한 대검은 익숙하리만치 반가운 그 모습 그대로였다. 뭉툭하게 생긴 칼자루와는 달리 길고 뾰족하게 솟아난 칼날은 예리했다. 홍염에 휩싸인 채로 타오르는 그 검을 향해 힘겹게 손을 뻗을 때다. 서서히 내려앉는 천장과도 같은 드래곤 발 한가운데에 검끝이 닿았다. 동시에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불길이 좌우로 퍼져나갔다. 귀가 떨어져나갈 것 같은 포악한 굉음이 울렸다. 드래곤은 꼬리를 휘둘러 아래지대를 쓸어버렸다. 콰과과아아앙, 처참히 부서져가는 대지를 뒤로하고 거대한 꼬리에 정통으로 맞은 렐리아의 몸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자신만한 바위덩이들과 섞여 그 작은 몸뚱이는 서쪽을 향해 활처럼 날아갔다. 우지끈 하고 나무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멀어져가는 드래곤과 그 아래에 꽂힌 주인 잃은 검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아….’ 수십 초 만에 전방 부채꼴 범위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녀의 몸에 부딪쳐 파괴되었다. 서서히 그 속력이 줄어들어갈 쯤에 그녀는 절벽처럼 끊긴 곳에 한번 머리를 처박히고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가파른 절벽아래에 튀어나온 날카로운 바위에 이마가 찍히고 울퉁불퉁한 곳에 수 십 차례 몸이 튕겨졌다. 아래로 하염없이 굴러 내려갔을까, 반송장과 다를 바 없이 축 늘어진 몸으로 렐리아는 산기슭 어느 지점에 풀썩 처박혔다. 새하얀 윤기가 흐르던 몸은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볼품없었다. 말 그대로 잘게 다진 고깃덩어리를 연상케 할 만큼 피범벅이었다. 0025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밤치곤 푸른 어스름이 깔린 하늘은 옅게 먹을 풀어놓은 것 같았다. 몇 시간동안 정신을 잃은 걸까, 하는 생각보단 ‘내 검’하고 딱 두 글자가 가장먼저 떠올랐다. 그 다음으로 든 생각은 ‘망했다.’였다. 가능하면 제 허리가 어떻게 됐는지 손으로 더듬어보고 싶었으나 태화는 손가락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손가락 마디마다 무게 추를 단 느낌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였다. 분명 내 몸이 아닐 텐데 고통은 왜 이렇게 실감나게 느껴지는 건지 불만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이 선명했으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다시 거멓고 뿌옇게 흐려지길 반복했다. 눈꺼풀이 무겁고 이상하게 호흡이 가쁘다. 피곤함에 자꾸만 정신줄이 힘없이 풀어졌다. 금방이라도 무의식의 저편까지 끌고 들어갈 것처럼 수마가 날카로운 갈고리를 세웠다. 억지로 뇌를 긁어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희미한 향수에 젖어 들어갔다. “이태화!” 또렷한 목소리가 번뜩 뇌리를 깨웠다. 눈꺼풀 너머의 풍경이 바뀌어있었다. “야 이태화!!” 눈앞에 있는 이 조그만 초딩 남자애는 누구지. 까무잡잡한 얼굴, 앞머리는 비대칭으로 깎여있고 조금 길게 기른 구레나룻은 브릿지 염색이 되어 있었다. 한동안 알아보지 못하다가 뒤늦게야 태화는 반색했다. 김창수가 어렸을 때 이랬지! 벌써 이만한 아들을 낳았을 리 없을 텐데 진짜 어릴 때 모습과 똑같이 생겼다. “야 이태화! 빌린 돈 언제 갚을 거야?! 빨리 오백원 내놔라?” “이틀도 못 참냐, 쯧쯧. 오늘 아빠한테 용돈 받았어. 피방 가자.” 초딩 김창수의 투정에 못이긴 나의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화는 그제야 아, 하고 깨달았다. 죽기 직전에 옛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안 돼. 나 오늘 영어학원 가야돼. 걍 오백원 내놔.” “뭐야, 오늘 드아 2시에 경험치 두밴데.” “아아악! 진짜?!” 김창수가 머리를 싸매고 초딩남자애 특유의 빽 올라가는 목소리를 냈다. 그 과장스런 반응에 근처에 있던 고만고만한 키의 남자애들이 몰려들었다. “뭐야뭐야? 드아가 뭔데? 너네 뭔 게임하냐.” “드래곤 아르카이샤. 요즘 그거 진짜 유명한데 너 모르냐?” “너도 해. 그 겜 진짜 쩔어.” 4교시가 끝나고 반남자 애들과 함께 피씨방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기억을 뒤로 하고 또 한 번 기억 속 풍경이 바뀌었다. 보자마자 알았다. 치산고등학교 삼 학년 삼 반의 반풍경이었다. 으레 수능 끝난 고삼들이 그러하듯 방과 후 빈 교실에서 풀메이크업을 감행하는 여학생들 사이에 자신도 끼어있었다. 물론 민낯과 체육복의 후줄근한 모습으로 친구들이 공들여 화장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너네 어디가?” “남친 만나러.” 옆에서 눈을 부릅뜨고 뷰러로 속눈썹을 집어올리고 있던 지혜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그렇구나~ 아주 열심히들 이네.” 심드렁하게 답하고선 맞은편에 앉아있는 수현이를 바라보았다. 털털한 성격이라고 짐작도 못할 만큼 청순여신이 따로 없었다. 입이 좀 걸걸해서 그렇지 그 입만 봉쇄해두면 남자가 개미처럼 꼬여드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여신 머리에 눈두덩 위로 살구빛과 갈색빛의 그라데이션이 자연스럽게 퍼져있어 반쯤 눈을 내리감으면 상당히 분위기가 있어 보인다. 한껏 위로 집어올린 속눈썹에 마스카라까지 촘촘히 발라주고, 연한 갈색빛이 도는 렌즈까지 장착하니 대학생 새내기가 따로 없다. 책상위에 파우치를 두고 잠시 일어나려는 수현이의 가는 허리를 기억 속의 자신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락 끌어안았다. “아 씨! 존나 예뻐!” “씨발! 이태화 너 내 남친해라!” 남친한테도 이런 대접 못 받는다며 수현이가 저를 마주 안아주었다. 서로 어화둥둥 하는 것도 잠시 수현이가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더니 그대로 품에서 떼어냈다. 남친에게서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수현을 보내고서 여전히 화장중인 친구들을 지루하게 훑었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반대손으로는 숏컷 머리를 긁적대면서 아무것도 안 바른 푸석한 입술을 열었다. “근데 너넨 남친이랑 만나서 무슨 대화해? 너넨 게임 안하잖아? 난 스포츠용어는 도저히 못 알아먹겠던데, 남자랑 카페에서 수다 떠는 게 그렇게 재밌남?” “너 연락하는 남자애들 많잖아?” 뭘 그런 걸 묻냐며 민지가 입술에 고운 핑크색을 입히며 답했다. 그에 픽 웃으며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적거렸다. “걔네는 초딩 때부터 같이 피씨방 다녔던 애들이라서 만나도 게임 얘기밖에 안 해.” “그럼 언니가 남소 해줄까? 내 남친 친구들 중에 키 크고 잘생긴 애들 많은데.” “됐네요~ 난 평생 게임만 하다가 늙어죽을 거야.” “아이구 불쌍한 우리 모쏠 태화. 우쭈쭈.” 귀가 간지러워 후비적댈 뿐이다. 수능 끝났으니까 집에 가서 게임이나 실컷 해야지. 뚜르르르. 신호음이 간다. 한 십초 넘게 기다렸을까 달칵하고 연결되었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엄마. 어디야?” [청산문구 앞에.] “그래? 그럼 시장으로 데리러간다?” [됐어 뭘 나와.] “나 이미 신발 신었음. 갑니다~” [너 또 슬리퍼 끌고 오려고 하지? 어휴, 내가 못산다.] 비에 젖은 도보 위를 걷기엔 역시 삼선슬리퍼가 제격이다. 철퍽철퍽 하고 슬리퍼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평화롭다. 왼손에 든 우산아래에는 엄마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엄마의 왼손에는 접은 체크무늬우산이 들려있었는데 같이 쓰고 가자고 하도 고집부린 탓에 결국 접으신 거다. “아- 오늘 기상청에서 비 밤부터 온 댔는데. 맨날 틀려.” “네 아빠 오늘 회식이래.” “뭐? 앗싸~! 회식 끝나고 치킨 사오라고 해야지.” 날아온 등짝스매싱에 엄마를 향해 팩 얼굴을 돌렸다. “아, 진짜 아프다고~” “어휴, 철없는 기지배.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그래도 나 이번에 수능 좀 잘 봤지 않아?” “그래봤자 뭐해, 여기서 한참 먼 대학 가면서.” “거기도 나름 수도권이거든요~?” “네 그 사촌언니는 거, 어디야. 서울에 있는 대학 갔다더만.” “눼눼~ 그 언니는 그 언니고 난 나고.” 부러 얄밉게 삐죽 내민 입술에 다시 한 번 등짝스매싱이 날아왔다. 악, 이번 건 진짜 맵다. “아 그래도 이번엔 열심히 했다고오~ 내 머리로는 이게 최선인거 어떡해!” 어떻게 하나뿐인 딸의 노력을 몰라줄 수 있냐고 엄마의 어깨에 마구 머리를 들이댔다. 그런 애교 아닌 애교에 질색하는 엄마의 얼굴이 선명했다. 징그러워, 앞이나 봐, 하는 잔소리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와 함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이삿짐치곤 조금 간소한 짐박스들이 작은 트럭에 실렸다. 트럭운전석의 옆 좌석에 오르기 전 아파트 주차장까지 나온 엄마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그저 대견한 눈빛만 띄우셨다. 너라면 어딜 가든 어련히 잘 먹고 잘 살겠지 하는 눈빛이셨다. 그에 반해 엄마는 걱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닌 척 구시더니 아침에는 무슨 생필품과 반찬들을 한가득 싸놨는지 이사짐이 초과될 뻔했다. “짐들 혼자 잘 정리할 수 있겠어? 도착하면 냉장고부터 정리하고.” “그럼~ 걱정 붙들어 매셔. 도착하면 전화할게. 그리고 엄마, 이거 용돈.” “뭔 용돈이야. 네 생활비에나 보태 써.” “어허 넣어두라니까~?” “됐다 됐어. 네 아빠가 웃는다.” 엄마의 말에 아빠를 돌아보자 아빠는 굳은살 가득한 두툼한 손바닥을 내미셨다. “아빠거는 없냐.” “왜 없겠어. 자 아빠도 용돈.” 손바닥에 봉투가 얹어지기 무섭게 갈무리해서 바지주머니 속에 슥 집어넣는 아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우리아빠야. 엄마가 다시 뱉어내라며 아빠의 주머니를 손끝으로 콕콕 찔러댔으나 아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먼 산을 바라볼 뿐이다. 한손에는 치킨박스가 들려있다. 고소한 튀김냄새와 짭조름한 간장냄새가 솔솔 올라와 코끝을 간질였다. 간판들만 요란하게 번쩍이는 회색도시의 거리를 홀로 걷다가 조금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제야 떠들썩한 잡음이 사라져갔다. 들어온 동네는 조금 한적할 만큼 조용했다. 폰을 꺼내들고 습관처럼 누군가를 향해 전화를 건다. 신호가 가고 한참 뒤에 누군가가 받았다. “엄마!” [귀 따갑다. 왜.] “나 오늘 첫월급 탔다?” [어히구. 목소리부터가 아주 날아가겠네?] “당연하지, 인생 첫월급인데~” 흠흠, 하고 이제껏 마음속에 고이 저장해두었던 말을 능청스럽게 꺼내보였다. “이 효녀 딸내미가 계좌로 반 넣어줄게! 아빠랑 비싼 것 좀 사드셔.” 조금은 철이 든 듯이 어른스럽게 말하려고 했는데 실패였다. 역시나 엄마는 예상했던 반응을 내놓았다. [됐어 이 기지배야. 그 돈 저축해. 또 뭔 놈의 캐시인가로 쓰지 말고.] “에이 안 해~ 현질 안한지 벌써 몇 년 째인데.” [너 냉장고에 반찬은 있어? 엄마가 보내줘?] “여기 시장에서 사먹으면 돼. 누가 그걸 일일이 보내줘? 누가 보면 시골에서 상경한 줄 알겠네!” 킥킥 하고 웃어버리자 전화상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썩 진지해졌다. [요새 김치값 비싸잖아. 한번 사려면 돈이 얼마야. 그리고 맨날 사먹는 거 좋아하지 말고. 저녁마다 뭐 시켜먹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아빠한테도 전화 좀 하고.] “응응 알겠어. 아 나 집 다 왔다. 엄마 끊어~” [그래.] “그리고 계좌로 넣는다?” [뭐? 이 기지배가!] 뭐라 잔소리할 게 뻔한 지라 바로 뚝 끊고서 킥킥 웃음을 터뜨린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서 작은 원룸자취방으로 향한다. 그 뒤에 이어지는 기억들은 최근의 기억들이었다. 계약직이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잠시 취활 쉬다가 회사 다닐 때 못했던 ‘드래곤 아르카이샤’가 서비스중단 된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급히 게임폐인 생활로 돌아갔다. 엔딩크레딧을 보겠다는 오기하나로 밤새서 게임을 하다가 지진이 일어나고, 천장이 무너지고, 그리고…… ‘엄마 목소리, 더 들어놓을 걸.’ 가장 먼저 든 후회는 이거였다. 왠지 모를 억울함과 후회의 감정들이 물밀 듯이 밀려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타지에 있다는 핑계로 몇 년 지기 친구들과 만나는 걸 미뤄둔 것, 방학 때마다 집에 내려가서 부모님의 얼굴보단 모니터를 더 많이 본 것, 마땅히 해드린 게 없는 것, 부모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본 게 반년전이라는 것, 좀 더 열심히 살지 않은 것. ‘…하아.’ 울음대신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러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에 그녀는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일제히 지면을 박차는 말들의 발굽소리가 점점 가까워져왔다. 렐리아는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해가 떠오르지 않은 하늘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하늘을 비껴가듯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눈에 토벌단의 모습이 뭉텅이로 흐릿하게나마 잡혔다. 뒤늦게 시야가 점차 또렷해져가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말을 타고 다가오는 그를 볼 수 있었다. 까만빛깔이 흐르는 갑옷과 시린 새벽바람에 나풀거리는 검은 머리칼, 그 아래로 드러나는 짙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새하얗게 제 시야에서 터지는 듯 했다. ‘…아, 공작이다….’ 타고 있는 말 또한 흑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카맣게만 보였다. 얼핏 저승사자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렐리아에게 있어서 그의 존재는 포근한 안식처럼 다가왔다. 렐리아는 몸의 긴장을 풀었다. 그리고 그가 제게로 다가올 때까지 태평하게 누워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의 지척에서 블리어는 말의 고삐를 당겨 멈췄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들도 일제히 멈춰서 눈밭위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거의 만신창이가 된 옷은 갈기갈기 찢겨져서 헐벗은 차림과 다를 바 없었다. 반쯤 푸른 눈을 뜨고 있는 여인의 얼굴은 스러지는 꽃처럼 창백해보였다. 그에 반해 주위가 붉게 물들어있어 꼭 이 겨울에 장미가 만발해있는 것만 같았다. 기사들이 그런 숭고한 생각을 하는 동안 블리어는 근처수레에서 모포를 한 장 꺼내들고 여인에게 다가갔다. 저를 엿먹이는 데엔 참 악착같은 여자라고 블리어는 생각했다. 끝까지 자신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할 셈인지 저가 지나가는 길 위에서 떡하니 죽어있었다. 몬스터들에게 상당히 비참하게 죽임 당했는지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그 눈조차 감지 않고 있었다. 마지 저 보란 듯이 말이다. 그래도 한 생명이었던 만큼 블리어는 최소한의 예를 표하기 위해 그 차디찬 시신위에 모포한 장 덮어줄 생각이었다. 부디 애석한 죽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살리려했다는 걸 조금이나마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부디 원망만은…” 하지 말고 이 세상 편히 떠나라고, 그리 고인의 명복을 빌어주려 할 때다. 그의 내리깐 짙은녹안이 동그랗게 떠진 맑은 푸른눈과 허공에서 맞닥뜨렸다. ‘안녕, 공작?’ 희뿌옇게 타들어가는 시야 속에 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환상이 아닐까 싶었으나 렐리아는 그 얼굴이 너무나도 뚜렷해서 차마 거짓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매끄러운 백지장 같던 미간이 설핏 일그러지고 고귀한 녹안위로 얕은 파동이 일었다. 늘 날카롭고 매섭던 인상이 무색하게도 약간 멍을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블리어는 그답지 않게 놀라있는 중이었다. '어째서.' 당연히 죽은 줄 알고 모포라도 덮어주려 했으나 피투성이의 여자는 번듯하게 숨이 붙어있었다. 블리어는 이번에도 이 눈앞의 여인에게 거하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토록 당혹스러운 적도 없어서 그는 기가 차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여러모로 상당히 끈질긴 여자였다. 명줄도 질긴 모양인지 이정도면 독종수준이 아니라 불사신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여자는 어째서 꼴 보기 싫다고 하면 할수록 자꾸 제 앞에 나타난단 말인가, 최대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다. 눈앞에서 치워버렸다고 생각하면 돌연 튀어나와 악착같이 제 발목을 붙잡았다. 블리어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의 인연은 보통 악연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가 하나의 깨달음을 득도할 때, 렐리아는 그나마 멀쩡한 오른쪽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존나 싫은 건 알겠는데…나 좀 살려주라.’ 이 세계에서 그나마 의지가 되는 게 공작밖에 없다는 사실에 괜스레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웃기엔 배가 아파서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가 배 한복판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늘하고 무섭고 끔찍할 만큼 아팠다. 그런 것치곤 그녀의 입엔 희미하게 미소가 맺혀있었다. 예쁜 척이었다. 그나마 반반한 이 얼굴이라도 봐서라도 저를 데려가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체력이 방전된 상태에서 입꼬리를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고서 렐리아는 정신을 잃을 랑 말랑한 그 순간까지도 악착같이 눈을 떴다. 그에 보다 못한 블리어가 몸을 굽혀 손을 뻗었다. 그의 미지근한 손이 그녀의 두 눈을 덮었다. 영원한 안식을 취하라는 뜻이 아닌 제게 뒷일은 맡기고 처자라는 의미였다. 0026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아침때가 지나서야 토벌단 일행은 겨우 작은 마을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밤새 고된 산행에 시달린 기사들은 여관에 들어서자마자 각자 여장을 풀고 휴식에 들어갔다. 블리어는 피투성이의 여자를 기사에게 떠맡기고서 저가 머무르는 방의 반대편방에다 데려다놓도록 명했다. 그러곤 마을에서 가장 실력 있는 의원을 부르도록 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공작씩이나 되는 자가 머무르기엔 상당히 조악한 시설이었다. 여관주가 바닥에 넙죽 엎드려 사죄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딸린 욕실이 없어 방 한가운데에는 미리 몸종을 시켜 물을 채워놓은 나무욕조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촌구석이라 수도시설이 형편없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 수준이었을 줄이야. 잔뜩 쉰 목에선 한숨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깨끗하게 몸부터 씻었다. 뒤집어쓴 먼지와 피를 씻겨낸 뒤 정갈하게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지친 몸을 뉘이고 눈을 붙이는 동안 맞은편방 안에선 두 시간 넘게 치료가 이어졌다. 뒤늦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깬 블리어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덜 말린 채 누워버려 살짝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과 다크서클이 짙게 물든 눈가는 과연 고귀한 혈통을 이은 귀족이 맞나 의문을 품게 했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문을 열고 나온 블리어는 곧장 의원에게서 여인의 몸상태에 대해 전해 들었다. “일단 큰 고비는 넘겼습니다. 배에 난 상처의 봉합은 끝냈지만 곪을 가능성이 큽니다, 워낙 큰 상처라……늑골부위에 손톱크기 정도지만 심한 화상자국이 있더군요. 흉이 질 수 있으니 늦기 전에 신관에게 따로 상처를 보이셔야합니다.” 주름진 얼굴에 고생한 흔적이 역력한 노령의 의원의 말을 들으며 블리어는 문가에 서서 무심하게 머리만 쓸어 올렸다. 몰려오는 졸음을 억지로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살아있는 게 기적일 정도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입니다. 아,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시고요.” “알겠습니다. 수고비는 기사를 통해 넉넉하게 지불할 테니 이만 돌아가도 됩니다.” 그리 말하고선 블리어는 문을 닫고 다시 협소한 침대위에 누웠다. 늪에 빨려 들어가듯 금세 얕은 수마에 잠겨버렸다. 일어나면 여자의 상태를 보러 가봐야겠다고 그는 무의식중에 생각하며 숙면을 취했다. * 렐리아는 비교적 멀쩡한 정신으로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실상 그녀가 입은 상처는 며칠 내리 정신을 잃고 사경을 헤매도 이상하지 않을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작 본인은 거동이 조금 불편하고 윗배가 욱신거릴 뿐이라 여겼다. 부상 때문에 혼절했다기보다는 단순히 체력을 다 써서 곯아떨어진 것뿐이었다. 지금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머릿속이 개운할 정도였다. 그녀는 현재 입고 있는 남자상의를 슥 걷어 올렸다. 갈색으로 변한 피가 묻어난 붕대가 배꼽에서부터 갈비뼈아래까지 둘둘 감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 왼쪽 늑골부분에 손톱만한 크기로 살이 벗겨져있었다. 다름 아닌 드래곤의 브레스에 당한 상처였다. 그을린 수준이 아니라 살이 완전히 녹아내려 하얀 뼈가 도드라져보였다. 다행히 작아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렇게 징그럽지는 않은데 이런 하자가 있는 몸을 공작이 안고 싶어할까가 문제였다. ‘…망했다.’ 이번엔 누가 뭐래도 망했다. 왼쪽눈알도 여전히 미세하게 구멍이 나있는데 이젠 몸에도 하자가 생겼다. 집, 집, 집! 집 생각에 금방이라도 눈앞이 뿌옇게 변해가려할 때였다. 문밖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노크도 없이 공작이 문을 열고 들이닥쳤다. “…….” 블리어는 침대위에 앉아있는 여인의 옆모습을 보고 한쪽눈썹을 슥 치올렸다. 벌써 깨어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살아난 게 기적이라더니 의원이 감히 제게 과장된 허위사실을 고한건가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상태를 보러오지도 않았다. 뒤늦게 렐리아는 귓등너머로 쓸어 넘긴 얇은 은색머리칼이 사락 흔들릴 정도로 가볍게 오른쪽으로 고갤 돌렸다. 허공에 시선이 마주쳤다. 블리어는 피하지 않고 그녀를 향해 다가섰다. “상태는 어떻습니까.” “그럭저럭. 그나저나 공작이 날 보러올 줄은 몰랐는데.” 의외네? 하고 말하듯 렐리아가 씰룩 웃어보였다. 습관처럼 눈웃음을 살살 치는 그 가증스러운 모습에 블리어는 역시 의원이 과장된 사실을 제게 전했다고 판단했다. 아마도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의원에게 부풀려서 전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겠지 싶었다. 블리어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잠시라도 진지하게 여자의 상태를 보러온 자신에게 묘한 짜증을 느끼며 방을 벗어나려할 때다. “아.” 쿠당탕, 하고 황급히 공작을 잡기 위해 뻗은 팔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붕대를 감은 홀쭉한 배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상의가 들춰진 것 빼곤 별탈은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렐리아는 저가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까 싶으니 약간 자존심이 상해 바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키려했다. 꿰맨 뱃가죽이 다시 찢어지는 것 같은 극한의 고통이 몰아치지만 않았다면. “…,” 윽, 하고 하마터면 튀어나올 뻔한 신음을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어 간신히 참아냈다. 이번 건 좀 장난이 아니다. 괜스레 식은땀이 이마에서 흐를 것 같았다. 허리를 구부린 채 잠시 멈춰있는 그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던 블리어는 반사적으로 여인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마치 부축이라도 해주려는 듯 잠시 손끝이 움찔거리며 뻗어지려했으나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구구 소릴 내며 혼자서도 잘만 일어나는 모습에 블리어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엉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태연하게 다시 침대위에 드러눕는 모습에 하마타면 실소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블리어가 그런 생각을 속으로 차갑게 이을 때,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대놓고 구시렁거렸다. “보지만 말고 좀 도와주지, 끝까지 안 움직이네.” “멀쩡하게 잘만 일어나면서 내가 왜 그래야합니까.” “그래. 넌 쉬운 남자가 아니지.” 킥킥대며 그녀는 배를 잡았다. 아 여기부분 지금 피가 흘러나오는 거 아니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제 몸 아니란 생각에 자신이 몸을 너무 굴렸나 싶었다. 어차피 고통은 제게 고스란히 오는데 정신적으로 덜 괴롭기 위해선 몸을 사릴 필요가 있었다. “공작.” 렐리아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깊은 산속의 옹달샘처럼 아름답고 맑은 빛깔이 흐르는 벽안이 천장을 담았다. “이번에도 나 버릴 거야?” 공작은 대답이 없었다. 렐리아는 그럴 거라고 대충 예상했으나 역시나 그가 제게 미약하게나마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었다. 그야 이렇게 뻔뻔하게 하대를 하는데도 아무런 말조차 없이 묵묵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해해.” “…….” “그다지 원망하지도 않아. 내가 실수로 넘어진 걸 누굴 탓할 수도 없는 거고.”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진 순간, 저를 일으키려던 손을 거두고 차갑게 등을 돌려버린 공작의 모습. 그때의 광경은 아직도 선명했으나 렐리아는 가슴속에 미련 한 톨 남지 않게 탈탈 털어내었다. “그래도 얼어 죽든, 굶어죽든, 괴물한테 찢겨죽든 신경 안쓰겠다 해놓고서 날 끝까지 챙기려했잖아.” “지금 비꼬는 겁니까.” “공작의 속이 꼬인 것 같은데? 뭐, 고맙다고. 나 같았으면 그렇게 열 올리고 싸웠던 상대를 그 자리에 버리고 갔을 텐데. 적어도 양심적으로 굴어줘서 고맙더라.” “결국 비꼬는 겁니까.” 그렇게 안보였는데 최소한의 양심은 있더라, 하고 들리자 블리어는 설핏 미간을 접었다. 지나치게 냉랭한 눈길이 쏘아져 내려왔으나 렐리아는 눈 한번 깜짝 안했다. 그저 배에 얹고 있던 손을 들어 공작을 향해 뻗었다. 잡아달라는 듯이 말이다. “나 다 나으면 버릴 거지?” “주운 적도 없습니다.” “그럼 왜 날…” “기사들의 눈이 있으니 임시보호 중일뿐입니다.” 주위시선 한번 엄청나게 신경 쓴다며 속으로 투덜대며 렐리아는 무안하게 뻗었던 손을 거뒀다. 그래도 완전히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왕국에서 떠받드는 공작인데 인간성 같은 면에서 흠 잡히지 않도록 이미지관리 정도는 해야 될 것 같기는 하다. 그래야 환상을 품고 여자들이 다가오지. 겉으론 북풍한설처럼 매서운 철혈의 대공으로 보이지만 사실 속으론 인간적인 면이 있는 너그러운 남자, 같은 환상 말이다. 사실 겉도 속도 밴댕이 소갈딱지인데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렐리아의 입가엔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나 앞으로 공작한테 정말 정말 잘할게. 저번처럼 공작이 인상 찌푸릴만한 일은 절대로 안하고 얌전하게 있을게.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큼 나 손버릇 안 나빠. 그땐 조금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거야. 공작이 원한다면 다신 몸에 손 안 댈게.” “꽤 당연한 말을 대단한 맹세처럼 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제 몸에 손을 댔다간 그 팔을 잘라내 버릴 듯한 흉흉함이 그의 어두운 녹안위로 떠올랐다. 렐리아는 이해한다며 오른손을 허공에 대충 휘적거렸다. 그만큼 초반의 그와의 관계는 극악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황을 몰아간 건 따지고 보면 다 제 탓이었다. 단순히 만져지는 3D남캐도 함께 있다 보니 이젠 다르게 느껴졌다. 틀에 박힌 캐릭터설정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부터가 게임오류가 아닌가 싶지만서도 서로 부딪치면서 알게 되는 새로운 모습들이 이젠 더 좋다. 딱딱한 맛밖에 없다고 여겼는데 이상하게 요즘따라 생동감이 넘쳐보였다.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씨익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그에 공작은 길바닥에 누가 싸질러 논 굵은 똥이라도 본 듯 험악하게 미간을 구겼다. 그래 저 표정, 엄청 생동감 있다. “나 사실 갈 곳도 없고 여기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진짜 너밖에 없어.” 밖에 나가보니까 알겠더라, 정말 공작이 제게 잘해줬다는 걸 말이다. 죽인다 죽인다 하면서도 끝까지 저를 살려놓은 공작과 다짜고짜 저를 죽이려든 드래곤을 비교하면 공작은 말랑말랑한 젤리수준이었다. 저 혐오감을 띠운 썩은 표정도 이제 보면 귀여울 정도였다. “그러니까 당분간 나 좀 데리고 있어주라. 공작 부탁할게~?” 표정은 전혀 웃고 있지 않으면서 말투만 능글맞았다. 누운 채로 저만을 뚫어져라 올려다보는 여인의 모습에 블리어는 얼굴에서 혐오감을 지워냈다. 그저 호수처럼 잔잔해진 표정은 동요라곤 없었다. 이제껏 태연한 분위기와는 달리 여자는 마치 갈 곳 잃은 강아지처럼 처량한 분위기였다. 왠지 거둬들여 먹이라도 입에 물려야 될 것 같은 기분이다. 물론 그것도 잠시, 뒤늦게 그는 자책했다. 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면서도 가슴속 한편으론 연민이라는 걸 느끼는 건가 싶었다. 자신이 이리도 무른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단호히 정해진지 오래였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는 여인을 스치듯 내려다보고서 등을 돌렸다. “생각, 해보겠습니다.” 선뜻 나오려는 대답을 무겁게 억누르듯이 뜸들인 어조였다. 여전히 꼴 보기 싫은 여자라는 건 변함없기에 그는 곧바로 방을 나가버렸다. 하지만 간만에 렐리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피어났다. 예전 같았으면 듣기도 전에 냉철하게 잘라내 버렸을 텐데 조금은 인간다워졌구나 싶었다. 0027 / 0172 ---------------------------------------------- 위기에 빠진 로맨스 그날 밤 알싸한 술냄새를 풍기며 다시 제 방을 찾아온 공작은 승낙하겠다는 말을 남기고서 돌아가 버렸다. 자신을 데려갈지 말지로 상당히 고뇌했던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그의 뒷모습이 문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계속해서 큰 목소리로 고맙다고 외쳤다.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 같아 렐리아는 맘 편히 침대위에 드러누웠다. 다시 긴 잠을 청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떠오른 중요한 사실에 그녀는 복부에 무리가 가는 걸 알면서도 황급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주문이라도 외듯 경건하게 운을 뗐다. “차크란의 갑옷세트.” 여덟 글자를 중얼이는 동시에 어둑한 방 허공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 성스러워 보일 만큼 찬란한 은빛으로 둘러싸인 갑옷이 눈앞에 둥둥 떠올라있었다. 노출이 심한 게 흠이지만 방어력이 거의 백 프로를 자랑할 만큼 능력치 좋은 전설의 방어구였다. "…하아, 이 예쁜 것." 이렇게 부르면 나오는 건줄 알았으면 진즉 불렀을 테다. 놔두고 와서 미안해! 렐리아는 차마 감격에 뒷말을 잇지 못하고 와락 눈앞의 방어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묘한 악취에 슬쩍 제 품에서 떨어뜨려놓았다. 공작성의 시녀가 쓰레기통에다 처박아놓았던 건지 냄새가 좀 난다. 이건 나중에 빨아야겠다. 렐리아는 이번 기회에 방어구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적어도 이걸 입고 있었다면 그 무자비한 드래곤의 이에 허리가 갈리는 일은 없었을 테다. ‘용새끼…몸이 회복되거든 언젠간 반드시 잡으러가마.’ 잠시 흉흉하게 이를 벼르다가 렐리아는 다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차크란의 갑옷세트 다시 들어가.” 곧이어 허공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갑옷을 보며 렐리아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타게임이지만 인벤토리가 이어져있는 건가. “차크란의 갑옷세트 나와 봐.” 부르자 삼 초도 지나지 않아 허공에서 현란하게 등장하는 방어구에 렐리아는 수긍했다. 그 뒤로 인벤토리에 있던 다른 아이템들도 불러보았고 역시나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지금 착용하고 있는 템에 비하면 효과도 낮고 쓸데도 없어서 다시 돌려보냈다. 원래 팔려고 넣어놓은 것이니 말이다. “카르갈의 홍염.” 마지막으로 가장 소중한 애템을 부르자 어둠을 잡아먹으며 무럭무럭 타오르는 붉은 불꽃이 허공에 생성되었다. 드래곤이 제 검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했을까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멀쩡해보였다. 불꽃이 나무천장에 옮겨 붙을 것을 염려해 렐리아가 황급히 검 손잡이를 잡자 그제야 허공에 떠올라있던 검의 불길이 사그라져갔다. 일반 평범한 대검처럼 얌전해진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띠우며 렐리아는 냅다 드러누웠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검이 어찌 예쁘지 않을까. 렐리아는 성인만한 기다란 대검을 품에 끌어안았다. 주인을 알아보는지 검날이 무뎌져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잠자다가 찔려죽을 걱정은 없단 소리였다. 자세가 살짝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좋은지라 그녀는 대검을 곰인형처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 하루간의 휴식을 뒤로하고 공작일행은 다음날 느지막이 출발했다. 블리어는 마을에서 마차 다섯 대를 구했는데 네 대는 부상당한 열다섯 명의 기사들이 타고 가도록 배려하고 자신은 여인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비교적 몸이 멀쩡한 기사들은 말을 타고 움직였다. 제법 여유롭게 달려도 수도까지 앞으로 다섯 시간 남짓이었다. 오늘저녁 안에는 도착한다는 소리였다. 블리어는 마차 안에 앉아 제 지적수준에 그나마 맞는 책을 골라 읽고 있었다. 궁벽한 촌구석에서 급히 구한 책치곤 저급한 수준은 아니었다. 심심풀이로는 제격이었다. 그가 조용히 독서를 하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여인은 창틀에 머릴 기대고 졸고 있었다. 요란하게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한번 깨지도 않고 조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두 시간 넘게 줄지어 이동하던 일행들은 조만간 공작이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잠깐의 휴식을 가지자는 뜻이었다. 별안간 선두에서 이동하던 마차가 완전히 길가에 멈춰 섰다. 기사들은 말린 치즈나 초콜릿 같은 간식거리를 먹거나 말의 체력을 보충시키기 위해 당근을 먹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동안 렐리아는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있다가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슥 입가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렐리아는 잠이 덜 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뒤늦게 그녀의 시선이 차창너머에 머물렀다. 숲 속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영지와 영지사이를 잇는 탁 트인 숲길이었다. “어…뭐야. 마을 어디 갔어?” “…….” 맞은편에서 품위 있게 앉아있는 사내는 대답대신에 한심스런 눈길을 넌지시 주고 말뿐이었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린 그는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긴 검지와 중지사이로 팔랑팔랑 종이가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렐리아는 지루한 듯 하품만 터뜨렸다. “오래 앉아있었더니 엉덩이가 아프네.” 마차소파의 질이 좋지 못한 탓에 엉덩이가 얼얼했다. 엉덩이아래 손을 깔아뭉개고서 그녀는 제 왼쪽궁둥이를 문질문질 어루만졌다. 그것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 블리어는 못본 척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경박스럽고 수준 낮아보였다. 그런 그의 얕은 짜증이 스친 무표정에 렐리아는 입술 끝이 절로 씰룩 올라갔다. 이런 걸 못견뎌하는 구나 싶으니 괜히 골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있잖아 공작~ 내 엉덩이에다 호 한번만 해주면 안 아플 것 같은…," “나가십시오.” “뭐?” “나가서 반성하고 오십시오." 반성? 어이없음에 그녀의 얼굴이 해괴하게 구겨졌다. "얼른.” 그러거나 말거나 블리어는 몸까지 일으켜 여인을 몸소 문밖으로 밀어냈다. 렐리아가 마차문 앞에 서자 그는 바로 쾅 소리가 나도록 마차문을 닫아버렸다. 심지어 못 들어오게 걸쇠까지 걸어놓기까지 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서느런 표정을 한 공작은 창문을 열고 저를 내려다보았다. 값비싼 외제차를 타고 지나가던 재벌이 차 유리창을 슥 내려 길거리에 내쫓긴 노숙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그런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이었다. “어떻게 입을 열면 그런 상스러운 말만 나오는 겁니까. 자신의 대화법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시간을 가져보십시오. 그리고 앞으론 고쳐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기 전까지는 마차에 오를 생각 마십시오.” “하아…이럴 때보면 참 답답하다니까. 농담하기가 무섭네.” 당연히 웃자고 한 농담에 저렇게 정색하고 앉았으니 렐리아는 답답하기만 했다. 변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대충 좀 넘어가라며 손을 휘적거리자 대번에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또 그 태도,” 블리어는 가볍게 넘어가려는 여자의 태도가 탐탁지 않았다. 천한 신분일수록 더 나은 환경, 안락한 삶을 얻기 위해 스스로 바뀌려는 노력을 해야 할 텐데 어째 매사가 건성이었고 대충이었다. 그런 태만한 꼴은 그가 못 본다.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 모든 실언을 농담이었다고 변명하면 그만입니다. 중요한 건 듣는 사람이 농담으로 받아들이냐지 본인의 판단이 아닙니다. 입으로 싸지르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에게 어떻게 들릴지, 그걸 듣고 웃어 넘길지 인상을 찌푸릴지 결정하는 건 상대방이니 먼저 타인의 시점에서 생각하는 자세를 기르십시오. 그대의 말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나오는 것 같아서 문제입니다.” “네에- 네에.” 독설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잔소리도 수준급이었다. 우리 엄마도 내게 이렇게까지 잔소리를 퍼붓지는 않는데, 렐리아는 턱을 긁적거리며 똥, 아니 공작을 피해 멀리 떨어져있는 기사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킬리한테 가서 말에 태워달라고 해야지. * 토벌임무를 수행하는 중이 아닌 수도로 복귀하는 길이다보니 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여도 비교적 풀어진 분위기였다. 킬리와 큰 소리로 떠들고 웃어도 마차 안에 타고 있는 공작은 조금도 이것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힐끗 마차창문 너머로 공작을 훔쳐보니 그는 곧은 자세로 책만 읽고 있었다. 딱딱하게 틀에 박힌 형식에만 치중하는 성격다웠다. 기사들을 군기잡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고 판단한 순간부터는 일체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렐리아는 마차창문을 사이에 두고 블리어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무료하게 가라앉은 녹안은 녹차라떼의 바닥에 가라앉은 가루덩어리와 비슷한 색이었다. 참 써보였다. 공작은 별안간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제게 검지를 치켜세웠다. 신종뻐큐인 줄 알았는데 두어 번 까딱하는 걸 보니 들어오라는 뜻인 것 같았다. 렐리아는 킬리의 도움을 받아 다시 마차위에 올랐다. 그러곤 바로 공작의 옆에 앉아 왜 불렀냐며 빤히 응시했다. 그에 그는 미천한 주제에 감히 어딜 같은 자리에 착석하느냐고 꾸지람을 주듯 비뚜름하게 한쪽눈썹을 치올렸다. “근데 아까부터 뭐 읽어?” 그가 하도 본론을 꺼내지 않고 입만 다물고 있으니 렐리아는 바로 딴 길로 샜다. 그에게로 바짝 다가간 그녀는 고개를 내밀어 그의 왼손위에 펼쳐진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옆머리가 딱딱한 근육으로 이뤄진 그의 각진 어깨에 살포시 닿았다. “흐흥 야한 거라도 읽…뭐야 이게?” 렐리아는 일렬로 줄지어선 검은 지렁이 수십 마리처럼 생긴 책의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한글도 영어도 심지어 아랍어도 아닌 지구상에서 본 적이 없는 생소한 문자였다. 책표지에도 이것과 비슷한 형태의 문자가 박혀있었지만 이제껏 단순히 심벌인 줄 알았다. 이 세계에서 쓰는 언어가 설마 다 이러냐고 묻기 위해 렐리아는 고갤 들었다. 어느덧 바로 코앞에 위치한 사내의 잘생긴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아버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윤곽이 뚜렷한 깊은 눈매는 꽤나 날카로웠다. ‘은근슬쩍 몸 붙여보십시오. 그 선 넘어가 보십시오.’ 하고 단단히 경고하는 눈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사람 쏘아죽을 것 같으니 렐리아는 슬쩍 뒤로 몸을 물리고서 책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거 대체 뭐야? 글이야?” “…….” 공작은 대답대신에 ‘글도 읽지 못하다니 대체 왜 삽니까.’하는 지독히도 한심에 찌든 눈빛을 드러냈다. 졸지에 무식의 끝을 달리는 여자가 되었다지만 렐리아는 그보다 속으로 게임평을 하기에 바빴다. 역하렘 게임주제에 세계관은 물론 그 세계 언어까지 신경 쓰는 디테일이란 굉장할 정도다. 하지만 한글패치가 안되어 있는 것은 크나큰 감점요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느닷없이 공작의 입이 열렸다.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이제 곧 수도에 다와 가니 다시 한 번 주의사항을 명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블리어는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책을 탁 소리가 나게 덮어버렸다. 그러곤 깐깐하리만치 길고긴 말이 이어졌다. “출발하기 전에도 말했지만 부상당한 몸이라 바로 내쫓지 않고 데리고 있는 것뿐, 혹여 라도 속으로 과한 착각이라도 하고 있다면 지금당장 버리십시오. 기한은 반년입니다. 더도 말고 그 안에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독립하든가 아니면 괜찮은 평민남자를 잡아 살림이라도 차리든가 하십시오.” “응.” “그 이상 내게 어떠한 호의를 바라지 마십시오. 나또한 그대에게 관심을 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미 그어놓은 선을 다시금 짙게 그어놓는 것 같은 말투였다. 블리어의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얼음물을 들이켠 듯한 냉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지만 렐리아는 담담했다. 그저 고개를 한번 끄덕일 뿐이었다. “조건은 아까 말했다시피 그대의 존재가 외부에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나 나와 관련되어 그 어떠한 소문이라도 새어나가는 즉시 바로 내쫓을 생각입니다.” 결혼도 안한 가주가 창부를 집안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건 상당히 세간으로부터 관심을 끌만한 내용일 테다. 더욱이 올르아 공작가문의 여식과 혼담이 오가고 있는 중이라면 블리어는 절대 새어나가게 해선 안 된다 여겼다. 애초에 천한 미색에 홀렸다느니, 주색에 빠졌다느니 하는 온갖 낭설이 제 이름 뒤에 따라붙는 건 사양이었다. “그 몸뚱이는 치료받을 수 있게 따로 조처를 취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또박또박 따라하십시오.” 블리어는 어린아이를 앞에 두고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선생처럼 엄하게 운을 뗐다. “저택 안에선 일절 아는 척 혹은 말을 걸지 않습니다.” “너무하네.” “따라하라고 했습니다.” “눼눼. 저택 뭐시기해서 뭐시기 않습니다. 됐어?” 성의 없이 나불거리며 창밖만 내다보는 그 얄미운 모습에 블리어는 입가를 미미하게 짓이겼다. 쌀쌀하고 정나미 없는 어조가 흘러나온 건 바로 그 뒤였다. “반복학습을 통해서 그 아둔한 머리에 강제로라도 욱여넣어야 될 거 아닙니까.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내가 유아야? 공작. 날 너무 수준 낮게 보는데 내 학습수준은 그렇게 낮지 않아요~” “우매한 문맹주제에 자존심은 있습니까.” “하하 거참, 기분 나쁘려고 하네.” “됐습니다. 같은 말 반복하게 만들지 말고 제대로 따라하십시오.” 가차 없이 엄한 어조 탓인지는 몰라도 그는 마치 교탁 위에 군림한 선생님 같았다. 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은 친구와 장난치다가 깐깐한 담임에게 걸려 훈계 받는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저택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저택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그대에게 허락된 구역에만 처박혀있으라는 겁니다. 있는 듯 없는 듯 쥐죽은 듯이 사십시오.” “그대에게 허락된 구역…” “그건 따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여인의 작은 입술을 위아래로 집어 눌렀다. 곧바로 손을 뗀 그는 옆자리에 개어놓은 로브를 들어올렸다. 노파가 뒤집어쓰고 다닐 것 같은 낡고 초라한 로브였다. “외출을 하려거든 담당시녀에게 말을 한 뒤 로브로 몸을 가리고 눈에 안 띄게 뒷문으로 나갑니다.” “그게 더 수상해보이지 않을까.” “토 달지 말고 따라나하십시오.” “외출을 하려면 담당시녀에게 말을 한다. 그리고 로브로 몸을 가리고 눈 안 띄게 뒷문으로 나감.” 블리어는 로브를 길게 펴서 그녀의 머리에 무작정 뒤집어씌워버렸다. 알아서 잘 입으라는 듯이 말이다. 렐리아는 로브에서 나는 구린내를 맡고 인상을 한껏 찌푸렸다. 비료냄새가 뒤섞인 한 번도 빨지 않은 구리터분한 냄새였다. 정말 마을노파에게서 급히 로브를 구해온 모양이었다. “재차 강조하지만, 그대의 존재가 나와 관련되어 외부로 알려지는 건 사양입니다. 어디까지나 이 지긋지긋한 악연도 마지막이란 생각에 받아준 것이니 처신 잘하십시오. 두 번은 없습니다.” ‘나도 두 번은 없어. 이번에야말로 이 관계를 쫑낼 거거든?’ 렐리아는 자신이 뒤집어쓴 칙칙한 로브처럼 구리기만 한 이 관계를 하루빨리 매듭짓고만 싶었다. 공작보다는 드래곤이 문제라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수도에 도착하면 공작과 황제를 어떻게든 공략하겠다는 비장한 포부를 품고서 그녀는 소파에 늘어져 곯아떨어졌다. 0028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장미덩굴이 새겨진 장려한 철제대문을 지나면 나오는 거대한 궁전과도 같은 대저택은 라콘드 공작저였다. 수도중심에 우뚝 세워진 왕성을 중심으로 정확히 남서쪽에 위치한 저택은 총 다섯 개의 공작가문 중 당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얀 눈이 뒤덮인 대지위에서도 우아한 빛깔을 잃지 않는 회백색 건물은 그 운치가 남다르다. 총 오 층으로 이루어진 드높은 저택본관과 그 주위로 U자형을 이루며 솟아난 아치형지붕들, 흡사 궁전이라 해도 될 만큼 웅장했다. 저택 정면에는 중앙로비와 바로 통하는 가장 큰 입구가 있다. 서편과 동편에도 각 입구가 있고 그 외에도 저택 옆과 뒤편에는 별관과 안뜰을 오갈 수 있는 수십 개의 문이 존재했다. 족히 백 명이 넘는 시종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공작이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설 때, 렐리아는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로브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으슥한 구석에 자리 잡은 작은 문을 통해 들어갔다. 마침 기다리고 있던 앳된 시녀는 말없이 그녀를 안내했다. 그러곤 별관에 속해있는 구석자리의 방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렐리아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냄새나는 로브부터 벗어버렸다. 그에 시녀는 놀란 토끼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가탄할 만큼 아름다운 미모를 칙칙한 로브 속에 숨기고 있을 줄은 몰랐던 탓이다. “아~ 저기.” 함치르르 빛나는 은발을 둥그렇게 흩날리며 갑작스레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비스듬히 붕대로 왼쪽눈을 가리고 있었으나 그 화사한 미모는 가리지 못했다. 대뜸 제게 얼굴을 내미는 은발여인의 행동에 앳된 시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발자국 물러났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 이름이 뭐야?” “…소피아라고 해요. 열아홉이에요.” 갈색 양갈래머리의 수줍은 소녀, 거기다 서양식 메이드복을 착용한 모습은 상당히 가슴속의 무언가를 간질이게 만들었다. 이런 컨셉의 걸그룹이 나온다면 팠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렐리아는 검지로 인중을 슥슥 문질렀다. ‘귀여워.’ 렐리아는 공작에게도 보이지 않던 다정한 눈웃음을 머금었다. 눈앞의 여자애는 키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의 다솜이와 닮았다. 귀염상의 여자친구는 언제 봐도 마음을 몽실몽실하게 만든단 말이지. “언니는 스물넷이야. 오늘부터 여기서 반년동안 살게 됐어. 너도 여기서 살아?” “…네? 네. 이곳 숙소에서요.” “열아홉인데 벌써 집 나와서 돈 버는 거야? 대단하네, 대단해~.” 대단한 건가? 소피아는 얼떨떨하게 생각했지만 굳이 대꾸하지는 않았다. 이곳엔 저보다 어린 시녀들도 많았다. 정식과정을 수료한 시녀가 아닌 배우면서 경력을 쌓으러 들어온 하위가문의 여식들이었다.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자란 영애라면 이런 쪽에 대해 잘 모르는 건 당연하기에 굳이 이상하게 생각지는 않았다. 그동안 렐리아의 적극적인 대시는 계속 이어졌다. 여자애를 오랜만에 봐서 기쁘다느니, 자기 고삼 때는 어땠다느니, 옷 귀엽다느니, 심지어 이번 주말에는 뭐하냐고 묻기까지 했다. 소피아는 왠지 길거리에서 잘생긴 오빠에게 붙잡힌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심심할 때 언제든 찾아와. 언니랑 같이 떠들자.” “…아, 네.” 소피아는 방을 나서려는 자신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아리따운 은발여인이 부담스러워 황급히 나가버렸다. 그 모습까지 렐리아의 눈엔 마냥 귀여워보였다. 꼭 새학기에 쑥스러움 많은 여자친구와 짝이 된 그런 기분이다. 공작은 그 뒤로 한 번도 자신을 보러오지 않았다. 당연하긴 한데 조금 섭섭함을 느끼긴 개뿔이, 렐리아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비록 으슥한 곳에 거의 감금생활처럼 지내고 있다지만 욕실이 딸린 시설 좋은 특실이라 불편함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공작을 업고 다니라면 업고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거기다 삼시세끼 매일 맛있는 음식만 나온다. 매일 먹고 자고 뒹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길 이틀째였다. 이렇게 백년 만년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렐리아는 오늘도 소피아를 제 옆에 붙잡아두고서 수다를 떠들어댔다. 이 소심한 시녀의 입을 열게 만드는 데는 하루면 충분했다. 소피아가 들려주는 얘기로 렐리아는 이 세계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왕권 체제인 건 알았지만 그보다 더 상세한 신분체계나 왕도민이라면 알아야할 겉핥기식 지식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소피아의 현실적인 세상얘기를 들으며 렐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공작이 훨씬 더 까마득한 신분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내가 평생 놀고먹을 돈이 공작은 발가락 때보다 못한 작은 돈이라니….’ 어림잡아 이정도의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건 지구상으로 치면 세계재벌 순위에 들 만하다. 거물은 거물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렐리아는 그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재력, 권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생에 대충이란 법이 없는 것 같으니 말이다. 좀 더 편하게 돌아서가도 될 일을 굳이 정면으로 부딪치질 않나, 쉬엄쉬엄해도 될 일에도 엄청나게 까다로웠다. 이상한데서 결벽이 상당히 심한 것 같았다. ‘그 돈으로 평생 놀고나 먹지. …이러니까 내가 성공 못하는 건가.’ 그렇게 안보는 데서도 일처리가 정확하고 매사 철저해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공작인건가 싶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시큰둥하게 잇던 중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근처에 앉아 오독오독 쿠키를 맛보고 있던 소피아가 서둘러 쿠키바구니를 정리하고 문밖으로 나갔다. “…들어오세요.” 소피아가 과하게 머리를 숙이며 문 옆으로 비켜섰다. 그제야 렐리아는 소피아가 아닌 문으로 들어서는 웬 처음 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네모로 각진 흰 모자를 눌러쓴 적발의 사내가 조용히 웃으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젊은 사제인 모양이었다. 사제복 소매는 손목을 조일 듯이 꽉 채워져 있었고, 장미와 십자가 두 개를 서로 가로지른 모양의 상징적인 문장이 왼쪽가슴 위에 수놓아져있었다. 온화, 자상함, 부드러움을 뜻하는 은수가 물결치듯이 사제복 테두리를 따라 박혀있었다. 마찬가지로 은수가 놓아진 하얀 장갑을 껴서 손조차 노출이 되어있지 않았고, 답답하게 목 끝까지 단추 채우고 있었다. 응당 갖춰야할 신자로서의 청렴, 절제 등의 덕목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남자는 문을 닫고서 한번 방안을 휘 둘러보더니 성호를 긋고서 작게 읊조렸다. “주신의 은혜가 이 평화로운 방안에 깃들기를.” 그러곤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하고 서있기만 했다. 뭔가 공작과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고방식이 꽉 막힌 사람일 것 같았다. 렐리아는 첫인상만 보고 그렇게 무심하게 판단해버렸다. 그저 멀뚱히 서서 잔잔히 웃기만 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에 렐리아는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추어인가. “안녕하세요. 치료 때문에 오셨죠?” “네, 안녕하세요. 공작전하의 부름을 받고 온 치료사제 아럼프 세브로웰라고 합니다.” “전 렐리아예요. 치료는 어떻게 받나요? 벗나요?” 빨리빨리 좀 하자 라는 생각으로 렐리아는 대뜸 침대에 드러누워 배를 까뒤집었다. 상의와 하의가 분리된 평민 옷이라 새 붕대를 두르고 있는 가느다란 허리만이 훤히 드러났다. 실상 이틀 동안 몸이 낫도록 온갖 수단을 동원했었다. ‘드래곤 아르카이샤’에는 힐러라는 특정직업이 없다. 워낙 구식게임이라 힐러가 없는 대신 자가치유 기능의 스킬을 따로 갈고 닦을 수 있게 되어있었다. 거울을 보며 스킬이름을 죽어라 외쳐댔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다른 스킬은 단축키위치만 알지 이름은 몰라서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혹시 인벤토리에 있는 HP를 채워주는 포션을 마시면 낫지 않을까 싶어 그 빨간 소독약 같은 걸 삼켜도 봤으나 맛도 느껴지지 않고 상처도 그대로였다. 결국 사제가 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기에 렐리아는 정말로 상처와 빨리 좀 이별하고 싶었다. “이런, 배를 다치셨나보군요.” 적발의 사제는 놀라기는커녕 잔잔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유 없이 웃어 모자라다기 보단 의심쩍게만 보이는 미소였다. 이윽고 사제가 제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침대를 손바닥으로 누르고선 제 옆에 앉았다. 아까의 아마추어 같던 수동적인 모습과는 달리 이상하게 여유로운 모습이다. “꿰맸는데 아직 실밥을 안 풀었어요. 이럴 경우엔 어떻게 하나요?” 소피아에게 미리 사제가 올 거란 말을 듣고서 신성력에 대해서도 조금 들어놨었다. 듣기로는 신성력을 부리기 위해선 엄청난 비용이 요구된단다. 공급자인 사제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했다. 하지만 효과는 기적이라 불릴 만큼 대단해서 파인 살도 단번에 아물게 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살이 돋아나게 한 다음에 실밥을 빼나요? 아니면 실밥 먼저 제거하고 살을 돋아나게 하나요?” “글쎄요. 중간중간 실밥을 제거해나가면서 살을 채울까 하는데요.” “치료사제시라니까 믿고 맡겨야죠 뭐.” 왠지 젊어보여서 썩 신뢰가 가진 않지만 렐리아는 겉으로나마 씰룩 웃었다. 실력 있는 베테랑사제를 불러주지 왜 이런 새내기 티가 나는 사제를 불러준 걸까, 역시 돈문제 때문인 걸까. 렐리아가 속으로 딴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사제는 그녀의 허리에 묶인 붕대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심하네요.” 그는 인상을 찌푸리기는커녕 여전히 미소 지은 채 말했다. 안심을 시키려는 건지 아님 이 정도는 치료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미소가 잘 어울리는 상당한 미남이라는 건 알겠다. 낙조에 물든 하늘처럼 붉게 타오르는 머리와 마찬가지로 붉은 적안은 인상에 강렬하게 남을 것 같았다. “아플 테니 눈 감고 있어요.” 내가 저를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그가 상처부위로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그러곤 품속에 지닌 작은 은제보관함을 꺼내 내려놓고선 날카로운 핀셋 같은 걸 집어 들었다. 그는 얼굴에 띄운 미소를 지우지 않고 차분하게 복부상처에 핀셋을 가져다댔다. 그 뒤론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그의 말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이름은 그냥 렐리아예요? 성은 없나요?” “…,” “나이는요?” “…,” “신음소리 참는 게 더 힘들 텐데 그냥 내도 돼요.” “…,” 아럼프라는 사제는 치료 중 계속해서 제게 말을 걸었다. 그게 단순히 저와 친해지고 싶어서인지, 제게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지루한 치료시간을 달래기 위해서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고, 어차피 또 심하게 다치진 않는 이상 하루 만나고 다신 안볼 사이였다. ‘…엄마…엄마, 엄마 나죽어.’ 시간이 유난히 억겁처럼 길었다. 속으론 어으으 하는 앓는 소리를 내는 동안 렐리아의 이마위로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생각해보니 아직 새살이 돋았을 리 없을 텐데 실을 잡아 뜯는다는 건 다시 상처부위를 벌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기껏 꿰매났더니 이런 생고생도 없었다. 0029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럼프는 장갑을 벗고 신속히 상처부위에 손을 가져다댔다. 성스러운 은빛이 손끝에서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그녀의 벌어진 상처가 서로 맞물리며 겹겹이 새살이 돋아났다. 오 초도 지나지 않아 상처는 완전히 아물었다.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다시 상처부위를 찾으라고 한다면 찾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렐리아는 고통이 사라지자 곧바로 허연 배부터 더듬어보았다. “…헐. 진짜 다 나았네요. 매끈해요.” “화상자국도 있다고 들었는데 보여줄래요.” “아 네.” 갈비뼈가 살짝 드러날 정도로 옷을 끌어올리고서 렐리아는 왼쪽아래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보였다. 아럼프는 다시금 신성력을 손끝에서부터 불러일으켰다. 톡 톡 하고 두어 번 녹아내린 살 위를 건드리자 이번에도 말끔히 사라졌다. 신성력이 이정도 수준이었다니, 현대문명을 뛰어넘다 못해 가히 경이로울 정도다. 렐리아는 순수하게 감탄하며 이 사제를 지구로 납치해와 의료계의 혁명을 불러일으키는 상상을 잠시 했다. 억만장자가 되는 건 정말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그 눈도 다친 건가요? 왼쪽 눈도 봐줄게요.” “아뇨, 이건 단순한 눈병이에요.” “눈병도 치료할 수 있답니다. 계속 붕대를 감고 있는 것보단 빨리 낫는 게 더 편하잖아요.” “아뇨아뇨 괜찮아요. 사실 치료비도 모자라거든요.” “눈 치료비용은 안 받는다면요?” 그렇게까지 해서 자신을 치료해줄 이유가 뭐지? 렐리아는 이 남자에게 조금의 꿍꿍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혹여 라도 자신이 공작의 숨겨진 애인인 줄 알고 이렇게 과한 호의를 베풀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래야 공작으로부터 약간의 콩고물이 떨어질 테니까. 붕대를 감은 눈을 보호하듯 그녀는 왼손을 들어 눈을 덮었다. 됐네요, 하고 말하듯이. “눈 감고 있어도 돼요. 그래도 신성력은 내부로 흘러들어가니까요.” “아 그럼 해주세요." 마음이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그녀였다. 바늘구멍이 난 눈알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면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혼자서 공작의 애인으로 착각하든지 말든지 제 알 바 아니기도 했다. 아럼프라는 남자는 저가 이럴 줄 알았다는 양 웃어보였다. 한 손을 들어 붕대를 푼 제 왼쪽 눈을 덮고서 그는 또 한번 눈을 내리깔았다. 신성력을 쓸 때마다 나오는 버릇인 모양이었다. 남자답지 않게 긴 속눈썹위로 노을빛이라도 어린 것처럼 붉게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 별안간 그가 고운 호선을 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 수도 사람인가요?” “아뇨. 여기 온지 이틀밖에 안됐어요.” “그렇군요. 사실 저도 수도로 올라온 지 얼마 안됐어요.” 공통점을 찾음에 그는 여자 꽤나 울릴 미려한 눈웃음을 지은 채 손을 떼어냈다. “수도구경은 해봤나요.” “그게 아직이요.” “그럼 내일주말에 시간 괜찮다면 같이 수도구경하는 건 어떤가요?” 렐리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순전히 놀라서였다. 남자를 단 한 번도 연애대상으로 만나본 적이 없는 여자답게 경계심 짙은 태도였다. “초면예요? 밖에서 따로 만나자고요?” “만나면서 점점 친해지는 거지 처음부터 친해지는 경우는 없어요. 지금 이렇게 봤으니 내일 보면 구면이 되잖아요. 물론 제 예상으론 저흰 잘 맞을 것 같네요.” “지금 저한테 이성적인 관심이 있다는 거예요?” “아뇨. 너무 멀리 갔네요.” “저도 병인가 봐요.” 하하 하고 기계적인 웃음을 흘리며 렐리아는 간신히 썩을 뻔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하긴 제게 이성적인 매력 따위가 있을 리가. 조금의 기대라도 한 건지 스스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제안이 조금 당혹스러웠나요? 제가 이곳에선 아는 사람이 없어서요. 수도에 오면 꼭 가봐야 할 재밌는 곳들이 많아요. 그런데는 혼자 가면 재미없어서 옆에서 함께 어울려줄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음-” “마침 렐리아 양도 수도에 올라온 지 얼마 안됐다고 하니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요?” 밝은 붉은빛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접혀지며 저를 담았다. 초면인데도 불구하고 제게 상당히 짙은 호감정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 렐리아는 바로 의심부터 했다. 이 남자의 속셈은 단순히 내 몸인가? 하는 썩은 생각이 가장먼저였다. “같이 어울려주는 조건으로 비용은 제가 부담할게요.” “아뇨 됐어요. 내일은 자기 먹고 쓸 돈만 가져와요. 근데 제가 이곳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런데 몇 시에 어디로 나가야되는지 약도로 그려주실래요?” “적당히 낮 네 시쯤이 낫겠네요. 네 시쯤에 저택 뒤편으로 마중 나갈 테니까 그 앞에 서있어요.” “네- 네.” “그럼 내일 봬요. 렐리아.” 저 남자 은근히 고단수가 아닌가. 단순히 이름한번 불렀을 뿐인데 렐리아는 그렇게 착각 속에 빠졌다. 실상 그의 제안에 승낙해준 건 별 이유 없었다. 계속 들이대기에 그냥 하루만 어울려주면 알아서 떨어져나가겠지 싶은 것이다. 수도의 재밌는 곳들을 많이 안다는 말에 혹한 것도 있었다. 나름 시크하게 침대에 앉아 그를 배웅했으나 그가 나가버리자 렐리아는 침대시트 위에 머리를 박았다. 미쳤지, 미쳤지. 공략하라는 상대들은 멀쩡히 놔두고 지금 NPC와 놀 때인가 싶었다. 어쩌자고 생판모르는 남자와 이런 약속을 잡아버린 건가 싶었다. 그래도 혼란함과는 별개로 처음으로 여자 대 남자로 밖에서 따로 만난다는 자체에 신기해졌다. 그냥 게임얘기하려고 만나는 남자도 아니고, 그냥 공략하려고 들이대는 남자도 아니고. 순수하게 같이 수도구경이라는 건전한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냥 심심해서 한번 만나준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저 혼자 큰 의미를 둬버리는 렐리아였다. 복도소등을 마친 늦은 시간 렐리아는 몰래 방밖으로 빠져나왔다. 후미진 구석계단을 타고 두 개의 층을 올라간 후 바로 코너를 돌자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 같은 복도구석에 방이 있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였다. 다름 아닌 이 대저택의 주인이 머무르는 침실이었다. 저택 최중심부에 삼엄한 경비를 치고 있을 거라 여겼던 렐리아의 상상은 단번에 무너뜨리고도 남을 만큼 접근이 허술했다. 하긴 이런 구석에 공작이 있을 거라곤 아무도 생각지 못할 거다. 원래 저택중심에 가장 넓고 화려한 가주의 방이 있다고 했으나 공작은 그곳 침실은 두고 굳이 이 방에서 머무른다고 했다. 지극히도 단절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이 엿보이는 이 구석방 말이다. 렐리아는 슬그머니 문고리를 쥐고 돌렸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인지 아니면 다음날아침 전속시종이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인지 문을 잠가놓지 않았다. “저기 공작~” 문을 열자마자 나오는 거실에서 기웃거리다가 침실로 추정되는 방으로 걸어갔다. 그도 매번 노크 없이 벌컥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데 저가 할 필요는 없다 여겼다. 슬그머니 문을 열어 안으로 한발디디기 무섭게 문 바로 옆에서 서느런 검이 뻗어져왔다. 정확히 턱 아래에 닿은 검 옆날위로 방의 잔잔한 진주홍불빛이 흐르고 있었다. “안자네?” 비교적 가벼운 복식을 한 흑발의 그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차라리 문앞에 경비병을 세워두는 게 어때? 그렇게 예민해서야 잠은 어떻게 잔대?” 이렇게 항시 문 옆에서 대기하고 있냐고 렐리아가 우스갯소리를 했으나 그는 한 치의 표정변화도 없었다. 그에 괜히 머쓱해진 렐리아가 어깨를 으쓱하자 그제야 그가 한손에 쥔 검을 거두었다. 긴 검자루에 집어넣고서 일인용 탁자 옆에 세워놓았다. “이 시간에 용무라 함은 또 그겁니까.” 이 야심한 시각에 몰래 사내의 침실로 숨어들어왔다는 건 그 의도가 불 보듯 뻔하다. 블리어는 참 지치지도 않는 여자라고 생각하며 바로 내쫓으려했다. 그 전에 턱을 긁적이며 조금 제 눈치를 보는 여자의 태도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내가 너무 염치없는 건 아는데,” “뭡니까.” “돈 좀 빌려주라?” “정말 염치없는 부탁만 합니다.” 거두어준 은혜도 모르고 이젠 저를 돈줄로 이용할 셈인가, 그녀에 대한 평가가 최악까지 내려갔다올라 온 전적이 있던 지라 블리어의 시선은 마냥 곱지 못했다. 그 탐탁찮은 눈빛을 알아차린 렐리아는 곧바로 오해를 풀기위해 그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많은 돈도 안 바래. 여기 돈으로 치면 밥 한끼 사먹을 돈 정도?” 그의 기준에서 밥 한끼 사먹는 돈은 평민의 약 보름치 생활비에 맞먹는다. 하루 두 끼면 한 달 생활비인 셈이었다. 어릴 적부터 최고급에 해당되는 값비싼 음식들만 먹고 자랐으니 당연하게도 웬만한 음식으론 그의 미각을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렐리아가 원한 비용은 단돈 만원이었다. “꼭 갚을게. 내가 돈 들고튀면 어디로 튀겠어. 그것도 고작 밥값 가지고.” 블리어는 맞는 말이라 여겼다. 이 영악한 여인이라면 그 작은 돈을 갖고 도망칠 바엔 이곳에 더 오래 눌어붙어있기 위해 잔머리를 굴릴 터였다. 하지만 귀찮다고 자꾸 받아주다 보면 저의 신분을 잊고 기어오르려 할 테다. 그 오만방자한 꼴은 못 참는 지라 블리어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기한을 정해두겠습니다.” “좋아.” “일주일 안에 갚으십시오. 안 갚을 시엔 그 손가락하나를 자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각서작성법을 모를 테니 내가 쓴 종이에 지장만 찍으십시오.” ‘미친아.’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렐리아는 간신히 참아 넘겼다. 괜히 손가락사이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무슨 밥값까지고 손가락을 걸어? 밥맛 떨어지게, 에이.” “갚으면 됩니다.” “됐다 됐어. 안 빌리고 말지.” 사실 돈 빌릴 사람이 공작뿐인 것도 아니었다. 최근에 말을 튼 소피아도 있다. 어린 동생한테 돈을 빌리기 뭐해서 공작에게 찾아온 거라지만 고작 만원 때문에 손가락을 걸 바엔 소피아에게 사정사정하는 게 훨씬 더 나았다. “근데 공작. 나 내일 외출할 때 입을 옷이 없는데…,” “붙여준 시녀한테 따로 말하십시오. 구해다줄 겁니다.” “아 그래?” 그것 참 다행이네, 렐리아는 내일아침에 바로 소피아에게 부탁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방을 나서려고 했다. 뒤에서 저를 붙잡는 매서운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누구와 식사라도 하러 가는 겁니까.” “응.” “누굽니까? 내가 안본 사이 어떻게 남자를 꾀어낸 겁니까.” 경계심, 예민함이 가시처럼 잔뜩 오른 그의 목소리는 집착소유욕에 찌든 남자주인공의 전형적인 대사를 내뱉는 것만 같았다. 슬프게도 공작은 자신이 아니라 그 상대에게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는 게 문제였다. “혹 상대가 귀족이라면 골치 아픈 일이 꼬이지 않게…” “네가 뭘 걱정하는 지 알아. 걱정 마, 네가 불러준 그 남자사제니까.” 이틀 동안 나돌아 다니지 않고 얌전히 방안에만 있었는데 어떻게 귀족남자를 만나냐며 덧붙여 얘기해줬다. 그제야 다소 누그러진 어조가 딱딱한 선을 그리는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나는 분명 신전에다 여사제를 호출했습니다만.” “…뭐?” 그 사람이, 여자? 렐리아는 저보다 훤칠한 키의 붉은 머리 사제를 떠올렸다. 속눈썹이 길고 입술도 곱상하리만큼 아름다웠었다. 목소리가 약간 중성적이란 느낌만 들었지 전혀 여자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쩐지 불편하지 않다더니 여자였구나. 렐리아는 약간 몸의 긴장을 풀어졌다. 무의식중에 내일약속에 과장된 의미를 부여하고 있던 지라 부담감에 옭아매어있던 그녀의 가슴이 조금 후련해졌다. 내일은 그냥 편하게 나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그전에 돈을 구해야겠지만. 0030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약속당일 점심때까지 렐리아는 원 없이 퍼질러 자다가 아침겸 점심을 먹으라며 소피아가 찾아오자 그제야 부스스 일어났다. 소피아는 부지런하게 쟁반 위에 담긴 식기를 테이블 위로 옮겨놓았다. 그런 소피아의 뒤로 슬금슬금 다가온 렐리아는 뒤늦게 흠흠 하고 헛기침을 두어 번 터뜨렸다. 그제야 소피아는 그녀의 존재를 눈치 챈 듯 놀란 토끼눈을 하고 뒤돌아보았다. “있잖아, 소피아~” “…아, 전해준다는 게 깜빡했어요.” “?” 소피아에게 말을 걸기 무섭게 작은 그녀는 메이드복의 앞주머니를 뒤적이며 작은 주머니하나를 꺼내놓았다. 이래봬도 비싼 쇠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였다. 소피아가 건네는 주머니를 받아든 렐리아는 그 내용물을 확인하기 위해 입구를 벌렸다. 안에는 은색동전이 열 닢 넘게 들어있었다. “소피아 너…독심술도 할 줄 알아?” “네?” 돈 빌려 달라 부탁하기도 전에 돈주머니를 제 손에 쥐어주다니, 도라에몽 저리가라였다. 렐리아는 고마움을 넘어 소피아에게 경외감까지 생겨날 지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피아는 다시 앞주머니를 뒤적거려 곱게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것도 함께 읽어주라고 하셨어요.” “음? 누가?” “공작님이요.” 오늘 오전에 소피아는 부엌일을 하는 언니들을 돕다가 저를 급히 호출하는 공작의 집무실에 찾아가게 되었다. 자신이 은발여인을 시중들면서 뭐 부족한 것이라도 있었나, 속으로 소심하게 생각하며 발발 떨었으나 막상 집무실안에 도착했을 땐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시종을 통해 돈주머니와 종이 한 장을 제 손에 쥐어주고서 나가보라던 공작님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소피아는 종이를 펼쳐들었다. 분명히 읽어주라고 하셨으니 이건 훔쳐보는 게 절대 아니다. 사실상 이제껏 공작님과 이 아리따운 은발여인의 관계가 상당히 궁금했었던 소피아였다. 허나 차마 시녀주제에 도 넘는 짓을 할 수 없어 꾹 참고 있었다. 이 편지에 어떤 달달한 글들이 적혀있을까 생각하며 소피아는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점점 표정과 말투가 이상하게 변해갔다. “그 돈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 것. 나갔다 일찍 돌아올 것. 사고치지 않을 것. 위 세 가지 사항을 지키지 않을 시에는 손가락을 자를 것…. 더러워서 준 것이니 돈은 갚지 않아도 됩니다…….” 이게 뭐야…? 소피아가 시무룩 울상을 짓는 동안,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보였다. ‘하여튼 세심하다니까.’ 돈을 빌려준 것보단 자기가 글을 못 읽는다는 걸 기억하고서 소피아에게 미리 읽어주라고 지시한 것에 새삼 감탄해버렸다. 안 그랬다면 소피아에게 이 글자 어떻게 읽느냐고 머쓱하게 부탁을 해야만 했을 텐데 말이다. 이런 점에선 그 까다롭고 세심한 면이 조금은 예뻐 보인다. 물론 편지내용은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재수 없지만. * 렐리아는 약속시간에 맞춰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저택뒷문으로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러곤 바로 멀지않은 곳에 세워진 마차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도 저를 발견했는지 이윽고 마차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의 사제가 내려섰다. 반질거리는 고동색가죽의 구두가 가장먼저 눈에 들어왔다. 렐리아는 아래에서부터 쭉 올라가며 눈앞의 사제를 훑어보았다. 두꺼운 재색코트 사이로 화려함을 덧댄 조끼와 긴 다리에 달라붙은 바지는 무슨 연회라도 나갈 것처럼 말쑥해보였다. 바람에 한 올 한 올 나부끼며 가볍게 흐트러진 적발은 어제 보았던 그 사제가 맞나 싶을 만큼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남자는 머리빨이라더니. 잠깐, 여자랬지. 센 언니 같다.’ “어서 오르지 않고 뭐해?” 그러다 전조 없이 돌연 들려온 반말에 렐리아는 다시 사제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사제는 그저 잔잔하게 웃고만 있었다. 사제복을 입었을 때는 차분하게만 보였던 그 미소가 이런 모습으로 보니 새삼 가벼워보였다. “왜 내가 반말해서? 지금은 업무상 만나는 게 아니니까 서로 딱딱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 “뭐 그렇죠. 근데 몇 살이세요?” 렐리아는 안쪽소파에 편하게 앉았다. 소파의 시트감촉부터가 저번에 탔던 작은 마을마차와는 급이 달랐다. “너는?” “저 스물넷이요.” “나도 스물넷. 그럼 너도 내게 반말하면 되겠네.” “응. 아 저기, 일단 우리 어디부터 가는지 얘기해줘.” “아럼프라고 불러.” 아럼프는 마차문을 닫고서 천장을 두어 번 툭툭 쳤다. 서서히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제야 아럼프는 입을 열었다. “재밌는 곳.” 그게 다야? 하고 반박할 뻔했으나 렐리아는 아직 친해지지 않은 사람에게 따끔하게 쏘아붙이질 못했다. 그저 ‘뭐 재밌다고 하니 재밌겠지’하고 심드렁히 수긍하고 말았다. 사제라는 청렴한 직업을 가졌으니 마음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무엇보다 공작이 제게 붙여준 여사제니까 그것이 은근한 신뢰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 나비모양의 가면으로 눈매를 가린 렐리아는 현재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할 말을 잃었다. 수도에서 가장 화려한 것들로만 장식된 것처럼 반짝거리는 장소였다. 황금을 부어 놓은 것 같은 수백 개의 기둥과 샹들리에의 불빛이 반사되는 맨들맨들한 대리석이 까마득하게 펼쳐져있었다. 공작새처럼 화려하다 못해 우스꽝스럽기도 한 의상을 입은 귀족들로 가득 찬 곳은 다름 아닌 수도 가브리나의 합법적인 도박장이었다. 그것도 최대 규모의 시설을 자랑하는 귀족들의 오락시설이었다. 주위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와 흥분에 이기지 못한 목소리가 왁자지껄했다. 그 사이로 데구르르르, 하고 작은 쇠공이 구르는 맑은 소리와 도미노 무너지는 소리, 주사위 굴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렐리아는 근처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느 귀족남자가 전 재산을 다 잃은 허탈한 표정을 하고 빠르게 도박장을 벗어나는 게 보였다. 그에 하마터면 옆에서 온화하게 웃고 있는 아럼프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재밌는 곳이 도박장이야? 엉?! 너 이 새끼 성직자 맞아?’하고 멱살을 짤짤 흔들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넘겼다. 벌써부터 피로함이 겹겹이 쌓이는 기분에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런 도박장에 올 줄 알았으면 돈을 빌리지도 않았을 테다. 빌린 돈이 전재산인 자신보고 이곳에서 다 날리고 알거지로 쫓겨나라는 건지 뭔지. “…후. 저기 나 돌아갈게.” 친하지 않다보니 욕은 못하겠고 렐리아는 최대한 가식적인 목소리로 힘없이 몸을 돌렸다. 이 여사제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이다. 차라리 공작과 쎄쎄쎄라도 하며 노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저기 자리 비었어.” “아니, 나 몸이 안 좋아서 그냥 갈게.” “나랑 함께 어울려주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렇게 나오면 섭섭한데.” ‘…네가 이런데 올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도 않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더니, 눈앞의 사람과 정말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아럼프는 가늘게 눈웃음을 지은 채 일단 따라와 보란 듯이 제 손목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한 대 치면 저 기둥 끝까지 날아갈 이 여인을 차마 뿌리칠 수가 없어서 렐리아는 순순히 이끌려줬다. 아럼프가 멈춰선 곳은 둥그런 룰렛판을 중간에 두고 금괴들이 왔다 갔다 하는 어느 게임테이블 앞이었다. 그 주위를 둘러싸고 네 명의 사람들은 나이, 외모, 성별이 다 달라도 사치스러워 보인다는 거 하난 공통적이었다. 손에 낀 몇 개의 반지들과 몸에도 치렁치렁하게 달린 보석, 값비싼 털가죽으로 된 외투까지 두르고 있었다. “이 자리에 착석해도 될까요?” “꽤 하는 젊은인 가보군. 전재산을 탕진할 각오로 앉게나.” 아럼프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재산을 탕진할 각오로 앉으라는 말이 이 여사제의 귀에는 가볍게만 들리나보다. 자리에 착석해있는 참여자들은 다들 재력과 운이 따라주는 모양인지 각 테이블 위에 금괴들이 수두룩이 쌓여있었다. 렐리아는 아럼프가 한판하고 속곳바람으로 쫓겨나는 과정을 지켜보기 위해 옆에 서있었는데 조만간 부드러운 손이 제 어깨에 내려앉더니 그대로 저를 의자에 앉혔다. 일어나지도 못하게 양어깨를 단단히 누르고 있는 손힘에 렐리아는 경악스럽게 제 옆에 선 아럼프를 올려다봤다. ‘미친년아! 왜 날 여기 앉혀?!’ “그렇게 보지 마. 금방 재미 붙일 수 있을 거야.” 귓가로 속삭여오는 나지막한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두 손을 들었다. 저 여기서 빠질게요, 라는 기권의사였으나 이미 게임은 시작된 후였다. 회전원반 가운데에 동그란 쇠공과 주사위를 넣고 게임진행자가 빠른 속도로 판을 회전시켰다. 참여자들은 일제히 저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가면너머로 ‘니 차례다, 불쌍한 초짜야’ 하는 거만한 눈빛들이 드러났다. 렐리아는 움찔 주눅 드는 동시에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절망을 느꼈다. 젠장 망했다. 속곳바람으로 쫓겨나는 건 저 붉은머리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다시금 악마와도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솔솔 간질였다. “잃을 걱정은 마. 내가 말했잖아? 같이 어울려주는 조건으로 비용은 내가 부담하겠다고.” “진짜…? 진짜로? 진짜 그럴 거지? 나중에 딴말하기 없기다?” “그러니까 마음 편히 즐긴단 생각으로 해봐. 룰은 내가 설명해줄게.” 그제야 렐리아는 돌아가는 회전판을 응시했다. 가만 보니 지구상의 룰렛과는 형태가 많이 달라보였다. 50칸에서 80칸은 족히 되어 보이는데다 총 두 개로 나뉘는 판은 위아래로 서로 엇갈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실제로 카지노에 가본적은 없어도 영화나 드라마로 보고 알게 된 잡지식 정도는 있었다. 기존의 룰렛보다도 훨씬 난이도가 높아보였다. 빙그르르 돌아가는 커다랗고 정교한 원반위에 정확히 참여자들을 뜻하는 다섯 개의 구슬이 굴러갔다. 자신은 은색인 모양이었다. 위회전판에는 숫자인지 모를 이상한 기호들이 각 눈금에 등분되어 써져있었고 아래회전판에는 색깔별로 나눠지는지 은색, 흰색, 검정색, 금색, 붉은색, 초록색으로 눈금색이 다양했다. “네 구슬이 어느 눈금에서 멈출지 그 숫자와 색깔을 맞추는 거야. 물론 하나만 맞춰도 돼. 둘 다 동시에 맞추는 일은 확률이 굉장히 낮거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구슬이 어디에서 멈출 지까지 맞추면 네가 단번에 승자가 되는 거야. 하지만 위험부담이 커서 되도록 자기 구슬위치만 맞추려고 하지. 어때 간단하지?” “…후, 그래. 한번만 하고 일어날 거야? 나 말했어.” 스릴 있는 게임은 좋아하지만 이런 큰 돈이 왔다갔다하는 위험한 도박은 취향이 아니다. 가난한 서민이라 그런지 돈은 안전한 게 최고였다. “그러니까 내 건 금색에 1, 첫 번째분 것도 금색에…음 42, 두 번째분 거는 초록색에 33, 세 번째분 거는 은색에 28, 네 번째분 거는 검은색에 75.” 따갑게 재촉하는 눈길에 그녀가 뭣 모르고 말을 줄줄 잇자 둥그렇게 앉아있던 네 명의 참가자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웃겨서가 아닌 안쓰러워서 터져 나온 냉소였다. 게임룰조차 이해하지 못한 넌 이제 파산이다, 라는 쓰디쓴 냉소 말이다. 실제로도 그녀는 상당히 위험한 확률에 모든 걸 걸어버렸다. 하루아침에 수십억의 빚더미에 오를 확률이 대형운동장만한 하다면 그녀가 여기서 이길 확률은 현재 바늘구멍정도의 가능성이라 보면 되었다. ‘응? 이렇게 하는 거 아닌가.’ 렐리아는 턱만 긁적거렸다. 슬쩍 아럼프를 올려다보자 저를 여기에 강제로 앉힌 그녀 또한 표정이 살짝 굳어있었다. 0031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회전판이 서서히 멈춰가기 시작하고 이윽고 은색구슬이 가장먼저 금색에 1번 눈금에 멈춰 섰다. 근처에 앉아있던 몇몇 참여자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뒤늦게 이 정도는 초심자의 행운으로 봐도 된다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하지만 단순히 우연 따위가 아니라는 걸 참여자들은 곧이어 깨달았다. 족족히 멈춰서는 구슬마다 렐리아가 말한 눈금에 정확히 멈췄으니 말이다. 숙연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참여자들이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는 동안 렐리아는 또 한 번 턱을 긁적였다. ‘아 다 맞았다.’ 생각보다 쉬운 게임이었구나 하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게임진행자가 각 참여자들의 테이블위에 얹어진 금괴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그러곤 정확히 자신의 앞으로 그 금괴들을 몰아주는 게 아닌가. “총 이백골드 얻으셨습니다.” 설핏 인상을 찌푸리며 렐리아는 네? 하고 되물으려다가 말았다. 가면너머로 경악스럽게 쏘아져오는 시선들에 부담스러워서 슬쩍 비껴서있을 뿐이다. 게임진행자는 은발여인이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걸로 받아들이고서 질기고 튼튼한 가죽주머니에 금괴들을 담아주기 시작했다. 한 10분의 1정도 담기자 렐리아는 그만 되었다며 말했다. 그러곤 바로 주머니를 챙겨들고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저들의 눈에 띄었다가 공작에게 또 무슨 잔소리를 들을까 싶을 뿐이다. 그녀 옆을 아럼프는 한동안 말없이 조용히 걸었다. 얼이 빠진 표정치곤 진지해보였는데 뒤늦게 입술이 기다랗게 휘어지며 흥분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단풍처럼 새빨간 홍채가 놀란 듯 조금 가늘게 떠져있었다. “방금 그거…도박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가장 희박한 확률이야. 하, 난이도가 굉장한 높은 건데.” “그런 위험한 거에 날 끌어들였다는 거야…?” ‘이 친구야? 너 뭐하는 애니.’ 진지하게 묻고 싶은 걸 꾹 눌러 참는 동안 반대로 아럼프의 입가에선 황홀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내가 말한 건 자기숫자 아니면 색깔 둘 중에 하나만 맞히라는 거였어. 그 정도면 조금 손해보고 마는 정도거든. 근데 네가 무턱대고 다른 참가자들것까지 부르길래 솔직히 말해서 순간적으로 널 버리고 갈까 생각했었어.” “뭐 이…” 이 무슨 골 때리는 친구가 다 있을까, 렐리아는 처음으로 강적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문제는 그런 성격이 은근히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그 청아한 웃음소리가 혼재된 목소리가 제 귓가에 낮게 스며드는 것이 싫지 않았다. “이 정도면 변방에 작은 땅덩어리를 사도 될 것 같은데.” “뭐?” “거짓말이야. 아까 네가 딴 돈이 땅덩어리 구매할 정도고 지금은 집 한 채 값은 될 거야. 이제 좀 현실감이 느껴져?” “그걸 왜 안 말했어?!” 단순히 게임머니란 이유만으로 가볍게 취급했는데 그런 억소리가 나는 금액이었다면 등에 짊어지고서라도 가져갔을 테다. “어차피 못 들고 갔을 거잖아. 포기해. 다시 돌아가도 이미 네가 버린 금괴라 생각하고 진행자가 치웠을 거야.” 못 들고 갈 리 없었다. 다만 들고 가는 모습을 주위에 보일 수 없는 것뿐이다. 산더미처럼 쌓인 금괴에 미련이 남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양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모습에 키 큰 아럼프가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안 그래도 작아져있던 렐리아는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려야만 했다. “굉장한 거야. 평생의 운을 끌어다 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악마인지 천사인지 구분이 안갈 목소리로 아럼프가 그녀의 귀에 속살거렸다. 듣기 좋은 미성으로 천연스럽게 그 속내를 드러내었다. “운이 굉장히 좋은 것 같은데 다른 게임도 해볼래? 운 좋은 날일수록 도박에 매진해야지.” “…풉, 미치겠다…” 렐리아는 고개를 숙인 채 골 때리겠다며 웃어버렸다. 성직자가 뭐 이따구인가 싶으면서도 정말 그 성격한번 마음에 들었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제게 편히 어깨동무를 한 아럼프를 올려다보았다. 선명한 붉음 아래 화려하게 빛나는 고운 얼굴이 저를 향해 마주 웃어주고 있었다. 동갑이라지만 멋진 언니 같았다. “그래 돈도 많이 땄겠다. 이차 고!” 그렇게 호쾌하게 외치며 렐리아는 아럼프가 이끄는 데로 움직였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카드게임이 한창 중인 곳이었는데 그곳에서 렐리아는 의외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어?” “어.” 무장을 하지 않은 가벼운 연회복차림의 갈색머리 사내는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킬리였다. 커다란 왼손에 스무 장의 카드를 부채처럼 펼쳐들고서 게임 중인 모습이 꽤나 여유로워보였다. 킬리는 저와 눈이 마주치면서도 술술 게임을 진행했는데 그의 앞 테이블엔 금괴가 착착 쌓여 올라가고 있었다. 숙련된 솜씨는 보통이 아니어보였다. 막바지에 들어선 카드게임은 얼마안가 킬리의 승으로 끝났다. 렐리아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바로 킬리에게 다가갔다. “역시 게임광 아니랄까봐 여기서도 보네요.” “남 말할 처지는 아니지 않나요.” “하하 그 촌철살인은 여전하네요. 아 이쪽은 아럼프예요. 아럼프, 이쪽은 킬리예요.” 렐리아는 가볍게 서로 소개를 시켜주고서 카드게임 테이블에 착석했다. 이번엔 아럼프도 함께 껴서 카드를 잡았다. 게임시작 전에 킬리와 아럼프가 양옆에서 게임룰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어때, 이정도면 이해됐겠지?” “뭐 어느 정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지금이라도 돈 잃고 싶지 않으면 일어나요. 옛정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에요.” “킬리 저 오늘 운 되게 좋거든요? 그 코 납작하게 만들어줘도 되죠?” 방금 게임룰을 터득한 초짜치곤 대담한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실력 있는 킬리와 아럼프, 몇몇 고수들이 낀 8명의 게임테이블에서 쟁쟁한 승부가 펼쳐졌다. 그리고 승리는 놀랍게도 초심자 렐리아가 거머쥐었다. 첫판부터 잭팟을 터뜨리더니 뒤이어 연승이 이어지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스스로의 손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단순 우연이라고 여겼는데 계속 좋은 패가 제 손에 들어왔다. 이기고 싶지 않아도 상황자체가 자연스레 이기게 돌아갔다. 게임고수들은 뭐하는 여자냐는 눈빛으로 저를 놀란 듯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킬리는 약간 자존심이 상했는지 이젠 진지하게 두 손으로 카드를 쥐고 있었다. 아럼프는 그저 빙글거리며 여유롭게 머릴 굴리는 듯 했다. 그동안 렐리아는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대체 뭐지, 뭐 때문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거지, 끊임없이 의문을 품다가 내부가 덥게만 느껴지자 긴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 그리고 그제야 손목에 채워진 얇은 은팔찌의 존재를 깨달을 수 있었다. 퍼뜩 이제까지의 괴현상들이 이해가 갔다. <신전 드필드라의 보물>의 영향인건가. 운 스텟과 지능스텟, 회피율을 최고로 올려주는 이 희귀템이 무서우리만치 제게 행운을 끌어들이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했다가는 어떤 식으로든 이목을 끌겠다싶어 렐리아는 나비가면을 단단히 고쳐 쓰며 몸을 일으켰다. “저 이제 일어날게요. 킬리 다음에 또 봐요." 승부욕이 붙었는지 킬리는 조금 아쉬운 얼굴을 했다. 하지만 제게 계속 털리는 건 두려운지 순순히 보내주었다. 렐리아가 일어나자 아럼프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친구에겐 한결 마음이 누그러지고 마는 렐리아는 평소처럼 능글맞게 웃었다. “재미 들린 것 같던데 계속하지 그래?” “말했잖아? 옆에 어울려줄 사람이 없으면 재미없다고.” “흠 괜히 미안해지려고 그러네.” “속으론 안 그런 거 알아.” 렐리아는 그 잔잔한 웃음기어린 어조에 가슴이 찔려 픽 웃어버렸다. 오랜만에 대화가 재밌는 상대는 킬리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그래도 금방 적응했지? 그렇게 나쁜 데는 아니야. 어디까지나 왕국에서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곳이니까.” “근데 성직자라면서 이런 데 다녀도 돼?” “그래서 가면 쓰는 거잖아?” “참 대단하셔라.” 빈말을 터뜨리며 렐리아는 묵직한 금괴가 든 자루를 들고 도박장을 벗어났다. 중간에 삼층탑을 쌓은 금괴대신에 귀부인의 값비싼 반지로 맞바꿔서 그나마 무게가 덜 나갔다. 도박장안에 틀어박혀있다 나오니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렐리아의 긴 은발을 흐트러뜨렸다. 수많은 사람들의 눅눅한 숨으로 데워진 듯한 공간속에 있다가 차가운 바깥공기를 쐬니 기분이 상쾌했다. “왠지 너라면 나랑 잘 맞을 것 같았어. 생각보다 내 감은 좋거든.” 눈 주변만 가리는 가면을 벗어던진 아럼프의 고운 옆얼굴 선이 노을빛으로 물들어갔다. 차츰 적발을 먹어 들어가는 노을은 불과 불이 만난 것처럼 강렬했다. “내 앞에서 배부터 까뒤집던 모습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반할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어.” “예쁜이한테 이런 말 들어봤자 하나도 안 기쁘네요.” 렐리아가 피식 웃어버리자 아럼프는 더더욱 가늘게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도 찾아가도 될까?” “뭐?” “사실 아직 네 치료가 다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거든. 날마다 나눠서 치료한다고 둘러대면 계속 널 만날 수 있는 구실이 생기는 거잖아. 물론 비용은 변함없다고 하면 그쪽 공작님도 불만 없을 테고.” 치료하러오는 척 계속 날 만나러오겠다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싶으면서도 렐리아는 눈앞의 이 여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겼다. 수도관광이랍시고 뻔뻔하게 도박장으로 끌고 온 여자니까, 보통 철면피가 아닌 것이다. 물론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문제라지만. “더 친해지고 싶어. 렐리아.” 그 낯간지러운 말에 렐리아는 머리를 헤집듯이 긁적거렸다. 하필이면 노을이 배경이라 왠지 청춘하이틴 드라마를 찍는 기분이었지만 그녀는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음- 그럼 나랑 지금 쇼핑 갈래?” * 공작가의 모든 식솔들이 잠드는 시각, 오늘도 공작의 방에 잠입을 시도하는 겁 없는 자가 있었다. 짐 꾸러미와도 같은 거대한 보따리를 짊어지고서 살금살금 불이 꺼진 거실로 들어서더니 이윽고 보따리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두었다. 어둠에 스며든 가는 실루엣은 곧바로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 식구가 둘러앉아도 될 만큼 커다란 테이블 위에 포장된 음식들이 놓아지기 시작했다. 서늘하리만치 상쾌한 향이 감돌던 거실은 방주인의 성격을 반영하듯 잡냄새하나 떠돌지 않았으나 현재는 먹음직스런 냄새로 가득 차있었다. 육즙이 쫙 빠진 폭립과 훈제닭고기 샐러드, 향신료가 뿌려진 굵은 파와 돈육이 번갈아 끼워진 짧은 꼬치, 두툼한 햄이 일품인 샌드위치, 시럽과 함께 졸인 딸기가 켜켜이 쌓여있는 크레이프케이크, 까만 빛깔의 포도쨈이 올라간 오동통한 파이, 모카향이 솔솔 나는 정통 디저트 등 상당히 화려한 구성이 아닐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모든 세팅을 마친 여인은 흡족하게 미소 지은 채 침실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어젖힌 채 “공작 나와 봐.” 하고 외쳤으나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저 청결하게 정리된 불 꺼진 침실 안을 둘러보고 있을 때 조만간 파앗하고 거실의 불이 들어왔다. 렐리아는 반색하며 침실에서 튀어나와 지금 막 방안으로 들어선 흑발사내를 바라보았다. 감정 없는 싸늘한 표정의 그는 일을 하다왔는지 흐트러짐 없는 정장차림이었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야식 먹자.” 이럴 줄 알았으면 살금살금 움직이지도 않았다며 속으로 툴툴대면서도 렐리아는 호쾌하게 씩 웃고 말았다. 어서 앉으라며 그녀는 그의 옆으로 다가가 채근했다. 테이블 다리가 부러질 듯이 한상 가득 차려진 음식들에 혹시 감동이라도 먹었나 싶으니 인중이 근지러웠다. 검지를 들어 코밑을 슥슥 문지르는데 별안간 문가에 서있던 블리어가 미세하게 인상을 구겼다. “이게 다 뭡니까.” “내가 준비했지.” “누구 마음대로.” 별 거 아니라며 렐리아가 어깨를 으쓱하기도 전에 그가 칼같이 자르고 들어왔다. “난 내 방에 이런 음식냄새가 나는 게 싫습니다. 불쾌하니 치우십시오. 창문열고 환기까지 완벽하게해서 원상태로 돌려놓으란 말입니다.” “뭐?” “그 돈으로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 했거늘…” 0032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짜증스럽게 구겨진 그 얇은 사내입술을 스치듯 포착한 렐리아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거 네 돈으로 사온 거 아니거든? 기껏 사람이 생각해서 사다줬는데 이러기야?” 렐리아는 괜히 울컥해버렸다. 저건 입체캐릭터다, 한낱 캐릭터다, 수십 번을 되뇌어서 겨우 짜증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아럼프와 함께 이 수도의 유명한 디저트점과 이색음식점을 쏘다녀서 구해온 음식이었다. 그녀성격에 화장품이나 드레스 쇼핑을 다닐 리는 없으니 음식쇼핑이 제격인 것이다. 아럼프도 여성스런 쇼핑에는 별로 관심 없는지 그녀의 음식쇼핑에 끝까지 어울려주었었다. 맛보고 괜찮다 싶으면 집에 있을 공작을 생각해 바리바리 포장해왔더니 정작 공작은 다 싸들고 꺼져라는 냉랭한 반응이었다. 말은 재수 없게 해도 뒤에선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 같아 이렇게 고마움을 표한 건데 자존심이 안 상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렐리아는 품속에 넣어두고 있던 작은 주머니를 꺼내 그의 앞에 내밀었다. “자. 받아. 네 돈 한 푼도 안 썼다.” “그 돈 갚을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더러워서 먹고 떨어져라 준 겁니다.” ‘…재수 없는 새끼.’ 조용히 속으로 삭히며 렐리아는 구겨질 뻔한 입술을 가증스럽게 끌어올려야만 했다. 저 남자를 어떻게든 살살 굴려 한 번의 합의하의 관계를 맺어야하는데 이제와 대판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대한 좋게 좋게 가야하는 건 렐리아지 그가 아니니 당연스럽게도 굽히는 건 그녀가 되었다. “꼭 그렇게 삐딱하게 나와야 돼? 같이 먹을 사람이 없어서 그런데 같이 좀 먹어주라.” “안 먹습니다.” “공작~ 응?” 자존심까지 버리고 눈웃음을 살살 쳤으나 그는 눈길한번 주지 않고 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또 쌀쌀맞은 무시였다. 그와는 단 한 번의 합의점을 찾기란 아직까지도 멀고도 험한 모양이었다. ‘…엄마 내가 요즘 이러고 살아.’ 닫힌 침실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고개를 돌려버린 렐리아는 테이블위에 올려놓았던 포장음식들을 다시 주섬주섬 보따리 안에 싸 넣기 시작했다. 육류는 식으면 맛없으니 방에 가서 혼자 먹어야겠다. 디저트는 내일 소피아와 티타임을 가지면서 먹으면 딱 일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보따리를 다시 등에 짊어지려할 때였다. 달칵, 하고 멀지 않은 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을 켜지 않아 어둑어둑한 침실문 사이로 공작은 마귀처럼 서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이 어둠과 동화될 듯 새카매서 멀리서보면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것 같기도 했다. 그늘이 깔린 진녹안은 어둡게 빛났는데 멀리서 저를 지켜보는 한 쌍의 눈동자로 인해 괜스레 누가 목 뒤에 칼을 들이민 것처럼 소슬하기만 했다. 뒤늦게 블리어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냄새가 안 나는 건 놔두십시오.” “냄새가 안 나는 거 뭐?” 곱지 않게 받아치며 렐리아는 작작 하라는 눈빛으로 그를 퉁명스레 쏘아보았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태도는 그녀를 더 열 받게 만들었다. 이미 포장용 상자를 전부 봉해 보따리에 차곡차곡 쌓아놨더니, 지금 누구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냄새 안 나는 거 뭐~? 말해야 알 거 아닌감. 공작.” “…….” “샐러드 말하는 거야? 샐러드 꺼내줄까?” “내가 닭비린내 나는 샐러드를 말했겠습니까?” “아 씨, 그럼 뭐?” “아 씨?” “아씨~ 마님이 찾으십니다요~” 얄밉게 이죽이며 돌쇠흉내까지 해줬더니만 그는 답답한 듯 표정을 미세하게 구기고 있었다. 정작 답답한 건 자신인데 말이다. 다시 문을 닫으려는 것처럼 문고리를 세게 눌러 쥐던 그가 이윽고 이 갈리는 살벌한 소리를 냈다. “디저트 말입니다. 한번 말할 때 알아먹으십시오.” “풉…” 렐리아의 입술 새로 절로 뭉개진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왕도전체에 위용을 떨친다던 저 공작이, 저 딱딱하고 메마른 남자가 분명 디저트라고 말했다. 아기자기하고 몰랑몰랑하고 달달한 디저트를 달라고 말이다. 차라리 검 한 자루를 가져오라고 한 걸 잘못 알아들은 게 아닌가 제 귀를 의심할 정도였다. "푸하하학, 방금 뭐라고?" "……천박하긴." "하하하 내 배야!" 정말 개그가 아닐 수 없어서 그녀는 대놓고 배를 잡고 킥킥거렸다. 그에 블리어는 피곤함에 찌들다 못해 가히 썩은 표정을 하고서 쾅 소리가 나게끔 문을 닫아버렸다. 한참 뒤에야 웃음을 멈춘 렐리아는 디저트 줄 테니까 나와 보라고 몇 분간 침실문을 두들겨야만 했다. * 자정이후로 가장 성한 도박장에는 유흥으로 밤을 보내기 위한 자들로 넘쳐나 있었다. 거대한 샹들리에 아래 늘어진 수백 개의 크리스탈에 불빛이 반사되어 넓은 내부를 고루 비추었다. 환한 빛들이 화려하게 장식된 귀족들의 머리 위를 비출 때 그들의 머리꼭대기에 위치한 한 사내가 있었다. 도박장의 2층에 마련된 귀빈석에 서있는 은발의 신사는 아래층에 위치한 여인들을 느긋하게 훑어보고 있었다. 유선형으로 잘 빠진 흰 가면아래 섬세하게 뻗은 콧날과 조각 같은 입술이 매력적인 사내는 이 도박계에서 상당히 거물로서 취급받는 남자였다. 신분은커녕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으나 달빛이라도 내려앉은 것만 같은 고귀한 은발만으로도 그 존재가 증명되는 자였다. 늦은 밤에 나타나 가장 탐스런 재물을 손에 쥐고 사라져 사람들 사이에선 달이라고도 불렸다. 수많은 여인들의 환대를 받고 온갖 도박계 거물들에겐 경외심을 사는 존재. 그런 그가 오랜만에 이곳에 등장한 것이다. 허나 사내는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도 불구하고 아래층에 발을 디딜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저 드넓은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공기 속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자취에 입꼬리를 길게 말아 올렸다. “그 여자 냄새가 나.” 대기자체에 녹아든 달콤한 체향, 감미롭게도 달뜬 숨결, 그는 모든 감각을 세우고서 그 옅어진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 흥미로운 존재가 마치 이곳에 숨어있는 것만 같았다. 작디작은 자신을 찾아보라고 은근히 약을 올리는 것 같았다. 가면너머로 기묘한 은색광채가 흐르는 눈이 가늘어졌다. 아래층을 메우고 있는 귀족들 사이를 훑어보았으나 그 어디에도 여자로 추정되는 이는 없었다. 지금 여기 있을 리가 없나. 아쉽다는 양 혀끝으로 붉은 입술을 적시며 남자는 가면아래 가늘게 웃었다. * * * 렐리아는 어젯밤만 생각하면 피식피식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근처 테이블 앞에 앉아 머핀을 맛보고 있던 소피아가 머리를 갸웃하며 물어왔다. 렐리아는 침대위에 비스듬히 머릴 괴고 누운 채로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그런 건 아니고. 근데 그거 맛있지?” “네! 정말 맛있어요.” “차도 마셔가면서 먹어. 체하겠다.” 단 걸 좋아하는지 활짝 핀 얼굴로 소피아가 고갤 끄덕였다. 이젠 완전히 저가 편해진 모양이었다. 렐리아가 흡족함에 ‘나중에 또 사다줄까?’하고 묻자 소피아는 머핀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서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연하게 쌍꺼풀이 진 동그란 눈은 정말 볼 때마다 다솜이와 닮았다. 먹는 게 복스럽다고 남자친구가 매번 칭찬했다고 했었나, 암튼. “소피아는 남자친구 있어?” “아니요. 한번도…” 다시 급 소심해진 성격으로 돌아온 소피아가 귀여워서 렐리아는 광대가 절로 흐뭇하게 올라갔다. 이래서 여자애가 좋다니까, 짓는 표정이나 하는 행동이 아기자기해서 보는 내내 마음이 절로 몽글몽글해진다. 똑같이 단 걸 좋아하지만 딱딱한 누구 씨에 비하면 천배 만 배 사랑스러운 것이다. ‘이래야 사줄 맛이 나지.’ 또 한 번 어제일이 생각나 혼자서 작게 킥킥거리고 있을 때 별안간 노크소리가 방밖에서 들려왔다. 소피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선 남은 머핀을 바구니 속에 숨겨둔 후 문을 열었다. 입가에 머핀가루가 묻어있었으나 그 사실은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치료하러 왔는데 렐리아 양은 안에 있어?” 문밖에서 익숙하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렐리아는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나 근처테이블위에 놓여있는 바구니를 쥐고서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제 만났던 센 언니는 어디가고 흰 모자를 푹 눌러쓴 깔끔한 사제복차림의 아름다운 적발사제가 서있었다. 렐리아는 밖에 서있던 그녀를 방안으로 들여보낸 뒤 조용히 고개 숙여 나가려는 소피아를 붙잡았다. 머핀이 종류별로 든 바구니를 쥐어주며 ‘혼자 방가서 먹어’하고 말하듯 한쪽 눈을 찡긋하자 소피아가 팟, 하고 전구가 켜지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구니를 품에 안고 총총 걸어가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렐리아는 방안으로 들어왔다. “시녀한테 뭐 전해준거야?” “머핀.” “잘 챙겨주네.” “챙겨주긴, 오히려 소피아가 날 챙겨주지.” 다섯 살이나 어린데 참 대견하다며 얘기하다가 렐리아는 다시 침대위에 털썩 앉았다. 근처에 서있던 아럼프는 자연스레 그녀 옆에 앉더니 싱긋 눈을 접어보였다. 갸름한 턱날 아래를 문지르며 그녀를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 가보고 싶은 곳 있어?” “도박장 데려간 게 미안했던 모양이지?” “그건 아니고. 어제 재밌었잖아.” “뭐 돈은 벌었으니까.” “수도에서 가보고 싶은 곳 없어?” 화려한 미소가 미끄러지듯 맺힌 입술은 왠지 그 얼굴을 한층 더 반질거리게 만들었다. 렐리아는 의심쩍은 눈을 하고서 팔짱을 꼈다. 그녀답지 않게 조금 단호했다. “근데 말이야. 이건 친구가 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자. 왜 이렇게 실실 웃는 거야? 치료할 때도 웃더니만. 누군 아파죽겠는데 진짜 얄밉더라.” “되기 전? 우리 이미 친구된 거 아니었나?” “묻는 말에나 답해줄래~ 친구?” “그건 너무 불공평한데. 우리 서로 한 가지씩 묻고 답하기 할까?” 불공평하긴 개뿔, 렐리아는 픽 웃어버렸다. 일단 너부터 말하라며 재촉하자 얼마안가 아럼프가 턱을 문질이던 손을 들어 올려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글쎄. 굳이 말하자면 습관 같은 거려나?” “습관?” “대신전으로 옮겨온 후로는 매일 수백 명 넘는 신도들과 만나다보니까, 아마 이런 쓸데없는 버릇이 든 게 아닐까?” “맞다. 너 수도 올라온 지 얼마 안됐다고 했지. 원랜 어디에 있었는데?” “야누이스 신전. 촌구석이라 말해줘도 모를 걸. 그럼 이젠 내 차례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운 채 아럼프는 그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적안 위로 흥미로운 빛이 흘렀다. “라콘드 공작님과는 무슨 사이야?” “별 사이 아닌데.” “별 사이 아닌데 왜 널 방에 가두는 건데?” “가둔 거 아닌데.” 심드렁한 렐리아의 대답에 아럼프는 비스듬히 왼쪽눈썹 끝을 끌어올렸다. 미소만 살짝 지웠을 뿐인데 약간 고뇌하는 젊은 학자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흐음, 좀처럼 시원하질 않네. 그럼 조금 속보이는 질문으로 바꿀게. 공작님과는 애인사이야?” “아무사이도 아닌데.” “이것도 시원찮은데 뭐 됐어.” 아럼프는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로 넘겨버렸다. 남의 침대인지 자기 침대인지 분간이 안 가는지 살짝 상체를 뒤로 젖히고서는 고개도 넘겼다.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탓에 중앙에 톡 튀어나온 목 울대뼈를 렐리아는 보지 못했다. 다시 짧은 적발이 쓸려내려 오도록 고개를 내리자 목 울대뼈가 티 나지 않을 만큼 밋밋하게 돌아왔다. 그때, 옆에서 잠시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던 렐리아는 잽싸게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수도 어딜 가고 싶냐고 물었잖아. 나 왕궁가고 싶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왕을 잡으려면 왕궁밖에 더 있을까. 물론 잡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일단 어떤 공략캐릭터인지는 파악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몸도 다 나았겠다, 한시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시간을 허투루 보낼 순 없었다. 무리한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아럼프는 그저 잔잔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지독히도 버릇이 든 모양이었다. “이래봬도 내가 고위급사제거든. 왕궁출입이야 자유롭지. 동행인도 말이야.” “너와 친구하길 잘 한 것 같아.” “그렇지? 근데 언제갈래?” “지금.” 다음은 없다는 듯 렐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아럼프의 한 팔을 양손으로 붙잡고 잡아당겼다. 아럼프가 부러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자 그녀는 얼른 서두르지 못하냐며 아럼프의 흰 바지에 싸인 작은 엉덩이를 두들겨주었다. 여자친구들한테 하는 행동이 그대로 튀어나온지라 렐리아는 그다지 제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아럼프만이 조금 놀란 듯 쳐다보았다가 말뿐이었다. 뒷문으로 빠져나온 두 사람은 곧장 아럼프가 타고 온 마차에 함께 올랐다. 0033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수도중심에 있는 왕궁으로 향하는 동안 렐리아는 참 좋은 친구를 구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비록 만난 지 이제 삼일 째라지만 그녀가 편하기만 했다. 모델처럼 키도 큰데다 얼굴은 작고 화려하게 생겼다. 목소리가 여자치곤 약간 낮고 허스키한 게 매력이라면 매력이었다. 무엇보다도 성격이 잘 맞았다. 하는 행동거지라든지 말하는 스타일이 자신과 닮았다. 그래서 대화하는 게 재밌는 친구기도 했다. “여기 와서 사귄 친구는 네가 처음이야. 아럼프.” “그래? 그 킬리라는 사람은?” “킬리는 친구는 아니지. 그냥 말 통하는 아는 오빠?” 그녀의 말에 조금 흡족해진 듯 아럼프가 마차소파에 나른히 몸을 기대었다. 렐리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럼프는 차창너머로 스며드는 오후햇살에 기분 좋은 지 부드럽게 풀린 얼굴을 했다. “가브리나로 상경한 후로는 대신전에서 머무르면서 매일 손님들 치료하고 기도하고 치료하고 기도하고 지루하더라고. 그런데 이번에 받은 손님은 참 신선해서 좋았어. 배 까뒤집던 게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아. 나 그 손님에게 단단히 빠진 것 같아.” “아 그래? 난 어제 사기를 당했거든. 수도관광 시켜준대서 따라갔더니 도박장에 데려간 거 있지? 너무 골 때려서 뇌리에서 잊혀지질 않아.” 그녀의 말에 아럼프는 소리 내서 웃어버렸다. 그들이 한동안 웃고 떠드는 동안 마차는 부지런히 달려 거대한 성곽입구에 다다랐다. 창가에 앉아있던 아럼프가 경비병에게 왕실에서 발행한 통행증을 보여주자 구구궁 소리를 내며 묵직한 나무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곳을 지나가자 이제는 족히 3미터는 넘을 듯한 웅장한 철문이 나타났다. 예술품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교하게 무언가가 양각되어 있었는데 렐리아는 그 검은 철문에 조각돼있는 것이 다름 아닌 드래곤이라는 걸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나 문에 새길게 없었으면 별 거지 같은 걸 새기냐고 속으로 툴툴대는 동안 그들은 단번에 왕궁에 입성할 수 있었다. 렐리아는 바로 본궁으로 들어섰다. 가장 외부인출입이 삼엄한 곳이 본궁이었으나 대신전의 고위급사제라는 신분은 이곳마저 단번에 통과시켜주었다. 아럼프가 의외로 능력 있는 사제였다는 사실에 새삼 충격을 받을 것만 같았다. ‘나처럼 노는 거 좋아하고 인생대충 사는 줄 알았지…나도 돌아가면 맘먹고 취업준비할거지만.’ 생각해보면 깊은 상처를 한 번에 깔끔하게 치료하는 실력이 대단하기는 했었다. 역시 사람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선 안 되구나 생각하다가 렐리아는 옆에서 들려온 질문에 잡생각을 접어야만 했다. “이제 여기서 어쩌고 싶어? 이 뒤로는 나도 통과 못할 구역이야. 구경했으니 돌아갈래?” “국왕폐하를 멀찍이서 라도 보고 싶어. 어떻게든 안 될까?” “왜 굳이?” “이왕 여기 왔는데 유명한 사람정도는 보고가야지 싶어서.” 렐리아는 어떻게든 이 기회에 왕과의 작은 접점이라도 만들고 싶었다. 멀리서 우연히 눈이 마주치는 정도의 접점 말이다. 아럼프가 언제 또 자신을 이곳에 데려와줄지 모르는 일인데다 공작에겐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집한다고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 법이다. 자신은 현재 대통령이 보고 싶다고 무턱대고 청와대에 현장체험 온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도 아니니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눈에 비칠 자신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을 테다. 공작도 매일 천박하다, 천박하다 입에 달고 살지 않나. 왕의 눈에 띌지는 애초에 미지수였다. 쓰디쓴 현실을 맛보며 렐리아는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아럼프와 나란히 걸으며 그녀는 사소한 정보라도 알아내기 위해 왕에 대해 뭐 아는 거 있냐고 캐묻기 시작했다. “글쎄, 국왕폐하라도 관심이 없다보니 딱히.” “좀 흔한 거라도 좋아. 모두가 다 아는 대중적인 얘기라도 없어?” “흐으음…, 아.”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기며 아럼프가 또 습관적으로 싱긋 웃었다. “최근들은 소식은 알아. 올르아 공녀와 약혼을 했다고 들었어.” ‘약혼?’하고 떨떠름하게 되물으려던 찰나였다. 모퉁이너머에서 대화소리가 귓속을 자연스레 가르며 들어왔다. “…제2기사단 신병? 기사서약식 때문에 온 거지? 이곳에서 한참 더 멀리 가야있어. 여긴 본궁이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모퉁이를 돈 렐리아는 그대로 딱딱하게 턱이 굳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서 뒤를 도는 남자의 뒷모습에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새하얄 만큼 눈부신 은발이었다. 동시에 확 물을 끼얹듯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공간의 대기를 확 짓눌러버리는 강렬한 기운이 뇌를 점령했다. 은빛비늘을 뒤집어쓴 드래곤을 눈앞에서 마주한 것처럼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저 자다. 왠지 그런 강력한 확신이 들었다. “아,” 짧은 탄성이 작은 입술 새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먼발치에 있던 은발머리 사내가 갑작스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한눈팔기 무서울 정도로 날랜 속도였다. “렐리아?” 옆에서 아럼프가 부르기 무섭게 렐리아 또한 달려 나갔다. 보는 눈이 있기에 설렁설렁 달렸지만 누가 봐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의 빠른 속도였다.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달리는 여인치곤 무릎과 팔꿈치가 정확히 직각을 유지하며 번갈아갔고 결승선을 눈앞에 둔 단거리선수처럼 전심전력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중간에 모퉁이를 하나 더 돌아 본궁 서쪽방향의 출입문으로 빠져나온 렐리아는 생전 처음 와보는 장소에서 잠시 헤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올올이 흩날리던 은발은 자신을 농락하듯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본궁 주변을 벗어나 무작정 직진으로 달렸을까, 탁 트인 눈밭너머로 거대한 군집을 이룬 기사들이 보였다. 까마득할 만큼 긴 열을 이루고서 일제히 절도 있는 자세로 검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들을 훑던 중 수많은 기사들 사이로 은발의 사내가 지나가는 걸 포착한 렐리아는 곧바로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칙칙한 기사들 사이로 유독 튀는 새하얀 은발과 훤칠한 신장은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이제 잡는 건 시간문제였다. 하지만 이 사람 많은 곳에서 잡아서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때려눕혀? 그리고 올라타서 키스라도 해? 답이 없다. 일단 드래곤도 공략상대인지라 어떻게든 좋게 좋게 가야하는 실정이었다. 저쪽이 또 나를 죽이려 든다면 막막하기만 했다. ‘아 근데 모르는 척하면 어떡하지. 이 사람 많은 곳에서.’ 그쪽에서 드래곤이 아니라고 발뺌한다면 자신이 뭐라 박박 우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쯤하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지라 사람 없는 곳에서 은밀하게 접촉을 시도해야겠다고 여겼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나오려나.’ 아까 우연히 들은 대화내용으로 미뤄봐선 기사서약식인가 뭔가 하는 행사인 것 같았다. 렐리아는 차마 기사들 사이에 낄 수는 없는지라 그 근처에 팔짱을 끼고 서서 기다렸다. 단상 위에는 견장이 달린 남청색 제복차림의 중년남자가 뭐라 연설하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를 긴 연설을 지루하게 흘려듣고 있을 때 우렁찬 나팔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렐리아는 심드렁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고갤 들어올렸다. 그리고 멀리서 단상 위로 올라서는 한 남자를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왠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무거운 와인색망토와 어깨위에 단단히 고정시켜놓은 금장식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었다. 먼 곳에 있지만 뚜렷한 이목구비는 훤했다. 까마득한 태양아래 환하게 물들어있는 금발은 태생부터 고귀해 보이는 빛깔이었고 그 찬란함 위에 붉은빛이 넘실거렸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비로운 색감을 띠었다. 무엇보다 선명하고 밝은 에메랄드빛 눈은 어디 사는 누구와 명도만 다르게 준 느낌이었다. 짙은 눈매에 어울리는 탁한 녹안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듯 떠올랐다. ‘…저게 왕.’ 소피아를 통해 알게 된 이 세계의 곁가지 지식들 중 하나가 바로 혼기였다. 남자는 보통 20살에서 23살까지가 결혼적령기이고 여자는 더 어린 17살에서 20살이라고 들었다. 듣기론 왕의 나이가 스물다섯이라 들었는데 혼기가 꽉찬 나이에 아직 비가 없다고 했다. 아까 아럼프에게 듣기론 최근 약혼녀가 생겼다지만 아직 왕비로 책봉하지 않은 상태인 것이다. 이렇게 미루는 걸 보면 뭔가 있겠지 싶을 뿐이다. 신분 낮은 애인이라거나 신분이 낮아 숨길 수밖에 없는 애인이라거나 말이다. 생각해보면 왕도 불쌍하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왕이라 주위 기대는 클 테고, 권세를 공고히 하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비로 맞아 후계를 보고 평생을 함께 살아야……, 그런 오지랖 넓은 생각을 잇던 도중 렐리아의 심드렁한 시야 속에 어느 여인이 잡혔다. 왕의 뒤를 따라 바이올렛색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단상위로 오르는 금발미인을 말이다. ‘왕 복받은 새끼...’ 렐리아는 어느새 팔짱도 풀고서 뚫어져라 단상 위에 선 여인을 바라보았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아도 시야를 가득 메우는 아름다움이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숨이 멎을 것 같은 느낌은 처음 경험해봤다. 찬바람에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흐트러지는 금발은 말 그래도 순도 높은 금빛을 띠었다. 하얀 햇살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것만 같았다.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엉덩이에서부터 종아리까지 타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보랏빛자락은 그녀를 마치 먼 신기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대체 모난 부분이 어딜까 싶을 만큼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였다. 연말시상식 단상에 오른 기품 있는 여배우 같은 느낌이었다. ‘…대박, 여신.’ 답지 않게 흥분에 찬 얼굴로 렐리아는 두 손으로 입까지 가렸다. 진짜 길을 걷다가 우연히 게릴라데이트를 하던 여배우를 만난 기분이 이럴까 싶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그 존재자체만으로도 감격 그 자체였다. 뒤늦게야 이성적인 생각이 차츰차츰 들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렐리아는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훌륭한 여덕의 자세였다. 공적인 자리에 왕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걸보니 저 여인이 바로 국왕의 약혼녀인 것 같았다. 실제로도 렐리아의 추측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삼 년에 한 번씩 왕실기사단에서 신인을 발탁해 치르는 기사서약식에 그 충성을 맹세 받을 젊은 왕, 그리고 그를 따라 약혼녀도 이 중요한 일정에 참석한 것이다. ‘올르아 공녀였던가.’ 고이 가슴 속에 그 이름을 아로새기며 렐리아는 자신 좀 봐달라고 손을 흔들고만 싶었다. 하지만 너무 동떨어져있던 탓일까 여인은 제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것에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끼던 중 수줍은 벚꽃 같은 분홍빛눈동자가 허공에 마주쳤다. ‘아 눈 마주쳤다.’ 단아한 용모의 금발여인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얼마안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줘버렸으니 분명 멀리서 시선이 맞닿았었다. 그 짧은 눈맞춤이 뭐라고 렐리아는 단단히 그녀에게 매료되어버렸다. 이미 왕은 안중에도 없었다. 십분 정도의 짧은 연설이 끝나자 왕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뒤따라 내려오는 자신의 약혼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느새 다정하게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젊은 국왕은 수백 명의 기사들 사이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여인을 좀 더 가까이보기 위해 기사들 주변에서 기웃거리다가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두 사람이 지나가는 길목주변에 다다랐을 때 렐리아의 바로 눈앞에서 가느다란 금빛머리칼이 살랑이며 스쳐지나갔다. 달달한 향기가 잠시 코끝에 머물렀다. 그녀를 따라 눈동자를 굴리다가 렐리아의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하얀 손수건이 들어왔다. “아 이거.” 렐리아가 황급히 몸을 굽혀 손수건을 주운 후 그녀를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왕과 함께 길 끝에 도착해 마차에 오르고 있었다. 드레스자락을 우아하게 집어 들고서 발판을 밟고 올라가는 뒷모습마저 아름다워 렐리아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그러다 뒤늦게 제 어깨를 붙잡는 손길에 렐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너울거리는 불꽃처럼 새빨간 머리가 이리저리 흐트러져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성직자가 쓰는 하얀 모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는 게 자신을 찾느라 여기저기 돌아다녔던 모양이다. “…하. 왜 이렇게 빨라?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네.” “아 미안.” 은발하나에만 꽂혀 워낙 정신없이 쫓아오느라 아럼프는 뒷전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존재를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것에 미안해져 렐리아가 말이 없자 아럼프는 가볍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고향사람을 본 것 같아서.” 렐리아는 대충 둘러대며 아럼프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미안해서라도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향사람은 만났어?” “내가 잘못 봤나봐.” “그래? 근데 손에 들린 그 손수건은 웬 거야? 아까 전에는 없었지 않나.” “주웠어.” 덤덤하게 답해주던 중 렐리아는 사선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언뜻 눈앞에서 스쳐지나가는 은발남자를 볼 수 있었다. 기사들의 무리에 합류해 어디론가 향하는 그 뒷모습에 걸음이 잠시 우뚝 멈췄다. 뛰어가면 잡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 자신의 팔을 부드럽게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이제 가자. 데려다줄게.” 왜 갑자기 멈추냐며 아럼프가 의아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자 렐리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었다. 이번에도 아럼프를 버리고 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왕실기사단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았으니 언제 한번 은밀히 접촉해봐야겠다고 렐리아는 속으로 생각했다. 0034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공작저로 돌아오는 길에 렐리아는 아럼프와 함께 유명 디저트점에 들렸다. 단 걸 좋아하는 무표정의 흑발남자가 떠오른 탓이다. 그곳에서 다디단 디저트는 죄다 포장해온 그녀는 현재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중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쫓겨나지 않고 이 까다롭고 딱딱한 남자의 거실에 편히 눌러앉아있다니 꿈인가 생신가 싶을 정도다. 맞은편 소파에 앉은 공작은 묵묵히 포크를 놀리고 있었다. 한평생 검만 잡아온 듯이 거친 사내 손에는 앙증맞은 은포크가 들려있었다. 서느런 표정의 사내 앞에는 눈으로만 봐도 달아 보이는 디저트들이 옹기종기 놓여있었다. 녹아내린 진한 다크초콜릿에 촉촉하게 적셔진 초콜렛시트, 묵직한 헤이즐넛 크림이 얹어진 카라멜푸딩, 연한 갈색의 모카생크림이 어우러진 초코머핀 등 종류는 다양했으나 대부분 커피 혹은 초콜릿맛 나는 디저트였다. 입맛에 맞는지 그는 말없이 계속 포크만 움직이고 있었다. 진득한 초콜릿을 게 눈 감추듯 먹어버리는 모습에 솔직히 렐리아는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진짜 단거 좋아하나보네…이제까지 어떻게 참았대.’ 그가 굳이 사정을 얘기해주지 않아도 렐리아는 그 성격만 봐도 대충 이해가 됐다. 여자들의 전유물 같은 아기자기한 디저트를 어디서 구할 수조차 없었겠지. 디저트를 내오라고 한다면 눈치 빠른 사용인들은 그가 달달한 걸 좋아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 챌 테니 말이다. 남들 시선은 또 엄청나게 신경 써서 이제껏 단 걸 먹고 싶어도 못 먹었을 이 남자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대체 이 얼마나 예민한 남자란 말인가. 조심히 다뤄야 되는 유리세공품 같았다. “공작 맛 어때. 괜찮아?” "피로가 풀리는 기분입니다." "아 그 기분 나도 알지. 꿀꿀하다가도 초콜릿 먹으면 기분 좋아지잖아. 많이 먹으면 달아서 질리긴 하지만." 처음으로 평범하게 정상적인 대화를 한 것 같은 기분에 렐리아는 흡족해졌다. 초콜릿의 효과인건가 싶었다. 단 건 입에도 대지 않을 것처럼 생긴 남자인지라 조금 깬다고 생각하면 깨는데 막상 보다보면 또 이해가 된다. 튼튼한 골격과는 달리 매일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것 같은 남자가 그였다. 어딘가 피곤에 찌든 눈이나 메마른 표정을 볼 때면 정말 단 거라도 먹여서 정신적인 피로를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근데 공작.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렐리아는 슬쩍 몸을 일으켜 블리어가 앉아있는 반대편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럼에도 그는 어떠한 제지조차 하지 않았다. 초콜릿에 심취해서 그런지 평소의 날카로운 신경이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공작씩이나 되니까 세간의 눈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사람이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가만 보면 공작은 기계가 아닌가 싶어. 어떻게 사람이 조금의 오차도 허락하지 않는 거야? 실수도 하고 허점도 보여야 인간미가 있지. 알파고가 더 사람 같겠다.” “남 인생사 신경 끄십시오.” “에이 또 딱딱하게~” 앙탈부리듯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슬그머니 그에게로 엉덩이를 미끄러뜨리며 움직였다. 바짝 붙어 앉으려는 제 속셈을 간파한 건지 그가 한 손으로 쿠션을 집어 들더니 그와 저사이의 딱 중간에다 내려놓았다. 여기부턴 넘어올 생각마라는 무언의 경고 같았다. ‘에휴. 사람이 참 꽉 막혔어.’ 이 선 넘지 말라며 책상에다 줄 그어놓는 초딩도 아니고 말이다. 렐리아는 속으로 낮은 한숨을 터뜨리며 소파에 편히 등을 기댔다. 그래도 내쫓지는 않는 게 디저트를 사다준 게 은근히 고마운 모양이다. 서로 소파 양끝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동안 별안간 그가 초코디저트 하나를 해치우고서 입을 열었다. “단 걸 좋아한다는 소문이 도는 즉시 그 목을 효수…,” “아아- 한낱 천한 신분의 여자가 퍼뜨린 소문을 사람들이 믿겠어? 개소리라고 치부하지.” 그렇게 치졸한 사람으로 보지 말라고 렐리아는 심드렁히 대꾸했다. 블리어는 그저 아무 말 없이 모카향을 솔솔 풍기는 조각케이크를 포크로 세심하게 등분할 뿐이었다. 있어도 없는 사람들처럼 각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있을 때 이번에 먼저 입을 연건 렐리아였다. “근데 공작, 단거 좋아하는 거 별로 이상하게 안보여.” “…….” “오히려 이런 단 걸 좋아하는 게 반전매력일 수 도 있는 거고 말이야. 사람이 너무 일관적이면 또 매력이 없어요.” 무슨 대단한 연애코치라도 납신 것처럼 나불거리다가 렐리아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가리고서 눈매를 둥글게 휘는 게 완전히 능글맞아보였다. "아~ 혹시 공작 나한테 매력 있어 보이려고…" “그대 같은 천한 신분의 여자의 눈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뿐입니다.” “그놈의 판단, 어지간히도 좋아하네.” 슥 그를 돌아보며 렐리아는 쿠션 바로 앞까지 엉덩이를 당겼다. 그러곤 얼굴만 그를 향해 쭉 내밀고서 요염하게 살살 눈웃음쳐댔다. “그럼 말야~ 나랑 섹스해도 된다는 판단 같은 건 안 서나? 어때, 오늘 할래?” 그러나 대답대신에 철퍽, 하고 무언가가 렐리아의 얼굴위로 장렬하게 날아왔다. 정확히 콧등 위를 내리찍으며 뭉개지는 크림은 다름 아닌 모카머핀의 묵직한 크림이었다. 무릎위에 툭 떨어진 뭉개진 머핀을 내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슥 코 아래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내었다. 한 뭉텅이가 검지 끝에 묻어나왔다. “아...진짜. 콧구멍에 생크림 들어갔잖아.” 싫으면 싫다고 말로 할 것이지, 하여간 깜찍한 짓만 골라한다. 킁킁하고 렐리아는 콧구멍에 낀 생크림을 빼내느라 고생이었다. 십자모양으로 혈관이 빠직 돋아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의외로 산뜻한 얼굴로 고갤 들었다. “너무해~”하고 보살처럼 웃는 동시에 그녀는 제 무릎에 떨어진 머핀을 움켜쥐고서 그대로 공작의 옆얼굴을 향해 찍어 내리려했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팔을 들어올리기도 무섭게 블리어가 손을 들어 가냘픈 손목을 붙잡아버렸다. "먹는 걸로 장난치는 거 아닙니다." “…공작 이런 성격이었어?” “내려놓으십시오.” “놔. 그 얼굴에다 생크림을 발라야 직성이 풀리겠어.” “내려놓으라 했습니다. 내 말이 말같이 안 들립니까?” “공작이 먼저 했잖아, 이러기야?!” “그 천박한 말버릇 탓 아닙니까. 합당한 벌을 준 것뿐입니다.” “싫다고 하면 될 것이지, 굳이 남 콧구멍에다 크림을 쑤셔 박아야 될 합당한 이유가 뭔데?” “나또한 그대의 천박함에서 기인한 말을 들이며 정신적인 피로를 느껴야 될 이유가 뭡니까?” 서로 잘났네 못났네 겨루더니 어느새 두 사람은 본격적인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블리어는 의외로 끈질기게 밀고 들어오는 여인 탓에 포크까지 내려놓고서 그녀의 다른 손을 붙들고 있었다. 생크림이 뭉개진 머핀을 악착같이 쥐고서 어떻게든 제 얼굴에 묻히려고 이를 벼르고 있었다. "무슨 여자가…손힘이 이리 셉니까." "이게 반전매력 아니겠어?" 블리어는 두 손으로 여인을 상대했으나 어떻게 된 노릇인지 쟁쟁하게 저와 맞서고 있는 여인으로 인해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가녀린 팔뚝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혹 저가 먹은 디저트에다 무슨 약이라도 탄 게 아닌가, 그래서 힘을 못 쓰는 게 아닌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저가 은근 밀리는 것 같은 이 상황자체가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그러던 중 별안간 그의 널찍한 등판이 소파위로 풀썩 소리를 내며 넘어가버렸다. 공작이 뒤로 무너지기 무섭게 렐리아는 그가 일어나지 못하게 허리위에 올라탔다. 오로지 생크림을 묻히겠다는 생각 밖에 머리에 든 게 없는 자 같았다. “어디다가 쑤셔 넣어줄까? 왼쪽 콧구멍? 오른쪽 콧구멍?” “…미친 여자 같으니라고.” 즐거운 듯이 말갛게 입술을 벌리고서 흥얼거리는 렐리아를 올려다보며 블리어가 인상을 썼다. 여자에게 깔아뭉개지다니 이런 빌어먹을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허나 그는 곧 다른 관점에서 이 상황을 보게 되었다. 별안간 가볍게 혀를 놀리는 그녀 때문에. “우리 이대로 할까?” 망측한 발언을 당돌하게 꺼내며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여인의 모습에 블리어는 슬쩍 접고 있던 미간을 폈다. 붉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간 작은 입술이 서느런 시야에 밟혔다. 도톰한 아랫입술위에 묻은 약간 누런 빛깔의 생크림은 누가 봐도 야릇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테다. 특히 창부라면 사족을 못 쓰는 탕아가 봤다면 주저 않고 탐했을 입술이었다. 블리어는 새삼 그 천한 미색에 주목했다. 확실히 지체 높은 귀족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반반한 외모였다. 어느 귀족의 정부로 들어간다 해도 입만 열지 않는다면 흠 잡힐 일은 없을 것 같다. 얇은 허리위에 신비로운 베일처럼 길게 늘어진 은색머리카락. 더 아래로 내려가, 제 아랫배에 허벅지를 벌리고 앉은 모습에서 허리를 돌리며 달뜬 신음을 터뜨리는 여인의 모습이 상상되는 건 어느 사내라도 다 그럴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은근히 사내의 쌓인 욕정을 건드리는 것이다. 블리어는 왼손을 들어올렸다. 아래로 흘러내린 은빛머리칼을 파고든 굵은 손가락이 이윽고 그녀의 뒷머리를 덮었다. 바로 아래로 훅 끌어당기는 악력에 렐리아는 얼떨결에 머리를 숙였다가 코앞에 위치한 남자의 얼굴에 숨을 참았다. 조금 놀란 듯 부풀어 떠진 벽안에도 불구하고 블리어는 이 여자가 웃기지도 않는 순진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제 입술을 물려주면 순순히 빨아 당길 것을 안다. 허나 여인의 얼굴은 일정한 높이에서 멈춘 채 내려올 생각을 안했다. 그는 작은 뒤통수를 덮은 손에 연신 힘을 실었으나 어떻게 된 건지 여자는 목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한 십 초간 말없이 또 한번의 힘겨루기가 이어지자 블리어는 차차 싸늘한 이성에 욕정이 식어만 갔다. 한순간이나마 이 가벼운 몸뚱이와 놀아줄 관대한 의향이 있었던 그였으나 수초도 지나지 않아 저가 미쳤었지 하는 지독한 회의감만 들뿐이다. “비키십시오.” “…어.” 그의 허리위에서 순순히 내려온 렐리아는 조용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목힘으로 버텼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자동차 전조등 앞에 뛰쳐나온 야생노루라도 된 것처럼 몸도 사고도 쩡 굳어있었을 뿐이었다. 실상 렐리아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으니 블리어는 이십대 중반의 건장한 사내라는 것과 한 번도 못해본 그녀완 달리 제법 성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키스정도야 대수롭지 않을 그에 비해 렐리아는 이마저도 쫄아서 굳어있었다. “입술에 묻은 생크림, 좀 닦지 그럽니까.” 또 한 번 옆에서 들려온 차디찬 목소리에 렐리아는 그제야 멍한 상태에서 벗어났다. 뭐야, 뭐지 방금. 스스로도 얼떨떨해서 턱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그 무디고 태연자약한 성격이 어디 갈 리 없었다. ‘아 씨, 방금 쟤 키스하려한 거 아냐? 목에 담 걸렸나. 아오 이 좋은 기회를.’ 무릎을 탁 치며 렐리아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0035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콘드 공작저에서 가장 부지런한 자를 꼽으라한다면 다름 아닌 이곳 가주되시겠다. 단 한 번의 어김이 없는 칼 같은 기상시간 탓에 공작의 시중을 드는 전속시종들은 따라 부지런해야만 했다. 보통 이십대 남성귀족들은 늦은 시각 연회를 찾거나 밤새 유흥을 즐겨 점심때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곳 공작저에서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게 공작은 신붓감을 물색하기 위해 연회에 나가는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듯 얼굴을 비출 뿐 늘 일찍 가문으로 돌아오는 일이 허다했다. 귀족여식을 한 번도 가문에 데려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명 있었다. 일 년 남짓 만난 애인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리소문 없이 깔끔하게 관계가 정리되어있었다. 한번 헤어진 후로는 다시 만나는 일은 일체 없었다. 여인 쪽에서 미련을 끊지 못해 가문을 찾아와도 응접실만 내어줄 뿐 결코 만나는 일은 없었다. 매정하리만치 관계를 단숨에 정리해버린 탓에 현재 공작의 옆에 남아있는 여인은 단 한명도 없었다. 아니 대외적으론 그렇게 알려져 있으나 단 한명 존재하긴 했다. 저택별관에 숨어살고 있는 은발여자가. 비록 악연을 질질 끌고 온 형태의 관계라지만 어찌됐든 존재하긴 했다. 이곳 저택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내무관련 서류를 보고 가택 내 연무장에서 자율훈련을 하며 부지런하고 규칙적인 일과를 보낼 때, 이곳에 얹혀사는 여인은 팔자 좋게 잠에 허우적대고 있었다. 블리어는 오늘도 두 시간동안 검술수양을 쌓은 뒤 깨끗하게 샤워부터 했다. 주름하나 없이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집무실 안에 앉아서 피로를 풀어주는 쓴 차를 마시며 마저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들려온 노크소리에 블리어는 서류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들어오라는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문을 열고 중년의 집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올르아 가문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주십시오.” 조만간 먼저 기별을 보낼 거라고 예상했던 지라 블리어는 담담하게 서신을 받아들었다. 불과 보름 전만해도 라콘드 공작과 혼담이 오갔던 올르아 공작가문의 여식에게서 온 것이었다. 며칠 전 들려온 왕과의 약혼소식에 블리어는 사실상 혼담은 결렬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공작가문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양측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여겼건만 그쪽에서 일방적으로 돌아섰다. 단순히 돌아선 것도 아니고 뒤통수를 쳤다. 괘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몬스터토벌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국왕과의 혼담이 오갔다는 소리가 아닌가. “오후 다섯 시경에 올르아 공녀가 이곳을 방문을 할 겁니다.” 맞이할 준비를 하라며 블리어는 집사에게 가볍게 일러두었다. 집사가 곧 고개를 숙이며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그는 손에 들린 서신을 무감정한 얼굴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종잇조각을 쓰레기통에 털어버리고서 블리어는 정장 겉옷의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안주머니에는 하얀 유산지로 낱개로 포장된 초콜릿들이 채워져 있었다. 렐리아에게 선물 받은 것이었다. 빨간 리본이 달린 포장을 벗겨 그는 새카만 초콜릿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이제야 기분이 한결 나아진 그는 다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 오전 내내 퍼질러 자던 렐리아는 점심때가 돼서야 일어났다. 배불리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는 조각케이크를 맛보며 소피아와 함께 이런저런 수다를 떠들었다. 연애경험이 전무한 렐리아는 이런 쪽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연애관련 주제로 화제를 돌렸다. ‘키스해봤어?’라는 가벼운 얘기로 시작했을 텐데 어쩌다 그녀들의 얘기는 수위 높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한 번도 애인을 사귀어본 적이 없는 소피아였지만 렐리아와는 달리 주위언니들에게 듣는 연애경험담이 많다보니 연애지식은 풍부했다. 듣는 것으로라도 공부가 된 것이다. “저도 주위에 해본 언니들한테 들은 건데요.” 이런 야한 주제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지 소피아는 발그레 볼을 붉히고서 술술 말을 이었다. 어느새 조각케이크를 포크로 자르다말고 그녀는 비밀얘기라도 하듯 손으로 입을 가리고서 목소리를 죽였다. “…거기를 칼로 찢고 들어오는 고통이래요. 실제로 기절할 정도랬어요.” 기절할 정도로 애인과의 밤이 황홀했다는 얘기였으나 소피아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오해로 빚어진 발언에 렐리아는 새삼스럽게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여자친구들과 이런 얘기는 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었던 지라 진위는 더더욱 가려낼 수 없었다. 스물네 살인데 야동정도는 충분히 접했었다. 하지만 그런 쪽의 전문배우들이 촬영한 야동과 실전이 같을 리는 없다는 건 잘 알았다. 그녀는 첫경험에 팩트를 두고 있었다. 첫경험이 아프다는 소리는 몇 번 들은 적이 있었지만 기절이라니? “에이- 그렇게 아프겠어? 설마.” “진짜래요.” “언니를 놀리면 못써요.” “…아니에요, 진짜랬어요.” 분명히 언니들이 그랬다고 소피아는 시무룩하게 대꾸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렐리아는 소피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었다. 어서 케이크마저 먹으라며 다정하게 눈길을 주자 소피아는 그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포크를 놀렸다. 막 케이크 두 조각을 해치웠을 무렵 노크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는 소피아를 붙잡고서 렐리아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어, 내가 나갈게. 남은 건 바구니에 담아서 가져가서 먹어.” “아, 네!”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소피아를 마주보다가 렐리아는 슬쩍 문 앞에 섰다. 소피아가 서둘러 조각케이크를 정리해서 바구니 안에 담는 동안 그녀는 닫힌 문틈에 입술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오늘도 우리 예쁜이 왔나보구나?”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곤 한 명밖에 없었다. 붉은 머리의 예쁜 사제밖에 더 있겠나 싶었다. “이런이런, 이래서 인기 있는 여자는 피곤하다니까. 예쁜이~ 얼굴 좀 볼까?” 소피아가 정리를 마치자 그제야 렐리아는 스르륵 문고리를 돌렸다. 벌어지는 문틈 새로 얼굴을 집어넣고서 아럼프를 놀릴 속셈으로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하지만 문 너머로 보이는 건 귀신같은 무서운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는 검은머리 남자였다. “…아오, 놀래라.” 쭉 내밀고 있던 주둥이를 집어넣고서 렐리아는 얼굴에 떠올랐던 장난기를 지워버렸다. 뒤늦게 조용히 문밖으로 나가려던 소피아도 공작의 출현에 놀라 허둥지둥 고개를 푹 수그렸다. 문 앞을 막고 서있는 공작 탓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굳어있는 소피아가 안쓰러워 렐리아는 몸을 움직였다. 비스듬히 공작의 앞을 가로막고서 소피아가 지나갈 수 있게 틈을 만들어줬다. 그제야 황급히 소피아는 문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마움이 담긴 눈빛으로 렐리아에게 목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동안 여인의 등 뒤에서 잠자코 서있던 블리어는 새카맣고 짙은 눈썹을 슥 치올렸다. 공작인 저는 뒤로 물리고 시녀를 지나갈 수 있게 배려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 이렇게 남에게 온화하게 구는 심성 고운 여자가 아니란 걸 알기 때문이다. 작은 시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제야 블리어는 말문을 뗐다. “왜 하지 않던 짓을 합니까. 보여주기 위함입니까?” “뭐래. 그렇게 문 앞을 떡 막고 있으면 어떻게 해. 애 곤란하게.” “언제 그렇게 남을 신경 썼다고 그럽니까.” “글쎄다- 찾아온 이유나 말해주지 그래?” 심드렁한 태도로 렐리아는 용건만 말하라며 문가에 등을 기대고 섰다. 그에 블리어는 속으로 실소했다. 저보다 머리하나는 더 작은 여자가 이리 당돌하게 구는 게 우습기만 했다. “다섯 시 이후론 절대 방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흐음~ 왜? 왜 나오면 안 되는데?” “귀빈이 찾아올 겁니다.” “흐응 여자구나? 뭐 방해 안 해.” 여자와 깨를 볶든 말든 상관 안한다. 처음부터 이러려고 섹스 한번으로 끝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렐리아가 표정변화 없이 그저 담담하게 굴자 블리어는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그 집요함을 생각하면 귀족여자냐고 꼬치꼬치 캐물어올 줄 알았는데 추잡한 질투는커녕 관심조차 없어보였다. “믿어도 됩니까.” “응.” “그럼 문은 잠그지 않겠습니다.” “허, 참. 원래는 날 가둘 생각이었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다며 렐리아는 기가 찬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블리어는 개의치 않고 바로 왔던 길을 돌아가기 시작했다. * 그가 가고 한 시간이 지나서야 붉은머리 사제는 찾아왔다. 네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렐리아는 5시에 온다는 그 손님을 피해 완전히 밖으로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하루 종일 방안에 있다 보니 답답하기도 했다. “오늘은 밖에 나가서 놀자. 안에 있어봤자 뭐해.” “바깥 좋지. 도박하러 갈래?” “넌 도박밖에 모르지.” “그럼 준비하는 동안 밖에서 기다릴게.” “아냐. 나 옷만 갈아입으면 돼. 거기 있어.” 렐리아의 말에 아럼프는 굳이 거절하지 않고 문 근처에 서있었다. 그에게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렐리아는 위에 입고 있던 조촐한 상의부터 훌훌 벗어버렸다. 얇은 브래지어가 드러난 상태에서 렐리아는 윗옷을 침대 위에 던져두고서 바로 옷장부터 뒤졌다. 위부터 대충 아무거나 껴입고서 이젠 치마를 벗으려할 때였다. 렐리아는 등 뒤에서 뚫어질 듯이 향해져오는 시선을 느끼고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머리의 예쁘장한 여사제가 싱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뭐야.” 렐리아는 그 웃음이 수상쩍다며 가늘게 눈을 떴다. “수상한데~ 뭐 때문에 웃는 거야?” 치마를 내리려다말고 렐리아는 그대로 여인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장난삼아 어서 불라며 손가락으로 허리를 쿡쿡 찔러보았으나 그녀는 말없이 더 짙게 웃을 뿐이었다. 더 수상쩍기만 했으나 차마 이 화려한 이목구비 탓에 웃는 게 예뻐 보여서 강압적으로 굴 수가 없었다. “안 되겠다. 넌 좀 뒤돌아있어야겠어. 왠지 내가 신경 쓰여.” 아무리 같은 여자래도 찝찝한 건 찝찝했다. 여탕에서 탈의중인데 어떤 언니가 제 몸을 뚫어져라보며 히죽히죽 웃고 있으면 아무래도 맘이 편치는 않으니 말이다. 렐리아는 다시 옷장 앞으로 돌아가 치마를 벗고 활동성이 좋은 긴 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동안 아럼프가 뒤를 돌아보나 안돌아보나 감시하며 말이다. 0036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섯 시 정각에 공작저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 마차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올르아 공작가의 마차였다. 미리 출입문에서 대기하고 있던 공작가 시종원들은 공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반겼다. 굽이치는 황금물결과도 같은 머리칼에는 은은한 꽃향기가 배어있을 것만 같았다. 꼿꼿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분홍빛 눈과 우아하게 다물려진 입술엔 중천에 뜬 태양처럼 드높은 자신감이 스며있었다. 수도에서 가장 높은 신분의 여식이자 아름답다고 그 소문이 자자한 여인다웠다. 가느다란 목과 손목에 채워진 은장신구와 풍성한 실크자락에 은빛무늬가 세세히 수놓인 드레스, 가는 어깨위에 엷은 아이보리 빛깔의 실크 숄을 두른 차림은 황홀한 미모를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주었다. 다이아나는 로비에 당도했다. 그곳엔 라콘드 공작이 집사를 옆에 세워두고서 미리 나와 있었다. 어두운 흑발과 절묘할 만큼 잘 어울리는 왜청빛정장은 그가 입어서 더 근사해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이 드러나는 차림으로 블리어는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혼담이 오갈 적에 두 번 정도 이곳을 오간 적이 있는 다이아나였으나 그녀는 새삼 넓은 복도를 둘러보며 그의 에스코트에 따랐다. 주위를 눈으로 훑는 것마저도 기품 있어보였다. 이윽고 당도한 곳은 공작저 내에서 가장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큰 응접실이었다. 다이아나는 둘만의 공간에 들어와서야 입을 열었다. “일찍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알고 있다니 다행입니다.” 딱딱한 사내의 대답에도 다이아나는 기품을 잃지 않고 소파에 앉아있었다. 시녀들이 디저트와 찻잔을 내려놓고서 공손히 허릴 구부린 채 나갈 때도 그녀는 눈앞의 사내만 흔들림 없이 곧게 응시할 뿐이다. “공작령에 대한 소식 들었어요.” “폐하와 약혼이 성립되었다 들었습니다.” 거의 동시에 나온 말에 다이아나는 설핏 미소 짓기만 했다. 그 모습에 블리어는 묘하게 기분이 나빠져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 “비상사태로 인해 화급히 영지로 내려간 사이에 설마 폐하와 약혼을 진행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대는 예의에 어긋나다 못해 한 나라의 공녀라 하기엔 수준이하의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비록 잠시 혼담이 오간 사이이나 올르아 공작가에는 참으로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다지 동요가 없는 고운 얼굴로 여인은 한 입 들이켠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짝지근한 향이 입술위에 감도는 채로 다이아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입장을 말씀드린다 해도 공작님의 귀에는 이기적인 변명으로만 들릴 테니 변명은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수준이하라는 말에는 납득 못하겠네요. 갑작스레 혼담을 파한 것은 제 잘못이나 일단 공식적으로 혼담이 오간 게 아니었던 데다 사적으로 두 번 정도 만난 게 다가 아니었나요?” 반박하는 목소리가 아닌 설명하듯이 나긋나긋하고 여유가 담긴 목소리였다. 그 미려한 목소리에 심기불편 했던 블리어는 괜히 꿈틀하고 치올렸던 눈썹을 풀어야만 했다. “서로 이해관계가 다르기에 이렇게 갈라섰다고 생각해요.” 웃으면서 말하는 게 보통 여인이 아니어보였다. ‘어딘가 바뀌었군.’ 블리어는 그리 생각했다. 오랜만에 대면해서 그런 진 모르겠으나 사적으로 두 번의 만남을 가졌을 때와는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상냥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그대로이지만 그 속에 은근 굵직한 뼈가 느껴졌다. “그래도 공작님과는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예요. 이건 약소하지만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부디 너그럽게 제 사과를 받아주시겠어요?” 다이아나는 티테이블 위에 작은 선물함을 내려놓았다. 고급스런 붉은 벨벳으로 싸인 그것은 어느 누가 봐도 값진 게 들어있다는 추측이 가능할 테다. “저는 이만 약속이 있어서 일어나볼게요. 나오실 필요는 없어요.” 풍성한 드레스자락을 쥐고서 우아하게 몸을 일으킨 다이아나는 가볍게 인사했다. 또각또각 거리는 소릴 내며 응접실을 벗어나는 여인을 블리어는 굳이 붙잡지도, 바래다주지도 않았다. 그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작은 보석함에 손을 가져갔다. 그의 커다란 손에 올려놓으니 터무니없을 만큼 작은 크기였다. 브로치라도 든 건가 생각했으나 안에 든 것은 목걸이였다. 가느다란 은줄의 끝에 세공된 푸른 사파이어가 달려있는 여성용 목걸이였다. 실수로 다른 선물과 헷갈려서 준 건가, 그렇게 추측하면서도 블리어의 날카로운 신경은 왠지 모르게 찝찝하기만 했다. 둔한 곳을 쇠못으로 긁어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 목걸이의 생김새에 문득 그 여인이 떠오른 탓이다. 하지만 이곳에 여인이 산다는 걸 노리고 일부러 주었다고 하기엔 의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첫째로 어떻게 여인의 존재를 아느냐 겠고, 둘째는 자신을 상대로 굳이 이렇게 속보이는 도발을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일 테다. * 렐리아는 아럼프와 함께 도박장에 놀러갔다가 오늘도 짭짤하게 돈을 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해질녘의 거리를 걸으며 마차가 세워진 곳까지 향하던 중 그녀의 눈에 고급 남성의류점이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열장너머에 있는 넥타이에 시선이 꽂혀버렸다. 검은색과 청회색이 사선으로 번갈아가며 무늬를 이루고 있는 넥타이는 고급스러워 보이면서도 깔끔했다. 어두운 컬러를 무난하게 소화하는 그 남자가 하면 참 끝내주게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도 많겠다, 하나 사다줘?’ 공작은 자기한테 어울리는 인생템을 찾고, 자신은 선물로 호감도를 올린다면 일석이조가 아닐까. 렐리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곧장 남성의류점에 들이닥쳤다. 그에 아럼프는 습관성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직원에게 진열장에 있는 넥타이를 달라고 한 뒤 렐리아는 흔쾌히 값을 지불했다. 직원이 포장해준 선물을 들고서 렐리아는 아럼프와 함께 바로 마차에 올랐다. 흡족함에 렐리아가 팔짱을 끼고 앉아있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아럼프는 싱겁게 미소 지은 채 턱을 문지르거나 자꾸 렐리아를 바라보며 기대어린 눈빛을 드러냈다. “그럼 내일 봐. 친구.” 오늘도 저택 뒷문까지 마차로 데려다 준 아럼프에게 작별인사를 하며 렐리아는 마차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잘가라며 마차 문을 닫아주려는데 조만간 아럼프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럼프의 시선은 노골적으로 그녀의 손에 들린 선물상자에 닿았다. “뭐 잊은 거 없어?” “없는데?” 렐리아는 그대로 마차문을 닫아버렸다. 그날 밤 공작이 침실로 돌아오는 시간을 노려 렐리아는 그의 방을 찾아갔다. 한 손에 선물상자를 들고서 말이다. 앉아서 기다릴 생각이었으나 방주인은 이미 거실소파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절제된 검은 셔츠를 입고서 덜 말린 새카만 머리칼위에 흰 수건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소파 앞 테이블에는 초콜릿포장지가 벗겨져있었는데 독서를 하면서 부지런히도 초콜릿을 까먹은 모양이었다. 블리어는 방안으로 훼방꾼이 들어옴에도 무심하게 책만 읽을 뿐이었다. 이윽고 그 훼방꾼은 그가 앉아있는 소파옆자리에 사뿐히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동시에 공작의 허벅지에 무언가가 내려앉았다. 블리어는 또 나쁜 손인가 싶었으나 시선을 내리깔아 확인하니 웬 길쭉한 상자가 놓여있었다. 푸른색 리본이 묶인 것이 선물인 모양이었다. “뭡니까.” “땅에 떨어져 있길래.” 더러운 것으로 판단하기 무섭게 블리어는 그것을 손등을 밀어내 치워버렸다. 소파 아래로 떨어진 선물상자를 렐리아는 황급히 주워들었다. “참 농담하기 무섭네.” “누가 하랬습니까.” 차갑게 대꾸하는 블리어의 말을 무시하고서 렐리아는 선물상자를 개봉했다. 진열장의 환한 불빛에 은은한 광택이 흐르던 값비싼 넥타이는 역시 제값을 하는지 뚜껑을 개봉하자 아까의 고급스런 형태 그대로였다. 렐리아는 조심스럽게 넥타이를 들어서 그대로 옆에 앉은 남자의 머리 위에 씌웠다. 넥타이 줄이 수건위에서 잠시 걸렸으나 이윽고 스르륵 흘러내려 그의 목과 넓은 어깨를 잇는 부분에 안착했다. 블리어가 뭐냐며 슬쩍 인상을 쓰자 렐리아는 여기 좀 돌아보라며 되레 인상을 썼다. 옆에서 넥타이를 매려니 은근 어려워서 정면에서 봐야 될 것 같았다. 몸을 돌릴 생각은커녕 돌부처처럼 미동조차 없는 남자에게 기대한 저가 잘못이라 여기고선 렐리아는 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 어정쩡하게 허리를 구부리고 서서 그녀는 넥타이를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넣고, 이렇게 빼는 건가. 실험은 계속되었다. 그래도 공작은 책만 읽고 있을 뿐 당장 그 손 치우라거나, 저의 손을 내치는 등 까칠하게 굴진 않았다. 덕분에 렐리아는 좀 더 수월하게 넥타이 매는 법에 접근할 수 있었다. “아 이게 이렇게 하는 거구나.” 무관심하게 책만 읽지 말고 좀 알려주면 좋으련만, 그래도 넥타이라서 그나마 쉬웠다. 나풀거리는 크라바트였다면 아마 진즉 때려치우고도 남았을 테다. 역시 자신의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색감도 그렇고 그와 굉장히 잘 어울렸다. 내일 정장 입을 때 매라고 말하는 대신 렐리아는 약간 짜증이 나서 능글맞게 웃어보였다. “공작, 사실은 이거 주운 거야. 개똥이 묻어있던 건데 너한테 어울릴 것 같아서 대번 주웠지.”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공작은 대번에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헤쳤다. 금방이라도 저 멀리 집어던질 것 같자 렐리아는 황급히 거짓말이었다고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에 농담하기 무섭다니까.” 넥타이를 다시 예쁘게 매주면서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능글맞게 씩 웃어보이자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그가 서느렇게 미간을 접었다. 마치 옷을 사와서 억지로 입혀놨더니 유행지난 옷이라고 얼굴 썩은 사춘기 아들 같았다. “그래도 오늘은 기분나빠보이진 않네? 우리 분위기도 나쁘지 않은데 저기서 떡 좀 칠까?” “떡이 뭡니까.” “섹스.” “…….” 천박하다느니, 상스럽다느니 이젠 신랄하게 욕도 하지 않고 그저 차갑게 무시할 뿐이었다. 블리어는 한 손에 든 책을 읽어 내리면서 다른 한 손으론 갑갑한지 넥타이 풀어헤쳤다. 잠잘 때 넥타이를 하고 잘 수는 없을 테니 렐리아는 봐주기로 했다. 그는 한동안 렐리아를 공기취급 하고서 책만 읽었다. 타인이 있으면 유난히 예민해지는 그치곤 조금은 평온하고 담담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에 반해 렐리아는 하도 조용해서 졸음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뒤늦게 꿈쩍도 않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위에 올려놓았던 넥타이는 테이블위에 대충 던져두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침실로 향했다. 그제야 렐리아는 잽싸게 몸을 일으켜 침실로 달려갔다. 그보다 한발먼저 문턱너머에 발을 디딘 그녀는 바로 침대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에라 모르겠다 싶어 눈까지 감았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했다. 분명 저번에 제게 키스를 하려했질 않았나, 자신감을 가지고 결단력 있게 행하면 이번엔 거사를 치를 수 있을 테다. “세엑스 하고 싶지 않아? 침대시트도 푹신푹신하고 정말 세엑스 하기엔 딱이다! 정말 이런 침대에서 하면 천국 같을 거야, 암. 세엑스하면 다이어트 효과가 있다더라. 그리고 의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인데 세엑스가…” ‘제발 걸려라 걸려라 걸려라.’ 입으로나마 계속해서 섹스어필을 하고 있지만 실상 렐리아조차 저가 잘하는 짓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건드릴까? 아니 건드려주면 오히려 고마울 정돈데 당연히 건드려줘야지. 그런 태연한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온신경은 청력에 쏠려있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심장이 버썩버썩 타들어가는 동시에 머릿속에 잡생각들이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몰아닥쳤다. ‘다리를 벌려야겠지…? 쟤가 잡아서 벌려주려나? 손은 어디다 둬야 되지? 갑자기 쉬 마렵다. 화장실 미리 갔다와야 되나. 아…근데 진짜하면 눈 못 마주치겠다. 그냥 눈 딱 감고 훅 지나갔으면 좋겠는데. 아 맞다 피임약…….’ 혼자 지지리 궁상맞게도 그런 생각만 잇는 동안 뒤늦게 저벅저벅하고 그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 렐리아의 어깨가 저절로 흠칫 굳어버렸다. 블리어는 침대 옆에 서서 ‘이 미친년은 대체 뭘 하는 거지’와 비슷한 눈으로 그녈 내려다보았다. 한심하지도 않았다. 원래 이렇게 한심한 여자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감정소모도 귀찮았다. 그저 그는 여인이 깔아뭉개고 있는 이불한쪽자락을 잡았다. “고, 공작? 그래 덮쳐! 세엑…읍읍!” “…….” 이불로 꼴 보기 싫은 여인의 얼굴을 덮어버리고서 그대로 김밥 말듯이 여인을 한 바퀴 밀어말았다. 무슨 병원균을 처리하는 사람처럼 그는 손이 닿지 않게 이불로 그 몸뚱이를 둘둘 말아버리고서 그대로 두 팔에 안아들었다. 이불안에서는 온갖 쌍욕이 터져 나왔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 “공작! 제기랄!” “…….” 그 거친 말에도 대꾸조차 않고 한동안 싸늘한 정적이 이어지더니 얼마안가 블리어는 방문 밖에서 그녀를 내려놓았다. 말 그대로 복도위에 툭 떨어뜨렸다. “쾍!” 렐리아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이불고치 속에 갇혀 있다가 갑작스레 허리에서 찌르르 이는 미세한 충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또 말로 안하고 이런 깜찍한 짓을 하는구나 싶었다. 자신을 어디다 내던졌다는 사실에 퍽 짜증이 났지만 렐리아는 꾹 눌러 참았다. 그래, 좋게 좋게. “…그래. 싫다면야 뭐.” 누군 지랑 하고 싶은 줄 아나. 왠지 허무하면서도 한 고비 넘긴 기분이었다. 속으로 툴툴대다가 렐리아는 이불사이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근데 너 이불 안 가져가?” “이미 더러워진 걸 어떻게 씁니까.” 똥 묻은 걸 어떻게 쓰냐고 말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말투였다. 렐리아는 반쯤 썩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뒤늦게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기 위해 활짝 웃어보였다. 가식을 뒤바른 벽안은 자존심 따윈 뒤로하고 그저 해맑게 빛났다. “마음생기면 내 방에 언제든 쳐들어와도 돼. 침대 위에서 항시대기…” “그 침대 째 태워버려도 됩니까.” “농담이지?” “진담입니다.” 그리 말하고서 그는 바로 문을 쾅소리가 나게끔 닫아버렸다, 렐리아는 문에다 대고 ‘그래 잘자라 이 빌어먹을 새꺄!’하고 외쳐주려다가 말았다. 그저 차디찬 복도바닥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이불고치에서 탈피할 뿐이었다. 0037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악을 쓰는 듯한 기합과 반복적인 구령이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왕실 제2기사단 연무장은 철저히 외부인 출입금지였다. 특히 여인의 출입을 엄금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위사제라도 통과할 수 없는 금녀구역의 밖에 서서 렐리아는 아쉽다는 양 손톱만 깨물고 있었다. 높고 푸르른 대낮의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다. 해가 쨍쨍하다보니 어제보다 조금 추위가 무뎌졌으나 그렇다고 야외활동에 적합한 날씨는 아니었다. 렐리아는 구령에 맞춰 치열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그저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오늘은 건전하게 도박장에 가지 않고 작전을 실행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으나 문제는 드래곤은커녕 기사 그 누구하고도 접촉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음은 다급한데 현실은 아무것도 되는 게 없었다. 벌써 수도에 정착한지 일주일이 넘었다. 허나 공작과도, 저 멀리 떡하니 나 드래곤이오 하는 자하고도, 심지어 이곳이 집인 왕과도 놀라울 정도로 아무 일도 없었다. 접점은커녕 평생 이러고 스토커처럼 지켜보는 게 다가 아닐까 싶었다. 렐리아는 폐인이 된 기분으로 손가락만 쪽쪽 빨고만 싶었다. “슬슬 갈래? 헤어지긴 아쉬우니까 커피숍에서 얘기라도 나누자.” 그런 제 속을 알 리 없는 아럼프는 태연하게 근처에서 데이트나 하자고 휘감은 저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얻은 건 이 예쁘장한 여사제 하나뿐이었다. 그냥 나 레즈나 될까, 하는 회의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가 렐리아는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본궁을 떠올렸다. “본궁 현장체험은 어때?” “또 본궁?” 운명은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 법, 만날 수만 있다면야 그런 기회를 닥치는 대로 만들어야 됐다. 렐리아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술술 내뱉었다. “응. 저번에 가본 웅장한 본궁의 모습이 인상 깊었던 모양인지 꿈속에서 계속 그곳만 나오는 거 있지? 이번기회에 한 번 더 가보고 싶어서.” “솔직히 말해봐. 거기에 뭐 놓고 오기라도 했어?” “사람 참 못 믿네. 암튼 나 한번만 더 거기에 데려가주라~ 응? 예쁜아 내가 밥 사줄게?” 아럼프가 없으면 왕궁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니 그녀는 나의 신분증이나 마찬가지였다. 신분증에게 따라와 달라고 비는 수밖에. “그럼 본궁 갔다가 커피숍에서 얘길 나누고 저녁에는 식사하자. 그리고 데려다줄게.” 오늘 하루일정을 쫙 머릿속에서 뽑은 아럼프는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만족스런 모양이었다. 렐리아가 끄덕임 한번으로 흔쾌히 수락하자 두 사람의 행선지는 바로 결정되었다. 같은 왕궁 안인데도 거리가 멀어서 마차를 타고 십 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들은 하얀 눈 덮인 본궁 앞에 도착했다. 성당에서나 볼 법한 뾰족하게 깎인 철제대문 앞은 여전히 은빛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아럼프가 신분증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에게 다가서려할 때였다. 30대로 추정되는 경비병하나가 투구를 벗더니 정확히 그를 향해 뛰어왔다. “대신전에서 오신 사제분이시군요. 이리로.” 사제복을 입은 아럼프를 단번에 알아보고서 이렇게 열렬하게 대해주는 이유가 뭐지, 렐리아가 잠시 생각에 잠길 때였다. 경비병이 곧장 아럼프의 팔을 붙잡아 어디론가 이끌기 시작하더니 근처에 있던 기사하나를 빠르게 호명했다. “맥키 경, 서둘러 안으로 안내해드려.” “죄송하지만 이곳에 방문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사유입니다만.” 저와 렐리아를 억지로 잡아뜯어놓듯이 하는 기사의 무례한 행동에 아럼프는 처음으로 미소를 싹 지우고 있었다. 아럼프는 기사에게 잡힌 팔을 단번에 떨쳐낸 후 조금 떨어져있던 렐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녀의 팔을 잡으며 아럼프는 다시 잔잔하게나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쪽은 동행인입니다.” “아…, 그러십니까? 저 그럼 실례되는 부탁이지만 지금 호출되신 고위사제분 대신 환자의 상태를 봐주실 수 있습니까? 내무부의 워낙 높으신 분께서 현재 지병으로 쓰러지셨습니다. 급히 궁의원이 진찰하고 있습니다만 상황이 썩 좋지 못합니다….” 오기로 한 사제가 늦으니 대신 진료해줄 수 없냐는 부탁이었다. 환자의 신분 때문에라도 쉽게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아럼프는 그저 웃고만 있었다. 입술은 휘어졌는데 그 눈은 짜증나서 못해먹겠다는 눈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다 제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손길에 아럼프는 무심코 옆을 내려다보았다가 마음이 바뀌고 말았다. ‘그런다고 해. 그런다고 해.’ “알겠습니다. 대신 제 동행인도 함께 갈 겁니다.” 워낙 옆에서 집요하게 재촉하는 눈길에 아럼프는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곧 본궁의 깊숙한 내부로 안내될 수 있었다. 저번에는 들어오지 못했던 구간을 단숨에 통과하자 렐리아는 오늘따라 뭔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윽고 경비병이 어느 방 앞에 멈춰서더니 아럼프에게 들어가 보라며 정중하게 손짓했다. “난 밖에 있을게.” 렐리아는 슬쩍 뒤로 물러서며 아럼프에게 히죽 웃어보였다. 그 미소가 의심쩍다는 양 아럼프는 눈을 가늘게 접어보였으나 렐리아는 끝나고 밥 사준다는 말로 꿋꿋이 버텼다. 결국 아럼프 홀로 환자상태를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고 렐리아는 잠시간 자유의 몸이 되었다. ‘됐어. 이제 왕을 찾으러 가보자.’ 경비가 삼엄하다는 본궁의 중심부, 듣기론 이곳에 왕의 집무실이 있다고 하니 복도를 지나다니다 우연히 만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렐리아는 무작정 길을 나섰다. 오로지 육감에만 의지해 발을 놀린 지 체감 상 이십분 정도가 흐른 것 같았다. 뿌연 햇살이 아롱진 흰 대리석복도 위를 부지런히 걷다가 그녀는 먼 반대편복도에서 걸어오는 어떤 인영을 볼 수 있었다. 아치형태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빗질하듯 쏟아져 내리는 주홍빛 때문에 한순간 적발이 아닌가 싶었으나 다시 보니 붉은빛이 감도는 금발이었다. 잘 익은 홍시와 황금빛 가을햇살이 생각나는 색이었다. 렐리아는 좀 더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보기 힘들다는 그 왕이 바로 멀지 않은 곳에 걸어오고 있었다.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들떠 렐리아는 다짜고짜 왕의 길목을 막아버렸다. “안녕하세요. 저기 혹시 죄송한데, 폐하…?” “…….” “폐하 맞으시죠? 세상에 이제야, 흠흠. 처음 뵙겠습니다. 렐리아라고 해요.” 라델리우스의 밝은 에메랄드빛 눈이 그제야 그녀에게 내리꽂혔다. 돌연 앞에 나타나 길을 막고 있는 은발의 여인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여식이었다. 귀족가의 여식이라곤 하기엔 드레스차림이 아닌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단출한 차림이었다. 솜을 가득 채워 넣은 외투와 바지, 가죽부츠, 그 외에 귀와 손목에 차고 있는 가벼운 장신구가 다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그리 판단하기 무섭게 라델리우스는 허리춤에 걸고 있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리우스.” 빠르게 발검하려는 그때 등 뒤에서 울린 익숙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의 손이 멈칫했다. 라델리우스는 순순히 검에서 손을 떼어 뒤를 돌아보았다. 먼 복도 끝에서부터 봄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환한 꽃이 피어난 듯한 노란드레스 자락과 황홀한 금빛머리칼을 휘날리며 아름다운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또 호위를 두고 혼자 어딜 가시는 건가요?” “잠깐, 산보를 나가던 중이었어.” “저도 부르지 그랬어요.” 여리지만 따스한 손길이 라델리우스의 단단한 팔뚝위에 내려앉았다. “춥잖아.” “괜찮아요. 추위정돈.” 그는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서 다정한 빛을 띤 눈으로 그녈 내려다보았다. 약혼녀 다이아나 올르아를. 그리고 왕을 제외하고도 다이아나를 다정하게 바라보는 또 한명의 시선이 있었다. 렐리아는 감격에 숨까지 참고서 여인의 섬세한 선을 그리는 옆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바라보는 눈은 후끈할 정도였다. ‘목소리도 개존예…하, 여신님.’ 여덕이 치이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대포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거나 팬블로그까지 개설해서 덕질을 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새 왕은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는지 뚫어져라 다이아나만 바라볼 때, 뒤늦게 그녀의 여신이 그녀를 향해 살며시 고갤 돌렸다. 스윽, 촘촘히 빛이 성긴 엷은 속눈썹아래 분홍빛 눈이 우아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마저 화보카메라를 향해 고갤 돌리는 여배우가 따로 없을 지경이었다. “이쪽은? 아는 여자인가요?” “처음 보는 여자야.” 어느새 자신에게로 관심이 향해졌으나 렐리아는 그저 뭉근하게 녹아내린 눈만 하고 있었다. 그 몽롱한 눈과 마주한 다이아나는 스르륵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조금은 우습다는 듯 오만함이 섞인 도도한 미소였다. “길이라도 잃은 모양인데 제가 데려다줄게요.” “아냐. 바로 근위대에 넘기면 될 일, 그대가 수고할 필욘 없어.” “수고라뇨, 리우스. 그저 이 여자에게 조금 흥미가 생겨서 그래요.” 다이아나는 렐리아의 왼팔을 부드러이 끌어당기며 기품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에 라델리우스의 표정위로 미세한 불안감이 어렸다. 정체불명의 은발여자를 미덥잖게 훑는 그는 금방이라도 친히 근위대를 불러올 것처럼 굴었다. 그때 뻗어져온 작은 손만 아니었다면 이미 행동에 옮겼을 테다. “산보는 다음에 같이 하도록 해요.” 고운 남자의 턱선을 미끄러지듯 쓸어 만지며 손끝이 떨어져나갔다. 라델리우스는 그대로 얌전히 굳어서 불안감과 의심이 녹아내린 얼굴을 했다. 그를 익숙하게 다루는 다이아나는 꼭 늠름한 사자를 조련하는 여조련사 같았다. 친해지면 나도 저렇게 쓰다듬어주실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렐리아는 뒤늦게 다이아나의 손에 이끌려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찾아다녔던 왕과는 점차 멀어지고 있음에도 렐리아는 이 시간에 두근거리기만 했다. 제게 상냥하게 말을 걸어주는 미인 때문에 이게 꿈인지 생신지 헷갈릴 정도였다. “이름이?” “렐리아예요. 언니.” “나이는?” “스물넷이요. 저기…언니는요?” “난 스물둘.” 아리따운 얼굴은 이십대 초반으로 보였지만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기품 있어 보여 나이가 조금 있을 줄 알았다. 저보다 두 살 어릴 줄이야! 렐리아는 그마저도 감탄하면서 공작에게는 한 번도 지어보이지 않던 가장 예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환한 미소였다. “괜찮아요. 예쁘면 다 언니랬어요.” “내가 언니소리를 듣기 싫다면?” 어머나 하고 웃음 짓듯이 다이아나가 제 한쪽 뺨을 살포시 덮으며 마주 웃어주었다. 갓 피어난 싱그러운 꽃 같았다. 가볍게 대화를 나누며 걷다가 얼마안가 다이아나는 화려한 복도 끝에 자리한 응접실로 그녀를 안내했다. 렐리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금빛 실이 너울거리는 것 같은 가느다란 블론드머리칼을 뒤쫓았다. 과실향처럼 달달하면서도 성숙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이윽고 렐리아는 응접실 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고동색 가죽소파가 마주보고 있는 응접실은 벽 윗부분이 금으로 도배되어있고 커다란 창문 세 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창문 위에 가지런히 묶어놓은 와인빛커튼 아래 새하얀 커튼이 드리워져있었다. 천장 중앙에 달린 샹들리에는 반지르르 금빛이 흐르고 있었다. “차와 디저트는 없는데 괜찮니?” “아…언니 실물..아니 가까이에서 보니까 진짜 예쁘시다. 진심 제 취향..아니 미모가 부럽다구요. 하하.” “정말 사람말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목소리자체가 곱고 귀에 쏙쏙 잘 들어오는 톤이었다. 편안하고 잔잔한 느낌이라 자신보다 어리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았다. 반전매력이라면 반전매력이라 렐리아는 도저히 그 매력에서 헤어날 수가 없었다. “아 저번에, 그 기사서약식?에서 언니 봤었는데…언니랑 눈도 3초간 마주쳤었는데 기억하세요? 사실 그날 언니 손수건 주웠었거든요. 전해드리고 싶은데, 아 그게 지금 놓고 와서. 내가 왜 이러지…하하하.” 스스로가 생각해도 참 두서없는 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둘만의 장소에서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던 탓에 조금 긴장해 버렸나보다. 꼭 우상이었던 여배우와 일대일 팬미팅을 하는 기분이랄까, 렐리아는 홍조 띠운 채로 턱을 긁적이다가 헤프게 웃어버렸다. 둥그스름하게 접힌 눈은 이미 답이 없을 지경이었다. “지금 스스로의 위치는 자각하고 있니?” 다이아나는 상냥한지 시크한지 모를 눈부신 미소를 짓고서 귓등을 따라 금발을 쓸어 넘겼다. “리우스는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야. 아까 검을 뽑으려는 자세를 취한 것도 널 바로 베려는 생각이었을 거야. 안면도 없으면서 무작정 왕의 앞을 가로막다니 멍청한 건지, 대담한 건지 구분이 안가.” 언니밖에 모르는 멍청한 아이가 될게요, 하는 눈빛으로 렐리아는 히죽 웃을 뿐이었다. 그에 다이아나는 길고 하얀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리우스가 호위를 떨어뜨리고 와서 망정이지. 네 목, 분명 떨어졌을 거야?” 싱긋 웃으며 다이아나는 손가락으로 제 목을 지익 그었다. 그것이 꽤 효과가 있었던지 렐리아는 웃음기를 싹 거뒀다. “열심히 가꾼 얼굴만 믿고 이런 덜떨어진 짓을 저지르는 여자애들이 꼭 있지. 어떻게든 왕의 눈에 띄면 될 거란 생각에 무례를 저지르는, 그 뒤는 생각도 안하는 부나방 같은 여자애들 말이야.” “…….” “그 가녀린 목들이 리우스의 검에 잘린 적이 다섯 번인가로 알고 있어. 다들 출세욕에 눈이 멀었던 하위가문의 여식들이었지. 너도 자기만의 망상에 도취돼있지 말고 현실감을 좀 가지지 그래?” ‘…아 말하는 거 진짜 살벌하네. 어떻게 성격도 취향저격이냐…하.’ 렐리아는 그 고운 목소리를 놓칠까 귓구멍에 욱여넣듯이 새겨들었으나 심각성은커녕 전혀 다른 생각만 하고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강한 운명을 느꼈다. 어쩌면 이 역하렘게임 속에 들어온 것은 다 이 언니를 만나기 위함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이 상황이 덕통사고라면 자신은 이미 중환자였다. “네 목적이 대체 뭐야? 단순히 왕의 호감을 사는 것? 아니면 후궁의 자리를 얻는 것?” “말해도 돼요? …언니요.” 인중을 슥슥 문지르며 렐리아가 히힛 하고 웃자 다이아나는 그제야 답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0038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라콘드 공작은 네가 이런 성격이란 거 아니?” 침묵을 지키던 다이아나는 별안간 고운 입술을 떼며 물었다. 생각 없이 히죽거리고 있던 렐리아는 그제야 날아온 돌덩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흠칫 굳었다. 지금 그녀의 입에서 공작이 거론된 건가 싶었다. 분명 라콘드 공작가와는 아무런 접점 없이 굴었을 텐데 어떻게 그와 저의 사이를 알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알고 있느냐고 묻는 듯 렐리아의 맑은 벽안이 조금 커져있었다. 그 의문을 읽어 내린 다이아나는 그저 상냥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다 알아내는 수가 있어. 공작가문의 정보력은 우습게 볼만한 게 못된다고만 해둘게.”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미소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목걸이는 받았어?” “…?” “숨겨진 애인에게 주라는 의미였는데 애인사이는 아닌가보네?” 예리한 이채가 흐르는 분홍색 눈은 조금은 선홍색으로 보일 만큼 짙어져있었다. 이윽고 우아하게 눈꼬리를 따라 접은 다이아나는 몸을 일으켰다. 화려한 눈웃음을 뒤로한 채 잔잔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수건은 내일 만나서 돌려받는 걸로 할게. 낮 세시쯤에 올르아 공작가로 와줄 수 있니?” “아 물론이죠.” “그럼 내일 기다리고 있을게.” 렐리아는 여전히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각선미에 걷는 모습까지 환상적이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단아하고 고상한 기품이 흘러넘치는 그 아름다움은 취향저격이라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었다. “오늘 나눈 말은 공작에겐 비밀이야. 알아들었지?”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다이아나가 긴 금발을 출렁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검지를 코끝에 갖다 댄 옆얼굴마저 눈부실 만큼 아름다워 보였다. 렐리아는 넋이 나간 채로 생각했다. 이 언니에게선 당분간 헤어나질 못하겠구나 하고 말이다. * 렐리아가 다시 아럼프가 있는 곳으로 돌아갔을 때 이미 아럼프는 치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두 사람은 왕궁을 벗어나 수도중심가에 있는 커피숍에 들렀다. 그곳에서 간단한 디저트와 커피를 시키고서 세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가 해가 저물자 유명호프집으로 기어들어갔다. 수다를 떨다가 이 세계에도 맥주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렐리아가 호프집으로 가자고 조른 것이다. 비록 아럼프가 원한 분위기 있는 식사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는 군말 없이 어울려주었다. 그곳에서 렐리아는 인생맥주와 만날 수 있었다. 깊이가 다른 시원함과 진하고 뒤끝 없는 깔끔한 맛은 일품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외에도 다른 술을 맛본 렐리아는 전통주에 꽂혔다. 기존의 포도와 몇 가지 과일을 동시 숙성시킨 와인이었다. 달짝지근한 맛이 있어 공작이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렐리아는 계산하면서 와인 세 병도 포장해달라고 했다. 그에 아럼프는 ‘세 병씩이나?’하는 의아한 눈빛을 드러냈다가 짐작 가는 눈치인지 눈빛을 가라앉혔다. “누구랑 또 마시려고?” “집에 있는 마누라. 단 거 하난 엄청 밝히거든. 사다주면 새침한 척해도 속으론 좋아할 걸 나는 알지.” 후후 하고 렐리아는 살짝 불콰해진 얼굴로 말했다. 술 취한 아저씨 같은 농담을 던졌음에도 아럼프는 웃지 않고 “그래?”하고 그저 담담한 반응만 보였다. ‘흠…안 웃기남.’ 렐리아는 제 개그가 통하지 않자 얼쯤하게 뺨을 긁적이며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 “공작 안에 있남. 내가 오늘 뭘 사왔는지 알아?” 렐리아는 공작의 방에 당당히 쳐들어오자마자 호쾌하게 떵떵거렸다. “네 취향일 것 같은 술 사왔어. 같이 마시자.” “이미 마시고 왔습니까. 술냄새 납니다만.” “어? 흐흐 조금.” 간에 기별도 안 간다며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와인 세 병을 테이블위에 내려놓을 때까지도 소파에 앉아있는 사내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서 책을 읽고 있던 블리어는 뒤늦게야 서랍을 뒤적이는 소리에 슥 녹안을 내리떴다. “뭐합니까.” “와인 따게. 그거 없어? 그 뭐냐….” “와인오프너 말하는 겁니까. 와인진열장 열어보십시오. 맨 위에.” 관심 없는 척하다니 아주 친절하게 잘 알려주는 그다. 렐리아는 피식 웃으면서 진열장 문을 열고서 그가 말한 대로 맨 위칸에 손을 가져갔다. 까치발까지 하고서 팔을 최대한 높이 뻗었으나 손가락만 간신히 닿고 말았다. “흠 의자 없나.” “제자리에서 뛰어보십시오.” 그의 충고대로 렐리아는 껑충 뛰어보았으나 손가락이 좀 더 올라갔다가 말 뿐이었다. 와인오프너가 맨 위칸의 어디에 처박혀있는지도 모르는데 암만 뛰어봤자 소용없을 것 같다. 이쯤 되면 말없이 다가와서 도와줄 만도 할 텐데 검은머리 남자는 끝까지 무관심하게 독서 중이었다. “공작. 좀 일어나봐.” 렐리아는 소파뒤쪽까지 다가와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청소하게 좀 일어나보라는 아내 같은 태도였다. 블리어가 말없이 몸을 일으키자 렐리아는 그대로 소파를 뒤에서 단단히 붙잡았다. 그러곤 두 다리를 쭉 빼고서 소파를 와인진열장 앞까지 옮기려는 모습에 블리어는 진심으로 기가 막혔다. 소름끼칠 만큼 무식하고 한심해보였다. “그냥 내게 부탁하지 그럽니까.” “부탁하면 들어줄 건감?” 네가 그럴 위인이냐는 비꼼이 없잖아 있었으나 블리어는 무시하고서 진열장까지 걸어갔다. 바로 맨 위칸에 있던 와인와프너를 꺼낸 그는 소파 뒤쪽에 서있는 렐리아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고서 다시 착석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렐리아는 와인의 코르크마개를 따기 시작했다. 퐁, 소리와 함께 마개가 쉽게 따졌다. 두 병을 개봉하고서 그 중 한 병은 병째로 블리어의 앞에 내려놓았다. “자 공작. 쭉 들이켜.” “누가 와인을 쭉 들이켠답니까. 애초에 지금 잔도 없이 이리 마시라는 겁니까.” “왜? 같이 병나발 불자.” 두 손으로 묵직한 와인병을 든 렐리아는 입구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값비싼 와인을 천 원짜리 소주와 진배없이 다루는 렐리아였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본 블리어는 야만적인 종족이라도 본 듯 슬그머니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태어나기를 기품 없이 태어난 자처럼 천박하기만한 모습은 정말 손쓸 도리가 없어보였다. 블리어는 몸을 일으켜 진열장에서 자기 와인잔만 꺼내왔다. 와인을 따르는 것도 흔들림 없이 정확했다. 품위 있게 와인잔을 오른손에 쥐고 딱 45도를 유지하며 잔을 기울이는 모습에 렐리아는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저 정도면 병적인 게 아닌가 싶으니 무서울 정도다. “뭘 그렇게 빤히 봅니까.” “지금 컴퓨터랑 술을 마시는 것 같아서.” “컴퓨터는 또 뭡니까. 전에 알던 남잡니까.” “응. 참 끝내주는 애였지.” 그 모니터와 본체가 그립다, 렐리아는 차마 꺼내지 못할 말을 삼키며 병째 술만 홀짝였다. 한동안 말없이 술만 들이켰을까, 약간 알딸딸하게 취기가 오르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딱딱하고 재미없는 남자와 술을 마시는데도 흐흐하고 얕게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이유는 뭘까. “있잖아 공작~” 슬쩍 장난기가 떠오른 얼굴로 렐리아는 제 옆에 앉아 묵묵히 와인만 들이켜던 남자의 어깨에 머릴 기댔다. 그러곤 최대한 입술을 야릇하게 벌리며 한 글자 뗐다. “섹~” “그만.” “응? 나 색소침착에 대해 얘기하려고 한 건데?” “미세하게 섹 발음이 났습니다만.” “그건 네가 예민해서 그래. 색이라고 발음했어. 아니 근데 뭔 차이야?” 섹이나 색이나 둘 다 발음은 같지 않냐며 렐리아는 킥킥거렸다. 뒤늦게 다시 장난기가 돋아난 얼굴을 하고서 그의 귀에다 입을 가져갔다. “섹~” “….” “소폰.” 섹, 이라는 앞글자만 들어도 거슬리는지 와인잔을 쥔 그의 손등위로 미약하게나마 힘줄이 돋는 게 보였다. 그 반응이 여간 웃기지 않은 게 아니라서 렐리아는 악동처럼 입꼬리를 사악하게 끌어올렸다. “섹~” “….” “종이.” “섹~” “그만.” 곧바로 커다란 손이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을 덮더니 그대로 밀어내버렸다. 콰당하고 렐리아는 소파 아래로 굴러 떨어져서도 재밌는지 배를 잡고 낄낄 거렸다. 그 추태에 블리어는 못 볼꼴이라도 본 듯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고서 조용히 쿠션을 집어 들었다. 한번만 더 그 입을 나불거릴 시엔 이 쿠션을 얼굴에 처박아주겠다는 뜻이었다. “아 그래 안해, 안해. 한번 장난쳐본 건데 되게 반응 좋네.” 렐리아는 소파 위로 끙끙 기어 올라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테이블 위에 얹어놓은 자신의 와인병을 품에 안고서 홀짝거리다가 그녀는 조금 차분해진 얼굴로 옆에 앉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근데 공작. 그렇게 내가 섹스라는 단어 쓰는 게 싫어?” “더럽고 천박하게 들려서 싫습니다.” “섹스가?” “그만. 그런 천박한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그대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굳이 그 말 꺼내지 않아도 공작 눈엔 난 원래 그렇게 보였잖아.” “그대의 행동으로 빚어진 결과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그래, 그건 좀 그만 잊자고 말했잖아.” 퉁명스레 대꾸하며 렐리아는 꺽 트름을 했다. 그에 자동적으로 미간을 찌푸린 블리어가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릴 때 렐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난 그렇게 더럽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데. 섹스는 뭐랄까, 사랑의 마지막단계에 온 느낌?” 렐리아는 게임퀘스트 자체가 시스템상 결과만 본다는 걸 잘 알았다. 가령 퀘스트에서 보석을 구해오라고 한다면 직접 광산가서 캐든, 상점에서 사든, 지나가던 유저에게 훔치든, 일단 보석만 구해오면 그 퀘스트는 완료된다. 이 게임도 마찬가지로 무조건 사랑만 얻으라고 했으니 썸, 연애, 결혼 다 뛰고 마지막단계인 섹스만 하면 되지 않을까. 결과적으론 서로 진하게 사랑해서 섹스를 했다고 판단하고 퀘스트가 완료되는 게 아닐까. 몸으로 사랑한 건 증명할 수 있지만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증명할 길이 남지 않으니까 말이다. 단순한 사고방식을 가진 그녀답다면 그녀다운 생각이었다. “난 사랑은 곧 섹스라고 생각해. 남녀 서로 너무 사랑하다보니까 결국 자는 거고. 더 나아가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차리고, 얼마나 신성해.” “그래서 잘했다는 겁니까.” “글쎄.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섹스라고 생각하면 괜찮지 않아?” “전혀 안 괜찮습니다. 애써 포장하려 마십시오. 내 귀엔 여전히 천박하게만 들립니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 섹스섹스 거려보십시오. 열에 열은 미친여자 보듯 볼 겁니다." “참나, 우린 친하니까 그런 거고. 내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러겠어?” 친하다는 건 그냥 둘러대는 말이고 필요하니까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뿐이었다. 직원한테 저가 원하는 걸 말하지 않는 이상 그쪽에서 뭔 수로 알아차려주겠는가. 가만히 있는 다고 얻어낼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이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 이상 합의하에 관계가 이뤄지는 일은 천년만년 오지 않을 거다. 공작과 자연스럽게 썸을 타고 연애를 하고 사랑에 타올라 섹스를 하려면 한 백년은 기다려야 되지 않을까. 공작과 사랑에 빠진다는 상상은 불가능하지만 혹시 만에 하나라도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할까. 원래세계에 돌아가려할지 이곳에 남으려할지 고민이라도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니 끔찍하기 그지없다. ‘지금쯤 엄마아빠가 집에서 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을 텐데 겜캐릭터에 홀랑 빠져서 여기 남아? …불효자식이 따로 없지.’ 아빠는 강하니 그리 걱정은 안 되지만 외강내유인 엄마라면 매일 우울증약을 달고 살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니 렐리아는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괜히 집 생각을 했더니 기분이 찝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렐리아는 양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홀짝홀짝 술로 배를 채웠다. 그때 옆에서 깊은 상념에 잠겼다 깨어난 듯한 낮은 울림 있는 저음이 흘러나왔다. 묵직하고도 감미로운 첼로음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0039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뭐가?” “사랑이 곧 섹스라는 거말입니다.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억, 뭐야. 그건 네가 너무 유별난 거 아닌감?” 그게 따로따로 놀면 사랑은 다른 사람이랑 하고, 섹스는 또 다른 사람이랑 한단 말인가? 렐리아는 도저히 취기 오른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애꿎은 뒷머리만 긁적거렸다. 이미 잔뜩 헤집어놔서 새집이라도 지어놓은 것 같았다. 그녀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소파위에 편히 엎어졌다. 그의 옆허벅지에 정수리 닿을 듯 말듯이 머릴 내려놓고 소파턱에는 두 다리를 얹어놓았다. 이제 좀 편하다며 나른하게 눈을 감고 있다가 렐리아는 순수한 호기심에 살짝 눈을 떴다. 여전히 곧은 자세로 와인을 들이켜는 공작의 날렵한 턱선이 아래서는 더 뚜렷이 보였다. “근데…공작.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면 기분 어떨까?” “많이 해봤지 않습니까, 모르는 사내들과.” “나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아예 믿지도 않는지 그는 무시해버릴 뿐이었다. 그에 렐리아는 ‘진짠데~’하고 능글맞게 툴툴대다가 이윽고 킥킥 웃어버렸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이 목석같은 남자가 이상하게 편하게 느껴졌다. 기분이 몽롱해짐에 따라 렐리아의 입도 가벼워졌다. “공작은? 공작은 해봤남?” “스물여섯인데 못해봤겠습니까.” 그도 술기운 탓인지 의외로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어땠어?” “별 감정 없었습니다.” “뭐야 쓰레기네.” “적어도 그대에겐 듣고 싶지 않습니다.” 차갑게 쏘아붙이는 말에도 렐리아는 가볍게 누워있던 몸을 옆으로 뒹굴 굴렸다. 소파시트를 짚고서 상체를 세운 채 앉아선 순수히 궁금증을 드러냈다. 아기는 어떻게 생기냐고 물어보는 초등학생과도 같은 오롯한 호기심이었다. “그치만 애인이랑 한 거잖아? 근데 왜 아무 감정이 안 느껴진 건데?” “대외적인 애인이었습니다.” “와…그렇게까지 보여주기에 치중된 인간이었다니……. 치밀한 건지 결벽스러운 건지 이젠 모르겠다.” 렐리아는 실망감이 그득 드러난 얼굴을 한 채 다시 냅다 엎어졌다. 이 남자에게 조금이라도 낭만적인 연애경험담을 기대한 저가 멍청했다. “그럼 그 애인은? 지금은 어디 갔는데?” “네 명 다 지금은 결혼했습니다.” “애인이 네 명이나 있었어? 헐…” “그 중 한 명은 타국으로, 나머지 셋은 결혼한 가문의 영지로 내려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야. 진짜 미련 없나보네.” 그냥 덤덤해 보이는 블리어 때문에 외려 말을 잃은 건 렐리아였다. 옆집 개에 대해 얘기하더라도 이것보단 흥미진진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근데 공작. 사랑 없이도 할 수 있으면서 왜 나랑은 안 해줘?” 워낙 까다로운 인간이니 이제껏 순결을 중시하는 줄로만 알고 그에게 억지로 관계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냥 나는 언제든 오픈마인드이니 너 마음생기면 언제든 환영이다 라고 끊임없이 어필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랑 따로 섹스 따로가 가능한 인간이었다니 은근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대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여서 거부감이 듭니다. 그리고 사내로서 자존심이 상합니다.” 블리어는 어둡게 녹안을 내려뜨고서 누워있는 렐리아에게 시선을 줬다. 깊은 짜증이 스며든 눈이었다. “사내알기를 우습게 알지 않습니까. 고작해야 종족번식을 위해 예쁜 여자 뒤만 쫓는, 욕정밖에 머리에 안든 머저리로 보지 않습니까.” “…그건 아닌데…음…” 막상 변명을 하려하니 렐리아는 조금은 숨이 턱 막혀왔다. 양심에 은근히 찔리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나름대로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기어이 입을 열었다. 물론 자신감 없이 빌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치만 몸매 좋은 여자 보면 막 꼴린다고 하고… 성격 나빠도 얼굴만 예쁘면 데리고 산다고 하고…얼굴 못생기면 취급도 안하고…내가 아는 놈들은 다 그랬던 걸….” “내가 그렇게 보입니까.” 차갑지도, 무미건조하지도 않은 낮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살며시 숨을 들이켰다.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대가 그런 치우진 생각만으로 남자를 대하려하니 여태껏 그 몸뚱이를 거쳐 온 사내들이 첩으로도 맞이하지 않았던 게 아닙니까? 이제껏 나도 그런 사내들 중 하나로 보고 그렇게 가볍게 행동했다고 하니 할 말 없습니다.” “…아,” 렐리아는 턱을 긁적거렸다. 차마 그 눈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 낮게 내리깔고서야 그녀는 운을 뗄 수 있었다. “....후우. 그건 사과할게, 공작. 넌 적어도 그런 남자는 아닌 것 같아. …응.” 렐리아는 솔직하게 인정할 건 인정했다. 블리어 그를, 아니 모든 남자들을 그런 식으로 봐왔다는 거에 자연스레 낯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언제부터 이런 고정관념이 생겨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이제껏 이걸 당연하게 여겨왔던 자신이 한없이 모자라게만 느껴졌다. 그가 저를 한심하게 여긴 이유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렇게 행동했으니까, 뭐 당연한 건가….’ 그와 삼 주 넘게 함께 붙어있으면서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이 남자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함부로 대할 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조금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한동안 말을 꺼내지 않을 때 위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내려왔다. “그래도, 그대는 이성으로서는 최악이지만 얘기상대로는 나쁘진 않습니다.” 취중진담인지는 몰라도 그가 이 말을 정정하지는 않을 거란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렐리아는 조금 놀란 듯이 눈을 키웠다. 이제까지 선물을 사다 바친 효과가 있었던 건가, 하는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다가 슬그머니 공작의 무릎에다 머릴 올려두었다. 블리어는 잔을 기울이려다말고 그 감촉에 눈만 내리깔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징글징글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살짝 불그스름하게 떠서는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작 의왼데? 나 지금 칭찬 받은 거?” 하얀 이를 드러내며 능글맞게 웃고 있어도 대번에 좋아라하는 티가 났다. 망나니 같던 여자가 맞나 싶을 만큼 해맑기만 했다. ‘칭찬에 의외로 약한 건가.’ 블리어는 이 답 없는 여자를 앞으로 어떤 식으로 다뤄야할지 조금은 감을 잡은 느낌이었다. 채찍보다는 당근이 잘 먹힌다는 걸 알았으니 앞으로 참고해야지 싶을 뿐이다. “근데 나 이거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나 진짜 한 번도 안 해봤다니까?” 그러다 아래에서 들려온 당돌한 목소리에 블리어는 또 한번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널찍한 허벅지 위에 마구잡이로 흐트러져있는 은색머리칼에 미세하게 그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저 얇은 실 같은 머리칼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던지 깔끔하게 빗어놓던지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게 뭐라고 은근히 거슬렸다. 그래서 뒤이어진 그녀의 말은 거반 흘려들어버렸다. “내 몸뚱이를 거쳐 가긴 누가 거쳐 가. 나 진짜 이렇게 남자랑 술 마시면서 편하게 얘기하는 거 공작이 처음이야.” “…….” 이럴 땐 무시가 낫다는 걸 블리어는 이제까지의 수 없이 많은 경험을 통해 깨우친 상태였다. 한번 물고 늘어지면 어떻게든 끝장을 보게 만드는 피곤한 여자이니 말이다. “진짠데. 뭐 안 믿으면 말아라.” 렐리아는 그의 무릎위에서 가뿐히 머리를 들어 올리고서 다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아기를 품에 안 듯이 소중한 술병부터 끌어안았다. 술을 홀짝거리면서 렐리아는 편하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거나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쳐대며 웃었다. 블리어는 무시로 일관하는 게 대부분이었으나 그래도 불편하진 않은지 묵묵히 술만 들이켤 뿐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는 밤이 무르익어가는 동안에도 계속 이어져갔다. * 이른 아침 전속시종은 커피 한잔과 샌드위치를 들고 주인이 머무르는 방을 찾았다. 이 시간이면 샤워를 마치고 말끔히 착의까지 마친 공작이 거실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다는 걸 알았다. 독서에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이윽고 시종의 눈에 공작이 들어왔다. 그리고 헉, 하고 외마디 비명대신 크게 숨을 들이켰다. 긴 소파를 차지하고 누워있는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소파턱에 불편하게 옆얼굴을 묻고 있는 그 갸름한 얼굴은 상당히 익숙했다. 희고 매력적인 피부와는 대조적인 검은 머리칼은 관자놀이 위로 흘러내려와 있었다. 뒤늦게 그 얼굴 위로 미세한 주름이 일었다. 얼굴뿐이랴, 주름이 길게 진 흐트러진 셔츠는 생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었다. 과연 자신이 알고 있는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시종은 경악한 채 서 있다가 소파 앞 테이블 위에 놓인 세 병의 와인을 발견했다. 빈 병들이었다. 거나하게 취해 그대로 소파위에 뻗으신 거구나 하는 추측은 가능했으나 왠지 쉽사리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술을 마시더라도 항상 절제해서 마시는 그를 알기 때문이다. ‘대체 밤사이에 무슨 일이?’ 시종은 예리하게 방안을 훑기 시작했다. 조금의 단서라도 될 만한 것을 찾기 위해 소파주위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시체처럼 뒹굴고 있는 여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욱.” 렐리아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입을 틀어막으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잔뜩 헝클어진 쑥대머리를 하고서 그녀는 힘겹게 소파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근처에 굳어있는 시종에게 까딱 머리를 숙이며 지나쳤다. 욱욱거리는 소리를 내며 황급히 방을 뛰쳐나가는 은발의 여자를 눈으로 좇다가 시종은 혼란스런 눈으로 제 주인을 내려다보았다. 대낮부터 퀭한 낯으로 블리어는 집무실안에 앉아있었다. 면도를 했을 텐데 턱밑이 까끌까끌한 기분이었다. 블리어는 찝찝함에 이미 주름지지 않게 몇 번이나 점검한 정장셔츠의 아래를 잡아당겨 폈다. 반듯하게 매어있는 넥타이도 또 한 번 고쳐 매고 손목에 차고 있는 은시계도, 소맷부리와 단추도 매만졌다. 그런데도 기분은 좀체 나아지지 않았다. 무언가 진득한 것을 밟아 구두밑창에서 떨어지지 않는 기분, 깨끗한 흰 손수건에 작은 회색얼룩이 생긴 그런 기분이었다. 너무나도 더러웠다. ‘그런 꼴을 시종의 앞에서 보이다니…미쳤군.’ 짙은 짜증과 피로가 묻어나는 눈을 하고 있던 블리어는 이윽고 메마른 손으로 눈가를 덮어버렸다. 늘 몸과 태도를 청결하게 관리하고 신경 쓰는 것은 물론 매사 자기관리에 철저한 그였다. 스스로에게도 조금의 풀어짐은 용납하지 않는 그였으나 오늘 그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그 여자 때문이 아닌가. 같이 술을 먹자고만 하지 않았다면, 술을 사들고 오지만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블리어는 냉하게 속을 가라앉혔다. 업무책상 한편에 올려놓은 숙취에 좋다는 차가 글라스 안에서 차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손을 뻗어 잔을 쥔 그는 기품 없이 식은 차를 원샷했다. 속이 갑갑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여자와 얘길 나눠야겠다는 판단한 블리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한번만 더 늦은 시각 술을 들고 찾아와봐라 하고 협박성 짙은 경고로 기선제압을 하고서 오늘 자신이 치른 굴욕에 대해 상세히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래야 좀 마음이 풀릴 것 같다. 그의 갑갑한 가슴은 단순히 공유할 상대가 필요한 것뿐이라지만 블리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저 서둘러 여자가 있을 별관구석 객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어디 있습니까.” 갑작스레 나타난 블리어에 홀로 남아 방청소를 하던 소피아는 깜짝 놀라 고갤 숙였다. 그의 녹안은 숙취가 가시지 않아 퀭한 탓에 누가 봐도 화가 난 사람처럼 무서워보였다. 아담한 키의 시녀가 말을 꺼내기 위해 숨을 고르는 동안 블리어는 넓은 방안을 휘 둘러보았다. 평소 잘만 뺀질거리며 얼굴을 비추더니 하필 찾을 때 없었다. “그, 그게…, 방금 약속이 있다고 나갔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피아는 힘겹게 대답했다. 혹시 어디로 나갔냐고 캐물으시면 어떡하지, 전속시녀가 돼서 그것도 모른다고 꾸중하시면 어떡하지, 소피아는 괜히 겁에 질려 소심한 생각만 이었다. 그러다 조용해진 주위에 그제야 소피아를 살짝 고개를 들어올렸다. 문가에 서있던 새카만 흑발의 공작은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지 오래였다. 0040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렐리아는 올르아 공작저를 향해 달리는 마차 안에 앉아 답지 않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어제 본 국왕과 다이아나의 다정해보이던 모습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왕이 공략대상일게 뭐람…하아.’ 이미 왕에게는 어엿한 약혼녀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로 보였다. 집에 돌아가기 위해선 어떻게든 왕에게서 사랑을 얻어야하는데 그러면 언니가 상처받을 게 불 보듯 뻔했다. 그 여린 분홍빛 눈에서 눈물방울이 아롱지는 상상을 하니 렐리아는 괜히 가슴이 쿡쿡 찔렸다. 왕의 마음을 원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육체적 사랑을 얻는 게 옳은 일도 아니었다. 한 번의 관계는 결과적으론 두 사람의 사랑을 망쳐놓는 꼴이었다. 사랑하는 약혼녀가 떡하니 있으면서 다른 여자가 한번 합의하에 즐기자고 한다고 홀랑 넘어가는 남자도 이상한 거 아닌가. 그건 그냥 쓰레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남자를 꼬드긴 자신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인 건 마찬가지였다. ‘젠장…! 언니에게 큰 상처를 줄 순 없어.’ 그 가녀리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언니를 지켜줘야만 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절박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제 이기심에 언니를 상처 주는 일 따윈 할 수 없었다. 크윽, 하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렐리아는 치맛자락이 구겨지도록 세게 쥐었다. 하지만 그런 렐리아의 비장한 각오는 올르아 공작저에 다다르자마자 쓸모없게 되어버렸다.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건 거래야.” 다이아나의 기품어린 말에 렐리아는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입안에 차를 머금고 있었다면 아름다운 폭포줄기가 완성되었을지 모른다. 도착하자마자 으리으리한 공작저의 응접실로 안내된 후 계속 이 상태였다. 처음엔 자신이 잘못들은 줄 알았다. 다짜고짜 왕이 목적이냐, 공작이 목적이냐를 묻기에 멍하니 깊은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손수건을 돌려받는다는 건 핑계고 자신을 이곳까지 불러들여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함이었다니, 어떻게 얼굴도 예쁜데 머리도 좋을 수 있지.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언니를 상처주지 않겠다는 아까의 굳은 다짐은 코푼 휴지조각보다 못한 신세로 전략한지 오래였다. 렐리아가 쓰디쓴 차를 들이켜며 눈썹을 꿈틀거릴 때 다시금 다이아나가 연분홍의 탐스런 입술을 벌렸다. “우리 조금 솔직해져보기로 할까?” 눈앞의 미소가 눈부신 여인은 끝까지 여유로웠고 우아하게 차까지 한 모금 들이켰다. “리우스를 어떻게 하고 싶어?” “쿨럭! 언니 참 강렬하시네요.” “마음을 허락하지 않은 이에겐 한없이 과묵한 사람이긴 하지만 내면은 괜찮은 사람이야. 성실하기도 하고 한번 좋아하게 된 사람에게는 열심히 거든. 귀엽게도.” ‘…그 왕이 좋아하는 사람이 언닌데요.’ 렐리아는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은 걸 억눌렀다. 분명히 언니를 대하는 왕의 태도는 누그러졌었고 얌전했으며 보는 사람도 알 만큼 다정했었다. 누가 봐도 애인사이로 보일 만큼 말이다. ‘일방적인 짝사랑인건가. 아무튼 언니는 왕한테 관심이 없어보이네…’ 조금 혼란한 머리를 굴려 렐리아는 이러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갑자기 왕이 불쌍해지네. 말수가 없어 보이긴 해도 언니를 좋아한다는 게 피부로 생생히 느껴졌었던 왕이기에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반면에 눈앞에서 봄날의 햇살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는 미인의 속내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리우스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좋지. 왕후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내려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대신 공비자리는 포기해야겠지만.” “너무 멀리 갔어요, 언니. 돌아와요.” 자신이 지금 한발자국 정도의 거리에 와있다면 지금 이 언니는 비행기를 타고 머나먼 타국까지 간 수준이었다. 이런 성질 급한 면도 매력으로 다가온다면 이젠 답도 없는 덕후인 거겠지, 렐리아는 떨떠름하게 턱을 긁적거렸다. “언니는…그러니까 대체 왜 날 도와주려는 거예요? 뭐가 목적이에요?” “말했잖아. 도와주는 게 아니라 거래라고. 내가 너와 리우스를 밀어주면, 넌 라콘드 공작을 내게 밀어줘야 돼. 이해했니?” “그럼 제가 폐하와 잘된다고 치면 언니는요? 언니는 약혼녀인데 피해가 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된다면 난 그와 파혼을 할 수 있어. 공작과 재혼담이 오갈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것밖에 원하는 건 없어.” “정말 언니의 속은 알 수가 없네요. 아무리 예뻐도 그렇지…사람이 그렇게 너무 신비주의면 또 안돼요. 너무 매력적이잖아요…하.” 헤벌쭉하게 입꼬리를 벌리고서 렐리아는 녹녹한 한숨을 내뱉었다. 다이아나는 가볍게 눈웃음을 지을 뿐 그 말에 대꾸조차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거래는 성립한 거지?” “뭐 좋아요.” 어찌됐든 간에 상황자체가 왕의 사랑을 얻기엔 수월해졌단 거 하나는 확실했다. 언니가 옆에서 코치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일이 빨리 진행될 거라 여겼다. 물론 언니가 공작에게 마음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그 때문에라도 서둘러 공작과도 이 지긋지긋한 관계를 끝내는 게 좋을 테다. 집에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았다. 렐리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씰룩 웃었다. “일단 리우스는 향기로운 차를 좋아해. 후각에 예민하거든. 은은하게 옅은 향수를 뿌리고 오면 좋아할 거야.” 예민한 건 누구랑 닮았네. 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공작은?’하고 물어오는 다이아나의 눈을 능글맞게 마주보았다. 입에 침도 바르지 않았는데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사실 아직까지 공작님에 대해 잘 몰라요.” “뭘 좋아하는 지조차 모른단 거니?” “굳이 뭘 좋아한다고 티를 내지 않으셔서.” 공작에 대해 모를 리 없었다. 험담할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이 언니 앞에서 뒷담을 깔 수는 없으니 말이다. 언니에겐 미안하지만 공작이 달콤한 걸 좋아한다는 건 차마 의리에 어긋나서 말해주지 못하겠다. “다른 정보 알아내면 꼭 말해줄게요.” “그래. 둘이 잘 얘기해서 최대한 많은 걸 알아내봐. 가령 이상형이라든가, 생일이라든가, 많잖아?” “네네. 그래볼게요.” “그리고 이거 받아.” 다이아나가 제게로 웬 연노란 봉투를 내밀자 렐리아는 의아해하면서도 덥석 그것을 받아들었다. 네모난 봉투위에는 하얀 꽃을 닮은 코사지가 붙어있었다. 다이아나가 열어보라고 사근사근한 눈길로 재촉해오자 렐리아는 순순히 손을 움직여 개봉했다. 봉투 안에 테두리를 따라 레이스가 둘러진 예쁜 디자인의 카드 한 장이 들어있었다. “사트릴나 후작부인이 주최하는 보석품평회 초대장이야. 시일은 정확히 사흘 뒤고.” “이걸 왜 저한테?” “내가 참석하는 자리에 네가 와줬으면 좋겠어.” 심금을 울릴 만큼 곱고 잔잔한 목소리라고 렐리아는 생각했다. 그만큼 다이아나의 말은 그녀에게 있어서 파급력이 컸다. “내 사람으로서 데려가는 것뿐이니까 부담가질 필요 없어. 치장은 걱정하지 마. 사람을 따로 보내줄 테니까.” “내 사람이라니…아 지금 진짜 감동했어요. 누구는 나 숨기기 급급한데 언니 진짜 와…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멋있어요.” “이건 공작에겐 비밀로 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얘기해야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는 건데.” “중요한 자리에 날 데려가주는…하, 이런 사람 처음이에요.” 렐리아는 홀로 딴 생각에 잠겨 먹먹한 탄성을 터뜨렸다. 왕국에서 내로라하는 유명한 미인에게 이런 호사를 받아도 되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괜히 목이 잠긴다며 ‘하…’하는 한숨만 연방 터뜨려댔다. 그 모습을 맞은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이아나는 그저 매혹적일 만큼 가늘게 웃을 뿐이다. “라콘드 공작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내일 다시 와서 나한테 얘기해줘. 시간은 오늘과 같이. 알았니?” * 추운 거리로 나가서 따로 수도마차를 잡아야하는 렐리아를 배려해 다이아나는 가문마차까지 내어주었다. 그에 렐리아는 진하게 감격한 얼굴을 하고서 마차에 올랐고 말이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금장식이 된 화려한 마차내부는 여덟 명이 타도 될 만큼 넓어서 괜히 혼자타고 있는 게 민망할 지경이었다. 대귀족들만이 탈 수 있다는 부의 상징인 육두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은 정말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창가에 앉아 한동안 밖을 내다보고 있었을까 얼마안가 마차는 라콘드 공작저 대문 앞에 서서히 멈춰 섰다. 언니가 저를 공작저에만 무사히 데려다주라고만 했지 저택뒤편에 내려주라고 하진 않았으니 당연했다. 뒷문을 통해 조용히 드나드는 신세라는 건 앞으로도 언니가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정문 앞에서 내리게 된 렐리아는 올르아 공작가마차를 떠나보내고서 그대로 등을 돌렸다. 철제대문 앞을 지키고 있는 공작가 병사들의 시선을 피해 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여인이 황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려 다가오는 게 보였다. 짧게 흩날리는 붉은 머리와 몸매를 가리는 품이 넉넉한 흰 사제복을 입은 여인은 다름 아닌 아럼프였다. 그 예쁘장하고 곧은 선의 얼굴은 어딘가 섭섭함과 짜증이 역력해보였다. “어디 갔다 왔어? 놀러왔는데 없어서 한참을 기다렸잖아." 역시나 그녀는 제게 다가오자마자 대뜸 강하게 어깨부터 쥐고 저기압성 목소리로 말했다. 지루했던 모양인지 화려한 웃음은 사라진지 오래처럼 보였다. "네 시녀도 네가 어디 갔는지 모르고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어.” “미안. 너 오늘 놀러올 줄 알았으면 미리 소피아한테 말해두는 거였는데.” "매일 그 시간에 오는 거 알면서 일부러 자리 비운 건 아니고?" "그럴 리가. 내가 예쁜이를 피할 이유는 없지." “능글맞긴. …진짜 두 시간동안 너만 기다렸어. 알기는 해?” 투정부리는 것 같으면서도 왠지 달래는 것처럼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뒤늦게 저를 내려다보던 그 예쁜 얼굴에 묘하게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어떻게 책임져줄 거야? 내 두 시간.” “허이구, 뭘 책임져." "기다리게 했으니까 책임져야지?" "미련곰탱이처럼 기다리긴 왜 기다리래?” “지금 서운해하는 사람 더 섭섭하게 그렇게 말하기야?” 얄미워죽겠다며 아럼프의 길게 뻗은 눈썹이 별안간 꿈틀대며 휙 올라갔다. "하여간, 내가 져준다." 이윽고 키 큰 그녀가 살짝 상체를 굽혀와 저를 끌어안았다. 렐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아럼프를 마주 끌어안아주었다. 장난삼아 저를 끌어안는 여자친구를 놀리듯 오히려 등을 토닥거려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이제 좀 기분이 풀리남? 우리 예쁜이." "조금은." 그가 살짝 머릴 숙이자 부드러운 붉은 머리칼이 렐리아의 하얀 이마에 닿았다. 렐리아는 그 품에서 나는 향긋한 향기에 순순히 코를 묻었다. 역시 포옹은 여자와 하는 게 최고란 생각이 들었다. 렐리아가 맑은 미소를 입술에 내걸 때, 두 남녀가 포옹하는 모습을 멀리서 조용히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저택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최상층의 집무실 창가 앞에 서서 블리어는 멀리 떨어져있는 대문너머의 풍경에 시선을 두었다. 가느다란 창으로 된 철제대문 사이로 유독 그 새하얀 은색머리가 시야에 밟히는 그다. ‘어디 갔나 했더니.’ 평민인지 귀족인지 알 수 없는 붉은 머리의 남자. 너무 멀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으나 저리 당당하게 서로 만나고 다니는 걸 보니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을 만한 신분은 아니겠거니 짐작했다. 블리어는 창문의 커튼을 길게 쳐버리고서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조금이나마 이 여자가 언제 돌아오나 기다렸던 마음이 없잖아 있었던 그는 지금상황이 약간 불쾌하게만 느껴졌다. 정장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블리어는 습관적으로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 포장지를 벗겼다. 혀 위에서 달달한 다크초콜릿이 녹아내리자 어느새 접혀져있던 그의 미간도 스르륵 펴졌다. 0041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아까 그 남자 누굽니까.” 급한 용무를 보러온 사람처럼 갑작스레 방에 들이닥친 흑발남자가 처음으로 연 말문이 저것이었다. 용건이라 하기엔 지극히도 사적인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웬일이래.’ 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네가 붙여준 여사제잖아. 내 친구.” “여자였습니까.” 짧은 머리길이와 키 차이 때문에 당연히 남자라고 생각했던 블리어는 조금 의외란 듯이 말끝을 흐렸다. 그에 렐리아는 퍽 인상을 쓰며 ‘내 친구한테 실례잖아.’하고 쏘아붙였다. 아럼프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대경했을 소리였다. “근데 왜 여자끼리 안고 있었던 겁니까.” “뭔 소리야. 여자니까 서로 안고 있던 거지.” “…?” “?” 둘 사이에 커다란 벽 하나를 세워놓은 것처럼 대화는 어딘가 미묘하게 비껴나가 있었다. 뒤늦게 렐리아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 픽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남자랑 부둥켜안고 있겠어? 징그럽게시리~” 손사래를 치며 렐리아는 자신의 침대위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그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 때문에 더욱이 귀족남자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덧붙여 얘기했다. 그제야 문가에 서서 꿈쩍도 안하던 블리어는 일말의 궁금증을 해소했다는 양 차갑게 등을 돌렸다. 그대로 말없이 나가려는 그를 렐리아는 곧바로 붙잡았고 말이다. “있잖아, 공작. 나 초대장 받았어.” 초대장이란 소리에 블리어는 다시 여인에게로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다가온 그는 어디 한번 내놔보라는 엄한 눈을 하고서 손을 내밀었다. 렐리아는 괜히 주눅 들지 않기 위해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서 품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초대장을 옛다!하고 커다란 손바닥위에 얹어놓았다. 그는 봉투를 개봉하고서 카드 위에 적힌 내용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꼭 여행객들의 소지품을 검사하는 세관직원처럼 깐깐함이 흐르는 눈이었다. “어디서 받았습니까.” “그게 올르아…” “공녀가 그대에게 대체 왜 접근한 겁니까.” “깜짝이야. 나 올르아 라고 밖에 말 안했거든?” 다짜고짜 쏘아붙이는 냉정한 말투에 렐리아는 화들짝 엉덩이를 들었다가 놓았다.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습니까. 그 여자가 어떤 식으로 접근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그 예리함은 예사의 것이 아니었다. 여자의 감보다도 무서운 블리어의 감은 아무리 렐리아라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 부리부리한 시선에 렐리아는 턱만 작게 긁적여야만 했다. 말하기가 좀 복잡했다. 그에게 어디까지 말해줘야 될지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데 돌연 그가 제 양어깨를 내리누르듯 붙잡았다. 힘을 주진 않았으나 아마도 말하기 전까진 일어나지 못하게 할 속셈인 듯했다. 참 무서울 만큼 치졸한 인간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순순히 친구와 함께 왕궁에 놀러갔던 이야기, 그곳에서 우연히 공녀를 만나게 된 얘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두루뭉술하게 말을 포장하며 언니와의 대화내용은 비밀에 부쳤다. “어떻게 안 건진 모르겠는데 내가 여기 사는 거 알고 있던 거 같던데…?” “…….” 그 말에 블리어는 그제야 렐리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모든 걸 다 실토했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표정은 듣기전보다 더 험악하게 변질되어있었다. ‘그 목걸이, 결국 도발이었던가.’ 서로 얼굴 붉히기 싫어 직접 사과하러왔다더니 웃기지도 않는다. 실제로도 블리어는 공녀의 입에서 사과다운 사과를 들은 기억이 없었다. 대부분 자기입장에 대한 얘기만 하고 오 분도 지나지 않아 가버리지 않았는가. 사나운 빛이 흐르는 어두운 녹안을 렐리아는 조용히 힐끔힐끔 올려다보다가 엉덩이를 움직였다. 침대 끄트머리에서 서서히 움직여 내려가려할 때 그의 눈이 딱 그녀에게 꽂혔다. “그 가문과는 두 번 다시 엮이고 싶지 않습니다. 특히 그 여자하고는.” “왜? 그렇게 예쁘고 착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지금 내 앞에서 그 공녀 편을 드는 겁니까? 그대의 편의를 봐주는 건 나입니다. 그 여인이 어떤 식으로 그대를 구슬렸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도 어차피 한순간일 뿐입니다. 변덕스럽기론 어느 여인 저리가라에, 더 나은 조건의 혼처가 있으면 바로 빌붙는 줏대 없는 가문이 어디 가겠습니까.” 무표정한 얼굴로 독설한번 지나치게 살벌했다. ‘같은 공작가문일 텐데 사이는 왜 저렇게 나쁜 건가’에 관한 고찰을 하고 있을 때 렐리아는 뒤늦게야 방을 벗어나려는 그를 알아차리고서 급히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 갈 거다? 갈 거라고.” “가든 말든 상관안합니다. 대신 짐 싸들고 가십시오.” * 다음날 블리어는 평소의 컨디션으로 돌아와 여느 때보다 치장에 힘썼다. 한올 한올 흐트러짐 없이 쓸어 넘긴 흑발과 남자답게 반듯한 이마가 드러나 더욱 훤칠해진 얼굴은 연회장이라도 가는 것처럼 존재자체가 빛났다. 평소 답답해서 잘 하지 않는 크라바트를 매고, 흑갈색의 조끼와 그와 비슷한 짙은 색의 바지, 고급스런 흑광이 흐르는 남성구두까지 신고서 그는 나갈 채비를 마쳤다. 저택출입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집사가 두꺼운 외투와 검은 장갑을 건네는 것을 마지막으로 블리어는 밖을 나섰다. 이주에 한번 정기적으로 중앙귀족회가 열린다는 그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수도에 있는 중앙귀족들이 왕궁으로 소집되어 각자 그동안의 업무내용이나 가문상황을 보고하거나 중요한 안건에 대해 회의를 하는 날이었다. 그곳에 라콘드 공작인 블리어가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마차에 올라 왕성에 향하고 있을 때, 렐리아는 이미 그곳에 도착해있었다. 올르아 공녀를 찾아뵙기로 약속한 두 번째 날, 렐리아는 낮 세 시까지 여유롭게 퍼질러 자다가 그녀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으나 오전 10시쯤에 도착한 편지 한통에 서둘러 씻고 나갈 준비를 해야만 했다. 다이아나가 약속시간을 앞당기자고 한 것이다. 다시 잡은 약속시간인 오전 11시에 렐리아는 서둘러 올르아 가문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이아나는 그녀를 응접실이 아닌 치장실로 데려왔다. 가장먼저 나눈 대화는 어제 공작의 반응이 어땠냐에 관한 대화였다. 렐리아는 다이아나가 상처받을 것을 염려해 최대한 그 독설을 둥글둥글하게 바꿔서 얘기했다. 그 뒤론 왕에 대한 이야기가 갑자기 시작되었는데 다이아나는 오늘 바로 왕과의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노라 얘기했다. 이유는 즉 이러했다. 오늘하루 왕궁에서 중요한 귀족회의가 열리는데 그로 인해 왕의 빡빡한 국사일정이 조금은 느슨해질 거라고 했다. 회의가 끝나는 즉시 왕과의 티타임을 가질 시간정도는 만들 수 있다는 거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렐리아가 ‘네?!’하고 인상을 해괴하게 찌푸리자 다이아나는 말없이 천장의 줄을 잡아당겨 시녀들을 불러들였다. 렐리아는 처음으로 이 세계 양식의 드레스를 입게 되었다. 현실에서도 신지 않던 굽 높은 하이힐을 신고 급한 대로 연한 화장까지 받게 되었다. 치장이 끝나자 다이아나와 함께 공작가 마차에 오른 그녀는 본궁의 깊숙한 곳에 감춰진 지극히도 사적인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왕이 회의를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오도록 약속을 잡아놨으니 이곳에서 꼼짝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는 다이아나의 충고대로 자의적 감금을 진행 중이었다. 렐리아는 세월아 네월아 하는 마음으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그나마 소파가죽이 부드러워 망정이었지 안 그랬다면 진즉 바닥에 드러누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현재 렐리아는 5시간째 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기 운행지연으로 인해 피치 못하게도 공항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피폐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거의 네 시간은 자다가 한 시간은 망상이나 딴 짓을 하면서 보냈던 것 같다. 아침은커녕 점심조차 먹고 오질 않았기에 차와 디저트는 이미 제 것만 먹어치운 지 오래였다. 회의랍시고 왕궁 뒤편에 있는 산에 다 같이 등산하러간 건 아닌가 모르겠다. 주말에 회사에서 등산가자고 하면 정말 끔찍하지, 아니 이게 아니라 대체 뭐하느라고 이렇게 시간이 걸리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이면 산 정상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고도 남았을 테다. 어쩌면 필리버스터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갑자기 최장기록에 오를 수 있게 응원하고 싶어지네. 렐리아는 이젠 별 생각이 다 들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선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언니가 애써 만들어준 자리를 내팽개치고 싶진 않았다. 집 생각에 그럴 수도 없었고 말이다. 그렇게 파김치가 되어 소파에 축 늘어져있을 때였다. 조만간 렐리아의 청력이 희미한 발소리를 잡아내었다. 드디어 온 건가 싶어서 찌뿌드드한 허리를 곧게 피고 정전기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정리할 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렸다. 기름칠이 워낙 잘 되어있어 소리 없이 스르륵 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금발사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반쯤 잘생긴 얼굴이 드러났을까 다시 소리 없이 문이 스르륵 닫혔다. ‘응? 나 방금 사람을 본 것 같아.’ 렐리아는 문사이로 방금 뭐가 나타났다 사라진 건지 되새겨보다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분명히 왕이었다. 옆방과 헷갈려서 문을 열었다 닫은 3초 엑스트라 같았지만, 비록 존재감 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분명 왕이었다. 응접실문을 열고 복도로 뛰어나온 렐리아는 먼 곳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금발사내를 향해 달려갔다. 발목 위에서 나풀나풀 거리는 긴 드레스는 천 주제에 은근히 무게감이 있었다. “저기 폐하. 잠시만요.” “…….” 렐리아는 걸음을 멈춘 왕의 뒤에 비스듬히 서서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를 올려다보며 렐리아는 눈에 먼지라도 낀 것처럼 커다란 눈을 최대한 빠르게 깜빡거렸다. “올르아 공녀님께서 중간에 일이 있어 가버렸지만 저희 둘이라도 티타임을 가지는 게 어떠세요? 이대로 헤어지는 건…” “…함께 티타임을 가지자고 했다.” 그때 제 말을 자르고 들어온 진지한 목소리가 있었다. 언니는 단순히 둘만의 자리를 만들기 위한 미끼였다는 걸 왕은 눈치 빠르게 깨달은 모양이었다.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내의 머리 위에 어째서 골든리트리버의 두 귀가 시무룩하게 처져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언니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 구나, 렐리아는 괜히 안쓰러워질 정도였다. ‘나도 그 맘 이해해. 그 언니 매력이 철철 흘러넘치잖아…어휴. 여자인 나도 이러는데 남자인 네가 안 반하는 게 이상하지.’ “그녀가 없으니 돌아가는 것뿐이다. 비켜라.”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닌지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복도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괜히 선물을 기대하고 온 아이에게 되레 선물을 빼앗은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비록 저가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앞으론 이런 식으로 왕을 꾀어내는 짓은 하지 못하겠다고 여겼다. 언니가 또 이런 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하면 거절해야겠다. 왕은 사랑 앞에선 너무 가녀린 남자였다. * 터덜터덜, 렐리아는 하루를 끝마친 회사원처럼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된 채 본궁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지평선은 이미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노을빛으로 물든 하늘을 올려다보며 걷고 있을 때 렐리아는 멀리서 익숙한 마차한 대를 보게 되었다. 화악 하고 얼굴이 밝아져만 갔다.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할 듯이 날개를 펼친 매와 방패가 양각되어있는 문장은 올르아 가문의 문장이었다. 그것이 붙어있는 육두마차라 함은 결국 올르아 공작가의 마차란 소리였다. 이윽고 멈춰서있는 자신을 향해 한 여인이 마차에서 사뿐히 내려와 걸어오기 시작했다. 노을에 물든 분홍빛 눈은 진한 붉은빛처럼 보였다. “얘기는 잘 나누고 왔니?” “……아. 언니 이제껏 기다리고 있던 거예요?” 회사 끝나고 남친이 데리러온 기분이 뭔지, 감히 모쏠 렐리아는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이런 황홀한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렐리아가 굳은 채로 아름다운 금발여인을 마주보고 있을 때, 그들에게서 한참 멀리 떨어진 창가에서 두 눈을 의심하는 남자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블리어였다. 본궁복도를 걷다 우연히 창밖너머로 들어온 게 하필이면 올르아 공녀였다. 공녀의 모습에 미약하게나마 이맛살이 찌푸려지고 말았으나 뒤이어 시야를 채운 주홍빛이 넘실거리는 은발에 표정이 은은하게 풀려버렸다. 이런 기막힌 우연도 없다지만 블리어는 렐리아의 옆모습에 말없이 집중하게 되어버렸다. 화사한 물빛드레스 차림에 옅게 화장을 했는지 멀리 떨어져있는데도 그 옆얼굴이 새삼 아름다워 보였다. 조촐한 평민복만 입고 다니던 여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꾸민 모습은 색달랐다. 블리어는 조금 감탄이 될 외모라고 생각했다. 인정할 건 인정하기로 했다. 비록 속은 썩어문드러졌다지만 겉이 반반한 건 사실이니 말이다. 공녀와 나란히 세워놔도 어느 귀한가문의 여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정말 그 입만 닫고 있으면 중앙귀족의 첩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얼굴이겠군. 성격이 워낙 모나서 문제지만…’ 냉소적인 생각을 이으며 블리어는 실소했다. 모난 것뿐이랴. 교태랍시고 부리는 수준은 창부촌에서 굴러먹다온 티가 날 정도로 싸보이고 천했으며 오만방자하고도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여자였다. 출생에서 비롯된 천한 티는 평생 버리지 못한다지만 그 빌어먹을 가식을 때려치우고 조금이라도 솔직하게 군다면… “하…진짜 감동이에요. 언니 너무너무 멋있어요. …진짜 완전 최고.” 0042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진심으로 감격한 듯이 살짝 투명하게 글썽이는 물빛이 푸른 벽안위로 흘렀다. 동시에 행복한지 헤실헤실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혹시 저녁에 선약이라도 있니?” “아. 아뇨.” “그럼 우리가문에서 식사하고 가. 돌아갈 땐 어제처럼 바래다줄게.” “헛 정말요?” “그럼.” “아이 그럼 저야 완전 좋죠~” 저절로 들뜬 어조는 능글맞기는커녕 소녀처럼 발랄하기만 했다. 애교가 철철 넘치다 못해 사랑스러워 보이기 위해 작정한 연인처럼 볼을 연하게 붉히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 속눈썹까지 살며시 접어내렸다. “저기 언니…팔짱껴도 돼요? 하하, 제가 너무 들떴죠…?” 턱을 긁적이며 살짝 소심하게 눈치를 보는 렐리아를 향해 다이아나는 상냥하게 팔 한쪽을 내어주었다. 그에 렐리아는 찰싹 달라붙어 그녀 옆을 총총히 걸어갔다. 꼬리가 달렸다면 마구 흔들어댔을 것 같은 조금 들뜬 걸음걸이였다. 언니 좋아요, 좋아요 하고 노래를 부르던 여자는 이윽고 공녀와 함께 나란히 마차위에 올랐다. 그 모습을 고스란히 위층에서 지켜보고 있던 블리어는 충격, 혼란함, 붕괴 등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인 눈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돌연변이가 태어나는 과정을 지켜본 학자와도 같았다. * 밤이 늦은 시각 렐리아는 어김없이 공작의 침소에 숨어들어왔다. 은은한 침대조명만 켜놓은 방안은 조명빛과 어둠의 경계가 자연스레 녹아내린 것 같았다. 널따란 침대위에 홀로 앉아있어 더욱 고독해 보이는 검은머리 남자는 미동조차 않고 책을 읽고 있었다. 렐리아는 침대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내려놓고서 슬쩍 그에게로 몸을 돌렸다. “나 왔어.” “…….” 어쩌라는 거냐는 냉랭한 침묵만이 돌아왔으나 그렇다고 침실 밖으로 내쫓지는 않았다. 렐리아는 편하게 침대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서 그에게 씩 웃어보였다. 누가 봐도 어떤 목적을 품고 있는 가식적인 웃음이었다. “공작. 오늘은 나랑 안 놀아줄 건감?” 대화 안 나눌 거냐며 렐리아는 불만스레 그의 손에 들린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문자가 대문짝만하게 금박처리 되어있는 가죽표지는 낡아보였는데 내용은 안 봐도 지루할 것 같았다. 한동안 렐리아는 말없이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하게 되었다. 고전인건가, 그의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단 거 말고 다른 거 뭐 좋아해? 아. 책인가? 매일 손에서 안 놓고 사니까.” 혼자 열심히 자문자답하며 렐리아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독서에 집중한 얼굴은 그답지 않게 편안해보이긴 했다. “책은 주로 뭘 읽어? 지금은 뭐 읽는 건데?” “역사서입니다.” “역사?” 그제야 그가 입을 열어 대답해주자 렐리아는 바로 깊이 파헤치기 위한 질문에 돌입했다. 취재경쟁을 벌이는 기자와 같은 치열함이었다. 어떤 역사서냐며 집요하게 캐묻자 그는 왕국역사서라고 간단하게 답해줄 뿐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서 많은 정보를 알아낼 필요가 있는 지라 렐리아는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지금 무슨 부분 읽고 있는데?” “황금드래곤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서로 엇갈린 해석에 관한 부분입니다.” “역사라며? 드래곤이 왜 나와?” “건국사를 모르는 겁니까.” 그리 물으면서도 블리어의 차분한 눈은 그럴 리가 없다는 강한 확신을 띠었다. “귀족평민 할 것 없이 왕국의 모든 어린아이들이 동화책으로 가장먼저 배우는 게 건국신화입니다. 스물넷이 모르는 게 말이나 됩니까.” “모르는데.”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심드렁히 내뱉는 렐리아의 말에 블리어는 그제야 짙은 의심을 담아 눈을 가늘게 접었다. “정말 모릅니까.” “응.”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니 내가 모른다는데 무슨 소리야.” “어떻게 성인이 돼서 건국사를 모를 수 있습니까. 그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겁니까.” 냉담한 느낌을 주는 선이 날카로운 얼굴위로 불쌍한 것을 내려다보는 듯한 얕은 동정심이 깔렸다. 매정하고 딱딱한 남자가 맞나 싶을 만큼 처음으로 감정적으로 굴었다. 렐리아는 왠지 그가 저를 긍휼히 여기고 있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데다 가슴한편이 갑갑해서 렐리아는 긴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 그냥 좀 말해줘. 답답해죽겠네. 모르면 모르는 거지!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라고.” “부끄러운 건 내 몫이지 말입니다.” “아 쫌!” 렐리아는 못 이기겠다는 얼굴을 한 채 그의 팔뚝을 장난스럽게 철썩 때렸다. 그에 어딜 하고 블리어는 책을 방패처럼 들고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책 너머로 드러난 사내의 눈은 쓸데없이 진중해서 렐리아는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얼른 말 안할 거냐며 렐리아가 재촉하자 녹빛이 어른거리는 눈동자가 별안간 누그러졌다. “한번 설명할 때 잘 들으십시오.” 책을 손바닥위에 겹쳐놓은 채 그는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이불위에 편히 내려두었다. 수업을 들을 준비가 된 학생처럼 렐리아가 바르게 자세를 고쳐 앉자 블리어의 짧은 역사수업은 시작되었다. “우리 왕국은 다른 강국에 비하면 짧은 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건국사 만큼은 타국에 비할 바가 못 될 만큼 특별합니다. 그래서 건국사를 알기 전에 드래곤에 관한 내용을 먼저 알아둬야 합니다.” “응응.” “드래곤이 어느 일정한 곳에 보금자리를 트는 순간 그 주변이 척박하게 변한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존재는 주위에 있는 모든 생명의 활력을 빨아 당기기 때문에 식물은 말라가고, 땅은 메말라가고, 인간은 활력을 잃고, 짐승은 굶주림에 광포해진다고 합니다.” “…….” “즉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라는 겁니다.” 이 세계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것에 렐리아는 조용히 동의를 표했다.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자신에 반해 그 드래곤은 점 크기의 구멍이 날개에 생긴 것 빼곤 다친 곳이 없었다.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였었다. “전해져오는 건국신화에 의하면 원래 이 수도를 중심으로 드넓게 퍼진 왕국의 영토는 농사를 지을 수 없을 만큼 척박했다고 합니다. 초대 국왕 바일로트 1세는 그 척박한 대지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려했던 자였습니다.” “혁명적인 사람이었네.” “그러니 초대국왕 아니겠습니까.” 바보 같은 질문마라며 그가 살짝 손등을 들어 렐리아의 이마중심을 톡 쳤다. 그마저도 무심한 태도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드높은 광산위에 잠들어있는 황금드래곤을 깨우고서 세상에서 가장 값진 황금을 바쳤다고 합니다. 그에 감동한 드래곤이 바일로트 1세를 도와 왕국을 수호하게 되었고, 현재 바일롯의 왕가문장이 황금드래곤인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제야 렐리아는 왕궁 성곽입구에 새겨진 거대한 드래곤조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혈투를 벌였던 그 드래곤이라 여기고 별 거지같은 걸 새겨놨다고 욕했는데 얘길 들어보니 드래곤이 이 세계에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황금드래곤은 척박한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특히 북쪽의 땅을 기름지게 만들었으며 빈곤한 자에게는 부를 가져다주었고, 왕가에는 드높은 위엄과 충성을, 백성에게는 안정과 평화를 내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 “미안 계속해줘.” “안정기를 되찾자 황금드래곤은 사라져버렸고 지금까지 그 평화가 내려오고 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왕국의 건국사에 등장하는 드래곤에 대한 수많은 추측과 역사적해석이 존재합니다만 그중 정설로 자리잡은 것은 그 당시 초대 국왕 바일로트 1세가 적어놓은 기록에 의한 해석뿐입니다.” “어딜 가나 역사는 복잡하구만? 근데 은색드래곤은?” 게임의 배경시나리오를 대강 알았으니 이제 은색드래곤에 대해서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 세계에선 드래곤이 얼마나 오래 사는 진 모르겠으나 까마득한 천 년 전에 존재한 황금드래곤이 아직까지도 살아있진 않을 것 같았다. 역하렘 공략대상이라는 드래곤이 역사서에 나오는 조상님 뻘은 아닐 것 같기도 하고. “은색드래곤에 대한 내용은 없어? 은색드래곤은 대체…,” 탁, 하고 블리어는 책을 덮어버림으로써 렐리아의 말을 잘라버렸다. “그런 얘기 어디 가서 함부로 하고 다니지 마십시오. 괜한 오해사고 싶지 않다면 허무맹랑한 소리는 자제하는 게 좋을 겁니다.” “허무맹랑이라니 은색드래곤은…” “그만.”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블리어는 또 한번 그녀 말을 잘라먹었다. 렐리아는 대번에 합죽이가 된 채 뭐냐는 퉁명스런 눈빛을 주었다. 대체 뭔 말을 못하게 해. “그 입 조심하라는 겁니다.” 돌연 뻗어온 그의 긴 검지가 렐리아의 삐죽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성의 없이 툭툭 두드렸다.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슬쩍 안으로 밀어 넣으며 블리어와 눈을 마주했다. 가벼운 장난삼아 하는 말은 아닌지 어두운 녹안위로 희미하게 경고의 빛이 흐르고 있었다. “아 그래 안해. 안해.” 무서워서라도 못하겠네, 속에도 없는 소릴 구시렁대며 렐리아는 입술을 히죽 벌렸다. 능청꾸러기처럼 태연한 미소였다. “대신 다른 거 물어봐도 돼?” “또 뭘 물어보려고 그럽니까.” “공작에 관한 거~ 내가 평상시에도 공작에게 관심 많은 거 알잖아.” 블리어는 제게 다가오지 않고 적정거리를 유지한 채 가볍게 입만 놀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특유의 작위적인 미소와 톤 변화가 없는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은 제게 필요이상의 관심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녀의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확실히 정반대일 만큼 다른 모습이었다. 공녀와 함께 있던 모습을 봤을 땐 저런 식으로 솔직하게 남에게 호감을 보일 수 있는 여자였던가 싶었다. 들뜬 목소리나 자연스럽게 튀어나오는 반응, 나는 너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 같던 다정한 눈, 저절로 지어지는 미소 따위에서 처음으로 이 여자를 투명하게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번 봐서 그런지 지금 모습이 상당히 가식으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 블리어였다. 필요에 의해 억지로 제게 들러붙어있는 것처럼 어딘가 건성적이었다. “생일이 언제야?” “챙겨주기라도 할 겁니까.” “왜 또 삐딱하대. 챙겨주면 챙겨주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지났습니다.” “뭐야…” 이미 생일도 지났으면서 왜 챙겨줄 거냐고 물은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렐리아는 삐딱하게 머리를 왼쪽으로 기울이고 있다가 슬쩍 다시 균형을 찾았다. 금방이라도 취재수첩에 적어갈 것처럼 열렬한 기세로 질문이 이어졌다. “좋아하는 색은?” “깔끔한 색 좋아합니다.” “그게 뭐야. 아~ 분홍색? 분홍색 좋아하는 구나.” 블리어는 말을 아꼈다. 대답조차 아깝다는 양 말 그대로 싸늘한 무시였다. 마치 관심종자에게 먹이를 주지 마세요, 하는 태도를 몸소 실천하며 다시 책을 펼쳐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가 침대 헤드보드에 등을 기대고서 독서를 이어가는 동안 렐리아는 다시 슬그머니 질문을 던졌다. “즐겨 입는 옷차림은?” “간정하게 검은색정장을 선호합니다.” “여행 좋아해?” “싫어하진 않습니다.” “이상형은?” “딱히 없습니다.” 이런 사소한 관심이 싫지만은 않은지 의외로 블리어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그에 은근히 장난기가 발동한 렐리아는 씰룩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감추고서 진지하게 물었다. “청순한 타입? 섹시한 타입? 넌 어느 쪽이야?” “청순한 쪽입니다.” “그렇구나. 공작은 스스로를 청순한 남자라고 생각하는 구나.” “…여자취향을 물어본 게 아닙니까?” 뭐 별거지 같은 질문이 다 있느냐고 항의라도 할 것처럼 블리어는 탐탁찮은 눈초리로 그녈 흘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침대 아래로 가볍게 내려올 뿐이다. “아무튼 인터뷰에 응해줘서 고맙고 잘자.” 정보를 수집한 렐리아는 만족스럽게 입매를 휘고서 그의 침실을 벗어났다. 0043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보석 품평회에 참석하기로 한 당일날 아침, 렐리아는 올르아 공작가에서 찾아온 시녀들을 맞이했다. 다이아나는 그녀를 데려가는 추천인로서 책임을 다할 생각인지 드레스와 구두, 장신구까지 맞춰서 보내주었다. 윤이 흐르는 우윳빛구두에 연하디 연한 푸른 자락이 엉덩이에서부터 금붕어꼬리처럼 하늘하늘 펼쳐지는 형태의 드레스를 착용하고서 렐리아는 거울 앞에 섰다. 역시 언니의 안목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한 것 같다. 캐릭터 꾸미는 게 은근 힘든 일인데 이렇게 완벽하게 의상세트를 맞춰서 선물해주다니. ‘기다려요 언니. 당신의 탱커가 달려갈 테니.’ 여자들의 전쟁터, 화려한 웃음으로 가장된 칼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곳. 소피아의 말에 따르면 겉 다르고 속 다른 곳이 바로 사교장이라고 했다. 눈꽃 결정을 닮은 <코로르비타의 귀걸이>와 <신전 드필드라의 보물> 은팔찌를 빼서 서랍보관함에 잘 넣어둔 렐리아는 비장하게 다이아나가 준 장신구를 착용했다. 자신을 꾸며준 시녀들을 지나쳐 렐리아는 마침내 방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복도창가에서부터 새하얀 햇살이 쏟아지듯 내려왔다. 잔뜩 힘을 준 어깨윤곽이 새하얗게 빛나고 그녀의 등이 그림자로 짙게 물들었다. 렐리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는 등으로 말한다. 그저 오른손을 머리위로 살짝 들어올렸다. 검지와 중지를 붙이는 건 잊지 않았다. 아듀. 소피아는 문앞까지 따라 나와서 무사귀환을 빈다는 양 새하얀 손수건을 흔들어주었다. * 사트릴나 후작부인이 주최하는 보석품평회에 도착한 렐리아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미인 천국이로구나. 눈부신 상아빛의 드넓은 홀을 가득 채운 아름다운 여신, 아니 여인들은 진열되어있는 보석들보다도 그 존재가 빛났다. 연예인들만 모인 파티에 놀러온 기분이라 렐리아는 괜히 마음이 들떠버렸다. 카키색머리에 핑크립스틱을 바른 색조합 예쁜 언니, 도도한 고양이 같은 눈매를 가졌으나 웃음소리가 맑고 성격 밝아 보이는 언니, 화끈한 레드립에 진한 스모키화장이 잘 어울리는 섹시한 언니, 모델처럼 늘씬한 키에 베이비페이스인 언니 등 아름다움의 기준도 참 다양했다. 총 마흔 명의 참석자들은 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후반까지 연령대가 다 달랐으나 각자의 매력을 지닌 여성들이었다. 렐리아는 마음속으로 개인취향과 사심을 가득담은 프로듀스40을 진행했다. 1위는 당연히 다이아나였고 2위부터 40위까지는 순위를 매기는 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기만 했다. ‘다들 너무 예쁘잖아…. 근데 난 왜 이 가혹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거지…?’ “잠깐 사트릴나 부인과 인사하고 올게.” “…네?” “돌아다니지 말고 여기 있어. 알아들었니?” 과하지 않은 금빛펄이 은은히 펴 발라져있는 눈을 살며시 둥그렇게 휘며 다이아나가 상냥하게 말했다. 원래는 비슷한 키인데 이번에 높은 굽을 신어서 저보다 5센티 더 커진 언니는 저를 구석자리에 두고 걸음을 옮겼다. “네 언니. 잘 다녀오세요~” 절로 웃음꽃이 피어난 렐리아는 다이아나를 향해 왼손을 살살 흔들어주었다. 이윽고 먼 곳에서 풍성한 흰 망사가 달린 모자를 쓴 귀부인과 인사를 나누는 다이아나가 보였다. 금실자수가 촘촘히 놓인 드레스자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서있는 그녀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단아한 기품이 흘러넘쳐서 꼭 한 폭의 명화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실례지만, 못 보던 얼굴이네요.” 그러다 옆에서 생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퍼뜩 시선을 거두고 그쪽으로 고갤 돌렸다. “이렇게 아리따운 얼굴을 기억 못할 리 없는데 말이죠.” 붉은 면장갑을 낀 성숙한 금발여인이 호호 하고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나이가 조금 있어보였는데 가슴둔덕을 드러낸 와인색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뽀얀 쇄골아래에 콕 찍어져있는 갈색 점은 사내들의 시선을 모으고도 남을 정도로 섹시하게만 보였다. “다이아나 올르아 공녀님의 추천으로 함께 오게 됐어요. 렐리아라고 불러주세요.” “라느띠아느 프렐리예요. 편하게 마담 라띠느라고 불러주세요.” 그 짧은 인사에도 렐리아는 혹여 라도 언니의 이름을 한 글자라도 잘못 발음할까 상당히 신경 써야만 했다. 성을 물어보면 어쩌지 했으나 다행히 라띠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오로지 자기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수도에서 부티크를 운영하고 있답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개성적인 의상디자인을 선보이기 위해 늘 노력해요. 그리고 이미 소식 접했을 테지만……올 봄에 내놓을 신상품을 준비하고 있느라 정신이 없지 뭐예요. 이렇게 젊고 아리따운 영애와 얘기를 나누니 나도 한 십년은 젊어진 것 같네요.” 중간에 거의 다 흘려듣게 되었으나 다행히 마담 라띠느는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저기 오네요.” 뒤늦게 마담 라띠느가 어느 한곳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렐리아도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맺혔는데 다름 아닌 안도의 미소였다. 평민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고 용케 잘 버텼구나, 스스로가 대견하기만 했다. 그렇게 운 좋게 넘어가는 줄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직 영애의 성을 듣지 못했네요. 가문이 어떻게 되죠?” “…아 그게.” 철렁하고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고 바짝 긴장하고 있을 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여유로운 미성이 흘러들어왔다. “이프네.” “?” “렐리아 이프네예요. 나와는 먼 사촌이죠. 탐피아 제국의 귀화귀족 출신이라 이곳수도는 처음이에요. 그러니 수도에 적응할 때까지 예쁘게 봐줬으면 해요.” “어머나, 그렇군요. 말씀도 어쩜 이렇게 예쁘게 하실까. 사촌이라니 보기 좋네요.” 마담 라띠느의 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렐리아는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 렐리아가 깊이 안도하는 동안 라띠느와 다이아나는 가볍게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다, 국왕폐하와의 약혼소식 들었다 등 대부분 라띠느가 이야기를 이어가고 다이아나는 잔잔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두 여인이 근처에 있는 얘길 나눌 때 렐리아는 그 주변에서 겉돌았다. 언니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마담은 좀처럼 물러날 생각이 없어보였다. 심드렁하게 드레스 속에서 발장난을 치다가 렐리아는 긴 드레스자락 아래로 흰 발목이 살짝 드러나도록 다리를 쭉 내밀었다. 이러면 조금은 우아해보이려나. 공작이 옆에 있었다면 “나 어때?”하고 능글맞은 장난이라도 걸었을 텐데 참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 연분홍빛이 도는 복사뼈를 내려다보면서 렐리아가 앞으로 내민 다리를 다시 집어넣으려던 중 그녀의 구두앞코를 밟는 작은 구두가 있었다. “앗…! 미안해요.” 바닥의 감촉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 무섭게 영애가 놀란 듯 저를 바라보았다. 굽슬굽슬한 분홍색머리칼이 허공에서 잠시 흔들리다가 멈췄다. 옆머리에 매단 하얀 레이스리본이 사랑스러운 영애가 이윽고 크고 동그란 눈을 뭉그러뜨렸다. “정말 미안해요. 으아, 발 괜찮아요? 많이 아팠을 텐데…” 초코크림색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울먹거릴 것처럼 변했다. 어쩔 줄 몰라서 주먹 쥔 손을 위아래로 붕붕 흔드는 모습이 귀여움의 결정체로만 보였다. 렐리아는 자신보다 10센티 정도 더 작은 아담한 영애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다고, 그러니 울지 말라고 달래는 그녀가 더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뒤늦게 놀란 새가슴을 가라앉혔는지 영애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마저 솜사탕처럼 달 것 같았다. 얼마안가 영애는 방긋 웃으며 고갤 들었다. “전 슈로니 알락디사예요. 용서해줘서 고마워요.” “아 전 렐리아 이프네예요.” “렐리아 양이군요. 반가워요.” 웃음을 가장한 칼이 날아다닐 거라던 소피아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 그 칼에 찔려 씹덕사할 것만 같았다. 렐리아는 슈로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영애와 마주본 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달콤하고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 “렐리아 양도 혼자 왔나요?” 슈로니는 두 눈을 깜빡이며 아무런 경계심 없이 제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만약 그러면요. 지금 저기서 희귀한 보석을 보여준대요. 저랑 같이 보러 갈래요?” “아 음, 그게 제가…” 갈래요, 하고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한 대답을 간신히 억누르며 렐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간다면 언니에게 어디 가있겠다고 허락을 맡아야 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언니는 중요한 얘기 중인 것 같았다. 모르는 귀부인까지 한명 더 추가된 상태라 끼어드는 건 아무래도 힘들어보였다. 어쩌지 하고 고민에 잠길 찰나였다. 별안간 허공에서 다이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마치 가고 싶으면 가도된다고 말하듯 살며시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제게 계속 관심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새삼 또 그녀에게 ‘치여’버렸다. 짐작하건데 전치 1년, 덕통사고만 벌써 다섯 번은 발생한 것 같았다. 풀어지려는 표정을 겨우 다 잡으며 렐리아는 새로 사귄 영애 슈로니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슈로니가 향하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이미 어느 한자리에만 영애들이 뭉치듯 모여 있었다. 렐리아는 작은 슈로니를 배려해 앞으로 가게 해주고서 자신은 그 뒤에 섰다. 영애들의 머리너머로 주최자인 사트릴나 후작부인이 우아하게 황금진열대 옆에 서있었다. “대륙에 단 8개밖에 존재하는 보석이랍니다. 최근에 가장 희귀한 보석 광물로 선정되기도 했죠. 조명아래에선 이렇게 기품 있는 녹색 빛이 흐른답니다. 속이 투명하게 비춰지죠?” 얇은 망사를 풍성하게 부풀린 모자를 쓴 샤트릴나 부인은 보석에 대한 설명을 잇고 있었다. 초대된 지금 이 자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드문 기회인지 깨닫게 해주려는 듯 과장스런 어조였다. 그에 귀족여인들은 저마다 부러운 표정을 한 채 보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녹빛이 흐르는 검고 투명한 보석. 투명한 진열케이스 안에 들어가 있는 그 보석을 구경하면서도 렐리아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그저 다이아몬드보다 천배는 더 비싸다기에 오, 하는 짧은 감탄을 터뜨릴 뿐이었다. ‘그나저나 저 보석 뭔가 공작 닮았네.’ 새까맣지만 윤이 도는 머리칼과 채도 낮은 녹안을 떠올리게 했다. 머릿속에서 그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때 옆에서 수줍은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좋아하는 사람이랑 닮았어요.” 렐리아는 머릿속에서 빠르게 공작을 지워버렸다. 그저 조금 놀란 눈으로 슈로니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자신과 같은 인물을 떠올린 건가 하는 얼떨떨한 생각을 하다가 뒤늦게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를 것 같은 그녀의 핑크빛 뺨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귀엽네.’ 공작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그 사랑을 응원해주고 싶을 뿐이다. 0044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렐리아는 팔짱을 끼고서 느긋한 마음으로 보석을 구경했다. 그동안 사트릴나 후작부인은 보석설명을 끝내고 영애들과의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중 정략혼을 앞둔 한 영애가 사트릴나 부인에게 결혼에 대한 조언을 듣고 싶다며 수줍게 얘기했다. 그에 이야기는 결혼에 관한 주제로 흘러가게 되었다. “결혼 초에는 그이와 어색하기만 했답니다. 하지만 부부라는 관계에 묶여있다 보니 어느새 저절로 그이를 좋아하게 되어있더라고요. 내 남편이라는 생각을 가진 후부터 였을 거예요. 이 가슴으로, 그이를 남편으로 받아들인 후부터는 보이지 않던 장점들이 계속해서 보이고 그이의 새로운 면들을 알아가기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낭만적인 사람이었더라고요.” 사트릴나 부인의 입에는 어느새 잔잔한 호선이 그려져있었다. 더불어 듣고 있던 영애들의 입에도 비슷한 미소가 맺혀졌다. “서서히 그이를 사랑하게 되어버렸죠. 그리고 아이를 가지고…” 그녀의 결혼스토리는 본격적으로 이어져가고 영애들은 간간이 짧은 탄성으로 호응해주었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지금은 그이를 누구보다 사랑한답니다. 전 주위에 늘 이렇게 말해요. 사람은 상황에 지배된다고 말이죠.” 익살스러운 후작부인의 농담에 여인들의 고운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람은 상황에 지배된다라……, !' 영애들 사이에서 함께 듣고 있던 렐리아는 순간적으로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번쩍 뇌리를 강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마터면 탄성이 터져 나올 뻔했다. 왠지 왕을 어떻게 공략해야 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 가면 바로 계획을 짜봐야겠는데…? 가능성이 있어 보여.' 굳이 서로 멋쩍게 둘만의 시간을 만들 필요도 없고 더 나아가 부담스럽게 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왕의 순수한 사랑을 지켜줄 수 있다는 점에선 제법 괜찮은 생각이었다. “만져 봐도 돼요. 진열목적이 아닌 판매목적이라 눈으로만 보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런 생각을 끝마치고서 렐리아는 붉은 벨벳쿠션위에 수십 개의 보석들을 올려놓고 돌아다니는 후작부인을 볼 수 있었다. 영애들의 손바닥위에 작은 보석들을 일일이 내려놓으며 마음에 들면 사라고 속살거리던 부인은 렐리아의 손에도 하나 쥐어주었다. 알밤만한 크기의 다이아몬드였다. 렐리아는 생전 처음 만져보는 다이아몬드에 신기한 기분만 들었다. 게임 속에서 호강하는 구나 싶었다. 그런 제 표정을 읽은 건지 눈앞에 선 사트릴나 부인은 이것이 얼마나 값진 보석인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하철 잡상인에게 걸린 기분이었다. 그러나 렐리아는 후작부인의 설명이 아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영애들의 수다소리에 슬쩍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듣기론 폐하께서 약혼 피로연을 성대하게 여신대요. 무도회 기대되지 않아요?” “규모부터가 왕궁무도회인데 당연히 성대하겠죠. 주인공이 되실 공녀님이 부럽기만 하네요.” “벌써 다음 주인데 준비들 하셨어요? 드레스와 장신구 맞추느라 이번 주는 얼마나 바쁘던지.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간 거 있죠?” “라콘드 공작전하께서도 참가하실지 궁금하네요.” 왕국의 남편감후보 1위에게 임자가 생겼으니 2위로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느 영애와 파트너로 오실까요?” “저도요. 그게 제일 궁금해요.” “그러고 보니 공작전하께서 최근 교제하는 영애가 있었던가요?” “아뇨, 줄리아 영애 뒤로는 지금 거의 반년 간 없으시지 않나요?” “줄리아 영애도 이별하고 나서 서둘러 결혼했었죠. 그 일레닌 백작가에 혼담이 들어오자마자 바로 진행했다고 들었어요.” “백작영애라 신분차가 조금 있긴 했지만 두 사람 나름 괜찮아보였는데 말이죠. 옆자리의 공백이 기신 건 혹시 줄리아 영애를 못 잊으셔서 그러신 게 아닐까요?” “혹시 모르죠. 가문에 숨겨놓은 여자가 있으시다거나.” 흠칫, 그 말에 지레 찔려버린 렐리아는 무의식중에 주먹을 쥐어버렸다. “평범한 다이아몬드처럼 보여도 다이아몬드보다 열배 단단한 광물…” 그때 빠각 하고 이상한 소리가 렐리아의 손안에서 들려왔다. 그에 수집품을 팔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던 사트릴나 부인도, 멀리 있는 희귀보석을 구경하던 슈로니도, 그 주변에 있던 영애들도, 심지어 렐리아 본인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 자신이 주먹을 쥐고 있었는지 몰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다이아몬드 광물의 감촉이 뭔가 이상했다. 츄파츕스를 밟아서 으깬 거 같은 그런 감촉이었다. 홀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렐리아에게 꽂혔다. 사트릴나 부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분명 저가 보석을 쥐어주었던 렐리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나요…?" "네? 뭐가요?" “…방금 빠각이라고…" "네? 빠각이요?" "네… 영애 손에서 분명 빠각하는 소리가…" 렐리아는 주먹 쥔 상태로 손가락만 미세하게 움직여 가루로 으스러진 보석의 촉감을 느껴졌다. 음. 망했군. 렐리아는 금방이라도 자신이 가루화가 돼서 이 자리에서 홀연히 사라지고만 싶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그 태연자약한 성격은 빛을 발하는 모양이었다. "꺄아아악! 내 손가락!“ “?! 영애?” “제 엄지손가락뼈가! 부러졌나 봐요!" 갑작스런 심각한 상황에 주위에 있던 여인들은 일제히 놀란 얼굴들을 했다. 아까의 그 의문의 빠각소리가 뼈가 부러지는 소리였다니, 큰일이 아니냐며 슈로니는 옆에서 발만 동동 굴렀다. 걱정 어린 시선들을 받으면서도 렐리아는 낯가죽 두껍게도 발연기를 이어갔다. “괘,괜찮아요. 자주 있는 일이라… 아야야, 저 치료받으러 나가볼게요.” 렐리아는 왼손으로 최대한 오른 주먹을 가리며 홀을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주먹틈사이로 가루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홀을 벗어나자마자 렐리아는 어느 복도창가 앞에 서서 활짝 창문부터 열었다. 창문 밖에 손을 내밀고 탈탈 털자 웬 투명한 가루들이 찬바람에 몸을 싣고 떨어져 내렸다. 나는 원래 다이아몬드였어요, 하고 아우성치듯 반짝이는 가루들은 겨울 햇살아래 찬연하기도 했다. ‘…이건 잃어버렸다고 해야겠다.’ 담배 한 개비를 피기위해 추운 회사옥상으로 올라온 회사원처럼 렐리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창틀에 심드렁히 턱을 괴고서 적당히 오 분 있다 돌아가야지 싶었다. 초연해진 얼굴로 황량한 겨울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뒤에서 달칵하고 문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창문을 닫고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조명빛이 터져 나오는 홀에서 벗어나 제게 다가오는 다이아나가 보였다. 늘 상냥한 얼굴이었던 그녀는 웃음기를 지워낸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쳤다면서?” “괜찮아요, 언니. 엄지손가락을 삔 정도예요.” “어디 좀 봐.” “원래 자주 이래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걱정돼서 저를 뒤쫓아 온 건가 싶자 입이 금방이라도 헤벌쭉 벌어질 것만 같았다. 가슴속으로 봄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기분이었다. 간질거리는 심장께를 부여잡고 있던 렐리아는 슬쩍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 언니…이런 말해서 죄송한데요. 급하게 큰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조금 친해졌다고 무턱대고 돈을 빌려달라는 건 아무래도 좋지 못했다. 혹여 라도 언니에게 빈축이라도 살까 렐리아는 황급히 뒷말을 이었다. “제가 아까 보석을 쥐고 있었는데 그게, 뛰어오다가 떨어뜨렸는지 안보여서요. 잃어버려서 변상해야 되는데 제가 지금 현금이 없어요.” “대신 변상할 테니 걱정 마.” “어, 아니에요! 그럼 너무 미안하고 돈만 빌려주심 되는데…” 렐리아는 괜히 미안함에 쪼그라들어버렸다. 절대 그럴 필요 없다고 언니의 발에 매달려서라도 애원하고 싶은데 언니는 끄떡도 없었다. “널 여기 데려왔다는 건 이런 사소한 책임도 질 생각이었단 거야. 그래야 초대한 사람으로서의 체면이 살지 않겠니? 후작부인에겐 잘 말해둘게.” “아뇨. 진짜 괜찮은데…하, 언니 사람이 너무 그렇게 착하면 안돼요.” 그런 식으로 저를 대하면 대할수록 자신의 심장은 뜨거운 땡볕아래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된다는 걸 이 언니는 모르나보다. 렐리아의 마음은 이미 흐물흐물해질 대로 녹아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언니에겐 빚을 지고 싶진 않은데 돈으로 주면 언니의 자존심상 안받으려할 테다. 값비싼 보석을 선물로 주는 식으로 은근슬쩍 빚을 갚아야겠다. “근데 언니. 먼 친척 중에 있다는 이프네 가문 말인데요.” 속내를 숨긴 채 렐리아는 슬쩍 다른 화제로 돌려버렸다. “제가 이프네란 성을 달고 있어도 괜찮을까요? 나중에 언니친척한테 무슨 문제가 될지 모르고, 그게 일이 복잡해질까 봐요.” “괜찮아. 없는 성이니까.” “네? 그럼 그 성은 지어내신 거예요?” 어쩜 작명센스와 상황대처력도 수준급이실까, 렐리아는 황홀한 생각에 잠겼다. 단단히 반한 눈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볼 때 조만간 다이아나가 스륵 고갤 돌렸다. 한줄기 빛처럼 흘러내린 금실이 섬세한 귓바퀴를 스치고 갸름한 얼굴이 훤하게 드러났다.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지는 눈과 반투명한 분홍입술에 순간적으로 렐리아는 숨이 멈췄다. “널 보고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뿐이야. 이프네.” 상냥한 웃음기가 어린 목소리가 렐리아의 머릿속에 있는 종을 댕댕 쳤다. 이상하게도 방금 그녀가 제게 이쁘네 라고 말한 것처럼 들려서 렐리아는 한동안 멍을 때려야만 했다. * 가냘픈 허리 위에서 고양이 꼬리처럼 살랑살랑 거리는 은색머리카락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기는커녕 당당할 정도로 빛이 흘렀다. 평민남성이 입을 법한 면바지와 밋밋한 리넨셔츠, 누가 봐도 편한 복장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며 방안으로 들어선 여인이 있었다.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매일 늦은 시간마다 이곳을 찾아오다보니 이젠 침입에 도가 터있었다. 렐리아는 보자기에 꽁꽁 싸온 것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소파에 냅다 앉으려했다. “짐 싸서 나간 게 아니었습니까.” 그전에 옆에서 들려온 무미건조한 저음과 홱 던져진 쿠션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렐리아는 저가 앉으려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베이지색 쿠션을 안아들고서 소파시트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는 길에 사왔어. 초콜릿 일주일분.” 이거면 됐지? 하고 말하듯이 렐리아는 눈썹을 씰룩이며 편하게 소파에 등을 묻었다. 누가 보면 자기 집 소파인 줄 알만큼 뻔뻔하게 눈까지 감고 있었다. 집주인 블리어는 그녀가 바친 뇌물을 보고 그 정성이 갸륵해 한번 눈을 감아주기로 했다. 테이블위에 쌓인 초콜릿더미를 바라보는 짙은 녹안 위로 흡족함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문득 든 의문에 그림자처럼 어두운 의심이 눈동자위로 깔렸다. “항상 든 의문입니다만 대체 돈이 어디서 난겁니까.” “땅에서 솟아나는데.”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하십시오. 돈 어디서 났습니까.” 늘 고급스런 디저트와 수십 개의 초콜릿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그녀를 알기에 블리어는 상당히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밖에서 돈을 빌리고 다니는 건가 싶었다. 한번 제게 돈을 빌려간 적이 있기에 밖에서 만난 자들에게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었다. 블리어가 회초리라도 들듯이 엄한 눈초리로 쏘아보자 렐리아는 턱만 긁적거렸다. 특유의 당황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눈을 굴리며 딴청을 부리다가 렐리아는 에라 모르겠다 싶어 운을 뗐다. “그냥…” “그냥?” “나가서 몸으로 일해서 번거지, 뭐. 어디서 났겠어?” 차마 도박장에서 땄다고는 말할 수 없기에 그녀는 대충 알아듣도록 둘러대었다. 나가서 단기알바라도 하는 모양이지 하고 그가 생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하지만 블리어는 그녀의 의도와는 다르게 날카로운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 성격상 수도에서 번듯한 일자리를 구했다면 제게 먼저 말을 했을 테다. 저가 대견하지 않느냐고 신나게 나불대고도 남았을 여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고 둘러대는 꼴이 가히 수상쩍다. 어디서 몸을 굴리고 다니는 건가 하는 무거운 생각에 다다르기까진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블리어는 제 옆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아 딴청을 부리는 여잘 바라보았다. 살집 없이 마른 등을 동그랗게 휘고서 까딱까딱 몸을 앞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정신 사나운 행동에 안 그래도 혼란한 속이 더 휘저어지는 기분이 들어 블리어는 조용히 미간만 구겼다. “돈이 필요하다면…” “응?” “말하십시오. 지저분한 짓 하고 다니지 말고.” 뜨끔, 하고 렐리아는 사파이어빛 눈동자를 옆으로 데굴 굴려버렸다. 도박장 다니는 거 알고 있나. 왠지 무당을 속여도 저 남자는 못 속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답하십시오.” 0045 / 0172 ---------------------------------------------- 수도 가브리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렐리아는 다시 슬쩍 왼편에 앉아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피했던 자신과는 달리 곧게 저를 응시하는 진녹안은 흔들림이라곤 없었다. 그게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는지라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고서 물었다. “왜? 공작이 돈 줄 거야?” “초콜릿 살 돈도 포함해서 수고비삼아 지급할 겁니다.” “웬일이래.” 정말 돈을 줄 생각인 것 같아서 렐리아는 되레 놀랐다. 이번에도 먹고 떨어지라고 주는 돈인가, 픽하고 웃으며 그녀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머릴 기울였다. 조금 졸린 기분이었다. 이른 오전부터 부지런히 치장을 받고 점심에는 보석 구경하며 서있다가 거의 저녁 넘어서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자마자 드레스며 장신구며 풀어헤치고 화장을 지우는데 족히 한 시간은 걸렸다. ‘초콜릿도 줬겠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 공작과 얘기한지 비록 십 분이나 됐을라나 싶지만 일찍 가든 늦게 가든 그가 상관이나 하겠나 싶었다. 일방적으로 이 방을 드나드는 것뿐이고 오히려 그는 독서를 하고 있을 뿐 저와 대화를 나눌 생각은 전혀 없어보였다. 뭐 그럼 그렇지, 하고 슬슬 몸을 일으키려할 때 의외의 목소리가 저를 붙잡았다. “오늘 가서 어땠습니까.” “아, 보석품평회? 재밌었어. 언니들도 다 예뻤고.” “공녀가 어떤 식으로 욕보이게 하진 않았습니까.” “천만에- 오히려 날 감싸주기도 하고 걱정도 해주고 나보고 이쁘네란 성도 달아줬어.” “이쁘네?” 뭐 그런 병신 같은 성이 다 있냐는 듯이 무표정한 그가 새카만 눈썹을 소리 없이 일그러뜨렸다. 렐리아는 그렇게까지 반응할 필욘 없지 않느냐고 반박하듯 그 일그러진 눈썹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펴주었다. “실은 이프네라는 성인데 분명 그렇게 들렸다니까? 이쁘네라고 했어, 이쁘네.” “아프네 아닙니까?” “내 감수성을 깨지 말아줄래?” 퉁명스레 쏘아봐주고선 렐리아는 느긋이 팔짱을 꼈다. 떼려던 엉덩이를 푹신한 시트에 완전히 눌러 붙이고선 편하게 등도 기댔다. 모처럼 그가 제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는데 조금만 더 있다가야지 싶은 것이다. 서느런 옆모습의 그는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독서를 이어가고 있었으나 그다지 단절된 태도는 아니었다. 방해하지 마시오 하는 흉흉한 분위기는 사라지고 말을 걸면 금방이라도 대화가 이어질 것 같았다. 오히려 이 침묵을 즐기듯이 여유로워보여서 렐리아는 절로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버렸다. “아깐 왜 짐 싸서 안 나갔냐고 하더니 말야. 막상 내가 안 들어올까봐 불안했던 거 아냐?” 킥킥 웃으며 렐리아는 솔직하게 불어보라며 그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에 블리어는 회색쿠션을 집어 들어 옆구리에 방어벽을 구축한 뒤 무시하고 책을 읽었다. 개소리는 받아주지 않는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재미없다며 툴툴대다가 양반다리를 한 채 삐딱하게 턱을 괴었다. “공작, 솔직히 말해봐. 이제 나 못 내쫓겠지?” “솔직히 지금당장에라도 내쫓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강제로 못할 것 같습니까.” 무력으로라도 내쫓을 기세로 블리어는 싸늘하게 대꾸했다. 여인을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예전의 서리가 내려앉은 차디찬 눈을 재연했으나 지금은 그 서리사이로 미세한 틈이 보였다. 추위 속에도 겨울햇살에 어느 정도 녹아내린 수준이었다. 그가 예전처럼 매정하게 내치질 못하고 어딘가 누그러져있다는 걸 아는지 렐리아는 빙글거리며 입꼬리만 끌어올릴 뿐이었다. “내가 나가면 이제 누가 매일 밤마다 와서 공작이랑 얘기해주남~” “…….” “독거노인 같은 공작과 누가 이렇게 놀아주려남~” “…독거노인, 죽고 싶습니까.” “이렇게 초콜릿 사다주는 사람도 없겠지~ 암암.” 고개를 주억이며 렐리아는 제 말에 저 혼자 동의했다. 그 얄미운 모습을 내려다보던 블리어는 곧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깟 초콜릿 안 먹으면 그만입니다. 슬슬 입에 물리던 참이었습니다.” “아 그래? 그럼 이거 다시 가져가도 되지? 이거랑 같이 짐 들고 나가면 되겠네.” “나가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그 무뚝뚝한 말에 렐리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테이블위에 높이 쌓여있던 초콜릿들을 다시 보자기속에 집어넣고 꽁꽁 죄어 묶었다. 묵직한 무게의 초콜릿 보따리를 품에 안고서 렐리아는 문으로 걸어갔다. 점점 문에 가까워지자 슬쩍 그녀의 보폭이 좁아지며 동시에 속도도 느려졌다. ‘음 뭐야. 진짜 안잡네.’ 서운해 할 리 없었다. 서운하기는 개뿔이, 렐리아는 속으로 덤덤하게 생각했다. 돈도 충분히 있는데 솔직히 굳이 공작저에 얹혀살 필요도 없고 지금 당장 나가도 혼자서도 문제없었다. 단지 이곳을 나가는 순간 그와의 인연이 끝난다는 걸 알기에 쉽사리 행동에 옮길 수 없는 것뿐이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것뿐이다. 그래서 렐리아는 이번에도 자존심을 버리는 쪽을 택했다. 기껏 들고 온 보따리를 문 앞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냥 너 다 먹어라. 잘 자.” 건방지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 팔만 휘휘 저으며 나가는 모습에 블리어는 냉수라도 마신 것처럼 차갑게 속을 가라앉혔다. 역시 돈을 주겠다고 약조한 건 저의 실수가 아니었을까. 안 그래도 공작저에 눌어붙어있다고 기고만장한 여자에게 날개를 달아준 셈이 아닌가 싶었다. ‘…나도 물러 터졌군.’ 창부가 몸을 파는 것은 당연할 텐데 그는 잠시나마 그녀가 그런 일에 더 이상 몸을 담지 않았으면 했다. 오지랖 넓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이라도 든 건가. 블리어는 실소를 흘리면서도 그녀가 문 앞에 두고 간 초콜릿 보따리를 챙겨들어 침실로 들어갔다. * 렐리아는 다음날 자신을 찾아온 아럼프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서 앉으라며 의자까지 손수 빼줄 정도니 말 다했다. 미리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준비해둔 차를 손수 따라주며 렐리아는 평소보다 짙게 웃어보였다. 어떤 목적을 품고 있을 때 나오는 호의적인 미소였다. 아럼프는 어제 하루 선약이 있다며 저와 만나주지 않은 것에 그녀가 은근 미안해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이렇게 잘해주는 게 아닐까 추측하며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있는 여인을 마주 바라보았다. “아럼프. 혹시 말야.” 은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인이 뒤늦게 작은 입술을 벌렸다. 탐스런 은빛머리칼과 유독 잘 어울리는 연한 분홍빛입술은 아럼프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어떤 말이 노랫소리처럼 낭랑하게 흘러나올지 기대했으나 그녀는 좀체 뒷말을 잇지 않았다. 아럼프는 속이 타는 기분에 먼저 환하게 웃으며 그녈 꾀어냈다. “뭐든 들어줄 테니까 말해봐. 뭔데 그래?” “있지. 목소리를 변조할 수 있는 마법 같은 것도 있어?” “….” “역시 사제라서 잘 모르나?” 턱을 긁적이며 렐리아는 약간 난처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곳 세계의 마법이 얼마나 잘 발달되어 있으며 어느 정도의 마법기술이 가능한지 알아야만 했다. 하지만 소피아에게서 듣기론 마법은 전문종사자가 아닌 이상 보기도 힘들고 평민이라면 더더욱 접할 기회가 드물다고 했다. 마법사가 소수인 탓도 있고 왕실에서 인재양성에 힘을 쓰며 보호하고 있는 탓에 대귀족이 아닌 이상 귀족들도 함부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사제가 다루는 신성력과 마법사가 다루는 마력은 근본부터가 다르다고 했으니 아럼프도 마법 쪽으론 문외한일 가능성이 컸다. 역시 아럼프도 잘 모르는 건가 싶을 때 의외로 그녀가 진하게 미소 지으며 짧은 적발을 가볍게 쓸어올렸다. “아주 모르는 건 아니야.” “아 그래? 그럼 목소리변조 마법에 대해서도 알아?” “그건 처음 들어보지만.” 긴 손가락들이 앞머리에서 손을 떼자 화려한 붉은 머리칼이 고운 이마위로 흘러내려왔다. 그 모습을 반대편에서 바라보며 렐리아는 ‘뭐야’하고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럼프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며 가늘게 웃어보였다. “종교라는 게 말이야. 수많은 인맥이 실처럼 여기저기에 연결되어있거든. 특히 국교라면 말할 것도 없지.” “오.” 제법 믿음직한 말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제 일을 잘 해결해줄 것 같다는 신뢰감이 단번에 팍 솟아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싱글거리며 웃고 있는 그녀가 아니라 그녀가 소속된 국교단체에 말이다. “그런데 목소리변조 마법은 왜 찾는 거야?” “조금만 더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어서. 내 목소리를 한층 더 낮게 바꾸고 싶어.” “안 돼. 지금 목소리도 예쁜데 왜 굳이?” 아럼프는 길게 끌어올렸던 얄팍한 입술을 딱딱하게 굳혔다. 절대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 단호한 모습에 렐리아는 서둘러 덧붙여 얘기해야만 했다. “평생 바꾼단 소리는 아니고 아주 잠깐만 목소리변조를 하고 싶어서.” “난 또, 다행이네. 일시적인 효과를 원하는 거면 마도구를 이용하면 될 거야. 한번 이런 쪽으로 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볼게. 전문마법사에게 의뢰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술술 방법을 제시해주는 아럼프가 조금은 언니처럼 든든하게 느껴져 렐리아는 씰룩 웃었다. “난 아럼프 네 정도의 목소리가 딱 좋은 거 같아.” 적당히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은 중성적인 톤, 이정도만 낮게 만들 수만 있다면 원래 목소리를 감추고도 남을 테다. 어젯밤 세운 계획을 되새기고 있을 때 별안간 맞은편에서 손이 뻗어져왔다. 부드러운 손끝이 뺨에 녹아내릴 것처럼 닿더니 스르륵 움직여 제 한쪽 뺨을 감쌌다. “지금 그 말, 내 목소리가 듣기 좋다는 걸로 들리는데.” 옆얼굴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손의 온기가 퍼진 범위가 넓었다. 생각보다 손이 크구나, 하고 렐리아는 덤덤히 생각하면서 그 손바닥에 얼굴을 비볐다. “핸드크림 뭐 써? 냄새 좋다.” 역시 여자손이다. 살결이 부들부들해서 좋다며 렐리아가 사람 손을 탄 고양이처럼 애교 있게 굴자 반대로 아럼프는 손끝부터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예쁜이. 손에 뽀뽀해줄까?” 아럼프가 주춤하고 손을 거두려하자 그 손을 빠르게 붙잡는 작은 손이 있었다. “왜 빼셔? 특별히 기분이다, 나의 뽀뽀를 받아라. 거부는 거부하겠다.” 렐리아는 능글맞게 킬킬 웃으며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그러곤 도장을 진하게 찍듯이 부드러운 손바닥위에 입술을 꾸우욱 눌렀다. ‘우움~ 쪽’하는 소리가 절로 날 정도였다. 저가 지금 여자 손이 아닌 남자 손에 이런 짓을 했다는 걸 알면 아마 기겁하는 쪽은 렐리아일 테다. “…….” 그녀의 돌발행동에 아럼프는 전신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좌상이 아닐까 싶을 만큼 미동조차 없다가 뒤늦게 잡혀있던 손을 확 빼버리고서 몸을 뒤로 물렸다. 의자 끄는 소리가 한적한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 “뭐야, 침 안 묻었거든? 정색은.” 렐리아는 아럼프의 창백하게 굳은 안색에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웃어넘기기는커녕 아럼프가 조용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그제야 렐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녈 올려다보았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곧잘 이러고 놀았기에 이게 당연하다 여겼는데 여긴 동성친구들과 이런 장난은 안치는 건가 싶었다. “…아럼프? 내가 장난이 너무 심했다면 미안.” “장난이었어?” “응. 당연하지. 혹시 이런 거 싫어하면 안할게.” 다신 안하겠다고 약속까지 해줄 수 있다며 렐리아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아럼프는 말없이 등을 돌렸다. 뒤이어 “가볼게.”하고 딱딱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렐리아는 그녈 붙잡을 수조차 없었다. 허망하게 서서 아럼프의 등을 바라볼 뿐이다. 반면에 방을 나서는 아럼프는 아쉬움인지 모를 감정에 목이 타들어가서 아랫입술을 살짝 혀로 축였다. 욱신거려서 미칠 것 같았다. 허벅지위까지 내려오는 넉넉한 사제복상의 덕분에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겼다. ‘장난이었다니 아쉽네.’ 청렴해야할 성직자가 성스러운 흰 옷 아래 새빨간 욕정을 품고 있는 것은 엄연한 신성모독일 테지만, 그는 양심의 가책은커녕 진심으로 아쉬움에 차있었다. 0046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낮 동안 집무실안에 틀어박혀있던 공작 블리어는 잠시 업무를 내려놓고 방을 나섰다. 오래 앉아있느라 옅은 주름이 진 진회색 정장조끼와 검은빛바지 차림은 산책을 나가기에는 외투를 걸치지 않아 비교적 얇은 차림새였다. 넓은 복도가 십자모양으로 나뉜 저택 중심부에서 벗어나 그는 건물과 건물이 이어진 서측별관으로 향했다.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러 가는 사람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으나 가볍게 누굴 만나러 가는지 매무시를 가다듬거나하진 않았다. 블리어는 곧바로 어느 방안으로 들어섰다. 갑작스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피아는 드레스를 정리하다말고 그곳으로 고갤 돌렸다가 깜짝 놀랐다. “고,공작전하…” 허둥지둥 머리를 푹 숙이는 갈색머리 시녀에겐 시선조차 두지 않고 블리어는 침대부터 응시했다. 누가 누웠던 흔적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진짜 나간 것인가. 가늘게 양 미간을 좁히며 생각하던 그가 뒤늦게 시녀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정확히 시녀의 손에 들린 드레스와 장신구에 말이다. 푸른빛이 도는 액세서리와 그와 비슷한 빛깔의 드레스, 그 옆에 나란히 놓인 한 켤레의 우윳빛구두는 예사 가격으론 보이지 않았다. 연회장을 찾는 영애들이 입을 법한 값비싼 것들이었다. 어디서 난 건가 추측하기 무섭게 블리어는 바로어제 그녀가 보석품평회에 초대되었던 일을 떠올렸다. 이것들을 준 자가 누군지 아주 쉽게 머릿속에 도출되었다. “공녀입니까.” “…네?” “이것들을 사람을 시켜 보낸 자가 올르아 공녀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제야 소피아는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했다. 분명 올르아 공작가에서 온 시녀들이라고 했었다. 소피아가 맞다고 공손하게 머릴 조아리며 대답하자 블리어는 곧바로 가차 없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리 주십시오.” 반입금지 물품을 압수하는 엄한 교관처럼 그는 소피아에게서 선물상자 째 빼앗아들어 방을 나가버렸다. 블리어는 다시 제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그것들을 책상 한편에 내려놓았다. 그러곤 시종을 불러다 간결하게 명령했다. “올르아 공작가에 서신을 보내십시오. 저녁에 잠시 방문하겠다고 말입니다.” * 수도 중심가에 위치한 작은 부티크 라느띠아느는 마담 라띠느의 이름을 내건 부티크였다. 개업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꾸준히 개성 넘치는 디자인을 선보여 한번 이곳을 찾은 손님은 바로 단골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일주일도채 남겨두지 않은 무도회로 인해 때 아닌 성수기를 맞이한 부티크는 낮부터 수많은 귀족영애들이 드나들었다. 저녁때가 가까워져서야 여인들로 붐비었던 가게 안이 한산하게 비기 시작했다. 저물어가는 노을을 보며 직원들이 휴식을 맞이하고 있을 때 이곳에 조금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있었다. 렐리아는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마담 라띠느를 따라 작은 응접실에 도착해있었다. 실내에서도 깃털이 달린 챙이 넓은 모자를 비스듬히 눌러쓰고 있는 마담은 확실히 패션피플다웠다. 네크라인이 벌어져 약간 가슴노출이 있는 드레스를 입은 성숙한 금발여인은 제게 차를 따라주며 나긋하게 이곳에 찾아온 이유에 대해 물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가죽 클러치백 안에 챙겨온 종이를 꺼내들었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아서 도안은 무리고 대충 이런 디자인이라는 형태만 잡은 러프스케치였다. 그림에는 자신이 있으니 알아볼만 할 테다. 마담 라띠느는 렐리아에게서 받은 스케치를 꼼꼼히 훑으며 조용히 차만 들이켰다. 좀 생각할게 많은지 한 이분 넘게 희미한 홀짝임만 들려오다가 뒤늦게 라띠느가 찻잔 테두리에서 입술을 뗐다. “…뭔가 색다르네요.” 라띠느는 최대한 해괴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개성 있는 디자인을 취급한다기에 가져와봤더니 너무 개성 있는 건 또 안 되나 보다. “어떠세요? 만들 수 있을까요?” 조심스런 물음에 마담 라띠느의 표정은 딱 이랬다. 이걸 대체 왜 만들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프로답게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서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으흠, 전체적으로 퀄팅이 쓰이겠네요. 조금 난이도가 있겠는데요?”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 “워낙…독특한 디자인이다 보니 만드는 재미는 있을 것 같네요.” 마담 라띠느는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로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혹시…이걸 밖에서 입고 다니실 건가요?” “아뇨, 그건 절대 아니고요.” 밖에 나갈 때 입을 거지만, 그러기 위한 패딩이라지만 렐리아는 전혀 아니라고 고갤 저었다. 왠지 이 세계에는 패딩이라는 개념자체가 없다보니 입고나가는 순간 외계인취급을 당할 것 같았다. “제가 잘 때 추위를 많이 타서 잠옷대용으로 입으려고요.” “아- 그런 거군요. 그렇담 피륙 사이에 거위의 가슴 솜털을 채워 넣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런 식으로 볼록볼록한 모양이 잘 나오게끔요. 거위 털은 다른 털에 비해 길고 풍성해서 보온성도 좋고 누울 때 더 푹신한 기분이 들 거예요.” 납득하기 무섭게 마담 라띠느는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진짜 이상했나 보구나, 렐리아는 괜히 입맛이 씁쓸해졌지만 바로 동조하며 슬쩍 말을 덧붙였다. “이런 우스꽝스런 잠옷을 입는다는 소문이 나는 건 원치 않아서요. 아직 시집도 안간 처녀가 이런 옷을 입고 잔다는 건 좀 그렇잖아요?” 산악동호회 아저씨 같잖아요, 하고 대놓고 말하진 않아도 마담은 알아들었다며 은밀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비밀로 해드려야죠. 저희 부티크는 고객님과의 비밀을 최우선으로 여긴답니다.” “만드는 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오늘은 마침 드레스 제작주문이 들어오지 않은 상태라서요. 퀄팅처리가 손이 좀 가겠지만 전체적으로 단순한 디자인이라 한 이틀이면 될 것 같네요.” “좋네요. 바로 선금 치를게요.” 클러치백에서 작고 동그란 지갑을 꺼내 렐리아는 은화 다섯 닢을 지불했다. 라띠느는 지불금액에 흡족한 모양인지 여유롭게 선금을 갈무리하고선 본격적인 영업미소를 띠웠다. “그런데 이번 무도회에 입고 갈 드레스는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아직 이라면 제가 한번 골라드려 봐도 될까요?” “아 죄송해요, 제가 지금 선약이 있어서요.” 렐리아는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도회에 갈일도 없을 텐데 드레스를 골라봤자 뭐하겠냐 싶을 뿐이었다. * “무도회 초대장이야.” 렐리아는 놀란 듯 크게 떠진 벽색눈동자를 아래로 도륵 굴렸다. 조명아래 자르르 금빛이 흐르는 초대장이 제게 내밀어져있었다. 금을 발라놓은 것처럼 재질부터가 고급스런 종이를 얼떨결에 받아들며 렐리아는 꼬불거리는 검은 지렁이들을 내려다보았다. 음 길군. “아마 라콘드 공작도 참석할 테니까 자세한 건 그에게 물어보면 될 거야. 그리고 넌 내가 초대하는 손님이니까 그에 맞는 격을 갖출 수 있게 치장을 도울 시녀나 옷, 마차를 따로 공작저로 보내줄게. 알아들었니?” 늘 범상치 않은 말을 나긋나긋하게 잇고서 마지막은 이렇게 상큼하게 미소 짓는다. 예전이라면 그녀의 페이스에 멋모르고 휘말려들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치만 전 평민이잖아요.” “그건 걱정 마. 내가 네 신원을 보증한다는데 감히 누가 걸고 넘어지겠어? 성 때문에 불안한 거라면 지금당장이라도 이프네란 성을 실제로 만들어줄 수도 있어.” 조명빛에 부서질 듯이 은은한 미소를 입에 걸고 다이아나는 우아한 자세로 차를 들이켰다. 렐리아는 맞은편에서 그녀를 바라보다가 습관적으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입술아래를 긁적였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계속 받는 건 부담스럽기만 했다. 좋아하고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기에 더더욱 과분한 기분만 들게 했다. “음 그냥 되도록…공식적인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아요.” “혹시 공작이 뭐라고 그랬니?” “그건 아니지만 아마 제가 가면 싫어하실 거예요.” 무도회에서 공작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참 그의 표정이 가관일거라 여겼다. 렐리아는 조용히 사양하겠다고 대답하며 클러치백안에 넣어둔 선물을 슬쩍 꺼내들었다. 그러곤 그녀 앞으로 내밀자 다이아나가 분홍빛 눈을 조용히 내리깔며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마저도 기품이 흐르는 모습이었다. “이게 뭐야?” “언니한테 주는 선물이요.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하나 샀어요.” 사실은 어제 부순 다이아몬드 보상값 대신에 주는 거지만 그것보다 좀 더 비싸게 주고 산 보석장신구 세트였다. 이제껏 그녀에게 받은 게 많으니 말이다. “렐리아. 어제도 말했지만 네가 이럴 필욘 없어. 다시 가져가.”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눈치한번 빠르다. 렐리아는 그녀가 눈치 챌 거라곤 생각했지만 역시 바로 알아차리니 좀 당혹스러웠다. 서둘러 손을 내저으며 렐리아는 돌려받는 걸 되레 사양했다. “아니에요, 이제껏 감사해서 드리는 거예요. 폐하와 개인적인 자리도 만들어주시고 많은 걸 알려주셨잖아요?” “그건 거래였을 뿐이야.” “네 알아요. 그렇지만 고마운 걸 어쩌겠어요. 받아두세요, 언니.” 절대 다시 안 돌려받을 기세로 렐리아는 테이블아래 손을 감춰버렸다.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잘 어울릴 테니 한번 껴보라고 눈웃음까지 살살 쳤다. 이에 다이아나는 선물을 테이블 중앙까지 밀어냈다가 그대로 손끝으로 눌러 다시 제 앞으로 가져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작은 미소만 보일 뿐이었다. 잔잔한 침묵이 깔리자 렐리아는 기왕이면 지금 다 털어놓자는 생각에 슬그머니 말문을 뗐다. “저 이제 폐하께는 그런 식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아요.” “리우스에게 관심을 잃은 거니?” 원래도 관심이랄 것도 없었지만 렐리아는 그저 수긍하듯 고개를 주억였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는 지극히 일반적인 방법으론 왕을 공략할 수 없다고 여겼을 뿐이다. “변덕스럽게 굴어서 죄송해요. 그래도 공작님에 대한 정보는 계속 알려드릴게요.” 서로 밀어주기로 했는데 혼자 거래를 관두겠다고 했으니 면목만 없을 뿐이다. 렐리아가 힐끔힐끔 맞은편에 앉은 다이아나를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였다. 다이아나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노크소리가 응접실 안을 울렸다. 대체 누구지? 하고 렐리아가 문 쪽을 응시할 때 다이아나는 누가 올지 이미 알고 있다는 양 가볍게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공녀가 일어났는데 저가 앉아있을 순 없는 노릇이기에 렐리아도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기하학무늬가 새겨진 고동색 문을 열고 들어서는 한 남자와 직선상에서 눈이 마주쳤다. 0047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빛마저 삼킬 듯이 새카만 검은머리와 깔끔한 매무새를 자랑하는 남자는 다름 아닌 블리어였다. 그의 어두운 녹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렐리아는 입꼬리를 씰룩 움직였다. 대놓고 저를 노려보는 그 눈은 네가 왜 여깄냐고 날카롭게 캐물을 것 같아서 나름 소심하게 반박한 것이다. 그 둘 사이에 있던 다이아나는 한발 먼저 블리어를 향해 다가섰다. 마치 제지라도 하듯이 적극적인 행동과는 달리 고요한 움직임이었다. “공작전하, 오랜만이네요. 미리 손님이 와있어서 미처 반겨드리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해요. 일단 앉으시겠어요?” “무슨 생각인겁니까.” 블리어는 앞뒤 말을 싹 다 잘라먹고서 본론부터 꺼냈다. 그러곤 드레스와 갖가지 치장품이 담긴 선물상자를 테이블위에 탁 소리가 나게끔 내려두었다. “일부러 이 여잘 여기 불러들인 겁니까.” 성난 눈발처럼 조금 거칠어진 감정이 차디찬 눈동자 속에 담겼다. 블리어는 그쪽에서도 이런 식으로 대놓고 도발을 해오는데 저가 참을 이유는 없다고 여겼다. 그 불쾌한 눈빛에도 다이아나는 여전히 고요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이 상황에 끼지 못하고 자연스레 뒤로 물러나게 된 렐리아는 왠지 자신이 긴장될 정도라 여겼다. 어두운 흑발과 환한 금발, 겨울과 봄을 나란히 세워둔 것만 같았다. 비주얼적으로 본다면 상당히 잘 어울리는 선남선녀였으나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이 팽팽한 긴장감은 아마 그것에서 기인하는 것일 테다. “대체 그대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목적이 제게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한낱 평민에게 이리 잘해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잘해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나요?” 정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다이아나가 이윽고 호선을 그리며 입술을 열었다.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는 모든 사내의 로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다. “제가 누구에게 호의를 베풀든 공작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무슨 피해라고 주었나요? 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말씀해주시겠어요?” “아직까지는 피해랄 것은 없습니다만 언제든 피해가 가도 이상하지 않으니 하는 말 아닙니까.” “경고라는 건가요?” “예방이라고 해두겠습니다.”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두 남녀는 치고받았다. 본격적인 싸움을 앞두고서 하는 신경전 같았다. 렐리아는 슬쩍 다이아나의 곁으로 다가갔다. 혹시 공작이 어떤 식으로든 언니에게 위해를 가하려한다면 튀어나가서 막을 셈이었다. 하지만 블리어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만 보였다. 민원 넣겠다고 난리피우는 옆집 아저씨를 피해 엄마 뒤에 숨는 아이처럼 앙증맞게 다이아나의 뒤에 서있는 렐리아가 저를 피하고 있다 여겼다. 넌 왜 거기 붙고 난리냐는 눈으로 탐탁찮게 바라봐주었으나 은발머리 여자는 꿈쩍도 않고 있을 뿐이었다. 괜히 기분이 더러워진 블리어는 더욱 매서운 기세로 나왔다. “애당초 이 여자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부터가 썩 의심쩍어서 말입니다. 혼담을 먼저 내쳤던 주제에 저희가문에 미련이라도 남은 것입니까. 올르아 가문의 정보력이면 숨겨둔 여자의 존재정돈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애초에 이쪽에서부터 허술하게 관리했으니 그쪽에서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진 않습니다.” “….” “하지만 굳이 제 저택에 눈과 귀를 두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가서 말입니다. 이리 행동하는 것엔 이유가 있을 터, 대체 뭐가 목적입니까? 라콘드 공작가를 상대로 무슨 약점이라도 잡고 싶었던 겁니까.” 그는 아주 미약하게나마 입술 끝을 휘어 올렸다. 얼굴전체에 음영이라도 깔린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섬뜩한 냉소였다. 무서운 얼굴위로 낫이라도 그려놓은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 여잘 이용해보려는 수작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아무사이도 아니니 말입니다. 앞으로 오 개월 후면 저택 밖으로 쫓아낼 여자이니 맘대로 가지고 놀아보십시오.” 다이아나를 응시하던 그는 다시 싸늘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등을 돌려버렸다. 이 정도 충고했으니 공녀도 뭔가 깨달은 것이 있겠지 싶을 뿐이었다. 거슬리던 먼지를 털어낸 기분에 그가 만족스럽게 응접실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렐리아. 저 분의 말씀대로 오 개월 후에 라콘드 공작저에서 나올 거니?” 발목을 붙잡는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오늘당장 우리가문으로 오는 게 어때? 너 하나 정돈 충분히 받아줄 수 있는데 말이야.” “아 정말요? 그럼 저…” 생각 좀 해봐도 되냐고 말을 이으려던 순간 렐리아는 제 뒷덜미를 잡아채는 커다란 손에 꽥 소리를 내야만 했다. 바로 고갤 뒤로 젖혀보니 공작이 앞장서서 저를 끌고 가고 있었다. 차마 언니가 보는 앞에서 반말로 찍찍 반항을 할 수가 없기에 렐리아는 응접실 밖까지 조용히 끌려나올 수밖에 없었다. * * * 계획을 시행하기로 한 당일에 맞춰 아럼프는 음성변조 마도구를 가지고 찾아왔다. 렐리아는 바로 마도구를 셔츠칼라에 끼웠다. 심플하게도 작은 머리핀처럼 생겨서 얇은 옷자락이나 종이에 끼웠다 뺄 수 있었다. 아럼프의 설명대로 은색핀 끝에 달린 동그란 구슬을 꾹 누르고서 렐리아는 마이크테스트 하듯 가볍게 입을 열었다. “아아, 내 목소리 어때?” 두 키 정도 낮아진 목소리는 적당히 듣기 좋은 중저음이 되어있었다. 아럼프는 그다지 좋지도 싫지도 않은지 잔잔하게 웃기만 했다. “그나저나 이거 진짜 잘 만들었다. 누가 만든 거야?” “왕궁에서 마도구 발명,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마법사가 있더라고. 바로 부탁했지.” “어떤 원리인진 모르겠지만 이건 진짜 획기적이네.” “근데 실용성은 없잖아.” “하긴 그건 그래.” 목소리를 낮추는 게 실생활에 도움이 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렐리아는 마냥 좋기만 한지 마도구를 계속 켜놓은 채 수다를 떨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여심을 녹이는 발라드가수처럼 황홀한 목소리가 입술 새로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예쁜이~ 우리 밥 먹으러 갈까?” “…….” “오 예쁜이~ 오늘밤 시간 있어?” “이제 끄자. 왠지 내 기분이 이상해질 것 같아.” 아럼프는 더는 못 들어주겠다고 여겼는지 바로 렐리아의 셔츠에 달린 마도구의 작동을 정지시켜버렸다. 렐리아는 다시 원래 목소리로 돌아와 버린 게 허전한지 연방 흠흠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무튼 고마워.” “말로만?” “나중에 한턱 쏠게.” 씩 웃으며 렐리아는 침대위에 편히 드러누웠다. 마담 라띠느를 찾아가 완성된 패딩을 받아오기만 하면 계획의 모든 준비는 끝난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싶으니 뭔가 기분이 묘했다. 이날만을 위해 열심히 짜두었던 계획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설렘 반 긴장 반의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때 별안간 침대 위가 낮게 출렁였다. 옷감이 시트에 쓸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생생히 들려오자 렐리아는 스륵 눈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창문턱에서 흘러내리는 빛살을 등진 화사한 적발이었다. “렐리아.” 웬일로 다정하게 저를 부르며 아럼프가 가늘게 웃고 있었다. 희고 예쁜 얼굴에 본능적으로 약한 렐리아는 “왜~?”하고 따라 능청스럽게 웃어주었다. 누워있지만 않았다면 아구 예쁘다 하고 그 흰 뺨을 마구 만지작거렸을 텐데 아쉽기만 했다. “나중에 쏘는 거 말고 지금은 안 돼? 원하는 거 있는데.” 애정이 담뿍 담긴 푸른빛눈동자에 비친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아럼프는 시트위에 흐트러진 은색머리칼에 자연스레 손을 가져갔다. 그에 렐리아는 추리라도 하듯 살짝 가늘게 눈을 뜰 뿐이었다. “지금? 뭘 원하는데?” “글쎄.” 소리 없이 빙글거리며 웃던 그가 조만간 은색머리칼을 살짝 집어 들어 그 위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긴 머리카락에 배인 체취를 맡아가듯 깊이 고갤 숙여 그녀 쪽으로 서서히 상체를 기울여갔다. 여전히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조금씩 옮겨가던 그의 입술이 귓등에 닿을락말락할 쯤에, 렐리아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숨김없이 솔직하게 나불거렸다. “너 지금 진짜 섹시하다.” “어때, 동해?” “동해~" "정말?" "물과 백두산이~” “…….” “아. 나 지금 가봐야겠다. 원하는 건 다음에 들어줄게.” 렐리아는 벽시계에 힐끗 시선을 주고서 바로 몸을 일으켰다. 근처 의자에 걸려있는 외투를 입는 걸로 나갈 채비를 마친 그녀는 바로 문고리를 쥐었다. “조심히 가고 이거 진짜진짜 고마워, 예쁜이.”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며 나가는 렐리아를 향해 아럼프는 허무함을 감추며 마지못해 미소지어주었다. 탁 하고 문이 닫혀서도 아럼프는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고 걸터앉아있을 뿐이었다. 미소대신 심란함만이 잔존해있는 얼굴위로 뒤늦게 진한 의문이 어렸다. ‘이성적으로 싫어하진 않는 것 같은데…….’ 그녀의 마음을 도통 모르겠다. * 수십 개의 첨탑이 높게 솟아있는 궁전지붕 위로 교교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아치형으로 파인 기둥들과 장려한 곡선무늬가 새겨진 하얀 외벽은 밤에 보아도 여전히 장엄했다. 모든 이들이 고개를 꺾어서 우러러봐야 될 높이, 보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높이에서 자그마한 점 크기의 인영이 맨손으로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장비도 없이 의지하는 건 오로지 몸 하나였다. 거의 아파트 십층 높이에서 내려다본 아래는 모든 것이 다 작게만 보였다. 높은 곳에서 더욱 세찬 겨울바람이 몸을 마구 두들겼다. 정신없이 귀에서 들려오는 혹독한 바람소리에 없던 현실감도 느껴질 정도다. 잠시 발밑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시야가 아찔해지는 높이에서 인영은 겁도 없이 창틀과 창틀사이를 뛰어넘거나 지붕 끝에 위태롭게 한손으로 매달리는 묘기를 선보였다. 한 시간 가까이 왕궁의 외벽에서 위험한 암벽등반을 하던 작은 인영은 어느 복도창문으로 들어갔다. 민첩한 동작으로 복도아래 착지한 인영이 머리를 홱 쳐들었다. 온 몸이 거멓게 뒤덮여있는 인영은 상체전체가 울룩불룩하게 솟아난 실루엣이라 근육으로만 이뤄진 게 아닌가 싶었다. 허나 쫙 달라붙는 하반신은 의외로 마른 편이었다. 뒷목에서부터 이어진 모자를 눈썹아래까지 뒤집어쓰고 콧대 위까지 불룩한 천을 끌어올린 검은 인영은 달랑 푸른 눈 하나만 내놓고 있었다. 키는 165센티 정도였으나 상체만 우락부락 비대해보여서 이종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괴이한 생김새를 지녔다. 그때 근처에 지나가던 근위병이 그 괴상망측한 실루엣의 인영을 발견했다. 마찬가지로 근위병의 인기척을 감지했던 인영이 복도카펫을 박차고 근위병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침입…!” 쿨럭,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진 근위병을 구석벽 아래 대충 눕혀놓고서 인영은 차가운 공기로 가득찬 복도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 역시 패딩, 따뜻해.’ 머리카락 한 올 튀어나오지 못하게 꽁꽁 패딩모자로 얼굴을 감싼 렐리아는 훈훈한 숨을 내뿜었다. 최대한 실루엣을 숨기기 위해 과하게 부푼 패딩을 택한 지라 <코로르비타의 귀걸이>는 잠시 빼고 왔다. 겨울에는 역시 패딩이라는 생각을 하며 한가로이 복도 안을 걷다가 렐리아는 가장 화려한 금색 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는 네 명의 근위병들이 수상쩍은 기척을 느끼기 무섭게 렐리아는 어둠속에 몸을 숨겨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맨 왼쪽에 있던 기사의 울대뼈를 엄지손가락으로 쳐 기절시키고 그 옆의 기사 또한 새끼손가락으로 스치듯이 인중을 쳐 쓰러뜨렸다. 나머지 두 명은 동시에 뒤에서 뒷목을 쳐 수월하게 기절시켰다. 렐리아는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을 지나쳐 황금색 문을 열었다. 0048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과 금, 백은으로만 둘러싸인 듯한 사치스러운 방풍경이 드넓게 펼쳐졌다. 금벽과 높다란 천장위로 펼쳐지는 웅장한 명화는 마치 천국을 연상시켰다. 렐리아는 박물관에 온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 끝에 자리한 방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왕의 침실이었다. 화려함으로 치장된 거실과는 달리 침실은 고급스러운 붉은색과 아늑한 와인색으로 조화롭게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렐리아는 겁도 없이 왕의 침실에 발을 디뎠다. 일부러 소리를 내며 저벅저벅 다가가 이윽고 침대에 누워있는 사내를 향해 손을 뻗으려할 때였다. 스릉, 하고 어둠속에서 날카로운 푸른 예기가 흐르는 검이 렐리아의 목 끝에 정확히 닿았다. 어느새 넓은 침대위에서 상체를 일으킨 금발의 왕은 살기를 띤 눈을 하고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 놈은 대체 누구지…. 정체를 밝혀라.” “네가 이 세계의 권력자인가?” 이래봬도 최대한 왕 앞에서 위엄 있어 보이기 위해 열심히 생각해낸 대사였다. 잠들기 전 한 번씩 연습까지 한 덕에 혀가 꼬이는 일 없이 술술 나왔다. “가소롭군. 고작해야 인간의 검으로 내 목을 칠 수 있을 거라고 보나.” 렐리아는 패딩아래 튀어나온 흰 손을 들어 그 검에 가져다댔다. 살짝 힘을 주어잡자 왕의 검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이불위에 떨어져 내렸다. 그에 마주보고 있던 에메랄드빛 눈이 크게 흔들렸다. 살기대신 당혹, 두려움, 경악을 담고서 찌푸려지는 눈은 패색이 짙어져있었다. 저를 죽일 거라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둠 속에서도 올올이 적빛이 감도는 금발을 내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손을 뻗었다. 그러곤 왕의 날렵한 턱선을 힘을 주지 않고 잡아 들어올렸다. “이 세계의 왕이여.” 허스키한 누님 같은 중성적인 목소리가 렐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검은 패딩 사이로. “오늘부로 넌 내 것이다.” 왕이 사랑 앞에서 한없이 가녀린 남자라는 걸 알기에 렐리아는 본격적인 세뇌에 들어갔다. “넌 내 것이다. 똑똑히 기억해.” 사람은 상황에 지배된다는 후작부인의 말에서 렐리아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렸었다. 다름 아닌 정략혼처럼 상황자체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면 어떨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사랑한다고 착각하다가 결국 홀딱 빠져버린다면 좋겠지만 일단 저에 대해 계속 신경 쓰게 만드는 것에 팩트를 두기로 했다. “넌 내게서 헤어나질 못할 거야, 평생. 날 사랑할 수밖에 없게 너에게 강력한 저주를 걸었으니까.” “…저주라니…! 어느 틈에 그런 짓을 했다는 거지!” “이 눈을 마주본 순간부터.” 왕을 어떤 식으로 상황에 귀속시킬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 힘을 적절히 이용하는 방법으로 계획을 세웠다. 공포, 억압, 세뇌. 총 세 가지 단계의 계획이었다. 사람의 뇌는 심리적인 억압을 받을 때 가장 세뇌가 잘 된다고 알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사이비종교로, 현실에서 큰 위기를 맞이한 사람일수록 더욱더 비현실적인 것에 매달리게 되는 법이다. 여긴 실제로 마법이 있고 신성력도 있는 모양이니 저주저주 거리면 제법 더 그럴싸하게 들릴 테다. “이 저주는 인간의 힘으론 풀지 못하는 강력한 저주야. 이 세계의 교황을 데려와도, 그 어떤 천재적인 마법사를 데려와도 신이 아닌 이상은 풀지 못해.” “…대체 네 놈의 정체가…무엇이지?” “인간을 초월한 존재라고만 해두지. 내 저주에 넌 점차 날 잊을 수 없게 될 거야. 하루하루 날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 끝내 넌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이 괴로운 저주를 풀어달라고 나를 찾겠지.” “…!! 내게 대체 왜, 이런 끔찍한 짓을 한 거지? 무슨 속셈이냐 묻고 있다! 혹…그대는 실버드래곤인가.” 실버드래곤이 여기서 왜 나옴? 하고 렐리아는 두 눈만 끔뻑거렸다. 뒤늦게 체면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사납게 눈을 치뜨고서 경고했다. “내 존재를 세상에 알릴 시에는 이 왕국 전체에 무시무시한 저주를 내릴 것이다. 너만이 날 알고 있어라. 왕이여.” 이미 검을 산산조각 냈을 때부터 그는 자신을 인간이라 믿고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떨리는 긴 금빛속눈썹이 마치 재앙을 눈앞에 둔 것처럼 속절없어보였다. 왠지 애꿎은 남자하나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기분이었으나 렐리아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선 이게 가장 최선책이라 여겼다. “대체…신도, 드래곤도 아니라면 정체가 뭐지.” 짙은 좌절감이 밴 왕의 목소리에 렐리아는 가볍게 사내 턱에서 손가락을 거두고 등을 돌릴 뿐이었다. 그러곤 거대한 창문틀위에 올라서서 활짝 문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알려하지 마. 다친다.” 새하얀 달빛을 등진 채 상체만 우락부락한 존재가 경고했다. 그대로 렐리아는 창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성의 최상층, 까마득한 높이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검은 존재는 잔상조차 남기지 않았다. 라델리우스는 허망과 절망이 어린 눈을 하고서 침대위에 꿋꿋이 몸을 지탱하고 앉아있었다. 이불 위에 조각조각 널린 날카로운 검 파편이 아까의 일이 지독한 현실임을 깨닫게 해주었다. 인간의 힘으론 맞서기조차 힘들던 압도적인 힘, 무시할 수 없는 위압감이 흐르던 근육질의 몸, 왕국전체에 저주를 내리겠다는 그 존재는 공포 그자체가 아닐 수 없었다.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가 아닌가 싶을 만큼 온몸이 새카맣던 남자를 떠올리던 라델리우스는 뒤늦게 그 자리에서 조용히 혼절했다. * 렐리아는 돌아가는 길에 <코로르비타의 귀걸이>를 불렀다. 허공에서 둥둥 떠 있는 눈꽃결정 귀걸이를 귀에 걸고서 패딩은 네모나게 개서 옆구리에 꼈다. 은발에 리넨셔츠, 그리고 검은바지를 입은 채로 야심한 밤거리를 홀로 걸었다. 공작저로 돌아가는 길에 렐리아는 이 계획의 문제점에 대해 생각했다. 첫 번째 문제는 상대가 제 정체를 모른 채 사랑에 빠져도 사랑으로 간주되는 건지 알 수 없단 거고, 두 번째는 정신조작으로 인한 착각사랑도 사랑으로 치는 건지 모른단 거다. 애초에 공략한다는 것 자체가 명확한 기준이 없었다. ‘골치 아프네.’ 이렇게 머리 아프게 골몰히 생각하는 타입은 전혀 아니기에 렐리아는 귀나 후비적거렸다. 직접 몸으로 부딪쳐보지 않는 이상 감도 안 올 것 같았다. 불 꺼진 어두운 거리를 홀로 터덜터덜 걷던 중 렐리아는 먼 곳에서 불이 들어와 있는 작은 파이가게를 발견했다. 왠지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을 느꼈다. 단 게 먹고 싶은 건 아니었으나 그냥 달달한 파이를 떠올리니 갑자기 그 남자가 생각났다. 지금쯤 공작은 자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렐리아는 파이가게의 문을 조심스럽게 당겼다. 딸랑하고 차임벨이 맑게 울렸다. 마침 문 닫기 직전이었는지 가게주인은 마지막하나 남은 파이를 렐리아에게 싸게 팔았다. 초콜릿이 얇게 펴 발린 층위에 블루베리 쨈이 가득 얹어져있는 파이를 곱게 포장한 흰 상자를 들고 렐리아는 다시 밤거리로 나왔다. 한손에 들린 파이상자를 내려다보며 그녀는 씰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매일 밤마다 찾아갔는데 오늘은 안와서 삐쳤을까. 공작 성격상 그럴 일은 죽어도 없을 테지만 혹시라도 저를 기다리진 않았을까, 렐리아는 조금 궁금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렐리아는 자정이 다 돼서야 공작저의 후문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후문에서부터 공작의 방까지 찾아가기는 상당히 수월했다. 십분도 안 걸려서 공작의 방에 침투한 렐리아는 조용히 침실 문을 열어보았다. 야심한 시각, 역시나 블리어는 침대위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캄캄하게 불이 꺼진 침실을 허무하게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슬쩍 침실 안에 발을 디뎠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여 침대 옆에 있는 탁자위에 파이상자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린 그녀가 나가기위해 조용히 문고리를 쥐는 순간이었다. “…뭡니까.” “안자고 있었어?”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얼떨떨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관짝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미동 없이 누워있는 남자가 어둠 속에서 녹안만 형형하게 뜨고 있었다. “뭔데 그렇게 조용히 놓고 갑니까.” “그냥 땅에 떨어져 있길래.” “…….” “맞다, 공작 더러운 거 싫어하지. 땅바닥에서 주운 거 아냐. 그냥 네 생각나서 사왔어.” 렐리아는 머릴 긁적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그가 괜히 또 파이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릴까봐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파이가 무슨 죄란 말인가.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먹으라고. 잘 자.” 낯간지러운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침실 밖으로 나간 렐리아는 조용히 문을 닫아주려 했다. 문틈 새로 “잘 자십시오.”하고 무뚝뚝하게 흘러나오는 대답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의외가 아닐 수 없어서 렐리아는 아주 잠깐 행동을 멈췄다. 뒤늦게 “응.”하고 답해주며 살며시 문을 닫아주었다. * * * 화려함의 끝이라 불리는 왕궁무도회는 늦저녁이 돼서야 온갖 빛을 끌어안고 그 문을 개방하였다. 환하게 터져 나오는 불빛에 귀족들은 나방처럼 몰려들었다. 수백 명의 인파가 동시에 쏟아져 와도 끄떡없는 거대한 성문은 골드드래곤의 비늘처럼 금빛으로 무장되어있었다. 크고 작은 사고에 대비해 기사단의 모든 인력이 회장곳곳에 배치된 상태였다. 수도규모의 성대한 피로연에 참석한 귀족들이 저마다 무리를 짓고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이윽고 연회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온갖 찬란한 금빛을 끌어 모아도 두 남녀를 대신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붉은 기가 잔잔히 감도는 금발과 고운 모래알처럼 옅게 반짝거리는 금발, 이 자리를 빛내줄 왕과 그 약혼녀였다. 두 사람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한층 무르익어갈 때 그들만큼이나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사내가 등장했다. 모든 귀족가의 여식들은 여태껏 그만을 기다렸다는 양 목을 빼고 입구를 주시했다. 깔끔하게 정리된 흑단 같은 머리는 바람조차 스치질 못했다. 새카만 연미복을 입은 라콘드 공작이 회장 안으로 들어서자 여식들은 그를 훑기 바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칠흑으로 일관되었으나 덧없이 진한 광채를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웬만한 평균 남성을 웃도는 우월한 신장과 그에 비례해 넓은 어깨, 날렵하게 빠진 허리선과 긴 다리는 그의 완벽한 신체조건을 보여주고 있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느낌이 드는 몸은 듬직했고, 석고상처럼 하얗고 무감각한 얼굴은 아름다웠다. 혼기가 찬 젊은 공작, 이것만큼 미혼여식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존재도 없을 테다. 블리어는 무도회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국왕의 앞에 다가가 그에게 인사했다. 따지고 보면 라델리우스와 블리어는 비교적 가까운 혈연관계에 놓인 이종형제였으나 어릴 적에 만난 적도 거의 없고 공식적으로 몇 번 본 게 다인지라 그리 친하진 않았다. 황후였던 라델리우스의 친모가 일찍 타계한 탓이 컸다. 국왕 옆에 나란히 서있는 올르아 공녀와도 인사치레로 몇 마디 나눈 뒤 블리어는 몸을 돌렸다. 마땅히 뒤따르는 수많은 시선들에도 그는 지배자의 오만한 탈을 쓰고서 부러 구석쯤에 자리 잡았다. 예민한 성정 아니랄까봐 무심하고 차가운 척하고 있어도 피부로는 다 느끼고 있었다. 저를 힐끗대는 따가운 시선들을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더 힘들다. ‘근데 공작.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왜 하필 지금 그 여자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살거리듯 들려오는지 모르겠다. 블리어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저를 둘러싸듯 서있는 수많은 군중들을 바라보았다. 그중 과반수가 젊은 영애들로 어떻게든 제게 다가오고 싶어 바쁘게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공작씩이나 되니까 세간의 눈을 신경 쓰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사람이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이 수많은 눈들을 달고 사는 입장이 되어봐라, 둔하던 성격도 절로 예민해지리라. 자유로운 한낱 평민주제에 뭘 알겠는가 싶어 블리어는 차게 실소를 흘려버렸다. 하지만 그 여자라면 지금 제 옆에 서있어도 그 방정맞은 입을 아무렇지 않게 나불댔을 것 같긴 하다. 블리어가 회장구석에 서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렐리아는 다이아나가 보내준 마차를 타고 느지막이 무도회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0049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거절하려고 했는데 결국 다이아나의 뜻을 꺾지 못했다. ‘렐리아 이프네’란 이름을 달고 공녀의 손님으로서 초대받는 것이니 이렇게 공작 몰래 가도 상관은 없을 테다. 무도회장에서는 공작과는 일체 아는 척을 해선 안 되고 마주쳐서도 안 될 테지만. 이윽고 사륜마차가 멈추고 렐리아는 우윳빛의 대리석계단 앞에 내려섰다. 계단 한 칸을 밟고 올라선 구두는 유리구두처럼 은광이 반질거렸다. 가녀린 발목 위까지 겹겹이 흘러내려온 드레스자락은 반투명한 은하늘빛 재질이었는데 언뜻 물이 넘실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한 땀 한 땀 푸른 꽃수를 놓은 소매는 흰 손목을 유독 도드라지게 했다. 왠지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아름답게 꾸며준 언니는 동화 속 요정처럼 느껴졌다. ‘언니한테 자꾸 신세만 지네. 나 돈 있는데…’ 드레스며 장신구며 마차며 전부 하루 빌리는 걸 값으로 환산한다면 아마 한화로 약 천만 원의 가치가 아닐까 싶다. 쩝 하고 입맛을 다시며 렐리아는 긴 계단의 끝에 다다라 고개를 들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담아놓은 듯한 보석장신구가 귀와 목에서 치렁거렸다. 마지막 계단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은 곳에 족히 15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높이의 회장입구가 있었다. 렐리아는 쥐고 있던 초대장을 기사에게 보여주었다. 기사가 들어가라며 정중하게 문 앞을 비켜서자 그제야 그녀는 한발을 내디뎠다. 아니 내딛으려고 했다. 제 뒤를 스쳐지나가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감지한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고갤 돌렸다. 짧은 은발이 눈앞에서 흩날렸다. 바로 손을 뻗어 렐리아는 저의 뒤를 지나쳐가려던 은발의 남자를 붙잡았다. 푸른 제복의 옷감위로 조금 구김이 갈 정도로 강한 손아귀에 남자가 이윽고 고갤 돌렸다. 늦저녁의 서느런 바람에 은발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 아래로 드러난 검은색 눈이 의아함을 담고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갓 스무 살처럼 보이는 앳된 청년의 얼굴에 오히려 붙잡은 렐리아가 더 놀랐다. 은발은 분명 드래곤의 은빛비늘을 연상시키는데 그 순하게 생긴 눈매나 검은 눈동자는 전혀 상상과는 달랐던 탓이다. “저기…저 알죠?” 렐리아는 슬쩍 떠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 놀란 표정을 지은 채 대답이 없었다. “알잖아, 왜 모르는 척해?” “…….” “나야 나, 네가 물었던…” “이스티온 경. 신입이 벌써 그렇게 해이해지면 되겠나?” 그때 먼발치에서 들려온 중년남성의 목소리에 렐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왠지 은발남자가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녀는 순순히 그를 놔줄 수밖에 없었다. 구겨진 옷자락을 발견하고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세게 잡았구나 깨달을 때 은발남자가 살짝 고갤 숙여왔다. “저…죄송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곤 바로 등을 돌려 멀어져갔다. 푸른 수가 놓인 제복을 입은 은발남자를 렐리아는 끈질기게 응시하며 ‘이스티온’이라는 이름을 되새겼다. 무사히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선 렐리아는 가장먼저 슈로니와 만날 수 있었다. 진한 분홍색머리를 양갈래로 풍성하게 묶어 안 그래도 귀여운 얼굴이 더 귀여워보였다. 커다란 초콜릿색 눈과 오뚝한 코, 조그마한 체리사탕 같은 입술, 그리고 트레이드마크처럼 양뺨에 연하게 되어있는 분홍블러셔는 그녀의 순진한 매력을 더욱 끌어올린 것 같았다. 레이스양산을 쓰면 잘 어울릴 것 같은 크림색드레스는 어느 나라의 공주님이 입을 것처럼 단이 풍성했다. 슈로니는 제 앞에서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며 어떠냐고 고갤 갸웃하며 물었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귀여워’라는 말이 절로 우러나올 것만 같았다. 렐리아가 귀여워죽겠다며 엄지를 여러 번 치켜세워주자 슈로니는 사심 없이 빙그레 웃었다. “렐리아도 오늘 너무너무 예뻐.” 보석품평회 때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친해진 슈로니와는 서로 편하게 말을 놓기로 했었다. 렐리아는 그녀와 단둘이 적당한 자리에 서서 얘기를 나눴다. 슈로니는 자신의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는데 아마도 저가 무리에 끼기를 은근히 원하는 눈치 같았다. “정말 밝고 재밌는 영애들이야. 다 같이 얘길 나누면 더 재밌을 거야.” “내가 생각보다 낯을 가려서, 그냥 혼자 있는 게 편해.” “렐리아 네가?” 갸우뚱 고갤 기울이며 슈로니는 ‘전혀 아닌데’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렐리아는 꿋꿋이 사양하며 제자리를 지켰다. 귀족영애들 사이에 끼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가짜신분이 들통 날 지도 모를 일인데다 다수에게 얼굴이 알려지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아쉽다는 감정을 한가득 드러내며 슈로니는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렐리아가 살살 녹아내릴 때 슈로니는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그녈 올려다보았다. “있지, 렐리아. 혹시 올르아 공녀님과 친해?” “응. 그건 왜?” “아…그렇구나. 친하구나.” 왠지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서 슈로니는 주위를 힐끔힐끔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작은 목소리로 렐리아에게 소심하게 말했다. “올르아 공녀님, 요즘 뭔가 이상하지 않아? 분위기라던가…” “글쎄 잘 모르겠는데?” “혹시 말이야. 무슨 얘기 들은 거 없어?” “무슨 얘기?” “심경변화가 올만한 무슨 일이 있었다든지…” 그걸 네가 왜 알고 싶은데? 하고 렐리아는 물으려다가 말았다. 그저 슈로니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그녀 얼굴을 꼼꼼히 훑어볼 때였다. “앗,” 한 손에 체리가 꽂힌 칵테일잔을 쥐고 좌우로 흔들던 슈로니가 별안간 삐끗하고 잔을 놓칠 뻔했다. 다행히 슈로니는 아슬아슬하게 잔을 다시 붙잡았으나 문제는 기울어진 잔 때문에 안에 담긴 내용물이 고스란히 렐리아에게로 튀었다는 거였다. 은하늘색 드레스의 한복판, 그것도 하필이면 왼쪽 가슴중앙에 붉은 체리빛 얼룩이 졌다. 둥그렇게 번진 얼룩은 위치도 위치지만 색 때문에 괜히 젖꼭지처럼 보였다. 암만 봐도 망측하고 우스꽝스럽게만 보였다. 그렇다고 가슴에 손을 얹고 가리고 있는 것도 이상해서 렐리아는 벽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려야만 했다. “어떡해. 아 미안해…정말 미안해. 어떡하면 좋지.” 그동안 옆에서 슈로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사과를 이었다. 정말 미안하다며 손수건을 내밀었으나 손수건으로 지워지기는커녕 더 번지기만 했다. 렐리아는 괜찮다는 말로 슈로니를 달래며 생각에 잠겼다. 그냥 지금 나갈까, 이 꼴로 무도회에 더 있는 건 무리고 얼른 가서 손빨래나 해야겠구나 싶었다. 언니가 선물해준 드레스에 얼룩이 생길까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러다 점차 가깝게 들려오는 하이힐굽 소리에 렐리아는 상념에서 퍼뜩 벗어났다. 또각또각하고 여유 있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아름다운 금발미인이 어느덧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화장이 평소보다 진해서 부드럽고 단아한 분위기의 미인이 아닌 인상에 깊게 남을 화려한 미인처럼 보였다. “언니?” 저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냐고 렐리아가 반가워할 때, 그녀 앞까지 말없이 다가온 다이아나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숄을 끌어내렸다. 스르륵, 매혹적인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은회색 숄에 렐리아는 잠시 시선이 팔렸다. 그러다 바로 손을 뻗어와 어깨에 숄을 둘러주는 다이아나의 다정한 손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입고 있어.” 그 말에 렐리아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가슴부근에 진 얼룩은 어느새 그녀가 둘러준 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올르아 공녀님, 약혼 축하드려요.” 슈로니는 다이아나에게 방긋 미소 지은 채 인사했다. 허나 다이아나는 그저 잔잔하게 입꼬리를 휘고 있을 뿐 아무런 대답조차 않았다. 그에 조금 당혹스러워진 슈로니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바로 렐리아를 향해 고갤 돌렸다. “나 친구들한테 이만 가볼게.” 슈로니가 좀 있다 보자며 인사하고 등을 돌리자 그제야 렐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자리에 서서 작게 손을 흔들어주다가 렐리아는 슬쩍 옆에 서있는 그녈 올려다보았다. 황금색으로 물든 들녘처럼 부드러운 빛깔을 띠는 머리칼이 출렁이며 숄이 사라진 어깨 위를 덮고 있었다. 왠지 추워보여서 렐리아가 다시 숄을 벗어 그녀에게 건네려했으나 그것을 제지하는 손이 있었다. “내가 아까 뭐라고 했지?” “음 입고 있으라고 하셨죠…?” “그래. 기억하다니 착하네.” 머리라도 쓰다듬어줄 듯이 기특해하는 눈이었다. 렐리아는 상냥하게 휘어진 분홍빛 눈을 마주보는 내내 심장이 간지러워졌다. 이 감격스러움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언니의 가냘픈 어깨를 안아주고만 싶은…어디가세요?” 렐리아는 갑작스레 걸음을 옮기는 다이아나를 따라잡기 위해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얇은 실타래처럼 흔들리는 금발을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그녀의 귀에 걸린 레드다이아몬드 귀걸이를 발견했다. ‘아 내가 선물한 거 하셨다.’ 그냥 일상생활에 하라고 선물한 건데 이 중요한 자리에 하고 올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예쁘고 값진 걸로 선물할 걸, 하고 생각하던 중 옆에서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아이 어떤 것 같니?” “누구요? 슈로니요?” “그래. 겪어보니 어떤 것 같아?” “귀여운 친구예요.” 좀 덤벙거리는 구석이 있고 실수가 잦긴 하지만 하는 짓이 귀여웠다. 그런 제 말이 어딘가 잘못되었는지 다이아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뒤늦게 붉은 입술을 뗐다. “네가 그렇다면 어쩔 순 없지만 너무 마음을 주진 마.” “…?” “가까이 지내서 좋을 거 없는 애야.” 언니가 이렇게 냉정하게 사람평가 하는 건 또 처음이라 렐리아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물론 곧 그녀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며 수긍했다. “그런데 언니, 오늘은 입술 빨갛게 칠했네요?” “공식석상인데 평소처럼 하고 올 순 없잖아.” “평소에도 이렇게 하고 다녀도 예쁠 것 같은데. 근데 언니는 워낙 이목구비가 또렷해서 얼굴이 화장을 잡아먹는 느낌이에요.” 보통 화장에 따라 얼굴분위기가 좌우되는데 본판이 워낙 예쁘다보니 어떤 화장도 잘 어울렸다. 오히려 화장이 묻히는 기분이 들 정도다. 다이아나와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걷던 렐리아는 뒤늦게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 눈치 챘다. 하필이면 그쪽에서도 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상석에 앉아있는 왕을 향해 예를 갖추었다. 본건 있기에 드레스자락을 좌우로 살짝 잡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벨벳원단이 덮인 화려한 의자에 앉아있던 라델리우스는 굵직한 금테가 둘러진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상념에 잠긴 눈으로 그는 자신의 약혼녀 옆에 서있는 여자를 조용히 주시했다. ‘그 자와 눈동자색이 닮았군.’ 라델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허나 가녀린 체구를 보건데 저 여자가 우락부락했던 그 남자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다. 검은 근육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자체가 애초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라델리우스는 이제껏 그자를 찾아내기 위해 조용히 정보를 수집했었다. 왕의 권력을 총 동원해 공개적으로 수배를 한다면 금방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정체를 세상에 알린다면 그 남자의 손에 왕국전체가 몰락할 지도 몰랐다. 근육질에 키가 작은 남자나 저주에 대해서 닥치는 대로 정보를 긁어모아 보았으나 아직까진 그렇다할 이득은 보지 못한 상태였다. 라델리우스는 그자가 자신에게 걸었다던 그 저주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왠지 저주의 뜻대로 가고 있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저주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지 절대 그 남자에 대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고 수도 없이 되뇌었다. 저가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로지 다이아나 하나뿐이었다. 그런 제 순결한 사랑이 고작 저주에 더러워질까 그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또 고뇌했다. 티가 나진 않았으나 며칠 새 살이 조금 빠지기도 했다. ‘설마 이게 저주인건가. 저주가 이미 진행되고 있는 건가.’ 생각을 안 하려고 하면 할수록 은근 더 신경 써지는 게 인간의 심리라는 거지만, 라델리우스는 그 심리에 철저히 놀아나고 있는 중이었다. 저주를 의심하고 저주에 대해 고뇌하는 동안 그는 그 남자를 매일같이 떠올리게 되었으니 말이다. 0050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렐리아는 다이아나와 함께 무도회장의 상석근처에 서서 얘길 나누었다. 화려한 웃음소리와 감미로운 연주소리가 드높은 회장천장을 가득 메운 채 빙빙 선회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소리들이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주위에선 끊임없이 오색 이상의 다채로운 색상들이 어지럽게 스치고 지나갔다. 공작새처럼 시선을 끌기 위한 독특한 옷차림과 특이한 머리색 등이 두루 섞여 보고 있으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러다 렐리아는 어느 한곳에 고정되어있다시피 한 단색을 찾을 수 있었다. 온통 새카만 무채색의 남자였다. 구석에서 틔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그는 미동조차 않고 샴페인만 들이켜고 있었다. ‘진짜 지루해 보인다.’ 그가 남의 시선을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자였다면 아마 구석에서 책이라도 읽거나 회장 안을 순회하며 다디단 디저트를 맛보았을 테다. 품위 있는 공작을 연기하기위해 참 애쓴다 싶었다. 그러다 옆에서 들려온 고운 목소리에 렐리아는 빠르게 시선을 거뒀다. “렐리아. 난 잠깐 리우스에게 가볼게.” “갔다 와요~ 언니.” 한 시간 가까이 자신과 얘기를 나누느라 고생했을 언니를 떠나보내고서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기둥에 기댄 채 섰다. 하지만 눈은 흥미롭게 대각선상에 있는 공작을 바라보았다. 과연 언제까지 저렇게 미동도 않고 있나 지켜보는 맛이 있었다. 공작은 검은 돌로 만든 조각상이 아닌가 싶을 만큼 거의 움직임 없이 자릴 지켰다. 체감 상 반시간을 그를 지켜본 결과, 피로로 짙어진 그의 녹안이 아주 가끔씩 근처에 있는 초콜릿 분수대로 향해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휴. 불쌍해라.’ 먹고 싶어도 먹질 못해서 쳐다만 보다가도 누군가 시선을 주면 아닌 척 다른 데로 시선을 주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못 봐줄 지경이었다. 렐리아가 눈물 많고 감수성 풍부한 자였다면 지금쯤 눈물이 핑 돌았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되겠다. 공작 좀 먹여야지.’ 렐리아는 기둥에 붙여두었던 등을 떼고서 몸을 움직였다. 뷔페식으로 되어있어 접시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디저트만으로 구성된 널따란 테이블 앞으로 갔다. 새하얀 식탁보가 덮인 그 위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된 초콜릿 분수대와 상큼하고 달달한 한입크기의 과일들, 작은 빵이나 과자, 마시멜로가 놓여있었다. 공작의 입맛을 꿰고 있는 그녀는 접시 위에 알찬 구성의 초콜릿랜드를 건설했다. 이제 저 공작을 어떻게 밖으로 꼬셔내나 싶을 때 마침 허공에서 그 진녹안과 눈이 마주쳤다. 또 초콜릿 분수대를 눈으로만 감상하려다가 그 옆에 있던 자신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파르페처럼 화려하게 데코한 접시를 들고서 렐리아는 멀찍이 서있는 공작에게 눈짓했다. ‘당 채우러가자, 공작.’ 눈빛만으로도 찰떡같이 알아들었는지 조각상처럼 굳어있던 남자가 별안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남들 시선을 피해 한발먼저 회장과 연결된 복도로 빠져나왔다. 레드카펫이 길게 깔려있는 복도를 걸으며 대충 어디서 먹이면 되나 주위를 살피고 있을 때 이윽고 자신의 뒤를 따라붙는 묵직한 발소리가 있었다. 누가 보면 스토커인 줄 알만큼 그답지 않게 성급한 걸음이었다. 뒤늦게 뻗어져온 손이 제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조금 날카로워진 음성이 흘러나온 건 이 뒤였다. “대체 그대가 왜, 여깄습니까.” “공녀님이 초대해줘서 그냥 한번 와봤어.” 몇 번 거절했는데도 오라고해서 결국 오게 됐다고 말하면 언니의 입장이 난처해지니 렐리아는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답했다. 그에 이상하게도 그의 태도가 누그러지는 걸 렐리아는 보았다. 그 날카로움은 자신에게 향해있던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 공녀…. 대체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줄 알고 그대가 참석한단 말입니까. 지금이라도 돌아가십시오.” “너무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마. 그리고 나도 곧 갈 거니까 너무 재촉하지도 말고.” “알겠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찍 돌아가십시오.” 생각보다 그가 저를 몰아붙이지 않아 렐리아는 많이 의외라 생각했다. 다짜고짜 가버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는 앞장서서 저를 어딘가로 이끌기까지 하고 있으니 역시 초코의 효과가 대단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렐리아는 그를 따라가 어느 객실 안에 안내되었다. 최상급 객실답게 침대며 소파며 와인진열장, 심지어 욕실까지 두루 갖춘 공간이었다. 공작인 그에게 물어보니 중간에 휴식 겸 개인시간을 보낼 수 있게 중앙귀족에게만 따로 지급되는 객실이라고 했다. 준귀족에겐 없다고 하니 귀족들 사이에서도 신분차이가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작품제목은 초코랜드야.” 렐리아는 테이블에 그와 나란히 마주보고 앉아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블리어는 그토록 맛보고 싶어 했던 초코 묻은 과일을 포크로 찔러 묵묵히 입에 가져갔다. “어때, 내 작품은?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나오남?” “십 점 만점에 칠 점 주겠습니다.” “뭐야, 기껏 가져다줬더니만. 이거 데코레이션 내가 한 거야. 잘 보라고.” 초코를 얼마나 섬세하게 묻혔는지 주목해달라며 렐리아는 손끝으로 가리켰으나 그는 무시한 채 맛만 계속 보았다. ‘그래도 계속 먹는 거보니 맛있나보네.’ 한 거라곤 초코퐁듀 속에 집어넣었다 뺐다 한 것밖에 없지만 렐리아는 속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그러다 반대편에 앉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청록색으로 보일 만큼 짙어진 눈 위로 별안간 작은 이채가 떠올랐다. “그댄 왜 안 먹습니까.” “아까 많이 먹었어. 공작이나 많이 드셔~” 웬일로 권유를 다 하지, 수상쩍은 눈으로 쳐다보며 렐리아는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없던 정나미도 떨어져나갈 것 같은 이 냉랭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어도 이제 편안한 기분밖에 안 든다. 참 적응이란 무섭구나 싶었다. 이젠 대화도 서로 편하게 하는지라 렐리아는 주저 않고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근데 공작, 사람이 말이야. 먹고 싶은 게 눈앞에 있으면 좀 집어먹을 수도 있고, 뭐 그런 거잖아?” “짐승입니까. 그런 기본적인 욕구조차 조절하지 못하고 행동부터 옮기다니 천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나왔네요. 그놈의 천박하다. 이거 완전 유행어야 뭐야.” 렐리아는 그를 아예 놀릴 속셈으로 이기죽거렸다. 뒤늦게 뻗어져온 그의 손이 그 얄미운 입술에 초코 묻은 빵을 쑤셔 넣어줘서야 잠시 조용해졌다. 말없이 빵을 우물거리며 씹다가 렐리아는 꿀꺽 삼키고서 또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원래 막 간섭하고 잔소리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남한테 그럴 입장도 못 되지만. 근데 공작. 공작은 가만 보면 사소한 것까지 완벽하게 신경쓰느라 정작 중요한 걸 놓치는 것 같다고 해야 되나, 암튼 그래.” “뭐가 그렇다는 건지 똑바로 말하십시오.” “남 신경 쓰느라 자기가 좋아하는 걸 눈앞에 두고도 등 돌리는 건 아니란 거지. 남한테 피해만 안가면 되는 거 아닌감? 남이 좀 보면 어때, 내가 즐거우면 됐지. 눈치보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라는 책제목도 있잖아?” 물론 안 읽어봤지만. 렐리아는 덧붙이지 않고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좀 깨닫는 게 있지 않느냐는 눈으로 재촉까지 해봤으나 블리어는 그저 무심한 반응뿐이었다. 결국 복장 터지는 건 렐리아라 그녀는 눈에 불을 킨 채 달려들었다. “공작은 예민한 게 문제가 아니라 남의 눈에 어떻게 비춰질지 너무 생각하느라 행동을 못하는 것 같아. 근데 정말 인생 대충 살아도 된다니까? 내가 그 살아있는 증거잖아?” “그것 참 자랑입니다.” “물론 너무 대충 살아도 안 되지만 가끔은 남 신경쓰지 말고 살아도 봐. 인생 좀 즐기라고! 진짜 보는 내가 답답해서 그래.” 렐리아는 과장스럽게 명치부근을 두들겼다. 정말 뭐라도 막혀있던 것 같았는데 이렇게 속 시원하게 털어놓으니 약간 숨이 트였다. “내 말 조금은 이해됐지? 이해됐다고 말해주라, 공작.” “어느 정도는 알겠습니다.” “어, 정말?” 자신의 문제에 대해 깨달은 것만으로도 어디냐 싶었다. 렐리아는 한 명의 꽉 막힌 답답이를 구제한 것이 꽤 흡족한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제발 그가 남 눈치 안보고 단 걸 먹는 날이 오기를. 솔직히 남이 보기엔 별 거 아닌데 그 혼자서 끙끙대는 게 안타깝기만 했다. “나도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공작도 나한테 쌓인 거 있었어? 말해.” 대수롭지 않게 렐리아는 턱을 괴고서 얘기했다. 그가 어떤 불만을 털어놓을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찔리는 게 많다보니 또 잔소리폭격이 이어지겠구나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블리어는 고요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나만이 그대에게 모든 걸 솔직하게 드러내놓은 느낌입니다. 내 사생활의 자유도 침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흠 그래서? 앞으로 찾아오지 말란 거야?” “그대도 날 속이려고만 하지 마십시오.” 솔직하게 구는 건 기대도 하지 않지만 적어도 저를 상대로 거짓만은 말아달라고 그는 잠잠히 얘기했다. 그 말에 렐리아는 청렴하다는 양 턱을 괸 자세를 풀고 두 손을 들어보였다. “안 해. 나 공작한텐 숨기는 거 없어. 의심되면 내 방 뒤져봐도 돼.” “그렇게 말하니, 그걸로 됐습니다.” 제법 신뢰가 깔린 말이었다. * 작품 초코랜드가 검은 초콜릿흔적만 남은 폐허도시로 변하자 렐리아는 빈 접시를 들고 객실을 나섰다. 다 먹을 줄은 몰랐는데 깨끗하게 해치웠다. 공작인 그와 함께 회장 안으로 들어가면 어떤 식으로 오해받을 게 뻔한 지라 렐리아 먼저 무도회장안으로 들어섰다. 근처에 지나가던 왕실시종에서 빈 접시를 건네주고서 다시 다이아나가 있을 곳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렐리아는 어느 구석에 무리지어 있는 여인들에 잠시 눈이 갔다. 하나같이 끝내주는 미인이라 예쁜 언니들이구나 싶을 때 그 사이로 잠시 익숙한 얼굴이 드러났다. 잘못 봤나 싶어 제자리에 멈춰 서서 다시 힐끗 응시하니 역시나 선명한 적발의 여인이었다. “아럼프?” 여인들에게 둘러싸여있던 남복차림의 그녀가 이윽고 제 목소리를 들었는지 여인들 사이로 고갤 내밀었다. 렐리아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진 않았다. 자신도 학창시절 때 곧잘 여자친구들에게 둘러싸였던 한명이었으니 말이다. “진짜 맞네. 너도 여기 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 렐리아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나도 몰랐지.” 여기올 줄 알았으면 이런 모습 보이지 않는 거였는데, 아럼프는 완전히 여인들에게서 벗어나 아름답게 꾸민 모습의 렐리아에게 다가갔다. 은빛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리고 은하늘색 드레스차림을 하고 있는 여인은 세상에 단 한 송이만 피어있는 고결한 꽃을 연상케 했다. 기분 좋은 향기가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음 같이 오는 거였는데.” “그건 아니고.” 렐리아는 제게 들러붙듯이 다가온 아럼프의 허리를 콕콕 찌르며 물러서게 했다. 아럼프가 워낙 남자같이 하고 와서 은근히 오해할 만한 그림이 그려질 테다. 그녀와 함께 나란히 서서 언제 왔냐는 둥 간단한 얘기를 나누다가 렐리아는 슬금슬금 주위에서 흩어지는 여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미색이었으나 마치 자신을 피하는 모습들이었다. 뭐지? 하고 아럼프의 친구들을 바라볼 때 옆에 서있던 그녀가 제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쟤네는 신경 쓰지 마.” “친한 애들 아니야?” “아냐. 잠깐 얘기 좀 하자고 귀찮게 굴 길래.” 방금 만나 어울렸던 애들이라고 그녀는 둘러대고 있었으나, 그런 것치곤 아까 그녀의 손이 어떤 여자친구의 엉덩이에 머물러있던 걸 렐리아는 목격했었다. 친하지도 않은데 엉덩이를 만지남. 렐리아는 당최 알 수 없단 눈빛으로 제 친구를 쳐다보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난 아직 너한테 엉덩이는 허락하지 않을 거야.” “넌 내 엉덩이 때렸으면서 그러는 게 어딨어?” “그건 네가 너무 늦게 가니까 팡팡 두들겨준 거고. 아무리 친하더라도 엉덩이는 좀 고려해볼 사항이야.” 고등학교 삼년 친구들에게도 겨우 허락하는 엉덩이였다. 게다가 은근히 아럼프의 손은 남자처럼 커다래서 저게 제 엉덩이에 닿으면 상당히 기분 이상할 것 같았다. 렐리아는 그렇게 철벽같이 생각했으나 얼마안가 금방 편하게 풀어져 아럼프와 단 둘이 구석에서 얘길 나눴다. 0051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저런 춤추는 거 처음 봐.” 렐리아는 댄스플로어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백여 명의 남녀가 짝을 이뤄 춤을 추는 모습을 감상했다. 궁중악단의 감미로운 연주에 맞춰 스텝을 밟거나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빙글 도는 모습이 한 편의 뮤지컬을 연상시켰다. 눈을 떼지 못하는 렐리아의 모습에 아럼프는 그녀 앞에 비스듬히 기대서서 웃었다. “사교댄스는 처음이야?” “응.” “우리도 나가서 한번 춰볼래?” “지쳐. 그냥 여기 서서 떠들기나 하자.” 귀찮다며 렐리아가 벽에 등까지 붙이고서 심드렁히 말했다. 체력적으로 지치지는 않는데 왜 이렇게 자세가 불편한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높은 굽을 신어서 서있는 게 조금 고되었다. 아럼프와 만나 한 시간 넘게 수다를 떤 것 같았으나 아직은 헤어지긴 아쉬웠다. “앉아서 편하게 얘기하고 싶은데, 넌 객실 없어?” “시골사제한테 그런 게 있겠어?” “미안하다. 잠깐 널 과대평가했어.” 렐리아는 바람 빠지듯이 웃으며 먼 곳에 서있는 새카만 흑발사내를 응시했다. 단 걸 먹어서 그런지 아까보단 누그러진 표정인데다 음침한 구석에서 완전히 나와 있었다. 여전히 한자리에 붙박여있는 게 정적이기는 했지만 나름 활동적으로 변해있었다. 연로한 귀족과 잠시 얘길 나누거나 먼저 다가온 귀족여식을 정중하게 상대하기도 했다. ‘바빠 보이네.’ “나 구두 벗고 싶은데 편하게 둘만 있을 수 있는데 없남?” 렐리아는 어서 높은 굽을 벗어버리고만 싶었다. 객실이 딱이겠지만 공작에게 허락받지 않고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층갈래? 조금 춥긴 하겠지만 야외테라스에 지금쯤 사람 없을 텐데.” 아럼프의 말에 렐리아는 좋다며 경쾌하게 손가락까지 튕겼다. 콜 하고 외치기 무섭게 렐리아는 오른편에 있는 층계를 발견하고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무도장의 각 동편과 서편을 차지하고 있는 윤이 흐르는 대리석계단은 오르기 쉽게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었다. 서둘러 이층위로 올라선 렐리아는 계단 난간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층인데도 꽤 높이가 있어서 대형운동장처럼 드넓은 회장 안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확 트인 시야 속에서 유독 검은 머리를 찾는 건 식은 죽먹기였다. “저기 안쪽이야.” 아럼프는 빈 야외테라스를 찾아 렐리아의 손목을 쥐고 이끌었다. 렐리아는 공작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고 그녈 따라갔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뒤늦게 블리어는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았다. 계단 난간사이로 은빛머리칼의 끝이 살짝 스쳐지나간 걸 본 것 같았다. 저긴 왜 올라간 건가 하는 생각을 블리어가 하는 동안, 렐리아는 야외로 나와 편하게 테라스 벤치에 앉았다. 기다란 소파 째로 놓인 공간은 의외로 아늑했다. 난간 너머가 탁 트여있어 왕궁의 눈 덮인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별이 쏟아져 내릴 듯한 밤하늘이 장관처럼 펼쳐져있었다.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는 왠지 모를 편안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좀 추운 게 흠이라 <코로르비타의 귀걸이>와 패딩이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아 발 시려.” 구두를 벗어서 소파아래 내려둔 상태라 렐리아는 하얀 맨발을 드러낸 채였다. 무릎을 세워 앉은 채 렐리아는 발등을 두 손으로 문질렀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아럼프는 그저 잔잔히 웃을 뿐이었다. “정말 내가 편한가보네.” 갸름한 턱을 괸 채 아럼프는 밤하늘에 뜬 달보다도 가늘게 눈을 접어보였다. “너무 편해보여서 가끔 서운하기는 하지만.” “그럼 내가 너한테 내숭이라도 떨까?” 렐리아는 아럼프의 어깨에 살포시 머릴 기대며 눈을 깜빡거렸다. 애교랍시고 떠는 그 앙증맞은 행동에 아럼프는 살짝 고갤 숙여 콩하고 이마를 들이박았다. 하지만 렐리아는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너른 어깨에 옆머리를 묻고 그녈 올려다보았다. “난 네가 편해서 좋은데, 왠지 오래사귄 친구 같아. 성격도 잘 맞기도 하고.” “나도 네가 편하고 좋은 건 사실이야. 하지만 좋은 마음이 더 커.” 연애감정을 느끼고 있노라 솔직하게 얘기했으나 렐리아의 반응은 덤덤해보였다. 아럼프는 제 어깨를 내준 상태로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조금씩 지워지고 있을 때 렐리아는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한숨이야?” “답답해서. 어떡하면 좋을까 널.” “그냥 덮쳐.” 킥킥하고 작은 웃음소릴 내며 렐리아는 섹드립을 쳤다. 고딩 때나 했던 시답잖은 섹드립을 오랜만에 치니 기분이 색달랐다. “솔직히 이런 게 동성친구의 묘미 아니겠어? 난 이런 섹드립 받아주는 친구가 너무 좋더라. 나보다 더 하면 더 좋고.” “동성친구라니…?” 위에서 들려오는 껄끄러운 중저음은 조금 당혹감이 어린 듯했다. 여전히 몸을 아람프에게 기울인 채 그녈 올려다보자 그녀도 마찬가지로 저를 내려다보았다. 미소가 잘 어울리는 화려한 이목구비의 그녀답지 않게 약간은 굳은 얼굴이었다. “나 남잔데 무슨 소리야.” “너…, 아무리 농담이라고 해도 자학은 하지 마.” 렐리아는 알고 있었다. 아럼프는 설부화용이란 말이 어울릴 만큼 상당히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미인이지만 동시에 크나큰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절벽처럼 밋밋한 가슴을 가리기 위해서 일부러 품이 넉넉한 사제복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가슴 좀 없으면 어때.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어떤 놈이 가슴 작다고 뭐라 그러면 네 고추크기나 보고 말하라고 해.” 친구가 AA컵이든 AAA컵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렐리아는 사실 그녀의 절벽가슴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말 대신 아럼프의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그 위로의 손길을 말없이 받아주고 있던 아럼프는 코가 막히고 기가 막힌다는 듯 낮은 실소를 흘렸다. “…정말 널 어쩌면 좋을까.” 아럼프는 한숨 대신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갔다. 이제껏 그녀의 모호한 태도도, 스킨십도, 말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진 사람처럼 얄팍한 입술선을 따라 검지를 움직였다. 붉은 입술을 훑던 긴 손가락이 이윽고 렐리아를 향해 뻗어져왔다. “렐리아, 네가 한말 책임질 수 있어?” “응?”하며 고갤 들어 올리는 여인의 얇은 턱을 붙잡고서 아럼프는 느릿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냥 덮치라는 말.” 휘어진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며 아럼프는 고갤 숙였다. 작은 얼굴에 제 얼굴을 묻을 것처럼 깊게 입술을 갖다 대었다. 촉촉하게 스며들 듯이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느껴지자 그는 여유롭게 손을 움직여 무릎위에 얹어진 렐리아의 왼손을 붙잡았다. “…….” 렐리아는 갑작스런 사태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 멍을 때릴 뿐이었다. 커다란 손이 제 손등을 덮고서 어디로 가져가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저 눈앞에 흘러내려와 있는 붉은 실 같은 머리칼을 보며 멍만 때릴 뿐이었다. 그녀의 손은 벌어진 연미복의 겉옷 사이로 드러난 잿빛조끼 위에 얹어져있었다. 판판한 사내가슴팍을 직접 확인해보란 듯이 그는 그녀의 손을 움직여 억지로 더듬게 했다. 수 초간 그 작은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다가 아럼프는 그저 대고만 있던 입술을 가볍게 떼어냈다. “아직도 내가 여자 같아?” “…….” 빙글거리며 물어오는 질문에 렐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방금 자신이 레즈키스를 당한 건가, 아니 그녀는 남자였던 건가, 아럼프의 가슴이 단단했던가, 해일처럼 밀려든 믿기 힘든 사실들에 그녀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어지는 그녀의 긴 침묵이 의심에서 비롯된다고 받아들인 아럼프는 그대로 렐리아의 가녀린 몸뚱이를 소파위에 무너뜨렸다. “못 믿겠으면 아래도 확인해볼래?” 어느새 그녀위에 자리 잡은 아럼프는 여유롭게 웃으며 어질러진 은실 같은 머리칼을 한손으로 정리해주었다. 길지만 좁은 소파위에 서로 엉켜있는 것처럼 야릇한 자세를 유지하고선 애무라도 하듯 다정하기 짝이 없는 손길을 구사했다. 이윽고 렐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린 얼굴을 했다. 크게 떠진 눈엔 당혹감이 가득 어려 있었다. “잠깐, 나 일어날…” 그 순간 벌어진 입술을 수월하게 가르고 들어온 붉은 혀가 있었다. 이번엔 확실히 빼지 못하게 아럼프는 그녀 입을 막고 어깨를 눌렀다. 아까와는 달리 진하고 긴 키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 렐리아는 충격과 혼돈에 빠져 방황하다가 자꾸 입속에서 꿈틀거리는 생소한 것에 경계심이 확 들었다. 혀가 부딪히는 순간 서로의 작은 돌기들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미끌거리고 온기가 있고 꿈틀거리고, 마치 살아있는 외계생명체를 입안에 받아들인 것 같은 생경한 체험이었다. 생애 첫키스였기에 어설프고 불편하고 계속 이상한 느낌만 들었다. 키스가 원래 이런 느낌이 드는 거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으면서도 내 몸도 아닌데 첫키스는 아니지 않나, 하는 덤덤한 생각이 뒤이어 들었다. 렐리아는 그를 밀어내기 위해 슬며시 두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 닿은 단단한 가슴팍에 괜히 꺼려지고 징그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했다. 힘을 줘 밀어내려는 순간, 멀지 않은 곳에서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망했다…’ 모르는 사람한테 이런 추잡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렐리아는 황급히 아럼프를 밀어냈다. 작은 혀를 탐닉하던 혀가 물러나고 타액으로 범벅된 서로의 입술이 떨어졌다. 공공장소에서 하려고한 무개념 커플로 찍혔겠구나, 하는 암담한 심정으로 렐리아는 천천히 문 쪽으로 고갤 돌렸다. 열린 문 너머에 서있는 자는 상당히 낯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감정 없이 서느런 표정에, 마찬가지로 감흥 없이 가라앉은 녹안은 야외에 나와 있어서 그런지 어두웠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만 아니었다면 렐리아는 하마터면 ‘공작?!’ 하고 소릴 지를 뻔 했다. 하필이면 공작이라니, 차라리 모르는 사람에게 보이는 게 천배는 더 나았다. 그녀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그는 테라스 입구에서 비스듬히 등을 돌려 완전히 문을 닫아버렸다. 괜히 발끝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태도였다. 이제까지의 관계가 단절된 기분이었다. 껄끄러운 기분에 렐리아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해명하기위해 그를 쫓아나가려 할 때 뒤에서 뻗어져온 커다란 손이 제 손목을 세게 그러쥐었다. “렐리아. 방금 일은…,” “놔봐.” 렐리아는 내치진 않고 덤덤히 한마디 했다. 그에 아럼프는 강제적으로 굴지 않고 순순히 손을 떼었다. “다음에 얘기해.” 여러모로 신선한 충격을 선사해준 친구였지만 결국 정 때문에 렐리아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물론 다음에 볼 땐 웃고 떠드는 친한 친구로서 볼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렐리아는 바로 야외테라스를 벗어나 근처 복도를 내달렸다. 얼마나 뛰었을까 멀지 않은 곳에 그가 보였다. 가지런하게 정리된 짧은 흑발, 어깨에서부터 날렵하게 떨어지는 검은 연미복 차림의 남자. 그의 옆으로 빠르게 뛰어가기 무섭게 렐리아는 그의 팔등을 붙잡았다. “공작. 내가 설명할 테니까…,” 잠깐 멈춰보라고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가 팔을 들어 제 손을 떨쳐냈다. “날 속이니 재밌습니까.” 그다지 높낮이가 없는 음성은 무덤덤하기만 했다. 0052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블리어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 눈엔 얕은 배신감이 깔려있었다. “공작인 나를 이리도 기만한 자는 아마 그대가 처음일 겁니다.” 이제껏 사제에 대해 조금은 수상쩍게 여겼던 그였다. 매일같이 공작저를 드나들면서도 금액에는 조금의 변동도 없었다. 사제란 대부분이 돈에 환장한 속물적인 족속들이기에 추가로 붙는 출장비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벌써 삼주가 넘었음에도 아직까지도 치료할 정도의 수준인건지 의심이 갔다. 그런 것치곤 너무 멀쩡하게 싸돌아다니는 여인 때문에 언제한번 사제를 따로 불러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물론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 둘의 관계를 알아버렸다지만. “그대가 어떤 여자인지 애초부터 알고 있었으니 이젠 그러려니 합니다. 여사제를 불렀건만 어째서 남성이 온건 진 몰라도, 이제껏 둘이서 작당하고 날 속여 저택 내에서 그런 짓을 해왔던 겁니까? 뒤통수도 참 가지가지 칩니다.” 블리어는 비릿한 조소를 내걸었다. 제겐 숨기는 게 없다고 당당하게 외치던 그 뻔뻔한 얼굴이 얄밉기 그지없었다. 제 가문에 얹혀사는 주제에 어떤 식으로든 남자를 방으로 불러들이는 이 여자가 참 우습지도 않았다. “환장하겠네. 진짜 몰랐다고…남자인거,” “남자인 걸 몰랐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네가 여자라고 했잖아! 여사제라서 믿은 건데!!” 공작말만 신뢰했더니 결과가 이 지랄이었다. 렐리아는 절로 구겨진 표정을 필 생각도 않고 주먹만 쥐었다. “그대는 여자와도 그런 짓을 합니까.” “아씨…이건 내가 지금 설명한다고 하잖아.” “그대가 뭘 하든 신경 안 씁니다. 그러니 굳이 그렇게 변명할 필요 없습니다. 믿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이 기회에 번듯한 사제라도 잡으면 그대는 출세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허나 내 저택 안에서 그런 더러운 짓을 일삼지는 말아주십시오. 그 정돈 지킬 수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렐리아는 어쩐지 가슴속이 싸늘해지는 기분만 들었다. 내가 왜 이딴 소리를 듣고 있어야 되지? 렐리아는 진심으로 우스워졌다. “차라리 독설을 하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게 더 상처받거든?” 그녀는 잠시 멈춰 섰다. 반대로 블리어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떼고 앞으로 나아갔다. “상처받으라고 한 말아닙니다. 반성하라고 한 말입니다.” 어느새 멀찍한 곳에서 저 홀로 걷는 흑발사내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렐리아는 “멈춰!”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한적한 복도에서 메아리처럼 울리는 외침에도 공작은 뒤돌아보기는커녕 멈춰 서지도 않고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뒤늦게 렐리아는 그와 자신의 벌어진 간극을 메우기 위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마지막엔 거의 뛰다시피 해 계단을 내려가려는 그를 간신히 붙잡을 수 있었다. 블리어는 계단난간 바로 앞에 멈춰 서서 제 팔을 힘 꽉 주고서 잡고 있는 여잘 내려다보았다. 무슨 여자가 이리도 손힘이 센 가 싶었다. “무슨 변명이 하고 싶은 진 몰라도 나는 더 이상 할 말 없습니다.” “…그래 시밤 내가 잘못했다. 내가 처음부터 너한테 그런 짓을 해서 네가 날 그런 식으로 본다는 거 알아. 안다고. 그래, 따지고 보면 마음 급했던 내 잘못이지. 근데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좀 믿어주면 안되냐. 오해라고 하잖아, 설명한다고 하잖아….” 렐리아는 속사포처럼 제 속을 털어놓았다. 그런데도 말끝은 축축 늘어지고 목소리는 늪에 빨려가듯 잠겨들었다. 어느새 중얼거리듯 낮아진 목소리로 렐리아는 운을 뗐다. “나 내 친구가 남잔 것도 오늘처음 알았고, 그것도 방금 나한테 뽀뽀해서 알았다고.” 혼란해죽겠는데 이곳에서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놈은 그걸 가중시키기만 하고, 믿어주지도 않았다. 그리고 믿어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꿋꿋이 말하는 자신은 어리석기만 했다. 렐리아는 고갤 푹 숙였다. 하지만 입을 멈출 수 없었다. “시밤…네가 여사제라고 해놓고선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고 난리야. 나 너 안 속였다고. 내가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너한테 초코랜드를 먹였는지…” “나도 무슨 호사를 누리겠다고 그대 같은 여인을 받아들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당장 내쫓지 않는 걸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그 차디찬 말에 렐리아는 숙이고 있던 고갤 들어올렸다. 일그러진 건지 웃고 있는지 모를 표정이 떠올라있었다. “야…너는 내가 강간당하고 있어도 내가 그 남자 꼬셨다고 생각할 놈이잖아…내 말 틀려?” “…그 경우와는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달라. 똑같은데?” 피식 하고 입은 절로 웃고 있으면서도 눈은 딱딱하게 굳어있는 기분이다. 그녀가 차분해지자 되레 흥분한 쪽은 블리어였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나는…,” 블리어는 제 팔을 놓는 여인을 다시 붙잡기 위해 한발 내딛으려했다. 그러다 들어 올린 그의 팔꿈치가 옆에 있던 장식용 도자기를 툭 쳐버렸다. 난간 위에 놓여있던 묵직한 도자기가 흔들리며 기울어졌다. 이윽고 난간 아래층에 서있는 사람머리 위로 떨어지려하자 블리어는 반사적으로 붙잡기 위해 팔을 뻗었다. “……!” 그러나 하필이면 그의 발이 계단 끄트머리를 밟으면서 몸 중심이 아래로 쏠렸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던 검은 머리칼이 높은 허공에서 짧게 흩날렸다. 아찔한 높이에서 뒤로 굴러 떨어져 죽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렐리아는 순간적으로 눈을 의심하면서도 빠르게 그를 붙잡으려했다. 손만이 앞서서 마지막계단에 걸쳐져있던 그녀의 발은 자연스레 허공으로 떼어졌다. “공‥,” 쨍그랑, 묵직한 것이 깨진 큰 소음과 소란스러운 웅성거림이 생생하게 그의 귀로 흘러들어왔다. 블리어는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포근한 것이 저의 머리를 끌어당기고, 뒤통수를 보호하듯 끌어안았다. 바로 엄청난 충격이 강타해져 정신이 어질했으나 생각보다 덜한 고통이었다. 무언가가 대신 충격을 막아주고 있으니 당연했다. 저보다 큰 남성을 어떻게 다 끌어안을 수가 없어서 렐리아는 중요한 머리와 등만 꽉 안아 보호했다. 겹쳐진 두 사람의 몸은 완만한 경사의 계단위에서 옆으로 끊임없이 굴러 내려갔다. 처음에 렐리아가 대각선 방향으로 몸을 틀어 모든 충격이 제게로 오게끔 하지 않았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블리어가 즉사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렐리아는 계단의 맨 아래층까지 그를 안고 굴러 내려와 벽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일반인이었다면 머리가 깨지고도 남았을 테지만 렐리아는 멀쩡하기만 했다. 오히려 벽이 부서지지 않았을까 걱정만 들 뿐이다. “……윽.” 블리어는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매타작이라도 당한 것처럼 욱신거린다고 여겼다. 여러 번 계단 모서리에 등이 찍힌 탓에 척추가 울리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그는 상황파악조차 않고 무언가의 위에 누워만 있었다. 비교적 부드럽고 작고 따스한 그것이 무언인지 파악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위에서 울리는 크나큰 웅성거림에 블리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왼쪽손목이 특히나 욱신거려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어야만 했다. 그리고 제 손바닥이 놓인 곳 옆에 자리한 하얀 얼굴이 보였다. 죽은 것처럼 고요하게 눈만 감고 있는 여자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저를 감쌌던 그 작고 따뜻한 온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순간 블리어는 입에서 쉰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싸하게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놀라서인지, 당혹해서인지, 목이 조금 메여옴에 평소의 목소리 톤과는 전혀 다른 비교적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렐리아.” 껄끄러운 기분으로 그 이름을 불렀으나 여자는 미동조차 않았다. 블리어는 불편한 왼손으로 그녀머리를 감싸고 급히 목가에 맥을 짚었다. 다행히 살아있었다. “내 목소리 들립니까. 렐리아.” “…….” “…정신 차려보십시오. 어서." 한동안 여인의 이름을 부르던 그는 황급히 몸을 굽혀 그녈 안아들었다. 왼손과 팔근육이 심하게 욱신거렸으나 서둘러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고갤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웅성거리는 소음이 계속 어디에서 나나 싶더니 이미 자신의 주위로 수많은 인파가 몰려든 상태였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수백 명의 시선들이 자신과 제 품에 안겨있는 여인을 따갑도록 훑어대고 있었다. 아주 노골적이고 뚫어져라 꽂혀지는 시선에 블리어는 단시간에 굳어버린 진흙처럼 딱딱하게 두 다리가 굳었다. 모든 이들이 저와 여인의 관계를 추측하고 있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온갖 추문으로 휩싸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상황이었다. 뒤늦게 깨진 도자기로 인해 화급히 달려온 왕실기사들은 피해자가 없는지 살피다가 그 주변에서 라콘드 공작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왔다. 그리고 공작의 품에 안겨있는 은발여인을 피해자라 여기고 넘겨받기 위해 팔을 뻗었다. “공작전하, 뒷일은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서둘러 의원에게…,” “됐습니다. …내가 안고 가겠습니다.” 블리어는 그제야 굳어있던 두 다리를 기계적으로 성큼성큼 움직였다. 기사들을 지나쳐 직접 걸음을 옮긴 그는 여기저기서 따갑게 꽂히는 시선들과 비로소 마주했다. 하지만 아랑곳 않는 척 무표정을 고수했다. 그저 묵묵히 인파속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 렐리아는 왕궁객실에 누워있었다. 정신이 말똥말똥했지만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조용한 방안에는 한 남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왕실의원이 찾아와 진찰을 할 때 자신이 깨어있는 걸 알아차릴까봐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의원은 눈에 띄는 외상은 없지만 뇌손상이나 심각한 후유증이 찾아올 수 있다는 말로 넘어갔다. 대신 경상인 공작을 치료했는데 듣기론 왼손을 접질려 일주일간은 부목을 대야한다고 했다. 그 뒤로 체감상 한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의원이 나갈 때 같이 나가겠거니 싶었으나 그는 근처에 앉아서 뭘 하는지 꼼짝도 안했다. 아무런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아서 괜히 더 저가 숨이 막혔다. 불편해서 몸을 뒤척이고 싶은데 정신이 든 티가 날까 그럴 수도 없었다. 예리한 그의 눈을 속일 자신이 없는 탓이다. ‘아…불편해. 그냥 지금 정신이 든 척 할까.’ 속으론 그렇게 구시렁거려도 렐리아는 자기 옆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공작을 새삼 다시 보고 있었다. 동시에 그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약간의 호기심도 생겨났다. 하지만 체감 상 두 시간이 지나간 것 같자 이젠 슬슬 한계가 왔다. 잠도 오지 않고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으, 음.” 렐리아는 지금 막 정신이 든 척 얕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이마저도 그에게 어설프게 들릴까 상당히 신경을 기울여야만 했다. 그 소리에 그제야 옆에서 두 시간 가량 돌처럼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움직이며 소리를 냈다. 렐리아는 힘겹게 눈을 뜨는 척 파르르 눈썹까지 떨어야만 했다. 돌아가면 연기학원을 더 다녀서 실력파 배우로 자리매김해볼까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여긴 어디……” 0053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객실입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온몸이 쑤시고 아파…” 끙끙거리는 목소리로 렐리아는 대답했다. 그에 블리어는 한숨대신 차분함이 한층 짙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누군지 기억은 납니까.” “…나는 대체…누구지?” “머리는 멀쩡해서 다행입니다.” “이런 안 속네.” 렐리아는 키득거리는 대신 입술을 살짝 끌어올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진녹안과 그 주변 눈가가 칙칙하게 물들어있었다. 많이 피로해 보이는 그 얼굴에 대고 차마 눈치 없이 웃을 수가 없었다. 잠시 조용한 침묵이 깔리자 렐리아는 천장을 한번 올려다보았다가 침대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블리어를 힐끗 응시했다. “근데 언제부터 와있었어?” “방금 왔습니다.” “흐음 그래?” 모른 척 렐리아는 가볍게 넘어가며 눈을 굴렸다. 그러다 침대시트에 살짝 얹어져있는 그의 왼손이 보였다. 흰 붕대를 감아놓은 것뿐인데도 훤칠하던 사내가 왜 이렇게 없어 보이는지 모르겠다. “공작 깁스했네. 손 괜찮아?”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형용할 수 없는 음습한 녹안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나오려는 말을 애써 집어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던 그가 마른입술을 뗀 건 조금 뒤였다. “…왜 그랬습니까.” 낮고 기운 없는 목소리가 그의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피곤해서 죽을 것 같지만 이것만은 물어봐야겠다는 의지라도 담긴 것 같았다. “대체 왜 그런 겁니까. 혹여 라도 잘못되기라도 했으면 어쩌려고,” “공작도 나 때문에 한겨울에 강에 뛰어든 적 있잖아. 그때 일이랑 쌤쌤으로 쳐.” “…….” “그리고 둘 다 무사하면 된 거지. 이미 지나간 일 돌이켜봐야 뭐해.” 렐리아는 말장난이라도 하듯 가벼운 어조였으나 블리어는 전혀 아니었다. 더 묻고 싶은 말이 있으나 진지하게 대답해줄 것 같지 않자 마지못해 참아 넘기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렐리아는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근데 공작이야말로 왜 그랬어?” 심드렁하게 묻는 것치곤 눈매를 접어서 그런지 진지한 표정이었다. 답지 않게 구는 여인을 내려다보던 블리어의 입에서 조금 떨떠름한 음성이 튀어나온 건 바로 그 뒤였다. “정신, 있었습니까.” “잠깐은.” 렐리아는 동그랗게 눈을 떠 그를 올려다보았다. 휘우듬하게 엇갈린 시선 끝에는 저의 눈을 피해 내리깔아진 녹안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당하질 못한 게 지금 생각해도 후회되나보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나서 차마 멀쩡하게 눈을 뜨기 뭐해 기절한 척해있을 때, 솔직히 기겁하는 줄 알았다. 처음으로 제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고 심지어 남들 보는 앞에서 직접 안고가기까지 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기절한 척하고 있던 렐리아가 더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이제껏 저를 숨겼던 수고는 다 잊어먹은 모양인건가 싶었다. 유명연예인과 일반인이 다정하게 얘길 나눠도 다음날 아침이면 일반인의 신상이 털릴 지경인데 이곳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오히려 혈안이 되어 저의 정체를 알아내려할지 몰랐다. 내일이면 라콘드 공작과 은발여자에 대한 잡다한 낭설들이 수도에 파다하게 퍼질 테다. 특히 여자들의 입에 오르고 올라 한동안 사교계가 시끄러워질 지도 모를 일이었다. 렐리아는 퍽퍽한 한숨만 내쉬었다. 저 딴에는 관계한번으로 깔끔하게 그의 인생에서 사라져주려고 했더니만 그 스스로 자기발목을 붙잡은 셈이었다. “공작. 암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인 척 했었어야지.” “나 때문에 다친 사람을 두고 그 자릴 떠났어야 됐다고 말하는 겁니까? 도덕적인 문제로 유명해졌을지 모르겠습니다.” “왜 또 까칠하대. 그냥 어쩌다 같이 굴러 떨어진 사람인척 기사한테 맡겼어야지. 왜 아는 척했냐고 내 말은.” 골치 아프게만 됐다고 구시렁거리면서도 렐리아는 힐끔 그의 표정을 살폈다. 뭔가 좀 깨달은 게 있나 싶었으나 그는 그다지 표정에 동요라곤 없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그가 모를 리 없을 테다. 허나 반응자체가 너무나도 무덤덤해서 렐리아는 되레 인상을 찌푸리게 됐다. “이미지 관리는 그렇게 열심히 해놓고 말이야. 지금 공작, 초코랜드 먹는 것보다 엄청난 흠집이 생긴 거라고.”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안되겠네, 안되겠어~ 결혼도 안한 남자가 젊은 여자를 집에 데려왔다고 이제 동네방네 소문 다 나겠네. 이를 어쩌면 좋남.” “목숨값으로 치겠습니다.” 정말 대단히도 각오를 다진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이마를 짚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애써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겠어? 나랑 이상한 소문 나돌아도.” “이걸로 빚 갚은 겁니다.” “나중에 내 탓하면 재미없는 거 알지?” “아마도 그대를 숨기는 건 더는 무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공작저에 숨어산다는 게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이 일의 파급력은 더 커질 겁니다. 올르아 공녀가 그대를 먼 사촌이라 속인 탓에 일이 조금 복잡해졌다는 겁니다.” “그러게. 복잡하네.” 공녀의 먼 사촌이 왜 굳이 라콘드 공작저에 숨어살까, 수상쩍은 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다. 예전에 두 사람사이에 혼담이 오갔다고 들었기에 괜히 저가 훼방꾼처럼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봤습니다만. 이미 공녀의 초대를 받아 사교계에 데뷔도 했으니 계속 그 거짓신분을 이용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러니 그대는 불건전하게 숨겨놓은 여자가 아닌 내 대외적인 애인으로서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겁니다. 아직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소문이 나지 않았다 둘러대면 되는 일입니다.” 술술 제 할 말을 논리정연하게 잇는 그를 올려다보며 렐리아는 잠시 멍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곱씹어본 후에야 그녀는 그의 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억, 하고 뒷목이 당겨오는 기분이 들었다. “애인행세를 하자고? 공작 미쳤어…?” “어차피 들킬 거 그런 식으로 먼저 발을 빼놓자 이겁니다. 공녀 쪽에선 안 그래도 내 약점을 잡고 있다 여기는 모양인데 뒤통수를 칠까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공녀와는 한 배를 탄 셈입니다.” “너 언니 왜 그렇게 싫어해.” “단순히 사감이 있다고만 해두겠습니다.” 단순히 가 아닌 것 같았지만 렐리아는 아무렴 어떠냐 하고 넘겨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언니였다. 자신이 애인행세를 하게 되면 왕에서 공작으로 갈아타려던 언니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게 아닌가. 이를 어쩌지 싶으면서도 렐리아는 일단 언니와 이 문제에 대해 얘길 나눠봐야겠다고 여겼다. “오 개월 뒤에는 깔끔하게 헤어졌다고 하면 아무 탈 없을 겁니다.” “잠깐 생각할 시간을 좀 줘.” “내일 안에는 결정지으십시오.” 정말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걸까. 그가 없었다면 렐리아는 침대시트에 여러 번 머릴 박았을 지도 몰랐다. 자신은 그냥 사랑만 얻고 조용히 이 세상을 뜰 생각인데 점점 판을 벌리는 기분이었다. ‘…아 그냥 집 가고 싶다.’ 그런 단순한 생각을 하는 동안 침대 옆에 있던 의자가 뒤로 끌리는 소리가 울렸다. 몸을 일으킨 공작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카만 머리가 흘러내린 무감정한 얼굴은 기가 막히게 무서운 데가 있었다. 마치 저세상으로 데려가기 위해 찾아온 저승사자처럼 안색한번 지독하게 창백했다. “혼자 걸을 수 있겠습니까.” “그건 왜?” “저택으로 돌아가야 될 거 아닙니까.” 벌써 새벽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아직까지도 밤 연회는 이어지고 있었으나 블리어는 한시 빨리 저택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 피곤했다. 하지만 그런 제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편하게 몸을 축 늘어뜨린 채 실없이 실실 웃고만 있었다. “아 무리~ 나 지금 온몸이 다 쑤셔서 꼼짝도 못하겠어. 그냥 오늘 하룻밤은 여기서 보내지 뭐.” “혼자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 블리어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지 쉽사리 발을 떼지 못했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던 렐리아는 한 손을 들어 올려 휘휘 저어댔다. “두고 가도 돼~” “…….” “신경 안 써~” 본인이 그렇다는데 굳이 신경 안 써도 될 테다. 블리어는 몸을 돌렸다. 가죽구두 앞코를 문 쪽을 향해 두는 순간 제 발목을 붙잡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근데~ 자고 있는데 웬 남자가 문 따고 들어와서 날 덮치려고 하면 어쩌지~ 뭐 아픈데 반항이나 할 수 있으려나.” “왕궁에 그런 파렴치한이 있겠습니까.” “혹시 모르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못 움직이는 여자라고 막 손 댈지.” 블리어의 시선이 따갑게 여인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희고 맑은 얼굴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걸 얘기하듯이 은은한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아 신경 쓰지 마~ 자는데 누가 내 몸을 조물락조물락 거려도 모른척하고 잘 테니까.” 능글맞은 척 굴어도 듣는 이로 하여금 괜히 더 신경 쓰이게 만드는 얄미운 말투가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도 렐리아는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입을 나불거렸다. 하나같이 ‘넌 나를 그런 여자로 보는데 그런 일 당해도 신경 쓰겠어?’하는 가시가 돋친 의미심장한 말들이었다. “자는데 누가 내 치마를 막 들춰도 그러려니~ 해야지.” “…….” “누가 막 내 가슴을…” “그만. …됐으니까 그만 말하십시오.” 이미 제 신경을 벅벅 긁어놓은 주제에 여자는 해맑게 ‘왜?’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엷은 은색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동그란 이마에 꿀밤이라도 먹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결국엔 또 그가 인내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불편한 왼손까지 동원해 블리어는 그녀를 코알라새끼처럼 등에 업고 나가야만 했다. 0054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회색 페인트가 칠해진 아파트 계단층을 올라가 2층에서 발걸음이 멈춘다. 202호라고 써진 노란 플라스틱패가 붙여진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신발장에는 이미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있다. 낡고 유행에 뒤처진 진갈색 남성화와 50대 아줌마가 주로 신고 다니는 운동화는 익숙했다. 신발장 옆에 붙어있는 전신거울과 그 옆에 튀어나온 흰 벽 너머에는 작은 거실이 있다. 그 반대편에는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아 식사할 수 있는 식탁이 있다. 애호박과 네모난 모두부, 잘게 썬 청양고추를 넣어 끓인 된장찌개와 증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갓 지은 밥, 세 쌍의 쇠숟가락과 젓가락, 갖가지 반찬들, 그리고 밥상을 사이에 두고 자리에 앉아계신 부모님. 얼큰하고 구수한 된장냄새가 집안에 진동을 한다. “저거저거, 딱 밥 먹을 때 되니까 기어들어오는 거봐. 얼른 가서 손 씻고 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의 엄마가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 맛보시고는 입을 여셨다. 아빠는 이미 두부와 밥을 비벼서 한술 크게 뜨시며 묵묵히 식사 중이시다. 저가 올 줄 어떻게 아셨는지 이미 자신의 자리에는 밥과 수저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앗싸, 오늘 된장찌개다.” 자리에 바로 앉아 숟가락부터 드니 바로 철썩하고 엄마의 등짝스매싱이 날아왔다. “기지배가 드럽게! 갔다 오면 손부터 씻으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 “아야. 근데 진미채 볶았어?” “네 아빠가 하도 먹고 싶다고 해서.” 아빠에게 잘하셨다는 의미로 엄지를 척 들어준 후 젓가락으로 빨간 진미채를 집어 든다. 매콤하면서도 뒤끝이 달콤한 게 딱 제 입맛이다. 엄마의 잔소리는 이미 물 흐르듯 자연스레 넘어간 후였다. 아니 넘겼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잔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좀 엄마아빠 저녁상 한번 차려줘봐라, 응? 어떻게 그 나이 먹도록 반찬하나 할 줄 몰라? 자취는 그렇게 해놓고선.” “나 생활력 제로인 거 엄마도 알잖아.” “그래 자랑이다, 자랑이야.” “아니~ 나도 끓여보긴 해봤는데 엄마가 끓여준 맛이 안 난단 말야.” 검은 뚝배기 안쪽 표면에 보글보글 맺혀있는 주홍색거품까지 거둬가듯 숟가락으로 크게 한술 뜬다. 흰 쌀밥위에 옮겨가 애호박이 뭉개질 정도로 슥삭슥삭 비빈다. 먹음직스런 밥숟갈 위에 새로 담근 배추김치를 올려놓고 한입 크게 벌려 욱여넣는다. 입천장이 조금 뜨거워서 앉은채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언제 먹어도 절로 감탄이 나오는 맛이다. 맛있어서 숟가락을 멈출 수가 없다. 바로 옆에서 엄마가 머그컵에 보리차를 한가득 따라 밀어주신다. “어디서 굶고 왔어, 왜 그렇게 허겁지겁이야? 체할라.” “안 뺏어먹는다.” 걱정 어린 눈으로 잔소리부터 하는 엄마와 한마디 툭 뱉는 아빠. 그리고 두 분의 애정 어린 시선 끝에 있는 자신. ‘아 뭔가 행복하다.’ 사소한 일상인데도 큰 행복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너무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건가. 이정도로 집밥이 그리웠던가. 가슴가득 들어차는 훈훈함에 미소가 절로 입가에 떠올랐다. 렐리아는 눈을 떴다. 새벽어스름이 가득 메운 방안은 찼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단번에 가르고 들어오는 차가움이었다. 잠이 덜 깬 부스스한 낯으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쩌억 입을 벌렸다. 이마저도 성의 없는 하품이 터져 나왔다. ‘뭐였더라…’ 거추장스런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이며 렐리아는 몽롱하게 생각에 잠겼다. 갑자기 생각하려니까 꿈 내용이 정확히 뭐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입가엔 여전히 진한 미소가 떠올라있었다. 그 여운마저도 따뜻하고, 다정하고, 그립고, 행복한 그런 꿈. ‘뭔가 굉장히 기분 좋은 꿈 꾼 것 같았는데…’ 가슴을 가득 메울 만큼 따스한 온기는 잠시간 가슴에 머물렀다 사라져버렸다. 그 커다란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박탈감은 가슴아래에서부터 천천히 스며들어왔다. 밀려드는 바닷물처럼 차고 시린 기분이었다. ‘…모르겠다, 잠이나 더 자야지.’ 렐리아는 그저 단꿈으로 치부하고서 넘어가버렸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두툼한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다시 길고 긴 잠에 빠져들었다. * “왜 이렇게 늦게 와.” 푸른 커튼과 황금색 티테이블, 색색의 여름을 옮겨놓은 것처럼 화려한 응접실에는 금발을 늘어뜨린 여인이 앉아있었다. 한참 기다렸다는 듯 그녀는 싱긋 웃다가 식은 차를 마저 들이켰다. 다이아나와 차마 당당히 눈을 마주할 수가 없어서 렐리아는 고갤 숙인 채 맞은편에 착석했다. 지금부터 언니에겐 석고대죄 해야 하는 입장인지라 일단 다소곳이 두 손을 무릎위에 올려두었다. 질 좋은 푹신한 소파에 앉았건만 엉덩이는 왜 이렇게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따끔한지 모르겠다. 한동안 렐리아가 말이 없자 다이아나도 조용히 빈 글라스에 홍차를 채울 뿐이다. 마치 말할 시간을 주듯이 느긋하게 차를 들이켜는 그 우미한 모습에 뒤늦게 렐리아는 푹 고갤 숙였다. “…미안해요, 언니. 비록 제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돼버렸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부터 해드릴…,” 마차를 타고 오는 내내 생각해두었던 말들을 줄줄이 읊을 때 테이블 위로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렐리아는 말을 멈추고 눈만 굴려 그것을 응시했다. 이상한 문자가 얇게 새겨진 네모난 은패였다. 이게 대체 뭐예요, 하고 소리 내지 않고 눈으로 조용히 묻자 별안간 맞은편에서 옅은 미풍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읽지 못하니?” “네.” “이런 큰일이네. 일단 귀화귀족이 되기 전에 공부부터 해야겠는걸.” “네?” “이프네 남작. 실제로 만들었어.” 웃음기가 스며든 그녀의 말에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아 렐리아는 아랫입술만 살짝 뗐다. 스스로도 멍하니 그녈 쳐다보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이어진 다이아나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빠르게 탐피아 제국에 신분을 만들려고 하다 보니 남작가의 성이 되어버렸지만. 괜찮지?” 그러니까 하루아침에 평민에서 귀족으로 인생역전 했다는 소리였다. 렐리아는 튀어나오려는 탄성을 막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세상에, 이 언니 뭐하는 언니지. “두 사람이 그런 애틋한 사이였다는 걸 알았다면 나도 그런 거래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어. 네가 리우스를 원하는 것 같기에 서로의 이익을 위해 거래를 청했을 뿐이야. 사랑하고 있는 연인을 갈라놓는 취미는 없으니 난 이제 손 뗄게.” “언니, 섭섭하게 무슨 그런 오해를.” 하지만 기뻐하는 것도 잠시였다. 급히 공작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며 사실무근이라고 구구절절 늘어놓았지만 언니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실망스런 기색을 드러내는 것이 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이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발뺌할 생각은 마.” “저기 언니?! 진짜 아니라니까요? 애인이라니, 어딜 봐서 그런 오해를 할 수 있어요!” “렐리아. 앙증맞게도 날 속이려드는 구나? 그 공작이 그럴 남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목소리 그만 높이고. 차 더 따라줄까?” 렐리아는 목 끝까지 끓어오르는 답답함에 절로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다이아나가 꿋꿋이 불신을 드러내자 점점 지쳐만 갔다. 푹 고갤 꺾었다가 렐리아는 스르륵 기가 죽은 얼굴을 들어올렸다. “언니…진짜 이러기예요? 정말 제 말 안 믿으실 거예요?” 서운함을 가득 담은 눈은 렐리아 답지 않게 초롱초롱하기까지 했다. 자길 잡아달라고 마지막까지 처연하게 매달리는 애인 같은 모습은 그 누가 봐도 생소하리라. 하지만 그 눈을 바로 맞은편에서 마주하고 있는 다이아나는 조금의 동요도 비추지 않았다. 그저 차 한 모금 들이켜고서 테이블위에 무언가를 또 올려놓을 뿐이었다. “그럼 이렇게 선물까지 준비한 내 입장이 뭐가 되겠니?” “?” “받아. 내가 주는 선물이야.” 은으로 된 신분패 옆에 나란히 놓아진 것은 다름 아닌 반지함이었다. 다이아나가 열어보라고 눈짓을 하자 렐리아는 힘없이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곧추세우고서 반지함을 조심히 들어올렸다. 달칵하고 벨벳뚜껑을 젖히자 얇은 백금의 광채가 흐르는 금반지가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을 녹여 만든 반지야.” “돈 급할 때 이거 팔아도…,” “팔면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줄 알아.” 다이아나는 갓 피어난 백합처럼 우아하고도 싱그럽게 웃었다. “농담~ 농담이었어요. 어쩜 살벌한 모습도 매력적이실깜, 우리 언니는.” 심드렁하게 한손으로 턱을 괬으나 렐리아의 입가엔 자연스레 환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선물에 대해 묻는단 것도 어느새 잊은 채였다. 헤벌쭉하게 벌어진 입술 아래로 침이 흘러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이었다. 그 기품 없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어도 다이아나는 흐트러짐 없는 곧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테두리가 은으로 세공된 찻잔받침대에 잔을 내려두며 다이아나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그건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물건을 축하선물로 준 거니까 잃어버릴 생각 마. 아무튼 두 사람이 잘되기를 바랄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얘기하고.” “언니 저 진짜,” “물론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서. 내가 받아줄 테니까.”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온 말은 따스하게 뺨을 훑고 가는 것처럼 다정했다. 올르아 공작가에서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는 말로 받아들인 렐리아는 액체화가 되기 일보직전이었다. 흐물흐물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에 다이아나는 기특한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 * 해질녘이 돼서야 공작저 후문으로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한 인영이 있었다. 도둑고양이 같은 걸음을 재촉해 방 앞까지 서둘러 도착한 인영은 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를 끌어내리며 문가에서 막 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그 몸으로 어딜 싸돌아다니다 이제 들어오는 겁니까.” 정확히 방 안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렐리아는 놀란 눈으로 그곳을 돌아보았다. 창가를 등지고 서있는 사내의 몸은 그림자 탓에 어둡게 물들어있었으나 듬직한 체격은 눈에 익었다. 0055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공작? 왜 여깄대?” 렐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응수하며 거무튀튀한 로브를 의자에 대충 걸어놓았다. 그에 조금 딱딱한 중저음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흘러나왔다. “내 저택인데 내가 어디에 있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래. 공작이 옷장 속에 있든 침대아래에 있든 내 상관할 바 아니겠지만,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야. 혹시 기다렸어?”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며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물었다. 맑은 물빛벽안이 저를 올려다보자 블리어는 피하지 않고 마주 바라봐주었다. 그 당돌하기 짝이 없는 뻔뻔한 낯이며 가냘픈 어깨며 마른 팔뚝이 훤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꼼짝 못한다더니 쌩쌩해 보입니다.” “아직도 여기저기 결리기는 한데 내가 젊잖아~” 의심을 피하기 위해 렐리아는 대충 손을 휘적거리며 둘러대었다. 그 건성으로 넘어가려는 태도에도 아랑곳 않고 블리어는 단호히 그녈 붙들었다. “대체 어디가 어떻게 결린다는 건지 최대한 상세하게 증세를 말하십시오. 내가 일일이 캐물어야합니까.” “그냥 여기저기 쑤셔.” “제대로 말하십시오. 그래야 주치의를 붙여주든 말든 할 거 아닙니까.” “주치의는 무슨. 가만히 놔두면 나을걸.” 어깨를 으쓱하며 렐리아는 자꾸 저를 붙들려는 그의 팔에서 벗어났다. 능글맞기 그지없는 대답에 블리어는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냈으나 그렇다고 권유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후유증이 몰아닥쳐 아프다고 징징거리기만 해봐라, 라고 말하듯 싸늘히 눈빛만 가라앉힐 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 블리어는 사뭇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나저나 어딜 갔다 온 겁니까.” “언니네. 안 그래도 공작에겐 할 말 있었어. 우리 소문 이미 수도에 쫙 퍼진 모양이야. 언니가 그러더라고.” “그 여자 반응은 어땠습니까.” “언니?” 픽, 하고 다소 허무함이 스며있는 웃음소리가 입새로 튀어나왔다. “그게 허무할 정도로 아무 반응이 없었어…오히려 철썩 같이 믿고 우릴 밀어준대. 하아.” 렐리아는 절망스럽게 머릴 헤집다가 슬쩍 고갤 들어 제 앞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있는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따지고 보면 다 이 남자 탓일 텐데 그는 마치 이 사건과는 아무 관계없는 제삼자처럼 굴고 있었다. 그 태도에 심히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아. 이게 다 누구 탓일감, 응?” 곧바로 눈을 부라리며 렐리아는 그의 멱살을 아주 가볍게 붙잡았다. 그제야 블리어는 눈을 내리깔며 비온 뒤의 찝찝함처럼 예민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렐리아도 막상막하로 앙칼지게 눈꼬리를 치올렸다. “진짜 내가 억울해서,” 여전히 멱살을 붙든 채 하소연을 늘여놓으려 할 때였다. 돌연 그가 한 발짝 다가서더니 몸이 닿을 정도로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머릴 숙여왔다. 그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리며 쥐고 있던 그의 멱살을 얼떨결에 놓아버렸다. 조금만 더 고갤 들어 올리면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 미미하게 찌푸려진 남자의 허연 얼굴이 내려와 있었다. 끝이 살짝 올라간 새카만 눈썹과 호기로운 이채를 띤 진녹안은 뭐 이런 게 다 있냐는 거만함이 흘렀다. 렐리아는 자존심상 물러서진 않고 삐딱하게 그와 눈을 맞췄다. “뭔데, 공작. 왜 공격적이게 얼굴을 들이밀고 난리야.” “내 멱살을 잡는 이 건방진 짓거리에 머리 좀 세게 들이박으려고 했습니다만. 문제 있습니까.” “공작이 무슨 황소야? 마음에 안 들면 들이박게?” “그대는 날이 갈수록 기어오르는 게 거미인가 봅니다.” 그 말에 렐리아는 그만 킥킥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딱딱한 남자가 방금 자신과 말장난을 친 건가 싶으니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허무하게도 웃겼다. 화를 내려고 해도 못 내겠다. “이젠 나랑 죽이 착착 맞는데?”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같은 취급 말아달라는 양 그가 차갑게 대꾸했지만 렐리아는 가볍게 양어깨만 으쓱했다. “그나저나 볼일은 이걸로 끝? 나 이제 쉬고 싶은데.” “대답 들으러온 겁니다. 내 제의를 받아들일지 말지 오늘 내로 답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거 얘기한다는 게 까먹었다. 받아들일게.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언니가 신분까지 만들어줬거든.” 품에서 도금이 된 신분패를 꺼내 공작에게 보여주자 그는 앞뒷면을 꼼꼼히 살피고선 제국에서 발행하는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얕볼 수 없는 여자라며 언니에 대한 뒷담을 진지하게 늘어놓다가 그는 다시 제게 신분패를 돌려주었다. “앞으로는 당당히 정문으로 드나들어도 됩니다. 그대는 오늘부로 라콘드 공작저에 머무르는 정객입니다. 처우가 달라진 만큼 그대도 지금보다 처신을 곱절로 잘해야 될 겁니다.” “아…괜히 한다고 했나보다.” 벌써부터 귀찮아지는 건 왜지, 렐리아는 몰려드는 피곤함을 억누르며 침대위에 편하게 걸터앉았다. 그녀가 흐트러지거나 말거나 블리어는 침대 근처에 서서 계속해서 제 말만 이어나갔다. “현재 머무르고 있는 방도 본관 중심부에 있는 객실로 새로 배정해주겠습니다.” “됐어. 집주인도 별관 구석에서 자는데 무슨 염치로. 뭐 옮기기 귀찮기도 하고.” 벌러덩 드러누워서 됐다며 손만 휘휘 저어대는 꼴을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잠시 말을 아꼈다. 사치란 온갖 사치는 다 누리려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얌전했다. 그가 생각해도 그녀는 별로 재물이나 명예, 신분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녀입장에선 게임 속에서 얻는 재물과 명예가 다 뭔 소용인가 싶을 뿐이라지만, 그의 입장에선 궁극적으로 그녀가 추구하는 게 뭔지 의문만 들뿐이다. “내일부터는 따로 교양수업을 진행할 테니 그리 아십시오.” “교양수업? 이름만 들어도 귀찮다 어휴.” “그대에겐 딱 맞는 수업이 될 겁니다.” 아무리 오 개월 동안 세워둘 허수아비 애인이라 해도 그의 사전엔 대충이란 단어는 없었다. 그 저급한 말투하며 방정맞은 태도를 고칠 수 있게 단단히 교육시킬 생각이었다. 그가 직접 선생질을 하려한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한 채 렐리아는 홱 몸을 뒤집어 그를 돌아보았다. “근데 공작. 나 부엌 같은 데도 써도 되려나?” “담당시녀에게 말하십시오. 데려다줄 겁니다. 헌데 요리를 할 줄 압니까.” “고럼~ 내가 자취생활 몇 년 째인데.” 턱 아래를 문지르며 은근한 자신감을 내비치는 렐리아를 버려두고 블리어는 걸음을 옮겼다. 할 말이 끝났으니 방을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묵묵히 움직여 막 문밖으로 나서려할 때 뒤에서 저를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 내일 점심스케줄 비워둬.” 뜻밖의 말에 블리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침대에 누워서 공작인 저를 개떡같이 배웅하고 있는 여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 “초코랜드 말하는 겁니까.” “그거 취향이었구나.” 렐리아는 인중을 슥슥 문지르며 아련하게 한마디 했다. 물론 곧바로 여상한 태도로 돌아와 그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그건 아니고 이곳에선 맛볼 수 없는 색다른 이색요리야. 기대해도 좋을 걸?” 큰소리를 떵떵 치는 모습이 썩 의심쩍기만 했으나 블리어는 한번 가볍게 머릴 끄덕여주었다. 어찌됐든 알겠다는 뜻이었다. * 점심때를 한 시간가량 지난 시간, 블리어는 공작저의 집무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늘 어김없이 열두시 정각에 점심을 먹는 그이지만 현재 그는 빈속이었다.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물밀 듯 밀려오는 서류 탓도 있지만 기실 그에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허기진 배를 숨긴 채 업무를 이어가고 있을 때 똑똑하고 문을 간결하게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밖에서 흘러나왔다. 블리어는 들어오라는 짤막한 허락의 말을 뱉은 뒤 업무에서 바로 시선을 뗐다. 드디어 이 여자가 왔나 싶었으나 집무실 안으로 들어온 자는 다름 아닌 집사였다. 고급스런 음식을 품고 있을 것 같은 은쟁반을 든 집사는 책상 앞까지 걸어와 그것의 뚜껑을 열었다. 신선한 야채와 햄, 참치로 속이 꽉 찬 샌드위치였다. “시장하실 것 같아 준비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가볍게라도 드십시오. 무작정 굶으시는 건 몸에 좋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블리어는 그것마저 물리고서 하다 만 일에 집중했다. 집사가 못내 염려스런 눈빛을 감추지 못하고서 물러나려할 때 돌연 무거운 목소리가 집무실 안을 낮게 울렸다. “렐리아는 돌아왔습니까.” 집사에게까지 감췄던 존재인지라 블리어는 식솔들 앞에서도 애인으로서 대우해야만 했다. 그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는 일도 그 중 하나였다. 집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깍듯이 대답하며 샌드위치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직도 안 돌아왔다라….’ 다시 넓은 집무실안에 외따로 남게 된 블리어는 애꿎은 깃펜만 세게 꽉 쥐었다. 서느런 기류가 흐르던 단정한 얼굴은 어느덧 구겨진 옷감처럼 미미한 주름이 새겨져있었다. 그가 이렇게 허기를 참아내는 이유는 오로지 오기 때문이었다. 과연 언제 오나 보자 하는 오기. 점심스케줄을 비워 놓으라던 인간은 정작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난 아직까지도 외출중이였다. 돌아오면 어떤 식으로든 바가지 긁어댈 속셈으로 그는 벼르고 벼른 채 업무에 집중했다. 한편 점심약속을 한 당사자는 수도의 시장 한복판을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느지막하게 아침을 맞이하고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외출준비를 하고 나오니 벌써 12시가 훌쩍 지나가 있었다. 허나 렐리아는 그다지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 까다롭다 못해 칼같이 냉철한 사내라면 약속시간을 일분 어긴 시점부터 바로 식사를 했을 테니 말이다. 무식하게 굶고 있진 않겠지 싶을 뿐이다. “다음은 푸줏간이죠?” 렐리아는 소피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수긍했다. 향신료가게와 채소가게, 디저트가게에서 구매한 짐을 양손에 바리바리 싸들고서 소피아만 믿고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정말 안 무거우세요…? 제가 좀 나눠들까요?” “이 정돈 거뜬해. 뼈밖에 없는 가녀린 애를 어떻게 시키겠어, 죄책감 들게.” “어…음 그치만 저보다 더 마르셨는걸요.” “아냐~ 의외로 숨겨진 살 많다? 팔뚝살이라든가 뱃살이라든가.” “헉 정말요?” 전혀 그래 보이지 않는다며 소피아가 동그랗게 눈을 뜬 채 깜빡였다. 그 순진한 반응에 렐리아는 스치듯 작게 말했다. “역시 닮았어.” “네?” “내 친구 중에도 너처럼 작고 귀여운 친구가 있는데 진짜 닮았어.” 귀엽다는 칭찬이 내포된 말에 소피아는 부끄러운 얼굴을 했다. 이런 말에 면역이 되어있지 않다보니 늘 그녀의 말에 새삼스럽게 반응하고 만다.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조금 허둥지둥되고 말았으나 소피아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저 있잖아요. 이제껏 쭉 물어보고 싶었는데요. 생일이 언제세요?” “응? 생일?” “제가 모시고 있는 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서…지금부터라도 하나하나 알아둘까 해서요.” 너무 도 넘은 질문이 아닌가싶어서 이제껏 몇 번이나 주저했으나 소피아는 용기를 냈다. 이대로 기본적인 정보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전속시녀 된 도리가 아니었다. 이젠 세간에 공개적으로 알려지신 분이 아닌가. 듣기론 귀화귀족 출신이라고 들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편하게 언니라고는 부를 수 없으나 여전히 저를 편하게 대해주시는 분인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일이 언제냐는 소피아의 물음에 여기 온지 얼마나 지났는지 일일이 셈하며 원래 날짜와 대입해야했기 때문이다. '아…벌써 이렇게 됐나.' 열 손가락까지 동원해서 셈해본 결과 원래세계에선 이틀 뒤가 생일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렐리아는 잠시간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생일이 겨울이기에 날짜와 가까워졌다는 건 알았지만 바로 코앞일 줄은 그녀로서도 몰랐다. 원래세계에서는 자신은 한 달간 행방불명 상태이거나 사망한 상태일 테다. 혹은 생일을 앞두고 빈사상태로 중환자실에 누워있을 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생일 안에는 못 돌아가겠지 싶으니 렐리아는 괜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실을 떠올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살인마가 뒤쫓아 오는 것처럼 조급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가슴이 무거웠다. 물론 곧바로 태연스럽게 ‘한 달 정도는 뭐.’하고 넘기며 렐리아는 옆에서 소심하게 제 눈치를 보는 소피아를 돌아보았다. “아, 미안미안. 다른 걸 생각하느라고. 내 생일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가까워지면 한 달 전에 얘기해줄게.” “아 네!” “그거 말고 더 알고 싶은 거 없어?”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넉넉하게 두 달 안에는 어떻게든 돌아가면 된다. 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소피아의 질문에 어울려주었다. 그동안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마지막 남은 주재료를 사기 위해 푸줏간에 들렀다. “어서 오십쇼.” 푸근한 인상의 푸줏간주인이 조금 놀란 눈을 했으나 곧 싹싹하게 인사해왔다. 생각보다 깔끔한 내부엔 육질이 좋아 보이는 돼지고기와 소고기 부위가 천장에 달린 쇠고리에 걸려있었다. 통통한 분홍소시지들도 허공에 줄처럼 길게 늘어져있었다. 렐리아는 그것들에게서 시선을 뗀 후 자기가 원하는 부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돼지 앞다리살이랑 요.” “네에.” “닭의 발 좀 잘라주세요.” 0056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오후 세 시경이 다 되어서야 렐리아는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미리 보여주지 않기 위해 동그란 은뚜껑에 덮어서 안으로 들어가자 대번에 분기어린 음성이 날아 들어왔다. “지금이 몇 시입니까.” 지금 이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작정하고 엄한 말투였다. 렐리아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 채 우측 벽에 걸려있는 고풍스런 벽시계를 힐끗 쳐다보았다. “세 시?” “약속한 시간은 몇 시입니까.” “미안.” 차마 면목이 없기에 렐리아는 솔직히 사과부터하고 봤다. 허나 블리어는 깁스한 왼손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불쾌한 감정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서릿발처럼 거친 기운이 어둡게 물든 진녹안 속에 자리했고 굳게 다물린 입술은 도저히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단단히 날이 선 얼굴로 그는 차갑게 렐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는데 다른 이가 보았다면 대경실색할 무시무시한 낯이었다. 허나 그런 그의 앞에서도 능청을 떨 수 있는 자가 렐리아였다. “혹시 굶었어? 에이 그럴 리가.” “…….” “음…진짜 굶었어?” 은쟁반을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렐리아는 그의 앞에 서서 턱을 긁적거렸다. 은근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그제야 블리어의 성난 얼굴도 조금은 풀어져만 갔다. 언제 기분 나쁜 티가 역력했냐는 듯 그는 직접 입을 열기까지 했다. 물론 며칠 굶은 짐승의 그르렁거림처럼 사나운 목소리였다. “그대가 점심을 약속해놓고선 안 먹었냐고 묻는 건 뭡니까. 당연히 안 먹었습니다.” “미안 공작. 나는 공작이 일분 넘기자마자 바로 먹었을 줄 알았어.” “그대와 같은 취급 마십시오. 나는 한번 한 약속은 지키는 성격입니다. 상대가 어긴다고 하더라도 내 쪽에서 어기는 일은 없습니다.” 그 무뚝뚝한 말에 렐리아는 쥐구멍에 숨고 싶을 만큼 제 행동이 부끄럽게만 여겨졌다. 잠시 허공을 보며 딴청을 부리다가 그녀는 슬쩍 한마디 했다. “다신 약속 안 어길게.” “…….” “뭣하면 벽 앞에 손들고 서있을까?” “됐습니다. 만든 음식이나 주십시오.” 블리어는 많이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그에 렐리아는 다시 능글맞은 얼굴로 돌아와 은쟁반의 뚜껑 손잡이를 쥐었다. ‘기대하시라’라고 써놓은 것 같은 얼굴엔 오히려 기대감이 잔뜩 어려 있었다. 블리어는 그녀의 들뜬 감정을 묵묵히 읽어낸 후 이윽고 열린 은뚜껑 아래로 드러난 세 가지 요리에 시선을 가져갔다. 순간적으로 놀라지 않으려고 노력해야만 했다. 이색음식이라더니 정말 하나같이 독특하기 짝이 없는 요리들이었다. 하나는 누런 흙 빛깔의 고기였고, 하나는 튀김옷을 입은 검은 물체였고, 다른 하나는 빨갛고 작은 물갈퀴처럼 생겼다. 외양부터가 심상치 않은 음식들이었으나 블리어는 덤덤한 척 포크를 들어 고기에 가져갔다. “이건 뭡니까.” “불고기. 맛있어, 먹어봐.” 재촉에 못 이겨 블리어는 한입 크기의 돼지고기를 입에 가져갔다. 그가 맛을 음미하는 모습을 숨죽여 지켜보는 렐리아는 마치 까다로운 요리평론가의 앞에 가게 메인요리를 내놓은 사장님이 된 기분이었다. 블리어의 표정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는 표정관리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무난한 표정이 지어져있음을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다. 블리어는 순수한 궁금증에 입을 열었다. “고기가 답니다. 고기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달다니, 불고기 소스로는 딱 인데?” 갈은 사과와 설탕을 넣었으니 단 맛이 나는 건 당연하지만 한국인 입맛에 맞게 적당히 담백했다. 불고기를 처음 맛보는 외국인을 위해서 나름 간을 맞춘 건데 그에겐 독특했나보다. 무릎을 접어 몸을 낮춘 렐리아는 교차한 두 팔을 책상위에 얹고서 나른하게 턱을 괬다. 영락없이 책상에 매달린 꼴이었으나 앉아있는 그와 눈높이가 맞았다. “그래도 맛있지?” “배고파서 그런지 맛, 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뜸 들여?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려는 그녀의 말을 끊듯 블리어가 돌연 한마디 툭 내뱉었다. “이 검은 걸 튀긴 건 대체 뭡니까.” “초코과자 튀김.” 별 해괴한 걸 다 들어본다는 듯 블리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구겨졌다. 하지만 렐리아는 자신 있게 자신의 요리를 어필했다. “고칼로리이긴 하지만 진짜 달고 입안에서 살살 녹아.” 자취할 때 호기심삼아 만들어먹은 오레오 튀김은 꽤 자신이 있었다. 오레오랑 비슷한 맛이 나는 초코과자를 디저트가게에서 직접 사와서 튀긴 것뿐이지만, 단거 좋아하는 공작을 생각해 특별히 준비한 음식이었다. “공작 어때? 이정도면 꽤 합격점 아닌감?” 책상너머로 얼굴을 빼꼼이 내놓고서 저를 올려다보는 여인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블리어는 솔직하게 당근을 주기로 했다. “맛있습니다.” 조금 마음이 풀어진 듯한 어조였다. 렐리아는 그럴 줄 알았다며 싱겁게 웃었지만 마음만큼은 몹시 뿌듯해졌다. 눈앞에 있는 사내가 친근한 여자친구였다면 아마 많이 먹으라고 두 뺨을 감싸 쥐고 오구오구 했을지도 모르겠다. ‘…예쁜이 생각나네.’ 아럼프한테는 그랬었는데. 문득 예전 일이 떠오르니 렐리아는 조금 입맛이 떫어졌다. “한데," 그러다 앞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는 정면을 바라봤다. 먹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유려하게 뻗어있던 사내의 눈썹이 슬쩍 일그러져있었다. 공작은 미심쩍은 눈으로 불퉁하게 닭발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건 뭡니까. 재료가 짐작조차 안갑니다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말고 한번 먹어보셔. 이 중에서 만드는데 가장 시간 많이 걸린 애야. 구하는 것도 힘들었고.” 푸줏간에 있는 모든 닭의 발만 베어달라는 말에 푸줏간 주인이 얼마나 두려운 눈을 하던지. 저가 무슨 흑마법의 재료를 사러온 마녀인 줄 아는지 죽은 닭의 다리를 자르던 아저씨의 손끝이 조금 떨리는 걸 봤었다. 저택에 돌아와서는 소피아와 함께 닭발을 직접 손질했었다. 누린내를 없애기 위해 소주대신 와인을 부어 40분가량 팔팔 끓인 닭발이라니 얼마나 고급스러운가. 게다가 고추장, 고춧가루와 가장 맛이 비슷한 이 세계의 향신료를 섞어 맛을 낸 붉은 소스는 꽤나 혁신적인 맛이었다. 야들야들해진 닭발에 각종 야채와 소스를 부어 동그란 팬에 볶아서 만든 음식은 이세계식 닭발치곤 매콤하고 맛있었다. 여기 온 후로 이게 얼마나 먹고 싶던지 그는 아마 상상도 못할 테다. “…대체 뭘로 만든 음식입니까. 처음 봅니다만, 먹어도 몸에 아무런 해가 없는 게 확실한 겁니까.” 닭의 발을 본적이 없는지 공작은 포크로 닭발을 아슬아슬하게 집은 채 차갑게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새로운 물질을 발견해 그것을 탐구하는 화학자처럼 사뭇 진지해진 눈은 쓸데없이 지적이기까지 했다. 이대로 두면 한참을 닭발과 눈씨름을 할 것 같아 렐리아는 시범을 보이듯 닭발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곤 너도 한번 해보라는 듯이 위로 펼친 손바닥을 까딱거렸다. 블리어는 그녀만을 믿고 입안에 닭발을 밀어 넣었다. 오독오독 씹히는 게 그의 세련된 입맛과는 맞지 않을 만큼 괴상한 식감을 자랑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렐리아가 맛있게 먹자 그도 별말 없이 묵묵히 씹기 시작했다. 의외로 그는 빠르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유난히 말이 없고 안색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게 눈 감추듯 닭발과 불고기 1인분을 금세 먹어치웠다. 후식으로 초코과자 튀김을 먹어서야 블리어의 안색은 눈에 띌 만큼 나아졌다. 하지만 렐리아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심드렁히 입을 열 뿐이었다. “근데 공작. 내가 요리를 오랜만에 해서 양조절에 실패했거든? 그래서 부엌에 아직 한 10인분이 더 남아있어.” “…10인분?” 꿈틀하고 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술술 제 말만 이었다. “응. 상하기 전에 어떻게든 다 먹어치워야 되는데,” “일이…많습니다. 오늘부터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 중간에 음식 들고 찾아와도 먹지 못할 겁니다.” “나 아직 말 꺼내지도 않았는데. 흠 암튼, 오늘 밤에 같이 먹…” “밤에는 아예 안 먹습니다.” “평소에 단 거 먹었잖아?” “오늘부터는 되도록 밤엔 안 먹을 생각입니다.” “그래? 다이어트 하나보네.” 엄청난 철벽을 상대한 기분이었으나 렐리아는 그저 그런가보구나 하고 넘겼다. * 렐리아는 부엌에 남은 닭발과 불고기 10인분을 막막한 심정으로 내려다보았다. 각각 10인분이었다. 총 20인분을 저 혼자서 다 먹어치우긴 무리라서 소피아를 꼬드겼으나 소피아는 다섯 입정도 먹고서 그대로 입을 틀어막고 아련하게 부엌을 뛰쳐나가버렸다. 아무래도 소피아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거 곤란한데. 인맥을 다 동원해볼 생각이었으나 친한 사람이라곤 아럼프나 언니 정도였다. 한동안 이걸 어떻게 처리하면 되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렐리아는 기가 막힌 해결책을 떠올렸다. 시간을 확인하니 아직 오후 네 시도 지나지 않았다. 외출복 차림인지라 렐리아는 준비랄 것도 없이 10인분씩 담은 통을 양손에 들고서 저택 밖을 나섰다. 마차를 잡아 그렇게 삼십분을 부지런히 달려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왕궁이었다. 신분증이 있기에 성곽을 바로 통과할 수 있었다. 왕궁 안에서도 마차는 수 분간 더 달려 왕실 제2기사단의 연무장 앞에 도착했다. 은발의 남자를 정찰하기위해 여러 번 이곳을 찾아온 전적이 있는 렐리아로서는 익숙한 곳이었다. 0057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기사단의 정문은 오늘도 날카로운 창으로만 이뤄진 새까만 대문으로 봉쇄돼있었다.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단속하는 분위기라 늘 밖에서 힐끔거리다 발걸음을 돌렸지만 오늘은 달랐다. 렐리아는 주위를 슥슥 둘러보다가 멀리서 훈련을 하고 있는 한 기사를 불렀다. 저기요, 저기요 하고 한 다섯 번은 외쳐댔을까 남청색 훈련복을 입은 기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냐고 정중하게 묻는 기사를 향해 렐리아는 곧바로 제 용건을 말했다. “저기 킬리경을 만나러 왔는데요. 지금 만날 수 있을까요?” “혹시 안으로 들어오실 건가요?” “네. 잠깐이면 돼요." “그게 외람된 말씀이지만 저희가 외부인 출입에…” 기사가 난색을 표하며 뭐라 말하려할 때 멀리서 한 기사가 황급히 뛰어오더니 그대로 귀에 입을 가져다댔다. 속닥속닥, 뭐라고 몇 마디 전하더니 갑자기 기사의 태도가 돌변했다. 깍듯하게 머리까지 숙이며 기사는 웅장한 대문을 좌우로 활짝 열어주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렐리아는 얼떨떨했으나 뒤늦게 퍼뜩 이해가 됐다. 라콘드 공작의 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 행동이 180도 달라지는 건가 싶었다. 아직 정식부인도 아니고 고작 애인인데 말이다. 물론 렐리아가 모르는 게 있었으니 이제껏 라콘드 공작이 공식적인 애인으로서 받아들였던 여인들은 하나같이 다 이런 대접과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의 이름이 곧 권력이나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워우… 부담스러.’ 정말 공비가 된다면 세상에서 저를 떠받들지도 모르겠단 생각은 그다지 시답잖게 느껴지지 않았다. 잠깐이지만 공작이 왜 그렇게 세간의 시선에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무장 쪽으로 안내하는 기사를 따라 걷는 동안 또 다른 기사가 저가 들고 있던 짐을 대신 들어주었다. 그들은 고른 흙이 깔린 연무장이 아닌 가장자리에 둘러진 석조계단으로 자신을 안내해주었다. 잠시 여기서 기다리시라는 말을 하고서 서둘러 연무장에서 치열하게 검을 휘두르는 기사들을 향해 되돌아갔다. 렐리아는 그들이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얼마안가 제 얘길 전해들은 건지 뻥 뚫린 넓은 연무장 한가운데서 킬리로 추정되는 이가 이곳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갈색머리가 찬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꼈으나 표정만큼은 한없이 덤덤한 기사였다. 문제는 그뿐만 아니라 노란 금발의 사내도 쫄래쫄래 뒤따라온다는 거였다. 다른 기사들도 발만 떼지 않았을 뿐 시선은 모두 제게 몰려있었다. 덩치 큰 사내들이 기웃기웃하며 여길 보려고 안달이 난 모습은 조금 웃기기도 하다. 여기 와서 늘 상기하는 거지만 외모의 힘이란 기가 막힌단 말이지. 그런 우습고도 씁쓸한 생각을 하던 중 렐리아는 제 앞을 막아서듯 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킬리는 형식적인 인사말은커녕 반가움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어제 본 사람처럼 담담한 얼굴이었다. “저번처럼 우연히 도ㅂ…” 렐리아는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말을 꺼내나 싶더니! 역시 입이 문제인건 고쳐지지 않았나보다. ‘네가 거기서 입을 한번 만 더 뻥긋하면 난 공작에게 죽는다.’라는 눈빛으로 경고하다가 렐리아는 어떤 오해라도 불러일으킬까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장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직접 절 찾아오셨군요. 무슨 볼일이라도?” “레이디.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 라미우스 므토르를 잊진 않으셨는지요?” “기억하죠. 사실 수고하시는 기사님들을 위해 직접 음식을 만들어왔어요.” “정말이십니까? 레이디께선 어찌 마음도 이리 고우신지!” 말만 그렇게 예쁘게 다듬었을 뿐 렐리아는 자신의 마루타가 될 기사들을 슥 훑어보았다. 몸이 건실해서 그런지 하나같이 다 잘 먹게 생겼다. 공작도 그렇고 소피아도 그렇고 제 음식을 맛보고 그다지 안색이 좋지 못했었다. 그래도 공작은 묵묵히 잘만 먹어줘서 그냥 먹을 만하구나 싶었으나 소피아가 입을 틀어막고 달려갈 때 조금은 뜨끔했다. 저가 만든 것치곤 나름 훌륭한 수준이었으나 대체 뭐가 잘못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안한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킬리에게 냉정한 음식평가도 받고, 은발기사가 있으며 슬쩍 접근해보고, 무엇보다 이 골칫거리 20인분을 해치우는. 말 그대로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었다. “이리 오셔서 좀 드셔보세요.” 렐리아는 순수한 음식대접이라는 명목을 앞세워 멀리 있던 기사들을 덫으로 끌어들였다. 라미우스는 갓 잡은 활어처럼 가만있질 않고 동료기사들을 불러 모으는 일에 직접 나서기 까지 했다. 어느새 렐리아의 주변에 대략 열다섯 명 정도의 기사들이 모였다. 몬스터토벌 적에 봤던 익숙한 면면만 반이었다. 깜빡하고 식기를 가져오지 못했는데 다행히 그들은 곤란해 하는 자신을 대신해 기사 한명을 심부름꾼으로 시켜 건물식당 안에서 급히 식기를 빌려왔다. 뷔페용 집게와 접시, 은포크. 누가 보면 밥차라도 온 줄 알만큼 화려한 구성이었다. 기사들은 각자 접시와 포크를 나눠 갖고서 통 안에 담긴 음식을 배분하기 시작했다. “마침 출출했는데, 영애께 감사해야겠는걸요. 하하.” “그럼.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밝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기사들은 각자 식사를 시작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헛기침을 터뜨리거나 사레에 들리는 등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쿨럭! 큼큼. 고, 고기가 달짝지근하네요.” “…처음 먹어봅니다. 이런 맛…독특하니 좋네요.” “아무래도 저희들의 기호에는 좀...맞질 않는, 컥.” “레이디의 고상한 입맛에는 저희 같은 기사들은 따라갈 수가 없나봅니다! 하하.” 말은 고상이라고 하는데 왜 ‘고’가 ‘이’로 들리는 건지 모르겠다. 동료기사의 옆구리를 세게 치며 끼어든 라미우스는 필사적일 정도라 렐리아는 그렇게 맛이 없나, 하고 턱만 작게 긁적였다. “음. 환상적인 맛이네요.” 그때 그들 사이로 유독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접시를 들고 서있는 킬리였다. 렐리아는 상당히 의외라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물론 그녀뿐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놀란 듯 킬리를 쳐다보았다. “킬리. 정말이에요?” “네. 정말 환상적일 만큼 병신같은 맛이에요.” “킬리! 이 자식!!” 그걸 솔직하게 말하면 어쩌냐, 하는 반응이 주위에서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기사 중 누군가는 급히 킬리의 살인적인 입을 틀어막으려고 하기까지 했다. 허나 킬리는 잽싸게 피하며 계속해서 돌직구를 이어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기에서 단 맛이 나니 굉장히 안 어울려요. 차라리 짠맛이 더 강했으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거 닭의 발입니까?” 헉, 하고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단체로 입덧이라도 하듯 욱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그 소리를 잔잔한 배경음삼아 킬리는 깔끔하게 돌직구를 마무리 지었다. “특색이 너무 진해서 뭐랄까. 정말 병신 같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네요.” 킬리는 거기서 한 술 더 떠서 순수하게 병신 같아서 병신같다고 하는 것뿐이니 오해하지 말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역시 입이 테러수준인 남자다웠다. 하지만 렐리아는 왠지 사이다를 한 병 쭉 들이켠 기분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닭발은 아무래도 생소해서 껄끄럽고, 불고기는 취향이 아니구나 싶었다. 짭짤해야할 돼지고기에서 단 맛이 난다는 발상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불고기가 아니라 제육볶음으로 시도해볼 걸 그랬다. 덕분에 속 시원하게 궁금증이 풀렸다고 렐리아가 후련한 얼굴을 할 때였다. “전 맛있네요.” 멀지 않은 곳에서 한줄기 빛처럼 중저음의 미성이 흘러들어왔다. 소년이었을 적에 성가대를 하지 않았을까 짐작이 될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에 렐리아는 기사들 틈에 숨어있는 남자를 빠르게 찾아내었다. 어딘가 귀에 익다고 했더니 역시나 였다. 붉게 물든 닭발을 오독오독 씹으며 검은 눈을 빛내는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에 남자는 산뜻한 외모가 조금 더 순해 보일 만큼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제 입맛에 맞는 것 같습니다.” 은발의 남자, 이스티온 제프였다. * 생각보다 아주 큰 수확이 있었다. 이스티온과는 오 분 정도지만 그래도 대활 나눌 수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주위에 있는 기사들 때문에 드래곤이냐 아니냐, 대놓고 물어볼 순 없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딘가 싶었다. 다음에 닭발을 또 만들면 가져와도 되냐고 물었는데 그는 좋다며 살며시 머리를 끄덕여주었다. 제 허리를 아작 내었던 그 흉포함은 어디가고 인간세계에 맞춘 호감형 미남처럼 구는 게 아니꼽기는 했다만 다음을 기약해주었으니 됐다. 20인분 중 남은 4인분은 다시 가져오게 되었지만 이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히 먹어치울 수 있는 양이었다. 낮에 잠깐 기사단을 들르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렐리아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 돌아갈 날도 이제 멀지않았어, 암.’ 넉넉잡아 앞으로 한달 안에는 돌아갈 수 있겠다는 기대에 부푼 채 렐리아는 소파에 길게 늘어졌다. 안쪽 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자기 생각에만 사로잡혀있을 때다. 그녀의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뚝 떨어져 내렸다. 비가 내릴 리는 없기에 슬쩍 천장 쪽을 올려다보니, 짧은 흑색머리칼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남자가 조명을 등진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백한 도자기빛 피부와 음영 짙은 눈매는 처녀귀신 뺨칠 정도였다. “서서 뭐해. 공작.” “그대야말로 뭐합니까. 남의 소파에 누워서 히죽거리는 게 여간 수상한 게 아닙니다만.” “히죽대긴, 내가 언제.” “좋아서 히죽대지 않았습니까.” 소파 옆에 서있던 그가 돌연 손을 뻗어왔다. 여인의 왼쪽 뺨을 부드럽게 감쌀 듯이 섬세한 손길이었으나 그는 정확히 집게손가락을 이용해 뺨을 꼬집듯 쥐었다. "입이 이만큼." “아아.” "올라가있었습니다." 학생주임이 불량학생의 귀를 잡아당겨 끌고 가는 것처럼 왼뺨을 위로 잡아당기자 입꼬리만 씰룩 따라 올라갔다. 그는 이만큼 입술이 올라갔다고 증명해보일 것처럼 굴었으나 정확히는 저를 강제로 일으켜 세우기 위함이란 걸 렐리아가 모를 리 없었다. 렐리아는 마지못해 상체를 일으켜 소파 옆으로 엉금엉금 움직였다. 그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그제야 블리어는 군말 없이 자리에 착석했다. 이젠 좁으니 맞은편 소파로 가란 말도 하지 않는 그를 보며 렐리아는 이래서 적응이란 무섭구나 새삼 감탄했다. ‘근데 냄새 좋다.’ 그에게서 맡아지는 은은한 세정제 향에 슬쩍 따라 고갤 기울이며 렐리아는 생각했다. 언니가 풍기는 따스한 향과는 다르게 서늘하고 상쾌한 향이었지만 거부감은 없었다. 그러다 때마침 생각났다는 양 렐리아는 덤덤히 말문을 열었다. “공작. 오늘 내가 해준 거 맛없었지? 솔직하게 말해도 됐었는데.” 그는 말이 없었다. 목에 둘러진 흰 수건 끝으로 머릴 문지르던 손도 일순 멈췄다. 그 선이 굵은 손에 의해 그의 눈이 비스듬히 가려져있었는데 렐리아는 오히려 말하기 편하게 되었다 여겼다. “내 눈치 안 봐도 돼~ 내가 못 만든 건데 왜 공작 탓을 하겠어? 맛없는 거 남한테 억지로 꾸역꾸역 먹이는 게 더 죄책감 든다고.” “내가 왜 그대의 눈치를 봅니까.” 장난처럼 가벼운 말에도 받아치는 사내의 말은 무거웠다. 블리어는 머리를 말리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며 옆에 앉은 여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이 뒤였다. “순전히 내 의지였습니다. 그대가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맛있게 먹은 사람의 입장은 뭐가 되겠습니까.” “….” “입맛이 해괴한 자밖에 더 하겠습니까.” 자기 입맛을 이상하게 만들지 마라며 구박하는 음성은 차가웠다. 허나 렐리아는 잠시 따스한 봄바람이 솔솔 가슴에 와닿은 기분이었다. 허파가 조금 간지러운 기분이 들자 렐리아의 입술 새로 바람 빠지듯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 좀 감동받은 듯.” 뒤늦게 개구쟁이처럼 킥킥하는 웃음소리로 변질되고 말았지만 따스한 기분은 가지실 않았다. 렐리아는 긴 뒷머리에 손을 집어넣고 긁적이다가 애꿎은 딴 곳을 바라보던 눈을 홱 그를 향해 굴렸다. 수목이 우거진 듯이 짙고 선명한 녹안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공작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막 낭만적인 거 알아?” “이게 낭만적으로 들렸습니까.” “어, 음. 조금은?” “이제껏 어떤 사내들을 만나봤기에 그럽니까.” “그러게~ 세상에 공작 같은 남자들만 수두룩했으면 좋겠네.” “진담입니까.” “아니. 그러면 좀 무서울지도.” 그 말에 블리어는 들을 가치도 없단 듯 차갑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0058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그동안 장난스럽게 킥킥 웃던 렐리아는 두 무릎을 세우고서 끌어안았다. 그러곤 그의 옆에 앉아 그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블리어는 미리 테이블 위에 준비해두었던 잉크병과 종이 스무 장, 깃펜 두 자루 중 사용할 것만 제 앞으로 가져왔다. 질 좋은 고급지 한 장이 그의 앞에 반듯하게 놓여졌다. 펜촉의 끝에 검은 잉크를 잔뜩 머금고서 블리어가 막 글을 써내려가려던 찰나였다. 옆에서 훼방꾼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끼어들었다. “뭐하는 거야? 누구한테 편지 쓰게?” “글자공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글자공부?” “대륙공통어이니 그대도 르자카 어의 표기법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어느 수준정도인지 일단 간단한 시험을 치르겠습니다.” 블리어는 가볍게 한 문장을 써내려갔다. 완벽하고 깔끔한 성미답게 군더더기 없는 달필이었으나 이리 꼬고 저리 꼬아서 의사가 써준 처방전 같기도 했다. “읽어보십시오.” “아예 못 읽는데.” “농담하지 말고 진지하게 임하십시오.” “농담 아니라 진짜 못 읽는데.” 내 눈엔 암만 봐도 지렁이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여 얘기하자 그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 심각성을 알지 못하는 렐리아만이 해맑게 빙글거릴 뿐이었다. “근데 뭐라 써놓은 거야? 내 욕 아니지?” “건국신화의 첫 구절입니다. …6세도 읽을 수 있는 문장입니다.” “글 몰라도 별로 사는데 지장만 없으면 되지 않남.” “그런 안이한 생각이 그댈 이런 끔찍한 무지렁이로 만든 원흉이 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댈 가르치는 입장이 된 이상 그 사고방식이 오래갈 생각 마십시오. 완전히 뜯어고칠 테니 말입니다.” 뜯어고친다는 대목에서 팔에 소름이 끼쳤으나 렐리아는 그의 말 중 이상한 단어를 잡아낼 수 있었다. “가르치다니? 공작이 왜 날 가르쳐?” “말했잖습니까. 그대에게 딱 맞는 교양수업을 진행할 거라고.” “아 싫어. 이 시간에 놀자.” “그런 놀기만 좋아하는 성격도 개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좀 더 의욕적인 인간이 되어보십시오.” 블리어는 쥐고 있는 깃펜을 회초리처럼 들고서 짐짓 엄하게 말했으나 렐리아는 귓구멍만 열심히 팔 뿐이었다. 현실로 돌아가면 누가 뭐래도 열심히 살 생각이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고작 게임 속에서 열심히 살아봤자 뭐하겠나, 어차피 성취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말 가상세계인데. 허나 시작부터 태만해져있는 그녀의 꼴을 잠자코 두고 볼 그가 못되었다. 블리어는 일단 그녀의 흐트러진 자세부터 교정시켜놓았다. 허리를 똑바로 펴라, 턱을 아래로 살짝 잡아당겨라, 시선은 정면을 봐라. 없던 기품도 자아내려고 작정한 듯이 그의 교육방식은 철저하고도 매서웠다. 렐리아는 정말 하기 싫다는 티를 팍팍 내었다. 이 한밤중에 예절교육에 글공부라니, 갑자기 잠이 절실할 정도였다. “아 싫어. 싫어. 안 들린다아-” “정말 혼나고 싶습니까.” “아~ 그치만 공작.” “그치만 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한번 하기로 한 일 최선을 다해 그댈 가르칠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대도 하다못해 하려는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이십시오.” 어차피 한 달 안에는 여길 떠날 텐데 뭐하러 배우냐, 하고 렐리아는 투덜대려다가 말았다.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땅히 반박할 거리가 없자 렐리아는 결국 두 손 두발 다 들 수밖에 없었다. 그를 상대로 말싸움에서 이길 자신도 없었다. 그녀는 일찍이 자유를 포기한 채 억지로 산책에 끌려나온 개처럼 심드렁히 첫 수업에 임했다. * 다음날 렐리아는 닭발도시락을 싸들고 기사단을 방문했다. 이번엔 훈련에 방해되지 않게 점심시간을 노려 찾아갔는데 이스티온은 정말 찾아올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런 기색을 보였다. 렐리아는 대뜸 으슥한 곳에서 대화 좀 나누자며 저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사내의 팔을 붙잡아 이끌었다. 처음 와본 건물이었으나 누가 보면 렐리아가 이곳 기사인 줄 알 만큼 걸음엔 주저라곤 없었다. 이리저리 누벼 한적한 복도구석에 당도하게 되자 그제야 렐리아는 멈춰 섰다. 구석이었으나 어둡진 않았다. 네모난 창틀을 가득 채우는 하얀 빛이 그들이 선 자리에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렐리아의 엷은 은발에도, 그보다 조금 더 연한 농도를 자랑하는 사내의 은발에도 고스란히 겨울햇살이 내려앉았다. “나이가 어떻게?” “스무 살입니다.” 렐리아는 흐음, 하고 그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슥 훑어보았다. 이제 막 성인의 티가 물씬 풍기는 청년은 정말로 스무 살처럼 보였다. 드래곤의 나이가 스무 살일 리는 없을 테지만 살짝 앳된 나이의 미남으로 폴리모프한 모양이었다. 제법 디테일에 신경 썼다. “그쪽이 그렇다면야 뭐. 인간나이는 내 쪽이 더 많고 뭣보다 우린 구면이니까 말 놓을게.” 동그란 눈을 능글맞게 휘며 렐리아는 얘기했다. 가식적인 미소를 띠운 채 제 앞에 선 남자를 뚫어져라 올려다보았다. 켕기는 게 없나 훑어보는 그 열렬한 눈빛에 남자는 확실히 찔리는 게 있는지 시선이 불안정했다. 어제도 그렇고 영 저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역시 눈앞에 있는 이 자는 드래곤이 맞다. 렐리아는 또 한 번 확신하며 대수롭지 않게 운을 뗐다. “빵꾸낸 거 때문에 그런 거지? 당연히 그때 일 생각하면 미안하겠지. 이해해, 이해해~” 뱃가죽이 무참히 찢어졌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릴 지경이지만 렐리아는 보살에 빙의라도 된 듯 너그럽게 굴었다. 그만큼 그에겐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일에 대해선 너도 나도 할 말이 많겠지만 썩 좋은 얘기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깔끔하게 끝을 내보자.” “그때 일이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그렇게 발뺌 안 해도 돼. 네 정체 이미 다 눈치 깠걸랑~ 내가 너한테 보복할까봐 두려워서 그러는 거라면 더더욱 안 그래도 돼.” 시치미를 떼는 그에게 렐리아는 자신이 평화주의자임을 거듭 강조했다. “나 합의금 안 바래. 그냥 나랑 하룻밤만 자자.” ‘잘래?’도 아니고 무려 ‘자자’였다. 그 박력 있는 말에 사내의 여린 눈빛이 마구 떨렸다. 톡 건드리면 이지러질 듯한 들꽃 같았다. 하지만 렐리아는 그 순진한 청년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질질 끌 시간도 없었다. 폴리모프 상태인 것 같은데 다시 유희를 끝내고 드래곤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떻게든 원나잇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물론 눈앞의 남자가 저렇게 끝까지 소극적으로 나온다면 방법이 없었다. 무력을 쓰면 침대에 눕힐 수는 있겠지만 그 뒤는 자신으로선 어떻게 손 쓸 수가 없었다. 자신도 처음인데 대체 뭘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니면 뭐, 나 좋아하던지.” “…….” “근데 나 양다리 걸치는 여자다? 그건 알아둬.” 라콘드 공작의 애인으로 파다하게 알려진 지금 드래곤도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렐리아는 그에게 최소한의 선택지를 주기로 했다. 은발사내가 도망가지 못하게 슬그머니 어깨동무를 하고서 어두운 구석 쪽으로 이끌었다. ‘콩팥 뗄래? 배에 탈래?’하고 위협적으로 몰아붙이는 사채업자가 따로 없었다. “근데 자~알 생각해봐.” 사내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속닥이자 그의 사슴같이 긴 목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왠지 자신이 나쁜 년이 된 것만 같았지만 배를 몇 십 바늘이나 꿰맨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꽤 싸게 먹히는 것이었다. 애당초 죄를 지었으면 합의를 봐야할 것 아닌가. 서로 좋게좋게 가는 방향으로 렐리아는 그럴듯하게 세치혀를 놀렸다. “하루, 그것도 딱 삼십분이면 끝나는 일이잖아? 우리 멀리가지 말자. 진짜 딱 삼십분이면 우리관계 끝. 오케이? 너 모습까지 새로 싹 바꾸고서 지금 막 인간세상에 정착했는데 내가 자꾸 이렇게 찾아오면 너도 곤란하잖아?” 잘 생각해보라며 거듭 강요하는 말에 이스티온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절 놀리시는 거라면 그만둬주셨으면 합니다.” 아랫입술까지 지그시 깨물고서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에 렐리아는 슬쩍 어깨동무를 하던 팔을 풀었다. 초등학생에게 돈을 뜯는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너 드래곤이잖아.” “…네?” 유순해보일 만큼 동그랗게 뜬 눈은 갓 성인이 된 남자답지 않게 앳된 구석이 있었다. 키는 저보다 크면서 저렇게 난 아무것도 몰라요, 하고 구는 그는 괜히 사람 이상하게 만들었다. “…드래곤이잖아?” “…그게 무슨.” 어 이상하다. 분명 드래곤 맞는데. 렐리아는 자기최면이라도 걸 듯 계속 되뇌었으나 왠지 그러면 그럴수록 은발사내에게 단단히 휘말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확신은 점차 사라지고 스스로도 긴가민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심을 거두지는 않았다. 인간보다 한 차원 위에 있는 존재였다. 대륙하나를 집어삼킬 수 있는 위력을 가졌는데 한낱 인간하나 속이기는 오죽 쉬울까 싶었다. 어쩌면 기사치곤 연약한 인상의 저 낯가죽너머로 자신을 비웃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렐리아로서도 이런 당혹스러운 때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끝까지 오리발을 내민다면 자신도 어떻게 계속 물고 늘어질 수는 없으니 일단은 후퇴였다. “서.”하고 렐리아는 무겁게 운을 떼었다. “프라이즈~” 뒤이어 발랄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술 새로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렐리아는 언제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이 능청스럽게 굴었다. “사실 내가 살던 지역에서 유행하는 농담이야. 너 드래곤이지? 하면 드래곤인 척 받아주는데 여기선 안 먹히구나~ 아직 수도에선 안 유명한가보네.” “…그런 거였나요.” “응. 아까 했던 말들도 다 농담에서 나온 상황극이었어. 난 네가 받아주는 줄 알았지 뭐야. 아 이건 닭발이야. 너 먹으라고. 하하 그럼 안녕.” 두서없는 말들로 렐리아는 속전속결로 작별을 선고했다. 정신없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렐리아의 두 다리는 저녁운동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들의 빠른 걸음과 흡사했다. 하지만 그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그녀의 머릿속은 포화상태였다. 뭐야뭐야뭐야 하고 범람하는 생각들을 그득 끌어안은 채 렐리아는 마차에 올랐다. 여전히 그녀의 인상은 구겨진 종이처럼 와락 찌푸려져 있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자가 드래곤이 아닐 리 없었다. 아닐 가능성을 생각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현실로 닥쳐오니 혼란스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에 봤을 때 ‘저 남자가 드래곤이다’라고 불같이 확신했던 기억이 있다. 뭔가 강렬하게 확 사로잡히는 기분이 들었었다. 주변의 공기가 이 자라고 아우성치는 그런 기분. 설명할 수는 없으나 육감이란 게 있었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치열하게 싸워댔는데 그 존재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기운을 잊을 수 있을 리 없었다. 허나 지금은 드래곤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에게서 아무런 기운조차 느낄 수 없었다. 외형은 은빛비늘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머리칼을 소유했으나 순한 미안의 일반인처럼 밖에 보이질 않았다. ‘…젠장. 이렇게 나오면 안 되는데.’ 어떻게든 여기 온지 두 달 안에는 돌아가겠다고 마음먹은 상황인데 이 상태라면 한 달은커녕 일 년은 더 걸릴 것 같다. 렐리아는 그가 드래곤인지 아닌지 정확히 판별할 수 있는,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어떻게 하면 되나 하고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길 삼십분 가량 지나서야 마차는 라콘드 공작저의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렐리아는 마차 아래로 내려섰다. 밖에서 빌린 수도마차이기에 대문 안까지는 들어올 수 없어서 대문부터 저택정문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허나 렐리아의 발은 얼마안가 멈춰 섰다. 대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세워져있는 마차로 인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마안가 마차문을 열고 내려서는 사내가 보였다. 이제껏 여자라고 믿었던 것이 다 무색할 정도로 검은빛을 띠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미남처럼만 보였다. 단풍처럼 붉고 화려한 남자. 곱상한 여인으로 보일 만큼 아름다운 용모는 여전해보였다. 아럼프는 빠른 걸음으로 제게로 다가왔다. “사제복 안 입었네.” “응. 사적인 일로 찾아온 거니까.” 0059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전남친처럼 이제껏 공작저 앞에서 죽치고 기다린 건가 싶었으나 렐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에 서운하다는 듯 그는 겨울햇살이 성긴 긴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이제껏 왜 안 찾아왔는지 안 물어봐?” “안 찾아올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바빴겠지, 하고 심드렁히 대답했다. 아럼프는 제게서 두발자국 정도 남겨두고서 완전히 멈춰 섰다. 부담스러울 만큼 바로 코앞에 존재하는 남자는 소리 없이 싱글거리던 입을 일자로 굳히고 있었다. “나 아팠어. 그래서 못 온 거야.” “어디가 아팠는데.” “몸살 때문에, 여기저기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니 확실히 웃음기가 가신 얼굴은 초췌해보였다. 머리카락만 생생하게 붉게 타오르는 느낌을 줄 뿐 얼굴은 불꽃아래에 진 그림자 같이 어두웠다. 조금 걱정스레 그를 올려다보니 그도 덩달아 걱정스런 낯빛을 띠웠다. “너도 아팠었다면서.” 그랬나, 하고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뻔한 말을 삼켰다. 언제 아팠더라 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길 때 돌연 눈앞에 있던 그가 한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서로의 몸이 닿고 체온이 느껴질 것만 같은 거리였다. “들었어.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거.” “아, 뭐 그랬지.” 렐리아는 고갤 꺾어서 훤칠한 신장의 그를 올려다봐야만 했다. 살짝 돌출된 목울대 뼈가 지금에 와서야 보인다. “나랑 그런 일 있고나서…네가 계단에서 떨어졌단 소식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그런 일이라고 하면 야외테라스에서 키스하고 소파 위에 눕혀졌던 일을 말할 테다. 조금은 낯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자 렐리아는 한발자국 뒤로 물러서려했다. 그것을 눈치 빠르게 포착한 아럼프가 팔을 뻗어 어깨를 휘감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렐리아. 나는 네가,” 보고 싶었다는 말 대신에 그는 저를 꽉 끌어안았다. 뭔가 미안해하는 감정과 동시에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뒤섞인 행동 같았다. 그마저도 자연스러워서 렐리아는 아럼프가 보통내기는 아니구나 싶을 뿐이었다. 세게 끌어안은 탓에 렐리아는 생전 인연이 없었던 사내가슴팍에 잠시 얼굴을 묻어야했다. 여자치곤 밋밋하다고 여겼던 가슴은 아예 판판한 바위 같았다. 렐리아는 일 분도채 지나지 않아 얼굴을 떼어냈다. 여자인 줄 알았을 땐 마냥 좋다고 생각했던 향긋한 품이 이젠 남자몸뚱이라 생각하니 조금 징그럽게 느껴졌다. “소문 들었겠지만 나 공작님의 애인이 됐어.” “…들었어.” 그의 낮아진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게 렐리아는 덤덤했다. 알면 포옹 풀라고 말하려는데 언뜻 아럼프의 어깨너머로 그가 눈에 들어왔다. 대저택의 삼 층에 위치한 집무실 창가에 선 점만한 크기의 검은 남자. 분명 공작이었다. 너무 멀어서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 진 모르겠으나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렐리아는 공작 말고 다른 이가 볼 새라 황급히 아럼프를 밀어내었다. 아럼프는 순순히 포옹을 푼 채 두세 걸음 힘없이 뒤로 물러났다. 허나 표정만큼은 불합리하다고 말할 듯이 서운함으로 물들어있었다. “친구로서 포옹정도는 할 수 있잖아?” “네가 날 이성으로 보고 있다면 친구래도 확실히 선을 그어야지. 뽀뽀한 거 나 안 잊었다?” 키스까지 해놓고서 순수한 의도로 포옹을 한다는 헛소리는 집어치우라고 렐리아는 말했다. 조금 삐딱하게 다리를 짚고 선 그녀는 팔짱을 꼈다. 누군가를 보고 배운 듯 딱딱하게 선을 긋는 태도였다. “난 네가 남잔 거 그날 처음 알았고 솔직히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워. 그래도 너는 너고, 나랑 제일 죽이 잘 맞았던 친구였던 건 사실이니까 너랑은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 “렐리아,” “하지만 예전처럼 지낼 수 없다고 생각해.” 끌어안거나 애교부리거나 섹드립을 치거나 하는 건 어디까지나 동성에 한정되어서였다. 남자인 친구들과는 오로지 게임에 한해서만 함께 놀았던 탓에 여전히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건 렐리아로서는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동성친구처럼 편하게 안 대할 거야. 그냥 사내놈 대하듯이 대할 거야.” “…네가 그렇다면 그래 좋아.” 아럼프는 못내 섭섭함을 드러냈으나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 “아야어여오요.” 유려하게 써진 검은 글씨로만 이뤄진 문단아래에 렐리아는 찌그러진 글자를 새겨 넣고 있었다. 각각 열 번씩 따라 써야만 했다. 이 한밤중에 뭐하는 짓인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렐리아는 귀찮아죽겠다는 얼굴을 한 채 설렁설렁 써내려갔다. 그동안 옆자리에서 독서를 하던 블리어는 그녀가 괴발개발 그려놓은 글자들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유연하게 휘어져야할 부분은 울퉁불퉁해져서 글자인지 그림인지 구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대충대충은 봐주지 않는 그답게 내리깐 그의 녹안이 바로 탐탁찮게 일그러졌다. “세상에 그런 글자는 없습니다.” “대충 알아만 보면 되잖아.” “다시 열 번.” “뭐? 장난해?” “지금 하늘과도 같은 스승에게 대드는 겁니까. 제대로 열 번 다 채우기 전까진 안 돌려보낼 줄 아십시오.” 엄하게 으름장을 놓은 사내는 다시 책에 시선을 가져갔다. 품격 있는 우아한 취미를 즐기는 사람처럼 책을 넘기는 손짓엔 여유가 흘러넘쳤다. 괜히 그가 얄미워보였으나 렐리아는 군말 않고 다시 글자를 써내려갔다. 물론 그것도 잠시였다. “우유워웨위유으의이…에라이! 드럽게 재미없네.” 렐리아는 깃펜을 툭 던져두고서 그대로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 한동안 방안은 고요할 정도로 아무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그녀 옆에서 얇은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일분단위로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자는 척을 하는 주제에 렐리아는 그 침묵에 견디지 못하고 스륵 고갤 돌렸다. 교차한 팔뚝위에 턱을 괸 채 괜히 힘없이 중얼거렸다. “공작. 나 졸려…” “아직 열한 시입니다.” “벌써 그렇게나 됐어? 이제 자자. 밤새면 키 안 큰다고.” “그 나이에 크긴 합니까. 평소 새벽 한두 시까지 잘만 떠들다 가던 그댈 압니다. 엄살 부리지 마십시오.” “…하여간 쓸데없이 기억력만 좋아선…” 투덜투덜 거리며 렐리아는 옆에 던져놓았던 깃펜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굴렸다. 테이블 위에는 도르륵 소리만이 한동안 울려댔다. 하기 싫다, 하기 싫다 주문처럼 되뇌는 여인은 공부에 흥미를 잃은 아이처럼 불만과 지루함을 한 움큼 집어삼킨 얼굴이었다. “그렇게 하기 싫습니까.” 뒤늦게 블리어는 탁, 소리가 나게끔 책을 덮으며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자르르 은빛이 흐르는 긴 머리칼을 고동색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펼쳐놓고 있는 여자는 대낮에 신세 좋게 늘어진 고양이 같았다. 뭘 하겠다는 의욕도 없고 게으르기만 했다. 놔두면 한참을 저러고 뒹굴거리다 갈게 분명했다. 억지로라도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에 블리어는 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루하면 잠깐 일어나보십시오.” “어 왜?” “계속 앉아있는 건 아무래도 졸릴 테니 다른 걸 가르쳐주겠습니다.” 뻗어진 커다란 손이 테이블위에 얹어진 여인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그대로 위로 당기는 손길에 렐리아는 어정쩡하게 몸을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그는 렐리아를 붙잡고 소파 뒤로 돌아갔다. 고급스런 격자무늬 융단이 깔린 대리석바닥 위에 크기 다른 두 쌍의 발이 나란히 마주보고 섰다. 보통 이렇게 마주보고 서서 할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있었다.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며 의이함을 담아 물었다. “뭐야 씨름하게? 아님 손바닥 치기게임?” “그것들은 또 뭡니까.” “손바닥 치기는, 이렇게 해봐.” 시범삼아 렐리아는 양손바닥을 활짝 펴보였다. 블리어가 붕대를 감은 왼손을 제하고 오른손만 따라 펴보이자 곧바로 여인의 손이 뻗어져와 짝 소리가 나게끔 떠밀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반발자국 뒤로 물러섰는데 그에 렐리아는 왜 이렇게 허무하게 지냐며 키득거렸다. “좀 버텨보지. 남자가 왜 이렇게 하체가 부실해?” “…왼손 낫고 봅시다.” 단단히 자존심 상했는지 블리어는 어금니까지 사리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슬그머니 두 손을 뻗어 블리어의 허리춤을 가볍게 붙잡았다. “씨름은,” 아직 안 끝났는지 그녀는 몸소 그에게 안다리 걸기를 시도했다. 자신의 오른쪽 다리를 뻗어 그의 왼쪽 다리를 걸더니 그대로 그의 단단한 상체를 자기의 어깨로 밀어 넘어뜨리려했다. 미처 생각지 못한 기술에 블리어가 중심을 잃으려하자 렐리아는 한 손으로 그의 넓은 등을 받쳐 잡아주었다. “이렇게 하는 거야.” “…자존심 상하니 그 손 치우십시오.” 사내의 현란한 리드에 한순간 몸을 맡겨 춤을 춘 시골영애라도 된 기분이었다. 블리어는 기우뚱하게 뒤로 기울어진 몸을 바로 세우고서 저보다 작은 여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력이 나오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이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리드하겠습니다.” 블리어는 다시 주도권을 쥐고서 차분하게 그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오 개월 동안의 크고 작은 행사를 생각하면 연회장에 갈 일이 제법 있을 거라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사교계에 데리고 다니기엔 아직 한참 부족한 수준인 이 여자에게 예절에서부터 귀족가의 영양들이라면 숙지할 기본적인 교양을 가르쳐야했다. 그 중 하나가 사교춤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엄살 부릴 생각 마십시오. 더도 말고 최소한, 내 애인으로서의 수준에 적합한 수준까지만 끌어올릴 생각입니다.” “미안. 그냥 나 애인 안할래.” “한번 배워놓으면 어디 가서든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겁니다. 가르쳐줄 때 배우십시오.” “웃기고 있네.” 렐리아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아줌마 아저씨들이 취미로 다니는 댄스스포츠 클럽에 가게 된다면 몰라도 살면서 평생 도움 될 일은 없을 테다. 그쪽으로 전공을 바꾸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하지만 블리어는 단기간 내에 겉만 귀족여인으로 만들기 위한 강행군을 이어나갔다. “일단 인사입니다. 치마양쪽을 잡고 살짝 들어 올리면서 고갤 숙여보십시오. 이때 왼발은 뒤로 자연스레 숨기면 됩니다.” “공작. 이 치마 여기까지밖에 안 올라가.” “드레스가 아니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것 말고 다른 드레스 있지 않습니까?” “아니 없는데. 나 드레스 옷장에 두 벌밖에 없어. 그것도 언니가 준거.” “…이제껏 그것만 입고 다닌 겁니까?” 시작부터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블리어는 미간만 꾹꾹 짓눌렀다. 묵직한 한숨이 새나가려는 걸 참고서 그는 애써 누그러진 말투를 사용했다. “마침 내일 휴일이니 의상점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웬일이래.” “그러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임하십시오. …역사, 정치, 문예, 철학 같은 부분도 배우고 싶습니까?” 별안간 주름진 미간에서 손을 뗀 그가 험상궂게 물었다. 렐리아는 아니요 하고 말하듯 고개를 좌우로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반협박으로 시작된 댄스교습은 의외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그는 불편한 왼손을 가볍게 가는 허리 뒤에 놓는 걸로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오른손으론 렐리아의 작은 손을 포개듯 잡았다. 렐리아는 손끝이 조금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갑작스레 그와 몸이 밀착하게 되자 양어깨에 괜히 힘이 실렸다. 어딘가 뻣뻣해졌다는 걸 그녀자신은 몰라도 블리어는 바로 알아차렸다. 허나 미심쩍은 눈초리로 그녈 내려다볼 뿐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차분히 지시했다. “내 왼팔에 손을 얹으십시오. 어깨아래를 가볍게 잡듯이 내려놓으면 됩니다.” “이렇게?” “잘했습니다.” 칭찬에 은근 뿌듯해지자 자연스레 몸의 긴장도 풀려버렸다. 렐리아는 그 사실은 알지 못한 채 열심히 집중하는 눈을 했다. 답지 않게 의욕적으로 나오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블리어의 입가도 조금 느슨하게 풀렸다. 역시 칭찬에 약한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0060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곡이 없는 관계로 블리어는 직접 낮고 잔잔하게 허밍을 내서 박자에 맞출 수 있도록 지도했다. 사방이 벽으로 한정된 공간에서 두 사람은 조금 느린 빠르기로 왔다 갔다 하며 움직였다. 한걸음 앞으로 진행했다가 다시 뒤로 가고, 왼쪽으로 두 걸음 갔다가 오른쪽으로 옮겨가는 식의 간단한 구조였다. “이게 기본적인 동작입니다. 빠른 곡이든 느린 곡이든 이렇게 계속 순환하는 원리이니 그리 어렵진 않을 겁니다.” “아. 나 지금 완전히 터득한 거 같아. 혼자 해볼까?” “둘이서 추는 춤입니다. 뭘 어떻게 혼자서 하겠다는 겁니까.” “킥킥, 그건 그래.” 렐리아는 웃는 도중에도 박자가 틀리지 않게 신경 썼다. 낮은 음역대의 허밍이 귓가를 가득 메웠는데 생각보다 듣기 좋았다. 어느새 그녀도 따라 흥얼대며 그의 리드에 맞춰 자연스레 움직여갔다. “아럼프, 그 사제와는 어떻게 된 겁니까.” 그러다 허밍대신에 귓가로 실려 온 낮고 무거운 목소리에 렐리아는 더딘 움직임을 보였다. 집무실 창가에서 전부 내려다보고 있던 걸 아는데 어쩐지 얘기를 안 한다고 했다. 역시나 하는 구나 체념하면서도 아직도 제게 불신을 보이고 있다 여겼다. 렐리아의 기분은 영하권에 접어든 것처럼 순간 뚝 떨어져 내려갔다. “그 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습니까.” “공작. 아직도 내 말 못 믿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조금 흥분한 렐리아를 진정시키듯 갈바람처럼 사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나 이어지는 목소리는 아이 달래듯 나긋나긋한 구석이 있었다. “그대가 그리 말하는데 나를 속였으리라고는 판단되진 않습니다. 무엇보다 내 쪽에서 먼저 여자라 소개한 잘못이 있지 않습니까. 그대도 그 사내를 동성친구라 여기고 그리 친근하게 굴었다면 말이 맞습니다. 내 말 틀립니까?” 올르아 공녀의 뒤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는 모습하며, 언니언니하며 애교를 다 떠는 모습하며, 아무래도 이 여잔 동성이 더 편한가 보다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 반의 반만이라도 사내에게 살갑게 군다면 어느 고위귀족의 첩 자리를 꿰차고도 남았겠노라고. 그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묻는 질문입니다. 그 사제가 남자인 걸 안 후에는 아예 만나지 않는 겁니까.” “왜 그게 순수하게 궁금한 건데?”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일단은 대외적인 애인으로서 묻는 질문이라고만 답하겠습니다.” “그게 뭐야.” 픽 하고 렐리아는 웃어버렸다. 이 남자가 제게 순수하게 궁금증을 가질 때도 다 있네 싶으니 낮아졌던 기분이 다시 물방울처럼 퐁퐁 솟아올랐다. 몽글몽글해진 기분으로 렐리아는 그의 이어지는 말을 매끄럽게 경청했다. “동성친구라 여겼을 때 상당히 그에게 호감이 컸을 거라 봅니다. 그쪽에서도 매일 방문했을 정도니 서로 친했다고 봐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응 맞아.” “그러니 그때의 감정이 남자인 걸 안 직후엔 연애감정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혹 나로 인해 만나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해서 하는 말입니다. 고위급 신관정도면 좋은 신랑감입니다.” “푸훕, 공작이 무슨 중매인이야?” 렐리아는 입을 가린 채 눈매를 과하게 둥그렇게 휘었다. 웃음보가 터지기 직전이 돼서야 그녀는 다시 경박하게 푸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블리어는 꽤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전에도 얘기했다시피 고위급 신관이면 출세하는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는 그대가 지금이라도 좋은 남자를 만나 안정적인 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지금도 안정적인데 뭘 굳이.” “그대가 이곳을 나가서도 이런 생활을 누릴 거란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여인 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뭐든 대충대충인 그녀의 성미를 알기에 블리어는 무겁게 충고했다. 인생자체가 가볍고 삶 자체를 가볍게 여기는 여자임을 알기에 더 그랬다. 오 개월 뒤에 밖에 내놓으면 또다시 제 발로 이상한 데를 기어들어갈까 그는 순수하게 걱정이 되었다. “한 가지만 더 참견한다면…다시 그런 일에 몸담지 마십시오. 그대는 충분히 괜찮은 여인입니다.” “뭐야~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칭찬? 혹시 나한테 뭐 원하는 거 있남?” 그가 뭘 걱정하는지 충분히 잘 알아들었으나 렐리아는 모른 척 능글맞게 굴었다. 훗날을 위해서라도 이러는 쪽이 더 편했다. “근데 공작 오해하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 아럼프와는 그럴 생각 전혀 없어. 키스도 거의 강제로 당한 거였고.” “…….” 강제라는 말에 블리어는 꿈틀, 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해버리고 말았다. 휙 치올렸던 새카맣고 짙은 눈썹을 다시 원래자리로 돌려놓는 동안 그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도 모르겠어. 남자로서 좋은 건 아닌데 안 만나니까 또 섭섭하고. 예전관계가 그립기도 하고. 여기 와서 처음 사귄 친구라 진짜 친했거든.” 친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듯해보였다. 블리어는 머릿속에서 붉은 머리사내를 지워내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럼 뭡니까.” “공작?”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렐리아는 댕그랗게 눈을 떴다. 뒤이어 턱 아래를 문지르며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공작은…뭐 굳이 말하자면 봉?” “…봉?” 다시 한번 꿈틀하고 그는 반사적으로 반응해버렸다. 검은 머리칼사이로 드러난 날카롭게 솟은 눈썹을 발견한 렐리아는 다시 정정했다. “봉은 좀 심했나. 암튼 금전적이든 뭐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응. 임시보호자 같잖아. 그럼 공작은? 공작에게 나는 뭐야?” 순수하게 묻는 듯했으나 렐리아는 어디 한번 내 욕을 해봐라, 하는 경고의 눈빛이었다. 골치 아픈 여자라거나, 골치 아픈 노숙자라거나, 골치 아픈 하숙생 등등의 예상대답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낮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딱히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순 없습니다만. 그대와 만나고 난 후 정이라는 게 조금은 무서울 수도 있겠다고 새삼 그런 생각이 듭니다.” 블리어는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그 작은 얼굴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지금도 하루 안 찾아와도 어디서 뭐하길래 안 오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오 개월 후면 혹여 라도 그 빈자리가 허전하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종종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아직은 오 개월까지 넉넉하니 차차 정을 끊어내면 되는 일이지만. “공작답지 않게 감성적인 답변이네. 좀 감동인데?” 이에 질세라 렐리아는 곧이어 작은 입술을 나불댔다. “나도 뭐 공작이랑 영영 헤어지게 되면 가끔 생각날 것 같긴 해. 특히 밤에 혼자 있을 때.” 매일 잠들기 전에 이렇게 얼굴을 보는 사이인지라 돌아가고 며칠 동안은 이 남자 얼굴이 떠오르겠지 싶었다. 그럴 때마다 게임화면으로 접속해서 모니터너머의 공작에게 말이라도 걸지 않을까 생각하니 좀 무섭기도 했다. * 주신을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성스러운 장소. 숙연한 분위기로 그득 채워져 있는 곳은 대신전의 미사실이었다. 흰 석조건물의 높다란 천장엔 장미와 십자가 두 개를 서로 가로지른 모양 틀의 창문이 서로 마주본 채 달려있다. 수십 개의 아치형태 기둥이 길게 이어져있는 그 끝엔 달빛이 고요하게 쏟아져 내렸다. 그 달빛을 조명삼아 기도를 드리듯 단 위에는 교황이 엎드리고 있었다. 새하얗게 센 흰 머리가 그 나이를 짐작케 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몸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불편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경건히 그러모은 주름진 두 손은 안쓰러울만치 바르르 떨렸다. 실내도 추위를 피해갈 수 없는 겨울이건만 노년의 교황은 식은땀 투성이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땀은 쉼 없이 뚝 뚝 떨어져 내렸다. 절을 드리는 교황의 머리가 향하고 있는 곳엔 주신의 조각상도, 대신전의 상징도 없었다. 정확히 까딱까딱 움직이는 남성구두만 있을 뿐이었다. 장미목으로 된 제단 위에 걸터앉은 젊은 남자는 은은히 내려앉는 달빛을 나른하게 쬐었다. 눈부신 은발 위로 은혜로운 광채가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제 앞에 엎드린 늙은 교황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말 그대로 재밌는 것을 내려다보듯 가늘게 휘어진 입술엔 즐거움이 걸려있었다. “신은 없나봅니다.” 부드러운 선율처럼 귀를 매료시키는 목소리가 미사실 안을 울렸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죠. 나란 존재가 있는데. 한데…그 신이란 작자는 아무래도 당신을 구할 생각이 없나보네요. 한평생을 신의 충실한 종으로서 살아왔건만.” “…….” “물론, 나 같아도 이런 쓸모없는 늙은이를 구하기 위해 천당에서 내려오진 않겠지만요.” 신의 권좌를 우롱하고 늙은 교황을 능욕하며 그는 지루한 듯 웃어보였다. 그러곤 괴상하고 품격 있는 취미를 자랑하듯이 손바닥 안에 둥그런 와인잔을 놓고서 서서히 흔들었다. 붉은 액체가 따라 흔들렸다. “신전이라고 해도 별거 없네요. 신권도 완전히 흡수해버렸으니 이제 남은 건 왕궁인가요.” 남의 의사를 묻듯이 다정한 톤이었으나 이윽고 남자는 꼬고 있던 발을 들어 올려 그대로 교황의 뒷머리를 짓밟았다. 쾅, 하고 딱딱한 대리석바닥 위에 주름진 얼굴이 세게 부딪쳤다. 코가 뭉개지고 코뼈가 으스러진 충격에 곧바로 피가 쏟아지듯 터져 나왔다. 고통스럽게 구겨진 노인의 얼굴이 바닥에 비벼지는 동안 핏물은 점차 넓게 하얀 돌바닥위에 번져나갔다. “물으면 대답. 그렇죠?” “…으…으으….” “목숨 붙어있을 날이 얼마 남지않은 인간은 다루기 힘드네요.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다니.” 쯧 하고 혀를 차기 무섭게 아름다운 남자의 미안이 싸늘하게 물들었다. 기묘한 은빛 테가 둘러진 눈동자는 얼마안가 조각달처럼 가늘어져갔다. 그는 한손에 쥐고 있던 와인잔을 그대로 반대로 뒤집었다. 붉은 액체는 고스란히 늙은 교황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렸다. 깊게 패인 주름을 타고 흘러내린 와인은 피범벅이 되어있던 얼굴을 씻겨 내려갔다. 그러다 옆으로 튄 와인 한 방울이 매끄러운 검은 구두위에 아롱졌다. 눈만 내리깔아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본 은발남자는 이내 매끄럽게 입매를 휘었다. 자애로운 미소였으나 그 기묘한 눈만큼은 정말 저가 신이라도 된 양 이 세상에서 가장 소름끼치고 오만했다. “핥아먹으세요.” 그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교황은 천천히 머릴 숙였다. 마치 신의 발바닥을 핥듯이 정성스럽게 구두앞코를 제 혀로 닦아내기 시작했다. 0061 / 0172 ---------------------------------------------- 호감도가 상승했습니다 친구관계가 새로 정의된 그 다음날, 아럼프는 평상시처럼 렐리아를 찾아왔다. 예전과 다른 게 있다면 치료목적 방문이 아닌 사적인 방문이라는 거였다. 그가 방 앞에 도착했다는 얘길 소피아를 통해 들은 렐리아는 외출준비를 마치고 방밖으로 나왔다. 몇 겹을 덧댄 속치마로 인해 드레스는 겉으로 보기에도 충분히 부풀어있었다. 흰 스타킹을 신은 가는 발목은 그녀가 걸을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났다. 아럼프는 문 맞은편 벽에 기대어 서있다가 제게로 다가오는 그녀를 보며 자연스레 걸음을 떼었다. 마치 예쁘게 꾸미고 나온 애인을 반기는 남자처럼 입가는 반사적으로 길게 휘어 올라갔다. “예쁘네. 나랑 데이트 나가려고 준비한 거야?” “나 지금 나갈 건데 따라올 거면 오고. 아님 말고.” 렐리아는 그의 뼈있는 농담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저 자기 갈길 가는 모습에 아럼프는 환하게 지었던 미소를 약간 어설프게 누그러뜨리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가 두 발짝 옮기면 그는 소리 없이 한걸음 옮기는 식으로 걸었다. 그러다보니 서로의 간극은 조금도 좁혀지지 못했다. 아럼프는 렐리아의 뒷모습만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저를 돌아볼까 내심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녀의 눈치만을 살폈다. 허나 렐리아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따라 걷다가 그녀가 저택정문으로 나와 마차에 오르려하자 그제야 아럼프는 입을 열었다. “어디 가는데?” “왕실 제2기사단.” “흠. 거길 또 가는 거야?” 예전에도 종종 자신을 끌고 가던 곳이 그곳이었기에 아럼프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그녀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며 렐리아를 뒤따라 마차에 올랐다. “근데 손에 든 그건 뭐야?” 아럼프는 맞은편 소파에 앉자마자 그녀의 무릎위에 얹어진 네모난 고급함에 시선을 뒀다. 이에 렐리아는 “도시락.”하고 심드렁히 대답해주었다. 조금 성의 없어 보이는 털털한 태도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그녈 보며 싱글거렸다. “나 주려고 만든 건 아니겠고. 혹시 기사들 훈련하는 거 구경하면서 먹으려는 건 아니지?” “그럴 리가.” 피식하고 웃으며 렐리아는 받아주었으나 그다지 감흥 없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아럼프는 계속해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점심은 먹었는지, 갔다가 어딜 갈 예정인지, 오늘시간 있으면 놀러가지 않겠냐고 스리슬쩍 데이트 신청까지 했다. 물론 선약이 있다고 거절당했지만. 다시 원래관계를 회복할 생각으로 그는 스스럼없이 그녈 대했으나 렐리아는 그렇지 못했다. 일정거리를 두고 그를 대했다. 그걸 아럼프는 진즉 눈치 채고 있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얇은 벽이 세워진 기분이었으나 벽은 부수면 그만이었다. 저가 남자라는 것에 조금 혼란스러워 그런 것일 뿐 금방 다시 예전처럼 저를 대해줄 거란 믿음이 있었다. 렐리아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지만. 두 사람은 농담식의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가 이윽고 도착한 기사단에서 내렸다. 렐리아는 닭발이 담긴 도시락을 들고서 당당히 기사단 정문으로 들어섰다. 동행인으로서 뒤따라온 아럼프는 그제야 그녀가 공작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눈치였다. 조금 어색하게 입술 끝이 다물어진 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렐리아는 넓은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에서 조금 지난 시간이라 기사들은 건물 안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몇몇은 밖에서 게임 삼아 대련을 하고 있었다. 그들 중 베테랑 기사들의 검술대련을 집중한 채 지켜보고 있는 이스티온을 발견하는 것은 쉬웠다. 동시에 이스티온에게로 다가오는 렐리아를 다른 기사들이 발견하는 것은 더욱더 쉬웠다. 대련하는 두 기사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열띤 함성을 지르던 기사들은 어느새 대련에는 신경 끊고 렐리아를 향해 와르르 모여들었다. 그 중 선두는 어김없이 라미우스가 차지했다. “레이디! 오늘도 저 라미우스를 보러 와주셨군요! 그런데 옆에 계신 이분은?” “대신전의 사제, 아럼프 세브로웰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전 라미우스 므토르라고 합니다 하하.” 라미우스가 노란 금발을 한손으로 쓸어 넘기며 과장된 인사를 하는 동안 아럼프는 그저 조용하게 웃을 뿐이었다. 초면인 사람에게는 더 극성맞아지는지 라미우스는 재잘재잘 자기자랑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그를 떨어뜨려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렐리아는 아럼프를 미끼로 던져주고서 다른 기사들에게서도 벗어나 빠르게 이스티온을 향해 다가갔다. 이스티온은 얼마나 집중하고 있던 건지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야 렐리아를 돌아보았다. 숲속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다가 작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머리를 쳐든 수사슴처럼 검은 눈은 순하고 맑았다. 렐리아는 도시락을 슬쩍 위로 들어 올리며 하얀 이가 드러나도록 미소 지었다. “오늘도 좋아하는 거 만들어 왔는데 어때, 좀 드셔보실?” “아…감사합니다. 어제 주신 도시락통은 지금 드릴게요.” 미안함인지 부담스러움인지 이스티온은 조금 멋쩍게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얘기했다. 그런 것치곤 빠르게 그녀를 기숙사건물 쪽으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아럼프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신호를 보내고서 이스티온을 뒤쫓아 갔다. 사무적이고 공용건물느낌이 나는 본관과는 달리 그 옆에 따로 지어진 별관건물은 외관에서부터가 금녀의 구역이라는 게 느껴졌다. 내부도 마찬가지로, 깔끔하지만 칙칙해 보이는 회색벽과 두 줄로 길게 늘어선 남청색의 문들은 교도소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기숙사가 이렇게 생겼구나- 근데 집에서 나와서 완전히 기숙사생활 하는 거야?” “네. 수도에 올라 온지 얼마 안됐거든요.” 렐리아는 '그래?'하고 의미심장하게 응수하며 그가 안내한 방 앞에 멈춰 섰다. 이스티온은 잠시만 기다려보라고 한 후 홀로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문 너머로 잠시 드러난 방안 모습은 적당히 아늑하고 깔끔해보였다. 정말 흉포한 그 드래곤이 맞는지 의심이 갈만큼 단정한 방 풍경이었다. ‘…누군 급해죽겠는데 참나, 사람 헷갈리게 하네.’ 첫 만남 땐 자기를 알아봐달라고 심상찮은 기운을 흩뿌리더니 지금은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렐리아는 방 앞에 지루하게 서있다가 얼마안가 문을 열고 나오는 은발남자를 주시했다. 그는 깨끗하게 세척한 빈 도시락통을 제게 내밀며 맛있게 잘 먹었다고 예의바르게 인사까지 했다. “저기 말야. 우리 이제 좀 친해졌지?” 사적으로 그를 찾아온 지 이제 겨우 세 번째라지만 렐리아는 뻔뻔함으로 밀고 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너한테 호감 있어서 매일 닭발 갖다 바치는 거 알면 나한테 조금이라도 시간 내줄래?” “네?” “주말에 시간 있으면 데이트하자는 말이야.” 렐리아는 정공법으로 찌르고부터 봤다. 너무 강한 정면충돌이었던 건지 그녀를 담은 맑고 검은 눈동자 위로 살며시 파동이 일었다. 그러고는 슬쩍 시선을 회피하듯 눈을 내리깔며 귓불을 연하게 붉혔다. 건물 안인데도 불구하고 어디선가 솔솔 봄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순박한 시골청년 같은 반응에 렐리아도 자연스레 분위기를 타게 되었는데 어느새 괜히 턱만 긁적거리고 있었다. 그녀도 남자한테 이런 말 하는 건 생전처음인지라 이 상황자체가 쑥스럽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정신 차려! 게임이라고!’ 뒤늦게 그녀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뺨을 한대 후려갈겨진 기분이었다. 평생 게임에 빠져 살고 싶냐, 현실과 게임을 구분 못하냐 등의 독설을 속으로 퍼부어대며 렐리아는 게임에 대한 높은 경각심을 다졌다. 그때 머리 위에서 난감한 기색이 어린 낮은 미성이 흘러내려왔다. “저 죄송하지만 이러시면…저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공작전하께서 계시지 않으신가요.” “너와 사귀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너무 순수한 거 아니야?” 남 말할 처지는 아니라지만 렐리아는 가식미소를 띠우며 방긋 웃었다. 누가 보면 남자경험 많은 연상녀처럼 보이는 당돌한 모습이었다. “그냥 너에 대해서 알고 싶어.” 정확히 말하자면 드래곤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지만 렐리아는 뒷말은 쏙 삼켰다. 기사단에 출입할 수 있는 건 다 공작의 애인이라는 타이틀덕분이지만, 동시에 다른 남캐를 공략하기에 방해되는 것도 공작의 애인이라는 타이틀이었다. 거리를 좁히기는커녕 상대방은 이미 공작의 분노라도 살까 조심스러워하는 게 딱 눈에 보인다. 드래곤씩이나 돼서 한낱 인간인 공작이 무섭겠냐만은 기껏 자리 잡은 인간세상의 유희를 망칠 게 뻔하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걱정 마. 사실 공작님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서 네가 공작님 눈치를 볼 필욘 없어. 애인이긴 한데 형식적인? 뭐 그런 거.” 렐리아는 그를 꾀어내기 위해서 전력이었다. 그 가상한 노력이 통했는지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가까스로 휴일날 약속을 잡을 수 있었다. 이번 주말에 수도 중심상가의 조각분수대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빈 도시락통도 받았겠다 두 사람은 기숙사 건물을 벗어나 다시 왔던 길을 부지런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약속을 잡아내 후련해진 렐리아와는 달리 이스티온은 아직도 걸리는 게 있는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저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아까 같이 오셨던 분은 그럼 누구신가요?” “아럼프? 그냥 친구야.” “아 그렇군요. 제가 공작전하의 용모를 몰라서 혹시나 같이 오신건가 싶었습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뭐.” 렐리아는 의미심장하게 씰룩 웃어넘겼다. 이 순수한 기사청년이 드래곤인지 아닌지 여전히 긴가민가하다지만, 조금은 확신이 들었다. 어디 산골짜기 구석에 틀어박혀 살았던 게 아니라면 공작쯤 되는 유명인사의 머리색정도는 익히 들어봤을 테다. 이곳에선 검은머리가 흔치않다고 들었기에 라콘드 공작이 흑발이라는 걸 모를 리 없다. '진짜 드래곤이기에 이 인간세상에 무지한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라고 한다면 말이 맞는 것이다. “그나저나 같이 오신 친구 분은 먼저 돌아가신 것 같네요. 저기에 계셨는데 지금은 안보입니다.” “어, 그러게?” 라미우스에게 잡혀 있을 거라 여겼는데 라미우스는 다른 기사들과 한창 대련 중이었고 아럼프가 서있던 자리엔 아무도 없었다. 최대한 일찍 돌아온 건데 바쁜 일이 있어 먼저 가버린 건가 싶었다. 그러다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렐리아는 다시 이스티온에게 집중했다. “그분은 신분이 어떻게 되시나요?” “신분?” “네. 용모나 옷차림새가 귀족으로 보이시던데.” “음, 귀족인지는 모르겠는데 고위급사제 하는 애야. 요기 근처 대신전에 다니는.” “대신전…말인가요?” 조금 놀란 듯이 확장된 동공은 얼떨떨한 감정을 옅게나마 비치고 있었다. 이스티온은 새하얀 은발을 흐트러뜨리고 가는 차가운 바람에 슬그머니 눈을 내리깔며 원래표정을 되찾았다. 차분해진 모습이지만 입술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위아래가 살짝 어긋나게 닫혀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렐리아는 ‘대신전이 진짜 영향력 있는 곳인가 보구나, 한국으로 치면 대기업정도이려나?’ 하는 태연스런 생각을 할 뿐이다. 얼마안가 이스티온은 닫힌 입술을 뗐다. 흠잡을 데 없이 공손한 말투였다. “저 죄송한데 그 사제 분을 언제 한번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게 부탁드려도 될까요? 최대한 빠른 시일 내라면 더 감사할 것 같아요. 부탁드립니다.” “? 아럼프를?” “아무래도 신참기사인 제가 쉽게 만날 수 없는 신분이시니까요.” “흠…그 정도야? 근데 내 친구랑 만나서 무슨 얘기하게?” “그게…제 가족과 관련된 얘기라서 자세하게는 말씀드릴 순 없지만 아무튼 그분과는 개인적으로 만나고 뵙고 싶습니다.” 그가 난처한 기색을 조금 드러내자 렐리아는 억지로 캐물을 수조차 없었다. 그저 드래곤에게 가족이 있나 싶으면서도 알겠다고 흔쾌히 약속해버렸다. 렐리아는 이번 휴일 데이트약속을 거듭 강조하고서 이스티온을 놓아주었다. 볼일이 끝나자 렐리아는 라미우스가 들러붙을 새라 서둘러 기사단 정문을 빠져나왔다. 정문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마차 문을 열고 오르려다 그녀는 멈칫했다. 마차 안에는 화려한 붉은 머리사내가 이미 편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간 줄 알았는데.” “친구를 두고 갈 순 없지.” 아럼프는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 손을 잡고 오르라는 배려에 렐리아는 됐다며 풍성한 드레스자락을 한쪽으로 몰아 잡고 사뿐히 올라섰다. 그런 그녀를 맞은편에서 바라보던 아럼프는 뻗었던 손을 다시 거두며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다. “선약 있다고 했지?” “응.” “내일은 뭐해?” “그냥 방에 있으려고.”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얘기를 나누는 동안 차창너머의 풍경이 천천히 스쳐지나갔다. 렐리아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은 채로 슬쩍 용건을 꺼냈다. “내가 아는 기사동생이 너 만나고 싶어 하더라.” “나는 왜?” “자세한 건 모르겠는데 가족에 관한 일이래. 대단하신 고위급사제 분께 개인적으로 상담 받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암튼 시간돼?” “글쎄. 그쪽에서 신전으로 찾아와도 개인적으로 만나주기엔 곤란한대. 그렇다고 따로 밖에서 만나기엔 내가 요즘 땡땡이를 칠 수가 없거든." "무슨 바람이 불었대. 성직자치곤 불량했던 행실을 드디어 뉘우치기라도 했나보지?” 렐리아의 얄궂은 말에 아럼프는 낮게 웃음소릴 흘렸다. “네가 몰라서 그렇지 원래도 성실한 신자였어.” “아~ 그렇구나. 성실한 신자는 매일같이 도박장 쏘다니고 여자 엉덩이 만지고 그러나보구나~” “그거랑 주신에 대한 믿음은 상관없지-” “전혀 상관없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의 능청스러운 어조를 흉내 내며 렐리아는 예쁜 입술을 이죽거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럼프는 고갤 돌리며 바람 빠지는 웃음을 보였다. 못 이기겠다는 듯 입가엔 고운 미소가 걸려있었다. 한동안 차창너머를 주시하던 그는 나른한 한숨소리와 함께 다시 그녈 돌아보았다. “최근 들어서 성하께서 편찮으셔서 신전 분위기가 많이 어수선하거든. 오늘도 일 있다고 해서 간신히 빠져나온 거야.” “어 그랬어?” "응. 분위기도 그렇다보니까 외부인 출입도 더 엄격해졌어. 그 기사한텐 아무래도 개인적인 방문은 어려울 거라고 전해줘. 그렇다고 내가 사적으로 기사단을 방문하기엔 초면이라 좀 생각해봐야할 것 같아.” “알겠어. 친구 네가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렐리아는 어깰 으쓱하며 그와 다른 화제에 대해 두런두런 얘길 나누었다. 남녀 선을 긋듯 여전히 어딘가 딱딱하긴 해도 올 때에 비하면 확실히 많이 나아진 모습이었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서로가 편해지는 건 그녀로서도 어쩔 수 없나보다. 어느덧 마차는 라콘드 공작저에 다다랐다. 마차가 완전히 대문 앞에 멈춰 서자마자 렐리아는 바닥에 내려섰다. 그 뒤를 따라 내려선 아럼프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렐리아의 손목을 가볍게 쥐어 붙잡았다. 저를 돌아보는 그녀의 얼굴에 아럼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였다. 물론 그답게 바로 매끄럽게 입술을 휘며 능숙하게 대처해버렸다. “잘 들어가. 내일도 만나러올게.” “새삼스럽게 웬 인사?” 그에게 잡힌 손을 빼며 렐리아는 픽 웃어버렸다. 오지 말라고 해도 잘만 올 거면서, 하고 장난스레 덧붙여주려다 먼발치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그쪽으로 고갤 돌렸다. 허나 아럼프는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는지 서둘러 뒷말을 이었다. “저기 렐리아. 내일은 밖에서 단둘이 식사하는 건…” 하지만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끼이익, 하고 끼어드는 불청객의 소음에 아럼프는 순순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웅장한 공작저의 대문이 좌우로 열리며 검은 마차한 대가 위풍당당하게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윽고 마차는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정확히 말하면 렐리아의 앞에. 차창너머의 어두운 커튼을 살짝 손으로 거두며 안에 타고 있던 공작이 고귀한 존안을 드러냈다. 음지에 숨어사는 마귀할멈처럼 깐깐함이 흐르는 얼굴이었다. 창가에 앉아서 오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던 블리어가 별안간 창문을 위로 열어젖혔다. “렐리아.” 다정한 부름이었으나 그의 진녹안은 어서 오르지 않고 뭐하느냐는 예민한 짜증을 담고 있었다. 남은 몰라도 렐리아는 그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아럼프에게 내일 보자는 간단한 인사말을 내뱉고 서둘러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약속시간에 딱 맞춰온 것 같은데 그새를 못 참고 마차에 오른 공작을 보건데 어마어마한 잔소리가 날아오겠지 싶었다. 제 발로 시끄러운 구렁텅이에 기어들어가는 기분이었으나 렐리아는 그나마 덜 잔소리를 듣는 쪽을 택했다. 서둘러 마차에 오른 그녀를 블리어는 조금은 흡족한 눈으로 응시하고선 바로 천장을 두어 번 두드렸다. 출발신호에 마부가 여섯 필의 말들을 일제히 몰기시작하자 마차는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이 떠나고 난 자리에 아럼프는 홀로 붙박인 듯 서있다가 뒤늦게 오후미사에 참례하기위해 대신전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0062 / 0172 ---------------------------------------------- 진심과 가벼움 맞은편에 앉아있는 흑발사내는 본격적인 면접을 진행하려는 면접관처럼 팔짱을 풀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심플한 블랙정장을 입고서 검은색과 청회색의 사선무늬가 엇갈린 넥타이를 매고 있었는데 능력 있고 이지적인 성품의 사업가 같았다. 안경이라도 썼다면 한번 추켜올렸을 지적인 인상은 역시 피해갈 수 없는 깐깐함을 띠었다. “약속시간에서 정확히 팔분 늦었습니다. 대체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겁니까.” “에게? 고작 팔 분?” “고작?” “이 정돈 좀 애교로 봐주면 안 되남? 내가 무슨 면접에 늦은 것도 아니고 지금 옷 사러가는 거잖아.” 대충 넘어가자는 렐리아의 심드렁한 말에도 블리어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본격적인 잔소리의 도화선에 불이 붙이고만 꼴이었다. “그대에게 있어선 고작 일 분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하루 일 분도 아까운 사람입니다. 그것도 쓸데없이 남 기다리는데 사용하는 일 분이라면 더더욱 허락 못합니다. 그대는 종종 내가 이 나라의 공작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단 일분이라도 나와 대면할 수만 있다면 밤새 줄을 설 자들이 이 수도에 수두룩이 널렸는데 그대는 지금 얼마나 제 입장이 분에 과한지 모르나봅니다. 이 나를 기다리게 하질 않나, 평생을 갚지 못할 귀한 은혜를 입은 것과 마찬가지…” 렐리아는 청력을 포기했다. 자신이 탄 마차는 수도의 쇼핑중심지로 향하고 있을 텐데 마차 안은 참혹한 잔소리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듣는 이에겐 끝없는 고통뿐일 테니 일찍이 귀를 포기하는 게 나았다. “…제대로 듣고 있긴 한 겁니까.” 벌써부터 상당한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 듯한 블리어가 날카롭게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차창 밖만 응시하며 대놓고 딴청을 부렸다. 빗질하듯 쏟아져 내리는 흰 햇살을 맞으며 기우뚱하게 머리를 괸 모습은 마치 유리된 세상에 있는 사람 같았다. “하여간….” 못마땅한 듯 낮게 혀를 차며 블리어도 따라 차창 밖을 응시하자 그제야 렐리아가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어둡게 역광이 스며든 옆얼굴은 날카로운 윤곽이 더욱 두드러져있었다. 한없이 무표정한데도 괜히 건드리기 무서운 험악한 인상처럼 보였다. 조금 화났나 싶어서 그의 눈치를 살피다가 렐리아는 슬며시 운을 뗐다. “공작. 오늘 나 데리고 나온 거보면 스케줄이 여유로운 거 아니야? 그러고 보니까 휴일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정해놓은 개인휴일이기에 평소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뿐입니다. 업무를 아예 안보는 건 아닙니다.” 사무적이지만 묘하게 가시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화났네 화났어, 렐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느새 저와 마주보고 있는 그를 향해 어르는 말투를 사용했다. “그래 알겠어. 앞으론 약속시간 전에 도착하는 습관을 길러볼게.” “말로만 그러지 말고 좋은 습관을 좀 들여 보십시오. 그래야 사내에게 예쁨 받을 거 아닙니까.” “그럼~ 공작은 나한테 예쁨 받으려고 그렇게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건감?” 그 은근한 비꼼을 명색의 블리어가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그는 다시 차갑게 고갤 돌리고서 차창너머만 묵묵히 응시했다. 뒤따라온 렐리아의 말에 다소 누그러진 기색을 보였지만. “그래도 애인이라고 꽤 잘 챙겨주네. 그냥 애인이란 이름표만 달았을 뿐인데 같이 옷도 사러 가주고. 보통 남자들 여자 옷사러갈 때 따라가는 거 귀찮아하던데, 공작은 좋은 남자였구나? 이런 점은 전여친들이 좋아했을 듯.” “처음 이래보는 겁니다. 내 성미에 여자 옷 사러 잘도 따라다녔겠습니다.” “어 그래?” 렐리아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가 다시 반달모양으로 접었다. 누가 봐도 능글맞은 눈이었다. “지금은? 지금은 뭐 공작성격이 아닌감? 사소한데서 예민하고 까다롭고 성질 더럽고 근데 이상한데서 또 관용적이라서 마음 넓어 보이지만 역으로 또 까다롭고.” “…대체 칭찬을 하는 겁니까. 내 욕을 하는 겁니까.” “둘 다.” 자신은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한다고 얘기하는 그 뻔뻔함에 블리어는 질린 듯 싸늘한 침묵으로 무시했다. 곧바로 “너무해~”하고 실실대며 그녀가 관심을 구걸하자 그는 몇 마디 툭툭 내뱉어주었다. “예전보다는 좀 누그러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대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남 눈치보며 살기엔 인생은 짧다고.” “그거 책제목인데.” “…아무튼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반듯한 미간이 소리 없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에 렐리아는 건성으로 물개박수를 치며 크게 하품을 터뜨렸다. “도움 됐다니 뭐 다행이고. 인생명언 찾으셨네.” 다시 창가에 기대며 나른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블리어는 등받이에 더 깊게 등을 묻으며 그녀를 관찰했다. 새하얀 콧등에 내려앉은 햇살이 간지러운지 콧잔등을 찌푸리거나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끔뻑끔뻑 대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찌푸려진 미간은 자연스레 펴져있었다. “졸리면 잠깐 눈 붙이지 그럽니까.” 그 말에 그제야 렐리아는 편히 늘어졌다. 도착하면 깨우라는 말과 함께 낮잠삼매경에 빠진 여인은 정말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든 모습이었다. 지켜보는 블리어마저 괜히 평온함에 젖어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는 한동안 체면을 지키기 위해 솔솔 밀려드는 수마와 싸워야만 했다. 약 반 시간 후, 두 사람은 여성복을 전문으로 하는 수도 의상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푹 자다 일어나서 상쾌한 렐리아와 졸음과 싸우느라 한껏 인상이 찌푸려진 블리어가 나란히 부티크 안으로 들어서자 종업원들은 깜짝 놀라 그 둘을 반겼다. 다행히 평일 대낮이라 손님은 별로 없었다. 블리어는 부티크의 한 공간전체를 전세 낸 사람처럼 자리 잡고서 진열된 드레스전부를 일일이 제 앞으로 가져오게 했다. 드레스 고르기는 그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그의 까다로운 안목과 취향을 통과하기란 좁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드레스행거를 이리저리 옮기며 종업원들이 고생하는 동안 렐리아는 몸 치수를 재고 그가 고른 드레스들을 하나하나 입어보는 수고를 치러야만 했다. ‘내 드레스를 사러왔는지, 지 드레스를 사러왔는지. …시밤.’ 렐리아는 속으로나마 욕을 했다. 앉지도 못하고 사십 벌이 넘는 드레스를 벗었다 입었다 하기를 벌써 네 시간째였다. 이정도면 피팅모델 알바수준이 아닌 똥개훈련이라 봐도 되었다. 다행히 정신 놓고 탈의실을 뛰쳐나가 그의 목을 조르기 전에 공작은 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이 정도면 적당하다고 생각됩니다." 최대한 사람을 우아해보이게 만들며 세련되고 귀티가 흐르면서도 단아하고 조촐하지도 않지만 화려하지도 않은 그런 '적당한' 이브닝드레스 외 각기 다른 디자인의 열아홉 벌을 골랐다. 계절별로 외출복, 실내복, 연회용드레스 등 종류도 다양했다. 이왕 나온 김에 본전을 뽑을 생각인지 그는 5개월치 드레스를 일시불로 사들였다. 밴댕이 소갈딱지주제에 마음씀씀이는 정말 허허벌판만큼이나 넓은 그였다. 총 스무 벌의 드레스는 다섯 명의 짐꾼들과 짐마차까지 대동해서 옮겨야만 했다. 렐리아는 타고 왔던 마차에 그와 단둘이 오른 채 머쓱하게 턱만 긁적였다. 이렇게 많이 사줄 줄은 몰랐던 탓이다. “한 두세 벌이면 되는데. 어차피 입고나갈 때도 없잖아.” “그대는 나의 공식적인 애인입니다. 누가보든 안보든 항상 격식에 맞게 몸치장을 차려 갖추십시오. 그러라고 사준 옷들이니 옷장에 있는 조촐한 평민 옷들은 다 버리십시오.” “그 옷들 편했는데.” 버리기 아깝다고 은근슬쩍 투덜거리자 그는 5개월 후에 맘껏 입되 지금은 자기 말에 따르라고 쐐기를 박았다. 렐리아는 하는 수 없이 평민 옷은 버리기로 하고선 도랑도랑하게 물었다. “이거 사는데 총 얼마 들었어?” “그대가 줄 겁니까? 돈이 어디서 나서.” “…나도 벌 땐 잘 벌거든?” “됐습니다. 안 받을 테니 돈 구하러 다닐 허튼 생각 마십시오.” “허튼 생각이라니, 미안해서 그러지.” 렐리아는 창가에 스며드는 노을빛을 따라 맞은편 자리를 바라보며 톡 쏘아붙였다. 붉은 빛이 도는 흑발과 짙은 녹안은 가만 보니 조금 국왕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 왕은 지금쯤 잘 세뇌되어 있으려나 생각하다가 렐리아는 퍼뜩 무언가 떠오른 얼굴을 했다. 바로 드레스 숄을 벗은 그녀는 안쪽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뭐합니까.” “여기 돈 들어있나 싶어서.” “…….” “음…분명 여기다 넣었던 것 같은……아 찾았다!” 그 과정을 블리어는 거지가 쓰레기통을 뒤지는 광경 보듯 지켜보았다. 은화 세 닢을 꺼내들고서 저리 기뻐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예 땡잡았다. 공작, 이걸로 저녁 사줄게!” 그러다 이가 드러날 만큼 새하얗게 웃는 렐리아의 모습에 블리어는 그 기쁜 감정에 조금은 동조해버렸다. 말갛게 끌어올린 입술이 유독 그의 눈에 또렷이 잡혔다. “먹고 들어가자. 휴일인데 외식정돈 가줘야지. 응~?” “뭐 사줄 겁니까.” “공작은 뭐 먹고 싶어? 다 말해봐. 내가 한 턱 쏘는 거니까.” 가슴 언저리를 탕탕 두들기며 렐리아는 호쾌하게 말했다. 일단 이 주변이 식당가라는 점을 상기하고서 렐리아는 곧바로 간이창문을 열어 마부에게 이 근처에 세워달라고 말했다. 그러곤 저 먼저 내리려는 걸 블리어가 한발먼저 나서서 막아섰다. “뭐야- 배고팠나봐?” 렐리아는 저보다 먼저 문을 열고 내려서는 그를 보며 킥킥 웃었다. 그 웃기지도 않을 오해에 블리어는 대꾸조차 않고 그대로 여인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그가 먼저 내린 이유를 알아차리고서 머쓱하게 웃음을 거뒀다. “아까 먼저 내리지 않았습니까. 앞으론 이렇게 에스코트를 기다리는 겁니다. 알겠습니까?” 블리어는 그녀가 제 손을 잡고 마차 아래로 사뿐히 내려서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볍게 충고했다. 차마 낯이 팔려서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지도 않았다. 그에 놓치지 않겠다는 양 블리어는 조금 힘을 불어넣어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그러곤 바로 제 옆으로 오도록 부드러이 끌어당겼다. “걸을 때는 내 팔등에 손을 얹으십시오.” 살짝 고개를 숙여 블리어는 렐리아에게 귓속말로 나지막이 알려주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벌써 사람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모였나 싶었으나 근방에 있는 사람이라곤 지나가는 행인 두 명이 다였다. 두 사람 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쪽은 볼 수조차 없었다. ‘뭐야.’ 남이 보지도 않는데 왜 굳이 귓속말을 해서 팔을 잡으라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렐리아가 슬쩍 옆에서 걷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오로지 정면만 보며 모른 체했다. 날카로운 눈매와는 어울리지 않게 제법 녹진해진 녹색빛 눈이었다. 두 사람은 인적 드문 거리에서 벗어나 시가지로 이어지는 광장에 들어섰다. 호화거리답게 귀족들과 짐꾼들로 북적이는 곳은 흰색돌과 베이지색 벽돌이 고르게 깔려있고 커다란 분수대가 놓여있는 제법 운치 있는 곳이었다. 왕국 수도 가브리나의 명소라 불리는 시계탑 광장이었다. 저녁때라 조금 한산한 것인데도 주위로 수십 명이 동시에 지나다닐 만큼 인파로 넘쳤다. 그들 중 절반가량 되는 귀족영애들이 라콘드 공작을 멀리서부터 알아보고 힐끗거려댔다. 허나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있는 은발의 여인으로 인해 접근조차 못하고 가던 길을 다시 재촉해야만 했다.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이미 왕국 내에서 파다하니 말이다. 렐리아는 이곳에 처음 와본 것이기에 이국적인 시계탑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족히 사층 건물높이는 될 법한 탑의 꼭대기엔 거대한 황금시계가 4면에 붙어있었다. 시계지름만 해도 오 미터는 될 것 같았다. 허나 색색의 유리조각을 박아 넣은 듯이 다양한 광채가 흘러 아름다웠고 시침과 분침, 눈금마저 섬세한 조각물처럼 보였다. 어느새 두 발을 멈추고서 렐리아가 시계탑을 올려다보자 블리어도 따라 멈추고서 그녈 내려다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탑 내부에는 종이 있는 걸로 압니다. 자정과 정오에 종이 울린다고 들었습니다.” “공작은 종소리 들어봤어?”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서로에게만 목소리가 들리도록 두 사람은 도란도란 말을 주고받았다. “그럼 자정까지 기다렸다가 듣고 갈까?” “얼어죽고 싶다면 그러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애인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는 말치곤 지극히 살벌했다. 렐리아는 마치 다정한 말을 들어 행복하게 웃는 여인처럼 입을 가리고 킥킥거렸다. 그러곤 그를 향해 살짝 까치발을 든 채 그의 귓가에 대고 속닥거려주었다. “아니면, 공작 몇 시에 일 끝나지? 자정에 마차타고 잠시 나와서 듣고 갈까? 그리고 근처 술집에서 떠들다가 저택으로 돌아오면…” 벌써부터 즐겁게 놀 생각만 하며 속삭거리다가 렐리아는 그의 어깨를 쥔 손이 조금 떨린다고 여겼다. 아니 그의 몸도 따라 떨렸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었던 두 발을 다시 지면에 내려두고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지가 떨리고 있었다. 0063 / 0172 ---------------------------------------------- 진심과 가벼움 ‘…지진?’ 그건 자신만이 느낀 게 아닌지 주위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서 ‘어, 어’하는 소리를 냈다. 분수대의 물이 출렁이고 어린아이가 놀라 들고 있던 인형을 떨어뜨렸다. 우드드득, 트득. 암벽에서 바위덩어리가 굴러 떨어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숨 막히는 불안감을 조성했다. 멀지않은 곳에서 들려온 소리는 점차 크게 들려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라 여길 때였다. 구구구구구궁ㅡ 쿵, 쿠구궁. 시계탑 너머에서부터 연달아 굉음과 먼지, 그리고 하늘을 찌를 듯한 놀란 비명소리가 허공을 뒤흔들었다. 비명아래 깔린 무거운 굉음은 철거현장에서나 들을 법한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거대한 소리가 수차례 울리기 무섭게 수백 명의 사람들이 건물에서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었다. 흠칫하고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땅도 강하게 흔들려서 자칫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질 뻔했으나 옆에 있던 그가 저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렐리아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편편하던 흰색과 베이지색 벽돌이 울퉁불퉁하게 솟구쳐 오르고 땅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 이게 대체,” “렐리아! 이리로.” 두려움에 질린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는 그 아수라장 속에서 렐리아는 블리어가 이끄는 대로 달렸다. 중간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동안 어느새 그의 커다란 손은 렐리아의 작은 손을 꽉 쥐고 있었다. 세게 맞물린 두 손을 내려다보다 렐리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낙조의 하늘은 더 이상 평화롭지 못했다. 티비 속에서만 보던 재난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검은 그림자로 물든 새떼가 살기위해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광경을 바라보다 렐리아는 어느 높다란 첨탑지붕 위에 서있는 인영을 스치듯 발견했다. 노을 위에 수놓듯 짧게 휘날리는 은발. 곧이어 지붕 뒤로 모습을 감추는 은빛머리칼에 그녀가 불길함을 느낄 때다. 렐리아는 비스듬히 고갤 위로 쳐들어 올렸다. 시계탑의 꼭대기 부분이 닳아 떨어지는 것처럼 처참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정확히 자신의 머리 위로. 사고가 정지한 순간이었다. 끼이이이익, 끼기긱. 쇠가 구부러지는 기이한 소리와 함께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웅장한 크기의 석재가 하늘에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짙은 그림자가 점점 크게 졌다. 그 눈 깜빡할 짧은 순간, 렐리아는 제 손을 붙잡고 있던 그를 강하게 밀쳐내었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거대한 모래폭풍이 피어올랐다. 아슬아슬하게도 블리어는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튕겨나갔다. 벽돌바닥에 어깨부터 찧고서 옆으로 다섯 차례 넘게 굴렀으나 어디가 탈골되거나 하진 않았다. 블리어는 무사했으나 정작 그의 주위로 참혹한 생지옥이 펼쳐졌다. 시계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이 차례차례 무너지더니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을 동시에 짓뭉개버렸다. 짙디짙은 모래먼지가 이는 그 속에서 건물이 부서지고 생명이 으스러지는 고통의 찬 비명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올랐다. 콰과과광ㅡ 이삼 층짜리 건물 외벽이 거리에 주저앉더니 사람들의 몸을 뭉개고 그 위로 또 한번 시계탑의 중간부분이 기울어지며 쓰러졌다. 커다란 건축물 잔해아래에 깔린 수십 명의 인간은 신발에 밟힌 개미 꼴을 면치 못했다. 광장 중앙에서 블리어는 호흡 때문이라도 잠시 엎드려있어야만 했다. 모래먼지가 가라앉자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제야 바르작거리며 힘겹게 고갤 쳐들었다. “…….” 깁스를 한 왼손으로 그는 바닥을 짚었다. 지끈거리는 통증조차 무시하고 상체를 세우고선 그제야 참담한 정경을 먼지 낀 시야에 담았다. 바랜 누런 먼지가 내려앉은 검은 구두는 광을 잃은 지 오래였다. 발치에는 사람 머리만한 건물의 잔해들이 떨어져있었다. 처참히 부서진 흔적아래에는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피와 뇌수를 흘리며 쓰러져있었다. 방금 전만 해도 호화거리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전쟁보다도 잔인했다. 블리어는 아비규환이 된 주위에 살아남은 자들의 통곡을 들으며 먼 곳을 응시했다. 자신이 서있던 자리를. 그 여자가 서있던 자리를…. 작은 두 손으로 저를 세게 밀쳐내던 그 순간이 자꾸만 생생하게 머릿속에 반복되었다. 그 익숙한 얼굴이 자꾸만 밟혔다. 아까까지만 해도 웃고 얘기를 나누었던 여자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저 무너진 돌탑의 잔해 속에 그 여자가 깔렸다. 그는 움직이려했으나 쉽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혈류가 멎고 심장이 멈춘 기분이었다. 블리어는 따끔따끔하게 쑤시는 왼손으로 바닥에 세게 짓누른 채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비가 된 정신을 깨우려 노력했으나 역시나 되질 않았다. 물에 잠긴 것처럼 그는 잠시 숨이 막혔다. “…렐리아.” 잔뜩 가시에 긁혀 나온 것처럼 껄끄러운 목소리가 굳은 입매사이로 흘러나왔다. 돌가루가 입안에 굴러다니는 기분이었다. 살아있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블리어는 그녀를 불렀다. 거대한 건물잔해를 치우고 직접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게 얼마나 우습고 어리석은 짓인지 알면서도 그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고를 거부했다. 그런 그의 뒤로 돌연 커다란 남자손이 뻗어져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검은 머리칼을 한 올 건드리기 무섭게 블리어는 쏟아져오는 수마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뒤를 돌아보겠다는 의지하나만으로 꼿꼿이 고갤 세웠으나 그마저도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먼지투성이 바닥위에 공작이 순순히 몸을 뉘이자 그제야 그 옆을 지나치는 한 남자가 있었다. 수백 명이 죽고 다친 사고현장임에도 남자의 걸음엔 주저라곤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참혹한 광경 속에서 흙먼지 한 톨 묻지 않는 찬란한 금빛머리칼이 부드러이 나부꼈다. 물결치는 기다란 금발아래 농도 짙은 황금빛 눈이 자리했다. 수많은 군중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 없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여인치고는 선이 굵은 턱선과 음영 짙은 눈매는 완벽에 가까웠다. 허나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생존자들의 눈에 그 외모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남자는 광장의 중심지에 섰다. 영롱한 금실이 놓아진 수의가 손목아래까지 올라온 두 손이 허공에 들어 올려졌다. 지휘라도 하듯이 가벼운 손짓이었으나 그 손끝에서부터 넘실거리는 금빛 줄기가 타고 올라왔다. 선율처럼 잔잔하게 퍼져 나온 빛줄기는 서서히 엮이고 얽히면서 거대한 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붉은 자색으로 물든 저녁하늘 위에 태양을 쏘아올린 것처럼 강렬했다. 거대하게 뭉친 환한 금빛은 이윽고 사방으로 하얗게 터져나갔다. 아비규환 속에서 심장을 쥐어짜듯 절규하던 생존자들은 하나둘 빛을 좇으며 고갤 돌렸다. 먼지와 뒤섞여 뺨을 타고 흘러내리던 그들의 눈물이 잠시 멎었다. 빛줄기가 닿는 곳곳마다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다리에 피가 철철 흐르던 짐꾼은 피가 멎었고, 팔이 부러졌던 귀부인은 다시 뼈가 붙었다. 고통을 호소하던 어린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잔해에 신체 일부분이 깔려있던 자들은 서서히 붕 떠오르는 벽을 올려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이끌어내고 있는 남자를 향해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휘황찬란한 금빛에 휩싸인 것 같은 남자. 이윽고 그에게서 뻗어져나간 황금줄기가 시계탑의 부서진 꼭대기 잔해에 닿았다. 성인 스무 명이 동시에 밀어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던 거대한 잔해가 서서히 아래에서부터 들려지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벽돌바닥이 움푹 파였을 정도인데 그 아래에 사람이 깔렸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했다. 두개골은 산산이 파훼되고 안면은 움푹하게 일그러졌을 테다. 아마 원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뼈와 살이 뭉개져있을 터였다. 허나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작은 탄성에 다시 수많은 시선들이 그곳으로 모였다.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아래에는 역시나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끔찍하게 짓눌려터진 시체가 아닌 아리따운 여인이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은발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의 주변에선 금빛이 일렁였다. 마치 그녈 보호하듯이. 렐리아는 눈을 감은 채 미약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추락한 대형석재가 몸 위를 내리누르는 것치곤 숨도 쉬어지고 몸도 너무나 가벼웠다. 이상하다 싶어서 눈을 뜨니 제 몸을 덮치고 있는 깜깜한 그늘을 몰아내는 금빛막이 있었다. 반투명한 유리관처럼 저를 네모나게 둘러싸고 있었다. 방어막인 건가 싶으면서도 그녀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상체를 일으키고도 남을 정도의 높이에서 떠있는 대형석재는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공사장 대형크레인이 아니고서야 사람이 들어 올릴 수 없는 무게였다. 의문을 품고 천장처럼 떠있는 잔해를 노려볼 때 귓가로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벌어진 틈사이로 고개를 돌리니 구두 한 켤레와 긴 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공작인 걸까 싶어서 빤히 쳐다보는데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몸을 굽히며 제게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정신이 드나요?” 웬 처음 보는 남자였다. 미려하게 일렁이는 긴 금발과 휘어진 고운 단홍빛 입술. 자애롭게 그려진 명화 속 세기의 미인이 캔버스를 찢고 나온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눈부신 외모였다. 괜히 눈을 떴나, 렐리아는 골치 아프게만 됐다고 여겼다. 허나 눈앞까지 뻗어져온 큰 손을 차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낯선 이의 손을 맞잡고서 그녀는 밖으로 끌려나왔다. 남자는 끝까지 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주었다. 동시에 주위에서 쏟아져오는 수많은 시선들에 렐리아는 지금이라도 기절하는 척해야하나 싶을 때였다. 별안간 남자가 왼손을 가볍게 잡아들어 올리며 그녀의 검지를 눈짓으로 가리켜보였다. “아가씨가 멀쩡한 건 다 이 마법반지 덕분인 것 같네요.” “이게 마법반지‥라고요? 선물 받은 거라….” 렐리아의 혼란스러운 표정에 남자는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실드마법이라고 들어봤나요? 상당히 강한 마나를 담고 있는 반지이니 귀중히 여기세요. 선물해주신 분께 감사해야겠네요.” 언니가 귀한 반지라고 당부하던 이유가 이거 였구나. 렐리아는 제 검지에 껴있는 가느다란 금반지를 내려다보았다. 잘 때도 안 빼놓고 살았는데 이것덕분에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마도구도 없이 몸 멀쩡히 살아나왔다면 수많은 이들이 인간의 탈을 쓴 괴물이라고 저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봤을지 모를 일이었다. “…아.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뒤늦게 렐리아는 그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갤 숙였다. 끔찍한 재앙을 목도한 후유증 때문인지 혼이 나간 듯 조금 정신이 없었다. 허나 멍한 상태에서도 이 불가사의한 힘을 다루는 남자가 누군지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근데 실례지만 누구신지…” “왕실마법사 가브란이라고 합니다.” 왕실에서 철저하게 보호한다는 그 고급인재였다. 0064 / 0172 ---------------------------------------------- 진심과 가벼움 렐리아는 다시 한 번 그에게 감사하다고 머릴 숙인 후 몸을 돌렸다. 다시 한 번 처참한 광경이 그녀의 뻑뻑한 두 눈에 빼곡히 들어찼다. 완전히 무너진 시계탑과 석재건물들은 폭격을 당한 것처럼 쑥대밭이었다. 회색먼지와 부서진 돌의 잔해가 광장 위를 덮쳐 빛바랜 삭막한 풍경을 그리고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마저 메말라가고 눈자위는 더없이 건조해졌다. 어린아이가 주위에서 뛰놀던 아름다웠던 분수대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다. 돌덩이가 굴러다니는 그 주변에서 한 귀부인이 죽은 소년을 끌어안고 서글피 울고 있었다. 그녀뿐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은 피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호소할 길 없는 비탄한 심정을 구슬프게 토해냈다. 대부분 가족, 애인, 친구를 살려달라는 말이었다. 듣는 사람까지 먹먹하게 만드는 울음소리를 지나쳐 렐리아는 돌바닥위에 누워있는 공작에게 다가갔다. 먼지가 내려앉은 새까만 정장과 검은 머리칼은 혼탁한 잿빛으로 보였다. 정신을 잃은 건지 창백하게 질린 낯은 핏기라곤 없었다. “공작…일어나봐. 집 가야지.” 그의 옆에 몸을 낮춰 앉아 렐리아는 그를 불렀다. 하지만 깊이 잠이 든 블리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렐리아는 그를 깨우는 대신 어디 크게 다치진 않았는지 머리나 깁스한 왼손 주위로 살폈다. 그리고 부축하듯이 그의 어깨를 안아 상체만 일으켜 세운 후 저보다 머리하나는 더 큰 남자를 등에 업었다. 작은 개미가 저보다 더 큰 과자조각을 옮기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형태였으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말없이 걷다가 렐리아는 근처에서 죽은 여자를 끌어안고 눈물을 훔치는 초라한 안색의 노모와 눈이 마주쳤다. 딸 또래를 보니 더욱 서러워지는지 노모는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먼지 낀 딸아이의 뺨이 늙은 어머니의 눈물로 씻겨 내려갔다. 렐리아는 고갤 돌렸다. 희뿌옇게 보이는 시야 속에서 시계탑 광장을 벗어나는 출구를 찾아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그녀는 무슨 정신으로 공작저까지 온 지 알 수 없을 만큼 그저 멍했다. 마차를 타고 공작저 정문에서 내린 렐리아는 블리어를 업고 일부러 후문으로 돌아갔다. 기절한 그를 업고 들어오면 저택 안이 한바탕 소란스러워질 테니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뒷문으로 들어섰다. 늦은 저녁, 점등이 된 구석복도를 굳이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렐리아는 평소 사용인들도 잘 사용하지 않는 간이계단을 이용해 그의 방으로 들어갔다. 호화스런 방안은 커튼이 쳐져있어 푸른 어둠으로 물들어있었다. 늘 웃고 떠들던 장소가 맞는지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오싹함이 흘렀다. 넓은 침대 위에 그를 눕히고서 렐리아는 잠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그를 지켜봤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가 부러웠다. ‘차라리 공작처럼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을 텐데.’ 모든 게 다 귀찮게만 여겨졌다. 자신도 그냥 누워서 쉬고 싶었다. 하지만 점점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그럴 수가 없었다. 렐리아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소리 없이 방을 벗어났다. 처음부터 아무도 오지 않았던 것처럼 방안엔 그 홀로 누워있을 뿐이었다. * 그녀가 떠나고 한 시간 가량 지나서야 블리어는 눈을 떴다. 그는 한동안 익숙한 천장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디부터가 꿈이었고 어디까지가 꿈인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지끈거리는 왼손의 통증에 그제야 블리어는 인상을 쓰며 힘겹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둠에 적응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흙이 묻어 더러워진 정장과 구두였다. 블리어는 끔찍한 악몽이라 여겼던 그 모든 일들이 현실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건물이 차례차례 내려앉고 높은 시계탑이 무너져 내리던 그 아찔한 순간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되풀이되니 신경줄이 해지고 닳는 기분이었다. 일반인이라면 감당키 힘든 정신적인 고통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잠시 사고후유증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다가 아주 뒤늦게야 이성적인 사고를 깨울 수 있었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고 한들 구두도 벗지 않고 흙먼지가 묻은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을 리는 없었다. 애초에 제 발로 방에 돌아온 기억이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누군가 자신을 옮겨왔다는 것일 테다. 불현 듯 그런 생각이 들자 블리어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방에서 벗어났다. 왼손을 감고 있던 붕대의 매듭부위가 느슨하게 풀려있었으나 그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택 안에서 숨소리가 거칠어질 정도로 뛰었다. 먼지로 뒤덮인 손가락을 타고 붕대가 스르륵 풀려 내려가더니 소리 없이 복도바닥에 떨어졌다. 블리어는 어느 방 앞에 도달하기 무섭게 오른손으로 거칠게 문을 젖혀 얼었다. 망나니짓을 일삼는 철없는 귀족자제나 할 만한 품위 없는 행동이었다. “…….” 문가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고서 숨소리가 차분하게 잦아들어가는 걸 느꼈다. 달려온 것이 무색할 만큼 다급함, 절박감 따위의 감정이 빠르게 멎어들어만 갔다. 불 꺼진 빈방의 모습에 그제야 블리어는 황량한 빈손에 억지로 현실감을 쥐었다. 이럴 리가 없지. 잔뜩 먼지를 들이켠 목에선 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왜곡된 기억을 다시 바로잡을 수 있었다. 뒤에서 느껴졌던 인기척, 동시에 제 관자놀이 너머로 보였던 웬 남성의 손. 그 뒤로 기억이 없으나 옮겨왔어도 그 남자가 자신을 옮겨왔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블리어는 한동안 여자의 방에서 나가지도 들어서지도 못한 채 문고리만 세게 쥐었다. 따지고 싶은데 따질 인간이 이 방안에 없다는 사실에 문득 공허한 기분을 느꼈다. 여전히 그 처참한 현장에 깔려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드니 사고현장에서 느꼈던 그 기분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심장의 핏기가 싹 빠져나간 느낌과 더불어 욕이라도 하고 싶은 욱한 감정이 치밀었다. 왜 이렇게 목구멍이 욱신거리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왜 그 자리에서 자신을 밀쳐낸 건지 묻고 싶었다. 왜 그랬냐고 진정 그녀에게 묻고만 싶었다. 자신이 이렇게 죄책감을 느낄 걸 그 여자는 알았을까 라고 생각한다면 전혀 아니다 라는 답이 나온다. 순 저 밖에 모르는 그 뻔뻔한 여자에게 조금의 섬세함이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차라리 같이 깔리는 게 더 마음 편했으리라. 블리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손톱아래와 손금에 낀 흙먼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는 메마른 손으로 눈가만 쓸어 만졌다. 먹먹한 한숨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는 시간개념이 없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문가에 서 있다가 등을 돌렸다. 왠지 그 여자라면 죽지 않고 살아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죽을 고비를 악착같이 넘겨왔으니 이번에도 끈질기게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드니 그의 걸음은 절로 빨라졌다. 서둘러 저택에서 벗어나려할 때 블리어는 맞은편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속도를 줄였다. 그러곤 환하게 조명등이 켜진 중앙복도에서 걸어오고 있는 한 인영을 주시했다. 워낙 멀리 떨어져있는데다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으나 조금 작은 키에 빠른 걸음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두 가지 단서에 블리어는 그쪽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윽고 확인한 얼굴과 체형은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빼빼마르고 작았으나 엄연한 시종이었다. “무례를 용서해주시길. 방금 왕궁에서 급서가 도착했습니다.” 시종은 무릎을 꿇고서 공손하게 급서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블리어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급서내용을 확인하고서 당장 왕궁으로 갈 마차를 준비할 것을 명했다. 다시 반대편으로 황급히 달려 나가는 시종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블리어는 깊은 허무감을 감춰야만 했다. 스스로도 뭘 기대한 건지 이젠 모르겠다. * 왕궁 긴급 소집회에 불려온 총 아홉 명의 귀족들과 왕의 본격적인 회의가 진행되었다. 공개적인 왕실 회의장에서가 아닌 개국공신가의 가주들로만 이루어진 비공식적인 자리였다. 오로지 아홉뿐이었으나 나라의 5대 공작과 네 명의 최측근들이었다. 이들만으로 나라를 움직이기엔 충분했다. 그들이 긴급히 소집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수도중심지에서 일어난 재앙을 방불케 한 사고 때문이었다. 그 사고현장에 있었던 블리어가 제대로 된 단장도 하지 못하고 회의실에 들어섰을 때 귀족들은 무거운 침묵을 지켜야만 했다. 직접 현장에 가보지 않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먼지를 뒤집어쓴 그의 행색만 봐도 현장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피해도 상상이상으로 심각했다. “인명피해는 사망자 243명, 부상자 84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그 중 사망한 자는 지방귀족이 118명, 귀화귀족이 2명, 중앙귀족이 59명, 타국인이 10명, 평민신분이 54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국왕 라델리우스는 높은 상석에서 보고를 들으며 눈을 깊게 감았다가 떴다. 눈가에 짙은 주름이 남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지 젊은 왕의 얼굴엔 수심이 가득 떠올라있었다. 유능한 최측근 중 한명의 보고를 주의 깊게 듣는 동안 안색은 더욱 어두워져만 갔다. “기록에 따르면 천 년간 한 번도 지진이 인 적이 없습니다. 헌데 최근 들어 지축이 여러 번 흔들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수도 중심으로 말이지요.” “제가 생각하기엔 말입니다.” 평소 인자하던 목소리를 무겁게 짓뭉개며 맥더프 공작이 끼어들었다. “이 이상현상들이 라콘드 공작령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무슨 얘기이십니까.” 블리어는 회의시작부터 상념에 잠긴 채 까칠한 턱만 문지르다가 저의 가문이 언급되자 그제야 반응을 보였다. 손을 내리고 냉정하고 곧은 시선을 맥더프 공작에게 주었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란게르드 산맥에서였지요. 몬스터 떼가 산기슭에서 출현하던 그때의 괴현상 말입니다. …란게르드하면 다들 뭐 짚이시는 거 없으십니까?” 맥더프는 하얗게 센 턱수염을 거친 손으로 문지르며 주변 반응을 살폈다. 그에 가장먼저 동조한 것은 마법가문으로 알려진 타렌치오 공작가의 가주였다. “사실 이번 비상사태는…저로서도 실버드래곤의 소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리가! 지금 봉인이 풀렸다고 말하는 거요?” “그것이 깨어났으면 이 왕국은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소.” 흥분한 노령의 측근과 그 옆에 앉은 칼토바스 공작이 경고하듯이 엄중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타렌치오는 단순히 추측만으로 말하는 게 아닌지 심각하게 운을 뗐다. “왕궁 최상위급 마법사들이 거대한 마나의 흐름을 감지했습니다. 이번 재앙은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지진도, 우발적인 사고도 아닙니다. 시계탑광장 전체를 둘러싼 대마법진의 발동으로 인한 계획적사고입니다. 민간인을 상대로 학살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타렌치오 공. 그게 사실이오?” “믿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이럴 수가….” “…그렇담 이를 어찌하란 말이오.” 회의실안은 곧 절망어린 탄식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젊은 국왕은 마른한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눈가를 짚었다. 갑작스런 종말설에 모든 이들은 잠시간의 휴식이 필요해보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이 위급한 상황을 앞두고 말을 아낄 수는 없었다. 타렌치오 공작은 나이 있는 자들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어나갔다. “수도에 나타난 이상증세들이 이것 말고 또 있었을 터입니다. 최근 왕궁기둥에 금이 발견돼 복원마법이 진행된 걸로 압니다. 실드마법과 경계수위를 최상단계로 올렸습니다만, 왕궁도 안전할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만일…정말로 실버드래곤이 깨어난 것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실버드래곤이 깨어난 것은 확실하다고 봅니다. 천년 동안의 봉인도 약해졌을 터…, 기나긴 잠에서 깨어나 저희 인간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땅에서 나가라는.” “……왕국의 역사도 여기까지 인 것인가….” 누군가의 허무한 중얼거림에 몇몇 노령의 측근들이 민감하게 반응했으나 그렇다고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진 못했다.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물들이던 그들도 곧 현실을 깨닫고 절망에 잠겨들었다. 단시간만에 초췌해진 면면들은 믿기 힘든 감정들로 얼룩져있었다.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하루아침에 대륙의 지도에서 바일롯의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을, 어떻게 맨 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 땅은 예로부터 드래곤이 소유하고 있던 영토 아니겠습니까. 왕국민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 함은…실버드래곤에게 이 영토를 돌려주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럼 백성전체를 피란민으로 해서 타지로 내보내란 소리입니까.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렇지 않는다면 대학살이 일어나겠지요.” 이제껏 긴 말을 한 타렌치오 대신에 맥더프 공작이 한마디 했다. 왕은 침묵을 지키고 다른 이들도 그렇다할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실버드래곤을 상대로 협상을 하자는 등의 우스운 발언조차 나오지 않았다. 0065 / 0172 ---------------------------------------------- 진심과 가벼움 “골드드래곤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저희에겐 희망이 없습니다…다들 아시지 않습니까?” 타렌치오 공작의 발언이 묵직한 침묵을 깨고 이 절망적인 상황에 마침표를 찍었다. 천 년전, 역사 속에 모습을 감추었던 골드드래곤만이 이 상황을 타파할 유일한 비상구이자 그들이 기댈 수 있는 희망이었다. 실제 바일롯 왕국의 건국은 현재 왕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 건국사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 차이가 현실과 동화라고 봐도 될 만큼 말이다. 바일롯 왕국이 터를 잡기전의 대지는 척박한 땅도, 하물며 곡식이 자라지 않는 땅도 아니었다. 드래곤들이 터를 잡고 있던 땅이었을 뿐이었다. 드래곤이 한 지대에 계속 머무르면 생명이 시든다는 설과는 달리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영토였다. 보석은 끝없이 넘쳐나고 생명은 활기를 띠었고 곡식은 풍요로웠다. 그 미지의 땅을 처음으로 탐낸 자가 바일롯의 초대 국왕 바일로트 1세였다. 역사서에 서술되어있는 바처럼 바일로트 1세는 골드드래곤에게 세상에서 가장 값진 황금을 바쳤다. 하지만 이 뒤는 역사서의 서술과는 달랐다. 골드드래곤은 현재의 수도를 얻기 위해 그 땅의 원래 주인인 어느 드래곤을 몰아내었다. 인간의 왕과 함께 나라를 세운 골드드래곤은 인간의 관점에서 봐도 좋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건국사는 미화가 된 것이다. 골드드래곤이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들었으며, 부를 창조해 왕실은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는 것도 사실은 전부 드래곤에게서 훔친 영광이었을 뿐이었다. 단순히 듣기 좋은 미화에 지나지 않은 동화 같은 얘기였다. 그리고 그것에 유일하게 반발했던 드래곤이 실버드래곤이었다. 허나 골드드래곤은 그의 땅을 강제로 빼앗은 것도 모자라 실버드래곤을 란게르드 산맥에 봉인하였다. 이 사실은 건국초기 당시부터 극비리에 부쳐져 나라를 지탱하는 9명의 개국공신의 귀족들만이 알았다. 반역을 도모하거나 나라를 위협하려는 자들이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실버드래곤을 깨울 가능성이 있기에 국왕을 제하고 같은 왕족들도 알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물론 봉인을 푸는 방법은 국왕조차 알지 못한다지만 범국가적인 위험대상인 만큼 실버드래곤의 존재는 극비사항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실버드래곤이 천년이 지난 지금 깨어났다는 사실은 왕국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봐도 되었다. 국왕은 물론이고 자리해있는 모든 귀족들은 종말의 위기를 맞이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면면이었다. 단 한 사람을 제하고서 말이다. “직접 사고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블리어는 회의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껏 얘기를 제대로 들은 건지 만 건지 평소의 냉철하기로 알려진 공작답지 않게 어딘가 혼란스럽고 멍한 낯이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꼴로 회의장에 들어서질 않나, 긴급회의 중에 딴 생각을 하고 있질 않나, 이미 남 신경을 안 쓴지 오래였다. 실제로 현재 그의 눈에 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한시 바삐 시계탑 광장으로 가봐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은 포화상태를 달렸다. 블리어는 국왕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의장을 거의 뛰쳐나가듯 벗어났다. 그 예의에 한참 어긋난 행동에도 귀족들은 왕국의 멸망설에 라콘드 공작이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거니 하고 넘어갔다. * 돌가루가 묻은 로브와 패딩을 벗어 마차 한편에 처박아두고서 렐리아는 도착한 곳에 내렸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왕궁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제2기사단이었다. 사람이 넘지 못할 높이의 철대문은 봉쇄된 지 오래였으나 렐리아를 막을 순 없었다. 두 개의 까만 창살을 양 손으로 쥐고서 벌리니 손쉽게 좌우로 휘어졌다. 렐리아는 그 사이를 통과해 기사단 안으로 들어섰다. 해가 진 어두운 연무장을 가로질러서 그녀가 도착한 곳은 기사들의 기숙사였다. 텅 빈 복도를 걸어서 렐리아는 어느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했다. 삼 초가량 지났을까, 문 너머에서 철컥 하고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은색머리칼은 오늘따라 더욱 성스럽고 영롱한 빛이 흐르는 듯했다. 렐리아는 곧바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남자의 멱살을 빠르게 낚아채었다. 어느새 방안으로 밀고 들어와선 방주인을 닫힌 문 앞에 세워놓은 렐리아가 아니꼬운 듯 남자를 노려보았다. 이번에도 그는 순수하게 놀란 눈을 하고서 저를 얼떨떨하게 내려다보았다. 대놓고 저를 능욕하는 것 같아 렐리아는 기분이 더럽기만 했다. “저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자꾸 발뺌할래? 너……새끼, 지붕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잖아! 나랑 눈 마주칠까봐 숨는 거 다 봤다고!!” 렐리아가 작게 욕설을 뱉자 이스티온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두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곤 일단 진정해보라며 여자의 가녀린 어깨를 붙잡았다. 다짜고짜 멱살을 잡힌 사람치곤 태연한 행동이었다. 보기에도 자신보다 작은 이 여인이 뭘 할 수 있겠냐는 믿음 때문이었다. 허나 렐리아는 여기올 때만 해도 눈앞의 남자가 본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계속 두들겨 팰 생각이었다. 막상 그 선하게 휘어진 눈매와 착해빠진 얼굴 때문에 못 건드리게 된 것뿐이었다. 괜히 애꿎은 애 잡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만 하고 있는 자신에게 울분이 치미는 건 당연했다. 어차피 게임인데 이 새끼를 패 죽여도 현실에서 죄가 되는 것도 아니다. 눈앞에서 사람 수백 명이 죽는다고 해도 어차피 게임이다. 어린아이가 죽는다고 해도, 일가족이 죽는다고 해도 어차피 게임이다. 어차피 게임인데……. 그렇게 수백 번은 다짐했는데 막상 손이 안 나갔다. 건물이 무너지게 할 수도 있고 수천수만 명을 학살할 수 있는 힘을 가졌으면서 이 눈앞에 있는 남자를 한 대 때리는 것조차 못하는 자신이었다. “날 그렇게나 죽이고 싶어 했잖아, 어? 그럼 죽여 봐. 여기서.” 말은 그렇게 해도 렐리아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람의 정신을 농락하는 이 게임 때문에. 몇 번이나 눈뜨고 죽는 체험을 하는지 차라리 순간적으로 기절하는 기능이라도 만들어주었으면 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깔아뭉개졌지만 이번에는 하필이면 지진이었다. 대형잔해에 깔리던 그 찰나의 기억 때문에 현실로 돌아가면 하늘보기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실제가 아니라는 것만이 유일한 심리적인 안정과 위로가 되었다. 맨 정신을 계속해서 피폐하게 만드는 주제에 말이다. 이 게임세계 자체가 병주고 약을 주는 꼴이었다. “암만 게임이라고 해도…좆같아서 못하겠네.” 렐리아는 결국 그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게임이면 속 풀릴 때까지 깽판을 쳐도 되는데, 병신같이 끝내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었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기도가 콱 막히는 기분이 들만큼 답답함은 쌓여 가는데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다. 제 처지를 이해해줄 사람이 없다. 출구가 없는 작은 방에 갇힌 기분이었다. * 허락받지 않은 자가 들어서면 목이 댕강 잘려나간다는 왕의 침실. 왕국 내에서 가장 호화스럽다고 불리는 방답게 황금과 백은으로 두루 치장되어있었다. 하지만 방안은 조도 낮은 조명으로 인해 어두움을 몰아내기보단 어둠과 공존했다. 커다란 창에서 부어내리는 쓸쓸한 달빛을 조명삼아 젊은 국왕은 홀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분부하신 대로 시계탑 광장에 나타난 금발남자에 대해선 조사하는 중입니다. 허나 아직까지는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옆에 선 최측근 위터 백작의 보고를 들으면서 라델리우스는 깊은 근심에 잠긴 얼굴을 했다. 황홀하다 자자하던 외모는 빛을 잃은 지 오래였다. "장발에 금안이라는 희귀한 외관을 소유한 자입니다만 아직까지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건 타국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 왕실 정보기관은 타국으로 범위를 넓혀 신원파악에 나서고 있는 중입니다.” 라델리우스는 긴 침묵을 지키다 이어지는 말에 턱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경은 어떻게 생각하지.” 굳이 보고서를 읽지 않아도 그 남자가 한 기적 같은 일이 수도에 파다하게 알려진 상황이었다. 신비로운 금빛마나를 자유자재로 다루던 남자. 그 참혹한 재앙 속에 한 줄기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진 남자. 대기에 부유하는 마나들만으로 건물을 떠올릴 정도의 강한 마법적 힘을 가졌으며 고급계열의 치유마법을 손가락 구부리듯 손쉽게 사용했다. 타렌치오 공작을 따로 불러다 사견을 묻기를 그자가 천 년 전에 모습을 감춘 골드드래곤일 가능성이 크다는 답변을 얻었다. 혹은 그 동족, 후속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그 정도의 마법위력을 내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백여 명의 마법사들이 동시에 마법진을 시동시켜야 한다고 했다. 바로 그 자에 대해 조사관 및 추격대를 파견했으나 아직까지 아무런 소득조차 없었다. “저로서도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심스러운 말씀이오나, 그 위대한 마법으로 왕국을 수호하려들지 모르겠으나 일단은 실버드래곤과 대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뭐지.” “긴급회의를 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들어온 정보입니다. 시계탑 광장에 웬 수상쩍은 자가 나타나 시신수습과 건물 철거를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수상쩍은 자?” 라델리우스는 가느다란 눈썹을 슥 치올리며 입술에서 차가운 잔을 뗐다. 입김이 서린 잔 표면은 금세 다시 투명해졌다.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키는 160대 초중반으로 추정되며 확실한 건 신장이 작은 남자라는 것입니다. 체형이 상체만 비대하게 우락부락했다고 합니다.” 사무적인 보고였으나 라델리우스는 어떤 치욕적인 언사라도 들은 것처럼 잠시 낯빛이 굳었다. 그는 불안정한 시선을 감추기 위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술병을 쥐어들었다. 이미 반쯤 채워진 잔에 또다시 술이 부어졌다. 황금빛의 농익은 과실주가 넘치기 직전까지 잔 가득 출렁였다. 들이켜는 순간에도 갈증이 나 라델리우스는 계속해서 잔을 비워나갔다. 말없이 술만 묵묵히 들이켜는 왕의 모습에 위터 백작은 소파 옆에 서서 걱정스레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평소 잘 찾지 않는 도수 높은 술을 최근 들어 자주 찾으니 심리적인 부담감이 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몸 생각을 하시라고 간언을 올리려했으나 때마침 방밖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에 위터 백작은 입은 다물었다. 그러곤 왕을 대신에 직접 문으로 걸어가 찾아온 이를 맞이했다. 머리 숙인 근위대들의 환영을 받으며 서있는 자는 왕의 하나뿐인 약혼녀 다이아나 올르아였다. “오랜만이네요. 백작.”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르아 공녀님. 폐하께선 안쪽에 계십니다. 그럼 저는 이만.” 위터 백작은 마침 찾아와준 공녀에게 뒤를 맡기고서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자신보다는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될 터였다. 백작이 나가고 방안에 단 둘이 남게 되자 다이아나는 그제야 소파에 앉아 술잔만 비우는 사내에게 다가섰다. “술 언제까지 마실 건가요. 리우스?” 그 목소리에 그제야 라델리우스는 취기가 오른 눈으로 그녈 돌아보았다. 야심한 시각에도 한낮에 뜬 태양처럼 따스하고도 눈부신 여인을. “오늘 긴급소집회가 열렸다고 아버지께 들었어요. 회의결과가 좋지 못했나요.” 다이아나는 안타까운 눈으로 라델리우스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보석을 갈아 뿌린 듯 환하던 금발은 방분위기 탓인지 칙칙하게만 보였다. 며칠 새에 날렵하던 턱은 더 살이 빠져있었다. 요새 들어 잠까지 설치는지 핏줄이 선 눈하며 피로와 뒤범벅되어 어딘가 야윈 얼굴이었다. “그래도 몸에 해로우니 이제 적당히 마셔요.” 제 뺨을 어루만지는 그 다정한 손길에 라델리우스는 그 온기를 붙잡았다. 그러곤 비스듬히 고갤 돌려 작은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향긋한 체향과 온기가 그를 사로잡았다. 주인의 손을 핥는 개처럼 그는 순종적인 키스를 하며 그녀의 팔을 부드러이 잡아당겼다. “…다이아나. 나는,” “잠깐…리우스.” “누가 뭐래도 당신뿐이야.” 어느새 여인을 제 무릎에 앉히며 끌어안은 라델리우스는 그녀의 뺨을 쥐고 바짝 끌어당겼다. 고귀한 흰 뺨에 입술을 누른 후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어느 때보다도 절절한 목소리가 감미롭게 흘러나왔다. “당신을 사랑해.” 라델리우스는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자신이 그 남자를 사랑할리는 없다고 여겼다. 반할 리가 없다. 아무리 저주라 해도 그럴 수는 없다. 수천 번 되뇌어서 찾은 답은 결국 제겐 다이아나 그녀뿐이라는 거였다. 자신이 평생 동안 사랑할 여인은 오로지 이 여인 하나뿐이었다. 그녈 사랑하게 된 순간부터 그렇게 맹세했었으니까. “그만…, 그만해요.” 다이아나는 갑작스레 제게 키스해오는 그를 밀어내었다. 허나 밀어내려하면 할수록 그는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마치 범람하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사람이 밧줄을 놓지 않으려하듯이, 절대 그녀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라델리우스는 그녀를 제 무릎위에 앉힌 상태에서 가볍게 두 팔로 안아들어 일어섰다. 그가 향하는 곳에 침대가 있다는 걸 눈치 챈 다이아나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했으나 남자의 팔뚝은 끄떡도 안했다. 결국 풀썩 소리를 내며 그녀는 침대 한가운데에 눕혀졌다. 그 위를 바로 올라탄 사내는 곧바로 여인의 부드러운 젖가슴을 뭉개듯 쥐었다. 드레스를 벗기려는 조급한 손놀림에 다아이나는 조금 무거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크고 단단한 사내 손을 붙잡으며 그녀는 붉은 입술을 열었다. “얘길 나누러온 거예요. 리우스.” “날 받아줘.” “일어나요. 지금 취했어요.” “다이아나…난 그대가 떠날까 두려워.” 취중진담이라도 하려는 것인지 라델리우스의 표정은 허물어져있었다. 그는 고개를 내려 그대로 보드라운 입술을 탐했다. 깊은 늪에 제 발로 빠지려는 사람처럼 작은 입술을 벌리고 혀를 밀어 넣었다. 뜨거운 혀가 녹아내릴 것처럼 좁은 입안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동시에 알코올향이 미끄러운 타액 속에 묻어났다. 헤엄치듯이 유연한 움직임에 간간이 할짝거리는 소리가 침대 위를 울렸다. 눈을 감고 키스를 이어가는 그와는 달리 다이아나는 순순히 눈을 감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밀어내지도 않았다. 제 흐트러진 머리와 뺨을 어루만지며 자신을 사랑해달라고 구걸하는 남자를 손 놓고 지켜만 보았다. 가만히 있는 그녀완 달리 라델리우스는 성심성의껏 그녀를 애무하며 애달픈 키스를 이어나갔다. 뒤늦게 입술을 뗀 그가 여인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한번 더 빨아 당겼다. “내 곁에 있어줘.” 무뚝뚝한 남자가 어리광을 부리듯 여인의 입술을 짧게짧게 머금었다. 커다란 손은 허락을 구하듯이 여인의 가슴앞섶을 맴돌았다. 다이아나는 그제야 누그러진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떴다. 저를 내리누를 수 있는 듬직한 어깨와 팔을 가진 남자는 어디서 놀다온 아이처럼 흐트러진 붉은 금발과 흥분이 가시지 않은 녹색빛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 닮은 널 거부하지 못하는 나도 어리석지.’ 마지못한 듯 다아아나는 남자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 작은 허락의 뜻에 라델리우스는 다시금 키스를 이어가며 여린 몸뚱이의 드레스를 벗겨 내려갔다. 0066 / 0172 ---------------------------------------------- 진심과 가벼움 블리어는 늦은 밤이 다 되도록 사고현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시신의 반은 이미 빠르게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고 남은 시신만이 현장에 얇은 모포를 뒤집어쓴 채 놓여있었다. 그는 백이십구나 되는 시체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있었다. 생존자 명단에 그 여자의 이름이 올라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뿌연 먼지로 뒤덮여있어 머리색이 다 희게만 보였기에 시체의 얼굴을 들여다봐야만 했다. 허나 건물에 깔린 시체의 상태가 양호할 리가 없었다. 특히나 얼굴이 남아나있지 않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체 몇 구 앞에서 그는 한참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키와 체형, 머리길이, 옷차림. 이 네 가지 단서만으로 그녀를 찾아 헤맸다. 물론 이곳에 없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말이다. 중간에 부상자가 있는 인근치료소로 찾아가 직접 환자들을 상대로 찾아보기도 하고 혹여나 이곳을 들린 기록이 남아있지 않나 진료내역까지 확인했다. 그럼에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죽었다면 현장에 시체가 남았을 테고, 살았다면 어딘가에 있을 텐데 그 여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감쪽같이 종적을 감췄다. 혹여 시신을 헷갈려 들고 간 게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타들어가는 속에 블리어는 정처 없이 맴도는 사람처럼 사고현장을 맴돌았다. 그런 공작으로 인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왕궁에서 파견된 인부들은 섣불리 작업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약 네 시간 전 어느 로브를 쓴 작은 남성이 나타나 시신수습 작업을 도와준 탓에 일이 많이 수월해져있어 그리 서두를 필욘 없었다. 마법인지 뭔지 모를 괴력으로 건물잔해를 들어준 덕에 맨 아랫바닥에 깔려있던 시체들을 서둘러 인양할 수 있었다. 거기다 부서진 건물 벽과 기둥들을 차곡차곡 옆에 쌓아준 탓에 이차 붕괴위험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다. 상체만 비대하게 컸던 작은 남자에게 사례를 하겠다고 왕실의 누군가가 나서서 얘기했으나 남자는 제 할 일을 끝내고 말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늦게 도착해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블리어는 추운 날씨 속에 한동안 그곳을 서성이다가 자정이 다 되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드넓은 저택 안으로 들어선 그는 불 꺼진 복도를 가로질러 침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마지막 미련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을 깔끔히 지워내 보려 해도 연거푸 그 여자가 떠올랐다. 이대로 침실로 돌아간들, 침대에 눕는다한들 마지막 미련을 버리지 못할 게 분명하니 스스로에게 좌절을 안겨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제 포기하자는 생각을 하며 구석복도에 막 들어섰을 때 그의 눈에 희미한 불빛이 들어왔다. 고요한 어둠이 안식처럼 깔린 캄캄한 복도에 옅은 빛이 네모난 틀을 따라 새어나왔다. 정확히 방문에서 새어나오는 빛이었다. 그 여자의 방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 블리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두 다리는 이성의 제어를 벗어 난지 오래였다. 만약 살아남아서 이곳에 돌아온 것이라면, 그런 희박한 가능성이 남아있다면…, 블리어는 문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세게 문을 열어젖혔다. 쾅, 하고 돌연 들려온 소음에 침대 위에 신세 좋게 누워있던 렐리아가 홱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뭐야? 하고 대놓고 써놓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조금 다른 말이었다. “뭐야. 공작 아직도 안 씻었어?” 그 결벽스러운 성미를 알기에 렐리아는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뜰지도 모르겠다 여겼다. 먼지와 땀이 눌어붙은 검은 머리칼은 어디 거지가 와서 친구먹자고 해도 될 정도였다. 새까만 정장은 땟국으로 염색했다고 해도 믿겨질 정도로 여기저기가 해지고 더러웠다. “...어디 있었습니까.” 늦은 밤 제 방에 쳐들어온 남자가 대뜸 내뱉은 말은 이것이었다. 그가 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끼이익 대는 경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지만 렐리아는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은 낯을 하고 있었다. “찾았어?” 그 뻔뻔한 말에 블리어는 하마터면 하, 하고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기가 막혀서 잠시 말문이 막히고 온몸의 기운이 쫙 빠져나갔다. 이제까지 이 여자하나 찾겠다고 자신이 얼마나 뛰어다녔는지 과연 당사자는 알기나할까 싶었다. 생채기하나 없는 그 뺀질거리는 낯을 조금 탓하듯이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운을 뗐다, “살아있었습니까?” “그럼 살아있지, 죽었을까봐?” “...죽은 줄 알았습니다.” “죽긴 왜 죽어~ 내 명줄 질긴 거 공작이 더 잘 알잖아.” 시시덕거리며 얘기하는 여자는 정말 가벼움 그 자체였다. “공작도 참 쓸데없는 걱정만 한다니까.” “이게...쓸데없는 걱정입니까.” 능글맞은 말에 블리어는 순간 무거운 것이 뒤집어진 것처럼 크게 속이 울렁거렸다. 찾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찾았다. 걱정했냐고 한다면 당연히 걱정했다. 마음이 편치 못해서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돌아다녀야만 했다. 이 날씨에 제 발로 직접 뛰어다니느라 귀도 손끝도 얼얼했다. 수백구나 되는 시체들의 얼굴까지 일일이 확인하고 왔다고 말하려다가 그는 간신히 참아내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라 했습니까? 그렇게 밖에 말을 못합니까.” “공작 나 피곤해.” “언제부터 이렇게 누워있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그대하나 때문에 밖에서 얼마나 고생 했는진 압니까. 안다면 이런 소리 못합니다.” “너만 고생한 거 아냐. 힘들다고.” “뭐가 그렇게 힘듭니까? 대체 그대가 나보다 힘든 게 뭡니까.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입니까.” “이기적? 하….” 진짜 이기적인 게 뭔지 보여줘? 하고 반박하려다 렐리아는 입안의 여린 살을 꽉 깨물었다. 대신 차차 언성이 높아지려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 아예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써버렸다. 그냥 자고 싶을 만큼 모든 게 다 귀찮고 짜증만 났다. 몸은 으슬으슬하고 피곤해죽겠는데 저 남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얼굴이었다. 하긴 다쳐도 겉으로 티도 안 나는데 당연했다. 또 저가 잔소리듣기 싫어서 피하는 줄로만 알겠지. “나 잘래. 문닫아줘.” 뭐라 둘러대야 할지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려서 렐리아는 그냥 직설적으로 내뱉었다. 졸리니까 나가달라는 그 축객에 블리어는 어금니를 지그시 사리물고서 그대로 등을 돌렸다. 조명을 끄고서 쾅 소리가 날 만큼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방불이 꺼지고 싸늘한 적막이 채워진 방안엔 서로의 서운한 감정이 밀려들어왔다. 시린 바닷물처럼 서서히. 뒤늦게 렐리아는 이불너머로 얼굴을 내밀고서 어두운 방 한편을 주시했다. 대체 자신이 거기서 뭘 더 어떻게 해야 했을까. 피곤해도 아닌 척 능글맞게 웃으며 받아줬더니 대뜸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냐고 욕이나 얻어먹었다. 밖에서 무슨 고생을 해서 짜증이 난 걸 왜 저한테 푸는 건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든 한 달이든 오 개월 뒤든 헤어져도 대수롭지 않은 사이였다. 자신이 인생에서 영원히 꺼져주면 가장 후련해할 자가 그였다. 사라지면 찾기는커녕 드디어 거머리 한 마리가 떨어져나갔다고 생각할 사이였다. 그가 새삼스러운 것이지 절대 자신이 너무한 게 아니었다. 그렇게 자기합리화를 해도 마음한편으론 역시 편치 못했다. 그가 나간자리를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애써 찝찝한 기분을 떨친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악몽을 꿨다. 애애애애애애애애앵ㅡ 이옹이옹이옹ㅡ 시끄러운 엠뷸란스 소리와 사이렌소리가 울려 퍼지는 현장이었다. 뼈를 바른 생선처럼 부실한 철골이 드러난 주위엔 회색 콘크리트 잔해와 부서진 가구, 생활용품 따위가 굴러다녔다. 그 주위에 있는 작은 빌라단지나 허름한 놀이터, 동네슈퍼가 상당한 익숙한 동네였다. 멍하니 그 풍경을 둘러보며 자신이 살던 동네와 닮았다고 생각하다가 다시 무너진 건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건지 처참히 부서진 건물잔해 주위로 주홍색구조복을 입은 구급대원들이 빠르게 구조작업을 펼치고 있었다. 들어오지 못하게 노란 폴리스라인을 쳐놓았으나 어쩐지 통과가 되었다. 뭐지? 하고 생각하던 중 문득 자신의 눈에 들어온 광경에 손끝이 떨렸다. 파르르 하고 눈꺼풀도 떨리는 기분이었다. 처참할 만큼 팔다리가 꺾인 사체가 보였다. 두피가 찢겨진 곳엔 검붉은 핏덩이가 묻어있는 짧은 숏컷머리의 여자였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새빨갈 정도로 피투성이였다. 눈에서 관자놀이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사이로 뼈가 보였고, 콧대가 완전히 함몰되어 하관은 아예 핏물범벅이었다. 살짝 입술사이로 드러난 앞니 두 개는 처참히 깨진 상태로 검은 핏덩이를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입을 틀어막으려하는데 손이 보이진 않았다. 눈을 가리려하는데 가려지지 않았다. 이 상황에 눈물이 터지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가만히 서있는 동안 자신의 눈앞에 또 다른 희생자들이 실려 나갔다. 머리가 갈라지고 뇌수가 터진 사람, 다리뼈가 돌출된 사람, 목이 꺾인 사람, 하나같이 거대한 공포 앞에 퍼렇게 질린 안색들을 하고 있었다. 차갑게 죽어있었다. “태화야!” 그러다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충격에 싸늘하게 식었던 몸뚱이에 혈류가 다시 도는 기분이었다. 안도감에 황급히 뒤를 돌았다. 기온이 내려가 더욱 쌀쌀한 밤에 거의 잠옷처럼 얇은 차림을 한 엄마 아빠가 구급대원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하시는 게 보였다. 급히 차를 타고 오신건지 아빠는 맨발에 실내화만 신고 계셨다. 이미 붉게 눈시울이 물든 부모님의 눈엔 투명한 눈물이 맺혀있었다. 특히 엄마는 이곳까지 오면서 몇 번이나 우신 것 같은 얼굴이셨다. 빠르게 부모님께로 달려가는데 그 순간 엄마가 현장으로 들어가려는 구급대원 한 명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붙잡아 세웠다. “우, 우리딸… 우리딸…태화, 어딨어요…? 우리딸……” 처음 듣는 생소한 목소리였다. 우리엄마가 이렇게 목소리 떠는 사람이 아닌데, 억지로 가슴을 쥐어짜내는 것처럼 먹먹한 떨림이 느껴졌다. 이윽고 한 경찰이 다가와서 부모님과 무슨 얘기를 바쁘게 나누시며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셨다 건물잔해에서 조금 떨어져있는 곳에 세워진 구급차의 옆이었다. 부상자를 긴급소송하기 위해 분주한 그 옆에는 일렬로 길게 늘어선 사망자들의 시체가 있었다. 하얀 천을 뒤집어쓴 그 사이에 방금 옮겨져 천이 씌워지지 않은 자신도 함께 있었다. “아…,아아…” 멀리서도 쉽게 눈에 띄는 제 모습에 엄마는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옆을 아빠가 굳건히 버티고 서계셨으나 입을 틀어막으셨다. 안 그래도 붉어진 눈이 더 붉게 붉게 물들어갔다. 피눈물이라도 흘리실 것처럼. “어흐으윽. 흐윽…흐으으윽…” 엄마는 더러운 흙바닥위에 무너져서는 일어날 생각조차 않으셨다. 몸을 추스르는 것조차 하지 못하셨다. 오히려 이러다 쓰러지시지 않을까 싶을 만큼 가는 어깨며, 두 손이며, 잠긴 목소리를 심하게 떠셨다. “…태, 태화아빠……이거 아니지…? 어떻게 이게 현실이야? 어떻게!! 어떻게…! 이게 현실이냐고! 어떻게!!!” 현실을 강하게 부정하며 엄마는 기어코 눈물을 터뜨리셨다. 오열하시는 엄마 옆에서 아빠는 끝내 고갤 돌려버리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굳은살이 박인 아빠의 손가락에 묻어나는 눈물을 보며 나까지 시야가 뿌옇게 물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차마 아무 말씀하지 못하시고 아빠는 묵묵히 등을 보인 채 눈물을 훔치셨다. 떨리는 숨소리 끝에 미약한 울음소리가 섞여있으셨지만 엠뷸런스 소리에 끝내 묻혔다. “…아니라고…아니라고 좀 말해봐! 우리태화가……우리 태화가 왜…왜!!” 엄마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치 오열하는 소리를 애써 참아내듯이 힘겹게 입을 틀어막고 우셨다. 눈물로 푹 젖은 검은 두 눈은 가장 큰 절망을 눈앞에 목도한 사람처럼 생기를 잃었다. 하루아침에 빛을 잃고 어둠속에 남겨진 맹인처럼 떨리는 손바닥으로 여러 번 땅을 짚으셨다. 억지로 일어나려는 듯이. 허나 두 다리는 힘이 풀려 일어나는 것조차 쉽지 않으셨다. 뒤늦게 엄마는 저의 머리위에 흰 천을 뒤집어씌우려는 구급대원을 보고 그제야 아빠의 도움을 받아 몸을 일으키셨다. 금방이라도 다시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불안한 걸음으로 힘겹게 힘겹게 움직이셨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생소해 차마 뒤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서서 지켜만 보았다. “어흑…, 태화야….” 그동안 엄마는 자신의 시체 앞에 다시 무너져 내리셨다. 천을 거두고서는 또 한번 하늘이 무너진 듯이 오열했다. 아빠는 붉게 충혈된 눈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시느라 안경을 벗어 아예 한 손에 들어야만 했다. “흐으윽…태…화야…눈 좀…떠봐……제…발….” 엄마 가슴이 찢어지잖아. 태화야, 제발, 제발 하고 애원하는 엄마의 중얼거림에 차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체가 없는 몸인데도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나 자신도 끔찍해서, 징그러워서 쳐다볼 수 없는 시체를 엄마는 거부감 없이 품에 끌어안으셨다. 뭐가 예쁘다고 죽은 자신의 뺨을 연신 쓰다듬으며, 흙먼지가 내린 이마를 닦아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의 눈에서 추적추적 떨어져 내리는 눈물은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보다도 무거웠다. 속절없이 덜덜 떨리는 엄마의 손끝을 지켜보는 태화의 마음도 찢어졌다. 아니야 엄마 나 살아있어. 건강해. 건강하다고. 울지 말라고… 제발 금방 돌아갈 테니까 울지마요. 금방 돌아갈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옆에서 엄마를 끌어안아주었다. 자신의 온기를 느낄 수 있게 아주 세게 꼭 끌어안았다. 엄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나 곧 갈게. 그렇게 수십 번 다짐하는 동안 시선이 뿌옇게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눈앞이 어느덧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암흑처럼 새까만 공간에서 갑작스레 환한 빛이 확 터져 나왔다. 0067 / 0172 ---------------------------------------------- 진심과 가벼움 “…허억. …헉…헉.” 렐리아는 생생할 만큼 차가운 공기로 폐부를 가득 채웠다. 바닷물 속에 푹 잠겼다가 올라온 것처럼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동시에 눈가가 너무나도 짰다. 귓가를 가득 채우는 헐떡이는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이곳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한동안 침대위에 누워 있다가 렐리아는 베개 위가 축축하다는 걸 눈치 챘다. 상체를 서서히 일으키자 그제야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소리없이 뚝 뚝 이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는 습관적으로 방 한편에 걸린 시계를 찾았다. 새벽 한 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아 생일 지났네.’ 원래세계의 생일이 지났다. 하필이면 이런 뒤숭숭한 꿈을 꿀 게 뭔가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렐리아는 자꾸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지는 눈을 손바닥으로 연방 비벼댔다. 왠지 눈가가 쓰라렸다. 퍽퍽한 한숨만 내뱉다가 그마저도 시원치 않자 렐리아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엄마랑 전화라도 하고 싶다…’ * * * 어젯밤 다시는 안볼 것처럼 방을 나섰던 남자는 다음날 점심에 방을 찾아왔다. 렐리아는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간까지 침대 위에 늘어져 있다가 갑작스레 들이닥친 블리어 덕분에 그제야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그가 와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올린 그녀는 몸을 웅크리며 다시 잠을 청했다. 깜깜한 방안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잠만 잘 생각인 모양이었다. 블리어는 그런 여자를 한심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사고후유증을 생각한다면 그럴 만하다고 여긴 채 창문에 길게 드리운 암막커튼을 걷어냈다. 맑은 날씨의 후원풍경이 창밖너머로 펼쳐졌다. 방안을 가득 내리쬐는 햇빛에 그는 만족스러운 낯을 하고서 다시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두 시쯤에 왕실 의원이 오기로 했습니다.” “…왜…” “진찰 받으십시오.” “…을래…” 뭐라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웅얼거리는 소리가 이불너머로 들려왔다. 정확히 ‘안 받을래’였지만 블리어는 침대 앞까지 다가와 오른손으로 이불을 쥐었다. 상태가 악화된 왼손은 다시 부목을 대고 고정된 상태라 무언가를 잡기도 힘들었다. 그가 한손만으로 이불을 거둬내자 그제야 몸을 말고서 잠들어있던 여자가 꿈틀거렸다. 허리께까지 흘러내린 얇은 머리칼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하얀 뺨과 하얀 눈두덩이, 뽀얀 햇살이 어린 콧대, 그 중 유일하게 새빨간 입술은 설산 속에 열린 작은 열매 같았다. 그녀는 이불이 사라진 걸 뒤늦게 깨닫고서 눈을 감은 채 애꿎은 시트 위만 더듬거렸다. 끝내 눈은 뜨지 않고 콧잔등만 설핏 찡그리고만 있었다. “내 말 알아들었습니까.” “…잘래….” “알아들었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지마…귀찮다고….” 건들지 말라며 렐리아는 짜증스럽게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정말로 모든 게 다 귀찮았다.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내리 잠만 자고 싶었다. 이런 저를 보고 게으르다고 대놓고 욕을 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정말 기력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그때 뻗어져온 손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움찔 고갤 움츠렸다. 제 미간을 살짝 누르는 그 손가락에 렐리아는 되레 인상을 썼다. “아…진짜 좀!” 순간 머리끝까지 욱 신경질이 치밀었다. 가만히 놔두는 게 그렇게 힘든 건가? 그녀답지 않게 날선 반응에도 블리어는 손을 거두지 않았다. “안색이 별로 좋지 못합니다.” 귓가를 두드리는 낮은 목소리가 허밍처럼 왠지 부드럽게 느껴졌다. 건조하고 커다란 손은 제 머리칼을 거둬내고 이마에 고스란히 닿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손의 온기에 그제야 렐리아는 욱했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았다. 다시 얌전해진 렐리아를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천천히 손을 옮겼다. 콧대를 스치고 뺨을 스쳐 도착한 곳은 입술이었다. 그는 도톰한 아랫입술에 가볍게 엄지를 얹었다. 그대로 엄지를 입술사이로 파고들듯이 집어넣고서 억지로 입을 벌리게 만들었다. 그에 렐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며 ‘으해?’하는 소리를 냈다. 뭐하냐고 뚱하게 올려다보는 벽안에도 블리어의 눈은 오로지 한곳을 차분히 훑었다. 하얗고 고른 치아, 건강해 보이는 분홍색 혀. 구강검사라도 하는지 유심히 입속을 내려다보다가 블리어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의 손에 풀려나자마자 렐리아는 푸푸 하고 입에서 침을 분사하는 소리를 냈다. 엄지가 직접적으로 닿은 부분에서 미묘한 짠맛이 느껴졌다. “담당시녀에게 말할 테니 한시 반쯤에는 일어나있으십시오.” “…싫다니까 그러네. 잘 거야.” “진찰만 받으면 그 뒤로 푹 자게 내버려둘 테니 내 말에 따르십시오.” 그 말에 렐리아는 솔깃해져서 그를 돌아보았다. 허나 블리어는 비스듬히 고갤 돌리며 문고리를 쥐었다. 긴 목덜미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흑발과 검푸른기가 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사내의 깔끔한 뒷모습은 어제완 상반될 정도였다. “어디 아픈 곳이 있으면 의원에게 꼭 말하십시오. 실력 있는 어의이니 잘 봐줄 겁니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주었다. * 작은 조명하나 켜둔 방안은 어두웠다. 달빛이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쳐져있는 긴 커튼에는 화려한 문양이 수놓아져있었다. 고급스러운 연분홍색 벽지에 마호가니 가구들, 누가 봐도 귀족영애의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푹신한 벨벳소파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자가 있었다. 인형처럼 기대앉아있는 여자의 앞에 한 시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치사량으로 준비해. 최대한 양을 많이 넣어.” 곱디고운 분홍빛 입술에선 달콤한 목소리가 노랫말처럼 흘러나왔다. 그 말에 시녀는 떨리는 손가락을 숨기기 위해 앞치마 밑에 손을 집어넣어야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죽는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기에 죽음을 각오해야만 했다. 허나 생에 유일한 미련을 두고 간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번처럼 실패하기만 해봐. 귀여운 어린 동생들까지 죽는 거야?” 여자는 말갛게 웃어보였다. 바닥을 향해 떨어뜨린 시녀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려나갔다. 살고 싶다. 하지만 이미 큰 죄를 저지른 자신은 그럴 수가 없다. 차마 울지 못하고 시녀는 일그러진 얼굴이 딱딱한 바닥에 닿을 정도로 깊이 고개를 수그렸다. “한번 거둬주신 이 목숨…아가씨를 위해…바치겠습니다.” * 오늘도 악몽을 꾸다 일어났다. 끔찍한 지진사고를 여기서 또 한 번 접한 탓에 이제껏 생각하지 않으려했던 것들이 봇물처럼 꿈으로 나타났다. 머리 아픈 일은 되도록 생각지 않으려했는데, 애써 조급해질까 부모님에 대해선 생각하지 않으려했는데 기분만 잡쳤다. 외면해왔던 현실 문제를 비로소 마주하게 되니 아침부터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지금으로선 꿈에서처럼 자신이 사망선고만 받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중환자실에 산소마스크를 끼고 있어도 살아만 있었으면, 콧대가 함몰되어도 좋으니 살아만 있었으면, 그런 생각만 하게 되었다. 어제 하루는 온종일 자는데 허비했다. 중간에 아럼프가 찾아왔다는 얘길 아침에 찾아온 소피아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어디 아픈지 걱정하며 한 시간 동안 침대 옆에 앉아 있다가 갔다고 했다. 렐리아는 아럼프에게 미안해서 오늘은 어떻게든 만나줘야겠다고 여겼다. 하루 종일 자서 이젠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았다. 허나 뜻밖에 방문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슈로니였다.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미리 전갈을 보내왔기에 충분한 여유를 두고 준비한 뒤 그녀를 맞이할 수 있었다. 테이블 위는 오후의 산뜻한 티타임을 가질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귀족영애가 온다는 사실에 잔뜩 긴장한 소피아가 평소보다 과하게 차린 것이다. 낮에 방문한 슈로니 덕분에 점심대신 달짝지근한 디저트로 배를 채우게 생겼다. 하지만 작은 불평도 잠시 저에게 안기며 눈물을 보이는 슈로니 때문에 렐리아는 마음이 살살 녹아내렸다. “광장에서 일어난 사고소식 접하고…나 정말…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아.” 양갈래로 높게 묶은 분홍머리가 평소 발랄한 분위기를 냈으나 얼굴만큼은 애인을 떠나보내는 것처럼 서글픔이 담겨있었다. 울먹거리면서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던 슈로니는 팽하고 코까지 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렐리아는 슈로니가 맞은편 소파에 앉을 수 있게 했다. 우는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절로 입가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인중이 간지러웠다. “…여워.” “응…?”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정말로. 내 친구를 보호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주신께 얼마나 기도를 드렸는지 몰라.” 슈로니는 작은 손을 뻗어 제 두 손을 꼭 잡아주며 말했다. 말랑말랑한데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심약한 성정에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하면 괜히 그런 안 좋은 사건에 휘말린 것에 미안해질 정도다. 동시에 지루하고 꿀꿀할 때 마침 놀러와 준 슈로니에게 감사했다. 렐리아는 곧바로 슈로니와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조각케이크며 슈크림이며 초콜릿무스며 다양했는데 그중 몇 접시는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잠깐 집무실에 들려 공작에게 갖다 줘야지 싶을 뿐이다. 사교계에서 떠도는 재밌는 일화나 주위친구들의 연애이야기 등 슈로니가 해주는 밝고 사소한 얘기는 듣는 것만으로도 조금의 활력소가 되었다. 천성이 밝고 얘기 나누는 걸 좋아하는 그녀는 주위를 행복하게 만드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있잖아. 렐리아.” 그러다 잠시 슈로니가 찻잔을 꼭 쥐며 뜸을 들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끙끙거리는 얼굴이었다. 말을 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자 얼마안가 슈로니가 어설프게 웃었다. “나…렐리아가 공작님의 애인이라는 소식 듣고 정말 깜짝 놀랐어.” “아 그거, 미안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아냐, 아냐. 렐리아에게도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해. 그냥 놀라서 얘기한 거야. 정말이야.” 그런 것치곤 너무 허둥댄다. 렐리아는 그녀가 혹시 공작을 좋아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저번에도 녹빛이 흐르는 검은 보석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과 닮았다고 볼을 붉혔던 그녀이니 말이다. 혹시 남몰래 짝사랑하고 그런 거면 왠지 친구에게 미안해진다. 저란 존재가 방해가 되니까. ‘돌아가고 싶다.’ 무의식중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렐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운을 뗐다. “슈로니 뭐하나 상담해도 될까? 그냥 누구한테 털어놓고 싶어서.” “그럼, 우린 친구잖아. 상담정도는 언제든 들어줄게.” 0068 / 0172 ---------------------------------------------- 진심과 가벼움 얘기해봐, 하고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는 슈로니의 초콜릿색 눈을 마주하니 렐리아는 포근한 기분을 느꼈다. 그래도 이 세계엔 이런 친구가 한명쯤은 있어서 다행이었다. 렐리아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하며 느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내가 중요한 일이 있는데. 그 일을 이루려면 어떤 애의 도움이 결정적으로 필요해.” “응응.” “근데 아직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데 좀 욱해서 멱살을 잡아버렸거든…사실 걔가 어떤 큰 잘못을 했는데 아니, 걔가 한 건진 아직 확실하지는 않아. 자백을 안 받아냈거든. 그래도 난 걔가 거북해." "응.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 "아무튼 그런 일로 걔 멱살까지 잡아서 결과적으로 만나기 껄끄러운 상대가 되어버렸어. 근데 문제는 일을 이루려면 걔가 필요하다는 거야.” “렐리아에겐 어느 정도 중요한 일이야?” “…다른 걸로는 대체할 수 없는 거야. 그만큼 중요해. 그걸 위해서라면 죽을 고비도 넘길 수 있어.”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루빨리 엄마 아빠가 걱정하지 않게 돌아갈 수만 있다면. 생전 잘해드린 적 없는 딸이지만 적어도 걱정은 끼쳐드리지 않아야 했다. 렐리아는 가슴 콱 메이는 갑갑함에 무릎위에 얹은 두 손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음. 그게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맞겠지?" 그때 맞은편에서 오르골 소리처럼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애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받아내. 거부감이 들더라도 독하게 눈 꼭 감고 해내야지. 사사로운 감정이나 죄책감, 양심 따위 무시하고서라도 꼭 이뤄내야 할 중요한 일이라면 말이야.” 슈로니는 방긋 웃었다. 외유내유로 보이는 슈로니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지라 렐리아는 그녀의 말에 뺨을 후려갈겨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안하고 나태한 주제에 마음만 급해서 뭐가 되냐고, 그리 가차 없는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아 내 정신 좀 봐.” 슈로니가 조각케이크를 자르던 포크를 놓더니 작은 손가방을 뒤적거렸다. 이윽고 테이블 위로 앙증맞은 리본이 묶인 작은 선물이 올라왔다. “이거 티백이야. 우리가문 시녀가 직접 찻잎 조합해서 만든 거래. 내 취향에 맞을 거라면서 선물로 준 거 있지? 렐리아 네 생각나서 가져와봤어.” “그걸 나 줘도 돼?” 왠지 고맙고도 미안해서 렐리아는 선뜻 받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미안함을 덜어내듯이 슈로니가 발랄하게 말을 이었다. “시녀한텐 다시 만들어달라고 하면 돼.” “그래도 시녀가 너한테 준거라며. 서운해하면 어떡해.” “헉, 정말 나한테 서운해하면 어쩌지. 마리한테는 마셨다고 둘러댈 테니까 비밀이야?” 시녀이름이 마리인가. 친해 보이네. 렐리아는 흐뭇하게 생각하며 나른하게 턱을 괴었다. “고마워, 슈로니. 아 뜨거운 물 있는데 지금 우릴게.” “어, 지금? 아…내 취향이 렐리아 입맛에 맞을지 모르니까 부끄러워.” “아니야~ 맞을 거야. 시녀가 너 생각하면서 만들었다니까 분명 맛있겠지.” 능글맞게 웃어준 렐리아는 도자기로 된 찻주전자에 티백을 넣어 우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슈로니에게 말을 붙이며 다정하게 얘길 나누다가 빈 찻잔에 우린 찻물을 가득 채웠다. 솜사탕을 녹인 것처럼 연한 분홍색 찻물은 왠지 모르게 달아보였다. 실제로도 적당히 씁쓸하고도 달달한 차 맛이 일품이었다. “이거 맛있다. 그 마리라는 친구 솜씨가 좋나보네.”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야.” 베실 웃으며 슈로니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포크로 깨작깨작 조각케이크를 헤치며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너도 따라줄까?” “아직 찻물 있어서. 난 돌아가서 새로 만들어달라고 할게.” 신경 안 써도 된다며 빙그레 웃는 친구의 모습에 렐리아는 한입 마셔보라고 제 찻잔을 내밀어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귀족예법에 어긋날 것 같아 관뒀다. 왠지 혼자만 맛보니까 양심이란 게 콕콕 찔렸다. 그런 것치곤 목이 말라서 그런지 네 잔째 술술 들어갔다. 렐리아가 다섯 잔째 원샷을 할 때 맞은편에 앉은 슈로니의 안색은 점차 하얗게 표백되어갔다. 힐끗힐끗 렐리아를 올려다보다가 포크날로 빵 부스러기를 더욱 잘게 다졌다. 그 불안증세 같은 태도에 렐리아는 여섯 잔째 마시려다말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슈로니. 어디 몸 안 좋아?” “으,응? 아니야.”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걱정돼서 몸까지 일으키며 슈로니에게 다가가려 할 때였다. 똑똑 하고 방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렐리아는 잠시 슈로니에게 양해를 구하고서 문 앞으로 걸어가 살짝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연한 회색양복차림의 남자가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렐리아. 몸은 괜찮아?” 붉은 머리칼을 왼쪽가르마를 타고 가볍게 쓸어 넘긴 아럼프가 화사하게 웃었다. 충분히 설렐만한 화려한 미소에도 렐리아는 “잠시만.”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러곤 슈로니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양해를 구해야만 했다. “나 사실 선약이 있었거든. 잠깐 밖에 나가서 얘기 좀 하고 올게. 아주 잠깐이면 돼.” “아, 그런 거라면 내가 가야지. 지금 나갈게.” 슈로니는 작은 손가방을 챙겨들고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그에 렐리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슈로니는 다음에 보자는 말로 방을 나섰다. 그녀가 나가고 십초도 흐르지 않아 방안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누구야?” 여전히 뒷짐을 지고서 아럼프는 방금 나갔던 귀족영애에 대해 물었다. 렐리아는 조금 풀어진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사내와 한 방에 있으니 어느새 절로 심드렁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내 친구. 왜? 내 친구한테 작업 걸어보려고?” 어디한번 그래봐라는 눈으로 쏘아봐주자 아럼프가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그럴 리가.” 그녀 옆으로 다가온 그가 돌연 뒷짐 지고 있던 손을 그녀의 얼굴 앞으로 내밀었다. 렐리아는 제 눈앞에 피어난 오색빛깔의 꽃들을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해졌다. 부케처럼 예쁘장한 꽃다발이 제게 내밀어져있었다. “이 한겨울에 웬 꽃?” “낭만 없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이 재미없는지 아럼프는 바로 맞은편으로 가서 편하게 걸터앉았다. “마법온실 속에서 재배한 꽃이야. 비싼 꽃이니까 죽이지 말고 잘 화병에다 꽂아놔.” “얼만데.” “내 월급에 십 분의 일이던데?” “으 비싸라. 그 돈으로 도박이나 하지.” “청렴한 사제보고 도박이라니.” “그 사제가 절 도박세계에 입문시켰죠, 네.” 렐리아가 머리를 끄덕이며 하는 말에 아럼프는 지긋이 그녈 바라보다가 입가에 맺힌 웃음기를 살짝 지워냈다.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며 그는 턱을 괴었다. 뒤늦게 찻잔 테두리를 응시하던 그의 적안이 렐리아를 향해 올라갔다. “어제 네 시녀한테서 들었어. 그, 안 좋은 사고에 휘말렸다고….” “아 뭐. 그랬지.” “다친 데는 없어? 바로 치료해줄 테니까 말해봐.” “없어. 멀쩡해.” 가볍게 둘러대는 모습에 아럼프가 뭐라 운을 떼려할 때 렐리아가 슥 자기 찻잔을 내밀었다. 새로 따르고 아직 입에 대지 않은 상태였다. “마셔. 맛있어.” “그래.” “거기 아냐. 반대편으로 입 대.” 간접키스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말에 아럼프는 설핏 웃으며 반대편에 입술을 가져다댔다. 아니 대려다가 슬쩍 내려다본 시야에 잡힌 무언가에 찻잔을 입술에서 떨어뜨렸다. 아럼프는 빠르게 이상함을 알아차리고서 미간을 좁혔다. “렐리아. 이 찻잔무늬에 된 도금 말이야. 원래 이런 색이야?” 얇게 들어간 은무늬가 한쪽은 연갈색으로 바뀌어있고 다른 한쪽은 은색이었다. 그라데이션 효과를 준 것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색깔이었다. 아럼프는 찻잔 안쪽을 보여주며 그녀가 알고 있는지 확인했다. 허나 렐리아는 이제야 알아차린 듯 떨떠름하게 굳은 얼굴이었다. 혹시나 싶어 아럼프는 은으로 된 회중시계를 꺼내들어 찻물을 몇 방울 부었다. 얼마나 독극물의 농도가 짙은지 금세 그 부분만 색이 변했다. “역시나… 혹시 마셨어?” “…….” “독이 들어있어. 이 차에.” “…….” 심각하게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게 맞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슈로니와 정답게 얘길 나누었던 기억 때문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슈로니가 그랬겠어, 설마. 그 시녀가 독을 탔겠지, 그런 태연한 생각을 했으나 등골이 싸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렐리아, 마셨어?” 그때 다급하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아럼프가 제 양어깨를 움켜쥐고서 재차 물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떫은 침을 삼키며 운을 뗄 수 있었다. “조…금.” 슈로니가 독을 탔다. 아까의 불안해보였던 행동들이 이해가 가자 렐리아는 그만 헛웃음이 튀어나와버렸다. 진짜 여긴 믿을 사람이 한명도 없네. 배신감인지 허무감인지 절로 고개가 수그려졌다. “…렐리아?” “응 조금 마셨어.” 웃고는 있지만 입안은 씁쓸했다. 찻물의 단맛만 싹 증발한 것처럼 입 안이 썼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주치의 데려올게.” 아럼프는 그녀의 어깨를 놓아주고서 서둘러 방을 나서기위해 몸을 돌렸다. 뛰쳐나가려는 그를 렐리아는 바로 붙잡았고 말이다. 그녀로선 일이 커지는 건 원치 않았다. 독을 탄 차를 다섯 잔째 마시고도 멀쩡하면 그걸 사람으로 볼까. 소란스러운 건 딱 질색이기에 조용히 지나갔으면 했다. “나 아무이상 없어. 그리고 마신지 한 삼십분 넘게 지났는데도 멀쩡하잖아.” “전혀. …내가 보기엔 괜찮지 않아 보여.” “나 괜찮은데?” “독이 든 차를 마셨다는데도 그렇게 웃고 있는 것부터가 괜찮지 않다는 거야. 렐리아.” 보통은 저가 먹은 음식에 독이 들었단 소릴 들으면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제 몸에 무슨 이상이 나타날까 호들갑을 떨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녀는 제 일 아닌 것처럼 유독 초연해보였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서 초연한 게 아니라 그런 티를 낼 수가 없어서 꾹 참아내는 것처럼만 보였다. 아럼프는 그런 그녀를 왠지 보듬어주고만 싶었다. 내리깔아진 푸른 눈과 고집스레 다문 입술이 여린 속내를 감춰놓은 것 같았다. 문을 걸어 잠그고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과 어떻게든 마주하려는 사람처럼 아럼프는 그녀의 팔을 부드러이 붙잡고 눈을 맞추려고 노력했다. “네가 왜 조용히 넘어가려는 진 몰라도 그렇게 참는 건 안 좋아.” “별로. 참는 거 아닌데.” “울고 싶으면 내 앞에선 울어도 돼. 이러라고 있는 게 사제거든. 많은 사람들이 무거운 사연 털어놓고 참회하고 우는 걸 지켜보고 다독여주는 직업인데…너 하나 더 받아준다고 무거울 리 없잖아.” 그는 한손을 들어서 렐리아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눈물을 닦아주듯이 조심스런 손끝이 흘러내린 머리칼을 귓바퀴를 따라 쓸어 넘겨주었다. 이윽고 다정하고도 나직한 중저음이 그녀의 귀를 사로잡았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기대줘, 렐리아. 보듬어줄게.” 그 말에 렐리아는 푸훕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릴 냈다. 그러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에 경계하듯이 한발 뒤로 물러섰다. “진지하게 이러지마. 아 웃기다.” “렐리아. 속에 담은 걸 얘기하지 않고 그 사람이 이해해줄지 안할지를 미리 정해버리는 건 좋지 못해.” “아니.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정해.” 이해 못한다. 여긴 게임이고 자신은 졸지에 게임 속에 갇힌 사람이란 걸 이 세계의 어느 누가 이해해줄까. 제 심정의 십분의 일도 짐작할 수 없을 거다. 애초에 믿어주기나 할까. 렐리아는 그런 냉소적인 생각을 하며 그를 보며 웃었다. “털어놓을 것도 없어. 그냥 남들 다하는 그런 고민이야. 일자리 알아봐야지, 오늘은 뭐 시켜먹을까, 엄마생신 때는 뭐해드릴까, 아빠생신 때는 뭐 사드려야 좋아하실까, 이런 사소한 고민 말이야.” 어딘가 입술끝이 비틀린 미소였다. 0069 / 0172 ---------------------------------------------- 진심과 가벼움 연한 분홍색벽지와 아기자기한 공예품들로 둘러싸인 방안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으나 방안 한구석에서 살갗을 찢는 타격음이 연방 울렸다. 채찍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가느다란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달달 떨렸다. “…읏. …으읏. 읏.” 고통스런 신음이 새어나가지 않게 꽉 물어 아랫입술은 피투성이가 된 채 너덜너덜했다. 속옷만 입은 여자의 몸뚱이 위엔 붉은 선이 수두룩이 남아있었다. 배어나온 핏물이 팔이며 다리며 덕지덕지 묻어나 피비린내가 훅 느껴질 정도였다. 구석에서 엎드려있던 시녀는 간헐적으로 몸을 떨다가 뒤늦게 채찍질이 잠시 멈추자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정말 아니에요…아가씨…저, 전…분명…,” “독을 타지 않아놓고선 뻔뻔하게 발뺌하는 거야?” 피가 묻은 채찍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분홍머리를 풀어 내린 귀족영애가 하얀 면장갑을 벗었다. 귀여운 얼굴이었으나 미소 없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은 낮과는 딴판이었다. 낮과 밤의 얼굴이 따로 공존해있는 것 같은 영애는 다름 아닌 슈로니였다. 찻잔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기에 슈로니로선 독의 유무는 알 수 없었다. 마신 자가 멀쩡한 걸보니 독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고 판단할 뿐이었다. 저번에도 이러한 비슷한 일이 있었기에 시녀의 어수룩함에서 발생한 일이라 여기고서 시녀를 벌할 수밖에 없었다. 시녀의 교육은 귀족의 의무이자 책임이니 말이다. “아…아가씨, 저,저는 정말…” “얘, 마리. 이번엔 네 입에 부어줄까?” 그제야 슈로니는 방긋 웃었다. 재밌는 것이 생각났는지 가볍게 손뼉을 짝 치기도 했다. “아니다. 네 귀여운 동생들을 불러다가 마시도록 해볼까? 단 걸 참 좋아한다고 했었잖아.” “죄,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제, 제발 동생들만큼 만은……” “넌 동생이 소중하지? 나도 이 일이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이야. 근데 넌 이렇게 내 인생을 방해하고 싶어?” 아닙니다, 아닙니다하고 정신 나간 여자처럼 뇌까리는 마리를 내려다보며 슈로니는 나머지 한쪽 장갑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영애답게 기품 있는 손짓이었다. “너와는 함께 자란 정이 있으니 이 정도에서 봐주는 거야. 마리.” 이 아이는 정말 자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아이라는 걸 아니 믿고 일을 시킨 것뿐이었다. 큰돈이 필요한 시녀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줄 사람이 필요한 자신과의 쌍방계약이기도 했다. “내가 공비만 된다면 네 어린 동생들에게 막대한 돈을 지급할거라 했잖아. 내가 약속하난 잘 지키는 거 너도 알지? 네가 안 지켜서 그렇지.”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정말 죄송합니다… 하, 한번만 더 기회를…,” “어차피 죽일 거 죄책감 같은 건 가지지 말아야지?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어수룩하게 구니까 자꾸 죽어야 될 애들이 안 죽잖아.” 어릴 적부터 곁에서 봐온 터라 착해빠진 마리를 잘 알았다. 독을 타는 것도 제대로 못해 벌써 두 번째 실패였다. 슈로니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제 손으로 직접 채찍을 휘두르느라 동그란 이마엔 땀이 스며있었다. “애초에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인데 죄책감 따위에 연연한다는 게 말이나 돼?” 슈로니로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나 자신과의 계약이 우스운 걸까 싶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매번 엄하게 매로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는 시녀 앞에 다가가 슈로니는 몸소 몸을 숙였다. 누가 보면 다친 시녀를 돌봐주려는 마음착한 귀족영애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독해지는 거야. 알았지, 마리?” 손을 꼭 쥐어주며 슈로니는 말갛게 웃어보였다. 너만 믿는다며 말이다. * “……싶다.” 턱을 괸 채 밖을 내다보던 여자의 입에서 돌연 흘러나온 말에 블리어의 시선이 돌아갔다. 몽상에 잠긴 사람처럼 어딘가 얼이 빠진 낯이었다. 또 인가 싶었다. 블리어는 부러 큰소리가 나게끔 책을 덮었다. 그제야 집무실 창틀 앞에 앉아있던 렐리아가 기우뚱하게 기울였던 고개를 바로 했다. 하지만 여전히 턱을 괸 채 심드렁히 창밖만 내다보고 있었다. 누굴 기다리는 것처럼 그 자리에 앉아 꼼짝도 안했다. “어딜 나가고 싶습니까.” “귀찮게 방구석에 있지 뭐 하러.” “그럼 여기 와서 차나 마십시오. 기껏 준비한 차가 식질 않습니까.” “차는 별로. 목도 안 마르고.” 평민이라면 평생 입에 대지도 못할 귀한 차를 시녀가 내왔음에도 한 입도 대지 않았다. 내온 성의를 봐서라도 한 모금 마시는 게 어떠냐고 아까부터 권유해봤으나 '공작이나 많이 마셔~'하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블리어는 더 이상 권유하길 포기하고서 다시 책을 펼쳐들었다. 집무실 안에 딸린 티테이블 앞에 앉아 품위 있는 다과와 독서를 즐기는 남자, 그리고 창문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아있는 여자. 대체 무슨 조합인지 알다가도 모를 만큼 따로 노는 두 사람이었다. 그나마 놔두면 하루 내내 퍼질러 자는 여자를 티타임이나 가지자는 핑계로 불러낸 것이었다. 렐리아는 자다가 온 침의차림에다 카디건만 한 장 걸친 모습이었다. 낮 두시에 입고 있는 차림새치곤 너무나도 늘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창 너머로 펼쳐지는 저택정원이 아닌 드높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건축양식도 생활양식도 언어도 인종도 모든 게 다른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원래 세계와 닮은 건 하늘뿐이었다. 잔잔히 흘러가는 구름과 그 뒤에 떠있는 한낮의 태양, 조금 흐린 날씨지만 그나마 익숙했다. “……싶다.” 또 다. 블리어는 독서를 하던 와중에 눈동자만 움직여 창가 쪽을 응시했다. 또 멍하니 생각에 잠긴 옆얼굴로 여자는 ‘가고 싶다’하고 습관적으로 중얼거렸다. 오늘만 해도 네 번째였다. 그때마다 어딜 가고 싶냐고 물으면 ‘뜬금없이 무슨 질문이냐’ 혹은 ‘귀찮게 어딜 나가냐’하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즉 무의식중에 하는 소리란 거였다. 블리어는 짐작으로나마 이 여자가 원래 살던 타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고 여겼다. 평소라면 제게 빌붙어서 사는 주제에 향수병이라니 참 바쁜 여자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는 그리 여기지 않았다. 시계탑광장 사건이후로 어딘가 달라진 여자를 알아차렸다. 원래도 무기력하고 손 쓸 도리 없는 의지박약인 여자였다지만 그 사소한 비틀림을 눈치 챘다. “오늘밤에는 퍼질러 자지 말고 내 방으로 오십시오.” “공작이 웬일이래~ 드디어 해줄 맘이 생긴 거야?” “공부해야 될 거 아닙니까.” 지금도 아무렇지 않은 척 능글거려도 그런 태도가 블리어에겐 조금은 위화감을 느끼게 했다. 그는 렐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유심히 관찰하듯 가만히 저를 응시하고만 있는 남자의 눈에 부담스러울 만도 할 텐데 렐리아는 피식 웃으며 의자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소파에 앉아있는 그에게로 다가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옆자리를 차지했다. “무슨 생각해?” “최근 분위기가 변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누구 나?” “변한 걸 못 느끼는 겁니까.” “변하긴. 평소랑 똑같은데?” “그대가 그렇게 느낀다면 별말 안하겠습니다. 한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습니까.” “고민이라면 있지. 공작이 언제 나랑 해주나~” 신세타령이라도 하듯이 말끝을 늘이며 렐리아는 소파등받이에 옆머리를 기대었다. 그러곤 블리어를 올려다보며 ‘어때 할래?’하고 묻듯이 한쪽 눈을 깜빡거렸다. 그 앙큼한 모습에도 무덤덤히 가라앉은 표정을 고수하던 그는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완벽한 무시에 그럴 줄 알았다는 양 렐리아도 픽 웃을 뿐이었다. 편하게 실내화를 벗어 소파아래에 두고 그녀는 내친김에 양반다리까지 했다. “그보다 나 돈이 조금 필요한데.” “그보다 오늘밤에 올 겁니까, 말겁니까.” “또 밤새서 공부시킬 걸 아는데 내가 왜…아 갈게. 가면되잖아.” 품속으로 다시 지갑을 찔러 넣는 그의 행동에 렐리아는 서둘러 말을 바꿔야만 했다. 도박장에 안간지 오래돼서 돈이 바닥나있었다. 두 손바닥을 다소곳이 모으고서 내밀어보이자 그 위에 금화 한 닢이 놓여졌다. “아껴 쓰십시오.” “걱정 마. 오히려 더 벌어서 갖다 줄 테니까.” 히죽 웃는 것치곤 제법 의기양양한 미소였다. 블리어는 이 여자가 또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닐까싶어서 건조하게 충고했다. “그대는 내 애인입니다. 내가 안보는 곳에서도 처신 잘 하십시오.” “말 안 해도 잘 알거든?” “잘 안다니 됐습니다.” '응? 이게 끝?' 본격적으로 받아칠 준비가 된 렐리아는 조금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뒤이어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말다툼해봤자 기운만 빠질게 뻔하니 말이다. 대신 옆에서 책만 내려다보고 있는 시시한 남자에게 다가가 괜히 집적거렸다. 그가 읽는 부분에 손가락을 얹으며 렐리아는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서 질문했다. 호기심보다는 방해하고 싶은 감정이 더 컸다. “이거 뭐라고 읽어?” “당면한.” 의외로 그는 순순히 받아주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렐리아는 검지로 다음 글자를 짚었다. “이 뒤에 글자는?” “국제적 정세.” “뭐야. 또 재미없는 거 읽네.” 듣기만 해도 재미없었다. 렐리아는 이 남자랑 놀 바에는 차라리 방으로 돌아가 소피아와 놀거나 아럼프를 부르는 게 낫겠다 여겼다. 아님 자거나. 그런 생각을 하며 몸을 일으키려 할 때 무심하게 내리깐 그의 눈이 제게 닿았다. “그럼 뭐가 재밌습니까.” “응?” “그대가 추천해보십시오. 재밌는 게 뭔지.” “재밌는 거라…” 휴대폰, 컴퓨터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무시하고서 렐리아는 지금 할 수 있는 재밌는 게 있나 곰곰이 생각했다. 폰 없을 때 친구들이랑 주로 뭘 했었지, 하는 생각에 잠겨있다 그녀는 뭔가 떠올랐는지 경쾌하게 검지를 튕겼다. “아 공작. 나랑 오목 할래? 펜이랑 종이만 있으면 되는데.” 소파 앞에 테이블도 있겠다 오목하기엔 안성맞춤이라 여겼다. 렐리아의 재촉에 못 이겨 블리어는 책을 내려두고서 책상까지 걸어갔다. 불편한 왼손을 대신에 오른손으로 깃펜과 종이를 쥐고 돌아와 알아서 해보라며 여인의 앞에 내려두었다. 이런 쓸데없는 일로 공작신분의 사내를 부려먹을 수 있는 여자도 세상에 얼마 없을 테다. 0070 / 0172 ---------------------------------------------- 진심과 가벼움 렐리아는 깃펜을 쥐고 종이위에 대충 쫙쫙 줄을 긋기 시작했다. 시작점과 끝점이 안 맞는 울퉁불퉁한 선은 디자인 전공이라 하기엔 무색한 솜씨를 자랑했다. 적당히 알아만 볼 수 있다면 되었다 여기고서 렐리아는 옆에 앉아서 저를 지켜보는 남자에게 오목에 대해 설명했다. 간단해서 설명이랄 것도 없다지만. 울퉁불퉁한 오목판위에 렐리아는 저 먼저 까만 점을 칠했다. 블리어는 그 아래에다 하얀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일직선으로 곧게 내려가는 블리어의 동그라미와는 달리 렐리아는 왕년의 오목실력을 살려 교묘한 대각선으로 그려나갔다. 첫 판의 승리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렐리아가 거머쥐었다. 블리어는 저가 졌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는지 그제야 미간을 서느렇게 접었다. 종이가 뚫릴 정도로 내려다보며 제 패배에 짙은 의문을 가졌다. “이게 어떻게 한 줄입니까.”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봐봐, 딱 다섯 개지?” “선을 이따위로 그려놓으니 내가 압니까.” “그럼 공작이 긋던가.” 렐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그에게 깃펜을 맡겼다. 블리어는 자를 대고 긋는 것처럼 정확하고도 차분하게 가로 열 다섯줄, 세로 열 다섯줄을 그려놓았다. 미술을 전공했다고 해도 믿겨질 만큼 깔끔한 오목판이 완성되고 다시 그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승리의 여신은 렐리아를 향해 안겨올 것처럼 굴었다. 이미 검은 돌 네 개가 완성된 상황에서 렐리아는 누가 봐도 얄미울 만큼 입술을 길게 끌어올렸다. “여기 뚫렸네~?” “…알고 있으니 그 입 다무십시오.” “공작 좀 분발해봐. 이번 건 내가 봐준다.” 으스대는 그 태도에 블리어는 쉬엄쉬엄 그녀를 상대하려던 생각을 완전히 버렸다. 이게 뭐라고 그는 서늘하게 낯까지 가라앉히고 있었다. 심각한 군무회의에서나 보일 법한 표정으로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분석해 작은 칸에다 하얀 동그라미를 그려 넣었다. 참 신중한 손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두뇌와 노력은 무시할 게 못되는지 바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겼습니다.” “뭐? 어디?” “하나 둘 셋 넷 다섯. 보입니까?” “아나, 언제 완성했대. 다시다시.” 종이 한 장 놓고서 두 남녀는 머리를 굴렸다. 서로의 어깨가 어느새 자연스레 붙어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열렬히 집중한 얼굴들이었다. 종이 앞뒷면을 오목판으로 만들고서 그것도 모자라 종이 세 장을 더 동원해 두 사람은 결판을 지을 수 있었다. 육대사로 블리어가 이겼다. “내일 비가 오려나? 왜 이렇게 삭신이 쑤시지.” 렐리아는 딴청을 부리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게나 으스대놓고서 막상 져버리니 낯이 깎여 도망갈 심산인 것이다. “나 이만 가볼게. 수고하셔.” 돌아가겠다는 그녀를 블리어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다과상에 차려진 디저트도 맛보았겠다 이제 슬슬 업무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다 문득 블리어의 시선에 여자가 앉았던 자리가 들어왔다. 검은 소파가죽위에 금색의 납작한 화폐를 발견하기란 쉬웠다. 돈이 필요하다 해놓고선 놓고 가다니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건지 모를 여자였다. 확실히 요즘 들어 뭔가 이상하다 여기며 블리어가 금화를 주워들고서 몸을 일으킬 때다. 이번엔 소파 아래에 벗어놓은 한 켤레의 실내화가 그의 눈에 띄었다. 신발을 벗고 그냥 나간건가 싶으니 일자로 다물린 입술 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돌아오지 않는 걸보니 맨발로 복도를 거닐어 잘도 제 방까지 간 모양이었다. 블리어는 직접 갖다 줘야겠다는 생각에 결국 집무실을 벗어났다. 다행히 별관구석에 있는 방까지 인적 드문 복도를 이용하기에 지나가던 사용인이 그녈 목격하진 않았을 거라 여겼다. 맨발로 저택 안을 거닐던 여자를 보고 정신이 나갔다는 소리가 나돌 일은 없을 거란 소리였다. 그가 몸소 방까지 찾아갔을 때 마침 방에서 나오는 시녀가 있었다. 담당시녀 소피아였다. 그녀는 제 앞으로 걸어오는 자가 누군지 쳐다본 순간 바로 닁큼 고갤 숙였다. 당황한 시녀에게 예를 갖출 시간도 주지 않고 블리어는 바로 용건부터 물었다. “렐리아는 안에 있습니까.” “아. 그게 피곤하시다고 방금 잠 드셨어요…" 소피아의 난처한 대답에 블리어는 소리 없이 무거운 숨을 흘려보냈다. 일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자는 건가 싶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문제가 있었다. 왕실의원에게는 아픈 데가 없다는 보고를 받았으나 최근 부쩍 잠이 는 것에는 어떤 심리적인 요인에 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그것을 자신보다는 그녀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시녀가 더 잘 파악하고 있을 거라 여기고 블리어는 운을 뗐다. “최근에 이상한 점 못 느꼈습니까?” “…이상한 점이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피아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머리를 더 깊숙이 숙였다. 그저 평소같이 제게 친절한 여인이었기에 별다른 점을 느끼진 못했다. 블리어가 듣기엔 썩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시녀에게 뭐라 다그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모시는 주인을 좀 더 관심 있게 살피도록 낮게 주의를 주고서 그는 단단히 충고했다. “앞으로는 뭐든지 좋으니 내게 보고하십시오. 평소와는 다르게 이상한 말을 했다든가, 안 찾던 걸 찾는다든가, 뭘 시켰다든가 하는 사소한 것들도 좋습니다. 내가 빠짐없이 보고하십시오.” “네…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지금 생각난 게 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의 말에 그제야 소피아는 한 가지 떠오른 게 있는지 머릴 더 조아렸다. 이런 걸 말해도 되나 싶었으나 그 당시 여인의 표정이나 목소리가 평소답지 않게 가라앉아있어서 찜찜하기는 했다. 그럴 분이 아니셨기에 더욱 그랬다. “아…그게 엊그저께…피임약을 찾으셨어요. 주무시다가 갑자기 깨어나셨는데…복용해야한다면서 제게 급히 사오라고 하셨어요. 그때 안색이 너무 창백하셔서 악몽을 꾸신 것 같았고요.” 걱정스런 소피아의 말에 블리어는 긴 침묵만 지켰다. 뒤늦게 제 손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녀를 눈치 채고서 들고 있던 여자신발을 금화와 함께 넘길 수 있었다. 블리어는 업무를 위해 되돌아가야했으나 신경은 여자의 방 앞에 두고 온 것처럼 한참을 찝찝함에 시달려야만 했다. * 그날 밤도 렐리아는 가족 꿈을 꿨다. 항상 같은 꿈의 연속이었다. 자취한 뒤로 줄곧 비워진 자신의 방에서부터 꿈은 시작되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있었던 위인전과 버리지 않은 교과서나 참고서가 꽂힌 책장과 빈 침대, 그리고 책상위에 덩그러니 놓인 영정사진이 자신을 반겼다. 그것들을 보며 서 있다가 자신은 항상 거실로 나갔다. 집안은 흑백사진을 보는 것처럼 삭막하고 정적이었다. 엄마는 매일같이 소파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예능프로그램을 봐도 웃지 않고 항우울제만 찾으셨다. 가끔씩 집안일을 하시기 위해 움직이시는 게 다였다. 생기가 없어 보이셨다. 아빠가 퇴근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엄마는 늘 챙겨보던 드라마도 보지 않고 안방에 들어갔다. 아빠는 홀로 거실에 앉아 티비만 켜놓은 채 술만 드셨다. 잠드시기 전에는 베란다로 나가 십 년 전에 끊었던 담배를 매일같이 피우셨다. 그 뒷모습을 자신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없었다. 만질 수도 없고 말을 걸 수도 없는 귀신이 되어서 그 삭막한 집안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빠가 거실 불을 끄고 안방으로 들어가면 그제야 꿈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눈을 뜨면 늘 그렇듯 머리는 띵하고 가슴속은 황폐해져있었다. 눈물은 말라붙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두 눈이 너무나도 건조해서 유리처럼 파삭 깨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렐리아는 습관적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래 잤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여덟 시간정도 지나있었다. 아직 밤 열시를 가리키는 시침을 바라보다 렐리아는 다시 잠이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문득 떠오른 남자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기다리려나.’ 턱을 긁적거리며 렐리아는 마지못해 몸을 일으켰다. 이 세계지식을 깨우치는 시간이 쓸모없이 느껴져서 최근 들어 공작의 방에 찾아가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약속했으니 싫어도 가야했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렐리아는 침의만을 입은 채 그의 방으로 향했다. 늦은 시각이라 복도엔 아무도 없었고 끄트머리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데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문과 이어져있는 거실의 중앙에는 어김없이 그가 소파에 앉아있었다. “공작 뭐해.” 렐리아는 친숙하게 그를 부르며 그의 옆자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인 걸 아는지 블리어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다가 그녀가 저를 부르자 그제야 시선을 주었다. “지금까지 자다온 겁니까.” 잔뜩 흐트러진 잠옷차림이었다. 그것이 밤에 보기엔 자극적이라기 보단 참 열심히 자다왔구나 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차림이었다. 구겨진 치맛자락이나 쇄골까지 편히 풀어 내린 단추보다도 어깨위에 어지러이 붙어있는 은색머리칼에 더 시선이 갔다. “그 머리.” 짧고 굵은 말에 렐리아는 그제야 그의 눈이 어딜 뚫어져라 보고 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정리해 봐도 됩니까.” 왠지 오랫동안 별러오던 것을 해치우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듯 했다. 실제로 그의 녹안은 평소답지 않게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렐리아는 어디 해보란 듯이 고개를 까딱했다. 간단한 허락에 블리어는 읽고 있던 책까지 덮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뭘 찾는지 방을 둘러보다가 커튼을 묶고 있던 흰 레이스끈을 풀어서 가져왔다. 그러곤 바로 여인을 뒤돌게 앉게 한 후 그 옆자리에 앉아서 머리카락 정리에 들어갔다. 렐리아는 소파위에 두 무릎을 세워 앉은 채 두피를 훑는 딱딱한 남자손길을 느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이리저리 엉킨 머리를 손 하나만으로 빗어 내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머리를 달고 사는 저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었다. 허나 미용사가 만져주는 것처럼 섬세하고 숙련된 손길로 그는 제 머리를 한 갈래로 가지런히 묶어주기 시작했다. 끈으로 두 바퀴 돌리고서 리본으로 묶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애인의 머리를 이렇게 직접 묶어준 적이 많나, 하고 생각될 정도로 말이다. “이제 보니 공작. 로맨티스트였나 보네?” “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이렇게 머리를 묶어드린 적이 종종 있었습니다.” “아니네. 효자였네.” 자신도 이렇게 엄마 머리를 묶어드린 적이 있었나. 기억이 안난다. “그리고 나또한 열두 살 전까지는 머리를 길렀었습니다.” “열두 살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나 보네.” “터닝포인트는 또 뭡니까.” “그냥 전환점 같은 걸로 알아들어. 근데 열두 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잘랐대?” “왕립 아카데미에 입학했었습니다.” “푸훕. 그래서 깎은 거야? 그 나이 때 소년답네~” 렐리아는 머리 묶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씰룩 끌어올려진 입술과 과하게 휘어진 눈매는 ‘그랬구나 그랬어~’하고 말하듯이 능청스러웠다. “또래여자애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잘랐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 말해두겠습니다. 당시 검술학부였기에 거추장스러운 머리가 학업에 방해만 된다 여기고 자른 것입니다.” 무당을 속여도 그의 날카로운 눈을 속이진 못했다. 남 속마음 꿰뚫기로는 무당 저리가라 하는 자다웠다. 렐리아는 뜨끔한 속을 감추기 위해 부러 화제를 전환시켰다. “아 왠지 공작이 소년이었을 때는 상상이 잘 안가. 같은 또래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분위기라거나, 그건 좀 상상된다. 그때는 뭐 친구는 있었남?” “있긴 했습니다. 중간에 절교했지만.” “푸학.”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뿜어버렸다. 만약 입에 물을 머금고 있었다면 분사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평생 홀로 고고할 것 같은 그의 입에서 절교라는 말이 나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왜, 왜 절교했는데?” “싸웠습니다. 여자문제 때문에.” 0071 / 0172 ---------------------------------------------- 진심과 가벼움 “읭? 여자?” “친구의 약혼녀였던 여자, 아니 소녀가 그 당시 날 좋아했었습니다.” “정말? 몇 살 때였는데?” 어느새 편하게 아빠다리를 하고서 렐리아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공부를 뒤로 미루기 위한 영악한 속셈이 없잖아 있었으나 순수하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호응에 힘입어 블리어는 다신 꺼내볼 일 없다 여겼던 퀴퀴 묵은 기억을 되짚어올라가기 시작했다. “열일곱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그 친구의 약혼녀는 열셋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서 사리분별을 잘 못하는 건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건지, 약혼자가 옆에 있음에도 내게 마음을 드러냈었습니다. 내가 저를 좋아한다고 혼자 단단히 착각에 빠져선 양가 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비가 될 거라 선포하기도 했었습니다.” “푸하하. 골 때리는 애네. 뭐하는 애야.” 소파 팔걸이를 두들기며 렐리아가 웃음을 터뜨리자 블리어의 눈썹이 저절로 슥 올라갔다. 의외라는 듯이 말이다. “웃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만. 흠, 재밌습니까?” “응.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당사자가 생각했을 때는 인생에 있어 가장 재미없던 시절에 불과했으나 듣는 입장은 다른 모양이었다. 한 번도 이런 얘길 남에게 해본 적이 없으니 당연하기도 했다. “공작 빨리. 그렇게 뜸 들이면 더 궁금해진다고.” 지긋이 자신을 바라보며 계속 얘기해보라는 여자의 재촉에 블리어는 친구와 싸웠던 뒷얘기를 순순히 풀어놓았다. 그리 흥미진진한 얘기도 아닐 텐데 귀를 기울여주고 있다는 게 신기했다. 은근히 흡족하기도 하고 저를 담은 파란 눈동자에 작은 이채가 떠오르는 게 흥미로워 그는 계속 얘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물론 단순히 여자문제 때문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어린 약혼녀에게도 무시 받았으니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상했을 터, 그걸 핑계 삼아 공자인 내게 갖가지 열등감을 터뜨린 것이라고 나는 봅니다.” “하긴 우리 공작이 어딜 내놔도 완벽하니까. 열등감 느낄만해.” 받아주고 맞장구쳐주는 렐리아의 반응에 블리어도 어느새 편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쓸데없는 얘기는 일절하지 않는 칼 같은 성미는 어디가고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물론 그 자신은 물론이고 렐리아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학업과 후계수업을 병행했던지라 그 당시 안 그래도 바빴습니다. 상대하기도 귀찮아 결국 친구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잘했어. 그런 애는 한번 친구로 두면 인생 피곤해져. 지 혼자 열등감 느껴서 꼴값 떠는 걸 뭔 수로 받아준대.” “그대 말대로 그런 꼴값도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 처음으로 단 것에 의존했던 것 같습니다. 오전 내내 검을 휘두르고 외교, 정치, 문예, 역사관련 수업을 듣고 친구한테 시달리다 가문 내 승계수업까지 받아야했으니 말입니다. 그 당시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피로했기에 체력보충 위해 초콜릿을 항시 들고 다녔었습니다.” “…많이 피로한 정도가 아닌데. 공작 어떻게 살아있는 거야?” 쩝하고 렐리아는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별로 좋지 못한 반응에 블리어의 곧은 눈썹이 일자로 가지런히 내려앉았다. “이건 재미없습니까.” “재미 이전에 소름인데. 학원 열 개 다니는 아이가 공작이었구나.” “아무튼 내가 단 걸 좋아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라 얘기한 거였습니다. 근데 무슨 얘길 하다가 이 얘기까지 온 건지……, 흠.” “킥킥, 나도 가끔 그러는데. 정신없이 떠들다보면 별의별 주제가 다 나온다?” 그를 돌아보고 있던 자세가 불편한지 렐리아는 정면을 돌아보며 소파등받이에 기대었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로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공부얘기가 안 나오는 걸보니 그도 잊은 모양이었다. 물론 안심할 수는 없기에 렐리아는 다시 입술을 뗐다. “근데 그 너 좋아했다는 중이병 말이야. 걔 지금도 그러는 거 아니지?” “알락디사 후작가문의 여식입니다. 미혼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도 내게 마음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라, 나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알락디사. 슈로니 알락디사로 기억합니다.” 렐리아는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싸악 얼굴빛이 굳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중이병 시절에는 가슴속에 저마다의 흑염룡을 품는다지만 성인이 돼서도 그런다는 건 문제가 있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만의 세상에 도취되어 사는 환자가 그러하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애인이 생겼다고 독을 탔던 그 일만 봐도 얼추 견적이 나온다. 그런 애를 한순간 친구로 여길 뻔했던 제게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이게 다 마음이 약해져있어서 그런 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렐리아는 제 옆에 앉은 그를 돌아보았다. “공작. 걘 아냐.” “말하지 않아도 관심 없습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어서 다행이네.” 안도하는 렐리아와는 달리 그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한순간 그녀의 표정이 많이 꺼림칙 해보여 그게 더 신경 쓰일 뿐이었다. 알락디사 영애를 아는듯해 보이니 자기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문제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른 문제들은 다 사소하게 느껴질 만큼 상대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시녀에게 들었습니다.” 어떻게 운을 떼야할지 몰라 블리어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렐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나 가만히 옆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를 돌아보는 진녹안에 슬며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는 쓰디쓴 약초를 삼킨 것처럼 텁텁한 눈빛이었다. “…어째서 피임약을 복용하는 겁니까.” “생리불순 때문에.” 소피아가 물을지도 모른단 생각에 이미 둘러댈 말을 생각해놓았기에 렐리아는 매끄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피하듯 고갤 정면으로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다행히도 블리어는 이 여자가 민망해한다고 받아들였다. 피임약이라는 주제가 외간남자와 나눌 대화는 아니니 말이다. “그대도 내게 털어놓을 일이 있으면 언제든 털어놓으십시오.” 그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으나 눈길은 렐리아에게 향해있었다. 거친 침엽수 잎을 연상케 하는 녹색 눈은 투박하지만 잔잔했다. 기댈 수 있는 소나무처럼 우직하기도 했다. “들어주겠습니다.” * 밤이 지고 해가 떠야할 시간이었으나 창밖은 어두웠다. 렐리아는 창가 앞에 서서 우중충하게 먹구름이 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껏 주말이 왔는데 날씨한번 더럽게 우울했다. 제 기분도 별반 다를 바가 없어서 화창한 것보단 낫겠지 싶었다. 렐리아는 흐릿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소피아가 가져온 외출용 숄을 가볍게 위에 걸쳤다. 드레스가 아닌 겨울에 입기엔 조금 짧은 원피스차림의 그녀는 조용히 외출준비를 마쳤다. 평소 잘 하지 않던 화장까지 했으니 다름 아닌 데이트 약속 때문이었다. 생전 처음 하는 데이트였지만 그다지 두근거림이라곤 없었다. 가슴은 무겁고 입은 자꾸만 바싹 마르고 긴장감만 들 뿐이었다. 렐리아는 초조하게 시계만 주시하다가 근처에서 옷장을 정리하던 소피아를 불렀다. “지금 약 먹을 시간인데 약 준비해줘.” “아…네.” 소피아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어딘가로 향했다. 물을 잔에 따르고 서랍장을 뒤지는 소피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봤을까 일분도 안지나 그녀가 작은 환약과 잔을 가져왔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렐리아는 쓴 환약을 입안에 밀어 넣고 삼켰다. 남자를 사귄 적도 관계를 가져본 적도 없다지만 상식으로나마 피임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복용방법이 원래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매일 규칙적으로 복용하고 있다지만 아직 복용한지 닷새밖에 안 지났다. 무엇보다 약재를 빻아 뭉친 이 약이 얼마만큼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마나와 마법이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과학적으로 피임효과를 입증하는 것도 어려운 일일테다. 확실한 정보도 없이 너무 서두른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가 데이트 장소에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다는 것뿐이다. 되도록 다신 마주하고 싶지 않기에 오늘을 마지막으로 삼고 싶을 뿐이었다. 약속시간에 가까워지자 렐리아는 구두로 갈아 신고 문으로 향했다. 그러곤 저를 따라 나와 배웅하려는 소피아를 돌아보며 작게 웃었다. 비밀얘기라도 하듯 검지를 코앞에 대고 능청스럽게 말을 걸건 이 뒤였다. “그 사후 먹는 약 같은 것도 있으면 좀 사다줘. 내가 뭐 부탁하는지 알지?” “…이미 드시고 계시는데 또요…? 그, 건강에 안 좋으실 텐데….” “왠지 불안해서. 한 개만 더.” 제 부탁에 소피아의 동그란 얼굴위로 갈등하는 빛이 떠올랐다. 사오는 것도 갈등되고 공작에게 일러바칠지 말지도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굳이 소피아의 입을 단속시키지 않았다. 아무래도 작은 약속도 어기지 않고 매번 책임 운운하는 그 반듯한 성미상 저를 창부로 여기는 편이 낫다 여긴 것이다. 몇 번 솔직하게 얘기해줘도 믿지 않았기도 했고, 지금도 그의 이미지 속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짓을 하려하는 중이었다. “나 다녀올 때까지 좀 사다 놔줘. 부탁할게? 돈은 여기.” 소피아는 저에게 금화을 건네며 능글맞게 웃고 있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화장을 해서 곱고 환한 얼굴이었으나 왠지 우는 게 더 어울릴 것 같은 표정 같았다. 하나도 밝아 보이지 않고 태연해보이지도 않는다고 소피아는 생각했다. 불안한 마음에 어디 가시는지 조심스레 물으려했으나 붙잡기도 전에 이미 여인은 방밖을 나간 후였다. 0072 / 0172 ---------------------------------------------- 진심과 가벼움 날씨가 흐리다 싶더니 마차에 오르기 무섭게 굵은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겼다. 날이 조금 풀렸다고 눈이 아닌 차가운 비가 내렸다. 다행히 세차게 쏟아지지는 않았지만 무겁게 추적추적 내리는 모습에 렐리아의 마음도 덩달아 무거워졌다. ‘우산 가져올걸 그랬나.’ 이미 나온 후라 다시 마차를 돌릴 수도 없었다. 차창너머로 어지럽게 튀어나오는 마차들이 보였다. 빗물로 젖어 들어가는 거리에 서로 비를 피하기 바쁜 군상의 모습 또한 보였다. 수도마차를 잡느라 바쁜 신사들과 지붕아래 비를 피하는 영애들, 다들 주말이라고 데이트라도 나온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마차 안에 앉아있는 시간은 꽤 오래갔다. 시가지를 가득 메운 마차들로 북적이다보니 오고가지도 못하고 체감상 십분 정도 느릿느릿 제자리만 맴돌았다. 간이창문을 열어 마부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낮 세시 반이라고 했다. 약속시간에서 삼십분은 더 지체된 상태였다. 자신이 안 오는 줄 알고 그가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기에 마음이 급해졌다. 어떻게 잡은 약속인데 이대로 날려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렐리아는 지금 마차가 서있는 곳이 수도 중심상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부에게 급히 여기서 내리겠다고 말했다. 마차에서 내려서기 무섭게 얼음물보다 차가운 빗물이 렐리아의 머리며 어깨며 내려앉았다. 귀걸이를 하고 오지 않아 추위가 오싹한 전율이 되어 몸 이곳저곳을 찔러왔다. 쏟아지는 비에 옷자락이 그대로 푹 젖어 들어갔다. 기껏 소피아가 공들여 해준 화장이 번져가는 게 느껴졌으나 렐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굽 있는 구두를 신고서 몇 분간을 달렸을까, 마침내 그녀는 상가의 중심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텅 빈 회색상가의 중심에는 상아색 조각분수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나팔 부는 소년 조각상은 검은 먹구름아래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약속장소 앞에서 비를 피하지도 못하고 서있는 은발남자가 말이다. 렐리아는 멀찍이서 저를 바라보는 한 쌍의 검은 눈과 마주했다. 어떤 감정을 띠고 있는지 모르겠다. 자신도 무슨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약속장소에 있음에 안도감도 긴장감도 들지 않았다. 그저 허무한 감정이 벌써부터 치밀어 올랐다. 무겁게 걸음을 옮겨 어느새 그녀는 그의 앞에 섰다. 이스티온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병약한 사람처럼 창백한 이마와 뺨에 달라붙는 긴 은색머리칼이 더없이 음울해보였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추위가 제게도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여인의 핏기 없는 입술이 벌어졌다. “옷.” 무겁게 한 자 운을 떼며 렐리아는 남자의 마른 손을 붙잡았다. 서로의 낮은 체온이 더욱 서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젖었네. 어디 들어갈래.” 이스티온은 젖은 그녀를 보며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였다. 저번처럼 다짜고짜 제게 멱살을 잡지도, 저번 일에 대해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다 잊었다는 양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런 것치곤 뒤이어 흘러나온 얇은 목소리는 살짝 떨렸지만. "가자." 그녀가 안 올 거라고 이스티온은 약속시간 전만해도 그리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약속장소에 나온 이유는 혹시나 나올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이스티온은 여인이 이끄는 대로 따르다 도착한 곳의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고급스럽지 않고 그저 색정적인 붉은 간판이었다. 짐작은 했던 지라 그는 잠자코 안으로 발을 들였다. 렐리아는 무작정 걸어 도착한 곳의 인테리어나 조명, 기타 세부적인 것들이 정확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와인색, 천홍색, 분홍색 등 야릇한 색조합만 간간이 눈에 띠었다. 막상 숙박업소에 발을 디디게 되니 더없이 기분이 이상했다. 여관주인은 홀딱 젖어 들어오는 두 남녀에게 적당히 으슥한 방 하나를 내주었다. 렐리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안내해줌에 감사했으나 동시에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왠지 들어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 이렇게 행동해선 안 될 것 같은 느낌, 영영 지울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을 남길 것 같은 느낌. 마지막으로 제어하려드는 이성인지, 불안감인지 모를 감정에 렐리아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찌질하네.’ 여기까지 와놓고서 막상 한발 내딛기를 주저하는 자신이 한심하기만 했다. 남들처럼 즐기다 나오는 것뿐이다. 그렇게 마음 편히 가지면 끝날 일이다. 렐리아는 저보다 큰 사내의 손을 붙잡고 불 꺼진 방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드리워진 그늘 속으로 두 남녀가 자취를 감추기 무섭게 끼이익 문이 닫혔다. 달칵, 되돌릴 수 없는 이 소리를 기점으로 적막감이 들개처럼 사납게 들이닥쳐 왔다. 숫기 없는 남자를 연기하듯 말이 없어진 이스티온을 바라보며 렐리아는 두 손을 가슴위로 들어올렸다. 말은 필요 없었다. 가장 먼저 어깨를 두른 숄이 바닥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옷 리본 풀고 끌어내릴 때 손가락이 잠시 멈칫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성인남녀가 이곳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할 일은 정해져있었다. 가슴앞섶을 가리던 리본이 사라지니 바로 속옷만 입은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그에 이스티온은 방구석으로 잠시 시선을 옮겼다. 말리기는커녕 침묵을 지킨 채 가만히 서있는 모습이 싫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에 반해 렐리아는 아랫입술만 지그시 깨문 채 탈의를 이어나갔다. 일부러 벗기 편한 옷으로 입고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탈의가 길어졌다면 몇 번이나 내면에서 갈등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부에 달라붙어있던 서느런 옷자락을 끌어내리자 오돌토돌 닭살이 돋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에 걸쳐져 있던 옷자락이 말려 내려가 어느새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졌다. 가느다란 두 다리를 타고 흘러내려가는 감촉에 순간 등골이 싸했다. 렐리아는 허공에 떨어뜨렸던 두 손을 들어 등 뒤로 가져갔다. 브래지어 후크를 쥔 손끝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어차피 내 몸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하며 렐리아는 바닥을 본 채 브래지어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새하얀 맨가슴을 훤히 드러내놓고서 렐리아는 천천히 고갤 들었다. 어떠냐고 묻듯이 매끄럽게 입가를 끌어올린 채 젊은 기사를 바라보았다. 수백 명을 죽인 꺼림칙한 원흉을 두 눈에 담았다. 평소 순하기 그지없던 눈은 거짓이었다는 듯 그는 여인의 반라에 달아오른 눈을 했다. 뽀얗고 흐벅진 자태를 적나라하게 훑고 있었다. 찝찝하게 피부에 들러붙은 긴 머리칼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눈길이었다. 렐리아는 끈적하게 달라붙는 사내의 눈길에 그 생소한 흥분이 제게까지 전해져온다고 여겼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뭔가 부족한지 적극적으로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자존심을 짓뭉개고 팬티에 손을 가져갔다.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그럴 생각으로 들어왔으니 끝을 내야할 시간이었다. 허벅지를 타고 끌어내린 얇고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렐리아는 애써 외면했다. 여자는 모든 걸 벗었다. 천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어느 남자가 봐도 눈이 뒤집힐 만큼 야한 모습을 했다. 적당히 어두운 방안, 단 둘뿐인 남녀, 무언의 허락. 본능에 충실해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환경이었다. 백옥 같은 살결과 눈부신 나신에 이스티온은 그녀에게 다가섰다. 아름답다.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아름다움에 그는 말 그대로 홀렸다. 젊은 혈기답게 그는 이성의 끈을 놓고 아름다운 여인을 끌어안기에 이르렀다. 여린 살결이 느껴지고 묘한 떨림이 커다란 손아래 전해지자 이스티온은 더 이상 참기가 힘들었다. 강하게 이는 충동을 외면하지 않고 이 짧은 순간만은 이성을 배제하기로 마음먹었다. 렐리아는 그런 남자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려했다. 물론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급작스레 저의 한쪽가슴을 움켜쥐고 밀고 들어오는 낯선 품에 그녀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다 뒷무릎에 와 닿은 딱딱한 나무판자의 감촉에 그녀의 몸이 기울어졌다. 순간 세상이 반 바퀴 회전했다. 다행히 그녀의 등을 받쳐준 것은 푹신한 침대시트였다. 깜깜한 천장을 담기 무섭게 부스럭대는 소리가 성급하게 들려왔다. 침대 앞에 선 젖은 은발의 남자가 벨트를 풀고 셔츠단추를 끌어내리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렐리아는 실소를 흘렸다. 이제까지 정말 순진한 적 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입안만 지독히도 썼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저를 죽이려들더니 이젠 저를 탐하려드는 남자의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뻔뻔스러워서 욕이 다 나올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도 이스티온은 서둘러 바지만 끌어내린 채 침대 위로 올라왔다. 전도유망한 젊은 청년답게 온몸이 군살 없이 매끄럽게 가꿔져있었다. 이스티온은 가장먼저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의 입에 제 입술을 가져다댔다. ‘이것만 참으면, 참으면….’ 본격적으로 들리기 시작한 삐걱대는 침대소리에 렐리아는 생각했다. 이 꺼림칙한 것과는 다신 안 봐도 된다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지나가려는 사람의 바지자락이라도 붙든 사람처럼 처절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몸은 텅 비워진 것처럼 흔들리는데 머릿속은 오히려 꽉 채워졌다. 아플 리가 없는데 아팠다. 강간일리 없는데 마음 어느 부분이 북북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미약한 신음소리도 새어나가지 않게 더욱더 이를 꽉 깨물었다. 제 남은 자존심이라도 챙기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소리를 참아 넘겼다. 배려 없이 무참히 성인남자아래 짓눌린 첫 경험은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게임치곤 너무 현실감 있어서 괜히 더 그랬다. 생각보다 많이 끔찍했다. 즐긴다는 개념은 사라지고 최악일 만큼의 첫 경험만이 그녀에게 남았다. 그래도 이걸로 가장 공략하기 힘들 거라 여긴 드래곤과의 인연은 끝난 것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후련해졌다. 길게만 느껴졌던 십 분이 지나고 렐리아는 한번 더 저에게 욕구를 해소하려는 남자를 붙잡았다. “…두 번은 싫어.” 마치 울다온 여자처럼 잔뜩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 때문인지, 저가 뿌린 희뿌연 씨를 발견해서인지 이스티온은 뒤늦게야 정신을 되찾았다. 몰려든 현실감에 약간은 놀란 것 같았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스스로가 한 짓을 외면하듯이 그는 서둘러 침대 아래로 내려와 젖은 바지를 챙겨 입었다. “저…이만 가보겠습니다.” 침대위에서 한 행위들에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태도로 그는 제게 가볍게 고갤 숙여보였다. 그러곤 들어 온지 얼마나 지났다고 남자는 현장에서 벗어났다. 렐리아는 문밖으로 사라진 짧은 은발의 남자를 머릿속에서 지워내었다. 좁은 방안 침대위에 누워 공허하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가랑이 사이가 찝찝해서 미칠 것 같았으나 애써 무시했다. ‘이제 두 명….’ 이걸로 된 거다. 0073 / 0172 ---------------------------------------------- 진심과 가벼움 렐리아는 그 공간에 있기 싫어 서둘러 여관을 벗어났다. 아직도 밖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이미 젖은 상태라 렐리아는 거리낌 없이 빗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온몸을 때리는 차가운 빗물에 어쩐지 으슬으슬한 기분이 들었다. 감기에 걸릴 일은 없을 텐데 참으로 이상했다. 공작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도 한기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차마 이 꼴로 저택 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설 수 없기에 렐리아는 부러 후문으로 돌아갔다. 복도구석에 있는 방으로 걸어가는 동안 무겁게 늘어진 옷자락에서 물방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이 모습을 누가 볼 새라 렐리아는 서둘러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무도 없겠지 싶었으나 방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리잡고 있었다. 문에서 멀지 않은 소파에 시커먼 남자가 팔짱을 낀 채 앉아있었다. 블리어는 테이블 위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다가 지금 막 들어온 여자를 서느렇게 돌아보았다. 허나 비를 쫄딱 맞고 들어온 렐리아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그 해괴한 꼴에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갔다 왔기에 그렇게 젖어서 들어옵니까.” 근처에 걸려있던 수건을 집어 들고서 블리어는 곧장 문가에 서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문 모습에 그는 미세한 주름이 난 미간을 반듯이 폈다. “우산 안 가져갔습니까.” “…….” 렐리아는 대답하지 않고 발치에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제 머리위로 씌워진 부드러운 수건의 감촉에 그제야 고개를 들어올렸다. 저를 기다려준 사람이 소피아도 아니고 다름 아닌 공작이라는 사실에 여전히 얼떨떨했으나 렐리아는 여상하게 운을 뗐다. “공작 왜 여깄어.” “티타임이나 가질까 싶어 잠깐 찾아왔습니다.” 혹시나 올까싶어 기다린 지 반시간 째라지만 블리어는 부러 사실과 다르게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비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저 멀뚱히 서있는 여자에게 맡기려니 답답해서 저가 하는 게 낫겠다 판단한 것이다. 그의 진녹안은 작은 얼굴을 세심히 훑어 내렸다. 평소 뺀질거리던 낯은 어디가고 안색이 창백하기만 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래 보여?” “그대는 무심할 만큼 주위에 둔하지만 스스로에게도 둔한가봅니다.” 그 따끔한 말에 렐리아는 하하 하고 그저 힘없이 웃어버렸다. 이상하게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기력이 쑥 빠지는 기분이다. “무슨 일이랄 것도 없어. 잘 해결됐으니까.” “뭐가 잘 해결됐다는 건진 몰라도 우산은 쓰고나가질 그랬습니까.” “아 그럴걸. 찝찝하다.” 렐리아는 아령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머리를 그의 가슴팍에 툭 기대었다. 힘이 없으니까 네가 좀 어떻게 해달라는 듯이 체중을 그에게 실었다. 그런 여자를 블리어는 밀어내지 않았다. 정수리만 보이고 있으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진 알 수 없으나 이 여자가 답지 않게 군다 여겼다. 수건 위에 얹어두었던 손을 내려 그는 작은 어깨에 얹어놓았다. 그러곤 동그란 어깨를 살포시 잡았다 놓기를 반복하며 무언가 시도하려다 말기를 반복했다. 그에 렐리아는 그가 뭐하는 건가 싶어서 고갤 들어 올리려 했다. 동시에 저의 어깨를 쥐고 끌어당기는 행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몸이 살짝 닿는 정도로 조금 부드러운 포옹에 그녀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당혹스러움이 컸으나 뒤늦게 낮게 숨을 고르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뭐야, 왜 이래.” “답지 않아서 말입니다. 저번부터 뭘 종종 놓고 가질 않나 오늘은 우산도 챙기지 않고 나가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지금 공작도 답지 않은데.” “그대가 좋아하는 쌤쌤이로 치겠습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날카롭게 캐묻는 것이 그의 정석대로라면 지금 그의 행동은 정반대에 해당되었다. 최근 찾아본 책에 나오는 내용대로 행한 것이었다. 물론 별 효과가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말없이 안아주는 게 우울증에 큰 도움이 된다던 책의 저자를 찾아내 문단마다 조목조목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의 사고후유증 때문인 겁니까.” “그런 거 아냐.” 블리어는 그다지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다. 어딘가 나사 풀린 여자의 무얼 믿고 신뢰할 수 있을까. 멀쩡한 것 같으면서도 위태롭다. 그 괴리를 진즉 눈치 챈 그였으나 정작 당사자는 모르는 듯해서 더 신경 쓰였다. 얼음장 같은 몸뚱이를 하고 있음에도 여자는 자기 몸 상태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바로 욕실에 밀어 넣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쥐고 있던 작은 어깨를 놓았다. 막상 그 가녀린 몸뚱이를 몸에서 떨어뜨려내려는 순간이었다. 작은 손이 제 등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공작.” 제대로 닦지 않은 물기에 그의 겉옷이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것을 느꼈으나 렐리아는 더 깊숙이 머릴 기댔다. 지금 제 얼굴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동시에 이 남자품은 썩 징그럽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품이 따뜻해서 그런지, 품이 커서 그런지 나름대로 의지는 됐다. “나 막 남자한테 안기고 이러는 성격 아닌데.” “압니다.” 블리어는 하려던 모든 행동을 멈춘 채 받아주었다. “그대성격에 어련히도 그러겠습니다.” 상대가 여자라면 재고해봐야겠지만 남자라면 가차 없는 여자였다. 그렇기에 정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리도 순순히 구나 싶었다. 그가 언짢은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렐리아가 끼어들었다. “공작 잠깐만 이러고 있자. 지금 화장 망해서 차마 고갤 못 들겠어.” “별로 신경 안 씁니다.” “아니 내가 신경 쓰인다고. 프리허그 한다고 생각하고 가만히 좀.” “프리허그는 또 뭡니까.” “공작이 모르는 그런 게 있어.” 어떻게든 고개를 들지 않으려고 제 등 자락만 꽉 붙드는 손길에 블리어는 더 캐묻기를 관두었다. 말없이 제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그는 생각보다 여자가 왜소한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블리어는 진득하게 침전된 눈을 하고 있다가 이제껏 담아왔던 속생각을 드러내었다. “요새 들어 우울증이 찾아온 것 같습니까.” “그랬어? 공작 괜찮아?” “내가 아니라 그대를 말하는 겁니다.” “그런 게 나한테 왜 와. 나처럼 만사태평한 애 있음 나와보라고 해.” “그런 것치곤 기운 없는 얼굴이라는 건 압니까.” 깐깐한 음성에도 렐리아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말았다. 그녀는 그제야 단단한 품에서 이마를 떼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매끄럽게 휘어진 눈이 재밌는 얘길 들은 것처럼 짓궂었다. “괜한 사람 우울증환자로 만들지 마셔.” “우울증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가장 흔한 병 중…,” “됐어. 아 춥다. 옷 갈아입을래.” 팔짱을 끼고 팔등만 슥슥 문지르는 꼴에 블리어는 바로 그녀의 팔을 쥐고 욕실 쪽으로 이끌었다. 이번에도 제법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씻고 나오십시오. 기다려주겠습니다.” “뭐야~ 야한데.” 씻고 나오라니 신혼 첫날밤도 아니고 말이다. 렐리아는 저질스럽게 능글거렸으나 블리어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조금의 동요도 비치지 않은 채 씻고나 오라고 욕실 안으로 밀어 넣기까지 했다. 렐리아는 욕실 안에서 샤워를 했다. 가랑이사이로 찝찝하게 흐르던 액은 티슈로 적당히 닦아만 냈는데 샤워를 하는 게 낫겠지 싶었다. 마법시설이 갖추어진 욕실이라 즉시 보온도 되고 참 편리한 세계였다. 수증기로 가득 채워진 욕실 안에서 그녀는 욕실 내 비치되어있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네모나게 벌어져 쇄골이 드러난 네크라인과 앞섶을 풀어헤치기 쉬운 끈 리본이 달린 원피스였다. 무릎아래서 이단 프릴이 나풀거리는 거추장스러움이 싫긴 하지만 그나마 가장 심플한 스타일이었다. 렐리아가 깨끗하게 샤워를 끝마치고 나오자 근처 소파에 앉아있던 블리어가 이리 와서 앉으라고 명했다. “뭐야 공작.” 샤워를 하는 동안 따스한 차를 준비해놓은 센스에 렐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거기다 소파 옆에 반듯하게 놓인 담요는 방에 없던 것이었다. “진짜 이러기 있남?” 커다란 담요로 몸을 두르고서 렐리아는 그의 옆자리에 편히 앉았다. 차라는 게 꺼려지긴 했지만 공작이 손수 준비해주었으니 의리 있게 마셔주기로 했다. 설령 공작이 호의를 가장해 독을 탔다고 하더라도 이번엔 은테두리가 없는 찻잔이라 모르고 지나갈 테다. 그거면 되었다. “아 따뜻하다.” 속이 따스해지는 기분에 렐리아는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그녀는 반 정도 홀짝대며 마신 후 찻잔을 내려두었다. 그러고는 장난스런 미소를 띠운 채 옆에 앉아있는 그에게 수건으로 둘둘 말아 올린 제 머리를 내밀었다. “공작 머리 감았으니까 다시 말려줘.” “내가 그대 시녀입니까.” “아니 꼬봉.” 꼬봉은 또 뭐냐고 그는 묻기를 관둔 채 눈매만 가늘게 접었다. 이제는 머리꼭대기 위에 오르려드는 이 평민여자를 어떻게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딱딱하게 접힌 눈매를 원상태로 되돌린 채 나긋한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등 돌린 채 앉아보십시오.” 긴 머리를 다루는 데에 전문화된 손 아니랄까봐 섬세한 손끝이 느껴졌다. 그의 손은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며 빗어내려 갔다. 렐리아는 괜스레 장난스런 기분이 들어 머리를 앞뒤로 까딱거려보거나 좌우로 흔들었으나 그 방해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공작.” “뭡니까.” “공작.” “왜 자꾸 부릅니까.” “그냥.” 심심해서, 하고 늘어지는 목소리에 블리어의 혈압이 한 단계 조용히 올라갔다. 그걸 알 리 없는 렐리아는 지루한지 연방 그를 불러댔다. “공작~” “…….” “공작~” “취했습니까.” “내가 마신 차에 공작이 술탄 거 아냐?” 뭐가 재밌는지 혼자 또 킥킥대는 모습에 블리어는 소리 없이 미간을 구겼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어보였다. 일단 이 여자를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블리어는 머리를 다 말리는 데로 몸을 일으켰다. 혼자 앉아서 실실거리고 있는 미친 여자를 내려다본 채 그는 일어나라며 재촉했다. 그에 여자는 멀뚱히 저를 올려다보며 이해할 수 없단 표정만 지었다. “왜? 같이 놀자. 왜 일어나야 되는데?” “그대 스스로 양심이 있다면 순순히 일어나십시오.” “나 양심 없는데.” 그 당돌한 발언에 블리어의 혈압이 또 한 칸 조용히 올라갔으나 그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우울증이라 여겼는데 우울증에 이런 증상도 있었나싶었다. 블리어는 결국 여자의 어깨 뒤와 무릎 뒤를 받쳐 안아들었다. 참으로 손 많이 가는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블리어는 침대 앞에 멈춰서 살짝 상체를 굽혔다. 안겨있던 여자를 침대위에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던 렐리아가 빠르게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안 그래도 상체를 숙인 상태에서 무게중심이 쏠리니 그는 그녀를 깔아뭉개듯이 몸이 무너져버렸다. “이게 대체…무슨 짓입니까.” 결국 쌓여있던 혈압이 서느렇게 표출되었으나 렐리아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무슨 목적이라도 있는지 가늘게 웃었다. 서로의 코가 닿을 듯한 거리에 블리어는 한 팔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바로 일어나지 못하게 잡아당기는 손길에 다시 어정쩡하게 몸을 굽힐 수밖에 없었지만. 손힘이 얼마나 센지 블리어는 그 작은 손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영락없이 여자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된 채 탐탁찮은 눈초리로 렐리아를 조용히 내려다볼 때다. “우리 분위기도 좋은데 할까?” 0074 / 0172 ---------------------------------------------- 진심과 가벼움 별안간 렐리아가 유혹해왔다. 야릇한 분위기가 조성하려는지 야살스럽게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미색에도 블리어는 여전히 저혈압을 떨쳐내지 못한 서느런 낯이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립니까.” “응 그럼~ 나 제법 진심인데.” 하루에 두 명 다 공략한다면 이것보다 좋은 일도 없었다. 평범한 몸이었다면 첫 경험 후 바로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는 무리일 진 몰라도 이 몸에 무리가 어딨있을까. 싫은 것일수록 빨리 해치우고만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때? 좀 하고 싶다는 생각 들어?” 시리지만 날렵한 윤곽이 인상적인 사내의 얼굴과 마주한 채 렐리아는 웃었다. 그러곤 한 손을 들어 가슴앞섶을 헤치기 시작했다. 한번 유혹해봤으니 두 번째는 쉬웠다. 벗는다는 것에 그다지 수치심도 들지 않고 처음보단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답답하게 네크라인중심을 조이던 끈 리본이 흘러내리고 그 사이로 훤하게 가슴골이 드러났다. 우유처럼 뽀얀 둔덕과 탐스런 곡선을 그리는 가슴에 블리어의 시선도 따라 내려갔다. “공작, 나 싫어하지 않지? 나도 공작 좋아해.” 그 말에 블리어는 손을 들어 여자의 적나라하게 벌어진 가슴골에 가져갔다. 투박하고 건조한 손끝이 살결에 닿을 듯이 내려왔으나 이어진 그의 행동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십시오.” 벌어진 옷자락을 쥔 그는 드러난 가슴골을 가려주었다. 꽁꽁 잘 감추라는 듯이 엄한 손길이었다. “웃고 있는 사람얼굴이 그렇습니까? 내가 그대의 얇은 낯가죽하나 간파 못할 거라 여겼습니까.” 자신을 속일 생각 말라는 듯 예리한 눈초리가 날아 들어왔다. 마치 제 모든 걸 꿰뚫어본 듯해서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입술을 다물었다. 타인주제에 자신보다도 저란 인간을 더 잘 아는 것 같았다. “평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게 하기는 하나 진심이 아니라는 거 압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대의 행동은 평소와는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래도 쉴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모르게 다정한 목소리라 입술이 살짝 떨려왔다. 그걸 보이지 않으려 렐리아는 고갤 숙이며 습관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별로 안 쉬어도 돼. 멀쩡하거든 내 몸.” 무슨 짓을 당해도 끄떡없거든. 그런 생각을 했지만 무의식중에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입술을 꾹 깨물랴 웃으랴 바쁘다보니 입술 끝은 자연스레 뭉개졌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겐 정을 주고 싶진 않아 렐리아는 그에게서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차라리 싸우는 한이 있더라도 미련으로 남기는 게 더 싫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방으로 오십시오.” 그의 말에도 렐리아는 침대 위에 편하게 늘어져있을 뿐 눈길한번 안주었다. 이윽고 그가 방을 나서서야 렐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나 소피아가 약을 넣어두는 서랍장을 열자 작은 쪽지하나와 처음 보는 약통하나가 놓여있었다. [약 사다뒀어요.] 공작에게 배운 단어 중 ‘약’만 간신히 알아보았다. 렐리아는 사후피임약으로 추정되는 약을 챙겨먹고 다시 침대위에 드러누웠다. 약효가 들을지는 모르겠으나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단 나았다. 만에 하나 최악의 상황이 닥쳤을 때의 불안함이 없잖아있으니 말이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은 시간이지만 렐리아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가족 꿈을 꿨다. * 봄이 오고 있다는 게 느껴질 만큼 한풀 꺾인 추위였다. 화창한 날씨에 방안에만 틀어박혀있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렐리아는 오랜만에 저택 밖을 나왔다. 근질근질한 몸을 이끌고 나왔으나 막상 갈 데는 없었다. 킬리가 있는 왕실 제2기사단은 그 자도 있기에 갈 수 없었고, 언니를 만나려면 적어도 반나절 전에는 공작가에 기별을 넣어야만 했다. 결국 혼자 시내거리를 산책하다가 그녀는 발이 닿는 어느 찻집에 들어섰다. 커피를 시키고서 찻집 안에 앉아 거리를 내다보았다.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던 그날의 사건 뒤로 거리전체가 일주일간은 애도를 표하듯 조용했었으나 이젠 완전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레이스보닛을 눌러쓴 어린 소녀와 그 손을 잡고 걷는 소년, 누가 풀어 놓았는지 귀족들이 다니는 거리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하얀 강아지, 빵을 사들고 가는 노파, 보석을 주렁주렁 매단 귀부인,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 신사. ‘평화롭네.’ NPC들이 평화로워 보이니 괜히 자신도 평온함속에 젖어 들어갔다. 렐리아는 춘곤증 환자처럼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희귀한 은빛머리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찻집 종업원은 물론이며 신사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주목되었으나 정작 본인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커피는 줄지 않고 그대로인 채로 사십 분이 훌쩍 흘러갔다. 눈뜨고 자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여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녀의 하늘빛깔 눈은 창밖의 세상이 아닌 창에 비치는 제 모습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초점이 없었다. “태화야.” 뒤늦게 렐리아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몸을 일으켰다. 시끄럽게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에 주위의 시선이 또 한 번 모였다. 그 따가운 시선들에 렐리아는 무안하게 다시 자리에 착석했다. 방금 엄마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얇은 턱만 긁적거렸다. 다시 맑은 유리창을 바라보며 렐리아는 멍한 상념에 잠겼다. 또 얼마나 흘렀을까, 렐리아는 따스한 내부공기 탓인지 나른한 햇살 때문인지 졸음이 본격적으로 몰려온다고 여겼다. 가게 안의 시계를 확인하고서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한입도 안 댄 커피를 남겨두고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찻집을 나섰다. * 그 시각 공작저를 방문한 손님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아럼프였다. 매번 찾아올 때마다 잔다는 소피아의 말에 그는 선물을 놓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평소와는 다르게 외출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어제와 같은 시간에 방문하실 줄 알고 말씀 못 드렸어요…” “어쩔 수 없지. 대신 이거 전해주겠어?” 아럼프는 활짝 핀 프레지아 꽃다발을 키 작은 시녀에게 건네고서 몸을 돌렸다. 노란 꽃과는 상반되는 붉고 화려한 미남자를 뒤따라 문 앞까지 나온 소피아는 그를 배웅해주었다. 아럼프는 한숨 대신에 마지못해서 입가를 끌어올렸다. 습관이란 참 무섭구나 싶으면서 말이다. 오늘도 만나지 못했음에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다. 일부러 피하려도 이렇게는 못하겠다 싶었다. 그녀와 저 사이에 뭐라도 끼었나 싶을 만큼 타이밍한번 극악이었다. 씁쓰레한 미소를 차츰 지워내며 넓은 저택의 로비에 막 다다랐을 때였다. “저기, 사제님! 잠시만 멈춰주시겠습니까?” 가벼운 무장차림의 기사가 서둘러 뛰어와 아럼프와의 간극을 마저 따라잡았다.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도 아럼프는 부담스러운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공작각하께서 찾으십니다.” “저를 말인가요?” “네. 지금 당장 집무실로 모시라하셨습니다.” 혹여 도망갈까 아럼프의 왼팔까지 단단히 붙잡고서 기사는 깍듯하게 그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여기로.”하고 이어지는 정중한 음성에 아럼프는 거부할 생각 없이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는 답지 않게 깊은 상념에 빠진 채 왜 공작씩이나 되시는 분이 저를 찾는지에 대해 생각해야만 했지만. 저를 부르는 이유가 그녀와 관련되었다는 거 하난 확실했다. 치료도 끝났는데 사적으로 방문하는 저가 눈엣가시로 보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더 나아가 연인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훼방꾼으로 보였을 가능성 또한 있다. 아럼프는 안내된 집무실 앞에 서서 잠시 표정을 가꿔야만 했다. 적어도 사람 좋아 보이는 웃는 얼굴에 무턱대고 검을 휘두르시지는 않겠지 싶었다. “들어오십시오.” 노크소리를 뒤로하고 들려온 무거운 저음에 아럼프는 기사가 열어주는 문사이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고위귀족 앞에서의 경건한 인사법을 구사하며 깊이 머릴 숙여보였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공작각하.” 기껏 차려입은 회색정장에 구김이 생겼으나 아럼프는 개의치 않았다. 뒤늦게 고개를 들어도 좋다는 허락의 말이 떨어지자 서서히 고갤 들어올렸다. 미려한 적발, 발월한 외모의 사내는 곧바로 중성적인 톤을 이어나갔다. “저를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용건이 무엇인지 감히 제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안 그래도 용건만 말할 참이었습니다.” 인상 좋고 눈치가 빠른데다 상당히 처세술이 좋다. 블리어는 눈앞의 사내를 그렇게 평가했다. 여전히 산적한 서류가 쌓인 책상 앞에 착석한 채 블리어는 붉은 남자를 보며 운을 뗐다.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최근 들어 렐리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그대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시종일관 멍을 때리거나 허공에다 중얼거린다거나 하는 증상들은 전보다 심해졌다. 가만히 있어도 불안해보이고 무언가 집중하질 못해 한번 말할 걸 두 번세번 말해야 알아들었다. 그 증상들을 종합해본 결과 블리어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내리게 되었다. 꼼꼼히 책을 찾아보니 그리 명시되어 있었다. 자연재해나 인명피해 등의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한 후 겪는 병이라 하였다. 여러 증상들 중에서 그녀는 극심한 무력감에 해당되는 것 같았다. 정신의학의 전문가를 불러줄 테니 상담을 받아보라고 몇 번 권유했으나 그럴 때마다 여인은 새겨듣지 않았다. 외려 웃기지도 않다는 양 코웃음만 쳐댔다. 자기 입으로 멀쩡하다는 것치곤 나날이 사람은 달라져만 갔다. 둔하면서도 예민했다. 평상시에는 뒤통수를 쳐도 모를 만큼 멍한 주제에 쓸데없는 곳에서 답지 않은 날선 반응을 보였다. 그걸 지켜보는 블리어로선 그녀를 마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렐리아가 친하게 지내는 자가 그대입니다. 그대가 옆에서 잘 신경써주고 다독여주십시오. 이에 대한 작은 성의를 표하고 싶어 불렀습니다.” 야음의 빛깔을 띠는 검은 머리 아래 사무적인 눈을 하고 있었으나 그 목소리는 달랐다. 깃들어있는 작은 한조각의 걱정을 아럼프는 알아차렸다. “친구로서 당연합니다. 제게 사례하실 필요는 없으니 거둬주시지요.” 돈 봉투라도 건넬 것처럼 품 안쪽에 손을 가져가는 공작을 아럼프는 정중히 만류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으나 제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여겼다. 그녀와 만나는 것에 제약을 두거나 경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기뻤다. “걱정 많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녀는 제가 옆에서 잘 다독여주겠습니다. 걱정 마시지요, 공작각하.” 아럼프의 믿음직스런 말에 블리어는 꺼내려던 것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끝났다. 아럼프는 집무실을 벗어나 저택 밖으로 나서는 동안 절로 입술이 호선으로 휘어졌다. 어서 그녀를 만나고 싶을 만큼 가슴 한복판이 들썽거렸다.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의 어딘가가 이상해진 기분이었다. 이렇게 기뻐질 일인가 싶었다. 마차에 오르기 위해 아럼프는 정문을 벗어났다. 대문 앞을 지키는 경비병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나설 때다. 마침 들어서는 또 다른 마차에 그의 웃던 입가가 더욱 길게 휘어 올라갔다. 타이밍이 이렇게 좋을 수도 없었다. “렐리아.” 대문이 열리는 동안 잠시 멈춰선 마차 옆으로 다가간 아럼프는 팔을 뻗어 차창을 두들겼다. 똑똑 하는 맑은 소리에 그제야 렐리아의 눈길이 창문 아래로 꽂혔다. 장미가 만발한 것 같은 화사한 적발이 가장먼저 그녀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럼프.” 닫힌 창문을 위로 올리며 그를 부르자 별안간 창밖에 있던 아럼프가 손을 내밀었다. 나오라고 다정하게 손짓하는 모습이 누가 봐도 매력적일 정도다. “나 지금 너 만나러왔는데 그냥 들어갈 거야?” “그럼 저택에 들어가지 어디로 가?” “같이 기분전환 하러 가자.” 평소라면 준비하기 귀찮다고 사양했겠지만 이미 외출준비하고 나온 터라 거절할 수도 없었다. 까짓 거 어울려주기로 마음먹고 렐리아는 창 너머로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시내 나갈 거지? 이 마차 타고 갈래, 아님 네 마차로 갈래?” “내 마차로 모실게.” 그리 말하고서 아럼프는 밖에서 마차문을 열어젖혔다. 창가에 가깝게 앉아있던 렐리아의 허리를 한 팔로 휘어 감고 다른 한 팔로 엉덩이아래를 받쳐 가뿐히 안아 들어올렸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당황한 렐리아는 그의 어깨에 어정쩡하게 매달린 채 동그란 귀를 잡아당겼다. “뭐야. 사람들 보는데 미쳤어?” “누가보든 어때. 우리만 즐거우면 됐지." "안 즐거운데." "그리고 언제 네가 남 눈치를 봤다고.” “…아 옮았나보다.” “누구한테?” “그냥 어느 아무개 씨한테.” 심드렁한 대답에도 아럼프는 그 아무개 씨가 누군지 대충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우리 죽이 잘 맞았는데 이렇게 변하면 안 되지. 다시 옮겨줄 필요가 있겠어.” 아럼프는 그녀를 마차에서 강제로 내리게 한 후 자신의 마차까지 직접 그녀를 나르기 시작했다. 친구로서의 가벼운 장난처럼 보여도 애인을 안아든 남자처럼 애지중지하는 태도였다. 그 친절한 이동서비스에 렐리아는 허공에 두 발이 붕 떠있는 채로 가만히 매달려있었다. 남자 품이라는 게 징그럽기는 해도 확실히 편한 탓이다. “우리 렐리아, 오랜만에 친구로서 본전 좀 뽑아볼까?” 침대위에 여인을 눕히듯이 아럼프는 조심스런 태도로 그녀를 마차소파에 내려놓았다. 그의 몸 아래에서 렐리아는 지랄 말라며 험상궂게 눈썹만 구길 뿐이었다. 어서 치우라며 그의 얼굴에 대고 홱홱 손을 저어대자 아럼프는 그제야 활짝 열어두었던 마차문을 닫았다. 은밀한 사생활을 가리듯 비밀스러운 행동이었다. 이윽고 두 사람이 탄 마차가 유유히 공작저 앞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블리어는 대저택 삼층에 자리한 집무실창가에서 지켜보았다. 어디로 가는 진 몰라도 얘기했던 대로 그녀 옆에 붙어서 기분을 달래주려는 모양인 것 같았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둘 사이가 많이 친근해보여서 의외였다. 남자의 품에 순순히 안겨가던 모습이 조금 끈덕지게 뇌리에 붙었으나 블리어는 바로 떨쳐냈다. 그녀 혼자 두는 것보단 이게 나았다. 업무를 봐야하는 자신이 내내 옆에 붙어 신경써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식으로라도 사고후유증이 나아진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런 것치곤 그는 한동안 무언가를 합리화하듯이 구구절절 생각을 이어갔다. 0075 / 0172 ---------------------------------------------- 진심과 가벼움 ‘기분전환은 개뿔.’ 렐리아는 여기저기서 쇠공 굴러가는 맑은 소리를 들으며 구겨지려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남을 치료하는 신성한 직업을 가졌으면서 정작 사제란 인간은 도박치료가 시급했다. 따라온 저가 잘못이지 잘못이지 하면서 렐리아는 들어 온지 일 분도 되지 않아 다시 출입구로 향했다. “어디가?” 바로 뻗어져온 커다란 손이 렐리아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사람 좋게 싱긋 웃으며 그는 그녀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냥 가면 섭섭하지. 여기까지 왔는데 본전은 뽑고 가야지.” “됐고, 너 혼자서나 실컷 해.” “흠. 지금이 사람도 많고 딱 즐거울 때인데?” “사람 많은 곳은 딱 질색.” “그렇게 빼지 말고. 돈 따면 좋잖아?” “별로 안 궁한데.” 어느새 질질 끌려 움직이는 쪽은 렐리아가 아닌 아럼프였다. 황소처럼 무식하게 힘만 센 그녀가 움직이자 그녀의 손목을 놓지 않은 그는 매끄러운 바닥에 구두창을 긁어대며 끌려 다녔다. 남자체면이 말도 아니라지만 아럼프는 그저 좋은지 입술만 끌어올렸다. “그럼 한 게임만하고 식사하러 가자.” “뭐 먹을 건데.” 한번 뒤돌아보지 않던 그녀가 힐끗 뒤를 돌아 그를 쳐다봤다. 조금 누그러진 반응이었다. “네가 먹고 싶은 거 뭐든.” “정말이지?” “나랑 어울려주는 대신에 비용은 내가 부담할게.” “됐어. 게임비용은 나 혼자 알아서 구할 테니까 넌 밥값이나 구해와.” 그리 심드렁히 말하며 렐리아는 가면구멍 너머로 슥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운 스탯을 최고로 높이는 은팔찌가 얇게 채워져 있고 검지에는 금반지가 껴져있었다. 전설템과 마법보호템의 만남이었다. 최상의 조합에 두려울 게 없다보니 렐리아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도박장 중심으로 향했다. 한창 활발하게 큰돈이 오가고 있는 게임테이블에 착석하기 위해 렐리아는 끼고 있던 금반지를 걸었다. 보석하나 박혀있지 않아도 얇은 테를 따라 영롱한 금빛이 흐르는 그 반지에 가면을 쓴 여성들은 관심을 보였다. 그녀들의 재촉 덕에 다른 도박꾼들도 흔쾌히 합석을 허락해주었다. 렐리아는 카드를 집어 들었다. 거대한 행운은 벌써부터 그녀에게로 몰려들어 패가 상당히 좋았다. 첫 판부터 다 휩쓸게 생겼다. 아럼프는 그녀와의 합석을 꺼려하고서 진즉에 다른 게임테이블로 가있었다. “렉 2” “카우스.” “리턴.” “언더로우3” 여러 번하다 보니 전문용어들이 저절로 귀에 익었다. 렐리아는 제 패를 훑고서 눈에 띄는 것부터 골라서 카드를 냈다. 몇몇이 끙 앓는 신음소리를 터뜨렸다. 득의양양하게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던 어느 중년사내는 테이블 위에 피라미드형태로 쌓아두었던 금패가 위층에서부터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하자 초조하게 재떨이에 담뱃불을 지졌다. 판자체가 렐리아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그 심상치 않은 전조를 알아차린 몇몇은 일찍이 파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빚을 지면서까지 게임을 진행하기엔 위험부담이 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동안 렐리아 앞에 착실히 쌓인 금패는 6층에 달해있었다. 대부분을 빼앗겨 밑바닥만 남아있는 중년사내는 담배도 손에 놓고서 패만 살피고 있었다. 렐리아는 여유롭게 패를 만지작거리며 게임테이블을 빙 두르고 앉아있는 다섯 명의 안색을 살폈다. 불안한 듯 입술을 곱씹는 두 명의 귀부인과 비교적 여유롭게 부채질하는 금발 여인, 신중하게 패를 고르고 있는 젊은 청년, 이마에 주름이 새겨진 중년사내가 남아있었다. 적당히 이 정도 선에서 게임을 끝내는 게 좋을 것 같아 렐리아는 제 차례가 되자 눈여겨보고 있던 패를 냈다. 게임은 가볍게 렐리아의 승으로 돌아갔다. 꽤나 묵직한 이익을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난 렐리아가 초반에 걸었던 금반지를 다시 제 왼손검지에 끼우던 찰나였다. “잠깐. 한판 더 이어서하죠.” 아름다운 새의 깃털이 달린 부채를 접으며 금발여인이 소리 없이 웃었다. 렐리아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여인을 좀 더 꼼꼼히 훑어 내렸다. 나비가면 너머로 노란 눈동자가 우아하게 접혀있었다. 한 올 흘러내리지 않게 금발을 위로 틀어 올려 긴 목덜미와 하관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상당한 미인으로 추정되었다. “마음에 드는 건 어떻게든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금반지에 단단히 눈독들인 건지 자존심이 강한 건지 여자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높게 사는 모양이었다. 이미 거금을 잃어놓고서도 여유가 흐르는 것이 대륙에서 알아주는 대상인의 딸이거나 외유를 온 황녀일 지도 모르겠다. “콜. 좋아요.” 렐리아로서는 거물급 상대를 놓치는 미련한 짓을 할 만한 성격이 못됐다. 어차피 이길게 뻔한데 이왕 온 거 크게 한번 잭팟을 터뜨리고 다신 안와야겠다 생각할 뿐이다. 이번엔 굳이 금반지를 걸 필요가 없으니 끼고서 참여했다. 이에 금발여인의 눈빛이 달라졌지만 가지고 싶으면 저를 실력으로 탈탈 터는 수밖에. 두 명이 더 빠져 네 명이서 새로 게임이 진행되었다. 딜러가 숙련된 솜씨로 카드를 나눠주고 역시나 이번에도 렐리아에게 좋은 패만 골라 들어왔다. “카우스.” 시작부터 큰 패를 드러내며 렐리아는 기선제압에 들어갔다. 다음 차례인 중년사내가 낭패스런 기색을 드러내며 비장의 패를 선보인 건 이 다음이었다. ‘이 아저씨는 끝났네.’ 렐리아는 가면아래 코를 씰룩 움직이며 웃었다.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배팅액수에서 두 곱절은 훌쩍 뛰어올라있었다. 벌써부터 제게 들어올 어마어마한 금액을 셈하며 입술을 슬며시 끌어올릴 때였다. 문득 느껴지는 기운에 렐리아는 흠칫 주위를 돌아보았다. ‘뭐지.’ 주위에는 오로지 게임에 정신 팔린 귀족들 밖에 없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창 카드게임 중인 아럼프와 맞은편에 앉아서 고요히 웃으며 부채질하는 금발여자, 무엇을 내야할지 몰라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청년과 다시 담뱃불을 태우는 중년사내.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뭔가가 이상하다. 익숙하고도 불길한 기운이 제 감을 시험해보는 것처럼 자꾸만 어디선가 느껴졌다. 정신없어 보일 만큼 렐리아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고개를 쳐들었다. 일순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황금빛 울타리가 쳐진 이층 귀빈석에 서있는 은발의 남자가 보였다. 고급스런 정장차림에 곧은 콧대가 드러난 흰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확실했다. 그 자다. 순간 심장이 싸늘하게 굳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여유로운 신사처럼 기대어서있던 그가 짧은 은발을 흩날리며 등을 돌려 나가는 모습에 렐리아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충격에 쌓여있던 금패들이 테이블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잠깐 이게 뭐하는!” 중년사내가 흥분하여 외치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렐리아는 옆 테이블로 향했다. 한가롭게 딴 금패들을 쓸어 담고 있던 아럼프는 갑작스레 제 팔을 휘어잡는 작은 손길에 고갤 들었다. 그녀답지 않게 핏기 없이 굳은 얼굴이었다. “아럼프 일어나. 여기서 나가야돼.” “뭐?” “여기서 나가야된다고! 당장!” “렐리아 잠깐 게임이,” 억지로 일으키는 손길에 아럼프는 딴 돈을 내려두고서 그녀를 따라가야만 했다. 렐리아는 드넓은 도박장 중심에 몰려있는 인파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조급함에 절로 발걸음이 빨라졌으나 주위는 여전히 열띤 흥분의 도가니였다. 금은보화를 끌어안고 호탕한 웃음소릴 흘려대는 귀족들과 삼삼오오 모여 게임을 관람하며 부채질하는 여인들, 그들은 환락에 취해 정신이 없어보였다. 잔과 금괴를 나르느라 바쁜 직원들로 인해 더욱 정신사납기 그지없었으나 그들의 평온함은 깨뜨리지 못했다. “여기 불이…! 갑자기 불이 붙었습니다!!” 그때였다. 출구 쪽에서부터 심상치 않은 냄새와 한 직원의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역시나 렐리아의 불안한 추측이 들어맞았다. “물 가져와, 어서! 빨리빨리 움직여!” “…저기 점장님. 손님들께는 뭐라 말씀을,” “고작 이 정도 불길가지고 무슨! 손님들께 방해되지 않게 서둘러 진압하란 말이야! 장사 하루아침 해봐? 어!” 호통소리에 렐리아의 발걸음도 멈췄다. 멀리서도 확연하게 보였다. 출구에서부터 모든 걸 빠르게 집어삼켜오고 있는 거대한 화마가. 도박에 빠져있는 귀족들은 작은 게임테이블에 집중해있을 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웃음소리가 더 컸다. 허나 출구 근처에선 한바탕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다. 불길을 진압하기 위해 직원들은 물동이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달린 호화로운 중심과는 극과 극인 풍경에 위화감은 더욱더 커져만 갔다. 방재시설은커녕 화재훈련조차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지 직원들은 모두 허둥지둥 이었다. 덩치 있는 직원들이 있는 대로 물을 퍼부었으나 불길의 기세가 누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바닥과 장식품, 천장을 거멓게 집어삼켜가고만 있었다. 배를 불리는 괴물처럼 부피는 늘어만 갔다. 단순한 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어 렐리아가 뒤로 한 발짝 주춤 물러설 때였다. 불 근처에서 양동이의 물을 퍼부어대던 덩치 큰 직원의 옷에 화르륵 불이 붙었다. 사내가 놀라 팔을 휘둘러댔으나 불길은 빠르게 사내의 목을 타고 머리를 먹어치웠다. 벌겋게 살이 벗겨지듯 타들어가더니 까맣게 얼굴형태가 일그러지기까지 한 순간이었다. “살려,…려, 줘! 살려줘! 제발…!!” 화마에 집어삼켜진 남자가 허우적대자 옆의 직원에게도 불길이 옮겨 붙었다. 눈이 녹고 코가 뭉개지고 귀가 우그러들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짐승울음소리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피부에 옷감이 눌어붙는 괴로움에 카펫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니자 보다 못한 다른 직원들이 도와주기 위해 물 양동이를 들고 나섰다. 허나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변해 불길이 옮겨 붙기만 할 뿐이었다. 한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그들의 모습은 지옥도의 한 풍경을 보는 것처럼 처참했다. 그에 아까 기세 좋게 호통을 치던 나이 지긋한 점장은 빠르게 걸음을 돌렸다. 서둘러 지시를 내리러간다 기보단 저 혼자 도망치는 것으로밖에 안보였다. 공포에 질린 부하직원들이 그의 곁에 붙자 그는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뭐해?! 지금당장 대피령을 내려…!! 빨리 손님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란 말이야!” “그게…, 서측 출구로 나가는 복도에도 화재가…!” 그들의 대화를 고스란히 듣고 있던 아럼프가 상황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서 먼저 걸음을 뗐다. 굳어있는 렐리아를 대신해 이번엔 그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빠르게 움직였다. “렐리아. 반대편으로 가야…,” 허나 막상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가 없었다. 뒤늦게야 이 소동을 알아차린 귀족들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채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화재에 대피를 할 여유조차 없어보였다. “잠깐 이게 무슨 냄새야?” “콜록…탄 냄새 같은데?” “불이 났나 봐! 어머어머 어떡해….” “비상구가 어딨다는 거야…직원! 직원!!” “어디로 가야…! 앗, 구두가!” “잠깐만, 잠깐, 나 목걸이 놓고 왔는데!” 웅성대는 목소리와 굴러 떨어지는 물건들의 소리, 거기에 겹친 비명소리까지 말 그대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안 그래도 북새통을 이루는 와중에 금과 보석들을 챙기려는 사람들로 인해 더더욱 홀 안은 혼잡하게 변했다. 아럼프는 그들의 틈에 껴 또 다른 출구를 찾기 위해 움직였으나 워낙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이리저리 움직이는 탓에 제대로 나아갈 수조차 없었다. 그는 렐리아가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그녀의 손을 세게 꽉 쥐었다. “…….” 렐리아는 점차 대기 속에 스며드는 매캐한 연기냄새를 맡았다. 패닉에 질린 머리는 마땅한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녀는 애꿎은 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그때 일로 모든 인연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자신을 죽여야 속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몽땅 불태워버릴 속셈이었다. 이곳과 함께 자신을. ‘젠장, 개새끼가…!’ 그날 기사단 숙소에 찾아갔을 때 계획대로 이스티온을 두들겨 팼어야했다. 정체를 드러낼 때까지 패다가 정체를 드러내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끝장을 봤어야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이렇게 큰 화가 되돌아온 것이다. 수백 명을 죽인 것도 모자라 이번엔 수도 최대 규모의 도박장과 함께 천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이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불에는 자신이 없다. 한번 화상을 입은 적이 있기에 그때의 살 타들어가던 고통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두렵다는 게 옳은 말일테다. 제 발로 걸어들어 갔다간 전신 화상을 입을 것이다. 끔찍하게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도 기절하지 않는 상상을 하니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주위에서 소란스럽게 들려오는 말로 추측컨대 네 개의 출구에서 모두 화재가 난 것 같았다. 일층에는 창문이 없고 아래층을 관람할 수 있게 만든 이층 귀빈석에 창문이 달렸을 리 만무했다. 직원 및 관계자들이 이용한다는 삼층에는 창문이 달려있을 지도 모르나 뛰어내리면 즉사할 높이였다. 물론 자신은 괜찮지만 아럼프가 문제였다. “…콜록…콜록.” 출구로비에 가까이 있던 여성들을 시작으로 하나둘 연기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연로한 귀족들도 따라 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헐떡거렸다. 수많은 인파로 인해 옴짝달싹 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이곳에 몰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호흡기를 막고 최대한 몸을 낮추는 것뿐이었다. 허나 입과 코에서 분비물이 흘러내리며 괴로움을 호소하는 와중에 호흡기를 틀어막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도에 솜을 쑤셔 박은 것처럼 숨통이 콱콱 막혀오자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숨쉬기 위해 입을 벌렸다. 허나 그러면 그럴수록 연기를 더 들이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주위에서 기절하는 자들이 생겨나고 그들 사이로 정신이 있는 자들은 바닥을 긁으며 괴로워했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로워하던 어떤 이는 어떻게든 나가기위해 불길로 뛰어들기까지 했다. 독은 물론 독가스에도 어림없는 렐리아는 견딜 만 했으나 그녀 손을 붙잡고 있던 아럼프가 주저앉아버렸다. 호흡이 거칠어진 그는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쿨럭쿨럭…숨이,” “아럼프. 일단 몸을 낮춰봐.” “하아…하아…”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여전히 숨쉬기가 버거워보였다. 렐리아는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황급히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잠깐 기다려봐.” 렐리아는 그를 편하게 앉혀놓고서 사람들을 헤쳐 나가 출구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출구로비는 사납게 치솟은 불길과 시야를 방해하는 검은 연기로 점령되어있었다. 서서히 거멓게 벽과 바닥을 태우며 다가오고 있었으나 이미 실신한 사람만 반이었다. 불타서 죽기 이전에 질식사로 사망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렐리아는 혼탁한 검은 연기 속으로 들어섰다. 벽을 허물어 출구를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그러면 아럼프는 물론이고 수많은 목숨들도 구할 수 있다. 다만 보는 눈들이 많기에 이렇게 된 이상 연기 속에서 작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안보여.’ 독하고 매운 연기에 평범한 사람이라면 눈물 흘리랴 비비랴 눈조차 뜨지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시야확보가 가능했다. 왼손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서 렐리아는 벽을 더듬어 나아갔다. 바로 코앞에서 엄청난 열기가 훅 끼쳐왔다. 대충 이정도 쯤이면 되겠지 싶어 그녀는 벽 앞에 서서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길 순 없었다. 안 그래도 탄 건축재로 인해 부실해진 건물이었다. 충격에 건물 째로 흔들리거나 기둥이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인명구조는커녕 전원 매몰될지 모를 일이었다. 얼마만큼의 힘으로 쳐야할지 하얗게 질린 머리로는 가늠이 되지 않아 주먹이 조금 떨렸다. 한 번의 실수로 친구가 죽는다. 잘 알기에 무조건 성공해야만 한다. 이윽고 마음을 먹고 주먹을 내지르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익 하고 불길너머로부터 육중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떨결에 주먹을 거두고 그곳을 돌아보자 동시에 검은 연기가 확 물러나며 바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순간 눈이 움찔해 렐리아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폭발인건가 싶었으나 몸을 덮치는 화염이나 약간의 뜨거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윽고 서서히 팔등을 내리자 검게 썩은 것처럼 타들어간 로비내부만이 보였다. 타오르던 불길은 눈 깜짝할 새 진압되어 있었고 그 탄 잔해들 속에서 찬란한 긴 금발을 늘어뜨린 인영이 들어섰다. ‘저 남자는…’ 순간 여자인가 싶었으나 지나치게 훤칠한 장신의 남자였다. 그때와 같은 차림으로 들어선 그는 흰 옷에 재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곤 여유롭게 저를 돌아보며 부드럽게 한번 웃어주었다. “또 만나네요.” 순간적으로 신이 아닌가 싶을 만큼 선한 자애로움을 느꼈다. 미려하게 나부끼는 옷자락마저 신성함이 깃든 것 같았다. 남자는 스치듯 미소를 머금고 지나쳐버렸으나 렐리아는 도저히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0076 / 0172 ---------------------------------------------- 진심과 가벼움 ‘어째서 매번 알고 오는 거지.’ 한번이면 몰랐다. 하지만 두 번씩이나 재앙 속에 나타나 사람을 구하니 외려 반발심이라는 게 솟았다. 재앙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렐리아는 곧 거대한 의문을 털어낼 수밖에 없었다. 출구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사람들로 인해 렐리아는 안쪽으로 다시 진입하지 못하고 그들에게 밀려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한동안 출구에선 사람들이 계속해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대다수가 귀족이었으나 그들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보도위에 쓰러지거나 주저앉아 콧물과 침, 눈물을 토해내었다. 지위도 체면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던 보석도 버리고서 오로지 제 몸뚱아리 하나 건사한 것에 안도하였다. 실제로 신을 부르짖으며 기도를 올리는 사람 또한 있었다. 렐리아는 한참동안 출구근처에서 서성이며 불안하게 손톱만 깨물었다. 아럼프가 보이지 않았다. 혹여 라도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자신이 다시 들어가 봐야하는 게 아닌지 끊임없이 다급한 생각만 들었다. 급히 빠져나오는 사람들로 인해 들어가지도 못하겠고 면면들만 초조하게 살피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뻗어져온 두 팔이 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익숙한 음성이 귓가를 두들겼다. “렐리아…” 안도의 한숨이 녹아든 목소리에 덩달아 렐리아의 가슴속마저 안도감으로 가득 메워졌다. 아럼프였다. “사람들한테 밀려서…정신없이 부딪치며 나와보니까 네가 없어서 걱정했어.” “…야. 난 네가 더 걱정이었다고.” 다행히 다른 출구를 통해 빠져나온 모양이었다. 렐리아는 제 허릴 끌어안고 있는 그의 두 팔을 떼어낸 후에 뒤를 돌았다. 가면을 벗은 그의 얼굴은 재와 땀이 얼룩져있어 많이 초췌해보였다. 탄광에서 고생하다 나온 인부 같았다. 그래도 생채기하나 없이 말짱한 모습에 렐리아는 그제야 가슴속에 응어리져있던 걱정이 쓸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혹여 라도 친구가 죽어서 나왔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경험도 없을 테다. “앞으론 또 한번 도박장에 오자고 해봐…한대 콱 쥐어박을 줄 알아.” 렐리아는 울컥함을 숨긴 채 그를 안아주었다. 그보다 체구가 작은 탓에 남이 보기엔 끌어안긴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두 손은 사내의 판판한 등에 올라가있었다. 그 깊은 포옹에 아럼프는 소리 없이 미소 지은 채 그녀의 머리 옆에 편히 얼굴을 기댔다. * 렐리아는 방에 돌아오자마자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기가 배어있지 않게 깨끗이 물로 씻겨 내렸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렐리아는 편히 침대 위에 누웠다. 노을이 지고 있는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 방안은 정적으로 거멓게 죽어있었다. ‘자다가 저택이 무너지는 거 아닐까.’ 천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불이 날지도.’ 건물아래 깔린다고, 불에 탄다고 해도 죽기나 할까 싶지만 문제는 소피아와 공작이 죽는다는 거였다. 눈뜨고 일어나니 친했던 사람들이 처참히 죽어있는 상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렐리아는 애써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해 몇 번이나 뒤척이며 깨버렸다. 식은땀에 푹 젖은 머릴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세 시간이나 흘러있었다. 아럼프가 죽고 소피아가 죽고 주변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나가는 그런 악몽을 세 시간동안 시달렸다는 말이었다. 꿈속에서는 예전에 일어났던 끔찍한 사고들이 어김없이 재현되었는데 그때마다 스치듯 은발이 등장해 속을 뒤집어 놨다. ‘…아나.’ 렐리아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거리를 꾹 눌러 참았다. 당장이라도 외출복을 입고 뛰쳐나갈 걸 간신히 인내했다.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개인적으로 찾아갔다가 괜히 이상한 추문이 따라붙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신 내일 일찍 기사단에 찾아가서 깔끔하게 끝장을 볼 생각이었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그 순한 면상을 보자마자 두들겨 팰 생각을 하니 그나마 마음이 좀 놓였다.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리고 잠이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어렴풋이 잠들 무렵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들려온 크나큰 노크소리에 렐리아는 화들짝 상체를 일으켰다. 어떤 성질 급한 인간이 두들겼는지 소리 한 번 요란했다. 이윽고 매끄럽게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짜증도 잠시, 어둠에 젖은 흑발과 전체적으로 날렵한 선을 그리는 무뚝뚝한 낯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 공작 잘 왔어. 마침 꿀꿀했는데 술이나 마시자.” 서둘러 아빠다리를 하고 앉아서 렐리아는 어서 오라며 손짓했다. 그 열렬한 반응에도 블리어는 들어설 때와 한 치의 변화 없는 얼굴로 침대 옆에 섰다. 죽은 사람을 저승으로 인도하러온 사자처럼 멀뚱히 서있던 그가 별안간 무겁게 입을 열었다. “몸은 괜찮습니까.” “내 몸이 왜?” “사고자 명단에 올라온 그대 이름을 봤습니다.” “아 그래? 보다시피 멀쩡해.” 그 담담한 반응에도 블리어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멀쩡한 게 확실하냐는 눈으로 그녀를 훑어 내리다가 그제야 편히 숨을 내쉬었다. 절로 한숨이 튀어나오는 걸 간신히 막고서 그는 미간만 주물렀다. 한 시간 내내 접혀있던 옅은 주름이 그제야 반듯하게 펴졌다. “왜 갔다 와서 말 안했습니까. 그런 사고를 겪었다는 걸.” “말해서 뭐해.” “내가 그대 애인입니다. 모르는 게 말이나 됩니까. 앞으론 사소한 일도 좋으니 꼬박꼬박 보고하십시오.” 어차피 소피아가 다 알아서 고해바칠 텐데 뭐하러, 라는 의미를 담아 어깨만 씰룩 움직여주었다. 그런 렐리아의 성의 없는 몸짓에 블리어는 폈던 미간에 다시 미세한 주름을 새겼다. 오늘 오후 다섯 시경에 일어난 수도 도박장 화재사건에 관련하여 서류가 올라오고 난 후 두 시간 가량이 지나서야 겨우 확인한 내용이었다. 왕실에서 운영하는 합법적인 곳이다 보니 라콘드 공작가도 사업적으로 어느 정도 개입이 되어있는데 그렇다보니 경영에 간섭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덕분에 피해내역과 사고자명단을 보고받았고 그 명단에서 그녀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블리어는 참 운명적인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비꼼이었다. 아마 명단을 덮어두었다면 평생 몰랐을 비밀이 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하나 알게 된 은밀한 사실이 있다면 그녀가 돈을 버는 경로였다. 이제까지 여자가 지닌 큰돈들이 다 어디서 났나 했더니 도박장을 다녀서 딴 돈이라는 게 밝혀졌다. 쉽게 유추 가능한 사실인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이제껏 괜한 의심을 해왔던 것에 그는 후련해하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었다. 아직까지 털어내지 못할 만큼. “웬 한숨.” 블리어는 스스로가 한숨을 내쉬었다는 자각조차 없다가 렐리아의 말에 그제야 벌어진 입을 다물었다. 일자로 다물린 입은 무심함의 극치를 달렸으나 블리어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줄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껏 품속에 넣어두었던 네모난 상자를 꺼내들었다. “그래도 불안장애 걸릴 것 같았는데 공작이 와주니 한결 낫…뭐야?” 태연하게 입만 나불거리던 렐리아는 제 목으로 두 손을 옮기는 남자의 모습에 혼자 괜히 움찔하고 말았다. 최대한 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다시 고개를 꼿꼿이 쳐들자 목에서 서느렇고 얇은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힐끗 눈동자만 굴려 내려다보자 쇄골 중앙에 걸린 반투명한 보석이 보였다. 크리스탈 속에서 작은 꽃처럼 피어난 흰 눈의 결정이 희소성 있으면서도 상당히 비싸보였다. 물론 예뻤다. “이게 뭐야?” 순수하게 호기심이 들어 묻자 그의 목울대뼈가 살짝 느릿하게 들어갔다 나오는 게 보였다. 그는 검은 머리칼이 관자놀이를 타고 쓸려 내려올 만큼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채 제 목덜미에 목걸이의 이음매를 채우는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보통은 뒤로 가서 채워줄 텐데 처음해보는 건지 많이 어색해보이고 시간이 걸렸다. 렐리아는 목덜미에 닿는 그 미적지근한 손가락들을 모른 척 해주었다. 한 일분정도 기다려줬을까 그제야 공작은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집중하느라 열지 못했던 입도 열렸다. “통신구입니다.” 그의 미지근한 손끝이 떨어져나갔다. “나와 그대를 이어주는.” 원래는 사제를 불러 사례와 함께 이 목걸이를 줌으로써 그녀에게 전해줄 생각이었다. 자신이 주는 것보단 친한 사이인 사제가 주면 아무래도 이 여자가 냉큼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애초에 여자에게 이런 장신구를 선물한다는 것이 처음이라 익숙지 않기도 했다. 결국 목걸이를 직접 채워주게 되어버렸다지만 블리어는 굳이 처음이라는 걸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목걸이의 쓰임새에 대해 참으로 시시하고 딱딱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것만 있으면 서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거네? 그 신호 같은 걸?” 삐삐 같은 건가. 렐리아는 신기함에 손톱만한 보석을 들어 요리조리 들여다봤다. 그냥 별거 없는 크리스탈 장난감 같은데 이런 기능이 있다니 놀랍기만 했다. 그는 설명에 더불어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세게 두 번 누르면 호출이 된다고 했는데 정말로 크리스탈 속의 하얀 결정이 금빛으로 변하며 그의 팔찌도 똑같은 색깔로 바뀌었다. 그는 착용한 자에게만 느낄 수 있는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해봐.” 이번엔 그보고 해보라고 하자 그가 왼손에 찬 팔찌의 보석을 쥐고서 두 번 눌러보였다. 이번에도 결정은 금빛으로 물들며 심장의 두근거림처럼 따스하고도 얕은 진동이 목가에서 느껴졌다. “아 느껴진다.” “내가 부르고 있다는 신호이니 무시하지나 마십시오.” “그보다 공작은 팔찌네? 내가 팔찌하면 안되남?” “주는 대로 받으십시오.” “그래 가차 없네.” 렐리아는 성의 없게 아랫입술을 이죽거렸으나 목걸이만 계속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신기한 걸 선물 받아서 그런지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기분이 꿀꿀하면 언제든 그를 호출할 수 있는 기능이라니 얼마나 좋은가. 술친구가 항시대기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론 당사자는 그러라고 준 목걸이가 아니라지만. “급한 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할 시엔 이것으로 나를 호출하십시오. 알겠습니까?” 몇 달 후면 풀어줘야 할 길고양이에게 개목걸이를 달아준 격이었으나 그럼에도 블리어는 신신당부하게 되었다. 특히나 오늘 같이 큰 사고가 일어났을 땐 저를 호출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없잖아있었다. 이왕 몇 달간 기댈 거 제대로 제게 기대었으면 좋겠다는 약간의 의무감과 책임감이었다. “의지하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의지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러라는 용도로 주는 것이니 항시 착용하고 있으십시오.” “목욕할 때도?” 어디까지나 순수한 궁금증에 의한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질문이었으나 블리어는 무시했다. 그에 렐리아는 조금 어감이 이상했음을 깨닫고 슥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악동 같은 사악함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만약에~ 목욕하던 중에 비누 밟고 알몸으로 넘어지면 어쩐대.” “쓸데없는 질문은 사양하겠습니다.” “머리에서 피 줄줄 흘리고 알몸으로 쓰러져있으면 위급상황이잖아? 어떻게 이게 쓸데없는 질문이야?” “그대에겐 생사가 달린 중요한 문제라 할지라도 내가 듣기엔 쓸데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의하고 싶다면 목욕시중을 드는 시녀와 얘길 나누십시오. 나와는 무관한 얘기입니다.” “어우 재미없어.” 이런 반응을 원한 게 아닌데 진짜 재미없는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생득적으로 타고난 재미없음이었다. 그나마 이렇게 시답잖은 얘길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렐리아는 감지덕지로 여겼다. 그러다 렐리아는 제 손목을 부드럽게 움켜쥐는 블리어를 올려다보았다. 단순히 쥐는 것도 아니고 살짝살짝 잡아당기고 있었다. 지금 뭐하자는 거지? 하는 눈빛으로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자 그제야 그가 저를 내려다보며 넌지시 운을 뗐다. “안 일어나고 뭐합니까.” “뭔데. 뭐하려고?” “술 마시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자리를 옮기자는 거였군. 머쓱하게 침대에서 일어나 렐리아는 그를 따라나섰다. 물론 완전히 문밖으로 나서기도 전에 예리한 그의 검열을 받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녹진한 기운을 띠는 짙은 녹안은 정확히 렐리아의 하얀 발등에 내리꽂혀져있었다. “매번 슬리퍼를 안 신고 돌아다닙니다만. 맨발로 다니는 그 야만적인 습성은 좀 버리지 그럽니까.” “맨발이 뭐 어때서. 내가 살던 곳에선 집에 들어가면 다 맨발이라고.”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이곳 생활양식에 따라야하지 않겠습니다.” “슬리퍼 신기 귀찮은데.” 꼼짝도 안하려는 여자를 말없이 내려다보던 블리어는 얕은 한숨을 뒤로하고 직접 몸을 움직였다. 침대아래 나란히 놓여있는 슬리퍼 한 켤레를 들고 와 그는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신으라는 무언의 압박에 렐리아는 그제야 하는 수 없다는 식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뭐, 공작이 가져와줬으니까 신는다!” 마치 통 크게 쏘는 사람처럼 호탕한 외침과 이가 드러나는 미소가 얄밉기 그지없었다. 블리어는 그녀를 두고 먼저 걸음을 옮겼으나 그리 빠른 걸음은 아니었다. 얼마안가 렐리아가 실리퍼를 질질 끌며 곁으로 다가오자 그의 걸음은 알게 모르게 조금 느려졌다. “오늘은 진짜 술 땡긴다. 요즘에 잠 많아서 고민이었는데 어떤 개새끼가 불질러준 덕에 잠이 안 오는 거 있지?” “개새끼가 뭡니까. 개새끼가.” “그래, 세상의 모든 강아지들에게 미안한 말이지. 쓰레기새끼라고 했어야하는데. 암튼 자도 잔 것 같지도 않고 오늘은 공작이랑 술 마시면서 밤새 내내 떠들래.” 장난스레 그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공작. 나랑 같이 밤 새줄 거지? 중간에 먼저 자기 없기다?” “그대나 먼저 뻗지 마십시오.” 조각처럼 딱딱한 입술 새로 조금은 옅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것 같았다. 어쩌면 복도창문에서 들어와 희미하게 스쳐지나간 바람일지도 모르겠으나 렐리아는 그렇게 여겼다.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두 사람은 먼저 자면 쌍싸대기 맞기 내기를 했다. 0077 / 0172 ---------------------------------------------- 진심과 가벼움 밤새 술을 퍼마시고도 렐리아는 다음날 멀쩡한 얼굴로 나갈 준비부터 했다. 늦게 일어난 탓에 정오에 다다라서 왕실 제2기사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사단대문 앞에 서있자 얼마안가 기사 하나가 그녀를 알아보고 즉각 뛰어왔다. 기사가 뭐라 정중히 인사하기도 전에 렐리아는 다짜고짜 용건부터 말했다. “이스티온 경 불러주세요.” “이스티온 말입니까? 지금 없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수더분한 낯의 기사는 뒷목을 긁적이다가 바로 연무장에 있던 다른 기사들에게로 뛰어갔다. 뭐라 얘기를 나누고서 기사는 먼 거리를 다시 빠르게 뛰어왔다. 헐떡이는 숨소리 없이 입을 연 건 바로 이 뒤였다. “오늘부터 장기휴가를 냈답니다.” “장기휴가요?” “네.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달간은 안 나올 거라네요.” 기사는 더 자세하게 알려주지 못함에 미안한 표정을 걸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깊은 생각에 빠져있느라 눈앞에 있는 남자의 표정이 어떤지조차 몰랐다. 그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만 한번 까딱하고서 등을 돌렸다. 저가 찾아올 줄 알고 한발먼저 발을 뺀 건가 싶었다. 철저히 그의 손에서 놀아나는 기분이었다. 그 새하얗게 흩날리던 은발을 떠올리며 그녀는 입술만 까득 깨물었다. * 블리어는 도박장 화재사건의 피해자를 집계한 보고서를 살피고 있었다. 사망자는 열두 명, 부상자는 세 명이나 그 부상정도가 심각했다. 세 명 다 전신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스스로를 왕실마법사라 칭하는 의문의 인물이 아니었다면 최소 수백 명의 희생자가 나왔을지 모를 일이었다. 네 곳의 출구로비만 불에 타 물질적 피해는 거의 없지만 새까맣게 탄 구조물을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사고로 인해 방재훈련의 허술함이 드러나 앞으로 도박장을 찾는 손님이 부쩍 줄어들 것이다. 사고경위는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직원들의 증언을 토대로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갑작스레 화재가 난 점과 물로도 꺼지지 않은 특수한 불이었다는 점에서 마법이라고 추측할 뿐이었다. 이미 세간에서는 개인적인 원한을 품은 마법사가 저지른 범행이라 알려져 있으나 왕국 수뇌부의 의견은 달랐다. 이번에도 실버드래곤의 소행이라 여겼다. 수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불길한 사건들에 왕실에서도 엄밀하게 총력전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머지않아 왕궁을 공격해올 것이란 것은 이미 기정사실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블리어는 왕궁에 불려가랴 업무를 보랴 내무회의를 하랴 최근 들어 정신없는 삶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 틈틈이 여자까지 끼어들었다. 갑작스레 손목에서 이는 미미한 진동에 블리어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꿈틀 휘었다. 여자가 저를 호출하는 신호였다. 어제 단단히 일러두었는데 또 이런 호출이 온다는 건 이번엔 진짜 급한 일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블리어는 업무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만 해도 열다섯 번은 박차고 일어났던 자리였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신호를 무시 못 하고 여자의 방에 도착하면 여자는 저와 놀아달라거나 불을 꺼달라는 둥의 쓸데없는 부탁만 했었다. 그리고 오늘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작 심심해.” 바삐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이 후회가 될 만큼 여자는 침대위에 퍼질러 누워있었다. 신세한번 좋은 모습에 블리어는 문가에 서서 미간을 주무르려다 그제야 손에 들린 깃펜을 발견하고 더욱 움푹 주름을 새겼다. 다급하게 쫓아오느라 펜도 놓지 않고 온 자신의 모습이 수치스럽기만 했다. “누누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낮에는 그대에게 신경 못써준다고.” 약간 노기어린 음색에 렐리아는 슬며시 베개로 두 귀를 막았다. 역시나 무뚝뚝한 음성의 잔소리가 대번에 날아 들어왔다. “어제도 말했지만 그 목걸이는 위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라고 준 겁니다. 압수당하고 싶습니까. 나는 하루 종일 침대위에서 빈둥거리는 그대처럼 한가하지 못합니다. 그대가 자꾸 이런 식으로 호출하면 업무에 방해된다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습니까.” “그럼 업무 중엔 팔찌 빼놓으면 되잖아.” “그대가 만일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을 때는 어쩌라는 겁니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것도 그렇네가 아닙니다. 그러라고 준 겁니다.” 블리어는 말끝마다 악센트를 주며 렐리아가 누워있는 침대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어느덧 침대 옆에 선 그는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베개를 확 뺏어버렸다. 베개에다 양쪽 귀와 얼굴을 묻고 있던 렐리아는 그제야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른 낙엽에 불이 붙은 것처럼 그의 진녹안이 이글이글했다. “위급한 상황에만 호출하십시오. 알겠습니까?” “네에.” 다시 베개를 달라고 손을 뻗자 그는 순순히 베개를 돌려주었다. 렐리아는 푹신한 베개를 끌어안은 채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서 하품만 터뜨리는 그 게으른 모습이 블리어의 무의식적인 결벽증을 건드렸다. 그는 근처에 있던 빗과 머리끈을 찾아들고 와서는 직업병처럼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째 현직시녀인 소피아보다도 더 솜씨가 좋아 렐리아는 가만히 그에게 머리를 맡겼다. “공작. 내가 시급 쳐줄 테니까 공작일은 때려치우고 그냥 내 옆에서 머리나 빗어주고 말동무나 하는 게 어때.” “허튼 소리. 그럼 반대로 내가 품위유지비를 매달 지급할 테니 완벽한 숙녀로서의 교양을 갖추겠습니까.” “아니.” “그럴 줄 알았습니다.” 섬세한 손길로 그녀의 삼단 같은 머리를 한 갈래로 질끈 묶어 올린 블리어가 대답했다. 머리카락 한 올 내려오지 않은 깔끔한 목덜미가 참 희고 부드러워보였다. 그는 여자의 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느지막이 운을 뗐다. “정 그렇게 심심하면 그 사제나 다른 친구라도 데리고 오십시오.” “아 그것 때문에 그러는데.” 그제야 그를 부른 또 다른 용건이 떠올랐다. 렐리아는 홱 뒤를 돌아보며 바로 말을 이어갔다. 그에 블리어는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그 슈로니 알락디사 라는 친구가 이따 방문한다는데 혼자 만나기는 껄끄러워서.” “거절하지 그랬습니까.” “그렇다고 거절하기엔 내가 귀여운 여자애들한텐 약하거든.” 그렇게 둘러댔으나 렐리아는 누가 봐도 영악한 목적이 있는 사람처럼 푸른 눈동자엔 짓궂은 빛이 흘렀다. “공작. 시간 괜찮으면 걔 올때 나랑 같이 있어주라.” “약속한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다섯 시.” “조정은 해보겠습니다.” * 오후 다섯 시경.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 슈로니는 라콘드 공작저에 도착했다. 미리 문 앞에 나와 대기하고 있던 시종은 곧바로 후작영애를 저택안쪽 응접실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슈로니는 얼마안가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렐리아와 대면할 수 있었다. “와아 렐리아. 일주일만이지? 보고 싶었어.” “심심했는데 마침 잘 왔어.” “근데 렐리아 더 예뻐진 거 같아. 뭔가 분위기가 그래. 응응.” 누가 봐도 사이좋은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고서 슈로니는 방긋 웃으며 렐리아의 반대편에 앉았다. 렐리아는 그저 여유롭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오늘은 또 뭘 가져왔을까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얼마안가 슈로니는 손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슬며시 꺼내들었다. 분홍색 리본이 묶여진 작은 티백이었다. ‘참 수법한번 변하지 않네.’ 렐리아는 속으로 피식 웃으며 슈로니의 말을 경청했다. “저번에 맛있다고 한 차야. 렐리아 생각나서 마리한테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했어.” 이번엔 마리가 찻잎 속에 독을 넣는 걸 옆에서 지켜보며 직접 양까지 조절한 것이었다.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슈로니는 그런 시꺼먼 속내를 숨기고서 도자기로 된 찻주전자에 찻물을 우려주기까지 했다. 분홍색 찻물을 렐리아의 잔에 그득 따라주고서 한번 마셔보라며 권유하려던 찰나였다. 단조로운 두 번의 노크를 뒤로하고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들어선 정갈한 복장의 흑발사내와 눈이 마주친 순간 슈로니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흠칫 크게 몸을 떨었다. “아 블리어. 마침 잘 오셨어요.” 렐리아는 그 반응에 하마터면 경박하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으나 가까스로 꾹 눌러 참았다. 물론 목소리가 하이톤으로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를 소개시켜드리고 싶어서. 괜찮지, 슈로니?” “아. 물론이지.” 허둥지둥하며 몸을 일으킨 슈로니는 가슴앞섶을 한손으로 다소곳이 누르며 무릎을 한번 접었다 펴보았다. “공작전하를 뵈어요.”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슈로니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최대한 억눌러야만 했다. 생각지 못한 사적인 자리에서 그와 만나게 된 이 상황에 더없이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영영 만끽하고 싶을 만큼 좋았다. “오랜만입니다. 영애.” “아…네, 네.” 누가 봐도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소심해지고 덜렁거리는 순진한 소녀 같은 반응이었다. 렐리아의 두 눈에도 그 모습은 확실히 귀여워보였다. 동시에 만만한 장난감을 발견한 것 같은 묘한 이채가 그녀의 가늘어진 눈동자위로 떠올랐다. “아참. 내 정신 좀 봐.” 렐리아는 손뼉을 가볍게 친 후에 잠시 내려두었던 찻잔을 들어올렸다. 맞은편에 앉은 슈로니가 보란 듯이 말이다. “블리어. 제 친구가 맛있는 차를 우려준 거 있죠?” “!” 그제야 슈로니는 잊고 있던 가장 중요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독을 탄 차가 아직 렐리아의 손에 있었다. 어디까지나 마리가 자신을 살해하려고 만든 티백을 모르고 렐리아에게 주었다 발뺌하면 되는 일이라지만 공작이 바로 옆에 앉아있으니 마음에 걸렸다. 슈로니가 긴장감에 손만 꾹 쥐고 있을 때였다. “한번 마셔보세요~” 렐리아는 평소와는 다르게 상냥한 미소를 입술에 걸며 바로 제 옆자리에 앉은 그를 올려다보았다. 꾸준히 자세훈련을 한 덕에 제법 기품 있는 몸가짐이었는데 누가 봐도 내조하는 부인처럼 조신해보였다. 저부터 챙겨주려는 그 고운마음씨가 생소하기는 하나 블리어로서는 이런 호의가 싫지는 않았다. 이 여자가 웬일이지 싶어서 블리어는 누그러진 마음으로 그녀가 내미는 찻잔을 받아들였다. 아니 받으려고 했다. 갑작스레 끼어든 불청객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아…, 자, 잠깐만!” “응? 슈로니 왜 그래~?” “그…안 돼.” “뭐가 안 되는데~?” 짙게 끌어올린 입술을 하고서 렐리아는 되물었다. 능청스러운 미소 뒤에 언뜻 사악함이 드러났다. 악마꼬리가 렐리아의 엉덩이 뒤에서 하느작거리고 있다면 슈로니의 머리위엔 천사의 링이 떠올라있을 테다. 겉모습만 본다면 그러했다. “…남자는 마시면 안 돼.” “왜 마시면 안 되는데~?” “…남자가 마시면…그, 그…정력에 안 좋거든. 부끄러워라….” 발갛게 뺨을 물들이며 슈로니는 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에 렐리아는 속으로 성의 없는 박수를 짝짝 쳐야만 했다. ‘와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이 정도 내숭스킬은 렐리아로서는 불가능했다. 렐리아는 이렇게 된 이상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렇구나. 그럼 어디에 좋은데, 이 차?” “피부에 좋다고 알고 있어.” “그럼 슈로니의 피부에 양보할게.” “아니야, 렐리아. 나는 마리가 잠들기 전에 매일 타줘서 많이 마시거든.” “그래? 그럼 내가 마실까~” 렐리아는 찻잔을 쥐고서 매끄러운 흰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분홍색 찻물에 비친 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알면서도 마시기엔 마음한편으론 껄끄럽다. 그렇다고 안마시면 의심을 살게 분명하고, 마시고 또 멀쩡하게 살아남으면 이상한 취급받을 테다. 렐리아로서는 고민인지라 혼란함을 달래기 위에 옆을 돌아보았다. 수초도 안지나 저의 눈길을 알아차려주고서 마주 바라봐주는 그 익숙한 녹색 눈에 조금은 혼란함이 잦아들었다. “블리어, 저 이거 마시고 피부 좋아지면 오늘밤은 평소보다 더 진하게 사랑해줄 거죠?” “다른 사람 앞에서 무슨 얘길 하는 겁니까.” 한 톤 낮아진 감미로운 목소리로 대답했으나 블리어는 손을 들어 그 작은 입을 틀어막았다. 물론 슈로니가 보기에는 그가 부끄러우니 자제하라는 뜻에서 여인의 입을 가린 걸로만 보였다. 스킨십이 대수롭지 않은 그 다정한 모습에 슈로니의 가슴속의 무언가가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제게만 녹을 거라 여겼던 얼음이 미지근하게 녹아있었다. 슈로니는 이제껏 공작이 사귀었던 영애들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알고 지냈고 또 지켜보았다. 심지어 그녀들의 고민상담을 들어주며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처럼 굴기까지 했다. 형식에만 치중하는 연인관계에 서글퍼져 울고 있는 친구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손을 잡아주며 몇 마디 속살거리면 되었다. ‘공작님이 너한테 차가운 건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야.’라고 은근히 그와 헤어지길 권유했다. 물론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가지고서 한 말이었다. 어릴 적의 첫사랑인 저를 못 잊어 현재까지도 사귀고 있는 여성들에게 차가우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결국 자연스레 떨어져나간 친구를 다른 곳으로 서둘러 시집갈 수 있도록 혼처를 소개해주기까지 했다. 서로서로 좋게 끝난 마지막 친구가 줄리아 영애였는데 딱 한명 쉽지 않은 상대가 있었다. 올르아 공녀였다. 슈로니는 그때와 같은 다급함을 느꼈다. 아니 그때보다도 더했다. 지금은 약혼사이까지는 아니었으나 서로 사랑하는 것 같은 애인관계였다. 어떤 의미에선 약혼관계보다 더 했다. ‘…안돼. 안돼.’ 렐리아가 이 차를 마시고 쓰러지는 게 과연 제게 도움이 될까. 다급함에 슈로니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자꾸만 들었다. 형식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였다. 렐리아가 눈앞에서 쓰러진다면 공작님은 아마 지금보다도 더욱 그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끼실 테다. 운이 좋아 렐리아가 살아난다면 바로 결혼까지 하려들지도 모른다. 슈로니가 읽어왔던 로맨스소설은 죄다 이런 전개였다. 독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지 몰랐다. ‘잠깐. 이건 오히려 기회일지도 모르잖아…?’ 슈로니는 번개처럼 떠오른 기막힌 생각에 곧바로 렐리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렐리아 미안. 갑자기 목이 말라서 그런데 내가 마셔도 될까?” 자신이 이 자리에서 쓰러진다면 어쩌면 어릴 적 제게 느꼈던 사랑을 그가 다시 한번 자각하는 계기가 될지 몰랐다. 그의 첫사랑은 자신이었다. 아직까지도 저를 가슴한편으론 못 잊고 소중하게 여기실 것이다. 이제와 허무하게 다른 여자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는 질투심에 슈로니는 마음 굳게 먹었다. 그런 강한 믿음과 자신만의 세상에 사로잡힌 슈로니는 눈을 딱 감고 한 모금을 들이켰다. 죽진 않겠지 싶은 것이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 슈로니는 그대로 소파위에 풀썩 쓰러지며 기절해버렸다. 그 어이없는 행동에 렐리아는 떨떠름하게 턱만 긁적였다. “공작. 얘 쓰러졌는데?” “시종을 불러오겠습니다. 범인으로 몰리고 싶지 않다면 가급적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있으십시오.” “안 건드려. 얼른 불러와, 죽겠다 얘.” 렐리아는 소파위에서 게거품을 물고 있는 슈로니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중이병도 병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0078 / 0172 ---------------------------------------------- 진심과 가벼움 슈로니는 이틀간 사경을 헤매었다. 수도의 명의들이 몇 번이고 저택을 들락날락하는 동안 알락디사 후작부부는 눈조차 제대로 붙이지 못했다. 무남독녀라서 더욱 애지중지하던 딸이었다. 하나뿐인 딸이 혼수상태가 되어 돌아왔으니 후작부부의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슈로니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후작가문은 또 한 번 발칵 뒤집어졌다. 시녀 마리가 자살을 한 것이다. 단순히 모시던 주인아가씨가 깨어나지 못하자 그 비통함에 목을 매달았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리에겐 돌봐야할 어린 동생들이 있었으니 단순우울증에 시달리다 죽었다고 하기엔 이상한 것이다. 이를 수상쩍게 여긴 후작은 시종들을 시켜 자살한 시녀의 방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했다. 그리고 모두가 설마 했던 추측이 들어맞았다. 독극물이 발견되었고 후작은 격노했다. 이로 인해 후작영애에게 앙심을 품은 한 시녀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짓으로 파악되었고, 세간에는 이를 들킬 것이 두려워 시녀가 자살을 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찝찝한 소문이 수도에 돌고 돈 후에야 슈로니는 기적처럼 눈을 떴다. 후작부부는 신께 감사하며 딸을 품에 안고 눈물을 쏟았다. 슈로니가 벌인 자작극이란 것도 모르고 평소 그녀와 친하게 지내던 영애들은 편지와 선물을 보내오기도 했다. 모든 이들의 관심 속에서 슈로니는 시치미를 뚝 뗐다. 마리가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후에도 가녀린 피해자인 척했다. 슈로니는 이중적인 제 면모에 스스로도 놀라워하며 감탄했으며 또 즐거워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감쪽같이 속이고 그들의 걱정을 받는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유일하게 바라는 단 한명, 라콘드 공작에게서 그 관심과 걱정이 오지 않아 서운하긴 했으나 슈로니는 쿨한 척했다. 대중의 시선이 제게 모여 있으니 애인이 있는 와중에 제게 사적인 연락을 취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길 뿐이었다. 사실은 눈앞에서 쓰러진 저를 잊지 못하고 밤낮으로 내내 걱정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착각 속에 빠져 슈로니는 홀로 빙그레 웃었다. 언제 그에게 다가가면 좋을지에 대해 고민하며 말이다. * “오늘밤은 낭만적인 게 딱 하기 좋은 날이네~” 렐리아는 검은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들을 올려다보며 그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창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있는 여인의 긴 은발은 은하수가 쏟아져 내린 것처럼 올올이 반짝거렸다. 머리카락이 흘러내린 가는 허리와 얇은 의자다리 사이로 보이는 흰 다리가 사내로 하여금 눈길을 끌게 만들었다. 블리어는 부정하지 않고 책에서 눈길을 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윽고 렐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바로 마주친 시선에 그녀는 능글맞게 입꼬리를 휘어 올렸다. 유혹하듯이 윗입술을 살짝 핥거나 한쪽 눈을 찡긋거렸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소파에 앉아있던 사내는 무관심하게 한손에 들린 책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하기 좋은 날인데~ 마침 단둘이 있는데~” 신세타령처럼 늘어지는 목소리가 공허하게 넓은 방안을 울렸다. 진심이 텅 비어서 더 공허했다. 블리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으나 속으로는 다 듣고 있었다. 일주일 전만해도 어디로 가고 싶다 가고 싶다 중얼거리던 여자는 이제는 틈만 나면 하자하자 노래를 불러댔다. 그 쌍스러운 언사에도 블리어는 지적하지도, 뭐라 대꾸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지치면 알아서 돌아가기도 했고 일종의 매일하는 타령 같은 거라 받아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여 결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외려 많았다.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건지 그 나름대로 그녀에 대해 세심히 관찰하고 분석하고 깊이 생각하니 말이다. 말이 상스럽기는 해도 원래는 이렇게까지 집요하지는 않았다. 지나친 요구를 고집하고 극단적인 표현을 곧잘 하는 게 전형적인 우울증 증세였다. 낮에는 멀쩡하다가 밤만 되면 이러니 조증기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인지 평소보다 질긴 구석이 있었다. 하자 하자 노래를 부르던 여자가 별안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의자 위에 두 발을 얹어놓고서 창 앞에 섰다. 뭘 하나 싶어 쳐다보니 여자가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밤바람이 서늘한 한기를 업고 몰아닥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블리어의 목가를 스쳤다. 이 밤중에 환기라도 하려는 건가 싶을 때였다. 여자가 다리 한 짝을 들더니 창틀위로 불쑥 올라서는 게 아닌가. 고양이처럼 민첩한 몸놀림으로 올라서더니 아슬아슬하게 창틀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안 해주면 죽어야지 뭐.” 창틀위에 올라가서 한다는 말이 이것이었다. 이젠 하다못해 자살소동이라니 끈질긴 여자가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 위험합니다.” 이래봬도 삼층이었다. 대저택답게 층과 층사이가 꽤 높아 일반 여염집에 비교하자면 거의 오륙 층에 맞먹는 높이였다. 제정신인가 싶어 블리어가 서느렇게 눈매를 접을 때 렐리아는 천진한 낯짝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낮에 봤으면 조금은 아찔했겠지만 어두워서 땅바닥이 잘 안보였다. 깊은 심해 같은 바닥을 집요하게 내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씰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늘어지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노랫소리처럼 낭랑하게 울려퍼졌다. “안 해준다는데 죽어야지~ 죽어야지~”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별수 있나~ 안 해준다는데.”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철딱서니 없다. 하지만 블리어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을 제 기준에서 멋대로 재단하고 비난하지 않았다. 정상인이 무턱대고 이런 짓을 할리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남이 보기엔 이해는 안 될 지라도 이런 짓을 할 만한 심리적 요인이 그녀에게 존재할 거라 여겼다.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렇다고 도 넘은 짓을 눈감아줄 수는 없기에 블리어는 나직이 경고할 뿐이다. “조심성 없기는. 죽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내려오십시오.” “정말 안 해줄 거야?” “내려오라고 했습니다.” 치 하고 렐리아는 성의 없게 이기죽거렸다. 그가 진심으로 화를 낼까봐 쫄아서 일어나는 건 결코 아니었다. 렐리아는 창문틀을 붙잡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떨어져도 죽지 않으니 그 스릴을 즐기는 것이다. 허나 그것이 문제가 되었다. 내려 오기위해 안쪽으로 몸을 돌리려다 렐리아는 창틀 가장자리를 밟는 순간 몸이 기울어지는 걸 느꼈다. 아, 하고 탄성을 지를 새도 없이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 가녀린 몸뚱이가 창밖으로 떨어져 내린 그 아찔한 순간 블리어의 심장도 따라 곤두박질쳐졌다. 들고 있던 책을 내팽개치고서 그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남들이라면 정신없이 허둥지둥됐겠지만 그는 반대로 전신이 굳어버려 기계적이고도 빠르게 두 다리를 움직여 창가 앞에 섰다. 너무나도 급작스럽고 허무해서 블리어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황망하게 흔들리는 눈길을 감추지 못했다. 떨어졌다면 이미 살아있을 확률은 없을 텐데도 창밖을 내다보기가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살아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저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공작. 나 좀 끌어올려줘.” 간신히 창틀을 붙잡고 있는 작은 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외벽에 거의 달라붙어있다시피 한 여자의 모습에 블리어는 가슴속에 응어리졌던 묵직한 감정을 쓸어내리며 곧바로 여인의 팔을 붙잡아주었다. 손힘이 풀리지 않게 단단히 잡느라 평소보다 더 과하게 악력을 실어버렸다. 렐리아는 저를 단번에 끌어올려주는 그의 악력에 감탄하며 창틀을 넘어 바닥에 무사히 착지할 수 있었다. 후, 하고 가볍게 한숨을 쉬는 모습은 죽다 살아난 사람 같지 않을 만큼 태평했다. 외려 블리어가 죽다 살아난 사람처럼 깊고 짙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려야만 했다. 여전히 피가 마른 심장은 싸늘했다.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저기압성 목소리가 그의 목울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어깨를 짓누르는 낮은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음 놀랐어?” “죽을 뻔했다는 자각은 있는 겁니까.” 오랜만에 그답지 않게 냉랭한 반응이었다. 얼쯤해진 렐리아는 웃으려던 걸 관두고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를 뒤따라갔다. 블리어는 바닥에 뒹굴고 있는 책을 주워들었다. 나동그라진 충격에 몇 장이 구겨져있었다. 대륙에 몇 권밖에 없어 그 희소성으로 유명한 서적이었으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책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이 썩 좋지 못하자 렐리아는 슬그머니 그의 옆에 서서 턱을 긁적였다. “이거 내가 새로 사줘?” “신경 안 써도 됩니다.” “진짜 신경 쓰지마?” 제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라 렐리아는 그의 눈치만 살폈다. 하지만 블리어는 가라앉은 표정으로 묵묵히 책을 책장에 꽂아놓을 뿐 독설은커녕 한 마디조차 없었다. 너무 조용해서 되레 불안감만이 조성될 때였다. 별안간 무겁게 닫혀있던 사내의 입이 벌어졌다. “그대는 안정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 웬 안정?”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고 묻기 무섭게 강한 손아귀가 제 팔을 쥐었다. 렐리아는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사내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왜 또 저렇게 강경한가 싶었다. 그러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에 방문이 있음을 깨닫고 그제야 그의 손에서 팔을 빼내기위해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야만 했다. 저를 방에서 내쫓으려한다는 게 훤히 보이는데 미쳤다고 졸졸 따라갈까 싶었다. “나보고 나가라고? 아직 공부도 다 안 끝났잖아.” “언제 공부를 신경 썼다고 그럽니까. 그대는 지금 쉬어야 됩니다. 내 말에 따르십시오.” “충분히 쉬었어.” “더 쉬어야합니다.” 치매노인병원에 입원시키려는 아들과 싫다고 버티는 노모처럼 문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실랑이를 이어나갔다. 렐리아는 아직 열한 시밖에 안됐는데 왜 쫓아내려하느냐고 이를 갈았다. 저번처럼 또 쌍싸대기를 맞고 싶냐고 손바닥으로 위협도 해봤으나 블리어는 작은 새끼고양이를 상대하는 맹수처럼 늠름하면서도 덤덤했다. “그대는 몰라도 나는 압니다.” “뭘 아는데?” “누가 뭐래도 그대는 지금 쉬어야 됩니다. 일단 방으로 돌아가서 침대에 누워보십시오. 편안하게 눈을 감고 있다 보면 잠이 올 겁니다.” “안 오면?” “명상이라도 하십시오.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될 겁니다.” “공작 방에도 침대 있잖아. 여기서 하면 되겠네.” 렐리아가 등을 돌려 침실로 향하려하자 블리어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세우며 확 끌어당겼다. 그녀의 등이 문가의 벽에 닿은 것은 한순간이었다. 딱딱하고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서 렐리아는 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막아서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날렵한 턱 아래에 음영이 져 더욱 무서워 보이는 얼굴로 그는 저에게 나가라는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허나 렐리아는 꿈쩍도 안했다. 움직일 기미를 안 보이는 렐리아를 향해 그가 별안간 한손을 뻗어와 그녀의 머리 옆을 지그시 눌렀다. 오른쪽경로를 차단하고 왼쪽에 있는 문으로만 갈 수 있게 한 것이다. “공작, 공작. 진정해봐.” 여자들의 로망인 벽치기를 생각할 만도 할 텐데 렐리아는 으슥한 곳에서 돈 뺏기는 중학생이 된 기분만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쉽게 물러날 그녀가 아니었다. 렐리아는 코 위까지 숫자 1을 뜻하는 검지를 슬며시 들어보였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가난한 소년처럼 딱한 모습이었다. “나 그럼 나갈 테니까 딱 한번만.” “쉬십시오.” “아 제발 딱 한번만!” 블리어는 제게 사정사정하는 여자를 매정할 만큼 문 쪽으로 내몰았다. 활짝 열린 문 앞에서 렐리아는 문틀을 붙잡고 어떻게든 버티고 섰다. “한번만 해주라. 진짜 내가 각서도 쓸게. 해주는 즉시 바로 이 저택에서 나가줄 수도 있어.” 껌딱지 같은 자신을 내쫓고 싶은 게 아니냐는 간절한 눈빛에도 그는 끄떡도 안했다. “그런 야만적이고 저질스러운 방법이 아니더라도 그댈 쫓아낼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금방이라도 무력으로 끌고 나가려는 듯 엄하게 굴었으나 그는 손끝하나 대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질린다는 냉한 눈빛이나 썩은 표정을 바로 드러냈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화조차 내지 않아 김새는 반응에도 렐리아는 꿋꿋했다. “제발 한번만. 공작!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 “아 혹시 임신할까봐 걱정되는 거면 나 꾸준히 피임약 복용하고 있으니까, 지금 딱 확률 낮을 시기고. 어때?” “그런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블리어는 애써 구겨지려는 인상을 피고서 고집을 써대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가 또 정서적 불안을 느끼고 있구나 싶었다. 재물을 탐내는 것도 아니고 명예욕도 없었다. 이렇게 악착같이 잠자리를 원하는 것이 사고의 불안감을 떨쳐내기 위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한 그였다. 남자가 저밖에 없으니 이렇게 안아달라고 애타게 조르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보고 있는 그가 다 답답했다. “공작. 예전에 마음 없이도 잠자리 가질 수 있다면서? 그때 나랑 안 해준 이유가 내 속이 너무 빤히 보여서라고 했던감. 지금은 어때? 나 공작정도면 진짜 즐길 수 있을 것 같은데, 공작도 그렇지 않아?” “바뀌었습니다.” “뭐?” “마음이 없으면 잠자리 안 가집니다.” 블리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모습이 바위처럼 단단해보여서 차마 렐리아는 거짓말이냐고 캐묻지 못했다. 대신 입을 옹다물고서 그를 쳐다보다가 한참 있다 다시 입술을 뗐다. “공작 나한테 마음 없어?” “…….” “나는 있는데.” 0079 / 0172 ---------------------------------------------- 진심과 가벼움 “허튼 소리 마십시오. 마음 있다는 인간이 그럽니까.” 진실로 마음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더 사랑받고 싶어 예쁜 면만 보여주려 노력하는 게 당연하다. 눈앞의 이 여자는 제 모든 바닥을 드러내면서까지 하자고 조르고 있었고 말이다. 초라하리만치 상대에게 매달리는 건 사랑이 아니라 구걸이라 하는 게 옳은 표현일 테다. “뭐에 쫓기기에 그렇게 악착같이 내게 매달리는 겁니까. 지금 서둘러 일을 치른다한들 그대가 즐길 수나 있겠습니까.” “그건 내가 판단해.” “그것으로 정말로 그대 마음이 안정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그댈 봐온 내가 장담합니다.” “아니…,” “그러니 이상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쉬십시오. 사고의 후유증이 아직 덜 나은 모양이니 돌아가서 느긋이 머리를 식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그래. …그럴게.” 무뚝뚝함 속에 어린 부드러움을 눈치 챈 렐리아는 더 이상 떼를 쓸 수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어르듯이 말하는데 눈치 없이 계속 그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진 않은 것이다. “근데 말이야 공작. 나랑 해줄 마음은 일단 있는 거야?” 또 천박하다고 욕할까, 조심스럽게 물으며 렐리아는 문밖으로 한발 내디뎠다. 그러곤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의외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없지는 않습니다.” 늘 흘려들었던 물음에 블리어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답을 내놓았다. 호감에 가까우니 제 침대에서 하루 재운다한들 불편하지도 않을 것 같다. 그저 지금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편할 테다. “이런 걸 약속하는 것도 우습지만 일단은 그대 상태가 호전되는 게 우선입니다. 그때 돼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정말로? 공작 그 말 정말이지?” 블리어는 말없이 고갤 한번 끄덕여보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싶으면서도 그녀의 표정이 아까보다는 한결 밝아졌으니 이걸로 되었다 여겼다. 지금 이 친숙한 분위기에서 실제로 할지 안할지 장담은 할 수 없다지만 말이다. “나 그럼 믿고 돌아갈게. 공작 고맙고 잘자.” 조금은 후련해진 마음으로 렐리아는 방문을 닫고 제 방으로 돌아갔다. ‘이제 이주 남았나.’ 전부 클리어하기로 계획한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마냥 손만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마음이 조급한 채로 가만히 있는 건 확실히 정신건강에도 좋지 못했다. 실제로도 악몽을 꾸는 빈도가 높아지니 뭐라도 해야만 했다. 공작과는 약속을 받아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왕 하나였다. ‘언니 때문에 문젠데. 어떡하지…’ 또 멍하니 생각에 잠겨서 렐리아는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 * * 침대아래 꼭꼭 숨겨두었던 검은 패딩을 오랜만에 착용하고서 렐리아는 한밤중에 왕성을 맨손 등반했다. 날카롭게 솟은 수백 개의 첨탑지붕을 넘나들고 까마득한 높이에서 혹독한 칼바람을 맞으며 렐리아는 왕성복도를 통한 잠입을 시도했다. 허나 저번보다 훨씬 경비가 삼엄해져서 틈을 타 안으로 들어가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소란을 일으키는 것보단 왕의 침실로 바로 직행하는 게 낫겠다고 여겼다. 다행히 예전에 한번 찾아와 침실위치를 알아냈기에 창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단지 침실 안에서 정사를 나누고 있는 두 남녀로 인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단 거였다. 침대 위에 누워있는 여인은 하필이면 언니였다. 섬세한 금빛머리칼을 침대시트위에 흐트러뜨려놓고 가냘프리만큼 긴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었다. 아름다운 도자기인형처럼 가만히 누워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왕은 그녀 입술이 닳도록 키스하고 여러 차례 허리를 흔들어댔다. 다행히 아랫부분은 금수가 놓인 이불로 가려져있어 그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줄 수 있었다. 렐리아는 언니가 왕의 침실에서 나가기만을 기다려야만 했다. 밖에서 겨우 대롱대롱 매달려서 까마득한 발치를 내려다보거나 오늘따라 환한 만월이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했다. 안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에 괜히 민망했다. 왕은 지칠 질 모르고 언니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 같았다. 열정적인건지 순애적인건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사랑을 퍼부어댔다. 한 삼십분 가량이 흘러서야 침실 안이 조금 잠잠해졌다. 얼마안가 희미한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지만 지나치게 내리깔린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곤함에 잠긴 것 같기도 했다. “…이제 가볼게요. 리우스.” “…다이아나. 오늘밤만이라도 나와 같이 있어주면…” “…아버지께서 걱정하실 거예요. 그리고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사이에 이리 문란하게 구는 것도 좋지 못해요. 정략적인 약혼사이일 뿐 우리가 부부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럼 부부가 되면 되잖아. 식은 봄까지 늦추더라도 지금 당장이라도 공식적인 왕후로서 책봉할 수 있어. 난 그대가 왕후의 관을 써줬으면 해. 형식적인 게 아니라 단지 내 옆자리에 있어주었으면 해. 다이아나, 난 그대에게 약혼을 청한 순간부터 쭉 진심이었어. 그러니 내 마음을…,” “…미안하지만 리우스. 놓아줘요. 난 아직 결혼할 생각 없어요. 처음부터 정략적이었던 우리의 관계를 이제 와서 바꿀 생각도 없고요.” 냉담한 거절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말을 뒤로하고 또각거리는 구두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만이 왕의 침실에서 흐르자 렐리아는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패딩모자로 얼굴을 거의 다 가리고 눈만 보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눈이 마주치면 민망한 기분만 들 것 같았다. ‘이제 와서 돌아갈 수도 없고.’ 렐리아는 잠시 고민한 후에 마음 굳게 먹고 창틀 위로 뛰어올랐다. 창문을 뜯어야하나 싶었으나 다행히 한쪽 창문을 당기자 쉽게 열렸다. 목소리 변조기를 킨 상태로 렐리아는 창틀을 타넘어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오랜만이군 왕이여.” 대지위에 군림한 지하세계의 왕처럼 위풍당당한 기세를 뽐내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침대 위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있던 왕 라델리우스가 침입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색 빛이 도는 금발과 화려한 에메랄드 눈, 그리고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나는 한줄기 눈물이 렐리아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혹시 우는?” 렐리아는 하마터면 말하면서 혀를 깨물 뻔했다. 그만큼 당혹스러웠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다 큰 사내가 헤어진 여인, 혹은 죽은 여인을 못 잊고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등장하기야 한다지만 실제로 보니 의아스럽기만 했다. 헤어진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데 얜 뭐지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녀는 슬쩍 걸음을 옮겼다. 라델리우스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친 후 그대로 눈가를 덮고서 고뇌하는 사람처럼 상체를 옹그렸다. 누가 봐도 실연에 슬피 우는 남정네였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대형견처럼 추욱 처진 사내의 어깨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무래도 근엄한 왕으로는 보이지 않아서 렐리아는 그 옆에 얼쯤하게 서서 위로 몇 마디를 던졌다. “그 아가씨도 진심은 아니었을 거다…큼, 기운차려라 왕이여.” “…듣고 있었나.” 사무치게 낮은 목소리였다. 절절하게 대기를 울리는 슬픔과 좌절이 렐리아에게도 느껴질 정도라서 그녀는 차마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라 목을 한번 가다듬고 솔직히 사과했다. “고의는 아니었다. 미안하다." 미동조차 않고 눈가만 손으로 덮고 있는 라델리우스의 옆에 렐리아는 사뿐히 걸터앉았다. 쭈뼛거리며 서있기에는 폼이 안사니 이세계의 왕과 동급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착석이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그녀를 사랑한다…사랑해. 하지만 내게 조금도 마음을 허락하지 않아. 남이 보기엔 내게 미소지어주는 그녀가 상냥해보이겠지, 다정해보이겠지…. 허나 단 한 번도 내게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라델리우스는 잔뜩 쉰 목소리를 뒤로하고 얕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에 듣고 있는 렐리아도 덩달아 실소가 튀어나올 것 같다. 누가 보면 실연당한 친구의 전화를 받고 달려온 불알친구인 줄 알겠다. 협박하러 왔다가 되레 등을 두드려주게 되어버렸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고백도 했었다. 처음으로…진심으로. 허나 그녀의 굳건히 닫힌 문은 내게 열리지 않았어.” “그래.” “이제는 괴롭군. 정말 신인지 드래곤인지 모를 그대에게 반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그런 끔찍한 저주에 걸려서라도 난, 난…그녀를 잊고 싶다. 하지만 결국 저주 또한 내게 통하지 않았지. …그녀에게 자꾸만 기대하고 마는 이 가슴을 뜯어내고 싶다. 어찌하면 좋지. 한낱 인간의 감정은 그대 같은 초인적인 자도 다룰 수 없는 건가?” “그럼 내게 반하면 되지 않나.” “절대 그럴 리는 없다…다이아나 그녀가 아니고서야 아무도…그 아무도…. 난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어.” ‘아니 어쩌자는 거야. 이 답정너 새끼가.’ 렐리아는 정색한 채 왕의 등이나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그래 울어라, 울어 하고 두드려주는 동안 방안 시계만 힐끗 거렸다. 대체 본론은 언제 꺼내야 될지 생각하는 동안 지루하면서도 한편으론 초조하기만 했다. ‘그나저나 언니도 참 나쁜 여자라니까, 그런 점이 더 매력적이라서 홀릴 것 같지만.’ 같은 사람을 열렬히 좋아하는 입장에서 왕의 마음이 조금 이해는 된다. 비록 덕심이라지만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은 애틋한 남녀의 사랑과 비교한다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연애설이 터졌을 때의 그 세상이 무너진 것만 같은 상실감도 덕후에겐 실제 실연과 비슷할 테다. 물론 이해하는 것과 사리를 취하는 건 또 별개다. 여기 온 목적이 있으니 자신은 그걸 이뤄내야만 했다. 몇 분이 더 흐르고 마침내 왕이 마음을 추스른 것 같자 그제야 렐리아는 제 차례가 왔음을 깨닫고 사악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넌 나를 사랑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 했다. 저주도 듣지 않았으니 하는 수 없지. 왕이여, 그렇담 몸을 내놓아라. 왕국이 무사하고 싶다면 순순히 내 말에 따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제야 흠칫하고 왕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왠지 가련한 마을처녀에게 성상납을 요구하는 악덕영주가 된 기분이었다. 0080 / 0172 ---------------------------------------------- 진심과 가벼움 렐리아는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 뒤에 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내가 너를 강제적으로 어떻게 하진 못한다. 합의하에 하자는 거다. 그러니 그대는 좋을 대로 나를 덮쳐라. 몸매는 좋으니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한번 모텔에서 즐긴다는 생각으로 하면 될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는…정확히 모르겠으나 그대에게는 간곡히 부탁하겠다.” 라델리우스는 자신이 보였던 추태를 수습하듯이 다시 원래의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왕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바로 침대 아래로 내려가 앉아있는 렐리아를 향해 두 무릎을 꿇어보였다. “이 왕국을 수호해주었으면 한다.” 너도 목적이 있었냐는 눈빛으로 렐리아는 황당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대에겐 이 왕국을 통째로 지배할 힘이 있다는 걸 안다. 적어도 인간의 영역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허나 초월적인 존재여, 그대가 무너진 시계탑광장에서 우리 인간들을 도와주었던 걸 안다. 그대의 선행을 듣고서 그대가 악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알고 있었을 줄은 몰랐기에 렐리아는 얼떨떨한 눈빛을 드러냈다. 왕국을 통치하는 최고 권력자답게 왕국전체에 눈과 귀를 두는 모양이다. “그 힘을 이 왕국을 구원하는데 써줄 수 없겠나. 이렇게 무릎 꿇고 부탁하지.” “…뭐?” “제발 저희를, 이 왕국을 도와주십시오.” 급 존대에 렐리아는 또다시 얼쯤한 기분이 들었다. 저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 남자의 절을 받으니 더 그랬다. 그것도 젊은 왕이었으나 정작 왕 라델리우스는 제 행동에 조금의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실버드래곤을 상대할 수 있는 초월적인 존재였다. 눈앞의 존재를 놓친다는 것은 국가적인 손해임이 당연했다. 무릎을 꿇는 것으로 왕국의 수호를 자처해준다면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꿇을 수 있으리라. “너도 그럼 날 도와줄 텐가.” 이윽고 렐리아가 가볍게 운을 뗐다. “너는 내 힘이 필요하다고 말했지? 나또한 네가 필요해.” “왕국이 건사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이 바일로트 핀 아이작 라델리우스가 이 자리에서 맹세하지. 부든, 명예든, 그 무엇이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겠노라고.” “말이 통해서 좋다! 원래는 너의 사랑이 필요했으나 넌 나를 절대 사랑하는 일은 없다고 했으니 부득불 하게도 너와의 육체적 사랑이 필요하다.” 호쾌한 왕처럼 렐리아는 다리를 한번 꼬고서 제게 충성을 바치는 것처럼 부복자세를 취하고 있는 왕을 내려다보았다. 잘 길들인 군용견 같았다. “그러니 나와 합의하에 관계를 맺어주었으면 한다.” “관계란 무엇을 말하는 거지.” “잠자리.” 명료한 대답에 라델리우스의 표정이 일순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공포와 직면한 작은 인간처럼 어깨와 커다란 손이 속절없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렐리아는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어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에 보석같이 영롱한 에메랄드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깨질 듯이 마구 초점이 흔들렸다. “미안하지만 초월적인 존재여. 나는…남색에는 취미가 없다. 차라리…내가 깔리는 쪽이…,” “나는 여자다.” 뭔가 위험한 발언이 왕의 입에서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자르고 들어왔다. “여성이라는 성을 가지고 있기에 그 흉물스러운 것은 달리지 않았다.” “…….” “그러니 합의하에 네가 날 덮치면 되는 거다, 왕이여. 그래줄 수 있나? 딱 한번이다, 한번. 맨 정신으로 못하겠으면 술 마시고 해도 돼.” 이번엔 자신도 술을 마시고 할 생각인지라 렐리아는 술을 권유했다. 허나 왕은 말이 없었다. 그 단단한 침묵에 뭔가 이상하다 싶더니 뒤늦게 왕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여자…여성이라니……” 믿기 힘든 충격적인 사실에 패닉상태에 빠진 것처럼 낮은 목소리가 마구 떨렸다. 렐리아는 왕이 진정할 때까지 느긋이 기다려주기로 했다. 체감상 한 십 분정도가 흐르고서 “다시 본론을 이어가볼까.”하고 다시 왕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물론 상대는 아직까지도 준비가 안 된 모양이라지만. “…여성이라니……여성……” “아직도 거기서 헤어나지 못했나?” “……그 모습이 어떻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생물학적인 여자다, 왕이여.” 이거 모자 벗어서 인증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렐리아는 갑갑했다. 대체 왜 못 믿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허스키한 중성적인 목소리로 변조하긴 했지만 언뜻 여성처럼 들리는데다 패딩을 입어 상체몸매를 감춘 것뿐이지 다리각선미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여자다리였다. “여자일 리가…” “여자라고.” “…그럴 리가…” “아니, 왜 못 믿는 건데! 두 눈 똑바로 뜨고 봐, 여자라고!!” 흥분해서 벌떡 일어난 렐리아는 순간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 잡기위해 침대기둥을 붙잡았다. 대리석으로 된 침대기둥이 바로 우드득 소리를 내며 반토막이 되어버린 건 한순간이었다. 동시에 부러진 기둥 쪽으로 침대천장이 기우뚱하게 무너졌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라델리우스의 안색은 어느새 시퍼렇게 질려버렸다. 무시무시한 존재에게서 거대한 분노가 느껴졌다. 검게 핏발이 선 근육들이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공포에 압도된 그의 얼굴은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어 백지장과 방불했다. “아 이건 실수. 아무튼 나는 여자다, 왕이여! 한번 말하면 알아들어라! 이번엔 진짜 화낼 줄…왕이여?” 털썩하고 바닥위에 쓰러진 왕의 모습에 렐리아는 당황해버렸다. “미치겠네, 얜 또 왜이래.” 누가 보면 자신이 국왕을 살해한 줄 알겠다. 렐리아는 황급히 몸을 숙여 쓰러진 왕을 살폈다. 다행히 혼절한 건지 얕게나마 숨을 쉬고 있었다. 울기도 잘 운다지만 고작 이런 일에 기절하지 않나, 무슨 왕이 이렇게 마음이 여린지 모르겠다. 겉은 한 나라의 왕답게 위엄있고 과묵하며 카리스마 있도록 꾸며졌으나 속은 부실하기만한 느낌이었다. 신화적인 위인이자 건국영웅 초대 국왕 바일로트 1세의 후손이 맞나 싶을 만큼 말이다.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침대천장은 폭삭 주저앉을 위험성이 있기에 따로 분리해서 바닥에 내려두었다. 렐리아는 왕을 안아들어 침대 위에 곱게 눕혔다. 이불을 쥐고서 가슴께까지 끌어올려주던 중 문득 왼손 검지에 껴있는 금반지를 눈치 챘다. ‘…아 이거 안 빼고 나왔구나.’ 혹시 왕이 이걸 봤을까 생각하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달빛아래 금빛광택이 흐르는 얇은 반지를 내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애써 찜찜함을 떨쳐내었다. 디자인은커녕 아무런 세공도 돼있지 않기에 나중에 알아봐도 흔한 반지라고 둘러대면 될 테다. 베개를 머리 뒤에 받쳐주고 이불까지 덮어주니 왕은 완벽하게 잠든 사람의 모습이었다. 전혀 기절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상황을 수습한 그녀는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내일 다시 와야지.’ 렐리아는 목적의 반은 달성했다고 여기며 홀가분하게 창틀 아래로 뛰어내렸다. * 라콘드 공작가의 공식적인 연인사이인 두 남녀는 오랜만에 오붓한 저녁식사 자리를 가졌다. 대저택의 이층에선 한동안 은색트레이를 끌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용인들만이 보였다. 긴 식탁위의 세팅을 마치고 사용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식당 안은 넓고 화려했다. 샹들리에의 불빛은 환하게 흩뿌려져 가녀린 목덜미위로 흐르는 은발에 내려앉았다. 가볍지만 기품이 있는 흰색 이브닝드레스를 입고서 렐리아는 의자에 앉아있었다. 겉모습만 본다면 영락없는 귀족여식이겠지만 하는 짓은 예법과 무관하게 살아온 평민이었다. “식탁에 앉을 때에는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깁니다. 그리고 허리를 곧게 펴고 최대한 바르게 앉습니다. 냅킨은 그렇게 얹어두는 게 아닙니다. 무릎위에 펴놓으십시오.” “방금 어디서 안내음성이 흘러나온 줄.” 렐리아는 기계적인 안내에 따라 행동에 옮기면서도 표정은 떨떠름했다. 고작해야 저녁밥 먹는데 무슨 치장이며 이렇게 딱딱하게 틀에 잡힌 교육을 받아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정말 교육을 위한 자리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젠 이 나라의 문자는 모두 익혔고 동화책을 혼자서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되었다. 물론 한 글자씩 더듬어 가야하는 속도로. 가끔씩 춤 연습과 화교술, 기본적인 소양을 쌓기 위한 몇 가지의 교육을 받고 바로 오늘 식사 예절을 교육받게 되었다. 중요하게 격식을 차려할 곳에서 평소처럼 먹는다면 출신성분을 의심받을지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된 교육이었는데 렐리아는 조금 불만이었다. 기왕 교육할 거 맛없는 음식을 두고 할 것이지 이렇게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고 기계처럼 움직이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맛있는 건 누가 뺏어먹기 전에 숟가락으로 게걸스레 퍼먹어야 제 맛인데 말이다. “젓가락이 편한데. 포크는 영.” 렐리아는 식전 빵을 포크로 쿡쿡 찔러 입에다 가져갔다. 그에 바로 블리어의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 들어왔다. “크기가 어른주먹만한 빵은 포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조금씩 뜯어먹습니다.” “아 뭐야. 그래도 되는 거였어? 난 또~ 빵도 우아하게 먹어야 되는 줄 알고.” 렐리아는 자기 접시에 빵을 내려놓고서 새 모이만큼 뜯어서 제 입에 넣었다. 갓 구운 따끈따끈한 빵의 담백하고 살짝 달달한 맛이 부드럽게 혀에 감겼다. 어느 ‘ㅂ’ 뷔페의 스테이크보다 맛있는 식전 빵이 생각날 만큼 맛있었다. 전채요리를 시작으로 식사 메뉴 코스에 맞춰 하나하나씩 먹는 법을 배워나갔다. 스프, 면 요리, 해산물, 와인 마시는 법 등 종류에 따라 터득해나가는 과정은 빨랐으나 문제는 갑작스레 하려고하면 약간 주춤하게 돼버렸다. 기름칠이 덜 된 기계이음새처럼 무언가를 쥐려는 모양새로 손가락관절이 어색하게 구부려졌다. 아직까진 예법이란 게 몸에 익을 만큼 익숙지 않았다. 느릿느릿한 손짓으로 포크를 접시의 어느 부분에 걸쳐놓아야할지 주저하던 중이었다. “다급해할 필요 없습니다. 그대는 이제 막 첫 걸음마를 뗀 것이 아니겠습니까. 애초에 맛은 느긋하게 음미하는 게 중요합니다. 서두르는 건 식사기본에 어긋나는 것이니 그런 식으로 천천히 하면 됩니다.” 맞은편 끄트머리에 앉아서 저를 면접관처럼 지켜보던 공작이 말했다. 예전 같았다면 관찰하는 듯한 그 깐깐한 눈빛에 불편하고 부담감만 들었을 텐데 아장아장 걸어가는 아기 보듯이 바라봐주니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그는 이뿐만 아니라 천천히 하라는 말과 함께 무덤덤하면서도 어딘가 나직한 톤으로 지적을 종종 해주었다. 바로바로 알려주니 가르침받기는 쉬었다. 단지 몸이 안 따라 줄뿐이다. “그러려고 노력해볼게.” 여전히 복잡하게만 느껴져서 렐리아는 가볍게 인상을 쓴 채 다시 식사를 이어갔다. 0081 / 0172 ---------------------------------------------- 진심과 가벼움 평소 신경 쓰지 않았던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신경을 쓰느라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거기다 기품이란 것도 챙겨야 돼, 표정관리까지 해야 하니 대체 매일같이 이런 식사법을 구사해야하는 귀족이란 것들은 어떻게 신경과민을 겪지 않는지 의문이기만 했다. 십오 분정도의 느릿느릿한 요리의 맛 음미가 이어지고 또다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저녁식사의 메인 요리인 소고기 스테이크가 나오자 렐리아는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포만감을 느꼈던 배가 거짓말처럼 고요해짐을 느꼈다. 시녀가 나가고 렐리아는 자축의 의미로 가볍게 소리를 죽인 박수를 쳤다. 그에 대번에 맞은편남자의 예리한 시선이 날아 들어왔다. 참 제게 관심한번 많은 남자였다. “왜 그러는 겁니까.” “여기까지 온 내가 기특해서.” “확실히 기특하긴 합니다.” 블리어는 낮은 실소를 흘릴 듯이 누그러진 입매를 보였다. 딱딱해 보이는 각진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그는 본격적으로 나이프를 쥐고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렐리아도 따라서 썰기 위해 세 개의 나이프 중 맨 안쪽 나이프를 쥐려던 찰나였다. “식사용 도구는 되도록 바깥쪽부터 안쪽 방향으로 사용하십시오.” “오키. 근데 공작, 음식에 따라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프가 다 다른 거야?” “다른 음식의 소스가 묻지 않습니까. 지저분하니 보통 세네 개씩 놓고 개별적으로 사용하는 겁니다.” “그렇구남.” 끄덕끄덕 거리며 렐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블리어는 여전히 시선은 정반대편 테이블에 착석한 여인에게 두고서 그녀를 훑어 내렸다.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애인으로 두었던 네 명의 여인들 중 가장 지위가 낮았던 영애가 문득 떠올랐다. 단아하면서도 스무살 앳된 티가 남아있어 발랄하고 귀여웠던 여인으로 기억한다. 동시에 제게 맞추기 위해 뒤에서 말없이 부단히 노력하던 여자였다. 교양을 두루 쌓기 위해 책도 많이 읽었었고 그런 점을 높게 사 가장 오래 사귀었던 여성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이곳에 데려와 식사를 했던 적이 있었다. 가문에서는 늘 한 개씩 써왔을 나이프와 포크의 개수가 많아 당황스러운 기색을 드러냈었다. 애써 숨기고 있었지만 블리어는 그걸 간파했었다. 순서를 모르는 것인지 가장 안쪽부터 집기에 그는 자연스럽게 지적부터 했었다. ‘식사용 도구는 되도록 바깥쪽부터 안쪽 방향으로 사용하십시오.’ ‘아‥ 네.’ 웃으며 대답했지만 창피했던 건지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입술을 슬그머니 안쪽으로 깨무는 모습을 보였었다. 물론 그 예리한 시선에 잡히지 않을 리도 없었고, 깐깐한 성미상 그냥 넘어갔을 리도 없었다. ‘혹 내 지적이 기분 나빴습니까.’ ‘천만에요. 공작전하.’ 그녀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지만 낮은 지위 때문인지 사소한 격식이나 몸가짐에 흠이 잡히는 걸 스스로도 콤플렉스로 여기는 게 눈에 보였었다. 블리어로서는 상당히 그런 사소한 시간들이 불편하고 거리감 있게만 느껴졌었다. 제 지적에 그렇게 반응할 필요는 없을 터인데도 저가 너무 깐깐하고 예민하게 굴었던 것인지에 대해 늘 고심해야만 했다. 허나 밖에서 흠이 잡히는 것보단 나았다. 자신은 알려주려 했던 것뿐이고, 그런 점은 차차 배워나가면 되는 것일 텐데도 여인은 항상 자신의 무지를 왜인지 부끄럽게 여겼다. 고위귀족과 하위귀족의 채울 수 없는 간극인건가 싶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마냥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이라지만. “그댄 이런 점이 좋습니다.” “무?” 렐리아는 갑작스런 공작의 혼잣말에 한입 크게 썬 스테이크를 입안에 넣고 댕그랗게 눈을 떴다. 자신을 말하는 거냐는 눈빛이었다. “아닙니다.” 먹던 거나 마저 먹으라고 블리어는 그녀를 내버려두었다. 여전히 배울 것이 태산이기는 하나 이런 식으로 점차 서로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시간이 편안하기만 했다. 그런 점이 좋다는 거였다. 물론 그의 예리한 지적은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포크는 왼손과 오른손을 번갈아가며 사용해도 됩니다만, 나이프는 반드시 오른손에 쥐고 사용하십시오. 그리고 고기는 한꺼번에 다 썰지 말고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가면서 먹는 것이 옳은 방법입니다. 그런 식으로 다 헤쳐 놓으면 보기에도 좋지 않으니 말입니다.” “응응.” “식사하는 동안에는 왼쪽 팔꿈치를 식탁에 기대어서는 안 됩니다.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습니까. 반듯하게 허리를 펴도록 노력하십시오.” “응응 그래.” “뭐합니까.” 갑자기 몸을 일으킨 여인의 행동에 블리어는 어딜 나가느냐는 눈빛으로 그녈 쳐다보았다. 그것도 포크와 나이프를 올려둔 접시를 든 채 어딜 가려나 싶었다. 허나 렐리아는 문 쪽으로 가지 않고 길게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블리어를 향해 다가왔다. 그러곤 그의 자리에서 바로 꺾인 왼쪽 빈 좌석에 앉아버렸다. “…왜 굳이 여기에 앉는 겁니까.” “떨어져있으면 대화하기 불편하잖아. 두 명이서 먹는데 긴 식탁은 비효율적이지 않아?” “두 명이서 식사를 할 때에는 원래 양쪽에서 마주보고 먹는 것이 원칙입니,” “공작, 이것 좀 먹어봐.” 렐리아는 그의 말을 끊고서 바로 소고기 조각을 찍은 포크를 내밀었다. 블리어는 밥상머리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깐깐한 할아버지처럼 엄한 눈을 했으나 결국 입술에 닿은 고기에 무시 못 하고 마지못해 입을 벌려주었다. 소리 없이 씹어 넘긴 블리어는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원래 이러한 행동도 식사예절에 어긋나는 행동이나 애인사이이니 너그러이 넘어가겠,” “자~ 이것도 먹어봐.” 향긋한 식감을 더하기 위한 버섯도 준비되어있다며 렐리아는 바로 포크를 내밀었다. 블리어는 이러한 여인의 행동에 묵묵하게도 입을 벌려 받아먹어주었다. 그리고 다시 입안의 음식물을 삼키면 지적하기위해 입을 열었으나 렐리아는 그때마다 포크로 그 입을 봉쇄시켰다. “나이프는 사용 후 칼날이 자기 방향으로 놓는,” “와~ 이거 고기 육즙이. 공작 먹어봐.” 입 닥치라고 자꾸만 먹여주는 렐리아의 행동을 블리어의 냉철한 두뇌는 간파하지 못했다. 웃으며 다가올 때부터 뭔가 꿍꿍이가 있음을 알아차려야했으나 블리어는 완벽하게 그녀의 다정한 태도에 휘말려있었다. 나쁘지는 않다고 여겨 하나 둘 받아주다 보니 어느새 지적할 거리도 잊고 있었다. “맛 어때?” “저택 요리사의 솜씨는 어디 내놓아도 좋을 만큼 맛이 일품입니다. 이거 하나만큼은 인정합니다.” “공작은 입맛 까다로운 편이랬지? 공작입맛에 맞춰서 삼시세끼 만들다보면 요리실력이 안 늘 레도 안 늘 수가 없겠네.” “그렇게까지 까다롭지는, 흐음.” “공작 양심은 있나보네.” 렐리아는 킥킥 웃으며 제 거추장스런 머리칼을 어깨 너머로 쓸어 넘겼다. 식사 중에 머리를 만지거나 큰 소리로 웃지 않아야한다는 지적도 어느새 그의 입에선 흘러나오지 않았다. 본래의 목적도 잊고 두 사람은 평소처럼 여유 넘치는 시시껄렁한 대화를 이어나가며 식사를 했다. 아까보단 훨씬 오붓하고 즐거운 자리였다. “그럼 잘 먹었습니다~” 배부르고도 편안한 식사를 끝낸 렐리아는 이만 가보겠다며 유유히 식당을 벗어났다. 그녀가 빠져나간 후에도 블리어는 뭐가 이상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 그날 밤 렐리아는 완벽하게 샤워를 마치고선 거울 앞에 섰다. 하의만 벗으면 되니 비교적 가벼운 차림을 하고서 목 칼라에 목소리 변조기를 장착했다. 허전한 목덜미에 뭔가 이상하다 싶을 때 렐리아는 샤워를 하느라 잠시 빼놓은 크리스탈 목걸이를 발견했다. 역시 하고 가지 않는 게 낫겠지 싶었다. 혹여 라도 하는 중에 공작이 저를 호출하기라도 한다면 뭔가 기분이 이상할 것 같다. 모텔에서 남자랑 하고 있는데 엄마 전화 온 느낌이랄까. 렐리아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서랍 위에 올려놓고서 이번에는 금반지도 같이 빼버렸다. 그러곤 낮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도수 높은 술을 챙겨들었다. ‘오늘밤만 지나면 이제 공작 하나 남는 거네.’ 목적을 이루겠다는 생각하나로 좋아하지도 않은 놈과 몸을 섞는 게 창부나 다름없다지만 어차피 제 몸 아니기에 정신적인 타격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술도 챙겼으니 몽롱한 사이에 일이 일사천리에 끝날 테다. 이젠 작은 양심이나 자존심, 심지어 남자에게 가랑이를 벌리러간다는 수치심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게임세계에서 지금당장 벗어날 수만 있다면야, 걱정하실 부모님을 지금당장 만날 수만 있다면야 그걸로 되었다. ‘이 속도면 이삼일 안에는 돌아가겠다.’ 계획보다 일찍 끝날 것 같았다. 렐리아는 그 생각에 새삼 우중충한 기분도 훨 날아갈 만큼 희망적으로 변했다. 빵빵한 검은 패딩을 걸치고서 렐리아는 불 꺼진 방을 나섰다. 주인 없는 방안은 금세 차가운 한기로만 가득 채워졌다. 텅 빈 공허한 몸뚱이처럼. * 국왕 라델리우스는 이미 술에 취한 채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오늘밤도 그 존재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애써 달래려 독한 술을 들이켰다. 허나 어김없이 창문이 크게 덜컹거리며 이윽고 벌컥 열어젖혀진 창문 새로 돌풍이 불어 닥쳐왔다. 달이 뜨지 않아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찢고 들어선 자는 예상대로 ‘그 존재’였다. “미리 술을 마시고 있었나.” 오늘따라 더욱더 시커멓고 거대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 여실히 그 위용을 드러냈다. 라델리우스는 소파 끄트머리를 자처하고 앉아 제게로 점점 다가오는 공포스런 존재를 올려다보았다. 짙은 어둠이 제 발끝부터 시작해 머리까지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기분이었다. “왕이여, 서둘러 일을 끝내지.” “잠깐…초월적인 존재여. 짐은 아직 준비가…….” “그건 내가 해야될 대사 같군.” 클클클 하고 낮게 깔린 허스키한 음성이 호화스런 방안을 울렸다. 라델리우스는 약소국의 공주님처럼 강한 손아귀에 잡혀 힘없이 침대로 끌려가야만 했다. 비틀거리는 성인남자를 무참히 침대 위에 깔아뭉개듯이 눕힌 렐리아는 왕이 도망치지 못하게 한쪽다리로 깔아뭉개고서 앉았다. 마치 자기집 안방에 들어온 것처럼 편안한 모습으로 그녀는 대뜸 들고 온 술병부터 땄다. “…!” 크게 퐁 소리가 나자 라델리우스는 엎드린 상태에서 흠칫 머릴 떨었다. 와인오프너도 없이 맨손, 그것도 두 손가락으로 코르크마개를 따는 그 야생적인 모습과 소름끼치는 힘에 진심으로 두려움만 솟았다. 진정 여성이라는 성을 가진 생물체가 맞는지 의문만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존재에게서 맡아지는 은은한 향기는 생각보다 향기롭다고 라델리우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더 괴기스럽게만 느껴진다지만 역한 땀 냄새보다야 낫다는 생각이 취중에도 문득 들었다. 그동안 옆에선 벌컥벌컥 술을 쏟아 붓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렐리아는 살짝 입술이 드러난 하관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아예 고갤 돌려서 술을 입안에 들이붓고 있었다. 한 병째 다 털어놓고서 그녀는 탄산음료를 단번에 들이킨 식신처럼 더부룩한 뱃속 가스를 연방 토해내었다. 그것마저 목소리변조가 되어 참으로 묵직하게 깔렸다. “준비는 되었다. 왕이여…” 0082 / 0172 ---------------------------------------------- 진심과 가벼움 “…짐은 아직이다……아직이니 제발…아량과 자비를,” 적색금발의 왕은 흐느끼는 것처럼 살짝 늘어지는 말투를 사용했다. 꽐라가 된 상태에서 허둥지둥 댔으나 누가 봐도 침대위에서 자유형을 선보이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 왕을 내려다보며 렐리아는 속전속결로 바지를 벗고 팬티를 벗어던졌다. 침대아래 떨어진 옷가지는 하의뿐이었으나 이윽고 남자의 옷도 툭툭 떨어졌다. 살짝 취기가 오른 렐리아가 찢어발기듯이 그의 상의와 바지를 잡아당겨 벗겨낸 것이다. “나를 덮쳐라…최대한 빨리…조루면 더 좋겠다.” 실크로 된 얇은 침의한 장과 팬티만을 입은 채로 라델리우스는 살기 위해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에 렐리아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젯밤 스치듯 보았던 장면이 불현듯 떠올랐다. 누가 봐도 거부하지 못해서 반강제로 잠자리를 가지는 것 같던 언니와 정력적으로 허리를 흔들어대던 눈앞의 남자의 모습이 말이다. “못난 놈…” 가만히 있던 언니를 자기 멋대로 수차례 안을 때는 언제고 막상 자기는 합의하에 하기 싫은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못견뎌하고 있었다. 그때의 언니 심정을 지금 왕이 느끼고 있을 거란 생각에 퍽 우스워졌다. 렐리아는 팔을 뻗어 이불 속에 숨은 라델리우스의 발목으로 추정되는 부위를 잡았다. 그에 발작을 일으키는 듯한 옅은 떨림이 전해져왔다. “…오분. 오분이면 되지 않나. 눈 딱 감고하라 해도!” 꺽 하고 올라오는 트림을 누를 생각도 않고 렐리아는 서서히 사내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스르륵 이불이 거둬지며 침의도 따라 말려 올라가 넓은 등판이 훤히 드러났다. 저보다 큰 몸집의 사내일 텐데도 어째 저가 우위에 있으니 이상할 노릇이었다. 지성도 덕성도 무시된 채 오로지 힘에 의해 판가름이 나는 상황은 여자로서 달갑지만은 않았다. “자리에 누워줄 테니까…대충 알아서 해봐라.” “…부디 자비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아닌 것 같다…” “왕이여. 분명히 말하지만…이건 내 의지와는 상관없다! 피해갈 수 없는 숙명…그래 너와 나의 숙명 같은 거다. 애초에 서로 합의 본 내용이지 않나! 이렇게 나오면 계약위반이다!” “하지만…이건 아닌 것 같다…끅. 끅.” 렐리아는 소심하게 고개를 내저으랴, 취기에 올라 딸꾹질을 하랴 바쁜 남자를 바라보았다. 살짝 홍조처럼 붉은 기가 어린 눈가가 그의 착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 같았다. 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할 수는 없었다. 평생 저를 사랑할 일이 없는 놈과 어떻게든 사랑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빠른 돌파구를 찾았으나 단 오 분을 못 참고 저리 빼고 있었다. 렐리아로서도 인내에 한계가 왔다. 남자가 한입으로 두말하기가 어딨냐고 멱살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허나 멱살 대신 라델리우스의 사각팬티를 붙잡았다. “당장 벗어라…!” “역시 이건 아니다…아니야…” “누군 지금 노팬티인데…꺼억, 모옷난 놈. 지 팬티만 사수하기냐! 질질 끌어서 뭐가 나오겠냐!” “차라리…왕궁의 모든 금은보화를…국고를 통째로 주겠다…” “사랑을 내놓으라고! 거참…말귀를 못 알아듣네!” 살짝 몽롱한 상태에서 렐리아는 목청을 높였다. 동시에 쥐고 있던 팬티를 굵은 허벅지 아래로 끌어내리려던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렐리아는 눈앞이 핑 돎을 느꼈다. 상당히 부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생각과는 달리 몸은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져만 갔다. 늪에 빨려 들어가듯 무서우리만큼 빠른 속도였다. 거멓게 물드는 시야 속에 적빛이 감도는 금발사내가 취기 오른 낯으로 놀란 눈을 하는 게 보였다. 렐리아는 얼마못가 무거운 머리가 앞으로 픽 고꾸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탄탄하게 지탱해줄 것 같던 남자의 몸도 아래로 허물어졌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안은 순식간에 컴컴한 어둠이 잠식했다. “…으음.” 렐리아는 잠결에 잠긴 채 작게 웅얼거렸다. 어느 정도 정신이 들었을 때 든 생각은 불편하다는 거였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뻗은 모양인데 침대치고는 굴곡이 있으며 딱딱하고 열기가 느껴졌다. 조금 무르면서도 속이 단단한 것이 사람 몸인 것 같았다. 얼굴을 묻고 있던 가슴팍을 짚고 스르륵 고갤 쳐든 순간 매끄러운 남성의 턱이 보였다. 대낮인지 환한 햇살이 사내의 얼굴위에 내려앉아있었다. 뙤약볕 아래의 금빛모래처럼 자르르한 빛이 흐르는 눈썹이 길게 드리워져있었다. 깊이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지금 나가야겠네.’ 다행히 패딩모자를 건드린 흔적이 없어 제 얼굴을 보지 않은 것 같으나 아무래도 깔끔한 게 최고였다. 왕이 깨어나면 어색하고 곤란해질 테다. 원나잇은 원나잇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렐리아는 남자위에 엎어져있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려했다. 허벅지 깊숙한 안쪽에 닿아있는 무언가를 눈치 채고서 렐리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슥 이불을 들췄다. 하마터면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뻔했다. 개불같이 생긴 것이 반쯤 끌어내린 남자팬티에서 빼꼼히 튀어나와있었는데 제 그곳에 붙어 있다가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필름이 나간 것처럼 싹둑 잘려진 어젯밤 기억으로 인해 이것이 제 안으로 들어왔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론 관계를 했다고 판단되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애초에 한 침대위에서 성기를 드러내놓고 같이 잤는데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리 없었다. 이것으로 서로 사랑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근데 아침부터 기분 잡치네.’ 밝은 곳에서 개불을 봤다. 렐리아는 못 볼꼴을 본 사람처럼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서 주섬주섬 남자의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져있던 팬티와 바지를 주워들어 입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제…왜 뻗었던 거지?’ 독한 술을 병째로 원샷해서 한꺼번에 취기가 몰려온 건가 싶었다. 물론 독도 해독하는데 웬만한 술은 그냥 음료 넘기듯 넘기는 자신이었기에 의문스럽기만 했다. 알딸딸하기는 해도 이렇게 픽 쓰러진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뭐 됐겠지. 이걸로 드디어 하나 남았다.’ 렐리아는 급 기분이 좋아졌다. 여전히 깊은 잠에 취해있는 왕을 내버려두고 그녀는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 그 시각 렐리아의 방안에 나란히 서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서 쩔쩔매는 시녀였고, 다른 하나는 저기압이 극에 달하고 있는 이 저택의 주인이었다. 호통을 치지는 않았으나 매정하리만큼 냉한 말투로 몰아붙이기를 오 분째였다. “전속시녀가 되어서 모시는 주인이 어디 갔는지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송구합니다, 공작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입매를 울먹이며 소피아는 허리를 더더욱 굽혔다. 이러다 머리가 바닥에 붙지 않을까 싶을 만큼 조아리고 또 조아렸다. 그러나 블리어는 저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쉬이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중죄인을 신문하는 것처럼 그의 질문은 계속해서 안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어젯밤 어딜 나간다는 소린 없었습니까.” “…어,없었습니다. 전혀요.” “이상증세라거나.” “…저,저번에 보고 드렸던 내용이 전부입니다…평소 같으셨습니다.” 혹여 라도 어떤 벌을 내리실까 소피아는 긴장감에 잔뜩 목이 타들어갔다. 허나 싸늘하고 무표정한 낯과는 달리 블리어는 무자비한 성격은 못되었다. 국법에 관련된 일이었다면 예외겠지만 결코 이런 사적인 일에 가혹한 벌을 주거나 하진 않았다. 십대의 앳된 티가 나는 시녀에게 더 따져봐야 무엇하나 싶어서 그는 직접 방안을 뒤지기에 이르렀다. 점심을 같이 하자고 찾아온 것인데 정작 방주인은 외출 중이었다. 그것도 어젯밤에 남몰래 나가 한낮인 아직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전례 없던 외박에 블리어는 기분이 묘하기만 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가 또 어딜 갔나싶어 명치가 콱콱 쑤시면서도 왜 안 들어오나 싶어 불안했다. 묶여있던 실이 풀린 것처럼 허탈해서 그 실마리를 다시 찾아와 묶고 싶은 강박관념도 들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싶어 블리어는 손목에 채워진 실처럼 얇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저가 찾는다는 걸 알고 다시 신호를 보내지 않을까 싶었으나 스치듯 눈에 들어온 서랍 위에는 주인 잃은 목걸이만 홀로 반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투명하고 작은 크리스탈 속에서 순금결정이 애처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미약한 진동을 꺼뜨리듯이 블리어는 손안에 목걸이를 넣고서 아주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것마저 놓고 나가다니 무슨 생각인건지 진정 알 수가 없었다. 키우던 개는 사라지고 덩그러니 놓인 개목걸이만 발견한 기분이었다. ‘아예 나갔을 리는….’ 블리어는 서랍장과 옷장을 열어보았다. 즐겨 입던 옷, 생필품은 그대로였으나 그 여자라면 짐은 챙기지 않고 몸뚱이만 나갈 확률이 컸다. 정말로 저택에서 나간 건가 싶으니 얹힌 것처럼 답답하던 속이 싹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한차례 허무감이 몰아닥치고 빈속이 싸하기만 했다. 블리어는 그녀와 자신을 잇고 있던 줄이 이렇게나 얇고 허술했나 하는 의문이 가장먼저 들었다. 어쩌면 이제야 깨달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여자가 기분 내킬 때 나가면 그걸로 끝나고 말 사이라는 걸 말이다. 어째서 오 개월 동안 그녀가 이 저택에 얌전히 붙어있을 거라 여겼는지 모르겠다. 알면서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여자였다. 애인이라는 형식적인 관계도 헤어졌다고 선언하면 끝날 사이인 것이다. 이런 목걸이 하나로 구속하기엔 어림도 없다. 기껏 생각해서 사준 것도 이렇게 보란 듯이 놓고 갔다. 단발성에 그칠 사이라는 것을 정말 이제 와서 깨달은 그였다. 허나 아직 그에겐 여자가 돌아올 거라는 희미한 믿음이 존재했다. 뭘 믿고 그러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도 마땅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나 호의를 베풀어주는 곳이 또 어딨다고 제 발로 나간 건지 갑갑하기만 할 뿐이었다. 블리어는 오늘 안에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면 외박에 대해 묻지 않고 넘어가줄 의향이 있었다. 없던 너그러움까지 생길 지경이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그는 상당히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그 자신은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소피아는 알아차렸다. 냉하게 느껴질 만큼 지독히도 낮게 가라앉은 녹안 위로 언뜻 날카로운 예기가 흘렀다. 이성적인 건지 예민한 건지 알다가도 모를 정도였다. 미련을 끊듯 마지못해 그녀의 방을 나서는 동안 블리어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단 것이 시급했다. 소피아는 한동안은 그 누구도 공작님을 건드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저 저가 모시는 은발여인이 어서 빨리 돌아와 줬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0083 / 0172 ---------------------------------------------- 진심과 가벼움 블리어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잘 갈아놓은 칼의 기세 같을 때 공작저로 들어서는 마차가 있었다. 다름 아닌 알락디사 후작가문의 마차였다. 슈로니가 마차에서 내리자 풍성한 레이스 속치마 위에 덧댄 여섯 겹의 드레스단이 출렁였다. 항상 즐겨 입는 드레스 스타일이 이런 화려한 맵시에 귀여움이 공존하는 스타일이었다. 오늘은 친구라는 명목상 렐리아를 만나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화장은 진해져있었다. 슈로니는 마차에서 내려 공작가 하인을 대동한 채 웅장한 대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무작정 집무실로 안내해달라는 후작영애를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하인은 울며 겨자먹기로 움직여야만 했다. 이윽고 도달한 집무실 앞에서 하인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서있는 두 명의 기사에게 알락디사 영애가 찾아왔음을 알렸다. 그 소식이 집무실 안에 자리해있는 공작에게 전달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여보내십시오.” 무심한 목소리이긴 해도 예상외로 허락의 말이 떨어졌다. 슈로니는 꼿꼿하게 쳐들고 있던 고개를 살짝 다소곳하게 내리며 조신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흐드러진 벚꽃처럼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이 뺨에도 내려앉아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동그란 초콜릿색 눈동자 안에 얼마안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가 들어섰다. 유난히 새카만 머리칼은 그의 저조한 기분을 나타내듯 착 가라앉아있었다. 날렵한 어깨에서 손목까지 깔끔하게 떨어지는 잿빛정장에 검은색과 청회색의 무늬가 어우러진 넥타이를 매어 깔끔한 맵시를 자랑했다. 늘 반듯한 느낌을 주는 모습으로 남자는 한 점의 그림처럼 미동조차 않고 앉아있었다.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저번에…제가 쓰러졌을 때 급히 조치를 취해주셨다고 들었어요. 공작님께 감사하단 말씀을 꼬옥 드리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가,감사해요.” 슈로니는 머리를 꾸벅 숙이면서 어수룩하게 인사를 해보였다. 그에 구불거리는 분홍머리칼이 그녀의 얼굴위로 흘려 내려왔다. 영락없이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나 보일 듯한 덤벙대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저 괜찮아요. 보시다시피요. 이렇게 씩씩하게 걸어오기까지 한 걸요.” 헤헤하고 깜찍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슈로니는 귓등으로 머리칼을 수줍게 쓸어 넘겼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이 창피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영애처럼만 보였다. 그의 책상 앞에 서서 슈로니는 소심하게 작은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입에서 ‘그동안 걱정했습니다’, ‘괜찮다니 다행입니다’와 같은 다정한 말이 흘러나오기를 기대하며 말이다. “그대는 예의를 모르는 겁니까.” 그때 정적을 깨고 무거운 저음이 들려왔다. 슈로니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표정이 당혹스럽게 굳었다.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에 블리어는 친절하게도 긴 말을 덧붙여주었다. 당혹에서 곤혹으로 슈로니의 표정이 변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그대를 들여보낸 까닭이 무어라 생각됩니까. 무턱대고 찾아왔으나 그렇다고 하여 후작가문의 여식을 들여보내지 않고 내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무안하지 않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는 말입니다. 한데 영애는 기본적인 예법조차 무시하고 이리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것입니까. 알락디사 후작이 딸 교육을 어떻게 시켰는지 알만합니다. 그 나이가 돼서도 예법에 무지하다니 참으로 오냐오냐 키워졌을 터, 내 말이 틀립니까. 그대가 이리 생각없이 날뛰는 것에도 책임이 뒤따른다는 것을 아십시오.” 일정한 박자, 안정적인 속도, 무감정한 말투, 거기에 흐트러짐 없는 태도로 블리어는 쏘아붙였다. 이유모를 저기압에 오후 내내 시달려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진 그였다. 예민함이 최고조에 이른 상태에서 그를 건드리니 이 사달이 날 수 밖에. 그를 찾아온 불청객은 만만한 희생양만 될 뿐이었다. 운 한번 더럽게 없었다. 뵈는 게 없는 사람처럼 블리어는 계속해서 가냘픈 여자하나를 독하게 몰아붙였다. “알락디사 후작가문과 더불어 그대의 친부 얼굴에 먹칠하는 일과 진배없습니다.” “저…저 그게…” “지금 그대가 말을 더듬을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알락디사 영애.” “…공작님. 저,저는 단지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감사인사, 뭐 수단은 좋습니다. 허나 내가 그런 말에 호락호락 넘어갈 상대로 보입니까.” 봐주는 것 없이 매몰찬 말은 깔끔할 정도였다. 곧이어 슈로니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아니에요, 아닌데…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슈로니는 앙증맞은 두 손을 들어 눈가를 닦기 시작했다. “죄,죄송해요…공작니임….” 발개진 두 눈에서 후두둑 투명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큰 눈망울 탓에 상처받은 어린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어떤 사내든 마음이 풀리다 못해 흔들릴 지경일 텐데 블리어는 역시나 뵈는 게 없었다. “울라고 한 말이 아닙니다. 영애.” “제,제가 실례를 범한 것 같아요…흐윽.” “영애는 실례라는 말의 뜻 자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알면 그러겠습니다.” “…흐으윽, 죄송해요. 제가 싫으시다면 지금 돌아갈게요.” “지금 그 상태로 뛰쳐나간다면 내 평판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봤습니까. 또 앞뒤 생각 못하고 굴려하지 않습니까. 방문허가도 받지 않고 멋대로 찾아와서는 타인에게 민폐만 끼치고 가는 겁니까. 생각이 그리 짧아서야…쯧. 그대가 마냥 어릴 때는 단순히 철이 없어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어째 커서도 변하지 않습니까.” 상대를 가리지 않는 독설은 차갑다 못해 혹독할 지경이었다.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던 눈물은 어느새 슈로니의 발치에 수두룩했다. 슈로니는 눈물을 훔치며 그대로 집무실 밖을 벗어났다. 뛰쳐나가는 영애의 뒷모습에 기사들이 어안이 벙벙할 때 또 한번 방문객이 찾아들었다. 블리어는 냉하게 속을 가라앉히며 다시 서류처리에 집중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달칵 하고 가볍게 문이 열리는 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허락도 없이 누군가 싶어 그가 차갑게 접은 눈매를 슥 치올릴 때 익숙하리만치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쟤 왜 울어?” “그대는 대체…,” 그토록 찾던 여자였다. 블리어는 이제껏 망부석처럼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 무색할 만큼 화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갔다 이제 들어옵니까.” “나 찾았어? 목걸이 놓고 가서 몰랐는데.” 렐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자 블리어는 슬며시 미간을 접었다. 그러나 아까보다는 많이 풀린 낯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기분이 바닥을 쳤다는 걸 알리 만무한 렐리아는 제 앞에 다가온 그는 무시한 채 문만 힐끔댔다. “그보다 걔 왜 그런 건데. 오다가 마주쳤는데 막 폭풍눈물 쏟던데.” “별거 아닙니다. 예법에 어긋난 행위에 대해 몇 마디 지적했더니 울지 뭡니까.” “어떻게 말했는데?” “철이 없다고 했습니다. 축약해 말하자면 가문망신 시키지 말고 채신머리없이 구는 걸 자제하라고 했습니다. 어디까지나 신사적으로 울지 말라 달래기도 했습니다.” “아 그래? 좋게좋게 말해줬네. 나한텐 그렇게 가차없어놓고선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가차 없었던 공작에게 이제껏 능글맞게 들러붙어온 렐리아는 살아있는 인간승리였다. 달리 말하자면 집요함이 불러온 폐해라 할 수도 있겠다. “나한텐 막 죽으라고 하고~ 또 뭐라고 했지? 목 자른다고 했던가?” 그 당시 그에게도 그리 굴만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지만 말이다. 렐리아로선 지금에 와서는 다 이해하고 애초에 이미 지나간 일로 치부했다. 장난삼아 꺼낸 얘기였으나 블리어는 괜스레 마음이 좋지 못했다. 살벌하고도 날카로웠던 상태에서 내뱉은 말을 아직까지도 그녀가 마음에 두고 있는 건가 싶어서 더더욱 그랬다. 물론 뒤끝 없는데다 잘 까먹는 렐리아는 기억 못한다고 해도 욕한 장본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자세히.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은데다 그녀 같은 천박한 부류를 혐오한다느니, 그 목을 효수하겠다느니 심지어 벌레만도 못한 목숨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블리어가 잠시 말이 없어지자 그제야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이 슈로니에 대해 깊은 상념에 잠긴 것 같았다. 자기가 생각해도 울려서 미안한가보다. “같은 여자보다도 쌍년 알아보는 눈이 좋아. 공작은.” 렐리아는 그가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등을 토닥거려주었다. 표리부동한 슈로니가 겉으로 흘리는 눈물은 결코 믿을 게 못되는 것이다. 보나마나 저를 잡아달라는 뜻에서 그리 서글프게 울며 떠나간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그를 달래주던 중 넓은 등판에 머물렀던 그녀의 손이 슬그머니 남자의 허리에 머물렀다. 뱀처럼 가느다란 두 팔로 휘어 감고서 렐리아는 그의 품에 쏘옥 안겼다. 키 차이로 인해 누가 봐도 포옹이었고 그의 시점에서 봐도 역시나 포옹이 맞았다. 블리어는 제 상복부에 맞닿아있는 여자의 부드러운 가슴과 등허리에 머물러있는 작은 두 손을 알아차렸다. 평소보다 더욱 그 온기나 촉감이 또렷하게 와닿았다. 그리고 이것이 싫지 않은 시점에서부터 블리어는 그녀에게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왜 이러는 겁니까.” “기분 좋아서.” 빙그레 입술을 휘며 렐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묻고 있던 얼굴을 그의 목가로 끌어올렸다. 상쾌하고도 봄꽃처럼 향긋한 체향이 블리어의 코끝에 머물렀다. 그는 그 향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씻었습니까?” “방금 방에서 씻고 왔어. 내 머리냄새 맡아봐. 향긋하지?” 명백히 원하는 게 있는 눈치로 그녀는 나름대로 유혹해보였다. 슬쩍 그에게 저가 꼴리지 않냐고 어필함과 동시에 관계를 요구하고 있었으나 블리어는 달리 보았다. 제게 지은 죄가 있어 이렇게 애교 있게 군다고 여겼다. “이리 굴면 내가 순순히 넘어갈 거라 봅니까.” “그럼 뭘 해주면 넘어가려남?” “점심이 아직이라면 식사 어떻습니까.” “공작도 점심 아직이야? 나돈데.” 렐리아는 슬그머니 그에게 떨어져나갔다. 갑자기 밥 얘기가 나오니까 확 깬다. 무엇보다 기본욕구에 충실한 인간 아니랄까봐 배가 고파서 뭘 할 힘도 없었다. 일단은 후퇴였다. 이제 고작 해봐야 공작 하나 남았으나 느긋하게 해도 되겠지 싶었다. 어차피 넉넉하게 일주일안에는 그에게서 동의를 얻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도 아주 할 마음이 없지는 않다고 말하기도 했었고 말이다. “얼른 내려가자. 나 배고파죽겠다.” “잠시만 기다려보십시오. 하던 업무를 정리해놓겠습니다.” “근데 공작. 혹시 나랑 점심 같이 먹으려고 기다린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는 업무 때문에 바빠서 못 먹었다고 했으나 그런 것치곤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양이 평소보다 적었다. 렐리아는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던 입술을 싱겁게 일자로 끌어내렸다. 허기로 인해 그를 놀릴 힘도 없었다. “공작 멀었어?” 혼자 문 앞까지 가서는 렐리아가 얼른 오라고 보채자 블리어는 서류철을 가지런히 한쪽으로 치워놓고서 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에 렐리아가 문고리를 쥐고 먼저 나가려할 때였다. 뒤에서 뻗어져온 굵직한 손가락에 그녀의 손가락이 얼기설기 얽혔다. 알아차리지 못하게 다가와 어느새 단단히 붙잡는 손길에 렐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렐리아는 저의 코를 덮치는 서느런 향기에 숨을 멈췄다. 딱딱한 남자의 품이 느껴졌다. 갑작스런 포옹에 당혹스러웠으나 뒤늦게 목덜이에서 느껴지는 미지근한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또 풀지 마십시오.” 저번보다는 한결 자연스러워진 손길로 그는 제 목에 손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다시 주인을 찾은 크리스탈 목걸이가 절단면 위로 투명한 광채를 드러냈다. 렐리아는 목 아래에 걸린 목걸이를 내려 보다가 봄비처럼 누긋하게 귓가를 두드리는 목소리에 고갤 들었다. “걱정하지 않게 앞으로는 나갈 때도 꼭 하고 나가십시오.” “샤워할 때는?” “샤워할 때도 하십시오. 비누 밟고 넘어지면 내가 구하러가겠습니다.” 썩 진지한 목소리였다. 0084 / 0172 ---------------------------------------------- 진심과 가벼움 렐리아는 다음날 오랜만에 올르아 공작저를 찾았다. 응접실에서 저를 상냥한 미소로 맞아주는 다이아나는 여전히 아름답고 단아한 기품이 흘렀다. 세월이 흐르면 분위기가 더해져 더욱 아름다워질 그런 고아한 미인이었다. “미안해요 언니. 요즘 연락 뜸해서.” “아니야. 나도 최근 들어 아파서 연락할 상황이 못 됐어.” “아팠어요…? 어디가?!”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야. 가벼운 감기처럼 몸에 힘이 없는 정도였으니까.” 다이아나는 병에 걸린 건 아니고 허약해진 정도라고 말했지만 렐리아는 달랐다. 옅은 화장 뒤에 약간 낯빛이 창백해 보이기 시작했고 못 본새에 낭창한 허리가 더 가늘어진 것만 같았다. 어쩌면 큰 병이 있는데 숨기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과 이틀 전 일이 렐리아의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어쩐지 창문을 통해 얼핏 봤을 때 인형처럼 가만히 있는 언니가 너무 기운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런 언니를 붙잡고 왕이 반강제로 으쌰으쌰한 기억이 나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거시기 달린 놈들이란…지 욕구 풀기 급급한 게 사랑인가? 사랑하면 가장먼저 알아차려줘야지, 암. 세상남자들이 다 공작 같으면 얼마나 좋아.’ 아직까지도 어딘가 치우친 생각을 버리지 못했으나 공작은 예외로 두는 그녀였다. 이제껏 옆에서 봐온 공작은 상당히 괜찮은 사내였고 그렇기에 여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리라는 신뢰가 깔려있었다. 애초에 돋보기 저리가라 할 만큼 세심해서 낯빛이 조금만 달라져도 바로 여자마음을 알아차려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중 렐리아는 맞은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움찔했다. “공작… 라콘드 공작전하를 사랑하니?” 하필 공작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이런 질문이 나와서 더 그랬다. 독심술도 할 줄 아는 건가 싶었으나 잠시 뜸을 들인 걸 보면 언니가 생각해도 뜬금없긴 한가보다. 동시에 아직까지도 이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던 건가 싶어서 렐리아는 황급히 입을 열어야만 했다. “언니, 아직도 저 못 믿으세요? 저번에도 말했지만 진짜로 형식적인 관계예요. 사랑하는 거 절대 아니고 걍 애인인 척하는 거예요.” “사실대로 말해줬으면 해.” 아까까지만 해도 우아한 곡선을 그리던 붉은 입술이 일자로 닫혔다. 상냥하던 얼굴의 언니가 공작이라는 주제를 꺼내자마자 분위기가 급변한 게 그제야 보였다. 약간 화가 난 듯이 무서운 표정이라 렐리아는 배신한 입장에서 조금 찔려버렸다. 역시 앞에선 괜찮다고 말해도 뒤에선 아니었던 건가 싶었다. 다이아나는 그걸 눈치 채고서 표정에 어린 단호함을 지워냈다. 그러곤 다시 부드럽게 운을 뗐다. “너희 두 사람 사이를 확실하게 알고 싶어서 하는 말이야. 저번에도 말했지만 렐리아 네가 내 눈치를 볼 필요 없어. 단지 정말 사랑하는 사이인지, 네 마음은 어떤지 알고 싶을 뿐이야.” “저 정말 공작님과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에요.” “렐리아.”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해요. 이런 식으로 빙빙 돌려가면서 얘기하는 거 완전 언니답지 않은데… 아무튼 진짜 아무사이 아니니까 오해마세요.” 렐리아는 꿋꿋하게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털어놓았다. 사실이기도 했고 뭐라고 더 둘러댈 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언니의 안색이 좋지 못하니 마음한편으론 찝찝하기만 할 뿐이었다. ‘언니는 대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지..’ 누구보다 자신을 이해해주었던 언니였기에 오늘따라 그 의중을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 ‘뭔가 기운 빠지네.’ 기분전환을 하려고 찾아간 것인데 결국 어색한 분위기속에서 언니와 대화를 나누다 돌아왔다.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방안에 앉아 있었다. 먹구름이 진탕 낀 하늘은 칙칙한 게 또 비가 내리려나보다. 초봄에 가까워질수록 어째 축축하게 비만 내려대는 것 같다. 멀뚱히 창밖만 바라볼 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저 들어갈게요’하고 수줍은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걸보니 소피아는 아니었다. 누구지 싶어 가만히 문만 응시하고 있는데 별안간 예고 없이 문이 열렸다. 문 너머로 드러난 것은 시커먼 남자였다. 흑발과 검은 정장의 조합이라니 참 단색을 좋아하는 인간이구나 싶었다. 그래도 자칫 칙칙할 뻔한 무채색 속에 청회색의 포인트가 들어간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꼬박꼬박 잘 매고 다니니 선물한 입장에선 흐뭇할 수밖에 없다. “공작. 무슨 볼일이 있어서 다 찾아왔대? 혹시 나 보러왔남?” “이주 후에 연회 일정이 잡혔습니다.” “드디어 갈고닦아왔던 기품을 뽐낼 때가 왔구나!” 천하제일 무술대회 소식을 접한 무인처럼 렐리아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방정맞기 그지없는 행동에도 블리어는 적응한 건지 너그러이 눈을 감아주었다. “내일 의상점에서 사람이 오기로 했으니 그리 알고 계십시오.” “옷장 안에 드레스 넘치던데 또 사?” “애인으로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습니까. 많은 시선들이 몰릴 겁니다. 개중엔 그대의 사소한 흠 하나라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는 자도 있을 겁니다. 그대의 품위는 나의 위신과도 직결된 문제이니 입는 것, 몸에 거는 것 하나라도 그만큼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여간 할 짓 없는 인간들이 널렸어. 그렇게 남한테 관심이 많아서야.” “시녀들에게는 치장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일러놓겠습니다.” “그래. 공작 말대로 했다가 손해 본 적은 없으니까.” ‘근데 이주 후면 돌아가지 않나.’ 렐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리다 문득 든 생각에 떫은 걸 삼킨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낯빛은 달라지지 않았을 텐데 그 미세한 표정변화에 블리어의 눈길에 깊은 관심이 깃들었다. “왜 그럽니까.” “뭐가? 그보다 공작~ 솔직하게 말해봐.” 상황을 유연히 넘어간 렐리아는 능글맞게 입꼬리를 휘고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보러 온 거지? 이 얘기 밤에 해도 되는데 굳이 찾아와서 하는 거 보면 수상한데~?” “괜히 이상한 생각 마십시오.” “응~? 무슨 생각?”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싱글벙글거렸으나 되레 그 모습은 꿍꿍이가 있어 보일 뿐이었다. 렐리아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쥐었다. “이상한 생각말고 우리 이상한 짓 하자.” 순식간에 확 끌어당기는 힘에 블리어는 장신이 무색하게도 휘청거려야만 했다. 뭐 이리 무식한 힘이 다 있나 싶었다. 달구지를 끄는 소처럼 렐리아는 저보다 머리하나 더 큰 사내를 이끈 채 성큼성큼 침대로 돌진했다. 눈 깜짝할 새에 블리어를 침대위에 쓰러뜨리고는 렐리아는 그가 못 일어나게 그의 허리위에 올라탔다. 부뚜막위에 올라간 고양이처럼 앙큼하기 그지없었다. “하자. 하자. 응?” 렐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연방 얼굴을 비벼대며 해달라고 졸랐다. 통나무처럼 굵직한 사내 몸통을 꼭 끌어안은 폼이 영락없는 개다래나무에 찰싹 달라붙은 고양이였다. “하자, 공작~” 백에 백은 넘어갈 육탄공격이었으나 블리어는 말이 없었다. 한 톤 올라간 부자연스러운 목소리에, 교태랍시고 제 품에 얼굴을 비비적대며 아양을 떨고 있으니 곤혹스럽기 그지없었다. 뒤늦게 이성을 찾은 건지 그의 굳은 입매사이로 지독히도 내리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입니다.” “그래도~ 밝지는 않잖아.” “일이 있습니다. 곧 가봐야 합니다.” “오 분이면 되잖아?” 블리어는 여간 그 유혹을 떨쳐내기가 힘들다 여겼다. 애초에 뭔 말로 거절하려해도 여자는 악착같이 매달릴 기세였다. 약간 서느렇게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가 돌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저절로 떨어져나간 렐리아가 옆자리로 풀썩 소리 내어 눕기 무섭게 커다랗고 메마른 손이 뻗어져왔다. “오 분으로 되겠습니까.” 그녀의 머리 옆을 지그시 누르고서 블리어는 제 아래에 누워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아까의 그 기세는 어디가고 잠시 얌전해졌다. 렐리아는 눈알을 데굴 굴려 옆에 놓인 손을 바라보았다. 침대시트를 얼마나 누르고 있는지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돋아나있었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천장을 가리고 있는 남자의 매끄럽고 훤칠한 낯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원하게 뻗은 콧날을 따라 올라가니 내리깔아진 상태로 굳어진 눈매가 들어왔다. 잠시간 알 수 없는 눈빛의 교류가 이어졌다. 녹진하게 풀린 진녹안이 그답지 않게 끈끈하기까지 했다. “렐리아 나왔어. 들어가도 되지?” 그때였다. 문밖에서 익숙한 중저음이 들려오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냅다 팔을 들어 블리어를 옆으로 퍽 밀쳤다. 얼마나 세게 밀쳤는지 그는 아예 침대 옆으로 굴러 떨어져버렸다. 콰당, 몸을 찧는 소리가 요란한 게 지금쯤 엉덩이를 부여잡고 있을지 모르겠다. 곧이어 문이 열렸다. 렐리아는 어정쩡하게 허공에 팔을 치켜든 상태에서 아럼프를 맞이했다. 왜 그런 자세로 침대에 누워있느냐는 눈빛으로 아럼프가 쳐다보자 그제야 렐리아는 손을 내리고 침대 아래로 서둘러 내려왔다. 다행히 아럼프가 서있는 위치에선 침대 반대편 바닥에 꼴사납게 굴러 떨어진 공작이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으로 마주쳤다면 상당히 공작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테다. ‘근데 나 왜 밀친 거지.’ 렐리아는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히 심장이 벌렁거렸다. 애인사이인데 남부끄러운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눈만 마주치고 있을 뿐이었는데 말이다. “큼, 오늘은 일없나보네?” “금방 돌아가 봐야 돼.” 렐리아는 여상한 척 굴며 아럼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 이상 들어오지 말라고 미리 선을 그어놓는 작업이었다. 아럼프는 제 적발에 어울리는 화사한 붉은 장미로 장식된 꽃다발을 들고 서있었다. 병문안 이후로 매번 꽃을 사다 바치더니 이젠 아예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소피아는 이 겨울에 꽃을 장식할 수 있음에 기뻐했지만 렐리아는 먹지도 못하는 비싸기만 한 꽃이 사치로만 느껴졌다. 차라리 그 돈으로 레스토랑에서 최고급 소고기를 사준다면 기뻐할 테다. “또 꽃이야? 비싸다며 작작 사.” “안 사려고 했는데 네 생각나서. 그리고 여자는 꽃에 약한 거 아녔어?” “아니 미남미녀에 약할 걸?” 잘생긴 오빠 언니를 싫어하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차라리 눈요기로는 꽃보다 미인이 더 낫다는 게 렐리아의 지론이었다. 이에 아럼프는 렐리아가 도망가지 못하게 턱을 잡고서 고개를 숙여보였다. 길게 입술을 휘니 그 부담스러운 미안이 환하게 빛이 나는 듯 했다. “미남 여깄잖아. 이걸로 모자라?” “아니 충분한 듯.” 실없기 킥킥대며 렐리아는 슬쩍 제 턱을 쥔 그의 손을 떨어뜨렸다. “암튼 꽃 고맙고 나 지금 일이 있어. 내일 봐.” “벌써? 십 분정도는 같이 있을 생각이었는데.” 가볍게 웃었으나 아럼프는 아쉬운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바로 제 손을 떨어뜨리는 그녀의 부드러운 손과 들어오자마자 바로 축객령을 내리는 그녀의 고운 입에 서운하기만 했다. 오 분이라도 안 되겠냐고 아쉬운 맘을 드러내볼까 싶었으나 아럼프는 그녀가 곤란할까 은은히 웃을 뿐이다. “다음에 와. 오늘은 바빠.” “그럼 아쉬운 대로.” 그는 팔을 뻗어 렐리아를 가볍게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어진 깊은 포옹에 렐리아는 슬쩍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이럴 때는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지 공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면 기절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니 렐리아는 황급히 난처한 티를 드러냈다. 아럼프를 쫓아내고 공작이 괜찮은지 살펴봐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풀어. 공작님 오시면 어쩌려고.” 0085 / 0172 ---------------------------------------------- 진심과 가벼움 “포옹정도는 괜찮잖아.” “풀어, 풀라고.” 퍽퍽 남자의 옆구리를 가격하며 렐리아는 다소 과격하게 행동했다. 아럼프는 맞은 옆구리가 얼얼하자 마지못해 그녀를 꽉 끌어안은 두 팔을 풀어야만 했다. “이런. 멍들었으면 내일 치료해줄래?” “너 사제잖아. 네 몸은 네가 치료하지 그래?” “가차 없네.” 이마저도 좋은지 아럼프는 매끄럽게 웃었다. 그녀의 재촉에 못 이겨 그는 방밖으로 제 발로 걸어 나왔다. 저가 안긴 장미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아럼프는 내일을 기약했다. “대신 내일은 나랑 시간 보내주는 거야. 알았지?” “그래. 맛있는 거 준비해놓을 테니까 내일 봐.” “응. 들어가.” 아럼프가 되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 렐리아는 황급히 문을 닫고 방안으로 몸을 돌렸다. 바로 침대 맞은편으로 돌아가 상태를 살피려했으나 그 전에 침대너머로 불쑥 시커먼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살짝 구김이 간 정장을 반듯하게 피며 그는 삐뚤어진 넥타이를 정리하는 여유를 보였다. “살아있었네?” “밀친 인간이 할 말입니까?” 얼마나 세게 밀쳤는지 블리어는 아직도 바닥에 찧은 어깨와 옆 허벅지가 지끈거린다고 여겼다. 무려 콰당 소리가 났으니 말 다했다. 그는 누가 봐도 기분 나쁜 티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퉁명스러운 대답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렐리아는 어떻게 하면 그의 기분이 풀리려나 싶어서 그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털끝만치의 양심은 있기에 침묵을 지키다가 ‘미안’하고 운을 떼려던 찰나였다. 서느런 음성이 낮게 울렸다. “그나저나 저 자는 내가 그대 애인이라는 걸 모릅니까. 이런 걸 매일 사다 바치기에 하는 말입니다.” “뭐? 꽃다발 말하는 거야?” 품에 안긴 장미꽃다발을 한번 내려다보았다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겁게 내려앉은 그의 시선은 여전히 고운 붉은 꽃잎에 머물러있었다. “근데 공작이 매일 사다 바친다는 걸 어떻게 알아?” “아까 또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매일 사다 바친다는 추측이 나오긴 힘들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듯이 거침없던 걸 보면 아마도 소피아에게서 이 얘기를 들었던 모양이다. 소심하고 성실한 어린시녀는 빠짐없이 다 일러바쳤을 테니 말이다. “딱 봐도 사제 쪽에서 마음이 있어 보입니다만 희망고문 시키지 마십시오.” “뭐야. 전에는 나보고 잡으라며.”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랬거든요?” 렐리아는 이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싶어서 한껏 비아냥거리는 어조로 이어 말했다. “공작이야말로 기억하면서 발뺌 하지 마. 분명히 사제 잡으면 출세하는 거니 뭐니 하면서 친구사이지만 호감 가져보라고 중매 섰잖아.” “그런 적 없습니다.” 그답지 않게 참 뻔뻔하게 나왔다. 올곧은 그 성미상 이쯤에서 슬슬 스스로 인정할 텐데 말이다. “정말 기억 안나?” “기억 안 납니다.” “흐음, 공작 치매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확 제 품에 있던 꽃다발을 낚아채어갔다. 그대로 방문을 벗어나려하기에 렐리아는 그의 앞을 막아서고 당돌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야. 내 친구가 사준 걸 왜 공작이 가져가?” “애인으로서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뭐 관리?” 어이가 없다며 렐리아가 허, 하고 눈을 세모꼴로 떴다. 블리어는 저보다 머리하나 작은 은발 여인을 내려다보며 석상처럼 무미건조한 얼굴을 했다. 네가 덤벼봐야 뭘 하겠냐는 눈빛으로 그는 앙칼진 고양이 같은 그녀를 진정시키듯 다른 손으로 그녀 머리를 눌렀다. “다른 사내가 사적으로 주는 선물은 받지 마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압수입니다.” “이젠 별걸 다 간섭하네. 그럼 공작이 여자한테 사적으로 받은 선물은 다 내거다?”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 안 씁니다.” “그래 좋다. 어디 막장으로 가보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치며 렐리아는 유치뽕짝하게 나왔다. 그런 그녀의 머리위에 머물러있던 큰 손이 이윽고 머리를 한번 문질러주었다. 제법 따스한 손이었다. 블리어는 그녀를 스쳐지나가며 손을 거뒀으나 한동안 그 온기는 그녀의 머리위에 머물러있었다. * 다음날. 한가로운 정오부터 렐리아는 의상점에서 찾아온 살롱 디자이너와 직원들에게 시달려야만 했다. 해가 뜨고도 반나절은 잠에 허우적대는 지라 렐리아에게는 낮 열두시도 이른 시간이었다. 대충하고 자고 싶은데 저를 가만히 두지 않는 디자이너 덕분에 하품을 참느라 고생이었다. 게을러터진 누군가와는 달리 살롱 디자이너는 상당히 열정적이고 성의를 다해 일에 임했다. 왕국의 공작이 저를 믿고 맡겨주었다는 것에 그녀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수도최고의 의상점을 운영한다는 자존심과 자기 일에 대한 열정, 그것들을 기반으로 한 꼼꼼함 때문에 몸의 치수를 재는 데만 한 시간이 걸렸다. 한 치의 오차도 허락지 않는단 듯이 같은 부위를 또 재고 재고 쟀다. 이제 다 끝났나 싶었으나 다시 디자이너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올해 유행하는 컬러부터 시작해서 대륙을 통틀어 최근 어떤 드레스 양식이 성행하고 있는지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서로 상의를 하면서 최종적으로 어떤 디자인의 드레스를 만들지 결정하는 것 같은데 렐리아는 거의 ‘네’, ‘예’, ‘그러세요’ 이 세 종류의 말만 했을 뿐이다. 결국 결정은 디자이너가 알아서 해놓고선 왜 이걸 한 시간에 걸쳐서 물었는지 알 수 없었다. 러프스케치에 들어간 후 원단샘플을 몸에 대보는 작업이 지나서야 렐리아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장장 세시간만이었다. 두 번하면 사람이 아니라고 속으로 욕을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살롱 디자이너와 직원들이 돌아가고 이제 좀 쉬려할 때 아럼프가 찾아왔다. 어제 미리 얘기해둔걸 소피아는 잊지 않았는지 아럼프가 오자마자 맛있는 간식을 준비하러 갔다. 맘 같아서는 침대에 편히 드러눕고 싶지만 아럼프가 성인남자라는 점을 감안해 소파에 축 늘어졌다. 한동안 눈만 감고 있다가 렐리아는 너무 조용하자 슬쩍 눈을 떴다. 성스러울 만큼 새하얀 사제복을 입은 남자의 화려한 적발은 너울거리는 불꽃처럼 화려했다. 거기에 화사함을 추가하듯 맞은편 소파에 앉은 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이라면 왜 웃는 건지 의심이 들 테지만 렐리아는 달랐다. “아럼프. 너 또 버릇 나왔다.” 친절하게 신자들을 상대하는 직종이다 보니 자본주의 미소가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런 친구를 씁쓸하게 바라보는데 별안간 아럼프가 더 짙게 웃었다. “버릇이라니, 진짜 웃고 있는 건데.” “뭐 좋은 일 있어?” “그냥 너 봐서.” 대놓고 좋아한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에 렐리아는 못들은 척 무시했다. 이런 의미심장한 발언이나 무의식중에 표출되는 과한 호감이 자꾸만 친구사이를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다. 표면적으로 애인이 있기에 렐리아로서는 난처했다. 그런 것치곤 할 말은 다 한다지만. “왜 자꾸 웃어. 변태같이.” 다행히 그는 친구와 이성사이를 모호하게 넘나드는 정도의 수위에서 매번 그쳐주었다. 아마 저가 난처해한다는 걸 알고 물러서주는 것 같기는 개뿔. “네 말대로 변태 맞나봐. 네가 안 아팠으면 좋겠는데 힘없는 모습을 보니까 또 좋네.” “그래. 오늘부터 절교하자.” “농담도 가차 없네.” “진담인데.” 렐리아는 하마터면 정색하며 중지를 치켜들 뻔했다. 다행히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소피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주방에서 가져온 블루베리파이와 접시 두 개와 포크, 차제구가 티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다시 나가려는 소피아를 렐리아는 빠르게 붙잡아 제 옆에 두었다. 그러곤 자신의 접시와 포크를 소피아 앞에 놓아주고서 같이 티타임을 즐기자고 권유했다. 오면서 블루베리파이에 군침이 돌았을 어린시녀는 바로 고개를 주억이며 수락했다. 평소에도 종종 저와 티타임을 가지다보니 이젠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편한 모습이었다. 소피아가 있으면 그래도 아럼프가 이성적인 호감을 덜 보일 거라 여겼는데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다. 접시에 덜어준 파이조각을 맛있게도 잘 먹는 소피아가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줄 때였다. 목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져 렐리아는 드레스 속에 집어넣은 목걸이를 슬며시 꺼내들었다. 연한 금빛으로 물든 손톱크기의 크리스탈 속에서 순금 결정이 눈송이처럼 잔잔히 퍼지고 있었다. 그에 바로 반대편에서 아럼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법목걸이 인가보네.” “아, 공작님께서 선물해주신 거래요. …서로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대요.” 소피아는 자기자랑 하는 것처럼 발그레 뺨을 물들이고서 대답해주었다. 자신이 모시는 분은 공작님께 이렇게 사랑받는 분이라고 당당히 얘길 늘어놓을 것 같아 렐리아는 소피아의 접시에 파이를 한 조각 더 얹어주었다. 소피아는 감사하다며 말없이 파이만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공작의 저를 부른다는 걸 알면서도 부러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손님이 있어서 못가겠다고 역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시 아럼프와 얘기를 나누는데 일분도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그에게서 호출신호가 왔다. 이번에도 못 간다고 맞대응해주고서 렐리아는 친구를 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씰룩 웃었다. “아럼프. 파이 한 조각 더 먹어.” “넌 안 먹어?” “나 다다음주에 무슨 연회갈 일 있어서 강제 다이어트 중이야. 드레스 입는데 살 때문에 안 들어가면 민망하잖아.” “흐음 의외네. 렐리아는 뱃살도 귀여울 것 같은데.” “지랄마라고.” 킥킥 웃던 중에 렐리아는 또 한 번 오라는 호출신호를 받았다. 분명 오늘낮 시간대는 아럼프랑 시간을 보낼 거라고 얘기해놨는데 참 징할 만큼 오라고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이놈의 목걸이를 확 빼버릴까 싶다가 렐리아는 이번에는 읽씹으로 대처했다. 그렇게 하하호호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공작저의 한편에선 유독 저기압이 형성되어있었다. 블리어는 왼손에 차고 있는 가느다란 팔찌에 손을 가져갔다. 오라는 호출신호를 보내도 묵묵부답이었다. 지금쯤 방안에 그 사제와 단둘이 있을 터였다. 대체 뭘 하기에 제 신호는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건지 신경이 안 쓰일 레도 안 쓰일 수 없었다. 서류에 집중해보려 깃펜을 쥐었으나 펜촉아래 뭉툭하게 퍼진 잉크만 연달아 찍혔다. 다시 무의식중에 오른손을 팔찌에 가져가다 블리어는 결국 업무 중에 몸을 일으켰다. 웬만해선 한번 자리에 앉으면 네다섯 시간은 일어나지 않는 공작을 알기에 문밖에 선 보초병들은 풀어져 있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해야만 했다. 돌연 집무실 밖으로 나온 공작으로 인해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묵례했다. 업무 중에 작은 흐트러짐조차 용납 못하는 공작의 엄격한 성미를 잘 아는 기사들은 잔뜩 긴장했으나 블리어는 그들에겐 관심 한 톨조차 없었다. 오로지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여자 하나였다. 신경이 쓰여서 도저히 업무에 집중이 안 되니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후에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남자사제가 사적으로 방으로 놀러와 몇 시간 동안 안 나온다면 세간에 뭐라 소문이 나겠나. 이것도 다 자신의 완벽주의적인 성향 탓이었다.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이토록 신경 쓰는 것이라고, 딱 그뿐이라고 블리어는 생각하려 노력했다. 허나 빠른 걸음으로 렐리아의 방 앞에 당도한 그는 수초도 기다리지 못하고 문부터 열어젖혔다. 흉흉한 기세로 들어선 흑발 사내를 가장먼저 발견한 소피아는 히익 소릴 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뒤늦게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피아는 고개를 푹 수그렸다. 시녀로서의 일은 내팽개치고 모시는 분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었으니 뭐라 변명할 말이 없었다. 그때 소피아는 제 손을 잡아주는 부드럽고 고운 손에 옆을 돌아보았다. “앉아있어.” “…아.” 걱정 말라며 다정하게 웃어주는 렐리아의 모습에 소피아는 그제야 안도감을 느꼈다. 앉아있던 아럼프는 조금 뒤늦게 몸을 일으켜 공작을 향해 가볍게 예를 갖춰 인사해보였다. 그 유연한 인사에 되레 블리어는 불편한 기분만 들었다. 바로 렐리아 앞까지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쥐고서 바로 방을 빠져나왔다. 0086 / 0172 ---------------------------------------------- 진심과 가벼움 “뭐야 공작? 다짜고짜 어디로 데려가는데?” “…….” “아야야. 손목 아픈데~” 블리어는 엄살이라는 걸 단번에 눈치 챘다. 아플까봐 부러 힘을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웬만한 남성만큼 손힘이 센 그녀라면 금방 뿌리칠 수 있을 테지만 그녀는 어슬렁대며 순순히 따라오고 있었다. 복도를 끝에 위치한 계단통로로 들어와서야 블리어는 렐리아를 놓아주었다. “사람이 안다니는 으슥한 곳이네? 한번 공작의 속셈을 알아 맞춰볼까?” 역시나 엉큼한 속내를 드러내며 렐리아가 먼저 블리어에게 엉겨왔다. 그의 단단한 목 주위에 두 팔을 휘감고서 그늘진 구석으로 그를 몰아갔다. 허나 곧바로 제지하는 손에 의해 렐리아는 팔을 내려야만 했다. 그녀가 팔을 내리기 무섭게 다른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구석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상황은 순식간에 역전되어 렐리아가 구석에 갇힌 꼴이 되었다. 물론 그늘진 곳에서도 의기양양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고 더욱 당돌하게 저보다 큰 남자를 올려다볼 뿐이다. 그런 그녀를 마주 내려다보던 블리어는 뒤늦게야 무겁고도 느지막이 운을 뗐다. “내가 몇 번 불렀습니까.” “음~ 기억 안나.” 해맑을 만큼 단순한 대답이었다. 이런 뻔뻔함에도 블리어는 음역대를 높이지도 낮추지도 않은 채 무뚝뚝하게 말을 이었다. “정확히 서른아홉 번 불렀습니다.” “많이도 불렀네.” “반성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얼굴 위로 내리쬐는 엄한 눈길은 강렬한 뙤약볕보다도 따끔거렸다. 렐리아가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양 슬쩍 고개를 돌리자 바로 손이 뻗어져왔다. 양뺨을 아예 덮어버리듯 쥔 손은 렐리아의 조막만한 얼굴도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뺨이 눌려 입술이 붕어입처럼 된 여자를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얄미움을 감추지 않았다. “부르면 재깍재깍 오십시오. 바쁜 내가 이리 찾아와야 됩니까?” “내가 개야? 부르면 달려가게.” “개처럼 예뻐해줄 테니 달려오십시오.” “이젠 하다못해 개취급이네.” 입술이 튀어나온 상태에서도 또박또박 말대답은 잘한다. 그 모습이 조금은 귀여워 보인다면 저가 지는 것 같아 블리어는 손을 거두었다. 허나 이를 놓치지 않고 바로 렐리아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개취급 말고~ 여자취급 언제 해줄 거냐고, 공작.” 한 옥타브가 올라간 가식적인 목소리로 렐리아는 두 팔로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바짝 몸 밀착한 상태에서 얼굴을 들이밀며 앙탈을 부리는 건지, 눈에 뭐가 낀 건지 연방 눈을 깜빡깜빡 거렸다. 블리어는 이렇게 유혹을 못하는 여자도 드물 거라고 여겼다. 어떻게 유혹하는 수법이 매번 한결같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다 섹스에 갖다 붙이거나 무작정 몸을 들이미는 수법은 여전히 저속했다. 이 정도면 괜히 남들에게 이상한 오해를 사고도 남을 정도라 블리어는 찝찝했다. 그가 보기에도 남자를 다루는 테크닉이 부족해 보이는데 정작 그녀본인은 모르는 모양인지 당당했다. “나 침대에서 예쁨 받고 싶은데?” “그럼 예쁨 받을 짓을 해보십시오.” 여자의 한 팔을 붙잡아 떨어뜨리자 곧바로 여자는 가냘픈 척 신음소릴 흘렸다. 참 씨알도 안 먹힐 내숭을 당당하게 하고 있으니 블리어로서는 기가 찼다. 예전 같았으면 천박하다고 뒤도 안돌아볼 터인데 블리어는 요새 들어 이런 모습이 어설프게만 보여서 너그러움마저 생겨나고 있었다. “유혹이라는 건 말입니다. 손짓 하나, 말 한마디로도 남자를 넘어갈 수 있게 하는 고도의 기술입니다. 손끝과 혀끝에 꾸며내지 않은 우아함이 항시 깃들어있어야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그대는 매혹적이라고 하기엔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다른 매력으로 어필해보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지컨설팅 고마운데 그 유혹대상이 공작이라는 건 좀 알아주라.” 어딘가 힘없이 뇌까리는 렐리아의 말에 블리어는 기운 내라는 듯 작은 머리위에 손을 얹었다. “지금 모습이 매력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너무 서운케 듣진 마십시오.” “됐네요. 이미 빈정 상했거든요.” 렐리아는 그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그러곤 이만 돌아가 보겠다며 그를 지나쳐나갔다. 하지만 계단통로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손목을 그러쥐는 우악스런 손길에 다시 구석자리로 끌려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삐쳤습니까.” “내가 왜. 전혀 안 삐쳤는데~?” “자존심 상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대도 그게 필사적인 유혹이었을 텐데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 그래.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걸 어쩌겠어. 내가 이렇게나 들이댔는데 이제껏 단 한 번도 공작이 안 넘어왔다는 건 내게 문제가 있는 거지, 설마 공작이 고자라거나 고자일리는 없잖아?” “그대가 현실도피를 할 수준까지 올 때까지 방치한 내 잘못입니다. 앞으론 부족한 유혹에도 넘어가기 위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아냐. 젊은 나이에 불감증이 온 공작을 탓할 수는 없지. 내가 노력할게.” 렐리아는 씰룩 웃었으나 한쪽 입꼬리를 특히나 더 끌어올렸다. 곧바로 굳은살이 박인 긴 손가락이 뻗어져와 보조개를 살살 문질러 다시 내려가게 만들었다. “확실히 아까보단 이게 더 낫습니다.” “?” 블리어는 손을 거두고서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싱겁게 정면을 응시했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를 것 같은 차가운 겉가죽이 절륜한 얼굴윤곽위에 덧씌워져있었으나 아주 살짝 입술이 올라간 것 같다. “뭐야. 공작 속으로 무슨 재밌는 생각했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 대답이 냉소적인 느낌을 주지 않아 렐리아는 의외란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삐친 건 이제 다 풀렸습니까.” “오늘 저녁에 소고기스테이크가 나온다면 뭐 재고해볼게.” “그 정도야. 요리사에게 말해두겠습니다.” “공작이니까 이 정도에서 봐주는 거야. 알아, 콱.” 장난삼아 위협하듯이 렐리아는 우씨하고 주먹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곧 덮쳐온 거대한 손아귀가 그대로 조그만 주먹을 포개버렸다. 그는 작은 주먹틈사이로 엄지를 집어넣어 부드럽게 손을 피게 만들고서 어느새 자연스레 마주잡은 형태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계단통로 밖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제 집무실로 갑시다.” “내가 왜?” “아까 전에 불렀는데 안 왔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 봤잖아. 난 돌아가서 아럼프랑 놀래.” 돌아가겠다고 말했으나 공작은 그런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으로 가다보니 어느새 점점 자신의 방과 멀어져만 갔다. “아 내가 집무실가서 뭐해. 지루하기만 할 텐데.” 투덜투덜 대는 목소리는 점차 커졌다. 동시에 점점 지쳐감에 따라 늘어지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아- 쫌- 공작.” 질질질 끌려가며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그의 넓은 등짝을 노려보았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이걸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고 참 골치 아팠다. '내가 그냥 봐준다.' 렐리아는 마지못해 끌려가 그의 지루한 업무시간동안 옆에서 창밖이나 구경했다. * 렐리아는 이른 오후부터 시가지에 나가 쇼핑을 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결이 고운 나무채로 엮은 흰 바구니에는 달콤한 디저트가 한가득 담겨있었다. 혼자 먹기에 벅찰 만큼 많은 양을 들고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공작저의 중심부에 위치한 집무실이었다. 업무 중일 시엔 중요사항을 전달하러온 집사나 측근을 제하고는 다른 이의 출입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었으나 렐리아는 특별히 예외대상이었다. 오히려 보초병들은 깍듯하게 머릴 숙이며 문까지 직접 열어주었다. 렐리아는 바구니를 흔들며 안으로 들어섰다. 최근 들어 이곳을 자주 찾아오는 렐리아였기에 블리어는 익숙하다는 반응이었다. 한번 사인을 휘갈긴 후 그는 일거리를 잠시 손에서 놓았다. 디저트 타임을 즐기려는 바람직한 자세였다. “공작은 계속 일해.” 하지만 렐리아는 그에게 포크를 넘겨줄 생각이 없는지 책상 가장자리에 가볍게 걸터앉아 허공에 작은 은포크를 휘둘렀다. “내가 옆에서 단 거 먹여줄 테니까.” 콕 그를 허공에서 집으며 렐리아는 무릎위에 올려둔 바구니 속에서 초코무스 케이크를 꺼내들었다. 확 올라오는 다크초콜릿 향은 얼마나 달지 짐작이 갈 만큼 진한 초코농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포크로 깔끔하게 단면을 따라 자른 후 렐리아는 서류를 살피고 있는 그의 입에 포크를 가져갔다. “아~” “…….” “독 안탔으니까.” 블리어는 그 선이 뚜렷하게 굳어진 입매를 슬며시 벌려주었다. 남성다운 입술에 살짝 초코크림이 묻자 렐리아는 직접 손가락을 가져가 닦아주기까지 했다. “어때? 맛있어?” 누가 봐도 원하는 게 있는 눈치였지만 블리어는 모른 척 서류에 시선을 두고서 그 호의를 즐겼다. 대답이 없는 그의 태도에 렐리아는 약간 안달이 나서 다른 디저트에 포크를 가져갔다. 비싼 최고급디저트인 만큼 남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사로잡기엔 충분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기에 이 남자가 말이 없는지 모르겠다. 단순히 업무에 집중하는 중이라서? 아님 입맛에 안 맞았나?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것치곤 순순히 받아먹어주는 게 참 그 태도가 의뭉스러웠다. “뭐 불편한 거라도 있남?” “없습니다.” “근데 왜…” 태도가 그 모양이냐고 직설적으로 쏘아붙이려다가 렐리아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대체 이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어 괜히 애꿎은 디저트들만 포크로 쑤셔대던 중이었다. 한동안 입을 열지 않으려고 작정한 듯이 무거운 침묵을 지키던 블리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요새 들어 왜 이렇게 잘 대해주는 겁니까.” “왜? 싫어?” “그대 솔직히 부십시오. 내게 뭐 잘못했습니까?” 마음 있어야 해준다. 그 요건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지만 렐리아는 부끄러운 듯 은색머리칼을 베베 꼬았다. “공작이랑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러는 거지~ 다.” 하루가 지나고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니 렐리아로선 서서히 조급함이 들었다. 부러 블리어에게 찾아오는 빈도수가 높아진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나 이렇게 노력하는데 기특하지 않아?” “단순히 그 이유뿐입니까. 수상쩍습니다만.” “그럼 뭐, 내가 공작 사로잡아서 공작가의 기밀문서라도 빼돌릴까?” “동화책도 못 읽는 주제에 기밀문서인 건 용케도 알겠습니다.” “공작 나 지금 무시해? 나도 읽을 수 있거든.” 슬쩍 자존심이 상하자 렐리아는 그의 손에 들린 서류를 보기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탄탄한 근육으로 이뤄진 어깨에 손을 얹고 그에게 살짝 기댄 채로 맨 윗줄부터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녕? 대…화의 개최…? 승안…” 읽을 수 있다고 자부하던 것치곤 더듬더듬 거리는 목소리는 어설프기만 했다. “사냥대회 개최건에 대한 승인서류.” 블리어는 낮은 음률처럼 매끄럽게 정정해주었다. 그러곤 따라해 보라고 렐리아를 눈짓으로나마 재촉했다. 렐리아는 그가 저를 놀린다고 생각해 바로 그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떼었다. 다리를 한번 꼬고서 책상 위에 앉아있는 여인은 요염한 자태와는 달리 새침때기 소녀같은 얼굴이었다. “그래. 평생 동화책이나 읽으며 살아야지 원.” “그래도 전에 비하면 많이 성장한 겁니다. 잘했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제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었다. 몇 번 제 머리위에 손을 얹은 후로는 완전히 버릇이 든 건지 걸핏하면 이런다. 여자친구들이 쓰다듬어주는 건 좋아한다지만 커다랗고 거친 손은 조금 적응이 안 되어 렐리아는 슬쩍 썩은 표정을 지었다. “근데 사냥대회도 해? 뭐 사냥하는데?” “수도 서쪽에 위치한 야누이스 산맥에서 매년 산짐승들을 사냥합니다. 단순히 귀족의 유흥이라기 보단 대회라는 명목을 앞세운 백성들을 위한 토벌작전입니다.” 블리어는 그녀에게 한 자라도 더 알려주려는 마음에 약간의 설명을 더 보탰다. “이맘때만 되면 허기가 극에 달해 포악해진 산짐승들이 먹이를 찾으러 마을을 급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작물 피해와 그로 인한 민간인들이 입을 경제적 피해를 생각한다면 왕실에서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지 않습니까. 단순 농작물도 아닌 마법이 동원되는 농사이기에 값이 꽤 나갑니다. 수출하는 품목이라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기사단 쓰면 되잖아?” “기사들 같은 고급인력을 부리려면 그만한 수당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병력을 투입한다면 그 지역의 조세부담이 커질 테니 한가하고 돈 많은 귀족들을 끌어들이는 겁니다.” “폐하가 많이 열일하시네. 백성들 생각도 다 하시고.” “개국 초기부터 내려온 겁니다.” 그는 또 습관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렐리아의 보드라운 머리칼에 닿기도 전에 이빨이 그의 손끝을 깨물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깨물린 기분이 좋지 못해 블리어는 부러 손가락을 더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일일이 찾아보면 백성들을 위한 제도가 상당히 많습니다. 구빈제도나 평민교육제도 같은 것들 말입니다. 바일로트 1세가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라 칭송받는 이유가 현재에도 왕국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에퉤퉤. 아나.” 렐리아는 혓바닥 위에 닿은 짠 손가락을 황급히 빼내었다. 기껏 잘해주려고 했던 작전은 물거품이 되고 되레 욱하고 성질이 튀어나와버렸다. 안 치우냐며 주먹까지 치켜드는 모습이 위협적이라기 보단 털을 세우고 경계하는 작은 새끼짐승 같다. 귀여운 건지 얄미운 건지 모르겠으나 괜히 가만히 놔두고 싶지 않았다. 블리어는 여전히 차갑고 무감정한 얼굴로 끝까지 사무적인 말투를 사용했다. “이 서류는 어디까지나 검토 중입니다. 올해는 사냥대회를 열만한 상황이 될지 안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서느렇게 가라앉은 낯은 어두웠다. 왕국 멸망이라는 게 피부로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은 데다 한동안 너무도 평화롭기만 했다. 블리어는 언젠가 닥쳐올 미래를 생각하면 지금현재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여겼다. 조금 여유를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되레 마음은 평안했다. 0087 / 0172 ---------------------------------------------- 진심과 가벼움 공작과 금방 일을 치를 수 있을 거라 여긴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벌써 계획했던 일주일이 지났다. 이러다 다음 주에 있을 연회에 참석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막막한 기분에 잠시 한숨이 새어나왔으나 렐리아는 곧 전투적인 자세로 준비에 돌입했다. 오늘밤은 어떻게든 끝장을 볼 생각으로 완벽하게 샤워를 끝내고 향수를 뿌리고 야시시한 레이스 속옷으로 골랐다. 최대한 벗기기 쉽고 노출이 심한 원피스차림으로 그녀는 당당히 공작의 방을 찾았다. 할 마음이 없지는 않다는 대답과는 달리 그는 이제까지 저를 돌보듯이 보았다. 아무리 품에 안기고 노출을 시도해보고 별 지랄을 다 떨어 봐도 저를 안을 생각자체가 없어보였다. 게이이거나 고자이거나 무성애자가 아닐까,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이번엔 저도 순순히 물러날 생각은 전혀 없었고 여러 가지 치밀한 작전을 구상해놓은 상태였다. 그는 거실소파에 앉아 독서 중이었고 늘 그렇듯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렐리아는 사뿐히 그의 옆에 앉아 살짝 젖은 긴 머리를 목뒤로 쓸어 넘겼다. 향기가 그에게 전해지도록 비단실처럼 매끄러운 머리칼을 찰랑찰랑 흩날렸으나 남자는 무심할 만큼 관심이 없어보였다. 플랜 A는 실패군. 렐리아는 바로 플랜 B로 나갔다. “공작. 뭐 읽어?” 다정한 연인처럼 렐리아는 그의 왼쪽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댔다. 평소 그가 제 머리에 무심결에 손을 가져가는 걸 잘 안다. 머리에 약할지도 모른단 생각에 렐리아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애교 많은 고양이처럼 자존심도 던지고 부비부비 댔으나 그는 오른손을 들어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줄 뿐이다. “머리를 덜 말리고 온 겁니까.” 블리어는 살짝 촉촉한 머리카락의 감촉에 바로 책을 내려두고 몸을 일으켰다. 욕실에서 흰 타월을 들고 나온 그는 바로 머리를 말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시밤…내가 원한 반응은 이게 아니라고! 전생에 미용사였나….’ 쓸데없이 솜씨는 또 좋아서 렐리아는 차마 거부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에게 긴 머리를 맡겼다. 햇살에 보송보송하게 말린 특유의 섬유냄새가 기분 좋았다. 두피도 섬세하게 만져주며 올올이 빗어주니 이 맛에 블리어미용실을 애용하는 게 아닌가 싶다. 뒤늦게 헛, 하고 렐리아는 정신을 차렸다. 그에게 휘말려서 어쩌잔 건가 싶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도발적인 플랜 C로 가야겠다. “갑자기 졸리네. 공작~ 무릎베개해줘.” 렐리아는 머리를 다 말리기 무섭게 소파위에 풀썩 몸을 뉘였다. 단단한 감촉이 느껴지는 남자의 허벅지에 머리를 올려두고서 렐리아는 슬쩍 두 무릎을 세웠다. 무릎위에 걸쳐져있던 원피스자락이 스르륵 내려와 뽀얀 허벅지살이 다 드러났다. 이에 그치지 않고 슬쩍 양허벅지 안쪽이 서로 마찰되게 비빈다거나 괜히 몸을 꼰다거나 다리 각선미가 드러나게 쭉 핀다거나 등의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기에 노골적인 플랜 D로 렐리아는 바로 강행군을 이어갔다. 누워있던 몸을 홱 뒤집고서 그녀는 소파를 짚고 블리어를 올려다보았다. “나 잠깨게 재밌는 얘기해주라? 공작 응?” 아무것도 모른 척 싱글거렸으나 거울에 직접 비춰보며 어떻게 하면 가슴골이 더욱 잘 보일 수 있나 거듭된 연구를 걸쳐서 알아낸 각도와 자세였다. 거기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붉은 레이스속옷은 사내의 성욕을 자극하기엔 충분하리라. “재밌는 얘기 말입니까. 흠. 알고 있는 얘기가 하나있긴 합니다만.” 그렇게 이십 분에 걸쳐 재밌는 얘기가 시작되었다. 그도 성인남성이긴 한지 얘기 중에 몇 번 노골적인 눈길이 제 가슴골에 꽂혔으나 그게 다였다. 동물원에서 쌍봉낙타를 생애 처음 본 유치원생도 이것보단 더 호기심 있게 바라볼 테다. 머릿속에서 쥐어짜낼 수 있는 작전은 사실 별로 없었다. 뭘 자세히 알아야 아이디어가 샘솟든가 하지 아는 거라곤 피임법과 뻔한 AV와 인터넷 출처글로 배운 지식이 다였다. 플랜 E는 철판 깔고 과하게 들이대기였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의 허벅지에 손을 얹고 문질거리거나 검은 머리칼사이로 도드라진 하얀 귀에 후 바람을 불거나 그의 손을 쥐고 강제로 제 몸을 만지도록 했으나 공작은 미세하게 눈썹만 꿈틀거렸다. 종내에는 뭐하냐는 듯이 제게 잡힌 손을 빼내고서 다시 책에 가져갔다. 마음 없으면 안한다더니 진짜였던 모양이다. 한번 꺼낸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그 칼 같은 성미는 역시 무시할 게 못 되었던 것이다. 망했다. 렐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안 좋은 감은 제법 잘 맞는지라 더 불안하기만 했다. 공작에겐 미안하지만 정말 미약이라도 비밀리에 사들여 디저트 속에 숨겨 먹여야 되나 싶었다. 아무리 게임이라도 그렇지 정말 막장으로 가는구나 싶기만 했다. ‘…안돼. 집에 가야돼.’ 까득 입술을 깨물고서 렐리아는 내면에서 불쑥 머리를 쳐든 불안감을 짓뭉갰다. 이렇게 된 이상 플랜 F만이 남아있었다. 렐리아는 몸도 체면도 자존심도 다 던져버린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최고의 무리수를 던지기로 마음먹었다. 이 방법도 안 된다면 암거래정보를 입수해 미약부터 알아봐야겠다. “공작. 사실 말이야.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데…” 렐리아는 그의 옆에 앉은 채로 분위기를 잡기 시작했다. 벌써부터 낯이 간지러워서 얼굴을 벅벅 긁고 싶었다. 막상 말을 꺼내려니 자꾸 가래처럼 목구멍에서 턱턱 껴버리고 말았다. “그…크흠.” 경상도 사나이나 낼법한 소리가 목에서 나왔으나 렐리아는 개의치 않았다.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머리를 한번 헤집다가 입술을 만지작거렸다가 목을 가다듬었다가 한동안 바쁘던 그녀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컥, 하고 잠시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조, 좋아해.” 현실에서도 한번 소리내해보지 못했던 고백을 게임캐릭터한테 다해보구나 싶었다. 뜬금없는 고백과 동시에 긴 침묵이 이어지자 렐리아는 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으아 미치겠다. 시바시바.’ 살면서 이토록 시바신을 부르짖은 적은 또 없을 거다. 바로 옆에 있는 그와 눈을 못 마주치겠다. 왠지 지금 눈을 마주치면 피부 전체에 오소소 닭살이 돋을 것만 같았다. 하필이면 상대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공작이라서 더 그랬다. 무리수 고백을 초강수를 둘게 뭔가 싶었지만 이젠 모 아니면 도였다. 허나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서라도 생각나는 대로 어떻게든 고백을 이어서 지껄여야만 했다. “공작이랑 있으면…항상 편하고 즐겁고 좋아. …나만 그런 거였남.” 턱을 긁적거리며 렐리아는 차마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무릎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래선 죽도 개밥도 안 될 것 같았다. 끝없이 이어지는 침묵의 연장선에 더 숨이 막혔다.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어차피 돌아가면 안볼 사이니까 한 번의 쪽팔림은 감수하기로 하고 렐리아는 슬쩍 다시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나 공작 좋아하는 것 같아.” 두 눈에 오롯이 담긴 녹안은 평소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생각보다 닭살이 돋지는 않았다. 묵직하고 올곧게 저를 마주하고 있는 그의 눈동자에 되레 차분해질 정도였다. 렐리아는 긴 침묵에 얼쯤해져서 목을 한번 가다듬었다. 짙게 가라앉은 눈은 그 생각을 헤아릴 수 없게 했다. 울창한 수목이 우거진 녹빛 수면의 호수처럼 저를 잔잔히 비추고 있을 뿐, 그 속은 읽을 수 없을 만큼 깊었다. 그때 돌부처처럼 꿈쩍도 안하던 그가 손을 움직였다. 이번에도 머리나 쓸어 만져주려나 싶었으나 두터운 손바닥이 뺨에 닿았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여상한 온기가 생소하게 느껴질 때쯤 그가 돌연 뺨을 감싸고서 얼굴을 숙여왔다. 코앞까지 다가온 진녹색 눈이 스르륵 감기고 깊게 내려앉은 새까만 속눈썹만 보였다. 눈치채지 못할 새에 서로의 입술이 닿아있었다. ‘…?!’ 입맞춤을 당한 상태에서도 렐리아는 믿기지가 않았다. 어이가 없었다. 온갖 아양이란 아양은 다 떨 때는 하려는 기미가 전혀 없던 남자가 이런 진부한 고백에 돌변했다. 이제까지 무슨 개짓거리를 한 거지 싶다가 렐리아는 제 아랫입술을 톡 건드리는 혀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하마터면 뒤로 고개를 내뺄 뻔했으나 렐리아는 뻣뻣하게 목을 피고서 개방적인 자세로 입술을 살짝 벌렸다. 이에 블리어는 고개를 틀어주었다. 동시에 크고 단단한 살덩이가 여리고 따스한 입속으로 파고들었다. 뺨에 어린 미지근한 온기와는 달리 입 속을 헤젓는 살덩이는 뜨거웠다. 블리어는 입안에서 유려한 글씨를 쓰듯이 느긋하고도 매끄럽게 움직였다. 뺨에 머물러있던 손이 점차 적극적으로 변해 동그란 귀를 덮다가 아예 뒷머리를 받쳤다. 렐리아는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 혀를 움직였는데 꿈틀꿈틀 대며 맞붙는 커다란 혀에 기분이 이상하기만 했다. 반복적으로 숨을 들이쉴 때마다 열기가 느껴지는 습한 숨결이 닿아 더 그랬다. 그런 서툰 움직임에 블리어는 영 못 따라오고 있는 그녀를 알아차렸다. 숨 쉴 틈을 주기 위해 맞물린 입술사이를 고갤 틀어 벌려주자 그제야 렐리아가 작게 헐떡거렸다. 소극적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내리고 있는 여인의 턱을 쥐고서 블리어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녈 내려다보았다. 쓰다듬듯이 부드러운 시선이었다. “…하,” “…더 합시다.” 그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살짝 그녀의 턱을 눌러 입을 벌리게 했다. 다른 손으로는 여인의 목덜미를 매만지며 다시 한 번 깊게 입술을 탐했다. 키스실력이 영 형편없는 렐리아를 가르치듯이 입술을 겹친 상태에서 천천히 혀로 혀를 어루만져갔다. 조금씩 끈적하게, 열망을 드러내는 키스에 렐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혀가 제 몸을 옭아매는 기분이었다. 꼼짝은 못하겠고 그렇다고 여기서 진도가 멈춰서는 안 되었다. 작작 키스하고 진도 좀 나가고 싶은데 이와 중에도 공작은 저를 배려해주려는지 몸을 더듬거나 하지 않았다. 오로지 뒷머리와 목을 왔다갔다하며 느긋하게 쓸어 만져줄 뿐이었다. 질긴 농락에 입속에선 침이 고여 갔다. 이렇게 길게 해본적은 없기에 렐리아는 흥건하게 고여만 가는 침을 언제 삼켜야 되는지 그 타이밍을 잡기가 약간 힘들었다. 남의 혀와 뒹굴거리며 생성한 침이기에 약간 더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닷속 물고기처럼 미끌거리는 몸체의 그것을 밀어내며 꼴깍꼴깍 침을 넘기다가 렐리아는 단단한 가슴팍에 두 손을 얹었다. 입술을 꽉 막고서 뜨거운 숨결을 방출하는 그의 입술을 피하게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공기가 입술에 닿자 렐리아는 서둘러 운을 뗐다. “키스 말고…” 그것도 잠시 제 뺨을 붙잡고 다시 따라붙는 입술에 렐리아는 또 한 번 그에게 삼켜졌다. 그녀는 넓은 가슴위에 얹은 손에 힘을 실었다. 밀어내는 힘에 성마르게 헤엄치던 혀의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도톰한 입술을 빨아 당기면서 천천히 그녀 입에서 떨어져 나왔다. 동시에 하아, 하고 작은 입술에서 터져 나온 끈덕진 숨결이 그의 귓가에 달라붙었다. “얼른 넣어줘.” “후회 없겠습니까.” “응. 당장 해줘….” 블리어는 제 목을 끌어안으며 다시 다가온 여자를 밀어내지 않았다. 부드러운 젖가슴이 뭉개지듯 몸에 닿고 진한 꽃향기가 코를 부드럽게 에워쌌다. 굵직한 팔로 여인의 무릎 뒤와 등 뒤를 받치고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0088 / 0172 ---------------------------------------------- 진심과 가벼움 그가 향한 곳은 거실과 이어진 침실이었다. 불 꺼진 침대위에 렐리아를 앉혀주고서 블리어는 그녀 앞에 서서 잠시 차가운 이성을 찾으려는 듯 미동이 없었다. 이에 렐리아는 조급한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안하겠다고 뺄까봐 곧바로 하얀 손가락들을 뻗어 그의 허리춤에 걸린 허리띠쇠를 풀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그 손을 블리어는 누르듯이 붙잡고서 상체를 숙여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곤 서서히 넘어가면서 렐리아를 뒤로 눕혔다. 블리어는 그녀가 반쯤 풀어놓은 허리띠쇠를 마저 풀어 완전히 끌어내렸다. 벌어진 바지앞섶 사이로 뭉툭하게 불어난 속옷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렐리아는 슬쩍 그것을 바라보다가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려 제 얼굴위에 위치한 그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서느런 낯이었으나 갈증이 이는지 짙고 새카만 눈썹사이가 좁아져있었다. 잘 뭉개어 쑨 약초처럼 눅진하게 가라앉은 진녹색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한번 시작한 일 대충하지 않을 겁니다.” “응. 바라던 바야.” “엄살 부려도 쉬이 안 놓아줄 겁니다.” 농담치곤 잔뜩 성대를 긁으며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가 간지럽게 입술에 닿았다. 렐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자 곧바로 남자답게 선이 진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그는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위에 올라타 키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팔꿈치를 침대시트에 편히 내려놓고서 그녀의 뺨과 머리를 어루만져갔다. 렐리아는 누운 채로 얌전히 그의 키스를 받았다. 가만히만 있어도 공작이 알아서 다 해줄 테니 이제 다 끝났구나 싶어 후련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오 분이 흐르고 십 분이 흐르는 동안 그가 일절 제 몸에 터치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놈의 키스만 몇 시간을 할 생각인지 끈적하게 키스만 이어나갔다. 서로의 혀가 유연하게 얽히어가던 중 렐리아는 두 손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내었다. 그제야 블리어는 키스를 멈추고 왜 그러냐는 눈으로 그녈 내려다보았다. “근데…굳이 키스할 필요는 없지 않나. 공작, 언제까지 키스할 거야?” “…싫습니까?” “뭐 싫은 건 아닌데…나 이제 슬슬 넣어줬으면 해서.” 뚫어져라보는 그의 눈빛이 조금 부담스러워 렐리아는 눈을 내리깔고 대답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이 없자 애가 타는 건 그녀 쪽이었다. 설마 키스를 안 하면 안 서는 쪽인가? 그런 것치곤 아까 불룩하던데. 불안함에 렐리아는 슬쩍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려야만 했다. “저기, 내 말 알아들었지? 공작?” “.......” “공..,” 허나 바로 저의 입술을 틀어막는 입술에 렐리아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또 다시 이어지는 격정적인 키스에 렐리아는 속수무책으로 밀리다가 제 입안에 들어와 있는 혀를 살짝 깨물었다. 블리어는 설핏 인상을 쓰며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렸다. 조금 불만스러워 보이는 그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렐리아는 뻔뻔하게 나왔다. “나 벗을래.” 렐리아는 얇은 원피스를 위로 돌돌 말아가면서 두 팔을 통해 벗어버렸다. 등 뒤에 있는 브래지어 후크를 빠르게 풀고 어깨끈을 끌어내리기까지 수월했다. 블리어는 그 과정을 위에서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이번에는 입술이 아닌 새하얀 목에 고개를 파묻고서 입을 맞춰주었다. 그러곤 손을 내려 아직 벗지 않은 팬티위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중지와 검지를 붙여 실크면 위로 미끄러지듯 문질렀다. 그 자극적인 손길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다리를 살짝 오므렸다. “아직 안 젖었습니다만.” “괜찮으니까 넣어줘.” “자꾸 보채지 마십시오. 이 상태로 하면 아플 거 아닙니까.” 블리어는 안쪽에 머물러있던 손을 움직여 허벅지 바깥쪽을 쓸어 만져주었다. 진정하라고 달래주듯이 차분한 손길이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애무에 들어가려해도 여자는 바로 넣어달라고 졸라댔다. 뭐가 그리 급한 진 몰라도 블리어로서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풀어주겠습니다.” 뭘?하고 렐리아는 물어보려다가 귓가에 닿는 나직한 음성에 그대로 숨을 멈췄다. “손가락을 삽입해 풀어줄 테니 팬티 벗어보십시오.” 렐리아는 그의 입에서 이런 외설적인 말이 흘러나오니 새삼 낯이 뜨거워졌다. 그냥 넣고 흔들기나 하지 괜히 시간을 끌어서 더 쪽팔리고 수치스러웠다. 그녀는 반쯤 고개를 돌린 채 한 손으로 주섬주섬 팬티를 벗겨 내려갔다. 발목에 걸쳐져있던 팬티가 침대 시트에 툭 떨어지자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블리어가 움직였다. 그동안 그도 셔츠를 벗어 매끄러운 상체가 드러난 상태였다. 무가의 주인답게 근육이 균형 있게 잘 잡힌 다부진 몸을 하고 있었다. 허나 렐리아는 그의 몸을 구경하기는커녕 그가 옷을 벗었다는 것조차 모르는지 천장구석만 고집스레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안가 남자의 투박한 손이 뻑뻑한 곳에 닿았다. “힘 풀어도 됩니다.” 손을 움직이는 동안 그는 그녀가 젖기를 부드럽게 기다려주었다. 뒤늦게 이만하면 되었다 판단한 블리어는 렐리아를 올려다보았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누워있는 여인은 팔을 들어 눈을 가리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도 충분히 아래가 뻐근한 상태였으나 그녀를 배려할 수 있는 여유정도는 있었다. “정 꺼려진다면 다음에 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그냥 해줘.” 렐리아는 움츠리고 있던 두 다리를 활짝 벌려주었다. 강제가 아닌 합의하에 하는 것일 텐데도 블리어는 위화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이런 모습에 되레 내키지 않았으나 계속 ‘얼른, 얼른’ 하고 안아달라고 조르는 여인을 내치기도 힘들었다. “최대한 배려해줄 테니 힘 빼십시오.” 블리어는 완전히 앞섶을 풀어헤쳤다. 그는 천천히 하체를 움직이며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자꾸만 움찔움찔 오므려지려는 그녀의 양다리를 붙잡고서 블리어는 뿌리까지 심어 넣었다. 미간을 구긴 채 그는 사정직전의 쾌감을 참아내었다. 넣은 것뿐인데도 굳은 입매사이로 얕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 불편하진 않습니까. 괜찮으면…이대로 해도 되겠습니까.” “….” 렐리아는 여전히 팔등으로 눈을 덮은 채 머리만 한번 끄덕였다. 블리어는 그 팔을 끌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키스를 하고 싶어도 저 팔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었으니 사내의 속은 타들어갈 수밖에. 허나 그는 아쉬움을 달래려 여인의 벗은 몸을 훑어 내렸다. 깨끗한 눈처럼 새하얗기만 한 나신에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안고 있는 몸이 그 어떤 것보다도 고결해보였다. 그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천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블리어는 그녀의 쇄골 중앙에 매달린 목걸이를 내려다보다 그 아래에 입을 맞춰주었다.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자 섬세하게 배열된 등 근육이 느릿하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하, 하아. 큿….” 상당히 비좁고 뻑뻑했다. 하지만 달아오른 전율이 꺼지지 않도록 블리어는 서서히 속도를 높여갔다. 남자의 날렵한 허리를 휘감은 매끄러운 흰 다리가 허공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발끝이 움찔거리며 튕겨졌으나 렐리아는 작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전혀 즐기지 못하는 여인을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알 수 없는 답답함만이 들었다. 여태껏 만나온 다른 사내들과 즐길 때도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로 임해왔는지 모르겠다. 허나 자신은 그 사내들과는 다르다고 여겼다.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아한다, 잔잔하던 그를 뒤흔들 만큼 파급력이 있던 말 한마디였다. 사춘기 소년소녀나 설렐만한 그런 시시하고 진부한 감정의 교류에 흔들려버렸다. 블리어는 인정해야만 했다.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자신의 세계에 들어와 멋대로 어질러놓는 여자를 내쫓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싫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다. 문을 잠그면 되는 일을 그러지 않았던 것은 어느새 그녀를 허락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 오기까지 그녀를 끝내 밀어내지 못했던 까닭은 그녀를 좋아하는 탓이리라. 절절하고도 애틋하게 가슴속에 품는 사랑과는 달랐다. 이 감정은 사랑한다고 표현하기에는 그런 숭고한 감정과는 멀지만 그렇다고 아주 멀지 않은 감정이다. 몇 번 마주치다보니 싫지 않던 얼굴이 어느 순간은 찾아가면서까지 보게 되고, 안보이면 직접 찾아와서 옆에 두는 정도의 호감이었다. 악연이 질긴 인연으로, 질긴 인연이 연인이 되어있었다. 여기까지의 과정이란 그가 생각해도 참 신기할 정도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온 건진 몰라도 그녀와 저의 마음이 같다는 걸 알게 되었고 비로소 인정했다. 하지만 블리어는 위화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정말 저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제게 안겨있는 그녀의 태도나 분위기는 너무나도 딱딱했다. 뻣뻣한 통나무를 안는 기분이었다. 이래서는 서로가 즐길 수 없다는 판단 하에 블리어는 빼려고 했으나 그 순간 소리 없이 자신의 등을 끌어안는 작은 손에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멈췄다. 계속 안아달라는 듯 그녀는 저를 놓아주지 않았다. “…큿, 원하는 게 있으면 바로바로 말하십시오.” 갑자기 몰려드는 뻐근한 충동에 블리어는 인상이 절로 써졌다. 거칠어진 숨결이 렐리아의 쇄골부위를 훑었다. 이윽고 사내의 입술이 흔들리는 뽀얀 가슴위로 내려와 키스라도 하듯 섬세하게 입을 맞추었다. 혀로 감싸 올리며 그는 흐벅진 젖가슴을 물었다. 아이처럼 보드라운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갑작스런 가슴애무에 렐리아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신음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막았다. 제 위에 올라탄 그는 미지근한 체온과는 달리 태양아래 뜀박질을 하는 것처럼 뜨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색정적인 숨소리와 뜨겁게 닿는 숨결에 귓불이 자연스레 데워졌다. “신음…참지 않아도 됩니다.” 그때 또 한번 낮게 별러진 음성이 튀어나왔다. 흔들리는 시야 속에 살짝 흐트러진 새카만 머리를 한 남자가 들어왔다. 마구 흔들리는 자신과는 달리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올곧기만 했다. “나 혼자 즐기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렐리아는 여전히 입술을 꾹 깨물고서 작은 소리조차 새어나가지 않게 막았다. 소리를 내는 순간 수치스러울 것 같았다. 그의 등에 머물러있던 손을 거두고서 렐리아는 다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섹스중인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이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렐리아….” 그 회피성 행동에 블리어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쥐며 끌어내렸다. “나 좀 보십시오. 하, 흐읏… 왜 자꾸 피하려드는 겁니까….” 하자고 유혹하며 조를 때는 언제고 막상하게 되니 저 혼자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어딘가 불만족스러워서 이러나 싶어서 블리어는 답답함만 치밀었다. 역시 애무가 부족했다고 여긴 그는 매끄러운 흰 목을 따라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그곳뿐 아니라 입술이 닿는 몸 곳곳마다 세심히 키스를 이어갔다. 렐리아는 꼼짝 않고 잠자코 그의 애무를 받을 뿐이었다. 좋다 싫다는 말은커녕 신음소리 없이 잠잠했다. 그가 상당히 애무에 공을 들인다는 걸 알고 그저 공작은 애무를 길게 해야 꽂히는 타입인건가 싶었다. 일방적이고 한쪽만 열성적이었던 섹스는 곧 파정의 때를 맞이했다. “…하아…하.” 모든 걸 쥐어짜낸 후 잔뜩 거칠어진 숨소리가 블리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이제껏 여러 관계를 맺어왔었으나 이렇게 절정에 다다를 때까지 필사적인 섹스는 또 처음이었다. 숨소리를 단번에 정리한 후에도 블리어는 그녀위에서 여전히 내려오지 않았다. 그로선 만족시키기 위해 나름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으나 여자는 끝까지 좋다 싫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들썽거리는 숨을 정리한 후 홀로 일어나려하기에 그 어깨를 잡아 내리눌렀다. 어딜 가느냐고 묻듯 무뚝뚝한 태도였다. 렐리아는 저를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 우악스런 손을 우습다는 듯이 힐끗 쳐다볼 뿐이다. 당돌한 얼굴로 블리어를 올려다본 채 그녀는 입술을 이죽거렸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치곤 참으로 태연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미 한번 했잖아. 나 두 번은 안하는 성격인…,” “역시 나와의 섹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겁니까.” “그런 거 아냐. 진짜 기쁜데.” 이제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생각에 가슴속에선 절로 행복감이 넘쳐흘렀다. 렐리아는 마음 같아선 저와 관계를 가져준 그에게 백번 볼뽀뽀를 할 수 있을 정도라 여겼다. 물론 마음 같아선 그렇다는 얘기다. “공작 비켜. 나 돌아가서 샤워할거야.” “…….” “비키라니까? 아저씨, 비키시라고요.” 장난삼아 그의 팔을 툭툭 치고 있을 때였다. 렐리아는 갑작스레 제 입술을 틀어막는 습한 열기를 느꼈다. 뜨겁고 메마른 입술이 무작정 제 입술을 벌리려하자 렐리아는 홱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아 쫌! 정신 나갔어, 공작?” 하마터면 미쳤냐고 욕이 튀어나올 뻔했으나 렐리아는 최대한 걸러서 얘기했다. 이제 한번 했으니까 놓으라고 하는데도 공작은 안 놓아주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평소엔 찾아볼 수 없는 그 끈질김에 렐리아는 슬슬 인내가 바닥이 났다. 결국 힘으로 그의 손을 잡아떼어내고서 렐리아는 벌떡 나체상태로 몸을 일으켰다. 0089 / 0172 ---------------------------------------------- 진심과 가벼움 블리어는 무슨 여자가 손힘이 이렇게 세냐고 불만스런 눈초리를 했으나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토실한 엉덩이와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위에서 긴 푸른빛 머리가 찰랑거렸다. 뒤태가 참 요사스러운 여인은 당당하게 침대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돌아보았다. “됐고.” 렐리아는 가랑이사이가 찝찝해죽을 것만 같았지만 동시에 은인이기도 한 그에게 깔끔하게 씨익 웃었다. “해줘서 고맙고 이제 다 끝났어. 끝났다고!” “아직 안 끝났습니다.” 여전히 넓은 침대위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가 별안간 빠르게 팔을 뻗어왔다. 굵직한 팔뚝으로 잽싸게 낭창한 허리를 낚아채 다시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어정쩡하게 무너져 그에게 안긴 렐리아는 바로 옆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좀체 놔줄 생각을 안했다. 푹신한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형태가 됐음을 알아차리고서 렐리아는 바로 뱁새눈을 했다. 그와 중에도 베개를 양보해주는 공작 때문에 화도 못 내겠다. “아 진짜 뭔데. 나 돌아가서 씻을 거라니까, 공작?” “그대야말로 어딜 갑니까. 관계를 한 후 이렇게 남녀가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도 섹스에 포함됩니다.” “뭐?” “그러니 오늘밤은 내 침대에서 자고가십시오.” “그딴 게 어딨어.” 렐리아는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리를 얽매고 있는 굵다란 두 팔을 풀고서 다시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끈질기게도 팔이 따라붙었다. 놓치지 않겠다는 양 이번엔 단단히 허리를 휘감은 팔뚝이 또 한 번 저를 그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자고가라 하지 않습니까.” “씻고 싶다니까 그러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씻으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자고 노래를 불렀으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할 거 아닙니까.” “지금 찝찝하다고. 그리고 섹스 끝났는데 곧 죽어도 섹스타령하시겠다?” “섹스 후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아닙니까.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의미자체에 이것도 포함됩니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목욕하십시오.” 그리 말하는 그는 정말 저를 잠재울 속셈인지 이불을 끌어올렸다. 여전히 허리께에 머물러있는 팔은 풀어줄 생각이 없어 보여 렐리아는 이번만큼은 그에게 져주었다. 그가 사귀었던 애인만 해도 네 명이라고 했으니 아마 이성간의 관계를 맺은 횟수도 저보단 훨씬 많을 테고 실제로도 유연하게 일을 처리하기도 했었다. 이제껏 관계가 끝난 후 다 이런 식으로 여성과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유별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고맙기도 하고 하룻밤 같이 누워 자는 것뿐인데 이 정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다 여겼다. 하지만 렐리아는 사내의 품에 안겨있는 자세가 영 불편하기만 한지 미세하게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자리에 누웠을 그의 전 애인들도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불 꺼친 침실은 완전히 적막감으로만 가득 채워진 것 같았다. 잠자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으나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지척에 놓여있는 사내의 얼굴 때문일 테다. 거기에 이불 위로 훤히 드러난 근육질의 반라는 부담스러움을 가중시켰다. 그에 반해 나신인 제 허리를 휘어감아 뒤에 놓인 남자손은 무감정한 건지 태연한 건지 미동조차 없었다. 맨살에 고스란히 닿는 남자의 단단한 살갗에 렐리아는 기분이 이상했다. “잠이 안 오는 겁니까.” 그때, 그의 한쪽손이 허리 뒤에서 머리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용케도 저가 안 잔다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이윽고 뒷머리를 덮는 투박한 손바닥이 느긋하게 머릴 쓰다듬어주었다. 아이를 끌어안은 젊은 엄마가 어서 자라고 토닥여주듯이 썩 상냥한 손길이었다. “가끔 보면 말이야. 공작은 날 개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렐리아는 심드렁하게 눈앞에 위치한 남자얼굴을 응시하며 말했다. 깊이 감겨있던 그의 눈이 또렷한 눈매를 따라 소리 없이 떠졌다.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런 말을 하는 저의 의중을 묻는 듯 했다. “걸핏하면 집무실로 오라고 부르고, 요즘엔 머리 쓰다듬는 거 완전히 습관된 것 같고.” “제대로 여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참 다행이네. 암컷으로 봤으면 아주 소름이었을 뻔.” “여자로 보고 있으니 이리 관계를 맺은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암컷이 뭐냐는 듯이 그녀의 단어선택을 꼬집는 듯한 엄한 말투였다. 블리어는 그녀에게 꽂혀있던 시선을 천장으로 올곧이 옮겼다. 따라 돌려진 고개로 인해 어둠 속에서 날렵한 옆얼굴선이 더욱 또렷이 드러났다. “그래도 그대가 먼저 진솔하게 얘기해주었기에 이런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생각합니다. 난 제법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땠습니까.” 전혀 즐기지 못하던 그녀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건지 블리어는 조용히 물었다. 그러나 렐리아는 그의 말속에서 적절하지 못한 단어를 걸고 넘어질 뿐이다. “의미 있다니? 무슨 의미?” “서로 마음이 통해서 한 것이 아닙니까.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닙니까?” “오늘 건 한번 즐긴 거잖아.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자.” “왜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겁니까.” 서느렇게 검미를 찌푸리며 블리어는 다시 여인을 향해 고갤 돌렸다. 사뭇 진지해진 눈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어보였다. “섹스는 사랑의 마지막 단계라고, 그대가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놓고선 지금 와선 즐겼다는 걸로 결론을 내버리는 겁니까?” “아 오해가 있었던 거 같은데.” 예전에 저가 했던 말로 받아쳐올 줄은 몰랐기에 렐리아는 그의 눈을 피해 어두운 천장으로 고갤 돌렸다.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공작. 아까 내가 한말, 그거 그냥 인간적으로 좋다는 거였어.” “…….” “같이 있으면 편하고 적어도 심심하진 않으니까, 그냥 그렇다고. 공작을 찐하게 사랑해서 한 건 절대 아니라는 거야.” 일부러 오해하게 들리게끔 말했던 것은 싹 다 잊었는지 렐리아는 뻔뻔히 정정했다. 목적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한번 던져본 말이었는데 그가 응해줄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이런 태도가 불편했다. 돌아갈 입장이기에 더더욱. “나도 그렇습니다.” 그때 별안간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가 운을 뗐다. 고저 없이 잔잔한 파도 같은 목소리가 렐리아의 귀로 밀려들었다. “그대만 그리 생각한 게 아닌 나도 그리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나도 그대와 함께 있으면 편하고 적어도 심심하진 않습니다. 어쩌면 그대 때문에 심심하다는 말의 의미를 처음으로 알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블리어는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진심을 처음으로 드러내보였다. “좋아합니다.” 이제껏 블리어가 만나온 여인들은 렐리아에 비하면 한없이 하는 행동이 곱고 아름답다고 느껴질 만한 고귀한 여성들이었다. 또한 네 명의 애인들 모두 순결한 처녀였었다. 그녀들은 공비가 될 수 있다는 단꿈에 젖어 쉽사리 첫 경험을 허락했으나 결국엔 그와 헤어졌었다. 몸까지 합쳤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미묘하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당시 지극히 폐쇄적이었던 그는 한 침대위에 누군가와 함께 눕는다는 발상자체가 불가능했다. 사적인 개인공간에 남이 있으면 불편했다. 특히 여자 쪽에서 자신을 모든 것에 무심하고 드높 지위에 걸맞은 무거운 남자로 알고 있기에 쉽게 풀어질 수 없었다. 귀족으로서, 한 사내로서 자는 동안에도 예민한 구석을 숨기고 체면을 지켜야하는 것이다. 결혼 시작부터 독방생활을 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부터 블리어는 결혼상대의 수준을 낮춰가기 시작했다. 그저 한평생을 함께 살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편한 분위기의 여성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과욕에 의해 여자들이 일 년도 못가 바뀌어가길 여러 차례였다. 끝내는 보잘 것 없는 변두리지방 출신의 영애로까지 낮춰졌었다. 그녀마저 헤어지고 블리어는 올리아 공작가에서 먼저 정략혼을 제의해와 공녀와의 만남을 가졌었다. 청초한 외모에 생각이 깊으며 조신하던 여자였다. 처음 만난 자리가 썩 불편하지 않아 괜찮다고 생각했던 공녀는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제 뒤통수를 쳐버렸지만. 허나 지금와선 별 상관없는 것이 그 당시 이 여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공작인 자신을 만만한 남자취급을 하며 낮잡아보았던 게 렐리아 이 여자였다. 제 주제조차 모르고 날뛰던 여자. 하늘과 땅 같은 신분차이에도 아랑곳 않고 천박한 유혹을 해대던 여자. 미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겁 대가리를 상실한 여자였다. 처음엔 그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해 노기마저 치밀었으나 어느 순간 그녀에게 휘말려 본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저를 발견했다. 자신의 공간에 무단으로 침입해오던 여자. 밀어내도 밀어내도 악착같이 찾아오던 여자.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문을 잠근다는 발상조차 않고 그녀와 어울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러 번의 요철이 있었으나 그것마저 기름처럼 유연하게 미끄러져가던 여자였다. 특유의 능글맞음으로 끝내는 제 옆자리를 차지했다. 이 여자라면 적어도 여가생활을 함께 해도 불편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방에 있어도 혼자 있는 것처럼 편안하기만 한데 평생을 이렇게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식으로 관계를 이어나가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어느덧 진심이 되어 블리어의 가슴한편에 자리잡고 있었다. “나또한 인간적인 호감이 아직은 더 크나 그대가 좋습니다.” 블리어는 고개를 돌려 제 옆에 누워있는 렐리아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이 여자가 떠난다는 상상이 되지 않았다. 평생을 이렇게 뻔뻔하게 제 곁에 눌러앉아 희희낙락거려도 이 여자라면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원체 찰거머리처럼 끈질긴 여자이니 납득이 될 것만 같다. “그대가 바로 옆에 있어도 나는 불편하지 않습니다. 비단 나만의 생각이 아닐 거라 생각합니다.” “…….” “예전에도 말했다시피 그대는 말동무로 나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편안한 상대입니다. 곁에 두기엔, 이런 사소한 시간을 함께 보내기엔 그대만큼 적합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겁니다.” 잘만하면 그 절륜한 외모로 고위귀족의 첩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고 여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그 고위귀족이 자신이 되면서 새로이 직면해야 될 문제가 되어있었다. 이미 공식적인 애인사이로 자리 잡고 있으니 후실자리를 내주든 정실자리를 내주든 세간에선 그다지 놀랍지 않을 거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대로 계속 머무르십시오.” 허나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천장만 고집스레 쳐다볼 뿐 아까부터 쭉 말이 없었다. 베개 위에 흐트러진 은색머리칼을 옆에서 바라보다가 블리어는 조용히 손을 뻗어 정리해주었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도 할 일도 없잖습니까. 이보다 안락한 삶도 찾기 힘들 터, 안정적이게 이곳에 정착하는 건 어떻습니까. 자리를 내어줄 터이니 그 자리에 눌러앉으라는 소리입니다.” “그럴 일은 없을걸.” 낭랑하게 들려온 목소리에 블리어는 느긋한 손길을 멈추었다. 뒤늦게 렐리아가 돌아보자 그는 그녀 머리칼에 닿아있던 손을 거두었다. 렐리아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닿았던 눈길을 서둘러 거두어버렸다. 떨떠름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렐리아로서는 가볍게 농담조로 받아친 것인데 그가 너무 무거워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사소한 얘기도 진중하게 들리게끔 하는 그의 말투 때문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진심이었을 줄은 몰랐다. “미안. 난 여기서 계속 살 생각 없어.”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라면 그래도 됩니다. 지금 바로 결정하라는 소리는 아닙니다. 그저 언젠간 그대가 떠날 때가 됐을 때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고향에 갔다가 언제든 다시 돌아와도 되는 것이니…,” “아니.” 그는 계속해서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인 것 같았다. 이제 막 친구를 사귀어 이것저것 같이 어울리고 싶어 하는 마음과 닮았다. 그 마음을 이해 못할 리 없지만 렐리아는 모르는 척 부러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난 귀족 같은 거에 어울리지 않아. 뼛속부터 더러운 걸. 공작도 잘 알고 있잖아, 내가 어디서 굴러먹다 온 여자인지. 이제와 신분세탁하고 여기 눌러앉는다고 해도 제 버릇 개주겠어?” 이제껏 동고동락하며 지내오는 동안 그는 저를 혐오해마지 않던 사실마저 잊어버린 모양이다. 정이란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빨리 돌아가기 위해서 몸 굴린 자신이나 목적을 위해선 아무에게나 몸을 굴릴 수 있는 창부나 다를 바 없다. 아끼던 게임캐릭터를 이런 식으로 굴리긴 했지만 뭐 어떤가, 원래 제 몸도 아닌 것을. 자신은 그가 기억하는 천박한 타국의 성노리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렐리아는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이렇게 하면 그도 못내 포기하며 놓아줄 줄 알았다. “…그런 식의 논리라면 그대와 한번 즐겼던 나도 똑같이 더러운 게 아닙니까.” 허나 블리어는 되레 더욱 강하게 그녀를 붙잡았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고 성이라도 낼 듯이 눈매를 일그러뜨렸으나 뒤이어진 목소리는 노여움보다는 호소에 가까웠다. “우리가 무슨 더러운 일을 했습니까. 남부끄러운 짓을 했습니까?” 티 없이 깨끗한 피부는 눈처럼 고결하게만 느껴졌을 뿐이다. 불순하단 생각이 들었다면 그런 식으로 몸 곳곳에 입을 맞추지도 않았을 테다. 그 향기로운 품이, 어루만진 살결이 결코 더럽다고 생각한적 없다. 블리어는 반쯤 상체를 일으켜 세워 그녀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돌렸다. 이불 위로 드러난 희고 동그란 어깨를 쥐고서 렐리아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마십시오.” “뭘 그렇게 진지하게 반박해.” 피식 웃으며 렐리아는 김이 샌 반응을 보였다. 전부터 항상 느껴왔던 거지만 공작은 성격한번 참 좋다. 처음 다가갈 때가 어렵지 한번 마음을 허락하면 다 퍼줄 것 같은 사람이 그였다. 그리고 그가 처음 마음을 허락한 상대가 렐리아였으나 렐리아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려하지 조차 않았다. “이제까지 어떤 남자를 만나왔든 신경 안 씁니다. 나또한 여러 여자를 만나왔으니 이걸로 서로의 과거는 상쇄된 겁니다. 그러니 지금부터만 잘하십시오.” “그러니까 난,” “자리를 내줄 테니 이제부터 내게만 잘하면 되지 않습니까.” “말은 좋지. 사실을 얘기해줄까?” 렐리아는 웃었다. 영악한 장난을 칠 준비를 하는 악동처럼 조금 짓궂어 보이는 미소였다. “소피아한테 들었겠지만 나 요즘도 피임약 먹고 있어. 사실 생리불순 때문이란 거 거짓말이고 최근까지만 해도 남자랑 자고 다녔어.” 그 말에 작은 어깨를 쥐고 있던 그의 손힘이 저절로 풀리는 게 느껴졌다. 이에 그치지 않고 렐리아는 말뚝을 박았다. 허나 의도와는 다르게 엇나가서 아마도 그의 심장주변에 박히지 않았을까 싶다. “이래도 내가 좋다는 소리 나올까, 안 그럴걸? 나보다 참한 여자들이 수도에 널렸는데 왜 굳이 내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뭣하면 내가 중매서줘?” 렐리아는 완전히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온기가 빠져나간 빈손을 블리어는 말없이 거두었다. 뭐라고 더 붙잡지도 않고 그저 침대위에 몸을 뉘었다. 섣불리 깰 수 없는 무겁고도 단단한 침묵이 두 사람사이에 내려앉았다. 되는대로 지껄인 렐리아라고 해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조악하고 형편없는 쇠붙이로 질긴 줄을 가닥가닥 잘라내는 기분이었다. 강제로 정을 잘라낸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그가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리고 누운 채 렐리아는 숨소리를 죽였다. 오랜만에 이런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을 맛보는 것 같았다. 이대로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원래 세계에 도착해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렐리아는 돌아가더라도 아주 잠깐의 시간이 제게 주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차차 정을 끊어내고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자신이 없어지면 게임세상이 새로 초기화될지, 아니면 남은 세상은 계속 평화롭게 돌아가는 시스템인지는 몰라도 기왕이면 찝찝하지 않는 쪽이 좋았다. 이곳에 생활하면서 정이 들었던 소피아와 아럼프, 언니, 킬리, 그리고 공작. 그들은 단순히 정해진 시스템을 따라가는 NPC캐릭터라기 보단 어딘가에서 접속해있는 또 다른 유저가 아닌가 싶을 만큼 생동감이 있었다. 인간스러움을 표방한 NPC식의 정해진 흔한 반응이 아닌 가끔씩 예측 불가능한 반응이 나올 때면 신기했다. 심심이에게 ‘사실 프로그램 아니고 모니터링 하고 계신 알바죠?’하고 묻는 싶은 감정과 동일했다. 공작만 봐도 그렇다. 프로필상 철혈의 공작이라느니, 생김새만 본다면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냉혈한일 텐데 디저트를 입에 달고 살만큼 단 걸 좋아하고 너그러울 땐 아주 너그럽다. 한 달하고도 반이란 시간이 결코 짧지만은 않은 시간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한낱 게임캐릭터에게 정주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했는데 이대로 현실세계로 돌아간다면 이들이 문득문득 떠오를 것만 같다. 모니터 밖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입장에 됐을 땐 어떤 기분일까 싶으니 약간은 입맛이 썼다. 렐리아는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느라 그날 밤 편히 잠들지 못했다. 0090 / 0172 ---------------------------------------------- 진심과 가벼움 고요한 새벽, 블리어는 잠이 덜 깬 채로 옆자리로 돌아누웠다. 포근하고 매끄러운 이불이 쓸려 내려가 거친 훈련을 통해 다져진 등 근육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잠결에도 문득 가는 허리를 휘감아보려 팔을 움직였다. 굵은 팔뚝이 옆자리를 쓸었으나 그의 왼팔에는 서느런 온도만이 그러모아져 끌어 안겼다. 블리어는 깊게 감긴 눈을 떴다. 옆에 누워있을 거라 여겼던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그녀가 베었던 베개만이 남아있었다. 텅 비어있는 옆자리는 단 한 번도 제 침대위에 누군가의 자리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그로서는 당연하기만 했다. 당연할 텐데도 알 수 없는 허무감이 들었다. 세상물정 모르고 편안히 잠들어있는 여자얼굴이라도 볼 줄 알았던가. 겨울이 채 덜 가셔 흔적처럼 남아있는 찬 공기가 호화로운 방안에 부유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이 넉넉한 공간이 문득 허전하단 느낌을 받았다. 푸른 어스름이 가득 찬 방풍경을 바라보다 블리어는 짙은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여전히 그의 왼팔은 차갑게 식은 옆자리에 놓여있었다. * * * 칠흑과도 같은 검은 세상이었다. 눈을 굴려 둘러본 결과 위도 아래도 옆도 없는 말 그대로 새까만 공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몸조차 암흑 속에 먹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처럼 귓가로 서서히 실려오는 작은 소리가 있었다. 아득하고도 환각처럼 몽롱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소리였다. ‘여긴 어디지’ 하는 생각보다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그 소리에 ‘대체 무슨 소리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제…나눈…의사…말씀…” “…가망이 없진…기다리는…” 그 목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다가 점차 가까이, 가까이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익숙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물이 날 만큼 그립고 그리운 목소리였다. “…정년퇴직…버텨봐야지. 걱정 말고…태화나 잘…” “…그래도…내가 병실 지킬 테니까…이제 가봐…” “…전화는…형이 이번에……그래서……” “…어머님께서…전화한…아주버님도 잠깐 들르신다고…” 이십사 년간, 평생을 귀에 익어온 목소리는 다름 아닌 엄마아빠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태화는 형체 없는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목소리가 안 나와서 속으로 악을 지르듯이 불렀다. 그 발버둥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점차 검은 천장이 가늘게 벌어져만 갔다. 그 얇은 틈새로 실낱같은 빛줄기가 쏘아져오더니 이윽고 서서히 부채꼴모양으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래. 좀 고생해줘.” “고생은. 아주버님께는…” 새하얀 천장 중앙에 걸린 형광등이 가장먼저 보였다. 흐릿흐릿했지만 조금씩 시야가 또렷해져가자 살짝 시선을 내렸다. 하얀색 블라인드와 침대 주위에 반쯤 처진 커튼, 베이지색의 벽지에 걸린 시계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위에서 들려오는 삑, 삑하고 반복적인 기계음에 살짝 눈알을 위로 굴렸다. 생전 처음 보는 하얀 기계들이 머리주위를 에워쌌다. 은 막대기에 걸린 투명한 링거팩이 그나마 익숙했는데 아주 뒤늦게 저가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태화는 익숙지 않은 장소에 조금 정신이 사나웠지만 반쯤 쳐진 커튼너머를 집요하게 응시했다. 저곳너머에서 바로 엄마아빠가 있는 것 같았다. 허나 몸이 움직여지기는커녕 입술만 살짝 뻐끔거려 질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속은 거멓게 타들어갔다. 이러다 엄마아빠가 갈까봐 힘겹게 쥐어짜듯이 “엄…마”하고 소리를 낼 때였다. 커튼 사이로 엄마의 반쪽얼굴이 보였다. 중환자실을 나서는 아빠를 향해 고개를 돌린 채 어서가보란 듯이 손을 휘젓다가 뒤늦게 엄마는 자신을 향해 고개를 내렸다. 마침내 눈이 마주친 순간, 엄마의 눈이 크게 떠졌다. 생전처음 보는 하얗게 질린 낯으로 엄마는 비명을 지를 듯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곧바로 몸을 부르르 떠셨다. 아연실색한 낯으로 엄마는 다시 커튼 밖으로 달려 나가셨다. “태화아빠!!” 안 그래도 좁은 방안이라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마치 누가 죽어나간 것처럼 찢어질 듯한 목소리에 바로 크게 문이 열어젖혀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태화가…우리, 태화가…깨어났어.” 커튼 사이로 보이는 엄마는 보는 자신마저 울컥할 만큼 왈칵왈칵 눈물을 쏟으셨다. 서글픔보다는 감격과 기쁨으로 얼룩진 눈물이었다. 그런 엄마를 지나쳐 혼비백산해서 달려온 아빠의 모습이 곧 커튼너머로 보였다. 아빠가 아닌 줄 알았다. 오랜만에 보는 것치곤 너무 많이 핼쑥해보였다. 한 일 년은 어디 해외에 나가서 고생하신 것처럼 그런 꾀죄죄한 모습이셨다. 얼마나 오랫동안 면도를 안 하신 건지 까칠까칠한 턱수염이 아빠 입주위에 지저분하게 자라나있었다. 눈가는 푹 패었고 그간의 고생을 보여주듯이 인중과 입술이 거뭇거뭇했다. “…태화야.” 아빠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실핏줄이 선 눈동자 위로 물기가 돌았다. 목이 메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괴로운 표정을 지으시다 침대로 바짝 다가와 저를 안아주었다. “고맙다…고마워…너무 고마워.” 거의 무릎을 꿇다시피 침대 옆에 주저앉아서 아빠가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살아나줘서 고맙다는 말이겠지만 태화는 돌아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들렸다. 한동안 아빠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다가 눈물을 닦고 힘겹게 일어나서는 엄마를 부축했다. 그러곤 엄마를 제 옆에 앉히시고 바로 담당의사를 부르러 뛰쳐나가셨다. 아빠가 나간동안 방안은 말 그대로 울음바다였다. 한평생 이렇게 엄마가 눈물을 쏟는 모습을 본적이 없어서 괜히 태화의 눈에서도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타고 흘러내렸다.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들었다. 여전히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안 움직여서 답답한데 엄마까지 눈앞에서 울고 계시니 더 답답했다.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고, 왜 우냐고 말을 걸고 싶은데 외려 엄마가 제 눈물을 닦아주며 저를 다독여주었다. 따스한 손 온기가 뺨과 관자놀이를 쓸어 만져주었다. 뒤늦게 엄마도 눈물을 그치고 활짝 웃으셨다. 너무 환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려 되레 팔자주름이 펴지지 않을까 싶을 만큼. 하지만 눈가는 여전히 심하게 운 흔적이 남아 붉었다. “답답하지? 조금만 참아. 의사선생님 곧 오실 테니까 인공호흡기는 끼고 있자.” 엄마는 계속 혼자 말했지만 이렇게 말을 걸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모양이셨다. 우실 때도 감사하다고 감사하다고 연방 중얼거리셨는데 오죽 하실까. 그런 엄마를 올려다보는 동안 태화는 어떻게든 말이 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말을 걸고 싶어서 무리를 해서 한자 한자 힘을 주어 소리를 냈다. “보고…싶었…어.” “무리해서 말하지 마. 목이 바로바로 쉬네.” 지독한 감기에 걸린 후에 나는 쉰 소리 수준이었지만 엄마는 제대로 들은 것 같았다. “할 말 많은 거 엄마도 알아. 근데 목 아프니까…” 걱정스럽게 뺨을 쓸어 만져주는 엄마의 손길에 왠지 열 살짜리 애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다정한 사람이 아닌데 신기하기도 하고, 투정부려볼까 싶기도 하고, 얼른 엄마랑 건강하게 떠들고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다. “선생님 오시면 물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볼게. 이제 밥도 먹고…그래야지. 깁스 풀면 앉아서 혼자 밥도 먹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하고…” 엄마의 말에 그제야 전신 깁스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왜 꼼짝을 못하나 싶었는데 목과 양팔, 양다리는 물론 가슴부터 골반까지는 아예 통으로 깁스를 해서 상체조차 들지 못했다. 하지만 사지 멀쩡한 몸이 아니어도 너무나도 행복했다. 어디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이곳에 돌아왔다는 사실에 너무나도 행복했다.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꿈같아서 그런지 점차 노곤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기 무섭게 쏟아져오는 졸음에 엄마가 잠깐 눈을 붙이라며 이마를 따라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었다. ‘엄마 나 열심히 살 거야. 진짜로, 진짜로…. 매일 말만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젠 정말 정신 차리고 살게. 좋은 곳에 취직해서 엄마아빠 호강시켜드릴게. 오늘부터 진짜 좋은 딸 될게.’ 아직 못한 말이 한가득 이었다. 이대로 잠들기 싫었다. 좀 더 엄마얼굴을 보고 싶고 아빠가 오면 아빠얼굴도 더 자세히 보고 싶다. ‘진작 좀 착한 딸 될 걸 그랬나봐.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엄마아빠밖에 생각 안 났어. 고작해야 한달 반인데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이 세상, 부모님, 친구들…, 다 너무 그리웠어. 친구들도 만나러 가야하는데… 일어나면 가장 뭐 부터하지. 된장국 먹고 싶다, 집반찬도.’ 가장 먼저 뭘 해야 할지는 오래전부터 정해놓은 상태였다. 게임 속 세상에 있으면서 줄곧 미련처럼 마음속에 담아두었었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엄마아빠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진짜 너무 보고 싶었다고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기 무섭게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렐리아는 눈을 떴다. 눈꼬리를 따라 물방울이 미끄러져내려 베개 위를 적셨다. 밀려오는 현실감에 얼떨떨해져 렐리아는 조용히 눈만 감았다 떴다. 익숙하지만 보고 싶지 않은 화려한 천장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가 흐려졌다가를 반복했다. 낮인지 창가로 쏘아져 들어오는 빛이 너무나도 밝았다. 돌아간 게 아니었나. 방금 뭐였지. 왜 내가 다시 여기에 있지…. 현재 보이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한 채 침대위에 누워 있다가 렐리아는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노크소리에 흠칫, 상념에서 벗어났다. 0091 / 0172 ---------------------------------------------- 진심과 가벼움 “일어나셨어요?”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소피아가 작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늘 늦게 아침식사를 먹으니 오늘도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샌드위치와 크림스프를 준비해왔다. 렐리아는 쟁반 위에 놓인 그것들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차츰 현실감을 되찾았다. 어젯밤 공작과 관계를 가졌었다. 그의 침대위에 누워있는 동안 하도 잠이 안와서 어두운 새벽에 몰래 방으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샤워를 하고 누워 잔 것까지가 기억의 전부였다. ‘아직…인건가.’ 돌아갔다가 다시 온 건지, 아니면 단순히 현실반영에 철저한 꿈이었는지 아직도 잘은 분간이 안 갔다. 하지만 렐리아는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제 들은 건데요. 장미수로 세안하면 피부에 좋대요. 오늘은 장미수로 세숫물 받아드릴게요.” “소피아.” “네? 왜 그러세요?”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해맑게 저를 바라보는 소피아에게서 등을 돌린 채 누웠다. 렐리아는 이불을 머리까지 끌어올렸다. “나 혼자 씻고 알아서할 테니까 나가.” “…네?” “나가달라고.” 지극히 담담한 목소리였다. 소피아는 그 말에 당황했다. 평소 다정하고 장난스러우셨던 분이었기에 더더욱 저런 분위기를 읽어내기 힘든 것이다. 공작님께 뒤에서 몰래 보고 드린다는 걸 아신 걸까. 소심한 성격답게 질레 찔려버린 소피아는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뒤늦게 고개를 숙이고 시무룩하게 밖으로 나섰다. 홀로 방안에 남은 렐리아는 그제야 몸을 일으켜 소피아가 두고 간 음식을 맛보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이 늦은 조식을 먹는 동안 소피아는 옆에 앉아 간식을 먹거나 가볍게 방안 정리를 하며 수다를 떨었기에 한시도 조용할 겨를이 없었다. 이제껏 늘 화기애애해서 그런지 이런 침묵이 더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렐리아는 차차 적응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혼자 지내며 미련이 될 만한 것들을 정리해갈 생각이었다. ‘근데 맛 왜 이래. 요리사 바뀌었나.’ 렐리아는 반쯤 베어 먹은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스프로 옮겼으나 결국 몇 스푼 뜨다가 말았다. 평소엔 맛만 좋았는데 오늘따라 음식 맛이 별로였다. * “절교하자.” 오늘도 저를 찾아와준 하나뿐인 친구를 향해 가장먼저 꺼낸 말은 이것이었다. 렐리아는 무심하게 찻잔을 내려다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맞은편에 놓인 찻잔안의 찻물도 전혀 줄지 않았다. 아럼프는 차를 마실 생각조차 없어보였다. 그만큼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애쓰듯이 미소 짓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장난이 하고 싶은 거야?” “장난 아니고 진담이야.” 렐리아는 눈을 내리깔아 고집스럽게 찻잔 테두리를 응시했다. “솔직히 남자여자 사이에 친구가 어딨어. 앞으로는 이렇게 찾아오는 것도 그만해줬음 해.” “내가 뭘 잘못한 거야?” “아니.” “그럼 대체 왜…그런 말을 하는 거야?” “딱히 네가 뭘 잘못한 건 아니야.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게 잘못된 거지.” “우리가 만나는 게 왜 잘못인데? 렐리아, 난 네 말이 이해가 안가. 갑작스럽기도 하고 혼란스러워서 받아들일 수 없어.” 아럼프는 습관처럼 웃고 있었지만 휘어 올린 입가가 사그라지는 게 보였다. 화려하게 타올랐다가 전부 연소되어 차츰 줄어드는 불길같이 애처로운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그와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까놓고 말하자면 내가 곤란해.” “곤란하다니?” “말 그대로야. 너 때문에 내 입장이 곤란하다고. 자꾸 방에 남자 데려온다고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암만 친구래도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그럼 여장해서 찾아올까.”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렐리아, 난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옅은 미소가 서서히 거둬지더니 이윽고 아럼프는 흐릿한 얼굴로 티테이블 위를 내려다보았다. 비라도 내릴 듯이 분위기는 우중충했다. “그런 식으로 말해도 하루아침에 받아들일 수는 없잖아.” "그럼 오늘부터 꾸준히 말할 테니까 그렇게 알던가." “방으로 직접 찾아오지 않을게. 밖에서 몰래 만나면 되잖아?" “밖에서 몰래 만나다 누구한테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쪽이 더 수상한데.” 렐리아의 반박에 아럼프는 더 이상 할 말을 잃고서 입술만 지그시 깨물었다. 불편한 침묵이 둘 사이로 흘렀다. 그가 말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자 렐리아는 기다려주는 것 없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디가?” 곧바로 아럼프가 손을 뻗어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얘기를 나누길 원하는 것 같았으나 렐리아는 그 손을 가볍게 쳐냈다. “다른 친구랑 약속. 아무튼 내일부터는 찾아오지 마.” 태연한 목소리로 렐리아는 그에게 잘 돌아가는 인사까지 남기고 방밖을 나섰다. 문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렐리아의 입에선 짧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차마 아럼프한테 미안해서라도 다음부터는 얼굴을 못 보겠다. ‘그래도 뭐.’ 렐리아는 후회하지 않았다. 돌아간 후 평생 못 볼 인연이라면 이렇게 절교를 선언하는 편이 서로에게 나았다. 유리된 세계에 동떨어져있는 기분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시스템상 떠날 준비가 되었다 판단하면 클리어 화면창이 뜨는 건지, 아니면 게임세계에 저를 처넣은 그 신이란 작자가 다시 나타나는 건진 몰라도 렐리아는 언제든 돌아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언니는 일방적으로 연락을 안 하면 자연스레 연락이 끊길 사이고, 킬리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건 역시 공작이려나.’ 발걸음은 집무실로 향했으나 막상 그의 얼굴을 보기가 껄끄러웠다. 마음 같아선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두고 떠나고는 싶지만 역시 이제까지 저를 먹여주고 재워줬던 그에겐 매정하게 그러고 싶진 않았다. * 렐리아는 대뜸 집무실로 찾아왔다. 오후부터 업무 중이던 블리어는 이 시간에 난입한 불청객이 누군지 굳이 확인하려하지 않았다. 위의를 갖춘 채 그저 단정하고 오만하게 내리깔아진 녹안은 서류에만 꽂혀져 미동조차 않았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제 일만 묵묵하게 처리해나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렐리아도 미동 없이 서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지 않음에 더 마음이 편했다. 말을 꺼내기에도, 그를 바라보기에도. “나 오늘 나갈게.” 유연하고 매끄럽게 글씨를 새겨 넣던 그의 굵은 손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까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서 고맙다고.” 렐리아는 흔들림 없이 태연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대리석바닥에 붙어있던 두 다리를 움직였다. 뚜벅뚜벅 점차 크게 들려오는 발소리에도 불구하고 블리어는 시선을 서류 위에 고정해두었다. 그 모습이 무관심하고 매정해 보인다기보단 고집스러워 보였다. 그렇게 조신하라 일러두었는데도 다시 호걸처럼 큰 발소리를 내고 있었다. 늦은 밤 함께 방안을 거닐며 걷는 연습을 했던 기억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블리어는 그 기억의 여운을 곱씹으며 긴 침묵을 지키다가 책상위로 툭 던져진 묵직한 주머니에 주목했다. “이거,” 선뜻 말을 꺼내기가 어려워 렐리아는 한번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동안 모은 돈이야.” “필요 없습니다.” “더러워서 먹고 떨어져라 주는 돈 아니거든? 고마워서 주는 거야.” 그가 불퉁하게 받아쳐올 줄은 몰랐던 탓에 렐리아는 괜히 울컥 곤두서버렸다. 여전히 시선이 마주치지 않은 상태에서 렐리아는 무겁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생각보다 가벼운 목소리가 기름이라도 바른 듯 매끄럽게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그럼 잘 지내. 공작.” 한 발을 떼기 무섭게 동시에 뒤에서 저를 붙잡는 무거운 음성이 있었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여보십시오.” “한 발자국 움직이면 뭐?” “계약위반입니다. 앞으로 사 개월 반 남았습니다.” “그거 그때까지는 나가라고 기간 정해둔 거였잖아. 내가 그때까지 산다고는 안했거든?” 렐리아의 얄미운 반박에 블리어는 쾅 소리가 날만큼 책상을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흉흉한 기세에 렐리아는 솔직히 말해 조금 뜨끔했다. 오후의 노란 햇살을 집어삼키고도 남는 칠흑 같은 머리칼아래 무감정하게 굳은 사내얼굴이 드러났다. 항상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주었으나 오늘만큼 강렬한 매서움을 풍긴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말없이 제게 걸어왔다. 거의 코앞에 다가와서야 걸음을 멈춘 그가 바로 가는 팔을 휘어잡았다. 렐리아는 어정쩡하게 그에게 팔목이 잡힌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쭈, 못나가게 날 막으시겠다?” “막아도 어떤 식으로든 빠져나갈 그대를 뭔 수로 막겠습니까.” 블리어는 냉정하게 받아쳤으나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만큼은 유달리 뜨거웠다. 그 상반된 온도에 내부에서 무슨 변화라도 일어났는지 뒤이어 미지근한 목소리가 그의 입매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러니 이것만 약속하십시오. 양심 걸고, 아니 그대에게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뭐?” “한달. 더도 말고 한달만 더 있으십시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그 사이에는 말없이 사라지지 않겠다고 그 이름을 걸고 맹세하십시오. 그 이름도 가명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그대에게 걸 거라곤 그것밖에 더 있겠습니까.” 실소를 흘릴 듯이 가벼운 어조였으나 그의 목소리에 깔린 감정은 씁쓸함이었다. 렐리아도 눈치 챌 만큼 지독히도 썼다. “나도 감정을 느끼는 인간입니다. 옆에 있던 인간이 갑자기 사라지면 걱정되는 게 당연하고 허전함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내 쪽에서도 정리할 시간을 달라는 겁니다.” 블리어는 그녀의 팔을 쥐었던 손을 서서히 놓아주었다. 고의적이라기 보단 손힘이 풀림에 따라 자연스레 그리되었다. 그는 렐리아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 작은 입술에서 무슨 대답이 흘러나올지 잔뜩 긴장한 사람처럼 살짝 시선을 내리깔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돈 해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알겠어.” 렐리아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역시 이래서 공작과는 얼굴을 직접 대면해선 안 되겠구나 싶었다. 강단 있게 자르고 나가려했으나 그 결심은 오 분도 지나지 않아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0092 / 0172 ---------------------------------------------- 진심과 가벼움 다음날 점심이 조금지난 시각 아럼프가 찾아왔지만 들여보내주지 않았다. 아예 문을 잠그고서 소피아조차 만나주지 않았다. 방 청소는 혼자서도 알아서 할 수 있는 거고 어차피 침대 위에 하루 종일 누워있을 거라 치울 거리도 없었다. 매 끼니때마다 식사나 문 앞에 두고 가라고 일러두었을 뿐이다. 개인욕실과 화장실이 방과 이어져있기에 딱히 불편한 점도 없었다. 렐리아는 그날 반나절을 자는데 소비했다. 자면 어김없이 엄마와 아빠가 나왔기에 이게 꿈이어도 현실처럼 행복했던 탓이다. 이제 곧 만나게 될 부모님을 생각하면 마음이 절로 벅차올랐다. 스스로를 감금한 채 방안에 틀어박혀있기를 약 스무 시간째였다. 렐리아는 희미한 인기척에 잠에서 깼다. 정확히 문밖에서 들려온 발소리 때문이었다. 눈을 다시 감았을 때가 한낮이었는데 이미 창밖이 깜깜해진 늦은 밤이 되어있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라면 소피아 밖에 없었다. 렐리아는 어두운 방 천장을 바라보다가 모른 채 눈을 감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철컥하고 매끄럽게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렐리아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눈썹만 움찔했다. 방문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집주인과 소피아뿐일 텐데 어째 소피아라고 하기엔 발소리가 낮고 무거웠다. 무엇보다 그 정갈한 발소리는 상당히 귀에 익을 만큼 익숙했다. 렐리아는 공작이 제 방에 들어왔음을 눈치 챘으나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었다. 보나마나 저가 야반도주를 했을까봐 확인하러 온 것일 테다. 저가 잠들었다는 걸 확인하면 다시 나가겠지 싶었다. 그러나 나가야될 인간은 나가지 않았고 오히려 침대 옆에서 천이 스치는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육중한 성인남성이 침대위로 올라와 움직이는 게 여실히 시트를 통해 전해져왔다. ‘…뭐야.’ 렐리아는 눈을 뜰까 싶었으나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설마 제 몸을 탐하려고 온 건가 싶으니 약간 몸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공작이 자는 사람을 건드릴 리는 없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역시나 아무 짓도 안하는 구나 싶어 안심하려던 찰나였다. 렐리아는 왼손 손목에서 느껴지는 가느다란 줄의 감촉을 느꼈다. 몇 번 단단한 손가락이 스치더니 이윽고 제 손목을 피가 통하는 정도로 느슨하게 묶기에 이르렀다. 왼쪽손목을 포박한 줄에 렐리아는 속으로 기함해버렸다. 알고 있던 청렴한 공작의 이미지가 산산이 부서지고도 남았다. 무슨 변태플레이를 하려는 건가 싶어서 잔뜩 예민하게 오감을 세우고서 집중할 때였다. 배꼽 위치에 머물러있던 이불이 스르륵 쓸려 올라오더니 목 아래에서 멈추는 게 느껴졌다. 그 뒤론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숨 막힐 듯한 적막감만이 넓은 공간에 가득 채워지자 렐리아는 되레 불안했다. 이것이 함정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눈을 뜨면 왠지 검은머리의 무표정한 남자가 저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지금 눈이 마주치면 굉장히 얼쯤할 것 같아 렐리아는 약간 시간이 흐른 뒤에 슬쩍 눈을 떴다. 가늘게 떠올린 시야에는 다행히 공작의 얼굴이 들어오지 않았다. 물론 옆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기에 렐리아는 조용히 왼쪽으로 고갤 돌렸다. 쥐 죽은 듯이 고요한 평온이 깔린 그의 잠든 옆얼굴이 보였다. 미리 씻고 온 건지 이마위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에 습한 윤기가 돌았다. 렐리아는 다시 눈을 굴려 침대시트 위를 바라보았다. 하얀 노끈으로 묶인 가느다란 손목이 보이고 그 옆에 나란히 놓인 거친 남자손이 보였다. 굵다란 뼈가 드러난 손목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노끈이 묶여있었다. 그걸 확인하기 무섭게 렐리아는 허,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손목을 묶고 자다니 어지간히도 신뢰가 바닥인 모양이었다. 역시 자신을 못 믿는 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이 뭐길래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상반된 생각이 들었다. 렐리아는 베개조차 베지 않고 잠이 든 블리어를 바라보았다. 불편할 텐데도 그는 안심하고 잠이 든 사람처럼 상당히 깊고 평안하게 잠들어있었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었다.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있어도 저를 건드릴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니 이성적인 것보단 인간적으로 더 많이 좋아하는 모양이다. ‘공작은 내가 왜 좋은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천에 널린 게 미인이고 외모뿐 아니라 마음씨도 곱고 현명하기까지 한 신붓감들이 그의 주변에 널렸을 텐데 왜 굳이 자신인지 모르겠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남자인 친구들에게조차 너무 편하게 여겨지던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라고 해서 짝사랑을 한 번도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중학교 때 딱 한번 짝사랑이란 걸 해본 적이 있었다. 한때 학생들 사이에서 열풍이었던 게임 드래곤 아르카이샤를 하며 친해졌던 반 남자애. 키가 크고 운동을 잘하고 우등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툭툭 팔장난을 치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등의 은근한 스킨십이 뭐라고 설렜었다. 3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체육시간에 다른 애들보다 일찍 반에 들어가려다가 먼저 와있던 남자애들의 대화를 훔쳐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다솜이? 걔 뭔가 작아서 귀여…, 어 귀여워.’ ‘오오오올!! 사겨라! 사겨라!’ ‘솔직히…남이 봐도 예쁘잖아. 남친 있을 것 같은데.’ ‘그럼 이태화는?’ ‘걔는 그냥 머리 기른 남자애 같아.’ ‘킥킥킥, 머리 기른 남자래! 킥킥 개웃기네!’ ‘솔직히 이태화는 아니지. 존나 겜 밖에 모르던데. 걍 겜친구니까 어울리는 거.’ 우연히 들은 그 말에 사춘기시절 괜스레 마음의 상처를 입음과 동시에 당연하게도 그 남자애를 좋아하던 마음을 접었다. 그 대신 다솜이를 좋아하게 됐다. 사랑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우정에 한해서였지만 그 감정은 몹시 컸다. 제게 결여된 모든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였다. 키가 작고 동글동글한 얼굴에, 살짝 쌍꺼풀이 져 동그란 눈과 오뚝한 코, 작은 입술, 거기에 모든 남자애들이 좋아할 만큼 성격이 밝고 귀여웠다. 그 친구를 좋아하면 좋아할수록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됐다. 그리고 다솜이는 그 남자애를 좋아했다. 자신이 마음을 숨길 때 다솜이는 드러냈다. 주위 여자친구들도 다솜이와 그 남자애를 밀어주는 눈치였기에 섣불러 드러낼 수도 없었다지만. ‘근데 태화 너도 걔 좋아하지 않냐? 딱 봐도 티 나던데.’ ‘뭐어어? 설마?! 태화도?’ ‘뭐야 이태화. 진짜 걔 좋아함?’ ‘아~ 그랬남? 그랬어도 다 예전이지 예전.’ ‘아큭큭큭 미친, 이태화 능글맞은 거봐.’ 간혹 이런 식으로 말이 나오면 전부 가벼운 장난으로 치부되었다. 아무도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을 뿐더러 나 자신도 진지하게 굴지 못했다. 겨울방학 전 크리스마스이브 날, 단짝친구로서 다솜이의 고백을 도왔다. 그전부터 다솜이에게 마음이 있어 보였던 남자애는 당연히 그 고백을 받아주었다. 둘이 사귀고 얼마안가 셋이서 피자가게에 간 기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거길 왜 따라갔나 싶다지만. 원래 자기가 먼저 고백하려고 했다, 2학기 때부터 줄곧 마음이 있었다 둥의 남자애 얘기를 들으며 피자를 먹었었다. 속이 안 좋아서 먼저 간다든가, 다른 약속 있어서 먼저 간다든가 하는 핑계를 대며 자리를 박차고 싶었으나 차마 티가 날까 거짓말도 못하고 피자만 꾸역꾸역 먹었었다. 그때 알았다. 아직도 그 남자애를 좋아하는 마음을 못 버렸구나 하고 말이다. 고등학생이 되고 머리를 잘랐다. 적어도 머리 긴 남자소리는 듣지 않겠지 싶어서 후련했다. 다솜이와는 다른 고등학교로 배정받게 되어 떨어지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는 무더운 여름에 다솜이와 오랜만에 만났고, 그날 그 남자애와 헤어졌다는 얘길 듣게 되었다. 다솜이 대신 내가 그 남자애 옆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더 오래가진 않았을까? 이런 멍청한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자기 스스로를 잘 알았고 다솜이 정도의 레벨에는 아예 끼지 못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은 다솜이가 더 좋으니까. 다솜이가 그 남자애와 연락할 시간에 자신과 연락하고, 그 남자애를 만날 시간에 자신과 만나준다는 것에 그저 기뻤다. 기쁜 척했다. 다솜이는 성인이 될 때까지도 연락하는 중학교 친구 중 한명이었다. 기억하기로는 지금은 그 남자애보다 훨씬 더 괜찮은 남자와 만나 삼 년 넘게 연애중인 걸로 안다. 다솜이는 전화통화를 할 때마다 제게 남자친구에 대해 꾸준히 자랑했다. 남자친구가 오늘은 뭘 해줬네, 오늘은 어딜 갔네, 오늘은…, 그리고 그 마지막은 태화야 너도 게임만 하지 말고 남자 좀 사겨봐 하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때마다 웃으며 대답했다. 어차피 남자 따위에 관심 없으니 게임만 할 거라고. 평생 게임만 하다 늙어죽을 거라느니 하는 말은 어느새 입에 달라붙어 기계적으로 흘러나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자신은 이런 여자가 되어있었다. 머리긴 남자. 그 우스갯소리는 어쩌면 저라는 인간을 정확히 꿰뚫어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말이 사춘기소녀를 백팔십도 달라지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한들 이제와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단순히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못생긴 여자애도 못생긴 남자애와 연애는 하니까. 자신의 성격에 있는 어느 결함에 의해서 스물넷이나 먹도록 연애한번 못 해본거구나 넘겨짚을 뿐이다. 귀엽고 예쁜 건 저와 선천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 후로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이 남자가 조금 눈에 밟혔다. 렐리아는 숨소리를 죽인 채 눈앞의 남자의 옆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와서 별다른 감정이나 관심을 가진다한들 우스울 뿐이었다. 그는 게임속 인간이고 자신은 현실속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남을 것이고 자신은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0093 / 0172 ---------------------------------------------- 진심과 가벼움 며칠 새 추위가 완전히 누그러지고 왕도는 봄에 한발짝 들어섰다. 풋풋한 싹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초봄 날씨에도 렐리아는 여전히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안에만 있었다. 밖에 나가질 않으니 바깥 날씨 따위 알리 만무한 것이다. 소피아는 그녀를 걱정해 매일 식사를 문 앞에 놓고서 한참을 얼쩡거렸으나 렐리아는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었다. 매일같이 아럼프가 찾아와 장장 한 시간동안 문을 두드리고 그녈 불렀으나 렐리아는 귀를 막고 잠을 청했다. 이런 생활이 이어지는 동안 블리어의 이상행동도 덩달아 이어졌다. 매일 밤만 되면 무단출입을 해오는 남자를 알면서도 렐리아는 잠든 척했다. 그렇기에 눈이 마주칠 일도, 말을 나눌 일도 없었다. 늦은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옆자리는 누운 흔적 없이 깨끗이 비워져있었고 덩달아 왼쪽손목을 묶고 있던 노끈도 사라져있었다. ‘오늘도 오려나.’ 렐리아는 어둑어둑해진 방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오든 말든 저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옆에 누웠다가 가는 것 정도고 그와 저 사이에 우려할만한 일이 일어날 리도 없었다. 그렇게 태연한 마음으로 반쯤 잠에 취해있을 무렵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철컥, 하고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최대한 죽인 듯한 무거운 발소리를 뒤로하고 그가 침대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항상 그래왔듯이 렐리아는 자는 척을 했다. 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거칠었다. ‘뛰어왔나.’ 렐리아는 그 소리에 약간 신경이 쓰였지만 눈을 뜨진 않았다. 하지만 들뜬 숨소리가 누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술이라도 마신 건지, 아니면 흥분제라도 섭취한 건지 그답지 않게 들썽거리는 숨이 컸다. 어디서 다쳐온 거대한 맹수가 으르대며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것처럼 안쓰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외면하지 못한 채 렐리아는 슬쩍 눈을 떠 왼편을 응시했다. 이불도 덮지 않고 제 옆자리에 뻗다시피 누워있는 남자가 훤히 드러났다. 백지장처럼 고귀한 흰빛의 얼굴이 어딘가 파리해보였다. 대비되는 검은머리 때문에 더 그래보였다. 그답지 않게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연방 뜨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메마른 열사의 땅에서 헤매는 여행자처럼 수분이 잔뜩 증발돼있었다. “뭐야, 공작 아파?!” 제 목소리가 너무 컸는지 조각을 맞춘 것처럼 완벽하던 사내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서느렇게 미간을 접은 채 블리어가 눈을 떴다. 어둠속에서도 낮은 명도를 자랑하는 진녹안은 생생했다. “…일어나있었습니까.” “공작. 아프냐고.” “…약 먹었으니 내일이면 나을 겁니다.” 낮은 목소리도 잔뜩 쉬어있었다. 렐리아는 상체를 일으킨 채 안쓰러운 것을 보듯 공작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감기 걸린 거야? 건강한 사람이……하긴, 온종일 앉아서 일만 하고 몸에 안 좋은 단거만 죽어라 먹어대니까 건강이 안나빠질 리가.” 환절기에는 공작 같은 인간도 감기에 걸리나 보다. 귀신도 잡는 해병대교관이 감기에 몸져누워 시름시름 앓는다면 이런 기분이 들것 같다. 참으로 묘했다. “아픈데 그냥 자기 방에서 편히 잘 것이지 굳이 내 방에…” 혹시 저가 얄미워 감기를 옮기러왔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렇게까지 찾아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공작은 서로의 손목을 끈으로 이으려고 왼손을 들어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렐리아는 그의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델 듯이 뜨거웠다. 괜히 마음이 좋지 못해 렐리아는 그의 손에 들린 노끈을 압수해버렸지만 블리어는 끈질기게 내놓으라고 제 손을 움켜쥐었다. 그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은 대체 누구한테 배운 건지 모르겠다. “아 그냥 내가 묶어줄게. 그냥 자, 자.” 렐리아는 스스로 자기 손목을 묶고서 그의 손목에도 똑같이 묶어주었다. 이제 됐냐고 그의 눈앞에 들이밀어 직접 확인시켜주자 그제야 남자는 한결 편해진 낯으로 눈을 감았다. 결벽증이 있어 남 침대에선 편히 못잘 거라 여겼는데 자기침대인 양 깊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 블리어를 뚱하게 내려다보다가 렐리아는 넌지시 입을 열었다. “물수건 해줘?” “…됐습니다.” 거의 잠결에 묻힌 듯 몽롱한 목소리였다. 렐리아는 그가 푹 자도록 이불을 덮어주고서 저도 돌아누워서 잤다. 묶인 끈 때문에 멀리가지 못해서 불편했으나 생각보다 금방 잠이 들어버렸다. 다시 잠에서 깨어난 건 푸른빛이 감도는 새벽녘이 되어서였다. 렐리아는 다시 눈을 붙이려다가 문득 공작 생각이 나 옆을 돌아보았다. 그는 반듯하게 누워 잠이 들어있었는데 어둑어둑한 밤에 보았을 때보다 안색이 많이 좋아져있었다. 여전히 창백한 낯인 건 변함없었지만 검은 머리칼을 들춰 이마에 손을 얹어보니 자연스레 열이 내려있었다. ‘이제 괜찮나보네.’ 렐리아는 그에게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 다시 눈을 붙이려는데 갑작스레 옆에 있던 그가 제 쪽으로 돌아누웠다. 습관적인건지 의도적인건지 탄탄한 팔뚝이 허리를 휘감아왔다. 하도 바짝 끌어당기는 통에 렐리아는 순식간에 그의 품으로 끌려들어갔다. 항상 미온하던 체온이 밤새 열이 올라 그런지 평소보다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커다란 품은 따스했다. 렐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어정쩡하게 이마를 댄 체 누워있었다. 조용하고 천천히 뛰는 심장소리가 그대로 전해져와 자신의 심장소리와 화음을 이루기 시작했다. 모체 안에서 보호를 받는 태아라도 된 기분이었다. 괜히 지금순간이 평온하게 느껴졌다. ‘…어우 잠온다.’ 이대로 잠들었다가 깨어나면 엄청난 낭패를 볼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뿌리치지 못하고 렐리아는 솔솔 잠에 빠져들었다. 렐리아는 긴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기 무섭게 쏘아져오는 강렬한 광선에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손을 들어 눈을 가리려했다. 허나 손을 듦과 동시에 딸려오는 것이 있었다. 왼손에 묶인 줄과 그 줄에 걸려있는 굵직한 남자손목을 발견한 렐리아는 조금 해괴하게 인상을 구겼다. ‘…그렇다는 건.’ 옆을 돌아본 렐리아는 숨을 쉬는 것도 그만 잊어버렸다. 반듯한 미간에서부터 미끄러지듯 시원하게 뻗은 콧날에 하마터면 제 코가 부딪힐 뻔했다. 그 정도로 가까웠다. 검은 부채를 펼쳐놓은 것 같은 그의 속눈썹은 서느런 눈매를 따라 조용히 감겨있었다. 렐리아는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곧바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허리아래를 휘감고 있는 사내의 팔은 똬리를 튼 구렁이처럼 움직일 기미가 없어보였다. 산발이 되어 엉킨 뒷머리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렐리아는 곧바로 방 한편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눈이 부셔서 가늘게 떠져있던 사파이어 눈동자가 확 뜨였다.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시침은 낮 12시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다. 렐리아는 옆에 누워있는 사내의 다부진 어깨를 쥐고 크게 흔들었다. 그제야 낭창한 허리를 감고 있던 블리어의 왼팔이 스르륵 거둬졌다. “공작 일어나. 12시라고, 지금!” “알고 있습니다.” “뭐야. 일어나있었어?” 일어나있었으면서 왜 안 움직였나, 하는 의문은 곧 일어났으면서 왜 제 허리를 놓아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으로 변질되었다. 의심쩍게 그를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미련 없이 그의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러곤 제 침대인데도 불구하고 자리를 피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왼손을 확 잡아당기는 힘에 렐리아는 일어나려다말고 균형을 잃고 오른손으로 침대시트를 짚었다. 그제야 왼손이 묶여있는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느슨하던 노끈이 그와 저 사이를 팽팽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창피해서 인상을 쓴 채 렐리아는 묶인 끈부터 풀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려할 때 뒤에서 붙잡는 음성이 있었다. “감기 옮진 않았습니까.” 힐끔 옆을 돌아보니 제 침대인양 한가롭게 헤드보드에 기대앉아있는 남자가 보였다. 흐트러진 셔츠매무시를 가다듬으며 블리어는 아래로 쓸려 내린 흑발에 나란히 묻어갈 듯이 시선을 무겁게 깔았다. 눈을 마주쳐오지 않았으나 걱정하는 건지 조금 많이 누그러진 음성이었다. “혹 나로 인해 감기기운이 있다면…” “난 누구처럼 허약하지 않아서 안 걸려.” “거의 오년 만에 처음 걸린 겁니다.” “누가 뭐래요? 아저씨 혼자 발끈하시네.” 그제야 블리어의 시선이 렐리아를 향해 올라왔다. 미안함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약간의 후회만 남은 듯한 눈빛이었다. “…그대와 무슨 얘길 하겠습니까.” “나도 공작이랑 할 말 없거든?” 일부러 얄밉게 굴며 렐리아는 팩 돌아섰다. 침대 아래로 완전히 내려선 후 곧장 욕실로 향하려다가 렐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응시했다. “근데 공작. 한 가지 물어보자.” 가볍게 운을 떼는 것과는 달리 이어진 말은 상당한 직구가 아닐 수 없었다. “왜 맨날 와서 내 옆에서 손 묶고 자는 거야?” “역시나 그동안 안자고 있었습니까.” “그건 아니고. 중간에 몇 번 깨서.” 그래서 알았다고 그녀는 심드렁히 변명했으나, 이제는 그녀의 거짓말쯤은 쉽게 간파하고 남는 그였다. 블리어가 대답 없이 침대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자 렐리아는 집요하게 그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렸다. “내 질문에 대답은. 안 할 거야?” “옆에서 누워 잔 건 별 뜻 없었습니다. 그대가 약속을 어기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뿐입니다.” “안 도망간다니까 그러네. 공작도 남 침대에서 같이 자면 불편하잖아.” “그렇다고 하여 내가 그대의 손발을 침대에다 묶어놓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으…소름.”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나또한 그리 하고 싶진 않습니다.” 사람을 뭐로 보냐는 그 부리부리한 눈빛에 렐리아는 백주에 튀어나온 변태 보는듯한 눈빛을 지워낼 수 있었다. “앞으론 묶을 필요도 없고, 옆자리 지키고 있을 필요도 없어.” “그런 식으로 내가 방심한 사이에 도망갈 작정이라면 관두십시오.” “나 진짜 안 도망친다니까?” 원래세계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지낼 생각인지라 결과적으로 사라진다고 해도 도망간 건 아니었다. 렐리아는 고개를 뻔뻔하게 쳐들고서 대화의 마침표를 찍을 기세로 쐐기를 박았다. “공작이 자꾸 옆에서 자면 불편해서 중간에 자다 깬다고. 암튼, 자꾸 문 따고 들어오면 옷장으로 막아둘 거니까 그렇게 알아.” “지금 위치에서 단 일 센티라도 옷장을 움직여보십시오. 다음날 옷장이 통째로 사라지는 줄로 아십시오.” “그럼 어쩔 수 없네. 그날부터는 야만인처럼 발가벗고 다닐 줄 알아.” “그렇담 그 미개한 수준에 맞춰 익히지 않은 생고기를 식사로 내어줄 줄 아십시오.” “방안에서 불 피울 줄 알아.” “그날부로 방 없을 줄 아십시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서로 유치한 말다툼을 벌이다가 렐리아와 블리어는 동시에 고갤 돌려버렸다. 이 남자, 혹은 여자와 무슨 대화를 하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용건이 있는지 블리어는 여전히 방을 나서지 않았다. 새침데기 아가씨처럼 고개를 돌리고 서있는 여인을 힐끗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진지한 태도로 운을 뗐다. “앞으로 이틀 뒤입니다. 이번 연회는 외교사절단을 초청하는 상당히 중요한 자리입니다. 탐피아 제국의 고위급 귀족들이 참석하는 자리이니 몸가짐에 평소보다 신경 쓰십시오.” “….” “두 시쯤에 의상점에서 사람이 올 겁니다. 오늘부터는 방에 틀어박혀있지 말고 본격적인 연회준비에 들어가십시오. 내가 가르쳐줬던 예법은 잊지 않았을 거라 믿습니다.” 블리어의 말에도 렐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돌린 채 묵묵부답의 태도를 고수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블리어는 홀로 문 앞까지 걸어가 이윽고 문고리를 붙잡았다. 여전히 그의 오른손목에는 하얀 노끈이 묶여져있었다. 아래로 길게 늘어져있는 끈은 미련처럼 질긴 구석이 있었다. “렐리아.” 나가려다말고 문 앞에 잠시 멈춰선 남자가 저를 불렀다. 창가를 고집스레 바라보고 있던 렐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남자와 함께 있는 동안 그 속을 읽는 경지까지 이른 모양이었다. 끝까지 안볼 거냐는 무언의 압박이 슬슬 저를 죄어오는 것 같았다. “나 갑니다.” “그래, 수고.” 렐리아는 마지못해 답하며 그를 돌아봐주었다. 단순한 눈 맞춤에도 무언가 확신을 받은 건지 그제야 그는 후련히 방을 벗어나버렸다. 0094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오르골 소리가 천장높이 울려 퍼질 듯한 성스러운 미사실. 그 안에서 가장 높은 참배단 위에 앉아있는 수려한 은발의 사내가 숨죽여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기괴하리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이것 참, 궁중연회라니.” 올올이 흘러내린 은발위로 창유리 한번 거치지 않은 순수한 농도의 달빛이 흘러내렸다. 미사실 천장에 자리 잡고 있던 장식용 창은 그 형태 틀만 남았을 뿐 유리가 깨져 아예 무용지물이 된 상태였다. 간혹 밤바람에 작은 유리조각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으나 사내는 상관없는지 까만 서류철 안을 살폈다. 그의 한손에 들린 서류철은 대신전 내에서 최고 높은 지위를 가진 교황에게 전달된 왕실 문서였다. 그 누구도 쉬이 열람할 수 없는 문서를 남자는 시시한 소설을 넘기듯이 가볍게 훑었다. 팔랑 팔랑 넘어가는 종이 끄트머리는 핏물로 젖어있었다. 그뿐 아니라 남자가 앉아있는 참배단 주변에도 붉은 선혈이 낭자해있었다.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성스러운 달빛마저 외면한 구석에는 총 열한 구의 시신이 널브러져있었다. 시신들 모두 왕국주교의 수뇌부에 해당하는 최고위급 사제들이었다. 본래의 색마저 잊게 만들 만큼 새빨갛게 물든 사제복에서는 짙은 피비린내가 오싹하게 퍼져 나왔다. 하나같이 신전 내 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이었던 만큼 나이가 있는 자들이었다. 허나 감히 자세히 살펴볼 수 없을 만큼 흉측하게 일그러진 안면은 그 고귀함을 잃은 지 오래다. 천장과 딱딱한 대리석바닥을 번갈아 내리찍은 듯이 얼굴 가죽에는 유리조각이 빽빽이 박혀있었다. 입술이 귀 끝까지 찢어져 얇은 살이 덜렁거리기도 했다. 몇몇은 심하게 반항했었던 건지 팔다리가 처참하게 뒤틀려있거나 꺾였고 심지어는 팔이 뜯겨져나간 자또한 있었다. “그렇게 경고를 주었건만 여전히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나보네요.” 악마가 꽈리를 틀었던 것 같은 그 광경 속에서 남자는 홀로 고고히 웃었다. 가늘어진 눈을 뒤로하고 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닥에 머리를 찧고 있는 나이 지긋한 노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번 꼰 다리 위에 팔꿈치를 올려두고서 지루한 듯 턱을 괴었다. 허나 입가에 맺힌 나른한 미소는 흡족한 감정을 동반하고 있었다. “천 년이 지났거늘…, 종족번식 의지만 있을 뿐 더 나은 종족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성하?” “…네…예…” 고통스러움에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늙은이는 잔뜩 피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답했다. 희미한 목소리가 교황의 꺼질 듯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듯 했다. 다 죽어가는 왼쪽 눈은 초점이 없었고 오른쪽 눈은 도려내어 검게 움푹 패어있었다. 신성력도 듣지 않을 만큼 심하게 곪아있었다. 노쇠한 그는 비릿한 핏물로 얼룩진 바닥에 이마를 대고 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심하게 찢어진 이마에선 뜨거운 피가 뭉개진 콧대를 따라 흘러내렸다. “누가 멈추라고 했나요.” “…죄…죄,죄송…하,합니…” “한시라도 빨리 평안해지려면 계속 머릴 움직여야죠. 단번에 죽도록 자비를 내려줄 생각은 없답니다.” 은발의 남자는 매끄럽게 웃어보였다. 생김새만 본다면 지상에 강림한 자애로운 천사라고 해도 믿겨질 정도였다. 그는 다시 연방 머리를 찧어대는 교황을 머리맡에 앉아 지켜보다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보다 연회 말입니다. 신전 측에서도 한명 보내야겠죠? 성하가 부디 인간하나만 추려주었으면 합니다. 내게 귀찮은 일을 떠맡길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탁, 하고 생생한 핏물로 점철된 바닥에 서류철이 던져졌다. 개에게 먹이라도 던져주는 것처럼 성의 없는 행동이었다. “명단을 훑기엔 역시 눈 하나로는 불편한가요.” “…어…으. 아닙…니다.” “고위 사제들 이름은 외우고 있다고 아는데 그 중 한명만 골라주시죠.” “…어,어…떤…” “사교적이고 입만 산, 희생되어도 별 쓸모없는 인간으로.” 비교적 간결한 요구사항에 교황은 머리를 찧던 것을 잠시 멈춘 채 힘겹게 입술을 덜덜 떨며 벌렸다. 스쳐지나가듯 떠오른 젊은 사제의 이름이 주저 없이 교황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아…아럼…프…. 아…럼프…세브…로웰.” “그를 추천하는 이유는?” “사교적인…건…물론이며…새로 들어온…젊은…라…사라져도…저희 신전 측에는…피해가…가,가지 않을…겁니다.” 호오 하고 가늘게 입술을 끌어올리며 은발의 남자는 빙그레 웃었다. “그럼 그 자를 보내보도록 하죠.” 다행히 교황의 의견이 수렴됐으나 동시에 아름다운 그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 제스처가 무얼 의미하는지 깨닫기 무섭게 교황의 남은 왼쪽 눈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대리석바닥에 벌건 핏물이 후두둑 튀었다. 백발의 교황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피거품을 문채 바닥위에서 고통스럽게 뒹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왼쪽 눈알은 묽은 흰죽처럼 뭉개져 흘러내렸다. 비명소리가 그칠 줄 모르는 잔혹한 밤은 교황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 “국새를 준비하라.” 연회를 개최하는 무도회장으로 향하기전 라델리우스는 최측근 위터 백작에게 일러두었다. 라델리우스는 본궁을 나서기 전 황국전속 시종들에게 매무시를 가다듬는 작업을 거쳐야만 했다. 국왕의 존위에 걸맞게 화려한 금수와 금 장신구가 달린 연회복은 안감은 붉은 자줏빛으로 처리했다. 겉감은 태양빛처럼 찬란한 광택이 흘러 그의 적빛이 감도는 금발과 상당히 잘 어울렸다. 라델리우스는 본궁 앞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올라섰다. 그 안에는 왕의 파트너로서 참석하는 다이아나가 앉아있었다. 에스코트하는 남성이 여성을 마차로 데리러가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모습이었으나 두 사람 다 개의치 않아했다. 오히려 라델리우스의 입가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다이아나. 오늘은 더더욱 아름다운 것 같아.” 왕궁 무도회장으로 향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그는 약혼녀를 어떻게 가만히 두지 못해 안달이었다. 다이아나의 향긋한 품에 끌어안길 듯이 엉덩이를 붙여 앉고서 그는 그녀의 드러난 쇄골과 목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런 그의 행동에 다이아나는 출렁이는 긴 금발을 부러 그 쪽으로 쓸어 넘기며 단호히 한마디 했다. “애무라면 침대위에서 해요.” “…미안해. 너무 좋아서 그만.” 끼잉 소리를 낼 듯이 라델리우스는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왕의 체면도 버린 지 오래였다. 안절부절 자신의 눈치만을 보는 남자를 알았으나 다이아나는 무심하게 창문만 응시했다. 싸늘한 옆얼굴은 지독히도 아름다워 라델리우스의 이성을 뒤흔들었다지만. “다이아나.” 라델리우스는 잠시간의 침묵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제야 다이아나는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단아한 규수로서의 기품을 지키며 묻기 무섭게 라델리우스가 고갤 내렸다. 마음을 풀어줄 속셈으로 가볍고도 따스하게 살짝 입술을 머금었다. 애교 같은 귀여운 키스는 일분도 이어지지 않아 끝났다. 다이아나가 힘껏 밀어냈기 때문이다. “리우스. 연회시작도 전에 화장이 뭉개지면 어쩌려고…,” “립스틱 안 지워졌어. 이 정도는 봐줘.” 매일이 무덤덤하기만 한 사내가 작게 웃었다. 그녀만을 위해 빚어 올린 입술은 카리스마라곤 모르는 순박한 시골청년 같았다. 라델리우스는 화를 낼 듯한 여인을 품에 끌어안았다. “전적으로 아름답게 꾸미고온 그대 잘못이야.” “또 그런 말로 넘어가려고…,” “좋아하는 마음이 주체가 안 되잖아.” 라델리우스의 말에 다이아나는 하려던 말을 삼킨 채 한숨으로 녹여내었다. “풀어요.” “…다이아나.” “이제 내려야해요.” 다이아나는 창밖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연회가 시작되었는지 찬란한 빛을 휘감고 있는 왕궁 무도회장이 보였다. 이에 아쉬움을 달래려 라델리우스는 고운 여인의 손등에 연방 입술을 찍었다. 이윽고 마차가 회장으로 들어서는 웅장한 계단입구 앞에 세워졌다. 라델리우스는 어깨 핀으로 고정시킨 적색망토를 휘날리며 먼저 내려섰다. 미소기가 사라진 것뿐인데도 무거운 왕의 위엄이 되살아났다. 그는 마차 안에서 몸을 일으킨 다이아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드러운 실크면에 그녀의 손끝이 닿았다. 젊은 국왕은 제 약혼녀의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양 꼭 붙잡았다. * 렐리아는 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레 블리어와 떨어졌다. 몰려든 귀족여성들에게 둘러싸여 친목을 꾀하는 인사 겸 질문세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식적인 애인사이로 알려진 후 수많은 연회초대장이 쏟아졌으나 렐리아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던 탓이다. 그 당시 예법은 거의 무지한 상태라 블리어가 제 선에서 다 잘라내 버렸던 것이다. 그동안 렐리아의 존재는 의도치 않게 베일에 싸인 존재가 되어있었다. 현재 공식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으니 대중들의 관심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너나할 것 없이 달려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트릴나 후작부인이 주최하는 보석품평회에 저도 참석했었는데.” “어머, 그때 저도 있었어요. 기억하세요?” “그러고 보니 올르아 공녀님의 사촌이라고 들었어요.” “탐피아 제국에서 오셨다구요?” 언젠간 공비가 될 지도 모를 일이기에 여인들은 앞 다투어 친해지려고 했다. 조금이라도 접점이 있으면 바로 그 대화로 흘러가버려 렐리아는 어디다 맞장구를 쳐줘야할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렐리아로서 할 수 있는 대답은 ‘아. 네네~’ 혹은 ‘아~그런 거 같아요.’가 다였다. 무도회에 참석한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아직까지는 이 분위기가 익숙지 않았다.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 호의를 가장하며 웃거나 시기어린 눈빛을 보내는데 그만 좀 쳐다보라고 까놓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혹시 외교사절단 분들 중에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그러던 중 옆에서 귓가를 사로잡은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도 낮은 금색머리칼을 한 갈래로 땋아 내리고 부드러운 몸의 곡선을 강조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었다. “아뇨. 몰라요.” “한분도요?” ‘모른다고. 모른다는데 뭐, 뭐’ 하고 쪼아주려던 걸 억누르고서 렐리아는 싱긋 웃었다. “네~ 잘 모르겠는데요.” “제국에서 오신 분이라 아실 줄 알았어요. 하긴 남작가면 같은 귀족이라도 높으신 분들을 모를 수 있겠네요. 더욱이 제국이니.” 납득하는 여인의 나긋한 말투에 다른 영애들도 따라 이해심이 많은 여인처럼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그 은근한 비꼼과 무시를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어찌나 얄밉던지 렐리아는 끌어올린 입술아래 혈관 줄이 볼록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 다들 여기 있었어?” 그때 아이처럼 맑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려 퍼졌다. 렐리아는 뒤를 응시했다. 몽실몽실한 솜사탕을 닮은 분홍색머리칼이 한껏 컬을 넣어 부풀려져 있었다. 진주를 박은 리본으로 반 묶음을 한 슈로니가 방긋 웃었다. “다들 찾았다구. 리리카랑 이사도라는 저기서 봤는데 일로니랑 멜리는 하도 안보여서 한참 돌아다녔어.” “미안해. 슈로니.” “어머 슈로니네?” “앗, 론리사 오랜만이야!” “슈로니, 세상에 오늘 너무 귀여운 거 아니야? 무도회 남자들을 모두 가슴앓이하게 만들 작정이니?” “그런 칭찬 부끄러워. 멜리도 오늘 너무 아름다워. 여신님인 줄 알았어.” “슈로니 얘도 참, 칭찬 고마워. 후후.” “나는 안보이니?” “제니퍼! 오늘 머리 진짜 잘 어울려. 애인한테 보여줬어?” “당연하지. 그보다 단짝친구는 두고 일로니랑 멜리만 찾기 있어?” 이십대 초반영애들 중의 반이 슈로니 쪽으로 다가가 대화의 장을 이루었다. 하하호호 하고 떠드는 모습이 늘 무리지어 노는 영애들인지 굉장히 친한 모양이었다. 끼어들 수가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자연스레 소외된 렐리아는 손가락만 쪽쪽 빨고 싶어졌다. 자신도 현실세계 친구들이 모이면 저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특히 고등학교 친구들이 모이면 용솟음처럼 끓어오르는 반가움과 흥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머릿속으로 친구들을 떠올리며 울적해져있을 때였다. “세상에, 렐리아도 있었네?” 렐리아는 한쪽으로 몰려있는 영애들을 돌아보았다. 그녀들의 중심에 선 슈로니가 저를 보며 방긋 웃었다. 0095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보고 싶었어. 왜 그동안 연락 안했어?” 슈로니는 부담스러울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는 렐리아의 두 손을 꼭 붙잡았다. 이에 렐리아는 하마터면 ‘그러는 니는 연락했냐?’하고 아니꼽게 받아쳐주려다가 주위에 있는 수많은 귀를 생각해 참았다. “내 친구들이랑 인사 나눴어?” “어.” “그렇구나. 안했으면 따로 소개시켜주려고 했지.” 친한 척, 순수한 척, 아무런 악의 없는 척 정말 세 박자를 고루 갖췄다. 어떻게 이렇게 얄미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렐리아는 슈로니의 이마에 딱밤을 먹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살인현장으로 변할 것 같아 참았다. 공작에게 크게 데여 울면서 집무실을 뛰쳐나갔던 그날을 마지막으로 슈로니는 저와 연락을 끊었었다. 그동안 공작에 대한 집착을 정리했으면 다행이지만 아마 그 성격엔 스스로 뉘우치기보단 남을 탓할 가능성이 컸다. 사고당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어둠의 기운을 빌어 저주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여기 있는 친구들이랑 인사 나눴다고 했으니까 론리사랑도 인사 했겠네?” ‘…론리사? 아까 이름 들은 것 같긴 한데.’ 렐리아는 겉으로 의문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눈썹만 씰룩했다. 해맑게 말을 이으며 슈로니는 오른편을 응시했다. “론리사가 평소에 널 많이 만나보고 싶어 했었어.” “아~ 그래?” 이젠 거의 반사적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렐리아는 슈로니를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군지 모르겠으나 대충 그쪽에 있겠거니 싶어 모르는 영애들에게 반가운 미소를 보였다. 그때였다. “렐리아! 어딜 보고 웃는 거야? 론리사는 여기 있는데.” 발랄하고 마음씨 착한 소녀 같은 부름에 렐리아는 퍼뜩 웃음기를 거두고 반대쪽을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슈로니의 바로 옆에 서있는 물빛머리 영애가 보였다. 난처한 미소를 띠는 게 이 여자가 론리사인 것 같았다. ‘저기 보고 말하기에 저깄는 줄 알았는데, 썅…속았다.’ 렐리아는 머쓱하게 눈웃음을 새로 지어야만 했다. 서로 인사를 나눴다고 말한 지 일분도 지나지 않아 상대의 얼굴을 기억 못한다는 걸 그 본인에게 들켰다. 크나큰 실례였다. 귀족사회에선 왕가 족보는 물론이거니와 인맥을 두루두루 형성하기 위해 미리 초상화를 수집해 이름을 외울 정도라고 하니 완벽한 저의 실수였다. 물론 렐리아로서는 억울했다. 몰려든 여인들로 인해 정신이 없었거니와 어떻게 한번보고 삼십 명이나 되는 여자들을 일일이 다 외우겠냔 말이다. 학급의 담임선생님도 학생들 이름과 얼굴을 외우는데 일주일은 걸린다고! 하고 항변이라도 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슈로니의 유치한 계략에 넘어가 단단히 물먹었단 생각에 스스로 수치스럽기만 했다. “미안해요. 제가 정신이 없어서…”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렐리아의 사과에 론리사는 괜찮다고 웃었지만 썩 진심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곧이어 론리사는 제 가식을 숨기려는 듯 황급히 대화를 이어나갔다. “평소 어떤 보석과 귀금속에 관심 있으신가요? 전 타린 아드리석에 관심이 많아요. 밝은 푸른 계열의 보석이 아무래도 제게 잘 맞나 봐요.” 이제야 좀 기억이 난다. 보석품평회 얘기에서 자신도 있었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었던 것 같다. 론리사의 대답에 뭐라 답해야하나 잠시 생각하고 있을 때 또 한 번 맑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니지, 론리사. 공작님께서 평소 어떤 보석장신구를 주로 선물해줘? 렐리아.” “다이아몬드 장신구이려나.” “어머나. 어디 보석점의?” 그런 것도 외우고 사나. 렐리아는 보석점 명도 지어내서 말할까하다가 탄로 날 거짓말은 차라리 안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잘 모르겠는데.” 풋, 하고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에 렐리아는 아차 했다. 그 웃음소리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을 비웃을 때에 나는 소리였다. 마치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느냐는 듯한. “수도에 오신 후로 사교계 참석도 거의 없으시고, 바깥에 쇼핑도 잘 안 나가셨나 봐요?” 갈색빛이 도는 금발을 가진 차분하게 생긴 영애였다. 하지만 묻는 말은 명백히 ‘집에만 갇혀 살았냐?’하는 비아냥이었다. 그렇다고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굳이 반박하고 싶지도 않았고. 쇼핑이라 봤자 아럼프와 함께 음식쇼핑을 하러 돌아다닌 게 가장 기억에 뚜렷이 남았다. 시밤. 역시 친구로선 아럼프가 최고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스레 이제껏 잘만 피해 다닌 아럼프가 보고 싶어지니 기분만 꿀꿀할 뿐이다. “멜리 실례야. 렐리아는 친구가 나밖에 없단 말이야.” 그런 제 속도 모르고 슈로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설쳐댔다. 음역대가 높고 종소리처럼 맑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어놓는 기분이었다. “근데 내가 평소에 바빠서 잘 못 놀아줬어. 그러니 친구인 내 책임이 크다고 밖에 할 수 없어.” “하긴 슈로니는 거의 매일 사교장에 참석하니까 시간 비울 틈이 없었겠어요.” “우리랑 자주 노니까요. 후후.” 또 친목 형성인가. 저를 받아줄 생각은커녕 무리에 끼워주지도 않을 거면서 친한 척 사람 속을 살살 긁는 게 여간 얄미운 게 아니다. 왜 슈로니의 친구들인지 알 법했다. 렐리아는 이런 애들이랑 어울릴 바에는 그 시간에 다른 예쁜 언니들을 찾으러가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과는 달리 저를 잡고 놓아주려하지 않는 영애들로 인해 꼼짝도 못하는 상황이라지만. ‘그래 끼리끼리 잘 노네. 나도 돌아가면 친구들이랑 노래방도 가고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실 거다 뭐.’ 그런 생각으로 꼿꼿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주변이 조금 술렁이는 것 같아 렐리아는 그녀들의 눈치를 살폈다. 또 뭘 실수했나 싶었으나 하나같이 제 뒤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지 싶어서 렐리아는 아무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백송이의 장미를 품에 안은 듯한 화려한 붉은빛이 가장먼저 시야를 채웠다. 너무 익숙해서 렐리아는 순간 헛것을 봤나 싶을 정도였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아리따운 영애분들.” 아럼프는 자연스레 렐리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수려한 낯의 그는 눈웃음을 지은 채 정중하게 예법을 구사했다. 이에 순식간에 여인들의 태도와 눈빛이 달라졌다. “대신전의 대표로 참석한 고위사제 아럼프 세브로웰이라고 합니다.” “어머나 잘생기셔라.” “칭찬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영애분과는 먼저 업무상 선약이 있어서요.” “아, 그랬나요? 선약이 있는 지도 모르고 저희가 너무 붙잡은 것 같네요.”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영애들은 웃음소릴 흘렸다. “중요한 얘기도중에 끼어들어 다시 한 번 죄송합니다.” “후훗 천만에요.” 정중히 양해를 구하기 무섭게 아럼프의 손이 렐리아의 가는 손목을 감쌌다. 그가 렐리아를 이끌고 그 자리에서 벗어나자 그제야 살짝 굳어있던 슈로니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전에 한번 렐리아를 찾아갔다가 문밖에서 보았던 그 중성적인 미남자였다. 그땐 남복차림의 여잔가 했지만 목소리를 들으니 남자가 확실해보였다. 옆에 떨어져서 올려다본 것뿐인데도 슈로니는 솔직히 그 요요한 옆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건 미남을 눈독 들였던 다른 영애들도 마찬가지라지만. “젊은 나이에 대신전 소속이면 능력 있는 남자인가보네.” “난 사제 같은 사람 좋더라. 청렴하고 반듯하고.” “손가락 봤어? 미혼인 것 같던데.” “얘는, 이럴 때보면 참 치밀하다니까.” 깊은 인상을 남긴 섬세한 미모와 적색머리칼 때문일까. 그 여파가 쉬이 가시지 않아 한차례 술렁이던 중 한 영애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입을 열었다. “저 남자, 누군가 했더니 말이야. 그때 왜 도박장에서 대형화재가 난 적 있었잖아?” “기억나. 그때 정말 큰일 날 뻔 했었는데…아, 혹시 그?” “분명히 저 사제였지 않아? 여자쪽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분명 은발이었었고.” “맞아 맞아. 나도 있었어. 밖에서 포옹하고 있던 여자, 공작님 애인이 아니냐는 말들 돌았었잖아?” “어머 참 웬일이래. 그럼 저 둘이었어?” 렐리아가 가기 무섭게 여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입방아를 찧기 시작했다. 불과 이 주전, 수도 도박장 화재사건으로 떠들썩할 당시 그 현장에서 공작의 애인이 다른 사내와 포옹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은근히 돌았었다. 몰론 사실 확인이 되지 않아 며칠안가 수그러진 소문이었으나 지금 다시 그 얘기에 불이 붙었다. 더불어 소문 당사자에 관한 험담도 빼놓을 수 없었다. “공작님께선 이 사실을 아실까? 뻔뻔하기도 하지.” “솔직히 난 저 잘생긴 사제랑 무슨 내연관계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되는데…오히려 공작님과는 썩. 예쁘긴 한데 기대했던 것만큼 품위도 없고 공비후보로는 한참 부족해보여.” “나도 실망스러웠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구나? 뭔가 특색이 없달까. 공작님은 왜 저런 여자랑 사귀시는 거지?” “말을 재치 있게 받아치는 능력도 없는 것 같고, 아무래도 화교술도 부족한데다 몸가짐이…,” “남작영애잖아. 귀부인 밑에서 배움의 기회조차 없었을 텐데. 아, 내가 너무 날카로웠나?” 한 영애가 앙칼진 눈을 휘며 웃음 지었다. 이에 다른 여인들이 덩달아 달려들어 응해주기 시작했다. 험담의 수위는 한층 더 높아졌다. “은발은 확실히 희유한 편이긴 한데 그런 것치곤 매력이 너무 없지 않아? 기품도 없고, 심지어 말투도. 아까 걷는 것 봤어? 못 배운 창부도 그 정돈 아닐 텐데. 어머 내 말이 너무 심했나?” “당연히 심했지. 창부도 사내에게 매혹스런 웃음은 날릴 수 있다구.” 일순 그 주위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고아한 웃음소리들이었으나 꾀꼬리 같은 명랑함을 띠었다. “아무튼 정말, 우아함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더라. 얼굴 빼곤 남자를 매료시킬 만한 매력은 딱히 없는 것 같달까?” “예전에 공작님과 사귀었던 백작 영애, 그 누구였지?” “아 줄리아 영애? 그 영애가 참 똑 부러졌지. 변두리 지역 출신이라곤 해도 공작가문에 들어가 내조하기엔 부족함이 없었어.” “맞아. 얌전한 데가 있고 지식이나 소양에선 거의 흠 잡힐 곳 없었잖아. 개념 있고.” “그에 비해 아까 그 이프네 남작영애? 공작님과의 지적이고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봐?” “너무 많은 걸 바라네. 그렇담 이미 사교계의 퀸으로 뽑히고도 남았겠지.” 사교계의 퀸, 즉 주목받는 여성이 되기 위해선 단순히 외모뿐 아니라 교양, 역사, 철학, 문예, 정치 등의 폭넓은 지식을 갖춰야했다. 그래야 사내와의 대화 폭이 넓어지고 더불어 지위상승의 기회를 노릴 수 있으니 말이다. 외모뿐 아니라 내면의 성숙까지 갖춰야 비로소 레이디라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천한 것들도 그들만의 매력을 가질 텐데. 평범함 그 자체야, 외모가 아까울 정도로. 아마 공작님께선 오래가지 않아 질려하실 것 같아. 이번에도 헤어지겠지.” “이해해줘. 렐리아가 먼 곳 시골출신이라 그래.” 그 사이로 쏙 끼어드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슈로니였다. 어디까지나 스스로들을 뛰어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자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중앙귀족가의 영애들이었다. 그렇다보니 은근히 시골출신 영애들을 낮잡아보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험담으로 달궈진 분위기에 기름을 부운 격이었으나 슈로니는 소심한 척 허둥지둥 손을 흔들어보였다. “아, 오해하지 말아줘. 나쁜 뜻으로 그런 건 아니니까….” “우린 네 말 이해해. 슈로니. 우리 모두다 동감할 정도로 무식해 보이던 걸.” “슈로니 그런 애랑 친구하느라 힘들었겠어. 말은 통해?” “네가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 수준 낮은 친구를 거절할 줄도 알아야지.” ‘수준 낮은’, 영애들의 험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슈로니는 천군만마를 얻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하려고 했는데…” 어물어물, 말할 듯 말 듯 슈로니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자 주위 영애들이 다가와 재촉했다. 비밀을 지켜줄 테니 진짜친구인 자신들에게 솔직히 얘기해보라고 그리 속살거렸다. 슈로니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포옥 한숨을 내쉬었다. “렐리아가…은근히 남자를 밝힌다고 해야 하나? 뒤에서 남자를 몰래몰래 만나고 다녀.” “세상에나.” “난 공작님을 생각해서라도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슈로니는 근심으로 얼룩진 얼굴을 하다가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 근데 저 사제분과는 아직까지 아무사이 아니래. 내가 듣기론 그랬어.” “그럼 저 남자는 그냥 가지고 노는 상대인거야? 세상에 불쌍해라.” “공작님도 계시면서, 어쩜 저렇게 몰염치할 수 있지?” “난 저런 여자가 제일 싫어. 외모만 믿고 이 남자 저 남자 건드리고 다니는…여자들의 수치잖아?” 순식간에 렐리아를 비하하는 말들이 난무했다. 여인들은 별꼴이라며 부채질을 하거나 고운 미간을 찌푸린 채 기가 차했다. 험난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큰 기여를 한 슈로니는 그제야 슬그머니 꼬리를 뺄 준비를 했다. “슈로니 어디가?” 슈로니가 한발 뒤로 물러서자 론리사가 바로 슈로니를 돌아보았다. 다른 영애들의 시선까지 덩달아 꽂히자 슈로니는 당황하지 않고 작게 미소 지었다. “나 역시 신경 쓰여. 렐리아에게 가볼게.” “가서 뭘 하려고…? 그런 애는 그냥 내버려둬.” “하나뿐인 친구잖아. 이건 아니라고 친구로서 따로 말하고 올게.” “휴, 정말 넌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걱정 마, 잘 얘기하고 올게. 그리고 아까 그 얘기는 꼭 비밀이야?” 슈로니는 렐리아가 사라졌던 방향으로 부랴부랴 뒤쫓아 갔다. 0096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아래층 댄스플로어에서 대부분 웃고 춤추느라 비교적 2층은 한산했다. 아럼프는 탁 트인 야외테라스로 가지 않고 으슥하게 꺾인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의 구석에 도착해서야 아럼프는 렐리아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렐리아가 자그맣게 인상을 찌푸린 채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먼저 사과했다. “멋대로 행동해서 미안.” 오랜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건데도 살가움보단 조심스런 기류가 흘렀다. 아럼프는 제대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공들여 치장한 모습은 아름다웠으나 생소할 만큼 분위기나 태도가 딱딱했다. 렐리아의 눈치만 살피다가 그는 결국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곤란해보이니까 친구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빠져나오게 해준 건 고마운데 누구세요.” “렐리아. 그 농담 조금 상처인데.” “농담 아냐. 절교했으면 끝이지 뭐가 더 있는데?” 렐리아는 그에게 잡혔던 손목을 문지르며 완전히 등을 돌렸다. 다시 되돌아가려했으나 바로 자신을 붙잡는 목소리에 잠시 멈춰서야만 했다. “난 너랑 절교하겠단 소리 한적 없어.” “한쪽이 끊으면 끝난 거야.” “그 말 되게 이기적인 거 알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기적일지도. 근데 원래 이런 성격인거 뭐 어떻게 해. 난 내 처지가 곤란해지면 주위부터 내쳐. 그게 설령 친구라도 달라질 건 없고.” 솔직히 아럼프가 도와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쳐냈는데도, 몇 번을 찾아와준 그에게 대답한번 해주지 않았는데도 그는 어김없이 난처해있는 자신에게 다가왔다. 확실히 아럼프만큼 좋은 친구도 없다. “생각해봐.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분은 공작님이라고. 공작가의 안주인이 될지도 모르는데 고작 너 하나 때문에 내 인생 망쳐야겠냐고.” 냉대와 무시에도 떨어져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니 렐리아는 그와 아예 싸울 작정을 하고서 말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 아럼프의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이젠 그냥 실망하고 떨어져나갔으면 했다. 렐리아로선 화가 난 친구에게 뺨 한쪽을 기꺼이 내어줄 의향이 있었다.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당연했다. “친구가 나밖에 없어? 다른 친구 좀 사겨. 진짜 답답하네.” “마음이 맞는 건 너밖에 없어.” 하지만 등 뒤에서 들려온 아럼프의 목소리는 조금의 분기도 담겨있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덤덤해서 괜히 듣는 사람까지 허무할 정도였다. “정말이야. 사제가 도박장 다니는 거 알고도 뻔뻔하게 같이 어울려줄 사람이 그렇게 흔할 것 같아?” “그건 모르지.” “종교 내 규율이 엄격한 건 누구나 다 알아. 특히 규모가 큰 국교라면 말할 것도 없지. 난 이런 종교분위기가 싫었어. 청렴을 강요하면서 내 자유를 억압하는 게…, 그래서 늘 불만이었고.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닌데 음주나 노는 것에도 당연하게 자유를 박탈당하고 감시당하는 삶이 싫었어.” 다소 흥분한 아럼프의 말투는 곧 순응하듯 누그러졌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사제 중에서 몇명이나 동의할 것 같아? 없어. 단 한명도.” “…….” “다른 비신자들도 그건 마찬가지야. 내가 왜 밖에선 되도록 사제인 걸 숨기는 줄 알아? 사제자격을 운운할게 뻔하니까 그런 비판을 듣고 싶지 않아서야. 하지만 렐리아 넌 달랐으니까. 그래서 특별하다고 생각했고, 널 처음 봤을 때부터 그 인연을 놓치기 싫었어.” 아럼프는 살짝 고개를 내린 채 씁쓸하게 웃었다. 그 얼굴을 렐리아는 보지 못했으나 목소리만 들어도 그가 서운함에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처음부터 지금까지 네게 진심이었어. …욕심, 그래 욕심이 조금 있었긴 했지만 평생 유일한 친구자리에서 만족할 생각이었어. 그런데 넌 언제든 날 내칠 수 있는 거야?” 뻗어진 긴 손가락들이 렐리아의 손목을 힘없이 그러쥐었다. 아럼프는 매끄러운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고갤 들어 렐리아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여자든 남자든 다 떠나서, 너랑 제일 죽이 잘 맞는 건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 너밖에 없어, 렐리아.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건 네 착각이고. 주위 좀 둘러보지 그래?” “…….” 렐리아는 가볍게 그의 손을 내쳤다. 단칼에 그의 희망을 자르고 친구로서의 끝을 고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그녀를 아럼프는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허망하게 무너져버린 기대에 그녀의 말만 곱씹으며 서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바로 모퉁이너머에서 실낱처럼 또각또각, 작은 발소리가 되돌아오는 게 들렸다. 아럼프는 렐리아가 다시 돌아온 거라 여겼다. 그녀가 아니고서야 다른 여자가 굳이 외진 구석으로 찾아올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모퉁이너머로 나타난 여인은 휘황한 은빛머리가 아닌 풍성한 분홍색머리를 한 여자였다. “저어…” 소심하게 벽 너머로 걸어 나오며 슈로니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미안해요. 엿들을 생각 없었는데…여기까지 들려서. 아, 저 렐리아 친구예요. 예전에 한번 마주친 적 있었죠, 저희?” “…….” “렐리아가 나쁜 뜻은 없었을 거예요. 렐리아 입장에선 신분이나 명예가 더 중요했을 테고…물론 전 렐리아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명예욕 때문에 친한 사람을 버릴 수 있을까요…?” “그러게요.” 말없이 서있던 아럼프는 나지막이 대답하고선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슈로니는 그제야 내리깔던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바로 옆으로 다가온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귓가로 스며드는 낮고 점잖은 목소리가 있었다. “아무리 명예욕과 시기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친구가 마실 차에 독을 넣을 수 있을까요.” 쿵 하고 슈로니는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을 맛보았으나 애써 태연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무슨 소리세요?” “그쪽 가문의 하녀가 범인이었던가요. 많이 허술한 계획이었지만 그렇다고 영애께서 벌인 자작극이라는 물질적인 증거가 없으니까요.” “대체…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더 얘기해봤자 입만 아프겠네요.” 눈 한번 깜짝 안하는 슈로니를 담은 붉은 눈동자 속엔 혐오스런 기색이 드러났다. 아럼프는 그녀를 지나쳐 꺾인 구간을 벗어나버렸다. 그가 간 후에도 슈로니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서있었다. ‘뭐지뭐지뭐지. 뭐야 대체…어떻게 아는 거지?’ 슈로니는 당혹감에 차서 꼼짝하기는커녕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얇은 실이 뒤죽박죽 엉킨 것만 같았다. 그 작은 머리를 한참동안 굴리고 굴려 슈로니는 어떠한 결말에 도달하기에 이르렀다. ‘첫 번째는 분명 실패했었어. 그런데 저 남자가 대체 어떻게… 그래. 렐리아가 말했구나. 두 번째에서 날 의심하고 있었던 거야. 공작님이 쓰러진 내게 관심을 보이니까 괜히 자작극이라고 저 남자한테 뒷담을 한 걸 거야.’ 슈로니는 렐리아를 의심했다. 저 남자한테 그런 말을 속삭일 자는 렐리아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런 건 아니잖아. 마리가 독을 탄 거잖아. 난 지켜만 봤다고. 그리고 내가 마셨는데 뭐어어? 자길 죽이려했다고 날 의심해?’ 마침내 슈로니는 분노했다. 자기만의 생각에서 빠진 채 홀로 분노하고 욕을 하고 저주했다. 이윽고 슈로니는 자기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싸느랗게 얼굴을 가라앉힌 채 걸음을 옮겼다. 어둠의 기운에 휩싸인 사악한 마녀처럼 입술은 가늘게 끌어올렸다. 생기를 잃은 동공이 기묘하기까지 했으나 슈로니는 이런 자신의 표정이 남들이 보기에도 무섭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남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자신의 이중적인 면에 대해 짜릿함을 느꼈다. 2층 복도를 거닐던 슈로니는 바로 아래층 홀에서 홀로 걷고 있는 렐리아를 발견했다. 마침 그 주변에는 사람들도 없었고 지켜보는 눈도 없었다. ‘너만 죽으면…’ 슈로니는 2층 난간 위에 장식용으로 놓아둔 거대한 도자기 앞에 멈춰 섰다. 얕게 휘어 올린 입술이 짙은 미소로 변질된 건 한순간이었다. ‘너만 죽으면 돼. 고작 예쁜 것밖에 없으면서 다 가지려하고. 욕심이 많으니까 벌 받지.’ 힘껏 두 손으로 도자기를 밀어낸 순간에도 슈로니는 키득키득 웃었다. 기우뚱 기울어진 묵직한 도자기가 그대로 렐리아의 머리위로 정확히 떨어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그러기에 왜 자꾸 내 앞에 거치적거려서…’ 쨍그랑, 큰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슈로니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을 받았다. 아래층에 보이는 광경은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상식’이 부서졌다. “응?” 렐리아는 잠시 서서 머리를 갸우뚱했다. 뭐지 싶어서 머리 위를 문질거리다가 가는 머리칼에 걸린 작은 사기조각을 발견하고서 바닥에 툭툭 털어냈다. 그녀의 발치에는 깨진 도자기의 파편들이 수두룩했다. 뒤늦게 제 머리에 떨어져서 깨졌단 걸 깨달은 렐리아는 퍼뜩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네.’ 하필이면 드레스와 함께 새로 맞춘 장신구를 낀다고 보호마법이 걸린 금반지를 안 끼고 왔었다. 이런 모습을 사람들 앞에서 보일 뻔했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싸했으나 렐리아는 빠르게 안도하고 그 자리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 모습을 위에서 모두 내려다보고 있던 슈로니는 차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파삭, 하고 자기만의 세계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다 못해 유리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기분이었다. 멍해진 상태에서도 슈로니는 본능처럼 친구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삼삼오오 무리지어서 떠들어대던 영애들은 돌아온 슈로니를 반겼다. 그녀들은 벌써부터 그 여우같은 이프네 남작영애를 잘근잘근 씹고 욕하기 위한 의지로 불타올라 있었다. “둘이서 얘기는 잘하고 왔어?” “잘하고 왔겠니? 그 모자란 여자가 슈로니의 말을 반만이라도 이해했다면 다행이지.” “뭐라고 얘기했기에? 응?” “아우 궁금해. 어서 말해줘, 얘. 슈로니.” “…슈로니? 그래서 그 여자랑 어떻게 됐어?” “주, 죽, 죽었…” 슈로니는 헙,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불안정하게 마구 흔들렸다. ‘…이,이걸 어떻게 얘기해?’ 자기가 분명 렐리아를 죽였는데 렐리아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닌다고 얘기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슈로니는 생애 처음으로 맛본 큰 괴리감에 적응할 수 없었다. 제 주위를 둘러싼 영애들 중에서도 사실 인간이 아닌 자가 숨어있을 지도 몰랐다. 믿었던 남자에게 크게 한번 데여 모든 남자를 의심하는 여자처럼 슈로니는 곤두서있었다. 그런 슈로니의 이상증세에 그제야 영애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혹시 그 여자가…너한테 죽으라고 그랬니?” “세상에 들었어? 슈로니에게 죽으라고 그랬다나봐.”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 상대할 가치가 없는 여자였나 보네.” 영애들은 딱 반으로 나뉘었다. 슈로니를 걱정하는 무리와 렐리아를 욕하는 무리였다. 그 중에서 슈로니의 제일 친한 친구를 자처하는 멜리가 기어이 앞장서기에 이르렀다. “안되겠어. 내가 나서야지.” “멜리, 네가 가서 뭘 하게?” “좋은 방법이 있어. 그런 여자를 골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 0097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렐리아는 무도회장에 들어선 후 홀로 시간을 때웠다. 공작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넓은 무도회장을 돌아다니기엔 정신적으로 피로해질 것 같아 그저 눈에 안 띄는 구석에 서있었다. 여전히 앵무새와 같이 특색 없는 목소리와 웃음소리들, 거기에 웅장한 연주소리가 귓가를 맴돌았으나 이젠 소음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이대로 시끌벅적한 그곳으로부터 연회가 끝날 때까지 동떨어져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렐리아는 인기척을 느끼고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왜 여기 서계시는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웬 처음 보는 미청년이 빙그레 웃고 있었다. 어깨너머로 기른 금발머리를 한 갈래로 단정하게 묶은 남자는 세련된 연미복 차림이었다. 진한 회색재킷과 그 안에 갖춰 입은 연회색 체크무늬 조끼, 거기에 크라바트를 매고 있었다. 부드럽게 휘어진 보랏빛 눈이 조금 독특해서 시야에 콕 박혔는데 곧이어 청년은 제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이내 옆에 떡하니 섰다. “죄송하지만 여긴 제 자리라서요. 누굴 기다리시는 게 아니라면 비켜주시겠습니까?” 진부한 헌팅인건가 싶었으나 영역다툼이었던 모양이다. 렐리아는 어이가 없었으나 최대한 감정을 감춘 채 말했다. “앉는 것도 아니고 서있는 건데 지정석이 따로 있나요?” “일리 있는 말씀이로군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누가 보면 노점상 주인들끼리 자리싸움하는 줄로 알 것 같아서 렐리아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그보다 누구시죠?” 렐리아는 예의를 갖추는 대신에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쪽에서도 깍듯하게 굴지 않는데 저가 그리 굴 필요는 없다 판단했기 때문이다. 뒤늦게 금발의 미청년은 비스듬히 제 쪽으로 돌아서서는 오른손을 왼쪽가슴 위에 얹고서 가볍게 고갤 숙였다. “제 소개가 늦었습니다. 윈 레그로 카일로아스. 편하게 윈이라고 불러주세요.” 성이 두 개인건가 싶었다. 특별히 성이 두 개가 붙으면 왕족이라는 설명을 예전에 공작에게 들은 적이 있기에 렐리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윈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한발먼저 운을 뗐다. “제 풀네임에서 알아차리셨겠지만 탐피아 제국에서 왔습니다.” 제국 양식의 이름이구나, 렐리아는 오늘처음 알았으나 굳이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살며시 무릎을 굽혔다 피며 자신을 소개했다. “반가워요. 렐리아 이프네라고 해요.” “이프네 양이군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흐음.” “블리어 공작님의 애인이랍니다.” “이런, 제가 큰 실례를 저질러버렸군요.” “괜찮아요.” 귀찮게만 안하면 괜찮다. 렐리아는 너그러운 미소를 지은 채 먼 곳을 응시했다. 뱅그르르 돌며 춤추는 여인들로 인해 색색의 드레스자락이 출렁이며 화려한 물결을 이루었다. 벌써 두 시간째 지겹게 봐온 광경이었다. 따분하기 짝이 없을 때 다시 옆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프네 양은 저곳에 가서 춤추지 않는 겁니까?” “호호. 절 저쪽으로 보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네요.” “그럴 리가요. 보기 좋은 꽃다발에 가장 아름다운 꽃이 빠지면 섭섭하지 않습니까.” 지랄. 렐리아는 성의 없게 고개만 한번 까딱거려보였다. 갑자기 찾아온 윈이라는 남자는 확실히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먼저 이곳에 자리 잡고 있던 것은 자신일 텐데 이런저런 말을 걸며 은근히 저가 다른 데로 가길 원하는 눈치였다. 친구 분들도 아름다우실 것 같은데 어디 계시냐, 지금쯤 섭섭해 하실 공작전하께 한번 가보는 게 어떻겠냐, 공작전하와 함께 사교댄스의 마지막을 장식해야 되지 않겠냐 등의 아부 섞인 말까지 넣는 걸보면 어지간히도 저를 내쫓고 싶은 모양인가보다. 웬만해선 비켜주겠지만 그 속이 너무 빤히 보여 렐리아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후…쉽지 않은 분이시군요. 알겠습니다.” 윈은 품에서 탐피아 황실문양이 세공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러곤 싱긋 웃으며 능구렁이처럼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시간은 넉넉하니, 얘기라도 나눌까요?” 그 말을 시작으로 윈은 스스로를 제국 마법사라고 소개했다. 마법사라 그런지 자연스럽게 마법에 관한 대화가 이어졌는데 렐리아는 마법에 무지한 인간이었기에 가만히 듣기만 했다. “왕국 쪽이 마법사에 대한 대우가 훨씬 좋고 또 그쪽으로 시설이나 제도가 잘 갖춰져 있죠. 대륙적으로 봤을 때도 이곳만큼 인재양성에 힘쓰는 곳도 없습니다.” 렐리아는 바일롯 왕국이 마법사가 살기엔 굉장히 좋은 나라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마법사가 희귀하고 인력 보호차원이 대단하다고는 들었지만 왕국이 유독 유난이었던 거구나 싶었다. “가문에 얽매인 몸이 아니었다면 왕국으로 이주했을 겁니다. 순수하게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말이죠.” “어떤 가문이신데요?” “제국에서 알아주는 가문이라고 해두죠.” 비밀이라는 듯이 윈은 코에 검지를 가져다댔다. 가늘어진 보랏빛 눈에는 순진한 사람을 놀리는 짓궂음이 담겨있었다. 그는 남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았다.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흥미를 불러일으켜서 어느새 렐리아도 그와 자연스레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제국에서는 마법사는 물론이고 기사도 신분에 따라 등용합니다.” “확실히 왕국 쪽이 마법사가 살기 좋을만한 이유가 있네요.” “아마 왕실마법사의 절반이상이 타국출신일 겁니다. 장담하죠.”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도 신분고하를 따지니 낮은 신분의 사람은 출세할 확률이 지극히 낮은 제국보단 마법사 이주정책을 펼치는 왕국을 택할 것이다. 렐리아는 이 부분에 대해선 미리 공작에게 배워두었기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엇보다 예나 지금이나 제국은 군사력을 중시합니다. 천년 전만해도 과거 마법사들은 여러모로 열약한 처지였죠. 지금은 그나마 개선되었다지만 마법계열은 여전히 등용이 적고 방에 틀어박혀서 연구만 하는 약골들로 취급하고 있죠. 생활마법 분야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윈씨는 생활마법 분야 마법사인가요?” “글쎄요. 이것도 비밀이라 해두죠.” 뭔 놈의 비밀이 이렇게 많은 남자가 다 있나 싶었지만 렐리아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아 마법사시면 마법아이템 같은 것도 보실 줄 아시나요?” “그럼요. 보여주시겠습니까?” 그가 흔쾌히 수락하자 렐리아는 바로 왼손검지로 손을 가져갔다. “보여주고 싶은 반지가 있는데…음 놓고 왔네요.” 늘 끼고 있던 금반지라 그런지 하루 빼고 있는 걸 자꾸 까먹는다. 렐리아는 보여주는 대신에 설명을 이었다. “그 선물 받은 건데 마법보호막이 쳐지는 신기한 금반지거든요. 실드마법? 이라고 들었던 것 같아요.” “실드마법 말인가요. 그 분야도 제 특기입니다.” 윈은 자신감 있게 얘기했다. 실제로 그의 자줏빛이 감도는 눈동자위로 흥미로운 이채가 흘렀다. “한동안 이곳에 머물 계획이니 다음에 언제라도 불러주십시오. 저도 그 반지를 한번 보고 싶네요.” “네, 꼭 그럴게요.” 렐리아도 흔쾌히 그와의 다음을 기약했다. 그런 렐리아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던 건지 윈은 살짝 상체를 굽혀 렐리아의 귀에 입을 가져갔다. 사내의 왼쪽어깨위로 긴 금색머리칼이 가지런히 흘러내렸다. “비밀이지만, 아가씨께만 따로 알려드리죠. 전 이 자리에서 조금도 벗어나선 안 됩니다.” “화난 애인이 이곳에서 손들고 서있으라고 했나요.” “재밌는 말씀이지만 안타깝게도 아닙니다. 제가 십이각별의 여섯 번째 모서리를 맡고 있기 때문이죠.” 비밀얘기를 하는 건지, 사람을 놀려먹으려는 농담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도 윈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일 뿐 더 자세하게 말해주지 않고 상체를 바로 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되도록 일찍 귀가하시길 바랍니다.” “왜죠?”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거든요.” “흥미로운 대화 감사하네요. 근데 전 이만 가봐야겠어요.” 렐리아는 그의 말보다는 주위에서 저를 힐끔되는 영애들에게 더 신경 썼다. 실제로 렐리아라는 만인의 적을 향한 눈빛들은 강렬했다. “…또 다른 사내에게 꼬리치는 것 좀 봐.” “경박해라.” “사내를 현혹시키는 기술이라도 있나보죠.” 보다 못한 자신들이 나서야겠다고 의기투합하며 나섰던 영애들이었다. 서로 숙덕거리면서 영애들은 어떻게 렐리아를 물 먹일지에 대해 의견을 공유했다. 대놓고 실수인척 음료를 끼얹자는 말도 있었고 발을 걸어 넘어뜨리자는 말도 있었다. 그걸 알 리 없는 렐리아는 그녀들의 숙덕거림에 귓구멍에 난 털이 조금 간지러울 뿐이다. 윈에게서 멀어진 렐리아는 혼자 서있어도 눈에 안 띌 만한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조금 멀지 않은 곳에는 블리어가 서있었다. 조금만 더 고갤 돌린다면 그를 볼 수 있었으나 미처 거기까지는 렐리아의 시선이 미치지 못했다. “….” 반면에 블리어는 스쳐가는 시선 속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그녀를 단번에 잡아내었다. 여자는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나 제 시선에 들어오는 범위 내에서 움직였다. 블리어는 그쪽으로 직접 걸음하고 싶은 충동을 누른 채 눈으로나마 여자의 움직임을 좇았다. 어딜 그리 열심히 가나 싶었으나 여자가 도착한 곳은 사람이 없는 한산한 기둥 밑이었다. 그녀답다면 지극히 그녀다웠지만 블리어는 저리 혼자 있는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여인들의 무리에서 빠져나온 것을 보니 잘 어울리지 못한 건가 싶었다. 그러던 중 블리어의 시선에 기둥근처로 다가온 물빛머리 영애와 갈색빛이 도는 금발영애가 차례차례 들어왔다. 그 둘 뒤로 다섯 명의 영애가 더 따라왔다. 뭐라 얘기를 나누는 건진 몰라도 영애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렐리아를 향해 꽂혀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눈빛에 적의가 드러나 있다는 것 또한 명백하게 느껴졌다. 블리어는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여인들의 문제에 사내가 함부로 개입하는 것은 외려 사교계에서 좋지 못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익히 들어왔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였다. 물빛머리 영애가 짙은 자주색 와인이 가득 담긴 잔을 쥐고 렐리아를 향해 의도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이 그의 시선에 포착되었다. 뭘 하려는지 뻔히 짐작이 갔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더럽고 저조했다. ‘…감히, 일부러 쏟을 작정인건가.’ 무려 감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블리어는 의문을 품기보단 자신의 일인 양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들였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 누가 봐도 남의 얼굴에 와인을 끼얹으려 작정한 사람처럼 영애는 부러 삐끗 발목을 접질린 흉내를 냈다. 잔보다는 와인이 출렁이며 먼저 렐리아가 서있던 자리로 크게 튀어 올랐다. 동시에 렐리아는 옆으로 살짝 몸을 비껴 피하며 손을 뻗었다. 허공에 붕 뜬 유리잔을 민첩하게 잡더니 방금 전 물빛머리 영애에게 잔을 건넸던 웨이터를 다시 불러 새 잔으로 바꿔오기까지 했다. 다시 채워진 잔을 받고 돌아온 렐리아는 놀라 굳어있는 영애의 손에 잔을 쥐어주었다. 영애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고맙다고 예를 표하는 것 같았으나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렐리아가 씨익 웃으며 뭐라 말하는 게 블리어의 시선에도 똑똑히 들어왔다. ‘그럴 수도 있죠 뭐.’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해코지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싶자 블리어의 분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이게 뭐라고 안도감까지 들었다. 유치한 영애들의 괴롭힘에 그녀가 망신을 당할까 조마조마했던 건가 싶었다. 치열한 토벌전에서조차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한낱 이런 일로 낭비하니 웃길 노릇이었다. 그동안 대기하고 있던 왕궁시녀들이 발빠르게 달려와 금칠된 기둥에 묻은 와인을 닦아내었다. 렐리아가 비켜주기 위해 걸음을 옮겨 무리지어 서있던 영애들 곁을 지나칠 때다. 한 영애가 각오하고 드레스사이로 쏙 발 내미는 게 블리어의 시야에 목격되었다. 허나 뒤이어 휘청거리는 자는 렐리아가 아닌 그 영애였다. 렐리아는 누가 발을 걸었는지도 모르는지 정면만 보고 계속 걷다가 “아앗!”하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로 나자빠질 뻔한 영애의 허리를 휘감아 간신히 붙잡아준 건 그 순간이었다. 마치 현란한 춤사위 후에 마무리 동작을 보이는 남녀처럼 영애는 아슬아슬하게 렐리아의 뒷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뒤늦게 렐리아는 발개진 얼굴을 한 영애를 일으켜 세워주었다. 싱긋하고 웃어주는 게 여간 능글맞은 게 아니었다. 멀리서 그걸 전부 지켜보고 있던 그의 입에선 스치는 바람처럼 얕은 웃음소리가 새어나와 버렸다.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에 저가 다 후련했다. “공작전하?” “왜 그럽니까. 사울트 경.” 큼, 하고 기침으로 위장하며 블리어는 국내 경제둔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던 백작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날이 갈수록 뻔뻔함의 경지에 오르는 게 어째 자신도 그 여자를 닮아가는 건가 싶었다. 0098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기둥에 정착한 후로는 저를 건드리는 사람 없이 아주 조용했다. 렐리아는 만족스럽게 팔짱을 끼고 기둥에 기대어 서있었다. 그렇게 이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누굴 기다리는 사람처럼 바닥을 응시하고 있던 렐리아의 시야에 광택이 흐르는 검은 남성구두가 들어섰다. 고개를 든 순간 렐리아는 하마터면 반가운 표정을 지을 뻔했다. 바로 표정관리를 해버렸지만 그 미세한 표정변화에 블리어는 짙은 눈썹을 슥 치올렸다. “불렀는데 왜 대답이 없습니까. 몇 번이나 불렀는지 압니까.” “오늘 그 목걸이 안했어.” 왜 안했습니까, 하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렐리아는 재빨리 이실직고했다. “새로 맞춘 목걸이 때문에. 그렇다고 목에 두 개를 걸 수는 없잖아.” “그런 이유라면 뭐 넘어가겠습니다.” 렐리아는 그의 대답에 조금 기분이 묘했다. 괴리감까지는 아니지만 원래 저런 말투를 사용했었나 싶은 것이다. 하지만 관심 없는 척 부러 심통하게 받아쳤다. “그나저나 왜 부른 건데?”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바람이나 같이 쐬자고 불렀습니다.” “그렇게 안 좋았어? 나 분명 입술 잘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남이 보기엔 티가 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내 눈은 못 속이지 않습니까.” 그 말에 렐리아는 딴청을 부렸다. 지루해서 죽을 것 같았으나 그렇다고 그런 티는 낼 수 없어서 입술만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용케도 잡아냈다. 대체 언제부터 저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보고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약간 등이 서늘할 뻔했으나 그 전에 제 손을 쥐는 커다란 손에 ‘어?’하고 고갤 들었다. 훤칠한 장신의 그는 앞장서서 저를 이끌기 시작했다. 흰 셔츠칼라와 구분이 안갈 만큼 새하얀 목덜미는 길었다. 윤기가 도는 흑발이 짧게 너울거리며 샹들리에 불빛을 갈랐다.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 야외테라스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바로 불빛이 사라지고 사위는 순식간에 어두컴컴하게 바뀌었다. 불어오는 서느런 바람을 맞다가 렐리아는 뒤늦게 자신도 모르게 마주 깍지 끼고 있던 손에 기겁했다. 사내의 굵직한 손가락이 무슨 개똥이라도 되듯 휘휘 떨어뜨리고서 렐리아는 머쓱하게 홀로 난간으로 걸어갔다. “….” 블리어는 내쳐진 자신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여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고작해야 손을 잡은 것뿐이면서 저 반응은 뭐란 말인가. 누가 보면 억지로 입을 맞춘 무뢰한쯤 되는 줄 알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은 없었다. 이러려고 야외테라스로 나오자고 한 것이 아닐 텐데 블리어는 괜스레 답답한 감정이 치밀기 시작했다. 허나 무슨 얘기를 꺼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는 그녀가 조금 위험해보인단 생각이 들었다. 뻗어진 왼팔은 그녀의 작은 어깨를 휘감아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본인도 놀랄 만큼 빠른 행동력이었다. 이에 왕궁 정원을 바라보던 렐리아가 고갤 돌렸다. 긴 은발이 사락 쓸리며 은은한 진주빛 펄이 올려 진 풍성한 속눈썹이 들어 올려졌다. 동그랗게 떠진 두 눈동자는 그로 가득 찼다. 블리어는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받게 되자 온몸의 근육이 살짝 경직되는 느낌을 받았다. 구기고 있던 미간이 펴지고 불쾌했던 기분이 씻은 듯이 가셨다. 한곳에 집중하느라 자연스레 다른 것들은 열외 되었다는 게 맞는 말일테다. 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조금 내렸다. 그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칵테일 잔에 퐁당 들어간 체리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이 벌어졌다. “돈지랄부터 시작해서 아주 태생적으로 지랄 맞은 게 귀족인가 봐. 어휴, 썅. 서비스직도 아니고 내가 걔들 같은 진상 상대하느라…,” “…잘 참았습니다.” 여기 온 목적을 아주 똑똑히 잘 기억하고 있는 렐리아는 이제까지의 노고를 털어놓았다. 상스러운 말씨에도 블리어는 묵묵히 들어주었으나 그녀를 외면하듯이 일층 정원을 바라보았다. 잠시 제게 뭐가 씌었던 건진 몰라도 그것을 정의 내리기가 그로서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공작은 상상도 못할 거야. 얼마나 유치한지. 초등학생이나 할 법한 괴롭힘을 당당하게 하고 있으니 원, 내가 그냥 맞아줄까 하다가 관뒀어. 화장 새로 하고 옷 갈아입기 귀찮잖아.” 블리어는 렐리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간적인 호감을 부정할 수 없기에 누가 뭐래도 그는 그녀의 편이었다. “잘했습니다.” “머리 만지지마. 흐트러지…아니, 공작이라면 오히려 삐져나온 잔털하나 없이 만들어줄 것 같네.” 흐음, 하고 렐리아가 마지못해 입을 다물자 블리어는 계속해서 천천히 머릴 쓸어 만져주었다. 작은 머리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니 이 감각만큼 귀여운 것도 없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자칫 아랫것을 상대하는 태도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의 눈빛은 존중에 가까웠다. “그댄 일반여성들보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을 터인데도 용케도 한발 먼저 피하지 않습니까.” “걔들이 나한테 뭐 하러 다가오겠어. 보나마나 골탕 먹이러 왔겠지 싶어서 미리 피할 준비하고 있었지.” “그래도 그 영애 중 하나가 넘어지려할 때 그대가 잡아줄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거기서 똑같이 행동하면 뭐가 돼. 그보다 공작, 다 보고 있었어?” 렐리아는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바른대로 말하라고 멱살잡이를 하지 않아도 그는 알아서 순순히 다 불었다. ‘참 올곧다니까.’ 굳이 구구절절 말하지 않아도 될 사항까지 스스로 설토해주니 부인입장에선 편할 테다. 밖에서 사회생활을 어떻게 하는지 카톡이나 메시지를 굳이 뒤질 필요도 없었다. 렐리아는 변명보다는 사실에 가까운 그의 긴 말을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물러서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내 사정도 헤아려주십시오.” “알겠어. 이번만 넘어가는 거야.” 렐리아는 난간 위에 턱을 괴었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는 그녀를 돌아보며 블리어는 다시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만져주었다. 든든한 손의 온기를 느끼며 얌전히 있던 렐리아가 별안간 담담히 운을 뗐다. “그, 미안 공작. 애인으로 있는 동안은 나름, 애인역할 열심히 임해보려고 했는데 망한 것 같아.” “그대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망했다는 데에 중점을 두지 않고 외려 다른 데서 의외라는 듯 구는 블리어였다. 그를 힐끗 바라 본 렐리아는 다시 정면을 응시한 채 중얼거렸다. “..암튼 그렇다고. 어차피 헤어질 거라지만 공작이 이런 여자 만날 만큼 뒤떨어졌다는 소리 듣게 하고 싶진 않았어.” “그런 걱정을 다 했습니까.” 공작에겐 면목이 없을 각오로 말한 건데 그가 되레 이런 태도이니 기분이 묘했다. 그것도 잠시, 뒤이어진 그의 말에 렐리아는 눈썹을 지렁이처럼 구길 수밖에 없었다. “풀이 죽을 필요 없습니다. 그대는 뻔뻔한 게 장점 아닙니까.” “나 그렇게 배은망덕한 애 아니거든?” “내가 기억하는 그대는 배은망덕한 여자 맞습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만사 대충인 그대가 나름, 열심히 임해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거에 중점을 두겠습니다.” “비아냥이지, 그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고작 몇 주간 겉핥기식으로 배운 걸로 영애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내긴 어렵습니다. 형태가 그럴싸하게 보이게끔 겉만 꾸며놓은 것과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그대는 충분히 잘해주었습니다.” 그는 다시 머리위에 손을 얹고서 쓰다듬어주었다. 렐리아는 그 손을 콱 깨물어줄까 싶다가 그마저도 귀찮아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인간에는 두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겉이 그리 되었다고 정말 그렇게 된 줄 알았다고 착각하는 자만한 부류. 또 하나는 겉이 그리되어도 자만하지 않고 속이 다르다는 걸 깨닫고 있는 부류.” “그래서? 공작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감?” “나는 그대가 전자일거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대를 정확히 알기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은혜도 모르고 경거망동한 모습에 공비자리를 넘본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놔두면 과욕을 부릴 거란 생각에 무작정 그녀를 곱게 보이지 않던 과거와는 달리 현재의 그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전자였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그런가. 난 잘 모르겠는데.” 렐리아는 전자든 후자든 관심 없다는 양 대놓고 딴청을 부렸지만 블리어는 달랐다. “아직도 그때의 생각과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으니 이곳을 떠나겠다는 말말입니다.” “내가 그랬었나.” “고작해야 일주일 전입니다. 그날에 내가 그랬을 겁니다. 과거 일은 신경 쓰지 않을 테니 현재에만 잘하라고. 아직도 그때와 같은 생각이라면 별수 없습니다만, 그날 뒤로 나름대로 생각해봤습니다.” 태생적인 고귀함을 이 여자는 발끝도 따라잡지 못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의 것은 노력하면 된다고 블리어는 판단했다. 지식이란 보이지 않는 천한 말투는 고치면 되는 것이고, 무능함은 저가 옆에서 하나하나 가르쳐주면 된다. 내부 인사관리나 집안을 돌보는 일, 외부의 공식적인 사교활동도 가르치면 최소 일이년 내에는 혼자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을 테다. “태생이 다르면 뭐 어떻습니까.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그 차이정도는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나는 봅니다.” “말했잖아. 난 귀족 같은 거랑은 절대 안 맞는다니까.” 이 여자가 그럴 생각만 가지고 있다면야. 블리어는 작은 미련을 죽이고 잠시 진지했던 녹안에 어렸던 기대의 빛을 죽였다. 후련한 듯 고개를 떨어뜨린 채 그는 덤덤히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하도 그리 말하니 이젠 잘 알겠습니다. 한데 그거 압니까. 귀족이든 평민이든을 떠나 그대자체가 상당히 가볍다는 것을. 그 어떤 단어로 표현해도 이것만큼 잘 표현한 단어는 아마 없을 겁니다.” “뭐야. 나 욕하는 거야?” 엉덩이가 가벼운 여자라고 욕하는 건가 싶자 렐리아는 입술을 작게 이죽거렸다. “욕입니다.”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정정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여자는 가벼웠다. 상대가 귀족이든 평민이든을 떠나 누구에게도 얽매이려 하지 않는다. 후 하고 불면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 같은 가벼움이 아니라 자기 멋대로 머물렀다 사라지는 바람과 같은 가벼움이다. 잡아둘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뜻대로 움직일 수도 없는 그런 여자였다. 그러나 온갖 가벼움으로 주변을 치장해놓고 막상 중심이 되는 것은 무겁다. 어떠한 외부의 유혹, 타격에도 흔들리지 않게 그녀를 바로 잡고 있는 중심, 그것은 늘 그녀가 애타게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이제껏 말없이 잘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합니다.” “만족수치 너무 낮은 거 아냐?” “누가 깎아먹었다고 생각합니까.” 단호한 말씨에 렐리아는 치,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에 블리어는 그녀 쪽으로 손을 뻗어 가볍게 머리 위를 토닥여주었다. 돌로 빚어진 것처럼 무표정한 사내가 하기에는 참 괴리가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뭐, 노력했습니다.” “뭐, 그렇게 알게.” “내 말에 섭섭해서 그럽니까.” “허, 참나. 착각하지 말아줄래?” 블리어는 머리에서 손을 떼고 가만히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당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 여자였다. 그래서 행동과 말 한마디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그였다. “혹 내가 머리 만지는 게 싫습니까.” “응.” “예전에 좋다하지 않았습니까.” “언제 좋다고 했어. 블리어 미용실이라고 했지 좋다고는 한적 없거든.” “어째 말이 다릅니다만. 일관되게 행동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 말에 렐리아는 됐네요, 하고 말하듯이 어깨만 씰룩 움직여 보일 뿐이다.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즉흥적인 여자는 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싫습니까.” “좋지도 않아.” “의지된다 하지 않았습니까.” “응. 봉.” “그 봉이 그 봉이 아닌 걸로 기억합니다만.” 금전적이든 뭐든 의지할 수 있는 임시보호자 라고 답했던 걸로 기억한다. 의지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건 기본적으로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하고 그 신뢰는 호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감정이었다. 블리어는 그녀가 저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걸 애진즉 알아차렸으나 알다가도 모를 여인의 태도로 인해 손에 땀을 쥐었다. 이도저도 아닌 채 멈춰선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밀어붙이기에도 애매하고 강제로 잡아당기기는 더더욱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담 반대로 묻겠습니다. 그대는 뭘 좋아합니까.” “흐음~ 그을쎄? 아, 별이려나.” “…별 말입니까.” “응. 공작이 하늘 올라가서 별 따다줘.” “그 말은 곧 죽으라는 겁니까.” 그녀의 옆에 세 발짝 떨어져 선 블리어는 영락없이 덩치값 못하는 사내 같았다. 매사 무심하고 냉철한 공작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았다간 아연할 모습이었다. “별은 불가능하니 다른 걸 가져다주겠습니까.” “그럼 달.” “천체와 관련된 용어는 앞으로 일절 금지입니다. 다른 거 없습니까.” “무능력하네. 무슨 달도 못 따다줘.” “다른 것도 많지 않습니까. 평소답지 않게 왜 서정적이고 난리입니까 그대는. ……됐으니 다른 걸 말해보십시오.” 서투르지만 대화가 끊어지지 않게 넌지시 말을 붙이는 모습이 토라진 연인을 달래는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0099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춥진 않습니까. 이제 안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완연한 초봄날씨라 밤공기가 으스스하게 찼다. 렐리아는 블리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야외테라스를 벗어났다. 그와 함께 시답잖은 얘길 나누는 동안 지루함이 조금은 가셨는데 다시 그 지루한 무도회장으로 제 발로 돌아가야 되니 기분이 썩 좋지 못했다. “아 가기 싫다.” 군말 없이 화려한 궁정복도를 걷던 렐리아는 계단이 나오기 바로 직전의 복도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이에 블리어의 걸음 또한 덩달아 멈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그의 점잖은 시선에 머쓱해진 렐리아의 입에서 본의 아니게 투정부리는 말이 흘러나왔다. “가도 얘기 나눌 친구 한 명 없고 공작도 딴 데 갈 거고, 흐응 나 또 혼자네.” “옆에 있어주면 됩니까.” “그런 건 아니고… 큼, 공작 돌아가기 전에 잠깐? 콜?” 소주잔을 쥔 흉내만 낸 엄지와 검지를 입술 앞에서 까딱까딱 거려 보였다. 술 좀 마시고 들어가자는 렐리아의 제스처에 블리어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였다. 탐피아의 사절단은 물론 주요인사들과 미리 자리는 다 가졌으니 공작의 긴 부재에 의문을 표할 사람은 없을 테다. 두 사람은 공작개인이 배정받은 호화객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번 와본 적이 있는 렐리아는 제 집 안방인 양 편하게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동안 블리어는 객실 한편에 마련되어있는 와인진열장에서 최고급 품질을 자랑하는 브랜드 와인을 꺼내들었다. 금장식이 돼있는 마호가니 탁자 위에 두 개의 와인잔을 내려놓는 걸로 세팅을 마쳤다. 그는 직접 잔에 따라주기까지 했으나 렐리아는 여전히 침대와 한 몸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술 아닙니까. 와서 마시지 않고 뭐합니까.” “움직이기 귀찮은데….” 작게 구시렁거리더니 렐리아는 한 십 초가량 조용히 누워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작, 잔 줘. 나 침대 위에서 마실래.” “그러다 흘립니다.” “뭐 어때, 내 침대도 아닌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 전용객실의 침대이지 않습니까.” 블리어의 반박에 렐리아는 누운 채로 한 팔을 휘휘 저어보였다. 벌써부터 태만에 찌든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차피 공작이 치울 것도 아니잖아.” “왕궁시종이 시트에 묻은 와인자국을 보고 뭐라 생각하겠습니까. 한 나라의 공작으로서의 체면이 이불위에 뭘 질질 흘리는 여섯 살 난 아이로 격하되는 꼴을 꼭 보고 싶습니까.” “아 거참, 안 흘리면 되잖아.” “안 흘리면 된다가 아니라 안 흘리도록 여기 앉아서 마시라는 겁니다.” 도대체가 빈틈이라곤 없는 남자였다. 렐리아는 그와 말로 싸우면 저가 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불리한 싸움은 회피가 최선인지라 그녀는 몸을 옆으로 홱 뒤집어버렸다. 일방적인 대화단절에 블리어는 탁자 앞에 자리를 지키고 있다말고 침대가로 다가왔다. 침대기둥 옆에 선 그는 여인의 몸에 터치를 하기보다는 슬그머니 미끼용 말을 던졌다. “그렇게 게을러서야 밥은 어떻게 먹고 산답니까.” “나 평소에 밥도 침대위에서 먹는데?” “그것 참 자랑입니다.” 발끈해서 저를 돌아보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으나 렐리아는 미끼를 물지 않고 덤덤히 흘려보냈다. 블리어는 허무하게 끝난 대화에 무슨 말을 더 붙여야할지 몰라 그저 등 돌리고 누워있는 여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에 부담스러움을 느낀 렐리아는 슬쩍 눈썹을 구겼다. 언제까지 저러고 있나 속으로 별렀으나 오 분도 못가서 그를 팩 돌아보았다. “아까는 무슨 밤하늘에 별을 따다준다고 해놓고서는 이거 하나 못 들어줘?” 당당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며 항의하는 여인을 블리어는 단호한 눈길로 내려다봤다. 허나 그것도 얼마못가 한껏 고집스럽게 치뜬 그녀의 두 눈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만 그였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서 블리어는 조금 더 근접한 거리에서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따다준다고 약속한 기억은 없는 걸로 압니다. 그대가 일방적으로 우겼을 뿐이지 않습니까. 난 지키지 못할 약속은 처음부터 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 얘기, 전에도 들었거든여? 어유~ 질려라” 무성의한 태도로 렐리아는 두 손을 들어 귀를 막았다 뗐다 반복했다. 누가 봐도 얄미우라고 하는 행동이었다. 렐리아는 예전보다 막나갔다. 단칼에 내치려고 해도 공작에게는 이상하게 그게 힘들었다. 뭔 수로 상처를 줘도 결국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정 떼려고 완전히 밉상처럼 굴었지만 그걸 이미 간파한 건지 아니면 면역이 되어 별 소용이 없는 건지, 아무튼 그는 무덤덤했다. “뭐야. 무슨 생각하길래 조용해? 그 시간에 와인 가져오라고.” “어떻게 이렇게나 예쁜 구석이 없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블리어는 한 번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해 새로이 고찰하는 학자처럼 비장히 운을 뗐다. 그 말에 렐리아가 말다했냐고 반발하기 전에 그녀의 입술에 조심스레 그의 검지가 닿았다. 살짝 튀어나온 아랫입술을 밀어 넣어주며 그는 낮게 뇌까렸다. “어째 입술도 얄밉고.” “…뭐,” “눈도 얄밉고, 이 코도 얄밉게 생겼습니까.” “지금 시비거는 거지.” 얄밉다고 욕하면서 눈은 귀여운 걸 보듯이 포근하기 그지없으니 단단히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못마땅한 듯이 굴었다. 허나 가슴속에서 활어처럼 팔딱팔딱 뛰는 심장을 그에게 들킬까 속으론 조마조마해있었다. 그런 저를 꿰뚫어본 건지 그는 끈질기게도 저와 눈을 마주쳐왔다. 곧 그의 오른손이 뻗어져오더니 저와 그의 몸 사이에 내려앉았다. 공작은 편한 친구 대하듯 비스듬히 천장을 가리고선 저를 내려다보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못난 그댈 누가 데려갈지 감히 상상이나 갑니까.” “거참, 말귀를 못 알아듣네. 됐고! 와인이나 내놔라고오!” 그가 뭔 소리를 하려는지 그 의도를 눈치 챘으나 숫제 모른 척 굴었다. 렐리아는 행패를 부리는 취객처럼 대뜸 술을 가져오라고 바락바락 떼를 썼다. 자기 원하는 대로 해달라고 하는 것도 모자라 과격하게 그의 팔과 어깨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이런 모습에 질릴 법도 할 텐데 블리어는 오히려 미약하게 입술 끝을 휘었다. 그 반응에 기어이 렐리아는 자기가 와인병을 들고 오겠다며 몸을 일으키려했다. 동시에 그의 팔 아래에서 벗어날 것을 꾀하고 있었으나 블리어는 오른팔을 치워주지 않았다. “침대에서 마시지 말라고 했습니다. 곧 죽어도 가져올 생각입니까?” “더러워서 정말… 내가 가서 마시면 되잖아.” “정말 그렇게 할 겁니까. 그래놓고서 와인병을 안고 침대위로 뛰어올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겁니까.” “참나, 안 그런다니까. 좀 비키시지?” 렐리아는 도도하고 까칠한 아가씨에 빙의해 그의 팔을 한손으로 툭 내쳤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렐리아는 그토록 원하던 와인 잔을 손에 넣었다. 달달한 향과는 달리 진한 도수를 자랑하는 술은 오늘따라 목 넘김이 좋았다. 지랄 맞던 심장이 술이 들어가는 순간 바로 잠잠해졌다. 렐리아는 캬 하고 소리를 내며 투명한 잔 테두리에서 입술을 떼었다. “어우 취한다!” “그렇게 원샷 하라고 오랜 기간 숙성시킨 술이 아닙니다. 음미하면서 마셔보는 게 어떻습니까.” “술이 들어간다~” 눈 깜짝할 새에 거뜬히 두 잔째 비워낸 렐리아는 블리어의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혼자 흥얼대며 술만 들이켜고 있는 그녀를 블리어는 잠자코 바라만 보았다. 도저히 떨어져나갈 기미가 없어 보이는 그의 조용한 눈길에 렐리아는 보란 듯이 와인잔을 탁, 소리가 나게끔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다시 한 번 캬, 소리가 그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렐리아는 와인병을 쥐고 이번에도 잔 가득 따르기 위해 병을 기울였다. 그 순간 바르르르, 유리잔 속의 액체가 미세한 떨림을 보이자 잠시 기울였던 병을 바로 했다. 자세히 투명한 잔 안을 살피려했으나 얕은 진동은커녕 자색빛 와인은 그저 잔잔하게 반쯤 채워져 있을 뿐이었다. “어라? 내가 너무 한꺼번에 많이 마셨나.” 헛것을 본 사람처럼 렐리아는 두 눈을 비비적거렸다. 취해서 잘못 봤다고 하기엔 아직 취기도 제대로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 “왜 그럽니까.” 그런 렐리아의 행동이 이상해보였던 건지 블리어가 걸터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눈에 뭐가 들어간 건가 싶어서 그녀 양 뺨을 쥐고서 고개를 숙였다. 어디 좀 보자고 그는 느릿하게 말하며 깜빡깜빡 대는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뭐가 특별히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눈이 간지러운 겁니까?” “그건 아닌데.” 부담스러울 만큼 가깝다. 렐리아는 두 손으로 그를 슬쩍 밀어내고서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잔을 쥐었다. 괜히 딴청부리며 잔을 기울이느라 엉뚱하게도 다른 쪽으로 와인이 흘러내려 턱을 적셨다. 렐리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닦아내려하자 대번에 블리어가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반대 손의 엄지로 턱 아래에 매달린 와인방울을 거두고서 품속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다시금 닦아주었다. 아기의 입가에 묻은 이유식을 닦아주는 애기엄마처럼 상냥한 손길로 그는 무뚝뚝하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내가 뭐라 했습니까. 흘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아까 잔 흔들린 거 생각하느라 실수로 그런 거야. 원래는 안 흘린다고.” “앉아서도 흘리는데 누워서는 오죽 하겠습니까.” “평소엔 안 그런다고.” “이렇게 칠칠치 못해서야, 이런 것까지 내가 옆에서 일일이 챙겨줘야 합니까.” “됐다, 됐어. 말을 말지….” 구시렁대며 렐리아는 다시 와인잔에 입을 가져다댔다. 그러다 또 한번 요동치는 와인잔의 내용물에 멈칫 잔에서 입을 뗐다. 단순히 와인잔뿐 아니라 몸 전체로 미세한 진동을 느꼈다. “역시 이거,” 전조 없이 갑작스레 찾아오는 진동은 익숙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치솟을 때 천장 위에 달려있던 샹들리에가 좌우로 작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잔을 내려두고 몸을 일으키려했다. 양어깨에 내려앉는 커다란 두 손에 멈칫하고 떼었던 엉덩이를 바로 의자위에 붙여야만 했다. “내가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뭐? 나는?” “위험할지 모르니 그댄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웃기지마. 누구 맘대로.” 그의 손을 치우고 렐리아는 일어나려했다. 사뭇 진중하게 가라앉은 블리어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행동이 딱 멈춰버렸다. 부모님이 누누이 충고한 말을 어기려다가 딱 걸린 말썽꾸러기가 된 기분이었다. “이번은 내 말 따르십시오.” “…뭐,” “부탁입니다.” 무거운 녹빛의 눈은 이제껏 자기가 한 말이 틀린 적은 없지 않느냐고 묻고 설득하는 듯했다. 이에 대해 렐리아도 딱히 반박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확실히 그가 냉철하게 내린 판단들이 틀린 적은 거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공작의 말에 따랐다가 손해 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신중하게 말하는 거보면 그래도 따르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였다. 진동이 멈췄다. 렐리아는 조금 긴장감이 풀렸다. 현실에서도 예기치 못한 약한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여기도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괜히 쫄았구나 싶어서 렐리아가 머쓱할 때 블리어가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잠깐 회장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더도 말고 십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약속하며 두 손에 부드럽게 감싸고 있던 동그란 어깨를 놓아주었다.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않습니까?” “알겠어. 기다릴게.” “잘 생각했습니다.” 블리어는 딱딱한 말투를 나름 다정하게 바꾸며 대답했다. 읊듯이 일정한 톤에, 그녀가 듣기엔 말의 속도가 조금 느려진 정도였지만. 홀로 객실을 나서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심드렁히 말했다. “딱 십 분이다?” “알겠습니다. 상황보고 슬슬 가문으로 돌아가도 될 것 같으면 일찍 돌아갑시다.” “엉.” 렐리아는 끝까지 저를 돌아보며 말하고 있는 그에게 어서 문이나 닫으라고 손을 휘적거렸다. 그제야 목석같은 남자는 문을 닫고 나갔다. 렐리아는 의자에 앉아서 지루하게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응시했다. 딱 십분 안에 안돌아오면 어떻게 그를 쪼아댈지에 대해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덜덜덜, 수전증처럼 얕게 진동이 시작되더니 의자다리가 갑작스레 마구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떨림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테이블 위를 짚다가 쨍그랑 하고 뒤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리자 고갤 돌렸다. 화병이 바닥에 산산조각 깨져있고 그 중심으로 물과 줄기달린 꽃들이 퍼져있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심상치 않은 진동에 렐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벽에 걸려있던 괘종시계는 물론이고 풍경화 액자와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장식용 잡동사니들이 떨어지거나 크게 흔들렸다. ‘역시 불안해.’ 단순히 지진이었으면 좋겠지만 이번에도 그것이 온 건가 싶었다. 렐리아는 공작을 혼자 보낸 것에 급 후회가 치밀었으나 생각할 시간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가 나간 동시에 객실 벽위로 쩌저적 균열이 생겨났다. 0100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렐리아는 궁정복도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빠르게 달렸다. 바닥과 벽, 천장을 뒤흔드는 불규칙적인 진동과 긴 복도의 여러 구간을 꺾고 돌아야하는 구조로 인해 아주 빨리 달리기도 힘들었다. 그런 것치곤 렐리아는 삼분도 안 걸려 1층 무도회장과 이어지는 계단 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급한 기세와는 달리 그녀의 걸음은 이층 계단난간 앞에 허무하게 멈춰 섰다. 두 귀를 가득 메우는 대중의 술렁거림과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이 벌어졌다. ‘…대체,’ 렐리아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일층의 회장을 바라보기보단 놀란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지금 저의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천장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아니 그려져 있다기보다는 비행물체처럼 떠있었다. 전체적인 무늬만 봐서는 열두 개의 모서리를 가진 복잡하게 생긴 십이각 별이었는데 각 모서리마다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 원안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긴 글귀와 복잡한 기아학적인 무늬가 새겨져있었다. 무엇보다 그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푸른빛을 내며 넘실넘실 움직였다. 무도회장의 가장자리 곳곳에서부터 끊임없이 푸른 글귀들이 흘러나와 각 모서리마다의 원 안을 채워나갔다. 위층에 서있는 렐리아는 그 위치가 정확히 허공에 떠있는 마법진의 모양을 뜻한다는 걸 알았다. 점 위치마다 사람이 서있었다. 아까 마법사 윈과 나란히 서서 얘기를 나누었던 자리에서도 그 형광빛을 띠는 푸른 글자들이 흘러나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너무 멀어서 얼핏 늘어난 비디오테이프의 줄 같기도 했는데 마법진 안으로 빨려가며 빠르게 빈 공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몰라도 렐리아는 공작을 찾는 게 우선이라 여겼다. 렐리아는 왼편으로 고갤 돌렸다. 금으로 된 계단 난간은 아래층을 향해 곧게 뻗어있었다. 회장안 모여 있는 군중들 모두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느라 계단 쪽으론 시선 하나 없었다. 난간위에 사뿐히 걸터앉아 렐리아는 미끄럼틀을 타듯 빠르게 미끄러져 일 층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공작은 대체 어딨는 거야.’ 수많은 인파 속을 헤집으며 렐리아는 블리어를 찾아 헤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고 구시렁대다가 무도회장 중심에 서있는 마법사로 보이는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노인의 주변에는 개미 한 마리 없이 휑하니 비워져있었다. 흰 수염을 길게 기르고 있는 노인은 낡은 지팡이를 천장을 향해 치켜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지휘관과도 같았다. 또한 우렁찬 목소리는 호기로운 젊은 청년 못지않았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잡다한 술렁임으로 인해 뭐라 외치는 건지 자세히 알아들을 수 없었는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외침이 사람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페드락…! 속도가 빨라! 윈에게 맞추거라!!” 윈. 그 익숙한 이름에 렐리아의 시선이 아까 머물렀던 자리로 향했다. 중심에서 상당히 먼 구석자리에는 단정하게 금발을 묶은 사내가 기둥을 짚고 서있었다. 윈에게서 세 기둥 떨어진 거리에는 페드락이라 불린 사내가 서있었다. 목소리는 거의 안 들렸으나 그들의 입모양을 보니 미리 맞춘 것처럼 정확하고도 빠르게 무언가를 읊고 있었다.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허공에 떠오른 투명한 선들이 형광하늘색을 입어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선들은 의지가 있는 것처럼 스르륵 움직여갔다. 구부러지고 꺾이며 글자를 만들었고 마법책에서나 볼 수 있는 복잡한 공식과 문장을 끊임없이 생성해나갔다. 구현화 단계라고도 불리는 단계였다. 패턴을 이뤄가며 피어나가는 선들이 얼기설기 얽혀 허공에 무도회장 천장을 거의 메울 듯이 거대한 마법진을 그려나갔다. 노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호통과 같은 언어들에 마법진이 반응해 더욱더 밝고 강렬한 빛을 뿜어내었다. 좌중을 압도하는 크기에 대중들이 바보처럼 멀거니 올려다보고만 있던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궁──!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무도회장 천장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심하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지름 5미터에 달하는 샹들리에는 용케도 떨어지지 않고 천장에 매달려있었다. 곳곳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겁에 질린 동물처럼 최대한 바닥에 가깝게 몸을 옹송그리며 낮췄다. 울부짖음과 가까운 남녀노소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그 공포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잡아먹혀 목을 움츠린 채 마법진을 응시했다. 구구구궁─. 또 한번 뒤흔들리는 천장과 동시에 마법진에 조금 금이 가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그 마법진의 색이 짙은 형광푸른빛에서 하늘빛으로 변할 듯 말 듯한 경계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문자들 사이로 오묘한 금빛이 터져 나온다는 것도. “조금만 더 버텨라!” 중심에 서있던 노령의 마법사가 소리쳤다. 마법진은 시시각각 색이 변했으나 시동단계에 들어서면서 미세하게 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마법에 무지한 자들이 보기엔 단순히 환한 금빛일진 몰라도 마법사들에게는 살수 있다는 희망, 이겨낼 수 있다는 희망을 뜻하는 금빛이었다. “커헉…, 쿨럭!” 그때 회장 중심으로부터 2시 방향에 서있던 한 젊은 마법사가 각혈을 하며 몸을 굽혔다. 동시에 외관으로도 식별 가능할 만큼 마법진에 뚜렷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법진은 금빛에서 다시 푸른빛으로 돌아갔다. 까마득한 무도회장의 천장이 거센 파도처럼 뒤흔들리기 시작하고 금 부스러기와 돌먼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악! 흐으…” “흐으윽…윽…제발, 제발.” 덜덜 떨면서 주저앉아있는 여인들과 두 팔로 머리를 보호하며 겁에 질린 남성들 사이에서 렐리아는 서느런 목을 애써 꼿꼿하게 폈다. 목덜미에 소슬한 칼날이 닿아있는 것만 같았다. 시각적, 청각적인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는 사이 멀리서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하고도 메아리처럼 퍼져 나오는 웅장한 소리는 분명 위층 객실이 있는 방향이었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곧 좌중의 모든 이들이 죽음의 공포에 눌려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때였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다시피 한 젊은 마법사가 희미하게나마 중얼거림을 보태는 게 들려왔다. 그는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갈비뼈아래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마법을 이어갔다. 그의 노력을 배반하지 않으려는 듯 나머지 열 한명의 마법사들도 집중해서 신속히 마법진을 완성시켜갔다. 천장 위에 떠오른 거대한 마법진은 다시 점차 금빛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청명한 새벽하늘을 뒤덮는 금빛의 일출처럼 희망이 되살아났다. “푸라 홀락트!!!” 강한 호통 같은 목소리가 장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무도회장 중심에 서있던 노령의 마법사가 높이 치든 지팡이로 세게 바닥을 내리찍었다. 낙뢰와 같은 기세로 번쩍, 빛이 튀며 순간 그 일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새하얗게 시야를 뒤덮는 강한 빛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한동안 무도회장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천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잠잠해진 가운데 저벅저벅 하고 단 하나의 발소리가 군중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흔들림을 멈춘 샹들리에가 태양처럼 환한 빛을 쏟아내었다. 그 아래 선명한 적색망토를 나부끼며 회장 중심으로 걸어온 사내는 다름 아닌 무도회장의 최상석에 앉아있던 국왕 라델리우스였다. 라델리우스는 공손하게 몸을 낮춘 채 서있는 노령의 마법사를 향해 다가섰다. “드라도스. 결과는 어떻게 되었지.” “대마법방위진을…무사히 완성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실버드래곤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해질 겁니다.” “훌륭히 잘해냈다.” 왕의 말에 왕국의 대마법사 드라도스는 그제야 지팡이에 지탱하고 있던 몸을 허물어뜨렸다. 참아내고 있던 눈물이 주름진 그의 눈가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법진을 완성시키고서 그 자리에서 순직한 젊은 마법사를 바라보며 드라도스는 해냈다는 감격과 어린 제자를 잃은 슬픔에 힘겨워했다. 라델리우스는 늙은 대마법사의 어깨를 한번 두드려주고서 귀족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들어라.” 좌중을 둘러보는 왕의 무거운 시선에 귀족들은 숨소리마저 낮추고 몸을 낮췄다. 모든 이들이 그에 대한 존경을 표할 때 라델리우스의 기백 있는 목소리가 사위로 뻗어져나갔다. “방금 전, 이곳 왕궁을 공격한 존재는 침탈을 꾀하는 적국의 군대도, 하물며 천재지변도 아닌, 드래곤이다.” 숨을 들이켜는 작은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허나 술렁임이 흐르기 전 왕의 목소리가 완전히 좌중을 압도해버렸다. “건국사에 나오는 수호드래곤과는 다르다. 그것은 우리 바일롯을 멸망시키기 위한 존재로, 지난 천 년간 극비리에 봉인해왔던 존재다. 현재 어떠한 연유로 그것이 깨어났고, 왕국은 건국 이래 가장 큰 멸망위기를 맞이했다고 본다.” 국왕을 제하고 단 아홉 명밖에 알지 못했던 극비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결단코 알려서는 안 된다는 몇몇 측근들의 우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항상 백성이 우선시 되어야한다는 초대 국왕의 건국이념에 따른 결과였다. “우리 바일롯 왕국은 최대한의 인명 손실을 막을 것이다. 그러니 이날을 기점으로 왕국을 떠나도 좋다. 왕국을 위해 남을 자들만 남아라.” 억눌렸던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허나 짐과 충직스런 아홉 개의 개국공신가는 왕국의 흥망을 건 거대한 재앙과 맞서 싸울 것이다.” 수도 여기저기서 불운한 사고들이 이어지고 수백에 달하는 희생자가 나온 후, 국왕 라델리우스는 더 이상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는 것을 볼 수만은 없었다. 그리하여 국왕은 탐피아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조건으로 제국은 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하였고, 외교사절단을 가장한 왕국 방위의 사명을 띤 황실마법사 여섯 명과 제국의 다섯 무가를 지탱하는 명장군들을 급히 왕국으로 파견했다. 더 이상의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한시 빨리 드래곤을 봉인시켜야 한다는 판단에 이른 국왕은 왕국의 대마법사 드라도스의 말을 적극 수용해 다소 위험한 작전을 세우게 되었다. ‘드래곤과의 정면에서의 전투는 아무래도 저희 인간들 쪽이 불리합니다. 그러니 공격할 시기를 기다려야합니다. 대대로 드래곤을 연구해왔던 마법사들의 학설에 의하면 드래곤은 레어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일정지역에 에너지를 정체시킬 결계를 쳐두고서 마나공급 시기에 들어갑니다. 일종의 휴식기라고도 하죠.’ 드라도스는 그간 실버드래곤이 수도를 공격해온 시기와 그 공격범위, 피해규모 등을 조사하였고 이러한 결론을 내렸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일정시기를 두고 여러 차례 수도를 공격한다는 건, 아직까진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제 막 봉인에서 풀려난 상태인지라 기력이 없거나, 혹은 봉인을 푸는 과정에서 부상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기에 본모습을 숨길 가능성이 크며, 왕국의 일정한 곳에 이미 자리를 틀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휴식기동안 본체화로 있어야하니 아무래도 넓은 지대를 자신의 레어로 만들어놨을 거란 추측이 부가적으로 뒤따랐다. ‘드래곤이 왕국을 집중적으로 공격해올 때까지의 준비기간을 주어선 안 됩니다. 그렇기에 저희왕국 쪽에서 먼저 드래곤을 꾀어내는 작전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폐하께 간곡히 여쭙고 싶습니다.’ 언제, 어느 곳을 공격할지 예측할 수 없다면 가장 공격하기 좋은 장소를 만들면 되는 법이다. 왕도의 모든 귀족들과 국왕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는 드래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드라도스는 드래곤이 무리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놓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위험한 것은 아닌가.’ ‘작은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에는 확실히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허나, 저희로서는 만반의 준비를 다할 것입니다. 폐하.’ 드라도스는 허옇게 센 턱수염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드래곤은 마나의 의존적인 개체입니다. 왕궁을 무너지게 할 만큼의 거대한 마나를 끌어다 사용한다면 다시 왕도에 집중공격을 퍼붓기까지 약간의 휴식기가 필요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희는 그것을 역으로 노려서 레어 속에서 휴식기에 접어든 드래곤을 단번에 봉인시킬 생각입니다.’ ‘괜찮은 생각이다. …가능성이 있겠어.’ ‘문제는 레어의 위치를 알아내는 것인데 이에 저희는 마나 추적마법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왕궁자체가 드래곤이 마나를 사용하게 만들 미끼가 되어야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두고 라델리우스는 긴 시간 고민해야만 했다. 하지만 한시가 시급한 터라 여유롭게 고민에 빠질 시간도 없었다. ‘드라도스, 필히 성공해야 된다. 실패하면 그야말로 왕국의 멸망이다.’ ‘만일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폐하께서는 안전한 곳에 미리 대피하여 계시는 게…,' ‘아니. 나도 함께 한다.’ 왕도의 모든 귀족들을 위험에 끌어들여놓고 홀로 살겠다고 피해있는 무책임한 왕은 될 수 없었다. 선대가 이어온 현군의 길에 어긋나는 짓이었다. 만일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귀족을 제한 수도의 남은 백성들이 이곳을 완전히 떠날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라델리우스는 그걸로 족하다 여겼다. 그렇게 시작된 작전준비는 연회일로부터 약 2주전부터 시작되었다. 왕국마법사 백삼십 명이 미리 왕궁전체에 걸쳐 완성해놓은 방어결계에 황실 대마법사 여섯 명의 힘을 더 보태 강력한 방위결계를 설계함으로써 드래곤의 공격을 대비했다. 그리고 왕실 대마법사 드라도스의 지휘아래 결계 속에 추적마법을 시동시킬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드래곤이 알아차릴 가능성이 있기에 그들의 작업은 은밀히 이루어졌다. 마침내 당일, 마법진을 구현시킬 열두 명의 뛰어난 마법사들을 연회장 곳곳에 배치하고서 드래곤이 공격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 명의 젊은 마법사를 그 자리에서 잃고 한 단계 더 견고하고, 높은 완성도를 띠는 대마법방위진을 끝내 완성시켰다. 정면으로 싸우기엔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일지 모른다. 라델리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왕국하나를 통째로 지배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초월적인 존재와 수호드래곤이 이 땅에 뿌리내린 왕국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이 왕국 편에 서서 나서준다면야 실버드래곤의 봉인은 물론, 어쩌면 왕국을 위협하는 그것을 아예 제거해버릴 수 있으리라. “짐은 이 자리에서 선포하는 바이다. 반드시 바일롯은 불멸이다.” 0101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라델리우스는 급히 연회를 파했다. 소란스러웠던 위층의 사고파악을 위해 왕궁 마법사들과 기사단을 올려 보냈다.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왕이 사라진 후에도 무도회장안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군중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중엔 렐리아도 있었다. 귀족들은 죽다 살아난 것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막상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선 당혹감과 얼떨떨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드래곤이 이곳을 공격할 것을 알면서도 저들을 한곳에 모아둔 왕을 향한 얕은 배반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물론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하는 자들은 소수였고 대부분이 수도 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왕궁이라는 믿음과 더불어 무사하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허나 회장 안에 있는 귀족들이 모르는 위층의 피해는 실로 참혹했다. 스무 개의 객실과 그 근처복도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짙은 먼지연기만 자욱히 피어올랐다. 그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타닥타닥 거친 발소리가 울렸다. 한 사내가 처참한 사고현장을 향해 서둘러 뛰어오고 있었다. 뿌연 먼지도 가리지 못하는 남자의 새까만 머리카락이 짧게 이리저리 나부꼈다. ‘내가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습니다.’ ‘뭐? 나는?’ ‘위험할지 모르니 그댄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십시오.’ 블리어는 연회복이 흐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나풀거리는 먼지바람 너머의 시야에 집중했다. 점점 사고 현장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발치에는 튕겨져 나온 벽의 잔해들이 즐비해져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로 그의 성급한 발걸음을 멈춰 세우지는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잠깐 회장을 살피고 오겠습니다. 더도 말고 십분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리 약속했던가. 블리어는 뇌리에서 스치고 또 스쳐지나가는 아까의 장면을 회상했다.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않습니까?’ ‘알겠어. 기다릴게.’ 잠시 아래 무도회장으로 내려와 위터 백작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던 블리어는 위층에서 들려오는 심상치 않은 소리에 급하게 뛰어올라와야만 했다. 멈추지 않고 달리느라 그의 숨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있었다. 들썽거리는 숨은 먼지로 뒤덮인 대기로 인해 더더욱 가빠지기만 했다. 매캐한 숨을 들이켜며 블리어는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허무하게 발걸음이 멈춰졌다. 무언가에 세게 맞은 것처럼 부서진 외벽사이로 건물의 골격이 드문드문 보이는 현장이 드러났다. 그 속에서 왕궁마법사와 기사들만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복원마법이 한창 진행 중일 때 기사들은 널브러진 잔해 밑에 깔려죽은 희생자들의 시체수습 작업에 한창이었다. 블리어의 시선은 무거운 추를 단 것처럼 잔해더미 밖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시신들로 떨어졌다. 넝마가 된 의상과 탁한 피와 먼지로 얼룩진 몸뚱이로 인해 시체들의 얼굴확인이 어려웠다. 블리어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회상했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추운 날씨 속에서 시신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피며 그 여자를 찾아 헤맸던 적이. 그때는 이 정도로 절망스럽지는 않았다. 저기서 조금만 더 가면 렐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객실이었다. 하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광경은 차마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블리어는 이성적인 사고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그 자리를 메우듯 자연스레 머릿속에 가득 차는 여인을 떠올렸다. 낭랑한 목소리, 얄밉기 그지없는 눈코입, 선연하기만 한 그 모습들이 그의 두 눈에 괴었다. ‘가도 얘기 나눌 친구 한 명 없고 공작도 딴 데 갈 거고, 흐응 나 또 혼자네.’ ‘공작, 잔 줘. 나 침대 위에서 마실래.’ ‘나 평소에 밥도 침대위에서 먹는데?’ ‘아까는 무슨 밤하늘에 별을 따다준다고 해놓고서는 이거 하나 못 들어줘?’ 하나같이 죄다 시답잖은 기억들뿐이라 더 기분이 묘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상적인 얘길 나누었기에 더욱더 지금과 매치가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어떻게 비극적인 대형사고가 이렇게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틈도 없었다. 그리고 자꾸만 그녀를 마지막으로 봤던 순간이 머릿속에서 되풀이되었다. ‘딱 십 분이다?’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같이 가자는 여자를 다름 아닌 자신이 그 방에 밀어 넣었는데 어떻게 일이 이렇게 될 수 있단 말인가. 의자에 기대앉은 채 어서 갔다 오라며 손을 휘적거리던 여자가 저 지옥같은 현장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 여기니 블리어는 쉰 소리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입안은 얼얼하다 못해 혀뿌리가 마비된 기분이었다. 놀라서인지 원통해서인지, 숨이 다 막힐 만큼 심하게 목이 시큰거렸다. 전체 피해현황과 희생자를 조사 중이던 한 기사가 자리에 붙박여서있는 그를 발견하고 무겁게 경례했다. 그제야 블리어는 굳어있던 다리를 강제로나마 움직여 현장으로 직접 걸음 했다. 살아있을 수도 있다는 근본 없는 희망이 신기루처럼 그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현장으로 들어선 후 점점 더 무거워져만 가는 그의 마음이었다. 무너진 벽 아래에서 하나둘 시신들이 발견되고 블리어의 주위로 기사들이 드바쁘게 시신을 옮겼다. 시신은 남녀노소 할 것 없었다. 객실에서 쉬고 있던 귀족들의 대부분이 죽은 채 발견되었다. 간혹 죽어있는 여성들이 발견될 때마다 블리어의 시선은 더욱이 무거워졌다. 찢어져있는 드레스자락 사이로 피투성이 다리가 드러나 있거나 목이 반쯤 꺾여있는 정도는 그나마 양반이었다. 희고 고왔던 피부가 너덜너덜한 고깃덩어리 신세를 면치 못한 자들이 태반이었다. 훅 끼쳐오는 역한 피비린내에 블리어는 걸음을 멈췄다. 방을 구분하는 벽들이 죄 허물어져있어 객실구분이 힘들긴 했으나 거리상 이 다음이 자신의 객실이 있을 자리였다. 그러나 막상 나아갈 수가 없었다. 죄책감이 발목을 단단히 틀어쥐고서 놓아줄 생각을 안했다. 블리어는 차마 그녀의 생사를 확인할 면목이 서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발소리가 있었다. 그가 지나쳐온 곳을 따라 들어선 여인은 드레스자락에 먼지가 묻고 구두창이 피로 적셔지는 것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애써 잔인한 살풍경으로부터 시선을 주지 않기 위해 익숙한 사내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시키다시피 했다. 기사들의 귀를 피해 렐리아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공작.” 그 부름에 블리어의 몸이 먼저 반응했다. 뒤를 돌아보자마자 바로 가직한 곳에 위치한 여인의 모습에 그의 동공이 소스라치며 커졌다. “어디 갔었던 거야. 계속 찾아다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블리어의 손이 렐리아의 팔목을 붙잡아 세게 잡아당겼다. 그에게 끌어당겨지기 무섭게 다른 팔이 빠르게 뻗어져와 그녀의 등을 와락 옭아매었다.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렐리아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격한 포옹에 혀를 깨물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미지근한 온기 속에 갇힌 채 렐리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뒤늦게 숨 막히게 뭐하는 짓이냐고 그를 떼어내려 했으나 순간 귓가를 절절하게 채우는 목소리에 멈칫해버렸다. “미안합니다…” 안 그래도 꽈악 조여 오는 팔에 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몸을 굵은 밧줄로 동여맨 것만 같았다. 렐리아는 그와 맞물린 상체에 거의 가슴이 눌렸으나 그다지 불쾌한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여겼다. 왠지 오히려 저가 그를 안아줘야만 될 것 같은 충동에 휩싸였다. “무작정 기다리라고만 해서…정말 미안합니다. 나의 무책임한 발언에 하마터면 그대가,” 블리어는 끝내 뒷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 깊이 안도한 탓에 목소리가 메여 나오지 않았다. 그는 무식하게 조르고 있던 팔을 들어 여인의 작은 뒷머리를 받쳤다. 그러고는 애틋하게 그녀 옆머리에 코를 가져다댄 채 십년감수한 사람처럼 나지막이 한숨소릴 흘렸다.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만큼 그의 행동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다. 그런 사내에게 얌전히 안겨서 렐리아는 머쓱하게 그의 목을 바라보았다. 너무 가까워서 제 입술이 닿지 않을까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척 운을 뗐다. “왜 공작이 나한테 미안해하는데.” 작은 숨결이 그의 목가에 고스란히 닿았다 떨어졌다. 그에 블리어의 팔힘이 조금 풀리자 렐리아는 슬그머니 그를 제게서 밀어내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내가 안에 있는 게 안전하다고 함부로 실언하지 않았습니까. 그대가 저곳에서 나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어찌 됐을지,” “됐어.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뭐. 진짜 못된 놈들은 이런 위험이 있을 줄 알고 있으면서도 쉬쉬한 윗대가리들이지 공작이 아니야.” 렐리아는 블리어의 눈을 회피하듯이 고갤 돌렸다. 누가 보면 진짜 연인인 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니 간지러움이 일었는데 멀지 않은 곳에 놓여있는 시신들에 간지러움이 순식간에 해소되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면 돈이든 뭐든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여기 사망자의 신상이 전부 확인되었습니다.” 기사의 보고가 렐리아가 서있는 곳까지 또렷이 들려왔다. 괜히 듣고 있으면 마음만 착잡해질 것 같아 등을 돌려 걸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사망자는 총 스물셋 입니다. 스물두 명은 귀족이며, 나머지 한명은 대신전의 사제로 파악되어……” 그녀의 움직임이 멈췄다. 렐리아는 귀가 멍멍해진 기분이 들었으나 애써 떨쳐내며 기사들이 서있는 곳으로 바로 움직였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블리어는 그녀를 붙잡기 위해 뒤따랐다. 얼마안가 렐리아의 걸음은 자동적으로 멈춰졌다. 차마 시신들을 세세히 훑어 내릴 수가 없어 빠르게 눈을 굴리다가 렐리아는 멀지 않은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덩달아 숨소리도 멈췄다. 한쪽 어깨와 머리를 제하고 전신이 거대한 벽의 잔해아래에 깔려있는 남자가 보였다. 희뿌연 먼지구덩이 속에서도 저녁의 낙조처럼 타오를 듯한 적발이 어째 그녀 눈에는 선명했다. 장미꽃잎 같던 화려한 붉은색이 검붉은 핏물에 젖어 탁하게 죽어있었다. “…….” 렐리아는 시선을 돌리지도 못했다. 입을 틀어막고 싶은데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아,럼프.” 바닥에 괴인 흥건한 핏물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렐리아는 겨우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자신의 친구가 왜 저기에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보이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은 처음이었다. 렐리아는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함께 있었던 그를 떠올렸다. 살짝 고개를 내린 채 씁쓸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제 손목을 힘없이 그러쥐었던 긴 손가락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그런데 넌 언제든 날 내칠 수 있는 거야?’ 마지막까지 친구에게 모질게 대한 결과가 이런 거였다니 미처 상상이나 했을까. 손끝이 그녀자신도 모르게 떨렸다. 몸의 감각은 없는데 금방이라도 속절없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때 뒤에서 뻗어져온 손이 부드럽고도 강하게 제 손목을 감싸고 몸을 돌려세우는 게 느껴졌다. 렐리아는 그제야 눈을 스르륵 내리깔며 단단한 품에 툭 이마를 기댔다. 몸의 힘이 풀려 곧 그의 품에서 축 늘어졌다. 블리어는 그녀가 친구의 시신을 더는 보지 못하게 꽉 끌어안아주며 지탱했다. 괜찮다고 다독여주는 조용조용한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전혀 괜찮지 못했다. 이상한 괴리감에 두방망이질치는 가슴은 터질 것 같고 두 발을 지탱하는 바닥은 푹 꺼질 것 같은 아찔한 기분만 들었다. 암담해서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무겁게 느껴졌다. 이 세계의 공기조차도 그랬다. 한번 들이마셨는데도 폐가 가득 차 터질 것처럼 갑갑했다. ‘…현실이 아닌데……게임인데 어째서,’ 자연스레 눈가가 젖어 들어가며 눈물이 났다. 미칠 듯이 허무하고 가슴이 먹먹해서 렐리아는 소리 없이 고갤 떨어뜨렸다. 0102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깊은 밤, 농밀한 달빛이 스며드는 웅장한 방안에서 드라도스는 홀로 차가운 돌바닥에 앉아있었다. 밤하늘을 닮은 로브를 뒤집어쓴 늙은 그의 앞에는 관이 놓여있었다. 왕실 마법사들이 일일이 찾아와 놓아둔 국화꽃이 만개한 관 속에는 새하얀 분을 바른 곱상한 사내가 반듯이 누워있었다. 제자 루툰 조우의 관이었다. 늘 걱정이 될 만큼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실력만큼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웠던 어린 제자였다. 드라도스는 흰 수염을 습관적으로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루툰. 누구보다 책임감이 강하며 성실했던 나의 제자여…. 편히 잠들 거라. 훗날 다시 만나거든 네가 얼마나 많은 목숨들을 살려냈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얘기해주마.” “…스승님. 이제 슬슬 가보셔야 됩니다.” 열린 문사이로 조용히 들어온 제자 페드락이었다. 드라도스는 옆에 내려둔 지팡이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그래. 다른 이들은?” “먼저 출발했습니다.” “높으신 분들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 어서 가자꾸나.” 서둘러 걸음을 떼는 드라도스의 옆에 페드락이 다가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왕실 제1마법사단 건물에서 벗어나 국무회의장으로 향했다. 긴 야외통로를 거닐다가 페드락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스승님. 제국에서 온 그 윈이라는 사내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와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새로 마법진을 설계하실 때 파트너를 바꿔주시면 안됩니까.” “꼭 아이 같은 투정을 하는구나.” “…솔직히 그 자를 이번 긴요한 작전에 투입시키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드래곤과의 전투를 앞두고도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던 놈이라고요. 이번 일이 두고두고 마법학의 고증이 될 거라느니, 드래곤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느니…! 누군 목숨을 바쳐서…큿.” 페드락은 입술을 세게 깨물며 고갤 돌렸다. 오랜 기간 드라도스의 밑에서 함께 동문수학했던 친구를 잃은 슬픔은 여전히 그에겐 벅차기만 했다. 그런 페드락의 등을 말없이 두드려주며 드라도스는 묵묵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국무회의장 앞에 도착할 때까지 드라도스는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제국마법사 윈이 결코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실력은 인정해야만 했다. 제국의 으뜸으로 꼽히는 마도가문의 젊은 수장 윈 레그로 카일로아스.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동시에 그 통제가 안 되는 어긋난 호기심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 긍지가 대단히 높은 마법사였다. 그래서 그런지 위기상황에 대한 대처력도 뛰어났다. 페드락도 훌륭한 제자 중 하나이기는 하나 곧잘 흥분하고 겁이 많았다. 그런 페드락의 옆에 안정감 있는 윈을 배치해둠으로써 차분함을 유지하도록 꾀한 것이라지만, 그런 스승의 깊은 뜻을 페드락이 이해할리 만무했다. 페드락은 국무회의장 안에 들어서자마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주요인사들의 위엄에 바로 짓눌려버렸다. 그에 반해 드라도스는 정숙히 자리에 착석했다. 페드락의 맞은편에는 이미 윈이 제국마법사 일행들과 함께 앉아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장 문이 열리며 국왕 라델리우스가 들어섰다. 모두가 일어서 예를 취해보인 후 본격적인 내밀회의가 시작되었다. 제국에서 파견된 황실 대마법사 6인과 다섯 명의 장군들, 그리고 왕국의 라콘드 가주와 올르아 가주를 뺀 세 명의 공작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 만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제국 총사령관 뫼드아스 반 볼프가 가장먼저 왕과 대면했다. “제국의 대표로 온 그대에겐 먼저 심심한 성의를 표하지.” “크나큰 영광입니다.” 라델리우스의 우측에 자리하고 있던 제국사절단 대표 뫼드아스의 손위로 묵직한 황금이 떨어졌다. 물욕에 눈이 먼 자답게 뫼드아스의 태도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저희 탐피아 국은 왕국에 상당히 우호적입니다. 왕국을 위해 어떠한 희생도 불사할 생각입니다. 천군만마를 얻으신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 뫼드아스 반 볼프가 장담합니다.” “제국의 명장이라 불리는 이답게 듬직하다. 좋군.” “베르무트 경. 국왕폐하께 서간을 올리시오.” 부복자세를 취한 기사가 명을 받들고서 라델리우스를 향해 서간을 바쳤다. “클라우스 4세 폐하께서 전하라 명하신 답신입니다.” 봉해진 서신을 펼친 라델리우스는 모든 이들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근엄함을 지키며 읽어 내렸다. 황금의 땅이라고 불리는 경작지의 반을 제국에 넘겨줌으로써 조약을 체결하자는 내용이었다. 지도에서 왕국이 영영 지워질 문제 앞에서 국토의 오분의 일을 내주는 것 따위야 대수롭지 않았다. 이미 각오했던 라델리우스는 최측근 위터 백작에게 미리 준비하라 일렀던 국새를 받아들었다. 드래곤에게 뺏길 바에는 왕국의 곡창지대를 반이라도 가로채려는 제국의 속셈이야 뻔했다. 결국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라지만 제국에서 파견된 황실 대마법사 6인과 다섯 명의 장군, 그리고 만 명의 군사는 결코 적지 않은 인원이었다. 물론 제국입장에선 잃어도 크게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의 도움이라지만. 옥새가 찍힌 문서를 교환함으로써 바일롯 왕국과 탐피아 제국의 막후 조약체결이 완료되었다. “왕국은 물론 그대들에게도 힘든 싸움이 될 거다.” “허나 저희 제국의 병력은 드래곤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무엇보다, 왕국의 멸망은 곧 대륙 평화를 위협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말입니다. 제국은 대륙의 안보를 위해 왕국의 보호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뫼드아스의 기백서린 맹세의 말이 회의장안을 울렸다. 라델리우스는 이에 흡족하게 한번 고개를 끄덕인 후 바로 대마법사 드라도스를 향해 고갤 돌렸다. “전투는 아무래도 마법 전투부대 중심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드라도스를 시작으로 작전의 기본 전략에 대한 얘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 시간가량의 작전회의가 진행 중인 동안 페드락은 반대편에 앉아있는 윈을 살폈다. 차분하게 금색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남자는 유독 조용했다. 그의 표정에는 작은 고뇌와 짙은 흥분이 어려 있었다. 역시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굳게 닫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회의실 문이 돌연 활짝 열렸다. 두 명의 호위기사를 대동한 채 문가에 서있는 인영은 가냘팠다. 문 쪽을 돌아보며 가볍게 묵례하는 왕국의 귀족들과는 달리 제국의 귀족들은 노골적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함부로 출입해서도, 끼어들어서도 안 될 내밀회의 중에 멋대로 난입한 여자에 대해 의아함과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설령 왕의 약혼녀라 해도 도가 지나치다는 표정들이었다. 허나 다이아나의 고개는 수그러질 줄 몰랐다. 오히려 고고하게 고개를 들고서 원탁의 상석에 앉아있는 국왕을 향해 다가섰다. 고귀한 빛이 흐르는 금발이 허리께 위에서 한올한올 출렁였다. 연회라면 이미 두 시간 전에 끝났을 터인데도 마치 눈부신 무도회장 조명아래 홀로 서있는 듯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에 이제껏 아무 말 않던 윈이 슬며시 눈매를 좁혔다. “저 무례한 아가씨는 대체…,” “쉿. 삼가시게.”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는 눈빛으로 드라도스가 엄하게 눈치를 줬다. 사실상 훗날 왕후가 될 가능성이 현재로써는 가장 높은 여인이었다. 올리아 공작가의 유일한 공녀이기도 하니 당연 그 신분은 무시할 게 못됐다. 다이아나의 눈빛 한 번에 무려 국왕이 몸을 일으킬 정도이니 말다한 것이다. “잠시 휴식하지.” 중요한 작전회의는 계획에도 없던 휴식을 맞이했다. 허나 감히 왕의 말에 반박할 이가 어딨겠는가. 모든 이들이 숙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는 동안 라델리우스는 다이아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충성스런 개처럼 그녀와 시선을 맞춘 채 선 라델리우스는 이미 그녀가 어떠한 이유에서 저를 만나러 온 건지 알고 있는 듯 했다. 반성하듯이 온순해져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다이아나는 제법 강경한 목소리를 내었다. “솔직하게 말해줘요, 리우스. 이 작전을 모두 스스로가 계획한건가요? 그래서 아버지께 미리 나를 데리고 먼저 돌아가라 한건가요.” 사실상 다이아나는 연회가 시작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나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와 함께 공작저로 돌아와야만 했었다. 제국 외교사절단 중 절반이 왕의 약혼녀얼굴을 모르는 것도 다 이 이유에서였다. 서두르시는 아버지의 행동에 단순히 어디 몸이 좋지 못하신 거라고 여기고 그렇게 저택에서 편히 쉬고 있던 중 왕궁에서 일어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짓을…,” 다이아나는 단단히 화가 나있었다. 이 야심한 시각에 라델리우스를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 달려온 까닭도 이 때문이었다. “그대만은 무사해야하니까. 다른 이유는 없었어.” “내가 찾아온 이유는 그런 이기적인 변명을 듣기위해서가 아니에요.” 그가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아마 라델리우스는 그녀의 마음을 십분의 일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다이아나는 모든 것들이 위험에 빠질 수 있었다는 것에 초점을 뒀다. 기름진 영토와 그 땅위에 세워진 화려한 건축물보다도 생명이 우선시 되어야했다. 사람이 일궈야 땅이 기름지고, 사람이 짓고 관리해야 건축물도 존재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가 주도한 작전은 결단력 있는 면모를 보여준 성공적인 작전이라기 보단 생명경시의 가장 큰 사례가 될 것이다.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어째서 수도의 모든 귀족들을 끌어들인 거예요. 자칫 수도전체가 잘못되었다면 어쩌려고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시행했어야할 중요한 작전이었어. 이대로 언제 어디서 또 희생자가 나올지 모를 상황에…이 나라의 왕으로서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으니까.” “그렇다고 이런 방식은 너무 무모했어요. 자세한 내막을 귀족들이 알게 된다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생각은 안하나요.” "궁전 전체에 마법결계를 쳐두고 모든 인력을 배치시켰어. 위급사태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갖췄고,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았어. 우린 이 앞날에 희망을 걸 수 있게 됐어. 역사에는 불리함을 이겨낸 대전투였다고만 기록되겠지. 난 그것으로 되었어.” “그렇게 스스로의 명예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 왜 저와 아버지를 돌아가게 명한 건가요? 적어도 저는 두었어야죠. 훗날 치세에 길이 오명을 남길 일을 해놓고서 애써 변명해봤자 무슨 소용인가요.” 약혼녀를 미리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는 건, 완벽하다고 자부한 대규모의 작전에 그 스스로 흠을 내는 꼴이었으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다이아나는 진즉에 그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유약한 성정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그는 사사로운 욕심, 명예 따위에 치중하는 남자가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급했을 테지, 그는 아직 천하를 다스리기에는 젊었고 또 부족했다. 다이아나의 연한 다홍색눈동자 위로 금빛이 감돌았다 사라졌다. “그대…말대로야.” 굳어있던 입매를 부드럽게 풀며 라델리우스는 순순히 인정했다. 역시 그녀는 속이지 못한다 여겼다. 이 나라의 왕인데도 저보다 세 살이나 어린 이 여인에겐 당해낼 수가 없었다. “최선이었지만, 어떻게 될지 나로서는 장담할 수 없었어. 그렇기 때문에 다이아나…그대를 끌어들일 순 없었어. 내 양심이 그리 허락하게 두지 않았어.” “난 절대 그 행동을 옳다고 인정할 수 없어요.” “알아. 그래도 그대를 내 손으로 위험에 빠뜨리게 할 순 없었어.” 라델리우스는 무표정을 지우고 처연하게 살짝 웃어보였다. 그녀만을 안전하게 지키려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여겼다. 왕으로서 희생을 강요받더라도 끝까지 백성을 위해야한다는 성군으로서의 덕목과 자질을 갖추지 못한 것일지 모른다. 허나 다른 건 다 저가 희생해도 그녀만큼은 조금의 위험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하니까 그럴 수가 없었어.” 씁쓰레한 그의 진실된 고백에도 다이아나는 회피하듯 차갑게 등을 돌려 걸어가버렸다. 0103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렐리아는 이틀내리 잠을 설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몸은 온갖 상해를 입혀도 끄떡없는 주제에 정신은 평범한 24살 대학생이었다. 친구의 시체를 눈앞에서 본 후 스트레스성 위염이라도 온 건지 음식을 넘기는 것도 괴로웠다. 특히 고기나 소시지는 아예 입에도 대지 못했고 화장실만 들락날락 거렸다. 단순히 게임이래도 너무도 현실적이라 그 충격이 컸다. 특히 아럼프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 와서 렐리아는 하루 종일 흐린날 속에 살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아럼프가 떠올랐다. 아럼프가 선물해줬던 꽃을 꼬박꼬박 꽂아놓았던 화병은 치워버렸을 텐데 매일 그가 생각나니 아이러니 했다. 어제만 해도 그의 죽음에 대해 반나절 넘게 의문을 품었었다. 아럼프는 분명 개인객실이 없다고 했는데 왜 객실 주변에 있었고 사고에 휘말렸을까. 어쩌면 그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보다 그 답은 간단하게 나와 렐리아를 더욱 슬픔으로 밀어 넣었다. 무도회장에 없는 저를 찾으러왔다가 객실 복도벽이 무너져 그런 사고를 당한 것일 테다. 그도 그럴게 아럼프가 사고를 당한 위치는 공작의 전용객실 바로 옆이었으니 말이다. 친구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며 수천 번도 더 후회했다. 그런 식으로 차갑게 밀어내지 말걸, 자신이 옆에 붙어있었다면 아럼프가 그런 일을 당할 일은 없었을 텐데. 다 제 책임 같기만 했다. 동시에 정말 끝인 걸까 싶었다. 게임 속인데도 현실처럼 가혹하기만 했다. 부활정도는 가능하게 해줘야하는 게 아닌가 이 세계에 강한 불만도 치밀었다. 원래도 썩 좋아하지 않는 세계였지만 현실도 아닌 주제에 리얼리티를 내세운 이 게임세계는 더럽게 끔찍하고 짜증만 났다. ‘얼른 돌아가고 싶다…진짜.’ 최근 들어 더더욱 주문처럼 되뇌게 되었다. 대체 왜 신이라는 작자는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건지 생각할 때마다 가슴속엔 화만 쌓여갔다. 렐리아는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잠만 늘어지게 잤다. 활동량이 없으니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뭘 하려는 의욕조차 없었다. 그러다 똑똑 가볍게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방안 넓게 울렸다. 찾아올 사람이라곤 이제 공작밖에 더 있나 싶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단조로운 남색정장을 빼입은 블리어가 방안으로 들어섰다. 사무적인 차림과는 달리 그의 한손에는 늘 그렇듯 쟁반이 들려있었다. “저녁식사 같이하러 왔습니다.” 벌써 저녁인가. 렐리아는 어두운 암막커튼을 쳐놓아 세상이 낮인지 밤인지도 구별가지 않았다. 어차피 굶어도 이 몸뚱이는 죽지도 않을 텐데 그는 하루 삼시세끼 꼬박꼬박 저와 같이 먹으러 찾아왔다. 그때마다 시간을 알게 되어서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안 먹을래. 속 안 좋아.” “아침점심 조금 먹었지 않습니까. 그러다 속 버립니다.” “거 참 끈질기네.” 렐리아는 환하게 방의 조명이 켜지자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침대 옆으로 다가온 블리어는 다시 끄라고 투덜대고 있는 여인의 양어깨를 조심스레 쥐었다. 블리어가 일으켜 세워주는 손길에 렐리아는 강제로나마 상체를 일으켜야만 했다. 하지만 앉아서도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 태만하기 짝이 없는 모습에도 블리어는 부지런하게 침대 옆 테이블에 세팅을 마쳐놓았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화백의 작품을 공개하는 사람처럼 그는 흰 이불자락을 쥐고 단번에 아래로 끌어내렸다. 이불 속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여인은 긴 머리는 엉망으로 엉킨 데다 눈곱도 떼지 않은 지저분한 몰골이었다. 물도 마시지 않고 종일 내리 잠만 자 입에서는 단내만 풀풀 풍겼다. 폐인의 꼴이 따로 없었으나 블리어는 손을 뻗어 헝클어진 머리를 살살 풀어가며 쓰다듬었다.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감자스프입니다.” “됐다고요. 자게 냅두라니까?” 깔끔하고 번듯한 사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를 챙겨주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양 바로 심드렁히 굴었다. 렐리아는 다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서 등 돌리고 누워버렸다. 그런 그녀 옆에 걸터앉은 채 블리어는 가녀린 실루엣을 따라 불룩 튀어나온 이불 위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깥에 나가봤습니까." "……." “산책을 해도 될 만큼 날이 풀어졌습니다만 내일 낮에 같이 산책 나가는 게 어떻습니까.” “싫어.” “아무래도 꿀꿀할 때에는 단 것을 먹는 것이…,” “싫어 싫어, 다 싫다고. 꺼져.” “렐리아.” 나직이 부르는 음성에 렐리아는 끙 입술을 깨물었다. 이 ‘현실적인’ 남자가 무슨 얘기를 할지 짐작이 가서 더 기분이 더러웠다. 역시나 그녀의 예상이 맞았다. “그대가 그런 식으로 현실을 회피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른 기운차려야 하지 않습니까.” “현실? 개똥같은 소리하네.” 피식 하고 렐리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아럼프가 죽은 것 때문에 저가 이런다고 생각하면 천만에다. 물론 아럼프의 죽음이 이제까지의 불만, 초조, 불안을 터뜨리는 기폭제가 되긴 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렐리아는 화병에 걸린 것처럼 가슴이 콱 쑤시고 답답해 속 시원하게 말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가짜야. 다 가짜라고. 공작도 가짜고, 시체도 가짜고, 존나 다 가짠데 진짜인척 오지네. 이딴 게 현실이면 그냥 자살하고 말지.” “렐리아.” 이번엔 좀 단호하게 그가 나오자 렐리아는 바로 합죽이가 되었다. 공작이 화나면 무섭다는 건 예전에 겪어보았기에 잘 안다. 달팽이집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달팽이처럼 렐리아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그대가 정신적으로 많이 힘든 거 잘 압니다. 이해합니다.” 허나 뒤이어진 그의 말은 아까보다도 훨씬 누그러져있었다. 블리어는 이불 끝을 살짝 쥔 채 그녀의 가는 목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반쯤 돌리고 있던 그녀의 덤덤한 옆얼굴이 드러나자 그제야 그는 한결 안심한 듯 말을 이었다. “허나 나쁜 생각은 절대 가지지 마십시오. 차라리 내게 투정을 부리십시오. 받아주겠습니다.” “필요 없어.” “머리 묶어주겠습니다. 일단 일어납시다.” 블리어는 렐리아의 등 아래에 손을 파고들듯이 넣어 이불과 함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 큰 아기가 따로 없었지만 블리어는 그녀의 수발을 자처했다. 촘촘한 머리빗을 가져와 헝클어진 긴 머리를 일자로 곱게 빗어주고 직접 손을 들어 눈곱까지 떼어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지부동인 여자는 침대 헤드보드에 가만히 기대앉아있을 뿐이었다. 말하기도 귀찮은지 표정으로나마 저를 내버려두라는 의사를 표출했다. 그에 반해 블리어는 아주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심하고도 정성껏 그녀를 챙겨주었다. 블리어는 손수건을 펼쳐 렐리아의 목 아래에 턱받이처럼 둥글게 둘러주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아랑곳 않고 그는 웃음기 한 점 없이 진지하게 임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면 좋습니다.” 이유식처럼 묽은 스프그릇을 들고서 블리어는 이젠 하다못해 떠먹여주는 시늉을 해보이고 있었다. 카리스마가 흐르는 서느렇게 접힌 눈매와는 전혀 매치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 “그대는 그저 입만 벌리십시오. 내가 떠먹여주겠습니다.” “됐다니까 그러네.” “이렇게라도 해야 먹을 거 아닙니까. 입 벌리는 것도 내가 해줘야합니까.” 어떻게든 먹일 생각인지 그는 한사코 물러서지 않았다. 이제껏 그녀와 미우나 고우나 함께 지내왔던 자답게 그 또한 만만찮은 성격의 소유자인 것이다. 렐리아는 짜증이 났지만 그를 이길 수는 없었다. “아아.” 성의 없이 작게 입을 벌려주자 그제야 블리어가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입속으로 스푼을 넣어주기 무섭게 렐리아가 팔짝 뛰며 고개를 뒤로 확 뺐다. “아 뜨!” 데인 혀를 내밀고서 렐리아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 성격 어디 안 가는지 블리어가 물을 따르는 그 수초도 못 참고 다시 냅다 누워버렸다. “에이씨…안 먹어.” 이불을 다시 머리 위까지 끌어올린 채 렐리아는 엎드려 누웠다. 블리어는 잠시 스프그릇을 테이블위에 치워두고서 잔을 쥔 채 렐리아의 머리맡에 다가왔다. 그는 렐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평소에는 어림도 없을 나직한 음성이 서근서근하게 울리니 마치 잠든 남편을 깨우는 부인을 연상케 했다. 내조하는 부인치고는 목소리가 상당히 굵직하다지만. “렐리아.” “……아 왜.” 결국 마지못해 렐리아는 이불을 거둔 채 그를 향해 두 눈을 치떴다. 작작 좀 부르라고 신경질을 부리려다가 녹진하게 가라앉은 진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 불만을 쏙 밀어 넣어야만 했다. “온도를 재고 먹였어야했는데 미안합니다. 내 과실임을 인정하겠습니다.” “그게 더 웃기거든.”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무슨 분유온도가 맞나 확인하지 않고 먹인 애기엄마도 아니고 말이다. 그의 말만 들으면 정직하게 아기에게 사과하는 것 같았다. 순간 풋, 소리가 튀어나오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확실히 그와 마주보거나 대화를 나누면 어느새 자연스레 짜증이나 불만스런 감정이 사라진다. 부러 그에게 나쁘게 굴려고 마음먹어도 다 수포로 돌아가니 그녀로서는 허무하기만 했다. 렐리아는 이불을 거두고서 스스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이에 기특하다며 머리를 한번 톡톡 두드려주는 커다란 손길이 따스했다. 블리어는 테이블 위에 놔두었던 스프그릇을 다시 가져와 그녀 옆에 걸터앉았다. 믿고 맡기라는 듯 그의 눈빛은 또다시 사뭇 진지해져있었다. “이번엔 잘 불어서 주겠습니다.” “스프에서 공작 입냄새 나겠네.” “양치를 안한 건 그대지 내가 아닙니다.” “하아아악.” 작고 도톰한 입술을 벌리며 렐리아는 입냄새 공격을 시전했다. 방금 전만해도 그 칼 같은 성미가 푸근하게 뭉그러졌던 남자는 어디가고 인정사정 볼 것 없이 피해버린 그였다. 생판모르는 남처럼 냉랭하게 거리를 둔 남자는 그녀의 이런 모습까지 받아줄 순 없는 모양이었다. “좋아하던 마음이 사라질 뻔했습니다.” “잘됐네.” 렐리아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민망함이라거나 창피함은 찾아볼 수 없는 뻔뻔함으로 무장한 채 귀만 후비적거리고 있으니 여간 얄미운 게 아니었다. 그것들은 제 몫인 건가 싶었다. 블리어는 잠시 벌려두었던 그녀와의 간극을 좁히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마음정리에 특효인 것 같으니 앞으로도 종종 그렇게 썩은 내가 나는 주둥이를 열어주십시오.” “썩은 내라니, 너무하네.” “정정하겠습니다. 역한 내라고 부르겠습니다.” 적어도 이리 말하면 다신 안하겠지 싶었다. 블리어는 얄미운 주둥이를 내려다보면서 오른손에 쥔 스푼에 후하고 얕은 입 바람을 불었다. 입냄새는커녕 시원한 바람뿐이었지만 렐리아는 코를 틀어막고서 썩은 표정을 지었다. “어우, 공작이야말로 이 좀 닦아라.” “내가 동요할 거라 여겼다면 오산입니다.” 자신만큼 깔끔하고 자기관리 철저한 인간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당당히 호언할 수 있을 만큼 그는 스스로의 청결도에 자신 있었다. 폐인생활에 찌들어 사는 렐리아에 비하면 뭔들 낫지 않겠냐만은 아무튼 그러했다. 블리어는 잔말 말고 받아먹으라며 식은 스프가 담긴 스푼을 얄미운 주둥이 앞에 내밀었다. 이에 렐리아는 그의 손에서 스푼을 빼앗듯이 가로채버렸다. “됐어. 내가 알아서 먹을래.” 저 챙길 시간에 공작이나 식사하라며 렐리아는 테이블 위의 접시를 힐끗 바라봐주었다. 하지만 블리어는 제 식사에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오로지 빼앗긴 스푼을 돌려받겠다는 의지로만 가득 찬 사람처럼 그녀의 작은 손을 눌러 쥐었다. “어차피 시간도 남는데 내가 하겠습니다.” “저녁업무 있잖아.” “하루 미룬다고 해서 큰일이야 있겠습니까.” 블리어는 진심에서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수일 후에는 이런 한가로운 생활도 바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업무에 파묻혀있을 바엔 이 여자와 같이 단란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이젠 과욕도, 작은 소망도, 무엇도 아니었다. 붙잡고 있던 인연의 실을 놓아줄 생각이니 적어도 손끝에 머무는 지금 순간을 잠시나마 편하게 누리고 싶었다. “미쳤어? 업무태만 쩌네.” “내가 일주일을 쉰다한들 그대만큼 태만하겠습니까. 그러니 내가 하겠습니다.” 부드러운 음성치고는 블리어는 제법 강경했다. 그녀 손에서 스푼을 뺏기 위해 살짝 힘을 실어보였으나 손가락이 무슨 무쇠로 되어있는 건지 여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슬슬 남성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그는 미간을 미세하게 접은 채 단호하게 나왔다. “주십시오.” “아 됐다고.” “기력 없는 그대를 위해 내가 떠먹여준다 하지 않습니까.” “수치스러워서라도 내가 먹겠다고.” “이불위에다 흘릴 수 있으니 내가 하겠다는 겁니다.” “아 그래서 턱받이 했잖아.” 아옹다옹 다투는 동안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낀 스푼만이 안쓰러울 뿐이다. 0104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블리어는 늦은 저녁 왕실에서 온 칙서를 받고 본궁으로 향했다. 왕궁 깊숙한 심장부에 위치한 집무실에서 라델리우스는 이종사촌 되는 라콘드 공작을 맞이했다. 다소 딱딱한 인사가 오고간 후 라델리우스는 그에게 소파에 앉도록 권유했다. 응접실을 옮겨놓은 듯한 격식 있는 자리였다. 라델리우스는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본래 사냥대회 개최지였던 야누이스 산맥의 토벌일정을 앞당기자는 얘기였다. 수도 서쪽에 위치한 산은 매년 이른 봄마다 마을을 기습하는 산짐승들로 골치를 썩었는데 올해는 그 피해규모가 컸다. “언제든 떠나도 그만인 귀족들과는 달리 농민들은 그게 아니니 말이다. 경작지를 두고 쉬이 떠날 수도 없을뿐더러 하루 벌어 겨우 먹고사는 자들도 더러 있다. 비상사태라고는 하나 그들에게 있어선 지금 나라가 처한 국면보다도 더 큰 위기일 거다.” 야누이스 산맥을 끼고 있는 영지는 총 백 명도 안 되는 인구가 살고 있는 작은 산골민가였다. 라델리우스는 배부른 귀족들보다는 열약한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가는 평민들에게 더 큰 관심을 쏟았다. 초대국왕을 본받으려는 그 나름의 노력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한 이유에서 공이 대신 토벌대를 이끌어준다면 고맙겠군. 피해가 시급하다하니 한시라도 빨리 출정을 해야 될 거다.” “당연한 일입니다. 믿고 맡겨주십시오.” 블리어는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이런 일정까지 잡혔으니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다. 용건이 끝났다면 바로 돌아가 볼 생각이었으나 그 전에 라델리우스가 그를 붙잡았다. “공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무엇입니까.” “내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최선의 방책이었지 않습니까.” 무거운 어조에는 여러 뜻이 담겨있었다. 실상 블리어는 작전모의는커녕 왕실 회의에 거의 불참하다시피 했던 터라 그 당일에 위터 백작에게 들어 겨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희생자들 중에 하마터면 렐리아가 있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만으로도 기분은 저조해졌으나 애써 무던히 운을 뗐다.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백성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야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저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피하지 말라는 듯한 강한 뜻을 담아 블리어는 충고했다. 그 말에 라델리우스는 한번 고개를 까닥이는 걸로 공작과의 사적인 자리를 파했다. *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침의로 갈아입은 그가 가장먼저 향한 곳은 렐리아의 방이었다. 불이 꺼진 방안으로 들어선 그는 침대위로 조용히 올라와 익숙하게 그녀 옆에 몸을 뉘었다. 어두운 가운데 하얀 끈으로 그녀와 저의 손목을 잇고서 오늘도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았다. 제 옆에 누가 누웠는지도 모른 채 렐리아는 얕은 잠에 취해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꿈을 꾸고 있었다. 고등학교 친구들이 평소 자주 모이는 시내호프집으로 들어서는 꿈이었는데 언제 만나기로 했는지 문을 여니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가장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청순한 긴 생머리에 청스키니진과 흰 셔츠로 코디한 수현이었다. “태화 저년 또 지각이네.” 입 걸걸한 수현이가 입술에 맥주거품을 묻힌 채 손짓했다. 옆자리를 크게 두들기며 여기 앉으라는 듯 말이다. 안주는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다들 맥주잔의 반만 남겨두고 있었다. 테이블에 기본 세팅되는 알록달록한 뻥튀기를 입에 욱여넣고 있던 지혜가 쾌활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태화가 쏜대! 더 시키자.” "와아아아. 이태화!" "뭐래." 이에 이상한데서 잘 터지는 현지가 자기혼자 깔깔 웃어댔다. 누가 보면 스물넷 꽃다운 처자가 아니라 아줌마인 줄 알 것이다. 그러다 등허리를 팍팍 두드리는 솜방망이에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또 제 옆으로 왔는지 민지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고 있었다. “이태화. 늦은 벌칙으로 인디언~밥!” “뭐야. 왜 이래.” “민지 쟨 또 혼자 신났어 키키킥.” “아 배고파, 안주우우!” “벌써 취했냐. 누가 야생원숭이 격리시켜라.” “누가 야생원숭이얏!” “민지.” 민지는 반박하기 보다는 심통한 얼굴로 조용히 중지를 치켜들어보였다. 제일 일찍 취업한 사회인주제에 초딩스러운 면은 어째 나이를 먹어도 변하질 않았다. “안주 뭐뭐 시켰어?” “갈릭치킨이랑 지혜 이년이 오뎅탕 시키자고 해서 오뎅탕 시킴. 태화 넌 늦었으니까 선택권 없는 거 알지?” “젠장. 불닭발은!” 수현이의 좁은 어깨에 기대며 징징거렸다. 얼마나 애타게 찾았던 불닭발인데 그걸 빼놓을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보았던 혜리애교를 써먹을 때가 왔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매운 거 완전 땡기는데~ 이이잉.” “그러게 네가 일찍 왔어야지, 이년아. 어디서 앙탈이야?” “그러지 말구 언니~ 우리 불닭발도 시키자?” “민지야. 인디언 밥 허락할 테니까 얘 좀 때려.” “인디언 밥! 밥!” 신이 난 민지가 제 등을 철썩철썩 내리치는 손길에 마주 때려주다가 문득 구석자리에 시선이 닿았다. 진주홍빛 조명으로 인해 호프집 내부는 전체적으로 칙칙했는데 조명이 닿지 않는 구석자리는 아예 어둠에 잠식되어있었다. 자주 왔던 곳이기에 원래 이정도로 어두웠던가싶었다. 같은 테이블자리인데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아까부터 말없이 등을 돌린 채 사람이 앉아있었다. 너무 어두워서 입고 있는 옷과 뒤통수, 심지어 피부색까지 말 그대로 새카매보였다. 언뜻 드러난 실루엣은 분명 사람인데 남자인지 여자인지조차 구별이 가지 않았다. 친구들 중 누가 데려온 것 같은데 아무도 시선을 주거나 말을 걸지 않으니 괜히 더 이상했다. 슬쩍 반대편으로 고갤 돌리고서 수현이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근데 수현. 쟤는 누구야?” “무슨 소리야, 너랑 같이 왔으면서. 태화 네 친구 아니야?” “…뭐?” 순간 등 뒤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옆에 앉아있던 민지는 어디가고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검은 사람이 비스듬히 제게로 몸을 돌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드문드문 검붉은 핏물에 젖어있는 남자는 어딘가 익숙한... “…렐리아.” 그 낮은 목소리에 소름이 확 끼쳤다. 훈훈했던 호프집 내부가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찬 것처럼 추웠다. 황급히 수현이 돌아보니 휑하니 자리는 비어있었다. 수현이뿐만 아니라 지혜도 현지도, 호프집 안에 있던 사람들도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적했던 게 다 거짓말처럼 아무도 없었다.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뒤에서 뻗어져온 서늘한 손가락들이 손목을 붙잡자 그제야 렐리아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시체같이 푸르뎅뎅한 얼굴이 바로 뒤에 위치해있었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새빨간 피가 흥건히 묻어있었다. 자갯빛 눈알위에도 핏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일 텐데 이상하게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숨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넌 언제든 날 내칠 수 있는 거야?” 서글픈 낯으로 그가 웃었다.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려고 했다. 하지만 입술을 떼려는 순간 구구구궁, 하고 심상치 않은 진동과 소리가 위에서 울렸다. 천장을 올려다보자 먼 벽모서리에서부터 빠르게 실금이 생겨났다. 방사형으로 뻗어져나간 금이 이윽고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내더니 순식간에 오려낸 듯한 천장중심이 아래로 푹 꺼졌다. 쿠우웅, 그의 머리위로 벽이 떨어져 내린 순간 사방으로 돌먼지와 선혈이 튀었다. 렐리아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서려다가 그만 나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반사적으로 뻗어진 발이 콘크리트 잔해를 건드렸다. 잔해아래서 흥건히 핏물이 고여 나오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주춤 발을 거두려고 했다. “…레…리아….” 뼈가 뭉개진 피투성이의 손이 힘겹게 잔해사이로 뻗어져 나왔다. 잡아달라는 듯이 뻗어진 친구의 손에 렐리아는 숨이 넘어가는 소리만 냈다. “…렐리아.” “…아.” “렐리아…!” 그때 저를 부르는 낮고도 힘있는 소리에 렐리아는 확 잠에서 깨어났다. 사방에 튀었던 핏물도, 잔인한 광경도 없이 고풍스런 천장만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에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들어왔다. 달빛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희고 날렵한 얼굴은 많이 낯이 익었다.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딱딱하게 굳었던 몸을 조금 부드럽고 편안하게 풀며 렐리아는 누운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블리어는 오르락내리락하는 여인의 가슴께를 내려다보다 그녀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진정된 건지 심하게 들썽거리던 숨이 잔잔해져 있었다. 살짝 창백해진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그녀답지 않은 파리한 안색에 블리어는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으로 땀방울을 살며시 거둬내며 다시 그녀 옆에 누웠다. 여전히 시선은 그녀에게 내리꽂은 채 블리어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자다가 소리를 지르기에 놀랐습니다. 괜찮습니까?” “…어.” 괜찮다고 하는 것치곤 많이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반쯤 잠긴 목소리는 심장이 억눌려나는 소리였다. 렐리아는 여전히 심장이 쿵쾅 뛰어대는 걸 느꼈으나 태연한 척 고집스레 천장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블리어는 여인의 배 위에 머물러있던 이불을 쥐어 목 아래까지 끌어올려주었다. 왠지 위로를 해주어야 될 것 같아 그는 홀쭉한 배 한가운데에 제 손을 얹어놓았다. 어찌해야할지 몰라 어색하게 가만히 있다가 뒤늦게 천천히 투박한 손을 움직였다. 도닥도닥 악몽을 꾼 손녀를 달래는 할머니처럼 다정한 손길이었다. 평소라면 뭐하는 짓이냐고 해괴하게 쳐다봤을 여인은 그저 가만히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은 건가 싶었다. 블리어는 조금 더 편안해진 손길로 그녀의 배를 두드려주었다. 그 위로의 손길 덕분인지 렐리아는 울컥 올라오려는 무언가의 감정을 뒤로한 채 슬쩍 입을 열었다. “아럼프가…꿈에 나왔는데…” 슬퍼서 무서운 건 또 처음이었다. 렐리아는 익숙한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꿈인데도 그의 손을 결국 잡아주지 못했던 것에 원망감과 자괴감이 치밀었다. 친구를 두 번 죽인 기분이었다. “…나는, 잡아주고 싶었는데…” 밤이라 그런지 더욱 감성적이 되어버렸다. 렐리아는 흐느낌이 튀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무서워서…,”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블리어는 이해한다는 듯이 그녀의 말을 부드러이 막았다. 어떤 꿈을 꾸었는지 자세히 듣지 않아도 그녀가 심한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직하게 살짝 울먹이는 입꼬리와는 달리 두 눈은 여전히 고집스레 천장을 향해 치떠져 있어서 더 안쓰럽기만 했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이불속에서 두 팔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여인의 가느다란 체구를 끌어안았다. 얇은 옷차림인지라 손이 닿지 않게 배려하며 깊이 안아주었다. 그에 천장을 향해 머물러있던 렐리아의 얼굴이 별안간 블리어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짙은 눈매를 바라보고 있을 때 블리어가 살짝 고개를 움직여왔다. 그는 고운 이마위에 가볍지만 길게 입을 맞춰주었다. “괜찮습니다.” 느직이 입술이 떨어지며 그의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렐리아는 그 음성이 조금은 감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등에 머물던 두꺼운 팔이 한 번 더 움직이자 어느새 그의 단단한 품속으로 끌려와있었다. 미온한 체온이 느껴지는 가슴팍에 렐리아는 아주 살짝 이마를 기댔다. 만일 또 심하게 악몽을 꾸고 잠을 설치더라도 옆에 있을 공작이 깨워주겠지, 그런 생각이 당연하게 들었다. “아침이 되면 깨워주겠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읽은 건지 그가 나직이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굵다란 선을 그리는 목과 어깨를 응시하다가 렐리아는 든든한 기분이 들어 안심하고 눈을 감았다. 조금 더 깊이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고선 말이다. 밤새 내내 서로의 온기가 온전히 한자리에 머물렀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잠에 들 때 서로의 손목에 묶인 끈은 더 이상 그 의미가 없어졌다. 0105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다음날 오전 렐리아는 제국마법사 윈에게서 먼저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되도록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으나 금반지에 대해 물어볼 것이 있었기에 결국 수락했다. 일면식이 있을 뿐 친하지는 않은 사이인지라 공작저의 응접실에서 그를 맞이했다. 금색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길게 늘어뜨려 묶은 윈은 무도회장에서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차림을 하고 있었다. 지적인 학자처럼 모노클을 쓰고 팔이 없는 조끼형태의 심플한 차림이었다. “선물 받았다고 하셨던 그 마법반지는 어디에, 아 여깄군요.” 찾아온 용건부터 말하는 윈의 태도에도 렐리아는 기분나빠하지 않고 반지르르 윤이 흐르는 암갈색 테이블위에 금반지를 올려두었다. 시원스럽고 진취력이 강한 모습이 렐리아로서는 오히려 좋았다. 쓸데없이 귀족식 인사치레를 나누거나 최근 뭐하고 지냈냐는 안부를 묻는 행위는 귀찮고 비효율적이라 여기는 그녀였기에 더더욱. 그런 점에 있어선 아럼프는 저의 즉흥적인 성격을 닮았으며 변덕적인 부분도 유연하게 받아주던 친구였다. 렐리아는 우울하게 입술 끝을 가라앉히고서 맞은편 사내를 가만히 응시했다. 윈은 반장갑을 낀 손으로 금반지를 쥐고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마치 감정사처럼 꼼꼼한 눈길로 살핀 후 모노클을 한번 추켜올렸다. “확실히 실드속성입니다. 한데, 선물로 주신 분께선 단순히 보호마법 기능이라고 밖에 설명하지 않으셨나요?” “네. 혹시 그거 희귀한건가요? 생각보다 마법이 강해서요.” 렐리아는 마음한편이 찝찝했다. 아무리 보호마법이 걸려있다 해도 작은 금반지가 하늘에서 무너져 내린 시계탑의 머리부분을 견뎌냈다는 게 가능한 건지에 대해 말이다. 그 무게가 최소 오십 톤은 넘었을 텐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진 않았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비보라거나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하는 마법귀금속은 아닐지 상상하기도 했으니 말다했다. 무엇보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금을 녹여 만든 반지라고 선물해준 그녀가 장담하기까지 했으니 더 찝찝한 것이다. 원래세계로 돌아가더라도 따로 만나서 되돌려주고 가야되는 건 아닌가 하고 고민될 정도로. “어느 정도인지 이 자리에서 직접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강력하고 견고한 마법력이 느껴집니다. 웬만한 물리적 타격에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흠, 마나의 탄력성이 뛰어난 게 고차원성 다중마법이 확실한 것 같습니다만….” “제가 마법에 문외한이라서요. 좀 쉽게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쉽게 말씀드리자면 천재적인 분께서 직접 설계하신 마법인 것 같습니다. 상상을 초월할 가격이 붙을만한 물건이란 소립니다.” 윈의 친절한 대답에 렐리아는 입술을 살짝 뗐다. 역시나 평범한 건 아닐 거 같더라니. 그녀가 놀란 마음을 추스르는 동안 윈의 매끄러운 어조가 이어졌다. “역시나 저로선 처음 보는 패턴이군요. 추적…아니 비슷한 계열로는 통신기능에 가깝기도 하고. 겉으로만 보기에도 교묘하고 완벽한 짜임새를 갖췄습니다. 어느 천재적인 분이 제작했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심열을 기울인 것 같네요. 여기에 어떤 식으로 마법이 사용된 건지 파헤쳐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운 물건입니다.” 시름겨운 소리를 흘리는 사람치곤 그의 자색눈동자엔 흥분이 서려있었다. “제가 읽지 못할 리 없는데, 이것 참. 한층 더 고차원적인 방식으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아니 마법자체가 고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고차원이요? 음 그러니까 고차원 마법이라는 거죠? 근데 그게 뭔가요.” “예를 들어 공간적인 제약을 받지 않는 통신마도구나 공간이동이라고도 불리는 텔레포트, 마법게이트, 차원이동 같은 개념이라고 할까요.” “차원이동? 차원이동이 가능한 거예요?” “이 반지로요? 하하. 턱도 없습니다.” “아뇨. 차원이동이라는 마법이 존재하냐고요.” 이번엔 렐리아가 흥분해있었다. 차원이동이라는 게 저가 알고 있는 의미와 동일한 개념인지 짚고 넘어가야만 했다. 그렇다면 언제 나타날지도 모를 신을 굳이 하염없이 기다릴 필요도 없으니 말이다. “차원이동에 성공했다는 사례는 아직까진 대륙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차원을 넘나든다는 건 아직 꿈같은 이야기고,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론적으로 학설을 제기하는 정도죠.” 아, 하고 렐리아는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기대가 허물어지니 머리는 자연스레 차츰 이성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현실로 차원이동이 가능하더라도 자신의 몸은 어떻게 되찾을 거란 말인가 싶었다. 캐릭터인 채로 현실 밖으로 나온다면 문제만 더 복잡하게 될 뿐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왕국은 차원이동이나 고차원 마법 같은 경우 그 위험성 때문에 철저히 엄금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법사 보호차원에서 제약을 둔 것 같네요. 쓸데없는 위험한 호기심과 욕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니 말입니다.” 짤막한 설명을 덧붙이고서 윈은 바로 금반지에 대한 주제로 넘어왔다. 그는 여전히 금반지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펴보고 있었다. 봐도 봐도 흥미로운지 그의 입가엔 짙은 미소가 흘렀다. “어떤 분이 선물해준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음 사적인거라,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런, 아쉽군요.” 정말로 아쉬운지 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입은 웃고 있었지만. 이윽고 그는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반지를 쥔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단번에 꿰뚫기에는 마나구조 자체가 세밀하고 복잡하네요. 이것에 대해 확실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별도의 연구요? 개인적으로 제가 번지르르한 포장지는 의심부터 하고 안 뜯어보는 성격이라서요.” “흠…그렇담. 개인적으로 마법성능을 시험해보고 싶은데 잠시 제게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밝혀내지 못한 기능들이 있는 것 같으니 아가씨께도 썩 나쁜 제안은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가 투명하게 본심을 드러내자 그제야 렐리아는 흔쾌히 수락했다. 단 일주일 안에 돌려줄 것을 약속하고서 말이다. * 최근 들어 블리어의 일과에서 업무의 비중은 대폭 줄었다. 낮 대부분은 서류에 파묻혀있지만 저녁이 되면 모두 물리고 렐리아를 찾아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늘도 렐리아는 침대위에 팔자 좋게 늘어져있었다. 그가 창문에 드리워진 암막커튼을 거두고 방안을 환기시키는 동안에도 이불속에서 게을리 하품이나 해댔다. 그동안 블리어는 더 치울 것은 없나 방안을 한번 훑은 뒤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아까 낮에 불렀는데 왜 신호 안줬습니까.” 노을을 등진 채 뒷짐 지고 서있는 사내로 인해 렐리아의 얼굴위로 고스란히 긴 그림자가 졌다. 렐리아는 가늘게 눈을 뜬 채 무성의하게 늘어지는 말투를 사용했다. “…잘 때는 목걸이 빼놓는단 말이야.” “결국 하루 종일 안한다는 소리지 않습니까.” “맨날 안 자거든?” “맨날 잡니다만.” 활동성이 없는 렐리아를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아니 변명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루를 침대위에서 시작하고 침대위에서 끝내는 여자였다. 블리어는 오늘이야말로 이리 둬서는 안 된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 몸을 망칠뿐더러 정신건강에도 해롭습니다.” “남이사…졸려.” 렐리아는 베개를 끌어안고 옆으로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대나무를 끌어안은 판다처럼 베개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 태만한 꼴을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는 블리어가 이윽고 행동에 나섰다. 그는 가장먼저 왼손은 베개 끄트머리를, 오른손은 렐리아의 팔을 붙잡아 서로 떨어뜨려 놨다. 새하얀 도마와도 같은 침대시트 위에서 렐리아는 손질을 기다리는 식재료처럼 반듯하게 누워있었다. 베개와 분리된 렐리아의 몸은 이불로 둘러져있었는데 곧이어 껍질을 벗겨내듯이 이불마저 치워버렸다. 그제야 렐리아는 활어처럼 날뛰어대며 이불을 내놓으라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블리어는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몸을 굽혀 여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잔뜩 흐트러진 뒤통수를 한손으로 받치고 다른 팔로 그녀의 어깨아래를 휘감아 일으켜 세워주었다. “다시 누우면 안 됩니다.” “…어.” 불만스레 침대위에 앉은 채 렐리아는 눈가만 문질러댔다. 오래 잤는데도 불구하고 잠이 부족하기만 했다. “렐리아.” 잘 정돈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렐리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어디서 찾아왔는지 카디건과 플랫슈즈를 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검은 머리의 그는 실력 좋고 깔끔한 집사처럼 침대아래에 슈즈를 내려놓고서 한 팔에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쥐었다. 그러곤 살짝 상체를 굽혀 저의 어깨위에 카디건을 손수 둘러주었다. “왼쪽부터 팔 넣으십시오.” “안 추운데.” 툴툴 대면서도 렐리아는 그의 말에 따라 왼손을 뻗어 소매에 팔 한쪽을 꿰었다. 이에 바로 블리어는 반대쪽도 손이 들어가기 쉽도록 벌려주었다. 그 다음에 블리어는 무릎을 굽혀 침대아래 내려두었던 플랫슈즈 한 짝을 들었다. 이번엔 왼쪽 발부터 내밀어보라는 그의 말에 렐리아는 앉은 채로 살짝 왼발을 들어주었다. 사이즈에 꼭 맞아 발이 쏙 들어갔다. 반대쪽도 똑같이 신겨주고서 블리어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납시다.” “에구구.” 부러 엄살을 부리며 렐리아는 근육통 때문에 못 일어나는 사람처럼 뭉그적댔다. 그 속내를 간파 못할 블리어가 아닌지라 그는 낮은 한숨소리와 함께 가깝게 다가왔다. 렐리아를 향해 두 팔을 내린 후 그대로 가볍게 허리를 둘렀다. 단순히 여인을 안아주는 것 같았으나 그는 작은 날개뼈를 감싸 그녀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허공에 살짝 떠있던 렐리아의 두 발이 바닥에 닿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킨 후에도 굵직한 사내의 팔뚝은 여전히 가느다란 허리 뒤에 머물러 있었다. “놓아줄 테니 스스로 걸을 겁니까?” “아니 어디 갈 건데?” “바깥에 바람 쐬러 나가려합니다. 정원에 꽃이 많이 피었습니다.” “응…뭐 그러든가. 기사님. 정원으로 가주세요.” 탑승자처럼 렐리아는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 심드렁한 태도에 블리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사롭게 반응했다.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던 그가 곧이어 팔에 힘을 주어 렐리아를 홀가분히 안아들었다. 아이를 번쩍 안아드는 것처럼 가뜬해보였다. 물론 생각보다 자세는 낭만적이지 않았다. 거의 어깨에 둘러메진 터라 렐리아의 긴 머리는 미역줄기처럼 늘어져 그의 등에 닿아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처녀귀신 같기도 했다. “미리 말해두지만, 돌아올 때는 이렇게 안 해줄 겁니다.” “아 갑자기 나가기 귀찮아진다.” “좀 걸으십시오. 이렇게 게을러서야 어디다 써먹겠습니다.” “침대 위에서?” “정말 써먹어도 됩니까.” 예전 같았으면 믿는 구석이 있어서 허세가득한 말로 받아쳤을 텐데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 해봐라, 하고 말하는 순간 정말 침대위에다 쓰러뜨릴 것 같아 렐리아는 에헴 하고 헛기침소리만 냈다. 블리어는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입구로 들어섰다. 그녀가 밖으로 안 나온 요 며칠 동안 빠르게 싹이 움터서 정원으로 들어서는 길은 푸릇푸릇했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 그는 향긋한 봄 향기가 자리해있는 꽃밭 앞에 그녀를 내려주었다. 부드러운 크림색의 카디건이 원피스자락을 따라 하늘하늘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의 두 발이 촉촉한 땅 위에 닿았다. 상쾌한 정원공기를 들이켜며 렐리아는 이르게 갓 피어난 꽃을 내려다보았다. 여섯 쌍의 아이보리색 꽃잎 사이로 연한 노란빛이 살며시 물들어있었다. “진짜 꽃폈네?” 그런 제 말에 옆에 서있던 그는 핀지가 언젠데 새삼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시간하나는 참 무섭도록 빨리 가는 구나 싶었다. 꽃 구경하는 취미는 없다지만 그렇다고 어딜 돌아다니기는 또 귀찮아서 렐리아는 꽃밭 앞에 자릴 지키고 서있었다. 그동안 블리어는 습관적으로 그녀의 엉킨 머리칼을 부지런하고도 섬세히 쓸어내려주었다. 안쪽에 엉킨 머리를 풀어주느라 그의 긴 손가락이 뒷덜미에 스치듯이 닿았다. 살짝살짝, 닿을 듯 말 듯 굴어서 더 기분이 묘했다. 목덜미는 물론 가슴께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절로 렐리아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솔솔 불러오는 저녁바람 때문에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꽃을 보니 그렇게도 좋습니까?” 그때 들려온 그의 목소리에 그제야 렐리아는 자기 입술이 살짝 올라가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설마 꽃 한번 봤다고 이러겠냐만은 그가 하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꽃이기에 렐리아는 말없이 고갤 끄덕였다. 이에 비스듬히 그녈 내려다보던 그의 눈동자색이 미세하리만치 변했다. 노을빛 탓인지 푸석한 진녹안의 색감자체가 부드럽고 따스해져있었다. “내 말이 맞지 않습니까. 나오니까 기분전환도 되고 무엇보다 그대가 웃질 않습니까.” 뭉근한 온기를 품은 손가락들이 두피에 내려앉았다. 기껏 손질해놓은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살살 쓰다듬어주는 손길에서 알게 모르게 흡족함이 느껴졌다. 렐리아는 작게 풉, 소리를 내버렸다. 설마 자신이 꽃보고 해맑게 웃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싶으니 그가 너무 귀여웠다. 어감 상 절대 공작과는 매치되지 않을 거라 여겼는데 요상하게도 괴리감은 없었다. “흠. 그렇게 좋습니까?” “크큭킁.” 누가 들어도 코 먹는 소리였다. 렐리아는 입을 틀어막고 고갤 숙였다. 그 반응에 블리어는 이 여자가 부끄러워한다고 여겼다. 꽃을 좋아하는 걸 들킨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인가 싶지만 그는 여인의 수줍은 구석을 말없이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다음날 렐리아의 방에 꽃화분 30여종이 공작의 명으로 배달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0106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부쩍 잠이 줄었다. 렐리아는 일상 속 그 사소한 변화를 인정했다. 사실상 매일 같이 있는 공작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낮에 보던 업무를 제 방으로 가져와 처리했다. 저녁이 되면 그와 함께 식사를 했고, 소화를 시킬 겸 느긋하게 정원 산책을 한 후 밤이 되면 그와 함께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밤새 떠들다가 느지막이 정오에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걸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자신으로 인해 그의 일상까지 나태하게 물든 것 같았다. 일직선밖에 모르는 늘 반듯하고 시간관념에 철저하던 남자가 늦잠에다 업무태만을 몸소 실천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염시킨 게 아닌가 싶지만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같이 있자고 조른 것도 아니고 본인의지로 옆에 있는 걸 제 탓이라 할 수는 없었다. 렐리아는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블리어는 낮잠이라는 낯선 개념에 적응하지 못해 낮 시간에는 그녀 방 테이블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 렐리아는 그 옆에 앉아 떠들거나 비교적 쉬운 어휘로 구성된 책을 읽으며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그런 생활을 닷새간 유지한 탓인지 며칠간 내리 시달리던 악몽은 꾸는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어 현재엔 가물가물해질 정도였다. 렐리아에게 좋은 영향을 미쳤다는 건 확실했다. 둔한 렐리아는 그걸 잘 못 느껴도 옆에 있는 블리어는 달랐다. 예민하고도 섬세한 내면의 소유자 아닐까봐 그 세밀한 변화를 모두 알아차렸다. 처음엔 낮의 대부분을 퍼질러 자는 렐리아가 더는 자지 못하게 하자는 생각에서 그녀 방에서 업무를 처리하게 된 것이었다. 소소한 계기였으나 생각보다 큰 효과를 거두어 되레 블리어가 놀랄 정도였다. 그간 블리어의 노력을 생각한다면 놀라울 수 밖에 없었다. 함께 있는 동안은 그녀가 다시 기력을 되찾을 수 있도록 뭐든 해주고 싶었으나 뭘 해줘야할지 알 수 없었다. 사소한 것이라도 그녀가 관심을 보이면 챙겨줬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꽃을 좋아하는 것 같아 30여종을 골라 선물해보아도 시큰둥했고,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하라 일러둔 진수성찬 앞에서도 몇 술 뜨고 마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저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변화했으니 그동안의 노력만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딘가 모난 것 같던 여인이 둥그렇게 변함을 느꼈다. 칭찬에 약한 여자였다. 옆에서 다독여주고 좋은 말만 골라 속삭여줄수록 무르게 변화했다. 곧잘 짜증을 내던 것도, 우울해하던 것도, 밤마다 잠을 설치는 것도 확연히 줄었다. 곧잘 웃고, 장난을 치고, 규칙적인 생활을 보냈다. 그 능글맞은 미소를 최근엔 수분 단위로 볼 수 있으니 블리어로서는 그녀 곁에 머무르는 생활이 만족스러울 수밖에. “공작, 공작.” 늦은 저녁에도 어김없이 침대위에 누워 한가롭게 뒹굴거리던 렐리아가 그를 불렀다. 이리 와보라며 한손으로 손짓하는 모습에 블리어는 순순히 그녀에게로 다가와 주었다. 블리어는 침대 옆에 섰다. 또 무엇 때문에 부르냐고 묻듯이 그의 눈동자가 자상하게 내려졌다. 고운 코에서 입술로 떨어지는 그 지점에 그의 시선이 잠시 머무를 때 앵두처럼 깜찍한 입술이 벌어졌다. “이거 뭐라고 읽어? 안 배운 거 같은데.” “어디 봅시다.” 그녀가 다른 한손에 들고 있는 소설책을 들여다보기 위해 블리어는 침대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럼에도 깊이 고개를 숙여야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조용히 감내했다. 그걸 알 리 없는 렐리아는 배려라고는 모르는 낮은 책높이를 유지했다. 너무 가깝게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에도 렐리아는 당당했다. 기본적인 단어라면 왜 안 가르쳐줬냐고 그에게 꼬투리를 잡을 생각뿐이었다. 영악한 속을 숨기고 있을 때였다. 바로 머리 옆에 위치해있던 그의 입술이 너무나도 전조 없이 열렸다. “사랑합니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귀에 스며들었다. 순간적으로 뭐? 하고 떨떠름하게 물으려다가 렐리아는 뒤이어진 그의 말에 혀를 깨물었다. “사랑합니다 라고 읽습니다.” “…아 그렇구나.” 쌍반점 두 개가 나란히 따라붙을 뻔했다. '아 씨 뜸을 왜 들였지.' 민망, 어색, 괜히 또 뜸을 들인 것이 창피해서 렐리아는 슬쩍 책에 집중하는 척 굴어버렸다. 왜 순간 당혹스러워했는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책의 글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서 눈동자만 열심히 굴리고 있을 때, 돌연 블리어가 몸을 일으켰다. “참고로 그 뒤 야한 내용입니다.” 거기에 초를 치는 그의 발언에 렐리아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쥐고 있던 책을 거의 던지다시피 옆자리에 내려두고서 그를 피해 등을 돌려버렸다. 그녀의 입에선 뜬금없이 ‘아 졸리다’가 연달아 흘러나왔다. 시트 위에 놓은 자신의 빈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문득 든 생각에 홱 그를 돌아보았다. 공작은 근처 소파에 앉아 두꺼운 서적을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렐리아의 눈이 암고양이처럼 가늘어졌다. 굳이 말할 필요 없는 말을 이 상황에 꺼내다니 일부러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 “…야?” 고상한 취미를 즐기고 있던 블리어가 조만간 한쪽 눈썹을 가만히 치올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옆에 놔두었던 책을 챙겨들고서 태연하게 몸을 일으켰다. “공작~” 렐리아는 나머지 호칭을 덧붙이고 슬며시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소파옆자리에 앉았다. 두 다리는 편하게 양반다리하고서 무릎 위에 책을 얹어두었다. 아까 읽었던 페이지를 찾아 활짝 펼쳐두고서 렐리아는 그를 돌아본 채 두 눈을 크게 깜빡거렸다. 순수함을 흉내 내는 모습은 가증스럽다못해 뻔뻔할 지경이었다. “여기 부분 다 모르겠어. 뭐라고 읽어?” “굳이 읽어야겠습니까.” “응~” 렐리아는 순전히 그를 골탕 먹일 생각뿐이었다. 물론 쉬운 상대가 아닌 지라 곧바로 예리한 지적이 날아들었다. “읽을 줄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건 아닙니까.” “사랑합니다도 몰랐는데 더 진한 걸 알 리가.” “의심스럽습니다만.” “공작도 참, 의심만 많다니까. 나중에 이런 내용인 줄 모르고 읽다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망신이라도 당하면 큰일 아니야. 공작은 내가 공개적인 망신을 당해도 좋아? 어?” “일상생활에 도움이 안 되는 저속한 내용입니다만, 뭐 좋습니다.” “응?” 그 씨알도 안 먹힐 것 같던 협박은 의외로 잘 먹혔다. 블리어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드러내기는 했으나 너그러이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렐리아의 옆머리에 닿을 듯이 숙여진 그의 날렵한 턱이 비스듬히 기울어지고, 두 사람 사이도 부쩍 좁아졌다. 대각선으로 내려진 그의 시선은 그녀무릎에 얹어진 책에 닿아있었다. 블리어는 펼쳐진 책 내용을 가볍게 훑은 후 잠시 침묵을 지켰다. 정말 이걸 읽어줘야 하나 고민이 될 정도로 적나라한 단어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렐리아는 코앞에 위치한 선이 굵은 기다란 목을 바라보았다. 유독 도드라진 목 울대뼈가 한번 울렁이더니 바싹 메마른 목소리가 바로 위에서 흘러나왔다. “그녀의 무릎을 잡아 양쪽으로 훤히 벌린 세니오스가 자신의 큼.을 힘껏 박아 넣었다. 뻐근하게 조여 오는 그녀의 큼,은 평소에 부드럽게 쥐고 흔드는 작은 손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끈적했다. 달라붙는 내벽의 감촉과 뜨거운 온기에 세니오스의 입에서 갖가지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젖…크흠. 대략 이러한 내용입니다. 이 뒤는 말하지 않아도 대략 어떠한 내용인지 알 거라 여기겠습니다.” 갈증이 이는지 블리어는 바로 물을 찾았다. 그동안 렐리아는 말이 없었다. 그가 탁자로 걸어가 물을 따라 마시고 온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도 조용해서 블리어가 그녀 옆자리에 앉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방안을 울렸다. 그 침전된 분위기에 블리어는 결국 갑갑함을 느끼고 한소리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왜 읽어 달라 해서 이런 분위기를 만든 겁니까.” “무슨 분위기? 아무 분위기도 아닌데.” 시치미를 뚝 떼는 것치곤 목소리 톤이 일정하지 않다는 걸 블리어는 눈치 챘다. 그가 뭐라 더 말하기도 전에 렐리아는 어정쩡하게 양반다리를 풀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허나 몸만 앞선 탓에 벌떡 일어나는 순간 그만 발이 꼬여 휘청거려버렸다. 그녀의 손은 앞으로 쭉 뻗어져 블리어의 탄탄한 어깨를 밀치듯이 잡았다. 사내의 견고한 몸은 다행히 밀리지 않고 그녀의 무게를 지탱해주었으나 괜히 껴안길 것처럼 가까워진 탓에 분위기는 한층 더 이상해졌다. 렐리아는 그의 어깨에서 화들짝 손을 뗐다. 급히 몸을 뒤로 물리려다 소파시트에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대로 소파 턱걸이너머로 홱 나자빠질 것만 같아 블리어는 빠르게 그녀의 팔을 쥐었다. “렐리아.” 강한 손힘이 순간 부드럽게 풀려가는 게 느껴졌다. 렐리아는 그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어느새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에 세운 무릎을 움츠렸다. 이미 섹스까지 한마당에 이런 접촉이 뭐가 부끄럽겠냐만은 렐리아는 유난히도 견뎌내질 못했다. 간지러웠다. 막 긁고 싶을 만큼 그의 손길이나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간지러움이 일었다. 조용한 방안은 더욱 조용해졌다. 살짝 닿아있는 서로의 몸에 블리어는 평소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왠지 놓아주기 싫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렐리아의 눈을 들여다보다 그녀의 팔목을 쥔 손을 서서히 어깨 쪽으로 움직여 올라갔다. 그에 조금씩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렐리아의 하얀 발끝이 그의 단단한 옆허벅지에 닿았다. 평소 같았으면 ‘뭐. 뭐’하고 시비 걸었을 여자가 이상하게 조용해서 더 그의 행동이 대담해졌다. 그녀의 어깨 뒤를 휘감은 블리어가 다른 손으로 그녀 뒷머리를 감싸 밀착시켰다. 넓고 미지근한 품이 뜨겁게 느껴졌다. 렐리아는 배가 닿아있는 상태에서 손만 바르작댔다. 밀어내야 되는데 밀어낼 타이밍을 찾기가 힘들었다. 고요한 정적가운데 귓가를 간질이는 고른 숨소리가 저를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그저 안은 것뿐인데 과민반응처럼 밀어내면 또 이상할 것 같아서 렐리아는 결국 가만히 있는 걸 택했다. 그러다 다시 저를 떨어뜨리는 그의 손길에 슬쩍 그를 올려다보았다. 뒤통수를 습관적으로 두 번 쓰다듬어주던 블리어가 돌연 고개를 숙여왔다. 느릿하게 입술을 가져와 렐리아의 아랫입술부터 머금었다. 입술의 여린 살이 녹아내릴 것처럼 부드러웠다. 블리어는 그 황홀한 감촉을 느끼면서 입술을 살살 깨물며 빨아 당겼다. 결국 애가 타는 쪽은 그였다. 조심스레 혀를 집어넣은 그가 입술 안에 있는 작은 혀를 눌러 녹여갔다. 할짝거리는 애틋한 소리와 함께 단비처럼 촉촉한 타액이 밀려들어왔다. 괜히 갈증이 날 만큼 얕게 얕게 스며들었다. 블리어의 기다란 콧날이 렐리아의 코에 비스듬히 닿은 채 따스한 숨결을 내보냈다. 고개를 조심씩 틀며 그가 입을 맞춰올수록 서로의 거리는 다시 점점 좁혀졌다. 큰 손바닥은 여인의 뺨과 귓가의 경계에 머물러 있다가 이따금씩 머리칼을 어루만져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렐리아는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꼭 드라마의 낭만적인 키스신을 촬영하는 여자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살짝 눈을 뜰 때마다 제게 집중하며 입술을 맞춰오는 끝내주는 미모의 그는 배우처럼 잘생겼으니까. 그걸로 됐다고 여겼다. 키스는 삼 분을 넘기지 못했다. 유독 가만히 있는 그녀가 신경 쓰여 본능을 죽이고 이성을 택했기 때문이다. 블리어는 혀를 빼내며 천천히 누르고 있던 입술을 떼어냈다. 스르륵 날카로운 눈을 떠 가장먼저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키스를 하느라 살짝살짝 묻어나온 타액이 그녀 입가에 투명하게 묻어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여인은 덤덤하게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다. “미안합니다. 왠지 모르게 조절이 안됐습니다.” 그는 솔직히 사과했다. 욕구가 쌓인 것도 아닌데 강한 충동을 느껴버렸다. 이럴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불가항력처럼,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할지 모른단 생각에 잡아버렸다. 마지막이라 더 충동적이 되었던 것 같다고 블리어는 생각했다. “렐리아. 잔소리 한번만 해도 되겠습니까?” 내리깐 블리어의 두 눈이 청명한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를 담았다. 투명하게 저를 비추는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저가 할 말까지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블리어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운을 떼야만 했다. “내가 옆에서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매 끼니 놓치지 말고 챙겨먹고 잠도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십시오. 괜히 혼자 있는다고 하여 굶고 퍼질러 자면 안됩니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하루 종일 누워있으면 몸을 망칠뿐더러 정신건강에도 해롭습니다.” “공작 어디가?” “내일 야누이스 산맥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아 그 사냥…?” 렐리아는 쉽게 납득하는 듯 했지만 뺨을 긁적거렸다. 바로 내일이라는 말이 뭔가 조금 그랬다. 미리 말해줄 수도 있지 않나 싶었다. 언제 오느냐고 묻어볼까 했지만 그래봤자 뭐하냐는 생각에 렐리아는 훌쩍 몸을 일으켰다. “그래 뭐, 잘 갔다 와.” 침대에 풀썩 누워서 렐리아는 소파에 앉아있는 그를 쳐다보았다. 공작은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어보였으나 곧 아무것도 아니란 듯이 가벼이 머리를 저어보였다. 그러곤 몸을 일으켜 제게로 다가왔다. “오늘은 일찍 잡시다.” 미리 비워둔 옆자리에 익숙하게 올라와 눕는 그를 보며 렐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은 처음으로 서로의 손목을 묶고 자지 않았다. * 동이 틀 무렵에 블리어는 이미 일어나있었다. 푸른 새벽빛이 가득한 방안에 그는 초상화처럼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반듯한 자세로 그는 깔끔하게 면도한 매끄러운 턱을 문질렀다. 단정한 길이의 검은 머리칼은 살짝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의 눈길도 자신의 오른손 위치에 내려와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새하얗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크고 또렷하게 글자를 새겨 넣었다. 최근 글자를 뗀 아이를 배려하듯이 긴 글을 잘 읽을 수 있게 부러 유려하게 흘러가는 필체는 피한 것이다. [렐리아는 보십시오.] 시작은 간결했다. 하지만 그 뒤는 무겁게 이어졌다. 적어 내려가는 손의 속도도 마음에 비례하듯 느렸다. [이른 시일 내에 이 왕국에서 떠나십시오. 그대를 마주보고 얘기하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그 얼굴을 보면 조금 망설여질까 이렇게 편지로 얘기합니다. 나는 아마 일주일간은 저택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더 걸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 인사입니다. 인사 없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겨두었다고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대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잘된 일 아니겠습니까. 그대의 고향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돈주머니와 마차를 준비해두었습니다. 제국 화폐이니 대륙어디든 그 가치는 인정받을 겁니다. 그대가 정착해서 안락한 생활을 하는데 그만하면 충분할 겁니다. 마부에게는 미리 말해두었으니 말만한다면 그대를 어디든 안전하게 데려다줄 겁니다.] 블리어는 떠나라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더 붙잡아두고 싶은 그의 마음과는 달리 그의 이성은 놓아주어야한다고 판단했다. 안전할 것이라 말하며 그녀를 객실에 밀어 넣었던 그 순간을 그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는 것은 중요치 않았다. 그로 인해 그녀가 희생될 뻔했다는 사실이 끔찍했을 뿐이다. 그날 일로 저의 생각이 얼마나 안이했던 것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비참한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저택일 수도 있는 것이다. 왕국의 어느 지역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 모든 이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다한들 자신은 공작으로서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만 했다. 왕국이 멸망한다하더라도 끝까지 나라와 가문을 지켜내야 했다. 그렇기에 렐리아를 일찍 떠나보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저의 욕심으로 붙잡아두었다가 괜히 그녀까지 휩쓸리게 할까 그것이 걱정될 뿐이었다. [이제까지 내 애인역할을 소화해내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다소 까다로운 성미인 나를 받아주기엔 앞으로도 그대만한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훗날에, 우연히 라도 다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오. 블리어 씀.] 적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블리어는 최대한 간결하게 끝맺었다. 서로에게 미련이 될 일은 자제하고 싶었다. 블리어는 미리 준비해둔 묵직한 돈주머니를 편지와 함께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을 나서기 전 그의 시선은 잠시 세상물정 모르고 잠들어있는 여인의 보얀 얼굴위에 내려앉았다. 중간에 악몽 때문에 깨는 일 없이 이젠 깊이 잘 잔다. 이러면 되었다 여기고서 블리어는 방을 벗어나 조용히 문을 닫아주었다. 0107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렐리아는 눈을 떴다. 커튼사이로 흘러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셔 잠시 눈을 찌푸리다가 돌연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았으나 기분 나쁜 꿈이 아니었다는 거 하난 확실했다. 홀가분하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려다가 문득 돌아본 옆자리에 렐리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어디 갔지?’ 최근 닷새간 매일 함께 일어나고 잠들었던 그인지라 렐리아는 허전한 빈자리가 괜스레 어색하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침대에서 내려온 렐리아의 발길이 멈춘 곳은 항상 그의 지정석이었던 테이블 앞이었다. 탁자위에 놓인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튼튼한 쇠가죽으로 된 주머니와 반듯하게 놓인 편지를 내려다보다 렐리아는 딱 봐도 그가 제게 쓴 것 같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활자판으로 찍어낸 것처럼 커다랗고 정형화된 글씨는 6세 교육용으로 편찬한 학습지에서나 볼 것만 같았다. 아래에다 따라 써도 될 것같이 바람직한 필체였다. 렐리아는 더듬더듬 졸린 눈으로 읽어 내리다가 그대로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뭐야….” 저가 잘못 읽은 게 아닌가 싶어서 그녀는 다시 천천히 그가 써놓은 편지윗줄부터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에게서 배운 단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떠나십시오’라고 적혀있었다. 떠나라는 단어가 이런 단어였던 건가. 낯익은 글자모양이 조금 생소하게 보였다. 망막에 들러붙은 것처럼 자꾸만 눈에 밟혔다. 허나 그보다도 렐리아의 눈길을 사로잡는 문장은 따로 있었다. [그러니 이게 마지막 인사입니다.] 노도처럼 밀려오는 수많은 감정의 혼재 속에서도 렐리아는 바위처럼 굳어있었다. 허무감, 이유모를 박탈감, 배반감, 놀람, 경직, 그리고 서운함. 블리어의 예상대로였다. 오랫동안 파도 앞을 버티고 있던 해변가의 암석처럼 우두커니 방안에 서있었다. 렐리아는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눈을 두어 번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아, 하고 시름어린 소릴 흘렸다. 마지막 인사. 그 말이 왜 이렇게도 마음에 걸리는지 알 수 없었다. 골병에 든 사람처럼 렐리아의 몸은 자연스레 침대부터 찾았다.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누워서 그녀는 멀거니 천장만 올려다보았다. 마음을 정리해보려 눈을 감아보았지만 생각만 많아질 뿐이었다. 대부분 합리화적인 생각이었다. ‘그래. 잘된 거잖아.’ 이렇게 끝날 사이였다. 돌아가면 평생 못 볼 사이, 그렇게 잔인하게 정의되는 사이가 저와 그의 사이였다. 공작 쪽에서 먼저 이렇게 정리해주었으니 제겐 더 고마운 일일 테다. 덕분에 언제 돌아가든 제 마음이 후련하지 않느냐고 스스로를 강하게 타일렀다. 하지만 머릿속에선 야누이스 산맥이라는 여섯 글자가 뱅뱅 맴돌았다. 자신이 그를 찾아갈 이유조차 없는데도 그 단어가 뇌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렐리아는 외면하듯 눈을 감아버렸다. 이번에 눈을 뜨면 현실이기를 부디 간절히 소원하며 말이다. * 그날 방안에서 이틀내리 자고 렐리아는 극심한 허기에 눈을 떴다. 배에선 이미 한차례 소란이 일어난 후였다. 중간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일어날 기력도 없고 귀찮아서 더 자버렸는데 덕분에 이 사달이 나버렸다. 소화기관들이 요동쳐대니 빈속은 더할 나위 없이 쓰라렸다. 뭐라도 섭취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았다. “공작…밥 먹자.” 무의식중에 웅얼거리다가 렐리아는 슬며시 마른 입술을 베어 물었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구나 싶다가 렐리아는 창밖에서부터 슬금슬금 기어들어오는 노란 노을빛을 응시했다. 이 시간이면 늘 공작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정원 산책을 나갈 시간이었다. ‘…뭔데 또 생각나냐.’ 어차피 일주일 후면 돌아온다고 했으니 언제가 됐든 여기 눌러있는 한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 테다. 공작을 마주하게 되면 가장먼저 편지에 대해 바득바득 따지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인사가 아닌 것에 한껏 조롱해줄 테다. 그에게 흑역사를 만들어준다는 생각에 비실 입새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으나 정말 웃겨서가 아닌 건조한 소리에 불과했다. ‘…돌아오기만 해봐라.’ 이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 쫄쫄 굶은 채 폐인처럼 누워있을까 하는 오기도 들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그를 맞이한다면 어느 정도 공작이 반성하지 않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본능에 충실한 몸 아니랄까봐 렐리아는 방밖으로 나와 문 근처를 기웃거렸다. 지나가는 시녀가 있다면 붙잡고서 식사 좀 가져다달라고 말하기 위함이었다. 허나 노을에 젖은 복도는 황량하기만 했다. 구석자리라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렐리아는 저택 중앙으로 향했다. 초저녁이 되면 일감을 마무리 짓기 위해 서두르는 저택 고용인들로 인해 한창 소란스러울 중앙인데도 불구하고 어째 평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뻥 뚫린 네 갈래 복도에 선 렐리아는 아미를 씰룩였다. 꼭 유령저택에 온 기분이었다. 식사를 만들기 위해 더욱 분주해있을 주방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 안으로 슬며시 들어선 렐리아는 텅 비어있는 주방 외관을 훑다가 ㄷ자로 꺾인 내부에서 들려오는 문소리에 고갤 돌렸다. 안쪽 문을 열고 나온 자는 다름 아닌 주방에 침입한 인기척을 느끼고 튀어나온 공작가의 최고령주방장 크루크였다. “렐리아님…?” 긴 앞치마를 두른 크루크는 물 묻은 두 손을 감추듯 황급히 앞치마에다 닦았다. 공작의 애인이라고 깍듯하게 대해주는 그에게 렐리아는 가볍게 머릴 까딱이는 걸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설마 아직 저택에 남아계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배가 고파서 그런데 식사 좀 만들어줄래요?” “네, 이렇게 직접 걸음 하시게 만들었으니 면목만 없을 따름입니다. 당장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크루크는 바쁘게 등을 돌려 미리 다듬어놓은 식재료들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렐리아는 그 자리에 서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는데 그러다 크루크와 또 한번 눈이 마주쳐버렸다.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속히 식사를 가져다드릴 터이니…,” “내가 들고 가죠.” 새침한 아가씨처럼 렐리아는 대답했다. 그냥 배가 너무 고파서 걸을 힘이 없는 것뿐이었지만 도도하게 주변을 훑다가 주방안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런데…수발을 들어야할 시녀도 떠난 건가요?” 왜 직접 여기까지 오셨냐는 물음이었다. 렐리아는 그 조심스러운 질문에 그저 고개만 갸웃했다. 채소들을 가지런하게 썰던 크루크가 네모나게 썬 당근, 감자 등의 채소들을 냄비 속에 퐁당 빠뜨렸다. 그 신속하고 노련한 요리 실력을 뒤에서 지켜보던 렐리아가 입술을 뗀 건 한참 뒤였다. “떠나다니 무슨 말이죠?” “…모르셨습니까? 험, 당연히 아실 줄 알고 드린 말씀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다소 무례한 발언이었다고 여긴 크루크가 스스로 정정한 후 뒤를 돌아보며 머리를 숙였다. 렐리아가 괜찮으니 마저 스튜를 저으라고 제스처를 보내자 그제야 크루크는 본격적으로 스튜를 끓이며 말을 이었다. “고용인들 대부분이 그만두었습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라 마냥 욕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다른 가문 같았다면 저 목숨 온전하겠다고 주인의 곁을 떠나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을 텐데…다 공작님의 아량이 하해와도 같이 넓으신 덕이지요. 저희 같은 하찮은 것들의 목숨까지 생각해주시니….” 수도 비상령이 내려지고 난후 블리어는 집사에게 하나의 전달사항을 맡겨놓고 갔었다. 가문 내에 몸을 담그고 있는 고용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떠날 기회를 준 것이다. 죽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날로 커지는 공포감에도 쉬쉬하며 일을 하던 고용인들은 그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뿔뿔이 흩어지게 된 고용인들 가운데에는 어린 소피아도 있었다. 저택도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에 언니들을 따라나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이 가족을 데리고 제국 쪽으로 넘어가거나 고향에 찾아갔을 겁니다. 모두 가족들을 놔두고 죽을 수 없는 자들일 테지요.” “주방장은 왜 안가고 여기에…,” “저는 오래전에 자식도 아내도 모두 잃어 홀몸입니다. 이 생에 미련이 없을뿐더러 한번 죽고 끝날 이 미천한 목숨, 명예롭게 이 가문에 바치기로 오래전 맹세했었습니다.” 돈 때문에 들어온 고용인들 대부분은 관두었지만 이 가문에 뼈를 묻을 각오로 일평생 일 해왔던 충직한 식솔들은 여전히 남아서 맡은 바를 다하고 있었다. 크루크도 그들 중 한명이었다. 공작가문의 오랜 경력 주방장이라는 자부심과 더불어, 죽어서도 끝까지 라콘드 공작저의 기반이 될 흙 한줌이 될 것이라는 사명감까지 띠고 있었다. “늙은이가 말이 많았군요. 주책이 심해가지고…죄송합니다.” 괜찮다는 의미로 렐리아는 고개를 두어 번 저어주었다. 완성된 스튜와 부드러운 식감을 자랑하는 빵, 양고기와 샐러드로 구성된 식사는 푸짐했다. 자신이 나르겠다는 크루크의 말을 한사코 거절한 렐리아는 쟁반을 든 채 방으로 돌아왔다. ‘수도가 정말 비상상태구나.’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느릿하게 스튜를 떠먹으며 렐리아는 생각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먹음직스런 스튜냄새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비이상적일 만큼 식욕이 없어졌다. 사태의 심각함이 피부로 느껴져서 괜히 조급한 감정이 들었다. 이곳이 안전하지 못하다는 건 공작의 상황도 마찬가지라는 소리일 테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산 이랬는데 만약 무슨 사고라도 터지면…어떻게,’ 불현듯 죽은 아럼프가 생각나버렸다. 렐리아는 잠시 스푼을 내려놓고 미약한 헛구역질을 참아 넘겼다. 잔인한 그날의 광경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그날 뒤로 얼마나 후회했었는지 렐리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자신이 옆에 있었다면 하고 얼마나 자책감을 느꼈는지 또한. 혹여 라도 공작이 사지에서 죽었단 소식을 듣고 현실로 돌아가게 된다면 돌아가서도 얼마나 후회할지 불 보듯 뻔했다. 한동안 후유증처럼 자나 깨나 그만 떠오를 테다. 렐리아는 다시 스푼을 쥐었다. 따끈따끈한 빵 위에 담백한 스튜에 졸인 채소들을 얹고서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입맛이 있고 없고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역시 돌아가기까지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러모로 저가 마음 편히 돌아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야 훗날 되돌아봤을 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 자신을 위해서 라고 렐리아는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곤 입안에 욱여넣듯이 식사를 끝내고 나갈 준비에 서둘렀다. 원피스를 집어던지고 옷장 안에 묵혀두었던 간편한 평민바지와 리넨셔츠로 갈아입었다. 혹시나 돈이 필요할지 모르니 그가 놓고 간 돈주머니에서 금화 몇 닢을 꺼내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마지막으로 렐리아는 이제껏 서랍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목걸이 끝에 매달린 작고 투명한 크리스탈이 허공에 흔들리며 반짝거렸다. 그 속에 품고 있는 순금결정은 조금 탁하게 가라앉아있었다. 렐리아는 목걸이를 목에 걸고 여러 번 그에게 신호를 보내봤으나 묵묵부답이었다. 팔찌를 놓고 간 건지, 아님 그가 있는 곳까지 너무 멀어 신호가 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여긴 렐리아는 바로 로브하나를 걸치고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0108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수도 가브리나에서 북서쪽으로 길게 뻗어있는 산줄기는 드래곤의 머리형상을 띤다고 해서 예로부터 야누이스 산맥이라고 불렸다. 지형도 완만한데다 물줄기가 산골짜기를 따라 시원하게 뻗어져있어 산등성이마다 작디작은 민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블리어는 그 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진지를 치고 차례차례 토벌영역을 넓혀나가고 있었다. 시급한 사태에 왕도의 군 인력을 이곳으로 빼돌릴 수 없기에 공작가문의 사병들로 작전인원을 충당하였다. 거기에 매년 사냥대회에 참가하던 무가귀족들 중 소수가 먼저 지원자로 나선 탓에 일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선발대와 후발대로 나뉘어져 사냥은 진행되었다. 선발대는 라콘드 공작이 직접 지휘했기에 사냥진전은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산맥 초입까지 내려와 기승을 부리던 멧돼지 떼와 사나운 맹수들의 사체는 날이 갈수록 수북이 쌓여갔다. 아예 씨를 말릴 작정으로 산 중반 일대를 샅샅이 뒤져 난폭한 산짐승 무리들을 베어나갔다.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활과 검을 휘두르고 온 블리어는 토벌부대를 이끌고 진영지로 돌아왔다. 묵직한 흑색갑옷을 착용한 그가 말에서 내리자 종자들이 달려와 피가 흠뻑 묻은 갑옷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핏물이 뚝뚝 흐르는 검을 젊은 종자에게 닦으라 명하고서 자신의 막사로 향했다. 그의 손목에 실오라기처럼 걸린 팔찌가 으스스한 산바람에 흔들렸다. 투명한 외관으로 인해 그다지 튀지 않았으나 그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측근과 종자들은 그 팔찌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다. 칠흑빛의 갑옷을 두르고 무자비한 검을 휘두르는 사내가 늘 왼쪽손목에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 것이 다소 이질적이긴 했으나 아랫사람이 뭐라 간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사들은 잡은 산짐승들에게서 살과 가죽을 분리하거나 각자 야영준비에 한참이었다. 블리어는 그들에게서 동떨어진 자신만의 공간에서 폐쇄된 휴식을 가졌다. 공작이 머무르는 개인막사에 함부로 다가올 간 큰 자가 있기야 하겠냐만은. 블리어는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게끔 입구에 천을 쳐두지 않았다. 투박한 간이의자에 앉아 땀에 젖은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팔찌 액세서리를 손가락에 끼워 굴렸다. 실수로 누른다고 하여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최대 반경 2킬로미터 안에서만 신호가 오갈 수 있기에 그녀에게 신호가 전달될 일은 없었다. 벌써 이곳에 온지 나흘 째라지만 그의 생각은 늘 수도에 있는 라콘드 공작저에 머물러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있을지 모를 여인에게 향해있었다. 고향으로 떠났다면 다행이겠으나 어쩌면 아직까지 방에 남아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자꾸만 치미는 것이다. 확실하고도 강경하게 편지를 썼어야했다. 이렇게 마음에 걸릴 바에 단호하게 나갈 것을 괜히 마음이 여려져 일주일 정도 소요될 거라는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여버렸다. 정말 일주일동안 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까봐 블리어는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렸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처럼 막사 안을 쓸쓸히 가득 채우고 있던 정적은 산 부엉이 우짖는 소리에 깨져버렸다. 점점 희미하게 들려오는 새소리에 그녀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던 중이었다. 굵은 왼쪽손목에 채워진 팔찌에서 미미한 떨림이 전해져왔다. 블리어는 믿기 힘든 눈으로 팔찌를 살폈다. 작은 크리스탈 속에서 환한 빛을 내며 부유하는 순금결정들을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거칠게 몸을 일으키자 그 반동으로 인해 간이의자가 넘어졌다. 의자를 일으켜 세울 생각조차 않고 블리어는 서둘러 천막 밖으로 뛰쳐나왔다. 완전히 해가 산등성너머로 넘어가 적적한 어둠이 사위에 깔려있었다. 깊은 산속이라 밤처럼 어두웠고 야행성 짐승들이 본격적으로 돌아다닐 시간이라 낮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험했다. 그런데 이 산속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에 블리어의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반경 2킬로미터를 뭔 수로 다 뒤지겠냐만 블리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검 한 자루 챙겨들고 말에 올랐다. 이곳에 그녀가 찾아왔다. 계속해서 울리는 팔찌의 고동소리가 그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그가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 다그닥 다그닥, 날쌔게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가 고요한 산속을 크게 울렸다. 돌부리와 나무 뿌리가 드리운 거친 산길에서도 좀처럼 속도가 주는 법이 없었다. 블리어는 동쪽 방향으로 달렸다. 산속에 있다면 아직 깊숙한 산중반부가 아닌 초입이나 그 주변에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기를 빌 수밖에 없었다. 사라졌다 나타났다 신기루처럼 흩어지는 팔찌의 희미한 불빛에만 의존한 채 그는 무리하며 어둠을 찢고 달려 나갔다. 선선하던 밤바람은 북풍처럼 거세게 몰아쳐왔다. 이마에서 스민 구슬 진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약간 젖은 검은 머리칼이 밤공기에 녹아내릴 듯이 부드럽게 흐트러지길 반복했다. “렐리아!” 말이 달리는 와중에 혀가 씹히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블리어는 타이밍에 맞춰 반복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달리는 동안에도 제 시야확보보다도 주변을 둘러보기에 더 바빴다. “…어딨습니까. 대답하십시오!” 거대한 바위로 인해 길이 막힌 지점에서 블리어는 고삐를 쥐고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그 주변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온통 사람키만 한 풀과 늘어져있는 나무줄기, 이끼가 낀 바위만 듬성듬성 보였다. 그 너머에 뭐가 있는지 까마득하기만 한 산속에서 그는 미아가 된 것처럼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어딨는지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블리어는 예리한 오감을 잔뜩 곤두세웠다. 부디 작은 소리라도 괜찮으니 제 귀에 들리기를 속으로 하염없이 바랐다. 이렇게 간절한 적도 없다는 듯이 그는 불안하게 말 안장위에 앉아 연방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거의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의 머릿속에서는 냉랭한 이성적인 사고가 이어지고 있었다. 초입까지 앞으로 몇 십 분이 더 걸릴지, 만일 초입까지 갔다 오는 동안 그녀가 반대편에 있다면 어찌할 것인지, 그 사이에 그녀가 무슨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는 건지, 스스로 그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무한한 사고회로를 가진 것처럼 끊임없이 복잡한 생각은 이어졌다. 시야를 가리는 차폐물은 많고 광활한 지대는 끝도 없어서 일일이 뒤지기엔 시간이 촉박할 지경이었다. 꼭 끝이 없는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렐리아! 대답해보십시오!” 스산한 울림을 타고 메아리치는 저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가슴속에 갑갑함만 쌓여갈 때였다. 멀리서 희미하게 잡힌 인기척에 블리어는 곧바로 말안장에서 뛰어내렸다.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는 수풀지대였다. 사납게 삐죽삐죽 솟아난 나뭇가지들 앞에서 발목이 잡혀있을 때 수풀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간헐적으로 중얼거리는 시름겨운 목소리는 가느다란 게 분명 여자인 것 같았다. “렐리아. 거기 있습니까?” 블리어는 잠시 근처 나무밑동에 말을 묶어놓고서 수풀을 헤치며 들어섰다.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을 꺾으며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 목소리는 또렷해졌다. 흐느낌처럼 애달픈 구석이 있는 목소리였다. 손에 생채기가 늘어갔으나 블리어는 개의치 않았다. 수풀너머로 보일 듯 말듯한 먼 곳을 응시한 채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다 뺨을 스치는 화끈한 감각에 블리어는 그제야 눈앞에 집중했다. 수풀 속에 작은 가시가 세워진 가시덤불이 마구 얽혀있었다. 이대로 무식하게 맨몸으로 헤치고 나갔다가는 온몸 곳곳에 가시가 박히는 것을 면치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블리어는 허리춤에 걸린 검을 빼들었다. 가시덤불을 일일이 베어내며 그는 길을 개척해나갔다. 다행히 옳은 방향으로 온 건지 점점 그 얕은 흐느낌과 가까워졌다. 이윽고 수풀하나를 넘자 유일하게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탁 트인 지대가 나타났다. 나무 둥치에 앉아 비에 맞은 새처럼 바르르 작은 몸을 떨고 있는 여인또한 보였다. “아……. 고, 공작님?”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평소 양갈래로 즐겨 묶던 분홍색머리칼은 풀어헤쳐져 허리아래서 나폴나폴 흔들리고 있었다. “…다행이에요, 흐윽.” 두 손을 기도하듯 꼭 쥐고서 슈로니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를 만나서 크게 안도한 듯한 모습이었다. 허나 블리어는 수풀을 헤치고 나온 자리에 멈춰 서서 무겁게 굳은 눈으로 여인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있을 거라 여겼던 렐리아는 그 어디에도 없으니 당연했다. 기대감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늘어뜨린 손목에 걸린 팔찌에서도 빛이 꺼졌다. 그녀 하나만 보고 달려온 블리어로서는 그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금방이라도 암담함에 파먹힐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대가 왜 여깄습니까.” 검만 들이밀지 않았을 뿐 잔뜩 날카로움이 선 질문이었다. 슈로니는 흠칫 어깨를 떨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산에서…길을 잃어버려서…” “알락디사 영애. 나는 그대가 이 시간에 왜 야누이스 산맥에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제국으로 넘어가려다가 일행이랑 그만 떨어져서… 무서워서, 어떻게 헤매다가 여기까지 오게 됐어요. 죄,죄송해요…” 소심하게 잔뜩 어깨를 움츠리고 고갤 숙였으나 슈로니의 심장은 터질 듯이 두근대고 있었다. 제국에 먼저 가있으라는 아버지의 말에 기회라 여긴 슈로니는 부러 야누이스 산맥을 지나는 경로를 택했었다. 야누이스 산맥으로 출정을 떠난 라콘드 공작과 우연을 가장해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공작에게 냉대를 받고, 괴물일지도 모를 렐리아의 정체를 알게 된 후 마음고생이 심했던 슈로니였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기회라고 여겼다. 렐리아도 없을 테니 접근도 수월할 터였다. 슈로니는 야누이스 산맥근처 영지에서 일찍 쉬자는 말로 용병출신의 호위들을 따돌렸다. 그들이 한눈을 판 사이 마차를 타고 산맥초입으로 들어선 후 맨몸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마지막으로 운명적인 사랑을 시험하러 일부러 난관에 봉착하러 들어온 그녀는 소설 속 여자주인공이 따로 없었다. 물론 산이 이렇게 넓을 줄은 몰랐던 슈로니는 제 발로 들어온 것에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하지만 다시 되돌아가기엔 길을 잃은 데다 설상가상으로 방향감각까지 상실해 막막한 상황이었다. 해가 지고 급속도로 산속이 깜깜해지자 후회는 물밀 듯이 밀려와버렸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어두운 산속에서 결국 슈로니는 주저앉아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정말 그와 자신이 운명이라면 그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나타날 것이라는 믿음에만 의존한 채 흐느끼고 있을 때, 그는 정말 로맨스소설의 남자주인공처럼 제 앞에 나타났다. 잃어버렸던 반쪽심장이 돌아온 것처럼 오랜만에 마구 요동치는 심장 박동소리에 슈로니는 귀를 먹혀버렸다. 스산하던 바람소리도, 새가 우짖는 음산한 소리도 모두 들려오지 않았다. 어느새 제 앞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손을 내민 채 무표정하게 서있는 그만이 시야에 가득 찼다. “일어나십시오.” 슈로니는 그 커다랗고 단단한 손에 살짝 손을 얹었다. 수줍게 볼을 붉히면서도 닭똥 같은 눈물이 추적추적 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블리어는 고생이라곤 모르고 자랐을 작고 부드러운 손의 촉감이 연약하기 그지없다고 여겼다. 그토록 찾던 여인이 아님에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여인을 보호해야한다는 도의적 책임과 의무는 변하지 않았다. 일단은 안전하게 막사로 데려간 후 알락디사 후작에게 따로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여겼다. 가녀린 체구의 여인을 말안장에 태운 후 블리어는 그 뒷자리에 올라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0109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진영지가 있는 곳에서 정반대편에 위치한 산 중심부에서 렐리아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헤매고 있다기보다는 보이는 나무와 수풀을 족족이 뜯어 발겨 산림훼손을 하고 있다는 게 맞는 말일 테다. 이곳에 들어온 지 체감 상 두세 시간은 훌쩍 지난 것 같았다. 나침반이나 지도 없이 오로지 직감에만 의지하며 산을 등반한지 그만한 시간이 흘렀단 얘기였다. 드리워진 울창한 나뭇잎들로 인해 달빛도 닿지 않아 어두워진 곳에서 렐리아는 겁도 없이 전진했다. 집채만 한 바위가 버티고 있으면 가볍게 타넘었고 절벽이 보이면 기어 올라갔다. 그녀의 몸은 끄떡없으나 문제는 옷이었다. 넝마를 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기저기 실밥이 터지고 찢겨져있었다. 특히 리넨셔츠는 빨면 땟국이 줄줄 흐를 만큼 원래 색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지저분했다. 절벽을 오를 때 걸레조각이 된 로브는 과감히 버려버린 지 오래였다. “공작!! 어딨어!” 젠장, 렐리아는 생각보다 드넓은 산중에 진저리가 다 났다. 분명 아까 반대로 신호가 온 것을 보면 그도 이 첩첩산중에 있는 것이 확실했다. 허나 가도 가도 새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인기척이라곤 없었다. 대체 어떻게 공작을 찾아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산을 너무 우습게 봤다. 란게르드 산맥에서도 며칠을 돌아다녀놓고서 또 똑같은 짓을 반복하고 있는 스스로가 한심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렇다고 말을 빌리자니 말보다 저의 체력이 더 좋은 것을 어떡하란 말인가. 지도나 나침반도 그를 찾는 데는 하등 도움 되지 않을 테다. 렐리아는 굶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혹시 몰라 챙겨온 육포는 이미 바닥이 나있었다. 주머니 안에 배어있는 진한 육포냄새에 꼬르륵 소리만 더욱 커져만 갔다. “공작! …젠장 어딨는 거야.” 덜 자란 작은 나뭇잎이 달라붙어 엉망인 긴 은색머리를 신경질적으로 흐트러뜨렸다. 아마 이 산속에서 허기로 인해 가장 난폭하고 위험한 짐승은 렐리아 그녀일 테다. 서쪽인지 북쪽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한곳을 노려보며 서있을 때였다. 이 야밤에 희미하게도 작은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횃불인지 장작불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규모가 그리 크진 않았다. 렐리아는 일단 그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 판단하고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빠르게 달려 나갔다. 어쩌면 공작일지도 모른단 생각에 목걸이를 쥔 손에 힘을 가득 실었다. 수풀을 헤치고 또 한번 가파른 바위지대를 넘어 렐리아는 조금 평평하게 다져진 땅에 도착했다.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곳이었다.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는 작은 산골민가가 보였다. 동화 속 난쟁이들이나 살법한 볼품없고 투박한 통나무집이었다. 굴뚝으로 보이는 곳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고 고작해야 두 개뿐인 창문에선 적당한 조도의 불빛이 새어나왔다. 다섯 그루의 나무가 자라있는 땅은 마당구실을 하는 것 같았다. 렐리아는 이 집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소 무례하긴 해도 금화 한 닢이면 충분할 것이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문 앞에 선 렐리아는 질 좋은 나무로 만든 진갈색 문을 통통 두드렸다. ‘계세요’하고 운을 떼기도 전에 안에서 끼이익 하고 문이 열렸다. 포근한 백발의 노부부가 살 것 같은데 상당히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누런 집조명이 바깥어둠을 물러나게 하고 곧이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집주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 렐리아의 턱이 일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건 맞은편에 서있는 자또한 마찬가지였다. 경악스러운 신음을 차마 내지 않으려 애써 입을 다물고 있는 자는 다름 아닌 환한 은발의 사내 이스티온이었다. 그는 황망한 시선을 감추지 못한 채 결국 살짝 뒷걸음질 쳐버렸다. 그에 렐리아는 바로 반응하며 문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스티온의 멱살을 잡아채고서 렐리아는 한껏 격양된 채로 퍼석한 입술을 뗐다. “너…이 개새,” “…누구 왔니?” 그때 들려온 노파의 목소리에 렐리아의 벌어졌던 동공이 다시 원래크기로 돌아왔다. 떨떠름하게 입술을 닫고 렐리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안쪽 방을 응시했다. “…누워 계세요 할머니. 마을분이 잠시 찾아오신 거예요.” 이스티온은 목이 살짝 눌린 상태에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에 안심한 건지 안쪽 방에선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일순 정적이 흘렀다. 렐리아는 혼란스러움에 잠시 멱살을 쥔 손을 풀었다. 드래곤에게도 할머니가 있는 건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다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화가 풀린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번에야 말로 그 멱살을 붙잡고 바닥에 패대기를 치려할 때였다. “…나가서…얘기해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급작스럽게도 그가 깊이 머리를 숙여보이자 렐리아는 또 한 번 멈칫했다. 짜증스럽게 입술을 우그러뜨리다가 렐리아는 먼저 나가라고 한번 홱 고갯짓을 해보였다. 이스티온은 순순히 먼저 집밖으로 나갔으나 불안한 듯 어깨를 잔뜩 굳히고 얕게 손끝을 떨고 있었다. 조금은 각오한 듯이 입술은 뻣뻣하게 다물려 있었다. 그는 통나무집에서 조금 떨어진 흙바닥위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을 렐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삐딱하게 서서 내려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이제까지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 대역죄인치고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렐리아는 마음 같아선 그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고 피해를 입었던 천여 명의 왕도민들 앞에 그를 세우고 싶었다. 돌팔매질을 당해도 싸다. “저를 발로 차고 싶으시다면 그러셔도 좋습니다. 분이 풀리실 때까지…마음껏 걷어차 주셨으면 합니다.” 정말 그래도 되냐고 렐리아는 물어보려다 말았다. 드래곤이 아닌 지금 인간모습으로 한번 걷어차인다면 최소 사망일 텐데 알면서 저런 말을 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더 얄밉고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그동안에도 그의 이실직고는 계속해서 힘겹게 이어졌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짐작하고 있습니다. 이제껏 연락 없이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저도 무슨 염치로 뵐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한심하게 후회만 했습니다. 그때 일은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으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거 알지만 언젠간 만나게 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가지런히 쓸려 내려온 은발이 흙바닥에 닿고 그의 이마와 콧대에도 축축한 흙 비린내가 묻었다. 이스티온은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겹친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짧게 깎인 손톱사이로 흙 알갱이가 긁혀 파고들었다. “결국 저 때문에……죄송하게 됐습니다.” 목이 메어 잠시 할 말을 늦춘 이스티온이 곧이어 속절없이 떨리는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제…아이를 가지신 거죠.” * 슈로니를 막사에 두고 블리어는 다시 홀로 말을 타고 나섰다. 허나 반경 2킬로미터에서 벗어나버린 것인지 더는 신호가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블리어는 포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말을 타고서 달이 휘어청 넘어가는 내내 산속에서 렐리아를 찾아 헤맸다. 산중턱의 끝 지점에서 동서남북 빠뜨리지 않고 돌아다녔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큼 산 전체를 쏘다녔다. 밤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말의 체력 또한 급격히 떨어져가자 블리어는 마지못해 포기하고 주둔지로 향해야만 했다. 돌아왔을 때엔 거의 세 시간이 지나있었다. 땅에 내려오자 안쪽허벅지 근육이 심하게 지끈거려왔다. 낮에 쉴 틈 없는 사냥으로 혹사시킨 몸을 또 승마로 혹사시켰으니 당연했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얼굴이었으나 그보다도 걱정이 더 깊이 얼룩져있었다. 땀에 푹 젖은 머리로 블리어는 개인막사로 돌아왔다. 막사 안을 비추고 있는 짙은 노란색의 등불이 잔잔하게 그를 맞이했다. 블리어는 그 안에서 길게 진 또 하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기다리고 있던 슈로니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재롱이라도 부리려는 강아지처럼 그에게 다가가더니 작게 놀라며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연분홍색 손수건이 그의 왼뺨에 조심스레 닿기 무섭게 커다란 손이 차갑게 그녀 손을 내쳤다. “왜 여깄습니까.” 놀란 슈로니가 손의 힘을 풀어 손수건이 바닥에 힘없이 툭 떨어졌다. “개인 막사를 지정해주었을 터, 그대가 여기 있을 이유는 없습니다. 나가십시오.” 블리어는 무감정한 눈을 했다. 자신의 막사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가 무슨 불쾌한 오물덩어리라도 되는 양 그 눈빛엔 감정조차 담지 않았다. 감정소모도 아깝다는 듯이 인정사정없이 구는 사내의 행동에도 슈로니는 부러 떨리는 손길로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곤 안절부절 못하며 큰 눈동자를 굴렸다. 다디단 초콜릿색 눈동자에는 물기가 슬금슬금 올라왔다. “뺨에 피가…” “그대가 상관할 일 아닙니다.” 차마 여인을 상대로 무력을 쓸 수 없는 그는 계속 냉랭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슈로니가 누구인가. 이쯤에선 대부분 눈물을 훔치며 나갈 텐데도 슈로니는 투명한 눈물방울을 툭툭 흘리면서도 한사코 제자리를 지켰다. “…왜 상관이 없겠어요. 저를 찾으시러 오셨다가 그 상처가 생기신 거잖아요? 가시덤불에 긁혀서…,” “알락디사 영애.” 그녀 말대로 왼뺨중앙에 긁힌 자국을 따라 핏덩이가 가늘게 굳어있었다. 상처치료가 시급해보였으나 블리어는 괴이할 만큼 이성적이었다. 제 상처의 쓰라림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그대를 발견한 덕분에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그 뒤로 도통 렐리아와 연락이 닿질 않습니다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는 오랜만에 냉혈한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차라리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내가 이런 생각을 품지 않게 부디 나가주십시오.” 너무나 지독히도 차가워서 되레 손이 데일 것 같았다. 단순히 따끔한 정도에서 끝나려하지 않고 영영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기려 작정한 것 같았다. 슈로니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한 움큼 집어먹었다. 발끝에서부터 자욱하게 올라오는 냉기에 시린 두 다리가 바르르 떨렸다. 결국 그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나누지 못한 채 슈로니는 도망치듯 그의 막사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녀가 흩뿌리고 간 눈물엔 관심조차 두지 않고 블리어는 아롱진 눈물을 짓밟고서 간이침대에 다가갔다. 여인이 앉은 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어 털어내고서 그는 그 자리에 편히 앉았다. 그제야 자신만의 공간을 찾았다는 듯이 블리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미세하게 미간에 주름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기에 신호가 또다시 닿지 않는지 걱정만으로도 가슴이 다 벅찼다. 애간장이 타는 데에 국한되지 않고 그 갑갑함은 제삼자를 향한 증오로 이어질 것만 같았다. “…어디 있습니까, 대체.” 들리지 않을 걸 알면서도 답답함에 절로 잠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팔찌가 채워진 왼쪽손목에 그는 눈덩이를 누르듯 묻고서 길고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습관처럼 블리어의 길고 곧은 손가락은 팔찌를 천천히 어루만져갔다. 여인의 뺨이라도 어루만지듯이 썩 애달프고 조심스러웠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짙은 사념에 잠겨있던 그는 곧이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달빛이 농익은 야심한 시각, 실력 있는 베테랑 기사들로 구성된 수색조가 급하게 편성되었다. 그들을 이끌고서 블리어는 다시 산 일대를 수색하기 위해 말을 타고 나섰다. 0110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안쪽 방안에서는 간헐적인 잔기침 소리가 꾸준히 들려왔다. 콜록콜록 마른 기침소리가 심해질 때마다 이스티온은 민첩하게 몸을 일으켜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동안 렐리아는 좁은 거실에 앉아있었다. 아직 대화가 전부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거반 중점적인 대화를 나누었기에 어느 정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갔다. 렐리아는 밖에서 그와 제법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고 온 참이었다. 괜한 생사람을 잡을 뻔했다는 생각을 하면 아직도 등줄기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아까의 대화를 회고했다. ‘아이? 여기서 아이가 왜 나와. 미쳤냐?’ ‘…그렇지만, 제가 그때…’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대는 남자를 보며 솔직히 아직도 순수한 청년인척 군다고 여겼다. 싸질러놓은 씨가 걱정이 되었긴 했나보구나, 그렇게 삐딱하게 생각하며 제대로 생리하는 중이라고 답해주었다. 그 말에 크게 안도하며 남자는 더욱 땅바닥에 머리가 닿을 듯이 숙였다. 윤기가 흐르던 밝은 은발은 어느덧 흙바닥에 쓸려 그 색이 탁해져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흐느끼듯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그 뒤였다. ‘당신 같은 분께서…왜 보잘 것 없는 제게 잘 대해주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품어선 결코 안 된다는 생각을 했지만 결국엔…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미안합니다.’ ‘…하. 지금 와서 무슨,’ ‘…처음이라, 그날 가진 관계가 제, 첫 관계였습니다. 그런 관계를 가져본 적도, 여자를 만나본 경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자에 대해 무지하고 임신이나, 그런 거에 어떻게 대비해야할 지조차 모르는 등신입니다. 우습게 들릴지는 몰라도 전부 사실입니다.’ ‘뭐?’ ‘사실 그날…도무지 경황이 없어서 어떻게 뒤처리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저질러 놓고 결국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나와 버린 게 가장 큰 실수였습니다. 이미 실망하셨을 거라 생각되지만…미안합니다, 정말로. 사과드리고 싶었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진솔하게 털어놓고 사과하는 그의 태도에서 정말 미안해한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렐리아는 솔직히 당혹스러웠다. 아이 얘기도 뜬금없기도 했지만 뭔가 굉장히 인간적이라서 놀라웠다. 이렇게까지 정체를 숨길 필요가 있나 싶을 만큼. ‘두고두고 후회했습니다. 하지만 먼저 찾아갈 수도 없었습니다…그 얼굴을 다시 뵈는 것조차 두려웠지만 한낱 기사가 개인적으로 만남을 청하는 것은 아무래도 하늘의 별따기 같은 일이었습니다. 괜히 공작전하의 귀에 들어가 의심을 받을까 섣불리 행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 왜 튄 건데. 너 찾아갔더니 장기휴가내고 없던데.’ ‘…할머니께서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편지를 받았습니다. 곁에서 간호할 가족이 저밖에 없기 때문에 당연히 제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걸 부디 아량 넓게 이해해주세요.’ 그는 모든 사정을 얘기해주었다. 급히 장기휴가를 낸 건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옆에서 모시려고 했던 것이라는 것과 약간의 짤막한 가정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산골짜기가 이스티온의 고향이자 본가라고 했다. 명예기사 출신인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렇게 셋이서 산골짜기에서 살았다는 얘기와 검술은 할아버지에게 어렸을 적부터 배웠다는 얘기,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친구분에게 자신의 뒤를 봐달라고 부탁했다는 얘기. 결국 할아버지의 지인추천으로 간신히 수도에서 기사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는 간략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예전에 고위급 사제인 아럼프를 개인적으로 꼭 좀 따로 뵙고자 했던 이유는 할머니 치료에 때문이었다고 했다. 치료비가 만만치 않게 들 테지만 개인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고 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이제 겨우 신참소리를 듣는 수습기사가 고위급사제를 부른다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을 테다. 렐리아는 당시 의문을 품었던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해가 갔다. 공작의 생김새조차 모른다기에 인간 세상에 무지한 드래곤일 거라 여겼던 제 추측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정말 이런 산골짜기에 일평생 살았다면 몰랐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덥석 믿지도 않았다. 찝찝하게 걸리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분명히 그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심상찮은 기운은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자다!’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끔 강하게 뇌리를 파고들듯이 강렬한 감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의심하기엔 역시나 렐리아에게도 짚이는 이유 몇 가지가 존재했다. 첫째는 이렇게까지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기 때문일 테고, 둘째는 그가 유년시절부터 살았던 오래된 통나무집이나 할머니가 실제로 존재하는데 그의 말이 거짓일리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아직 현실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 그가 드래곤이 아니라는 사실을 뒷받침했다. 분명히 관계를 가졌지만 그가 드래곤이 아니라면 말짱 도루묵인 셈이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억울하고 분하기는 했지만 진짜 몸이 아니기에 렐리아는 이 문제에 대해선 넘어갔다. 그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시골청년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에 기분만 좋지 않을 뿐이다. ‘나도 처음이었다지만…’ 둘 다 어설픈 첫 관계였었고 서로 오해한 채로 어긋나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섣불리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인제공은 자신이 했으니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이스티온은 그동안 자책감과 불안에 떨어야했고, 자신은 게임 클리어가 되지 않아 하루 종일 우울했으니 말이다. 렐리아는 끝내 경계를 풀기로 마음먹었다. 집안 거실벽에 기대앉아 가만히 그를 기다리다가 뒤늦게 안쪽 방문을 닫고 나오는 이스티온을 바라보았다. 어색함을 못 견뎌 렐리아는 슬쩍 운을 뗐다. “…할머니는?” “이제 주무세요.” “그럼 나 배고픈데 식사 좀 내줘.” 혹여 라도 그가 진짜 드래곤이고 저를 속여 독 탄 스프를 내놓는다 해도 해가 될 것은 없었다. 물론 독을 탔더라도 감쪽같이 속을 수 있게 맛있고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는 양이면 된다. 그런 렐리아의 생각을 알리 만무한 이스티온은 곧바로 거실 한 켠에 놓인 커다란 솥단지를 끓여 식사를 준비해주었다. 식사는 간소했다. 대충 잘라다 만든 것 같은 투박한 나무테이블에 앉아 렐리아는 그가 차려준 음식을 맛보았다. 치즈향이 진하게 풍기는 노란 스튜였다. 감자, 허브, 계란과 닭 가슴살로 추정되는 것이 한입크기로 토막 나 넣어져있었다. 걸쭉한 생김새는 그다지 보기 좋게 생기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맛있었다. 간도 맞고 무엇보다 생치즈가 들어갔는지 담백했다. 한입 크게 떠먹으며 맛을 음미하던 중 렐리아는 살짝 입안에서 걸리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오독오독 씹히는 게 참으로 익숙한 감각이었다. 비리지도 않고 이상하게 담백한 맛과 어울려서 몰랐는데 슬쩍 뱉어보니 씹다만 닭발이 보였다. “이거,” 렐리아는 저가 반쯤 씹은 닭발을 이스티온에게 집어 보여줬다. 이에 이스티온의 하얀 얼굴위로 살짝 붉은 기가 감돌았다. 누가 봐도 당황한 모습으로 그는 서서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아 그게, 저번에…만들어주신 요리를 맛보고 닭의 발도 식재료로 사용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냥 네 입맛에 맞았다고 하지 그래.” “…하하.” “뭐 맛있네.” 퉁명스럽게 말해도 깨끗하게 그릇을 비웠다. 렐리아는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다시 거실 벽에 기대어 앉았다. 씻을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갈아입을 옷이 없어 더러운 채로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이스티온은 따스하게 데운 우유를 내밀었다. 컵 테두리가 이 빠진 것처럼 살짝 울퉁불퉁했지만 상관은 없었다. “극진히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집에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됐어.” 도도한 영애를 흉내 내면서도 렐리아는 갓 짜낸 것처럼 신선하고 따스한 우유를 양껏 들이켰다. 비리지도 않고 참 고소했다. 왠지 알프스에 놀러온 기분이라 렐리아가 이런 체험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스치듯 할 때였다. “…역시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는 것치곤 너무 편하게 대하는 것 같아서……저 나중에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언제든 수도에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어. 그땐 서로 즐긴 거잖아.” 그땐 자신도 처음이었다지만 렐리아는 경험 많은 연상여자를 연기했다. 그러곤 빈 잔을 바닥에 내려두고서 졸린 티를 팍팍 냈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뿐이라 여긴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잠을 더 자두는 게 피로회복에도 좋고 여러모로 효율적일테다. “담요 한 장 있으면 좀 주라.” “아. 제 침대를 양보해드리겠,” “이 꼴로 어떻게 남 침대에 누워. 거실 바닥에서자도 별로 상관없어.” “하지만 어떻게 여인을 차가운 바닥에…” “됐으니까 담요 내놔.” 산속에서 나뭇잎 깔고 노숙하는 거에 비한다면 거실바닥은 천국이나 따로 없었다. 막무가내로 드러누워 자겠다는 취객처럼 렐리아가 강경한 입장을 취하자 이스티온은 깔고 덮을 수 있는 모포 두 장과 베개를 서둘러 내주었다. 그 다음날 날이 밝기 무섭게 눈이 떠졌다. 렐리아는 고양이세수 하듯 대충 눈을 비볐다. 세수조차 않고 그녀는 바로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담요를 네모나게 개서 거실 구석에 놓아둔 후 바지주머니에서 금화 다섯 닢을 꺼내들었다. 숙박비치곤 어마어마한 금액이라지만 할머니 치료비에 보태 쓰라고 후하게 테이블위에 올려두었다. 이래봬도 가진 소지품 중 전재산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가져올 걸 그랬나 후회되긴 했지만 이걸로 이스티온과의 관계도 깔끔하게 정리되었다고 여겼다. 렐리아는 후련한 기분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조용한 걸음과는 달리 문을 닫는 소리가 조금 요란한 게 흠이라지만 제법 산뜻한 출발이었다. 나뭇잎들 사이로 듬성듬성 오려내듯 쏟아지는 하얀 아침햇살이 눈부셨다. 렐리아는 목에 걸린 투명한 목걸이를 습관적으로 눌렀다 뗐다. 신호가 제대로 간 건지 안간 건지 알 수 없었다. 밤새 내내 조용한 걸 보면 정말 자신과의 관계를 칼같이 자를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서 뭐가 크게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괜히 스스로 미련한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잠시 망설여질 무렵이었다. 먼 뒤에서 땅을 박차고 달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렐리아는 뒤를 돌아보았다. 청명한 햇살아래 짧게 출렁이는 은발이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자다가 뛰쳐나온 건지 이스티온은 살짝 풀어헤쳐진 셔츠차림이었다. 그가 살짝 몸을 굽히자 영락없이 쇄골이 드러났다. 아침부터 자극적인 장면에 렐리아는 스스로 두 눈에 매너모드를 설정한 채 그의 어깨너머에 있는 먼 산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동안 숨을 고르고서 차분한 모습을 되찾은 이스티온은 돌연 그녀에게 주먹을 뻗어보였다. 위로 손바닥을 펼치자 이제껏 말아 쥐고 있던 금화 다섯 닢이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하지만 이 돈, 받을 수 없습니다. 가져가주세요.” “어제 먹은 밥값이랑 숙박비인데.” “너무 많습니다. 애초에 제가 당연히 해드려야 할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너무 열약한 환경에서 대접해드려 죄송할 뿐인데 어떻게….” 역시 순박한 시골청년 타이틀이 아쉽지 않은 사내였다. 이렇게까지 양심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기에 렐리아는 아미를 조용히 찌푸렸다. 그냥 대충 좀 넘어가라는 의미였다. “내가 가지고 있어봐야 필요 없어.” “돌아가실 때 역마차를 타실 텐데 차라리 그 비용으로 내는 게…” “필요 없어. 그리고 나 바로 안돌아가. 공작님 찾으러 온 거거든.” “아…, 공작저하께서 여기 계신 줄 몰랐습니다.” “암튼 그런 줄 알고, 난 갈게.” “어디에 계시는지 정확히 아십니까?” “여기 산 속에 있다고 하던데. 지금부터 찾아봐야지.” 남 얘기하듯이 심드렁한 발언에 이스티온이 되레 놀라서 얘기했다. “여긴 산골짜기 막바지니까 비교적 안전하다고 해도 산 중심부만 해도 야생짐승들이 득실거립니다. 아래지방에선 멧돼지도 자주 출몰하고요.” 이스티온은 실례인 걸 알지만 그녀의 팔목을 쥐었다. 이대로 놓쳤다가 큰 화라도 당하게 두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역시 혼자 다니시는 건 위험합니다. 제가 같이 따라가겠습니다.” “응? 필요 없는데…” “이곳 지리는 제가 잘 아니까 분명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녀가 애인되는 공작을 무사히 만날 때까지 곁에 있어주겠노라고 이스티온은 강하게 주장했다. 딱히 반대할 이유도 없고 이 산 지리를 잘 안다고 하니 렐리아는 결국 마지못해 수락해버렸다. 이스티온이 집을 문단속하고 검을 챙겨 돌아오는 그 약간의 시간을 할애한 후 렐리아는 그와 함께 출발했다. 0111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렐리아는 산책이라도 나온 듯 서서히 움직였다. 가죽신의 밑창이 떨어져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스티온은 느린 그녀의 걸음속도에 맞춰 함께 움직였다.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가는 동안 한 번도 장애물이란 걸 만나보지 못했다. 흔한 바위나 가파르게 깎인 바윗길 같은 것 말이다. 확실히 평생 이곳에서 산 사람답게 그는 산 지형을 꿰고 있었다. 눈부신 은빛을 두른 외양에 비해 참 소박하게도 식용버섯이나 약초, 야생화 이름을 설명해주는 이스티온은 산이 정말 익숙해보였다. 그리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렐리아는 그에게 면목이 없어졌다. ‘착하네.’ 생각보다 마음이 여리고 고운 남자였다. 아픈 할머니를 옆에서 정성들여 간호하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있나 살펴보겠습니다.” “아냐. 계속 가.” 기사답게 체력이 좋아 다행히 렐리아가 그를 배려해줄 필요는 없었다. 이스티온은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서 거친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경사진 바윗길을 가리켰다. 다행히 작은 바위가 차곡차곡 쌓인 계단식 구조라 무릎관절이 좋지 않는 이상 정정한 노인도 거뜬히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저기 가파른 고개 보이시죠. 한 고개만 더 넘으면 바로 반대편 산과 이어져요.” “저쪽으로 내려가는 거야?” “그쪽으로 내려가면 민가가 없고 여기서 더 올라가야 됩니다.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바위계곡이 하나 나오는데 그 건너편에 작은 마을이 있어요. 거기 분들에게 물어보면 더 찾기 수월할 겁니다. 문제는…,” “문제는?” “여기서부터는 가는 길이 조금 많이 험난합니다. 올라갈수록 절벽도 많고 웬만한 약초꾼들도 힘들어해요. 정말 안 쉬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스티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도 렐리아는 턱을 까딱이며 전진하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공작이 저 산에 있는 게 확실해보였다. 목걸이의 작은 보석이 아까부터 시종일관 웅웅 울리고 있었다. 목 언저리에서 느껴지는 그 미세한 진동을 렐리아만 느낄 수 있었기에 이스티온은 그녀의 강경한 태도에 갸웃할 뿐이었다. 두 사람은 지체 없이 바로 산행을 이어나갔다. 높은 고개를 하나 넘은 후에도 새로 이어지는 비탈길은 끝이 없어보였다. 피치 못하게 바위를 올라야할 때는 이스티온이 한발 먼저 움직인 후 그녀를 위에서 잡아주었다. 배고픈 것을 빼면 별 무리 없는 산행이었다. 덜 굳은 흙 위에 산짐승들이 새기고 간 발자국을 발견할 때면 이스티온은 주위를 살피며 허리춤에 걸린 검 손잡이를 쥐었다. 다행히 두 시간 반 동안 하염없이 산을 오르는 동안 산짐승은커녕 털조차 보지 못했다.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저기서 두 고개만 더 넘으면 됩니다.” 바위계곡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졸졸 흐르는 물소리가 새들의 지저귐 사이에 섞여들었다. 렐리아는 손바닥만 한 암녹색 이파리들을 손등으로 치우며 길을 헤쳐 나갔다. 이 깊숙한 산중에 마을이 있다니 조금은 궁금하기도 했다. “…람 살려! 꺄아악!” 그때였다. 서쪽 방향에서 돌연 귀청을 찢을 듯한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조금 익숙한 새된 비명소리에 렐리아가 발걸음을 멈출 때, 이스티온은 충실하게 검을 뽑아들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렐리아는 이스티온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뛰었다. 얼마나 갔을까, 햇빛도 침범할 수 없는 음침한 수풀더미 사이에서 이스티온이 날렵하게 생긴 산짐승과 대치하고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나무둥치에 주저앉아있는 슈로니를 발견한 순간 렐리아는 나 몰라라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이스티온이 걱정되는지라 근처에서 적당히 묵직한 짱돌을 쥐어들었다. 부스스한 털의 산짐승은 여우처럼 세모난 주둥이를 가졌지만 덩치는 늑대보다 덜 큰 정도였다. 성인손가락 크기만 한 이를 세우고서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이스티온의 주위를 맴도는 모습이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적갈색 털이 드문드문 섞여 더 난폭해보였는데 돌연 산짐승이 앞발로 땅을 긁으며 튀어 올랐다. 이에 맞춰 렐리아가 짱돌을 던지자 짐승의 옆 주둥이에 아슬아슬하게 맞았다. 켕! 소리를 내며 주둥이를 틀자 이스티온은 빠르게 검을 내찔렀다. 예리한 검날 끝이 짐승의 목을 꿰뚫자 곧 커다란 산짐승이 힘없이 뒤로 물러서다가 픽 고꾸라져버렸다. 목에서 피를 흘리며 늘어져있는 짐승을 내려다보며 이스티온이 안심할 때였다. 파스스스, 하고 조금 먼 곳에서부터 수풀이 마구 부딪치며 무언가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마리는 아닌 것 같았다. “다른 녀석들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리로!” 혼자서 상대할 수 없다 판단한 이스티온은 그녀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도망쳐야한다고 여겼다. 이스티온은 근처에 주저앉아있던 슈로니를 일으켜 세우고선 황급히 내달렸다. 별로 위기감이 없는 렐리아는 그의 뒤를 따라 설렁설렁 달렸다. 그들은 수풀을 헤치며 가로질러 어느 삭막한 절벽에 다다르게 됐다. 녹음이 끝나는 지점에서 멈춰선 이스티온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그의 우려와는 달리 쫓아오는 소리는 일절 들려오지 않았다. 허나 혹시 모른다고 생각한 이스티온은 가볍게 머릴 숙였다. “근처에 다른 무리가 와있을지 모르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두 분은 잠시 안전하게 이곳에서 기다려주십시오.” 이스티온이 헤치고 온 수풀 속으로 다시 들어가자 렐리아는 슈로니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이 무슨 어색한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왜 슈로니가 이곳에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끝단에 달린 하늘하늘한 레이스가 발목 위에서 떨어지는 앙증맞은 드레스를 입고 사냥하러 오진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렇다고 굳이 먼저 말을 걸고 싶지도 않았다. 이젠 친한 척도 하지 않는 슈로니는 그저 자신에게서 약간 거리를 둔 채 서있었다. 그녀의 분홍머리에는 덜 자란 나뭇잎과 풀떼기가 잔뜩 엉겨붙어있었다. “…공작님이 널 찾았어.” 작은 목소리가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처연하게 울렸다. 렐리아는 그제야 관심을 가지고 그녈 돌아보았다. 공작은 지금 어딨냐고 상기된 채 물으려다가 다시 이어지는 슈로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슬며시 입술을 다물었다. “눈앞에 내가 있는데도…너만 찾았어. 심지어 괜히, 괜히 날 발견했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하셨어.” 슈로니의 창백한 뺨을 타고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산발에 조금 엉망인 모습이라 그런지 약간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신발 한 짝 잃어버리고 우는 어린 소녀 같았다. “…렐리아. 네겐 이제껏 비밀로 했지만, 공작님과 나는 어렸을 적에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어. 하지만 부모님이 정해준 약혼자가 하필이면 공작님의 친구라서…공작님은 늘 나를 봐도 마음을 숨기셨어.” “….” “물론 얼마 안가서 나 때문에 하나뿐인 친구와 싸우셨다는 소식을 듣게 됐지만….” 렐리아는 갑작스럽게 시작된 슈로니의 애달픈 과거 사랑이야기에 담담히 서있기만 했다. 어떻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해 듣는 부모처럼 그저 가만히 팔짱만 꼈다. “난 그때…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어. 공작님은 나 때문에 친구의 연도 잘라내시는데,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 그래서 약혼자의 저택에 어머니와 함께 초대받은 날, 그 자리에서 공작님을 사랑한다고 솔직하게 내 마음을 말씀드렸어.” 양가 부인이 있는 자리에서 떳떳하게 공비가 될 것이라 선포했다던 그 사건이었다. 이미 공작이 스포한 시점에서 재미가 살짝 반감되긴 했지만 렐리아는 어찌됐든 계속 들어주었다. “얼마안가 파혼을 당하고, 부모님은 안 좋은 소문을 잠재울 요량으로 나를 왕립아카데미에서 제국아카데미로 유학을 보내셨어. 하지만 멀리 떨어진 타지에서도 공작님만을 애타게 그렸었어. 렐리아 넌 그 기분 모를 거야. 절대.” “…네가 그 심정 반이라도 알까.” 렐리아는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부모님에게 안부라도 전해주게 한번 연락이라도 됐으면 하고 소원하는 제 절박한 심정을 말이다. 렐리아의 입가에 맺힌 삐뚜름한 조소를 알지 못한 채 슈로니는 제 감정에 심취해있었다. “스무 살에 졸업을 한 후 왕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렸을 적에 봤던 그분은 너무 멀어져있었어. 공작으로 승계하신 후 그의 주변엔 아름다운 여자가 넘쳐났으니까…….” 너무나도 완벽해진 그에 비하면 미운 오리 같은 자신이었다. 까마득해진 차이를 좁힐 수가 없었다. 키도 작고 볼륨감도 없어서 늘 귀여운 스타일로 꾸며야하는 자신에게 퍽 슬퍼졌다. 슈로니는 두 뺨을 적시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꿋꿋이 말을 이었다.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는 그분께 차마 다가갈 수가 없었어…. 연회에서 가끔 얼굴을 보는 정도였어. 그렇지만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공작님은 내게 항상 눈길을 줬어. 아무리 멀리 있어도 눈으론 날 찾으셨어. 물론 무슨 심보이신지 계속 애인을 만드셨지만…아마도 날 애타게 만들려는 속셈이었을 거야. 난 확신해.” 그렇게 쉽게 잊혀질 첫사랑이 아니었다. 슈로니에게 있어선 말이다. “오래전부터 쭉 좋아 했었어. 서로 마음이 있었지만 결국 엇갈려서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그런데 네가 나타난 후로 나는 잊혀 진 존재취급을 당한단 말이야. 흐윽. …렐리아 부탁할게. 공작님을 포기해주면 안 돼? 그럼 네 정체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 “뭐 포기할 것도 있남. 아무사이도 아닌데.” 심드렁하게 받아치는 목소리에 슈로니는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떴다.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똑똑 발치를 적셨다. 불사신인지 괴물인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났다는 게 약점이라 여겼는데 별로 대수롭지 않아했다. 혹 공작님께서도 이 사실을 아시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슈로니가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 채 머리를 굴리는 동안, 정작 렐리아 본인은 ‘네 정체’가 뭘 뜻하는 지도 모른다지만. “네가 뭐 착각하나본데," 렐리아는 그 어린애 같은 투정을 듣는 동안 쌓였던 짜증에 슬그머니 팔짱을 풀었다. 대신 눈썹을 작게 꿈틀대며 공작의 변호를 자처했다. “나 때문이 아니라 공작님은 그냥 네가 아예 싫은 거야. 슈로니.” “……뭐?” “어렸을 때 너랑 엮일 때마다 너무 짜증나고 싫었대.” “그게 무슨 말이야? 괜히 나와 공작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생각인 거면…” “답답하네, 슈로니. 공작님은 널 싫어한다고. 네 존재자체가 존나게 싫다고. 무슨 말이냐면 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긴 것부터 해서, 네 그 짜리몽땅한 몸뚱이, 뼈랑 장기, 목소리, 숨소리, 머리카락 한 가닥, 세포, DNA까지 전부 다 싫으신 거라고. 슈로니라는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성분물질이 싫으신 거라고. 너라는 인간자체가 혐오라고. 응? 이 정도했으면 엔간히 좀 알아들어라.” “……” “이제까지 너 혼자 착각하고 쌩쇼하고 있던 거 공작님이 참아주고, 참아주고, 참아줬던 거야. 쓸데없이 마음만 넓어가지고.” 고개를 두어 번 주억이며 렐리아는 머릿속으로 그를 떠올렸다. 다가가기 힘든 냉혈한인 척 군다지만 짜증이든 장난이든 뭐든 말없이 다 받아주고 묵묵히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속 깊은 남자였다. 공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한 크게 남에게 관여하지 않는 무심함도 갖췄기에 슈로니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여겼다. 슈로니의 머릿속에 깊게 뿌리내린 채 쑥쑥 자라난 망상을 오늘에야말로 뜯어버릴 속셈이었다. 렐리아는 제법 단호하게, 칼같이 말했다. “그러니까 마음 넓은 사람 좀 그만 귀찮게 해라. 부탁 좀 하자! 안 그래도 서류다 뭐다 바쁘고 인생 피곤한 사람이야. 왜 거기에 너까지 껴서 사람 피곤하게 만드냐고? 엔간히 좀 해. 편하게 좀 살게 냅두라고. 그리고 과대망상증이 있는 것 같은데 정신병원에 한번 내원해보고.” 언제 정신 차릴래! 하고 따끔한 잔소리 수준이었다. 귀여우니까 이정도 선에서 봐주는 거지 남자였다면 가차 없이 쌍싸대기가 나갔을 거다. “……아니야.” 하지만 역시 슈로니에겐 약했던 건가 싶었다. 렐리아가 골치 아프단 표정을 지을 때였다. 고막을 찢고 들어온 날카로운 소프라노음에 렐리아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니라고!! 네가 뭔데! 뭔데!!”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슈로니가 확 고개를 쳐들더니 눈물을 흩뿌리며 성큼성큼 걸어왔다. 보통 성질이 아닌지 표독스레 치뜬 눈자위로 물기가 감돌아 희번덕거렸다. 눈이 맛이 간 게 금방이라도 머리채를 휘어잡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가 아니야. 이게 맛이 갔나.” “아아악!! 아니야!” 네가 노려보면 뭐 어쩔 건데, 하는 눈으로 왜소한 슈로니를 내려다볼 때였다. 퍽, 하고 큰 타격감이 울리기 무섭게 몸이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슈로니의 쭉 뻗어진 두 팔이 순간적으로 시야에 가득차서야 렐리아는 밀쳐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허나 그녀의 가냘픈 몸뚱이는 이미 아래로 빠르게 떨어진 후였다. 정말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까마득한 절벽아래서 이리저리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머리가 깨지고 관절이 꺾이다 못해 산산조각날 것 같은 높이에서 그런 소리가 났으니 죽은 것과 진배없을 테다. 패닉상태에 빠진 상태에서도 슈로니는 역겨움이 치밀어 뒤로 한발 물러섰다. 기사가 돌아오기 전까지 마땅한 알리바이를 세워두려 했으나 가직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크게 흠칫 놀라버렸다. “방금…뭐하신…,” 놀란 건 이스티온도 마찬가지였다. 눈앞에 펼쳐졌던 방금 전의 광경이 눈에 선하기만 했다. 믿기 힘들어서 이스티온이 긴 침묵을 지킬 때 슈로니는 불안증세에 시달리는 환자처럼 몸을 발발 떨었다. 황급히 입을 열었으나 횡설수설할 뿐이었다. “내..내가 안 그랬어. 혼자 떨어진 거야!” “…대체…무슨 짓을,” “아,아니야!! 아니야! 내가 아니야! 아ㅡ, 아.” 주춤거리다가 슈로니는 제 발에 꼬여 풀썩 주저앉았다. 이와 중에도 머리는 제법 이성적이었다. 그녀는 기사가 굳어있는 지금이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에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이스티온에게서 멀리 달아나듯 가본 적 없는 방향의 수풀을 헤집으며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이스티온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제자리에 서서 한동안 입만 틀어막고 있었다. 0112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이스티온이 정신을 차린 건 제법 시간이 흘러서였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렐리아가 떨어진 절벽 앞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휑한 바람만이 불어 닥쳤다. 거의 직각을 이루는 절벽을 따라 삐죽삐죽하게 솟아난 바위모서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그 아래 초록빛 강이 흐르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 바위모서리에 한번 부딪치면 최소 목이 꺾일 것만 같았다. 한없이 처참하게 사람이 죽을 수 있도록 설계된 곳 같았다. 이스티온은 일단 이 사실을 공작전하에게 알려야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달려가는지도 모른 채 그는 어정쩡하게 검을 허리춤에 끼워 넣고 달렸다. 말 그대로 하염없이 달렸다. 삼십분 가까이 멈췄다 달렸다를 반복할 때, 이스티온은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그곳으로 필사적으로 또 달렸다. 그렇게 맞닥뜨린 자는 다행스럽게도 사냥에 참가한 무가귀족 중 한명이었다. 이스티온은 급한 상황인 만큼 바로 공작전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그의 무례함을 꾸짖기보단 어서 제 말에 오르라는 뜻밖의 권유에 이스티온은 십분도 지나지 않아 바로 공작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기사입니다. 각하께 급하게 전해야 될 사항이 있다고 해서 데려왔습니다." 블리어는 말을 잠시 다른 기사에게 맡긴 후 산속 한가운데서 저를 뵙기 청한 은발머리의 기사와 마주했다. 멀쩡한 외관과는 달리 어딘가 나사하나 빠진 기사를 그는 너그럽게 기다려주지 않았다. “한시가 바쁩니다.” 성을 낼 듯이 엄격하고 짜증스러운 음성이었다. 그나마 하대하지 않는 걸로 이제까지의 인간적인 면모를 지켰으나 블리어는 가차 없이 등을 돌려버렸다. 불과 한 시간 전 그녀와의 신호가 닿았다는 것에 그는 또 한 번 수색대를 이끌고 산속을 뒤지고 있던 차였다. 한시가 급하다 못해 애간장이 검게 타 녹아내리기 직전이었다. “고,공작전하…!” 바로 그때 결심한 듯 이스티온이 힘겹게 운을 떼었다. “죄송합니다. 이제까지 렐리아 그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대가 어찌 렐리아를 압니까.” 서느렇게 뼈와 살을 가르는 검날처럼 블리어의 기세는 소슬하다 못해 흉흉하기까지 했다. 블리어는 성급하게 몸을 돌리고서 다시 은발머리 기사를 응시했다. 난처한 기색을 가득 띠는 그 얼굴을 꿰뚫을 듯이 강한 시선이 와 닿았다. “그게…,” “뜸들이지 말고 말하십시오. 그래서 지금 어딨습니까, 렐리아는.” “분홍머리의 영애분을 아시는 지요.” 갑자기 그 여자 인상착의가 왜 나오는지에 대해 블리어가 싸늘하게 한껏 인상을 쓸 때였다. “…목격했습니다. 그 영애분이 렐리아님을 절벽에서 밀쳐 떨어뜨리는…모습을 말입니다.” 속절없이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적인 장면이 또 한 번 뇌리에 떠올라서 이스티온은 싸한 기분만 들뿐이었다. 허나 높으신 분 앞에서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 없어 그는 마저 보고를 이으려했다. 그녀가 죽었다고 보고하려는 순간 이스티온의 입술이 저절로 닫혔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도 창백하게 질린 낯을 한 사내 때문에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수 초전까지만 해도 철혈이라는 꼬리표가 당연하게 따라붙을 것 같던 무서운 기세의 흑발의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동일인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소했다. 그 단번에 깎아내린 듯이 날렵하고도 진한 선을 그리는 옆얼굴에 이스티온은 시선을 두었다.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며 턱을 아래로 서서히 내리는 남자의 옆모습은 모든 걸 잃은 사람처럼 공허해보였다. 무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고갤 숙인 자 같았다. 굳게 꽉 입을 다문 채 바닥만 응시하던 블리어가 곧 분기에서인지 쓰라린 상실감에서인지 붉어진 눈을 했다. 그는 끝까지 깊은 침묵으로 감내했다. 허나 상처가 난 뺨 위로 눈물줄기가 타고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길 만큼의 절망스러운 모습이었다. 새카만 머리칼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핏기가신 낯 때문에 더 그런 기분을 받았다. “…절벽아래에 강이 있습니다. 수심이 얼마나 깊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아계실 지도 모릅니다.” 정말 많이 사랑하시는구나. 이스티온은 순간 그의 표정에서 읽은 감정들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든 죄스러운 마음에 살짝 고개를 떨어뜨렸다. * 하류를 향해 흐르는 강물 위에 시체처럼 떠오른 여자가 있었다. 움직이지 않으려 해도 물살 때문에 몸이 저절로 떠내려갔다. 렐리아는 얼굴을 둥둥 띄운 채 올라갈 곳이 없나 눈동자를 굴렸다. 하나같이 거대한 바위가 에워싸고 있었다. 렐리아는 바위 때문에 올라가기 힘들 것 같아 좀 아래로 내려간 후 적당한 지점에서 땅위로 가뿐히 올라왔다. 누런 흙바닥위에 물이 쏟아져 내렸다.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렐리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렐리아는 무작정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향했다. 흠뻑 물이 들어간 가죽신에서 첨벙첨벙 소리가 울렸다. “…예배시간 내에…어서…오는 게 어때…” “…빨랫감은 왜 줄지 않은 거야, 하아.” “사내놈만 열여섯이잖아. 빨래당번 힘내라.” “계곡까지는 같이 가줘야지. 리온 자매.” 목소리는 점점 또렷해져갔다. 무질서하게 솟아난 수십 그루의 나무너머에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 두 명이 나란히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렐리아는 드리워진 나뭇가지들을 거둬내며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저기요.” “…? 우어억! 괴물!” 뒤를 돌아본 갈색머리의 청년이 그대로 혼자 크게 놀라며 철퍼덕 주저앉았다. 으슥한 나무사이로 잔뜩 풀떼기가 붙은 몸을 한 정체모를 인영이 다가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뒤늦게 렐리아는 제 꼴을 눈치 채고 물기 때문에 질척하게 달라붙어있는 나뭇잎들을 털어냈다. 그때 두 팔 가득 빨랫감을 든 채 서있던 남색머리 청년이 싱긋 웃으며 먼저 운을 뗐다. “사제 스와미라고 합니다. 외지에서 오신 분이신지요?” “아 네. 렐리아 이프네라고 해요.” “그러시군요. 제 친구가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쪽은 사제 리온이라고 합니다.” “저희 둘 다 하급사제이지요.” 갈색머리 사제 리온이 엉덩이를 탈탈 털며 일어나며 얼쯤하게 덧붙였다. 그러곤 괴물 취급한 것에 미안해하며 한번 머릴 숙여보였다. 서로 어색하게 서있을 때 붙임성 좋게 생긴 남색머리 사제가 이 분위기를 살려냈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네요. 리온 자매, 얼른 신전으로 모셔가세요.” “알겠습니다. 스와미 자매.” 아까까지만 해도 서로 찍찍 반말을 사용하던 두 청년은 온화한 말씨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제란 다 이런 족속들인가 싶었다. 문득 아럼프가 생각나 렐리아는 그저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빨랫감을 들고 계곡으로 향하는 스와미 사제를 뒤로하고 렐리아는 리온 사제를 따라 움직였다. 몸을 말릴 때까지 잠시 이들에게 신세를 지기로 했다. <코로르비타의 귀걸이>를 언제든 소환할 수 있으니 저체온증으로 고생할 일은 없겠지만 이 상태로는 돌아다니기 찝찝했다. 부지런히 걸은 지 십 분도 걸리지 않아 렐리아는 산 속에 있는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바위계곡 건너에 있다는 마을이 이곳인 것 같았다. 우연찮게도 이스티온보다 먼저 도착해버렸다. ‘이것 참 슈로니에게 감사해야할지…’ 금방이라도 뽁 하고 이마에 핏줄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렐리아는 뿌드득 소리가 날 만큼 두 주먹을 살벌하게 풀다가 문득 “여깁니다.”하는 목소리에 눈앞에 집중했다. 띄엄띄엄 놓아진 민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다란 언덕위에 회백색 석재건물이 외따로 세워져있었다. 신전이라고 하기엔 산골교회 같은 느낌이었다. “저희 마을신전입니다. 신전이라고 하기엔 오래돼서 조금 누추하지만요.” 리온은 먼저 들어가라며 튼튼한 참나무소재로 된 문을 열어주었다. 특유의 닳은 경첩에서 나는 끼이익 소리가 신전내부에서 크게 메아리치듯 울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신전 주위를 둘러싼 나무가 많아서 그런지 상쾌하고 시원한 향이 맡아졌다. 서느런 온도의 신전내부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기다란 나무의자가 일렬로 늘어서있고 기도를 드릴 수 있게 약간 높은 단이 있었다. 아치형 지붕을 받치는 돌기둥은 매일 깨끗하게 닦는지 반질반질해보였다. “야누이스 산을 두르고 있다고 해서 모두 야누이스 신전이라고 부릅니다. 저 말고도 열다섯 명의 사제가 더 있습니다.” 리온의 설명을 옆에서 들으며 걷다가 렐리아는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액자를 볼 수 있었다. 회백색의 신전 한편에 걸려있는 대형액자는 혼자서 모든 색감을 끌어안은 것 같았다. 단체초상화였다. 하얀 사제복을 입은 열일곱 명의 젊은 청년들과 그 앞자리에 앉아있는 열두 명의 늙은 선교사들이 그려져 있었다. 순백색의 들꽃과도 같은 수수함 속에 유독 붉게 핀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렐리아는 순간 자신이 잘못 봤나 싶었지만 아무리 봐도 익숙하기만 했다. 액자 속에서 반듯한 얼굴을 하고 서있는 청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렐리아는 입을 벙긋거렸다. “……저 이거,” “이건 작년에 화가를 불러서 그린 겁니다. 스물아홉 명을 일일이 다 그리시느라 화가분이 좀 고생하셨죠.” “아럼프 아닌 가요…?” 렐리아의 말에 그 옆에서 점잖은 체 서있던 리온이 팔짝 뛸 듯이 놀라했다. “어- 어떻게 아럼프를 아시는 지요?” “…아럼프 세브로웰, 제 친구예요.” “아럼프는 맞지만…세브로웰이요?” 처음 들어본다는 듯 리온이 살짝 머리를 갸웃하는 동안 렐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야누이스 산맥을 처음 들었을 때도 어디서 들어본 지명인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생각나버렸다. 그가 살아있을 때 나누었던 대화가, 무심하게 흘려들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야누이스 신전. 촌구석이라 말해줘도 모를 걸. 그럼 이젠 내 차례지?’ 의미심장하게 한번 방긋 웃던 그의 얼굴이 아주 잠깐 떠올랐다. “…맞아요. 아럼프가 여기 출신이라고 들었었는데…” 입 안이 썼다. 친구에 관해서 제대로 아는 게 뭔가 싶었다.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나 싶었다. “수도에서 새로 성을 부여받은 모양이네요. 고아원 출신이라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성이 없거든요. 저도 마찬가지 라지만요.” “아 그런 건가요.” “수도로 간 후에 한 번도 저희에게 연락을 안 해서 성이 생긴 지도 몰랐습니다. 그 녀석이 정 없는 성격은 절대 아닌데 원체 소심하고 조용한 녀석이라….” “소심하고 조용하다니요?” “음, 화려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얌전해서 성전만 죽어라 읽던 친구였었죠. 노력도 많이 했고, 법이 없어도 혼자 올곧게 살 만큼 발랐고 착했습니다.” 리온은 그리 멀지 않은 과거를 회상했다. 이른 새벽에 나와 보면 항상 한발먼저 예배당에 앉아서 새벽기도를 드리고 있었다는 일화도 덧붙였다. “그렇게 성실하게 임해서인지 신성력 발휘도 잘 못하던 녀석이 어느 순간 신성력 발현이 되었었죠. 후로 약간 거만해졌다고 해야 하나…하하. 아무튼 고위급 사제로 수도로 발령됐을 때는 정말 모두 놀랐습니다.” 십년지기 친구를 회상하며 리온은 인중을 문질렀다. 그의 눈동자엔 뿌듯한 기색이 여려있었다. “촌에 있는 작은 신전에서 수도 대신전으로 간다는 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거든요. 모두 아럼프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죠. 최근에 그런 불행한 사고만 당하지 않았더라면…언제 한번 수도로 만나러갔을 텐데 말이죠.” 씁쓸한 미소로 입가를 가라앉히는 리온을 보지 못한 채 렐리아는 여전히 액자 속 아럼프를 바라보았다. 붉은 장미색의 머리칼과 중성적인 미모가 또렷하게 묘사되었지만 미소를 짓지 않고 가만히 정면을 보고 있는 표정은 확실히 어딘가 밋밋했다. 향기 없는 꽃 같기만 했다. “근데 아럼프가 정말 소심했나요? 좀 의외라서…” “아 네. 낯을 좀 많이 가렸습니다. 특히 마을아가씨들이랑 눈도 못 마주치고…그래서 아럼프와 친구라고 얘기하셨을 때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과 친구라니, 리온은 렐리아의 옆얼굴을 슬쩍 내려다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당장 수건을…아니,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녀를 신전으로 데려온 목적을 상기하고서 그는 바로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한번 모퉁이를 돌자 바로 짧은 복도가 나타났다. 세 쌍의 문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간격이랄 것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방의 크기가 짐작이 되었다. "저 혹시 이 마을에 공작님 오시지 않았나요? 사냥하러 오셨다고 들었는데." "건너편 산으로 들어가신 걸로 압니다. 아 여기로." 신전 안에 딸린 여섯 개의 방 중에서 가장 구석방으로 리온은 안내해주었다. 창고처럼 좁은 방에 홀딱 젖은 생쥐꼴의 여인을 밀어 넣고서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넣어주었다. 옷은 당연하게도 때타지 않은 순백의 사제복이었다. 원피스처럼 길이가 길어서 멀리서보면 사제복인지도 모를 것 같았다. 헐렁한 허리를 끈으로 꽉 조여 묶고서 렐리아는 창문 앞에 놓여있는 나무의자에 앉았다. 자그마한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 닥쳐왔다.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며 렐리아는 창문너머로 펼쳐지는 작은 마을풍경을 시야에 담았다. 이렇게 마을은 평화로운데도 왠지 모르게 불쾌하고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더러운 불순물이 가슴 속에는 가득 낀 것처럼 찝찝하기만 했다. 렐리아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서 젖은 옷과 수건을 내려놓고 나왔다. 방 앞에는 사제 리온이 갈색 광이 엷게 흐르는 단화를 미리 준비해 놓아두었다. 신발창이 아예 뜯겨나간 가죽신은 차마 신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기에 렐리아는 그 마음씀씀이에 멋쩍기만 했다. “미안하네요. 초면에 자꾸 받기만 해서…” “아닙니다. 아럼프의 친구 분이신데 오히려 이 정도는 마땅히 해드려야죠.” “저 그럼, 신세졌습니다. 이만 돌아가볼게요. 근처에 일행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아 그러시군요. 혹 건너편 산으로 가실 일 있으시면 상류 쪽에 다리가 있으니 이용하세요. 바위계곡을 따라 쭉 올라가면 보일 겁니다.” “넵.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또 이곳을 방문해주세요.” 온화한 미소를 짓고서 배웅해주는 사제 리온을 뒤로하고 렐리아는 야누이스 신전을 벗어났다. 일단 해가 넘어가기 전에 공작이나 이스티온 둘 중 한사람이라도 만나야했다. 만일 이번에도 슈로니를 만나게 된다면 똑같이 강물에다 던져버리리라. 렐리아는 바위계곡을 따라 상류를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사제가 말했던 대로 얼마안가 산과 산을 건널 수 있게 놓아진 외나무다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건너편 산으로 넘어온 렐리아는 다시 먼 길을 홀로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하늘을 향해 드리워진 나뭇잎사이로 종종 노란 햇살이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지저귀는 새소리와 청량한 산 공기가 짙어질수록 음지에 가까워지는지 기온이 뚝뚝 내려갔다. 체감상 한 시간은 쉬지 않고 걸은 것 같았다.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나무는 울울창창해져갔다. 야생그대로의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 햇살이 파고들지 못한 탓에 대낮인데도 조금 어둑어둑했다. 방향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물소리는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제대로 가고 있는 건지, 잘못 들어온 건 아닌지 불안한 생각을 하면서 렐리아는 습관적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어딨는 거야….’ 이러다 산 일대를 뒤져야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감 상 꽤 걸어온 것 같은데도 그렇다할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렇게 몇 시간을 또 헤매야하는 건지 알 수 없어 막막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때였다. 미미한 진동이 축축한 흙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렐리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살짝 위를 올려다보자 잘게 떨리는 나뭇잎들이 보였다. 돌연 나타난 불길한 전조에 불현듯 끔찍한 사고들이 연달아 뇌리를 갉아먹을 때다. 파스스스, 파스스ㅡ 조용한 산중에 급작스럽게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0113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수풀을 재빠르게 헤치며 달려오는 소리 같았다. 무언가가 엄청난 속도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툭, 툭, 잔 나뭇가지들이 부러지는 소리와 심상치 않은 발소리가 마치 쿵쿵 대지를 뒤흔드는 것 같았다. 그만큼 긴장감에 감각이 곤두선 것일지도 모르겠다. 렐리아가 답지 않게 굳은 안색을 한 채 경계하고 있을 때 마침내 2미터는 족히 될법한 수풀을 뚫고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이스티온?” 크고 날렵한 산짐승이라 여겼으나 막상 튀어나온 것은 길고 훤칠한 은색머리칼의 남자였다. 이스티온은 숨 가쁘게 뛰어왔던 것이 무색하게 바로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해 멈춰서있던 그가 입을 연 건 그로부터 수 분이 흘러서였다. 몹시 거칠어진 숨결이 섞인 갈라진 목소리였다. “…살…아계셨군요. 하아.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너야말로 무슨 일 없었어? 그보다 아까 산 전체가 흔들렸던 것 같은…” “공작전하께서 걱정 많이 하셨습니다…지금 바로 가시죠.” “어, 뭐야. 만났어? 어디서?” “한 시간 전쯤에 그분 소속 수색대에 합류해있었습니다. 지금은 따로 떨어졌지만 아마 서쪽방향에 계실 겁니다. 그쪽으로 말을 몰고 가시는 걸 보고 왔거든요.” 이스티온은 그녀에게 걸어왔다. 한시가 급한 사람처럼 그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어서 가요. 공작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아 그래.” 렐리아는 그 손을 붙잡으려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잠시 허공에 있던 손을 거두고 렐리아는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 풀숲을 응시했다. 잎과 잎이 부딪쳐나는 바스락거림이 점점 커졌다. 나뭇잎들이 마구 흔들리며 심상치 않은 진동이 계속되자 이스티온은 어서 가야된다며 그녀의 팔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하지만 렐리아는 두 발이 바닥에 붙은 사람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탁한 녹색이파리들 사이로 피투성이의 팔이 튀어나왔다. 나뭇잎에 붉은 선혈을 묻히며 완전히 수풀을 비집고 나타난 한 사내를 본 순간 숨이 철렁 멎었다. “…그 기사한테서 떨어져. 렐리아.” 온몸이 피로 흥건하게 물든 채 서있는 사람은 이제까지 죽었다고 여겼던 아럼프였다. * 산이 수차례 진동했다. 블리어는 말을 타고 이동하면서 묵묵히 사위에 집중했다. 새떼가 한 번에 날아오른 후 적막으로 가득 채워진 어두운 산속은 아까 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알 수 없는 공포가 엄습해왔다. 갑작스런 대지의 진동이 간헐적으로 계속해서 이어지자 블리어는 아무래도 싸한 불안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블리어는 떨어져서 수색 중인 기사들을 모으기 위해 다시 말머리를 돌렸다. 빠르게 말을 몰다가 갑작스레 수풀 사이로 튀어나온 웬 기사와 말에 블리어는 고삐를 세게 잡아당겼다. “워어.” 엄한 목소리에 앞발을 치켜들며 놀라던 말이 금세 투레질을 하며 뒤로 두 발 물러났다. 블리어가 차분히 중심을 잡을 때, 대각선에서 미친 듯이 말을 타고 질주해왔던 기사는 급하게 말을 멈추느라 잠시 어금니를 꽉 물어야했다. 기사의 안색은 심상치 않았다. 시체처럼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기사가 다급히 입을 연건 이 뒤였다. “공작전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저희 주둔지가 피습 당했습니다! 피해상황은 잘 모르겠으나…큰일이,” 패닉상태에 질린 기사의 불완전한 보고에 블리어는 바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주둔지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에도 드넓은 대지에서 이는 진동은 옅어졌다가 짙어지기를 반복했다. 묘하게 신경을 긁는 노이즈가 사위에 가득 낀 것 같았다. 블리어는 주둔지에 가까워질수록 죽음에 가까워지는 기분을 느꼈다. 바람에 실려 훅 끼쳐오는 비릿한 혈향을 맡았기 때문이다. 우거진 거목들을 스쳐 황량한 바람만이 부는 막사주위에 그들은 도착했다. 블리어는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의 속도를 늦췄다. 그를 뒤따라 달려오던 기사도 마찬가지로 속도를 늦추며 천천히 주둔지의 입구로 들어섰다. 블리어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피로 번진 사람머리였다. 투구를 쓰지 않은 게 주둔지를 지키던 보초병인 것 같았다. 입을 틀어막고 웁 웁 소리를 내는 기사를 내버려두고 블리어는 그 참혹한 광경 속에 내려서서 걸음을 옮겼다. 척박한 땅위에 흥건히 고인 피 웅덩이를 밟고 지나가며 블리어는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무자비한 살육이 벌어졌던 모양이었다. 나무둥치에 묶여있는 말들은 살아있었으나 주둔지 안을 지키고 있던 스무 명 넘는 기사들은 죄다 목이 잘려 죽어있었다. 대부분 눈을 감지 못하고 퍼렇게 굳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들의 원통한 비명소리를 대신해 피 비린내가 스며든 스산한 칼바람이 장내에 울렸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블리어는 뒤를 돌아보며 멀찍한 곳에서 헛구역질을 하는 기사에게 하명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든 상황을 설명하십시오.” “자세하,한 것은 모릅니다. 저는 그저 타,타일럿 경의 임무를 받아 주둔지로 철수하던 중에…주둔지 쪽에서 피습이라는 외침과 비명소리를 들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여기고 그,급히 각하께 고하기 위해 달려온 것입니다….” 말을 타고 달려오는 그 짧은 시간 내에 학살이 끝났다는 소리였다. 블리어는 다시 한 번 사위를 훑듯이 둘러보았다. 몸과 머리가 분리된 기사들의 시신만 보일뿐 어디에도 적으로 추정되는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동료가 수습해갔을 확률이 크지만 대체 이런 짓을 저지를 만한 무력집단이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그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게 옳았다. 그러다 문득 작은 인기척이 블리어의 예리한 귓가를 스쳐지나갔다. 블리어는 바로 그곳으로 몸을 돌려 저벅저벅 신속히 움직였다. 허리춤에 걸린 장검을 빼들고 주둔지 한편에 부러져 나뒹구는 천막 뒤를 가리켰다. “나와라.” 갈라진 뱃가죽에서 창자가 쏟아져 나온 끔찍한 시체를 발치에 두고서도 블리어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부서진 천막을 엄랭하게 노려보며 검을 치켜든 순간이었다. “저,저,접니다! 프, 프라시오 가의…종자…!” 벌벌 떨며 기다시피 튀어나온 자는 앳된 티가 남아있는 어린 청년이었다. 상체 절반에 긴 핏자국이 그어져있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 같았다. 머리에는 흙먼지가 잔뜩 껴있고 눈가는 짠 눈물로 범벅되었다. 벌겋게 충혈된 눈은 퀭했는데 상당한 정신적인 쇼크에서 헤어나질 못한 건지 양손에 흙만 가득 그러쥐고 있었다. “생존자는 그대뿐입니까.” “…혀, 형이…아…아아,” 엄한 물음에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하던 종자의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공작의 발치에 널브러진 시체를 담기 무섭게 그는 자지러질 듯이 굴었다. 선홍빛의 창자들이 흙바닥 위에 늘어진 끔찍한 모습에 곧이어 헛구역질을 하며 울음을 토했다. “이 자를 부축하십시오.” 블리어는 근처에 떨어져서있던 기사를 불렀다. 곧이어 기사가 다가와 종자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허나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고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제대로 일어설 시간조차 주지 않고 블리어는 시급한 상황인 만큼 상황파악을 위해 그를 냉철하게 신문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그대는 이 피살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네…예.” “그렇담 피습을 주도한 자들을 목격했을 터, 그대가 본 것들을 모두 빠짐없이 설토하십시오. 그들이 총 몇 명이었는지 기억합니까.” “…그, 그게……하, 한명이었습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기사들이 목이 잘려 죽었다. 그것도 단시간 만에. 이것이 오로지 단 한사람의 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블리어는 위협을 가할 셈으로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그대에겐 약간의 신체적 고통을 주는 수밖에 없습니다.” “저,정말입니다! 하…하,한 명이었습니다.” 숨이 널어갈 듯이 꺽꺽대는 종자는 흙바닥에 튄 핏자국을 내려다보며 공포에 질린 눈을 감추지 못했다. “으,은발 남자가 갑자기 쳐들어와선…! 모두…죽였습니다. 허억. 모두 다…그 자리에서…그,그자에게 죽임 당했습니다. 분명…머리가 하얬어요. 은발이었습니다!! 분명…!” ‘은발이라 함은…….’ 블리어는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어수룩해보이던 은발머리의 기사가 순간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너,” 렐리아는 누군가 제 뒤에서 납덩이로 둔탁하게 머리를 내리친 기분을 받았다. 호되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말도 제대로 못했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한 채 렐리아는 멀찍이 떨어져서있는 아럼프를 바라보았다. 사고는 정지해도 용케도 호흡은 정상궤도를 찾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피투성이인 아럼프의 모습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안. 이제까지 무사하단 걸 알리지 못해서.” 아럼프는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그의 어깻죽지에서부터 허리까지 핏물이 잔뜩 묻어있었는데 대형참사에서 살아남은 사고자처럼 만신창이였다. 그의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새빨간 핏물을 내려다봤다가 렐리아는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집중했다. “하지만…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저 기사, 아니 드래곤에게서 당장 떨어져.” 언뜻 비장한 목소리가 귓속으로 가득 밀려들어오자 렐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아럼프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어둡게 표정을 굳혔다. “이제까지 수도에서 터졌던 사건들…단순히 우연이라고 생각해? 믿기지 않겠지만, 지금 네 옆에 서있는 그 남자 짓이야. 대신전도 이미 저 녀석과 한패야. 난 그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서 죽은 척 벗어났던 거야. 이제까지 저 자의 정체를 캐고 왕실에 알리기 위해서…” “…그게 무슨,” 이스티온의 억눌린 목소리가 옆에서 터져 나왔다. 렐리아는 바로 옆에서 제 팔목을 꽉 그러쥐고 선 은발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순하게 생긴 옆얼굴에 당혹스런 티가 역력해보였다. “렐리아.” 그때 또 한번 아럼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팔을 뻗어 제게 내밀고 있었다. 이 손을 잡아달라는 듯이, 한번만 믿어달라는 듯이. “아무리 친구라도 바로 신용할 수는 없겠지. 그래. 이해해…그래도 지금은 날 따라 와줘.” “…….” “다 설명해줄게. 그리고 너와 만나게 해줄 사람이 있어.” 0114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가슴을 절절하게 울리는 그 반가운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감정적으로만 움직인다면 이미 그에게 달려가고도 남았겠지만 이성이 발목을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아교로 붙인 듯 떨어지지 않던 입술은 불신을 인정하는 순간 의외로 손쉽게 열렸다. “네가 아럼프라는 걸 어떻게 믿어.” “……렐리아.” “네가 만일 아럼프라고 한다면…그게 더 수상쩍잖아. 애초에 너 진짜아럼프가 맞아?” “진짜아럼프 라니?” “발뺌하지 마. 나 야누이스 신전에 다녀왔어. 거기서 들은 아럼프는 내가 알고 있는 아럼프와는 딴판이었어. 아럼프가 두 명 일리도 없는데 말이야. 넌 대체 뭐야…?” 렐리아는 흔들림 없는 곧은 시선으로 아럼프를 응시했다. 그러곤 자신이 내린 결론을 한 글자씩 똑똑히 힘주어 내뱉었다. “이스티온은 드래곤이 아니야. 이건 확신해.” 렐리아는 왕궁 안에서 처음 이스티온을 맞닥뜨렸던 순간을 기억했다. 초면에 그가 드래곤이라고 확신할 만큼 강렬했던 순간 또한 기억한다. 소란스럽게 아우성치던 대기와 그 익숙한 기운을 느꼈을 때 이스티온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너도 있었어.” 수도 도박장의 화재사건도 찝찝하긴 매한가지였다. 껄끄럽고도 익숙한 기운을 느끼고 두리번대다가 이층 귀빈석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은발남자를 보았으나, 문제는 그때 같이 있던 사람역시 아럼프라는 거였다. 항상 뒷모습만 보여주던 은발남자도 그렇고 한두 가지가 걸리는 게 아니었다. 정말 작정하고 저를 가지고 놀기 위해 마법으로 만든 환영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한겨울에 꽃을 피우고, 목소리 변조마도구도 만드는데 그 정도는 대수롭지 않을 테니까. “그 기운이 느껴질 때마다 넌 항상 내 곁에 있었어. 그렇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기운이라니?” “그리고 네 몸에 묻어있는 그 피, 네 피라는 걸 어떻게 알아?” 렐리아는 떨떠름한 감정에 물든 얼굴로 아럼프의 상의를 흠뻑 적시고 있는 피를 가리켰다. “이번에도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묻힌 피 아니냐고. 정말 아니라면 네 상처를 보여 봐.” “상처를 보여 달라니…….” 그녀를 바라보던 처연한 눈빛 그대로 그가 땅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아럼프는 고개를 숙이며 씁쓰레하게 웃어보였다. “그렇게도 날 못 믿는 거야…?” 여전히 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 끝엔 핏방울이 매달려있었다. 아럼프는 피가 묻은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장미처럼 선명한 적색눈동자 위로 슬며시 은빛 광이 맴돌았다. 한밤에 뜬 기묘한 붉은 달을 닮은 눈동자가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이스티온이 서있는 곳이었다. "…!" 렐리아가 서둘러 이스티온을 돌아본 순간이었다. 쉭ㅡ, 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무언가가 빠르게 뺨을 스쳐지나갔다. 매서운 칼바람 같았다. 동시에 무언가가 시야가득 튀었다. 뜨뜻한 온기를 가진 액체가 얼굴은 물론 어깨위에도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는 살짝 어깨를 내려다봤다. 새하얀 옷 위에 점처럼 찍혀있는 삼십 개의 붉은 핏방울을 한번 바라봤다가, 숨을 멈추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스티온의 양어깨부터 시작해 상의전체가 붉디붉게 물들어갔다.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린내에도 인상을 찌푸릴 수도 없었다. 머리가 없었다. 너무 현실적으로 잘려있는 목사이로 빨간 살과 뭉툭하게 깎인 목뼈가 보였다. 여전히 제 팔을 쥐고 있는 그의 손에 소름이 확 끼칠 때, 그 손이 스르륵 펴지며 한순간 뻣뻣하게 서있던 몸이 철퍼덕 허물어졌다. 극도의 공포감과 서글픔, 믿기 힘든 일이 바로 옆에서 벌어졌단 충격에 마구 손이 떨려왔다. 수십 초간은 심장이 아예 멈췄던 것 같았다. 렐리아는 파르르 떨리는 손과는 달리 정신을 잃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았다. 게임일 뿐이니까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고 되뇌고 또 되뇌는 그때였다. 귓바퀴에 나긋하고도 다정한 목소리가 닿았다. “미안해.” 렐리아는 삐거덕거리는 목을 애써 그쪽으로 돌렸다. 뒷목 위로 서느런 소름이 훑고 갔다. “모처럼 감동적인 재회를 하려고 했는데,” 바람에 잔잔히 나부끼는 적색머리칼이 차차 색소가 빠지듯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달빛이 내려앉은 것처럼 환한 은빛이 감도는 머리칼 아래, 얼굴형도 서서히 달라져갔다. 중성적이었던 얼굴은 비인간적일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되어있었다. 날렵한 빛이 흐르는 콧날과 피부는 옅은 광채가 감도는 것처럼 환했다. 붉은 기가 모두 빠져나가고 기묘한 은빛이 흐르는 눈동자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늘게 벌어지는 입술이 곧 환한 미소가 되기까지 수 초도 걸리지 않았다. “참 유감이야.” 렐리아는 굳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각목처럼 딱딱하게 굳은 목을 움직여 몸에 튄 이스티온의 피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점차 가빠지기 시작했다. “……하…하…” 굳은 목에서 제일 먼저 나온 것은 웃음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폐가 조였다가 펴지는 감각이 이렇게 고통스러웠던가. 렐리아는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떨리는 손을 도드라진 갈비뼈위에 가져갔다. 주춤주춤 힘없이 뒤로 물러서는 걸음은 절벽 끝에 선 사람처럼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정말이었어.”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잔뜩 쉬어있었다.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내질렀던 사람처럼 이 작은 소리를 내뱉는 것조차 목구멍이 화끈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따갑고, 아프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쓰라린 기분이었다. “와, 네가…어떻게 이럴 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뭐,” “사실이야. 힘 조절이 안돼서 저 기사에겐 유감이라고 밖에,” “뭐? 유감…? 이 개 같은 새끼가!” 렐리아는 악을 쓰듯 욕을 했다. 다행히 알고 있던 친근한 얼굴이 아니라서 그럴 수가 있었다. 중성적이었던 아럼프의 목소리와는 달리 깊고 낮은 목소리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전혀 달랐다. 아니 실제로 다른 사람이었다. 저건 아럼프가 아니라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마에 불과했다. “…개새끼야, 이스티온 살려내! 살려내라고! 왜, 왜 죄 없는 사람 죽이고 지랄이야!!!” 가느다란 목소리가 하늘로 치솟을 것처럼 강한 위력을 냈다. 일순 기온이 뚝 떨어졌던 싸늘한 주위를 쩌렁쩌렁 만들더니 원망이 그득 괴인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개씹쓰레기!! 이 시발새끼야! 당장 살려내라고…!!” 충혈 된 눈동자위로 점점 광기가 감돌았다. 렐리아는 그 뒤에도 비명을 지르듯 그에게 쌍욕을 쏟아 부었다. 공포감을 해소하기 위함인지, 상황을 회피하기 위함인지 머리가 잘려죽은 시체를 옆에 두고도 기세는 누그러들기는커녕 살벌했다. “…미친 새끼…, 하아…직도 웃어?” 결국 제 풀에 지쳐 숨소리는 잔뜩 거칠어졌다. 숨 쉴 타이밍을 번번이 놓쳐 악을 써댔으니 당연했다. 단전에 있던 묵직한 것들을 목 끝까지 끌어올려 모두 쏟아낸 기분이었다. 얕게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와중에도 렐리아의 두 눈은 은발남자를 향해있었다. 그러나 허탈감이 범람해오자 순간 두 다리에서 확 힘이 풀려버렸다. 가만히 서있는데도 아슬아슬 흔들렸다. 외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은 모습에 한 폭의 명화처럼 아득하게 서있던 은발머리 남자가 드디어 움직임을 보였다. 멀찍하게만 느껴졌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바짝 곤두선 채 낮게 읊조렸다. “…카르갈의 홍염.” 휘발유에 순식간에 붙이 닿은 것처럼 그녀의 앞에 화르르륵 뜨거운 불길이 솟아났다. 렐리아는 오랜만에 보는 거대한 대검에 빠르게 손을 뻗었다. 낚아채듯이 검 손잡이를 틀어쥐고서 바로 제게로 다가오는 그를 향해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휘감은 검신이 렐리아의 흥분에 맞춰 더더욱 뜨겁게 달궈졌다. 사람의 살은 닿기 만해도 눌어붙으며 녹아내릴 수준이었다. 허나 검 손잡이를 이루는 쇳덩이는 주인을 알아보는지 그저 미지근했다. “다가오면 태워버릴 거야. 경고했어.” “역시 아직 이 모습으론 무린가…뭐 이해해.” 그녀의 살벌한 경고에도 아럼프는 그저 난감한 듯 한번 웃고 말뿐이었다. 그가 한발 내딛자 바람에 출렁이던 은색머리칼이 고운 단풍에 물들듯 빨갛게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붉음이 남김없이 먹어치운 그 자리에는 적색머리를 가진 익숙한 남자만이 남아있었다. 장미꽃잎을 닮은 눈동자와 선연한 얼굴로 되돌아온 아럼프는 살짝 눈을 내리깔다가 처연하게 눈매를 휘었다. “한번이라도 좋아. 렐리아, 내 얘길 들어줘.” 렐리아는 검을 쥔 손의 힘이 잠시 풀렸다. 오랫동안 의심조차 않고 믿어왔던 그 친근한 얼굴을 다시 보니 역시 기운이 빠졌다. 그것도 잠시, 왜 하필 그 모습으로 돌아온 거냐고 욕이라도 퍼붓고 싶어졌다. 저가 불리하도록 하기위해 그 모습을 이용하는 거냐고, 친구라는 허울 좋은 모습으로 끝까지 자신을 농락하는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그가 제 나약한 부분을 잘 찔렀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약점이 잡히지 않아야 된다는 생각에만 악착같이 매달려 있을 때다. 차분한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오자 렐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다섯 발자국을 남기고 서있는 아럼프의 모습에 렐리아는 흠칫 놀라며 대검을 치켜들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번쩍 들어 올려 진 대검의 끝날이 하늘을 가리키며 위협적인 예기를 드러냈다. 반사적으로 한 행동에 렐리아가 다시 손힘을 풂과 동시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예리한 날이 붕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갈랐다. 바로 후끈한 열기와 함께 무형의 기운이 아럼프를 벨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순간 붕 떠오른 짧은 적색머리칼의 끝이 살짝 녹아 없어졌다. 일순간이었으나 그 뒤에 남은 흔적은 무시무시했다. 누군가 부러 단단한 땅바닥 위에 긴 금을 그어놓은 것 같았다. 문제는 그 움푹 파인 자국에서 끊임없이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여전히 열기가 가시지 않아 흙 알갱이가 지글지글 타들어가는 땅을 어디선가 낮게 불어온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바로 식기는 힘들어보였다. 렐리아는 그 선이 자칫 옆으로 조금만 치우쳤다면 아럼프의 오른팔을 베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 수 없는 혼란함에 주춤 뒤로 물러서며 그녀는 한층 더 방어적인 태세를 보였다. “…그러니까 다가오지 말랬잖아.” “렐리아. 진정해.”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 씨, 돌아버리겠네….” 또 한 번 대검을 휘두를 것처럼 굴었으나 렐리아는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제거해야 될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 그 사이를 오가는 아럼프에게 큰 망설임이 일었다. 친구의 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끔찍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도 있지만, 자신은 절대 드래곤을 죽여선 안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자신을 살해하지 않는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 누가 알까, 저렇게 웃고 있다가도 제 목을 자르려들지. “너와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좆까. 좆까라고!! 너 같으면 이 상황에 대화가 되겠냐고!” 허나 한 박자씩 늦는 그녀의 대답을 아럼프는 진즉 눈치 챘다. 벌써부터 내면이 흔들리고 있다는 걸 아주 쉽게 간파하고선 아예 뿌리째 쥐고 흔들기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섰다. “오랜만에 만난 건데 렐리아, 너는 내가 반갑지 않아? 이래봬도 눈뜨자마자 바로 널 찾아온 건데.” “…닥쳐. 이제 와서 반갑기는 지랄.” “저 기사를 저렇게까지 만들 생각은 없었어. 말했잖아, 힘 조절을 못했다고.” 세 걸음을 남기고서 아럼프는 멈췄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목 한가운데에 닿을 듯이 근접해있는 사나운 검날 때문에라도. 안면을 덮치는 후끈한 불의 열기와 이러다가 목이 꿰뚫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도 그는 초연했다.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한 사람처럼 슬며시 입가를 끌어내리고서 씁쓸하게 웃어보였다. “지금 너와 싸운다면 난 죽을 거야. 그만큼 내 몸은 약해져있으니까.” 아럼프는 잔잔한 목소리로 실토했다. 반듯한 시선너머로 적색머리칼이 어지러이 흐트러졌다. 어딘가 서글프게 가라앉은 눈과는 달리 그녀를 향하는 말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날 죽이고 싶다면 그 무기를 휘둘러. 좋은 기회잖아, 날 제거할 수 있는. 이 육신이 사라진다면 이젠 다신 네 앞에 나타날 일도 없겠지.” “너 존나 뻔뻔하다. …네가 말 안 해도 난 널 죽일 거야. 이제까지 너도 날 죽이려고 했으니까! 나만 보면 죽이려고 했잖아, 틀려!!” 시계탑의 꼭대기부분이 저를 향해 떨어져 내렸던 순간, 그 아찔하던 찰나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한껏 표정을 구긴 렐리아는 검을 쥔 손에 그득 힘을 실었으나 뒤이어진 그의 대답은 힘을 빠지게 만들 뿐이었다. “네가 아니었어.”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 옆에 있던 라콘드 공작이었지만, 그는 괜히 그녀의 화를 부추기는 말은 자제했다. 대신 교묘하게 질문에서 빗겨난 대답으로 갈무리했다. “그날 광장에 네가 온건 단순히 우연의 일치였어. 내가 무슨 수로 네가 올지 알았겠어.” “그럼 화재는…? 뭐라고 발뺌한 건데? 도박장에서 모두 다 타죽을 뻔했다고!” “정말 그들을 죽일 생각은 없었어.” “웃기지마. 왕궁 사건은 또 뭐라고 핑계될 건데?” “전부 솔직하게 말할게…. 하지만 여기서는 아니야. 잠깐 다른 데로 자리를 옮기자.” 모든 걸 다 털어놓겠노라 그가 말해도 렐리아는 불신을 표했다. 수그러질 줄 모르는 배반감과 실망, 충격은 단 몇 마디로 없어지기에는 이미 너무도 깊은 상처를 남긴 탓이다. 움직일 생각은커녕 오히려 검날을 바짝 세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아럼프는 살짝 눈매를 접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 그래 좋아. 네가 아직 날 신뢰할 수 없는 건 당연해.” “…….” “다른 건? 내가 널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는 사건이 더 있어?” “…….” “그런데 렐리아. 만일 네가 목적이었다면 네 방에 놀러갈 때마다 꽃이 아닌 칼을 가져갔겠지. 물론 네 몸은 칼로도 죽일 수 없겠지만 말이야.” 아럼프는 다시 정면을 향해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이어지는 침묵에도 그는 답답해하지도, 성급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려주겠다는 양 너그러운 태도로 그녀의 불신어린 두 눈을 응시했다. “모두 다 설명해줄게. 그러니 날 한번만 믿어줘. 한번 믿어주는 것도…그렇게 어려운 일이야?” 뒤늦게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긴 입술은 자연스레 끌어올려져있었다. “저번부터 이유 없이 날 밀어내고 차갑게 행동하고. 이젠 내 목소리를 듣는 것도 싫어? 그렇게 한번 내치면 끝인 사이인 거야?” “어.” 철컥, 검을 기울이기 무섭게 검신에서 또 한 번 맹렬한 불길이 치올랐다. 불똥처럼 튀어 오르는 강한 화염 앞에서도 그는 뒤로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그래. 죽여.” “네가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그게 아니라면 난 널 강제로 데려갈 거야.” 그렇게 말하는 아럼프는 살이 타 녹을 열기에도 요지부동인 채 외려 한발 내디뎠다. 그의 턱과 목이 불에 닿아 검붉게 타들어가기 전 렐리아는 살짝 검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를 향한 검을 치우지 않았다. “오지 마. 난 분명 경고했어. 불태워버릴,” “렐리아.” “…손 대지마.” 그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아럼프는 검에 비껴가며 팔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부드러운 뺨을 누르고서 단단한 손바닥으로 뺨을 에워쌌다. “일단 자자.” 그 손이 가볍게 뺨에 닿기 무섭게 렐리아는 밀려오는 수마를 느꼈으나 치우라고 말할 기력도 없었다. 순식간에 몸의 기력이 모두 빠져나간 듯 무기력해진 탓이다. 렐리아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의 눈과 꼿꼿하게 마주하려 노력했다. 채도 높은 선홍색 눈동자 위로 영롱한 은가루가 뿌려진 것처럼 은빛이 일렁였다. 그것을 감추려 그는 살짝 눈을 비스듬히 내리깔며 웃었다. “자고 일어나면 한결 머릿속이 가벼워질 거야.” “……무,슨.” 손가락 한번 제대로 까딱하지 못한 채 렐리아의 몸이 앞으로 허물어졌다. 손의 힘이 풀리면서 자연스레 묵직한 검은 챙강,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형태를 갖추고 있던 검은 그녀가 눈을 감기 무섭게 불씨가 꺼지며 허공에 사라져버렸다. “넌 날 못 죽여. 그건 나도 마찬가지겠지만.” 무너지는 그녀를 받아주며 아럼프, 아니 세브로웰은 만족스럽게 입매를 휘었다. 그러다 가는 목에 걸려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서 슬쩍 마뜩찮은 표정으로 바꿨다. 미약한 마력이 흐르는 목걸이가 누구와 연결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긴 손가락들이 목걸이를 가볍게 쥐더니 그대로 뚝 끊어버렸다. 미련 없이 목걸이를 던져버린 그는 바로 렐리아를 고쳐 안고서 그 자리에서 소리 없이 종적을 감췄다. 0115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블리어가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놀이 진 후였다. 지원요청으로 도착한 인력들이 수십 구의 시신을 수습하는 동안, 말을 타고 산 일대 수색을 계속하다가 도착한 곳에서 목만 따로 분리되어있는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바로 말에서 내려 시신을 살폈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서 몸 주인으로 추정되는 새하얀 은발머리를 발견했다. 피에 젖어 그 색이 탁해져있었으나 확실한 은발이었다. 얼굴을 확인하니 역시나 그 기사가 맞았다. 수십 명의 기사를 사살한 범인이 이 자가 아닐까 추정했으나 시체상태를 보니 그러한 가능성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 자도 피해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대체 누가 이러한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일지에 대해 블리어는 깊은 사념에 잠겼다. 아직도 렐리아가 이 산속에 있다면 그자와 마주치지 않고 무사하길 바랄뿐이었다. 블리어는 약 한시간전 렐리아가 건너편 산골민가를 방문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었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크게 안도하는 것도 잠시, 렐리아가 일행을 만난다며 이 산으로 들어갔단 증언을 접했었다. 해질녘에 가까워진 시간에 무기를 지니지 않은 여인이 혼자서 산으로 들어간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런 흉흉한 사고가 연달아 터진 시점에서 그녀가 안전할 거라는 보장은 더욱이 없었다. 다시 그녀를 찾기 위해 블리어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였다. 야생풀이 드문드문 자라난 땅 위에서 홀로 고고하게 반짝이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떨어진 유리조각인가 싶었으나 이 산중에 웬 유리가 떨어져있겠냐는 의문에 그는 기어이 그곳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작은 단서나 증거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허나 뒤이어 시야에 들어찬 것은 눈에 익은 형태의 목걸이였다. 노을빛이 투과해 더욱 투명한 빛을 발하는 크리스탈 목걸이를 블리어는 조금 떨리는 손길로 주워들었다. 그 주변에 튄 혈흔들은 조금 진득하게 흙에 말라붙어있었다. 버려진 목걸이.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판단하기까지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가 이 흉흉한 살해현장에 있었다. 무엇보다 강제로 잡아 뜯었는지 목걸이의 이음매가 심하게 망가져있었다. 가늘지만 은으로 되어있기에 단순히 여인의 힘으로 잡아 뜯기에는 무리였다. 평균 남성보다 월등한 신체능력을 가진 남자라는 결론이 나왔다.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체를 보아 아직 이 산속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에 블리어가 급히 수색조를 파견하기 위해 말에 오르려던 찰나였다. 별안간 부스럭대는 소리가 근처에서 울렸다. 바로 허리춤에 걸린 긴 검을 소리 없이 빼든 그가 움직임을 보이려 할 때,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있었다. “아…” 미친 여자인 줄 알만큼 잔뜩 헝클어진 분홍머리를 한 여자는 슈로니였다. 흰 뺨에는 얇게 긁힌 생채기가 두세 개 나있고 눈은 발갛게 퉁퉁 부어있었다. 커다랗고 순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있던 그녀는 허공에서 블리어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털썩 주저앉았다. 엄청난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흑. 흐으윽….” 주저앉아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그 모습에 블리어는 검을 다시 허리춤에 걸었다. 그동안 슈로니는 눈가에서 굴러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훔치며 그의 발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널브러진 목 잘린 시체를 눈에 담았다. 역한 욕지기가 절로 식도를 타고 올라왔으나 슈로니는 꾹 참아 넘겼다. 슈로니는 그 자가 누군지 금방 짐작할 수 있었다. 렐리아와 함께 있었던 은발남자였다. 유일한 목격자가 죽었단 생각에 슈로니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입안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어떤 식으로 이 상황을 이용할지 요리조리 머릴 굴렸다. “언제부터 이 근처에 있었습니까.” “…네?” 그때 돌연 저기압적인 목소리가 차갑게 귓속을 가르고 들어오자 슈로니는 눈물이 방울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놀라서 뚝뚝 눈물만 떨어뜨리는 여자에게 블리어는 감정이 배제된 말투를 사용했다. “그대가 목격자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다면 지체 말고 말하십시오.” 금방이라도 홀연히 떠나갈 사람처럼 그는 성급하게 굴었다. 미세하게 구겨진 그 표정에 슈로니는 마침내 다짐한 듯이 입술을 뗐다. “레.. 렐리아가 죽였어요. 믿기지 않겠지만 사, 사실이에요.” “…….” “이런 짓을 할 사람은....걔 밖에 없어요...! 공작님도 아시잖아요, 걔 사람이 아니라는 거… 괴물이라고요!” 마지막 발악처럼 슈로니는 외쳤다. 그가 어서 환상에서 깨어나 저를 봐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블리어는 침묵적인 태도를 고수하다가 종내에는 들을 가치도 없단 듯이 차갑게 등을 돌렸다. 서둘러 말에 올라 고삐를 쥐는 그의 모습에 슈로니는 그제야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공작님?” 왠지 불길한 감이 엄습해왔다. “저..저를 설마 놔두고 가실...” “그대가 이 산속을 헤매다 죽든 말든 내 관여할 바 아닙니다.” 힐끗 돌아간 냉혹한 눈동자가 비틀대며 다가오는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분한 기색과 혐오스러운 기분을 애써 참아 넘기려는 듯 입매는 단호하게 굳어있었다. “절벽에서 밀어뜨렸지 않습니까. 내가 사랑하는 여인을.” “…아,알고…” “그러니 나도 그대를 사지에 밀어뜨리는 겁니다.” 그 말만 남긴 채 블리어는 말을 타고 떠나버렸다. * 렐리아는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스스로가 잠들어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어둠속에서 시간을 보내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자 깨기 위한 발버둥을 쳤다. 끈끈한 잠결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으려 달라붙었지만 애써 수마를 밀어내고 눈을 떴다. 조금 초점이 흐릿한 시야가 십 초도 걸리지 않아 분명하고 또렷하게 바뀌었다. 삭막하고 어두운 와중에도 이곳이 무지하게 드넓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현실적일 만큼 높은 천장은 일반저택이라고는 보기 힘들었으니 말이다. 높다란 성의 어느 침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거운 정신과는 달리 몸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상체를 일으키니 벨로아원단의 이불이 몸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내려왔다. 렐리아는 시트를 짚어 가장자리까지 움직인 후 캄캄한 어둠속에도 새하얗게 눈앞을 가리는 침대휘장을 거둬내었다. 눈앞에 탁 트인 이국적인 방의 정경이 펼쳐졌다.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성의 맨 위층에 위치한 방인지 까마득한 천장이 점으로 모아질 만큼 뾰족하게 솟아나있었는데 높이가 거의 사오층 건물높이와 맞먹어보였다. 방이라고 부르기엔 확실히 어감에 문제가 있는 널따란 공간은 흡사 언젠가 보았던 고딕 양식의 대성당의 내부를 닮아있었다. 그리고 렐리아의 입을 다물게 만든 건 따로 있었으니, 다름 아닌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서 엎드려있는 거대한 존재였다. 영롱함이 배인 은백색 비늘이 눕힌 수천수만 개의 방패처럼 촘촘하고 단단하게 자리해있는 몸피는 두터웠고, 똬리를 튼 몸은 누가 봐도 파충류의 자태를 띠고 있었다. 기차를 늘어놓은 듯한 굵은 꼬리너머로 눈을 감고 있는 드래곤머리가 드러나 있었다. “…….” 렐리아는 잠시 할 말을 잃었지만 곧 침대에서 내려왔다.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맨발에서 저벅저벅 소리가 났다. 그녀는 자신의 몸집과 비교도 되지 않는 존재의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이에 벼룩만한 작은 존재가 내는 희미한 인기척을 드래곤은 이미 눈치 챘는지 기다렸단 듯이 움츠렸던 육중한 몸을 한번 움직였다. 천장에 닿지 않을 정도로 드래곤의 머리가 살짝 들어졌다. 기묘한 생김새를 가진 눈이 가늘게 벌어지며 몇 겹의 눈꺼풀 뒤로하고 만월과도 같은 은색눈동자가 드러났다. [벌써 일어난 거야? 더 오래 잘 줄 알았는데.] 순간 남자목소리가 들려오자 렐리아는 슬쩍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포악한 주둥이에서 흘러나왔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나긋하고 감미로운 음성이었다. 애초에 주둥이가 열리지 않았기도 했다. [발성기관으로 내는 게 아니야. 봐봐, 어디서 소리가 흘러나오는지 모르겠지?] 확실히 그 말대로 어디 방향에서 흘러나온다는 걸 감 잡을 수조차 없었다. 사위를 가득 에워싸는 목소리는 마치 동굴 속에서 나누는 것처럼 웅웅 울렸으나 또렷하게 전달되어서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렐리아는 감정 없이 고개만 쳐들고서 그 눈을 노려보다시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드래곤은 이런 저가 귀엽다는 듯 가늘게 눈을 접어보였다. [이렇게 작은 렐리아도 신기하네.] “닥치고 인간 몸은 어딨어.” [내 몸은 이게 본체야. 네가 원한다면…피곤해도 어쩔 수 없지.] 그 말을 뒤로하고 눈 깜짝할 사이 환한 은빛에 휩싸인 거대한 몸집이 인간크기로 축소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발월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은발사내가 부드럽게 입매를 휘며 나타난 것은 순식간이었다. “혼란스러워 보이네.” “…닥쳐. 카르갈의 홍…” “그건 불러내지 말아줘.” “내가 왜…,” “부탁이야. 난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 그리고 여긴 내 레어 안이라 부서지면 지금 내겐 상당히 치명적일 수밖에 없어. 이 공간자체가 내 약점인데 왜 굳이 널 이곳으로 데려왔겠어.” 세브로웰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무섭게 물러서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자신을 믿어달라는 무언의 압박과 함께 밑도 끝도 없이 신뢰를 가장한 눈은 잔잔하기만 했다. 괜히 가정집에서 각목을 들고 난동피우는 조폭이 된 기분이라 렐리아는 얼쯤함에 검을 불러내진 않았다. “내가 완전히 안심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손 놔.” 그 말은 곧 언제든 위협이라 느껴질 시에 검을 불러낼 거라는 뜻과 상통했다. 여전히 경계어린 기색을 지워내지 못한 채 렐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서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방안은 까마득하게 넓을 뿐 실효성이라곤 없었다. 앉을 데라곤 오로지 침대뿐이라 렐리아는 그냥 찬 바닥을 택했다. 양반다리를 하고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모양새가 제 방인 양 편해 보인다지만 렐리아는 행동과는 달리 날카로운 기세로 질문했다. “여긴 어디야. 레어가 지명은 아닐 거 아냐.” “수도 대신전.” “허. 미친 놈… 대신전의 교황님은 어떻게 꼬셔냈대?” “사정을 말했더니 이곳을 쓰라고 내주시던데?” “지랄 마.” 누가 속을 줄 아냐고 눈을 부라리는 렐리아를 향해 세브로웰은 쉽게 바스러질 꽃처럼 섬연하게 웃어보였다. “교황성하가 몸이 안 좋으시거든. 한번 말한 적 있지 않아? 그래서 요양 차 아래지방에 내려가 있으시고 대신 내가 이 방을 쓰고 있지.” “원래는 교황님 방이라는 거네.” “응. 하지만 가구는 필요가 없어서 내가 치웠어. 침대는 널 눕혀야 해서 다시 가져왔지만.” 싱긋 웃는 모습이 아럼프와는 사뭇 달랐다. 섬세하게 휘어지는 기다란 눈모양이 사람을 매료시킬 만큼 아름다운 눈웃음을 자아냈다. 물론 요사스러움이 첨가돼 그다지 신뢰성을 일으키진 못했다. “교황 대리로 이 집단의 권력을 쥐고 있는 거라 아무도 불만을 가지지 않아. 너도 이곳에 편하게 있으면 돼, 렐리아.” “편하게?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지금 당장 족치고 싶은 걸 참고 있는데…”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아까 네가 검을 휘둘렀다면 나 정말 죽었을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 몸, 진짜 몸이거든.” “그럼 그때 왕궁에서 깔려죽었던 건…? 그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아- 그 인간 몸 말하는 거지? 내가 죽어서 많이 슬펐어?” 그 말에 렐리아는 울컥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단 기분이 구역질날 만큼 더러웠다. 며칠간을 악몽에 시달려 고생했건만 그는 마치 우스갯소리를 하듯 가볍고 재밌어보여서 꾹 말아 쥔 주먹이 다 바르르 떨렸다. 그런 렐리아를 내려다보며 세브로웰은 알 수 없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이런 모습조차 좋다는 듯이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훑으며 더욱 입가를 끌어올렸다. “화났다면 미안해. 하지만 그날은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어. 덫에 걸렸었거든. 인간들이 교묘하게 쳐둔 추적마법에.” “덫…?” “그래, 덫. 그 마법이 골치 아픈 게 시전자가 죽지 않는 이상 끝까지 마나의 경로를 추적할 수 있어. 그렇게 된다면 내 본체가 잠들어있는 레어 위치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겠지.” 세브로웰은 렐리아의 팔을 쥐고서 그녀를 침대로 이끌었다. 렐리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려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집중하느라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물론 그들이 실수한 게 내가 가짜 몸으로 활동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 몸에 추적마법을 걸어버린 거지. 난 그 몸만 벗으면 끝인데 말이야.” “그래서? 몸을 버렸다는 거야? 죽인 거냐고.” “끈질긴 덫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추적마법을 떼놓을 겸 혼선을 주기 위한 최선의 결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도마뱀이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라 여전히 렐리아는 마뜩찮기만 했다. 생명경시 수준이 아니라 인간을 단지 쓰고 버리면 말 도구로 여기는 것 같았다. 인상을 쓰고 있는 렐리아의 양어깨에 별안간 손이 내려앉았다. 세브로웰은 그녀를 침대에 앉히고서는 앞으로 흘러내린 은색머리칼을 어깨너머로 쓸어 넘겨주었다. 다분히 다정한 손길은 꼭 아끼는 인형을 어루만지는 소녀처럼 정성이 깃들어있었다. 이에 더 기분 나빠진 렐리아는 그 손등을 밀어내듯 쳐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치워. 아럼프." “아럼프는 잠시 빌렸던 몸 주인의 이름이고 원래이름은 세브로웰이야.” “와…,” “이제부터는 세브로웰이라고 불러줘.” 렐리아는 기가 막혔다. 잔잔히 웃으며 자신을 아럼프 세브로웰이라고 소개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대놓고 자신을 놀려먹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이제까지 놀려먹으니까 좋아?” “놀려먹다니?” “나 지금 빡쳤거든? 작작 발뺌해라. 이스티온이랑 처음 우연히 마주친 날, 그 이상한 기운은 뭐라 설명할 건데? 날 놀려먹으니까 좋아?” 설명할 수 없는 그 기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이렇게 제 옆에서 아무것도 모른단 듯이 기운을 방출하고 있었을 거라 여기니 말이다. 실제로 아럼프를 데리고 왕실 제2기사단에 수시로 찾아갔을 때도 그는 옆에서 웃고 있을 거라 여기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너, 내가 드래곤 찾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좀 물어보자. 왜, 왜 오해하게 만든 건데!? 너만 아니었다면 그런 개짓거리 할 필요도 없었는데…! 이스티온도 괜히 휘말려서, 이렇게 될 필요도 없었잖아!” “일종의 호기심이었어.” “…….” “널 일부러 속이고 접근했던 건 사실이야. 인간 몸으로 다가가서 널 관찰하는 게 흥미로웠거든. 그런데, 사실은 네가 날 알아봐줬으면 하고 내심 바랐던 거야. 아럼프라는 인간의 몸을 뒤집어쓰고 있어도 네가,” “…닥치고, 몸주인 아럼프는 대체 왜 끌어들인 건데?” “기운을 숨기기엔 이쪽이 더 요긴하니까.” 너무나도 간단한 대답에 렐리아는 두 번이나 말문이 막혀버렸다. “봉인에 막 풀렸던 상태라 본체를 움직일 기력이 없었어. 그때 너와의 전투도 한몫했었고, 본체가 회복할 수 있는 레어를 만드는 게 급선무였지. 그때 있던 곳이 란게르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야누이스였어. 그 산속에서 운 좋게 맞닥뜨린 인간 사제의 몸을 빌린거고.” “…그게 아럼프란 거네.” “응. 다행히 하급사제라는 신분 덕에 수도로 올라오는 과정이 쉬었어. 내 마나를 신성력으로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거든. 이곳 대신전에 들어온 후에는 레어를 만들었어. 본체는 레어 안에서 쉬게 두고 그 인간의 몸을 계속 빌려서 활동했었어.” “그래서 나랑 만났다? 그럼…, 란게르드 산맥에서는 왜 날 다짜고짜 죽이려 들었는데.” “그때는 봉인에서 막 풀려 제정신이 아니었을 뿐더러 이지가 아예 없는 상태였어. 거기다 널 다른 이와 착각을 했었어.” 매끄럽게 웃어보이던 세브로웰이 잠시 험악한 기운을 표출한 건 그 순간이었다. "그 자의 기운이 느껴졌었어, 아주 희미하지만. 그 역겨운 가브리나의 기운이." 이를 사리물고서 그가 씹어뱉듯이 말했다. 신의 완벽한 외모를 흉내 낸 것 같던 흰 얼굴에 써느런 구김이 가있었다. 시종일관 미소 짓던 그가 백팔십도 돌변하니 렐리아는 약간의 궁금증이 생겨났다. 물론 그녀의 의문을 읽어낸 그는 친절하게도 친히 그 자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우리 일족의 배신자이자, 내 형제들을 모두 이 대지에서 내쫓고 그 위에 왕국을 건설한 드래곤이야. 가브리나라고 한번쯤 들어봤을 텐데?” “그…수도 이름 아니야?” “맞아. 그런데 웃긴 건 이곳 수도가 원래는 내 땅이라는 거야. 지금은 멋대로 왕도가 자리 잡고 있지만, 여전히 이 광활한 대지 밑에는 내 기운이 흐르고 있어. 이 비옥한 땅은 내가 이뤄낸 거야. 나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으니까.” 어딘가 그리운 미소를 입가에 걸고서 세브로웰은 분기를 가라앉혔다. 그러곤 그녀 앞에 서서 작게 속삭이듯이 나직한 어조로 운을 뗐다. “이곳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정성을 기울였던 만큼, 천년이 지난 지금도 지맥을 따라 내 기운이 넘쳐흘러. 렐리아 넌 느끼지 못하겠지만.” “…….” “그런 내 땅이 어지간히도 탐이 났던 건지, 이곳의 주인인 나를 강제로 봉인시켜버리고 거기다 자기이름을 붙인 거야. 멍청한 인간들은 수도를 가브리나라고 부르며 수호드래곤 이랍시고 천년 넘게 기리고 있다지만.” 뭐라 반응해야할지 몰라 살짝 굳어있는 렐리아를 내려다보며 그는 슬며시 웃음기를 띠었다. 여전히 씁쓸해 보일 만큼 가라앉은 미소였지만. 세브로웰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가브리나 그 자만 아니었더라면…, 내가 억울하게 천 년간 봉인될 일도 없었을 거야.” “…….” “역겹게도 남의 것을 빼앗아 그걸로 인간들의 환호와 추대를 받더니 정말 자기가 이룩한 건 줄 아는 건지. 아직까지도 뻔뻔하게 수도에 자리 잡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그렇게 가증스러울 수가 없어.” “뭐? 이 수도에 있단 말이야?” “렐리아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그 공녀, 다이아나 올르아 라고 하는 여자.” 0116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단단히 굳어버린 렐리아를 눈앞에 두고 세브로웰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갔다. 이슬을 닮아 투명한 윤기가 흐르는 은빛머리칼이 서느랬다. 느릿하게 겉돌듯이 긴 손가락들을 움직이면서 그는 매끄러운 머릿결을 음미했다. “왜 나처럼 인간 몸을 빌려 쓰고 공녀의 행세를 하고 다니는 진 몰라도 여러 번 네가 접근하는 걸 봤어. 그 속내는 여전히 알 수 없다지만…이번에도 분명 뭔가 노리는 게 있을 거야.” 사뭇 가늘어진 눈이 의심스러움과 경고를 보였다. “왜 네게 접근하고 호의를 보이는 진 몰라도 그 자의 말은 절대 귀담아듣지 마. 동족마저 이 땅에서 몰아냈던 자야. 그 가증스러운 배신자의 말에 현혹되었다간 뭘 잃을지 모르지. 뭐 내가 말하지 않아도 렐리아 넌 의심이 많아서 괜찮겠지만.” “…너, 제대로 말해. 사실이야? 언니…아니 공녀가 네가 말한 그 드래곤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 “사실이야. 혹시 그 공녀와 만나게 된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 아마 그 성격상 끝까지 숨기려하진 않을 거니까.” “왜 굳이…나한테…” 렐리아는 혼란에 빠진 채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자신에게 무언가 노리는 게 있다는 말일 텐데 크게 짐작 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제까지 받았으면 받았다. 확실히 제게 아무 이유 없이 큰 호감을 보였던 언니였었다. 이제까지의 호감이 무언가를 노리고 접근한 거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오싹하긴 하지만. 그러다 문득 그녀가 주었던 금반지가 떠올랐다. 제국마법사 윈에게 맡겨놓고서 아직 돌려받지 않았는데 그걸 파헤치면 뭔가 답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대체 원하는 게 뭔지, 왜 저를 위험상황에서 보호하려 들었던 건지 말이다. 그때 세브로웰의 유연한 말씨가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마 렐리아 네게 있어 가장 값지고 귀중한 것일 수도 모르지.” “내게서 딱히 가져갈 게 없는데….” “혹시 알아? 네 몸이라거나.” 그는 눈짓으로나마 심장을 가리켜보였다. 일순 심장이 싸하게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굳이 제 몸을 보호했던 이유가 모두 설명되기 때문이다. “난 내 피와 살의 일부였던 땅을 그 자에게 눈뜨고 빼앗겼어. 그러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얘길 하면서 세브로웰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넘겨져 있는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장난쳐보였다. 베베 꼬는 손길이 썩 부드러워서 렐리아는 한동안 그 손길을 인지하지 못했다. “손 치워.” 렐리아는 눈앞에 부쩍 다가와 있는 남자를 알아차렸다. 은근슬쩍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척 다가와 놓고선 저가 한눈판 사이 대담하게 놀려졌던 그 손가락들을 쳐냈다. 혼란을 틈타 지분거렸다는 생각에 조금 기분이 나빴다. 아직까지는 세브로웰의 말을 어디까지 받아들여야하는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믿었던 언니마저 자신을 싸하게 만드는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거다. 누린내가 붙은 듯 찝찝해서 렐리아는 잠시 상념을 닫았다. 성격대로 갔다면 지금쯤 문을 박차고 나갔을 텐데 렐리아는 침대에 머물러있었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기회를 엿보고 있는 속물적인 마음이 내면에 존재한다고 여기니 역한 기분만 들었다. 여기서 나간다면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렐리아는 패배감에 젖은 사람처럼 무릎 위를 내려다보다가 그제야 흰 옷자락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음을 깨달았다. 고개를 모로 돌려 어깨를 내려다보니 역시나 핏방울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도 그 편리한 마법덕분인진 몰라도 몸도 깨끗했다. 상황이 몰아가는 구나, 하는 허한 생각이 들었으나 마음과 몸은 별개였다. “난 널 이해 못해.” 입은 솔직했다. 렐리아는 직설적으로 말하며 한껏 고개를 쳐든 채 그를 노려보였다. “네 개인사정이 어떻든 간에,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꼭 희생됐어야 됐어? 이제까지 너 때문에 몇 명이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저지른 일은 학살이야, 학살이라고! 무도회장에서 죽을 뻔한 사람 수만 해도 천명은 넘어! 알아!?” “내가 널 이해하게 만들면 돼.” 수긍과 동조를 원했던 세브로웰은 그녀의 날선 비난에 크게 실망한 듯 비뚜름하게 고갤 숙여보였다. 덤덤하게 가라앉은 은색눈 위로 안광이 희미하게 빛났다. 조금은 미약하게 끌어올려진 입술은 아직까진 그녀에게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것 같았다. “넌 결국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여겨.” “아니. 난 널 이해 못해. 죽어서도 이해 못 할걸?” “내 얘기 들었잖아, 렐리아.” “어 들었어. 근데 너 쌍또라이로밖에 안 느껴져.” “하. 천 년이라고…, 어떻게 눈이 안 뒤집어져. 내 모든 것을 강제로 빼앗아서 지들 멋대로 분배하고 자기네 것이라고 떳떳하게 고개를 쳐들고 사는데.” 금방이라도 음성이 높아질 거라 여겼던 그는 의외로 사무치게 낮아졌다. 분노 때문인지 손끝이 잘게 떨리고 안광이 한층 사나워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화를 내지 않는 모습에 렐리아는 이런 부분은 알고 있던 아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외관은 천애지각일 만큼 판이했으나 속 알갱이는 그대로인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약해질 렐리아가 아닌지라 그녀는 싸우자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천 년이든, 만 년이든 난 현실감 없어서 잘 모르겠고. 왜 이런 학살을 하는 건데! 꼭 이런 방법으로 내쫓아야됐었냐고. 평화적인 방법도 얼마든지 있었을 거 아냐!” “평화적인 방법?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그들이 순순히 터전을 내놓고 물러나줄 거라 여겨? 공포밖에 없잖아. 지금 봐, 그렇게 호화스럽고 시끄럽던 수도가 텅텅 비어있어. …살기 위해서 떠난 거야. 인간들이란 참 알기 쉽지.” 다소 냉소적인 말을 하며 세브로웰은 렐리아에게로 한걸음 다가섰다. 그는 상체를 굽히며 렐리아의 팔을 강하게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침대 시트가 출렁이며 그 위로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긴 은빛머리칼이 뭉텅이로 흐트러졌다. 렐리아는 여전히 제 팔을 꽉 쥐고 놓아주지 않는 세브로웰을 올려다보았다. 흥분한 거라 여기고 바로 검을 소환해내려 했으나 생각보다 그는 차분해보였다. 아까의 헤까닥 돌변할 것 같던 모습은 온데 간 데 없었다. 기세피우며 제 위에 올라탄 것치고는 이어진 말은 호소에 가까웠다. “…우린 닮았잖아. 네가 공감해주지 않는다면 누가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아? 억울하고 속이 타들어가는 건 난데 왜 내가 그들의 고통까지 생각해야 되냐고.”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남의 땅 빼앗고 왕국 지은 놈들이 백프로 잘못이지. 근데 그걸 돌려받는 방식이 틀렸다고.” “렐리아, 난 내 방식이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아.” 코가 닿을 것처럼 숙여진, 말 그대로 바로 코앞에서 그의 황홀한 입술이 웃어보였다. 렐리아는 아미를 찌푸렸다. “너 존나 문제있…” “하지만 미안. 너에겐 사과할게.” “…어이없네. 왜 나한테 사과하냐? 두 눈 멀쩡히 뜨고 가족 잃은 유가족들한테 사과해야지.” “네가 상처받았다면 사과해야지.” 세브로웰은 제 손아귀에 부러질 듯한 가는 나뭇가지 같은 팔을 부드러이 놓아주었다. 대신 그녀의 흰 목을 따라 마구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들을 옆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제법 자상한 손길에도 렐리아는 시큰둥하게 세브로웰과 눈을 마주했다. “렐리아 네가,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학살이라고 생각한다면 학살이겠지. 그리고 네가 그 일에 눈살 찌푸려한다면 다신 그러지 않을게. 네게 약속해.” “…그걸 어떻게 믿어?” “그럼 이제부터 쭉 네가 내 옆에서 감시하면 되잖아. 내가 그러나 안 그러나.” 이 짓궂으면서도 친절한 모습은 역시나 저가 기억하는 아럼프가 맞았다. 동시에 애타고 처연한 기색을 드러내는 눈동자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갤 숙이던 그날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나에겐 네가 필요해.” “왜 내가 필요한데? 너도 내 몸을 노린다든가 그런 거면 얼씬도 마. 이 몸은 절대 안 뺏길 거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네 몸 노리는 건 맞는 것 같아. 다른 의미에서 말이야.” 휘장에 반쯤 걸쳐져있던 그의 몸이 침대 안쪽으로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침대를 둘러싸던 휘장이 내려왔다. 완벽하게 시각적으로 고립된 공간은 캄캄했다. 렐리아는 여전히 저를 뭉개고 있는 굵다란 남자허벅지를 슬쩍 내려 봤다가 어둠속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난 이목구비를 노려보았다. 아무것도 모른단 듯이 조각 같은 아몬드형태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지만 영 엉큼해 보이기만 했다. 이런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상황이 마음한편으론 달가우면서도 불쾌했다. 이 상황에서도 부모님의 얼굴이 떠오르는 건 비정상적인 걸까. 렐리아는 전혀 분위기를 타지 못했으나 목선을 따라 집요하게 어루만져짐에도 그 손길을 가만히 받고만 있었다. 도드라진 쇄골을 훑는 긴 검지에 그제야 흠칫, 반사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가슴팍에 두 손을 가져갔다. “네가 싫다면 나도 아무 짓 안할 거니까 걱정마.” 하지만 그 말이 되레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게 되었다. 역시 밀어내지 못했다. 좋은 기회 라는 생각이 머리를 점령했다. 몸도 썩더니 머릿속까지 단단히 썩었나보다. “흐음…, 이젠 밀어내지 않네.” 그런 그녀를 세브로웰은 단번에 알아채고서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힘껏 밀어낼 거라 여겼던 그녀의 손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 오히려 포기한 듯 순순히 내려가 침대시트만 그러쥐고 있었다. 이렇게 온순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세브로웰은 환희에 젖은 눈으로 그녈 내려다보았다. “뭐 때문에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야?” “…….” “나 말이야. 렐리아 네가 온전히 내 것이 되어준다면 이 땅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아. 그런 기분이야.” 세브로웰은 오랫동안 빼앗긴 걸 드디어 되찾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소원했던 것을 마침내 손에 쥔 기분은 언제 맛보아도 좋은 것이다. “아, 좋아해.” 그 나지막한 숨결이 내려앉은 귓바퀴에서 알게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짐작이라도 한 듯 말이다. 렐리아는 비스듬히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닫았다. 솔직한 입이 뭐라 지껄일지 몰라 아예 원천봉쇄해버린 것이다. 말없이 눈만 내리깔고 있는 렐리아의 모습에 세브로웰은 이상하게도 흥분이 동했다. 그녀의 희고 부드러운 목가에 닿아있던 손이 굴곡진 몸매를 따라 쓸어내려갔다. 소름끼치는 전율이 그의 손끝부터 야금야금 삼켜갔다. 그의 입매도 덩달아 환하게 휘어 올라갔다. “…내가 마지막이야. 널 가지는.” ‘아. 네가 마지막이야.’ 이 새끼랑만 하면 이제 돌아가겠구나, 렐리아는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이번엔 틀림없이 그 신이라는 작자가 나타나 이 지긋지긋한 게임세계에서 꺼내줄 것이다. 마지막까지 공작을 보지 못하고 가니 시원섭섭하기도 하다지만 렐리아는 현실에 순응하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무언의 허락이었다. 곧바로 눌러오는 달짝지근한 숨결이 입 안 가득 퍼져왔다. 젖어있는 혓바닥이 입술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서 그녀의 입술에 타액이 흠뻑 묻어났다. 혀가 오가는 느낌은 익숙지 않았으나 렐리아는 그의 달뜬 흥분을 받아주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제 몸 여기저기를 만지는 감각도 이젠 그다지 소름 돋지 않은 것이 정신력으로 슬슬 적응해가나 보다. 맞댄 서로의 입술사이에 뜨거운 습기가 가득 채워지고, 렐리아는 그의 아래에 깔려 입술만 빠끔빠끔 움직였다. 그동안 세브로웰은 성실하게 그녀의 입술을 빨아당기며 그녀 뺨에 비스듬히 제 콧날을 묻었다. 고개는 서서히 돌아갔다. 격정적인 건지, 성급한 건지 그의 키스가 점점 빨라져갔다. “……하.” “흐…. 하아.” 유연하게 고개를 몇 번 틀다가 다시 편한 자세를 찾고서 긴 키스를 이어가길 몇 번이나 했을까. 세브로웰이 깊게 숙이고 있던 고갤 들어 올리자 붙어있던 두 입술이 떨어졌다. 얼마나 눌러대고 맞붙어있었는지 문어의 빨판처럼 떨어질 때 끈적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두 눈이 반쯤 풀어헤쳐진 그녀의 옷매무새를 담았다. 하필 옷도 새하얘서 여과 없이 드러난 가냘픈 어깨와 허벅지가 더욱 순결하게만 보였다. 정숙한 처녀를 눈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그는 먼저 욕정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발끝부터 탐해갔다. 큼지막한 두 손이 이윽고 창백한 발등을 감싸 쥐었다. 스스로 덫으로 기어들어가는 아둔한 맹수처럼 그는 발끝에 입을 맞추며 헌신적인 척 굴었다. 드디어 가진다. 세브로웰은 그녀를 누르고 마침내 천천히 하체를 움직였다. 그로 인해 벌어진 그녀의 두 다리사이에는 그의 끝없는 불길한 욕망이 자리해있었다. 0117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렐리아는 멍하니 어두컴컴한 사위에 집중했다. 여기가 어딘지 생각하다가 정신을 놓기 전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분명 관계를 가졌었다. 거친 숨소리가 가득 채워진 공간에서 몇 번이고 그 남자아래에 짓눌려 흔들렸었다. 찬연한 은빛이 흐르는 짧은 머리칼이 따라 흔들리던 것도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문제는 왜 정신을 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단 거였다. 관계 중에 잠이 든 건가 싶다가 렐리아는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낮은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어?” “…….” 턱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있던 세브로웰이 가늘게 웃으며 손을 뻗어왔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준 후에도 계속 뺨을 감싸고 어루만져주었다. 렐리아는 그 손길에도 그저 멀뚱멀뚱한 시선을 보냈다. 이상했다. 몇 시간이 흐른 거냐고 물으려했으나 퍼석 마른 입새로 흘러나오는 건 쉰 소리에 불과했다. 단지 목이 잔뜩 쉬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목소리가 안 나왔다. 당혹스러움도 잠시 두려운 생각이 설핏 머릿속을 스쳐지나갈 때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해?” 누그러진 봄볕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걱정스런 눈길이 닿자 한껏 인상을 쓰고 있던 렐리아는 목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아.’ 아무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렐리아는 목을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그제야 세브로웰은 짐작이 가는지 그녀를 향해 반쯤 몸을 일으켜보였다. 여전히 오른손으론 그녀의 뺨을 다정히 쓸어주면서 그는 렐리아의 배꼽까지 내려간 이불을 탐스런 젖가슴위로 끌어올려주었다. “성대를 끊어버렸어. 렐리아, 안 나오는 게 당연해.” “…….” “그 골치 아픈 검을 불러내서 또 난리라도 치면 큰일이니까, 나로선 어쩔 수 없었어.” 내용을 모른다면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줄 알만큼 나긋나긋한 음성이었다. 렐리아는 그 말에 등골이 오싹해져서 꿈쩍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끊어졌다고? 하고 반문하려다가 뒤늦게 얼떨떨하게 목을 부여잡은 채 켁켁 거렸다. 목소리가 나오도록 끊임없이 목에 힘을 주었으나 피가래가 끓듯 비린 쇠맛만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계속 그래봤자 목만 더 망가져. 그러니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나한테 집중하는 게 어때?”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이 렐리아의 얇은 턱을 훑으며 떨어져나갔다. 그녀머리에서 조금 위에 위치해있던 그가 고갤 숙이더니 옆머리에 키스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실처럼 가는 머리카락 속에 파묻혀있던 귓바퀴를 찾아내 혀로 핥기 시작했다. 도드라진 귀의 윤곽을 따라 희롱하는 단단한 혀에 렐리아는 바로 손을 뻗어 그 이마를 세게 밀어내고선 몸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침대에서 내려가려했으나 바로 뒤에서 뻗어져온 굵은 팔에 허리가 얽매였다. “어디가게, 화장실?” 웃음기가 스며든 목소리가 타액으로 젖은 귀에 닿아 축축하게 느껴졌다. 렐리아는 소름이 돋았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그 팔을 잡아 뜯을 기세로 쥐었는데 어째 꿈쩍도 안했다. 연붉은 손톱자국만 팔뚝위에 할퀴듯 났을 뿐이다. “많이 당황한 것 같네." "…!" "걱정마, 네 힘을 뺏은 건 아니니까. 네 힘에 구속마법을 걸어놔서 앞으론 일정한 힘만 사용할 수 있어. 일반 인간여자정도로 제약해뒀으니 힘으로 나한테 못 이겨.” “…….” “떠는 거야? 무력해진 렐리아도 귀엽네.” 렐리아의 꽉 쥔 주먹에서부터 진한 떨림이 올라오고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배반감과 알 수 없는 수치심이 얼굴에 피어올랐다. 적어도 이 세계와 타협하기위해 노력해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힘을 못 쓴다. 이젠 현실이랑 뭐가 다르지? 홱 머리를 쳐들고서 렐리아는 바로 제 어깨 뒤에 위치한 그의 얼굴에 주먹을 뻗었다. 허나 그의 다른 손에 의해 가볍게 막혀버렸다. 오히려 잡힌 손목을 강아지풀 흔들듯 이리저리 흔드는 손길에 렐리아의 남은 자존심마저 툭 꺾였다. ‘씨발새끼….’ “뭔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네.” 끓어오르는 분노가 눈동자에 맺힌 것처럼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아무리 악을 쓰듯 입을 벌려도 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러다 질식해서 죽지 않을까싶을 만큼 갑갑해서 몸부림을 치니 그는 순순히 저를 놓아주었다. 렐리아는 신경질적으로 근처에 있던 베개를 쥐고 그의 머리에 세게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단정하게 흘러내린 은발이 크게 흐트러졌다. 그것도 잠시 세브로웰이 바로 베개를 낚아채 빼앗고서는 침대 위로 대충 던져버렸다. 렐리아는 소리 없이 쌍욕을 크게 내질렀다. 때려도 푹신푹신할 뿐 그다지 위력을 내지 못해서 더 분통이 터지는데 거기다 빼앗기기까지 했으니 당연했다. 베개로 수천 번은 그를 내리쳐도 모자랐다. 가슴속에 누가 불을 붙여놓은 것처럼 활활 타들어만 갔다. 속에서 거멓게 피어오르는 연기가 목구멍을 콱 막고 있는데 어떻게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금방이라도 답답해서 죽을 것 같은 그녀의 발치에 별안간 경고처럼 차디찬 목소리가 떨어졌다. “렐리아. 난 뭐든 내 말에 순순히 따르는 걸 좋아해.” 뻗어진 세브로웰의 손바닥이 그녀의 어깨를 눌러 그대로 침대위에 쓰러뜨렸다. 가볍게 허물어진 몸에 렐리아는 저가 다 놀라 여린 입안의 살만 깨물었다. 그동안 그는 손가락 하나하나에도 힘을 불어넣으며 작신작신 무른 어깨를 눌러보였다. “네가 그 검을 불러낼 생각이 없다면 다시 목을 고쳐줄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네 표정만 봐도 네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거든. 그렇게 날 증오하고 노려봐도 달라지는 건 없어.” 렐리아는 몸을 짓누르는 손을 힐끗 내려 봤다가 눈을 들었다. 튼실한 근육으로 이뤄진 팔을 지나쳐 강직한 어깨를 가진 은발사내가 비스듬히 웃고 있었다. “내 것이 되어도 난 여전히 널 존중해줄 거야. 네가 가지고 싶은 것, 원하는 거 모두 이뤄줄 수 있어. 그런데 네가 자꾸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태도가 달라지겠지.”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내려앉은 또 다른 손이 렐리아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 “…….” “당연히 상냥하게 다뤄주길 원하겠지.” “…….” “그러면 너도 그렇게 대우받도록 행동해야지 않겠어?” ‘적어도 강제로 덮치지는 않는단 얘긴가. 이걸 참 고마워해야할지 모르겠네.’ 렐리아는 삐딱하게 생각하다가 퉤, 하고 그의 안면에다 침을 뱉었다. 저 황홀한 낯이 쌍코피를 질질 흘릴 때까지 두들겨 패는 상상을 잠시 하다가 렐리아는 고집스레 눈을 내리깔았다. 이 정도 선에서 봐주는 거다, 하고 말하듯이. 세브로웰은 제 왼뺨에 묻어있던 투명한 타액을 손가락으로 거둬내었다. 그리고는 입으로 가져가 뾰족하게 세운 붉은 혀로 날름 핥아먹었다. ‘미친 놈…’ 더럽다고 질색하는 렐리아의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세브로웰은 어여쁘게 웃었다. 네가 주는 건 뭐든 좋아, 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렐리아는 그가 덮어주는 이불 속에 완전히 들어갔다. 세브로웰이 꼴 보기도 싫었지만 그에게 나체 일부분을 보여주는 건 더 싫었다. 아닌 척 싱긋 웃으면서도 탐욕스런 시선이 맨가슴에 닿을 때마다 수치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속옷이라도 달라고 말도 못했다. 애당초 속옷은 어디다 치워버렸는지 아예 줄 생각도 없어보였다지만. 머리까지 덮고서 잠이나 청해야지 싶었다. 어차피 그가 굳이 안 보내줘도 자신은 돌아가게 돼있었다. 클리어 조건을 완벽하게 끝냈으니 이번에야말로 눈을 뜨면 현실세상일 것이다. “렐리아. 벌써 자는 거야?” 이불너머로 들려오는 감미로운 목소리가 고스란히 귓전에 스며들었으나 렐리아는 모른 체했다. “배가 안고플 리 없을 텐데, 뭐 좋아.” 세브로웰은 자신을 외면하듯이 돌아누워 버린 여인을 바라보다가 이불자락을 쥐었다.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게 꽁꽁 숨은 것이 불만스러워 이불을 거둬내자 동그란 뒤통수가 가장먼저 보였다. 갈라진 긴 은발사이로 뽀얗게 드러난 목덜미와 유선형을 그리는 뒤태는 아름다웠다. 골반에 걸쳐진 이불을 더 끌어내리려 할 때 별안간 그녀가 고갤 돌렸다. “…….” 놔라, 하고 말하듯 사나운 눈초리가 쏘아졌다. 시린 분노가 담긴 벽안을 부라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에 세브로웰은 그저 한번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서까지도 강한 모습을 보여줄 줄은 몰랐다. 말을 못하는 것에 큰 충격에 빠져 한동안 공황상태에 놓여있을 거라 여겼는데 너무나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실망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세브로웰은 드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그녀의 향긋한 체취에 만족하기로 했다. 제게 안겨 내뱉던 달뜬 숨과 미약한 땀 냄새가 아직까지도 대기 중에서 느껴졌다. 꼭 처음 그녀를 만나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어딘가 달큼한 냄새로 가득찬 방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왠지 웃음이 멈추질 않았었다. 그녀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에 상황은 더욱 재미있어졌었다.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좋았으나 세브로웰이 좋아하는 모습은 따로 있었다. 바로 그녀가 깊숙한 내면에 상처를 받아 기력 없는 모습을 보일 때였다. 처음 그것을 느낀 건 분홍머리 여자에게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상처받았을 때, 일 것이다. 내리깔아진 푸른 눈과 고집스레 다문 입술이 여린 속내를 감춰놓은 것만 같아서 억지로 벌려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었다. 보듬어주고 싶은 반면에 살살 망가뜨려보고 싶은, 어디까지나 즉흥적인 충동이었다. 하지만 자기 것에 흠집 나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성미 때문에 육체적으로 상처를 주는 짓은 할 수 없었다. “알겠어. 안 건드릴게.” 어쩔 수 없다는 양 세브로웰은 이불을 놓아주었다.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흐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은 몇날 며칠이 흐른 건지도. 렐리아는 하루 종일 그의 감시 하에 방안에만 있었다. 낮인지 밤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가끔 식사를 하고 잠들고 씻는 정도의 삶을 살아갔다. 신은 결국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기대가 허물어질수록 렐리아의 마음도 공허해져만 갔다. 답답하지도, 화가 나지도, 먹질 않아도 허기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얌전해져만 가는 렐리아의 모습에 가장 흡족해하는 건 당연하게도 세브로웰이었다. 그동안 렐리아가 그와 같은 침대를 쓰며 알게 된 사실은 완벽한 피조물 같은 그의 몸에도 흉터가 있다는 것 정도였다. 왼쪽 발바닥에 난 흉한 화상자국을 그가 누워있는 동안 우연히 발견했었다. 자신의 상처도 말끔하게 치료했던 그일 텐데 어째서 화상자국은 그대로 남겨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굳이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다. 알게 된 다른 사실은 공작에게서 선물 받은 목걸이가 어디에도 없단 거였다.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가물가물했다. 합의하에 관계를 맺을 때 세브로웰이 제 옷을 벗기면서 목걸이도 어디다 치운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은 했다. 그 외에 알게 된 사실은 없었다. 내내 잠만 자느라 알 겨를이 없었다는 게 옳았다. 그런 렐리아에게 우연찮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 건 나흘째하고도 반하루가 지난 새벽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잠만 자는 렐리아 때문에 세브로웰은 그녀가 탈출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여러 번 자리를 비웠었는데 날이 갈수록 방을 비우는 시간이 늘어갔다. 어쩔 때는 체감상 한 시간이었다가, 어쩔 때는 체감상 세네 시간이 지나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렐리아는 바로 그때를 노렸다. 잠이 든 척 새벽까지 눈을 감고 있다가 세브로웰이 방밖으로 나선 후 바로 움직였다. 이제까지 세브로웰은 그녀가 필요하다 여기는 것은 대부분 가져와주었었다. 그 중 속옷은 간신히 얻은 것이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만 있을 건데 뭐하러 입냐는 그에게 위생상 문제를 들먹이며 온종일 어필했었으니 말다했다. ‘…대신전이라고 했으니 사제가 한명이라도 남아있겠지.’ 나가면 사제에게 도움을 요청해 공작에게 편지를 하거나, 아니면 혼자 힘으로 탈출할 생각이었다. 물론 괴력이 사라진 지금상태로 무사히 탈출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렐리아는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한참을 뛰어서야 방 끝에 자리 잡은 거대한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손으로 밀어봤으나 육중한 크기의 문은 꿈쩍도 안했다. 힘만 있었다면 열 필요도 없이 부수고서 탈출이 가능했을 텐데 고작 이런 거에 막히니 욱 짜증이 치밀었다. 만일 밖으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공작에게 가리라. 몸으로 갈 수 없다면 편지라도 써서 제 위치를 알릴 생각이다. 그에게 글을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공작…공작. 공작.’ 그를 생각하며 렐리아는 힘껏 어깨로 문의 한 짝을 밀어댔다. 조금씩 밀리는 것 같자 바로 등짝이 얼얼해질 만큼 등으로 세게 부딪쳤다. 미세하게 들썩거리는 문사이로 푸른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조금 만 더, 좀만 더!’ 어금니를 사리문 채 렐리아는 한 번 더 몸을 부딪쳤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틈이 생겼다. 렐리아는 얼른 닫힐 새라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걸음을 멈췄다. 새하얬을 고풍스런 복도의 벽지가 검붉은 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따로 마법처리를 한 건지 역겨운 시취가 풍기진 않았으나, 대리석바닥 위에 널린 부패한 시체들과 끈적하게 눌어붙은 피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어보였다. 0118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굳어있는 발을 떼기가 힘들었다. 꽝꽝 언 호수위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발바닥의 여린 가죽이 혹독한 냉기를 내뿜는 얼음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선뜻 한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얼마동안 괴여서 썩어있던 핏물인지 그 색이 탁했다. 한때는 살아있었을 사람이 흘렸을 그 핏물덩이 위를 맨발로 걷는다는 건 웬만한 담력을 가진 이가 아니고서는 힘들 것이다. ‘가상세계…’ 렐리아는 힘겹게 되뇌며 바닥을 걷기 시작했다. 찰팍 찰팍 찐득한 핏물이 맨발바닥에 들러붙는 기분은 생각보다 끔찍했다. 괜히 목덜미가 쭈뼛 서는 기분이라 렐리아는 현실적인 감각에 욕을 해야만 했다. 즐비해있는 시체상태는 쳐다보기도 싫을 만큼 끔찍했다. 그나마 반듯하게 목이 잘려죽으면 최소 양반이었다. 얼굴이 반토막이 난 사람들이 몇몇 눈에 띌 때마다 렐리아는 꾸역꾸역 올라오는 토기와 구역질을 넘겨야만 했다.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랍시고 저를 여기다 보낸 신을 탓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시체를 자세히 보지 않으려 렐리아는 거의 외면하다시피 빠르게 걸었다. 혹시나 뛰다가 이 피바다 위에 넘어진다면 죽고 싶은 기분이 들 거라 여겼기 때문에 걸음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다행히 시체와 닿지 않은 채 렐리아는 무사히 그 복도구간을 지나쳐갔다. 사람들이 떼로 죽어있던 복도에서 멀지않은 코너를 도니 제법 양호한 복도가 나타났다. 어둠이 깔린 음산한 복도 자체만으로도 무서웠으나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창문에 반쯤 걸쳐진 시체나 하반신이 잘린 시체가 눈에 띄긴 했지만 아까의 그 공포스런 광경보다는 참을 만했다. 윤기 나는 흰 대리석바닥에 렐리아의 발바닥에 묻은 피가 길게 묻어났다. 걸음을 재촉할 때마다 핏물과 매끄러운 바닥이 마찰하며 쩍쩍 소리가 났다. 여러 차례 복도를 지나는 동안 느낀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대신전의 규모가 너무 광활하다는 것이었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어두운 복도를 헤매는 동안 공포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처럼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까마득한 미로 속을 헤매면서 렐리아는 창문을 주시했다. 그래야 방향감각을 잃지 않을 것 같단 생각에서였다. 성 내부도 그렇다지만 창문 밖은 더 조용했다. 파리한 달빛이 내려앉아 더 스산해 보이는 풍광은 창백한 소음이 에워싸고 있는 것만 같았다. 본래 힘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굳이 성 내부를 돌아다니며 계단을 찾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창문에서 뛰어내리면 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렐리아는 처음 이 세계에 들어와서 지극히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을 했다. ‘뛰어내렸다가 죽으면 어떡하지….’ 평범한 인간여자가 낼 수 있는 힘으로 단순히 제약을 걸어두었다고 했지만 혹시 또 몰랐다. 힘이라는 게 악력뿐 아니라 방어능력이나 전반적인 신체능력에 해당될 수 있으니 말이다. 괜히 시험 삼아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졌다가 억울하게 사망할 수는 없었다. 그때, 돌연 이상한 굉음이 천장에서 들려왔다. 살 떨리는 감각이 몸뚱이를 훑고 지나갔다. 심하게 떨리는 두꺼운 유리창과 석조기둥들만 봐도 심상치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렐리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갔다. 하필 평범해졌을 때 이런 상황에 들어서니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헉, 헉 하고 쉰소리를 내며 렐리아는 확실히 예전 몸이 아니라는 기분을 받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느껴보지 못한 폐활량이었다. 공기가 아니라 물이 폐부에 들어찬다고 해도 믿겨질 만큼 벅찼다. 끝없이 펼쳐지는 복도가 괴물의 위장처럼 느껴져서 닭살이 피부를 뚫고 수시로 올라왔다. 그러다 특색 없는 복도 끝에 자리한 계단을 발견하게 되자 렐리아는 짙은 안도감을 느꼈다. 폭이 널찍한 계단은 층 중간마다 계단참이 있었고 그 아래층에는 네 갈래로 나뉘는 복도가 새로 또 시작되었다. 렐리아가 계단을 타고 중간쯤 내려왔을 때였다. 순간 위층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멈칫 발이 굳었다. “그쪽으로 내려가면 안 돼. 아직 치우지 않아서 지저분하거든.” 멈춰선 렐리아는 뻣뻣해진 목으로 애써 비스듬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계단 위에 서있는 남자가 보였다. 바람 한 점 없는 데도 그의 은빛머리칼이 약간 일렁거리는 것이 아마 기분이 좋지 못해 저조한 기운이 발산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시 올라오라며 오만하게 눈을 빛내는 그는 이 공간을 지배하는 단 하나뿐인 지배자답게 여유로웠다. “이리와, 렐리아.” 어둠속에서 그가 느른하게 운을 뗐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돌아오면 용서해줄게.” 제게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그는 감히 용서라는 말을 당당히 입에 올렸다. 오랜만에 욱하고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오를 때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발소리가 렐리아의 귀를 잡아끌었다. “아……이런.” 누군지 이미 알아차린 건지 세브로웰이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탄식했다. 그에 반해 입가는 환하게 끌어올려져 기괴하고 이질적인 표정이 되어있었다. “누가 침입했나 싶었는데, 설마 정면으로 결계를 뚫고 들어올 줄이야. 세월이 흐르더니 많이 과격해졌네요, 가브리나.” “…….” “아니 원래 그런 이중성을 가졌었나.” “세브로웰.....” 렐리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계단 아래를 응시했다. 태양빛을 담아 짠 베를 길게 늘어뜨린 것처럼 긴 금발위로 희미한 광채가 감돌았다. 몸에 걸친 흰 옷자락을 유유히 흩날리며 남자가 그늘 속에서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섬세하게 곡선을 그리는 문양이 금수로 가득 메워진 순백의 수의가 그렇게 고귀해보일 수가 없었다. 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을 구원해주었던 그 자였다. 싱그러운 이목구비가 신을 찬미하며 빚어놓은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짙은 황금색 눈을 가라앉힌 그는 혼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저 자가 네가 알고 있는 공녀의 본체야, 렐리아. 공녀의 몸을 점거한 채 이제까지 네게 친근한 척 수작질을 부려왔던 그 장본인이라고.” 별안간 들려온 세브로웰의 잔뜩 벼린 목소리에 남자의 눈빛이 마구 흔들렸다. 그는 굳은 티를 내며 섣불리 입술을 떼지 못했다. 유려한 변명이라도 생각한 건지, 뒤늦게야 깊은 울림을 담은 목소리가 성대를 타고 흘러나왔다. “……렐리아.” 역시 언니가 맞구나. 충격과 허탈함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 반걸음 물러서버렸다. “어서 내게로 와, 렐리아.” 세브로웰은 경계어린 태세를 풀지 못하고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모았다. 백사장의 모래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고운 입자들이 한눈에 보일만큼 그의 주위에서 낮게 일렁였다. 은은한 달빛에 휩싸인 것만 같았다. 이에 금발의 사내도 곧장 환한 금빛무리를 왼손에 끌어 모았다. 터져 나오는 빛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팔을 휘감고 전신을 집어삼켰다. 계단중간에 서있는 렐리아에게로 그가 한걸음을 내딛자 바닥이 미약한 빛을 뿜으며 수십 개의 원형 마법진을 그려내었다. “세브로웰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날 믿어줘. 모두 설명해줄게.” “저 자는 위험해. 당장 안전한 곳으로 이동……, 렐리아?” 렐리아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세브로웰에 대한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지금 저가 그 말을 모조리 믿을 거라 여긴다면 오산이다. 계단아래에 서있는 금발의 사내를 향해 렐리아는 힘껏 계단참 끄트머리를 박차며 뛰어올랐다. 붕 떠오른 긴 머리칼이 느리게 휘날리며 잠시 허공에 부유했던 몸이 아래로 추락했다. 세브로웰에게 돌아가 수치심을 느낄 바엔 차라리 육체가 목적이라도 저 남자한테 가는 게 백배 낫다. 자신의 성대도 잘랐는데 아킬레스건을 자르지 않는단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렐리아는 두 눈을 덮치는 눈부신 빛을 직시했다. 환하게 터져 나오는 금빛이 이윽고 저를 삼키며 동시에 받아주는 든든한 품이 있었다. 안도감 때문인지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저를 부르는 세브로웰의 외침이 점점 아득해지더니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다. 얇은 막을 통과한 느낌이었다. 고요한 정적이 귓가를 에워싸자 렐리아는 그제야 눈을 떴다. 살짝 허공에 떠있던 발이 스르륵 지면에 닿았다. “……?” 누군가의 방인 것 같았다. 크림색의 우아한 커튼이 흘러내린 창은 커다랬고 연한 금색무늬가 도금된 벽지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새하얀 문이 자리 잡은 곳에서 멀찍이 떨어져있는 침대에 렐리아의 눈길이 스치듯 닿았다. ‘…언니다.’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렐리아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죽은 듯이 조용해서 자는 게 아니라 기절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의심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황금을 바른 듯한 금빛머리칼을 늘어뜨리고 선 남자가 있었다. “일단 뭐라도 입어야 될 테니까 따라와.” 잠시 침묵한 채 서있던 그가 마침내 움직임을 보였다. 이곳에 평소 자주 드나들었던 건지 침실과 연결되어있는 드레스룸으로 자신을 안내했다. 렐리아는 얼쯤한 시선을 감추며 사내의 건장한 어깨를 타고내린 머리카락에 시선을 두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느작하느작 윤기가 감도는 게 찬란해보였다. 그는 삼면의 벽을 차지하고 있는 옷장 중에서 가장 무난한 드레스로 꽉 찬 옷장을 열어 여러 옷을 보여주었다. 렐리아는 말을 못하기에 뭐가 좋다, 싫다 얘기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애초에 발바닥은 시체의 피로 굳어있었다. 발가락사이에 껴있는 진득한 핏덩이 때문에 뭘 입든 간에 발만 죽어라 신경 쓰일 것이다. 그 찝찝한 표정을 알아차렸는지 뒤늦게 사내의 황금색 눈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제 발등에 닿았다. “더러워졌구나.” 그는 몸을 숙였다. 오래전 인터넷기사에서 본 교황이 노숙자의 발을 씻겨주는 사진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렐리아가 괜찮다고 손을 휘젓자 그제야 남자는 깨달은 게 있는지 속옷만 입고 있는 그녀의 몸에서 시선을 거뒀다. “이런 모습으론 불편할 테니까.” 젊은 청년모습과는 달리 겸허한 목소리가 또 한 차례 울리더니 순식간에 눈앞의 남자몸이 여성으로 뒤바뀌었다. 살짝 몸을 굽히고 있어도 여자치곤 훤칠한 키였다. 175 정도 될까, 늘씬하게 뻗은 몸매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등을 뒤덮는 환한 금발과 진한 황금을 녹인 것처럼 무겁게 빛나는 금색눈동자는 인간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같은 여자라 그런지 바로 안도감이 들며 느즈러지고 마는 경계심이었다. 렐리아는 부드러운 손이 제 두 발을 덮기 무섭게 깨끗해지는 걸 느꼈다. 찝찝하던 감정이 모두 소멸되고 남은 것은 하얀 맨발뿐이었다. “다음은 목이겠지.” ‘이 목소리...!’ 귀에 익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놀라고 말았다. 바로 알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어두운 공간 속에서 안내방송처럼 흘러나오던 목소리였다. “묻고 싶은 게 많을 테지만 그 목부터 치료해줄게.” 나긋하게 웃으며 여인이 잠시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풍만한 가슴 위로 떨어져 내리는 금발은 다이아나의 금발과는 색부터가 오묘하지만 명백하게 달랐다. 진품과 가품처럼, 그 영롱한 광채는 따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따스한 손끝이 목에 와 닿았다. 렐리아는 치유 받는 느낌이라는 게 어떤 건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실히 느꼈다. 간절하고 애틋하고 성수로 몸을 씻는 것처럼 성스러운 느낌이었다. “몸에도 심각한 마법이 걸려있어. 생명을 갉아먹을 수 있는 부작용이 따르는 건데…보나마나 세브로웰 그 아이가 저지른 짓일 테지.” “…아.” 목소리가 나온다. 렐리아가 어색하게 목을 눌러보며 소리를 낼 때다. “심장에 가까운 위치에 손을 가져다대도 되겠니?” 또 한 번 가직한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렐리아는 존재자체만으로도 눈부신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여성의 몸으로 바꿨다고 해도 본체는 남자가 아닐까 싶어서 섣불리 허락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숨달린 일에 왼쪽가슴을 만져지는 게 뭐 그리 대수겠냐만은 아무튼 그랬다. “드래곤은 한 성별에 구애되지 않아. 인간을 초월한 존재가 번식에 집착할리 없잖아.” 부드러운 설명조에 렐리아는 그제야 수긍하며 브래지어 끈을 끌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저를 치료하려는 게 아니라 심장을 빼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드래곤이라는 게 세브로웰같이 남을 현혹시키는 외모와 말씨로 손쉽게 인간을 속이면서 몸을 빼앗는 종족일지 모르니 말이다. 렐리아는 들어 올렸던 두 팔로 가슴을 감싸고서 뒤로 물러났다. 날카로운 눈초리로 눈앞의 아름다운 존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으면서 말이다. “정말 당신이 언니…예요? 아니, 그보다도…! 날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쳐넣은 게 당신 맞지? 목소리…당신 목소리 맞잖아!” 경계하며 물러서던 렐리아의 등에 서느런 옷장 문이 닿았다. 양각이 되어 두드러진 문짝무늬가 고스란히 등으로 느껴졌다. “나는 황금의 드래곤 가브리나.” 입을 닫고 있던 여자가 서서히 입술을 벌렸다. 어딘가 서글픈 눈매가 단호하면서도 애처로웠다. “이 땅위에 초대국왕을 도와 나라를 건국한 수호드래곤이자, 네가 알고 있는 공녀 다이아나이기도 하지. 그리고 너에겐 갚지 못할 큰 은혜를 입은 자이기도 해.” 0119 / 0172 ---------------------------------------------- 퀘스트가 종료되었습니다 “은혜…? 나 그런 거 모르고, 아무튼 언니가 날 여기다 집어넣었다는 거잖아요?” 렐리아는 경계하며 물러났던 걸음이 무색하게 다시 그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빠르게 걸어와 백옥같이 하얀 팔목을 덥석 붙잡았다. “나, 클리어 했어요. 전부 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보내줘요.” “…….” “제발…! 다 클리어 했잖아!” “미안해. 난 널 원래세계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 “…뭐?”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정지할 뻔한 뇌를 애써 이성으로 두들겨 깨워서 렐리아는 더욱 억세게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거짓말하지 말라고 협박을 가하는 것처럼 잔뜩 힘을 실은 손이었지만 손끝은 영락없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브리나는 눈을 내리깔아 자신을 꽉 붙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에서 안타까움이 절로 배어나왔다. “난 네가 그런 식으로……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원을 빌기 위해 육체적 관계에 목매어왔다는 걸 아주 뒤늦게 눈치채버렸어.” 라델리우스의 침실에서 그와 관계를 가지려하던 렐리아를 간신히 잠재워 말린 것은 그 전날의 대화를 들은 덕분이었다. 렐리아에게 선물했던 금반지, 그것은 단순히 착용자를 보호할 수 있는 실드마법뿐 아니라 가브리나의 또 다른 눈이 되어주었던 것이었다. “네게 모든 걸 설명해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하지만 내가 너무 늦어버렸어. 네게는 그 어떤 말로 사과해도 모자라.” 슬프게 가라앉은 눈은 마치 가여운 것을 내려다보는 것 같아서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허나 곧 성스러운 흰 옷자락을 쥐어뜯을 듯이 매달렸다. “…아니, 하, 그냥…집에 돌려보내달라고. 이 지긋지긋한 게임 속에서 내가 얼마나 굴렀는지 알아? 보내달라고! 어!! …사람 억울하게, 진짜.” “렐리아. 여긴 게임이 아니야.” “……….” “현실이야.” 서글픈 목소리가 내린 선고는 그 어떤 말보다도 잔인했다. 렐리아는 발을 떨었다. 금이 가있는 얇은 얼음장위에 서있는 다면 이런 기분일까. 한번 빠지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깊은 심해가 발밑에 자리한 느낌이었다. 아찔한 현기증이 올라온 얼굴로 렐리아는 뒤로 물러났다. 혼란한 정신 속을 하염없이 헤매다가 울컥 눈가에서 짠 기운이 치밀어 올랐다. 아닐 거다, 라는 강한 최면은 여전히 머릿속을 지켰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경험이 자기최면을 좀먹어갔다. “이 세계는 현실이야.” “현실……, 아냐. 마,말이 안 되잖아? 게임무기도 되는데…몬스터도 나오고, 또…마법 같은 건 뭐라 설명할 거고? 어떻게 이게 현실이야…? 내 몸만 해도 게임캐릭터인데,” “그래. 너에게는 이 세계자체가 게임이라는 개념이 강할지 몰라. 네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이뤄진 세계이니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의 마법은 정상적인 거고 일반적이고 당연한 거야.” 네가 이곳에서 경험해왔듯이. 가브리나는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듯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세계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네가 있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할 거야. 허상, 허구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너와 같은 현실세계의 사람이야. 대기를 이루는 주성분만 다를 뿐이지.” “……아….” 암담할 거라 여겼으나 이상하게도 아주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내면에서 꾸준히 의심을 하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렐리아는 인정했다. 하지만 게임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기에 끝끝내 부정하고 외면해왔던 것뿐이다. 그랬던 것뿐인데. 이렇게 잔인하게 되돌아올 줄은 몰랐을 뿐이다. “지금 해줄 얘기는 긴 얘기가 될 거야.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이해하는 것도 그만한 시간이 걸리겠지. 아마 하루가 될지 모르고, 한 달이 될지 모르고, 수년 혹은 수십 년, 혹은 평생이 될지 몰라.” 이런 무거운 사실을 렐리아의 품에 안기는 가브리나도 결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의 황금색 눈에 담긴 렐리아는 막 금이 가기 시작한 사기그릇 같았다. 다 담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지만, 담지 못하고 깨져버린다면 가브리나로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루고 미뤄왔었다. 종내 오고야만, 피할 수가 없는 경지에 다다라 말문을 여는 가브리나의 입술은 천근같기만 했다. “네가 이 세계에 오기 전, 우린 만난 적이 있었어. 비록 너의 세계와 나를 이어주는 작은 매개체에 불과한 세계였지만. 그걸 너희들은 게임이라고 불렀어.” “혹시 드래곤 아르카이샤……말하는…?” “그래 맞아. 그리고 네가 그 세계에서 최종적으로 무찔렀던 드래곤이 바로 나였어.” 렐리아는 숨소리를 죽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육신이 아닌 내 영혼을 옭매고 있던 임시적인 육체였지. 나를 그 세계로부터 해방시켰던 유일한 존재가 너였어. 유렐리아.” 밀려드는 진실에 렐리아는 숨이 막혔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나 그와 중에도 선하게 떠오르는 것은 그녀가 말한 ‘드래곤 아르카이샤’의 최종맵 스토리화면이었다. 무시무시한 재앙 일러스트들과 압밤감을 주던 글귀들이 뇌를 작신작신 눌러오기 시작했다. [ Ⅻ 최종관문 다크드래곤. 왕가를 수호하던 드래곤 아르카이샤는 타락과 동시에 육신이 검게 물들어버렸다. 흑결정을 닮은 눈과 수천 개의 창도 뚫지 못하는 새카만 비늘, 검은 창을 연상케 하는 발톱. 아르카이샤를 상징하던 붉은 가죽은 더 이상 아무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지를 잃고 폭주하는 다크드래곤이 되어 평화시대에 재앙을 물어왔다. 가장먼저 광기에 눈을 뜨고 보이는 것들은 닥치는 대로 불바다로 만들어버렸다. 왕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만 갔다. 수만 번의 전쟁, 수천 만의 희생, 그리고 남은 것이 네 명의 전사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다크드래곤은 용암동굴을 점령하고서 긴 잠이 들었다. 그곳은 사방에 용암이 들끓고 유황연기로 가득 채워져 있다. 평탄하고 드넓은 지대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발판이 될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다크드래곤에게 깊은 안식을 내리고, 새로운 평화를 가져올 자는 이제 당신뿐이다. 왕국을 구하는 유일한 전사가 되어라. ] 최종맵의 스토리컷은 천 번은 넘게 돌려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자신만큼 그 맵을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란 얘기다. “그럼 내가……게임상에서 상대했던 건……진짜 드래곤이었단,” 입술이 딱딱하게 다물어졌다. 최종맵 클리어가 되지 않는다고 고객센터에 항의할 때마다 돌아오던 답변이 이제는 조금 알 듯 말듯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퍼즐조각처럼 맞춰져가는 기억의 편린 앞에서 렐리아는 혼란함을 감추지 못했다. 얕고 희미한 틀이 머릿속에서 어느 정도 완성이 되자 가브리나는 거기에 자세한 사실들을 부어주었다. “네가 말하는 원래세계는 이곳과는 대기를 이루는 기본성분자체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야. 나는 가보지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유입돼온 지식들을 쌓고 쌓아온 덕에 대기성분이 마나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 마나라는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와 마나가 존재하지 않는 전혀 다른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 가브리나는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마나로 구성되어있지 않은 세상에선 존재할 수 없어. 육신을 구성하는 물질이 마나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구체화를 할 수 없다는 얘기야. 한마디로 너의 세상은 이 세상에 있어선 철저히 분리된, 어떤 고차원의 마법으로도 닿을 수 없는 제3의 세계야.” 이 세계와는 철저히 분리된 제 3의 세계. 마법이라는 개념이 전혀 통하질 않는 세계가 바로 태화의 세계였다. “그런데 두 세계를 이어주는 매개체의 차원이 존재했었어. 서로 다른 세계의 틈에 낀 또하나의 세계, 그 작은 세계는 이곳과 상당히 흡사한 물질로 이뤄져있었고, 내가 그곳으로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하게 했지.” 서로 섞일 수 없는 극과 극의 성질을 가진 두 세계의 유일한 접합점이 있었으니, 바로 ‘드래곤 아르카이샤’라는 게임세계였다. “네가 이곳에서 그 방어구와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것 또한 이곳과 흡사할 만큼 세계를 이루고 있는 성분이 비슷하기 때문이야.” 재차 같은 사실을 반복하며 주입시켜주었으나 렐리아는 정신박약아처럼 그저 멍해보였다. 우두커니 두 다리로 서있었으나 뻣뻣해서 움직이질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가브리나는 그런 그녀에게 스스로 죄를 고하듯 괴로운 얘기를 꺼내놓았다. “…내가 왜 차원을 넘어갔는지 궁금할 테지. 그 당시 나는 무한한 지식욕에만 앞서 차원에 관한 마법에 손을 대고 말았어.” 아득한 저편의 기억은 아지랑이처럼 눈앞을 스치고 갈 뿐이다. 이제와 잡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단편적인 기억 속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 가브리나는 입술 끝을 끌어내리며 그림자가 드리워진 바닥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건 끔찍한 실수였어. 나는 그 세계에 육신과 이지를 잃고 끌려들어가 버렸어. 차원을 넘으면서 몸은 물론이고 체내를 이루던 마나를 다 소진해버린 거지. 남은 건 영혼이라고 하는 마나의 집합체였고 나는 어딘가에 갇히게 됐었어.” 목소리는 한층 더 무거워져만 갔다. “끔찍할 만큼 긴 세월을 보내면서 일부마나가 회복되었고 서서히 이성을 찾게 되었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어. 마치 누가 강제로 조종하는 것과 같이 늘 한곳에 머물러서 드문드문 찾아오는 자들을 상대하는 게 다였지.” 이성도 자제력 잃은, 그저 광포함에 날뛰는 몸뚱이는 자신이 다룰 수 있는 권한을 완전히 벗어난 것 같았다고 가브리나는 회고했다. 이때 그녀가 임시로 머무르게 된 육신이 최종관문 다크드래곤이었다. “그동안 임시육체 속에 깨어있는 이성으로 조금씩 흘러들어오는 세계의 정보를 수집하고 터득해서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어. 게임이라는 개념을 알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몰라.” 수많은 유저들이 나누는 대화는 지식의 보고라고도 할 수 있었다. 바람을 타고 동글 안으로 들려온 희미한 목소리들을 가브리나는 모든 감각을 깨워 흡수했었다. 대체로 '게임 접속', '게임 플레이', '다른 게임', '재밌는 게임', '역하렘 게임' 등 게임에 관한 말들이었다. 귀동냥을 통해 언어를 습득하고 게임이라는 크나큰 개념을 이해하기까지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사실상 ‘드래곤 아르카이샤’는 태화의 세계에선 정식오픈한지 13년 채 되지 않은 게임이다. 그러나 그 한 차원너머의 세계는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왕국이 존재하고, 드래곤 아르카이샤의 타락으로 인한 재앙이 오랫동안 지속되어진 또하나의 세계, 말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수백수천 년은 이태화가 있던 세계의 수년에 불과했다. 서로 다른 차원의 생물이 어느 매개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촉한다 해도 차원의 차이에 따라 생기는 시간의 각과 요철은 어쩔 수 없었다. 동시간대라도 시간은 굴절되고 굴절되어 태화의 1초가 그곳에선 1시간, 하루, 혹은 한 달이 될지도 모른단 얘기였다. 지구상에선 태양의 고도차이로 인한 시차가 존재한다면 각 차원의 시차는 불규칙적이다 못해 시간의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태화에게 있어선 ‘드래곤 아르카이샤'라 불리는 게임은 가브리나에게 있어선 자신을 자그마치 천 년간 가둬둔 작은 세계였다. 그 세계에 갇혀 가브리나는 억겁의 시간동안 게임을 이해하려 노력했었다. “유저, 라는 자들은 직접적으로 작은 세계에 관여할 수 없는 모양인 것 같았어. 모니터라는 것을 통해서 세계를 들여다보고, 마우스라는 것으로 또 다른 몸을 조종하고, 키보드로 명령을 내렸지.” 요컨대 가브리나에게 있어선 듣도 보도 못한 특이한 세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있는 작은 세계를 게임, 혹은 드래곤 아르카이샤 라고 부른다는 걸 알게 되었지.” 그런 가브리나가 게임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유저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였다. 연애시뮬레이션, AOS, RPG, FPS, 액션, 가브리나는 이 세분화된 개념을 이해하는데 또 수백 년의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나는 다시 차원을 넘어 원래세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차차 지식과 힘을 모으기 시작했어. 그 시간이 여기선 천 년이란 시간이 흘러있었지만, 마침내 모든 힘을 모으는 데 성공했지. 하지만 이 과정에 크나큰 문제가 있었어. 스스로의 의지만으로는 갇혀있는 육체에서 벗어날 수 없단 거였어.” “…….” “임시육체를 누군가 부숴줘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거야.” 견고한 드래곤의 영혼으로 채워진 몸은 아무도 쉽게 깨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러있었다. 그 당시 빗발치던 항의전화에도 게임회사는 억울할 뿐이었다. 시스템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차원을 건너온 골드 드래곤의 영혼이 게임 내 실제로 봉인되어있다는 걸 무슨 수로 알겠냔 말인가. 수많은 플레이어가 포기하고, 시대에 뒤쳐짐에 따라 탈퇴회원수도 늘어갈 때 이태화가 도전했다. “너는 내 임시육체를 가름으로써 나를 구원했어. 하지만 그 고리를 끊은 영향이 너에게도 미친 건지……,” 모니터너머의 태화에게 내린 재앙, 그것은 필연적인 재앙이었다. 가브리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자신을 구한 ‘유저’를 살리기 위해 태화의 영혼을 모니터 속으로 불러들였다. 게임캐릭터의 몸에 영혼이란 개념의 마나집합체를 집어넣고 함께 이 세계로 돌아온 것이 가브리나가 한 모든 일의 전말이었다. “너에게 보답하기 위해 죽기직전의 네 영혼을 회수해 유렐리아의 몸에 집어넣고 이곳 세계로 데려온 거야.” 하지만 가브리나가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그녀의 육신은 천 년간 영면상태에 돌입해있었단 거였다. 그것도 왕의 비호라도 받듯이 왕궁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었다. 차원을 넘는데 거의 모든 힘을 소진한 가브리나는 몸속으로 들어가 휴식을 취해야만 했으나 육신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다. 가브리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없었다. “네게 자세한 설명을 하기엔 상황자체가 촉박했지. 길게 설명하려해도 그 방대한 내용을 이해시키기도 전에 네 의식에서 끊겼을 거야. 그래서 차라리 네게 큰 혼란을 줄 바엔 게임이라고 인식하게 만든 거야.” 평행세계라도 해도 될 만큼 닮은 세계 속에서 렐리아의 몸은 게임과 똑같은 위력을 낼 수 있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을 가브리나로서는 마냥 간과할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같은 RPG부류의 게임이라고 하면 넌 그 힘을 무자비하게 사용할 테니까 연애시뮬레이션이라는 제약을 둔 거였어.” ‘네가 이다음 눈떴을 때 도착할 곳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속이야.’ 렐리아의 눈이 흐릿하게 변했다. 모든 게 끔찍해졌다. 아니라고 믿고 싶었으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내가 진정 원한 건, 네가 진실한 사랑을 찾음으로써 완전히 정착하는 거였어. 네 마음까지 내가 움직일 수는 없기에, 적어도 네가 자의적인 의지로 이곳에 남을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 “…….” “그렇게 되면 네게 나타나 모든 걸 설명하려했어. 네가 여기 오게 된 이유와 널 원래세계에 돌려놓지 못하는 이유, 그리고 네가 이 세계에서 원하는 모든 것들을 이뤄주려고 했어. 물질적인 모든 걸 채워줄 능력이 있으니까.” 가브리나는 자신을 구해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최고의 짝을 찾아주려 했다.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 중 미혼남성인 국왕 라델리우스와 라콘드 공작을 공략대상이라 정하고, 마지막은 렐리아가 먼저 자신을 찾아오도록 부러 드래곤을 후보에 집어넣었다. “나머지 힘으로 공작이 향하는 길목에 널 떨어뜨려놨어. 그리고 내 힘은 소멸직전에 들어섰지. 내가 깃들 수 있는 육신을 빠르게 찾던 중 발견한 게 올르아 공녀였어. 독에 의해 다 죽어가던 여자의 육신에 깃들어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생명을 구하고 깊은 잠이 들었지.” 이날 다이아나 올르아를 독살하려했던 범인이 바로 슈로니 알락디사였다. 가브리나가 공녀의 몸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동안 렐리아는 라콘드 령에 있었다. 허나 며칠 못가 쫓겨나고만 렐리아는 란게르드 산맥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실버드래곤이 봉인해있던 산을 부숴버림으로써 그를 깨워버렸다. 가브리나가 그 심각한 사태를 깨닫게 됐을 때는 이미 렐리아는 모든 일을 벌이고 수도로 상경했을 때였다. “하지만 남자와의 사랑만으로는 널 이곳에 묶어놓을 수는 없었어. 원래세계를 현실로 두고 늘 절박하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줄 몰랐어. 널 가볍게 속박하려들기 위한 내 거짓말에 네가 목을 매달고 벗어나려할 줄 알았더라면. 이 상황이, 조건이, 널 병들게 하는 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무슨 조치를 취했을 텐데.....미안해.” 힘겹게 휘어지는 황금색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처럼 서글펐다. 가브리아는 렐리아의 손을 붙잡아주었다. 충격에 속절없이 떨리는 그 연약한 손을 보듬어주듯이 잡아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왕국을 너도 사랑하고 정을 붙일 거라 여겼어. 하지만 그건 내 짧은 생각에서 기인한 오만한 판단이었을 뿐이었어.” “…다시…차원이동 하면 되잖아요…? 시간이 좀 걸려도, 기다릴테니까……” “네 본래 몸이 있던 세계로 가기 위해선 게임세계를 필히 거쳐야해. 그런데 너의 세계와 통하는 유일한 매개체였을 세계가…, 너의 세계와 완전히 단절이 돼버렸어.” '서비스가 정식중단 되는…….' 그것은 곧 이태화가 있던 현실세계와의 완전한 단절을 뜻한다는 소리였다.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애타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친구들을. 영영 돌아갈 수가 없다. 렐리아는 억눌린 흐느낌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까지 거센 풍랑에 맞서왔던 하나의 돛대가 꺾였다. 그녀를 지탱하고 있던 굵직한 심지가 가슴 속에서 부러짐과 동시에 무릎이 꺾였다. 침몰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가브리나는 무수히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지만, 렐리아의 머릿속에 남는 것은 단 하나의 결론뿐이었다. 게임세계라 여겼던 이 세상은 현실이었고 자신만 게임캐릭터였다. 게임이었던 건 자기 혼자뿐이었다. 0120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렐리아는 고개를 아래로 툭 꺾었다. 매끄러운 바닥위에 아롱져가는 눈물 수만큼 원래세계에 두고 온 소중한 사람들이 떨어져나갔다. 가장 무거운 눈물은 부모님이었다. 눈이 따가웠다. “…돌아갈, 다른 방법…있을 거 아니에요.” 이대로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분명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충혈 된 눈을 들어 가브리나를 올려다보았으나 가브리나는 마음이 아픈 듯 그저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렐리아. 미안해.” “…그만, 그만 사과하고 방법을 찾아달라고…….” “네가 원래 살던 세계로 다시 돌려보내줄 수 없어. 나부터가, 이 쇠잔한 육신으로는 더는 차원을 넘나들만한 기력이 없어. …그리고 네 육체가 무사할 거란 보장 또한 쉽사리 할 수 없어.” 일으켜주려 다가온 그녀의 손을 렐리아는 매섭게 쳐냈다. 그러고는 악에 받쳐있던 두 눈을 고집스럽게 내리깔며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렐리아가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노력이라도 해본다고, 차라리 그렇게 얘기해줄 수 있잖…아요.” 목소리엔 절망이 깊어져갔다. 가로지르는 뜨거운 눈물에도 이상하게 뺨에 감각이 없었다. “돌아가야 된다고요!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부모님은…어쩌라고…….” 하나뿐인 자식을 잃고 평생 그렇게 슬픔에 묻혀 사시게 두라고? 렐리아는 꿈속에서 보았던 삭막한 집 풍경을 떠올렸다. 우울증 약을 달고 사는 엄마와 술로 하루하루 고통을 달래던 아빠. 더 이상은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우리 부모님을 위해 달려간단 건데……." “네가 어떤 기분일지 이해할 수 있어. 사랑하던 사람들과 동떨어진 채 유리된 세계에 외따로 갇혀버린 기분……네가 지금 이런 기분이겠지. 끔찍하고 괴롭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래서 가능한 한 네가 덜 상처받았으면…,” “시끄럽고, 나 가야된다고…!! 가야된다고! 몇 번을 말해야…하.” 울컥 솟아오른 울분을 터뜨리며 렐리아는 머리를 싸맸다. 화끈거리는 목이 자꾸만 메었지만 꾸역꾸역 올라오는 울음을 억지로 삼켰다. 말을 하는 게 우선이었다. “…여기…더 있기 싫어. …돌아갈래. 제발, 우리 엄마아빠한테 가게 해줘! 언니 제발… 제발 나 좀 보내줘. 다 저기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포기하고 여기 살란 건데....” 다른 세계에 떨어져 산 지 고작 두 달이었다. “갑자기 게임이 아니라니…이러는 법이 어딨어. 대체…,” 한두 달이 아니라 평생을 이곳에서 보내야했다. 평생을 살다가, 죽어서도 이 땅에 묻힐 것이다. 렐리아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콱콱 막혔다. 꾸역꾸역 내려 보낸 울음들이 가슴속에 쌓여 아주 깊은 곳에서 멍울로 맺힐 것 같았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헐떡거리자 곧바로 가브리나가 무릎을 꿇어 그녀를 살폈다. 렐리아는 숨통이 조여 갑갑한 가슴 위를 세게 내리쳤다. 허나 바로 행동을 제지하려드는 가브리나의 손에 또 한 번 숨이 콱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 몸이야. 자신의 몸을 좀 더 소중히,” “……이 몸이 왜 내 몸이야. 진짜 몸은 저기 있는데…! 이게, 이게 왜 내 몸인데…!!” 이제까지 이 몸을 어떻게 했었는지는 망친 당사자가 제일 잘 알았다. 정신적인 충격을 감내하면서까지 저질렀던 일들이 한꺼번에 역으로 자신에게 몰아닥쳐왔다. 원치 않은 관계도 이 악물고 해냈는데 이럴 수는 없었다. 깊은 수렁에 빠져 헤어나질 못할 것 같았다. 그 역겨운 새끼랑 입을 맞추고 벌거벗고 몸을 섞었다. 몇 번을 넣다 뺐다했던 감각들이 소름끼쳤다. 이제와 가랑이 사이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싫어…싫다고, 싫어! 이 세계도! 이 몸뚱이도!!!" 렐리아는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자신이 왜 그랬지 하는 후회나 자책감보다는 증오와 혐오가 앞섰다. 이 몸으로 평생을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한 깊은 혐오감이었다. "다 싫어…욱, 우우욱….” 렐리아는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그것뿐이랴, 사람도 죽였었다. 이 손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에 분명 죽였었다. 어떻게 이 몸이 혐오스럽지 않지. 렐리아는 빈속에 나온 묽은 위액이 묻은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패닉상태에 질렸다. “죽었잖아! 내 손에 죽은 거잖아요……그때, 감옥 벽이 무너지면서…분명 죽었다고요. 가볍게 한 일에, 내,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무심결에…사람을 죽였어요. …사람을, 같은 인간인데!” “진정해. 공작령의 지하감옥사건을 말하는 거라면 나도 접했어. 무너진 벽에 깔려죽은 자들은 하나같이 다 중죄인들이었어. 한평생 감옥에 갇혀 생을 마감했을 죄인들이야. 그들의 목숨에 네가 죄책감을 느낄 필욘 없어.” “이게 현실이면 난 살인자잖아……! 죄인이라고 해도 결국 사람이잖아! 사람을……죽인 거라고. 살아있던 사람들을……내가 죽게 만든 거라고…….” “네가 살린 목숨도 있다는 걸 기억해. 렐리아.” 가브리나는 어떻게든 렐리아를 달래보려 애썼으나 렐리아는 한사코 거부했다.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혐오적인 생각에 빠졌다. 어깨와 이어져있는 양팔과 진득한 위액으로 젖은 손, 하반신을 이루고 있는 두 다리가 남의 것처럼 생소하게만 느껴질 뿐이었다. 몸 전체가 자신을 거부하는 느낌이었다. “…구역질이 나……어떻게 이게 현실이야? 이딴 게 왜 현실이야!! 드래곤이 나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잖아아…. 우욱, 이게 왜 현실이라는 건데……! 대체 왜!” 돌려보내달라고 울고불고해도 소용없는 걸 깨닫자 렐리아는 절망에 빠진 채 현실도피부터 했다. 고운 얼굴에선 온갖 분비물이 흘러나왔다. 눈물이며 콧물이며, 계속해서 빈 위장을 비워내느라고 야윈 등이 크게 들썩였다. 차라리 실신이라도 했으면 좋을 만큼 기분은 참혹하고도 끔찍했다. 렐리아는 심장이 썩어문드러지는 기분을 느끼다가 허탈하게 몸에서 힘을 뺐다. 늘어뜨린 두 팔이 바닥에 닿고 휑뎅그렁한 두 눈이 바닥을 가리켰다. 묽은 침이 길게 늘어진 입술이 힘겹게 떨어졌다. “……차라리 죽게 내버려두지…,” 그 희미한 중얼거림에 가브리나는 숙연해진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여전히 가엾고 딱한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시선은 조용했다. “왜 여기 오게 만들어서……사람 생고생하게 만들고…!” 괴로움에 눈살을 찌푸리며 렐리아는 가브리나를 쳐다보았다. 희번덕거리는 눈자위에는 짙은 원망이 드리워있었다. 그냥 천장에 깔려죽는 게 편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는 없었을 것 같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에는 아무것도 느낄 새 없이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미안해……. 일찍이 모든 걸 말해주지 못한 내 잘못이야.” 그녀가 괴로워하는 게 모두 자신의 탓이라 자책하며 가브리나는 몸을 숙여 그녀 앞에 무릎 한쪽을 꿇었다. 자신이 한 일이 렐리아에게 희망을 주었다 모조리 빼앗는 일이 되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렐리아가 이 세계에서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부와 재물, 명예와 권력, 수명, 그 무엇이라도 안겨줄 거야.” 그녀는 어느 날 나타나 자신을 그 세계로부터 해방시켜준 고마운 은인이었다. 해줄 수 있는 건 가능한 뭐든 해주고 싶은 게 가브리나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렐리아가 거부한다면 그 무엇도 강제로 안겨줄 수 없는 것이다. “일단은 네 몸을 구속하고 있는 그 마법부터 제거해야…,” “싫어, 이대로 내버려둬요….” 가브리나의 손을 뿌리치고서 렐리아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물기가 싹 마른 텅빈 눈과는 달리 꽉 깨문 입술은 의지를 품고 있었다. 그 짙어진 눈이 뭘 꾸미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할 가브리나가 아니었다. 렐리아의 심장을 옥죄고 있는 구속마법은 그 위험성 때문에라도 속히 제거하는 게 옳았다. 그냥 두기엔 위태롭다지만 당사자가 거부하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가브리나는 뻗으려던 손을 다시 거두며 자애로운 미소를 누그러뜨렸다. 씁쓰레한 눈길은 속옷차림의 마른 몸을 담았다. “알겠어…, 쉬렴. 라콘드 공작이 있을 곳으로 돌려보내줄게.” 처음엔 라콘드 공작과 렐리아를 떨어뜨려놓으려 했을 만큼 그를 좋게 여기지 않았었다. 그 자가 렐리아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렐리아만 원한다면 라델리우스와 이어줘 왕실의 고귀한 왕후자리에 앉을 수 있게 도우려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런 가브리나의 생각은 바뀌게 되었다. 정확히는 왕실무도회의 층계에서 굴러 떨어진 라콘드 공작이 렐리아를 안아들고 서둘러 회장을 벗어난 날부터일 것이다. 가브리나는 희박한 힘을 끌어 모아 렐리아를 공작에게로 돌려보냈다. 렐리아가 마음을 추스르기엔 가장 좋은 장소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미움 받는 자신보다는 그가 곁에 있어주는 게 훨씬 안정이 될 것이다. 가브리나 자신의 가호를 받고 있는 곳이니 안전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지 그녀가 주어진 새 삶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짓만은 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었다. * 렐리아는 눈을 떴다. 빛무리가 몸에서 흩어지고 시야가 맑아지자 그제야 새로 도착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짙은 고동빛의 원목책상과 새까만 가죽으로 뒤덮인 의자였다. 검은머리 남자의 지정석이었을 간정한 업무자리는 희미한 어둠이 대신 앉아있었다. 불 꺼진 집무실은 창가에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이 어우러져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귀빈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마련된 티 테이블과 예스러운 분위기가 나는 책장, 높은 천장을 가로지르는 그림자와 대리석 바닥. 밤에 보는 집무실은 낮과는 천지차이였다. 맨발인 채로 렐리아는 차가운 바닥을 저벅저벅 걸어 창가 앞으로 다가갔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뺨을 스친다. 휘날리는 머리칼에 눈을 찔린 건지 갑작스레 눈가가 아려왔다. 렐리아는 창밖으로 비스듬히 시선을 내려 바닥을 내려다봤다. 대저택의 삼 층은 웬만한 건물 오층 높이에 맞먹어 그 높이가 아찔했다. 떨어지면 최소 사망일 것이다. 렐리아는 죽으려면 몸이 약해진 지금 이 기회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일반사람과 같아졌으니 자살도 수월하게 이뤄질 것이다. 세브로웰 덕분에 이 세계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단지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장소였지만 그것도 잠시, 렐리아는 지금 자기가 남 생각할 때냐는 이기심이 치밀었다. ‘…아무도 이해 못해. 우리 엄마가 얼마나 아픈지도…, 아빠가 힘든지도…….’ 현실에 대한 절실함과 걱정, 불안이 단순히 꿈으로 반영된 것뿐이래도 태화를 병들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어쩌면 살아갈 자신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도 자신이 행복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세브로웰도, 왕국의 멸망위기도 전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또 괴롭게 만들게 뻔했다. 괴로워질 바에는 단번에 깔끔하게 끝나는 게 나았다. 바닥을 향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창가에 얹고서 렐리아는 창틀에 올라서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먼발치에서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있습니까.” 어둡고 넓은 공간, 분명 아무도 없어야할 이 안에 누군가 있다. 예민하게도 기척을 감지한 블리어는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누군가 침입한 것이라 여기고 책상 쪽을 응시했다. 책상 위를 건드리지 않았다는 걸 대강 훑어 확인하고서 그는 바로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서 한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의 발치로 서류들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실종자에 대한 조사와 실종 직전의 행동경위가 상세히 적힌 보고서였다. ‘렐리아’라는 여자이름이 적힌 보고서가 발아래서 뒹굶에도 그는 서류의 존재조차 잊은 듯 다급하게 성큼성큼 나아갔다. 양쪽 다 활짝 열려있는 창문 앞에는 그토록 찾던 여자가 서있었다. 이윽고 불어 닥친 바람에 은발이 나부끼며 여자가 비스듬히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서 확장된 눈과 잇자국이 난 작은 입술, 푸르스름한 달빛이 내린 얼굴은 안 본새에 조금 푸석해 보일만큼 살이 빠져있었다. 블리어는 그 작은 얼굴을 자세히 다 담기도 전에 그녀의 팔을 붙잡아 품속으로 세게 끌어당겼다. “…어디 가 있었습니까.” 속옷만 입은 섬연한 몸은 전보다 부쩍 말라있는 것 같아 더욱 안쓰럽기만 했다. 거기다 몸 전체가 찼다. 혹 유령이 되어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니 블리어는 퍽 다급해졌다. 피부에 서린 작은 온기라도 놓칠까 그가 손을 들어 창백한 뺨을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닿은 미약한 온기에 만족 못하고 손바닥으로 조막만한 얼굴을 담아보거나 제 이마를 갖다대보였다.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 따위가 아니라는 걸 확인받고자 함이었다. 그 애틋한 행위들에도 렐리아는 돌처럼 가만히 그에게 안겨있을 뿐이었다. “이제까지 어디 가 있었습니까…. 찾았습니다.” 처마 끝에 매달린 빗물처럼 위태로운 목소리가 귓속으로 미끄러져 흘러들어왔다. 마음속까지 잔잔히 적시는 목소리에 그제야 렐리아의 눈에 생기가 감돌았다. “며칠을 찾아다녔는지 압니까. 산 일대를 몇 번이나 수색했는지 압니까. 그래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이렇게라도 돌아와 줬으니 다행입니다.” 옷은 어디가고 왜 속옷차림인 건지, 어떻게 돌아온 것인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묻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블리어는 많고 많은 말 중에서 다행이란 말을 택했다. 가느다란 허리를 서서히 조여 가며 팔뚝에 힘을 실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체취에 마음이 놓였다. 며칠 내내 잠도 못자고 그녀만을 찾느라 쌓인 피로가 그의 뇌를 좀먹어갔다. 블리어는 꿈처럼 몽롱한 기분 속에서 끌어안고 있던 여인의 머리를 한손으로 받쳐 슬며시 떨어뜨렸다. 그 얼굴을 내려다보니 이제까지 참아왔던 말이 노도처럼 밀려올라왔다. “편지에 떠나라고 써놓고서 이런 말하는 것은 궤변으로 들릴 진 모르겠으나,” 조금은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유연하게 아래로 휘어져갔다. "내겐 아직 그대가 필요합니다.." 참을 수 없는 경지에 다다르니 사람이 이리도 솔직해져버린다. 이렇게도 이기적이 되어버린다. 블리어는 깊숙이 고개를 숙여 렐리아의 옆얼굴에 제 얼굴을 가져다묻었다. 닿은 그녀의 뺨은 여전히 찼고 희미한 눈물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바래지니 알겠다. 제 마음에 두고 있는 그녀가 얼마나 선명한 존재였는지. 그 잔상이 떠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눈앞을 맴돌았다. 자신이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 그 아릿한 목소리에 렐리아는 아랫입술만 질끈 깨물었다. 0121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어젯밤 이후로 렐리아는 통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자기 방에서 죽은 듯이 내리 잠을 청할 뿐이었다. 블리어는 그런 그녈 자게 내버려두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곤히 잠든 여인을 차마 깨우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늦은 밤 속옷차림으로 돌아왔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리 없었다. 신경 쓰여 밤새 잠을 설쳤을 정도였다. 피골이 상접할 만큼 마른 몸과 더 가느다래진 팔다리, 속옷만 입은 상태라서 앙상해진 몸이 더욱 적나라하게 들러났었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어떤 일을 겪은 것인지 알 수 없기에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캐물으려 들었다 되레 그녀를 상처 입히는 일이 되어선 안 되었다. 쇠약해진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하는 게 먼저였다. 적어도 심신이 안정되었을 때 물어도 늦지 않을 테니 그로서는 기다릴 뿐이었다. 그녀가 먼저 제게 입을 열어주기까지. 블리어는 렐리아가 편히 쉴 수 있게 그녀의 방에 부러 찾아가지 않고 집무실에 자릴 지키고 있었다. 그렇게 평화롭게 하루가 끝나갈 때쯤이었다. 늦은 저녁에 갑작스런 방문요청을 한 올르아 공녀로 인해 블리어는 저녁식사도 마다하고 집무실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탐탁지 않았으나 블리어는 찾아온 객을 내쫓지 않았다. “라콘드 공작전하를 뵈어요. 미리 양해를 구하지 못하고 방문한 점에 대해선 사과드릴게요.” 대뜸 집무실로 찾아온 다이아나는 여전히 눈부신 외모를 간직한 채 사근사근하게 웃어보였다. 허나 철옹성처럼 웃음기 한 점 없는 안면의 사내는 그녀를 집무실 한편에 마련된 티 테이블에 앉도록 했다. 다과를 미처 준비하지 못함은 의도된 행동이었으나 다이아나 쪽에서 먼저 다과를 사양한 채 할 말만 하고 바로 가겠다고 해버려 그의 기분은 더욱 저조해졌다. “그래서 용건이 뭡니까.” 당연히 좋게 나갈리 없는 블리어는 서늘하게 눈빛을 가라앉힌 채 맞은편에 앉은 여인을 응시했다. 그 은근한 중압감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시선에도 다이아나는 기죽는 기세 없이 꼿꼿했다. “렐리아를 잘 돌봐줘요.”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던 블리어의 태도가 일순 돌변했다. “무엇을 알고 있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 어제 렐리아와 함께 있었어요. 전하의 집무실에 렐리아를 데려다놓은 것도 저예요.” 그것이 사실이냐고 되묻듯이 블리어가 양미간에 힘을 주어 찌푸릴 때다. “…렐리아가 어떤 사정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영영.” “그게 무슨…….” “그래서 상심이 커요. 평소 남에게 제 속내도 잘 털어놓지 않던 강한 아이라 전 걱정이 돼요. 강하기 때문에 한번 부러지면 재기가 힘들죠. 상상도 못할 만큼 충격이 클 텐데 그 아이가 마음의 병을 얻지 않게 전하께서 부디 신경써주세요.” 다이아나는 단호하리만치 딱딱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가녀린 여인답지 않게 진중한 눈동자 위로 희미한 금빛이채가 스쳐지나갔다. “렐리아가 이곳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는 사람이 바로 공작전하이시니까요.” “…….” 블리어는 그제야 자신이 놓치고 있는 가장 큰 걸 놓친 기분이 들었다. 방치가 답은 아닐 텐데 하루 종일 혼자 둔 그녀가 미칠 듯이 걱정되었다. “…알겠습니다. 다른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네. 그래요.” 다시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온 다이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블리어는 먼저 자리를 파하고 일어섰다. 그는 집무실을 벗어나 바로 렐리아의 방을 찾았다. 서둘러 방안으로 들어서자 우중충하게 가라앉은 방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뒤이어 어두운 방안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려오자 블리어는 침대 옆으로 급하게 다가갔다. 누워있는 렐리아의 이마에 손을 얹자 뜨겁게 열기가 올라왔다. 블리어는 곧장 그녀의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치웠다. 불덩이 같은 몸은 손을 대는 것이 무서울 정도였다. 이렇게 가냘픈데도 정상체온을 한참 벗어나있었다. 자칫 잘못될까 블리어는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다가 고열로 신음하는 그녀얼굴에 욕실로 들어섰다. 새 타월을 차가운 물에 흠뻑 적셔 물기만 짜낸 뒤 다시 그녀 곁으로 돌아왔다. 블리어는 우선 식은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주고서 타월을 한번 접었다. 찬 기운이 남은 타월 반대편은 창백한 이마 위에 얹어두고서 바로 다른 타월을 가져와 목과 팔을 닦아주었다. 하지만 고열증세는 사그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쇼크와 향수병, 영양부족, 우울증, 정신쇠약 등의 복합적인 원인이 겹쳐 발병한 탓에 그 여파는 컸다. 한차례 약해진 몸뚱이를 휩쓴 열병은 렐리아의 생명마저 좀먹으려하고 있었다. 블리어는 조금도 열이 식지 않자 바로 주치의가 머물렀던 방으로 뛰어가 몸소 해열제를 찾기에 이르렀다. 아직 수도에 남아있을 의원이 몇이나 있을 진 모르겠으나 그들에게 연락을 취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의원이 도착하기도 전에 렐리아가 잘못될까 그는 속을 바싹 졸여야만 했다. 그의 다급한 심정에 하늘이 돕기라도 한 건지 상비용 서랍에서 해열제를 찾을 수 있었다. 십 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방으로 화급히 돌아온 블리어는 혼을 뺀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그는 가루약을 물에 곱게 풀어 렐리아의 입안에 조금씩 흘려보내주었다. 실력만큼은 왕실 명의 못지않던 주치의였으니 약이 잘 듣기를 바랄 뿐이었다. 미량의 해열제를 먹인 후에는 그녀의 뜨거운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손가락 하나도 차갑게 식혀주기 위해 주물러주기를 몇 분째 반복하다가 다시 소량씩 약을 먹이기를 여덟 차례였다. 블리어는 시간이 조금씩 흐를 때마다 렐리아의 상태가 호전됨을 알아차렸다. 그에게는 일분일초도 억겁 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거의 한 시간이 지나서 그녀의 열이 겨우 식었다지만 그는 하루를 흘려보낸 기분이었다. 하아, 하고 퍼석한 마른 한숨을 뒤로하고 블리어는 그녀 이마위에 얹어둔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그러다 문득 닿은 손길에 움찔하고 떨리는 속눈썹을 알아차렸다. “….” “정신이 듭니까?” 그녀가 놀라지 않게 최대한 조용하게 운을 뗀 그가 렐리아를 살폈다.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운지 바르르 떨리던 긴 속눈썹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맑은 사파이어 빛은 어디가고 탁한 파란색 눈동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블리어는 렐리아의 옆에 걸터앉은 채 병색이 감도는 퀭한 눈을 내려다보다가 관자놀이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미안합니다.” 온종일 아픈 여인을 방치했다. 그녀가 들끓는 열 속에서 홀로 고통스러워했을 거라 여기니 쉬이 자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라도 그대 곁을 지켰어야 했었는데 내가 너무 무책임했습니다.” 렐리아는 그가 뭐라 하는지조차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귀가 멍멍했다. 눈앞은 흐릿했고 감각은 열 때문에 둔해져있었다. 그러나 서느렇게 와 닿는 상냥한 손길은 꿈에서 느껴본 엄마의 손길과 많이 닮아있었다. 왠지 엄마가 지금 제 옆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 나 살아야 될까.’ “……아야 될까…” 열에 바싹 마른 입술이 힘겹게 오므라졌다 벌어졌다. 화끈한 목을 긁고 튀어나온 쉰 목소리는 지나치게 건조했다. 그녀가 심한 갈증을 느낀다는 걸 알아차린 블리어는 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른 손으로 물 잔을 쥐고서 입에 가져다댄 그는 조심스럽게 잔을 기울여 그녀가 조금씩 목을 축이게 했다. 렐리아는 물을 넘기면서도 뜨거운 숨결을 토해냈다. 열감이 느껴지다 못해 펄펄 끓는 몸은 여기저기가 아팠다. 꼼짝도 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워서 렐리아는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평생 볼 수 없을 부모님과 친구들, 두고 온 그 미련들이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되어 온몸이 찔러대니 당연했다. 아팠다. ‘…이렇게나 아픈데, 엄마…나 굳이 살아야 될까.’ “……살아야…될까….”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순간 먹먹했던 귀가 확 틔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낮은 목소리가 서글프게 귓가를 어루만져주자 렐리아는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그런 말 마십시오.” 블리어는 그녀가 어떤 기분일지 이해할 수 없었다. 태연한 척 굴어도 마음 한곳으로는 늘 떠나온 고향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여자였다. 그 심정을 자신이 감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고향은 그녀의 전부라고 할 만큼 무거운 것이라는 건 안다. 그것이 단번에 사라졌으니 얼마나 가슴 아플까 싶었다. 이제껏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가 싶으니 블리어는 가슴이 지나치게 쓰렸다. “렐리아. 나는 그대가 사라진다면……많이 슬플 겁니다. 식사도 못하고 밤마다 그대가 생각이 나 잠도 제대로 못잘 겁니다. 빈자리가 생각날 때마다 허전하고 괴로울 겁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 마십시오.” ‘…우리 엄마아빠가 그랬겠지.’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는 동안 눈물이 새어나와 버렸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렐리아의 모습에 블리어는 물 잔을 협탁 위에 내려놓고 그녀 뺨에 손을 가져갔다. 투박한 엄지가 눈물을 연방 쓸어내리듯이 닦아주었다. 하지만 계속 젖어드는 손끝으로는 그녀의 뺨을 눈물로 얼룩지게만 할 뿐이었다. 블리어는 손을 거두고서 렐리아를 말없이 끌어안아주었다. 스르륵 등허리를 감아오는 두 팔에 렐리아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목이 메여 살짝 턱을 내리자 눈두덩이 눌러지며 그의 셔츠에 눈물자국이 묻어났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내려다보는 블리어의 시선은 착잡하게 타들어갔다. 끅끅 눌러지는 울음소리가 애처로웠으나 그는 울지 말라고 위로하지 않았다. 그 버거운 슬픔을 혼자 가슴에 쌓아두지 못하게 제 가슴을 묵묵히 빌려줄 뿐이었다. 슬픔을 눈물로 모두 흘려보낼 수만 있다면, 강을 이루어도, 바다를 이루어도 언제든 옆에서 받아주고 싶었다. 젖어드는 셔츠가 맨살에 찝찝하게 달라붙어도 블리어는 더욱 렐리아를 깊이 안아줄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지친 건지 렐리아는 쓰러지듯 잠을 청했다. 제 품에 안겨 잠이 든 여인은 눈물에 푹 젖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깔끔하게 눈물을 닦아 정리해주고서 블리어는 그녀를 눕혔다. 그는 그 옆에 베개 없이 돌아누워 그녀를 안아주었다. 꿈에서도 슬피 울까 그는 쉬이 잠을 청하지 못했다. 0122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일어났습니까?”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들려온 목소리는 이것이었다. 렐리아는 제 이마에 닿아있는 두터운 손바닥을 알아차렸다. 열을 재는 건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느릿하게 쓰다듬어주었다. 큼지막한 손 주제에 미풍이 쓸어 만져주는 것처럼 보드랍고 상냥했다. 그에 반해 눈두덩은 거친 사포로 문지른 것처럼 쓰라렸다. 퉁퉁 부은 눈으로 비스듬히 옆을 돌아보자 바로 굵고 커다란 손이 거둬졌다. 역광이 져 있는 날렵한 선의 얼굴이 조금 위에 자리 잡은 채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영 깊은 눈매가 조금은 둥그렇게 휘어져있는 것 같았다. 자상해 보이는 낯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뭐야.” 렐리아는 쇳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를 냈다. 뒤늦게 큼큼 하며 목을 풀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어젯밤 무슨 정신으로 잠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렐리아는 그의 앞에서 추태를 부렸던 것만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질질 눈물을 짰었지…아마.’ 괜히 손을 들어 머리를 헤집으며 렐리아는 시선을 피했다. 엄마 앞에서도 우는 모습을 잘 보이지 않던 자신일 텐데 어제는 열에 취해 미쳤던 게 틀림없었다. ‘……엄마.’ 렐리아는 그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자게 내버려두라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우울하게 입매를 가라앉혔다. 이대로 잠들고 영영 눈을 뜨지 못한다면 정말 이보다 편한 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도 잠시 그냥 자고 싶어졌다. 길고긴 휴식이 필요했다. 침대위에서 이런 식으로 자기만 하는 것과 관속에서 평생 잠드는 것은 대체 무슨 차이일까. 그런 음울한 생각을 하면서 렐리아가 스르르 눈을 감을 때였다. “아침은 뭐로 먹겠습니까.” 정확히 이불위에서 들려온 점잖은 저음은 태평하기 그지없었다. 렐리아는 부러 대답하지 않은 채 무시해버렸다. 아침식사고 나발이고 입맛이 없었다. 뭘 넘길 기력조차 없는 것 같다. 그런 제 우울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집요했다. “아침으로 소고기 스테이크는 어떻습니까.” “…….”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대.” “…….” “빈속에 부담가지 않게 최대한 육질을 부드럽도록 요리하라 이르겠습니다. 샐러드와 곁들어서 먹어도 든든하니 괜찮을…,” “……안 먹어.” 짜증스러운 말투가 먼저 나가버렸다. 렐리아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블리어는 의외로 쉽게 순응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렐리아의 귀엔 유독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하나 나갔을 뿐인데도 방안은 지독히도 허전했다. 온기가 떠난 옆자리는 미지근하지 않고 차가웠다. 갑작스레 마음이 심란해지자 렐리아는 이불속의 작은 공간에 의지했다. 혼자가 되기엔 딱 좋은 공간이었다. 그러다 반시간이 흘러 다시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수마에 잠겨있던 머릿속이 다시 선명해졌다. 마치 그 소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살짝 이불을 들춰 발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자 쟁반을 든 흑발의 남자가 보였다. 테이블에 쟁반을 내려놓기도 전에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방안 가득 퍼졌다. 향긋한 고기 향은 렐리아의 식욕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꼬르르륵, 배가 마구 요동치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다시 서둘러 이불을 덮었다.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서 배를 움켜쥐고 있을 때 다시 가직한 곳에서 저벅저벅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만약 그가 이불을 들춘다면 민망할 거라 여겨 자는 척을 했다. 예상대로 억센 손이 이불자락을 쥐고 단번에 허리아래까지 거둬냈다. 렐리아는 눈을 감은 채 온 신경을 그에게 두었다. 숨이 막힐 만큼 고요한 가운데 그의 낮고 희미한 숨소리가 느껴졌다. 적어도 자고 있다면 깨우지 않을 거라 여겼으나 뒷목 아래를 파고드는 굵직한 팔뚝에 렐리아는 기겁하며 눈을 떴다. 블리어는 나머지 한 팔로 그녀의 뒷무릎을 받쳐 그대로 가볍게 안아들었다. 이에 그녀의 하반신을 덮고 있던 이불은 자연스레 흘러내려갔다. 침대에서 벗어나 렐리아는 의자에 강제로 앉혀졌다. 테이블 위에는 한 상 가득 아침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아침부터 호화롭기 그지없는 소고기 스테이크와 브런치로 주로 먹는 노릇한 버터빵과 스프, 신선한 채소와 과일이 올라가 알록달록한 샐러드가 제 앞에 놓여 졌고, 반대편 그의 자리에는 커피와 메이플스콘이 놓아져있었다. 뒤늦게 그의 손이 뻗어져와 다정한 손길로 목에 냅킨을 둘러주었다. 무릎에 얹어야할 냅킨을 턱받이 대용으로 쓰고서 그는 맞은편 자리에 돌아가 착석했다. 그와 동시에 렐리아는 몸을 일으켰다. 다시 침대 쪽으로 발을 돌리고서 목에 둘러진 냅킨을 끌어내리려할 때였다. “렐리아.” 들려온 목소리가 발을 붙잡았다. 렐리아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녹색 눈은 여전히 자상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대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입맛 없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난거 압니다.” “안 먹었으니까.” “안 먹었으니 먹어야하는 게 아닙니다.” “별로. 먹고 싶지도 않고 굳이 먹을 필요도 없잖아.” 몸이 말라비틀어지든 말든 저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내 몸도 아닌데, 그런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그냥 다 귀찮고 피곤한 사람처럼 몸이 무거워서 침대위에 쓰러져 누웠다. “혼자 먹게 둘 겁니까.” 그것도 잠시 블리어가 나지막이 운을 뗐다. 그는 근처 침대에 다시 누워 이불을 주섬주섬 끌어올리는 여인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낮은 한숨소리를 흘렸다. “그대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겁니다. 그리 아십시오.” “굶든지 말든지…” 렐리아는 신경 안 쓴다는 듯 등을 돌려 누워버렸다. 제법 강경하게 나왔으나 십 분정도가 흐르자 슬슬 찝찝한 기분이 가슴속에서 머릴 쳐들었다. 뒤에서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뿐 식기는 일체 건드리지 않는 것 같았다. 십 분이 넘어가고 이십분이 되어가자 렐리아는 성질을 못 이기고 홱 뒤를 돌아보았다.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잠이 오지 않은 탓이다. “……공작, 진짜 안 먹을 거야?” “별로.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굳이 혼자서 먹을 필요도 없지 없습니까.” “…진짜 얄밉다.” 자기가 한 말을 고대로 인용해서 반박하는 남자는 꼰 두 다리 위에 책을 얹고 있었다. 흑백화보처럼 시선을 내리깐 채 책에 집중하고 있던 그가 슬며시 두 눈을 들어 올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부드럽게 녹아내릴 듯한 시선에 렐리아는 속으로 뜨끔했다. 블리어는 읽고 있던 책을 테이블에 얹어두고서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반대편 자리로 돌아가 의자를 빼주었다. “어서와 앉으십시오. 내가 이리 의자도 빼주지 않았습니까.” 앉으라는 회유의 눈길이 한 차례 이어졌으나 렐리아는 꿈쩍도 않은 채 침대위에 자릴 지킬 뿐이었다. 결국 블리어는 직접 걸음을 옮겨 그녀를 데리고 왔다. 신사적으로 다시 자리에 앉혀주고서 불퉁한 그 얼굴과 마주보고 앉았다. 렐리아는 자신이 포크를 쥐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잡내 없이 담백한 소고기 냄새에 침이 고이며 또 한 번 빈속이 크게 울렁였다. 여기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면 이보다 큰 낭패도 없을 것 같다. 그녀가 거세게 밀려오는 식욕과 충동을 밀어내는 동안 블리어는 여유로운 아침 한 때를 보내는 대부호처럼 조용했다. 블리어는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며 맑은 아침햇살이 내려앉는 여인의 흰 얼굴을 살폈다. 한 눈에 봐도 눈두덩은 살짝 튀어나와있을 만큼 부어있었다. 어젯밤의 애처롭게 울던 모습이 눈에 선했으나 블리어는 애써 대수롭지 않은 톤으로 말을 꺼냈다. “입안에 침이 고인 거 다 압니다.” “…뭐래.” 렐리아는 차갑게 대꾸했으나 그의 눈을 피해 슥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다. 그것을 보지 않아도 알아차린 무당 블리어였지만, 블리어는 내색하지 않고 팔을 뻗어 그녀의 손에 포크를 쥐어주었다. “고기는 식기 전에 먹어야 맛있습니다. 나보다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안 먹는다고.” “제발 먹어주십시오. 이러면 먹어줄 겁니까?” 그의 뜬금없는 애원조에 렐리아는 하마터면 입꼬리가 미약하게 끌어올려질 뻔했다. “…큼, 오늘만이다.” 마지못한 듯이 렐리아는 포크를 놀렸다. 그런 것치곤 말도 하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할 만큼 오랜만에 제대로 느끼는 음식 맛에 심취했다. 세브로웰에게 감금당한 그 며칠 동안 스프만 입에 쑤셔 넣는 게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조금 식어도 스테이크는 맛있었다. 역시 공작가의 요리사의 실력은 일품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갑작스레 기름기 많은 고기가 들어가니 약간 속이 울렁이긴 했지만 렐리아는 맛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여겼다. 식사를 마치고 렐리아는 또 한 번 그의 손에 이끌려 소파에 앉게 되었다. 식사 후 바로 누우면 소화도 잘 안될뿐더러 몸에 안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동안 블리어는 테이블을 치우고 방안을 한번 휘 훑듯이 정리한 후 렐리아를 욕실로 밀어 넣었다. 렐리아는 욕실 안쪽 문에 서서 어이없는 얼굴에서 한가득 표정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문밖에서 들려오는 저음은 짐짓 엄하기까지 했다. “깨끗이 씻고 나오지 않으면 문 안 열어줄 겁니다.” “…뭐?” 렐리아는 있는 힘껏 문을 쾅쾅 두들겼다. 허나 밖에서 힘으로 막고 있는지 꿈쩍도 안했다. 원래 힘만 있었다면 남자 손에 잡혀 질질 끌려들어가는 수모는 겪지 않았을 터다. 이렇게 강제로 갇혀있지도 않았을 테다. 왠지 모를 분함에 숨이 콱콱 막혀올 때 문 너머에서 단호하면서도 나직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이건 내기입니다.” “…?” “그대가 씻을 동안 나도 내 방에 돌아가 씻고 오겠습니다. 먼저 씻는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내기에서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거 어떻습니까.” 예전이라면 콜 하고 외쳤겠지만 렐리아는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저 괴상한 표정으로 문을 노려보다가 “그럼 지금부터 시작입니다.”하는 말에 슬쩍 승부욕이 생겼다. 그가 방을 나서는 소리가 들리자 렐리아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그래도 간밤에 흘렸던 식은땀이 물에 씻겨 내려가니 찝찝함은 확실히 가셨다. 렐리아는 샤워를 하는 동안 그가 참 쉴 틈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우울해죽겠는데 말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원하다고 여겼던 물줄기가 먹구름 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물 같았다. 우중충한 기분이 전신을 점령하자 렐리아는 물기가 뚝뚝 흐르는 머리를 대충 짜내고 발로 문을 툭 걷어찼다. 당연히 안 열릴 거라 여겼던 문은 활짝 열어젖혀졌다. ‘뭐야. 문도 안 잠가놨잖아.’ 렐리아는 속으로 투덜대다가 넓은 방 한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미 돌아온 건지 옷장이 있는 방향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실제로 옷장 앞에 있는 게 맞는지 옷장을 뒤지며 이것저것 꺼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공작이 아니라 좀도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렐리아는 서둘러 비치된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좀도둑은커녕 훤칠한 기럭지를 가진 사내만이 옷장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청색기가 감도는 짙푸른 정장차림의 그는 깨끗하고 단정한 옆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수상했다. 방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간을 차치하더라도 샤워시간과 이렇게 차려입을 시간을 합산한다면 최소 한시간일테다. 세수하고 옷만 갈아입고 온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폴폴 피어올랐다. 렐리아는 벌써부터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공작. 뭐야. 샤워 안했지?” “그대는 샤워까지 했습니까. 승자는 나지만 뭐 잘했습니다.” 블리어는 가운차림을 하고 다가온 여인의 아슬아슬한 모습에서 바로 시선을 거두고 손을 뻗어 젖은 머리칼을 만져주었다. 감기 걸리지 않게 완전히 말리는 게 어떻겠냐고 그가 운을 떼기도 전에 렐리아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들 듯이 굴었다. “뭐? 이거 반칙이잖아.” “나는 샤워하란 말은 일체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씻으라고 했을 뿐 그게 몸 전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논리정연 한 말투였다. 렐리아가 눈만 부릅뜬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을 때 블리어가 꺼내서 살펴보고 있던 드레스들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왜 하나같이 입질 않았습니까.” 새물내가 전혀 나지 않는 드레스만 십여 벌이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몇 번 입은 것 빼고는 일상생활에서는 불편하단 이유로 드레스를 멀리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블리어는 새삼 이 드레스들이 이제껏 방치되어왔던 것에 아쉬운 기색을 완연히 드러내었다. 렐리아가 뭘 입던 평소 크게 관여하지 않는 그였으나 블리어는 설득조로 타이르기까지 했다. “맞춤으로 제작된 고가의 옷들입니다. 그대만 입을 수 있는 드레스일 텐데 이렇게 예쁜 옷들이 옷장 안에서 썩어가고 있질 않습니까.” 그렇게 예쁘면 공작이나 입든지, 하는 빈정거림이 튀어나올 뻔했다. 렐리아는 탐탁찮게 고갤 돌려버리고서 심플한 잠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한 발 떼려던 찰나였다. “어디 갑니까. 이거 입어주십시오. 씻기 내기에서 이긴 내 소원입니다.” “…….” 렐리아는 다시 해괴한 표정을 지은 채 저를 부드럽게 잡아 옷장 앞으로 이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드레스는 전체적으로 펑퍼짐하지 않고 몸의 굴곡을 따라 떨어지는 우아한 스타일로, 푸른 안개꽃이 소복이 피어난 것처럼 소매와 단 자락마다 비즈가 달린 연하늘색 드레스였다. 청순하다면 청순하고 우아하다면 우아한 아름다운 드레스였다. “소원 안 들어줄 겁니까.” 재촉하는 그 눈빛에 못 이겨 렐리아는 결국 떠다밀어지듯이 드레스를 안고 침대 앞으로 갔다. “입을 수 있는 데까지 입으십시오. 바로 도와주겠습니다.” 썩 그 말이 의심스럽기만 했으나 렐리아는 등을 돌린 채 가운을 벗었다. 가운은 침대위에 대충 던져두고 보정속옷부터 착용했다. 혹시 뒤에서 보고 있진 않을까, 하는 의심에 슬쩍 뒤를 돌아보니 공작의 단정한 검은 뒷머리만 보일 뿐이었다. 렐리아는 바로 주섬주섬 긴 드레스를 입기 시작했다. 늘 시녀들이 달라붙어 착의를 도와주었는데 혼자 입으려니 팔 구멍 찾기도 힘들었다. 겨우 양팔을 꿰고 어깨까지 끌어올렸으나 문제는 등허리에 위치한 코르셋이었다. “공작. 코르셋.” 그 짧은 두 어절에도 그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제게로 몸을 돌려 다가왔다. 블리어는 처음 시도해보는 코르셋도 막힘없이 술술 해내보였다. 경험 없는 시녀도 손을 버벅거리기 일쑤일 텐데 그는 커다란 손을 가지고서도 작은 구멍에 촘촘하게 끈을 꿰어 넣어갔다. 원체 성격이 꼼꼼하다보니 이런 일에는 태생적인 소질이 있는 듯 했다. 혹여 허리가 아플까 그는 조금 느슨하게 코르셋을 묶어주었다. 그러고는 전신 거울 앞으로 그녀를 데려왔다. 쌩얼에 드레스라니 다소 웃긴 조합이긴 했으나 렐리아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역시나 완벽한 성미 아니랄까봐 그가 제 젖은 머리를 어루만져주며 귀 옆에 입을 대고 말했다. “그대가 원한다면 화장도 직접 해줄 수 있습니다.” “왜 공작됐대…. 시녀로 태어나지.” “지금도 시녀와 다를 바 없이 그대의 시중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난 아가씨인감.” “아가씨라고 불러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아가씨.” “으, 느끼해.” 렐리아는 집어치우라며 그의 팔등을 찰싹 때렸다. 매끄러운 정장 겉감에 마찰음이 거의 흡수되었지만 말이다. 블리어는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이제껏 품속에 넣어두고 있던 것을 꺼내들었다. 그것을 보고 렐리아는 놀란 눈을 했다. 잃어버렸던 목걸이가 블리어의 손에 들려있으니 당연했다. 이윽고 그의 미지근한 손이 렐리아의 목을 스쳐 손수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쇄골 사이에 떨어진 작은 크리스탈이 은은한 금빛결정을 머금은 채 반짝거렸다. “렐리아. 같이 산책 나가겠습니까?" "……웬 산책." "아니면 오랜만에 같이 앉아서 티타임을 가지는 건 어떻습니까? 나는 뭐든 좋습니다만 그대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블리어는 정말 시중을 드는 사람처럼 자상한 태도와 말씨를 사용했다. 누가 보면 윗사람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사람보다도 더욱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그녀와 시선을 맞춘 그의 눈은 오랜만에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처럼 온화하게 누그러져있었다. 0123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렐리아는 한사코 방안에 있는 것을 고집했다. 그런 그녀의 의견을 블리어는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함께 방에서 노닥거리기를 택했다. 물론 느긋하게 늘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는 방안을 뒤져 방주인 렐리아도 있는지 몰랐던 잡다한 것들을 어디서 꺼내왔다. 얼굴에 바르는 색조화장품들과 천과 실, 바늘, 심지어 누가 반쯤 수를 놓다가만 수틀을 가져왔다. 아마도 소피아의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이걸로 뭘 하라고.” 기상천외한 과제들만 내주시는 대학교 교수님도 아니고 이게 다 뭐냐고 렐리아는 자그맣게 툴툴 거렸다. “우리가 오늘 하루 가지고 놀 것들입니다.” “…….” “그런 반응 마십시오. 사람은 항상 새로운 걸 경험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블리어는 내빼려는 렐리아의 손목을 쥐고서 다시 소파 옆자리에 앉혔다. 렐리아는 감흥 없는 눈으로 지루하게 천장을 올려다본 채 소파 등받이에 머릴 기대었다. 이럴 바에는 드레스로 왜 갈아입으라고 했는지 알 수 없었다. 공작 속을 자신이 어떻게 알겠냐만은 확실히 거추장스러운 긴 드레스는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동안 블리어는 바늘에 금색 실을 꿰서 그녀의 손에 건네주었다. “그걸로 이 수틀을 완성해봅시다.” “…이걸로 공작 찔러도 돼?” “손재주는 내가 더 뛰어날 터이니 나는 불리하게 이 천으로 도전하겠습니다. 둘 다 처음인 만큼 그럴 듯한 자수를 놓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또 내기? 근데 이기면 뭐가 좋은데.” “저기 있는 화장품들로 상대를 화장시켜주기 어떻습니까.” “뭐, 그러든가.” 렐리아는 조금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던 건지 곧장 불만 없이 수틀을 쥐고 바늘을 냅다 끼워 넣기 시작했다. 한땀 한땀 수를 놓으며 집중하는 그 옆얼굴을 블리어는 소리 없이 훔쳐보며 안도하듯이 웃었다. 물론 내기에서 질 수는 없기에 그도 바로 하얀 천을 집어 들었다. 예술적인 안목이 뛰어난 고위귀족답게 그는 대강 눈으로 어떤 식으로 자수를 완성시킬 것인지 생각한 뒤 차분히 바늘을 움직였다. 그에 반해 디자인 전공이 무색하게도 렐리아는 손을 바르르 떨었다. 다름 아닌 분노에서였다. 바늘을 끼워 넣는 족족 반대편에 있던 엄지에 꽂히니 환장할 수밖에. 사십분 째에 다다라서는 렐리아는 이것을 바닥에 패대기칠까 하는 격한 충동과 싸워야만 했다. 그에 반해 블리어는 굳은살 박인 손끝에서부터 하나의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과연 그의 세심함과 예리함, 꼼꼼함은 무시할 게 못되는지 자수에서도 어김없이 진가를 발휘했다. 말이 없이 묵묵히 바늘을 놀리는 모습이 어딘가의 조신한 규수 같기도 했다. 그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와 굵다란 팔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렐리아는 슬쩍 그가 얼마나 완성시켰는지 보기위해 등을 완전히 소파에 파묻었다. 그리고 목을 길게 빼서 힐끗힐끗 훔쳐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때 다소곳이 내리깔아진 서느런 눈매가 떠지며 그의 진녹색눈동자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합니까, 하고 묻듯이 잔잔한 시선이었다. “…아무것도.” 괜히 찔린 채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렐리아는 바로 자신의 수틀을 가슴에 묻었다. 누가 보면 국가기밀쯤 되는 서류인 줄 알 것이다. 그러나 그 우스운 행동을 블리어도 똑같이 행했다. 미리 보여주어선 안 된다는 강박을 느끼고서 그녀에게서 반쯤 몸을 돌린 채 철저한 보안 속에서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 작업을 이어갔다. 마무리할 때쯤이 되어선 이미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정오를 겨우 넘긴 시간이었다. 렐리아는 아예 드러눕다시피 소파에 앉아 대충 얼기설기 검은 실로 마무리를 했다. 블리어는 아직 제 작품이 미흡하기만 한지 아쉬운 기색이 녹안에 스몄으나 마지못해 손을 떼었다. 가장 먼저 렐리아의 작품이 두 사람 앞에 공개되었다. 수틀을 시야에 담기 무섭게 블리어는 짙은 녹안위로 스치는 오묘하고 혼란한 감정을 숨겨야만 했다. 금색실로 열심히 수를 놓은 것은 알겠다. 허나 검은 때가 낀 금덩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일그러진 형태는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섣부른 평가가 되레 그녀를 상처 줄까, 블리어는 깊은 고심 끝에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황금광 시대를 비판하는 그런 심오한 주제가 담긴 것 같습니다만……흐음.” “아니 그냥 바나나인데.” 과한 평가는 자신이 부담스러웠다. 렐리아는 대신 팝아트적인 효과를 주었노라 당당하게 얘기했으나 사실상 앤디 워홀의 바나나 작품을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공작은 뭔데.” 유독 은실을 많이 사용하던데 그는 무슨 은광 시대를 비판하는 심오한 주제를 담은 모양이었다. 렐리아가 그의 것도 공개하라고 툭툭 치며 재촉하자 블리어는 잠시 시간을 끌다가 그녀에게 반으로 접은 천 조각을 넘겼다. 새하얀 천을 펼치자 드러난 것은 여자의 옆얼굴이었다. 은실로 귓등너머로 흘러내리는 긴 은발을 표현해놓고 내리깐 속눈썹도 촘촘하게 은실로 수가 놓아졌다. 유려한 옆얼굴 선은 최대한 부드럽게 회색실로 표현해놓았다. 렐리아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블리어는 그녀의 놀란 표정을 은밀히 살폈다. 그녀가 우울해질 틈이 없게 만들기 위해 권유한 일일 터인데 괜히 그 자신이 진지해져서는 집중하게 됐었다. 그녀 몰래 옆얼굴을 관찰하며 작은 한 땀조차 신경 써서 찔러 넣었다. 물론 시간이 짧은 관계로 완성도가 다소 떨어져 블리어 그의 눈에는 썩 만족스럽지는 못하다지만. “처음 하는 거 맞아…?” 렐리아는 차마 어떻게 감상평을 내놓아야할지 몰라 엉뚱하게 운을 떼야만 했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자신은 그를 경계하고 바나나를 만드는데 필사적이었다고 여기니 얼굴에 열이 올랐다. “…퀄리티만 보면 공작이 이기겠네, 뭐.” 시큰둥하게 말하면서도 렐리아는 천을 놓지 못했다. 왠지 이 천속의 얼굴이 예쁘게 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보는 자신은 이렇구나, 하고 새로이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그 말은 내가 이겼다고 생각해도 됩니까.” “…뭐어, 그러든가.” “그렇다면 내 손으로 그대 얼굴을 화장해주어도 됩니까?” 아 맞다. 렐리아는 그제야 내기의 이유와 목적을 상기했다. 다시 말을 무를까 싶었으나 렐리아는 그 정성을 봐서라도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인정해야겠다고 여겼다. “얼굴 이쪽으로 돌려보십시오.” “지금당장하게?” “내기는 내기지 않습니까.” 블리어는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했으나 두 손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한평생 검과 펜만 잡아왔을 그가 여성의 화장도구를 만져볼 기회가 있을 리도 만무했고, 당연히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는 것도 처음이라지만 대강의 생김새만 봐도 무엇에 쓰이는 물건인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입에 바르는 것이겠구나, 하는 냉철한 판단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립스틱 뚜껑을 뽑아들었다. 투박하고 힘줄이 드러난 손에 쥐어져있는 분홍 립스틱은 앙증맞기 그지없었다. 블리어는 그녀의 턱을 살짝 잡아서 약간 고개를 들게 한 후 립스틱을 움직였다. “후흐흡.” “웃지 마십시오. 떨려서 번지지 않습니까.” “간지러…” “말도 하지 마십시오.” 그는 또다시 진지하게 임하기 시작했다. 완성도가 낮았던 자수의 결과물을 대신해 이번엔 그녀의 얼굴로 완벽하게 완성시켜 보이겠다는 의지에 타올랐다. 블리어는 립스틱이 뭉개지지 않는 선에서 그녀의 입술에 문댄 후 분칠을 해주었다. 순서는 뒤죽박죽이었으나 생각보다 실력이 나쁘지 않아 렐리아는 자신의 뺨을 도닥도닥 두드리는 쿠션의 감촉을 얌전히 느꼈다. “눈 떠보십시오.” “…?” 렐리아가 동그랗게 눈을 뜨자 블리어는 바로 마스카라를 쥐고 침착하게 그녀의 속눈썹에 가져다댔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그냥 내가 할까.” 뭔가 불안한데, 렐리아는 그가 실수라도 해서 마스카라로 제 눈을 찌르는 상상을 했다. 생각보다 처참한 고통이 예상이 돼서 부르르 몸을 떨 때 문득 가까워진 그와의 거리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코앞의 남자는 아무런 생각이 없는지 침묵만 고수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느라 가느다래진 눈은 자신의 눈썹을 내려다보며 마스카라로 눈썹 한올 한올을 쓸어 올려주고 있었다. 한 이십 초간은 가만히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렐리아는 슬쩍 고개를 뒤로 물렸다. “나 남자한테 화장 받아보는 거 처음이야.” 그래서 어색하다고 얘기하려 했으나 그전에 그가 점잖게 운을 뗐다. “그러는 나도 여인에게 이리 해주는 것은 처음입니다.” “…….” 참 할 말없게 만드는 남자였다. 렐리아는 지그시 입술을 다물고서 마지막으로 그가 눈두덩에 찍어 발라주는 고운 가루입자의 감촉을 느꼈다. 뭉툭한 손가락 끝이 왔다갔다 움직이더니 얼마안가 떨어지며 바로 콧등 위로 나직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이제 다 됐습니다.” 렐리아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흡족감이 서린 그의 얼굴이었다. 딱딱한 목석같은 이목구비가 조금은 유하게 휘어진 것 같았다. “거울 봐보십시오.” “…됐어. 봐서 뭐해.” “꽤 예쁘게 됐습니다만 정말 안볼 겁니까.” 무뚝뚝한 저음에는 장담한다는 단호함이 은근히 깔려있었다. 그럼에도 렐리아는 꿈쩍도 안한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심드렁하게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입술 언저리를 긁적였다. 손끝에 묻어나는 연한 분홍색립스틱에 바로 손을 내렸지만. “뭔가 입이 심심한데.” “벌써 점심을 먹을 시간이니 말입니다. 오찬을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아냐. 아침에 먹은 거 아직 덜 꺼졌어.” “그럼 간단하게 디저트 어떻습니까. 후원에 꽃이 많이 폈을 겁니다. 정원에서 티타임이나 가집시다.” 그는 이번엔 밖으로 나가자고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물끄러미 창문 쪽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꽃을 봐야 뭐하겠냐는 생각만이 머리를 점령했다. “예쁘게 차려입고 방안에만 있기엔 아쉽지 않습니까.” 하지만 블리어는 한사코 그녀를 방안에서 끌어내려 작정한 사람처럼 굴었다. 순순히 따라오지 않으면 자신이 직접 안고 갈 거라고 협박 아닌 협박에 그제야 렐리아는 타의 반, 자의 반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여간, 사람을 가만히를 안 놔둬….” 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황량한 복도 안을 울렸다. 사용인 대부분이 떠나간 대저택은 대낮에도 삭막할 만큼 조용했다. 왠지 이 드넓은 저택에 그와 자신밖에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편했다. 외딴 섬에 단둘이 있는 것 같았다. 저택 서측 문으로 나오자 바로 후원과 이어졌다. 렐리아는 따사로운 볕이 내리쬐는 후원을 그와 나란히 거닐었다. 서서히 정자까지 걷는 동안 활짝 핀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완연한 봄기운에 활발하게 노니는 한 쌍의 하얀 나비를 바라보다가 문득 화단에 심어진 화려한 꽃들에 눈이 갔다. 그 독특한 조합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여겼는데 예전에 그가 선물해주었던 서른 종의 꽃들이었다. 방에 놓을 자리가 없다는 이유로 30개의 화분을 죄다 복도에 내놨었는데 정원사가 화단에다 옮겨 심은 건지 싱싱하게 잘 자라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합니까.” 그러다 옆에서 함께 걷던 블리어가 불쑥 말을 건네자 렐리아는 급히 시선을 회수했다. 자기가 아직까지도 그 선물을 신경 쓰는 건줄 알까봐 다소 생뚱맞은 말을 해버렸다. “그냥, 이러니까…공작이랑 단둘이 남겨진 것 같아서.” 화원 한가운데에 놓인 회백색 정자지붕 아래로 들어와 렐리아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괜찮지 않습니까. 남 눈치 볼 필요 없이 둘이 이렇게 사는 것도.” 블리어는 그녀의 반대편에 앉아 평화로운 어조로 말을 받아주었다. 단둘뿐이어도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삶이 여유로웠다. 골치 아픈 국정을 외면한 채 그는 오랜만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공작은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그때 돌연 들려온 질문에 블리어는 정원풍경에서 맞은편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비스듬히 무릎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녀의 심드렁한 두 눈은 다시 우울함이 돋친 것 같았다. “성가시지 않나. 나.” “그럴 리 있겠습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자신이 슬슬 귀찮게 여겨지는 거라고 렐리아는 단념해버렸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공격적인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공작은 나한테 있어서 아무것도 아니야.” 0124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 “그냥 우울증 환자 돌봐주려는 정의감인지, 의리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잘해줘 봤자야. 장담하는데 공작에게 돌아오는 거 없을 걸.” 계속 죽지 못해 살거나, 아니면 죽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한테는 버거운 짐을 지우게 할 것이다. 렐리아는 제법 스스로를 잘 알았다. 자기 분수도, 처지도. 지금은 제 기분이 우울하다는 걸 알아차리고 이렇게 비위맞춰주고 잘 해준다지만 나중에 공작마저 찾지 않는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다. 렐리아는 하루 내내 그러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공작은 이 세계에서 유일한 미련이 되는 사람이니까 의리상 자살소동은 벌이지 못하고 어울려준 것뿐이었다. “공작은 단순히 내가 편하고 그나마 나랑 노는 게 재밌는 거 아냐. 그뿐인데 왜 잘해줘? 공작도 누군가랑은 결혼해야 될 거 아니야. 나랑 이렇게 쓸데없이 탱자탱자 놀 시간에…좀 건설적이고 미래를 함께할 사람한테 투자하지 그래.” “…….” “의리 때문에 이러는 거라면 이럴 필요 없으니까, 나 부담스럽기만 하고. 시간낭비잖아.” 가시 돋친 말에도 블리어는 그다지 미동 없이 굴었다. 바위처럼 굳건히 듣기만 하던 그가 운을 뗀 건 한참이 흐른 뒤였다. “그대는 내가 찾은 진주입니다.” “공작…요즘 무슨 시 써?” 떨떠름하고 황당한 눈으로 렐리아가 그를 바라보았으나, 블리어는 그저 담담하고도 부드러운 말씨를 사용했다. “흔히들 진흙 속의 진주라고 표현하질 않습니까.” 사소한 단점 속에 묻힌 큰 강점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에게 있어 렐리아가 그랬다. 한때는 그저 천박하고 타성과 나태에 젖은 여자였지만 이래봬도 그 가냘픈 몸으로 위험상황에서 자신을 몇 번이고 구했던 여인이었다. 칙칙한 단점을 거둬내서야 비로소 발견한 그녀의 진짜 모습은 블리어의 마음을 열게 하기엔 충분했던 것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진흙투성이에서 발견한 진주처럼 말이다. “비슷한 진주야 얼마든지 있겠지만 내가 직접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 발견한 진주는 그만큼 특별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발견한 시점에서 이미, 대체할 수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게 된 겁니다.” 이러니 더욱 값지고 예뻐 보이는 게 당연하다. 이렇게 예쁜 것을 왜 여태껏 아무도 탐을 내지 않았나 싶을 만큼 말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비하하려하지 마십시오.” “…공작이 마음씨 좋은 건 알겠어. 근데 굳이 이런 식으로 추어주지 않아도 돼.” “렐리아. 나는 거짓은 말하지 않습니다. 내 말이 과장이라고도 생각지 않습니다.” “아니 이건 그냥…공작이 이만큼 친했던 여사친이 나뿐이라서 그런 거잖아. 정들어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나 진짜 별 거 없어.” 진주니 뭐니 애써 좋은 얘기를 해줘봤자다. 그럴수록 부담스럽기만 하다고 렐리아는 툭 까놓고 얘기했다. 차마 자기는 언제든 힘들면 이 목숨줄부터 끊을 거라는 얘기는 하지 못한 채 그를 밀어냈다. 다가와 봤자 자살자 때문에 슬퍼질 일밖에 더 남을까. 그러나 블리어는 그럴수록 더 끈질기고 악착같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렐리아가 그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언제부터 그대가 그리 남의 입장을 잘 헤아렸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눈을 마주하고 블리어는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반쯤 걸쳐진 여린 손을 포개듯 붙잡았다. 타이르듯 다정한 목소리가 렐리아의 작은 마음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 부담스럽다면 내가 주는 걸 버려도 좋습니다. 허나 내가 좋아서 그대와 함께 있는 거고 그대에게 베푸는 겁니다. 내 마음까지 버리진 마십시오.” * 동이 틀 무렵이었다. 렐리아는 몸을 심하게 뒤척이며 눈을 떴다. 또 다. 또 부모님이 나오는 꿈이었다. 분명 현실처럼 생생했을 꿈은 막상 눈을 뜨면 어떤 내용인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안개가 낀 듯 희미한 시야로 어슴푸레한 천장을 응시하다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익숙한 물기가 귓바퀴와 베개를 적셨다. 크게 헐떡이던 숨이 잦아들 무렵 바로 옆에서 이불이 부스럭대며 커다란 손이 뻗어져 나왔다. 언제 깬 건지 옆에 있던 블리어가 눈물로 푹 젖은 눈가를 한번 어루만지듯 닦아주었다. 마른 손끝이 대신 젖어들었다. “또…악몽을 꿨습니까.” 그게 악몽인지, 행복한 꿈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눈을 뜨는 걸 괴롭게 하는 거면 악몽이 맞았다. 렐리아가 다시 조용히 눈을 감자 그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답지 않게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는 팔뚝이 단단히 허리를 안아주었다. “옆에 있겠습니다.” 그러니 걱정 말라며 블리어가 잠긴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어두운 새벽 눈을 떠 그녀를 달래며 잠재우는 일은 이제는 습관과도 같았다. 어느새 평안한 얼굴로 돌아와 얕은 숨을 고르는 여인을 내려다보다가 블리어는 이불을 한번 정리한 후 자신도 눈을 감았다. 렐리아는 또 한 번 깊은 어둠속에 빠져들었다. 숲인지, 건물 안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곳은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공간을 헤매다가 어렴풋이 들려오는 희미한 외침이 귓가에 닿았다. “……화야! 태화야…!” 웅웅 메아리치는 목소리가 절박해서 도무지 안 뛰고는 베길 수가 없었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드러나는 두 발은 하염없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내달렸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전혀 가까워지질 않았다. 분명 들려오는 곳을 향해 옳게 뛰어왔다고 여겼는데도 아득하기만 했다. 어느새 등 뒤에서 그 애달픈 메아리가 울려 퍼지자 렐리아는 완전히 방향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더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어디선가 실낱처럼 들려오는 엄마의 목소리만이 희망이 되고 의지가 되었다. 렐리아는 계속해서 걸어갔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때쯤 멀지않은 곳에서 또 한 번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화야! 어딨니, 태화…! 엄마야, 대답 좀 해봐!” “엄마? …거기 있어?” 강 건너편에 엄마가 서있는 것만 같았다. 혹은 낭떠러지를 사이에 두고 있는 것처럼 거리는 전혀 닿질 않으나 목소리가 선명했다.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태화야! 태화니……?” “엄마! 나 여깄어!!” 일순 뚝, 엄마의 목소리가 끊겼다. 잠시간의 정적을 뒤로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어둠을 가르고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 “……아.” 렐리아는 멈칫 한발을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자신의 몸이 이태화가 아닌 렐리아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 꼴로 엄마를 만나려했던 건가 싶으니 손끝이 조금 떨렸다. 하지만 등 뒤를 단단한 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발이 좀체 떨어지지 않았다. 저를 못 알아볼 거라는 두려움보다도 이런 식으로도 엄마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다. “우리 딸…혹시 이태화라고 알아요? 이태화라고.” “……네.”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알아요…” 힘겹게 폐를 쥐어짜내듯이 대답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곧바로 맞은편에서 희미하게 엄마의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딸 지금 어딨냐고, 몸은 건강하냐고, 별 일은 없냐고…, 그 힘겹게 쏟아지는 질문들은 이제껏 가슴에 쌓인 한과 그리움이 녹아들어있었다. 듣고 있는 렐리아조차 눈이 시큰거릴 만큼 서글픈 목소리였다. 그러나 렐리아는 그 질문들을 모조리 무시하고 애써 담담한 척 운을 뗐다. “…태화가 못 돌아간대요.” “……그, 그게 무슨,” 당혹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애탄 감정이 엄마의 목소리에서 그대로 묻어났다. 렐리아는 모른 척 입술을 깨문 채 말을 이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중간에 목이 메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화가……사정이 생겨서 돌아갈 수가 없대요. 기다리지 말래요." "……아아…," "그러니까 자기 걱정 말고…우울증 약 의존하지 말고, 아빠랑 단 둘이……건강하게…행복하게 웃으며 사시래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맞은편에서 엄마가 소리 내어 우는 게 더욱 생생하게 들려왔다. 어둠 탓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으나 엄마가 어떤 표정으로 울고 계실지 눈에 선하기만 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아 렐리아가 바로 등을 돌려 도망치듯이 가버리려 할 때였다. “저기…, 잠깐만요. 아가씨!” 크나큰 엄마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해서 렐리아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우,우리 태화한테도 말 전해주시겠어요…?” 떨리는 목소리에 짙은 슬픔이 부걱부걱 괴어올랐다. 렐리아가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바로 눈물기가 배인 엄마의 목소리가 짠 바람에 실려 왔다. “정말 집에 못 돌아오는 거면……어쩔 수 없는 거라면……너도 괜히 죄책감 느끼지 말고, 엄마아빠 걱정 말고 거기서 행복하게 살라고 전해줘요. 그게 효도하는 거라고…꼭 좀 전해줘요. 부탁해요.” “……그게…가능할까요…?” 울먹거리는 입술을 간신히 벌리며 렐리아는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아무도 없는 세상에서 살아봐야 절망스러울 뿐일 텐데 어떻게 다 잊고 행복해지지. 어떻게 엄마아빠를 잊고 살지? “…네가 거기서 행복해야 우리도 웃으며 살 수 있다고…그렇게 전해줘요.” “……흐으,” 입을 꽉 틀어막았다. 손가락의 미미한 틈새로 울음소리가 삐져나왔다. “그리고 우리 딸, 잘 좀 챙겨줘요. 아프지 않게, 상심하지 않게…부탁할게요. 꼭…….” “……네에. 꼭, 그럴…게요.” 엄마. 울음에 억눌려 나오지 못한 말을 가슴 깊숙이 눌러 삼키며 렐리아는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바로 관자놀이를 타고 눈물이 소리 없이 굴러 떨어졌다. 귓바퀴로 스며들기 전에 부드럽게 엄지로 쓸어 닦아주는 손길에 렐리아는 옆을 돌아보았다. 침대 머리맡에 앉아 독서를 하고 있었던 건지 무릎위에 책을 얹고 있는 그가 보였다. 환한 아침햇살에 젖어든 검은 머리칼아래 다정한 진녹색 눈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0125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일어났습니까?” 창백한 이마위에 어질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블리어가 물었다. 렐리아는 아무 말도 않은 채 꿈의 여운을 달래야만 했다. 가슴이 뻐근해서 조금 아플 지경이었다. 블리어는 울먹이는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어린 미소를 눈치 챘다. 무서운 악몽이 아닌 그립고 슬픈 꿈을 꾼 것이구나 싶었다. “…꿈을 꿨어.” 한참 뒤에 조금 진정이 된 건지 렐리아가 자그맣게 입술을 벌렸다. “엄마가…나왔는데.” 입술을 꾹 깨물고서 렐리아는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차마 덤덤하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꼴불견스럽게 눈물이 괴어 오를까봐 고집스레 방구석을 응시하다가 겨우 여상한 척 말을 이었다. “엄마랑, 앞으로는 영영 못 만난다고 작별인사를 했어.” “…….” “지금 내 상황이 그래. 그래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아마도..말이야. 현실을 받아들일 시간이,” 받아들일 수나 있으려나, 렐리아는 씁쓸하게 속말을 삼켰다. “얼마나 걸릴지는 몰라. ……근데, 많이 힘들 것 같아.” 지금도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괴로운데 언제쯤 이 고통이 가실지 알 수 없었다. 기약 없는 고문을 받는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눈가의 시큰거림이 조금은 가셨다. “공작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고통스러운데도 이대로 참고 받아들이는 게 옳은 걸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그대에게 있어서 고통이라면, 일단은 가볍게, 가볍게 받아들이려 노력해봅시다.” 블리어는 가볍게 현실을 받아들이려 노력한다면 그만큼 슬픔의 무게도 줄어들 거라고 나직이 얘기해주었다. “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매일 매일을.” 영원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반복될 일상이 그녀에겐 고통이라 했다. 그렇담 고향을 떠나와 잠시 긴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고통이 조금은 덜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내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해줬던 적이 있을 겁니다.” 블리어는 다시 몸을 뉘여 렐리아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끌어 당겨와 제 품에 기대게 만들었다. “어렸었습니다. 그때는 충격이 커서 실감조차 나질 않았습니다. 며칠 내내 식사도 못하고 잠도 잘 못 잤던 걸로 기억합니다.” “……괴로웠겠다.” “그래서 어머니가 잠시 긴 여행을 떠나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었습니다. 여행이라 함은 완전한 이별이 아니라 끝에는 다시 돌아오게 되어있으니 말입니다.” 따스한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블리어는 누가 봐도 애틋한 눈길로 그녀와 눈을 마주했다. “그 고통을 외면할 수가 없다면 스스로 최면을 거는 겁니다.” “…….” “고통스런 현실에 갇혔다고 생각지 말고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렐리아는 잠자코 그의 손길과 눈길을 느꼈다. 마음속까지 따스해지는 기분을 받았다. 잠시 뺨 위에 겉돌던 커다란 손이 부드러이 뺨을 감싸더니 곧 그의 고개가 내려왔다. 이마에 닿는 뜨거운 숨결과 조심스런 감촉에 렐리아는 숨을 참았다가 천천히 몰아쉬었다. “그대마음 가는 대로 살면 됩니다.” 매 끼니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즐거운 대화를 하고, 산책도 하고, 새로운 것을 도전해보고, 졸릴 때 눈을 붙이는 것. 모두 다 그녀 마음대로 하면 된다. “그대를 억압하는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세상 또한 말입니다.” 짧게 이마에 입을 맞춰준 후 블리어가 낮게 속삭이듯 얘기해주었다. 왠지 다 알고 위로해주는 것 같아서 렐리아의 눈가가 뭉근하게 달아올랐다. 슬며시 고개를 숙여 푸근한 그 품속에 이마를 기대고 팔을 뻗었다. 그의 허리를 덮고 있는 이불을 스쳐 넓은 등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고마워.” 아주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것 같았다. * 며칠을 또 보낸 걸까. 렐리아가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난 후 하는 생각이었다. 시간은 너무 빨리 가버려서 이렇게 아침이 올 때마다 현실감이 없었다. 그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 한 때 티타임을 가지고, 저녁식사를 하면 어김없이 하루가 지나가버리니 말이다. 과연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과 언제까지 이런 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일었다. 아침부터 그런 우울한 공상에 빠질 때면 그녀자신도 모르게 어딘가 멍해졌다. 얼핏 보면 잠이 덜 깨 졸린 것처럼 보이겠지만 렐리아는 분명 마음속에 내제된 심각한 불안을 느꼈다. 언제 이 평화로운 일상이 깨질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이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두 눈만 끔뻑거리던 렐리아가 하품을 터뜨리며 등을 돌렸다. 옆으로 돌아누워 더욱 굴곡진 라인을 따라 이불이 흘러내렸다. 사내라면 한번쯤 시선이 고정될 아름다운 몸매에도 블리어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정리해주듯 손가락으로 빗어주었다. 한 침대위에서 지내는 동안 시각적으로 익숙해져서 이제는 제법 초연한 태도를 고수하는 그였다. 블리어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에 담으며 자장가처럼 낮은 목소리를 냈다. “졸리면 더 자십시오.” “별로. 안 졸려.” 잠결이 묻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렐리아는 대답했다. “그럼 삼십 분 뒤에 아침식사 합시다.”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렐리아가 몸을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냐고 묻는 블리어의 시선은 여전히 부드레해서 렐리아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목석같은 남자가 뭐든지 다 받아줄 것 같았다. “공작 말이야. 왜 그렇게 줏대가 없어졌어?” “무슨 말입니까.” 예전 같았으면 바로 예민하게 반응하느라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을 텐데 그저 잠잠하기만 했다. 블리어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기만 하자 렐리아는 두 손을 움직여 그의 허리를 감았다. 바짝 들러붙은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그제야 새카맣고 짙은 눈썹이 매끄럽게 휘어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두 눈은 왜 그러냐고 묻듯 다정하기만 했다. 렐리아는 서로의 얼굴이 상당히 가까워져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얄궂게 그의 등 근육을 조물조물 만져댔다. “왜 화 안내?” “내가 화내길 바랍니까?” “그건 아닌데, 예전에 이랬으면 화냈잖아.” 그를 귀찮게 만들려고 작정한 건지, 아니면 그냥 저가 심심해서 못살게 구는 건지 렐리아는 그의 근육질 몸이 찰흙이라도 되는지 주물럭거렸다. 블리어는 그 작은 손이 싫지 않고 외려 좋은듯했다. 티는 내지 않았으나 미약하게 입술 끝이 올라가있었다. 렐리아는 관심도 없다지만 아무튼 그랬다. “공작.” 문득 렐리아가 손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란히 누운 채 서로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뒤늦게 렐리아가 입을 열었다. “저번에 공작한테 공작은 나한테 있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 틀려.” “그럼 뭡니까?” “그게…” 우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지만 블리어는 그녀의 영악한 속을 알면서도 기대감이 들었다. “뭡니까? 얘기해보십시오.” “나 어디 가서 이런 말 잘 안하는데…하아.” “괜찮습니다. 그러니 어서 얘기해보십시오.” “공작은……뭐냐면은. 아, 진짜 이런 말 처음인데.” 다시 긴 뜸을 들이며 렐리아는 옆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그 모습에 냉정한 이성도 내다버린 채 거의 속아 넘어간 블리어는 그녀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겹친 두 손이 두 사람도 알지 못하게 자연스러웠다. “듣고 싶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공작은 내 침대인형이야. 안고 자는 인형.” 킥킥 소리를 내며 렐리아는 다시 그를 꼭 안아주었다.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튼실한 몸이다 보니 딱딱한 죽부인 같기도 했다. 이에 블리어는 오랜만에 냉랭한 표정을 되찾았다. 포옹도 소용없었다. 긴 침묵이 이어지고 그는 다소 딱딱해진 말투로 단호하게 운을 뗐다. “그거 밖에 안 됩니까.” “침대인형이면 대단한 건데. 진짠데.” “…….” “나 여자친구랑도 안고 안자. 공작은 특별한 거라고.” 불신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그에게 렐리아는 사실이라며 재차 어필했다. 침대인형이라고 밖에 표현할 단어가 없기도 했다. 보통 친구사이에 서로 끌어안고 자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연인도 아니고 사랑의 교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의리와 친근감, 신뢰가 오가는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정도였다. “그렇다고 안고 자는 단백질인형 하면 이상하잖아. 왠지 어감상 드럽기도 하고,” “단백질인형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드러운 거라면 하지 마십시오.” “안 해.” 사람 뭘로 보냐며 렐리아는 칼같이 대답했다. 그와 동시에 블리어도 칼같이 렐리아의 팔을 풀어 제 몸에서 떨어뜨려놓았다. 오랜만에 저기압이 찾아온 옆얼굴은 새까만 머리와 잘 어울릴 만큼 칙칙해보였다. “그대에겐 참으로 실망이 큽니다.” “아 왜, 인형이라고 하면 예쁘고 좋잖아.” “그건 외모를 인형에 비유할 때의 얘기이지 않습니까. 그대와 나의 관계가 고작 사람과 끌어안기는 인형이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니, 누가 그런 뜻 이래! 공작!” 일어나려는 그의 허리를 다시 와락 끌어안았으나 그는 먼지 털듯이 가뿐히 저를 털어내었다. 그러곤 길게 음영이 진 눈으로 저를 한번 스치듯 바라보았다. “내가 꽤 비싼 인형이라서 말입니다. 이 베개나 끌어안고 있으십시오.” 자신의 베개를 친히 품에 안겨주고서 블리어는 침대를 벗어나 저벅저벅 문으로 향했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는 단호한 의지가 그의 너른 등을 통해 보여지는 듯 했다. “공작 때문에 우울해~ 어휴.” 렐리아는 속 썩이는 아들의 관심을 끌려는 주부처럼 일부러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블리어는 시선 한 점 주지 않고 문가에 잠시 섰다. 문고리를 덮은 커다란 손이 옆으로 기울어지려할 때 렐리아가 투덜투덜 대는 목소리를 냈다. “나는 그냥, 공작을 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푸근하고 따뜻해서 그런 의미에서 그런 거지 인간 같지 않아서가 아닌데.” “그런 거면 진즉 말했어야하지 않습니까.” 차갑게 방을 나서려던 사내는 어디가고 침대로 성큼성큼 성급하게 다가오는 사내만 남아있었다. 블리어가 침대위에 올라오자 그대로 매트리스가 성인무게만큼 출렁거렸다. 그는 여전히 누워서 구시렁거릴 준비를 하고 있던 여인의 위로 올라왔다. 위협적이라기보다는 보호하는 것 같은 자세였다. “나간다더니 왜 왔대.” 그가 방밖으로 나가려던 것은 단순히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기 위해서라지만 그 사실을 렐리아가 알리는 만무했다. 공작이 크게 삐쳤다고 홀로 착각한 채 렐리아는 심통하게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마음은 좀 풀리셨남?” “…….” “아 진짜 그런 의미 아니라고. 내가 공작을 얼마나,” 말없는 그가 아직도 삐쳤다고 여긴 렐리아가 술술 본심을 털어놓으려할 때였다. 그 순간 블리어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비스듬히 올라탄 채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안은 깊은 애정이 느껴질 만큼 부드러웠다. “얼마나? 그 뒷말은 뭡니까.” “…큼, 아끼는데.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보호자 같은 공작을…,” 렐리아가 슬그머니 그와의 시선을 비껴가려할 때 블리어가 고개를 내려 입을 맞추었다. 너무나 훅 들어온 혀에 렐리아는 눈이 동그래졌다. 따스한 물기가 촉촉하게 입안을 적셔주고 부담스럽지 않게 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랫니를 살짝 건드린 후 조금 입 안쪽 살을 핥아 올렸다. 조금씩 천천히 입힘으로 빨아 당기고 놓아주면서 그가 제게 다가왔다. 렐리아는 그 상냥하고 달콤한 키스에 손의 힘이 풀렸다. 밀어내지도 못하고 얕게 숨을 내쉴 때 그제야 그가 순순히 떨어져나갔다. 아침부터 이러기에는 그녀가 벅찰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첫 모닝키스에 렐리아는 그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한 이십초도 안 지난 것 같았다. 생각보다 너무 짧아서 허무한 건지, 혹은 그가 더 해주길 바라 아쉬운 건지 마음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침대인형이랑 키스도 하나…” 대수롭지 않은 척 렐리아는 머리만 긁적였다. 그러나 몸은 솔직하게도 블리어에게서 벗어나 바로 침대에 정좌로 앉았다. 어딘가 조금 어색하게 머리만 긁어대는 모습에 블리어는 갑자기 키스해서 미안하다고 정직하게 사과하려했다. 그녀가 당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가 운을 떼기도 전에 렐리아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나 오늘점심때 올르아 공작가에 갔다 올래.” 0126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올르아 말입니까.” 블리어는 아직까지도 올르아 공녀와 렐리아의 접점을 찾지 못했다. 어째서 공녀는 렐리아의 고향과 사정을 알고 있는지, 렐리아는 왜 그 공녀를 찾아가려하는 것인지, 렐리아가 사라졌던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지. 마음 찜찜하게도 제대로 아는 게 하나 없었다. “마음…거의 다 정리했거든.” “알겠습니다. 올르아 공작가에는 미리 기별을 넣어두겠습니다.” 그러나 블리어는 자신의 의문은 접어두고 렐리아의 뜻에 따랐다. 언젠간 제게도 어떠한 얘기를 해주겠지 하염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아침식사와 올르아 공작가에 인편을 보내기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했다. 블리어가 침대에서 내려와 한번 흐트러진 매무시를 가다듬고 막 한걸음을 떼려던 찰나였다. 뒤에서 잡아당기는 손길에 블리어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공작. 고마워.” “갑자기 웬 인사입니까.” “공작 없었으면 마음 정리하기 힘들었을 거야. 혼자 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밝아졌을까, 나.” 떠나가려는 옷자락을 붙들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대신 습관적으로 턱을 긁적이며 렐리아는 어설프게 씰룩 웃었다. 누가 그랬던가, 우울증은 혼자가 되려는 병이라고. 거부하고 밀어내려는 자신을 유일하게 달래주고 받아주었던 사람이 공작이었다. 그가 여태껏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면 분명 하루도 못가 자살시도부터 했을 것이다. “아무튼 큼, 많이 고맙다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마움을 표현할 길을 찾기 못해 렐리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그래야 진심이 더 잘 전달될까. 평소 영악하게 잔머리만 굴리던 머리를 골똘히 굴릴 때다. “그대답지 않게 예쁘게 굴지 마십시오.” 왼뺨을 아래에서부터 감싸고 올라온 미지근한 손에 렐리아는 슬며시 고갤 젖혔다. 여상했던 목소리와는 달리 마주친 시선이 무척이나 상냥했다. 그는 어느새 말을 하지 않고 묵묵한 손길로 제 뺨을 어루만졌지만 그래서 더 간지럽고 얼떨떨했다. 눈길이며, 손길이며, 그의 모든 신경이 제게 집중하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블리어는 사소한 행동에마저 스미게 되는 감정을 더는 감추지 않았다. 투박한 손바닥에 닿은 그녀의 여린 살결에서 미끄러지듯 손을 떼고서 그는 아쉬운 듯 몸을 돌렸다. 잠시라도 떨어지기 아쉬운 사람처럼. “식사가지고 오겠습니다.” “…어. 다녀와.” 그가 문을 닫고 사라진 후에도 렐리아는 여전히 왼뺨이 간지러웠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 마차가 도착지에서 멈춰 섰다. 렐리아는 내려서자마자 올르아 공작저택 입구에 서있는 다이아나를 발견했다. 편한 실내용 드레스를 입고 긴 금발을 성의 없이 늘어뜨렸으나 그 섬연한 자태는 가려지질 않았다. 다이아나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한 채 ‘왔니?’하고 묻듯이 조심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렐리아는 저택 입구의 하얀 석조계단을 올라가 다이아나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래.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지독히도 덤덤해 보이는 얼굴이 전과는 사뭇 달랐다. 다이아나, 아니 가브리나는 이 짧은 일주일새에 마음을 추스른 렐리아를 안도가 아닌 불안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깨진 마음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겨우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게 아닐까. 가브리나의 걱정은 현실이 되어있었다. 저택 내 가장 은밀한 장소를 꼽으라면 공녀의 침실이었다. 침실로 들어선 후 다이아나의 육신은 침대에 편히 뉘어졌다. 그리고 곧이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황금빛을 끌어 모은 듯한 찬란한 미색의 여인이 등장했다. 가브리나의 본체였다. 가브리나는 렐리아에게 응접용 소파에 앉기를 권유했다. “그래도 이렇게 먼저 날 찾아와줘서 고마워.” “그 힘 억누르는 마법 때문에라도 찾아왔어야 됐잖아요.” 렐리아는 가장먼저 용건부터 말했다. 심장근처에 손을 대는 걸 허락하자 바로 가브리나가 렐리아의 왼쪽 가슴위에 손을 얹었다. 유려한 손끝에서부터 따스한 황금빛이 움텄다. 깊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나듯 일렁이는 황금빛은 고스란히 가슴위로 스며들었다. 덜컥, 하고 한번 심장이 정지하는 것처럼 심하게 지끈거렸으나 곧 빠르게 피가 도는 기분이 들었다. 가브리나가 서서히 방대한 마력을 주입시키자 렐리아는 손끝과 발끝이 저릿저릿해졌다. 전신이 심장의 박동에 맞춰 요란하게 요동치는 것 같더니 뒤늦게야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게 느껴졌다. 피부 속 미세한 혈관마저 힘이 끓어 넘치며 튼튼해진 기분이었다. “다 됐어. 다행히 부작용은 없구나.” 가브리나는 렐리아의 몸을 원상태로 되돌려주고서 맞은편 소파에 조용히 착석했다. 이젠 본론이었다. 렐리아가 그 어떤 말로 저주하고, 경멸하고, 원망한다할지라도 가브리나는 전부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그것이 자신이 져야할 책임이었다. “나는 언니를 탓할 수 없어요.” 하지만 들려온 말은 너무나도 뜻밖이라 가브리나는 애써 침착하게 유지하던 표정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의중이 뭔지 조심스럽게 물으려했으나 렐리아의 얼굴은 번복은 없다는 듯 단호하기만 했다. 렐리아는 수천수만 가지의 생각을 통해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녀를 탓할 수가 없다고. 마음은 그게 아니라지만 탓할 수가 없다는 생각으로 매듭지어졌다. 가브리나가 게임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자신은 어디까지나 게임클리어 화면을 보겠다는 개인만족으로 이 일에 도전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운이 나빠 사고를 당한 거다. 따지자면 그러했다. 가브리나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붕아래 깔려죽을 뻔한 자신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준 것이었다. 원치 않게도 살 기회를. “내가 언니를 구한 것도, 언니가 나를 구한 것도, 우리 둘 다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이니까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아마 자신은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드래곤 아르카이샤 최종맵을 깨겠다고 이를 갈며 밤을 샜을 테다. 그 장소가 자취방이 아닌 피씨방이었다면 피씨방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다. 같은 빌라에 살던 이웃들은 자신이 게임을 깨고 가브리나를 해방시킨 그 여파로 개죽음을 당했다. 말 그대로 개죽음이었다. 그들의 억울한 죽음은 누가 보상할까. “죽을 목숨 다시 한번 살려준 건데, 고마워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적어도 자신은 가브리나에 의해 다시 목숨을 연명해 이 세계로 왔다. 그들에겐 두 번째 기회도 없었을 텐데 자신이 너무 신세 좋게 한탄만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것도 재앙의 원인이 되었던 자신이. “하지만 다신 안 엮일 거예요.” 렐리아는 강하게 쐐기를 박으며 말했다. “누군가가 옆에서 죽어가는 것도 싫고, 세브로웰이 사람들 학살하는 것도 보기 싫고, 시체도 보기 싫고, 다 싫어.” 아직도 자신이 본 시체가 진짜 살아있던 누군가의 시체라고 생각하면 구역질이 올라왔다. 끔찍하고 너무 비참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상세계라 여겼던 세상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니 모든 게 다 싫었다. 이곳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들도 싫었다. 지워버리고 싶다. 다신 안 보게 어디다가 묻어버리고 싶었다. “더 이상 이 왕국문제에 휩쓸리고 싶지도 않아요. 세브로웰이랑은 영영 다시 보기도 싫고요.” 왕국의 존속이 걸린 문제는 머리가 아프고,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수천수백 명이 단숨에 죽는 재앙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누가 죽어나가는 것도, 그런 소식도 지긋지긋해서 이젠 듣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구할 힘이 있으면서 왜 구하질 못했냐는 심한 자책감에 시달릴게 뻔했다. 자신에겐 그들을 지켜야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있어서도 이젠 현실인데 자신이 잘못되면 누가 책임져줄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곳에 억지로 끼게 된 제삼자인 만큼 한평생 겉돌다가 떠나고 싶었다. “나한테 새로 준 인생이니까, 내 맘대로 살 거예요.” 무엇보다 이제 와서 이 세계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늦었다. 그렇기에 눈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귀를 닫고 눈을 감을 더 안전한 곳이 필요했다. “먼 곳으로 떠날 거예요.” “…….” “이 왕국이라면 더는 지긋지긋하니까.” 결사의 각오를 다지듯 단호한 눈빛이었다. 이미 마음을 단단히 굳힌 듯 보여 가브리나는 고개를 살며시 끄덕여보였다. 존중의 뜻을 보이는 짙은 황금색눈동자는 아치형으로 부드럽게 휘어져있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러렴…. 난 널 막을 권리가 없어. 네가 행복한 길이 그 길이라면 더더욱 막을 수 없어.” “이해해서 다행이네요.” “그저 난…네가 어딜 가서든 행복하기만을 바랄뿐이야.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다면 꼭 내게 연락을…,”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렐리아는 다신 가브리나와는 엮기기 싫었다. 자신의 죽음을 그녀에게 탓할 수는 없지만 이제까지 다이아나로서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은 아무래도 용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만 가볼게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렐리아는 서둘러 공녀의 화려한 침실을 벗어났다. 공작저의 긴 복도를 뛰듯이 걸으며 벅차오르는 알 수 없는 자유를 느꼈다. 이젠 이 왕국에서 해방된다는 생각에 묘한 안도감까지 들었다. 이 몸이라면 여자혼자 타국을 떠돌아도 위험할리 없었다. ‘더 이상 공작에게 신세질 이유도 없겠지.’ 뭔가 후련한데 한편으론 또 시원섭섭했다. 괜히 남의 왼뺨을 그렇게 애인 뺨 어루만지듯 만져대니까 혼란스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렐리아는 그와의 관계를 섹파, 혹은 스폰서정도로 정의하기로 마음먹었다. 괜히 이상한 감정을 집어넣었다가는 제 발목이 묶일게 뻔하기 때문이다. ‘공작 혼삿길 방해할 수도 없으니까. 이제 비켜줘야지.’ 그 생각을 뒤로하고 렐리아는 마차에 올라 라콘드 공작저로 향했다. 0127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블리어는 오랜만에 집무실에 앉아서 홀로 시간을 보냈다. 쌓여있는 소량의 업무를 간단히 보고 남은 시간은 독서를 했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는 재차 집무실 한편의 시계를 확인하며 렐리아가 언제쯤 저택으로 돌아올지를 가늠했다. 긴 얘기가 아니라면 한 시간 안에는 돌아올 테지만 중요한 사안이라면 두세 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될 테다. 왠지 소박맞은 아내라도 된 것 같은 스스로의 처지에 우스워 입가에는 설핏 조소가 맺혔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이 시간마저 기대되고 기분 좋은 것이다. 그는 잠시 두꺼운 두께의 책을 덮고서 책상위에 둔 작은 함을 손바닥 안에 쥐었다. 각이 진 모서리가 날카롭게 현실감을 깨웠다. 딱딱하지만 붉은 벨벳이 두르고 있어 겉감의 질이 부드러운 반지함이었다. 그녀와 자신의 관계를 새로 결정지을 중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청혼은 아니었으나 이리 계속 같이 사는 게 어떻겠냐고 정식교제를 청할 생각이었다. 그의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보석함은 이를 위해 이틀 전 준비해둔 것이다. 육체적으로 관계를 가진 적이 있고 키스를 한 적도 있으나 한 번도 제 마음을 표현해본 적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블리어는 최근 들어 그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보면 만지고 싶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싶은 것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한계에 왔음을 알려주었다. ‘……사랑해왔습니다. ……사귑시다. 흐음…….’ 최대의 난제가 하나 남아있었으니 어떤 말로 고백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블리어는 어떻게 하면 그녀가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레 제 고백을 받아들여줄지에 대해 긴 시간 고심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사귑시다, 가 낫겠군.’ 그 어디에도 안 메이려는 바람 같은 여자이니 부담스럽게 했다가는 내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블리어는 미소가 절로 떠오르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반지함을 챙겨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돌아왔을 거라 여기고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반쯤 창문이 열려있어 햇살로 가득 찬 환한 방안은 아무도 없이 휑한 게 그녀가 나가기 전과 똑같았다. 아니, 똑같다고 넘어가려했다. 지나칠 뻔한 침대 옆 협탁이 문득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노란 햇살에 작게 반짝이는 크리스탈 목걸이가 유독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허나 협탁 위에 남겨진 것은 익숙한 목걸이뿐만이 아니었다. 편지 한 장이 놓여있었다. 불현듯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펼쳐봐서는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절로 주먹에 소리 없는 악력이 가해졌다. 하지만 블리어는 그녀가 제게 남긴 것이 가벼운 내용일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택했다. 그것이 부수는 짓인지도 모른 채. 블리어는 편지를 펼쳤다. 삐뚤삐뚤한 서툰 글씨가 가장먼저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여섯 살 아이가 쓴 것처럼 형편없는 글자들이었으나 블리어는 그 필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편지에 저절로 구김이 갔다. [공작. 봐. 얼굴보고 제대로 인사하려고 했는데 결국 공작같은 짓을 해버리네. 하지만 언젠간 이 저택을 떠났어야했으니까. 얼굴보고 떠난다고 하면 공작이 잡을게 분명하기도 하고. 아니라고? 뻥치시네. 아무튼 공작같이 좋은 사람 만나서 다행이야. 나쁜 생각 많이 했는데 공작이 좋은 말 많이 해줘서 용기가 났어. 고마워. 그래도 아까 고맙다는 인사는 얼굴보고 했다? 이제 고향 말고 어디 갈 거냐고? 난 여행을 하려고 해. 아직 어딜 갈지 정하지 않았지만 발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가려해. 그리고 괜찮은 보금자리를 찾으면 정착할 거야. 왕국으로 다시 돌아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젠간 길가다 만나게 된다면 인사하자. 이제까지 돌봐줘서 고마워. 공작도 잘 지내고 안녕. -렐리아가.] * 야누이스 산봉우리에 위치한 초라한 민가가 한 채 있었다. 오래되어 낡은 티가 고스란히 나는 통나무집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젊은 기사와 병든 노파가 살고 있던 집이었다. 유일하게 노파를 간호하던 손자마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노파는 죽을 날만 바라보고 나날이 버티고 있었다. 퀴퀴한 냄새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간혹 약을 챙겨먹고 누릿한 죽을 챙겨먹는 정도가 노파가 할 수 있는 일의 모든 것이었다. 해가 소리 없이 넘어가는 저녁이었다. 끼이익 나무문이 열리는 소리에 잠귀 밝은 노파가 눈을 떴다. 바람이 세게 불어열린 건지, 산속에서 길을 잃은 누군가가 찾아온 건지는 알 수 없다. 노파는 마른 기침소리를 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끽끽 울어재끼는 목재바닥을 지나쳐 노파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문틈 새로 좁다란 거실을 살폈다. “거기…뉘세요?” 대답이 없다. 노파는 방문을 열었다. 살짝 열어진 바깥 나무문이 바람에 흔들려 끼익 소리를 냈다. 더는 굽어질 수 없을 만큼 구부정한 허리가 지긋한 노파의 나이를 알려주었다. 노파는 살짝 열려있던 바깥문을 다시 닫았다. 바람이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그때, 낡은 테이블 위에 덩그러니 놓아진 커다란 갈색주머니 하나가 노파의 눈에 들어왔다. 누가 놓고 간 것일까. 노파는 제 집에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주머니를 향해 다가가 조심스레 안을 들여다보았다. “에그머니나……이게, 이게 다.” 주머니 안을 확인한 노파는 손을 발발 떨었다. 생전 본적이 없던 온갖 화려한 보석과 금괴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 * * 렐리아가 소리소문 없이 사라진지 이틀이 지났다. 단 이틀이었지만 블리어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드바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는 가장먼저 올르아 공녀를 찾았었다. 렐리아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자가 그녀였고, 또 렐리아와 깊은 사정을 공유하는 자가 그녀였기 때문이다. 허나 어찌된 일인지 올르아 공녀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잠이 든 후로 통 눈을 뜨지 못한다는 소식만 접했다. 올르아 공작가에서 방문객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공녀가 예전에도 이러한 증세를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몸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숙면을 취하면 보통 하루나절 잠들어있거나 길게는 이삼일 후에 눈을 떴다. 이러한 얘기가 국왕의 귀에 들어갈까 노심초사한 공작은 전속시녀들의 입을 봉하고 쉬쉬했다. 건강상의 문제로 왕후로 적합하지 않다 여겨 파혼을 당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한 이유로 방문을 거절당한 블리어는 집무실로 바로 돌아왔었다. 그러고는 수도 통행관리소는 물론이고 국경 출입국관리소에 연락해 출국기록을 급히 보내달라 요청했었다. 하루 천여 건에 달하는 기록을 여섯 시간 넘게 뒤지고 뒤졌지만, 블리어는 이렇다 할 정보를 얻진 못했다. 그동안 가병들을 각지에 풀어 여인을 찾아서 데려오라 명했으나 날이 밝아 돌아온 가병들로부터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는 보고만 들었을 뿐이었다. 블리어는 밤을 지새우고도 반나절을 더 버텼으나 결국 쌓인 피로에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듯 누웠다. 매일을 그녀와 함께 잠들던 침대위에서 그는 쉬이 잠들지 못하고 긴 생각에 잠겨야만 했다. 그녀라면 어딜 갔을지, 그 자유분방한 성미를 알기에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었다. 끈질긴 상념을 뒤로하고 어느새 희미해져버린 의식이었지만. 잠이 든 그는 정확히 네 시간 뒤에 깨어났다. 그마저도 시간이 아깝다 여기니 자책감이 들 정도였다. 급선무는 그녀를 찾는 것이었다. 그로서는 그녀에게 가지 말라 붙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가 안전하게 타국에 있다면 그도 안심이기에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타지라 해도 치안이 보장된 곳에서 안락하게 지낼 수 있게 할 것이다. 호위기사를 붙이고, 타국에서 머무를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보내는 그런 거라면 허락할 수 있다. 몇 년 정도 떨어져있어도 참을 수 있고 기다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블리어가 현재 걱정되어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돈이나 돈이 될만한 물건은 일절 챙겨가지 않았으며 얇은 옷과 로브하나 뒤집어쓰고 나갔다. 연고 없는 여자혼자 맨몸으로 돌아다닌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는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피가 말라버릴 것 같았다. 거기다 올바른 판단을 할 만큼 정신이 건강하지도 않았다. 요 며칠 전만해도 심한 감정기복이 있었으며 혼자서는 식사조차 하지 않으려할 만큼 삶의 의지가 없던 여인이었다. 이제야 제게 마음을 허락하고 의지하려하나 싶었건만 그녀가 제 곁을 떠났다. 일주일, 혹은 보름에 한번 연락이 닿아도 좋았다. 그저 무사하단 소식만 알려주었으면 하는 게 그의 유일한 바람이었다. 0128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바일롯 왕성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는 왕을 제외한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장소가 있었다.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충직한 공신들도 존재유무를 모를 만큼 천년 동안 극비리에 전해져오는 비밀의 방이었다. 그렇다보니 이 나라에서 가장 안전하고도 은밀한 곳이라 할 수도 있었다. 그곳에는 왕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보화가 있는 것도 아니며, 왕만이 볼 수 있는 진귀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오랫동안 녹슬지 않게 만들어진 순금의 침상과 양초를 담은 놋쇠그릇이 올려 진 협탁, 그리고 단 한명을 위한 안락의자가 놓여있는 방이었다. 전부 금으로 도배 있다는 것을 제외하곤 특별할 것 없는 그곳엔 한 사내가 누워있었다. 깊게 깔린 눈이 떠지며 순금보다도 농도 짙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가브리나는 잠시간이긴 하나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고 판단했다. 마법적 기능은 현저히 떨어진 채 움직일 기력이 있는 정도였으나 이만하면 되었다. 더 이상 조신한 공녀를 행세하며 나라의 어지러운 국면을 모른 채 관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전에……슬슬 찾으러 가야겠지.’ 가브리아의 동공색이 한층 더 짙어졌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넓은 어깨위로 금사처럼 영롱한 긴 머리카락이 일자로 떨어져 내렸다. 구김이 없는 깨끗한 흰 옷자락은 남자의 손짓에 가볍게 흔들렸다. 그가 직접 걸음을 옮길 필요는 없었다. 빛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신성한 금빛무리가 그의 몸을 감싸고 장소는 순식간에 변했으니 말이다. 가브리나는 처음 발을 디딘 공간을 휘 둘러보았다. 고아한 귀족의 취향을 절대적으로 반영한 넓은 방이었다. 왕가 문양이 돋을새김 된 기둥과 금장을 이용한 인테리어가 왕궁 어딘가의 객실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침대주위로 금 휘장이 늘어져있었고 방 중앙에는 세 개의 책상과 테이블이 길게 이어붙여져 있었다. 그 위는 아수라장이라 할 만큼 산적한 헌 책들과 고급양피지로 뒤죽박죽이었다. 그리고 익숙한 기운은 그 난장판을 방불케 하는 책상위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가브리나는 책상 앞에 멈춰 서서 자료들 속을 뒤지기에 이르렀다. 조잡한 수식으로 설계된 마법진이 그려져 있는 양피지는 금기시된 인류초월의 마법에 대한 연구물들로 보였다. 그것들을 뒤져가며 가브리나는 마침내 자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작은 반지함을 찾을 수 있었다. 반지함을 손에 넣고 그제야 깊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을 때다. 달칵ㅡ, 반지함을 여는 소리가 아니었다. 방문이 열리며 긴 금발을 한 갈래로 길게 묶어 내린 남자가 나타났다. 호기로운 자색 눈과 지적인 생김새, 검소한 차림새가 심도 있는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처럼 깔끔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방 한가운데에 서있는 가브리나를 발견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사이에 좀도둑이 들 정도로 왕실의 경비가 허술했던가요.” 왕성 내부를 지키는 경비대는 왕의 곁을 수호하는 근위대를 제외하곤 극소수의 인원에 불과했다. 언제 수도를 공격받을지 모른단 불안감에 왕궁의 병력이란 병력은 죄다 성곽수비대로 전략해버렸으니 당연했다. 그 기본적인 사실을 알지 못할 윈이 아니었으나 그는 그저 빙글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그 반지함은 내려두시죠. 제 물건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렐리아가 잠시 빌려준 걸로 알아. 나의 소중한 물건이니 돌려받겠어.” “아, 당신이 이 반지의 원주인이시로군요.” 윈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차분히 눈빛을 가라앉혔으나 반대로 입가는 과장스럽게 올라갔다. “그리고 반지의 원주인이라는 건 당신이 드래곤이라는 소리겠지요. 그건 인간이 만들 수 있는 물건이 아니거든요.” 싱긋 하고 제법 맑은 미소가 걸렸다. 가브리나는 젊은 마법사로 추정되는 사내와 마주보고 서있었으나 그다지 동요하지 않았다. 제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지 오래였기에 숨길 필요가 없기도 했다. 그 무던한 반응에 별안간 윈이 왼팔을 안으로 굽어 휘고서 예의바르게 머리를 숙였다. 왼쪽어깨를 타고 단정히 묶은 금발이 흘러내렸다. “좀도둑 취급해서 죄송합니다. 어떻게 나오실지 궁금해서 이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습니다. 사실 당신에 대한 소식은 예전부터 많이 접했습니다. 그 보기 드문 인상착의도 말이죠.” 같은 금발이래도 그 급이 다를 만큼 영롱한 금빛이 흐르는 머리칼, 거기에 짙은 황금색 눈은 대륙을 뒤져도 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실제로 제국에서 밝고 화려한 축에 속하는 윈의 금발도 가브리나의 앞에서는 그 색이 조금 탁해 보일 정도였다. 거기에 진귀하리만치 아름다운 미모까지 겸비했으니 존재감부터가 예사롭지 않은 건 당연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탐피아에서 온 마법사 윈 레그로 카일로아스라 합니다.” 호감정을 잔뜩 두른 윈의 인사를 가브리나는 받아주지 않았다. 무시하고 돌아가려했으나 그가 마나를 움직이는 그 미세한 기류의 변동을 눈치 채고서 윈이 나불거렸다. 다분히 의도적인 언사였다. “그보다 그 은발머리 아가씨 말입니다. 상당히 아리따운 외모를 지니셨지만 특출난 마법적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범한 일반여식에 불과하다 여깁니다만. 어떻게 했기에 당신 같은 신화적인 존재의 가호와 애정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네요. 이름이 단순히 렐리아라서,” “그쪽 인간청년에겐 한마디 하지.” “아 제 발언이 무례했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윈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으나 살짝 들어진 두 눈은 가브리나에게로 열렬히 꽂혀있었다. 허나 여전히 방중앙에 우뚝 선 가브리나는 고개만 비스듬히 그에게로 돌렸다. “그녀에게서 신경 끄는 게 좋을 거야.” “걱정 마시죠. 제가 흥미를 보이는 쪽은 아쉽게도 그녀가 아니라 제 앞에 있는 당신이니 말입니다.” 윈은 겁도 없이 가벼이 웃으며 가브리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실버드래곤이 날뛰는 걸 보고만 계신 겁니까.” “…….” “과거 실버드래곤을 란게르드 산맥에 봉인시켰던 게 바로 당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적어도 그보다 우위라는 소리일 텐데 어째서 지금은 방관하시는 겁니까.” “나는 그 아이를 봉인시킬 힘이 없어.” 의외의 대답이 시원스럽게 흘러나오자 윈은 걸음을 멈췄다. “육체가 쇠하기도 했지만 그만한 힘을 사용하려면 오랜 시간 휴식이 필요하겠지.” “…그런 사정이 있으셨을 줄이야. 이런.” 진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으나 가브리나는 무덤덤하게 잔실을 털어놓았다. 자신은 이리도 낡아빠진 존재라고, 아무래도 인간에게서 받는 지극히 큰 관심은 곤란했다. “그 아이는 내가 약해졌단 사실을 몰라. 그래서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는 거지. 내게 또다시 봉인당할까 두려워하면서도, 내가 틈을 보이면 언제든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이를 갈고 있겠지. 지금은 제 힘을 회복시킬 다른 안전한 레어를 찾고 있겠지만….” 세브로웰의 레어로 사용되었던 대신전을 들이닥침으로써 일단은 잠시간 시간을 번 셈이었다. 문제라면 가브리나는 휴식기가 필요한 세브로웰과도 정면으로 싸울 기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인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실은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내 경고를 우습게 여기지 마렴.” “그건 걱정마시죠. 이래봬도 입은 무겁답니다.” 왼손검지를 코앞에 가져다대고서 윈이 썩 비밀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겨 침착한 얼굴로 서있는 가브리나의 앞에 다가왔다. 장대해보이던 황홀한 금발사내는 가까이에서 보니 의의로 자신과 엇비슷한 체구였다. 물론 두뇌라든가 신체 내부기관의 쓰임은 인간과는 판이하게 다르겠지만. 윈은 속내를 감춘 채 다시 한 번 짓궂게 웃었다. “그렇다면 그 드래곤을 봉인시킬 다른 방법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아,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진즉 봉인시켰겠군요.” “이에 대한 대책은 왕과 직접 논의할 일이야.” 가브리나는 그 열기를 띤 보라색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색 동공위로 스치는 다채로운 이채가 시시각각 변할 만큼 흥분해있었다. 그 위험한 호기심을 자르기 위해 가브리나는 얕은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네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 궁금한 게 다 풀렸다면 다신 나와 렐리아의 이름을 그 입에 쉬이 담지 마렴. 그녀는 더 이상 나와 관여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니 말이야.” “대신, 저와 비밀리에 어느 작전을 진행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때였다. 윈이 가브리나의 손에 쥐어져있던 반지함을 가로채 뺏어든 것은. 가브리나의 표정에 설핏 미세한 찡그림이 일기도 전에 윈이 매끄러운 말씨로 말을 이었다. “젊어서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으셔도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로 칭해지거든요, 저.” “무례하구나.” “당신 같은 대단한 존재가 저와의 협력을 약속해주신다면 아마 이 세상 그 어떤 초월적인 마법도 성공하리라 확신할 수 있습니다. 실버드래곤을 봉인할 힘이 없다고는 해도 일단 인간인 저보다 배는 월등하신 마법력을 지니고 계실 테니까요.” “초월적…, 그런 마법은 왕국에서 금기시된다는 걸 모르나보지.” “그러니 저희 둘이서 은밀히 진행하자는 것이 아닙니까.” 빙글거리는 윈의 얼굴을 가브리나는 담담하게 응시했으나 조금은 기분이 저조해진 건지 몸 주위로 천천히 마나가 끌어당겨졌다. 그 얕은 대기의 동요를 윈은 빠르게 알아차렸다. “나는 네 사사로운 욕심에 동참할 생각이 없단다. 그것이 어떤 파멸을 불러일으킬지는 내가 더 잘 아니까.” “사사로운 욕심…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네요. 하지만 왕국을 지킬 최후의 보루정도는 준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아. 이 말은 틀리군요. 국가에서 준비한 최후의 보루마저 꺾인다면, 그 멸망위기에 대비해 또 다른 기밀작전 하나는 세워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윈은 네모난 반지함을 손바닥 안에서 굴리며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전 역사에 길이 남을, 마법계에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대마법을 완성시킴으로써. 당신은 또 한 번 왕국을 수호한 영웅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이 왕국의 평화를 되찾아야한다는 목표는 어차피 같지 않습니까, 서로?” 가식으로나마 정중을 표하던 얼굴로 윈은 뱀처럼 제법 야살스럽게 웃어보였다. 속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보랏빛 동공이라서 더 비밀스러운 눈이 짙어져만 같다. “물리적인 총공격이 먹히지 않는다면 저는 이에 대응할 최고의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단 이 나라에서는 금기이지만요.” “네 그 간사한 혀에 속아 넘어갈 거라 여긴다면 나를 한참 잘못 봤어.” 가브리나의 오른팔을 휘감고 올라온 옅은 금빛은 점차 선명하게 발광하며 짙은 황금빛을 띠었다. 사납게 일렁이는 그 마나의 위력은 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으나 윈은 격론이라도 벌일 셈인지 한층 더 흥분해있었다. “아뇨, 저는 옳게 봤다고 생각합니다. 시공간을 간섭하기 위해선 그만한 초월적인 존재의 힘이 절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열광적인 마법적 호기심이었다. 윈은 딱딱한 반지함을 세게 말아 쥐었다. 조금만 더 하면 그 막대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자색 눈이 둥그스름하게 휘고 목소리는 지나치도록 침착하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금기를 어김으로써 닥쳐올 부정적인 파장에 대해 걱정하시는 거라면 이해합니다.” “이해한다면 더욱이 그런 금기에서 손을 떼렴. 단순히 개인적인 욕심에 의한 거라면 뭣 모르는 인간이 손을 댈만한 것이 못돼.” “뭣 모르는 인간인겁니까. 그렇군요. 한낱 인간들의 발상은 모두 분수도 모르고 부리는 욕심이고, 그저 떠드는 공상에 불과하다는 거군요.” “인간청년이여. 나는 경고를 주는 것뿐이야.” 가브리나의 비인간적일 만큼 차분한 눈길이 윈에게 닿았다. 투명한 얼음조각처럼 감정이라곤 보이지 않은 채 그에게 다가갔다. 이에 윈은 그저 거대한 존재가 제게 주는 한 톨의 관심마저 기꺼워하며 생글거렸다. “그런데 금기 말입니다.” “또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진 몰라도 그 반지를 이리 내.” “단어자체가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정한다는 건데 우습지 않나요?”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정해선 안 되잖아요.’ 돌연 뇌리에서 겹치는 희미한 음성에 가브리나의 힘이 맥없이 탁 풀렸다. 오른쪽어깨를 휘감고 올라오는 금빛은 소리 없이 흩어지고 흰 수의만이 그 자리에 남아 흔들렸다. “고차원 영역은 마법사들이 손을 대지 못하도록 초대국왕이 법으로 제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허나 그것이 인류를 구하는 마지막 방법이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무작정 금기를 걸어두고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한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위험한 발상이라 생각되는군요.” ‘가브리나. 이번 일도 반드시 성공할거예요. 지금까지처럼……그대가 함께 해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니 한번만 절 믿어줘요.’ 내면에서 휘몰아친 강한 파도에 가브리나는 단숨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눈가에 차오르는 기억도, 범람하는 후회도, 끝끝내 홀로 묻어야만 했던 아픔도 그 목소리 하나에 깨어나 버렸다. 뒤늦게 자칫 허물어질 뻔한 마음을 다잡고 그는 빠르게 손을 뻗었다. 윈의 손에 들려있던 반지함을 빼앗아들고서 가브리나는 수초도 지나지 않아 금빛무리와 함께 그 공간에서 벗어났다. ============================ 작품 후기 ============================ 0129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9명의 개국공신들과 총사령관, 마법사들이 둘러앉은 원탁위로 오늘도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나왔다. 젊은 왕 라델리우스는 상석에 앉아 그들의 보고를 들었다. “각 지방에서 조달되고 있는 물자들 중 반은 수도창고에 비축해두고 있습니다. 언제든 식량창고의 개방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는 백성들의 생활에 어떤 불편도 없는 걸로 조사되었습니다.” “수도에 남아있는 자들이 오분의 일로 대폭 줄어든 상황입니다. 그 중 떠난 자들은 대체로 귀족들로, 남아있는 쪽은 평민들입니다.” 어딜 가도 정착할 수 있는 것은 돈 있는 귀족들이니 당연했다. 자애로운 주인아래 소속된 자들은 주인을 따라 타국으로 건너갈 기회가 생기지만, 그게 아니라면 가문에 발이 묶이거나 생계유지를 위해 수도에 남는 일이 허다였다. 재앙에 휘말려 죽을 지도 모르는데도 하루를 살기 위해 이곳에 남는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왕궁의 사용인들은 가장 안전한 곳이 왕궁이라 여기고 되레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지만. 다행히 부의 도시답게 식량창고가 널널하게 빌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있다면 경제가 마비되고 수년 간 식량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어서 일 것이다. “위급 상황에 대비해 군수물품도 꾸준히 공급받고 있습니다만, 폐하. 아시다시피 저희들에게 중요한 것이 검보다는 마법이질 않습니까?” “흠.” 맥더프 공작의 말에 총사령관 뫼드아스 반 볼프가 부러 소리를 냈다. 하지만 드래곤의 거죽을 검으로 뚫었다는 얘기는 듣도 보도 못한 터라 가만히 입을 다물 뿐이었다. “앞으로는 공조가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이 지긋한 맥더프 공작의 인자한 목소리에 라델리우스는 조용히 수긍했다. 둥근 원탁을 휘 둘러보고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자 바로 수락되어졌다. “그보다 실버드래곤의 수색은 어떻게 됐소이까?” 화제를 돌린 것은 맥더프 공작의 맞은편에 착석해있던 칼토바스 공작이었다. 다소 공격적인 물음에도 대마법사 드라도스는 느른히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맥더프 공,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추적마법은 그리 간단한 마법이 아닙니다. 거기다 드래곤은 저희보다 한수 위였지요.” 눈가의 주름 새로 드러난 고뇌의 흔적은 깊었다. 드라도스의 눈동자가 덩달아 침전되었다. “대신전이 레어의 역할을 하고 있었단 것도 거의 한달 만에 밝혀진 사실이지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드래곤은 없었지만 다시 대신전에서부터 이어지는 새 흔적을 찾는 중입니다. 하지만 이미 저희들의 수를 꿰고 있으니…흐음.” “그보다 정말 잔인하더군요. 대신전의 천여 명에 달하는 신자들이 모두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소식…말입니다.” “이 얘기는 모쪼록 새어나가지 않게 입조심하세. 불안을 고조시킬 수 있어.” 노령의 측근의 말에 타렌치오 공작이 가벼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진중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던 총사령관 뫼드아스가 짐짓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보다 만일 실버드래곤이 장기적인 측면에서의 공격을 꾀한다면…” “가장 먼저 공격할 곳이라면 수로가 될 것일세.” 맥더프 공작이 냅다 끼어들었다. 다섯 개의 큰 강줄기에서부터 수도곳곳으로 이어지는 수로는 총 삼백여개에 달했다. 귀족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크고 작은 수도관만 해도 그 수를 훨씬 웃도니 말이다. 이 중 왕성과 이어지는 중심수로는 잔가지처럼 이어진 수로들의 줄기역할을 했다. 이곳이 파괴된다면 먹을 것보다도 식수가 더 큰 문제였다. 머리를 맞댄 명장들이 심상찮은 표정들로 입을 열기도 전에 어느 매끄러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드래곤이 장기적인 전략으로 나올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우습게 여기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허나, 모두 보셨지 않습니까. 한번의 공격에 왕궁이 흔들리던 것을.” 한 갈래로 묶은 금발을 왼쪽어깨위로 늘어뜨린 채 윈은 단정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그것이 사람 좋아 보인다기보다는 짓궂기 그지 없어보였다.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한다면 왕궁 하나는 거뜬히 파괴하고 수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전.” “……크흠.” 젊은 제국마법사의 대담한 발언에 왕국 노신하들은 부릅 눈을 뜬 채 흘기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윈은 올곧게 상석으로 시선을 가져가 빙그레 웃었다. “폐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사실 이 자리에 어느 분을 더 초청했다. 그분 얘기를 듣지.” 한 나라의 왕이 무려 분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자 노신하들의 놀란 눈이 라델리우스에게로 옮겨졌다. 하지만 라델리우스는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오른편에 서있던 위터백작을 돌아보았다. “위터 경.” “네.” 최측근 위터백작이 희의실 안쪽에 마련된 문을 열자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어느 사내가 나타났다. 걸음에 따라 유유히 물결치는 긴 금빛머리칼과 순백색 옷감위에 금수가 어우러진 수의자락이 천천히 휘날렸다. 마침내 훤히 드러난 신성한 미모만으로도 회의장은 그 존재감에 압도당해버렸다. 그 정체를 눈치 챈 듯 하나같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정말 드래곤……” “……이럴 수가…,” 귀족들은 금방이라도 엎드려 절이라도 할 것처럼 대경실색하였다. 경외감을 표하는 면면들 앞에서 가브리나는 유독 태연하기만 했다. 물론 여기서 태연한 자가 또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윈이었다. 윈은 외려 남들 모르게 흥미어린 눈길을 그에게 집요하게 보내기까지 했다. 원탁 앞에 멈춰선 가브리나가 한 자리에 모인 정상급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중간 자리에 앉아있는 윈의 눈길은 피한 채 끄트머리에 앉아 무관심한 침묵을 고수하고 있는 흑발의 사내를 한번 깊게 응시했다. ‘…조금 야위어 보이네.’ 렐리아가 떠난 후로 한숨도 제대로 못 잔건지 깊게 진 다크써클이 안쓰러웠으나 가브리나는 애써 시선을 거두었다. 황금색의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하고 날렵한 선을 그리는 턱이 허공에 멈췄다. 이윽고 가브리나는 긴 일자를 그리는 입술을 열었다. “내가 바로 이 왕국을 수호하는 황금의 드래곤 가브리나다. 천 년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한줌도 덜어내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왕국의 위기를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엄숙해진 분위기속에 울림 있는 낮은 목소리가 위엄 있게 뻗어져나갔다. 가브리나는 전날 밤 왕을 따로 찾아가 세브로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었다. 그리고 그 대책이 오늘날 그들의 앞에 공개되었다. “나또한 싸울 것이지만,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다른 드래곤들에게 도움을 청할 것이다.” 다소 엄격하게 굳어져있던 미안이 곧 부드럽게 풀렸다. “이 땅을 사랑했던 그들이라면 나를 기꺼이 도와주러 올 것이니.” 금빛으로 치장한 사내, 가브리나는 원탁을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을 내려다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그 굵직한 팔에 푸른 줄기를 휘감고 있었다면 생명을 주관하는 주신이라 해도 믿을 만큼 눈부신 모습이었다. “이 아름다운 황금의 땅이 피로 물드는 일은 결코 없을 거다.” * 원탁회의를 마치고 가문으로 돌아온 블리어는 다시 집무실에 앉아 실종자 보고서부터 뒤적였다. 오로지 한 여인의 행방을 추적하고 조사한 보고서치고는 그 수가 수백여 장이나 되었으나 그 안에서 건질 수 있는 정보는 극히 적었다. 하지만 블리어는 작은 희망을 좇는 사람처럼 자는 시간마저 쪼개어 보고서를 확인했다. 희망은 없지만,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저녁이 질 무렵이었다. 공녀 다이아나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접한 블리어는 다시 나갈 채비에 서둘러야만 했다. 그는 바로 올르아 공작가를 찾았다. 사라진 렐리아와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자가 그녀였고, 블리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정을 꿰고 있는 자였다. 공녀만이 렐리아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라고 여겼다. 그런 절실함에서 였을까, 조금은 무리하게도 블리어는 공녀의 침실까지 침입하게 되었다. 침대 옆에서 저녁식사 시중을 들고 있던 전속시녀가 벽 쪽으로 물러나고, 안내해준 시종은 방을 나섰다. 블리어는 침대위에 밀랍인형처럼 앉아있는 다이아나에게로 곧장 다가와 얇은 침의만 입고 있는 여인의 팔을 붙잡았다. “렐리아와 만났던 마지막 날, 무슨 얘길 했던 겁니까. 그대는 렐리아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습니까.” 다소 흥분한 모습에 곧바로 전속시녀가 쪼르르 달려와 조심스런 눈길을 보내자 그제야 블리어는 제 무례를 알아차리고 팔을 놓아주었다.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나가는 것이 옳을 테지만 블리어는 한걸음도 뗄 수가 없었다.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칼보다도 더 새까맣게 심장 언저리가 타들어간 지 오래였다. “대체 뭐라 말 좀 해보십시오.” “……렐리아…라니요?” 하지만 그런 블리어의 다급한 눈길에 다이아나는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여린 어깨위로 구불거리며 흘러내린 금발과 젖은 아기새의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새삼스레 그녀를 유약해보이게만 했다. 앵두빛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도 조금 움츠러든 듯 소극적이었다. “죄송하지만, 그런 이름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아요….” “지금 장난치는 겁니까. 이리 발뺌한다고 하여 내가 돌아갈 거라 여깁니까.” 블리어는 갑갑함에 아미를 일그러뜨린 채 더욱 서느렇게 몰아붙였다. “내 애인 말입니다. 렐리아 이프네, 왕도민이 다 아는 이 이름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말할 겁니까.” “…애, 애인이라니요? 저와 분명 약혼 얘기가 오가셨던 게 아니세요? 어떻게 갑자기, 애인이라니…,” “혼담은 그대가 일방적으로 파하질 않았습니까. 그러곤 폐하와 약혼을 진행하지 않았습니까.” “제가 국왕폐하와…약혼이요?” 순하게 떠진 분홍색 눈이 깨질 듯한 유리구슬처럼 흔들리자 바로 전속시녀가 무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다. 공손히 블리어의 옆에 서서는 작게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저희 아가씨께서 잠에서 깨어난 뒤로 기억상실증 증세를 보이십니다. 공작전하께서 라콘드 령으로 내려가시기 전까지만 기억하세요. 그 뒤는 전혀 기억이 없으십니다.” 그러니 약혼추진 중으로 기억하는 것은 당연하니 너그러이 이해해달라는 말이었다. 고개를 한번 숙이고서 전속시녀는 다시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실상은 가브리나의 영혼이 몸에서 완전히 빠져나오고 다이아나의 영혼이 원래 제 자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 과정에서 깊은 숙면과 기억상실이 동반되었다. ‘기억상실’이라기보다는 가브리나가 육체를 차지한 후로 다이아나의 영혼은 내면 깊숙이 잠들어있었으니 활동한 기억이 없는 것이 당연했다. 실제로 주치의의 소견도 정상이었다. 그 외의 기억은 또렷했고, 체내에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독극물은 가브리나가 신속히 제거해 육체적으로는 조금도 이상이 없는 게 당연했다. “줄리 말대로 아무기억이 안나요. 분명…알락디사 영애가 저에게 티타임을 가지자고 한 기억이 마지막이었는데…,” 다이아나는 기억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날 일정과 무슨 요리를 먹었는지 까지도 말이다. “알락디사 영애는 어딨나요? 제가 왜 쓰러졌던 건지 물어본다면 어느 정도 기억이 날 것 같은데...” “그녀라면 죽었습니다.” 소름끼칠 만큼 냉담한 반응에 다이아나는 놀란 눈을 한 채 눈앞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 놀란 눈으로 쳐다보지 마십시오. 그 여자는 죗값을 치렀을 뿐입니다.” 블리어는 슈로니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직접 두 눈으로 그 시신을 눈에 담았었다. 웃기게도 그가 슈로니를 처음 산속에서 발견했던 그 자리에서 산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어있었다. 마치 운명대로 이곳에서 숨을 거뒀어야했을 사람처럼 말이다. 구할 필요도 없는 여자였군, 그것이 그의 감상의 다였다. 갈가리 해체된 시신을 기사들에게 수습하라 명한 후 후작가문으로 돌려보냈고 이로써 블리어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0130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왕실 회의장에 모이는 아홉 명의 공신들은 수도 상황보고를, 각 분야의 최고지휘관들은 자기들이 맡은 일의 진행상황 보고를 매일같이 올렸다. 가브리나는 그 회의에 참석해 라델리우스의 옆에서 보고사항을 듣고 그가 자리를 파하면 바로 벗어났다. 대륙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동족들을 깨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강렬한 기운을 대륙 끝까지 전파시킬 힘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왕궁의 깊숙하고 은밀한 방에서 휴식을 취하며 어느 정도 힘을 끌어 모았으나 아직은 부족했다. 사실상 드래곤은 종족 특성상 같은 동족이라 해도 배타적 성향이 강하고 한없이 개인주의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소속감도 떨어지고 협조나 친목, 협동심도 영에 수렴할 만큼 떨어진다. 그런 그들이 발 벗고 도와준다는 표현은 다소 이질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브리나의 명에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 옳은 표현이었다. 그렇기에 가브리나는 자신의 기운을 최대한 증폭시킬 의무가 있었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선. 가브리나는 오늘도 소집된 회의를 마치고 회의장에서 걸어 나왔다. 탁 트인 복도에는 오로지 그 혼자였다. 진한 금색햇살이 일렁이는 대리석바닥 위를 소리 없이 걷는 가브리나는 긴 장발을 늘어뜨린 청년의 모습이었다. 특정성별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나 활동하기에는 아무래도 남성체가 편했다. 원탁회의만 봐도 특권층의 자리는 죄다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참을 걷다가 가브리나는 긴 복도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모퉁이를 돌아갔다. 그가 아무도 없는 으슥한 복도에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 걸음은 멈췄다. “나와.” 멈춰 섬과 동시에 잔잔히 흔들리던 머리칼도, 금자수가 놓인 옷자락도 허공에 멈췄다. 가브리나는 정면에 두었던 발의 앞코를 비스듬히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만물을 꿰뚫는 황금색 눈동자는 기둥 뒤에 숨어있는 한 인영을 향해있었다. “정말 끈질기구나. 난 네가 생각하는 그런 대단한 존재가 아니야. 쇠하고 닳아가는 수천 년도 더 산 드래곤의 표본일 뿐이지.” 무엇 때문에 그가 이토록 자신에게 접근하려 하는지 가브리나는 잘 알고 있었다. 성가실 만큼의 지대한 관심과 절대적인 호기심, 강한 집착은 암컷을 사로잡으려는 수컷의 구애보다도 끈질기기만 했다. “정말 가치 있는 물건은 스스로가 가치 있다고 드러내지 않는답니다.” 기둥 뒤에서 한 사내가 발소리를 내며 걸어 나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브리나의 예상대로였다. 회의에 참석했던 정장차림 그대로 윈은 태연하게 서서 가브리나를 응시했다. “수천 년의 세월이 녹아든 방대한 지식과 혜안은 쉽게 생기는 게 아니죠. 팔팔한 다른 드래곤에 비해 조금 힘이 부친다한들 어떻습니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네가 필요하지 않단다. 이젠 지나친 관심은 접어두지 그러니.” “제 관심이 지나쳤나요?” “조그마한 너 하나 신경 쓰는 것도 내겐 피곤한 일이야.” “그러시질 마시고, 저를 받아들이려 한번 노력이라도 해보시면 안 됩니까?” 대놓고 유혹이라도 할 것처럼 깔끔하게 묶음머리를 한 남자가 초승달처럼 곱게 눈을 휘었다. “늙은 당신과 싱싱한 저.” 그 당돌한 말에 가브리나는 섬세하게 눈썹을 휘었다. “힘쓰는 일은 젊고 파릇파릇한 제게 시키시면 되지 않나요?” “힘쓸 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보다는 내가 더 강하겠구나. 안 봐도 뻔해.” 가브리나의 조금 지친 말투에도 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다가가며 사람 좋게 방긋 웃기만 했다. “저희는 환상의 파트너가 될 겁니다. 확신합니다. 그 누구도 이룩하지 못했던 최고의 경지에 도달해 마법원론은 물론 세계사가 새로 쓰이게 될 겁니다.” “기적이라도 부리고 싶다면 잘못 찾아왔어. 신전에라도 가보렴.” “기적이라, 어감이 참 좋네요. 애당초 마음이 통하는 자들끼리는 외관부터가 닮아있다던데 저희가 딱 그 짝인 모양입니다. 금발에, 그것도 장발이라니 흔치않은 조합 아닙니까.” “내가 머리를 자르면 되겠니.” “그럼 저도 자르죠.” 까짓 거 그러겠다며 윈이 얘기하며 가브리나의 앞에 두발자국을 남겨두고 멈춰 섰다. 가브리나는 오랜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흔히들 그러지 않습니까. 오래알고 지낸 연인이나 부부가 닮는 일도 있지만 영혼의 동반자는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를 닮는,” “…우습지도 않은 얘기 그만하렴.” 가브리나는 자신과 어떻게든 마주하려드는 윈의 열렬한 눈길을 피했다. 인간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런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그 짧은 생을 살아도 늘 예상을 뒤엎는 발칙함, 작은 육체의 한계마저 돌파해버리는 의지가 기특하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이 도를 지나쳐서는 안 되었다. 인간의 한계는 물론 세상의 한계까지 뛰어넘으려는 인간들이 시대마다 존재했었다. 흔히들 말하는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자들, 그들은 간혹 세상에 빛보다 밝은 영광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대다수가 비극을 불러왔었다. 그리고 세상의 한계보다도 한 차원 더 높은 차원의 한계를 뛰어넘으려한 인간이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에 존재했다. “그럼, 우스운 얘기는 이쯤하고 진지하게 본론으로 넘어가죠.” 등을 돌리려는 가브리나의 팔을 세게 꽉 붙잡고서 윈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비슷한 눈높이에 두 사람의 서로 대비되는 눈동자가 허공에 맞부딪쳤다. “내일 꼭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것을 보시고서도 저의 제안에 영 흥미가 동하시질 않는다면 그땐 깔끔하게 포기하겠습니다. 이래봬도 구질구질하진 않거든요.” 가브리나는 자신의 팔을 쥐고 있는 윈의 손을 떨어뜨리려했다. 그전에 울린 진지한 목소리가 이제까지와는 사뭇 달라 그도 모르게 움직임이 멈췄다. “내일 한번만, 언제든 좋으니 저를 찾아와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기묘한 열기를 발산하는 보라색 눈동자를 외면하듯이 가브리나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가볍게 팔을 털고 나가자 더 이상 윈도 귀찮게 그의 앞길을 막아서질 않았다. 허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끝까지 가브리나의 뒷모습을 갈망어린 눈길로 좇았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꼭!”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가브리나는 모퉁이를 돌아서서 왕만이 출입할 수 있는 복도로 들어섰다. 화려한 금으로 된 바닥위에 깔린 매끄러운 붉은 벨벳카펫을 밟으며 그는 곳곳에 새겨진 왕가의 문장을 눈에 담았다. 드래곤을 형상화한 문양이 오늘따라 유독 또렷하게 시야에 밟혔다. 그 사람이 자신을 기리기 위해 왕성 곳곳에 남긴 흔적들이었다. ‘알렌. 오랜만에 너만큼이나 열성적인 인간을 만났구나.’ 이걸 기뻐해야할지, 슬프다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가브리나의 입가가 흐릿하게 물들었다. * 다이아나는 국왕 라델리우스의 부름을 받고 왕성으로 향했다. 이제껏 그녀만큼이나 잦게 왕궁을 출입한 귀족여식도 별로 없을 테지만 왕의 침소에 초대받은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다이아나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국왕의 하나뿐인 약혼녀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과 그가 공식적으로 사랑하는 연인사이라고 했다. 기억을 하진 못했지만, 아무튼 그랬다. 그렇다고 국왕 앞에서 기억이 안난다 사실대로 고할 수도 없었다. 왕후의 자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다이아나는 기억상실에 대해선 입을 꼭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는 자는 전속시녀와 아버지, 그리고 갑작스레 침실에 쳐들어왔던 라콘드 공작뿐이었다. ‘…긴장하지 말자.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하니까.’ “올르아 공녀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왕의 침실 앞에 서있던 근위병 중 하나가 그녀의 도착을 알리며 별도의 허락없이 곧바로 문을 열어주었다. 오로지 왕이 사랑하는 여인이라는 이유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다이아나는 오늘 처음 알았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들어서는 공간을 호기심어린 눈길로 훑어보지도 못하고 다이아나는 소파에 앉아있는 왕의 곁으로 다가가야만 했다. 그를 부르는 호칭이나 평소 어떤 대화를 주고받는지 알 수 없기에 무심한 척 눈을 내리깐 왕의 앞에 서있었다. 교양 있고 침착한 얼굴을 했지만 다이아나는 속으론 안절부절못했다. 서류를 살피며 앉아있던 적빛 도는 금발의 사내가 이윽고 한 팔을 뻗어 다이아나의 허리를 휘감았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아,”하고 다이아나가 소리를 내기도 전에 다른 팔로 등허리를 끌어안고서 라델리우스는 그녀의 부드러운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는데…결국 이리 되는군. 하아.” 라델리우스는 어느새 서류철도 테이블위에 던져둔 채 서있는 여인의 온기에 푹 빠졌다. 조금씩 팔에 힘을 불어넣으며 소파 쪽으로 끌어당긴 그가 다이아나를 안정적으로 소파 위에 무너뜨렸다. 혹여 소파 턱에 머리를 부딪칠까 한손으로 뒷머리를 감싸기까지 했다. 그런 자세를 취하느라 라델리우스의 수려한 얼굴이 부쩍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그는 사랑스런 눈길로 가까이에서 다이아나를 촘촘히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에 참을 수가 없어 그가 바로 입을 맞추었다. 점차 짙어지는 키스에도 다이아나는 얌전히 입을 벌리며 혀를 섞었다. 공식석상에서 젊은 국왕을 본 적은 많았으나 이런 짜릿한 관심과 애정을 받은 적은 그녀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너무나도 달콤해 혀가 녹을 것 같을 때 돌연 라델리우스가 입술을 뗐다. 다이아나는 꾹 내리감고 있던 눈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싶어서 손가락을 움츠려 풍성한 드레스자락 속에 숨겼다. 허나 바로 위에서 들려온 왕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혹 내가 그대를 화나게 한 건 아니지…?” “…제가 왜,” “말이 없잖아.” 진하게 밀어붙일 때면 유독 저가 투정부린다고 싫어하던 여인은 이상하게도 순순히 받아들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자신을 받아주려고 해서가 아니라 속으로 조용히 감내하는 중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해 밀고나가는 경우가 빈번했다. 이번에도 그러하다고 여겼지만 뭔가 조금 달랐다. 결국엔 씁쓸하게 입매를 누그러뜨린 채 라델리우스는 그녀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손수 닦아주었다. “밤에 불러내서 미안해. 그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어.” “…….”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안본 새에 어디 아프거나 그러진 않았지? 그대에게 전혀 신경써주질 못해 미안해.” 부인도 아닐 텐데 그 과도한 관심에 다이아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와 사랑한 기억이 없어도 몸은 기억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담은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자상한 손길에 심장이 심하게 두근거렸다. 이윽고 그 또한 제게 이끌렸는지 그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시 고개를 숙여왔다. 서로의 입술이 닿고, 삼키고, 애탄 마음을 달래듯 상냥한 키스가 이어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방문이 활짝 열리는 소리가 넓은 침실 안을 울리자 두 사람은 서둘러 닿은 혀를 숨기고 입술을 뗐다. 이 시간에 함부로 왕의 침소에 들어온 자가 누군지 다이아나는 어이가 없었다. 약간의 수치심을 느끼며 젖은 입술을 꾹 다물 때 먼저 제 위에서 일어난 왕 라델리우스의 반가운 옆얼굴을 발견했다. “…아. 가브리나님.” ‘님?’ 생각지도 못한 존칭에 다이아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국의 황제라도 납신 건가 싶어 문가를 돌아본 그녀는 바로 숨이 멎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남자의 외모에 넋이 나갔다는 게 옳았다. “죄송합니다. 이런 추태를 보여드려서.” “괜찮아. 의논하고 싶은 것이 있어 잠깐 들렸는데 내가 눈치가 없었구나.” 비현실적인 미모의 남자가 유하게 미소를 짓자 그 모습이 신계에서 내려온 자처럼 찬란하기까지 했다. 라델리우스는 다시 왕으로서의 위엄을 되찾듯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으나 가브리나를 향한 얕은 반가움은 숨기질 못했다. 그는 바로 다이아나를 일으켜 세워주고서 입가에 다정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분은 이 왕국을 수호하시는 드래곤이시다. 그대도 인사드리는 게 좋겠군.” “아, 건국의 영웅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올르아 공작가의 여식 다이아나, 드높으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다이아나는 형식적인 말로 예우를 갖췄지만 좀처럼 드래곤이라는 존재 앞에서 기를 피질 못했다. 인간과 드래곤의 차이란 이런 것인가 싶을 만큼,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여성인 자신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백옥 같은 깨끗한 피부하며, 깊은 황금눈과 허리께 아래로 찰랑이는 금빛의 머리칼은 오후 햇살을 담아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이아나는 알지 못했으나 가브리나는 은근한 애정어린 눈길을 그녀에게 주고 있었다. 한때 그 몸을 빌렸던 자인만큼 그 원주인을 싫어할 리 만무했다. 다만 다이아나였을 때는 출입이 자유로웠던 왕의 침소가 이런 식으로 거리감을 줄줄은 몰랐을 뿐이다. “실례했어. 내일 다시 찾아오지.” 이만 가보겠다며 가브리나는 조금의 시간도 지체하지 않고 나가기 위해 바로 등을 돌렸다. 넉넉한 흰 소맷자락이 살짝 나부낄 때 라델리우스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 손을 뻗어야만 했다. 그의 손끝이 떠나가려는 옷자락을 반사적으로 붙들자 가브리나가 멈칫 걸음을 세우고 그를 돌아보았다. “…죄송합니다. 왠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왠지 잡아야만 될 것 같았다고 해명하려 했으나 그 차분한 황금색 눈과 마주치자 그는 속말을 삼켜야만 했다. 라델리우스는 옷자락을 떠나보냈다. 사랑하는 여인은 지금 제 옆에 있을 텐데 순간 그녀가 홀연히 제 곁을 떠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째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슴이 약간은 허전해졌다. 혼란한 눈길을 숨기며 라델리우스는 사랑해마지않는 여인을 돌아보았다. 문을 응시하고 있는 분홍빛의 눈동자는 아름다웠고 물기가 스민 입술은 빨아들이고 싶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아까까지만 해도 가쁘게 뛰던 심장이 지나치게 고요해진 것만 같았다. 0131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다음날 저녁, 제국마법사 윈이 머무르는 객실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와주실 줄 알았습니다.” 윈은 환희에 젖은 얼굴로 다가왔으나 가브리나는 물끄러미 남자를 마주볼 뿐이었다. 마지못해 찾아오기는 했으나 이 끈질긴 관심을 끊어내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써 온 것뿐이었다. 가브리나는 바로 그에게 안내받아 어질러진 책상 앞에 앉게 되었다. 자신이 온다는 이유에서 나름 정리를 한 것 같았으나 여전히 방대한 자료들이 탑처럼 쌓여있었다. “잠시만 앉아계시죠. 중요한 손님을 모셨는데 마실 거라도 내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으니 용건만 간단히 해.” “번거롭지 않아 좋습니다.” 웃으며 동의한 그는 차가 아닌 바로 다른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브리나의 침전된 눈은 책상 위를 향해있었다. 유독 낡은 문헌들과 그 사이에 빼곡하게 꽂힌 빛바랜 종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백 가지의 수식이 뒤섞인 복잡한 마법진을 일일이 그려놓은 흔적들에서 수십 시간을 공들였을 정성과 고생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확실히 젊어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천재라는 수식어는 단순한 폼으로 달고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경쾌히 울렸다. “저쪽에선 이만 눈을 떼시고 이쪽을 봐주시겠습니까?” 가브리나는 난해한 자료들에서 윈이 서있는 오른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단정한 얼굴로 한번 싱긋 웃은 윈이 앉아있는 가브리나를 향해 살짝 상체를 굽혔다. 책상을 짚고 선 그는 가브리나의 앞에 내려놓은 연구자료와 결과물을 토대로 자기 계획에 대한 중점적인 설명을 이으려했다. 하지만 그전에 멋대로 가브리나의 손이 뻗어졌다. 사람의 상반신 길이만큼 기다랗게 말린 것은 노랗게 변질되다 못해 암갈색으로 부식된 양피지였다. 심하게 가장자리가 해졌으나 가브리나는 세월에 닳은 그 양피지를 미처 다 펼치기도 전에 알아보았다. 그리운 필체와 곳곳에 묻어난 희미한 흔적들에 손끝이 떨렸다. “……이건,” “알아보실 거라 생각했습니다만, 이리도 빨리 간파하실 줄이야.” 금기마법에 해당하는 인류초월의 대마법진 중 하나인 차원이동에 관한 마법진이었다. 이 마법진을 알아보는데도 이틀간 내리 밤을 지새워 연구해야했던 윈은 역시나 드래곤은 다르다 여기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메울 수 없는 마법지식의 수준 차는 극명했고 이는 그를 흥분케 하는 요소가 되었다. “왕실 도서관에서 발견한 문헌입니다. 오래되어 양피지의 질자체가 썩 좋지는 못하지만 내용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부스러질 것처럼 얇아진 가장자리를 쥐고서 윈은 모든 자료들을 뒤로 물리고 완전히 펼쳐볼 수 있게 했다. 성인 셋이 누워도 될 만큼 널찍한 책상 위에는 그 반을 차지하는 대형양피지가 놓여졌다. “상태를 보아 수백 년 전의 학자가 완성시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이건 말 그대로 인류의 위대한 발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마법학적 지식을 집대성한 보화라고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 값어치를 인간이 매길 수나 있을까요. 억만금……, 아니 천문학적인 액수로도 따질 수가 없을 테죠.” 윈은 애써 차분하려 노력하기 위해 지그시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그러고는 동조를 얻을 셈으로 굳어 앉아만 있는 가브리나를 돌아보았다. 벌어진 기다란 입술 새로 매끄러운 말이 흘러나왔다. “차원의 간섭이 가능해진다면 한낱 인간을 만족시키는 재화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황금색머리칼을 허리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사내는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하지만 희미하게 떨리는 눈빛을 윈은 알고 있었다. “저는 이 자료를 토대해서 여러 가지 색다른 접근을 구상해보고 구성력을 연구했었습니다. 무려 이 자그마한 선은 수억 개에 달한다니 믿겨지십니까? 여기에 사용된 수식은 또 어떻고요. 이천팔백여 개의 수식을 이렇게 유기적으로 배열해 놓는다는 건 그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딱딱 소리가 나게끔 윈은 검지와 엄지를 비비듯이 튕겼다.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나오는 특유의 버릇이었다. “만일 이것이 제대로 발동만 된다면 그 어떤 고차원의 마법영역에 접근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겁니까.” 하지만 대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해선 윈은 최소 오백 명에 달하는 마법사들이 달려들어야 가능할 것이라 보았다. 이 수식 하나하나를 배분해서 마나를 구체화하고 연결하는 작업은 또 얼마나 복잡할지 알 수 없었다. 분담하여 맡는다면 효율성도 떨어지겠지만 그만큼 협동심도 중요해져 단 한 명이라도 조건미달이 되면 발동에 실패하거나 대마법진의 오작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천변지이를 방불케 할 피해를 인간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윈은 눈앞에 있는 이 자가 필요했다. 수천 명의 인간을 가뿐히 뛰어넘을 초월적인 힘과 수천 년의 진리에 도달한 방대한 지식을 소유한 드래곤 가브리나가 말이다. “얼핏 완벽해보일진 모르나 저는 여기서 몇 가지의 작은 오류들을 발견했습니다. 이제까지 이것들을 고치고 응용하려 노력했지요. 최대한, 최대한 말입니다.” 수십 년간의 광적인 마법연구 끝에 도달한 위대한 발견, 그걸 윈이 놓칠 리 없었다. 대마법진의 배열을 고스란히 흡수한 상태에서 불안전한 부분은 수정하고 새로운 수식을 불어넣어 또 다른 원리의 대마법진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 위대한 발견에 의한 재창조였다. “그리고 이것이 새로 수정해서 완성시킨 저의 마법진입니다. 이 모든 역사가 다시 쓰일.” 윈은 새로운 양피지를 그 위에다 펼쳤다. 부러 얇은 재질을 골랐기 때문에 전등 불빛을 비추니 반투명하게 아래에 깔려있는 원본 대마법진이 흐릿하게 겹쳐보였다. 전체적으로 같은 틀을 갖췄으나 빼꼭히 들어찬 아주 작은 글씨들은 달랐다. 움직일 생각을 않던 가브리나가 의자를 뒤로 끌며 몸을 일으켰다. 두 손으로 양피지 위를 짚고서 그는 전체적으로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알렌이 완성시켰던 것과는 다르다. 차원이동 마법진이 아닌 새로운 형태의 마법진은 어쩌면 왕국뿐 아니라 이 세계의 역사를 새로 쓰이게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을 무無로 되돌릴 수 있을 테니. “제 제안에 대해 다시 생각할 시간을 드릴까요?” 단정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윈이 손을 내밀었다. 가브리나는 굳은 눈동자로 그를 돌아보았다. 성공하리란 확실한 보장은 없었다. 너무나도 비참했던 실패가 존재했기에 희망이란 단어는 다시 쓸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마워요. 가브리나.’ 이 순간에도 마음은 그 사람으로 가득 차버렸다. ‘절 믿어줘서, 제 손을 잡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반드시 그 믿음에 보답할게요.’ ‘알렌. 난 수천 년을 살아도 이렇게 어리석어.' 가브리나는 왼손을 들어 윈의 단단한 손바닥을 누르듯이 붙잡았다. 윈은 잠시 놀란 듯이 자색 눈을 살짝 크게 떴으나 곧 매끄럽게 웃었다. 잘 선택했다는 듯이. 그 눈앞의 자신만만한 얼굴에서 순간 맑고 환하게 웃던 그의 얼굴이 겹쳐 보인 듯 했다. '…이번엔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걸까. 실패했던 우리의 마법을 네가 없는 지금 끝맺을 수 있을까.’ 죽은 이는 말이 없었다. 왼손 약지에 낀 금반지만이 은은히 빛날 뿐이었다. * “최근 들어 기억나는 건 없습니까.” 블리어는 올르아 공작가를 매일같이 방문했다. 탐피아 제국에까지 사람을 풀었으나 아직까지도 사라진 여인의 행방은커녕 그녀를 봤다는 목격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이곳을 찾았으나 공녀에게서도 건질만한 것은 없었다. 다이아나는 오늘도 딱히 기억나는 것이 없다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렐리아가 누군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도움이 되어드리진 못해도…돌아오실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혼담이 오갔던 사내와 매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지만 다이아나는 최근 들어 이 시간이 가장 편안했다. 이 시간이 아니면 딱히 사람을 만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수도의 쇼핑지와 시내거리는 텅텅 비었고 수요를 책임지던 귀족여성들이 떠나니 부띠끄나 작은 모임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딱딱하지 않은 것 같아.’ 다이아나는 차를 홀짝이며 맞은편에 앉아있는 라콘드 공작을 힐끔 훔쳐보았다. 기억 속의 그는 빈틈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무표정했었다. 철두철미하고 엄격한 성격처럼 보여서 가볍게 자리를 가지는 것도 심한 압박감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단거 좋아하시나 봐요.” 새까만 초콜릿장식이 올라간 조각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조용히 음미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에 다이아나는 예외라고 생각했다. 단 음식을 입에 넣을 때는 유독 분위기가 느른하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제가 이 사실도 알았었나요? 공작님께서 단 걸 드시는 모습은 기억이 안 나서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몰랐을 겁니다.” 블리어는 입안에서 달짝지근하게 녹아내리며 사라진 초콜릿의 씁쓸한 뒷맛을 느꼈다. 그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을 사실이었다. 밤만 되면 단걸 바리바리 싸들고 제 사적인 영역에 당당히 쳐들어오던 그녀모습이 불현 듯 떠올랐다. 단맛조차 혀를 따갑게 찌르는 것 같아 블리어는 텁텁하게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예전에는 예민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단 걸 주로 먹었으나 지금은 피로에 견딜 유일한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먹어 두질 않으면 빈혈기가 돋을 것 같아 가릴 처지가 못 됐다. “저도 개인적으로 단걸 정말 좋아해요. 이 디저트들도 다 저희가문 파티시에가 만든 거예요. 혹시 좋아하시는 다른 디저트 있으세요? 내일도 오시면 준비할게요.” “초코랜……,” “…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칫 새어나올 뻔한 희미한 웃음을 그는 입술로 베어냈다. 쓰라린 감정을 갈무리하며 블리어는 부러 미적지근하게 반응했다. 오랜만에 떠올린 초콜릿 범벅의 디저트가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게 만들 줄은 몰랐던 탓이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블리어는 슬슬 돌아가야 된다고 여겨 몸을 일으켰다. 알아봐야할 것들과 좀 더 살펴봐야할 조사내용들이 산더미였다. 다이아나가 배웅하기위해 따라 일어서려할 때 그가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이건 혹시 기억나는데 도움이 될까 해서 가져왔습니다.” 곱게 접혀있는 정사각형의 그것은 천이었다. 다이아나는 손수건인 건가 싶어 펼쳐보았으나 곧 얕은 감탄사를 흘렸다. 누군가가 한땀 한땀 수놓아 완성시킨 자수였다. 한 송이의 꽃을 연상케 하는 아리따운 여인의 옆얼굴이 가장 먼저 다이아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유려한 얼굴선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형형색색의 꽃들은 화사했다. 은은한 보라색, 흰색, 분홍색, 산뜻한 노란색, 배경은 빈틈없이 꽃들로 수북하게 채워져 있었다. 열흘간의 빈자리를, 마음의 공허함을 대신해서 채우려하다 보니 이리된 것이었다. “이런 생김새입니다. 초상화만큼 정확하진 않지만 초상화가 없으니 이것이라도 지니고 있으십시오.” “그 렐리아라는 여자분이군요. 무척 아름답게 생겼네요.” 다채로운 꽃밭 속에 앉아있는 것 같은 은발의 여인을 바라보며 다이아나는 작게 웃었다. “조금이라도 기억이 돌아온다면 연락 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부드러운 여인의 미소를 뒤로한 채 블리어는 응접실을 벗어났다. 완전히 저택복도로 나와서 걷던 중 그는 문득 창문을 돌아보았다. 저택 뒤편에는 이미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있었다. 알록달록한 수채화 물감이 사방에 번진 것처럼 화사했다. 그리고 왠지 그 속에는 자수에서처럼 긴 은발의 여자가 존재할 것만 같았다. 블리어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꽃들 사이로 스치듯이 익숙한 옆얼굴을 본 것만 같았다. 시야를 부옇게 만드는 눈부신 햇빛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런 몽환적인 착각이 들었다. 역시나 착각이었던 건지 한참을 기다려도 그 어떤 기적도 그의 눈앞에 펼쳐지지 않았다. 블리어는 마지못해 나아가기위해 걸음을 뗐다. 그녀를 찾으려면 한시도 멍하니 지체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고, 또 그 다음날이 되어도 블리어의 가슴에 화장한 봄날이 깃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 없이 말라버린 그의 마음은 한발 앞선 여름이었다. 0132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가브리나는 왕성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작고 휘황찬란한 방에서 빠져나왔다. 마법을 쓰면 걸을 필요가 없겠지만 그는 되도록 마나를 쓰려하지 않았다. 위급사태에 대비해 항상 일정량의 마나를 체내에 모아두기위해 가급적 사용을 줄였다. 사실상 석 달 전만해도 조금씩 쇠해가던 기력이 지금은 바닥이라 할 만큼 영 좋지 못했다. 대륙각지에 있던 이들을 모으기 위해 기운을 시도 때도 없이 방출한 결과였다. 그리고 현재 가브리나가 향하는 곳은 브리쉬니 궁이었다. 초대국왕의 현명한 아내이자 최초의 왕후였던 여인의 이름에서 따온 궁이었다. 국왕 라델리우스가 그에게 내어준 궁이기도 했다. 현재 공식적인 왕후가 없기에 빈 궁이기도 했지만 수호드래곤이 머무를 거처로 적당한 별궁을 내어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나라의 건국을 돕고 천년 간 수호했던 존재였다. 왕성을 통째로 내주어도 할 말이 없겠지만 가브리나는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브리쉬니 궁도 거처로 삼질 않고 본궁 심장부의 작은 방에 머물렀다. 사용인을 제하고는 그간 아무도 출입하지 않았던 브리쉬니 궁이 오늘에야 비로소 제 역할을 소화해내고 있었다. 가브리나는 궁 건물 안으로 들어선 후 바로 시종의 안내를 받아 로비와 이어진 깊숙한 내부복도로 들어섰다. 금 기둥이 이열로 죽 늘어서서 드높은 천장을 받친 건축형태는 천장화의 웅장함을 더했고, 진귀한 갖가지 예술품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복도 끝에는 거대한 석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가브리나가 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렸다. “가브리나님을 뵙습니다.” “우리들의 수장을 뵙습니다.” 가브리나를 배알하기 위해 이곳에 모인 여섯 명은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형상을 한 드래곤이었다. 모두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 때 그들 중 간드러진 여성의 목소리가 황홀함을 그득 머금고 터져 나왔다. “세월이 지나도 가브리나님은 여전히 멋지시네요.” “스니온.” 스니온이라 불린 적발의 관능적인 미인은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다가온 파르마판이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옭아매고 더는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스니온은 아쉬운 듯 파르마판의 어깨에 머릴 기댔으나 여전히 홀린 눈으로 가브리나의 전신을 탐욕스럽게 훑어 내렸다. “정신 차려라. 공사 분간을 못하는군.” 대놓고 혀를 찬 자는 푸른 머리의 사내였다. 평화와 규율을 중시하는 블루드래곤 닉오드였다. 이에 돌연 스니온의 구두굽 아래서 새빨간 스파크가 튀어 오르며 불길이 치솟자 파르마판이 곧바로 마나로 잠재웠다. 스니온과 마찬가지로 붉은 적발의 엄한 인상을 한 남자 파르마판은 그녀와 심장의 반쪽을 공유한 사이였다. 강한 상대에게 매력을 느끼는 드래곤의 특성상 서로 엇비슷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은 상당히 궁합이 잘 맞는 드래곤 부부라고 할 수 있었다. “닉오드도 그만해요.” 흰 천을 교차해 아슬아슬하게 양가슴을 가린 초록머리의 미녀가 다가왔다. 녹음이 우거지는 계절이 되면 힘이 증폭되는 특이한 체질의 그린드래곤 메리미아였다. 메리미아의 소극적인 참견에 스니온은 코웃음을 치며 섬연한 눈썹을 씰룩 휘어 올렸다. “그보다 메리미아 넌 아이를 만들었다고?” “네. 신록의 계절에 태어난 아이예요. 아직은 제 힘이 부족해 말은 못하지만요.” 중성체인 드래곤에게는 종족번식이란 개념자체가 없기에 생식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메리미아가 말하는 아이는 마나로 창조한 아이로, 그녀도 생물학적인 어머니가 아니었다. 생명창조. 천 년 이상 산 드래곤에게만 그 권한이 부여되는 심화마법이기도 하지만 자기희생이 동반되는 작업이었다. 굳이 제 살과 같은 마나를 깎아내어 아이를 만들고 거기에 제 생명의 일부를 불어넣을 드래곤은 거의 드물었다. 종족수가 현저히 적은 것도 이 이유에서였다. “나도 가지지 않는 자녀를 메리미아 네가 먼저 가지다니. 그보다 심장의 반을 공유할 상대는 찾지도 않고 아이부터 만들다니, 참 너 답다고나 해야 할까.” “난…반려보다는 보살필 수 있는 아이가 더 좋은 걸요.” 수줍은 메리미아의 말에 근처에 서서 듣고 있던 닉오드가 양눈썹을 구기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그걸 포착한 스니온은 대놓고 마녀처럼 깔깔 거렸다. 고혹적인 웃음소리가 홀 안을 가득 메울 때 얌전히 앉아있던 갈색머리 소녀가 운을 뗐다. “우리가 오늘 여기모인 이유는 뭐죠? 가브리나님.” “적어도 쓸데없는 친목 따위의 이유는 아닐 테지.” 단발머리 소녀 쉴의 말에 옆에 앉아있던 하늘빛머리의 미청년 크라누가 한마디 했다. 그제야 홀 안이 잠잠해지고 상석에 앉아있는 가브리나를 향해 일제히 눈길이 모였다. 그들이 다시 긴 테이블에 열석하자 가브리나는 그들을 한번 가볍게 훑고서 무겁게 입술을 열었다. “세브로웰이 깨어났어.” “……!” “설마, 그런!!” “……역시 세브로웰이,” 다른 이들이 자리를 박차며 놀란 반응을 보일 때, 크라누는 예상했다는 듯 낮고도 깊게 이를 갈았다. 몸에서 배어나오는 살벌한 기운에 하늘빛머리칼이 짧게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그때 크라누의 옷자락을 꼭 쥐는 작은 손길에 일순 모든 기운이 거둬졌다. “…노피……” 공포에 질린 얼굴로 쉴이 눈가에 그득 눈물을 매달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소녀를 크라누는 조심스럽게 끌어안아주었다. 단순히 크라누가 쉴을 달래주는 것 같아도 그들은 누구보다도 서로를 의지했다. 둘의 조금 독특한 관계형성은 노피의 죽음 덕분이었다. 노피는 전 수장이자 무리에서 가장 현명하고 인자했던 드래곤이었다. 만년에 들어섰지만 누구보다 강했던 그를 존경했던 크라누와 그를 유독 잘 따랐던 쉴은 그의 죽음에 가장 큰 충격과 상심을 얻었었다. 모든 드래곤에게 있어 충격적이었던 그 일을 벌인 자가 세브로웰이었다. 그 당시 사태를 진압했던 자가 가브리나였고 노피의 뒤를 이어 수장자리에 올랐으나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었다. “이번은 선택이 아니라 수장으로서의 명이야.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건 알지만 너희들의 힘이 필요해.” 엄숙한 가운데 가브리나의 진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절하는 이는 없었으나 하나같이 초조하고 언짢은 기색들을 내보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 돌연 거대한 문이 열리며 그 사이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무겁게 깔렸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환기시킨 존재는 다름 아닌 화려한 복식의 라델리우스였다. 그들에겐 턱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했으나 왕다운 기백이 서린 얼굴에 드래곤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대가 이 나라의 왕인가?” 가브리나의 왼편에 앉아있던 적발의 남자 파르마판이었다. 부부 아니랄까봐 바로 그 뒤를 이어 스니온까지 합세했다. “젊어 보이네. 오십 년은 살았으려나.” “오십이면 인간나이로 중년에 해당된다. 그것도 모르나.” 스니온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닉오드였다. 당연히 원수지간인 스니온은 그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왕을 향해 교사스레 웃어보였다. “반가워. 인간의 왕.” “체통을 좀 지켜라.” 또 한 번 닉오드가 핀잔을 주었다. 스니온의 왼손에서 작은 불길이 터져 나오자 닉오드도 바로 오른손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내었다. 그 사이에 낀 파르마판은 여전히 묵묵한 눈길로 인간 왕에게 관심을 보였다. 익숙하다는 듯이 가브리나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문가에서 걸어오는 라델리우스를 맞이하며 그의 팔을 잡아 부드러이 이끌었다. 라델리우스를 상석에 앉히고 가브리나는 그 옆에 서서 자애롭게 한번 웃었다. “이 자가 바로 바일롯을 다스리는 국왕, 바일로트 핀 아이작 라델리우스란다. 나의 왕이 곤란해보이니 인사는 다음에 미루고 대책부터 논의하지.” 말수 없는 자답게 파르마판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느새 탁상 아래로부터 뻗어져 나온 황금빛 줄기가 닉오드와 스니온의 몸을 강하게 휘감고 있었다. 그 둘의 결착이 다음으로 미뤄지고 탁상 위는 다시 진지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이제까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던 메리미아가 불안함에 슬며시 입을 열었다. “세브로웰이 봉인에서 풀려난 것치곤…생각보다 평화롭네요.” “지금은 말이지.” 가브리나는 한숨대신 낮은 목소리를 냈다. “지금쯤 이 대지 어딘가에 레어를 만들고 휴식기에 들어서있을 거야. 최소 일 년에서 몇 년이 흐른 뒤에 공격해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수장님도 아시겠지만…저희들은 세브로웰을 정면으로 상대할 힘이 없어요. 세브로웰의 레어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자도 가브리나님 정도죠.” “나는 선제공격은 가하지 않을 생각이란다.” 봉인시킬 힘이 없다고, 쇠하고 있는 중이라고 사실대로 말하지는 못하고 가브리나는 달리 말했다. 오로지 힘에 의해 차등을 두는 드래곤의 특성상 무리를 이끄는 수장은 절대적인 지배자일 수밖에 없다. 개인의 탐욕,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종족들이 질서를 이룰 수 있는 이유는 철저한 위계질서 때문이었다. 그런 지배자가 약해져있다는 걸 알면 그들은 모른 체 등을 돌리거나, 거절하려할 것이 분명했다. 씁쓰레한 속마음을 숨긴 채 가브리나는 강하게 웃으며 어조에 힘을 실었다. “지금으로썬 혹시나 모를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대비책을 세워둔 상태야. 하지만 내가 이쪽을 신경쓰다보면 아무래도 방어에 취약해지게 되겠지.” 두 쪽 다 신경을 쓰기엔 그만한 기력이 없다는 말이었다. 대마법진을 작동시킬 정도의 힘이 모아질지도 사실상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힘을 모으는데 전념해야하는 만큼 방어력은 상대적으로 곤두박질치듯 약해질 것이다. 자신의 몸조차 지킬 수 없을지 모른다. 인간마법사들이 왕궁에 쳐둔 결계만으로는 진심으로 공격해오는 세브로웰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끔찍한 재앙들은 자신의 신경을 건드릴 작정으로 조금 있는 힘으로 장난을 친 것에 불과했다. 그가 본래 힘의 반만이라도 되찾는다면 왕국은 꼼짝없이 검은 불바다가 될 터였다. “너희들은 그저 방어에 전념해줬으면 해. 나를 믿고, 왕성에 쳐진 결계에 힘을 보태어서 수도까지 범위를 확장시켜주렴.” “알겠습니다.” 대답한 자는 파르마판이었다. 그 정도는 흔쾌히 움직여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방어라면 저희끼리 어떻게든 될 것 같네요.” “맡겨만 주십시오.” “최선을 다해볼게요.” 스니온과 닉오드, 메리미아가 뒤따라 대답하고 쉴과 크라누는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가브리나는 여전히 자리에 일어선 채 듬직한 면면들을 살피다가 흡족한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아름다운 미소에 라델리우스만이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0133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늦은 시각, 라델리우스는 방에 앉아있었다. 수호드래곤 가브리나가 앞장서서 드래곤들의 협조를 받아 내준 덕분에 수도의 방위는 안심할 만한 수준에 들어섰다고 봐도 되었다. 그것이 고맙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고, 은혜로운 처사에 늘 감사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탄복했다. 그는 의지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깊은 존경마저 보였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울림이 있는 감정이었다. 사실상 라델리우스는 이런 복합적이고 강한 감정을 예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왕에게만 출입이 허락된 장소에서였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라 불리 우는 가장 으슥하고 은밀한 왕성 심장부의 복도. 국고와 이어져있으며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얘기에 따르면 비밀의 방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했다. 물론 라델리우스 또한 그 장소를 알지 못했다. 바일로트 3세까지만 해도 그 방의 위치를 알았다고 했으나 언젠가부터 없는 방으로 취급되었다. 라델리우스가 처음으로 생경하고 벅찬 감정을 느꼈던 것은 그리 오래전 일도 아니었다. 그 순간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창밖에 흰 조각달이 걸리고 달빛과 어둠이 미묘하게 경계를 이루는 심장부의 복도, 그곳에서 운명처럼 여인을 발견했었다. 아마도 지금 시간과 비슷한 시간이었을 테다. ‘올르아 공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올르아 공작가의 여식이라는 것을 라델리우스는 뒷모습만 보고도 알아차렸었다. 그만큼 접점이 많은 여식이기도 했었다. 공식석상에서 스치듯 안부 인사를 나눌 땐 그리 대담한 성격은 아니라 여겼건만 경비가 삼엄하지 않는 틈을 타 이곳까지 침입한 건가 싶었었다. ‘여기서 뭘 하느냐 묻고 있다.’ 서느렇고 무뚝뚝한 말투에도 다이아나는 순순히 몸을 돌리지 않았었다. 공녀 몸으로 원래육신이 숨겨진 곳을 찾으러 온 가브리나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연 팔목을 붙잡는 강한 힘에 속절없이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허공으로 돌아간 눈이 정확히 그를 담는 순간 가브리나는 무참히 흔들려버렸다. ‘바일로트…’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무표정한 왕은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무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일 리가 없겠지.’ 뒤이어진 허탈한 말에 라델리우스는 다시 한 번 미간에 찌푸림을 가했다. 왕족을 눈앞에 두고 바일로트라는 성을 부정한다는 건 그 왕족을 부정한다는 것과 상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흘러들어온 맑고 자애로운 음성에 라델리우스는 알 수 없게도 불쾌감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그대가 바일로트의 자손인가요.’ ‘그 말은 내가 직계혈통이 아니라는 건가.’ 처음으로 경험해보지 못한 심장의 근질거림이 일었다. 물론 이성은 깨어있기에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고 그는 조금 덤덤하게 그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공녀는 제 말에 대답도 않고 그저 소리 없이 손을 들어보였다. 서글픈 눈으로 뺨을 쓰다듬어주는 여인은 알고 있던 여인과는 너무 달랐으나 한편으론 묘하게 익숙했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 이상한 행동에 다른 때와 같았다면 냉정히 쳐냈을 터인데도 라델리우스는 심장이 싸하게 멎었다. 심장이 이유 없이 저릿저릿해서 아프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편으론 너무나도 정겨웠고 다정해서 진한 울림을 주었다. 묘한 끌림은 생애처음으로 그런 강하게 사로잡히는 느낌이 들게 했다. 이것이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구나, 하고 느끼게 될 만큼 강렬한 감각이었다. 특별할 것도 없을 텐데 마음 한 곳을 진하게 울리는 애틋함에서 그는 헤어나질 못했다. 설명할 수 없지만 그 당시 뭔가에 홀렸던 걸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달빛이 가득 에워싸던 으슥한 복도였기에 더더욱. “저 왔어요.” 라델리우스는 깊은 상념에서 벗어나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여인을 맞이했다. 늦은 밤중에도 아름다운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한 여인은 경국지색이라 할 만큼 화사했다. 그는 기다리고 있었단 듯이 다이아나를 소파위에 쓰러뜨렸다. 그녀를 눕히고 바로 입을 가져다대 한껏 빨아 당겼다. 달콤한 향유라도 바른 듯 사뭇 다른 달달함이 혀끝을 녹였으나 라델리우스는 얼마못가 입술을 뗐다. 한껏 열이 오른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다이아나의 모습에 그는 되레 무겁고 침착한 기분만 들었다. 애써 다시 키스를 해보려 노력했으나 그의 자책감만 부추길 뿐이었다. 전과는 달랐다. 라델리우스는 확실히 인정해야만 한다고 여겼다. “…나는 더 이상 그대를 사랑하지 않아.” 더 이상 그런 기분이 들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던 마음이 이제는 한 톨 남기지 않고 비워진 것 같았다. 충격에 얼어붙은 분홍색 눈동자가 곧이어 얕게 떨렸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라델리우스는 괴로움을 느꼈다.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읊던 맹세가 이렇게 부질없는 거였던 건지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에게 미안해서 가슴이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 다이아나…. 이젠 그대를 놓아줘야 될 것 같아.” 한때는 너무나 사랑했던 여인을 이젠 이유 없이 사랑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파혼하자.” * 국왕과의 파혼은 올르아 공작가문에 상당히 큰 타격으로 돌아왔다. 다이아나는 파혼소식이 수도에 파다하게 알려지기 바로 그 전날, 아버지의 서재로 불려가 이런저런 불편한 얘길 나누어야만 했다. 그녀도 왜 자신이 파혼을 당한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근엄한 목소리로 아무리 저를 다그쳐도 쉽사리 입술을 뗄 수 없었다. 왕후 후보자격을 잃었다. 그 사실만이 큰 흠집으로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다이아나는 슬프거나 하진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아니었으며, 제게 파혼을 얘기하던 왕이 너무 서글퍼보여서 그것이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안해한 건 그였고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이 그와 자신을 파혼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문제를 본질적으로 보지 않으려 회피했다. 그리고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오늘도 자신을 찾아온 흑발의 남자 앞에서 다이아나는 살며시 웃었다. ‘역시 편해.’ 시원하고 단 디저트를 맛보며 다이아나는 마음의 안식이 찾아옴을 느꼈다. 어지러운 여름벌레의 울음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오고 습한 바람이 활짝 열린 창을 드나들었다. 너무 한가로워서 마치 딴 세상에 있는 기분이었다. “남한테 빚을 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박장에서 유흥 겸 자기 나름대로 돈을 벌려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덥지근한 대기를 울리는 남자의 메마른 저음이 현실과 이어진 유일한 줄이었다. 다이아나는 불그스름한 찻물 위에 비친 맞은편의 사내를 훔쳐보았다. 날렵하게 깎인 턱선과 목이 예리한 각을 이루었다. 붉은 색소가 빠진 얄팍한 입술은 피로해보였고 거무스름한 눈가는 푸석했다. 흘러내린 새까만 머리칼아래엔 늘 애수가 감도는 얼굴이 자리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는 동안 다이아나는 약간 몽롱한 기분에 젖어들었다. 귓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뒷전이 되어있었다. “받으면 받은 것보다도 더 많이 돌려주려 애쓰는 여자였습니다. 돈으로 주지 않고 먹을 걸로 사다주거나 선물로 갚았지만 말입니다. 그것이 흐뭇해서 하나둘 받다보니 어느새 밀어내지도 못하게 되었다지만……그런 여자였습니다.” 서로 얼굴을 대면한지도 사 개월이 훌쩍 넘었지만 그는 그다지 제게 사적인 정을 붙이려하진 않았다. 오로지 렐리아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없냐는 물음뿐이 대화의 전부였다. 간혹 그녀에 대해 얘기해주었으나 다이아나는 그것이 자신에게 말하고 싶어서가 아닌, 조금이라도 기억이 돌아오는데 효과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가 아닐까 추측했다. “성격은 많이 둔한 편입니다. 스스로에게조차 둔감해서 어디 다쳐도 모르고 돌아다닐 만큼 둔합니다. 사실상 무관심하다는 게 맞는 말일 겁니다. 남 신경은 전혀 쓰지 않던 여자였습니다.” 어두워진 녹안이 무심히 내리깔렸으나 투박한 손끝은 잔 테두리를 섬세하게 쓸었다. 묻어날리 없을 텐데도 무언가가 진득하게 묻어나는 기분이었다. 자꾸만 배어나오는 그녀에 대한 기억은 참 끈질기게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쩌면 반대일지도 모른다고 여기니 블리어의 입가가 무거운 추라도 달린 듯이 묵직하게 내려갔다. “이상한데서 잔재주가 많았습니다. 던져진 물건을 받아낸다거나, 동전을 걸고 내기를 건다거나, 제법 그림솜씨가 좋았습니다.” “그림은 저도 잘 그리는데……” 아. 허공에서 엇나간 두 시선이 순간적으로 맞부딪쳤다. 다이아나는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사내의 무감정한 눈동자에 그만 찻잔을 쥔 손을 물렸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서 시선을 내렸다. 찻잔을 건드리는 바람에 연붉은 찻물이 흔들리고 그 일렁이는 수면위로 맞은편 사내의 얼굴이 비쳤다. ‘나 뭐하는 거지.’ 한 점 동요 없는 서느런 얼굴을 본 후에야 다이아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잠시 무더운 여름날씨에 홀린 모양이었다. * “이 부분을 어떤 식으로 배열하는가에 따라서 시동률을 높일 수 있을 겁니다. 아직 기본구조를 확립한 정도지만 마나를 공급했을 때 지속력이 오래가는 게 훨씬 효율적일 테니까요.” 윈은 매끄럽게 설명을 잇고서 왼편을 돌아보았다. 언제 봐도 감탄이 나오는 훤칠한 이목구비의 남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말에 응수해주었다. 가브리나는 수정하는 게 나을 것 같은 곳을 짚으며 윈과 함께 어떤 식으로 마법진을 수정할 지에 대해 논의했다. 한계에 부닥치면서까지 차원을 두 번이나 넘나든 탓에 몸은 말이 아니었지만 그것이 곧 경험이 되어 새로운 계획의 완벽성을 높일 수 있게 했다. 가브리나가 원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성공확률을 높이는 것이었다. 대마법진이 완성되고 그것을 시도하게 될 날이 온다면 아마도 제 모든 마나를 불어넣어야 될 테다. 육체가 소멸되는 것쯤은 이미 오래전에 각오했다. “잠깐 옆으로,” 윈은 말문을 뗀지 수초도 안 되어 다시 힐끗 그를 돌아보았다. 이해하자마자 말은 흐지부지하게 변하였다. “…벽이 있어 못 가실 것 같네요. 남자 두 명이서 작업하기엔 조금 자리가 비좁은 감이 있습니다만 어쩔 수 없죠.” 대형양피지의 끄트머리 부분을 수정하는 작업인지라 그들은 구석자리에 나란히 서있어야만 했다. 양피지를 아예 단단히 책상에 고정해두었기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더위에 취약한 윈이었으나 그는 긴 금발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작업을 이어가려했다. “하는 수 없구나.” 그 순간 가브리나의 흰 살결이 영롱한 금빛으로 일렁이더니 곧 그 장대한 체구가 얇고 가느다래졌다. 뜨겁게 닿아있던 두 사내의 어깨는 어디가고 바람이 지나들 만큼 약간의 틈이 생겼다. 윈은 바로 옆에서 일어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휘둥그레 보라색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매사 천연스러움을 가장하던 남자는 아마 처음이자 진심에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 것이리라. “뭘 그렇게 놀란 눈으로 보는 거니.” “…여성이었습니까?” 0134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나는 중성이란다. 무엇을 하는데 성별이 중요하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은.” 딱딱딱, 엄지와 검지가 마찰되는 정신 사나운 소리만이 그들 사이를 가득 메웠다. 깊은 고뇌에 빠진 얼굴로 윈은 힐끗 내렸던 눈을 천장 어디쯤에 올려두었다. “그…옷 사이즈는 신체에 맞게 안 줄여지는 겁니까? 가슴골이 보이는데 말이죠.” “보이면 안 되니.” “굳이 보이고 싶으시다면야 보이십시오. 자기 마음이겠지요.” 대수롭지 않은 듯이 윈은 대답했으나 아직은 당혹감이 채 가시지 않은 표정이었다. 기골이 장대하던 미남이 하루아침에 늘씬한 몸매의 미인으로 바뀌었는데 그 괴리감은 쉽게 씻어낼 수 없었다. 거기에 금수가 놓인 수의는 체격에 맞지 않은 탓에 네크라인이 늘어져 의도치 않게 가슴골이 파인 형태가 되어버렸다. 시각적인 충격이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윈은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에 눈과 손을 두고서 닿을 듯 말듯 가까이 서있는 가브리나를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드래곤이 중성이란 학설은 아직 학계에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가 학계에 보고하면 되겠구나.” “그것도 꽤 괜찮은 생각이군요.” 양피지 위에 부가수식을 적어 넣으면서 윈은 부지런히 입을 놀렸다. 관심을 다른 데에 돌리려 애쓰는 사람처럼 말이다. “한데 드래곤은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신에 가까운 존재였군요. 주신이 그러지 않습니까. 낮에는 남성의 모습을 하고 밤에는 여성의 모습을 한다고 성전에 그리 쓰여 있습니다.” “많은 인간들이 드래곤을 신격화하지만 사실상 그렇지 못해.” 신에 가까운 존재라 불리기에는 한참 부족하다고 가브리나는 잔잔히 얘기했다. 남성이었을 때는 깊은 울림을 간직하던 목소리가 여성이 되자 은은한 자애로움을 담았다. “인간처럼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고 탐욕을 알지. 다만 긴 세월을 살다보니 인간을 뛰어넘는 지식과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뿐, 우리도 인간과 한 치 다를 바 없어. 세브로웰도 마찬가지고.” “세브로웰이면 그 실버드래곤 말하는 건가요?” “그래. 세브로웰은 그 정도가 특히나 심했어.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살았지. 자기 눈에 띄는 것, 마음에 드는 걸 갖기 위해 동족간의 전투도 서슴지 않고 벌였어. 이간질은 물론이고 죽이는 것도 말이야.” 한번 소유한 것은 쓸모가 없어지더라도 평생 제 곁에 둬야 직성이 풀려했다. 그런 세브로웰에게 번번이 경고한 게 가브리나였다. 애정에 목말라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브리나의 안일한 생각인 동시에 크나큰 실수였다. “빼앗기려하지도 않고 절대 내어주는 법이 없었어. 아무도 그 아이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소유물을 건드리지 못했어.” “그런 우월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독점욕이 심하다니, 인류를 위협하기엔 더없이 완벽한 성격이네요.” 당연히 비꼼이었다. 윈은 어깨를 한번 으쓱한 후에 아무생각 없이 말문을 열었다. “인간과 비슷하다면, 그럼 사랑도 합니까?” “그래.” “중성인데 사랑이 가능합니까? 아니 그전에 가브리나님도 사랑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있었어. 남녀가 짝을 이루는, 종족번식을 위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드래곤은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만들어낼 수는 있어도 말이지.” “생식기가 없어서 말입니까?” “인간 형체로 있을 때는 임의로 생식기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하지만 생식능력과는 별개로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나도 그런 사랑이었어. 무척이나 사랑하는 사람이었지.” 수천 년의 세월을 살았는데 사랑하는 이가 한명도 없었다는 것도 이상할 테다. 태연한 표정으로 윈이 그러려니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그 사람을 위해서 이 나라를 세웠을 만큼 말이야.” “?!!!”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윈은 손에서 툭 깃펜을 떨어뜨렸다. 꼴불견스럽게 버벅대는 손을 말아 쥔 그는 이어지는 가브리나의 말을 해괴한 얼굴로 주워들었다. “그 사람은 뭐든 나눠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어. 작든, 크든, 제 손에 있는 게 뭐든.” 여전히 양피지를 내려다보며 가브리나는 입가에 어린 평온한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땅에서 겁도 없이 내가 자리를 튼 광산으로 올라왔지. 내 레어의 틈새를 찾아낼 만큼 그 작은 침입자는 제법 머리가 좋았어. 물론 대담하진 못해서 콧김 한방에 기절해버렸지만 말이야.” “혹시나 제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면, 말씀하고 계신 게 바일롯의 초대국왕입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맞아. 그 심약한 성정을 고려해본다면 확실히 왕이 될 재목은 아니지.” 그 자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라델리우스도 사실상 같은 핏줄임을 속일 순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뚝뚝해보여도 남에게 의지를 잘하고 상당히 심약한 성정이었다. 가브리나가 집안내력은 어디 안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 윈의 입에서 조금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흐음…, 제가 아는 건국사와는 많이 다르네요.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말입니다.” “건국사에선 용맹한 바일로트 1세로 서술되어있다지. 그건 인간들이 멋대로 초대국왕을 기리기 위해 각색한 허구에 불과해. 통치하는 동안 가장 현명하고 자애로웠던 왕이라는 건 맞겠지. 하지만 그는 전사도, 하물며 영웅도 아닌, 거적때기하나 걸치고 제국에서 넘어온 떠돌이 마법사였어.” 왕실도서관에서 발견된 낡은 대마법진 설계도가 그 왕이 남긴 연구기록이란 걸 모를 것이다. 가브리나는 굳이 그 사실을 윈에게 말하지 않았다. “제국마법사였다니……저와 같은 출신이란 것이 참 충격이군요. 왕국민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겁니까?” "천년이란 시간이 흘렀는데 진실을 아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지.” “그렇지만 초대국왕이 황금을 드래곤에게 넘기고 협상함으로써 이 나라를 세웠다고 들었는데…초대국왕에게 받은 건 사실 금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까?” “사랑을 받았다라……,” 가브리나는 그저 의미모를 미소를 짓다가 고개를 가벼이 내저었다. “오히려 금을 받았지.” 그녀는 자기 왼손약지에 낀 금반지를 윈의 눈앞에 내밀어보였다. “이것이야.” “……?” “이만한 크기의 반지밖에 못 만들 만큼 정말 작고 보잘 것 없는 금이었지.” 남이 보기에는 너무 작아 코웃음이 나올 크기일 테다. 하지만 가브리나에게 있어선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주 귀한 황금이었다. 그것을 녹여 만든 반지는 어떤 것보다도 값질 수밖에 없었다. “왕이 되고 싶어서 찾아온 게 아니었어. 거래, 아니 거의 구걸이었지.” * * * 지금으로부터 천년을 거슬러간 이야기이다. 탐피아 제국의 변두리 지방에서 한 보잘 것 없는 남자가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소작농으로 겨우 벌어먹고 사는 아버지의 밑에서 자랐다. 평범한 출생답게 생긴 것도 평범했다. 제법 동그란 눈에 쌍꺼풀은 연했고 그다지 특색 없는 밋밋한 얼굴의 소유자였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붉은기가 섞인 짙은 금발정도였다. 그의 이름은 알렌 시누프스였다. 그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오로지 가난뿐이었다. 고기는 꿈도 꿀 수 없었고 간혹 마을에서 얻은 우유나 치즈 따위의 유제품이 그에게 허락된 사치였다. 또 한 가지, 알렌에게는 허락된 사치가 있었으니 바로 책이었다. 어느 촌구석의 평민이든 다 똑같겠지만 문맹이 아닌 자를 찾는 게 힘들만큼 탐피아 제국은 문맹률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일자무식으로 크길 바라지 않아 도시에서 건너오는 낡아빠진 헌 서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서적들이 마법서였다는 건 어쩌면 운명이 아닌 필연이었을 것이다. 여덟 살이 되었을 무렵 알렌은 책 하나로 혼자서 글을 깨우쳤고,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에는 마법진을 그리는 법을 터득했다. 머리가 영리하기도 했지만 일찌감치 마법분야에서 남다른 두각을 드러냈다. 무서우리만치 비상하다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아무리 타고난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해도 낮은 평민의 신분이면 재능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것을 알렌은 잔인하게도 한참 꿈을 상상할 열 살에 깨달았다. 불공평하다고 주위에 소심하게 말했다가 괄시를 당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훌쩍이는 소년의 말은 그저 현실을 모르는 우스갯소리에 불과했다. 물론 알렌이 정말 천운을 타고나 가까스로 황실 마법사가 되었다고 해도 그 대우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법사라고하면 약골 혹은 팔푼이 취급을 받는 게 대부분이었고, 제국에서 원하는 인재상은 오로지 검을 쥔 강인한 육체의 기사이지 깃펜과 씨름하고 동그라미를 그리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알렌. 신분은 바보 같은 거야. 이렇게 대단한 걸 담고 있는데도 그릇의 겉만 보고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거니까. 언젠간 네가 가진 대단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날이 올 거야. 이 아버지가 장담하마.” 그러니 마법사의 꿈을 포기 말라며 알렌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던 아버지마저 14살의 어느 추운 겨울날,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에게 남겨진 재산이 있을 리 만무했다. 겨울이라 먹을 식량조차 부족했으나 이웃들은 자신들이 가진 물건을 팔아 알렌을 도왔다. 하지만 언제까지 받기만은 할 수 없었다. 소년이었던 그는 봄이 되자 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살아갔으나 19살이 되던 해 영주가 바뀐 후로 턱없이 많은 조세를 요구받게 되자 쫓겨나듯 살던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그럴 능력이 안 되는 건 알렌뿐만이 아니었고 다른 이웃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얇은 옷가지를 잔뜩 껴입고, 전 재산인 마른 곡식을 담은 자루와 작은 보따리 짐만 챙겨들고 영지 밖을 나서야만 했다. 혹독한 추위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하루아침에 유랑민 신세가 되어버린 영주민들은 꽁꽁 얼어붙은 강물을 건너 정착할 곳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먹고살기 힘든 것은 다른 영지들도 마찬가지였다. 돈이 없어 내쫓겨난 부랑자들을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로 차갑게 외면했다.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해 며칠을 떠돌다가 끝내는 제국 끝자락에 위치한 척박한 황야에 도착하게 되었다. 눈보라는 그쳤지만 앙상한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있는 그곳은 사람이 살만한 곳이 되지 못했다. 꿋꿋이 스스로를 마법사라고 칭하던 알렌은 가진 것은 없지만 마법은 부릴 수 있었다. 그 능력은 상당히 유용하게 사람들을 도왔다. 꽝꽝 언 맨땅위에 불을 피워냈고 온기를 유지할 수 있는 마법진 위에 나뭇가지로 집을 지어 임시로 머물 수 있는 거처를 만들어냈다. 마을사람들은 알렌을 다시 보았다. 너의 능력을 이제껏 몰라봐주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는 자까지 있었다. 하지만 마법으로 먹을 것이 어디서 솟아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야생토끼를 사냥하거나 사냥이 잘 되지 않는 날은 나무의 껍질을 뜯어 그 속의 여린 속살을 질겅질겅 씹었다. 당연히 영양가는 없었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절반이 드러누울 만큼 상황은 좋지 못했다. 황야위에서의 생존은 더없이 치열했고 절박해졌다. 결국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서야만 했다. 저 광산을 넘느냐 마느냐로.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곳까지가 제국 땅이야. 저기보이는 광산부터가 드래곤들이 사는 땅이고. 저 너머에는 먹을 게 있을 거야. 분명.” “이미 여기까지 몰렸어. 더 이상 갈 데가 없다고…!” “어흐윽, 계속 여기 있다가는 우리 아이들이 모두 죽어요…죽는다고요.” “다들 진정해. 탐피아에서 왜 저 땅을 욕심내지 않겠어! 군대를 보냈다가 저기서 죄다 죽어나간 거잖아!” “맞아! 황제폐하가 바뀔 때마다 저기로 넘어간 군대가 몇 갠데!! 하지만 전부 잔인하게 죽었잖아…강이 핏물이 됐었다고!” 갈기갈기 찢겨진 인간들의 시체가 강을 타고 흘러내려왔다는 건 제국인이라면 모두 다 알만큼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설화였다. 제국 변두리에 흐르는 강이 핏빛 강이 되었다는 얘기는 단순한 괴담이 아니었다. 실제로 드래곤의 땅에 파견되었던 삼천여 명의 기사들의 살점이 강물위로 떠오르고 피로 탁하게 물든 바람에 한동안 식수를 사용하지 못해 난리가 난 사태도 있었다. “드래곤들은 인간을 싫어해…. 끔찍이도 싫어하는 게 분명해. 아마 자기 영역에 들어온 인간은 어른아이 가리지 않고 전부 찢어 죽이려들 거야.” 이 사지에서 죽을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사지로 걸어들어 갈 것인지. 어느 것을 택해도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지극히 적었다. 뾰족하게 솟은 광산은 한눈에 봐도 가파르고 험준해서 넘기도 전에 죽을 지도 몰랐다. “제…제가, 혼자 갔다와볼게요.” 이때 조심스럽게 손을 들며 나선 자는 알렌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숨길 수 없었지만 그는 사람들의 앞에서 애써 힘겹게 웃었다. “모두가 갔다가 변을 당하면 안 되잖아요… 아주머니 아저씨들은 여기 남아서 아픈 사람들을 보살펴주세요. 먹을 게 있다면, 드래곤들에게 나눠달라고 부탁해볼게요.” “알렌! 그러지 마렴. 그러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괜찮아요. 그리고 여기서 제가 가장 젊으니까 저 산을 오르는데 가장 적합할 거예요.” 눈물 많고 겁 많은 어린 청년은 그렇게 사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홀로 광산을 올랐다. 0135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초입부터 돌이 무더기로 쌓여있어 걷기가 힘들었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제 유약한 성격상 멈춘 순간 뒤를 돌아보게 될 것 같아서 알렌은 의지를 다져먹으며 앞만 보고 움직였다. 마른 체구지만 어릴 적부터 온갖 굳은 일을 하다 보니 근육이 붙어 체력과 근성은 알아줄만 했다. 하지만 출발 전부터 몸 상태가 썩 좋지 못해 산 중반부에 다다랐을 때쯤엔 급작스런 빈혈기가 올라왔다. 걸음은 더뎌져만 갔고 다리는 꼼짝도 못할 만큼 무거워졌다. 자기 몸이 자기 몸 같지 않게 되어서도 그는 걸었다. 중심을 잘 잡지 못하니 날카로운 바위모서리에 부딪치는 일이 잦아지고 몸에 타박상은 늘어만 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험난해지는 지세에 부상은 심해져만 갔다. 밤에 움직이다가 끝내 크게 넘어져 왼쪽 무릎관절에 완전히 금이 갔으나 알렌은 굵직한 나뭇가지를 주워 지팡이대신 사용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서도 그는 의지가 없는 빈껍데기인 상태로 독하게 움직였다. ‘죽더라도 도움이 되고…죽어야……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로지 해내겠다는 집념뿐이었다. 그의 등에 짊어진 건 스무 명의 목숨이었다. 내려놓으려 해도 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스스로 짊어진 순간 각오했었다. 뭐라도 하고 죽자고. 이틀내리 물도 마시지 못하고서 부지런히 산을 올라간 결과 그는 마침내 산의 정상에 다다랄 수 있었다. 밑창은 헤져있어 신발구실을 하지 못했고, 추위를 막기 위해 두른 거적때기는 너덜너덜해져서 더는 쓸 수 없을 정도였다. 팔다리에는 수두룩하게 멍과 생채기가 들어서있었다. 환한 동이 터오고 해냈다는 안도감에서 였을까, 알렌은 차가운 바위에 그대로 머리를 박고 허물어졌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하루 반나절이 지나있었다. 알렌은 정신이 훨씬 더 말짱해짐을 느꼈다. 손으로 더듬어 지팡이를 쥐고서 몸을 일으켜 걷다가 그는 왼발에 부딪치며 튕겨진 작은 것을 발견했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진 저녁이라 멀리서는 무엇인지 몰랐는데 작은 돌맹이가 아니라 황금이 굴러 떨어져있었다. ‘여기가 정말 드래곤의...’ 혹시 몰라 알렌은 황금을 옷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드래곤이 금을 좋아한다는 속설을 예전에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팡이를 짚은 채 절뚝거리며 나아가던 그의 앞에 산꼭대기에 위치한 거대한 동굴이 나타났다. 동굴의 주위를 따라 얇은 절벽길이 아슬아슬하게 이어져있었다. 휑한 절벽아래에서 새까만 밤바람이 위로 철썩철썩 불어 닥쳐왔다. 까딱 발을 헛디디면 죽는다. 그렇다고 섣불리 동굴로 다가갈 수 없는 것은 그 주위에 쳐져있는 범상치 않은 무형의 기운 때문이었다. 동굴에 둘러져있는 것은 강력한 마나였다. 이 안에 드래곤이 있다. 확신한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으며 어느 순간보다도 죽음을 가까이에서 느꼈다. 알렌은 침착하게 동굴주위를 따라 걸었다. ‘…강한 마법결계……틈이 분명 있을…아, 여기다.’ 그는 유독 마나가 약하게 느껴지는 구간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동굴의 아랫부분을 날카로운 돌멩이로 긁어 선을 만들더니 빠르게 마법진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알렌은 그 위에 손을 얹고 마나를 주입시켰다. 강한 진동이 일더니 순식간에 작은 섬광이 일며 폭발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는 그 사이로 사람하나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개구멍이 생기자 알렌은 엉금엉금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바닥을 짚어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가 고개를 쳐들자 까마득하게 쌓아올려진 금은보화의 광경이 펼쳐졌다. 금덩이에서 흘러넘치는 광채는 어둠을 몰아낼 정도였다. 탑 높이만큼 수두룩하게 쌓아올려진 보석들과 찬란한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호화로운 동굴내부에 입을 떡 벌리고 있을 때였다. 그르르르르릉ㅡ 심상찮은 울림에 금을 뒤바른 동굴천장과 벽이 진하게 흔들렸다. 알렌은 그제야 그 금은보화의 탑 뒤에 잠들어있던 존재를 알아차렸다. 육중한 몸이 서서히 움직이자 수천만 개의 보석들이 해일처럼 쓸려 내려가고 여기저기서 사람무게만한 묵직한 금덩이가 굴러 떨어져 내렸다. 두 다리가 심하게 덜덜 떨려왔다.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다시피 쳐들고서 알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둠 속에서 훅 끼쳐오는 압도적일 만큼 강한 바람은 뜨거웠다. 검은 그림자가 진 몸을 한 거대한 존재가 살기로 뒤범벅된 황금빛의 기이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처럼 커다란 한 쌍의 눈동자가 가늘게 째지더니 침입자를 가까이에서 확인하려는 듯 점점 아래로 내려왔다. […침입자……] 뇌리를 긁는 무시무시한 목소리에 압도당한 알렌은 숨이 턱 막혔다.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에 머리는 산발이 된지 오래였다. 그는 눈을 하얗게 까뒤집기 무섭게 스르르 뒤로 넘어갔다. * 알렌은 하루가 거의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딱딱한 동굴바닥에서 상체를 일으키기 무섭게 아릿한 근육통이 전신을 덮쳤지만 그는 애써 허리를 곧추세웠다. 먼 출입구에서 새어 들어오는 아침햇살이 그의 마른 등에 얼룩졌다. 역광이 진 몸을 잠시 내려다보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금속들이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알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존재도. 드높은 천장가까이에 닿아있는 드래곤의 머리가 실로 놀라울 만큼의 웅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알렌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또 한 번 숨넘어갈 듯이 부릅 흰자를 치떴다. [또 기절한다면 이번에야말로 살려두지 않으마.] “…힉.” 입을 틀어막으며 알렌은 신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녹색의 눈동자가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으나 금방이라도 식은땀이 비 오듯 내릴 얼굴이었다. 깡말라 볼품없는 두 어깨를 덜덜덜 떨고 있는 한심한 모습에 골드드래곤은 고개를 살짝 낮추었다. [작은 인간이여. 지금 네가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는 아느냐.] 얼핏 분기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알렌은 이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가뜩이나 침입자에 기분이 좋지 못한 드래곤이었다. 모르고 잘못 들어왔다고 한다면 살려줄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알렌은 떨리는 주먹을 말아 쥐고서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 했다. “…아,아,알아요.” 쥐어짜낸 목소리는 터무니없을 만큼 작았지만 골드드래곤은 용케도 들은 듯 사나운 콧김을 뿜었다. 이에 알렌은 두려움에 질끈 두 눈을 감았으나 입만은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사실은…드래곤님을 뵙기 위해…온 거예요. 이곳에.” [제국에서 한동안 군단을 보내오지 않는다했더니, 너 같은 작고 볼품없는 인간을 보내올 줄이야. 그대는 마법사인가.] “…그. 저, 저는 제국인이 맞지만 제국에서 보낸 자는 아니에요. 제국에서 버림받은…유,유,유랑민 신세에…불과해요. 마,마,마법사는 마,맞지만요.” 공포에 질려 숨을 내쉬는 것도 힘들었다. 알렌은 달달달 떨리는 입술을 한번 꾹 깨물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 버벅거림이 아까보단 덜했다. “제가 넘어온 이유는…곡식을…, 머.먹을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알렌은 속절없이 떨리는 손을 옷주머니 속에 감추듯 넣었다. “이 금으로…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윽고 그가 주먹을 꺼내들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콩알보다 조금 큰 금덩이가 놓여있었다. 알렌은 침을 꿀꺽 넘기고서 다시 힘겹게 운을 뗐다. “…보,보잘 것 없을 테지만. 가진 게 이게 정말다라, 죄송합니다…” 넓은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휘황찬란한 금은보화에 주눅 들었지만 빈손으로 구걸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알렌은 두 손바닥에 작은 금 알갱이를 얹어놓고서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마치 왕에게 공물을 바치는 신하처럼 이마를 납작 바닥에 붙였다. “영지에서 갑작스레 쫓겨나서…추운 황야로 내몰린 사람들이 있어요. …죽을 지도…몰라요. 제대로 된 음식조차 먹질 못해서 아파 누워있는 사람들도 있어요……이대로는, 그 사람들이 죽을 지도 몰라요.” 영묘한 데가 있는 드래곤의 황금색 눈이 조금은 가느다래졌다. 그것이 단순한 흥미인지, 아니면 한입거리도 안 되는 인간을 어떤 식으로 죽일지에 대한 흥미인지는 그 아무도 알 수 없을 테다. [어리석은 인간이구나. 지금당장 이 자리에서 네가 죽을 수 있단 생각은 안드니?] “…죽을 각오로 왔으니 저는 죽는 것은, 두,두,두렵지 않아요.” [그리 말하는 것치곤 목소리는 떨고 있구나.] “…사실은 두렵지만……죽더라도 부탁하러왔습니다. 부디, 굶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만이라도 곡식을 나눠줄 수 없을까요?” 알렌은 형편없이 갈라지는 목소리로 꿋꿋이 부탁의 말을 했다. [그들이 죽든 말든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단다.] “…….” 하지만 날선 선고와도 같은 싸느란 거절에 그만 쿵, 하고 심장이 무너져 내렸다. 알렌은 두 손을 심하게 떨며 거친 바닥에 짓누른 눈꺼풀을 더 세게 감았다. 인간들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죽음을 비롯해 기다리고 있을 친한 사람들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서글픔이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완벽한 절망이었다. 차마 울음소리가 튀어나오지 않게 입술을 꽉 깨물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내게 있어 곡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 곡창지대의 일부를 버리는 셈 치마.] “그……그 말씀은,” 번쩍 하고 알렌이 고개를 쳐들었다. 눈가에 밀려든 눈물이 순간적으로 후두둑 바닥을 적셨다. [그곳에서 인간들이 뭘 주워 먹든 내 상관할 바 아니겠지.] “아……흐윽,” 알렌은 몸을 옹송그리고서 조그마한 금을 꾹 말아 쥐었다. 양 손목을 들어 눈가에 끓어오르는 뜨거운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내야만 했다. 생애처음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기분과 함께, 사람들을 구했다는 기분에 크나큰 안도감이 전신을 뒤흔들었다. 살 수 있다. 살릴 수 있다. “…감사합니다! 정말…흐으, 정말 감사합니다아….” 울먹이는 입매가 말갛게 웃는 것 같기도 했다. 골드드래곤 가브리나는 인간을 내려다보며 조금은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이곳을 찾아온 가소로운 인간들은 여태껏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단단한 갑옷은커녕 무장도 하지 않은 채 낡고 닳은 거적때기를 걸치고서 찾아왔다. 그것도 다른 이들을 위해 이곳까지 홀로 찾아왔으니 그 용기가 어떻게 가상하지 않을까. 가브리나는 이런 용기는 기특하게 여기기로 했다. 검과 방패를 들고 드래곤을 무찌르러 들어온 전사의 용기 따위보다도 이쪽이 훨씬 훌륭하기만 했다. 자기희생을 아는 그 마음씨가 제법 갸륵했다. 애당초 드래곤들의 땅과 보석을 탐내어온 인간이 아닌 먹을 것을 달라 구걸하러온 인간이었다. 드래곤들은 섭식을 할 필요가 없기에 지천에 널린 것이 곡물이고 과일이었다. 조금 내주는 것이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눈물 그치렴. 여기까지 올 용기를 쥐어짜낸 인간치곤 제법 울보구나.] 그제야 동굴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던 알렌이 끅끅 소리를 내며 울음을 멈추려 노력했다. 그동안 가브리나는 황금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의 형상에서 가냘픈 인간여성의 형상으로 바꿨다. 아무래도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유약한 인간에게는 제 모습자체가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거라 여긴 것이다. 뒤늦게 알렌은 바로 코앞에서 들려온 가벼운 발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잠시 시간이 멈춘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름다운 미인이 눈앞에 있었다. 찬연한 태양빛이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몽환적인 미녀였다. 곡선을 그리는 고결한 흰 나체위로 금색머리칼이 유연하게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에 반쯤 가려진 맨가슴에 알렌은 뒤통수라도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움찔댔다가 그대로 머리를 푹 숙였다. 적빛 도는 금발 사이로 유독 붉혀진 귀가 도드라졌다. 빨개진 귀를 보지 못한 가브리나는 바닥에 옹송그린 인간 사내를 향해 몸을 굽혔다. “왜 그러느냐. 내가 아직도 무섭니?” “...아, 아뇨......” “목소리가 아직도 떨리는 구나.” 알렌은 이 여인이 드래곤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그럼에도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얗고 고운 발 앞에 넙죽 엎드린 어린 청년은 홧홧해진 얼굴을 식히려 애써 차가운 바닥에 갖다 대었다. 당혹감에 두 눈은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그,그,그게....오..옷을 입어...주시면....” “.....?” “...아,아,안될까요?” 히끅, 하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딸꾹질 소리에 가브리나는 흐음하고 턱을 문질렀다. 그 작은 소리에 외려 알렌은 자신의 무례한 발언이 드래곤의 신경을 건드렸다고 여기고 화들짝 놀랐다. “제,제,제가 너무 거,건방졌다면 죄,죄,죄송합니다!” 다시 넙죽 엎드린 모습에 가브리나는 갑갑함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었다. 인간이라고 하기엔 지극히도 차가운 손이 바닥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알렌의 뺨을 감쌌다. 그녀는 손에 힘을 줘 그의 얼굴을 서서히 들어올렸다. 댕그랗게 눈을 뜨고서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인간은 가여운 새끼동물을 연상케 했다. 가브리나는 빨갛게 익은 뺨을 한번 어루만져주었다. “나는 이제껏 여러 인간들을 많이 봐왔기에 인간을 썩 좋아하진 않는단다.” 그늘이 드리운 황금빛눈동자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원색이 빛났다. “나는 곡창지대 일부를 버렸으나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다른 것을 욕심을 낸다면 그들을 내쫓을 거야. 그들의 행동에 따라서 죽일 수도 있단다.” 그리 관용적인 성격이 못된다고 가브리나는 경고했다.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 필요가 있으니 잠시 지켜볼 것이야.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평가한 후 그때서야 너의 처분을 결정내릴 것이다.” 0136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가브리나는 움직일 수 없는 인간을 두고 그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황야에 있는 인간들을 광산너머로 데려왔다. 알렌은 가브리나의 마나로 왼쪽다리를 치료받고서 바로 그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알렌!!” “…세상에, 알렌!” “장하구나. 장해. 네가 우릴 구했단다!” “흐으윽, 고마워…정말 고맙구나.” 눈물을 흘리며 반기는 인간들 틈에서 다시 눈물을 쏟는 알렌을 가브리나는 멀찍이서 떨어져 지켜보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인간들과는 너무나 달라서 새삼 괴이하기까지 했다. 허름한 차림새의 인간들은 가진 것 하나 없으면서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하며 울고 있으니 말이다. 철갑으로 무장한 채 요란스런 쇳소리를 내던 인간들. 궁수부대를 이끌고 와 난데없이 불붙은 화살비를 쏟아 붓던 인간들. 감히 제게 이 땅을 내놓으라며 저에게 창과 검을 휘두르던 인간들. 위협은 되지 않으나 지극히도 기분을 상하게 만드는 거슬리는 종족, 가브리나의 기억 속에는 그런 분수를 모르는 자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쉽게 저런 모습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인간이란 가진 것에 감사할 줄 모르며 더 탐욕을 일삼는 자들이었다. 드래곤 못지않은 탐욕을 가진 자들이 저 인간이란 작은 생명체였다. “…아, 감사인사하고 올게요.” 가브리나를 경계하며 섣불리 다가가지 않는 사람들을 대표해 알렌이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알렌 또한 가브리나가 거대하고 위협적인 존재라는 것을 알기에 아직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비위를 거스를까봐, 더더욱. “저……드,드래곤님. 저흴 도…,” “명심하렴. 나는 다시 너희들을 내쫓을 힘을 가지고 있어. 완전한 허락이 아닌 지금은 두고 보는 것뿐이니 내 비위를 거스를 생각 마렴.” 알렌의 말을 차갑게 자르고 들어선 가브리나의 말이 스치듯이 살벌한 경고를 남겼다. 그 형형한 눈빛도 함께. “너희 인간들이 분수모르고 덤비는 짐승을 베어죽이듯이, 우리도 똑같단다.” * 위태로울 거라 여겼던 인간들의 정착생활은 상당히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어졌다. 광산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데도 드래곤들의 가호를 받은 땅은 사시사철이 온화한 편이었다. 고작해야 스무 명의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와 오두막을 짓고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은 과일을 따거나 쉬엄쉬엄 물을 길러오는 일을 맡았다. 자라난 농작물을 돌보고 가축을 키우고 작은 인간들은 서로 도우며 자신들의 손에서 하나하나씩 무언가를 일궈나갔다. 먹을 게 천지에 풍요롭게 넘치는 데도 말이다. “인간들은 참 부지런하구나.” 가브리나가 삼 개월 넘게 그들을 관찰하며 느낀 것이었다.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들이 너무나 활기차 보였다. 스스로가 더 좋은 것을 많이 가지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오히려 작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세분화하여 나눠가졌다. 나누는 것을 좋아라했고 뿌듯해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열심히 일구어낸 산물을 꼭 반드시 가브리나에게 가져왔다. 그것도 가장 먹음직스럽고 큰 것으로. 처음에는 다들 눈치를 보며 경계했지만 일주일쯤 지나자 어느새 그 경계를 허물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한번 드셔보시라며 뿌듯한 눈망울을 빛내기 일쑤였다. 물론 단 한명, 알렌만 제외하고 말이다. 알렌은 가브리나의 감시 하에 놓일 겸 유일하게 그녀의 동굴에서 같이 지내었다. 모두들 가브리나를 은인으로 여기고 추대했으나 그는 가장 그녀와 가깝게 지내면서도 한편으론 멀었다. 남들이 속편하게 가브리나님, 가브리나님 부를 때 편하게 부르는 것도 하지 못하고 알게 모르게 그녀를 경계했다. 가령 가브리나가 뒤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기라도 하면. “히..히익.”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내며 크게 놀라기 일쑤였다. 가브리나는 그 태도에 알 수 없는 언짢음을 느꼈다. 심약한 성정을 미루어봤을 땐 그저 잘 놀라는 타입이라 여겼지만 남들과 있을 때는 다른 모습에 그게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실감했다. 말끝을 흐리지도 않았고 눈을 피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거리감, 경계심이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져 가브리나는 마침내 입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는데 네가 그런 식으로 과민하게 반응한다면 내가 기분 나쁘지 않겠니?” “…아…죄,죄송합니다.”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청년의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에 가브리나는 더 기분이 안 좋아졌다. 힐끔힐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저를 살펴보았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다시 아래로 시무룩 내려갔다. “이를 테면 이런 기분이겠구나. 인간이 떠도는 강아지가 가여워 밥을 주기 위해 다가왔는데 강아지가 크게 경계하며 물려고 한다면, 인간은 어떤 기분일까. 아마 서운함을 가장먼저 느끼지 않겠니.” “…저…떠돌이 강아지인가요.” 알렌은 소심하고도 허탈하게 중얼거렸지만 가브리나의 눈에는 영락없이 끼잉 하는 것 같았다. 이 기운 빠진 가여운 생물체를 어떻게 달래주어야 할지 그녀 나름대로 턱을 괴고 고심할 때다. “…예전에 저희를 두고 보고 처분을 결정할 것이라고…얘기하셨잖아요. 지금까지 호,혹시 저희가 무슨 실수를 저지르거나 하진 않았나요…?” 그가 살짝 고개를 수그린 채 마른 주먹을 쥐고 힘겹게 말했다. 알렌은 아직도 뇌리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눈동자를 떨쳐내지 못했다. 살벌한 경고는 꽤나 충격이 컸으니 당연했다. 다른 사람들이 가브리나에게 좋은 인상을 가지고 다가갈 때, 오히려 알렌은 뒤에서 노심초사했었다. 그들의 사소한 행동이 혹여 드래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진 않을까 혼자 좌불안석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경고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았다. 굳이 말해서 가브리나에 대한 인식을 안 좋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은인이었고, 자신들을 도와준 유일한 구원자였다. 고마운 마음과는 달리 두려워하는 마음이 가슴한편에 자리 잡은 그였지만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고마워하는 자가 알렌일 것이다. 이 마음은 경외감이라고 하는 게 옳을 것이다.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걸 이제껏 잊고 있었구나.” 가브리나는 그 질문만으로 그가 보인 이제까지 모든 행동들의 이유를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제 말이 여린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것이 한없이 연약하게 여겨지면서도 저에게 다가오지 못하게 한 기제가 되었단 것에 안타까움마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가브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한껏 부드러워진 말투를 사용했다. “난 이 땅의 주인으로서 언제든 너희를 내쫓을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지금은 보류란다.” “……아.” 느리게 반응하며 알렌은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제야 그 순한 눈망울이 자신을 올곧게 응시하자 가브리나는 만족감에 입술을 미끄러지듯 휘었다. “내 땅은 활기가 넘치는 게 더 보기가 좋은 것 같구나.” 아 웃으셨다. 숨을 멈춘 알렌의 녹빛 눈동자위로 짧은 이채가 스쳤다. 아마 처음으로 본 미소일 것이다. *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가브리나는 완전히 인간들에게 마음을 열었다. 약하고 순한 인간들. 베풀 줄 아는 그 착한 성정은 어디 가질 않는지 그들은 조금도 땅과 보석에 욕심을 내지 않았다. 오히려 가브리나에게 더 못줘서 안달이었다. 가브리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찬가지로 그녀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은 것 하나 나누려는 그 마음씨가 예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함이 피어올랐다. 협동심과 친근감, 유대감, 드래곤 무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것들이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알렌은 누구보다도 가브리나를 따르는 추종자이자 제자가 되어있었다. 드래곤의 밑에서 직접 마법을 배울 수 있음에 행복해하면서도 하루하루가 열의에 차있었다. 성실하고 마법에 큰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알렌은 날마다 일취월장해나갔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가브리나는 작은 기적을 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는 동안 인간의 발전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하루도 게을리 않고 마법에 전념하더니 한 달, 아니 일주일 단위로 큰 성장을 이뤄 가브리나를 놀라게 했다. 훗날 인간들 사이에서 대마법사라는 칭호에 어울리는 자가 될 것이라 얘기해주어도 쑥스러운 듯 한번 웃는 게 다였다. 야망보다는 순수한 마법에 대한 갈망과 열성에 가까웠다. “너도 욕심이란 걸 품니?” 가브리나는 진심으로 궁금해서 하는 이야기였다. 언젠간 이 바르고 순한 인간도 탐욕이란 걸 배울지 모른다. 아니 탐욕을 알지만 부리지 않는 걸까. 그런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알렌을 응시하자 그가 탁자에 앉은 채 말똥말똥 눈을 빛냈다. “저요? 네, 당연하죠. 가브리나님 밑에서 여러 가지 마법들을 좀 더 배우고 싶고, 후에는 훌륭한 마법사가 되고 싶어요.” “넌 다른 것에 욕심을 가지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런 욕심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며 가브리나는 설핏 웃음을 지었다. 알렌은 그 말의 숨은 뜻을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다가 동굴 밖의 밤하늘을 스치듯 본 후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 가브리나님. 유성우가 떨어져요.” 알렌은 밝게 웃으며 낡은 모포를 챙겨들었다. 그러고는 동굴 밖으로 나가 바로 입구 앞 편편한 자리에 모포를 깔았다. 어서 오시라며 손짓하는 알렌을 향해 가브리나는 조용히 웃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동굴 앞에 걸터앉아서 별이 총총 뜬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은 그들의 하루일과 중 하나였다. 간혹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는 아름다운 정경이 펼쳐지면 알렌은 앉아서 멍하니 그 광경을 구경했다. 탄성이 절로 흘러나오는 입술을 닫지 않고 말갛게 웃고 있는 사내의 옆얼굴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덜 앳되었다. 그가 조용히 운을 떼자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가브리나의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가끔씩 이곳에서 사는 게 너무 사치로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그런 생각 말이에요. 가브리나님은 제게 욕심을 가지라고 하셨지만 제게 있어 이 삶은 충분히 욕심이에요.” 옆에선 말이 없었다. 알렌은 그녀가 밤하늘을 구경하느라 그런다고 생각했다. “항상 감사해요. 제가 아직 부족해서…뭘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미안할 뿐이에요.” 맑은 미소를 보이며 알렌이 슬며시 가브리나를 돌아보았다. 허나 짙푸른 어둠속에서 아름다운 황금색 눈과 코앞에서 마주치자 알렌은 다시 황급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 황홀하던 밤하늘의 정경이 조금은, 덜해보였다. 심장이 아주 얕게 두방망이질 쳤지만 알렌은 이것이 항상 그녀에게 품고 있는 황송함이라고 생각했다. “…그, 저 너무 행복한가 봐요. 이런 소리도 다 하고.” 붉은 기가 도는 금발에 손을 집어넣고 들썩거리며 알렌은 애써 쑥스러움과 당혹감을 감추려했다. 한동안 그 둘 사이에 말이 없자 그는 슬며시 손을 내렸다. 고요한 정적 속에서도 새까만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의 비는 멈출 줄 몰랐다. 스치듯 사라지는 초록빛과 푸른빛, 작게 반짝이는 분홍빛, 짙은 잔상을 남기는 금빛과 은빛, 원래 살던 곳에서는 절대 볼 수 없었을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그래도… 언젠간 이런 세상이 왔으면 좋겠네요. 저 말고도 제국의 모든 소민들이 이런 삶을 꿈꿀 거예요.” 어느새 고즈넉한 표정을 짓고서 알렌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모두 이런 행복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배우고 싶은 걸 맘껏 배울 수 있고, 하루 먹고 사는데 걱정이 필요 없는 그런 삶 말이에요. 그리고 돈 있는 귀족이든, 가난한 평민이든, 공평한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재능이 있으면 신분 상관없이 누구나 꿈을 펼칠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얼마나 좋을까요.” 가난한 마법사는 꿈꿨다. 하지만 무릎에 얹은 두 주먹은 소심하게도 동그랗게 말아졌다. 아무것도 몰랐던 열 살이라면 모르지만 현실을 아는 지금은 그저 씁쓰레하게 마음을 가라앉힐 뿐이었다. “물론 제국에선 허황된 꿈이지만요.” “그럼 네가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지 그러느냐?” “하하…농담도 심하시네요.” “알렌.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이구나.” 가브리나의 진중한 어조에 알렌은 하늘에 고정되어있던 눈을 옆에 앉아있는 그녀에게로 고정시켰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진심이라니, 무엇이? 그 어리벙벙한 눈빛에다 대고 가브리나는 지극히 여상한 어조를 띄웠다. “너는 이미 스무 명의 인간들을 데려와 이곳에 작은 세상을 만들었단다. 이 광활한 대지를 네게 빌려줄 테니 나라를 세워보지 않으련?” “네…네…?” 말을 크게 더듬으며 알렌은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키웠다. 농담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나라를 세워보는 게 어떻겠냐는 얘기를 듣고 단번에 진담으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마도 이 세상에 극히 드물 것이다. 특히나 소시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청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왕이 되어볼 생각은 없는 거니.” “와,와,와…와, 왕이라니요. 턱도 없는 얘기예요…….” 알렌은 슬슬 진지해지는 가브리나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그 눈빛이 너무 무거워 심장이 다 쫄렸다. 거세게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알렌은 움츠린 두 손을 가슴위로 들어올렸다. “진담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저 같은…소심하고 배짱도 없는 인간에게 왕의 자질이 있을 리가요. 전 왕이 될 만한……그런 거창한 인물이 못되잖아요. 딱 봐도 용맹하지도 않고, 당황하면 말부터 더듬죠. 기품도 없고 카리스마도 없어요. 무력은커녕 차라리 맞는 쪽을 택하는 한심한 인간일 뿐이에요.” “네가 생각하는 성군은 그런 왕이니.” “네……?” “기품이 있고 카리스마가 있는, 남을 짓밟고 지배할 수 있는, 그런 무력을 지닌 왕을 성군으로 여기냔 말이다.” “그건… 아니에요. 왕의 자질도 갖추었지만 백성을 위하는 그런 따스한 마음씨의 왕이 제겐 성군일 것 같네요…….” 탐피아 제국의 황제를 생각하고서 한 말이었다. 군사력을 확장시킨다며 터무니없는 공물을 각지에 요구하고 주변소국을 정복하는 야망에만 차 굶고 있는 백성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진정 원하는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닌데 말이다. “그렇담 네가 돼보지 않으련, 네가 진정 성군이라 생각하는 그 왕이.” 반쯤 의기소침하게 깔렸던 녹색 눈이 부풀어 오르듯 크게 떠졌다. “백성들이 진실로 원하는 왕이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그 왕을 따를 테지. 가난과 고초를 겪어온 너라면 백성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단다. 왕의 자질은 지금부터 갈고닦고 나가면 되는 일이니 큰 걸림돌이라 생각지 않아.” “하,하지만 혈통이란 게 있잖아요....전 천민이에요. 영지에서도 쫓겨난 한낱 유랑민 신세에 불과한...” “혈통은 네가 왕이 되는 순간부터, 새로이 시작되는 거란다. 너의 핏줄을 이은 후손들이 가지게 될 왕족으로서의 요건일 될 테지.” 알렌의 눈빛이 꺼질 듯한 촛불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렸다. 좁아진 양어깨도, 다소곳이 내려간 두 주먹도 도저히 떨림이 멎질 않았다. “네가 선택하렴. 한 나라를 건국하겠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 될 테지만 네가 꿈꾸는 세상이 있다면, 너와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 그런 세상을 만들어보렴.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가난한 자들에게 네가 최초로 가능성과 기회를 열어주는 왕이 돼보렴.” 전율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선량한 인간이여. 나는 네게 제의를 하는 거다. 이 무구한 세월이 슬슬 지루하던 참이었으니 내 유희에 동참해주지 않으련.” 가브리나는 자신을 변화시킨 인간을 믿었다. 이리 한없이 작고 보잘것없는 인간들에게 관대한 자비를 베풀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이건 인간들이 일으킨 크나큰 기적이었다. 그리고 그 기적의 시초는 이 울 것 같은 얼굴의 어린 청년이었다. 이 자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크나큰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이 너희 인간들에게 좀 더 요긴하게 쓰인다면야 나는 기꺼이 내주려한다.” “…….” “내 손을 잡아보지 않겠니.” 진심에서 하는 얘기라는 걸 알렌은 이제야 깨달았다. 드래곤의 유희라는 것이 한권의 역사서를 만들어낼 만큼의 대단한 것이라면 자신은 어울릴 수 없었다. 그럴 자격조차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주는 그 눈부신 모습에 알렌은 손가락이 움찔 움직였다. “…어째…서…….” 새 변화를 알리듯 북방에서부터 강하게 불어 닥친 밤바람에 눈자위가 시큰거렸다. 알렌은 울먹이는 입술을 앞니로 꽈악 누르고서 고개를 숙였다. 처음으로 두 주먹에 강한 힘이 실렸다. 이런 가슴벅차오르는 기분은 알렌에게 있어서 생전처음이었다. 불공평하다고 세상에 얘기했을 때 되돌아왔던 괄시보다도 열 살 소년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었던 건 바로 이 세상이었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세상이었다. 부조리에 꺾여야만 했던 열 살짜리 소년의 꿈이 새롭게 가슴속에서 되살아났다. 송두리째 빼앗겼던 희망이 성인이 된 지금 다시 눈앞에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알렌. 신분은 바보 같은 거야. 이렇게 대단한 걸 담고 있는데도 그릇의 겉만 보고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 거니까. 언젠간 네가 가진 대단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날이 올 거야. 이 아버지가 장담하마.’ 만일 그런 세상이 온다면, 바라오던 세상을 이 보잘 것 없는 능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면. “제가…으흑. 흑, 과연 할 수…있을까요.” 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자신을 선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두 뺨 위로 터져 나올 때 바로 옆에서 잔잔한 목소리가 대기를 적셨다. “네가 통치를 잘 하지 못한다면야 나라는 저절로 망할 테고 인간들은 뿔뿔이 흩어질 테지. 그러면 그 영토는 다시 내 것이 될 테니 내겐 손해 볼 것이 전혀 없구나.” “……그…런…,” “하지만 내 눈이 틀리지 않는다면. 넌 훌륭한 왕이 될 것 같구나.” 알렌은 눈물이 그득 찬 두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천여 개의 무수한 별똥별이 일시에 쏟아져 내렸다. 비스듬히 그의 시야를 채우고 있는 가브리나의 얼굴이 소리 없이 대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흔들림 없이 곧은 황금색눈동자는 그에게 ‘너는 그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가에서 커다란 눈물방울이 쉼 없이 타고 흘러내렸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메어와 알렌은 눈꺼풀을 닫았다. 소리 내어 우는 남자의 등이 애처롭게 떨렸다. “물론 그 감수성이 풍부해서 잘 우는 버릇이나 기절 잘하는 건 좀 고치도록 해보렴.” 이 앞날이 진심으로 기대가 된다는 듯이 가브리나는 부드럽게 입술을 휘었다. 동굴바닥에 모포를 깔고 앉아있던 한 청년이 왕이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 기나긴 이야기의 서막이 이제 막 펼쳐지려하고 있었다. 0137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건국계획을 세운 가브리나가 가장먼저 한 일은 드래곤들의 수장으로서 이 사실을 다른 드래곤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대지 곳곳에 흩어져있던 여섯 마리의 드래곤은 가브리나의 호출을 받고 한자리에 모였다. [건국이념은 사실상 대단하지는 않단다. 배고픈 사람에겐 빵을 주고, 정착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겐 터를 내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농사지을 땅을 내주겠다, 그리고 신분고하에 상관없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펼칠 수 있게 하겠다. 이것이 그 사람이 내세운 건국이념이란다.] 가브리나는 황금빛을 두른 드래곤의 형상을 한 채 그들을 둘러보았다. [그는 베풀 줄 아는 왕이 될 거야. 옆나라 탐피아와는 전혀 다른 평화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나는 장담하마.] 결의에 찬 눈과 황금비늘위로 흐르는 광채가 한껏 그 존재감을 발휘시켰다. 가브리나에게서 뿜어지는 강력한 기운에 레드드래곤 스니온은 매료되어 온순하게 거대한 몸집을 낮췄다. [갸륵한 마음씨로 나를 움직인 자란다. 나는 그 사람을 도와서 이 땅위에 인간들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게 도우려한단다. 땅과 곡식은 사실상 드래곤에게는 필요 없는 것들이니 좀 더 유익하게 쓸 수 있게 인간들에게 내어주는 게 어떻겠니?] [저는 찬성이에요. 수장님께서 옳은 일을 하신다고 믿어요.] 연녹빛 비늘로 뒤덮인 꼬리를 고아하게 늘어뜨린 메리미아가 부드러운 음성을 전파시켰다. 그 맞은편자리에 있던 블루드래곤 닉오드도 이의가 없는지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흙의 드래곤 쉴과 물의 드래곤 크라누는 수장 가브리나의 뜻에 크게 수긍했다. [우리들은 이곳을 떠날 겁니다.] 이제껏 엄숙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파르마판이 얘기했다. 그제야 정신 차린 스니온이 붉은 꼬리를 하느작하느작 흔들어댔다. [세브로웰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도 모르겠고, 예전부터 워낙 불안했던 터라… 이이와 함께 좀 더 안전한 대륙으로 가려고요.] [아. 저도 크라누랑 같이 다른 대륙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어요.] 흙빛의 비늘을 눕힌 채 머리를 든 쉴이었다. 허공에서 웅웅 울려 퍼지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에 다른 드래곤들은 이미 그럴 거라 예상한 듯 말이 없었다. 쉴이 얼쯤한 듯 다시 고개를 푹 수그리자 물빛비늘로 전신이 뒤덮인 크라누가 그제야 덤덤하게 음성을 보냈다. [한때 서녘 땅을 소유했던 드래곤으로서 이 대지에 새 역사가 쓰일 것을 기쁘게 받아드리겠습니다.] [저도 이 대지에 싱그러운 기운이 깃들기를, 축원하겠습니다.] 메리미아의 축복의 말을 끝으로 드래곤들은 서둘러 각자 자리를 떴다. 떠날 대지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게 맞는 말일테다. 전 수장 노피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던 드래곤들은 세브로웰에게 화를 당할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 땅위에서 벌어질 모든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하는 그들을 가브리나는 이해했다. 마지막으로 처리해야할 일이 있다면 당연히 세브로웰에 관한 일이었다. 대지의 중심부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금싸라기 땅은 세브로웰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수도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비옥한 땅과 교통에 편리한 위치조건, 큰 강과 이어져 뱃길이 통하며 위아래로 위치한 산맥은 더 없이 풍부한 자원의 보고였다. 이를 기반으로 왕도를 세울 계획을 한 가브리나는 수년 만에 세브로웰을 찾아갔다. 결계로 둘러싸인 넓은 땅에선 세브로웰의 기운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터를 잡고 가꿔왔던 건지 곳곳에서 그 정성이 묻어났다. […내 땅엔 무슨 볼일이지요. 가브리나.] 가브리나가 느긋하게 지형을 둘러보기도 전에 창공에서부터 날카로운 은빛비늘을 세운 드래곤이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며 내려앉았다. 그 육중한 무게에 깔린 백여 그루의 거목들은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나 흙에 파묻혔다. [이 땅에 인간들의 나라를 세울 생각이란다. 그걸 통보하러왔어.] 경계어린 태도를 보이는 세브로웰과 눈을 맞추며 가브리나는 이곳을 찾아온 목적을 무덤덤하게 얘기했다. 이에 당연하게도 세브로웰은 분노하는 기색부터 보였다. [고작 하찮은 인간들 따위를 위해서 내 터전을 내놓고 물러나란 건가요?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세브로웰, 너는 원래 이 대지에서 추방당했어야할 몸이었어. 수장의 명이다. 이곳을 떠나려무나.] [이곳을 떠나야하는 건 당신이지, 가브리나.] [넌 내게 반기를 들 자격조차 없단다. 그때의 일을 잊었니.] 가브리나는 어느 때보다 음산하게 가라앉은 기운을 분출했다. 노피를 죽음에 이르게 한 세브로웰을 바로 내쫓지 않고 둔 이유는 한 가지 의문 때문이었다. [네가 죽이려한 건 노피가 아니었어.] […….] [넌 오히려 노피를 잘 따랐었지. 쉴이 나타나기 전만해도 말이야.] 성년체가 되기 전의 세브로웰을 유독 챙겨주었던 것이 전 수장 노피였었다. 그런 노피의 관심이 어린 쉴에게 옮겨간 후로 세브로웰은 매사 지극히도 독선적인 경향을 보였었다. 레어에 침입한 동족에게 공격을 서슴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약한 드래곤의 레어를 부수고 약탈을 일삼았다. 애정에 목말라 그런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일한 생각에 불과했다. 어린 드래곤 쉴을 노피의 앞에서 죽이려들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너는 네 소유욕으로 가득 차있어. 남이라는 걸 모르지. 오로지 네 것이냐, 남 것이냐로 가를 뿐이야. 그런 삐뚤어진 소유개념으로 노피도 독점할 생각이었던 거니.] 검게 불타 황폐해진 땅위에서 쉴은 충격과 공포로 떨었었다. 녹아내린 가죽이 새까맣게 그을린 뼈에 달라붙어있는 드래곤의 사체는 다름 아닌 노피의 것이었다. 사태를 진압하기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가브리나는 알 수 있었다. 노피는 쉴을 보호하려다 대신 죽은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창공에서 그 기묘하리만치 오싹한 눈빛을 고요히 드러내던 세브로웰을 기억하고 있었다. 분명히 그 은광으로 얼룩진 눈동자는 아쉬워하는 탐욕에 찬 눈이었다. [너보다 훨씬 작은 인간들도 남에게 베풀 줄을 안단다. 넌 네 것을 포기하는 법을 알아야해. 그러지 않는다면 언젠간 네 욕심에 네 스스로가 지쳐 무너질 거다. 내 말 명심하렴. 세브로웰 넌,] 가브리나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세브로웰이 검은 화염을 뿜어내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대지를 태우며 뻗어져나간 불길을 가브리나는 횡으로 날갯짓하여 가볍게 막아내었다. 황성의 철문을 연상시킬 만큼 거대한 황금날개는 그을리기는커녕 더욱 영롱한 광채를 발했다. 마을하나가 들어서도 될 만큼의 면적이 이글이글 열기를 내뿜고 울창한 숲 하나가 파괴된 그곳에서 가브리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그 너머엔 광기로 물든 은빛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말이 많아지는 건 늙은 것들의 종특인가요. 가브리나. 할 말은 거기까지 하고 이제 나가. 내 영역에 함부로 들어선 놈들이 이제껏 어떻게 되었는지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이젠 수장인 나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냐. 어리석은 것……그 꼴이 지독히도 불쌍하구나.] 살의로 가득 찬 눈앞에서도 가브리나는 가여운 것을 보듯 나지막이 혀를 찼다. 하극상으로 간주하기에는 이미 그 도를 한참 지나쳤다.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야 나도 무력으로라도 널 내쫓으마. 그러면 너도 조금은 반성하는 게 있겠지.] 결코 쉽지 않을 거라 여겼으나 이만한 피해는 각오했던 일이었다. 드래곤들의 수장으로서 물러서지 않고 맞서야만 했다. 하지만 가브리나가 각오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치열하고 처참한 싸움이 벌어졌다. 전력으로 가브리나를 죽이려드는 세브로웰은 제 뜻대로 되지 않자 이성까지 놓은 채 말 그대로 살의와 파괴본능에 몸을 맡겼다. 밤이 되면 산이 파괴되고 낮이 되면 땅이 뒤집어졌다. 폭주하는 세브로웰을 막을 가장 평화적인 방법은 봉인뿐이었다.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동안 가브리나는 자신의 땅에 사는 인간들에게 피해가 갈까 부러 아래지방으로 밀려나야만 했다. 사흘밤낮의 전투 끝에 가브리나는 살기등등한 세브로웰을 가까스로 제압하고 아래지방 란게르드 산맥에 봉인시켜버렸다. 그렇게 얻은 비옥한 땅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는 ‘평화롭다’의 뜻을 담아 바일롯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골드드래곤을 왕가의 상징으로 삼고 수도의 이름을 드래곤의 이름인 ‘가브리나’로 지었다. 물론 건국 한 달째의 백성은 불과 삼백여 명에 불과했으며 왕성보다도 민가가 먼저 지어졌다지만 말이다. 그 후 십년이 흘러 바일롯은 제법 왕국이라 불릴 만한 외견을 갖추었다. 어디까지나 외견이었지만 살기 좋다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대륙의 가난한 이들이 속속 이주해왔다. 부보다는 안락한 삶을 꿈꾸고 찾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가족단위였기에 인구는 금세 불어날 수 있었다. 알렌은 그들 모두에게 일정량의 경작지와 정착지를 내어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 어설픈 구빈제도가 되레 부작용으로 돌아오지 않게, 가브리나와 꾸준한 상의를 통해 본격적인 지원 제도를 마련했다. 이 제도가 들어섬으로써 정착은 한결 빠르게 진행되었다. 개인의 출세욕을 위해 찾아오는 자들도 많았다. 각 분야에서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치지 못했던 이들은 굳은 결심을 하고 왕국으로 넘어왔다. 개중에는 풍요로운 자원과 비옥한 토지, 보석을 탐내고 들어온 욕심 많은 제국인들도 있었지만 엄격한 단속을 통해 제국으로 빼돌리려는 이들을 잡아내었다. 그리고 정치이념에 맞아 부러 명예를 내려놓고 찾아오는 제국의 신흥세력 귀족과 지식인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이주해온 백성만 해도 천만 명에 달하는 시대가 도래 했다. 제국에 비하면 터무니없는 숫자였지만 신생국가치곤 크나큰 발전이었다. 제법 빠르게 마을마다 질서가 잡히고 안정적인 정착이 이루어졌다. 백성들이 살기 좋은 평화로운 나라가 되겠다는 건국이념 하나로 세워진 나라였기에 왕성은 아주 뒤늦게야 지어졌다. 자신들이 모실 왕을 위한 성을 짓겠다며 수많은 백성들이 울력에 동참해주었다. 그들이 주춧돌을 나르는 동안 알렌도 마법으로 그들을 도왔다. 그렇게 오년이란 세월이 또 한 번 흘렀다. 드래곤의 힘을 빌려서야 마침내 바일롯의 수도에는 까마득할 만큼 높다란 성이 들어섰다. 바일롯의 초대 국왕 바일로트 1세가 머무를 성이었다. 시누프스 알렌 바일로트. 그는 십오 년이 지나도 그대로 젊은 외관을 유지하고 있는 남자였다. 가브리나가 늘 옆에서 늙지 않는 몸으로 만들어줬기 때문이었다. 건국이란 십 년, 이십년 만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원하는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알렌이 늙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었다. 알렌이 가장 먼저 펼친 정책은 다름 아닌 평민교육제도, 즉 문맹 퇴치였다. 글을 모르는 자들에겐 글을 깨우칠 수 있게 곳곳에 양성소를 세웠다. 무력을 중시하는 제국과는 달리 학문과 마법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재능에 따라 신분고하 막론하고 등용하였고, 뒤늦게 화폐를 생산하고 본격적으로 시장이 활성화됨에 따라 무역의 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이고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최초의 중앙귀족을 선발하였다. 그는 태생도, 신분도 보지 않고 오로지 개인의 능력만을 보았다. 나라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도움이 될 수 있는 아홉 명에게 그만한 직위를 내렸다. 그것이 훗날에 이르러 나라를 지탱하는 9명의 개국공신들로 자리 잡게 된다. 신분이 낮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제국에서 그 실력을 펼치지 못했던 무장 라콘드는 훗날 공작직위에 올라 군대를 조직하고 바일롯의 검이 되었다. 제국에서 신흥세력의 주춧돌이었던 맥더프는 공작이 되어 바일롯의 방패로 자리매김했다. 현명한 조언을 할 수 있는 문관 올르아 공작과 마법의 분야를 폭넓게 확산시키고 싶어 하는 타렌치오 공작, 그리고 냉철한 판단력으로 제국의 전쟁 지휘관이자 책략가로서 활동했었던 칼토바스 공작. 이렇게 다섯 개의 공작가문이 탄생했다. 그들은 탐피아의 정치 제도와는 사뭇 다른 근본적인 변혁을 추구하며 적극적인 정치개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건국 초반의 정치는 안정적이게 잡혀가기까지 20년간의 꾸준한 정치개편에 들어가야만 했다. 그와 중에 탐피아 제국에 간섭을 많이 받았으나 결코 전쟁을 일으키지 않으려 알렌은 노력했다. 끊임없는 제국의 조공요구에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평화협정을 이어온 끝에 왕국으로서 받아들여지고, 대륙지도에 그 이름이 새겨졌다.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고, 끊임없이 더 좋은 국가를 이룩하기 위한 왕의 노력 덕분에 백성들은 평탄하고 풍요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성군이라 칭송받는 왕이 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렇게도 노력했으나 그 심약한 성정과 가난한 출신, 마법사였다는 점이 나라의 흠집이라 여긴 후대들은 실제와는 다르게 역사서에 서술해버렸다. 초대국왕은 검사였고, 용감했다고. 또한 그가 원했던 마법사들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은 오지 못했다. 타렌치오 공작과 손을 맞잡아 왕실마법사를 모집했으나 그 인원은 지극히도 적었다. 백성들의 출신이 다 가난했던 농민들이었던 탓에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되는 마법사의 씨는 제국에 비해 극소수에 달했다. 하지만 알렌은 포기하지 않았다. 왕실마법사들과 함께 또 20년에 걸쳐서 마법을 생활마법, 이동수단마법, 군수마법, 여러 분야에 걸쳐 발전시켜나갔고 비록 소수였으나 곧 국력이 되었다. 어수룩하고 비쩍 말랐던 가난한 마법사는 국왕으로서 지낸지 여든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20대의 젊은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변화는 있었다. 몸에 살이 붙고 운동을 한 덕에 제법 건장한 체격이었다. 신하들 앞에서 위엄 있는 모습을 갖출 만큼 마냥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돌아 보기가 좋았다. 전혀 늙지 않는 왕의 모습에 신하들은 이를 경외시하며 신격화했고, 현명한 국왕의 치하아래 행복한 백성들은 그를 추앙했다. “이제 제법 쉬어도 되겠구나.” “아직 한참 멀었는걸요.” 가브리나는 국왕의 집무실 창가에 서서 훤히 펼쳐지는 왕도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육십년을 넘게 노력해서 이룬 것이었다. 이리도 훌륭한 나라가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알렌은 하루도 쉬지 않고 국무를 보고 백성을 살폈다. “가브리나. 잠시 얘기 괜찮을까요?” “그래. 하려무나.” “매년 산짐승에게 피해를 입는다는 야누이스 산간지역에 대해 아시죠? 마법이 동원되는 농사라서 농민들의 경제적 피해가 큰데 그 피해를 막기 위해 병력을 투입한다면 마찬가지로 농민들에게 부담이 갈 거예요.” 최고급 마호가니책상 앞에 앉은 채 알렌은 가볍게 턱을 괴어 아래턱을 문질렀다. 가브리나의 버릇이 옮은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이맘때쯤에 사냥대회를 개최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귀족의 유흥을 병력으로 끌어들인다면 그 지역의 조세부담도 낮출 수 있을 테고, 장기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경제적인 상승효과를 보일 거라고 봐요.” “좋은 생각이구나. 문건으로는 만들어뒀니?” “네, 아무래도 좀 더 상의가 필요할 것 같아서 공작가문들에 보내볼 생각이에요.” “너는 참 성실해. 오래전 그날과 다를 바 없이.” 동굴 레어 속에서 그를 가르쳤던 때가 문득 떠올라 가브리나는 미소를 머금었다. 이에 알렌이 쥐고 있던 황금 깃펜을 내려두고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성실하게 저를 도와주시는 가브리나 덕분인 걸요.” 그도 여전히 한 점 변함없는 황송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너무나 감사해서 섣불리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알렌은 그녀의 옆자리에 서서 깊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별똥별이 스치듯 시야에서 사라졌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아마 옆에 서있는 그녀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줄 것이 있어 찾아왔단다.” “제게요?” 동그랗게 눈을 뜨며 놀라는 모습은 여전했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윤기 도는 적금발이 부드러이 흐트러졌다 원래대로 돌아왔다. 가브리나는 그에게 금반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야. 내 마나를 불어넣었단다. 이걸 끼고 있으면 그 어디에 있든 네가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나의 또 다른 눈과 귀가 되어줄 거야.” 덧붙여 혹시나 그와 떨어져있을 때, 자신을 대신해 이 반지가 그를 어떠한 위험에서도 보호해줄 거라고 친절히 설명했다. 가브리나는 밤하늘의 풍경으로 고개를 돌리며 초승달대신에 아름다운 눈매를 휘었다. “그리고 이건 특별한 거란다. 너에게 처음 받았던 그 금을 녹여 만든 거거든.” “그걸 아직도 가지고...계신 거예요?” 알렌은 놀란 눈을 했다가 곧바로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아…죄송해요. 더 값진 걸로 드렸어야 됐었는데…” 사실상 그녀의 레어주변에서 우연히 주운 것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면 이제까지 그녀에게 변변한 선물하나 해주지 못했던 그였다. 인간의 그 어떤 값비싸고 출중한 물건으로도 드래곤인 그녀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소심한 생각에서였다. 이제껏 백성을 위해 수많은 결단을 내리고 정책을 시행해왔던 그라지만 이런 데서는 소심한 남자티를 벗지 못했다. “괜찮단다. 네가 준 것이기에 의미가 있었던 것이지 않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애롭게 웃는 가브리나의 옆얼굴을 바라보다가 알렌이 살짝 손을 뻗었다. 그녀 손을 그러쥘 뻔한 손은 다시 그의 고급진 허리옷감에 닿아 소리 없이 주먹만 말아 쥐었다. 또 그런 충동이 들어버렸다. 자신도 어찌할 수도 없게 불순한 마음이 불쑥불쑥 고개를 들어버린다. 사실상 알렌은 아직도 왕후, 혹은 비가 될 여인을 성에 들이지 않고 있었다. 늙지 않으니 아직은 후계를 볼 필요가 없다고 한사코 혼사를 거절하는 왕이었다. 여자만이라도 곁에 두어라고 충신들은 간곡히 청을 올리기 일쑤였으나 이에 왕이 둘러대는 변명은 늘 한결같았다. 국정을 살피기도 바쁜데 자신이 여자를 만날 시간이 어딨으며, 여인을 곁에 둔다고 해도 다른 것에 정신이 쏠린 탓에 잘해주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여기서 다른 것은 마법연구라고 충신들은 생각했으나 사실은 달랐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이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돼요. 고마워요, 가브리나.” “또 의논할 것이 있다면 그 반지로 나를 부르렴.” “네. 그럴게요.” 이제껏 수많은 여인들이 구애를 해와도 흔들림이 없었던 왕은 오래전부터 일편단심이었기 때문이다. 왕에겐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짝사랑이 존재했다. 마음에 품은 자가 있었으나 고백은커녕 그런 티조차 내지 못했다. 인간과 드래곤이라는 어마어마한 종족차이와 한낱 인간의 구애는 오히려 그녀를 무시하는 꼴이 될까봐, 자격지심만이 들었다. 이렇게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는데 차마 욕심낼 수가 없었다. 0138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그로부터 사흘 후 국왕 알렌은 가브리나에게 작은 선물하나를 보냈다. 사내들이 좋아하는 여인에게 자연스럽게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 주로 애용하는 방법으로, 패물과 드레스를 함께 보냈다. 평소 금수가 놓인 순백의 수의만을 고집하는 가브리나였으나 그는 알렌이 제게 처음 보낸 선물이란 것에 의미를 두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세 시간 뒤, 가브리나는 알렌과 약속한 장소로 그를 만나러갔다. 다름 아닌 왕의 개인처소이자 마법연구실이었다. 알렌은 기대 반, 긴장 반인 상태로 한 시간 전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상 입고 오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지만 그의 두 눈은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충견처럼 문에 꽂혀있었다. 이윽고 금으로 섬세히 세공된 손잡이가 달린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방안으로 늘씬하고도 섬려한 자태의 미인이 들어섰다. 은백색의 드레스는 한 떨기 백합을 연상케 했다. 백금과 자잘한 흰 진주가 꽃잎에 달린 이슬처럼 허리선을 타고 내려와 아름다운 문양을 그려냈다. 움직일 때마다 발목 위에서 사뿐히 펼쳐지는 동심원의 자락은 과하게 부풀리지 않아 더 자연스럽게 몸매를 과시하게 했다. 알렌은 자신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멈추지 않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구 눈빛이 흔들리는 녹색눈을 떨구었다. 자연스레 칭찬을 해야 되는데 입술이 얕게 떨리며 그도 모르게 허둥지둥해버렸다. “이..이프네요…….” “그러니? 이프다는 단어는 처음 들어보는구나.” “…이프,프, 쁘,다는 말이었어요. 너무 이쁘다고…생각했습니다…” 당황하면 한심하게 말부터 더듬는 버릇이 수십 년 만에 튀어나와버렸다. 자괴감에 손으로 얼굴을 덮은 남자의 모습에 가브리나는 그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알렌은 열감이 느껴지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양피지를 서둘러 펼쳐보였다. 몇 사람이 누워도 될 만큼 커다란 대형양피지에는 조잡한 수식과 각종 도형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오늘 이곳에 부른 이유는 이걸 보여드리기 위해서예요." 가브리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십 년 동안 잠을 줄여가며 틈틈이 연구해서 완성시킨 마법진이었다. “저는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믿어요. 이 마법진이 저의 꿈을 실현시켜줄 거라는 것도요.” 불현 듯 가브리나는 오래전 그가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을 기억해냈다. 역시나 다름이 아닐까 알렌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마법진을 내려다보며 황홀경에 젖은 목소리를 냈다. “다른 차원은 아마도 인간들의 세상보다 훨씬 완벽한 세상일지도 몰라요. 대지위에 진귀한 보물과 값비싼 금이 산처럼 쌓여있다거나, 온통 먹을 것으로 넘쳐흐르는 강과 바다가 존재하는, 그런 꿈같은 세상 말이에요. 만일 그런 차원을 발견한다면 우리 왕국민 말고도 다른 대륙의 모든 빈곤한 자들을 도와줄 수 있을 거라고 저는 봐요.” 이걸 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눠준다면 행복의 질이 더 올라가지 않을까. 질시, 욕심 같은 감정은물론 도둑질이나 강도 같은 질 나쁜 범죄도 사라지지 않을까. 알렌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를 세계에 대해 이미 청사진을 가득 부풀리고 있었다. 환상을 품고 있다는 게 옳았다. “이런 동화 같은 세상이 차원 어딘가에 반드시 존재할 거라 믿어요. 이 드넓은 차원 속에 우리 대륙인들만이 존재할리 없잖아요. 그러니 인간들의 이상향도 존재한다고 봐요.” 가브리나는 알렌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훤히 꿰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때보다도 회의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네가 원하는, 모두가 동등한 세상이 과연 존재할까? 존재한다고 해도 그걸 이 세상으로 끌어들이는 순간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될거야.” “…인간이 인간의 한계를 정해선 안 되잖아요.” 예상치 못한 그녀의 차가운 반응에 알렌은 서글프게 가라앉았던 눈을 들어 가브리나를 직시했다. “저만해도 그렇잖아요. 한때 보잘 것 없고 가난하고 나약했던 제가 한 왕국의 왕이 되었어요. 그런 우스운 동화 같은 얘기가 현실이 되었어요. 다 가브리나가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는 믿었다. 이런 크나큰 기적도 이루어졌는데 모든 이들이 행복할 수 있는 기적도 머지않았노라고. 평화로운 나라라 불리는 지금의 바일롯 왕국보다도 한 차원 더 완성도 높은 평화를 꿈꾸는 왕이었다. 차원을 극복함으로써 단순히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대륙의 모든 가난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게 될 거라고 말이다. “…우습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제 소원이자 마지막 시도예요. 이번엔 제가 직접 연구한 마법으로 이루고 싶어요. 또 도와달라고 손을 벌려서 죄송하지만…, 이 나라 백성뿐 아니라 인류를 위한 새로운 길이 열리도록 부디 도와주세요. 모두가 살기 좋은 이상적인 세계는 어쩌면 가까운 곳에 있을지 몰라요.” 공평하게 나눠가져도 인간은 끝끝내 만족하지 못할 거라 여기는 가브리나의 앞에서 그는 무릎까지 꿇어보였다. "가브리나. 이번 일도 반드시 성공할거예요. 지금까지처럼……그대가 함께 해준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그러니 한번만 절 믿어줘요." 그런 희망적인 세상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가브리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그런 세상이 존재한다 해도 타 종족의 세상일 것이다. 인간들은 그런 완벽한 세상을 만들 수 없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해 아주 사소하게 작은 것마저 질투하는 게 인간이었다. 알렌이 순량한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백성들도 어진 왕을 사랑했기에 나라가 두루 태평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이상의 평화를 추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너는 그런 눈부신 이상향의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겠지.’ 가브리나는 차마 불가능한 꿈이라고 얘기하지 못했다. 그가 위험해질까봐 반대하려했으나 끝내 알렌이 대리석바닥에 이마를 대자 가브리나의 반대의지도 허무하리만치 꺾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그의 뺨을 감싸 들어올렸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와 같이 차가운 손의 온도가 따스한 사내의 뺨에 머물렀다. 초래할 위험을 생각한다면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되었지만 희망에 부푼 그의 옆에서 따라 부풀고 싶은 그녀였다. 가고 싶은 길이 그 어디든 함께 가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알겠어. 네가 꿈꾸는 세상이 그것이라면, 나는 네 꿈을 이루어주려 노력해보마.” “……아.” 알렌의 눈가에서 실낱같은 한줄기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감격에 겨워 한번 고개를 숙인 그는 이윽고 제 눈앞에 내밀어진 고운 손을 발견했다. 잡고 일어나라는 듯이 상냥한 손에 감사함이 북받쳐 올랐다. “고마워요. 가브리나.” 그는 눈물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가브리나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서 알렌은 그 새하얀 손등에 얼굴을 묻었다. 목소리가 속절없이 떨렸다. “절 믿어줘서, 제 손을 잡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반드시 그 믿음에 보답할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인간의 초월영역이자 신에 도전하는 차원이동의 마법에 도전하게 되었다. 평소 마법적인 향학열이 강했던 알렌은 또다시 2년이라는 세월을 대마법진에 몰두했다. 그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동참한 가브리나도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매일을 방대한 지식과 고전해야만 했다. 수억 개의 선과 수만 개의 마법진을 그리고 또 그려 마침내 완성시킨 단 하나의 마법진. 드래곤과 희대의 천재 마법사가 만들어낸 마법진은 사용한 수식만 해도 기존에 알려진 마법수식을 한참 뛰어넘는 숫자에 달했다. 그들은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걸 시험해볼 단계에 다다랐을 땐 가브리나는 알렌을 마법진에서 떨어뜨려놓았다. “알렌. 너는 남으렴. 완벽하게 준비는 갖췄지만,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그 어떤 일도 생기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어. 혹여 돌아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일단은 나 먼저 가는 게 옳아.” “하지만……,” “이 나라에는 네가 없어선 안 돼. 왕인 네가 사라진다면 나라는 바로 혼란에 갇혀버릴 거란다. 섭정을 미리 세워두어도 그건 마찬가지 일거야.” 가브리나는 부드러운 말씨로 그를 달랬다. 자신이 성공해서 돌아오면 그때는 둘이서 함께 새로운 차원을 구경하자며 그리 속삭여주었다. 그렇게 가브리나는 체내의 모든 마나를 마법진에 불어넣어 마침내 혼신의 힘으로 발동시켰다. 번개가 내리친 듯이 강한 금빛이 터지고 귀청을 찢는 굉음이 드넓은 공간을 울렸다. 어둑한 공간에서 한바탕 일어났던 빛의 소란이 끝나갈 때쯤엔 주변의 공간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벽이 허물어져 내리고 기둥잔해가 굴러다니는 그 사이에서 알렌은 자신을 지켜준 그녀의 반지 덕에 가까스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륙최초였던 세기의 마법진은 그 어떤 고차원의 세계로도 그들을 데려다주지 못했다. 알렌은 거대한 마법진 한가운데에 쓰러져있는 여인을 발견한 순간 그제야 무엇인가가 크게 잘못됐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브리나…!!” 허겁지겁 달려간 그는 두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가브리나의 뒷머리를 받쳤다. 힘없이 흘러내리는 긴 금색머리칼이 부드러이 그의 손등을 덮었다. 이상하리만치 가벼운 몸은 겨울호수에 잠긴 것처럼 차가웠다. 손을 대는 게 시릴 만큼 찼다. 덜컥 두려움이 치밀어 오른 알렌은 그녀의 심장에 귀를 가져다댔다. 뛰지 않았다. 그는 단번에 빈껍데기가 된 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녀가 죽었다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제발…눈 좀 떠보세요. 제발…….” 그녀의 몸은 이렇게도 차가운데 자신의 눈물은 되레 뜨거워서 그것이 더 비참하고 서글프게 느껴졌다. 알렌은 가브리나의 뺨과 눈두덩에 아롱지는 자신의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어야만 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울고 후회해야만 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지나친 욕심과 헛된 기대로 인해 벌어진, 되돌릴 수 없는 기나긴 비극뿐이었다. 그의 애탄 목소리는 끝내 그녀에게 닿질 못하고 그 사건으로 가브리나는 영면에 잠기게 되었다. 알렌은 어떻게든 그 비극을 되돌려보려고 했으나 그것마저 끝내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의 곁에서 가브리나가 떠나가자 알렌의 몸은 급작스레 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왕은 하루도 눈물 없이 보내지 않은 날이 없었다. 가브리나의 육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왕궁의 가장 깊숙한 심장부에 방을 만들어놓고서 그곳에서 매일 그녀가 눈을 뜨길 기다렸다. 덧없는 세월 속에 차차 늙어간 왕은 자신의 한계를 알아차렸다. 결국 후계를 위해 왕후를 맞이하고, 그는 자신의 모든 마법 연구기록들을 폐기시켜버렸다. 그로부터 삼십 년이 더 흘러 알렌은 장성한 나이가 된 친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왕좌에서 내려왔다. 백발노인이 되어 무릎이 성치 않게 되어서도 그는 으슥한 궁내부에 숨겨진 비밀의 방을 꾸준히 찾아갔다. 오히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던 방에서 아예 며칠씩 틀어박혀 나오질 않았다. 잠들어있는 가브리아가 혹여 눈을 뜰까, 옆에서 하루 종일 지키면서 그녀에게 남기고 싶은 말들을 일지대신 적어나갔다. 그의 주름진 손가락에는 세월에도 변함없이 늘 같은 금반지가 껴있었다. 하루도 빼지 않던 반지를 마침내 빼게 된 날은 너무도 늙어 더 이상 그녀를 기다릴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였다. ‘이걸 끼고 있으면 그 어디에 있든 네가 날 부르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나의 또 다른 눈과 귀가 되어줄 거야.’ “…대답해줘요…….” 금반지를 방안에 두고 나온 지 이틀 뒤, 선왕은 자신의 침대위에서 평안히 숨을 거두었다. “가브…리나.” 알렌은 눈을 감는 마지막순간까지 그녀를 불렀다. 살아생전 초대국왕은 차원이동에 관한 모든 고차원적 마법을 금기시하고 이를 국법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법은 현세에 이르러서도 시행되고 있는 엄격한 법으로 마법사들은 절대 깰 수 없는 조항 중에 하나였다. 그는 현군으로서 나라를 다스리다가 백팔십 년의 기나긴 생을 끝으로 숨을 거뒀다. 그가 죽고 천년이 흘러 한 여인이 비밀의 방에 찾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에는 세월에 빗겨나간 듯 아름다운 여인만이 침대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그는 죽어 없었지만 그가 매일같이 앉아 시간을 보내던 안락의자가 침대 옆에 놓여있었다. 검게 타들어간 흔적이 있는 놋쇠그릇, 그리고 탁자. 매번 잠든 가브리나의 옆에서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던 왕은 촛불에 의지한 채 탁자위에서 글을 써내려갔었다. 그리고 그 기록이 고스란히 담긴 한 권의 일지가 탁자 위에 올려져있었다. 천 년간 주인을 잃고 방치된 금반지와 함께 말이다. 다이아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금반지를 주워들었다. 한참을 그 작은 반지만 쥔 채 가만히 서있다가 낡아서 누렇게 바래진 일지를 펼쳐보았다.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은 누런 종이를 넘기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작은 그의 글씨들이 수천 장 넘게 채워져 있었으나 정작 그의 마음을 다 담지는 못했을 테다. 그가 쓴 기록들을 살피다가 다이아나는 마지막 장에 시선이 머물렀다. [가브리나. 제가 죽기 전에 또 한 번 그대와 얼굴을 마주할 날이 올지 모르겠네요. 저는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글자조차 흐릿하게 보인 답니다. 하지만 그대의 얼굴은 여전히 선명하게 보이네요. 그대를 잃고 모든 걸 다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저는 이제 뭘 위해 살아왔던 건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어요. 그대가 늘 곁에 있어주었기에 비로소 삶이 화사해보였던 거겠죠. 제게 모든 걸 주었던 그대에게 전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네요. 가브리나. 그대에겐 사과해야할 것이 너무도 많아요. 감사하다고 얘기해야 될 것이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이것도 제게는 다 욕심이겠죠. 그저 제가 눈을 감기 전에 한번이라도 얘길 나눌 수만 있다면, 한번만이라도 얼굴을 마주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이제 그것밖에 바라지 않아요. 그저 눈만 떠줘요. 죽는 순간에라도 좋으니 마지막 단 한번이라도 그댈 보고 싶어요. 가브리나.] 눈물로 인해 굴곡이 진 종이와 흐릿하게 번진 글씨들. 그 흔적을 살피던 다이아나의 눈에서도 투명한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새어나왔다. 이제야 겨우 돌아왔는데. “…너만 없구나. 알렌…….” 눈물은 이미 천년이 지나버린 빛바랜 종이를 적셨다. 0139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작. 공작.” 비밀스러운 어둠의 휘장이 내려온 침대 위였다. 미동조차 없이 반듯이 누워있던 사내가 희미한 부름을 용케 알아차리고 눈을 떴다. 그는 눈을 뜨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부른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바로 시선을 움직였다. 어슴푸레한 빛이 쏟아지는 격자무늬 창을 등지고서 한 여자가 서있었다. “뭐야. 어제 밤 샜어?” 제법 퉁명스런 말투였다. 하지만 너무도 듣고 싶었던 익숙한 목소리라 블리어는 그마저도 개의치 않아했다. 침대에서 홀린 듯 몸을 일으키고서 차가운 바닥을 걸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울리는 간격이 점차 빨라졌다. “한참을 불렀다고.” 툴툴대면서 가느다란 은색머리칼을 헤집는 여자는 한쪽 입꼬리를 씨익 끌어올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얄미워서 블리어는 강하게 그 머릴 헤집던 손을 붙잡았다. “나야말로 한참을 찾았습니다. 대체……어딜 갔다 이제 돌아온 겁니까.” 그는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절로 손에 악력을 실었다. 새파란 혈관 줄이 날카롭게 세워졌다. “말했잖아, 여행 갔다 온다고.”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서 여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마지막 보았을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얼굴에 블리어는 그녀 모르게 깊이 안도했다. 고생한 흔적이 없었다. 오히려 여자는 기다려보라는 듯이 그의 손을 풀고서 창문 밖에서 무언가를 끄집어 올렸다. 줄과 이어진 푸른 천의 보따리는 무엇이 들어있는 진 몰라도 그 부피가 상당히 컸다. “공작한테 줄 선물도 잔뜩 들고 왔지. 에헴.” 한껏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여자는 인중을 검지로 문질렀다. 특유의 뿌듯한 기색이 어렸지만 아쉽게도 블리어는 그 선물 보따리보다도 그녀를 더욱 애타게 바라왔던 사람이었다. 청색 천을 풀려는 여자의 손을 붙잡고서 그는 그대로 한 팔로 여인을 힘껏 끌어안아 당겼다. 얼마동안이나 그리워했는지 모른다. 지금 자신이 어떤 심정인지 이 여자는 조금도 알지 못할 것이다. 복중의 바닥에서부터 끌어올린 짙디짙은 한숨 한 번에 이제까지의 모든 고생과 피로를 쏟아낸 것만 같았다. 자꾸만 풀리려는 팔에 부러 힘을 꽉 주고서 블리어는 그 동그란 정수리를 턱으로 내리눌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작은 온기가 그에겐 크나큰 안도감을 주었다. 아직은 놓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완전히 돌아온 겁니까. 다신 떠나지 않는다 약속하십시오.” “무슨 소리야?” “렐리아.” 블리어는 절로 미간을 찌푸리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또 얼마만큼 제 속을 썩여야 만족할거냐는 매서운 눈빛을 드러내기 무섭게 여자가 한발 입술을 내밀었다. “내가 언제 떠난대? 그보다 선물 풀어보라니까, 거참.” 그 대답에 블리어는 지나치게 안도하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얼른 선물을 풀어보라는 여인의 재촉에도 그는 그저 더 깊이 끌어안아줄 뿐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그녀의 마른 몸을 끌어안았다. 그것이 깨면 허무하게 밀려나갈 단순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그는 깨는 그 순간까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아.” 깊은 숨을 몰아쉬며 블리어는 아무도 없이 적적한 침실에서 홀로 눈을 떴다. 꿈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이렇게 시릴 수가 없었다. 지독히도 사람을 메마르게 만드는 몽중의 상봉이었다. 블리어는 상체를 일으켜 지극히 저조해진 암녹색의 눈으로 창가를 응시했다. 푸르스레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은 양쪽걸쇠가 채워져 있었다. 출입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블리어는 몸을 일으켰다. 꿈에서 그녀가 서있던 창가자리에 멈춰 서서 그는 창문걸쇠를 풀고 양쪽 창을 바깥으로 밀어내었다. 매끄럽게 열린 그 사이로 차가운 초겨울의 한기가 몰아닥쳤다. 밤새 덥혀졌던 방안 공기가 서리가 내린 것처럼 서늘하게 변했으나 블리어는 창문을 열어두고서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 다이아나는 아버지인 공작을 따라 저택의 긴 복도를 걷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부녀가 나란히 걸었으나 두 사람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간해서는 인상을 쓰질 않는 다이아나가 섬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분은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계세요.” “이리 둔해서야 원.” 츳츳, 혀를 차는 올르아 공작은 오로지 정면에 시선을 둘 뿐이었다. “일 년을 매일같이 방문한 사내다. 네게 마음이 없다면 그리 하겠니.”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분은 단지 애인을 찾기 위해…,” “사라진 애인을 찾는다는 건 마땅히 널 찾아올 구실을 대기 위함이 아니느냐. 애초에 일 년씩이나 사라진 여자를 무어로 그렇게 시간 들여 찾아. 다이아나, 이 아비 말을 듣거라.” 평소 무쇠와 같은 결단력을 가진 사내 아니랄까봐 올르아 공작은 좀체 고집을 꺾지 않았다. 추진했던 왕후 책봉의 계획이 무산되어 막막할 따름이었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눈앞에 굴러들어와 있었다. 왕에게 파혼당한 딸아이를 1년 동안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온다는 건 무언가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라콘드 가문과는 원래 혼담이 오가던 사이였던 데다 이만한 좋은 혼처도 없었다. 그렇기에 올르아 공작은 자처하고 나섰다. 라콘드 공작이 평소 오는 시간에 맞춰 올르아 공작은 다이아나의 조심스런 만류에도 불구하고 응접실을 차지하고 앉았다. 아무리 얘기했지만 듣질 않는 아버지로 인해 다이아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억겁 같은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마침내 응접실 문이 열렸다. 오늘도 번듯한 정장을 차려입은 새까만 흑발사내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올르아 공작이 근엄하게 일어나서 그를 맞이해주었다. “오랜만이군, 라콘드 공. 내 긴히 할 얘기가 있어 합석했다네. 급작스러워도 이해해주게나.” 예순의 나이로도 제법 장대한 체격을 유지하고 있는 올르아 공작은 블리어가 착석하자 자신도 다시 소파에 푹신하게 등을 기댔다. 올르아 공작은 간단한 안부를 묻고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예상했겠지 만은 다름 아닌 혼담에 관해서라네.” “이미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블리어는 잔뜩 쉬어 갈라진 저음으로 답했다. 감기기운이 올라 목 상태는 물론이고 평소보다 더욱 신경은 예민해져있었다. 뿌리가 썩은 거목처럼 건조한 외관을 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병색과 피로를 꿋꿋이 숨겼다. 허나 아무리 무덤덤한 척해도 심신은 지쳐있다는 걸 올르아 공작은 연륜의 눈으로 쉽게 간파해냈다. “그 소식, 들어 알고 있다네. 그래서 안타까운 걸세. 라콘드 공, 언제 돌아올지 모를 여인을 기다리는 것도 힘들지 않나. 자넨 모르겠지만 상당히 지쳐 보인다네. 한 길이 옳을 수도 있겠지만 때때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인생의 정답일 수도 있어.” “…….” “언제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그리 혼자 지낼 건가. 슬슬 신붓감도 물색해야하지 않겠나.”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고 스물일곱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는 그였다. 혼기를 꽉 채운 시점에서 그도 다급하지 않을 리 없었다. 올르아 공작은 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오해해듣지는 말게. 만일의 경우에 대한 대비란 말일세, 대비.” 그 말에 다이아나는 안면이 다 뜨거워졌다. 그의 사라진 애인이 돌아오지 않는 경우를 대비한 예비용으로 전략한 기분이었다. 열기가 오른 얼굴과는 달리 마음은 차갑게 식어만 갔다. “우리 딸아이와의 혼담을 다시 진행해보는 것은 어떤가. 지금 바로 혼인을 치르잔 것도 아니니 공에겐 부담스러울 것이 없을 걸세.” 무안하여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다이아나의 반대편에는 여전히 눈썹도 까딱하지 않은 채 무표정한 인상을 한 남자가 자리했다. “왕국이 어찌 될 진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렇기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대비는 철저히 해두어야지. 라콘드 자네도 혼기를 놓쳐서는 안 되지 않나. 돌아올 거란 보장이 확실치 않다면 이런 대비책 하나정도는,” “돌아올 겁니다.” “그러니 무슨 믿음으로…” 당혹스런 투로 대꾸하려는 올르아의 공작의 말허리를 블리어는 칼같이 자르고 들어왔다.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으러 가면 그만입니다.” “크흠….” 두 번씩이나 말문이 막히자 올르아 공작은 마뜩찮은 듯 마른기침 소리를 냈다. 쇠고집 수준이 아닌 철문을 눈앞에 두고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던 블리어는 뒤늦게 표정에서 서슬 퍼런 기색을 드러낸 채 몸을 일으켰다. 몸은 불덩이인데 반해, 그에게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듯 했다. “이런 자리는 불편하니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공녀. 기억나는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네… 꼭 그럴게요.” 공손하게 답하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딸의 모습에 답답해진 건지 올르아 공작은 한번더 마른기침 소리를 냈다. * 겨울은 깊어져있었다. 블리어는 한 달 내리 같은 꿈에 시달렸다. 날이 갈수록 커지는 푸른 천의 보따리는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결국 확인하지 못했다. 어젯밤보다도 커진 선물보따리를 안아들고 찾아온 여자는 어서 펼쳐보라며 기대어린 얼굴을 하고서 눈앞을 알짱대었다. 블리어는 침대에서 일어선 채 그런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꿈일 거라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그를 지배한 탓이다. 반응이 없자 여자는 제 앞에 다가와 빤히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뭐야. 공작 어디 아파?” 코앞에 있는 조막만한 얼굴을 블리어도 마찬가지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기억 속의 모습 그대로다. 이렇게 생생하게 제 앞에 있는데도 꿈이라는 사실이 참 애석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퍼석 메마른 입술의 양끝이 얕게 요동치더니 곧 참지 못하고 열렸다. “왜왔습니까.” “뭐?” “왜왔냐고 묻고 있습니다.” “참나, 걱정해줬더니.” 여자는 가늘게 눈을 좁히며 퉁명스럽게 혀를 찼다. 그러고는 등을 돌려 다시 창가로 걸어가는 여자를 블리어는 굳이 붙잡지 않았다. 붙잡히지 않는 걸 굳이 붙잡으려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괴로운 것도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날마다 지쳐갔지만 그럴수록 눈덩이처럼 무섭도록 불어나는 그리움은 감당키 힘들 정도였다. 블리어는 불과 1년 새에 자신의 몸무게가 얼마나 빠졌는지 알고 있었다. 혼자 누웠을 때 침대의 빈자리가 얼마나 허전한지도, 아무도 없는 빈방에 혼자 있을 때의 그 공허함이 얼마나 큰지도 알고 있었다. 이젠 너무 잘 알아서 그만 알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환경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건 그 자신이었다. 원체 결벽스러운 탓에 뭐하나 틈이 생기면 못 견뎌했다. 하지만 도저히 빈자리를 메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는 그의 삶에 있어서 유일하게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이었다. “렐리아.” 블리어는 몽환적인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창가자리로 걸어간 여자를 불러 세웠다. 여자는 창틀을 짚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느냐고 묻는 옆얼굴은 조금은 심드렁해보였다. “이것만 대답하십시오. 얼마나 멀리 있습니까.” “멀리 있다니 뭐가?” “그대가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내가 찾아가겠습니까. 그러니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꼼짝도 마십시오. 알겠습니까?” 비록 꿈일 테지만 블리어는 단호히 당부했다. 대륙 각지에 사람을 풀어놓았는데도 아직까지도 그녀 행적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왕국은 이미 말할 것도 없이 샅샅이 뒤졌고 탐피아 제국은 서서히 그 조사망을 좁혀가는 단계에 있었다. 일부러 행적을 감추고 숨어버렸다면 더 찾기 힘들겠지만 그 성격상 치밀하지 못하리란 건 추측 가능한 사실이었다. 얼마나 멀리에 있든 자신이 조만간 찾아갈 것이라고 블리어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에 여자는 태연하게도 턱을 한번 긁적일 뿐이었다. “뭐, 공작이 늦게 오면 다른 데 가버려야지.” “꿈이어도 얄미운 건 어째 똑같습니까.” 바람 새어나오듯 얕은 웃음소리에 여자도 따라 씰룩 웃어 보였다. 블리어는 비록 꿈에서라지만 오랜만에 웃어본다고 여겼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그를 기다린 건 삭막한 천장도, 황량한 방풍경도 아니었다. “주무시는 중에 죄송합니다, 공작전하. 급히 전해드릴 것이 있어…,” 낮고 조심스러운 말투와 함께 집사가 황급히 푸른 벨벳으로 뒤덮인 서류철을 내밀어왔다. 벨벳 결보다도 매끄러운 말이 바로 옆에서 흘러나왔다. “방금 조사단에서 보내온 것입니다. 대륙 최북단에 위치한 작은 산자락마을에서 은발여자를 봤다는 목격자가…,” 그 뒤는 들리지 않았다. 블리어는 서둘러 침대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가에선 여전히 어슴푸레한 달빛만이 소리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0140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눈발이 차츰 굵어져가고 있었다. 저녁 무렵의 어둠을 뚫고 달리는 검은 쌍두마차는 대륙의 최북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일롯과 탐피아 제국의 국경을 넘어 북방의 왕국 알타디오에 도착하는데 장장 닷새하고도 20시간이 소요되었다. 블리어는 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마차에 올랐고 현재 알타디오의 변방 산 부근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산 초입에 들어설 무렵부터 이미 해는 저물었고 눈은 휘날리고 있었다. 마부가 내일 다시 출발하는 게 어떻겠냐고 여쭈어봄에도 그는 한사코 강행을 명했다. 촌각을 다투는 사람처럼 극심히 초조해져있었다. 이제 겨우 그녀의 행방을 알아내었다. 사실상 바일롯에서 출발하고도 이틀간은 확신할 수 없었다. 목격했다는 이가 허위로 제보했을지 모를 일인데다 렐리아로 추정되는 이의 인상착의라 봤자 긴 은발이라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드물기는 해도 은발이 이 대륙에 하나일리도 없는데다 그거하나 믿고 대륙 최북단까지 가기에는 너무도 큰 도박이 아닐 수 없었다. 오묘했던 꿈 때문에 괜히 더 필연의 소지를 강하게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서인지 조금도 냉정해지질 못했다. 이미 행동에 옮긴 뒤에서야 블리어는 그 근처지역에 있던 조사관에게 더 자세히 알아보라 명했고 탐피아의 제국에 발을 디딘지 사흘째 되던 날 조사관으로부터 ‘신원이 확인되었다’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보고서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여행자신분으로 산간 부락에서 잠시 머무르는 모양이라고 했다. 블리어는 일단 조사관에게 직접 접근하지 말고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은 없는지 지켜보라고만 일러둔 상태였다. 원래 출신지가 알타디오 왕국인가 싶었으나 보고내용에는 그녀가 전혀 남과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그 지역사람들과의 교류도 전혀 없다고 했다. 탐피아 제국어를 쓰는 바일롯과는 달리, 알타디오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가진 왕국으로 자국의 언어가 따로 존재했다. 그녀가 그 나라 말을 아예 모를 가능성이 크다는 소리였다. 알타디오 출신도 아니면서 왜 거기까지 간 건지 그 답은 의외로 빠르게 그의 머릿속에서 도출되었다. 발이 닿을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떠나겠다더니, 정말 편지에 적힌 대로였다. 단순하기 그지없는 여자를 떠올리며 블리어는 품속에 넣어둔 크리스탈 목걸이를 만졌다. 제발 그곳에서 또 홀연히 떠나지 않기를 속으로 초조하게 바랄 때다. 깊은 산중을 달리던 마차가 갑작스럽게도 돌연 멈춰서버렸다. 마차안과 이어지는 진갈색 틀의 간이창을 위로 밀어올린 마부가 황급히 상황을 보고했다. “공작전하, 폭설 때문에 눈사태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길이 막혀 이 이상 마차 진입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지금이라도 마차를 돌릴까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마부의 표정에 블리어는 꺼내놓았던 목걸이를 품속에 밀어 넣고 바로 몸을 일으켰다. 두꺼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서 직접 상황을 살피기 위해 마차에서 내려섰다. 거친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마차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진입을 막는 원흉과 마주할 수 있었다. 눈과 나무가 한데 뒤엉켜 제거하기도 힘들어보였다. 하지만 여기 와서 발이 묶일 수는 없었다. “그대는 돌아가십시오.” “…전하께서는 어찌하시려고,” 마부의 걱정스런 눈초리에도 블리어는 마차와 연결되어있던 말 한필을 끌어내 그 위에 안장을 얹었다. 갈 수만 있다면 잘 닦인 흙길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나무와 나무사이로 난 길은 좁았으나 말 한필이라면 어떻게든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블리어는 말 옆구리에 박차를 가해 홀로 어두워진 산 속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것이 얼마나 무식하고도 위험한 짓인지 알았으나 이성이 그를 제지하려들 순 없었다. 살이 베여나갈 것처럼 예리한 바람이 거세게 안면을 때렸다. 무른 인간의 피부가 딱딱하게 얼어 굳은 것처럼 감각은 점차 사라져만 갔다. 십분 째가 되자 바람조차 검의 날붙이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얼얼한 통각이 실제 검에 베인 것과 같은 착각을 주었다. 눈보라를 뚫고 한 시간가량을 하염없이 달렸을까, 어둑한 마을 어귀로 들어서기 전 희미한 불빛이 블리어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작은 불빛만이 보였으나 뒤늦게 눈밭위에 서있는 길쭉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깊이 로브를 눌러쓰고 점화한 촛불을 넣은 유리램프를 들고서있던 조사관도 곧바로 공작을 알아보고 다가왔다. “라콘드 전하! 마차는 어찌하시고…먼 길 오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렐리아는, 그녀는 어딨습니까.”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마중 나와 있던 중년의 조사관은 그를 마을로 안내했다. 산간 아랫마을은 들어서는 입구부터 휑하기 그지없었다. 눈이 쌓인 거리를 따라 초라하고 아담한 이층짜리 목재건물들이 늘어서있었다. 작은 창문들에서 희미하게 새나오는 불빛은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조도가 낮았다. 좁은 마을 안에서도 한참 끝자락에 위치한 여관 앞에 블리어는 마침내 당도했다. 조사관은 그에게서 말의 고삐를 대신 받아들고서 렐리아가 머무는 방위치를 설명해주었다. 허름한 여관 안으로 들어서기 전 블리어는 로브위에 한가득 쌓인 눈을 기계적으로 한번 털어내었다. 막상 이 안에 그녀가 있다고 하니 마음은 무서우리만큼 묵직해졌다. 여기까지 전속력으로 말을 몰고 달려온 것이 무색하게도 떼는 한걸음은 무거웠다. 여관 내부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 끽끽 나무바닥이 울렸다. 로브의 끝단 아래서 반쯤 녹은 눈이 굴러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조사관이 알려준 방 앞에 블리어는 멈춰 섰다. 뒤집어쓰고 있던 검은 로브를 끌어내려 벗고서 한 손에 쥐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손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동상을 입어 발갛게 터진 살갗보다도 이 손등 뼈가 마른 문짝에 닿아있다는 게 더 중요했다. “…….” 잠시간의 침묵 뒤 그가 손을 움직였다. 텅텅 속이 빈 나무문에서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안에서는 한참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뒤늦게 그가 다시 손을 움직이려할 때였다. 얇은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오며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졌다. 허름한 방문너머로 마른 나무냄새가 물큰 덮쳐왔다. 복도의 눅진한 불빛과는 달리 깜깜한 어둠으로 뒤덮인 방 안에는 흐트러진 차림새의 여자가 서있었다. “…밤에 누구…,” 반쯤 감겨진 벽안이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을 확인하려는 순간이었다. 지나치게 차가운 손이 팔목을 붙잡자 렐리아는 소름이 쫙 척추를 따라 달렸다. 오싹하리만치 낮은 체온이 현실감을 깨웠다. 그제야 잠이 확 깬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으나 거구의 남자는 안으로 저를 밀고 들어오며 그대로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뭐야. 이 새,” 끼, 하고 욕설이 튀어나가기도 전에 더운 숨결이 입을 훅 틀어막았다. 렐리아는 입술을 누른 것이 어둠에 가려진 남자의 얼음장 같은 아랫입술이란 걸 알아차렸다. 밀어내기도 전에 팔뚝이 아래허리를 지나치더니 널따란 손으로 단단히 등을 받쳤다. 얇은 옷감 속으로 냉기가 파고들어 기분 나빴으나 입술 안에 닿은 혀는 뜨거웠다.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남자를 상대로 두려움은 들지 않았다. 들어온 혀를 깨물어 질척하게 달라붙은 입술을 뗐다. 바로 제압하려했으나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앞에 있는 자의 윤곽을 빠르게 잡아나갔다. 꽤나 익숙한 얼굴과 체격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렐리아는 손이 다 떨렸다. 어, 설마, 그럴 리가, 덤덤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입은 허무하게 나불거렸다. “…공작? 공작이 왜 여기……” 최대한 힘을 빼서 렐리아는 남자를 조심스레 밀어내려했다. 허나 그건 괜한 조바심이었다. 외려 힘이 풀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는 쪽은 그녀였다. 손에 조금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당혹스러울 때 렐리아는 뒷무릎에 닿은 침대의 나무테두리를 알아차렸다. 딱딱한 그것이 렐리아의 몸을 무너뜨릴 때, 입안으로 다시 들어온 부드러운 혀가 렐리아의 이어지려는 목소리를 무너뜨렸다. “아….” 렐리아는 자신을 깔아뭉개듯이 넘어온 남자를 받아내야만 했다. 넘어져서 잠시 빠진 굵은 혀가 장님처럼 더듬더듬 제 입술을 찾았다. 무작정 부딪쳐온 그의 입술이 갈급하게도 입술 살을 힘껏 빨아들였다. 잘근잘근 깨물어보다가 입술의 위치를 조금 바꿔 핥아 올렸다. 여전히 등 뒤에 머물러있는 차가운 손이 느릿하게 상의 아랫자락을 파고들어왔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옷자락을 쓸어 올리더니 그대로 복부 쪽으로 옮겨와 가슴아래부분을 받쳐 감쌌다. 남자의 손안에 그득 담긴 가슴이 탄력 있게 살짝 흔들렸다. 그는 부드러운 살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원을 그리듯 진하게 주물렀다. 그동안에도 키스는 정신없이 이어져갔다. “…흐, 하…잠ㄲ, 뭐하는,” 적나라한 가슴애무에 렐리아는 그의 어깨를 쥐었다놓았다 했다. 입안을 채우는 뜨거운 숨이 안개처럼 뿌옇게 뇌를 점령했다. 너무 급작스러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때쯤이었다. 잘그락 대는 소리가 아래에서 울린다싶더니 금속버클이 허공에서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입으로는 빨고, 오른손으론 제 가슴을 주무르면서, 그의 왼손은 성급하게 바지춤을 풀어 내리고 있었다. 렐리아는 그제야 손에 힘을 줘 그의 오른쪽어깨를 약간 밀어내었다. 진득하게 닿아있던 서로의 입술이 타액을 늘어뜨리며 떨어졌다. “…뭐야, 하게?” “…….” “공작? 술 마셨어?” 어제 본 사람 대하듯이 렐리아가 그에게 담담히 말했다. 허나 블리어는 대답조차 않고 곧바로 깊이 고갤 숙여왔다. 이미 습윤할 대로 젖은 입술이 미끄럽게 입술을 파고들어왔다. 그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이 감각, 하나하나를 놓칠 새라 따스한 온기가 도는 피부를 더듬고 만졌다. 한참동안 그녀의 젖가슴을 뭉개며 키스를 해오던 남자는 바지를 무릎까지 끌어내리고서 허물 벗듯이 다급히 발을 통해 빼냈다. 바지뿐 아니라 상의셔츠도 한쪽부터 벗겨낸 후 바로 침대밖에 패대기쳤다. 그동안에도 애무는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기보다는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어떻게든 악착같이 줄을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끈질긴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렐리아는 그래 해라해, 하고 가만히 다리에 힘을 풀어주었다. 진득한 애무가 깊어질수록 아랫배가 간질간질해서 못 견딜 것 같았다. 블리어는 몸에서 힘을 푼 여자를 알아차렸으나 한참을 애무만 이어갔다. 가슴에서 떠나질 못하던 큼지막한 손이 이윽고 홀쭉한 하복부에 닿았다. 미끄러지듯 둔덕에 닿은 손을 더 아래로 내리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아래속옷을 벗겨내지 않고 옆으로 치워내고서 바로 굵은 손가락을 세웠다. 서느런 손가락이 이상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발가락을 오므렸다. 그 미세한 반응에 그는 바로 손을 거두고 빠르게 그녀의 가는허리를 안아 바짝 서로의 하체가 닿게 했다. 그는 다시 키스했다. 그동안 서로의 것이 거웃을 스치며 맞닿았다. 그저 닿아있는 것뿐인데도 묘한 흥분과 간지러움이 일었다. “됐어, 그냥 해.” 차라리 넣으라고 렐리아는 고갤 돌리며 심드렁히 말했다. 공들인 애무덕분인지 요상하게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가벼운 생각도 한몫했다. 팬티를 벗기기 쉽게 렐리아가 살짝 엉덩이를 들어주자 블리어가 바로 작은 천을 끌어내렸다. 말려 내려온 팬티를 침대위에 내려둔 손이 곧바로 렐리아의 발목을 감싸 쥐고선 좀 더 활짝 벌렸다. 어둠 속에서 감각만으로 위치를 맞추고서 블리어가 천천히 안으로 밀어 넣었다.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키는 동안 절로 인상이 써졌다. “…아.” 오랜만에 느끼는 뻐근한 중량감에 렐리아는 다시 발가락을 움츠렸다. 벌어진 허벅지 사이로 들어선 남자의 허리가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이자 조각처럼 잡힌 등 근육이 따라 움직였다. 제 아래를 가득 채운 물건이 부드럽게 왔다갔다 하는 것도 잠시, 렐리아는 조금씩 격해지는 남자의 허리짓을 알아차렸다. 성이 차질 않는지 잔뜩 힘을 불어넣고 그가 골반을 흔들었다. 거친 숨을 토하는 입술이 내려와 키스하더니 완전히 그녀의 혀를 내리눌러버릴 것처럼 짙은 키스를 이어갔다. 렐리아는 눈을 감고 최대한 느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움직임이 격렬해 쉽지 않았다. 가슴이 쳐졌다가 한껏 치솟으며 그 둥그런 형태가 흔들렸다. 정수리는 금방이라도 침대의 낡은 헤드보드에 부딪힐 것만 같았으나 용케 부딪치지 않았다. 끽끽 대며 울어대는 침대소리가 요란하자 렐리아는 이곳 방음이 좋지 못함을 알아차리고 번뜩 눈을 떴다. “…잠, 만, 아…, 읏, 잠만.” 명확한 발음을 내려 입술을 한번 깨물고서 렐리아는 고집스레 위를 올려다보았다. 생각해보니 그의 목소리는커녕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듯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애초에서 그쪽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블리어는 울분을 토하듯이 격렬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떠나려는 온기를 붙잡으려는 듯 또 끌어안고 안았다. 작은 틈도 새어나지 않게 꽉 맞물린 두 사람의 몸이었다. 처절한 허리짓은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뚝 끊어졌다.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 사정은 아니었다. 외부가 아닌, 아마도 그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격하게 치밀어 오른 것일 테다. 그는 그대로 렐리아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는 블리어를 렐리아는 숨죽여 가만히 지켜보았다. 뺨을 조심스레 누른 투박한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제 뺨과 목에 두고 한참을 바르작거리더니 끝내는 자신의 머리 옆에 깊게 고개를 묻은 채 필사적으로 얼굴을 들려하지 않았다. “공작……,” 혹시 우냐고 물어보려다 렐리아는 관두었다. 끝이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축축하게 귓가를 적셨기 때문이다. “…사랑한다고 고백하려했습니다.” 자그마치 일 년이었다. 늘 변함없이 한자리에 고여 있던 마음을 그는 마침내 쏟아내었다. “그대가 떠난 날…, 그리 하려했습니다.” 블리어가 서서히 머리를 들어 제 아래에 누워있는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두 사람의 눈이 올곧게 마주했다. 이제까지의 간극을 메우듯 그립고 애탄 감정들이 서로를 끈끈하게 얽어 들어갔다. “그대에게 있어서 나는 단지 떠나면 그걸로 끝일 상대일지는 모르나…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생각했습니다. 보고 싶어 잠을 설치다가 잠들면, 이 얼굴이 꿈에도 나올 정도로…….” 달이 기울어져 작은 방 창문으로 푸른빛을 쏟아내었다. 렐리아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정면에서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공작답지 않게 조금은 야윈 얼굴이었다. 1년 안 봤을 뿐인데 3년은 늙어버린 것 같았다. “뭐야. 어디서 고생하다 왔어. 왤케 얼굴살 빠졌냐고….” 렐리아는 투덜대면서도 제게 키스해오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따스하게 혀를 섞으면서도 왠지 짠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서로를 탐색하고 확인하듯이 입술을 빨아 당기고 맛보다가 렐리아는 뒤늦게 자신을 놓아주는 그의 입술에 감았던 눈을 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그녀도 가슴이 울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도 공작 많이 생각했었어. 무작정 나오고…솔직히 후회도 들더라. 근데 다시 뻔뻔하게 돌아가기도 뭐하고, 그냥 이래저래 살고…그랬지 뭐.” 말은 그렇게 해도 아직까지도 어느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렐리아였다. 그녀는 바다 한가운데에 놓인 작은 종이배처럼 이리저리 정처없이 떠돌았었다. 이런 식으로 얽매이지 않고 살다가 홀연히 떠날 생각으로 그렇게 살았었다. “배를 채워도 허전해. 공작은 이런 기분 알아? 큰 맘 먹고 가장 시설 좋은 화려한데서 묵었는데도 뭔가 부족했어. 유명하다는 데는 다 가봤는데 그 멋진 광경을 눈에 담아도 그냥 그렇더라. 웃기지?” 부모님, 친구, 원래 세계에 두고 온 그 모든 걸 잃은 상실감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았다. 이 세계의 것은 다 그저 그랬다. “처음엔 왕국을 떠나서 가슴한쪽이 뻥 뚫린 것 같았어. 근데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녀 봐도 공작 옆만큼 편한 곳도 없더라고.” 그나마 마음이 놓였던 곳이 공작의 옆자리였음을 떠나고 나니까 절실히 깨닫게 되었었다. 렐리아가 조용히 드러내는 허무감을 그는 묵묵하게 받아주었다. 무엇으로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 기분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다. 뜨겁게 올라오려는 깊은 감정응어리를 억누르며 블리어는 애틋하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그대가 없는 시간이 내겐 그랬습니다.” 1년간의 방황 끝에 마침내 채워주는 존재를 찾았다. 서로에게 있어 가장 든든한 존재를. 0141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서로를 찾고 애달픔과 간절함이 터져 나온 뒤에는 그 어느 때보다 시간은 잔잔하게 흘러갔다. 오랜만에 휴식을 가지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좁은 방안의 더 작은 침대위에서 두 사람은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얘기를 나누었다. 렐리아는 1년간의 여행담을 그에게 들려주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곳을 쏘다녔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단열이 제대로 되지 않은 초라한 시골여관은 방안 공기가 찼으나 이불 속은 서로 맞붙어있는 몸으로 인해 훈훈하게 달아올랐다. 한두 시간이 흐르자 좀 더울 정도였다. “그 숲에서 이상한 생명체를 봤는데 큰 뿔이 세 개나 달린 거 있지. 왜 예전에 우리 호수에서 물고기괴물 봤었잖아. 그 괴물처럼 등에 가시도 나있었어.” “아르누우스 말하는 겁니까.” “그건가? 암튼.” “몸빛이 갈색인 그 생명체를 말하는 거라면 운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재작년 토벌지에서 맞닥뜨린 적이 있었는데 상당히 난폭하게 달려드는 바람에 기사 하나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 그래?” 렐리아는 턱을 긁적였다. 사실 그 고슴도치와 사슴을 섞은 듯한 기이한 괴물을 맨손으로 잡아서 뿔 세 개를 녹용으로 팔았으니 말이다. 상당히 비싼 값에 쳐주기에 그날은 호화로운 숙박시설에서 투숙했었다. “공작은 무슨 일 없었어?” “무슨 일이 있었기를 바랍니까.” “그런 건 아니고.” 오랜만에 재회에 더 들뜬 건 렐리아였다. 그녀는 이 짧은 시간이 아쉬워 그와 좀 더 많은 얘길 나누고 싶었다. 타지에서 십년지기 단짝과 만난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밤새서 얘기 나누고 싶은데~ 뭐 졸리면 말고.” “눈사태가 나서 어차피 내일당장은 못 출발합니다. 그러니 오늘은 이만 자는 게 어떻습니까.” “눈사태 났었어? 뭐야, 괜찮은 거야?” “내일 동이 트면 마부가 인력을 동원해 눈을 치우든지 할 겁니다. 마차가 이곳에 도착하면 그때 다시 왕국으로 돌아갑시다.” 차분히 달래는 듯한 그의 어조에 렐리아는 그제야 얼쯤하게 입을 닫았다. 같이 돌아갈 생각이라는 걸 알아차리니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어, 음…공작.” “왜 그럽니까.” “희망 부숴서 미안한데 난 안갈 거. 그러기로 예전부터 결심했어.” 렐리아는 단호하게 얘기했지만 눈동자는 그가 아닌 하얀 눈보라가 치는 창밖을 응시했다. 우박과도 같은 기세로 거세게 유리창을 두들기는 눈발 속에 뭐라도 있는지 뚫어져라 서리 낀 창너머를 바라봤다. 무슨 대답이 들려오든 간에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겠다 다짐한 상태였다. “붙잡을 생각은 아닙니다. 제국에 새로 지낼 곳을 마련해줄테니 차라리 그곳에서 좀 더 안락하게 지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런 게 아니야.” 이제까지 렐리아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지역보다는 드넓은 자연경치가 펼쳐지는 곳을 주로 다녔었다. 가끔 기분전환을 하러 도시에 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발길이 닿은 외딴마을에서 쉬거나 아니면 노숙을 했었다. 블리어가 그녀를 찾기 힘들었던 것도 이 이유에서 일 테다. “한번만 다시 생각해줄 순 없는 겁니까. 내가 그대에게 맞추겠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블리어를 놔두고 렐리아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보여주지 않는 이상 믿을 리 만무할 테고 그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 여겼다. 렐리아는 의자에 걸쳐둔 두꺼운 가죽옷을 뒤져 그 안에서 헝겊으로 둘러싸인 마름모꼴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헝겊을 벗겨내자 드러난 것은 끝이 날카롭게 별러진 단검이었다. 블리어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단검을 꺼내든 것인지 알 수 없어 숙연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곧 단검을 두 손으로 말아쥐고 높이 쳐들자 그는 발빠르게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거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말리기도 전에 일은 벌어졌다. 순식간에 렐리아가 자기 목에 힘껏 단검을 찔러 넣어버렸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다못해 블리어의 심장이 일순 멎었다. 단번에 핏기가 증발된 것처럼 퍼석 마른 가슴이 뻑적지근했다. 그것도 잠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두발이 굳었다. 가냘픈 목을 관통할 거라 여겼던 단검이 바스러진 가을낙엽처럼 그녀의 발치에 후두두둑 떨어져 내렸다. 보고도 믿겨지지 않은 광경에 블리어의 전신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갈 때였다. "난 평범한 인간이 아니야." 실색하여 할 말을 잃은 그에게 렐리아가 태연히 말했다. 지하 감옥에서 죄수들을 죽였던 일을 그녀는 두고두고 잊을 수 없었다. 힘 조절을 실패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언제든 그런 참사를 벌일 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밀림이나 무법지대가 자신에겐 어울렸다. 남 눈치 보지 않아도 되기에 훨씬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그런 가벼운 생각을 하며 딴청을 부리던 중이었다. 다소 경직되었던 그가 걸음을 떼고서 다가오더니 곧바로 제 오른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렐리아는 그가 이끄는 대로 느리게 걸음을 떼며 그의 앞에 섰다. 블리어는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다가 곧 타박하듯이 나직이 운을 뗐다. “위험하질 않습니까.” “봤잖아, 나 멀쩡한 거.” “아프진 않습니까.” “아프기는. 검이 깨졌는데 검을 걱정해야지.”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블리어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걱정스럽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단검이 부서지는 걸 직접 목격했어도 아직은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바닥에 떨어져있는 단검의 잔해를 보니 눈속임은 아닌 것 같았다. “그대 피부가 남들보다 단단하단 건 알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자기 목에 칼을 찔러 넣고도 아무렇지 않을 인간이 어딨겠습니까. 인간을 살상하기 위한 무기이지 않습니까. 그대에게도 위험한 겁니다.” 그러니 다신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말라며 블리어가 진지하게 얘기했다. 렐리아는 그 말에 잠시 멀뚱한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씩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괴물이라고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의외.” 이만하면 자신이 인간들 속에서 지내기에는 너무 위험한 존재라는 걸 알아차릴 만도 할 텐데 그는 위험천만한 묘기를 선보이는 곡예사정도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걱정 받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서있던 렐리아는 머쓱함을 숨기기 위해 부러 심드렁히 말했다. “그래도 조금은 놀랄 줄 알았는데. 에이 좀 시시하다.” “안 그래도 충분히 많이 놀랐습니다. 다신 그러지 마십시오.” 꽤 단호하게 눈을 굳히며 블리어는 그녀를 조심스레 품에 안았다. 감싼 건 그 자신일 텐데 외려 온기로 감싸진 기분이 들었다. 소중하고 따스했다. 여태껏 몇 번이나 죽을 위기에서 자신을 구했던 몸치고는 작았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게만 느껴졌다.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단순히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고 하기엔 그 정도가 심했다. 남자하나를 끌어안고 계단에서 구르고, 건물 잔해아래에 깔리고, 화재현장에 갇히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잔혹한 사고만 겪어왔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블리어는 그녀의 목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쓸어 만졌다. “정말 아프지는 않습니까.” “안 아파.” 목을 매만져주는 손이 싫지 않는지 렐리아는 잠시 그에게 몸을 기대고 서있었다. 그런 그녀가 귀여워 블리어는 고갤 숙여 옆얼굴에 은밀히 입술을 맞춰주려 했으나 그전에 렐리아가 고갤 들었다. 입술이 닿을 듯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둘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했다. “공작이야말로 정말 안 놀라워?” “그대가 뭐든 이제 별로 놀랍지도 않습니다. 사실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응. 나 이 세계사람 아니야.”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블리어도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내놓았다. 이에 렐리아가 눈썹을 구기자 그제야 그가 미세하게 눈을 키웠다. 나름 놀란다고 보인 반응에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 진짜, 공작이니까 얘기해준 거다? 다른 데 가서 얘기하면 안 돼. 알았어? 몰랐어?” 씩 장난스레 웃으며 렐리아가 퍽퍽 그의 배를 치는 시늉을 하자 블리어는 뒤로 조용히 물러섰다. 한발 한발 물러나다가 그는 무릎 뒤에 침대가 닿자 털썩 주저앉았다. 그걸 놓치지 않고 렐리아는 단번에 그를 누르고 올라탔다. 단전 위를 작은 엉덩이로 깔아뭉개고서 냅다 앉은 여인은 승마자세에 더욱 의기양양해져있었다. 블리어는 그녀 밑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손을 뻗었다. 뒷머리를 단번에 감싸고서 정수리부터 목덜미까지 매끄럽게 쓸어내려가며 덮었다. “나도 그대니까 믿어주는 겁니다.” “이거, 믿는 거 맞아?” “믿습니다.” “아닌 거 같은데.” 매끄러운 대리석 같은 남자의 상반신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렐리아는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우위를 점하고 있으니 이 얌전한 남자를 괜히 막 만지고 괴롭히고만 싶어졌다. 하지만 딱히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이래봤자 나중에 그를 떨쳐내기 더 힘들 거라 여기니 손가락이 순순히 거두어졌다. “나 아니면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그건 그래.” 렐리아는 홀가분하게 그의 위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풀썩 누웠다. 대자로 뻗은 여자를 블리어는 돌아보다가 살짝 아슬아슬하게 말려 올라간 옷자락을 내려주었다. 아래로 내려갔던 그의 투박한 손이 다시 위로 올라와 그녀가 아무렇게나 펼쳐놓은 은발을 정리했다. 그 부지런한 손길을 느끼며 렐리아는 커다란 눈을 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그래도 털어놓으니까 뭔가 속 후련하다.” 그녀가 뿌듯한 미소를 입가에 얹을 때 블리어는 씁쓰레한 눈길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의사를 존중해주고픈 마음과는 달리 이렇게 계속 곁에 잡아두고픈 욕심이 들었다. 일반 사람보다 몇 배는 강한 육체를 가졌으니 안전 따위의 이유로는 못 잡아둔다. 그렇다고 한평생 대륙을 떠돌도록 놔두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만이 온전히 그녈 이해해줄 수 있다는 강한 자만심마저 들 정도로 말이다. 블리어는 무거운 어조로 운을 뗐다. “렐리아. 같이 돌아갑시다.” “안돌아간다니까 그러네.” “설득하겠습니다. 제 발로 나와 함께 돌아가게끔.” “날 하루 안에 설득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씰룩 양눈썹을 들어 올리는 여자는 상당히 자신에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작. 날 너무 쉽게 보는 거 아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대만큼 어려운 상대도 또 없을 겁니다.” 자유분방한 바람 같은 여자였다. 어떻게 묶어두어야 할지 그 방법조차 알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건지도 모르겠으나 블리어는 여기까지 와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주겠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 뭔데.” “소고기.” “에헤이.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렐리아는 키득키득 웃다가 됐다며 그를 밀어내었다. 그러나 블리어는 진담이었는지 한없이 진지해진 기세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비싼 술, 안주, 도박, 그 외에 뭐가 또 있습니까.” “사람을 뭐로 보고.” “나를 화장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주겠습니다. 지난번에 하고 싶어 하질 않았습니까.” “오 그건 좀 끌린다.” 내기에서 져서 그에게 화장을 받았던 렐리아는 그날을 떠올리며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물론 정말 그것 때문에 왕국으로 돌아갈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무표정한 사내 얼굴을 눈앞에 두고서 렐리아는 발그레한 핑크빛 블러셔를 발라주고 서느런 눈매위에 펄쉐도우를 얹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뭔가 좀 약하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나불거렸다. “공작이 레이스달린 브래지어랑 삼각팬티 입고 내 앞에서 훌라춤을 춘다면 생각해볼게.” “못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무섭게 왜이래.”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블리어가 단호한 목소리를 내자 렐리아는 해괴하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다음날 눈을 떴을 때 그가 정말 실행에 옮길까봐 슬슬 두렵기까지 했다. 진담이 아니었다고 말하려했으나 바로 구구절절 이어지는 블리어의 말에 렐리아는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더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 행복한 삶을 실현하겠다, 마치 후보자가 선거 공약을 내세우는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제게 어필했다. 그렇게 만들어줄 재력이 있고, 뭐가 있고, 또 뭐가 있으며… 하는 얘기가 십분 가량 이어지자 렐리아는 대놓고 그만하라고는 못하고 능글맞은 발연기를 보였다. “아웅 졸리다. 왜 갑자기 졸리지~” “그대를 위한 술 저장고를 방 옆에다 따로 만들어주겠습니다. 고품질의 술들로만 매일 채워놓을 테니…” “됐어. 내일 얘기해.” 단호하게 끊어내며 렐리아는 홱 돌아누웠다. 그제야 그는 잠잠해졌으나 이어지는 깊은 침묵에 렐리아는 왠지 모를 양심의 가책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다고 다시 뒤를 돌아보기에는 얼쯤해 누런 벽지만 뚫어지게 바라볼 때였다. 뒤에서 소리 없이 뻗어져온 팔이 그녀의 가슴아래 부근을 감싸 안았다. 갈비뼈를 지나 배 중앙에 두툼한 손바닥을 얹고서 그가 조금 더 세게 끌어당기자 얇은 옷감너머로 그의 단단한 몸이 느껴졌다. 렐리아는 뒤에서 저를 안고, 목덜미에 코와 입술을 갖다 댄 남자로 인해 얼굴에 약간 열이 올랐다. 그가 낮게 숨을 쉴 때마다 목덜미가 근지러웠다. 그에게 안긴 상태로 가만히 있자 별안간 블리어가 입술을 떼고 나직이 속삭이듯 얘기했다. “내일 봅시다.” “응. 잘자, 공작.” 렐리아는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든든한 품에 끌어 안겨 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여기며 말이다. 0142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이른 새벽이었다. 렐리아는 어두운 천장을 한번 봤다가 희미한 숨소리에 옆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이마쯤에 뚜렷하게 날렵한 선을 그리는 턱이 위치해있었다. 그 아래로 길게 뻗어진 목과 한가운데에 불룩 튀어나온 울대뼈를 응시하다가 렐리아는 제 허리에 머무른 팔뚝을 알아차렸다.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굵다란 팔을 쥐고서 살짝 들어 그의 옆구리 쪽에 놓았다. 스륵 이불을 거두며 렐리아는 조용히 상체를 일으켰다. 하필이면 침대에서 내려오기 불편한 벽 쪽이라 아래로 슬금슬금 기어가려할 때였다. 낚아채듯이 강한 손아귀가 렐리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렐리아는 놀란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언제 일어난 건지 짧은 흑발의 사내가 마저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비스듬히 저를 돌아보고 있었다. “어디 갑니까. 나도 데려가십시오.” 조용히 얕은 어둠속에 묻힌 녹안이 피로에 물들어있었다. 렐리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따라오라며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블리어는 여전히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뒤를 따랐다. 열 발자국은 갔을까, 방안에 위치한 또 다른 문 앞에서 그녀는 멈춰 섰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어젖히자 간단히 씻을 수 있는 공간과 화장실이 나타났다. 렐리아가 변기 쪽으로 당당히 걸어가자 그제야 블리어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성마른 기분을 드러내며 그는 한손으로 자다 깬 얼굴을 쓸어내렸다. 복잡한 심경이 섞인 한숨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문을 닫아주기 위해 서있는 그를 멀뚱히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성의 없이 툴툴거렸다. “데려가 달래서 데려가줬더니만.” “화장실이라고 말했어야 될 거 아닙니까.” “쉬 싸는 것도 허락 맡아야 돼?” “…그놈의 입. 입.” 꽤나 악센트가 실려 있는 말에 렐리아는 딴청부리며 시선을 피했다. 블리어는 탁 소리가 나게끔 문을 닫아버리고서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누웠다. 눈을 감고서 잠을 청하려할 때 다시 가직한 곳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무거운 눈을 떠 옆을 돌아보았다. 이불안으로 들어온 렐리아가 빼꼼히 얼굴을 내놓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공작 화났어?” 미안하거나 민망한 감정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얄밉다는 감정보다는 귀엽다는 감정이 앞서버리는 그였다. 블리어는 입술을 가져가 그녀의 입술과 한번 맞닿게 한 후 천천히 떼어냈다. 그러고는 바로 렐리아를 품에 끌어안고 나른히 눈을 감았다. “화 안 났으니 더 잡시다.” * 아침이 되니 눈은 그쳐있었다. 렐리아는 창 너머를 바라보며 기지개를 켰다. 거리에 소복하게 쌓여있는 눈은 자신이 알고 있는 원래세계와 다를 바 없었다. 하얗게 쌓인 그 위가 아침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아파트단지…아니 집 앞에 눈 쌓여있으면 맨날 친구들 불러서 눈사람 만들었는데. 뭐 초딩때 얘기지만.” 태연하게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렐리아와는 달리 그녀 옆에 서있는 블리어는 여유롭지 못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내린다면 불가피하게 마차가 오는 시간이 늦어질 터인데 하늘은 자신을 돕지 않았다. 그녀와 이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것도 오늘 내지 내일로 끝일테다. 냉철한 그답지 못하게 조바심을 느끼고 있을 때 렐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공작은 눈사람 만들어본 적 있어?”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어떻게 만드는 겁니까.” “그냥 뭉치고 굴리면 돼.” 쉽다고 얘기하며 렐리아는 소소한 팁을 그에게 알려주었다. “장갑 껴도 손이 엄청 시려서 핫팩은 필수야. 그리고 학교 쓰레받기, 그거 참 좋아. 집에 있는 욕실바가지도 좋고.” 분홍색 플라스틱바가지로 눈을 퍼다 나르고 몰래 집에다 가져다놓는 일은 첩보작전만큼이나 스릴이 넘쳤었다. 물론 어린 나이에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엄마를 속일 수는 없었다지만. “동상 걸려서 가면 엄마한테 혼났는데…파리채로 말이야. 겨울에 파리도 없으면서 나 잡으려고 맨날 거실에다 둔 거 있지. 엄마가 파리채 들면 하나뿐인 딸한테 너무한 거 아니냐고 반항하다가 방에 숨었었는데.” 피, 하고 웃어버리며 렐리아는 창밖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산골마을 꼬맹이들을 바라보았다. 눈을 뭉치고 서로 던지며 아침부터 신이 나있었다. “내가 고집쟁이잖아. 어릴 적에는 더해서 엄마랑 별 걸로 다 싸웠거든. 가장 크게 싸운 게 털 실내화가 다람쥐가 아니라 분홍토끼라서 싸웠었나. 우리 엄마 나 어떻게 키웠는지 몰라~” “외동이었습니까.” “응. 그러고 보니 공작도 외동이랬지.” 목을 꺾으며 위를 올려다보자 바로 그의 턱이 보였다. 아래에서 봐도 굴욕이라곤 없이 높이 솟은 콧날은 유독 두드러져있었다. “공작은 형제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 적 없어?” “별로, 없었습니다.” “난 솔직히 언니나 여동생 있었으면 좋겠던데. 언니 있는 친구들 보면 사이좋을 때는 또 엄청 좋더라고. 공작 여장시켜서 내 언니로 삼을까?” 렐리아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완전히 뒤를 돌아보았다. 짓궂은 미소는 또 어떻게 그를 괴롭힐지 궁리하는 것처럼 악동 같은 영악함을 지녔다. 하지만 블리어는 미동조차 없이 가만히 서서 포근한 시선으로 렐리아와 마주했다. “렐리아. 우리 사귑시다.” “뜬금없이?” 그때 갑작스럽게도 블리어가 고백해오자 렐리아는 휘둥그레 눈을 떴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파악하기위해 그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가 요모조모 얼굴을 뜯어보려할 때다. 순식간에 사냥감을 낚아채는 날짐승처럼 그가 렐리아의 턱을 붙잡고서 고개를 숙였다. 턱을 비스듬히 틀어 훅 밀고 들어오더니 단번에 입술을 점령했다. 그의 혀는 자연스레 닫힌 입술을 가르고 들어왔다. 렐리아는 으음, 하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떼라고 말하는 대신 왼쪽어깨를 덮고 있는 굵다란 손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만졌다. 깜깜해서 그런지 더욱 촉감에 의지하게 되었다. 뒤늦게야 자신이 왜 눈을 감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졌지만 렐리아는 눈을 뜨진 않았다. 어깨에서 등허리로 흐르듯 내려간 그의 손이 따뜻했다. 입안으로 터져오는 숨결도 너무 따스해서 입속이 후덥지근할 정도였다. 블리어는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중앙에 손을 얹고 더 깊이 입술을 맞대어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눌려 숨이 빠져나갈 공간조차 없었다. 간간히 비틀면서 공간을 만들어냈지만 그가 다시 적극적으로 막아버렸다. 물컹하게 뒤섞이는 혀의 감각은 참 요상하게도 중독성이 있었다. 렐리아는 어느새 그의 어깨를 반쯤 휘감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그에게 몸을 맡긴 채 주춤주춤 물러나다 차가운 벽에 등이 닿아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진하게 키스를 이어가던 블리어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슥 혀를 떨어뜨리는 대신 이마를 맞대어온 그가 한번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후끈한 숨결이 렐리아의 젖은 입술 위를 덮쳐왔다. “사귑시다.” “…….”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어제 말했던 것들 모두 지키겠습니다. 그대 방 옆에 술 저장고도 새로이,” “아 됐어.” 또 그 얘기냐며 렐리아는 블리어의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애당초 그가 약조한 게 뭔지도 기억하지 못하거니와 부담스럽기만 했다. 약조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딱 잘라서 한번 더 말하려다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그의 녹안과 마주쳤다. 눈에 띄게 굳어있는 모습에 렐리아는 서둘러 운을 뗐다. “내가 뭐 술고래도 아니고, 방 옆에 술 저장고를 만들 필요가 있남…. 그냥 술이나 사줘.” 괜히 저가 다 당황하고 놀랐다. 처음 본 그의 표정은 뭐라 설명해야하지 좋을지 모를 정도였다. 너무 바싹 말라 바스러질 일만 남은 낙엽을 만지는 것보다도 조심스럽게 대해야될 것 같았다. 착잡한 기분에 렐리아가 힐끗힐끗 올려다볼 때였다. “…술쯤이야 어렵지 않습니다.” 블리어가 렐리아의 목쯤에 손을 얹고 가벼이 쓸어내렸다. 벽 앞에서 꼼짝도 못하고 서있는 렐리아를 내려다보다가 그가 다른 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잡아들었다. “그대가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얽매일 여자가 아닐 텐데 내가 이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순서가 잘못되었지만, 그럼에도 염치없이 또 한 번 청하겠습니다.” 저수지처럼 깊게 가라앉은 녹안은 짙은 뉘우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턱까지 작은 손을 끌어올린 블리어가 그대로 보드라운 손가락에 입술을 묻었다. 따스한 살갗냄새를 맡으며 시선은 오롯이 렐리아를 향해 두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반지 대신 간지러운 숨결이 그녀의 얇은 손가락 틈새를 파고들었다. “평생 이대로 내 곁에 머물러주었으면 합니다.” “…어, 음. 청혼 아니지?” “부담스럽다 해도 이것이 내 진솔한 마음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저 계속 내 곁에 있어주십시오. 그것밖에 바라는 건 없습니다.” 난데없는 고백이기도 했지만 생애 처음으로 받아보는 고백에 렐리아는 괜스레 낯이 뜨거워져만 갔다. 그에게 잡히지 않은 오른손으로 턱을 긁적이다가 결국 시원치 않아 뒷머리를 긁어댔다. "안 됩니까…그것마저도." “미안.” 비스듬히 눈길을 옆으로 둬 회피하는 모습에 블리어는 슬그머니 그녀의 왼손을 놓아주었다. 역시 그녀를 붙잡기에는 자신의 진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절망을 느낀 그가 고개를 내린 채 어두워진 마음만 싸늘하게 굳혀가고 있을 때다. 렐리아가 슬며시 눈동자를 굴리며 고갤 들었다. “솔직히 평생 같이 있자는 건 좀 부담스러워. 근데 공작, 나 지금 와서 얘기하는 건데.” 그녀의 담담한 목소리에도 블리어는 실낱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반응했다. 하지만 그다지 동요 없는 여인의 모습과 목소리만 낭랑하게 그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다. “공작이 내 세 번째 상대였었다?” “좋아한 사람 말입니까?” “아니 섹스한 상대. 네 명중에 한명이 공작이었어.” 블리어는 그다지 놀라하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묵묵히 받아들였다. 성생활이 문란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진즉 알아차리고 있던 사실이었다. 무엇보다도 성경험이 많든 적든, 교제했던 상대가 있든 없든 그것은 그녀를 사랑하는데 있어 별로 중요치 않았다. 그가 진실로 알고 싶은 것은 이런 게 아니었다. “근데,” 아직 말이 다 안 끝났다는 듯이 렐리아가 더 꼿꼿하게 턱을 쳐들었다. 그제야 그와 정면에서 시선이 맞아떨어졌다. “진짜 이런 기분 들게 한 사람은, 공작이 처음인 것 같다고.” “…….” “이게 좋아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 막 싫지 않아. 같이 있으면 기분 좋고…그거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흠 암튼 공작이 유일하다고, 여태껏.” 렐리아는 얼쯤하게 오른뺨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다시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한동안 가만히 서있다가 콧등위로 숨결이 느껴지자 슬쩍 눈을 들었다. 사실이냐고 묻듯이 자상한 진녹색눈동자가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무뚝뚝하던 입가에는 소리 없이 긴 미소가 맺혀있었다. 처음으로 본 흡족하고 행복한 미소였다. “나또한 사귄 상대는 여럿 있었으나 이렇게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상대는 그대가 처음입니다. …그대뿐입니다, 여태껏.” 벅차오른 감정에 말끝이 흐려지기 전에 블리어가 입술을 붙여왔다. 아까전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입을 맞춰왔으나 이번에는 서로 적극적으로 입술을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그의 어깨에 다시 팔을 두르고서 좀 더 편한 자세를 잡아갔다. 벽에 닿아있던 머리와 등이 살짝 떨어지기 무섭게 렐리아의 몸이 옆으로 틀어졌다. 블리어는 따뜻한 입술 속을 파고든 후에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갈구하듯이 격정적으로 혀를 놀렸다. 마찰을 최소화시키는 타액으로 인해 혀 전체가 미끌거렸으나 지금은 아예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는 문득 첫 관계상대가 렐리아였다면 하는 생각을 했다. 이리 그녀를 만날 줄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형식적인 관계에 얽매여 살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녀였기에 공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경험이 되었을 거라 여기니 지난날의 쾌락은 전부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자기 자신에 대한 어리석음과 후회가 점철되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훨씬 애가 타고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렐리아를 침대위에 부드럽게 무너뜨리고서 블리어는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목가에 갖다 대었다. 체취를 들이켜는 동안 느릿하게 여린 살을 빨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자신이 이렇게도 절제심이 없는 인간이라는 걸 오늘처음 알았으나 그는 끝내 인정해야만 했다. “…하고 싶습니다. 해도 됩니까.” “하든가, 물어보지 마.” 대답하기도 민망하다며 렐리아가 아주 살짝 얼굴을 붉혔다. 블리어는 그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미약하게 달아오른 그녀의 체온을 알아차린 듯이 곧바로 다정한 애무에 들어갔다. 그녀의 도드라진 쇄골에 깊이 입술을 묻고 핥으면서 오른손을 아래로 내려 바쁘게 움직여갔다. 더는 상상할 수 없이 질척하게 휘감겨오는 감도에 만족스러워진 그가 제 하의마저 탈의하고서 그녀를 안아 이불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아침부터 점심까지 둘은 이불 속에서 나오질 않았다. 0143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렐리아는 흔들림 없는 마차 안에 앉아있었다. 워낙 쇼파질이 좋아 오래 앉아있어도 엉덩이가 아프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심드렁히 창문틀에 턱을 괴고서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눈이 내린 평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고 까마득하게나마 웅장한 성과 마을이 드러나 있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고성의 주위로 제법 높다란 건물들이 방사상으로 즐비해있는 번화한 영지였다. ‘그때도 겨울이었는데.’ 문득 아주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설산에서 그에게 주워져 맨 처음 이곳으로 왔을 때의 기억이었다. 쫓겨난 뒤로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 여겼는데 이렇게 제 발로 돌아오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상 수도로 돌아가야 되겠지만 그녀가 수도만큼은 가기 싫다고 하니 블리어가 이를 배려해 아예 목적지를 바꾼 것이다. 수도와 떨어져있으니 지내기에도 비교적 안전할 테고 자기 영지이다 보니 생활에 여유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도 당분간은 영지를 돌보아야한다는 이유로 이곳에서 함께 지내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내가 어쩌다 공작한테 코가 꿰여서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구시렁거리며 렐리아는 거의 다 온 공작령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옆자리에 앉아 잠자코 그녀의 옆얼굴을 감상하고 있던 블리어가 슬며시 운을 뗐다. “코가 꿰인 겁니까.” “암, 코가 꿰인 거지.” “내가 좋아 함께 온 것이 아닙니까.” “공작 자기가 한 말들은 기억 못하나보지. 기억하고 있는 내가 일일이 얘기해줄까?” 그는 미온적인 태도로 렐리아의 말을 슥 무시했다. 이에 렐리아는 거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한평생 곁에 머물러달라느니, 하루도 떨어지기 싫다느니, 어디서 그런 설탕범벅의 말만 배워왔는지는 몰라도 참으로 끈질긴 구애를 해왔던 남자였다. 잠시라도 떨어지면 시들어죽을 것만 같기에 마지못해 승낙하기는 했지만 막상 공작령으로 돌아오니 감회가 남달랐다. “한다면 장거리연애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멀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공작한테 신세만 지는 것도 좀 그렇잖아. 한번보고 말 사이면 몰라도, 그거거든~ 친한 사람일수록 빚지는 거 부담스러운.” “빚진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내가 좋아서 주는 걸 그대가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길 원치 않습니다.” 그리 말하면서 블리어는 창가에 붙어있다시피 한 렐리아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그대로 떨어뜨려놓았다. 대신 자신의 품과 가까워지도록 바짝 끌어당겨 안은 후 가볍게 입술을 맞춰왔다. 렐리아는 또 시작이라는 생각에 눈썹을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두세 번 입술을 떼었다 붙였다가를 반복하더니 곧 혀가 깊이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허리께에 머무르던 그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 소담한 가슴한쪽을 뭉개듯이 쥐었다. 결국 못 참은 렐리아가 그를 밀어내었다. 몇 번 받아주니까 이젠 시도 때도 없었다. “우린 아직 그거잖아, 썸 타다가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 날수로 따지면 사귄지 오 일밖에 안됐다고.” 블리어는 순순히 물러난 채 그녀에게서 완전히 손을 뗐다. 타액으로 젖어든 얄팍한 입술을 무덤덤하게 가라앉혔으나 두 눈은 서운한지 마냥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보통은 말이야, 공작.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커플은 안 이런다고. 손잡고 포옹하고 뭐 이런 거에도 막 설레고 그럴 때라고. 근데 우린 너무 막 나간다고 해야하남.” 풋풋한 설렘이 빠진 연애였다. 오로지 진하거나 편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비유하자면 초고속승진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회사를 다녀 친숙한 사원에게 사장이 덥석 부장자리를 내준다면 사원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게 당연한 것이다. 물론 좋기야하겠지 만은 그것과 비례한 부담감이 들 테다. “가슴을 주무르는 것도 엄청 쉽고, 물론 내가 공작을 그렇게 만든 원흉이겠지만…에잇. 미안하다!” 렐리아가 한 팔을 길게 뻗었다. 섹스 섹스 노래를 불러대다가 결국 하룻밤 같이 잤으니 첫 연애의 풋풋함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이미 진도를 다 뺀 상태에서 이제 막 사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뭔가 부부 같은 편안함도 없잖아있었다. 그의 앞에서 발가벗고 돌아다녀도 새삼스레 쑥스러운 기분이 들지도 않을 것 같다. “그래도 난 좀 천천히 가고 싶거든. 공작은 연인들이 네 명인가 있어서 연애고수일지는 몰라도 난 사귄 건 공작이 처음이고, 연애도 처음인데.” 아무리 남자보다 게임이 더 좋았던 그녀라지만 연애에 대한 환상정도는 있었다. 그걸 충족시켜줄 남자가 없는 걸 현실 탓으로 돌린 채 게임에만 빠져서 그렇지, 아무튼 자신이 그 두근거리는 연애를 한다는 것에 약간은 들뜬 맘도 없잖아 있었다. 다솜이가 왜 그렇게 연애를 하라고 했는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렐리아의 손등을 덮어왔다. 블리어는 그녀와 눈을 맞춘 채 가느다란 손가락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깍지를 꼈다. “그대가 무얼 말하는지 잘 알겠습니다.” 그녀가 빼지 못하게 꽉 쥐고서 블리어는 깍지 낀 엄지를 안으로 숨겨 여린 손바닥살을 살살 문질렀다.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을 움찔했다. 근지럽기도 했지만 한참 차이 나는 손크기에 기분이 이상야릇했다. 그녀가 서로 꼭 쥔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블리어가 다시 그녀를 불렀다. “렐리아. 오늘부터는 내 이름으로 불러주십시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라면 그리해야 옳은 게 아니겠습니까.” “공작 이름으로?” “설마 모릅니까.” “그럴 리가. 흠… 블리어.” “왜 부릅니까.” “공작이 부르라며.” 렐리아는 무심결에 공작이라 말하게 되는 스스로를 깨닫고 슬쩍 입술을 닫았다. 확실히 애인사이인데 공작공작 거리는 것도 이상하다. 문제는 이제와 이름으로 부르는 게 묘하게 낯간지럽다는 거였다. “한번 더 불러주십시오.” “블리어.” “얼굴보고 불러주십시오.” 그 나직한 음성에 렐리아가 손에 위치해있던 눈동자를 정면으로 들어올렸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부쩍 가까워진 거리에서 그녀는 기계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블리어. 블리어. 블리어. 이제 됐지?” “그리 성의 있게 불러주니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당연히 반어법이었다. 내심 기대했던 블리어는 무성의한 그녀의 부름에 누가 봐도 실망한 티를 역력히 드러냈다. 싸하게 표정을 가라앉히고 있는 흑발사내의 모습에 렐리아도 입을 한 댓 발 내밀었다. “그럼 뭐 어떻게 하라고.” “이렇게 하라는 겁니다.”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그가 잠시 상체를 숙여 렐리아의 얼굴 쪽으로 마주 얼굴을 가져갔다. 이에 또 키스하려는 건가 싶어 렐리아가 입술을 안으로 잔뜩 밀어 넣을 때 블리어가 뺨을 스쳐지나가 귓가에서 멈췄다. 말랑한 입술이 귓바퀴를 한번 건드리더니 곧이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렐리아. 나 좀 보십시오.” “으, 닭살. 귀에다 대고 그렇게 부르는 거 극혐인데.” “극혐은 또 뭡니까.” 분명 좋지 못한 단어이리라. 블리어는 확신하고서 ‘어디 네가 한번 해봐라’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봐주었다. 괜한 승부심이 발동한 렐리아는 소파시트에서 엉덩이를 살짝 뗐다. 대신 무릎으로 블리어의 허벅지사이에 있는 시트를 눌렀다. 서로의 깍지 낀 손에 의지해 몸 중심을 잡은 그녀가 살짝 상체를 숙였다. 낮게 뛰는 심장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거리에서 렐리아가 그의 귀에 대고 속닥거렸다. “…야. 나 좀 봐.” “시비 거는 겁니까.” “하라고 해서 해줬더니만.” 끌끌 혀를 차며 렐리아가 다시 원래자리로 돌아가려할 때 블리어가 확 그녀와 맞잡은 손을 당겼다. 소파에서 무릎을 떼려다가 그만 몸 중심을 잃게 된 렐리아가 빠르게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나 블리어는 곧바로 한손으로 작은 뒷머리를 받쳐주며 그대로 그녀를 소파위에 눕혔다. “블리어, 해보십시오.” “…진짜 집요하다.” “다정하게 내 눈을 보면서 불러주십시오.” 렐리아는 쩝하고 마차천장을 바라보다가 어느새 제 시야를 가득 채우며 다가온 남자를 응시했다.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다는 양 남자가 무미건조한 낯에 묘한 흥분을 불어넣고 있었다. 이와 중에 깍지 낀 손에 조금씩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가 안달 나있다는 걸 알아차린 렐리아는 양쪽입술을 길게 끌어올렸다. “블리어~ 찐하게 뽀뽀할까?”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불러주면 안됩니까.” 안 넘어간다는 소리였다. 조금 서운해 하는 것 같아서 렐리아는 이번엔 제대로 불러주기 위해 그와 조용히 눈을 마주했다. 밖에서 땅을 박차는 말발굽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차 안이 고요해지자 렐리아는 그제야 조그맣게 입술을 뗐다. “블리…” 푸훕, 하고 그녀의 타액이 블리어의 안면을 덮쳤다. 블리어는 한번 깊게 눈을 감았다가 무언가를 참아내며 눈을 떠올렸다. “아 감정 잡기 힘들다. 무리, 무리~” “내 얼굴이 그리 웃깁니까.” “웃긴 건 아니고, 분위기 때문에.” “진지하게 분위기를 잡고 있었지 않습니까.” “아니 진지하게가 안된다니까 그러네.” 애초에 달리는 마차 안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렐리아가 머리를 설레 저어댔다. 아무리해도 안 될 거란 의미였다. 그러나 블리어는 그녀 못지않은 집념의 남자였다. 어떻게든 제 이름을 다정하게 속삭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남모르게 조용하면서도 형형히 짙은 녹안을 빛낼 때 그들의 마차가 라콘드 령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성문이 개방되었다. 영주성의 굳건한 철문사이로 마차 한 대가 빨려들어 가듯이 빠르게 입성하였다. 0144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공작성의 모든 사람들이 오랜만에 돌아온 공작을 맞이하기 위해 성 입구로 나왔다. 가문 소속의 사용인들이 계단 아래서 일렬로 길게 줄지어 서있을 때 가신들은 계단 위에서 주군을 기다렸다. 그 가신들 중에서도 그들을 대표하듯 가장 앞자리에는 중년사내가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공작가의 유능한 측근 중 한명인 타렌이었다. 고지식하기로도 유명하지만 평생 공작가에 몸을 담아온 신하답게 일처리 또한 훌륭했다. 전대 공작은 물론 현공작 블리어의 곁을 직접 보좌하는 이였다. 타렌이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공작성 문을 응시하고 있을 때 마침내 철문이 벌어지며 검은 마차한대가 들어섰다. 그들이 기다리지 마지않은 공작이라는 것을 다들 알아차리고 벌써부터 깊이 머리를 조아렸다. 타렌만이 뻣뻣하리만치 고갤 들고 계단 아래 마차를 응시하고 있을 때 마침내 마차문이 열렸다. 오랜만에 보는 것치곤 어딘가 야윈 기색의 검은머리 사내가 내려섰다. 허나 여전히 몸은 건장해보였고 주위를 누르는 위압감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타렌이 곧 안도의 숨을 내쉬려할 때였다. 조만간 젊은 공작이 마차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손바닥과 손을 겹친 채 아래로 사뿐히 내려선 여인이 있었다. 겨울바람에 휘날리는 은발이 더없이 눈부신 여자였다. 그 여인을 본 순간 타렌은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특유의 흥분했을 때 그 스트레스가 눈주름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타렌은 그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알다 마다였다. 여인의 신원을 조사했던 자가 타렌이었으니 말이다. 창부들이 입을 법한 차림새로 입성하였다는 사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현재 입은 옷만 다를 뿐 신분도, 연고도 없는 말 그대로 천출이었다. 오래전 성에서 내쫓은 걸로 알고 있었으나 지금 그 여인을 성안에 다시 데리고 들어왔다. 그것이 무얼 뜻하는지 타렌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단단히도 미색에 홀리신 거구나.’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오랜 세월 보좌해왔던 주군이 저의 믿음을 배반했다. 타렌은 흔들다리 위에 놓인 것처럼 다리를 떨다가 옆에서 저를 잡아주는 드알루 덕분에 겨우 지탱하고 설 수 있었다. 정렬해있는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으며 블리어는 렐리아의 손을 잡아 계단입구 위로 에스코트하였다. 렐리아는 말없이 그의 옆에서 따라 걷기만 했다. “저희들의 주군을 뵙습니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가신들이 일제히 공손하게 머릴 조아리며 반겼다. 물론 그 인사는 블리어에게 향할 뿐 렐리아에겐 조금도 눈길이 가지 않았다. 블리어가 그들과 간단히 영지에 무슨 일은 없었는지 그간의 안부를 나눌 때 렐리아는 그 옆에 비스듬히 서서 주위만 두리번거렸다. 그때였다. “……크흠, 흠.”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들려오자 렐리아는 앞을 주시했다. 그제야 소리가 그쳤으나 렐리아는 저를 마뜩찮게 흘기는 중년남자의 눈과 마주할 수 있었다. ‘…뭐야. 이 할아버지.’ 반쯤 센 머리를 하고 있는 늙은 중년남자는 누가 봐도 고집스러운 생김새였다. 불독상이라고 해도 될 만큼 험상궂었는데 순간 블리어가 그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동시에 주름진 남자의 얼굴이 방긋 펴졌다. “라콘드 전하.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시진 않으신지요.” 곧바로 블리어의 오른편으로 다가온 타렌이 인자한 눈초리를 하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렐리아는 그 순식간의 변화에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정실자리에 앉은 여인이 새로 들어온 첩을 경계하는 것만 같은 괴리감이었다. * 정예 기사단장 드알루는 성내에 훈련장으로 향하는 길을 타렌과 함께 걸었다. 잘 닦인 벽돌길을 걷는 동안에도 타렌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아미를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팔자로 깊이 주름진 입에서 답답한 한숨과 함께 역정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왔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그 아가씨가 뭘 그리 잘못했나.” 타렌과 두 살밖에 차이나질 않는 드알루는 쉰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하게 정정한 중년사내였다. 서로 알고 지낸지 이십여 년, 나이를 먹고서 사적으로 있을 땐 편히 말을 놓는다지만 여전히 대하기 힘든 성격이란 건 여전했다. “그저 두고봅세. 공작께서도 나이가 나이이니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 “그러나 덜컥 아이라도 들어서면…!” “그리되면 후계를 보시는 건데 경사 아닌가. 마음만 맞으시다면 공식적인 비로 맞이하실 테지.” “그게 문제네, 문제. 그 천출이 뭘 노리는지 뻔하질 않나.” “천출이라니, 말조심하게. 신분이라면 남작의 성을 가지고 있던데…,” “사들인 신분일게 불 보듯 뻔해! 내 직접 조사했을 땐 신원조차 밝혀지지 않았다네. 이제와 탐피아의 귀화귀족이라 하면 내가 순순히 받아들일 줄 알고!” 빼어난 미색 하나로 높은 신분의 사내를 홀리고 공작의 아이를 가져 공비가 된다. 이 얼마나 간파하기 쉬운 속내란 말인가. 타렌은 크게 혀를 차며 가슴을 퉁퉁 소리가 나게끔 쳤다. “귀족은 혈통이고, 혈통은 곧 인간의 뿌리 아닌가. 어찌 중요치 않아. 뿌리 썩은 식물이 건강히 잘 자라는 거 봤나.” “그리 따지면 나도 낮은 신분이질 않은가.” “그것과는 다르지 않나.” “흠.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그 여자는 국적도 없는 노예였을 걸세. 그러니 아무리 뒤져도 정보가 나오질 않지! 그리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행색이 어땠는지 내 시녀들을 통해 똑똑히 들었다네. 성노리개로 살았거나, 성노예로 팔리기 직전 운 좋게 도망쳐 나온 거겠지. 난 그 천출을 들인 것이 우리 공작가문에 큰 화를 불러일으킬까 두렵다네. 두려워.” 곧 죽어도 맘에 안 든다며 쐐기를 박는 타렌의 말에도 드알루는 눈 깜짝하질 않았다. 그럼 그렇지 하며 반쯤 수긍하다가 여상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나를 처음 봤을 때도 그렇게 치를 떨었지 않나. 신분 천한 용병이 기사대장을 하고 있다며 말이네. 아직도 똑똑히 기억이 나. 왕국의 검이라 불리던 라콘드 공작가가 한낱 칼잡이 집단이나 용병 떨거지가 될 것이라고 그리 핏대 세우고 험담하던 것을.” “…내가 그랬을 리 없을 터인데, 크흠!” 머쓱해진 타렌이 유독 헛기침소리를 크게 내며 입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드알루는 태연한 눈으로 먼 곳에 있는 훈련장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대에게 인정받았지. 비록 십수 년 걸렸지만.” “…….” “이번엔 그대가 좀 너그러운 시선으로 그 아가씰 봐주었으면 하네. 출생이 어떻든 간에, …사실 확실한 것도 없질 않나. 그대도 봤을 진 모르겠지만 주군께서 연신 그 아가씨를 바라보고 계셨다네. 그 눈의 애정이 남달랐어. 분명 그리 아끼실 만한 이유가 있을 터겠지.” 이렇게까지 강하게 확신하는 이유는 드알루는 공작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단순히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쉬이 남에게 잘 대해주실 분이 아니셨다. 그 냉엄한 판단력과 관찰력은 사람의 내면마저 쉽게 꿰뚫어보니 말이다. 배경도, 신분도, 출생도 마다하고 그를 움직이게 했을만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여겼다. 자신을 단장의 자리에 직접 임명했던 현 공작이라면 말이다. * 공작성의 사람들 중 렐리아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는 무리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젊은 시녀들이었다. 배정받은 지 나흘도 지나지 않아 렐리아의 방은 시녀들의 은밀한 사교장소가 되었다. 예전에 소피아와 매번 하던 짓을 인원만 늘려서 한다고 보면 되었다. 시녀들은 점심시간이나 휴식 때만 되면 찾아와서 기꺼이 렐리아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예쁜 은발미인이 차도 따라주고 쿠키도 주고 손수 머리도 예쁘게 땋아주는데 어떤 시녀가 거부할까. 깐깐한 시녀장에게 들킬까 조심스럽게 찾아가야만 했지만 마음여린 시녀들은 개미지옥처럼 빨려 들어가 렐리아와의 즐거운 시간을 누렸다. 개중에는 최근 삶의 낙이 된 시녀도 있었다. 그녀들은 한번 모일 때마다 방대한 수다를 떨었는데 그것은 렐리아에게 가장 유용한 정보가 되고 귀를 즐겁게 했다. 공작성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혹은 가신들 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가 누군지 말이다. 거기에 젊고 어린 시녀들은 공작성 전체에 렐리아에 대한 평가를 좋게 형성하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었다. 누가 감히 공작의 애인을 대놓고 험담할까 하겠지만 뒤에서 은밀히 형성되는 입지라는 게 있으니 말이다. 모든 소문의 근원지가 되는 시녀들은 렐리아가 천사라느니, 이분만큼 친절하신 분도 없다느니, 인품이 훌륭하시다느니 하며 그녀를 추어주었다. 공작성의 사람들 중 대부분이 좋은 이미지를 가질 때, 단 한명만 무쇠 같은 고집을 꺾지 않는 자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타렌이었다. 타렌은 나흘 만에 개인적으로 렐리아를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한참 벼르고 있다가 드알루의 등살에 못 이겨 마지못해 온 것이었다. 공작이 직접 성에 초대한 정객이었다. 어찌되었든 간에 가신들을 대표해 인사드리는 게 옳았고 그를 모시는 자로서 굽혀야했다. 다행히 때마침 시녀들이 없을 시간이라 렐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그를 방안에 들여보내주었다. 티 테이블로 안내하려 했으나 타렌은 대화를 나누러온 것이 아닌 공작가의 측근으로서 인사하러온 것임을 밝히고서 서있겠다 고집했다. “타렌이라고 부르십시오.” 누가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팍팍 내는 타렌을 눈앞에 두고 렐리아는 고지식한 영감님이라고 생각했다. 듣자하니 이 영감님이 이곳에서 공작이 없을 때 모든 것을 통제하고 관리한다고 했다. 한마디로 공작다음으로 이 공작성을 주무를 권력을 가진 자라 할 수 있었다. 물론 공작의 허가가 필요하겠지 만은 사용인 누구도 그의 눈밖에 벗어나는 짓은 못한다고 했다. “편히…말을 놓아주십시오.” 편한 게 편한 게 아니었다. 어금니를 사리물고서 타렌은 원수를 대하듯 흉흉한 기세로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타렌을 눈앞에 두고서 렐리아는 오랜만에 가식적인 미소를 보였다. 시녀들에게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흠 잡히지 않도록 공손하게 대해야겠지만 렐리아는 ‘자신이 왜 이 할배에게 잘 보여야하는가’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공작이랑 결혼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공작의 아버지도 아니고, 단순히 자신은 공작이랑 사귀는 사이일 뿐인데 말이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말을 놓을 수는 없죠. 같은 집식구끼리 편하게 할아버지라고 부를게요.” “쉰일곱입니다.” “할아버지시네요.” “이래봬도 정정한데 말이지요.” 한 글자씩 짓이기다시피 얘기하는 타렌에게 렐리아는 과장되게 입을 찢어 웃어보였다. 최대한 환하고, 말갛게, 하지만 가식이라는 게 느껴지게 말이다. “할아버지. 나이에 비해 정정하시네요.” 타렌은 눈앞의 새파란 여자가 자신을 대놓고 도발하고 있음을 알았다. 들판에 불이 번지듯 머리끝까지 빠르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으나 타렌은 눈가만 파르르 떨었다. 부글부글 끓는 머릿속과는 달리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은 여기서 물러날 쏘냐, 하는 비장한 눈빛을 띠었다. “할아버지라 부르시니 저도 편하게 손녀처럼 대하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 “네~ 그래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과장되게 호홋 소리를 내자 타렌이 더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내었다. 렐리아는 더 경박하게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타렌도 지지 않으려 더 크게 허허하고 웃어보였다. “한데 말입니다.” 타렌이 인자한 듯이 웃으며 매끄럽게 운을 뗐다. 허나 이어진 말은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하나 걸려서 묻지요. 어디 출신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걷는 자태가 과히 예법에 무지한 여섯 살 난 아이 같더군요. 허허.” “…하하. 그랬나요?” “출생이 천하다 해도 이해합니다. 공작성의 누구도 이해 못한다 한들 저는 다르지요. 그러니 모르는 게 있으면 제게 편히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언제 한번, 참한 귀족여식이 걷는 법을 몸소 가르쳐드리지요.” “할아버지. 무릎도 안 좋으실 텐데…그러시지 않아도 돼요.” “…허허. 무릎 말입니까. 무릎! 그것 참,” “마음만은 고맙게 받을게요. 좋은 할아버지가 생겨서 기뻐요.” 핏줄이 돋은 손을 꼬옥 쥐며 렐리아는 까르륵 웃어보였다. 말 그대로 까르륵이었다. 얼마나 웃긴지 입안에 고인 침이 진동하고 있었다. 고작해야 아버지와 딸뻘 이었지만 렐리아는 그를 완전히 할아버지 취급했다. 탈모조짐이 있다고 꼭 조심하시라고 얘기하자 그에게서도 덕담을 빙자한 비꼼이 쏟아져 나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에 혈관이 돋아날 만큼 하하호호 웃다가 그렇게 첫 대면을 마쳤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젖어있던 타렌의 얼굴이 방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살기등등하게 변했다. 희번덕거리는 눈은 허공을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미친년이 공작성에 들어왔다. 이런 생각을 문을 사이에 두고 렐리아도 하고 있다지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난 듯 해보였다. 0145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블리어는 잠시 집무실에 앉아 예전 기록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가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기록은 작년 지하감옥 사건을 조사한 보고서였다.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녀와 연관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감옥을 이루는 벽 120개와 지하외벽 파손, 당시에는 외부에서 침입한 몬스터의 소행이라 여겼으나 왠지 모르게 속이 찝찝했다. 그 사건현장에 있었던 렐리아와 그녀가 있던 감옥까지 단번에 벽들이 관통되었던 흔적. 여러모로 상황을 따져봤을 때 그녀의 소행이 아닐까 싶었다. 인간의 몸치곤 단단하다고 여겼는데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녔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가녀린 몸으로 말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지금과도 같이 그녀를 사랑할 수 있을 것인가, 아쉽게도 블리어는 그런 우스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첫 만남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설산에서 속옷과 진배없는 옷차림을 하고 있던 여자, 어쩌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은 정말 사실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의심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단번에 수긍하기에는 역시 무리가 있는 얘기이니 말이다. 그녀가 정말로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맞다면 이제까지 자신의 주위에서 벌어졌던 불가사의한 일들도 모두 설명이 된다. 몬스터사체가 주둔지 한가운데에 산처럼 쌓여있던 것도, 절벽을 맞닥뜨렸을 때 갑자기 그 주위의 나무 세 그루가 쓰러져 다리가 생겨났던 것도. 그만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였다.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블리어는 침전된 눈을 하고서 책상위에 올려둔 보고서를 덮었다. 기록을 보관하는 세 번째 서랍 안에 끼워 넣고 서랍문을 닫았으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찝찝한 감정은 그의 가슴을 들쑤셔댔다. 평온한 일상을 위협하는 불온한 예감이었다. * 성의 중간층인 4층 서편계단에 위치한 방으로 블리어는 들어섰다. 전 공작부인이 자주 머물렀을 만큼 성 내에서 가장 화려한 방으로 손꼽히는 방이었다. 그리고 그 격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인이 은발을 늘어뜨린 채 방안 한가운데 소파에 앉아있었다. 다소 늘어진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그 몸매가 돋보였다. “왔어?” 렐리아는 기우뚱 고개를 돌려 지척에 다가온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블리어의 눈길은 그녀가 아닌 티 테이블 위였다.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독서를 할 여자가 아닐 텐데 책이 반듯하게 놓여있었다. 의외라는 눈길로 바라봐주자 그제야 렐리아가 그의 눈길이 꽂힌 곳을 따라 바라보았다. “뭘 보고 있었습니까.” “아. 이거?” 렐리아가 손을 뻗으려했으나 그보다 먼저 그의 손이 가죽재질의 책을 집어 들었다. 그가 책을 펼쳐 내용을 좌르륵 훑기 시작하자 렐리아는 쩝 소리를 내며 뺨을 긁적였다. “시녀들이 놓고 간 건데 요즘 귀족여자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거래. 불륜내용 이랬나. 남편인가? 약혼자 몰래 젊은 기사랑 쿵떡쿵떡하는 얘기던데 나는 그닥~” “흥미 없는 거 맞습니까.” 그런 것치곤 상세하게 잘 아는 것 같다고 블리어가 예리하게 캐물었다. 렐리아는 정면에서 발끈하기보다는 다른 화제로 유연히 넘어갔다. “그보다 공작. 우리 오랜만에 술 마시,” “또.” “?” 뭐가 잘못된 건가하고 가만히 있다가 렐리아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곤 머릴 긁적였다. “아 맞다. 아오, 이거 진짜 버릇됐네.” 공작에서 블리어로 치환되는 과정에 자꾸만 오류가 생겨버리니 당사자도 답답할 노릇이었다. 입술을 찰싹찰싹 때리다가 렐리아는 자신의 손을 붙잡는 그를 올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블리어. 우리 오랜만에 단둘이 술 마실까?” “좋습니다.” 잔잔한 미소와 함께 수락한 그가 곧바로 책을 내려두고 와인진열장에서 값비싼 오르주아산 와인을 꺼내들었다. 와인잔을 그녀와 자신 앞에 세팅한 뒤 옆자리에 등을 묻고 앉았다. 렐리아는 그가 따라준 붉은 와인을 단번에 들이켜며 크으 소리를 냈다. 그것도 잠시 입술에 묻은 와인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낸 후 두리번거렸다. “뭔가 입이 심심한데.” “주방에서 과일이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됐어. 저기에 육포 있으니까 그거 먹자.” 이번엔 렐리아가 몸을 일으켜 건조된 육포조각이 담긴 통을 들고 왔다. 방안에 있을 때 주로 찾는 군음식이었지만 안주로도 제격이었다. 고급입맛의 그는 오로지 와인만을 고집했기에 렐리아는 양반다리 중앙에 육포통을 끼고 혼자 맛보았다. 블리어는 그녀와 얘기를 나누는 게 하루 중 가장 즐거웠으나 오늘따라 마음이 무거웠다. 평소 그녀가 얘기할 때는 잔에서 입을 떼고 경청해주던 그가 연거푸 술만 들이켰다. 와인 석 잔째에 다다랐을 때 렐리아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올 정도였다. 아무래도 얘기를 꺼내려면 술기운이 필요하다고 여겨 술에 의존했던 것뿐이었다. 블리어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고개를 한번 느리게 젓고서 잔 안에 담긴 와인을 내려다보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푸른 눈동자를 마주한 채 블리어는 한동안 굳게 닫혀있던 입을 천천히 열었다. “렐리아. 혹시 오래전 지하감옥에서 일을 저지른 자가 그대입니까.” “…….” 삽시간에 굳은 눈으로 렐리아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 당혹감이 어린 표정은 블리어도 처음 보았기에 살짝 손끝이 딱딱해져버렸다. 그는 쥐고 있던 와인을 내려놓고서 침착하면서도 서둘러 운을 떼야만 했다. “그대를 탓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절대 그대에게 실망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응. 알아.” 렐리아는 애써 담담한 듯 굴었으나 두 눈은 자신 없이 내리깔아졌다. “내가 한 짓이야.” 정말 자신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해도 두려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 정도의 힘이라는 걸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실제로 죽이기도 했기에 그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사실상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렐리아는 거짓 한 점 없이 털어놓았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는 평범하지가 않아. 공작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비정상적인 존재일지도. 뭐 쉽게 말하면 돌연변이 같은 거겠지.” 인간들 사이에 낀 게임캐릭터가 어떻게 평범하겠냐만은. “아, 또 공작이라고 했다.” “괜찮습니다.” “아무튼 그렇다고. 내가 조금은 꺼려지거나 무서워져도 이해해줄게.” 블리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렐리아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다가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어느 정도입니까. 그 힘이라는 건.” “음. 드래곤이랑 맨손으로 싸울 수 있는 정도? 물론 졌지만.” “실버드래곤을 말하는 겁니까.” “응.” 블리어는 더 깊이 침묵했다. 오래전에 그녀가 제게 국가기밀에 해당되는 실버드래곤의 존재에 대해 물었던 것이 기억났다. 그 당시에는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고 경고했었으나 그때엔 이미 실버드래곤과의 접촉이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새에 그런 위험에 휩쓸렸었다고 여기니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 그때였다. “근데 다시 실버드래곤이랑 싸우라고 한다면 안 싸울 거야. 아니 못해. 그땐 내가 살려고 싸운 거거든.” 그래서 필사적일 수가 있었던 것이라고 렐리아는 솔직히 말했다. 허리가 끊기기 일보직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아직도 그 섬뜩한 고통은 잊혀 지지 않았다. 게임이 아닌 현실이란 걸 안후부터는 간혹 그때 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옆구리가 날카롭게 쑤셔오는 기분이 들었다. “공작도 알다시피 내 성격이 좋은 성격은 못되잖아. 숭고한 희생정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롭지도 않고, 사람을 좋아하냐고 물으면 워낙 병신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서 내 사람들만 좋아.” 인류 평화라느니 하며 왕국을 수호하는 거창한 일은 하지 않을 거란 소리였다. 렐리아는 양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이런 힘을 가졌는데도 뒤에 숨어있는 다고 이기적인 쌍년이라고 욕먹을 지도 모르겠지만 어쩌겠어. 나도 내 목숨이 제일 소중한데.” 그 말에 이제야 종일 가슴을 쑤셔댔던 찝찝한 감정이 무엇인지 블리어는 눈치 챌 수 있었다. 동시에 유독 평온해진 마음이었다. 마음이 이러니 딱딱했던 표정도 누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부드레한 눈을 하고서 렐리아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긴 머리칼에 손을 가져갔다. “란게르드 산맥에서의 일도 그대 소행입니까?” “완전범죄 될 수 있었는데 아까비.” 렐리아는 정수리 위에서부터 시작해 아래까지 매끄럽게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얼굴선을 따라 흘러내려온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쓸어 넘겨주었다. 커다란 손에선 그윽한 남자향수 냄새가 맡아졌다. 예전엔 좀 싸했던 것 같으나 최근 들어 어딘가 따스해서 좋아하는 향이었다. “그 많은 몬스터는 어떻게 잡았습니까.” “산에 좀 올라가니까 있던데.” “나무로 다리를 만들어준 것도 그대가 한 겁니까? 내가 곤란해 하니까 그랬습니까.” 뒤에서 몰래몰래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에 블리어는 그녀가 너무 귀엽기만 했다. 그 당시엔 왜 몰라봤던 건지 참 의문이었다. 그녀에게 모질게 굴었던 기억이 여전히 머릿속에 잔존해있는 블리어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에 잠시 입매를 단정히 다물고 있다가 뒤늦게 운을 뗐다. “이제와 얘기하는 거지만 고맙습니다. 그대에게 이런저런 큰 도움을 뒤에서 받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니…. 뭘 새삼스레.” “나는 그대가 참으로 좋습니다. 알게 될수록 더 좋아집니다.” 부드러운 은색머리카락의 끝을 문지르다가 블리어가 입술 앞으로 가져다댔다. 정중하면서도 제법 그 모습이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에 이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아마 지금보다도 훨씬 빨리 사랑했을 겁니다.” “지금 나 탓하는 거야?” “그럴 리 있겠습니까.” 블리어는 머리칼을 놓아주고서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잡아 뒤로 눕히려했다. 렐리아가 그 굵고 단단한 손을 붙잡으며 태연하게 한마디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나 오늘부터 생리.” “밤새 끌어안고 자도 됩니까.” “…그러든가.” 살포시 웃는 그 입술에 블리어가 못 참고 가볍게 입술을 갖다 댔다. 허나 강렬한 육포냄새 때문에 혀는 도저히 집어넣을 수가 없었다. 이럴 때만 눈치 빠른 렐리아는 영악하게 방긋 미소를 지었다. “앞으론 공작 올 때마다 육포 먹고 있어야겠다.” “그래보십시오. 전부 압수입니다.” “공작이 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봐? 하루아침에 영지에 있는 소들 전부 잡아와봐?” “그러기만 해보십시오. 술 저장고를 개방해 영주민들에게 소 대신 보상하겠습니다.” 단 한마디도 지지 않는 그와 기싸움을 하듯이 노려보다가 렐리아는 결국 둥그렇게 눈매를 휘었다. 킥킥하고 개구쟁이처럼 웃음을 터뜨리는 렐리아를 블리어는 품속 깊이 끌어안았다. 그대로 한참을 안기고 안은 채 서로의 온기를 만끽했다. 0146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새벽의 어스름도 숨을 죽인 밤이었다. 은은한 노란 불빛만이 어둠을 밝히는 방안에 한 중년남자가 앉아있었다. 버릇처럼 크흠, 하고 기침소리를 내던 그는 연륜 짙은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맞은편에 서있는 남자는 제법 단단한 몸을 갖춘 젊은 청년이었다. 호리호리한 허리선이 어딘가 날렵하고 잽싸 보이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눈을 피해 접근할 수 있겠나. 방밖을 지키는 호위는 없을 걸세.” “맡겨만 주십시오.” 젊은 남자가 부복자세를 취했다. 이에 흡족한 눈빛을 띤 중년남자는 양팔을 교차하며 단단히 팔짱을 꼈다. “혹여 라도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내 하루 안에 은밀히 꺼내줄 테니 걱정은 말게. 자네에게 피해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야.” “…네.” “일만 잘 처리해주게.” 뒤늦게 남자가 소리 없이 빠져나가고 노란 불빛 속에서 중년사내가 얼굴을 드러냈다. 반쯤 센 회색머리 아래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던 타렌은 창가로 고갤 돌렸다. 그 엄하던 얼굴이 조금은 후련한 낯으로 바뀌었다. ‘…분수모르는 어린년이 마냥 설치게 내버려둘 순 없지.’ 공작의 애인이자 정객신분의 여자를 그가 직접 내쫓을 순 없다. 그러나 내쫓아지게 만들 수는 있었다. 미친 여자를 공작성에서 내쫓을 생각에 타렌은 벌써부터 얹힌 속이 내려가는 기분을 받았다. 달이 휘영청 밝은 게 내일이 참으로 기대가 되었다. * 나른한 오후의 한때를 소파위에 누워 보내던 렐리아는 꿈뻑 잠이 들어있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졸다가 난데없이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흠칫 깨어났다.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슥 거두고서 렐리아는 소파에 길게 뻗어둔 두 다리를 내렸다. “블리어?” 이번엔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렐리아는 흡족함에 입꼬리를 말며 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문 너머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아마도 그가 조금 감동한 탓에 말이 없어진 거라 여기고서 부러 모른 채 그를 불렀다. “블리어?” 렐리아는 문고리를 쥐었다. 반대편에서도 문고리를 쥔 건지 차가운 쇳덩이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아주 살짝 문을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갑자기 밖에서 밀고 들어오는 강한 힘에 렐리아는 반걸음 물러나야만 했다. 그러나 문 틈새로 들어온 자는 새까만 머리칼이 아닌 옅은 금발머리의 남자였다. 뭐야, 하고 당황한 티를 내기도 전에 남자가 강하게 제 양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벽에 밀어붙였다. 단숨에 모르는 남자 품에 갇힌 렐리아는 잠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눈만 껌뻑댔다. 의도치 않고 연약하고 가녀린 여인의 흉내를 내게 됐지만, 어찌됐든 손목을 포박당한 채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동안 남몰래 연모해왔습니다. 렐리아님….” 목소리는 사내치곤 조금 얇은 미성이었다. 살짝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남자는 꽤나 미청년이었다. 머리 위로 하늘거리며 늘어진 금발이며, 호리호리한 체격과는 달리 건실한 몸을 가진 남자는 호스트바에서나 볼법한 그런 류의 남자였다. 예쁜 생김새래도 키는 저보다 훨씬 컸으나 렐리아는 그다지 이 남자에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힘으로 제압당하지 않을 자신도 있었지만 이 상황자체가 우스웠기 때문이었다. “저를 허락해주시면 안될까요?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연극을 해라해, 하고 톡 쏘아붙여주려다 렐리아는 점점 고개를 숙여오는 남자 때문에 입술을 닫아야만 했다. “단 한번만……제게 기회를.” “어딜 주둥이를.” 민첩하게 뻗어진 손이 남자의 입술은 물론 얼굴하관을 꽉 틀어쥐었다. 뼈가 눌릴 만큼 세게 쥐고서 놓아주지 않자 남자가 기겁하며 발버둥치는 게 느껴졌다. 고통에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약간 우스꽝스러워졌다. 렐리아는 좀 더 정성스럽게 얼굴윤곽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래도 여자에게 험하게 손을 대는 스타일은 아닌지, 혹은 그런 명을 받은 건지 놓아달라고 제 팔등만 끙끙 쥐고 있을 뿐이었다.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을 느끼며 렐리아는 코웃음만 쳤다. 일부러 밀회상황을 연출한 뒤에 현장을 덮치려는 수작일 게 뻔했다. 무슨 쌍팔년도 드라마도 아니고, 렐리아는 어이가 없어 한 번 더 코를 먹었다. 마침 그런 불륜소재의 소설이 유행하고 있을 때이니 먹혀들 거라 생각했나보다. 그리고 이걸 누가 지시했는지는 안 봐도 훤했다. “그 영감님이 얼마 찔러줬어.” * 렐리아의 예상대로, 타렌은 블리어와 함께 부랴부랴 현장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정무를 보던 중인 블리어에게 급히 찾아가 어떤 수상한 젊은 남자가 그녀 방에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며 일러바친 것이다. 타렌은 여기서 더 그럴듯하게 혀를 놀렸었다.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고 말이다. 허나 자신이 함부로 정객의 방에 들어갈 순 없으니 공작께서 직접 가셔서 무슨 상황인지 살펴봐달라고 했다. 혹여 흑심을 품고 들어간 자일지 모르기에 급히 달려왔다고 덧붙였다. 그간의 신뢰가 있는 만큼 그가 허풍을 칠 리 없다고 여긴 블리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었다. 그 목격했다던 젊은 남자와 방안에서 들렸다는 이상한 소리가 거슬려서라도 앉아있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재 두 사람은 문제의 방 앞에 멈춰 섰다. 블리어는 잠시 굳은 낯으로 문고리를 쥐었다.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으나 타렌은 그의 뒤에서 은밀히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영지 내에서 가장 여자를 잘 홀린다는 기생오라비였다. 성공만 한다면 두둑이 거금을 치르겠다고 약속했으니 어떤 말로든 그 여자를 꿰어냈을 터다. 지금쯤 침대위에서 한바탕 질펀하게 서로 껴안고 있을 거라고 타렌은 확신했다. 천박한 출생에 문란한 여자가 어디 갈까. ‘…마음에 상처 입혀 죄송하지만 이 모든 건 라콘드 가문을 위한 일……, 이게 그 여자의 본모습입니다!’ 비장한 외침이 타렌의 마음속에서 메아리쳤다. 타렌의 앞에 서있던 블리어가 이윽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펼쳐진 광경은 문란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침대는커녕 소파에 나란히 앉아있던 두 남녀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문을 돌아보았다. 예상과는 다른 그림에 타렌이 문가에 서서 뻣뻣하게 굳어있을 때였다. 이때다 싶어 몸을 일으킨 금발 청년이 놀란 표정을 하고서 늙수그레한 중년남자를 향해 뛰어갔다. 미처 타렌이 피하기도 전에 청년이 그의 어깨에 두 팔을 두르고 와락 안겨왔다. 진한 향수냄새가 물씬 타렌의 코를 덮쳐왔다. “사실은 저 사랑하고 있었어요…, 타렌님을.” 금발의 미청년은 두 눈을 질끈 감고 정확히 팔자주름 위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가 나며 떨어진 순간 청년이 수줍게 눈망울을 빛냈다. 그리고는 냅다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의 바지주머니에 달린 묵직한 돈주머니를 스치듯 발견하고서야 타렌은 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먼저 뒷돈을 찔렀구나! 타렌의 부릅떠진 두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젊은 남자한테 인기 많으시네요~ 할아버지 좋으시겠어요.” 그때 얄밉다 못해 기름처럼 유들유들한 목소리가 가직한 곳에서 들려왔다. 소파에서 이제 막 몸을 일으켜 다가온 렐리아였다. 렐리아는 타렌의 앞에 다가와서는 그가 얄미워죽으라고 씰룩 눈을 휘며 웃었다. 작은 콧구멍이 조금 벌름거렸다. “…왕년에 한가락 하셨나 봐요. 게이로.” 낮게 속삭이며 렐리아가 키키킥, 하고 억눌린 웃음소리를 내자 타렌의 혈압이 미칠 듯이 급상승했다. 단 오초 만에 그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새빨개져있었다. 눈가는 물론이고 입가마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이,…이…” “타렌.” 그러나 앞에서 들려온 짧은 부름에 들쑥날쑥하던 흥분이 쥐죽은 듯 가라앉았다. 타렌은 자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짙은 녹안과 마주했다. 싸늘한 냉기가 흐르는 얼굴은 이미 상황파악을 끝낸 듯했다. 이제야 타렌은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머릴 깊이 숙였다. 여자를 내쫓는데 급급한 나머지, 자신이 성에서 내쫓길지도 모를 최악의 상황에 대해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계집에게 홀랑 빠진 주군이 제 편이라도 들어줄 줄 알았던가. 새파랗게 질린 낯으로 서있던 타렌이 두 손을 바닥으로 내렸다. 넙죽 엎드리려는 그를 놔두고 블리어는 당장 나가라고 차가운 축객령을 내렸다. 답지 않은 호들갑을 떨며 저를 이곳까지 불러들인 타렌을 조금이라도 의심했었어야 했다. 감히 자신을 상대로 자작극을 벌이려했단 것에 블리어는 분기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한갓 연출된 상황에 렐리아를 그런 식으로 오해할리는 없을 테지만 그러도록 부추기려했다는 게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이다. 타렌이 물러나서도 한동안 탐탁지 않은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그나마 렐리아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블리어는 최대한 분을 삭이려 노력해야만 했다. 그가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나를 보좌하는 자가 이런 모략을 꾸몄으니 그대에겐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자에게는 당연히 엄벌을 내리겠습니다. 내 선에서 확실히 처리할 테니 다신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진짜 화났나보다. 오랜만에 보는 그 냉랭하다 못해 살벌한 표정에 렐리아는 혀를 내둘러야만 했다. '그 영감님 진짜 큰일났네.' 엄동설한의 한기가 느껴지는 눈은 아량이라곤 보이지 않았으나 렐리아는 그 무서운 표정 앞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한 발짝 다가가 기분 풀라는 듯 커다란 손을 붙잡았다. “아니야. 내가 알아서 잘해볼게.” 블리어는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는 말랑한 손의 감촉에 약간은 그 눈빛이 유순해졌다. 곱고 하얀 손가락들은 굳은살 박인 딱딱한 손을 한번 조몰락거렸다.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해치려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잘생긴 남자로 날 유혹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용서할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잘 처리할 테니 그대가 괜히 마음 쓸 필요 없습니다.” “으으응. 정년퇴직을 바라볼 나이에 이런 일로 파면당하고 그러면 서럽잖아. 그리고 날 안 좋게 보는 사람이 공작성에서 한둘이 아닐 텐데 그때마다 블리어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아. 내 스스로 좋게 인식을 변화시키고 싶어. 친해지도록 다가가 봐야지.” 오늘따라 말을 예쁘게 하는 그녀의 모습에 블리어는 괴이한 기분만 들었다. 그가 사랑하는 여인은 이런 말을 할 여인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어딘가의 개념 꽉 찬 현명한 여성을 코스프레 했으나 렐리아는 속에도 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었다. 좋게 인식을 변화하기는 개뿔 당한 건 당한 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그저 이 고집스런 영감님이 앞으로 어떻게 나오나 완전히 재미 들린 채 겉으로만 말갛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날. 타렌의 개인집무실로 렐리아가 직접 선별한 선물들이 보내졌다. 다름 아닌 피부 탱탱한 젊은 남정네들이었다. 구릿빛 피부의 근육질 남성부터 희고 마른 체격의 남성까지 취향별로 모아진 반라의 그들은 부담스럽게 타렌의 주위를 둘러쌌다. 집무실을 가득 메운 남성들은 겨울임에도 상반신을 시원하게 드러내놓고 있었다. 그 중 타렌의 책상 양옆에 선 두 남자는 업무를 보고 있는 타렌에게 큰 이파리로 부채질을 해주었다. 여리여리하게 생긴 미청년들은 간혹 포크에 과일을 찍어 타렌의 입에다 가져다댔다. 세레나데를 부르거나 하프연주를 하거나, 가끔씩 아들뻘 되는 남자들은 타렌의 주름진 뺨에 입을 맞춰왔다. 렐리아에게 따로 주문사항을 받은 자들이었다. 결국 타렌은 부르르 주먹 쥔 손을 떨다가 책상 위가 뒤흔들릴 정도로 크게 쾅 내리쳤다. “나가!!!!” 우렁찬 목소리가 개인집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불호령에도 아랑곳 않고 미청년들은 고정하시라는 듯 타렌의 어깨를 쓸어 만져주었다. 기어코 폭발한 타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근처에 있던 사내들을 향해 삿대질을 일삼았다. “나가! 당장 나가! 당장…!!” 핏대를 세우고 씩씩대던 그가 부채질을 하던 남자의 등을 두 손으로 힘껏 밀쳐댔다. 그러나 타렌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건장한 젊은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에서 밀리는 탓에 강제로 내보내지도 못하고 타렌은 결국 뒷목을 붙잡고 아이고, 아이고야 하는 시름겨운 소리를 냈다. 십년은 폭삭 늙은 것 같은 얼굴로 그가 스트레스에 두 눈가를 바르르 떨고 있을 때였다. 그때 타렌을 구해주러 집무실에 등장한 자가 있었으니 기사단장 드알루였다. 쉰다섯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곰처럼 산만한 덩치에 시원하게 바짝 깎은 머리가 카리스마적인 중년남성은 문간에 서서 젊은 남자들을 휘 둘러보았다. 이에 미청년들의 분위기가 숙연해지며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를 때, 드알루의 등 뒤에 숨어있던 렐리아가 씨익 웃으며 얼굴을 드러냈다. “드알루 삼촌. 제가 할아버지 도와드리라고 보낸 일꾼들이에요.” 렐리아가 소개해주자 곧바로 미청년들이 드알루를 향해 깍듯하게 인사해보였다. 드알루는 그들을 기특하게 바라보며 수고한다고 짤막한 말을 건넸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타렌은 드알루에게 미쳤냐는 눈빛을 노골적으로 쏘아 보냈다. “아 맞다. 삼촌, 아까 연무장 구경시켜주기로 하셨죠?” 하지만 드알루는 못 본체하며 제 팔을 잡아 이끄는 딸뻘되는 아가씨를 따라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우락부락한 아들만 셋인 드알루에게는 확실히 이런 붙임성 좋은 애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삼촌 연무장 완전 기대된다~” 사이좋게 다시 집무실을 벗어나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타렌은 부들부들 턱을 떨었다. 잇몸 째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두 살 차인데 누구는 할배고, 누구는 삼촌이라 불리니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에게 진정하라며 젊은 미청년들이 모여들었으나 타렌은 “예끼, 이 미친놈들!”하고 역정을 내며 그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났다. 0147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천박하든 문란하든 간에 그냥 상종 못할 미친 여자라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어야했다. 주군은 어쩌다 이런 정신 나간 계집에게 마음을 줘버린 건지, 타렌은 하루하루가 눈앞이 다 깜깜하기만 했다. 물론 펄쩍 뛸 듯이 질색하는 그의 반응에 재미 들려 렐리아가 더 과하게 군다지만 그 사실을 타렌이 알리 만무했다. 공작가의 미래가 어둡다. 그러나 타렌의 그런 걱정과는 달리 그녀가 온지 8개월이 넘도록 공작성은 화평하기만 했다. “할부지. 용돈 줘.” 제게 두 손을 내밀고 책상 너머에 쭈그려있는 은발의 여자를 타렌은 오늘도 미친년 보듯이 흘겼다. 하지만 곧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떨떠름하게 입을 열었다. “얼마가…필요하신지요.” “할부지 전재산.” 완전히 썩어 들어간 타렌의 얼굴에 대고 렐리아는 방정맞게 키득키득 웃었다. 이 재미로 산다는 듯이 말이다. 예전 같았으면 철 좀 들라는 잔소리가 대번에 날아들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흠. 제가 지금은 바쁘니 장난은 나중에 받아주겠습니다.” 타렌은 무시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이젠 대수롭지도 않다. 한때는 누그러져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태어나기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릴 적엔 할아버지가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고 잠잠히 얘기하는 렐리아의 말에 잠시나마 혹했던 흑역사가 존재했다. 그러나 심심하면 제게 찾아와 시도 때도 없이 우스갯소리만 늘어놓는 계집을 예쁘게 봐주려도 봐줄 수가 없었다. 품행을 조신하고 바르게 해라고 그리 일렀건만 들은 체도 안했다. 한 고집하는 렐리아도 어떻게 보면 그와 동류이리라. 현재에 이르러선 기피대상 1호로 자리매김한 렐리아였다. “할부지. 내가 앞으로 할부지한테 잘할게요.” “제게 잘할 필요 없으니 정신만 좀 제대로 붙잡으시지요, 크흠…!” 타렌의 까칠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렐리아는 씨익 웃기만 했다. 저를 뒤에서 미친 계집이라고 부르는 그를 알고 있으나 그래서 더 재밌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욕쟁이 할배 같아서 괜히 더 정겹기만 했다. 일부러 욕을 먹으려고 촐싹대고 방정맞게 굴 때도 있었다. 최근 들어 반응이 조금 싱거워졌다지만, 그래도 미운정이 들었는지 타렌과 하루에 한 시간은 꼭 함께 있어야 직성이 풀렸다. 물론 렐리아 본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였다. 타렌은 그 한 시간도 가능한 피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럼 할부지. 내일도 올게.” “…크흠!” 제발 오지 말라는 뜻에서 그가 마른 기침소리를 내자 렐리아는 더 과하게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왔다.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것은 좋았으나 이제 어디 가지? 하는 생각이 점령했다. 잠시 머리를 비우고 걷기만 하다가 렐리아는 서편복도의 나선형 계단에서 올라오는 남자를 발견했다. 어두운 흑발과 절묘하게 잘 어울리는 남색의 베스트와 검은 정장바지를 입고 손목에는 과하지 않은 얇은 은시계를 착용했다. 끝내주게 훤칠하고 능력있어 보이는 남자를 복도난간에서 염탐하며 렐리아는 그가 자신의 층까지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의 구두 왼발이 마지막 칸을 밟고 올라서자 그녀는 잽싸게 몸을 움직였다. “블리어~” “……?” 블리어가 자상한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기까지 2초도 걸리지 않았다. 관심을 뭉쳐놓은 것처럼 열렬한 눈동자는 조용함을 가장한 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갔다 오는 길입니까?” “응. 할아버지 만나고 왔어.” 무더위가 가시지 않은 늦여름에 맞게 렐리아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조금은 매끈하게 신체에 달라붙는 원피스의 실크소재는 흐벅진 가슴라인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매일 보는데도 불구하고 블리어는 그 잠시를 못 참아 농염한 몸매를 자신도 모르게 훑어 내렸다. 렐리아에 관해서라면 언제든 참 부지런해지는 눈이었다. “또 그런다. 머리 떡지게 왜 자꾸 만지는 거야.” 약간 툴툴대는 목소리에 멈칫 블리어의 손이 거둬졌다. 사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한 탓에 블리어는 조금 놀라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와 있을 때는 유독 머리를 만지게 되는데 이젠 거의 반사적으로 나오는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다. 어쩌다 이런 습관이 배어버린 건지 블리어는 자신에 대한 깊은 고찰에 빠졌다. 한동안 일자로 다물린 입매가 무언가 깨달음을 뱉어내려 달싹거렸다. “만지고는 싶은데 어딜 만져야 될지 모르니까 가장 가볍게 머릴 만지는 것 같습니다…흐음. 그렇다고 욕구불만은 아닙니다만.” “그냥 만져. 뭐 어때.” 그렇게 깊게 생각해야 되는 문제냐며 렐리아는 답답함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반성하는 아이를 타이르는 어머니처럼 그의 양팔을 붙잡아 제게로 돌려세운 후 발꿈치를 들어 눈높이를 맞췄다. “내 어디가 가장 만지고 싶은데?” 돌발적이다 못해 도발적이었다. 그녀의 갑작스런 공세에 블리어는 잠시 얼음처럼 굳어 있다가 서서히 표정을 풀었다. 살짝 크게 벌어진 눈이 곧 다시 무덤덤하게 가라앉았으나 목에는 알게 모르게 미열이 올라와있었다. "알겠다." 미약하게나마 당혹감을 표출했다는 걸 눈치 챈 렐리아가 허리를 피고 가슴을 한껏 곧추세웠다. 짓궂게 입술을 휘어 올리더니 그의 한손을 붙잡아 제 가슴 앞에 닿을 것처럼 가까이 가져왔다. "가슴 만지고 싶은 거지? 만질래?" “그런 말은 대낮 말고 밤에 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블리어는 정중히 사양했으나 사랑스러운 눈길은 그녀의 이목구비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조금 뒤에 있을 가문회의 때문에라도 자제하기 위해 반걸음 물러섰다. 은근히 거리를 두는 태도에 렐리아는 주위를 슥 돌아보고는 복도에 아무도 없자 대놓고 들러붙어왔다. “나 오늘 안전한 날인데~” “알고 있습니다.” 사귄지 어언 8개월 차 블리어는 그녀의 생리주기는 물론 가임기, 배란일까지 꿰고 있었다. 그녀가 달력에 체크한 걸 자기 일처럼 꼼꼼히 살피고 예상일을 계산하는 법까지 책을 통해 알아두었다. 그러다보니 간혹 그녀의 월경시작이 하루라도 늦춰지면 그날 내내 마음 써야만 했다. “우리 안한지 벌써 며칠이나 됐는지 알아?”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는 석상같이 단단한 사내 가슴팍에 제 폭신한 가슴을 붙여왔다. 과장스러운 푸념조가 흘러나온 건 바로 이 뒤였다. "기억 못하겠지, 알아알아. 항상 내가 먼저 하자고 졸라야 되고 블리어는 관심도 없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사실 어제부터 하고 싶었는데 눈치 없는 블리어는~ 방에 오자마자 바로 자버리고 말이야. 피곤해보여서 깨우지도 못하고. 아침에는 눈뜨니까 일하러 사라져버리고.” “그래서 섭섭했습니까.” “그렇다고 섭섭한 건 아니고. 뭐 오늘도 안 해주면 엄청 섭섭해질듯.” 툴툴거리는 그녀의 앞에서는 강철처럼 굳건한 의지도, 냉정한 이성도, 단호한 다짐도 모두 소용없었다. 모든 게 스러지고 나면 그녀를 향한 욕정만이 그의 아랫도리에 남게 되었다. “그 머릿속엔 오로지 섹스밖에 들어있지 않습니까. 사랑스러운 여자 같으니.” “블리어가 할말은…으응?” 쪽 입술을 틀어막으면서 블리어가 본능에 충실한 자세로 달려들었다. 성난 짐승처럼 두 팔이 그녀의 아래허리를 꽉 옭아매고 놓아주지 않았다. 렐리아는 손만 오므렸다 폈다하며 진한 키스를 받아주다가 바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맞닿은 입술이 더욱 깊게 파고들고 더 좁아질 수 없을 만큼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나 블리어는 계속해서 밀어붙여갔다. 렐리아는 그가 한걸음 다가오면 따라 뒤로 한발 물러나는 식으로 받아줘야만 했다. 등이 두어 번 벽에 닿았으나 렐리아는 뜨겁게 키스를 해오는 그 때문에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그동안 블리어는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잘 이끌어 근처 방문을 열었다. 방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에도 두 사람의 입술은 떨어지지 않고 더욱 끈적끈적하게 서로에게 달라붙었다. 낡은 헌책과 마른 종이냄새가 물큰 코끝에 풍겨오자 그제야 렐리아는 이곳이 성 어딘가의 작은 서재 안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속 주춤주춤 밀려나다가 이윽고 그녀 몸이 뒤에 있던 책상에 의해 가로막혔다. 블리어는 그녀 허리를 옭아매던 팔을 풀고 한 손은 책상 모서리를 짚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벅지 속에 밀어 넣었다. 스르륵 올라가는 치맛자락에도 아랑곳 않고 렐리아는 입안에서 진득하게 움직이는 그 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타액이 입안에 흥건히 맺히자 달짝지근한 그의 숨결과 함께 들이켰다. 그 따스한 수증기 같은 숨결은 몽글몽글한 형태를 가진 것처럼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조금 애가 타는 기분이었다. 렐리아는 허겁지겁 원피스 아랫단을 완전히 허리까지 끌어올리고 팬티가 드러난 엉덩이를 책상에 걸쳤다. 겹쳐있던 두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하.” “숨 안찹니까.” "조금…" 작은 얼굴에 진 그늘이 떨어져나갔다. 블리어는 눈동자만 내려 그녀의 하반신을 바라보다가 바로 손을 뻗었다. 렐리아가 속옷을 벗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바로 둔덕아래를 매끄럽게 왔다 갔다 움직이는 커다란 손이었다. 그는 조금씩 천천히 렐리아를 책상 유리덮개 위로 눕히고서 한손으론 자신의 바지앞섶을 풀어헤쳤다. 성급한 손길 뒤에 다시 따뜻한 키스가 이어졌다. 끈끈하게 블리어의 등에 눌러 붙는 햇살은 늦여름답게 따가웠다. 달아오른 체온을 느끼기 위해 렐리아는 넓은 등을 여유롭게 쓰다듬다가 조금씩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를 끌어안았다. 햇빛을 등지고서 허리를 움직이는데 집중하던 그가 별안간 움직임을 늦췄다. 더운지 셔츠의 팔뚝을 걷어 올리자 손목에 채워진 얇은 은시계가 햇살을 받아 은은히 반짝였다. 렐리아는 투명한 땀방울이 스민 그의 날렵한 턱 아래를 바라보다가 문득 머리 옆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을 돌아보았다. 불거진 힘줄과 손목뼈가 조각한 것처럼 툭 튀어나와있었다. 장난기가 돋아 손가락으로 살살 손목뼈를 쓰다듬어주자 바로 그의 미간이 확 좁아지는 게 보였다. 렐리아가 헤 입을 벌렸다. “아 귀여워.” “내가 말입니까.” “이럴 때 얼마나 귀여운지…으응, 모를 걸. 갑자기 하지 마.” 강하게 밀어붙여 올리는 그의 허리짓에 렐리아가 벌린 다리를 살짝 안으로 움츠렸다. 그 사이에 낀 굵다란 허리는 중간에 멈추는 일 없이 부지런히 움직여댔다. 무표정해보여도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가끔씩 새까만 눈썹을 추켜세우거나 갈증이 나는지 마른 입술을 축였다. 찌푸린 아미가 예뻐서 렐리아는 잠시 넋을 놓고 보고 있다가 훅 허리 뒤를 눌러오는 손에 다시 한번 놀라야만 했다. 어정쩡하게 그에게 매달리자 성마른 손길이 바로 허리를 지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저를 애태울 생각인지 다시 놓고 가슴부근을 느릿하게 배회하기만 했다. 하지만 렐리아는 애가 타기보다는 이 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에게 집중한 채 안달 나있는 그 표정이 좋았다. 자제력이라곤 보이지 않는 구겨진 표정이 예뻤다. 예쁜 건 언니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인 줄 알았는데 눈앞의 이 남자가 너무나 예뻐 보이는 건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도 씌었나보다. “……큿.” 간간이 억눌린 소리를 내기 위해 벌어지는 입술은 또 얼마나 섹시한지 모른다. 렐리아는 몽롱해진 눈을 그와 맞추며 터져 나오는 신음 속에서 그를 불렀다. “…응…읏, 키스해읏…줘.” “하아…….” “키스…으응.” 삼초도 걸리지 않아 바로 입술을 맞춰온 그가 부드럽게 입안을 헤집어놓았다. 렐리아는 그의 뜨거워진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흥분에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황홀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껏 부풀며 뜨거운 액을 토해낸 살덩이가 미끄러지며 쑥 빠져나가자 렐리아는 허무감에 다리를 오므렸다. 블리어가 그녀의 몸을 일으켜준 후 다정하게 손수 흐트러진 매무시를 정리해주었다. “회의가 있습니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하는 그는 어느새 다시 단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렐리아는 시시하다는 양 혀를 살짝 빼물고 툴툴댔다. 팬티는 언제 의자에 던져놓았는지 의자 팔걸이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심드렁하게 팬티나 주우러가려할 때 블리어가 기습적으로 그녀의 뺨에 입술을 맞춰왔다. "오늘 밤에 기대하십시오." 미안한 눈빛과는 달리 기다란 입술은 시원하게 올라가있었다. 블리어는 손목단추를 바르게 채우고서 바로 작은 서재를 벗어났으나 렐리아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뺨만 문지르고 서있었다. “허…허…저 미췬…내가 좋아할 줄 아나.” 그렇게 렐리아가 자기 방으로 돌아왔을 때 방청소를 하고 있던 시녀하나가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했다. "여,열나시는 거 아니세요?!" 목부터 머리끝까지 벌개져서 방에 돌아온 렐리아로 인해 시녀들은 얼음찜질 도구를 구하느라 분주해져야만 했다. 0148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깨끗이 씻은 렐리아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틀어 올리고서 욕실에서 나왔다. 침대위에는 이미 샤워를 끝마친 블리어가 앉아 독서 중이었다. 물기라곤 없는 검은 머리칼은 밤인데도 단정했고, 굳이 흐트러진 구석을 찾는다면 쇄골아래까지 편히 푼 칼라 단추정도일 것이다. 그에 반해 물기가 촉촉하게 피부에 어린 그녀는 희고 보드라운 가운하나만 달랑 입은 채였다. 심지어 그 속에는 팬티조차 입질 않았다. 렐리아는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기발하게도 잘 돌아가는 제 머리를 칭찬했다. 지적이고 차가운 얼굴로 고상한 취미 중이신 애인님을 놀려줄 속셈으로 그녀는 침대로 기어 올라왔다.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상체를 당당하게 쫙 핀 렐리아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가운 끈의 매듭부분을 단단히 붙잡았다. “블리어. 여기 봐봐.” 블리어가 책에서 렐리아를 향해 눈길을 준 순간, 렐리아는 기다렸다는 듯 가운을 활짝 벌렸다. 그와 동시에 블리어의 손에 들려있던 묵직한 책이 내던져지다시피 바닥에 나뒹굴었다. 빠르게 뻗어져온 손은 벌어진 가운속의 어깨를 붙잡고 렐리아를 그의 몸 아래 무너뜨렸다. 그녀가 눕자 가운이 더 활짝 벌어져 아름다운 나신을 훤하게 드러냈다. 블리어는 고개를 숙였다. 물가에 목을 축이러온 맹수처럼 뽀얗고 탐스런 속살에 입을 가져다댔다. 배꼽에서부터 키스하며 올라가더니 조금 쳐진 소담한 가슴을 한입 크게 물었다. 물론 이는 전혀 쓰지 않고 입술로만 부드럽게 물었다. 향긋하고 따스한 여인의 체취가 입 안 가득 퍼졌다. 블리어가 서서히 혀를 움직이려할 때 렐리아가 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쭈욱 밀어냈다. “빨지 마. 미쳤어, 미쳤냐고?” “달려들라고 한 행동이 아닙니까.” “아니거든. 보라고 한 행동이었거든.” 렐리아의 말에 블리어는 조금 탐탁지 않은지 가라앉은 표정을 했다. 그러나 몸은 순순히 물러났다. “그런 식으로 날 애태울 생각이었습니까.” “흥이다. 놀래켜 줄 생각이었거든요.” 사실 그의 말도 맞지만 렐리아는 제 속내를 들킬까 괜히 퉁명스레 받아쳤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후 몸을 옆으로 돌리려할 때 블리어가 다시금 팔을 뻗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놔. 팬티입고 잘거야.” “속옷 내가 골라줘도 됩니까.” 귓등에서 조근조근 속삭여온 말에 렐리아는 어디 한번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와보란 듯이 거만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여보았다. 그녀를 놓아준 블리어는 바로 옷장으로 걸어가 얇은 천 하나를 쥐어들고 왔다. “또 끈이야?” 참 무서울 정도로 한결같은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렐리아는 야시시한 팬티를 받아들고서 해괴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떨었다. T팬티는 아닌, 비키니처럼 골반 양옆에 리본으로 묶는 형태였는데 블리어는 자기가 묶고 싶은지 뚫어지게 눈빛을 보냈다. “…꼭?” 그래야겠냐는 눈빛으로 마주 바라봐주자 흑발남자는 무덤덤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는 어슬렁어슬렁 대는 거대한 맹수처럼 자신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탔다. 왼발먼저 팬티를 꿰고서 나머지 오른발에도 마찬가지로 꿰어 넣자 바로 그가 엉덩이아래까지 끌어올려줬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었지만 렐리아는 티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블리어를 올려다보며 능글거렸다. “카리스마 어디 갔어? 응?” “…….” “카리스마 어디 간 거야? 나 카리스마 있는 블리어가 좋은데.” 남자의 단단한 엉덩이를 톡톡 쳐주자 블리어가 리본을 묶어주다 말고 느릿하게 입술을 부딪혀왔다. 가볍게 아랫입술을 한번 빨아주고는 다시 팬티리본 묶기에 집중했다. 투박한 손가락들은 이젠 제법 능숙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쁘게 묶어준 후 떨어져나간 손길에 렐리아가 잘했다고 칭찬해주려 할 때 블리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렐리아. 사실 긴히 할 얘기가 있습니다.” “음 뭔데?” 여전히 그 아래 누운 채 렐리아는 동그랗게 눈을 떴다. 어느덧 침체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장난기는 금세 종적을 감췄다. 정말 중요한 얘기인지 그는 눈길조차 마주쳐오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자 렐리아는 손을 들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혹시 헤어지잔 거 아니지?” “…….” 그 얘기에 외려 그가 더 놀란 듯 보였다. 블리어는 손을 내려 자신의 셔츠를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말아 쥐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얘기했다시피 나는 그대 없인 하루도 못삽니다.” “또 오바한다. 흠.” 렐리아는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부끄러워하는 여인을 블리어는 한없이 자상한 눈길로 내려다보았으나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목울대를 타고 조심스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생활을 계속 이대로 유지해야 될지 고민입니다.” “블리어는 이 생활이 불만인 거야?” “불만일리 있겠습니다. 하루가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달에 적어도 열 번이상은 관계를 가지지 않습니까. 나는 그대가 어느 날 덜컥 아이를 가질까 걱정됩니다.” “…왜?” “아이를 가지는 것은 기쁜 일이나, 그대가 원치 않는 회임을 하는 것은 솔직히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든 그대를 책임질 수 있다지만 그대는 그걸로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블리어는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내려 침대위에 누르고서 부드럽게 깍지를 껴왔다. 겹쳐진 두 손을 렐리아는 힐끗 눈을 굴려 바라보다가 뺨에 닿는 두터운 온기에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임신만큼 그대를 힘들게 만드는 것도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아이를 낳는 것도 기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마할 수 없는 일인데다 우린 연인사이이니 말입니다.” 그의 다른 한손은 하얀 뺨을 다정하게 여러 번 쓸어 만져주기 시작했다. “그래서 늘 걱정만 됩니다. 그런데 그대는 매일같이 정면에서 유혹해오니 거부도 못하겠습니다. 그대만 안으면 절제심이 사라져버리니…, 내 말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런 생각까지 했었어…?” “매일하던 생각을 얘기하는 것뿐입니다. 그대가 월경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드는 줄 압니까.” 혼낼 것처럼 약간은 엄한 눈초리에 렐리아가 아랫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이에 그녀를 담고 있던 눈동자의 단호함이 물에 닿은 솜사탕처럼 녹아내렸다. 블리어는 어느 때보다도 달달하게 키스해왔다. 혀로 부드러운 아랫입술 안을 살살 문지르다가 도톰한 입술을 입힘으로 빨아들였다. 얕게 밀려들어오는 타액을 삼켜 목을 축인 후 블리어가 입술을 뗐다. 서로의 코가 닿은 거리에서 블리어가 나직하게 숨결을 뱉어냈다. “이제와 얘기하는 거지만 우리 결혼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음?” 키스의 여운을 느끼고 있던 렐리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결혼? 어, 진짜로?” “그럼 가짜로 얘기하겠습니다.” “혼전임신 얘기였잖아.” “그래서 결혼하자는 거 아닙니까. 이제까지 내가 한 얘기는 뭐로 들었습니까.” 블리어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멍한 표정의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손을 내려 가운 앞섶을 여며주고 끈을 동여매 거의 무방비상태로 드러나 있던 가슴을 가려주었다. “혹 내가 남편감으로는 부족합니까.” “그건 아냐. 블리어만한 사람이 또 어딨다고….” “그럼 평생 내 곁에 있는 게 부담스럽습니까.” “그건, 잘 모르겠어.” 솔직하게 대답하며 렐리아는 제 옆에 조용히 눕는 블리어를 돌아보았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그와 함께 이렇게 사는 건 어떨까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근데 블리어랑은 늙어서 이렇게 같이 지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 “나돕니다.” 블리어는 동조해준 후 잠시도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녀의 팔과 옆구리 사이를 파고들어 바짝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겼다. “결혼합시다. 잘해주겠습니다, 평생.” “흐음, 말로만?” “서면계약으로 하면 결혼해줄 겁니까.” “하여간 한마디도 안 져.” 킥킥 웃음을 터뜨리며 렐리아는 단단한 품에 안겼다.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음 하는 소리만 그들 사이로 흐르자 별안간 블리어가 희고 동그란 이마에 소리 없이 입술을 붙여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합니까.” “블리어랑 결혼해서 애기 가지면 기분 어떨지 생각하는 중이야.” 예상외의 대답에 블리어는 한번 더 깊이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렐리아는 간지럽다며 바로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다 홱 하고 다시 머리를 치켜든 그녀가 블리어의 턱 아래에서 빙그레 웃었다. “애기이름은 블리블리로 짓자.” “블리블리 라콘드 말입니까. 있지도 않은 아이에게 미안해지는 건 또 처음입니다.” “딸이면 사랑스럽게 자라라고 러블리. 러블리 라콘드 어때?” “…진담입니까.” 아쉽게도 블리어는 그녀의 미래 자녀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줄 수 없었다. 이름부터가 진입장벽이 컸기 때문이다. 그가 하도 진지해보여서 렐리아는 뒤늦게 장난이었음을 솔직히 밝혔다.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뒤로하고 렐리아는 이번엔 질문을 던졌다. “만약 우리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면 누구 닮았으면 좋겠어?” “그대는 누굴 닮았으면 좋겠습니까.” “난 오바마.” “오바마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농담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나 진지하게 생각해주니 참으로 감격스럽습니다.” “킥킥. 알겠어, 농담 그만할게. 이번엔 하나둘하면 솔직하게 답하기다? 하나, 둘.” “날 닮았으면 합니다.” “나 닮았으면 좋겠어.” 거의 동시에 나온 대답은 각자 서로를 가리켰다. 한 치도 물러섬 없는 기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렐리아가 바로 능구렁이 같은 태도를 고수했다. “그럼 뭐 반반 섞자.” 까짓 거 그러자는 그녀의 말에 블리어는 “잘도 그리 되겠습니다”하고 미온하게 웃어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포옹자세를 바꿨다. 블리어가 내준 굵다란 한 팔을 베개 삼아 베고서 렐리아는 그와 나란히 돌아본 채 누웠다. “뭔가 이런 점은 블리어 닮았으면 좋겠다, 세심하고 친한 사람한테 엄청 잘해주는 거. 그리고 친절한 거, 아 그게 그건가?” “나는 그대처럼 주위에 무디고 사람편한 분위기를 닮았으면 합니다. 또 대담한 성격이나 악착같고 의지가 강한 점도 좋겠습니다. 그리 된다면 말입니다.” “뭔가 이런 얘기하니까 우리 진짜 결혼한 거 같다.” “나도 그런 기분입니다.” 설익은 과일처럼 새삼 풋풋하고 설렌 기분을 받은 렐리아처럼, 블리어 또한 늘 눕던 침대가 신혼방의 침대처럼 느껴졌다. 이 아늑함이 더 오래가기를 바라며 그가 렐리아에게 얘기했다. “결혼에 대한 대답은 지금 당장 주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잘 생각해보십시오.” 낮게 시를 읊조리듯 잔잔한 목소리였다. 반쯤 내리깐 눈을 그대로 깊이 감으며 블리어가 또 한 번 속삭여왔다. “눈 감고 있을 테니 결혼에 대해 긍정적이라면 입 맞춰주십시오.” 차분하게 눈을 감고 기다리는 그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 못지않게 미목이 황홀했다. 약간은 서늘하게 올라간 눈매임에도 불구하고 한번쯤 입을 맞춰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렐리아는 서서히 얼굴을 가져갔다. 쪽, 하고 맞춰주고서 바로 당돌하게 혀를 집어넣어 먼저 딥키스를 시작했다. 입안을 활발하게 휘저어대는 그녀의 혀에 블리어는 기어코 눈을 떠서 렐리아를 말려야했다. 블리어가 원하던 것은 버드키스였다. 새 부리가 콕 닿는 것처럼 짧지만 사랑스러운 키스를 그녀가 해주기를 바랐으나 짧은 혀는 물 만난 것처럼 날뛰어댔다. 그러나 렐리아는 멈추지 않고 입술을 밀어오며 반쯤 몸을 돌리고 있던 그를 완전히 천장을 향해 뒤집어버렸다. “블리어. 이대로 잘 거 아니지?” 0149 / 0172 ---------------------------------------------- 사라진 계정입니다 젖은 입술을 휘며 렐리아는 은근히 영악하고 유혹적인 미소를 보였다. 수건을 풀자 물기에 젖은 긴 머리칼이 일자로 흘러내려왔다. 어느새 제 복부위로 올라와 민망하게 두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모습에 블리어는 한쪽 눈썹을 슥 휘어 올렸다. 그 반응에 만족스러워진 렐리아는 그가 묶어주었던 가운 끈을 풀어헤치고 순식간에 가운을 허리아래까지 끌어내렸다. 탐스런 젖가슴이 작게 출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도 하고 내일도 섹스하자. 그러니까 내일아침에는 꼭 나 깨워? 모닝섹스하고 싶단 말야. 나 배려해줄 필요 없으니까 눈뜨자마자 덮치라고.” 크고 작은 근육들로 잘 짜인 복부를 툭툭 주먹으로 치며 렐리아는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알았어? 몰랐어?” “알겠다고 안하면 뭘 하려고 그럽니까.” 블리어는 그 앙칼진 협박에도 바위처럼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이에 렐리아는 골몰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뒤늦게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기발한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곧바로 그녀의 엉덩이가 하복부에서 물러났다. 대신 그의 허벅지중앙에 앉아 바지앞섶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나 새로운 거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남들 다하는데 우리만 안하는 거 같다고~” 벌어진 바지앞섶에서 또 주섬주섬 팬티를 젖힌 그녀가 두 손으로 무언가를 덥석 쥐었다. 이에 블리어의 미간이 확 좁혀지며 그가 시름겹고도 억눌린 소리를 흘렸다. 그녀가 무얼 하나 잠시 지켜보고 있던 그는 뒤늦게 렐리아가 우람한 존재감을 뽐내는 그것에 입술을 가져다 대려하자 바로 긴 팔을 뻗어 막아냈다. “됐습니다.” “…아 뭐야. 깨게.” 서둘러 상체까지 일으킨 블리어는 필사적으로 제 것에서 그녀가 손을 떼게 만들었다. 커다란 손바닥 안에 얼굴이 갇혀버린 렐리아는 굵은 손가락 틈새로 그를 노려보았다. “해준다니까 그러네.” “더럽습니다. 그대 입에 어떻게 내 성기를 물립니까.” “뭐 어때. 애인사이인데.” “괜찮으니 안 해줘도 됩니다.” “하면 엄청 짜릿할 텐데~? 남자들 후기 보면 막 절로 선다던데? 미치겠다던데? 싸고 싶어 죽겠…우으.” “그리 빨고 싶으면 내 손가락이나 빠십시오.” 친히 손가락을 물려주자 렐리아는 입안에 들어찬 따스한 손가락을 피하기 위해 혀를 이리저리 굴렸다. 해괴한 표정으로 큰 손을 붙잡고 빼내자 그의 검지에 미끌거리는 타액이 묻어났다. 렐리아는 분홍색 혀를 내밀고서 그를 향해 한가득 인상을 써보였다. “으엑 짜.” “손가락도 못 빨면서 그런 말하는 거 아닙니다.” 블리어는 흥건히 침이 묻은 검지를 손수건으로 닦고서 다시 누워 자기나 하라며 그녀를 제 옆에 눕혔다. * * * “최근 수도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원탁의 상석에 앉은 블리어가 왼쪽 두 번째 자리에 앉은 가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질문을 받은 그는 사흘 전 수도에 다녀왔던 자로 한번 머릿속에 정리했던 보고내용을 곧바로 줄줄 읊기 시작했다. “평화로웠습니다. 재작년 사고통계내역을 살펴보았는데 실버드래곤에 의한, 혹은 추정되는 피해는 0건이었습니다. 절도사건은 증가한 추세였지만 그 외엔 지난 5년간 통계 평균치와 비슷합니다.” 보고를 듣는 와중에 블리어의 손목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진동이 일었다. 정장소매에 숨겨져 있는 크리스탈 팔찌였다. 투명한 원석 속에서 금빛으로 물들어가며 미약한 진동으로 그에게 신호를 주고 있었다. 블리어는 잠시 렐리아에게서 오는 신호를 신경 쓰느라 보고를 한 귀로 흘려듣다가 뒤늦게 다시 집중했다. “…해서 않고 있습니다. 벌써 2년 넘게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으니 해외로 나갔던 귀족들이 하나둘 돌아오는 추세더군요. 유입인구는 물론 경기도 차츰 정상궤도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상점가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시가지를 오가는 마차들도 많았습니다.” 잠시 멈췄나싶더니, 다시 부르르 하고 손목에 닿은 팔찌에서 연약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벽 한편에 걸린 괘종시계를 힐끗 눈동자를 움직여 바라보았다. 십 분, 앞으로 십 분 뒤가 예정된 가문회의의 종료시각이었다. 보고야 나중에 들어도 되는 사항이고 가주인 그가 지금당장 몸을 일으킨다 해서 감히 누가 토를 달겠냐만은, 블리어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자신이 가문회의를 내팽개치고 그녀에게로 달려간다면 이제 막 안주인으로서 가신들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불 보듯 뻔했다. 안 그래도 가신들의 과반수가 반대하던 결혼이었다. 정비는 터무니없이 높은 자리라며 차라리 측실의 자리를 내어주라던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옆자리에 앉혔다. 그녀를 보는 시선이 자신으로 인해 안 좋게 변하는 것만큼은 막아야했다. “병력이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건 여전합니다. 외곽 수비대는 여전히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더군요. 그리고 왕성에 집중되어있던 마법보호결계가 현재 수도외곽까지 보호구역을 확장시켰다고 합니다. 드래곤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준 덕분이라고 하니 만일의 사태에도 끄떡없을 겁니다.” “그걸 자네가 어떻게 아나. 안전할지 아닐지는 두고 봐야지.” 섣부른 판단 말라며 타렌이 엄하게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드알루가 영지의 안전에 대한 본격적인 안건을 제안하자 반대편에 있던 치안경비대장이 거들며 회의가 원활하게 진행되던 중이었다. 콰앙! 하고 두 문짝이 떨어질 것처럼 활짝 열어젖혀졌다. 가문회의 중에 쳐들어 온 자는 다름 아닌 렐리아였다. 이런 간 큰 짓을 벌일 자가 그녀밖에 더 있겠냐만은 렐리아는 회의장이 떠나가라 쩌렁 외쳤다. "블리어!!" “…흠.” “큼, 큼.” "크흠…!" 눈치를 주는 가신들의 헛기침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고 렐리아는 오로지 원탁으로 뚜걱뚜걱 걸어왔다. 그러고는 바로 허물어질 것 같은 벅찬 표정으로 외쳤다. "나 임신이래!" 타렌이 한번 더 언짢은 소리를 내려다말고 크게 헛숨을 들이켰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과장스럽게 등을 들썩이며 사레들린 몇몇 이들을 내버려두고 곧바로 블리어가 쾅 하고 자리를 박차고서 일어났다. 블리어는 그 자리에서 렐리아를 번쩍 안아들 것처럼 세게 끌어안았으나 곧바로 조심스러운 마음에 살짝 몸을 떼어냈다. 그는 마치 꿈속을 헤매듯이 몽롱하고도 황홀경에 빠진 얼굴이었다. 생애 처음으로 맞이하는 일에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블리어는 확실히 평소답지 못했다. “정말입니까. 정말…아이를……,” “그럼 내가 거짓으로 말하겠어! 진짜…하. 방금 듣고 얼마나 놀랬는데.” 정말 놀란 건 자신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렐리아를 두고 사레에 들리지 않은 가신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로 기립박수를 치며 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감격스러워했다. “이런 경사가!!” “허허…정말이지 축하드립니다!” “라콘드 가의 후계라니, 이 얼마나 성스러운 날입니까.” “유달리 금슬이 좋으시더니…,” 모두가 그런 덕담을 나누는 와중에 블리어가 감격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가신들을 눈앞에 두고도 그들은 마치 딴 세상에 서있는 것처럼 굴었다. 부드럽게 뺨을 감싸고 핥아주는 키스를 하더니 어느새 서로의 혀가 끈끈하게 이어진 듯 굴었다. 눈치 없이 깊고 진득한 키스를 이어가는 신혼부부를 두고 가신들이 저마다 침묵을 지켰다. "오늘회의는 이만 여기서…흠, 흠." 민망함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의 타렌을 선두로 가신들은 종종걸음으로 사라져주었다. 안이 유독 조용해지자 그제야 렐리아는 조심스레 그와의 입술을 떼어냈다. 실타래처럼 늘어나는 투명한 타액이 그의 입속으로 사라지는 걸 보면서 천천히 두 눈을 위로 떴다. 약간은 가쁜 숨과 함께 서둘러 말이 흘러나왔다. “의원이 그랬어. 나 애기 가진 거 맞대. 요즘 왜 자꾸 속이 더부룩한가했더니 말야.” “미안합니다. 아까 불렀을 때 달려갔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아니야. 나도 달려가던 중에 부른 거라, 만약 길 엇갈렸으면 어떡해.” 서로 꼭 끌어안고서 그 둘은 또 한참동안 서있었다. 누군가 방해하려해도 못할 것이다. 정말 이 시간만큼은 둘 다 서로밖에 보이질 않았으니 말이다. “아, 뭔가 기분이상한데 감격스럽고 막 그래.” “난 너무 행복합니다. 이리 행복해도 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만큼…세상 모든 것에 감사한 적은 처음입니다.” “또 오바한다. 블리어 이거 병이라니까.” 프시시 바람 빠지는 소릴 내며 렐리아는 그의 품에 더 깊이 안겨왔다. 벌써 태동을 느낄 리 없겠지만 평소보다 배가 더 따뜻해진 기분이었다. 결혼한 지 세달 만에 아이를 가진 라콘드 공작부부였다. 0150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소곤소곤 얘기를 나누었다. “…너무 신기한 것 같아.” “뭐가 말입니까?” “8개월 후에 블리어는 아빠, 나는 엄마가 된다니 말이야. 블리어는 믿겨져?” “하루 내내 실감한 탓에 믿겨집니다. 내일부터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본격적인 연습을 할 생각입니다.” “치, 뭐야. 이럴 땐 받아줘야지.” “미안합니다. 이번엔 잘할 테니 다시 기회를 주십시오.” “됐어 뭘. 근데 역시 난 믿겨지지가 않아. 우리 엄마가 이런 기분이었겠지….” 푸른 어둠으로 얼룩진 방 천장을 돌아보며 렐리아는 혼란한 기분을 드러냈다. 스물여섯. 아이를 임신하기엔 아주 빠르지도, 아주 늦지도 않은 나이였다. 하지만 렐리아는 좀처럼 미진한 느낌을 버리질 못했다. 엄청난 일을 앞두고 흥분이 주체 안 되는 것처럼 가슴은 설렘으로 부풀어 오르는 데에 반해, 여전히 머리로는 비현실적인 일처럼 느껴졌다. 정말 아이를 가지다니…, 확실히 하루 만에 받아들이기엔 너무나도 큰 인생의 중대사였다. 그녀의 얼떨떨한 감정을 눈치 챈 블리어가 조용히 말했다. “나도 아직 믿기 힘든데 그대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푸학, 말 바꾸는 것 좀 봐. 아깐 믿겨진다며? 엉?” “다시 기회를 달라하지 않았습니까.” “알겠어. 감정 잡고……내 기분이 어떠냐면, 뭐랄까. 약간 초조하다고 해야 하나? 사실은 아직까지 믿겨지지도 않고 실감도 안나.” “그렇습니까?” “응.” 렐리아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어둠속에서도 은은한 금의 광택을 드러내는 화려한 금장몰딩이 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쩌다 이런 대부호의 권력가에게 시집을 왔는지도 모르겠다. 렐리아에게는 모든 게 혼란스러울 밤이었다. 잠시 사색에 잠긴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가 슬며시 입술을 뗐다. “나 말이야,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당연한 소릴.” 차분하고 잔잔한 목소리였다. 블리어가 옆에서 입술을 조용히 맞춰오자 렐리아는 다시 그에게로 고갤 돌렸다. 행복한 감정에 보얗던 그녀의 뺨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연붉게 물들어있었다. 블리어는 짧고 부드럽게 키스한 후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곁에서 부지런히 내조할 테니 앞으로는 다른 일은 일체 신경 쓰지 말고 그대 몸만 신경 쓰십시오. 그리고 필요한 게 있다면 언제든 날 부르십시오, 알겠습니까?” “바로 달려와 줄 거야?” “날아서라도 가겠습니다.” “또 오바한다. 킥킥.” 렐리아는 그에게 안긴 상태에서 그의 배에다 토닥토닥 주먹을 먹였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진 건지 어느새 입가에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우리 애기 엄청 영웅적인 존재로 태어나면 어쩌지.” “무슨 그런 걱정을 다합니까.” “아니, 생각해봐. 막 아기장수 우투리처럼 날개가 달려있어서 태어나자마자 천장 뚫고 날아가면 어떡해.” 그녀의 말을 귀 기울이며 듣고 있던 블리어가 소리죽여 웃었다. 간지러운 숨결이 이마에 닿자 렐리아는 그의 목에다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우리 아이가 강해도 그댈 감당이나 하겠습니까.” “하긴 그건 그래.” 갓 태어난 아이가 엄마보다 강하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렐리아는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작게 주억거려보였다. 하지만 다시 든 걱정에 천천히 배를 쓸어보였다. 아직 불러오지 않아 밋밋하기만 했다. “만약에 너무 강해서 내 배 찢고 나오면 어떡하지.” “…그런 말 마십시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냐며 블리어는 주름이 패도록 슬그머니 미간을 접어보였다. 그도 자신의 말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단호한 눈에 렐리아는 알겠다며 순순히 안 좋은 생각을 떨쳐냈지만 여전히 미래에 대한 근심은 이어져갔다. “입덧하면 어쩌지.” “입덧 말입니까.” “응. 물비린내 나서 물도 못 마신다던데, 나 못 먹어서 살 쪽쪽 빠지는 거 아냐.” “그때엔 나도 같이 굶겠습니다.” “진심이야?” “내가 거짓으로 말하는 거 봤습니까?” 다시 미간을 편 그가 검은머리가 흘러내린 이마를 바짝 가져와 서로의 이마를 붙이고, 자신의 콧등에 입을 맞춰주었다. 뭔가 그라면 자신과 같이 입덧을 겪을 것 같기도 하다. 벌써부터 이렇게 극성맞은데 뒤에 가면 더 하지 않을까, 렐리아는 약간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 주저 말고 말하십시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 옆에서 충실히 내조하겠습니다.” “언제부터 블리어가 내 아내였대? 내가 하지 않은 내조를 말이야, 블리어가 하겠다고?” “아내가 남편을 돕고, 남편이 아내를 돕는 것에 꼭 구분이 필요합니까. 내가 그대를 내조하겠습니다.” “그냥 외조라고 하면 되잖아.” “외조라고 해서 생각났습니다만, 무리한 바깥활동은 오늘부로 금지입니다.” “뭐야, 왜 그게 그렇게 이어져!”하고 렐리아가 벌떡 몸을 일으켜 항의했다. 하지만 블리어는 어서 누워 자자며 그녀를 눕히고서 다시 콧등이며, 뺨이며, 이마에 따스한 입술을 차례차례 찍어주었다. 렐리아는 꼭 부모에게 잠들기 전 굿나잇 키스를 받는 서양어린이가 된 기분이었지만 간지럼을 꾹 참고 받아주었다. 눈앞이 가무레하게 물들어가기 전에 렐리아는 문득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엄마아빠가 알면 깜짝 놀라겠지.’ 다른 친구들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알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번듯한 사위가 생겼다고 방방곡곡 친척들에게 전화부터 걸 엄마와 어색해도 사위와 친해져보려고 어떻게든 한마디 걸 아빠의 모습이 상상이 되니 괜스레 미소가 떠올랐다. 그날 밤 렐리아는 오랜만에 부모님이 나오는 행복한 꿈을 꿨다. * 날씨가 화창한 가을날, 렐리아는 넓은 홀을 가득 채우는 감미로운 연주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전용소파에 등과 머리를 편히 기댄 채 눈을 감고 아랫배까지 담요를 끌어올렸다. 음악이 태교에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블리어는 악단을 성으로 불러와서 매일 한 시간씩 그녀 앞에서 연주하게 했다. 렐리아는 이 시간을 노래들으며 낮잠 자는 시간으로 여기고 온몸의 긴장을 풀었다. 클래식은 취미에도 없었지만 가을과 어우러지는 잔잔한 연주음에 잠이 솔솔 쏟아져왔다. 그녀가 완전히 잠이 든 후에도 연주소리는 은은하게 홀 안을 채우고 복도로 흘러넘쳤다. 그 소리는 서편의 둥그런 홀로 향하던 블리어의 귀에도 닿았다. 그가 홀의 문을 열자 연주소리가 한층 더 선명하게 복도를 적셨다. 블리어는 창가자리에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잠든 렐리아를 가장먼저 발견한 뒤 이제 되었다고 지휘자에게 제스처를 주었다. 연주자들은 능숙하게 악기를 정리하고 조용히 그곳을 벗어났다. 그들이 빠져나가고 대신 홀 안에 블리어가 와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 렐리아는 꿈속에 나른히 잠겨있었다. 잠든 그녀를 옆에서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소리 없이 미소 짓다가 소파에 묻힌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이게 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은 소파 앞에 몸을 숙였다. 그녀의 두 팔이 양어깨에 걸쳐지도록 만들고 가볍게 엉덩이 아래를 받쳐 들어올렸다. 그녀를 조심스레 업고서 블리어는 침실로 돌아가기 위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홀에서 벗어난 지 몇 분되지도 않아 그의 등에서 희미한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뭐야. 누구야…?” “일어났습니까.” 그 귀에 익은 자상한 목소리에 렐리아는 그의 목을 두 팔로 꼭 둘렀다. 하지만 곧 장난기가 발동했다. 블리어의 귀에다 대고 렐리아는 잠결에 묻힌 목소리를 냈다. “누구세요?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하도 안 일어나기에 기회라 여기고 그댈 납치한 사람입니다.” “납치요? 저는 사랑하는 남편이 이미 있는 몸이에요.” “예쁘니 상관없습니다.” “뱃속에 그 사람의 아이도 있다고요.” “그게 사실이라면 다시 부군이 있는 곳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블리어는 한두 번 이러는 게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그녀의 장난을 받아주었다. 그러다 이틈에 물어볼 것이 생각나 다시 슬며시 운을 뗐다. “한데, 뭐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뭔데요?” “부군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 남편이요? 음~ 블리어는 엉덩이가 튼실한 게 아주 섹시해요.” “남편이 그런 말을 들으면 좋아합니까.” “속으론 뿌듯해하지 않을까요.” “틀렸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그제야 렐리아는 키득키득 웃으며 능청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블리어? 언제 왔어?” “방금 전에 왔습니다.” “좀만 늦게 오지~ 아까 그 납치범 제법 내 취향이었는데.” 얄밉지만 사랑스러운 대답에 블리어는 흐뭇한 건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의 침실에 다다를 무렵 렐리아가 고삐대신 그의 옷자락을 쥐어 당겼다. “됐어. 이제 내려줘도 돼.” 복도 한복판에서 블리어는 걸음을 멈추고 몸을 숙였다. 그녀가 넓은 등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의 두 발이 가볍게 대리석바닥에 착지했다. 나란히 걸을 생각으로 블리어가 한 걸음을 뗐으나 렐리아는 그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고 거만하게 손짓했다. “왜 그럽니까.” “블리어, 어부바!” 그 말에 다시 그녀를 업어주기 위해 블리어가 몸을 숙이려하자 렐리아가 그의 등을 찰싹 때렸다. "아니, 아니. 나한테 업히라고." "미쳤습니까. 산모한테 무리가 가는 행동은 절대 금지입니다." "산모한테 미쳤다니." "미안합니다. 우리 아기한테도 미안합니다." 정중하게 자신의 배에다 대고 사과하는 블리어를 보며 렐리아는 콧방귀를 뀌었다. "됐고, 업혀. 별로 무리가지도 않는데." “안된다고 했습니다.” “안되긴 뭐가 안 돼. 나도 남편 좀 업어보자.” 렐리아는 요 앞인 침실까지 만이라도 그를 업겠다고 우겼으나, 블리어는 산모허리에 무리가 가선 안 된다며 결사반대했다. 한참을 실랑이 끝에 블리어는 무게를 최소화하기 위해 자신의 다리 한 짝은 바닥에 닿아있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그렇게 금슬 좋은 부부답게 그들은 일심동체가 되어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 근처를 지나가던 시녀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고 다시 조심스레 벽 뒤에 몸을 숨겼다. 한쪽다리를 공작부인의 허리에 걸치고 반대쪽 다리는 바닥을 지탱하고 있는 요상한 자세로 침실로 들어서는 공작을 발견한 것이다. 0151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이리 와서 편하게 누워보십시오.” 화장대에 앉아 머리를 말리던 렐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바로 침대위로 올라섰다. 블리어의 옆에 풀썩 눕자 하얀 실크로 된 슈미즈가 무릎아래서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머리 살짝 들어보십시오.” “뭐야? 뭔데?” 블리어는 잔뜩 기대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에 고갤 숙였다. 가벼운 입맞춤을 눈두덩위에 선사해주고서 그녀의 머리아래에 푹신한 베개를 받쳐주었다. 렐리아는 오랜만에 성관계를 가지자는 건 줄 알고 부푼 마음을 누른 채 동그랗게 눈을 떴다. “몸에 힘을 푸십시오. 물위에 떠있다고 생각하면 더 잘될 겁니다.” “다리 벌려?” “뭘 생각하는 건진 몰라도 그걸 하려는 게 아닙니다.” “에이….” 뭐냐며 심통하게 눈을 부라리는 렐리아를 향해 블리어가 낮게 입술을 휘어 올리며 “안타깝게 됐습니다.”하고 받아주었다. 그녀의 몸이 바른 자세가 되도록 고쳐준 후 블리어는 바로 떨어져나갔다. “이제 한번 심호흡 하십시오.” “뭔데 이거.” “진통을 줄일 수 있다고 알려진 호흡법입니다. 그리 복잡하지는 않으니 틈틈이 연습해두면 출산 시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누운 그녀 옆에 앉아서 블리어는 경력 많은 산부인과 원장처럼 지적이되 나긋나긋하게 얘기했다.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해보십시오.” “…어휴.” 렐리아는 마지못해 심호흡을 해주었다. 또 무슨 책을 읽은 건지는 몰라도 산모와 아기에게 좋다는 건 빼먹는 법이 없었다. 태교에 태 자도 몰라도 남편이 다 알아서 준비해주니 편하기는 했다. “1초정도 짧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쉽시오.” “후.” “다시 짧게 들이마시고 다시 내쉽시오.” “후. 저기 근데 이거 언제까지 해야 돼.” 벌써부터 지루하다고 불평을 토로하는 렐리아의 입술위로 따스한 입김이 휘덮어왔다. 발빠르게 입을 막은 것이다. 자연스레 입술을 헤집던 블리어의 입술은 아쉽게도 일분도 가지 않아 떨어졌다. 더 하자며 렐리아가 멀어지려는 사내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먼저 입을 맞춰왔지만 그가 받아주지 않아 쪽 소리 나며 떨어질 뿐이었다. 뒤늦게 부드러운 타박조가 그 얇은 입매에서 흘러나왔다. “아직 무리하면 안 되질 않습니까.” “내가 괜찮다고….” 투덜대는 목소리를 숫제 못들은 체하고 블리어는 연습을 이어나갔다. “다시 몸의 긴장을 풀고 따라해 보십시오. 히. 히. 후.” “히~ 히~ 후~” “그렇게 크게 소리를 낼 필요까진 없습니다. 내 입모양 따라해 보십시오.” 렐리아는 천장을 가리고서 히히후 입모양을 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애써 웃지 않으려 노력했다.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지만 다행히 침 튀기며 폭소하진 않았다. “들이마실 때는 코로 해야 입안이 덜 건조할 수 있다하니 노력해봅시다.” “넵. 블리어 선생님.” “다시 심호흡을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다물어보십시오.” 렐리아는 입술을 옹 닫았다. 별안간 그녀의 아랫배 위에 커다란 손바닥이 얹어졌다. 약간 간지러워 콧바람이 잠시 강해지긴 했지만 다행히 숨을 참을 수 있었다. “그리고 힘을 줘보십시오. 아래에.” “흡, 하고 있어.” “그렇게 하는 겁니다. 잘했습니다.” 만족스러운지 도닥도닥 거리던 블리어의 손이 배꼽주위를 천천히 둥글게 문질러주었다. 하지만 그게 끝인 줄 알았던 호흡법은 아직 더 남아있었다. 귀에 들어오는 설명은 어느새 솔솔 잠을 부르는 자장가가 되었으나 렐리아는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려 노력했다. “지금부터 숨을 잠시 참는 겁니다. 하나, 둘 , 셋…,” 아무생각 없이 숨을 참는 동안에도 잠깐 졸았던 모양인지 숫자가 크게 뛰어있었다. “…열, 열하나.” 이제 되었다며 블리어가 얘기하자 그제야 렐리아는 푸, 하고 과장스레 숨을 뱉어냈다. 약간 건성으로 하는 것 같았으나 그 작은 분홍빛입술이 사랑스러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십시오.” “…후암.” “졸립니까?” 아예 눈을 감은 렐리아가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블리어는 그럼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제 잡시다.”하고 얘기했다. 그러고는 수고했다며 둥근 이마에 오래오래 입을 맞춰주었다. 한번 이부자리를 정리하고서 그가 눕자 렐리아는 옆으로 돌아누우며 설핏 콧잔등을 찌푸렸다. “블리어. 열성적인 건 좋은데…….” 렐리아는 졸린 눈을 떴다. 오롯이 자신만을 담은 따스한 녹안과 마주한 순간, 투덜거리기 위해 반쯤 튀어나왔던 입술이 쏙 들어갔다.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마음이 여려져 불평도 못하겠다. “아냐 됐어.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뭐.” “뭡니까. 평소답지 못하게 싱겁습니다만.” “키스해줘.” “갑자기 말입니까.” “잠들기 전에 매일 해줬잖아. 키스, 얼른.” 블리어의 단단한 품속에 안겨 칭얼거리자 수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고갤 내려 달콤하게 입술을 빨아주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이 젖이라도 되는지 쪽쪽 빨다가 맞붙인 입술을 비스듬히 틀어 혀가 들어갈 공간을 냈다. 블리어는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덮고 혀를 넣으려다가 그녀가 벅찬 듯 숨을 몰아쉬자 모든 행위를 멈췄다. 그의 혀는 고운 입술을 살짝 핥아주고 떨어졌다. 아쉬운 지 연방 입술을 들이미는 렐리아를 품에 깊이 끌어안은 채 블리어는 그만 자자며 등을 두드려주었다. “좋은 꿈꾸십시오.” “흥. 자다 몽정이나 해라.” *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처럼 흐린 겨울날이었다. 라콘드 령의 영주성에서 가장 밝고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방을 꼽으라한다면 공작부부의 방일 테다. 벌써 임신 17주차에 접어든 렐리아의 배는 아주 눈에 띌 정도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 사랑스럽게 불러와있었다. 블리어는 밤마다 아내를 침대에 앉힌 뒤 은대야에 받은 따스한 물로 그녀의 발을 씻겨주었다. 매일 아침마다 시녀들에게 관리를 받아 씻을 것도 없다지만 그는 매번 신선한 의식을 치르듯 발을 마사지해주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자기도 피곤하면서.” "배가 불러오면 몸도 잘 굽히지 못할 거 아닙니까." "아직 그 정돈 아니잖아." "지금부터 적응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살짝 불룩해진 아랫배였지만 블리어는 그녀가 벌써부터 만삭이라도 되는 양 행동했다. 그래도 시녀를 시켜도 될 일을 기꺼이 자처하는 남편이 예쁘기만 한지 렐리아는 오늘도 그의 이마와 코에 뽀뽀해주었다. 아마도 이런 보상 때문에 더 지극정성이 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희고 고운 발을 닦아주고서 블리어는 렐리아를 눕혀주기까지 했다. 그는 잠시 욕실로 들어가 자신도 씻고 나왔다. 젖은 흑색머리칼을 말리기도 전에 블리어는 침대위에 누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에게 다가왔다. “한밤중에 뭘 그리 입맛을 다십니까?” “그냥. 갑자기 배가 좀 고픈 것 같기도 하고.” “먹고 싶은 거 없습니까.” “음……” 고민하는 얼굴에 대고 뭐든 말하라는 눈빛을 보내었으나 뒤이어 들린 말은 가벼웠다. “블리어. 블리어 먹고 싶어." 렐리아는 우람한 팔뚝을 쥐고서 안쪽 살을 안 아프게 냠냠 깨물었다. 얕게 잇자국이 남았지만 블리어의 눈에는 이것도 사랑스럽기만 한지 그녀의 뺨으로 고갤 숙여 입술을 맞췄다.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이 뒤였다. "렐리아. 최근 들어 나한테 뭐 쌓인 거 있습니까. 받아줄 테니 말해보십시오." "성욕. 최근 쌓인 거 같아." "초기를 지났다 해도 지금도 조심해야 되질 않습니까. 되도록 임신 중에는 관계를 가지지 않는 게," "오랜만에 침대위에서 사랑받고 싶단 말이야. 아주 살살하면 괜찮지 않을까?" 목을 휘감아 교태를 부리는 렐리아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이게 다가오는 게 사실이었다. 블리어는 자꾸만 혹하려는 마음을 접고서 그녀의 다리사이에 자릴 잡고 앉았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해주겠습니다.” 입맞춤처럼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블리어는 허벅지에 머물러있던 슈미즈 아랫단을 살짝 새하얀 배가 보이도록 들추고서 그 옷자락사이로 양손을 집어넣었다. 두터운 손바닥은 위로 올라가더니 마침내 맨가슴을 손안에 크게 감쌌다. 그러고는 그대로 가슴을 전체적으로 둥글게 돌아가며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냥 주물럭거리는 것과는 다른 게 각 손가락의 위치나 힘을 주는 부위, 힘의 강도를 조절해야하는 숙련된 유방마사지 기술이었다. 뭉툭한 엄지로 가슴의 옆 부분과 아랫부분을 지나며 눌러주고 좌우는 물론 아래에서 위로도 한번 가슴을 돌려주었다. 부드러운 가슴살은 그의 손에서 쥐어짜지듯 뭉개졌다가 다시 형태를 만들어내길 반복했다. 혹여 라도 아플까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머무른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조금이라도 아픈 느낌은 없습니까.” “전혀. 근데 블리어, 나 요즘 가슴 큰 거 같아. 부은 건가?” “확실히 전보다는 커진 것 같습니다.” 유륜과 딱딱해진 유두를 근육 풀어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눌러주던 블리어가 대답했다. 그는 계속 자신이 하는 일에 집중하면서 넌지시 렐리아에게 물었다. “요즘 들어 여기서 액이 나온다거나 하진 않습니까.” “아직은.” “조금 늦나봅니다.” “그런가보네.” 남 얘기하듯이 렐리아는 태연하게 받아주었다. 아니 태연하려고 나름 노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그녀의 온신경은 가슴에 가있었다. 주물럭거리는 손가락이 기분 나쁘지 않고 오히려 좋아서 문제였다. 약간은 이상야릇한 게 뱃속에서는 묘한 흥분이 휘몰아쳤다. “이제 그만해줘도 돼.” “지금 충분히 하지 않으면 나중에 아플 겁니다.” “어차피 렐블리 태어나면 쭈쭈 먹이느라 아플 텐데 뭐.” 아들이면 착하고 씩씩하라는 의미에서 브라이슨, 딸이면 똑똑하고 생기 넘치라는 의미에서 에렐리 라고 이름을 정해두었다. 하지만 아직은 뱃속 아가가 아들인지 딸인지 모르니 애칭으로 ‘렐블리’라고 부르기로 정했었다. “그보다 오늘, 우리 렐블리랑 대화 나눴어?” “그러고 보니…아직 입니다.” 잊고 있던 사실을 알아챈 블리어가 유방마사지를 잠시 멈추었다. 이에 렐리아는 이제 그만하고 아기와 대화를 나누라며 매몰차게 그의 손을 가슴에서 쫓아냈다. 블리어는 그녀가 다시 옷자락을 허벅지 아래로 끌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녀가 편히 눕자 곧바로 다가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짝 올라온 아랫배에 입을 가져갔다. “렐블리. 아빠입니다.” “블리어. 애기한테 언제까지 계속 존댓말 쓸 거야?” 가만히 듣고 있던 렐리아가 설핏 미소를 띠며 물었다. 블리어는 잠시 차분히 가라앉은 얼굴을 하고 있다가 약간은 적응이 안 되어 딱딱한 어조로 운을 뗐다. “렐블리. 아빠다. 들리니.” “푸훕.”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렐리아는 순간 근엄해진 표정으로 그의 딱딱한 말투를 흉내 냈다. “아빠다. 들리니. 경고한다. 아빠다. 항복해라 렐블리. 너는 포위됐다.” “놀리니깐 재밌습니까.” “아주 재밌는데 킥킥. 렐블리. 아빠다.” “렐블리, 엄마가 나를 놀리는데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여전히 배에 입술을 붙인 채 블리어가 조곤조곤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대답이 없었고 렐리아만이 신랄하게 떠들 뿐이었다. “아빠다 가 뭐야. 좀 더 정겹게. 아빠야~ 해봐.” “렐블리. 아빠야.” “그래, 그거야. 잘했어.” 싱긋 웃으며 렐리아가 그를 격려하려할 때였다. 헉, 하고 살짝 숨을 들이켠 렐리아가 눈을 크게 뜨고 블리어를 바라봤다. “블리어 방금 태동 느꼈어?” “……?” “뱃속에서 뽕하고 뭔가 움직였어.” “뽕 말입니까?” “아. 지금은 안 움직이는데 아까 뭔가 톡 튀어 오르는 것 같았는데…” 렐리아는 약간은 감격에 찬 놀라워하는 얼굴이었다. 그건 블리어도 다르지 않았으나 곧바로 배에 입술을 맞추느라 의도치 않게 얼굴을 숨기게 되었다. 아이와의 행복한 대화를 나눈 후 두 사람은 불 꺼진 침대위에 나란히 누웠다. 몸을 돌려 눕는 게 불편할 렐리아를 배려해 블리어가 비스듬히 돌아누워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그녀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그녀의 배를 아주 따스하고 섬세하게 쓸어 만져주었다. “아…블리어. 내일 점심 말인데,” “미안합니다. 내일은 점심에 선약이 있습니다.” “…으응 그래?” 그러면 됐고, 하고 렐리아는 잠결에 반쯤 잠겨있는 몽롱한 목소리를 냈다. 그녀가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 편안하게 잠든 옆얼굴을 지켜보던 블리어도 뒤늦게 따라 눈을 붙였다. 겨울도 침범하지 못할 그들의 방은 밤새 따뜻했다. 0152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렐리아는 점심이 되자 타렌의 집무실을 찾아왔다. 선약이 있다며 성 밖에 외출중인 블리어를 대신해서 같이 점심을 먹어줄 사람을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타렌은 독불장군처럼 앉아서 오로지 서류에만 눈길을 주었다. “할부지. 나왔어.” “…….” “할부지. 내가 왜 왔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 “할부지. 나왔어요.” “크흠…!” 가문의 안주인에게 대놓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이는 타렌은 확실히 무례했으나 렐리아는 이 점을 좋아해 더 깐족거렸다. 책상 앞에서 정신 사납게 왔다갔다 거리는 여인을 무시하지 못해 결국엔 불퉁한 목소리가 타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전하께서 금방 오실 텐데 뭐하러 이 노친네를 찾아오십니까? 상가에 다녀오시는데 넉넉잡아 한 삼사십 분 걸리겠지요.” 타렌은 여전히 잉크를 찍은 깃털 펜을 들고 섬세하게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넣고 있었다. 렐리아는 그 글씨보다는 말에 더 집중한 채 그 모르게 히죽 웃었다. 그는 블리어가 어디 갔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좁혀진 눈을 내리깔아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타렌이 렐리아의 미소를 보지 못한 채 구시렁거리기 시작했다. “아랫것들을 시키시면 될 일을 굳이…….” “뭐가요~?” “의상점에 맡겨놓은 임부복이랑 아기옷 말입니다. 직접 가지러 가실 필요까진 없으실…,” “허어얼, 대애박. 임부복이랑 아기옷이요?” 유독 과장스러운 목소리가 집무실안을 낭랑하게 갈랐다. 구시렁거리던 소리는 뚝 끊긴지 오래였다. 타렌은 좌불안석에 앉은 사람처럼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들어올렸다. 불안한 감은 어째 틀린 적이 없었다. “깜짝선물인 걸 할부지가 알려줘 버렸네?” “…!” “몰래 준비해서 주려고 했던 걸 할부지가~ 망쳤대요~” 얼레리꼴레리 하고 음까지 입혀서 렐리아는 영악하게 깔깔 댔다. 타렌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입을 손바닥으로 치며 ‘이놈의 입! 이놈의 입!’하고 외칠 듯이 낭패어린 기색이었다. 이에 더 신난 렐리아가 방정맞게도 훌라춤 비스무리하게 몸을 움직여댔다. 그때 밖에서 한바탕 소란스러운 발소리가 들려오더니 타렌의 집무실문이 떨어질 것처럼 열어젖혀졌다. 타렌이 벌떡 몸을 일으켜 들어온 상대를 확인하자 렐리아는 주춤 옆으로 물러섰다. 급하게 집무실안으로 쳐들어온 자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이마가 땀으로 흠뻑 젖어있는 노기사였다. 성 내곽의 경비대장으로 보였는데 그는 한동안 헉, 헉 하고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현재 영지…에…큰일이!……소식에 의하면 엄청난…폭발이….” “진정하고 말해보게.” 잔잔하던 대기가 급변했다. 경비대장은 공작부인에게 예를 갖춰야한다는 것도 잊은 채 서둘러 숨을 고르고서 말끝을 맺는데 급급해했다. “…폭발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외곽 경비병으로부터 급하게 전해진 소식이라 자세한 상황은 모르겠습니다만, 영지의 장벽이 무너져 내려…민가와 상가를 덮쳤다고……그런데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 것 같습니다. 성가퀴에서도 영지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습니다.”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다. 상가라는 단어가 유독 귀에 잡혀 떠나질 않았다. 그건 타렌도 마찬가지인지 순간적으로 힘이 탁 풀려 비틀거리다 의자를 짚었다. 말이 없는 타렌을 대신해 경비대장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심상치 않은 일의 전조일게 분명합니다! 급히 공작전하께 전달하여야하는데 어디계신지 보이지 않아 타렌님께 달려왔습니다.” 공작의 대리자인 타렌이 잠시 굳어 꼼짝도 못할 때 렐리아가 한걸음을 내디뎠다. 그 발소리에 그제야 타렌이 흠칫 사념에서 깨어나 방을 나서려는 렐리아를 간신히 붙들었다, “어딜 가시려고 그럽니까!!” 힘겹게 그녀의 팔을 꽉 붙든 타렌은 렐리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꿰뚫어본 듯했다. 타렌이 호통을 치듯 강하게 말했다. “공작전하는 무사하실 겝니다! 분명, 무사하실 테니…! 늙은이 말 들으시죠. 갔다가 혹여라도 위험에 휘말리신다면…이 늙은이, 공작전하를 볼 면목이 없어집니다.” “…할아버지.” “그러니 제발, 이 늙은이 말을 이번만이라도 귀담아……,” 바르르 떨리는 주름진 손을 떼어내며 렐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슬프게 가라앉은 푸른 눈은 곧이어 정면을 똑바로 직시했다. “내가 가야돼요.” 만일 블리어가 무너진 건물아래 갇혀있다면 그걸 들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이 영지의 어느 누가 그걸 할 수 있을까. 자신이 가야된다는 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을 불러내려는 함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말이다. 렐리아는 머릿속을 들쑤시는 불안하고 섬뜩한 기분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눈치 채고 있었다. 이런 짓을 할 자는 그 자밖에 없었다. 이 평화롭던 영지에 세브로웰이 찾아온 것이다. 그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외상후유증처럼 온몸이 싸느랗게 굳었다. 반쯤 잘려나갔던 적이 있던 허리가 다시금 지끈거렸다. 한번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가 렐리아는 타렌의 집무실을 벗어나 일단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방안에 있던 시녀들에게 바로 드레스의 탈의를 돕게 한 뒤 잠시 나가있도록 했다. 렐리아는 거울 앞에 서서 낮게 중얼거렸다. “차크란의 갑옷세트.” 오랜만에 읊는 게임아이템 이름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곧이어 허공에서 은색갑옷이 나타나 자신의 품에 안겼다. 펼쳐진 박쥐날개 형태의 은쇄갑으로 어깨와 쇄골을 덮고 가장 중요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 흉갑을 둘렀다. 탄력성이 있어 아랫배 크기에 맞게 갑옷소재가 늘어났다. 몸매의 실루엣을 가리기 위해 그 위에 두꺼운 겨울코트와 승마용 바지를 껴입었다. 성 밖은 추울 것이다. 동상이라도 걸린다면 고스란히 뱃속 아이에게 안 좋은 영향이 갈 거라 여기고 렐리아는 <코로르비타의 귀걸이>를 귀에 걸었다. 목에는 여전히 그와 이어진 크리스탈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마지막으로 다리 보호구인 세 줄의 번개무늬가 은으로 세공되어 있는 흰 장화를 바지 입은 무릎까지 끌어올렸다. ‘렐블리. 아빠 찾으러가자.’ 렐리아는 자신의 배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두터운 솜옷을 입어 티가 나지 않았으나 아기의 태동은 생생히 느껴졌다. 이 몸으로 싸운다는 건 불가능했다. 어떻게든 세브로웰의 눈에 띄지 않아야했다. 렐리아는 생전 찾지 않던 신을 찾았다. 자신이 갈 때까지 블리어가 다치지 않고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그와 함께 다시 성까지 안전하게 돌아오는 것만이 현재로써 그녀가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었다. 이 쓸데없이 강한 힘은 이럴 때만큼은 제게 도움이 되어야했다. 이 세상 유일한 단 한사람을 지키기 위해 렐리아는 공작성을 나섰다. * 공작령에서 벌어진 사건은 급히 수도로 알려졌다. 국왕 바일로트 핀 아이작 라델리우스는 왕국 방위를 책임질 대마법사 드라도스를 포함한 마법사 6인과 제국의 다섯 무가를 지탱하는 명장군들, 그리고 왕국의 개국공신들을 급히 한자리에 소집했다. “드래곤들은 어딨습니까. 이 위급상황에 그들이 없어선…,” “그들은 가브리나 님과 함께 있다.” 라델리우스는 불안해하는 타렌치오 공작에게 한마디하고 바로 작전회의에 들어갔다. 수십만 군을 지휘할 총사령관 뫼드아스 반 볼프는 모든 전투태세를 갖췄음을 보고했다. 수도는 이미 2년 전부터 착실히 모든 전투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대마법사 드라도스도 제국의 마법사들과 함께 드래곤을 공격할 최종마법진을 완성시켜놓았기에 언제든 시동만 걸면 되노라 대답했다. 근위대를 포함한 기사단 총책임자와 왕도의 성벽을 책임지는 경비대장의 보고가 차례로 끝나갈 때쯤 한 사내가 회의장안으로 들이닥쳤다. 왕의 명을 받드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던 최측근 위터 백작이었다. “분부하신대로 긴급대피령을 수도는 물론 왕국 전 지역에 내렸습니다.” “피난민들의 안전 확보는 어찌되었지?” “국경부근에 있는 경비대와 왕실기사단 1,2부대, 각 영지에 있는 병사들이 맡아서 보호 및 피난로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라콘드 령에 대해 보고하라.” “라콘드 공작령의 장벽이 무너진 피해가 있은 후로 아직까진 아무 소식 없이 잠잠합니다.” “폐하. 이것이 저희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작전일지 모릅니다. 한곳에 집중시켜야합니다.” 칼토바스 공작이 왕의 생각을 꿰뚫기라도 한 듯 한발먼저 입을 열었다. 라델리우스는 깊은 침묵을 지켰다. 1차 피해지역으로 섣불리 원군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실버드래곤의 소행이라는 게 확실해진 지금 왕도수비에 더 집중해야 된다는 건 틀림없었다. 병력이 감소된 상황에서 수도가 공격받기라도 한다면 이처럼 큰일도 없을 테다. 무엇보다도 라콘드 령에선 아직까지 소식은커녕 원군요청도 없었다. 지켜볼 것인가, 아니면 위기에 빠지기 전 한발 먼저 도울 것인가를 두고 라델리우스는 고심해야만 했다. 인간 역사상 전례 없던 드래곤과의 대규모의 전투를 준비하는 동안, 한편에선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브리쉬니 궁의 홀에서 여섯 명의 인간형상을 한 드래곤들은 급히 떠나려는 가브리나를 배웅했다. “내가 없는 동안 이 왕도를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적발의 엄숙한 표정인 파르마판이 대표로 대답했다. 그의 옆에 선 스니온의 알랑거림을 마지막으로 가브리나는 드래곤들에게서 등을 돌려 문에서 걸어 나왔다. 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금발 남자는 그녀가 나오자마자 문기둥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윈. 가자꾸나.” “몸 상태는 괜찮으신가요.” 윈은 라콘드 령으로 떠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완성된 대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와 고대부터 내려와 낱장마다 헐어있는 마법서적, 그리고 천 년 전 초대국왕이 사용했던 귀한 마석이 박힌 지팡이. 그에 반해 가브리나는 왼손 약지에 낀 금반지만이 소지품의 다였다. “충분히. 2년 새에 꽤 많은 마나를 회복했어. 차원이동을 한번 더 해보라면 가능할 것도 같구나. …걱정되는 게 있다면 그 아이 또한 회복했다는 거겠지.” “아. 세브로웰 그 자말입니까.” “만약에라도 세브로웰이 과거의 힘을 거의 대부분 되찾았다면…사태는 생각보다 끔찍할 거란다.” “대체 그 실버드래곤은 봉인 전의 위력이 어느 정도였길래…,” “드래곤들의 수장은 대지하나를 통째로 지배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가지고 있단다. 드래곤에게 있어 힘은 곧 권력이니까. 오래전의 나도 이 대지의 모든 것을 다스렸었어. 그 당시 그런 나와 정면으로 싸울 수 있었던 유일한 드래곤이 그였단다. 이제 이해가 가겠니?” 가브리나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태도였으나 목소리는 어둡게 침전되어있었다. “나보다 천 년은 더 적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힘만으로는 나와 대등했었지. 내가 너무 오래산 것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동안 터득한 이 마법적 지혜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거겠지.” 그를 봉인시켰던 건 가장 평화적인 방법이기도 했으나, 힘으로는 그를 죽일 수 없는 가브리나에게 있어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드래곤의 비늘은 보통 열에 녹지 않아. 하지만 그 아이의 화염에는 비늘이 녹다 못해 검게 타버려 뼈만 남게 된단다. 그래서 같은 드래곤도 세브로웰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피하려하지.” “무서운 적이네요.” “이건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단다. 그 아이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어디에도 없어.” 찝찝한 기분과 알 수 없는 공포를 털어내려는 듯 윈이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속절없이 조금 떨리고 말았다.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성공하지 않는다면, 이 왕국의 미래는 없는 거란다.” 이제 곧 있을 천재지변과도 같은 재앙을 앞두고서 가브리나는 마지막 보루라도 되듯 금반지를 오른손으로 덮어 쓸어 만졌다. “하지만 우리에겐 세상을 초월하는 마법이 있지.” “…….” “그리고 이 마법은 나 혼자서는 안 돼. 네가 필요하지.” 가브리나의 굳은 신뢰가 담긴 눈에 응하듯, 윈의 눈이 가늘고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 따라갈 수가 없겠네요.”하고 능숙하게 받아친 그는 곧 가브리나와 함께 본궁으로 들어섰다. 지하로 내려간 그들은 라콘드 령으로 급히 내려가기 위한 텔레포트 설계에 착수했다. 0153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영지 안에서도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상점가는 마차로 달려 십오 분 거리에 위치해있었다. 영지를 두르고 있던 장벽이 무너져 내린 곳도 그 부근이었다. 벌써부터 충격의 여파로 인해 지형이 고르지 않은 건지 마차 안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렐리아는 마차 창문을 통해 바깥 상황을 살폈다. 검은 재가 섞인 먼지바람이 거리를 점령하고 있었다. 석재건물은 충격파에 의해 비스듬히 기울어져있었고 목재 건축물 중 몇 채는 아예 허물어져있었다. 상가 근처의 영주민들 대다수가 집을 두고 떠나 버려진 가구들만이 거리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렐리아는 스치듯이 거리에 떨어져있던 검댕이가 묻은 더러워진 곰인형을 발견했다. 어느 꼬마아이가 잃어버렸을 그 인형은 그녀의 시야에서 멀어져 개미처럼 작아졌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배위로 올라왔을 때였다. 쇄골부근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렐리아는 잠시 숨을 멈췄다. 숨을 내쉬는 것도 잊고 그녀는 급히 두꺼운 옷 속에 숨겨두었던 목걸이를 꺼내들었다. 크리스탈 속의 하얀 결정이 금빛으로 변하며 그의 체온처럼 따스한 온기를 뿜어냈다. 블리어가 제게 안전하다고 보낸 신호였다. “……다행이다.” 목걸이를 두 손으로 꼭 말아쥐고 렐리아는 눈가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이것이 말해주는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의 신호가 전해질 만큼의 반경 내에 들어왔다는 걸 의미할 테다. 안도하기도 잠시 몇 분쯤 더 달려서 마차가 덜커덕 움직임을 멈추었다.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며 마부가 간이창문 너머로 손짓을 보였다. 렐리아는 그제야 창밖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 검은 연기가 사위를 지배하고 있는 땅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으스스하고 섬뜩해보였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깨끗한 돌바닥과 하얀 조각분수대가 있을 자리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상가 곳곳에 땅이 갈라져 그 사이로 붉은 것이 흐르고 지독하리만치 짙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렐리아는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가 말리기도 전에 호흡기를 가리고 그 연기 속으로 뛰어들었다. 흐린 날씨라 분간이 잘 안될 거라 생각했던 것치고는 어느 정도 시야확보가 되었다. 풀풀 피어오르는 연기 너머로 쓰러진 건물들과 어지럽게 널브러진 거멓고 길쭉한 것들이 보였다. 그것이 뭔지 몸을 굽혀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전에 렐리아는 주춤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검은 재로 뒤덮인 그것은 타다 남은 앙상한 인간이었다. 산 채로 불타죽은 것이었다. 시체가 굴러다니는 폐허가 된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비참했으나 렐리아는 올라오려는 헛구역질을 억지로 참아내었다. 버티기 힘들 때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까만 먹빛의 하늘은 금방이라도 날름 불길을 토해내며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상가 중심부였던 그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렐리아는 조금씩 숨을 쉬기 편해진다는 걸 알아차렸다. 연기가 오히려 덜 올라오고 있었다. 막고 있던 호흡기에서 슬며시 손을 떼고 렐리아는 애탄 감정의 크기만큼 크게 외쳤다. “…블리어!!” 공기 중에 떠도는 잿가루 때문인지, 절박감 때문인지 목이 금세 따가워지는 기분이었다. “대답해봐! 어딨어!” 렐리아는 목걸이를 한손에 꽉 쥐고서 회색빛의 폐허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돌먼지가 내려앉은 거리는 흑백사진처럼 황폐했으나 간간이 부서져있는 건물잔해 사이로 요란하게 튀어있는 핏물만큼은 붉었다. 렐리아는 건물에 깔려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시신의 얼굴에서 도저히 눈을 떼지 못했다. 서른 명 정도 지나쳤을까, 다시 목걸이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자 렐리아는 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멀지 않은 편평한 바닥에 놓인 검은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익숙한 흑발의 사내를 발견한 순간 렐리아의 가슴이 안도감에 의해 철렁 내려앉았다. “블리어…!” 렐리아는 쓰러져있는 그에게로 달려가 그의 옆에 주저앉아 상태부터 살폈다. 다행히 그는 눈을 감고 있을 뿐 맥박과 호흡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타박상 하나 없을 만큼 말끔한 모습이었다. 정말 신이 도왔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어 렐리아가 감격과 흐느낌이 동시에 북받쳐 올라왔다. 그때 그가 눈을 떴다. 어두운 진녹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자 렐리아는 그를 한번 끌어안고서 부축하는 자세로 바꿨다. 이곳을 빠져나가기 전까진, 안도하기엔 아직 일렀다. “일어날 수 있지? 일단 여기서 얼른 나가자.” 불편함 없이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렐리아는 왔던 길로 그와 함께 돌아가려했으나 문득 목걸이에서 울리는 희미한 진동에 발걸음을 멈췄다. “…블리어? 왜 부르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섬뜩한 소름이 빠르게 치고 올라와 렐리아의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애초에 자신을 팔찌로 부른 건 그일 텐데 어째서 그는 바닥에 눈을 감고 쓰러져있었던 것인지, 이상하게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손목에 팔찌가 걸려있었던가. 서느런 목줄기가 곧 뻣뻣하게 굳어갔다. 렐리아는 자신보다 반걸음 뒤에 선 그를 돌아보았다. 먼지가 묻었으나 생각보다 깨끗한 검은 정장차림과 무엇보다 왼쪽 소매사이로 드러나 있을 팔찌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블리어가 아니,” 렐리아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온 신경을 민감하게 바짝 건드리는 기운이 옆에서 퍼져 나와 강하게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새카맣던 흑발이 끝에서부터 하얗게 물들어가더니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별안간 자신을 바라보았다. 웃고 있는 은빛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렐리아는 하마터면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오랜만이야.” 웃음소리가 스며든 목소리는 선율처럼 부드럽게 귀를 휘감아왔다. 완전한 미형을 갖춘 남자는 홀로 교교한 달빛 속에 선 것처럼 선명한 은빛머리칼을 드러냈다. “오랜만에 본건데 영 반가워하질 않네.” “……!!” “그동안 잘 지냈어?” “그럼 블리어는……, 당장 말해. 어쨌어!” 렐리아는 충격에 굳어있는 것도 잠시 그의 멱살을 한 손으로 붙잡아 당겼다. 서로의 얼굴이 부딪칠 것처럼 가까워진 거리에서도 그녀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눈을 했다. 푸른 눈이 시리게 타올랐다. “어쨌냐고…!” “나도 몰라.” “……뭐?” 불신의 눈빛을 그득 드러내는 렐리아에게 세브로웰은 가늘게 눈을 휘며 잔잔히 웃어보였다. 입을 맞춘다면 맞출 수 있는 거리에도 그는 굳이 그러지 않고 멱살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풀어내었다. 그러고는 렐리아로부터 한걸음 물러났다. “정말이야, 렐리아. 그래도 다행이잖아? 만일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완전히 그 숨통을 끊을 생각이었는데 그전에 네가 날 먼저 발견했으니 말이야.” “……너,” “내가 다른 짓 못하게 옆에서 감시하면 되잖아.” 대신 그는 렐리아를 향해 한 손을 내밀어보였다. 그 길게 뻗은 손가락들은 먼저 잡아오라며 그녀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마치 기회를 베풀 듯이. 렐리아는 기가 차서 잠시 말이 나오질 않았으나 날선 경계를 드러내며 그에게서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네가 나한테 한 일은 전혀 기억 못하나본데…,” “네가 나한테 한 짓은 똑똑히 기억하지.” “뭐?” “날 배반하고 그 간악한 가브리나에게로 뛰어간 게 누구였지?” “정신 못 차렸구나, 너.” “이젠 정말 실수 안할게. 도망치지 못하게 다리 두 짝을 잘랐다면 너도 나도 이렇게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안타까운 음성으로 세브로웰은 진심으로 탄식했다. 동시에 무형의 기운이 빠르게 뻗어져왔다. 피부위로 훅 끼쳐오는 강한 기운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보호하기위해 배를 움켜쥐었다. 눈을 깜빡이기도 전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관자놀이를 베어나갔다. 따끔따끔한 기분은 단순히 제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렐리아는 손을 들어 확인할 수 있었다. 관자놀이에 닿은 손끝에 얕게 핏방울이 묻어나왔다. 검으로도 잘라지지 않는 제 피부가 고작 보이지 않는 기운에 잘렸다는 게 믿기 힘들었으나 렐리아는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세브로웰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한 이빨로 자신의 배를 관통했던 적이 있던 그라면 말이다. 만일 그게 스치지 않고 눈에 정통으로 맞았다면 실명이 됐을지도 모른다고 여기니 렐리아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카르갈의 홍염.” “또 그 검? 무기를 꺼내는 거 보니까 단단히도 겁먹은 것 같네.” 대수롭지 않게 웃는 은발의 남자를 눈앞에 두고 렐리아는 허공에 나타난 대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어둠으로 뒤덮인 땅 위에 강렬한 노란빛과 새빨간 불길이 이리저리 번져 일렁이고 있었다. 먼지가 뒤섞인 대기 위로 붉은 잿빛이 피처럼 번져갔다. 렐리아는 검 끝을 세브로웰을 향해 겨누고서 짓씹어 뱉듯이 말했다. “…나한테 뭘 할 속셈이든 너한테는 다른 중요한 목적이 있잖아. 수도가 네 땅이라며? 네 입으로 땅을 찾는다고 했으면 수도로 가. 왜 괜한 곳을 공격하고 지랄…,” “잃어버린 걸 찾는 것도 순서가 있잖아. 가장 중요한 것부터 다시 되찾으러왔을 뿐이야.” “내가 네 물건이냐?” “그 이상의 존재로 인정받고 싶으면 네가 그렇게 행동해야지.” 자애롭게 성자들을 굽어보는 신의 조각상처럼 아름다운 미목을 하고서 그는 불길 앞에서도 태연한 음성을 흘렸다. “교황성하는 적어도 개처럼 굴기라도 했다고. 굴종하며 내 발을 핥고, 뭐든 시키는 대로 잘했지. 비록 그 늙은 걸 내가 아끼진 않았지만.” “…미친 새끼.” 렐리아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상 엮여봤자 좋을 것은 없었다. 괜히 싸웠다가 아이에게 무리만 갈 터였다.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그녀의 두 눈이 급히 주위를 둘러보려던 찰나였다. 세브로웰이 그녀에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기 무섭게 다시 숨 막힐 만큼 강한 기운이 터져 나왔다. 수십 개의 폭탄이 투하된 것처럼 연쇄적인 폭발음이 일며 땅 한복판이 길게 갈라졌다. 황급히 튕겨지듯 뛰어오른 렐리아는 발밑아래 그 기운이 지나가고 나서야 아슬아슬하게 손으로 먼 뒤쪽바닥을 짚고 착지했다. 뒤로 긁힌 땅에서 먼지가 피어올라 눈을 잠시 가렸다. “다리를 자르겠다는 말은 그냥한 말이 아닌데,” 흙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너머에서 기기묘묘한 은색눈동자가 빛을 냈다. "렐리아. 왜 아까부터 배만 보호해?" 0154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너한테 뱃가죽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뜯긴 적이 있어서 그렇다. 왜?” 렐리아는 설마 그의 일격에 다리가 잘려나갔겠냐는 생각을 했으나 두 다리는 어쩐지 조금 후들거렸다. 땅속에 묻혀있던 돌덩이가 부서져 나와 어지럽게 널린 바닥 위를 힐긋 내려다보았다가 렐리아는 연기사이로 걸어오는 남자를 주목했다. 식은땀이 피와 섞여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아ㅡ 그래.” 수긍조가 아니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한음 낮은 목소리였다. "아이 가진 거구나." "웃기시네. 누가 아일 가져. 너 때문에 트라우마 생긴 거잖," “너한테서 희미한 생명력이 느껴져." 세브로웰은 이미 꿰뚫은 후라는 듯 웃음기를 싹 거두었다. 그의 눈은 발광하고 있었다. 희미하게 누그러들었던 그 무형의 기운이 다시금 그의 주위로 사납게 넘실거리는 게 느껴졌다. 세브로웰이 천천히 입을 끌어올렸다. 긴 입술 끝이 비틀려 올라간 미소는 괴기하기까지 했다. “밴 거잖아. 그 공작의 아이를.” “배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 엄청난 굉음에 렐리아가 입을 다물었다. 멀지않은 곳에서부터 질주해오듯 대지가 세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변을 알아차린 순간 렐리아는 잽싸게 옆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인간은 흉내 낼 수도 없는 반사신경과 가공할 속도였다. 오른쪽 어깨가 먼저 땅에 닿고도 다섯 바퀴를 더 굴러 왼쪽 무릎으로 땅을 찍고 구르던 몸을 멈췄다. 방금 전만해도 서있었던 곳이 멀찍하게 멀어져있었다. 겨우 몸체를 지탱하고 있던 석조건물들이 주저앉고 한층 더 강한 먼지바람이 땅 위를 휘덮어왔다. 삽시간에 렐리아가 있는 곳까지 휘몰아쳐온 연기는 뜨겁고 매캐한 열기가 스며있었다. 렐리아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누런 땅이 검고 투박한 속을 드러내며 몇 갈래로 갈라져있었다. 그 사이로 훅 끼쳐오는 살인적인 열기와 함께 코를 찌르는 유황냄새가 매워 입을 막고서도 한참을 콜록거려야만 했다. 시야를 가리는 짙고 희뿌연 연기가 창공으로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그 연기사이로 순간 무언가가 빠르게 뻗어져왔다. 쉭, 허공을 가르는 바람소리가 아슬아슬하게 귀를 빗겨나가자 렐리아는 한발 늦게 대검을 크게 휘둘렀다. 새빨간 불길이 허공을 가르며 짙은 연기를 몰아내었으나 보이는 건 없었다. ‘어디 갔지.’ 세브로웰이 보이지 않자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타들어가는 입안을 외면하며 렐리아는 검 손잡이를 더 세게 말아 쥐었다. 마치 드래곤 아르카이샤 최종맵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용암이 들끓는 동굴던전 속, 언제 다크드래곤이 튀어나와 자신의 캐릭터를 허무하게 죽일지 몰라 잔뜩 마음 졸이며 플레이에 임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니터 바깥에서 바라보던 그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숨통을 짓누르는 공포에 압도당한 채 렐리아는 숨소리를 죽이고 오감에 최대한 집중했다. 혹독한 추위를 막아주는 귀걸이가 삭풍에 흔들렸다. 저녁놀을 닮은 선명한 주홍빛과 시뻘건 불길이 날름대던 검 끝이 별안간 이유 없이 파르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불쾌한 진동이, 무언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느끼려하지 않아도 점차 숨을 죄여오는 그 강한 기운은, 그녀의 직감이 적중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하늘에서 쇄도하는 거대한 검붉은 불덩이가 렐리아의 주위를 마구잡이로 파괴시켰다. 콰과강, 콰쾅. 땅바닥이 처참히 두들겨지며 발밑이 들썩거리는 게 느껴지는 와중에 그녀는 중심을 잡고 양손에 단단히 쥔 검으로 날아오는 불덩이를 그었다. 검이 지나간 자리를 기준으로 화염에 휩싸인 바위덩어리가 정확히 반으로 좌우 분리되어 퉁 내려앉았다. 지글지글거리는 표면은 새카맣게 그을려있었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아직까지도 듬성듬성 불타오르고 있는 그것은 닿는 순간 인간의 살을 시꺼멓게 태우고도 남아보였다. 화염에 둘러싸인 채 렐리아는 언제 다시 공격이 퍼부어질지 몰라 바짝 주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열기 때문인지 긴장해서인지 손바닥에는 식은땀이 흥건해있었다. 그때, 바로 등 뒤에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걸 느끼고 고갤 돌리려했으나 바로 온몸이 확 세게 날아갔다. 볼 수조차 없었다. 렐리아는 아찔한 현기증과 동시에 무너진 건물 벽 어딘가에 처박힌 자신을 알아차렸다. “…허억,” 뒤늦게 숨을 토해내며 렐리아는 떨어지는 건물 잔해에 뒤섞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뒹굴었다. 바로 공격해올 것이라 여기고 황급히 배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켰다. 손이 허전했다. 검, 렐리아가 잠시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사라진 검을 찾기도 전에 머리위로 거대한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빠르게 덮쳐오는 건물외벽을 한 손으로 막아내야만 했다. 쿠르르릉, 천둥이 내리친 것처럼 대지 위가 요란스러웠다. 대형 먼지폭풍이 일며 시야가 거멓게 물들었다. 렐리아는 제 몸 주위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딱딱한 건축자제들을 조금씩 밀어냈다. 그의 시야를 가려줄 차폐물이 되어줄 거라는 생각에 렐리아는 최대한 몸을 낮춘 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은밀히 빠져나가 도망칠 수만 있다면 지금당장은 싸움을 피할 수 있을 테다. 블리어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한손으로 부서진 건물잔해를 치우며 겨우 들키지 않게 그 더미 속에서 헤어 나왔으나, 그녀가 기어 나온 바로 그 앞에 서서 은발사내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리로 나올 줄 알았다는 양. 렐리아는 세브로웰에게서 도망치려했으나 그전에 무형의 기운이 뻗어져와 오른쪽 발목을 단단히 잡아챘다. 거의 훅 끌려가다시피 움직이던 몸이 또 한 번 건물사이로 처참히 처박혀졌다. 렐리아는 숨조차 내쉬질 못했다. 물리적인 고통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멍했으나 심리적인 고통이 상당히 컸다. 뱃속의 아기가 놀랐을까봐, 외부의 충격이 내부로 고스란히 갔을까봐, 처박히는 와중에도 문득 애 떨어진다는 말이 떠올라서 더욱 그랬다. 몸을 일으키기가 무서웠다. 또 무슨 일을 당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다고 계속 당하고 있다간 자신과 아기가 죽을 것이다. 두려움에 부들거리는 두 팔로 간신히 잔해더미를 짚고 몸을 일으켰으나 렐리아의 발은 쉬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여야했다. 이곳 어딘가에 블리어가 있을 테다. 그가 무사한지 알기 전까지는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렐리아는 근처에 서서 여유롭게 웃기만 하고 있는 세브로웰과 눈을 마주했다. 저걸 죽일 수나 있을까 하는 막막한 생각보다는 어떻게 하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가장먼저 떠올랐다. 틈을 만들 수만 있다면, 그 틈에 무사히 도망쳐 블리어를 찾으러갈 수 있다면, 머리가 맹렬하게 돌아가는 동안 세브로웰이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이 한걸음 내디뎠다. 렐리아는 근처에 무더기로 덜린 거대한 건물잔해를 집어 들어 그에게로 던졌다. 산산이 부서지며 그 주위로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닥치는 대로 던져 자신이 있는 곳까지 먼지연기가 물씬 피어오르자 렐리아는 그 속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오감이 확장된 기분으로 렐리아는 세브로웰을 찾아 나섰다. 그러다 앞쪽에서 차례차례 벽이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점차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커져오는 기척에 렐리아는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바로 그때, 가까이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뒤쪽으로 왼손을 뻗었다. 정확하게 휘어 잡히는 기다란 팔을 반대편으로 우두둑 꺾어버린 후 오른편으로 세게 내던져 처박아버렸다. 튕겨져 나온 파편을 비껴나간 오른 주먹이 세브로웰의 복부에 강하게 내질러졌다. 작렬한 주먹은 그뿐 아니라 그들을 뒤덮고 있던 건물 잔해들이 한번 붕 뜨게 만들었다. 거대한 타격감을 뒤로하고 렐리아는 힘의 균형이 깨져 쑥 끌려온 그의 뒤통수를 더 힘껏 벽에 욱여넣었다. 벽에 처박힌 세브로웰의 등을 노려보며 “카르갈의 홍염.”을 빠르게 중얼거린 후 허공에 잡힌 대검을 널따란 등에 비스듬히 쑤셔 넣었다. 칼날이 힘껏 뼈를 꿰뚫는 소리가 잔인하게 울렸다. 인간 체온의 피가 울컥울컥 튀어 올랐다. 등에서부터 관통한 검은 정확히 그의 왼쪽 가슴을 찔러 넣은 것으로 보였다. “…하아…하아,.” 렐리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튄 핏방울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서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미동조차 않고 벽에 처박혀있는 남자는 죽었거나 아니면 치명상을 입은 게 확실했다.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렐리아는 깊이 안도하며 검을 그대로 꽂아둔 상태로 돌덩이들을 헤쳐 나갔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데 순간 뒤에서 후두둑, 돌 부스러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간헐적으로 울리는 그 소리에 순간 등줄기에 얼음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으스스해졌다. 뻣뻣해진 몸으로 천천히 어깨너머를 돌아보았다. 분명히 왼쪽가슴이 꿰뚫린 상태로 세브로웰이 똑바로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비틀려진 미소를 뒤로하고, 살을 베어내는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지며 빠져나왔다. “이걸로는 내게 치명상을 입히지 못해.” 울컥 피가 솟아오르던 심장부근에서 한순간 출혈이 멈췄다. 탁하게 가라앉았던 은색 눈이 어느새 녹은 은을 부어놓은 것처럼 형형히 빛나고 있었다. 기묘하고도 아름답고 지독히도 소름끼치는 그 눈을 마주한 순간 렐리아는 금방이라도 무릎을 꿇을 것처럼 다리가 심하게 떨렸다. 알 수 없는 무형의 기운이 머리 위를 강하게 짓눌러오는 것처럼 머리에 피가 쏠렸다. 그가 제게로 다가오고 있음에도. 렐리아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세브로웰은 부러 느긋한 걸음걸이로 다가왔으나 렐리아는 그 한걸음마다 숨이 조여 오는 극한의 공포를 맛보았다. 저걸 대체 무슨 수로 이겨…? 패닉에 질린 머릿속은 스스로에게 조소를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불리한 현 상황을 도피해보려 입은 더듬더듬 움직여졌다. “소용…없을 리가, 없는데…. 분명 네 왼발에 화상자국이…있었다고. 그건…분명 내 검 때문에 생긴…,” “설마 그게 또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 “무르네, 렐리아. 설마 그때와 지금 내 상태가 같을 거라 생각하다니.” 미소를 지어보이며 세브로웰은 그녀와의 거리를 부쩍 좁혀왔다. 친근한 아럼프의 얼굴이 떠오를 만큼 다정한 미소로 그가 손을 뻗어왔다.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시야를 덮쳐오는 커다란 손에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 네가 아는 나는 그대로야. 단지 천 년간 잃어버렸던 힘을 지금 거의 다 되찾은 것뿐이지.” 돌가루로 굳은 건조한 손바닥이 렐리아의 뺨을 감싸고서 천천히 어루만져주기 시작했다. 연인의 뺨을 어루만지는 것과는 달랐다. 자비를 베풀어 살려둔, 연약하고 불쌍한 동물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주는 것 같은 손길이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목소리가 더 근접하게 귓가에서 울렸다. “재밌는 사실을 알려줄까? 그 당시에 말이야. 내 육신이 상당히 약해져있던 상태였거든? 넌 가브리나에게 고마워해야할 거야. 덕분에 네 검이 쑤셔 넣어질 수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걸로 내 비늘을 뚫을 수나 있을까?” 세브로웰의 반대손이 불길이 잠잠해진 대검의 날을 맨손으로 쥐어 보였다. 그가 조금씩 강렬한 기운을 손안에 싣기 무섭게 맹렬히 달아올라와 있던 시뻘건 검신위로 쩌저적 소리가 나며 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것덕분에 그날 네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거였지만. 이젠 쓸모없잖아? 있어봤자 또 덤비려들게 뻔하고 말이야.” “…….” 렐리아는 눈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머리가, 심장이 무거운 쇠망치로 두들겨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뺨에 겉도는 꺼림칙한 사내의 손에 현실감은 떠나질 않았다. 마지막 남은 희망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면 이런 기분일 것이다. 더는 느끼고 싶지 않은 끔찍한 기분이 전신에 휘몰아쳤다. “반항하려거든 이제 포기해. 아니면 더 자세히 현실을 알려줄까? 그날 봉인에서 막 풀려나 힘과 이지가 바닥인 상태로도 너를 상대했던 나. 그리고 모든 힘을 쥐어짜 필사적으로 몸부림쳐도 결국 나한테 졌던 너. 드래곤과 인간은 역량자체가 다르다는 게 이제 실감나지 않아?” 그의 검지 끝이 렐리아의 뺨에 묻어있던 붉은 핏자국을 문지르며 닦아내었다. 더욱 가까워진 짓궂은 속삭임은 렐리아의 귓가를 괴롭혔다. “인간은 내게 상대가 안 돼. 아무리 인간이 강하다고 해도 한낱 지능이 있는 고깃덩어리일 뿐이지. 물론 넌 그들과는 달리 특별하고 희귀해서 눈길이 갔지만.” 세브로웰은 그녀의 입술에도 묻은 피를 발견하고서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 붙였다. 뒤늦게 힘을 줘 밀어내려하는 렐리아를 강압적으로 붙잡아 더 깊게 입술을 부딪혀왔다. 하지만 곧 들어가려던 혀를 그녀가 입구에서 깨물어버리자 세브로웰은 못마땅해도 입을 뗄 수밖에 없었다. 바짝 얼굴을 가져다놓은 채 그녀의 뺨을 쓸던 손으로 긴 은실타래 같은 머리를 서서히 헤집어보였다. “기억나? 우리가 처음 키스했을 때. 그땐 제법 얌전하게 받아줬었는데 말이야.” “…그때도 지금처럼 강제적이었잖아.” 렐리아는 반쯤 공허하게 대답했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푸른 눈으로 세브로웰을 직시했다. “…나를……이제 어떻게 할 거야?” “널 어떻게 할 거라니?” “살려둘 생각이…없다는 거 알아.”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고는 있나보네.” 실소처럼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던 세브로웰은 그제야 본색을 드러냈다. 새하얗게 보이는 순은색의 동공이 가늘어져갔다. “간단해. 다리를 자르기 전에 네 배에 있는 아이를 도려낼 거야.” 푹, 하고 서느런 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뜨거운 게 울컥 아랫배에서 새어나오자 도저히 렐리아는 믿기지가 않았다. 더 커질 수 없을 만큼 경악스럽게 떠진 눈을 내리자 자신의 옆구리를 관통한 남자의 손이 보였다. 뼛속깊이 파고드는 섬뜩한 고통에 강제로 그 손을 떨쳐내고 뒤로 물러났다. 목화솜이 터져 나온 겨울외투와 은백색의 갑옷이 차차 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주춤주춤 물러서자 붉은 핏덩이가 배에서 늘어져 나왔다. 렐리아는 순간 그것이 제 아기가 아닌가 하는 헛것마저 보았으나 그것도 잠시 배를 걷어차이고 뒤로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구르다가 렐리아는 먼 곳의 건물더미에 처박혔다. “쿨럭...! 켁.....컥...!” 렐리아는 패닉에 질린 채로 호흡조차 제대로 내뱉을 수 없었다. 배가 타들어갈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힘겹게 몸을 들썩이자 가녀린 등과 팔 아래에서 부스러진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죽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가깝고도 강하게 죽음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어느새 고통 때문에 두 눈에 고인 눈물이 소리 없이 뺨을 적시고 떨어져 내렸다. 그런 그녀의 앞에 나지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가엾을 만큼 덜덜 떠는 렐리아를 내려다보며 세브로웰은 감흥 없이 입술만 매끄럽게 말아 올렸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빌어. 잘못했다고.” 0155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광기가 떠오른 눈동자는 눈부신 흰 초승달을 연상케 했다. “내 아래에서 순종하겠다고. 뭐, 발에다 입이라도 맞춰준다면 이런 식으로 강제적으로 굴진 않을게.” 고압적인 명령을 내릴 것처럼 자신의 앞에 군림해있는 은발의 남자를 올려다보며 렐리아는 멍하니 죽은 눈을 했다. 초점은 명확하지 않았으나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들은 건지 서서히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그 고집……. 아 그래. 넌 항상 이렇게 고집이 셌었지.” 중얼거리는 음성을 뒤로하고 세브로웰은 눈물로 젖어있는 렐리아의 눈을 바라보았다. 잔뜩 공포에 질려 목소리조차 내질 못하면서 굽히려들지 않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그가 잔인한 선고를 내렸다. “어디서 들었는데 말이야. 임신한 인간여자를 계단에서 굴리거나 배를 세게 내리치면 아이가 사라진댔나.” “하지마…” 희미하게 렐리아의 입에서 고통스런 말이 흘러나왔다. 배를 보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려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세브로웰은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제발…아악!”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땅 위로 둥그렇게 쩍 금이 갈만큼 세브로웰이 세게 그녀의 배를 짓밟아버린 탓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등뼈가 산산이 으스러지다 못해 뱃가죽 속의 장기가 터져 나왔겠지만 렐리아는 멀쩡했다. 다만 외관상으로는 말이다. 쿵, 쿵, 거칠게 밟아대는 남자의 발에 짓눌린 아랫배가 고통스러웠다. 금방이라도 뭔가가 찢겨나갈 것처럼 아픈 와중에도 렐리아는 세브로웰을 말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 다리에 매달렸다. “…제…발. ……그만….” 벌어진 복부상처에 압력을 가한 탓일까, 그녀의 목구멍에선 핏물이 넘어왔다. 말조차 하지 못할 만큼 피가 한가득 입에 고인 상태에서도 렐리아는 살기 위해 애썼다. 살리기 위해, 없는 힘까지 바득바득 쥐어짜내었다. 말아 쥔 주먹으로 세브로웰의 발목을 쳐댔으나 그럴수록 점점 더 의식이 희미해져 감을 느꼈다. 사물이 느릿하게 움직이고 소리가 둔탁하게 변해갔다. 몸이 절규하는 가운데 의식은 거멓게 꺼져만 갔다. * 재가 섞인 잿빛 눈이 검은 하늘아래서 휘날렸다. 세상은 종말이 다가오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했다. 검게 그을리고 허물어진 건물잔해 사이로 눈송이가 떨어져 먼지로 뒤덮인 창백한 피부위에 내려앉았다. 검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나 있던 눈썹이 움찔 떨렸다. 미미한 찌푸림과 함께 블리어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가장먼저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새까만 먹구름이 군림한 검은 잿빛하늘과 잔잔하게 휘날리는 회색 눈이었다. 가물거리는 의식과 기억이 혼동을 불러일으켰으나 곧 정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한 각도를 유지하며 쌓여있는 건물 더미사이로 블리어는 엎드린 몸을 일으키려했으나 뒤늦게 제 상태를 깨닫고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블리어의 다리 한 쪽이 붕괴한 건물잔해에 깔려있었다. 근육이 뒤틀리고 끊어질 것 같던 고통은 사라지고 왼쪽다리 전체가 마비된 것만 같았다. 감각이 사라진지 오래였다. 천장입구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을 땐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으나 어떻게든 목숨은 부지했다. 이 사실이 끔찍한 상황 속에서 유일한 위안이 되었다.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그것도 잠시 블리어는 가슴아래 깔린 것을 알아차렸다. 반쯤 상체를 일으키자 제 무게에 짓눌려 처참히 일그러진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묻고 너덜너덜해진 상자의 입구에는 작은 아기옷이 삐죽 튀어나와있었다. 블리어는 목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뜨거운 감정을 알아차렸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 결의에 찬 눈에서 다 꺼져가던 생명불이 타올랐다. 어떻게든 다리를 빼내보려 블리어는 반쯤 상체를 돌려세우고 기둥으로 추정되는 잔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끄떡도 하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기둥잔해에 깔린 왼다리를 어떻게든 비틀어서 빼내보려고도 했으나 이 이상 무리했다간 허벅다리가 잘린 채 빠져나올 것 같아 관둬야만 했다. 사실상 기둥잔해에 가려보이지는 않았으나 다리 쪽에서의 출혈이 심각한 상태였다. 블리어는 다시 뿌옇게 흐려지기 시작하는 시야로 인해 한껏 인상을 써야만 했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으나 자신의 느린 숨소리가 고막을 메울 듯이 커지며 의식은 현저히 멀어져가는 게 느껴졌다. ‘렐리아. 마지막이라도 그대를 볼 수만 있다면…,’ 이전에 한번 의식을 잃기 전 사실은 어떠한 꿈을 꿨었다. 모든 게 흐릿흐릿해진 가운데 그녀가 너무도 보고 싶어 왼손에 찬 팔찌를 만졌고 그 순간 미약하게나마 원석에서 빛이 나던 꿈을 말이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에서 이곳까지 신호가 닿을 리 만무할 텐데 분명 그녀와 자신을 이어주듯이 희미한 떨림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원래 꿈이라는 게 절박하게 염원하는 걸 보여주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성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렐리아와 뱃속 아이를 생각하며 그가 천천히 눈을 감으려할 때였다. 흐릿해지는 시야너머로 순간 무언가 검은 것이 아른아른 겹쳐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머리 주변에서 울리는 둔탁한 발소리도 말이다. 블리어는 다시 정면을 집중해서 보기위해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눈에 먼지가 낀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변질되었으나 그 사이로 유독 선명한 얼굴이 보였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블리어는 모든 고통을 싹 잊어버렸다. “블리어. 이제 돌아가자.” 울컥하며 웃는 렐리아의 모습을 보며 그 또한 입가에 희미한 감정이 떠올랐다. 참을 수 없을 만큼의 그리움과 애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가슴은 먹먹해져만 갔다. “렐…리아…….” “……작전……사하십…!” 아득하게 멀어졌던 청력이 단숨에 원상태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공작전하. 무사하십니까!” 블리어의 시야가 말갛게 탁 트인 순간 렐리아의 얼굴이 있던 자리에 절박한 기사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공작전하. 정신이 드십니까?!” “…좀 더 힘껏 밀어붙여라!!” “조금만 더, 더 하면 된다!” 이미 오십여 명의 기사들이 모여 기둥잔해를 들어올리기 시작했고 블리어는 두 명의 기사에게 부축을 받아 점점 벌어지는 그 더미사이에서 끌어져 나오고 있었다. 이윽고 깔려있던 왼쪽다리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성기사단의 단장 드알루가 서둘러 그의 앞에 부복해 다리상태를 확인했다. 피투성이가 된 다리는 외관상 보기에도 그 상태가 심각해보였다. 길게 찢긴 바짓단사이로 드러난 종아리는 검붉은 핏덩이와 너절해진 살덩이가 서로 질척하게 엉겨붙어있었다. 봉합수술도 수술이지만 뼈가 분질러져있어 이대로 두었다가는 평생 다리를 못 쓰게 될지도 몰랐다. “치료가 시급하군요…. 조금만 참으시지요.” 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미간이 일그러질 만큼 참혹해 드알루는 신음을 삼켜야만했다. 블리어를 조심스레 부축한 드알루가 주위에 있던 기사들을 향해 외쳤다. “어서! 성으로 전하를 뫼셔라!” “예!” 정예기사들이 블리어의 주변을 호위하며 그가 탈 말을 가져올 때 드알루가 근심어린 표정으로 입을 달싹였다. 어차피 성으로 돌아가시면 아시게 될 사실이었다. 숨길 수는 없었다. 말할 것인가,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던 드알루가 뒤늦게 무섭게 운을 뗐다. “공비전하께서 반시간 전 이곳에 들어왔다는 마부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방금 뭐라 했습니까.” “공비전하께서 이곳에 계십니다. 하지만, 부디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이미 수색부대를 상가안쪽으로 보내놓았으니 금방 무사히 돌아오실 겁니다.” 블리어는 이미 드알루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분명 팔찌가 울렸었다. 그 신호는 꿈이 아니었다. 그녀는 진짜 이곳에 와있었다. 자신을 찾으러 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터라 급속도로 그의 안색이 밀랍처럼 굳어만 갔다. 손목에 걸린 가느다란 팔찌를 블리어는 어느새 세게 꽉 말아 쥐고 있었다. “공비전하는 반드시 저희가 신속히 모셔오겠습니다. 기사단장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나도 함께 가겠습니다.” “허나…전하! 지금 다리상태로는 무리십니다. 치료가 우선입니다! 저희에게 맡기시고…” “짚을 것을 주십시오.” 블리어의 단호한 음성에 바로 기사 하나가 허리에 매달고 있던 검을 검집에 씌운 상태로 내밀었다. 기다란 장검으로 바닥을 짚은 채 블리어는 근처에 있던 말에 올랐다. 뒤이어 말을 탄 스무 명의 기사들이 선두에서 달리는 공작의 뒤를 부지런히 뒤쫓아 갔다. 0156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 렐리아는 어딘가에 가만히 서있는 자신을 알아차렸다. 그곳은 익숙하고도 정겨운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베란다에 서있으면 바로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단지의 모습, 주차장이 있고 놀이터가 있고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아파트 입구를 드나드는 모습이 선명했다. 어디선가 맴맴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가 몽롱함을 불러일으키고 눈에 쏘아지는 노란 햇살이 한낮인지 강렬했다. 후덥지근한 기온에 자연스레 몸이 녹아 들어감을 느꼈다. 방충망이 처진 창문 앞에 서서 시원한 바람을 맞고 있을 때다. “이태화. 거기서 뭘 그렇게 서있어?” 등 뒤에서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에 렐리아는 믿기 힘든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소파에 앉은 엄마와 아빠가 수박을 세모꼴로 가지런히 썰어놓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안 오면 수박 없다.” “네 아빠가 수박 다 먹는데.” 퉁명스러운 엄마의 목소리에 렐리아는 서둘러 거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한도전 재방송이 틀어져있는 티비와 윙윙 돌아가고 있는 하얀색 선풍기 한 대가 눈에 익을 만큼 반가웠다. 알 수 없는 안도감이 차오르며 렐리아는 입을 열었다.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엄마, 아빠…….” “딸. 우리 에어컨 살까? 요즘 그 최신형 뭐야…,” “에어컨은 무슨, 선풍기면 충분하지. 설치비도 그렇고 전기세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데 그래?” 뾰족한 눈으로 흘기는 엄마를 못 본 체하며 아빠는 “에어컨이 지금보자, 세일이…” 하며 폰 액정을 들여다보았다. 검지를 쭉 핀 채로 휙휙 넘기는 모습이 전형적인 아저씨들이 스마트폰 다루는 모습이었다. “이거 진짜지…?” 렐리아는 목이 메여왔다. 믿고 싶었다. 돌아가는 선풍기바람이 다리에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티비 소리도, 엄마아빠의 모습도 진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한 현실감을 느꼈다. “이게, 진짜지? 이게 현실인 거지…?” 다행이란 생각에 왠지 모르게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서서히 차올랐다. 주저앉아 울고만 싶은 기분이 들 때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불어 닥쳤다. 뺨을 가로지른 눈물이 바닥에 떨어져 아래를 내려다보니 어느덧 발밑에 있던 노란 장판이 대리석으로 바뀌어있었다. 렐리아의 맨발이 천천히 돌려지며 반대편을 가리켰다. 뒤를 돌아보니 베란다가 아닌 익숙하고도 화려한 침실이 펼쳐져있었다. 그곳은 추운 겨울이었다. 두꺼운 솜이불을 하반신까지 덮고서 책을 읽고 있는 어느 익숙한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흑색머리칼 아래 단정하게 내리깔린 녹안이 얼마안가 들어 올려졌다. 허공에서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블리어…?” 자신이 그 이름을 부르자 그의 얼굴 위로 자상함이 깃들었다. 딱딱해보이던 무표정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며 제게 미소 지었다. 이리 와보란 듯이 따스한 눈짓으로 자신을 부르는 블리어의 모습에 렐리아는 그에게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왜 이리 늦었습니까?” 침대 위로 올라선 자신을 깊이 끌어안아주며 받아주는 단단한 몸이 따스했다. 이윽고 커다란 손이 올라와 젖은 눈가를 섬세하게 쓸어 만져주었다. “울었습니까?” “…….” 렐리아가 아무 말이 없자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렐리아를 조심스레 침대 옆에 눕혔다. 이불을 끌어올려주는 블리어는 평소와 같았다. 푹신한 침대시트의 감촉과 이질감이 없는 방 풍경, 모든 게 너무 따스하고 평화로웠다. “이제 잡시다.” “…이게 현실인거야?” “거짓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소리 없이 흘러내린 눈물을 감추며 렐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그 행복한 일상이 맞았다. 다행스러운 감정에 입술이 살짝 올라갔다. 뒤늦게 블리어가 자신의 배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곤 사랑스러운 눈길로 시선을 맞춰오더니 곧이어 제 눈두덩에도 짧게 키스해주었다. 울지 말라는 듯이 상냥한 입맞춤을 뒤로하고 두둥실 뇌리에 떠오른 행복했던 기억들이 일제히 포말처럼 터져나갔다. “……당장…막아내야……!” “…아아악, 아악…! 살려……!” “…물러서지……대열을……뒤를 보여선…!!” “…최선……어떻게든 공비전하를 지켜라…!” 들려오는 소란스런 외침과 비명소리에 렐리아는 헉, 하고 눈을 떴다. 눈가에 닿았던 따스한 온기는 어디가고 어둑어둑한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차가운 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피부에 녹아내린 잿빛 눈이 눈물과 섞여 귓바퀴로 흘러내렸다. 코끝을 찌르는 비릿한 피비린내에 렐리아는 몸을 일으키기 위해 두 팔을 바르작거렸다. 한손으로 무언가를 짚고 일어서려는데 건물잔해라고 하기엔 상당히 이상한 감촉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그건 누군가의 잘린 다리였다. 렐리아는 황급히 제 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자신의 두 다리 다 멀쩡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본 순간 공포에 질려 숨소리조차 내뱉기 힘들었다. 너저분하게 널린 장기와 신체부위들로 인해 피 냄새가 진동할 수 밖에 없었다. 누군가의 손과 발, 머리였을 그것들은 하얗게 뼈를 드러내고 고기단면처럼 끔찍한 모습들이었다. 퍼렇게 핏줄이 서고 생생한 피로 물들어 사람의 것이라 보기도 힘들었다. 렐리아는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으나 곧 얼굴에 튄 뜨거운 피로 인해 화들짝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시뻘건 물감을 넣은 물풍선이 터져버린 것처럼 갈가리 찢긴 사람의 몸이 허공에서 비처럼 떨어졌다. 분해된 은색 철제갑옷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살점이 떨어진 그 주위에선 이미 혼비백산으로 도망치려는 기사들이 보였다. 그러나 등을 보인 기사 중 하나가 저 멀리 나가떨어져 온몸이 꺾여죽자 곧바로 기사들은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기사들의 검 끝에 노려진 건 멀리서 혼자 동떨어져서 서있는 은발의 남자하나였다. 하지만 결코 치열하게 싸우는 광경이 아니었다. 사람이 벌레만도 못하게 마구 죽어가는 모습은 도저히 전투라고는 볼 수 없었다. 혼미해졌던 정신이 점차 또렷해질수록 렐리아의 호흡은 불안정해져갔다. 극한의 공포가 심장을 쥐어뜯을 것처럼 달려들었다. ‘못 당해낼 거야……이번에도 덤빈다면 죽을 거야…. 죽을 지도 몰라.’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이 떨리고 있었다. 렐리아는 자신의 배를 끌어안았다. 출혈이 그쳐있었으나 어째 뱃속 안이 지독히도 허전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망칠까.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지금이라면…도망칠 수 있을지 않을까….’ 눈가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울컥 눈물이 새어나왔다. 미안함과 서글픔, 공포, 두려움, 증오가 한데 뒤섞여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흘러내렸다. 한 손을 들어 거칠게 눈물을 닦아내었다. 렐리아는 한 팔로 배를 끌어안고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마음이 정해진지는 오래였다. ‘도망칠 곳이나 있을까…….’ 헛웃음처럼 튀어나오는 날숨을 뒤로하고 렐리아는 바닥을 힘껏 박찼다. 총알처럼 튀어나간 몸이 순식간에 은발의 사내가 서있는 곳 앞에 당도하기 무섭게 그녀가 뒤로 젖힌 팔을 힘껏 앞으로 내질렀다. 주먹이 정확히 세브로웰의 턱에 맞아 들어간 순간 렐리아는 제 복부에서 터진 격음과 함께 먼 곳에 처박혔다. 콰과과과과광ㅡ!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기사들은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였으나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먼 곳에서 짙은 먼지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기 중심지에는 건물 서너 채를 부수고 들어가 처참히 고꾸라져 박혀있는 여자가 있었다. 렐리아는 입안에 고인 것을 뱉어냈다. 쇠맛이 심하게 난다했더니 침이 아니라 피였다. 연기로 인해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으나 후들거리는 두 팔로 몸을 지탱하고 일어서려 노력했다. 이번엔 제대로 피하지 않는다면 진짜 죽임당할 지도 몰랐다. ‘블리어...... 나 괜히 싸우는 게 아닐까. 죽으려고 자초하는 게 아닐까. 널 데리고 어디 먼 곳에 멀리멀리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데……’ 세브로웰을 따돌려 도망칠 곳이 있다면, 만약 이 세상 어딘가에 있다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렐리아는 그의 곁을 지켜야했다. 국가의 위험을 모른 체하고 타국으로 떠나는 짓은 개국공신가로서의 위신과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인 동시에 국가적인 배반에 해당하는 짓이라고 들었었다. 그가 일평생 가꿔왔던 영지와 작위를 버리게 하고 왕국의 배반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면, 과연 그와 자신은 행복할까. ‘이래선 너도, 아이도 지킬 수 없을 텐데......’ 자꾸만 약한 마음이 드는 건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나보다. 렐리아는 비척거리던 걸음을 똑바로 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줬다. 아랫배가 싸하게 느껴졌으나 렐리아는 부러 더 강하게 배를 움켜쥐었다. ‘미안해 렐블리. 너까지 휘말리게 해서. 그치만 엄마 소원하나만 들어주라.’ 두 다리가 무겁게 땅을 지탱하고 섰다. 렐리아는 흙먼지가 섞인 누런 연기 속에서 잠시 먼 훗날을 그렸다. 평화로운 영지에서 마음껏 뛰노는 아이의 모습과 제 옆에서 함께 미소 짓고 있을 블리어를 상상했다. ‘약속할게. 네가 태어날 때쯤엔 세상은 평화로워져있을 거라고.’ 눈앞에서 흩어지는 연기너머로 고결하리만치 하얀빛의 은발이 드러났다. 렐리아는 저절로 배를 보호하는 손에 힘이 실렸다. 그득 흘러넘친 눈물을 대신해 짙푸른 눈동자의 한가운데서 비장한 결심이 일렁였다. ‘그러니까 같이 지키자. 아빠와 이곳을…….’ 0157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각오를 다졌으나 역시 그의 아래턱이 붉어진 흔적하나 없이 말끔하자 사기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제법 일격을 담아 내지른 주먹이었는데도 조금의 타격도 주지 못했다. 세브로웰은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그것이 되레 긴장감과 불안감을 고조시킨 건지 기사들은 등을 지고 서있는 그의 주변에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들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세브로웰이 서있던 자리를 기점으로 반경 5미터 안에 있던 땅이 갑자기 강하게 뒤흔들렸다. 누가 억지로 잡아뜯어내는 것처럼 얼어붙은 대지가 들쑥날쑥 들리더니 뾰족하게 끝이 갈린 수십 개의 바윗덩이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표정변화라곤 없이 은빛머리칼만이 고요히 나부끼는 와중에 급작스럽게도 그 수십 개의 바윗덩이가 렐리아가 서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콰광, 쾅, 콰광. 콰광ㅡ 연달아 대지와 건물 벽을 두드려 부수는 바위는 웬만해서는 깨지지 않는 단단한 강도를 자랑했다. 부서진 건물 벽의 잔해가 어지럽게 튕겨져 나오는 와중에도 렐리아는 끄떡도 하지 않고 서 있다가 한 팔을 들어 제게 정확히 날아온 거대한 바윗덩이를 잡아챘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균열이 일며 단숨에 잘게 부서져 고스란히 렐리아의 머리와 어깨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을 목격한 기사들이 아연실색한 표정을 짓고 손에서 검까지 떨어뜨릴 때, 세브로웰은 당연히 그럴 거라 여기고 무미건조한 얼굴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떨까?” 렐리아에게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그 사이, 세브로웰은 다른 것을 지표면 속에서 찾아내고 있었던 건지 입꼬리를 설핏 말아 올렸다. 남성의 구둣발이 허공을 내딛자 가볍게 그의 몸도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아까 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강한 지동과 함께 반경 수백 미터의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전조에 기사들이 서둘러 퇴각을 외치며 달려 나갔으나 쓰나미처럼 이는 흙더미에 집어삼켜져버렸다. 렐리아는 뒤로 빠르게 몸을 물러섰다. 삽시간에 오백 미터 너머로 밀려나간 다리가 흙바닥이 굵게 파일만큼 사납게 긁어내었다. 기사들을 생매장시킨 그 모래폭풍은 렐리아를 아슬아슬하게 집어삼키려다 말고 그녀의 이마만 살짝 스치고 갔다. 렐리아는 먼지를 피해 잠시 얼굴을 숙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허공으로 고오오오, 떠오르는 그것은 팔 층짜리 빌딩이 통째로 들려있는 것과 같은 착각을 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였다. 그것이 숨어있었을 지반은 함몰되어 이미 거대한 싱크홀을 연상케 했고, 움푹 패어 들어간 그 속에는 수 초만에 매장당한 기사들의 사체와 폐허가 된 건물들이 있었다. 단순히 들어 올려지는 것만으로도 그 지반 위에 있었을 모든 것이 수챗구멍에 빨려 들어가듯 들쑥날쑥 흙더미에 파묻혀버렸다. 압도적인 크기답게 그 아래에 진 새카만 그늘은 오백 미터너머에 널찍이 떨어져있는 렐리아의 머리 위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것이 공작성을 덮친다면 천 명은 순식간에 죽어나갈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것을 더는 들어 올리지 못하게 막아야 된다는 생각에 렐리아가 살짝 몸을 낮춘 상태로 땅을 발끝으로 밀어 단숨에 뛰쳐나갔다. 잔뜩 힘을 실은 발로 지면을 한 번 더 박찬순간 거세게 몸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우둘투둘하고 검은 바위 표면에 얼굴이 스칠 듯이 바짝 가까워진 상태로 활주하다 빌딩 오층 정도의 높이에 다다르자 렐리아는 훅, 숨을 들이켰다. 거친 겨울바람에 살짝 뜬 오른쪽다리로 바위표면을 가볍게 찬 후 렐리아는 상체를 크게 비틀었다. 그러곤 원상태로 자세를 바로하며 바위덩이의 중심에 주먹을 강하게 꽂아 넣자 거친 작렬음과 함께 만 여개의 크고 자잘한 바윗덩이로 나뉘어 으깨져버렸다. 그 어지러운 바위파편들이 눈앞에 끼쳐올 때였다. 그 뒤에 숨어있던 남자의 손이 확 쳐들어왔다. 가까워진 서느런 손이 제 목에 닿기 무섭게 렐리아가 허공에 떠있던 몸을 오른쪽으로 눕히며 왼발 등으로 정확히 옆구리를 걷어찼다. 강력한 일격이 들어간 순간 무형의 기운이 막아낸 게 느껴졌다. 동시에 그 기운이 허공에 떠오른 제 몸 위를 빠르게 집어삼키는 것도. 쉭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머리를 뒤흔드는 격렬한 둔통과 함께 충격파가 땅위를 뒤흔들었다. 렐리아는 일어난 거대한 모래폭풍이 잔잔해지기 전에 내다꽂힌 몸을 움직여야만 했다. 무형의 기운이 서느렇게 무릎 옆을 스치고 지나가기 직전 간신히 몸을 굴려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한 기운은 살짝 무릎을 파고든 것인지 수평으로 길게 핏물이 맺혀있었다. 싸한 감각이 관절사이를 날카롭게 후벼왔다. 렐리아는 절뚝일 뻔한 두 다리를 곧게 폈으나 곧 전신을 지배하는 소름끼치는 고압감에 무릎이 절로 꿇릴 것만 같았다. 해저 2만 미터의 깊은 심해에 들어선 것처럼 팔다리는 물론 머리가 터져나갈 듯이 심하게 지끈거렸다. 그때 둥그렇게 파훼된 땅위로 전조도 없이 검은 화염이 내려앉았다. 숨 막히는 열기가 뺨을 스쳐지나갔다. 렐리아는 따끔거리는 피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걸쭉해진 진물과 피가 함께 섞여 묻어나왔다. 갈빗대아래에 뼈가 드러날 정도의 화상을 입었던 그날과 같은 화염인 듯했다. 렐리아는 힘겹게 목을 꺾어 얼굴을 들었다. 희뿌연 먼지가 뒤덮인 허공 그 너머를 올려다보려 노력했다. 척추에 오싹한 한기가 타고 올라와 뒷목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고개가 푹 꺾일 것만 같았다. 은빛 창을 세운 군대가 칠흑처럼 어두운 하늘을 등지고 군림해있는 것 같았다. 상공에서 거대한 날개를 움직이는 은빛비늘의 드래곤은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다시금 긴 주둥이를 벌렸다. 검은 화염이 집어삼킨 자리가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탁한 연기가 치고 올라왔다. 갈라져있던 대지가 외부충격에 의해 미미한 진동을 토해냈다. 틈이 벌어지고 여기저기서 유황가스가 솟구쳐 올랐다. 렐리아는 잽싸게 화염과 연기를 피해 그곳에서 멀어진 후 공작성이 있는 곳과 정 반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먹힐 무기도 없다. 가진 거라곤 이 몸뚱이 하나였다. ‘영지 밖으로 유인해야…,’ 다행히 이 몸뚱이에는 지극한 관심을 보이는 드래곤이었다. 강철과도 같은 비늘로 이뤄진 양날개를 몸체에 붙여 빠르게 활공하며 자신을 추격해오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맹렬해서 렐리아의 등줄기 위로 절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치 비행기 한 대가 쫓아오는 것처럼 요란하고도 무서웠다. 소름끼칠 만큼 기이한 노이즈가 귀를 사로잡았으나 렐리아는 떨쳐내기 위해 더 세게 지면을 박차고 달려 나가야만 했다. 그러다 등을 덮쳐오는 강한 기운을 느끼고 렐리아는 순간적으로 오른발을 안쪽으로 눕혀 왼편으로 비끼듯 피해야만 했다. 새까맣게 일렁이는 불길이 방금전만해도 렐리아가 서있던 곳을 태워버렸다. 휘날리던 은색머리칼은 끝에서부터 한 뼘 정도 타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머리칼을 신경 쓸 시간도 없이 렐리아는 곧바로 왼발에 중심을 실어 앞으로 튀어나가야만 했다. 콧김이 목덜미에 닿은 것이다. 이빨에 신체 한 부위라도 물린다면 영락없이 잘려나갈 것이다. 스치는 예리한 칼바람에도 마치 거대한 이빨이 닿은 것처럼 팔다리에 닭살이 돋았다. 렐리아는 앞만 보고 달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시선은 힐긋힐긋 어깨너머의 대각선 방향을 연방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낮게 날아오는 드래곤의 형상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관찰한 적도 없을 테다. 집체만한 몸집에 악어와 비슷한 생김새로 사납게 맞물려있는 이빨과 길쭉하게 내려앉은 코, 그 끝에 달린 양 구멍은 인간이 걸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크다. 그리고 그 겉가죽은 오묘하고도 섬광이 흐르듯 짙은 광택이 났다. 확실히 비늘자체가 예전과는 달랐다. 다이아몬드를 한 겹 더 덧댄 것처럼 도저히 뚫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비늘이었다. 렐리아는 눈앞보다 뒤를 더 집중하다가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는 그 지점에 도착한 것인지 쓰러진 성벽의 돌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산적한 돌 더미의 가장 맨 아래를 이루고 있는 잔해를 밟고 뛰어오른 후 렐리아는 중반쯤에 착지하자 잡히는 것부터 뒤로 던졌다. 제법 거대한 1톤짜리 돌덩이가 높이 날아갔다. 둔탁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먼 허공에서 울렸으나 렐리아는 성벽더미의 맨 꼭대기위로 올라서는데 급급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올라서는데 걸리는 시간은 1초였지만, 촌각을 다투는 이 상황에서는 따라잡히고 말테다. 그때 무지막지한 타격감이 렐리아는 물론이고 그녀가 서있던 곳까지 쓸어버렸다. 한꺼번에 붕 떠오른 몇 톤짜리 성벽잔해들 사이에서 몸이 반 바퀴 느릿하게 돌았다. 머리에 피가 쏠리고 먼 아래에 있는 까마득한 땅바닥이 거꾸로 뒤집혀 빙빙 맴돌았다. 꼬리를 휘둘러온 것인지 멀리 멀어져가는 드래곤의 거대한 꼬리를 스치듯 포착했다. 렐리아는 스스로가 상공으로 떠올랐다 다시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팔을 뻗었다. 손이 드래곤의 날카로운 발톱 옆의 돋아난 비늘을 간신히 붙잡았다. 수천 개의 성벽잔해들이 먼 바닥아래 추락해 먼지바람을 풀풀 흩날렸다. 힐긋 아래를 주시하다말고 바로 팔에 힘을 주어 가뿐히 드래곤의 굽어진 무릎까지 올라섰다. 그 희미한 소리를 감지한 건지 서서히 드래곤의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는 툭 불거진 두 개의 눈. 어둠 속에서도 기묘한 순은색의 동공은 어둠을 찢어발기고 튀어나올 것처럼 입체적인 공포를 느끼게 했다. […렐리아. 더 놀아줄 의향이 충분히 있는데 말이야.] 세브로웰의 감흥 없는 목소리가 뇌 속에 가득 차 울렸다. [더 도망 안 칠거면 이제 그 불필요한 다리를 잘라도 되는 거지?] 약간은 지루한 듯한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모든 일이 삽시간에 일어났다. 렐리아는 갑작스레 발목을 확 끌어당기는 무형의 기운에 휑한 허공으로 끌려 내려왔다. 창졸간에 은빛비늘을 간신히 붙잡고 버텼으나 두 다리가 뜯어질 것처럼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관절이 억지로 뜯어질 것 같은 고통이 수반되었다. 렐리아는 그 무형의 기운에 끌려간 순간 제 두 다리가 눈 깜짝할 새에 사라질지 모른단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왼손으로 비늘을 악착같이 붙잡은 채 렐리아는 오른손을 꽉 말아 쥐었다. 바로 눈앞의 거죽을 두들기자 소용이 없지는 않은지 콰드득 소릴 내며 비늘들이 날카롭게 횡으로 세워졌다. 모든 힘을 쥐어짜내 한번 더 강한 주먹질을 내지르자 묵직한 타격감과 함께 주변대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동심원으로 넓게 퍼지는 충격파가 일순 귓가에 어지러이 맴돌았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동시에 다리를 뜯어내려던 무형의 기운이 사라짐을 느꼈다. 바로 오른손으로 그 위의 비늘을 붙잡고, 자유로워진 두 다리로 드래곤의 발뒤꿈치로 추정되는 부위를 걷어차 렐리아는 상공에 뛰어올랐다. 기나긴 옆구리에 달린 우측 날개를 스쳐 올라가 뼈로 이루어진 윗부분을 35도 기울인 손바닥으로 짚고서 등을 둥글게 휘었다. 마치 장대높이뛰기 선수같이 날개 끝에 달린 사납게 휘어있는 뿔을 아슬아슬하게 지나쳤다. 실 끊어진 연처럼 붕 떠올라간 몸이 스산한 기류를 타고 밀려나 등허리로 추정되는 경사진 곳에 착지했다. 검처럼 뾰족하게 세워진 비늘덕분에 자칫 미끄러져 넘어질 수 있는 위태로운 경사에서도 두 발로 버티고 설 수 있었다. 렐리아는 생각했던 대로 일단 등 뒤로 넘어오자 큰 안도감을 느꼈다. 강력한 무형의 기운으로 그냥 제 다리를 베어낼 수도 있었을 텐데 세브로웰은 그러지 않았다. 그건 곧 그 자신에게도 피해가 갈 수 있기에 하지 않은 것이다. 남 다리 베려다 칼을 잘못 휘둘러 자기다리 베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남 다리를 벨 수는 없겠지.’ 세브로웰의 몸에 붙어만 있다면 그 골치 아픈 무형의 기운은 물론이고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검은 화염에서도 자유롭게 될 수 있을 테다. 물론 세브로웰은 어떻게든 자신을 몸에서 떨어뜨려내려고 할 테지만. 역시나 렐리아의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그 기운은 유선형을 그리는 등허리를 빠르게 타고 올라와 바로 그녀를 붙잡으려했다. 0158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렐리아는 널찍한 들판처럼 펼쳐지는 은빛 비늘 위를 내달렸다. 세브로웰이 가만히 있지 않고 몸을 꼬아대며 움직이자 등선이 언덕처럼 솟아났다가 푹 꺼지기를 반복했다. 시야에 담긴 하늘도 따라 빙그르르 돌아가는 와중에 가볍게 발을 굴러 왼쪽어깨 부위로 뛰어 올라섰다. 목의 시작점이 되는 부위였다. 비늘을 붙잡아 겨우 균형을 잡을 때 세브로웰의 목이 틀어져오더니 제게로 거대한 주둥이를 확 들이댔다. 날카롭게 끝이 갈린 이빨들이 새하얀 검신처럼 빛났다. 빠르게 다가온 이빨들은 그 육중한 크기와는 다르게 정확하고 민첩했다. 팔을 물어뜯기기 직전 렐리아는 거대한 드래곤의 턱 아래로 몸을 띄웠다. 목둘레를 따라 미끄러지듯이 떨어져 내릴 때 허공을 허우적대던 손이 오른쪽 어깨의 비늘을 잡아챘다. 힐긋 아래를 내려다본 후 렐리아는 세브로웰이 보기 전 민첩하게 날개를 스쳐 뛰어내렸다. 느릿하게 펄럭이는 은색날개 뒤편의 작은 비늘을 두 손으로 단단히 쥐고서 몸을 숨겼다. 바로 정통으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골랐으나 바로 강렬한 기운이 뒤쫓아 오자 반대편 옆구리까지 뛰어내렸다. 그때, 아래에서 위로 급작스럽게 한풍이 불어 닥쳐왔다. 세찬 바람 때문에 몸이 한번 높은 허공에서 뒤집혔다. 머리가 바닥으로 가있자 아찔한 기분과 함께 지평선이 가로가 되었다 세로가 되었다 정신없이 돌아갔다. 반사적으로 뻗은 왼손에 반대편 날개아래의 비늘이 붙잡혔다. 그러나 머리 뒤에서 훅 느껴지는 기운에 안도할 틈도 없이 하나, 둘, 세며 허공으로 또 한 번 뛰어올랐다.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듯이 살짝 위로 뜬 몸을 둥글게 말다가 아래로 떨어지려는 순간 두 다리를 쭉 차며 뻗었다. 탄력 있게 발에 닿은 날개뒤쪽은 트램펄린 구실을 해주었고, 다시 허공을 돌아 정수리가 갈고리처럼 생긴 날개뿔에 찢기기 전 간신히 드래곤 등 위에 착지했다. 그러나 곧 바짝 뒤를 추격해오는 기운을 피해 달려야만 했다. 렐리아는 은빛 들판처럼 펼쳐진 겉가죽 그 너머에 걸린 어두컴컴한 하늘이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간혹 아래가 펼쳐질 때는 울긋불긋한 불씨로 뒤덮인 먼 곳의 땅과 자색의 지평선에 물든 회색연기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마치 게임 속 재앙일러스트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바람에 스며있는 매캐한 냄새와 손과 발끝을 스치는 속도감이 현실임을 깨닫게 했다. 단순한 스릴이 아닌 생존을 건 사투였다. 공포감에 쥐어터질 듯한 심장이었으나 살기위해선 드래곤의 본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기운과 날카로운 이빨로부터 도망쳐야만 했다. 점차 사납게 움직여대는 통에 뛰어올라 착지하는 것도 고역이 되어갔다. 균형을 잃어 아래로 곤두박질칠 뻔한 것을 몇 번이고 반사적으로 비늘을 붙잡아 겨우 회생할 수 있었다. 가장 안전한 곳을 꼽으라면 드래곤 머리의 윗부분 혹은 그 뒷부분이겠지만 저를 잡으려 쫓아오는 그 끈질기고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에 의해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렐리아는 이번에도 사납게 저를 짓이기려는 이빨을 피해 날개부근까지 뛰어내려왔다. 두툼한 날개 아래에 촘촘히 박혀있는 은비늘을 붙잡고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가 바로 날개 뼈대를 타고 돌진해오는 기운을 피해 꼬리위로 착지했다. 곧바로 대형 트레인을 이어놓은 듯한 굵고 긴 꼬리가 저를 상공으로 떨치기 위해 거칠게 휘둘러졌다. 렐리아는 꼬리 쪽의 단단한 비늘을 붙잡고 매달린 채로 발밑에 펼쳐진 까마득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새까맣게 그을린 길이 보이고 허물어진 장벽과 곳곳에 땅위에 처박혀 있는 잔해들이 보였다. 그러다 다시 기운이 삽시간에 가직한 곳에서 느껴졌다. 렐리아는 기운을 피하기 위해 꼬리중심에 있던 비늘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갈마쥐고 바로 꼬리 끝부분으로 옮겨가기 위해 오른손을 뻗었다. 하지만 너무 서두른 탓일까, 손끝이 비늘에 닿았다 싶어 왼손을 놓기 무섭게 오른손이 미끄러졌다. 렐리아는 황급히 왼손으로 그 근처 아무비늘이나 붙잡았다. 숨을 헐떡이는 와중에 몸이 드높은 상공에서 종이인형처럼 흔들려댔다. 당황함을 감추고 다시 오른손을 뻗어 꼬리위로 올라서려던 중 급작스럽게 오른다리를 낚아채는 무형의 기운이 있었다. 갈고리에 끌려가듯 렐리아는 순간적으로 훅 끌려 내려졌다. 오른손의 손톱이 비늘 끝을 긁었다. 렐리아의 몸이 한번 크게 허공에서 붕 뜨더니 바로 대지 아래로 세게 처박혔다. 멀쩡한 겉과는 달리 속은 마구 요동쳤다. 뒤통수를 뒤흔든 충격과 현기증에 제대로 숨이 멈췄다. 그때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는 무언가를 알아차렸다. 신경이 곤두설 만큼 칼날처럼 서느런 기운은 마치 단두대에 목을 내놓고 있는 것 같은 오싹함이 들게 했다. 잘린다, 그런 강한 직감이 들기 무섭게 렐리아가 옆으로 몸을 굴렸다. 별러진 기운은 양쪽다리를 내려찍기 전 위태롭게 다리를 비껴나갔다. 안도하기도 전에 갑작스레 추위가 몰려왔다. 렐리아는 천천히 눈을 굴려 옆을 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한쪽에 낀 코로르비타의 귀걸이가 붉은 액체에 젖어 뒹굴고 있었다. 그제야 렐리아는 천천히 왼쪽 귀로 손을 들어올렸다. 두려움에 막혔던 숨통이 다시 콱 막혀왔다. 핏물에 젖어 잘은 보이지 않았으나 귀가 잘려나가 있었다. “……아….” 없다. 왼쪽 귀가 없다. 만져져야할 것이 사라진 곳은 그저 번번했다. 번들거리는 핏물에 미끄러진 손가락이 허무하게 아래로 떨어져 내려갔다. 충격 속에 잃었던 고통이 서서히 밀려오자 렐리아는 몸을 옹송그린 채 새끼짐승이 낼법한 억눌린 흐느낌을 흘렸다. 불에 대인 듯 화끈거려서 체면도 집어던져 버리고 땅바닥에 뒹굴고 싶을 정도였다. “으으…씨발……씨발놈아…” 숨도 못 쉴 만큼 아픈데도 욕은 절로 튀어나왔다. 시야에 뭐가 낀 듯 앞이 점차 뜨겁고 흐려져 갔다. 렐리아는 피 묻은 왼손으로 흙을 잔뜩 그러쥐었다. 피비린내가 도는 입안을 쥐어짜듯 비명소리를 토해냈으나, 얼마가지 못해 뚝 끊겼다. 가직한 곳을 사뿐히 밟는 남성의 구둣발이 시야너머로 들어서기 무섭게 온몸의 솜털들이 쭈뼛 곤두섰다. “치료해줄까?” 바로 앞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은발의 남자가 긴 다리를 느긋이 움직여 흙먼지가 풀풀 흩날리는 그 한가운데로 진입했다. 고개를 흠칫 떨자 두 눈가에 괴여있던 눈물이 절로 타고 내렸다. “아니면, 이대로 널 기절시킬까.” 싸늘하리만치 낮은 체온의 손바닥이 머리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렐리아는 그 예리한 기운이 두개골 안쪽을 파고들어 뇌를 두 동강낸 게 아닌가 생각했다. 피해야하는데도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렐리아의 머리 위를 미약하게 짓누르던 손이 가볍게 다시 허공으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아까 너와 약속한 게 있으니 한 번 더 기횔 줄게. 순종적으로 굴겠다고 약속하면 강제적으로 굴기 않겠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선택해.” 세브로웰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스며있었다. 렐리아는 두려움도 잠시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되는 그를 두려워했단 사실에 가슴속의 무언가가 처참히 밟힌 기분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길길이 날뛰는 분노가 깃든 건 한순간이었다. 바닥을 짚기 무섭게 꿇었던 무릎이 펴지며 렐리아가 어느새 세브로웰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브로웰이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서 넘실거리는 검디검은 화염은 엄청난 열기를 방출시켰다. 얼굴이 널찍한 손바닥 안에 고통스럽게 뭉개지기 전 렐리아는 간신히 몸을 멈췄다. 하마터면 얼굴전체가 끔찍하게 타버렸을 거라 여기니 분노가 무색하게도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다. 겨울바람이 건드린 왼쪽 귀퉁이에서 후두둑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 너와는 싸우고 싶지 않아. 네가 내 실수 때문에 죽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고 슬플지 상상이 안가.” 세브로웰의 손이 렐리아의 뺨으로 미끄러지며 닿았다. 화끈한 열기나 피부껍질이 벗겨지는 고통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부드럽게 한번 어루만져준 손은 미지근하게 변해있었다. 꼭 블리어의 손길을 연상케 하는 온기였다. “물론 넌 내가 하는 모든 말이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진심이야. 모든 걸 빼앗겨서 정말 가진 게 하나도 없거든. 그래서 잘못해서 너마저 잃게 될까봐, 내가 속으론 얼마나 조심스러워하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렐리아의 두 눈에 씁쓰레하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들어왔다. 렐리아는 입술을 세게 짓이겼다. 떨리던 손가락들이 엄지 안으로 꽉 말아지며 강하게 주먹 쥐어졌다. “이 싸움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데……그딴 표정을 짓고 지랄이야.” 언제든 강렬한 화염이 터져 나와 뺨을 지질 수 있는 손앞에서도 겁을 상실한 것처럼 말문은 닫히지 않았다. “평화롭게 살고 있던 블리어와 나를…, 죄 없는 사람들을 건드린 게 누군데! 이제 와서 그딴 개 같은 소리를 지껄이냐고! 네가 무슨 자격으로!!” 세브로웰은 말없이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은 그녀의 뺨을 덮은 채 멈춰있었다. “네가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죽지 않고 다치지 않았을 거라고! 알아!?” 렐리아는 도저히 분을 식힐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늘 순 제멋대로에 일방적이었었고, 항상 이런 식으로 교묘하게 감정을 이용해 자신을 희롱했었다. 그가 벌인 자작극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초조해지고 죄책감을 쌓아올렸던 날들이 분명 존재했다. 말간 겉가죽 뒤에선 분명히 웃고 있었을 거라 여기니 도저히 분노가 식질 않았다. 그는 자신을 속이는 데에 있어서 절대 치밀한 성격은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그는 언제나 여유로웠다. 마치 권력자의 오만함처럼 상대를 휘둘렀고 종내 손에 넣고야말겠다는 소유욕과 광기의 집합체로 변했을 뿐이다. “…난 네가 좀 죽었으면 좋겠어, 아럼프. 아니 세브로웰.” 한 글자씩 씹어뱉자 세브로웰은 그제야 처연하게 내려갔던 입술을 살짝 끌어올렸다. 의외로 그는 순순히 손을 거두었다. 마치 이렇게 나와도 상관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것에 되레 큰 불안함이 들 때 렐리아는 그의 입가에 떠오른 의미심장한 미소를 발견했다. “그보다 렐리아. 너도 지금쯤이면 눈치 챘을 거라 생각하는데…,” 세브로웰은 부러 뒷말을 흐렸다. 항상 저런 식으로 중요한 얘기에선 말끝을 흐리는 버릇을 렐리아는 알고 있었다. 전혀 다른 목소리, 전혀 다른 외형을 갖추고 있어도 동일인물이란 걸 의식해서인지 아럼프의 얼굴과 겹쳐보였다. 화려한 붉은빛의 잔상을 애써 머릿속에서 떨쳐낼 때다. “그 뱃속부터 서둘러 정리해야 되지 않을까?” 마치 상대의 반응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쓴 것만 같은 느긋한 어조였다. 그가 몸을 굽혀오더니 세브로웰의 섬세하게 깎인 턱이 렐리아의 옆머리로 내려앉았다. “언제까지 죽은 태아를 품고 있을 순 없잖아.” 귓가를 파고든 목소리가 뾰족한 송곳이 되어 뇌를 찔러왔다. 섬뜩한 감정에 렐리아는 두 다리의 힘이 풀렸다. 공포에 짓눌린 뇌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0159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네 몸속에 아주 작은 시체가 들어있단 소리야.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주듯 친절하고도 배려적인 속삭임은 가장 큰 잔혹한 상처를 남겼다. 눈물조차 쥐어짜내기가 힘들었다. 렐리아는 심하게 떨리는 한 손을 들어 아랫배에 가져다댔다. 차가웠다. 이상하게도 한기가 느껴졌다. 숨을 헐떡이면 헐떡일수록 호흡이 엇박자를 이루어갔다. 뇌로 가지 못한 산소들이 입 밖에 그저 머물러만 있는 느낌, 아기가 아닌 자신이 죽어버린 것만 같았다. “원래 없애기로 얘기했던 아이니까 충격은 그쯤에서 관두기로 하고. 아참, 다음은 다리인 거 알지?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해두는 게 아무래도…,” “아아악…!” 매캐한 연기가 스민 대기를 찢으며 비참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렐리아는 그 자리에서 절규했다. 한번 달군 것처럼 뜨거운 눈물은 마치 세찬 빗방울이 뺨을 두드리는 것처럼 흘러내렸다. 힘이 완전히 풀린 무릎이 풀썩 꺾였다. 태어나서 이렇게 소리 내어 울어본 적이 있을까 싶을 만큼 렐리아는 울었다.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터져 나온 슬픔에, 금방이라도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네가, 네가……!!” 내 아이를 죽였어, 블리어와 나의 아이를 죽였어. 렐리아는 목이 메여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눈물과 함께 삼켜낸 말은 늑골이 저릴 만큼 아팠다. 모든 미래와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긴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죽어!!! 죽어버리라고!!” 격분한 눈이 이성을 잃은 지 오래였다. 개 같은 새끼, 미친 새끼, 씨발 새끼, 저주를 담아 욕을 퍼부을수록 비참해지는 건 세브로웰이 아닌 렐리아였다. 그 사실이 그녀의 밑바닥에 남은 이성마저 모조리 무너지게 만들었다. 눈으로 쫓지 못할 속도로 땅을 박차고 일어선 렐리아가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은발 남자의 옆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기 무섭게 그대로 그 면상을 잡아 땅바닥에 처박으려했으나 바로 굵직한 손가락에 의해 막혔다. 단단히 렐리아의 손목을 틀어쥔 그가 한번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뺨 때린 걸로 네 아이는 앞으로 잊어버리는 거야.” 맞은 뺨은 부어오르기는커녕 붉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말끔했다. 마치 선심을 쓴 것 같은 표정을 지어보이던 세브로웰이 어느 순간 씻은 듯 미소기를 없앴다. 렐리아가 왼손으로 반격하려하자 이번엔 그 주먹을 받은 순간 아래로 비틀어 꺾어버렸다. 얇은 손목뼈가 동강나고 손목의 형태가 조금 기이하게 변했으나 렐리아는 아픔조차 잊은 것인지 여전히 살벌하게 달려들 틈만 봤다. “자꾸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내가 곤란한데…….”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리던 세브로웰이 무형의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날아온 섬뜩한 칼날이 코앞에서 멈춘 것처럼 렐리아는 낮게 숨을 들이켰다. 피해야 된다. 동물적인 감각은 그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렐리아는 그의 손에 잡혀있는 주먹을 빼기 위해 어깨를 비틀었으나 소용없었다. “나도 이제 기력소모는 사양이야. 단번에 자를 거니까 피하지마.” 무릎 바로아래에 스산한 바람이 스쳤다. 뼛속까지 파고든 한기에 순간 피가 튀고 종아리가 잘려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있는 공포가 바로 앞에서 숨 쉬었다. 이번엔 진짜 잘려나갈 것이다. 그런 강한 확신이 들만큼 그의 주변에서 넘실대던 기운이 삽시간에 낫처럼 날카롭게 별러지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찰나의 극통을 시작으로 눈앞까지 시뻘건 핏물이 튀어 올랐다. 생살을 가르고 무릎을 파고드는 감각은 상상이상으로 잔인했다. “슬슬 이곳도 마무리 짓고 수도로 올라가야…,” 순간 세브로웰의 말이 멈췄다. 무릎 앞뼈에 생생히 닿은 채로 기운이 멈추고 렐리아는 어디선가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저를 휘감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눈에 보이지 않을 바람은 선명하리만치 짙은 금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짓만 하는구나, 너는.” 연약하게 느껴지는 여성의 목소리였으나 듣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강한 안도감이 들었다. 렐리아는 그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서서히 고개를 돌리자 뒤쪽에서부터 한층 더 강한 바람이 불어 닥치며 렐리아의 몸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세브로웰과의 거리가 멀어졌다. “늦어서 미안해.” 렐리아는 자신의 옆머리를 덮는 가녀린 손을 바라보았다가 정면을 응시했다. 휘황찬란한 금발머리를 늘어뜨린 여인이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가브리나는 잘려나간 왼쪽 귀부분의 출혈을 멎게 하고 꺾인 손목을 바로 해주었다. 손쓸 수 없을 만큼 심각해 보이는 무릎에도 금빛줄기가 파고들더니 서서히 아물어가기 시작했다. “세브로웰과는 끝을 보러 왔단다. 이제 마지막이야.” 가브리나는 자신을 바라보는 렐리아와 한번 눈을 맞춘 뒤 멀찍한 곳에 서있는 세브로웰에게 시선을 주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으나 두 개의 은빛눈동자는 점차 채도가 높아져갔다. 몸서리처질 만큼 방대한 마나의 흐름을 가브리나는 감지했다. 예민한 감각은 모든 대기 속 마나가 비정상적이게도 세브로웰 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생각이 있어. 비록 정면으로 상대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뭐든 좋으니까…,” 빠드득 이가 갈리는 살벌한 목소리가 가브리나의 말허리를 끊어냈다. “저 자식을 죽일 수만 있다면 뭐든…, 뭐든 좋으니까 어서 서둘러요….” 가브리나는 렐리아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훑은 순간 진정하라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희미한 죽음이 느껴진다고 여겼건만 그것이 복중에서일 줄은 몰랐다. “나도 도울 테니까! 어서…!” 잠시 굳어있던 가브리나의 표정이 렐리아의 외침에 다시 원래대로 침착히 돌아왔다. 가브리나는 완전히 그녀를 돌아본 상태로 진중하게 운을 뗐다. “조금만 더 하면 준비한 대마법진을 시동시킬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잠시만…잠시만 시간을 끌어주렴.” “알겠어요.” “그리고 이거 받으렴.” 가브리나가 내미는 것을 렐리아는 손바닥을 펴서 받았다. 영롱하게 빛이 흐르는 금반지가 놓여있었다. “이거…,” “끼고 있으면 널 지켜줄 거야.” 필요 없다고 하려했으나 가브리나의 무겁고 슬픈 눈동자에 렐리아는 하는 수 없이 받았다. 왼손 검지에 끼워 넣고서 그녀는 서둘러 사라진 가브리나를 뒤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정면만 고집했다. 둥그런 눈동자는 웃으며 서있는 은발 남자를 담기 무섭게 점차 그 모양이 일그러져갔다. 암청색의 밤바다처럼 깊어진 눈동자에 지워지지 않는 분노가 아로새겨져있었다. 살고 싶은 마음도, 그럴 기력도 싹 가시게 만들었다. 그저 죽여 버리고 싶다는 살의만이 전신을 지배한 채 들끓고 있었다. 잔인한 핏빛의 배를 드러내놓고 죽었으면 좋겠다. 부디 그러도록, 렐리아는 그의 뱃가죽을 갈라버릴 생각만으로 발꿈치에 우직하게 힘을 실었다. 흙으로만 이뤄진 지반이 와드득 내려앉으며 황토색먼지가 발목을 휘감았다. 눈을 감았다 뜨는 그 짧은 순간에 렐리아가 세브로웰의 지척까지 날아와 머리를 날려버릴 듯이 세게 주먹으로 쳤다. 세브로웰이 오른팔을 들어 막아냈으나 강한 한 방이 제대로 먹혀들은 건지 먼지가 덮인 구둣발이 대각선으로 밀려났다. 곧이어 왼발로 그의 옆머리를 세차게 걷어찼으나 왼손에 의해 가로막혔다. 세브로웰의 왼손이 렐리아의 발목을 꽉 쥐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부어오르는 발 위로 벼린 도끼날 같은 섬뜩한 기운이 파고들었다. 그대로 렐리아의 왼발목이 싹둑 잘려나가기 전 환하고 강력한 금빛의 마법결계가 나타났다. 금반지에서 터져 나온 빛무리는 세브로웰의 기운을 튕기듯 막아내며 두 사람간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렐리아는 착지하면서도 순발력을 더해서 다시 세브로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렐리아가 발을 디딘 그 위로 거대한 균열이 일며 땅이 연쇄적으로 솟아올랐다. 콰파파파파팍ㅡ, 5미터를 훌쩍 뛰어넘는 벽들이 그녀 주위를 두르듯이 올라오더니 2초 만에 그 높이가 두 배로 상승해 렐리아를 덮쳐 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렐리아는 조금의 주저도 없이 꽉 쥔 주먹으로 첩첩이 겹친 흙벽들을 깨부숴버렸다. 거대한 흙벽 뒤에 뭐가 튀어나오든지 이젠 조심할 필요가 없었다. 조심할 필요가 없다, 이 사실만으로도 뜨거운 설움이 복받쳐 오른다는 걸 세브로웰은 알까. 용서할 수 없다. 죽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포악한 광기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렐리아를 움직이게 했다. 부수고 부숴도 끝없이 생성되었으나 격파하기를 멈추지 않을 때 순간 강인한 열기가 주먹등으로 느껴졌다. 눈앞을 가릴 만큼 자욱한 흙먼지가 훅 들어간 주먹주위로 뚫리더니 그제야 시야가 환하게 텄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납게 쫘악 벌린 괴물의 아가리 속처럼 새까만 어둠이었다. 그것이 화염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땐 이미 온몸이 덮쳐져버린 후였다. 치이이이익, 대지 위가 희뿌연 연기를 방출하며 들끓었다. 커다란 불기둥의 형상을 한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모든 걸 녹여낸 후였다. 장벽의 무너진 잔해는 온데 간 데 없고 검게 눌러 붙은 잿덩이로 변해있었다. 군데군데 붉은 불씨만이 숨 쉬는 검게 타들어간 땅 위로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타다만 종이처럼 일부분이 거무스름 녹아내린 금빛결계 속에서 긴 은발이 잔잔히 흩날렸다. 금반지의 겉이 갈색으로 변모해있었으나 그 사실을 렐리아는 알지 못했다. 그저 살기등등한 눈으로 반대편을 노려보았다. 대지에 내려앉아있는 비대한 몸집의 드래곤은 은을 부어놓은 것만 같은 찬란함으로 무장한 채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위협해볼 심산인지 드래곤의 길게 쭉 찢어진 입가에선 새까만 브레스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에 렐리아는 오히려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내가 죽으면 내가 더 아쉬울까, 네가 더 아쉬울까.” 두려울 게 없는 지금 실성한 눈동자에는 광기만이 배어나왔다. 렐리아는 살짝 숙인 자세에서 그대로 대지 위를 활공하는 것처럼 빠르게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드래곤의 옆구리 높이까지 뛰어올랐으나 강한 날갯짓에 인 돌풍에 그대로 몸이 뒤집히며 땅으로 처박혔다. 목이 두세 번 꺾이고 불씨 사이에 처박혔던 가느다란 몸이 또 한 번 잽싸게 튀어나갔다. “아아아아악!” 살기를 품은 눈은 앞에 있는 적밖에 보질 못했다. 렐리아는 다시 허공으로 뛰어오르기 무섭게 주먹을 날렸으나 무형의 기운에 의해 강하게 내쳐져 반대로 처박혀버렸다. 줄이 없는 마리오네트처럼 그녀의 몸은 후끈한 열기를 뿜는 땅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댔다. 팔다리가 뒤틀릴 만큼 심하게 구른 후에도 다시 새총처럼 튀어 올라가 세브로웰에게 공격을 시도했다. 세브로웰은 잇달아 달려드는 그녀를 튕겨내고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었다. 거드름스럽게 지상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간간이 기운을 방출하여 땅을 들쑤셔댔다. 하지만 금속방패 같은 비늘로 둘러싸인 육중한 몸은 빈틈이 없어도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다는 걸 렐리아는 알아차렸다. ‘그 빌어먹을 화염과 눈에 안 보이는 힘만 어떻게 하면…,’ 깊은 사념에 빠진 채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하려할 때였다. “……렐리아!!” 먼 곳에서부터 메아리치듯 들려온 익숙한 외침에 렐리아의 발이 묶였다. 가슴이 묵직이 내려앉았다. 눈물이 다시금 튀어나올 것처럼 시야가 뿌옇게 변해갔다. 그가 무사하다는 안도감과 차마 그를 볼 면목이 없다는 죄책감과 상실감, 서글픔이 한데 겹쳤다. 렐리아는 아랫배를 한 팔로 끌어안아 숨긴 채 이곳에서부터 수백 미터 동떨어진 곳을 돌아보았다. 흑색 군마위에 앉아서 달려오고 있는 블리어와 그 뒤에 수십 명의 철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흐릿하게나마 보였다. 0160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블…리어.” 렐리아가 그의 이름을 희미하게 불렀다. 그 순간 움직일 생각을 않던 세브로웰이 거친 돌풍을 일으키며 상공으로 비행했다. 드래곤이 향하는 곳이 어딘지 렐리아보다도 그 방향에 있던 블리어와 기사들이 먼저 알아차렸다. 거대한 한 쌍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건물이 폭삭 무너져 내리는 굉음에 맞먹을 만큼 컸다. “이…이쪽으로 온다!!” “공작전하!! 피하셔야합니다!” “후퇴하라! 후퇴!” 금방이라도 자신들의 머리 위를 덮칠 것처럼 다가오는 드래곤을 발견한 기사들은 일제히 경악스럽게 외쳐댔다. 하지만 맨 뒷줄에 있던 기사들은 패닉에 질려 고삐만 단단히 쥐고 있을 뿐이었다. 판단력을 가진 인간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제자리에서 앞발을 치켜세우며 놀라는 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들을 덮치고도 반경 이백 미터의 지대가 뒤집어지다 못해 완전히 깔아뭉개질 것만 같았다. 공포스러울 만큼 거대했다. 앞으로 계속 달려가든 뒤로 도망가든 이미 늦었다는 걸 직감으로 알아차린 순간 머릿속은 백지장이 된지 오래였다. 그건 블리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냉철한 판단력이 발휘되기도 전에 그의 머리 위에는 이미 섬쩍지근한 죽음의 그림자가 내리깔려있었다. 웅장한 굉음과 함께 커다란 원형의 모래폭풍이 일었다. 절망스런 회색빛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을 향해 낮게 내려앉는 그것이 선사하는 공포에 산산이 짓뭉개져버릴 뿐이다. 그때였다. 순간적으로 블리어는 가직한 곳에서 들려온 소리와 인기척을 느꼈다. 모든 주위를 뒤덮은 먼지로 인해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나 그는 호흡기를 가린 상태로 서서히 눈을 떴다. 먼지에 찔려 따끔거리는 시야너머로 어느 작은 등이 바로 앞에서 보였다. 누리끼리한 먼지 속에서도 그 색이 바라지 않는 은빛머리칼이 찬연히 나부꼈다. “이틈에…어서 가!!!” 그 절박한 외침에 그제야 블리어는 이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완전히 아랠 짓뭉개려고 하는 드래곤과 이에 맞서 혈혈단신으로 두 팔로 받친 채 버티고 있는 렐리아를 말이다.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는 끔찍한 기분이었다. 엄청난 무게를 견뎌내는 동안 피가 쏠린 렐리아의 얼굴이 조금씩 붉디붉게 변해갔다. 몸을 지탱하는 발은 점차 땅속에 파묻혀가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가락의 얇은 뼈 마디마디가 짓눌려 비스킷조각처럼 산산조각 바스라질 것만 같았다. 이미 90도 이상 접질린 손목에서 기이하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고 있었다. 어깨에선 뼈가 탈골된 것과 같은 무지막지한 고통이 밀려왔다. 렐리아는 받치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계를 느꼈으나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아기는 지키지 못했지만 사랑하는 그만큼은 어떻게든 지켜내고 싶었다. 끝내 지키지 못했기에 느꼈던 가슴 저린 미안함을, 그 절망을 또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뱃속에 있는 아기가 제게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를 지켜달라고, 태동처럼 희미하지만 사랑스럽게 속삭여오는 것 같았다. 뱃속 아가와의 첫 교감이 생각나 렐리아는 더 가슴이 미어왔다. 엄마가 돼서 자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엄마가 강하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럴 힘을 줘야 될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니 어금니가 있는 힘껏 꽉 맞물려졌다. 이가 도자기조각처럼 입안에서 산산조각 부서질 것 같았으나 잔뜩 불어넣은 힘을 풀지 않았다. 렐리아가 정면을 응시했다. 자욱한 연기 탓인지 시야가 다시 뿌예졌다. “가, 빨리…!!” 렐리아의 절규어린 외침을 뒤로하고 조금씩 위가 들썩이며 들어 올려지더니 흙먼지가 순식간에 사위로 확 빠져나갔다. 그 희미한 탈출구를 발견한 말들이 그리로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블리어는 고삐를 쥐어 당겼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앞으로 계속 달려 나갔다. 뒤따라 달려오는 기사들의 말 때문에 멈출 수도 없었다. 불편한 다리로 인해 내려서는 것도 편치 않은 그는 말에 매달려 렐리아가 있는 곳을 주시했다. 고갤 돌리자 순간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서 렐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붉게 충혈 되어있는 새파란 눈동자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블리어는 아프도록 심장이 쥐어짜지는 기분이 들었다. 렐리아는 제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해.’ 그 입술을 따라 읽는 순간 블리어의 눈도 따라 벌겋게 충혈 되었다. 심장의 핏기가 모두 빠져나가 눈자위에 몰린 것만 같았다. 싸한데 아프도록 화끈거렸다. “안됩니다……,"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걸 블리어는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 결의에 찬 눈은 제 곁을 영영 떠날 각오로 드래곤에 맞서려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아마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 하나는 확실했다. "안됩,니다. 렐리아!” 요란하게 들썩이는 안장위에서 블리어는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끝내 렐리아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 단숨에 그 자리에서 벗어난 말들은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기사들은 자신들이 본 광경에 반쯤 얼이 나가있으면서도 무사했다는 안도감에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한 기사가 공포에 질린 몰골로 내지른 비명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비스듬히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일동 머리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경악에 찬 신음조차 흘리지 못할 만큼 공포감에 질려있다는 게 맞는 말일테다. 다시 상공으로 날아오른 은색비늘로 뒤덮인 드래곤이 자신들을 추격해오며 긴 주둥이를 벌려왔다. 가로로 찢긴 입새로 위협적인 송곳니가 드러나고 검은 브레스가 넘실거렸다. 곧바로 말을 타고 달리는 기사들을 향해 정확히 쏘아져 내렸다. 인간의 살가죽은 물론 뼈째로 녹여내는 브레스가 닿기 직전 성문과도 같은 거대한 황금색 날개에 의해 가로막혔다. 가브리나였다. 촤아아아악ㅡ, 인간들을 보호하기위해 대신 화염 공격에 당한 한쪽 날개에서 짙은 회색빛 연기가 피어올랐다. 천 년 전만 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을 공격일 터인데 선명하게 그을음자국이 남아있었다. 검게 그을려진 금빛의 날개가죽에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자는 가브리나가 아닌, 세브로웰이었다. 세브로웰은 지면과 근접해있는 가브리나를 향해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모든 걸 휩쓸 듯 강한 회오리바람을 일으켰으나 가브리나의 뒤편에서 계속해서 말을 타고 달려 나가는 기사들에게는 닿지 않았다. 세브로웰은 멀리 도망치는 인간들에게 이미 관심이 사라진 것인지 조용했다. 착지하며 고개를 낮추고 있던 세브로웰이 서서히 다시 높게 머리를 든 순간이었다. [가브리나. 내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다르네요. 그 몸이 쇠약해진 사실을……이제까지 교묘하게 감추고 있었다니,] 별안간 세브로웰의 흰자위가 희번덕거렸다. […죽일 수 있었던 걸 이제까지 살려두고 있었던 거잖아?] 세브로웰의 몸체를 두르고 있던 마나에서 기괴한 비틀림이 일었다. 강한 기운이 순간 은빛비늘 사이사이로 터져 나와 다트 끝의 송곳처럼 한 과녁을 향해 날아갔다. 가브리나의 목을 베어내고도 남을 날카로운 마나는 넘실대는 금빛보호막에 의해 대부분 가로막혀졌으나 가브리나의 몸체에 몇몇 가느다란 선이 생겨났다. 마법결계를 뚫고 금속처럼 단단한 황금색비늘을 벤 것이다. 그때 세브로웰의 주둥이가 찢어질 것처럼 크게 벌어졌다. 가브리나는 그을려진 날개 끝을 흠칫 떨었다. 브레스를 정통으로 맞는 순간 이번에야말로 몸 전체가 검게 타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등 뒤에서 도망치고 있는 인간들을 내버려두고 피할 수가 없었다. 어둡게 넘실대던 화염이 뿜어내지려는 순간 전투기처럼 날아든 매서운 일격이 실버드래곤의 옆 주둥이를 강타했다. 그 두꺼운 가죽을 뚫을 것처럼 날카로운 주먹은 쿠우웅, 하고 묵직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주먹의 주인 렐리아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외쳤다. “가요!!!” 세브로웰의 머리가 모로 돌아가지며 육중한 몸의 중심이 어긋난 순간 렐리아가 또 한 번 반대편 주먹을 세차게 내질렀다. “내가 붙잡고 있을 테니까!!” [……렐리아.] 마법을 시동할 동안 세브로웰의 발을 붙잡아주겠다는 렐리아의 외침에 그제야 가브리나가 고공으로 날아올랐다. 다시 윈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향하려할 때 거대한 굉음이 대지에서 울렸다. 가브리나는 먼 땅바닥위에 처참히 뒹구는 작은 몸을 응시하다가 순간 제 아래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열기에 왼쪽 날개를 접어 몸을 기울였다. 먹빛하늘을 뚫을 것처럼 새카만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가브리나가 불기둥을 피해 전속력으로 날아간 순간 또 한 번 대지 위에선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이 계속되었다. 땅위에 내쳐진 작은 몸이 수십 미터 가까이 굴러대자 먼지가 끊임없이 피어올랐다. 세브로웰이 렐리아를 떨쳐내면 떨쳐낼수록 렐리아의 반격의 간격도 더욱더 짧아져만 갔다. 고통을 잊고, 감각을 잃은 몸 안에서는 아드레날린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분비되었다. 지면이 빠르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다리가 달리는 건지 지면이 달리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감을 뒤로하고 이성을 잃은 동공이 순간 크게 뜨였다. 동공에 자리 잡은 세브로웰을 향한 추악한 분노가 시뻘겋게 타올랐다. 눈의 실핏줄이 터져나갔다. “아아아아악!” 성대가 찢어져라 질러대며 렐리아가 세브로웰에게 악을 쓰며 덤벼들었다. 수차례 땅에 갈리고 처박힌 온몸은 이미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였다. 피와 먼지를 뒤집어쓴 작은 인간을 세브로웰은 이번에도 힘껏 날개로 쳐내려했으나 렐리아가 그 날개 끝의 비늘을 붙잡았다. 악착같이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렐리아를 향해 순간 강한 기운이 덮쳐왔다. 시야가 붉은 핏물 천지였다. 동시에 오래전 바늘로 눈을 찔렸을 때와 비슷한 극통이 오른쪽 눈을 덮쳐왔다. 눈가주위도 땡볕의 아스팔트에 끔찍하게 쓸린 것처럼 화끈거려 렐리아의 손힘이 절로 풀렸다. 렐리아의 몸이 허공에 한번 붕 떴다가 그대로 거친 바닥에 머리부터 처박혀 뒹굴었다.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널브러진 몸이 움찔움찔 떨리기 시작했다. 렐리아는 엎드린 상태에서 한손은 바닥을 짚고, 다른 손은 오른쪽 눈에 가져갔다. 땅을 짚고 있는 팔이 자꾸만 안으로 구부러지고 쳐졌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오른쪽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느리게 내렸다. 손바닥은 끔찍하리만치 검붉은 핏덩이로 젖어 붉었다. 그 핏덩이사이로 묽은 흰 것이 묻어나왔다. 오른쪽 눈이 안보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렐리아는 눈 한쪽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 헛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제게 잃을 게 더 남아있단 사실에 퍽 우스워졌다. 그때 렐리아의 왼쪽 눈에 먼 곳의 서편하늘이 문득 들어왔다. 아득하고도 절망스러운 검은 하늘위로 떠오른 것은 대형 마법진이었다. 영지를 뒤덮을 듯이 까마득한 크기의 마법진이 연한 하늘빛에서 형광처럼 밝은 금빛으로 서서히 뒤바뀌는 광경은 경이롭기 까지 했다. 아직 시동이 되기 전의 마법진이라는 걸 알아차린 순간 렐리아는 몸을 완전히 일으켜 세워야만 했다. 세브로웰이 가만히 놔둘 리 없는 것이다. 역시나 멀찍한 땅위에서 고아한 은빛의 날개가 펼쳐졌다. 원형의 먼지폭풍을 일으키며 비상하려는 세브로웰의 몸체에 가까스로 손을 뻗었으나 막기에는 이미 늦었다. 장대한 몸이 순식간에 지면을 박차고 하늘로 치솟았다. 그 등에 악착같이 매달려 렐리아는 단숨에 상공으로 진입했다. 정신이 없을 만큼 오른쪽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가 시끄러웠다. 긴 머리칼이 거칠게 휘날려 안 그래도 렐리아의 하나뿐인 시야를 가렸다. 렐리아는 녹초가 된 팔이 다 후들거렸으나 오른손을 위로 뻗어 다른 비늘을 붙잡았다. 절벽과도 같은 경사진 드래곤의 등을 타고 올라가기 위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양팔에 악착같이 힘을 불어넣었다. 손이 미끄러질까봐 단단히 손톱까지 세워야만 했다. 0161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위태롭게 매달린 상태에서 조금씩 위로 올라가려는 렐리아의 가냘픈 몸뚱이를 까마득한 아래서 올려다보는 인간들이 있었다. 기사들은 그녀가 자신들이 찾고 있던 공비라는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가까이에 있는 공작에게로 시선을 내렸다. 그 순간 블리어가 기사들을 제쳐두고 서둘러 말에 박차를 가했다. 칼날 같은 바람이 먼지로 뒤덮인 흑색머리칼을 자를 듯이 매섭게 스쳐지나갔다. 드래곤과 그 등에 매달려있는 렐리아를 쫓아가기 시작하는 남자는 그렇게 불안해보일 수 없었다. 블리어는 그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안 뒤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았던 불온한 예감을 떠올렸다. 언젠가 찾아올 재앙을 알고 있기에 그 사실이 몹시도 불안하게 다가왔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재 그의 예감은 정확히 들어맞아있었다. ‘렐리아…….’ 어떤 이유에서든 나서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기를 바랐다. ‘그대가 혹여 무거운 사명을 강제로 짊어지게 될까, 나는 그것이 줄곧 두려웠던 걸지도 모릅니다.’ 일반사람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특별한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인류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할까봐 그것이 몹시도 두려웠었다. 자유롭고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와 잡아둔 게 자신이기에, 죄책감에 짓눌린 왼쪽가슴이 크게 지끈거렸다. 먹먹해져오는 귀를 대신해 점차 가빠지는 숨소리와 심장박동 소리가 선명해져갔다. 그의 두 눈은 하늘위에서 치열하게 드래곤의 몸을 기어오르는 렐리아에게 꽂혀있었다. 금방이라도 지면으로 추락할 것 같은 아찔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급할 대로 조급해진 가슴은 바싹 타들어만 갔다. 물기 없는 건조한 눈가에선 그저 시큰거리는 열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러니…지금이라도 돌아와 주십시오. 그저 내 곁에서 렐리아인 채로 머물러주십시오.’ 그녀도, 자신도 대단한 영웅적인 존재를 원하는 것이 아닐진대 어째서 그녀가 고통받아야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야하는지 정녕 알 수가 없었다. 사소한 행복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러나 블리어의 애탄 바람은 렐리아의 귀에 끝끝내 닿질 않았다. 렐리아는 서녘하늘에서 점차 형태를 갖추고 있는 대형 마법진을 올려다보았다. 그곳까지 세브로웰이 올라가질 못하게 막는데 급급한 터라 렐리아는 드래곤의 목 부근에 매달려서 주먹 쥔 오른손을 힘껏 뻗었다. 상당히 묵직한 타격감이 손 뼈마디에서 퍼져나갔다. 세브로웰은 상공에서 날아오르던 상태에서 멈춘 채 머리를 기이한 각도로 꺾어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기운을 방출해 그녀를 떨쳐내려 했으나 그녀의 몸 주위로 흐릿하게나마 금빛 결계가 떠올라 있어 세브로웰의 기운이 통과하기 쉽지 않았다. 세브로웰은 곧바로 냉기류를 타고 북서쪽으로 몸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아래로 비스듬히 몸을 눕히고 성문처럼 거대한 양 날개를 접었다. 까마득한 땅을 향해 머리를 둔 채 렐리아는 세브로웰과 함께 고공에서 떨어져 내렸다. 온 힘이 주먹에 다 쏠리도록 한 탓에 몸을 지탱하는 양 허벅지와 한손이 조금 위태로운 상태였다. 아찔한 현기증에 오금이 저리고 손의 힘도 절로 풀릴 것만 같았다. 심장마비로 죽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문득 들었다. 추락하는 비행기의 몸체처럼 비늘달린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중심을 잡기 힘든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왼쪽 시야마저 팽그르르 돌았다. 새까만 경치가 지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져있고 하늘과 땅이 수차례 뒤집혔다. 불어 닥치는 칼바람에 두피가 찢겨나갈 것 같았다. 하강 비행하던 세브로웰은 곧 한쪽 날개로 땅바닥을 휩쓸 것처럼 널찍하게 펼치더니 곧바로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렐리아는 다시 올라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아래에서 부닥쳐오는 거센 바람 탓에 뒷머리가 얼얼했다.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내려다보자 그녀의 시야아래 훤히 높고 낮은 스무 개의 산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졌다. 높이 상승하던 세브로웰의 몸이 어느 순간 뚝 떨어질 것처럼 멈췄다. 영지전체가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지점은 주위가 온통 까매서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이때 세브로웰의 몸이 점차 앞으로 기울여지더니 렐리아의 머리에 다시금 피가 쏠렸다. 떨어질 것만 같은 아찔한 기분이 듦과 동시에, 세브로웰이 산꼭대기를 들이박을 것처럼 고속하강을 시작했다. 망치로 목을 두들기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바람이 강했다. 렐리아는 자꾸 푹 꺾어지려는 목을 최대한 뻣뻣하게 세운 채 힐끗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이대로 산과 부딪친다면 산 윗부분이 부서지는 건 물론이고 최소 척추와 갈비뼈가 나갈 거라는 오싹한 직감이 들 때였다. 문득 그 산의 꼭대기만 다른 산들과는 조금 특이하게 생겼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우묵하게 들어가 얕은 호수가 생겨있었다. 쌓여있는 까무스름한 부석들도 그렇지만 분명 분화구 모양이었다. ‘이거……’ 과학책에서 본 적이 있는 백두산 천지의 사진과 흡사했다. 주홍색과 붉은색의 마그마방이 개미집처럼 그려져 있던 휴화산의 단면도도, 그 외 배운 내용들도 어렴풋하게 기억이 났다. 추락하고 있던 렐리아가 그대로 양손에 꽉 잡고 있던 세브로웰의 비늘을 놓았다. 단번에 세브로웰의 육중한 머리를 지나쳐 몸이 빠르게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붕 떠오른 채로 바람에 실려 올라가던 몸을 렐리아는 반 바퀴 뒤집어 다시 머리부터 떨어져 내리는 자세로 만들었다. 역시나 무식하게 산꼭대기에 부딪칠 생각은 없었는지 세브로웰은 찰나에 거대한 날개를 펼쳐 호수위에 멈췄다. 성난 파도보다도 거친 물결이 둥그렇게 퍼져나간 순간이었다. 아래로 쏜살같이 떨어져 내린 렐리아가 그대로 세브로웰의 머리를 짓눌러 호수바닥에 처박히게 만든 것은. 고공낙하로 인해 가속이 더해져서 그 파괴력은 굉장했다. 미사일이 투하된 것처럼 호수를 이루던 지반이 부서지고 거대한 돌들이 허공 50미터까지 튀어 올라왔다. 홍수가 난 순간 산의 표면에 뿌리를 박고 있던 나무들이 강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세브로웰의 입으로 들은 사실이니 확실할 것이다. 비늘이 약해진 상태에서는 분명 화상을 입는다고 말이다. ‘아무리 너라고 해도…!' 분명 칼데라호였다. 이 아래 섭씨 1600도의 뜨거운 마그마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끓는 마그마 속에 계속 몸을 담그고 있으면 안 죽고 배길까?’ 다시 지상으로 올라가려는 세브로웰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렐리아는 악착같이 그 거대한 머리를 붙잡아 아래로 곤두박질 치게 만들었다. 산의 맨 꼭대기가 부서져 내리고 밖에선 산사태가 일어나는 동안에도 그들의 몸은 끝없이 지층을 뚫고 내려갔다. 렐리아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호흡기를 가득 메운 흙과 돌 알갱이로 인해 내려가기도 전에 질식해서 죽을 것만 같았다. 그건 세브로웰도 마찬가지인지 괴로워하며 모든 기운을 방출해대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무형의 기운은 어두운 주변을 파괴하다가 금빛 결계마저 뚫고 들어와 렐리아의 반지 낀 손을 잘라내기에 이르렀다. 반쯤 잘려나 날캉거리던 왼쪽 손목이 저절로 암석들에 부딪쳐 뜯겨져나갔다. 그 기절할 듯이 화끈한 고통에도 렐리아는 끊어진 손목까지 더해 더 끈질기게 세브로웰의 머리를 아래로 짓눌렀다. 끊임없이 드래곤의 은빛비늘이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치고 벗겨졌으나 몸은 멈추지 않고 빠르게 내려갔다. 근육과 뇌로 가는 혈류량이 늘어나며 까맣던 시야가 점차 선명해지고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지 더 그랬다. 마침내 거대한 암석들이 모두 갈려나가고 검고 투박한 지층을 통과하기 무섭게 그 너머로 살인적인 열기가 훅 끼쳐왔다. 뜨거운 수증기가 터져 나오더니 순간 왼쪽 눈이 녹아내린 것처럼 앞이 흐릿흐릿해져갔다. 이미 심각한 화상을 입은 얼굴전체는 피부껍질이 벗겨지고 진물이 터져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앞에 위치한 오른손은 진홍색으로 물들더니 흰 뼈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피부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타들어갈 듯 아픈 통증도 잠시 렐리아는 모든 게 끝났다는 평온한 기분을 맛보았다. 새까만 공간에서 마침내 선명하게 올라오는 형광주홍빛의 액체가 세브로웰과 자신을 반겼다. 천천히 상승하는 마그마에 같이 뛰어드는 순간, 렐리아는 자신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다시 앞을 집중해서보았다. “…태화야.” 시야가 눈부셨다. 마치 천국에 온 듯이 하얗게 변한 세상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울음을 터뜨린 채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울컥하고 속에서 뜨거운 게 올라왔다. 엄마가 두 팔을 뻗어오자 렐리아는 바로 그 품속으로 절뚝이며 달려갔다. 엄마는 속상한 듯이 얼굴을 구기면서도 입가는 애써 끌어올리고 있었다. “…기지배, 꼴이 이게 뭐니. 엄마 속 터지는 꼴 보고 싶어?” “애한테 왜 그래. 고생했다,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가족과의 재회는 감격스럽고 기쁘면서도 뼈저릴 만큼 슬펐다. 렐리아는 차마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몰랐다. 무너질 것만 같을 때 뒤에서 반갑고도 시끄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야, 이태화!!” “태화야! 아…흐윽, 진짜.” “이제까지 연락도 안되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렐리아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둘러싸이자 그제야 구기고 있던 얼굴을 폈다. 다른 세계에 가서도 너희들만한 친구는 없었다고 너스레를 떨고 싶은데 입이 무거워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친구들과 친한 사람들 모두에게 둘러싸여 회포를 풀 때였다. 렐리아는 멀찍한 곳에서 저를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니 남들과 동떨어진 채 서서 서글픈 미소를 짓는 블리어가 시야에 어렸다. 렐리아는 서둘러 블리어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걸어갔다. 막상 그를 눈앞에 두니 마지막 이별을 앞둔 것처럼 목이 메었다. “블리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렐리아는 뭐부터 말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작별인사를 그렇게 허무하게 한 거? 아니면 그를 버리고 세브로웰과 같이 죽음을 택한 거? 뿌옇게 변하는 시야를 뒤로하고 렐리아는 자신의 아랫배를 한 팔로 끌어안았다. “…미안해. 나…우리 아기 지키지 못했어.” 그의 앞에서 렐리아는 그제야 눈물을 터뜨렸다. 섧게 메어오는 목에 울음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 없었다. 그때 두 팔이 뻗어져왔다. 그는 그저 말없이 저를 안아주었다. 따스한 품은 평소 같았고 늘 잠이 들기 전 그가 제게 부드러운 솜이불을 덮어주었을 때처럼 안락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일상적인 평화가 찾아온 듯했다. 렐리아는 한참을 흐느껴 울다가 그 포근한 품속에서 눈을 감았다. 0162 / 0172 ---------------------------------------------- 서버가 클라이언트를 거부했습니다 란게르드 산맥에서 가장 높이 우뚝 솟아난 산꼭대기에서 거대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곳에서 약 2km넘게 떨어진 영지까지도 강한 진동이 전해져왔다. 기사들은 아득하리만치 먼 산꼭대기에서 벌어진 광경에 잠시 굳어 있다가 놀라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기 위해 서둘러 고삐를 잡아당겨야했다. 선두에서 굳어 멈춰서있던 블리어는 고삐를 쥔 손힘이 풀려 기어이 말 안장에서 떨어졌다. 한 기사가 다급히 뛰어오기 전 잘 훈련된 군마는 곧 발길질을 멈추고 온순해졌다. 기사 둘이 라콘드 공작을 부축하려했으나 이미 한 다리를 못 쓰게 된 그는 한사코 스스로 걸어가려했다. 그녀가 뛰어든 산꼭대기를 향해 절뚝거리며 걷던 블리어가 얼마못가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베인 듯 쓰라렸다. 붉어진 두 눈에서는 피보다 묽고 투명한 것이 소리 없이 타고 내렸다. 렐리아의 마지막 순간을 담았던 그의 눈동자가 절규했다. 비참한 눈물을 기사들은 보지 못한 채 먼 광경을 응시했다. 얼이 나간 몰골들로 기사들은 하나같이 아까의 광경을 반추하고 있었다. 점처럼 흐릿한 실버드래곤이 산꼭대기 위의 지반을 파괴하며 그 안으로 사라졌던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라 절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난 것인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꼭대기위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잿빛의 연기와 심상치 않은 대지의 진동이 그들에게 도망치라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토록 절망스럽던 먹빛하늘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살아남은 그들의 머리 위로 잔잔히 진눈깨비가 흩어져 내렸다. "렐……리아…" 그때 지독히도 슬픔에 억눌린 목소리가 기사들의 무거운 회상을 깨웠다.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앞으로 향했다. 한쪽 다리를 절며 주저앉아있는 흑발사내의 등이 이토록 초라해 보일 수 없었다. 숙연한 표정으로 기사들은 저마다 애도를 표하듯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여보였다. 해진 소매사이로 얇은 실 같은 팔찌가 흘러내렸다. 블리어는 울리지 않는 크리스탈 원석을 원망스럽게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괴로움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지탱할 힘도 없는지 목이 아래로 꺾였다. 폐부를 억눌러오는 고통에 감히 숨조차 내쉬질 못했다. 블리어는 알았다. 그녀가 죽음을 택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드래곤과 함께 사지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끝까지 좇았던 두 눈은 이제 무엇을 좇아야할지 몰라 허망하게 초점을 잃었다. 어둡게 죽은 녹안위로 눈물이 끓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고통스러웠다.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웠을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항상 단정하던 흑빛의 머리칼이 뿌연 먼지에 덮여 헝클어진지 오래였다. 이마가 긁힐 듯이 거친 흙바닥에 닿아 문질러졌다. 그러쥔 흙 한줌이 마치 그녀의 어여쁜 뺨이라도 되듯 블리어는 놓질 못했다. 이 세상 단 한명을 지키기 위해 렐리아는 죽었고, 이 세상 단 한명을 잃고 블리어는 살았다. 그러나 블리어에게는 살아있는 것이 더 큰 지옥처럼 느껴졌다. 숨 쉬는 것조차 비참한 대가를 치르는 것 같아 블리어는 그녀를 탓해야만 했다. 목숨을 걸고 지켜내는, 그런 거창한 것은 절대 바라지 않았다. 그저 제 곁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웃고, 잠드는 일상만을 바랐을 뿐이다. 어째서 그리 쉬운 것을 알아주지 못하고 자신을 이 세상에 혼자 남겨두었던 말인가. 벌써부터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들었다. “……내게……어쩌자고 그런 겁니까." 아이도, 그녀도, 이대로 평생 볼 수 없을 텐데……어쩌자고 자신을 살려놓았단 말인가. 블리어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누우면 그녀가 보고 싶을 테고, 먹으면 그녀가 떠오를 테고, 걸으면 그녀가 생각날 텐데 앞으로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먹먹한 가슴을 끌어안고서 블리어가 무거운 눈물에 하소연을 할 때였다. 팔찌에서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그것은 곧 착각이라는 것을 블리어는 깨달았다. 팔이 짚고 있던 대지전체가 강하게 울리고 있었다. 이상한 조짐에 말들이 가장 먼저 소란스러워질 때 먼 곳에서 검은 하늘을 집어삼킬 듯이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가직한 곳에 서있던 기사 둘이 달려와 블리어의 양팔을 어깨에 걸쳐 부축했다. “공작전하…! 뭔가 조짐이 좋지 못합니다! 물러나셔야합니다!!” 강하게 쐐기를 박는 기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굉음이 터져 오르며 화염에 둘러싸인 검은 돌덩이들이 튀어 올랐다. 상공으로 튀어 오른 그것들이 순식간에 대지 곳곳을 들쑤셨다. 블리어가 서있는 곳에서 불과 수백 미터거리에도 하나 떨어져 내리자 대지전체가 크게 들썩였다. 울퉁불퉁한 표면의 새까만 돌덩이가 내려앉은 그 자리는 2피트가량 움푹 파였고 가장자리는 검고 붉게 지글거렸다. 피어오르는 잿빛연기를 뒤로하고 엄청난 열기를 발산했다. 굳어버린 기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먼 곳에 있는 산꼭대기로 향했다. 산사태로 인해 깎여 내려간 산 정상은 희뿌연 연기를 두르고 있었다. 공포스러울 만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짙은 연기 너머로 순간 괴기한 소리가 들려왔다. 새의 목을 세게 잡아 비트는 것처럼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그 소리가 불안감을 증폭시킬 때다. 형광주홍빛의 액체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오전 햇살처럼 노르께하고 선명한 액체는 석양빛도 드문드문 섞여있는 것 같은 혼합된 빛깔을 띠었다. 무엇보다 그것의 표면은 보글보글 끓어오르고 있었다. 불에 탄 종이 같은 재가 눈발처럼 거칠게 휘날렸다. 시야를 방해하는 그 너머로 용암을 뒤바른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보아도 한 눈에 들어올 만큼 크나큰 존재감에 기사들은 기함하기 직전의 표정들로 숨을 멈췄다. 굵직한 뼈가 드러난 날개가 좌우로 넓게 펼쳐졌다. 찬연한 은빛비늘로 뒤덮여있어야 할 거대한 날개는 넝마처럼 군데군데가 검게 타들어가 있었다.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게 뼈가 드러나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실버드래곤이었다. 날카로운 삼지창 뼈가 드러난 날개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드래곤은 서서히 산꼭대기 위에서 날아올랐다. 한 번의 날갯짓마다 지상에 걸쭉한 마그마와 방대한 재를 흩뿌려댔다. 마치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몰골로 세브로웰은 천천히 영지를 향해 날아들었다. “후퇴하라!!! 다들 후퇴하라!!” “…드, 드래곤이 오고 있다! 당장! 여길 떠나야…!” “라콘드 전하, 어서!!” 차아아아악, 치이익. 용암이 떨어져 내리는 대지위로 타들어가는 소리가 연방 울렸다. 그것이 점차 선명해질수록 기사들은 혼비백산으로 말을 몰아 반대편으로 달려 나갔다. 블리어는 기사들의 재촉에 못 이겨 말 안장에 올랐으나 어느 순간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 그들의 대열에서 이탈했다. 그러고는 화산폭발의 조짐을 보이는 란게르드 산맥으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공작전하!!” 부리나케 후퇴하던 기사들 중 하나가 이를 알아차리고 비명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 광경에 기사들 중 몇몇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잿빛하늘아래 서서히 날아오고 있는 실버드래곤을 향해 거칠게 말을 모는 공작의 귀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렐리아. 나를 탓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저곳에 있다면…나는 그대를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녀가 사라졌던 곳에서 올라오는 어마어마한 열기가 벌써부터 여기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블리어가 천재지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아갈 때 서녘하늘에서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두 명의 기사가 공작을 붙잡기 위해 뒤따라 달리다가 자신들의 머리 위와 눈앞에서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것을 포착했다. 시시각각 반짝이는 그것은 눈이 아니었다. 금가루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아름다웠다. 그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서쪽상공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운 하늘 바로 밑에서 짙은 황금빛으로 물든 거대한 문양들이 수놓아져있었다. 일정한 패턴을 유지한 도형과 기하학적인 무늬가 어지럽게 쓰여 진 문장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은 빛이었다. 뜨지 않은 태양을 대신해 지상을 밝히듯이 강렬한 금빛을 내뿜고 있는 초대형 마법진의 한가운데에서 금가루를 흩뿌리며 서서히 부식되어가는 수호드래곤이 있었다. 육체를 이루는 금빛비늘에 금이 가며 가루화가 되기 시작했다. 살점들이 뜯어지며 육체가 바스러져가는 그 고통 속에서도 가브리나는 고요한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금빛의 비늘조각은 나비처럼 팔랑대며 떨어져내려 지상 아래에서 지팡이를 들고 서있는 윈에게도 내려왔다. 윈은 자신의 앞에 떨어져 내린 그것을 손바닥 위에 고이 받쳐내었다. 희미해진 마력이 느껴졌다. 가브리나의 바스러져가는 생명력을 의미하고 있었다. [윈. 집중하렴.] 약간은 주저하는 눈빛이 스쳐지나갔으나 그것도 잠시, 윈의 동요를 알아차린 가브리나가 상공에서 그에게 눈길대신 목소리를 내려 보냈다. [마지막 기회야. 네가 아니면 이 마법은 성공시킬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저만 믿으시죠.” 윈은 매끄럽게 대답했으나 여전히 손바닥에 올려 진 가브리나의 금빛비늘에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힘을 주면 부스러질 낙엽 같은 비늘을 윈은 로브 주머니에 조심스레 찔러놓고 바로 두 손으로 지팡이를 힘껏 쥐었다. 절단면에서 신비로운 팔 색의 빛을 내뿜는 마법석이 박인 지팡이에서는 강한 힘이 내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윈이 땅바닥에 손수 그려낸 거대한 마법진을 허공에 띄우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라던 것이 코앞에 있다. 마력으로 묶여 서로의 머릿속과 마음속이 공유된 상태에서 윈과 가브리나가 동시에 집중하여 마력을 쏟아 붓자 그 순간 초대형마법진에서 성스러운 빛이 서서히 터져 나왔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눈이 멀게 될 만큼 강하고도 초월적인 힘이었다. 가브리나도, 윈도, 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으리라. 기적과도 같은 빛이 하늘의 한계를 넘어서 더욱이 그 너머로 뻗어져 올라갔다. 닫혀있던 잿빛의 하늘아래 천천히 환한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틈은 이 세계를 통째로 삼킬 것처럼 빠르게 하늘전체를 갈라내기 시작했다. 뒤늦게 가브리나는 자신의 육신이 금이 간 석상처럼 조각조각 부서져 내려감을 느꼈다. 두 날개가 서서히 가루로 변해 흩어져 내리고 뒤이어 꼬리와 다리, 몸뚱이가 아래에서부터 떨어져 내려갔다. 금빛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날리는 그 광경은 마치 지상에 희망을 뿌리내리는 민들레홀씨처럼 잔잔하기만 했다. “…가브리나님. 다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때 조금은 서글픈 듯 가라앉은 진지한 목소리가 가브리나의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가브리나는 까마득한 지상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윈과 눈을 마주했다. [찾아가마. 새로 찾아올 세상은 네가 남긴 업적을 기억하지 못해도 나는 너를 기억하고 있을 거야, 반드시.] 지워진 시간 속에서 아마도 이 거대한 기적을 일으킨 인간 마법사를 기억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최초의 공간초월 마법에 성공한 알렌을 기억하는 자가 없듯이, 인류최초의 시간초월 마법을 성공한 윈을 기억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역사서에 그 업적과 이름을 실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도와준 유일한 인간마법사였다. 다시금 제게 신뢰를 불어 일으켰던 존재에게 가브리나는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제까지 고마웠단다. 윈.]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제 일생의 소원을 이뤄주셔서….” 하늘에 생긴 거대한 시공의 틈을 올려다보며 윈은 말끝을 흐렸다. 시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가브리나의 조각난 육신을 바라보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췄다. 세상을 이루고 있던 모든 빛과 색채들이 삽시간에 그 안으로 빨려들어 간 것처럼 생기를 가진 모든 생명체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팡이를 하늘을 향해 치켜든 윈도, 상공을 날아오르고 있던 실버드래곤도, 말을 타고 달려가던 블리어도 흙처럼 굳어 정지해버렸다. 세상은 적막감으로 가득 찼다. 칙칙한 회색빛으로 뒤덮인 세상은 바람조차 멈춘 채 고요했다. 0163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블리어는 사방이 칠흑으로 뒤덮인 공간에서 눈을 떴다. 소리, 냄새, 심지어 대기의 흐름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간은 그저 까마득하고 어두웠다. 사물의 구분은커녕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그곳은 모든 것이 차단된 것처럼 고요했다. 블리어는 만져지는 바닥을 손바닥으로 짚고서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먼지 한 점 없는 깨끗한 공간은 어딘가 건물의 내부가 아닌가 생각하게 했다. [라콘드 공작이여. 내 목소리가 들리니.] 그때 넘실거리는 바다물결처럼 귓속으로 밀려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청초한 미성이 블리어의 뿌옇던 머릿속을 맑게 깨웠다. [나는 바일롯 왕국을 수호하는 드래곤 가브리나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기는 또 어디이며,” [네게 모든 걸 설명하고 싶지만,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단다. 그렇기에 난 내 기억의 일부를 너에게 넘길 거야.] 블리어는 미약하게나마 짙은 눈썹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캐묻기 직전 가브리나의 목소리가 공간전체를 잔잔히 울렸다. [이제까지 렐리아에 관한 모든 기억들을.] 마지막 영혼 한 점까지의 소멸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했다. 가브리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블리어의 뇌로 올라가는 혈류가 급작스럽게 빨라졌다. 한꺼번에 범람한 기억과 시각적인 정보들을 받아들이는 동안 혼란스러움이 그의 뇌리를 가득 메웠다. 블리어는 한 손을 들어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끈거리는 두통도 잠시 블리어의 시야에 서서히 그녀가 맺혀갔다. ‘나, 클리어 했어요. 전부 다. 그러니까 다시 돌려보내줘요.’ ‘난 네가 그런 식으로……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소원을 빌기 위해 육체적 관계에 목매어왔다는 걸 아주 뒤늦게 눈치채버렸어.’ ‘미안해. 난 널 원래세계로 돌려보낼 수가 없어.’ ‘현실……, 아냐. 마,말이 안 되잖아? 게임무기도 되는데…몬스터도 나오고, 또…마법 같은 건 뭐라 설명할 거고? 어떻게 이게 현실이야…? 내 몸만 해도 게임캐릭터인데,’ ‘그래. 너에게는 이 세계자체가 게임이라는 개념이 강할지 몰라. 네가 살아왔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이뤄진 세계이니 말이야. 하지만 여기서의 마법은 정상적인 거고 일반적이고 당연한 거야.’ ‘하지만 남자와의 사랑만으로는 널 이곳에 묶어놓을 수는 없었어. 원래세계를 현실로 두고 늘 절박하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줄 몰랐어. 널 가볍게 속박하려들기 위한 내 거짓말에 네가 목을 매달고 벗어나려할 줄 알았더라면. 이 상황이, 조건이, 널 병들게 하는 걸 알았더라면 진즉에 어떤 조치를 취했을 텐데.....미안해.’ ‘…여기…더 있기 싫어. …돌아갈래. 제발, 우리 엄마아빠한테 가게 해줘! 언니 제발… 제발 나 좀 보내줘. 다 저기에 있는데... 대체 어떻게 포기하고 여기 살란 건데....’ ‘갑자기 게임이 아니라니…이러는 법이 어딨어. 대체…,’ 렐리아가 바닥에 주저앉아 슬피 울고 있었다. 그 모습에 블리어의 가슴도 덩달아 먹먹해져만 갔다. 환영과도 같은 아릿아릿한 잔상에 손을 뻗으려다 문득 새까만 정면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이 가브리나의 기억 중 일부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순간 다시금 서글픈 선율과도 같은 미성이 울려 퍼졌다. [나에겐 세브로웰을 죽일 힘도, 봉인시킬 힘도 없었어. 있는 거라곤 무한한 마법적 지식뿐이었지. 나는 윈이라는 인간마법사와 함께 내가 가진 모든 힘으로 시간을 초월하는 최초의 마법을 시도했단다.] 뒤이어 블리어의 머릿속에 혼미하게나마 그런 내용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가브리나의 기억과 혼재되어 뒤엉킨 지식들은 마치 알코올처럼 톡 쏘되 증발되지 않고 뇌리에 머물렀다. 가브리나가 완성시킨 마법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했지만 어떤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신의 영역에 있는 시간의 차원을 건드려 모든 것을 무無로 만들어내었다. [그 기억 속에서 들여다본 바와 같이 세브로웰을 깨운 자는 렐리아란다. 하지만 이것이 렐리아의 책임이라 할 수는 없어. 이 비극이 초래하게 된 이유에는 내가 있어. 나의 섣부른 판단이 그 아이를 오랫동안 상처받게 만들었어.] 그녀가 불과 2년 전만 해도 이 세상을 ‘게임’, 즉 가상의 차원으로 생각했었다는 것을 블리어는 이해했다. 자신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고 오래전 제게 얘기했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고향은 닿지 않는 곳에 있었던 것이다. [렐리아가 이곳이 사실은 가상세계가 아닌 현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될 쯤, 정신적인 타격 없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게 될 쯤에 난 이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야.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하단다.] “…….” [렐리아가 이 세상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는 너였으니까.] 블리어의 기도를 타고 뜨거운 감정이 울컥 북받쳐 올랐다. 조금씩 선명해지는 가브리나의 기억 속에서 그는 렐리아의 파편을 좇았다. 그녀가 왜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인지,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실들, 그녀가 혼자서 삭혔을 아픔들. 모든 것들이 노도처럼 밀려와 블리어를 집어삼켰다. [반대로 렐리아가 이 세상을 끔찍하게 여긴 이유는 세브로웰 때문이었어.] 가브리나의 영혼을 이루고 있는 마나가 순식간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힘이 소멸된 직후 그 속도가 더 빨라졌음을 느꼈으나 가브리나는 끝까지 정신을 붙잡아 그에게 말했다. [다음에 깨어났을 땐, 이 세상은 세브로웰이 깨어나지 않은 평화로웠던 시대로 돌아가 있을 거야. 내 힘의 최대치는 고작해야 이삼 년의 시간을 되돌리는 정도라지만 이 기회가 크나큰 운명을 바꿀 수 있을 거야.] 시간초월의 대마법은 무사히 성공했으나 가브리나가 모든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저편의 세계에 있을 이태화가 게임을 하지 못하게 막을 힘은 없기 때문이다. 운명은 똑같이 흘러갈지 모른다. 하지만 세브로웰이 깨어나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렸고 그곳엔 블리어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이번엔 렐리아를 확실히 잡아주렴. 방황하지 않게, 혼자 슬픔을 삭이지 않게 이번엔 옆에서 따스하게 붙잡아주렴.] 사랑은 생각보다 위대하다. 싫어하던 인간들을 사랑하게 되고, 한 사람을 위해 헌신적이 되고, 하나의 왕국을 세울 만큼 말이다. 비록 이루어지진 않았으나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게 한다. 가브리나는 제 육신이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던 순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를 어렴풋이 본 것만 같았다. 조금은 그와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건 이게 다야.] 속삭임처럼 희미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가브리나의 기운이 서서히 흩어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딱딱하던 바닥이 돌연 물렁해지더니 아래에서 쑥 잡아당기는 기이한 느낌이 하체에서부터 퍼졌다. 블리어는 검은 바닥에 집어삼켜진 후 정신을 잃었으나 곧 희미한 감각이 온 몸에 퍼져나갔다. 오감은 점차 생생해져갔다. 약간은 차가운 기온, 등허리를 푹신하게 받치는 소파등받이, 흔들리는 내부, 지면을 박차는 말 발굽소리. 차분하게 내려앉은 속눈썹이 서서히 들어 올려졌다. 블리어는 눈을 떴다. 새카만 속눈썹 위로 겨울햇살이 어리며 짙은 녹안 속에 마차의 풍경이 들어왔다. 라콘드 가문마차였다. 어둠으로 뒤덮인 공간은 어느새 사라져있고 익숙한 공간이 펼쳐져있자 블리어는 잠시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그는 창밖의 풍경으로 고갤 돌렸다. 차창너머로 설경이 드넓게 펼쳐져있었다. 맑은 햇살이 내려앉아 눈 쌓인 대지 위가 새하얗게 반짝였다. 블리어는 이 경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이 어렴풋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동공 위에 비친 세상이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하얀 눈이 덮인 구릉에 듬성듬성 심어진 뾰족하게 솟은 가문비나무 사이로 한 여자가 서있었다. 그 가녀린 뒷모습과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긴 은색머리칼, 블리어의 심장이 멎었다. 그는 빠르게 마차의 천장을 두드렸다. 곧바로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여섯 필의 말들이 일제히 달리던 속도를 낮춰갔다. 마차가 멈추자 블리어는 굳게 닫혀있던 마차 문을 거칠게 열어젖혀 밖으로 뛰쳐나갔다. 발이 소복이 쌓인 눈 속에 빠졌다. 빠득빠득 밟히는 소리와 함께 시린 온도가 발목까지 느껴졌다. 그는 달렸으나 생각보다 속도가 나질 않자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지독히도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의 창백한 뺨을 스쳤다. 짧은 흑색머리칼이 겨울바람에 일렁이며 흐트러졌으나 블리어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숨소리가 점점 커져만 갔다. 점점 그녀의 뒷모습이 가까워져갔다. 앙상한 나무들을 지나치자 시야가 환하게 트며 멀지 않은 곳에 서있는 그녀가 보였다. 흠칫 어깨를 떨며 여자가 제게로 고갤 돌렸다. 한기가 스민 손끝이 그녀의 어깨에 닿고 마른 등을 안기까지 수초도 걸리지 않았다. 속옷과 진배없는 차림이었으나 그녀의 몸은 따스했다. 평소처럼 부드럽고 은은한 체취가 맡아졌다. “…?!” 작은 몸이 놀라는 게 여실히 느껴졌으나 블리어는 팔에 힘을 주어 조금 더 꽉 끌어안았다. 은발 사이로 드러난 귓등으로 머릴 숙이자 곧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시밤?” 휘둥그레 눈을 뜨며 태화는 기겁했다. 웬 설산에 떨어진 것도 놀라운 데 멀리서 눈밭을 가로지르며 달려온 남자가 저를 덥석 끌어안는 게 아닌가. 굵직한 목 아래 드러난 흑발을 슬쩍 올려다보다가 남자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그가 달려온 곳에는 중세시대에나 볼법한 마차가 서있었다. 금장식이 요란하게 달린 새까만 대형마차는 그 값이 상상되지 않을 만큼 고급스러웠다. 마차를 뚫어져라 구경하다 태화는 멀찍이서 놀란 눈을 한 마부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왠지 얼쯤한 기분이 들어 태화는 곧바로 두 손을 들어 남자의 가슴팍을 단번에 밀어냈다. 그 품에 안기기 전 스치듯 눈에 들어왔었지만 역시나 이목구비가 훤칠했다. 끝내주는 미남이긴 했으나 태화는 경계를 풀지 않고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위아래로 흘겼다. “이봐요. 뭐야, 당신. 누군데 초면에 끌어안고 난리야?” “…….” 서늘해 보이는 눈매를 가진 남자였으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그 미소가 더 의심을 증폭시켰으나 곧 남자의 무겁게 다물린 입매가 떨렸다. 블리어는 새하얀 백짓장 같은 이 첫 페이지를 감히 무슨 말로 채워야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랑하고 사랑했었던 여인이 눈앞에 있음에도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 핏발이 서 붉어져만 가는 남자의 눈에 태화는 어리둥절한 채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남자는 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서 깊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봐요. 갑자기 왜 그래?” 어디가 갑자기 아픈 건가 싶어 태화는 조금 몸을 숙여 흑발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상 도움이 필요한 건 자신인데 자신이 남을 도와주게 생겼다. “그, 어디 아픈 거예요?” “……괜찮습니다.” 블리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물기가 스민 손바닥을 메마르게 문질렀다. 녹색 눈은 붉게 충혈된 지 오래였으나 그는 곧 자신의 감정을 가슴 깊숙한 곳까지 짓눌렀다. ‘이번엔 렐리아를 확실히 잡아주렴. 방황하지 않게, 혼자 슬픔을 삭이지 않게 이번엔 옆에서 따스하게 붙잡아주렴.’ 가브리나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 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남에게 쉽게 마음을 주는 성격도 아닐뿐더러 친해져도 제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그녀를 잘 알았다. 그렇기에 이번만큼은 렐리아 그녀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든,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함께 할 것이다. 그녀 혼자서 감당해야했을 아픔과 외로움, 괴로움이 조금이라도 덜어지도록 그 옆을 영원토록 묵묵히 지킬 것이다. 자신은 그것으로 되었다. 설령 자신을 그녀가 기억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블리어는 떨리는 입매를 더 꽉 짓이기고 차가운 눈이 묻은 몸을 일으켰다. 약간은 딱딱하게 고갤 숙인 그가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북받쳐 오른 벅찬 기운 탓에 쉽사리 운을 떼기가 힘들었으나 의심 많은 그녀 성격을 잘 아는 블리어는 뒤늦게 정중하되 무덤덤한 목소리를 내었다. “……초면에 무례했습니다.” “아 뭐. 괜찮아요.”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약간의 호기심, 경계, 의심, 찜찜함의 감정을 알아차렸으나 블리어는 애써 모른 척 무덤덤하게 운을 뗐다. “블리어 라콘드, 이것이 내 이름입니다. 그대…이름은 무엇입니까.” “……요.” 태화는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 최대한 이름을 뭉개지듯 발음한 탓에 그가 듣기엔 ‘…흐흠흠요.’ 정도로 들릴 테다. 조금 짜증이 날 법할 텐데도 흑발 남자는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원래 게임상 이름은 유렐리아지만 초딩 때 치은 닉네임이라 초면인 사람 앞에서 대려니 창피해서 안면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약간 외국이름처럼 들리게끔 앞 글자를 교묘하게 빼고 말했다. “…렐리아요.” 무표정이 더 어울릴 듯한 얼굴에 순간 매끄러운 긴 미소가 맺혔다. 어딘가 서글픈 미소에 태화는 조금 머쓱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이름이 어디서 들어온 것 같은 익숙한 이름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턱을 긁적여야만 했다. ‘네가 이다음 눈떴을 때 도착할 곳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 속이야.’ 속삭이는 것처럼 은밀하게 목소리가 태화의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역하렘 게임의 충실한 덕후가 하는 말로 치부하고서 주의 깊게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막상 닥친 현실에 태화는 턱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야 자신이 공략해야할 대상하나가 눈앞에 버젓이 존재해있으니 말이다. 두 번째 공략상대. 바일롯의 젊은 공작. 뭐시기 라콘드. 0164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엇차. 푹신해라~” 렐리아는 널찍한 방 한가운데에 놓인 침대에 뒤로 다이빙했다. 푹신하게 몸을 받아주는 매트가 흡사 구름 위라고 해도 믿겨질 만큼 보드랍다. 화려한 금장장식이 펼쳐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렐리아는 이게 꿈이야 생시야 하고 혀를 찼다. ‘그나저나 정말 통이 크네. 그 인간.’ 편의를 봐준다기에 그냥 대충 공작성에 남아도는 아무 방이나 내어줄 줄 알았는데 최고급 호화룸을 내어주었다. 자신이 누군 줄 알고 이렇게 좋은 방을 덥석 내주나 싶을 만큼 말이다. 태화가 생각하기에도 그 블리어라고 하는 공략상대는 정말이지 제게 호의적이었다. 마차를 타고 공작령으로 오는 내내 과할 만큼의 호감을 보였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자신을 편하게 대하되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으며, 추워 보인다며 자기 겉옷까지 벗어서 주었다.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이성의 호의였다. 그것도 냉미남처럼 생긴 남자가 이렇게 하나하나 챙겨주니 마음이 조금은 녹아내리는 것이다. 태화는 설산에서 우연히 라콘드 공작을 만나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 모두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분명히 주인공 버프일 것이다. 이 상태로 가다보면 황제와 드래곤도 우연히 만나게 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약간은 골치가 아팠다. ‘황제랑 공작이랑 드래곤…이었나? 걔들을 완전히 공략하면 소원 한 가지 들어준댔지. 그 언니는 신인가? 날 이런 곳에 처넣었을 정도면 신이라고 봐도…흠. 그럼 소원으론 다시 집으로 보내줘요 가 적당하겠지? 아니 그전에 내 몸은 진짜 어떻게 된 거야. 보내줘요 했는데 이미 화장된 직후면…’ 렐리아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다가 제 은발머리를 헤집었다. 역시나 이 손끝에 걸리는 비단처럼 매끄러운 감촉은 아직 낯설기만 했다. ‘그럼 우선은 블리어를 공략하고.’ 무턱대고 눕힐까. 원래 몸이었다면 가능성이 희박하겠지만 지금 이 몸으론 꽤 자신이 있었다. 나올 곳은 확실히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쭉쭉빵빵한 몸매는 확실히 ‘꼴린다’는 축에 들 테다. 남자와 한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대충 자빠뜨리면 그가 알아서 하지 않을까. 태화는 속으로나마 픽 웃었다. 신원확인도 되지 않은 여자에게 호의를 베풀어줄 정도면 아무리 남자주인공이래도 어지간히 얼굴 밝힌다는 걸 알 수 있는 것이다. ‘역시 사내놈들은 다 똑같아~’ 예쁜 여자라면 사족 못 쓰는 건 동서고금 막론하고 다 똑같구나 하고 태화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이거 좀 쉽게 될 것 같다. 귀라도 후빌 것 같은 심드렁한 얼굴로 렐리아는 침대에 대자로 누워 나른한 기분에 잠겼다. 배불리 먹고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해서인지 이른 저녁부터 잠이 솔솔 쏟아져 내렸다. 달빛이 온 세상에 은은히 내려앉는 시각, 렐리아가 있는 침실 창가에도 희미한 달빛이 맴돌았다. 렐리아는 뒤척이지도 않고 곤히 잠이 들어있었다. 숨소리만이 침실 안을 메운 채 고요한 정적이 흐를 때였다. 낮은 노크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이 야심한 시각에 누구야?’ 게슴츠레 눈을 뜬 렐리아는 자신의 단잠을 방해한 그 소리에 하얀 콧등을 찌푸렸다. 베개에 깊이 귀를 묻고 자는 척을 시전 했다. 대답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는 줄 알고 내일 다시 오겠지 싶은 것이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흑발남자가 떠올랐다. 그가 찾아온 것이라면 이보다도 좋은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자 잠이 확 달아났다. 태화로서는 빨리 해치울수록 이득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문까지 뛰어갈 필요는 없었다. 아주 조용하게 문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어둠에 젖은 한 남자가 들어섰다. “…누구…으응, 졸려.” 이미 반쯤 상체를 일으킨 상태에서 렐리아는 능청스럽게도 지금 막 일어난 사람처럼 눈을 비비적거렸다. 쩍 벌어져있던 두 다리는 최대한 사랑스럽고 아름다워 보이게끔 다소곳이 오므린 채 렐리아는 방안으로 들어선 그를 맞이했다. 창가에서 비스듬히 새어 들어오고 있는 달빛 속에 남자의 얼굴이 들어섰다. 반은 푸른 기가 감돌고, 반은 옅은 그림자가 져 왠지 모르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불러일으켰다. 깔끔하게 다듬어진 흑발은 유달리 새카맣다. 짙은 눈썹아래 자리 잡은 녹안은 서리가 녹아내린 가시나무 잎색을 띠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엔 욕정이나 사심은 일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약간 미안해보였다. “나 때문에 깼습니까.” “…공작님?” “그리 존칭을 쓸 필요 없습니다. 편히 불러 달라하지 않았습니까?” 나직한 음성으로 말한 블리어가 침대 옆에 서서 렐리아를 내려다보았다. 씁쓸함은 숨긴 채 더 큰 다정함으로 그녀를 대했다. “내 이름 기억합니까?” “…음, 블리어?” “잘했습니다.” 사내가 대뜸 커다란 손을 뻗어오자 태화는 속으로 조금 놀라버렸다. 뭐, 뭐야, 하고 당황한 속을 감추며 위를 올려다보자 곧바로 따스한 녹빛 눈과 마주쳤다. 블리어는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보드라운 머릿결을 쓸어 만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사랑스러운데다 닿은 손길마다 그 감각이 애틋해 차마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동안 렐리아는 알게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있었다. 긴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 약간 뒷목에 힘이 과하게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이대로 자연스레 분위기를 타 눕는다면 자신에겐 되레 이득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첫 경험이었으나 어차피 ‘이 몸’은 제 진짜 몸이 아니니 관계를 가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상대도 게임캐릭터 아닌가. ‘얼른 집에 좀 가자. 집에 좀.’ 속으로 심드렁하게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렐리아의 귓불은 희미하게나마 발그레 떠있었다. 머리를 만져주는 것뿐인데도 괜히 간지러움이 일었다. 마치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하듯이 다정해서 더 그랬다. 아무리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이라 해도 현실처럼 그 감각이 생생하다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왜 자신이 조용하게 있지? 하고 의문을 제시하기 무섭게 퍼뜩 정신을 차린 태화였다. ‘…와씨, 이러다 내가 공략당하겠다. 선수 아냐?’ 의심을 품은 눈으로 쏘아보자 곧 눈앞의 남자가 멈칫하고 빠르게 손을 거두었다. “놀랐다면 미안합니다. 손이 멋대로 갔습니다.” ‘그걸 변명이라고…. 역시 이거 선수네. 선수.’ 태화는 속으로 낮게 혀를 찼다. 이 남자 보통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한 경계가 깃든 푸른 눈은 곧 누그러지며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런 렐리아를 내려다보는 블리어 또한 조심스런 마음을 살짝 누그러뜨린 채 그녀를 대했다. “얘기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이 밤에요?” “말 놓아도 됩니다.” “…그럼, 이 시간에?” 무슨 꿍꿍이지. 역시 몸인가. 렐리아는 갸웃하면서도 역시 그런 거라고 스스로 납득해버렸다. “오늘 도착하자마자 긴급회의가 있어 도저히 시간을 내질 못했습니다.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니니 그대가 걱정할 필욘 없습니다. 한데 저녁식사는 맛있게 했습니까. 같이 하고 싶었습니다만 회의가 늦어져 그러질 못했습니다.” “…아, 예.” “회의에서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공작령의……,” “…….”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직 누가 누군지조차 모를 터인데 내가 너무 무심했습니다. 타렌은 공작가문의 가신 중 한명입니다. 나중에 따로 소개시켜주겠습니다.” 얼굴을 보지 않은 반나절동안 남자는 자신에게 있었던 모든 일을 구구절절 얘기해주었다. 왜 보고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렐리아는 잠자코 들었다. 마치 오늘 하루 회사에서 힘들었다는 남편의 말을 베갯머리에서 들어주는 아내 같았지만 말이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대화를 더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밤이 늦었으니 말입니다.” “…아, 뭐.” “실은 그대 얼굴이 보고 싶어 온 겁니다.” 괜찮다고 말하려했으나 렐리아는 순간 나긋하게 들려온 저음에 머릿속이 하얗게 표백되었다. 음? 방금 뭐라고? 얼빠진 얼굴로 되묻자 흑발남자는 자신의 표정을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혹 나 때문에 불편합니까? 그렇다면 바로 나가겠습니다.” “아뇨. 아니. 괜찮아.” 하루 본 사이에 반말을 하려고 하니 약간은 어색하기는 했으나 렐리아는 애써 능청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저기 블리어…씨?” “블리어로도 괜찮습니다.” “어, 음. 블리어? 여기 편하게 앉는 게 어때…? 아주 긴 얘기가 될 것 같은데.” 렐리아는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침대에 앉으라며 대놓고 유혹해옴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을 배려하려는 듯 정중하게 사양했다. “서서 듣겠습니다.” “흐흥 괜찮아~ 왜? 내가 잡아먹을까봐?” “정말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럼~” 딱딱한 표정과는 달리 순순히 제 옆으로 다가와 앉자 렐리아는 거의 다 잡은 물고기라고 여겼다. 렐리아의 아름다운 외관을 뒤집어쓴 상태인지라 태화는 아주 자신만만해있었다. 이 화려한 겉가죽만 있다면 공략대상 세 명뿐 아니라 이 세계남자는 죄다 꼬실 수 있겠다는 믿음에서였다. ‘자고로 예쁜 여자를 싫어하는 남자는 없단 말이지.’ 렐리아는 제 옆자리에 걸터앉은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일어서있을 때도 크다고 여겼지만 바로 옆에 앉으니 그 체구가 새삼 거대하다고 느껴졌다. 탄탄한 팔뚝과 각진 어깨, 아래로 갈수록 날렵하게 빠지는 굵은 허리는 만져보지 않아도 단단하다는 게 느껴졌다. 어디까지나 3D로 구현되어있으나 속은 이차적인 게임캐릭터라는 소리였다. 기분 나쁘든 말든 상관할 바 아니었다. 태화는 얼른 집에 가겠다는 마음만 앞서있었다. “왜 그렇게 빤히 보는 겁니까.” 그때 귓가를 두드리는 자상한 목소리에 렐리아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가직한 곳까지 내려온 그의 얼굴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져있었다. 몸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들켰나? 그것도 잠시 언제 당혹감이 들었냐는 듯 최대한 입술을 끌어올려 요사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언젠가 영화 속에서 본 경험 많은 요부를 떠올리며 손을 움직였다. “으음, 글쎄. 블리어는 몇 살이야?” 렐리아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았던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하며 제 풍만한 가슴을 스치듯 매만졌다. 시각적으로 자극이 되게끔 허리도 살짝 움직여주었다. 그 모습에도 눈 한번 깜빡 안한 채 그는 약간 부드럽게 웃었다. 마치 귀여운 걸 보는듯해서 렐리아는 기분만 뒤숭숭해져버렸다. “스물여섯입니다,” “난 스물넷. 다시 존댓말 쓸까?” “괜찮습니다. 이대로가 좋습니다.” 어째 소개팅에 나온 기분이었지만 렐리아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막상 야릇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니 어려운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이라던가? 그런 거 있어?” “단 거 좋아합니다.” “단 거?” 의외다. 하지만 렐리아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겉모습만 무뚝뚝하고 냉정해보일 뿐 성미가 부드러워 약간은 아기자기한 디저트가 어울려 보이기도 했다. “그대가 뭘 좋아하는지 내가 한번 맞춰 봐도 됩니까?” “응, 뭐.” “그대는 왠지 애주가일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하며 렐리아는 도도하게 두어 번 고개를 끄덕였다. 소맥이 취향이라지만 비싼 와인과 칵테일을 즐겨 마시는 우아한 애주가인 척 굴었다. “그리고 즐겨먹는 안주로는 딱딱하게 씹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말린 해산물이나 닭의 발, 육포를 특히나 좋아할 것 같습니다. 내 말 맞습니까.” 태화는 크게 뜨끔했지만 아닌 척 도리질을 쳤다. 일반적인 취향이라고 하기엔 너무 독특했다. ‘그보다 이 게임세계에도 닭발이 있어?’하고 반문하려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입술을 옹 다물었다. “음식취향은 아니지만 젊고 몸매와 얼굴이 예쁜 여자를 좋아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언니라는 호칭을 자주 쓸 것 같습니다.” 척추를 타고 소름이 쫙 올라왔다. 렐리아는 팔에 돋아난 닭살을 숨기기 위해 팔등을 문질렀다. “이 영지에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만, 수도에는 그대가 좋아할만한 미인들이 참 많습니다. 아담하고 귀여운 영애들이나 우아하고 세련된 여성들 말입니다. 그대 취향 아닙니까?” “…왜 그래. 나 남자 좋아해.” “말을 그렇게 해도 여자 앞에서는 특히나 애교가 많아질 것도 같습니다. 내 말 맞습니까?” 분명 유혹하려고 분위기를 잡았었는데 어느새 점집에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되어있었다. 귀신 같이 알아맞히는 남자는 혹시 용하다는 박수무당이 아닐까 싶었다. '아씨… 이대론 안 되는데….' 얘기를 나눌수록 어째 자신이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잔머리를 굴리다가 퍼뜩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자 렐리아는 바로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아아 졸려라. 갑자기 왜 이렇게 졸리지?” 빈혈기가 올라온 것처럼 몸을 휘청거렸으나 참으로 허술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부러 사내의 가슴팍에 옆머리를 기대면서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오른손으로 그의 바지앞섶을 덥석 붙잡았다. "어이쿠 섰…" 그 순간 커다란 남자손이 올라와 왼쪽가슴 위를 덥석 쥐었다. 맞공격을 해올지 몰라 렐리아는 급당황한 눈초리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에 블리어는 곧바로 가슴에서 손을 떼어내며 사파이어빛 눈동자와 마주했다. 찰나의 입맞춤처럼 부드러운 눈맞춤이었다. “정말로 하겠습니까? 그럴 배짱도 없으면서 함부로 사내의 것을 건드는 거 아닙니다.” “…….” 얼쯤하게 렐리아가 손을 거두자 블리어가 곧바로 낮게 웃으며 이마에 입을 맞춰주었다. 렐리아는 엉덩이를 조금 뒤로 물려 한손으로 이마를 가렸다.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은 마치 풋풋한 첫 키스를 한 소녀와 같았다. 속은 썩을 대로 썩었다지만 겉은 영락없이 그러했다. ‘…연애시뮬레이션 미친, 대박. 가슴 잡혔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배우 같이 잘생긴 흑발남자가 팔을 뻗어왔다. 곧이어 두 팔가득 자신을 끌어안아주자 렐리아는 얼떨떨하게 그의 품에 안겼다. 허리 뒤를 두른 남자의 팔뚝이 단단했다. 서로 맞닿은 온기가 따뜻했다. 렐리아는 약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난생처음 아빠 의외의 남자 품에 안겨보니 더 기분이 요상했다. 날렵한 턱선과 목을 지나쳐 서글픈듯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내려왔다. “기다리겠습니다. 그대가 날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질 때까지, 내게 솔직하게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이 남자 갑자기 왜 이런데……?’ 약간 놀란 렐리아가 슬며시 고개를 젖혔으나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이러면 내가 나쁜 거 같잖아.’ 왠지 모르게 애틋한 포옹에 렐리아는 방금 전 자신의 행동에 괜스레 양심이 찔렸다. 비스듬히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렐리아는 슬쩍 그의 등허리에 손을 얹었다. 단순히 게임캐릭터일 텐데도 약간은 기분이 묘했다. 0165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공작성에서 지내는 동안 렐리아는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만큼 호화로워서 탈이었다. 친해진 시녀를 통해 들은 것은 자신이 머무르는 방이 전 공작부인이 살아생전 자주 묵던 방이라고 했다. 현지인들과의 대화는 이 세계가 어떤 구조로 돌아가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했다. 왕권 체제인 건 알았지만 그보다 더 상세한 신분체계나 제국민이라면 알아야할 겉핥기식 지식들을 말이다. 세상얘기를 들으며 렐리아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블리어가 훨씬 더 까마득한 신분이라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것도 모르고 공작새라느니 시녀로 태어나지 그랬냐느니 하고 놀렸는데…’ 보름간 그와 함께 지내며 렐리아는 그에게 온갖 시시껄렁한 농담과 개소리를 지껄였었다. 그만큼 그와 친해졌다는 것도 있겠지만 워낙 블리어가 오냐오냐 잘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그녀가 보였던 불손한 언행과 태도를 충신 타렌이 알았다면 아마 그 자리에서 경을 쳤을 테다. ‘그나저나…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지?’ 주인공 버프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이것은 마치 단순한 게임시스템으로 인한 것이 아닌 인간과 인간의 교류 같은, 그런 오묘하고도 복잡한 무언가를 느끼게 했다.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겠지.’ 렐리아는 공작성의 후원에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매일 먹고 자고 뒹구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길 보름째였다. 이렇게 백년 만년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을 부모님과 친구들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돌아가야겠지만 막상 실천이 되질 않는 것이다. 공작과 왕은 차치하더라도 드래곤을 어디서 찾아야할지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왔다. 애초에 남주캐릭터들을 공략한다는 의미자체가 마음을 얻는 건지, 손잡기인지, 포옹인지, 키스인지, 섹스인지, 결혼인지를 모르겠다. ‘이런 걸 해봤어야지 원. 마음 얻으려다가 내가 마음 주면 어쩌지? 애초에 내가 뭔 수로 마음을 뺏냐, 뺏길. 어휴. 원나잇이 그나마 안전빵인데……’ “실례지만 거기 계신 아름다운 레이디!” 뒤에서 들려온 웬 남성의 목소리에 렐리아의 발이 우뚝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금발의 남자가 공작성의 별채 통로를 지나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열렬한 눈길로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코앞에서 제 손을 덥석 붙잡는 게 아닌가. “이 한겨울에 꽃이 피어난 줄 알았지 뭡니까? 실례지만 이 라미우스, 감히 레이디의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윽고 금발의 청년 라미우스가 한쪽 무릎을 꿇어보였다. 허리춤에 찬 검을 보아 기사인 듯 했다. 여전히 제 손을 쥔 채 손등에다 짧은 키스를 하려할 때 소리 없이 빠르게 뛰어온 갈색머리 남자가 무덤덤한 낯으로 금발기사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청아한 울림이었다. 렐리아는 갈색머리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곧 정중하게 금발머리 기사 옆에 서서 살짝 머릴 숙여 인사했다. “왕실 중앙기사단 소속, 킬리 바티무스입니다. 이쪽의 무례를 용서해주세요. 원래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녀석이거든요. 지금과 같이 편하게 무시하시면 돼요.” “아 그렇군요. 저는 렐리아예요.” “…킬리. 누가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그러거나 말거나 렐리아와 킬리는 서로 악수해보였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 렐리아는 편하게 입을 열었다. “킬리 씨? 킬리오빠? 몇 살이세요?” “그냥 킬리라고 부르세요. 스물다섯입니다.” “아. 제가 한 살 더 적네요. 근데 아까 기사단 뭐라고 하신 것 같은데 이곳에서 일하세요?” “아뇨. 왕궁 제2기사단에서 근무합니다." "아~ 왕궁에서 일하시는 구나." "원래는 수도에 머무르지만 몬스터 토벌 때문에 저번 주에 내려왔어요. 어제 막 토벌을 마무리하고 공작성에서 잠시 신세지고 있습니다.” “몬스터요?” 렐리아는 킬리의 말을 거반 흘려들은 채 한 단어에 주목했다. 그녀의 발언에 킬리도, 이제껏 무시당하고 있던 라미우스도 놀란 눈을 했다. 설마 모르고 있었냐는 듯이 말이다. “영지에서 제법 이 일로 소란스러웠었는데 몰랐습니까? 어, 흠. 괜찮습니다! 제가 그 악독한 몬스터들을 이 애검 일라니오스로 전부 베어냈으니 레이디께서는 걱정하실 필요가…!” “흉흉했었죠. 몬스터 떼들이 란게르드 산을 내려오느니 마니해서. 뭐 잘 끝났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만요.” 킬리가 무심한 어조로 간략히 설명해주자 괜히 얼쯤해진 라미우스가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동안 렐리아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RPG 덕후의 피를 주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힘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었다. 한번은 블리어와 어떻게 얘기가 나와 한밤중에 손바닥치기와 씨름을 하게 됐었는데, 이겼었다. 그다지 힘을 들이지 않고 블리어를 들어 바닥에 패대기칠 뻔했었다. 그때 이후로 쭉 제 힘이 범상치 않다고 여겼지만 이것을 차마 어디다 시험해볼 곳이 없어 묻어두고만 있었다. ‘만약 올스텟의 영향이 여기에서 힘으로 발휘되는 거면……,’ 렐리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것을 시험해볼 기회가 란게르드 산맥에 있다. 현실에 대한 막막함과는 별개로 몬스터가 들끓는다는 산으로 뛰어 들어갈 생각에 벌써부터 심장이 두근거렸다. * “안됩니다.” “왜?” 그날 밤 렐리아는 생각지도 못한 복병과 마주해야만 했다. 자신의 방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블리어는 책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다. 딱 잘라 거절하려는 모양새라 렐리아는 그의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있다 말고 그쪽으로 완전히 몸을 틀었다. “나 조금 힘이 센 거 같다고. 블리어도 알잖아? 나 힘 센 거. 씨름에서 나한테 졌잖아.” “그건 다시 거론하지 않아도 됩니다.” “암튼 딱 한번만. 사냥 나가보고 싶단 말이야. 내일 낮에 잠깐 다녀와보게 마차 좀 빌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안됩니다.” 블리어는 강경했다. 답지 않은 서느런 표정으로 책을 내려다보고 있는 옆모습은 평소와는 정반대였다. 그가 이렇게 냉정하게 나올 줄은 몰랐던 렐리아는 약간 기분이 상했다. 짚고 있던 소파시트에서 두 손을 거두고서 다시 홱 돌아앉았다. “출입금지도 풀렸다며. 거참, 쪼잔하게시리……됐다. 나 혼자서 못갈 줄 알아? 블리어 일하러간 사이에 아주 가방 메고 떠날…” “렐리아.” 낮고 단호한 부름에 렐리아는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어느덧 책에서 눈길을 뗀 블리어가 자신을 잠잠한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몬스터 토벌은 이미 거의 다 마무리된 상황입니다. 그대가 가도 몬스터는 볼 수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사냥이라니 너무 위험하질 않습니까.” 어르는 목소리에 렐리아는 고집이 조금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마음은 란게르드 산맥을 향해 가있었다. “나도 알아, 위험할지도 모른단 거. 근데 나한텐 중요한 사항이라고.” 현실이라면 자신도 그런 미친 짓은 안한다. 하지만 몬스터가 버젓이 돌아다니는 게임 속인데 어떻게 도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가상현실게임을 생생하게 체험해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다니,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것과 진배없는 것이다. 렐리아의 옹다문 입술과 드센 눈빛에 블리어는 가슴에 사무칠 듯한 낮은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부러 숨겨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 이 얘기를 접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렐리아의 시중을 드는 시녀들은 물론 성 안의 사용인들에게도 이런 얘기는 하지 말라고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으니 말이다. 이제 겨우 저를 편하게 대하고 시답지 않는 장난질도 곧잘 치는 그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 이상도이하도 아닌 어정쩡한 사이였다. 사실상 블리어에게는 렐리아를 붙잡아둘 권한이 없었다. 내일 당장 소리 없이 떠난다면 그녀를 어디서 찾을 지부터 막막한 것이다. 그녀가 이곳에 머무르는 이유는 친해진 자신도 있겠으나 의식주에 있었다. 게으른 빈대 같은 속성을 어찌 보면 블리어는 교묘하게 잘 이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절대 안 됩니다.” “뭐?” 블리어는 손을 뻗어 흥분한 렐리아의 정수를 덮었다. 그러곤 미끄러지며 그녀의 뺨 아래까지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대신 나와 수도로 올라갑시다.” “…뭐?” 어이없는 목소리가 재차 울렸으나 블리어는 꽤나 진지했다. 그녀와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그녀를 잘 이해하고 조련할 수 있는 자가 그였다. 그 테크닉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수도에 볼 것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 산 속에서 며칠 내내 돌아다녀봐야 눈과 몬스터 사체밖에 볼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쏟아내는 내장과 피는 얼마나 악취가 심한지 맡아보지 않은 그대는 모를 겁니다. 한겨울에도 악취가 진동할 정도이니 말입니다. 거기다 뱃속에는 인간의 세 배 가까이 되는 오물과 기생충이 득실거립니다.” “…….” “검으로 찌르면 그런 더러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꼭 보고 싶습니까?” “아니.” “잘 생각했습니다. 굳이 그곳에서 고생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대신 수도로 따라와 준다면 그대가 원하는 것 하나 들어주겠습니다. 단 위험한 것은 제하고.” “진짜?”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저 논리적인 말빨. 렐리아는 혹한 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리얼리티를 내세운 게임세계이다 보니 확실히 그의 말대로 몬스터를 잡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테다. 뼈와 내장, 기생충이나 오물 같은 보고 싶지 않은 것들까지 볼 게 뻔했다. 거기다 더러운 피를 뒤집어쓴다고 생각하니 약간 소름이 끼쳤다. ‘여기서의 스릴은 사서 고생인 걸까…. 흠.’ 턱을 긁적였으나 렐리아는 마지못해 블리어의 말에 수긍했다. 0166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제국 수도에 위치한 라콘드 공작저는 한겨울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대저택이다. 총 오 층으로 이루어진 드높은 저택본관과 그 주위로 U자형을 이루며 솟아난 아치형지붕들, 흡사 궁전이라 해도 될 만큼 웅장했다. 렐리아는 그 저택을 마차창문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다. 영국 왕실의 궁전이 아닐까싶었다. 장미넝쿨 무늬가 새겨진 대문이 좌우로 활짝 벌어졌다. 천천히 안으로 움직이던 마차가 이윽고 멈추고 하얀 분수대가 중앙에 놓인 벽돌길 위에 내려서게 되었다. 블리어는 에스코트하며 렐리아의 손을 잡아준 뒤로 계속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을 신경 쓰지 못할 만큼 렐리아는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족히 백 명이 넘는 시종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가주인 블리어와 함께 저택정문으로 당당히 들어섰다. 말이 당당이지 속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이러면 저가 무슨 어디 사는 공주라도 되는 것 같지 않은가. 철면피를 깔고 행동하긴 했지만 생애처음으로 받는 주목된 눈길에 렐리아는 지금당장 뒷머리를 벅벅 긁고만 싶어졌다.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대가 누려야할 것을 당연히 누리는 것뿐입니다.” 이때 옆에서 나직이 내려온 목소리가 있었다. 렐리아는 힐끗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자신의 왼손을 포개어 붙잡고 있는 그의 따스하고 단단한 손이 느껴졌다. 이러니 꼭 버진로드를 걷는 신랑신부라도 된 것 같아서 괜히 잡힌 손이 간질거렸다. 딴청 부리며 걷는 렐리아를 내려다보며 블리어는 맞잡은 두 손에 더 힘을 실었다. 과거 그녀의 머리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씌우고 으슥한 건물뒤편으로 돌아가게 했던 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서로 사이가 안 좋았던 데다 추문이 퍼질 것을 염려해 그렇게 했다지만 괜스레 그녀에게 미안하기만 했다. “…못해줬던 것만큼 더 많이 잘해주겠습니다.” “……?” 렐리아는 희미한 속삭임과도 같은 저음에 고갤 그에게로 돌렸으나 블리어는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뭘 못해줬단 거지? 렐리아는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받은 것만 해도 되돌려줄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말이다. 남의 호의를 계속 받아먹고만 있는 뻔뻔한 구석을 스스로도 알지만 그렇다고 남의 호의에 대한 감사함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언젠간 뭐로든 갚아야지 하고 벼르고 있기도 했다. 렐리아는 가끔 생각하곤 했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제게 잘해주는 남자가 또 있을까 하고. * “소피아. 여기는 뭐가 유명해?” 렐리아는 전속시녀인 소피아를 이끌고 수도 상가로 나온 참이었다. 수도에 왔는데 구경은 해야겠고, 마침 가깝게 지내는 현지인이 시녀 소피아였다. 갈색 양갈래머리가 귀여운 열아홉 소녀는 수도지리를 아주 꿰고 있었다. 여기저기 쏘다니며 렐리아는 소피아와 함께 음식쇼핑을 즐겼다. 소피아는 참 특이하신 분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이 나이 때 귀족아가씨들은 미모와 몸매를 한층 더 아름답게 가꾸는데 혈안이 되어있을 텐데 드레스나 화장품, 보석에는 일체 관심이 없으셨다. 오로지 먹을 것에만 관심을 보였으나 소피아는 그런 렐리아가 좋았다. 함께 맛있는 걸 맛보는 동안 절로 방실방실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 맛있다, 그지? 이제 후식 먹으러 어디로 갈래?" 소피아와 함께 거리를 나온 렐리아의 눈에 우연히도 작은 파이가게가 들어왔다. 왠지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을 느꼈다. “오 마침 건너편에 파이가게 있네? 우리 저것도 먹으러 가볼까?” 배는 이미 포만감을 느끼고 있었지만 렐리아의 발은 멈추지 않았다. 소피아도 아직 더 들어가는 모양인지 고개를 열렬히 끄덕이고 있었다. 혹자가 말하길, 여성은 남성과는 다르게 신체 구조상 디저트 배라는 게 따로 존재한다고 했던가. 두 사람은 해질녘이 될 때까지 파이가게 안에 앉아서 차와 디저트를 즐겼다. 고즈넉한 거리 풍경을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몸을 일으켜 가게주인에게 다가갔다. “이거 포장되죠?” 얇게 초콜릿이 펴 발린 그 위에 블루베리 쨈이 가득 얹어진 파이는 단 걸 좋아하는 어느 남자의 입맛에 딱 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가 곱게 포장된 흰 상자를 들고 렐리아는 소피아와 함께 다시 공작저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후 샤워를 하고 편한 옷을 갈아입은 렐리아는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배가 불러 저녁식사는 사양하고 계속 누워 있다가 블리어가 찾아오자 또 한참을 활발하게 떠들어댔다. 그동안 렐리아는 파이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블리어가 취침하러간 후에도 렐리아의 방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뒹굴거리다가 그림이 절반을 차지하는 어린이 모험소설을 읽었다. 블리어에게서 배운 단어 몇 개만 알아보고 나머지는 삽화만 슥슥 넘겨보았다. ‘끄응. 이제 그만 잘까.’ 하품을 쩍쩍해대며 렐리아는 슬슬 졸린 기분에 몸을 일으켰다. 방 불을 끄고 다시 누우려할 때 서랍 위에 올려두었던 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맞다, 하고 렐리아의 입에서 절로 얕은 탄성이 튀어나왔다. 기껏 포장해 와서는 파이를 전해준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낮까지 또 일 있을 테고, 난 그 시간에 자고 있을 텐데…흠 전해줄 시간이.’ 귀찮았으나 렐리아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블리어의 방까지 찾아가기는 상당히 수월했다. 십 분도 안 걸려 방에 침입한 렐리아는 조용히 침실 문을 열어보았다. 야심한 시각, 역시나 블리어는 침대 위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캄캄하게 불이 꺼진 침실을 허무하게 바라보다가 렐리아는 슬쩍 엄지발가락을 침실 바닥에 두었다.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여 침대 옆에 있는 탁자 위에 상자를 소리 나지 않게 내려두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린 그녀가 나가기 위해 조용히 문고리를 쥐는 순간이었다. “…뭡니까?” “안자고 있었어?” 등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얼떨떨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이미 반쯤 상체를 일으킨 블리어가 어둠 속에서 의아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데 그렇게 조용히 놓고 갑니까.” “그냥 땅에 떨어져 있길래.” “…….” “맞다, 블리어 더러운 거 싫어하지. 땅바닥에서 주운 거 아냐. 그냥 네 생각나서 사왔어.” 렐리아는 머릴 긁적이며 사실대로 말했다. 그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겠지만은 그래도 주워왔다고 하면 괜히 먹는 입장에선 찝찝할 테니 말이다. 이럴 때는 솔직해지는 게 좋겠지 하는 훈훈한 깨달음과 함께 렐리아는 그를 향해 작게 미소지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먹으라고. 잘 자.” 낯간지러운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침실 밖으로 나간 렐리아는 조용히 문을 닫아주려 했다. 그때, 문틈 새로 커다란 손이 튀어나오더니 강제로 문을 잡아 벌렸다. 그러고는 문고리를 쥐고 있던 자신의 손목을 붙잡았다. 렐리아는 어정쩡하게 그에게 붙잡혀 안으로 끌려들어갔다. 뭐야? 하고 눈만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볼 때였다. 렐리아는 유독 가깝게 내려오는 그의 얼굴을 알아차렸으나 피하기도 전에 날카로운 콧대가 비스듬히 콧등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자신의 아랫입술을 천천히 파고들어왔다. 렐리아는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밀어내기도 전에 그가 다시 느릿하게 입술을 거뒀다. 언제 손목이 붙잡혔냐는 듯이 부드러운 손길이 떨어져나가고 바로 코앞에 있던 남자의 얼굴도 사라졌다. 렐리아는 잠시 굳어 있다가 상황파악을 위해 천천히 턱을 들어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살짝 뭉근하게 달아오른 그의 녹안이 선명하게 빛났다. “고맙습니다. 렐리아. …이건 내일 잘 먹겠습니다.” 그 다정한 인사말을 뒤로하고 렐리아는 그대로 도망치듯 침실을 벗어났다. * “저어…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소피아가 창가에 의자를 갖다놓고 앉아있는 렐리아에게 소심하게 말을 걸었다. 아무리 잘해주신다고 해도 감히 시녀로서 도 넘은 질문일까봐 한참을 우물쭈물해야만 했다. 소피아는 자신이 모시는 아리따운 은발여인이 공작님의 하나뿐인 연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직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공작저택의 모든 사용인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었다. 둘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정황증거가 포착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둘 사이에 스킨십이 오가는 것을 소피아도 본적이 없었다. 결국 당사자에게서 직접 사실확인을 받기위해(같이 일하는 시녀언니들의 등쌀에 못 이겨)이렇게 나선 것이다. 발그레 뺨을 물들인 채 소피아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정말 궁금했는데요…. 공작님과는 무슨 사이세요?” “나도 모르겠어.” 창밖을 내다보며 렐리아는 심드렁하지만 솔직하게 답했다. 어젯밤 분명 그에게 키스를 당했다. 아직까지도 그때의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지 않아 렐리아는 하루 내내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꼈다. 그 얼굴을 어떻게 봐야하나, 하는 소녀적인 방정은 떨지 않았으나 가슴은 주체되질 않는 것이다. 렐리아는 이 일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남자로 보이기는 하는데……그래. 남자지. 그 떡 벌어진 어깨가 여자로 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막 이성으로서 좋아하는 건 아니야. 그냥 갑자기 안 보게 되면 섭섭하고 또 그리울 것 같고…. 여기 와서 처음 사귄 친구정도랄까?” 돌아온 대답은 없었다. 뒤에서 조용하게 문이 열리고 있었으나 렐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창밖만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래도 내 기준에서는 많이 친하거든. 정도 많이 들었고, 뭐 나 돌봐준 사람이 블리어 밖에 더 있었겠냐만은 그런 사람 드물지, 암.” 만약 이 게임세계에 떨어진 이후로 쭉 혼자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양식도 다르고 글자조차 읽지 못하는데 이렇게 빨리 적응하지도 못했을 테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 시작부터 모든 게 막막했을 것이다. 어쩌면 영지 밖에서 노숙을 했을지도 모른다. 산 속에서 밤새 헤매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을 테다. 지금 이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한 채로 지내니 부모님과 친구 생각도 조금 덜 나는 것 같다. 외로우면 견딜 수 없었을 텐데 매일 옆에 있어주니 고마웠다. “그래서 결국 나는 대체 뭡니까.” “블리어?”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렐리아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새 어디 갔는지 소피아는 보이지 않고 문가에서 깔끔한 차림새의 흑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언제 왔대…?” 담담한 척 하려해도 괜스레 턱이 근지러웠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들은 건지 알아내려는 듯 렐리아는 제게 다가온 블리어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그는 그저 평소와 같은 자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대에게 뭡니까?” 집요하게 물어올 줄은 몰랐기에 렐리아는 게슴츠레 눈을 접었다. 여기 와서 처음사귄 친구라느니, 안보면 섭섭하다느니, 그런 사람 드물다느니 하는 얘기를 나불댄 제 입을 곤장형에 처하게 하고 싶었다. 벅벅 긁고 싶을 만큼 낯이 근지러웠으나 렐리아는 뻔뻔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채 굴었다. 턱 아래를 문지르며 이제와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블리어는…뭐 굳이 말하자면 봉?” “…봉?” 미약하게 입술 끝이 움찔하며 블리어는 반사적으로 반응해버렸다. 검은 머리칼사이로 드러난 눈썹이 약간은 위로 휘어 올라가있었다. 렐리아는 다시 정정했다. “봉은 좀 심했나. 암튼 금전적이든 뭐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심할 리 있겠습니까. 내가 그대에게 의지될 수 있는 사람이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임시보호자 같잖아. 그럼 블리어는? 블리어에게 나는 뭐야?” 순수하게 묻는 듯했으나 렐리아는 약간은 속으로 긴장하고 있었다. 왜 긴장하고 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제까지 자신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잘해주던 그라지만 그가 막상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듣는 게 약간은 떨렸다. “…뭐라 정의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낮은 목소리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집중했다. “그대는 내게 있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사람입니다.” 블리어는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는 그 작은 얼굴을 마주보며 솔직하게 얘기해주었다. 렐리아는 잠시 그와 홀린 듯 시선을 공유했다. 뒤늦게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렐리아는 이에 질세라 곧이어 작은 입술을 나불댔다. “…올. 답지 않게 감성적인 답변이네. 좀 감동인데?” “그렇습니까?” “나도 뭐 블리어랑 영영 헤어지게 되면 가끔 생각날 것 같긴 해. 특히 밥 먹을 때나 혼자 있을 때, 음 잠자기 전에도 잠깐 떠오를 듯.” “나돕니다.” “암튼 그렇다고.” 매일 이렇게 얼굴을 보는 사이인지라 돌아가고 며칠 동안은 이 남자 얼굴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겠지 싶었다. 그럴 때마다 게임화면으로 접속해서 모니터너머의 블리어에게 말을 걸지 않을까 생각하니 좀 무섭기도 했다. 0167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어젯밤 오랜만에 부모님과 친구들이 꿈에 나왔다. 평소와 같이 웃고 떠들며 일상을 보냈는데 눈을 떠보니 모두 허무하게 밀려나가는 꿈이었다. 눈을 떠서야 렐레아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늦은 점심, 편안한 침대, 오늘도 어김없이 환한 대낮까지 퍼질러 자버린 자신, 한번 소피아가 왔다간 건지 깔끔하게 정리된 티 테이블 위. 언제까지 이런 나태한 일상을 지속할 생각인지 스스로에게 한숨이 다 나왔다. 너무 편해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다간 정말 늙어 죽을 때까지 클리어하지 못하고 여기서 사는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태연하게 놀고먹는 동안 부모님과 친구들은 경찰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인데 말이다. ‘……하아. 안되겠다.’ 도저히 이래선 안 되겠다.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린 렐리아는 양반다리를 한 후 오랜만에 머리를 굴렸다. * 그렇게 반나절이 지난 그날 밤, 렐리아는 그가 방에 찾아오기 전에 미리 샤워를 마치고 이성을 유혹하는데 효과가 있다는 향수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뿌렸다. 군인으로 치자면 전쟁터에 나갈 준비를 하는 것처럼 렐리아는 비장하게도 오늘밤 일을 치르기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새 시트를 깐 침대에는 향긋한 냄새가 감돌았고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은은한 조명과 장미꽃, 와인까지 준비했다. 이제 자신을 침대에 눕힐 블리어만 오면 되었다. ‘아니면 내가 눕혀……?’ 그런 흉흉한 생각을 하며 시간을 재고 있던 중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는 원래부터 앉아있었던 것처럼 빠르게 침대에 걸터앉아 치명적인 여배우를 흉내 내듯 다리를 꼬았다. “왔어?” 후훗 웃으며 가식적으로 눈꼬리를 휘었다. 누가 봐도 ‘나는 너에게 바라는 게 있다’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렐리아의 속마음에 따른 행동양식 분석과 고찰’이라는 책을 써봐라 하면 써낼 수 있을 만큼 그녀에 대해 줄줄이 꿰고 있는 블리어가 그 음흉한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으나, 그는 부러 모른 체해주었다. “오늘은 소파가 아닌 침대에서 마실 겁니까.” “응~ 어서 와서 앉아.” 평소와는 다르게 사근사근한 어조였다. 그게 싫지만은 않아 결국 고분고분하게 그녀 옆으로 가 앉은 블리어였다. “일단 한 잔 쭉 들이켜고.” 렐리아는 그의 손에 강제로 와인잔을 쥐어주고서 어서 마시라며 쭉쭉쭉 소리까지 냈다. 일부러 도수 높은 술로 준비했으니 그도 조금은 평소보다 풀어질 것이다. 말없이 와인잔을 비우는 블리어의 옆에 바짝 다가와 앉은 렐리아는 젖은 머리를 그의 어깨에 한번 비빈 후 교태스럽게 눈웃음을 쳤다. “공작. 있잖아~” “뭡니까. 뭔데 그렇게 미소가 입술에서 떠나가질 않는 겁니까.” 무슨 좋은 일이 있냐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렐리아는 눈치로나마 그가 제게 무슨 꿍꿍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 참 공작도~ 내가 꼭 무슨 부탁이 있어서 그러는 건 아니고.” 슬슬 속을 내보이는 앙증스러운 여인을 눈앞에 두고 블리어는 따라 자상하게 시선을 마주쳐주었다. “말하면 들어줄 거야?” “들어주겠습니다.” “뭐든?” “뭐든 그대가 원하는 거라면 들어주겠습니다.” “히~ 그렇구나.” 조금 실없어 보일 만큼 그와 눈을 마주친 채 해죽 웃어 보인 렐리아가 곧 평소처럼 돌아왔다. 태연하다 못해 뻔뻔한 목소리였다. “그럼 나랑 한번 자주라.” “알겠습니다.” “정말? 정말이야?”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팔을 붙잡고 있다가 뒤늦게 너무 흥분했음을 깨닫고 놓았지만. 이렇게 쉽게 될 걸 이제까지 뭐한 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반절의 긴장과 반절의 한 건 해결했다는 시원스러운 기분을 맛보던 중 렐리아는 와인잔을 테이블에 살며시 내려두는 그를 발견하고는 냅다 침대 위에 누웠다. 그는 바로 할 생각인지 저가 누워있는 침대 위로 올라왔다. 익숙한 침대일 텐데도 왠지 남의 침대에 누운 것 같은 생소함이 들었다. 어색하게 천장을 바라보다가 옆에서부터 비스듬히 제게 몸을 숙여오는 그가 보였다. 렐리아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의 손이 움직였다. 이불과 옷감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옷을 먼저 끌어내릴까, 키스를 먼저 해올까, 이어질 행위를 기다리며 딱딱하리만치 어깨를 굳히고 있을 때였다. 자신의 목까지 끌어올려진 이불과 도닥도닥 할머니처럼 이불 위를 두드려주는 그의 손길에 렐리아는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옆에 앉아있던 무뚝뚝한 낯의 사내가 곧 어서자라며 부드럽게 시선을 마주해오자 그만 정색하고 말았다. “아니. 자자고.” “불 끄겠습니다.” “큼, 섹스하자고!” 렐리아는 자자는 말을 정말 같이 자자는 말로 받아들인 그를 이글이글 쏘아보았다. 보통 한밤중에 샤워를 마친 여자가 이렇게 섹시어필까지 해오면 눈치껏 덮칠 만도 할 텐데 참 청렴한 건지 순진한 건지 모를 사내였다. ‘……4명 사귀었다는 것도 뻥이고 사실 나처럼 동정아냐?’ 잠시 의심을 거두지 못했으나 렐리아는 곧 불같은 짜증을 거두고 가식을 뒤집어썼다. “공작~ 너무 귀엽다. 설마 진짜 그 뜻으로 받아들인 거야? 에이, 우리 솔직해지자고.” 그러면서 슬쩍 블리어를 침대 위에 무너뜨린 렐리아는 천천히 그의 가슴팍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서부터 석고처럼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랑~ 섹스 한번만 해주라. 나 요즘 굶주렸는지 좀 하고 싶은데 지금 같이 할 사람이 공작밖에 없네?” 제법 앙큼하게 한쪽 눈을 감았다 뜨며 유혹해오는 렐리아의 앞에 블리어의 인상이 일순 굳었다. 그의 몸은 충실하게 그녀에게 반응했지만 그는 딱딱하리만치 미동이 없었다. “……” “섹스, 응? 섹스하자.” “렐리아.” “섹스 어때? 공작도 나랑 하고 싶지? 하고 싶다고 말해줘. 나 지금 여기 엄청 달아오른 거 같은데…” 어디선가 주워들은 AV배우나 할 번한 대사를 해주며 렐리아는 괜히 가슴주위를 손으로 훑었다. “……공작 나랑 섹스하는 거 싫어? 아니면 내가 섹스거리는 게 정 떨어진다거나?” “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섹스섹스 거리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아 그래…?” 의외의 취향이 아닐 수 없었다. 섹스거린다고 더 싫어하면 어쩌나 염려했던 게 우스울 만큼 괜한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이런 유혹을 해오면 솔직히 마음은 동합니다만.” “동합니다만?” 블리어는 자신의 말을 따라하며 긴장감어린 눈빛을 드러내는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손바닥전체로 렐리아의 뒷머리를 부드러이 쓸어내렸다. “무엇이 그리 다급한 겁니까.”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애타게 졸라오는데도 그의 마음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돌덩이처럼 무겁기만 했다. 저를 좋아한다고 착각한 채 그녀의 유혹에 넘어가 처음 그녀를 안았던 날이 있었다. 돌이키고 싶을 만큼 서로에게 상처만 되었었던 밤이었다. 그날과 똑같은 일을 반복할까 그는 두려웠다. “평소 하지 않던 말을 다 하고.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미소지어보이며 블리어는 렐리아를 달래듯 떨어뜨렸다. 그녀가 왜 이렇게 다급해하는지 모를 리 없었으나 그렇다고 그녀 뜻대로 해줄 순 없었다. 대신 옆에서 불안함을 달래줄 수는 있었다. “내게 털어놔도 됩니다. 들어주겠습니다.” “…….” 렐리아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포기한 듯 입술을 휘었다. “아니야. 그냥 공작말대로 다급했나봐.” 솔직히 이런 말을 해올 줄은 몰랐다. 렐리아로서는 차마 그한테 마음 없이 몸만 요구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나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기 위해 노력하는 그인데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여간 공작도, 분위기 깨는 데 뭐있다니까. 이제 섹스하고 싶은 마음 사라졌어.” 괜스레 툴툴대며 그에게서 떨어져나간 렐리아는 요염함이라곤 눈 씻어도 찾아볼 수 없는 양반다리 자세를 했다. “흐암, 졸립다. 암튼 내일 봐.”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잘 준비를 하다가 렐리아는 여전히 옆자리에서 꼼짝 않고 누워있는 그를 슬그머니 쏘아보았다. “내일 보자니까?” “같이 자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기야? 진짜 안 나갈 거야?” 렐리아는 그를 이대로 이불에 돌돌 싸 침대 밖으로 밀어내버릴까 하다가 관뒀다. “됐다, 밤새 와인이나 까자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준비해둔 와인이나 마시면서 놀자고 렐리아는 그제야 씨익 웃어보였다. * 필름이 끊겼다. 렐리아는 어둑어둑한 새벽쯤에 다시 정신이 돌아와 멍한 눈으로 방을 바라보았다. 협탁이 바로 근처에 보이는 걸보니 침대 위인 것 같았다. 도수 센 술을 얼마나 퍼마셔댄 건지는 몰라도 중간에 누군가를 얼싸안고 잠든 기억이 어렴풋하게 남아있었다. 희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다가 어깨가 배겨 누운 채 뒤를 돌때였다. 어두운 흑색 머리가 잠시 시야에 들어온다 싶더니 어느새 눈앞에 잠든 사내의 얼굴이 위치해있었다. 매섭게 솟아있는 짙은 눈썹과 가지런히 감긴 눈매를 바라보며 두어 번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어? 한 건가. 그런 것치곤 옷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직한 곳에서 제 손을 덮고 있는 든든한 손을 보니 그런 의심을 한 게 괜스레 미안할 정도다. 머릿속에서 절로 도출된 ‘그와 밤새 손만 잡고 잤다’는 결론은 어느새 ‘그와 밤새 손을 잡고 잤다’로 변하였다. 렐리아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문득 예전에 다솜이와 통화하면서 나눴던 말들이 생각났다. 남자친구가 오늘은 뭘 해줬네, 오늘은 어딜 갔네, 오늘은……, 제게 꾸준히 남자친구에 대해 자랑하던 다솜이는 항상 마지막에 ‘태화야 너도 게임만 하지 말고 남자 좀 사겨봐’ 하고 농담처럼 말했었다. 그때마다 웃으며 대답했었다. 어차피 남자 따위에 관심 없으니 게임만 할 거라고. 평생 게임만 하다 늙어죽을 거라느니 하는 말은 어느새 입에 달라붙어 기계적으로 흘러나왔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자신은 이런 여자가 되어있었다. 머리긴 남자. 중학교시절 처음으로 좋아했던 남자아이에게 들었던 우스갯소리는 어쩌면 저라는 인간을 정확히 꿰뚫어본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말이 사춘기소녀를 백팔십도 달라지게 한 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한들 이제와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단순히 외모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못생긴 여자애도 못생긴 남자애와 연애는 하니까. 자신의 성격에 있는 어느 결함에 의해서 스물넷이나 먹도록 연애한번 못 해본거구나 넘겨짚을 뿐이다. 귀엽고 예쁜 건 저와 선천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한 후로는 이성에 대한 관심이 귀찮게만 여겨졌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이 남자가 조금 눈에 밟혔다. 렐리아는 숨소리를 죽인 채 눈앞의 남자의 옆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눈을 감아버렸다. 이제 와서 별다른 감정이나 관심을 가진다한들 우스울 뿐이었다. 그는 게임 속 인간이고 자신은 현실 속 인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남을 것이고 자신은 현실로 돌아갈 것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만 될 텐데……. 렐리아는 미련처럼 다시 눈을 떠 코앞에 있는 블리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게임캐릭터주제에 뭐가 이렇게 실감나는지 모르겠다. 애당초 그가 사람이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이 세계가 사실……게임세계가 아니라 현실이라면,’ 렐리아는 이제와 생각해도 말도 안 된다며 코웃음을 픽 쳤지만 왠지 지금 순간은 현실이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0168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가로운 늦저녁이었다. 렐리아는 오늘도 어김없이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소파위에 늘어져있었다. 그 포즈며, 냄새며, 딱 백수삼촌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렐리아.” 그 맞은편에 앉아있던 블리어가 품속에 지니고 있던 것을 꺼내 티 테이블위에 내려두었다. 그것은 봉투였다. 광택이 흐르는 종이재질은 마치 금이라도 뒤바른 것만 같았고, 그 위에는 화려한 드래곤 문양이 찍혀있었다. 딱 봐도 범상치 않아 보여 렐리아는 힐긋힐긋 시선을 주었다. “이게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뭔데?” “무도회 초대장입니다.” “좋겠네. 예쁜 언니들도 보고.” 렐리아가 대수롭지 않게 귀를 후비며 받아치자 블리어는 곧바로 뒷말을 이었다. “나의 파트너로서 함께 참석해주지 않겠습니까.” “…뭐?” 새끼손가락이 귓구멍 깊숙이 들어갔다. 아야, 렐리아는 곧바로 손을 거두고 당혹스럽게 그를 돌아보았다. 잠시 블리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의 말이 진담인지 아닌지를 살폈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진심인 것 같았다. “그치만 나 평민이잖아. 그런데 가도 돼?” 살짝 당혹스럽게 올라간 목소리에도 블리어는 대수롭지 않아보였다. 오히려 이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양 차분히 입술을 열었다. “신분을 만들어두었습니다.” “신분? 진짜로?” “탐피아 제국에 귀화한 귀족출신이 되는 겁니다. 지위는 남작입니다. 그대마음에 들 거라 여겨 성을 이프네 라고 지었습니다만 괜찮습니까.” “이프네? 뭔가 어감 상 아프네로 들리는데.” “이쁘네 입니다.” 처음 이프네 라는 성을 받고 제게 자랑하던 모습이 선명했기에 굳이 예전과 같은 성으로 지었을 뿐이었다. 허나 블리어가 정정해주는 목소리에도 렐리아는 그저 턱아래만 한번 긁적일 뿐이었다. “음 그냥 되도록…공식적인 자리에는 가고 싶지 않은데. 신분도 필요 없어. 그냥 이대로가 좋아.” 렐리아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블리어를 바라보며 솔직하게 얘기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계속 받는 건 부담스럽기만 했다. 평소에도 의지하고 있고 친한 사람이기에 더욱더 과분한 기분만 들게 했다. “나는 되도록 편한 사람과 함께 참석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건 그대에게 의뢰하는 겁니다. 함께 가주는 것뿐 아니라 내 애인행세를 해줬으면 합니다.” 블리어는 그녀의 부담감을 덜어줄 요량으로 말했으나 렐리아는 이에 기함하듯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애인행세라니,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으나 역시 그건 아닌 듯했다. 진지한 녹안과 마주한 채 렐리아는 머쓱하게 제 뒷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애인행세를 하라고? 블리어 미쳤어…?”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염려 마십시오. 내가 애인이라는데 그 어느 누가 걸고넘어지겠습니까. 공작의 권위에 대항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그건 그렇겠지만, 흠.” “넉넉히 생각할 시간을 주겠습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배려해주듯 특유의 누긋한 저음은 듣기 좋았다. 렐리아는 가만히 블리어를 응시하다가 씰룩 어깨를 움직였다. “블리어는 참 사람성격도 좋아.” 이제까지 그에게서 받은 걸 이번 한번으로 상쇄시킬 수 있기는커녕, 오히려 이런 식으로 더 받는 느낌이었다. 신분도 만들어줘, 드레스도 사줘, 시녀도 붙여줘, 거기다 공작의 공식적인 애인이 된다면 그에게 더 이득일지 자신에게 더 이득일지는 쉽게 답이 나오는 것이다. ‘복잡하네. 그래도 흔치않은 기횐데.’ 무도회에 참석하면 왕을 우연히 볼 수 있을 테고, 혹여 이 미모로 눈에 띄기라도 하면 일이 조금 수월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공작의 애인이라는 점이 발목을 붙잡겠지만 왕과 공식적인 사이가 될 것도 아니고 원나잇을 원하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렐리아가 오랜만에 잔머리를 굴릴 때였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합니까?” 그의 다정한 물음에 렐리아는 떨떠름한 눈빛으로 반대편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자상한 눈길로 마주해오는 블리어였다. 자신의 얼굴이 또렷하게 비친 진녹색 눈동자와 마주본 순간 왠지 모르게 바람피다 걸린 아내가 된 것만 같았다. 뜨끔한 감정을 지운 채 렐리아는 “아무것도.”하며 심드렁하게 굴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까? 그런 것치곤 찔려 보입니다만. 성격 좋다 말해놓고서 말을 번복하려한 건 아닙니까.” “에이, 그럴 리가.” 렐리아는 한 손을 파리 쫓듯 휘휘거리며 내저었다. “블리어는 만인이 인정하는 보살이잖아~ 나도 살면서 이렇게 성격 좋은 사람은 본 적이 없는 거 있지?” “그다지 진심은 안 느껴지지만 뭐 알겠습니다.” “근데 말이야. 블리어도 막 사람이랑 싸우거나 그래? 골치 아픈 사람이라거나, 되게 사이 안 좋았던 사람이라거나? 있었어?” “일방적으로 친구관계를 정리한 적은 있어도 싸운 적은……,” 블리어는 자신을 호기심과 기대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그녀를 알아차렸다. 설핏 입가가 아주 조금 끌어올려졌다.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골치 아팠던 사람이 딱 한 명 존재했었습니다.” “오 진짜? 누군데?” “인내심을 시험하게 만들던 여자였습니다. 떨쳐내도 다시 얄밉게 눈앞에 나타나고 거기에 매사가 가볍고 능글맞았습니다. 여러모로 참 악착같았던 여자였습니다.” “음 여자? 여자라고?” “그대 지금 질투하는 겁니까.” 귀여워하는 시선이 얼굴에 와 닿자 렐리아는 발끈하며 양반다리를 했다. 조금은 귀 끝이 도드라질 만큼 발개졌으나 허허, 하고 기가 찬 소리로 가리려는 듯 목소릴 높였다. “어허, 참나. 질투라니! 그냥 좀 궁금해서 그렇다!” “…….” “뭐 말해주기 싫음 관두고.” 블리어는 잠자코 소리죽여 웃었다. 웃음기를 띤 상태에서 그가 뒤늦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딪치고 부딪치다보니 전혀 예상치도 못하게 어느새 그 여자와는 아주 친하게 지내게 됐습니다. 첫사랑이라고만 해두겠습니다.” “풋풋할 때였나 보네.” 치고받고 싸우며 사랑에 빠지다니, 렐리아는 한 소년소녀로 불릴 시절쯤이겠거니 싶었다. “지금은 어딨는데?” 순수한 궁금증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저 말없이 미소 지었다. 눈치 없게 괜히 물어봤다는 생각에 렐리아는 머쓱하게 검지를 들어 턱을 작게 긁어야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얘길 하지 않는 걸 보니 그 첫사랑이라던 여자가 죽었구나 하고 조심스레 추측했다. 괜히 측은한 기분이 들어 렐리아는 슥 그의 앞으로 육포가 담긴 통을 내밀었다. 매일 옆구리에 끼고 살만큼 아끼는 것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먹으라고 양보해주었다. “나 주는 겁니까?” “같이 먹자고.” 블리어는 사양하지 않고 말라비틀어진 육포조각을 하나 집어 입안에 밀어 넣었다. 짭조름한 후추간이 강해 늘 기피했으나 씹으면 씹을수록 소고기 맛이 담백하게 다가왔다. 그녀가 왜 이렇게 자주 찾았던 건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 왕궁무도회는 늦저녁이 돼서야 온갖 빛을 끌어안고 그 문을 개방하였다. 환하게 터져 나오는 불빛에 귀족들은 흡사 나방처럼 떼 지어 몰려들었다. 수백 명의 인파가 동시에 쏟아져 들어와도 거대한 성문은 끄떡없었다.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기사단의 모든 인력이 무도회장 곳곳에 배치된 상황이었다. 렐리아는 마지막 계단을 블리어와 함께 손을 잡고 올라섰다. 족히 5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높이의 회장입구 앞에 멈춰 서자, 입구주위에서 공작을 알아본 기사들이 깍듯이 묵례했다. 그 중에 독특한 은발의 기사도 있었다. 머리색이 신기해 눈길을 주다가 곧바로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끄는 커다란 손에 렐리아는 정면을 돌아봐야했다. 그와 나란히 아치형 입구를 가로질러 들어서자 저마다 무리를 짓고 연회를 즐기고 있던 귀족들의 따가운 시선이 모였다. 젊은 여성들의 술렁임이 어디선가 들려왔으나 렐리아는 무시하려 노력했다. 이 순간만큼은 욕먹을 각오로 디스랩을 선보이는 신인래퍼만한 각오가 필요했다. 혼기가 찬 젊은 공작, 이것만큼 미혼여식들에게 구미가 당기는 존재도 없을 테다. 하지만 허무하게도 금방 눈길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우렁찬 나팔소리가 가장먼저 귀를 사로잡았다. 군중의 시선들이 일제히 옮겨간 곳은 렐리아와 블리어가 들어섰던 먼 뒤쪽의 입구였다. 렐리아는 비스듬히 돌아서서 지금 막 입장하고 있는 두 남녀를 응시했다. 온갖 찬란한 금빛을 끌어 모아도 두 남녀를 대신 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강렬한 붉은 기가 감도는 금발은 그가 이 자리를 빛내줄 젊은 국왕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는 웬 처음 보는 여인이 걸어오고 있었다. 우아하게 곡선을 그리며 흐트러지는 금발은 말 그래도 순도 높은 금빛을 띠었다. 하얀 조명빛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것만 같았다. 등에서부터 허리까지, 엉덩이에서부터 종아리까지 타고 흘러내리는 부드러운 보랏빛자락은 그녀를 마치 먼 신기루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대체 모난 부분이 어딜까 싶을 만큼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몸매였다. ‘와…장난 아니게 예쁘다.’ 가까이에서 스쳐지나가는 금발의 여인을 뚫어져라볼 때 여인의 손끝에서 흰 손수건이 살랑이며 떨어졌다. 옆얼굴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렐리아는 한발 늦게 윤기가 흐르는 대리석위에 시선을 두었다. 살짝 몸을 굽혀 고급스런 손수건을 쥐고서 달달한 향수냄새가 코끝을 떠나기 전 재빨리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기 손수건 떨어뜨리셨어요.” 렐리아의 부름에 또각또각 소리를 내던 진주빛 구두가 멈췄다. 이윽고 여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고마워, 렐리아.” 조명빛에 부서질 듯이 은은한 미소를 입에 걸고서 여인이 손수건을 갈무리해갔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지…?’ 이미 자신의 소문이 수도 내에 쫙 퍼진 건가 싶었다. 공작저에 얹혀사는 젊은 여성, 이 얼마나 유명해지기 쉬운 가십거리란 말인가.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슬쩍 옆을 올려다보는데 렐리아는 생각보다 많이 진지한 그의 표정에 막상 말을 걸 수 없었다. 동시에 깊어진 녹안위로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이채를 발견했다. 0169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저기 앗, 안녕하세요?” 그 다음으로 만난 상대는 용케도 인파 속에서 저를 찾아 먼저 다가온 귀족영애였다. 렐리아는 그녀를 본 순간 팔등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잠시 정계의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내가 간 사이 분홍머리 여자가 다가온다면 귀엽다고 헤벌쭉하지 말고 피하십시오. 그대에게 충분히 해코지를 할 수 있는 정신 나간 여자입니다.’ 블리어의 예언이 놀랍도록 적중해서 진짜 그가 박수무당이 아닌지 생각해야만 했다. 진한 분홍색머리를 양갈래로 풍성하게 묶고 크림색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누가 봐도 순진하고 귀여워보였으나 렐리아는 그 외모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늘 제게 부드러운 말투를 구사하는 그가 그렇게 살벌하고도 단호하게 얘기할 정도면 뭔가 있는 쌍년이구나 하는 감이 오는 것이다. “정말 밝고 재밌는 영애들이라 같이 얘길 나누면 분명 재밌을 거예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 선약이 있어서.” “아 그러시군요….” 커다란 눈망울이 아쉽다는 양 반짝반짝 빛났다. 자신이 그녀의 무리에 끼기를 은근히 원하는 눈치였으나 렐리아는 한사코 정중히 거절했다. 분홍머리 영애는 곧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며 해맑게 웃었다. “아, 저! 제 이름은 슈로니예요. 꼭 다음에 봬요.” ‘네에. 아마 볼일은 없을 것 같네요.’ 렐리아는 속마음을 철저히 감춘 채 한번 예의상 가식적으로 웃고 그녀를 지나쳐갔다. 분홍 똥을 피해 한참을 걷다가 구석진 곳에 있는 석조기둥 앞에 멈춰 섰다. 웃고 떠드는 귀족들로 북적대는 무도회장 중심을 응시하다가 그들 속에 흑백초상처럼 서있는 블리어를 발견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나이든 귀족과 얘기를 나누는 그를 관찰하다가 언뜻 호화롭게 차려진 디저트가 눈에 띄었다. ‘왠지 저거 블리어가 좋아할 거 같은데.’ 그러나 디저트테이블은 이미 귀족여인들에게 점령당해있었다. 하하호호 정답게들 웃으며 테이블을 두르고 있어 남자인 그가 접근하기 쉬워 보이지 않았다. 특히나 위엄을 갖춰야할 공작이 디저트테이블 주위를 기웃거린다면 얼마나 폼이 안 살까. ‘안되겠다. 블리어 좀 먹여야지.’ 렐리아는 기둥에 붙여두었던 등을 떼고서 몸을 움직였다. 디저트만으로 구성된 널따란 테이블 앞에 멈춰 서자 단 냄새가 물큰 풍겨왔다. 새하얀 식탁보가 덮인 그 위엔 여덟 개의 층으로 구성된 초콜릿 분수대와 상큼하고 달달한 한입크기의 과일들, 작은 빵이나 과자, 마시멜로가 놓여있었다. 뷔페식으로 되어있어 접시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 블리어의 입맛을 꿰고 있는 렐리아는 접시 위에 알찬 구성의 초콜릿랜드를 건설했다. 이제 그를 어떻게 밖으로 불러내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러나 고민도 잠시 때마침 허공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렐리아의 눈짓 한 번에 블리어는 순순히 대화를 갈무리하고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미안합니다. 가볍게 인사만 나누려했으나 생각보다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됐어, 뭘. 그보다 이거 봐라?” 능글맞은 미소를 흘리며 렐리아가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접시를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초콜릿을 뒤집어쓴 색색의 과일조각과 나선형으로 캐러멜 소스가 들어간 우윳빛생크림, 마시멜로 등으로 화려한 데커레이션이 된 접시였다.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렐리아는 ‘먹고 싶어 죽겠지?’하고 묻듯 양 눈썹을 으쓱 치켜 올렸다. “흠. 간만에 요리솜씨 좀 발휘했지.” 요리라 할 것도 없이 그냥 준비된 재료를 접시위에 얹기만 한 거라지만 렐리아는 뻔뻔하게 말했다. 블리어는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미온하게 입술을 길게 휘었다. 평소와는 달리 시원해보이지 않고 어딘가 가라앉아있는 미소였다. “서서 먹는 것도 좀 그러니 객실로 갑시다. 그대도 맘 편히 앉아 쉴 수 있는 곳이 더 나을 테니 말입니다.” “그거 좋지. 앞장 서.” 렐리아는 흔쾌히 받아들이며 무도회장을 벗어났다. 부지런히 블리어를 따라가 어느 객실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고급 객실답게 침대며 소파며 와인진열장, 심지어 욕실까지 두루 갖춰진 공간이었다. “작품제목은 초코랜드야.” 렐리아는 그와 나란히 앉아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일단 한번 먹어보라고 권유하자 블리어는 손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은포크를 쥐었다. 녹은 초콜릿이 묻은 과일을 포크로 찔러 묵묵히 입에 가져갔다. “어때, 내 작품은? 맛있어서 눈물이 다 나오남?” “…….” 블리어는 말하지 않았다. 렐리아는 맛이 너무 달아 그가 잠시 목이 멘 거라 여기고 마실 것을 가져다주려 했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옆에서 뻗어져온 손에 속수무책으로 손목이 붙잡힌 렐리아가 다시 소파에 걸터앉아 그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은포크가 바닥에 떨어지는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순간 머릿속에서 종이 울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가지런히 감겨있는 검은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렐리아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기분을 받았다. 그건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라는 걸 아주 뒤늦게야 깨달았다. 닿았던 입술이 더욱 벌려지며 그 사이로 따스하고 촉촉한 숨결과 물기가 스며들었다. 입술 밖은 물론 안쪽까지 적시고서는 두꺼운 살덩이가 점차 안을 가르고 들어왔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입안을 점령한 그것은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적당히 미지근한 체온이었다. 그래서 더 놀라지 않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던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차 미끌거리는 감각이 선명해지자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가 굳었다. 팔을 타고 올라온 투박한 손끝의 온기가 어깨에 머물렀다. 렐리아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이 서서히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등에 닿는 소파가죽의 감촉도 아주 느리게 다가왔다. 새카만 연미복을 입은 그가 어느새 우위를 점하고 자신에게 야한 키스를 하고 있었다. 렐리아는 눕혀진 상태로 멍하니 눈만 뜨고 있었다. 반듯하던 목 칼라에 구김이 가고 넓은 어깨선을 타고 얕은 주름이 생겨났으나 그것을 블리어는 알지 못하는 듯 했다. 점차 흐트러져가고 있었다. 블리어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야 겨우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듯했다. 애타는 기다림 속에서 그 자신도 모르게 내면에선 줄곧 바라왔던 걸지도 모른다. 그녀가 사랑했던 자신을 기억하고 있기를. 항상 꿈에서만 곱씹어봐야 했던 이 단맛처럼 언젠간 돌아올 자신의 아내를 줄곧 그리워했던 걸지도 모른다. 울적한 초콜릿의 향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진득하게 혀를 감아왔다. 블리어는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함에 심취해 쥐고 있던 렐리아의 어깨에서 점차 손을 내려갔다. “…음.” 렐리아는 가슴을 부드럽게 쥐어오는 커다란 손에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끼고 입안에서 신음을 흘렸다. 반사적으로 두 손이 움직여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바위처럼 단단한 느낌이 드는 몸은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짙디짙은 녹안을 잠시 멍하게 응시하고 있다가 렐리아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 갈래.” 떨떠름한 목소리가 튀어나오기 무섭게 렐리아는 서둘러 그의 아래에 눕혀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한없이 자상하고 배려적이던 그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혀 달라보였다. 잘못 건드리면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무언가 아슬아슬한 경계를 오가는 느낌이었다. 평소 그와 저 사이에서 오묘하고도 간지러운 느낌을 많이 받았지만 지금과는 달랐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서둘러 객실문을 열고 나와 자리를 벗어나는데 멀지 않은 뒤쪽에서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렐리아.” 다급한 음성에 렐리아는 순간 멈춰야할지 말지 주저해야만 했다. 그러나 두 다리는 빠르게 복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미 복도로 나온 상황에서 다시 객실 쪽으로 돌아가는 것도 웃기고 뭣보다 그 얼굴을 본다면 참 민망할거라 여겼다. 왠지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렐리아는 그를 피해 달아났다. “잠시만 내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러나 악착같이 블리어는 그녀를 쫓아와 결국엔 그녀의 손목을 붙드는데 성공했다. 그의 애탄 눈길이 긴 은발이 흘러내린 뒷모습에 꽂혔으나 렐리아는 고집스럽게도 뒤를 돌아봐주지 않았다. 그와 마주한 순간 얼마나 민망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괜히 뒤통수가 따끈따끈해져만 갔다. “놀랐다면 사과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아 됐어. 무슨 사과.” 렐리아는 쿨한 척 심드렁하게 말했지만 목에선 열이 올라왔다. “정말 괜찮다면 지금 뒤돌아서 날 봐주십시오. 그래야 내가 알 것 아닙니까.” “…남자가 뭐 이리 끈질겨. 됐다고, 아 쿨하게 서로 잊자고.” 한 손을 머리위로 들어 올려 렐리아는 대충 끝내자고 휘적거렸다. 끝까지 뒤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예전 같았다면 쇠고집에 얄미워보일진 몰라도 지금의 블리어의 눈엔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는 걸로 보였다. 상대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기 전까지는 이렇게 끝까지 솔직하지 못한 여자였다. “됐다고~ 없었던 일로 할 테니까.” “그러면 내 맘이 편치 않습니다.” “아니, 내가 이게 더 편하다니까?” “일단 뒤돌아보십시오. 내 눈 봐보십시오.” 조금은 아이 어르듯 다정하고 나직한 어조에 그제야 렐리아가 반응했다. 마음이 약해진 건지 슬그머니 뒤를 힐끗거렸다. 블리어는 이 정도로도 만족해 그녀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서서히 허공으로 떨어뜨렸다.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변명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네. 암튼 나 먼저 갈게.” 애꿎은 뒷머리를 흐트러뜨리며 렐리아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도회장인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계단난간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였다. “예전에 여기서, 첫사랑이었던 여자와 함께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오해가 빚은 사고였으나 따지고 보면 서로 오해한 채 대화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그대처럼.” 호기심을 이끌만한 발언 때문인지 렐리아의 걸음이 다시금 우뚝 멈췄다. 렐리아는 완만한 경사의 대리석계단을 내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아……계단에서 떨어져서 죽은 거구나. 그것도 이 계단에서.’ 첫사랑 상대가 어딨는지 좀처럼 말을 안 해주기에 그와 관련된 안타까운 사고가 있었을 거라 여겼으나, 역시나 였다. 렐리아는 조용하면서도 떨떠름한 눈으로 계단아래를 응시하다가 슬쩍 반걸음 뒤로 물려 블리어를 돌아보았다. “그 일이 있고난 뒤로 나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을 할 만큼 말입니다.” “…그날 사고로?” “지금도 바뀌고 싶습니다. 그대를 붙잡고 다시 계단을 구를 수는 없겠으나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사이가 바뀌길 바랍니다. 렐리아.” 블리어는 세 걸음을 더 다가가 렐리아를 끌어안을 것처럼 가까이에 멈춰 섰다. “형식적으로나마 만족하려했습니다. 애인행세를 해달라고 분명 일주일전 그대에게 그렇게 말했으나, 더는 참을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 렐리아는 뒤로 물러서려다말고 이 뒤가 바로 계단이란 걸 깨달았다. 자칫 휘청거릴 뻔한 몸을 블리어가 강하게 잡아당겨왔다. 부쩍 가까워진 두 사람의 모습을 그 아래층에서 쑥덕거리며 얘길 나누던 귀부인들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놀란 눈길을 주었다. 귀부인들의 수선스러운 행동을 우연히 본 주위 다른 이들도 2층 계단난간을 올려다보기에 이르렀다. “사랑합니다. 이젠 그대가 내 하나뿐인 사람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나랑 진짜 사귀자고……? 농담이지?” “렐리아. 나는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다.” 예민한 성미답게 그 술렁이는 낮은 소음과 시선들을 진즉에 알아차렸으나 블리어는 고백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렐리아의 뺨을 감싸고 바짝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부드럽게 한번 닿고 그가 날렵한 턱을 틀면서 약간은 진하게 서로의 입술이 비벼졌다. 블리어는 조금 깊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파고들었다가 숨 쉴 틈을 주듯 붙였던 입술을 살짝 떼어냈다. “오래전부터 좋아했습니다." “…뭐,” “그댈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니 그 전부터 줄곧 사랑해왔었습니다.” 따스하게 밀려드는 숨결이 달콤했다. 놀라기도 잠시 렐리아는 다시금 블리어의 키스를 받으며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어느새 그녀자신도 모르게 굵다란 팔뚝을 붙잡다말고 그의 어깨에서 등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에 손을 얹었다. 서로의 이마가 애틋하게 닿고, 비껴가듯 콧대가 닿고, 눌러진 입술이 더 깊게 닿았다. 정신이 어지러울 만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애인행세가 아니라 진짜 애인이 되어달라는 그 진심어린 고백은 어쩌면 렐리아의 가슴속에 자리 잡고 있던 그에 대한 마음을 부추겼던 걸지도 모른다. 난생처음 받아본 고백이었기에 더더욱. 하지만 렐리아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성적인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설레고 떨리는 기분에 집중했다. 진하게 키스를 이어가는 두 남녀를 무도회장 아래 위치한 수백 명의 시선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서있던 다이아나는 남들이 알지 못하게 은밀히 미소 지었다. 곧이어 수천가지의 환한 빛이 계단 난간 위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서 폭죽처럼 터져 올랐다. 꽃처럼 피어나는 환한 금빛과 그 사이 꽃잎처럼 휘날리는 분홍빛, 강렬한 자줏빛 꼬리를 따라 이어진 연둣빛, 투명한 레몬빛의 고리를 잇는 하늘빛, 맑고 다양한 빛깔들이 뒤섞여 이곳에 모여 있는 군중들의 탄성을 자아낼 만한 장관을 선사했다. 그 아래에 서있는 두 사람을 축복하듯이 빛들이 그들의 옆모습에 얼룩져갔으나 정작 눈을 감고 있는 당사자들은 알지 못했다. 아름다운 빛의 소용돌이가 남긴 그 잔상은 꽤 오랫동안 무도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뇌리에 박혔다. 수도 전체에 소문이 퍼지기까지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라콘드 공작이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한 미모의 여인에게 키스를 하며 고백한 사건은 특히나 미혼영애들의 입에 더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그 폭죽처럼 화려한 빛들은 라콘드 공작이 사전에 프로포즈를 위해 준비해두었던 걸로 기정사실화되면서 역사상 가장 로맨틱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0170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최근 들어 부모님이 자주 꿈에 나왔다. 꿈은 거듭될수록 가랑비처럼 가슴을 무겁고 축축하게 적셔갔다.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언제 올 거냐고 애탄 속을 드러내며 묻는 엄마아빠의 표정엔 간절함과 근심이 가득해보였다. 사고자 명단에서 딸의 이름이라도 본 것 같으셨다. 그런 부모님 앞에서 렐리아는 차마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서 입만 꾹 다물고 있어야만 했다. 그리고 한참 뒤에 꿈에서 깨어나 뒤늦은 잠꼬대를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엄마아빠. 걱정 말고, 나 곧 갈게. 금방 돌아갈 테니까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요. 그렇게 수십 번 다짐하는 동안 시야가 뿌옇게 변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 같아서 렐리아는 더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 눈앞이 어느덧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암흑처럼 새까만 공간에서 갑작스레 환한 빛이 확 터져 나왔다. “…허억. …헉…헉.” 렐리아는 생생할 만큼 차가운 공기로 폐부를 가득 채웠다. 바닷물 속에 푹 잠겼다가 올라온 것처럼 가슴 한편이 서늘했다. 동시에 눈가가 너무나도 따가웠다. 귓가를 가득 채우는 헐떡이는 숨소리와 빠르게 뛰는 심장소리가 이곳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한동안 침대위에 누워 있다가 렐리아는 베개 위가 축축하다는 걸 눈치 챘다. 상체를 서서히 일으키자 그제야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소리 없이 뚝뚝 이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렐리아는 습관적으로 벽 한곳에 걸린 시계를 찾았다. 밤 열두시가 지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도 생일이네…….’ 하필 자신의 생일날 이런 뒤숭숭한 꿈을 꿀 게 뭔가 싶었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렐리아는 자꾸만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해지는 눈을 손바닥으로 연방 비벼댔다. 왠지 눈가가 쓰라렸다. 퍽퍽한 한숨만 내뱉다가 그마저도 시원치 않자 렐리아는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애인은 하루 내내 바쁜지 얼굴조차 볼 수 없었고, 무도회날 손수건을 주워준 소소한 계기로 친해진 언니를 잠시 만나고온 게 다였다. 생일인데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엄마랑 전화통화라도 하고 싶다…’ 울적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렐리아가 궁상맞게 몸을 옹송그리고 있을 때였다. 별안간 닫혀있던 방문이 조용히 열렸다.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며 렐리아가 흠칫 고개를 들어 올리자 저음의 잔잔한 울림이 귓가에 먼저 닿았다. “일어나 있었습니까?” “어. 노크 좀 하고 들어오라니까 그러네…” 렐리아는 서둘러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고 안 운 척 담담하게 말했다. 다행히 어둠 속이라 티가 나지 않을 거라 여기고 태연하게 행동했으나 블리어는 예리하게도 그녀의 눈가에서 운 흔적을 잡아내었다. 하지만 물으면 발뺌할 것을 알기에 블리어는 모른 체해주었다. 대신 그녀의 옆에 걸터앉아 천천히 그녀에게로 고갤 숙였다. 훈훈한 숨결과 함께 부드럽게 뺨을 눌러오는 입술에 렐리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간지러운 기분에 갑자기 왜 이러냐고 캐묻기 전에 순순히 그의 입술이 떨어져나가 귀 옆에서 멈췄다. 다정한 목소리가 밀려들어왔다. “생일 축하합니다.” “어?” 렐리아는 놀란 눈을 하고서 블리어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 블리어는 또 한 번 뺨에 깊이깊이 입술을 맞춰주었다. “…내 생일인 거 어떻게 알았어?” “그대에 관한 거라면 뭐든 압니다.” 실상 블리어가 그녀의 생일을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은 결혼하고도 며칠이 지난 후였었다. 두 번이나 그녀의 생일이 지나간 후였었다. 과거 못해주었던 것들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한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블리어였다. 뺨이 닳을 만큼 자꾸만 쪽 소리가 나게끔 입을 맞춰오는 사내를 슬며시 밀어내며 렐리아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난치지 말고 어떻게 알았는데? 어?”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대에 관한 거라면 뭐든 다 안다고.” “어휴. 내가 말해서 뭐해….” “자꾸 그리 인상 찌푸릴 겁니까.” 블리어는 그녀를 품에 안고서 얼굴 이곳저곳에 아주 천천히 키스를 해주기 시작했다. 이에 렐리아의 작은 얼굴에 더 깊은 주름이 생겨났으나 그의 눈엔 그것마저 사랑스러워 보이는 듯했다. 렐리아는 두 눈을 찌푸린 상태에서 마지못해 그 눈길을 받아주다가 그가 품속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하자 그제야 호기심어린 눈을 했다. “뭐야? 총 꺼내드는 거 아니지?” 우스갯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블리어는 정중한 손길로 그녀에게 작은 반지함을 내밀었다. “내가 주는 생일선물입니다. 원래는 오늘 낮에 주려고 했습니다만 그대가 방에 없어서 줄곧 지니고 다녔습니다.” “나 오늘 낮에 올르아 공작저 다녀왔거든. 서로 엇갈렸나보다.” 렐리아는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적이다 한 손에 반지함을 들었다. 그와 눈을 마주하다가 블리어가 한번 열어보라고 상냥한 눈길로 재촉하자 그제야 반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윤기가 흐르는 검은 벨벳뚜껑을 열어젖히자 크고 작은 은반지 한 쌍이 놓여있었다. 섬세하게 세공된 유리알 같은 보석은 달빛이 반사되어 투명한 광이 흘렀다. “이거 커플링이네?” “마음에 듭니까.” “응.” 살면서 남자친구와 커플링을 맞출 날이 오다니 렐리아는 이 사실이 지극히 신기하기만 했다. 현실이 아닌 게임이라지만 블리어는 역시 현실 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자신보다도 더 자신을 사랑해줄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딨을까. “하루 동안 같이 있어주지 못했으니 오늘은 밤새 옆에 있어주겠습니다.” “뭐…?” 사귄지 이제 막 한 달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렐리아는 살짝 크게 뜨인 눈을 하고 블리어를 바라보았다. 커플이 하룻밤 같이 있을 시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대강의 상상도가 그려지는 것이다. 이렇게 첫 성관계를 맺게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 블리어가 오해의 소지를 없앴다. “손만 잡고 자겠습니다.” 그 말에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렐리아는 웃었다. “아~주 듬직하네. 믿음직해.” “비꼬는 겁니까.” “그럴 리가.” 키득거리며 렐리아는 자신을 끌어안는 그의 품에 기대어 풀썩 침대에 누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누워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뒤늦게 블리어가 느지막이 운을 뗐다. “사실 이 반지 말입니다. 오늘 낮에 예약한 레스토랑에서 주려한 거였습니다.” “뭐야, 레스토랑? 레스토랑 예약했었어? 얘기했었어야지. 그것도 모르고 언니랑 점심 먹고 후식까지 먹었는데.”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습니다. 조금은 눈치 채게 했어야하는데 미안합니다.” “됐어, 실망 안했어. 레스토랑 가봤자 소고기나 사묵었겠지 뭐.” 렐리아는 그가 자책할까봐 바로 말을 바꿨다. 대신 장난기가 떠오른 눈으로 블리어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블리어 생일날에는 레스토랑을 예약해서 스테이크 속에서 24캐럿 금반지가 나오게 할 거야. 와인 속에는 순은을 넣어야지.” “날 죽일 셈입니까.” “오 그거 좋다. 생일날이 알고 보니 제삿날이었다는 서프라이즈.” “못됐습니다.” 블리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콧등을 깨물 것처럼 바짝 입술을 가져왔다. 렐리아가 살짝 목을 움츠렸으나 그는 오뚝한 콧등에 가볍게 입술을 맞춰줄 뿐이었다. 렐리아는 제게 무한한 애정을 주는 그가 사실은 게임이 아닌 현실 속 남자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긴 머리칼을 빗어 넘겨주는 손가락이 좋았다. 부드럽고 나직한 저음도, 뺨을 매만져주는 손길도, 조각 같은 입술에 걸린 매력적인 미소도. 렐리아는 가까이 다가와 있는 그의 얼굴을 보며 황홀경을 느꼈다. “졸리면 자도 됩니다.” “별로. 안 졸려.” 잠결이 묻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렐리아는 대답했다. 가만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 부드레한 눈길이 좋아 렐리아는 두 손을 움직여 그의 허리를 감았다. “있잖아. 블리어.” 바짝 들러붙은 상태에서 그를 올려다보니 그제야 새카맣고 짙은 눈썹이 매끄럽게 휘어 올라갔다. 하지만 여전히 두 눈은 왜 그러냐고 묻듯 다정하기만 했다. 렐리아는 얄궂게도 그의 셔츠 속으로 두 손을 집어넣어 등 근육을 조물조물 만져댔다. 그를 귀찮게 만들려고 작정한 건지, 아니면 그냥 저가 심심해서 못살게 구는 건지 그의 근육질 몸이 무슨 찰흙이라도 되는지 주물럭거렸다. 블리어는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이 뒤에 이어질 그녀의 말이 사뭇 기대가 되는지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얘기 안했는데…,” 렐리아가 손을 멈추고서 얘기했다. 널찍한 등판에 닿아있던 손을 쏙 빼서 등 뒤로 감춰버리고는 눈을 굴렸다. “그게…” 우물거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보인다지만 블리어는 그녀의 영악한 속을 알면서도 반쯤 넘어갔다. “그게 다음이 뭔지 얘기해주지 않을 겁니까?” “나 이런 말하는 거 처음인데…하아.” “말해주십시오. 듣고 싶습니다.” “진짜 이런 말 하는 성격도 아닌데……,” 다시 긴 뜸을 들이며 렐리아는 옆머리를 마구 헤집었다. 이에 블리어는 반쯤 잃었던 이성을 되찾고 차분하게 한마디 했다. “침대인형이라느니 하는 소리라면 안 해도 좋습니다.” “무슨 소리야. 침대인형은 또 뭐고.” 작게 투덜대던 렐리아가 별안간 눈을 부릅떴다. 그러고는 녹안을 뚫어질 듯이 바라보았다. “나 말인데… 큼, 블리어가 좋아…….”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굴던 것치곤 자신감이 없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손가락은 은실타래 같은 머리를 어질러놓고 있었다. “사귀는 사인데도 한 번도 얘기 안 해줬잖아…그냥 그렇다고.” 공략상대인 그와 원나잇으로 끝낼 생각이었을 텐데 어떻게 이렇게 연인사이로까지 발전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정이라는 게 무섭고, 사람 마음이란 게 무섭다. 자신을 이렇게나 사랑해주고 아껴주려는 블리어를 두고 차마 다른 공략상대와 섹스를 한다는 생각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바람 피는 게 될 텐데 블리어를 무슨 면목으로 볼까. 스스로도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영영 게임을 클리어하지 못하는 건 아닌가하는 우려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클리어하면 블리어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고민하게 됐다. 그만큼 블리어는 이제 제 인생에 있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부모님만큼은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갈 만큼 소중했다. “렐리아. 나도 그대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가 귓가를 두드렸다. 은은한 달빛을 등져 그 윤곽이 더 뚜렷해진 얼굴이 다가왔다. 렐리아는 슬며시 시선을 내려 제 옆구리를 지나 등허리를 두른 그의 팔뚝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팔뚝을 따라 올라간 시선이 어깨를 거쳐 곧은 선을 그리는 턱에 머물렀다. 그 아래에선 목 울대뼈가 서서히 움직였다. “이제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대가 어느 날 홀연히 내게서 떠나려 할까봐 줄곧 두려웠었습니다.” “…….” “나만이 착각 속에 얽매여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대와 내 마음의 무게가 다른데 정작 그대마음은 헤아리지 못하는 게 아닐지. 내 고백을 받아준 것도 사실은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탓에 얼떨결에 받아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대를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내가 너무 서두르고 있는 게 아닌지 늘 불안했습니다.” “…그런 생각도 했었어?” 렐리아는 설핏 인상을 쓰며 물었다. 어쩐지 사귄지 한 달이 다 되어가도 키스 이상으로는 진도가 안 나가더라 싶었다. 자신이 마치 값비싼 유리공예품이 된 것만 같았다. 작은 흠집이라도 날까 조심스럽게 다뤄주는 이 남자 때문에 말이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누가 보면 연애가 아니라 마피아하고 있는 줄 알겠네.” “마피아는 또 뭡니까.” “그런 거 있어. 하는 순간 다들 구라쟁이가 되는 교묘한 심리게임.” “…구라쟁이 말입니까.” 그가 얕은 웃음소리를 흘리자 렐리아는 큼, 하고 한번 목을 가다듬었다. “암튼 앞으론 그런 생각 마. 나 사람진심 가지고 노는 어장관리녀 아니거든? 그럴 능력도 없으니까 안심하라고.” 역시 바람은 절대 피면 안 되겠다고 렐리아는 다시금 다짐해야만 했다. 블리어는 그저 렐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느릿하게 눈길이 닿는 곳곳마다 마치 봄바람이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다정해서 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두 뺨 위에 작은 열이 올랐다. “혹시 블리어, 어장관리남아냐? 이거 수상한데.” 애써 간지러운 분위기에서 벗어나보려 던진 헛소리에도 블리어는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 마치 그의 눈은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더 오랫동안 자세히 담을 수 있을지에 대해 연구 중인 것만 같았다. 참으로 골몰히 집중해오는 깊은 녹안에 렐리아는 더 입을 나불거렸다. “봐봐, 선수잖아. 이런 것도 다 선수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뒷머리는 물론 안면이 다 근지러웠다. 긁고 싶을 만큼의 설레는 근질거림을 생애 처음으로 맛보는 동안 렐리아는 눈을 애꿎은 곳에 두느라 바빴다. 한번 침대 모서리를 봤다가 천장을 봤다가 슬쩍 눈앞에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안심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제 말이 웃겨서인지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가 제 이마에 입술을 묻을 것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렐리아가 슬쩍 눈을 감자 블리어의 휘어진 입술이 가볍게 이마에 닿았다. 블리어는 자신이 안고 있는 그녀의 체온과 희미한 맥박을 느꼈다. 가끔씩 그날의 잔혹한 일들이 어쩌다 꾼 기나긴 악몽이 아닌지 생각하곤 했다. 연약한 비누향기가 느껴지는 이 가녀린 몸으로 그런 상상하고도 싶지 않은 고통을 견뎌냈을 거라 여기면 늘 꿈으로 여기고만 싶었다. 그녀가 가져다준 이 평화 속에 젖어서 말이다. 블리어는 팔에 힘주어 그녀의 따스하고 여린 등 뒤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이젠 다시는 말없이 떠나지 마십시오.” “이젠…?” 그의 말에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고 렐리아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혹시 지금 전 여친이랑 나랑 헷갈린 거야?” 부리부리한 눈길에 블리어는 웃음소리를 죽여야만 했다. 이에 렐리아가 더 수상하다며 그의 단단한 복부를 주먹으로 툭툭 두들겨댔다. 어서 순순히 불라는 재촉에 못 이겨 블리어는 그녀를 더 깊이 끌어안고 해명했다. “오래전부터 어떤 꿈에 시달렸었습니다. 그대가 말없이 사라지는, 그러곤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 그런 끔찍한 꿈 말입니다.” “내가 왜 떠나.” 그런 거였냐며 렐리아는 머쓱하게 그의 복부에 갖다 댄 양주먹을 거두었다. 대신 어색하게 두 팔을 뻗어 슬쩍 넓은 등을 안아주었다. “나 절대 안 떠나.” ‘떠나는 방법도 모른다지만…’ 0171 / 0172 ---------------------------------------------- 새 퀘스트가 시작되었습니다 언니한테서 모든 얘기를 듣게 된 날은 이곳에 온지 약 세 달을 넘긴 날이었다. 사실은 그녀가 공략대상 중 하나인 드래곤이라는 것과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이곳이 진짜 현실세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이아나의 사근사근한 설명에 렐리아는 그동안 미심쩍었던 부분이 모두 해소되었다. 머릿속에선 마침내 퍼즐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 하나의 그림을 완성시켰으나 그녀의 가슴은 뒤죽박죽 섞인 감정들로 혼란스러웠다. 다행히도 평온하고 차분한 분위기속에서 얘기를 마칠 수 있었다.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에 렐리아는 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곧바로 마부에게 공작저가 아닌 잠시 수도외곽 쪽을 한번 빙 돌아달라고 부탁했다. 렐리아는 달리는 마차 안에 혼자 앉아 해가 지는 창밖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게임세계라고 여겼던 이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녀가 생각해도 순조로웠다. 죄책감도, 혐오감도, 거부감도 없었다. 그녀가 이 평화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데에 방해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평생 부모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만이 가슴에 사무쳐올 뿐이었다. 한동안 궁상맞게 창가에 앉아 눈물을 닦아내다가 렐리아는 문득 블리어가 생각했다. 블리어가 게임캐릭터가 아닌 인간이라고 했다. 그 사실에 알 수 없는 큰 감격과 기쁨이 벅차올랐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아서 도무지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가 보고 싶다. 두 시간 넘게 천천히 달리는 마차 안에 있다가 렐리아는 마부에게 이제 그만 공작저로 돌아가 달라고 말했다.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깜깜하게 해가 저문 후였다. 렐리아는 마차에서 내려서자마자 저택입구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블리어를 가장먼저 볼 수 있었다.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초조한 기색이 어렸던 블리어의 얼굴에 순간 안도감이 올라오자 렐리아는 높은 구두굽도 개의치 않고 그에게로 빠르게 뛰어갔다. “블리어…!” 계단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맞이하는 블리어에게 안긴 채 렐리아는 숨도 고르지 않고 말했다. “나 할 얘기가 있어. 아주 중요한 얘기야.” “…알겠습니다.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블리어는 그녀의 얼굴을 세심히 살피다가 나긋하게 얘기해주었다. 급히 렐리아의 방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렐리아는 잠시 혼란스런 마음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블리어가 이 사실을 받아들여줄지 알 수 없었다. 속으로는 허무맹랑한 얘기로 치부하고 겉으로만 받아들이는 척 한다면?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렐리아는 조금 불안했다. 그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으면 어쩌지 하다가 문득 블리어의 허리춤에 걸린 장검에 시선이 갔다. 렐리아는 서있는 그에게로 다가갔다. “렐리아. 일단은 앉아서 얘기를…, 지금 뭐합니까.” 그녀의 손이 빠르게 검 손잡이를 쥐었으나 미처 검을 다 뽑기도 전에 블리어의 손에 붙잡혔다. 제지하는 그의 눈길과 손을 차마 내칠 수가 없었으나 렐리아도 순순히 검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이거 잠깐만 빌려줘.” “…….” “제발, 허튼 짓하려는 거 아냐.” 렐리아는 그에게 자신이 이 세계 사람이 아니며, 평범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직접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검으로 심장이나 목 같은 데를 찔러도 자신은 죽지 않고 검이 망가질 것이다. 그야 자신의 몸은 현실에 구애받지 않는 게임캐릭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블리어는 검을 넘겨주지 않았다. 렐리아가 강한 답답함을 느끼고 인상을 찌푸릴 때였다. “사실 다 알고 있습니다.” “……뭐?” 뭘 다 알고 있는데? 하고 떨떠름하게 묻기도 전에 그가 힘을 주지 않고 제 손을 검 손잡이에서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저 꼭 끌어안아주는 그의 행동에 렐리아는 잠시 멍하니 입을 닫아야만 했다. 이러니 마치 다 알고서 행동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렐리아. 그대에게는 이제까지 얘기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그대가 혼란해 할까봐 차마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소리야?” 블리어는 잠시 무거운 침묵을 지켰다. 선뜻 내뱉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받아들이려할지, 그전에 믿어주기나 할지 하는 회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렐리아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지만 그 사실을 두 사람 다 서로 몰랐다. "다 알고 있었습니다." 힘겹게 입술을 열자 자연스레 그의 눈시울이 뜨거워져만 갔다. "그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도, 이 세계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두고 온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한다는 것도……모두 다 알고 있었습니다.“ "……." “예전에 얘기했던 그 첫사랑이었다던 여인이 바로 그댑니다. …그대가 내 첫사랑이었습니다.” 렐리아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이아나에게서 모든 얘기를 들었을 때보다도 더 큰 충격이 온몸을 강타하는 것만 같았다. 그를 골치 아프게 했다던 그 여자가, 둘도 없이 친해졌다던 그 여자가, 계단에서 함께 구르고, 그의 첫사랑이었다던 그 여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농담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이제까지 그의 미심쩍었던 말과 행동 때문이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그였다.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생일도, 음식 취향도, 생활 패턴도, 누구든 안 좋게 오해할만한 짓을 해도 그만은 항상 자신을 이해해주었었다. “…그대가 오기 전, 그 오래전부터 나는 그대를 사랑했었습니다.” 오랫동안 삭혀온 습한 울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블리어는 굳건히 참아내고 있었다. 속은 더할 나위 없이 뜨거워지는데 반해 그의 안색은 서리 내린 듯 창백했다. 그는 깊숙한 슬픔을 짓누르는 대신 어금니를 악물었다. “우리의 아이도 있었습니다. 비록 태어나진 못했으나…….”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 블리어의 입술 끝이 잘게 떨려왔다. 그는 숨통이 억눌릴 만큼 더 세게 렐리아의 몸을 꽉 안았다. 덕분에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으나 렐리아는 그가 눈물로 진실을 호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마침내 다다른 사람처럼 그 침착한 목소리가 무참히 갈라지고 떨렸으니 말이다. “…그대는 여기서 두 번째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그대가 살아있던 때로, 이곳에 처음 왔을 때로 다시 시간을 되돌린 겁니다.” 그것이 가능하냐고 렐리아는 차마 묻질 못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의 슬픔에 전염된 것처럼 가슴이 지끈거려왔다. 그동안 블리어의 흐릿해져가는 시야 속에 렐리아의 얼굴이 들어왔으나 지금의 그녀가 아닌 오래전의 그녀가 보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날의 잔인한 기억을 그렸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속에서 그녀가 작게 웃었다. 붉게 충혈 되어있는 푸른 눈동자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사랑해.’ 그 짧은 마지막인사를 뒤로하고 그렇게 돌아오지 못했었다. 억눌린 숨을 내쉬지 못할 만큼 블리어는 경련하는 가슴이 아팠다. '…왜 그랬습니까. 예전이었다면 그리 탓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의 죽음이 헛되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희생했기에 지금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현재의 그녀를 만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되돌아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필연으로 묶인 연장선이었다. 과거의 그녀가 있었기에 자신은 그녀를 사랑할 수 있었고, 과거의 자신이 남았기에 지금의 그녀가 저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블리어는 차마 이 현실이 원망스럽고 괴로워 이제까지 살아갈 희망조차 없었을 것이다. 렐리아 하나만을 위해 그는 살아있었다. "애초에 그대를 탓하려고 해도……그대는 이미 내 곁을 떠나간 후였습니다.” 오래전 그녀를 떠나보냈을 때의 서글픔과 통한, 가슴 먹먹했던 감정들이 다시금 밀려들어왔다. 블리어는 그때처럼 가슴으로 눈물을 삼켰다. 속에서부터 억눌린 눈물은 더 이상 눈가를 적시지 않았다. “……이 얘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그대가 그저 내 곁에만 있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족합니다.” “…블리어.” “사랑합니다.” 애틋한 이마, 뺨, 콧등, 입술, 그리고 그 온기. 블리어는 하나하나 순서대로 입을 맞춰주며 그녀에게 사랑한다 계속해서 속삭였다. 평생 해주어도 모자랄 그 벅찬 말을 아로새겨주었다. "렐리아, 사랑합니다." 렐리아는 올라오려는 눈물을 그처럼 삼켜내었다. 왠지 모르게 입술이 떨렸으나 아주 살며시 입가를 끌어올렸다. “이제까지 기다려줘서 고마워.” 기억하지는 못했다. 이전의 블리어와 그 모든 일들을 기억 못한다고는 해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마치 기억하고 있다는 듯이 심장이 절절하게 아파왔으니 말이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를 깊이 당기며 마주보았다. 몇 년 동안 헤매어왔던 눈길이 이제야 제대로 서로를 확인하고 마주한 기분이었다. '블리어가 기억하는 이전의 나도 이런 기분이었겠지.' 렐리아는 입속말을 삼키는 대신 팔을 뻗어 그의 등을 꽉 안았다. 그가 하염없이 기다려왔을 다른 시간 속 자신의 맥박과 온기를 전해주듯이. 자신이 현재라는 시간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알려주듯이. “사랑해.” 벅차고도 벅찬 이 한마디를 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完 마지막 인사였던 '사랑해'가 시작의 인사가 되었네요. 이제까지 이 부부의 긴 사랑이야기를 지켜봐주신 분들께 완결의 영광을 바칩니다ㅎㅎ! 소중하고 애정하고 감사합니다♡! 0172 / 0172 ---------------------------------------------- 후기+ <작은 선물> 외전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독자님들 ^ㅇ^/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다고 하기엔 날씨가 많이 춥죠...TT? 완결 나면 후기로 뵙겠다고 약속했었는데 호,혹시 기억 하시나욧? ↓ [YES] [NO] ↓ 일단, 140화에서 171화로 늘어났지요 허허.. 놀라지 마세요. 전자책 출간 분량과 맞추기 위해 늘린 것이옵니다. 아쉽게도 새로운 스토리가 포함되어있다거나 그런 건 전혀 아니에요ㅠㅇㅠ ↓ 그 과정에서 후기가 하얗게 변해버렸어요...! ↓ 후기는 되도록 지우고 싶지 않았는데ㅜ (특히 치킨무 등장씬....) 내용이 뒤로 밀려나다보니 후기가 스포가 될 것 같아 지웠습니다... 여러분과의 소통의 흔적은 비록 사라졌지만 코멘 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어 보존하였습니다 b (미라로 만들어버릴 거얏...!) ↓ [퀘스트: 독자님들의 궁금증을 해소시켜라. / 보상: 지혜+20%] ↓ [퀘스트1] Q: 세브로웰 봉인 안 풀리나요? A: 세브로웰은 봉인된 산이 뿌셔뿌셔 되지 않는 이상은......네. 그냥 렐리아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 [퀘스트2] Q: 가브리나는 어떻게 되나요? A: 의외로 가브리나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 기쁩니다! 기뻐요! 가브리나는 이전 기억이 있구요. 공녀 다이아나 몸에 머무르는 건 기력소진해서 충전중입니다. 그리고 이번 생에서도 원래 다이아나는 분홍똥에게 독살 당했기에 가브리나가 한 번 더 살려준 거예요. 국왕 라델리우스와는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이 있었는데용 제 생각에는 이번에는 가브리나가 왕과 완전히 거리를 둘 거 같아요. 전에는 초대왕과 겹쳐보여서 마음이 약해져 진도를 뺐지만...이번에는 넘어가지 않을 것 같네요. 다이아나 몸이기도 하고, 후회될 만한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아요. 적당히 힘 모으고 다이아나의 몸에서 나온다면 아마 마법사 윈을 찾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윈은 가브리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요. 요건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 쓰는 개인적인 망상인데요. 라델리우스: 초대왕의 피가 흘러 얼굴, 성격이 비슷한 초대왕의 후손. 마법사 윈 : 초대왕과 외모, 성격은 전혀 딴판이지만 전생이 초대왕.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독자님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요건 확실치 않는 걸루 ^o< ↓ ☆중요공지☆ 프리미엄 전환일은 다음 주 월요일(11/28)입니다. 정주행하실 분은 서둘러주셔요! ↓ ☆중요공지2☆ 리디북스 이북으로 나올 거예요! 아마도 이번 겨울이 다 가기 전에...나올 것 같습니다. 날짜가 확정되면 그때 다시 공지드릴게요! ↓ ☆중요하진 않지만 말씀드리고 싶어서...공지☆ 이북 표지가 참말로 예쁩니다, 렐리아와 블리어가 나오는데...블리어가 참 예쁩니다TdT 턱선이 아주그냥......//// ↓ 긴 후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ㅇ^/ 아직 좀 이르지만 2016년 올해 마무리 잘 하시고,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하시는 일 모두 잘 되시고, 구냥 하루하루가 사랑과 행복으로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릴게욧 아멘‘♡’/ -2016년 어느 11월에 세싹 올림 ============================ 작품 후기 ============================ +) <아벨을 위하여> 이북이 나왔습니다 ㅠㅠ미리 공지드리지 못해 죄송하네요 워낙 조용하게...나왔지요...ㅠ 리디북스와 네이버 이북에 있사옵니다! +) 소장본 계획은 아쉽게도 없습니다..8ㅁ8 언젠간..기회가 된다면...꼭 종이책을 가지고 싶네요... +) 이북에는 외전이 따로 없습니다 ㅠㅇㅠ 하지만 지금 쓰면 되지요 호호 <작은 선물> “까꿍.” 렐리아는 하얗고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가 떼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솜사탕처럼 녹아 사라질 것만 같은 연약함을 품은 딸아이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렐블리, 렐블리 라고 불렀던 자신과 블리어의 아이는 예쁜 공주님으로 태어났다. 에렐리라는 밝은 이름에 잘 어울리는 자신의 딸은 저만 보면 시도 때도 없이 방긋방긋 웃었다. 딸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곳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렐리아의 눈길은 에렐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렐리. 아빠 왔네?” 누가 왔는지 안 봐도 훤했다. 렐리아는 에렐리에게 방문자의 존재를 알린 후 뒤늦게야 제 곁으로 다가온 블리어를 돌아보았다. “아빠 인사.” “…….” “아빠, 인사 안 해?” “나보고 하라는 거였습니까. …흠. 에렐리 나 왔습니다. 아빠 보고 싶었습니까.” “네네, 오늘도 딱딱하기 그지없는 인사 자알~ 들었습니다. 에렐리, 네 아빠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응?” 이제 막 눈을 떠 똘망똘망한 녹색 눈동자를 빛내는 아이는 그저 멍하니 아빠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곧이어 블리어는 렐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제 품에 안았다. 덩치에 맞지 않게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받치고 토닥거려주다가 곧 고개를 숙여 에렐리의 작은 콧망울에 입을 맞춰주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 블리어는 초콜릿을 끊었는데 다름 아닌 아이와 뽀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른의 작은 입속 균도 아이에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얘길 들은 이후로 항시 입안 상태를 최대한 청결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렐리아는 참 집념의 아빠라고 혀를 내둘렀지만 아이와의 작은 스킨십은 모든 업무스트레스를 날아가게 해주니 그로선 차마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물론 좋은 아버지 이전에 좋은 남편이 되려는 그의 노력이 더 많았는데 렐리아는 그 중 밤 서비스를 최고로 여겼다. 곧 둘째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블리어는 바로 고개를 돌려 고생했을 아내의 입술에 입을 맞춰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하게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은 곧 가지런하게 정리되었다. “쉬십시오. 이제부턴 내가 돌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기 무섭게 에렐리가 작게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아는 렐리아는 다시 아이를 넘겨받고서 한손으로 가슴앞섶을 풀어헤쳤다. 오른쪽 가슴을 꺼내려다 그만 왼쪽가슴도 같이 나왔는데 에렐리는 왼쪽으로 고개를 팩 돌렸다. 이에 렐리아는 안고 있던 에렐리를 가슴에서 살짝 떨어뜨렸다. “에렐리는 반대지. 이 쭈쭈는 아빠 거예요.” “지금 애 앞에서 무슨 소립니까.” 미세하게 미간을 접은 블리어는 상기된 얼굴을 숨기듯 흠, 하고 헛기침을 터뜨렸다. -------------------------------------------------- +) 안타깝게도 가브리나의 외전은 없..사옵니다 ㅠㅇㅠ 그리고 저를 충격에 빠뜨린 어느 분의 질문, 두둔. '윈은 win인 건가요?? 마법에 성공하니까??'ㅋㅋㅋㅋㅋㅋㅋㅋ독자님의_흔한_추리력_txt. 멋있네요. 윈이라서 윈이라니.....! 그럼 이걸로 가시죠!(?) +) 차기작이 이미 나왔습니다 ㅋㅋㅋ잘생긴 다섯남자가 나오는 역하렘입니다 라고 낚시를 해볼까 싶었으나 왠지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같아 병맛개그라고 솔직하게 밝힙니다. 근데 잘생긴 건 사실이에요 ㅎㅎ <로판의 정석 기본편>이여요/ 혹시 취향 맞으시다면 같이 달려봅시다..하핫...! ++) 완결났는데 투베에 보내주시다니 넘 감격스럽네요 ㅠㅠ 거기다 후원쿠폰까지....사화예님, 자겸자겸님, aa2012aa님, oblivius님, 혜윰00님 모두 감사합니다ToT 세싹: 애정에 보답해드리고 싶은데 드릴것도 없구...(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며) 독자님: 괜찮아요...그럼 다음에 봬요, 세싹씨. 세싹: (멀어져가는 독자님의 등을 바라보다가, 급히 뛰어가며) 저기...! 독자님! 독자님: ....네? 세싹: 이거 놓고 가셨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