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 죽음 약간 쌀쌀한 날씨에 간간이 지나가는 차 소리를 제외한다면 너무나도 적막 하여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밤거리였다. 나는 가로등에 비쳐 길게 늘어지는 나의 그림자를 친구 삼아 느긋하게 길을 걷고 있었다. 문득 손목의 시계를 보고 시간이 벌써 2시가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 하기 시작했다. 독서실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이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한 건 정 말 오랜만인 것 같다. 수능시험이 가까워 오니까 나도 의외로 중압감을 느 끼는 걸까? 아무리 내 성적이 원하는 곳에 충분히 갈 수 있을 정도로 높다 고는 해도 이제까지 내가 해온 노력의 모든 것이 단 한번의 시험에서 결정 되는 것이니 말이다. 나는 장장 10년하고도 2년 동안의 학교생활 중에서 한번도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기에 솔직히 말 해서 나의 지망학과인 S대 법학과에도 무난히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 각하고 있다. 혹시나 실전에서 실수를 해서 성적이 약간 낮게 나오는 일이 있다해도 S대에는 면접과 논술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에 더욱 마음 을 놓을 수 있었다. 나의 특기 중의 특기가 바로 청산유수 같은 말발이기 때문이다. 그 말발 때문에 면접과 논술에서 나를 따를 자가 없음은 자타가 공인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꼭 S대 법학과를 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냥 사회적으로 가장 인 정받는 학과이고 그리고 그 학과를 나옴으로서 택할 직업, 그러니까 판사, 변호사 같은 것들이 사회적 위치도 높고 돈을 많이 버는 일이기에 그것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나에게도 예전부터 하고싶은 일이 있긴 하다. 하지만 굳이 현실적인 이득 을 전부 포기하면서까지 나의 꿈을 이루고 싶은 마음은 없다. 자신의 꿈을 위해 달려가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멋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는 이런 쪽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이기에 모든 이득을 버리고 꿈을 쫓겠다는 생 각을 해본 적은 거의 없다. 게다가 나의 꿈이 일반인이 보았을 때 그렇게 멋진 꿈이라 생각할만한 것도 못되고 말이다. 어쨌든 현재의 나는 학생의 신분으로서는 가장 편리한 재능을 가졌다고 할 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있지만 솔직히 학교라는 작은 세계에 서 살아가는 학생의 행복엔 성적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잖아.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게 우리 나라 학생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냐고. 그러나 내가 뛰어난 건 두뇌만이 아니다. 스포츠, 음악, 미술 내가 못하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얼굴만 좀 잘 생겼 으면 그야말로 인류가 따라야 할 완벽한 인간상이라 할 수 있을 텐데!!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드디어 나에게도 왕자병의 증세 가?! 어쨌든 나는 정말 축복 받은 인간에 속할 것이다. 집 앞에 도착한 나는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내들었다. 2시를 훨씬 넘긴 시 각이니 부모님들은 전부 자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문을 열었을 때 그 예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날카 로운 남자와 여자의 고함소리가 나의 귀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으휴, 또 시작이구나." 신은 공평하다고 누가 말했었던가. 겉으로 보면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행 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도 말못할...까지는 아니지 만 나름대로의 고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하루가 멀다하고 눈이 마주 칠 때마다 원수 보듯 싸우는 저 부모님들이었다. 굳이 말하자면 난 꽤나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나의 부모님들은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싸움을 했고, 난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도 괜히 싸움 을 하는 그들이 무서워서 거실에 홀로 숨은 채 눈물로 밤을 지새워야 했 다. 초등학생이 되자 그들은 별거를 시작했고 난 아버지와 함께 살게됐다. 아버지는 항상 일을 하러 회사에 나가셨기 때문에 학교를 다녀와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저녁 늦게까지 언제나 혼자 이 썰렁한 집을 지킬 수밖에 없 었다. 그러다가 내가 중학교에 들어오자 갑자기 부모님들은 다시 함께 살기 시작 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다른 방에서 잠을 자는 건 물론이거니와 서로 말도 나누지 않았고, 어쩌다 얼굴이라도 마주치게 되면 저 모양으로 싸움질을 해댔다. 아직까지 정식으로 이혼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집안 분위기는 언제나 살벌했다. 싸움을 하고 난 뒤의 부모님들은 항상 나 때문에 이렇게 함께 살고 있는 것뿐이라고 신세타령을 하곤 했다. 아직까지 이혼을 안하고 있는 것도 후 일 내가 장가갈 때 결손가정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봐 참고 있는 거라나 어쩐다나 라는 소리까지 하면서 말이다. 내가 상처받으면 어쩌려고 아직 중학생밖에 안된 애한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집이 콩가루 집안이라는 걸 애 앞에서 그렇게 적나라하게 드러 낼 건 또 뭐냐고! 객관적으로 꽤 불행한 유년시절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건만 나는 잘도 삐뚤어지지 않고 누구나 인정할만한 바른 생활 청소년(?)으로 컸다. 어릴 땐 저들이 저렇게 싸우는 게 정말이지 싫고 못마땅했지만,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부모님도 인간인데 싸울 수도 있는 거 아니겠냐고 생각하고 이해해 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사이가 좋은 부모님 밑에서 컸 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 불만이 쌓이는 건 어쩔 수 없다. 난 조용히 나의 방으로 들어가서 씻지도 않고 잠을 청했다. 괜히 기분도 더럽기도 하고 내일 아침도 씻을 걸 굳이 지금 또 씻을 필요 있냐고 생각 하면서... 오늘은 해가 하늘에 떠 있는데도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수능 시험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기 때문에 학교 선생님들이 원하는 사람은 야간 자율학습을 하지 않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차 피 이틀밖에 남지 않은 거 편안하게 쉬자고 생각하며 큰마음 먹고 거금 600원을 더 투자해서 좌석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따뜻한 버스 안에서 창틀에 팔을 고고 바깥 풍경을 느긋이 바라보고 있노라니 몸이 노 곤해져 왔다. "빵집!" 노곤함에 살짝 졸음에 빠져들려 하는데 갑자기 앞에서 작고 앙증맞은 목소 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번뜩 뜨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꺄아...안경 집!" 내가 앉은 좌석 앞쪽에는 2,3살쯤 되어 보이는 꼬맹이가 의자에서 폴짝폴 짝 뛰며 귀여운 탄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창을 손가락질하며 말하는걸 보 니 창밖에 보이는 간판을 보고 저러는 모양이었다. 크으!! 나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구나!!! 나는 졸면서도 애들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는 이 귀에 스스로 감탄하며 의 자 위로 손을 내밀어 그 꼬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나의 손길을 느 꼈는지 꼬마는 창에서 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똘망똘망한 눈동 자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꼬마는 금세 방긋이 웃음을 지었다. 헉, 살인적인 미소로다! "안녕? 이름이 뭐니? 이 오빠한테 이름을 가르쳐 주지 않을래?" "짠녕이." "이름이 찬영이니?" "헤..." 찬영이라는 이름의 꼬맹이는 자그마한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나의 손을 꼭 쥐고 방긋방긋 웃었다.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손을 쏙 빼내서 찬영이의 주위로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찬영아, 이거 잡아 봐라?" 아니나다를까 찬영이는 꺄꺄거리며 나의 손을 잡기 위해 폴짝폴짝 뛰기 시 작했다. "아으, 귀여워라!! 누나. 얘 몇 살이에요?" 나는 찬영이 옆에 앉아 그 모습을 보고 웃고 있는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 다. 솔직히 아줌마라고 불러주고 싶었지만 이 나이쯤 되는 여자들은 누나 라고 불러주는 것이 훨씬 좋아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 행동이었 다. "올해로 태어난 지 3년이 됐지. 그런데 너, 저렇게 혀 짧은 발음을 하는데 도 잘도 이름을 찬영이라는 걸 알아들었구나?" "그 정도야 기본이죠. 찬영아~ 찬영아~ 잡아봐라~ 우우우... 얘 너무 귀여워 요!" 사실 내가 되고 싶은 일이 유치원 선생이나 초등학교 선생이었다는 게 아 니겠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어린아이거든. 현실적 이해 득실을 감안해 그 꿈은 포기하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나의 열정이 식은 건 아니란 말씀이야. 그건 그렇고 얘 정말 귀엽네!! 찬영이는 내 손을 잡으려고 조그마한 양손을 이리저리 휘젓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손으로 찬영이의 뺨을 찍 눌러서 부비부비 문질러 주었다. 덕분에 약간 이상하면서도 앙증맞은 목소리가 찬영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뀨에...." "아하하하!! 학생. 애들하고 정말 잘 노네?" "너무 귀엽잖아요. 찬영이 한 번 안아봐도 돼요?" "우후후... 자. 여기." 누나는 자기 딸을 보고 계속 귀엽다고 탄성을 지르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찬영이를 안아서 내 쪽으로 넘겨주었다. "에구. 찬영아. 오빠랑 놀래?" "꺄아꺄아~~" 내가 안아서 위로 높게 들어주자 찬영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꺄르르 웃음 소리를 냈다. "누나!! 저 찬영이를 들고 튀어버리고 싶은데 어쩌죠?" "어머. 그러면 곤란해." 내가 찬영이를 보며 소리치자 그 누나는 피식 웃었다. 나는 비행기를 태워 주고 있던 찬영이를 내려서 나의 품에 꼭 안고는 보드라운 머리카락을 살 살 쓰다듬으면서 질문했다. "찬영아. 오빠하고 같이 도망가자." "응!" "정말? 나중에 크면 오빠랑 결혼할래?" "응!!" 찬영이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함박 웃음을 지었다. "보세요! 찬영이가 저한테 오겠다고 그러잖아요. 아무리 아기라고는 하나 그렇게 본인의 의사를 무시하는 건 좋지 못한 행위라고요." "어머, 찬영아. 너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그랬잖니?" "이해를 못 하시는군요. 찬영이는 드디어 참된 이성에 눈을 뜬 거라고요." "아하하하! 너도 참, 입심도 좋구나!" 나는 한참동안 찬영이와 그 누나랑 장난을 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몇 정거 장 못 가 내릴 때가 됐는지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찬영이를 그 누나에게 넘겨주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안녕~ 찬영이~~ 빠이빠이 해야지." "빠이빠이~" 찬영이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내가 하는 걸 따라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 나 누나가 내리는 문 쪽으로 걸어가자 곧 발버둥을 쳤다. "우에...!! 시러!!" "어머, 찬영아! 아하... 얘가 벌써 너한테 정이 들었나봐." "더 놀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찬영아. 착하지~ 엄마말씀 잘 들어야 착한 아이지." 나는 내리는 문까지 같이 따라가서 찬영이의 배웅을 했다. 찬영이는 나랑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웠는지 계속 내 쪽으로 오려고 발버둥을 쳤다. 나도 아쉬웠지만 안타깝게도 내 아이가 아닌 관계로(?) 그냥 손을 흔들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몇 정거장 후 버스가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하여 나도 그곳에서 내렸다. 오랜만에 만난 귀여운 아이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괜히 철 지난 유행 가를 흥얼거리며 집을 향해 가볍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 또 그런 애들을 대할 기회가 생길까나. 나도 얼른 애를 하나 낳던지 해야지. 내가 동생을 가지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이니 말이... "억!" 짧은 비명과 함께 나는 옆의 벽을 잡고 겨우 중심을 잡았다. 잠시 딴 생각 을 하며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걷다가 발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걸 했던 것이다. "에이씨!! 저 공사장은 아직까지 저 상태인가? 빨리 좀 끝내지." 나는 길 한쪽에 잔뜩 쌓여 있는 철근들을 발로 툭툭 차며 투덜거렸다. 나 의 앞에는 작은 아파트 단지를 재개발하던 중에 공사를 하던 회사가 부도 가 나는 바람에 얼마 전부터 방치되고 있는 공사장이 있었는데 이 철근들 은 그 공사장에서 쓰던 것이었다. 공사가 끝나거나 말거나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여기저기 널린 공사자 재들은 다 치우고 가야할거 아냐. 괜스레 한참동안 공사장을 째린 다음에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 앞에 도착 한 나는 열쇠로 문을 따고 한 발자국 집안으로 들어섰다. 와장창!! 그러나 그 순간 뭔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 와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들려오는 익숙한 고함소 리에 나는 한숨을 쉬며 집안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이 집구석이 다 그렇지. 한동안 잠잠하다 했더니 또 싸우는 모양이 군. 그러나 두 번째 현관문을 연 나는 또 다시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엉망이 된 집안 꼴을 보고야 말았기 때문이다. 뒤엎어진 식탁과 지저분하게 널브 러진 음식. 깨어진 장식장과 덕분에 땅 바닥에 가득 깔린 유리 조각들. 집 안의 물건들은 텔레비전부터 시작해서 멀쩡한 것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순간, 나는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번도 부모님에게 소리를 질러본 적이 없던 모범생 중의 모범생인 나였지 만 이때만큼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지금 바쁘다!! 나가있어!!" 아버지가 날 째리며 말했다. 아니, 뭘 잘했다고 날 째리느냔 말이야!! "뭐? 지금 집이 이게 뭐냐고!!" "나가 있어라!! 엄마 아빠 지금 싸우는 거 안보이니?" 머리가 산발이 된 어머니도 나를 보고 눈을 부라렸다. 어머니가 날 보고 눈을 부라리다니, 얼마나 화가 났으면 그랬을까....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지 금쯤 대성인으로 추앙 받으며 TV에 출현하고 있었으리라. "뭐 이런 집구석이 다 있어? 나 내일 모레가 수능시험이야! 알아? 하나밖 에 없는 아들이 수능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 디 못해줄망정 어디서 싸움질이야, 싸움질이~~!!! 둘 다 나가! 아니, 내가 나가준다!!" 정말로 열 받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내가 아무리 집구석과는 관계없이 건전하게 커왔다고는 하지만 아들이 일생을 건 사투(?)를 치르기 직전인데 저렇게 나오다니. 싸우고 싶어도 나를 위해 참았어야 할거 아니야. 참는 건 둘째 치고라도, 째려? 눈을 부라려? 이런 빌어먹을!! 보통 수능을 앞둔 아들을 가진 부모들은 그 아들이 조금이라도 기분 나쁜 일이라도 생길까 염려하며 온갖 비위를 맞춰주는 게 보통이 아니냐고. 아 니, 비위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따뜻한 집안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랑 도란도란 연속극 여자천하를 보는 정도로... 쿨럭! 그러고 보니 여자천 하!!! 시파! 정말 열 받았다! 생방송으로 보려고 친구 놈한테 녹화해놓으라 고 말 안 했단 말이다! 이제 이 집구석은 끝이야!! 나 혼자 잘 쳐 먹고 잘 살고 말 테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정신없이 휘적휘적 걸어나갔다. 한참을 씩씩거리면서 걸어가다가 문득 조금 전에 보았던 공사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하루정도 외박하고 들어가면 그 부모들도 반성하지 않을까. 가출을 할 생각은 없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거 안 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하루동안 연락 없이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부모님들을 골탕먹이기로 했다. 실상 이제까지 부모님들에게 난 엄 청난 모범생이었므로 단 하루의 외박이라도 분명 큰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런 콩가루 집안에서 이런 모범생이 나올 수 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 무나 대단하단 말이야. 인간이 이렇게 착하고 순진해도 되는 거냐고. "좋았어! 저 공사장에서 하룻밤 버티는 거야!!" 나는 주먹을 쥐어 하늘을 향해 치켜올리며 소리쳤다. 친구 집으로 가는 것도 생각해보았지만, 이미 나의 친구들에 대해서도 좔 좔 꿰고 있는 부모님이 그들에게 전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서실도 얼마 전에 끊어버려서 딱히 밤을 샐 곳이 없다는 생각에 -사실, 독서실도 부모님이 충분히 나를 찾아낼 수 있으니 후보 자격미달이다- 나는 그 공사장으로 들어가기로 마 음먹었다. 땅바닥이나 공원 벤치에서 자는 것 보단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일단 공사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야식으로 쓸 빵이랑 우유를 하 나씩 샀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중 누가 날 알아보고 -내가 원래 우리 동 네에서 좀 유명하다. 매일 싸움질하는 부모 밑에서도 건전하게 큰 착한 녀 석으로 말이다.- 부모님께 알릴까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잽싸게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쪽으로 들어갔다. 시간도 많다는 생각에 괜히 아파트 건물 윗층까지 하나하나 전부 들어가 보았다. 퀴퀴한 시멘트 냄새가 풍겼다. 거의 다 완성되어있었는데, 부도가 나서 아깝게 버려져 있는 것이다. 장판 좀 깔고 청소만 하면 그냥 살아도 되겠구만. 아 수도관도 연결하고, 저기쯤엔 목욕탕에 거울도 달아야겠네. 싱크대도 제대로 달아야겠고 전기도 넣고...또..... "하아... 수능이 이틀 후인데 이게 무슨 짓이람."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수능시험 망치면 나만 손해지 않은 가. 부모님들은 나중에 얼마든지 괴롭혀줄 수 있는데 말이야. 아, 젠장!! 나 바보 아냐? "그래도 기껏 큰소리치며 나왔는데 이제 와서 되돌아간다니... 내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돌아가지 않겠다! 원래 오늘은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잖아. 그 래! 초지일관이라 하지 않았던가 버티는 거야!! 우웃... 근데 쪼끔... 춥네." 수능시험 볼 때가 되면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다더니 올해도 어느새 겨울이 다가왔는지 상당히 쌀쌀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굴하지 않고 방 하나를 골라잡고 그곳에 앉아 버티기로 마음먹었다. 창문 밖으로 해가 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앉아 창문 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젠장!!" 난 덜덜 떨리는 턱을 양손으로 감싸고 벌떡 일어났다. 하필 나는 오늘따라 옷을 가볍게 입고 있었다. 게다가 가만히 유리창문을 보고 있노라니 왠지 문틈 사이로 바람이 술술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 들어 더욱 추웠다. 난방도 안 되는 이런 곳에서 이렇게 가벼운 옷을 입고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서 나올 때 옷을 몇 개 더 껴입고 나오는 건데...!!"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1층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전부 포기 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문득 지하실 쪽에 뭔가 잔뜩 쌓여 있는 물건 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약간 흥분해서 그 쪽으로 뛰어 내려갔다. "역시나!"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지하실 계단 한 구석에 모포들이 잔뜩 쌓여있었던 것이다. 뭔가를 옮기는데 썼던 것인지 쓰레기처럼 한군데 모여있었는데 먼 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하고 냄새도 좀 나는 것 같았지만 이불 대용으로 덮 기에는 충분할 것 같았다. "오기다." 그렇다. 오기였다. 정말 그 집구석에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매일같이 고분고분하고 착하게 살았더니 사람을 이렇게 물 먹이다니! 나도 성깔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다. 절대 그냥은 넘어가지 않으리라! 겨울밤(?) 에 범생이가 외박을 하다. 음, 좀 약하다. 더 강력하게 한 일주일 할까? ......내가 고생이니 그만두자. 분명 그 정도로도 부모님들은 맘을 졸일 것이 다. 내가 누군가? 우리 부모님에게 한 범생하지 않는가? 그래. 하루만, 하 루만 여기서 버티자!! 나는 불끈 주먹을 쥐고 다시 한번 결의했다. 그리고 눈앞의 반쯤 열린 지 하실의 문을 조금 더 열어보았다. 끼이... 기름칠을 제대로 안 했는지 철문은 그렇게 부드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 나 복수심을 원동력으로 불타오르는 불굴의 의지로 문을 열고 그 안 쪽을 살펴보았다. 안에도 역시 여기저기에 지저분한 모포가 잔뜩 있었다. 모포들 을 보노라니 깨끗하긴 해도 아무 것도 없는 썰렁한 윗 층보다는 이곳에 있 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모포를 들고 위로 올라가 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도 한 몫을 했다. 나는 깨끗한 모포를 고르고 골라 그것을 들고 지하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 쪽이 상당히 어두운 관계로 빛이 어느 정도 들어오도록 문을 조금 열어두 고 한쪽 구석에 걸어갔다. 그리고 옆에 책가방을 벗어둔 다음 모포를 둘둘 말고 주저앉았다. 가만히 모포를 덮고 있으니 몸이 조금씩 따뜻해져 왔다. 추위에 잔뜩 움츠 렸던 몸이 따뜻해지자 점점 긴장이 풀리면서 살살 졸음이 밀려왔다. 그렇 게 살짝 졸려고 하는 순간. 휘잉...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과 동시에 나는 잠에서 깨버리고 말았다. 조금 열 어둔 것뿐인데도 그 열려진 문 사이로 간간이 밀려들어오는 바람이 유일하 게 모포에 감싸지지 않은 나의 얼굴에 닿아 -모포가 더러워 도저히 얼굴에 까지 덮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상당히 추웠던 것이다. 나는 잔뜩 웅크린 자세로 한동안 그 문틈을 째려보았다. "이쒸...." 그러나 째린다고 바람이 안 들어올 리가 있겠는가. 나는 자면 어차피 다 똑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좀 어둡더라도 문을 닫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궁 시렁거리면서 모포를 둘둘 감은 채로 종종걸음을 쳐서 문 쪽으로 걸어갔 다. 나는 모포 사이로 손끝만 살짝 빼서 문고리를 당겼다. 그러나 기름칠이 잘 안되어 있어서 그런지 뻑뻑한 문은 한 손의 힘만으로는 끝까지 잘 닫히지 않았다. "이띠... 끼걱거릴 때부터 알아봤어..." 나는 결국 모포를 내려놓고 철문을 약간 열었다가 다시 세차게 닫았다. 쾅! "...우우. 어둡구먼... 그래도 바람이 안 들어와서 좋네, 뭐. 그냥 불 끈 거라 고 생각하자." 나는 손을 더듬으며 모포를 다시 둘둘 말고 저쪽 구석으로 번데기처럼 꾸 물꾸물 기어갔다. 그리고 조금 전처럼 다시 웅크린 자세로 잠을 청했다. 곧 주변은 매우 따뜻해졌고 나는 무척이나 포근함을 느끼며 그대로 깊이 잠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잠을 잔 거지?" 나는 언제나 아침 6시만 되면 바로 잠에서 깨는 버릇이 있었다. 조금 전에 도 그 버릇 때문에 잠깐 잠이 깼었지만 오늘따라 이불 바깥은 무척 쌀쌀했 다. 그리고 때마침 오늘이 수능시험 소집 일이라는 생각이 떠오르자 조금 늦잠을 자기로 하고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왔다가 지금 눈을 뜬것이 다. 그런데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왔지만 이상하게도 아무 것도 보이는 것 이 없었다. "아, 맞다!!" 나는 탁 소리가 나게 이마를 쳤다. 그제야 내가 부모님을 골려주려고 지하 실로 들어와 잠을 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얼마나 잤지? 빨리 학교 갈 준비를 해야겠어." 나는 옆에 던져둔 가방을 들고 벽을 더듬거려 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문 고리를 잡고 힘껏 그것을 밀었다. "...잉?" 나는 문득 문고리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철컥철컥. "이거 왜 이래?" 철컥철컥. 나는 계속 문고리를 돌리면서 문을 밀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문고리가 마치 잠긴 것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뭐야! 왜 안 돌아가는 거야!!" 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애써 빠르게 회전시켰다. 나는 우선 문고리를 손 으로 더듬으며 자세히 관찰했다. "어어? 이거 열쇠구멍이잖아? 왜 열쇠구멍이 이쪽에 있는 거야?" 나는 손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그것이 열쇠구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은 열쇠구멍이 바깥쪽에 있고 잠그는 부분이 안쪽에 있어야 하는데 이상하 게도 이 문은 반대로 돼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돼!! 어떻게 이런...!!" 갑자기 어젯밤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마지막에 문을 닫을 때 뭔가에 걸 린 것처럼 잘 닫기지 않았던 그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저 문이 빡빡해서 부드럽게 닫기지 않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문고리가 잠긴 상태 여서 그랬던 것이었던 걸까!!! 나는 문에 몸을 마구 부딪혀댔다. 그러나 내 어깨만 아플 뿐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틈 사이로 빛도 새어 들어오지 않을 정도면 이 문이 얼마 나 제대로 된 문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쓰벌!!! 뭐야! 어떤 놈이 문을 이렇게 만든거야아~~!!!!" 나는 문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나의 목소 리는 지하실 안을 맴돌 뿐이었다. "젠장! 젠장할!! 나 예비 소집에 가야한단 말이야!! 젠장! 누구 놀리나?! 누 구 없어요? 문 좀 열어봐요!!" 나는 한동안 계속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주먹이 얼얼해질 정도로 문을 친 다음에야 나는 겨우 문을 치는 일을 포기했다. "누가...누가 찾아오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쭈 뼛쭈뼛 몰려오는 불안한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일부러 누가 보지는 않는지 확인까지 하면서 이곳으로 숨어들어 왔다. 게 다가 원래 이곳은 공사가 중지되어 한동안은 아무도 찾아올 일이 없는 장 소였다. 그런데 누가 오는 일이 가능할까? "아, 휴대폰!!" 나는 가방을 마구 뒤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러나 폰을 열어도 빛이 나 오지 않는 것을 보고 신경질이 벌컥 나서 그것을 바닥에 확 내던졌다. 가 만히 생각하니 귀찮다고 그제께 저녁 그것을 충전하지 않고 그냥 잠이 들 었던 것이다. 배터리가 삼일이나 버티고 있을 리가 없었다. "......부서졌나?" 나는 한참동안을 씩씩거리다가 다시 휴대폰을 조용히 집어들어 탁탁 털고 여기저기 만져보았다. 다행히 크게 파손되지는 않은 것 같아서 나는 한숨 을 쉬었다. 휴대폰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괜히 화풀이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 아닌가. ......최신형인데 말이다. "나... 이대로 굶어죽는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인간이 이렇게 썰렁하게 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여긴 서울 한복판이란 말이다. 내가 실종되면 찾으러 오 겠지. 아마 이 주변을 샅샅이 뒤져 분명 나를 찾아낼 것이다. 까짓 거 진짜 이 곳에서 며칠 버티지, 뭐. 나는 가볍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움직임을 멈추자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눈앞의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 방이 깜깜했다. 이 철문은 처음 들어올 때만해도 끼걱거리는 소리를 내면 서 꼭 허술하게 만든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보니 문틈 사이로 빛줄기 하나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고 세심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갑자기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인간은 어두운데 오랫동안 있으면 미쳐 버린다하지 않던가. 아닌게 아니라 이 어둠 속에 계속 가만히 있다가는 진 짜 미쳐버릴지도 모르겠다. 뭔가를 하려고 괜히 손을 더듬거려 보았지만 이렇게 깜깜한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한가지 있긴 있구나. 바로 잠자기. "그래...자자. 자고 일어나면 구조되어 있을 거야. 암, 그렇고 말고." 난 그렇게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다시 모포를 온 몸에 둘둘 말고는 잠을 청 했다. 이러고 있으니 꽤나 따뜻했다. 음...그나마 다행이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몇 번이나 잠들었다가 깼다가 했는지 모르겠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사방의 어둠과 적 막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문득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배고픔도 느끼지 못하다니, 나도 정말 긴장하고 있는 모양이다. 난 손 으로 책가방 속을 더듬어 어젯밤 저녁으로 먹으려고 사왔다가 추위 때문에 그냥 잠들어버려서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빵을 꺼냈다. "그래도 이거라도 있으니 다행이군. 어제 깜빡 잊고 잠들길 잘했어. 최대한 아껴 먹어야겠네. 이게 내 생명 줄인가. 크흑... 이왕이면 커다란 점보 빵으 로 사올걸. 이걸 사는 게 아니었어. 어쩐지 편의점에서 빵을 살 때 점보 빵 이 더 땡기더라니..."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혼자 괜히 중얼 거리며 빵을 조금 뜯어먹었다. "얼마나 지난 거지? 젠장!!! 정말 미쳐버리겠군!!"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난 것인지.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다. 혼자서 노래 를 불러보기도 하고, 내가 이런 꼴이 되게 만든 근원인 부모님 욕을 하기 도 했고, 그러다가 지치면 잠을 청했다. 그러기를 벌써 여섯 차례. 나는 우유와 빵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배가 고픈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난 그것을 먹고 있었다. 빵과 우유가 나 의 마지막 비상식량이라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한 것은 정말 뭔가를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아서였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도 먹을 수는 있었으니까. 먹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 느껴짐으로써 내 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겨우 느낄 수 있었다. 빵도 우유도 다 떨어졌다. 어둠이란 이런 것일까. 무섭다. 답답하다. 끔찍하 다! 빠져나가고 싶다!! 왜 내가 이런 곳에 있어야하지? 난 주먹으로 미친 듯이 문을 두들겨댔다. 반대편에서 몸 사리지 않고 문 쪽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쳐보기도 했다. 발이 마비될 정도로 문을 찼다. 아 니, 부수는 건 무리다. 난 문의 연결부위를 찾아 떼어내려고 손톱으로 긁어 내며 발광을 했다. 그러나 문은 너무나도 견고했다. 황당하고 황당했다. 서 울 한 복판에서 방안에 갇혀 죽게 되다니. 이게 웬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란 말인가. 눈물이 흘렀다. 아니, 아까부터 난 울부짖고 있었다. 어두워서! 너무나 어두 워서!!!! 벽을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고 머리를 찍어댔다. 몽땅 다 때려부수고 싶었 다. 화가 끝까지 나면 뭔가를 때려부수고 싶어진다던데, 이제까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행동이 지금은 절실히 이해가 갔다. 문득 발에 뭔가가 걸렸다. 난 그것을 패대기치고 주먹으로 두들기며 괴성을 질렀다. 내가 미친 듯이 치고 있었던 것은 아마 가방이었던 모양이다. 가방이 열려 있었는지 가방 속의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난 그 중 책을 들었고, 그것을 찢어버리고 싶어서 손에 힘을 주려고 했다. 그 찰나!! 빛이다!!! 빛이었다. 너무나 희미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난 책을 내던지고 재빨리 그 빛을 집어들었다. 그 빛의 정체는 내가 귀찮 아서 손목에 차지 않고 가방 안에 넣어 두었던 시계였다. 손목시계의 숫자 부분과 분침 시침에 붙은 작은 야광 스티커가 약한 빛을 내뿜고 있었던 것 이다. 그 순간의 감동이라니!! 그 시계가 얼마나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당해보 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 것이다. 난 곧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만큼 그 자그마한 빛이 나에게 굉장한 힘 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난 그 작은 빛에 의존해 가방에 들어 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할 일이 없으면 또 발광할 것만 같았다. 뭐든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수능시험이 얼마 남지 않은 나의 가방 속에 든 것은 전부 책들이었다. 공부하려는 의 도에서 가져온 게 아니라 이젠 이 책을 사용할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해 수 능시험이 끝나는 직후 집 근처의 헌 책방에 팔아 버리려고 고이 모셔온 것 이었다. 분침 시침에서 나오는 빛이 밝으면 얼마나 밝았겠는가. 하지만 책에 시계 를 바짝 갔다대면 글자 몇 개 정도는 보였다. 난 그렇게 책을 읽고 외웠다. 마음이 서서히 차분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문득 마음이 가라앉자 수능시험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렇다. 수 능!! 내 일생일대의, 그렇게 까진 아니라고 하더라도 큰 시험이 아닌가. 그 런데 이런 곳에 갇혀서 시험을 못 치게 된 것이다. 젠장맞을!!! 이럴 수가 있나!!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다 고!! "......훗,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미친놈처럼 X랄을 떤 주제에 수능시험 이라니... 그냥 책이나 읽자. 밖으로 나가게 되면 내년에 응시해도 충분해!!" 책을 반쯤 읽었다. 아니 외웠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을 했던 탓이었다. 시 계가 있어서 시간이 5시간 정도 지났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난 지금 굉장히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 무척이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지 금은 그래도 참을만했다. 그러나 언제 여기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마지막 식량을 그따위로 낭비하다니!! 너무나 후회가 됐다. 조금만 빨리 시 계를 발견했었더라면... 머리가 점점 더 식어갔다. 나는 어쩌면... 어쩌면 굶어죽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죽음 중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사'라 하지 않던가. "설마...아니야....누군가...누군가 찾으러 오겠지." 나는 벌써 네권째 책을 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책을 홱 집어던졌다. 목이 말랐다. 너무나. 배고픔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너무나 목이 마르고... 고통스러웠다. 물!! 물이 필요해! 힘이 들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참고있었다. 내가 시계를 발견한 이후로 벌 써 삼일하고도 반나절이 지난 것이다. "왜!! 왜 나를 찾으러 오지 않느냔 말이야!! 왜!!!!!" 이곳에서 두번째로 눈물을 흘렸다. 너무 두려워서. 진짜로 굶어죽을지도 모 른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강타했다. 내가 태어나 언제 이렇게 오래 굶어본 적이 있겠는가. 그것도 이런 칠흑과 같은 어둠 속에서. 그러다가 갑자기 약하게 소변이 마려운 것을 느꼈다. "......" 목이 마르다. "소변도 물이잖아.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야? 난 죽고싶지 않아!!!!" 난 나 스스로에게 소리쳤다. 난 손을 모았다. 그리고 손에가 그것을 모았다. 기분이 진짜로 더러웠다. 너무너무 더러웠다. 그래도..... 나는 죽고싶지 않았다. "우웩~~!!! 엑~~!! 컥컥!! 커헉" 난 아무 것도 없는 나의 위를 게워내고 있었다. 소변이 나의 입술에 약간 닿자마자 이렇게 구토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도 내 비위가 이렇게 약한 줄(?) 몰랐다. 쓴 위액이 나왔다.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내 혀를 적셔주고 있어 서 기뻤다. 별 게 다 기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당해보면 알 것이다. "젠장!! 미쳤지 미쳤어!!! 차라리 그냥 죽고 말지,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 려했던 거야?" 난 손을 방 여기 저기에다 문질러댔다. 가만히 생각하니 정말 내가 미쳤던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 죽는다면 그냥 당당하게 죽으리라!! 난 다시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7일. 일주일이다. 벌써 일주일이나 지난 것이다. 후회가 몰려왔다. 뭔가? 왜 그때 소변을 마시지 않았나? 네가 언제부터 그렇게 고상했다고!!! 이젠 소변도 나오지 않는다. 뭘 먹었어야 소변도 나오지!~!! 신경질이 났다. 미칠 것 같았다. 목이 마르다!! 목이 마르다!!!!! 너무 고통스럽다!! 시간은 정말 썩어날 정도로 많았다. 저쪽에 널브러져 있는 책들은 이미 다 외워버렸다. 몇 쪽에 커피얼룩이 있는 것까지 알아 맞출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제껏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오로지 잠을 자고 책을 읽는 것뿐 이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가능했다. 미치고 싶지 않다는 일념하나로 난 그 렇게 처절하게 책을 읽어온 것이다. "죽는 걸까...." 나는 바짝 메마른 입술과 혀를 겨우 움직여 중얼거렸다. 아마 나는 죽을 것이다. 그래!! 나는 이런 곳에서 굶어 죽을 것이다!! 이런 황당한 장소에서!!! 이 건물이 공사를 재개할 때까지 내 시체조차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책을 다 읽고 나자 오랜 굶주림으로 멍해진 나의 머리 한 쪽에서 저절로 잡념이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하고 싶은 일 전부 해둘걸. 죽기 전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해보는 건데 그랬다. 나는 아직 뭣하나 제대로 해본 것이 없지 않은가. 이제껏 그저 공부만 해왔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별로 즐겁지도 않은 공부만 미친 듯이 하다가 결국에는 수능시험을 치기 직전에 이런 곳에 갇혀서 죽어버리게 됐구나. 나도 정말 운도 더럽게 없는 놈이다. 정말 너무 후회된다.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죽기 전에 후회 없는 삶을 살고 싶어! ...쓸데없는 생각이다. 어차피 죽을 건데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하고 후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난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는 분명 악인은 아닐 것이다. 그 불우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건전하게 커오지 않았던가. 그래, 분명 난 천국에 가겠 지. 그러나 다른 쪽에서 몰려오는 또 다른 생각 때문에 나는 몸을 움츠렸다. 나는.... 정말 그렇게 불우했던가? 비록 부모님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 서로 싸우고, 그 때문에 쓸쓸한 어린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적어도 부모님들은 날 사랑했다. 그건 안다. 비록 다른 부모님들처럼 자상하게 행동하진 않았 지만 그걸 모를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다. 그리고 부모님 덕택에 매끼 음식을 먹고 따뜻한 집에서 이제껏 살아올 수 있었지 않았던가. 비록 우리 집이 서민층이긴 하지만 이제껏 나는 크게 부족한 것도 모르고 살아왔다. 널린 게 소년소녀가장인데 부모님이 싸운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투덜거릴 자격이 있었던 걸까. "죽고싶지 않아!!!" 나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힘겹게 소리쳤다. 난 악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들도 인간인걸!! 싸울 수도 있잖아. 그들도 분명 나를 위해 오랫동안 참았을 것이다. 이틀에 한번은 하던 부부싸움이 최근 들어서는 전혀 하지 않았다. 아마 수능시험을 앞둔 나를 위해 참았 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싸우게 된 것이겠지. 그것도 마침 내 가 돌아왔을 때 말이다. 난 지금껏 부모님께 좋은 말 한마디 해드린 적 있었나? 그저 싸우는 부모 님을 무시하고 속으로 툴툴거리기는 것 말고 내가 한 일이 뭐가 있지? 뭐 야, 혼자서!! 나는 혼자 불행하고 나 혼자 잘난것처럼 지금껏 행동해온 것 아닌가!! 나는 불안을 떨치기 위해 어지러운 억지로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야. 나보다 악한 놈들은 널리고 널렸잖아! 교도소에 살고 있는 수많은 죄수들도 있는데 내가 그런데 갈 리가 있겠어. 아니... 모르지. 나 정도의 악인도 지옥에 갈 자격이 충분한 지도 모른다. 알 수 없잖아!! 천국의 정원을 누가 정해놓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인류 중 단 1명만이 천국에 갈 자격을 가지게 되는걸 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반대로 생각해서 모든 인류가 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만 에 하나라도 내가 지옥에 갈 만큼 악인이라면!!! 봐. 지금도, 지금만 해도 갑자기 없어진 나 때문에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 생각은커녕 나 자신만을 걱정하고 있지 않나? 나는 끊임없이 비관적인 생각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내가 평소 천국이나 지옥을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죽음이 눈앞으로 다가오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지금의 나를 너무나 약하 게 만들고 있었다. 유치한가. 그러나 절실하다. 죽는다면, 이왕 죽는다면... 그래, 천국 따윈 바 라지도 않는다. 차라리 죽음이 영원한 소멸과 같은 것이라면 좋겠다. 차라 리 고통도 슬픔도 기쁨도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완전히 사라질 수만 있다 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독한 고통만이 나를 휩쓸고 있었다. 손 하나 꼼짝할 힘이 없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죽어가고 있다. 나는 지금 내 손에 꼭 쥐어진 이 희미한 빛이 흐르는 손목시계를 원망하고 있었다. 차라리 이 시계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미쳐서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이왕 죽을 거라면 훨씬 더 행복하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끝까지 의식의 끈을 놓고 있지 않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럼에도 죽 음에서 도망치기 위해 끝까지 발버둥치고 있었다.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보 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훨씬 더 컸던 탓이다. 두려웠다. 죽으면....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두렵다. 너무 두렵다!!! 내가 이토록 겁쟁이였다니!!! 죽고 싶지 않아! 얼마나 절실했는지 모른다. 내 평생 그렇게 무언가를 절실하게 바래본 적 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결코 구원의 손길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 끔찍한 곳에서 단지 고통만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의 복잡한 생각은 생각할 수 없었다. 나의 머리 속에선 오로지 그 생각 뿐. 죽고 싶지 않아!!! 무심한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따뜻해... 문득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부드러운 곳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아....!! 아마 나는 천국에 온 것이리라.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나도 모른다.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것 같았 다. 아니, 이곳엔 아마 시간의 개념이 없겠지. 천국이니까. 의외로 난 착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하하... 천국 커트라인에 턱걸이했을지도 모르지. 기분이 좋았다. 포근한 이곳에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곳에서는 없을 것이리라 생각했던 고통이 갑자기 몰려 왔다. 이 천국에서 누군가 날 끄집어 내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다급해졌다. 이곳이 너무나 행복했기에, 그리고 바로 죽기 전에 느꼈던 그 끔찍한 고통이 새삼스레 떠올라 난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정말 필사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말 잔혹했다. 나를 끄집어내는 힘은 훨씬 나 의 힘보다 더 강했던 것이다. 죽기 전에 느꼈던 것과 같은 절망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내가 아무리 신께 빌고, 죽을힘을 다해 애를 써도 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결국 그곳에서 끌려나오고야 말았다. 끌려나간 곳은 추웠다. 게다가 갑자기 엉덩 이 쪽에서 뭔가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아!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난 결국 악인이었던 거야!! 아까는 잠시 쉬고 있었던 것이 불과했던 거야!!! 나는 너무나 서러워 울음을 터뜨려 버렸고 정말이지 서~~럽게 울어제꼈다. "으아아아아아앙~~!!!!!" Part. 2 - 이르나크 몸이 전혀 내 몸 같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이 없었다. 게다가 사방이 뿌옇게 낀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래서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뭘 하는 곳인지 전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게 나를 더욱 두려움에 떨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났건만 나의 몸에는 더 이상 아무런 고통도 가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 같이 편안한 생 활을 했다. 내가 배가 고프다 싶으면 우유같은 것이 내 입으로 들어왔고 화장실 가고 싶다 싶으면 누군가가 알아서 욕구불만을 상쾌하게(?) 해결해 주었다. 여기는 도대체 어디일까. 대체 왜 이렇게 아무 것도 보이질 않는 걸까. 그 리고 묶여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이렇게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 는 걸까. 비록 어떤 고통도 가해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머리는 멀쩡한데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으니 너무나 답답하고 괴로웠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혹시 이것이 지옥에서 내가 받는 벌인가!? 젠장... 무섭다... 정말 미치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착한 일만 하는 거였는 데. 나는 한동안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러나 며칠 후 정말 다행스럽게도 나의 눈에 아주 약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더 지나자 희미하지만 서서히 무언가를 볼 수 있을 정도로 눈이 회 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눈동자마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가 힘들었 다. 나는 잘 굴러가지도 않는 눈동자를 애써 사용하여 주위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놀랍게도 나는 부드러운 천으로 둘러싸여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 여 보살핌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즉시 나 자신의 몸을 살피 기 위해 노력했다. 문득 조그마한 손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저 조그마 한 손이 나의 손이라는 것을 알아채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 다. "...우에...?!" 나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스스로의 몸을 열심히 훑어보면서 자신이 갓난아기의 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한동안 아무 것도 보 지 못하고, 지금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전부 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갓난아이였기 때문인 모양이다. 이럴 수가!! 이것이...이것이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환생! 환생이란 말인 가!!! 지하실에 갇혀 굶어 죽었던 내가 아기의 몸을 하고 다시 숨을 쉬고 있다!! 그것은 내가 죽어서 다시 아기로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믿어지 지 않게도 나는 다시 인간으로 환생을 한 것이다!! 잔뜩 흥분한 나는 방안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탐색의 결과로 내가 서양의 부잣집에 환생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저 미국 인처럼 -나는 백인은 다 미국인이라 부른다- 보이는 많은 사람들이 들락 날락 거리는 것과, 이 주위를 치장하고 있는 수많은 장식물들이 그것을 증 명해주고 있었다. 으아아아~~!!! 감겨억!!!! 지옥에 안 가고 이렇게 환생한 것만 해도 하늘에 감사할 지경인데 이건 부잣집의 자식으로 태어나다니 이렇게 기쁠 때가 있 나!! 정말 마음 같아서는 그냥 벌떡 일어나 캉캉댄스(?)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 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인지라 그 냥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부르르 떠는 정도로 그 감동을 표출할 수밖에 없 었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갑자기 한편에서 억울하다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이렇게 환생을 한다면 전생의 내가 죽기 전에 한 그 발버둥은 다 뭔가. 그 토록 굶주림과 목마름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마지막 까지 버틴 건 전부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랜 굶주림으로 미 칠 것 같이 고통스러웠지만, 죽은 후의 자신이 어떻게 될지 두려웠기에 마 지막까지 편안한 죽음보다 괴로운 삶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막상 죽고 나니 이렇게 다시 인간으로 태어난 게 아니겠는가. 사람 은 죽은 후에 지옥에 가는 것도 천국에 가는 것도, 영원히 소멸하는 것도 아닌 그냥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뿐이었던 것이다.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마음 편히 죽음을 받아들일걸 그랬다. 어차피 살아나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깨닫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끝까지 살고 싶다고 버티다가 괜히 스스로에게 고통만 가중시킨 결과가 되 어버린 것이다. 지하실에 갇혀 일주일 넘게 굶으면서 느껴야만했던 고통에 대해 생각하노라면 지금도 소름이 돋을 정도인데 편해질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오는 것을 내 발로 계속 차내고 있었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젠 장! 정말 나란 놈은...!! 아니, 진정...진정하자.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서 무슨 이득이 나오겠어. 그리고 나 같이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이런 경우가 아닌 이상에 야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줄 어떻게 알겠냐고. 좋게 생각하자. 환생 을 했으니 좋은 일이 아니겠어. 그래! 이렇게 기쁜 일이 또 어디 있겠냐! 기뻐하는 거야!! "히히히히...."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혼자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주위의 시중드 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고 금방 그만둘 수밖 에 없었지만 말이다. 환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며칠이 지났다. 나는 지금 지루함에 온 몸이 비틀려서 죽을 지경이었다. 인간은 간사한 동물이라고 첫날 느꼈던 환생의 기쁨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갓 태어나 몸도 잘 움직여지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에 그 지루함을 참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으아. 정말 미치겠다. 천장을 보기, 방안 탐색 같은 거 말고 할일 없을까. 컴퓨터가 하고 싶어라. 인터넷하고 싶어라. 농구하고 싶어. 아니, 거기까지 도 안 바란다. 수능시험 공부라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나 같은 아기가 그런걸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곁에서 시중 을 들어주는 아줌마가 주는 대로 우유를 한 통 얻어먹고 또 다시 킬링타임 용 비기 낮잠자기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누가 들어왔는가 싶 어 -이렇게 지겨우면 저런 쓸데없는 일에도 저절로 관심이 가게 되어있다 - 내 몸의 반이나 되는 머리를 겨우 움직여서 문을 바라보았다. 어떤 예쁜 누나와 중년 남자가 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는데 그들이 들어오자 주위에서 들락거리던 사람들이 사극의 한 장면을 연출이라도 하듯 일제히 그 두 사 람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을 보노라니 어쩌면 나는 민주주의가 발전 하지 못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방으로 들어온 그 남녀는 서양의 마치 중세 시대 때 입는 옷 같은 것 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옷깃이나 소매에 레이스와 프릴을 잔뜩 다는 대신 깔끔하게 끝처리를 하여 훨씬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 들의 옷을 자세히 보고 난 후 나는 눈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그들의 옷 에 뭔가 장식으로 달려있다고 생각된 예쁜 장신구들이 전부 보석이었던 것 이다. 나는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단돈 천 원에 벌벌 떨던 소심한(?) 서민이었단 말이다. 그런데 저것들은 저런 보석을 옷에다가 주렁주렁 달고 다니다니. 그래, 너네 부자구나. 부자야. 19년 동안의 경험으로 나의 마음속 갚은 곳에 완전히 자리잡아버린 서민근 성 때문인지 갑작스레 그들을 향한 괜한 적대감이 느물느물 피어오르기 시 작했다. 이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쁜 누나는 중년 아저씨의 부축을 받 아 내가 누워있는 침대 곁에 살포시 앉았다. 그렇게 다가온 누나는 꽤나 힘들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자세히 바라보더니 곧 나를 지긋이 안았다. 솔직히 그들의 옷에 잔뜩 달린 사치스러운 보석들 때문에 나는 조금 전까 지만 해도 계속 속으로 재수 없다는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누나의 품에 안긴 나는 금세 정 반대의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시력이 굉장히 나빠서 가까이 오지 않으면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본 그 누나가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미인이었던 것이다. 크허! 경국지색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내 일평생 이렇게 예쁜 여자에 게 안길 기회를 가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건만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옆에 서있는 중년 남자가 나를 안고 좋아하고 있는 예쁜 누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아마 자신도 한 번 안아보게 넘겨달라는 뜻이었지 싶 다. 아니나 다를까 누나는 나를 그 중년에게 넘겼고 나는 불가항력으로 중 년남자에게 안길 수밖에 없었다. 얼렁 누나에게 다시 나를 넘기라는 의미 에서 최대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그 중년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가만! 허어어억!! 저럴 수가!! 저 양반이 다 늙어서 바람이 났나. 머 리색깔이 저게 뭐야?! 흐릿한 시야 때문에 그저 붉은 머리라고 생각했던 머리색이 이제 보니 주황색이잖아. 더더욱 놀라운 건 누...눈동자도 선명한 주황색!!! 끼에엑! -점점 나의 비명소리가 발전해가고 있군- 징그러워~~!! 나는 눈을 정화시키기 위해 얼른 예쁜 누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 러나 나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으니, 검은머리라고 생각 했던 누나의 머리색이 신기하게도 푸른빛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좀 이상하긴 해도 저 중년의 기괴한 주황색 머리보다 백 배는 예쁘고 아름 다웠다. 아니, 비교하는 자체가 그녀의 머리색에 대한 모욕이라고 보면 된 다. 그 누나는 눈동자도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은은한 푸른빛을 띄는 검 은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 신비한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약간 창백한 듯 하 얀 피부와 어울려 너무나 청초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사람이 존재하다니! 그리고 저 색깔 너무너무 예쁘다! 나도 꼭 저 염색약이랑 콘텍트 렌즈를 구하고 말리라. 내가 그 아름다움에 취해서 멍하니 그녀만 보고 있자 그녀는 걱정스러운 듯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나는 아기다. 이런. 아기답게 행동해야 그녀가 걱정하지 않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고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그녀에게 보냈다. 소...솔직히 잘 보이고 싶었던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 사실 잘 보이고 싶었다!! 어쩔래!! 어쨌든 내가 그렇게 방긋거리자 그녀는 정말 천사보다 아름다운 미소를 지 으면서 나를 꼬옥 안았다. 아아...행복하여라. 그런데 그녀는 대체 나와 어떤 관계이기에 대체 누구기 에 나를 안고 이렇게 좋아라 하는 걸까? 그러고 보면 나의 부모라는 작자 들이 지금까지 얼굴 한번 들이밀지 않고 있는데 어쩌면 지금 이 예쁜 누나 랑 중년 아저씨가 내....부모님...일지도...? 설마. 저 누나랑 저 아저씨, 나이 차가 상당히 많이 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럴 리가 있겠어? ...하지만 어쩌면 예쁜 누나가 돈을 보고 부잣집 아저씨 한테 시집 온 걸지도 모른다. 그런 일 어디든 항상 있는 일이니까. 흠, 그 런 것이었나. 그러나 저러나 저렇게 예쁜 누나가 이번 생에서 나의 어머니 일지도 모른단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의문을 쉽게 풀 수 있었다. 그것은 예쁜 누나가 우연히 건네준 거울을 통해 환생한 나의 새로운 외모를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처음 거울을 보고 엄청나게 놀랐다. 나의 눈동자와 머리색은 그 예쁜 누나처럼 신기한 흑청색을 띄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질 수 있는 건지 정말 궁금했지만 그냥 이 머리색 은 특별한 유전자인가보다 하고 추측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알아보든 말든 하지. 어쨌든 정말 예쁘구나. 환생을 한 후로는 계속 재수 좋은 일만 생기고 있 는걸. 운도 좋지. 이렇게 멋진 머리색을 가질 수 있는 행운이 찾아들다니!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런 머리색을 빼고라 도 난 정말 깜찍하고 귀여웠다. 이 거울 속의 모습이 나 자신이라는 사실 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크고 똘망똘망한 눈. 조그마한 손과 발. 내가 원래부터 아이들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계속 거울을 붙들고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귀엽 다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헉! 나 이대로 나르시스트가 되는 건 아니겠지? 갑작스레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오한을 느끼고 내가 부르르 떨자 누나가, 아니 어머니인가? 어쨌든 그녀가 옷을 하나 덧입혀 주면서 걱정스러운 표 정을 지었다. 그냥 시덥지 않은 일로 그런 것뿐인데 저렇게 걱정스러운 표 정을 지을 것까지야... 그러고 보면 전생의 나의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갑자기 사라진 나를 찾느라 굉장히 걱정하고 계시겠지. 내 시체는 찾으셨을까. 굶어죽었으니 시 체가 참 흉측할 텐데... 그걸 봤다간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지도 모르겠 다. 빨리 말을 배워야지. 그래서 이 나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알아본 뒤에 내가 좀 더 크면 원래 살던 한국에도 찾아가 보는 거야. 부잣집처럼 보이 니까 해외여행쯤은 장난도 아니겠지? 내가 집으로 찾아가면 부모님은 내가 진짜 자신의 아들이었다고 믿을까. 갑자기 밀려드는 집 생각에 나는 조금 우울해졌지만 언젠가는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그렇게 슬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말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갑자기 우울한 표정을 짓는 내가 이상했던지 누나가, 아니 어머니가 걱정 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환생해서까지 부모님께 걱정을 끼치는 불효를 저지르면 안되겠지. 자, 웃 자, 웃어. 나는 그녀를 향해 방긋 웃었다. 창을 통해 햇빛이 따뜻하게 스며들던 어느 날 오후의 일이었다. 나는 평소 언제나 하던 대로 침대에 누워 오른쪽으로 뒹굴 왼쪽으로 뒹굴 하면서 필 살의 배 뒤집기를 감행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움직여 보고 싶어 한 행위였 으나 불행하게도 생후 3개월 된 갓난아기인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격렬 한 움직임은 그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하지만 열심히 운동하다보면 좀더 빨리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싶어 이렇게 계속 온몸으로 자반 뒤집기를 하고 있었다. 항상 나를 돌보아 주는 유모와 꼭 중세 기사 같은 차림을 한 경호원이 그런 나를 보며 희한한 꼬마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 약 간 쪽팔리기도 했지만 뭐 어떠냐. 어차피 나는 아기다 이거야. 그렇게 죽도록 배 뒤집기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있는 방향에서 평소와는 다른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진 나는 다시 몸을 뒤집어 문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왠지는 모르지만 유 모와 나의 기사로 보이는 자만 남고 모든 사람들이 딱 90도로 허리를 굽히 고 뒷걸음질을 치며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런 식으로 번개 같이 빠져나가자마자 자그마한 한 젊은 여자의 손을 잡고 3~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보는 순간 갑자기 작은 충격이 나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 젊 은 여자와 그녀를 따라온 작은 어린아이는 은발이었는데 외국인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회색 빛이 감도는 칙칙한 은발이 아닌 반짝 반짝 빛나는 진짜 은색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옆의 남자아이도 이에 질 수 없다는 건지 새빨간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갈색의 느낌이 나는 붉은 머리가 아닌 말 그 대로 피처럼 새빨간 색이었다. 아니, 무슨 인간들의 머리가 이렇게 컬러풀하단 말인가. 그때의 중년 남자, 그러니까 아버지의 주황색 머리카락도 그렇고 말이다. 설마... 그럴 리는 없 겠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 나라는... 염색하는 것이 전통인 것인가!! 이럴 수가!! 나 또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색을 당한 건가?! 그렇게 혼자 꿍얼꿍얼 잡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 젊은 여자와 정면으로 따 악 눈이 마주쳤다. "흐에에에에엑~~!!!" 순간 난 너무나 놀라서 괴상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은색인 건 그렇다 치자! 그런데 눈동자까지 은색이었던 것이다! 은색이면 예쁘지 않 겠냐고? 네 눈으로 직접 봐라! 흰자와 검은자가 거의 구분이 안 가는데다 가 동공만이 까맣게 자리잡은 그 눈은 정말, 한마디로 호러물 그 자체다. 차라리 저기 옆에 서 있는 남자아이의 새빨간 눈이라든지 중년남자의 주황 색 눈이 훨씬 낫다. 세상에, 저렇게 이상한 눈이라니!! 설마 멋있다고 저러 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나를 시중드는 사람들은 대부분 머리랑 눈동자가 갈색이나 검은 색이라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모두들 무시무시한 머리털과 눈깔을 가지고 있구만. "@@$%^&%($#%#" 괴성을 지르는 나를 보고 놀랐는지 내 주위로 유모와 그 젊은 여자가 몹시 당황하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뭐라고 말했다. 제대로 울지 도 않는 내가 저렇게 소리를 지르니 놀랄 만도 했겠지. 그녀가 가까이 얼 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는 그 은색 눈동자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유 모의 눈은 정상적인 갈색인데, 대체 저건... 정말 공포의 눈깔이로다. 은빛 머리카락의 여자가 나의 곁으로 오자 그녀의 아이들인 듯한 쪼끄마한 아이들도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 은색 눈동자에 놀란 가슴을 잠시 진정 시킨 후 다시금 그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우아! 귀여워라!!! 정말 너무너무 귀여웠다. 그래, 인정하자. 사실 난 어린애 들이라면 사족을 못쓴다. 그러나 말해두겠는데 난 절대 로리콘은 아니닷!!!! 그저 순수하게 어린애들을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원래 모든 생물은 아기 때가 귀엽다 하지 않았던가. 아흐흑. 귀여운 것들!!! 내가 움직일 수만 있다 면 달려가서 꽉꽉 껴안아 주는 건데!! 어쨌든 난 그 귀여운 아이들이 만지고 싶어져서 일단 가까이 있는 남자아 이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따악!!! 헉!! 저 녀석이 날 쳤냐? 나는 얼얼한 손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빨간 머리 의 남자아이가 내가 내민 손을 세차게 쳐버린 것이다. 아직 나의 몸은 아 직 여리디 여린 갓난아이의 몸. 저런 꼬마가 쳤다지만 맞은 손이 새빨개질 정도로 정말이지 아팠다. 절로 눈물이 찔끔했지만 내게 남은 모든 이성을 총동원하여 눈물이 나는 것을 꾸욱 참았다. 어린애가 한 일에 쪽팔리게 울 수야 없지. "##$%$#^" 젊은 여자는 약간 당황하여 나를 친 남자아이를 야단쳤다. 남자아이는 꾸 중을 듣더니 이내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 정도는 괜찮다 고 그들에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곳의 말을 모르는 관계로 그냥 웃으면서 남자아이를 향해 다시 한번 손을 내뻗었다. 내가 웃으면 괜찮다는 표시로 알아듣겠지, 뭐. 그리고 꼬마야. 네가 그렇게 거부해도 나는 꼭 만져보고야 말리라. 난 최대한 몸과 손을 뻗어 그 아이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었다. 그 꼬맹이 의 새빨간 머리카락은 어린애의 머리카락답게 굉장히 고왔다. 젊은 여자와 유모, 경호원은 울지도 않고 도리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이런 이상한 짓 을 하는 나를 약간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음... 너무 어린애답지 않게 행동했군. 그렇고 지들이 알게 뭐야? 난 방긋방긋 웃으면서 옆의 여자아이의 머리도 삭삭 쓰다듬어 보았다. 아이고, 귀여운 것들. 내가 앞으로 계속 귀여워 해주마! 음핫핫핫! 나는 앞으로의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며 속으로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오셔네요. 디트 경. 오늘 굉자히 날씨가 조치요?" 나는 빙긋이 웃으며 나의 호위기사인 디트리온 경에게 아침 인사를 했다. 나는 1살이 넘었을 때 -이곳은 만으로 나이를 따진다.- 어설프게나마 이 곳의 말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어린 관계로 혀가 잘 안 굴러가서 이상하게 발음을 하긴 하지만 일단 회화를 위한 문법과 단어는 완벽히 마스터 한 것이다. 훗, 약 일년만에 한 개의 언어를 습득하다니 역 시 나는 천재가 틀림없어!! 크하하하핫! 그러나 사실은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어 너무나 답답했을 뿐 아니라, 평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던 관계로 홀로 말을 익히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게다가 365일 주변에서 들리는 언어라고는 이 언어뿐이니 말을 빨리 배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나를 보고 주위의 사람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태어난 지 1 년이 약간 넘은 코딱지 만한 꼬맹이가 꼬이는 발음이라고는 하나 말을 좔 좔 해대는데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보통은 엄마, 아빠정도의 외 마디 말이 다인데 말이다. 솔직히 은근히 이 반응들이 즐거워 나는 더욱 말을 배우는데 열을 올렸다. 나를 보고 천재라고 감탄을 하는데 어떻게 기 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만 앞으론 조금 조심해야겠다. 실은 난 천재가 아니니까. 내 입으로 말하니 약간 서글프구나. 어쨌든 내가 19세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어린아이인 지금은 천재로 보일지 몰라도 내가 19세가 넘어버리면 천재가 아니게 되잖아. 그러면 곧 나에게 엄청나게 실망하겠지. 저놈이 어릴 땐 천 재였는데 말이야 라는 식으로 말이야. 그런 건 내 취미가 아니란 말씀이야. 나중에 찬밥신세라니 그건 너무 비참하잖아. "카류리드 전하. 부탁하신 책이랍니다." 또한 내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후, 이곳에서 한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이곳의 왕자!! 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왕위계승과는 까마 득히 먼 제6왕자이긴 했지만 그래도 왕자가 어디냐!! "고마어요. 아, 카류라고 불러달라니까요." 나는 디트 경이 주는 책을 받아들었다. 디트 경, 그러니까 디트리온 경은 전부터 나를 지켜주던 나의 호위기사였다. 왕족들은 왕궁 기사단 중에서 가장 실력이 있는 자들 중 한 명을 자신의 호위기사로 뽑아 늘 곁에 데리 고 다녔는데, 이번에 디트 경이 나의 호위기사로 뽑힌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는 상당히 고지식한 사람이라 내가 매일 만나는 사이니 가볍게 애칭을 불러달라고 했는데도 저렇게 자꾸 길게 원래 이름으로 불러대는 것이다. 왕자라서 애칭만으로 부르기는 좀 그렇다나? "네. 카류 님도 말을 낮추셔야지요." "에...응."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 나라의 언어는 꼭 문법이나 문자가 영어랑 비슷 했지만, 불행하게도 한국어처럼 깍듯한 존댓말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왕자 이다 보니 나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디트 경에게 반 말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바른 생활 청 소년인 나로서는 그것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디트 경에게 부탁해서 받은 책을 한 장 팔락 넘겼다. 1살 짜리 꼬마 가 책을 부탁하는데 디트 경은 정말 황당해 했지만 그냥 호기심이려니 하 고 나의 부탁을 들어준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부탁한 책이 지리책이기에 더욱 그랬다. 어차피 지리서는 그림만 잔뜩 그려져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나 도 말은 좔좔 하긴 했지만 아직 글은 읽을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리서라면 그냥 본다해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에 디트 경에 게 이런 것을 부탁했던 것이다. 내가 왕자이며 우리 나라 이름이 아르윈 왕국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지만 대체 이 나라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고등학 교 3학년까지 지리 공부를 하며 웬만한 나라 이름은 거의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나였으나 아르윈 왕국이라는 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이 름이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대체 우리 나라가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질문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내가 우 리 나라는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묻는 것을 보고 1살 짜리 꼬마가 그런 질 문을 한다는 사실 자체에 놀라워하며 호들갑을 떠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 이다. 또 끝까지 대답을 강요하여 대답을 듣게 되도 모두들 하나같이 크로 시아가 어쩌니 카르틴이 어쩌니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만 했기 때 문에 그냥 직접 내 손으로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응? 디트 경. 이게 모야, 대체..." 나는 손가락으로 지리서의 지도를 가리키며 디트 경을 바라보았다. 그 책 엔 내가 원하는 세계 지도는 그려져 있지 않고 이상한 그림만 잔뜩 그려져 있었다. 물론 그 그림들의 형태가 지도같이 생기긴 했지만 전부 내가 아는 진짜 지도가 아니었다. 나의 질문에 디트 경은 빙긋이 웃으며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건 지도랍니다." "......" 나는 잠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그럼 지리서에 지도가 있지 뭐가 있냐. 아마도 그는 내가 아직 어린애라서 저런 대답을 한 모양이다. 1년 반 을 아기의 몸으로 살았지만 여전히 이런 일에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건 아는데 난 세계지도를 보고 싶거든? 우리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 알 고 시퍼서 마랴." "...이게 저희 이르나크 세계의 세계지도입니다. 그리고 저희 나라는 여기에 있고요." "이루나크 세계? 그게 무쓴 소리야??" 나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는 디트 경에게 고개를 돌렸다. 혹시 이 사람 이 내가 어린애라고 이상한 그림을 가져다가 옛날 이야기 비슷한걸 들려주 려 하는 건 아니겠지!! "이 우주엔 창조신께서 만드신 12개의 세계가 존재하지요. 우리가 살고 있 는 세계의 이름이 이르나크이고, 나머지 11개의 세계가 있답니다. 비록 그 곳에 왕래를 할 수는 없지만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그런 곳이 있다는 것만 은 알 수가 있답니다." "디이~트 경! 난 옛날 얘기를 듣고 시픈 게 아니라 세계지도를 보고 싶다 고! 장난치지 말고 진짜 세계지도를 가따 줘!" 으이구!! 정말, 디트 경은!!! 의외의 곳에서 정감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구 나. 어린애의 동심을 키워주려 하는 그 애틋한 마음은 정말 아름답지만 불 행하게도 상대를 잘못 잡았다고!! "예? 카류 님? 이것이 진짜 저희 이르나크 세계의 세계지도인데..." "됐으니까 디트 경. 난 우리 나라가 어딧는지 알고 싶단 마랴. 제발 진짜 지리서 좀 갔다 주라. 응?" "카류 님.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이 진짜 세계지도랍니다. 그리 고 저희 나라는 여기 크로시아 대륙의 4개의 강대국 중 하나고요. 바로 여 기가 저희 나라랍니다." "크로쉬아 대룩?" "네. 크로시아 대륙이죠." 나는 문득 내가 이제껏 우리 나라가 어디 있냐고 질문했던 사람들마다 말 했던 단어를 떠올렸다. "여기 이건 혹시 카르틴 왕국?" "어떻게 아셨죠? 저희 나라와는 앙숙 관계에 있는 나라지요." 디트 경이 우리 나라라고 말했던 곳의 오른쪽을 짚으며 묻자 그는 참 놀랍 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했다. 왜 내가 우리 나라가 어디냐고 물 을 때마다 이런 헛소릴 하는 거지? 혹시 우리 나라의 영토가 너무나 조그 마하니까 그런 질문을 하는 아이에게 저런 식의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해줘 서 어릴 때나마 꿈을 키워주려고 하는 걸까? "디트 경. 있지... 나는 이런 거 말고 진짜 지도를 보고 싶거든?" "......이게 진짜 지도입니다만?" 디트 경은 오히려 이러는 내가 더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뻔뻔스 럽게 끝까지 그 지도가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아우, 어떻게 해야 디트 경이 진짜 세계지도를 보여줄까? "...조아. 디트 경. 12개의 세계가 있다는 걸 마법을 통해 아랐다고 해찌? 그럼 마법이란 걸 보여죠. 그럼 디트 경의 말을 믿을게." 나는 갑자기 아까 마법이 어쩌고 한 말이 기억이 떠올라 디트 경에게 말했 다. 마법을 보여줄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이거라면 옛날 얘기하는 걸 포기 하고 그만 진짜 세계지도를 가져다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디트 경은 한 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손을 탁 마주치면서 뭔가를 깨달았 다는 듯이 내게 이야기했다. "아...아아... 결국 마법을 보고 싶으셨던 모양이시군요. 하지만 마법사는 전 부 왕성 내에 있는 생명의 궁에서 연구를 하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밖 으로 출입을 하지 않아 만나보기 힘들 답니다." "으으... 그마해!! 그렇게 말하면서 어영부영 너머 가려 그러는 거지? 사실 은 마법 같은 거 없다는 거 다 아니까 그만하고 진짜 세계지도를 보여죠. 응? 디이트 겨엉!!" 나는 정말 답답해서 디트 경의 옷깃을 부여잡고 징징거렸다. 이 정도까지 애원하면 그냥 진짜 지도 좀 보여줘라, 이 사람아. 나는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고! "후후.. 그런 부탁이라면 폐하께 해보셔야지요." "폐하...? 아버지에게?" "네, 폐하라면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지요." 나는 디트 경을 보고 약간 인상을 구겼다. 마법사를 보여주기 곤란하니까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려하다니 의외로 디트 경도 사악한 면모를 가지고 있구만. 하지만 내가 어떤 표정을 짓든 말든 디트 경은 갑자기 실실 웃기 시작했 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디트 경의 저 웃는 얼굴, 왠지 굉장히 보기 거북 하구만. 어쨌든 나는 그 즉시 어머니를 찾아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왕족이라 그런 지 몰라도 나는 이렇게 어린데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따로 떨어진 방을 쓰 고 잠도 각자의 방에서 잤다. 물론 내가 조르면 함께 잘 수도 있지만 말이 다. 그러나 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장한 대한의 사나이(?)가 아니었는가. 그러다 보니 눈이 부실정도로 초절정 미인인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잔다고 생각하면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서 그렇게 함께 자자고 조르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어머니인데 계속 이런 기분이 든다면 그건 완전히 범 죄가 아닌가? "어머니!!" "어머? 카류?" 나는 방문이 열리자마자 어머니에게로 쪼르르 뛰어가 그녀의 무릎에 찰싹 붙었다. 어머니는 반가우면서도 약간 놀라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솔직히 태어난 지 1년밖에 안된 꼬마가 이런 곳까지 걸어오는 것이 참 신기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의 무릎 앞에서 눈을 반짝이고 있는 나를 살짝 안아 들어서 의자에 앉혀 주었다. 에이쒸... 이렇게 어린 아들이 일부러 찾아오기까지 했으면 귀엽다고 껴안 아주거나 뽀뽀라도 해줘야 하는 거 아닌... 쿨럭... 어...어쨌든 어머니는 너무 썰렁한 분이다. 스킨 쉽이 너무 없다고 할까. 유 년시절 사랑한다는 표시로 해주는 스킨 쉽이 나중에 그 사람이 성인이 된 후의 성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하던데, 내가 보통 아이였으면 나중에 커 서 삐뚤어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 마법사는 진짜루 있나요?" "물론이지. 생명의 궁에 많은 마법사들이 연구를 하고 있단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의 질문에 대답하는 어머니를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 었다. 디트 경이 해준 그 동화가 얼마나 보편화되어 있기에 저 썰렁한 어 머니마저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어머니, 그럼 제가 마법사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쎄오. 디트 경이 폐하... 아니, 아버지한테 말슴드리묜 뵐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써요." "음,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폐하께 부탁드려도 쉽게 만날 수 있는 분들은 아니란다. 큰 일도 없는데 바쁘신 분들을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일 아니 겠니?" "그런 게 어딧써요! 결국 못 만난다는 얘기자나요! 디트 경이랑 어머니 자 꾸 거짓말만 하고!!" 나는 자꾸 말을 돌리는 그들에게 신경질이 나서 처음으로 그들 앞에서 짜 증을 냈다. 마법사라는 것 자체가 없으니 만나게 해줄 수 있을 리가 없지. 언제까지 저렇게 빙빙 돌려가며 동화 얘기만 할건지 정말!!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와 마법사를 내놓으라고 떼까지 써봤는데도 저렇게 나오면 이제 어떻게 하지? 여기가 어딘지 알아보는데 이렇게 험난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알겠다. 그래, 내가 폐하께 마법사를 한 명 만나볼 수 있도록 부탁해보 마. 그렇게 마법이 보고 싶은 거니?" 어머니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살짝 웃었다. 그러나 나는 오랜만에 하는 그 스킨쉽이나 아름다운 웃음을 보면서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떻게 마법을 보여주겠다는 거지? 혹시 모자에서 비둘기를 빼낸다던 가 하는 마법을 보여주는 마술사를 데려오는 거 아냐? "...어머니.. 전 동전 숨기는 마법 같은 건 시러요." "후후후. 파이어 스톰이라도 시전해서 보여달라고 해야겠구나." 어머니는 이제 나를 보고 소리까지 내며 웃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러나저러나 파이어 스톰은 또 뭐야? 나는 축 늘어진 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뺨을 간질이는 바람에 나 는 그제야 전생에서는 한번도 느낄 수 없었던 깨끗한 공기를 실감할 수 있 었다. "전하..." 디트 경이 나의 곁에서 걱정스럽게 나의 이름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의 걱 정을 덜어주기 위해 다정한 대답을 건네기엔 나의 머리는 너무 복잡해져 있는 상태였다. 갑자기 얼마 전 보았던 그 커다란 불덩이가 떠올랐다. 마법사라며 불려왔 던 인간은 이상한 불덩이를 만들어 내더니 그것을 쏘아보내어 땅에 커다란 구멍을 내 놓았다. 갑작스레 나의 주위로만 불어오는 바람과 저절로 움직 이는 땅을 보면서 나는 황당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법사라는 것은 진짜로 실재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법을 보게 된 뒤로 나는 며칠동안을 멍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물론 단순히 마법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문제는 디트 경이 이제껏 한 말이 전부 장난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이르나크..." 나는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되뇌었다. 이 우주에는 총 12개의 다른 세계가 있으며 지금 내가 환생한 세계의 이름 은 이르나크였다. 그리고 그 12개의 세계 중엔 마법을 전혀 사용하지 않으 면서도 평소 살아가는데 쓰이는 기술을 극도로 발전시켜 마법과 같은 일을 가능하게 하는 토이렌이라는 세계도 있었다. 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으 면서 그 토이렌이 전생의 내가 살았던 세계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나는 환생을 했다. 그런데 그냥 환생을 한 것도 아니고 이세계에 환생을 해버린 것이다. "후...." 나는 팔을 꼬고 그 사이에 머리를 깊게 묻었다. 꼭 다른 세계에 환생했다 고 이렇게 축 늘어져 있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마법이라는 것이 있는 동 화 같은 세계에 환생을 했다는 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마냥 흥분하고 좋아할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 전생의 부모님 을 만나러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에 별로 큰 슬 픔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나는 영원히 나의 부모님과 전생에 있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없게 된 것이다. 비록 마 법으로 이세계의 존재를 알 수는 있어도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마법 따윈 최고위마법이라고 하는 9서클에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마치 피크닉을 온 것 같은 가벼운 기분이었다. 한 나라의 왕자님으로 태어나 아름다운 어머니와 사랑스러운 형제들이 있는 꿈과 같 은 세계. 그러나 피크닉은 언젠가 돌아갈 수 있기에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지금처럼 집으로 돌아갈 길은 완전히 막혀 버린 상태에서 언제까지나 헤헤 거리며 돌아다닐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가볍게 생각했던 것만큼 갑작스럽게 다가온 현실이 더욱 무겁게 내 머리를 짓눌렀다. "카류야?" 갑작스레 들리는 부드러운 음성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의 앞엔 언제 오 셨는지 어머니가 약간 불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 아픈 거니?" 그녀는 마치 조각상같이 하얀 손을 나의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걱정 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름다운 나의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전생의 나의 어머니는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었다. 갈색의 짧은 파 마 머리를 한 전형적인 아줌마였다. 매일같이 하는 아버지와의 부부싸움으 로 집안 일을 내팽겨 치고 밖으로 나가버린다거나 괜히 애꿎은 나에게 신 경질을 내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상냥하고 자상한 어머니는 아니 었다 할지라도 가끔씩 나에게 하는 신세타령 같은걸 들어보면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전생의 어머니도 분명 갑자기 사라진 나 때문에 지금 나의 앞에 서 있는 어머니처럼 이렇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불안해하고 있을 것이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디트 경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어머니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면서 말했다. 갑자기 나 때문에 걱정하 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디트 경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가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흩 날리면서 아름다운 푸른빛을 뿜어냈다. 너무 아름다워 도저히 나의 어머니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그녀가 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에 실감이 가지 않았 다. 자주 나를 찾지 않는 아버지는 더더욱 그랬다. 이제껏 나의 앞에서 걱 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름다운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러오긴 했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녀를 진정한 나의 어머니로 인정하 고 있지 않고 있었다. 나는 계속 전생의 부모님을 나의 부모님이라고 생각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바람의 궁에 가보겠니? 루블로프와 세렐리아를 보러가자. 그렇게 보고 싶어했지 않니?"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조심스레 나를 안아들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녀의 품에 안겼다. 루블로프와 세렐리아는 내가 생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찾아왔던 그 작고 귀여운 아이들로 나의 첫째 형과 첫째 누나였다. 평소라 면 그 귀여운 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좋아 날뛰었을 법도 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아? 카류?!" 어머니의 품에 안겨 바람의 궁의 정원으로 들어서자 곧 어디선가 익숙하면 서도 귀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인 빨갛고 하얀 꼬맹 이들이 어머니에게 안겨 있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있는 쪽으로 도도도 달려오고 있었다. "카류! 카류! 와와!! 카류가 왔네!" "꺄아... 카류다." 그들은 내가 온 것이 기쁜지 어머니의 주위를 뱅뱅 돌면서 꺄꺄 소리를 질 러댔다. "이런, 루브. 세라. 아스트라한 님 안녕하세요 라고 먼저 인사를 드려야지." 어머니가 나를 땅에 내려놓고 있는데 앞에서 아름다운 은빛 머리를 한 여 성, 그러니까 루블로프 형과 세렐리아 누나의 어머니이자 이 나라의 왕비 인 에렌시아 님이 다가와 꾸중을 했다. 루브 형과 세라 누나 -루블로프 형 과 세렐리아 누나의 애칭- 는 쭈뼛거리며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지만 곧 방 긋 웃는 얼굴로 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카류야아~ 우리 또 놀자아~~" 루브 형과 세라 누나는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나의 팔을 끌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의 손을 쳐내버릴 정도로 나를 싫어했던 루브 형이었으 나 지금은 이렇게 먼저 놀자고 말할 정도로 서로 친해져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 움직일 수도 있고 말도 몇 마디 할 수 있게 되자마자 어머 니에게 이곳 바람의 궁과 또 다른 나의 형제들이 있는 제1후궁 아르멘 님 의 거처인 물의 궁에 가자고 졸랐다. 보통 왕실이 그러하듯 국왕에게는 여 러 명의 후궁이 있었고, 나와 다른 형제들은 어머니가 달라서 서로 다른 궁에 기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루브 형과 세라 누나를 보려면 바람의 궁으 로 와야했던 것이다. 형제들이 처음 나를 싫어하는 기미를 보였다고 해서 이렇게 깜찍한 꼬마들 을 쉽게 포기할 만큼 나는 그렇게 만만한 인간이 절대 아니었다. 뺀질나게 바람의 궁과 물의 궁에 드나들면서 형제들에게 끊임없는 육탄공세를 퍼부 으며 나의 주특기를 발휘한 결과,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이렇게 화기애애 한 분위기를 이끌어낸 것이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아이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던 나였으나 지금은 그들 과 깔깔거리고 놀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아이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내 머리는 혼란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귀엽게 방방 뛰고 있는 루 브 형을 보고도 그냥 말없이 터덜터덜 앞으로 걸어갔다. "일루와. 루브 오빠. 카류. 이쪽으로....악!!" 세라 누나가 우리 쪽을 향해 손짓을 하면서 앞으로 먼저 뛰어나갔다. 그러 나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뛰어가다가 그만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어! 세라 누나!" 나는 놀라서 누나에게 뛰어갔다. 내가 얼른 세라 누나를 부축하여 일으켰 지만 누나의 얼굴은 잔뜩 울상이 되어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아 보였다. "누나. 누나, 나 좀 바바. 울면 내가 머라고 그래찌?" "...서..선물 안 준다구...훌쩍..." 세라 누나는 은색의 눈동자에 눈물을 그득 담고 잔뜩 인상을 찡그렸지만 울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내가 전에 산타클로스 이야기를 해주면서 우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준다고 말해주었더니 저렇게 울상이 되면서도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왕족이라 원하는 건 뭐든지 가질 수 있으면서도 저런 동심의 세계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세라 누난 착하니깐 분명히 선물 주실꼬야. 그치? 루브 형?" "응!" 옆에서 루브 형이 양 주먹을 꼭 쥐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브 형의 결 의에 찬 듯한 새빨간 눈동자를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우리 루브 형. 어쩜 이로케 착할까." "그지?" 내가 루브 형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어 주자 루브 형은 기분이 좋은지 방긋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에 나는 결국 풋 하고 소리를 내어 웃어버렸 다. 혀 짧은소리를 내는 1살 짜리 어린애의 칭찬을 듣고 좋아하고 있는 루 브 형의 모습에 새삼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나는? 나는? 카류!" 뾰루퉁한 표정을 하는 세라 누나를 보고 나는 다시 짧은 팔을 억지로 뻗어 세라 누나의 머리도 쓰다듬어 줬다. "우리 누나도 너무 착해. 아까 루브 형도 그러케 말해짜나." "에헤헤헤~ 진짜로?" 세라 누나는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언제 울려고 했냐는 듯 꺄르르 웃 기 시작했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들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사람들이 눈 에 들어왔다. 특히 어머니는 겨우 웃는 내게 안심했다는 듯이 오랜만에 정 말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형제들과 어머니를 번갈아 보며 나는 짧 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환생을 하고, 또 아름다운 어머니와 귀여운 형제들을 가족으로 가지 게 된 것은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행운이었다.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 에 그토록 절망했건만, 사후세계가 두려워서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던 때가 엊그제 같건만, 생각지도 않게 낙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죽 기 전의 그때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의 나는 너무나 큰 축복을 받은 셈이 다. "이리와 봐. 루브 형. 세라 누나. 내가 재미있는 거 가르쳐 줄게." "에에? 정말?!" "재미있는 거?" "응. 땅따먹기라는 건데 말이야." 나는 웃으며 그들을 이끌었다. 자신이 얼마만큼 큰 축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고 괴로운 일만 떠올리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카류가 너무 조아!" "억!" 갑자기 세라 누나가 나의 뒤쪽에서 육탄공세를 퍼부었다. 1살 짜리 어린아 이에게 힘이 있으면 얼마나 있겠는가. 거기에 나는 어린아이답게 머리가 커서 앞으로 쉽게 무게 중심이 쏠리는 인체구조까지 가지고 있었다. 덕분 에 나는 미처 방어자세를 취하지도 못하고 뒤에서 밀고 오는 세라 누나에 게 깔린 채로 땅과 정면으로 헤딩을 해버리고 말았다. 꽈당! 아까 세라 누나가 넘어질 때와는 전혀 다른 무시무시한 소리가 정원에 울 려 퍼졌다. 곧 어머니가 뛰어와서 세라 누나에게 눌려있는 나를 빼내서 일 으켜 세웠다. "카류! 카류야!!" 너무 제대로(?) 넘어져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지만 깜짝 놀란 얼굴 을 하고 있는 어머니가 시야에 들어와 나는 아픔을 참으면서 억지로 웃어 보였다. 내가 울면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정말 어색하겠지만 내 앞의 이 아름다운 여성이 나의 어머니라는 것을 인정하자. 그리고 전생에 했던 행동과는 달리 이번에는 꼭 어머니에 게 효도해 드리는 거야! "괜차나요. 쪼끔 아푸지만... 헉! 코피!!!" 나는 코를 손으로 슥 문지르다가 피가 잔뜩 묻어 나오는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어쩐지 지지리도 아프더라니 코피가 날 정도로 넘어졌단 말인가. 어흑! 불 쌍한 내 코!! "카류 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나의 곁으로 다가온 디트 경이 손수건을 꺼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의 코를 닦아주었다. 상당히 쪽팔리는 순간이군. 하지만 나는 어린애잖아! 어린애는 코피가 터져 도 귀여운 법이라고!! ...으윽! 부끄러워!! "으흑. 카류..." 세라 누나는 피를 흘리는(?) 나를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두 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울먹였다. "으...응. 누나. 갠차나. 그냥 코피인데 모..." "히잉... 난..." 하지만 세라 누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자 곁에서 그 모습을 보던 루브 형도 함께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윽? 누...누나, 형? 에구, 내가 울려버렸네..." 나는 그들 앞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달래려고 애썼다. 그런 와중에서도 나를 걱정해서 이렇게 조그마한 형제들이 눈물을 퐁퐁 흘려준다는 사실에 마음 한구석은 따뜻해져 옴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모든 것을 잊으라고 한다면 무리일 테지만, 그리고 부모님들을 잊 으려고 하는 일은 상당히 슬픈 일일 테지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자. 지금 우울해하기만 한다고 전생의 부모님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일도 아닌데다 가 지금의 가족들에게 걱정만 끼칠 것이다. 내가 받은 축복에 감사하고, 그 리고 지금 현실에 충실하자. 전생에 죽기 전에도 그렇게 다짐하지 않았던 가. 다시 기회가 온다면 후회 없는 삶을 살자고 말이다. 나는 지금 그것을 실행할 새로운 기회를 받은 것이다. "형, 누나 너무 조아해. 그러니까 울지마? 아랐지?" 하늘이 내게 내려준 축복인 사랑스러운 가족들을 보면서 나는 빙긋 웃었 다. Part. 3 - 이상한 아이 내가 20살에 왕궁 기사단에 입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이리저 리 익숙하지 않은 왕성을 돌아보다가 나는 우연히 왕궁의 정원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정원 가득 부서지는 빛 사이로 푸르게 빛나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한 여성을 보게 되었다. 나 역시 검은색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이런 색의 머리칼의 가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그 녀처럼 신비한 빛을 뿜는 검은머리는 처음이었다. 내가 잠시 그녀의 머리색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나의 기척을 느꼈 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는 그 머리 카락과 같은 색의 신비한 검푸른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천 사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한순간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생명체가 존재하다니. 지 금 내가 본 존재가 진정 나와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지금 이 상황이 현실 이라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한순간 나의 사고가 정지해버릴 정도로 미소짓고 있는 그녀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내가 그렇게 한동안 정신을 빼고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 보았을 때 그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서있지 않았다. 갑자기 내가 환상을 보았는지 의구심이 들었으나 그녀가 있던 곳의 풀이 약간 흐트러진 모양을 보고 그것이 완전히 환상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턱을 고고 생각이 잠겼다. 이런 왕궁의 정원을 거닐고 있었으니 왕궁과 관련이 있는 자일 거라 생각해서 왕궁의 사람들의 기억을 되새겨 7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나는 금방 그녀가 누구인지 깨달아 버린 것이다. 한번 스쳐보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앗길 정도로 아름답다고 온 왕국 내에 소문이 자자한 하르트 백작가문 특유의 흑청색 머리카락을 가진 미모의 여 성. 그녀는 국왕폐하의 세번째 아내인 제2후궁 아스트라한 님이었다. 나는 스스로 뺨을 세게 치며 자책했다. 그녀가 제2후궁 아스트라한 님이라 는 것을 깨닫자마자 온몸이 힘이 쭉 빠지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나는 검술에 있어 상당히 재능이 있는 자의 축에 속했다. 아무리 권력이 강한 귀족 가의 자식이라 하더라도 일단 왕궁 기사단에 입단하려면 최소한 25살은 넘겨야 했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도 검술에 빠른 진전을 보여 20살 임에도 실력을 인정받아 이곳 왕궁 기사단에 입단을 허락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예전부터 수많은 여자들의 청혼과 고백을 받아왔다. 하지 만 나의 마음을 흔드는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 우습게도 지금까지의 나는 자신의 외모를 내세워 나를 유혹하려 하는 여자들을 경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게 뭔가. 나는 겨우 외모 때문에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면 서도 그녀에게 반해버리지 않았나. 게다가 그녀가 폐하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자 이렇게 실망하고 좌절하는 꼴이라니... 그렇지만...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오랫동안 방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그녀를 보고자하는 마 음을 더욱더 커져만 갔다. 나는 도저히 그녀의 마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 다. 스스로 자신에게 놀랄 정도로 나는 그녀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매일 쉬지 않고 검술의 수련만에 열중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그분을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라한 님을 나의 아내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분의 주위에서 항상 맴돌 수 있 고 또한 그분이 상처 입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는 호위기사라도 되고자 나 는 그렇게 쉬지 않고 검술 훈련을 했다. 왕족의 호위기사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왕궁 기사단 중에서도 최고 의 실력을 가진 자들을 뽑았다. 아무리 검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다 해도 나는 아직 기사단에 갓 입단한 경험도 연륜도 부족한 20살의 애송이 에 불과했기에 경험이 풍부한 왕궁 기사단의 다른 나이가 많은 기사들과 비교해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그러나 다행히 왕족의 호위기사는 35세 이 하의 기사들 중에서 뽑았기에 나는 이렇게 어린 나이임에도 그 호위기사에 도전할 결심을 할 수 있었다. 35세 이하의 인물 중에서 호위 기사를 뽑는 이유는 호위기사의 특수성 때 문이다. 호위기사는 왕족이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때에 얻게 되는 기 사로 평생을 함께 하는 거의 동반자와 비슷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왕족은 혼인이나 탄생 등 젊은 나이에 왕실의 일원으로서의 자 격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동반자 역할을 하게 되는 이 러한 특성상 호위기사를 젊은 나이의 기사로 뽑아 주군과 어느 정도의 친 근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아스트라한 님도 후궁의 자리에 오르면서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받았기에 호위기사를 가지고 있었지만 출산을 하게 된다면 그 직위가 올라가게 되므 로 한 명의 호위기사를 더 얻게 된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아스트 라한 님이 출산하기 전에 왕족 호위 기사의 자격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 했다. 결국 나는 25살에 왕족 호위 기사가 될만한 실력을 쌓을 수 있었고, 또 모 두에게 그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드디어 아스트라한 님이 첫 번째 아이 를 출산했고 나 또한 호위기사의 후보에 들었지만 폐하께서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누구나 그 실력을 인정하는 기사, 레드라스 경을 손수 아스트라한 님의 호위기사로 정해주시는 바람에 나는 또 한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바로 카류리드 님의 호위기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비록 아스트라한 님을 지켜드릴 수는 없지만 그 분의 아드님이라도 지켜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모두가 나를 만류했다. 카류리드 님은 제6왕자. 왕족이라 하더라도 권력과 는 너무나 거리가 먼 단지 제2후궁의 소생일 뿐이었다. 모두들 나 정도의 실력이라면 제1왕자 루블로프 님이 태자로 책봉되어 몇 명의 호위기사를 더 가지게 될 때 그분의 호위기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입을 모았다. 그 러나 나의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모시게 된 카류 님은 조금 이상한 분이었다. 그 분은 태어났 을 때 한번 빼고는 전혀 우는 일이 없었다. 물론 4명의 시종들과 유모가 항시 붙어있으면서 불편이 없도록 시중을 들긴 했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한 번도 울지 않는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울어서 우유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대소변을 했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일 또한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 럼 밤에 칭얼대지도 않았고, 낮에도 조용히 누워있으면서 이리저리 몸을 뒤집어 본다거나 방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무언가 중얼거리기만 했다. 아 스트라한 님과 폐하는 카류 님이 무슨 이상이 있는 것이 아닌지 몹시 걱정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그분이 3개월이 되던 해, 에렌시아 왕비 전하가 카 류 님을 보러 왔다. 에렌시아 님의 곁에는 아직 어린 제1왕자 루블로프 님 과 제2공주 세렐리아 님도 있었다. 그날도 카류 님은 혼자 침대 위에 누워 온종일 몸을 데굴데굴 굴리는 약간 이해하기 힘든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평소와는 다른 기척 소리를 느꼈는지 몸을 문 쪽으로 뒤집었다. 그리고 고 개를 들어 에렌시아 님과 왕자님과 공주님을 쳐다보았다. "흐에에에에엑!!!" 그러나 곧 이어지는 비명소리에 방안의 모든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 다. 카류 님이 처음으로 크게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하더라 도 저렇게 기괴한 비명소리라니... 갑작스러운 비명소리에 놀란 카류 님의 유모와 에렌시아 님이 카류 님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그 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카류 님은 자신의 가까이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짓는 에렌시아 님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잠시동안 굳은 표정을 짓던 카류 님 은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을 보더니 이내 그 표정을 풀고 귀여운 미소 를 지으면서 루블로프 님께 손을 뻗었다. 그러나 루블로프 님은 갑자기 소리를 지른 카류 님이 싫었는지 있는 힘을 다해 그 분의 손을 뿌리쳤다. 짜악!! 상당히 큰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루블로프 님은 어린애치고는 상당 히 힘이 센 분이었고 또 아직 카류 님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뿌리쳐진 그 분의 손은 새빨갛게 물들 수밖에 없었다. 에렌시아 님은 당황하며 루블로프 님을 야단쳤고 루블로프 님은 이내 울상 이 되어 붉은 두 눈에 그득 눈물을 담았다. 그러나 카류 님은 맞아서 새빨 개진 손을 보고도 울지 않고 도리어 방긋 웃으면서 마치 루블로프 님을 달 래고 싶기라도 한 듯 그분의 붉은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카류 님은 정말 보통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분이다. 내가 카류 님의 호위기사가 된지도 1년이 넘었다. 카류 님은 지진아가 아 닌가 하고 걱정했던 사람들의 소문이 가소롭기라도 했던지 무섭도록 총명 한 분으로 자랐다. 사실 1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카류 님이 바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솔직히 나도 조금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겨우 1살임에도 그냥 단어만을 나열하는 수준이 아니라 명확한 문 장까지 구사하기 시작했다. 카류 님은 1살의 어린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총명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언젠가 나에게 지리서를 가져다 달라고 한 다음 그것을 보며 진짜 지도를 내놓으라고 떼를 썼을 때는 정말 당황했다. 황당하게도 이것이 진 짜 이르나크 세계의 지도라면 마법을 보여 그것을 증명하라는 요구를 한 것이다. 그분이 갑자기 왜 그러는지 카류 님의 말을 자세히 들어본 결과 나는 상당 히 놀랐다. 그분은 마법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마법사 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말을 하기가 어려우니까 그렇게 빙빙 돌려서 말했던 것이다. 그 당시 내가 그런 카류 님의 행동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대체 어떤 1살 짜리가 그렇게 말을 돌려서 한단 말인가. 카류 님의 성장과정을 보아 오며 그 분이 천재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지만 이런 행동까지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카류 님도 역시 어린아이라는 생각 이 들었다. 마법은 역시 어린이들에게 동경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가끔씩 소름끼칠 만큼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카류 님이지만 기본은 여전히 어 린아이였던 것이다. "카류 님..." 나는 창틀에 기대어 멍하니 창 밖을 보고 있는 카류 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보통 때 같으면 방긋 웃으며 답했을 그분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자세 그대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을 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 정상적인 모습이 되었다고 생각했건만 카류 님은 또 다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법을 보고 난 후 이상하 게도 멍하니 창문 밖만 쳐다보며 음식도 제대로 드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마법을 보고 싶어했으면서 정작 마법을 보여주었더니 왜 저런 반응 을 보이는 것일까. 정말 카류 님의 정신 세계는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너 무 많다. 원래 천재라는 아이들은 다 그런 것일까. 7"아스트라한 님 드십니다." 한동안 카류 님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데 문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셨습니까. 아스트라한 님." 나는 아스트라한 님께 정중히 인사드렸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는 최근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카류 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 이었다. 비록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카류 님의 방에 온 것만 봐도 그녀의 염려가 얼마나 큰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아스트라한 님은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카류 님 가까이로 다가갔 다. 하지만 카류 님은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카류?" 아스트라한 님의 조용한 부름에 카류 님은 그제서야 아스트라한 님이 자신 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평소처럼 환 하게 웃는 표정이 아닌 약간 어두운 표정이었다. "어디 아픈 거니?" 아스트라한 님이 조용히 카류 님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걱정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카류 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스트라한 님을 한동안 조용히 바라보았다.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정말이에요. 디트 경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나 카류 님은 이내 마치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부드러운 웃음 까지 지어 보이면서 아스트라한 님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정말 놀라운 일 이다. 어린아이에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단 말인가. 원래 어린아이들이 란 순수한 만큼 독선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아스트라한 님은 카류 님의 말에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멍청 하게도 아스트라한 님께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해주는 대신 놀라는 표정만 지어버렸다. 아스트라한 님도 사실 카류 님의 행동에 조금 놀랐던 건지 말 없이 그냥 카류 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 바람의 궁에 가보겠니? 루블로프와 세렐리아를 보러가자. 그렇게 보고 싶어 했잖니?" 아스트라한 님은 카류 님의 마음을 달래보기 위해 그렇게 제안했다. 카류 님은 태어난 지 3개월이 되던 해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을 만난 후로 끊임없이 그분들을 만나기를 원했다. 첫 인상이 안 좋을 만도 했건만 신기 하게도 그 분은 자신의 형제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가끔씩 다른 형제분들 이 거처하고 있는 바람의 궁이나 물의 궁에 갈 일이 생기게 되면 좋아서 팔짝팔짝 뛰기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바람에 궁에 가게 된다는 소식에도 별 반응이 없이 가만히 아스트라한 님에게 안겼다. 대체 무슨 일로 카류 님이 저렇게 우울해 하는 것일까. 나는 아스트라한 님과 카류 님을 따라 바람의 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종 에게 에렌시아 님과 다른 왕자 전하들이 정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바 로 바람의 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 우리들이 정원으로 들어서자마자 저 멀리에서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 이 카류 님을 발견하고 짧은 다리로 열심히 뛰어오기 시작했다. "카류! 카류! 와와!! 카류가 왔네!" "꺄아... 카류다."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은 카류 님이 온 것을 기뻐하며 카류 님을 안고 있는 아스트라한 님의 주위를 뱅뱅 맴돌았다. 아스트라한 님은 살짝 웃으 면서 카류 님을 땅에 내려놓았다. "카류야아~ 우리 또 놀자아~~" 루브 님은 카류 님의 팔을 이끌고 정원 중간에 있는 풀밭으로 그분을 이끌 었다. 평소엔 카류 님이 주도적으로 루블로프 님을 끌고 장난을 치곤 했는 데 카류 님은 그저 우울한 표정으로 루블로프 님이 하는 대로 이끌려가기 만 했다. "...카류리드가 왜 저렇게 힘이 없는 거죠? 아스?" "저도 잘... 후우... 얼마 전 마법을 보고 싶다고 처음으로 카류가 떼를 쓰기 에 폐하께 부탁드려 일부러 마법사를 데려와 마법을 보여주었더니 그 후부 터 저렇게 힘이 없답니다. 카류는 한번씩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해서..." "걱정하지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아스. 카류리드가 워낙 머리가 좋아서 우리가 모르는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그런데... 내가 에 렌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잖아요? 아스?" "에...에렌 님." 아스트라한 님은 약간 어색한 듯 말을 살짝 더듬었다. 에렌시아 님은 그런 아스트라한 님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짝 웃었다. 쿠당! 나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다시 카류 님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넘어져서 끙끙거리고 있는 세렐리아 님이 있었다. "어머. 세라가..." 에렌시아 님은 세렐리아 님이 넘어진 것을 보고 그쪽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러나 곧 카류 님이 그 곳으로 뛰어가 세렐리아 님을 일으켜 먼지를 털어 주며 달래는 것을 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후... 세라는 카류가 너무 좋은가봐요. 넘어졌는데 카류가 일으켜 주니까 울지도 않는군요." "...그보다 겨우 1살밖에 안됐으면서 넘어진 세렐리아를 일으켜 줄 생각을 하는 자체가 이상하죠. 저는 가끔씩 카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져요." 아스트라한 님은 카류 님을 보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과 비슷한말을 내뱉었다. "좋게 생각해요. 아스. 벌써부터 자신의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너무 기특 하지 않나요? 카류리드는 정말 착하고 똑똑한 아이예요. 저는 그런 아이를 낳은 아스가 너무 부러운 걸요?" 에렌시아 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보내며 아스트라한 님을 바라보았다. 에 렌시아 님은 아스트라한 님만큼 아름다운 미녀는 아니지만 대신 그 이상으 로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다. 아스트라한 님이 아름다운 외모 때 문에 국왕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의 질투도 보 이지 않고 마치 친언니처럼 아스트라한 님을 보살펴주고 있었다. "어머, 저것 봐요. 귀여워라~!!" 에렌시아 님의 말에 나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쪽에서는 카류 님이 루블 로프 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루블로프 님을 쓰다듬고 있는 카류 님은 어느새 우울한 표정을 버리고 살짝 웃음 짓고 있 었다. 나는 문득 아스트라한 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분은 겨우 웃음을 보인 카류 님을 보고 그제야 약간 안심이 됐는지 정말 오랜만에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카류 님은 평소처럼 완전히 웃으면서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을 이끌었다. 형제들을 만나자 이제 기분이 풀어진 것일까. 루블로프 님과 세 렐리아 님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어쨌든 평소처럼 방긋방긋 웃는 카류 님을 보자 자신들도 기분이 더 좋아졌는지 폴짝 뛰면서 그분의 뒤를 따랐 다. 그리고 세렐리아 님은 카류 님에게로 뽀르르 뛰어가 아주 카류 님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카류 님이 저렇게 어른처럼 행동해도 몸은 자기 세렐리아 님보다 훨씬 작은 어린애에 불과했다. 세렐리아 님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카류 님은 그만 앞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완전히 세렐리아 님의 밑에 깔 려버린 채로 말이다. 꽈당! 조금 전 세렐리아 님이 넘어질 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큰 소리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이번엔 모두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카류 님 쪽으로 달려갔다. "카류! 카류야!!" "괜차나요. 쪼끔 아푸지만... 헉! 코피!!!" 아스트라한 님이 놀라 카류 님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에야말로 울지 않을 까 싶었지만 카류 님은 이번에도 아스트라한 님을 향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어 보였다. 그러나 금세 흘러내리는 코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카류 님. 괜찮으십니까. 여기..." 나는 손수건을 꺼내서 그 분의 코를 닦아 드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카류 님은 왠지 쑥스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이렇게 코피를 보면 울음을 터뜨려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닌가. 쑥스러워하는 표정이라니... "으흑... 카류..." "으...응. 누나. 갠차나. 그냥 코피인데 모..." "히잉... 난..." 세렐리아 님은 피를 흘리는 카류 님을 보고 놀랐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카류 님이 세렐리아 님을 달래보려 했지만 세렐리아 님은 금세 눈물을 터 뜨렸고 그 연쇄작용으로 옆에 있던 루블로프 님도 울어버리고 말았다. "윽? 누...누나, 형? 에구, 내가 울려버렸네..." 카류 님은 그런 그 분들을 보며 곤란해하며 그들을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빙그레 웃으면서 그들을 꼬옥 안았다. "형, 누나 너무 조아해. 그러니까 울지마? 아랐지?" 카류 님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기는 힘들어도 이것만은 분명히 알 것 같 다. 카류는 님이 형제들을 사랑하는 너무나 상냥한 분이라는 사실 말이다. ◆ ◆ ◆ ◆ ◆ ◆ ◆ 시원한 바람이 불러오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정원의 풀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부드럽게 내 코를 찔러왔다. 전생의 내가 살았던 대도시에서는 상상 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싱그럽고 향긋한 향기를 가진 바람이었다. 이제는 이런 생각을 해도 그렇게 우울한 기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내가 지금 기다 리고 있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손님들과 근 4년 동안 계속 함께 해 온 덕분 에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우울해지는 일은 없어진 것이다. "카류!" 어디선가 들리는 익숙하면서도 앙증맞은 목소리가 나를 상념에서 끄집어냈 다. "앗! 루브 형? 세라 누나!" 정원 입구에서 뛰어오고 있는 귀여운 아이들!! 그 아이들은 올해로 8살이 된 루브 형과 7살의 세라 누나였다. 그들은 둘 다 만날 때마다 점점 더 귀 여워지고 있는 것 같다. "혀어엉~~" 난 오랜만에 만난 그들이 너무 반가워서 짧은 다리라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브 형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약간 멀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서 나의 호위기사인 디트 경이 이 쪽을 바라 보며 살짝 웃고 있는 것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디트 경은 가끔씩 이렇게 어린애처럼 행동하는 나를 보게되면 홀로 흐뭇하게 웃곤 한다. 애들답지 않게 말썽도 안 피우고 의젓하게 행동하는 내가 편하기도 하겠지만, 역시 애들답게 어리광피우고 장난치는 귀여운 아이가 더 좋은 모양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 나를 위해 고생하는 그를 위해 이렇게 서비스로 귀여운 짓을 해 주곤 했다. "오늘은 모하고 놀까? 카류?" "카류! 루브 오빠! 우리 용사놀이 하자!" 세라 누나의 제안에 우리는 잔디 위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형과 누나 는 몇 백년 전에 세계를 구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이야기 속의 주인공을 따 라하는걸 굉장히 좋아했다. 짧은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가며 자신의 역할 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는 루브 형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가까이 있는 형의 머리를 싹싹 쓰다듬었다. "카류, 너! 그러지 말라고 내가 말했지? 난 이제 다 컸단 말이야! 쪼끄만 게 왜 자꾸 남의 머리를 쓰다듬는 거야!!" 루브 형이 화가 난 듯 내 손을 뿌리치고 투덜거렸다. 5살 때까지만 해도 내가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걸 칭찬 받았다고 생각하고 그렇 게 좋아해 놓고서는 이제서야 머리 쓰다듬는 게 어린애 취급한다는 것임을 깨달았나보다. "난 루브 형의 빨간 머리가 너무너무 멋지게 보여서 그런 것뿐인걸! 난 정 말 형처럼 되고 싶어." "음... 내가 원래 좀 멋지지. 에헷. 카류 너도 굉장히 멋져!" 원래 애들은 쪼끔만 치켜줘도 저렇게 넘어간다. 에구, 깜찍한 루브 형! 앞 으로도 내가 많이 귀여워해 줄게!! "카류야!! 나는? 나는?" 큭! 세라 누나가 내게 그 공포스런 은색 눈동자를 들이밀고 말했다. 물론 얼굴도 귀엽고 머리색깔도 반짝거려서 너무 예쁘지만 도대체 저 눈동자만 은 적응이 안 된다. 그래도 사실대로 말했다간 큰일이지. "세라 누나도 예뻐! 정말 예뻐!!! 마치 하늘나라의 여신 님이 내려오신 것 만 같아" "헤헤. 너두 여신 님 같이 예뻐. 카류!" "윽!! 누나. 남자한텐 그건 칭찬이 아니야." "왜?" "예쁘다는 건 여자들에게 쓰는 말이잖아. 보통 남자들은 그런 말 안 좋아 하는걸?" "그런 거야? 루브 오빠?" "물론! 남자는 멋져야 하는 거야!!" "그렇지만 카류는 너무 예쁜데...어쩌지?" 세라 누나는 루브 형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헉! 솔직히 내가 상당히 귀엽긴 해도 어디가 예쁘다는 거야? "음...그래도 남자는 멋있다고 하는 거야." 루브 형은 뭔가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비장하게 세라 누나에게 말했다. 나는 도저히 루브 형의 그 깜찍함을 참지 못하고 기습적으로 형을 콱 껴안 아 버리고 말았다. "우악!! 카류!! 왜 갑자기 껴안는 거야?" "형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뭐야? 누가 귀엽다는 거야? 엉?" 내가 나도 모르게 진심을 토로하자 루브 형이 빽 화를 냈다. 언제 스스로 가 남자라는 것을 자각했는지(?) 최근 들어서는 귀엽다고 하면 저렇게 화 를 내는 것이다. "아... 음... 그건 난 왠지 귀엽다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 그래서 좋 아하는 사람만 보면 귀엽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져. 지금도 형이 너무너무 좋아서 한 말이야." "왜 하필 귀엽다야?" "하하, 글쎄. 어쨌든 내가 하는 귀엽다는 말은 무조건 좋은 말이야!" "카류는 한번씩 좀 이상해." "에이, 세라 누나. 사람마다 개성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크흑!! 누나도 정 말 귀여워!!" 난 마지막으로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 세라 누나를 꼬옥 껴안아 줬다. 이렇게 귀엽고 순진한 아이들 사이에 끼여 매일 매일 생활할 수 있다니, 정말 난 너무 운이 좋아! 한참 세라 누나에게 매달려 마구 얼굴을 비비고 있다가 우리와 쪼끔 떨어 진 곳에 루브 형과 세라 누나의 호위기사들과 나의 호위기사인 디트 경이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이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언뜻 보여 나는 슬그머니 누나에게서 떨어졌다. 솔직히 겨우 4살 짜리 어린애가 자신의 형 이랑 누나를 보고 귀엽다고 들러붙어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이 평범한 장면 은 아니지 않은가. 디트 경이나 다른 사람들이 내 앞에서 직접적으로 별다 른 말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나를 이상한 꼬맹이라고 생각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좀 자중해야겠다고 생각 은 하지만 눈앞에서 귀엽게 눈동자를 반짝이는 형제들을 보노라면 금세 그 결심이 와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카류! 루브 오빠! 세라!" 갑자기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정원 입구에서부터 상당히 낮이 익은 알록달록한 아이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뛰어오고 있었다. "캬하하!! 카류. 봐라? 내가 오늘 꼭 올 거라고 했지? 어때?" "나도, 나도!! 헤헤헤..." 이런... 오늘 여기서 루브 형들이랑 놀 거라고 얘기했더니 저렇게 아르멘 님께 떼써서 억지로 나왔나보다. 끄응... 나중에 아르멘 님께 눈총 받을지도 모르겠구나. 지금 내 앞에서 방실방실 웃고 있는 아이들은 제1후궁이신 아르멘 님의 아 이들로 올해로 7살인 제3공주 블라디미르 누나와 6살인 제4왕자 키예프 형 이었다. 그들 역시 컬러풀한 머리색을 가지고 있는데 블라디미르 누나는 주황색의 머리를, 키예프 형은 보라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 참으로 웃긴 것은 아르멘 님의 머리색이 파란색인데 국왕의 머리색 이 주황색이라 이 둘이 섞이면 저렇게 주황색머리, 파란색머리, 그리고 키 예프 형처럼 보라색 머리를 가진 아이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루브 형의 경 우도 국왕의 주황색 머리와 에렌시아 님의 은색 머리색이 섞여 그렇게 새 빨간 머리색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한다. 사람 머리색이 무슨 물감도 아닌 데 저렇게 서로 섞여서 저렇게 중간색(?)이 나온단 말인가. "카류...나도 왔어.." 블라디미르 누나와 키예프 형의 뒤에서 자그마한 꼬마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크흑!!!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여기저기를 꽉 꽉 깨물어주고 싶은 그 깜찍하고 귀엽디 귀여운 꼬맹이는 역시 제1후궁의 소실인 5살의 제5왕자 카이세리온 형이었다. 분명 말괄량이 블라디미르 누 나가 억지로 카이세리온 형을 끌어들인 것이리라. 카이세리온 형은 파란물 감을 쏟아놓은 것 같은 새파란 머리와 눈동자를 하고 있어서 언뜻 보면 약 간 차가워 보이는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은 형제들 중 가장 여리고 온순해 서 억지를 써서 나온다거나 하는 일을 할만큼 담이 크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황제의 6명의 아이들 중 같은 색깔의 머리를 가진 인간은 하 나도 없잖아!! 참고로 말하자면 나의 어머니는 제2후궁으로 아스트라한이라는 이름을 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가 나의 어머니를 엄청 총애하고 있어서 제2후 궁이건만 왕궁에서 그녀의 그 입지가 상당히 크다. 솔직히 우리 어머니가 황제의 처와 첩 중에서 가장 아름답긴 하다. 나도 처음 어머니를 보았을 때 굉장히 감탄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나의 아버지인 국왕은 왕비인 에렌시아 님과 제1 후궁 아르멘 님은 거의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우리 어 머님의 처소인 땅의 궁에만 들락거리시고 있었다. 저런 나쁜 아버지 같으니!! ....그러나 솔직히 할렘(?)이라니 몹시 부럽다. "전부 다 모였네. 인원수도 6명으로 딱 맞으니 용사놀이하기 좋겠네. 이번 에도 내가 마왕 할까?" 나는 형과 누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만 다들 사악한 마왕 역은 하기 싫어한다. 그래서 가장 어린 내가 항상 마왕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 이다. 이것 역시 사람들에게 상당히 이상하게 비춰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 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쓰다가는 제명에 못 죽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넘어가고 있는 실정이었다. "좋아! 카류 넌 사악한 마왕이고, 그럼 나 블라디미르는 아름다운 엘프 마 법사 이덴 님이시다!!" "미르!! 누구 맘대로? 이덴 님은 나 세렐리아가 더 어울려!! 넌 마검사 카 뮤리안으로 해!" "세라!! 나도 이번엔 이덴 님으로 해보고싶다고!!! 왜 맨날 나만 남자 역을 시키는 거야?" "그야 용사 님 파티엔 여자가 하나밖에 없고 미르 넌 남자 같기 때문이 지!" "뭐야, 루브 오빠!!! 나도 여자 역 할거야!!" "네가 그런 고상한 역을 어떻게 한다는 거야? 절~대로 안 어울려!! 절대, 절대!" "미르 누나.... 루브 형... 진정해...." "넌 조용히 해!! 카이!!" 음! 왁자지껄하군. 보통 어머니도 다르고 살아가는 공간도 다른 왕족의 아 이들이 이런 식으로 모이는 것은 흔치 않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좋아하는 내가 이 궁 저 궁 돌아다니면서 아이들의 호감을 얻어뒀었고, 또 어떻게 아이들을 다뤄야 하는지도 잘 알았기 때문에 형제들과 굉장히 사이가 좋아 져 있었다. 그리고 바야흐로 형제들이 직접 나를 찾아오는 지경에까지 이 른 것이다. 아아... 귀여운 것들. 아닌게 아니라 형과 누나들은 왕자와 공주여서 그런지 하나같이 깜찍한 미모를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저들이 모여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귀여운 형제들. 언제까지나 그들과 행복하게 살고 싶다. ◆ ◆ ◆ ◆ ◆ ◆ ◆ 시간은 유수같이 흘러 카류 님도 어느새 4살이 되었다. 그분의 총명함은 이미 전 왕실에 널리 퍼져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제6왕자가 너무 똑똑하면 왕위 계승에서 내분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할 수 없었다. 현재 하만 국왕폐하께서 왕위를 물려받으실 때도 뛰어난 동 생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날 뻔했을 정도로 문제가 많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직 카류 님은 4살밖에 안된 어린아이니 그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 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전하들과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기에 더더욱 그랬다. 카류 님이 형제들에게 보이는 애정 행동이 보통 어린아이들과는 조금... 상당히 달랐지만 말이다. 나무와 풀들이 그 언제보다도 새파란 아름다움을 자랑하던 여름 날, 카류 님은 루블로프 전하와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땅의 궁에 마련된 정원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원 한쪽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새삼 주위의 아 름다운 풍경에 감탄이라도 했는지 나무나 풀밭을 흐뭇한 표정으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린아이라면 아름다운 풀밭을 보고 감상을 하기보다는 그 위를 뛰어다니는 것이 정상일텐데 말이다. "카류리드!" 멀리 정원의 입구 쪽에서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이 오고 있었다. 카류 님은 오랜만에 만나게 된 그들이 너무 반가웠던지 짧은 다리로 쪼르르 루 블리프 님께 뛰어가 찰싹 달라붙어 방긋방긋 웃었다. 저렇게 보면 정말 어린아이인데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배여 나왔다. 매사에 너무 어른스러워 단 한번도 손이 가는 일이 없었을 정도인 카류 님이다 보 니 가끔씩 보이는 어린아이 같은 행동에 괜히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세 분은 잔디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보아하니 언제나 하던 용사놀이라도 시작할 모양이었다.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카류 님은 곁에 앉아 귀엽게 이쪽저쪽으로 손짓을 하며 말하고 있는 루블로프 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손을 들어 루블로프 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어째서 자신의 형 에게 하는 애정 표현이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표현되는 지 모르겠다. 루블로프 님이 괜히 화를 내자 카류 님은 슬그머니 그 분의 머리에서 손을 치웠다. 그러나 금세 다시 흥분해서는 루블로프 님을 껴안아버렸다. "우악!! 카류!! 왜 갑자기 껴안는 거야?" "형이 너무너무 귀여워서!!" "뭐야? 누가 귀엽다는 거야? 엉?" "아... 음... 그건 난 왠지 귀엽다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더라고. 그래서 좋 아하는 사람만 보면 귀엽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져. 지금도 형이 너무너무 좋아서 한 말이야." "왜 하필 귀엽다야?" "하하, 글쎄. 어쨌든 내가 하는 귀엽다는 말은 무조건 좋은 말이야!" "카류는 한번씩 좀 이상해." "에이, 세라 누나. 사람마다 개성이란 게 있는 법이라고. 크흑!! 누나도 정 말 귀여워!!" 카류 님은 자신보다 4살이나 많은 루블로프 님을 교묘하게 살살 달래어 넘 어가더니 곧 세렐리아 님까지 귀엽다면서 껴안았다. 대체 저 분은 뭘 생각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저런 말이나 행동을 대체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 겠다. 카류 님의 어머니인 아스트라한 님은 카류 님을 안아주기는커녕 머 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조차 거의 하지 않으시는데 말이다. 문득 옆의 루블로프 님과 세렐리아 님의 호위기사들이 그 광경을 보며 이 상한 표정이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을 다잡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제껏 나도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으리라. 그러는 도중 아르멘 님의 왕자님과 공주님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아마 카류 님과 놀고싶어 떼를 쓰고 온 것이리라. 그분들은 옹기종기 모여 용사놀이를 하려는 듯했다. 저 인원이 모이면 카 류 님은 언제나 마왕이 되었다. 악역이기 때문에 모두 그것을 하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른 전하들이 카류 님에게 그것을 강요하 는 것은 아니었다. 마치, '그래 내가 나쁜 역을 해줄 테니 놀자꾸나' 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카류 님은 항상 자신이 먼저 마왕 역을 하기를 자청했 다. 카류 님은 잔디에 둘러앉아 장난을 치는 자신의 형제들을 천천히 둘러 보다가 곧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카류 님이 굉장히 똑똑하고 총명한 분으로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이상한 분이라는 것 하나만은 정말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 같 다. Part. 4 - 생일파티 내일은 나의 5번째 생일이다. 그래서 국왕이 나의 5번째 생일을 맞아 성대 한 파티를 열라고 명령했다. 아, 내가 왜 아버지가 아니라 국왕이라는 호칭을 쓰느냐고 묻는다면 그가 전혀 나의 아버지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든 지금 생 의 부모님들을 나의 부모라는 것을 인식하려고 노력했지만 아버지만은 정 말 그것이 힘들었다. 아버지는 나를 거의 만나러 오지 못한다. 왕이라면 놀 고먹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평소 굉장히 할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할 일이 없어도 나를 만나러 오지 않는다. 시간만 나 면 오로지 땅의 궁에 있는 우리 어머니의 처소에만 들락거리면서 같은 궁 에 있는 나는 만날 생각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저런 싸가지를 -이런 말은 너무 심한가? 그래도 정말 너무하잖아- 내가 좋아할 수 있을 리가 있겠는 가. 게다가 원래부터 한나라의 국왕이 왕자, 공주들을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일은 거의 없는 모양이었다. 지금 아버지가 우리들을 찾지 않는 것을 당연 하게 생각하는 주위사람들을 보노라면 말이다. 한마디로 왕족의 성격을 정 의하자면 정이 없는 가족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니까 왕족이 자기 아버지를 암살하고, 형제끼리 싸우고 그러지. 과거 아버지가 왕위를 물려받을 때도 내전을 일어날 뻔했을 정도로 트러블이 있 었다지 않는가. 라이벌이었던 아버지의 동생이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조용히 넘어갔다고 하지만 말이다. 지금 나의 형이랑 누나들만 해도 내가 없었다면 서로 각자의 궁에서만 생 활하면서 얼굴도 거의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 고 환생을 한 것은 이 왕실의 축복인 것이야! 내가 아이를 좋아해서 여기 저기 들쑤시고 다닌 덕분에 우리 형제자매가 우애는 굉장히 돈독하지 않겠 어? 음? 말이 상당히 많이 샜군. 어쨌든 국왕의 명령으로 나의 5번째 생일을 맞아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는 중이다. 이건 국왕이 날 사랑해서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에게 푹 빠져있기 때문이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성내의 모든 사람들은 몹시 분주했다. 그리고 나도 굉장히 분주했다. 왕자가 무슨 일이 있냐고? 모르는 소리. 할 일은 굉장히 많다. 매일같이 향수를 들이부은 욕탕에서 피부관리하고, 머 리카락에 윤기가 흐르게 하려고 -난 어머니 닮아서 안 발라도 윤기가 흐른 단 말이다!!- 온갖 향료를 쳐발라 댄다. 그리고 파티에 나갈 때 입을 수백 벌이 넘는 옷과 장신구들을 입어보고 맞춰보고...... 오 마이 갓!!!! 내가 성인 군자라 백성을 위해 사치를 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 다. 솔직히 나도 처음엔 여러 가지 멋진 옷과 장식품이 내 것이라는 사실 에 약간 헬렐레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밀려드는 사치품에 나는 점점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이건 정말 해도해도 너 무하다. 이렇게까지 사치스러운 짓을 하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그런 파티에 나가기 위해 몸단장하는 건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그래 도 이건 정말 도가 넘는단 말이다!! 원래 전생의 난 단돈 600원이 아까워 좌석버스 타길 두려워하던 소심한 중 산층의 시민일 뿐이었다. 19년 동안이나 서민으로 살아온 경력을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지금 이 꼴을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었다. 문득 전생에 살던 세계에서도 돈 많은 놈들도 매일 이런 짓을 하고 지냈을 거라고 생각 하니 더욱 열이 뻗쳐왔다. 나는 지금 도주 중이다. 또 내 옷을 맞추겠다고 재단사들이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들은 난 도저히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이제껏 맞춰 놓은 옷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냔 말야!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난 우리 깜찍한 블라디미르 누나랑 키예프 형, 카이세 리온 형이 있는 제1후궁 아르멘 님의 처소인 물의 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절대 파티 준비 때문에 며칠동안 그들을 못 봐서 그랬던 건 아니다. "카류 님. 돌아가시지요. 블라디미르 전하들도 파티 준비로 바쁘실 것입니 다. 게다가 카류 님은 아직 옷도 다 맞추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헉!!! 지금까지 맞춘 옷이 몇 개예요... 몇 개야? 20벌은 맞췄겠다. 파티에 갈 옷이 하나면 됐지, 대체 몇 벌이나 맞출 심산인 거야? 그래!! 이미 재단 사들이 와 있을 테니 디트 경이 가서 옷 한 벌 맞춰! 그러면 되겠다! 난 그 동안 미르 누나들이랑 놀고 있을게! 응?" 난 디트 경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물의 궁으로 발걸음을 빨리 했다. 디트 경은 한숨을 쉬더니 계속 나를 따라왔다. 음... 그러고 보면 예전부터 고민 아닌 고민이 있는데, 그건 존댓말 문제였 다. 아직 5년이나 지났건만 나는 여전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보면 자동으로 존댓말이 나왔던 것이었다. 내가 모든 사람한테 반말을 쓴다면 익숙해 질 수도 있겠건만, 내가 자주 만나는 나의 어머니나 다른 내 형과 누나의 어머니, 그리고 나이가 많은 고위 귀족들에게는 존댓말을 써야했다. 귀족들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은 아 직 이 나라가 중앙 집권제 국가가 아니라 영주들의 힘이 강해서 그런 모양 이다. 그렇지 않아도 바른 생활 청소년인 나에게 사람을 골라가며 반말을 하라니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내 곁에 항상 머물러 있는 호위기사 디트 경 때문 에 많이 나아지기도 했지만... 그는 내가 반말을 써야하는 어른들 중 가장 자주 부대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유유히 물의 궁으로 향하는 중, 그러니까 내가 막 땅의 궁에서 나가려고 코너를 돌려는 찰나였다. "꺄하하하! 나처럼 쟁반 들고 뛸 수 없지? 난 먼저 가서 씻고 쉬어야.....꺄 악!!" "앗!!" 챙그랑~~!!!! 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장애물에 그만 중심을 잃고 뒤로 넘어지고 말았 다. 그리고 내 주변으로 유리로 된 비싸 보이는 찻잔과 주전자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시녀가 복도에서 컵과 그릇들을 가지 고 장난을 치며 뛰어가다가 나를 보지 못하고 이렇게 부딪혀 버렸던 것이 다. 어머니도 지금 땅의 궁 내에 없고 나도 재단사에게 있다고 생각해서였 는지 언제나 조용히 사뿐사뿐 다녀야 할 곳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앞도 보지 않고 시끄럽게 뛰어다닌 모양이다. 덕분에 시녀와 부딪힌 나는 그녀 가 들고 있던 주전자에 담겨 있는 뜨거운 물을 머리에서부터 몽땅 뒤집어 써야 했다. "우악! 뜨거워~~! 이게 뭐야!! 앞을 잘 보고 다녀야 할거 아냐! 아... 뜨거 워... 나 화상 입은 거 아냐?" 난 울컥 화가 나서 신경질을 부렸다. 그 주전자 안의 물은 갓 끓여 나왔는 지 무척 뜨거웠기 때문이다. 디트 경이 당황해서 나를 부축해 자리에서 일 으켰다. "카류 님!! 괜찮으십니까?" "몰라!! 뜨거워! 이~~!!" 내가 욕을 알았다면 그 시녀를 향해서 마구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그러나 왕성 안에서만 자란 나는 이 나라의 욕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나 는 '이~~!!' 다음으로 욕을 이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안타까운 순간(?)이 었다. "죄...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 니다!! 죄송합니다! 제발...제발 용서해주세요!! 전하!!" 난 시녀에게 더 신경질을 부리려고 했다. 하지만 새파랗게 질려 무릎을 꿇 고 머리를 땅에 쿵쿵 찍으면서 애걸복걸하는 시녀가 보이자 갑자기 화가 팍 식어버렸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일에 너무 화를 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왕족에게 해를 입힌 것이니 보통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 었을 것이다. 아마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겠지. 그래... 아까 욕을 하지 않아 서 -실은 못한 거지만- 정말 다행이다. "으음... 그러니까...아하하...내가 엄살이 쫌 심해서 말이야. 봐, 괜찮다고. 이 렇게 팔팔하잖...으윽?!" 나는 멀쩡한걸 보여주려고 팔을 휘둘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팔에서 몰려오 는 작은 통증에 고개를 돌려 팔을 쳐다보았다. 팔에는 조그마한 유리에 박 혀서 피가 쫄쫄 나고 있었다. 조금 전에 유리컵이 깨지면서 박힌 모양인데 뒤집어 쓴 물이 너무 뜨거워서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헛! 카류 님! 이런, 천한 계집이 감히 카류 님께 상처를 입히다니! 거기 아무도 없느냐!! 당장 이 년을 끌고 가라!" 내가 잠시 팔을 쳐다보고 있는 사이 디트 경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 헉!! 디트 경! 겨우 이 정도 갖고 사생결단 낼 것 같은 분위기 낼 필요 없 잖아! 어디서 나타났는지 번개같이 다른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살려달라 고 울고 있는 시녀를 끌고 가려고 했다. 나는 굉장히 당황했다. 왕족에게 상처를 입힌 죄로 끌려가는 거니 이대로 끌려가면 분명히 엄청 고생할 것 이다. 어쩌면 처형당할지도? 여긴 봉건국가잖아! "돼...됐어요! 괜찮다고요. 겨우 이 정도 갖고 호들갑 떨 거 없잖아요, 디트 경? 저들 빨리 물러가라고 하세요!" 당황해서 난 마구 존댓말을 쏟아 부으며 허둥지둥했다. "카류 님!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그리고 카류 님은 왕실의 중요하신 분 입니다. 왕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를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어서 저 년을 끌고 가라!!!" "디...디트 경!"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전하!!!" 나는 디트 경의 박력에 아주 잠시 할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문득 내 앞에 서 울부짖는 시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처형당한다면? 아마 나처럼 어디선가 환생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 한다면 솔직히 그녀가 죽는다는 사실에 그렇게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환생을 전제로 한다면 죽음이라는 건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 니게 된다. 죽음은 그저 삶과 삶의 경계선일 뿐. 죽음은 절망의 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환생이 있는 줄 모르는 그녀는 이대로 자신이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굉장히 두려워할 것이다. 나 역시 전생에 그렇게 죽음을 무서워하며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환생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렇게 아 무 것도 아닌 일에도 그냥 죽어버리도록 그녀를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이 다. "제발...제발 살려주세요. 다시는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제발..." 시녀는 병사들에 의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마구 발 버둥을 쳤지만 훈련된 병사들에게 연약한 소녀의 발버둥이 통할 리가 없었 다. 안돼!! 이대로 두면 진짜 끌려가겠다. 약간 부끄러워서 이러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뭐 어때. 급하기도 하고, 어차피 권력이라는 건 쓰라고 있는 게 아니겠어? "시끄럽다!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나는 제6왕자 카류리드 드 크레 티야 아르윈이다!! 겨우 이 정도 상처에 이렇게 난리를 피워야만 할 정도 로 내가 약해 보였단 말이야?! 내가 그 정도로 나약하고 형편없어 보였나 보지?" 난 당당한 목소리로 괜히 눈까지 부라려가며 그들에게 소리질렀다. 쪼끄만 게 눈 부라려 봤자 겠지만 소리 지른 것이 조금 통했는지 병사들이 약간 주춤거렸다. 아자!! 이 노선으로 나가자! "그...그런...카류 님! 그러나....." "시끄럽다고 했지!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저 시녀를 풀어주지 못해?! 지금 내 말을 우습게 여기는 건가? 말해봐! 디트리온 경!!" "......아닙니다! 그 시녀를 풀어주어라." 크하하하!! 이겼다. 그런데 역시 쑥스럽구먼. 어쨌든 잘 풀려서 다행이다. 이런 일이 궁내에 알려지면 저 시녀한테 좋지 않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함구령이라도 내려야겠다. "지금 있었던 일은 무조건 잊어라! 만약 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진 다면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네!" "네!" "너도 그만 돌아가라. 그리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라." "아...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시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했다. 쩝. 그녀가 그렇게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닌데... 역시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 야. "카류 님... 옷을 말리고 상처를 치료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응? 아...됐어. 치료는 무슨. 음... 그래도 일단 피를 씻고 싶군. 그래! 이 근 처에 우물이 있었지!" "네? 하지만 거긴 시녀들이 설거지하고 빨래를 하는 곳입니다. 제가 곧 목 욕준비를 하도록 명령을 하겠..." "됐어. 방금 뒤집어 쓴 건 깨끗한 물이었고, 뜨거워서 찬물에 팔이나 씻고 싶을 뿐이니까. 어서 가자~~!! 디트 경." 나는 빙긋 웃으면서 디트 경을 이끌었다. 디트 경은 방금 까지만 해도 마 구 화를 내다가 갑자기 이렇게 방긋방긋 웃으면서 살갑게 대하는 나의 행 동에 적응이 힘들었는지 디트 경은 말없이 나의 손에 이끌려 우물가로 걸 어갔다. 우물가엔 많은 시녀들이 왁자지껄 일을 하고 있었는데, 내가 그곳으로 들 어서자 모두가 일을 멈추고 내 쪽으로 쫘악 고개를 숙였다. 이런, 내가 폐가 되는군. "괜찮아... 모두 하던 일 계속하도록. 잠시 씻으러 왔을 뿐이니." "저...전하. 목욕 준비라면 저희들이 곧 하겠사오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 오." 가장 높아 보이는 시녀가 나에게 다가와 황송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겨우 팔을 조금 씻는 것뿐인데 그런 귀찮은 짓까지 할 필요 있나. "됐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다. 어서 할 일을 하라하지 않았나! 지금 게으름이라도 피우자는 건가?" 나의 호통에 시녀들이 부리나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 들어 이 버전을 자주 쓰는군. 하지만 좀 쑥스럽긴 해도 역시 이게 약 발이 가장 잘 듣는단 말이야. 그럼 난 씻어볼까나. 우물 주위에는 이미 물을 퍼담아 놓은 물통이 잔뜩 있었다. 그리고 우물 주위엔 두레박뿐만 아니라 펌프 같은 것도 몇 개 눈에 뜨였다. 오오... 펌프가 있다니 이 곳도 그렇게 미개하지는 않은 것인가. 그러나 시녀가 펌프를 사용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문득 한국의 달동네에 있던 그것과 상당히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에서 이런 걸 사용한다는 것은 역시 미개한 것인가. 어쨌든 나는 남이 애써 퍼놓은 물을 쓰기도 뭐하고 또 펌프를 사용해 보고 싶기도 해서 펌프를 사용해 새로 물을 뜨려했다. "카류 전하! 옆에 퍼놓은 물을 쓰십시오. 전하께서 일부러 그러시지 않으셔 도.." 끄응... 디트 경이 오늘따라 참으로 귀찮게 구는군. 물론 나를 위한 것이지 만 말이다. "됐어. 남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이 정도는 내가 스스로 할 수 있어!" 난 부리부리 버전(?)으로 디트 경에게 그렇게 말하고 펌프를 사용해봤다. 오, 내 힘으로도 가능하군. 이거 재미있는데? 난 물을 2통 정도 퍼담아 봤다. 솔직히 살짝 피만 닦으려했던 것 뿐이라 그렇게 많이 필요도 없었지만 괜히 재미있어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카류?" 응? 이건 블라디미르 누나의 앙증맞은 -닭살이라 그러지 마라. 직접 들어 봐!! 얼마나 귀여운데!- 목소리가 아닌가!! "미르 누나? 여기서 뭐해?" "너에게 갈려고 했지. 근데 너야말로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미르 누나는 우물가에게 펌프질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귀엽게 고개를 갸 웃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누나의 천진스러운 웃음을 보고 싶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건......" 난 물통의 물을 손에 모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주고 싶어서!" 미르 누나를 향해 파앗 뿌려줬다. "윽! 이게?" 미르 누나는 내게로 파다닥 달려오더니 내게서 가장 먼 곳에 있는 물통을 점령하고 조그마한 두 손으로 물을 내게 마구 뿌려댔기 시작했다. 아우~~ 귀여운 것!! 미르 누나라면 이런 장난에 걸려들 줄 알았지! 흩어지는 물방울 속에서 살짝 틀어 올린 주황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함박 웃음을 짓는 미르 누나는 마치 장난스러운 불의 요정 같았다. "꺄하하하! 에잇!! 카류~~ 이것도 받아라!" 미르 누나는 내가 퍼담아 놓은 물통을 전부 물장난으로 쓴 다음 시녀들이 모아놓은 물통의 것도 쓰려고 했다. "이런, 미르 누나! 그건 안돼!!" "왜애?" 미르 누나는 한껏 물장난에 즐거워했다가 내가 제동을 걸자 약간 짜증이 났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런 얼굴도 굉~~~장히 귀여웠다. 아, 이 게 아니지. "그건 시녀들이 길어놓은 물인걸. 이제까지는 내가 길어둔 걸로 썼지만 그 건 쓰면 안돼." "왜? 그런 게 어디 있어? 그냥 쓰면 되는 거지." 음... 어린애에게 이런걸 이해시키는데는 역시 무리가 있겠지? 안되겠다. 여 기서 벗어나야지. "누나! 우리 그만 가자. 내가 얼마 전에 또 이야기책 읽었거든. 그거 이야 기 해줄게. 응?" "무슨 얘긴데?" "응! 그게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이야기인데... 어쨌든 가자! 가을이라 날씨 가 조금 쌀쌀하니까 이대로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안에 들어가서 물기를 닦고 나면 내가 전부 얘기해 줄게." "좋았어~~ 가자~~!! 꺄하하하." 미르 누나는 내 말에 팔짝팔짝 뛰면서 기뻐하다가 쪼르르 땅의 궁 안으로 들어갔다. 미르 누나는 내가 해주는 이야기를 굉장히 좋아한다. 난 전생에 알고 있었었던 동화를 왕궁도서관의 이야기책으로 읽었다는 미명하에 형이 나 누나들에게 이야기해 주곤 했는데, 그것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비 단 미르 누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형제들이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다 고 하면 저렇듯 기뻐하는 것이다. "카류야! 어서어서!!" 내가 빨리 따라 들어오지 않으니까 미르 누나는 궁에서 다시 뾰로로 뛰어 나와 양팔을 파닥파닥 휘저으며 소리쳤다. 크헉!! 블라디미르 누나! 대체 누구 누나기에 저렇게 귀여울까! 들어가면 꽉꽉 껴안아줘야지! 난 미르 누나의 뒷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다 가 주위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녀들이 보이자 약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으윽? 가만히 생각하니 옆의 시녀들한테 엄청 민폐를 끼쳤잖아. 문득 내가 한 짓을 돌아보니 너무 어린애처럼 생각 없이 행동한 것 같아 상당히 부끄러웠다. 진짜 어린애니까 어린애처럼 행동해도 상관없는 일이 지만 그래도 역시 19세의 정신연령을 가진 나로서는 그렇게 간단히 넘어가 기는 힘든 일이다. "모두들. 이런데서 장난쳐서 미안했어. 정말이야. 음... 다음부터는 안 그럴 게. 정말 미안!" 난 우물가에 있는 시녀들에게 약간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말했다. 뒤에서 뭐라고 웅성거리는 시녀들의 말이 들렸지만 너무 부끄러워서 재빨리 땅의 궁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으으.. 다음부터는 좀 조심해야지. 드디어 나의 생일이 찾아왔다. 나는 화려한 옷을 차려입고 어머니와, 물론 나의 호위기사인 디트 경과 무뚝뚝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인 어머니의 호위기사 레드라스 경도 함께 나란히 파티 장소로 향했다. 이번이 나의 5번째 생일파티라 옷을 조금 화려하게 입는 건 어쩔 수 없지 만 그래도 이 옷들은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온몸에 주렁주렁 달린 보석 들! 이거 다 팔면 멋진 집 서너 채는 너끈히 사겠다. 아아... 나는 걸어다니 는 돈이로구나. 의외로 이상한데서 소심한 나는 계속 속으로 궁시렁거리다가 문득 곁에서 사뿐사뿐 걸어가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나의 생일 파티에 가는 길인지라 평소보다 좀 더 신경을 써서 치 장을 했기에 과장 하나 안보태고 정말 눈이 녹아버릴 정도로 아름다워진 상태였다. 하얀 피부에 발가스름한 입술. 청초한 느낌이 들도록 배치된 눈, 코, 입과 글래머는 아니지만 균형 잡힌 매끈한 몸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윤기가 흐 르는 신비로운 청흑발. 이 아름다움은 정말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이 아버지라는 인간, 정말 부럽구나! 나도 어머니 같은 애인 하나 있었으면 소원이 없겠... 헉! 나 이러다 진짜 변태가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파티장 안으로 도착하자 모든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쫘악 시선을 옮겼다. 이런, 쪽팔리게... 어차피 어머니를 보는 것이지만 말이다. 수근거리는 모습을 보니 모두들 한층 아름다워진 어머니의 미모를 찬양(?) 하고 있는 듯 했다. 곧 대귀족들이 우리들의 곁으로 다가와 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고 여러 가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대화 내용이 새 로 나온 보석이라든지 사치품에 관한 내용들이라 난 괜히 짜증이 나기 시 작했다. 그래서 이 지겹고 아니꼬운 대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기 위해 어머니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디트 경과 함께 어머니의 곁을 떠났다. "역시 누나와 형들은 아직 안 온 모양이네..." 사람들에게서 떠난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형제들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나 그들은 아직 파티장에 오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리 나의 이 고성능 센서를 작동시켜도 그들의 머리카락 한 올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주인공은 파티의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소리가 있다. 그러나 나의 어 머니는 제2후궁이고, 나 또한 그녀의 아들이니 이 파티의 주인공이 나라고 는 하나 그들보다 일찍 파티에 나와있어야 했던 것이다. "음? 저게 뭐지?" 나는 사람들이 약간 몰려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곳엔 한 여자가 부채를 들고 웃고 있었고 남자가 그 밑에서 무릎을 꿇은 채 뭔가를 하고 있었다. 저 여자는... 자기가 최고인줄 아는 성격 더러운 노이슈만 백작부인이군. 그 런데 저 남자는 대체 누구지? 난 살며시 그곳으로 다가가서 상황을 살폈다. "호호... 역시 평민은 안 된다니까... 호호호..." 순간포착~! 나는 곁에서 어떤 귀족부인이 아주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하는 것을 빠르 게 캐치해 낼 수 있었다. 이런 파티장엔 꼭 저런 사람들이 한두 명씩은 있단 말이야!! 난 바로 그 상황을 추리해 낼 수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남자는 바닥에 떨어 진 구슬을 하나하나 줍고 있었다. 아마 저 백작부인이 평민출신이면서도 실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신흥 귀족을 창피주기 위해 일부러 그와 부딪히 고 난 다음 목걸이를 흘려 그것을 줍게 했으리라. 남자는 그것을 줍기 위 해 백작부인의 앞에서 무릎을 꿇어야할 테니까. 전생에 읽은 어떤 소설에 서 따르면 이런 일을 할 때는 보통은 손수건을 흘린다고 들었는데 저 아줌 마는 목걸이 줄을 터뜨려 구슬-사실은 보석이다-을 쫘르르 흘린 것이다. 정말 독한 아줌마가 아닐 수 없다! 내가 이대로 있을 순 없지! 정의의 사도가 나가신다!! 크하하하하!!! "응? 기사 님! 뭘 하시는 거예요? 구슬 줍기 놀이 하시나봐!! 와아~ 나도 끼워줘요!!" 내가 폴짝 뛰어 그 기사 곁으로 가서 같이 구슬을 주우려고 하자 나의 앞 에 선 백작부인은 크게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왕자를 자기 앞에 무릎 꿇게 했으니 크나큰 무례가 아닌가! 그녀는 쩔쩔 매면서 내 쪽으로 몸을 굽히며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니까 기사 분께서는 땅에 떨어진 저의 목걸이 구슬을 주워주시고 계셨답니다. 별일 아니오니 일어나세요." "헤에? 그럼 같이 주우면 되죠. 같이 주우면 훨씬 빨리 주울 수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기사 님 어서 주워요!!" 내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백작부인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전하!! 괜찮습니다. 솔직히 저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주울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니 그만 일어나 주십시오. 네?" "끄응... 그런 거예요? 알았어요. 하지만 기사 님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 요?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도움을 주시다니. 그렇죠? 노이슈만 백작부 인?" "아... 네에... 그분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랍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해 주셨으니 말이죠." "헤에... 그럼 어서 인사드리세요~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다른 사람에게 도 움을 받으면 꼭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대요." "예?" 백작부인은 순간 얼굴을 팍 찡그렸다가 다시 순간적으로 폈다. 오오~~! 정말 대단한 표정관리가 아닌가! "가...감사했습니다. 레이포드 경."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숙이고는 신음소리 내뱉듯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이 것이 소위 말하는 별꼴이라는 것이리라. 난 그 꼴을 보고 잠시 즐긴 뒤에 그 파란머리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기사 님! 기사 님은 평민인가요?" "...네. 저는 평민 출신으로 이번에 남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드리크 혼 레이포드라고 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렇군요. 레이포드 경. 평민출신이 이런 파티에 있다니....." "......" 레이포드 경은 얼굴이 약간 구겨졌다. 그리고 그 피드백작용(?)으로 노이슈 만 백작부인의 얼굴이 화사하게 밝아졌다. 이런! 이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얼른 다음 말을 이어야겠다. "굉장해요! 평민이 이런 데까지 올 수 있을 만큼의 신분이 되었다는 건 분 명 실력이 대단하기 때문이겠죠? 이야!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도 커서 꼭 레이포드 경처럼 되고 말겠어요! 나중에 저를 보시거든 꼬옥 아는 채 해주 셔야해요?" "...네.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내가 빠르게 다음 말을 뱉어내자 레이포드 경의 얼굴이 처음으로 약간 밝 아졌다. 그리고 백작부인의 얼굴은 꼭 폭탄 맞은 것처럼 완전히 구겨졌다. 우후후훗!! 통쾌하여라. 이젠 더 이상 그를 이런 식으로 괴롭히지 않겠지. 음...됐어!! 좋았어! 오늘도 좋은 일을 하나 했더니 기분이 좋구나! 원래 내 가 천성이 좀 착해서 말이야. 그렇게 한동안 스스로의 착함(?)에 도취되어 있는데 갑자기 정비인 에렌시 아 님과 제1후궁인 아르멘 님, 그리고 나의 깜찍스러운 형제들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가 잽싸게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국왕의 등장 을 알리는 소리도 아주 어렴풋~이 들려왔다. 나는 듣고 싶은 소리만 크게 들리는 좋은 성능의 귀를 가진 듯하다. 난 어머니와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내가 다 가가자 국왕은 거의 형식적으로 나에게 축하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바로 어머니에게 추파를 보냈다. 뭐, 부부사이니 추파라는 말은 안 맞는 소리지 만. 불가항력으로 국왕에게 어머니를 뺏겨(?)버린 나는 형과 누나들을 찾았 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아르멘 님 주위에 우리 귀여운 보라돌이 키예프 형이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응? 아르멘 님. 키옌 형은 어디에 갔어요?" "카류! 키옌 형이 오늘 많이 아파." "응, 카류. 보라돌이가 -내가 그렇게 불렀다가 모두에게 통용되고 말았다- 막 끙끙거리고 그랬다?" 카이세리온 형과 블라디미르 누나가 나에게 다가와 그렇게 칭얼거렸다. "정말?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건데??" "카류. 키옌은 감기에 걸렸단다. 그래서 오늘은 푹 쉬기로 했어요. 그러니 다음에 만나도록 하자. 알겠지? 생일축하의 인사는 다음에 받아도 되잖 니?" 아르멘 님이 온화한 얼굴로 나를 타일렀다. 겨우 이 딴 시시껄렁한 파티 때문에 아픈 아이를 혼자 누워있게 하다니! ...내 생일 파틴데. 어쨌든! 가엾은 우리 키옌 형~!! 기다려라! 내가 곧 가마!!! 그때 루블로프 형과 세렐리아 누나가 에렌시아 님과 함께 우리의 있는 곳 으로 다가왔다. "루브 형. 세라 누나. 보라돌이 형이 감기에 걸려서 굉장히 아프대. 우리 보라돌이 형에게 가야하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자 둘도 곧 광분(?)했다. "뭐? 보라돌이가 아프다고? 그럼 가봐야지! 지금 당장 가보자!!" "어떻게 해~. 많이 아픈 건가? 어서 가보자. 루브 오빠. 카류." 우리가 당장이라도 물의 궁으로 가려고 하자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이 곤란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만류했다. "자자. 키옌은 괜찮을 거예요. 의원께서 진찰하고 계시는걸? 모두 파티가 끝난 후에 함께 가보자꾸나. 알겠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는 지금 갈꺼예요!!" 세라 누나가 그렇게 말하자 모두 옳소, 옳소 하며 물의 궁으로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흠... 가만히 생각하니 이 파티의 주인공인 나와 모든 왕자와 공주가 빠진 다면 그것도 꽤 곤란하겠군. 일단 파티가 끝날 때까지는 붙어 있어야 하겠 는걸. 어차피 우리가 가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을 테고 의원이 보고있다 고 하니까. "그러면 우리 파티가 끝나고 나서 보라돌이 형을 보러가자. 파티에서 있었 던 재미있는 일을 보라돌이 형한테 말해주는 거야. 그러면 보라돌이 형도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나을지도 몰라. 음... 아, 그래! 난 아까 파티장에서 구슬 줍기 놀이(?) 한 거 보라돌이 형한테 말해줘야지." 내가 이렇게 말하자 형과 누나들은 금방 마음이 변했는지 수근거리기 시작 했다. "음...그럼... 난 미르 누나가 물을 먹다가 입으로 뿜은 거 키옌 형한테 알려 줘야겠다." "뭐야? 카이! 너 그거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했잖아!!" "그렇지만... 키옌 형한테 말해주면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일어날지도 몰라. 분명 재미있어 할거야. 미르 누나... 난 웃겼는걸..." "푸훗!! 너 정말 그런 짓을 한 거야? 미르? 음...그런데 난 보라돌이한테 무 슨 얘기를 해주지? 아직 별로 재미있는 일이 없었는데..." "음...나도...루브 오빠..." "그러니까 지금부터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녀야지! 보라돌이 형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만한 걸로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가보자. 형, 누나!" 난 그렇게 그들을 선동해서 파티장으로 그들을 몰아넣는데 성공했다. 키옌 형을 걱정해서 어떻게든 그를 웃기기 위한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니는 그들 의 순수함에 저절로 흐뭇한 웃음이 배어왔다. 역시 아이들이 좋아!!! 나의 파티는 그렇게 형과 누나들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찾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 ◆ ◆ ◆ ◆ ◆ ◆ 오늘은 카류 님의 5번째 생일이다. 나는 파티를 위해 예복으로 갈아입으려 고 카류 님에게서 잠시 떨어져 내게 배정된 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거 들었니?" "응? 뭘?" "카류리드 전하의 얘기 말이야!!" 한쪽 벽이 트인 정원이 보이는 복도를 걷고 있을 때 어디선가 시녀들의 말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들은 정원에 모여 잡담을 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왕족에 대한 이야기를 잡담의 화젯거리로 쓰다니... 하지만 카류 님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그녀들의 대화에 갑 자기 호기심이 생겼기에 일단 들어보고 나서 뒤의 행동을 결정하기로 했 다. 그녀들은 이야기에 빠졌는지 누가 있는지도 모르는 듯 했다. "휘렌 알지? 서빙이라면 눈감고도 하는 걔 말이야. 걔가 장난을 치다가 카 류리드 전하께 상처를 냈다는 게 아니겠어!" "뭐? 말도 안돼! 걔 식당에서 감자 깎고 있던걸. 왕족을 상처 입히고 그렇 게 멀쩡하게 살아있을 리가 있겠어?" 휘렌이라면... 분명 어제 카류 님에게 상처를 입혔던 시녀에 대한 이야기인 듯하다. 분명 그 일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는데 이렇게 함 부로 이야기를 하다니. "그래! 감자 깎고 있지? 세상에, 카류리드 전하께 뜨거운 물을 뒤집어 씌운 데다가 그 분의 팔에 피가 철철 날만큼 상처를 냈다지 뭐겠니. 그런데도 저렇게 멀쩡하게 주방에서 감자나 깎고 있더라고." "피가 철철?" "그래! 그건 내 눈으로도 직접 봤어! 내가 그날 우물가에 있었는데, 카류리 드 전하께서 물에 흠뻑 젖은 채로 왼쪽 팔이 약간 찢어져 하얀 옷이 붉게 물든 상태로 그곳에 나타났었던 거야. 그래서 시녀장님도 놀라서 그분께 다가가기도 했었지. 나는 그때만 해도 팔에 뭔가 음식이라도 떨어뜨려서 그렇게 옷이 더러워진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나중에 말을 듣고 보니 그 게 휘렌이 낸 상처에서 난 피가 아니겠어? 근데 피가 날 정도로 상처를 입 고도 울지도 않더라니까!! 오히려 할 일이나 하라고 호통치는 게 아니겠 어? 4살 짜리 어린애인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였다고." 시녀 한 명이 완전히 자신의 말에 도취된 듯 쉬지 않고 말을 뱉어냈다. "이제 5살이잖아." "4살이나 5살이나! 넌 5살 때 집에서 뭐했니?" "음...." "그거 나도 우물가에 있어서 봤어. 팔 쪽이 빨갛긴하더라. 근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던걸? 맞아, 그때 블라디미르 전하와 장난까지 치고 놀았잖 아!!" "들어봐, 들어봐! 어쨌든 그렇게 휘렌이 카류리드 전하께 상처를 입혀서 완 전히 죽게 생겼었대. 카류리드 전하는 처음에는 당황하고 그러더니, 곧 큰 소리로 말하셨다더라. 내가 이 딴 상처에 약해질 정도로 보잘 것 없어 보 였느냐! 라고 말이야!! 다 큰 기사들까지 그 위압감에 질려 뒷걸음질까지 쳤다지 뭐니!!! 그 왜 있잖아. 그랜드 님이랑 파이렌스 님!! 그 분들이었대! 그리고는 의연한 모습으로 이일에 대해선 비밀로 부치라고 명령한 뒤에, 휘렌에게 이렇게 말했대." 항상 온화하기만 했던 카류 님이 갑자기 큰 소리를 치는 바람에 병사들이 놀라긴 했지만 뒷걸음질을 친 적은 없는데 정말 과장이 심하군. 솔직히 카 류 님의 그 자그마한 몸집에서 위압감을 내뿜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른 시녀들은 그런 의문이 들지도 않는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 로 그 시녀에게 다음 말을 하라고 독촉했다. "뭐? 뭐라고 그랬는데?" "그대가 상처를 입지 않은 것이 천만 다행이오.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 으니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심하시오......라고 말이야!!!" 나는 그녀들의 말을 듣고 잠시 이마에 손을 얻었다. 그 휘렌이라는 시녀의 허풍이 보통 센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응? 진짜야?? 겨우 4살 짜리 어린애잖아! 걔 괜히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래!! 함구령을 내렸다며! 이 얘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을 마구 얘기하고 다니는 건데?" 이제서야 겨우 의문이 생겼는지 이야기를 듣던 시녀가 질문을 해왔다. 그 러나 이야기를 주도하던 시녀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휘렌이 나한테만 가르쳐준다고 말해줬다니깐. 걔가 얼~마나 자랑을 하는 지! 그리고 너희들도 봤잖아. 전하의 물을 뒤집어써서 후줄끈해진 모습과 팔에 난 상처를 말이야! 그러니 안 믿을래야 안 믿을 수가 없겠더라고." "진짜로? 저...정말일까? 확실히 카류 전하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르게 영 특하긴 했었지. 말도 엄청나게 빨리 시작했고, 우리 같은 것들한테도 잘해 주시고 말이야. 정말 손 갈 데가 없는 분이시지." "정말이라니까! 우리는 정말 행복한 거야. 다른 궁의 시녀들은 그렇게 고생 을 한다지 않니. 그래그래! 우물가에서 장난을 친 후에도 우리에게 미안하 다고 말하고 가셨던 거 너도 그곳에 있어서 알지?" "맞아!! 난 그때 내 귀를 의심했다니까. 고귀하신 왕족께서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다니 말야. 그것도 우리들 같은 시녀들에게!" "그리고 우리가 힘들여 길어놓은 물은 일부러 쓰지도 않았다는 게 아니겠 어. 세상에~~ 너무 대단하지?" 저마다 한마디씩 카류 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시녀들을 뒤로하며 나는 다시 원래 가려고 하던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문이 꽤나 과장이 되긴 했지만 이런 식이라면 일부러 그들을 처벌할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는 그녀들의 말을 들으면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그 상대가 시녀들이라고는 하나 내가 모시는 분에 대한 가식 없 는 칭찬을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생각 이상으로 카류 님을 아끼고 있었던 것일까. 그분은 4살. 지금까지의 전하의 행동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의문가는 점이 많다. 진실로 카류 님이 휘렌이라는 시녀를 지키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셨던 것 일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엔 그 분은 아직 너무 어리다. 게다가 이제 껏 그렇게 떠받들어지며 살아왔는데 약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란 말인가. 분명 어제 상처를 입힌 시녀를 끌고 가려 했을 때도 자신이 약해서 그렇게 난리를 피우는 것이라 생각해서 불만을 터뜨렸던 것이 어쩌다가 시녀를 구 해주는 방향으로 된 것일 뿐이리라. 게다가 그때 입은 상처도 작긴 하지만 그 나이엔 울음을 터뜨릴 만도 한 상처였지 않는가.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면서 괜히 무리를 했었지. 우물가에서도 자신이 물을 떠올 리겠다고 고집을 피웠지 않는가. 뭐든지 스스로 하려하는 그 고집, 남의 도 움은 받지 않겠다는 자존심. 어쩌면 그분은 좋은 장군감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블라디미르 님과의 물싸움 후에 시녀들에게 깍듯이 사과를 한 것 은? 정말 시녀들의 생각처럼 그녀들을 생각해서 미안하다고 생각되어져서 이렇 게 사과를 하고, 또 시녀가 끌려가는 것을 막았단 말인가? ........바보 같은 소리. 이제 4살이다. 한참이나 어린 시기인 것이다. 그저 시 녀들의 바보 같은 추측일 뿐. 나는 예복을 갈아입고 레드라스 경과 함께 카류 님과 아스트라한 님을 호 위하여 파티장으로 들어갔다. 파티장으로 들어서자마자 곧 많은 사람들이 웅성대며 아스트라한 님의 아름다움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 분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여전히 시간은 아스트라한 님의 아름다움을 빼앗아 가지 못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다가와 카류 님에게 축하의 인사를 한 다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 했다. 그러나 아스트라한 님 곁에 서 있던 카류 님은 그들의 대화에 실증 을 느끼시는 듯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그 분께 이런 대화는 아직 무리겠지. 곧 카류 님은 아스트라한 님과 다른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 자리를 빠져 나왔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카류 님이 4살 짜리가 맞는지 의심스럽다. 그런 자리에서 양해를 구할 줄도 알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제는 5살이로군. 멀리서 카류 님의 총명함을 칭찬하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지만 카류 님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다. 카류 님이 간 곳에서는 노이슈만 백작 부인이 평민출신의 귀족 기사인 레 이포드 경에게 모욕을 주고 있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내가 굳이 평민 출신의 기사를 그렇게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정말 뛰어난 무장이라는 것은 익히 들어 충분히 알고 있다. 북쪽 국경 근처에서 수십 년 동안 골머리를 앓고 있던 북방 민족들의 끈질긴 침략을 작은 병력 으로 맞서 단 1년만에 승리로 이끌고, 그들을 북쪽 끝의 험한 리투아니아 산맥과 오테사 산맥으로 쫓아버린 것은 분명 대단한 전과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더 높은 작위를 얻을 수도 있었음에도 워낙 청렴하고 강직한 성격 때 문에 귀족들에게 미움을 받아 남작의 지위로 겨우 구석의 작은 영지를 관 리하고 있었다. 전부터 노이슈만 백작부인이 레이포드 경을 유혹하려하고 있다는 소문을 곁으로 들은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가 상대를 해주지 않자 이런 장소에서 직접적으로 모욕을 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말 역겨운 장면이다. "음? 카류 님?" 나는 갑작스러운 카류 님의 행동에 놀라 그 분의 이름을 불렀다. 그 분이 갑자기 그곳으로 다가가더니 무릎을 굽히고 구슬을 주우려 하고 있던 것이 다. 이런!! 어서 말려야.... "아닙니다, 전하. 그러니까 기사 분께서는 땅에 떨어진 저의 목걸이 구슬을 주워주시고 계셨답니다. 별일 아니오니 일어나세요." "헤에? 그럼 같이 주우면 되죠. 같이 주우면 훨씬 빨리 주울 수 있을 것이 아니겠어요? 기사 님 어서 주워요!!" "전하!! 괜찮습니다. 솔직히 저에게 중요한 것도 아니었으니 주울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니 그만 일어나 주십시오. 네?" "끄응... 그런 거예요? 알았어요. 하지만 기사 님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네 요? 별것도 아닌 일에 이렇게 도움을 주시다니. 그렇죠? 노이슈만 백작부 인?" "아... 네에... 그분은 정말 친절하신 분이랍니다. 저를 위해 이렇게 까지 해 주셨으니 말이죠." "헤에... 그럼 어서 인사드리세요~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다른 사람에게 도 움을 받으면 꼭 감사의 인사를 해야 한대요." "예?" 카류 님의 말에 노이슈만 백작부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카류 님께서 직접 의도했던 일은 아니겠지만 노이슈만 백작부인의 의도는 전하의 행동으로 물거품으로 돌아갔고 말았다. 게다가 오히려 감사 의 인사를 해야한다니 정말 상황이 재미있게 되었는걸. "가...감사했습니다. 레이포드 경." 노이슈만 백작부인은 겨우 그 말을 내뱉었다. 그쯤에서 그만 내가 카류 님 곁으로 가려고 했을 때 그분이 레이포드 경을 향해 또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 님! 기사 님은 평민인가요?" "...네. 저는 평민 출신으로 이번에 남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드리크 혼 레이포드라고 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렇군요. 레이포드 경. 평민출신이 이런 파티에 있다니....." "......" 이런.... 다시 레이포드 경이 궁지에 몰리고 말았군. 카류 님이 악의는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레이포드 경에게는 참으로 안타까 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노이슈만 백작부인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이 보였 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정말 보기 안타깝구나. "굉장해요! 평민이 이런 데까지 올 수 있을 만큼의 신분이 되었다는 건 분 명 실력이 대단하기 때문이겠죠? 이야!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도 커서 꼭 레이포드 경처럼 되고 말겠어요! 나중에 저를 보시거든 꼬옥 아는 채 해주 셔야해요?" 그러나 카류 님은 누가 오해라도 하면 곤란하다는 듯 빠르게 나머지 말을 내뱉었다. 레이포드 경의 얼굴이 어느 정도 밝아진 것이 보였다. 그가 어지 간 일이 아니면 귀족의 앞에서 밝은 얼굴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로서 는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 물론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하." 레이포드 경은 약간 들뜬 듯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카류 님의 행동은 정말이지 이해하기가 힘들다. 그 분 이 5살이라는 것만 빼면 카류 님은 정말 성군일 것이다. 이 모든 행동이 우연에서 발생했다는 것이 정말 놀라울 따름이다. 상처를 참고 시녀를 궁지에서 구해내고, 우물가에서 자신이 한 잘못에 대 해 시녀들에게 사과를 하고, 이렇게 제 잘난 맛에 사는 귀족들에게 모욕 받는 충직한 기사를 구해주기도 하는... 아니, 이것뿐만이 아니라 그 전에도 가끔씩 이런 일이 있어왔었던 것을 내 눈으로 보아왔다. 혹시 정말 이 모든 것이 의도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는 정말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며 천한 시녀의 목숨이라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그런 분일지 도......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인가!! 이제 겨우 5살이 된 어린아이에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바라고 있지 않나. 분명 모든 것은 우연이다. 곧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류 님은 그 소리가 끝을 맺기도 전에 고개를 반짝 들더니 다른 형제분들을 찾았다. 그렇게도 자신의 형제들이 좋은 것일까. 항상 카류 님의 주위를 맴돌아왔던 나는 알고 있다. 카류 님 덕에 왕가의 아이들이 모두 친해지고 우애가 돈독해져 있다는 것을. 보통 살벌함이 감 도는 왕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아니, 평민 아이들이라도 이토 록 사이가 좋을 수가 있을까. 카류 님은 아르멘 님 곁으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키예프 전하 가 없는 것을 보고 약간 당황하며 아르멘 님께 키예프 전하의 일에 대해 물었다. 아르멘 님의 말에 따르면 그분은 감기에 걸려 파티에 참석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전하들은 무척이나 걱정을 했다. 정말이지 순수하게 병에 걸린 자신의 형 제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정말 이들이 왕가의 아 이들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순간이다. 그분들은 의기투합하여 키예프 님의 곁에 있겠다고 말했다. 키예프 님을 걱정하는 마음은 정말 갸륵해 보였지만, 여기서 모든 왕자와 공주가 사라 져 버린다면, 아니 카류 님이 나가버린다면 파티가 성립되지 않는다. 오늘 은 카류 님의 생일파티인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가려하는 무리의 중심엔 카류 님이 있었다.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은 당황하며 그들을 말렸다. 하지만 그들은 완전 히 막무가내로 그 말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어린애들이 6명이다. 이미 마음 을 정한 아이들의 마음을 돌리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리라. 그때 카류 님이 나섰다. "그러면 우리 파티가 끝나고 나서 보라돌이 형을 보러가자. 파티에서 있었 던 재미있는 일을 보라돌이 형한테 말해주는 거야. 그러면 보라돌이 형도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나을지도 몰라. 음... 아, 그래! 난 아까 파티장에서 구슬 줍기 놀이(?) 한 거 보라돌이 형한테 말해줘야지." 키류 님의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마음을 조금씩 바꾸는 듯했 다. 저렇게 쉽게 마음을 바꿀 수 있다니... 아니, 그 기발한 발상을 넘어 다른 전하들은 이미 카류 님을 자신들의 어머니보다 더 따르고 있는 것 같 이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재미있는 일을 찾아다녀야지! 보라돌이 형을 즐겁게 해줄 수 있을만한 걸로 말이야. 그러니까 어서 가보자. 형, 누나!" 카류 님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형제들을 파티장으로 이끌었다. "음... 카류는 어떻게 저렇게 똑똑한거죠? 우리가 곤란해하는 것을 보고 일 부러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 같아요." 카류 님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에렌시아 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왔 다. "그냥 마음이 바꾸신 것이겠죠. 이제 막 5살이 되신 분입니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렇지 않아요. 디트 경. 전에도 제가 바람의 궁에 모여든 아이들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조용히 나가주기도 했고, 그전에도 여러 가지로 곤란할 때마다 도움을 주곤 했었지요. 어쩌면 저 아이는 본능 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음...그것은..." "참 착한 아이예요. 그렇죠? 그 아이가 없었다면 저 아이들이 이렇듯 친해 지지 못했을 텐데 말이예요. 루브와 세라는 입을 열기만 하면 카류가 이랬 느니 저랬느니 한다니까요. 게다가 카류를 만나고 나서는 믿기지 않을 정 도로 밝아졌고요. 후후..." "맞아요, 에렌 님. 우리 미르와 키옌, 카이도 모두 카류와 놀고 싶어 안달 이랍니다. 이제 누가 누굴 키우는 지도 알 수 없을 정도예요."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은 카류 님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놀라운 일이다. 원래부터 상냥하신 분들이긴 하지만 어쩌면 자신의 아들의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를 저렇게 좋아하고 계시다니. 게다가 방금 카류라고 애칭을 부르시지 않았는가. 다른 소생의 아들에게 애칭이라 니... 아니, 지금까지의 카류 님의 행동으로 본다면 당연한 일일까. 그래, 확 실히 카류 님은 마치 자신의 친어머니 대하듯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께 도 살갑게 대하셨으므로. 카류 님...... 역시 파악하기 힘든 분이시다... 하아... Part. 5 - 마법 수업 내 나이도 벌써 10살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벌써 10년인가. 하지 만 10년 동안 나는 한번도 성 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다. 위험하대나 어쩐 대나.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19세의 나로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 에 없었다. "듣고 계십니까?" "예? 예!" 나의 앞에 선 가정교사의 주의 소리에 깜짝 놀라 대답했다. 태어나서 10년 째 되던 해, 나는 이제서야 드디어 무언가를 배울 수 있게 되었다. 이곳은 교육이 참 늦게 시작되는 것 같다. 전생의 내가 살던 토이렌 세계에서는 6살 때부터 벌써 유치원이다 뭐다 하며 이곳저곳에 보이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배움에 목말라 했던 것일까! 전생의 내 가 열심히 공부를 하는 축에 속하긴 했지만 그저 해야하니까 했던 거지 공 부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열나게 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현재 의 나는 수업을 받는 사실에 굉장한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니, 사실 난 공 부를 하고 싶을 정도로 심심했던 것이다. 이곳은 정말 한차례 발광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귀여운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매일같이 그들과 노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나라와 어떤 관계라고 했지요? 전하?" 가정교사가 이르나크의 세계지도 중 우리 나라인 아르윈의 동쪽에 붙어있 는 카르틴 왕국을 짚으면서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딴 생각을 하다가 질문을 받아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곧 수업 시작한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잠시나마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에 기뻐했다는 사실을 후회했다. 젠장, 너무 수준이 낮다. 저런걸 묻다니... 최소한 '이 나라와의 관계로 미루 어 볼 때 우리 나라에선 매년 어느 정도의 군사를 키워야 할까요?' 정도의 질문은 해야할 거... 크흑!! 그러고 보면 난 10살이 아닌가. 이런 젠장. 바 랄걸 바래야지. 그렇다고 여기서 잘난 척 전부 대답해버리면 역시 저놈은 천재야!! 라는 소문이 쫘아악 퍼질 거다. 그리고 내가 19살이 넘으면 어릴 때만 해도 똑 똑하던 놈이 왜 저렇게 멍청해진 거야 라는 말을 듣게 되겠지? 그건 안돼. 적당히 장단만 맞춰줘야지. 천재소리는 못 듣더라도 최소한 띨띨하다는 말 을 듣고는 못살아! "음... 안 좋은 관계요." "왜 그렇다고 했지요?" 민족감정 때문이지. 한국이 일본을 싫어하는 것처럼 카르틴 왕국도 예전에 아르윈 왕국을 침략하여 거의 대부분을 지배한 적이 있었다. 백여 년 전에 지금 이 상태까지 수복을 했다고는 하지만, 카르틴이 아르윈이었던 지방을 지배할 때 굉장히 잔인한 정치를 했었기 때문에 감정이 아주 나쁘다. 아르 윈 인을 전부 노예취급 했었다나? 아직도 국경지대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 배당했던 후손들은 지금도 카르틴이라면 이를 간다고 했지, 아마. 하지만 10살 짜리가 민족감정이 어쩌고저쩌고 쏼라 쏼라 말할 수는 없지. "잘 모르겠어요. 잊어버렸어요." 가정 교사가 내게 질문을 하기 전에 그것에 대해 이미 뭐라고 설명을 했었 지만,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얘기인데다가 딴 생각을 하느라고 제대로 듣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정도만 얘기하면 10살 짜리의 대답을 될런지 알 수가 없어서 선생님에겐 미안했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3살 때부터 심심할 때마다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정치, 지리 등에 대 한 책을 읽어왔으므로 -내가 얼마나 심심했으면 그딴 책을 읽었겠느냔 말 이다!- 이미 이르나크 세계의 정치적 상황은 거의 다 꿰고 있었다. 그리고 3대륙 중 우리 아르윈 왕국이 있는 크로시아 대륙의 정세에 대해서는 정확 하게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를 천재로 안보이게 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내가 그런 책을 읽고 있다는 걸 들통나면 몹시 곤란하므로 동화책을 읽는척하며 최대 한 몰래몰래 그 책들을 읽어나갔다. 그렇지만 이르나크 세계에서 4살 짜리 가 벌써 글을 읽는다는 건 너무나 대단한 일었기에 천재 안되기 작전은 자 꾸만 틀어져 나가고 있었다. 내가 아이들이 몇 살 때부터 글을 읽는지 알게 뭐냔 말이다! 크흑!! 4살 정 도면 충분히 글을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사실 나는 2살 때부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비 천재 노선(?)의 추 구를 위하여 2년이나 필사의 노력으로 그것을 철저히 숨겨왔다. 그리고 4 살이 되던 해에 이쯤이면 되겠지 싶어서 대놓고 동화책을 좀 읽었다가 결 국 또 천재소리를 듣고 말았던 것이다. 디트 경의 말에 따르면 보통 이곳의 귀족 아이들은 빨라도 7살은 되야 글 을 읽는다고 한다. 이곳 이르나크 세계의 교육수준은 상당히 낮은 듯하다. 귀족이 저 모양이 니 평민은 대체?? "역시 한눈을 파셨군요. 카류리드 전하. 그럼 벌을 받으셔야지요." 갑자기 교사의 말에 나는 퍼뜩 상념에서 벗어났다. "네?" 교사는 스윽 회초리를 집어들었다. 헉뚜!! 그걸로 날 패는 거야? 내가 이 나이에 종아리, 어쩌면 손바닥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회초리로 맞아야하나? 으아아! 나는 장장 12년 동안 학교 를 다니며 언제나 선생들 사이에 말 잘 듣는 똑똑한 모범생으로 그 위명을 날려왔기에 단 한번도 벌을 받은 적 따윈 없었단 말이다!! 아아! 그냥 확 대답해 버릴까보다!! ...하지만 역시 원시안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게 좋겠지? 크흑!! 괴 롭다. 나의 인생에 크나큰 오점을 남기게 되는 순간이로구나!! 그렇게 한동안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내 옆으로 한 소년이 슬그머니 다가 왔다. 응? 갑자기 왜 오는 거지? 아까부터 뒤쪽에 서 있기에 그냥 단순한 시종인줄 알았는데. 근데 그 소년이 내 옆에서 뒤로 돌아서더니 선생을 향 해 종아리를 슥 걷었다. 응? 설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 상황은?? 그러나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선생은 그 소년의 다리를 향해 회초리를 높이 들어올렸다 힘껏 내려쳤다. "안돼앳!!!!" 난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재빠르게 손을 날려 회초리를 막았다. 그렇다고 내가 날아오는 회초리를 기사들이 칼날 잡듯 멋지게 잡아낼 능력은 없는지 라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회초리를 맞고 말았다. 따악!!! "아윽!" 으힉! 아파라!! 저 선생이 누구 잡을 일 있나. 적당히 쳐야할 거 아냐, 적당 히! 세상에, 있는 힘없는 힘 다 짜내서 때린 모양이네. 아이고 내 손아~~! 내가 손을 부여잡고 끙끙거리자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멍하니 있던 교 사가 당황하며 나의 상처를 살폈다. 그리고 나도 덕분에 내 손의 상처를 살펴볼 수 있었다. 뻘겋게 줄이 섰구나. 나중에 피멍 들 거 같아. 내가 왜 손등으로 막았지? 손바닥이면 좀 덜 아팠을지도 모르는데!! "전하! 대체 왜 그러신 겁니까. 이런, 어서 나가서 의원을 모셔라!!" "기다려요... 아구구구... 이런... 우우우...." 교사는 당황했지만 그냥 나의 상태를 살폈다. "아우...아파.... 그런데 선생님! 수업시간에 한눈을 팔아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건 저이건만 왜 저 아이를 때리는 것이지요? 설마 '왕족의 몸에 상처 를 입힐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려는 건 아니겠죠? 말하겠는 데 전 그런 인정 못하니 당장 저 애 내보내세요. 제가 잘못한 것은 제가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저 아이를 때린다고 해서 안 하는 공부 를 열심히 할거 같은가요? 제가 맞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아픈 것도 아닌데? 제게 벌을 주시려면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을 떠올려보시는 게 어떤가요? 괜 히 죄 없는 애 괴롭히지 말고 말입니다!" 난 선생이 이런 일로 어린애를 그렇게 심하게 때리려고 하자 약간 신경질 이 나서 속사포처럼 따졌다. 솔직히 손이 좀 많이 아파서 더 신경질이 났 었던 것 같다. "네? 하...하지만 전하..." "뭐예요! 지금? 저 녀석을 때려죽일지도 모르니 이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 으면 공부하는 게 좋아 라고 협박이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뭐예요? 그렇 지 않다면 대체 그 벌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 의.도.를 알고 싶군 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교수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놀랍다는 표정으로 빙 그레 웃었다. "전하는 소문 이상으로 총명하신 분이군요. 말을 그렇게 조리 있게 말하시 는 것하며, 상황판단능력에, 남을 배려하시는 마음까지. 이 알카온은 정말 기쁩니다. 이렇게 총명하신 전하를 가르치게되어 정말이지 기쁠 따름이옵 니다. 앞으로는 시동은 들지 않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의 수업이 부족하다 느끼시더라도 꼭 집중하여 들어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이런! 내가 잠시 미쳐서 말을 너무 조리 있게 해버렸다. 루브 형이 10살이 었을 때의 어휘능력과 비교해본다면... 헉! 내가 미쳤지! 돌았지! 차라리 아 까 그냥 대답을 할걸 그랬다! 훨씬 나쁜 쪽으로 돌아가고 있잖아! 괜히 손 만 아프고 나의 의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잖아아아아~~!!! 하지만 시동이 안 맞게 되어 다행이긴 하다. 나의 다른 형제들도 저런 시 동을 데리고 있을까? 음... 형과 누나들에게 뒷공작(?)을 펼쳐 매맞는 시동 을 없애도록 해봐야겠다. 나는 노인네처럼 느긋하게 햇빛을 쬐면서 연무장의 한구석에 배치된 의자 에 앉아 기사들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한 햇빛이 나의 얼굴을 따 뜻하게 데워주고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연무장 중간에서 땀을 흘려가며 연습을 하던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서는 꾸벅꾸벅 인사를 했지만 내가 가 끔씩 루브형이 이곳에서 검 연습하는걸 구경왔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다 시 검 연습을 시작했다. "카류!! 너 진짜 왔어?" "나 루브 형에게 들었어! 넌 왜 쪼끄만 게 벌써부터 검을 배우려고 그러 니? 응?" "카류... 너 검 들 수 있어?" 내가 앉아 있는 쪽으로 루브 형과 키옌 형, 그리고 카이 형이 다가왔다. "으응...글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한번 배워보고 싶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랜만에 형들을 자세히 주욱 둘러보 았다. 그리고 머리를 부여잡고 오열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루브 형! 왜 그렇게 커버린 거야!! 이 카류는 정말 슬퍼!!" 그렇다! 루블로프 형은 이제 14살!! 얼마나 발육이 빠른지 쑥쑥 키가 크기 시작해서 이제는 조금이지만 근육까지 생겨 귀엽다 할 면모는 거의 사라지 고 없었다. 그리고 키예프 형마저 그런 징후를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 히 아직 카이세리온 형은 귀여운 모습 그대로다. "뭐라는 거야. 카류! 요 쪼끄만 것이 어릴 때부터 귀여운 것을 밝히더니 말 이야!" "몰라! 카이 형~~. 형은 저렇게 되지 말고 영원히 귀여운 채로 있어 줘~~" 내가 카이 형에게 매달리면서 징징거리자, 정작 당사자인 카이 형은 가만 히 있는데도 다른 형제들이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카류, 이 녀석! 어서 카이한테서 떨어져! 카이는 좀 더 강해져야 한다고!!" "키옌 말이 맞아!!! 그렇게 귀엽고 싶으면 너나 그렇게 귀여운 채로 있으면 되잖아! 그래, 매일 네가 우리한테 귀엽다, 귀엽다 했었지만 솔직히 네가 제일 키도 작고 귀엽잖아! 나이도 제일 어리고 말이야!" 흐르는 세월이 나의 귀여운 아이들을 모조리 쓸어 가버리고 만 것인가? 형 들이 저렇게 내게 따지다니...! "뭐야! 예전에는 그렇게 작고 깜찍하고 귀여웠는데 지금은 우락부락한 남 자가 되 버렸어!! 싫어, 싫어! 징그러워!!" "카...카류...." "으윽! 저 녀석 옛날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니까" 루브 형과 키옌 형이 날 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저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니 애들 전부 헛키웠구나! "음...카류... 귀여운 게 그렇게 좋다면 이 루브 형님께서 몸소 너를 귀여운 미소년으로 만들어 주마! 그러려면 우선 어릴 때부터의 검술수련은 좋지 않아!! 근육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그래!" "윽?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키옌 형. 난 귀여운걸 보는 게 좋을 뿐이라 고! 나는 말이야... 그러니까...음....어디 있지? 아! 바로 여기 디트리온 경처 럼 멋진 남자가 되는 게 꿈이라고!!" 난 디트 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아닌게 아니라 디트 경은 적당한 근육이 단단하게 몸을 이루어 끝내주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병사들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긴 것도 아닌 게 멋지구리하다고나 할까. 게다 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과 적당히 그을린 얼굴 역시 엄청 멋지다. 이것이 바로 남성미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는 그렇게 미남형의 얼굴은 아니라 할지라도 사람의 가치 기준에 따라 미남이라고 불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으음! 바로 이거야!! "그래! 디트 경이야말로 내 이상형이지! 냐~하하하하!!!" 나는 허리에 손을 얻고 큰 소리로 웃기 시작하자 루브 형이 이마에 손을 대고 못 말린다는 듯 말했다. "제발 참아 주라, 카류. 웃음소리가 그게 뭐니? 누가 널 더러 왕자라고 할 지 정말 궁금하다. 그건 그렇고 자기도 남자다워지고 싶은 주제에 남에게 귀여워지라고 강요를 하는 이유가 뭐야? 그것도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 들한테." "으흑! 몰라! 묻지마!!! 형이 나의 숭고한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있겠어?" "......" 너희가 아느냐! 나의 깜찍한 아이들이 하나 둘 징그러운 남자로 변태해 가 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 현실이 얼마나 괴로운지!! 한동안의 잡담 후에 나는 루브 형을 따라 검술을 지도해주는 기사의 앞에 가서 섰다. "카류리드 전하. 정말 검을 배우시겠습니까?" "넵! 저의 목표는 디트 경과 같은 강한 검사이기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서는 빠른 시일부터 검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나의 앞에서 약간 엄한 자세로 질문을 하는 기사를 바라보며 나는 차려 자 세를 취한 채 조리 있는 어투로 또렷하게 대답했다. 원래 체육 선생(?)들은 이렇게 당당한 태도를 좋아하거든. 솔직히 저 얘긴 다 뻥이다. 너무나 할 일이 없어서 시간 땜빵용으로 검을 배우겠다고 했을 뿐이다. 이런 말하고 싶진 않지만 난 정말 조그마해서 - 보통 아이들보다 조금 작은 편인 듯하다.- 목검도 굉장히 무거워 들기 힘 들 지경이었다. "그러면... 자, 이것을 받으십시오. 이건 생명의 궁의 마법사에게 부탁해 특 별히 전하를 위해 만든 라이트 마법을 건 검입니다. 나이가 들면 점차 무 게를 늘려가며 훈련하면 되겠지요." 음? 라이트 마법?! "오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마법 검인가요? 저 이런 거 처음 봐요! 기뻐 라!" "바보 카류... 그게 무슨 마법 검이야?" 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내려치기 연습을 하고 있던 루 브 형이 참견을 해왔다. "말을 끼워 맞추면 그렇게 되는 거지. 루브 형." "험험... 루브 님. 검을 연습할 때는 잡념이 들어가서는 안됩니다. 지금까지 했던 것은 없는 것으로 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에엑?!?" "......" 생각 이상으로 검술훈련이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괘...괜히 한다고 했을까. 육체노동은 질색인데... 에라, 그래도 지루한 것 보단 훨씬 낫지 않 겠어! "국왕폐하 드십니다!!" 그 때 갑자기 국왕의 등장을 알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응? 국왕이 왜 이런 곳엘 온 걸까? 국왕이 어머니가 없는 곳에 몸소 거동을 하다니 이 거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냐? 모든 기사와 시종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국왕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국왕 은 휘적휘적 걸어서 루브 형과 내가 연습하고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 를 구경하고 있던 키옌 형과 카이 형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아버님." 우리들은 각자 그렇게 인사를 올렸다. "음 됐다. 이 근처를 지나던 중 한번 들려본 것뿐이다. 나머지 기사들은 모 두 하던 일을 하거라." 국왕이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다시 연습을 재개했다. 음? 근데 뭔가 우리들을 살피는 왕의 낌새가 이상한걸? "무슨 일이 있습니까, 폐하?" 난 왠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국왕의 시선이 신경 쓰여서 그렇게 질문했다. "음! 카류리드. 폐하라니... 아버님이라고 불러라." "아, 예. 아버님. 그만 실수로..." 음... 매일 속으로 국왕, 국왕하고 불렀더니 그만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 다. 그래도 무슨 아버지가 아버지 같아야 아버지라고 불러주지. 난 나의 실수를 깨닫고 아버님을 향해 나의 특기인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 서 깜찍하게 웃기를 선보여 그 상황을 얼버무리려 했다. 내가 좀 귀엽게 생겨서인지 이렇게 웃어 보이면 그 효과가 직빵이었던 것이다. "아니다... 뭐, 그건 그렇고 어제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벌써부터 검을 배 우려고 하는 것이냐?" "네? 아, 그것이... 그냥... 갑자기 저도 검을 다뤄보고 싶다고 생각해서 한 번 배워보고자 한 것입니다. 폐, 아버님!" 헉!! 또 폐하라고 부를 뻔했다. '폐' 자를 급하게 삼키며 아버님이라고 불렀 지만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난 힐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음, 그러면 절실히 검술을 배우고 싶은 것은 아니란 말이지?" 음... 못 들었나보다......휴.... "그렇다면 검은 그만두고 마법을 배워보지 않겠느냐?" "예? 그렇지만 마법은 최소한 15살은 넘어야 배울 수 있다고..." "그렇지. 그런데 너라면 지금이라도 마법을 배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너의 가정교사인 알카온이 칭찬을 아끼지 않더구나." 커억! 그놈의 할아범이! 이 할아범아!! 내가 그렇게 노력했건만 내 노력을 그렇게 전부 수포로 돌려놓는 것이냐! 처음 있었던 사건 이후로 몇 번이나 질문에 대답 못하는 둥의 버벅거리는 연기를 선보였는데! "그...그런... 전 아직 많이 미숙합니다. 제 나이가 올해로 겨우 10살이건만 마법 같은 어려운 지식을 배우기엔 전 아직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마법사 들도 나이가 30대가 되어야 진정한 마법의 세계를 깨우친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마법을 배운답시고 생명의 궁에 들어간다면 마치 다른 마법사들을 얕 보는 짓처럼 보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알카온 님께 배운지가 얼마 지나지 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분께서 저를 너무 과대평가 하신 것 같아 부끄 럽습니다." "허허...이런... 난 지금 네가 10살인 것이 믿어지지 않는구나. 어떻게 그렇 게도 조리 있게도 말을 늘어놓을 수가 있느냐? 게다가 겸손할 줄도 알고... 허허....알카온의 말이 전부 거짓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컥!! 내가 미쳤지! 나의 말발이 이럴 때 걸림돌이 될 줄이야! 그리고 그냥 애답게 잘난 척 하는 거였는데, 나 바보 아니냐? 난 미래를 위해 천재가 되선 안 된다고. 솔직히 난 천재도 뭐고 아니란 말이야. "카류! 대단하잖아, 마법이라니!! 넌 머리도 좋으니까 충분히 배울 수 있을 거야! 얼른 배우겠다고 해." "응... 맞아... 카류라면 할 수 있을 거야." "그래!! 카류! 또 모르지. 우리 왕가에서 대마법사가 나올런지도. 어서 배 워! 그래 넌 검보다는 마법이 더 어울린다고. 하하하!! 네가 꿈에 바라지 않던 미소년 마법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헉! 보라돌이 형! 누가 미소년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난 디트 경 같은 멋진 검사가 목표야!" "험험." 우리들이 어느새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버리자 멀뚱히 우리 앞에 서있던 국 왕이 헛기침을 했다. 우리가 국왕을 따돌렸군. "허허. 우리 왕가의 형제들이 이토록 사이가 좋으니 정말 이 아버지는 기 쁘구나. 그래, 카류야. 마법을 배워 보겠느냐?" 이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하는가. '10살 짜리 어린애가 마법을 배운대' 하고 삽시간에 온 성안에 소문이 퍼질 꺼야!! 안돼애애! 싫어어 어~!! 국왕은 왜 하필 이렇게 듣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이런 얘길 하느냔 말이다. "소...솔직히 마법이 머리만 좋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법을 위해선 마나를 느끼는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허허... 그런 것까지 알고 있었느냐? 역시 똑똑하기도 하지. 음...확실히 재 능 면에서 걱정이 되긴 하지만, 일단 최고의 마법사에게 너를 맡길 것이니 그의 수련을 받아보도록 하여라. 알겠느냐?" 아씨 젠장!! 입 다물고 있을 걸 그랬다. "네......아버님..." 크흑!! 이럴 수가... 싫어어어~~~!! Part. 6 - 새로운 친구 며칠 후, 나는 성안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생명의 궁으로 가게 되었다. 생명의 궁은 마법사들만이 살고 있는 곳으로 많은 아르윈에 속한 궁정 마 법사들과 그의 제자들이 이곳에서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전 쟁이나 다른 여러 가지 일에 마법으로 나라를 돕는 대신 평소에는 이렇게 생명의 궁에 틀어박혀 나라의 지원을 받으며 마법을 수련하고 연구하면서 살고 있다. 여기엔 단지 마법사들만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 흔한 경비병도 없다고 한 다. 이 생명의 궁의 주위를 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기는 하지만 정작 내부에는 기사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 하지만 게다가 이곳에서 사는 마법 사들이 걸어놓은 수십, 아니 수백 개에 걸친 마법트랙 때문에 성내에서 가 장 침투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흐음... 생명의 궁이라니. 처음 들어가 보는걸?" 생명의 궁은 마법사들의 수련을 위해서 귀찮은 방해물(?)은 없어야한다는 주장 하에 왕자인 나마저도 통행이 금지된 곳 중 하나였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한번도 이곳을 구경해보지 못했다. "카류야, 생명의 궁에서 힘든 일이 있다 하더라도 인내하고 이겨내어 꼭 훌륭한 마법사가 될 수 있도록 하거라. 알겠지?" 어머니가 생명의 궁 앞까지 나를 안내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를 바라보 는 그 검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기대가 엄청 큰 모양이다. 이러다 마법 못 배우고 나오면 무슨 소리를 들을까 겁나네. 내가 마나를 느낄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데 저 사람들이 애 기죽일 일 있나. "네.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그리고 디트 경, 제 가 없는 동안 휴가 즐겁게 보내세요. 제가 다시 생명의 궁에서 나오면 그 때 또 부탁드릴게요." "휴가라... 카류 님과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게 되는 것은 처음인 것 같군 요. 꼭 마법을 배우고 돌아오시기를 빕니다. 카류 님." 어디든 내 뒤를 그림자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디트 경이었지만, 생명의 궁 만큼은 들어가는 것을 허락 받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 휴가를 받게 된 것이다. 디트 경도 힘들었겠지. 이런 꼬맹이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거. 디트 경, 나랑 떨어져 있는 동안 여자도 사귀고 그러세요. 벌써 나이가 35 살이나 되는데 왜 아직 여자도 안 사귀고 저러고 있을까. 이 곳 아르윈 왕 국에서는 17살이면 성인으로 치니까 35살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남 자는 노총각도 보통 노총각이 아닌데 말이다. 바스라윈 백작 가의 차남이니까 가문도 좋겠다. 겨우 25살의 젊은 나이에 왕족의 호위기사를 맡았으니 능력도 있겠다. 얼굴도 저만하면 잘생겼지. 들 어보니 다른 귀족 가의 여인들에게서 청혼도 많이 들어오고 가문에서 독촉 도 심한 모양인데 말이다. 그런데도 디트경이 노총각으로 늙어 죽으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처 럼 저렇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은 역시...!! 역시 나의 호위기사 일에 바빠 시간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하루의 반나절은 나와 함께 행동해야하니까 디트 경은 개인행동을 할 시간이 거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원래 디트 경이 좀 고지식하지 않은가.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 않는 여자와는 결코 결혼할 수 없다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정 작 여자와 연애할 시간이 없으니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닐까? 왕족의 호위기사라는 것이 최고의 기사로서 명성은 높아도 정말 못해먹을 짓이구나. 일 때문에 시간이 안 나서 연애도 못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머니의 호위기사 중 하나인 레드라스 경도 아직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 하고 있다. 엄청 무뚝뚝하긴 해도 정말 끝내주는 미남인데 말이다. 여자들 은 그런 남자를 보면 터프 하다고 더 꺅꺅거리지 않는가? 언제 호위기사 일을 하루 2명 교차 근무제로 하자고 국왕에게 한번 말해봐 야지. 에구, 가엾은 디트 경. 어쨌든 나는 그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나는 생명의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 다. 내가 생명의 궁 입구로 다가가자 로브를 입은 한 남자가 나를 안내했다. 나를 보아하는 눈초리가 심상치 않은 것이 코딱지 만한 꼬맹이가 생명의 궁에 들어오는 것이 되게도 못마땅했나보다. 솔직히 그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난 이제 10살이니까. 말이 마법이 15살은 넘어야 배울 수 있다는 거지, 실제로는 마법이란 무지 막지하게 어려운 학문이라 보통은 20살은 넘어야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 데 이런 어린애를 마법을 가르치라고 보냈으니 아니꼬울 만도 하지. 이렇게 난리 피워가며 들어왔는데 마법을 못 배우고 나가면 되게 창피할거 같다. 힝.... 다들 너무해~~!! 너무 부담스럽잖아!! 나를 안내한 남자는 널따란 잔디밭에 서 있는 할아버지에게 나를 데려다 주고, 그 할아버지 앞에 줄을 맞춰 서있는 사람들 사이로 돌아갔다. 이 할 아버지가 내 마법 선생인가 보구나. 지금은 백발이지만 눈동자가 금빛으로 번뜩이는 것으로 보아 예전엔 금발이었나 보다. "네가 마법을 배우러 오기로 한 왕자냐?" 오우~ 할아버지 쎈데? 왕자한테 처음부터 반말이라니... 뭐, 나야 관계없지. 내가 원래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난 순수 토박이 한국인이 아니겠어. 훗, 오랜만에 맘 편히 윗사람과 얘기 할 수 있겠군. "넵,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이라고 합니다. 그냥 카류라고 불러주세 요, 할아버지." 난 나의 귀여운 면모를 한껏 발휘해가며 그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원래 할 아버지들이 손자들을 사랑하잖아. 나 역시 어린애니까 이런 쪽으로 점수 좀 받아놔야지. "윽! 할아버지라니 이 녀석이. 스승님이라고 불러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 아르윈 왕국에서도 유일한 8서클의 마법사 아르디예프 혼 클레모어다! 감히 할아버지라니, 요런 당돌한 꼬마를 봤나." 마법사를 하려면 머리가 엄청 좋아야하기 때문에 8서클 마법사쯤 되면 현 자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평범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정말 현자 소리를 듣는 8서클 마법사란 말이야? "네에~ 아르 스승님!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속마음을 보이는 대신 나는 눈동자를 반짝여가며 끝까지 귀여운 척 을 했다. "큭! 아르 스승님이라니... 이 녀석이 감히 나의 애칭을 부르다니... 흠흠... 아르디예프 스승님이다! 알겠느냐?" 쳇, 잘 안 넘어가는군. 하지만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면서 '윽!' 이라던가 '큭!' 하면서 감탄사를 내뱉는걸 보니 내가 귀여워 보이긴 했나보다. 그래, 이 정도로 만족하자!!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계속 깜찍한 척 하면 언젠가는 넘어오겠지? 이리 봬도 내가 아직은 한창 귀여울 10살인데 다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뭣하지만 어쨌든 정말 귀엽게 생기지 않았던가! 이곳에서 재수 없는 꼬마로 낙인찍히면 살아가기 어려울 테니까, 싹싹하고 착한 꼬마를 모티브로 잡고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자!! "마법은 어려운 학문이다! 처음부터 급하게 배우려는 생각은 가지지 말고, 일단은 너의 선배들에게 이곳 생활을 배우도록 하거라. 그리고 이곳은 생 명의 궁이다! 네가 비록 왕자이지만 이곳에서 네가 이곳으로 들어 온 이상, 그런 것은 전혀 관계가 없다! 항시 너의 스승인 나 아르디예프와 선배들을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도록 하거라. 알겠나?" "네에~ 잘 알겠습니다!!" 귀여운 척! 깜찍한 척!! 필살 앙증맞은 눈동자 광선~!!! "험험... 그러면... 그래, 하르몬. 카류....를 데리고 가서 여러 가지를 알려주 도록 하거라. 자... 모두 오늘은 이만 해산!" 풋!! 카류리드라고 말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카류라고 말하기로 한 모양이 다. 어느 정도 넘어온 건가? 아르디예프 스승님의 말이 끝나자 모두들 나를 힐끔 힐끔 쳐다보다가 그렇 게 뿔뿔이 어딘 가로 흩어졌고, 어깨보다 약간 길게 내려오는 검붉은 머리 칼을 뒤로 살짝 묶은 20대 중반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다가왔다. 그가 아마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말한 하르몬이라는 사람인 모양이다. "카류리드 전하이십니까? 올해로 몇 살이 되시죠?" "네에~ 하르몬 형! 10살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 형이라니, 선배라고 부르시기를... 그리고 10살이십니까... 10살이라..." 하르몬이라는 선배는 내가 일부러 만들어낸 앙증맞은 표정으로 형이라고 부르자 나의 뇌살적인 귀여움에 정신적 타격(?)을 입었는지 잠시 머뭇거렸 다. 그러나 10살이란 소리를 듣자마자 곧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오로라를 온 몸으로 팍팍 내뿜기 시작했다. 왠지 생명의 궁에서의 생활이 순탄치만 은 않을 것 같은 무서운 예감이 든다. 그래도 내가 이래봬도 왕자인데다가 10살의 깜찍한 어린애이건만 설마 이지매 같은 걸 하지는 않겠지...? "전하께서 머무르실 방을 안내해 드리죠. 전하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 을 배정해 드릴 것입니다. 땅의 궁에서 지낼 때처럼 화려한 침식은 하기 힘드실 텐데 그런 생활을 참으실 수 있으실 지... 게다가 이곳엔 아스트라 한 님이 계시지 않으니 전하께서 간밤에 외로운 나머지 울어버리지나 않을 까 심히 염려가 되는군요." 음? 내가 진짜 10살이라도 저 놈이 나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비꼬고 있다 는 걸 알 수 있겠다. 다 큰 어른인 주제에 이렇게 작고 여린 어린애를 괴 롭히려하다니! 어린이들의 수호천사(?)인 나 카류리드가 여기서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는 일! "훗, 전 원체 비위가 좋아서 어디서든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하니 침식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제가 생명의 궁에 들 어온 것이 처음인지라 사실 조금 쓸쓸했었는데 이렇게 저를 위해 걱정의 말까지 해주시는 하르몬 선배님을 만나서 정말 기쁘군요. 아, 그건 그렇고 하르몬 선배님은 원래 왕족들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다른 방에서 잔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하르몬 선배님은 나이에 비해 식견이 약간 부족하시군요. 아직 어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조금 더 상식을 쌓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네...네에..." 그는 내 말에 잠시 멈칫! 하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10살 짜리 어린애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겠지. 하르몬 선배, 태클을 걸 상대를 잘못 찍었어. 내가 장장 29년의 세월을... 음, 19년이라 해야 맞는 건가? 환생을 한 후로 10년 동안 제대로 말다툼할 기회가 없었으니... 어쨌든 그만한 세월을 살면 서 내 말발을 당해내는 자는 이제까지 본 역사가 없다 이거야. 나는 하르몬 선배의 안내를 받아 내가 앞으로 지내게 될 방에 도착했다. 그 방은 비록 땅의 궁에서 지내던 방과는 비교할 수 없이 작았지만, 그래 도 전생의 삶을 살면서 익혀두었던 서민의 시각으로 볼 때 정말 엄청나게 화려한 방이었다. 음... 저 침대만 해도 순백의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굉장 히 비싸 보이는 고급품이 아닌가. "음... 뭐죠? 여기 것들은 다 사치품이 아닌가요? 제가 책에서 읽기로 생명 의 궁은 너무 검소해서 생활하기가 불편할 정도라고 들었는데 전부 다 새 빨간 거짓말이었군요. 그 책을 쓴 마법사에게 수정을 가하라고 말해줘야겠 네?" "......카류리드 전하가 쓰실 방이라 일부러 고급품을 갖추어 두어서 그렇답 니다. 땅의 궁의 그 화려함 비한다면 형편없지 않습니까." "음? 아까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을 주신다 하시지 않으셨나요? 한 입 으로 그렇게 여러 말을 하시다니 정말 안 좋은 버릇을 가지고 계시군요? 이 기회를 빌어 그 버릇을 고치도록 노력해 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그리고 땅의 궁이야 아버님께서 사랑하는 어머님을 위해 최대한 아름답게 꾸미라 고 명령하셨기에 사치스러울 수밖에 없답니다. 어머니와 전 그런 거 바라 지 않는데도 말이에요." 음, 오늘따라 더욱 말발이 땡기는군! 하르몬 선배. 상대가 꼬맹이라고 나오 는 말 그대로 막하고, 같은 말 다시 번복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다! "....네. 그럼 방도 아셨으니 저를 따라오시지요." "응? 어디가요?" "원래 가장 처음 들어오는 사람은 가장 밑바닥 일부터 하기 마련이죠." 기분 탓인지 그 말을 한 후 하르몬의 웃음이 상당히 음흉하게 보였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지 하르몬 선배의 의도가 상당히 의심스러웠지만 일단 그 의 뒤를 따라 쫄랑쫄랑 걸어갔다. "헤에? 이게 뭐지요?" 하르몬 선배의 손에 이끌려 온 나는 그가 던져준 두벌의 로브를 들고 의아 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네, 원래 생명의 궁에 처음 들어오는 신입은 선배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바로 위의 선배의 옷을 빨아다 주는 게 예의랍니다. 이건 전하보다 조금 전에 들어온 칼스와 크루의 로브입니다. 저기에 우물가가 있으니 해다 주 시겠습니까? 제가 우물가까지 안내해 드리지요." 어디서나 이런 후배 잡기(?)가 있는 모양이군. 빨래라니 이게 몇 년 만이 냐. 뭐, 달랑 두벌인데 깨끗하게 빨아다 주자. 그런데 마법사라면서 대체 뭔 짓을 했기에 소매가 이렇게 새카맣지? "선배... 전 괜찮다니까요." 칼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선배가 하르몬 선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것 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크루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진 않았지만 대신 엄청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팔꿈치로 하르몬 선배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었 다. 그러고 보면 난 왕자잖아. 그런데 감히 빨래라는 걸 시키다니 상당히 찔리 겠네. 푸훗, 됐어! 착한 척 해줘야 이 생명의 궁에서 편하고 먹고사는데 지 장 없겠지? 왕궁 내에 있는 장소임에도 마법사들의 거처인 생명의 궁은 상 당히 왕권이 좀 약하니까 말이야. "가요, 하르몬 선배 님. 이걸 세탁하려면 우물가로 가야겠죠?" 내가 가볍게 이야기하자 모두들 의외라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그들의 표정을 즐기면서 나는 빠르게 먼저 방문을 나섰다. 이럴 때는 내가 왕자라는 사실이 너무 재미있단 말이야. 우물가까지 다 도착하자 나는 의도적으로 하르몬 선배에게 들리도록 중얼 거렸다. "그런데.... 우물가에 그게 있을까?" "무엇을 말이죠? 설마 시녀를 찾아 그들에게 빨아다 달라고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요? 한번씩 들어오는 어린 귀족들 중에 그런 짓을 하려하는 바보 같은 녀석들이 있거든요." "우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선배에 대한 예의가 갖춰져 있지 않 군요! 그런데... 음... 우물가에 없는 거 같은데 그거 안 주실 건가요?" "......무엇을 말입니까?" "비누요. 비누!! 혹시 한번도 빨래를 안 해보신 것 아니에요? 빨래를 하려 면 비누가 있어야지요! 비누가!! 그래야 존경하는 선배님들을 위해 로브를 깨끗하게 빨아드릴 것이 아니겠어요?" 내 말에 하르몬은 얼굴이 말 그대로 휴지조각같이 구겨졌다. 그리고 곧 비 누를 가지러 약간 떨어져 있는 우리가 나왔던 건물까지 다시 뛰어갔다. 이힛힛~ 고소해라!! 여기서 비누는 약간 고급품으로 여겨지고 있었기에 우물가 같은 곳에 함부 로 두지 않고 건물 어딘가에 고이 모셔놓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우물가까지 와서야 비로소 비누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르몬 선배에게 말한 것이다. 내가 이곳 생명의 궁에서 비누가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으니 천상 하르몬 선배가 그것을 가지러 건물 안까지 갔다와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고마워요, 선배님! 저를 위해 저렇게 멀리까지 뛰어갔다 오시다니 저 는 정말 감동했어요! 이 로브는 하르몬 선배님이 저를 위해 애써주신 것만 큼 정성을 담아 빛이 나도록 세탁해 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나는 숨이 턱까지 차 오른 하르몬 선배를 향해 상큼한 웃음을 날리고 우물 가로 사뿐사뿐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벌써 돌아오시다니, 설마 아무렇게나 해오신 건 아니겠죠? 빨래라는 건 그냥 비누를 발라서 물에 씻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내가 돌아오자 하르몬 선배가 정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쏘아 붙였 다. 후훗! 걱정을 마시라. 내가 누구냐. 전생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아니냐! 게다가 어머니가 부부싸움으로 집안 일을 다 버려 두고 있었을 땐 내가 설거지도 하고 교복이나 양말 같은 거 손빨래도 하고 그랬다고. 그건 그렇 고 하르몬 선배의 말투가 아주 노골적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나 의 기우인가? 어쨌거나 난 그들 앞에서 로브를 쫘악 펼쳐 보였다. "오옷!!" "웃! 소매가 이렇게까지 깨끗하다니!! 이런 의식을 이렇게 제대로 해온 분 은 처음 봤습니다." 깨끗한 로브를 보고 그들은 정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칼스 선배 와 크루 선배는 이때다 싶었는지 내게 마구 아부를 해대기 시작했다. 나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하르몬 선배를 바라보았다. "훗! 빨래를 그렇게 잘하시다니 어디 시녀의 소생이 아닌지 참으로 의심되 는군요, 카류리드 전하." 그러나 하르몬 선배는 간 크게도 완전히 비꼬는 태도로 내게 말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칼스 선배와 크루 선배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온갖 동작을 취해가며 온몸으로 그를 말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 하르몬 선배, 이젠 아주 막나오고 있군. 이봐, 이봐. 난 왕자라고. 알고 그 러는 거야? 내가 이렇게 착한 놈(?)이 아니었으면 넌 벌써 예전에 왕족 모 독 죄로 끌려갔겠다. "어? 전 틀림없는 어머니의 아들이랍니다. 봐요. 머리가 이렇게 파르스름하 잖아요? 이거 그렇게 흔하지 않은 머리색인 걸요. 그리고 빨래정도야 누구 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요? 전 정말 간단하던데... 겨우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는 바보가 있어요?" "....." 하르몬 선배는 아무 말도 없이 서 있다가 인사도 없이 홱 몸을 돌려 나갔 다. 우오... 똥배짱이로다. 하르몬 선배의 태도에 도리어 칼스 선배와 크루 선배가 당황하여 내게 머리를 파악 숙이고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했다. 하르몬 선배를 왕족 모독 죄로 처벌할 생각까지는 없지만 그렇더라도 날 예쁘게 봐주지 않는 사람에게 상냥하게 대해줄 이유는 없는 거 아니겠어? 난 그렇게 착한 인간은 아니란 말씀이야.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 바로 그 것이 평범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 이념이 아니겠냐고. "선배님들? 이상하네, 왜 사과를 하시고 그러세요?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 안녕히 가세요. 내일 또 봐요~" 난 하르몬 선배의 뒤에다 대고 방긋방긋 웃으면서 소리쳤다. 비록 뒷모습 이었으나 그가 곱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것은 안 봐도 삼천리였 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순진하고 착한 어린애를 못살게 구느냐고! 나는 약간 싸늘한 아침 공기를 맞으며 동쪽 건물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 기고 있었다. 생명의 궁에 온지 두 번째 날이 되는 오늘, 드디어 마법에 대 한 본격적인 수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약간 흥분한 상태 였다. 이 세계에 마법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안 후, 나는 마법이라는 것에 상당히 호기심이 생겨 왕실 도서관에서 마법에 관련된 책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도서관에는 마법에 대한 추상적인 정의나 역사 같은 것이 적혀있는 책만이 있을 뿐 어떻게 해야만 마법을 배울 수 있는지에 대한 책은 전혀 비치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폐쇄적인 성격의 마법사들이 마법에 관련된 책, 그러니까 마법서를 생명의 궁 내의 도서관에만 두게 했기 때문에 그랬 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마법이란 것은 독학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너무나 어려운 학문이라 생명의 궁 이외의 장소에 두는 것은 마법서를 낭 비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조치를 취한 거라나? 세상에 독학이 불가능한 학문이 어디 있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 쨌든 그런 이유로 나는 마법만은 독학을 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국왕이 내게 마법을 배우라고 했을 때 솔직히 말해 상당히 솔깃 했다. 마법이라니, 꿈의 능력이 아닌가!! 검 같은 거보다 훨씬 구미가 당기 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게 마법의 재능이 있어 겨우 10살인데도 불구하고 진짜 로 마법사가 되기라도 하면 나는 그 시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완전히 세 기의 대천재로 인식되어 버릴 것이다. 물론 천재로 추앙 받게 되면 좋긴 좋지. 그러나 원래 나는 천재가 아니지 않는가. 단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린아이임에도 천재적인 사고를 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을 뿐 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20살 정도가 되면 나도 결국엔 보통 사람들과 비슷한 레벨의 마법사가 될 것이다. 물론 10년 정도 일찍 배운다는 메리트 가 있긴 하지만 초기의 그 천재적 능력과 비교하면 얼마나 실망스럽겠는 가? 나는 그 실망의 눈초리를 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혹시라도 그런 사태가 일어날까 봐 마법을 배우는 건 미래로 미뤄두려 했 었던 건데 일이 이렇게 꼬여버리다니... 뭐, 이미 일이 이렇게 됐으니 일단은 내가 나이에 맞지 않게 똑똑하다는 거 최대한 티 내지 않고 꿋꿋이 비 천재 노선(?)을 추구하며 열심히 배워 보자. 마법이라!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불을 일으키고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 일까!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달리 일단은 수업은 이론으로 시작하는 듯했다. 나 를 포함해서 학생들로 보이는 젊은 남자들이 작은 방안에 반원 모양으로 모여 앉았고 그 앞에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서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늘은 카류도 들어왔으니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번 마법에 대해 기 초적인 것을 말해주마. 마법이란 대자연의 힘을 알고, 배우며, 이용하는 것 이다. 세계의 모든 물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의 자,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에서 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땅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무형의 힘을 가진다. 그 힘을 일컬어 마나라고 하지. 우리는 그 마나를 인위적으로 움직이고 소모시켜 강력한 폭발이나 반대로 치유를 행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정말 저 말이 사실인가? 이 의자에 마법을 행할 힘의 원천이 있다고? 꼭 동화 같은 이야기네. 원래부터 마법이 동화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그럼 지금 무생물만 예를 드셨는데 토끼나 사슴 같은 생물은 마나를 가지 고 있지 않나요?" "그렇지 않다. 너도 지금 온 몸에 마나를 잔뜩 품고 있으니까. 대자연이라 고 말하지 않았나. 우리 인간도 자연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아주 당연한 듯 마나를 가지고 있고, 또 그 속에서 생활하지만, 이것을 느끼고 자각하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지나 지 않지. 그렇기에 마법사는 희귀하고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어쩌면 모든 것들이 마나를 가지고 있고 또 당연한 듯 우리주위에 존재하 기 때문에 마나라는 걸 느끼는 사람들이 적은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가르 쳐 주기 전에는 대기 중에 공기가 있다는 걸 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말이에요." 음? 사람들의 시선이 이상하다. "......그래, 카류. 그것이 왜 일반인들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한 마 법사들의 가장 일반적인 학설이지. 그런 생각을 마나에 대한 정의를 듣자 마자 생각해 내다니 아주 똑똑하구나. 음!! 이 정도면 충분히 마법을 배울 자격이 있겠어! 소문이 아주 헛것만은 아니었나보구나!" 음? 이런... 신기해서 그만 헛소리를 지껄여 버렸군. 흑. 전생에 모범생이었 던 버릇을 버리지 못했구나. 보통 학교의 선생들은 이런 식으로 내가 그들 의 말에 한마디 덧붙이는 것을 엄청 좋아했거든. 게다가 내가 궁금한 것을 빠르게 풀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주 버릇이 됐다고 할까. 하지만 지금은 이러면 안 되는데... 참자. 아무리 묻고 싶어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려도 참는 거 야!! 참는 자가 이기는 거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속으로 새롭게 결의를 다지고 있는 나를 슬쩍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법을 배우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일단 내가 앞서 말한 것과 같이 마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하지.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라 마나를 움직이기 위한 마법 수식도 알아야 한다. 마나는 시간과 장소, 상황 에 따라 그 양이 다른데, 그 때문에 우리는 마법 수식을 통해야만 정확한 양의 마나를 움직일 수 있고 그 결과로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것이다. 우 리가 이렇게 골치 아픈 수식을 배우는 것은 그 때문이지. 카류야. 그 수식 을 이해하는 것은 몹시 힘들겠지만 너라면 몇 년 안에 금방 이해할 수 있 을 게다!" 그 이후로도 아르디예프 스승님의 마법에 대한 장황한 이론 수업이 계속 되었다. 나는 그 수업을 들으면서 마법은 수학이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마 법 수식은 주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마나의 양을 구하는 수 단 비슷한 것으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전생의 토이렌 세계에서의 수학을 예로 들자면 '이 방정식의 근을 구하여라.' 이런 걸까나. 그러나 계속 가벼운 마음으로 수업을 듣다가 처음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써 준 1서클 마법의 수식들을 보았을 때는 한순간 기가 팍 죽어 버렸다.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만큼 정말 너무나 복잡하고 길다란 수식들이었기 때 문이다.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져본 적이 없던 내가 수학을 배우면서 쪼 는 일이 생기리라고 언제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독학이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학문이라더니 정말 엄청나구나. 그러나 아르디예프 님이 그 수식을 풀어주는 것을 계속 보고 나는 곧 한숨 을 내쉬었다. 토이렌 식으로 따지자면 아르디예프 님이 써준 1서클 수식은 일차 방정식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저걸 저렇게까지 비꼬아 길 고 복잡하게 만들 수가 있다니, 저것도 재능 아닌가? 물론 그런 게 아니라 이곳 이르나크 세계의 수학이 토이렌만큼 발달하지 못해서 저렇게 길고 복 잡하게 쓸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토이렌의 고3수준의 수학까지 꽉 꿰고 있는 내 눈에 저 수식들은 정말 한심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휴우." 내가 멍하니 설명을 듣다가 한숨을 쉬자 너무 어려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 지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설명을 멈추었다. "카류야. 아직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자꾸 써가면서 반복하다보면 알 수 있 을 거다. 알겠지?" "네에... 그런데요. 마나를 느끼는 건 어떻게 수련하는 거지요?" "음. 명상을 한다." "네? 명상이요?" "그래. 마나를 느끼는 최고의 방법은 공기가 가장 깨끗한 새벽에 대충 2경 -1경이 한시간이다- 정도 명상을 하는 거다. 하지만 명상만으로는 힘드니 까 마나를 움직일 줄 아는 선배나 스승이 명상하는 동안 네 몸 안의 마나 를 움직여 준단다. 그러면 더 쉽게 마나에 대해 이해 할 수 있지. 하지만 그렇게 해도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자들이 태반이다. 보통 마나를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선 1년 정도는 명상을 해봐야 알 수 있단다." "헉! 1년이나요?! 바로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나요?" 무슨 적성검사를 1년이나 하는 거야? 나는 깜짝 놀라서 아르디예프 님에게 되물었다. "불행하게도 그렇다. 바로 알아낼 수 있다면 마법에 재능이 있는 자들을 빠르게 추려낼 수도 있겠건만... 그래서 더더욱 마법사가 적은 것이지." "그렇다면 마법을 쓸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1년 동안 이런 수식을 배워야 하는 건가요? 마법사가 되지도 않을텐데 일부러 이런 수식들을 배운다면 괜히 시간 낭비잖아요." "마법 수식을 더 간단히 하기 위해 그것을 연구하는 직업이 있으니 마나를 느끼지 못한다 할지라도 수식을 배워서 나쁠 건 없단다. 그게 바로 수학자 란다. 유명한 현자들은 대부분 수학자이시지. 게다가 이 수식이 의외로 생 활에 도움을 주기도 한단다." "네..." 마법은 마나 느끼는 것만 빼면 수학이었구나. 어쩐지 성내의 도서관에 실 질적으로 수학을 이용하는 측량이나 통계에 대한 책 이외의 수학에 대한 이론이 가득한 책은 찾아 볼 수가 없더라니, 그 수학 책이 이곳 이르나크 세계에서는 마법서이기 때문에 그랬던 모양이구나. 그렇다면 이곳 생명이 궁의 도서관엔 수학 책이 가득 차있겠군. 이곳의 수학이 토이렌의 그것과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지 한번 가봐야겠다! 나는 시시하다면 시시하다고 할 수 있는 수업을 끝까지 듣고 느긋하게 도 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곧 점점 발걸음을 빨리 할 수밖에 없었다. 생명의 궁에 있는 사람들은 최고로 어려봐야 20대 중반이었고, 대부분은 노인이었 는데 10살 짜리 어린애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니까 이상하게 보였는지 모 두 하는 일을 잠시 멈추고 나를 쳐다봤던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아무렇지도 않을 리가 있겠는가. 난 조금 얼굴 이 달아오르는 걸 느끼고 후다닥 뛰어서 얼른 도서관으로 갔다.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이! 아무리 내가 신기해도 저렇게까지 쳐다 볼 건 없 잖아. 정말 너무해! "카류리드 전하십니까?" "네? 네." 도서관 앞에 도착하자 도서관 관리인으로 보이는 중년 마법사가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내게 몸을 숙이고 물었다. "전하. 이곳의 복도에서는 뛰면 안됩니다. 아셨지요? 그러면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된답니다." 윽! 이런... 쪼..쪽 팔린다. 내가 이런 설교를 듣게 될 줄이야. 괜히 생각 없 이 뛰었군. "네..네... 죄..죄송합니다. 그러니까...음.. 채...책을 보러왔거든요? 괜찮을까 요?" 나는 부끄러워서 잠시 머뭇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물론이지요. 전하. 안에서도 뛰지 마시고, 조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착한 아이지요?" 허허헉! 이 나이(?)에 저런 소리를 듣다니!! 내가 의도적으로 귀여워 보이 고 싶어 귀염받는 거랑 저런 건 완전히 틀리단 말이야!! "예예.... 잘 알겠습니다...명심하도록 하겠습니다." 난 얼굴에 열이 화악 나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말했다. 나는 이제껏 형제들과 지내면서 대체적으로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그래서 그런지 정말 어린애임에도 저런 식의 소리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 런데 갑자기 내가 의도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저런 어린애 달래는 듯한 설교를 실제로 듣게 되니 엄청 쪽팔리고, 닭살스럽고!!! ...어쨌든 다시 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다. 정말 심장에 좋지 않다고 할까. '착한 아이지요~?' 라고?! 크아악~~! 난 속으로 끝없이 궁시렁 거리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의 도서관 도 보통 도서관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책장의 책들과 그 책을 읽기 위한 책상, 의자... 그런데... 허헉! 그...그렇게 쳐다보지 말란 말이야!! 애들 처음 봤나, 이 사 람들이! 내가 들어오면서 문을 닫자마자 또 다시 도서관 내의 사람들의 시선이 나 에게로 쭈와악 집중됐던 것이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시선집중을 받은 적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 다. 실제로 나는 전생의 학교에서 학생회장이 되었을 때, 상을 탈 때, 입 학·졸업선서를 할 때 등등...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번 단상에 서봤기에 시선 집중을 받을 기회가 엄청 많았다. -자랑은 아니지만 다시 상기시키자 면 나는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치 신기한 물건 보듯 훑어보는 시 선은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감추려고 난 으슥한 곳을 찾아 구석으로 숨어들 었다. 우씨... 성실한 생활을 모토로 삼는 착한 아이가 책 좀 보겠다는 데 정말 별꼴이야!! "음...? 오오~~!" 나는 투덜대다가 갑자기 눈앞의 물건을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마침 나의 눈앞에 '궁극!! 8서클의 모든 것!' 이란 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헤에... 가장 어려운 마법의 수식은 어떤 건지 볼까?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토이렌 세계의 궁극 모범생이었던 내게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음.. 그래도 이 세계의 가장 어려운 수식인데 설마 고3수준 밖에 안 되는 건 아니겠지? 사실 8서클이 마법의 끝은 아니다. 마법의 최종 단계는 10서클인데 이 서 클엔 창조와 파멸의 마법이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이 그런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10서클은 신의 경지를 말하는 가공의 영역이다. 그리고 9서클의 마법도 인간은 거의 쓸 수 없는 이른바 드래곤들의 영역이 다. 역사적으로도 9서클의 인간 마법사는 몇 백년에 겨우 한 명 나타날 정 도로 그 수가 적었다. 그렇게 가뭄에 콩 나듯 나타나는 그들은 언제나 속 세의 일에는 거의 간섭을 하지 않으면서도 꼭 뭔가 대단한 일을 하나씩 저 질러서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각종 용사 전대물의 주 캐릭터가 되곤 했다. 어릴 때 항상 형제들이 즐겨했던 용사놀이 중에 마검사 카뮤리안이 그 대 표적인 인물이지. 9서클의 마법사인데다가 최강의 검술까지 썼던 그 극악 한 인물 말이다. 정말 신은 불공평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런 인간을 만들어 낼 수 있냔 말이다! 어쨌든 이렇게 본다면 결국 8서클의 마법이 실질적으로 최고의 마법경지라 하겠다. 알고 보면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진짜로 굉장한 대마법사인 것이다. 8서클의 마법사도 한나라에서 한 명 있을까 말까한 경지이니까. 설명이 장황하군! 어쨌든 책이나 한번 보자!! 7"왜 벌써부터 그렇게 어려운 책을 보시죠? 귀여우신 왕자전하?" 허헉! 언제부터 내 옆에 사람이 서 있었지? 그건 그렇고, 뭐? 귀...귀여우 신? 생명의 궁에 들어와서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대체 몇 번이나 이런 닭살 돋는 단어를 듣고 있는 거지? 그냥 왕자전하면 됐지 거 기다 귀여우신은 왜 붙이냔 말이야? 나는 괜히 그의 말에 약간 발끈하여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한마디로 인해 첫인상이 더러워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내 곁에서 서있는 그 남자의 미소 가 상당히 얄밉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쏘아줘서 저 얄미운 얼굴을 구겨지 게 만들어 줄까 생각하던 나는 다시금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약간 놀랐 다. 그는 의외로 그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 아직 소년의 티가 나 는 굉장히 젊은 남자였던 것이다. 연한 황토색의 머리카락을 어깨에 약간 닿을 정도로 길러서 토이렌 세계의 빡빡 머리 고등학생과는 그 느낌이 많 이 달랐지만 어쨌거나 이 곳에서 이렇게 어린 사람은 처음이었다. 젠장, 하필이면 전생의 나와 비슷한 또래의 녀석한테 어린애 취급받을 건 또 뭐람. 저렇게 어린 녀석(?)한테 귀여운 애 취급을 받고 싶은 마음은 눈 곱만치도 없단 말이다. "그냥 제일 어려운 건 어떤 것일까 하고... 하하... 그냥 눈에 띄어서 꺼내본 것뿐이에요." 난 괜히 발끈한 속마음을 최대한 진정시키며 그에게 말했다. "그러셨군요. 그렇지만 마법의 수식이란 체계적으로 배워야만 다음 단계를 이해 할 수 있답니다. 제가 좋은 책을 구해드릴 테니 그건 다시 꽂아두고 저를 따라오세요." 그래, 구구절절 옳은 말이다. 그러나 난 이 책을 읽고 싶다고. 그러니까 남 의 일 자꾸 방해하지 말고 제발 네 할 일이나 하라고!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이 책을 읽음으로서 스스로가 목표로 하는 학문의 가장 높은 경지의 대단함을 느끼 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책을 읽던 내버려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역시 모든 일에 순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첫인상이 안 좋은 사람이 자꾸 내 일을 방해하려 하자 나는 말 에 뼈를 박아 약간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쏘아주고 말았다. 그는 내 말에 잠시 놀라는 얼굴을 했지만 곧 표정을 바꾸어 부드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셨군요, 제가 너무 전하를 무시한 듯한 행동을 한 것 같아 죄송스럽 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성취가 빠른 것도 아시겠지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좋은 책이 있답니다. 그것을 알려드릴 테니 같이 가시지요. 물론 그 책도 가지고 오세요." 우오, 강적이다. 내가 이렇게 투덜거렸건만 저렇게 상냥하게 나올 수가 있 다니. 나를 애 취급하는 건 되게 마음에 안 들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모양 이다. 그러고 보면 난 진짜 어린애이지 않은가. 어린애에게 귀엽다는 말은 욕이 아니잖아. 상대는 친절을 베풀려는 했던 것뿐인데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달아 그에게 너무 못되게 군 것 같다. 정말 미안한걸? "친절에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함께 가도록 하겠습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샘솟아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 젊은 마법사는 여러 가지 짤막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얇고 기초적인 책 을 3권 정도 골라주었다. 나는 그 책들과 내가 처음 뽑았던 '궁극!! 8서클 의 모든 것!' 이란 책을 빌려서 도서관에서 나왔다. "일부러 이렇게 좋은 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처음 불친절하게 굴었는데도 불구하고 화는커녕 이렇게 상냥하게 대해주시다니, 선배님은 너무 좋은 분이세요." "아닙니다, 전하. 저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처음 시작할 때 무엇 이 어려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때문에 비슷한 상황의 전하께 도움을 주고 싶다고 생각한 것뿐이랍니다." 나의 앞에서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는 정말 굉장히 친절한 사람 이었다. 게다가 내가 아무리 칭찬을 해주어도 저런 식으로 겸손한 말로 슬 쩍 뒤를 빼곤 했다. 저렇게 자연스럽게 겸손할 수가 있다니 저것도 엄청난 재주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군요. 제 이름이야 이미 알고 계시겠 지만 그래도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것이 좋겠지요? 전 카류리드 드 크레티 야 아르윈이라고 합니다. 카류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선배님은 성함이 어떻 게 되세요? " "전 유넨이라고 합니다. 전하." "유넨 선배님이시군요! 그런데 성(姓)은요? 풀 네임으로 가르쳐 주셔야죠." "그건..." "유넨!!!!"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시 선을 돌린 곳에서는 왠지 굉장히 눈에 익은 듯한 느낌의 남자가 우리 쪽을 향해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 남자... 분명 첫날에 나를 괴롭히려 했다가 도리어 개피를 보고 갔던 하 르몬 선배다! 아~아니? 저 선배가 이 천사표 유넨 선배를 알고 있다니? "아...하르몬 선배님." "음, 그래.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하르몬 선배가 영 좋지 못한 눈초리로 내 쪽을 힐끔 바라보면서 유넨 선배 에게 질문했다. 이렇게 귀여운 어린애를 향해 저 딴 눈초리를 하다니, 저런 극악한 놈을 봤나!! 저 눈초리와 이제껏 있었던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말 줄임표 사이에는 왜 저런 재수 없는 놈이랑 함께 있는 거냐는 말이 들어갔 을 것이 분명하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냐니요? 당연히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 하르몬 선배 님과 마주친 것이죠. 이 복도가 통하는 곳은 도서관 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동안 생명의 궁에서 생활하시면서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전에 도 말씀 드렸지만 하르몬 선배님은 마법을 공부하기보다는 일단 일상 생활 에 필요한 상식에 대해 조금 더 공부를 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훗, 저는 그런 뜻에서 질문을 한 것이 아니랍니다. 카류리드 전하. 평소 라면 유넨이 저와 함께 점심을 먹기 위해 동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텐 데 어째서 도서관 근처에서 카류리드 전하와 함께 있는 것인지 궁금해서 한 질문이었을 뿐입니다!" "아, 그러셨어요? 그렇다면 다음부터는 자신의 의도를 분명하게 표명할 수 있도록 수식어와 목적어를 제대로 끼워 넣은 완전한 문장을 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략이 심한 문장을 사용하면 서로 의사소통이 불편하지 않겠습니까.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 꼭 그렇게 하는 버릇을 키우시기 바 랍니다." "허, 그건...!!" 하르몬 선배는 내 말에 상당히 발끈했는지 나에게 뭐라고 따지려 했다. 그 때 유넨 선배가 우리들 사이에 끼어 들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제 곧 식사시간이군요. 카류 전하도 함께 가시 지 않겠습니까? 아직 아는 사람도 없으실 테니 혼자 드시기 적적하지 않으 시겠습니까. 저희랑 함께 식사하시지요." 유넨 선배의 말에 나는 갑자기 귀가 솔깃해져 하르몬 선배를 물 먹이기 위 한 다음 말을 선택하는 작업을 중지했다. 사실 나는 생명의 궁에 온 뒤로 이제까지 나의 방에서 혼자 식사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오기 전까 지는 매끼 형제들을 불러 함께 먹거나 그들과 함께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해도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했고, 아무도 없을 때도 디트 경과 동석을 했 기에 혼자 먹은 적은 거의 없었다. 물론 전생엔 부모님들의 부부싸움으로 인해 살벌한 분위기의 집에서 혼자 식사를 차려먹는 일이 일상 다반사였으 나 최근 들어서는 항상 북적거리는 상황에서만 식사를 했기에 오랜만에 혼 자 방에 처박혀 먹는 게 조금 적적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저기에서 황당한 표정으로 무슨 소리냐며 결사 반대라는 눈빛을 하고 있는 하르몬 선배를 보자면 그냥 확 싫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지만... 역시 혼자 끼니를 해결하는 건 처량하다. 쳇, 됐어! 유넨 선배가 저렇게 부탁하고 있 는데 여기서 거절하는 건 좀 그렇지? "괜...찮을까요?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은데.." "전하께서 그런 음식을 드실 수 있으십니까? 거긴 아직 2서클 이하의 견습 마법사들을 위한 급식소입니다. 전하의 입맛에 맞을만한 음식은 없을 줄로 사려되옵니다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비위가 좋아서 뭐든지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 고, 언제든지 잘! 놀고 한답니다! 하르몬 선배님이 이렇게 매번 저를 걱정 해주시니 정말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난 '잘'자를 몹시 강조하며 하르몬 선배를 비꼬아줬다. 하르몬 선배의 얼굴 이 약간 붉어지는 게 내 눈에 들어왔다. 그러게 왜 가만히 있는 애를 자꾸 괴롭히느냔 말이다! 아이들은 나라의 새싹, 나라의 보물이란 말도 모르나? 이 무식한 선배 같으니! "하르몬 선배님, 카류 전하. 식당은 이 근처니까 어서 가시지요. 이러다가 점심시간을 놓쳐버릴지도 모르겠군요." "네, 정말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유넨 선배님.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의 진 심 어린 충고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잦은 충고 부탁드리겠 습니다. 저도 그에 따른 감사의 인사를 꼭 해드릴 테니까요!" 난 결정타를 날리고 유넨 선배의 소매를 붙잡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하르몬 선배는 뒤에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는 것 같더니 곧 우리 뒤를 따랐다. 쳇!! 그냥 따로 가도 되는데~! 하르몬 선배와 유넨 선배와 함께 급식소로 들어온 나는 호기심에 찬 눈으 로 그 내부를 주욱 둘러보았다. 어제 하르몬 선배가 이곳 생명의 궁의 구 조를 말해 주었기에 급식소가 어디에 붙어있는 지는 알고 있긴 했지만 이 렇게 직접 들어와 보기는 처음이었던 것이다. 이르나크 세계의 급식소라고 해도 별로 특별한 것은 없구나. 식판을 들고 차례대로 음식을 받아 가는 모습은 토이렌 세계의 모습과 다를 바 없군. 우와, 대량으로 만든 음식일텐데 식단이 엄청나게 화려하구나. 게다가 전부 깔끔하고 맛있어 보이고 말이다. 하르몬 선배가 하도 날더러 먹을 수나 있 겠냐고 계속 비꼬는 치는 바람에 얼마나 극악한 음식이 나올까 약간 걱정 했는데 급식에서 이 정도면 충분히 멋진 식사가 아니냐고. 나는 살짝 하르몬 선배를 째리다가 문득 주위의 둘러보고는 내가 어떤 상 황에 처해 있는지 깨달았다. 식당 안의 많은 사람들이 또 다시 무슨 동물 보듯 일제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봐라, 봐! 이젠 너무 많이 당해서 그런 건지 이젠 거의 무아지경의 경지에 다다랐다 이거야. ...하지만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건 불가항력인 것인가. 난 붉어진 얼굴을 하르몬 선배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먼저 식판과 포크 등을 들고 음식을 받으러 쪼르르 뛰어 갔다. "음? 아니, 이 꼬마 손님은 누구시지?" 식판을 올려놓고 키가 작은 관계로 얼굴만 빼꼼이 내밀고 있는 나를 보고 빨강머리의 주방 아줌마가 웃으면서 질문을 해왔다. 음, 꼬마 손님이라... 아마 이 아줌마는 내가 왕자인걸 모르는 모양이다. 하 긴 어떤 왕자가 이런 급식소 같은데 올 거라고 생각하겠어. "네에~~ 카류리드라고 해요. 카류라고 불러주세요. 헤헤... 배고프니까 많이 많이 주세요~!" 모름지기 식당의 대장은 식당 아줌마인 것. 예쁘게 보이면 떡 하나 더 나 올지도 모른다. 자, 귀여운 척 하자! 귀여운 척! 캬캬캬!!! "에구~ 귀엽기도 하지. 이 아줌마가 많이많이 주마~ 자, 여기 토마토 하나 더 얹어줄 테니 맛있게 먹어라.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카 류?" "헉! 카류리드 전하? 카린!! 어제 들어온 아이라면 카류리드 전하라구요! 아이고, 전하!! 미천한 것들의 모르고 저지른 짓이니 제발 이 무례를 용서 해 주십시오!!" 옆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다른 식당 아줌마가 갑자기 기겁을 하 고는 고개를 숙이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끄윽, 이게 아닌데...나의 의도가 이렇게 변질되어 버리다니. "괜찮아요, 아줌마. 그보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혼자 먹기가 쓸 쓸해서 여기서 먹기로 했거든요?" "아이고 전하!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저희들이 알아 뵙지 못하고 무례 를 저지른 죄 백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이번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 오! 전하~~~~!!" 내가 괜찮다고 말했지만 아줌마는 더욱 벌벌 떨면서 사정을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또 존댓말을 썼구나! 여기서 여러 마법사들에게 존댓 말을 쓰고 다녔더니 그만 나도 모르게 시녀에게도 존댓말을 써버렸군. 존 댓말을 하는 나를 보고 비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모양인데, 어떻게 하지? 완전히 말이 안 통하네. 아줌마, 진짜 괜찮으니까 제발 그만해요! 크어억!! 또 한번 시선집중 당하고 말 꺼야!! "카류리드 전하께서 괜찮으시다 하지 않나! 모두들 어서 일이나 하거라. 카 류리드 전하께서 원래 장난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뿐이니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 없다.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 하르몬 선배는 엄한 목소리로 시녀들에게 호통을 친 후 나를 지긋이 째려 보았다. 비록 그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면 일단은 그에게 동조해야 하겠지. "그..그래. 어서 일들 보세...보거라.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음.. 그리 고 내일부터 이곳에 온다는 건 사실이니 그렇게 알아라." 우아아... 어색하다. 비록 이틀동안이지만 생명의 궁 안에 들어와서 거의 모 든 사람에게 존댓말 써왔는데 갑자기 또 어른한테 반말을, 그것도 명령조 로 하려니 상당히 무안하다. 어쨌든 시녀들한테는 말을 할 때는 주의하도 록 해야겠다. 잠시 동안의 소동 후 우리들은 음식을 전부 받아들고 비어있는 자리를 찾 아 앉았다. 그리고 내가 스테이크를 한 입 가득히 밀어 넣었을 때 잠시동 안 잠잠했던 하르몬 선배가 또 그 얄미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시녀들을 놀리면서 노시면 참으로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하...하르몬 선배님..." 웃! 저...저 놈이 또 시비를 걸어!! 하르몬 선배가 아주 노골적으로 나를 꼬나보며 말했기 때문에 유넨 선배는 약간 당황한 듯 그를 말리려했다. 그러나 하르몬은 유넨 선배의 말을 완전 히 무시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를 바꾸지 않았다. 그래~ 아주 막 나가는구나. 막나가!!! 뭐라 한마디 해주려고 했지만 입에 음식을 잔뜩 물고 있어서 넘길 때까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전하는 그런 일이 재미있으신 지 몰라도 저들은 전하의 말 한마디로 인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토록 총명하다고 알려지신 전하께서 왜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꿀꺽. 나는 스테이크 조각을 넘기며 약간 미간을 구겼다. 하르몬 선배의 말이 좋 은 말은 아니니까. 하지만...확실히...생각 없이 굴긴 했다. ...할말없군. 나 때 문에 저 아줌마들 얼마나 놀랐겠어. 분명 남들 눈엔 시녀들이 당황하는 걸 보면서 재미있어하는 걸로 보였을 거다. 하지만 시녀들을 괴롭히려고 그런 건 아니란 말이야! 씨... 내가 사과해야 하는 건가? "...제가 확실히 잘못했습니다. 나중에 저 시녀들에게 가서 사과 할 테니 지 금은 음식이나 먹는 것이 어떨까요?" 그래도 하르몬 선배에게 순순히 말하긴 싫어서 '음식이나' 라는 말에 악센 트를 주어 말했다. "하! 시녀들에게 사과를 하신다 고요? 고귀하신 왕자 전하께서?" 뭐야!! 아쒸, 정말! 사람 기분 더럽게 만드네. 왜 자꾸 시비를 거는 건데!!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인 주제에 요렇게 여리고 귀여운 어린 아이(?) 에게 그렇게 시비를 걸면 기분 좋은가? "하르몬 선배님께서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저 역시 선 배님의 말을 인정하며 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당연히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르몬 선배님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나요?" "카류 전하,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 진정하십시오. 정 그렇다면 점심식사 후에 카류 전하께서 시녀들에게 사과하시는데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와 하르몬 선배 사이의 기류가 점점 심상치 않아지자 유넨 선배가 천사 같은 미소를 띄우며 그렇게 말했다. "유...유넨!!" 이상하게도 유넨 선배의 말에 하르몬 선배는 굉장히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래요! 그러면 되겠군요!! 어서어서 먹고 주방 아줌마...아니, 시녀들을 찾 아가자고요!! 그걸로 됐겠지요? 하르몬 선배님?" 그러나 나는 그의 반응을 무시하고 한번 손뼉을 쳐서 주의를 끌며 유넨 선 배의 말에 동의했다. 사실 그게 가장 좋은 방법 아닌가. 이대로 말싸움을 하다간 음식이 다 식어버릴지도 모르겠다. 하르몬 선배도 생각 이상으로 내 말을 잘 받아치는 편이니 말이다. 나의 반응에 하르몬 선배는 말로 설명하기엔 상당히 복잡 미묘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번엔 또 왜 저러는 거야? 정말 이상한 선배라니깐. 아르디예프 님은 왜 하필 저렇게 괴팍한 인간을 소개시켜주었담! 생명의 궁에서 편안히 지내려 면 아무래도 하르몬 선배와 친해져야 할 것 같은데 저렇게 인간 자체가 괴 팍해서야... 나는 입안 가득 쑤셔 넣은 음식을 우적우적 씹으며 한동안은 생명의 궁에 서의 나날이 그리 평온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명에 궁에 도착한지 3일째 되는 날 새벽. 난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생 명의 궁 앞의 마련된 널따란 공터로 갔다. 오늘부터 드디어 마나를 느끼는 수련을 한다. 마나라! 마나를 느끼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 다들 적당한 자리를 잡고 앉아라. 그러면 각자의 앞에 마나를 움직일 줄 아는 선배들이 갈 것이다. 그들이 너희들 몸 속의 마나를 움직여 줄 것 이니, 그 마나를 느끼면서 선배들이 일부러 마나를 움직여주지 않아도 마 나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수련을 하는 것이다. 자, 어서! 지금부터 시작한 다!" 나는 쪼르르 가서 줄의 맨 앞에 앉았다. 국왕이 내게 가장 좋은 선생을 붙 이라고 명령했다고 들었으니 나의 마나를 움직여 줄 사람은 아르디예프 스 승님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강한 마법사 는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아닌가. "카류. 너의 마나를 움직이는 것은 여기 유넨이 해줄 것이다." 음? 아니, 유넨 선배? 유넨 선배가 어떻게 이곳에... 아니, 그것보다 유넨 선배가 움직여 준다고? "네? 아르디예프 스승님께서 해주시는 게 아니라요?" "음... 그래. 비록 내가 8서클의 대마법사이긴 하나 마법의 유동에서만큼은 유넨을 따라갈 수가 없단다. 유넨은 마나를 느끼고 움직이는데 있어 아주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지. 이제 막 19살인 유넨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마나를 느끼고 움직였으니 말이다." 유넨 선배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단 말인가!! 혼자서 마나에 대해 깨우 치다니! 마나는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깨우쳐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절대 아 니다. 보통 마법사로서 마나를 느끼는 천재적 재능이라 함은 다른 마법사 가 움직여주는 마나를 느낀 후에 바로 혼자 마나를 느끼고 움직일 수 있게 된다던가 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 마나를 움직여 주지도 않았는데 혼자 그걸 깨우쳐 버리다니, 이건 천재도 보통 천재가 아닌 것이다!! 우와~~ 어쩌면 우리 아르윈 왕국 에서 9서클의 마법사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는걸? "이야! 처음 알았어요!!! 유넨 선배님, 왜 처음에 봤을 때 그런 얘기 해주지 않으셨어요?" "음? 이미 서로 알고 있었느냐?" "네!! 어제 유넨 선배님이 제가 책을 빌리는 걸 도와주거든요. 식사도 같이 했고요. 선배님은 정말 친절한 분이에요." "그렇지 않습니다. 카류 전하께서 아직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마법에 그렇 게 열정을 쏟는 것을 보니 저도 모르게 그렇게 행동한 것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도 그와 같은 시간을 보낸 견습 마법사이니까요. 아마 누 구라도 카류 전하를 보면 그렇게 해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니지! 유넨 선배!! 적어도 그 하르몬이라는 선배는 절대 그렇지 않았을 걸! "역시 유넨 선배님은 너무너무 착하고 친절해요!! 유넨 선배님의 지도 감사 히 받겠습니다!" 아직 홀로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죽 정좌를 하고 앉자, 그 뒤로 마나를 움직여 줄 선배들이 섰다. 우음! 드디어 시작이로군!! "자! 시작해라." 유넨 선배의 손이 나의 어깨에 얹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음? 그런데 어깨 가 왜 이렇게 간지럽지? 으으으음?! "꺄...꺄하하하하하하~~!" 난 그만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고 말았다. "카...카류 전하...." "하하하.... 아...아아... 에....... 왜...왜 이렇게 간지럽지요? 온몸이 간지러워 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렇다. 유넨 선배가 손을 어깨에 얹자 갑자기 어깨부터 살살 간지럽기 시 작하더니 온몸에 누가 간지럼을 태우는 것처럼 엄청나게 간지러웠던 것이 다! 내게 약점을 하나 말하라고 한다면 그건 정말 간지럼만은 못 참는다는 거다!! ....실은 수많은 약점 중 하나다. "으음... 원래 마나를 처음 움직일 때는 조금 간지러운 법이란다. 지금껏 계 속 고정되어 있었던 너의 몸 속의 마나가 움직임으로써 간지럽다고 느끼게 되는 거지. 그렇게 엄살 피우지 말고 어서 다시 자리에 앉아라!! 확실히 유 넨이 마나를 잘 움직이니까 네가 조금 더 간지럼을 타는 것 일게다. 차분 히 참고 있으면 간지러움은 사라지고 곧 배꼽 아래를 중심으로 돌아다니는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식으로 마나를 움직여 보는 거 다!" "네...네에에.." 우움, 정말 간지럽던데... 내가 한참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으려 하는데 문득 멀리서 피 식 웃고 있는 하르몬 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이번엔 제대로 하고 말 테다! 하르몬 선배가 얄미워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눈을 꼭 감았다. "으...으... 아...하하하하!!!" 아앙...힘들다... 너무 너무, 무지~~~하게 간지럽다!! 으... 이대로는 다른 사람 들에게 피해만 주는 거 아냐. 아닌게 아니라 알게 모르게 은근히 나를 째 려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는군. "저... 스승님... 저만 다른 곳에서 하면 안될까요? 모두에게 폐가 되는 것 같아서 도저히..." "무슨 소리하는 거냐!! 여기만큼 공기가 깨끗한 곳은 없으니 이곳이야말로 마나를 느끼기에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게다가 생명의 궁 내에서 마나 수 련은 이곳에서만 하게 되어 있거늘 대체 어디를 가겠다는 말이냐? 너의 행 동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걸 안다면 간지러움 따위는 참아내는 인내 를 보여라." 이런...으윽...어째...흑흑... 왜 다들 괜찮은 거야? 흑흑... "카류 님... 다른 분들도 처음 시작할 땐 그렇게 조금씩 곤란해한답니다. 하 지만 곧 적응해 내는 걸요. 전하도 금방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잘 참아보 세요." 괜히 징징거리고 있는 내게 유넨 선배가 상냥한 목소리로 격려의 말을 해 주었다. 끄윽... 참자, 참어!! 이대로 라면 유넨 선배도 곤란할 게 아니겠어. 내가 왕 년에 죽어 본 적도 있는데(?) 이것 하나 못하랴!! 굶어 죽는 것만 아니면 뭐든지 한다! "윽....으윽....." 난 눈을 꼭 감고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간지러움을 참았다. 최대한 안 웃으려고 했더니 자꾸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윽!! 안돼, 참자. 참자...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하아...하아....윽...하아..." 저건 고의가 아니다. 너무 간지러움을 참아서 저런 거다. 크윽!! 이거 정말 못해먹을 짓이구만. 궁금하다면 누구보고 간지럼 태우라고 해놓고 참아봐 라. 이렇게 된다. ......하지만 왠지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거 같은 느낌이 든다. "후....후아......." 무언가가 느껴진다. 무얼까... 이 이상하고도 생소한 느낌은? 꼭 이물질이 낀 거 같이 찜찜하군. 아니, 틀려. 그런 느낌이 아냐. 하지만 뭔가...뭔가 내 몸을 맴돌며 머리와 가슴을 차분하게 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이..... 이것이 마나라는 걸까! 세상에!! 힘이, 힘이 느껴진다!! 물리적인 힘도 아닌, 그렇다고 따뜻하거나 차가운 것도 아닌, 부드럽거나 딱딱하지도 않은. 무얼까....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의... 분명 힘!! 그래, 힘이 느껴 진다!! 신기하다. 맙소사! 이럴 수가!!!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이 내 단전 -배꼽 밑 이랬으니 그 유명한 단전이 맞 겠지- 을 중심으로 뱅뱅 돌고 있었다. 아아... 왜 이게 간지럽다고 생각한 걸까. 이렇게도 기분이 좋은 것을. 나는 잔뜩 움츠렸던 몸을 서서히 풀었다. 호흡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을 느 끼면서 난 천천히 그 느낌을 음미하고 있었다. 우아... 이 상태에서 죽어버 린다면 정말 여한이 없겠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정말 마음 속 깊은 곳에 서 절절히 우러나오는 진심이다. 어쩌다가 전생에 죽으면서 당했던 일이 생각 날 때면, 밤에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더 이상 그런 식의 고통을 겪는 건 진절머리가 난다. 환생을 한 후, 나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바꾸지 않을 목표를 하나 세웠는 데 그건 언젠가 죽게 된다면 반드시 절명(?)하고 말리라는 것이다!! 또 다 시 그런 식으로 고통스럽게 죽을 마음은 정말 병아리 눈물만큼도 없다! 물 론 지금 죽을 마음 같은 건 없으나 혹시라도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상황 에 처해 죽을 성싶으면 최대한 빠르게, 고통 없이 죽기 위해 자살이라도 하고 말 테다!! 뚝!!! "응?" 한동안 인생의 마지막에 대한 심오한 고찰(?)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을 모 르고 있는데 갑자기 내 몸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고 있던 마나가 순식간에 끊어져 버렸다. 아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게 좋겠다! 이게 대 체 어떻게 된 거지?! 난 놀라서 눈을 떴다. "오늘 수련은 여기까지 하도록 한다. 모두들 해산하고 오전 수업에 늦지 않고 들어오도록!" 으잉?? "자...잠깐만요. 스승님! 방금 느껴지던 기분 좋은 게 갑자기 확 하고 사라 졌는데... 어떻게 된 일이죠?" "후후후. 그렇게 기분이 좋더냐? 사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일단은 그게 바로 마나란다. 지금까지 유넨이 너의 몸 속의 마나를 일부러 움직여 주고 있었기에 네가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된 거지. 지금은 유넨이 움직여 주고 있지 않으니까 마나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아아... 그렇군요... 그거... 마나 느끼게 하는 거 조금 더 하면 안되나요?" "안 된다." "어째서..." 나는 항의를 하려고 몸을 일으키려다가 갑자기 어지럼증 비슷한걸 느끼고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면서 숨이 갑자기 가빠져왔 다. "헉헉...이게...뭐지? 왜 갑자기..."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살짝 들어 제대로 앉혀 주었 다. 그리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보거라. 몸이 이상하지? 마나는 일종의 힘이다. 주변의 마나가 아닌 몸 속 의 것을 움직여 주는 것이 초보자가 마나를 자각하는데 가장 쉬운 방법이 기에 지금 이런 식으로 쓰고 있지만, 그렇게 하면 움직여진 마나만큼의 힘 의 타격을 몸이 고스란히 받게 되지. 그래서 마나를 느끼는 수련은 새벽에 딱 2경만 시키는 것이란다." "그...그렇지만... 헉헉... 겨우 이 정도로 지친다면 마법은...헉헉... 어떻게 써 요? 하아..." "사실 자신의 몸 속에 내재한 마나만을 이용해 마법을 쓴다면 그 충격으로 인해 살아남을 마법사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마법사들은 최대한 자신의 마나는 적게 사용하면서 대자연에 있는 힘을 고루 끌어쓰기 위해 노력한단 다. 뛰어난 마법사일 수록 자신의 몸 속의 마나를 사용하지 않음으로서 더 많은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 예를 들어 유넨처럼 마나 유동 에 능한 자들은 능숙하게 다른 곳의 마나를 끌어씀으로서 다른 자들은 하 루에 10번밖에 못 쓸 마법을 20번은 쓸 수 있게 되는 거지. 그만큼 마나를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은 굉장히 중요하단다." 음, 자신의 마나는 최대한 쓰지 않고 남의 것을 빼 쓰도록 노력해야 한단 말이구나. "어찌됐든 넌 어려서 마나 수련으로 인한 타격이 더욱 클 테니 가서 푹 쉬 는 게 좋겠구나. 유넨. 네가 카류를 방으로 데려다 주거라. 난 연구할 것이 있어 지금 가봐야 해서 말이야. 음...역시 아직은 너무 어리다니까."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내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잔 뜩 헝클어뜨리고 서쪽 건물로 사라졌다. 다 좋은데 왜 남의 머리를 그렇게 엉망으로 해 놓고 가는 거지? 오오! 드 디어 나의 깜찍함에 넘어오고야 만 것인가? 그래, 이렇게 성실한 꼬맹이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겠냐, 크하하하! 으으... 그런데... 완전히 하늘이 뱅글뱅글 도는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 분이 굉장히 좋았는데... 에구에구... 후유증이 장난이 아니군. 하지만 그 기 분은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거 같다. 마나 수련이란 거 마치 마약 같군. "하아... 그런 거였구나....마나란... 하아...하아..." "괜찮으신 가요? 카류 전하?" "네에... 유넨 선배님... 헤구... 괜찮아요. 헤헤... 하아..." "멍청하기는. 아직 쪼끄만 게 벌써부터 마법을 배우겠다고 설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고." 응? 이 밉살스러운 소리는 하르모온~~!! 애가 다 죽어 가는데 네가 그럴 수가 있냐아아~! 하르몬 선배는 아무리 시비를 걸어도 내가 왕족 모독 죄인지 뭔지로 벌을 내린다든지 하는 낌새를 보이지 않자 아주 나오는 대로 말을 막 하기로 한 모양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내게 반말까지 한 것 같은데?! "어린애는 아플 때 아프다고 징징 짜는 게 정상이다." 하르몬 선배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휙 안아들었다. "하르몬 선배님. 제가 하겠습니다. 아르디예프 스승님께서 제게 부탁하셨는 걸요." "어린애한테 어린애를 맡길 수는 없으니까 하는 것뿐이다. 유넨." "선배님... 저도 이제 곧 20살입니다. 성인식은 2년 전에 치렀고요. 게다가 하르몬 선배님과 전 겨우 6년 차이지 않나요." "1, 2년 동안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니, 유넨? 겨 우 6년이라니, 그렇게 세월을 경시하는 말을 하면 정말 곤란하다." 크흠! 하르몬 선배... 유넨 선배를 돕고 싶으면 그냥 솔직하게 돕고 싶다고 말하라고. "으으... 그래요. 아프고 하아... 어지럽고 토할 거 같다고요. 하아...그러니 하아...얼른 방에 데려다줘요." "...잘 참다가 갑자기 그러시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전하?." "으음? 하아... 저는... 어린애가 아니었던가요?" 내 말에 하르몬 선배는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피식 웃고 나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음, 저 인간도 웃으니까 의외로 괜찮아 보이는군. 평소에 이렇게 행동하면 얼마나 좋아. 어쨌든 하르몬 선배도 지금 하는 행동을 보면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닌가보다. 내가 첫인상 때문에 그를 너무 나쁜 놈으로 몰았던 것일 지도 모르겠다. 다음부터는 좀 상냥하게 대해 줄까? "카류리드 전하, 20살이 넘는 어른들도 1서클 마법을 이해하기 어려워하고 있는데 카류리드 전하는 이제 10살이 아니십니까. 전하라면 사람이란 모름 지기 자신의 분수에 맞는 일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믿습니다만... 그렇게 수준에 맞지 않는 어려운 책을 붙들고 있는 다고 해 서 금방 마법에 대해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빠른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그 일에서 완전히 손을 놓는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하르몬 선배님? 저는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부 지런히 노력한다면 언젠가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 믿고 있는데 하르몬 선배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언제나 쉽게 손에 닿지 않는 일 같으면 포기해버리시는 모양이죠?" "하르몬 선배님... 카류전하....." 나는 마나 수련을 마치고 오전동안 완전히 녹초가 된 몸을 쉰 후에 수업이 없는 한가한 낮 시간을 이용해 유넨 선배, 그리고 하르몬 선배와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나의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것이 이렇게 모인 이유였지만, 또다시 하르몬 선배가 시비를 거는 바람에 오전의 나의 결의 는 어느새 저 멀리 물 건너 가버리고 또다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의 말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주시면 안될까요? 저는 카류리드 전하께서 아직 어리신 데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마법서를 읽으시는 것 같아 충고를 드리려하는 것뿐입니다." "하르몬 선배님도 저의 행동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해석하여 행동해주시면 어떨까요. 겨우 10살 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놀지도 않고 마법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책을 읽겠다고 했을 때, 분수에 맞지 않으니 포기하라고 말 하는 대신 그 기특함에 칭찬과 격려를 해주실 수도 있는 일 아닌가요?" 어린애인 내가 생명의 궁에 들어온 게 맘에 안 든다는 건 알겠지만 이젠 좀 그만해라! 그러고도 당신이 어른이냐?! "......스스로 자신이 어린애라고 주장하는 어린애라니..." "전 올해로 태어난 지 10년이 된답니다. 키로 보나 얼굴로 보나 귀여운 어 린애가 아닌가요? 혹시 이런 말 들어보셨나 모르겠군요. 어린아이는 나라 의 기둥이라는 말을요. 어린아이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존재이므로 그만 큼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뜻의 격언이랍니다. 아시겠어요, 하르몬 선배 님?" "......허허..." 도저히 10살의 어린애라고는 봐줄 수 없는 나의 막힘 없는 말발이 기가 막 혔던지 곁에서 그저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유넨 선배님마저 입을 짜 악 벌리고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르몬 선배도 막 나가기로 한 모양인데, 나도 이젠 막나가겠다 이거야! 환 생하고 나서 이렇게까지 침 튀겨가며 마구 대들어 본 적은 없었는데... 하 지만 나도 당하고는 못살아!! "어디서... 그런걸 주워 들으셨습니까?" "책은 세상 만물의 지혜가 담겨있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보고랍니다. 책 좀 읽으시죠! 하르몬 선배님!" 내가 톡 쏘아 주자 하르몬 선배의 몰골이 말이 아니게 변해갔다. 애한테 이런 말 들으니 기분이 어때? 만약 내가 하르몬 선배라면 이불 안 에 들어가 홀로 배게를 껴안고 통곡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푸훗! 하르몬 선 배에게는 안됐지만 난 보통 애가 아니란 말씀이야. "하하하... 카...카류리드 전하. 일단 이 수식에 대해 알아볼까요..?" 유넨 선배님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면서 우리들 사이에 끼어 들었기에 하르 몬 선배와의 피 튀기는 언쟁은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동안 공부를 하는 듯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나 곧 어디선가 나타난 3 명의 남자들이 다가와서는 내게 말을 거는 바람에 또다시 우리들은 공부하 기를 접는 수밖에 없었다. 그 남자들이 다가오는 것에 하르몬 선배의 얼굴 이 약간 구겨지는 것이 보였지만, 아까 내가 한 말 때문에 저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카류리드 전하시지요?" "네, 그런데요. 아... 오후 수업을 들을 때 보았던 선배님들이시군요. 반갑습 니다." 난 최대한 귀엽게 방긋 방긋 웃으면서 그들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하르몬 선배 같은 사람은 하나로 충분하다!! 인상 관리하자. 인상 관리해서 모두에게 이쁨 받아 평안한 일상을 보내자!! "아직 한번밖에 보지 않은 얼굴을 잊지 않고 계시다니 역시 총명하신 분이 시군요. 그러나 저러나 왜 저런 녀석과 함께 계시죠? 하르몬이야 아예즈 공작가의 장남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유넨 같은 녀석과 함께 계시면 전하의 위명에 해가 갈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 무슨 말씀이신 지..." "아~ 이런. 역시 모르고 계셨군요! 이럴 줄 알았다니까." 무리를 지어온 남자들은 유넨 선배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건들먹거리기 시 작했다. 천사 같은 유넨 선배에게 긁어낼게 뭐가 있다고 저러는 거지? 원체 유넨 선배에게 좋은 감정만이 쌓여있어서 그런 것인지, 일부러 내 앞 에서 유넨 선배의 험담을 하려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구성된 그 들이 내겐 상당히 좋지 않은 시선으로 비춰졌다. "선배님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까! 유넨이 어쨌다고 그러시는 거 죠?" 하르몬 선배가 인상을 쓰면서 남자들에게 따졌다. 하지만 하르몬 선배의 말은 가차없이 무시하고 그 무리 중의 한 남자가 내게 말을 계속했다. "저 녀석의 이름을 아십니까?" "예? 그야 유넨 선배님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그의 성이 뭔지 아십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성을 묻다가 듣지 못했네." 문득 내가 아직 유넨 선배의 성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중얼거리자 그 남 자는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이마까지 탁 치면서 즐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 었다. "역시! 그러셨군요. 저 녀석은...." "그런 것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하르몬 선배가 소리를 질러 그 남자의 말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곧 유넨 선배가 그 뒤를 이어 말했다. "전 성이 없답니다, 카류리드 전하. 전 평민이거든요." "평민?? 유넨 선배님이 평민이었단 말입니까??" 기껏 하는 소리가 그거냐. 그걸 무슨 큰 단점이나 집어내는 것처럼 말하다 니. 정말 엄청난 권위의식이다.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면서도 일단 그들을 골려주기 위해 굉 장히 놀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솔직히 다른 이유에서 약간 놀랍기도 했다. 마법이란 완벽한 귀족 들의 전유물이다. 확실히 왜 그런지는 최근에 마법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 지만, 마법이 귀족들의 전유물이란 것은 정말 상식 중의 상식인 것이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단 마법사를 초청해서 최소 1년 동안은 꾸준히 마나를 느끼는 수련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수가 적은 마법사를 1년 동안이나 묶어두려면 그만큼 돈과 권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마법은 귀족들의 전유물이 되어간 것이다. "그렇습니다, 카류 전하. 저는 평민입니다." "우우.... 평민이라... 유넨 선배님이 평민이라니... 혹시 생명의 궁에 들어온 평민은 유넨 선배님이 처음인가요?" 갑작스러운 나의 질문에 유넨 선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 가 더러운 평민이라고 짜증이라도 부릴 것이라 예상했던 모양인데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해오자 저렇게 의아해진 것이리라. "아닙니다. 옛날에도 아주 가끔씩 저처럼 평민 출신인 사람들이 들어온 적 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지요?" "대부분 7서클의 마법사가 되셨습니다. 8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신 하버트 님도 계시지요." 후후후... 바로 이걸 노렸지. 직접 마법을 쓰는 법이 아니라면 마법에 대한 건 줄줄이 꿰고 있다 이 말씀이야!! "와아~~!! 굉장하네요!! 전 앞으로 평민만 보면 무조건 존경심을 품게 될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북방의 소수민족국가들의 침략을 1년만에 완전히 일소시킨 레이포드 경도 평민출신이잖아요? 게다가 얼마 전에 아이시스 남 작 작위 받은 게릭이라는 분도 평민 출신인데 엄청나게 박식하신 분이세 요! 제가 그 분을 뵙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옛날의 평민이었던 마 법사들도 전부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되셨다고 하니!! 유넨 선배도 혼자 서 마나를 깨우쳤죠?! 우우응~~ 평민들은 하나같이 너무 대단해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그 남자들에게 홱 얼굴 을 돌리고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서 유넨 선배님의 마법 공부를 방해할까봐 저를 유넨 선배님에게서 떼어놓으시려고 그러시는군요!!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아직 어리니까요. 제가 부족하다는 거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 다고 그렇게 말을 돌려 비꼬아서 말하시다니... 제가 비록 어리지만 그 정 도 눈치는 있습니다. 정말 섭섭하군요. 최대한 방해하지 않게 유넨 선배님 곁에 있을 테니 그만 가주시겠어요?" "예에? 그런!! 전하! 그게 아니라!!" "그만두세요!! 그만 가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도 제게 모욕을 주고 싶으 신 것입니까?" "카...카류리드 전하!!!" "당장 가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되 겠군요!" 잠시 머뭇거리던 남자들은 내가 열 받은 척 그들을 째리며 소리를 지르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났다. 내게 밉보였다고 생각할 테니 아마 꿈자리가 뒤숭숭할 거다. "우흠!! 우리도 이젠 공부해요. 공부하려고 모였는데 계속 딴 짓만 하고 있 네요. 방해를 해서 죄송해요. 유넨 선배님." "아..." 난 얼굴을 돌려 약간 멍해 보이는 유넨 선배를 향해 상쾌하게 웃어 보였 다. "네...네... 카...카류 전하... 호의에 감사드..." ".....흐흐흐흐흐......." 갑자기 하르몬 선배가 음침하게 웃기 시작했다. 왜 저래? 꼭 맛이 간 사람 같아... "저어... 하르몬 선배...?" "흐흐흐흐...아하하하하하하!!!!!" 헉!! 뭐..뭐야? 하르몬 선배가 음침하게 웃다가 갑자기 박장대소를 터뜨리 는 것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웃으려면 제발 정상적인 방법으로 웃어 줘!!! "그래...그렇군요. 하하하... 카류리드 님. 하하하... 정말...정말 통쾌했습니다!! 지금까지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제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네에?" "이제까지... 그러니까 저는 전하를 국왕폐하의 힘으로 아무 생각 없이 생 명의 궁에 들어온 건방진 꼬마... 음...정말 죄송합니다... 어쨌든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틀렸습니다. 식당에서의 일도 그렇군요.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으면 시녀에게까지 사과를 하시는 전하의 모 습을 보면서 조금씩 제 생각을 바꿔가고 있었습니다만..." 아, 그래서 식당에서 그렇게 복잡 미묘한 얼굴을 했었구나. 확실히 왕족이 시녀한테 사과를 하는 장면... 신기해 보였겠지? 하지만 난 전생의 기억 때 문에 왕족이면서도 왕족이 아니라서... 조금 복잡하구만. "그리고 유넨을 도와주신 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조금 전처럼 실력도 안 되는 녀석들이 귀족이랍시고 와서 유넨을 깔아뭉개는 걸 보자면 울화통 이 치밀어서 정말 제가 제명에 죽을 수 있을까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유넨 이 워낙 착하고 순해놔서 저런 놈들이 깔보거나 해도 그냥 웃으며 겸손하 게 넘어가는 일이 일상다반사가 아니었겠습니까. 크으... 한번씩 그런 장면 을 보노라면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전하께서도 유넨을 무시하셨다면 전 화 를 참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쯤 왕족 시해 죄로 끌려갔을지도 모르겠군요!!" 컥!! 내가 유넨 선배 편을 안 들었으면 날 팼을꺼란 얘기?! 우와, 무섭도록 터프하구나, 하르몬 선배! 예전부터 하르몬 선배가 막 나간다는 거 익히 알 고는 있었지만 저렇게 목숨 아까운 줄 모르다니... "대체 생명의 궁에 들어오는 녀석들은 인성교육이 안돼 있어요!! 그래도 이 렇게 전하께서 유넨을 도와주시니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군요. 카류리드 전하는 최소한 생각하는 면에서만은 확실히 생명의 궁에 들어오실 자격이 되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의 무례, 용서를 받고 싶 습니다! 저의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하르몬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내게 그렇게 투덜거렸던 것도 유넨 선배에게 거들먹거리는 귀족들의 영향 이 컸나 보구나. 쩝, 알고 보니 하르몬선배가 유넨 선배의 바리케이드 역할 을 했나보네. 내가 너무 하르몬선배를 편협한 시각으로 본 거 같다. 말투는 좀(?) 험해도 유넨 선배를 도와주는 정의의 편(?)이었는데. "괜찮습니다. 이미 전부 잊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유넨 선배님을 좋아하 는 걸요. 어서 일어나세요. 으음... 그러면 이제부터 저를 괴롭히지 않으실 거지요?" "후후후...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하르몬 선배님도 카류라고 불러 주세요. 앞으로 친하게 지냈 으면 좋겠어요. 하르몬 선배님! 그리고 유넨 선배님!!" 나는 하르몬 선배님과 서로 바라보며 빙긋빙긋 웃음 지었다. 해가 담벼락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는 초저녁, 나는 처음으로 생명의 궁 안에서 친한 친구를 사귈 수 있었다. Part. 7 - 건방진 꼬마 "정말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버님.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입니다." "그래, 하르몬. 너도 건강해 보이는구나." 나는 오랜만에 생명의 궁을 나와 아버님과 재회했다. 아버님은 나를 반기 며 응접실 중앙에 비치된 의자로 나를 이끌었다. "그래, 마법은 좀 진전을 이루었느냐?" "그저 그런 정도입니다. 이제 겨우 2서클 유저일 뿐이니까요. 아직 더 노력 을 해야 한답니다." "음, 그래. 노력해야겠지. 그리고 전부터 말하는 거지만 좀더 다른 마법사 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한 노력도 하거라. 아무리 그 유넨이라는 자가 너와 함께 아르디예프 님의 애제자라고는 하나 그런 평민하고 어울려 다니기만 해서야 쓰겠느냐." "유넨은 생명의 궁의 그 누구보다 뛰어난 마법사입니다. 멍청한 귀족들이 유넨을 평민이라고 무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젠가 유넨이 아르디예프 님 을 뛰어넘는 마법사가 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 연연히 떠돌아다닐 정도로 그는 대단한 재능을 가진 마법사입니다. 저는 유넨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는 사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아버님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와 어울리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재능이 대단하다는 것은 나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으니 평민이라는 것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친하게 지 내어 나쁠 것은 없겠지. 그러나 그 유넨이라는 마법사 때문에 다른 마법사 들과 사이가 틀어진다면 의미가 없지 않느냐." 아버님은 전부터 나에게 마법사들의 호감을 사 마법사 세력을 만들라고 나 에게 충고해왔다. 나를 통해 정치와는 거리가 먼 마법사들을 우리 세력으 로 끌어들임으로서 좀더 권력을 잡겠다는 속셈인 것이다. 우리 아예즈 공작 가는 처음 아르윈 왕국을 세우는데 가장 큰공을 세운 건 국 공신이었기에 파나인 공작 가와 함께 단 둘뿐인 공작 가문으로 가장 큰 권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세력을 키워온 리아 가문이라든가 트로이 가문 같은 후작 가에 의해 권력의 중심에서 상 당히 밀려나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아버님은 어떻게든 과거의 영광을 되 찾겠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물론 가문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공을 세워 그 입지를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닌 정치적인 뒷공작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 는 것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항상 지금처럼 아버님의 말을 거절하고 있었다. 게다가 생명의 궁에 있는 모든 마법사들의 존경의 대상인 8서클의 대마법 사이자 현자인 아르디예프 님이 마법사가 정치에 끼어 드는 일을 상당히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었기에 마법사를 끌어들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고 말씀드렸지만 아버님은 여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듯하다. "아버님, 그만 본론을 꺼내시지요.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갑작스레 저를 보자고 하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후, 아무리 생명의 궁에만 지냈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는 너도 알고 있겠 지? 요즘 화젯거리인 제6왕자 카류리드 님을 말이다." "카류리드 전하...?" "그래, 그가 이틀 후면 그분이 마법사가 되기 위해 생명의 궁으로 들어오 실 것이다." 나는 잠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카류리드 전하의 나이는 올해로 10살이 된다고 알고 있었기에 잠시 다른 사람과 헷갈렸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 보 았던 것이다.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지. 겨우 10살의 어린애에게 마법을 가르치라고 생명의 궁에 보내다니 말이다. 그 일로 아르디예프 님이 국왕폐하께 한바 탕 난리를 쳤던 모양이더구나." "...그게 사실입니까?" "쯧쯔... 마법이 얼마나 어려운 학문인지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으니 그런 어이없는 짓을 저지르는 거지. 네가 이제 겨우 2서클 마법을 배우게 될 정도로 굉장히 어려운 학문이 아니더냐.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 단 생명의 궁에 보낼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분이 머리가 좋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 앞으로 귀추가 주목되는 분이니 이번에 카류리드 전하 께서 생명의 궁에 들어가시거든 최대한 가깝게 지내도록 해보거라." "무슨 귀추가 주목된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버님의 말에 나는 미간을 약간 일그러뜨렸다. "하르몬... 비록 이런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는 하나, 가문의 미래를 위 해서 그 정도는 해야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제1왕자만이 왕이 되어야한다 고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다음 왕위계승에 가능성이 높은 분이라면 기 회가 있을 때 일찌감치 호감을 만들어 놓는 것이 후일을 위해서 좋을 것이 라는 말이다." "글쎄요. 최소한 지금 생명의 궁내에서 호감을 만들고 싶진 않군요."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직 어린애인 카류리드 전하를 벌써부터 권력 쟁탈을 위한 정치의 중심인물로 만들려하고 있는 아버님이 못마땅했 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에 도움을 줄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겨우 10살의 어린애를 마법을 가르치라고 생명에 궁에 들 이도록 명령했다는 것이라는 사실에 상당히 화가 났다. 보통 사람들이 생 명의 궁에 대해 무지하다고는 하나 이곳이 어린애를 들일만한 곳이 아니라 는 걸 꼭 가르쳐 주어야 아는 것인가! 아무리 머리가 좋더라도 아직 분별 이 어려운 어린아이가 아닌가. 조용히 마법에 열중해야하는 마법사들이 카 류리드 전하가 들어옴으로서 방해를 받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왜 생각하지 못하는 거지? "하르몬... 제발 말 좀 듣거라. 우리 아예즈 공작 가가 이대로 계속 리아 후 작 가에게 밀려도 좋은 것이냐? 오늘만 해도 내가 리아 후작 때문에 얼마 나 무시 받았는지 말도 못한다! 귀족 녀석들, 내가 곁에 있는데도 리아 후 작에게로 몰리는 꼴이라니... 작위도 우리보다 낮은 후작 가 주제에 권력이 조금 있다고..."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 뵙게 돼서 정말 반가웠습니다. 아버님!" "하르몬!" 내가 벌떡 일어나자 아버님은 소리질렀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아버님의 푸념을 듣고 싶지 않아 그대로 응접실을 빠져 나왔다. 후작이니 공작이니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나로서는 아버님의 생각 을 이해할 수가 없다. 비록 우리 가문이 리아 후작 가나 트로이 후작 가에 비해 약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공작 가문으로서 강한 권력을 자랑하고 있 지 않는가. 그렇게 권력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생명의 궁으로 향했다. 이틀 후, 나는 오전 수업을 하러 모인 공터에서 자그마한 어린아이를 볼 수 있었다. 아버님의 말대로 정말 카류리드 전하가 생명의 궁에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커다란 흑청색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이곳저곳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바라 보고 있는 카류리드 전하는 상당히 몸집이 작아서 보통 10살 짜리 아이보 다 훨씬 더 어려 보였다. 7,8살 정도밖에 안돼 보인다고 할까. 맙소사! 어떻게 저런 아이를 이런 곳에 보낼 생각을 했을까. 정말 황당하 다. 마법을 배울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이런 곳에 홀로 보내는 것이 안쓰 럽지 않았을까. 아르디예프 님은 카류리드 전하의 안내를 나에게 맡겼다. 카류리드 전하는 무엇이 즐거운지 조금 전부터 시종일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아는 사람 도 없는 낮선 곳에 와서 조금 불안해 할 만도 하건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 자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운 얼굴로 함박 웃음을 지으며 예의바르게 나에게 인사를 해왔다. 생각만큼 성가신 꼬맹이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어 린아이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마법사들에게 피해를 주기 전에 어떻게든 그를 내보내는 수밖에. 아이에게 할 짓은 아니지만 좀 퉁명스럽게 군다면 알아서 자기 발로 나가 겠다고 하지 않을까. 비록 내가 미움을 좀 받겠지만 말이다. "전하께서 머무르실 방을 안내해 드리죠. 전하께도 다른 사람과 똑같은 방 을 배정해 드릴 것입니다. 땅의 궁에서 지낼 때처럼 화려한 침식은 하기 힘드실 텐데 그런 생활을 참으실 수 있으실 지... 게다가 이곳엔 아스트라 한 님이 계시지 않으니 전하께서 간밤에 외로운 나머지 울어버리지나 않을 까 심히 염려가 되는군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류리드 전하는 눈썹 끝을 꿈틀 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만면에 부드러운 웃음을 띄우며 입을 열었다. "훗, 전 원체 비위가 좋아서 어디서든지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하니 침식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답니다. 제가 생명의 궁에 들 어온 것이 처음인지라 사실 조금 쓸쓸해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저를 위해 걱정의 말까지 해주시는 하르몬 선배님을 만나서 정말 기쁘군요. 아, 그건 그렇고 하르몬 선배님은 원래 왕족들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와 다른 방에서 잔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모양이군요? 하르몬 선배님은 나이에 비해 식견이 약간 부족하시군요. 아직 어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조금 더 상식을 쌓 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나는 예기치 못한 대답에 잠시 멈칫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지금 저것이 10살짜리 어린애의 입에서 나온 대사가 맞는가? 나는 잠시 혼란스러운 머리를 수습하며 카류리드 전하를 쳐다보다가 다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는 거친 발걸음으로 도서관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언제나 만날 장소에 유넨이 나와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크으!! 대체 그 꼬맹이는 뭐지?" 나는 결국 짜증이 섞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나는 그 이후로도 카류리드 왕자를 이래저래 괴롭혀서 자기 발로 생명의 궁에서 나가도록 계속 그 왕자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말을 해보았다. 그 러나 그 왕자는 도저히 어린애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말발을 가지고 나의 말을 모조리 되받아 쳐냈다. 게다가 얼마나 말을 얄밉게 하는지 마음 같아 서는 머리라도 한방 쥐어박아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 유넨!!!" 나는 투덜거리다가 뒤늦게 멀리서 유넨이 작은 어린애와 함께 걸어오고 있 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아...하르몬 선배님." "음, 그래. 그건 그렇고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나는 카류리드 전하를 약간 못마땅한 표정으로 힐끔 보면서 유넨에게 질문 했다. 유넨은 평민이라는 사실 때문에 처음 이곳에 오는 여러 귀족들에게 많은 수난을 당했는데 혹시 저 얄미운 왕자도 유넨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봐 약간 불안했던 것이다. "어째서 이런 곳에 있냐니요? 당연히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 하르몬 선배 님과 마주친 것이죠. 이 복도가 통하는 곳은 도서관 밖에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동안 생명의 궁에서 생활하시면서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전에 도 말씀 드렸지만 하르몬 선배님은 마법을 공부하기보다는 일단 일상 생활 에 필요한 상식에 대해 조금 더 공부를 하시는 것이 좋을 듯 싶군요." 그러나 그 왕자는 내 말꼬리를 놓치지 않고 트집을 잡았다. 약간 발끈한 내가 그 말을 맞받아 쳤지만 저렇게 조그마한 머리에서 어떻게 그렇게 긴 말을 좔좔 끄집어 낼 수 있는지 카류리드 왕자는 금세 얄미운 말을 톡 쏘 아냈다. "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제 곧 식사시간이군요. 카류 전하도 함께 가시 지 않겠습니까? 아직 아는 사람도 없으실 테니 혼자 드시기 적적하지 않으 시겠습니까. 저희랑 함께 식사하시지요." 우리들이 계속 말다툼을 하고 있자 유넨이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 제안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유넨을 바라보았다. 땅의 궁에서 사치의 극을 달리는 식사만을 했을 카류리드 왕자가 우리가 먹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이곳에서는 마법사의 등급에 따라 서로 다른 식당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 러나 대량의 음식을 만들어 내다보니 음식이 원래 자신의 저택에서 먹던 식사보다 영 질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서클이 낮은 마법사들을 위한 음식일 수록 그 질이 더 떨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처음 생명의 궁에 들어온 귀족들이 가장 먼저 겪는 난관이 바로 이 견습 마법사들을 위 한 급식소라고 할 정도로 이곳의 음식은 최악이었다. 사실 나도 처음 이곳 에 들어왔을 때는 이곳의 음식을 먹기가 약간 곤란했으니 말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유넨이 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괜...찮을까요? 괜찮다면 같이 가고 싶은데.." 내가 어제 생명의 궁에 대해 안내를 해주면서 분명 급식소에 대한 이야기 를 해주었는데도 카류리드 왕자는 우리와 함께 가고싶다고 말했다. 나는 약간 황당해서 그 꼬맹이에게 충고해주었다. "전하께서 그런 음식을 드실 수 있으십니까? 거긴 아직 2서클 이하의 견습 마법사들을 위한 급식소입니다. 전하의 입맛에 맞을만한 음식은 없을 줄로 사려되옵니다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비위가 좋아서 뭐든지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 고, 언제든지 잘! 놀고 한답니다! 하르몬 선배님이 이렇게 매번 저를 걱정 해주시니 정말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대체 남의 충고를 받아들일 줄을 모르는 고집불통 꼬맹이다. 에라, 나도 모 르겠다. 가서 고생 좀 해봐라. 혹시 가서 이상한 음식을 준다고 난동을 부 리는 건 아니겠지? "하르몬 선배님, 카류 전하. 식당은 이 근처니까 어서 가시지요. 이러다가 점심시간을 놓쳐버릴지도 모르겠군요." "네, 정말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유넨 선배님.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의 진 심 어린 충고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도 잦은 충고 부탁드리겠 습니다. 저도 그에 따른 감사의 인사를 꼭 해드릴 테니까요!" 윽! 저 꼬맹이가!! 끝끝내 얄미운 말을 던지며 돌아서는 카류리드 왕자의 자그마한 뒤통수를 보며 나는 꿀밤을 먹여주고 싶은 충동에 잠시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 나 어린애의 몇 마디에 내가 이렇게 열 받고 있다는 사실에 한숨을 쉬었 다. 지금까지 한 말다툼을 생각해보면 당돌하지만 정말 굉장히 똑똑한 꼬마다. 어떤 10살짜리 꼬마가 저런 식으로 말을 비꼬아 상대를 약올릴 생각을 하 겠는가. 어쩌면 내가 이렇게 그를 내보내려 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닐까? 급식소로 들어온 카류리드 왕자는 급식소 내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시 선 집중을 하자 조금 부끄러웠는지 먼저 식판과 포크 등을 들고 음식을 받 는 곳으로 쪼르르 뛰어갔다. 저 꼬맹이도 부끄러워 할 줄 아는군. 그건 그렇고 식판을 들고 가야한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음? 아니, 이 꼬마 손님은 누구시지?" 이런,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인지 음식을 담아주는 시녀가 카류리드 전 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반말을 해버렸다. 크게 경을 칠지도 모르겠군. 하지 만 이제껏 내가 카류리드 왕자를 괴롭히면서 얄미운 반박의 말을 듣기는 했으나 무례한 놈이니 당장 잡아넣으라는 명령을 듣지는 못했던 것을 생각 해 본다면 쉽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네에~~ 카류리드라고 해요. 카류라고 불러주세요. 헤헤... 배고프니까 많이 많이 주세요~!"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는 나의 모든 예상을 뒤엎고 방긋 웃으며 시녀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했다. "하." 나는 잠시 이마를 짚고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저렇게 어린데 벌써부터 저런 재수 없는 짓을 하다 니... 시녀를 조롱하고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 전부 몰아서 죄를 물을 생각 인가? 평민을 장난감 취급하는 귀족들을 많이 보아오긴 했지만 이건 정말 고단수구나. 잠시동안이나마 저 꼬마를 생명에 궁에 있게 내버려두어도 좋 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던 사실이 정말 후회되는군. "에구~ 귀엽기도 하지. 이 아줌마가 많이많이 주마~ 자, 여기 토마토 하나 더 얹어줄 테니 맛있게 먹어라.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카 류?" "헉! 카류리드 전하? 카린!! 어제 들어온 아이라면 카류리드 전하라고! 아 이고, 전하!! 미천한 것들의 모르고 저지른 짓이니 제발 이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뒤늦게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것을 깨달은 시녀들을 크게 당황하여 호들갑 을 떨었다. "괜찮아요, 아줌마. 그보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혼자 먹기가 쓸 쓸해서 여기서 먹기로 했거든요?" "아이고 전하! 말씀을 낮추어 주십시오!! 저희들이 알아 뵙지 못하고 무례 를 저지른 죄 백번 죽어 마땅하나 제발 이번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 오! 전하~~~~!!" 그러나 시녀들의 애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카류리드 왕자는 끝까지 존 댓말을 고수하며 시녀들을 조롱했다. 아니, 오히려 시녀들의 애원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짜증이 나는군. 나는 머리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 며 이를 갈면서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카류리드 전하께서 괜찮으시다 하지 않나! 모두들 어서 일이나 하거라. 카 류리드 전하께서 원래 장난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뿐이니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 없다.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시녀들을 향해 소리를 친 후 카류리드 왕자를 째려보았다. "그..그래. 어서 일들 보세...보거라.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음.. 그리 고 내일부터 이곳에 온다는 건 사실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러나 의외로 카류리드 왕자는 내 말에 동조해 조용히 이 일을 넘어갔다. 여기서 내 말에 반발하여 시녀들을 죽이라고 난동을 부린다면 어떤 수를 써서라도 생명의 궁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그래도 어 느 정도 상황판단력은 있는 것일까. 잠시동안의 해프닝 후 우리는 음식을 받아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카류리드 왕자는 이 음식들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스테이크를 크게 잘라서 한 입 가득히 넣어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이런 음식을 먹고도 별 말이 없는 걸 보니 비위가 좋다는 말은 진짜인 모양이다. 일단 나는 그 모습을 보며 그에게 한마디 해주기로 했다.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 것을 보면 그렇게 막 나가는 왕자는 아닌 모양이지만 그런 식으로 시녀들을 놀리는 짓은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버릇을 고쳐주어야 하겠다는 신념에 불타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녀들을 놀리면서 노시면 참으로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하...하르몬 선배님..." 유넨이 당황하여 나를 말리려하는 것이 보였지만 나는 말을 하는 것을 멈 추지 않았다. 왠지 저 왕자에게 제대로 된 이유를 들어 설명해 준다면 이 런 짓은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의 말을 되받아 칠 때도 틀린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지 않는가. "전하는 그런 일이 재미있으신 지 몰라도 저들은 전하의 말 한마디로 인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토록 총명하다고 알려지신 전하께서 왜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내 말에 카류리드 왕자는 양 볼을 잔뜩 부풀린 채로 얼굴을 찡그리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입안에 음식이 가득 들어 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음식을 전부 넘길 때까지 애써 조그 마한 입을 오물거리며 움직였다. 저런 모습만 보면 정말 귀여운데 저 입이 열리기만 하면 전혀 귀엽지 않은 꼬맹이가 된단 말이야.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할까. "...제가 확실히 잘못했습니다. 나중에 저 시녀들에게 가서 사과 할 테니 지 금은 음식이나 먹는 것이 어떨까요?" 카류리드 왕자는 순순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하여 나의 입가에 웃음이 번지게 만들 뻔했으나 마지막에 '음식이나' 라는 말에 악센트를 줌 으로서 또다시 나의 머리에 스팀이 솟구치도록 만들었다. 결국 '알았으니 밥이나 먹어라' 라는 뜻이 아닌가. "하! 시녀들에게 사과를 하신다 고요? 고귀하신 왕자 전하께서?" 나는 밀려오는 짜증에 완전히 비꼬는 어투로 카류리드 왕자에게 말했다. "하르몬 선배님께서 제가 잘못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요? 저 역시 선 배님의 말을 인정하며 저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당연히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사과를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하르몬 선배님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나요?" 이 꼬맹이가 점점... 잘도 왕족인 네가 시녀들에게 사과 같은 걸 하겠다! 정 말 뒤집어서 엉덩이라도 패주고 싶군! "카류 전하,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 진정하십시오. 정 그렇다면 점심식사 후에 카류 전하께서 시녀들에게 사과하시는데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유...유넨!!" 나는 갑자기 옆에서 입을 여는 유넨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식사하기 전에도 그렇고, 조금 전부터 유넨이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왕족 에게 시녀에게 가서 사과를 하라고 말하다니. 우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못해 어떻게든 말리려다가 그렇게 된 모양이지만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이런 말을 했다가 저 영악한 왕자에게 밉보이면 나중에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는데, 나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출신이 평 민인 유넨으로서는 상당히 곤란하지 않겠는가. "그래요! 그러면 되겠군요!! 어서어서 먹고 주방 아줌마...아니, 시녀들을 찾 아가자고요!! 그걸로 됐겠지요? 하르몬 선배님?" 그러나 이 왕자는 손뼉까지 치며 유넨의 말에 동의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짓만 골라서하는 그 어린 왕자를 한동안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선배님들! 이거 봐요! 많~죠~?" 풀밭 위에 마련된 탁자에서 마법수식을 공부하고 있다가 갑자기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조그마한 꼬맹 이가 과일을 한 아름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과일을 들고 짧은 다리로 쪼르르 뛰어 오는 모습을 보노라니 절로 웃음이 배여 나왔던 것이다. "아, 주십시오. 제가 들어드릴게요. 카류 님." "고맙습니다. 유넨 선배님~!" 유넨은 카류리드 왕자를 정겹게 카류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맹이 왕자도 유넨의 친절에 친근하게 답했다. 카류리드 왕자. 이 왕자에 대해 정의하자면 정말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데 소질이 많은 꼬맹이라 하겠다. 그리고 카류 왕자의 그 사람을 놀라게 만드 는 능력으로 인해 일어난 해프닝으로 우리들은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가장 나를 놀라게 한 일을 뽑으라면 역시 급식소에서의 사건을 꼽겠다. 내 가 시녀들에게 장난친 일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했더니 그 후 진짜로 시녀 들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그 일을 제안한 유 넨마저 당황한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게다가 유넨을 멍청한 귀족 녀석들에게서 그 특유의 재치와 입심을 이용해 서 구해주는 것을 보고 나는 더 이상 카류 왕자를 이 생명의 궁에서 내쫓 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보인 행동으로 볼 때 최소한 카류 왕자가 생각 없이 어린애 같은 행동을 함으로서 다른 마법사들의 일을 방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유넨 선배님! 선배님은 뭘 먹어서 그렇게 상냥해요? 제가 이제까지 살아 오면서 선배처럼 착한 사람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요!" "하하... 항상 저와 같은 음식을 드시지 않으십니까." 카류 왕자는 유넨의 팔에 찰싹 매달려서 유넨을 향해 싱거운 질문해왔다. 유넨이 팔을 약간 들어올리며 대롱대롱 매달린 카류 왕자를 보고 피식 웃 으면서 대답하자 그 꼬맹이는 또 다시 특유의 귀여운 웃음을 지었다. 유넨과 귀족들 사이의 트러블이 있은 후 나는 이런 카류 왕자의 행동에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넨이 평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피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 보통이건만, 카류 왕자는 유넨이 평 민이거나 말거나 전혀 관계없다는 듯 처음 만날 때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계속 그렇게 방긋방긋 웃으며 친근하게 굴었던 것이다. "하르몬 선배님은 이렇게 연약한 어린아이가 이렇게 많은 물건을 들고 오 는데 안쓰럽지도 않으셨어요? 생각이 없더라도 도와주겠다는 말 한마디 정 도는 하시는 게 주위사람들이 보기에도 좋다고요. 유넨 선배님 반의반만이 라도 본받으시면 안돼요?" 카류 왕자는 여전히 얄미운 소리를 했지만 귀엽게 웃는 모습을 보노라니 전과 같이 발끈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이 얄미운 꼬마와의 대화를 즐기 는 수준에까지 왔다고 할까. "카류 님이 뛰어오는 모습을 보노라니 뒤뚱거리며 뛰는 아기 오리가 생각 나서 그만 깜빡 잊어버렸군요. 하하하... 죄송합니다." 나는 장난스럽게 카류 왕자에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당히 궁금한 걸. 그러나 카류 왕자는 나의 모든 예상 안을 산산이 깨버리고 피식 웃으며 그 자그마한 입을 열었다. "훗, 제가 어지간히 귀여워 보였나 보군요. 원래 애들이 뛰는 모습은 귀엽 기 마련이죠." "콜록콜록!" 전부터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 저 꼬마가 어린애가 맞는 것인가! 자기자신 을 귀여운 어린애라고 정의하는 저 꼬맹이가 정말 10살의 어린애가 맞느냐 고!! "유넨 선배님, 어서 드세요. 저쪽에서 할아버지들에게 주신 걸 가져온 거예 요. 절보고 먹으라고 주셨는데 저 혼자 이걸 다 먹을 수는 없잖아요." 카류 왕자는 탁자에 올려놓은 과일을 양손 가득히 들어 유넨에게 내 보이 면서 방긋 웃었다. 카류 왕자가 말한 할아버지는 분명 고위 마법사들일 것이다. 그 분들이 카 류 왕자를 보고 귀엽다고 하나 둘 내어준 것이 저렇게 많이 쌓인 것이리 라. 보통, 마법사들은 일생동안 마법에만 빠져 살아서 독신인 경우가 대부분이 다. 그러니 늙은이들만 가득한 이 생명의 궁에서 유일한 10살의 어린아이 인 카류 왕자가 마치 손자처럼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저는 주시지 않는 건가요? 카류 님?" "훗... 과일껍질 좀 저쪽으로 치워주시겠어요?" 카류 왕자는 항상 내게만은 저렇게 톡톡거리며 장난을 친다. 그리고 나도 항상 그에 응당한 답을 해주곤 한다. 내가 주먹을 쥐어 슥 들어올리자 그 꼬맹이 왕자는 깔깔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폴짝 뛰어 일어났다. 그리고 뒷 걸음질치며 내게 소리쳤다. "폭력 반대! 제가 이런 환경 속에 자라다가 나중에 커서 폭력적인 어른이 되면 어쩌려고 그런 비교육적인 모습만 보여주시는 건가요, 하르몬 선배... 어?" "이렇게 소란을 피우면 곤란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다른 마법사들에게 피 해가 간답니다." 카류 왕자는 내게 장난을 치려고 주위를 살피지 않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근처 지나던 몇몇의 견습 마법사들 중 한 명과 부딪히고 말았다. 카류 왕 자와 부딪힌 남자는 약간 신경질을 냈다. "아...에. 죄송합니다. 선배님들." 카류 왕자는 늙은 고위 마법사들에겐 인기(?)가 높지만 젊은 견습 마법사 들에겐 그렇게 평판이 좋은 편은 아니다. 처음의 나처럼 어린아이가 이런 곳에 들어온 것에 대해 크게 불만을 품고 있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별로 대단한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야단을 칠 필요 있어?" 물론 모든 젊은 마법사가 카류 왕자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카류 왕자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을 만큼 똑똑 했으므로 생명의 궁의 마법사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주었지 피해를 주는 일 따윈 거의 없었다. 또 그 자그마한 손으로 펜대를 쥐고 항상 뭔가 공부를 해보려는 의지를 보여서 다른 마법사들에게 흐뭇한 웃음을 안겨주기도 했 다. 그래서 처음 불만을 품었던 마법사들도 점차 카류 왕자에게 호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젊은 마법사들이 일 일이 작은 실수를 문제 삼아가며 카류 왕자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소란을 피운 거지, 뭘 그래?" "싸우지 들 마시고요. 제가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 게요, 네?" 마법사들이 두개의 파로 나뉘어 싸움 아닌 싸움이 날 것 같자 카류 왕자가 그들 중 한 명의 소매 끝을 잡아당기며 사과했다. 그러자 카류 왕자를 옹 호했던 마법사가 다가와 상냥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카류 님. 그러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세요. 자, 웃으셔야죠?" 그 말에 카류 왕자는 약간 머뭇거리더니 금세 귀엽게 활짝 함박 웃음을 지 었다. 카류 왕자는 자그마한 몸집을 가지고 있어 가만히 있어도 상당히 귀여운 아이라고 불릴 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서면 그 커다란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면서 굉장히 깜찍한 표정을 지어 보이기까지 해서 금세 많은 마법사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 해버렸다. 특히 중년, 노인 층의 고위 마법 사들에게서는 거의 맹목적인 열렬한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아르디 예프 님마저 그런 표정을 짓는 카류 왕자를 보면 꽉 안고서 일경 -한시간 - 이내엔 놔 줄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다. 지금 우리들 앞의 견습 마법사들도 카류 왕자의 웃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 던지 그의 머리카락을 삭삭 쓰다듬었다. 아무리 왕권이 약해지는 생명의 궁 안이라도 저런 식으로 왕자를 대하는 것은 좋지 않을텐데... 뭐, 본인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니 관계없을까. 카류 왕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마법사를 향해 커다란 검푸른 색 눈 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면서 웃고 있었다. 카류 왕자는 누군가 자신을 쓰다 듬어 주거나 안아주는 것을 상당히 좋아하는 듯 보였다. 이 영악한 꼬마는 그런 행동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표시인 줄 알고 있기에 보통 꼬마들 이상 으로 이런 스킨 쉽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애정표현도 좋지만 이제 그만 각자 할 일을 해야하지 않겠나. 이러다간 해 지고 말겠네." 나는 저마다 한번씩 카류 왕자를 쓰다듬고 안아보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말 했다. 그들은 내 말에 약간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다시 원래 자신들이 갈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잘 가세요오~!" 카류 왕자는 손을 파닥파닥 흔들며 그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그렇게 누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게 좋은가요? 저도 한번 해드릴까요? 카류 님?" 내 말에 카류 왕자는 귀엽게 혀를 삐쭉 내밀고 말했다. "메~롱! 싫네요. 그런 말을 하는데 누가 쓰다듬어주길 바라겠어요? 어린아 이들의 심리를 그렇게 파악하지 못하다니, 하르몬 선배님은 역시 머리가 딸리는 게 분명해요." "...다 좋은데 그 메롱이라는 건 또 뭐죠? 새로 들어보는 말이군요. 상당히 어감이 귀여운데요?" "아, 아직 모르셨군요. 이 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먼 나라에서 쓰이는 매우 수준 높은 고 난이도의 의성어로서 주로 상대를 약올리고 싶을 때 쓰이곤 하지요. 메롱이에요. 하르몬 선배님." 그 꼬마는 볼에 엄지손가락을 갔다대고 나머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혀를 날름거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은근히 약이 오른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듯 하 다. "푸훗!! 푸하하하!!" 조용히 우리들을 바라보던 유넨이 갑자기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 체통 없이 행동하셔서야 쓰겠습니까." "훗, 체통이라니... 어린아이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는 거 아닌가요? 전 아직 요렇게 작은 어린아이인 걸요? 봐요, 안 그래도 어감이 귀여운 단어 를 어린아이인 제가 말하니까 더욱 귀엽죠? 메~롱, 메~롱!" "아하하하하!!" "으윽!! 보자보자 하니까 이 꼬마가!!" 이제 유넨은 배를 잡고 거의 자지러지고 있었다. 나는 계속 혀를 날름거리 는 그 꼬맹이를 잡기 위해 뛰쳐나갔다. 카류 왕자는 그 짧은 다리로 능수 능란하게 나를 피해 탁자 주위를 뾰르르 크게 한바퀴 돈 다음에 아직까지 웃고 있는 유넨의 뒤로 냉큼 숨었다. "아까부터 말했죠? 하르몬 선배님! 어린아이를 위해 건전하고 교육적인 분 위기를 조성하자고 말이에요! 폭력, 전쟁이야말로 어린이들에게 가장 무서 운 재앙이라는 걸 모르세요?" "...그냥 재앙을 받으시죠." "아앗~! 악! 악! 악!" 나는 카류 왕자를 유넨의 뒤에서 질질 끌어내서 결국 꿀밤을 세 개 먹여줬 다. 생명의 궁 밖의 누군가가 봤더라면 기겁을 했을법한 이런 약간 과격한 스킨쉽(?)은 이제 거의 일상화되어 있었다. 그 누가 저렇게 얄미운 입버릇 을 가진 꼬맹이를 안 때려 주고 참을 수 있단 말인가! "하하..하하하하...." "유넨...그만 웃어라...응?" "아..예...하하..." "하르몬 선배님이 너무 유아틱하게 구니까 유넨 선배님이 비웃잖아요? 아 으, 창피해! 어디 가서 저 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마세요!" 꿀밤 맞은 머리가 아파서 낑낑거리면서도 저 입은 끝까지 다물어지지 않는 구나. "유넨 선배님! 우리 저런 사람과는 놀지 말아요. 바보 균이 옮는다고요!" "유넨, 설마 배신하는 건 아니겠지?" "아, 그런... 이러시면 정말 곤란한 걸요? 이번엔 절 괴롭히실 작정이세요?" 웬만하면 장난스러운 말을 하는 일 같은 건 없는 유넨도 피식피식 웃으며 우리들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큰 애정 표현을 하진 않지만 유넨도 카류 왕자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으리라. 저 꼬맹이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즐거운 일상을 보내고 있다는 것만은 인 정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손을 머리에 얹고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어쩌다 보니 아버님의 부탁을 들어준 결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뭐, 좋겠지."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한 건방진 꼬맹이를 바라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Part. 8 - 천재 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은 내가 긁적여서 보여준 종이를 들고서 한동안 뚫어져라 바 라보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기에 나는 조용히 아 르디예프 님에게 말을 걸었다. "...아르디예프 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르디예프 님은 고개를 확 돌렸다. 그리고 나를 꽉 끌어안고 소리쳤다. "카류야! 믿어지지가 않는구나! 이 세계에 이렇게 똑똑한 꼬맹이가 존재하 다니!!" 그냥 이렇게 똑똑한 아이가 있다니 라고 말해도 좋을 텐데 꼭 꼬맹이라고 지칭해야 하나? 이 또래의 꼬맹이들이 가장 민감한 단어가 바로 꼬맹이라 는 걸 모르다니, 아르디예프 님은 어린아이들의 호감을 얻는 덴 영 빵점이 라니까. 하지만 나는 보통 꼬맹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 게다가 싹싹하고 착한 아 이를 목표로 삼고 있는 지금 이런 속마음을 보여서는 안되겠지. "매일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 거예요. 의외로 제가 수학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소질뿐이냐! 에구, 요 귀여운 것!!" "악! 아르디예프 님~!" 아르디예프 님이 꼭 나를 터뜨려 버릴 기세로 세게 껴안아서 나는 작은 비 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르디예프 님은 내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귀여운 아이를 보았을 때 그렇게 껴안아주고 싶어지는 마음, 그 누구보다 도 절실히 이해한다 만은 내가 직접 당하는 아이의 입장이 되니 정말 괴롭 구나. 나도 앞으로는 애들을 안을 때는 좀 자중해가며 안아야겠다.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놓으세요, 할아버지!! 끄악! 나 죽는다!! 나는 작은 몸을 억지로 바동거려 겨우 아르디예프 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즉시 아르디예프 님의 사정 범위에서 벗어나는 곳까 지 피신을 했다. 애를 질식사시키려 하다니! 나는 가슴을 탁탁 치며 켁켁거렸다. 그러나 금세 나의 머리에서 느껴지는 아르디예프 님의 손길에 흠칫 놀랐다. "에고, 미안하구나. 카류야. 내가 너무 세게 안았지?" "...아...아니예요." 아르디예프 님을 올려다보며 엄청 어색하게 히죽 웃었다. 나는 크리스털처 럼 깨끗하고 투명한 양심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로 안타깝게도 거짓말을 잘 못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후후... 꽤나 아팠나 보구나. 그렇지만 네가 너무 기특해서 그런 것이란다. 생명의 궁의 마법사 중 가장 진전이 빠른 하르몬이나 유넨만 해도 아직 1 서클 마법사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게 전부 마법수식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거란다. 그런데 겨우 10살인 네가 벌써 그걸 깨우쳐 버리다니!!!" "에헤... 그런가?" 알긴 알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계속 칭찬만 하면 쑥스럽다고요, 아르디예프 님. 나는 그만 이 대화를 중지시키기 위해 아르디예프 님을 향해 나의 필살 기 반짝반짝 눈동자 광선을 쏘아보냈다. 아니나 다를까 아르디예프 님은 나의 필살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나를 꼭 껴안았다. 음, 이로서 1시간 정도는 꼼짝없이 아르디예프 님께 안겨 있어야겠군. 문득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조금 전에 아르디예프 님이 뚫어져라 바라보 았던 종이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종이에는 내가 풀어낸 1서클의 마 법수식들이 적혀 있었다. 얼마 전 나는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서 1서클 수식을 풀 줄 안다고 선언했 다. 여러 마법사들이 그 소식을 쉽게 믿지 못해서 한참동안 내가 1서클의 수식을 푸는 모습을 구경하러 몰려들었고 당연히 모든 사람들은 엄청나게 놀랐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를 어린애라고 무시하는 인간들은 거의 다 사라졌으며 대부분의 마법사들, 특히 고위 마법사들은 그 태도가 상당히 우호적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아르디예프 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래부터 나를 조금 귀여워하는 기미가 보였지만 그 소식을 들은 후엔 점점 그 태도가 노골적 이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안 그래도 귀엽고 착한 꼬마 -음, 내 입으로 자꾸 이런 말을 하자니 민망 하군- 가 마법에서 천재적인 재능까지 보이기 시작하자 도저히 참기가 힘 들었던지 내가 조금만 귀여운 표정을 보이면 금방 안고 오랫동안 놔주지 않는 것을 예사로 했고, 그렇게 나를 안고 다니며 여러 가지를 보여주고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를 원했다. 나도 은근히 그것이 나쁘지 않아서 아르디예프 님을 위해 자주 재롱떨기 기술과 궁극의 필살기 앙증맞은 눈빛 광선을 연마해나가고 있었다. "반년만에 1서클 수식을 깨우치다니!! 어떻게 보면 넌 유넨 이상으로 천재 로구나! 내 평생 이런 엄청난 천재를 세 명이나 보게 되다니..." "하..하하하...그렇게까지... 그런데.. 세 명이라니...유넨 선배 말고 또 있어 요?" 하르몬 선배를 지칭하는 건 아닐텐데... 하르몬 선배도 진전이 빠르긴 하지 만 나나 유넨 선배 같은 소위 말하는 대천재는 아니걸랑. "뭐, 그런 싸가지 없는 놈이 있단다. 생명의 궁에 있는 놈은 아니니 그런 건 몰라도 된다. 그건 그렇고 내가 어제 생명의 궁 밖에 나가면서 국왕을 만나 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단다. 네가 벌써 1서클의 마법수식을 마스터했 다고 하니까 눈을 동그랗게 뜨더구나." 헉! 그렇다면 생명의 궁 밖에도 내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있겠구나. 생명의 궁 밖으로 나갈 생각 만해도 오싹해지는군. 물론 이런 소문이 생명의 궁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렇게 1서클 수식을 풀어 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빠져나갈 것을 알고 있 었기에 한 짓이라고 할까. 사실 내가 겨우 10살에 생명의 궁에 들어간다는 사실로 온 성안에서 화제 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여기서 나간다면 주위 사람들의 실망의 눈초리를 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것을 상상하자니 굉장히 신경 쓰여서 그냥 1서클 정도는 풀 줄 안다고 그냥 눈 딱 감고 선언한 것 이다. 거기에다가 그만 실수로 4서클 수준의 수식을 풀어버리는 짓까지 저질러서 생명의 궁 내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나의 소문은 무섭게 퍼져 있는 상태였 다. 어떻게 그런 일을 실수로 저지를 수 있냐고? 그게 다 그 원수 같은 하르몬 선배 때문이다! 하르몬 선배는 나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이 무의미할 정도로 여전 히 내게 시비를 거는데 재미를 붙이고 산다. 언제나 그 말싸움의 승리자는 나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언젠가 하르몬 선배가 너무 약 올리기에 그냥 그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려고 홧김에 하르몬 선배가 풀려던 수식을 뺏어서 풀어 보인 적이 있는데, 그 수식이 4서클 수식이었던 것이다. 2서클 유저인 주제에 풀지도 못할 4서클 수식은 왜 들고 있느냔 말이다!! 나는 그것이 4서클 수식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냥 어쩌다가 푼 것이라 고 웃으며 얼버무려 겨우 그 고비를 넘겼다. 그런데 하르몬 선배가 아르디 예프 스승님부터 시작하여 만나는 마법사면 만나는 족족 전부 그 얘길 조 잘거려 버려 온 성안에 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것이다. 물론 내가 4서클 수식을 풀었다고 직접적으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그 일이 더욱 나 의 소문을 크게 부풀리게 해주는 작용을 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내가 천재가 어쩌고 하는 소문이 퍼지는 것을 막는 일에 예 전보다 약간 신경을 덜 쓰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내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생명의 궁에 들어와서 토이렌과 이르나크 세계의 학문 수준의 차이를 더욱 확실히 느꼈기 때문이다. 이르나크 세계도 고대에는 마법을 이용한 엄청나게 발전된 문명이 있었다 지만, 현재는 마법의 발달이 미비하고 마법사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대 부분의 문명이 토이렌에 굉장히 뒤떨어져 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우리 나라는 토이렌의 서양의 중세와 분위기가 상당히 흡사한데 어쩌면 중세시 대보다 더 떨어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특히 수학이란 학문은 보통 사람들에게 마법이 아니라면 간단한 사칙연산 -이곳도 사칙연산이 있다. 대부분이 토이렌과 몹시 흡사하다- 을 이용하는 것 말고는 거의 필요치 않는 학문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었다. 일상에 널 리 연구되는 학문과 관심이 적은 학문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다. 아무리 천재적인 마법사들, 내지는 마법사 지망생이었던 사람들이 수학을 연구한 다하더라도 마법사의 수는 아주 적었기에 수학의 수준은 굉장히 낮을 수밖 에 없었다. 따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도 내가 알고 있는 고등학교 수준의 지식만으로 충분히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이런 행동을 하고 있는 것 이다. 내가 지금 전생에 한 행동 중 절실히 잘 했다고 느끼는 일이 있다면, 그것 은 내가 문과임에도 수학2를 공부했다는 것이다. 처음 의대를 지원하려 했 을 때 이과 수업을 들으면서 수학2를 배웠다가 부모님의 권유로 다시 법대 로 지망을 바꾸고 문과로 교차 지원하면서 그걸 배웠던 걸 엄청 후회했는 데, 생각지도 못하게 지금 그것이 도움이 되고 있었다. 8서클의 수식은 대 부분 수학2 수준의 수식이었기 때문에 내가 마나만 느낄 수 있다면 단숨에 8서클의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마법은 재미있니? 네가 매일 도서관에 들려 책을 빌려 가는 것을 보고 도서관의 서고가 얼마나 칭찬을 하는지... 그 깐깐한 녀석이 네 가 성실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더구나." 수학문제 푸는 게 재미있을 리가 있나. 원체 할 일이 없으니까 그렇지. 그 러나 그렇게 솔직한 대답을 해서 인생을 피곤하게 살 필요는 없겠지. 나의 모티브는 어디까지나 착하고 싹싹한 꼬맹이란 말씀이야. "하하... 저는 아직 어리니까 다른 분들 이상으로 노력해야지요." 아르디예프 님은 내 대답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흐뭇 하게 웃었다. 이로서 또 다시 호감도 레벨이 한 단계 증가하는구나. 아니, 이제 더 이상 올라갈 레벨이 있는지도 의심스럽... "헉!! 지금이 몇 시야? 아르디예프 님. 저 그만 가봐야겠어요. 유넨 선배님 이랑 공부하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서 너무 오래 놀았나봐요." 나는 문득 책상 위에 올려진 해시계와 비슷하게 생긴 시계를 보고 깜짝 놀 라 외쳤다. 아르디예프 님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지만 표정 을 보니 엄청 놓아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이것 때문에 나중에 유넨 선배가 구박 당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네. "아르디예프 님! 또 놀러 올게요. 네?" "알겠다. 알겠어." 내가 소매 끝을 붙잡고 일부러 재롱을 떨자 아르디예프 님이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케이! 이 정도면 후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 나의 몸집이 또래에 비 해 작은 게 솔직히 약간 불만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정말 도움이 크단 말이야. 귀여움 받기가 쉬우니 얼마나 좋아. 정말 인생 살기 쉽구만. 여기 서 좀 귀여운 표정만 만들어내면 웬만해선 모든 것이 오케이니 말이다. 움 핫핫핫! 나는 속으로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며 아르디예프 님의 방을 빠져 나와 유 넨 선배와의 약속 장소로 향했다. 유넨 선배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마법사들의 공부를 위해 야외에 마련 된 곳이었다. 생명의 궁이다 보니 마법 공부 외엔 별로 할 일이 없는 게 사실이다. 지금 유넨 선배를 만나러 가는 것도 스터디 클럽 비슷한 거랄 까? 솔직히 내가 유넨 선배에게 배울 건 없지만 말이다. 약속 장소엔 벌써 유넨 선배님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탁자에 펼쳐진 책 들을 보아하니 일찍부터 나와서 상당히 오랫동안 기다린 모양이다. "유넨 선배님! 제가 많이 늦었지요?" "뭘요. 저도 방금 왔는걸요." 반경(30분)은 족히 늦었는데도 유넨 선배는 여전히 얼굴에 사람 좋은 미소 를 띄우고 있었다. 에고, 조금쯤은 화내는 법도 알아야 인생 살기가 수월할 텐데 말이야. 이 험난한 세상에서 저렇게 마냥 착하게만 굴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갈취 당하 면서 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나는 유넨 선배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평소 하던 것처럼 이곳의 수식을 토이렌 세계의 수식으로 정리를 하면서 외우기 시작했다. 이걸 잘 외워두면 나중에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그 누 구보다 빠른 캐스팅으로 마법을 시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토이렌 수식을 모르는 이 곳 사람들로서는 내 행동이 괜한 숫자 장난 정도로 보일 지도 모르겠군. "으음......"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신음소리에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유넨 선배가 겨우 2서클의 수식을 풀지 못해 나의 곁에서 끙끙대 고 있었던 것이다. 마나를 느끼는 데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유 넨 선배였지만 두뇌는 보통 사람들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기에 그 재능 에도 아직 1서클 마법사에 머물러 있었다. 아니, 세세하게 말하자면 2서클 유저라고 할까. 2서클 유저란 아직 2서클 마법 중 수식이 쉬운 몇 개 밖에 못쓰는 마법사를 말하니까 말이다. 이곳의 수식은 너무 복잡하단 말이야. 훨씬 짧고 쉽게 만들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요렇게 저렇게 하면 쉬워요 라고 나불나불 조잘거 렸다간 그때야말로 진짜 끝장이다! 내 밑바닥까지 전부 보여주면 나중에 컸을 때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안돼... 도와주고 싶지만 참자, 참자. "후우." 유넨 선배는 미간을 손으로 쥐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크게 티를 내는 것은 아니지만 유넨 선배는 아직 2서클 수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 실에 상당히 초조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크... 이거 정말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구나. 평민의 신분으로 생명의 궁에 들어오게 된 유넨 선배에게 있어서 훌륭한 마법사가 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나는 별다른 큰 노력 없이 이 수식들을 풀 능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이것을 가르쳐준다 고 해도 별로 아까울 것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비 천재 노선이라는 별 시 덥지도 않은 목표 때문에 유넨 선배의 고뇌를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넨 선배가 이제까지 나에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었는데 내가 이 정도 도움도 주지 않는다면 그건 인간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겠지 않겠는가. 그 래, 눈 딱 감고 유넨 선배에게만 나의 진면목을 밝히자! "유넨 선배님... 이거요... 이렇게 하면 어때요? 실은 이건 편법인데 이렇 게... 이렇게 하면 더 쉽게 풀 수 있거든요... 이렇게요..." "......!!?! 이...이이...이렇게 간단하게 수식이 나올 수가 있다니!! 이걸 호...혼 자 새...생각해 내신 겁니까?" 유넨 선배는 굉장히 말을 더듬거리며 예기치 않게 똥집이라도 당한 것 같 은 표정 -표현이 좀 지저분하군. 그러나 이것이 지금 유넨 선배의 표정을 설명하는데 가장 알맞은 설명 같아서...- 을 지어 보이는 것으로 자신이 얼 마나 놀랐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솔직히 유넨 선배의 저런 반응은 오히려 약할 정도다. 그냥 이해하 기도 힘든 수식을 아주 새로이 창조해 냈다는데 어떤 녀석이 안 놀라고 배 길쏘냐. "아하하하... 그냥...뭐 어쩌다보니 우연히 발견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웬만 하면 비밀로 해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전 주목받는 거 딱 질색이거든요. 사실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주목받고 있어서 부끄러워요..." 부끄럽긴 뭐가 부끄러워? 가능하다면 이렇게 영원히 천재로서 주목받고 싶 구나!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유넨 선배에게 속마음과는 정 반대의 말도 안 되는 뻥을 쳤다. 크리스털처럼 깨끗하고 투명한 양심에 금가는 순간이라고나 할 까? "...너무... 대단하시군요... 원래 카류 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거 알고는 있었 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에...뭐... 별거 아니에요." 나는 은근히 기분이 좋기도 하고 쑥스러워 헤헤 웃어버렸다. "...제...제가 답례로 마나 유동을 해드릴까요? 항상 조금 더 하고 싶어 하셨 지 않습니까." "저...정말요? 해주실 수 있어요? 하지만 다른 마법사들에게 들키는 거 아 니에요? 원래는 새벽에 한번 이외에 하면 안되잖아요. 들키면 혼나는 거 아니에요?" 나는 유넨 선배의 말에 귀가 쫑긋해서 속사포처럼 질문을 던졌다. 마나 수련! 그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안 해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몸을 크게 피곤하게 만든다는 걸 알면서도 하루 종일 그것만하고 앉아있고 싶을 정도라고 할까? 그래서 나는 항상 조금만 더 수련을 하게 해달라고 징징거려 왔다. 게다가 마나 수련이 기분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떠나서 빨리 혼자서 마나 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에 좀 더 그 수련을 계속 하고 싶은 욕망은 더욱 컸 다. "근처에 다른 마법사들이 마법 수련을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라면 다 른 마법사들도 마법을 시전하느라 마나를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제가 마나 를 유동하고 있는 사실을 들킬 일은 없지요." 나는 입이 쫘악 찢어졌다. 물론 좋아서 저절로 찢어진 것이다. "해주실 거예요? 정말? 지금?" "물론이죠. 가실까요?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은 안됩니다. 아르디예프 님께 서 괜히 하루에 한번 하라고 정하신 것이 아니니까요." 유넨 선배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폴짝 뛰어 의자에서 내려와 유넨 선배의 곁에 찰싹 붙었다. 자기 공부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이렇게까지 해주겠다고 하다니, 역시 유 넨 선배가 최고야! "물론이죠! 유넨 선배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어요? 헤헷. 제가요~ 답례로 다른 수식 더 가르쳐 드릴게요." "여...역시 다른 수식까지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유넨 선배는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반문하며 다른 수식이라는 말에 민감하 게 반응했다 . 역시 유넨 선배도 마법사로구나. 어쩌면 내게 마나 유동을 시켜주겠다고 한 것도 그 수식을 더 알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에이, 아니다. 저 순진 덩어리인 유넨 선배에게 그런 주변머리가 있을 리가 있나. 그리고 현재 유넨 선배에게 마법 수식을 깨우치는 것은 굉장히 중요 한 일이니까 만에 하나 의도해서 한 말이라 해도 뭐라 말할 일은 아니다. "에, 헤헤... 예. 수식을 간단하게 하는 법을 몇 개 더 알고 있거든요." "아..예. 가...감사합니다. 이런 수식을 새로 만들어 내는데 얼마나 많은 노 력을 들였을지 저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할 정도인데 저에게 이렇게까지 친 절을 베푸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카류 님. 감사합니다." 유넨 선배가 허리를 굽혀 꾸뻑꾸뻑 인사하는 걸 나는 겨우 말릴 수 있었 다. 너무나 황송해하는 유넨 선배를 보면서 나는 엄청 양심에 찔려야만 했 다. 솔직히 그거 내가 만든 수식은 아니지 않은가? 노력은 무슨 개뿔이... 아니, 그거 배우려고 12년 동안 학교에 다니기는 했지만 그거나 토이렌 세계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하는 일이 아닌가. "아니에요, 유넨 선배님! 대신 마나 유동 해주시기로 했잖아요? 이걸로 서 로 동등한 거예요! 그죠? 그러니 감사해 할 필요 없어요!" "카류 님..." 유넨 선배. 그렇게 감동했다는 눈으로 바라보다니... 에구, 쪽 팔려라. 그러나 은근히 기분이 좋다는 건 부정할 수 없구나. 언젠가 내가 이 수식 들을 전부 까발린다면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시선을 받을 수 있겠지! 오 오~! 멋지다~! "유넨 선배님! 우리 가요!" 내가 유넨 선배의 손을 당기면서 조르자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넨 선 배가 겨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수식을 가르쳐 주고, 유넨선배는 마나 유동을 가르쳐 주고. 그래, 그 렇게 해서 둘이 나란히 최연소 8서클 마법사가 되는 거야! 움하하하!! 그리고 하르몬 선배에겐 정말 너무 미안하지만 내가 조금 큰 뒤에나 이 수 식들을 가르쳐 주자. 하르몬 선배... 입이 가벼운 자신을 탓하세요. 나중에 내가 나이를 먹으면 하르몬 선배에게 가장 먼저 가르쳐 드릴 테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나는 홀로 야무진 생각을 하며 유넨 선배의 손을 잡고 서쪽 건물로 향했 다. Part. 9 - 작별 "크으... 언제 봐도 신통하군요. 제가 그 수식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 간이 걸렸는지 생각한다면..." 내가 2서클의 수식 중에서도 가장 쉬운 수준의 것을 깔끔하게 풀어내는 것 을 보고 하르몬 선배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도 웬만하면 다른 사람들한텐 말하지 말아요. 주목받는 건 싫다고요. 특히 하르몬 선배님!! 주의해주세요!" 내가 생명의 궁에 온 지도 거의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항상 하 르몬 선배와 유넨 선배와 똘똘 뭉쳐 다니며 공부도 함께 모여서 하곤 했는 데, 매일 그들 앞에서 1서클 수식만 내리 풀다보니 너무 지루해서 최근에 는 2서클 수식까지 풀어 보였던 것이다. "거참, 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평소 제게 취하시는 그 기품 없 는 행동으로 볼 때 그 정도 일로 주목을 받는 것으로 수줍음을 탄다는 말 은 어불성설처럼 보입니다만은...? 다른 일로 주목받을 땐 가만히 있다가 왜 이런 일로 주목받는 때만 부끄러워하시는 건지 정말 궁금하군요." "에...뭐... 하하하..." 이럴 때만 날카롭구나, 하르몬 선배! 누가 이러고 싶어 이러는 줄 아냐? 머리 좋다고 추켜 주었을 때 기분이 좋 은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진짜 천재였다면 이것저것 숨 길 것 없이 내 지식을 전부 까발려서 그런 기분을 마음껏 누릴 수도 있을 텐데! 크흐흑!!! 하지만 그런 고민은 정말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나는 곧 깨달을 수가 있었으니!! 그것은 이곳에 온지 1년이 다 되어가건만, 유넨 선배가 특별 개인지도까지 해주면서 그렇게 나를 위해 애써주었건만, 마나를 개미 코딱지만큼도 느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법 수식이라면 8서클까지 전부 좔좔 꿰고 있는데!! 내가 아는 지식을 이 용하면 3서클 수식까지 아예 암산을 할 수 있을 정도란 말이다!! 마나만 느낄 수 있으면 그 누구보다도 초고속 캐스팅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비 극적인 일이 생기다니!! 아, 참고로 캐스팅이란 마법을 시전하기 전에 계산해야할 수식의 계산과 그 계산 결과에 따라 마나를 유동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말한다. 그러나 나 의 상상과는 달리 이 캐스팅이라는 건 정말 폼이 나지 않는 작업이다. 마 법사들은 수많은 수식을 자신이 알아보기 쉽게 적어둔 두꺼운 마법서를 항 상 소지하고 다니는데, 마법을 쓸 때마다 자신의 마법서에서 마법을 수식 을 찾아내 중얼중얼 거리며 그것을 풀게 된다. 마나를 움직이는 과정이야 일반인은 볼 수가 없으니 캐스팅이란 그저 서서 음침하게 수학문제를 푸는 과정이라 하겠다. 이걸 알았을 때 그 허탈감이란... 예전의 영화나 소설에서 본 것과 같이 화 려하게 수인을 맺는다거나 룬어를 영창 하는 것이 마법의 묘미가 아니냐 고!!! 어쨌든 나는 자신이 마나를 느끼는데 전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점점 인 정할 수밖에 없었고, 약간 우울해져 있는 상태였다. 솔직히 말해 내가 마법 을 배울 수 없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매일같이 모두가 천재가 어 쩌고 하면서 추켜 주는 바람에 마나를 느끼는 재능이라는 것이 얼마나 축 복 받은 희귀한 재능인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에휴, 역시 저보다는 유넨 선배님이 훨씬 더 대단해요. 어떻게 마나를 저 절로 느끼실 수가 있었던 거지요? 전 유넨 선배님께서 마나유동을 멈추면 언제 마나를 느꼈나 싶을 정도로 아무 것도 느낄 수가 없어요. 크흑! 이대 로는 1서클의 마법을 쓰는 것도 꿈에 지나지 않을 것 같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꼭 느낄 수 있게 되실 겁니다. 카류 님." "하아... 그러면 좋겠지만 역시 무리인 듯 싶네요. 아무래도 전 마법에 소질 이 없나봐요." "카류 님.."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난 마법에 소질이 없다는 걸. 보통 재능이 있으면 1 년 동안 혼자서 아주 어렴풋이 나마 마나가 존재한다는 걸 느낄 수가 있는 데, 난 유넨 선배가 손을 멈추면 내가 조금 전까지 진짜 마나를 느끼고 있 었는지 믿을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런 우울한 얘기보다는 유넨 선배님이 어떻게 마나를 느꼈는지 그걸 가 르쳐주세요. 듣고 싶어요." 나는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분위기도 띄울 겸 유넨 선배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잠시 화제를 돌릴 의도로 했던 말이건만 유넨 선배는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약간 머뭇거렸다. 혹시 별로 이야기하기 싫은 부분이 있는 걸까? 내가 괜한 얘길 꺼냈나? 그러나 나의 생각이 옳은지 아닌지 판단한 겨를도 없이 유넨 선배가 평소 와 같은 어조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사실 전 아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마나를 느끼고 움직일 수 있었답니다. 전 원래 산 속에서 할아버님과 단 둘이서만 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제가 느끼는걸 다른 사람들도 당연히 느낄 수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지요" 우와! 정말 천부적인 재능이구나.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마나를 당연하게 느끼고 생활화하고 있었다니 말이다. "그러다가 할아버님께서 제가 나이가 13살이 되었을 때 저를 수도에 있는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보내려고 일부러 도시로 내려 왔었답니다. 그리고 17살 때 처음 마법이란 것을 보고는 제가 평소 당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이 마나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 후, 아르디예프 님의 눈에 띄어 생명의 궁으 로 오게 된 것입니다." "와아~~!! 그렇군요!! 정말 대단해요!! 유넨 선배님은 정말, 진짜로 천재셨 군요!!!" "아주 마법사가 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녀석이지요. 유넨은 정말 대단 한 녀석입니다. 하하하..." 하르몬 선배가 마치 자기 일인 양 좋아하며 통쾌하게 웃었다. 내가 왕자임 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장난치길 좋아하고 꿀밤까지 먹일 정도로 간이 좀 부어서 그렇지, 나쁜 일이라면 상대가 왕족일 지라도 화를 내며 좋은 일은 상대가 평민일 지라도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해 주는 뼛속까지 정의파인 사람이라니까. 음? 그런데 학교라고?! "학교? 평민도 학교에 다니나요?" "물론이지요. 기부금만 많이 낸다면 누구든 학교에 다닐 수 있답니다. 모르 셨나요? 카류 님께선 학교에 다니지 않으실 건가요?" 유넨 선배의 목소리가 조금 격양된 듯해서 약간 의아했지만 일단 묻지 않 고 넘어가기로 했다. 어쩌면 아까 머뭇거린 것이 이것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카류 님은 왕족인데 학교를 다니실 리가 없지 않니, 유넨." "오옷? 저...저도 학교에 다닐 수 있나요??" 하르몬 선배의 말에 나는 금방 눈을 빛내며 반문했다. 나는 이제껏 형제들 이 전부 가정교사를 불러 배웠기에 왕족은 학교에 가면 안 되는 거라고 지 레짐작했던 것이다. "물론입니다. 전하께서 그런 생활을 참으실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닐 수 있겠지요. 학교에 왕족이 온다는데 조금 혼란이 일긴 하겠지만..." "하긴, 왕족이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니면 안 된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 꼭 학교에 다니기를 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요. 그렇지만 전하께는 분명 알카온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붙어 있다 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그를 내치고 일부러 학교 같은 곳엘 일부러 다닐 필요가 있을까요?" "어찌됐든 왕족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이지요?!" 나는 유넨 선배와 하르몬 선배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눈을 반짝이 면서 물었다. 내가 갑자기 너무 좋아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유넨 선배는 약간 황당해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그...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학교는 11, 12살부터 입학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도 내 년부터는 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으실 것 같군요. 만약 들어 가신다면요." "...음, 학교에 다닌 다라...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지요. 학교라는 곳엔 의외 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저만해도 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 추억이 되어 남아 있지요, 후훗." 학교, 학교라!! 난 당연히 왕족은 가정교사한테서만 배워야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하니 왕족이라고 학교에 가지 말란 법도 없잖아. 그래, 이걸 핑계로 근 10년 동안의 감금 생활(?)을 청산하고 왕성 밖으로 나가볼 수 있겠다. 생명의 궁에서 나가자마자 국왕에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보 는 거야! "그렇군요. 학교라, 저 꼭 학교에 다녀보고 싶어요!! 학교에 가면 제 또래 아이들도 많이 만나 볼 수 있겠지요?" "물론이지요. 학교엔 보통은 12살부터 17살까지의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검 술이나 지식을 가르쳐준답니다. 그러니 카류 님과 비슷한 또래를 많이 볼 수 있으시겠지요. 아마 전하가 내년에 들어가신다면 가장 어린아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아이들이 많다고 했겠다! 꼬옥 다니고 말리라! 15살 이상은 허용 불가능이 지만 14살까지는 발육이 엄청 좋은 녀석들이 아니면 아직 충분히 귀엽단 말이다. 어린애들은 나의 삶의 희망, 삶의 활력소가 아니던가! 오죽했으면 전생에 나의 장래희망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교사였겠는가. 세상의 평가 때문에 현실적인(?) 목표인 의사나 판사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마법을 배울 수 없다고 약간 우울해졌던 마음은 싸악 사라졌다. 뭐, 어차피 원래 마법 안 쓰고도 잘 살아왔잖아. 새삼스럽게 마법사가 될 이유도 없지! 그래 좋은 게 좋은 거다! 좋았어! 학교야, 내가간다. 아이들아, 기다려라!! 캬캬캬캬! 이곳에 온지 1년이 되었을 때, 나는 생명의 궁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내가 굳게 결심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아르디예프 님은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표정이나 말투로 미루어 볼 때 순순히 보내 주긴 싫었던 것 같았지만 내가 마나를 느끼는 재능이 없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자가 생명의 궁에 남아 있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물론 수학자가 되어 생명의 궁에 남을 수도 있는 일 이지만 일단은 국왕이 마법사가 되라고 생명의 궁에 집어넣은 것이기에 그 것은 일단 예외로 미루겠다. "에휴... 너의 수학적 재능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인데, 네가 마나만 느낄 수 있었다면 9서클 마법사도 꿈은 아니건만. 쯧쯧쯧... 정말이지 안타깝구 나...안타까와..."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아까부터 약간 침울한 표정을 하고 내 머리를 계속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그대로 성장한다면 자신을 뛰어 넘을 대마법사가 될지도 모르는데도 조금의 사심도 없이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걸 보면 아 르디예프 님이 괜히 현자라고 불리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이제껏 그냥 마법 잘 쓰는 약간 성격이 괴팍한 할아버지 정도로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생각 을 바꾸도록 해야겠다. 내가 생명의 궁을 떠난다고 하자, 친분이 있는 수많은 마법사들이 나를 전 송하기 위해 일부러 나와 주었다. 이렇게 나를 전송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 중 약 80%정도는 전부 노인과 중년 아저씨들이었는데, 이것은 나의 필살 기 앙증맞은 눈동자 광선이 일부 젊은 층엔 잘 먹히지 않은 치명적인 단점 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어린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싫어 하는 자들이 젊은 층에 더 많아서 이 필살기가 잘 안 통한 건지도 모르겠 다. "자, 언젠가 또 만날 수 있겠지요. 나가시더라도 몸조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건 저희들이 만든 빛의 보호마법이 걸린 마법 팔찌인데, 일회용 이긴 해도 웬만한 충격은 전부 막아주는데다가 마나 없이도 쓸 수 있는 귀 한 아티펙트이니 요긴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카류전하." "고마워요. 모두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선물까지 주시다니!! 비록 마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여러분들과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 다!!" 여러 마법사들의 대표로 누군가 팔찌를 내어주었다. 정교한 무늬 사이사이 에 자그마한 청색 보석이 끼워진, 그냥 액세서리로써도 손색이 없을 듯한 아름다운 금팔찌였다. 나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팔찌를 손목에 끼우고 감 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 별 것은 아니지만 이것도 가져가거라. 그리고 비록 네가 마법을 쓸 수 는 없었지만 내가 너의 스승이었다는 건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알았느 냐?" "넵!! 물론이지요, 아르디예프 스승님!" 아르디예프 스승님의 제자라는 걸 강조하는 것은 아르디예프 님을 등에 업 고 있다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 된다. 8서클의 마법사가 나의 뒤에 버티고 있다니 천군만마를 가진 거 같은 기분 이군. 역시 사람은 잘 보일 수 있을 때 잘 보이고 봐야하는 거야. 귀여운 척하며 재롱 부리길 정말 잘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재롱부리는 것이 나름 대로 재미있었고 말이야. 스승님이 주신 것은 마치 나의 머리색처럼 파란색으로 빛나는 검은색의 돌 멩이 -보석일지도?- 었는데 모르긴 몰라도 아마 아티펙트인 듯 싶었다. 그냥 들고 다닐 순 없으니 목걸이로 만들어야겠군. "카류 전하. 전 선물은 구하지 못했답니다. 하지만 선물이 없다고 나가자마 자 저희들을 바로 잊어버리거나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하... 그럼 다 음에 꼭 다시 뵙도록 하지요." "에이, 전 하르몬 선배님처럼 머리가 나쁘지 않답니다. 잊고 싶어도 잘 잊 혀지지 않는 머리를 가지고 있어서 말이죠. 그럼 꼭 다시 봐요!!" 나는 마지막까지 하르몬 선배와 투닥거리며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제 평소 우리의 진짜 모습이니까 갑자기 진지한 건 정말 안 어울릴 것이다. "카류 님 덕분에 마법에 큰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답니다. 저는 언제나 카 류 님의 도움을 받기만 했군요. 언젠가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습니다. 부디 저희가 곁에 없더라도 몸 건강하십시오." "그런! 유넨 선배님이 제게 얼마나 잘 해주셨는데 그 정도는 당연한 거죠! 게다가 유넨 선배님이 없었다면 전 마나를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유넨 선 배님, 꼭 9서클의 마법사가 되세요!!" 유넨선배는 마지막까지 겸손하구나. 선배의 천사 같은 미소도 한동안 볼 수 없겠네. "그럼 모두들 안녕히 계세요!" 나는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한 후, 생명의 궁을 뒤로하고 가볍게 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 때마다 조금씩 섭섭한 감정이 몰려왔 다. 1년이란 시간은 짧게 느껴지면서도 사람이 서로 헤어지기 싫다는 마음 이 들도록 만들기엔 충분히 긴 시간이었나 보다. 하지만 비록 자주 만나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어차피 같은 왕궁 안에 있는 데다가 이미 생명의 궁에 들어온 경력이 있으니 만나고 싶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만날 수 있으리라! 나는 밝은 표정으로 뒤돌아 서서 손을 흔들며 그들에게 다시 마지막 인사 를 했다. "모두들, 또 봐요!!" Part. 10 - 입학 나는 생명의 궁에 들어간 지 만 1년만에 드디어 그곳에서 밖으로 나왔다. 내가 마법 수식을 계산하는데서 엄청난 재능을 보였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결국 아무런 성과 없이 생명의 궁에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성안의 사람들 이 실망의 눈초리로 나를 보는 일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예전 이상으로 나의 위명이 더 높아진 것 같다고 할까. 이걸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뭐, 어때. 마법을 배우지 못했건 건 단지 천부적인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거 뿐이니까 카류가 전혀 상심할 것 없어." "맞아, 머리라면 카류를 따라갈 자가 없는데 말이야!! 그지?" 지금 우리 형제들은 루브 형이 검술을 연습을 하는 연무장에 우글우글 모 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잡담의 화제는 단연, 나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괜찮아. 마법을 배울 수 없어서 좀 아깝긴 하지만 대신 여러 가지 많이 배웠으니까 그걸로 만족할래. 근데, 마법을 배울 수 없다는 걸 알았으 니까 나도 검을 배워야 하는 건가?" "아앙, 아까워라. 카류라면 분명 엄청난 미소년 마법사가 될 거라고 생각했 는데!!" "블라디미르 누나! 대체 누가 가르쳐준 거야? 미소년 마법사라는 거." "보라돌이가 가르쳐 줬지롱." "보라돌이 형! 난 분명 디트 경처럼 멋진 남자가 되는 게 목표라고 했지!! 미소년 마법사가 뭐야?" "네가 겨우 그 정도 가지고 난리를 치다니. 내게 보라돌이라는 별명을 지 은 건 어디의 누구였더라? 난 키예프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다고!! 파랑돌 이도 있고, 주황돌이도 있는데 왜 유독 나만 보라돌이인 거야!!" 헉! 텔레토비라는 게 있다고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너...넘어가자. 어차피 난 마법사도 될 수 없잖아. 그러니 미소년 마법사라는 별명은 불가능하다 고. "어...어쨌든 정말 오랜만이네. 이렇게 모이니까 너무 반가운 거 있지? 카이 형! 한번 안아봐도 돼?" "....응." 카이 형은 자그마한 소리로 대답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직 내게 순순히 안기는 건 카이형 밖에 없다니까. 그리고 외모 상으로 가장 어린애 티가 많이 나는 것도 카이 형 뿐이고! 우후훗... 내가 카이 형 보는 재미로 살지, 암! "카류는 또 시작이네. 요새는 카이만 싸고도는구나." "세라 누나, 누나도 안아줄까? 난 루브 형처럼 우락부락한 남자만 아니면 다 좋아." "카류, 너!! 내가 어쨌다고 그러는 거야?! 남자라면 모름지기 이 정도는 돼 야지!!" 저 멀리서 수련에 열중하고 있던 아니,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루브 형이 내 쪽을 바라보며 빽 소리를 질렀다. 저렇게 먼데도 이야기 소릴 듣고 있었나 보다. 수련할 때는 정신집중을 해 야한다고 누누이 말했었는데... "루블로프 님! 검을 수련하실 땐 정신을 집중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크흐흑! 카류, 너 나중에 두고보자." "에고, 질투가 정말 심하구나. 정 그러면 루브 형도 있다가 한번 안아줄게." "필요 없어!!" "아니면 왜 그러는 건데?" "루블로프 님! 집중하세요! 카류리드 님도 수련을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 오." "네에~" "꺄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정말 오랜만에 정말 정겨운 분위기구나. 나는 종말 오랜만에 형과 누나들과 함께 이런저런 잡담을 하면서 웃고 떠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잡담으로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멀리서 누군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에렌시아 님 드십니다." 이게 무슨? 에렌시아 님이 왜 이곳에? 왠지 내가 연무장에 있을 땐 의외의 인물이 정말 많이 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지? "1년 동안 평안하셨습니까. 에렌 님. 그렇지 않아도 루브 형님의 수련이 끝 나면 에렌 님을 뵈러 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후후후... 정말 오랜만이구나. 카류." "네, 딱 1년만 이예요, 에렌 님. 정말 반갑습니다." "안타깝게도 마법을 배울 수가 없었다고 하더구나. 하지만 포기하지 마시 고 새로운 길을 찾아보거라. 카류라면 분명 뭐든지 가능할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단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마법을 배우지 못한다는 데서 그렇게 크게 실망하 고 있는 것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마법사 말고도 되고 싶은 건 굉장히 많은 걸요. 디트리온 경 같은 멋진 기사도 좋고요, 학자 같은 것도 괜찮겠군요. 제가 책이라면 굉장히 많이 읽었으니까요." "그래, 그래. 언제나 그렇게 밝은 게 우리 착한 카류다운 모습이지. 후훗." 하하하... 내가 한 예쁨 받는다는 건 알았지만 우리 착한 카류라니.... 어린 애 취급이긴 하지만 기분 좋은걸? 에렌시아 님은 어머니처럼 대단한 미인은 아니지만 한 나라의 국왕의 본처 인 만큼 굉장히 기품이 넘쳤다. 그리고 한 마디로 현모양처의 모범이라 할 수 있을만한 분이었는데, 그것을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조용하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몹시 착하신 분이셔서 우리 어머니가 국왕을 독차지하고 있는데도 질투도 하지 않는지 나를 다른 아이 들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해주었다. 내 어머니도 저런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루브 형, 세라 누나는 복 받은 거야. 그렇다고 지금 우리 어머니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녀는 에렌시 아 님 같은 부드러움은 부족하거든. 어머니는 날카로운 얼음 같다고 할까. 애인으로 매력적일지 몰라도 어머니로서는 조금 곤란한... 윽! 또 시작이군. 이런 생각을 하는 아들이 세상천지에 나말고 또 있을까. 정말 환생의 부작 용이 심각하다니까. 어...어쨌든 에렌시아 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다. 상냥한 에렌시아 님과 함께 있으면 절로 마음이 부드러워지는지라 나는 그녀를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 는데, 그런 그녀가 저렇게 칭찬을 해주니까 다른 사람의 칭찬보다 괜히 더 기분이 좋았다. "하하... 고맙습니다. 그런데 여기엔 어쩐 일이세요?" "어머, 내 정신 좀 봐. 루브가 검술 훈련을 하는 연무장에 모두 모여있다는 걸 듣고는 내가 직접 소식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렇게 여기까지 왔단다." "무슨 소식이요?" "뭐예요?" "헤에, 뭘까?" 우리는 모두 에렌시아 님에게로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저쪽에서 검술 연습 을 하고 있는 루브 형도 무슨 소식인지 굉장히 궁금해 보이는 기색이다. 얼굴을 쭈욱 빼고 검을 휘두르는 포즈가... 에구, 귀여워라! 내가 키워오다 시피 했더니 저렇게 근육질로 다 커버렸는데도 여전히 귀여워 보이는구 나. 헐헐헐... 손자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오랜만에 카류가 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니? 그래서 폐하께서 그분이 거처 하시는 빛의 궁에서 모두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고 말씀하셨단다. 이렇게 모두가 모여 식사하는 것이 대체 몇년만인지 모르겠구나. 호호호." "정말요? 아버님이?" "이야~~~ 다같이 식사하는 거네~!" "난 예쁜 드레스 찾아봐야겠다! 꺄하하하~"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식사라... 마침 정말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를 만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그 무심한 왕이 웬일이지? 혹 시 어머니가 국왕에게 그렇게 하자고 말한 것이 아닐까? 음, 확률이 한 90%정도 되는군. "그러면 준비를 해야겠군요?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서 식사하는 거 정말 오랜만이지요?" "그래. 우리들끼리 모여서 하는 식사는 많이 있었지만 폐하까지 함께 하는 건 거의 5년만이지? 후훗... 자, 루브의 검술 연습이 끝나면 모두 각자 궁으 로 돌아서 준비를 하도록 하거라. 알겠지?" "네에~~!" "알겠습니다아~" 그날 저녁, 나는 오랜만의 온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만찬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빛의 궁으로 갔다. 내가 식사를 위해 안내된 곳은 널따랗고 몹시 호 화스러운 홀이었는데 그 중앙에 거대하고 길다란 식탁이 놓여있었고 그 위 에는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정도의 온갖 산해진미가 풍성하게 올려져 있 었다. 원래 땅의 궁에서 먹는 음식들도 대단했지만 이건 정말 너무나 대단 해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과연 한나라의 제1권력자의 식탁이로 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카류리드. 네가 비록 마법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렇 게 상심하지는 말거라. 이거 아느냐? 전에 나를 만나러 왔던 아르디예프가 내게 침까지 튀겨가며 네 칭찬을 했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까지 대마법사 인 그가 그토록 남을 칭찬하는걸 들어본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얼마나 놀 랍던지... 다른 고위 마법사들도 하나같이 네가 비상하다고 입을 모으더구 나." "에이, 스승님이 너무 친절한 분인데다가 제가 어려서 많이 봐주셔서 거예 요." 우오오. 아르디예프 님. 국왕 앞에서도 그렇게 격렬하게 내 칭찬을 했을 줄 이야. 내 앞을 제외하고는 그런 추태는 안 부리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이거 한나라의 최고위 마법사에게 칭찬을 받은 건데 기뻐해야 하나 슬퍼해 야 하나. 여기까지 왔으니 비 천재 노선(?)은 이제 완전히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아르디예프가 친절하다니... 괴팍하다는 소린 많이 들었어도 친절하 다는 소린 난생 처음 듣는구나." 아르디예프 님이 확실히 조금 괴팍하긴 했지만 나한텐 잘해줬었지. 말 잘 듣는 어린애가 계속 애교를 부리는데 안 넘어갈 할아버지가 어디 있겠어. 흐흐흐... "카류는 좋겠다. 맨날 칭찬만 듣네?" "맞아. 부러워라. 전부 카류만 좋아해." 국왕과 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형제들이 하나 둘 불만을 터뜨렸다. 하하. 귀여워라. 질투하네? "....나도...카류가 좋은데..." 그러나 그런 형제들의 말에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듯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카이 형이 나를 보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우웃!! 카이형!! 나도 형 너무 좋아해앳!! 어쩜 저렇게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할까! "끄응, 카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우리도 얼마나 카류를 좋아하는데. 그지?" "맞아, 맞아. 카류가 없어서 얼마나 심심했는데~! 카류도 없는데 땅의 궁에 가서 놀고 그랬다?" 형들! 누나들!! 아윽~! 귀여워! 저리로 뛰어가서 하나씩 안아 주고파!! 콱 깨물어 주고파!!! "하하하... 나도 형들 누나들이 너무너무 좋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전생에 그 살벌하고 썰렁한 집을 생각하면 참 대조되 는 광경이다. 난 정말 운이 좋구나. 이르나크에 환생해서 왕자가 되질 않나. 이렇게 귀여 운 형제들까지 얻게 되다니. 비록 나의 아버지인 국왕이 우리들에게 조금 무심하긴 하지만 그 정도야 아무렴 어때. 하하핫!! 이거 정말 기분 좋은걸? 행복해라, 너무 행복해. "그럼 내일부터는 다시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받게 되겠구나. 카류야." 아르멘 님이 나를 향해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웃! 가만히 생각하니 나 할말이 있었잖아. 그래, 지금이 기회다. "아!! 제가 생명의 궁 안에 있을 때 학교라는 것에 대해 들었거든요? 그래 서 말인데요, 저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가정교사 대신 그렇게 하면 안될까 요?" "학교라고?" "예! 학교에선 재미있는 일도 많다고 하더라고요. 게다가 제 또래의 친구들 도 많이 사귈 수 있고 말이에요." "안돼. 아직 어린 네가 성밖으로 나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느냐." 으윽, 안돼! 나가고 싶어!! 나가고 말 테다! 학교에 갈꺼얏! 이곳에 계속 갇 혀 있다가는 신경쇠약에 걸릴지도 몰라. 좋아!! 좀더 강력하게 밀어붙이자. "그러지 말고 보내주세요. 학교가 그렇게 위험한 곳도 아니잖아요? 학교에 왔다갔다할 때는 마차를 타게 될 테니까 그때 마차의 호위를 철저히 하면 되지 않겠어요?" "그래도 안 된다. 왕족은 언제나 암살의 위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밖 은 몹시 위험하단다. 그러니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만한 나이가 되지 않는 한은 성밖으로 나가는 것은 허락해 줄 수 없다. 게다가 수업을 하는 교실 안에까지 기사가 따라 들어갈 수 없는 노릇이니... 역시 안돼." "누가 저를 노린다면 제가 커서 검술을 조금 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달라 지는 게 있을까요?" "안 된다면 안돼. 고집부리지 말고 식사나 하거라!" 커헉, 저렇게까지 강력하게 나오다니... 이대로는 안되겠다. 내 모든 지식을 드러내는 한이 있어도 말발로 승부를 보자!! "아버님! 일부러 왕족을 시해하는 것은 아주 큰 중죄임에도 불구하고 위험 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런 일을 벌이는 것은 그만큼 뭔가 이득을 노리고 하 는 일입니다. 그러한데 제6왕자인 저를 죽인다고 그렇게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을까요. 루브 형님이라면 몰라도 어차피 저는 왕위계승하고는 거 리가 멀지 않습니까. 제6왕자쯤 되면 왕족이라고도 불리기 어려울 정도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뭣이라!! 누가 너에게 그런 말을 했느냐! 왕족으로 불리기가 어려워? 생명 의 궁의 누군가가 너에게 그런 소리를 했느냐?!" 왕이 갑자기 칼로 그릇을 파악 내려치면서 흥분을 하며 소리쳤다. 컥뚜! 저런...! 이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 앞의 중요한 긴말은 딱 자르고 뒤쪽의 쓸데없는 말만 골라 듣느냐고! "아...아니. 그런 뜻이 아니고..." "카류. 언제부터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니? 네가 비록 제6왕자이긴 하나 너도 엄연히 우리의 가족이다. 어째서 그런 슬픈 생각을 한 거니." 에렌시아 님 그런 게 아니에요! 아이고 내가 못살아!! 헉,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시다니... 등뒤로 마구 식은땀이 흐르는구나. "아하하하. 그러니까 그건 그런 말이 아니라...." 나는 얼른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실없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 에는 형제들이 분개하며 나섰다. "뭐야?! 누가 카류가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그랬대? 당장 생명의 궁에 쳐 들어가서 그럼 건방진 말을 한 놈에게 복수하자!" "맞아!! 뭐 그런 녀석이 다 있지? 가자가자!!!" 형들, 누나들. 그게 아니란 말이야. 그리고 생명의 궁에 쳐들어가도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으니 전부 헛수고라고. 어떤 간이 부은 녀석이 그딴 소 리를 하겠어? ...음, 하르몬 선배라면 어쩌면 가능할 지도... 아니, 이게 문제 가 아니지!!! "아니에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자기 비하라니 당치 않아요. 저는 형님들 이랑 누님들, 그리고 아름다운 어머님들과 아버님 덕분에 언제나 행복한 걸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것이 아니에요!!" 왕의 앞에서 큰소리를 내는 건 무례한 일이었지만,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웅성거리는 모두의 주목을 끌기 위해 약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카류. 그렇다면 네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듣고 싶구나. 네가 자기 비하 를 하고 있었다는 건 이 어미로서는 정말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괴로운 일 이란다. 그러니 나와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해보거라." 어머니가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좌중이 조용히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과연 어머니로군. 어쨌든 빨리 말을 이어야지. "그러니까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제가 왕위 계승에서 가장 순위가 낮고 가능성이 없다는 건 엄연한 사실이라구요. 전 그저 현실을 말했을 뿐 입니다. 그런 걸로 자기 비하 같은걸 하진 않아요.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하겠어요? 왕위계승 순위가 저의 모든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 니까. 저는 루브 형님을 너무 좋아하고 형님이 왕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 하고 있는 걸요. 게다가 왕자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제가 하고싶은 말은 저는 왕위계승 순위가 가 장 낮아서 암살의 위험에 처할 일 따윈 없을 것이므로 성밖의 학교에 나가 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거라고요." 나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잠시 그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에게 이만큼 쏘아댄 건 처음이군. 모두의 생각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구나. '저 녀석 진짜 10살 맞아?' 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음... 그...그렇게 학교에 다니고 싶으냐?" 옷, 국왕이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하는군! 기회다!! "넵!! 꼭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평생의 소원이에요. 제발 다니게 해주세요.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고 할 테니 제발 보내주세요!!!" "돌다리..?" "아니, 그러니까 매사에 조심하겠다는 말이에요. 제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세요, 네에??" "조금... 생각을 해보자꾸나." "아버님! 제가 이렇게까지 말씀드렸는데 그러시기예요? 부탁드려요, 네에?" 안돼!! 마음이 바뀌기 전에 지금 확답을 들어야 해! "폐하. 이렇게 카류가 학교에 다니고 싶어하는데 그럴듯한 명분도 없이 막 는 것은 좋지 않은 듯 싶군요. 게다가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것 같아 보 이니 한번쯤 카류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좋을 듯 싶습니다." 오옷? 뜻밖의 아군이?! 어머니, 그거예요!! 좀더, 좀더 설득해주세요!! "으음... 그렇게 해도 괜찮겠느냐... 음. 하지만 이제까지 왕족은 성인식 전 에 성을 빠져나가지 않았는데..." 웬일로 국왕이 내 신변을 걱정하며 아버지다운 기색을 보인다 했더니, 저 런 시시한 전통 때문이었나. "카류는 생각이 깊은 아이인지라 분명 처신은 할 줄 알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말도 너무 논리 정연하여 제가 다 놀랄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면식을 넓힌다면 장차 루블로프가 왕이 되셨을 때 더 많 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사려되옵니다." "그래요!! 아버님께서는 언제나 제게 훌륭한 사람이 되라 하셨는데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생활도 한번쯤 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지 않나요, 아버님? 아잉, 그러지 말고 제발 부탁드려요오~~" 나는 이제 애교까지 부려가며 국왕에게 통 사정을 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좀 허락해주세요! "...그...래. 좋다! 이번에 수도에 있는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 록 해주마. 후후후... 참 고집도 세구나, 카류리드." "우와! 감사합니다~!! 아버님!! 사랑해요~!!!" "하하하... 그래그래." 성공이다!! 드디어 이 감옥 같은 성에서 빠져나가게 되는구나!! 감옥 치곤 엄청 넓고 화려했지만 말이야. 아이들아 기다려라. 내가 마음껏 귀여워 해주마! 움핫핫핫핫!! Part. 11 - 학교에서의 첫날 드디어!! 드디어 성밖으로 나가게 되었다. 오늘부터 수도에 있는 단 하나뿐 인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다니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나라인 아르윈 왕국은 각 유명한 도시나 영지에 학교를 하나씩 세워 두었는데, 그 수가 정확히 23개이다. 교육이야말로 나라의 발전을 위 한 지름길이건만 한 나라에 학교가 20여 곳 밖에 없다니. 이것도 우리 나 라가 강대국이라 그렇지 보통 다른 나라에서 학교가 23개면 그 나라는 학 문의 나라가 될 거라나? 이르나크 세계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는 순간이다. 내가 다니려는 파블료프 왕립 학교는 수도에 있는 만큼 가장 시설이 좋고, 가장 많은 인재들을 배출해낸 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그래서 먼 곳에 영지 를 둔 귀족 아이들도 일부러 이 곳에 이 파블료프 학교에 다니곤 한다. 그 리하여 콧대가 세진 이 학교는 입학생에게 엄청난 기부금을 요구하고 있었 다. 이 학교의 이름에 왕립이라는 말이 들어간 이유는 몇 대 왕인지는 모르지 만 어쨌든 아르윈의 왕의 명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나의 아버 지인 국왕은 이 학교에 대해 거의 관여를 하지 않고 있다. 학교 수입의 어 느 정도가 국고수입으로 들어오는 모양이지만 그 이외는 전혀 왕이라는 말 이 들어갈 이유가 없는 왕립학교였다. 이 학교는 그 대단한 기부금 때문인지 이 학교의 학생들은 엄청난 명문가 의 자제나 평민이라도 진짜 엄청 돈이 많은 거상의 자제들만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유넨 선배의 경우처럼 학교를 다니기 위해 전 재산을 탕진하 여 아이를 학교에 넣은 평민도 어쩌면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마차를 타고 성을 빠져 나와 파블료프 학교로 향하고 있 는 중이다. 분명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되어야 할 텐데 나는 지금 심히 기분이 더러웠다. 마차에 타자마자 내 몸이 엄청난 멀미를 호소했기 때문이었다!! 자동차든 버스든 어떤 교통수단도 뭐든지 잘 타고 다녔었는데 멀미라니 정 말 황당하구나. 확실히 자동차의 승차 감과는 비교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마차의 승차 감이 극악하긴 하다.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마차로 내주었 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흔들리다니 보통 다른 마차들은 얼마나 흔 들리는 걸까. 아아, 정말 힘들구만. 아마 마차의 바퀴가 나무여서 이렇게 흔들리는 것 일 거야. 고무 타이어를 발명하던지 해야지, 이대로는 멀미 때문에 여행 한번 제대로 하겠어? 그치만 고무 타이어를 어떻게 만들지? 내가 공대에 다녔다 면 고무 타이어 만드는 법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으으욱!!! 나는 너무너무 속이 안 좋아서 바람을 쐬러 창문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카류님?" "으음... 응..." 하나도 안 괜찮아, 디트 경. 그래도 예의 상 괜찮다고 해줘야지 어쩌겠어. 그러고 보니 멀미한답시고 성밖 풍경도 보지 못했네. "우와! 저거 봐. 엄청난 마차다." "이야, 왕가의 마차인 모양인데 저기에 저분이 혹시 왕자님이 아닐까?" 문득 사방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 데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지금 내가 탄 마차는 엄청난 시선집중 을 받고 있었다. 마차의 사방에 보석에 주렁주렁 박힌 것이 탈 때부터 좀 거북하더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난 원래 귀족들의 마차는 다 이렇게 화려한 줄 알았지. 아무리 둘러봐도 이렇게까지 화려한 마차는 없구나, 우헉!! "저기 저 기사 분 좀 봐. 너무 멋지지?" 그래, 마차 때문만도 아니다. 디트 경을 위시로 하여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 은 말을 탄 기사들이 무려 5명이나 내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겨우 학교에 가는 것뿐인데 너무 과보호란 말이야. 내가 디트 경만 붙여달 라고 그렇게 통사정을 했건만 어머니도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배부른 소리한다고? 그래, 나는 지금 복에 겨워 투정을 부리고 있는 거다. 예전에 내가 이런 거 상상이나 해봤겠어? 그래도 쪽팔리는 건 쪽팔리는 거 야!!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마차 안으로 다시 얼굴을 밀어 넣었다. 이 이상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간 어떤 의미로든 개 쪽 당할 거 같 다. 우욱, 다시 멀미가 나잖아! 토할 거 같아!!! 어서~~ 어서 학교에 도착해야.... 우우윽!!! 내가 탄 마차가 학교의 정문을 통과했다. 이 학교는 엄청난 넓이의 부지에 여러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르윈 왕국은 아니 이르나크 세계는 건축기술의 수준이 무척 낮아서 건물들의 높이가 높아봐야 4-5층이 최고였 다. 건물이 높이 쌓을 기술이 없는 관계로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그저 넓은 땅덩이에 건물만 여러 개 많이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궁이나 이 학교가 저런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에구... 살았다. 드디어 도착했네. 오? 저 건물은 5층으로 되어있네?" "네. 아르윈 왕국에서 아니 우리 이르나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 중 하 나가 바로 이 파블료프 왕립 학교의 본관 건물이지요. 이 건물이야말로 파 블료프학교의 최대 명물입니다. 카류 님께서 공부하실 교실도 저곳에 있을 것입니다." 디트 경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건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전생에 한 국의 63빌딩이라던가 뉴욕시의 쌍둥이 빌딩 같은 걸보고 자란 내가 저 정 도의 건물을 보고 놀라워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전생의 학교에서 4층의 교실에 올라갈 때도 엄청 힘들어했는데 5층까지 올라갈 생각을 하자 눈앞에 깜깜했다. "교실이 5층이면 다리만 아프잖아. 으으, 명물은 무슨 명물... 제일 높다는 건물을 어린 학생들이 왔다갔다 거리는 교실이 있는 건물로 만들다니, 생 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으...으음... 카...카류 님. 더 이상 지체하면 늦으실 것 같군요. 어서 가시 죠." 디트 경은 내 대답이 얼마나 의의였는지 잠시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엇? 근데 디트 경. 설마 5명이 전부 따라 들어오는 건 아니겠지?" "아닙니다. 일단 제가 카류 님께서 가셔야 할 건물의 앞까지 안내만 해드 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카류 님께서 수업을 받고 나오실 때까지 여 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어쨌든 고마워, 디트 경. 이제 그만 가자. 다른 기사들도 고마웠 어. 지루하더라도 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줘. 아니면 어디 주점에 가서 술이라도 마시면서 놀고 있던지." "그...그런 그냥 기다리겠습니다." 나의 장난 어린 말에 디트 경은 정색을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면서 먼저 건 물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학교 안에선 완전히 혼자가 되는구나. 잘됐다!! 왕자라고 사실을 티내 고 싶은 마음은 없단 말이야. 왕자라고 하면 괜히 어려워하면서 거리감을 둘지도 모르잖아? 5층 본관 건물 앞에서 디트 경과 헤어진 후 난 혼자서 나의 교실을 찾았 다. 천만 다행으로 내가 수업 받을 교실은 2층이었다. 내가 다리가 짧아서 -키가 작은 거다!!- 층이 높으면 정말 장난 아니게 힘 들단 말이야. 교실 문을 열자 20개정도 되는 책상과 의자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고, 정 면의 벽에 흑판으로 보이는 것이 판자가 붙어 있었다. 신기해라. 어쩜 이렇게 토이렌이랑 비슷할까.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비슷하단 말인가! 교실엔 이미 많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모여 앉아 잡담을 하고 있었고 남은 자리는 맨 앞의 몇 개 밖에 없었다. 선생님들 바로 앞에 앉는 것을 싫어하는 심리도 같은 모양이다. "안녕?" 나는 자리에 앉은 후 바로 옆자리의 꼬마에게 말을 걸었다. 신기한 녹색의 머리와 녹색 눈을 가진 꼬맹이였는데, 약간 건방져 보이는 포즈로 다리를 꼬고 앉아있었다. 나와 같은 교실에 있다는 것은 12살이란 뜻이겠지. 역시 아직 어린 티가 풀풀 나는구나. 움흐흐, 귀여운 것. 내가 많이 귀여워해 주마~~! "음? 누구지? 되게 쪼끄맣네. 너 신입생 맞아?" "응. 11살이긴 하지만 신입생 맞아. 학교에 가고 싶어서 1년 일찍 들어온 것이거든. 난 카류리드라고 하는데 넌 이름이 뭐야?" "네가 11살? 에구... 발육부진인 모양이구나? 나는 대 귀족 에스문드 백작 가의 장남, 에르가 혼 에스문드다. 난 12살이니까 에르가 형님이라고 불러, 이 꼬마야." 컥! 내가 좀 작긴 하지만 저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면 보통 애들은 상처받는 다고. 그러나 내가 누구냐. 그 정도에 상처받을만한 위인이 아니란 말씀이 야. 그러나 저러나 저놈 참 귀엽네. 저렇게 툴툴거리는 애들도 새로운 맛 (?)이 있는 법이지. "야, 뭐해?" "아...응. 에르가 형." "꼬마라고 불러서 화났냐? 그건 그렇고 카류리드 다음은 뭐야? 성 없어??" "......" 말할까? 혹시나 크레티야가 왕족의 성인걸 모른다해도 끝에 아르윈이라고 떡 하니 붙어있으니 바보도 내가 직계 왕족인걸 알 수 있다고. 내가 왕자 라는 걸 안다면 저렇게 귀엽게 굴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어쩌지? "...뭐야? 너 성이 뭐냐니까? 너 혹시 성 없는 평민 아니야? 에잇, 저리가!! 더러워. 재수 옴 붙었네." 윽? 저렇게 어린애가 벌써부터 저런 권위 의식이? 봉건사회란 이렇게 서 럽구나. 어서어서 민주주의가 이룩되어야 할텐데... 나중에 저 녀석 정신교 육부터 시켜줘야겠다. "큭큭큭큭... 저 녀석 얼었나보다. 야, 에르가. 그러게 왜 애한테 겁을 주고 그러냐?" "그래. 원래 평민이 다 저렇게 얼빵하잖아." 녹색머리의 에르가라는 꼬마를 위시로 해서 주위에 둘러앉은 또 다른 4명 의 귀족의 자제인 듯한 꼬마들이 차례차례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대체 귀 족들은 머리에 뭐가 들었는지 정말 궁금하다. 평민을 괴롭히면 그렇게 재 미있나? 그냥 왕자라고 확 밝혀 버릴까보다. 아냐, 그냥 평민인척 하자. 그 편이 더 재밌겠다. 크크크... 꼬마들아. 너희 들이 감히 이 몸을 말발로 이길 수 있다고 보느냐. "내가..." "자자, 모두 조용히 해주십시오! 제가 오늘부터 여러분들에게 역사를 가르 치게 될 유르만 선생님입니다. 서로 인사는 다들 하셨나요?" 내가 막 그들을 향해 쏘아주려 하는 찰라 갑자기 앞에서 말소리가 들려왔 다. 벌써 선생님이 왔네? 음, 너희들 운 좋은 줄 알아라. "아, 그리고 한가지 여러분께 말해주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번 입학생들 중에는 특히 뛰어난 명문귀족 출신이 아주 많은데다가, 왕자님까지 이 파 블료프 학교에 입학하셨답니다. 카류리드 왕자 전하, 앞으로 나와주시겠습 니까?" 헉!!! 저 아저씨가? 누가 불러 달래? 나의 화려한 데뷔를 이렇게 초장부터 망치다니! 나는 어쩔 수 없이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일어섰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에 르가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나를 보고 있었고, 또한 나를 갈구는 데 동 참했던 다른 꼬마들도 식은땀을 흘리는 장면이 보였다. 에구, 가엾은 것들. 그러게 처음부터 행동을 잘 했어야지. 근데 저런 모습 도 참 귀엽구만. "안녕하십니까. 전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입니다. 올해로 11살이라 조금 이르지만 어서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어서 이렇게 학교에 입학했습니 다. 잘 부탁드려요." "음? 하...하하하... 차...참 예의가 바르신 분이시군요. 카류리드 전하. 그럼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왜 저렇게 말을 더듬거리지? 아! 내가 또 존댓말을 썼구나. 그것 참 귀찮 네. 나는 턱을 긁적이며 나의 자리로 들어와 앉았다. 그 이후 약 일경(한시간) 정도 되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기초적인 수업시간이 이어졌다. 수업이 끝나 자마자 나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선생의 수업을 마치겠다고 하는 말이 이 렇게 기쁘게 들려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정말 잠 와서 죽는 줄 알았네. 하필 맨 앞자리에 앉아서 딴 짓도 못하고 말이야. 앞으로 계속 이런 수업을 들어야 한단 말인가. 나 그냥 월반 해버 릴까? 아냐, 그럼 요렇게 귀여운 애들이랑 같이 있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월반해봐야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어? "에르가 형." "...네?" 오옷. 기합이 들어가 있네. 슬픈 현실이로구나. 어린애들까지 저렇게 신분 이 높은 사람 앞에서 굽실거린다는 것이 말이다. "내가 에르가 형이라고 부를 테니 그쪽도 카류라고 불러 줄래?" "에...에? 그...래도 될까요?" "으응... 우리 친구잖아. 존댓말 안 써도 돼." "......카류?" "응?" 훗, 바로 카류라고 나오는구나. 어른들이라면 절대 안 된다고 굽실거리거나 한참동안 버틸텐데 말이다. 이런 면을 보면 역시 아직 어리다. 하하하. "흐음! 거참, 네가 왕자라니... 왜 왕궁에서 배우지 않고 여기까지 나왔냐? ...가만히 보니 너 어디가 좀 모자라는 거 아냐?" "콜록! 콜록!!!" 사...사레 걸렸다. 아니, 저놈이! 예쁘다, 예쁘다 해줬더니 아주 사람을 호구 로 보네. 아무리 놀려대도 내가 별 대응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니까 바보 왕자인줄 알았나 보다. 에르가라는 이름의 녹색머리 꼬맹이는 내 등을 툭툭 치며 또 다시 한마디했다. "그래그래. 왕궁에서 힘든 일이라도 당해서 도망 나왔나 보지? 이 형님이 네 친구가 되어주마. 어디 보자. 자, 돈 줄 테니 저기 가서 음료수라도 사 오련?" 허허허헉!!! 저럴 수가!! 내가 너무너무 황당해서 입을 쩍 벌리고 그 녀석을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 자 옆에 있던 다른 꼬마들도 기가 살아서는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카류 왕자야. 내 것도 같이 사와라. 돈은 일단 네가 주고. 너 왕자잖아. 돈 많지?" "그래, 우리들 것도 사와. 전부 5개면 되겠네." "그런데 손이 2개 뿐이라 어쩌지?" "뭘 걱정 하냐. 3번 정도 왕복하면 되잖아. 푸하하하" 우와, 요즘 애들은 이르나크 세계에서도 무섭구나. 이대로 가만히 나두었다 가는 아주 잡아먹히겠다. 여기서 컷트!! "난 그러고 싶지 않은걸. 나랑 다같이 함께 사러가자." "후후... 카류야. 내가 갔다 오라 하지 않았냐. 얼른 시키는 대로 안 해?" "안 할래." 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서 황당해하는 녀석들을 내버려두고 유유히 교실 밖으로 사라지....려고 했는데 녹색머리 꼬마 에르가가 제동을 걸었다. "왕자야. 너 지금 내가 시킨 심부름을 안 하겠다는 거야?" "헤에? 역시 그랬구나? 설마설마 하고 있었는데 정말 나에게 심부름을 시 키려고 했단 말이지? 와~ 세상은 참 넓구나. 이렇게 신비한 경험을 할 수 도 있다니 말이야. 오늘 왕궁으로 돌아가면 아버님께 말씀드려야지. 누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려했다는 희한한 경험을 했다고 말이야. 아! 에르가 형. 물론 심부름을 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먹고 싶으면 직접 가 서 사다먹어." "뭐...뭣?" 에르가 형은 나의 말에 놀랐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이쯤에서 결정타를 먹여볼까. "그러게 아까 같이 사러 가자니까 왜 거절하고 그랬어. 이 쪽에서 사람이 귀엽게 나오면 그 쪽도 알아서 기어야할 거 아니냐. 이 시건방진 꼬맹이들 아." 오오...얼었다. 귀족이라서 그런지 이 정도의 욕에도 -그다지 욕이 들어가지 도 않았다. 나는 아르윈 왕국의 욕을 모른다.- 꽝꽝 얼어버리는구나. 해동 주문은 나갔다가 들어와서 해주자. 사람은 강경책도 쓰고 회유책도 쓰고 그래야 하는 법. 난 완전히 얼어버린 꼬마들을 뒤로하고 쉬는 시간을 보내라고 만들어놓은 휴게실 같은 곳으로 갔다. 과연 최고의 시설을 갖춘 학교라더니 휴게실도 엄청나게 화려하구나. 음? 근데 뭐가 조금 이상하다. 어떤 금발머리 여자애가 앉아 있는 의자를 중심으로 사방 100M이내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이라도 걸린 것처럼 아무도 다가가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있지. 저거 왜 저래? 저기 여자애한테 왜 아무도 안 다가가는 거야?" "음? 너 신입생인 모양이구나. 저 선배 유명한 선배라고. 나도 좀 전에 알 았지. 그 유명한 리아 후작 가의 아이인데, 자세히 보면 엄청나게 예쁘거 든? 그런데 아무리 말을 걸어도 사람을 막 무시하고 그래. 역시 아르윈에 서 가장 권력이 강한 귀족 가의 딸이라고 비천한 우리들과는 말을 할 가치 도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헤에?" 난 옆에서 해주는 설명을 들으며 홀로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아 이를 가만히 관찰했다. "허헉...!" 나는 잠시 동안의 관찰을 마친 후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그 여자아이는 조물주의 실수로 하늘나라 천사가 똑 떨어진 건 아닐까 싶 을 정도로 깜찍하게 생긴 아이였던 것이다!! 정말, 진짜, 무지무지하게 귀엽구나. 우와~~!! 어쩜 저렇게 귀엽게 생긴 여 자애가 있을까!! 이제까지 내가 본 귀여운 아이 베스트 5는 오늘부로 즉시 랭킹 체인지다! "그런데 넌 이름이 뭐야? 난 후크라고 해. 평민이지. 나한테 말을 거는걸 보니 너도 평민인 모양이구나?" "그래 꼭 귀족같이 여리게 생긴 꼬마가 우리한테 말을 거는걸 보고 엄청 놀랐다니까? 난 카멜이야. 잘 부탁한다." "음? 으응... 난 카류리드. 카류라고 불러 줘." 문득 그들의 말을 듣고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후크와 카멜은 다른 녀석 들과는 거리를 두고 약간 떨어져 서있는데 다른 귀족 녀석들이 이쪽을 보 면서 노골적으로 '비천한 평민은 지구를 아니, 이르나크를 떠나라!!' 라는 광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아이고, 정말 이해를 못하겠다. 언제 평민들이 너희 귀족들에게 피해라도 줬냐고. 어.쨌.든 지금은 저기 저 금발머리 여자애한테 가봐야지. 귀여워라, 귀여워 라~~! 깨물어주고 싶어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다는 건 바로 저런걸 두고 하는 말이리라!!! "후크! 카멜! 우리 저 선배한테 가보자!"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 가봤자 무시당할게 뻔하다고. 벌써 몇 명이나 당하는걸 우리가 이 눈으로 봤는걸? 다른 귀족 나으리들도 다 무시당했는데 우리 같은 평민에 게 잘도 대답해 주시겠다." "됐어, 됐어! 일단 말이나 걸어보자니까? 거참. 평민이 어쩌고저쩌고 그러 는 거 지겹지도 않아?" 난 새로 사귄 두 친구들을 막무가내로 질질 끌고 그 금발머리 여자아이 앞 으로 갔다. 키도 몸집도 작은 내가 나보다 큰 그들을 힘으로 끌고 가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지만 그 둘은 못이기는 척 하며 날 따라왔던 것이다. 말은 그렇게 해도 그 여자애에게 상당히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우리가 여자아이 곁으로 다가가자 여기저기서 우리를 욕하는 소리가 들렸 다. 모두들 무시당할까봐 감히 다가가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모두들 하나 같이 이 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이렇게 귀여우니 당연한 일이겠네. "안녕하세요? 전 카류리드라고 하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요?" "......." 역시나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겨우 그 정도에서 굴한다면 진정으로 아이들을 좋아 한다고 할 수 없는 게 아니겠어?! 나는 말이 없는 그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고양이처럼 빛나는 금빛 눈이 나의 검푸른 눈이랑 따악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만 그 아이를 콰악 껴안아 버 렸다. "아앗, 귀여워라! 귀여워라!! 어쩜 이렇게 귀엽니?" "허헉!! 카류!! 무슨 짓이야? 야야!! 카류리드!!" "떨어져, 카류! 사람들이 보잖아!" 몰랏! 사람들이 보든 말든 내가 알게 뭐야. 안 떨어질 꺼야!! 껴안으니까 아직 어린아이 특유의 부드러운 느낌이 들었다. 난 너무너무 그 애가 귀여워서 머리카락까지 싹싹 쓰다듬어주며 더더욱 꼭 껴안았다. 난 서있는 상태였고 그 아이는 앉아있는 상태여서 내가 매달리듯 안긴 것 이 아니라 제대로 껴안아줄 수 있었던 것이다. "......"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구나. 아무렴 어떠냐! 마구 뿌리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아윽!! 귀여워라! 있지, 나랑 같이 안 놀래? 내가 재미있는 거 많이 가르 쳐 줄께. 이래봬도 내가 아는 게 많거든? 나랑 같이 놀자. 응? 착하지?" "...으...응." "!"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고 있는데 갑자기 작은, 아주 작은 목 소리가 내 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분명 '응' 이라고 그랬지? '응' 이라고!!! 너무 작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바 싹 껴안은 상태로 입을 주시하고 있었기에 난 확신 할 수가 있었다. 입이 약간 달싹하는 게 보였거든!! "그래? 정말? 정말 우리랑 같이 놀래? 정말? 그럼 네 이름을 가르쳐 줘. 난 카류리드야. 카.류.리.드. 자, 이제 네 이름을 가르쳐 줘. 응?" "...히...히노..." 우오옷!! 너무너무 작은 목소리였지만 분명 '히노' 라고 말했다. "히노!! 히노 혼 리아 인거야? 네 이름이?" 그러자 히노는 뺨을 살짝 물들이면서 아주 작게, 자세히 보지 않으면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말 작게 고개를 끄떡였다. 하하하하! 사람을 무시한다더니 그게 아니라 엄청난 부끄럼쟁이였구만! "봐봐, 후크. 카멜!! 히노 선배래. 서로 인사해야지!! 어서어서." "...나...난! 후..후크라고 하...합니다." "전 카멜!!...이라고 하는데...저..."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거야? 어울리지 않게! 히노 선배, 우리랑 같이 가 자! 에...그러고 보면 난 초면부터 반말이었네. 미안해요, 히노 선배. 선배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하하하..." 난 히노 선배를 -이 선배라는 말 무섭도록 어색하다. 저렇게 귀여운데- 이 끌고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무서운 질투의 시선들이 우리들에게 꽂혔지 만 신경을 쓰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전 1학년이고 205호에서 수업을 받거든요? 히노 선배는 어디서 수업을 받 아요?" "......" "으으응. 잘 안 들려요~~! 자, 다시 한번! 어디요?" "20...7호..." 하하... 정말 귀엽다. 내 이성이 간신히 날 붙잡아 주고 있는 거지, 내가 조 금만 방심하면 저 히노 선배를 와작와작 씹어버릴지도 모른다. 무슨 소리 냐고? 귀여우면 깨물어주고 싶다 잖아. 내 앞의 히노 선배는 정말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귀엽거든! 자그마해서 잘 안 들리긴 하지만 목소리도 너무 예쁘다. "히노 선배는 목소리가 참 작군요?" "카류. 넌 잘도 히노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구나?" "하하... 내가 아까 껴안아서 들렸지. 우연이었다고 할까. 엄청 운이 좋았지 뭐. 변태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 전화위복이 됐네? 아까는 미안했어 요, 선배. 제가 원래 귀여운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기분 나빴으 면 사과할게요." 그러자 히노 선배는 아주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아마 괜찮다는 표시겠지? "야. 근데 귀여운 게 뭐냐? 히노 선배가 아름답기는 해도 귀엽다니... 참 나..." "맞아. 네가 훨씬 작고 음... 귀엽잖아? 음.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뭣하지 만 넌 아직 너무 어려 보여서 말이야." "하하하... 내가 발육이 조금 더뎌서 말이지. 확실히 내가 자그마해서 좀 귀 엽긴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관계없는 거 아냐? 내 눈엔 히노 선배가 너무 너무 귀엽게 보인단 말이야!" "허헉, 너도 참 넉살도 좋다. 스스로를 자그마해서 귀엽다고 말하다니 말이 야." "후훗, 아무렴 어때? 히노 선배는 어때요? 제가 귀엽다고 그러는 게 싫어 요?" "......으으응." 히노 선배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엔 '응' 의 여운이 길었으니 아니란 뜻이겠지. 말 하나 하나를 해석해야 하 는구나. "봐, 괜찮다잖아. 귀엽다는 말도 다 칭찬이라고!! 칭찬!! 하하하." 우리는 히노 선배랑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다음 수업시간이 되어 각자의 교실로 흩어졌다. 후아~ 학교 오길 정말 잘했다. 저렇게 귀여운 아이를 만날 수 있게 되다니 말이야. 움하하! 이거 너무 기쁜 걸?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 웅성거리던 그 에르가와 나머지 4명의 꼬마들이 딱 굳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 중 에르가는 이내 불타는 시선으로 날 노려 보기 시작했다. 으음, 에르가 형. 꽤나 깡이 있는 녀석이구나. 국왕에게 이르겠다고 협박까 지 했는데 말이야. "에르가 형? 무슨 일이라도 있어? 왜 그렇게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 는 거야?" ".......너..." "응? 왜애? 아이 뜨거워라. 형! 그런 눈빛으로 바라보면 싫어." 내가 살살 약을 올리자 에르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면서 무섭게 구겨 졌다. 아무리 네가 그래봐야 내 눈엔 귀엽게만 보인단다. 얘야. "너... 히...히노..." "자, 여러분. 저는 앞으로 여러분을 가르치게 될 수이카 선생님이랍니다. 어서 검술 이론 교본을 펴세요. 그만 조용히 해주세요." 선생님이 들어오신 덕분에 에르가 형의 뒷말은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새빨개진 에르가 형의 얼굴에서 그 뒷말을 쉽게 추측할 수가 있었 으니... 어떻게 히노 선배랑 함께 있었냐는 거겠지. 에르가 형, 히노 선배를 좋아하는 모양이네. 내게 밉보였는데 히노 선배가 나랑 친해지니까 곤란했 겠지? 12살에 벌써부터 저렇게 좋아하니 마느니 하는 게 있다니 요즘 애들은 너 무 조숙하다니까. "그래서?" "그...그러니까! 그...히...히노...선배하고... 그...그게..." "응? 뭐라고?" "히노 선배한테 소개 시켜달라고!!" 수업이 끝나자 에르가와 그 외 패거리 4명이 -아직 이름은 모른다. 이름을 알 때까지 왕싸가지 5인방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나에게 다가와 통사정을 했다. 거참, 저희들이 말 걸어보면 될 것을 저렇게 부탁까지 할건 뭐람? 그저 쑥 스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여자애일 뿐인데 말이야. "알았어. 에르가 형. 대신 앞으로 나한테 못되게 굴고 그러면 안돼?" 난 최대한 귀엽게 방긋거리면서 그들에게 말했다. 아아... 저 가증스럽다는 얼굴들을 보라. 이거 정말 재미있네? 애들을 놀리 는 게 이렇게 재미있다니!! 하지만 이 이상은 자중해야지. 가엾잖아. 난 왕싸가지 5인방을 이끌고 반을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광경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히노 선배의 반으로 가려고 하는데 저 멀리 휴게실에 서 뭔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궁금한데... 일단 저기부터 가보고 히노 선배한테 갈까? 휴게실에는 조금 전 히노 선배가 앉았던 자리를 중심으로 수많은 남정네 (?)들이 우글우글 몰려있었다. 아니, 히노 선배가 앉았던 곳이 아니라 히노 선배가 앉아 있잖아? 이런, 아까 내가 말을 붙였더니 자기들도 말을 붙이 고 싶어서 저러는 모양이다. 뭐, 저 상태라면 히노 선배가 다른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을 테니 그냥 내버려둘까? 그렇지만 불러내서 함께 놀고 싶은데 부를까말까. "히노 선배?" 내가 그렇게 크지 않은 목소리로 살짝 불렀는데도 히노 선배는 그 많은 남 자들이 웅성대고 있는 중앙에서 휙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히 노 선배의 고양이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히노 선배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힘겹게 남자들의 벽을 뚫고 나에게 다가왔다. 음... 어쩌면 무서웠던 것일까. 확실히 엄청나게 내성적이고 부끄럼쟁이인 히노 선배라면 저런 남자들 속에 있는 게 굉장히 무서웠을지도 모르겠구 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 겠는걸? "히노 선배. 왜 거기 있었어요?" "......" "절 기다리고 있었어요?" "......" 잘 안보면 거의 알 수 없을 정도로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은 나도 금으로 빚어놓은 듯한 머리카락이 살짝 흩날리는걸 보고 겨우 알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의사표현을 할 수 있었으면 좋으련만. 가엾어라. 자신도 힘들겠 지? 지금까지 그렇게나 내성적 이여서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도 못하고 오 만한 여자 애라는 오해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자아. 우리 저쪽으로 가요. 후크하고 카멜은 아직 안 왔나? 아, 저기 오 네? 후크, 카멜! 같이 가자!!" "뭐? 저런 녀석들이랑? 저거 평민이잖아!" 에르가 형...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같이 가기 싫으면 그만둬, 에르가 형. 히노 선배가 지금 기분이 그다지 좋 지 않아 보이니까 모르는 사람보다는 말도 통하고 이미 아는 사이인 후크 하고 카멜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렇죠? 히노 선배?" 내가 에르가 형을 향해 말하고 있는 중에 후크와 카멜이 숨을 몰아쉬며 우 리들이 있는 곳까지 뛰어왔다. "히노 선배!! 헉헉. 늦어서 미안해요. 수업이 늦게 마쳐서 말이죠. 그렇지, 카멜?" "응! 그래! 히노 선배, 우리 어디로 갈까요? 응? 저기 저 우글우글 단체로 모여 남자애들은 다 뭐야? 야, 카류. 뭔 일 있냐?" 히노 선배는 얼굴을 붉히고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도 나의 초인적인 시각으로 겨우 알 수 있었다. 아마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리라. "자자. 우리 이러지 말고 저기 동편의 테라스에 가자. 아까 오면서 보니까 한적하고 넓어서 좋더라~" 우리가 빠른 걸음걸이로 그곳에서 빠져나가자 왕싸가지 5인방도 놓칠세라 우리들을 따라왔다. 등뒤로 남자들의 빠드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지 만 역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뭣? 네가.. 아니 당신이 카류리드 왕자전하라고...요?" "괜찮..." 놀라는 후크에게 괜찮다고 말하려는데 권위 의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에 르가 형이 빠르게 나의 말을 가로챘다. "그래! 너 같은 평민들이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거야!" "...에르가 형. 나는 에르가 형이 처음 날 봤을 때 평민이라고 오해하면서 더럽다고 말했던 거 아직 잊지 않았거든? 나에겐 역시 왕자로서의 기품이 부족한 모양이야. 아무도 내가 왕자인걸 못 알아보거든. 어차피 그런 거라 면 차라리 평민으로 오해한다고 해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쪽이 백 배 낫지. 히노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윽! 카류..." "히노 선배도 제가 자기 소개를 할 때 성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해줬잖 아요. 선배는 제가 평민이면 싫은 거예요? 상대도 안 할거예요?" 내 말에 히노 선배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는 구나. 역시 내 직감은 정확 하다니까. 이번엔 에르가와 나머지 4명의 꼬마들도 그걸 봤던 모양인지 사 이좋게 동시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봐! 그러니까 에르가 형. 후크하고 카멜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후크랑 카 멜, 그리고 히노 선배. 내가 왕자라도 우린 친구지?" "물론이지! 카류!" "당연 친구지. 암!!" "......응..." 왕싸가지 5인방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구겨졌다. 지금까지 히노 선배 앞이라 이미지 관리를 하는 듯 싶었는데 평민이랑 친하게 지내라니까 완전히 자기 페이스가 무너진 모양이다. 대체 저 권위의식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완 전히 이곳의 귀족이 아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조...좋아. 치...친하게 지내자. 후크. 카멜..." "그래...친하게 지내자..." 후크와 카멜은 통쾌하다는 듯 그들이 내민 손을 잡았다. 저러다가도 시간 이 지나면 친해지겠지. 아직은 아이들이니까. 그렇게 나의 학교에서의 첫날은 지나가고 있었다. Part. 11 - 특별한 아이 내 이름은 히노 혼 리아.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이다. 난 어렸을 때부터 몸 이 약해서 혼자 나의 방에서만 지냈다. 아버지는 굉장히 높은 사람이라 일 이 매일 너무나 바쁘셔서 거의 집에 들어오시지 않고 왕궁에서만 생활하셨 고, 어머니도 그런 아버지를 위해 매일 파티를 열거나 해서 다른 부인들의 호감을 사는 등의 일을 하셨기에 나는 언제나 나의 방에서 책이나 읽고 새 들을 바라보며 생활했다. 나와 함께 있어주는 사람은 나의 유모인 헤라뿐이었다. 그녀는 평민이었지 만 굉장히 아는 것이 많아서 나에게 밖에서 일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항상 여러 가지 일들을 상상할 수 있었기에 그녀와의 시간은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때 헤라에 게 평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내가 평민들에 대한 시각을 바꾼 건 그때였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7살이 되던 해 헤라 가 죽어버린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유모. 그녀만을 사랑했는데. 그녀에게 만은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내게는 그녀 밖에 없었는데 나만 남 겨두고 그냥 가버리다니. 나는 알고 있다. 그녀가 죽으면서도 나만을 걱정했다는 것을. 내가 이렇게 내성적으로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나는 헤라의 앞이 아니면 거의 아무 말 도 하지 못했다. 아니, 단지 헤라만이 나의 말을 알아들었던 것이다. 언제나 나를 귀여운 아가씨라고 부르며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헤라. 그녀가 없으면 난 평생 아무와도 이야기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 나를 버리고 간 거예요!! 헤라!!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는 내가 어느 정도 건강해진 것을 알 수 있었 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예쁘다고, 머리가 좋다고 항상 그런 식으로 칭찬을 하며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가오 면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서마저도 표정이 머리가, 입이 굳어버리는 것이었 다. 한마디도 하지 않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외모를 보고 금방 흥미 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지만 곧 나를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몹시 걱정을 했지만, 그들도 역시 나와의 대화에서 오 래 견디지 못했다. 대화란 한사람만 말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어쩔 수 없는 일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니,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힘겨운 노력 끝에 아주 작게 목소리를 낸다거나 작은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헤라만큼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 은 없었다. 말을 하고 싶은데... 조금만 나의 말에 귀 기울여줘요. 나도...나도... 12살이 되어 나는 학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도 난 관심의 대상이었지만 역시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제는 아르윈에서 가 장 권세가 큰 리아 후작 가의 딸이라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오만한 계집 애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내가 비록 벙어리처럼 제대로 말을 하진 못했 지만 언제나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욕망에 항상 여러 사람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그래서 오해를 풀고 싶어. 결코 무시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 헤라... 나는 영원히 아무와도 친해질 수 없을 거예요. 1년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휴게실의 의자에 홀로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곤 했기 때문에 항상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즐겼다. 비록 스스로 대화를 나눌 수 없지만 주변의 사람들의 이야기 를 듣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아... 참 아름다우시군요... 히노 혼 리아가 맞지요? 저... 그러 니까...." 몇몇의 신입생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말을 하고싶다!! 이번이 마지막 기 회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표정이, 입이 굳어버린다. 그 리고 내가 작은 소리로나마 말을 하려 애를 쓴 후에는 그들은 이미 떠나버 리고 만다. 내가 자신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서... "안녕하세요? 전 카류리드라고 하는데 이름이 어떻게 되요?" 학교에 들어오기엔 아직 많이 일러 보이는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아이가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도 난 역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아이 는 금방 나에게서 떠나가지 않고 그 커다랗고 신비한 검푸른 빛 눈동자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눈이 그 아이와 마주쳤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아앗, 귀여워라! 귀여워라!! 어쩜 이렇게 귀엽니?" "허헉!! 카류!! 무슨 짓이야? 야야!! 카류리드!!" "떨어져, 카류! 사람들이 보잖아!" 나는 갑작스러운 그 아이의 행동에 굉장히 당황했다. 아직 나보다 한참은 어려 보이는 어린애가 나를 보고 귀엽다니? 그 아이는 나의 머리를 껴안고 는 얼굴을 부벼댔다. 내가 앉아 있었기 때문에 작은 그 아이가 나를 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이 따라온 두 남자아이들이 크게 당황하며 내게서 카 류라는 아이를 떼어내려 했지만 왠지 그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오히려 더 껴안으면서 나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윽!! 귀여워라! 있지, 나랑 같이 안 놀래? 내가 재미있는 거 많이 가르 쳐 줄께. 이래봬도 내가 아는 게 많거든? 나랑 같이 놀자. 응? 착하지?" 그 아이가 천진난만한 얼굴로 나에게 계속 말을 건네 왔다. 말을 하자! 그래, 지금 여기서 같이 가자고 말하는 거야. 기회잖아!! 어서 말을 해야해!! 뭐든지, 뭐든지 말을!! 나는 힘을 짜내 겨우 말을 할 수가 있었다. "...으...응." 조금만 더 큰 소리를 냈어도 좋았잖아! 정말 나라는 애는!! 그러나 곧 그 아이는 내게서 떨어져서는 그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고 나 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너무 반갑다는 얼굴을 하고 다시 말을 걸었다. "그래? 정말? 정말 우리랑 같이 놀래? 정말? 그럼 네 이름을 가르쳐 줘. 난 카류리드야. 카.류.리.드. 자, 이제 네 이름을 가르쳐 줘. 응?" 그렇게 작은 목소리였는데도 내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던 것일까. "...히...히노..." 나는 다시 한번 힘을 내서 말을 했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이긴 했지만. "히노! 히노 혼 리아 인거야? 네 이름이?" 신기하게도 카류는 또 다시 내 말을 알아들은 듯 했다. 나는 너무나 기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그 아인 내 행동을 알아들었을까? "봐봐, 후크. 카멜!! 히노 선배래. 서로 인사해야지!! 어서어서." "...나...난! 후..후크라고 하...합니다." "전 카멜!!...이라고 하는데...저..."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 거야? 어울리지 않게! 히노 선배, 우리랑 같이 가 자! 에...그러고 보면 난 초면부터 반말이었네. 미안해요, 히노 선배. 선배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하하하..." 역시 그랬다. 카류리드! 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최초의 아이. 휴게실에서 자리를 옮겨 나는 후크와 카멜 그리고 카류 이렇게 넷이서 이 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몇 년만의 사람들과의 대화인지! 나는 너무 기뻤 다. "전 1학년이고 205호에서 수업을 받거든요? 히노 선배는 어디서 수업을 받 아요?" 카류가 질문을 했지만 난 이번에도 역시 쉽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돼. 저 아이를 놓치고 싶지 않을걸. 내 말을 들어준 두 번째 사람 이라구!! 왜 말을 하지 못하는 거야!! "으으응. 잘 안 들려요~~! 자, 다시 한번! 어디요?" 그렇지만 카류는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말을 걸어 주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그 귀여운 얼굴에 끊임없이 미소를 띄우면서... "20...7호..." 덕분에 나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소리로 말을 해낼 수가 있었다. "히노 선배는 목소리가 참 작군요?" "카류. 넌 잘도 히노 선배의 목소리를 들었구나?" "하하... 내가 아까 껴안아서 들렸지. 우연이었다고 할까. 엄청 운이 좋았지 뭐. 변태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는데 전화위복이 됐네? 아까는 미안했어 요, 선배. 제가 원래 귀여운 것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기분 나빴으 면 사과할게요." 그렇지 않아!! 내가 오히려 너무 고마운걸! 난 있는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힘껏은 마음뿐이고 나는 약간 고개 를 움직이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카류는 또 다시 나에게 싱긋 웃음을 보였다. 정말... 내 행동을 알아들은 걸까? "야. 근데 귀여운 게 뭐냐? 히노 선배가 아름답기는 해도 귀엽다니... 참 나..." "맞아. 네가 훨씬 작고 음... 귀엽잖아? 음.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뭣하지 만 넌 아직 너무 어려 보여서 말이야." 확실히 그 말엔 나도 동감이야. 카류는 학교 다니기에 무리가 있어 보일 정도로 아직은 작고 귀여운 어린애같이 보이는 걸. "하하하... 내가 발육이 조금 더뎌서 말이지. 확실히 내가 자그마해서 좀 귀 엽긴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관계없는 거 아냐? 내 눈엔 히노 선배가 너무 너무 귀엽게 보인단 말이야!" 하지만 카류는 조금도 기죽는 표정을 보이지 않고 활기차게 웃으면서 이야 기했다. 귀엽다는 말 너무 오랜만이다. 헤라가 언제나 나에게 해주었던 너무 정겨 운 단어. "허헉, 너도 참 넉살도 좋다. 스스로를 자그마해서 귀엽다고 말하다니 말이 야." "후훗, 아무렴 어때? 히노 선배는 어때요? 제가 귀엽다고 그러는 게 싫어 요?" 아니!! 너무 좋아!! 카류!!! "......으으응." ...슬프게도 이번에도 난 이상하게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이라니, 대 체 카류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헤헤...봐라 괜찮다잖아. 귀엽다는 말도 다 칭찬이라구!! 칭찬!! 하하하 하~~" 역시! 헤라만이 알아들었던 나의 목소리!! 헤라!! 이제는 헤라 말고도 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어요. 나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카류가 다시 올 것을 기대하면서 다시 그 휴게실 로 갔다. 그런데 갑자기 수많은 남자아이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난 너 무 당황했다. 그들의 말에 대답을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금세 나의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이런 내가 정말 싫어. "히노 선배?" 그때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도 작고 앳된 카류의 목 소리가 정확하게 나의 귀에 들려왔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 다. 나는 남자애들을 헤치고 카류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카류는 5명의 아이들과 함께 있었는데 왠지 나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까지 시종일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었는데도 내가 곤란 해하는 걸 눈치챈 건가? "히노 선배. 왜 거기 있었어요? 절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작은 움직임이라 이번 에는 카류도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나의 의사를 조금만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다면...! 너를 기다리고 있었어, 카류!! "자아. 우리 저쪽으로 가요. 후크하고 카멜은 아직 안 왔나? 아, 저기 오 네? 후크, 카멜! 같이 가자!!" "뭐? 저런 녀석들이랑? 저거 평민이잖아!" 카류와 함께 온 아이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쳤다. 그는 평민을 더러 운 벌레 취급하는 전형적인 귀족인 듯 싶었다. 처음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도 평민들과 함께 있던 카류가 왜 저런 아이들과 함께 있는 거지? "같이 가기 싫으면 그만둬, 에르가 형. 히노 선배가 지금 기분이 그다지 좋 지 않아 보이니까 모르는 사람보다는 말도 통하고 이미 아는 사이인 후크 하고 카멜이랑 같이 있는 게 더 좋을 거야. 그렇죠? 히노 선배?" 카류는 그 에르가라는 아이에게 쏘아붙이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내 가 카류 말이 옳다고 말을 해주기도 전에 후크와 카멜이 다가와서 대답을 해주지 못했다. "히노 선배!! 헉헉. 늦어서 미안해요. 수업이 늦게 마쳐서 말이죠. 그렇지, 카멜?" "응! 그래! 히노 선배, 우리 어디로 갈까요? 응? 저기 저 우글우글 단체로 모여 남자애들은 다 뭐야? 야, 카류. 뭔 일 있냐?" 그런 이야기는 싫어. 여기서 벗어나고 싶어. 난 조그맣게 고개를 흔들었다. "자자. 우리 이러지 말고 저기 동편의 테라스에 가자. 아까 오면서 보니까 한적하고 넓어서 좋더라~" 하지만 마치 그런 내 마음을 이해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카류는 우리들을 이끌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뭣? 네가.. 아니 당신이 카류리드 왕자전하라고...요?" 그건 나도 정말 놀랐다. 처음 말할 때부터 카류는 귀족답지 않게 쾌활하고 활발했으니까. 게다가 평민으로 보이는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하지 않았던가. "그래! 너 같은 평민들이 마음놓고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이거야!" 에르가라는 남자아이가 후크와 카멜을 보고 소리쳤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다. 평민이 뭐가 어떻다고 저런 식으로 후크와 카멜을 몰아붙이 는 거지? "...에르가 형. 나는 에르가 형이 처음 날 봤을 때 평민이라고 오해하면서 더럽다고 말했던 거 아직 잊지 않았거든? 나에겐 역시 왕자로서의 기품이 부족한 모양이야. 아무도 내가 왕자인걸 못 알아보거든. 어차피 그런 거라 면 차라리 평민으로 오해한다고 해도 친절하게 대해주는 쪽이 백 배 낫지. 히노 선배는 어떻게 생각해요?" "윽! 카류..." "히노 선배도 제가 자기 소개를 할 때 성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을 해줬잖 아요. 선배는 제가 평민이면 싫은 거예요? 상대도 안 할거예요?" 그렇지 않아! 난 네가 평민이든 뭐든 좋은걸!! 게다가 내가 너무나 사랑하 는 헤라도 평민이었다고! 난 최대한 힘껏 고개를 흔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도 그것을 보았는지 에르가라는 남자아이와 다른 4명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봐! 그러니까 에르가 형. 후크하고 카멜이랑 친하게 지내라고! 후크랑 카 멜, 그리고 히노 선배. 내가 왕자라도 우린 친구지?" "물론이지! 카류!" "당연 친구지. 암!!" "......응..." 카류의 말에 그들은 눈살을 크게 찌푸리는 듯 싶다가 곧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후크와 카멜에게 악수를 청했다. "조...좋아. 치...친하게 지내자. 후크. 카멜..." "그래...친하게 지내자..." 후크와 카멜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들과 악수를 했다. 카류는 참 이상한 면이 많은것 같다. 얼굴은 나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도 나보다 몇 배는 생각이 깊어 보인다고 할까? 내 인생에서 그렇듯 큰 의미를 가지게 한 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지 딱 1년이 되던 해였다. Part. 13 - 학교에서의 일상 "카류!! 다른 건 없어?" 뭐냐, 또!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저런 발육 부진아의 어디가 그렇게 좋 다고 난리인거야?! 매일 카류, 카류... 저 빌어먹을 녀석! "음, 이번엔 다른 거 가르쳐 줄까? 다들 의외로 이런 거 좋아하네? 그러니 까 옛날에 토끼랑 거북이가 살았거든. 그런데 토끼랑 거북이가 달리기 시 합을 하기로 했어..." 우욱! 대체 저 녀석은 저런 이상한걸 어떻게 생각해내는 거냐. 토끼와 거북 이 좋아하시네. 저런 현실성 없는 얘길 지껄여대다니. "딜티, 세미르. 일어나!! 제르, 엘! 휴게실로 가자!! 가서 과자라도 사먹자 고." "응? 에르가, 잠깐만 기다려봐. 저거 시작하잖아." "그래. 딜티 말처럼 듣고 가면 안되냐? 저거 의외로 재미있다고." 아니, 이 녀석들이? 대체 토끼랑 거북이가 달리기 시합하는 게 뭐가 재미 있단 말이냐! 그리고 애초부터 시합 같은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야! 갈려면 곱게 갈 것이지. 좀 조용히 해!!" "봐, 옆에서 뭐라 그러잖아. 잠시만 기다려, 에르가." 저런 놈들이 감히 에스문드 가문의 장남인 이 몸에게 큰 소리를 치다니!! 그냥 저걸 콱!! ...젠장. 쪽수로 밀리잖아. 카류 저 녀석은 어디서 저렇게 많은 애들을 불러 모은 거야. 이런 썩을!!! 딜티, 세미르, 제르, 엘. 저 녀석들까지 저 딴 이야기에 빠져 버리다니... 참자, 참어. 똑똑하고 마음 넓은 내가 참아야지. 무식한 것들이 저런 얘기 에 빠지는 거 내가 이해해줘야지 어쩌겠어. 하지만 딜티 녀석들... 나만 졸 졸 따라다닐 때는 언제고... 젠장. 어떻게 저 카류라는 놈의 콧대를 그대로 뭉개 버릴만한 좋은 수가 없을까. 저 놈이 꼴에 왕자라고 그냥 구석에 몰아넣고 마구 패버릴 수도 없는 일이 고 말이야. 카류 놈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너무 이를 갈았더니 목이 칼칼해져 왔다. 나는 음료수라도 살까 싶어서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저기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는? 히노 선배님이다! 아아~! 언제 봐도 아름답구나. 선배의 미모는 정말 화려 그 자체다. 태양으로 빚어 놓은 듯한 금빛의 머리카락과 금빛의 눈동자. 앙 다물어진 붉디붉은 입술. 진주 같은 피부! 정말 천상의 미로다!! 그래. 언젠가 그녀를 나 에르가의 아내로 맞고야 말 테다. 최고의 무가로 유명한 에스문드 백작 가문과 아르윈 왕국 최고의 권력을 자랑하는 리아 후작 가문의 결합! 이것보다 더 어울리는 것이 어디 있겠어? "히노 선배님. 여기서 뭘 하시지요?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차라도 한잔 드시겠어요?" "......" 에휴, 히노 선배는 굉장히 아름답고 여자임에도 이 학교에서 손꼽힐 정도 로 굉장히 머리가 좋다고 하던데, 대체 왜 저렇게 말을 안 하는지!! 그것만 아니면 그녀는 정말 나의 배우자로 딱 이건만!! 카류 녀석은 대체 히노 선배랑 어떻게 대화를 하는 건지 잘도 그녀의 알아 듣고 통역(?)까지 해주곤 한다. 그래서인지 히노선배는 항상 카류 곁에 있 으려고 한다. 젠장, 그 카류 녀석. 혹시 히노 선배의 약점이라던가 그런걸 쥐고 있는 거 아냐? "......" "......" 한참동안 굉장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게 아닌데... 뭔가 말을 해야할텐데... 히노 선배가 관심이 있을만한 게 없 을까? 관심이 있을만한... "......카류가 어디 있는 지 아는데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 히노 선배가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젠장! 카류 놈!! 언젠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리고 말 테다!!! 나는 히노 선배와 함께 카류 놈이 이야기를 하던 교실로 걸어갔다. 카류는 아직까지도 그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래서 거북이가 시합에서 이겨버렸지." "우웅~~ 토끼는 바보...." 어떻게 거북이가 이긴단 말이야?! 카류 저놈 대체 무슨 소릴 한 거지? 언 제나 별 해괴망측한 이야기만 하는 이상한 놈 같으니! 내가 히노 선배와 함께 카류의 곁으로 다가가자 그 놈은 우리들을 보고 눈 을 동그랗게 떴다. "응? 히노 선배?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 에르가 형이 데려 다 준거예요? 고마워, 에르가 형." 젠장! 꼴 보기 싫은 놈. 순진한 척 그 딴 표정으로 웃지 말란 말이다. 이 이중인격의 가증스러운 자식. 네가 첫날 교실에서 나한테 지껄인 말, 아직 잊지 않았다고!! "히노 선배! 선배도 이 얘기 들어서 알지요?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요. 지금 그 이야기를 해주고 있던 참이었어요. 그럼 얘들아, 이 이야기는 뭘 뜻하는 건지 알겠어?" "...끙." "...토끼처럼 게으름 피우지 말라는 거 아니야?" 갑자기 한 쪽 구석에 앉아 있던 제르가 말했다. 토끼가 게으름을 피운다니 처음 듣는 소리다. 한낱 미물이 게으름이 뭔지 알게 뭐냐! 제르 녀석, 우리들 중 유일하게 문관출신의 가문인 스나일 백작 가의 자식 으로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완전히 돌덩이였군! ...아니다! 제르 녀석이 갑자기 저렇게 덜 떨어지는 말을 하는 것도 전부 저 카류 놈이 교묘한 말발로 애들에게 이상한 지식을 주입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저 카류녀석 언젠가 선생들에게 들켜서 큰 코 다칠 날이 올 꺼다! "맞아, 제르! 그렇지만 더 심오한 뜻도 숨겨져 있지!" "뭔데?" "토끼 같은 재능을 가지고 거북이처럼 노력하라. 뭐 이런 거랄까. 푸핫. 심 오하진 않지만, 뭐 그런 거야." "다른 거 또 없어? 다른 거! 다른 얘기도 해줘!" 토끼의 재능과 거북이의 노력...? 안돼. 이 이상 듣다가는 내 머리도 이상해 질지 모른다. 어서 여기서 탈출하자. 나는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 빠르게 그 교실에서 벗어나 홀로 터덜터덜 복 도를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벽에 붙어진 성적표를 또 한번 보고 말았다. 이런 X같은!! 참혹하게도 저 성적표의 수석은 이 몸이 아닌 카류리드 놈이었던 것이다. 젠장!! 그 자식의 검술 능력은 나보다 한참 떨어지는데! 실기에서 중간 정 도의 점수밖에 받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총점에서 저렇게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나 에르가처럼 문무에 뛰어나지도 못한 발육부진아 자식주제에...!! 이건 비리가 분명하다! 저놈은 모든 필기에서 전부 만점을 받아버린 것이 다. 한두 과목이라면 내가 이 넓은 마음으로 이해 해줄 수도 있다 치자! 그 러나 어떻게 전과목에서!! 전대미문의 천재라고 한참을 시끄러웠지만 난 믿지 않는다. 카류같이 덜 떨어진 놈이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있겠는가. 분명 카류리드 그놈이 선생들을 돈이나 왕자로서의 권력으로 매수해서 벌 린 일일 거다. 옛날부터 나 에르가를 따라올 자는 공부로도 검술실력으로도 없었다. 이 학교에서 내가 수석을 차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 기 저 녀석이 비겁한 수를 써서 나의 영광을 멋대로 채 가버린 것이다!! 젠장, 저 빌어먹을 비겁한 놈!! "에르가!" 한참동안 카류에 대한 욕을 하며 투덜대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아이의 목소 리가 들려와 나를 상념을 깨웠다. 낮이 익은 예쁘장하게 생긴 애 인데... 음! 생각났다. 하티 남작 가의 그 계집애로군. "있지. 저...이거..." 그 여자애는 얼굴을 붉히면서 편지를 내게 내밀었다. ...이것은!!! "이거 카류한테 전해줄래? 너 카류랑 친하잖아. 알았지? 그럼 부탁해!" 이런 젠장할! 저 년을 그냥! 감히 이 몸에게 그런 하찮은 부탁을!! 제기랄!! 누가 전해준다고 했냐? 이런 건 찢어 버릴 테다. 전부다!! (이제껏 이런 식 으로 사라진 편지들이 무척 많았다) 카류 놈... 두고보자... 빠드득... 그래! 오후에 검술 실기 가 있었지. 좋았어. 오늘 내가 본때를 보여주마! "타핫~!" "으윽!!" 카류 녀석이 내 목검에 어깨를 맞아 비틀거렸다. 용케도 쓰러지지 않았지 만 네 놈이 버텨봐야 거기서 거기다!! 이 발육부진 꼬맹이! 나는 대각선으로 내려치던 검을 오른쪽으로 빠르게 꺾어 녀석의 얼굴을 노 렸다. 그 재수 없는 콧대를 뭉개주기 위해서였다. 그 녀석은 몸을 뒤로 젖 혀서 겨우 내 검을 피했지만 동시에 내가 건 다리에 걸려 꼴사납게 뒤로 나자빠졌다. 바보 같은 놈. 그렇게 허술하다니. 상체고 하체고 헛점투성이다. "끄응... 아이고...아파라..." "헛점투성이야! 대체 검술 수련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모르겠군! 너 혼자 따로 남아서 연습한 거 맞아?" "나도 노력하고 있는걸. 휴, 난 검술에 별로 소질이 없나봐. 옛날엔 반사신 경이라든지 운동신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현재의 몸은 운동 면에서 는 많이 딸린다니까." "꼭 실력 없는 놈들이 왕년엔 자기가 잘났었다고 얘기한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네 놈이 과거에도 이렇게 비실거렸을 거라는 걸 모를 거 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이제까지 10년 동안 왕궁을 벗어나 본 적도 없는데, 과거의 내가 비 실거렸는지 어땠는지 왕궁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에르가 형이 어떻게 알 아? 헉! 왕궁 안에 몰래 사람을 심기까지 하면서 예전부터 계속 나를 지켜 보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처음 만나는 날부터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더라니." "헉! 미쳤냐?" "아니면 뭐야?" 으윽, 잘도 빠져나가는군. 저놈은 말발이 너무나 세서 내가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다. 그것만 아니면 이 몸이 저 놈보다 떨어지는 건 없을 텐데, 매일 저 놈의 저 입 때문에 내가 당하고 사는 것이다!! 저놈은 콧대를 뭉개기보 다는 저 혀를 잘라버려야 해! "우리는 순수하게 네 말을 믿으니까 에르가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카류. 원 래 에르가의 특기가 남 트집 잡기잖아? 에르가는 자신의 특기를 좀더 써먹 어 볼 데가 없을까 싶어 해본 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럴 때는 그냥 그 러려니 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카류야. 아까부터 엄청나게 맞던데 괜찮니? 에르가. 너무 무지막지 하게 카류를 때리지 마. 어제도 보니까 카류 몸이 온통 멍투성이던데, 이렇 게 조그만 애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때려 패는 거 야?" "뭐야? 후크 너!! 그리고 카멜!! 네놈들이 감히 날 희롱하는 거냐?" 갑자기 후크와 카멜이 튀어나와 나와 카류 놈의 말싸움을 방해했다. 검술 실기 수업은 항상 다른 반과 합동수업을 했는데, 하필이면 그 반이 후크와 카멜이 있는 반이었던 것이다. 저놈들!! 특히 후크라는 놈은 카류의 영향을 톡톡히 받았는지 날로 말발이 세지고 있다. 후크 놈을 상대하노라면 카류의 또 다른 분신을 보고 있는 듯하니 말이다. 두고보자. 언젠가 에스문드 백작 가의 장남인 이 몸을 희롱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에구, 그만해.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뿐인걸. 지금은 대련 중이잖 아? 그리고 카멜... 나를 위해주는 건 좋지만 쪼끄만 건 자랑이 아니라구." "역시 좀 그렇지? 푸훗. 앞으론 자중할게." "너 귀여운 거 좋아하잖아. 키가 안 크고 계속 조그마한 채로 있으면 귀여 워서 좋지 않냐?" "글쎄, 후~크~! 난 남자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꼭 보라돌이 형 같은 말을 하네! 난 그저 어린애를 좋아하는 것뿐이고!" "푸훗!! 자기가 어린애인 주제에 뭘 좋아해? 푸하하하하하~~!!" 나는 카류 놈이 하는 말을 듣고 크게 비웃어 줬다. 세상에 저렇게 멍청한 놈은 더 없을 거다! "불행하게도 그건 나도 에르가 형이랑 동감이다. 카류..." "아...하하하.. 아까 그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줄래?" 저...저놈!! 또 가증스럽게 헤실헤실 웃는구나. 이번에도 저런 식으로 웃어 서 넘어 갈 생각인가 보군! 저놈의 저 미소 밑에 얼마나 능구렁이 같은 생 각이 가득 차 있는지 대부분의 인간들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다른 놈들은 저 얼굴에 넘어갈지 몰라도 이 몸만은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이거 야. 젠장, 두고보자~! 언젠가 네놈의 비리란 비리는 모두 밝혀 절망의 나락에 빠뜨려주고야 말테다앗~~!!! ◆ ◆ ◆ ◆ ◆ ◆ ◆ 내가 학교를 다닌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오늘은 파블료프 학교의 입학식 날로 모두들 학교 앞의 운동장에 나와 나란히 줄을 서고 있었는데, 나는 전교 수석으로서 입학생 축하 선언문을 읽어주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 고 교단 앞으로 불려나가게 되었다. 이런 짓을 여기 이르나크 세계에서도 하게 되다니. 나는 비 천재 노선을 완전히 포기했다. 내 나이도 벌써 12살! 그 수많은 노 력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이미 충분히 천재로서 소문이 자자했다. 때문에 지금부터 비 천재 노선이 성공적인 결과를 얻는다하더라도 찬밥 신 세를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거다. 분명, 저놈이 10살까지만 해도 머리 가 비상했는데 라는 소리를 들을게 뻔한 것이다. 19살에 가서 찬밥신세 안 되려고 비 천재 노선을 추구하며 최대한 조심조 심 행동했었지만, 어차피 언젠가 찬밥이 될 운명(?)이라면 최대한 오랫동안 천재이고자 하는 마음에 이젠 아주 어린아이의 행동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짓들을 그냥 서슴없이 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천재이고 싶냐고? 누가 옆에서 천재라고 치켜 줘 봐라. 얼마나 기 분이 좋은지 경험해본 사람은 알 거다. 어쩔 수 없지. 이곳 이르나크 세계의 교육, 학문이 굉장히 수준이 낮으니 내가 토이렌에서 가지고 있었던 지식을 최대한 조금씩 활용해가며 살아가 는 거야. 내가 그래도 왕년에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머리 좋다는 소리 듣 고 살았잖아. 좋아! 그거야!!!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까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시험이란 것이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곳의 시험은 어떤 식으로 칠까. 설마 객관식일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 겠지? 이곳에 그런 관념은 없다. 여기서 필기시험이라 함은 논술 형식으로 답을 써내게 하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는 너무나 쉬운 그런 문제였다. 적당히 중위권을 목표로 설정 하고 그 정도의 성적만을 유지하고자 했던 나였으나 막상 문제지를 받아보 니 제대로 풀지 않고는 내 자존심이 용납을 못할 만큼 쉬운 문제였던 것이 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이지 별 시덥잖은 자존심이 아닐 수 없다. 하 지만 시험에 '1+1은 얼마?' 하고 나오면 얼마나 풀고 싶겠는가!! 어쨌든 그 당시 나는 문제를 풀면서 상위권으로 내 목표를 재설정했다. 그리고 아주 약간 신경을 써서 시험답안을 써냈다. 그러나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각 과목의 선생님들 이 나의 답안을 보며 극찬의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12살의 아이 들의 언어능력이 그렇게까지 떨어지는 줄 난 그때 처음 알았다. 객관식 문 제였다면 반만 맞춰서 낸다거나 하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모든 필기시험에서의 만점!! 전대미문의 천재라나 어쩐다나 하는 소문이 쫘악 퍼졌다. 그때의 그 낭패감이란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 정도다. 한순간 울컥 생겨난 만고에 쓸데없는 호승심 때문에 나의 창창한 미래에 거대한 먹구름이 끼는 순간이라고 할까. 그러나 나는 아직 굴하지 않고 계속 비 천재 노선을 추구하려했다. 다음 시험부터 평범하게 써내면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것이라는 생각 하 에!! 그런데 내 마음을 바꾸게 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카류...너무...대단해." 이 세 마디!! 히노 선배가 내 점수를 보더니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그 앙증맞은 입으로 그렇게 무려 세 마디나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크허헉! 귀여워!! 그 세 마디가 결정적으로 나의 비 천재 노선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든 것이다. 됐어, 천재가 다 뭐냐!! 난 이렇게 살다 죽을랜다. 하하하. 나는 오늘도 아이들에게 전래동화를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벌써 12살이나 되었건만 아이들은 의외로 이런 얘기를 듣는걸 좋아하는 것이었다. 아마 이곳의 동화가 몹시 열악해서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의 동화가 어떤 거냐고? 미소녀미소년 용사 전대물. 이런 거라고 나 할까. 악룡이나 마왕을 상대로 싸워 악을 응징하는 권선징악의 내용이 동화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말하는 이솝이야기 같은 게 그 렇게 신기한 모양이다. 나는 오늘도 애들을 죽 둘러 앉혀놓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해주고 있 었다. 참으로 기괴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제일 어려 보이는 11살 짜리 꼬 마가 최소 12살에서 최고 17살까지의 애들을 죽 불러모아놓고 -불러모으진 않았다. 언제부턴가 저절로 아이들이 내게 찾아오는 것이었다.- 옛날 이야 기를 해주는 장면이라니, 정말 엽기다. 하지만 그것도 하다보니 상당히 재미있어서 자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 게 된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귀를 쫑긋 세우고 생각하거나 하는 모습이 너무너무 귀엽거든!! 나도 이젠 될 대로 되라다!! 옛날에도 루브 형들을 모 아놓고 이런 이야기 해주곤 했는걸 뭐. 그땐 조용히 숨어서 해줬지만. 문득 뒤쪽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을 향해 투덜거리다가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가버리는 에르가 형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에르가 형은 굉장 히 심통이 난 모양이다. 형은 처음 볼 때부터 골목대장 타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내가 그 자리를 뺏은 거나 다름없게 된 것이다. 별로 뺏으려한 건 아니었는데 저절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애들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가 오 지랖 넓게 여기저기 아이들을 만나러 다녀서 그런 것일 거다. 매번 동화를 들으러 오는 애들만 봐도 그 사실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나는 암암리 에 애들의 리더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압!" "으윽!!" 내가 봐도 에르가 형은 검술은 굉장히 강하다. 지금까지의 그 당당함은 그 냥 나온 것이 아니었던지, 형은 상당히 공부도 잘하고, 또 검술 실력도 뛰 어났던 것이다. 물론 나 때문에 공부에서 빛을 보진 못했지만. 에르가 형은 리더 자리를 뺏긴 것이 얼마나 심통이 났는지 검술시간만 되 면 대련상대로 나를 지정하고 복날 개 패듯 목검으로 엄청나게 두들겨 패 고 있었다. 에구에구, 삭신이야. 오늘도 멍투성이가 되겠구먼. 에르가 형의 검은 애들 이 치는 목검이라고 무시할만한 수준의 검도 아닌데다가 지금 내 몸은 애 란 말이다!! 어흑!! 아파라. 하지만 어찌하랴. 이렇게 라도 에르가 형의 마음을 풀어줘야지. 아니면 저 잘난척하기 좋아하는 에르가 형은 스트레스로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내가 일부러 맞아주고 있다는 건 아니다. 불행하게도 내가 실력 이 없어 얻어맞고 있는 거다. 그냥 대련상대를 다른 사람으로 해서 에르가 형을 피해도 되지만 그냥 계속 상대해주고 있다는 얘기다. 에르가 형이 대각선으로 내려치며 어깨를 치려는 듯 하다가 갑자기 각도를 바꿔 내 안면을 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몸을 뒤로 크게 젖혀 정말 간신히 내 얼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안심할 새도 없이 에르가 형이 내 발을 거는 바람에 나는 뒤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고, 오늘도 또 한번 추태를 부리는구나. 이곳의 검술은 일본의 검도 같은 것과 비슷하긴 하지만 스포츠가 아닌 실 전을 위한 검술이라 그런지 다리 걸기, 차기 등 꼭 검을 이용하지 않은 공 격법도 쓰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에르가 형이 이렇게 다리를 거는 것도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막지 못한 것뿐이지 에르가 형이 비겁한 행 동을 한 것은 아니다. 단지, 전쟁과 같은 실제 상황이 아닌, 이런 연습시합 에서 안면 치기는 통속적으로 불가임에도 내 얼굴을 노렸다는 점이 좀 걸 리긴 하지만 말이다. "헛점투성이야! 대체 검술 수련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모르겠군! 너 혼자 따로 남아서 연습한 거 맞아?" 에르가 형은 내 앞에 서서 즐겁다는 듯이 소리쳤다. 소리치는 모양을 보아 하니 스트레스가 조금 풀린 모양이다. 푸훗, 역시 어린애야. 어린애. 나는 마법에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검술이라도 잘해보고자 일부러 남아서 연습도 해보곤 했지만 내 몸은 의외로 운동신경이 그렇게 발달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중상(中上)정도 이상의 성과는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전생의 내 몸은 운동신경이 좋아서 못하는 스포츠 가 없었는데...스포츠랑 검술은 다른가? 이제 내게 남은 길은 학자 밖에 없구나. 어차피 그게 내게 제일 맞는 길이 기도 한 거 같다. 그렇게 책을 많이 읽었으니 말이다. 내가 전생에 죽기 직전도 오로지 책만 읽었지 않는가. 어렸을 때도 심심하다는 명목으로 많 은 책을 엄청나게 읽어댔었고. 아, 그러고 보면 난 정말 책과 인연이 많구 나. "나도 노력하고 있는걸. 휴, 난 검술에 별로 소질이 없나봐. 옛날엔 반사신 경이라든지 운동신경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는데 현재의 이 몸은 운동 면에 서는 많이 딸린다니까." "꼭 실력 없는 놈들이 왕년엔 자기가 잘났었다고 얘기한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네 놈이 과거에도 이렇게 비실거렸을 거라는 걸 모를 거 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에르가 형은 저렇게 나의 말꼬투리 하나 잡지 못해 안달이 나 있다. 그러 나 저런 식으로 시비를 걸어 피를 보는 자가 누구인지 이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는 이제까지 10년 동안 왕궁을 벗어나 본 적도 없는데, 과거의 내가 비 실거렸는지 어땠는지 왕궁에 들어와 본 적도 없는 에르가 형이 어떻게 알 아? 헉! 왕궁 안에 몰래 사람을 심기까지 하면서 예전부터 계속 나를 지켜 보고 있었던 거야? 어쩐지 처음 만나는 날부터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더라니." "헉! 미쳤냐?" "아니면 뭐야?" 나는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에르가 형을 향해 말했다. 에르가 형만 보면 이런 장난을 쳐주고 싶단 말이야. 항상 공이 통통 튕기듯 반발해오는 그런 면 때문인 것 같다. "우리는 순수하게 네 말을 믿으니까 에르가의 말은 신경 쓰지 마, 카류. 원 래 에르가의 특기가 남 트집 잡기잖아? 단지 에르가는 자신의 특기를 좀더 써먹어 볼 데가 없을까 싶어 해본 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이럴 때는 그 냥 그러려니 하고 무시하면 되는 거야." "그런데 카류야. 아까부터 엄청나게 맞던데 괜찮니? 에르가. 너무 무지막지 하게 카류를 때리지 마. 어제도 보니까 카류 몸이 온통 멍투성이던데, 이렇 게 조그만 애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때려 패는 거 야?" 후크와 카멜이 나에게 다가왔다. 검술 실기 수업은 다른 반과의 합동수업 이었는데 마침 그 반이 후크와 카멜이 있는 반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항상 에르가 형한테 비오는 날 먼지가 날만큼 두들겨 맞고 난 후 그들에게 간호 아닌 간호를 받고 있었다. "뭐야? 후크 너!! 그리고 카멜!! 네놈들이 감히 날 희롱하는 거냐?" 둘의 말을 들은 에르가 형이 또 한번 발끈해서 소리쳤다. 에구에구 후크, 카멜... 에르가 형의 화를 돋구면 내가 일부러... 일부러 라 고 할 순 없지만 어쨌든 이렇게 맞아준 의미가 없어지잖아. 그만 말려야겠 군. "에구, 그만해. 내가 실력이 모자라서 그런 것뿐인걸. 지금은 대련 중이잖 아? 그리고 카멜. 나를 위해주는 건 좋지만 쪼끄만 건 자랑이 아니라구." "역시 좀 그렇지? 푸훗. 앞으론 자중할게." "너 귀여운 거 좋아하잖아. 키가 안 크고 계속 조그마한 채로 있으면 귀여 워서 좋지 않냐?" 음, 후크의 말발이 날이면 날마다 일취월장하고 있다. 아마도 나의 영향이 몹시 큰 듯 싶었다. 교묘하게 남을 약올리는 그 말발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 정도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다 애 하나 망치는 거 아 닌지 모르겠다. "글쎄, 후~크~! 난 남자다운 어른이 되고 싶다고 말했잖아. 꼭 보라돌이 형 같은 말을 하네! 난 그저 어린애를 좋아하는 것뿐이고!" "푸훗!! 자기가 어린애인 주제에 뭘 좋아해? 푸하하하하하~~!!" "불행하게도 그건 나도 에르가 형이랑 동감이다. 카류..." 실수다. 귀여운걸 좋아해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거였는데. "아...하하하. 아까 그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줄래?" 나는 될 수 있으면 귀엽게 배시시 웃으면서 그 상황을 얼버무렸다.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애들한테도 이게 의외로 잘 먹힌다. 외모로는 내가 굉장히 어 려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도 굉장히 두들겨 맞더구나. 카류." "오? 딜티, 모두들. 전부 대련을 끝냈나 보지?" 한참 잡담을 하고 있는데 4명의 아이들이 우글우글 거리며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첫날 내가 에르가 형과 한 단위로 뭉쳐 싸가지 5인방이 라고 불렀던 아이들이었다. 모두들 한가닥하는 굉장히 유명한 귀족가문의 자제들로 에르가 형을 중심으로 다섯 명이서 우루루 몰려다니며 다른 아이 들 기를 죽이고 다녔던 것이다. 첫날 학교 선생이 유명한 귀족 자제들이 많이 왔다고 말하더니 그게 정말인 모양이다. 같은 학년에 저렇게 유명한 가문들 아이들이 다섯 명이나 있으니 말이다. 에르가 형과 다른 4명, 그리고 후크와 카멜은 현재 13살로 모두 동갑이다. 그리고 나만 12살로 1살이 어렸지만 같은 학년이었기에 전부 친근하게 이 름을 부르고 있었다. 어차피 그들도 왕자인 나를 마구 애칭으로 부르고 있 었으니 피차일반인 셈이다. 단지 에르가만을 첫날의 사건으로 형이라는 칭 호를 붙여 주고 있을 뿐이다. "그래가지고 서야 한달 후에 있을 아룬더스 축제에 참가나 하겠어? 왕자인 주제에 축제에 참가를 못한다는 거 정말 쪽 팔리는 일 아니야?" 4명의 아이들 중 엘시온이라는 금발머리 남자아이가 완전히 곤죽이 된 나 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들 4명과는 1년 넘게 한 학교, 한 교실에서 함께 지내면서 상당히 친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에르가 형이 나에게 끝없는 복 수심을 불태우는 관계로, 에르가 형과의 우정(?)을 버릴 순 없는지 은근히 형의 편을 들면서 나를 괴롭혀 보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딜트라엘이 말한 아룬더스 축제란 파블료프 학교에서 2년에 한번 개최하는 가을축제였다. 그리고 바로 올해가 그 축제가 열리는 해였다. 그런데 축제 에 참가를 못하다니 그게 무슨 소릴까? "축제에 왜 참가를 못해? 아룬더스 축제에 참가 제한 같은 것도 있단 말이 야?" "그야 당연하잖아. 축제에 모두가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나도 참가하 지 않을 거야." "제르의 집안은 우리들처럼 무가(武家)가 아니니까 당연하지만 카류, 네 녀 석은 왕족으로서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수준의 검은 해야하는 거 아니냐 고." 에르가 형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물 만난 물고기같이 화 사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든 에르가 형의 저 뿔난 심통을 고쳐줘 야 할텐데, 제대로 두면 나중에 성인이 됐을 때 사회 생활하기 참 곤란하 지 않겠어? 하지만 이런 심통을 부리는 면이 재미있기도 하니까 일단 지금 은 내버려두자. "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축제에 왜 문가의 자식은 참가를 안 한다는 거야?" 에르가 형의 성격 고쳐주기는 나중 일로 미루기로 하고 나는 일단 아이들 을 향해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야 당연하잖아. 카류, 너 혹시 축제가 뭔지 모르는 거 아니니?" "응? 학교 축제라면 학생들이 지은 시나 그림을 전시하고, 체육대회를 연 다던가 하는 거 아냐?" 갑자기 카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나 그림? 그런걸 누가 해? 그리고 체육대회는 또 뭐냐? 그런 소리 누구 한테 들었어?" 어? 여기서는 학교 축제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내가 너무 당연 하게 토이렌 세계의 학교축제와 이 곳의 축제를 동일시 해버렸구나. 이곳 학교가 배우는 과목만 빼면 예전의 학교와 너무 흡사해서 그런 착각을 한 모양이다. "아하하, 그냥 한번 해본 말이야. 언젠가 학교 축제가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거든." "우리가 그림 같은 걸 왜 그린단 말이야? 그림은 화가가 그리는 거야. 별 웃기는 놈을 다 봤네?" "하하... 그건 넘어가고, 그런데 왜 검을 잘 쓰는 사람만 축제에 참가한다는 거야?" "당연하잖아. 검술 시합을 벌일텐데 이 학교의 모든 학생을 전부 대결시킬 수는 없는 일 아니야?" "엉? 무슨 소리야? 축제에 왠 검술 시합?" "후후훗! 맨날 잘난 척 하더니 드디어 네 놈도 자신의 본 모습을 보이는구 나! 이 무식한 놈아! 우리학교 축제가 아룬더스 축제라고 불리는 것도 축 제에서 아룬더스 검술시합이 개최되기 때문이라고." 학교 수업도 과목의 반이 검술로 가득 채워져 있더니 축제마저 검술 시합 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아이들이 너무 폭력적으로 자라는 거 아 니야? 귓등으로 주워들은 얘기에 따르면 검을 좀 쓸 줄 아는 귀족들은 항 시 검을 가지고 다니면서 무례한 평민이라도 보일라치면 목을 치는 것을 여사로 안다고 하던데, 그게 전부 어릴 때부터 이런 학교 다니면서 키워진 거 아닌가 몰라! "그럼 예선전도 치르는 거야?" "그런 번거로운 짓을 뭐 하러 하니. 대충 자기 주제를 아는 인간들이 신청 을 하고 그 중 선생들이 적당히 골라 뽑는 거지. 너 의외로 이런 데서는 정보가 느리구나." "원체 성안에서만 살다보니 내가 세상을 접할 기회는 오로지 책뿐이지 않 았겠어? 그러니 책에 적혀있지 않은 약간 상식적인 건 잘 모른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나 정말 가엾지 않아?" "그 화려한 곳에서 살면 됐지, 뭘 더 바래?" 에르가 형이 투덜대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게 안 그렇잖아. 비록 편하고 화려한 곳이라도 한 곳에서만 너무 갇혀 살다보 면 질리고 물리는 법. "거기에 출전해야 하나? 어차피 우승은 물 건너 간데다가 상위에 진입하기 도 힘들어 보이는데." "솔직히 쪽 팔리는 일이지. 왕족으로 검술도 제대로 쓸 줄 모른다니 말이 야." 딜트라엘, 그러니까 딜티라는 애칭을 가진 옅은 갈색머리 아이가 약간 비 꼬는 투로 말했다. 저들의 말투를 보니 이대로 축제에 안나가겠다고 하면 영원히 그 일로 물고 늘어질 거 같은 기세다. 그건 그렇고 어쩐지 최근 들 어 딜트라엘의 혈색이 엄청 좋더라니 축제를 빙자한 검술시합이 다가와서 그런 모양이구나. 그도 유명한 권력가이자 무가인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 으로 상당히 검술 실력이 뛰어나니까. "왜 검술 시합만 하고 학문 쪽을 겨루는 시합은 없는 거야? 아무리 문보다 무를 중시하는 세계라지만 이거 너무한 거 아냐? 육체파가 아닌 두뇌파들 은 서러워서 살겠냐고." "그건 정말 동감이야. 카류. 나 같은 문관 집안의 아이는 이럴 때는 정말 서럽다고." "그렇지? 제르!?" "응!" 헉! 귀여워라! 저렇게 눈을 반짝이면서 바라보다니! 제르카인이 저렇게 순 순히 내 말에 동의해주긴 정말 오랜만이구나. 에르가 형 다음으로 내 말에 투덜거리기를 좋아하는 녀석이건만 말이야. "제르~! 에구, 귀여워라. 앞으로도 자주 그런 표정을 지어주면 안될까?" "야, 야! 비켜!! 내가 이래서 너를 싫어하는 거야!!" "허헉!! 사람의 심장에 비수를 찌르는 말을 하다니! 좀 껴안았을 뿐인데 어 떻게 그럴 수가 있어?" "당연히 그럴 수가 있지." 뒤쪽에 서 있던 엘시온이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엘시온의 말에 모두들 한마음 한뜻이 되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허허!! 후크, 카멜 너희마저!! "서로의 애정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이 뜻 깊은 작업의 진정한 의 미를 그렇게 모르다니, 너희들은 역시 너무 어려. 아직 어리다고." 나의 말에 에르가 형이 한차례 발광을 하려 하는걸 딜트라엘이 달려들어 겨우겨우 말릴 수가 있었다. 솔직히 에르가 형은 저런 다혈질인 면이 정말 귀엽다니까. 그냥 확 껴안아 줄까 싶지만 그랬다간 정말 사생결단을 내려 할지도 모르니 일단 지금은 참자. "음? 그런데 세미르. 넌 왜 아까부터 아무런 말이 없어?" 나는 문득 에르가 형 뒤에서 약간 침울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세미르 를 보고 물었다. 세미르도 에르가 형이나 딜트라엘, 엘시온처럼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3명의 아이들처럼 세미르 역시 유명한 무가 후르부 크 백작 가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영재교육을 받아 상당히 검 술에 능했기에 축제에서 상위 기록을 세울 것은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일 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세미르는 영 표정이 밝지가 못했다. "그야, 저 녀석은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그런 거지." "에르가 형. 좀 인생을 겸손하게 살아 봐. 너무 그렇게 살면 나중에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할지도 몰라." "별꼴이네. 진실을 말하는 것도 잘못이냐? 그리고 누가 감히 나를 따돌린 단 말이냐? 명문 에스문드 가문의 장남으로 검술이나 머리, 무엇하나 부족 함이 없는 나를 말이야!" 에르가 형은 허리에 손을 얻고 당당하게 말했다. 저 어조나 태도를 보아하 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에고, 귀여워라! 정말 어린애 로구나!! "에르가 말이 틀린 건 아냐. 카류." "응? 무슨 소리야? 딜티. 에르가 형을 이기지 못해서 세미르가 침울해 있 단 말이야?" "세미르한테 형이 있잖아." 옆에서 딜트라엘이 말을 거들어 왔다. 형이 있는 거랑 에르가 형을 이기지 못하는 거랑 무슨 관계지? "아, 알겠다! 세미르의 형, 세스케인이라는 이름이지? 그러고 보니 우리학 교의 역대 선배들 중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라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 은 적이 있어. 엄청나게 유명하더라? 그래, 아룬더스 검술 시합에도 매번 출전해 우승을 모조리 휩쓸어 버리고, 고학년을 이기기까지 했다는 말을 들었어." "음? 그런데 그게 어떻다는 거야?" 나는 의아해져서 후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미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솔직히 비교되잖아. 세스 형은 항상 모든 곳에서 일등이었단 말이야. 이번 에 축제에서 우승을 못하면 세스 형의 동생인데도 저거밖에 못하냐고 수근 수근 거릴 게 분명해." "아." 나는 그제야 이해를 하고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나에게 형제들은 여전히 어린아이로만 비춰지고 있었고, 형과 누나라기보다는 아주 어린 동생이라 던가 심하게는 아들, 딸 같은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그들은 내게 열등감을 느끼게 할 상대로서는 상당히 부족했다. 그리고 전생에도 외동아들이었던 관계로 열등감을 느낄 형제 자체가 없었고, 솔직히 말해 못하는 것이 거의 없어서 그다지 열등감 같은 건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바로 세미르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다. "에이, 그런 걸로 고민한 거야? 인생을 살면서 그런 일로 일일이 고민하면 세상 살아가기 너무 힘들다고. 봐, 나는 생명의 궁에 들어갔다가 마법도 못 하고 나왔지, 이제는 아주 검술도 못하잖아? 그래도 이렇게 쌩쌩한걸."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구나. 음, 마음에 들었어!" 세미르를 위로하고 있는데 에르가 형이 끼어 들어 정말 흐뭇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가 형!!" "뭐...뭐야?" "더는 못 참아!" "으악! 떨어져!! 야, 야!!" 정말 귀여워! 에르가 형은 저런 건방진 면이 오히려 더 귀엽게 느껴진단 말이야! "이제 알겠다. 카류의 포옹은 공격 수단이구나." "아,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군." 에르가 형이 발버둥치는데도 끝까지 늘러 붙어 있자 주위에 서 있던 후크 를 시작하여 아이들이 하나씩 감상을 내뱉었다. "헉! 무슨 소리야! 이건 애정 표현이라고!!" "젠장할! 떨어져, 이 자식아!" 멀리서 선생님의 집합소리가 들리 때까지 우리들은 한동안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집합 장소로 걸어가면서 에르가 형이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두고보자, 이 자식! 축제 후에 호되게 당한 네가 침대에서 끙끙거리는걸 보러 꼭 양호실로 찾아가 주마." "어머, 에르가 형이 날 간호해주려고? 고마워, 형. 나 감동했어." 내가 장난스럽게 콧소리를 내며 받아치자 에르가 형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 다. 저러다가 치아 건강이 나빠지면 어쩌나. 여긴 제대로 된 치과도 없는 모양이던데. 그러나 저러나 아룬더스 축제라. 기대되는 걸. Part. 14 - 축제 축제를 얼마 남겨 두지 않고 학교가 며칠동안 휴일에 들어갔다. 본격적인 준비를 위해서 학생들에게 쉬는 날을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랜만 에 물의 궁에서 미르 누나와 키옌 형, 그리고 카이 형을 데리고 바람의 궁 을 급습(?)했다. 시종의 알림도 없이 루브 형의 방으로 우리들이 갑자기 들 이닥치자, 둘이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는지 탁자에 앉아 있 던 루브 형과 세라 누나가 놀랐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우리들 을 바라보았다. "카류? 어? 너희들." "말도 없이 이렇게 온 거야?" "헤헤, 오랜만이지? 루브 형. 세라 누나." "와. 반가워라! 특히 카류는 정말 오랜만인 거 같아!!" "미안, 세라 누나. 그래서 이렇게 찾아왔잖아?" 나는 빙긋 웃으며 다른 곳에서 의자를 몇 개 더 끌어와서 형제들을 여기저 기에 앉히고 나도 탁자에 끼어 들었다. "헤헤, 이거 알아? 며칠 후에 우리 파블료프 왕립학교의 아룬더스 가을 축 제가 열린다는 거 말이야." "축제라고?" "응! 그런데 나도 거기에 출전하게 됐어! 기뻐해 주라! 축하해 주라! 형들~! 누나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아룬더스 축제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헤벌쭉 웃으며 자랑 아닌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웬만해서는 참가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참가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형제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어 이렇게 뛰어왔던 것이다. 그 말을 듣더니 키옌 형이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야, 너 약골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세구나. 카류." "헤헤헤. 보라돌이 형. 솔직히 나도 보통 이상은 한다고!" 다행히도 나는 한 학년에서 딱 16명이 출전하는 아룬더스 검술대회에 참가 할 수가 있었다. 나도 그렇게까지 검술 실력이 딸리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 이다. 그래도 한 학년에서 16위 내에 든다는 건 약간 비리가 있을지도 모 르겠다. 왕자를 축제에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게 걸려서 선생님들이 실력도 안 되는데 나를 통과시켰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다고 할까. 으으, 나도 몰 라! 통과 시켜줬으면 그런 줄 알자! "그거...우리도 보러 갈 수 있는 거야?" 카이 형에 곁에서 눈동자를 빛내며 내게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카이 형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면서 방긋 웃었다. "당연하지. 가족이라면 누구나 구경올 수 있어. 하지만 기대하고 오면 곤란 한데... 솔직히 난 1회전 통과가 목표걸랑." "1회전이든 2회전이든 구경가고 싶어!" "나도!" 형제들은 흥분해서 너도나도 축제에 구경오고 싶다고 난리를 쳤다. 솔직히 그들도 아직까지 한번도 왕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으니 이런 기회를 틈 타 한번쯤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단 에렌시아 님께 물어보는 게 우선 이겠지?" "좋았어! 어머님께 당장 물어보러 가자!!" 웅성거리던 아이들 사이에서 내가 간단히 방법을 알려주자 루브 형이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나 먼저 에렌시아 님의 방으로 성큼 성큼 걸어가기 시작했 다. 저 행동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축제에 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러나 우 리들이 에렌시아 님이 계실 것이라 생각했던 곳으로 몰려갔을 때 그곳엔 썰렁한 찬바람만이 불고 있었을 뿐 아무도 없었다. "어? 안 계시네? 루브 오빠. 어머니가 안 계셔." "이봐,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는지 알아?" 항상 계시던 곳에 에렌시아 님이 없다는 것을 알고 루브 형은 주위에 지나 던 시종을 하나 잡아 질문을 했다. "아, 예. 이크쟌트 후작 님이 오셔서 지금 그 분과 윗층의 서재에서 이야기 중이십니다." "어? 또오? 또 외조부 님께서 오신 거야?" "왜 그래, 루브 형?" 루브 형의 완전히 낭패라는 표정을 보고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몰라. 요즘 들어 외조부 님과 외숙부 님께서 거의 매일같이 바람의 궁을 찾으시거든. 게다가 무슨 이야길 하는지 나와 세라는 근처에도 못 오게 하 신다고." "맞아. 게다가 다른 귀족들도 굉장히 자주 여길 들락거려. 트로이 후작 님 이라던가 후르부크 백작 님 같은 대귀족이 심심하면 이곳을 들리는 바람에 우린 바람에 궁에서 맘 편히 지내지도 못한다니까. 그래서 아까도 루브 오 빠의 방에 모여서 조용히 이야기나 하고 앉아있었던 거야." "응? 왜지? 무슨 일 있나?" "내가 아니?! 에이, 축제에 가도 되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다 틀렸잖아!" 루브 형이 투덜투덜 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싱긋 웃었다. "좋아. 그럼 빛의 궁으로 쳐들어가자. 솔직히 이 일은 국왕...아버지께 물어 보는 게 확실하잖아? 그리고 오랜만에 아버지 얼굴도 볼 겸 말이야. 이대 로는 아버지 얼굴을 아주 까먹겠다니까?" "내가 듣기로는 아버님이 거의 매일같이 땅의 궁에 들리신다고 들었는데 카류는 왜 아버지의 얼굴을 잊어?" "크으, 말도 마! 땅의 궁에 와서도 내 얼굴은 보고 가지도 않는다니까. 루 브 형! 형은 나중에 커서 그렇게 아이들한테 무심한 왕이 되면 절대 안돼? 알았지?" "에고, 알았으니 그만 떨어져 주라. 카류." 우리들은 왁자지껄 떠들면서 빛의 궁으로 향했다. 너무 떠드는 바람에 주 위의 하인들과 관리들이 한번씩 우리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시끄럽다고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하나같이 보기 좋다는 듯이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왕가의 아이들이 이만큼이나 화기애애한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니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빛의 궁으로 향 하다가 나는 반가운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오? 어머니?" "...카류?" "우와! 우연이네요. 빛의 궁으로 가시는 거예요? 저희들도 지금 가고 있는 데!!" 나는 어머니를 보고 밝게 웃었다. 어머니는 그런 나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긴 하다만... 너희들은 어째서 모두들 이렇게 모여서 빛의 궁에 가려 는 거지?" "아! 어머니께서 궁에 안 계시는 바람에 아직 말씀 못 드렸는데 실은 제 가..." "카류가 이번에 아룬더스 축제에 참가한대요!!" "그래서 저희들도 어떻게 구경갈 수 없을까 싶어서 허락을 받으러 가려는 거예요!" "실은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간접적으로 물어보려고 했는데 외조부 님께서 오시는 바람에 직접 가려고 하는 거예요!" 어머니의 물음에 흥분한 형제들이 하나씩 튀어나와 저마다 대답을 했다. 상기된 얼굴이 너무 귀여워 한번씩 끌어안아 주고 싶었지만 일단 장소도 그렇고 어머니도 앞에 계신 관계로 눈물을 머금고 그 마음을 발로 꼭꼭 밀 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아, 그랬니..." 어머니는 저렇게 부산을 떠는 아이들을 보고도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나 같으면 귀여워서 예전에 끌어안고 마구 뽀뽀해줬을 텐데 역시 어머니는 썰 렁한 분이시라니까. "이크쟌트 후작 님께서 또 오셨니? 내가 어제 바람의 궁에 갔을 때도 그 분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에렌시아 님을 만나 뵙지 못했는데..." "잘 모르겠어요. 요즘 들어 외숙부 님께서는 어머니께 무슨 할말이 그렇게 많으신지... 아,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제가 어머니께 전해 드리 겠습니다." "아니란다. 루블로프. 나중에 천천히 말씀드려도 되는 일이니까. 자, 빛의 궁으로 가는 길이라고 했지? 함께 가자꾸나." 우리들은 어머니와 함께 빛의 궁으로 찾아갔다. 원래 알리지도 않고 온지 라 국왕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국왕은 우리 들이 왔다는 소식을 시종이 알러가자마자 금방 나타났다. "아스! 짐이 그렇게 빛의 궁으로 오라고 일렀건만 이제야 왔구나." "...아버지."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어머니에게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아 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이렇게 빨리 나타난 것은 어머니가 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일 거다. 우리끼리 왔었다가는 어쩌면 자정이 넘어가도록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구나. 너무 삐뚤어진 생각을 하는 건가? "으음? 아, 너희들도 왔구나. 무슨 일이지?" 국왕은 '으음?' 이라는 의성어를 내며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진짜 우리들이 눈에 보이지 않았다는 얘긴가? 어머니가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거 알긴 알 지만 국왕의 눈이 저 정도로 멀어 있었을 줄이야. "...며칠 후에 제가 다니는 파블료프 왕립학교에 축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형과 누나들이 거기에 구경오면 안될까 해서 허락 받으러 온 거예요." "뭐? 축제?" 국왕이 약간 언성이 높였다. "...안돼나요?" 루브 형이 국왕의 큰 소리에 약간 기가 죽어서 거의 웅얼거리다시피 말했 다. "당연하지! 카류를 밖으로 내보낸 것도 선례를 깨어가며 했던 일인데, 모든 왕족이 전부 성밖으로 나가겠다고? 말도 안돼는 소리 마라!" "그... 선례라는 거 그냥 잊고 한번만 가게 해주시면 안돼요? 이번 축제에 는 다른 귀족들도 많이 올 테니까 분명 경비도 단단하게 할거예요." "카류리드, 말도 안돼는 소리 말거라. 만에 하나라도 너희들에게 일이 생기 면 이 나라의 정세는 어떻게 되는 것이냐! 왜 갑자기 그런 말도 안돼는 소 리를 하는 거지?" 세게 나오는 국왕 앞에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가만 생각하면 국왕의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다른 귀족들도 많이 참여하는 만큼 철통같은 경비를 하 기에 웬만해서는 그런 암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정말 만 에 하나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 나라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는 일이 아닌 가. 사실 내가 학교에 다니게 나가게 된 것도 내가 제6왕자니 암살의 위험 이 없을 것이라는 논리적인 주장을 하면서 어머니의 요청까지 가세했기에 겨우겨우 가능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 형제들은 완전히 실망한 눈치였다. 형제들 중 가장 말발이 센 내가 국왕의 말에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이제 그들이 밖으로 나갈 가능성은 완전히 없 어져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됐으면 이제 그만 나가보거라." 형제들이 밖으로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저는 축제에 가보아도 될까요? 사실은 너무 오랫동안 밖 구경을 못해본 것 같아 답답했었는데 말입니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런 모습을 보면 겉으로는 냉랭하게 굴고 있지만 마음속까지 냉랭한 분은 아니라니까. 자기 아이가 축제에 참가했다는데 궁금하지 않을 부모는 드물겠지? 저기 아버지 같은 사람을 빼고서 말이야. "아스!! 절대 안 된다!! 하늘이 무너져도 그건 안돼! 너를 노리는 파렴치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절대로 안 된다! 밖으로 나갔다가 네가 어 떤 짓을 당할지 나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그러나 국왕은 형제들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흥분을 해서 소리 쳤다. "폐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설마 그런 일이 일 어날까요?" "아스! 너는 전혀 남자를 모른다! 한번씩 남자는 여자 때문에 비논리적인 생물로 변해버리기도 한단다. 그러니 절대로 안 된다!! 게다가 세상에 별의 별 놈들이 다 있으니 절대로 그건 안돼!!" 아버지의 말을 듣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를 딱 한 번만 안을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인간들이 나타날지 누가 알겠는가. 솔 직히 어머니를 보고도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보통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 아닐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니."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에휴, 이번 축제는 저 혼자만 가야겠군요." "어린애도 아닌데 그 정도도 혼자 참가하지 못한단 말이냐." 욱! 누가 그렇대? 그냥 가족들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한 거지!! 이구, 어머 니 때문에 흥분한 것은 이해하겠다만, 말만이라도 '어쩔 수가 없구나' 라던 가 하는 위로의 말을 해주면 어디가 떫나? "...알겠습니다. 국...아버지." 안타깝게 나는 형제들과 입맛을 다시면서 밖으로 그냥 나오는 수밖에 없었 다. "힝... 내가 왜 왕족으로 태어났지?" "미르 누나. 그런 말하면 못써.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왕족을 얼마나 부러 워하는지 알아?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거야." "...알았어." 솔직히 나도 불만이지만 일단은 우물거리는 미르 누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돌아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줄 테니까 심심하더라도 그 냥 조용히 궁에 있어. 응?" "응..." 내가 괜한 이야기를 해서 형제들이 괜히 더 우울하게 만들었네. 하지만 어 쩔 수 없지. 이번 축제엔 나 혼자 참석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러나 저러 나 형제들에게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서라도 웬만하면 1회전을 통과해야 할 텐데 말이야. 나는 약간 우울해 보이는 형제들을 한번씩 쓰다듬어주며 빛의 궁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블료프 왕립 학교의 아룬더스 가을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가까운 곳에 영지를 두었거나, 수도에 머물고 있던 많은 귀족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축제라고 해서 일반인, 그러니까 수도에 사는 평민들의 출입이 허락된 것 은 아니었다. 귀족이 어떻게 비천한 평민들과 어울리겠는가 하는 생각 때 문이었다. 그래서 가장 유명한 학교의 큰 축제라고 해도 내가 생각한 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지는 않았다. "디트 경. 그런 여기 앉아서 잘 보고 있어." "예. 카류 님께서도 힘내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객석의 앞줄에 위치하여 경기장이 잘 보이도록 특별히 만든, 이른바 명당 석(?)에 디트 경이 앉히고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 디트 경은 지금 내 부모님 자격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디트 경과는 언제나 함께였 고 항상 큰형같이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가 참관인이 되는 건 오히려 환영 할만한 일이다. "히노 선배도 디트 경이랑 같이 있어요. 히노 선배도 부모님이 못 오셨지 요?" "......" 히노 선배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나는 살짝 선배의 머리를 쓰 다듬었다. 히노 선배의 부모님이 계시는 리아 영지는 수도에서 꽤 떨어진 남부지방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오지 못했던 것이다. 대신 선배를 보살 펴주고 있는 수도에 위치한 별장의 기사들이 디트 경처럼 참관인 자격으로 온 모양이다. "잘해봐라. 카류." "그래 어떻게든 1회전은 통과하길 빈다." 후크와 카멜도 그 근처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손을 흔들어 그들에게 답례를 해주고 선수 대기실로 걸어갔다. "에르가 형, 모두들. 여기 있었구나. 기분은 어때?" "훗훗훗, 최고의 상태다. 이왕이면 1회전에서 너와 마주치기를 바라고 있다 고." "에고, 내 목표는 1회전 통과란 말이야. 나의 작은 목표마저 부셔버려야 속 이 시원하겠어?" "푸하하하. 참으로 시시한 목표로구나! 그래, 내가 넓은 마음으로 네가 1회 전만은 통과할 수 있도록 나를 만나지 않게 빌어주마. 하하하." 에르가 형은 허리에 손을 얹고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오랜만에 나를 눌러 버리고 자신이 스포라이트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그런지 오늘의 에르가 형은 거의 날아가 버릴 것 같이 기쁜 모양이다. 형의 오버하는 모 습에 곁에 서있던 딜티들까지 고개를 절래절래 내저었다. "하지만 그런 목표라도 잡을 수 있으니 좋겠다. 나는 아예 축제에 참여도 못하잖아." 제르카인은 진짜 상심했는지 약간 침울한 목소리로 나를 보며 말했다. 하 긴 가장 친한 친구들 중 자기 혼자만 참여하지 못했으니 상심할 만도 하 다. 아, 후크와 카멜은 상단의 아이들로 원래 검술과는 거리가 먼 녀석들이 었으니 제외하고 말이야. "제르, 힘내! 우리들은 저런 머리에 근육만 든 육체파가 아니라 알찬 지식 으로 무장한 머리를 가진 두뇌파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비하할 필요 없어. 세상은 우리 같은 두뇌파들이 저렇게 무식한 육체파를 조종해서 발전시켜 가는 거야. 알았지?" "뭐야? 너 죽어볼래? 누가 무식하다는 거야? 나랑 제르는 시험성적이 비슷 하다고!" 에르가 형.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해줘. 제르가 우울해 하니까 이런 말을 하 는 거 아냐. "아! 카류야. 너 그거 아니? 축제의 폐회식 때 해주는 마법시범을 위해 대 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이 오셨다더라. 이야, 운도 좋지. 웬만해서는 아르디 예프 님께서 잘 안 오시는데 말이야." "정말? 아르디예프 님이?" 우와, 이거 얼마만이야! 생각만큼 생명의 궁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을 만나 기가 상당히 힘들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들을 만날 수가 없었는데 말이 야!! "응, 그래서 이번 시상식은 우리 아버지랑 아르디예프 님께서 공동으로 해 주기로 했어. 아버지 때문에라도 어떻게든 우승을 해야 할텐데." 딜티가 에르가 형을 힐끗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딜티의 트로이 후작 가는 아르윈 왕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굉장히 강한 권력을 자랑하 는 가문이다. 히노 선배의 리아 후작 가만큼이나 세력이 큰 가문으로 수도 가까이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번에 딜티를 보러 학교에 온 모양이 다. "딜티 너만 그런 줄 아냐? 나도 꼭 우승해야 한다고. 마침 아버지가 일로 수도에 계시는 바람에 겸사겸사 나를 보러 축제에 오셨단 말이야. 다행히 세스 형까지 오진 않았지만 우승을 못하면 아버지에게 또 얼마나 비교되는 소리를 들을지..." 축제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그 세스케인이라는 형의 일로 편치 않은 기색 을 보이던 세미르가 결국 징징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희들이 감히 나를 이길 생각을 하다니 참 많이도 컸구나. 훗, 그래. 마 음껏 덤벼라. 얼마든지 상대해 줄 테니까. 훗훗훗훗..." "자자, 모두들 그만하고. 이제 시합이 시작되려 하고 있잖아. 추첨하러 나 가야지." 나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아이들을 달래서 토너먼트 식 시합의 추첨을 위 해 밖으로 나갔다. 경기장 쪽에서 올려다 본 관객석은 많은 학생들과 참관 인들도 꽉 차 있었다. 나는 방긋 웃으면서 객석에 앉아 있는 디트 경과 히 노 선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벌써부터 손을 흔들고 난리야. 제일 먼저 탈락할 녀석 주제에." "에르가 형!" "뭐야? 꼽냐?" "여기서 껴안아 버린다." "...!!" 에르가 형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진짜 포옹이 공격 수단이 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하지만 에르가 형의 반응은 정말 재미있다니까. "음, 난 1번이군. 첫 번째로 싸우겠네" 에르가 형이 추첨 종이를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흐뭇하게 보면서 나 도 추첨 종이를 뽑았다. "으헉! 거짓마알~~!!" 그러나 나는 곧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뽑아낸 종이에 적힌 숫자가 2 였기 때문이다. 세상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재수 없을 수가! 결국에는 1 회전도 통과 못했다는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해줘야 하는 건가!! "마음씨 넓은 내가 그냥 봐주려 했는데 알아서 나의 상대로 다가오다니. 그래, 네 소원대로 이번 시합에서 잘 주물러주마. 훗훗훗..." 으윽, 이번만은 저 모습을 보고 귀엽다고 말해줄 수 없구나. 에르가 형이 반발하는 게 너무 귀여워서 최근 들어 이런저런 말로 약을 잔뜩 올려놓은 데다가, 축제 준비를 한다고 직접적인 대련을 못했던 관계로 형의 스트레 스가 이만저만이 아닐텐데 말이야. "카류, 이런 데서 죽지 마라." "꼭 살아 남아라." "너희들, 너무 하는 거 아니냐. 설마 에르가가 저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카류를 죽이겠어." 딜티와 세미르, 엘시온이 차례로 심각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걸 위로라고 한 거라면 전부 빵점이야!! 모두가 추첨을 끝낸 결과 나와 에르가 형을 빼고는 모두들 5회전 이전에는 만날 일이 없도록 마치 짠것처럼 멋진 대전표가 나왔다. "제르. 우리 세상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눠보자." "현실 도피하지 말고 이리와, 카류. 너 첫 번째로 싸우잖아" "후후후, 카류리드. 오늘 너 개쪽 한번 당해봐라." 흐흐흑, 정말 무섭네, 이거. 좀 살살 약 올릴 걸 그랬다. 그런데 '개쪽'이 뭐 야. 에르가 형의 어휘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은어가 많다니까. 귀족 이면서 저런 은어는 다 어디서 배운 거야. 사회자의 호명에 따라 주위의 시종이 건네 준 목검을 들고 에르가 형과 무 대 위로 올라갔다. 평소 검술 실기 수업 시간에는 어린애들을 위해 진짜 검의 크기보다 작게 만든 목검을 사용했는데, 이번에 시합용으로 받은 목 검은 최대한 실제 것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원래 연습용으로 쓰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다. 제대로 검을 들지도 못하는데 우승 후보인 에르가 형이랑 싸우라니. 지는 건 둘째치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서 엉망으로 망가지는 거 아닌가 몰라. 좋아! 이번 시합의 목표는 어떻게든 최대한 멋지게 지는 것으로 하자! 나는 에르가 형과 서로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시작 신호가 울리는 동시에 재빨리 뒤로 몸을 뺏다. 아니나 다를까 무서운 파공음이 나의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내게로 휘둘려오는 검을 보고 피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 지 에르가 형을 대해오면서 깨달은 행동 패턴을 감안하여 시작하자마자 형 이 어떤 식으로 행동을 할 것인지 추측하고 무조건 뒤로 움직인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저 검에 맞았으면...!! 허헉, 정말 살 떨린다. 정말 너무너무 아 팠을 거야! 에르가 형은 자신의 검을 피한 내가 상당히 의외였는지 약간 놀란 듯했다. 그러나 곧 진지한 얼굴을 하며 내게 말했다. "나의 일 검을 피하다니... 한동안 나와 대련하지 않던 사이에 상당히 실력 을 키운 모양이구나. 좋아, 그럼 이번엔 제대로 간다!" 헉! 제대로 안 와도 돼!! 그냥 뒤로 몸을 뺀 것뿐이라고!! 이 이상으로 제 대로 나오면 날더러 어쩌라고! 그러나 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가 형은 양손으로 쥔 검을 아래 쪽으로 내린 상태에서 천천히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저 13살 짜리 어린애가 목검을 들고 가만히 서있을 뿐인데도 왠지 중압 감 같은 것이 팍팍 온몸으로 몰려왔다. 나 역시 어린애의 몸을 가지고 있 기에 어린아이인 에르가 형에게서 그런 느낌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 만 형이 어린애답지 않게 검술의 재능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건 분명 사실 이니까 그저 내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 "......" 긴장된 기류가 경기장에 흐르면서 웅성대며 딴 짓을 하던 사람들도 하나둘 씩 우리들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경기장이 물먹은 것 처럼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모두들 우리가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인지 궁 금해하는 눈초리였다. 에르가 형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나 는 형이 검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소리쳤 다. "기권하겠습니다!!" 에르가 형의 몸이 잠시 기우뚱한 것처럼 보인 것은 내 눈의 착각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도 살고 봐야 할거 아니냐! 나같이 조그마한 꼬맹이가 진 지하게 나오는 에르가 형의 검에 한방이라도 맞았다간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릴지도 모른다. 내가 유유히 대회장에서 내려올 때까지 에르가 형은 계속 멍하게 나를 바 라보고 있었다. "정말 갈 때까지 갔구나. 카류." "그런 상황에서 기권이라니 너의 얼굴 두께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할 정도 다." "하긴, 카류도 인간인데 죽는 게 무서웠을 테지. 우리가 이해하자." 딜티와 세미르, 엘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내게 한마디씩 던졌다. 그들의 말 에 이번만은 나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구석쟁이에 콕 처박혔다. 솔직히 말해 내가 무슨 초강력 철판가면을 쓰고 나간 것도 아니고, 전교생이 지켜 보고 있는 가운데 그런 진지한 상황에서 기권하는 것이 어찌 쪽팔리지 않 을 수가 있겠는가. 선수 대기실 쪽으로 에르가 형이 허탈한 표정을 한 채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너무나 쪽팔리는 짓을 한 나머지 잠시 동안 우울의 늪에 빠져 허 우적대던 나였으나 에르가 형의 모습을 보고 금세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겼으면서도 꼭 진 것 같은 표정으로 진이 다 빠져서 돌아오는 형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형,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이겼잖아." "......" 내가 괜히 찍쩝거리면서 말을 걸어 보았지만 에르가 형은 아무런 반응도 내비치지 않고 내 옆의 빈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에르가 형은 이번 일로 인해 내가 쪽팔림을 당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한 심리적 박탈감 과 상실감을 겪은 모양이다. 나는 멍한 상태로 앉아 있는 에르가 형을 위로해주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 어 주고, 껴안아주고 하다가 결국 정신을 차린 형에게 된통 꿀밤을 얻어맞 고 선수 대기실에서 나왔다. 어차피 시합도 끝났겠다 경기를 보는 것뿐이 라면 친구들이 있는 객석 쪽이 낫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객석 쪽으로 다가가자 아이들이 저마다 아까 시합에 대한 소감을 한마디씩 건네 왔다. "야, 정말 절묘하더라. 한동안 내가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절묘한 타이 밍의 기권이었어. 누가 감히 거기서 네가 기권을 하리라 생각했겠어? 하지 만 네 마음이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에르가의 검은 진짜 아프거든." "맞아. 에르가의 검에 맞고 꼴사납게 경기장 중간에 널브러지느니 그렇게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라." "모두들 위로 고마워. 모두가 나를 이해해 줄 거라고 나는 믿고 있었어." 나는 최대한 두꺼운 철판을 얼굴에 꺼내 쓰고 그들의 말을 하나하나 감내 해 가며 디트 경과 히노 선배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카류야, 멋졌어. 너도 분명 세스케인 선배처럼 역대의 유명한 선배로 이름 을 남게 될 거야. 사람을 극도로 허무하게 만드는 기권이라는 이름의 필살 기를 썼던 검사로서 말이야. 아까 에르가가 이기고서도 얼마나 허탈한 표 정으로 들어갔는지 너도 봤지?" "후크... 나도 알고 보면 상처를 받는 인간이라고. 내 가슴이 얼마나 작고 여린지 아니?" 나의 옆에 앉아 있던 디트 경은 후크와 나의 대화를 듣더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디트 경... 정말 배신감 느껴지는구나. 언제나 내게 상냥하게 대해줬던 디트 경만은 그럴 수도 있는 거라고 따뜻하게 나를 위로해 줄줄 알았는데. 아니, 고지식한 디트 경이니까 오히려 남자답지 않게 그런데서 기권했다고 설교 를 했을지도 모르겠군. 그건 그렇고 이거 정말 쪽팔리잖아. 아무리 애들 앞이라고는 해도 너무 부 끄럽네. 그냥 눈 딱 감고 에르가 형의 검을 맞아버릴 걸 그랬다. "히노 선배. 선배도 저한테 실망했어요? 제가 미워요? 흐흐흑!" "......" 내가 히노 선배에게 찰싹 달라붙어 징징거리자 히노 선배가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들겨 주었다. "야, 카류. 어떻게 이런 데서까지 히노 선배를 껴안고 그러는 거야." "아주 주접을 떨어라. 주접을 떨어. 너 정말 왕자 맞니? 왕족의 위엄은 찾 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구나." 후크와 카멜은 디트경이 곁에 있는데도 그다지 개의치 않고 장난을 쳐왔 다. 내가 원체 왕자답지 않게 마구 행동해서 귀족이나 왕족이라는 신분적 차이에 완전히 무감각해진 모양이다. 이런 면에서 상당히 고지식한 디트 경도 오늘은 별 말 하지 않고 장난을 치는 우리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 보기만 했다. 한동안 왁자지껄하는 가운데 아룬더스 검술 시합은 어느새 5회전, 그러니 까 준결승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과연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는지 2학 년 시합에서 준결승전의 마지막 4명은 에르가를 포함한 왕싸가지 5인방의 멤버가 차지하고 있었다. 얼마 후, 드디어 준결승전이 시작하려는지 세미르와 엘시온이 경기장 중앙 으로 올라와 서로 마주보고 서서 인사를 나누었다. "오, 드디어 세미르랑 엘이 붙는구나. 세미르가 시합 전에 계속 징징대던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세미르랑 엘은 실력이 꽤 비슷하지?" "음, 세미르가 낫지 않을까. 내가 그 둘이 대련하는 것을 볼 때는 항상 세 미르가 이기던데." "그거야 가벼운 연습시합이니 진짜 실력을 판가름하기엔 부족하지. 하지만 현재 상황으로서는 세미르에게 우승에 대한 유인이 더 많으니 세미르 쪽에 더 승산이 있을 거 같아." "...유인? 그게 무슨 소리야. 말 좀 쉽게 써라. 카류." 우리들이 떠드는데도 아랑곳 않고 시합은 어느새 시작되고 있었다. "오오, 과연 세다! 쟤들이 13살이라고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야." 나는 서로 검을 맞대는 세미르와 엘을 보면서 감탄사를 내질렀다. 자그마 한 몸집을 가진 13살의 아이들이 내려치는 검답지 않게 그들의 그것은 정 말 빠르고 힘있어 보였다. 내가 검술을 배우지 못했다면 저들의 시합을 별 생각 없이 봤겠지만, 1년 남짓 되는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검을 배워 본 사람으로서 저렇게 조그마한 녀석들이 저 정도로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 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기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후르부크 가의 차남과 에나르츠 가의 장남이로군요. 두 가문 모두 검술로 유명한 무가이니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들 집안 특유의 검술에 대해 여러 가지 많은 것들을 배워 왔겠지요. 같은 또래의 아이들이 하는 뛰어난 시합 이나 대련을 계속 관찰하는 것도 검술 실력을 향상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된답니다. 카류 님." 곁에서 디트 경이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의 검의 움직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금세 승부가 나는 바람에 그 시합에 서 내가 깨달은 것은 별로 없었지만 말이다. "역시 세미르가 이겼군! 역시 유인은 사람을 불타오르게 만든다니까." "하지만 세미르가 에르가를 이기는 건 무리 아니야?" "그러니까 이기고도 저렇게 우울한 표정이겠지." 후크와 카멜은 누구 들으라는 듯이 나의 말에 친절하게 세세한 해설을 달 아주었다. 확실히 세미르의 표정이 여전히 좋지 않긴 하다. 그만큼 에르가 형은 도저히 어린애의 검이라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했던 것이다. 내가 오 죽했으면 그런 상황에서 기권을 했겠는가. 내가 그런 시합을 했음에도 주 위의 다른 아이들이 그냥 놀리기만 했을 뿐 내 행동에 그렇게 큰 규탄이나 조롱을 하지 않았던 것도 전부 형의 검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이다. "에르가랑 딜티가 나오네?" "이건 볼 것도 없이 에르가의 승리겠군. 딜티도 안됐다. 세미르나 엘과 준 결승시합을 했으면 결승에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추첨을 잘못해 서 아깝게 상품을 놓치는 구나." "그래 말이야. 정말 안됐지? 크으! 역시 사람에겐 금전 운이란 게 있다니 까." 후크와 카멜은 손바닥을 탁 치면서 마치 자기 일처럼 아까워했다. 그 둘은 누가 상단의 아이 아니랠까봐 저렇게 돈 쪽으로 화제가 넘어가면 정색을 하곤 했다. "솔직히 딜티는 우리 나라에서 첫째 둘째 하는 가문의 장남이라서 금전적 모자람 같은 건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을 테니 우승상품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걸." "하긴 너도 그렇고, 여기 히노 선배도 그렇고 모두들 보통 인간이 아니었 지. 너무 야야 하면서 지내다보니까 네가 누구인지 잊어버릴 때가 많다니 까." 카멜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확실히 히노 선배는 대단한 집안의 외동 딸인 만큼 그 금전적 감각이 보통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히노 선배 의 리아 영지는 아르윈 왕국에서 무려 1/10을 차지하고 있는데다가 평야지 대도 많아 그 어느 곳보다 부강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아 후작 가 는 그 영지만큼이나 엄청난 권력을 자랑하고 있다. 사실 딜티의 트로이 후 작 가와 히노 선배의 리아 후작 가는 서로 만나면 스파크를 튀길 정도로 팽팽한 라이벌 관계라고 할까? 물론 아이들끼리 그렇게 긴장감을 내보이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우와!" 후크의 탄성에 나는 상념을 접고 빠르게 경기장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저 연습 시합에서 장난으로 슬슬 움직이던 것만 보다가 어느 정도 비슷한 실 력의 아이를 상대로 진심으로 움직이는 에르가 형의 검술을 보노라니 입을 저절로 벌어질 정도였다. 딜티 역시 힘겨워 보이긴 하지만 그 검을 잘 막 아내면서 멋진 검술을 보여주고 있었다. 역시 기권하길 잘했어. 우오, 저 바람소리 좀 봐. 나같이 작고 여린 어린애 가 저런데 맞았다간 어디 한군데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닐 거라고. "트로이 후작 가의 딜트라엘 님도 정말 대단하지만, 에스문드 가의 저분은 정말 무서울 정도군요. 아무리 에스문드 가문이 검으로 유명하다고는 하나 저 정도는 보통 재능으로는 힘들지요. 나중에 크면 굉장한 분이 될 것 같 습니다." "그렇죠? 에르가 형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하지만 훌륭한 인재란 지식이나 재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재능을 유용하게 운용하고 실 현할 수 있는 인간적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우리 에르가 형을 큰 사람으로 대성시키기 위해서라도 저 삐뚤어진 성격만은 어떻게든 고치 도록 만들어야겠어요." "아...예." "우리 에르가? 자기가 무슨 에르가의 아버지나 된 것처럼 말하네?" 문득 옆에서 이상한 꼬맹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디트 경과 웃기지도 않는다는 투로 말하는 후크를 보고 나는 한차례 어색한 웃 음을 흘렸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으로 나불거렸군. 잡담은 그만하고 경기에 집중하 자. 집중. 경기장의 두 사람은 거의 어른 수준의 시합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르가 형 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한 손으로 쥔 검으로 쉬지 않고 딜티를 향해 마구 찌르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검을 거둔 사이 딜티가 순 간의 여유를 이용해 에르가 형의 가슴께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그러나 형 은 몸을 빠르게 왼쪽 무릎을 꺾어 몸을 비스듬히 낮추어 아주 약간의 간격 으로 그 검을 피하면서 그 자세 그대로 크게 검을 휘둘렀다. 후우웅! "헉!" 묵직한 파공음이 들였다고 생각되는 순간 격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경기장 쪽에선 에르가 형이 검을 내밀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씩 웃고 있 었고 그 맞은 편의 딜티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로 땅에 무릎을 꿇고 있었 다. "후우, 빠르군요. 방금 것은 정말..." "저걸 어떻게 저런 식으로 약간의 간격만 두고 피할 수가 있는 건데? 우 와... 꼭 무협영화 보는 것 같다." "무협 영화?" "엉? 아니, 그냥 그런 게 있어." 나는 카멜의 물음에 대충 대답해주며 경기장의 둘을 바라보았다. 정말 대 단한 녀석들이구나. 은근히 부러워지는 걸. 솔직히 나도 남자 아냐. 저렇게 멋들어지게 검을 써보고 싶다고. "나 잠깐 내려가 보고 올께. 딜티가 정말 세게 맞은 거 같던데 괜찮을까 모르겠네." "음, 그래라. 나도 한번 가보고 싶은데 선수가 아니라 그 쪽으로 가볼 수가 없으니." "히노 선배도 잘 있어요. 저쪽의 친구들에게 가보고 올게요." 그 초롱초롱한 금빛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히노 선배에게 싱긋 미 소를 지어준 뒤 경기장 쪽으로 내려갔다. 또 한번 객석에 앉은 아이들에게 1회전에서 내가 했던 기권 때문에 한소리를 들어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 다. 정말 이 사건이 영원히 파블료프 왕립 학교 역사에 길이길이 남는 거 아닌 가 몰라. 선수 대기실의 한 쪽에는 의자에서 딜티가 의사의 진찰을 받으며 끙끙거리 며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로 에르가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이 웅성거 리며 그것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 혹시 많이 다친 건 아니고?" "카류리드 전하.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만, 한동안은 안정을 취하 셔야 할 것 같군요. 조금 다치셨거든요." 딜티를 진찰하던 의사가 내 질문에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옆구 리가 시퍼렇게 부어오른 것이 아무리 봐도 조금 다친 것 같이 보이진 않는 데 말이야. "허약한 녀석 같으니. 그 정도는 탁탁 털고 일어나야지." 헉, 형이 한번 맞아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고. 그냥 대련하면서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목검도 정말 눈물나게 아픈데, 시합 중에 진심으로 휘두른 검을 정통으로 맞고 배겨낼 아이가 어디 있겠어. "으으... 안 그래도 일어날거야. 시상식 때 나가야 한다고." "딜트라엘 님. 무리하시면 앞으로 고생이 심하실 텐데..." "아버지가 왔는데 한방 맞았다고 꼴사납게 누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갈 겁니다." 에르가 형의 영향인지 얘들은 전부 깡이 조금씩 있다니까. 나 같으면 누워 서 삼박 사일은 끙끙댔을 텐데. "이제 에르가와 세미르 차례지? 둘 다 힘내." "허, 이 이상 힘을 냈다간 무슨 일을 낼지 알 수 없을 텐데 그래도 좋으 냐?" 에르가 형의 말에도 세미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사용 할 목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저런 잘난 척은 에르가 형이 항상 하는 말인데도 이 번만은 그 말에 주눅이 든 모양이다. 조금 전 그 대단한 시합에 딜티의 상 처까지 봤으니 저렇게 주눅이 들어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결승전입니다. 에르가 님과 세미르 님 나와주십시오." 시종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서 소리지르는 것을 듣고 세미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세미르, 너무 승패에 집착하지 마. 알았지?" "됐어." 세미르는 내 말에 그렇게 툭 내뱉고 에르가 형과 함께 경기장 쪽으로 걸어 나갔다. 나도 그들의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경기장 쪽으로 그들을 쫓아갔 다. 에르가 형과 세미르가 경기장으로 올라서자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조금 전 에르가 형의 시합이 어린애의 시합답지 않게 상당히 멋졌 기 때문에 흥분하는 모양이었다. 에르가 형은 완전히 기가 살았는지 아주 다 이긴 것처럼 객석 쪽으로 손을 흔들기까지 했다. "자, 준비해주십시오. 그럼 시작." 사회자가 시작 신호를 울렸다. 에르가 형은 여유롭게 검을 한 손에 들고 세미르를 바라보았다. "어서 덤벼. 어차피 나를 이기진 못할 테니 최대한 오래는 버텨봐야 할거 아냐?" 세미르가 얼마나 이기려고 애썼는지 잘 알면서 저렇게 약을 올리다니 저 심통은 아무도 못 말린다니까. 이거 귀엽다고 내버려 둘 수준이 아닌 거 아냐? 세미르는 굳은 얼굴로 천천히 에르가 형 쪽으로 걸어갔다. 표정이 딱딱하 게 굳은걸 보니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러나 세미르가 어떤 표정을 짓고 다가오든 에르가 형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지 여유롭게 웃으며 세미르 를 바라보기만 했다. "에르가." "뭐야? 이런 곳에서 말을 걸다니. 설마 져달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 지?" "솔직한 마음으로 그러고 싶긴 해." "후후, 어쩌지? 나는 그럴 마음은 눈곱만치도..." 에르가 형이 말을 하고 있는 도중인데 갑자기 세미르가 검을 휘둘렀다. 에 르가 형은 깜짝 놀라 상체를 크게 뒤로 젖혀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피했지 만 중심이 뒤로 쏠리는 바람에 완전히 자세가 무너져 주저앉고 말았다. 그 틈을 타서 세미르가 빠르게 에르가 형을 향해 검을 찔러왔다. 저렇게 기습을 하려고 화난 척 굳은 표정을 지은 건가. 그러나 꼭 세미르 가 비겁하다 할 수 없는 게, 시합 중임에도 에르가 형이 세미르의 말에 빈 정거리며 한눈을 팔았으니 기습을 당해도 할말이 없다. "큭!" 어깨 끝에 검이 살짝 스친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에르가 형은 신음소리 를 냈다. 아마도 자신의 몸에 세미르의 검이 닿았다는 사실 자체가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형이 신음소리를 내거나말거나 세미 르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에르가 형의 무너진 자세가 돌아오기 전에 어떻 게든 결판을 보겠다는 듯 원래부터 스피드 중심이었던 세미르의 공격은 그 어느 때보다 빨랐다. 에르가 형은 어떻게든 엉거주춤한 자세를 바로 잡으 려고 애썼지만 세미르의 공격이 너무 빨라 일어서지 못한 채 검으로 겨우 겨우 방어를 하고 있었다. 용케도 저런 자세에서 세미르의 검을 이리저리 피해내긴 했지만 이미 한두 방은 가볍게 얻어맞은 상태였다. 에르가 형이 얼마나 열이 받아 있을 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겠다. "이 자식! 죽여버리겠어!" 에르가 형은 자신의 검으로 세미르의 검을 막는 대신 아주 절묘하게 귀를 스칠 정도로만 고개를 움직여 세미르의 검을 피했다. 그리고 세미르가 검 을 거두는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세미르의 다리를 발로 냅다 찼다. 앉은 자세에서 한 발차기다 보니 거의 아무런 타격도 없어 보였지만 세미르는 아주 잠시 주춤하고 말았다. 그 사이 에르가 형은 한 손으로 땅을 굴러 반 바퀴 돌면서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원심력을 이용해 나머지 반 바퀴를 그대로 돌면서 검을 세미르의 복부를 향해 야구 배트를 휘두르듯 검을 세게 휘둘렀다. "커헉!" 나는 잠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맞았을 때 났던 소리도 그렇고 정말 무지 하게 아파 보였기 때문이다. "악!!" 그러나 또 다시 나는 신음소리에 눈에서 손을 뗐다. 에르가 형이 얼마나 화가 났는지 복부를 쥐고 컥컥거리는, 이제는 거의 전부불능이라 해도 과 언이 아닌 세미르의 등을 있는 힘껏 검으로 세게 내려쳤던 것이다. "헉... 심하다..." 곁에서 함께 시합을 구경하고 있던 엘이 신음소리처럼 그 말을 내뱉었다. "세미르가 약간 열 받게 나오긴 했지만 저건 진짜... 세미르 몇 달간은 병 원 신세져야 하는 거 아냐?" 제르도 옆에서 세미르의 안위를 걱정했다. 다행히 기절까지 하진 않은 모 양이지만 세미르는 거의 죽을상을 하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약간 잔인하긴 했지만 어쨌든 경기가 끝나자 큰 환호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에르가 형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며 나는 한마디 해줘야겠 다고 생각하고 입을 열었다. "에르가 형. 너무 심하잖아. 세미르가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시끄러워. 저 놈이 사람 열 받게 만들잖아." "그러게 왜 방심하고 한눈을 팔고 그랬어. 형 잘못으로 그렇게 된 거잖아. 세미르가 오면 마지막 한방에 대해서 사과해!" "죽을래? 이 자식이 누구한테 감히 명령이야?" "카류는 왕자가 아니냐? 충분히 명령을 할 수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린 건가?" 나는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아르디예프 님!!" "그래, 정말 오랜만이구나. 카류야." 나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에 너무 반가워 아르디예프 님에게 달려갔다. 아 르디예프 님은 자세를 낮춰 나를 살짝 안아주었다. 문득 곁으로 또 다른 익숙한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우...우와!! 하르몬 선배님! 유넨 선배님!! 우와, 우와! 이게 얼마만 이예 요?!" "글쎄요. 2년만 인가요?" "저와는 외출을 위해 성밖으로 나갈 때 몇 번 마주쳤으니 1년 만이군요. 카류 님." 내가 그들을 보고 너무 기뻐서 방방 뛰자 아르디예프 님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네가 그렇게 보고 싶어할 줄 알고 일부러 이 녀석들을 수행원으로 데려왔 단다." "이야, 정말 고마워요! 아르디예프 님!! 모두들 하나도 안 변했군요!" "카류 님도 하나도 변하지 않으셨군요. 이제 12살이실 텐데, 10살 때의 그 조그마한 키와 비교해 조금도 바뀐 것이 없다니 약간 걱정이 되는군요." "걱정 마세요. 하르몬 선배님. 연구결과에 따르는 남자는 23살까지도 키가 자란다고 하니까 저는 아직 10년이나 남았다고요." "누가 그런 연구를 했다니?" "아하하, 그냥 책에 그런 게 적혀 있더라고요." 나는 싱겁게 웃으며 화제를 넘겼다. 그러다가 문득 아르디예프 님처럼 대 단한 사람이 이런 곳에 왔다는 것이 약간 의아해졌다. 나를 보려고 한 것 이라면 꼭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보면 됐을 텐데. "그런데 아르디예프 님. 학교에 오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여기까 지 오셨어요?" "아까 의사의 말을 들어보니 몇몇 꼬마들이 많이 다친 거 같더구나. 그래 서 너도 보고 아이들 치료도 해줄 겸 여기까지 내려 온 것이다." "우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너에게 해주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기뻐하는 거냐?" "친구잖아요. 아, 세미르다." 나는 에르가 형에게 완전히 깨져서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겨우 걸어 들어오는 세미르를 보고 아르디예프 님을 그 쪽으로 이끌었다. "세미르. 아르디예프 님께서 고쳐주시겠대." 세미르는 정말 아픈지 내 말에도 정신이 없이 콜록거리며 신음소리를 낼뿐 이었다. "아르디예프 님. 빨리 좀 해주세요. 이러다 애 다 죽겠어요." "알겠다. 그런데 애가 죽다니, 또래의 친구를 애라고 지칭하는 거냐?" "어? 아, 아니... 어쨌든 빨리요!" 나는 아무렇게나 말을 넘기며 아르디예프 님을 독촉했다. 에르가 형은 너 무 화가 나서 홧김에 그런 짓을 한 모양이지만 세미르가 너무 아파하니까 약간 미안했는지 우리들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아르디예프 님은 마법서를 편 뒤 한참동안을 캐스팅 한 뒤에 힐 마법을 시 전했다. 아르디예프 님이 마법을 쓰려는 듯이 보이니까 대기실 내에 있던 많은 아이들이 우리들 쪽으로 몰려들어 그 모습을 구경했다. "...괜찮아? 세미르? 아직도 아프니?" "...콜록...으음..." 세미르는 머리를 절래절래 저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일어나. 치료마법까지 받아놓고 뭐가 아프다고 난리야, 난리가." 에르가 형은 세미르를 향해서 그렇게 내뱉고 혼자 휘적휘적 떨어진 자리로 가서 앉았다. 미안하다고 말하기가 쑥스러우니까 오히려 더 툴툴거리는 모 양이다. "저쪽에 딜티도 많이 다쳤거든요? 딜티도 좀 봐주세요." "에구, 좀 기다려라. 힐은 6서클의 고위 마법이란 말이다. 조금만 있다가 하자. 그 애가 중환자는 아닐 거 아니냐." "아르디예프 니임~." 내가 오랜만에 필살기를 날려가며 약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부탁하자 아르 디예프 님은 내 머리를 꾹꾹 쓰다듬었다. 아마 안고 싶은데 자리가 자리인 지라 그렇게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아르디예프 님은 내 머리카락을 완전 히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뒤에 딜티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아르디예프 님은 4,5명 정도 되는 아이들을 전부 치료해 준 뒤에 자리에 앉아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아르디예프 님. 괜찮으십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고위마법을 쓰신 건 아 닌지." 유넨 선배가 약간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걱정스러 운 듯 말했다. "됐다, 유넨. 별거 아니다." "죄...죄송해요. 그냥 천천히 하시라고 말하는 거였는데 제가 괜히 떼를 썼 군요." 나는 약간 미안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기특해서 내가 인심을 쓴 거니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 없다. 나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누가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도 안 하 는 사람이야." 나와 아르디예프 님이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세미르와 딜티, 그리 고 다른 아르디예프 님의 치료를 받은 아이들이 우리들 쪽으로 걸어왔다. "아르디예프 님. 감사드립니다. 직접 만나 뵙게 된 것도 영광인데 이렇게 마법까지 써주셔서 뭐라 감사의 말을 드려야 할지..." 세미르는 제법 어른스러운 말로 아르디예프 님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인사는 됐다. 시합을 재미있게 봤으니 그걸로 충분하다. 너희들, 저 녀석 에게 신나게 얻어맞더구나." 아르디예프 님이 약간 떨어진 곳에 약간 볼이 부은 채로 앉아있는 에르가 형을 턱으로 가리키며 애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을 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심각한 상태일 텐데 아르디예프 님은 정말 애들 대할 줄을 모 르는구나. "후후, 하지만 카류 님의 시합을 보면서 재미있어 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새발의 피지요. 아르디예프 님." "윽, 하르몬 선배님! 하르몬 선배님이 에르가 형의 검을 한번 대해보시고 그런 말을 하시죠. 사람에게는 물러나야만 할 시기라는 게 있는 거라고요. 그러는 하르몬 선배는 얼마나 잘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왜 다른 사람의 쪽팔리는 과거를 새삼스레 들춰내고 난리야! "이런, 오랜만에 다시 만났나 했더니 또 말싸움 시작이로구나. 하지만 카류 야. 하르몬은 아룬더스 축제에 나와서 우승까지 한 적이 있단다. 그러니 이 번 말싸움은 네가 진것 같구나." "엥? 하르몬 선배님이?" 아르디예프 님의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하르몬 선배를 올려 다봤다. "뭐, 그때는 이들처럼 그럴듯한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일단 우승한 적이 있다는 건 사실이랍니다. 마법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는 저도 아예즈 공작 가의 장남으로 기본적으로 검술을 배워왔으니까요. 지금은 거의 잊어버려서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것입니다." "요즘도 조금씩 연습을 하시지 않습니까. 하르몬 선배님." "유넨, 그건 그냥 운동 삼아 하는 애들 장난이지." 와아, 참 의외구나. 마법사라고 하면 당연히 비실비실한 사람들이라고만 생 각했는데 말이야. 하긴 그들도 기본적으로 학교 정도는 다니다가 생명의 궁에 들어왔겠지? 그 후로 워낙 마법 수련에만 열을 쏟다보니 그렇게 허약 해 진 모양이다. "아, 유넨 선배님! 유넨 선배님도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다녔다고 하셨잖아 요! 세미르의 형이 3년 전에 졸업을 했다고 했으니 유넨 선배님이랑 동갑 이 되는 셈인데, 혹시 세스케인이라는 선배를 모르세요?" "...네, 알다마다요. 그렇게 유명한 분을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곤경에 처했을 때 그분께 도움을 받기도 했는걸요." "이야, 세미르! 이걸도 정말 대단한 우연이네? 유넨 선배가 너네 형이랑 아 는 사이래!" 내가 신기함에 호들갑을 떨며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려고 세미르를 부 르는 데 유넨 선배가 갑자기 아르디예프 님에게 말했다. "아르디예프 님. 그만 올라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시상식이 시 작될 거 같으니까요." "...음, 그렇구나. 알았다. 유넨." 아르디예프 님은 하르몬 선배와 유넨 선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쉬워라. 이렇게 갑작스럽게 헤어져야 하다니. 하지만 시상식 때문이라니 까 어쩔 수 없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말 섭섭해요. 축제가 끝난 후에 함께 저녁식사라도 할 수 없을까요? 맞아, 왕궁에 갈 때 함께 가요! 그러면 되잖아요!!" "오냐, 알았다. 귀찮은 파리들이 들러붙을 테지만 어떻게든 떼어내고 오 마." 귀찮은 파리? 그게 뭔데? "음, 어쨌든 그럼 나중에 봐요~!" 나는 선수대기실에서 나가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르디예프 님 이 나가자 왠지 모르게 조금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의 방이 다시 왁자지껄 해졌다. 아이들은 내가 아르디예프 님과 친한척했던 것이 신기했는지 우르 르 몰려들어 질문을 쏟아 부었다. "이야, 너 아르디예프 님하고 굉장히 친하구나. 마법을 배우러 생명의 궁에 갔다왔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말이야." "나 마법이라는 거 처음 봐! 정말 신기하다. 언제 아팠냐는 듯이 깨끗하게 아픔이 사라지더라고." 한 동안 왁자지껄한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시종이 2학년 시합의 시상 식을 알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에르가 형, 딜티, 세미르, 엘. 어서 가야지. 너희들 넷이 상을 받을 거 아 냐." "네놈이 말 안 해도 알아서 간다고." "지금 가." 에르가 형과 엘은 금세 나의 말에 대답하고 일어나서 경기장 쪽으로 걸어 나갔지만 딜티와 세미르는 영 얼굴 표정이 밝지 못했다. 특히 세미르는 얼 굴 주변에 먹구름이라도 낀 것 같이 어두웠다. "세미르. 어서 가야지. 응?" "...나 먼저 간다. 세미르, 그만 힘내. 에르가가 강하다는 건 다 아는 사실 아니냐." 딜티는 세미르의 어깨를 툭 치고 경기장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우 울한 표정의 세미르를 보고 한숨을 내쉬며 위로의 말을 꺼냈다. "세미르. 그렇게 상심하지 마. 너는 충분히 강한 걸." "...하지만 세스 형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꼭 검술만 잘 하는 게 최고는 아니잖아." "우리 형은 머리도 좋고 성격도 좋아. 학교 다닐 땐 언제나 상위등수였고, 친구도 굉장히 많아." "하지만 세미르에게도 장점이 있잖아." "...뭔데?" 그제야 세미르는 고개를 들어 나를 살짝 쳐다봤다. 나는 세미르의 기대에 찬 맑은 눈동자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잘생겼잖아. 세미르의 청보라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정말 멋져." 세미르는 내게서 뭔가 엄청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잔뜩 기대했다가 엉뚱 한 말이 나오자 결국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솔직히 세미르가 그렇게까지 잘 생긴 건 아니지만 원래 외모라는 게 잣대 가 불분명해서 등수를 매기기엔 어려움이 많은 항목이 아니겠어. 내겐 세 미르가 누구보다도 굉장히 귀여워 보이는걸. "푸훗, 바보... 세스 형은 진짜로 미남이야. 여자들의 청혼편지가 줄을 잇는 다고." "헉! 진짜?" 나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인간이 어딧냐고! 전생의 나도 머리 좋고 스포츠 만능이긴 했어도 얼굴은 그렇게 잘 생긴 편이 아니 었단 말이다!!! "세스 형이 괜히 유명한 줄 알았어? 공부면 공부, 검술이면 검술. 정말 못 하는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오죽했으면 세스 형이 졸업하고 3년이나 지났는데도 친구들이 우리 형의 이름을 알 정도겠어?" 세미르는 그 청보라빛 눈동자를 반짝이며 언제 우울했냐 싶을 정도로 빠르 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세미르를 보면서 살짝 웃었다. "세미르. 너는 매일 비교 당해서 세스케인이라는 형이 싫으니?" "......" 내 질문에 세미르가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보았다. "실은 세미르는 세스케인 형이 좋은 거지? 그래서 세스케인 형처럼 되고 싶은 거지?" "......" "그러면 초조해 하지마. 세스케인 형처럼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좋지만 그것 때문에 괴로워한다면 의미가 없잖아? 세스케인 형도 네가 그런 일로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 마음이 편치 못할 거야. 게다가 이렇게 너무 우울해 하다보면 형을 좋아하는 마음이 나쁜 쪽으로 변질될지도 몰 라. 그러고 싶진 않지?" 나는 세미르의 머리를 삭삭 쓰다듬었다. 웬일로 세미르는 내 손을 뿌리치 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자, 세미르. 상 받으러 나가야지." 세미르는 내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났다. 경기장 바로 앞까지 왔을 때 나는 세미르에게 한마디 덧붙여 주었다. "세미르가 이번 아룬더스 검술 시합에서 2위를 했잖아? 세스케인 형에게 그 소식을 적어서 편지를 보내봐. 분명히 기뻐할 거야. 물론 1위가 에르가 형이라는 말까지 적어서 말이야." "원래 매달 형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다고." 세미르는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인 다음 시상식 준비가 된 경기장 쪽으로 뛰 어갔다. 후후, 귀여워라.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머리를 쓰다듬는 걸로 그치지 말고 껴안아 줄 걸 그랬다. 정말 아깝네. 시상식이 끝난 후, 에르가 형을 제외한 아이들이 우리들이 앉아 있는 관객 석 쪽으로 몰려왔다. "오, 세미르, 딜티, 엘, 제르. 왔구나." "응, 아버지랑 함께 있다가 너무 눈치가 보여서 도망 왔어." "에구, 나도야." 딜티와 세미르는 한숨을 폭폭 쉬면서 근처의 빈자리에 골라 앉았다. "쳇, 배부른 소리하네. 나는 출전도 못했단 말이야. 상까지 탔으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너희들은 부모님이 오기라도 했지. 나는 아무도 안 왔다고." 제르와 엘이 딜티와 세미르를 보고 투덜투덜거렸다. "자자, 그만하고 어서 자리에 앉아. 에르가 형 차례잖아." 나의 말에 아이들이 전부 자리에 앉았다. 아룬더스 검술시합은 학년별로 시합을 해서 5회전까지 통과한 4명의 아이들에게 시상을 했는데, 특별히 1 위를 한 아이들끼리는 학년에 관계없이 또 다시 토너먼트를 치르게 했다. 이 싸움은 참여자가 6명인 관계로 일단 1·2학년과 3·4학년, 그리고 5·6 학년끼리 싸운 다음, 5·6학년의 우승자는 2회전을 치르지 않고 바로 3회 전에서 저학년들 중의 우승자와 싸우게 되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저 이벤 트 식으로 하는 시합으로 보통은 당연히 고학년이 이기게 되지만 세미르의 형인 세스케인이라는 사람처럼 뛰어난 아이들은 고학년을 이겨버리기도 한 다. "에르가 형이 고학년을 이길 수 있을까?" "4학년 정도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5·6학년은 힘들지 않아? 덩치 자체가 다르잖아." "맞아, 에르가도 작은 편은 아니지만 거의 성인이나 다름없는 그들의 상대 로는 무리일걸?" 내가 후크와 카멜과 함께 에르가 형의 승패에 관해 점치고 있는데 딜티가 고개를 저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덩치는 무슨... 작년에 에르가가 어떤 5학년 선배를 보고 건방지게 군다면 서 시비를 걸어서는 목검으로 엄청 두들겨 팬 적도 있는데 뭐." "헉, 뭐? 에르가 형이?" 나는 딜티의 말에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언제 또 그런 말썽을 부리 고 다닌 거야. "거짓말!! 난 그런 말 들어본 적 없어." "5학년이 1학년에게 졌는데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겠어?" "맞아. 그리고 고학년 사이에는 조심스럽게 그런 소문이 퍼져있다고. 에르 가가 괜히 고학년에게 평판이 안 좋은 게 아니야."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에르가 형의 깡이 보통이 아니라는 거 알고는 있 었지만 5학년에게 대들다니, 정말 엄청나구나. 정말 뵈는 게 없는 것인가. 하지만 그렇더라도 시비를 걸어서 이겨버렸다니, 그것도 정말 대단하군. "와,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경기장 가운데로 2학년 대표인 에르가 형이 목 검을 슬슬 휘두르며 걸어나오고 있었다. "어? 우...우와!! 쟤가 1학년 대표야?" 에르가 형을 뒤따라 나오는 1학년 대표를 가리키며 소리치자 옆에서 후크 가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했다. "그저 귀여운 애들만 나오면 남녀 구분 없이 발광을 떤다니까. 네가 모르 는 애야?" "발광이라니... 그런데 진짜 모르는 아이네. 웬만한 1학년은 전부 다 아는데 말야. 아니, 저런 애를 내가 왜 몰랐지?" 나는 거의 내 수준의 몸집을 가진 백금발의 꼬마를 보고 잔뜩 흥분해버렸 다. 내가 모르는 고학년의 아이는 있을지라도 -16, 17살 짜리 애들은 허용 범위를 초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거의 어른이나 다름없잖아.- 1,2학년 쪽 에서 모르는 아이는 정말 드문데 말이야. 게다가 저렇게 조그마한 아이가 1학년 시합에서 우승을 했다니! 저렇게 작 은 몸집으로 어떻게 검을 휘둘렀을까. 나는 검 들기도 힘들 정도인데 말이 야. 에르가 형은 피식거리며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너무 조그마하니까 가소롭 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저렇게 작은데도 여기까지 왔다는 건 뭔 가가 강점이 있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에르가 형이 너무 방심하 지 말았으면 좋겠다. 여기서 자칫 지기라도 하는 날엔 일년 정도는 에르가 형의 성질을 감내하느라 애를 써야 할 테니까. 에르가 형은 일단 몸을 풀자는 의도인지 그 아이를 향해 가볍게 검을 휘둘 렀다. 그 아이는 형의 검을 피해 뒤로 한발자국 몸을 뺐다. 하지만 그 다음 행동에 나는 굉장히 놀랐다. 에르가 형의 검이 자신의 앞을 지나치자마자 그 즉시 몸을 낮추고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형 쪽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타악! 나도 놀랄 만큼 빠른 공격이라 이번만은 에르가 형도 한방 맞을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형도 보통이 아닌지라 저런 의외의 공격을 잘도 막아내고 있었다. "우와, 빠르다!" "이야, 저렇게 쪼그마한 녀석이...!!" "거의 네 수준이지? 세미르?" 주위에서도 그 꼬마의 폭발적인 빠르기에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에르가 형은 그 아이의 검을 막아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아마 자신을 놀라게 한 자그마한 꼬마에게 약간 발끈한 모양이다. 에르가 형은 힘을 주어 검을 밀 어내고 빠르게 공격해 들어갔다. 역시 몸집이 자그마해서 그런지 에르가 형이 검을 퉁겨내자, 그 힘에 밀려 크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에르가 형의 검을 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피해냈다. "빠르군요. 힘은 많이 약해 보이지만, 속도를 중시하는 형인가 봅니다." "그렇죠? 대단하네." 디트 경의 설명을 듣는 동안 에르가 형은 드디어 진지하게 나가기로 했는 지 다시 자세를 고쳤다. 그리고 곧 바로 그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그 꼬마 아이도 상당히 빨랐지만 진지하게 나오는 에르가 형의 검은 더욱 빨랐다. 조금 전부터 이리저리 날다람쥐처럼 형의 검을 피해내던 그 아이는 이번만 은 몸을 움직여 피해내는 것이 힘들었는지 결국 자신의 검을 사용하여 방 어를 했다. "윽!" 하지만 역시 힘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는지 검으로 제대로 막지 못하고 밀 려나면서 완전히 중심을 잃고 말았다. 에르가 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위로 치켜올렸다. "헉, 저렇게 쪼끄만 애를 때리려는 거야? 피도 눈물도 없는 에르가 형!"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갑자기 내게로 쫘아악 시선집중을 했다. "항상 얻어터지면서 새삼스럽게..." "에르가에게 자신을 그만 때리라는 말을 저렇게 돌려서 하고 있는 게 아닐 까?" 모두들 고개를 절래 절래 저으며 한마디씩 내 말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에게 어색하게 히죽 웃어주고 다시 경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말을 들은 것은 아니겠지만 에르가 형은 그 아이를 그대로 내려치진 않 고 어깨 근처에서 검을 멈추는 것으로 시합을 끝냈다. 내려치던 검을 어떻 게 저런 식으로 딱 멈춰버릴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그 이후로 3·4 학년 시합과 5·6학년 시합이 계속되었다. 보통 그러하듯 그 시합의 우승자는 4학년과 6학년이 차지했다. "저 6학년 선배는 완전히 성인 티가 풀풀 나네? 에르가 형이 3·4학년 대 표에게 이기게 된다면 저 선배랑 싸울텐데 솔직히 너무 차이가 많이 나는 걸." "음, 맞아. 아무리 에르가라고 해도 좀 힘들 거 같지? 우리 세스 형이 이 최종 시합에서 이긴 것도 3학년 때였으니까. 그것도 전대미문이었다고." 웅성거리는 가운데 에르가 형과 4학년 선배와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그런 데 여유로운 에르가 형에 비해 4학년 대표는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만에 하나라도 에르가 형에게 질까봐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시작 신호와 함께 에르가 형이 빠른 속도로 뛰어나가 선제공격을 해 들어왔고, 4학년 선배는 계속 소극적으로 방어만을 했다. "저것 봐라. 완전히 얼었네?" "질까봐 그러는 거 아냐. 솔직히 4학년이면서 2학년에게 지면 그게 무슨 쪽이냐?" "에르가의 악명이 보통이어야지. 푸훗." 에르가 형의 공격에 4학년은 거의 맥을 못 추고 있었다. 긴장한 탓도 있겠 지만 솔직히 저 4학년은 실력 면으로 딜티들에게도 못 미쳐 보였다. 아니 나 다를까 금세 4학년 선배가 들었던 목검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허공을 날았다. "에르가 님, 승리했습니다!!" "와~~!!!" 사회자의 목소리에 경기장의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저학년이 고 학년을 이겼다는 사실에 흥분한 것이다. 누가 이길지 뻔한 이 최종시합을 지금까지 계속 개최해 온 이유도 이런 식으로 한번씩 나타나는 인재들로 인한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에르가가 정말 6학년을 이길 수 있을까?" "모르지. 아까 시상식 후에 헤어지면서 최종시합의 우승은 자기 거라고 큰 소리를 뻥뻥 치는걸 보긴 했지만, 솔직히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 "조금만 더 컸다면 에르가에게 승산이 있을 것 가기도 한데, 너무 차이가 많이 나잖아?" "그래도 에르가가 기술이 좋잖아." 주위에서 모두 에르가의 승패에 대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보통은 13살 짜리 아이가 17살의 거의 어른이라 해도 무방할 선배에게 이길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제까지 보여준 에르가 형의 검술이 13살 짜 리 답지 않게 굉장했기에 이번만은 모두들 크게 흥분하고 있었다. 흥분한 사람들로 인해 한참동안 시끌벅적한 잡담소리가 경기장을 메웠다. 곧 에르가 형과 6학년 선배가 경기장 중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등장에 그 어느 때보다 큰 환호성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만큼 에르가 형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가 크다고 하겠다. 에르가 형도 그 환호성이 자신 을 향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벌써 다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객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맞은 편의 6학년 선배는 상당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 다. 하긴, 6학년 선배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기분이 좋을 리가 만무하다. "음, 시작이다. 두근두근하네?" 정말 그렇다. 6학년 선배가 좀 불쌍하긴 하지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다고 이왕이면 에르가 형이 이기길 바라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 던 것이다. "시작해주십시오!" 사회자의 시작소리에 여러 사람들의 시끌거리는 소리로 들썩이던 경기장이 물먹은 솜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들이 어떤 시합을 보일지 상당히 기 대가 큰 모양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충분히 사람들의 기분을 이해 할 수 있었다. "합!' 기합소리와 함께 6학년 선배가 먼저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에르가 형은 힘 에서는 아무래도 밀릴 것이라 생각했는지 일단 검으로 막기보다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지만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바로 반격에 나섰다. 휘잉. 묵직하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이곳 관객석까지 들려왔다. 에르가 형의 상대는 과연 6학년 중 가장 강한 사람의 검답게 굉장히 빠르고 노련했다. 그는 자신의 검을 거꾸로 가로 세워 쉽게 막아낸 후, 그대로 위쪽으로 검 을 들어올려 에르가 형의 검을 걷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대각선으로 검을 휘둘러 에르가 형의 어깨를 노렸다. 그러나 그 공격을 단지 힘만 이용하는 것이 아닌 흘려내는 형식으로 차근차근 막아내고 있는 에르가 형은 더욱 대단했다. 에르가 형이 그 검을 막아내고 반격을 할 때마다 여기저기가 작 게 탄성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 꼭 쥔 두 손에서 땀이 날 정도로 두 사람의 시합은 정말 박진감이 넘쳤다. 그렇게 한동안의 검을 주고받고 하다가 갑작스런 6학년 선배의 공격으로 에르가 형은 검과 검을 맞댄 상태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힘은 에 르가 형이 많이 부족했기 때문에 금세 뒤로 밀리며 형의 자세가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에...에르가 형~~!! 힘내앳~~!!" 나는 너무 애가 타서 나도 모르게 경기장을 향해 큰 소리로 빼액 소리질렀 다. 나의 옆에 앉아 있던 디트경과 후크가 깜짝 놀라서 몸을 움찔할 정도 로 말이다. 갑작스러운 나의 큰소리에 놀란 것은 비단 주위 사람들 뿐만은 아니었던 듯 경기장에서 시합을 하던 두 사람도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며 검을 내려 대치상태를 풀어버렸다. "아자, 기회다!" 그다지 의도하고 한 짓은 아니지만 어쨌든 에르가 형의 위기상황은 넘어간 듯 싶어 나는 주먹을 콱 쥐고 온 몸으로 기쁨을 나타냈다. 관객이 소리를 지르면 안 된다는 법도 없으니 -멋진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지 않는 가?- 대치상태를 푼 것은 순전히 시합을 하는 당사자들의 탓인 것이다!! 움하하~! 좀 쪽팔리긴 해도 소리 지르길 잘했다!! 곁에서 후크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 너는 부끄러움이라는 걸 모르는 거니?." "에이, 너무 한다, 후크.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 거라고. 어쨌든 우리 에르가 형, 정말 기특하지 않니? 설마설마 했더니 진짜 6학년과 대등한 시 합을 보여주고 있잖아!" 나는 잔뜩 흥분해서 후크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한번 쪽을 당했다고 이 대로 가만히 있기에는 온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자기 자 식 자랑하기 좋아하는 부모님의 기분을 알 거 같다고 할까. "카류 님.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디트 경! 그죠? 우리 에르가 형, 너무 대단하죠? 시합 끝내고 돌아오면 꼭 칭찬해줘야겠어요!!" "에...? 예..." 디트 경이 곁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주먹을 꼭 쥐 고 경기장을 쳐다봤다. 에르가 형은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잠시 실눈을 뜨 고 째려보다가 다시 자세를 고치고 6학년 선배를 마주 보았다. 마찬가지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던 선배도 그런 에르가 형을 보고는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검을 고쳐 쥐었다. 솔직히 6학년 선배는 그 순간을 놓쳐버린 것이 굉장히 아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검을 내리래? 그 정도에 그렇게 쉽게 정신을 빼앗겨서야 진정 한 검사라 할 수 있겠어? 나는 양심이라고 불리는 어떤 부분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6학년 선배에 대한 미안한 감정을 그런 생각으로 가차없이 밟 아버리며 조금 전의 행동을 합리화시켜 버렸다. 시합은 또 다시 격렬한 공방전으로 들어갔다. 에르가 형은 힘의 차이로 인 해 검이 마주칠 때마다 조금씩 뒤로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잘도 자세를 흐 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지지 않고 순간순간의 작은 기회를 살려 공격을 해나가고 있었다. 6학년 선배는 간간이 파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공 격을 검으로 이래저래 막아내다가 그 중 약간 허술한 공격을 자신의 가장 큰 우위점인 힘을 이용하여 크게 퉁겨냈다. 약간 밀리는 듯 하면서도 한번 도 자세를 흐트러뜨린 적은 한번도 없었던 에르가 형이었지만 이번만은 검 이 퉁겨지면서 중심이 뒤로 쏠리고 말았다. 회심의 일격이 바로 이런 것일까. 6학년 선배는 그 타이밍을 이용해 검을 빠르게 횡으로 그었다. 드디어 에르가 형도 제대로 한방 맞겠구나!! 나는 에르가 형이 질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 이를 바득 갈면서도 쓸데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오옷?~!"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에르가 형은 맞아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형은 자세를 바로 세우려 애쓰기보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저앉으면서 6 학년 선배의 검을 피해냈다. 아니, 주저앉은 것이 아니라 한쪽 손으로 땅을 짚으면서 자세를 낮춘 다음, 한 쪽 다리로 그 선배의 다리를 세게 걷어찼 다. 이번 행동은 세미르 때처럼 궁지에 몰려 대충 찬 것이 아닌 제대로 힘 을 실려 찬 공격으로 보였다. 저 커다란 덩치의 6학년 선배가 한두 발자국 옆으로 물러선 것을 보면 말이다. 어쩌면 에르가 형은 이런 상황을 의도하 고 일부러 허술하게 검을 흘려 친 건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그답지 않게 허술하게 검을 휘두른다 했더니, 역시 이런 상황을 의도하기 위해 일부러 그랬던 모양이군요. 저 6학년도 아직은 어린지라 그 것까지 간파하긴 힘들었나 봅니다." 디트 경이 친절한 해설을 통해 나의 생각이 정답이었음을 통고해 주었다. 그 순간에도 에르가 형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면서 검을 위로 올려쳤다. 옆으로 주춤하고 있던 선배가 놀라서 검으로 막 으려고 했지만 너무 엉성하게 막는 바람에 에르가 형의 검과 부딪히는 순 간 검을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억?!" "이런, 경험 부족이군요. 저 정도의 검이라면 차라리 한번쯤 맞아준 다음 자세를 고쳐 다시 공격을 시작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말입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내가 짧은 탄성을 지르자마자 디트 경을 정말 아깝다는 어투의 목소리로 말했다. 디트 경은 해설 위원으로 나가도 손색이 없겠구 나. 어쨌든 에르가 형이 이긴 거잖아!! 따당! 잠시 하늘 구경을 하러 6학년 선배의 손을 떠났던 목검이 땅바닥으로 불시 착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록 압도 적인 실력으로 이겼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을지라도 어쨌든 에르가 형이 이 긴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파블료프 학교 사상 최초로 최종시합에서 2학년 짜리 우승자가 생긴 것이다. "에르가 형~! 최고다~~!! 핫핫핫!!" "...좀 조신하게 행동해라, 응?" 내가 난간에 한쪽 발을 디뎌 몸을 앞으로 내밀고 손 나팔을 만들어 소리치 자 후크가 못 말린다는 듯이 말을 걸어왔다. "그냥 포기해라, 후크. 카류에게 위엄이나 체면 같은 걸 찾는 건 에르가에 게 상냥한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힘들다고." "제르 말이 백 번 옳지. 그 누구도 저 녀석이 왕자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거야." 나는 뒤에서 나에 대해 논평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인간이 본성이 있는데 갑자기 신분이 왕자가 됐다고 행동거지까지 왕자처 럼 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어? 그것도 이렇게 동심이 가득한 아이들 곁에 있다보면 더욱 그렇게 된다고. "학생 여러분께서는 운동장으로 모여주십시오! 최종시합의 시상식과 폐회 식이 있겠습니다!!" 마이크가 없는 관계로 시종들이 각자 구역을 맡아 경기장에서 관객석을 향 해 목청을 돋워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럼 저는 먼저 마차로 돌아가 있겠습니다. 카류 님." "앗, 디트 경. 아마 아르디예프 님과 함께 갈 거 같아. 그냥 그렇다고 다른 기사들에게 알려두라고." "아르디예프 님요?" "응, 축제가 끝난 후에 함께 하기로 했거든!" 나는 방긋 웃으면서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몰아서 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 단상 아래쪽에는 에르가 형이 다른 최종시합의 출전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나는 너무 반가워서 후크와 다른 친구들과 함 께 형에게로 뛰어갔다. "에르가 형~~!!" "켁! 다가오지마!" 내가 형을 안기 위해 포즈를 취했지만 형이 소리를 꽥 지르며 빠르게 피해 버리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나의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나는 입맛을 다 시면서 형을 향해 말했다. "어찌됐건 정말 굉장해. 진짜로 이겨버렸구나!!" "훗, 그럼 이 몸이 누군데 그 정도도 못이길까 봐." "비록 약간의 운이 첨가됐다고는 해도 말이야." 나는 옆의 6학년 선배를 보며 히죽 웃었다. "실수라 해도 그것이 내 실력이다. 다음부터는 그런 식으로 실수를 하는 일이 없도록 수련하겠어." "맞아요. 원래 사람은 그러면서 성장하는 거죠. 역시 나이가 많은 사람은 달라도 어딘가가 다르다니 까요. 우리 에르가 형이 선배님을 보고 조금이 라도 교훈을 얻는다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뭐야? 죽어볼래?" 모두들 깔깔거리고 웃다가 나는 문득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우리들 쪽을 보고 있는 조그마한 백금발의 꼬마아이를 발견했다. 왜 함께 이야기하지 않는 건지 의아해서 나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넌 1학년 대표지?" "에? 예..." "왜 그런데 있는 거야? 함께 이야기하지 않고." 1학년 중에도 내가 올려다보지 않아도 돼는 아이는 거의 없는데, 이 아이 는 눈 높이가 나랑 거의 흡사했다. 우와, 사랑스러운 것!!! 요렇게 조그마한 몸으로 어떻게 에르가 형의 무지막지한 검을 상대했을꼬!! "이름이 뭐니? 내게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을래? 응?" "...또 시작이군." "또 시작이야."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 말들을 싹 무시하고 그 아 이를 바라보았다. 꼬마는 히노 선배의 금빛과는 다른, 굉장히 밝은 계통의 백금색 눈동자를 살짝 들어 나를 올려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깜짝 놀 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라트 혼 아이시스요..." 그 자그마한 목소리는 아이시스라는 말 쪽에서 더욱 기어 들어가서 내가 아는 성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아이시스? 게릭 혼 아이시스 님의 아이니, 일라트?" "...예..." "왜 그래?" 더욱 주눅이 든 아이를 보고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름에 무 슨 콤플렉스라도 있나? 일라트, 귀여운(?) 이름인데 말이야. "나는 알아. 쟤네 아버지 원래 평민이었다가 아이시스 남작 가의 작위를 받은 거잖아." "그런데?" "...보통 귀족들은 너처럼 그런데 무감각하지 않다고. 2학년은 너 때문에 거 의 그런 것 없이 마구 섞여서 놀지만 다른 학년은 그렇지 못해." "그래, 그러니까 일라트는 신분상으론 귀족이라 평민들과 함께 하기엔 그 들이 불편해하고, 귀족들과 어울리자니 귀족들이 원래는 평민이라는 생각 에 싫어하고, 그렇다보니 어디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거지." 원래 상인은 정보에 능통해야 한다는 생각 전제하에 언제나 소문이란 소문 은 전부 꿰고 다니는 후크와 카멜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의 신분이 평민이다 보니 이런 부분에 더욱 민감할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아직 그런 것이 있었단 말인가? 내가 얼마나 그런 차별은 그 만두라고 들쑤시고 다녔는데 말이야. "너무해. 대체 왜 그렇게 차이를 두는지 모르겠다니까." "멍청하기는. 그야 평민은 본질적으로 우리 귀족들보다 비천한 인간들이니 까 그렇지." 에르가 형이 잘난 체하며 내 말에 끼어 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후크와 카 멜과 상당히 친하게 지낸다고 생각했더니, 아직까지 저런 말을 하는군! 단 지 더 나은 환경에 태어나서 훨씬 좋은 교육을 더 받았기에 뛰어날 수밖에 없는 것을 저렇게 본질적으로 자신이 뛰어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말 이야. "뭐가 비천하다는 거야? 원래 평민이었던 게릭 님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알아? 나 같은 건 도저히 따라가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하단 말이야. 오죽 했으면 검도 하나 못쓰는데 단지 머리 하나만으로 귀족작위를 받았겠어? 그 비천한 평민인 게릭 님보다 머리가 나쁜 나나 에르가 형은 그럼 뭐야? 지금 이들을 욕하는 건 하늘 향해 침 뱉기보다 멍청한 짓이라고." 사실상 무보다 문을 천시하는 경향이 짙은 아르윈 왕국에서 무술 실력이 아닌 두뇌를 쓰는 쪽으로 성공을 해서 작위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시스 남작 가의 작위를 받아낸 게릭이라는 남자는 정말 살 떨릴 정도로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웃기지 마." "뭐가? 내 말이 틀렸어? 그지~? 일라트?" 나는 일라트를 보며 해죽이 웃었다. 약간 경직된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취 지에서 말이다. "그런데 게릭 님의 아들이라면 학문을 배우는 쪽으로 나갔을 텐데, 어떻게 검을 배우게 됐어?" "아...아버님께서 아르윈 왕국에서 성공하려면 검술을 배우는 것이 좋다고 하셔서...그리고 저에게 어느 정도 재능도 있...다고 하...하셨거든요. 그래서 매일매일 어릴 때부터 검술을..." "맞아! 넌 재능이 있어!! 정말 대단했다고!!" 우물거리는 일라트에게 용기를 주려고 나는 크게 소리쳤다. 일라트는 나를 힐끗힐끗 바라보더니 얼굴을 살짝 붉혔다. 헉, 귀여워라!! 오랜만에 학교에서 이렇게 작고 아기자기한 어린아이 특유 의 귀여움을 만나보는구나! "일라트~ 있지, 앞으로 나랑 친하게 지내자. 응? 좋지? 그렇게 할거지? 응?" 나는 일라트의 손을 꼬옥 잡고 그렇게 말했다. "말은 번지르르하게 해도 결국 일라트를 자기 수중에 넣으려고 그런 거잖 아." "맞아, 귀여운 애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껴안기 마왕 같으니!" 딜티와 세미르가 주위에서 궁시렁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한 손을 이마에 올리고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에휴, 애들의 질투는 정말 힘들다니까. 딜티, 세미르. 나는 너희들도 좋아 하니까 걱정할거 없어. 알았지?" "켁! 누가?!" "남의 의도를 곡해하지 마!!" 딜티와 세미르는 인상을 팍팍 쓰면서 소리쳤다. 또 한번 아이들의 웃음소 리가 주위를 메웠다. "카류 선배니임~!" "카류 선배님! 여기 계시네에?" "에? 너희들." 갑자기 1학년 아이들이 우리들이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나를 비롯한 유 명한 인간들이 이곳에 우글우글 모여 있으니까 이곳 단상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서있던 1학년들이 그것을 보고 몰려온 모양이다. "카류 선배님의 시합 봤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하하하, 재미있으라고 한 건 아닌데 말이야." "꺄하하하, 그래도 솔직히 정말 재미있던데." 크으, 결국 또 다시 이 화제로 넘어가게 되는구나. 슬프다. 한동안은 이 일 로 계속 놀림 당하겠군. 에르가 형이 최종시합에서 우승을 한 만큼이나 유 명한 화젯거리가 될 것 같다. "걔 누구예요? 누군데 카류 선배님이랑 손잡고 있는 거예요?" "아, 오늘 새로 사귄 후배야. 일라트라고 해. 귀엽지?" "에에~?" "카류 선배님! 저는요~!" 아직까지 일라트의 손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있는 나를 보고 1학년 아이 들이 난리를 쳤다. 내가 워낙 아이들에게 한 인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체 아이들을 좋아하고, 좋아하는 만큼이나 아이들을 대하는 법도 잘 알 고 있었기 때문에 학년이 낮으면 낮을수록 나의 인기는 더욱 높았다. 계속 해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아이들 덕분에 나와 주변의 친구들은 어느새 그 인파에 완전히 파묻히고 말았다. "에고, 카류야. 거기서 뭘 하니?" "응? 아르디예프 님?" 갑자기 위쪽에서 들려오는 아르디예프 님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파묻혔구나. 허허, 친구들에게 인기가 대단한걸?" 아르디예프 님이 하르몬 선배와 유넨 선배와 함께 단상 위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왔다. 아이들은 갑자기 나타난 대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약간 술렁였지만 그래도 떠나지 않고 계속 주변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제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아셨어요?" "아이들의 와글거리는데 그 중앙이 폭 꺼져 있어서 카류 님이라는 것을 알 았지요." "윽! 왜 자꾸 애들처럼 사람의 외모를 가지고 놀리시는 거예요? 가끔씩 저 는 하르몬 선배님이 정말 27살이 맞는지 의심스럽다니 까요. 나이를 거꾸 로 먹은 거 아니에요? 아이들의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도 좋지만 선배 님의 연세를 생각하세요, 연세를!" "아하하하~!" 나의 말에 주위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르몬 선배님은 약 간 부끄러웠는지 고개를 돌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이기지도 못할 걸 이렇 게 사람이 많은데서 말싸움을 걸다가 결국은 공개망신까지 당하는구나. 자 승자박한 하르몬 선배님께 잠시 묵념. "아르디예프 님. 카류리드 전하." 그러나 곧 들려오는 사람의 이목을 끄는 듯한 묵직한 어른의 목소리에 아 이들의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엇? 아버지." 딜티가 옆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들어올리지 않고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딜티의 아버지인 트로이 후작 님이라는 것을 깨달았 다. 성안에서나 매년 열리는 왕궁 파티에서 몇 번 마주치면서 알게 되었는 데 내게 트로이 후작 님은 약간 대하기가 어려운 분이었다. 트로이 후작 님은 천천히 우리들이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이제 곧 식이 시작될텐데 이런 곳에 모여있어도 되겠는가. 그만 자리로 돌아가라." 트로이 후작 님의 말소리에 드디어 아이들이 우루루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구 말이라고 감히 개기고 그 자리에 서있겠는가. 상대는 아르윈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 아닌가. "카류리드 전하. 이런 곳에 아이들을 모아두면 이곳을 정리하는 선생님들 이 곤란해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보란 듯이 그렇게 친구들을 몰고 다니시는 것이지요?" "...음.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생각 없이 행동한 모양입니다." 트로이 후작 님의 말에 나는 일단 사과를 했다. 내가 몰고 다닌 게 아니라 몰려 온 건데 말야. 약간 억울하긴 하지만 그런 일로 일일이 어른 말에 말 대답해서 심기를 어지럽힐 이유는 없겠지. 그렇지 않아도 대하기 힘든 분 인데 말이다. "아버지도 참, 너무 딱딱하세요. 우리가 여기서 얘기하고 있으니까 쟤들이 그걸 보고 그냥 몰려 온 것뿐인 걸요? 그렇게 큰 소리를 낼 일도 아닌 데..." "딜티. 그러면 돌려보냈어야지. 여기에 아이들이 몰려 있으면 아룬더스 축 제의 폐회식은 어떻게 한단 말이냐?" "음..." 자신의 아버지라 그런지 딜티가 유일하게 트로이 후작 님의 말에 토를 달 아왔다. 나는 이제껏 트로이 후작 님이 나에게 대하는 태도라던가 시합 전 의 딜티가 아버지가 오셨기 때문에 우승해야한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을 보 고, 그분이 매사에 굉장히 무섭고 엄격한 분이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런데 딜티의 지금 모습을 보면 트로이 후작 님이 집안에서 엄한 아버지 역 할까지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카류리드 전하. 이번에 전하의 시합을 보았습니다만, 조금쯤은 왕족으로서 의 체통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가볍게 행동하시는 것 같군요." "아..알겠습니다." 그러고 보면 내가 기권을 외치는 장면을 트로이 후작 님도 봤겠지? 으 악~!! 부끄러워!! 애초부터 이런 축제에 참가하는 게 아니었는데, 결국 트로 이 후작 님에게까지 이런 이야길 듣게 되는구나!! "푸훗, 솔직히 그 말은 동감입니다, 아버지. 저희들도 몇 번이나 좀 조신하 게 행동해보라고 말해봤지만 무리더라고요. 카류는 저게 천성인 가봐요." "딜티! 왕족에게 감히 카류가 무엇이냐!! 카류리드 전하라고 불러라!!" 트로이 후작 님의 큰 소리에 딜티는 약간 움찔거렸다. 그러나 금세 베실 웃으며 내 머리에 손을 탁 얹고 말했다. "에이, 왜 그러세요. 그냥 친구일 뿐인데 그렇게 딱딱하게 존칭을 쓸 필요 는 없잖아요. 게다가 왕족의 위엄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이런 꼬맹이 에게..." "아야, 아푸다고~ 딜튀이~" 딜티는 '눈꼽만치' 라는 부분에 강세를 주며 아주 내 뺨을 쭉쭉 당기고 있 었다. 나도 그런 딜티의 태도에 약간 긴장이 풀려 같이 장난을 쳐주려고 손을 들어올렸다. "딜트라엘!!" 그러나 그 의도가 전부 성사되기도 전에 갑자기 트로이 후작 님이 큰 소리 를 치는 바람에 나는 손을 엉거주춤 들어올린 자세 그대로 완전히 굳어 버 리고 말았다. 딜티도 화들짝 놀라 내 얼굴에서 손을 떼어냈다. "딜트라엘! 저번에 내가 한 말을 잊었느냐?" "예? 아...아니, 그게..." "카류리드 전하께서도 조금쯤은 다른 친구 분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 어떠 십니까. 전부터 생각해온 것입니다만 왕궁의 좋은 선생님을 마다하고 학교 에 다니겠다고 하신 것과 왕족의 체면까지 버려가면서 이렇게 친구들과 가 까이 지내려고 하시는데 무슨 이유라도 있으신 겁니까?" "예에?" 갑자기 너무 엄하게 나오는 트로이 후작 님께 놀라서 그만 바보같이 되묻 고 말았다. 트로이 후작 님이 약간 인상을 찡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빠르 게 뒷말을 이었다. "별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한번쯤 밖으로 나오고 싶다고 생각해서 학교에 오고자 한 것이고, 딜티나 다른 친구들이 너무 편하기에 가족처럼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의 가벼운 행동이 그렇게까 지 거북하셨다면 사과 드리겠습니다. 앞으로는 조금 예를 갖춰가며 행동하 도록 하겠습니다." "트로이 후작.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가. 아이들끼리 친하게 지내는 것 뿐인데 여기서까지 왕족의 위엄이니 뭐니를 내세울 이유는 또 뭔가." 곁에서 우리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아르디예프 님이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아르디예프 님 최고!! 왕족은 다른 아이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란 법도 있나? 트로이 후작 님은 다 좋은데 너무 딱딱하다고요. "휴우, 알겠습니다. 아르디예프 님. 하지만 어느 정도의 예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카류 님. 조금 전의 그 말 잊지 말아주시기를 바랍니 다." "예..." 그러나 원래부터 그렇게 위엄 있는 성격이 못되는 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 나의 행동이 더욱 장난스러워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눈 높이를 맞춰줘야 아이들이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중후한 어른을 좋아하는 어린애 는 거의 없지 않은가. 그런고로 그 말이 지켜질 가능성은 타진해보면... 어 림잡아 0.00001% 정도가 되겠구만. 한번 노력은 해보겠지만 역시 무리인 듯 하네요, 트로이 후작 님. 죄송합니 다. 제 인생 최고의 취미이자 즐거움을 뺏어가려 하지 말아주세요. 나는 트로이 후작 님을 힐끗 쳐다보며 그렇게 속으로 주절주절 지껄였다. "그런데 아르디예프 님. 축제가 끝난 후에 수도에 있는 저의 별장에 한번 들려주시겠습니까? 오랜만에 생명의 궁에서 나오셨는데 저녁식사라도 대접 하고 싶습니다만..." "미안하게 됐네. 트로이 후작. 이미 선약이 있어서 말이네." "선약...말씀이십니까?" 트로이 후작 님은 아르디예프 님의 선약이라는 말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 하며 미간을 약간 찡그리기까지 했다. "이 꼬마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 식사를 할 생각이거든. 그러니 미안하네만 그대와의 식사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지." "...선약의 상대가 카류리드 전하셨습니까." 트로이 후작은 지긋한 눈초리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르디예프 님과의 식사 약속을 빼앗긴 게 그렇게 억울했던 것일까. 하지만 나도 정말 오랜만에 아 르디예프 님을 보는 거니까 이건 양보할 수 없다고. "제가 생명의 궁에서 나온 후로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너무 기뻐서 저 녁식사라도 함께 하고 싶다고 말씀드린 것이랍니다. 제가 기회를 가로챈 듯해서 정말 죄송스럽군요. 트로이 후작 님." "...아닙니다. 선약이라니 어쩔 수 없지요. 다음 기회를 기약하도록 하겠습 니다. 그럼..." 트로이 후작 님은 나와 아르디예프 님께 인사를 하고 단상 위쪽으로 다시 올라갔다. 트로이 후작 님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나 곧 아르디예프 님께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르디예프 님, 인기 좋으시네요? 저 트로이 후작 님이 아쉬워하는 것 좀 보세요." "흥, 인기는 무슨... 또 권력 싸움이나 하려는 게지." "응? 무슨 뜻이에요?" 내가 의아해하자 곁의 하르몬 선배가 친절하게 부연설명을 해주었다. "지금까지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은 정치에서 항상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 요. 그래서 어떻게든 마법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세력을 키워보려 하고 있는 거랍니다. 오늘 하루동안 아르디예프 님이 몇 번의 저녁식사 초 대를 받았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인 걸요." "아아, 그럼 아까 선수대기실에서 아르디예프 님이 말씀하셨던 그 파리라 는 게..." "아무리 쳐내도 귀찮게 자꾸 꼬이지 않겠니. 그러니 파리지." 우오, 그 얘기를 트로이 후작 님께 들려주면 어떤 얼굴을 할지 정말 궁금 하다. 게다가 주위엔 트로이 후작 님의 아들인 딜티를 시작해서 다른 고위 귀족의 아이들이 우글거리는데 저런 말해도 괜찮은 거야? "참, 아르디예프 님도 못 말린다니까. 그럼 제 식사초대엔 허락을 하셨으니 아르디예프 님은 제 세력이 된 거네요? 오옷! 얘들아, 너희도 들었지?" "...그럼 그냥 가야겠구나. 잘 있거라, 카류야." "윽! 아르디예프 님, 미~워요! 제 세력이래 봤자 저기에 있는 아이들 정도 지 않겠어요? 여기에 힘 좀 보태주시면 어때서 그러세요." "누가 네 세력의 부하라는 거냐? 이 빌어먹을 놈아!!" 내가 주위의 아이들을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아니나다를까 에르가 형이 가 장 먼저 발끈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또 말의 뒤쪽에 뭔가 알 수 없는 단어가 붙어 있군. 분명히 욕일 거야. 역 시 성밖으로 나오니까 이런 은어를 많이 듣게 되는구나. 언젠가 나도 저거 잘 들어뒀다가 외워두던지 해야지. 언젠가 필요해질 날이 올지도 모르잖 아? 아르디예프 님은 에르가 형의 모습에 껄껄 웃고 나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 었다. "그래, 폐회식을 마치거든 너의 마차로 가있으마. 너도 그리로 오너라. 그 번쩍거리는 마차가 네 마차가 맞지?" "윽! 예...예. 조...좀 화려하죠? 하하하하..." 나는 보석이 잔뜩 박힌 엄청나게 화려한 마차를 떠올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르디예프 님이 단상 위로 올라간 후 시상식에서 상을 받아야 할 에르가 형을 뺀 아이들을 데리고 원래 우리들이 서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드디어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아룬더스 축제가 끝나는 건가." "확실히 이번 축제엔 일이 정말 많았지? 이렇게 재미있는 축제는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걸." "그래, 특히 누구누구 때문에 볼거리가 정말 많았지." "정말?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웃음을 준 사람이 누군지 정말 존 경스러운 걸?" 주위에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에 나는 철저히 철판을 깔고 아이들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의 아이들에게 후크가 한마디 보태 왔다. "사람은 한두 번 궁지에 몰면 곤란해하지만 완전히 궁지에 몰아 버리면 아 주 배 째라가 된다고 하던데, 지금 저 녀석이 그런 상황인 모양이다. 얘들 아. 완전히 맛이 가버리기 전에 우리 그만해주자. 가엾잖아." 아이들은 그제야 수긍하겠다는 듯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후 크가 바로 그 유명한 청출어람의 대표 케이스구나. 말발이 날로 발전한다 싶더니 이젠 아주 사부를 씹는 수준에까지 도달해버리는군. 내가 기쁘다 해야할지 슬프다 해야할지. 잡담을 하는 동안 최종시합 시상식과 아르디예프 님의 마법 시범, 그리고 폐회식이 차례로 지나가고 있었다. 마지막 폐회식 선언을 들으며 나는 약 간의 아쉬운 감을 감출 수 없었다. 부끄러운 일도 있었지만 꽤나 즐거웠다 는 사실은 나도 동감이었으니 말이다. 하늘의 태양도 하루 동안의 즐거운 일정을 마치는 것이 섭섭했는지 오늘따라 굉장히 느릿느릿한 속도로 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쉽다. 그지?" "응." "내일은 또 즐거운 일이 있을 거야." 원래 아이들은 내일의 꿈을 꾸는 존재니까. 나는 귀여운 친구들을 향해 방긋 웃어 보였다. 나의 말에 그들도 금세 웃 음꽃을 피웠다. 약간은 아쉬운 아룬더스 축제가 막을 내리고 있었다.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Part. 13 - 불행한 소식 "히노 선배. 히노 선배는 뭘로 먹을 거예요?" "......" 하노 선배가 작은 동작으로 메뉴 중의 하나를 살짝 가리키는 것을 보고 나 는 식탁에 옹기종기 앉은 친구들을 둘러봤다. "너희들은? 나도 이걸로 먹을까 하는데, 같은 걸로 시켜야 아주머니들도 만들기 쉽고, 또 빨리 나오지 않겠어? 모두들 이걸로 먹자. 응?" "난 상관없어." "나도." "난 상관 있어. 이걸로 먹겠어." 나의 말이라면 뭐든지 반발부터 하고 보는 에르가 형이 튀어나와 아래쪽의 다른 메뉴를 선택했다. "형의 음식만 늦게 나올 거야. 그래도 우린 기다려주지 않을 거라고." "시끄러, 남이야 혼자 먹든 말든!"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주문하고 올 테니까 모두들 기다리고 있어." 나는 괜히 고집을 부리는 에르가 형을 보고 피식 웃고는 주문을 하러 시녀 들에게로 걸어갔다. 무난히 주문을 끝내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약간 소 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카류야!!" "카류! 여기 좀 봐!!"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것을 듣고 무슨 일인가 싶어 뒤를 돌아 본 나는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에르가 형이 식탁 위로 올라가 맞 은 편에 앉은 세미르의 멱살을 잡고 난리를 피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에르가 형의 행동을 보았다면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에르가 형이 유명한 싸움꾼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형은 그 난폭한 성격 때문에 일주일에 한번은 꼭 다른 아이들과 싸움을 하곤 했고, 나는 에르가 형을 말리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헸다. 그리고 딱히 에르가 형이 아 니더라도 나는 항상 여러 아이들의 싸움을 말리고 달래는 일을 도맡아 하 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주위 아이들이 바로 나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에르가 형! 또야!? 식탁에 올라가면 어떻게 해!" "이 놈이 사람 열 받게 굴잖아!" "또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상황을 묻고 있는데 그 사이에 에르가 형이 세미르 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세미르가 에르가 형의 무지막지하게 아파 보이는 주먹에 얻어맞고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질렀 다. "앗, 에르가 형!! 무슨 짓이야!" "닥쳐, 네가 우리 아버지라도 돼? 왜 자꾸 참견이야!?" "친구로서 이 정도는 당연한 일 아냐? 친구들끼리 싸우는걸 옆에서 구경하 면서 응원이나 해주는 것이 진정한 친구로서 할 도리냐고!" "언제 너랑 나랑 친구였어, 이 자식아!! 너도 한번 맞아볼..." "에르가! 너 죽었어!!" 주먹에 맞아 쓰러져 있다고 생각했던 세미르가 어느새 일어나서 에르가 형 에게 주먹을 날렸다. 에르가 형은 나와 말싸움을 하던 중인데다가 식탁 위 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불안정하게 앉은 상태였던지라 보통은 손쉽게 피할 주먹을 그대로 안면에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 주먹을 얻어맞으면서 재수 없게도 식탁 위에 약간 남아있던 물기 때문에 발이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아앗!? 에르가 형!" 에르가 형이 머리부터 굴러 떨어졌기에 나는 너무 놀라서 형에게로 뛰어가 상태를 살폈다. 세미르로 열 받아서 한대 치긴 했지만 너무 심하게 떨어진 듯해 보이니까 놀랐는지 그 자리에서 주춤했다. "앗! 피가 나잖아!! 누가 가서 양호 선생님을 불러 줘!!" 그러나 나의 말에 에르가 형이 금방 일어나려고 애를 쓰며 소리쳤다. "시끄러! 쪽팔리게 무슨 양호 선생... 으으으... 누구든 불러오기만 해봐라. 죽여버릴 테다." "정말... 이럴 때까지 큰소리야. 괜찮아? 안 아파? 가만히 있어봐." 나는 주머니의 손수건을 꺼내서 에르가 형의 찢어진 이마에 갖다대었다. 에르가 형은 아직 어질어질한지 일어나려던 것을 포기하고 내가 시키는 대 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에르가 형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이마의 피를 닦아주면서 말했다. "정말 못 말려. 그러니까 식탁에는 올라가면 안돼. 알겠어?" "내 맘이야! 내가 필요하면 언제든 올라간다!" 말은 저렇게 해도 아마 다시는 올라가는 일이 없으리라. 내 손길을 뿌리치 지 않고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걸 보면 형 자신도 그 추락사고(?)에 상당 히 놀란 모양이니까. "야, 괜찮냐?" 세미르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와 에르가 형이 있는 쪽을 보면서 물었다. 나 는 살짝 웃으면서 그를 향해 이리로 오라는 손짓했다. 쭈뼛거리면서 다가 와 우리 앞에 쭈그리고 앉은 세미르를 보고 나는 입을 열었다. "세미르. 자, 말해봐. 왜 싸웠어?" "...그냥 에르가에게 괜한 고집 부리지 말라고 그랬더니 저렇게 열을 내잖 아. 솔직히 이번 싸움은 내 탓이 아냐." "내가 무슨 고집을 피웠다는 거야? 그러니까 네 놈이 먼저 시비를 건 거 지." 이번에도 에르가 형의 발끈하는 성질 탓이군. 세미르도 그 성질에 여러 번 당해서 충분히 형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또 저런 말을 했나 몰라. "에구, 둘 다 어리기는." "너 진짜 죽을래?" 내 말에 에르가 형이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려고 난리를 쳤다. 나는 이 마를 꾹 눌러서 에르가 형의 움직임을 봉쇄한 후에 계속 말을 이었다. "이렇게 쪼그마한 나한테 이런 말들으니 기분 좋아? 그러니까 나한테 이런 소리 안 듣도록 제발 싸우지 좀 마. 내가 읽은 어떤 책에 애들은 원래 싸 우면서 큰다는 말이 적혀 있더라? 꼭 누구누구 얘기 같지?" 나의 말에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던 주위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에르가 형 은 그것을 보고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러고 보니 에르가 형이 완전히 이 가는 걸 습관화해버린 모양이네. 심심하면 이를 갈잖아? "형, 자꾸 이 갈지마. 그러면 이가 흔들리고 심하면 턱 주위의 악관절이라 는 것이 나빠져서 고생하게 된단 말이야." "제발 입 좀 닥쳐!! 사내자식이 왜 그렇게 말이 많아!?" "알았어, 미안해.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까 앞으로는 그러지 마. 알았지? 진 짜로 턱이 안 좋아진단 말이야. 이 갈고 나면 턱 주변이나 어금니 쪽이 조 금 얼얼하지 않아?" "......" 에르가 형은 고개를 옆으로 팩 돌렸지만 더 이상 이를 갈거나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에르가 형이 너무 귀여워서 그의 부드러운 녹색 머리카락을 살 살 뒤로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서 의자에 앉혀 주었 다. "카류야. 너는 어디서 그런 얘기를 알고 있어? 이를 갈면 뭐... 악관절? 그 게 나빠져서 안 좋다느니 하는 그런 이상한 얘기 말야." 제르가 신기하다는 듯이 나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사실은 이 이야기는 잘 때 이를 갈면 그렇게 된다는 거지만, 상관없겠지. 어쨌든 이를 갈면 안 좋 다는 건 분명하니까. 그러나 내가 뭐라고 대답을 해주기도 전에 발끈한 에르가 형을 제르를 향 해 으르렁거렸다. "그 쓸데없는 소리, 한번만 더 지껄여 봐라. 제르!" "에르가 형!" 시종이 음식을 가지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지 않았다면 또 한번 격렬한 공 방전이 벌어질 뻔했다. "자, 식사를 해야지. 식사 할 땐 개도 안 건드린다는 말이 있다고. 식사를 한땐 소란을 피우는 게 아니라는 뜻이야." 나는 발끈한 에르가 형을 겨우 달랠 수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화기애애한 식사시간을 갖게 되나 싶어 스푼으로 수프를 떠올렸다. 그러나 또 다시 누 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음식이 내 입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스푼 은 그 역할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카류~~!!"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디서 또 에르가 형 같은 아이가 싸움이라도 일으킨 모양이군. 나는 고개 를 절래절래 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나를 부른 것으로 추정되는 아 이는 식당의 다른 아이들을 쳐내가기까지 하며 다급히 내 쪽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별거 아닌 일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네. 누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나? "헉헉... 카류야. 헉헉... 어서 왕궁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왕궁으로? 어째서?" "나도... 헉헉.... 자세한 건 모르는데, 휴우... 무슨 큰 일이 생긴 모양이야. 어서 가봐. 너를 기다리던 그 기사 아저씨가 금방이라도 쳐들어 올 기세를 하고 있더라." "디트 경이? 아...알았어! 얘들아. 나 다녀올게. 내일 보자!!" 무슨 일일까? 이런 시간에 갑자기 궁으로 나를 부르다니? 왠지 불안한 예 감이 든다. 내가 마차 쪽으로 가자마자 디트 경은 무슨 일인지 말해주지도 않은 채 바 로 날 마차 안으로 밀어 넣고 부리나케 왕성으로 향했다. 다급히 길을 서 두르고 있는 디트 경의 얼굴 색이 밝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은 아닌 모양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나는 지독하게 마차 멀미를 하면서도 그 궁금증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상 하게 디트 경은 아무리 무슨 일이냐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주 지 않았던 것이다. 마차는 왕성으로 들어가자 곧바로 땅의 궁으로 향했다. 뭔가 큰 일이 있다 면 일단 아버님이 계시는 빛의 궁으로 가는 게 아닌가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냥 땅의 궁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카류 님. 도착했습니다." "휴우, 드디어 도착이구나. 그런데 디트 경.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무슨 일 인지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거야?" 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디트 경은 무릎을 구부려 나와 눈 높이를 맞추고 살짝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뭔가 나를 격려해 주거나 위로해 줄만한 일이 있을 때마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곤 했다. 물론 왕족에게 눈 높이를 맞춘다거나 어깨를 감싸안는 둥의 짓은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워낙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살갑게 굴어서인지 고지식하기 이 를 데 없는 디트 경마저 가끔이나마 나에게 이런 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이 다. "...용서하십시오. 카류 님. 왕실의 중요한 문제인지라 밖에서 말씀 드리기 가 곤란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디트 경은 굉장히 어두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 었다. "카류 님... 마음 단단히 잡으십시오." "대체 왜 그래, 디트 경. 누가 죽기라도 했어?" 그냥 한번 해본 말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말을 들은 디트 경 은 약간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곧 더더욱 어두운 표정을 만들어 냈다. 아니, 설마...? "...오늘 왕비 에렌시아 님과 제1후궁 아르멘 님, 그리고 카류 님의 어머님 이신 아스트라한 님께서 승마를 나가셨습니다. 그러다가...그만...사고를 당 하셔서..." "......설마...세분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내가 급한 목소리로 묻자 디트 경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천만다행으로 아스트라한 님은 목숨에 지장에 갈 만큼의 큰 상처를 입지 않으셨지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야! 제발 뜸들이지 말고 빨리 얘기해봐!!" 나는 약간 큰 목소리로 디트 경에서 소리쳤다. 자꾸만 불안만 마음이 솟아 올라 그 초조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에...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께서......돌아가셨습니다." 무...무슨... 내가 잘못 들은 건가? "뭐...뭐라고? 그...그런 걸로 장난치면 안돼. 디트 경. 어린애를 놀리면 못쓴 다고..." "...제가 어찌 이런 일로 장난을 치겠습니까." "하하...하... 어...어머니는? 어머니는 어디 계시지?" "지금 침실에 누워 계십니다." "...어머님께 가보자." 나는 그 즉시 디트 경과 함께 어머님이 계시는 침실로 향했다. 내가 들어 갔을 때 그곳에는 의원과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어머니는 방 한가운데 놓인 침대에 누워 주무시고 계신 듯 보였다. "...어머니는 어떠하신가?" 나의 질문에 의원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한 후, 입을 열었다. "네. 카류리드 전하. 다른 큰 외상은 없으나 왼쪽 다리가 부러지셨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 국왕 폐하께서 지금 곧 마법사들을 불러오도록 명하였으니 곧 치유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면 정상적인 보행을 할 수 있을 줄로 아 옵니다." "......그런가..." 나는 의원의 말에 중얼거리듯 답하고 어머니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평소 에는 아름답게만 느껴졌던 신비스러울 정도로 푸르게 빛나는 청흑발이 어 머니의 얼굴을 더욱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숨이 고른 것을 보니 지금 어머니가 크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상세히 말해 줘. 디트 경. 대체 어떻게 세 분이 갑자기 이런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는지." "...얼마 전부터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께서 승마에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원래가 조용한 분들이시라 이제까지 전혀 승마를 배우지 않으셨던 것이지 요. 그래서 이번 기회를 삼아 한동안 승마 연습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스트라한 님과 함께 숲으로 나가셨다가 갑자기 말 앞으로 짐승이 뛰어드 는 바람에 말들이 놀라서 이렇듯 변고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무슨 변고! 확실히 자세하게 말해봐!!" 나는 너무 황당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디트 경을 괜히 닥달했다. "......그게..." "뭐지?" "그...그러니까 말들이 놀라 날뛰는 바람에 세분께서 낙마를 하신 것입니다. 아스트라한 님은 무사하셨지만, 아르멘 님은 그...그러니까 낙마를 하실 때 잘못 떨어지시는 바람에...모...목이... 그...그리고 에렌시아 님은... 발이 말안 장에 끼여..." 더듬거리던 디트 경은 결국 하던 말의 끝을 맺지 못했다. 그는 내가 에렌 시아 님과 아르멘 님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 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앞에서 두 분이 그렇게 참혹하게 돌아가셨다는 말을 하기가 굉장히 곤란했을 것이다. 그때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카류?" "어...어머님?" "그래...카류...카류야... 이리...이리 온..." "......" 난 말 없이 어머니의 곁으로 다가가서 침대 곁에 놓은 의자에 앉았다. 침 대 위에 놓인 어머니의 창백한 손이 왠지 나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손을 꼭 잡아드렸다. "카...류야... 실은.... 에렌시아 님이... 아르멘 님이..." "알아요. 어머니... 아니까... 그러니까..." 어머니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숙여 얼굴을 침대에 깊게 묻었다. 곧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느껴졌다. "울지마렴. 카류야...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렇게 슬퍼하지 말거라. 힘든 일 이지만 견뎌내야지. 착한 아이지... 우리 카류...?" 어머니는 그렇게 작은 목소리로 나에게 속삭였다. 그러나 나는 그에 답하 지 않고 계속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로 엎드려 있기만 했다. 어머니는 그 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멈추지 않고 계속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슬픈 목소리로 나를 어떻게든 위로하려 애썼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일 어나서 말했다. "...제 방에 가 있겠습니다. 어머니." "......그...그래. 그...그렇게 하거라." "그럼. 어서 쾌차하시길... 빌겠습니다. 어머니." 나는 약간 당황한 표정을 하는 어머니께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에서 벗어 났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게 이어진 복도를 느릿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었 다. 복도 곁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답게 단풍이 진 정원을 보며 나는 잠시 짧은 한숨을 지었다. 그 곳은 바로 얼마 전만 해도 나의 형제들과 에 렌시아 님, 아르멘 님과 함께 즐겁게 떠들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곤 한다. 나는 다시는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들 의 상냥한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을 것이며, 내가 그토록 이나 좋아했던 그 특유의 부드러운 분위기도 다시는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다시는 만나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녀들의 죽음에 슬퍼하고 있 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경험했듯 아마도 그녀들은 환생을 할 것이다. 그들은 죽어서 또 다시 어딘가 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죽은 자를 연민할 필요는 없다. 죽은 자를 가여워 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에 나는 슬프지 않다. 혼란스러운 기분이다. 하지만 확실히 예전만큼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전생에 나의 큰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이 정도로 담담하지는 않았 다. 지금 에렌시아 님이나 아르멘 님과 같이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던, 거의 안면이 없었던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죽음에 대한 본연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연민해 줄줄 알았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 는 만큼 다른 사람도 두려워 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제 곧 죽을 그들이 가엾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더 이상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내가 살인을 저지른다해도 예전만큼의 커다란 죄책감은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내가 죽인 자들 또한 다시 환생을 할 테니까. 죽어도 다시 태어날 뿐이니까. 동기만 충분하다면 나는 정말 살인을 해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느꼈던 생명의 절대적인 고귀함을 느끼지 않는다. 누 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생명은 단 하나뿐이기에 소중한 것이라고. 그래서인 지 그녀들의 죽음이 나에게 그렇게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다지 눈 물도 나지 않는다. 실은 조금 전 나를 위로하기 위한 어머니의 말에서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울지 말라고, 견뎌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나는 생각 이상으로 담담했 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내가 이렇게 담담해하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침대에 고개를 파묻었던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언제나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을 통감할 수가 있었다. 나는 아마 다시는 죽은 자들을 때문에 절망하며 절규의 눈물을 흘 리지 못할 것이다. 나의 방 앞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디트 경이 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디트 경?" 디트 경이 말도 없이 나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일에 나 는 그대로 그에게 안겨버렸다. 나를 머리까지 깊게 껴안은 디트 경은 천천 히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부드럽게 나의 머 리를 쓰다듬기만 했다. 아마 나도 모르는 사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는 내가 슬픔을 참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디트 경의 생각처럼 그녀들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끼 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괜히 그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그의 품이 너무 포근해서 눈물이 흘 렀다. 화려한 장례식이 끝났다. 그 장례식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들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상냥했기에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었다. 나 또한 그녀들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았던가. 장례식에 참석한 형제들은 모두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올라 있었다. 저렇게 슬퍼하는 그들을 보노라니 마음이 아파 왔다. 아직은 어린 그들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은 견디기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장례식들 보러왔던 대부분의 귀족들이 떠났지만 형제들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유체를 묻은 무덤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들은 그저 그곳에 서 훌쩍거리면서 울기만 했다. 단지 루브 형 만이 울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환생이란 것이 있다고 말해줄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 일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줄여줄 수 있을 정도로 환생에 대해 이해시킬 수 있을까. 죽음이란 생명체 본연의 두려움이며 경이이다. 그런데 환생이란 게 있으니 슬퍼할 필요 없다고 말해봤자 그들이 나의 말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나 또한 환생이란 말을 수없이 들어왔지만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증거가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진짜 증거를 보여준다 해도 쉽게 믿을 수는 없을 것 이다. 만약 환생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나서 전생의 나와 같은 상황에 처한 살 가망이 없는 사람에게 괴로움에 떨기보다는 그냥 죽어버리 라고 했을 때 그렇게 할 인간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죽음은 단 한번 생 명체에게 주어진 것이다.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보여줘도 마음 속 깊은 곳 까지 신뢰를 줄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시 환생이란 건 직접 경 험해보지 않는 한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들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형, 누나. 그만 돌아가자." "흑흑...싫어!" "루브 형. 이제 그만 돌아가자. 감기 걸릴 꺼야." "됐어! 넌 슬프지도 않아? 그래, 네 어머니가 아니니까 하나도 슬프지 않겠 지. 아스트라한 님이 아니라 우리 어머니가 죽어서 속이 다 시원하지?" "루블로프 님!!" 옆에서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디트 경이 소리쳤다. "그래!! 난 하나도 슬프지 않아!!" "...뭐...뭐야?" 모두 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루브 형은 아주 나를 잡아먹을 듯이 으르렁 거리고 있었고 다른 형제들도 거의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당연하지!! 에렌시아 님이랑 아르멘 님은 천국에 계실 테니까."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는 듯한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언제나 똑 똑한 척 하고 다녔던 내게서 그야말로 어린애 같은 소리가 나오자 모두들 황당하다는 표정들이었다. "...허참. 웃기는구나. 네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오다니." "흐흑...장난쳐? 훌쩍...천국 같은 게 어디 있어? 훌쩍... 그런 곳에 갔다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훌쩍....맞아...나두 알아. 훌쩍....어머니는 여기 차가운 땅 속에 묻혀 있다 고. 히잉...흑흑흑....추워서 울고 계실지도 몰라!" "그렇지 않아! 그분들은 분명 천국에 계셔!! 난 알고 있다고! 나는 이제껏 그분들보다 착한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걸!! 그러니까 그분들은 분명 천국에 가셨을 꺼야! 그분들이 가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천국에 간단 말이 야? 안 그래!?" 나는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 그분들이 다른 곳에서 잘 살고 있을 거라는 건 사실이니까 내가 괜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잖아? 에렌시아 님이랑 아르멘 님이 얼마나 좋은 분들이신 데! 그러 니 천국에 가셨을 꺼야. 분명히 그럴 꺼야.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천국에 계신 그분들도 마음이 아프실 꺼야! 그러니까 울면 안돼! 에렌시아 님이랑 아르멘 님이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드려야 할 거 아냐?" 내가 다시 한번 소리치자 잠시 그들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제일 어린 카이 세리온 형이 말하기 시작했다. "흑... 정말...흑...정말..그럴까?" "물론이지. 생각해봐. 에렌시아 님이랑 아르멘 님이 얼마나 착한 분이셨는 지. 그런데 그런 분들이 천국에 안가면 어디에 가신다는 거지? 안 그래? 천국은 착한 사람들만 가는 곳이잖아!!" "훌쩍...흑흑... 엄마는...거기서 행복할까?" "당연하지!!! 원래 천국은 굉장히 편하고 기분 좋은 곳이야!" 분명 만 1년간은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기분 좋게 살 수 있다. 나처럼 인 간으로 태어난다면 말이야. 그게 얼마나 기분 좋은지는 내가 겪어봐서 알 지. "난...난 울지 않을 거야... 훌쩍." 블라디미르 누나가 제일 말했다. "나도... 어머니는 분명히... 훌쩍... 천국에 가셨을 꺼야. 카류 말이 맞을 꺼 야.." "흑... 나도..." 그제야 형제들은 하나 둘 울음을 멈추기 하기 시작했다. 이런 막무가내가 통하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미...미안해. 카류.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맞아, 이렇게 울면 어머님이 슬 퍼하실 꺼야. 하하...그래. 분명히 어머님들은 천국에 가셨을 꺼야. 어머니만 큼 좋으신 분은 없는걸!" 최소한 루브 형만은 이게 거짓말 -전부 거짓말은 아니지만- 인걸 알 것이 다. 아마 어린 내가 이렇게까지 하니까 책임감을 느꼈을는지도 모른다. 형 은 원래 착하고 책임감이 강한 아이니까. 어쨌든 그렇게 겨우 우리들은 자신들의 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왕비와 제1후궁의 사망. 이것은 제2후궁인 어머니가 왕비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사실 이것 때문에 한동안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소문이 성안을 나돌았다. 어머니가 왕비가 되기 의해 그녀들을 죽인 것이 아니냐 는 소문들 말이다. 왕족들이 다니는 승마 길에서 짐승이 튀어나온 것하며 하필 그날 따라 호위기사와 시녀들을 전부 떼어놓고 산책을 간 일 등 이번 사고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점이 많았기에 그런 소문이 퍼진 모양이었다. 나도 그 소문들을 듣고 이번 일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죽이려 들만한 사람도 없거니 와, 소문처럼 어머니가 그녀들을 죽이려 했을 가망성은 더더욱 없기에 그 냥 그 헛소문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평소 무표정을 유지하며 그 어떤 애정 표현도 거의 내보이지 않는 어머니 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왕이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무시하고 자신만을 찾 는 것을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국왕인 아버지 가 땅의 궁을 찾을 때마다 싫은 기색이 완연히 나타냈기에 그것만은 확신 할 수 있다. 그런 어머니가 그녀들을 죽이고 왕비가 되려 할 이유는 병아 리 눈물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뭐, 그런 심증들을 다 제쳐놓고서라도 이번 일로 어머니도 다리가 부러지 는 상처까지 입었지 않은가. 게다가 함께 산책로에 갔었던 기사들의 증언 도 있었고, 처음 산책을 가자고 말했던 것이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이라 는 시녀들의 증언도 있으니까. 얼마 후, 어머니는 별탈 없이 무사히 왕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성내 에 나도는 여러 가지 소문과 에렌시아 님의 외척인 이크쟌트 후작 님을 위 시한 쟁쟁한 몇몇 귀족들의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국왕인 아버지가 그것들 을 일언반구의 여지도 없이 내쳤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믿어주었다는 것만 큼은 정말 기뻤기 때문에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국왕을 다시 보고 아버지로 서 존경하는 마음을 품어볼까 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우호적인 마음은 얼마 못 가 정반대로 바뀌어버렸다. 국 왕이 어머니를 왕비로 책봉하면서 몹시 기쁜 듯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 다. 아마도 왕비가 되면 더 당당히 어머니를 만나러 갈 수 있을 테니 저렇 게 기뻐하는 모양이다. 원래부터 그런 부분에 신경 안 쓰고 땅의 궁에 들 락거리긴 했지만 아무래도 체면이나 명분이라는 게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이번 일로 나는 더더욱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나빠졌다. 어떻게 저 런 표정을 지을 수가 있는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이 너무 가엾다. 자 신들의 죽음을 기뻐하는 저런 사람을 남편이라고 이제까지 잠자리를 함께 했겠지? 조금쯤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죽음을 슬퍼해 주면 안되나? 아버지는 환생이 뭔지도 모르는 평범한 사람 아냐? 나도 이렇게 우울해하 고 있는데 말이야. 많은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들었던 늦가을의 어느 날, 나는 땅의 궁의 솜씨 좋은 정원사에 의해 잘 다듬어진 잔디 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정 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은 쌀쌀한 기온에도 내 머리 바로 위에 떠 있 는 태양의 손길이 내 몸을 완전히 감싸주고 있었기에 나는 그 따뜻함에 약 간의 노곤함을 느끼고 살짝 졸아버렸다. "카류!" "흐악!?" 나는 귓가에서 들리는 커다란 고함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한 동안 정신없이 주위를 돌아보다가 문득 나의 앞에는 형과 누나들이 모두 모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모두들. 어떻게 된 거야?" 그런데 갑자기 나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루브 형이 양 겨드랑이에 손 을 끼워서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루브 형은 1년 동안 무섭도록 고속 성장을 해서 원래부터 조그마했던 나는 형의 가슴께밖에 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루브 형이 나를 들어올리면 꽤나 화기애애한 가족의 그림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들어올려지 는 어린애 쪽인 건 싫단 말이야~!! "으악!! 내려 줘!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은. 카류가 너무 좋아서 그러는 거지." "허허허헉!! 제발 그만둬! 내려달라니까! 우리 루브 형 착하지? 부탁이야, 응?" "싫어." 루브 형은 나를 자신의 목 쪽으로 끌어당겨 꼬옥 안았다. 갑자기 왜 저러 는 거지? 어찌됐든 정말 닭살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제발 내려줘라, 형님아!! 그러나 루브 형의 엽기 행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으니... 형이 나의 이마 에 쪽하고 키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혀엉!!" 나는 진짜 정원이 떠나가라 괴성을 질렀다. 그때서야 루브 형은 나를 땅으 로 내려주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받아 그 자리에 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바로 뒤에서 세라 누나가 다가왔다. "카류야. 고마워." 누나는 내 머리를 감싸 안더니 또 이마에다가 키스를 했다. 이런!! 감 잡았다. 분명 장례식 때 자신들을 위로했다고 고마워하는 것이리 라. 가장 작고 어린 막내 동생에게 위로 받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래도 왜 이런 식으로 고마움의 표시를 하는 거야?! 설마 이제까지 내가 자신들 에게 이런 식으로 애정 표현을 해와서 형제들도 지금 이러는 걸까? 허헉,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자승자박이라는 거구나!! 세라 누나가 떨어지자 이번엔 미르 누나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으으윽!! 날 한번만 더 안으면 진짜 가만 안 둘 꺼야!!" 나는 뒷걸음질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쪼끄만 내가 무슨 힘이 있겠 냐. 으아악!! 싫어어어.... "후훗. 카류는 작아서 이렇게 안으면 내 품에 포옥 들어오는 걸? 아이, 귀 여워. 언제나 먼저 안으려고 달려들었으면서 왜 안지 말라는 거야?" 그야 내가 안는 게 좋지, 안기는 건 싫어!! 말로 들으면 한 단어 차이에 불 과하지만 실상 그 둘 사이엔 차원과 차원의 거리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갭이 있다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키워왔던 애들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아~! "어쨌든 싫어!! 놔줘~! 싫어싫어~~!!" "이번엔 내 차례야. 카.류.리.드. 므흣흣흣흣" 짓궂기로는 미르 누나 다음으로 심한 키옌 형이 국적불명의 웃음소리를 내 며 나에게로 조금씩 다가왔다. "이리 온. 카류~. 옛날에는 네가 매일 이렇게 우리들을 안고 그랬지?" "하하하. 무슨 소리야, 형. 난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는걸? 허헛! 가...가까 이 오지마!! 으아아아악!!" "꺄하하~~!!" "하하하! 보라돌이 가랏, 가랏!!!" "안돼앳! 다가오지마!!!" 결국 그들에게 당하고 완전히 널브러진 나를 카이 형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작게 말했다. "카류야... 나도... 안고 싶은데..." "카이! 뭘 묻고 앉아 있는 거야! 어서 지금 가서 덮쳐!!" "대체 뭘 덮치라는 거야. 미르 누나!"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이쪽을 바라보는 미르 누나에게 소리질렀다. 그러 나 이렇게 안기기 싫다고 난리를 피는 가운데에서도 내가 형제들에게 흐뭇 한 감동과 더 없는 애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아직 어 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모두 극복하지 못했을 텐데도 나를 위해 웃 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 어떻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너무나 상냥하고 착한 나의 형제들.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아이들이 라서 더욱 마음씨가 따뜻한가 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위에서 이 쪽을 내려다보고 있던 태양도 밝게 웃는 그들이 사랑스러웠던지 더욱 따스 한 빛을 내려주고 있었다. Part. 16 - 고대의 유적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께서 돌아가신 지도 벌써 1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나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들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을 꽤 극복한 듯 보였다. 그녀들의 죽음 이후로 형제들 중 가장 많이 울었던 세라 누나도 이젠 더 이상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어졌던 것이다. 1년의 시 간이란 건 의외로 상당한 힘을 가지는 세월이었나 보다. 그러나 나의 몸은 이런 세월의 힘에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저항력을 선보 였다. 올해로 13살이 되었건만 나는 여전히 10살 이하의 꼬맹이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 자그마한 몸집은 루브 형들과 여러 아 이들에게 유일하게 놀림받는 부분이 되었다. 특히 에르가 형은 하루에 1번 이상은 꼭 '이 발육 부진아야!!' 라고 불러주어 친절하게 나의 상태를 상기 시켜주고 있었다. 솔직히 이대로 계속 키가 안 크는 건 아닌 지 조금 걱정 되기도 한다. 보라돌이 형의 입버릇처럼 진짜 미소년(?)이 되어버릴지도 모 른다는 불안감에 뭉클뭉클 솟아오르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꼬맹이로 살아야 하나. 어릴 때야 귀엽고 좋겠지. 하지만 이 몸집으로 늙으면 정말 끔찍할 거야! 설마 진짜 이대로 안 크는 건 아니겠 지~~!!! "자,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요." 갑자기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나는 그제야 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 었다. 선생님은 내가 딴 생각을 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잠시동안 상당히 의미심장한 눈초리(?)를 하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나는 민망함에 고개 를 푹 숙이고 그 시선을 모르는 척 무시하려고 애썼다. 솔직히 모범생의 본성을 가졌다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의 내가 한두 번이라면 모를까 이렇 게 수업시간마다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 수준에서는 수업이 너무나 기초적이고 쉬워서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 가며 수업시간을 버텨가고 있었던 것이다. "흠흠, 그럼 쉬십시요." 나는 눈동자를 굴려 밖으로 나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확인한 다음 바로 밖으로 따라나갔다. 물론 내가 학교를 다니는 궁극적인 이유인 귀여운 아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카류야, 왔구나." "응! 모두 벌써 와있네?" 나는 친구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했다. 수업을 마치면 나를 포함한 친구 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 것 같이 휴게실이 모여 잡담을 했다. 그렇게 오늘 도 평소처럼 그곳에 앉아 느긋하게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유적?" "응, 아직 쉬쉬하는 분위기지만 고대 마법 문명의 잔재가 새로 발견되었다 고 해." "그래, 나도 들었는데 남부의 리아 영지에 있는 호티나 산맥 근처라고 하 더라. 그곳에 계속 중요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왔다갔다했었다지, 아마?" 후크와 카멜은 잘도 그런 국가기밀을 재밌다는 듯 재잘거리고 있었다. "후크, 카멜. 그런 국가적인 기밀을 너희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야. 내가 누구냐? 쟈스칼 상단의 외동아들 후크가 아니겠냐? 비록 우리 집이 귀족 가문은 아니지만 아르윈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거 대한 상단이다 이 말씀이야. 원래 상인들이 그런 소문의 입수가 빠르지. 소 문 듣는 게 빨라야 장사를 잘 해먹을 수가 있다고." "맞아. 장사에는 가장 필수가 정보지! 정보가 느리면 아무 것도 못해. 나도 그런 연유에서 알고 있었던 거야. 우리 힐튼 상단도 쟈스칼 상단만큼은 아 니지만 굉장히 크다고." 후크와 카멜은 아르윈에서도 유명한 대 상단의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대단 한 집의 아이들이 아니면 엄청난 기부금을 요구하는 파블료프 학교에 쉽게 입학 할 수 없는 것이다. 권위적인 귀족 아이들이 평민을 무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학교에 다니는 평민들은 여느 시시한 귀족들보다 훨씬 대단한 인물들이다. "음... 그렇구나. 히노 선배. 선배도 알고 있었어요?" "......." "알고 있었다고요? 끙... 왜 나만 이렇게 정보가 느리지? 솔직히 이런 건 국가기밀이니 언제나 왕궁에서 먹고사는 내가 제일 먼저 알아챘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유적이 발견된 곳이 리아 영지잖아. 그러니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인 히노 선배가 모를 리가 없지. 안 그래?" "아직 리아 가문의 가주도 아닌 히노 선배가 어떻게 일일이 그걸 알겠어? 이건 정보 수집력 문제라고." 고대의 유적이라.... 이곳 이르나크에는 지금으로부터 2~300만년 전에 무서울 정도로 고도로 발 전된 마법 문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땐 도 저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 이런 미개한 상태의 이르 나크 세계를 보고 그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느 나라에나 신화는 있기 마련이니 말이다. 그러나 몇백 만년이 지나도 그 물체를 썩지 않게 하는, 현재의 마법력으로 는 흉내도 낼 수 없는 엄청난 마법인 이른바 보존 마법이라는 것으로 지금 까지 파손되지 않고 내려오고 있는 고문서라던가 이번처럼 간간이 발견되 는 유적의 유물, 아티펙트 등을 통해 그 것이 사실이라고 입증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고대문명이란 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토이렌 세계에서의 인간이 기원이라고 불려지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의 탄 생이 약 300만년 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곳 이르나크에서는 그 당시 인간이 벌써 문명을 발전시켜 대 마법국가를 건설했다니, 나로서는 정말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거의 원숭이처럼 미개하게 살고 있을 때 저 들은 마법을 펑펑 써대며 살아가고 있었다는 뜻이 아닌가. 아마 이곳 이르 나크 세계의 인류의 기원은 토이렌 세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모 양이다. 그러나 그때부터 그렇게 수십, 수백만 년을 번성하면서 대부분의 생명체들 을 지배했다는 인간들의 마법문명이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순간에 망 해버렸다. 인간은 더 이상 모든 생물의 패왕이 아니게 된 것이다. 모든 이 들이 마법을 사용하여 비, 바람 마저 조종했다고 하는 마법국가 시대와는 달리 인간들은 더 이상 어떤 마법도, 토이렌과 같이 도구를 사용하지도 못 하는 무력하고 미개한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가장 강력한 힘을 자랑하는 마법생물인 드래곤과 오크, 엘프, 드 워프 등의 유사인종들, 그리고 몬스터라고 불리는 이상한 생물들이 시대의 전면에 출현하기 시작했다. 보통 그들은 인간들보다 뛰어나고 오랜 세월을 사는 데다가 대부분 인간을 적대했기 때문에 인간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져 숨어살며 겨우 생을 연명했다고 한다. 실은 난 언제나 성안에서만 처박혀 살았기 때문에 아직 그런 유사인종이라 는 생명체들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런 게 실제로 존재한다니 믿 어지지가 않는다. 어쨌든 끈질긴 노력 끝에 지금과 같은 인간들의 시대가 어느 정도 다시 돌 아오기는 했지만, 고대 마법 문명 시대의 영광이 돌아오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 것이다. 가끔씩 이번처럼 발견되는 고대 유적을 통해 알 아낸 연구성과로 조금씩 마법을 쓰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긴 하지만, 알다 시피 여전히 마법사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마법문명이 망하지 않고 계속 발전을 거듭했다면 이르나크는 토이 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된 문명 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 고 어쩌면 이르나크에서 미개한 토이렌 세계를 정복하고 식민지화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르나크 세계에서는 토이렌 세계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까 마법 이 계속 발전했다면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 아 닌가. 어쩌면 아직 발견되지 않아서 그렇지 과거에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 가는 일이 가능했을는지도 모른다. 이런 걸 생각하니까 갑자기 더욱 유적에 대해 궁금증이 커지는 걸? 진짜 토이렌 세계에 넘어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생의 부모님을 다시 한번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이제는 전생에 대한 생각을 아무리 해 도 우울해지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데 마 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근데 의외로 거기에 별건 없었다고 그러더라?" "맞아. 축 늘어져서 돌아가는 마법사들을 봤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더라 고." "그래? 고대유적이란 대체 어떤 걸까. 나도 한번 보고싶다. 우리 아르윈 왕 국에서 그런 유적이 발견되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 않아?" 고대 유적은 정말 중요한 나라의 재산으로 아무나 들여보내 주지 않는 곳 이다. 여러 가지 귀중한 마법 자료나 문서 등이 발굴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유적이 별거 아니었다고 하니 국왕에게 조르면 나도 거기에 가 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그렇게 잠시 딴 생각을 하는데 히노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 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듯 한데 대체 뭘까. 이렇게 아무런 단서 없이 눈만 빛내면 나로서도 알 수가 없다고요, 선배. "왜 그래요, 히노 선배? 유적하고 무슨 관련이 있는 일이라도 있나요?" "히노 선배가 하고 싶은 말을 나는 알고 있지. 카류." "물론 이 몸도 알고 있다 이 말씀이야. 이번엔 우리가 너에게 통역해줘야 할 차례로군. 후후훗. 가르쳐줄까~ 말까아~?" 거참. 귀여운 녀석들. 그들은 이제 14살이 되어 상당히 성장한 상태이지만 12살 때부터 계속 돌봐주며 지켜보고 있자니 여전히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었다. "크흑!! 카멜. 여전히 하는 짓이 귀엽구나! 아우~~ 귀여워!!!" "으헉! 떨어져!! 카류!!" 내가 마구 껴안고 난리를 치자 카멜은 금방 기겁을 하고 나를 떼어냈다. 카멜의 손길에 강제로 떨어져 나온 나는 카멜을 안았던 손을 물끄러미 바 라봤다. 이제는 그들을 양손으로 안기도 꽤나 힘들었던 탓이다. 이제는 완전히 다 컸네. 세월이 원망스럽구나. 왜 내 키는 안 키워주고 저 귀여운 아이들의 키만 키워 주냐고!! "그냥 말해줄 껄 괜히 장난을 쳐서 또 한번 당하는군. 카류야. 너 제발 그 러지 마라. 나보다 훨씬 작은 주제에 왜 자꾸 남을 귀엽다면서 껴안는 거 야? 너무 안 어울리니까 제발 그 짓 좀 그만두라고!!" "쩝... 귀여워서 귀엽다는데 되게 그러네. 그래서 히노 선배가 말하려 했던 것이 뭔데? 어서 말해 줘." "카멜. 저 녀석은 저게 불치의 병이야. 괴롭지만 마음 넓은 우리가 이해하 도록 하자. 그리고 카류, 뭐냐하니 말이야. 우리 파블료프 학생 중 일부를 그 유적에 견학을 가도록 할 생각인가 봐." 난 귀가 번쩍 뜨였다. "견학? 정말? 정말이야? 일부라니 누구를 보내는 건데? 설마 상급생만 보 내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 그렇다고 이야기해, 후크~!" "그...그래. 상급생이 아니고 대 귀족이랑 우리 같은 대 상단의 아이들만 보 내도록 할 생각인가 봐. 그래봬도 그게 국가적인 기밀이라고 아무나 들여 보내 주진 않을 모양인 거 같더라고?" 우오오옷! 그렇다면 나도 갈 수 있다는 말이겠지? 야호!! 바라던 일이 금방 현실로 이루어졌네? "그런데 너도 갈 수 있을까. 저번에 왕비 님과 제1후궁 사건... 음 미안... 카류... 어쨌든 그 일 때문에 넌 지금까지도 굉장한 보호를 받고 있잖아. 하 마터면 학교도 다니지 못할 뻔했었고 말이야." "헉! 그...그럴지도!!" 확실히 나는 그 사건 이후로 엄청난 과보호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교엔 더 이상 보내지 않겠다는 국왕을 통사정에 반 협박까지 해서 겨우 말리긴 했 지만 나의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를 왕실 직속 기사단 출신의 기사들로 무 려 5명이나 붙여서 학교에 보냈던 것이다. 저번과 수가 같다고 별거 아니라고 생각지 마라. 왕실 직속 기사단은 정말 대단한 엘리트들이다. 왕궁 기사단에서도 추려내고, 걸러내서 뽑힌 기사들 로 그 실력은 왕족 호위기사와 맞먹는데다가 기사단 자체의 사람수도 겨우 3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가장 가엾은 건 그 기사 아저씨들이다. 겨우 애 마중하려고 죽 도록 검술 실력을 쌓아 왕실 직속 기사단이 된 것은 아닐텐데 말이다. 많 지도 않은 아까운 엘리트 기사들의 능력을 이런 식으로 낭비시키다니 바보 국왕 같으니라고. 에렌시아 님들 일은 사고가 아니었냐고! "절대로...절대로!! 가고야 말 테다!! 나의 이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아버 지를 설득시키고야 말리라!!" 나는 벌떡 일어나서는 한 손을 불끈 쥐고 그렇게 외쳤다. "...국왕폐하께서 힘드실 거 같다." "가엾으신 국왕폐하. 히노선배. 우리 폐하의 명복을 빌어드리자고요." "......" 옆에서 혀를 차는 아이들을 무시하며 나는 고대유적을 향한 집념을 불태웠 다. 달그닥. 달그닥.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내가 탄 흑마의 갈기를 흩날리고 있었다. 이 흑 마는 검은 빛 갈기와 검은 눈동자가 너무 멋져 보이는 정말 잘생긴 녀석이 었는데 생긴 것 답지 않게 굉장히 온순하여 국왕이 나에게 하사해 준 것이 다. "윽윽윽윽..." 그렇게 멋진 말을 타고 길을 나아가고 있었으나 -물론 혼자 탄 것은 아니 고 내가 워낙 조그만 관계로 디트 경이 함께 탔다.- 나는 조금도 즐거운 기분을 느낄 수가 없었다. 마차를 타면 무시무시한 멀미를 하는 나로서는 그 대안으로 말을 타길 원 했다. 처음 승마 연습을 했을 때는 그냥 할만 하기에 나는 마차 대신 먼 여행을 위한 교통수단으로 쓰려 했던 것이다. 어머니가 엄청나게 만류했지 만 아주아주 온순한 말을 얻는 것으로 겨우 말을 타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게 웬일. 이제 겨우 3경(3시간)이 앉아 있었는데도 엉덩이가 얼마 나 아픈지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자전거도 오래 타면 이렇게 엉 덩이 아팠지 않았던가. 왜 그것 기억 못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계속 머리 가 아래위로 흔들려서 이제는 띵한 느낌마저 든다. 결론적으로 말은 오래 탈것이 못된다는 거다!! 어쩌면 내가 아직 조그마한 아이의 몸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금방 아픔을 느끼는 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윽윽윽윽..." "그러게 마차를 타자니까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세니?" 내가 계속 신음소릴 내뱉자 카멜이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흔들리는 말 위에서 말발굽에 박자에 맞춰 윽윽 소리를 내면 서 겨우 말을 이었다. "내버려 둬, 그...그래도 이게 마차보다는 훨씬 나아...윽!" "이 발육 부진아야!! 네 주제에 말은 무슨 말이냐?!" 에르가 형이 나를 향해 소리치자 주위에서 우리를 호위하고 있던 기사들이 쫘아악 형을 째려보았다. 애들이 한 말인데 저렇게 나올 것까지야. 그건 그 렇고 에르가 형도 참 대단하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왕자한테 저런 소리를 하다니 말이다. 역시 깡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에구.... 아파 죽겠네.... 에구에구...언제쯤 리아 영지에 도착할까." 나는 끙끙거리며 앞으로 가야할 길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지금 고대 유적 지를 향해 리아 영지의 호티나 산맥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끈질긴 설득으로 국왕은 마지못해 나의 여행을 허락해주었다. 이번에는 어머니마 저 결사적으로 반대를 했기 때문에 나의 이 설득 공작이 얼마나 어려웠는 지 그 사연을 밝히자면 하루 밤으로는 모자랄 정도다. 지금 우리가 향하고 있는 리아 영지는 전에도 한번 설명했듯이 굉장히 넓 고 비옥해서 영지만으로 따진다면 리아 후작 가는 최고의 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고 말이다. 나와 만나기 전에 히노 선배는 후작 가의 아이라 오만하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 는데, 사실 저만한 가문이 아이라면 오만해지고도 남을 것이다. 어느 정도 이름을 떨치고 있는 에스문드 가의 에르가 형과 나머지 아이들이 처음 만 났을 때 보여주었던 그 오만함을 생각해보면 그 사실을 처절하게 통감할 수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총 13명의 아이들이 참여를 하게 되었다. 에스문드 가의 에르가 형을 시작한 나머지 4명의 아이들도 현재 이 멤버 중 하나였다. 평민도 몇 명 끼여있었는데, 그 몇 명이 바로 후크와 카멜이었다. 훗날 아르윈 왕국의 재계의 기둥이 될 아이들이니 당연한 일이겠다.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이 여행, 좀 위험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들 엄청난 거물이 아닌가? 어떤 의미로 이들은 나보다 훨 씬 더 대단한 녀석들이다. 나는 왕족이라 할지라도 겨우 제6왕자일 뿐이니 까. 어쩐지 신중한 어머니가 반대를 하더라니 이런 위험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 이었구나! 크으, 여기서 또 다시 나의 한계를 보여주게 되는군. 역시 천재 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니깐. 어찌됐든 이렇게 이번 여행은 엄청난 대 귀족의 자제들, 재벌 2세들(?), 왕 자 한 명 이렇게 총 13명의 아이들과 무려 20여명의 왕실 직속 기사단 출 신의 기사들, 20여명의 이름난 용병의 파티로 이루어져 있었다. 참으로 무 시무시한 일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저러나 머리랑 엉덩이가 정말 너무너무 아프구나. 얼른 마을에 도 착했으면 소원이 없겠다. "에구...윽윽... 아우... 아파라...흑... 도대체... 마을은 언제... 도착인 거지?" "힘드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아직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았기 때 문에 다음 마을에 도착하기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카류 님." "윽윽... 아...알고 있어. 디트 경. 그냥 아파서 괜히 혼자 중얼거리는 것뿐이 니... 윽... 그냥 내 말엔 신경 쓰지 마... 윽윽윽..." 그러나 내가 아무리 그래봤자 신경 안 쓸 수가 없을 거다. 왕자가 아프다 고 칭얼대는데 얼마나 신경이 쓰일꼬. 그러고 보니 앞서가는 용병 아저씨들이 전부 한번씩 나를 째려보고 있었 다. 물론 그들이 왕자인 나를 직접적으로 째린 것은 아니고 분위기로 그렇 다고 느낀 것뿐이지만 나를 마음에 안 들어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꼬맹이 주제에 괜히 억지를 부려 말을 탄 다음 여행길 동안 계속 아프다고 칭얼거리니 나 같아도 짜증나겠다. 그래도 너무 아픈 걸. 입으로라도 이러고 있으면 조금 낫단 말이야. "저... 있죠... 윽윽... 제가... 마차 멀미를 해서...말을 타려 했던 거거든요?... 윽윽...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시끄럽게 굴더라도...좀 봐주세요...아저씨들... 윽...아우..." "카류 님!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겨우 용병에게 존댓말을 쓰실 필요 는 없습니다. 거기 너희들!! 전하께 제대로 대하지 못하겠는가!" 헉!! 디트 경은 왜 저렇게 고지식한 거야. 그러면 역효과가 아니냐고. "아유, 디트 경!! 으윽. 그러지 마... 신경질 날만도 하잖아. 에구... 내가 좀 칭얼거렸어야지. 근데... 흔들리는 건 마차보다 말이... 윽... 더한데 왜 마 차...에서만 멀미를 하는...아흐흑!!" "카류 님!?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야? 카류. 왜 그래??" "...말 하다가 혀 깨물었어...흑...아파..." "푸하하하핫! 바보 같은 녀석!" 크흑! 에르가 형!! 아이고 아파라. 이번엔 기사들이 째려도 도와주지 않을 테다. 이주일 간의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리아 영지의 호티나 산맥 근처에 도착했 다. 워낙 대단한 인원에, 잘 닦인 길을 타고 내려왔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그 흔한 오크 -사람들이 긴 여행을 하다보면 꼭 한번씩 만나는 포악한 유 사인종이라고 책에 쓰여있었다.- 한번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편안한 여행 길이었건만 난 말을 타고 지금까지 오느라 거의 초죽음 상태(?)였다. "아이고~ 삭신이야... 아이고 나 죽네...아고고고고..." 내가 허리를 툭툭 치며 골골거리자 곁에서 나를 보던 딜티가 한마디 해왔 다. "이구... 넌 어찌 쪼끄만 게 그렇게 애늙은이 같은 소리만 하냐?" "카류 님. 힐링포션을 쓰시지요. 장거리 여행은 카류 님께는 아직 무리였던 것 같습니다." "...응? 나 멀쩡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허리를 반짝 펴고 국민체조를 하며 디트 경에게 멀쩡하다는 것을 보 여주었다. 힐링포션이란 일종의 아티펙트 같은 것으로 마법사들이 힐링이라는 치료마 법을 액체로 가공하여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쓸 수 있게 만들 어 놓은 치료약이다. 말이 힐링을 액체로 만든 거란거지 마법을 액체화시키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있는가? 이것도 고대 유적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지식 중 하나로 단지 포션을 만드는 방법만을 알 뿐, 대체 어떤 원리로 힐링이 이렇게 액체화되 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힐링은 6서클의 마법으로 웬만한 상처는 금세 낫게 해주는, 마법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신기하게 여기는 8서클의 리커버리를 제외한 유일한 치료 마법 이다. 사실 6서클의 마법사가 많이 존재한다면 상처 때문에 죽는 사람은 웬만해서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6서클 이상의 마법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가 적다. 생명의 궁에서 고위 마법사라고 불렸던 몇몇의 할아버지들이 바로 6서클 이상의 마법사들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힐링포션을 만들 수 있는 6서클 이상의 마법사의 수가 적은 데, 보통 아티펙트들이 그렇듯 이 힐링포션도 하나를 만드는데 굉장히 많 은 시간과 노력, 섬세한 마법 작업이 필요로 한다. 때문에 힐링포션은 그 수가 굉장히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 힐링포션이 얼마나 비싼지는 상상에 맡겨두지. 하지만 보통 1, 2서클의 마법을 가공하여 만든 아티펙트도 커다 란 저택 한 채 값을 호가한다는 것만은 알려두고 싶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런 살 떨리는 소리를 하다니 디트 경도 역시 귀족인 것인가. 이 비싸고 귀한 힐링포션을 겨우 신경통(?)에 쓰려 하다니!! "하나 둘, 하나 둘... 허헉! 으윽...!!" 나는 힐링포션을 사수하자는 취지로 잠시 오버를 하다가 그만 허리를 삐끗 해버렸다. 말의 등을 붙잡고 눈물을 머금고 있는 내게 디트 경이 걱정스레 말을 건네 왔다. "카류 님. 그냥.." "도착이 조금 늦었네? 견학은 내일부터 해야하는 건가?" 나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디트 경이 나를 걱정해서 이렇게 해주는 것은 싫지 않았지만, 그렇더라도 이런 식의 무시무시한 낭비를 할 정도로 내 금전감각이 둔해진 것은 아니었다. "...유적 근처에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하멘이라는 깨끗한 중소 도시가 있 습니다. 오늘은 그곳에서 쉰 후에 그곳에서 유적에 대해 잘 아는 학자를 만나 내일 이 곳을 둘러 볼 예정입니다." "흐음... 그렇다는 건 아직 말을 더 타야 한다는 거네." "...네." 크흑!!! 다 왔다고 생각했건만! 내 팔자야~! 우리는 하멘이라고 불리는 도시에서 하룻밤 여관에서 쉬고 난 후, 다음날 아침 여관에서 묵고 있던 학자의 안내를 받아 고대의 유적지에 도착했다. 나뭇가지들 사이에 교묘히 숨겨져 있었지만 조금 더 들어가자 커다란 동굴 의 입구가 보였다. "여기가 고대 마법 문명의 유적지입니다. 지금까지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 었던 듯한데, 어느 날 마법사가 이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마나의 파동을 느끼고 발견했습니다. 너무 세월이 많이 지나 아마도 마법이 불안해져서 이렇게 저희들의 손에 발굴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와... 여기가...." 유적지 입구에서 그곳을 관찰하며 난 입을 벌렸다. 겉에서 보았을 때 그 동굴은 그 크기와 깊이가 엄청나 보였기 때문이다. 동굴의 벽면에 일정 간 격으로 횃불을 꽂아두었는지 뭔가 어른어른하는 빛이 보였는데 그 빛으로 이루어진 줄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 들어가지 마십시오. 동굴의 깊은 곳에는 약하지만 적은 수의 몬스터 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냥 들어가시면 안됩니다." 응? 몬스터가 있다니... 위험하다. 위험해. 나는 학자의 말에 한발자국 앞으로 내딛은 발을 다시 원상복귀 시켰다. "이곳에서 여러 학자들과 마법사들이 연구를 거듭해본 결과 이곳은 고대인 들이 사용하던 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길이라고? "길이라니 무슨 말이예요? 이건 그냥 동굴이잖아요? 던전 같은 것이 아닌 가요?" "설마... 산을 가로지르는 동굴인가?"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설명을 하던 학자는 나를 쳐다보며 놀란 듯이 말 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아셨지요? 그렇습니다. 고대인들은 경이롭게도 이 험한 호티나 산맥을 건너는 대신 산의 아래에 일직선으로 구멍을 뚫어 다녔던 것입니다!" "아니! 그럴 수가!!!"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감탄의 소리를 질렀다. 그 정도야 전생의 토이렌 세 계에서도 얼마든지 있던 일인걸.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동굴은 보통 사람들이 걸어서 약 2주일정도나 걸릴 만큼 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통과하면 바로 에이브레 시 근처까 지 갈 수 있게 되지요! 보통 이 험한 호티나 산맥을 넘어 하멘 시에서 에 이브레 시까지 가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3주일 이상은 걸리는데 말이죠!" "헉!" 이번에는 나도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2주일이나 걸릴 만큼 긴 터 널을 뚫었다고? "아마도 이곳 하멘 시와 에이브레 시는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생활 터전이 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대단한 터널로 이 두 도시 를 연결했을 리가 없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더라도 고대인의 힘은 정말 경 이라는 두 글자로 밖에 설명할 수 없을 듯 싶군요." 우리에게 설명을 하는 학자는 황홀하다는 듯이 자신의 말에 도취되어 이야 기를 계속해 나갔다. 아닌게 아니라 나도 너무나 놀랐기에 그 학자의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정말... 놀라운 일이군요. 고대 마법 문명이 이 정도까지였을 줄이야..." 진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이곳 이르나크 세계의 고대 마법 문명이 내 가 전생에 살았던 시대의 토이렌 세계의 과학 문명보다도 훨씬 뛰어났다는 사실을. 내가 건축 관계의 일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2주일 이나 걸리는 거리로 산을 뚫기는 지금 내가 살았던 토이렌의 문명으로도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귀족 분들이 이렇게 길고 위험한 여행을 시키면서까지 여러분들을 이곳에 견학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것은 다음세대에 이 나라를 이끌어갈 여러 분께 이런 위대한 문명을 경험을 하게 해드리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판단 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제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말이에요." 아무래도 저 학자 아저씨의 말이 옳은 듯 싶다. 글로 읽는 것과 눈으로 보 는 거랑은 정말 천지차이다! 정말 감동했다고 할까? "이런 식으로 산을 뚫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모든 이들이 비행 마법을 쓸 수 있었다고 전해지는 고대인이 무엇 때문에 이런 동굴을 만든 것일까 요."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단지 길이 뚫려있을 따름이었을 뿐 아무런 단서 도 발견되지 않았으니까요. 이주일 정도 되는 길을 계속 비행마법을 사용 하기가 힘들어서 그랬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심심풀이로 이것을 뚫었을지 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하..." 학자 아저씨는 장난스럽게 마지막에 한마디 덧붙였지만 정말 그럴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곳 하멘 시에서 에이브레 시로 가는 길 을 뚫었다면 산을 똑바로 직각으로 관통한 것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비스듬 히 뚫었다는 소리가 된다. 산을 뚫는 대단한 작업을 한다면 최대한 짧게 뚫으려 애썼을 텐데 그들은 그런 것쯤은 장난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비스듬하게 뚫어서 이주 일이나 되는 길다란 터널을 만든 것이다. 심심풀이든 아니든 그들의 능력에는 정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겠다. 나는 어서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들어가 보고 싶군요. 괜찮을까요?" "그럼 질서정연하게 다녀주셔야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는 적 은 수이지만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으니까요. 사실 그렇게 위험한 놈들도 아닙니다. 실제로 이곳을 조사했던 사람들 중 단 한 명의 부상자도 없었거 든요. 게다가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몬스터는 이렇게 동굴입구 근처엔 서 식하지도 않지요. 그래도 신중을 기하는 것이 좋겠지요. 여보게, 용병들. 자 네들이 앞장 서주셨으면 좋겠군. 이런 몬스터를 잡는데는 기사들보다 그대 들이 전문가일 테니까."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용병들의 리더로 보이는 자들의 지시에 따라 맨 앞에 3명의 용병이, 그리고 아이들 사이에 2명 정도 용병이 끼어 들었다. 그리고 뒤쪽에 나머지 용병들이 섰다. "솔직히 이곳에 사는 몬스터들은 굉장히 약한 놈들이라 저희 5명만으로 충 분합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앞에서 공격해 나오는 놈보다 뒤에서 튀어나오 는 놈이 더 처치하기가 곤란합니다. 그래서 일단 대부분의 용병들을 뒤쪽 에 서도록 한 것입니다. 기사 분들은 저희 용병들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시 기를 바랍니다. 학자 님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일단 몬스터는 저희들 쪽이 전문이니 일단 이곳에서 이분들의 호위는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만에 하나 라도 있을 불행한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저희 말을 따라주십시오." 용병의 대장으로 보이는 중년아저씨는 숙련된 안내원 아가씨처럼 능숙하게 말하고는 앞장섰다. "디트 경도 뒤쪽에서 따라와 줘. 이런 장소에서는 잘 아시는 분들의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 같아. 그리고 나만 괜히 특별 취급하는 것도 조금 그렇 고 말이야." "...음. 알겠습니다. 확실히 그들은 이곳에서 자주 학자들을 호위하기도 했 었고 실력만은 믿을만한 일류용병이니까요. 그럼 전 다른 기사들과 함께 뒤쪽에 가 있겠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카류 님. 그리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는 소리를 치십시오." "에이, 무슨 일이야 있겠어? 어쨌든 뒤로 가 있어 줘. 걱정해줘서 고마워." 나는 디트 경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고 용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맨 앞에는 세 명의 가장 강해 보이는 용병아저씨 3명이, 그리고 그 사이로 우리 어린애들 13명과 학자 아저씨가 하나, 그리고 역시 강해 보이는 용병 이 2명이 하나의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다. 우리들의 뒤로는 나머지 15명 의 용병이 따라오고 있었는데, 뒤쪽으로 바싹 붙어 경계를 하긴 커녕 저만 치나 거리를 두고 잡담을 하며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태 도를 보아하니 이곳의 몬스터가 확실히 약하긴 약한 모양이다. 그리고 가 장 뒤쪽에는 미적거리는 용병들로 인해 아직 동굴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나머지 기사 20여명이 웅성대고 있었다. 50명이 넘는 대인원이다 보니 우리 일행은 상당히 긴 행렬이 되었다.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곳이라는데 호위가 대단하기도 하다. 쿠르릉~~!!! "...!! 뭐...뭐야?!" 우리 일행의 대열을 확인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놀라 소리 쳤다. 콰쾅!! 순식간의 일이었다. 갑자기 동굴의 입구가 커다란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 리고 있었던 것이다. 무너진 동굴 바위의 파편에 깔려 죽어 가는 용병들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나의 귀를 강타했다. 갑자기 왜?! 수백만 년간 온전하게 유지됐던 동굴이 왜 하필 지금 무너지 는 거야?! "도망쳐! 안으로!! 안으로 뛰엇!!" 맨 앞에 서있던 용병대장 아저씨가 소리를 질렀다. 동굴의 무너지는 속도 는 우리들이 걸음보다 훨씬 더 빨랐지만 뒤쪽의 용병들과는 달리 우리들은 이미 안쪽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기에 안으로 도망치면 깔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뛰어야해!!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린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뛰기 시작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나의 눈에 일행 중 가장 뒤쪽에 서있던 아이가 소리만 지르고 주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맙소사! 어서 뛰어!!" 나는 빠르게 그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낚아채서 곧 장 동굴 안으로 뛰려했다. 그렇지만 생각 이상으로 나의 몸은 힘이 약해서 패닉상태인 그 아이를 일으키는데 완전히 역부족이었다. 나는 어떻게든 공 포에 질린 아이를 일으키려 낑낑거렸다. 그러나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 그런 짓을 하고 있을 시간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나는 그만 도망칠 타이 밍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커다란 바위가 바로 나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고 내 몸으로 아이의 몸을 감쌌다. 죽는다!! 순간적으로 그 말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별로 큰 감흥은 없다. 다시 태 어날 테니까.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운 좋으면 구하고 아니면 그냥 죽 기밖에 더 하겠냐는 생각을 하고 정의의 사자인양 이 아이를 구하려고 도 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뻔히 눈뜨고 이 아이가 죽도록 내버려두 는 것도 꽤나 찜찜한 일이 아닌가. "아플 꺼야!!!" 나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상당히 긴장감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내 머리에 든 생각은 이것뿐이란 말인가? 아, 정말!! 최후의 순간에 어울리 는 좀 더 멋있는 말도 있잖아. 이왕 죽을 거면 좀더 멋들어지는 말을 했으 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훗날 아이들이 커서 나에 대한 일을 회상할 때 그 녀석은 아플 꺼야 라는 비명을 지르면서 죽었다는 이야길 하겠지? 아, 쪽 팔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좀 더 멋진 말을 하고 죽고 싶어. 다음 생 에 또 다시 기억을 가지고 환생을 한다면 꼭 죽기 직전에 할말을 생각해 놓아야겠다... "......" "......" ......왜 이렇게 안 아픈 거지. 상당히 많은 생각을 주절주절 떠들어 댄 것 같은데 말이야. 혹시 아플 새도 없이 즉사해 버린 걸까? 우와, 정말 행복하 게도 죽었네. "카류리드!!!!!" "응?" 나는 누군가가 익숙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번쩍 눈을 떴다. 죽지 않은 것일까! 내 머리 위로 짱돌도 아니고 내 몸통보다 세배는 더 큰 바위가 떨 어졌는데!?! "어서!! 어서 이리로 와! 카류리드으~~!!" 마치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본 나는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의 주위에 뭔가 반원 모양의 커다란 둥근 막 같은 것이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 팔찌, 팔찌다. 내가 생명의 궁에서 나올 때 마법사들에게서 선물로 받 았던 아티펙트 팔찌의 보호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내가 큰 충격이 올듯하 면 저절로 발동하게 되어 있었나보다. "뭐 하는 거야! 빨리 이리로와!! 카류! 카류야아!" 보호마법의 영향으로 보이는 하얀 반구형의 원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 다. 그리고 원의 위쪽으로 바위들이 당장이라도 떨어질듯이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내 품의 아이를 끌고는 기듯이 반구 안에서 벗어났다. 내가 반 구 안에서 어느 정도 떨어지자 그 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파앗 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바위들이 큰 소리를 내며 무너져버렸다. 바로 앞에까지 커 다란 바위들이 떨어져 내렸고 나의 몸 위로 작은 돌덩이와 모래가 우수수 떨어졌다. 까딱했으면 빠져 나오다가 깔려죽을 뻔했네. 그럼 엄청 황당했겠지. 일단은... 산 건가... "카류리드! 카류!! 이 멍청한 놈!! 네가 죽는 줄만 알았단 말이야! 네가 무 슨 정의의 용사라고! 이 나쁜 놈아!!" 갑자기 후크가 달려와서 나를 안고는 소리질렀다.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 벅이 된 상태였다. "뭐, 이런 녀석이 다 있어?! '아플 꺼야' 라고? 당연히 아프지!! 이 바보 같 은 자식! 멍청한 자식!!" 카멜 역시 나에게 다가오더니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카멜도 약간 글썽거 리고 있는 걸 보니 나 때문에 굉장히 놀랐던 모양이다. "하하하... 운이 좋네? 팔찌에 보호마법이 걸려있었지 뭐야. 깜빡 잊고 있었 는데 생명의 궁에서 나올 때 일회용 보호마법이 걸린 아티펙트를 받은 적 이 있었거든." "......!!" 문득 내 앞에 온통 눈물로 그 귀여운 얼굴이 엉망이 되어 서 있는 히노 선 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선배는 꼭 책망이라도 하고 싶은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모두를 내가 울려버렸네. 하긴, 나는 스스로의 죽음을 상당히 가볍게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겠지. "에구,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하하하... 그래도 이렇게 살았으니 됐죠, 뭐. 안 그래요?" "시끄러워! 이 바보야! 카류리드 이 바보!! 멍청이!!" 후크는 나를 더 꼭 안고 소리쳤다. 의외로 이 녀석 엄청 감수성이 예민하 구나. 그래도 이렇게까지 슬퍼해 주는걸 보니 정말 찡한걸? 이렇게 귀여운 애들이 슬퍼하는걸 보니까 앞으론 조금 내 목숨에도 신경을 쓰는 편이 좋 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뭔가 말이 이상하네? 하하하. "살아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왕자 전하... 하지만 지금 상황이..." 아이들과 함께 눈물의 재회(?)를 하고 있는데 용병 대장 아저씨가 다가와 나의 뒤쪽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대장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 아본 나는 약간 멍해져 버렸다. 나의 바로 코앞까지 거대한 돌들이 입구를 그대로 메우고 있었다. 도저히 인간의 힘으로 치우는 것은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많은 바위들이 우리들이 나가야 할 입구를 완전히 막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또... 갇혀버린 건가?" Part. 17 - 고립 바깥 세상으로 통하는 입구는 무심한 돌덩이들에 의해 완전히 가로막힌 상 태다. 겨우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판단이 섰는지 아이들은 모두들 불 안감에 휩싸여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나...나 봤어!! 우리가 들어올 때 아직 기사들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던 걸!! 그래, 조금만 기다리면 기사 아저씨들이 돌을 전부 치우고 들어올 꺼 야!" "너 바보냐?! 이 크고 무거운 돌들을 기사들이 어떻게 전부 치우고 온단 말이야!?" "마법사! 마법사가 오면 되잖아? 마법사가 공격마법을 써서 입구에 구멍을 뚫는 거야. 그러면 되잖아. 안 그래?" "확실히 기사들이 사람들을 모아 이걸 치우는 건 무리로군. 그리고 6서클 의 공격마법을 두 번 정도 날리면 저 바위들이 부서질지도 모르지. 대신 또다시 동굴이 무너질 거야.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바위들만 예쁘게 없 애서 길을 뚫을 수 있을 만큼 고상한 마법은 없어. 다시 말해, 입구를 다 시 뚫는 건 무리야." 시끄럽게 소리치는 아이들의 말을 내가 추가, 요약, 평가해주자 아이들은 완전히 겁에 질린 듯 보였다. "워...워프 마법은? 마법 중에는 그런 것도 있잖아. 이미 대부분의 마법사들 이 다녀갔을 테니 이곳으로 워프할 수 있을 거라고." "휴우, 워프 마법은 8서클의 대마법으로 아르디예프 님밖에 쓰지 못하는데 그분은 지금 수도에 계시잖아. 수도에 연락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전서구나 파발이 있는데, 전서구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에 연 락하기 위한 통신수단이니 국경지대도 아닌 이곳 하멘 시에 있을 리가 없 지. 그리고 그분을 모시러 파발을 띄운다해도 최소한 일주일은 넘게 걸릴 꺼야. 게다가 수도에 도착했다고 바로 아르디예프 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더욱 시간이 걸리겠지. 그리고 아무리 워프 마법이라 해도 한순 간에 이주 일이나 되는 거리를 워프할 수는 없어. 몇번의 워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하루, 이틀은 걸릴 거라고. 마법이 만능은 아니야." 마지막 희망인 듯한 의견마저 반론에 막히자 아이들은 완전히 새파랗게 질 려버렸다. 냉정하게 현 상황에 대한 평가를 내렸지만 사실 나 역시 속으로 굉장히 황당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 갇히는 것과 무슨 원수라도 졌나?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번 겪을까말까 한 일을 자꾸 당하는 것이야? "뭐야! 왜, 왜 저게 무너진 거지? 이봐!! 너! 넌 동굴 입구가 안전한지 정도 도 확인해보지 않았단 말이야?!" 에르가 형이 저 멀리서 망연히 주저 앉아있는 학자의 멱살을 쥐고는 소리 쳤다. 화가 날만도 하다. 나도 지금 정말 띵하니까. "그만해둬. 에르가 형. 분명히 이건 자연적으로 무너진 것이 아닐 꺼야. 생 각해봐. 수백만 년을 버텨온 동굴이 우리들이 막 들어오고 있을 때쯤 무너 져 버렸다는 것. 너무 타이밍이 잘 맞는다고 생각되지 않아?" "그럼 왕자님은 누구를 노리고 누군가가 일부러 이 동굴을 폭파시켰다는 것입니까? 감히 국가적 재산과도 같은 유물을?" 용병 대장 아저씨가 심히 좋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 한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나의 추측이 틀림없다면 우리 아이들 중 누군가 를 노린 것이 분명한데, 그것 때문에 용병단의 수많은 부하들이 죽고 자신 도 이런 처지가 되어버렸으니 그가 신경쓰지 말라는 듯한 밝은 표정을 짓 는다면 성인으로 추앙 받으며 온 세계를 떠돌아다니고 있겠지 이런데서 용 병 따윌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충분히 가능하지요.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전부 유명한 후작, 백작 가의 아이들이니까. 예를 들면 이들이 아닌 다른 자를 가주 자리에 앉히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수하들을 시켜 동굴을 폭파시킨다거나, 그저 아르윈 왕국 중요 인사들의 후계자를 모조리 없애기 위해서라든가, 가능성은 많지요. 게 다가 이렇게 대단한 가문의 아이들을 노리는 자들라면 엄청난 세력의 인간 일 테니까 마법사 한두 명 정도는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우리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려고? 네 녀석은 왕자잖아!! 암살이라면 네가 젤 가능성이 높지 않아?" "에르가 형! 미안한데 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제6왕자야." 내가 에르가 형을 바라보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하자 조용했던 주위가 순식 간에 더욱 조용해졌다. 또 다시 갇혔다는 사실에 약간 날카로워져서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던 거 같다. 에르가 형에게 미안해서 어쩌지? 바보같이 신경질을 내기보다는 살길을 모색해야 할텐데. 아무리 죽음에 초연해졌다 고는 해도 아직 살수 있는 길이 있는데 괜스레 죽을 이유는 없잖아? "흠.. 그래!! 먹을 것!! 먹을 것과 마실것!! 그거 가지고 있는 사람? 어서 어 서 내놔봐요!!" 내가 소리를 치자 모두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갑 자기 웬 먹을 것 타령이냐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여기에 갇혔어요! 살 방법을 모색해야지요! 고립된 곳에서 가장 필 요한 것은? 빛이에요! 빛이 없으면 사람들은 미쳐버리니까. 하지만 여기엔 횃불이 죽 걸려있고 여기 들어오기 전에 학자 아저씨가 말하길 작게 환풍 구멍이 뚫려있다니까 공기 걱정도 할 필요도 없겠지요. 빛과 공기 다음으 로 중요한 것은? 먹을 것! 먹을 거예요. 먹을게 있어야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얼른얼른 내놔봐요!! 먹을게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하니까!!" 나의 청산유수 같은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짖다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용병 아저씨가 말했다. "허.. 냉정하게 상황판단도 할 줄 아시고 그냥 보통 어린 왕자님은 아니 시 군요. 그렇습니다. 먹을 것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아무도 음식 같은 건 준 비해오지 않았습니다. 보세요, 귀족 자제 분들 13명과 용병 5명. 저기 넋빠 진 학자가 하나! 손에 든 건 저희가 든 이 칼 빼고는 아무 것도 없지 않습 니까?!" 헉! 그러고 보니!! 이럴 수가!! 나 또 굶어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런 법이 어디 있어! 말도 안돼~!! 싫엇!!! "그...그럴 수가...." 젠장! 나 자살해버릴까. 굶어 죽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잖아. 솔직히 칼로 목을 팍 찔러버리는 편이 훨씬 덜 괴로 울 거야. 그렇지만 내 손으로 스스로의 목을 찌르는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까. 차라리 아까 바위에 깔려 죽어버렸으면 좋았을걸. 젠장, 두 번이나 똑 같은 방법으로 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다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동굴 안으로 조금만 더 들어가면 음식이 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어서 어제 저녁때쯤 여러분들의 간식거 리라도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가져다 두었거든요. 그곳은 아직까지 저처럼 동굴에 심취해있는 학자들을 위해 만든 작은 캠프입니다. 그러니까 응급용 품 같은 것도 조금 있습니다!!" 넋이 빠졌다고 생각했던 학자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마구 소리쳤다. 그 말 은 나를 잡생각에서 화악 끄집어내기에 충분하고도 철철 넘쳤다. "정말인가요? 정말? 하하하!! 정말 잘하셨어요! 최고예요~!! 어서 가요. 빨 리 확인해봐야지요! 어서, 어서 가자니까요!!" 나는 호들갑을 떨면서 길을 재촉했다. 용병 아저씨들도 그때서야 기분이 조금 나아졌는지 얼굴을 펴고 함께 걸어갔다. 얼마 걷지 않아 자그마한 캠프 같은 것이 나왔다. 그 캠프에는 텐트 같은 천막과 약간 고급스러워 탁자와 의자가 무려 50개가 넘게 놓여있었다. 아 마도 우리들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부리나케 준비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저 걸 여기까지 가져다 놓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 저 일을 한 하인들에게 명 복을. "기사 님들 것까지 생각해 넉넉하게 가져다 놓긴 했지만, 어차피 금방 돌 아가실 것이라고 생각해서 제대로 된 음식이 아닌 잠시 즐길만한 과자나 마른 음식 같은 것밖에 없답니다. 죄송합니다." 학자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왜 사과를 하시는 거예요? 멋져요! 정말 잘 됐어요!! 과일이라든지 따끈한 스튜가 있었다면 정말 끝이었을 거예요! 이건 선견지명이 아닐까!!" "무슨 소리야? 나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다고!!" 에르가 형이 소리쳤다. 훗훗훗, 고립된 곳에서의 서바이벌에 관한 한 나를 따를 자가 없을 것이란다, 얘야. 너희는 갇혀서 굶어 죽어본 적 있어? "에르가 형. 지금부터 우리가 해야할 일은 뭐지? 여기서 간식이나 먹으며 누가 우릴 구조하러 오길 기다리는 것? 내가 말했지, 저 동굴의 입구를 다 시 뚫는 것은 현재 이곳의 과학기술과 마법기교로는 무리야. 그러니까 기 사들이 우리를 구하려면 에이브레 시 쪽에 있는 동굴 입구로 들어와야 해. 그런데 기사들이 에이브레 시 쪽의 동굴 입구로 가기 위해 험한 호티나 산 맥을 넘는데는 3주일이나 걸려! 게다가 우리를 찾기 위해 다시 동굴 쪽으 로 말을 타고 온다해도 1주일은 걸리겠지. 그런데 그들이 산을 넘어 동굴 반대편에서 우리를 구하러 오기를 4주일이나 여기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 자는 말이야?" "장확하시군요, 전하. 그런 이유로 우리들을 지금부터 이 동굴을 통과해야 합니다. 이 동굴을 통과하는 데는 최소한 2주일은 걸리는데 그 식량이 될 이 음식들이 물기가 많아 며칠을 못 가 썩어버린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굶 어 죽는 수밖에 없겠지요." "......" "......" 아이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그럴 만도 하다. 이런 곳에서 2 주일이나 침식을 하며 걸어서 통과해야 한다니 언제 그들이 이런 생활을 경험해 본적이나 있겠는가. "어쨌든 먹을 건 구했군요. 그런데 물은요? 마실 건 없나요?" "있습니다!! 마법사들이 자신들이 시원한 물을 마시려고 일부러 냉각 마법 걸어둔 물통을 여기다가 갔다 두었거든요. 그들이 이곳을 떠난 지 일주일 정도 되니까 아직 냉각 마법이 유지되고 있을 걸요? 아!! 물통이 저기 구 석에 있군요. 저 안에 물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오옷!! 거참 운도 좋네. 이런걸 천만 다행이라고 하는 거지! 재수 좋으면 살수도 있겠네?" 나는 구석에 얌전히 모셔져 있는 물통을 보며 기분 좋게 말했다. 운 좋게 도 물과 음식을 전부 구했으니 굶어죽을 염려는 없어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마법사 할아버지들도 이런데서 시원한 물을 마시겠다고 이런 고위 마법을 쓰다니, 참 대단하신 분들이다. 마법을 건 그 순간만 시원하게 만드 는 것이 아닌 냉장고처럼 계속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냉각 마법뿐만 아니라 7서클의 마력 보존 마법을 하나 더 써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 나 마력 보존 마법을 쓴다고 영원히 냉각 마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 마법과 상성이 잘 맞는 마법도 최고 2주일 이상은 유지되지 않는다. 어쨌든 덕분에 살았군. 사치스러운 마법사 할아버지들 사랑해요~! "자, 물도 음식도 전부 챙깁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 야지요!! 일경(한시간)이 바쁜 시기입니다!" 나는 용병 아저씨가 갈 길을 재촉하는 것을 보고 음식을 챙기려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음식을 탁자 위에 좍 펼쳤다. "맞아. 음식을 최대한도로 이용해야하니까 일단 음식을 모아봐요. 일단 분 류해야지!!" "왜 분류를 한다는 거야?" "원래 이런 상황에서는 음식이 가장 민감한 문제니까 아무렇게나 가지고 다니면서 되는대로 나눠먹으면 안돼. 정확히 19등분으로 나누어 자기 몫을 확실히 해야 극한 상황에서도 음식문제로 분쟁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이렇게 고립된 곳에서 서로 뭉쳐야지 우리끼리 싸우면 끝장이 아니겠어? 거기 학자 아저씨와 용병 아저씨들. 아저씨들은 어른이라 좀 많이 드셔야 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도 어리고 하니 한번만 봐주세요. 막판에 아이들이 불만을 터뜨리면 곤란하잖아요?" 나는 막힘 없이 줄줄 이야기하면서 음식을 종류별로 분류하여 정확히 19등 분으로 나누었다. 학자 아저씨와 용병 아저씨들은 멍한 표정으로 나의 행 동을 쳐다보기만 했다. 아까부터 어린애 -이젠 13살이나 먹었으니 어린애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작아서 어린애같이 보인 달까- 가 너무 유식 하게 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지금 죽게 생겼는데 그게 문제냐? 그런데 정말 과자들뿐이네. 애들 먹으라고 준비해 둔 거니 당연한가. 하지 만 오히려 그게 지금 상황에서는 더 낫겠지. "하하... 저같이 미천한 용병한테 그렇게 말을 높이실 필요 있으십니까. 그 리고 이런 건 언제 배우셨지요?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한 사람 같군요." 배운 것이 아니라 저절로 터득한 거지. 내가 굶어 죽으면서 뼈저리게 후회 했던 게 바로 음식을 아무렇게나 취급한 것이었거든. 그건 그렇고 존댓말이라니 정말 귀찮네. 학자 아저씨에겐 존댓말 해야 하 고 용병한텐 반말을 해야 하니까 정말 헷갈린다고. 이런 데서까지 그런 걸 따져야 하나? "됐어요! 귀찮아요! 그냥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다 존댓말 할거예 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잖아요? 얼른 이거나 보자기에 싸세요. 그리고 저 기 캠프장에 널려 있는 물통에 각자 물 담으시고요! 일경이 바쁜 때라고 말씀하신 분은 어디에 누구시더라?" 우리는 빠르게 짐을 쌌다. 음식을 19개씩 보따리에 싸서 각자 들도록 하고, 기타 응급약품은 용병과 학자가 들었다. 음식을 각자 들라고 했을 때 귀족 아이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내가 이 특유의 말발로 그대로 눌러버리고 각자 들도록 시켰다. 으이구, 이런 곳에서까지 귀족이라고 짐을 안 들겠다는 꼴이라니 정말 가 관이다. 내가 이런데 용병 아저씨들은 뭐라고 생각했을까. "으음, 검도 있네. 만약을 위해서 들고 가볼까?" "훗, 너 같은 발육부진아가 그런걸 들 수나 있겠냐? 이리 내놔, 내가 가져 갈 테니." 에르가 형은 검도 많은데 꼭 남의 집었던 것을 확 뺏어 가며 그렇게 말했 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자기도 무거울 거다. 진 검이 얼마나 무거운 데. 아니나 다를까 에르가 형은 내게서 뺏어갔던 검이 상당히 무거웠던지 괜스레 죄 없는 검을 차면서 툴툴거렸다. 에구, 여전히 하는 짓이 너무 귀 엽구나. 따라가서 꽉 껴안아 줄까? "쩝... 이게 젤 가볍네. 이걸로 가져가자." 나는 검들 중에서도 제일 작고 가벼운, 내가 들 수 있을만한 중 검을 집어 들었다. 내가 그들에게로 다가가자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함께 출발했 다. 동굴 속은 16차선 도로도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무지막지하게 넓었 기 때문에 그 넓이로 인해 길이 더더욱 멀게 느껴졌다. 정말 고대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이렇게 넓은 길을 뚫었을까. 토이렌 세계에서처럼 자동 차를 타고 다니지도 않았을 거 아냐? 아니, 모르지. 마법력으로 움직이는 자동차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혹시 여기 도로였던 건가? "넓~다~. 2주일이나 걸어야 한다니, 끝내주네." 나는 괜히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조용했기에 아이들이 조금 얼어 있는 듯 보였기 때문이다. "뭐가 끝내준다는 거야? 카류, 넌 무섭지도 않니?" "그래, 정말 긴장감이 없어. 저번에도 그래. 처음 동굴이 무너지면서 돌덩 이가 떨어질 때 네가 '아플 꺼야' 라고 소리질렀던 거 나는 아직 잊지 않 았어." 확실히 그건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생각하니 역시 쪽팔리는군. "모두들, 그 일은 그만 잊어 줘.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도록 다음 기 회를 위해 죽기 전에 지를 멋진 비명을 생각해 놔야지. 그래, '후크야, 내 가 죽었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마라~!' 로 할까?" "...대체 무슨 소리야?" 난 괜히 그 상황을 상상해보고는 웃겨서 키득거렸다. 그래, '부르투스 너마 저...' 라던가. 후후훗, 멋지군! (뭐가?) "...아직 어린 분이 그런 슬픈 소리를 하시면 안됩니다. 지금은 자기가 살 생각만을 하셔도 충분합니다. 벌써부터 자신이 죽은 후의 슬퍼할 다른 사 람들을 위한 생각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전부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예요." 앞에서 걸어가고 있던 학자 아저씨가 근엄한 얼굴로 나를 질책하듯 말했 다. 역시 학자는 학자구나. 내가 어떤 뜻의 말을 했는지 알아듣네? "농담이에요. 하지만 이왕이면 마지막 남기는 말은 멋진 게 좋지 않겠어 요?" "야!! 그런 말은 그만해. 정말...! 히노 선배가 또 울잖아." 엉? 진짜 히노 선배가 우네? 기분 풀어줄려고 그랬던 건데 농담이 너무 심 했나? ...가만히 생각하니 이런 상황에서 죽는 농담을 듣고 누가 즐거워하겠어. 이 바보 같은 놈!! "에구, 히노 선배. 울지 말아요. 전 안 죽어요. 아까도 안 죽었잖아요? 착하 죠, 선배? 울지 말아요. 네에?" 내가 그렇게 눈물을 글썽이는 히노 선배를 안고 등을 토닥이고 있을 때였 다. 푸하학~~!! 푸하학?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와 동시에 용 병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모...몬스터다! 어스웜이다!! 다들 움직이지 마라!!" 몬스터라고?! 그러고 보니 동굴 안쪽 깊은 곳에 몬스터가 나온다는 소릴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듯도... 맙소사!! 갑작스러운 사건과 먹을 것에 정신이 팔려 그만 모두들 그 사실을 깜빡해버렸구나! 우리 일행들은 전부 우왕좌왕하며 몬스터를 피해 뒤쪽으로 뛰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바로 앞쪽으로 용병들이 꼭 거대지렁이 같은 놈들을 베고 있었다. 어스웜이라는 몬스터는 앞에 에일리언처럼 흉측한 입이 달려있고 그 크기가 굉장히 크다는 것만 제외하면 빼면 정말 지렁이 그 자체였다. 크아악! 징그러워엇~! 몬스터라 더니 괜히 몬스터가 아니구나!! "으...으아악!!!!" 나는 어스웜의 징그러움에 최대한 그것들을 피해보고자 뒤쪽으로 걸음을 옮기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의 발 밑에서 거대지렁이가 나타났다. 깜짝 놀란 나는 안고 있는 히노 선배를 온 힘을 다해서 옆으로 밀고 나도 그 반동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아까 꼬마아이를 구하려고 했을 때 내 힘이 엄청 모자란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정말 이번엔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서 히노 선배를 밀었는데,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히노 선배가 아 직까지 반대편으로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너무 세게 밀었나 보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잖아, 이 바보야!! 아무리 죽음에 초탈해졌다지만 저런 지렁이한테 먹혀야 속이 시원하겠냐!! 나는 급한 김에 중 검을 빼들었다. 히노 선배와 나를 노리고 있던 지렁이 놈은 잠시 주춤하면서 움직이지 않더니 내가 발을 살짝 움직이자마자 내게 로 달려들었다. 허허헉!! 저거 혹시 발의 진동을 느끼고 공격하는 건가? "으앗~~!!" 나는 바로 정면으로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정말 끔찍스럽도록 징그러운 지 렁이의 입김을 바로 내 코앞에서 경험할 수가 있었다. 그 입김에 기겁을 한 나는 손에 든 중 검을 그냥 무대포로 대각선방향으로 휘둘렀다. 사실 그땐 아무생각도 없었다. 아니 징그럽다는 생각은 있었다. 어쨌든 그저 기 초 검술 연습을 할 때 했던 대로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지렁이가 나의 그 검을 맞고는 땅을 뒹구는 게 아닌가. 내 검에 당하는 몬스터가 존재할 줄이야. 그러고 보면 이놈들 굉장히 약하다고 그 랬었지. 그럼 내 검으로도 충분히 이 녀석들을 해치울 수 있다는 거네? 움 하하, 드디어 나도 검으로 활약할 때가 왔단 말인가!! 키에엑, 케엑! 잠시동안 그렇게 이겼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을 때 고통에 찬 기괴한 소 리가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어스웜이 내게 당한 입 주변(?)이 굉장히 고통 스러운지 몸을 비틀며 끊임없이 기괴한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 을 보며 나는 잠시 기쁨의 포즈를 취하던 것이 그만두고 천천히 어스웜에 게 다가갔다. 케케켁, 키엑!! 어스웜은 계속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바로 지렁이의 머 리부분에 검을 박았다. 예전이라면 나를 해치려한 녀석일지라도 이렇게 큰 생물을 죽이는데는 거부감이 들었을 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전 혀 그런 것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냥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일찌감치 죽여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나는 완전히 움직임을 멈 출 때까지 어스웜을 쳐다보다가 머리에 박았던 검을 뽑아냈다. "오 마이 갓!! 이게 뭐야!!" 그러나 나는 금세 심각했던 기분을 잊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며 오두방정 을 떨 수밖에 없었다. 어스웜의 몸에서 초록색 액체가 뿜어져 나와 내 몸 으로 퍼억하고 튀었기 때문이다. "아아아악~~!!!!" 어떻게든 몸에 튄 액체를 털어 내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 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뒤쪽에서 아이들이 지렁이를 피해 질겁을 하며 도망을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의 지렁이는 어찌나 둔한 지 아직까지도 단 한 명의 아이도 잡아먹지 못했나보다. 물론 아이들이나 내가 어스웜의 그런 사정을 봐 줄 이유는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패닉 상 태에 빠졌거나 넘어지는 아이들을 보니 금방이라도 잡아먹힐 것만 같았다. "에르가 형! 검을 빼!! 저놈들 진짜로 약해!! 어서~~! 에르가 형!!!" 그러나 에르가 형은 완전히 얼었는지 귀에는 내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모 양이었다. 아니, 들렸다해도 내 말대로 침착하게 행동하기엔 아직 저들은 어린아이다. 검술에 강하다고는 하나 언제나 자신 또래의 아이들과의 가벼 운 대련만을 했을 뿐이다. 귀족인 아이들이 언제 저런 몬스터 비슷한 거라 도 본적이 있었겠는가. 솔직히 나도 처음 저 녀석이 다가왔을 때 얼마나 굳었던가. 어스웜을 죽인 것도 잔뜩 얼어서 무대포로 검을 휘두르다가 우 연히 그렇게 된 거였지. "아아아아악!" 에르가 형 바로 뒤쪽으로 딜티가 뛰어가다가 넘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어스웜이 바로 딜티의 코앞까지 다가가는 것을 보며 나는 중 검을 거대지 렁이 쪽으로 집어던졌다. 지렁이가 원체 크고 거리가 별로 안 떨어져 있어 서 검은 정확히 지렁이의 허리 -그러니까 지렁이의 중간쯤- 에 박혔다. 앗싸! 바로 이거야!! 나는 달려가서 괴성을 지르며 땅에서 몸을 비틀고 있는 지렁이의 옆구리에 박힌 검을 뽑아 다시 머리에 박았다. 지렁이는 그 칼 덕분에 더 이상 괴로 워하지 않고 깨끗하게 절명했다. 이왕이면 편하게 죽여줘야지. 아파하다가 죽으면 얼마나 괴롭겠어? 나도 다음에 저 지렁이로 태어날지 모르는 일이잖아.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모두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용병들이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래, 이 지렁이들은 진동을 느끼고 공격하는 거야. 조금 전에도 내가 움직 이니까 공격을 해왔잖아. 그리고 지금도 저기에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애 들은 공격하지 않고 있지 않은가. "용병 아저씨들 말대로 움직이지마!! 이놈들은 움직이는 자들만 공격한다 고!!" 나 역시 소리를 질렀지만 도망 다니는 아이들한테 그 말이 통할 리가 없었 다. 나는 도망가고 있는 몇 명의 아이들 쪽으로 달려들어 지렁이를 두 놈 정도 더 죽였다. 그리고 아이들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다음, 움직이지 못하 도록 무자비하게 발로 밟았다. 솔직히 내가 손 힘만으로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많았기 때문에 한 행동이다. "야!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엉?!" 나는 아이들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런 나를 보던 주위의 아이들이 그제야 움직이지 않고 땅에 주저앉았다. 땅바닥에 엎어진 채 부들부들 떨 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좀 애처로워 보이긴 하지만 상황이 상황 인 만큼 지금은 어쩔 수 없지. 어쨌든 이제야 말을 좀 듣는구나. 아이들 일동이 조용해지자 지렁이들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대가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모든 지렁이들이 일제히 다 시 땅속으로 스믈스믈 기어 들어갔다. 휴우, 겨우 된 건가. "이런, 젠장!! 이러면 끝이 안 나잖아." 그러나 나의 추측이 틀렸는지 한 용병아저씨가 땅을 한쪽 발로 구르며 소 리쳤다. "왜요? 끝난 게 아닌가요?" "바보 같은 녀석! 이놈들은 진동을 느끼고 달려든단 말이다. 근데 이렇게 전부 사라지면 다음에 움직이는 사람에게로 한꺼번에 달려들 거 아니냐. 네가 먼저 움직여 볼 테냐? 저놈들이 의외로 이런 면에서는 똑똑하기 때문 에 앞쪽에서 싸웠던 인간들이 강하다는 것을 눈치채고는 우리들의 발소리 엔 나타나지 않는단 말이야. 원래 다른 자들은 가만히 서있는 동안 우리들 이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것이 정석인데!! 이런 젠장!!" 용병아저씨는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에게 반말로 소리를 쳤다. 그의 말을 듣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엿 같은 일이 있나. 우리들이 어스웜 죽이는 법 같은 걸 어떻게 알아! 어스웜이 사라지기 전에 아저씨들이 알아서 빨리 잘 없애버렸어야지!! ...솔 직히 5명밖에 안 되는 데 너무 억지인가? "...그런가요." 어쩔 수 없군. 다들 무섭겠지? 내가 나서야하나? 하긴, 큰일나봐야 죽기밖 에 더하겠어? 지렁이한테 먹힌다는 게 좀 찜찜하지만 이대로는 중도 소도 안되잖아. 에라 모르겠다!! 나는 슬그머니 한쪽다리를 든 다음, 최대한 용병들이 있는 쪽으로 폴짝 뛰 었다. 푸하학~!! "으헉!" 갑자기 주위가 캄캄해질 정도로 많은 지렁이들이 내 주위에 몰려들었다. 아무리 각오를 했다지만 그 엄청난 수에 나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까지 많이 나올 줄이야!! 나도 몇 마리 죽였는데 이거 사람 차별하 는 거 아니냐!!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는 검을 든 팔을 마구 휘둘렀다. 저놈들은 무지하게 약하니까 이 정도 검에도 맞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아니, 바랬다. 크 흑!! 젠장. 이렇게 지렁이한테 먹혀 죽어야 하나? "이 멍청한!!" 나의 뒤쪽을 공격하고 있던 지렁이가 용병 아저씨의 칼에 맞아 두동강이 났다. 그리고 앞쪽은... 내가 아무렇게나 휘두른 칼에 맞은 지렁이들로 북새 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와아... 정말 약하구나. "얼른 죽이기나 해욧!!!" 나는 용병들 주위로 촐싹촐싹 뛰어다니면서 지렁이들을 모았다. 용병들은 지렁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멋들어진 솜씨로 지렁이들을 단칼에 두 토막으 로 만들었다. 역시 전문 싸움꾼들은 다르구나. 내 검과는 차원이 틀리다!! 오오, 멋져라~! "이야, 아저씨들 역시 대단하네요? 정말 멋졌어요!! 아하하하~" 지렁이들이 전부 죽고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듯 하자 나는 용병 대장에게 로 다가가서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나 용병 대장 아저씨는 멱살을 잡고 들 어올려 내 면상에다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넌 대체 뭐냐? 저놈들이 약하긴 해도 그렇게 움직이면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다!! 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놈 아냐!?" 솔직히 내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는 게 사실이긴 하지. 그런데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보니 용병이면서도 나를 걱정해 준 모양이네. "으윽... 아...아저씨... 아파요.... 전부 살았음 됐지...으윽... 이거 놔줘요..." 내가 끙끙거리며 발버둥치자 용병아저씨는 그때서야 나를 내려줬다. 나는 목을 손으로 주무르면서 용병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콜록... 어쩔 수 없잖아요. 보아하니 어스웜에게는 사람의 발소리를 구별하 는 능력까지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 진동에 민감한 놈들을 사람의 발소리 가 아닌 돌멩이 같은 걸로 유인해 내는 것은 불가능 한 것 아닌가요? 제가 안 움직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어요? 그렇게 얼굴 구기지 말아요. 저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그랬지, 설마 막무가내로 달려들었겠어요." 실은 그냥 죽어보자고 달려든 거지만 솔직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 "카...카류야..." 잠시 용병 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나의 앞으로 아이들이 우루루 다가왔다. "고...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흐흐흑...카류야...흐흑... 고마워.." "나...나두..." 아이들은 자신들을 구해주어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야 죽음에 대한 두려운 감정이 없기 때문에 죽어도 별 상관없다는 식으 로 그렇게 가볍게 행동한 것뿐인데 그것이 이렇게 그들에게 감동을 주는 형식으로 변해버렸구나. 솔직히 기분이 좋긴 하다.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살신성인하고 살까? 의도야 어떻든 좋은 일이잖아! "괜찮아, 괜찮다니까. 별거 아니라고." 그때 저 구석탱이까지 굴러가 있던 히노 선배가 이제야 내 곁으로 달려왔 다. 땅바닥을 마구 굴러서 선배는 흙으로 완전히 범벅이 되어 있었다. "......!!! !!!" 히노 선배는 새빨갛게 된 얼굴로 나에게 무언가 소리치려고 입을 움찔거렸 다. 그러나 마음대로 안 되는지 주먹만 꼭 쥐다가 결국 눈물을 펑펑 터뜨 렸다. 아마도 위험한 짓만 골라하는 내가 너무나 걱정이 된 모양이다. 나는 히노 선배의 마음이 너무 고맙고 기특해서 그녀를 꼬옥 안아주었다. "걱정할거 없어요. 전 안 죽는다니 까요. 착하죠? 울면 나쁜 아이라고요. 에구, 귀여워라." 히노 선배는 내 말을 듣고 눈물을 참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모습의 선배 가 너무 귀여워 나는 마구 얼굴을 비볐다. "머...멍청하기는...! 나...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렇게 히노 선배를 토닥이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새빨개진 얼굴의 에 르가 형이 소리쳤다. 아마 조금 전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던 것이 못내 부끄러웠나보다. 모두들 그랬으니까 솔직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는데 형은 전혀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이지, 에르가 형은 나보다 훨씬 강하잖아?" 내가 빙긋 웃으면서 말하자 에르가 형은 오히려 그것이 더 부끄러웠던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나는 상당히 상심한 듯 보이 는 에르가 형을 위로해주고자 슬금슬금 다가가서 형을 확 덮쳤다. "뭐...뭣하는 짓이야!! 우웃, 냄새!! 저리로 꺼져!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 "어? 아까 지렁이 피가 튄 거네. 에이, 너무해! 모두를 위해 이렇게 피를 덮어썼건만~~!" "누가 해달래?" 내 머리를 퍽 치고는 툴툴거리며 저쪽으로 걸어가는 에르가 형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살짝 웃었다. 겨우 원래 형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기 때문이 다. "이제 그만 가야지. 앞으로는 어스웜이 나오면 움직이지 말도록 하고, 알았 지?" 우리들은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더 열심히 검술연습을 할 걸 그랬어요." 나는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마지막 지렁이의 머리에 칼을 박으면서 툴툴거 렸다. "아까 네가 검을 던지는 실력을 보니까, 꽤 재능이 있을 거 같던걸? 컨트 롤 능력이 좋아보였어. 단검 던지기 방면으로 한번 나가보지, 그래?" 곁에서 또 다른 어스웜을 죽이던 용병 아저씨가 나의 말을 받았다. 저번 일로 내게 화를 내면서 말을 놓은 뒤로는 아주 막가기로 한 모양인지 학자 아저씨만 빼고 모든 용병이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끝내주는 상황이구나. 용병은 왕자에게 반말하고, 왕자는 용병한테 존댓말 쓰다니, 밖의 기사들이 알았다면 거품을 물고 난리를 쳤을만한 일이 아닌 가. 물론 나에게 반말을 쓴다고 에르가 형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반 말을 쓰는 것은 아니다. 정말 그랬다가는 난리를 치는 아이들에 의해 이 일행은 벌써 예전에 와해됐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용병들은 웬만한 일 이 아니고서는 그들에게 아예 말을 걸지 않는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귀족 들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런 식의 잡담을 걸게 된 것도 어 스웜 사건이 지난 후부터랄까? "단검 던지기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는 게 정말이에요? 솔직히 전 마법에도 검술에도 재능이 없어서 얼마나 서글펐는지 몰라요. 그런데 다른 무언가에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듣게 되다니... 전...전...정말 감동했어요!!" 내가 우는 시늉을 하자 용병들이 크게 웃어 젖혔다. 용병 아저씨들과 꽤 친해진 거 같아 기분이 좋구나. "바보같이... 대체 그딴 단검던지기가 뭐가 좋단 말이야? 남자란 롱 소드, 바스타드 소드를 들고 전장을 누비는 게 최고야!!" 에르가 형은 이번에 지렁이를 몇 마리 잡더니 완전히 기가 살아서 나를 바 라보며 큰 소리를 쳤다. 나는 그런 에르가 형을 보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못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렇지 않아도 난 몸집이 작아 제대 로 된 검을 들 수 없으니 단검 던지기를 잘할 수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안 그래요? 용병 대장 아저씨?" "물론이지. 카류." 허허허. 이젠 아주 이름도 막 부르는구나.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어? "아, 맞아! 용병 아저씨들. 그리고 학자 아저씨. 아저씨들은 전부 제 이름을 아는데 저는 아저씨들 이름을 모르잖아요? 지금 가르쳐줘요 네? 저도 학자 A, 용병B, 용병C 가 아니라 이름으로 머리 속에 제대로 인식시키고 싶어 요." "하하하. 알겠습니다. 전 생명의 궁 출신인 타슬라인 혼 루드비라고 합니 다. 타스라고 불러주세요, 카류 님." "난 허크라고 한다. 평민이니까 성은 없지만 샤크 용병단의 대장 허크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단다. 그러니 알아모시도록 해라, 알겠 냐?" "하하하. 네네. 알아모시도록 합지요. 또요? 다른 아저씨들은?" 다른 용병들도 자기 소개를 했다. 왼쪽부터 알, 골크, 에민, 쟈츠 라고 자신 을 소개한 아저씨들은 하나같이 샤크 용병단의 1,2위를 다투는 최고 실력 자들이라고 한다. 난 아이들도 소개시켜주려 했지만 후크와 카멜, 히노 선배를 빼고는 귀족 이라고 버티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 누구도 소개를 시켜주지 못했다. 그냥 소개하고 싶어하는 아이들도 있는 듯 했지만 다른 귀족아이들의 눈 때문에 하지 거절한 듯 보였다. 용병 아저씨들도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모양이 다. 하지만 항상 당하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나? 오히려 나 같은 별종 은 태어나서 처음 봤단다. 솔직히 나는 천성이 평민이라서 말이야. 우리들은 한동안 어스웜이 나타나지 않았던 덕분에 한가하게 잡담을 하면 서 걸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어 굉장히 답 답했다. 이곳 이르나크의 시간은 하루를 대충 24시간으로 나누었기에 1경이라는 말 은 우리의 1시간과 같은 의미였다. 이런 '시'의 개념은 토이렌과 같았지만, 이곳에서는 그 시간을 더 이상 나누려고 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눌 수가 없다. 토이렌과 같은 전자시계는 없으므로 해를 이용해서 시계를 보았는데, 해시계로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가 없기 때문에 '분'의 개념이 없었던 것 이다. 그저 반경(30분)이라는 정도의 개념이 있을 뿐이다. 시계를 보려는데 비가 와서 먹구름이 끼면 어떻게 하나고? 그때는 마법을 이용한 자동시계 비슷한 것을 사용한다. 하지만 마법을 이용한 물품인 만 큼 이 마법시계는 정말 무섭도록 비싼 초고가 품이다. 그리고 시계를 계속 움직이게 하기 위해 추가로 걸려진 마력 보존 마법이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시 쓰려면 항상 주변에 마법사가 붙어 있어야 했다. 사실 이르나크의 사람들은 시간에 그다지 큰 신경을 쓰고 살지 않는다. 귀 족이나 왕족 마법사 같은 부류의 조금 바쁜 사람들이 거금을 들여가며 시 계라는 것을 쓰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동굴 속에 거의 갇혀 있다시피 하고 있다. 불행히도 우리 중 아무도 마법시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었기에 태양이 없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배고파." "또? 세미르. 아직은 안돼. 참아.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걸?" "네가 어떻게 알아? 분명 점심시간이 지났을 꺼야. 그냥 지금 먹자! 솔직히 스튜 같은 것도 아닌 이런 과자를 먹자니 식사를 한 것 같지도 않아서 자 꾸 배가 고프단 말이야." 그렇다. 얼마나 지났는지 전혀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자 이렇게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느니, 그만 쉬자 느니 하는 말을 하면서 진행 속도를 자꾸 늦 추게 하는 것이다. 솔직히 나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지만 어린아이들이라 그런지 전혀 참을성이 없어 정말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 은 것 같은데 자꾸만 칭얼대는 것이었다. "그만둬!! 그건 중요한 식량이란 말이야. 그렇게 마구 낭비하고 그러면 안 돼!! 세미르. 빨리 가자!" "나도 발 아파. 카류야. 우리 그만 쉬자. 응?" "그만해, 안느. 아직 얼마 걷지도 않았어. 응? 모두 힘 좀 내. 이렇게 느린 걸음걸이로 가면 2주는커녕 3주도 넘게 걸릴지 모른단 말이야." "싫어... 아파... 힘들어." "맞아, 네가 뭐야. 모두 이렇게 힘들 다잖아. 분명 꽤 멀리까지 왔을 꺼야." 나 혼자 아이들을 말리고 있자 보다못한 허크 아저씨가 다가와 함께 아이 들을 달랬다. "여러분들, 그러니까 우리들은 아직 3일 거리도 오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가 저녁이라고 생각하고 세 번 정도 잠을 자긴 했지만, 그게 저녁이 아니 었을지도 모른다고요. 저희들이 이런 곳에 다녀봐서 아는데 어두운 곳은 생각 이상으로 시간이 지나지 않는 법이랍니다." "시끄러워!! 용병 나부랭이 주제에 알기는 뭘 알아? 으으... 다리 아파. 충분 히 4일거리는 오고도 남았을 꺼야!! 이렇게 다리가 아픈데 3일거리도 못 왔을 거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난 과자를 먹을 꺼야!" "에르가 형! 그렇지 않아, 언제 에르가 형이 4일 동안 걸어보기나 했어? 허 크 아저씨들 말이 맞을 꺼야. 나도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이건 그만큼 걸 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에르가 형은 막무가내였다. 다들 힘에 부쳤는지 에르가 형의 말에 하나 둘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만두십시오!! 그 음식들을 먹으려 한다면 제가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허크 아저씨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에는 위협을 했다. "뭐야?! 이 미천한 용병 놈이! 지금까지 오냐오냐 해줬더니 아주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나는 에스문드 백작 가의 장남 에르가다!! 네놈이 마구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야!!" "맞아!! 감히 후작 가의 장남인 나를 가만두지 않겠다니? 네놈들이 죽고 싶 어 환장을 했구나!!" "이 무례한 놈들! 당장 무릎꿇고 사과해!" 맙소사! 얘들이!! 허크 아저씨들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용병들은 정말로 화가 난 모양이다. 학자인 타스 아저씨도 어떻게든 아이들을 말리려 했지 만 이 척박한 상황으로 불만에 불만으로 점철된 그들은 도저히 말을 들을 기세가 아니었다. 에르가 형을 위시로 하여 후크와 카멜마저 마구 폭언을 퍼부어 댔다. 평민이라 해도 그들은 거의 귀족과 다를 바 없이 떠받들어져 생활을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해! 허크 아저씨들이 우리를 위해 이렇게 해주시고 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웃기지마! 그들은 우리들에게 돈을 받고 고용됐다고. 돈을 받았으면 받은 만큼 일을 해야 할거 아냐!!" 완전히 무례함의 극치를 달리는 아이들을 보고 나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 각에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너는 돈이 중요해? 네 목숨이 중요해? 물론 아저씨들이 돈을 받기야 했겠지. 하지만 계약을 취소해도 돼! 그냥 우리들을 내버려두고 그 냥 밖으로 나간 후에 위약금만 내면돼지. 신용?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신 용도 살아있어야 쓸데가 있지, 죽었는데 신용이고 나발이고 있을 게 뭐야? 신용을 깎이더라도 그냥 아저씨들끼리 밖으로 나간 후 다시 열심히 일해서 다시 신용을 쌓는 편이 훨씬 좋을 거라고! 너희들 바보야?" 나는 숨을 들이키고 다시 쏘아댔다. "너희들이 할 줄 아는 게 뭐야! 단지 짐덩이일 뿐이잖아. 우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13명이야, 13명!! 용병 아저씨들이 우리 13명의 음식들을 그 냥 뺏어가 버린다면 이곳에서 충분히 나가고도 남을만한 양의 음식이 나온 다고.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배를 골아가면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겠어? 아저씨들은 우리에게 이만큼이나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는데 너희들이 이렇 게 아저씨들에게 무례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 는 거야? 나 같으면 시끄럽게 칭얼대는 애들 같은 건 벌써 옛날에 버리고 음식을 뺏어 밖으로 향했겠다!!" "......" 웅성거리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조용해진 아이들을 보고 내 말이 통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아이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 다. "...우리를...죽일 꺼야...?" 에구, 꼭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완전히 겁을 먹어버린 모양이네. "그런 일은 아마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도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될지 는 알 수 없는 일이니 저희들의 말을 따라주십시오." "......" 아이들은 겨우 진정이 되었는지 우리는 다시 앞으로 길을 재촉할 수 있었 다. 그렇지만 대부분 조금 전 내가 했던 말이 무서웠는지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서로 손을 꼭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굉장히 미안한 걸. 그래도 살려면 이래 야지 어쩌겠어. 내가 겁먹은 아이들을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허크 아 저씨가 내 머리를 쓱 쓰다듬더니 고개를 내 얼굴 근처로 고개를 숙여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후훗, 고맙구나.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해도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 해라." 나는 입을 쩍 벌리고 허크 아저씨를 바라봤다. 다른 애들은 죽이겠다는 말 3+ 0....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말은 그만 두라고 말해주려고 입을 순간 갑자기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에에엑~!! "응?" 나는 이 이상스런 소리에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지렁이가 나타날 때 나는 소리는 푸하학 이었는데, 이건 대체 무슨 소리지? "아아아악~!!!" 뒤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른 아이가 손가락질 하고 있는 그곳에는 사마귀같이 생긴 놈이 있었는데, 그놈도 지렁이처럼 입 부분이 에일리언처럼 무시무시하게 생겨서는 더럽게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 녀석은 왼편 동굴 벽이 뚫고 갑자기 나타난 듯 싶었다. "맙소사!! 이런 곳에 어스웜의 여왕이 있다니!!" 뭣?! 그 지렁이들한테 사마귀 엄마가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저놈은 어떻게 상대해야해요?!" "으아아악!! 살려줘!!" 나의 질문이 전부 끝을 맺기도 전에 그 사마귀 엄마는 제일 가까이에 있는 세미르에게 번개같이 달려들었다. 나는 그 사마귀의 움직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제껏 봐왔던 지렁이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빨랐던 것이다. 사마귀는 거대한 낫처럼 보이는 팔을 한껏 들어올렸다. 그 모습을 보노라 니 금방이라도 세미르가 두동강이 날거 같았다. "세미르!!" 나는 다급히 팔을 뻗어 세미르를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런데 힘이 모자 라서 그랬는지 세미르를 뒤로 당긴 그 반동으로 약간 앞쪽으로 밀려 버렸 다. 파앗.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아아아아악~~~!!!" 나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재수 더럽게 없게도 그 사마귀의 낫처 럼 생긴 팔에 왼쪽 어깨를 베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사마귀는 그 정도 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내 어깨를 베었던 피 뭍은 팔을 옆으로 휘둘렀 다. 비록 날카롭지는 않은 칼등 같은 부분이었지만 그 팔에 복부를 얻어맞 자 그 팔 힘에 그렇지 않아도 몸집이 작은 나는 완전히 허공으로 날려가 버렸다. "커헉!" 나는 땅바닥에 거칠게 내던져져 격한 비명을 토해냈다. "카류리드!" "카류!!!" 허크 아저씨가 다급히 어스웜 퀸을 상대하러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이 어렴 풋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허크 아저씨가 그 사마귀를 처리해 줄 것이라고 안심을 할 정도의 여유마저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악!! 하악...아아악!!"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꼬꾸라져서는 계속 비명을 질렀다.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이 아팠다. 얼마나 아프던지 저절로 눈물이 펑펑 흘 러나왔다. "카류!! 카류리드!!" 많은 사람들이 내 앞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그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이 백지처럼 새하 애진다는 느낌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흐흐흐흑... 아으윽...아파... 쿨럭쿨럭...아아아악...싫어... 아파...아파..." 나는 계속 괴로워하며 아프다고 신음소리를 냈다. 좀 더 절실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저 아프다라는 말뿐이었다. 그런 시시 한 말로 내 상태를 알려주기에는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에 갑자기 마구 신 경질이 몰려왔다. "쿨럭...커헉..." 갑자기 목구멍 저 깊은 곳에서 비릿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무언가를 토해 낸 나는 그것이 피라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는 어깨를 다른 손으 로 부여잡고 계속해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피를 토해냈다. 덕분에 숨을 제 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젠장, 영화 같은 델 보면 한쪽 팔을 잘리고도 잘만 뛰어다니던데 그거 전 부 다 뻥이다!! 다음에 그런 영화를 보게 되면 가만 안 두겠어!!! 온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괜스레 상관없는 다른 사람에게까지 짜증이 복 받쳐 올랐다. 정말 너무나 아팠다. 시비를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로 나는 완 전히 고통에 지배받고 있었다. "카류리드 님!! 오오, 신이시여!!" 타스 아저씨는 신을 부르면서 내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잔뜩 웅크린 채로 땅바닥에서 끙끙거리고 있는 나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나를 건 드리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아아아아아악!! 싫어!! 싫어... 거...건드리지...흐흑... 말아....요.... 크윽... 흐 흑." 타스 아저씨는 거의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소리에 주춤하며 나를 일으키기 를 포기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곧 다른 누군가가 다가와서 나를 안아 일 으켰다. "아아악!! 싫어!! 그만 둬!! 아아아악!" 그만두라고 마구 소리질렀지만 나를 일으키는 사람은 내 말을 무시했다. 내 말을 듣지 않는 그 인간 때문에 나는 짜증으로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던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흐름 다음에야 겨우 상황을 둘러볼 만큼의 최소한의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나를 일 으킨 다음 붕대로 어깨를 감싸려 했던 모양이다. 나는 응급 용품을 들고 웅성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어깨의 상처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 상처를 처음 본 그때의 심정을 말하라면... 죽었다!! 정말 그 한마디 말고는 없다. 그 놈의 사마귀에게 얼마나 심하게 베었는지 나의 어깨는 거의 가슴께 까 지 갈라져 있었다. 자신 몸이 갈라져 있는걸 보는 기분이 어떤 건지 상상 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상처에서 피가 얼마나 흘렀는지 내 몸의 왼쪽 은 완전히 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바로 이런걸 보고 피투성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허크 아저씨는 그 빌어먹을 사마귀를 언제 죽였는지 나의 곁에서 능숙한 솜씨로 붕대를 사용해 어깨의 상처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허옇게 질린 얼 굴로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내 상태가 과히 좋지는 못한 모양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건 내가 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피가 자꾸 흘러나오는 것을 보니 상처 때문이 아니더라도 과다출혈로 곧 죽어버릴 것 같았다. "젠장... 응급약 중에 힐링포션만 있었더라도!! 이 꼬마야! 그러게 왜 여기 저기 나서고 그러는 거냐고!!" 허크 아저씨가 거의 짜증을 내다시피 하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렇게 된 줄 알아!! 빌어먹을! 이렇게 외쳐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그것을 참았다. 아저씨의 말이 나를 위 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나는 꽤 진정이 된 상태였다. 아까 타스 아저씨가 강제로 뭔가 씁쓸한 물을 내게 강제로 먹였는데 그것이 진통제와 비슷한 기능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이 진정됐다지, 조금 전처럼 말도 안 되는 일 로 신경질을 내는 일이 없어졌다 뿐,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아팠다. 어깨의 상처에서 불로 지진 것같이 뜨거운 고통이 밀려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머 리까지 띵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사마귀에게 배를 맞으면서 내장 을 다친 모양인지 자꾸만 올라오는 피 때문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솔직히 어깨의 아픔이 너무 심해서 상대적으로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그 거대한 낫에 배를 얻어맞고 바닥에 내쳐지기까지 했기 때문에 나의 온 몸은 어디 한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 평생 이렇게 아파 보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했다. 굶어 죽었을 때의 그것과는 또 색다른 느낌이라고나 할까. 젠장...!! 온 몸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냥 지금 죽자!! 전생의 내가 죽지 않기 위해 했던 그 쓸데없는 노력을 떠올리며 나는 결심 했다. 어차피 이 대로면 얼마 못 가서 나는 죽을 것이다. 우리 일행 중에 의원이나 6서클의 마법사라도 있으면 또 모를까 이 동굴을 빠져나갈 때까 지 2주일동안 반은 쪼개진 어깨를 가지고 내가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가능하다면 살고 싶지만 어차피 가망이 없다면 끝까지 버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제 더 이상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으니 말이다. 좋아! 그냥 죽자. 칼로 목이나 그어버리자!! 그 동안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과 어머니 때문에 너무나 행복했지만, 왕자로 태어나서 너무나 편안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지만, 귀여운 친구들 덕분에 너무나 즐거웠지만... 하지만... 젠장... 그런 것 때문에 미련이 남아 시간 질질 끌어봤자 내가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은 달라질 바가 없지 않은가.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았 다. 아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눈물로 범벅이 된 침울한 얼굴들을 하고 있었 다. "돼...됐어요.. 쿨럭... 그만하고... 헉헉... 저는 그냥 두고.. 이거 가지고 가세 요.... 내 먹을 거..." "무...무슨 소리야? 누굴 두고 가!? 어디를!!" 후크의 목소리다. 후크가 또 언제 울었는지 완전히 엉망이 되서는 소리를 빼액 질렀다. "쿨럭... 그..그러니까...밖으로 나가야지... 나...나는 이제 틀렸잖아...헉헉... 자...이거...가지고.." 나는 입술이 덜덜 떨려왔지만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말을 하는 게 이렇게 힘들 줄이야. "말도 안됩니다!! 카류 님.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함께 나가야 합니다. 우린 모두 나갈 수 있어요. 나갈 수 있다고요!" "그만! 타스 아저씨...이거 가지고...헉헉...다들 나가요... 내가 먹을 분량이... 예요... 이젠 내겐 필요 없어.... 그러니.. 다들...꼭..빠져나가라고요... 쿨럭... 아...알겠지요..?" "시...싫어!!!" 울음 섞인 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을 때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히노 선배가 말을 한 것이 아닌가! 저렇게 큰 소리로. 나뿐만이 아니라 다 른 사람들도 깜짝 놀랐는지 히노 선배를 쳐다보았다. 히노 선배는 다치지 않은 쪽의 내 손을 부여잡고는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정말 폭포수처럼 눈 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아...안돼...카, 카류... 같이..가자.. 함께 가는 거야!!!" 코끝이 정말 찡했다. 히노 선배가 이렇게까지 하다니... 내가 죽어도 다시 환생을 할거라는 걸 모르는 이들은 정말 슬플 것이다. 아마 전생의 어머니 아버지도 이렇게 나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눈물을 흘렸 을 테지. 하지만 어차피 죽는다면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발버둥 친다해도 나는 곧 죽을 것이다. 혹시나 살 가능성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태라면 상처 의 아픔에 힘겨워하면서 계속 버틸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솔직히 이런 끔찍한 고통은 정말 사양이다. 사실 그들이 슬퍼하거나 말거 나 나는 일초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나에게 그것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종의 탈출구인 셈이다. 그러니 이들에게 나를 버려 두고 할 수밖에 없다. 자살을 하려면 최소한 그들이 없는 곳에서 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뻔히 보고 있는데도 괴롭다는 핑계로 자살을 해버린다면 그들은 그들의 엄청난 허탈감과 절망 감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나 때문에 의욕을 상실하고 어쩌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살기를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죽더라도 이왕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살고 봐야 할 것이 아닌가. "히...히노 선배.. 착하지요. 헉헉... 제발...그냥 가요... 쿨럭... 꼭 살아야 되요. 아...알겠죠?" "싫어... 싫어... 카류가 안가면...나, 나도 안가... 절대로 안가..." 굳게 고개를 젖는 히노 선배를 보며 나는 곤란해 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가라고 한다고 바로 홱 가버리는 것도 좀 그렇지만 끝까지 안 가고 버틴다 면 나의 의도는 물거품이 되지 않겠는가. "카류... 나...나는...." 내 앞에 선 세미르가 바들바들 떨면서 뭔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지만 끝내 뒤를 잊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내가 죽는다고 생각했는지 얼굴 색이 말 그대로 새파랗게 질려있었는데, 그 와중에서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이런, 어린애한테 이런 큰짐을 지게 할 순 없지.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 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란다면 얼마나 괴롭겠어. "괘...괜찮아... 세미르 때문이...아니야...헉헉헉... 다...그 사마귀 놈이...나쁜 거 지...하하... 아...사마귀 년인가...하하..." "가자!! 일경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가 상처를 치료해야지! 어서!!!" 옆에서 갑자기 허크 아저씨가 비장한 얼굴로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허크 아저씨의 말에 낭패감을 맛보아야 했다. 싫어! 절대 안돼! 나는 그냥 여기서 죽을 거라고!! 질질 끌려 다니다가 죽 는 건 너무 고통스럽다고!! 으으으...아파...제발 그냥 내버려두고 가라고, 나 를 위한다면 제발...!! "시...싫어! 놔!! 그냥...헉헉... 내버려두고 가라고... 해...했잖아!! 헉헉..." "멍청하기는! 조금 고통스럽다고 그렇게 쉽게 인생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 에 살아있는 자는 하나도 없겠다! 조용히 해! 어서 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거다!!" 젠장 할! 네가 이렇게 아파 봤어?! 그 말이 나를 위한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울컥 신경질을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시...시끄러워! 아파!! 정말...진짜로 아프다고! 허...헉헉... 쿨럭쿨럭... 크흑... 그냥 너희끼리...가라고 했잖아....헉...쿨럭..어차피..나는...쿨럭쿨럭쿨럭!!" 나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가슴 주변이 굉장히 아파 와 서 소리 지른 것을 엄청나게 후회했다. 기침과 함께 핏덩어리들이 마구 쏟 아져 나왔다. 가슴의 통증과 핏덩어리들로 인해 숨을 쉬기가 힘들어 너무 나 괴로웠다. 한시라도 빨리 죽어버리고 싶어!! "너를 두고 갈 수는 없어! 카류리드!! 고통스러워도 참아! 마법사에게 보이 면 너도 곧 살아날 수 있을 거라고!!" 카멜, 내 몸은 그렇게 오랫동안 버틸 수 없어. 아아! 제발 내버려두고 가라. 제발!! "쿨럭...크흑...흑.... 그만둬!!... 2주일동안 이 몸으로 어떻게... 버틴단 말이 야... 헉... 나는 곧 죽어... 그런 얄팍한 동정심 따위 경멸스러울...뿐이야!!" "카류!!" "꺼져... 꺼지라고!! 헉헉...당장 저리로...헉헉... 꺼지란 말이야!!" 나는 뒤에서 나를 부축하고 있던 허크 아저씨를 뿌리치려 애썼다. 덕분에 상처에서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정말 초인적인 의지로 참으면서 발버 둥쳤다.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그들은 정말 나를 데리고 가려 할 것이 다.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에 나는 아주 신경질까지 부렸다. 이렇 게 나오면 그들이 짜증이 나서라도 나를 버려주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헉헉...뭐야... 내버려 둬...나는...죽어..죽는다고!!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 나... 헉헉.. 제발 좋은 말로 할 때... 내 몫의 음식 가지고 가... 꺼져버리라 고.. 내 앞에서...헉헉헉...왱왱거리는 거...너무 신경 거슬려!...빨리..쿨럭..." "카류, 카류리드. 함께 가자. 함께 살자. 너와 함께 살고 싶어... 카류야. 제 발...우리 함께 가자." 히노 선배가 눈물을 쏟아내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녀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자니 내가 말도 안돼는 짜증을 부린다고 이들이 화를 내면서 나를 버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그들을 설득 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에 나는 고통으로 어지러운 머 리를 애써 굴려가며 입을 열었다. "조...좋아요... 그럼...말하지요...헉헉... 보다시피 나는 얼마... 못 버텨요.. 곧 죽을 거라고요. 그만, 끝까지 들어봐요!! 쿨럭...으윽... 게...게다가 이대로 나 를 데리고 간다면...헉헉... 나가는 속도가 훨씬 느려질 거예요... 거기다가... 곧 죽을 주제에...먹을 것만 축낼 거라고요. 안 그래요? 헉헉... 나...나는 더 이상... 싸...싸울 수도 없어요. 나는 짐일 뿐이라고요! 쿨럭쿨럭... 더 이상... 함께 가는 것은 아무런....헉헉헉...의미도 없어요... 나도...나도 그것을 원하 지 않아요... 나를 버리고 간다면...헉헉...내 몫의 음식을 더 먹을 수 있으 니...쿨럭...여러분이 살아남을... 가...가능성은 훨씬 높아지...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네가 그딴 걸 생각할 이유는 없다!!" 허크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갑자기 안아들었다. 그 충격으로 어깨 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와 나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아아악! 싫어!! 헉헉헉... 그만...!! 크흐흑...그만두라니까!!" 나는 나를 데려가려는 허크 아저씨에게서 떨어지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쳤 다. 그러나 이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힘이 다 빠져버린 나의 행동은 그에 게 아무런 소용도 없는 듯 싶었다. 이런 젠장! 말도 안돼!! 이대로 그냥 모두 앞에서 자살해 버릴까보다!! 젠 장!! 아파! 크흐흑! 정말 아프다고!! 죽고 싶단 말이야!! 나는 계속 허크 아저씨의 품안에서 흐느끼면서 중얼거렸다. "제발...제발...버리고 가요...제발, 제발...흐흑..." 나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안은 허크 아저씨와 다른 일행들 은 다시 동굴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발자국 소리에 리듬을 맞추듯 머릿속에서 윙윙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더 이상 신경질을 부리는 것을 그만 두기로 했다. 처음에는 나를 데려가는 그 들에게 너무 화가 났지만 사실 이들이 이러고 있는 것도 전부 나를 위해서 가 아닌가. 게다가 아픔에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거의 마비가 된 건지 추 위를 느끼는 것만 빼면 더 이상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것이기도 하다. "...하아... 힘들지 않나요..." "시끄러워! 너같이 코딱지 만한 꼬맹이를 안고 가는데 힘들 리가 있냐!" "하하...하... 이렇게 절 안고 가다가... 몬스터...가 나오면... 어쩔 건데요." "어스웜 따윈 발로 밟아 죽일 수도 있다!! 주제에 누구를 걱정하는 거야?" "그... 사마귀 엄마...는요?" "시끄러워!! 어스웜 퀸은 넓은 지역에 정해진 자신들의 영역에 한 마리 정 도밖에 살지 않는다고! 아까부터 그 입 좀 닥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지 알아? 내가 너 같은 놈의 걱정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허크 아저씨는 짜증스럽다는 듯이 큰소리를 냈다. 그렇지만 얼굴은 금방이 라도 울어버릴 듯이 일그러져 있었다. 나의 신경질적인 말보다 이런 식의 말이 그를 더 괴롭게 만드는 모양이다. 조금 미안하구나. 그냥 마음 모질게 먹고 버려 두고 가면 될텐데 말이야. 점점 추위가 짙게 몰려오면서 턱이 덜덜 떨렸다. "우웅... 추워...." 몸을 약간 꿈틀거리면서 그렇게 중얼거리자 허크 아저씨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러고 보니 추워하는 건 죽을 징조가 아닌가. 이제야 죽을 수 있는 건가. "이봐, 누구 옷 좀 벗어봐. 나를 이 녀석을 안고 있어서 옷을 벗을 수가 없 잖아." "내...내 것을..." 허크 아저씨 옆에서 계속 나를 지켜보면서 걷고있던 히노 선배가 자신의 겉옷을 벗어주었다. "으음... 피...필요 없어요. 선배도 춥잖아요. 도로 입어요. 네?" 에구, 곧 죽을 건데 따뜻하게 해줘서 뭐하냐고. 그리고 그냥 내버려두고 갔 으면 이런 추위를 느낄 지도 않았을 거 아냐. 솔직히 이건 병 주고 약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이 멍청한 녀석아!! 넌 조금이라도 살 생각만 하면 되는 거야! 무슨 군소 리가 그렇게 많아?!" 허크 아저씨는 눈을 부릅뜨고 또 한번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히노 선배는 여전히 그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맺은 채로 옷을 내 몸에 걸쳐 주었다. 이젠 곧 영원히 히노 선배의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르겠다. 아깝구나. 정말 착하고 귀여운 아이였는데 말이야. "허...허크 대장!!" 그러던 중 갑자기 용병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말이 씨가 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눈앞의 생물들을 보고 아연해졌다. 어스웜 퀸이 6마리나 길을 막고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확실히 우릴 누가 죽이고 싶어하긴 한 모양이다. 아니면 어스웜 퀸이 이렇게 무리를 지어 나타날 리가 없잖아. "이럴 수가!! 왜 이런 곳에 저것들이!!" 그 사마귀는 곧바로 나와 허크 아저씨가 있는 쪽을 향해 달려와 팔을 휘둘 렀다. 허크 아저씨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그 팔을 피해서 옆으로 재빨리 몸 을 날렸다. "아아아아악!!! 크흐흑!!" 그 격렬한 움직임 덕분에 나는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질렀다. 하지 만 나를 돌볼 여유가 없는지 허크 아저씨는 곧 나를 던지듯 땅에 내려놓고 는 검을 빼들고 어스웜 퀸에게로 달려들었다. 아아...정말 무지하게 아프다. 다행히 용병들은 아무 상처도 없이 사마귀들을 전부 없애버렸지만 이대로 아이들을 12명이나 데리고, 반 시체까지 끌고 다니려면 참으로 곤란할 것 이다. 그러기에 내버려두고 가라고 할 때 말들었으면 얼마나 좋았느냔 말 이야. "...정말 누군가가 우리들을, 아니 여러분들 중 누군가를 노리고 있는 것 같 군요." "......" 용병 중 한 명인 골크 아저씨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자 아이들은 침 묵을 치켰다. 이제는 아이들도 그 사실에 대해 거의 확신을 한 듯 싶었다.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참 살벌하구나. "으음... 애들아...전부... 콜록... 아저씨들 말... 잘 들어야돼...알았지?" 아이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서 내 말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말 한마디에 긴장을 풀라고 하는 것은 쉬운 일 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콜록콜록...크흠... 아까부터 말하는 건데 절... 버리고 가요...콜록... 이번엔 허크 아저씨도 죽을 뻔...콜록... 했잖아요.." "...시끄러워. 끌고서라도 널 데려갈 테다." "고집불통...콜록...하아... 죽으려고 환장...했군요...아저씨가 그러다 죽어도.... 아무도...콜록... 칭찬 안 해줘요." 허크 아저씨는 이번엔 자신이 안아들지 않았다. 자신이나 학자 아저씨가 나를 안고 갔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전투능력자가 한 명 줄게 되어 갑자기 나타나는 그 사마귀들에게 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 이들에게 부축을 시키려는 듯 그들 중 몇 명을 손짓으로 불렀다. 허크 아 저씨는 아이들에게 나의 다치지 않은 한쪽 팔을 부축하는 형식으로 데려오 라고 지시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완전히 하얗게 질려버렸다. 말도 안돼! 그런 식으로 부축하면 정말 아플 거야! 이젠 안돼!! 그것만은 절대 못 참아! "시...싫어. 콜록콜록... 그...그러지 마. 싫...!!" 내가 싫다고 버둥거렸지만 모두들 내 말을 무시하고 나를 부축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또 다시 어깨로부터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아아아악! 시..싫어!! 아아악!! 놔...놔두고 가라니까!! 헉헉... 윽... 나를 버리 라니까!! 아...헉헉헉... 그렇게 착한척하면.... 어디서 뭐가 떨어지냐고!!... 버 려!! 버리라니까!!" "...시끄러워. 끌고서라도 데려갈 거라고 했지. 네 녀석이 아프건 말건 나와 는 아무관계도 없어!!" 젠장!! 젠장! 이럴 수가!! 빌어먹을! 젠장할! 나는 마구 당겨 오는 어깨의 아픔을 참기 위해 속으로 마구 욕설을 내뱉으 며 이를 악 물었다. 그러나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깨의 아픔이 다시 스물 스물 피어올라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몇 발자국 못 가서 나는 결국 또 한번 악을 썼다. "싫엇!! 싫어엇! 제발, 제발!! 흐흑...아아... 내버려 줘... 제발...쿨럭쿨럭...쿨 럭!! 커헉!" 나는 마구 소리치다가 또 한번 피를 울컥하고 토해냈다. 격하게 피를 토해 내자 그 영향으로 온 몸이 다시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고 나는 너무 괴로운 나머지 그만 눈물을 터뜨렸다. 사람들은 멈춰서 내가 피를 토하는 것을 걱 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보면 뭐하냐!! 그냥 내버려두고 가면 얼마나 좋으냔 말이야! 아아...너무 아 프다. 정말, 정말 죽고싶어.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는 건지. 이들이 절 망하거나 말거나 지금이라도 당장 자살해버리고 싶다!! "내가..." 그 때 갑자기 용병 중 한 명인 알 아저씨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얼굴 표정 이 굉장히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어서 나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흑...쿨럭쿨럭...아...알...훌쩍...아저씨...? 콜록.." "...이거." 알 아저씨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품속에서 뭔가 작은 병을 꺼냈다. 나는 의 아한 마음에 눈물로 인해 흐릿해진 시야로 그 병이 무엇인지 보기 위해 애 섰다. 그때 주위로부터 큰소리가 들려왔다. "힐링포션!!" "이럴 수가!! 알! 너...!!" 모두가 알 아저씨를 보고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나도 한순간 그 충격에 멍해질 정도였다. 내가 그토록 고통스러워했건만 그걸 이렇게 숨겨?! "나...나는...내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해!! 당연한 거 아냐?! 저 놈과는 달리 내 목숨이 훨씬 소중하다고! 이곳에 갇혔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예 감했다고! 앞으로는 더욱 위험해질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나는... 나는..." "이 악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이렇게 카류가 죽어가고 있 는데!! 그걸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후크가 알 아저씨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그러나 알 아저씨는 후크의 손 을 세게 뿌리치며 더 크게 소리질렀다. "시끄러워!! 다친 것이 네놈이었다면 절대 내주지 않았을 거다! 젠장...! 앞 으로 언제 죽을만한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데... 젠장... 내가 언제부터 이렇 게 착했다고... 젠장 할!!!" "......." 다른 용병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그들도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나를 위해 쉽게 포션을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단 한 명이라도 전투력이 부족한 상황에 별 도움도 안 되는 꼬마를 위해 귀중한 포션을 그냥 퍼부어 줄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까지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긴 했지만 실상 그들은 몬스터뿐 아니라 전장을 누비며 수십, 수백의 사람들 을 죽이기도 했던 굉장히 거친 용병들이다. 그들에게 있어 그다지 친하지 도 않은 사람 한두 명쯤 죽는 것은 일도 아니라는 얘기다. "돼...됐어... 그...그런 거... 없어도 돼...쿨럭.... 어차피 죽을 건데...쿨럭쿨럭... 그걸 써도 낫지 않을 지도 몰라. 쿨럭... 헉헉헉..." 정말 냉정한 시각에서 볼 때 무슨 몬스터가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모르 는 이런 상황에서 힐링포션을 내게 쓰는 것은 큰 낭비이다. 나를 치료하는 데 써버려서 용병들이 큰 상처를 입었을 때 힐링포션이 남아있지 않다면 일행이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게 줄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잖아. 이왕이면 죽음을 무서워 하지 않는 자가 죽는 편이 낫겠지. 지금에서라도 포션을 내주려 했다는 게 어디야. 어차피 또 태어나면 되는데 그렇게 안 죽으려 발버둥칠 필요 있나. "쿨럭...잘못하면 귀중한 전력을 잃을지도 모르는데...쿨럭쿨럭...이런 일에 힐링포션을 쓸 수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헉헉... 그건... 필요 없어... 사...사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쿨럭....버리고 가라고 했었잖아." 좀 아프긴 하지만 지금 상황은 내가 생각해도 멋지군. 마치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성자 같잖아? 그래, 마지막을 이렇게 멋지게 장식하는 것도 나쁘 진 않겠다. 모두를 위해 좋은 일 하는 셈치는 거야. 그들의 죽음과 나의 죽 음은 의미 자체가 틀리잖아. 난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지만 이들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 죽고 싶지 않은 그 기분은 전생에 한 번 죽어본 내가 그 누 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가자... 최소한 너를 버리지는 않을 거다." 허크 아저씨가 일어나면서 말했다. "하지만!!" "됐어, 후크!! 전부... 됐다고 했잖아...콜록... 그거 써도...난 죽을지...몰라.... 피를 이렇게 많이 흘렸는데... 콜록...안 그래? 아...아무 말도 하지마...헉헉.... 얼른... 얼른 가자..." "카류!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착한척해도 아무 것도 안나온다고 한 건 카류잖아!!" 갑자기 나의 앞을 막고 히노 선배가 소리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도 못하고 어물거리기만 하던 히노 선배가 이제는 이렇게 소리를 지르기까지 하는구나. 이제 완전히 자유롭게 말을 할 수 있게 된 모양이다. 다행이네. "후후...콜록... 나...난 현실주의자니까...콜록콜록... 곧 죽을 사람한테 아까 운... 포션 낭비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야. 쿨럭...하아... 그만 가야지...시간 을 정말 많이도...하아하아... 잡아먹었네." 내게 포션을 쓰는 것이 낭비인 것도 사실이고 멋지게 죽고 싶은 것도 사실 이다. 나는 죽는다해도 그렇게 큰 두려움은 없으니까 이대로 죽는다면 아 이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고, 나는 길이길이 이들의 기억 속에 아름다운 카류리드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우욱, 젠장!! 아프지만 않으면 딱 좋겠는데! 으으으... 그래, 참자, 참자고!! 내가 왕년에 굶어죽어 본적도 있지 않은가! "거기... 아...알...아저씨..." 내가 힘겹게 더듬거리며 알 아저씨를 부르자 그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 했다. "쿨럭...양심에 찔리면 절... 좀 안아줘요. 물론...하아하아... 사...사마귀가 나 타나면 그냥 홱 던져버리시고요. 크흠... 부축 받아 가는 건 정말 아프거든 요. 끝까지 저를... 콜록... 데려갈 생각...이라면...콜록... 최소한 안아서 데려 가 달라고요. 그걸로 요...용서해드릴...콜록, 콜록콜록...콜록...용서해 드릴 테 니까요... 아아...말을...하기가 너무 힘드네요..." "......." 동굴 안은 물을 끼얹진 것처럼 조용해졌다. 나의 말에 그 누구도 입을 열 지 못했다. 알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다가와 나를 안아들었다. 아저씨의 품이 따뜻해서 숨쉬기가 약간 나아졌다. 그래. 저번보다 훨씬 멋진 죽음이지 않은가. 버리라는 말은 하지 말자. 아 프지만 참아주자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아저씨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들은 걸었다. "......" 아무 말도 없이 단지 걷기만 했다. 이젠... 그렇게 아프지도 않다. "쿨럭...쿨럭쿨럭... 커헉..." 나는 피를 토했다. 하지만 조금 전만큼 아프지는 않았다. 툭... 뭔가 내 얼굴에 떨어졌다. 알 아저씨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 큰 어른이 그렇게 울다니 과히 좋은 꼴은 아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 질 성인남자의 눈물은 특히 그렇다. "괜...괜찮아요...걱정하지 마요... 쿨럭... 아저씨...슬퍼하지 마세요... 곧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쿨럭...걱정...말아요...걱정할거 없어요....아저씨..." 난 어떻게든 그들을 위로해야 할거 같아서 힘겹게 말을 했다. 몸이 내 몸 인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나른해져 왔다. "걱정 마요... 괜찮을...콜록...거예요... 으음...걱정 마세요." 나는 같은 말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좀더 멋진 위로의 말을 하고 싶었지 만 왠지 머리가 점점 둔해져서 그이상의 말은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들이 너무 슬퍼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다시 태어날 테니까. 나는 죽 음이 전혀 두렵지 않으니까. 비록 나의 목표와는 달리 또 이렇게 고통스럽게 죽긴 했지만 이번엔 상당 히 기분 좋게 죽을 수 있을 거 같다.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모두...걱정 마세요.....다 들..." 말을 하기가 점점 힘겨워져갔다. 그들이 너무 슬퍼하지 않게 해주고 싶어서 마지막까지 위로를 해주고 싶어 서 나는 힘들었지만 계속 말을 이었다. 점점 나의 목소리가 작아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 ◆ ◆ ◆ ◆ ◆ ◆ "커허허헉!!!" 나는 벌떡 일어나서 빠르게 창문 쪽으로 걸어가 거칠게 창문을 열어 젖혔 다. 열려진 창문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와 내 이마의 식은땀을 말려 주었다. "또냐, 알?" "시끄러워, 골크! 죽여버리기 전에 그냥 디벼져서 잠이나 자, 이 자식아!" 나는 침대에 엎드린 채로 빈정대는 골크에게 소리를 질러주고 다시 창 밖 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년 전 국경 근처의 작은 소모전에 고용되어 싸우 고 돌아온 뒤로 나는 가끔씩 이렇게 꿈을 꾼다. 단지 쪽수만 믿고 달려드 는 실력도 변변찮은 놈에게 칼을 맞고는 거의 빈사상태까지 갔었을 때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악몽을 말이다. 몸 속에 있어야 할 내장을 내 눈으로 보았을 때 그 기분이란! 그런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 그것을 추측해 보는 것도 나는 인정치 않으리라! 죽는다! 뱃가죽이 찢어지는 고통보다도 더 절실히 다가오는 느낌!! 그 절망감!! 죽음!! 때마침 하릴없이 주위를 지나던 성질 더러운 마법사가 없었다면 나는 그대 로 죽어버렸을 것이다. 나는 그 이후로 평생 일해서 모은 전 재산을 털어 힐링포션을 샀다.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을 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할 줄 아는 짓이 용병질 뿐이라 이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이 힐링포션을 내 목숨과 도 같이 소중하게 다루었다. 목욕을 할 때마저 항상 그것을 지니고 다닐 정도로. 이번에 나와 우리 샤크 용병 단의 최고실력을 가진 20명은 엄청난 지위의 귀족 자제들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위험 하기도하고, 또 전혀 위험하지도 않은 그런 임무였다. 이번 임무를 마치면 한동안 놀고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례금이 나올 것이다. "에구...윽윽... 아우... 아파라...흑... 도대체... 마을은 언제... 도착인 거지?" 앞쪽에서 말을 타고 가던 한 꼬마가 얼마 가지도 않아 힘들다고 시끄럽게 쟁쟁거리기 시작했다. 그 꼬마 녀석은 카류리드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나라 의 제6왕자로, 올해로 13살이라고 하던데 외견상으로는 10살도 채 안되어 보일 정도로 조그마한 놈이었다. 정말 시끄럽게 구는군. 몸집도 제일 작은놈이 말을 타고 간다고 우길 때부 터 마음에 안 들더니 결국 저 모양이구나. 평소에 그렇게 외쳐대던 귀족 특유의 품위란 건 어디에 팔아먹은 거야! 이래서 귀족나부랭이들을 호위하 는 건 마음에 안 든다니까!! "저... 있죠... 윽윽... 제가... 마차 멀미를 해서...말을 타려 했던 거거든요?... 윽윽...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시끄럽게 굴더라도...좀 봐주세요...아저씨들... 윽...아우..." ...그래도 저 잘못한 건 아는군. 그러나저러나 용병에게 사과를 하다니 별 희한한 녀석도 다 있군. 생긴 것만큼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서 그런 것일 거다. 다음 날 우리들은 유적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학자의 지루한 설명을 들은 후에 귀족 꼬맹이들은 드디어 동굴 안으로 향하기로 했다. 나를 포함한 우 리들 용병 20명과 기사 20명이 이 일행의 호위병으로 함께 들어가게 되어 일행은 상당히 긴 행렬을 이루게 되었다. 이 13명의 아이들이 하나같이 엄 청난 집안의 자식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별것도 없는 동굴에 과도한 호 위병이었다. 쿠르릉~~!!! "...!! 뭐...뭐야?!" 나는 갑작스러운 폭음에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콰쾅!!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던 것일까. 갑자기 수백 만년간 멀쩡하던 동굴이 무 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하필 우리들이 들어오고 있는 지금 이 순간 에! 젠장, 이번 호위는 최악이 되겠구나!! "도망쳐! 안으로!! 안으로 뛰엇!!" 나는 그렇게 소리치며 안으로 뛰었다. 동굴 입구가 완전히 무너지면서 우 리들은 동굴 안에 갇혀버리고 우리 뒤쪽에서 따라오던 나의 샤크 용병단의 동료들이 모조리 몰살당해 버렸다. 밖으로 나갈 방법이 묘연해져 모두들 멍하게 동굴의 입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카류리드 왕자가 의외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 꼬 마 녀석은 우리들에게 침착하게 먹을 것과 마실것을 챙기도록 명했다. 그 행동은 정말 놀랄 정도로 정확해서 항상 거친 곳에서 생활해왔던 용병들마 저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그 왕자는 비실비실한 생김새와 첫인상과는 전 혀 다른 기질을 가진 꼬맹이였던 것이다. 동굴 안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갔을 때 어스웜들이 나타났다. 갑작스러운 몬 스터의 출현에 일행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음식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그만 몬스터의 존재에 대해 잊어버려 완전히 무방비 상태였던 것이다. 그 래봐야 우리 용병들이 위험해질 염려는 없지만 저렇게 난리를 치고 있는 귀족 녀석들까지 보호하려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귀족 꼬마들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도망 다니며 비명을 질렀다. 미리 언질 을 못해줬던 우리의 탓도 크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은 덮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정말 멍청한 녀석들이다. 허크 대장이 아무리 움직이지 말라고 소리쳐도 무용지물이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들을 일단 근처에서 나타나는 어스 웜들만을 처치해나갔다. 용병 들이 너무 앞쪽에만 몰려있어서 이대로 라면 분명 꼬마들 몇 명 정도는 어 스웜에게 먹혀 버릴 듯 싶었다. 젠장! 그러면 동굴 밖으로 나갔을 때 사례금이 줄어버릴텐데! 그런데 갑자기 그 꼬마 왕자가 뛰어들어서 엉성해 보이는 검 솜씨로 어스 웜을 죽이고 아이들 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또 다시 도망치려 일어나 려는 아이들을 확 밀어 넘어뜨리고는 발로 마구 짓밟으며 소리쳤다. "야!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엉?!" 거참, 황당한 꼬맹이다. 계속 사람의 추측을 벗어나는 짓만 하는구만. 어째됐든 그제야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고 조용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스웜들도 함께 땅으로 사라져버렸다. 우리 용병들이 아무리 발자국 소리 를 내도 어스웜들은 땅 밖으로 기어 나오지 않았다. 한참을 시끄럽게 난리 친 덕분에 어스 웜이 우리들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젠장, 더더욱 저 귀족들을 지키는 일이 어려워져버렸다. 정말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것들!! 이대로 그냥 버리고 가고싶지만 그랬다간 사례금을 한푼도 못 받을 뿐만 아니라 거액의 배상금까지 물어야할지도 모른다. 젠장, 누구하나 움직여줘야겠는데 저 어리버리한 놈들 중 누가 움직이려하 겠어...라고 생각했던 건 바보 같은 일이었나. 그 왕자가 그냥 움직여 버린 것이다. 검 실력도 좋지 않은 주제에 뭘 믿고 이렇게 뛰어드는 거야!? 정말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꼬마다! 처음에 동굴이 무너질 때도 웬 꼬마 를 구한답시고 무너지는 동굴입구로 뛰어들지를 않았던가! 우리가 빠르게 행동한 덕분에 그 왕자는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다. 그렇 다고는 하나 어스웜이 자신에게 구름같이 몰려드는 경험을 했으니 벌벌 떨 만도 하건만 그 꼬마는 넉살 좋게 웃으면서 우리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꼬마는 전혀 왕자 같지 않은 말투와 행동만을 해서 끊임없이 우리들을 놀라게 해주고 있었다. 다른 귀족아이들처럼 거들먹거리지도 않았고 존댓 말을 쓰기까지 하는 둥 정말이지 별종 중의 별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를 놀라게 한 것은 그런 것뿐만이 아니었다. 동굴 안에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참을성 없는 귀족 꼬마들이 힘들다 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고 카류 왕자와 허크 대장이 아이들을 달래어 데려가려 애썼다. 그러나 귀족 꼬맹이 놈들은 끝까지 말을 안 듣고 신경질을 부렸다. 그래서 결국 허크 대장은 결국 약간의 협박 어린 말까지 사용했다. 그러나 자기들을 위해 그러는 줄도 모르고 그 놈들은 무례하다 니 어쩌느니 마구 욕설을 퍼부어 대기 시작했다. 그 꼴을 보자니 열이 뻗 쳐올라 그냥 저것들이 죽거나 말거나 음식을 빼앗아 우리들끼리 나가버릴 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카류 왕자가 나서서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시끄러워!! 너는 돈이 중요해? 네 목숨이 중요해? 물론 아저씨들이 돈을 받기야 했겠지. 하지만 계약을 취소해도 돼! 그냥 우리들을 내버려두고 그 냥 밖으로 나간 후에 위약금만 내면돼지. 신용?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신 용도 살아있어야 쓸데가 있지, 죽었는데 신용이고 나발이고 있을 게 뭐야? 신용을 깎이더라도 그냥 아저씨들끼리 밖으로 나간 후 다시 열심히 일해서 다시 신용을 쌓는 편이 훨씬 좋을 거라고! 너희들 바보야?" 그 왕자는 한번 숨을 들이킨 다음 다시 한번 쏘아붙였다. "너희들이 할 줄 아는 게 뭐야! 단지 짐덩이일 뿐이잖아. 우리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13명이야, 13명!! 용병 아저씨들이 우리 13명의 음식들을 그 냥 뺏어가 버린다면 이곳에서 충분히 나가고도 남을만한 양의 음식이 나온 다고.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배를 골아가면서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겠어? 아저씨들은 우리에게 이만큼이나 호의를 베풀어주고 있는데 너희들이 이렇 게 아저씨들에게 무례한 짓을 해도 되는 거야? 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 는 거야? 나 같으면 시끄럽게 칭얼대는 애들 같은 건 벌써 옛날에 버리고 음식을 뺏어 밖으로 향했겠다!!" 정말 무섭도록 정확한 상황판단이다. 이 왕자가 우리에게 깍듯이 대했던 건 전부 저런 것을 감안하여 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나만이 아닌 모든 용 병들과 학자는 새삼 저 왕자에 대해 놀랄 수밖에 없었다. "후훗, 고맙구나. 만약 그런 일이 있다해도 너만은 죽이지 않을 테니 안심 해라." 나름대로 기분이 나아진 듯한 허크 대장이 카류 왕자에게 다가가 작은 목 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그 왕자는 입을 쩍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살려주겠다는 데 표정이 저게 뭐냐? 역시 별종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때 갑자기 앞쪽에서 어디선가 들었던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에에엑~!! "맙소사!! 이런 곳에 어스웜의 여왕이 있다니!!" 나는 거의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왜?! 어스 웜 퀸이라니!! 이제까지 몇 번이나 이곳을 들락거렸지만 저런 놈 은 단 한번도 나타나지 않았단 말이다! 젠장! 역시 이 꼬마들 중 누군가를 노리는 게 틀림없어!! 빌어먹을! 누가 이런데서 죽을 줄 알고? 절대로 살아 나가고 말 테다!! 갑자기 어스 웜 퀸이 한 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분명 세미르라는 녀석이 었지. 제엔장! 꼬마 하나 죽어나겠군! 사례금이 확 줄어드는 순간이구나!! 하지만 내 예상은 약간 빗나가 버렸다. 카류 왕자가 손을 뻗어 세미르라는 녀석을 뒤로 끌어당겨 어스웜 퀸의 손길에서 피하게 해 준 것이다. 그러나 그 꼬마 녀석은 생긴 것만큼 버티는 힘이 부족했는지 잡아당기는 반동으로 앞으로 한두 발자국 내딛어 버렸고 세미르 대신 어스웜 퀸의 낫같이 날카 로운 팔에 어깨를 심하게 베이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그 꼬맹이의 비명소리가 동굴 속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런 미친! 미친 왕자 같으니라고!! 그래! 아주 성자 났구나. 성자 났어. 실 력도 없는 주제에 아까부터 혼자 설치더니 결국 저렇게 되는군!! 젠장, 그 래도 꼬마들 중에 제일 도움도 되고 나가면 사례금도 제일 클 듯한 녀석이 었는데 저렇게 죽어버리게 되다니!! 어스 웜 퀸을 순식간에 죽여버린 허크 대장은 다급히 그 왕자에게로 다가 갔다. 카류 왕자를 꽤나 마음에 들어했던 허크 대장은 상처를 보더니 얼굴 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치명상이었다. 상처보다는 어리기도 하고 피가 너무 많이 흘렀기 때문에 과다출혈로 얼마안가 죽어버릴 것이다. "젠장... 응급약 중에 힐링포션만 있었더라도!! 이 꼬마야! 그러게 왜 여기 저기 나서고 그러는 거냐고!!" 허크 대장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아까 너도 이렇게 말했지, 카류 왕자. 내가 살아야 사례금도 있는 게 아니 냐. 나에겐 사례금이라던 지 싸구려 동정심보다는 내 목숨 쪽이 훨씬 더 중요하다! 지금이 바로 그 선택의 시기다. 미안하지만 너에게 이 포션을 내 줄 수 없어. 너처럼 전력에 도움도 안 되는 꼬마를 구한답시고 썼다가 나 중에 내가 치명상이라도 입는 날엔 전부다 끝이다. "돼...됐어요.. 쿨럭... 그만하고... 헉헉... 저는 그냥 두고... 이거 가지고 가세 요.... 내 먹을 거..." 갑자기 그 왕자 놈이 자신의 음식이 든 보자기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 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자 신의 귀를 의심했다. "시...싫어!!!" 그 왕자녀석의 말에 이제까지 벙어리인줄로만 알았던 여자애가 소리를 쳤 다. 계집애는 눈물을 쏟아내며 카류 왕자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 손을 부여잡고 가니 마니 하며 닭살 돋는 소리를 지껄여댔다. 하..하하하... 이거 감동의 물결이로구먼. 지금 무슨 로맨스 소설 쓰는 거 냐?! 정말 황당한 녀석들이다.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다. 이 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저게 대체 무슨 짓들이야! 소설을 쓰고 싶으면 집에나 가서 하란 말이다! "카류... 나...나는...." 이번에는 세미르라는 녀석이 다가와서는 울먹였다. 자신 때문에 카류 왕자 가 죽을 것 같으니까 완전히 얼어버린 모양이다. 그런데도 저 왕자 놈은 죽기 직전의 상처를 입고서도 화내긴 커녕 웃으면서 세미르라는 놈을 위로 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가자!! 일경이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가 상처를 치료해야지! 어서!!!" 허크 대장이 그 꼴을 보더니 소리쳤다. 내가 봐도 참 눈꼴사납다. 나는 신 경질이 확 나서 그 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저 놈이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건지 정말...!! 정말...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멍청하기는! 조금 고통스럽다고 그렇게 쉽게 인생을 포기한다면 이 세상 에 살아있는 자는 하나도 없겠다! 조용히 해! 어서 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거다!!" 과연...! 그런 거군. 아프다고 지금 그냥 홧김에 버려 두고 가라고 말한 거 였구나. 역시 그랬었군!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진심으로 저런 말을 하는 놈 이 있을 리가 있나!! 허크 대장은 다가와서 그 꼬마를 안아 일으키려 했다. 그런데 그 왕자 녀 석은 따라가지 않으려고 소리를 치다가는 피까지 토해냈다. 이상하다. 왜 저렇게 까지 하는가. 고통스럽다면 오히려 우리들을 붙잡아야 할 것이 아닌가!! 대체 뭐야, 저 녀석은...!! 저 녀석은 대체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어떻게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냐고!! "쿨럭...크흑...흑.... 그만둬!!... 2주일동안 이 몸으로 어떻게... 버틴단 말이 야... 헉... 나는 곧 죽어... 그런 얄팍한 동정심 따위 경멸스러울...뿐이야!!" "카류!!" "꺼져... 꺼지라고!! 헉헉...당장 저리로...헉헉... 꺼지란 말이야!!" 녀석은 좋은 말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발버둥을 치며 험한 소리까지 마구 내뱉고 있었다. 왜...왜 내버려두고 가라는 거야? 두렵지 않은가?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 이 두렵지 않으냐고! "카류, 카류리드. 함께 가자. 함께 살자. 너와 함께 살고 싶어... 카류야. 제 발...우리 함께 가자." 아까 신파극을 벌였던 예쁘장한 계집아이가 카류왕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애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하... 함께 살자니... 하긴, 얼마 못 가 저 녀석은 죽는다. 어차피 나는 힐링포션을 내줄 마음은 없으니까 저 놈이 살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 그냥 내버려두고 가는 것이 우리를 위해 좋아. 덕분에 저 녀석 분의 식량 도 얻을 수 있잖아? 저 왕자 놈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되겠군!! 홧김에 저 런 행동을 했기에 나중에 저 녀석이 후회한다해도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그러나 곧 나의 머리를 차갑게 굳어버리게 만드는 말을 그 왕자 놈이 내뱉 기 시작했다. "조...좋아요... 그럼...말하지요...헉헉... 보다시피 나는 얼마... 못 버텨요.. 곧 죽을 거라고요. 그만, 끝까지 들어봐요!! 쿨럭...으윽... 게...게다가 이대로 나 를 데리고 간다면...헉헉... 나가는 속도가 훨씬 느려질 거예요... 거기다가... 곧 죽을 주제에...먹을 것만 축낼 거라고요. 안 그래요? 헉헉... 나...나는 더 이상... 싸...싸울 수도 없어요. 나는 짐일 뿐이라고요! 쿨럭쿨럭... 더 이상... 함께 가는 것은 아무런....헉헉헉...의미도 없어요... 나도...나도 그것을 원하 지 않아요... 나를 버리고 간다면...헉헉...내 몫의 음식을 더 먹을 수 있으 니...쿨럭...여러분이 살아남을... 가...가능성은 훨씬 높아지...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 네가 그딴 걸 생각할 이유는 없다!!" 허크 대장은 카류 왕자의 말을 무시하고 신경질적으로 그를 들어올렸다. 덕분에 그 꼬마 놈은 어깨가 다시 아파 왔는지 말하기를 멈추고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어떻게 저렇게 냉정해 질 수가 있는 거지? 진정으로 우리들을 위해 자신을 버려 두고 가 라고 말하고 있단 말인가? 지금 내 앞에서 저 말을 하고 있는 것이 13살의 어린 왕자가 맞는가? 카류 왕자는 끝끝내 발버둥치며 반항했지만 허크 대장의 힘을 이겨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녀석은 흐느끼며 자신을... 자신을 버리라고 그렇게 말했 다. 카류 왕자는 더 이상 자신을 버리라고 울부짖지는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허크 대장을 걱정하는 소리를 하면서 옆에서 듣는 사람의 머리를 혼란스럽 게 하고있다. 젠장... 뭐냐...뭐냐... 저놈은... 젠장...젠장, 젠장!! 나는 젠장 말고는 할말도 없냐!! 지금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냐!? 주제에? 죽고 싶은가?! 싸구려 동 정심은 치워라. 어린애들이 죽어 가는 것 따윈 몇 번이고 보았지 않은가! 내 손으로 직접 죽인 일도 있지 않은가!! 푸하하학~!! 뭐...뭐야!! 어스 웜 퀸이 또다시 나타나다니! 이럴 수가!! 그것도 6마리나!! 우리들에게 어스웜 퀸 따위는 상대도 안되지만 계속 이대로 저런 꼬맹이들 을 데리고 나간다면...! "으음... 애들아...전부... 콜록... 아저씨들 말... 잘 들어야돼...알았지? 그리고... 콜록콜록...크흠... 아까부터 말하는 건데 절... 버리고 가요...콜록... 이번엔 허크 아저씨도 죽을 뻔...콜록... 했잖아요.." 젠장,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저놈이 또다시 내버려두고 가라고 지껄이고 있 다. 우리가 그냥 가버리면 너는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단 말이다!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지?!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왜! 왜!! 이 녀석 은!! 이 녀석은...!! 이 녀석은... 진심... 진심인 거다. 진심으로 자신을 버리 고 우리들을 위해 앞으로 나가라고 하고 있는 거다. 진심으로 자신의 죽음 을 앞두고... 그래, 실은 몇 번이나 이 녀석은 다른 꼬마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 동굴이 무너질 때도 어스 웜이 처음 나타났을 때도, 또 어스 웜 퀸이 나타났을 때도!!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왜 하필 이 녀석이지? 왜 하필 이 녀석이 다친 거냐고. 저기 저 건방지고 자기밖에 모르는 놈들이 수북하건만 왜 하필 저런 녀석이 죽어야 하는 거 냐고. 왜 하필 저 녀석이 다쳐서 나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하는 거냐고!! "...시끄러워. 끌고서라도 널 데려갈 테다." 허크 대장은 끝까지 카류 왕자를 데려갈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이 또 안고 갔다가는 자신도 위험해질게 뻔하므로 아이들에게 부축을 하게 했다. 그러 자 이번에 녀석은 거의 절규를 했다. "싫엇!! 싫어엇! 제발, 제발!! 흐흑...아아... 내버려 줘... 제발...쿨럭쿨럭...쿨 럭!! 커헉!" 소리치던 카류 왕자는 또다시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까지 쏟아 냈다. "내가..." 미쳤어?! 미친 거야! 뭐야!! 지금 뭘 하는 거야? "흑...쿨럭쿨럭...아...알...훌쩍...아저씨...? 콜록.." "...이거." 나는 품속에 숨겨두었던 병을 꺼냈다. 그것을 본 주위의 인간들이 이구동 성으로 소리질렀다. "힐링포션!!!" "이럴 수가!! 알! 너...!!" 내가... 내가 왜... 이렇게 해야하느냐고...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왜 저 녀석을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나...나는...내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해!! 당연한 거 아냐?! 저 놈과는 달리 내 목숨이 훨씬 소중하다고! 이곳에 갇혔을 때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예 감했다고! 앞으로는 더욱 위험해질 거야!! 그래서... 그래서 나는... 나는..." "이 악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이렇게... 이렇게 카류가 죽어가고 있 는데!! 그걸 뻔히 보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시끄러워!! 다친 것이 네놈이었다면 절대 내주지 않았을 거다! 젠장...! 앞 으로 언제 죽을만한 상처를 입을지 모르는데... 젠장... 내가 언제부터 이렇 게 착했다고... 젠장 할!!!" 한 빌어먹을 꼬마 놈이 내 멱살을 잡고 소리 치는 것을 내가 세게 쳐내며 더 크게 소리쳤다. 젠장! 당연히 내 목숨이 저놈 것보다 더 소중하기 때문이지!! 그런 당연한 걸 왜 묻느냔 말이야!! 나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아! 이런 곳에서 죽고 싶 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다고! 그래...! 그런데... 그런데도 나는 왜... "......" 용병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크 대장들도 알 것이다. 이렇 게 포션을 쓰는 것은 낭비일 뿐이라는 것을. 최소한 이 힐링포션을 다른 용병들이 다쳤을 때 쓴다면 밖으로 나가는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을. 그것을 알텐데... 그럴 텐데도 허크 대장과 다른 용병들은 아무도 나 를 말리지 않았다. "돼...됐어... 그...그런 거... 없어도 돼...쿨럭.... 어차피 죽을 건데...쿨럭쿨럭... 그걸 써도 낫지 않을 지도 몰라. 쿨럭... 헉헉헉..." 웃기게도 녀석은 또다시 거부했다. 거친 기침소리를 내면서 어렵게 입을 움직여 힐링포션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다. "쿨럭...잘못하면 귀중한 전력을 잃을지도 모르는데...쿨럭쿨럭...이런 일에 힐링포션을 쓸 수 없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괜찮아...헉헉... 그건... 필요 없어... 사...사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쿨럭....버리고 가라고 했었잖아." 살려 주겠다는 데도, 그런데도 거부하겠단다. 우리를 위해 그걸 쓰지 않겠 다는 것이다. "거기... 아...알...아저씨..." 카류 왕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나를 불렀다. 나는 찔릴 것 없어! 나는 네 놈과는 달리 내 목숨이 무엇보다 소중하단 말이다!! 지금 힐링포 션을 꺼낸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성인 감이라고!! "쿨럭...양심에 찔리면 절... 좀 안아줘요. 물론...하아하아... 사...사마귀가 나 타나면 그냥 홱 던져버리시고요. 크흠... 부축 받아 가는 건 정말 아프거든 요. 끝까지 저를... 콜록... 데려갈 생각...이라면...콜록... 최소한 안아서 데려 가 달라고요. 그걸로 요...용서해드릴...콜록, 콜록콜록...콜록...용서해 드릴 테 니까요... 아아...말을...하기가 너무 힘드네요..." "......" 나는 그 꼬마를 안고 말없이 동굴 속을 걸었다. "쿨럭...쿨럭쿨럭... 커헉..." 녀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피를 토했다. 내 옷으로 그 피가 젖어드는 것 이 보였다. 그 꼬마의 작디작은 몸은 이젠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거의 핏 덩이처럼 보였다. 툭... 내 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눈물? 믿어지지 않는다. 내가 울다니. 내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을 빼 고는 철이 든 후 한번도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는데. "괜...괜찮아요...걱정하지 마요... 쿨럭... 아저씨...슬퍼하지 마세요... 곧 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쿨럭...걱정...말아요...걱정할거 없어요....아저씨..." 시끄러워.... 그 꼬마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걱정 마요... 괜찮을...콜록...거예요... 으음...걱정 마세요." 닥쳐.... 녀석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걱정 말아요... 괜찮을 거...예요... 걱정 마세요... 모두...걱정 마세요.....다 들..." 전혀... 괜찮지 않아. 안돼.... 안돼....... "안돼~~~~!!!!!" 나는 소리쳤다. "안돼! 안돼! 일어나!!" 더 이상 꼬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애졌다. 그리 고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가슴이 미여지는 것 같 은 느낌이라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일 것이다. 나는 꼬마를 땅에 내려놓고 거의 본능적으로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꼬마 의 어깨에 묶인 붕대를 마구 뜯어내서 포션을 들이부었다. "알!! 죽은 녀석에게 아까운 포션을 낭비하지마!! 살리고 싶었으면 숨이 붙 어있을 때 해야할 것 아냐!!" "우...웃기지마! 아직...아직 숨이 붙어있다고!! 아직...아직 살릴 수 있단 말 이야!!" "뭐?" 번개같이 다가와서 코에 손을 대보고는 작은 숨을 느낀 듯 허크 대장은 내 게 소리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이 꼬마는 출혈과다 때문이잖아. 넌 그 비싼 포션을 가 지고 다니면서도 포션 쓰는 법도 모르냐!! 먹여야 될 거 아냐!! 먹여야!! 이 리 내놔!!" 허크대장은 나에게서 포션을 뺏은 다음 꼬마의 입에 흘려 넣으려 했다. 그렇지만 완전히 실신한 꼬마가 그걸 마실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도로 내놔!!" 나는 포션을 다시 뺏어서 입에 머금은 다음 꼬마에게 억지로 삼키도록 했 다. "크흑...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이 꼬맹아!!" "더 먹여!! 전부 다 먹이란 말이야! 어깨에도 더 붓고!! 야, 이 자식아! 소 리만 지르면 뭐가 나와!?!" 허크 대장과 나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꼬마에게 포션 한 병 을 붓고 먹이고를 반복했다. 어깨부위의 상처는 완전히 나았지만 피를 흘 린 지 너무 오래되어 신체대사가 너무 저하되어 있었기에 여전히 위험한 상태였다. 나는... 정말 초조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제발...아아...신이시여... 제발...제발.." 나는 완전히 늘어진 꼬마를 부여안고는 소리를 질렀다. 신을 찾다니 정말 처음이었다. 아니, 내가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때 이후로 처음으로 신을 불렀다.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의 행동에 이렇게까지 후회를 해 본적 은 단 한번도 없었다. 후회의 눈물이 마구 시야를 가려서 내가 안고 있는 바로 눈앞의 꼬마도 제대로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젠장,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힐링포션 한 병을 전부 쏟아 부었는데!! 빨랑 일어나라고!! 그게 얼마 짜린 줄 알아!?" 허크대장도 가까이 와서 소리질렀다. 두 남자가 애를 붙잡고 소리 지르는 장면, 참 볼만했을 것이다. "카류...리드..." 이 일행 중 유일한 계집애인 금발머리 꼬마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카류 왕 자의 얼굴을 조그마한 손으로 쓰다듬었다. "......따뜻해... 카류... 따뜻해요!! 카류리드!!" "뭐?!" 맞아! 따뜻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상당히 차가워져있던 몸이 조금이지 만 따뜻해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저...정말이야?" "진짜... 산 거야... 카류리드가?" 거의 멍하게 우리들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들이 그제야 하나 둘 카류 왕자 가 있는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저 비실거리기만 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었던 학자 놈이 다가와서 꼬맹이 왕자를 이리저리 만져보고는 소리 쳤다. "세상에... 신이 도우신 겁니다. 아아... 이렇게 착하신 분이니 분명 신께서 기적을 내리신 거예요!! 이렇게 오랫동안 피를 흘렸는데도!! 아무리 힐링포 션을 한 병이나 썼다지만!!" 진짜로 산 거다! 살아난 거야!! "하하...하하하하하하!!!!" 나는 웃었다. 이렇게 기쁠 수가...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내가... 내가 살아났을 때보다 훨씬 더 기뻤다.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너무나 기뻐서, 이번에는 너무 기뻐서 눈물이 흘렀다. 힐링포션을 쏟아 부어 카류 왕자가 살아났다는 사실에 한동안 난리를 친 다음, 우리들은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한동안 쉬기로 했다. 그 동안 또다시 어스 웜 퀸이 나타났지만 어차피 어스 웜 퀸 따위가 우리 상대도 아니고, 사실 수가 조금 많긴 했지만 이 꼬마를 지키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이었으므 로 수월하게 죽여버릴 수 있었다. "......" 동굴 속은 굉장히 고요했다. 주위에선 얕은 숨소리만 들릴 뿐. 그리고 나는 그 고요함과 약간의 안도감에 약간 졸아버리고 말았다. "깨어났구나!!!" 그 꼬마계집의 소리?! 설마! "카류리드!! 카류야! 허어엉~!! 엉엉엉!!" 고개를 돌리자 정말로 눈을 뜨고 고개를 약간씩 갸웃거리는 꼬마를 볼 수 있었다. 살았다!! 진짜로 살아났다! "히노 선배... 에이, 아직 안 죽었네. 에휴휴..." 그러나 되살아나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아직 안 죽었네 라는 말에 나는 어 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잠시 곤혹스러워졌다. 옆에서 카류 왕자를 보살피 고 있던 허크 대장도 그 말을 듣고 약간 발끈 했는지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럼 죽길 바랬냐!!" "아우... 그러지 마세요. 머리가 울려요... 하아... 음...? 이젠 거의 아프지도 않네요..? 오오, 정말 다행이다." 그 꼬마는 약간 숨이 차는 듯 숨을 가다듬으며 허크 대장을 향해 그 특유 의 긴장감 없는 소리를 했다. 나는 드디어 그 꼬마가 살아났다는 안도감에 더 없는 기쁨을 느꼈다. 정말...정말... 살아났구나!! 그러나 그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뭐... 뭐냐, 지...지금까지 저 꼬마가 죽을 지경이 된 게 대체 누구 때문인데. 내가 포션을 숨겼기 때문이 아니야? 지금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저 런 어린애가 그렇게 오랫동안 피를 흘리면서, 토하면서... 우리들을 위해서 스스로 포션을 쓰기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 꼬맹이가 고통스럽 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체 뭐라고 생각할까. 이제까지 괴로워하게 놔뒀 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서야 살려놓은 이유가 뭐냐고 생각하지 않겠나. 하하... 나 같아도 그러겠다. 맙소사...! 왜 포션을 바로 내놓지 않았지. 나는... 나는... "알 아저씨...전...." "용서해다오!!" 그것 말고는 없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알 수 없는 수치감. 모멸 감. 그리고 미안함... "....네?" "내가...내가 잘못했다!! 내가...내가..." 나는 외쳤다. 겨우 이 따위 말로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는 다. 그러나... 그러나... "...힐링...포션을 썼군요." 갑자기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나 자신이 싫어서,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 러워서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아...아저씨..." "나는...나는 크흐흑!! 미안하다...미안하다..." 나는 머리를 땅에 찍으면서 사과했다. 용서받고 싶었다. 용서받고 싶다!! 그러나... 이런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저씨... 아저씨...괜찮다고 했잖아요..." 그러나 그 꼬마녀석은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을 다시 했다. "아저씨... 저는 괜찮다니까요. 고마워요. 포션 말이에요... 그건 아저씨 것이 잖아요?" 용서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아저씨의 목숨을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이제..이제 괜찮아요...네?" '나의 목숨'을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다니까요..." 나는...... 나의 목숨은.... "걱정 말아요... 괜찮다니 까요. 괜찮아요... 알 아저씨..." 문득 그 꼬마가 나를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꼬마는 나를 토닥이 며 계속해서 괜찮다고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어째서 그 말에 이토록 이나 위안을 받는 것일까. 어째서 이 말이 이토록... 슬픈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그 꼬마에게 안겨 어린애처럼 징징 울어버렸다. ◆ ◆ ◆ ◆ ◆ ◆ ◆ "....으음.."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온몸이 굉장히 욱신욱신했는데 대체 뭐로 태어났기 에 이런지 모르겠다. 으휴, 이젠 정말 아픈 건 질색이다. 이번 생에서는 좀 멋지구리하게 죽어서 보람차긴 했지만 아픈 것은 아픈 것. "끄응..." 나는 여기가 어딘지 너무너무 궁금해서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하여 눈꺼풀 을 조금 들어올렸다. 음? 동굴 같은데? 파충류 같은 걸로 태어났나? 근데 왜 알속에 있는 느낌 은 안 느껴지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나 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네. 커 헉! 인간의 지식을 가진 파충류라니...!! "깨어났구나!!!" "응?" 한참동안 멍해 있던 나는 그제야 내 앞에서 어른거리는 물체의 정체를 파 악할 수 있었다. "카류리드!! 카류야! 허어엉~!! 엉엉엉!!" 나에게 와락 안겨오는 물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히노 선배였다. 선배는 주 위의 이목은 신경 쓰지도 않고 아주 목을 놓아 엉엉 울었다. 에고, 귀여운 얼굴로 그런 울음소리는 안 어울리는데 말이야... 아니, 이게 아니라!! 그렇다는 건 나 아직 안 죽었다는 소리? 기절했던 거 뿐이란 말인가. 꼭 죽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럴 수가 있나! 이미 한번 죽어본 사람의 경험으로 틀림없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아직 좀 더 아파야 하는 거잖아. 크흑!! 그건 정말 싫은데!! "히노 선배... 에이, 아직 안 죽었네. 에휴휴..." "그럼 죽길 바랬냐!!" 옆쪽에 앉아 있던 허크 아저씨가 내 말을 듣고는 빽 소리를 질렀다. "아우... 그러지 마세요. 머리가 울려요... 하아... 음...? 이젠 거의 아프지도 않네요..? 오오, 정말 다행이다." 맞아. 너무 다행이다. 다행히 편하게 죽겠구먼. 착한 마음(?) 먹었다고 하느 님이 상을 주시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동안 그렇게 딴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내 앞의 인기척을 느끼고 나는 고개 를 들어올렸다. 나의 앞에는 알 아저씨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저씨는 왠 지 말로는 표현하기가 힘든 복잡 미묘한 이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내게 힐링포션을 쓰지 않은 죄책감으로 저런 이상한 표정을 짓는 모양이 다. 좋아, 안 아플 때 신경 쓰지 말라고 한마디 해주자. "알 아저씨...전...." 풀썩!! 갑자기 알 아저씨가 나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용서해다오!!" "...네?" "내가...내가 잘못했다!! 내가...내가..." "...?" ......그제야 난 상황판단을 할 수 있었다. 어깨의 상처에서 거의 아픔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은 감각이 마비된 것과는 다르게 치료가 되어서 그랬던 것이다. 조금은 왼팔의 감각도 돌아오고 있 는 듯 했다. 게다가 조금 전처럼 숨쉬기가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힐링...포션을 썼군요." "크흐흐흑!!!" 알 아저씨는 아까 그냥 눈물만 슬쩍 흘렸을 때와는 달리 이번엔 오만상을 다 찌푸리면서 어린애같이 펑펑 울고 있었다. "아...아저씨..." "나는...나는 크흐흑!! 미안하다...미안하다..." 아저씨는 엎드린 자세에서 머리를 땅에 쿵쿵 찍으며 계속 같은 말을 되뇌 었다. 문득 콧등이 찡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렇게 고통스러워 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는 완전히 죽기 바로 직전에야 포션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약간 황당하지만, 그래도 아저씨는 끝내 자신의 목숨보다 나의 목숨을 택한 것이다. 만약 내가 아저씨의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전생에 내가 죽 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얼마나 죽고 싶지 않았는지, 얼마나 죽음이 두려웠는지 그 기억만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 다. 알 아저씨에게 자신의 목숨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 다. 그런 그에게 힐링포션이란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최후의 보루임이 틀 림없다. 솔직히 알 아저씨는 용병으로서 수많은 전장에 고용되어 전투를 치르며 애들의 죽음 따윈 언제나 보아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 죽을지 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서 나를 위해... 힐링포션을 써버린 것이다. 아저씨의 눈물을 보니까 역시 인간은 신기한 동물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 의 목숨을 담보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인의 목숨을 구해 줄 수 있다니 말이다. 나야 환생을 알게 된 뒤로 스스로의 목숨을 그렇게 절대적으로 생 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 짓을 한다해도 그렇게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없 지만 말이다. "아저씨... 아저씨...괜찮다고 했잖아요..." 나는 몸을 조금 움직여 어린애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아저씨 쪽으 로 다가갔다. 이제는 조금이나마 혼자서 움직일 수도 있을 정도로 몸이 많 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저씨가 너무 울자 안타까워져서 그를 끌어 안았다. "아저씨... 저는 괜찮다니까요. 고마워요. 포션 말이에요... 그건 아저씨 것이 잖아요?" "흐흑...크흐흐흑!!" "아저씨의 목숨을 주셨잖아요... 고마워요...이제..이제 괜찮아요...네?" 나는 죽어도 상관없었는데,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은데, 그냥 영웅심으로 죽어보자고 했던 것뿐인데. 그런데 아저씨는 이런 나를 자신의 목숨을 담 보로 하면서까지 살려낸 것이다. "우흐흐흑..." "괜찮아요... 괜찮다니 까요..." "나는...나는..." "걱정 말아요... 괜찮다니 까요. 괜찮아요... 알 아저씨..." 나는 알 아저씨의 등을 토닥였다. 몸집도 작은 어린애가 다 큰 어른을 안 고 토닥인다는 건 정말 어색한 장면이었지만, 그것 말고는 알 아저씨를 어 떻게 위로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아서 아이들을 달랠 때 쓰는 방법을 그대로 사용했던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을 능수 능란하게 달랠 만한 능력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아이들 달래는 거라면 자신 있는 데 말이야. 나는 괜찮다라는 말 이외는 뭐라고 위로의 말을 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서 계속 그 말만 반복했다. 아저씨는 내 품안에서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저 때문에 또 한참을 여기서 지체했겠군요?" "그래! 네놈 덕분에 얼마 가지도 못하고 시간을 얼마나 오래 끌었는지 아 냐? 네가 퍼 자고 있는 동안 어스웜 퀸이 무려 8마리나 동시에 나타났다 고! 아르윈의 어스웜 퀸이란 어스웜 퀸은 다 데려다 놓은 것 같군." "헤에... 그럼...이제 가야죠. 조금 가슴이랑 어깨가 욱신거리지만 이젠 거의 안 아프네요? 겨우 6서클의 마법 시약인 힐링포션이 이렇게 대단한 거였다 니 처음 알았어요. 저는 진짜 죽었을 줄만 알았다니까요. 하하하!" "너...!! 휴우, 웃기지 마라. 네가 살아난 건 기적이라고. 보통은 힐링포션으 로 그렇게 초죽음이 된 놈까지 살려내는 건 거의 불가능해." 허크 아저씨가 나의 말에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나는 그에게 싱긋 웃어 준 다음 다시 한번 일행을 죽 둘러봤다.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들 눈가가 온통 눈물 자국으로 엉망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위해 이렇게 슬퍼해 줬다니 너무 기쁘다. 왠지 힘이 불끈불끈 솟는 거 같아. "가요!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지요! 힐링포션도 썼는데 여기서 죽어 버리 면 포션이 아까워서 제명에 못 죽을지도 몰라요." "죽었는데 못 죽는다니 뭔 소리냐?" 에르가 형이 심통 맞은 소리로 나의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하지만 벌겋 게 된 눈을 한 에르가 형의 말은 심통 맞아 보이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냥 통속적인 표현이잖아. 에르가 형은 여전하네. 너무 귀여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키려했다가 그만 비틀거렸다. 상처가 거의 다 나았다고는 하나 아직 힘이 전부 돌아오지는 않은 모양이다. "훌쩍... 이리로 와라. 벌써부터 너 혼자 움직이는 건 초인이라도 무리다... 훌쩍...킁... 내가 비록... 그랬지만... 살려냈으니 너만은 내가 지켜주마." 알 아저씨가 훌쩍거리며 말했다. 겨우 울음을 그쳤구나. 근육질 인상파 남 자가 우는 건 역시 봐 주기 힘든 장면이다. 후훗, 다행이네. "헤헤헤... 그럼 신세지겠습니다, 알 아저씨." 나는 빙긋 웃었다. 기분이 좋다. 너무나. 내 평생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을 다시 겪을 수 있을까. 나를 너무나 소중하게 생각해준 사람들. 조금 전 그 렇게 아파했던 것마저 잊을 정도로 나는 무척이나 기분이 좋았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제대로 길을 재촉 할 수 있게됐다. 겨우 3일 새에 참 일도 많았군. 나 두 번이나 죽을 뻔했잖아? 다행히 그 동안 몬스터라고는 지렁이들만 조금 튀어나오는데 그쳤기에 우 리들은 조금 편안히 길을 나아갈 수 있었다. 하긴 거대한 자신의 영역 속 에 1마리밖에 서식하지 않는다는 어스 웜 퀸이 15마리나 나타났으니 이젠 아르윈 왕국엔 어스웜 퀸의 씨가 말라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음? 다른 나라의 어스웜 퀸을 데려온 거면? 새...생각하지 말자.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렇게 어스 웜 퀸을 불러모을 수 있었던 걸까. 아아! 생각만 해도 열 뻗치는 일이다! 사실 우리를 지금 호위해주는 용병들이 초일류 용병들이라 그렇지 아니었 으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다. 어스웜 퀸은 상당히 강한 몬스터의 축에 속했 기 때문이다. 아저씨들 정도가 되니까 8마리가 한꺼번에 나타나도 6명으로 -비리비리한 학자 하나 끼워서- 상대가 가능했던 거지, 아니었으면 우리는 벌써 저 세상 행 열차를 -아니, 환생 행이군- 타고 있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우리들은 마음대로 밤이라고 추측하며 네 번 정도 잠을 잤다. 생각대로라면 이로써 총 일주일 정도의 거리를 온 것이지만 나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힐링포션으로 치료를 했다지만 내 몸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 니라 금세 지쳐버리는 바람에 자꾸 길을 지체한 데다가, 내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의 걸음걸이는 너무 느렸다. 그리고 저번처럼 대놓고 불평을 하진 않았지만 계속해서 끙끙거리는 아이들 때문에 쉬는 시간이 자연히 많아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걸 생각하노라면 우리가 5일 거리를 채 왔을지도 의 심이 될 정도다. 길을 얼마 가지도 못한 듯한데, 음식과 물의 양이 자꾸만 떨어져 갔다. 용 병과 학자아저씨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상당히 초조해 보이는 모습이 었다. 잘못하면 불미스러운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내 심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점점 나빠지는 상황 속에서도 한가지 다행스러운 사실은 물론 조금 격하게 하면 금세 숨이 가빠져오긴 하지만 그래도 홀로 어느 정도 걸어다닐 수 있 을 정도까지 회복됐다는 것이다. 나한테만 다행한 사실이 아니라 일단 일 행의 짐이 하나 덜어진 거다. 왼팔은 아주 약간 감각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마비 상태였다. 그 정도 상 처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일단 움직이지 않고 고정시켜두었다가 이대로 나 간 후에 마법사에게 보이면 완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타스 아저씨가 말했 다. 음, 몸의 일부분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정말 이상한 기분이다. 허크 아저 씨가 붕대로 능숙하게 감아 흔들리지 않게 만들어 줬는데 그 때문에 팔이 정~말 찝찝했다. 팔뿐만이 아니라 솔직히 온몸이 간지러웠다. 내가 다칠 때 피 범벅이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그 전에는 지렁이의 피까지 뒤집어썼었 지. 얼른 빠져나갔으면 좋겠다! 목욕! 목욕하고 싶어!! "으으... 간지러워..." "참아라. 이 녀석. 죽다 살아난 녀석이 간지럽기는... 그게 다 살아있음으로 써 느끼는 축복인 게야." "그래도 쟈츠 아저씨. 간지러운 건 간지러운 거예요. 이젠 완전히 온몸에 썩는 내가 난다니 까요. 정말 그냥 홀딱 벗고 알몸으로 갈까보다." "카류!!"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히노 선배가 얼굴이 약간 빨개져서는 외쳤다. "푸훗, 제가 작잖아요. 외견만으로 본다면 사실 이렇게 조그마한 어린애인 걸요. 그런데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있을까나?" "으윽! 카류 저 녀석은 정말!! 5살이 넘으면 옷 벗고 돌아다니는 짓은 평민 도 안 해!" "저 녀석 정말 왕자 맞아?" 일행들이 하나씩 내 말을 걸고 넘어졌다. 조금 침울하던 분위기가 겨우 살 아난 듯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 며 아주 몸 장난까지 쳤다. "푸후후... 그렇게 왔다갔다 거리 다가 몬스터가 잡아가도 저희들은 모릅니 다?" 푸하학~~!!! 커헉! 말이 씨가 된다더니! "아니!? 저게 뭐야?!" 푸하학 소리만 믿고 그냥 어스웜이라고 생각했건만 옆에 서있는 아이의 급 박한 목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 예상이 맞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보통 어스 웜보다 2배는 몸집이 큰 지렁 이가 6마리가 버티고 서있었던 것이다. 생김새는 어스 웜이랑 똑같은데 대 체 왜 저렇게 큰 거야? "젠장!! 저건 뭐지? 어스웜이 저렇게 큰 건 처음 봤어!!" 허크 아저씨가 소리치던 찰나, 완전히 얼어버린 에르가 형 쪽으로 그 지렁 이들이 쏜살같이 다가가는 게 보였다. 맙소사!! 저렇게 빠르다니! 용병 아저씨들은 조금 앞에 있었기 때문에 에르가 형과는 내가 훨씬 더 가 까웠다. 이런 젠장!! 또 방패막이 해야하나? 나는 검을 빼들면서 에르가형을 발로 차 밀어버리고 검을 위에서 아래로 비스듬하게 휘둘렀다. 제발 이놈도 약하기를 빌면서. 챙! "크흑!!" 그놈은 과연 어스 웜과는 달랐다. 재수 좋게도 검으로 그놈의 입을 막긴 했는데 보통 어스 웜이라면 입부터 몸통이 반으로 쪼개졌을 테지만, 이놈 은 보통 놈들과는 달리 이빨이 굉장히 단단해서 나의 검을 그것으로 막고 있었던 것이다. 바야흐로 힘 겨루기 상태에 들어간 나와 기형 어스 웜. "크흐흑!!" 하지만 어린애인 내가 그걸 버틸 수 있을 리가 있나. 다행히 그 기형 어스 웜도 보통 어스 웜처럼 근력(?)만은 약했는지 나는 아주 잠시동안 그 놈과 대치상태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역시 오른쪽 팔 하나만으로는 도저 히 무리라 점점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왼팔로 오른팔을 받치면서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버텼다. 그러 나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형 어스 웜의 후끈한 입김이 점점 얼굴 가까 이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지자 등뒤로 식은땀을 주르르 흘렀다. 으으으, 힐링포션 먹고 살아났다가 나흘만에 다시 죽는 거냐!! 하이고! 포 션 아까워서 우짜노~~!! 알 아저씨한테 미안해서 어째~~!! 그런데 그 어스 웜은 이빨에 뭐가 끼인 게 상당히 찜찜했던지 더 이상의 힘 겨루기는 그만두고는 머리통을 휙 옆으로 돌렸다. 덕분에 젖 먹던 힘까 지 다해서 그 이빨 사이에 끼여있던 검을 잡고 버티고 있던 나는 검과 함 께 왼쪽으로 날려 버렸다. "우아악!!" 그런데 재수 없게도 하필 왼쪽어깨부터 땅으로 꼬꾸라지는 바람에 너무나 아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끼에엑!! 으아~~! 진짜로 죽는구나. 알 아저씨, 힐링포션을 낭비하게 해서 진짜로 미안해요! 그래도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고 살아나가세요! 나는 뒤로 넘어진 자세에서 눈을 꼭 감았다. 지렁이의 입안을 감상하고 싶 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카류리드! 이 멍청한 녀석!!" "응?" 알 아저씨가 굉장히 화난 얼굴로 나의 오른쪽 팔을 잡아 난폭하게 일으켰 다.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아직까지 욱신거리는 왼쪽 어깨를 손으로 감싸 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나는 아저씨의 옆에는 머리가 반쯤 갈라져 꽥꽥거 리는 기형 어스웜을 불 수 있었다. 내가 넘어져 눈을 감고 있는 그 짧은 사이에 알 아저씨가 저렇게 만든 모양이다. 나는 잠시 그 어스 웜을 보다가 그 놈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고쳐 쥐고 어스웜의 머리를 찔렀다. "어스웜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죽어 가는 건 정말 힘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알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팔 부분의 옷이 약간 찢어져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다급히 아저씨에게 물었다. "아...아저씨 다쳤어요?" "별거 아니다. 저런 웃기지도 않는 놈한테 내가 질 거 같으냐?" "그...그런가요? 그럼 다행이..." 끼에엑~!!! "헉! 맞아!! 아직 5마리나 남아있어요!!" 이번에는 아이들도 가만히 서있지 않고 이리저리 도망을 다녔다. 이번 어 스 웜은 발의 진동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지 가만히 서있기만 했던 에르 가 형에게도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본 아이들은 기겁을 하며 짐이 고 뭐고 다 내팽개치고 마구 도망을 다니기 시작했다. "젠장~~!!" 알 아저씨 등의 용병들은 재빨리 그 어스 웜에서 달려들었다. 그 기형 어 스웜들은 근력은 약해도 몸이 상당히 단단하고 꽤나 빨라서 그 용병 아저 씨들처럼 제대로 베지 않으면 상처를 입히기 힘들었다. 덕분에 타스 아저 씨도 아이들과 같이 이쪽저쪽으로 도망을 다니고 있었다. 알 아저씨가 내 앞에 있는 기형 지렁이를 순식간에 없애버린 덕분에 그놈 들이 5마리로 줄어서 빠르게 어스 웜들을 막아선 용병들은 전부 1:1로 그 지렁이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다행히 자잘한 부상을 빼면 그렇게 큰 상처 를 입은 용병은 없는 듯 했다. 그 기형 지렁이들은 사실 어스웜 퀸 수준밖 에 안됐는데 용병 아저씨가 너무 방심을 해서 이런 상처를 입은 거라고 했 다. "정말 다행이네요, 아저씨들. 그리고 알 아저씨.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살아난 지 나흘만에 또 죽을 뻔했지 뭐예요? 아하하하! 그러고 보면 이 동 굴 속에서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로 죽을 뻔했네!" "......대체 너란 놈은." "넉살도 좋군. 무섭지도 않으냐?" 다른 일행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분위기 띄우려고 농담한 건데... 그렇게 일행들을 주욱 둘러보던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데... 모두들...짐은 다 어쨌어?" 나는 지렁이들이 나오면 검을 휘두를 때 거치적거린다고 일부러 짐을 옛날 책보처럼 등에 매두고 있었다. 용병 아저씨들이야 검을 써야하니까 나와 비슷한 방법을 썼지만, 귀족아이들과 학자아저씨는 그럼 품위 없는 짓은 못한다면서 다들 손에 들고 다녔던 것이다. "......맙소사!!!" 나는 볼 수 있었다. 기형 지렁이들이랑 싸움을 벌리면서 엉망이 된 동굴. 그리고 그 사이에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스러지고 또 무너진 돌무더 기에 깔린 음식과 바닥에 전부 쏟겨버린 물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여기까지...여기까지 와서!!!!" 나는 절규할 수밖에 없었다. ◆ ◆ ◆ ◆ ◆ ◆ ◆ 완전히 초죽음이 되었던 카류 왕자를 힐링포션으로 살려낸 뒤, 우리는 한 참동안이나 지체했던 길을 다시 나아가기로 했다. 그만 출발하자는 말에 카류 왕자는 힘차게 몸을 일으키려다 금방 비틀거렸다. 아무리 포션을 썼 다고는 해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그렇게 움 직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훌쩍... 이리로 와라. 벌써부터 너 혼자 움직이는 건 초인이라도 무리다... 훌쩍...킁... 내가 비록... 그랬지만... 살려냈으니 너만은 내가 지켜주마." "헤헤헤.. 그럼 신세지겠습니다, 알 아저씨." 내가 부축을 해주자 녀석은 귀엽게 빙긋이 웃으며 곧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미소에 가슴이 약간 쓰라려 옴을 느꼈다. 이 녀석을 살려낸 것을 절대 로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이후로 약 4일 동안 그 꼬맹이는 여전히 유쾌했다. 얼마 전에 죽다 살 아난 녀석인지 의심될 정도로 말이다. 만들어 낸 모습이 아닌 너무나 자연 스러운 그 모습에 일행들은 모두 조금씩 침울한 분위기에서 벗어나고 있었 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서도 문제가 있었는데, 그건 식량이 점점 부족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카류 꼬맹이의 몸이 아직 완쾌되지 않은데다가 저 아무짝 에도 쓸모 없는 꼬맹이들이 비실거려서 길을 자꾸 지체하는 바람에 우리가 진짜로 4일거리를 걸어왔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이대로 라면 밖으로 나 가기도 전에 식량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푸하하학~!! 젠장, 또 나타났군!! 나는 신경질 적으로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이번에 나타난 놈 들은 보통 어스웜보다 2배나 큰놈이었다. 그놈은 갑자기 건방진 녹색꼬마 쪽으로 움직였다. 보통 어스 웜보다 훨씬 빨랐기에 조금 놀란 우리 용병들 은 약간 떨어져 있는 그곳까지 달려가 대처할 수가 없었다. "크흑!!!" 맙소사! 카류리드!! 저 녀석이 또다시 아이들을 밀치고는 대신 그 어스 웜과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저놈은 대체 몇 번을 죽어봐야 정신을 차리는 거야! 나는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어스웜과 대치하고 있던 카류 왕자는 그 놈이 고개를 움직이는 바람에 옆으로 밀려나고 말았는데 상처를 입은 왼쪽어깨 부터 땅에 넘어지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다. 고통 때문에 방어 할 생각을 못하고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어 있는 카류 왕자에게 어스웜이 달려들었 다. 그 모습이 눈에 비치자 갑자기 머리에서 피가 솟구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온힘을 다해 그곳까지 달려가 단번에 그놈의 머리를 베어버릴 수 있었지만 의외로 그놈의 머리가 단단한지라 방심했던 나는 팔에 약간 그놈 의 이빨이 스치는 상처를 입었다. 그 어스웜을 죽이고 고개를 돌릴 때까지 이 꼬맹이 녀석은 눈을 꼭 감고는 잔뜩 웅크린 자세 그대로 넘어져 있었다. 정말! 이 바보 같은 놈이!? "카류리드! 이 멍청한 녀석!!" 나는 벌컥 화가 나서 그놈에게 외쳤다. 왜 그렇게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 는 거지? 이제까지 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이다!! 내가 오른쪽 팔을 잡아 일으켜 주자 그 놈은 땅에 부딪힌 왼쪽어깨가 아직 아팠던지 다른 손으로 어깨를 쥐고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다가 곧 눈앞의 꽥꽥거리는 어스웜에게 다가가서 자신의 검을 머리에 박으면서 말했다. "어스웜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 천천히 죽어 가는 건 정말 힘들 거예요." 나는 잠시 멍해졌다. 지금 자신을 죽이려했던 어스웜을 걱정하고 있단 말 이야? "아...아저씨 다쳤어요?" "별거 아니다. 저런 웃기지도 않는 놈한테 내가 질 거 같으냐?" 녀석의 걱정스러운 말을 듣고 나는 약간 큰 소리로 말했다. 남을 걱정하기 전에 자신의 걱정부터 하는 게 어떠냐고! 그 이후로 나는 허크 대장들과 함께 나머지 어스 웜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어스 웜치고는 의외로 강한 놈이라 우리들은 그만 상처를 입었다. 미미한 생채기 정도였지만 저런 놈들한테 1:1로 다치다니 정말 수치다!! "정말 다행이네요, 아저씨들. 그리고 알 아저씨.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살아난 지 나흘만에 또 죽을 뻔했지 뭐예요? 아하하하! 그러고 보면 이 동 굴 속에서 이번으로 벌써 세 번째로 죽을 뻔했네!" 모두가 어이가 없어질 정도로 순진한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면서 이 꼬맹이 가 말했다. 정말 이놈 별종이었구만!! "...그런데... 모두들...짐은 다 어쨌어?" 문득 카류 왕자는 일행을 주욱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 꼬마의 시선을 따라 다른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아 이들과 학자는 손에 들고 있던 짐들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음식과 물이 들어있는 생명 줄과 같은 것을 마구 던져버리다니, 저 멍청한 놈들이!?!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여기까지...여기까지 와서!!!!" 꼬마는 자신이 다쳤을 때도 하지 않던 절규를 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여 기서 더 이상 저런 녀석들을 데리고 갈 순 없다. 지금이 그때이다. 이젠 더 이상의 길은 없는 것이다. "카류. 이리 와라. 우리끼리 간다." 나의 말에 다른 꼬맹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무슨 소리야? 우...우리를 버리겠단 말인가?" "당연하다. 어떻게 하자는 거지? 말해두지만 내게 숨겨둔 음식 따윈 없다." 힐링포션의 때와는 틀리다. 그리고 카류리드가 아니었다면 나는 끝까지 포 션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 꼬마를 살린 것을 후회하고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뿌듯하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다르다. 기생충같이 들러 붙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까먹는 듯한 짓만을 하는 녀석들. 마침내 자신 의 생명줄마저 자신의 손으로 버려버린 것들. "이...이... 네 놈이 진정 사람이냐? 어떻게 이런 애들을 버리고 가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야!?" "이 미친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귀족 꼬마들이 소리쳤다. "우리가 버린 것이 아니다. 너희들이 짐을 버렸지 않나!? 지금 우리 몫을 먹겠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용병 중 한 명인 에민이 화가 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젠 귀족이고 나 발이고 없다. "그...그런!! 그런 상황에서라면 누구라도...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렇잖아요? 그런 급박한 상황에서 어떻게 짐을 일일이 챙길 수 있단 말입 니까?" "품위를 위해 손으로 들고 가겠다고 한 놈들은 바로 너희 자신들이 아니던 가?" 이제는 허크 대장까지 냉랭한 목소리로 학자 놈에게 말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저들은 여기에 버리고 우리들은 나가는 거다. "그래. 그 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최소한 굶어죽는 고통은 느끼지 않도록 자비를 베풀어주마." 허크 대장은 그렇게 말하고 검을 빼들었다. ◆ ◆ ◆ ◆ ◆ ◆ ◆ "헤유...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내가 검을 빼들자마자 카류리드 왕자가 갑자기 그렇게 말했다. 무슨... 뜻이지? "끄응. 어쩔 수 없군요. 저도 그냥 여기서 죽을게요. 친구들을 두고 혼자 나가기엔 너무 양심에 찔리고, 밖으로 나갔을 때 다름 사람들 보기에도 그 럴 테고, 어쨌든 좀 그럴 거 같아요." ...저런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다니. 나는 이 아르윈 왕국의 최고의 용병 단인 샤크 용병 단의 대장이 된 뒤로 별의별 이상한 놈들을 많이 봐왔지만 내 앞에서 히죽 웃고있는 저 녀석만 큼이나 황당한 녀석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13살이라고는 하지만 외견상으로는 이제 겨우 10살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 는, 저 왕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생각이 깊고, 냉철하며, ...자애롭다. 몇 번이나 자신의 친구들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자신을 위험 속에 던지 고,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고도 남겨질 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자신을 죽기 직전에까지 몰아넣었던 배신자를 너무나 간단하게 용서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는 것일까. 세간에 말하는 성자라는 존재가 바로 저런 존재인 것일까. 저렇게 어린 꼬마 녀석이? "무슨 소리야. 넌 이 꼬마들을 데려가자고 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더 이 상은 절대로 무리다. 이제 음식은 거의 없어. 저 귀족출신의 꼬마녀석들을 데려가는 것은 사실상 무리란 말이다. 아니, 우리가 음식을 나눠준다 하더 라도 저 녀석들은 얼마가지도 못해 견디지 못하고 제풀에 먼저 포기해 버 릴 거라고." "그래, 우리가 음식을 나눠줘서 여기서 전부 굶어 죽는 게 좋겠냐?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야." 우리 용병들은 카류 왕자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솔직히 그 누구도 저 왕자 를 죽게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저도 알고 있어요. 휴우, 여기까지 왔는데 정말 운도 없지." 카류 왕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이 카류리드!! 요...용병들이 널 죽이지 않을 것 같으니까 지금 수 쓰는 거지?! 지금 착해 보이고 싶어서 그딴 소리를 하는 거잖아!!" 항상 제일 먼저 건방진 소리를 해서 내 눈에 단단히 찍혔었던 녹색 머리 꼬마가 카류 왕자를 향해 외쳤다. 과연 그 소갈머리 밥 말아먹은 듯한 태 도는 이런 상황이 될 때까지도 버리지 못한 듯 싶었다. 조금 전 카류 왕자 한테 목숨을 구원받아 놓고도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니. 한낱 미물도 그 은혜를 안다고 했건만 정말 뻔뻔스러운 놈이구나. 아니, 그게 원래 보통 귀 족들의 특징이기도 했었지. 카류 왕자는 그 녹색 머리의 녀석을 바라보면서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항 상 가지고 다니며 애용했던 중검을 빼들었다. "뭐...뭐야?! 지금 그 칼로 날 상대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설마, 에르가 형." 카류 왕자는 피식 웃더니 다시 우리들을 향해 검을 들었다. "설마 그...그걸로 우리를 상대해 보겠다는 건 아니겠지? 저 꼬마들을 위해 서 승산 없는 싸움이나마 해보겠다는 거냐?!" 골크의 말에 순간 가슴이 서늘해졌다. 저 왕자라면 그럴지도 모르지. "골크 아저씨, 너무해요. 설마 제가 아저씨한테 덤비겠어요?" 왕자는 검을 들고는 골크에게로 다가갔다. "자요. 이걸로 제 목을 쳐줘요. 한번에 하셔야 해요?" 나는 머리에서 띵 하는 소리가 들리는걸 느꼈다. 저놈은...저놈은 정말~~!!! "하...하하. 내가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지금 시위하는 거냐? 데 려가 달라고?" "아니에요. 솔직히 친구들을 전부 죽게 버려 두고 혼자 나가는 거 너무 양 심에 찔리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귀여운 쟤네 들 얼굴을 영원히 보지 못하 는 것도 좀 슬프니까 그냥 친구들이랑 같이 죽을래요. 솔직히 이대로 죽는 다면 제게 쓴 힐링포션은 완전히 낭비가 되는 거지만 알 아저씨는 착하니 까 분명 용서해 줄거라 믿어요." "미쳤냐?! 누가 용서해 줘?!" 알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은 카류 왕자에게 완전히 빠져 버린 것 이다. 예전에 고용된 싸움에서 죽다 살아난 이후로 알 녀석은 조금이라도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만드는 일을 하는 것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 카류 왕자는 만나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을 위해 힐링포션을 쓰도록 만 들어 버린 것이다. "식량은 겨우 6인분 밖에 안 남았어요. 우리 전부 19명이나 되는데 말이죠. 게다가 지금까지 늦은 진행속도로 식량의 낭비가 컸기 때문에 이젠 거의 남아 있지도 않으니 그것을 함께 먹으면서 가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렇다 고 저 어스웜의 시체를 먹을 수도 없으니... 어쨌든 제 친구들은 완전히 귀 족이라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일주일을 넘게 강행군할 수는 없을 거 예요. 아저씨들이 친구들에게 음식을 나눠준다 해도 그건 낭비일 뿐이에 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지금 누구 편을 들고 있는 거야?" 녹색머리 꼬마가 거의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다른 꼬마들도, 학자 녀석마 저도 얼굴이 새파래져서는 카류 왕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누구 편을 든다는 게 아니야. 나는 진실을 말하는 거야. 형들과 타 스 아저씨는 자신의 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자신의 품위를 위해 내팽개 쳤잖아? 그와 동시에 형들은 살 권리까지 내팽개친 거야." 아이들과 학자는 그대로 하얗게 질려버렸다. "완전히 끝나버렸어. 지금까지 왔었던 길이 허무할 뿐이야. 이젠 됐어. 어 쩔 수 없지.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됐으니까 난 친구들이 좋으니까 그냥 같 이 죽어주겠다고 말하는 거야." "미쳤냐? 누가 감히 너를 죽인단 말이야?!" 알은 얼굴까지 벌개져서는 소리 쳤다. 표정을 보니 황당하면서도 답답한 내 심정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었다. "골크 아저씨. 자요, 여기 검을 드릴게요. 죄책감 같은 건 느낄 필요 없어 요. 죽으면 끝이니까 고통도 아픔도 모를 거예요. 저는 제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아저씨들이 죽는 것도 원치 않아요. 저번에 제 가 다쳤을 때 쓸데없는 곳에 힐링포션을 낭비해 버린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나요? 이런 극한 상황에서 그런 순간의 잘못된 결정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게 할 수 있어요. 이젠 바른 길을 찾아야지요. 아저씨 들은 살아남을 권리도 있고, 그럴 능력도 있어요. 그러니 어서 저를 죽이세 요.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세요." 맙소사.... 알마저 할말을 잃고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을 살린 것을 순간의 실수라고 평하다니. 솔직히 저 녀석을 살린 것이 포션낭비이긴 했다. 저 꼬마는 우리들에게 방해는 되지 않을지언정 도움이 된다고 하긴 어려운 존재이니까. 그 포션으로 우리 용병들의 치료에 썼었 다면 분명 탈출하는데 훨씬 더 큰 도움이 되었겠지. 그렇다고 해서,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곤 하지만 저렇게까지 냉정하게 제3자처럼 논평할 수가 있다 니. "무...무슨 소리하는 거야. 카류리드! 지금 죽자는 거야?" "그렇게 되 버렸네? 에르가 형. 일단 내가 제일 먼저 갈게. 무서워할 것 없 어." 꼭 옆집에 놀러간다고 말하는 것처럼 카류왕자는 말하고 있다. "...재미있군." 골크는 카류 왕자가 자신의 손에 쥐어준 중검을 들면서 말했다. "확실히 네게 포션을 쓴 건 낭비였다. 카류 왕자. 지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너와 저 쓸모도 없는 자식들을 죽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인 데, 나는 저 알 녀석이나 허크 대장처럼 무르지 않아! 에민!! 쟈츠!!" 에민과 쟈츠는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약간 머뭇하더니 갑자기 나와 알을 덮쳐서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뭐...뭐 하는 짓이야! 이거 놓지 못해!?" 나와 알은 정말 의외의 행동에 깜짝 놀라서 그대로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골크는 그 특유의 화가 났을 때 쓰는 낮은 목소리로 카류 왕자에게 말했다. "카류리드 왕자. 그 동안의 쇼는 잘 봤다. 그래, 친구들과 함께 죽겠다고? 죽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냐? 한번 죽을 뻔했다고 아주 뵈는 게 없 는 모양이구나." "맞아요. 제가 원래 좀 이래요. 결심하셨나본데 어서 하세요. 저기 허크 아 저씨랑 알 아저씨가 풀려나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지요? 알 아저씨들도 그 렇게 발버둥치지 말아요. 이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미쳤어? 이 꼬맹아! 임마!! 헛소리하지마!! 너만은 내가 살릴 테다! 너만은 죽으면 안돼!!" 쟈츠에게 깔린 알이 거의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 하지만 완전히 제압 당한 상태라 꼼짝하기도 어려운 상태였다. "하하... 그래. 허크 대장들이 일어나면 정말 곤란하다. 완전히 너한테 빠진 모양이거든? 나도 웬만하면 너를 죽이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 싸구려 동 정심은 치우고 그냥 우리들과 함께 가자고!!" "전 안 간다니 까요? 친구들과 함께 있겠다고 했잖아요. 자꾸 불가능한 얘 기 그만하고 절 죽여요!! 지금 살리겠다는 거예요? 죽이겠다는 거예요? 다 같이 살아나가자고 라도 얘기하고 싶은 건가요? 무르지 않다니 다 거짓말 아냐?" 완전히 미쳤군! 저 황당한 꼬맹이 놈! 골크는 잔인한 놈이다!! 그런 식으로 나가다간 진짜 죽을 거란 말이야!! 저쪽의 애들은 물론이거니와 너 또한 죽고 말 거야!! 젠장! 이 에민 놈! 언제부터 이렇게 힘이 셌던 거야! "그래. 훗훗... 그렇게 죽고싶다니 그래 네 소원대로 목을 쳐주마. 아주 깨 끗하게 죽여줄 테니 걱정 마라." 골크는 검을 치켜들었다. "안돼~~~~~앳! 말도 안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알의 처절한 비명소리에 그제야 완전히 얼어있던 몇몇의 꼬마들도 앞으로 튀어나오려 했다. "닥쳐!" 카류 왕자가 소리쳤다. 그리고 똑바로 골크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아저씨들은 살아야해요. 제가 죽어 드릴 테니까요." "물론이다! 미쳐버린 왕자여!!" 골크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골크가 쥔 중검이 카류 왕자의 목으로 향하는 것을 나는 바라볼 수밖에 없 었다. ◆ ◆ ◆ ◆ ◆ ◆ ◆ 카류리드. 나는 그 건방진 왕자의 목을 겨냥하여 검을 들었다. "그래. 훗훗... 그렇게 죽고싶다니 그래 네 소원대로 목을 쳐주마. 아주 깨 끗하게 죽여줄 테니 걱정 마라." 나는 카류 왕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놈을 보면 화가 난다. 제깟 놈이 그 렇게 착한척하면 다야? 대체 삶을 무엇이라 여기고 있는가. 우리가 자신을 위해 포션을 낭비했다는 걸 안다면 자신의 목숨을 조금이라도 소중히 여겨 야 할 것 아닌가. 뭐? 자신을 살린 것이 한 순간의 실수라고? "안돼~~~~~앳! 말도 안돼!! 당장 그만두지 못해!?" 자신을 죽이는 것도 아닌데 알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알 저 녀석이 저렇게까지 할 정도로 이 카류리드 왕자는 이상한 녀석이다. 아니, 이 왕자 놈은 아마 미쳤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지나가는 파리 잡 는 것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지 여기저기 끼어 들어서는 벌써 몇 번째로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모른다. 지금도 뭐? 친구들을 남겨두고 가기 뭐하니까 같이 죽겠다고? 미쳤다. 항 상 남을 위해왔던 저 착했던 왕자는 아마 이 밀폐된 공간에서 더 이상 견 디지 못하고 미쳐버린 것이리라. "닥쳐!!" 카류 왕자는 나를 말리려고 다가오는 꼬마들을 일갈에 멈추고는 그 커다란 흑청색 눈동자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아저씨들은 살아야해요. 제가 죽어 드릴 테니까요." "물론이다! 미쳐버린 왕자여!!" 나는 더욱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미친 왕자여, 내가 최소한 고통 없는 안 식을 내려주마!! 나는 검을 카류 왕자의 목을 향해 내려쳤다. 그 순간 나는 녀석의 눈을 볼 수가 있었다. 맑았다. 너무나 더없이 맑은 눈 이다. 일말의 원망도 없다. 일말의 두려움도 없다. 카류리든 왕자는 모든 것을 초월한 듯한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나는 용병이다. 수많은 생명을 죽여왔다. 눈앞에서 수많은 자들의 죽음을 지켜봤다. 고통, 절망, 원망, 두려움,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죽음의 정체가 아닌가? 그런 것들이야말로 죽음에 다 다른 자들이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정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저놈에겐 눈곱만치도 그런 감정이 없다. 정말 미쳐버렸기 때문에? 미쳐서 저런 눈동자를 하고 있단 말인가? 미쳐버린 자가 저런 눈동자를 가 질 수 있는가? 미쳐버려서 자신의 죽음을 가벼이 여긴다해서, 자가 자신의 죽음을 발판으로 해서 우리들에게 살아남으라고 그렇게 말해 줄 수 있는 가? 진실로 그러한가?! 저 녀석은 대체 뭐야!! "으아아아악!!!!" 도저히, 도저히 칼을 내려칠 수가 없었다. 나는 땅에 처박힌 검을 들고 숨 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도저히 저 왕자를 죽일 수가 없다.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밖으로 나아갈 수 없을 텐데. 저런 놈에게 발목을 묶이게 되면 이제 더 이상 희망 을 없는데도!! 자기 친구들을 데려가지 않으면 저도 같이 죽겠다고 우기는 미친놈이잖아! 그때 저놈을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우리도 아 무 생각 없이 귀족 꼬마 놈들을 버리고 살아 나갈 수 있었을 텐데!!! 그 왕자는 다시 한번 내게 질문을 던졌다. "결정해요. 죽일 거예요? 아니면 적은 가능성이나마 함께 살아 나갈 거예 요?" 나는 그 왕자를 바라보았다. 나무나 당당한 눈빛. 참기가 힘들다. 그 눈빛 을 바라보기엔 나는 너무나 미천하다. 나는 더 이상 그 녀석을 똑바로 바 라보기가 힘들어져 고개를 숙였다. "...쩝. 어때요, 다른 분들은? 쟈츠 아저씨, 에민 아저씨. 괜찮아요. 아저씨들 이 정하세요. 절대 자신을 속이지 말아요. 우리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거 나 다를 바 없으니까." 나는 에민과 쟈츠를 쳐다보았다. 그놈들은 서로 움찔거리다가는 슬그머니 허크 대장과 알에게서 떨어졌다. 저놈들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너 무 깊게 저 왕자에게 관여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다시는 저놈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아...정말...그렇다면 다들 이리로 와요. 어서 음식을 전부 꺼내세요." 카류왕자는 한숨을 쉬면서 가만히 우리를 보더니 말했다. 우리들은 힘없이 카류 왕자에게 다가가서 전부 음식을 앞에 놓았다. 그제 야 그 귀족꼬마와 학자도 우리들 용병의 눈치를 보면서 옆으로 다가왔다. 귀족이 우리 같은 놈들의 눈치를 볼 때도 다 있군. "...정말 적군요. 이걸로 19명이 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면... 하하하, 진짜 힘 들겠는데요?" "그럼 쉬울 줄 알았냐! 이 멍청한 꼬맹아!!" 나는 화가 벌컥 나서 소리질렀다. "하하. 미안해요, 아저씨. 음... 우리들이 지금까지 온 거리는... 좋아요, 약 5 일거리 정도를 왔다고 해두죠. 그렇다면 총 19명의 일행이 9일 정도의 거 리를 걸어가면서 6인분의 일주일치 정도 되는 식량으로 버텨야 하는 거네 요. 솔직히 남은 식량이라고는 하나 과자부스러기가 조금, 물이 극소량..." "야!! 우리는 7일 밤을 잤어! 그러니 일주일 거리로 반이나 왔다고!! 무슨 5 일거리야!?" "에르가 형! 우리는 얼마 걷지도 못했어!! 내가 다치고 형들이 계속 꾸물거 렸기 때문에 5일거리도 정말 왔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야!! 이제 더 이상은 안돼! 이런 속도로는 다시는 빛을 볼 수 없어!! 이제 다같이 살자고 했잖 아!! 그러니까 죽기 싫으면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에르가라고 하는 일행 중 건방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 녀석의 말에 카류 왕 자는 약간 짜증이 났는지 조금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음식을 하나로 싸면 서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아. 이제부터 음식은 없어. 삼일에 한끼. 그것도 이 부스러기 한쪽씩만 이야. 그리고 걷는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도저히 걸을 수 없을 때까지 걷 기만 하는 거야. 이젠 휴식이고 뭐고 없어. 수면도 용병 아저씨들이 너무 지쳐 걷기가 힘들 때가 되서야 취한다." "야!! 미쳤어? 그게 말이 돼? 그것만 먹고 어떻게 사람이 살 수 있어!? 게 다가 용병이 지칠 때가 되서야 잔다고? 말이 되냐? 저 치들이 얼마나 독한 놈들인데! 너 용병이 뭔지 잘 모르는 거 아니냐? 수십의 전장을 누비며 남 은 건 체력밖에 없는 놈들이라고!! 그런 놈들을 우리가 따라갈 수 있을 거 같애!?" "에르가 형!!" 드디어 카류리드 왕자도 짜증을 참지 못했는지 소리를 질렀다. "...하아. 형은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인줄 알아? 아니, 모두들 알아요?" 그러다가는 곧 숨을 가다듬고 차분한 말로 물었다. 가장 두려운 것? 가장 두려운 것이라. 그것은 당연히 죽음... 죽음 바로 그것이겠지. 지금 우리가 이 난리를 치는 것도 죽지 않기 위해서가 아닌가. "주...죽는 거?" 저쪽에 있던 세미르라는 꼬마가 말했다. 자기 때문에 카류 왕자가 죽을 뻔 한데 대해 죄책감이 큰지 계속 저자세이다. "틀렸어. 그건 배고픔이야." 그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굶는 게 어떤 것인 줄 알아? 아니, 사람은 4일, 아니, 3일만 물을 못 먹어 도 목이 말라비틀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내장은 그대로 썩어 들어가는 것만 같지. 사람이 굶주리는 것보다 더 무섭고 두 려운 것은 없어!! 죽음? 그것이야말로 굶주리고 고통받는 자가 얻을 수 있 는 최고의 안식이며 축복이야!!" 카류 왕자는 크게 소리쳤다. 이번엔 꽤나 화가 난 듯해서 나는 정말 어리 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왕자인 주제에... 한끼도 굶어본 적 없게 생긴 주제 에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카류 왕자는 내가 떨어뜨렸던 중검을 다시 쥐고는 그것을 땅에 팍 꽂으면 서 말했다. "이제 우리는 3,4일을 굶어가면서 오로지 걷기만 해야해! 견딜 수 없겠지? 힘들겠지? 중도에 포기할거 같은 사람은 지금 앞으로 나와!! 내가 직접 목 을 쳐줄 테니까. 그러면 굶어 죽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할 테고 다른 살아 나가려 하는 자들에게 도움도 줄 수 있으니 한가지로 두개의 이득을 보는 셈이지! 자, 어서 나와!! 에르가 형? 내 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면 지금 이리로 와!! 내가 형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겠어! 어서!!" 왕자의 외침에 아이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카류 왕자의 말과 행 동이 금방이라도 아이들을 죽여버릴 듯한 기세였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 라 저 놈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행동만을 해댄다. 나마저도 그 기세에 놀랄 정도였으니까. "......만약 다른 대안이 있다면 말해봐. 그렇다면 나도 좋지. 하지만 그런 건 없잖아. 다같이 살아나가기로 했잖아. 이 삶을 추하게, 고통스럽게 끝까지 놓치지 않고 발버둥치며 놓지 않으려 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이 수밖에 없 다고. 모두 알았어?" 말이 없다. 우리는 이제 겨우 13살 짜리 꼬마의 말에 압도당해있었다. "...나도 함께 갈게. 이렇게까지 됐잖아? 그래, 고통스럽고 추해 보이더라도 모두 살아나가야지." 이상하게도 그 말을 하면서 카류 왕자는 왠지 허탈해 보였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우리는 저 꼬마에 의해 모두 구원받을지도 모 르는 일이다. 아니, 왠지 그것이 가능하다고 느껴지고 있었다. "가자. 어서 이곳을 벗어나자. 이르나크 세계의 태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희들은 모르지?" 카류 왕자는 음식을 챙기고는 자신의 등에 둘러매고 앞으로 향했다. 우리 들은 하나둘 일어나서 그 꼬마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끝없는 절망의 나락 과도 같은 동굴 속으로. "그만...그만...이제 제발 쉬자... 카류!!!" 저 뒤쪽에서 쳐져서 걸어오던 에르가라는 녹색머리 꼬마가 소리를 질렀다. 젠장, 그렇게 말했지 않나. 우리에겐 이제 시간이 없다고!! "안돼! 아직... 하아... 쉴 수는 없어! 얼마 걷지도 않았잖아!? 하아." 왕자는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확실히 이 중에서 가장 힘든 놈은 저놈일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멀쩡한 듯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긴 했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빈사상태에까지 빠졌던 녀석이 아닌가. 이렇게 오랫동안 걸으 면서 무리를 하면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네놈은 그래서 견딜 만 하냐?" "아아... 정말... 하아하아... 온몸이 마구 쑤시네요, 골크 아저씨. 힐링포션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 더니...헉헉.." 그 왕자는 투덜거리면서도 땀을 닦아내며 계속 걸어나갔다. "안돼! 이제는 싫어! 나는 더 이상 못 가! 안돼!! 안 된다고. 크흑... 나는 이 제 안돼. 쉴 거야! 아니, 잘 거야!!" 하아, 카류 왕자의 저런 모습을 보면 측은함에서라도 힘이 생길 만도 하건 만 저 에르가라는 놈은 땅에 주저앉아 투정을 해댔다. "나...나도... 나도 더 이상은 못 가겠어! 카류야. 제발 그만 쉬자. 용병 아저 씨들도 이젠 힘드실 거야. 그...그렇죠?" "맞아. 흐흑... 난...이제 싫어." "나도...훌쩍...집에 가고 싶어." 젠장, 끝이다. 역시 저러고 있잖아?! 이래서 저 놈들을 데리고 가는 건 무 리라고 했잖아!! 역시 아까 죽여버렸어야 하는 건데! "닥쳐! 당장 닥치지 못해?" 카류 왕자가 소리 질렀다. 드디어 저 녀석까지 신경질을 낼 단계에 이른 것이다. "시끄러! 네가 뭐야? 네가 우리 일행의 뭐라고 온갖 명령을 다 내리고 그 러는거냐고!! 이 자식아!!" 하하... 정말 역한 놈이다. 그렇게 수많은 도움을 받아 놓고 어떻게 저런 소 리를 할 수 있는 거지? 저렇게 재수 없는 놈은 또 처음 보는 구나! 왕자 녀석은 아무 말 없이 그 에르가라는 놈에게 다가갔다. 퍼억! "허헉!!!" 갑작스러운 사태에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저 카류 왕자가 에르가라는 놈을 검의 손잡이 부분으로 냅다 쳐버렸기 때문이다. 저 왕자가 저런 행동 을 할거라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시끄럽다고 했지?! 지금 형만 힘든 줄 알아? 좋아! 마음대로 해. 죽고싶은 자는 남고, 살고싶은 자는 걷는다!! 따라오는 자에게만 음식과 물을 주겠 어!! 힘들다고? 원하는 자는 언제든 내게 말해라. 내가 자비를 베풀어 한번 에 그 머리통에다가 구멍을 뚫어줄 테니까. 굶어죽는 것보다는 몇천 배 행 복할거다! 너희들은 하고 싶은 대로 해!!" 녀석은 마구 소리를 치더니 아이들을 기다리지도 않고 혼자 걸어나갔다. 아이들은 멈칫거렸지만 곧 비틀거리면서도 따라오기 시작했다. 좀 전에 그 녀석이 맞는지... 휴우...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는 녀석. "...헉...헉헉헉...." 카류 왕자는 거의 실신이라도 할 듯 숨을 몰아쉬면서 휘청거렸다. 그래도 쉬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나도 조금 힘들다만, 그래도 아직 걸을 만하다. 아이들도 완전히 죽을상이긴 했지만 뒤쳐지고 비틀거리면서도 서 로를 부축하면서 아직은 다들 따라오고 있다. 나는 카류 왕자에게 다가가 부축을 해주려했다. 아까부터 괜히 부축 받길 거부하고 있었는데 자기가 우리한테 부축 받으면 다른 녀석들도 하고싶어 할거라나? 별 쓸데없는 없는 곳까지 신경을 쓰는 녀석이다! 이제는 더 이 상 안되겠다!! "이리와. 이 멍청한 놈." "헉헉... 고...골크...아저...씨." 내가 부축해주기 위해 팔을 끌어당기자 카류 왕자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헉헉...나...나는..." 카류 왕자는 이번에는 나의 행동을 더 이상 거부하지 않았다. 나는 안심하 고 녀석을 부축하려고 팔을 붙잡았다. 그런데 갑자기 물먹은 솜처럼 녀석 의 몸이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응? 카류리드!?" "뭐...뭐야? 골크?" "크흠... 기절해버렸군. 무리를 하더니..." 나는 늘어진 꼬마를 안았다. 아직 너무나 가볍다.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 던 게 아닐까. 이 녀석이 아직 겨우 13살이라는 걸. 이 일행 중에서 가장 어린 녀석이건만 이 녀석의 행동에 따라 우리들의 행동 패턴이 결정되는 게 아닌가. 이 꼬마 놈이 이젠 이 일행의 리더가 되어버렸군. "그만...쉬자. 이젠 나도 힘들어..." 용병 중에선 가장 체력이 약한 에민이 말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꽤나 걸 어왔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만 쉬기로 결정했다. "으...음..." "깼냐...." "...아...?" 카류 왕자는 우리가 자리를 잡자마자 금방 깨어났다. 녀석은 잠시 멍한 표 정으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손으로 눈 주위를 꾹꾹 눌렀다. 그리 고 숨을 폭 내쉰 다음 고개를 들어 바로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 다. ...이상한 녀석. 아이들을 바라보는 표정을 보자니 완전히 애들 보모 같군. 이 중에서 나이도 제일 어린 주제에 말이야. "휴우... 저 때문에... 쉬게 된 모양이군요." "그게 아니..." "그래! 네놈 때문이라고! 저 혼자 잘난척하더니 지가 절 먼저 꼬꾸라져? 웃 기고 있네. 빌어먹을 놈!! 네 놈이야 말로 이 일행의 짐이야!! 알아? 이 젠 장맞을 놈아!?" 내가 말을 하려고 하는 찰나, 저쪽 구석에 다른 귀족 아이들이랑 함께 웅 크리고 있던 에르가라는 녹색머리 꼬마가 소리 질러대기 시작했다. 대...대체 저놈은 어떻게 하면 저 꼬인 심사가 풀릴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놈은 이르나크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저놈 이외엔 찾기 힘들 거다. "젠장... 젠장 맞을... 흑...크흑..." 그러나 그 외침은 곧 작은 흐느낌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꼴에 귀족이라고 울지 않으려고 참는 모습이었는데, 동정심은커녕 경멸감만 들뿐이었다. 쳇, 허세도 부릴 데가 있고 안 부릴 데가 있지. 추한 녀석. 카류 왕자는 비틀거리면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에르가라는 녀석 쪽으로 다 가갔다. 그리고는 움찔거리는 에르가를 가만히 내려보다가 기습적으로 녀 석을 껴안았다. "뭐...뭐 하는 짓이야?! 이 자식아! 이런 곳에서까지 이게 무슨 짓이얏!!" "으윽...에구... 좀 기다려봐! 아파, 아프다고!! 에르가 형?" ...여행하는 중에도 몇 번 본적이 있지만, 이런 식으로 저 왕자가 껴안는 일 이 자주 있었던 걸까. 어쨌든 그 에르가라는 놈은 괜히 반항하기가 힘이 들었는지 곧 뿌리치려는 행동을 그만 두었다. "...형. 엄마 보고싶지 않아?" "누...누가? 누가 그딴 거 보고싶대!?" "끙. 이상하네. 나는 무지 보고싶은데. 난 어머님이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말 이야. 루브형이랑 세라 누나... 전부...전부 보고 싶어 눈물이 날거 같은데..." "......" 카류 왕자의 말에 에르가는 아무대답도 하지 않았다. 카류 왕자는 손을 들 어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에르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면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이야.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형제 들과 부모님. 그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 어서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야. 모두들 그래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잖아? 사랑하는 가족의 품이 그리워서. 그들의 상냥 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그들이 그리워져서..." 에르가를 더욱 꼭 끌어안으며 녀석은 말했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해도 돼. 울어도 돼. 울어도 된다고... 에르가 형...응?" 카류 왕자는 그 작은 손으로 에르가의 머리를 살며시 매만져주면서 조용히 웃었다. "흐...흑흑...으흑... 어엉엉.... 엄마...엉엉...어어엉어엉" 에르가는 더 이상 시끄럽게 소리지르지 않았다. 대신 카류 왕자를 와락 끌 어안고 말 그대로 어린애처럼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카류 왕자는 그런 에르가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등을 토닥여 주었 다. "흑...으흑...카...카류...리드..." 옆에서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다른 꼬마 놈도 훌쩍이기 시작했다. "이리 와, 후크." 카류 왕자가 뻗은 손이 녀석에게 닿자마자 후크는 자기보다 훨씬 작은 꼬 마에게 달려들어 펑펑 눈물을 쏟아냈다. "허엉...엉엉... 나는...보고 싶어... 엉엉엉... 엄마가 보고 싶어..." "어...엄마....흑흑..." 다른 녀석들도 드디어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정말이지 이상하고도 어색한 장면이 연출됐다. 카류 왕자가 아이들에게 다 가가서 하나씩 안아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이들은 카류 왕자에게 안기는 게 익숙했던지 별 거부감이 없어 보였다. 아니, 어쩌면 이 분위기에 취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울어 버려. 마구 울어 버려. 그리고 엄마를 보러가자. 아버지랑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울다 지친 아이들은 금방 잠에 빠졌다. 그 동안의 강행군으로 완전히 녹초 가 되었음에도 잔뜩 긴장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아이들이 조금 울 어버리는 것 정도로도 금방 잠에 빠져 들어버린 것이다. "이상한 놈." "별종이지." 그 꼴을 보고 있던 허크 대장과 알이 한마디씩 던졌다. 평소답지 않게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누워 잠든 아이들과 그 가운데에 방금 잠이든 카류 왕자가 보였다. 피곤에 찌들고 굶주림과 눈물로 꾀쬐쬐한 몰 골이건만 아이들은 그 어떤 때보다도 평안한 얼굴들이었다. "그런 말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놈이다." 나는 중얼거렸다. "사랑스러운 분이십니다. 왕자님은." 우리들 반대편에 홀로 앉아있던 학자 타스가 그렇게 말했다. ◆ ◆ ◆ ◆ ◆ ◆ ◆ "하아하아...." 나는 걸었다. 어두운 동굴 속을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계속해서 걷 기만 했다. 온 몸의 근육과 뼈들이 아우성을 쳐대며 고통이 호소했지만 모 조리 무시하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걸었다. 금세 죽겠다고 난리를 쳤던 그 나약한 마음가짐이랑 비한다면 정말 엄청난 발전이다. 며칠 전, 친구들이 음식을 전부 잃어버렸을 때는 그냥 모두와 같이 죽으려 고 했다. 아껴서 먹고 가도 부족할 판인데 아주 음식을 땅에 내팽개쳐 버 렸으니 식량 사정이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이제껏 여러 가지 일로 미적거 리느라 그렇게 많은 거리를 걷지도 않은 듯 싶었기에 식량은 사실상 더더 욱 부족했다. 용병 아저씨들과 내 것을 나누어 먹고 간다해도 함께 살아나 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친구들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 의 없었기에 나도 그들과 함께 죽을까 했던 것이다. 솔직히 용병 아저씨들이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줄 리도 만무했다. 내 경우 만 해도 거의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힐링포션을 써주지 않았던가. 그것도 나의 행동을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성자의 그것처럼 오인하고 감동해서 그 랬던 일이 아닌가. 친구들은 음식이 없고, 용병들이 음식을 나누어 줄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 고 이제껏 용병들에게 의지해서 겨우 연명해온 주제에 싸우고 대들어서 그 들의 음식을 뺏을 수도 없었다. 역시 모두가 살아나는 것은 힘들었다. 최소한 친구들이 살아남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버리고 나 혼자 용병 아저씨들을 따라갈 만큼 내 얼굴 가죽은 두껍지가 못했다. 포션까지 써서 살아났으니 이왕이 면 살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런 이유로 나는 골크 아저씨에게 우리들을 죽이고 밖으로 나가라고 말했 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용병 아저씨들만이라도 살아 주었으면 했던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겠는가. 전생 에 죽기 전에 그토록 살고싶어 했듯이,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듯이 그들 의 마음은 나와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살 수 있는 사람이나 마 어떻게든 살게 해주고 싶었다. 때문에 나는 골크 아저씨를 도발까지 해가면서 우리들을 죽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골크 아저씨와 모든 용병 아저씨들은 나를, 우리들을 죽이지 않 았다. 어째서? 왜 죽이지 않는 거지? 우리들을 데리고 간다면 어떻게 될지 아무 도 예상할 수 없다. 가다가 생각 이상으로 길이 멀어서 음식이 떨어지기라 도 하면 용병 아저씨들 자신조차 죽을지도 모른다. 우리들과 함께 간다면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나였다면... 나였다면 절대 그런 짓 하 지 않을텐데...!! 그러나 나의 재차 거듭된 질문에도 용병들은 우리들을 버리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로... 아니, 조금 망설여졌겠지만 어쨌든 우리와 함께 나가기로 한 것이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도저히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죽어도 좋단 말 인가? 하지만 일단은 그 제의를 받아들여보자고 생각했다. 그것이 죽음의 공포에 떨고있는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결국 일이 이렇게 됐다면 최대한 살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 아니겠는 가. 음식은 도저히 못 견딜 때까지 참았다가 아주 극소량을, 대충 2,3일에 한끼 씩으로 먹기로 하고 먹도록 하고, 용병 아저씨들의 걸음을 기준으로 쉬도 록 해서... ...분명히 고통스러울 거다. 내가 그때 겪어봐서 누구보다 잘 안다. 이번엔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걷기까지 해야하지 않는가. 이렇게까지 하면서 따 라가야 하나? 용병 아저씨들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용병아저씨들은 우리들과 함께 나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런 관계 도 없는 우리들을 위해서 음식을 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그리고 모두와 함께 나가기로 결심했다. 더 이상 죽 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또다시 며칠 전에 어깨를 다 쳤을 때처럼 극한상황이 된다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만은 용병 아저씨들의 선택을 무시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용병 아 저씨들이 우리들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나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고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나는 마음을 고쳐먹고 동굴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걷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생각이상으로... 의외로 일행의 가장 큰짐은 나였다. 팔이 조금 안 움직일 뿐 거의 다 나았 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무리를 해서 걷자마자 금방 몸에서 반응이 왔던 것 이다. 어깨부터 온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해서 다리를 제대로 가눌 수가 없 었다. 솔직히 굉장히 미안했다. 큰 소리는 혼자 다 쳐놓은 주제에 항상 내가 제 일 먼저 쓰러져서 자꾸 가는 길이 지체되었던 것이다. 굶주림과 어깨의 상 처로 인해 몰려오는 극심한 고통이나 역시 모두가 탈출하려 하는 건 무리 라는 절망감, 이런 것들 보단 나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컸고 그래서 자살해버리자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잊고있었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여기서 '나는 괴로워서 그 만 죽고 싶으니까 너희들끼리 가버려!!' 이럴 수야 없지 않겠는가? "으...음..." "깼냐...." "...아...?" 나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또 내가 기절하는 바람에 길이 지체된 것 이다. 나는 손으로 눈을 꼭 눌러 멍해진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리고 조금 정신이 맑아진 것 같자 바로 고개를 들어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기절하기 전에 칭얼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든 따라오게 하려고 마구 때리 고 윽박 질렀던 것 때문에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했던 것이다. 용병들이 없는 한쪽 구석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은 며칠 동안 있었던 여 러 가지 사건에 잔뜩 긴장해서인지, 완전히 지쳐 있음에도 금방 잠을 이루 지 못하고 있었다. "휴우... 저 때문에... 쉬게 된 모양이군요." 내가 한마디하자 저쪽 구석에서 아이들과 함께 앉아 있던 에르가 형이 소 리를 질렀다. "그래! 네놈 때문이라고! 저 혼자 잘난척하더니 지가 절 먼저 꼬꾸라져? 웃 기고 있네. 빌어먹을 놈!! 네 놈이야 말로 이 일행의 짐이야!! 알아? 이 젠 장맞을 놈아!? 젠장... 젠장 맞을... 흑...크흑..." 그러나 그렇게 신경질을 내다가는 금방 울먹이기 시작했다. 에르가 형의 저렇게 울음을 삼키는 모습이 너무나 측은해 보여 나는 어떻게든 그들을 위로해주려 마음먹었다. 그래, 아이들이라면 가장 먼저 엄마가 보고 싶을 테지. 하하. 나도 어머니 가 조금 보고 싶은걸? 나는 에르가 형에게 다가가 그를 확 끌어안았다. 형은 발버둥을 치더니 평 소와는 달리 곧 포기하고 잠잠해졌다. 나를 뿌리칠만한 힘도 남아있지 않 은 모양이었다. 나는 형을 끌어안고 조용히 말했다. "...형. 엄마 보고싶지 않아?" "누...누가? 누가 그딴 거 보고싶대!?" 아니나 다를까 에르가 형은 나를 향해 소리를 빽 질렀다. "끙. 이상하네. 나는 무지 보고싶은데. 난 어머님이 보고 싶어 죽겠는데 말 이야. 루브형이랑 세라 누나... 전부...전부 보고 싶어 눈물이 날거 같은데..." "......" 웬 일로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내 말을 듣는 에르가 형을 보고 나는 그의 녹색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야. 어서 빨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형제 들과 부모님. 그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 어서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거야. 모두들 그래서 이렇게 애쓰고 있는 거잖아? 사랑하는 가족의 품이 그리워서. 그들의 상냥 한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다시 한번 그들의 얼굴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그들이 그리워져서..." 나는 에르가 형을 더욱 꼭 껴안았다. 에르가 형이 감정이 고조되었는지 몸 을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의 성격상 그것을 들키는 것을 굉장히 부끄러워 할 것 같아 나는 그를 더욱 꼭 껴안아 주었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해도 돼. 울어도 돼. 울어도 된다고... 에르가 형..." 그런 말을 하고 나니 나도 조금 울고 싶어졌다. 하지만 괜히 그것을 참으 면서 눈물을 흘리는 대신 조용히 웃었다. 그리고 품에서 약간 떨고 있는 귀여운 에르가 형의 녹색머리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드디어 에르가 형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연쇄작용으로 다른 아이들도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울어 버려. 마구 울어 버려. 그리고 엄마를 보러가자. 아버지랑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자." 나는 아이들을 하나씩 안아주었다. 그 동안 내가 마구 안아댔던 것 때문인 지 그들은 의외로 쉽게 내게 안겨왔다. 그때마다 아이들의 따뜻함이 느껴 졌다. 살아있는 자의 따스함이 나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울다 지친 아이들은 곧 하나둘 잠에 빠져들었다. 이것으로 조금쯤은 아이 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들에게서 위로 받을 수 있었으 니까.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힘들지만 계속해서 비틀거리며 걸었다. 아이들은 언제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굶주리면서도 억척스럽게 걸었다. 극 소량의 음식과 물만으로 우리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을 걸었다. 항상 제일 먼저 쓰러지는 것은 나였다. 잘난 척은 혼자 다한 주제에 미안 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에르가 형의 말이 맞았다고 할까. 죽 음에 초탈해졌다고 인간사에 초탈해진 건 아니기에 정말 민망하고 이 몸이 원망스럽기도 해서 기분이 굉장히 저조했다. 뭔가 이 짜증을 풀만한 것이 없을까. "아아... 헉헉... 누구 내게 욕... 헉헉... 좀 가르쳐 줘." "...욕? 방금 욕이라고 했냐?" "하아하아... 네... 맞아요. 욕 말이에요. 헉헉... 그러니까 마구 욕을 하고 나 면... 헉헉... 속이 다... 시원해지잖아요. 하아하아. 전 아르윈 어로 된 욕은 하나도 모르거든요. 하아... 뭔가...충격적인 거 없을까..." "...젠장맞을...이라고 에르가라는 놈이... 후우... 아까부터 계속 지껄이고 있 지 않냐?" 그러고 보니 에르가 형한테 그런 소리를 많이 들은 것도 같다. 나 의외로 욕 좀 알고 있었던 건가? "제...젠장맞을?" "푸훗... 그러고 보니... 하아... 카류가 욕하는 거 한번도 본적이... 하아... 없 었는데 그게 욕을 몰라서.... 안 했던 거야?" "하하.... 그...그렇지... 하아하아... 아니었으면 당장에... 모두한테 욕을 지껄 여댔을 거야. 하아하아...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우우.." 나는 히노 선배의 질문에 힘겹게 웃어 보이며 답해주었다.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지 못하고 거의 벙어리처럼 있던 히노 선배는 이제는 상당히 말을 유창하게 하고 있었다. 일행 중 유일한 여자인 히노 선배가 일행 중 가장 먼저 쓰러지지 않을까 하는 나의 걱정과는 달리 -내가 제일 먼저 쓰러졌다- 그녀는 단 한번의 칭얼거림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아이들만큼 힘들어하지도 않 는 것 같이 보였다. 칭얼거리지 않는 건 그렇다 치자. 참을성이 강해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저렇게 다른 아이들까지 부축해주는 모습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거지? 의외로 그녀는 통뼈였던 것인가!! "이 새꺄... 욕을 모른다고? 고상한 척... 헉헉...하고 앉았네!!" "새...새까...도 욕이지?" 에르가 형의 말에는 확실히 욕이 많다. 이 기회에 외워두자! "이 빌어먹을 놈이...헉헉...한번 내 손에 죽어...볼래?...헉헉.." "빌어먹을...빌어먹을...하아하아...이 빌어먹을 동굴 같으니!!!" 나는 에르가 형의 욕을 주워담아 외쳤다. 아마 욕이 맞을 거다. 내가 모르 는 단어였거든. "하하...그래...이 젠장할~!! 나가면 당장..헉헉... 이놈의 동굴...뒤집어 버릴 테 다!!" 옆에서 허크 아저씨가 외쳤다. 우리일행은 곧 하나 둘씩 마구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이 미친 자시~~익!! 헉헉헉헉... 누군지 걸리기만 하면... 헉헉... 정말 가만 히 안 둘테다앗~!!!" "빌어먹을~!! 다들 뒈져라앗~! 헉헉헉..." 금방 동굴 속은 욕지거리로 가득해졌다. 나는 굶주린 배에서 아우성 쳐대 는 것도, 숨이 차 오르는 것도 몽땅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는 욕을 주 워들어서 열심히 소리쳐댔다. 장장 13년 동안이나 욕을 못 했던 게 얼마나 답답했었는지 10년 묵은 체증이 -아니 13년 묵은?- 다 내려가는 듯 했다. 진작 이렇게 해볼 것을!! 그렇게 우리들은 너무 열심히 욕을 해서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뒈져라아아아앗~~!!!" 큰 소리를 치다가 문득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소리치 는 것을 멈췄다. "......지금...무슨 소리... 헉헉.. 들렸지?" "미치이이이인~~" "기...기다려봐!!...하아하아..." "누...누구......" 문득 저 멀리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어렴풋한 소리이긴 했지만 몬스터의 '푸학' 같은 그런 의성어가 아닌 명확한 언어였다. "아...아아아...." 이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은 듯 싶었다. "누구 있으십니까아~~!!!" 아픔? 굶주림? 다 소용없다!! 나는 어디서 그런 힘이 생겼는지 빠르게 달려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였다.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바람' 이라는 것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 에야 깨달았다. 곧이어 '빛'이라는 것도 느껴진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우아아아아~!!!!" 모두들 소리쳤다. 우리는 정말 미친 듯이 빛을 갈구하며 뛰었다. 빛이다! 태양의 빛이야!! "카류리드 님!!!" 아아...너무나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저기 흙투성이에 엉망이 된 나의 디트 경! "카류야!!" 그리고 아르디예프 스승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어느 정도 햇빛이 보이는 동굴입구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멈춰 서서 크게 웃었다. "빛이다!! 역시 이르나크의 태양은 최고라고!" 갑자기 동굴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 는 알고 있었다. "카류 님!!" "카류!!!"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기에... 나는 아마도 기절해버렸던 거 같다. Part. 18 - 생환 "으...음?" 왠지 몸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눈을 떴다. "아아... 일어났구나. 카류." 잠시 멍해있던 나는 침대 곁 의자에 앉아있는 노인이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라는 것을 곧 알아챌 수 있었다. "아...아르디예프...스승님?" "에유... 그래, 이놈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는지 아느냐?" "카류 님. 아르디예프 님께서 마법을 쓰셔서 완전히 치유해 주셨답니다. 이 젠 팔이 움직이지요?" 아르디예프 님 곁에 서있던 타스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며 웃는 얼굴로 말 했다. 그러고 보니 왼팔의 그 어색했던 느낌이 사라진 듯하다. 나는 왼손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까지 완전히 움직여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만 연습해보면 금방 회복 될 것 같았다. "아...아아... 역시 마법이란 정말 대단하군요. 이건... 겨우 6서클 힐링포션이 거의 죽은 사람도 살려내질 않나..." "바보 같은 녀석. 같은 6서클이라도 힐링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너도 그 수식을 보았으니 알게 아니냐. 거의 7서클 마법에 가까울 정도의 그 엄청나고 복잡한 수식을. 이 마법이 마나를 적게 움직일 뿐이지, 실상 7 서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수식을 제대로 계산한다하더라도 치 유 마법들은 마나를 그 어떤 마법보다도 정교하게 움직여야 하기에 더더욱 힘들지. 힐링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인데. 나도 하루에 5, 6번 쓰는 게 다란 말이다, 이 꼬마 녀석아! ...그러고 보니 거의 죽은 사람을 살려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르디예프 님은 소리를 빼액 질렀다. 왠지 진실대로 말한다면 무서운 일 이 날거 같아서 난 얼버무리기로 했다. "아하하... 그게...어깨를 좀 다쳐서요. 별거 아니에요. 봐요, 처음 볼 때도 멀쩡했잖아요?" "뭐가 멀쩡해?! 완전 반시체더구만! 너 말이야!! 상처와 영양실조로 죽을 뻔했다는 걸 아느냐?!" "그렇군요. 헤헤... 역시 아르디예프 스승님밖에 없어요. 고마워요." 일단 나는 아르디예프 님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려고 나의 필살기인 눈 반 짝이며 깜찍하게 웃기를 시도했다. 이러면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굉장히 나 를 귀여워하며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사실 나 역시 기분이 좋아서 진심으 로 웃었던 것이기도 하다. "험험... 카류, 넌 여전하구나. 어찌 1년 전이랑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느 냐." 얼굴을 살짝 붉히며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말했다. 이렇게 다가와서 마구 머리를 쓰다듬는걸 보니 내 장기가 또 한번 진가를 발휘한 모양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아르디예프 님이 여기에 계신 거죠? 스승님은 생 명의 궁에 계셔야 하는 게 아닌가요?" "후우... 정말 말도 말거라. 그것 때문에 나는 지금 온몸에서 삐그덕 소리가 날 정도니까. 하루에 워프를 3번씩이나 남발하며 수도부터 한 달이나 걸리 는 에이브레 시까지 이틀만에 오게 된 것이다." "이...이틀만 에요?" 나는 약간 놀라 아르디예프 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얼굴 색이 굉 장히 안 좋아 보였다. "그래. 이놈아. 이틀 전에 갑자기 생명의 궁에 웬 기사 놈이 들이닥쳐 나를 봐야하니 어쩌니 하고 난리를 쳤단다. 휴우. 너도 알다시피 전쟁이라도 터 지지 않는 한, 생명의 궁에 들어오려면 며칠동안의 허락을 받는 과정을 거 쳐야하는 법인데 그놈이 다짜고짜 나를 봐야 한다고 소리치니 마법사들이 가만히 뒀겠느냐." 원래 생명의 궁에 들어가는 절차는 몹시 까다롭다. 먼저 국왕에게 생명의 궁에 들어갈 것을 아뢰고, 국왕이 아르디예프 님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 눈 후 허락이 떨어지면 그제야 들어갈 수 있다. 말은 쉽게 들리지만 일단 은 아르윈 왕국 최고 권력자인 국왕이나 역시 아르윈 왕국 유일의 8서클 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이 그렇게 가볍게 움직일 리가 없다. 한동안 시간이 흐른 후에야 겨우 만나 허락이 떨어지므로 최소한 3,4일은 걸리는 것이다. "운 좋은 줄 알아라. 그 기사 녀석이 네가 위험하다고 고래고래 소리지르 면서 난입하려는 것을 마법사들이 매직 애로우나 한방 날리려하고 있을 때, 때마침 하르몬이 그 소리를 들은 거지." "하하. 정말 다행이네요. 하르몬 선배님을 만나면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 드 려야겠어요." "그러려무나.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에이브레 시까지 기사 놈 들을 데리고 거의 한달 거리를 이틀 밤낮으로 워프를 실행했지 않겠냐. 8 서클의, 그 중에서도 초고난이도 마법을 매일같이 3번이나 남발하고 나니 정말 죽을 지경이다. 에구에구... 머리통이 쑤시는구먼." 보통 8서클 마법은 하루에 1번 이상은 잘 쓰지 않는다. 그만큼 엄청난 마 법이기 때문이다. 좀 무리를 하면 2번까지는 쓴다고도 하지만, 3번이나 쓰 시다니, 그것도 이틀 내리 연속으로 말이야. 아르디예프 님 진짜 완전히 골 병 드신 건 아닌가 모르겠네. "음..? 그러고 보니 어떻게 기사들이 아르디예프 님을..." "카류 님!!" 내가 또 다른 궁금한 점을 아르디예프 님께 물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방문 이 열리면서 디트 경이 들어왔다. 우와, 고지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저 디트 경이 왕족과 8서클 마법사가 있는 방에 노크도 없이 난입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디트 경."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는 웃으며 그를 맞았다. 겨우 이주일정도 못 본 그의 얼굴이 얼마나 반가워 보였는지 모른다. "나머지는 저 녀석한테 물어보거라. 나는 더 이상은 못 버티고 있겠구나. 에구구구... 삭신이 쑤시는군."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르디예프 스승님." "그럼 도와야지!! 이 늙은이 혼자 비틀거리며 나가란 말이냐?" "하하. 당연히 아니지요." 타스 아저씨는 아르디예프 스승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함께 방밖으로 나 갔다. 그건 그렇고 타스 아저씨가 아르디예프 님을 스승님이라 불렀지? 생 명의 궁 출신 이라더니 아르디예프 님께 가르침을 받은 모양이구나. 비록 마법사는 되지 못한 모양이지만 아르디예프 님의 제자이니 그만큼 대단한 학자라는 뜻이겠지? 하긴, 대단한 학자가 아니면 애초부터 우리들의 안내 역을 맞았을 리가 없지. "디트 경. 정말 너무 오랜만이지? 정말 기뻐." 나는 진심으로 기뻐 화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 지는 순간이랄까. "아아... 정말...그렇습니다. 카류 님..." 왠지 디트 경이 울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우웃, 디트 경의 우는 모습이라니! 보고 싶기도 하고, 보고 싶지 않기도 하 고. 이것 참 미묘하군. 그러나 나의 예상과는 달리 디트 경은 눈물을 흘리는 대신 무릎을 파악 꿇 었다. "용서해주십시오! 카류 님! 제가 카류 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그런 큰 부상까지 입게 만들었으니..." 헉! 과연 고지식한 기사 님이다. 이럴 땐 '카류우~' 하며 달려와 포옹이라 도 해야하는 게 아닌가. 벌써부터 책임을 따지다니. "말도 안돼. 내가 디트 경을 뒤로 가라고 말했잖아? 그리고 이렇게 멀쩡하 게 돌아왔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러지 말고 어떻게 아르디예프 님을 모시고 올 수 있었는지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래? 그게 엄청 궁금하거든. 아!!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야? 며칠이나 지났고? 친구들은?" 나의 속사포 같은 물음에 디트 경은 약간 흐뭇한 표정을 짖고는 다시 일어 났다. 내가 멀쩡해 보여서 안심한 모양이었다. "여기는 리아 후작의 저택입니다. 모든 분들이 너무나 지치고 엉망인 상태 인지라 아르디예프 님께서 힘드신 데도 불구하고 이 많은 분들을 데리고 그 동굴 입구에서 또다시 이곳 리아 저택까지 워프를 하셨지요. 그 뒤로 까무치기까지 하셨답니다." "아아, 스승님께서..." 나는 잠시 뭉클했다. 그렇게 고난이도 마법을 난발하셨으니 정말 힘드셨을 것이다. 나중에 애교도 떨어드리고 귀여운 척 많이많이 해드려야겠다. "다른 분들은 도착하자마자 저택에서 내온 죽을 허겁지겁 드시고는 곧바로 잠이 드셨습니다. 지금까지 잠들어 계시지요. 정말 많이 지치신 모양이었습 니다." "하하. 사실 그랬지. 음? 난 별로 배 안고프네?" "아르디예프 님께서 오늘 아침 정신을 차리자마자 8서클의 회복마법 리커 버리를 써주셨습니다. 전 아르디예프 님께서 마법을 다 쓰실 때까지 대기 중이다가 방금 카류 님께서 정신을 차리셨다는 말을 시종에게 듣고 이렇게 부리나케 들어온 것이고요." "리...리커버리까지...? 우우... 어쩌지.. 스승님 정말 골병 드시는 게 아닐까." 내가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이긴 했어도 어느 정도는 견딜 만 했는데 리커 버리까지 쓰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야. 며칠동안 8서클마법만 대체 몇 번 이나 쓰신 거지? 연세도 있으신 데 너무 큰 무리를 하셔서 무슨 일이나 일 어나는 게 아닌가 모르겠네. "카류 님에 대한 아르디예프 님의 신뢰와 사랑이 정말 대단하더군요. 제가 아르디예프 님을 찾았을 때 그 분은 하멘 시가 아닌 에이브레 쪽 동굴 입 구를 목표로 잡고 워프를 하셨지요. 카류 님이라면 계속 입구에 남아있기 보다는 이쪽 동굴로 향하고 있을 거라고 말씀하시면서요. 게다가 며칠씩 쉬지도 않고 거의 한달 거리를 계속해서 워프를 감행하시기까지 하고, 카 류 님을 발견했을 때도 거의 십여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리아 저택까지 워 프를 하시다가 까무러치기까지 하는 것을 보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 니다. 제가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해주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이야, 아르디예프 님이 정말 아이를 좋아하시나 봐. 하긴, 그렇게 성 한구 석에 처박힌 생명의 궁에서 항상 노인들과 생활했으니 나 같은 어린애가 얼마나 귀여워 보였겠어. 아마 친손자라도 되는 양 나를 생각해주신 모양 이다. "하아, 아르디예프 님께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까." "카류 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신 모양이던데요?" 음? 디트 경이 저런 말을 하다니... 그렇게 아르디예프 님이 그 정도로 나 를 좋아하는 티를 낸다는 뜻인가? "그런데 용케 열흘만에 하멘 시부터 수도까지 갔네? 보통 2주일은 걸리잖 아." "처음 저는 험한 산을 3주 동안 넘어 에이브레 시 쪽의 동굴 입구로 가는 편보다는 차라리 수도의 아르디예프 님께 제가 직접 도움을 청하는 편이 더 나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분은 워프를 할 수 있으시니 어떻게든 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거의 자지도 먹지도 않고 말만 달렸지 요. 파발을 사용했으면 더 빨랐겠지만 그렇게되면 아르디예프 님을 만나 도움을 청하는 일이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릴 테니까요." "역시 다트 경이야! 좋은 판단이었어. 우리도 천만다행으로 음식이 있어서 살았거든. 여러 가지 일도 많았지만, 후후... 역시 살아남길 잘했다는 생각 이 드네." "하지만 정말 대단하시군요. 그 동굴을 거의 12일 만에 통과하셨으니 말입 니다." "12일?" "네, 저희들이 아르디예프 님께 갈 때까지가 열흘이었고, 아르디예프 님께 서 워프를 감행하신 것이 이틀이었으니까요. 저희가 구출을 위해 에이브레 시에서 구한말을 몰고 들어가려던 직전에 전하께서 나타난 것입니다." 우...우와...! 우리가 그렇게 엄청나게 걸었단 말인가! 실제로는 우리의 생각 보다 시간이 빨리 흘렀나보다. 시간에 대한 걱정이 오히려 시간을 벌어주 었던 모양이다. 하하... 정말... 인간은 정신력이 신체를 지배하기도 하는 구 나! 착각이 이런 행운을 주다니! "그...그렇구나. 이야, 이것 참." "후후.... 어디선가 욕이 들려올 때는 저희가 뭔가 잘못 들었나 생각했을 정 도였습니다. 카류 님." "응? 아... 그거...? 에...그게... 하하... 음식도 다 떨어진데다가 너무 오랫동 안 힘겹게 걸어서 신경질이 났거든. 우린 아직 입구가 한참 멀었다고 생각 했어. 욕을 하면 속이 다 시원해지잖아? 나 이번 기회에 욕을 상당히 많이 배웠다는 게 아니겠어? 하하하." 나는 그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하필 그때 입구가 나타날게 뭐람. 헤구, 배부른 소리한다. 디트 경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그렇게 기뻐한 주제 에 말이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영원히 당신을 지킬 것을 저 디 트리온 혼 바스라윈은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맹세합니다." 근엄한 말과는 달리 디트 경은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오랜만에 안긴 그의 품이 마치 아버지의 그것 같이 푸근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아아... 나는 정말로 돌아왔구나. "여깁니다, 카류리드 전하." "감사합니다, 리아 후작 님. 리아 후작 부인. 그렇지 않아도 여기서 신세를 지고 있는지라 죄송한데, 일부러 이렇게 직접 안내까지 해주시다니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인사는 무슨...! 언제든 우리 집에 있어도 돼. 카류. 그렇게 해준다면 난 정 말 기쁠 거야." 내가 왕자라고는 하지만 거의 왕 수준의 권력을 휘두르는 아르윈 왕국 최 고의 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리아 후작 부부가 시종처럼 직접 나를 응 접실까지 안내하는 건 분명 지나칠 정도의 친절이었다. 그런데도 싱글벙글 거리는 모습을 보니 그들은 마냥 기분이 좋기만 한 모양이다. 사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옆에서 히노 선배가 유창하게 말을 하 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벙어리라 생각했던 딸이 저렇게 막힘 없이 자유자 재로 말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야, 모두들!" 나는 응접실 안에 모여있는 동굴 탐험 일행(?)에게 달려갔다. 응접실에 있 던 그들은 리아 후작 부부에게 예를 갖추었고, 그후 우리는 커다란 탁자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이렇게 앉아서 모두를 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오오! 카류. 이젠 팔이 완전히 움직이는 모양이로구나? 왠지 우리보다 더 멀쩡해 보이는걸...요?" 허크 아저씨는 반말을 쓰다가 맞은편에서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 리아 후작 부부와 디트 경 때문에 곧 말투를 바꾸었다. 나도 말투를 바꿔야하 나? 그렇지만 거의 이주일 동안 정든 말투인데 갑자기 바꾸라니 좀... "하하. 허크 아저씨. 우리 스승님께서 일부러 리커버리까지 써주셨다고...요! 안 멀쩡하면 그게 시체지, 사람이겠어요? 아시죠? 8서클 마법, 리커버리." 어색해서 안되겠다. 남이야 뭐라던 그냥 무시하는 거야! 공식적인 자리도 아닌데 뭐 어때? "헉? 8서클? 대마법사 아르디예프 님께서 이 곳에 와 계신단 말입니까? 호...혹시 우리들을 한순간에 이곳까지 옮기는 마법을 써주셨던 노마법사가 그럼...!!" "맞아요. 그분이 아르디예프 님이죠. 워프도 8서클 마법이라고요. 허크 아 저씨들은 운이 좋은 거라고요. 언제 아르디예프 님을 만나볼 기회를 갖게 되겠어요?" "이거 정말, 놀랍군요." 우리는 큰 응접실에 두루 모여서 계속 잡담을 나누었다. 근데 조금 전부터 왠지 표정이 이상한 것이, 뭔가 할말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음... 근데... 혹시 무슨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요?"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화기애애한 대화를 끊어버린 다음, 그들을 행해 직 접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카류 전하. 비록 공식적인 자리는 아닐지라도 왜 이렇게 존댓말을 쓰시는 것이지요? 그들은 한낱 용병일 뿐입니다." 계속되는 내 존댓말을 보다못했는지 디트 경이 약간 일그러진 얼굴로 내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걸린단 말인가. 헤구, 디트 경은 너무 고지식해. "그렇지 않아, 디트 경. 그 동안 우리가 용병 아저씨들에게 얼마나 많은 도 움을 받았는지 알아? 그러니까 동굴 안의 몬스터를 죽이면서 우리를 지켜 준 것도 용병 아저씨고, 그래!! 내가 어깨를 크게 다쳤을 때 힐링포션을 준 것도 용병 아저씨야! 그리고 가다가 친구들이 음식을 잃어 버렸을 때 얼마 되지도 않는 적은 양의 음식을 나눠준 것도 용병 아저씨라고. 얼마나 고마 우신 분들인데! 내가 이렇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안 그래요? 모두들?" 그러나 그 누구도 나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아서 응접실 안은 상당히 썰 렁해지고 말았다. 음? 왜 이러지? 진짜잖아. 사람 쪽팔리게 얼른 대답 안하고 왜들 이러는 거야? 내가 궁지에 몰리는 게 그렇게 좋아? "...그것 때문에 할말이 있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네? 허크 아저씨. 무슨 할말이요?" 왠지 심각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그때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에...에? 감사?" "...순진한 척 하지마. 이 자식아." 에르가 형이 왠지 겸연쩍은 듯한 얼굴로 그 말을 내뱉었다. 정말 말과 표 정이 안 어울리는걸. 근데 이게 무슨 소리야? "......워..." 뭔가 에르가 형이 굉장히 작은 소리로 입을 달싹이는 것을 보고 나는 의아 해져 다시 한번 형에게 질문했다. "뭐라구? 에르가 형? 방금 나한테 뭐라고 했어?" "고맙다고, 이 자식아! 저게 꼭 사람 속을 긁네!!" "헤?" 에르가 형이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응. 꼭 그 얘기를 하고 싶었어. 우리 중 카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나 많은걸. 카류가 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거 야." 마치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진 에르가 형 맞은편에 앉아있던 히노 선배 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일이 많았지요. 그 동굴 속에서... 전하가 계셨기에 저희 들은 이렇게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아니, 모두가 함께 웃는 얼굴로 살아 나올 수 있었던 것이죠." 타스 아저씨마저 진지하게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왔다. 내가 뭘 그렇게 대단한 일을 했다고 그러는 거지? "우리는 모두 당신에게서 힘을 얻었지요. 카류리드 전하. 모두가 함께 살아 갈 힘을." 허...허크 아저씨? 내가 뭘 어쨌기에? "저는 거의 도움이 안됐는데요? 다행히 탈출하긴 했지만 마지막에도 저 때 문에 많이 지체했고, 괜히 자꾸 뛰어들어 상처만 입고, 힐링포션도 낭비했 고요. 찔리는 거라면... 으음!" 나는 중얼중얼 내가 한 짓에 대해 돌아보다가 숨을 들이켰다. 찔리는 일이 무지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탈출하긴 했지만 음식을 잃어버렸을 때 내가 끝까지 버티는 바람에 애들까지 데리고 나오느라 자칫 용병 아저씨들 까지 죽일 뻔한 일도 있었지. 크헉!! 나 저렇게 일행들에게 짐이 됐나? "포션...이라면..." "...알 아저씨?" "정말 그때는 미안했다! 진심이다. 내가 기회가 닿는다면 꼭 너의 목숨을 구해주마! 카류리드!! 목숨을 걸고 너를 지키겠어!" 알 아저씨의 비장한 말을 듣고 나는 상당히 당황했다. 디트 경 같은 기사 도 아닌 용병 아저씨가 갑자기 목숨까지 바쳐 나를 지키겠다는 데 어떻게 놀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만큼이나 알 아저씨가 내 행동에 감동했던 것일까. 아니, 그야 감동했으 니까 힐링포션을 내주었겠지. 에구, 나는 상당히 불순한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인데 솔직히 좀 찔리 는 걸? "알 아저씨. 그런 생각 마세요. 제가 다시 살아났을 때 알 아저씨가 울었던 거 기억 나세요? 저는 진실된 눈물이라는 게 이런 거라는 걸 처음 깨달았 어요. 저는 알 아저씨의 눈물을 보고 정말 감동했거든요? 아저씨는 한번이 라도 그렇게 울어보신 적이 있나요?" "...아니. 그래, 한번도 없지." "마음으로부터 울어 주셨잖아요. 그렇지요?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감동했 는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래. 네가 살아나서 너무나 기뻤다. 너를 바로 살려내지 않은 것을 너 무나 후회했어. 나는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지. 후...후후. 그래. 그렇구나. 나 도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정말이지 처음이었어." 알 아저씨는 다시 눈물을 약간 글썽이며 말했다. 가슴 한쪽이 찡해져 오는 것이 느껴진다. 이만큼이나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 동적인지! "....저도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까지 감동해본 적은 그리 오래 살지 않았지 만 거의 느껴본 적이 없어요." 내가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라 환생을 한 것이라는 걸 깨달은 그때 빼고 는 말이야. 환생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그때 말고는 정말 처음 이었지. 그러고 보니 나는 동굴 속에서 몇 번이나 이런 가슴 찡한 감동을 경험했구나. 사람은 극한 상황에 되서야 안다더니... 모두 너무 좋은 사람들 뿐이다. 정말로... "카류 님은 모두에게 감동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저희는 모두 시 기하고 싸우며 혼자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겠지요. 힘에 겨운 일이 있을 때 도, 마음이 침울해질 때도, 언제나 당신을 보고 용기를 얻었답니다. 카류 님." 나의 그 배째라 식의 행동이 그들에게 그렇게 힘을 준 것일까. 하긴, 그럴 지도 모른다. 나라도 조금 감동했을지 모르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짓 을 했는지 알 수 없었을 테니 단지 모두를 위해 희생한다는 식으로만 비추 어졌겠지? 실상은 내가 스스로의 목숨을 가벼이 여긴 나머지 아픔을 참으 려 하지 않고 자살하려고 한 것뿐이고 좀 멋지게 죽어보겠다고 포션을 거 부한 것 뿐으로, 지금 주위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삼일 밤낮 은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우리들은 모두 서로에게 감동 받은 것이군요. 일행의 짐일 뿐이었던 상처 입은 저를 위해 애 써주던 여러분의 모습에서 제가 얼마나 많은 힘을 얻었는지 모른답니다. 여러분은 저에게,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서로 감동 하고 힘을 얻었던 거예요. 그렇군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이렇게나 많은 도 움을 받아 왔군요. 우리는 서로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였어요." 나는 모두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말했다. "저를 살려주셔서 감사해요. 저에게 살아갈 용기를 주어서 고마워요. 저 혼 자였다면 전 결코 이르나크의 태양을 보려고 노력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 렇지요?" 나는 웃었다. 기분이 좋아서. 나는 또 한번 감동한다. "고마워. 카류. 모두들 고마워요, 진심으로." 히노 선배가 가장 먼저 이야기했다. "나...나도 고마워. 카류도... 그...그리고 용병 아저씨들도.. 모두 다 고마워!" 하나 둘씩 아이들이 인사를 했다. 용병 아저씨에게까지. 이젠 더 이상 용병 이라고 무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살아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나를 너무나 감동시키고 있다. 이것으로 나는 조금 더 이 삶을 소중히 여길 수 있을까? 살아있음으로서 죽음을 극복했다는데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까. 언젠가 죽은 자들을 위해 마음 깊은 곳부터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 지금 이 감동을, 나를 사랑해주는 자들의 마음을 쉽게 잃고 싶지는 않으니 까. 리아 영지의 태양이 우리들의 생환을 축복해 주려는 듯 아름다운 빛을 내 려주고 있었다. Part. 19 - 리아 영지 이곳 리아 영지에서 머문지도 4일이 지났다. 아르디예프 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마법을 마구 남발하신 덕분에 몸이 그렇게 좋지가 못하셔서 우리들은 그 분의 몸이 어느 정도 나으실 때까지 이곳에서 묵기로 한 것이다. 나는 그 동안 리아 후작 부부에게 엄청나게 후한 접대를 받았는데, 아마 나 덕분에 히노 선배가 말을 할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모양이 다. 한동안 할 일이 없어진 나는 한가하게 리아 후작 가의 저택 내의 서재에 앉아 에르가 형과 단란하게 책을 읽었다. 의외로 에르가 형도 책을 자주 읽었는데, 괜히 공부를 잘 하는 게 아닌 듯 싶었다. 평소 자주 발끈하는 성 격과는 달리 검술 연습을 하는 것도 그렇고 이런 공부를 하는 면에서도 그 렇고 형은 꽤나 노력파인 모양이다. 어찌됐든 내가 한가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 외 에 책을 읽는 것뿐이란 말인가! 성안에서도 그렇고 정말 서글프구나. "나갈래!" 나는 책을 덮고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이상은 지루해서 도저히 못 참아! "...바보. 그런 냄새나는 평민들이 사는 곳에 왜 가고 싶어한단 말이야?" "정말 에르가 형의 그 코는 실험 대상이야. 평민의 어디에서 냄새가 난다 는 거야? 언젠가 그 코를 내게 넘겨주지 않을래? 분석해서 논문을 쓰면 상 을 탈 수 있을지도 몰라." "저게...! 좋아, 솔직히 밖의 평민들이 지저분한데서 살기 때문에 그들이 사 는 곳이 냄새가 난다는 건 사실 아냐! 다른 뜻은 아니라고!" "...흐음, 그래도 나가고 싶어!" 동굴에서 나온 후로 에르가 형의 평민을 생각하는 태도가 약간이나마 달라 진 것 같아 흐뭇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지! "카류 님께서 그런 곳에 돌아다니셨다가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저번에 동굴 내에서도 누군가가 전하 일행을 노렸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아르디예프 님께서 쾌차하실 때까지 부디 조용히 이 곳에 머물러 주십시오." "싫어! 이 저택에만 머문 것도 벌써 4일째! 아르윈 왕국에서 가장 살기 좋 다는 리아 영지를 구경도 못해보고 이렇게 저택 안에서만 처박혀 있다가 그냥 수도로 돌아가게 된다면 평생의 한이 될꺼야." 디트 경의 말에 나는 마구 떼를 썼다. 정말, 정말 구경해보고 싶다. 가만히 생각하니 나는 13년 동안 이르나크 세 계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도 제대로 바깥 구경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렇게 비극적인 일이 있을 수가 있나. 이제까지 학교에 다니다보면 방과후에 잠시 수도 내를 구경해본다거나 하 는 일이 있을 법도 했건만 나는 매번 호위 기사들에 의해 마차를 타고 칼 같이 하교를 했다. 게다가 이번 여행을 하면서도 말을 타는 피곤함 때문에 제대로 거리 구경은커녕 끙끙거리기만 하다가 여관에 도착하자마자 누워 자는 것이 유일하게 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주일 동안의 -왕복 한 달의- 긴 여행기간동안 구경하고 싶다고 마을에 지체 할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절.대.로 나는 나갈 꺼야. 솔직히 이번 일도 나를 노린 건 아니었을 거라 고. 안 그래? 누가, 무엇 때문에 나를 노리겠어? 아르디예프 님께서 일어나 실 때까지 며칠은 하릴없이 계속 이곳에서 머물러야 할 것 같으니까 난 이 번 기회에 꼭 바깥 구경을 하고 말 꺼야!" "누가 일어나?" "누구긴... 음? 아르디예프 스승님!" 언제 들어오셨는지 반쯤 열린 서재 문 옆에 아르디예프 님이 서 계셨다. 이제 괜찮아지신 걸까? "와아~! 아르디예프 님! 이제 다 나으신 거예요?" 나는 쪼르르 아르디예프 님께 뛰어가서 찰싹 붙어서 최대한 귀엽게 보이려 고 애를 쓰며 애교를 떨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니 이것 말고 는 스승님께 보답해 드릴 수 있을만한 일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 이젠 다 나았다. 에구에구... 요놈. 키가 하나도 안 자랐구먼. 이러다가 계속 안 크면 어쩌냐, 우리 카류?" "윽! 너무 하세요. 잔인하세요. 전 상처받았어요." 아르디예프 님은 웃으면서 나를 안아들었다. 내가 확실히 작긴 작나보다. 아직 안색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만은 않은 아르디예프 님이 이렇게 나를 가뿐히 들어올리니 말이다. 크! 정말 미래가 심히 불안해지는 순간이 아닐 수 없구나. 나는 영원히 땅 꼬마인 채여야 한단 말인가. "후훗! 너도 완전 어린애 취급이로구나, 카류. 크흣흣흣... 이거 대서특필 감 인데?" 에르가 형이 몹시, 너무나 통쾌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면서 말 그대로 음흉 하게 웃었다. 아이고, 하는 행동은 정말 여전하구나. 귀여워 죽겠네! "형, 나 이제 13살 밖에 안됐는걸? 아르디예프 님에 비하면 당연히 어린애 지. 혹시 내가 아르디예프 님한테 안기니까 질투나? 걱정 마, 형. 있다가 형도 내가 안아줄게." "으윽! 누가? 절대 다가오지마, 알았어? 이 변태야!" "하하하!" 그 말을 들은 아르디예프 님이 갑자기 큰소리로 마구 웃기 시작했다. 에르가 형! 변태라니 너무하잖아! 하지만 확실히 에르가 형이 귀엽다고 안아주기엔 꽤 자랐다는 것을 부정할 수도 없겠다. 형은 이젠 나이도 14살이나 먹었고 검술을 해서인지 키도 쑥 쑥 자라서 상당히 남자다운 몸집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은 몸집이 작던 12살 때부터 계속 귀엽다, 귀엽다 하면서 대해 오다보 니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을 듣기엔 무리가 있을 나이가 되었어도 여전히 귀엽다라는 말을 입에서 뗄 수가 없구나. 부모가 다 큰자식을 보고 귀엽다 고 말하는 게 정녕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그래,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고?" "예. 전 한번도 밖에 제대로 나가본 적이 없어요. 저는 아르윈 왕국의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지도 알고 싶고요, 성안이 아닌 보통 거리도 제대로 구경해보고 싶어요. 한번만 나가게 해주세요. 전 정말 밖을 보고 싶어요. 일생의 소원이니 한번만 허락해 주세요. 네?" "카류 님. 위험한 일이라도 당하시게 되면 전 아스트라한 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제발 부탁드리니 이곳에 계셔주십시오." 디트 경의 태도를 보니 이번 사건으로 나는 어쩌면 영원히 밖에 나가지 못 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뭐 어떠냐. 카류야. 이 스승님이 데리고 나가줄까?" "엣? 정말이세요!?"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아르디예프 님이 어쩐 일로! 야호, 잘하면 나갈 수도 있겠다. 아르디예프 님이 우리 나라 최고의 마법사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지! 암!! "아...아르디예프 님..." "흥, 왜? 날 못 믿겠다는 거냐, 지금?" 바로 그거예요. 스승님! 더 밀어 붙여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희 기사들을 동행시켜 주십시오. 저를 포함해 5명 정도로 말입니다." 윽? 5명이나?! 그러면 엄청난 시선 집중을 받아야 할텐데! 그러면 제대로 거리 구경을 할 수가 없잖아. 오히려 우리가 구경거리가 될 거야. "그...그럴 거면 모두 변장하자! 변장! 음~ 맞아.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웬 귀족들이 거리를 마차도 없이 왜 이런 곳을 나돌아 다니는가하고 이상 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완전히 시선집중 받을 거라고. 그건 정말이 지 싫어." "...알겠습니다. 카류 님. 아르디예프 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훗. 나야 좋지. 여전히 재미있는 일만 생각하는구나. 카류야." "재미있는 일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저 제대로 길거리를 구경해보고 싶을 뿐이에요. 사실 디트 경은 너무 귀족틱하게 생겨서 그런 변장이 통할까 걱 정이 되네요." "그...그런가요?" "됐어요! 디트 경들은 호위병으로 하죠, 뭐. 일단 갈아입자고요!" 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수수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말이 수수한 이지 이 것도 엄청 고급 옷감으로 만들어진 옷이다. 딱 하나 평소에 입던 옷과 다 른 점이 있다면 옷의 치장으로 금박 은박이 입혀져 있거나 보석이 주렁주 렁 매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일행이 저택 밖으로 나오려하자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겠다고 떼를 썼다. 그 중에서도 특히 위험하며 알 아저씨가 끈덕지게 붙어오려 하는 바 람에 그를 말린다고 내가 얼마나 많은 애를 써야 했는지 모른다. 걱정해주 는 것은 좋지만 더 이상 일행이 붙었다가는 곤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자아. 일단 시장으로 가자." "네. 가요. 아르 할아버지." 나는 다정하게 아르디예프 님의 손을 잡은 채로 방긋 웃어 보이며 대답했 다. 멋지군! 이건 누가 봐도 사이 좋은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가 나들이 나온 것처럼 보일 것이다! "......안 가세요?" 그러나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을 않는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나는 의 아한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누가 앞장서서 안내를 해야할 것 아니냐." "...시장이 어딘지 모르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꼭 아는 것처럼 가자고 제안하고는 저렇게 당당하게 어딘지 모른다고 말하 다니. 대마법사에 현자라고 해서 모든 걸 알 수는 없다고는 하지만 이건 좀 그렇지 않아? 역시 평소 아르디예프 님의 행동은 '괴팍' 이라는 두 글자 이외로는 설명할 수가 없구나. "에구, 알았어요. 가요, 아르 할아버지. 일단 아무 데로나 가자고요." 나는 아르디예프 님의 손을 이끌며 눈앞에 크게 펼쳐진 도로를 향해 걸음 을 옮겼다. 현재 우리 일행은 우리는 상인인 아르 할아버지와 그의 손자인 나. 그리고 디트 경과 나머지 4명의 기사들인 호위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낱 상인 의 호위병이 너무 위풍당당하고 멋들어지게 생겨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 람들에 의해 약간의 시선 집중을 받았지만 대부분은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듯 보였다. 이곳 사람들은 보석이 잔뜩 달린 무시무시한 옷을 입 은 사람만 아니면 다 평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아르윈 왕국에서는 상업이 상당히 천시되고 있어서 후크나 카멜의 상단 같 은 엄청난 거상이 아니면 돈이 좀 많아 보이는 상인이라도 그렇게 대단한 대접은 받지 못한다. 게다가 상업의 천시 풍조로 인해 돈을 조금만 많이 모으면 사람들은 곧 귀족 지위를 사서, 어디 작은 시골의 땅이나 사 그곳 의 귀족행세를 하려해서 상업은 더욱 발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후크와 카멜도 상단을 해서 번 돈으로 귀족이 될지도 모르지. 사회 적 시선이 이렇게 상업의 발달을 막고 있으니 참 걱정이다. 걱정.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면서 나는 그들이 우리들 귀족들의 생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르가 형의 '냄새가 난다'는 비유가 전혀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헤구, 전부 가난해 보이는군. 정말 여기가 아르윈 왕국에서 가장 풍족하다 고 소문난 그 리아 영지가 맞나?" "...조금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어차피 평민이 아니겠습니까. 귀족들의 생 활과는 비교 할 수 없지요." 디트 경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디트 경이 기본적으로 남에게 그 렇게 매몰 찬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평민의 생활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도 역시 이 곳의 토박이 귀족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가? 기본 의식이 다르게 박혀 있으니 말이다. "오오! 시장이다!" 우리가 목표도 정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간 곳엔 정말 운이 좋게도 시장 이 있었다. 양옆으로 바닥에 무언가를 잔뜩 늘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물건 을 사고 팔고 하고 있었다. 마치 한국의 재래 시장 같은 분위기랄까. "저것이 평민들의 시장이라는 것이구나. 참 혼잡하기도 하지." "아르 할아버지는 이제껏 한번도 시장에 와본 적이 없어요?" "내가 무엇 하러 이런 곳에 온단 말이냐? 그리고 8서클 마법사가 아무나 되는 건 줄 아느냐? 나는 18살 때부터 생명의 궁에서 지금까지 마법에만 열중해 왔단 말이다." 확실히 마법이 어려운 학문이긴 하지. 그렇다고는 하나 시장에도 한번 나 와본 적이 없다니 보통 재미없는 인생을 산 게 아닌 모양이다. "후후. 저도 이런 곳은 처음 입니다. 카류 님. 마침 장이 열린 모양이군요." "헉?! 디트 경도 처음이라고? 디트 경이 나이가 얼만데 시장에도 한번 안 나와봤단 말이야?" "하하. 보통 귀족들은 평민들이 사는 곳엔 가 볼 기회가 없답니다. 시골의 작은 영지에서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런 곳에는 나다니지 않는 답니다. 실상 시종과 하녀들이 있는데 일부러 이런 천한 상민들이 있는 시 장 같은 곳까지 귀족들이 나올 이유는 없습니다." 저럴 수가. 평민을 다스리는 귀족이 저렇게 평민들의 생활에 무심하다니. 게다가 디트 경마저 천한 상민들이라고 말하잖아? "왜 그렇게 상업을 천시하는 거야? 상업이 있으면 이 나라는 훨씬 발전할 수 있을 텐데?" "나라의 근본은 농업이 아닙니까. 상업이야 서로 남는 물건을 교환하는 정 도에 불과한데 이런 면에서는 저보다 더 잘 아실만한 분이 왜 그런 말을 하시지요?" 무...무섭구만. 비록 무인이라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상당한 교육을 받은 귀 족인 디트 경이 저런 소리를 하다니. 음, 정말 심각하다. 심각해. "왜 이런 곳에 나와서까지 그런 골치 아픈 얘기를 하고 그러느냐. 어서 둘 러보자. 좀 지저분하긴 해도 활기차서 좋구나. 생명의 궁에 비하면 여긴 마 치 벌집을 쑤셔놓은 것 같이 분주해서 정말 재미있는걸?" 이 정도의 거리를 벌집이라 비교하는 건가? 스승님이 내 전생의 명동 거리 라도 오셨다면 뭐라고 하셨을까. 나는 아르디예프 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장을 둘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중 나는 문득 눈에 익은걸 파는 곳을 발견했다. 약 간의 고기와 야채를 꼬챙이에 잔뜩 꽂은 다음 그것을 구워서 팔고 있었는 데 딱 꼬치구이 그 자체였다. "우와, 우리 저거 먹어봐요. 저거." "아무거나 드시면 안됩니다. 카류 님." "윽! 디트 경. 저거 맛있다고요~! 한번 먹어봐요. 네? 조금 비위생적일지는 몰라도 괜찮을 거예요. 대체 시장에 나온 저의가 뭐예요? 설마 보석이나 사려했던 건 아니죠?" "음? 그럴 것이 아니었니? 직접 보석이라도 골라보려고 그러는 줄 알았더 니, 아니면 또 무엇을 하려 했단 말이냐?" 이런! 나와는 너무나 사고 방식이 틀리구나! "휴, 따라오세요. 보석 구경도 좋지만 그런 것 말고도 구경할 거리는 무궁 무진하다고요." 밖에 나와본 적도 없는 주제에 갑자기 자신이 안내하겠다고 옷자락을 끌자 아르디예프 님과 기사들은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별 것 아니려니 하고 생각했는지 내 말에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뒤따라왔다. "하하하... 평민들은 참 재미있게 사는구나." 아르디예프 스승님은 아까 봤던 꼬치구이를 손에 들고 먹어 가면서 이야기 했다. 다 큰 할아버지가 저러면 보기 안 좋은데 말려볼까? 그렇지만 싱글 벙글 하시는 모습을 보니 지금 말렸다가는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받을 듯 한 느낌이 들어 내키지가 않는구나. "참, 아르 할아버지랑 디트 경들이 너무 모르는 거예요. 어떻게 아는 게 보 석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금화를 겨우 군것질거리 사는데 벌컥 내놓 지를 않나." "그야 맛이 좋기에 비쌀 것이라 예상한 거지. 그건 그렇고 너는 어째 그리 도 잘 아느냐?" "예? 뭐... 직감이죠! 게다가 책으로 읽은 것도 있고요. 언젠가 나갈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이렇게 미리 알아둔 거예요." "흐음, 그래? 뭐, 아무려면 어떠냐! 어서 다른 쪽으로 가보자꾸나. 어서 다 른 곳도 안내해 다오. 응?" 아르디예프 님은 아직 가보지 못한 쪽을 보며 어린애 마냥 독촉을 했다. 그냥 음식과 값싼 수공예품을 구경을 하는데 불과한데도 저렇게 즐거워하 다니, 생명의 궁에서 얼마나 재미없게 사셨으면 저러실까. 어쨌든 다행이구 나. 저렇게 기뻐하시니까 나도 기분이 좋은걸? 시장을 전부 둘러본 다음 우리는 또 다른 흥밋거리를 찾아 그곳을 벗어나 넓은 거리를 걸었다. 평평한 돌이 깔려 잘 닦여진 거리는 활기찬 사람들에 의해 시장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분주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많은 사 람들이 몰려 서서 무언가를 구경하며 길 한가운데를 막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으음? 저게 뭐지? 왜 거리 중간을 막고 저러고 있는 거냐? 카류야. 저게 뭔지 알겠니?" "에이, 저라고 어떻게 그런걸 일일이 다 알 수가 있겠어요? 그리고 솔직히 저도 밖으로 나오는 건 처음이라고요." "커헉!" "어? 이거 비명소리 아냐?"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깜짝 놀라 구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로 후다닥 뛰어갔다. "무슨 일이지요?" 나는 둥글게 서 있는 사람들 가장 끝에서 구경하고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나로서는 키가 너무 작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존댓 말에 디트 경이 약간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나 보다. "아아, 소매치기인데 이 근방에서 가장 난폭하다는 놈한테 걸렸지 뭐겠냐. 어린애인데 조금 불쌍한걸? 오늘로 죽게 맞아 생겼구나. 쯧쯔..." "뭐야? 겨우 소매치기로 사람을 때려죽여? 말도 안돼! 여기는 법도 없어?" 나는 깜짝 놀라 외쳤다. "카류 님. 원래 소매치기는 잡은 사람이 마음대로 처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관습이지요. 보통 저렇게 심한 처벌까지 내리진 않지만 일단 잡은 사람이 때려죽이겠다고 말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소매치기를 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그럴 수가!" 나는 깜짝 놀랐다. 겨우 소매치기를 한 죄로 사람을 때려죽일 수도 있다니, 그것이 관습이라니, 이렇게 잔인할 수가! "아아악!!" 또다시 들리는 처절한 비명소리에 나는 곧바로 사람들 안쪽으로 파고들었 다. 사람들이 짜증을 냈지만 무시하고 전진했다. 뒤에서 나를 부르는 디트 경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빨리 도와주지 않으면 소매치기를 했다는 아이는 죽을 지도 모른다. 아니, 죽는 게 문제가 아니다. 매를 맞고 있다고 하지 않은가. 얼마나 고통스럽겠 는가! 장난이 아니다. 애를 때려죽인다니 말도 안돼! "그만둬!!" 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소리침과 동시에 내 눈에 들어온 아이의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 머리로 피가 솟구치는 것만 같았다. 피투성이의 아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진 팔, 다리로 인해 계속 비명을 지르고 있는 나보다 도 어려 보이는 정말 어린아이! "이...이... 이럴 수가! 네 녀석!!" 그 남자에게 달려드려는 순간 나를 디트 경이 붙잡았다. 나는 확 신경질이 나서 마구 발버둥치며 소리쳤다. "젠장! 이거 놔! 어떻게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저럴 수가 있지!? 이거 놓으 라니까!" "카류 님! 정신 차리세요. 이건 당연한 겁니다. 왜 그렇게 이성을 잃으신 겁니까." 화가 치밀었다. 왜냐고? 저런 꼴을 보고도 왜냐고? 왜냐고 물었어?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나는 머리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느꼈다. 이 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도 이것을 말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 누구도! 이것은...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소매치기는 잡히면 때려죽이든 태워 죽이 든 잡은 사람 마음 대로인 것이 이곳의 관습. 비록 저 꼬마가 가엾어 보이 긴 하지만 소매치기를 했으니 이렇게 맞아 죽는다 해도 도와줄 이유가 없 는 것이다. 이럴 수가. 전생의 내가 살던 곳과는 다르다. 이곳은 이런 곳이다. 별 것 아닌 일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로 치부되는 곳이다. "너는 뭐냐?" 소년을 긴 나무막대기 같은 것으로 두들겨 패고 있던 남자가 나를 꼬나보 며 말했다. 덕분에 나는 그 망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아...아..." "에구.. 카류야. 왜 그러느냐. 이 할애비 힘든 거 보고도 혼자 그렇게 들어 가다니..." 내가 말을 이으려 할 때 아르디예프 스승님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그제야 겨우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아르디예프 님을 보다가 그분이 마법사라는 것이 갑자기 떠올라 다급히 부탁을 했다. "아르 할아버지! 저 애 좀 치료해주세요!! 부탁드려요! 할아버지께서 힘든 건 알지만 제발 부탁드려요! 소원이에요!" 나는 아르디예프 님을 잡고 완전히 엉망이 된 아이를 가리키며 외쳤다. "...들어보니 소매치기인 모양인데 왜 살려줘야 하느냐? 게다가 내 힘을 저 런 쓰잘데기 없는 평민에게 꼭 써야만 하겠느냐, 카류?" 아르디예프 님은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쓰잘데기 없는 평민. 쓰 잘데기 없는 일이라고? 나는 성인이 아니다. 하지만 저렇게 얻어맞는 어린애를 보고도, 도와 줄 힘 이 있으면서도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무시하지는 않는다. 아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저대로 두면 곧 죽을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아이 를 눈앞에 두면서도 어느 누가 가만히 보고만 있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길거리에서 어린아이가 맞아죽는다 해도 당연한 눈 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평민을 살려주는 일 따윈 쓰잘데기 없는 일이라 고 말하는 귀족들이 있는 곳이다. 내가 서있는 곳은 전생의 토이렌이 아니 라 이르나크인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 나를 꼬나보고 있는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저 남자는 악인 이 아니다. 악인은 저 소매치기 꼬마인 것이다. "저 아이의 처벌권을 저에게 넘겨주시겠습니까?" "뭐야? 내가 왜 네놈한테 넘겨줘야 하냐?" 그의 약간은 무례한 말에 디트 경이 화를 내며 칼을 뽑아들려 했지만 내가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대신 저 아이의 처벌권을 제게 주십시오." 나는 혹시 돈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져온 보석을 하나 꺼냈 다. 그 보석은 내 옷장에 걸려있는 화려한 파티복을 몇 벌 골라 그곳에 주 렁주렁 매달려 있는 것을 떼어 온 것으로 지금 내 돈주머니 안에는 그 수 많은 보석들이 가득했다. "뭐...그...그건?" "루비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요? 이것을 가지고 아이의 처벌권을 제게 주 시거나, 아니면 그냥 그 아이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으로 끝내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시면 됩니다. 어느 쪽이 당신께 유리한지는 충분히 알고 계시 리라 믿습니다." 그 남자는 슬며시 다가와 내 손에 들린 보석을 가져갔다. 그리고 여기저기 돌려보고 깨물어보고 하다가는 금방 쏜살같이 달아났다. 아마 내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그러는 듯 싶었다. 나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너무 참혹해서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살이 찢어 지고 팔이 비틀어져서는 그 아이는 거의 빈사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디트 경. 이 근처에 힐링포션을 파는 곳이 있을까? 리아 영지의 가장 큰 중심 도시, 라누아 시잖아." 나는 급하게 디트 경에게 물었다. 힐링포션이 아니면 도저히 이 아이를 구 해줄 수 없을 것이다. 포션이 비싸긴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보석 무 더기를 팔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일단 그렇게 물었다. "...비켜라. 왜 그러는 지는 몰라도 일단은 살려주마, 에구, 나들이를 나와서 까지 나를 이렇게 고생을 하게 만들다니." 아르디예프 님은 나를 밀어내고 아이의 어긋난 뼈들을 강제로 맞춘 다음 마법서를 보고 꽤나 오랫동안 캐스팅을 해서 힐링을 시전했다. 주위의 사 람들의 감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싶었지만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 다. 아이의 상처가 하나둘씩 사라져가며 뼈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으음...." "괘...괜찮니? 아픈 곳 없어? 나는 아르디예프 님께 감사의 인사도 하지 않고 조금 정신을 차리는 듯한 아이에게 빠르게 물었다. 그 아이는 왠지 어리둥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 았다. 확실히 다 나은 모양이었다. 정말...정말 다행이다. "아아. 나...난 카류라고 해. 넌 이름이 뭐니?" "......" 하지만 아이는 내 뒤의 일행을 보자마자 금방 뒷걸음질을 쳤다. "괜찮아, 걱정할거 없어. 이제 너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을 꺼야. 자, 착하 지? 이름이 뭐니?" 그러나 일단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내가 계속해서 말을 걸자 약간 경계심 을 푸는 듯 보였다. 그 아이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슈카..." "슈카라고 하니?" 나는 그 아이를 꼭 안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나는 동굴 속에서 어깨를 조금 베었던 것만으로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주위 사람들의 수많은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아이는 거의 죽기 직전까지 매를 맞았던 것이다.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고통이 아니던가. 이 아이의 겪었을 고통을 상상하자니 가슴이 쓰라려 올 정도로 안타까워져 서 아이를 더욱 꼭 껴안았다. "누...누구세요..?" 슈카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존댓말을 사용해 나에게 물었다. 아마 다 죽어가던 자신이 갑자기 멀쩡해진 사실이라든지, 또 뒤쪽에 서 있는 일행 들을 보고서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걸 금방 깨달은 모양이다. "그런 것보다 집이 어디야? 내가 데려다 줄께. 응? 같이 가자. 아직은 팔 같은 곳이 조금 아프지? 집이 어디야?" "......" 슈카는 우물거리기만 할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일행들 때문에 너무 기가 죽은 건가? "있지. 우린 별로 이상한 사람들 아니거든. 사실 뒤에 있는 사람들이 널 고 쳐 준거야. 그리고 나에게 조금 돈이 있거든? 그러니까 네가 더 이상 소매 치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도와줄 수도 있어. 어때? 자, 집으로 가자. 응?" 내가 소매치기가 어쩌고 하자 슈카는 몸을 움찔했다. 괜한 말을 한 걸까? 몸이 굉장히 말라보이기에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소매치기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슈카? 집으로 가자니까?" "......" 슈카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왜 말을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해져 다 시 한번 질문을 하려는데 갑자기 아르디예프 님이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슈 카에게 소리쳤다. "집이 어디냐고 묻지 않았냐? 네놈이 지금 감히 말을 무시하는 것이냐?" 아르디예프 님은 아마 마법을 쓰고 몸이 안 좋아져서 약간 짜증이 나신 모 양이다. 숨을 몰아쉬는 아르디예프 님을 보니 갑자기 죄송스러운 마음을 샘솟았다. 슈카를 바로 치료해주지 않는데 발끈해서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저기 골목..." 아르디예프 님의 호통소리에 슈카는 움찔하면서 손가락으로 한 쪽 방향을 가리켰다. 슈카가 가리킨 곳은 멀리서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지저분해 보이는 골목길이었다. 으음, 웬만하면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금방이라도 깡패가 튀어나올 것 같 아. 하지만 슈카는 아주 저기서 산다고 하잖아. 배부른 소리 말고 어서 슈 카를 데려다 주자. "가요, 완전히 낫지도 않은 아이를 혼자서 집에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 "이 몸이 힘들게 힐링까지 썼건만 뭐가 완전히 낫지 않아? 내 평생 이런 고위마법을 저런 소매치기에게 쓰게 될 줄이야... 원래 저런 놈은 아무 데 나 굴러 먹여도 충분히 잘 살게 돼있다. 카류야. 한순간의 욱하는 감정으로 인한 동정은 그쯤 해두는 게 어떠냐? 게다가 동정이라는 것은 한번씩 사람 을 비참하게 만들기도 한단다." "동정이 어쨌단 말이에요? 물론 한순간의 감정으로 인한 값싼 동정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슈카가 아니니 그의 고통을 전부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 할 테니까요. 하지만 같은 인간으로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보면 자연스럽 게 안타까워지고 동정심이 우러나서 도와주고 싶어져요. 아르 할아버지는 그런 기본적인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고 계시면서 동정 받는 자의 비참함을 논하실 자격이 있는 거예요?" 아르디예프 님은 내 말에 화가 났는지 얼굴이 약간 일그러졌다. 그래도 나 는 이 말을 철회 할 생각이 없다. "저 아이는 소매치기를 했으니 이런 일을 당한 건 당연한 일입니다. 오히 려 소매치기를 한 죄인에게 아르디예프 님은 자비를 베풀어주시지 않으셨 습니까. 카류 님, 아르디예프 님께 사과하세요." "......" 나는 무시했다. 식어가던 머리가 스승님의 말로 도로 스팀을 받았기 때문 이다. 나의 이성은 저들의 탓이 아니라고, 원래 이런 곳이라고, 소매치기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래도 자꾸 화가 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어디지? 어디에 살아? 가자. 동정 받아서 비참하니? 그래도 난 너를 도와 주고 싶어. 아니, 이런 돈 많은 자의 얄팍한 동정심을 이용해서 네가 행복 해질 기회를 잡아봐." 그렇게 말하고 내가 부축해서 데리고 가려했지만 슈카는 계속 머뭇거렸다. 저쪽 골목이라면서? "지...집은 없어요... 그냥..." "길바닥에서 잔단 말이야?" 고개를 끄덕거리는 슈카를 보고 난 너무나 놀랐다. 이런 어린애가 집이 없 어서 땅바닥에서 잔다니! 역시 너무 가난해서 소매치기를 한 거였구나. "이런...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설마 데리고 갈 거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그냥 신전에 보내. 거기서 고아원 역할도 하고 있으니까."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데리고 있어봤 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까. 성에 데리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 아 닌가. "...가자. 신전에 데려다 줄께." 슈카는 머뭇거렸지만 그냥 우리들을 따라오기로 한 모양이다. 신전은 말 그대로 신을 모시는 곳이다. 현재 우리 아르윈 왕국이 있는 크 로시아 대륙에 알려진 신은 단 하나뿐이다. 아마 과거에 다른 신을 모시는 종교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600년 전 있었던 성전이라 불리는 전쟁 을 통해 탄압하여 모조리 없애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성전 이후로는 다른 종교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기에 종교는 단 하나로 일축되었다. 따 라서 그 종교에서 모시는 이름 없는 유일신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신전은 사람들이 힘들 때마다 신께 기도를 올리고 예배를 보는 곳으로 전 생에 있던 교회, 성당, 절과 거의 다를 바가 없는 곳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기능이 더 있었는데 고아원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가 신전?" "음.. 이것이 그 유명한 리아 영지의 신전. 과연 아름답구나." 우리 일행은 사람들이 사는 곳에서 약간 벗어난 곳까지 걷다가 주위의 수 풀과 어우러져 고아한 미를 뽐내고 있는 새하얀 대리석의 신전을 발견했 다. 굵고 커다란 돌기둥과 그 위에 걸쳐진 아름다운 아치형의 지붕을 가진 거의 4층 높이의 높은 단층 건물이었는데 이 새하얀 신전은 아르윈에서 보 통 볼 수 있는 다른 중세 풍의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것도 고대의 유산이죠?" "잘 아는구나. 아르윈 왕국에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고대 신전이지. 몇 만 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을 정도인데, 아직까지도 부서지지 않고 남아있 는걸 보면 고대의 마법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리가 밖에서 신전 구경을 하며 웅성거리고 있을 때 한 신관이 밖으로 나 왔다. "모두 무슨 일이십니까?" "아이를 맡기고 싶어서 왔습니다." "....네? 누구를?" 신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말하는 아이가 누구인지 짐작을 했는지 내 옆에 서 있는 슈카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그런데 그렇게 슈카를 살펴보는 신관의 얼굴은 영 밝지가 못했다. 나는 그의 태도에 왠지 기분이 찜찜했지 만 일단 대답했다. "이 아이입니다. 모두 부모도 집도 없는 가엾은 아이지요. 신관에서 이 아 이를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건..." "무슨 일이야?" 머뭇거리고 있는 신관 옆으로 왠지 높은 사람인 듯한 느낌이 팍팍 드는 노 신관이 다가왔다. "아이를 맡기려고 왔습니다만..." "아이?" 신관은 우리들을 본 다음 아이를 보았다. 구질구질하고 피죽도 못 먹은 거 같이 생긴 슈카를 본 노신관은 왠지 불만인 듯한 얼굴로 우리들에게 말했 다. "허어, 웬 아이인지...?" "보다시피 보통 아이입니다. 신전에 맡기려고 왔습니다." "...저희 신전엔 더 이상 아이를 받아들일만한 여력이 없습니다. 리아 영지 의 거의 모든 꼬맹이들이 이 신전으로 몰려드니까요. 아무 녀석이나 전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죠. 죄송합니다만 이 아이를 받아들일 수는 없겠군 요." 뭐? 아무 녀석이나 받아들일 수 없다니? 그럼 골라 받는단 말이야? "그...그냥 가요..." 슈카가 나의 팔을 이끌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자신은 신전에는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면 왜 그렇게 길거리에서 생활했겠는가. "슈카. 난 너를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그래도 최소한 네가 제대로 생활할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어. 내가 그냥 너에게 돈을 준다고 해도 너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잖아?" 나의 말에 금방 노신관의 얼굴 색이 바뀌어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하. 후원금이 충분하다면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답니다. 어디 대상인의 아드님 되시나보죠?" "뭐라고?" 디트 경이 약간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식한 디트 경은 후원금이라는 말에 흥분하는 노신관이 몹시 마음에 안든 모양이었다. 누구보다도 신성해 야 할 신관이 저렇게 돈에 흥분하는 꼴이라니 디트 경의 마음에 나도 200% 공감이다. 정말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돈이 최고구나. 이르나크 세계의 신전에까지도 말이다. 아니, 신관이 기도한다고 돈이 어디서 떨어지 는 것도 아닐 테니 당연한 건가? "...이거면 될까요?" 나는 또 다시 보석 하나를 꺼냈다. 그 보석을 본 노신관은 눈이 휘둥그레 졌지만 금방 안색을 바꾸고는 말했다. "아이고, 불쌍한 아이들을 위하는 참으로 상냥하신 분들이시군요. 하하. 그 런데 실상 저희 신전이 그렇게 상황이 좋지 못해서 말입니다. 조금 더 기 부하심은?" "참... 황당한 놈이로세. 카류야, 그냥 가자. 오랜만에 속세에 나왔더니 별 꼴을 다 보는군." 옆에서 아르디예프 님까지 한마디했다. 나도 정말 배알이 꼴렸다. 이런 곳 에 슈카를 맡겼다가 슈카가 제대로 클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일 단 내가 데려가기엔 여러 가지로 곤란한 점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불만스 러운 마음을 최대한 참으며 신관에게 보석을 꺼내 보였다. "이걸 두 개 드리지요. 한 개는 신전을 위해 쓰시고 나머지는 슈카를 위해 써주십시오. 훗날 제가 이곳에 돌아왔을 때 슈카가 제대로 생활하지 못할 시에는 저는 절대 이 신전을 용서치 않겠습니다." "후훗. 모르시나 본데, 이곳은 리아 영지의 신전이랍니다. 겨우 그쪽 상인 나부랭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이 말입니다. 아, 두 개로는 조 금 힘들지 않겠습니까. 저런 아이를 성인이 될 때까지 보살피는 일은 의외 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라 서요." 우리들을 참으로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노신관에게 디트 경이 검 을 뽑으려하는 것을 나는 겨우 말릴 수가 있었다. 한번씩 느끼는 건데 의 외로 디트 경도 꽤나 다혈질이다. 그러나 사실 나도 한방 쳐주고 싶은 심 정이긴 하다. 그냥 시선집중 받든 말든 나는 왕자고 내 옆의 사람은 우리 아르윈 왕국 유일의 8서클 마법사라고 확 불어버릴까 보다! "...세 개. 됐습니까? 설마 아이를 보살피는데 웬만한 저택을 하나 살수 있 을 만큼의 돈보다 더 큰돈이 든다고 말하고 싶으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 노신관는 흐뭇한 얼굴로 보석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주 대놓고 다른 신관과 함께 그 보석의 진품여부를 감정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진짜 신관 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슈카. 미안하다. 꼭 널 저런 보석 세 개로 팔아버린 것 같아. 그렇지만 홀 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만 힘들더라도 이곳에서 살아. 그리고 이건 나중 에 네가 컸을 때 쓰도록 해."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면서 작은 보석을 하나 더 꺼내서 다른 신 관들 못 보게 살며시 슈카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걸 그 신 관이 안다면 금방이라도 뺏어갈 것 같았기 때문이다. "허, 저런 소매치기 놈이 보석 세 개의 가치라니.. 너무 크지 않느냐?"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한번 더 스팀을 받을 뻔하다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 킨 나는 슈카를 한번 조용히 안아주었다. 토이렌 이였다면 소매치기를 한 정도로 죽을 정도로 매를 맞고, 이렇게 돈으로 흥정해 물건 넘기듯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텐데. "미안, 슈카. 나중에 만날 수 있다면 꼭 다시 만나자. 알았지?" "......" 슈카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들은 그렇게 슈카를 신전에 맡기고 신전을 떠났다. "저런 건방진 놈들에게 그 비싼 보석을 세 개나 주다니, 후우. 너도 참 너 무 마음이 약하구나, 카류야." "그저 제 눈앞의 곤경에 처한 사람 정도는 도와주고 싶을 뿐이에요. 일종 의 자기만족과도 비슷하지요. 남을 도와주는 일은 나름대로 기분 좋은 일 이니까요. 게다가 저는 강한 자이며, 가진 자이죠. 제가 그 상황에서 화를 내는 대신 잠깐 참아주면서 주머니 속에 남아도는 보석을 몇 개 던져주는 정도의 사소한 일로 인해 슈카는 더 이상 그런 땅바닥에서 잠을 자지 않아 도, 소매치기 하다가 걸려서 맞아죽을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런 것을 생각한 다면 이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일 아닌가요?" 나는 약간 냉소적으로 말했다. 아르디예프 스승님이나 디트 경은 아무 말 도 하지 않았다. 조용한 일행들을 보노라니 이번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생 각이 떠올랐다. 전생에 토이렌에서 살았던 기억이 없다면 나 역시 이렇게 슈카를 구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매치기는 맞아죽을 만한 죄가 아니다, 어린애를 때 려죽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는 토이렌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분개를 한 것이다. 이성적으로 볼 때 아르디예프 님과 디트 경의 행동이야말로 이르나크의, 이곳 아르윈 왕국의 올바른 풍습이다. 그들의 행동은 실상 전혀 틀린 점이 없었다. 그들은 해야할 행동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내 마음대로 이런 말을 해서 토이렌 식의 사고방식을 그들에게 강 요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로마의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듯이 나 역시 이곳의 관습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런 식으로 행동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을 가지는 것이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라 믿고 싶다. 나의 이 생각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는 왕자니까. 훗날 왕이 될 루브 형을 도와서 좀 더 많은 사람 들이 굶주리지 않게, 굶주림에 못 이겨 소매치기 따위 하지 않아도 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이르나크 세계의 사람들과는 다른 관점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것. 그건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닐 것이다. 슈카를 신전에 맡긴 뒤에 우리들을 그대로 후작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우 리들이 돌아오자 친구들과 용병 아저씨, 리아 후작 부부까지 나와서 반겨 주었다. 용병아저씨들이나 친구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리아 후작 부부들 은 너무 친절이 과한 걸? 이거 정말 부담스럽구나. "다친 곳은 없어? 카류? 아, 벌써 왔네?" "으...응... 내가 다칠 일이 뭐 있겠어." 히노 선배의 말에 나는 슬쩍 아르디예프 님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재미 있어 하셨는데, 내가 완전히 초를 친 것이 아닌가. 게다가 그 힘든 치유마 법까지 써주셨는데 고맙다는 말도 안하고 무시하고 퉁명스럽게 대하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봇물 터지 듯 밀려와 나는 더더욱 기가 죽었다. "뭐하느냐, 꼬맹아. 어서 들어가지 않고." "에? 예..." 아르디예프 님은 꼬맹이란 말에 악센트를 주어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내 머리에 손을 얹어 살짝 앞으로 밀면서 은근히 함께 들어가기를 권유하 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아르디예프 님이 그렇게 많이 화가 나지는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벌써 점심 먹었다고, 괜히 밖에 나가겠다고 떼 쓴 사람 잘못이니 알 아서 해." 에르가 형은 퉁명스럽게 그렇게 말하고 몸을 휙 돌려 먼저 저택으로 돌아 갔다. 그리고 다른 친구들과 용병 아저씨들도 전부 에르가 형과 비슷한말 을 한마디씩 던졌다. 혹시 걱정을 한 것일까. 나는 사실 그렇게 위험하지도 않은데, 그렇더라도 이렇게 나를 걱정해주니까 기분 좋은 걸?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고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도 시장 돌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많이 먹었으니까 점심은 안 먹어도 되겠죠? 아르 할아... 아르디예프 님." "됐다. 아르 할아버지로." 뭐?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아르디예프 님은 약간 얼떨떨해 하고 있는 나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면서 말했다. "아직 아기 티도 못 벗은 꼬맹이가 아르디예프 님이니 뭐니 하는 거 닭살 돋아 못 들어주겠구나. 그냥 아르 할아버지라고 불러라. 네가 한참 큰 후에 나 아르디예프 님이라고 부르게 해주마." "에..." 조금 전에 내가 그렇게 못된 소리를 했는데도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다 정한 말을 해주시다니... 그렇게 퉁명스럽게 굴었음에도 나를 이해하고 용 서해주기로 하신 걸까. 아르디예프 님... 아니, 아르 할아버지. "안 들어가고 뭐 하느냐?" "들어가요. 아르 할아버지." 나는 기쁘고 고마워서 아르 할아버지를 향해 방긋이 웃어 보였다. 헛기침 을 하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니 더욱 마음이 따뜻해진다. 나와 아르 할아버지는 히노 선배와 리아 후작의 안내를 받아 후작의 개인 응접실로 갔다. 물론 나의 그림자와 같은 디트 경도 함께였다. 응접실에 자 리를 잡고 앉은 우리들에게 리아 후작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어떻습니까. 리아 영지는? 이 리아 영지의 중심지인 라누아 시는 수도를 제외하고는 아르윈 왕국에서 가장 부강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자부한답니 다." "......"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 "확실히 아름다운 도시였어요. 크게 난 도로와 양 갈래로 그림같이 들어선 집들. 활기찬 시장. 아름다운 나무, 영원히 그치지 않을 듯한 중앙 광장의 분수. 그리고 영지 조금 밖에 서있는 순백의 신전." "아, 그렇지요?" 리아 후작 님은 벙긋 웃었다. "...그리고 커다란 도로에서 굶주림에 못 이겨 소매치기를 하다가 맞아 죽 어 가는 아이. 그림 같은 집 사이의 골목에서 살아가는 더러운 거지. 상업 의 부진과 천시로 인해 이렇게 큰 도시에서도 겨우 5일에 한번 열리는 시 장. 순백의 신전 안에서 시커먼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신관들이 있었지요." 금방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아르 할아버지와 디트 경도 잠시 흠칫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곳 리아 영지를 그렇게 보셨습니까." "실제로 그런 자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살벌한 공기가 응접실에 감돌았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해서 리아 후작 의 심기를 건드렸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자기 영지의 상태 정도는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모습밖에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영 지를 통치한다면 백년이 가도 평민들의 생활은 나아지지 못할 것이다. "...읽은 바에 의하면 리아 영지는 어느 곳보다 살기가 좋은 곳이라고 하더 군요. 솔직히 평야도 넓고 강도 있으니 이곳의 영주이신 후작 님께서 조금 만 더 신경을 쓰신다면 지상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훗, 영지를 다스리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카류리드 전하 께서 정 그러시다면 뭔가 고통받는 그들을 위해 좋은 생각이라도 가지고 있으신지요." 리아 후작은 약간 냉소적인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아마 아직 13살밖에 안 된 조그마한 꼬마가 아는 척하니까 건방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나도 이런 정치, 경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예전에 배웠던 중세 시대의 발전 과정에 대한 대략적인 지식만으로 조금은 그들에게 아주 약간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잘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래요. 상업의 중흥을 도우라는 겁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곳 리아 영지는 농토가 아주 넓고 비옥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잉여생산물도 있기에 저 렇게 5일장이 들어서게 되면 어느 곳보다 활기찬 사람들이 돌아다니게 되 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까지 상업을 천시하고 억압해서는 안됩니다. 현 재 제 친구 후크의 쟈스칼 상단이라던가 카멜의 힐튼 상단과 같은 거대 상 단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고 여러 상업 도시도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상업을 천시하는 태도 때문에 상업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훌륭한 인재들은 상업에 종사하기보다는 귀족 작위를 사서 다른 일을 하려 하고 있으며, 상업 자본은 상업 자본으로 남아 재투자되지 못하고 모두 땅을 사 는 것으로 자본이 흘러 들어가고 있습니다." 일단 시장을 보면서 생각했던 이야기를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아르윈 왕국 의 정세와 결부시켜 대충 아는 대로 내뱉고 나서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모두는 눈을 토끼처럼 뜨고는 나를 보고 있었다. 13살 아이에게서 나오는 말치고는 꽤나 조리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농업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지금 어느 정도는 농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이 리아 영지에서는 더 이상 농토가 없어서 습지 개간을 시작하고 있 는 것 같던데 제 말이 맞습니까? 음... 그러니까 이제는 상업이 번성할 시 기라는 것이죠. 서로 필요한 물품을 교환하고 그 이익을 챙김으로서 사람 들은 서로 더 큰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장을 5일에 한번 밖에 열지 못하게 한다거나 중요 길목마다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일, 길드를 통해 서로의 경쟁을 막는 일 등 모두 상업의 발달을 막고 있습니다." 리아 후작은 잠시 숨을 들이켰다.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 들으셨습니까?" "네? 아...아니.... 그저 왕궁의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책을 읽다가 알게 된 짧은 지식일 뿐입니다." "이 아르윈 왕국은 농업을 국가의 지상으로 삼고 있건만, 남에게 굽실거려 야 하는 천한 상업의 중흥을 조장하는 책을 왕궁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다 고?" 아르 할아버지가 눈을 치켜 뜨고는 말했다. 그...그러고 보니 상업에 대해 제대로 된 견해가 적혀진 책은 그다지 없었던 것 같기도 했다. 설마 그 많 은 책 중에 한 권도 없을라고.. 설마.. "아니예요. 의외로 왕궁 도서관엔 신기한 책들이 많은 것 같아요. 전 평소 언제나 카류가 해주는 동화의 교훈을 생각하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히노 선배가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윽~! 그 얘긴 하지 말아요, 히노 선배!! "동화?" "네, 그냥 들으면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 같지만 거기엔 전부 훌륭한 교훈 이 들어있었거든요. 카류는 그런 이야기를 책을 통해 알게 되었대요. 왕궁 도서관에 그렇게 좋은 책이 많다니 너무 아쉬워요. 저도 그런 책을 한번 읽어보고 싶거든요. 언젠가 제가 집으로 돌아오면 그것을 구해달라고 말해 볼 생각이었지요." "무슨 동화 길래?" 아르 할아버지가 흥미 있다는 듯 히노 선배에게 물었다. "아...아무 것도 아니에요! 정말 별거 아니라고요. 히노 선배, 그죠?" "아무 것도 아니라니.. 난 그런 이야기 처음 들었는걸? 정말 신기했다고. 한번 해 드릴까요? 어쩌면 아르디예프 님도 처음 듣는 이야기일지 모르지 요." 나의 간절한 바램과는 상관없이 히노 선배는 이런 저런 짧은 이야기를 했 다. 우우... 안 되는데. 아무 데도 그런 이야기가 적힌 책은 없단 말이야. "....호오?" "그런 책이 도서관에 있었습니까? 카류리드 전하?" "네,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서 봤는데 그런 신 기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친구들에게도 이야기 해주 고 그랬지요." 나는 최대한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나오는데 저들이 알게 뭐겠어. 하지만 자꾸 거짓말에 거짓말이 쌓이는 것 같아 상당히 기분이 찜찜하다. 그냥 내 생각이라고 말할까? 헤구, 그게 13살 짜리 꼬마가 생각한 것이라 고 잘도 믿어주겠다. "그렇군요...." "흠..." 잠시 조용해졌다. 달칵달칵 찻잔 소리만이 응접실을 메우고 있었다. "평소에도 이번에 동굴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사고가 많았느냐?" "네?"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일까? "그래서 일부러 자신의 뛰어난 지식을 숨기면서 모든 일에서 신중하게 행 동하고 계셨던 것이었습니까?" 리아 후작 님마저 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아직 전하께서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저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의 총 명함에 대한 이야기는 아르디예프 님과 여러 소문으로 귀가 따갑도록 들어 오고 있었습니다만 실제로 이렇게까지 생각이 깊으신 줄은 생각도 못했습 니다. 카류리드 전하! 제 풀네임은 프리란트 혼 리아입니다. 앞으로는 프리 란트라고 불러주십시오. " 갑작스러운 그들의 말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들이 갑자기 왜 이러 는 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리아 후작 님의 마지막 말은 정 말 황당했다. 한 지방의 영주의 이름을 불러도 좋다는 말은 그만큼 상대를 인정하거나, 내지는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뜻이 아닌가. "네? 무슨 뜻이죠?" "물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저를 믿으시기는 힘드시겠지요. 하지만 조금쯤은 본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이 어떨까요. 최소한 저와 아르디예프 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전하의 편이니까요." 갑자기 웬 편가르기? 저런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는지 내게 알려줄 사람 어 디 없을까. 본인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는 저의가 뭐야. "전하의 총명함은 무서울 정도군요. 평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지식을 숨기 고자 하셨던 것은 정말 탁월한 판단이셨습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전하 의 총명함을 두려워 한 나머지 제1왕자님이 안전한 왕위 계승을 위해 충분 히 전하의 목숨을 노릴 수 있을 테니까요." 뭐...뭐라고? "장난은 그쯤 해두시죠! 지금 루브 형님이 저를 노린다고 말씀하시고 싶은 건 아니시겠지요?" 나는 발끈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아 후작 님을 향해 소리쳤다. 루브 형이 나를 노린다니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내가 누구보다도 착하고 순진하게 키운(?) 형이란 말이야! 그런 루브 형이 나를 죽이려고 할 리가 없잖아!? "진정하십시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제1왕자 루블로프 님을 옹호하 는 자들이 미래에 위험요소를 없애자는 차원에서 카류리드 전하께 감히 칼 을 들이댈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나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럴 수가. 제6왕자라는 건 좀 똑똑하다는 사실 만으로도 암살 당할 수 있단 말인가. "확실히 이제까지 너의 태도는 굉장히 현명했다 할 수 있구나. 정말 넌 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생각이 깊어. 네가 그 많은 지식을 왜 그렇게 숨기 려고 하는지 언제나 궁금해했었는데 그게 전부 제1왕자파에게서 자신을 지 키기 위해서였던 것이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구나!"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러니까 내가 자신이 똑똑하 다는 것을 숨기지 않고 아주 천재인양 행동했다면 루브 형을 위한답시고 설치는 자들한테 옛날에 비명횡사 할 수도 있었다는 말 아냐? 그리고, 그 러니까! 이번 동굴에 있었던 일은 사실 나를 노린 것일 수도 있다는 뜻이 잖아!! "그...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제가 머리가 좋다는 사실을..." "아니, 너의 본 모습을 완전히 알아챈 사람은 나 정도일까. 그리고 리아 후 작도 그렇게 앞뒤 막힌 인간이 아니니 들통났다고 그렇게 얼 필요 없단다. 하지만 이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네가 어느 정도 머리가 좋다는 소문이 왕궁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특히 요즘 들어 그 소 문이 심하다 했더니 이런 일이 터졌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의 말은 정말 충격 그 자체였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별 것 아닌 이유로 비 천재 노선을 추구했던 것 이 스스로를 지킨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나중에 커서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지식을 숨겨온 것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것에 상관없이 마구 행동하기도 했던 것이 사실 아 닌가. 설마 진짜 나를 노리고 동굴을 무너뜨린 거란 말인가? 갑자기 오한이 느껴진다. 단지 다정하기만 한 나의 가족이 실은 실상은 살 벌하고 냉정한 정치와 권력의 중심에 있는 왕족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서 야 깨달을 수 있었다. 루브 형이 원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살해당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카...류야..." 히노 선배가 불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언제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살았던가. 내가 생각하 지도 않는 일 때문에 살해당하는 건 정말 억울하고 싫지만 이렇게 고민한 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까 후일 좀 더 커서 내가 루브 형님 에게 해가 가지 않다는 것을 알릴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되겠지. 그렇다고 그 동안 괜히 덜컥 죽어버리는 건 정말 사양이니까 한동안 몸조심을 해야 겠군. 나는 불안한 마음을 그런 식으로 가볍게 지워버렸다. 그리고 히노 선배를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히노 선배.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뭐, 별 일이야 있겠어요? 이번 동굴 사건이 저를 노린 것이라도 확정된 것도 아니고 말이죠." "그...그럴까?" "물론이죠." 나의 낙천적인 모습에 그제야 히노 선배도 불안한 표정을 풀었다. 나 때문 에 히노 선배가 불안해하는 건 싫으니까. 어린애(?)는 역시 웃는 게 최고로 귀엽거든. Part. 20 - 산길 우리들은 리아 영지의 저택에서 며칠을 더 머무른 다음, 수도로 향했다. 원 래 수도에서 함께 출발했던 아이들 13명과 8서클의 마법사 1명, 왕실 직속 기사 20명, 허크 아저씨 등의 용병 아저씨들 5명, 그리고 언제 불러들였는 지 새로 추가된 샤크 용병단의 용병 20명이 우리 일행의 전부였다. 여전히 엄청나고도 대단한 일행이다. 만약 사람들이 이 일행의 제대로 된 실체를 안다면 다들 놀라 뒤집어 질 것이다. "우옷! 야호! 또 맞췄다!" 나는 지금 나무에 붙어있는 표적에 단검을 맞추고는 좋아서 팔딱팔딱 뛰고 있는 중이다. 수도로 돌아가는 길에 휴식시간이 날 때마다 허크 아저씨에 게 단검 던지는 법을 배우고 있었는데 생각 이상으로 재능이 있었는지 빠 른 진전을 보여서 배운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표적의 정 중앙에 단검을 날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이 몸뚱이가 컨트롤 능력까지 무딘 건 아닌 모양이다. 사실 그렇게 운동신경이 둔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뛰어나지는 못해서 내심 굉장히 불 만이었다. 전생에 난 운동만능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런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갑자기 있던 능력이 사라져봐. 얼마나 억울한 데! "남자라면 제대로 된 검을 써야지! 게다가 왕자인 주제에 무슨 도적처럼 단검이라니 쓰겠다고 난리야?" 에르가 형이 괜스레 옆에서 시비를 걸고 있었다. 사실 왕자이면서도 단검 던지는걸 배우겠다며 쉴 때마다 이래저래 설치는 바람에 나는 상당히 시선 집중을 받고 있었다. 처음엔 꽤나 창피했지만 이제는 거의 초탈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시선을 자연스럽게 받아내고 있다. "에르가 형. 난 어차피 검도 못하고 마법도 못한다 이거야. 하나라도 제대 로 해놔야 나중에 다급할 때 하나라도 써먹을 수 있을 거 아냐." "카류 님. 벌써부터 검을 포기하실 시기는 아니지 않습니까. 좀더 오랜 시 간 수련에 임하신다면 분명 높은 성취를 이루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난 이왕 하는 거라면 최고가 되고 싶은 걸. 디트 경. 솔직히 일년 동안 나름대로 상당히 열심히 수련했는데도 에르가 형은 커녕 다른 애들도 따라가기가 힘들더라고." "훗, 네가 감히 나의 검 실력을 따라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더란 말이 냐, 그저 몸만 발육부진인 줄 알았더니 머리도 발육부진이었구나! 하하하 하!" 에르가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허리에 손을 얻고는 호탕하게 웃어 젖혔다. 크하~~! 귀여워라! 하는 짓이 어쩜 저렇게 귀엽냐! "에르가 형! 한번만 더! 더 해봐. 응? 아우, 귀여워!" "컥, 이...이게..." "하아... 카류야... 제발 그러지 마라, 응?" 에르가 형을 안기 위해 뛰어가려는 자세를 취하자 곁에서 우리들을 지켜보 고 있던 카멜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쩝, 어쩔 수 없지. 이번엔 참을까? 하지만 너무 귀엽잖아. 에르가 형은 저 렇게 다 커서도 생각하는 건 여전히 어린애 수준이라니까! "으음... 카류 전하. 그렇다 하더라도 역시 왕족에게 단검 던지기는 좀... 열 심히 하시면 충분히 검을 사용하실 수 있으실 텐데...." 디트 경과 나머지 기사들은 내가 단검 던지기를 배운다는 데에 상당히 불 만이 깊은 모양이었다. 거 참, 체면 되게 따지네. 체면이 밥 먹여 주나? 내 가 위험하다는 걸 알았으니 이젠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길러야 한단 말이야. "에휴, 빈부의 격차가 있고, 신분의 귀천이 있고, 직업의 귀천이 있더니, 검 술에도 귀천이 있군. 그토록 단검 던지기는 쓸모 없고 천한 기술이란 말이 야?" 나의 말에 더 이상 디트 경과 기사들은 내 행동에 토를 달지 않았다. 왠지 용병 아저씨들의 반짝반짝하는 느끼한 눈빛이 느껴졌지만 기분 탓이려니 하고 무시했다. "자자, 한눈 팔지 마시고 다시 한번 해보세요. 카류 님. 이번엔 좀더 중앙 을 목표로." "네에~ 허크 아저씨이~!" 그래! 연습하자! 연습! 이렇게 라도 내 살길을 모색해야지. 아무 것도 안하 고 바보같이 놀고 있다가 반항도 한번 못해보고 허무하게 암살 당하는 건 절대 내 취미가 아니라고. 비록 죽음이 두렵지 않다지만 내 사랑 루브 형 의 걸림돌이라는 명목으로 죽을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단 말씀이야. "이제 그만 출발하는 게 어때? 충분히 쉬었잖아." "알았어. 허크 아저씨, 오늘 여관에 도착해서도 가르쳐 주세요."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우리 일행은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음 마 을로 가기 위해 우리들은 작은 산을 넘기 위한 길로 접어들었다. 푸른 산 의 시원한 나무 그늘과 바람이 긴 여행길 때문에 흘렀던 땀들을 말려주고 있었다. 나는 나름대로 친숙해진 말 위에서 산길이 선물한 그 서늘함을 즐 기고 있었다. 약간 차가운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제껏 느껴왔던 후덥지근 함 때문에 그것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헤에, 시원해라." 나는 디트 경과 함께 말을 타고 가면서 기분 좋게 말했다. "에구 카류야. 이 할애비는 다 죽어 가는데 혼자 그렇게 좋아할 셈이냐." 그때 아르 할아버지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완전히 낫지 않아서 여전히 안색이 그렇게 좋지 못한 아르 할아버지는 지금 마차 대신 말을 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의 마차는 총 3대로 12명의 아이들이 각각 4 명씩 넓게 타고 있었는데, 아르 할아버지는 아이들만 있는 마차에 타고 싶 지도 않고, 그렇다고 혼자서 덩그러니 마차를 타고 싶지도 않다고 하셔서 이렇게 말을 타고 가시는 중이었던 것이다. 아르 할아버지가 아이들과 함께 마차를 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을 보고 나 는 약간 의아해했다. 나는 이제껏 아르 할아버지가 비록 아이들 대하는 법 이 서투르다고는 하나, 아이들을 굉장히 좋아한다고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 다. 그러나 오늘 아르 할아버지의 행동을 보니 내가 너무 귀엽게, 깜찍하 게, 착하게를 모티브로 행동해서 아마 특별 케이스가 된 모양이었다. 그 정 도로 나의 오버가 심했던 것인가? 뭐 어때. 결과가 좋으니 된 거지. 어쨌든 아르 할아버지의 몸은 말을 타고 가기에 역시 무리인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아르 할아버지." 나는 필살기 반짝반짝 눈빛내기를 동원하며 아르 할아버지 향해 내가 지을 수 있는 최고의 귀여운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미안함과 어색함 때문에 화 제를 대충 얼버무리고 싶을 때 내가 취하는 가장 대표적인 행동 중 하나라 고 할까? "카류야, 이리 오련? 할애비랑 함께 타고 가자." "예? 음... 뭐, 좋아요. 근데 아르 할아버지. 혹시 이번 일로 앙심을 품으셨 다가 복수를 위해 말에 탄 저를 떨어뜨리시려는 거 아니에요?" "허허. 요 녀석 좀 보게. 불만이면 됐다." "헤헤, 아니에요. 아르 할아버지. 지금 갈게요. 디트 경. 나 좀 내려줄래?" 내가 아르 할아버지와 말장난을 치며 말에서 내렸을 때, 갑자기 뭔가 주위 가 어수선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뭔가가 수풀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조심하십시오. 카류 님." 디트 경도 그것을 느꼈는지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 디트 경 을 보더니 다른 기사들도 말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리고 용병들 은 아이들을 엄호하기 위해 마차를 둘러쌌다. 실은 반대대형이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더 이상 용병들에게 모든 것을 맡겨둘 수는 없다면서 출발하 기 전에 디트 경이 이렇게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동굴 사건 등으로 아이 들과 용병들 사이에 알게 모르게 애틋한 정(?)이 쌓였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에 디트 경이나 기사들이 이만큼 용병들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 다. 꾸룩꾸룩. "응?" 마치 돼지가 꿀꿀거리는 소리 같은 것이 수풀 속에서 들려오기 시작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곧 그곳에서 하나, 둘씩 이상한 생물들이 수십 마리 튀어나왔다. "오크!?" 디트 경은 그렇게 외치고 검을 과 다른 자들은 모두 일제히 검을 뽑아들었 다. 갑자기 나타난 그 오크들은 수가 거의 30여 마리에 달했다. 나는 책에 서만 접했던 오크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눈을 크게 뜨고 눈앞의 생명체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거의 돼지와 다를 바 없는 머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아래로는 인간과 흡사하게 생긴 근육질의 몸을 가지 고 있었다. 그들을 보노라니 책에서 왜 그들을 유사인종이라고 했는지 -혹 자는 몬스터라고 분류하기도 하지만- 알 것 같았다. 머리만 빼면 그들은 정말 인간과 다를 바 없이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 관대하게 봐 주면 굉장 히 못생긴 인간 정도로도 봐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책 과 같다는 것은...? "머...먹을 것...내...내놔라..." 역시, 말을 하는구나!! "용병들. 모두 마차를 잘 보호하라. 중요한 분들이시다. 그럼 기사단 돌겨.." "잠깐만, 잠깐만!!" 금방이라도 공격을 위해 튀어나가려 했던 디트 경 외 여러 기사들은 나의 만류로 덜컥 정지했다. "너희들이 오크야?" 나는 약간 앞으로 나와서는 방실방실 웃으면서 물었다. 오크와 진짜 대화 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정말 흥미진진해서 나는 그 흥분을 감추기가 힘이 들 정도였다. "우...우리는...오...오크다... 머...먹을 거...내놔라...내...내놔라... 내놓는다면... 사...살려준다...." "정말? 정말 먹을 것을 주면 그냥 보내 줄 꺼야?" "카류리드 전하! 저런 오크는 저희 기사 10명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 니다!" 나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한 기사가 소리쳤다. "그런 게 아냐. 경들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아. 하지 만 먹을 것만 준다면 그냥 다 끝날 수 있는 일인데, 일부러 죽일 필요는 없잖아? 오크라도 죽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고. 이렇게 말도 통하잖 아? 한끼만 굶으면 다음 마을에서 음식을 보충할 수도 있을 텐데 그냥 음 식을 넘겨주고 가면 안될까?" "너 제정신이냐? 내가 왜 저런 놈들을 위해 한끼를 굶어야 한단 말이야!" 내 말을 들었는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는 에르가 형이 소리쳤다. "하지만 한끼 굶는 것 정도로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에 피 튀기는 싸움 을 한다는 건 좀 그렇지 않아? 그리고 솔직히 오크를 죽이는 것, 살인과 그 느낌이 좀 비슷하지 않아? 이렇게 말도 통하고 의사소통도 할 수 있잖 아. 유사인종이잖아." "틀리다. 카류." 말 위에서 아르 할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가 함부로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잘 안단다. 물론 오크는 말도 통하는 유사인종이지. 그러나 그 놈들은 인간의 적이다. 오크들이 우 리를 약탈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오크는 일을 하지 않아. 아니, 할 줄 을 모르지.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약탈만을 하지. 녀석들이 약탈을 위해 우 리들을 공격했을 때 그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면 조용히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줘야만 하느냐? 오크를 위해서 우리가 피땀 흘려 만든 곡식들을 바쳐야만 한단 말이냐?" 아르 할아버지는 말을 끊고 잠시 나를 바라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만약 이 길을 자신의 전 재산을 가지고 넘어가는 상인이라면? 우리들이야 한끼만 참고 마을에 가서 먹으면 된다 친다지만, 그 상인은 어쩌겠냐. 만약 그가 끝까지 가진 것들 내놓지 않는다면 오크들은 거침없이 인간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을 것이다. 그것이 오크야. 지금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이 길 을 넘는 다른 자들이 죽임을 당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내게는 오크도 거의 인간과 다름없는 생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인간의 목숨, 오크의 목숨. 하지만 나는 지금 인간이고 인간이 더 좋은 게 사실이기도 하다. 오크와 인간 중 딱 하나만 택해야 한다고 한다면 인간을 택할 수밖에 없겠지. 죽기를 바라는 생명은, 최소한 마음 속 깊은 곳부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 는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이왕이면 아무 일 없이 그냥 넘 어 갈 수 있기를 바랬지만 어쩔 수 없구나. 나는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나의 물러섬을 신호로 기사들이 뛰어들어 오크들과 맞섰다. 오크들은 굉장히 강했다. 며칠 전 동굴 속에서 상대했던 어스 웜과는 차원 이 달랐다. 저런 녀석들이랑 맞붙는다면 나는 1초도 견디지 못하고 두 동 강 나고 말 것이다. 하지만 기사들은 더 강했다. 2,3마리씩 덤벼드는 오크 들을 어렵지 않게 가뿐히 상대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많이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한 기사와 대치하던 오크가 뒤로 잠 시 물러서 주춤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오크의 커다란 머리 쪽을 목표로 단검을 던졌다. 어차피 죽여야만 하는 존재라면 기사들 을 도와 빠르게 끝내버리자는 생각에서 그런 짓을 한 것이다. 꾸에엑~! "카...카류리드 님?!" 과연 쉬운 목표를 향해 던진 나의 단검은 정확히 오크의 얼굴에 가서 박혔 다. 덕분에 오크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부여잡고는 뒤로 꼬꾸라 졌다. 그러나 이런 나의 행동이 너무나 의외였는지 기사는 상대하고 있던 오크 한 마리를 그만 놓쳐버리고 말았다. "헉!" 나는 잠시 잘난 척 한답시고 용병들보다 약간 앞에 나와 있었던지라 -사실 나도, 용병들도 완전히 기사들을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게 달려드는 오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갑작스레 어스 웜 퀸의 다리에 어깨를 맞았던 기억이 떠올라 등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상처를 입는 것은 질색인데!!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죽고 싶지도 않단 말이야! 나는 본능적으로 오크를 피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 했다. 그 때 갑자기 목덜미 사이로 뭔가 알 수 없는 뜨거운 것이 지나갔다. "꿰에엑~" 내가 그 뜨거움을 잊기도 전에 갑자기 달려들던 오크가 복부를 부여잡고는 미친 듯이 땅에 뒹굴었다. 나는 한동안 멍하게 오크를 바라보다가 겨우 저 놈이 왜 저렇게 괴로워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오크는 매직 애로우를 맞 았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오한이 서려왔다. 까딱했으면 매직 애로우를 목에 정통으로 맞을 뻔했지 않은가. "아...아르 할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카류!! 어서 이리로 와!" "그...그럴 수가! 마법을 쓸 거면 '매직 애로우' 라고 소리정돈 지르라고요. 저 마법을 제가 맞을 뻔했다는 걸 아세요?" "아니? 이 꼬맹이가 살려줬더니 고맙다는 소린 못할 망정! 매직 애로우가 비록 1서클 주문이긴 하나 이런 상황에서 이 정도로 빠르게 수식을 계산하 고 마나를 움직이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 그런데 마법 이름 같 은 걸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 어떻게, 왜 외친단 말이냐!!" 나와 아르 할아버지가 이렇게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 있는 사이에 모든 오 크들을 다 해치운 모양인지 기사들은 우리들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의 근처에서 오크를 놓친 기사만이 유일하게 움직여 나에게 다가 와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죄...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제가 그만 실수를 저질러 전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꿰에에에엑~~~" 나는 그 기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오크가 아직까지 배를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직 애로우를 정통으로 맞긴 했 지만 원래 오크가 육체적으로는 인간보다 몇 배는 강하기 때문에 아직 죽 지 않고 저렇게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의 탓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사를 지나쳐 그 오크에게로 다가갔다. 오크는 복 부에 반쯤 구멍이 뚫린 채로 완전히 죽지도 못하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저 오크는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럽게... "꾸...꾸에엑... 사...살려...꾸엑...살려줘..." 오크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나를 보고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기분이 나 빴다. 가볍게 죽여버렸던 어스 웜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마치 사람에게 상 처를 입힌 듯한 묘한 기분. 오크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은 최소한 내 눈에 는 인간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허리춤에 달린 나머지 또 하나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오크의 목덜미를 목표로 검을 박아 온 힘을 다해 그어버렸다. 무언가가 끊어지는 불쾌한 느낌이 나의 양손에서 느껴졌다. 피가 내 손과 얼굴, 옷으로 튀어 특유의 비릿한 냄새와 축축하고 뜨거운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의 다 죽어가던 오크는 나의 행동에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잠시동안 귀청이 찢어질 정도로 비명을 지르다가는 금새 절명해 버렸다. "카...카...카류...리드 전하?" 바로 근처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가 내 행동을 보더니 얼굴이 새파래 져서는 말을 더듬었다. 솔직히 그렇게 유쾌한 기분이 아니라 나는 냉소적 으로 말했다. "오크도... 피는 붉구나." 나는 손에 튄 그 붉은 피를 바라보았다. 마치 살인을 한 듯한 불쾌한 기분 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죽고 싶어하지 않는 자들에게, 너무나도 살고 싶어하는 자들에게 이해 할 수도 없는 환생을 빌미로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죽음을 내릴 정도로 나는 그렇게 잔인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나와 나의 사랑하는 자들이 상처 입지 않게 하려면 오크들을 모두 죽여야만 했다. 인간과 오크는 천적 사이였으니까. 죽고 싶어하지 않는 생명을 굳이 죽여야만 한다면 최소한 고통 없이 빠르 게 죽여주고 싶다. 그것이 죽기 직전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이니까. 비록 그들에게 원망을 듣겠지만, 이미 죽어버 린 자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죽은 자가 완전히 새로 운 생명이 되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한다는 것도 안다. 진실로 두려운 것은 살아있는 자의 원망, 고통일 뿐이다. 그 오크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고 죽인 후에 이렇게 기분이 찜찜하기도 하 지만, 그렇게 큰 슬픔도 죄책감도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오랫동안 내 손으로 죽음을 선사한 오크의 피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 ◆ ◆ ◆ ◆ ◆ ◆ 카류 님을 모신 우리 일행은 드디어 리아 영지를 떠나 수도로 향하게 되었 다. 아르디예프 님의 몸 상태가 좋지 못해서 꽤나 오래 지체되었던 길을 이제야 겨우 떠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도로 향하는 여행 중에 카류 님은 단검 던지기를 가르쳐 달라고 용병 대 장인 허크에게 부탁했다. 카류 님은 생각 이상으로 단검술에 상당히 재능 이 있었는지 꽤나 성취가 빨랐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나는 순수하게 기뻐해 드릴 수가 없었다. 천한 평민들이나 쓰는 그런 단검술을 카류 님이 배운다는 것이 탐 탁치가 않았던 것이다. "에휴, 빈부의 격차가 있고, 신분의 귀천이 있고, 직업의 귀천이 있더니, 검 술에도 귀천이 있군. 그토록 단검 던지기는 쓸모 없고 천한 기술이란 말이 야?" 하지만 나의 불만을 카류 님은 한 마디로 일축했다. 그 분의 말을 듣자니 검술에까지 이런 편협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조 금 부끄러워졌다. 13살의 어린아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언제나 폭넓은 생각을 하시 는 분.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으며 앞으로도 지켜야 할 분. 가끔씩 카류 님 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나의 선택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너무나 큰 기쁨을 느낀다. 다시 길을 재촉 한 우리 일행은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곧 서늘한 그 늘이 우리들을 맞이했다. 카류 전하는 전에 리아 영지에서 있었던 일로 아 르디예프 님과 더 친해져서 이제는 짓궂은 농담까지 나누곤 했다. 그러다 가 카류 님이 아르디예프 님의 말로 옮겨 타려 하던 중이었다. 나는 주위에 수상한 낌새가 감도는 것을 느끼고는 바짝 긴장했다. 만에 하 나라도 카류 님을 상처 입게 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이 번 사건으로 나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리아 영지에서 카류 님께 한 맹세를, 다시는 그렇게 방심하지 않을 것임을 되새기며 검을 뽑아 들었다. 곧 30여 마리의 오크들이 나타났다. 용병들에게 마차를 지키도록 하고 나 를 포함한 기사들은 오크들을 상대하려 말에서 내렸다. 동굴에서 있었던 일로 샤크 용병단의 대장인 허크가 카류 님을 얼마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 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놓고 용병들에게 마차를 맡길 수 있었다. 그 들이라면 충분히 전하들을 지켜 줄 것이다. "용병들. 모두 마차를 잘 보호하라. 중요한 분들이시다. 그럼 기사단 돌겨.." "잠깐만, 잠깐만!!" 기사들을 지휘해서 돌격하려 했던 나는 갑작스런 카류 님의 말에 엉거주춤 한 자세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오크야?" "우...우리는...오...오크다... 머...먹을 거...내놔라...내...내놔라... 내놓는다면... 사...살려준다...." "정말? 정말 먹을 것을 주면 그냥 보내 줄 꺼야?" 갑자기 카류 님은 오크에게 말을 걸었다. 설마 먹을 것을 주어 그냥 보내 려는 것은? "카류리드 전하! 저런 오크는 저희 기사 10명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 니다!" 카류 님의 말에 한 기사가 소리쳤다. 자신들의 실력을 믿을 수 없어 이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런 게 아냐. 경들이 강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아. 하지 만 먹을 것만 준다면 그냥 다 끝날 수 있는 일인데, 일부러 죽일 필요는 없잖아? 오크라도 죽고 싶어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고. 이렇게 말도 통하잖 아? 한끼만 굶으면 다음 마을에서 음식을 보충할 수도 있을 텐데 그냥 음 식을 넘겨주고 가면 안될까?" 역시 오크가 죽을 것을 가엾게 여긴 것이었군. 저런 오크에게까지 동정을 하다니, 전에 소매치기 일도 그렇고 카류 님은 너무 마음이 여린 분이다. 하지만 오크를 살려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카류 님은 어떻게든 오크를 살려보내고 싶은지 반발하는 에르가 님을 설득 하고 있었다. 그때 아르디예프 님이 나서 카류 님에게 말했다. "네가 함부로 생명을 죽이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잘 안단다. 물론 오크는 말도 통하는 유사인종이지. 그러나 그 놈들은 인간의 적이다. 오크들이 우 리를 약탈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지. 오크는 일을 하지 않아. 아니, 할 줄 을 모르지. 그래서 그들은 오로지 약탈만을 하지. 녀석들이 약탈을 위해 우 리들을 공격했을 때 그 욕망을 충족시켜준다면 조용히 넘어가기도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것들의 욕망을 충족시켜줘야만 하느냐? 오크를 위해서 우리가 피땀 흘려 만든 곡식들을 바쳐야만 한단 말이냐?" 무언가 반박하는 말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카류 님은 아 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르디예프 님은 잠시 숨을 들이키며 말을 끊었다가 다시 그분을 향해 말했다. "만약 이 길을 자신의 전 재산을 가지고 넘어가는 상인이라면? 우리들이야 한끼만 참고 마을에 가서 먹으면 된다 친다지만, 그 상인은 어쩌겠냐. 만약 그가 끝까지 가진 것들 내놓지 않는다면 오크들은 거침없이 인간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을 것이다. 그것이 오크야. 지금 그냥 넘어갔다가 나중에 이 길 을 넘는 다른 자들이 죽임을 당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아르디예프 님이 카류 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카류 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비록 원하지 않지만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인정한 모양이 다. 확실히 카류 님이 정이 깊은 분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반발할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하는 분은 아니었던 것이다. 카류 님이 뒤로 한발자국 물러서는 것을 신호로 우리들은 오크에게 달려들 었다. 빠르게 근처의 오크를 한 마리 베어버리고 나는 흘낏 카류 님 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혹시나 오크가 죽는 장면을 보고 마음의 상처라도 받으 시는 건 아닐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카류 님의 다음 행동을 보고 그만 오크가 휘두른 그 엉성한 칼부림에 당해 버릴 뻔했다. 카류 님이 오크의 머리를 향해 단검을 던져버 린 것이 아닌가!! 전하의 단검에 맞은 오크가 뒤로 꼬꾸라지는 모습을 멍 하게 쳐다보다가 그렇게 될 뻔한 것이다. 전하의 근처에서 오크를 상대하고 있던 기사도 그 의외의 모습에 놀라다가 그만 오크를 한 마리 놓쳐버리고 말았다. "카류리드 전하!!" 나는 거의 비명처럼 외치면서 카류 님께 달려드는 오크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떨어져 있어 나로서는 도저히 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다급해서 미칠 것만 같은 급박한 순간, 그 씹어먹어도 시원 찮을 오크가 카류 님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고 생각한 순간, 어찌된 일인 지 오크가 크게 뒤로 밀려나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아...아르 할아버지!"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라, 카류!! 어서 이리로 와!" 아르디예프 님이 약간 창백해진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아아, 아르디예프 님께서 마법을 써주신 모양이구나. 나는 일단 주위에서 얼쩡대고 있는 오크들을 해치웠다. 한 사람 당 2,3 마 리씩 상대해야 했지만 우둔한 오크는 우리들의 상대가 아니었기에 빠르게 해치워 버릴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카류 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소한 것으로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나와 기사들, 아니 모든 일행들은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에게 조금 전 카류 전하의 행동이 너무나 의외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곳의 모든 일행들은 동굴 안에서의 이야기를 대충이나마 들어서 카 류 님께서 얼마나 타인을 위하는 분인지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뿐만이 아니더라도 특히 10명의 기사들 중 5명은 리아 영지의 소매치기 사건 때 함께 있기도 했기에 카류 전하가 누구보다 마음이 여린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카류 님의 행동은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오크 를 놓친 기사가 이해가 갈 정도였다. 어째서 오크에게 검을 던진 것일까. 처음 그냥 먹을 것을 주어 놓아 주자고까지 말했던 카류 님이었는데. "죄...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제가 그만 실수를 저질러 전하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멍한 일행들 중에서 오크를 놓쳤던 기사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카류 님께 다가가 용서를 구했다. "...경의 탓이 아니야." 하지만 카류 님은 그렇게 중얼거리기만 할뿐 그 기사는 쳐다보지도 않고 뒤쪽의 오크에게 다가갔다. "꾸...꾸에엑... 사...살려...꾸엑...살려줘..." 아르디예프 님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오크는 괴성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 고 있었다. 반쯤 뚫린 배는 언뜻 보아도 곧 죽을 만한 상처였다. 그런 오크 를 카류 님은 왠지 어두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외견으로는 마치 인간처 럼 보이니, -사실 유사 인종이기도 하고- 그 오크에게서 측은함을 느낀 것 이리라. 그러나 나는 또 한번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카류 님이 단검을 뽑아들어 한번에 오크의 목을 베어버린 것이다. 흑청색의 신비한 눈동자가 오크의 목줄기의 검붉은 피를 비추어 냈다. 붉디붉은 오크의 피가 작은 전 하의 몸에 튀어 평소 푸른 이미지와는 다른 너무나 이질적인 분위기를 자 아냈다. "카...카...카류...리드 전하?" 카류 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던 기사가 얼마나 당황했던지 창백해진 얼 굴로 말을 더듬었다. 사실 나 역시 그 기사와 일반 다르지 않은 기분이었 다. "오크도... 피는 붉구나." 전하는 손에 튄 그 붉은 피를 바라보며 기사의 부름에 차갑게 답했다. 그 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단지 자신의 붉어진 손을 가만히 바라 보고만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일을... 어찌됐건 나는 카류 님의 곁으로 다가갔다. 최소한 전하의 얼굴이 기뻐 보 이는 얼굴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전하의 검푸른 눈동자가 남이 모르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카류...님." 카류 님은 그제야 자신의 손에서 눈을 떼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곧 카류 님은 몹시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파 보이잖아. 배에 구멍이 뚫리면 굉장히 아플 꺼야. 그지?"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그 말 한마디만으로도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 었다. 저급한 오크의 목숨마저도 고귀하게 여기는 상냥한 카류 님. 그러나 그 분의 바램과는 달리 우리들은 사람들을 위해 오크를 죽일 수밖에 없었 다. 이런 상황에서 카류 님은 그냥 오크들의 죽음을 바라보기보다는 스스 로 자신의 단검을 던졌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오크에게 직접 편한 죽 음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면서 이렇게 어울리 지 않는 웃음을 지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카류 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잊고 잠시 전하를 안아드렸다. 카류 님은 잠시 주춤했지만 내 품에서 벗어나려 하진 않았다. "디트 경... 왜 그래? 자, 이제 그만 가야지." 나의 손에서 벗어난 카류 님은 곧 평소와 같이 천사 같은 환한 웃음을 지 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그 표정에 나는 또 한번 가슴이 저 려왔다. "이리 오거라. 카류야. 자, 이 할애비와 함께 가기로 했지?" 아르디예프 님도 약간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 분도 아마 나와 같은 생각 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르디예프 님은 전하를 안아들어 자신의 말에 태운 다음 그 머리를 곱게 쓰다듬었다. 아르디예프 님의 가슴에 폭 묻혀버린 카 류 님은 머리를 쓰다듬는 촉감을 즐기려는 듯 눈을 꼭 감았다. 일행들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말을 재촉해 수도를 향해 출 발했다. 카류 님은 조금 전 일로 약간 피곤했는지 아르디예프 님의 품속에 서 금세 잠이 들었다.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카류 님은." 나는 곤히 잠든 전하의 모습을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말했다. "...어린애가 너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도 안 좋건만. 쯧쯧쯧." 검푸른 머리카락이 피가 튀어 엉망이 된 카류 님을 바라보면서 아르디예프 님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렇지만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 고 있는 손을 멈추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카류 님은." "네가 이 꼬마를 잘 지켜라. 상식을 뒤엎을 정도로 비상한데다가 어떤 상 황에서도 냉정하게 움직이는가 하면,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을 위한답시고 앞뒤 없이 행동해버리는 그런 바보 같은 꼬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만은 카류 님을 지키겠습니다." "후훗. 충성스런 기사로군. 무슨 일이 있더라도...인가." 아르디예프 님은 수도 쪽으로 눈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어느새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해가 짙푸른 하늘을 조금씩 붉게 물들여 가고 있었다. Part. 21 - 수도 "우와아앗~! 수도다!!" 긴 여행 끝에 우리들은 드디어 수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산길을 지나면서 오크를 한번 만난 것 빼고는 우리들은 별다른 해프닝을 겪지 않았다. 산적 이라도 나타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실망스럽게도(?) 그런 일은 더 이상 일 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이렇게 척 보기만 해도 대단해 보이는 호위병 이 줄줄이 붙은 일행에게 덤벼드는 짓은 멍청한 오크 이외엔 하지 않을 것 이다. 게다가 수도로 가는 길이 꽤나 잘 닦여져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했 다. "에르가 님!" "딜트라엘 니임~!!!" 우리들이 수도의 성문 근처에 다가가자마자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터져 나 왔다. 동굴에서 탈출한 후 리아 영지에서 파발을 보내어 우리들의 소식을 알렸기에 우리들이 올 대략적인 시기에 맞춰서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 던 모양이다. 프리란트 님이 -리아 후작- 우리들이 모두 무사하며 자신의 저택에서 제 대로 보살피고 있다는 소식을 재빠르게 전하지 않았으면 몇몇 다혈질 귀족 들은 군대라도 이끌고 유적지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사실, 몇몇이 어느 정 도 그럴 준비도 마쳤었다고 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아르윈 불굴의 명문 귀족의 자제가 몽땅 몰살당할 뻔한 엄청난 대 사건이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아르디예프 님! 무사하셨군요!! 이렇게 무사히 수도에 도 착하셔서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어, 라인 경! 정말 오랜만이에요!" 항상 등교 길에 호위를 해주었던 왕실 직속 기사단 출신의 가장 지위가 높 은 기사가 대표로 나에게 다가와 반겨주었다. 그리고 나도 그의 말에 웃는 얼굴로 답했다.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진심이 절절히 배어 나오는 것 같아 가슴 한쪽이 찡해졌다. 왠지 이 세계에 환생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만 받는 것 같구나. 좀 힘들었지만 역시 살아 나오길 잘했어!! "카류 님. 가시지요. 아스트라한 님과 다른 전하들께서 기다리고 계실 것입 니다." "응! 디트 경. 모두들 다음에 또 봐." "나중에 또 보자." "정말 고마웠어, 카류." 우리들은 각자 자신을 배웅 나온 사람들을 따라 자신의 집, 별장, 친적 집 등을 향해 성문에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나도 마차를 타고 나머지 일 행들과 함께 조금 속도를 내서 성을 향해 수도의 넓은 거리를 달려갔다. 수도의 거리는 평소처럼 활기차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솔직히 마차 멀미로 인해 거리를 그렇게 자세히 바라본적이 없어서 평소처럼 거리가 어쩌고 하 는 말에는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매일같이 다니던 길이라 어 느 정도 파악하고 있는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 말도 안돼는 평가라고 할 수 는 없겠지?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펄쩍 뛸 정도로 기뻐하며 그토록 벗어나 보고 싶어 했던 도시였는데도 다시 돌아온 지금 이렇게 감회가 새로워지는 것을 느끼 며 역시 사람은 뭐든지 한번 잃어봐야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걸 절실히 깨 달았다. 그렇다해도 몇 년 더 이 도시에 갇혀 지낸다면 또다시 수도가 지 긋지긋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내 수준에 더 이상 뭘 더 바란단 말인가. "카류야!!" "카류!!"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이 언제 전해졌는지 왕성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형과 누나들이 바람같이 달려왔다. "형!! 누나!" "흐윽, 카류야. 흐윽... 괜찮아?" 카이 형이 그 시리도록 크고 새파란 눈에 투명한 눈물을 가득 달고는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형을 꼭 안고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다른 형제들의 얼굴 을 바라보았다. 모두 몇 십 년은 못 보았던 것처럼 하나같이 상기된 얼굴 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 리가 있겠어? 나야 건강체질이잖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모두에게 씨익 웃어 보였다. "아아... 카류리드!!"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금 세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저 멀리서 자신의 호위 기사인 레드라스 경 한 명만을 달랑 달고는 마구 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저렇게 뛰는 모습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카이 형을 살짝 떼어내고 예를 갖추어 어머니께 인사를 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어머니의 다음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카류리드. 카류야..." 어머니가 갑자기 나를 안아버렸기 때문이다. 약간 냉랭한 분위기의 어머니 는 웬만해서는 껴안는다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애정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런데 단 둘이 있을 때도 아니고 이렇게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 눈은 의식하지도 않고 앞뒤 없이 나를 껴안은 것이다. 어머니의 이런 행동을 본 형과 누나들, 그리고 다른 호위병들은 조용히 자 리를 비켜주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 나는 굉장히 당 황해 있었다. 어머니는 멍해져있는 나를 안아서 레드라스 경과 디트 경과 함께 땅의 궁으로 돌아왔다.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구나, 아프지 않니? 카류리드?" 어머니는 자신의 침실까지 나를 데리고 왔다. 그리고 침대에 걸터앉아 나 를 자신의 무릎 위에 앉히면서 상냥하게 물었다. 너무 익숙하지 않은 상황 이라 나는 대답을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왠지 이렇게 어머니의 무릎에 앉 아 있는 것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자신의 입가로 가져가면서 말했다. "아직 이렇게 작구나... 우리 카류." 내가 좀 발육부진이긴 하지. ...이게 아니잖아!!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애정행각에 정말 몸둘 바를 몰라 했다. 머리에 자꾸 화끈화끈 열이 올라와서 나는 더욱 얼굴을 붉혔다. "내가 이러는 것이 싫으니?" "아...아뇨!!" 나는 어머니의 물음에 그 즉시 약간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으아! 부끄러워!! 내가 왜 큰소리를 냈지? 어머니가 뭐라고 생각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초절정 미인인 그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기분 좋았기 때문에 나의 입이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인 것이다. 너무 얼굴 밝힌다고 구박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국왕인 아버지가 어머니에게만 빠져 있는 것이 내심 이해가 갈 정도로 어머니는 너무나 아름답단 말이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안겨본 그녀의 품이 정말 따뜻하고 포근했기 때문이 기도 했다. 이것이 어머니의 품이라는 것일까. 평소 그 차갑고 이지적인 분 위기와는 너무나 다른 느낌. 사실 나는 전생에서도 어머니에게 안겨보고 그런 기억이 거의 없다. 유치 원 때부터 계속된 부부 싸움으로 인해 우리 집의 분위기는 언제나 살벌했 기 때문에 그런 화기애애한 애정행위는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어머니 와 대화를 할 때도 대부분이 일방적인 신세한탄뿐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을 크게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애정표시를 거의 안 했다 뿐이지 어머니의 말 을 듣다보면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정도는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 이다. 문득 지금 어머니의 모습과 예전의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떠오른다. 13년 이나 만나지 못한데다가 언제나 잊으려고 애썼던 부분이기에 솔직히 전생 의 어머니의 얼굴이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 닥쳤다면 전생의 어머니도 지금 나를 안고 있는 현세의 어머니처럼 따뜻한 표정을 지었음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더니 그런 느낌이 든 것이다. "다행이구나. 무사한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카류야. 정말 미안하구나. 그 렇게 너를 그곳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네가 원한다 해도 보 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어머니는 나를 더욱 꼭 껴안으며 말했다. 왠지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 있는 듯해서 나는 더욱 감동했다. 평소 그렇게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녔지 만 그래도 역시 그녀는 나의 어머니였던 것이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이렇게 멀쩡한 걸요. 게다가 제가 떼써서 가게된 거잖아요."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네?"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슬퍼 보 이는 얼굴로 말했다. "네가 괜찮다고 말할 줄 알면서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내가 미워서 그 런단다. 카류." "어...어머니..." 어머니는 도대체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나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리고 왜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유적지에 가게 된 것도 내가 억지를 쓰고 졸라서 가게 된 것인데... "카류... 우리 착한 카류...." 어머니는 나의 이름을 계속 반복해 불렀다. 따뜻한 어머니의 품속에서 그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 있자니 기분 좋은 나른함이 나를 덮쳐왔다. 어머니는 나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이마에 입 맞추면 서 조용히 말했다. "카류... 어서...어서 자라야지.. 나의 카류. 어서 커서..." 나는 한참동안 가만히 그녀의 품에 안겨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도 모 를 정도로... Part. 22 - 왕궁 파티 "훗훗훗훗..." "...또 시작이냐?" 아름답게 세공된 유리잔에 비친 얼굴을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내게 에르가 형이 한마디 던졌다. "훗훗... 어때? 이제 발육 부진아 라고 못 부르겠지?" "...뇌가 발육 부진인 상태라는 건 안다. 멍청한 녀석." 동굴 사건이 일어난지도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나는 15살을 조금 넘자 마자 급속도로 키가 크기 시작해서 16살이 된 지금은 다른 내 또래 친구들 보다 조금 작은 수준으로까지 성장했다. 물론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내가 이런 상황에서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그러지 말고 솔직해져봐, 에르가 형. 훗훗훗... 얼굴도 꽤나 남자다워졌지? 그렇지?" "감히 이 몸 앞에서 외모를 논하다니! 나와 같은 멋진 근육질을 갖춰야 남 자다운 맛이 나지. 너 같은 비실이가 무슨..." 나는 에르가 형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유리잔의 내 얼굴을 감상했다. 멋지 게 자란 에르가 형에 비교할 만큼 내가 남자다워진 게 아니라는 것은 사실 이긴 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스스로의 외모에 엄청나게 만족하고 있다. 어 렴풋이 기억나는 전생의 나의 외모가 비교해보면... 움흐흐흐... 입이 저절로 찢어진다고 할까? 사실 이렇게 크기 전에도 내가 꽤나 귀여운 얼굴이라고 생각하고 있긴 했 다. 그걸 알고 있기에 일부러 귀여운 척 애교를 떨기도 했지 않은가. 그러 나 솔직히 조그마한 꼬맹이의 모습에 상당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겠다. 남자인 이상 남자다운 외모를 가지고 싶어하는 건 너무 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게 웬일!! 핫핫핫! 나이를 조금 먹으니까 이렇게 훤칠한 미남... 내 입으로 말하니 뭣하지만 어쨌든 미남이 되지 않았겠냐!! 하긴, 어머니의 몸에서 태어난 나이니 이 정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 렇게 아름다운 어머니의 아들치고는 좀 떨어지는 수준이랄까. 그러나 아무 려면 어떠냐! 나는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이라고! "크크크... 이 정도면 충분히 미남이지. 밖에 나가면 여기저기서 여자들이 꼬일지도 모른다 이거야. 움하하하! 언제 몰래 성밖으로 빠져나가 여자라도 꼬셔볼까? 솔직히 내가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날 기회가 있었어야지!" "콜록! 콜록콜록!!!" 에르가 형은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렸는지 심하게 기침을 했다. 내가 등 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자 형이 갑자기 그 손을 뿌리치면서 빽 소리 질렀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뭐가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다고? 학교나 왕궁에 서 여는 파티 때마다 만나는 그 수많은 여자들은 다 뭐야? 이 색마 같으니 라고!" 그 여자아이들이야 내가 어릴 때부터 귀여워 해줬던 애들이잖아. 어린애 키워서 잡아먹는 짓(?)따윈 안 해. 난 변태가 아니다 이거야... 라고 말해줄 순 없지. "에이, 그냥 한번 해본 말이야.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는 게 어때? 보편 적인 시각에서 볼 때 나는 미남이 분명하다고." 그래, 전생에 평범한 얼굴로 살았던 경험이 있는 만큼 이것만은 내가 보증 한다! "웃기지 마! 이 멍청한 녀석아!! 키예프 전하와 비교하면 너 따윈 시궁창의 쓰레기 수준이야!" "보라돌이 형이랑 비교하면 섭하지. 에르가 형이라고 뭐 달라질 줄 알아? 보라돌이 형을 기준으로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을 평가하기 시작하면 인 생이 너무 허무해 질 거야. 키옌 형은 우리 형이지만 너무 잘 생겼다니까. 훗훗훗. 그리고 에르가 형, 이거 알아? 루브 형도 정말 멋지다? 디트 경처 럼 근육이 붙어 요즘 얼마나 멋진지 몰라. 우리 루브 형이 원래 잘 생겼다 는 거 알긴 했지만 이건 정말 예상했던 거 이상이지 뭐야. 카이 형도!! 카 이 형도 너무너무 귀엽다고. 어릴 때부터 심상치가 않더니 결국엔 그렇게 엄청난 미소년으로 자라버린 거야! 카이 형이 그 커다란 파란색 눈동자로 반짝이며 나를 바라볼 때면 그냥 확 잡아먹어 버리고 싶을 정도라니까?!" "...숨도 쉬지 않고 잘도 그렇게 나불거리는구나. 자기 자식 자랑하는 사람 은 팔불출이라는 말을 언젠가 너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하는 거지?" "그러지 말고 들어봐! 세라 누나는 또 얼마나 우아한지, 그 은색 머리랑 이 미지가 딱 떨어진 다니깐. 미르 누나도 발랄한 주황색 머리카락처럼 하는 행동이 너무너무 깜찍해. 에르가 형은 옛날의 미르 누나를 못 봤지? 예전 에도 엄청 귀여웠지만 지금 얼마나 예뻐졌는지 몰라. 최근에는 말이야..." "내가 뭐 어쨌다고? 카류?" 에르가 형과 내가 오손도손(?) 이야기하고 있는 응접실에 미르 누나를 포 함한 누나들, 형들 그리고 히노 선배가 들어왔다. "모두들 왔구나. 그리고 히노 선배. 아니, 선배가 아니라 히노 양이라고 불 러야겠지요?" "이젠 저도 카류리드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요? 후후..." 나는 일어서서 히노 선배... -에이, 그냥 선배라 부르자!- 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올해 18살로 매년 클수록 아름다워지더니 이젠 그 이상 의 경지가 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청초하고 얼음 같은 아름다움과는 다른, 화려하고 눈부신 아름다 움이라고 할까. "감히 히노 양 앞에서 외모 이야기를 하다니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카류." "루브 형. 난 인간이 아닌 자들과는 비교 자체를 하지 않아. 나의 외모관에 있어서 비교 허용 범위는 인간까지란 말씀이야." "카류!" 히노 선배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는 외쳤다. "우웃, 여전히 너무 귀여워요!! 히노 선배! 우리끼리 있을 때는 평소대로 하자고요, 네에~?" "허헉!! 이 녀석 감히 히노 양께 무슨 짓이야!!" 내가 히노 선배를 껴안아 버리자 카이 형을 뺀 3명의 남자 일동이 마구 소 리 질렀다. 이제는 거의 성인이나 다름없건만 나는 여전히 히노 선배를 아 무 데서나 껴안아 버리는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그녀가 아무리 아름다워졌다고 해도 내 눈엔 여전히 귀여운 아이로 보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계속 그런 시선으로만 보니 이젠 영원히 바뀌 지 않을 듯하다. 완전히 커서 근육질 남자가 된 에르가 형이나 루브 형이 귀여워 보일 정도라면 말 다한 거다. "빨리 그 버릇 버리지 못하면 히노 양은 완전히 혼사길이 막혀 버릴 꺼다! 너 제발 그만해라. 엉?" 에르가 형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보아하니 형은 아직까 지 히노 선배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난 단지 히노 선배가 귀여워서 이러는 것뿐이니까 걱정할거 없어, 에르가 형. 애들 키워서 잡아먹는 짓(?)따윈 안 한다니까. "으이그. 손님들 앞에서까지 저런 짓을 하다니..." "모두들, 내게 안기는걸 부러워해서 그러는 거 다 알아. 글쎄 왜 그렇게 커 버렸냐고! 카이 형처럼 귀여운 초절정 미소년으로 크면 얼마나 좋으냔 말 이야!" "카...카류야." 내가 카이 형의 손을 꼭 쥐고 외치자 형이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네가 미소년이든 아니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조건 껴안는걸 좋아하는 거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이 껴안기 대마왕아!" "웃! 보라돌이 형. 그렇게 아름다운 입술로 그런 폭언을 내뱉다니, 너무너 무 안 어울려." 장난스러운 웃음들이 응접실에 떠돌았다. 내일은 일년에 한번 있는 아르윈 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모여서 왕궁 안에서 파티를 하는 날이다. 에르가 형 과 히노 선배는 내일의 파티를 위해 일찍 왕궁에 들어와서 쉬고 있었는데, 파티 시간이 될 때까지 한가한 시간마다 우리 형제들이랑 응접실에 모여 이렇게 잡담을 나누고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딜티랑 세미르... 전부 볼 수 있겠구나. 하지만 후크와 카멜은 볼 수 없으니, 정말 아까워." 나는 정말 슬프게도 동굴 사건이 있은 후 학교에 나가는 것을 금지 당했 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번만은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하 지만 후크와 카멜을 제외한 친구들이 가끔씩 왕궁에 찾아와 주었기 때문에 밖으로 내가 나갈 수 없었어도 그들과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에르가 형과 히노 선배, 다른 많은 학교 친구들이 17, 18살 이 되어 파블료프 학교를 졸업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리하여 그들은 더 이상 수도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게 되었고 졸업을 하자마자 자신의 영 지로 돌아가는 바람에 한참동안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모두와 가벼운 편 지정도는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파티를 통해 오랜만에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 녀석들은 평민이니까. 대체 왕궁에서 뭘 바라는 거냐?" 에르각 형이 불만을 터뜨리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이제 더 이상 에르가 형은 카멜과 후크을 평민이라고 경멸하거나 하지 않았다. 여 전히 입이 험하긴 하지만 동굴 사건 이후 평민이라던가 아랫사람들에게 상 당히 너그러워져서는 에스문드 영지에서 멋진 도련님, 좋은 기사님이라는 평판을 받고 있는 듯 했다. 예전의 에르가 형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상 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장족의 발전이라 하겠다. "아아, 나도 성밖에 나가보고 싶다. 어서 성인식을 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후크랑 카멜도 만나보러 갈 수 있을 텐데."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이제 카류도 성인이 되는구나. 언제까지고 조그마 한 꼬마로 있을까 싶었는데..." "루브 형! 내가 요즘 얼마나 무섭게 크고 있는지 알아? 두고보라고. 언젠가 내가 루브 형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날이 오고야 말 테니까." "백년을 기다려봐라, 그게 가능한가." "맞아, 맞아. 후후훗." 어떻게든 나를 놀려보려는 형과 누나들, 에르가 형을 보고 피식 웃을 수밖 에 없었다. 이렇게 키가 커도 여전히 꼬마라고 놀림을 받는 건 어쩔 수 없 나보다. 사실 내가 제일 어리기도 하고 말이다. 다시금 형제들과 친구들을 바라보노라니 그들도 이젠 거의 어른이 다됐다 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 세월이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모 두들 이렇게 커버렸구나. 다른 아이들도 모두 많이 변했겠지? 어서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 ◆ ◆ ◆ ◆ ◆ ◆ "루블로프 태자 전하. 드시겠습니까?" "아, 한잔만." 파티장 한가운데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시종의 목 소리에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태양의 여신이 강림했다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금빛 여인이 파티장 가운데서 춤을 추고 있는 것을 바 라보다가 잠시 넋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히노 혼 리아. 수많은 남자들이 자신의 파트너는 아랑곳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찬란한 그녀의 금발은 뭇 남자들의 혼을 빼놓기 충분할 정도로 아름다웠 다. 그녀는 지금 카류와 함께 춤을 추는 중이었다. 생기 발랄한 얼굴로 웃고 있는 카류와 약간 상기된 얼굴의 그녀는 질투가 날 정도로 정말 잘 어울렸 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3년 전 나의 사랑하는 막내 동생인 카류를 통해서였 다. 그 끔찍한 동굴 사건이 일어난 후 카류가 완전히 성밖으로의 외출이 금지되자 몇몇 귀족 아이들이 직접 성으로 찾아왔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그녀, 히노였던 것이다. 처음 그녀를 보고 나는 그 아름다움에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게다 가 그녀는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귀족 여인들보다 총명하며 기품이 넘쳤으며, 또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 었다. 대 귀족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인 그녀가 예정된 남자가 없다는 사 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이런 나의 물음에 그녀가 직접 말하기를 그녀는 한 때 벙어리였다고 한다. 3년 전 동굴 사건에서 카류가 없었다면 자신은 영 원히 벙어리인 채였을지도 모른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루브 형님!" 카류가 밝게 웃으면서 히노 양과 함께 내게 다가왔다. "히노 선배, 아니 히노 양. 저하고만 이러지 말고 루브 형님과 한 곡 추세 요. 루브 형님이 얼마나 춤을 잘 춘다고요. 루브 형님도 좋지요?" 카류는 내게 히노 양의 손을 건네고 잠시 우리들을 바라보면서 무엇이 그 리도 좋은지 귀엽게 방긋방긋 웃었다. 그리고 곧 잘해보라는 말을 남기고 손을 흔들면서 음식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한동안 히노 양과 춤을 추었 으니 잠시 쉬려고 그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금세 다른 귀족 여인과 마주 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의 손에 다시 파티장 중앙으로 끌 려 들어갔다. 카류는 어릴 때부터 귀족 여인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좋았다. 다음 이 나라의 국왕이 될 나보다도 말이다. "...그럼 한 곡 부탁드릴까요?" "...네. 루블로프 전하." 그녀의 입에서 나온 작은 긍정의 목소리에 나는 히노 양의 손을 이끌어 파 티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악기소리에 박자를 맞추어 한발자국씩 움직일 때 마다 흩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다. 우리들은 아무 말 없이 춤을 추었다. 이젠 더 이상 벙어리가 아니지만 그 녀는 여전히 카류 앞이 아니면 말을 잘 하지 않았다. 아주 필요한 말이거 나 카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고서는 말이다. 그런 우리들 곁으로 조금 전 보았던 그 귀족여인과 춤을 추는 카류가 지나 쳐갔다. 카류는 우리들을 보더니 그 특유의 귀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다지 표정이 풍부하다고는 할 수 없는 히노 양의 눈동자가 금세 흔들리는 것을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카류를 좋아하시지요?" 나의 조용한 한마디에 히노 양의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카류, 저 녀석이 의외로 그런 곳에 조금 둔하답니다. 저렇게 수많은 귀족 여인들이 접근하는데도 아무 것도 모르는지 사귀는 여자 하나 없으니 말입 니다. 하지만 히노 양이라면 둔한 카류라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 다. 그렇지 않으면 남자라고도 할 수 없지요. 후후." 히노 양은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는 듯 고개를 약간 숙였다. 하지만 춤을 추기 위해 맞잡은 손이 뜨거워지는 것만은 숨길수가 없었다. 노래가 한 곡 끝나고 안쪽으로 들어오자 히노 양은 아직까지도 약간 상기 된 얼굴을 들고 잠시 살풋 웃어 보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작은 웃음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기뻤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행 복한 기분이 되는 건 남자라면 누구라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항시 그녀가 웃는 얼굴을 만들어 내게 하는 카류가 마법사처럼 보일 정도이다. 솔직히 이런 면에서는 카류에게 질투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루브 형님. 결국 히노 양과 춤을 추고야 말았군요. 그렇게 안달을 내시더 니 말입니다." 키옌이 나에게 다가와 장난을 걸었다. "너야말로 히노 양에게 춤을 신청해 보는 게 어떠냐. 물론 거절당하지 않 을 자신이 있으면 말이야." "으음. 그것만은 사양입니다. 저의 이 수려한 얼굴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는 건 히노 양 뿐이라니까요." 키옌이 나의 말에 키득이며 답했다. 키옌 역시 히노 양에게 마음이 있는 듯했지만 직접적으로 그녀에게 접근을 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카류의 여자 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화려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도, 즐겁게 이야기를 하게 만드는 것도 모 두 카류의 역할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형님들, 여기서 뭘 하세요?" "카이. 너도 이리로 와라. 애인도 없이 소외된 계층끼리 궁상이나 떨어보 자." "예?" 키옌의 말에 카이가 그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저런 모습을 보노라면 언제나 카이가 귀엽다며 껴안아대는 카류의 마음을 조금 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음? 리아 후작 님이 시군요." 문득 리아 후작과 히노 양이 함께 카류에게 말을 거는 것이 보였다. 카류 는 후작의 앞에서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리아 후작 역시 카류와의 대화가 즐거운 듯 연신 부드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휴우, 카류는 정말 대단하다니까요. 언제 저렇게 리아 후작 님과 친해져 버렸는지 그분의 호칭으로 이름을 부르기까지 하더라고요. 저는 저 깐깐한 리아 후작 님 앞에만 서면 잔뜩 긴장부터 되는데 말입니다. 누가 뭐래도 아르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력한 귀족세력이니까요. 그런데도 카류 는 저렇게 간단하게 리아 후작 님의 호감을 사버렸군요. 모두들 카류의 어 디가 그렇게 좋은 것일까요?" "저도...카류가 너무 좋은 걸요. 키옌 형님은...아니에요? 왜 그런 질문을 하 세요?" 카이가 옆에 선 키옌을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소극적인 성격의 카이지만 카류의 일이라면 항상 먼저 나서서 말을 하곤 한다. 비록 외모가 작고 어려 보인다고는 하나 이제는 성인식도 치른 성인이건만 카이에겐 여 전히 카류밖에 없는 듯 하다. 키옌은 머리를 긁적이며 싱긋 웃었다. "그렇구나. 카이.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건가?" "그래, 바보 같은 질문을 한 거다. 보라돌이 녀석아." "루~브 형님! 이런 곳에서까지 그러실 거예요? 저번에 형님이 저를 보라돌 이라고 부르신 덕분에 그 자리에서 그 말을 들은 다른 여성들이 저를 얼마 나 놀렸는지 아세요?" 사소한 일로 마구 분개하는 키옌을 보면서 나는 피식 웃어주었다. 우리들 이 이렇게 장난을 치는 순간에도 카류는 금세 대 마법사인 아르디예프 님 과 함께 이야기 하다가, 곧 대기사인 레이포드 경에게 다가가기도 하며 연 신 웃음을 지었다. 마치 카류의 주위에 빛이 있는 듯 수많은 인재들이 카 류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카류의 얼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천진한 웃음과 언제나 남을 생각하는 깊고 따뜻한 생각이 그런 빛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사람들 은 그런 빛에 나무나 자연스럽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나도 역시 그 빛 에 이끌리는 사람들 중 한 명이 아니던가. 언제나 카류를 사랑스러운 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로 나는 카류의 빛을 더욱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어머님과 아르멘 님의 장례식 날, 나의 작은 동생이 필사적으로 외쳤던 그 말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말에 내가 위로 받았다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장례식에서 카류는 우리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겨우 12살의 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행동을 했다. 자신도 슬픔을 채 이겨내지 못했을 텐데 우리 들을 걱정해서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은 양 행동하며 우리들을 위로하려 한 것이다. 비록 우리들의 슬픔을 직접적으로 덜어주기엔 설득력도 없고 어설 픈 말에 불과했지만 어린 동생이 두 손을 꼭 쥐고 어떻게든 위로하기 위해 애쓰는 그 모습에서 나는 더 없는 고마움과 애정을 느꼈다. 나로서는 카류의 그 깊은 생각과 따뜻한 마음을 흉내도 내지 못한다. 솔직 한 마음으로 카류야말로 아르윈 왕국의 국왕에 어울리는 자라고 생각한다. 이 나라의 태자인 나조차 카류가 제6왕자로 태어난 것이 안타깝다고 생각 할 정도로 그 생각에 통감하고 있다. 나는 아직 너무나 부족하다. 영원히 카류처럼 행동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저렇게 착한 카류를 위해서라도 나는 어떻게든 노력할 것이다. 카류를 본받아,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 ◆ ◆ ◆ ◆ ◆ "춤을 굉장히 잘 추네요. 히노 선배." 나는 히노 선배의 첫 번째 상대로 그녀와 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수많은 남정네들이 쏘아보내는 불타는 질투의 시선이 뒤통수를 따갑게 하고 있었 지만 나는 지금 상황이 재미있게만 느껴졌다. 사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남 자들은 거의 다 파블료프 학교에 다녔던 녀석들로 전부 내가 한번씩은 귀 여워해 줬던 아는 얼굴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그들의 시선이 성인 남자의 무서운 질투라기보다는 어린애의 깜찍한 질투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나는 문득 히노 선배를 쳐다보는 시선 중에 루브 형의 시선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브 형은 한 손으로 포도주가 든 잔을 쥔 채 멍하니 히노 선배 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브 형이 히노 선배를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저렇 게 넋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좀 곤란한데 말이야. 그러고 있다간 포 도주를 흘려 버릴지도 모른다고. "루브 형님!" 한 곡을 다 춘 다음 히노 선배를 이끌고 루브 형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지 금 루브 형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왕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색함과 닭살스러움을 참아가며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다. 사 실 이 나이가 되어서까지 서로 반말을 찍찍 쓰고 하는 왕족은 우리들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만큼 우애가 좋다는 뜻이다! "히노 선배, 아니 히노 양. 저하고만 이러지 말고 루브 형님과 한 곡 추세 요. 루브 형님이 얼마나 춤을 잘 춘다고요. 루브 형님도 좋지요?" 나는 히노 선배가 루브 형의 아내가 된다면 정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 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에 그들의 커플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심했 다. 키옌 형도 히노 선배에게 마음이 있는 듯 했지만 이왕이면 다음 이 나 라의 국왕이 될 루브 형과 결혼해서 왕비가 되는 편이 더 그녀에게 더 나 을 거라는 생각에, 키옌 형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루브 형 쪽을 밀어주기 로 했던 것이다. 지금 이것도 루브, 히노 커플 이어주기의 일환이라고나 할까. 히노 선배는 아직까지도 조금 숫기가 없어서 내가 없으면 말을 잘 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으면 영원히 남자를 사귀지 못할지도 모 른다! 루브 형 역시 넋 놓고 히노 선배를 쳐다볼 정도로 그녀를 좋아하면 서도 지금까지 고백 한번 안 하는걸 보면 이런 면에서는 상당히 소극적인 면모를 가진 모양이다. 그러니 내가 나서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이루어 지지 못할 듯 해서 더더욱 이 일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루브 형에게 히노 선배의 손을 넘기고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왠지 약간 긴장한 듯한 루브 형이 너무 귀여워서 꽉 껴안아주고 싶었지만 자리가 자리이기에 나는 베시시 웃어주기만 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카류리드 전하.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내가 루브 형을 향해 손을 뱅뱅 흔들어 주고 있을 때 한 여자아이-사실 아 이는 아니다-가 말을 걸어왔다. "쟈스민...양. 꽤 오랜만이네...요? 물론 저와도 한 곡 추셔야죠." "훗훗. 여전하구나, 카류." 어색한 존댓말을 쓰는 내게 쟈스민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이고는 파 티장 중앙으로 이끌었다. 쟈스민도 참 많이도 컸다. 예전에 학교에서 옛날 이야기 더 해달라고 그렇게 졸졸 따라다니던 귀여운 꼬마 아이였는데 말이 다. 그러나 이렇게 마냥 행복하기만 한 나에게 한가지 심각한 고민이 있었으 니... 항상 이런 생각을 하며 사람들을 대하다 보니 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전 부 이성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가 만나는 여자친구들도 남자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이 파블료프 학교에서 항상 귀여워하 고 안아주고 하던 아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이 17, 18살의 성인이 되었 다고 해서 갑자기 성숙한 여인으로 생각하라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던 곳이 다. 이것은 눈부신 미인이 된 히노 선배를 대하는 내 태도만 보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전생의 나였다면 히노 선배를 보고 거의 눈이 뒤집어져서 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물론 매일같이 어머니나 누나들 을 보면서 여자 보는 눈이 많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떠나 어릴 때부터 그들을 돌봐오다시피 한 나의 눈에 그들은 여전히 '아이'로 비추어 지는 것이다. 성안에서 만나는 사람이 한정되어 있는 나에게 이건 정말 불행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만나는 여자들이 전부 어린애들로만 보이니 잘못하면 영원 히 연애를 못 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다! 즐거웠던 학교 생활에 이런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을 줄 누가 알았 겠는가! 자! 마인드 컨트롤!! 쟈스민은 여자다... 성숙한 여자다... 섹시한 여자다...!! "후훗, 왜 그렇게 바라보는 거죠? 카류리드 전하?" "응! 쟈스민이 너무 귀여워서!" "또오? 아름답다가 아니고 귀엽다예요?" 크흑! 역시 안돼. 내가 어릴 적에 안면이 없었던 여자를 찾아야 해. 그렇지 만 왕궁에 찾아오는 수도의 귀족이나 귀족 중에서는 그런 여자 찾기 힘들 텐데 걱정이구나. 그래, 신분을 초월한 사랑!! 그것뿐인가!! 이래저래 장난을 치면서 춤을 추고 있는 우리들 옆으로 루브 형과 히노 선 배가 지나쳐갔다. 크하! 저런걸 보고 바로 그림 같은 한 쌍이라고 하는 거다! 당당한 붉은 머리의 기사 님과 수줍은 금발 머리의 레이디, 한 폭의 그림이다, 그림!!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후후훗! 나는 내심 흐뭇해져서 그 둘을 향해 베시시 웃어 버렸다. 노래가 한 곡 끝나자마자 내가 있는 쪽으로 학교 친구들이 몰려왔다. "이야야~ 딜티, 세미르, 모두들! 여기 모여 있었네....군요." "푸후훗. 카류리드 전하껜 고상한 말투가 정말 어울리지 않는군요." "모두에게 스스럼없고 활기차다고 해주시죠. 딜트라엘." 나는 오랜만에 학교의 친구들과 모여 왁자지껄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얼 마 못 본 사이에 모두 많이 컸지만 그래도 속은 여전히 하나도 변하지 않 은 듯해서 정말 기뻤다. 어릴 때의 정신연령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람을 대할 때의 느낌이 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카류리드 전하. 여기에 계시는군요." "아? 프리란트 후작 님. 히노 양도 함께군요. 후훗... 이젠 다른 높으신 분 들과 이야기가 끝나셨나봐요." "카류리드 전하도 높으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하하. 대충 이야기 해보셨어요? 상업적 규제 건 말이에요." "슬쩍 말을 건네 보긴 했습니다만 여전히 상업에 대한 시선이 곱지 못해서 말입니다. 그들의 눈에 상업적 성공은 농사를 잘 짓는 것과는 달리, 다른 자들과의 경쟁에서 자신보다 못하는 자들을 짓밟고 올라서는 나쁜 것으로 만 비추어지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눈앞의 이익만을 보며 먼 곳을 내다볼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영지 내에 이런 저런 규제를 함으로서 얻는 직접 적인 세금만을 생각하고 있죠. 대부분의 나이 드신 노귀족 분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그냥 넘겨버리더군요." 가벼운 대화 중에 갑자기 고고한 대 귀족 프리란트 님이 -리아 후작- 등 장해서 상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친구들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하 나, 둘 자리를 비켜주었다. 나는 속으로 내심 피식 웃으며 프리란트 님에게 말했다. "다른 나라와의 특산품 무역에서 이익을 얻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장려하 면서, 평소 나라 안의 상업은 천하고 나쁜 직업이라고 생각하다니. 다른 자 들과의 상업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다가는 이 나라는 영원히 발전 할 수 없을 거예요. 솔직히 가까운 예로 기사들만 해도 서로 눈에 보 이지 않는 경쟁을 하며 실력을 키워가고 있지 않나요? 그들도 더 강해지려 면 자신보다 약한 다른 자를 밟고 올라서야 하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거예요. 카류리드 전하. 규제 철폐로 인해 세금이 줄어들기는커녕 부강해진 영주민들과 상인들로 인해 오히려 더 많은 수입 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우리 리아 영지를 통해 증명되고 있지 않나요. 그것을 본 다른 귀족들도 차차 상업을 보는 눈을 바꾸게 될 거예요." 히노 선배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정말 이 아르윈의 귀족 여성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정치나 경제에 해박했다. 하긴, 저 유식함이 철철 넘치 는 프리란트 님의 딸이니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이라는 간판을 제하더라도 이 정도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동안 히노 선배 일로 프리란트 님과 상당히 친해져서 그분이 왕궁에 들 리거나 하면 자주 여러 가지 대화를 하곤 했다. 프리란트 님은 이런 정치 경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몹시 즐거워하는 사람이었다. 이제는 나도 왕 궁 도서관에서 여러 가지 수준 높은 책을 많이 읽기도 했고 또 전생에 배 웠던 중세의 대략적인 역사를 되새기기도 하면서 조금쯤은 심각한 주제도 이야기 할만한 수준에 도달했기에 이렇게 프리란트 님과 주절주절 유식해 보이는 이야기도 곧잘 하게 된 것이다. "리아 후작 님. 이렇게 카류하고만 이야기하시다간 주위의 다른 분들이 섭 섭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프리란트 님과 한참 동안 숨이 찰 정도로 심오한 대화를 -솔직히 나에게만 -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다가왔다. 이제야 겨우 국왕의 마수(?) 에서 빠져 나온 모양이다. "아, 아스트라한 님. 카류 님과의 대화가 즐거워 제가 그만 깜빡하고 말았 군요. 다른 분들과는 이야기도 못해볼 뻔했군요. 후훗, 충고 감사합니다." "뭘요. 리아 후작 님께 즐겁고 알찬 파티 되셨으면 좋겠군요." "아스트라한 님께서도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니와 프리란트 님은 서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프리란트 님과 친해진 이후로는 어머니까지 자연스럽게 그 분과 친해져 있는 상태였 다. 어머니가 작게나마 저렇게 웃음을 띄우고 있는 것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럼 즐기십시오. 카류 님." 프리란트 님은 부드럽게 웃으며 다른 귀족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하 긴, 저런 대 귀족이 한군데만 붙어 있을 수는 없겠지. "카류야, 파티는 즐겁니?" "물론이죠. 너무 즐거워요. 친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와서 말이에요. 이 런 말하면 안되겠지만 매일 파티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후후, 그래. 오늘 같은 날도 드무니 여러 사람들과 마음껏 즐기거라. 아깝 게도 폐하 때문에 나는 또 가보아야 할 듯 하단다. 지금도 네 얼굴이나 볼 까해서 잠시 빠져 나온 것뿐이니..." "에휴, 오늘 같은 날엔 국...아버님도 어머니를 좀 풀어주셔도 좋을 텐데 말 예요." 어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귀 뒤쪽으로 쓸어 넘겨주며 살짝 웃었다. 국왕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문득 나의 눈에 반가운 사람들이 보였다. "오오? 아르 할아버지다! 앗! 하르몬 선배님까지?!" 나는 멀리서 다른 왕족과 대 귀족들과의 인사를 쭉 마친 다음 내게로 다가 오고 있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고 반갑게 외쳤다. 아르 할아버지는 평소처 럼 웃는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 있었구나, 카류. 그래,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구나. 이건 완전히 성인 이 다 됐는걸?" "이제 더 클 거예요, 아르 할.... 아르디예프 스승님. 하르몬 선배님까지 나 오셨군요?" "원래 이 녀석이 내 직속 시종 같은 녀석이다. 생명의 궁에 처음 온 너를 안내 한 것도 하르몬이 아니었느냐." "시...시종이라니... 너무하십니다... 아르디예프 스승님..." 하르몬 선배가 너무 한다는 듯한 표정을 장난스럽게 지었다. "헤헤.. 하르몬 선배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주 예전에 파블료프 학교의 아룬더스 축제에서 한번 만나고 난 뒤로는 처음이잖아요." "네, 그 동안 마나 수련에 너무 바빠서 나올 시간이 없었답니다, 카류리드 전하. 아! 그리고 유넨이 이번에 5서클 마법사가 된 것을 아십니까? 평민이 라 파티장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생명의 궁 밖으로 나왔으니 한번 가서 만 나보십시오." "우...우와~! 정말이요? 유넨 선배라면 지금이... 25살일텐데... 우와... 역시 천재는 다르군요!! 꼭 가서 만나봐야지!!" 이곳의 수식은 수학이 발달하지 못해서 생각하기도 끔찍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에 그냥 수식 푸는 법을 배우는 것만 해도 수십 년이 걸린다. 거기다 가 마나를 움직이는 법까지 수련해야 하니까 5서클 마법사는 최소 4, 50대 는 되어야 가능 한 경지이다. 또한, 마나를 움직일 줄 알아도 그 재능 상 조금밖에 움직이지 못한다거나 하면 솔직히 다 끝장이다. 마법은 마나 유 동 능력, 빠른 수식의 계산이 필수인 것이다. 아마 유넨 선배가 저렇게까지 기적적인 성취를 이룬 건 내가 몰래 가르쳐 준 몇 가지 토이렌 식 계산법 덕택일 것일 거다. 사실 유넨 선배가 마나 유동에 천재적이긴 해도, 수식 계산 능력은 평범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제 비 천재 노선도 포기했는데 내가 알고 있는 토이렌 의 수식을 숨길 이유도 없잖아. 나의 이 천재적 능력을 만천하에 공개할 때도 됐구나. 우훗훗훗... 언제 대박을 터뜨려 볼까나. 음흐흐흐. "대체 무엇이 그렇게 기쁘신 건가요? 유넨의 성취가 기쁜 것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그 표정은 왠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군요." 홀로 음흉하게 웃고 있는 나에게 하르몬 선배가 여전히 얄미운 어투로 말 했다. "유넨 선배의 일이 너무 기뻐 표정 관리를 조금 못했다기로소니 그렇게 말 씀하실 필요까지 있을까요?" "에구, 오랜만에 만나고도 여전히 투닥거리는구나. 아, 그리고 카류야. 예전 에 내가 준 그 돌멩이는 잘 간직하고 있느냐?" "음? 아, 이거요? 당연하지요. 근데 이거 돌멩이였나요? 보석이 아니고?" 나는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를 꺼내 보이며 아르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8 서클의 대마법사인 아르 할아버지가 준 것인 만큼 계속 몸에 지니고 있으 면 뭔가 좋은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이 작은 돌멩이를 목걸이로 만들어 목욕할 때까지도 빼지 않고 목에 걸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려면 어떠냐. 예쁘지 않니, 까만 색이면서도 파랗게 반짝이는 것이." "그냥 예쁘다고 주신 거였어요?"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아 준 것이다. 그렇다고 잃어버리기라도 했다간 그날로 넌 다 산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겠느냐?" "그...그야 잃어버릴 일은 없겠지만... 전 또 뭔가 대단한 게 아닐까 싶었지 요." "그야 대단하긴 하지만 너한텐 예쁜 돌멩이 이상의 쓸모는 없을 것이다. 솔직히 지금의 나도 별 쓸모가 없을 것 같기에 네게 선물한 것이란다. 어 차피 넌 항시 생명의 궁 근처에 머물러 있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 도로 뺏으면 되겠다고 생각했지." "도...도로 뺏어요?" 내게만은 항상 상냥한 분이었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르 할아버지는 역시 괴팍한 분이셨던 거야. "음, 이곳에 반가운 분들이 다 모여 계시는군요." "에?" 나는 갑자기 뒤에서 돌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서 내게 말을 건 남자 를 바라보았다. "으음? 드리크냐? 여전하구먼." "아앗! 드리크 경!! 오랜만이예요. 이번에도 또 큰공을 세우셨다면서요? 이 번엔 동남부의 카르틴 왕국과의 분쟁에서 깨끗하게 승리를 거두셨다고 들 었어요." "전장이 아닌 곳에서 이렇게 뵈니 정말 반갑습니다, 대마법사 아르디예프 님. 그리고 카류리드 전하. 큰공이라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그건 그저 소 소한 분쟁일 뿐이었지요. 어차피 카르틴 왕국에서 우리 나라를 침공할 명 분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카르틴이라면 이를 가는 우리 용맹한 병 사들 덕택이기도 했었지요." 드리크 경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있었던 구슬 줍기 사건 이 후로 내게 호감이 있었던 것 같았던 그는 내가 단검 던지기에 흥미를 보이 자마자 저렇게 자주 검술을 봐주곤 해서 요즘은 상당히 친해져 있었다. 드 리크 경도 평민 출신이었기에 여러 가지 잡 기술(?)을 많이 알고 있었고, 단검 던지기 기술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레이포드라 는 성 대신 드리크 경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여전히 겸손하시군요. 드리크 경. 아, 그리고 다시 동남부로 내려가시기 전에 단검 던지는 것 좀더 봐주시겠어요? 한꺼번에 여러 개 던진다거나 하 는 기술은 무리일까요? 내가 너무 멋 부리는 건가?" "후후. 이 파티가 끝나고 제가 한번 봐드리지요. 전하께서 괜찮으시다면 말 입니다." "저야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좋지요! 하하하. 저녁 수련을 할 힘을 남겨 놓으려면 지금부터 살살 놀아야겠네요?" "쯧쯔. 네가 마나만 느낄 수 있었어도 그런 난폭한 검술보다는 우아한 마 법을 마음껏 쓸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우리들의 대화를 듣다가 아르 할아버지가 말했다. 마법도 가만히 보면 별 로 안 우아한데 말이야. 우두커니 서서 마법서보고 중얼중얼 수식 계산하 는 게 뭐가 우아하단 말이야. 음침하게나 안보이면 참으로 다행이게. 하지 만 이런 말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가만히 있자. "포도주 잔을 갈아드릴까요?" 나는 포도주 잔을 잔뜩 들고 나에게 묻는 시종을 바라보고 반갑게 웃었다. "옷? 루이스구나. 힘들겠다. 나중에 보자. 힘내!" "후훗, 별것도 아닌 걸요. 원래 저는 튼튼해서... 그럼 즐기십시오." 루이스는 내게 싱긋 웃어 보이면서 말을 하려다가 주위의 아르 할아버지라 든지 레이포드 경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다른 귀족들의 시 중을 들러 빠르게 사라졌다. 원래는 시종의 신분으로 왕자에게 이런 식으 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말을 거는 것은 무례한 짓이다. 이곳의 베테랑(?)인 루이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지만 내가 너무 친근하게 말을 걸어서 그만 실 수한 모양이다. "...저 시종은?" "땅의 궁의 시종이에요. 땅의 궁에서 항시 만나던 얼굴이다 보니까 이렇게 친해졌지 뭐예요. 조금 전에 한 루이스의 실수는 그냥 봐주세요." "...이런 곳에 불려나올 정도면 그다지 지위가 있는 시종도 아닌 듯 한데 어떻게 이름까지 아시는지요" "그야 매일같이 부대끼는데 땅의 궁의 시종들 이름도 모를까봐요. 땅의 궁 에서 일하는 시종들의 이름정도는 전부 다 알고 있다고요. 제가 그렇게 머 리가 나빠 보였어요?"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드리크 경을 향해 말했다. 드리크 경은 나를 잠 시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에 연무장으로 나오십시오. 어두울 때 검을 던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전하." "넵. 알겠습니다. 드리크 경!" 나는 저쪽으로 사라지는 드리크 경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봐아... 카류..." "흐엣?" 드리크 경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언제 다가왔는지 에르가 형이 슬며시 내 귓가에 조용히 말을 걸었다. "에르가 형이 웬일로 내게 이렇게 가깝게 다가오는 거야? 드디어 나에 대 한 사랑을 깨달아 버린 거야? 하필 이런 곳에서?" "켁. 이런 놈의 어디가 좋다고 다들 그렇게 난리인지. 이 변태 같은 놈! 레 이포드 경에 대해 물어 보려고 했더니... 내가 바보였다 바보였어." "훗, 그렇게 느끼한 말투로 말 걸었으면서 변명은." "...이리오시죠. 저기서 친구 분들이 기다리고 있답니다. 카.류.리.드.전.하." 몹시 띠꺼운 표정을 지으며 에르가 형이 말투를 바꾸더니 내 이름을 딱딱 끊어 발음했다. 어지간히도 그렇게 내게 존대하는 게 싫은 모양이다. 하하. 귀여워라. 껴안아주고 싶지만 잠시만 참도록 하자. 파티가 끝난 후에 꽉꽉 안아주자고!! 아아, 즐거워라. 오늘은 정말 반가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구나. 우후후후 후. "뭘 그렇게 실실거리며 웃는 거야? 정말..." "아니, 지금 가~ 에르가 형." 나는 웃으면서 에르가 형을 따라 파티장으로 향했다. 나는 한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가 파티가 대충 끝날 무렵 나는 디트 경에게 좀 더 즐기라는 말을 해준 뒤 그를 떼 놓고 파티장 밖으로 잠시 나왔다. 디트 경을 두고 홀로 나온 것은 오랜만에 만 난 다른 기사들과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는 그를 방해하기가 싫었기 때문이 다. 그를 떼어놓고 나오는데 어머니부터 시작해서 디트 경 본인까지 불만 을 표했지만 왕궁파티인 만큼 주위의 경비가 철저하니 걱정할 거 없다고 내가 막무가내로 떼를 써서 겨우겨우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나는 파티장을 나오자마자 유넨 선배를 찾았다. 유넨 선배는 귀족이 아니 라 파티장에 들어올 수 없기에 그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일부러 그곳에서 나온 것이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기쁨을 참기가 힘들었다. 솔직히 유넨 선배님은 다른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보다 밖으로 자주 나오는 편이었다. 보통의 마법사들은 전부 귀족이기에 가족들이 보고 싶으면 그들 에게 직접 왕성 안으로 찾아오게 했지만 유넨 선배는 평민인지라 그것이 불가능했다. 유넨 선배는 가족들을 보고 싶을 때면 자신이 직접 밖으로 나 가야만 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상당히 자주 유넨 선배를 만날 수 있었 다. 그렇지만 자주라고는 해도 아르 할아버지나 하르몬 선배에 비해 그렇 다는 거지, 유넨 선배 역시 생명의 궁의 마법사였기 때문에 몇 달에 한번 꼴로 만나는 것에 불과했다. 이번에도 거의 세 달만에 만나는 것이다. "옷! 유넨 선배님!" "아, 카류 님." 유넨 선배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선 배의 저 상냥한 웃음은 변하지 않을 듯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아르디예프 님을 기다리고 계시지요? 그런데 5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카류 님 덕분입니다. 아니면 제가 이렇게 빠른 진전을 보일 수 있을 리가 없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넨 선배님은 황송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해 깊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솔직히 그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가끔씩 만날 때마다 가르 쳐 준 수식들이 유넨 선배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었을 지는 보지 않아 도 눈에 훤하니 말이다. 나는 생명의 궁을 나와서도 유넨 선배님을 만날 때마다 토이렌의 수식들을 가르쳐 주곤 했다. 유넨 선배에게는 이것이 그 어떤 것보다 큰 선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내가 수식을 가르쳐 주게 되면 유넨 선배님은 누구보다도 빠른 성취를 하게 될 테고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평민이라고 무시 받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욱 유넨 선배에게 가르쳐 주는 일에 열을 올렸다. 누가 뭐래도 나는 유 넨 선배를 굉장히 좋아하니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남에게 무시당하는 게 좋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유넨 선배님의 마나 유동능력이 없이는 불가능했겠 지요. 에헤헤. 유넨 선배님. 너무너무 반가워요!" 나는 방긋방긋 웃으며 유넨 선배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앗, 예전의 버릇이 나오는구나. 나도 이제는 꽤 몸집이 컸기 때문에 이런 모습은 상당히 보기 안 좋을 텐데. 자중하자. 자중... "아, 카류리드 전하? 그리고 유넨 아니야?" "에?" 우리들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나는 의아한 생각에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저렇게 친근하게 유넨 선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하르몬 선배를 빼고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갑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리고 유넨까지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정말 우연이군요. 잠시 숨을 돌리러 이렇게 파티장에서 나오던 중이었거든 요."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상당히 말끔하게 생긴 미남이었는데 꽤 눈 에 익은 청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아! 당신은 분명 세미르의 형님 되시는 후르부크 백작가의..." "세스케인이라고 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세미르의 형인 그와는 연령대가 달라 안면만 조금 트고 있는 정도로 그렇게 큰 친분을 가지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멀리서 언뜻 보는 것만으로도 세미르가 왜 그렇게 존경의 눈빛으로 바라보 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는 굉장한 사람이었다. 문무에 출중한 것은 기본이고, 척 보기만 해도 상큼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데다가 유넨 선 배만큼이나 좋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니 할말 다 한 셈이 아닌가. 에르가 형의 영향을 받았는지 상당히 장난스러운 세미르에 반해 침착하고 단정한 그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많은 귀족들에게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 다. 파티장 같은데서 사람이 좀 많이 모여 있다고 생각되면 꼭 그가 중심 에 있는 것이다. "정말 반가워요! 그런데 세스케인 님의 행동을 보니 왠지 유넨 선배와 굉 장히 친한 듯이 보이는데 저의 착각인가요? 저야 어릴 때 생명의 궁에 들 어갔기 때문에 이렇게 친하지만 말이에요." "파블료프 왕립 학교의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동창생이랍니다. 그와는 여러 가지로 인연이 많았지요. 그렇지? 유넨?" "아... 네. 정말 반갑습니다. 세스케인 님." 세스케인 님은 유넨 선배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음 지었다. 나는 그런 세스 케인 님의 행동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귀족들의 뇌리에 평민이란 당연히 비천한 존재라고 각인 되어 있기 때문에 못살게 굴기까지는 않더라도 '비 천한 평민~~!!' 이라는 광선을 쏘아보내며 가까이 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 다. 그가 성격이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는 걸. 세스케인 님은 굉장히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귀족인 모양이다. "세미르가 얼마나 카류리드 전하의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답니다. 전하께서 그만큼 대단한 분이라는 뜻이겠지요." "대단하긴요. 그저 함께 있으면 서로 즐겁기 때문에 저절로 친해진 거죠. 저도 세미르와 함께 하면 얼마나 즐거운데요. 세미르도 에르가 형처럼 얼 마나 장난이 심한지... 앗, 이제는 아닌가? 하하하. 아시죠? 에스문드 가의 에르가 형 말이에요." "물론 알고 말고요. 그런 명문가를 모른다면 귀족이라 할 수 없지요. 게다 가 에르가라면 무가의 자손답게 강한 검술로 더더욱 유명하니까요. 후후. 게다가 그와는 어릴 때부터 인연도 많았으니 말입니다." 그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는 것을 보고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 다. "에르가 형을 잘 아세요?" "세미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에르가와 딜티, 그리고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몰려다니며 놀곤 했답니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아버지가 수도에 올라올 때마다 할 일이 없으면서도 괜히 이곳까지 졸졸 따라 올라오곤 했었는데, 어쩌다가 그들이 수도에 있는 저의 집 별장에서 모이게 되었을 때 비슷한 나이들끼리 눈이 맞아 의기투합을 하게 된 것이죠. 제가 파블료프 학교를 다니느라 마침 그 별장에 머물고 있을 때였는데, 그들의 장난에 얼마나 많 이 당했는지 어린아이들이고 뭐고 다 잊고 그냥 데려다가 때려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을 정도였답니다. 그 때 그 기억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겠 군요." "아하하! 어릴 때의 세미르들이라, 왠지 세스케인 님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걸요?" 저 세스케인 님이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장난을 쳤다니, 정말 에르가 형과 세미르들은 어릴 때부터 유명했구나. "최근 카류 전하께서 유쾌한 분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 한번 제대로 대화를 해보고 싶었답니다. 마침 유넨도 함께 있는데 셋이 함께 잠시 이야기라도 나누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그냥 두시고 두 분끼리 말씀 나누십시오. 어디까지나 저는 평민이니 까요. 성의 아무 곳이나 나다닐 수는 없답니다." 유넨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를 비켜주려 했다. 그럴 필요는 전혀 없는 데 말이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세스케인 님도 평민 어쩌고 하는 덴 신경 쓰지 않으니까. "그런 소리하지 말아요. 유넨 선배. 제가 그 누구도 평민이라는 이유로 유 넨 선배를 막도록 할 수 없게 할거예요. 그러니 모두 같이 가요." "그러나..." 나는 머뭇거리는 유넨 선배의 손을 꼭 쥐고 잡아끌었다. 그제야 유넨 선배 는 내 권유에 거절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나를 따랐다. "저도 세미르의 형님이신 세스케인 님과 친해지고 싶었어요. 아니, 세미르 는 저의 가장 친한 친구니까 후르부크 가의 모든 사람들이랑 전부 친해지 고 싶어요." 나는 세스케인 님을 보고 빙긋 웃었다. 왠지 그와의 대화가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세미르의 친형인 사실로 원래 기본 점수를 따고 들어가고 있었 던 데다가 유넨 선배에게 친근하게 대해주는 모습은 호감도 레벨을 급상승 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것을 다 제외하고서라도 그는 정 말 대하기 좋은 사람이었다. 과연 인간군집의 암묵적 리더(?) 같은 건 아무 나 되는 게 아니라니깐. 우리들은 정원의 따뜻한 햇빛이 드는 곳에 있는 의자에 자리잡고 앉아 거 의 해가 지려할 때까지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자주 이야기한 적도 없는 사람이건만 세스케인 님은 정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나갔고 나는 거 의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그와의 대화를 즐겼다. 그 정도로 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보고 카리스마라고 한다지? 크흑!! 세상엔 이렇게 대단한 사람도 존재하는 구나. 역시 신이 공 평하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앗! 저 가봐야 해요! 저녁에 드리크 경에게 단검술을 배우기로 했는데 옷 을 갈아 입어야하거든요. 이런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옷으로 검술연습은 무리니까요." "...레이포드 경에게 말입니까?" "맞아요, 드리크 경이 여러 가지 기술을 알아서 그분께 배우는 거예요. 단 검 던지는 기술 같은 건 성내의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거든요?" "후후.. 역시 카류리드 님은 많은 분들께 사랑 받으시는군요." 헉!! 저런 닭살스러운 말을!! "에이... 너무하세요. 남자한테 사랑 받아도 하나도 안 기쁘답니다. 세스케 인 님." 나는 농담을 건네며 먼저 일어섰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 둘 일어나 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 정도 시간이면 유넨 선배도 세스케인 님도 돌아가 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솔직히 저를 좋아해 준다면 기쁠 수밖에 없겠지요. 하하하. 세스케 인 님,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유넨 선배님. 한동안 만나지 못하겠군요. 정말 아쉬워요." "저도 그렇습니다. 카류 님." "그럼 다음에 또 봐요." 해가 왕성 안을 붉게 물들여가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서로 아쉬운 작별 인 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그 후, 나는 땅의 궁으로 돌아가서 빠르게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단검을 대충 허리에 찬 다음 연무장을 향해 마구 뛰었다. "...어? 어머니?" 늦지 않기 위해 부리나케 뛰어가던 나는 연무장이 있는 방향에서 오고 있 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보통 이 나라의 여성들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한은 연무장 같은 곳엔 발도 들이지 않기에 나는 의아함에 어머니에게 다 가갔다. "아, 카류구나." "예. 그런데 어째 그런 곳에서 오세요? 그쪽은 연무장이잖아요." "아, 실은 레이포드 경을 만나고 왔단다. 그 분께 널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고 왔단다." "예? 일부러 그런 곳까지 찾아가서요?" 갑자기 이런 시간에 저런 곳에서 감사의 인사를 해야할 이유라도 있나? 내 가 고개를 갸웃하자 어머니는 한동안 나를 지긋이 보다가 다시 말을 이었 다. "......그분께서 너에게 검술을 가르쳐주고 계시지 않니. 파티 때문에 피곤하 실텐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너를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셨다기에 감사의 인 사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거란다." "아아, 그러셨군요. 감사합니다. 어머니!" 나는 방긋방긋 어머니에게 웃어 보였다. 동굴사건이 있은 후부터 어머니는 내가 이렇게 귀여운 척하면서 방긋방긋 웃을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 곤 했다. 그래서 나는 심심할 때마다 이것을 써먹고 있었던 것이다. 다 큰 주제에 그런걸 좋아하냐고? 어머니가 하도 썰렁한 분이셔서 이런 스 킨쉽은 정말 드물단 말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느껴보고자 하는 나의 마음 을 몰라주다니. 어머니는 살짝 웃으시면서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빛의 궁으로 가셨 다. 왕비로 책봉된 후로는 국왕이 아주 놔주지를 않고 있어 현재 나의 아 버지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크흑, 아들이 아버지를 질투하 다니. 이것도 다 환생의 부작용이다. "드리크 겨엉~!" 연무장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그에게로 달려갔다. 어둑어둑한 연무장 가 운데 서있는 드리크 경은 정말 멋있었다. 대기사라 그런지 갑옷 입고 가만 히 서있기만 해도 폼이 절로 나는구나. "카류 님. 일찍 오셨군요." "에이. 드리크 경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계셨잖아요. 일찍 왔다고 하긴 힘 들지요. 하하." "제가 일찍 나와 있었던 것이랍니다. 이 곳을 조용히 혼자 둘러보고 싶어 서 말이죠." 드리크 경은 주위를 죽 둘러보며 말했다. 저것이 바로 우수에 젖은 기사인 가! 크으, 멋지다!! 디트 경도 멋지지만 드리크 경에겐 색다른 중후한 매력 이 있단 말씀이야. 나도 저렇게 늙는다면 정말 좋겠지만 지금 꼴을 봐서 그것은 무리인 것 같다. 나는 저렇게까지 근육질은 아니니까. "자, 일단 한번 저쪽을 목표로 여기서 던져보시겠습니까. 그 동안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알고 싶군요." "넵! 저도 그 동안 어느 정도 열심히 연습했다고요. 사실 제가 궁에 처박혀 할 일이 뭐 있겠어요?" 나는 장난을 치면서 단검을 뽑아들었다. 나의 말에 드리크 경이 싱긋 웃음 지었다. 타악. "명중~~!! 저도 꽤 하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움직이는 물체와 움직이지 않는 물체는 다르답니다. 특 히 살아있는 물체는 어디를 어떻게 던지는가에 따라 상처의 정도가 달라지 지요. 그런 것을 잘 알아두실 필요가 있답니다. 단검술은 그런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아무 의미가 없지요." "목이나 머리를 겨냥하는 게 확실하겠지요?" "물론 그렇습니다만, 죽이지 않고 제압하기 위해 여러 부위에 대해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죽이지 않고 상처만 낸다? 동굴에 갇혔을 때, 어스웜 퀸의 칼에 -실은 팔 이지만- 어깨를 조금(?) 베었을 뿐인데도 정말 끔찍하게 고통스럽지 않았 던가. 나에게 덤비는 사람이라곤 해도 그런 아픔을 가르쳐 주고 싶은 생각 은 없는데 말이야. 역시 목이랑 머리를 겨냥하자. 그게 상대방에게도 가장 좋잖아? "게다가 싸움에서는 머리와 목을 갑옷으로 방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단 검만으로는 이기기 힘든 일이 많이 발생하지요. 그러니 인체의 다른 부분 에 대한 연구는 필수입니다." 나와 드리크 경 단 둘밖에 없다고 생각한 이 연무장에서 갑자기 드리크 경 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자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약간 놀라버렸다. 벌렁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돌렸을 때 나 는 의외의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엣, 트로이 후작님? 이곳까지 어쩐 일이세요?" "건강하셨습니까, 트로이 후작님." 트로이 후작 님이 파티가 막 끝난 이런 시간에 왜 연무장에 찾아왔는지 정 말 궁금했지만 일단은 드리크 경을 따라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조금 전, 이곳 연무장 근처를 지나는 아스트라한 님을 보았답니다. 그 분 을 보노라니 저도 갑자기 이곳 연무장에 들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문득 연무장에서 검술 연습을 하던 옛 생각도 나는지라 이곳으로 와보았더 니 카류리드 전하와 드리크 경이 계시는군요." "트로이 후작 님도 여기서 검술 연습을 하신 적이 있으세요?" "저도 한때는 어느 정도 검술을 배웠답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래서 왕궁에 들릴 때마다 이곳에서 다른 기사들과 어울려 검술 연습을 하곤 했었지요." "하긴, 트로이 후작가도 남부럽지 않은 유명한 무가이니 당연한 일이겠군 요. 딜티도 에르가 형만큼 굉장히 검술에 강하고 전술 같은데 능하던데 트 로이 후작 님을 닮아서 그런가 봐요." 나의 말을 듣던 트로이 후작 님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여전히 딜티와 상당히 친분이 깊으신 모양이더군요." "하하, 가장 친한 친구니까요. 영원히 그와 친한 친구로 지내고 싶답니다."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트로이 후작은 짙은 웃음을 띄웠다. 그 모습을 보고 나도 얼떨결에 덩달아 빙긋 웃었다. "그런데 레이포드 경은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비록 카르틴 왕국과의 일전 이 대충 마무리되었다고는 해도 완전히 안정된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내일 당장 동남부의 전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렇게 일부러 시간을 내어 카류리드 전하의 검술을 봐주시는 것을 보니 전 하에 대한 애정이 보통 깊은 것이 아닌 모양이군요." "웃, 드리크 경이 단검술이 강하시다 길래 제가 가르쳐 달라고 떼썼거든요. 왕궁내의 다른 분들은 단검술을 쓰실 줄 아는 분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랬 던 건데... 그러고 보면 제가 눈치 없이 무리한 부탁을 해버린 해버렸나 보 네요. 죄송해요. 드리크 경. 피곤하시죠?" "저는 괜찮습니다. 카류 님." 내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하자 드리크 경은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걸 보니 내가 정말 눈치 없게 굴긴 눈치 없게 굴었 나 보다. "에...에... 하하. 그러면 드리크 경은 어서 가서 쉬세요. 신체 부위에 관한 것은 제가 책을 찾아봐도 되거든요? 다음에 왕궁에 오시면 그때 다음 내용 을 가르쳐 주세요." "아니, 그렇게 하실 필요 있으십니까. 이미 여기까지 나오셨는데 그냥 배우 시지 않으시고 도로 들어가시겠다니요?" "아니에요. 제가 너무 눈치가 없었어요. 트로이 후작님 덕분에 깨달았습니 다. 감사드립니다. 트로이 후작님. 그리고 드리크 경. 어서 들어가서 쉬세 요. 정말 죄송합니다." "...알겠습니다. 카류 님. 그러면 전 이만..." 드리크 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빠른 발걸음으로 연무 장을 벗어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정말 내게 검술을 가르쳐 줄만한 기분 이 아니었나보다. 피곤한데도 왕자인 나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이 허락한 모양이다. 혹시 드리크 경에게 미운 털이 박혀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 러고 보면 조금 전에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얼굴이 완전히 굳어있지 않았던 가. 허헉!! 정말 나 완전히 미움 받아 버린 건가? 서...설마 드리크 경이 그 렇게 쩨쩨할 리가 있겠어. 아닐 거야. 아닐 거라고... 하지만 솔직히 나 같 아도 짜증나겠다. 어흐흑! 나 바보 아냐? "카류리드 님은 남아서 연습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트로이 후작의 말에 나는 겨우 잡생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아...아니요. 도서관에 가서 책이나 찾아보지요. 충고 감사했습니다. 트로이 후작님. 천천히 구경하세요. 제가 나가고 나면 조용할 테니까 과거를 회상 하시는데 더 좋으실 거예요. 그럼 저는 이만." "무리를 하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가기보다는 쉬엄 쉬엄 정도에 맞춰 가는 편이 어떨까 싶군요." 트로이 후작은 연무장을 빠져나가려는 나에게 조금 전처럼 진한 웃음을 띄 우며 한마디 덧붙였다. "충고 감사합니다. 트로이 후작 님. 그렇지만 열심히 하는 편이 더 성과가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요. 그렇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답니다. 이 정도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약하지는 않거든요." 나는 그의 충고에 감사하며 이번에도 덩달아 빙긋 웃었다. 트로이 후작의 등뒤로 저물어 가는 태양이 연무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아름다워요 세상이 온통 붉은 빛이네요." "그렇군요. 카류리드 전하. 곧 다가올 저녁 하늘보다는 이 편이 훨씬 아름 답지 않습니까." 나는 저녁 석양의 아름다움에 혼이 빠져 트로이 후작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고 그 붉은 장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Part. 23 - 왕위 파티가 끝난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보통 왕궁파티가 끝나면 모두들 바로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기 마련이지만 이번에는 에르가 형, 히노 선배 등의 친구들과 그 외에도 많은 귀족들이 한동안 수도와 성안에서 머물었다. 친 구들이야 나와 헤어지기가 아쉬워서라고 친다지만 다른 귀족들은 왜 저렇 게 바글바글 남아있는 것인지. 그들이 수도에서 무슨 할 일이 그렇게도 많 은 것인지 약간 궁금했지만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내가 굳이 그런 정 사에 일일이 신경을 써야할 의무는 없었기에 그냥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 다. 그리고 솔직히 그런 곳에 관심을 쏟을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랜 만에 아이들과 함께 할 기회가 생겼는데 그런 재미도 없는 곳에 관심을 쏟 을 이유가 없지 않는가! 나는 이때를 기회로 삼아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만큼 그 동안 쌓인 분을 푼다는 기분으로 친구들을 마구 귀여워해 주었다. -안아주었다는 말이랑 비슷하다- 다들 내가 원래 이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별말이 없었지만 역시 히노 선배를 껴안는데 있어서는 남녀노소 를 불문하고 참으로 말이 많았다. 그렇게 한동안 모두와 재미있게 놀긴 했지만 사실상 대귀족인 그들이 별다 른 목적도 없이 자신의 영지에서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기 에, 그들은 곧 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일주일 후엔 모두들 돌아 가 버리고 나 혼자만 덩그라니 성에 남게 되었다. 물론 형제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성안에서 북적북적 거리며 돌아다니던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니 왠 지 휑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렇게 일주일 새에 갑자기 놀거리(?)가 몽땅 사라지니 왠지 맥이 탁 풀려버렸다. 나는 풀어진 마음을 다잡고 심심풀이나 할 겸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그리 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전부터 읽던 책을 뽑아들고 창가 곁에 놓여진 탁자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 책을 펼쳤다. "......푸우." 그러나 솔직히 그렇게 죽자고 놀았는데 갑자기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있 겠는가. 내가 아무리 책 읽는 것이 거의 취미처럼 되었다지만 그건 도저히 무리였다. 그래서 하릴없이 창가에서 비쳐드는 따뜻한 초여름 햇살이나 쪼 이면서 뒹굴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아아, 이곳은 정말 할 일이 없단 말이야. 아이들과 놀고 싶어라. 신선하고 깜찍한 꼬맹이들이 어디 없을까. "그렇게 매일 많은 분들을 만나시더니 이젠 지루하신 모양이군요. 카류 님." "응... 누구 나랑 놀아줄 사람 없을까. 디트 경, 나랑 놀아 주라, 응?" "후훗." 디트 경은 탁자에 엎드린 채로 뭉그적거리고 있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살짝 웃었다. 어릴 때 버릇이 남아서 나는 지금까지도 디트 경 에게 이런 어리광을 피우고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스스로의 외모를 이용하 여 귀여운척하며 마구 애교를 부리고 다녔지 않은가. 그 경험이 한 10여 년 정도 축적되다 보니 이젠 상당히 컸음에도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디트 경 같은 사람들을 대할 때는 저절로 이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세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던데 참 걱정이다. 이젠 이런 짓도 그만 둬야 할텐 데 말이다. 나라도 이렇게 다 큰 남자가 어리광을 피우는걸 본다면 정말 역겨울 테니까. "아스트라한 님 드십니다." "어? 어머니가?" 나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졌다. 나의 방에 찾아오는 일은 웬만해서는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무슨 큰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오셨습니까, 어머니." "카류야 책을 읽고 있었니?" "아니요. 그다지..." "여전히 부지런하구나. 카류. 그냥 앉아 계속 책을 읽으려무나. 그리고 디 트리온 경. 밖에서 기다려주겠나?" 어머니의 말에 디트 경은 허리를 숙여 깍듯이 인사하고 밖으로 나가는 것 을 보며 나는 약간 의아해졌다. 동굴사건 이후로 나의 안위에 대하여 무척 걱정하시던 어머니가 내린 조치중의 하나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디트 경 이 내 주변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잠시라도 내가 홀로 있는 것을 보게되면 어머니는 디트 경을 심하게 책망했다. 만약 나의 강력한 반 발이 없었다면 디트 경은 파티 때에도 내 옆에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디트 경을 방밖으로 보낸 것에 약간 의아한 마음이 생겼지만 이제껏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자 어머니의 불안도 많이 풀어져서 그런 것이라 쉽 게 생각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말씀대로 책을 읽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사 실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하지만 진짜 책 읽고 있었 던 것도 아닌데 어머니가 부지런하다고 칭찬해주시자 양심이 찔려 지금부 터라도 읽어보자는 생각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풀어질 대로 풀어진 나 의 마음을 다시 붙들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책 읽는 분위기에서 어떻게든 탈피해보기 위해 살짝 어머니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나 창 가에 기대어 서서 너무나 기특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에 눌려 나는 다시 책으로 눈을 놀릴 수밖에 없었다. "카류야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슨 책이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무렵 어머니가 내가 읽는 책에 대해 질문을 던졌 다. 더 이상 책을 읽는 척 하기도 힘들어진 나는 이때다 싶어 얼른 책에서 눈을 때고 어머니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선왕들의 일대기예요." "어느 분의 일대기인데?"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이런 소소한 일에 대해 잘 묻지 않는 분이었는데 오늘 은 유달리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관심에 상당히 기분이 좋아서 성의껏 대답을 해드렸다. "건국왕 헬켄스 님이요. 제일 맘에 드는 분이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 셨으면서도 항상 겸손하셨고 국민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셨죠. 특히 무척이 나 힘들게 사는 국민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보장된 지위와 꿈을 포기하고 일어서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후후, 많이 컸구나. 우리 카류." "요즘도 계속 크고 있어요. 이제 곧 저의 17살 성인식이 있을 테니까 이 정도는 커야지요." 어머니의 눈빛에는 나를 대견하게 여기는 기색이 가득했다. 쑥스러워진 나 는 말뜻을 이해 못하는 척하며 다른 말로 대답했다. 특히 우리 카류라는 말 때문에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책으로 얼굴을 돌리고 책에 신경을 집중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왜 이렇게 상냥하신 걸까. 솔직히 이런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일부러 깜찍한 척하며 웃어 보이는 둥 무진 노력을 기울인 적도 있었지만, 예기치도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이런 모습을 대하니까 너무 쑥 스럽구나. "카류는 성인이 되어서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국민들을 사랑해야 한다." "네." "헬켄스 님처럼 이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 고." "네." "어떤 힘든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냉정하고 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 "네." "그래, 카류는 분명 헬켄스 님처럼 훌륭한 아르윈의 왕이 되겠지?" "네." 팔락. "......." 나는 책을 한 장 넘기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뭔가 약간 이상한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 이 아르윈 왕국의 왕이 되어라. 일단 내가 리아 후작과 함께 여러 귀족들에게 은연 중의 가벼운 언질을 해두었다. 물론 이제 막 말을 꺼내본 것뿐이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니라 아직 제대로 된 세 력을 전혀 형성되지 않았지만, 조금만 세력이 늘어도 대부분의 귀족들은 금방 너를 지지할 분위기더구나. 아마 대충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이겠지."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입을 쩍 벌리고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머 니는 내 표정을 보면서도 그대로 그것을 무시하고 이야기를 계속해나갔다. "레이포드 경은 확실히 너의 편을 들어주시겠다고 하셨단다. 물론 확답을 들은 것이 아니지만 너를 돕는 일에 있어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는 말은 들을 수 있었지. 하긴, 극도로 귀족을 싫어하는 레이포드 경이 너 에게 직접 검술을 가르쳐 줄 정도니까 당연한 결과구나." "레...레이포드 경께서...?" 갑자기 연무장 쪽에서 걸어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왜 그런 곳에 서 나오는 가에 대해 의문을 품는 내게 잠시 동안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 던 어머니.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의 어머니가 무슨 일을 하려하고 있는지 자각하 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고개를 휘저어 사고를 멈추려 한 것이다. "일단은 너에게 호감이 깊고 믿을 수 있는 자들에게만 간접적으로 의사를 살짝 비추었을 뿐 다른 특별한 일을 벌인 것은 없단다. 파티장에서 있었던 너의 행동만으로도 수많은 귀족들에게 너의 위치를 충분히 상기시켜줄 수 있었으니 내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고 할까. 파티가 끝나고 나서도 왕궁 에 남아있는 여러 귀족들을 보니 현 상태에 대해 상당한 위화감을 느낀 것 같더구나."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파티장에서 친한 친구들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다. 파티가 끝나고도 왕궁에 남아있었던 귀족들은 그 저 나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서 조금이나마 더 놀기 위한 친구들로 인해 그렇게 된 것뿐이다. 다른 귀족들도 저마다 할 일이 있어서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래, 그 많은 대 귀족들과 고위귀족 자제들이 루블로프가 아닌 네 곁으 로 모였고, 이 나라의 큰 기둥이라 할 수 있는 레이포드 경과 대마법사 아 르디예프 님이 너에게 깊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였으니 대세가 어느 쪽에 있는지는 그들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몇몇 눈치 빠 른 귀족들이라면 어느 편에 서는 것이 유리할지 이미 깨달았을 테니 얼마 안 있으면 좋은 대답이 오겠지." 나는 멍하니 어머니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네 휘하에 두고 그들의 세력으로 루블로프를 태자에서 폐하고 너 를 다시 태자자리에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면 그 멍청하고 무능한 국왕 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왕위는 루블로프가 아닌 바로 네가 잇게 되는 것이야." "......" 정말 너무나도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할 수 없었다. 왕위라니 도대체 내가 왜 그 자리에 앉는단 말인가. 더군다나 왕위가 능력이 있다고 그렇게 쉽게 얻을 수 있는 자리인가?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자리다. 이 미 루브 형이 태자로 임명되었고 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 겼을 것이다. 그런데 루브 형을 태자의 자리에서 폐위시키려 하면 그 귀족 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더군다나 난 제 6왕자다. 내 위로 많은 형제들이 있 고, 더군다나 난 원래 왕비가 아닌 제2후궁의 자식으로 정통성에도 많은 문제가 있다. 아마 많은 고지식한 늙은 귀족들이 반대하고 나설 것이 분명 하다. "지금 이야긴 못 들었던 것으로 하지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경솔하신 분이셨군요." 나는 냉랭하게 말하며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을 결코 믿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농담이라고 말해주기를 절실히 바랬다. 그러나 어머니는 결코 농담 따윌 하는 분이 아니란 걸 난 너무나 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급했구나. 네가 완전히 성인식을 치르고 난 후부터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 네가 직접 이 일을 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네가 주체니까 말이다. 내가 조급한 마음에 서 두르고 말았구나. 그러나 이일은 그렇게 시간을 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 니란다. 게다가 이미 그들도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을 테 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단다." "그 일?"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설마 벌써 무슨 일을 벌이셨단 말인가? "왕위에 오르는데는 너의 정통성 문제가 가장 큰 약점이었으니까. 고지식 한 귀족들은 너를 왕으로 밀어주고 싶어도 제6왕자라는 정통성 문제로 손 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어머니는 한 템포를 끊고 숨을 들이킨 후 말했다. "....그래서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제거했다. 최소한 너의 어머니인 내가 제2 후궁이 아닌 왕비가 된다면 제6왕자이더라도 어느 정도 너의 정통성 문제 가 가벼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견제하는 자들은 분명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어머니가 그녀들을 죽였다고? 나는 내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닌가 하고 스스로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입에서 나온 그 말이 진실임을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 다. 조금 전부터 몇 번이고 귀의 탓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의 귀는 확실히 그 성능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쌀쌀맞은 기가 있는 어머니를 마치 친언니처럼 상냥히 대하던 그녀들 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그녀들의 사랑과 관심을 배신하고 피로 갚 아버린 어머니에게 나는 오한을 느꼈다. 그간 나에게 조금씩 보여준 어머 니의 사랑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어 갑자기 분노가 일었다. 어머니의 행동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솟았다. 어떻 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제까지 나와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그 모든 것은 위선이었단 말인가! 나는 복받치는 화를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에게 경멸의 말을 퍼 부어 주기 위해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정작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한 나는 입 밖으로 그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아무 렇지 않은 척하면서도 평소와는 다르게 끝없이 흔들리는 어머니의 눈빛 때 문이었다. 어머니의 표정을 보노라니 그녀도 분명 좋아서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죽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몰라도 지금 어머니 는 그녀들을 죽인 일을 마음 속 깊이 괴로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갑자기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혼란스러워졌다. 어머니의 행동을 국왕과 형제들에게 알려야할까. 하지만 그것이 알려진다면 어머니는 죽음 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한나라의 왕비와 후궁을 죽였으니 너무나 당연한 일 인 것이다. 차라리 어머니가 잔혹한 얼굴로 그녀들의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 고 있다면 나도 바로 이 일을 밝혀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어머니의 얼굴은 너무나도 슬퍼 보였다. 끝없이 그녀들의 죽음을 후회하는 듯한 그 런 느낌이다. 전생의 나였다면 그녀가 후회를 하고 있든 하고 있지 않든 살인을 한 어머 니를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살인이라는 것은 결코 그렇게 간단한 일 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이 얼마나 두렵고 절망스러운 일인데 그것을 후 회를 한다고 쉽게 용서해 줄 수가 있단 말인가! 나의 친인을 죽인 그녀를 어떻게 그렇게 간단히 용서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죽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이 어디선가 다 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예전과는 살인이라는 그 죄의 무게가 차원이 다를 만큼 가벼워졌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렇게 후회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그 죗값을 치르게 해야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그 죗값을 치르게 하면 나는 다시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더더욱 어머니를 용서해주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그러나 살인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용서해도 되는 일일까?! 어머니의 행 동으로 인해 절망하고 괴로워했을 나의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이런 생각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또 한번 환생으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환생이 내게서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에 살인을 한 어머니를 쉽게 용서해버 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아무 말 없이, 홀로 혼란 속에 빠져 있는 나에게 어머니가 허탈한 듯 말했 다.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그녀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 다." "하아?" 나는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말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약간 언성을 높였 다. 갑자기 저 말이 왜 튀어나오는 거야? "모두에게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만은 감출 수 없단다. 네가 자신 의 총명함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멀리 앞을 내다본다는 사 실을." "그런 것 때문에?" 어머니의 말을 듣자니 너무나 황당했다. 그래, 내가 스스로의 지식을 숨기 고 있다는 것은 아르디예프 님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언제나 나와 가까 이 에서 생활했던 어머니이니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것도 없지. 하지만 그 게 어쨌다는 건데? 머리가 좀 좋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뭐든지 알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천리안이라도 돼? 어머니가 그녀들을 죽였는지 어 쨌는지 어떻게 안단 말이야? "그래,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녀들이 죽었을 때. 네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너의 표정은, 눈동자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어. 그 소식에 당황하며 약간의 죄책 감만을 느끼는 듯하더구나. 내 말이 틀렸니?" "...!? 그...그걸 어...어떻게...?!" 나는 자신도 모르게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정말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듯 했다. 어머니가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에 대해 갑자기 머릿 속이 새하애졌다. 침대에 얼굴을 묻어가며 그토록 이나 감추려했던, 내가 그녀들의 죽음에 실은 상당히 담담해 했다는 사실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유가 그녀들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고 묵인했기 때문이 아닌, 그녀들이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말 이다. "하아... 역시... 그랬던 거구나. 나는 너의 어머니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단다. 옛날부터 너의 행동을 모두 보아 왔고 그리고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은 나의 행동이 들통났다 는데 혼란스러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 는 나를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훗훗...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아아.. 이것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너라면 알고 있었겠지." 나는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더 이상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두려웠다. "사실 내가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죽였다면 그렇게 어설프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고 내 주위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건 국왕뿐이었지. 그래서 국왕에게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 일을 계획한 것이지. 그러나 그 멍청한 국왕은 무능하기만 해서 여기저기 너무 많은 허점을 만들었어." "서...설마 아버님도 이일에?" "후후, 국왕이 한 짓이다. 국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우습지 않은 상황 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니 왕족이 다니는 수풀에서 그런 짐승이 튀어나와? 게다가 그 주위의 목숨을 바쳐 호위해야 할 그 많은 친위기사들이 그녀들 이 낙마할 때까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고? 이 나라 제일의 기사들이? 그걸 믿는 바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하하하! 그 멍청한 국왕 이외에는 말이다!!" 눈앞이 막막해졌다.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죽음에는 어머니뿐만이 아 니라 아버지도 연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어머니는 왕비에 책봉하면서 너무나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 녀들이 얼마나 상냥한 사람이었는데, 그 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마구 죽 일 수 있단 말인가. 그녀들을 죽이고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단 말 인가?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약간 흥분한 듯 했다. 언제나 차갑고 냉정하 여 흔들림 없던 어머니의 검푸른 눈동자에 아주 약간 물기가 어렸다고 느 꼈다. 그러나 금방 평소의 얼굴로 창가로 얼굴을 돌리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네가 루블로프를, 그리고 모든 형제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결코 그들과 대립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다." 나는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걸 안다면 왜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죽 였단 말인가. 왜 나에게 그렇게 루브 형과 대립하라고 말하는 것인가. 왜 반역 같은 걸 생각했느냐고! "그러나 명심해라. 네가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네가 원 하지 않아도 이미 너의 존재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의 한 명으 로서 루블로프의 경쟁상대로 인식되어지고 있단다. 네 그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제6왕자로 태어났을 때부터, 루블로프보다 뛰어난 인물로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건 정해진 길이었던 거란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제1왕자파 귀족들은 너에게 위협을 느끼고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동굴사건 같은 것 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다." 어머니의 말은 나에게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 일로도 이미 내 머리는 포화 상태인데 거기에 이미 내가 왕위 계승자로 서 귀족들의 관심사라고? 게다가 나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나를 죽일 거라 고? 왕위에 오른 다는 것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 자리는 너무나 당연히 루브 형의 것이었다. 내가 이제껏 돌봐온 착하고 성실한 나의 루브 형이 앉을 자리였던 것이다. 내가 왜 그런 자리를 탐낸단 말인가. 사실 리아 영지에서 들었던 나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그 제1왕자파라는 것 도 내게는 제대로 와 닿지 않았다. 그만큼 왕위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무런 생각도 없는 이상 저희들끼리 뭐라고 째끄럭거 려 봤자 큰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랬던 일이 언제 이렇게 커져 버린 것일까. 대체 내가 뭘 어쨌기에 루브 형이랑 대립해야 한단 말이야? 소설에서나 보던 왕족간의 왕권다툼을 직접 겪게 되니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나가주십시오. 어머니. 지금은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 나는 차갑게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째됐건 어머니도 내가 이런 처지에 놓 이게 한 장본인 중 하나임엔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나가는 문소 리가 들렸지만 디트 경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시킨 것이리 라. 갑자기 닥친 이 일에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더 이상 감출 수가 없었다. 많은 귀족들이 나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기 시작하고 있다고 한다. 그 리고 제1왕자파는 내가 완전히 왕위를 노린다고 생각하고 나를 죽이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가 정말 왕위를 노려야 한다고 했다. 죽지 않기 위해서는 이것 말고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왜 내가 그런 왕위 같은 것에 이렇게 맞물려 돌아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설마 하고 있었는데, 동굴에서 죽임을 당할 뻔한 것이 정말 전부 내 탓이 었던 것인가. 그래서 나와 친구들이 그 동굴 속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하 고, 그런 고생을 해야만 했었던 것이란 말인가. 나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런 왕위 때문에?! 퍼억!! 나는 벽에다가 책을 집어 던졌다.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 "아니...아니지..." 아직 아무 것도 실행된 것은 없다. 그래, 어머니도 직접적으로 귀족들에게 뭐라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거친 숨을 가다듬고 심호흡했다. 그래. 내일 어머니에게로 가자. 그리고 냉정한 기분으로 어머니에게 나의 진실된 마음을 알려드리자. 절대 루브 형의 자리를 빼앗을 마음이 없다고. 그리고 어떻게든 다른 출구를 찾아보자. 그래... 그러면... 그러면 될 것이다. "그래...." 나는 스스로를 그렇게 이해시키고 쓰러지듯 침대 위에 누웠다. 그리고 갑 작스럽게 돌아가는 일에 완전히 지쳐버렸는지 빨려들듯 빠르게 잠이 들었 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잔혹하고 달콤한 꿈의 세계로 빠져들고 말 았다. 콰당!! "으음...?" 나는 갑자기 들린 큰 소리에 살짝 잠이 깼다. "죄송합니다! 카류 님!! 저희들을 용서하십시오!" 아직 잠이 덜 깬 나는 멍하게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부스스하게 일 어나서 눈을 비비면서 내 방에 난입한 기사들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배시시 웃었다. 그들은 친숙했던 기사들이었기 때문이다. "으으응. 괜찮아. 라인 경이네? 그런데 어쩐 일이야, 이런 시간에?" "죄송합니다!" "응?" 갑자기 두 기사가 나의 양어깨를 맞잡아 강제로 나를 침대에서 일으켰다. 난 그제야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 뭐, 뭐야? 아니, 왜 그러는 거야? 라인 경?!" "전하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겠습니다." 뭐?! 순간 잠이 확 달아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거겠지. 바로 어제 어머니랑 한 두 마디 했다고 이렇게 바로 반역자가 될 수가 있 나. "라인 경?" "죄송합니다! 카류 님. 모두들 뭘 하느냐. 가자!!" 나의 물음에 라인 경은 시선을 피하고 기사들을 지휘했다. 하지만 왠지 자 꾸 내 쪽으로 멈칫멈칫 고개를 돌리려다 마는 듯한 행동으로 보아, 나에게 정말 그런 짓을 했냐고 묻고 싶은 듯했다. 나는 멍청히 기사들에게 끌려갔다. 주위의 수많은 시종과 안면이 있는 성 내의 관리들이 나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어머니와 잠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만으로? 아직 시작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나는 반역자가 된 것인가? 이건 꿈이 아닐까? "네 죄를 알겠느냐?" "예?" 나는 멍청하게 되물었다. 이곳은 예전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었다. 중앙의 약간 높은 자리에 국왕과 나의 형제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국왕 중심으로 양옆으로 항시 성안에 남아있는 낟 익은 귀족과 관리들이 앉아 있었다. 단 지 나만이 기사들에게 붙들려 그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네가 감히 나와 너의 형인 루블로프를 제치고 이 왕위를 탐했더란 말이 냐?" 나는 문득 나의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루브 형과 다른 형제들이 말로는 설 명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저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역시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어제 어머니랑 그런 대화를 한 뒤에 옷도 안 갈아입고 이 상한 자세로 자버려서 지금 가위에 눌리고 있는 건가? "물론 네가 한번에 모든 것을 인정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 여기 증 인과 증거가 있으니 보거라." 증인이라고? 증거라고? 나는 황당해 졌다. 반역모의를 했다손 치더라도 아 직 실제로 시작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증거라니? 국왕이 말을 마치고 손을 들자 나의 뒤쪽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 는 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그 기척의 정체를 확인했다. "...유넨 선배님? 세스케인 님?" 나는 눈을 동그랗게 키우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국왕은 일단 세스케인 님 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스케인. 네가 들은 것을 말해 보겠느냐?" "네, 폐하. 저는 약 일주일 정도전에 있었던 파티 후 카류 전하를 만났고 루블로프 태자 전하 대신 자신을 다음 왕위에 오르도록 지지해달라는 요청 을 들었습니다. 이미 저의 동생 세미르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저 역시 자신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일로 후르부크 백작 가 와 좋은 관계가 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사실 세미르도 저도 단지 카류 전하께 호의를 가지고 있었을 뿐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당 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엉?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언제 저랑 나랑 저런 이야기를 했다는 거야? "무...무슨 소리예요? 세스케인 님! 언제 제가... 후르부크 백작 가 사람들이 랑 전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는 했지만.. 대체...!!" "전하께서 루블로프 님을 제쳐두고 파티장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몰고 다니 며 하던 행동을 보고 설마 했는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자신 의 형을 끌어내리면서까지 왕이 되고 싶은 것이었습니까. 카류리드 전하!!" "저희 후르부크 가는 영원히 제1왕자이신 루블로프 전하의 우방입니다. 이 미 멀쩡히 태자 전하가 계신데 그런 계획을 세우다니!" 갑자기 국왕과 가장 가까운 맨 앞에 서있던 트로이 후작 님과 그 옆의 후 르부크 백작 님이 정말 열 받는다는 듯한 어조로 소리쳤다. 지금 무슨 소 리를 하는 거야? 정말 뒤통수가 띵했다. 내가 파티 때 사람들이랑 좀 격렬 하게(?) 놀았기로서니 그걸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비약할 수가 있는 거지? "대체...그런!! 말도 안돼요! 왜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누명을 씌우고 그러 는 겁니까! 트로이 후작 님! 후르부크 백작 님!" 나는 정말 황당해서 소리쳤다. "역시 제대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군.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주지! 유넨 어서 시작해라." 국왕은 퉁명스럽게 나를 보면서 말했다. 유넨 선배는 뭔가 작은 구슬 같은 것을 들고 나의 곁까지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러나 저는 하만 국왕 폐하께 충성을 바치는 몸.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답니다." 유넨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여전히 온화하지만 조금 슬픈 얼굴로 말했다. 혹시 어머니가 유넨 선배에게도 나의 반역이 어쩌니 하는 말을 한 것일까. 하긴, 당연하겠지. 유넨 선배는 생명의 궁에서도 나와 가장 친한 사람들 중 하나였고, 또 젊은 나이에 5서클 마법사가 된 굉장한 인물이기도 하니까 내 편으로 만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어머니는 그렇게 직 접적으로 그 일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다고 하지 않았는가. 대체 무슨 증거 를 보여준단 말이야? "꾸물거리지 말고 당장 시작하라." "네. 폐하." 국왕의 말에 유넨 선배는 자신의 들고 온 작은 구슬에 뭔가를 하기 시작했 다. 마나를 움직여 주입하는 듯 온 정신을 그 구슬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매일 많은 분들을 만나시더니 이젠 지루하신 모양이군요. 카류 님』 엉? 이게 뭐야? 『응... 누구 나랑 놀아줄 사람 없을까. 디트 경, 나랑 놀아 주라, 응?』 갑자기 그 작은 구슬에서 디트 경과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카류리드!! 이러고도 네가 시치미를 떼겠느냐?" 나의 놀란 표정에 그 국왕이라는 작자가 짜증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 구 슬에서는 계속해서 나와 어머니의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류는 성인이 되어서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국민들을 사랑해야 한다.』 『네.』 『헬켄스 님처럼 이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 고.』 『네.』 『어떤 힘든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냉정하고 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 『네.』 『그래, 카류는 분명 헬켄스 님처럼 훌륭한 아르윈의 왕이 되겠지?』 『네.』 『그래. 이 아르윈 왕국의 왕이 되어라. 일단 내가...』 그리고 그때의 했던 그 황당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모의를 했 다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엉? 이...이건?" 나의 멍청한 말소리에도 그 구슬에서는 계속해서 말이 흘러나왔다. 어머니 가 계속해서 나에게 다음 왕위를 빼앗기 위한 일에 대한 계획을 말해갔다. 그러나 가장 황당한 건 그 말을 들으면 들을 수록 내가 거의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갑작스러운 말에 너무 황당해서 멍청히 어 머니의 말을 듣기만 하던 대목인 모양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이다 보니 멍 청하게 듣기만 했던 나 자신에게 확 열이 뻗칠 정도였다. 『그들을 네 휘하에 두고 그들의 세력으로 루블로프를 태자에서 폐하고 너 를 다시 태자자리에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면 그 멍청하고 무능한 국왕 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왕위는 루블로프가 아닌 바로 네가 잇게 되는 것이야.』 『지금 이야긴 못 들었던 것으로 하지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경솔하신 분이셨군요.』 정말 내가 왜 저랬는지 모르겠다. 왜 저렇게 냉정하게 얘기했지? 아무리 그때 그 상황이 황당하다고 해도! 차라리 그게 무슨 소리냐고 마구 따졌으 면 좋았잖아! 『그래. 내가 너무 급했구나. 네가 완전히 성인식을 치르고 난 후부터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 네가 직접 이 일을 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네가 주체니까 말이다. 내가 조급한 마음에 서 두르고 말았구나. 그러나 이일은 그렇게 시간을 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 니란다. 게다가 이미 그들도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을 테 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단다.』 『그 일?』 그러나 여기까지 듣고 내 머리 속에서 얽히던 여러 가지 쓸데없는 생각들 이 덜컥 정지할 수밖에 없었다. 『왕위에 오르는데는 너의 정통성 문제가 가장 큰 약점이었으니까. 고지식 한 귀족들은 너를 왕으로 밀어주고 싶어도 제6왕자라는 정통성 문제로 손 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그만! 안돼!!" 나는 소리질렀다. 그렇지만 저 구슬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나로서는 멈출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제거했다. 최소한 너의 어머니인 내가 제2 후궁이 아닌 왕비가 된다면 제6왕자이더라도 어느 정도 너의 정통성 문제 가 가벼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견제하는 자들은 분명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마치 터져 나갈 것처럼. 이 이상은 ....이 이상은!!! 『역시... 알고 있었구나.』 『무슨 말씀이시죠?』 『내가 그녀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 다.』 『하아?』 그리고 그 다음 대화는 뜨거워졌던 내 심장을 차갑게 식혀주는데 충분했 다. 『모두에게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만은 감출 수 없단다. 네가 자신 의 총명함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멀리 앞을 내다본다는 사 실을.』 『그런 것 때문에?』 『그래,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녀들이 죽었을 때. 네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너의 표정은, 눈동자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어. 그 소식에 당황하며 약간의 죄책 감만을 느끼는 듯하더구나. 내 말이 틀렸니?』 『...?! 그...그걸 어...어떻게...?!』 내 머리는 누가 얼음을 갖다 놓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루브 형이, 다른 형제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그것에 대해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갈 때마다 머리가, 가슴이 더욱 차갑게 식어갔다. 형제들을 바라보기가 무서워졌다. 아까 형제들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도 이미 이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하아... 역시... 그랬던 거구나. 나는 너의 어머니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단다. 옛날부터 너의 행동을 모두 보아 왔고 그리고 많은 것을 알 고 있었지.』 대화는 여기서 끊겼다. "......다음은요?" 나는 국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나는 거의 자포자기 심정이었다. "이 다음은 없습니다. 더 이상 녹음되지 않았습니다." 유넨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허, 참 이렇게 황당할 데가. 없어? 하필 저렇게 절묘한 타이밍에서? "하...하... 그렇군요. 그랬어...." 나는 허탈하게 웃었다. 가능하다면 저 국왕의 얼굴 가죽을 확 벗겨주고 싶 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국왕 같으니!! 저렇게 운이 좋을 수가!! "하, 그래서 그 구슬은 뭐지요? 참 신기하군요." 나는 유넨 선배를 바라보며 물었다. 솔직히 아무리 내가 그토록이나 좋아 했던 선배지만 나를 이렇게 궁지로 몰아넣은 결정적 증거를 가지고 나온 그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 말투에 조금 빈정거림이 섞여 나 온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람과 공기의 흐름을 조종하는 기술을 응용한 마법이 걸린 아티펙트다. 내가 연구하다 내팽개쳐 둔 자료를 유넨이 이어서 연구했는데 어쩌다가 저 렇게 그 마법을 성공시켰더구나. 저 구슬을 내가 만들 때는 내가 도와주기 도 했었지." 국왕과 제일 가까운 곳에 서있던 아르 할아버지가 유넨 선배 대신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이 일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아.. 그때 카류리드 전하께서 제게 도움을 주시어 5서클에 당도하게 하 지 않으셨다면 이렇게 이 연구가 성공하지 못했을 텐데... 정말...우연...이군 요..." 아르 할아버지의 말을 이어서 약간 침울해진 얼굴로 유넨 선배가 답했다. 내가 내 무덤을 팠구만. 참, 황당하다. 황당해. 왜 난 맨날 내 무덤을 파는 짓만 하는 거지? 전생에도 그랬고... 거참. "그래, 그 동안 우리를 농락하는 것이 그렇게도 즐겁더냐?" 국왕이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붉히면서 나에게 소리쳤다. 젠장, 웃기고 있네!! 너는?! 너는 뭐 잘했냐?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의 죽음을 실제로 계획했던 건 너였잖아! 마구 그의 면상에 외쳐주고 싶었지 만 곧 죽을 자의 마지막 추한 발악같이 보일까봐 참았다. 어차피 증거도 없으니까 이런 말 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것이다. "저는 농락한 적이 없어요. 이건 전부..." "저건 전부 무엇입니까? 전부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또 다른 증거도 여기 충분히 있습니다! 후일 일이 성공했을 때 후르부크 가에 주기 로 한 혜택에 대한 각서라든지 아, 다른 것도 있군요..." 트로이 후작이 이상한 문서들을 꺼내며 말했다. 그곳에 적힌 필체는 분명 나의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몽유병이라도 걸리지 않는 한 내가 저런걸 썼 을 리가 없었다. "말도 안돼... 저런 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카류!" 갑자기 나의 말을 끊고 루브 형이 말했다. 그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저 대화가 진짜니? 저기에서 나오는 대화가 진짜냐고!" "아르디예프 님께서 검증하신 것입니다. 루블로프 태자 전하. 이것이 거짓 일리가 없지 않습니까! 제 딸은 저 놈들에 의해 죽은 것입니다! 역시 저 놈들이 왕이 되려고 제 딸을!! 에렌시아를...!!" "시끄러워!! 그대에게 묻지 않았소!" 루브 형은 자신의 외조부인 이크쟌트 후작에게 소리치고는 다시 나를 돌아 보았다. 형이 이런 식으로 소리 치는 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는 그만 큼 화가 나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카류. 말해봐. 너 정말 우리들의 어머니가 죽는 걸 알면서도 묵인한 거니? 그렇니?" "아...아냐. 나는..." 나는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변명을 하면 좋을까. 그게 아니라 실은 환생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 뿐이야. 그녀들이 어디선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크게 슬프지 않았어. 그러니까 그녀들의 죽음을 묵인한 일 따윈 한적 없어. 라고 말해야 하는 건가? 이걸 누가 믿어주겠냐 고. "역시 저건 엉터리야! 카류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아. 그렇지? 저 구슬 이 전부 가짜인 거지?" "그...그건..." 나는 카이 형의 말에 뭐라고 해야할지 몰라 어물거리고 말았다. 거짓은 아 니다. 저 대화 내용은 확실히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앞뒤 생각 없이 가짜라고 우겼다간 일이 어떻게 꼬일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저건 진짜입니다. 카이세리온 전하. 저 아르디예프가 검증한 결과입니다." 아르 할아버지는 침중한 목소리로 그렇게 내뱉었다. 가슴이 탁탁 막혔다. 이게 아닌데, 왜 일이 이렇게 꼬인 건지 모르겠다. "폐하. 이번 일의 주모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리아 후작. 그리고 평민으로 서 폐하께서 은혜를 베풀어 귀족작위까지 하사했는데도 불구하고 감히 주 제도 모르고 이런 일을 꾸민 레이포드. 이들을 모두 잡아들여 함께 처형시 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영지의 일부를 몰수하고 작위를 강등시키십시 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본보기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트로이 후작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그들은 관계없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아직까지 그렇게 순진하고 착한 척 하고 싶은 거냐? 이렇게 모든 것이 밝 혀졌는데도 남을 생각하는 척하는 꼴이라니 정말 꼴불견이 따로 없구나!" 국왕이 화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국왕은 완전히 나를 처형해버리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듯이 계속 나를 추궁해 오고 있었다. "루...루브 형! 히노 선배를 생각해 봐! 그녀를 좋아했잖아? 그녀의 아버지 가 이렇게 죽게 내버려둘 거야?" "그런 건 아무래도 관계없어! 왜 대답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들은 어떻게 된거냐고!!" 루브 형은 어머니들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듯한 해명을 해줄 수가 없었다. 환생이 어쩌고 하는 황당한 이야기를 형제들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너무 답답한 나머지 루브 형의 말에 괜히 맞받아 소리쳤다. "나는 그녀들의 죽음을 묵인하는 짓 따윈 하지 않았어! 나는 형을 끌어내 리고 왕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단 말이야!" "그렇다면 이 많은 증거들은 뭐냐! 어째서 이런 증거와 증인들이 나온단 말이냐!! 내가 얼마나 너를 귀여워 해주었거늘!! 네 형제들이 얼마나 너를 사랑했거늘!! 네 놈이 고마운 줄도 모르고.... " 국왕은 계속해서 발끈발끈 화를 내며 나를 추궁했다. 아니, 어째서 저런 증 거들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나는 저런 거 꿈속에서도 본 적이 없건만!! 나를 덩그라니 데려다 놓고 많은 이야기들을 오고갔다. 트로이 후작 님은 어디서 생겼는지 이상한 증거들을 하나, 둘 계속해서 가지고 나왔다. 세스 케인 님이 언제 나랑 그렇게 많은 말을 했다고 계속해서 이상한 증언을 해 대고 있었다. 유넨 선배가 가져온 구슬의 내용이 반복해서 들려왔다. 국왕 은 왠지 당장이라도 나를 죽였으면 하는지 계속해서 흥분을 하며 당장 처 형이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아르 할아버지는 그저 침통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면서 가끔씩 트로이 후작이나 국왕이 묻는 말에 대답을 할 뿐이었다. 형제들도 나를 돕지 못했다. 그들에겐 오로지 어머니들의 죽음에 대한 의문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해줄 수 가 없었다. 나는 계속해서 궁지에 몰렸다. 나의 편은 하나도 없었다. 나의 편을 들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있다해도 저 증거들을 보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자칫 아무 생각 없이 나의 편을 들었다가는 가문이 통째로 풍지박살 날지 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인지. 갑자기 내가 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인지!!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나는 이런 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데. 단지 어제 어머니에게 몇 마디 말을 들었을 뿐인데!! 그리고 나는 처형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결과를 얻고 끌려날 수밖에 없었 다.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혹시 어제의 꿈의 연속인가? 몽마의 장난으로 재수 없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어둡고 습기 찬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렇게 갇힌 게 벌써 세 번째로구나. "후후..." 나는 바보같이 웃었다. 썰렁하게도 잘 놀고 난 다음날 하지도 않은 반역을 했다고 갑자기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이것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것인 가. 이게 꿈이라면 정말 장황하면서도 리얼한 꿈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어머 니 편부터 시작하여 시리즈로 꾸게 되다니. 게다가 보통 내 꿈은 흑백인데 이번 꿈은 컬러에다가 촉각, 후각까지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한참동안을 잡생각을 하며 긴장감 없이 감옥 안에서 딩굴딩굴거리고 있는 데 갑자기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후후... 기분이 어떻습니까. 카류리드 전하?" 나는 낫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유넨 선배님?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어요?" "전하의 상태가 궁금해서 말입니다." "헤에...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솔직히 유넨 선배 덕분에 이렇게 잡혀 들어 온 거나 진배없지만, 이렇게 감옥에 들어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배는 루브 형을 위해 한 일이 아닌 가. 그런 생각이 들자 그다지 그를 원망하고픈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 것이다. 사실 그런 대화를 들으면 누구라도 내가 반역을 꾀했다고 생각할 테니까. 게다가 나는 여전히 지금 상황에서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썰렁한 꿈에서 빠져나갈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랬 기에 더더욱 유넨 선배를 증오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직까지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위선의 가면을 쓸 셈인가? 카류리드?" "예?" 나는 잠시 딴 생각을 하다가 유넨 선배의 말을 놓쳐 버렸다. 아니, 그렇다 고 생각했다. "후후후... 너와 처음 만난 것이 그래,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로구나. 그 때 는 그렇게 작았었는데 말이야. 한번도 너처럼 작고, 그리고 짜증나는 귀족 은 본 적이 없었지. 마치 소악마를 보는 것 같았다니까." 나는 입을 쩍 벌리고 유넨 선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귀에 뭐가 이 상한 장치가 되어있나 귀를 파보기도 했다. 역시 이건 꿈일 거다. 아니면 유넨 선배가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처음 생명의 궁에 10살 짜리 왕자가 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그때만 해 도 왕권을 등에 업은 왕자가 주제도 모르고 이 궁에 들어온다고 생각했다. 이 천재적 재능을 가진 나도 겨우 17살이나 되어서야 들어올 수 있었던 이 생명의 궁에 그런 꼬마가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짜증스러운 마음에 그 건방진 왕자를 찾았고, 결국 도서관에 서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때 8서클 수식이 담긴 책을 가지고 기웃거리던 그 멍청한 왕자를 말이다." "에에... 유...유넨 선...배님?" 나는 더듬더듬 그의 이름을 불렀다. 꿈이라 해도 이건 너무 리얼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나의 당황스러운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유넨 선배는 말을 계 속 이었다. "훗, 굉장히 마음에 안 드는 놈이긴 하지만 일단은 자주 만날 상대이니 만 큼 고분고분하게 굴어주는 것이 좋겠다 싶었다. 귀족들이 원래 평민이 순 종적인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발 밑에서 벌벌 떠는 것을 좋아하는 족속이 라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니까 말이야." 나를 내려다보는 유넨 선배의 눈초리엔 경멸의 빛이 가득했다. 언제나 나 를 따뜻하고 상냥한 눈빛으로 바라 보아주던 유넨선배였건만, 어떻게 갑자 기 저렇게나 바뀌어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처음 만날 때 그렇게 결심은 하긴 했지. 그랬지만 솔직히 그 식당에서 식 당의 하녀에게 하던 짓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군." 나는 유넨 선배의 말에 기억을 더듬었다. 식당이라 하던 짓이라는 건... 혹 시 내가 급식소에서 주방 아줌마들에게 존댓말을 썼던 그 일을 말하는 것 일까? "그래. 너같이 역겨운 놈은 난생 처음이었다. 하르몬의 충고까지 가볍게 무 시해버리는 너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나는 하녀에게 사과를 해보라고 말했지. 그런 짓을 하면 분명 내 이미지가 떨어지겠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배알이 뒤틀려서 말이야. 그 착한척하는 가증스런 하르몬도 날 걱정해주었 고 말이야. 그런데 너는 정말 생각 이상으로 고단수였어. 그런 미천한 하녀 에게 진짜로 사과를 하다니!!" 아, 기억난다. 그때 유넨 선배의 말을 듣고 하르몬 선배가 굉장히 당황했었 지. 그 당시 난 그저 하르몬 선배가 이상한 선배라고만 생각했을 뿐... 뭐 야! 왜 이런 기억이 생각나는 건데? 이거 꿈 아니야? 왜 이렇게 자꾸 상황 이 맞아떨어져 가는 거지?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복했던 나의 일상이 송두리째 뒤 집혀 버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어제 어머니와 대화를 했을 때부터? 파티가 시작 됐을 때부터? 동굴 속에 갇혔을 때부터? 아니, 생명의 궁에 들어가기 시작 했을 때부터?! "멍청한 왕자, 단지 왕권을 등에 엎은 왕자정도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 다. 그래, 인정하지. 넌 생명의 궁에 들어올 만한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너 는 하르몬처럼 비천한 평민을 도와주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빌어먹을 인종 이었다. 멋대로 나에게 친절을 베풀고 우월감에 도취되어 있는 너를 보고 내가 얼마나 이를 갈았는지 아느냐. 내가 비록 출신이 평민이라고는 하나 너의 친절을 받아야할 만큼 비천한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나는 단 한번도 너 따위의 도움 같은 것에 감동해본 적이 없다. 그런 식으로 너의 우월감 을 충족시켜줄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단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너의 친절 에 감동하고 벌벌 기며 너에게 복종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전부 오 산이다!" "아아? 지금 농담하세요?" 나는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비꼴 수가 있을까. 남의 친절을 어떻게 저런 비틀린 시선으로 바라 볼 수 가 있지? "한가지 알려줄까?" 그는 무슨 재미있는 비밀이야기라도 하듯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동굴에 갇힌 거 말이야. 내가 한 짓이야. 내가 원거리 공격 마법을 썼지. 너도 알다시피 난 천한 평민이라 자주 생명의 궁 밖으로 들락거렸었거든. 그때를 틈타 이 일을 추진 한 거지. 어스웜과 어스웜 퀸, 그리고 내가 배양 한 그 기형 어스 웜 어땠어? 함께 노니까 재미있든? 그들은 내가 산에 살 때 키웠던 착한 애들이야. 아르윈 왕국 여기저기에 퍼져 살다가도 내가 부 르면 우루루 몰려오지. 내가 해주는 마나 유동이 좋은가봐." "뭐!?" 나는 드디어 소리 질렀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럴 수가!! "아아. 아까워라. 어깨에 상처를 입어 잠시 빈사상태에 갔던 정도로 끝났다 며? 아아... 정말 아깝네." "나...나를 노리려고 혼자 그런 짓을 했단 말이야!?" "설마! 내가 아무리 너를 증오한다지만 그런 일로 목숨을 걸었겠어. 딜트라 엘이라고 알지? 어느 날 거리로 나갔다가 트로이 후작의 수하에게 제6왕자 카류리드와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인 딜트라엘을 죽여줄 수 있냐는 의뢰를 받게 되었지. 아, 왜 딜트라엘의 암살 의뢰까지 들어왔는지 알아? 트로이 후작은 제1왕자파인데 가문을 이을 장남인 딜트라엘이 너의 열렬한 추종자 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어. 그래서 딜트라엘 대신 자신의 다른 아이 를 가주로 만들기 위해 죽여버리려 했던 거야. 뭐, 결국 전부 네 탓이라 할 수 있지." 정말 그 동굴 사건이 나 때문에 일어났던 일이란 말인가?! 트로이 후작의 사주였다고?! 그리고 그 일로 딜티까지 죽이려했다고?! "그런 연유로 내가 겸사겸사 그 의뢰인의 호위를 받아가며 힘 좀 쓴 거다. 아, 네가 가르쳐준 그 마법수식 정말 좋더구나. 덕분에 내가 그런 4서클의 원거리 공격마법을 쓸 수 있었고, 동굴 입구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거야. 참 아이러니컬하다니까. 하지만 너도 만족하지? 그 동굴 사건으로 인해 인 기가 치솟아서 한때 재미 좋았잖아." "미치겠네!! 너 제정신이야? 그리고 대체 트로이 후작은 왜 그렇게까지 나 를 죽이려 했던 거지? 그리고 국왕도 그렇고...!! 정말 말도 안돼!!" 나는 빽 소리 질렀다. 정말 머리에서 김이 팍팍 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뭐 저런 것들이 다 있어!!! "아무래도 관계없지 않으냐? 너는 이렇게 잡혀 들어왔고 곧 죽을 테니까. 아니, 후훗.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일 테니 내가 자비를 베풀어 가르 쳐 주마. 왜 국왕이 너를 그렇게 죽이려 했느냐고? 트로이 후작에게 약점 을 잡혔거든. 왕위계승을 할 때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왕위계승의 라이벌 이었던 친동생을 죽인 전적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걸 어쩌다가 트로이 후 작에게 들켜버렸지. 덕분에 트로이 후작의 말에 따라 너를 죽이려고 혈안 이 되어 있는 거다." "구...국왕이 동생을?" 맙소사!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죽이더니, 자신의 친동생을 죽인 전과 까지 있었단 말인가! "트로이 후작들이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너를 죽이려하는 이유도 전대에 있었던 선례 때문인 모양이더군. 제1왕자 이외의 왕자가 왕위에 오르려 하 면 문제가 생긴다고 말이다. 트로이 후작 말이 아르윈 왕국의 평화를 지키 기 위해서 너를 제거해야 한다나? 뭐,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지 않아도 요 즘 너 때문에 온 나라의 귀족들이 한창 술렁이고 있었으니까." "뭐...뭐...나는 왕 같은 거 되고 싶지도 않아!! 관심도 없었단 말이야!!" "네가 관심이 없어도 다른 사람들은 많은 관심이 있었지. 그래서 그 일에 위협을 느낀 제1왕자파가 결국 일을 벌리기로 결심한 거다. 너도 이젠 충 분히 짐작할 수 있겠지만 재판의 모든 것은 제1왕자파가 꾸민 일이다. 그 리고 나도 마법을 이용해 약간의 도움을 주었지. 아, 그래. 이번 재판에서 의 너의 행동은 정말 끝내주더군. 그 마법 구슬의 내용을 듣다가 갑자기 그만 하라고 외치질 않나, 발뺌을 해도 뭣할 상황에 제 손으로 제 무덤을 파는 짓을 하다니 웃기는 녀석." "젠장!! 남은 생각도 없는데 그런 식으로 누명을 씌우다니!! 멋대로!!" 내가 너무 답답해서 소리지르자 유넨 선배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솔직히 말해봐라. 정말 왕위에 관심이 없었냐? 그랬다면 왜 그렇게까지 파티장에서 사람들을 끌고 다닌 거야? 다른 귀족들에게 자신이 이만큼이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재확인 시켜주려고 그랬던 거 아니냐? 그리고 아스트 라한이랑 대화를 할 때 왜 그렇게 냉정했던 건데?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죽 음을 묵인했냐는 대답에 왜 긍정의 대답을 했던 건데? 솔직히 나의 마법구 슬은 거짓이 아니잖아? 훗, 왕위에 관심이 없었을 리가 없지. 이렇게나 충 분한 심증과 물증이 있는데 저런 궁색한 변명을 하다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냐? "무...무슨 소리야. 내가 그딴 세력 다툼 같은 걸 어떻게 알아!?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친구들과 즐겼을 뿐이야!! 구슬에 녹음된 그 대화도 그저 어 머니의 말이 황당해서 그랬었던 것 뿐이라고!" "정말 몰랐다면 넌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바보인 것이고, 알고 있었다면 넌 형제들을 배반한 위선자다. 뭐, 어느 쪽도 좋은 편은 아니구만. 하하하" 어리벙벙한 나의 모습을 보고 유넨 선배는 한참동안 비웃음을 날렸다. "하하하. 아, 역시 왕족은 인간 이하의 종족이구나. 너도 그렇고 그 국왕도 그렇고 하나같이 짐승도 하지 않는 짓을 서슴없이 해버리니 말이다. 자신 의 친인과 혈육, 그리고 아내를 그렇게 간단히 죽여버리다니." "여...역시 국왕 일 알고 있었던 거야!? 국왕이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살해한 것이 실은 국왕이라는 사실 말이야!! 역시 그때 나왔던 구슬의 내 용이 전부가 아니었구나!!" "아아, 왕의 요청으로 그 부분에서 따악 잘랐지. 푸훗, 그것이 그렇게 약이 올랐던 모양이로구나. 그러나 너 역시 국왕이랑 다를 바 없잖아? 그녀들의 암살을 조장하고 묵인한 것은 너도 마찬가지가 아니냔 말이다, 위선자여!! 이제 그렇게 착한 척 하는 것도 끝이다. 이제 더 이상 위에서 남을 내려다 보며 자비를 베푸는척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일 따윈 할 수 없을 거다!!" "웃기지마!! 누가!!" 나는 철창으로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저 면상에 한방 날려주고 싶은 심 정이었다!! "아하하하!!! 마지막 발악이로구나!! 아하하...이거 안타까워서 어쩌지? 평생 동안 높은 곳에서 살아오다가 갑자기 이렇게 밑바닥까지 떨어져 버려서 얼 마나 분통이 터질까? 아하하하...이거...이거 안타까워서 눈물까지 나오네? 푸후후훗. 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결말을 알려줄까? 위선덩어리의 가증스 러운 제6왕자는 결국 처형당하고, 그 왕자를 고발한 유넨이라는 평민은 제 1왕자파의 신임을 얻어 원래 그의 신분으로서는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결말이지. 그 평민은 최연소 5서클의 마법사로 능력도 충 분하거든? 후훗. 그 마법수식들 정말 고마워. 푸후, 푸하하하하..." "유넨!!!" 그는 내 앞에서 계속 웃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연결된 통로로 발걸음을 옮 겼다. 머리에 열이 확확 올라 창살을 마구 두드리며 목이 터져라 유넨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젠장~~!!! 유넨! 유넨!!!" "아하하하하......" 그러나 되돌아오는 것은 그 빌어먹을 유넨의 웃음소리뿐이었다. 너무 억울했다. 정말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두 번의 생을 살아오면서도 이렇게까지 억울해보긴 난생 처음이었다. 대체 저 유넨은 왜 저렇게 꼬인 것일까!! 내가 언제 자기를 그렇게 비천한 평민이라고 치부하며 우월감에 도취되기 위한 대상으로 삼았단 말이야. 나 에게 유넨은 언제나 친절하고 상냥한 선배였고 그래서 나도 그에게 도움을 주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남의 행동을 그렇게 비비꼬아 멋대로 재해석하 다니 어떻게 저런 사고를 할 수 있는 거지?! 내가 왜 저런 놈 때문에 이렇 게 되야 하는 건데!! 젠장! 유넨, 유넨!! 그러나 그런 유넨에 대한 짜증과 원망도 잠깐, 빠르게 나의 머릿속이 정리 되는 것을 느꼈다. 유넨을 제쳐놓더라도 나는 이렇게 될 것은 정해진 운명이었단 말인가! 나에게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학교 친구들과 아르 할아버지, 리아 후작 님, 레이포드 경... 그들과의 만남이 너무 즐거워서 나는 한시라도 오래 그 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저 즐거운 만남이었을 뿐인 이 일에 주위의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나의 많은 친구들은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들이기도 했지만 엄청난 권력을 가진 대 귀족들이기도 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단순한 나의 친구가 끝나지 않고 다음 왕위를 위한 파벌이 될 수도 있었던 거다. 그래서 트로이 후작 과 후르부크 백작 등과 같은 제1왕자파는 내가 루브 형을 몰아내고 왕이 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나의 암살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고 있는 어머니는 나의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드디어 일을 시작했던 것이다. 정작 본인은 아무 생각도 없는데 모두가 나를 놓고 자기들끼리 권력 놀음 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주위의 사람들은 이유야 어쨌든 하나같이 언젠 가 내가 루브 형을 몰아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왕위를 빼앗기 위한 일을 저지를 것이라고 생각 한 것이다. 왕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왕위 따위를 위해 루브 형과 싸우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꿈에서조차 없었다. 애초부터 나는 그런 정치 권력에 관련된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런 것과 연관시킬 줄 몰랐던 것이다.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만남이 하나같이 나에게 기쁨만 을 선사해 주었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싶었던 것이다.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사람들, 나를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 어찌 그런 사람들을 싫어할 수가 있단 말 인가. 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을 만나 행복해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던 것뿐 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달라졌다. 많은 친구들과의 단순한 만남의 이면에는 정 치와 권력에서 기인한 복잡한 이해관계가 자리잡고 있었다. 나의 행복한 일상은 애초부터 그 이해관계에 얽매여 언제든 쉽게 깨어져 버릴 유리 같 은 것이었다. 멍청한 나는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하하하하하....." 나는 주저앉아 웃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는 감옥 바닥에 주저앉아 몸이 차가워지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한참동 안을 망연히 앉아 있었다. 유넨의 본모습도 충격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멍 청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자 옴 몸에 힘이 쭉 빠졌던 것이다. 천재라니, 나는 이렇게 덜 떨어지는 녀석인데 말이다. 내 실체를 알면 사람들은 뭐라 고 할까. 나는 이렇게 썰렁하게 죽는 수밖에 없나. 내 귀여운 형제들과 친구들. 디트 경. 아르 할아버지. 생명의 궁의 사람들. 용병 아저씨들. 그리고 어머니, 리아 후작 님. 레이포드 경... 모두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다시는 이렇게 행복할 수 없을 지도 모르 는데. 요즘 너무 행복했던 게 탈이었던 거야. 인간사가 그렇게 행복하기만 할 리 가 없잖아. 전생의 나만해도 여러모로 완벽한 놈(?)이었지만 부모님이라는 문젯거리를 안고 있지 않았던가. ...바보 같구나. 모든 것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려 하다니. 나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전생의 기억 같은 걸 가지고 환생을 하니 까 이런 일이 생긴 거다. 토이렌에서의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면 나는 그저 평범한 왕자일 뿐이었을 것이다. 천재로 오인 받아 생명의 궁에 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며, 11살 어린애 주제에 아이들을 귀여워 해 주고 싶다고 학교에 가겠다고 생떼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에렌시아 님이나 아르멘 님들 일도 마음 속 깊이 슬퍼할 수 있었 을 것이다. 형제들과 저런 오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꼴을 당하고 있는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천재가 됐다고 무조건 좋아하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젠장! 빌어먹을!" 나는 괜히 바닥을 치며 에르가 형에게서 배운 욕을 사용해가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카류...." 나는 정신없이 신경질을 내다가 문득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 었다. "루브 형... 모두..." 나는 문득 형제들이 전부 나의 감옥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부 러 여기까지 다시 나를 만나러 온 걸까. "카류야. 전부 거짓말이지? 우리를 배신한 게 아니지?" 항상 조용하고 얌전했던 카이 형이 제일 먼저 빠르게 다가와서 말했다. "아...아니야. 나는 그런 거 생각해 본적도 없단 말이야. 왕이 되어서 좋은 게 뭔데!! 나...나는 정말 루브 형을 좋아한단 말이야." 나는 약간 울먹였다. 그들을 보니 괜히 마음이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사 실 나는 그들에게 오해를 받는 것이 가장 슬펐다. "그러면 그 구슬에서 나오는 대화는 뭐야. 제발 말해 줘. 카류. 나는 너를 믿는다고. 저런 구슬 따위보다 나는 몇 년 동안 함께 했던 나의 카류를 나 는 믿고 싶어." "그건... 그건...." "역시 그 구슬 거짓이지? 아르디예프도 트로이 후작이랑 한통속인 거야! 그래서 카류를 못살게 굴려는 게 틀림없어! 절대 용서 못해!!" 루브 형의 말에 내가 어물거리고 있자 미르 누나가 소리쳤다. 누나의 두 눈은 토끼처럼 빨갰다. 이번 일로 많이 울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런 거야? 역시 그 구슬이 가짜인 거야?" "그럴 줄 알았어. 카류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그 구슬이 가짜인걸 나 는 알고 있었다고." 세라 누나와 키옌 형이 맞장구쳤다.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차라리 유넨이 가 져온 마법구슬이 거짓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궁여지책에 지나 지 않는다. 그런 거짓말은 금방 들통이 나버릴 것이다. 생명의 궁의 모든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그것이 진짜라고 검증할 테니까. 그 구슬의 내용은 정말 사실이니까. "그...구슬은 진짜야...." "...카류!!" "하지만 반역을 하려고 한 적은 없단 말이야!! 어머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던 것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너무 황당해서 그랬던 것 뿐이야! 난 아 무 것도 몰랐다고!! 정말이야! 트로이 후작이나 세스케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소리쳤다. 제발 그들만은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전 혀 그런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만은 알아주기를 원했다. "내가 묻는 건 그런 것이 아니야. 네가 진짜 우리 어머니의 죽음을 묵인했 냐고 묻고 있는 거라고."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루브 형이 말했다. "나는 얼마든지 너에게 왕위를 줄 수 있어.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그것 을 넘겨줄 생각이 있다고. 그러니까 네가 반역을 위해 무슨 일을 꾸몄든 나와는 아무 관계도 없단 말이야. 나는 단지 네가 왜 아스트라한 님의 말 에 그런 대답을 했냐 하는 거야. 정말 어머니들의 죽음을 묵인했어? 정말 어머니들이 돌아 가셨을 때 별로 슬프지도 않았어? 정말 약간의 죄책감이 들었을 뿐이었냐고!" 루브 형은 점점 흥분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나 의 심장도 박자를 맞추듯 점점 커지고 있었다. 심장이 정말 터져 나갈 듯 쿵쾅거려댔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그게 아니야!!" "아니라고만 하지 말고 말을 해보란 말이야. 너 평소에 말 잘했잖아!" 미르 누나까지 함께 흥분해서 소리쳤다. 주홍빛 머리카락에 물들듯 미르 누나의 새하얀 뺨도 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나...나는 전생에 토이렌에서 살았어!!" "뭐?" 나의 외침에 형제들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형제들의 오해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든 그들과의 오해를 풀고 싶었다. 이해시켜야한다. 환생이 어쩌니 하는 허황된 말로 이해시킬 수 없다고 포기할 시점이 아니었다. 무 슨 말이든 해서라도 내가 그녀들의 죽음을 묵인했기에 그런 대답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시켜야만 한다! "그러니까,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머리가 좋았던 거야. 내가 전생에 19살에 죽었기 때문에... 아, 그..그러니까 그래서 19살의 정신연령을 가지고 있는 어린아이니까 천재라고 불리는 게 당연하 지! 그래, 그렇게 사실은 내가 연상이니까 형들을 그렇게 귀엽다고 했던 거 라고! 나는 아이들을 좋아했었단 말이야. 어린 내가 형들을 귀엽다고 달려 드는 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 "전생...이라고?" 믿기 힘들다는 표정의 키옌 형의 말에 나는 더 내 말을 증명하기 위해 애 썼다. "난 전생에 토이렌에서 살았어. 토이렌은 여기보다 학문이 훨씬 발달되어 있거든. 그래서... 아, 내가 생명의 궁에서 4서클의 수식을 풀었다는 소문 있지? 그거 진짜야. 내가 토이렌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그걸 풀 수 있 었던 거라고." "우리가 사는 세계 이르나크가 아닌 과학이 발달했다는 이 세계 토이렌 말 이야?" "맞아!! 거기야! 거긴 여기와는 달라서 마법이란 건 없어! 대신 과학이 엄 청 발달되어 있지. 토이렌은 마법은 없지만 과학문명의 뛰어나서 이르나크 와는 비교도 못 할만큼 발전된 곳이야." 형제들은 내 말을 조용히 들었다. 어떻게든 진짜 이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19년 동안이나 살아왔다. 토이렌에 대해서 나만큼 최신정보 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을테니까. "지금 이르나크의 상태는 토이렌의 중세 시대라는 분위기와 거의 같아. 토 이렌의 역사를 고대, 중세, 근대, 현대로 나눈 것 중 중세라는 거지. 그만큼 이르나크는 토이렌에 비해 굉장히 떨어져 있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 아르 윈 왕국의 정세는 유럽의 중세시대 비슷한 영주들이 있는 봉건제이지. 이 건 토이렌의 역사대로 간다면 곧 중앙집권적 왕권으로 바뀔 거야.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평민세력이 점차 커지면서 왕은 붕괴하고 대표를 뽑는 것으 로 바꾸지. 그리고 언젠가 신분도 없는 일단 표면상으론 모두가 평등한 그 런 사회로 바뀌어가지. 언젠가 이르나크에도 민주주의라는 것이 생길 거 야."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나의 장황한 말에 루브 형이 침착하게 물었다. 나의 말을 조금은 믿게 되 었을까.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정말 환생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싶은 거라고. 전생의 나는 정말 죽음이 무섭고 두려워했지. 그런데 죽고 나서 보니까 이 렇게 다시 태어나는 게 아니겠어? 결국 죽으면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야. 에렌시아 님이랑 아르멘 님이 돌아 가셨을 때도 그녀들이 나처럼 어디선가 행복하게 다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생각 이상으로 그렇게 슬프지 않더라고. 비록 그녀들을 다시는 보지 못하기에 우울하고 안타까웠지만 예전만큼 커다란 슬픔을 느끼지는 못했던 거야. 그렇게 나는 그녀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고, 그로 인해 왠지 모를 죄책감이 일었던 거지. 그러니까 그녀들의 죽음을 묵인하고 그 런 게 아니야." "환...생...했다고?" "정말 환생이란 게 있단 말이야?" 세라 누나와 미르 누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조금 진정된 것 같아 나는 최대한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짰다. "그래서 그 때, 장례식 때 내가 그녀들은 천국에 갔을 거라고 했던 거야. 꼭 천국은 아니지만 그녀들은 어디선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 그녀 들은 나름대로 또 다른 행복한 삶을 살게 될 테니까 말이야." "어머니...는 정말 어디선가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키옌 형의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자신감이 붙어 계속 전생에 대한 이야기 를 해주었다. 내 평생 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줄 기회가 올 줄이야. "물론이야! 내가 그 증거잖아. 증거라면 얼마든지 댈 수 있어. 음, 난 전생 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세 가족이었어. 비록 부모님들의 사 이가 굉장히 안 좋긴 했지만 말이야. 또... 나는 전생에도 공부를 잘했다고. 내가 사는 나라의 가장 좋은 학교에서 쉽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말이 야. 아, 그리고 전생의 내 이름은 말이지..." 콰앙!! "카류리드!!" 갑자기 카이 형이 철창을 발로 차면서 나의 말을 끊고 소리쳤다. "차라리 아르디예프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 차라리 그 구슬이 전부 거짓이 라고 해!! 환생?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고? 19살까지 살다가 죽어서 다시 태어났다고? 토이렌에서 살았어? 재미있구나. 토이렌에 대한 정보 따 위 얼마든지 상상해서 지어낼 수 있어. 네가 토이렌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우리가 알게 뭐야? 우리는 토이렌에 갈 수가 없는 걸! 토이렌에서 죽어 이 르나크로 환생이라. 네가 머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 지만 이렇게까지 하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왕가를 없애고 만민이 평등한 세상까지 만들어내면서 말이야." 카이 형은 숨도 안 쉬고 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언제나 상냥하고 형제들 중에서 가장 내성적이었던 카이 형이었다. 카류가 좋아..라고 중얼거리던, 내가 리아 영지에서 돌아왔을 때 제일 먼저 뛰어와 눈물을 글썽이던 그런 너무나 귀여운 형이었다. 카이 형의 눈동자는 차가 울 정도로 짙은 파란색이었지만 언제나 따뜻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동자는 무섭도록 시린 푸른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사람이 카이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이런 카이형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만둬라. 왜 우리들을 그렇게 슬프게 하지? 무엇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우리들에게 환생을 믿으라고? 그렇게 똑똑하던 네가 왜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는 거냐고!! 카류!!" 루브 형이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의 붉은 눈이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언제나 논리적인 말로 우리들을 놀래키곤 했었잖아. 지금이 바로 그걸 쓸 때라고. 왜 하필 지금 그러는 거야? 왜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 야!?" 키옌 형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들을 그렇게 기만하는 거야? 그렇게 왕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어머 니들을 죽인 거야? 그런 거야?" "그렇지 않아!! 정말이야. 사실이라고!! 생각해봐. 정말 이상하지 않아? 평 소의 내 행동이 이상하지 않았냐고!! 내가 환생했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란 말이야." "그만둬, 카류! 환생을 믿으라고? 언제 이상한 종교 단체의 교주라도 된 거 야? 차라리 아르디예프가 거짓말을 했다면 믿겠어. 차라리 그 구슬이 거짓 이라고 말해주면 믿어 주겠다고!!" 세라 누나도 미르 누나도 이제는 완전히 눈물로 엉망이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환생이란 말로 자신들을 설득하려하는 나에게 더 화 가 난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는 나는 그만큼 더 가슴이 아팠다. 어떻게 하 면 나의 진심을 전할 수 있을지..!! "실은 자신의 어머니인 아스트라한 님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던 거 아냐? 그런 일을 시도한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까. 그래서 그때 그 일을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거 아니냐고! 그래서 우리들의 어머 니가 죽도록 내버려 둔 게 아냐?" "아냐!! 틀려!! 그게 아냐!!" 카이 형의 날카로운 말에 나는 거의 비명같이 외쳤다. "그랬던 거야? 자신의 어머니는 죽게 하기 싫으면서 우리들의 어머니는 죽 어도 좋다는 거야?" "그...그래서 자신의 어머니만 살리겠다고 우리 어머니의 죽음을 묵인해버 리고, 그것에 약간 죄책감을 느꼈다 이건가?" "그런 주제에 장례식 때 우리들에게 어머니들은 천국에 가셨니 어쩌니 하 는 말을 한 거야?!" 카이 형의 말을 시작으로 형제들이 하나같이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환 생이란 이유보다 훨씬 현실성 있는 이유가 제기되자 형제들은 모두 흥분해 버렸다. 하지만 진짜로 환생 때문이란 말이야!! 말이 안 되는 듯해도 이쪽 이 진실인데!! 내 말은 정말인데!! 거짓이 아니란 말이야! "제발... 제발 믿어 줘! 정말이야. 믿어지지 않겠지만 정말이란 말이야. 내가 환생을 했다고 생각하면 전부 맞아떨어지잖아!" 쾅! 카이 형이 다시 한번 철창을 걷어찼다. "그래. 믿어 줄께. 카류. 너는 환생을 했구나. 사실 환생은 존재하는 것이었 어. 그래, 이제 알았어. 환생을 한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그렇다면 정말 누 가 죽어도 그렇게까지 슬프지 않을지도 몰라. 환생을 한다. 모두는 환생을 해. 그래, 그렇게 네가 환생에 대해 잘 안다면.." 모두가 조용해진 가운데 카이 형이 고개를 숙여 나의 얼굴 쪽 가까이로 얼 굴을 들이밀었다. "너도 죽어버려. 카류리드." 형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조용히 감옥 밖으로 나갔다. 조용했다. 타탁 횃불에서 불꽃이 튀기는 소리만 들릴 뿐 이곳은 너무나 조 용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혼자 덩그라니 감옥에 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언제든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나는 지금 당장 죽어도 아 무래도 관계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흘렸다. 이제 그들은 다시는 나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나에게 웃음 지어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상냥하게 카류라고 불러주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나의 품에 안기려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Part. 22 - 아스트라한 혼 하르트 신비하고 아름다운 하르트 가의 장녀 아스트라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칭송한다. 그러나 나의 내면까지 보려하는 자들은 극 히 적었다. 사람들은 단지 나의 껍데기만을 본다. 나의 껍데기만을 칭송한 다. 그러한 칭송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나의 속까지 보아줄 사람이 나의 반려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꿈 이 컸던 것일까. 나는 꿈꾸는 소녀였던가. 나의 영원한 반려자가 될 자 역시 외모 말고는 여자에 대한 평가 기준이 아주 전무한 자였다. 하만 국왕이 나를 처음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부모님 께 제2후궁으로 내놓으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는 아직 16살 로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명문 귀족인 하르트 백작 가의 장녀를 제2후궁으로 보낸다는 사실도 탐탁지 않았기에 부모님은 그 제의를 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국왕은 막무가내였다. 나를 내놓지 않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까지 놓을 정도였다. 부모님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일로 국왕과 정면으로 대립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왕이 저 정도로 나를 마음에 들어하고 있으니 제2후궁이 되더라도 국왕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 잡아버리면 하르트 백작 가의 입지도 높아질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 다. 하만 국왕에게는 이미 너무나 상냥하고 착한 두 아내가 있었다. 왕비인 에 렌시아와 제1후궁인 아르멘. 그녀들은 아직 성인이 되지도 않는 내가 국왕 의 여자가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는지 나에게 도움을 주며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아니,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녀들은 나에게 친절했을 것이다. 하만 국왕은 나를 후궁으로 들린 후, 에렌시아와 아르멘은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내가 있는 땅의 궁에만 찾아왔다. 하만 국왕이 나만을 찾음에도 불 구하고 그녀들의 상냥함은 여전했다. 당연히 자신들이 누렸어야 할 권리를 나에게 빼앗겼음에도 그녀들은 여전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웃음을 보여주었 다. 아름다웠다. 그녀들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 나 국왕은 그것을 전혀 몰랐다. 그녀들의 아름다움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국왕은 쉬지 않고 나만을 찾았다. 그는 끊임없이 나를 칭송했다. 나의 머리 카락을. 나의 눈동자를. 나의 피부를. 나의 몸을. 국왕의 눈에는 진실이 비 춰지지 않았다. 그는 나의 환영만을 보았다. 괴로웠다. 대화할 시간도 아까운지 시간만 나면 끊임없이 나를 만지기를 원하는 국왕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신의 행복을 빼앗기고도 항상 따뜻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주는 에렌시아와 아르멘으로 인해 나의 일상은 고통 그 자체였다.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상냥함이 싫었다. 그녀들이 차라리 나를 증 오해 주었다면 훨씬 마음이 편했을 것을. 나에게 경멸의 말을 퍼부었다면 오히려 지내기가 수월했을 것을. 국왕이 싫었다. 평생을 그와 함께 할 것을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돋았 다.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싫었다. 나를 향해 항상 상냥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너무나 싫었다. 그냥 평범한 얼굴로 태어났다면 아 름다운 그녀들의 권리와 행복을 뺏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을!! 나의 외모는 언제나 말썽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아도 수많은 남자들이 꼬 였다. 항상 나를 지켜야 할 호위기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레드라스라 는 이름의 남자는 새로운 호위기사를 뽑을 때, 내게 꼬일 남자들을 염려하 여 국왕이 손수 뽑아준 귀족들 사이에서 무뚝뚝한 하기로 소문난 자였다. 그는 잘생긴 얼굴에도 여자들에게 너무나 관심이 없어 호모가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 호위 기사마저 나에게 빠져버렸 다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그림자같이 따라다니 는 그 남자가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에 무섭도록 민감하게 반응한다 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한날은 분수대에 앉아 신세한탄을 하다가 나를 넋 놓고 바라보는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는 꽤 유명한 자인지라 얼굴만 보고도 금세 누구인지 깨달 을 수 있었다. 디트리온이라 했던가. 약관 20살의 나이로 왕궁 기사단에 들 어온 남자. 레드라스처럼 여자보기를 돌보듯 하던 남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끔찍하다. 그저 예쁜 것만 보면 내용물이야 관계가 없다는 듯 달려들어 만 져보려 하는 인종들. 그저 말로만 착한 여자를 원한다고 하지. 성에서의 일상은 언제나 고통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서 벗어나기를 갈 망하고 있었다. 이런 나의 왕궁 생활에 처음으로 큰 기쁨을 가져다주는 일이 일어났다. 18 살이 되던 해에 아이를 낳았던 것이다.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 카류리드. 카류는 나를 닮아 흑청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하르트 가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자 쪽의 핏줄이라면 아이가 흑청색 의 색소를 가질 확률은 거의 없는데도 말이다. 정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변태 같은 국왕을 닮은 나의 아이라니 생각만으로도 정말 끔찍 하다.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나의 하루하루는 의미를 얻어가고 있었다. 카류는 내가 살짝 안아주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귀엽게 웃어 보였지만 국왕이 안 아들면 이상하게도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나는 이런 사소한 곳에서 통쾌 함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카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 복했다. 2년 동안 국왕에게 시달리면서 접촉을 싫어하게 되어 가끔씩 머리 를 쓰다듬어 준다거나 하는 정도의 애정표시밖에 해주지 못했지만 그것만 으로도 카류는 언제나 예쁜 웃음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카류는 똑똑했다. 카류는 놀랍게도 1살 때 마치 어른 같이 유창하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4살이 되어서는 누가 글을 가르쳐주지도 않았는 데 혼자 책을 읽어 버렸다. 그에 대한 소문은 이미 온 성내에 자자했다. 하지만 카류의 총명함은 그런 정도가 아니었다. 점점 커 가는 카류를 항상 유심히 바라본 나는 카류가 소소한 일상의 일에서 마치 어른처럼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발견했다. 평소 카류의 사고력과 지식은 정말 지나칠 정도 였다. 그것이 나를 기쁘게 하지 않고 절망하게 만든 것이다. 카류는 제6왕자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진 제6왕자는 정사에 큰 도움을 줄 인재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왕위 계승에 커다란 위협이 될 방해물이 될 수도 있다. 카류의 존재는 아르윈 왕국에 큰 혼란 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전대 왕위 계승 때 하만과 그의 동생이 서로 왕이 되기 위해 경쟁을 한 적 이 있었다. 하만 국왕의 동생이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사망해서 일단락 나긴 했지만 그 일로 아르윈 왕국은 오랫동안 혼란스러웠고 내전이 일어날 뻔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일을 통탄하며 왕위계승 은 무조건 제1왕자로만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던 귀족들이 있었다는 것 도 알고있다. 시간이 지나 제1왕자를 지지하는 대부분의 보수적인 귀족들이 제6왕자의 천재성을 깨달았을 때 이 아이를 어떻게 처리하려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절대 호락호락 하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류가 반역의 위험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하지도 않은 반역 때문에 암살 의 두려움에 떨다 죽는 것보다 차라리 진짜로 반역을 일으키는 편이 덜 억 울할 것이다. 게다가 만에 하나라도 그것이 성공한다면 카류가 진짜 이 나 라의 왕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그렇게 내가 불안해하고 있는 사이에도 카류는 탈없이 건강하게 자라났다. 그 아이는 머리가 좋은 만큼 무척이나 착하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걸어다 닐 나이가 되자 항상 자신의 형제들을 찾아다니며 친해지기를 원했다. 첫 날 카류에게 퉁명스럽게 굴었던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아이들도 지치지 않 고 찾아와 항상 웃어 보이는 카류에게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아이들 쪽에서 카류를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믿어지지 않는 장면이 연출된다. 서로 어머니가 다른 왕족의 아이들이 모 여서 서로 웃고 뛰어 노는 장면이. 카류는 항상 자신의 형제들을 챙기고 배려했다. 이것이 자신의 생각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나오 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류가 상냥한 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카류의 상냥함이 전염이라도 되듯 카류의 손길이 닿는 땅의 궁에, 물의 궁 에, 바람의 궁에는 항상 부드러운 공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한 모습에 나는 잠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덮어두기로 했다. 저렇게 사 이 좋은 형제라면 그런 무서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 아들에게 위기가 닥친다면 결코 망설이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카류가 반역을 해야 한다면 또 한번 그녀들의 행복을 뺏어야만 할 테 지만, 그렇더라도 내겐 카류가 더욱 소중하니까.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가야지? 카류? 아버님이 오실 거란다." "예? 또요? 대체 그 국왕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은 뭐로 알고 어머님 만 뺀질나게 만나러 오는 거래요? 그저 예쁜 것밖에 모르는 국...아버님 은.... 하하하.... 죄송합니다. 별 뜻은 없었어요. 그냥 어머니랑 오래오래 있 고 싶어서 그랬어요. 그럼 전 제 방으로 돌아갈게요." 카류는 잠시 흥분하다가는 곧 말투를 고치고 어색하게 웃으며 밖으로 빠져 나갔다. 신기하게도 아직 10살도 채 안된 저 아이는 가끔씩 조그마한 입으 로 저런 놀라운 말을 한다. 확실히 카류는 분명히 국왕을 싫어하고 있었다. 카류는 결코 하만 국왕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니, 항상 국왕이나 폐하라고 부르다가 곧 아 닌척하며 아버님으로 말을 고치곤 했다. 그리고 항상 국왕을 바라보는 표 정도 그렇게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방금 카류가 하다가 만 말을 곱씹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설마 벌써부터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것일까. 혹시, 이런 나의 슬픔마저 알아차리고 분개하고 있는 걸까. 훗, 너무 앞서 나가는군. 설마 그런 생각까지 했을 리가 있겠는가. 저렇게 어린데 말이다. 하지만 내게 이런 생각까지 하게 만들 정도로 카류는 어린아이였지만 결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카류의 어머니이다.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그리 고 가까이에서 유심히 카류의 행동을 보아왔다. 그리고 카류는 점점 더 어 른스러운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카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하기를 원했다. 결코 자신의 뛰어난 지식과 사고력을 들키고 싶지 않아 했다. 이번처럼 나와의 대화에 서 마구 말해버리고 나서도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웃고 넘어가려 하는 일이 허다했다. 왜 그렇게 자신의 본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까. 덕분에 내가 가장 염려했던 암살의 위험 같은 것은 지금까지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카류 는 어째서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까. 보통 아이들은 반대 로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어하는데 말이다. 잠시 죄책감이 인다. 카류는 어쩌면 저렇게 어린애처럼 행동함으로서 나의 애정표현을 받고 싶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국왕을 만난 이후로 누 군가와 접촉하는 것이 정말 극도로 싫었다. 그 상대가 카류인데도 그저 쓰 다듬어 주는 것 이상은 해주기가 힘들었다. 에렌시아나 아르멘처럼 안아주 는 일을 하지 않으니 저렇게 스스로 어린애처럼 보여 어떻게든 나의 애정 표현을 끌어내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은 언제나 카류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 아이를 안기가 너무 어 색했다. 언제나 마음으로만 안아주어야겠다고 생각할 뿐 한번도 실행에 옮 기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류는 이렇게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내 앞에서도 언제나 그늘 없이 예쁜 웃음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실은 역시 쓸쓸했던 것이리라. 아직 카류는 어린애에 불과하니까. 또한 너무나 정이 많은 아이니까. 확실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카류는 언제나 어린애처럼 행동하려고 했 다. 그러나 역시 본래 성격을 완전히 숨기기는 힘들었는지 금세 본래 자신 을 드러내버리곤 했다. 그리하여 결국엔 10살에 생명의 궁에 들어가게 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고 카류가 마법에 소질이 없어 소득도 없이 생명의 궁 에서 나올 때도 무능한 왕자라는 소문이 아닌 4서클의 수식까지 푼 천재라 는 소문이 나돌았다. 물론 그것이 사실일리는 없겠지만 그만큼 카류의 총 명함이 성내의 화젯거리였던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의 지식을 감추고 싶지 않았던 걸까? 카류는 그 동안 숨기던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산하기라도 하듯이 여러 사람의 만류에도 불구하 고 고집을 부려 루블로프 왕립 학교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전대 미문의 천재라는 위명을 얻었다. 카류의 천재성이 부각되자 걱정이 된 나는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찾아 앞으 로의 일을 상의하려고 했다. 웬만하면 그녀들을 만나고 싶진 않았지만, 그 녀들 역시 카류를 무척 아끼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왕궁 내에서 이 런 일을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들 밖에 없었기에 찾아 간 것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바람의 궁에 대표적인 제1왕자파라고 할 수 있는 에렌시 아의 아버지인 이크쟌트 후작이 와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돌아 올 수밖 에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이크쟌트 후작을 시작해서 트로이 후작까지, 여러 제1 왕자파의 귀족들이 에렌시아가 기거하는 바람의 궁에 드나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이크쟌트 후작은 에렌시아의 가족인지라 가끔씩 바람의 궁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처럼 빈번하게 드나든 적은 처음이었다. 게 다가 트로이 후작이나 후르부크 백작 같은 자들이 일부러 바람의 궁에 들 린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불안한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되었지?" "역시 그랬습니다. 이크쟌트 후작 님이 에렌시아 님을 설득하고 계셨습니 다. 이대로 두면 카류리드 전하 때문에 루블로프 전하의 앞길이 막힐 지도 모르니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랫동안 듣지는 못했으나 카류리드 전하의 암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 두 귀로 똑똑히 들었 습니다." "에렌시아 님의 반응은?" "일단은 거부하고 있지만 저렇게 설득하는데 넘어가지 않고 배길 수 있을 까요? 카류리드 전하 때문에 루블로프 전하께서 왕이 될 가능성이 줄어드 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성내에서 카류리드 전하의 총명함을 모르는 자는 없지 않습니까." 나는 불안한 마음에 바람의 궁의 시종을 하나 꾀어내어 그들의 대화를 엿 들었다. 그리고 나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1왕자파 귀족들이 그녀들에게 카류가 장차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으니 그를 죽이 는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하러 온 것이었다. 그녀가 거부했지만 귀족들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하려고 바람의 궁으로 찾아온 것이다.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카류를 해할 것이라 생각하긴 힘들다. 그러나 그녀들 이 끝까지 거부한다고 해도 제1왕자파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대의 왕위계승 때 있었던 파벌싸움을 통탄했던 가장 대표적인 귀족이 트로이 후 작이었기 때문이다. 트로이 후작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과격한 자인지는 모 르는 자가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이크쟌트 후작과 후르부크 백작은 자신 의 권력을 흔들리게 할 위험요소를 그냥 내버려 둘 위인이 절대 아니었다. 끊임없이 에렌시아를 설득하러 오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렇게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나는 이런 운명을 만든 신을 원망했 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카류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그 런데 이렇게 감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미 저들이 손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쪽에서도 손을 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애초부터 별로 권력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던 데다 가, 그렇지 않아도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나로 인해 상대적으 로 왕실에서 그 입지가 작아진 그녀들과 외척들에게 위협으로 비춰질까봐 이제껏 전혀 세력을 키우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것이 이렇게 후회가 될 줄이야. 빨리 힘을 키워야만 했다. 나는 일단 저들의 행동을 막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아 무런 권한도 없는 제2후궁의 지위와 미모 그리고 무능한 왕의 총애밖에 없 었다. 나에게는 좀더 높은 지위와 힘이 필요했다. "왕비가 되고 싶다고?" "네, 폐하. 이제까지 제가 제2후궁이라는 것 때문에 주위 사람들에게 얼마 나 무시당했는지 모른답니다." "아니, 대체 어떤 놈이 감히 너를 무시한단 말이냐! 당장 말해보거라! 아 스! 내 당장에 그놈을 붙잡아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무시하는 말을 하는 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위의 사람들이 미모를 가지고 폐하의 마음을 빼앗아 제2후궁이 된 천한 여자라 고 업신여기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더 이상 그런 말로 무시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저를 왕비로 만들어주세요. 폐하." 나는 침실에서 국왕에게 교태를 부리면서 왕비의 자리를 가지고 싶다고 말 했다.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카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는 언제든 해줄 수 있었다. "...하지만...귀족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을텐데...그것만은..."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러나 나의 카류의 생사가 달린 문제에서 이대로 포 기할 수 없었다. "폐하의 저를 사랑하는 마음은 겨우 그 정도였나요? 정말...실망했습니다. 흑...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주시겠다더니 사실은 전부 거짓말이셨던 거 였군요. 흑..." 나는 국왕의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국왕은 그런 나를 보고 깜짝 놀래서 나를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렸다. "됐습니다. 제가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해도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상관없으신 거였군요. 역시 저는 폐하께서 지나쳐간 수많은 여자 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거였어요... 흑흑흑."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아스!! 내 어찌 너를 그런 여자들과 비교할 수가 있단 말이냐! 이제까지 짐이 지나친 여자들은 전부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 다. 게다가 짐이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비로 책봉한 것을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아느냐? 너를 먼저 만났더라면 절대 그런 실수는 저지르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국왕은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격분하여 말했 다.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그에게 어떻게 행동했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 는 일이었는데 저 국왕은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억 울해서 내가 의도했던 거짓 눈물 이상으로 많은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녀들을 끌어내리는 일을 계획하고 있는 주범은 다름 아닌 바로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자꾸 억울하다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알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증명해 주마! 너를 꼭 왕비로 만들 어 주겠어! 그러니 그만 울거라. 자, 나의 아스." 국왕은 굳은 결심을 했다는 듯이 소리를 치고 손으로 나의 얼굴에 흥건한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꼭 감았다. 한동안은 왕의 비위를 맞춰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카류가 살 수 있 는 길일 테니까. 한동안 카류의 일로 고심하여 지쳐있는 나에게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갑자 기 산책을 가자고 제의해 왔다. 그녀들이 최근 승마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 을 배우고 있었기에 함께 승마를 하자는 뜻에서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고 나는 그녀들을 따라 나섰다. "으음, 경들은 오늘 하루 동안 휴가야. 이번 산책은 일반 기사들만 데리고 나갈 테니 따라오지 않아도 좋아." "...예?" 호위기사들이 줄줄이 나의 뒤를 잇고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에렌시아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호위기사들까지 의아해하고 있는 데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말 그대로야. 오늘 하루 쉬라는 뜻이라고. 우리들도 놀러나가는 거니까." "그래, 우리들도 오늘은 호위기사와 시녀들을 전부 떼어놓고 왔거든?" 그녀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한동안 여러 일로 만나보지 못한 동안 에도 그녀들은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래, 우리들끼리 다녀올 테니 쉬고 있어라." 나는 호위기사들에게 말을 하고 에렌시아를 따라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때 나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인 레드라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아스트라한 님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희들은 폐 하를 뵐 면목이 없어집니다." 나는 강한 어조로 말하는 붉은 머리카락의 그 남자를 가만히 쳐다봤다. 무 표정한 얼굴. 하지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저게 무뚝뚝한 남자라고? "됐다. 일반기사들을 충분히 대동할 테니까." 나는 냉랭한 목소리로 그들을 내친 다음, 에렌시아와 아르멘과 함께 미리 준비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일반 기사들을 대동하여 보통 왕족들이 승 마를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숲 쪽으로 향했다. 달그닥. 달그닥. 나는 그녀들이 안내에 따라 상당히 깊은 숲 속까지 오랫동안 말을 타고 들 어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호위기사들과 시녀들을 내쳤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호위기사를 떼어놓고 이렇게 먼 곳까지 오는 것은 상당 히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그녀들이 왜 이렇게 호위기사들을 떼어놓고 이렇게 깊은 숲까지 들어오는 것인지 의구 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불안감에 못 이겨 안절부절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눈앞 으로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장소가 펼쳐졌다. 그곳은 우리가 들어 온 소로를 제외한 다른 면에는 커다란 나무들이 벽처럼 둘러싸여 있는 곳 으로 중앙의 자그마한 공터에는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 둔 것같이 아름답 게 빛이 비쳐들고 있었다. 나는 그 곳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질렀다. "아..." "아름답지요? 아르멘과 함께 승마연습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랍니 다.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꼭 아스에게도 가르쳐 주려고 했지요. 자, 어서 이리로 와요. 아스!" 에렌시아는 손을 이끌어 빛이 바로 내리쬐는 곳에 놓인 편편한 바위에 나 를 앉혔다. "아아, 역시 그대에게 이곳이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동감이에요. 에렌 님. 아스가 거기에 앉아 있으니까 마치 이 숲의 지키는 엘프같군요. 한번도 본적은 없지만 엘프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이겠지 요?" 에렌시아와 아르멘은 마치 꿈꾸는 소녀처럼 꺄르르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 러다가 어색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나를 보고 양옆으로 한 명씩 와 서 살포시 앉았다. 한동안 그녀들은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을 약 간의 어색하면서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서 주위의 풍경을 더 자세히 감상할 수 있었다. 주위의 벽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다른 그 어느 곳보다도 아 름다운 늦가을의 붉은 색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주위의 풍경에 도취되어 있는데 갑자기 에렌시아가 잠 시 기사들에게 멀리 떨어지라고 명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고 말 았다. 갑자기 '그 일'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라도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카류 를 해하는 일을 승낙한 것일까. 제1왕자파들의 끊임없는 설득에 결국에는 그녀들마저 넘어가고 만 것일까. 자신의 아이들에 관계된 일이니까!? 설마 그래서 나를 죽이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온 곳일까. 결코 그럴 리 가 없다고 머리 한쪽에서 외치고 있었지만 그렇게 자꾸 떠오르는 생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스. 실은 고백할 것이 있어요." 갑작스러운 에렌시아의 말에 나는 약간 놀라 그녀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에렌시아는 약간 침울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요즘 들어 아버님과 여러 귀족들이 저에게 찾아와 카류 를 해하자는 말을 했답니다. 카류가 너무 똑똑해서 그들이 위협을 느끼는 모양이에요. 제가 아무리 카류가 상냥한 아이임을 강조해도 말해도 말을 듣지 않더군요." 에렌시아의 말을 듣더니 아르멘도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아스. 저에게도 그런 말이 왔었답니다. 정말, 바보 같은 일이지 요. 저의 아버님 또한 카류가 후일 왕이 되면 외척세력으로서의 힘을 잃을 것을 염려하여 이크쟌트 후작 님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는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최대한 침착하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걱정 말아요. 아스! 우리들은 꼭 카류를 지킬 거예요." "그래요, 우리들이 얼마나 카류를 좋아하는지 알죠? 꼭 아스를 도와줄 테 니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지나친 걱정으로 몸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카류 가 슬퍼할 거예요." "저...저는..." 약간 당황해하는 나를 아르멘은 따스한 손길로 감싸주고 안아주었다. 그리 고 자신들의 가족들을 용서하라고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자 신들에게 이야기하라고, 그러면 얼마든지 도와줄 것이라 속삭였다. 조금 전 했던 의심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들은 너무나 상냥했다. 그녀들의 상냥함이 바보같이 보였다. 제1왕자파의 동향 같은 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 리고 그 일로 인해 이미 일을 벌여놓은 상태였다. 바보 같다. 너무 바보 같 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서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 다. 그러자 에렌시아까지 다가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내가 카류의 일로 인해 놀란 나머지 이렇게 눈물을 흘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제 좀 진정이 되었나요? 아스?" "...예." 에렌시아와 아르멘에 품에 안겨있던 나는 한참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미안해요. 아스. 이런 이야기를 해서...하지만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야한다 고 생각했어요. 이 일의 당사자는 아스와 카류니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일부러 시녀들까지 떼어버리고 이곳까지 온 것이랍니다." "가...감사합니다. 에렌 님." 그러자 갑자기 아르멘이 등뒤에서 나를 꼭 껴안으며 말했다. "후훗, 아스. 그런 인사는 폐하께나 하세요. 요즘 아스가 너무 힘이 없어 보인다고 폐하께서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해주라고 셋이 함께 산책을 가는 것을 주선해 주셨답니다. 매일 함께 하던 호위기사들은 떼어놓고 새로운 기분을 내보라고 일부러 왕궁 기사단의 기사들을 선별해 주시기까지 하시 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나온 게 된 것이죠. 그런 계기가 없었다면 우리 아 버님이 카류를 해하려 하고 있다는 말을 아스에게 꺼내기가 쉽지 않았을 거예요. 후후, 여전히 아스에 대한 폐하의 사랑이 깊군요. 가끔씩은 저도 아스에게 질투가 날것만 같아요." 그 말에 나는 문득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최근 왕의 기분을 맞춰주 기 위해 항상 그 앞에서 기분 좋게 대하지 않았던가. "그만 돌아가요. 아스. 꽤나 시간이 지났군요. 깊은 숲 속인지라 내려가다 가 어두워지면 큰일이니 어서 서둘러요." 그러나 아르멘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나의 손을 잡고 말들이 있는 쪽으로 끌어당기는 바람에 더 이상은 생각을 잇지 못했다. 에렌시아가 멀리 수풀 쪽으로 떨어져 있던 기사들을 불러들이는 것을 보며 나는 다시 말에 올라 탔다. 에렌시아와 아르멘까지 말을 탄 다음 우리들을 왕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을 몰았다. 그리고 막 소로에 접어 들려하는 순간이었다. 꾸엑!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오른편 숲에서 우리들 앞으로 이상한 짐승이 튀어나왔다. 무척이나 놀란 말들이 갑자기 앞발을 치켜드는 바람에 나는 말의 고삐를 놓치고 땅으로 떨어졌다. "아?" 아니, 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를 재빠르게 안아드는 바람에 다행스럽게도 땅과 부딪히며 느꼈을 아픔을 느끼지 못했 다. 나는 약간 놀라서 나를 안아든 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와 에렌시아 들을 호위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지 절 묘하게 나를 받아낸 것이다. 잠시동안 의아해하다가 갑작스레 들리는 비명 소리에 그를 독촉하여 땅에 내려섰다. 함께 말을 타고 있었던, 나보다도 승 마에 미숙한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급히 그녀들 을 찾던 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아르멘...!! 에...에렌시아 님!!" 땅바닥에 쓰러진 채로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비틀려 있는 아르멘. 그리고 발이 안장에 끼여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며 말에 끌려 다니고 있는 에렌시 아. "뭐...뭐 하는 거야! 어...어서 에렌시아 님을...?!" 나는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도 가만히 서 있는 기사들을 보고 거의 비명처 럼 소리쳤다. 그러자 나의 바로 곁에 서있던 기사가 작게 말했다. "폐하의 어명으로..." 그의 몇 마디 말에 갑자기 온 몸에 핏기가 가시는 듯했다. 그날 밤 했던 국왕과의 약속이 머리를 스쳤다. 나를 왕비로 만들어 주겠다더니 결국 이 런 식으로 약속을 지키는 것인가? "하...하만..." 나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국왕의 이름을 낮게 으르렁거렸다. 국왕의 행동에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화가 났다. 그러나 곧 머리 다른 한 쪽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화로 뜨겁게 달궈진 머리를 빠르게 식혀주었 다. 정말, 정말 바보 같은 일이었다! 어떻게 왕비가 되기를 바랬단 말인가. 그 녀들이 죽지 않고 내가 왕비가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왕비가 되고 싶다고 떼를 쓴 것은 그녀들을 죽여달라는 말이나 진배없었던 것이 다. 나는 그녀들을 죽일 계획을 세운 국왕을 증오할만한 자격이 없는 것이 다. 날뛰던 말이 어느 정도 진정이 됐는지 자리에 멈추어 서서 푸르릉거리며 투레질을 해댔다. 그때까지도 에렌시아는 아직 죽지 않고 약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왕비가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나의 카류를 위해서 나는 왕비가 되어 야만 한다. 그런 모든 것을 제쳐놓고서라도 늦었다. 이제 와서 그녀를 구해 봤자 이미 늦었다. 그녀들은 카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카류를 지켜주겠다 고 말했다. 그러나 살아 난 후에도 카류를 지켜주겠다고 한 말을 지킬까. 내가 왕비자리를 노렸기 때문에 저렇게 다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어 도 나를 용서하고 내 아들을 지켜줄까. 만에 하나라도 용서하지 않는다면 이번 일로 인해 카류는 어떻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처음 카류를 보며 결심하지 않았던가. 만약 카류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어 떤 짓이든 하겠다고, 또 한번 그녀들의 행복을 빼앗아서라도 카류를 지키 겠노라고. 나는 눈앞에서 괴로움의 신음소리를 내는 가녀린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녀 의 얕은 신음소리가 끊어질 때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기사들이 그녀에게 다가가서 그녀들의 시체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시체를 운반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호위기사 들을 보며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곁에서 주위를 경계 하고 있는 에렌시아의 호위기사들을 보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도 그녀들의 암살에 참여할 했군. 그녀들이 죽으면 그대들은 그 책임을 물어 기사 자리를 내놓아야 할지도 모를텐데?" "아닙니다. 이 일로 인해 기사의 직위를 내놓고 오랫동안 근신을 해야 할 테지만, 언젠가 모두 왕궁 기사단에 복직시켜 주겠다고 폐하께서 약조하셨 습니다." "하지만 잠시동안이나마 그대들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지게 될 거다. 특별 한 이득도 없이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대들이 이런 암살에 끼여들다니 그 의도가 대체 뭐지?" 나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을 했다. 그 기사는 곤란한 표정으로 주 변의 기사들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폐하의... 어명이니까요. 거역하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그분께서 강력하 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 정말 무능한 국왕이다. 그녀들에 대한 암살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한두 명 정도가 거절했다면 그때야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면 된다지만, 만 약 모든 기사들이 말을 듣지 않고 끝까지 반발했다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했단 말인가. 그들을 전부 없애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그 일로 인 해 카류의 입장이 더욱 난처해졌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그런데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자 기사가 머뭇거리며 그 뒤를 이 어 말했다. "저...저희들은 아...아스트라한 님을 지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스트라한 님 께서 제2후궁이라는 이유로 다른 자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거...것을 보 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나는 눈살을 약간 찌푸렸다. 왕비가 되고 싶다고 울먹이며 국왕에게 했던 거짓 이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국왕이 이런 말까지 했단 말인가? 문득 주위의 기사들을 보았다. 분명 그들은 국왕의 협박을 무시했다가 죽 음을 당하고 싶지 않아 암살을 마지못해 허락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마 내가 관련되었기 때문이리라. 내가 왕비가 되 고 싶다고 했기에 이 명령을 따른 것이리라. 아니면 왜 저런 표정으로 나 를 바라본단 말인가. 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를 사랑하니 까!? 웃기는 일이다. 언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어 본 적이 없는 그들이 나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나를 사랑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에 대해서 모른 다고는 하나 에렌시아와 아르멘이의 선량함은 그들도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그녀들을 죽이는 일에 동참했던 것이다. "후...후후후..." 웃었다. 내 눈앞에 놓인 그녀들의 시체를 보고 웃었다. "호른 경." 나는 바로 곁에 서있는 그 기사를 불렀다. 나의 낮은 부름에 나를 받아들 었던 기사가 역겹게도 얼굴을 붉히며 나를 바라본다. "내 다리를 부러뜨려. 명령이다. 나의 바람이기에 그녀들까지 죽이지 않았 나? 이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겠지?" 이왕 하는 일이라면 완벽하게 하리라. 에렌시아와 아르멘은 완전히 죽어버 렸음에도 나 혼자만 멀쩡하게 돌아간다면 의심하는 자들도 생기지 않겠는 가. 왕궁에 돌아왔을 때 왕은 기사들에게 무척이나 화를 내었다. 모르는 사람 이 본다면 그녀들의 죽음으로 인해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실상은 오늘밤 나와 함께 밤을 보낼 수 없기에 저렇게 화를 내는 것이다. 아마 오 늘밤 나에게 자신이 벌인 일을 무척이나 자랑하고 싶었을 테니까. 땅의 궁으로 돌아온 나는 왕의 명령으로 부리나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고 피곤함에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뭔가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정신을 차렸을 때 방 한쪽에 서 있는 카류와 디트리온을 볼 수 있었다. "카...카류?" "어머님?" "그래...카류...카류야... 이리...이리 온..." "......" 나의 부름에 카류는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다가왔다. "카...류야... 실은.... 에렌시아 님이... 아르멘 님이..."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녀들의 비보를 들은 카류가 얼마나 절망할지. 나의 상냥한 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게 될지. 그녀들의 죽음에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것을 생각하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알아요. 어머니... 아니까... 그러니까..." 그러나 카류는 모든 것을 안다며 내 손을 붙잡고 침대에 고개를 파묻었다. 곁에 선 디트리온의 안타까운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도 그가 이미 카류에게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일은 이야기한 모양이었다. 나는 카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정말 속 깊은 아이였다. 지금 이렇게 침대 에 고개를 파묻은 것도 아마 나에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그 런 것이리라. 자신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더욱 괴로워 할 것이라 생각하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리라. "울지마렴. 카류야... 마음이 아프겠지만 그렇게 슬퍼하지 말거라. 힘든 일 이지만 견뎌내야지. 착한 아이지... 우리 카류...?" 나는 작게 카류에게 속삭였다. 카류가 너무나도 안쓰러워 그의 얼굴 가까 이에서 작게 속삭이며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다가 나는 카류의 모습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침대에 엎드린 카류 는 울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 방에 가 있겠습니다. 어머니." 카류는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는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겠다고 했 을 때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놀랍게도 카류는 단 한 방울 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오랫동안 카류의 곁에 있어온, 어머니인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카류는 분명 슬퍼하고 있지 않았다. 뭔가에 당황했고, 또 안타까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그래. 그...그렇게 하거라." 나는 혼란스러운 기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말을 약간 더듬었다. 카류가 나 의 방밖으로 완전히 빠져나가고도 나는 한동안 멍하니 방문을 바라보았다. Part. 24 - 아스트라한 혼 하르트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사건이 있은 후로 나는 오랜만에 바깥구경을 할 수 있었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국왕이 꼼짝도 못하게 방안에 있으라고 명령 했기 때문이다. 다리가 부러진 정도야 치유 마법을 써서 옛날에 치유되었 건만 정말 쓸데없는 참견이다. 나는 호위 기사 중 가장 말이 없는 레드라스 하나만을 데리고 고요한 복도 를 천천히 거닐었다. 땅의 궁은 카류와 나, 이렇게 둘이서만 살기에는 지나 치게 크고 화려했고 시종들의 거처까지 전부 제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 방 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사람이 다니지 않는 인적이 드문 조용한 장소가 있었고, 나는 아주 가끔씩 이곳을 산책로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 을 걷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들었어? 아스트라한 님이 국왕폐하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으로 모자라 왕비 자리를 노리고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을...." "말조심해. 그리고 그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리고 아 스트라한 님께서도 다리가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단 말이야." 나는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레드라스를 손을 들어 저지했다. 그리고 아무 없는 줄 아는지 소곤거리고 있는 시종과 시녀의 말을 조용히 엿들었다. "그저 남자들이란... 그 정도로 어떻게 아스트라한 님을 믿니? 얼마나 증거 가 많은데! 사실 이건 공공연한 비밀 아냐? 애초부터 그런 왕족들이 다니 는 숲에서 짐승이 튀어나온 것부터가 엉터리라고!! 일이 일어나기 전에 누 가 그 짐승을 데리고 가는걸 봤다는 사람까지 있다 이거야. 웬 짐승인가하 고 얼마나 말이 많았는데 세상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이걸 루블로프 님들 귀에 안 들어가게 하려고 얼마나 애썼는지 아니?" "모르면 가만히 있어. 나도 봤는데 그날 산책을 가자고 하신 건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 님이란 말이야. 아스트라한 님이 어떻게 그날 그곳으로 산책 을 갈 것을 알고 그런 일을 꾸밀 수 있단 말이야." "그래도 모르지. 아스트라한 님이 뭔가 수를 썼을지도. 요즘 들어 아스트라 한 님이 국왕에게 얼마나 상냥하게 대했는지 아니? 뭔가 냄새가 나지 않냐 고." "그만둬!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아무 데서나 그런 말을 떠들다가는 왕족 모독 죄나 국왕 모독 죄로 네 가족들까지 모두 끌려가 죽을 수 있 어!" 시녀와 시종의 잡담을 마지막까지 듣고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에는 그저 그들이 에렌시아들의 일을 마음대로 추측하여 잡담거리로 삼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사실 이번 일은 거의 공공 연연한 비밀이기까 지 했던 것이다. 나는 그제야 무능한 국왕이 벌인 일이 얼마나 어설픈 계 획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만약 내가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았다거나,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나를 위해서 이번 산책을 계획했다는 것을 시녀들이 증명하지 않았다면 완전히 궁지에 빠져버릴 뻔했던 것이다. 갑자기 머릿속으로 이렇게 소문이 자자한데도, 너무나 허술한 사건이었는 데도, 그렇게 생각이 깊은 카류가 한마디 의심의 말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 떠올랐다. 그리고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던 카류의 모습이 뒤를 이었다. 그때 카류는 슬 퍼하지 않았다. 단지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마치... 마치 죄책감 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던 카류! 나는 왕비로 책봉되던 날 국왕을 경멸의 눈빛으로 보는 카류를 보고 가슴 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카류는 이 일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카류가 이일을 알면서도 묵인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점점 나의 머리를 지배하 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카류가 그 수많은 의심들 속에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단 말인가. 그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카류라면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만 한 일이 아닌가! 왜 카류가 그녀들이 죽던 날 그렇게 슬퍼하기보다 죄책감 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단 말인가. 그녀들의 죽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알림으로서 내가 당할 일을 두려워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카류가 이 것을 알고 모르는 척 했다 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고, 카류가 완전히 모르는 것이라면 또 그것으로 좋 다. 어찌됐든 카류가 이일을 사람들에게 알릴 생각은 없는 듯하니까. 카류 에게 증오를 받는다해도 좋다. 그런 것보다도 나는 카류가 살기를 원한다. 카류가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하리라. 카류의 증오마저 기꺼 이 감내하리라.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단지 가벼운 인사를 하고 지나가려 했던 리아 후작의 입에서 갑자기 나온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아스트라한 님께서는 제1왕자파에 의해 위험에 처할 줄 뻔히 아는 카류리 드 전하를 궁 안에만 있게 하지 않고 무슨 이유엔지 일부러 학교에까지 보 내셨지요. 그리고 제 딸 히노의 편지를 보고 안 일입니다만, 카류리드 전하 는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굉장히 분주하신 모양이더군 요. 게다가 최근엔 본궁과 제1후궁이 함께 사망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갑작스러운 불행한 사건과 홀로 살아남아 왕비가 되신 아스트라한 님, 또 카류리드 전하께서 최근 하시고 계신 일, 이 모든 일들이 과연 우연일까 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리아 후작을 바라보았다. "카류리드 전하의 명석함에 대해서는 저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쉽게 '그것'을 노리는 것이 가능할까요?" "카류는 그저 바깥 구경을 하고 싶어 학교에 간 것뿐이랍니다. 게다가 카 류는 쾌활해서 친구들을 사귀기를 좋아하지요. 그리고 에렌시아 님과 아르 멘 님의 일은 불행한 사고였을 뿐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는지 영 문을 모르겠군요." "이대로 나가다가 아까운 인재가 하나 사라지기라도 할까봐 안타까울 뿐입 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뭐, 일단 저는 중 립이지만 충고 정도는 해드릴 수 있을 듯 하군요, 아스트라한 님. 신중히 알아서 행동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리아 후작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유유히 자신의 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해도 과언이 아닐 리아 후작. 아직 중립이지만 리아 후작이 카류에게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사 실인 듯하다. 그러므로 저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 왕비의 자리에 오른 나는 보다 쉽게 귀족들의 동향을 알 수 있었다. 그러 던 와중에 트로이 후작이 고대 유적의 위대함을 알려주고 약해진 아이들에 게 힘을 길러주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다니는 명문 가의 귀족 아이들을 모아서 최근 발견된 고대 유적지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트로이 후작의 제안에 당연히 대부분의 귀족들이 반대했다. 그런 일에 자 신의 아이들을 단체로 보냈다가 어떤 위험한 일을 겪게 될 지 모른다고 생 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트로이 후작과 다른 몇몇의 귀족들이 자신의 아이도 함께 보내겠다는 말로 그 반대를 일축했다. "카류야, 긴 여행이란다. 제발 말을 들으렴. 생각 이상으로 힘들 거야. 그리 고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른단다." 카류는 어디서 그 여행에 대해 들었는지 며칠 전부터 계속해서 나를 쫓아 다니며 여행에 자신을 보내달라고 졸라대고 있었다. 여행에 참가하겠다는 카류를 나는 극구 말렸다. 전 왕비의 죽음으로 인해 위축된 그들이 어떤 음모를 꾸밀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세요, 조심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제가 이미 다른 친구들에게 이 번 여행에서 빠지면 가만 안 두겠다고 협박까지 했는걸요? 제발 보내주세 요. 이제 와서 제가 안가면 어떻게 해요, 네에?" 카류는 커다란 검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아무리 어른스럽다고 하더 라도 아직은 아이라는 것이 이럴 때는 여실히 드러난다.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긴 거리야. 학교와는 너무 다르단다. 제발 마음을 바 꾸렴. " 나는 어떻게든 카류를 말리기 위해 애를 썼다. 왕비와 후궁의 죽음으로 예 민해진 제1왕자파 귀족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카류를 여행에 참가하지 못하게 말리려고 노력했지만 카류는 막무가내였 다. 학교에 가겠다고 했을 때처럼 카류는 이 여행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 다. "학교에서도 아무 일 없었잖아요! 이번 여행이라고 별 다를 거 있겠어요? 그러니 제발 보내주세요~! 네에?" "카류야, 이제 그만하거라.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니." 이번에는 학교 때처럼 간단히 허락해 줄 수는 없었다. 이 여행은 학교에서 의 위험과는 차원이 달랐다. 수도에서 멀리 떠나 여행을 하다가 언제 제1 왕자파에게 위험에 처해 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저번의 에렌시아와 아르멘 때의 산책처럼 도중에 어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기에는 너무나도 알맞은 상황이었다. "어머니. 전 누구보다도 건강하게 잘 다녀올 자신이 있다고요. 그리고 사람 은 고난을 통해 더욱 강해진다고들 하잖아요? 한번쯤은 이런 일을 경험해 보는 것이 미래에 도움이 될 거예요. 친구들과도 더 친해질 수 있을테고 요." 카류는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말이 완전히 틀 린 말은 아니었다. 솔직히 카류는 이번 여행기간 동안 카류는 아이들과 함 께 보다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테고,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많 은 아이들과 크게 친목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후일 세력 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미래를 생각한다면 이 여행은 상당히 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머니. 저 말도 잘 듣고 할 테니, 조심할 테니까. 호위병들도 많이 따라 가잖아요?" "...카류야..." 제1왕자파의 움직임이 약간 수상하지만 아직 특별한 움직임이 포착된 것은 없다. 카류만 노리기에는 그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도 많고, 집단 전체를 노 린다면 자신들의 아들까지 위험에 빠질 수 있으니 어떤 수를 쓰기 힘들다. 디트 경과 많은 다른 호위병도 함께 할 것이다. "어머니... 제발요... 제발, 한번만 보내주세요. 네?" 이제는 거의 애원조인 카류의 앞으로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 높이를 맞추 었다. 그리고 바람에 흩날려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며 말했다. "...정말 조심할거니?" "무...물론이죠!! 당연하죠! 절대로 조심할거예요!!" 그래. 카류를 위해서다. 이번 일은 나중에 카류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험한 곳에는 절대 가면 안 된다?" "네에! 근처에도 안 갈 거예요!! 사랑해요! 어머니!!" 카류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달려들었다. 너무나 기뻐하는 카류를 보 노라니 너무 흐뭇해져서 다른 이유를 제하더라도 허락해주길 잘했다는 생 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그렇게 카류의 여행을 허락해 주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로 인해 얻어질 큰 이익을 생각하고 그 한달 간의 길고 위험한 여행을 허락해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카류들이 떠나고 3주일 후. 디트리온이 왕궁으로 달려왔고, 나는 카류들이 동굴 속에 갇혀버렸다는 소 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나는 끝까지 카류를 말렸어야 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류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번 위험을 감수한다면 이제 일도 더욱 손쉬워 질 것이 라고 생각했다. 설마 제1왕자파 귀족들이 자신들의 아이들의 목숨까지 담 보로 그런 계획을 실행할 줄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아니,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카류를 말리지 않았다. 나는 알 고 있었다. 카류가 이번 여행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면서도 그럴듯한 생각으로 스스로를 이해시키고는 그 아이를 사지로 내 몰고 만 것이다. 왜 알지 못했을까. 반역 따위 카류를 살리고 싶어서 시작한 일일뿐인데!! 그런 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그 동굴에서 카류는 얼마나 고통스러워하고 있을까. 어쩌면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을 여행에 보낸 이 어머니를 원망하고 있을지 도 모른다. 차가운 바닥에서 자신을 끝까지 말리지 않은 어머니를 원망하 고 있을 것이다!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 그 아이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 데!! "카류... 카류야....."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왜 그 아이를 보냈을까. 아직 어린데, 아직 그 렇게 조그마한 아이였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카류를 그런 사지로 내몰아 버리다니. 나는 무엇을 생각한 것일까. 내가 한 일은 대체 무엇이었나. 그 저 카류를 살리고 싶었던 것뿐이었는데. "카류리드!!" "아스... 제발 그만두거라. 아르디예프까지 가지 않았느냐. 카류리드는 곧 돌아올 것이다." 침대에서 나를 안고 있던 국왕이 걱정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여 전히 손이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자신의 아이이기도 한데 그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듯 했다. 그는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죽었을 때처럼 카류가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죽여버리고 싶다. "하만...." "그래, 아스 왕비 자리 말고 또 원하는 게 있느냐? 무엇이든 말해보거라." 죽어버려. 그에게 그렇게 말하는 대신 나는 그의 역겨운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카류의 죽음이 확인 된 것은 아니다. 카류의 미 래를 위해서는 아직 국왕에게 잘 보일 필요가 있다. 만약 카류가... 카류가 죽는다면... 결코 카류 혼자 그 차가운 땅속에 놔두지 는 않으리라. 그땐 이 멍청하고 무능한 국왕 역시 무사하지는 못하리라. "아아... 카류리드!!" 나는 저 멀리서 카이세리온을 안고 웃고 있는 카류리드를 볼 수 있었다. 한때 큰 상처를 입고 빈사상태에 까지 갔다고 하는 그 아이가 무사히 구출 되어 리아 후작의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 다. 결코 그 순간을 잊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시는 카류리드의 안전을 담보로 어떠한 일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카류는 달려오는 나를 보고는 카이세리온을 살짝 떼어내고 예를 갖추어 인 사를 하려 했다. "카류리드. 카류야..."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카류를 안았다. 그리고 이름을 반복해서 불렀다. 절대 놓지 않으리라. 절대 그런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으리라. 결코 나의 곁에서 떼어놓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그럼 아픔을 겪지 않게 할 것이다. "큰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구나, 아프지 않니? 카류리드?" 나는 카류를 땅의 궁에 있는 나의 방 침대까지 안고 왔다. 그리고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카류를 무릎 위에 앉힌 다음 물었다. 하지만 카류는 왠지 얼굴만 붉히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이런 행동에 아마 놀란 모양이었다. 나는 부드럽게 카류의 손을 나의 입으로 가져갔다. 조그맣다. 너무 조그마 했다. 이런 아이가 그 춥고 어두운 동굴에서 갇혀버렸을 때 얼마나 두려워 했을까. 이렇게 작은 몸에 그렇게 큰 상처를 입었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웠 을까. 그렇게 큰 상처를 입고 카류는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아직 이렇게 작구나... 우리 카류." 하지만 카류는 평소와는 다르게 제대로 답을 못하고 얼굴을 더욱 빨갛게 붉혔다. 너무 오랫동안 카류를 안아주지 않았던 것 같다. 바보같이. 왜 카 류에게 이렇게 사랑한다고 표현해주지 못했을까. 왜 좀더 안아주지 못했을 까. "내가 이러는 것이 싫으니?" "아...아뇨!!" 나의 물음에 카류는 빠르게 대답했다. 그러다가는 당황하고는 얼굴을 더욱 붉히는 모습에 나는 그만 씁쓸해졌다. 그 동안 카류가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가 카류에게 매정하게 군것으로 인해 이 작은아이가 얼마나 서운해했을 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다행이구나. 무사한 것 같아 정말 다행이다. 카류야. 정말 미안하구나. 그 렇게 너를 그곳에 보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네가 원한다 해도 보 내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나는 목이 메이는 것을 느끼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카류를 꼬옥 껴안 아 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이렇게 멀쩡한 걸요. 게다가 제가 떼써서 가게된 거잖아요." 카류의 검푸른 눈동자는 나와 같은 색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답게 빛나고 있 었다. 그토록 오랫동안 동굴에서 굶주렸다고 한다. 빈사상태에 빠질 정도로 큰 상처를 입었다고 들었다. 아르디예프 님을 만났을 때도 영양실조와 상 처로 엉망이었다고 들었다. 그런 위험한 일을 겪은 뒤에도 이 아이의 눈빛 에는 어떠한 그늘도 없었다. 카류의 말에는 다른 사람을 위한 배려가 듬뿍 담겨 있었다. 그래 나는 카류는 이런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항상 남 을 배려하는 착한 아이 라는 것을.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나는 알고 있었단다." "네?" 카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네가 괜찮다고 말할 줄 알면서 이렇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내가 미워서 그 런단다. 카류." 한없이 착하기만 한 카류,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카류 가 내게 괜찮다고 말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행 도중 충분히 이런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그냥 보냈다는 사실을 안 다해도, 카류는 조금도 나를 원망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착한 아이는 언제나 웃으면서 내게 괜찮다고 말해주리라. "어...어머니..." 나는 카류의 눈가에 입맞추었다. "카류... 우리 착한 카류...." 나는 반복해서 계속 카류의 이름을 불렀다. 카류에게 미안해서, 카류가 안 타까워서 언제까지고 카류를 안아주고 싶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동안 나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나는 카류의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마에 입 맞추고 조용히 이야기했다. "카류... 어서...어서 자라야지.. 나의 카류. 어서 커서..." 더 이상 카류는 말이 없었다. 문득 나의 품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색색 거리며 잠들어 있는 카류를 볼 수 있었다. 이 착한 아이가 내가 자신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서 벌리고 있는 일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나올까. 자신의 형제를 무척이나 아끼고 있는 이 아이는 어 떤 표정을 지을까. 그래, 아직은 말하지 말자. 카류가 조금이나마 덜 슬퍼하게 하기 위해. 루 블로프와 적대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너무나... 슬퍼할 테니까. 나는 동굴 사건이 있은 후로 절대로 카류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명했 다. 이번 일로 제1왕자파들의 각오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으며 약 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그들이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 니 왕성 안도 충분히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알게 모르게 호위병들을 더 세 우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카류? 리아 후작 님? 무슨 일이시죠?" 나는 한동안 하만 국왕에게 붙잡혀 빛의 궁에서 머물다가 겨우 허락을 받 고 오랜만에 카류가 있는 땅의 궁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정하게 이 야기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는 카류와 리아 후작을 발견하고 놀랐다. "어머니! 와! 드디어 겨우 빛의 궁에서 나오셨군요." 카류는 나의 곁으로 뛰어와 평소처럼 귀엽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리아 후 작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헤헤, 프리란트 님이랑 그냥 이것저것 이야기를 했어요. 어머니는 그 동안 빛의 궁에 계시느라 잘 모르시겠지요. 프리란트 님과는 전에 리아 영지에 서의 일을 인연으로 안면을 익히고 있던 상태였는데, 성안에서 자주 얼굴 이 마주치다 보니까 이렇게 친해져 버렸답니다. 그죠? 프리란트 님?" "후후... 물론이죠. 카류 님." 둘은 서로 마주보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너무나도 다정 한 모습에 나는 잠깐 생각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프리란트..?" 카류는 리아 후작의 이름을 그냥 부르고 있었다. 그렇게 친한 사이가 아니 면 영주의 호칭으로는 성을 부르는 것이 보통인데도 말이다. "아, 제가 그렇게 불러달라고 했답니다. 이번에는 아스트라한 님과 대화를 나누어도 괜찮을까요? 오랜만에 아스트라한 님과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 군요." "에에? 그럼 저는 다른 곳으로 쫓겨나야 하나요? 프리란트 후작 님?" "잠시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류 님." 카류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리아 후작에서 묻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카류 에게 대답했다. 나는 한동안 그들의 의외의 모습에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놀라셨습니까?" 땅의 궁에 있는 나의 개인 서재로 들어와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리아 후작 이 앞뒤 없이 말을 꺼냈다. "간단히 하지요. 저는 카류 님을 지지하고 싶습니다. 확실히 카류 님은 너 무 아까운 인재입니다. 그분이 왕이 된다면 확실히 이 아르윈 왕국은 그 어떤 나라보다 발전을 거듭해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분과의 대화 에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만나보니 카류가 너무 똑똑하다라는 이유로 그 동안 중립을 지키던 그가 갑자기 카류의 편을 들겠다는 걸 어떻게 믿는 단 말인가. 카류는 아직까지 지지 세력이나 정통성 등 여러 면으로 불리한 입장이다. 일부러 그런 상태의 카류의 편을 들어줌으로서 혹이라도 실패했 을 때의 위험을 감수할 만큼 리아 후작에게 이득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함정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아직 그를 믿을 수 없기에 나는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그가 카류의 편이 된다는 것은 일이 거의 반이 성공한 것이나 다름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기뻐해서는 안 된다. 만에 하 나라도 리아 후작이 제1왕자파의 편을 들기로 했으며 이런 행동으로 나의 꼬투리를 잡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후후.. 믿기 힘드시겠지요. 좋습니다. 저의 생각을 제대로 말씀드리죠." "차나 드시겠습니까, 시종을 시키지요." "아닙니다. 바로 이야기하지요. 누가 아스트라한 님과 제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본다면 그 상대가 누구든 그다지 고운 시선은 아닐 것입니다. 단도 직입적 말해 저의 외동딸 히노를 카류 님의 왕비로 맞이해 주십시 오." 나는 잠시 얼굴을 굳혔다. 히노라면 리아 후작의 그 벙어리 딸이 아닌가. "제 딸은 사실 거의 벙어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후후. 솔직히 말 할까요. 아무리 외모가 아름다우면 무엇합니까. 머리가 좋으면 무엇합니까. 벙어리라는 것만으로 이미 히노는 사교계에서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였습니 다. 후작 가의 아이로서 미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요. 이대로 리아 후작 가를 몰락시킬 수는 없기에 저는 늦게나마 새로 양자와 양녀를 입양 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습니다. 아스트라한 님은 어떤 이유로 위험할지 도 모르는 그런 여행에 카류 님을 참가시키셨겠지만, 사실 저는 거의 포기 하는 마음으로 히노를 동굴 여행에 참가시켰습니다. 히노가 이대로 리아 후작 가에서 잊혀져 비참한 상태가 되게 하느니 차라리 라고 생각한 것이 지요." "매정한 분이시군요. 가문의 발전이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이를 위해 권력을 얻으려하고 있고 그는 가 문의 명예와 권력을 위해 아이를 버리려 하고 있었다. "물론 중요합니다. 대대로 이 100년 동안 리아 후작 가는 조상 대대로 언 제나 최고의 명문가였습니다. 저의 대에서 그것을 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 습니다. 원래 남자아이가 없는 리아 가문으로서는 양자는 어떻게든 들여와 야 할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히노는 여자아이로서도 가망이 없습니다. 양자 를 들이게 되면 애초부터 벙어리이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는 히노는 리아 후작 가에서 거의 없는 존재가 되다시피 할 것입니다. 가문을 영광을 떠나서라도 그런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하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저는 어떻게 살아있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스트라한 님. 저 는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여자에 불과한 히노에게 그 수많은 지식 을 가르친 것도 전부 걸출한 인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인 재는커녕 매장되다시피 그저 저택 한구석에 있기만 하는 아이라니 저는 참 을 수가 없습니다. 나의 아이가 가문의 걸림돌이나 되거나 후작 가에서 잊 혀진 존재가 되는 그런 비참한 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복에 겨운 고민을 하셨군요." 카류가 그저 성 한구석에 처박혀 살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 했을 텐데 말이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이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데 말이다. "후후...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르기 마련이지요. 아, 말이 조금 빗나갔군요.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겠군요. 그 동굴 사건 이후로 히노가 카류 님의 덕분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말입니다. 후후. 저는 지금도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저는 정말 제 딸의 목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저 는 처음 알았답니다." 리아 후작은 진심으로 기쁜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카류가 히노를 고쳐주 었다고? 리아 후작은 그런 이유 하나만으로 카류의 편을 들겠다고 한 것인 가? "물론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카류 님의 총명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 도입니다. 대화를 나누어본 결과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계시더군요. 그것은 이 아르윈에 필요한 시각입니다. 정체되고 발전 없는 이 아르윈에 커다란 변혁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어떤 부분에서 는 제가 오히려 카류 님께 배우는 입장이 되더군요." "그리고?" 그것 때문만은 아니겠지. 어디까지나 가문의 영광을 생각하는 리아 후작이 아닌가. "그리고 히노와 카류 님의 관계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정도로 카 류 님과 히노의 관계는 깊습니다. 이렇게 된 바에야 아주 카류 님의 편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더군요. 히노를 미래의 왕비로 앉히기 위해서 말입 니다. 히노를 설득시켜 루블로프 님의 아내가 되게 하는 것보다 이편이 낫 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너무 번거로운 일이 아닙니까.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의도하신 대로 이번 여행으로 히노처럼 많은 귀족 자제들이 카류 님에게 로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아니, 이건 기대 이상의 성과겠군요. 동굴에 갇혔 다가 벗어난 뒤로 그들은 거의 카류 님의 추종자가 되었으니까요. 하지만 솔직히 아직 그들이 어려 그렇게 가문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없고 큰 힘 이 되지도 못하겠지요. 그러나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들어갔을 때 귀족 들이 루블로프 전하와 카류 님, 이 중 하나를 택하는데 있어 분명 큰 도움 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이미 생각해두었다는 것인가. 카류의 입지가 루블로프만큼이나 올라섰다는 판단에 본격적으로 카류의 편에 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인가. "카류 님은 우리 히노의 은인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고 카류 님의 총명함 은 제1왕자파의 위협이 될 정도로 후일 아르윈의 왕이 되는데 모자람이 없 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류 님을 다음 왕위에 앉히기 위한 계획은 충분히 성 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히노가 카류 님의 왕 비가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아스트라한 님과 저, 그리고 이 아르윈 왕국. 서 로에게 이득만 가져다주는 되는 관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리아 후작은 부드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요. 리아 후작." 리아 후작과의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실 리아 후작은 나의 노력 때 문이 아니라 상황의 진행에 따라 자연스럽게 카류의 편을 들게 된 것이었 다. 카류의 지식을 미리부터 걱정하여 과격하게 나오는 제1왕자파라던가, 그로 인한 나의 노력이 없었다 해도 카류를 지지하는 세력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아이는 정말 왕의 재목이었던 것이다. 파티를 위해 수도까지 왔던 먼 곳에 영지를 둔 대 귀족들이 이번에는 파티 가 끝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대부분 성을 떠났다. 귀족들의 움직임이 점 점 더 신중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 동안 나는 리아 후작과 함께 귀족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한 기초적인 물 밑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카류와 친분이 깊은 귀족들에게 그저 슬쩍 은유 적인 말을 건네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정도만으로 아직 아무런 결실이 없었지만 단 하나, 레이포드 경의 그 말은 정말 큰 수확이었다. 리아 후작과 레이포드 경. 아르윈 왕국 최고의 권력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영주와 아르윈 왕국을 몇 번이고 궁지에서 지켜낸 최고의 기사가 이미 카류의 편에 들게 된 것이다. 자신감이 붙었다. 카류는 충분히 이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와 리아 후작이 말을 건네지 않은 자들도 이미 이번 파티에서 충 분히 깨닫고 있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위계승의 파벌이 생겨날 것 이라는 것을. 제1왕자파와 제6왕자파가 생겨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특별한 일을 벌이지 않아도 카류는 충분히 사람들의 관심 속에 있었다. 그 렇게 카류는 자연스럽게 왕위를 위한 발걸음을 착실히 옮겨가고 있었던 것 이다. 얼마후면 카류의 성인식이 다가온다. 그때가 되면 귀족들의 움직임도 더욱 확실해질 것이고 그 전에 카류의 마음을 알아야 하고 만약 왕위에 마음이 없다면 그 마음을 돌릴 필요도 있으니 이제 카류에게 모든 일을 알려주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카류도 이러한 정치적 구도를 인식하고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카류야 책을 읽고 있었니?" 언제나 성실한 모습의 카류가 기특해서 나는 그 아이를 보고 슬며시 웃음 지었다. "아니요. 그다지..." "여전히 부지런하구나. 카류. 그냥 앉아 계속 책을 읽으려무나. 그리고 디 트리온 경. 밖에서 기다려주겠나?" 디트리온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창가에 앉아 다시 책에 눈 을 돌리는 카류를 바라보았다. 서두를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나에 게 갑자기 카류가 읽고 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각 페이지 가장자리마다 금장이 되어있는 책이라면 선왕들의 일대기 밖에 없다. "카류야 지금 읽고 있는 책은 무슨 책이지?" 내가 물음이 무척이나 반가웠는지 그는 즉시 밝은 목소리로 답했다. "선왕들의 일대기예요." "어느 분의 일대기인데?" 문득 나는 카류가 누구의 일대기를 보고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건국왕 헬켄스 님이요. 제일 맘에 드는 분이죠.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계 셨으면서도 항상 겸손하셨고 국민을 무척 사랑하는 분이셨죠. 특히 무척이 나 힘들게 사는 국민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보장된 지위와 꿈을 포기하고 일어서는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카류도 많이 컸구나..." "요즘도 계속 크고 있어요. 이제 곧 저의 17살 성인식이 있을 테니까 이 정도는 커야지요." 카류는 나의 칭찬에 쑥스러운 듯 책으로 얼굴을 돌려 표정을 감추었다. 나 는 그 아이를 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카류는 성인이 되어서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국민들을 사랑해야 한다." "네." "헬켄스 님처럼 이 나라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 고." "네." "어떤 힘든 일이 눈앞에 있더라도 헬켄스 님처럼 항상 냉정하고 지혜롭게 처리해야 한다." "네." 카류가 내 말에 모두 수긍하자 나는 그만 본론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카류는 분명 헬켄스 님처럼 훌륭한 아르윈의 왕이 되겠지?" "네." 팔락. 카류는 쉽게 대답하면서 책을 한 장 넘겼다. 그러나 곧 멍한 표정으로 나 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을 한 모 양이다. 카류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씁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대로 이 이 야기를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그래. 이 아르윈 왕국의 왕이 되어라. 일단 내가 리아 후작과 함께 여러 귀족들에게 은연 중의 가벼운 언질을 해두었다. 물론 이제 막 말을 꺼내본 것뿐이고, 그렇게 직접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아니라 아직 제대로 된 세 력을 전혀 형성되지 않았지만, 조금만 세력이 늘어도 대부분의 귀족들은 금방 너를 지지할 분위기더구나. 아마 대충 이런 일을 예상하고 있었던 것 이겠지." 카류는 나의 말에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표정을 무시 하고 계속 카류를 향해 지금 상황에 대해 말해주었다. 카류는 정말 완전히 얼이 빠진 모양이었다. 내가 그렇게 긴말은 오랫동안 했음에도 별다른 반 박의 말도 없이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것 이다. "그들을 네 휘하에 두고 그들의 세력으로 루블로프를 태자에서 폐하고 너 를 다시 태자자리에 책봉하도록 압력을 가한다면 그 멍청하고 무능한 국왕 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왕위는 루블로프가 아닌 바로 네가 잇게 되는 것이야." 나는 드디어 카류에게 루블로프를 제치고 왕위에 오르라는 직접적인 말을 했다. 계속 황당하다는 듯이 멍한 표정을 짓던 카류는 드디어 약간 미간을 구겼다. "지금 이야긴 못 들었던 것으로 하지요. 미처 몰랐는데 이렇게 경솔하신 분이셨군요." 그러더니 책으로 고개를 돌리며 냉정하게 나의 말에 답했다. 그러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이 상황이 카류에게 얼마나 충격적 일지 상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아마 카류는 이 상황을 믿고 싶 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그래. 내가 너무 급했구나. 네가 완전히 성인식을 치르고 난 후부터 일을 시작했어야 하는 건데. 아니, 네가 직접 이 일을 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이 일은 어디까지나 네가 주체니까 말이다. 내가 조급한 마음에 서 두르고 말았구나. 그러나 이일은 그렇게 시간을 끈다고 해서 좋은 것이 아 니란다. 게다가 이미 그들도 그 일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을 테 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단다." "그 일?" 카류는 차갑게 되물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화를 내기 마련인데도 카류 는 오히려 가라앉는 모양이었다. 이 이상 말한다면 무슨 소리를 들을지 모 른다. 카류는 처음으로 나를 원망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나는 카류를 죽게 내버려두고 싶지 않으니까. 원망 받는다 해도 카 류가 살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 "....그래서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제거했다. 최소한 너의 어머니인 내가 제2 후궁이 아닌 왕비가 된다면 제6왕자이더라도 어느 정도 너의 정통성 문제 가 가벼워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너를 견제하는 자들은 분명 이 일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의 말로 인해 카류는 무척이나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카류는 화내지 않았다. 그녀들을 죽였다는 나의 말에 화를 내지 않 았다. 단지 어떻게 해야할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미어져 왔다. 카류는...역시... "역시... 알고 있었구나." "하아?" 카류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 그렇게 불안한 눈동자를 하고 있으면서도 어 떻게든 냉정을 가장하기 위해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내가 그녀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네가 알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 다." "왜죠? 저를 정말 과대 평가 하시는군요." "모두에게 감출 수 있을지 몰라도 나에게만은 감출 수 없단다. 네가 자신 의 총명함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멀리 앞을 내다본다는 사 실을." "그런 것 때문에?" 카류가 목소리를 높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그만 하라는 듯이 거의 나 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하지만 나는 깨닫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속이 깊은 카류가 그 많은 소문과 증거를 보고도 그 일의 실체를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 솔직히 그것만으로는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녀들이 죽었을 때. 네가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았다. 너의 표정은, 눈동자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어. 그 소식에 당황하며 약간의 죄책 감만을 느끼는 듯하더구나. 내 말이 틀렸니?" 그리고 그때 카류의 표정을 보아버린 것이다.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고 담담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안타까워하는 나의 아이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 그...그걸 어...어떻게...?!" 카류는 자신도 모르게 쥐어짜는 듯한 쉰 목소리를 내뱉었다. 드디어 카류 의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카류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손 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하아... 역시... 그랬던 거구나. 나는 너의 어머니란다. 그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단다. 옛날부터 너의 행동을 모두 보아 왔고 그리고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 항시 불안했다. 카류가 에렌시아들을 암살을 계획한 사실을 알고 있다해도 관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거짓이었다. 카류가 그 사실을 모르기를 바랬 다. 언젠가 알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내가 모든 것을 밝 히기 전까지는 카류가 순수한 마음 그대로 있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 런 추한 나의 마음에 얽매여 그녀들의 죽음을 묵인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 기를 바랬던 것이다. "훗훗...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줄까? 아아.. 이것도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구나. 아니, 너라면 알고 있었겠지." 나의 말을 들으며 카류는 자신의 떨리는 손을 다잡았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실 내가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죽였다면 그렇게 어설프지는 않았을 것이 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고 내 주위에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건 국왕뿐이었지. 그래서 국왕에게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가 그 일을 계획한 것이지. 그러나 그 멍청한 국왕은 무능하기만 해서 여기저기 너무 많은 허점을 만들었어." "서...설마 아버님도 이일에?" "후후, 국왕이 한 짓이다. 국왕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우습지 않은 상황 이 그냥 넘어갈 수 있겠니 왕족이 다니는 수풀에서 그런 짐승이 튀어나와? 게다가 그 주위의 목숨을 바쳐 호위해야 할 그 많은 친위기사들이 그녀들 이 낙마할 때까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다고? 이 나라 제일의 기사들이? 그걸 믿는 바보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하하하! 그 멍청한 국왕 이외에는 말이다!!" 나는 약간 흥분하여 말을 내뱉었다. 가증스러운 하만 국왕. 하지만 그 무엇 보다도 가증스러운 것은 바로 나. 누구보다도 그녀들을 잘 알고 있는 주제 에 그녀들을 죽여버린 바로 나. "나는 네가 루블로프를, 그리고 모든 형제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가 결코 그들과 대립하고 싶어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단 다." 거기까지 말한 후 나는 카류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동자. 카류는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할 것이다. 그러나 카류야 너는 그것을 극복해야만 한다. 그것을 이겨내야만 살아나갈 수 있 을 테니까. "그러나 명심해라. 네가 살기 위해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것을. 네가 원 하지 않아도 이미 너의 존재는 수많은 귀족들에게 왕위 계승자의 한 명으 로서 루블로프의 경쟁상대로 인식되어지고 있단다. 네 그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제6왕자로 태어났을 때부터, 루블로프보다 뛰어난 인물로 태어났을 때부터 모든 건 정해진 길이었던 거란다. 네가 원하지 않아도 제1왕자파 귀족들은 너에게 위협을 느끼고 너를 죽이려 할 것이다. 동굴사건 같은 것 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란다." 카류는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받쳤다. 그렇게 한동안을 있다가 나를 올려 다보며 말했다. "나가주십시오. 어머니. 지금은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가운 눈동자. 카류는 나에게 처음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자신을 루블로 프와 대립하도록 몰고 간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나를 경멸해도 좋다. 나를 증오해도 좋다. 하지만 결코 왕위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카류 가 유일하게 살길이니까. 그리고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흐름이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권력 에 민감한 귀족들은 알아서 파벌을 만들고 움직였을 것이다. 너는 죽지 않 기 위해 루블로프의 제1왕자파와 대립하여 이겨야만 한다. 아니, 이기도록 만들고 말 테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빠져 나왔 다. 이제 카류가 결심만 한다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다. 이제부터 제1왕자파와 진정한 싸움을 벌이기 시작하면 앞으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카류의 방에서 나온 후 디트리온을 불러 이 일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절대 카류를 배신하지 말게. 디트리온 경." "물론입니다. 아스트라한 님. 카류 님은 군주로서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계십니다. 그 분은 군주로 모신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 분은 저의 목숨과 같습니다. 배신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어떤 상황에서든 그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디트리온은 이미 굳게 결심했다는 듯 비장하게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 는 속으로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얼마나 나를 갈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게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작가문 출신의 기사임에도 아직까지 결혼도 하 지 않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가 카류가 아닌 나의 껍데기 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 맹세 꼭 지켜주시기를 바라네. 디트리온 경." 나는 진한 웃음을 띄우며 그에게 말했다. 나의 이 껍데기가 카류를 위한 방패막이를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한 것이다. 그날 밤 갑자기 침실에 트로이 후작과 유넨이라는 마법사, 그리고 국왕이 들이닥쳤다. 나는 갑자기 이 이상한 방문에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께서 이런 야심한 밤에 저 분들까지 모시고 침실을 찾으신 이유가 무엇인지요?" 나의 말에 국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스. 나에게 오거라. 너만은 내가 도망치게 해주마." "......" 나는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트로이 후작과 유넨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나의 시선이 닿자마자 유넨은 자신의 손에 든 작은 구슬에 무언가를 하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어머니.』 『카류야 책을 읽고 있었니?』 『아니요. 그다지...』 『여전히 부지런하구나. 카류. 그냥 앉아 계속 책을 읽으려무나. 그리고 디 트리온 경. 밖에서 기다려주겠나?』 "무...무슨?!"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나는 평정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이미 모든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것 말고도 수많은 증거가 있지요. 루블로 프 전하는 이미 태자로 책봉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죄는 절대 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것은..." "아스!!" 트로이 후작에게 반박하려하는 나의 말을 끊고 국왕이 소리쳤다. 국왕은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나에게 조용하게 말했다. "카류리드는 죽을 수밖에 없다. 감히 자신의 형의 자리를 탐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미 저렇게 증거까지 있다. 카류리드는 포기하거라. 하지 만 너만은 내가 어떻게든 해주마.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했는지 잊었느냐? 나를 믿거라. 자, 아스..." 국왕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손 같은 것엔 관심도 없 었다. 지금 그의 입에서 카류리드를 포기하라고 말한 것이 정말 현실인가? "카류를 어쩌신다고요?" "인륜을 저버리고 왕실의 평화를 어지럽힌 카류리드 전하는 형식적인 재판 을 거친 후 처형 될 것입니다." "뭐?" 트로이 후작의 말에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인륜을 저버려? 왕실의 평화를 더럽혀? 나의 아이. 착한 나의 아이. 누구보다도 형제들을 사랑하는 나의 카류. 카류 덕분에 이 왕실이 얼마나 따뜻한 분위기 속에 있었는지, 카류 덕분에 모두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너 따위가 카류를 알아?" 나는 그만 막말을 해버렸다. "아스! 그만 두거라. 제발 그만두고 나에게 와라. 처음부터 카류리드는 죽 을 수밖에 운명이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니었어!" "시끄러워!! 하만!!" 나는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감히 나의 아이를 욕하다니.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의 카류를 비난하다니! "아스!!" "아스트라한 님! 이 이상 말은 그만두시죠. 카류리드 전하는 처형당할 것입 니다. 하만 폐하의 마지막 호의를 받아들이시는 게 어떻습니까?" 국왕의 말을 가로막으며 소리치는 트로이 후작을 보며 나는 도저히 화를 삼킬 수가 없었다. "닥쳐!! 절대 용서 못해. 카류를 죽인다니 절대 그렇게는 안돼!" "아스, 자 진정하고 내 말을 듣거라. 그 아이는 이제 어쩔 수 없단다. 증거 가 너무나 많아. 더 이상 돌이킬 수가 없게 되었다. 이미 루블로프가 태자 의 위치에 있는데도 다음 왕위를 노린 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카류 리드는 살려낼 수 없단 말이다. 이미 저질러진 일이다. 그러니 너만이라도 내가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카류리드가 죽는다고 너까지 따라죽을 이유는 없지 않느냐? 아이는 다시 낳으면 될게 아니겠느냐." 대체 저 멍청한 왕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대체 카류를 무엇이 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다시 낳으면 된다고?! 그래서 아무런 죄도 없는 카 류를 죽이겠다고? "하만!" "아스." 하만 국왕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증오스럽구나. 에렌시아와 아르멘이 죽었을 때도 그렇게 눈물 한 방울 흘 려주지 않더니, 이번에는 자신의 친아들을 죽는다는 데도 다시 낳으면 된 다고?! 내가 얼마나 너를 증오하고 있었는지 네가 알까. 언제나 너를 죽이 고 싶었다. 네 놈의 손이 내 몸에 닿을 때마다 내가 얼마나 너를 죽이고 싶었는지 너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하만!!" 나는 탁자 위에 과일과 함께 올려진 과도를 들어 하만 국왕에게 달려들었 다. 몇 번이고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몇 번이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었는 지 모른다. "죽어버려!!" 그러나 나의 행동은 너무나 간단히 트로이 후작에게 막혔다. "아스!!!" 무언가 빠른 물체가 눈앞에서 번뜩였다고 생각했을 때 하만의 찢어지는 비 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스!! 아스!!!" "폐하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국왕과 트로이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복부에서 느껴지는 뜨거 운 고통에 그들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가 없었다. 겨우 나의 복부가 피로 붉게 물들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들었다. "이럴 수가... 아스..." 하만 국왕은 그 붉은 눈에 눈물을 담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견디기 힘 든 복부의 고통과 하만의 표정에서 나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이렇게 허망하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 허무한 죽음에 절망할 틈도 없이 나는 카 류를 떠올렸다. 내가 이렇게 죽어버린다면?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살려야 해! 이대로 죽었다간 카류는! 나의 카류는!! "하...하만... 아...안돼... 카...카류를... 제...제발 카류를..." 하만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을 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의 부탁이라면 그가 들어줄 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어떻게든 하만에게 카류 의 생명을 부탁하려고 애써 떨리는 입을 움직였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 다. 내가 죽으면 카류 역시 죽을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만 한다. 내가 지 금까지 해 온 일들은 모두 카류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카류를 살리고 싶 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던가! 나는 오로지 그 생각만을 하며 하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순간 뒤 에서 또 다시 강렬한 통증이 느껴져 나는 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하만이 분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보십시오. 아스트라한 님은 폐하를 안심시키고 암살하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식으... 멋대...로......!! ....것이...!! ...아...제....!!" 하만이 무어라 이야기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무 리 정신을 가다듬으려해도 나의 몸은 자꾸 나의 의지를 벗어나고 있었다. 안돼!!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나의 아이를 살려야 해!! 나의 아이를...!! 나의 의지를 거부하는 몸 때문에 가슴이 타버릴 것만 같았다. 어떻게든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든 죽기 전에 하만에게 카류를 살려달라 고 부탁해야 하는데!! 제발 나의 아이를 살려달라고!!! 계속해서 나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그 말! 나의 아이! 나의 아이를! 나의 아이. 나의 아이... 카류리드. 언제나 밝게 웃던 상냥하고 착한 나의 아이의 이름. 네가 웃을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었는지. 이렇게 차갑고 어머니 같지도 않 은 나의 앞에서 언제나 그늘 없이 웃던 너에게서 얼마나 많은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그것을 네가 알까. 나와는 너무 다른 검푸른 눈동자를 가진 아이. 네가 있었기에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네가 존재 함으로서 나도 존재했던 것이다. "카류...리드..." 나는 쥐어짜듯 그리운 나의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좀더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좀더 많이 안아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너무나...사랑한다고 말해 주었다면 좋았을 것을. "카...류..." 나의 의식이 모든 것을 떠날 때까지 나는 그 이름을 읊조렸다. 사랑하는 나의 아이의 이름을. Part. 25 - 유넨 "후후후... 그렇게 좋으니?" "유넨!! 또 그런 흉측한 놈들과 그러고 있느냐. 어서 이리 오너라." "할아버지, 너무 그러지 마세요. 솔직히 좀 그렇게 생기긴 했지만 착한 애 들이에요. 아마 제가 이렇게 해주는 것이 기분이 좋은지 이젠 아주 제 말 을 잘 들어요. 강아지랑 비슷하게 생각하시면 되요." "유넨!"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나는 그만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저 커다란 지렁 이 일 뿐인데 너무 과민 반응이시다. 이제는 저 애들이랑 노는 것도 마지 막이구나. 나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짐을 잔뜩 지고 할아버지를 따 라 산을 내려왔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할아버지와 함께 계속 산 속에서만 살았다. 그러 다가 13살이 되던 해에 파블료프 왕립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고 수도로 내 려가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산에서 내려가 수도로 가게 된 나는 정말 흥 분 상태였다. 수도라면 얼마나 멋진 곳일까. 분명 책에서처럼 기사님과 레이디가 가득한 멋진 곳이겠지. 할아버지는 그런 추잡한 곳은 몰라도 된다고 한번도 산에 서 내려가지 못하게 하셨지만 나는 그 동안 할아버지께 배운 짧은 글읽기 실력으로 할아버지께서 간간이 사오신 책들을 읽어서 이미 수도에 대한 끝 없는 환상을 펼치고 있었다. "다른 인간 따윈 무시해버려라. 유넨. 더럽고 지저분한 물만 들뿐이란다. 넌 그저 구석에 처박혀 공부만 하거라. 그저 검술을 배우고 책을 읽어라. 그것만으로 좋다.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람들과 격리해서 키우고 싶었지만 언젠가 너도 내가 죽고 없어지면 사람들을 만날 수밖에 없겠지. 이렇게 바 보, 멍청이로 키웠다가 나중에 죽고 나서 너에게 무슨 욕을 먹을 지 모르 니까 이렇게까지 해주는 것이다, 알겠느냐? 내가 전대로부터 물려받은 유 산과 평생을 일해 모은 돈으로 기부금을 냈으니 절대로 농땡이는 치면 안 돼!!" "바보, 멍청이라니. 대체 자신의 손자를 그렇게 칭하시는 할아버지가 어디 있어요! 정말 너무 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50세가 되셔서도 정정하게 나무 를 하시면서 무슨 죽는 타령이에요? 걱정 마세요. 이제까지 할아버지랑만 살아왔다지만 누구하고든 잘 사귀도록 노력할 테니 걱정 마세요." "쯧쯔... 내 말 명심하거라. 괜히 산에서처럼 까불지 말고." 나는 수도에 새로 마련한 마치 헛간 같은 집 앞에서 할아버지에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드디어 화려한 수도에 내려오게 되었는데 하필 저런 다 쓰러 져 가는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불만이 차 올랐다. 하지만 할아 버지가 나를 학교에 보내기 위한 기부금을 내느라 돈을 전부 써버렸기 때 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진짜 불만을 토해내지는 않았다. 학교로 가는 길에 둘러본 과연 수도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간간히 보이는 귀족 부인들, 번쩍이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님들. 바로 이곳! 이곳이 수 도로구나!! 그리고 내가 다닐 파블료프 왕립학교에 들어선 나는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 엄청난 높이의 건물이라니. 나는 옆에서 지나가는 시종에게 그 건물이 내가 다닐 교실이 있는 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의 감 격은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이건 뭐야?" 내가 배정 받은 교실의 의자에 자리잡고 있는 나에게 한 잘 생긴 남자아이 가 말을 걸어왔다. 과연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그 생김새부터가 다르 다고 감탄을 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넨이라고 하..." "너 귀족이냐?" "아니요." "이런 구질구질한 옷을 입고 있다니. 너 뭐 하는 놈의 자식이야?"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산에서 나무를 캐시는데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런 의심도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비해 말투 가 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약간 그의 험한 말에 발끈하기도 했지만 사실 내 옷이 다른 사람들의 멋진 옷보다는 안 좋아 보이는 게 사 실이었기에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퍼억! "헉!" "뭐 이런 건방진 게 다 있어. 그 주제에 이렇게 교실 중간에 떡 하니 버티 고 앉아 있어? 저기 구석에 앉아 있는 평민들이 안보이냐? 엉?" "우...우욱... 무...무슨 짓이야!!" 나는 갑자기 얻어맞고는 당연히 화가 나서 그에게 달려들었다. "어어. 이거 더러운 평민이 귀족을 치려드네!?" "야! 죽여!! 밟아!" 갑자기 이해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정말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맞았다. 너무 아파서 중간에 자존심을 버리고 그만해달라고 사정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나를 때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은 사정하는 나를 보고 더 재미있어하며 나를 때리는 데만 열중했다. 중간에 수업을 시작하려는 선생이 들어와서 점잖게 말리지 않았다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나는 학교에 있는 의료 시설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 다. 파블료프 학교를 들어올 때 내는 큰 기부금의 일환으로 무료로 치료를 해주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제대로 된 치료도 받아보지 못하고 그대 로 죽어버릴 뻔했다. 나와 할아버지는 이 학교에 들어오느라 완전히 빈털 터리였기 때문에 치료비를 낼 돈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서 제공되는 높은 수준의 치료를 계속 받으면 서도 나는 쉽게 완치되지 못했다. 어느 정도 움직일만해서 교실로 가면 또 구타당했기 때문이다. 자존심 때문에 끝까지 반항했지만 도저히 상대가 되 지 않았다. 이 학교의 대부분은 귀족이었다. 그들은 돈도 없고 힘도 없으면 서 괜히 반항적인 나를 가지고 노는데 맛을 들였던 모양인지, 나를 완전히 목표로 삼고 괴롭히는데 열중했다. 나는 같은 평민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사실 같이 싸워주길 바랬지만 그게 무리라면 그저 최소한 상냥한 말 한마디 정도는 해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평민들조차 나를 경멸했다. 평민들은 보통 대상인과 갑부의 후계자였다. 그 들에게 나는 같은 평민이 아니었다. 나는 가난해서 학교에 오기 위해 샀던 그 옷 단 한 벌만을 입고 오는, 그들과는 다른 종류의 더러운 평민이었던 것이다. 학교에 들어온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폭력. 경멸의 눈빛. 그리고 무시. 내가 머리라도 좋았다면! 검술 실력이라도 뛰어났다면! 실력으로 저 귀족 들을 눌러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러나 나는 그 어떤 것에도 그리 뛰어나지 못했다. 피 나는 노력에도 나 는 모든 부분에서 보통 수준을 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학교에 오기 전에도 뛰어난 가정교사에게 여러 가지 교육을 받아왔 으며, 매일같이 구타당하는 나와는 달리 항상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나를 뛰어 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비천한 평민! 주제를 모르는 건방진 평민!! 언제나 되돌아오는 것은 평민이 라는 그 말! 내가 그들보다 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는데! 그들과 같은 인 간일 뿐인데! 나는 언제나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짓밟혔다. 그러나 학교를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해 그렇게 평생 모아 온, 그리고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은 돈을 이곳에 퍼부어 주신 나의 할아버지를 생각해서. 할아버지를 제쳐두고서라도 여기서 학교를 포기하면 이미 빈털터리에 힘도 없는 내게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이대로 포기해 버 린다면 나는 정말로 비천한 평민이 될 것이다. 나는 절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거의 오기로 힘겹게 학교를 다녔다. "괜찮으니?" 나는 피투성이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다가 누군가의 말소리를 듣고 힘겹 게 고개를 들었다. 내게 말은 건 녀석은 부드러워 보이는 청보랏빛 머리색 을 가진 잘생긴 남자였다. 이름까지 기억나진 않지만 같은 반의 학생으로 나를 구타하는데 참가하지 않는 소수의 귀족들 중의 하나라는 것 정도는 인식할 수 있었다. 왜 나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지금 괜찮으냐고 물은 것이 맞나? 너무 사람 이 그리워서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멀뚱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자 그는 말끔하게 생긴 얼굴로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한 내가 바보였구나. 자, 가 자. 내가 부축해 줄께."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 나를 부축했다. 내 몸의 상처에서 배여 나온 피가 자신의 깨끗하게 손질된 옷에 묻어 지저분하게 되는데도 그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나는 이 파블료프 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누군가에 게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이름은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 후르부크 백작 가의 장남이야. 세스케인 이라고 불러도 좋아." 세스케인.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나. 검술과 학문에서 언제나 수석을 차지하 는데다가 성격마저 좋아서 언제나 아이들의 중심에 있는 그 유명한 후르부 크 백작 가의 장남. "정말 심하게 다쳤구나. 내 친구들을 용서해 줘.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 록 내가 꼭 널 도와 줄께. 이제까지 그냥 지켜보기만 한 건 정말 미안해. 그래도 전부 내 친구들이라서... 하지만 더 이상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을 것 같아. 이제 와서 이렇게 도와주는 척 한다고 화났니? 왜 말을 안 해?"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나는 혼자였다. 상황이야 어쨌든 그런 그가 나를 도와준다는 데서 작은 감동을 느끼고 있음은 틀림없었다. "...아...아니. 고...고마...콜록..."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한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고맙다는 말을 한 것 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얻어맞아 목이 상했는지 말을 하자 기침이 나왔 지만 그래도 역시 기뻤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하하... 뭘. 어? 뭐야? 너 울려는 거야?" "아...아니야!" 나는 당황했지만 그의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를 놀려댔다. 굉장히 부끄럽기 도 했지만 오랜만에 대화를 한 그 감동을 쉽게 감출 수가 없었다. 그 이후로 세스케인은 그때 약속한 대로 정말 나를 도와주었다. 오늘도 그 는 연례행사처럼 잔뜩 얻어터진 나를 발견해서 치료실까지 데려다주고는 나의 침대 곁에 걸터앉았다. "으응...? 왜 그래?" 언제나 쾌활한 그가 왠지 기분이 나빠 보여 내가 슬며시 묻자 그는 금세 정말 분통 터진다는 듯이 말했다. "아아... 내 동생 말이야. 얼마나 짜증인지 몰라. 굉장히 말을 안 듣는다니 까? 수도에 놀러온 에스문드 가의 어떤 꼬마랑 놀아나더니 5살밖에 안된 그 쪼끄만 녀석이 완전히 삐뚤어져 버렸다는 게 아니겠어." "그... 세미르라는 동생... 말이야?" "크으~! 그래, 다른 꼬마 녀석들 4명이랑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어디서 배웠 는지 못된 장난이란 장난은 골라서 하는 거야. 정말 조금만 더 컸다면 몇 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라니까." "하아. 나는 그런 동생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부러워." "모르는 소리 마! 너도 가져보면 안다니까. 에스문드 백작 가의 꼬맹이! 트 로이 후작 가의 그 꼬맹이!! 다른 귀족 꼬마 녀석들!! 아으... 그 꼬마들을 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에 끌고 가서는 콰악!! 휴우... 내 맘처럼 될 수 있다 면 얼마나 좋겠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세스케인을 보며 나는 슬며시 웃었다. 세스케인은 이 루블로프 학교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그가 나를 도와주고 몇 마디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 기뻐서 거의 세스케 인만을 바라보며 학교에 다니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아... 에구 목말라라." "아, 여기 음료수 마실래?" 내가 건넨 음료수를 받아 들고 세스케인은 음료수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곧 빙긋 웃었다. "아, 고마워. 후후... 너는 너무 착해. 유넨." "뭐...뭘..." "앗! 얼굴이 빨개졌어!! 아하하... 지금 부끄러워하는 거지? 그렇지?" 그는 내가 당황하는 것이 재미있는지 계속 장난을 쳤다. 그렇지만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를 대해주는 그가 오히려 더 좋았다. "허헉!!" "멍청하기는... 그러게 왜 그렇게 끝까지 개기고 그래? 엉? 보통 평민처럼 착하고 싹싹하게 굴면 얼마나 좋아?" 귀족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끝까지 내가 자신들에게 고분고분하게 복종하기 를 바라고 있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땅을 기며 굽실거려야 할 이유가 뭔데. 대체 평민이 어쨌다는 건지. 이 곳은 학교가 아닌가. 나는 이미 이곳에 거 액의 기부금을 내고 정정당당히 들어왔단 말이다. "야! 이젠 좀 그만해라. 정말 유넨 몸이 남아나지 않겠다." 그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세스케인이 다가와서 나를 구타하고 있는 자신의 친구들을 말렸다. "세스... 에휴, 알았다, 알았어." "유넨 괜찮으니?" "으...으으... 응..." 나는 힘겹게 말했다. 이번에 상당히 제대로 맞았는지 말을 하기가 엄청 힘 이 들었다. 매일같이 하는 인사치레 같은 일에 익숙해 질만도 하건만 인간 은 고통에만은 익숙해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으음... 가자. 내가 치료실까지 가는데 부축해 줄께." "아...괘...괜..." "안 괜찮으면서. 뭐, 괜찮으면 안 도와줄래." 말은 그렇게 심통 맞게 하며 장난을 쳤지만, 그는 결국 나를 부축해서는 치료실까지 가게 도와주었다. 내가 평민이라 할지라도 도움을 주는 세스케 인. 그의 그런 좋은 성격은 비단 나에게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세스케인 은 그 상대가 누구든 남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말이라 면 나를 때리느라 정신이 나갔던 귀족 녀석들도 꼬리를 말지 않는가. "고마워... 세...세스." 나는 부축을 받으면서 조심스럽게 그의 애칭을 불러보았다. 나를 때리던 녀석이 세스케인의 애칭을 불렀던 것이 꽤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빙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이 정도야 별거 아니야. 그렇지만 힘들더라도 세스케인이라고 불러줄래?" "으...응." 조금 허탈하고 사실 굉장히 안타까웠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그는 머리도 좋은데다가 친절하기까지 한 후르부크 백작 가의 장남인걸. 이렇게 그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2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맞고 다니고 있었지만 세스케인의 덕택 으로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말할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정말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도 세스케인과 함께 있으 면 맞는 일이 없었다. 나는 책을 한 권 들고 약간 빠른 걸음으로 세스케인이 있는 교실로 찾아가 고 있었다. 세스케인이 언젠가 필요하다고 말했던 책을 도서관에서 찾아냈 기에 그에게 건네주기 위해서였다. 이걸 갖다주면 그가 기뻐하겠지. "아, 세스케인..." "야, 세스. 너 왜 그렇게 유넨이란 건방진 자식을 감싸주는 거야?" 문이 반쯤 열린 교실 안에 있는 세스케인을 발견하고 이름을 부르려던 찰 나, 다른 귀족 녀석이 그에게 다가가 질문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스케인의 대답을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 던 것이다. 나는 잠시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야기를 들었다. 세스케 인이 괜히 평민을 구타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나를 두둔해주길 바랬 기에 그랬던 것 같다. "음, 건방지다니. 유넨이 얼마나 착한지 너희들은 전혀 모르는구나." "뭐가! 그 녀석이 우리들에게 얼마나 건방지게 구는지 몰라서 그래?" 세스케인의 말에 귀족 녀석이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상대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상냥한 세스케인과 그저 저 잘난것 밖에 모르는 멍청한 너희들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으니 나의 태도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휴우... 그러니까 너희들은 안돼. 왜 사람을 대하는 법을 모르니? 그렇게 때리고 못살게 굴면 누가 좋아하겠어? 그런 식으로 굴복시켜도 너에게 이 를 갈게 될 거야." "건방진 평민한테는 그저 매가 최고야. 대체 유넨 자식은 귀족을 존중할 줄 모른다니까." 상대편 귀족 녀석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그러면 안돼! 지금 유넨만 해도 그래. 너희들처럼 마구 때리면 오히려 반 감에 더 대들기만 하지. 하지만 나처럼 조금만 굽히고 들어가니까 이렇게 금세 착해지잖아. 요즘엔 내가 말하지도 않는데 알아서 내가 필요한걸 가 져다주는 일도 한다고." 세스케인의 말에 나는 문득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책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싫어. 평민에게 그렇게까지 해야한다니, 난 절대 싫어. 덜 떨어지 는 평민 따위에게 그런 노력까지 기울여가며 일부러 길들일 생각은 눈곱만 치도 없어." "그런 생각은 안돼. 확실히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떨어지는 인간들이지. 바 로 그렇기 때문에 그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귀족인 우 리들이 무지한 그들을 이해해주고 자비를 베풀어주어야 하는 거야. 그들의 비위를 맞춰줘야 한다는 게 조금 기분 나쁠지 몰라도 아주 조금인데 어때. 그 정도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히 큰 은혜를 얻게되고, 또 거기에 감사하며 복종할텐데 그렇게 때리기만 할 필요가 있니?" 나는 갑자기 멍해졌다. "으음... 너는 너무 착한 거 같아. 세스. 그렇게 평민들의 입장까지 일일이 신경 쓰고 말이야. 보통은 그런 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저 더러운 존 재라 치부하며 거부하기만 하지. 음... 하지만 네 말이 그렇게 틀린 것 같진 않아. 넌 정말 생각이 깊구나. 어차피 그들은 비천한 평민일 뿐이니까 고귀 한 우리들이 조금쯤 은혜를 베풀어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겠지." "그래, 맞아. 이미 평민들이 그렇게 비천하게 태어난 이상 그들보다 높은 자리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넓은 마음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포용해줄 필요 가 있는 거야. 유넨 같은 평민들은 그렇게 함부로 때리거나 하면 안돼. 비 천하다고 때리거나 피하지만 말고 싫더라도 나처럼 조금만 참고 상냥하게 대해 줘봐. 금세 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껄? 지금 유넨의 경우만 봐도 그렇잖아. 우리들이 약간 인내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그들은 끝없이 감동 하게 되고 반항은 커녕 언젠가 목숨을 걸고 충성을 바치는 둘도 없는 충복 이 되는 거야. 그러니 이정도야 친절하게 행동해 주어도 좋잖아? 상대는 평민일 뿐인걸." 세스케인이 뭔가 말을 더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아니, 세스케인은 옳았다. 나는 그의 작은 친절에 너무나 고마워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일이라면 뭐 든지 들어주려고 했다. 지금만 해도 세스케인이 시킨 것도 아닌데 일부러 책을 갖다 주려하지 않았는가. 그래, 그전에도 나는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나는 그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그래서 세스케인이 자신의 애칭을 부르지 못하게 했을 때도 그저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지나갔던 것이다. 그는 대단 한 사람이니까 말을 걸어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한다고 생각한 것 이다. 그것은 반대로 나는 비천한 놈이니까라는 말도 된다. 갑자기 역겨워졌다. 그대로 계속 나갔다면 어쩌면 나는 세스케인을 주인으 로 모시려 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모 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세스케인의 작은 친절에 그렇게 굶주려 했는지 모 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스스로를 그렇게 비천한 평민이라 생각해 왔는지 모르겠다. 그토록 얻어맞으면서도 나는 비천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버텼는 데, 단지 세스케인의 몇 마디 말에 무너져서 스스로를 비천하다고 낮추어 버린 것이다. 세스케인은 결코 악의가 없었다. 오히려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 나의 사이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두꺼운 벽이 자리하고 있었 다, 신분이라는 벽이. 세스케인에게 나는 같은 종족인 인간이 아니라 고귀 한 귀족과 비천한 평민이라는 전혀 다른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 스케인은 호의는 비천한 평민에 대한 호의였던 것이다. 귀족들은 결코 평민을 인간이라 보지 않는다. 세스케인은 상처 입은 인간 인 나를 당연히 돕고, 또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더러운 평민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었던 것이다. 세스케인의 행동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친절 이 아닌, 고귀한 귀족으로서 비천한 평민에게 베푸는 자비였다. 마치 인간 이 개를 주는 그런 자비. 세스케인은 반발하는 평민을 구타하는 대신 도리어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 고 그 작은 친절에 감동하여 자신의 발에 입맞추는 평민에게서 구타할 때 와는 차원이 다른 정복감과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나는 고 귀하신 귀족이며 너는 비천한 평민이라는 그런 우월감을! 귀족이란 그런 것이구나. 귀족이 평민에게 대하는 친절한 행동은 그런 의 미였구나. 끔찍했다. 내가 지금껏 그런 존재에게 위안을 얻고 있었단 말인가. 나는 이 제껏 마치 개처럼 세스케인에게 고마워하고 복종하려 했던 것이다. 나의 세계가 무너졌다. 할아버지가 처음 나에게 경고했던 것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원래 세계엔 인간이란 종족이 존재하지 않았다. 귀족과 평민과 농노라는 종족이 존재할 뿐이었다. 동화 속에 나오는 기사님과 레이디는 우리들과 같은 종족인 인간이 아니라 귀족이라는 다른 고귀한 종족이었다. 그래서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나는 이곳 수많은 고귀한 귀족과 지체 높으 신 평민들의 쉼터인 파블로프 학교에 들어오고 말았고 귀족들과 맞먹으려 했으며 그렇게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려 마침내 고귀 한 분의 자비를 얻게 되는 처지에까지 온 것이다. 13살 때 처음 세상과 사람을 접하고 나서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진정한 세계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일 이후 나는 모든 귀족들에게 착한 평민이 되었다. 부탁하는 일은 물 론이거니와 말하지 않아도 필요한 것을 대신 준비해주는 정도의 일은 언제 나 했다. 그들이 그렇게 이것을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자고 생각했다. 이렇 게 자존심을 구기고 비굴하게 복종하는 척 하는 것이 그들의 역겨운 친절 을 받는 것 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나는 최소한 마음만은 그들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되었다. 조금이라도 귀족들의 친절을 받고 싶지 않았다. 고분고분해져 건드리는 재 미가 없어진 나는 대부분의 귀족들의 장난거리가 아니게 되었고, 크게 맞 을 일이 없어진 나는 더 이상 세스케인의 친절을 그렇게 자주 받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결코 비천한 자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평민이 비천할지라도 나만 은 비천하지 않다. 그러므로 귀족들의 친절을 받지 않아도 충분하다. 아니, 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아니! 그렇게 할 수 없는 자리에 오르고 말겠다. 나는 언젠가 귀족이 될 것이다. 그들의 역겨운 친절 따윈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모두가 인정하는 그런 고귀한 종족으로 올라서고 말 것이다. 귀족 따위 너무나 역겹지만 그렇게 해야만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되어 보 이겠다. 진정한 세계에 대해 깨달았을 때 나는 그렇게 결심했다. "여러분, 정말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지요. 오늘 아룬더스 축제가 끝난 후 폐회식 때 이 나라 유일의 8서클의 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이 마법 시범을 보여주신 답니다!" 내가 17살이 되던 해, 졸업을 코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마법사라는 존재 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8서클의 대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을. 이 대륙에서 도 단 5사람 존재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 하나인 아르디예프.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인물을. 그가 귀족이든 아니든 충분히 존경받을만한 가치가 있 는 인물을.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단상 위에 선 아르디예프 님은 그리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나와 많은 아이들은 그분의 그런 표정에도 아랑곳 않고 그 분이 시전해 줄 마법을 기대하고 있었다. 아르디예프 님이 마법서를 펴고 뭔가를 하시는 동안 나는 뭔가 이상한 기 분을 느낄 수 있었다. 심심할 때마다 내가 언제나 조금씩 움직여왔던 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한동안 학교 생활에 절어 그런 짓을 할만한 여유가 없었 지만, 그래도 이 느낌을 잊을 리가 없다. 이렇게 엄청난 양의 그 무언가가 이렇게 움직이고 있는데 내가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않는가. 이렇게나 놀 란 나의 반응과는 달리 다른 아이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아르디예프 님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곧 그 무언가가 단상 앞에 서 있는 아르디예프 님의 의지에 따라 움 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거대한 불덩이로 변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놀라운 광경에 나는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 다. 언제나 나도 저것을 움직이며 놀긴 했지만 저렇게 대량으로 움직일 수가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불덩이로 만들다니! 저것이 마법사라는 존재란 말 인가!! 나는 그 마법 시범을 본 후 빠르게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리 고 언제나 하던 것처럼 그것을 움직여 보았다. 가능한 한 많이 움직이려 용을 써보았지만 아르디예프 님의 그 양에 비하면 그야말로 개미 눈물 만 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지는 현상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끙끙거리고 있는 나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너무 그 일에 열중하고 있어서 나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너는...!" 누군가의 신음성과 같은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제야 겨우 내 곁에 누군가 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황급히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이 대 마법사 아르디예프 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르디예프 님은 이렇게 소량에 불과한데도 가까운 곳에서 마나가 움직이 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근처에 마법사가 없다는 사실을 의아스럽게 여겨 여기까지 와서 나를 발견한 것이다. 나는 처음으로 나의 재능을 발견했다. 마나를 느끼는 재능. 그것도 여느 귀 족들이 가질 수 없는 그런 천재적인 재능! 그렇게 나는 아르디예프 님께 발탁되어 보통 귀족들도 들어가기 힘든 생명의 궁에 약관 17살의 나이로 최연소의 기록을 세우며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처음으로 귀족들을 실력으 로 누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드디어 비천한 존재에서 실질적으로 벗 어나게 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우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 낼 수 있었 다. 나는 아르디예프 님의 총애 받는 견습 마법사였다. 나의 마나를 다루는 능 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르디예프 님은 내가 평민이 라고 내치지 않았으며, 역시 평민 주제에 너무나 큰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질시하는 일도 없었다. 약간 괴팍하지만 그는 과연 8서클의 대마법사이자 현자 아르디예프였다. 하지만 나의 마법수식을 계산하고 이용하는 능력은 그리 좋지 못했다. 보 통 사람들처럼 나 역시 그 복잡한 숫자들의 엮어짐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때에 따라 변하는 그 복잡한 수식을 이해해야만 그 때 아르디예프 님이 했던 것처럼 대량의 마나를 움직여 불덩이를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그래서 아르디예프 님조차도 따라오지 못하는, 그 누구보다도 능 숙하게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이 능력은 제대로 빛을 볼 수가 없었다. 3년 이 지나도록 여전히 1서클의 마법수식 밖에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 론 1서클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마스터했고, 또 그 누구보다도 뛰어났지만 1서클만 뛰어나다고 누가 칭찬해 주겠는가. 아르디예프 님에게는 나 이외에도 아끼는 제자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는 하르몬이라는 자였다. 그는 아예즈 공작 가의 장남, 거기에다가 마법의 재 능까지 있는 자였다. 그리고 역겹게도 옛날의 세스케인처럼 평민을 도와주 면서 희열을 느끼는 타입이었다. 언제나 각종 귀족들에게 치이는 나를 구 해주는 이른바 '정의의 역'을 하는 자가 바로 하르몬이었던 것이다. 여러 마법적 능력에서 나는 그보다 훨씬 우월했건만 고귀한 공작 가의 장 남이신 하르몬의 눈에 나는 여전히 자비를 베풀어주어야 할 비천한 평민일 뿐인 모양이었다. 생명의 궁의 그 어떤 귀족들보다도 그 하르몬이라는 놈 이 가장 싫었지만 아르디예프 님의 애제자로서 우리들은 붙어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생명의 궁에서까지 이런 놈과 함께 있어야 하다니. 그렇게 3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이 왕국의 제6왕자가 생명의 궁에 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겨우 10살 된 어린 왕자가,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나조차도 17살이 되어서야 겨우 들어올 수 있었던 이 생명의 궁에 말이다. 아르디예프 님은 그 아이의 마나 수련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하며 가장 능력이 뛰어난 나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황당해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이 능력을 겨우 10살 된 꼬마에게 쓰라고? 그래 서 마법사로 만들라고? "네, 알겠습니다. 아르디예프 님. 왕자님의 수련을 돕게 되다니 정말 영광 입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르디예프 님은 그런 나에 게 힘내라고 말하고 왕의 명에 따라 그 왕자의 수업을 도와주러 방을 나섰 다. 이미 왕자에 대한 소문이 자자하게 퍼져 있어서 나는 금방 그 왕자에 대하 여 알 수 있었다. 그 왕자는 천재라고 한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해서 겨우 10살에도 생명의 궁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머리가 너무나 좋아서 10살 짜리 아이가 그 마법수식을 풀 수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과연 고귀하신 귀족들은 천재라도 차원이 다른 천 재만이 존재하는구나. 나는 이론 수업을 마치고 그 왕자를 찾아 다녔다. 그 왕자가 얼마나 천재 적인지 한번 보고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서관 구석에 서 있는 왕자 를 발견했다. 천재여서 인지 8서클의 수식이 담긴 책을 들고있는 모습의 왕자를 말이다. "왜 벌써부터 그렇게 어려운 책을 보시죠? 귀여우신 왕자전하?" 나는 그만 약간 비꼼이 들어간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작고 귀여운 손으 로 8서클의 마법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가소롭게 보였던 탓이다. "그냥 제일 어려운 건 어떤 것일까 하고... 하하... 그냥 눈에 띄어서 꺼내본 것뿐이에요." 설마 내 말의 비꼼을 알아챈 걸까. 왕자는 약간 눈썹을 꿈틀하다가는 곧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왕자는 여전히 책 을 도로 꽂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이 정말 우스워서 다시 한번, 이번 에는 아주 정중하게 충고해주었다. "그러셨군요. 그렇지만 마법의 수식이란 체계적으로 배워야만 다음 단계를 이해 할 수 있답니다. 제가 좋은 책을 구해드릴 테니 그건 다시 꽂아두고 저를 따라오세요." "무슨 말을 하시고 싶으신 지는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저 이 책을 읽음으로서 스스로가 목표로 하는 학문의 가장 높은 경지의 대단함을 느끼 고 마음을 다잡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제가 무슨 책을 읽던 내버려 두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 역시 모든 일에 순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왕자의 날카로운 어조로 너무나 조리 있게 내뱉는 말에 놀라고 말았 다. 나의 말에 가시가 있는 것을 알아챘을까? 아니면 그저 자신을 무시하 는 듯해서? 그렇더라도 정말 10살의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대사인가? 머리가 좋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만은 아닌 듯한 생각이 어렴풋 들었다. 나 는 입 조심을 해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다. 언제나 착하게 행동하는 그것 이 우월감에 사로잡힌 귀족들을 대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셨군요, 제가 너무 전하를 무시한 듯한 행동을 한 것 같아 죄송스럽 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책을 읽으면 성취가 빠른 것도 아시겠지요? 제가 얼마 전에 읽은 좋은 책이 있답니다. 그것을 알려드릴 테니 같이 가시지요. 물론 그 책도 가지고 오세요." 나는 웃으며 왕자에게 내가 읽었던 쉽고 정리가 잘된 책을 추천해주겠다고 말했다. 왕자는 주춤하다가 곧 나를 따랐다. 다행히도 나의 고분고분한 태 도에 왕자는 상당히 만족한 듯 싶었다. 매일 만나야 할 이 왕자에게 미움 을 받는다면, 그들의 기준에서 소위 말하는 평민나부랭이에 불과한 나는 언제 이 생명의 궁에서 비명횡사할지 모르는 일이니 이 정도의 비굴함은 필수사항이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그 왕자와 밖으로 나오고 있는데 문득 멀리서 거친 발걸음으로 이쪽을 향하는 하르몬을 볼 수 있었다. 원래는 함께 점심을 먹 으러 급식소로 가기 위해 항상 만나던 동문에서 기다리고 있어야 했지만, 왕자를 찾는답시고 언제나 만나던 약속장소에 나가있지 않아서 하르몬이 몸소 나를 찾아 나선 모양이다. "유넨!!!" 과연 정의파 하르몬! 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내가 이 왕자에게 무슨 짓이 나 당하지 않았나 싶었는지 놀란 표정을 한 채 헐레벌떡 이쪽으로 달려왔 다. 그는 상당히 왕자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지 계속 아니꼬운 표정을 지으며 왕자에게 툴툴거려 댔다. 역시 공작 가의 아드님이다 보니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왕자는 정말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 툴툴거리 는 하르몬의 말을 모조리 되받아 쳐내며 오히려 하르몬을 골탕먹이는 것이 었다. 나는 어느 정도 선에서 싸움을 말리기 위해 순진한 척하며 왕자에게 우리 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권유했다. 당연히 왕자가 견습 마법사들이나 먹는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저절로 떨어져 줄 것이라는 예 상에서였다. 내 말에 하르몬도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왕자는 오히려 좋아라하며 우리들에게 붙어버렸다. "전하께서 그런 음식을 드실 수 있으십니까? 거긴 아직 2서클 이하의 견습 마법사들을 위한 급식소입니다. 전하의 입맛에 맞을만한 음식은 없을 줄로 사려되옵니다만?" 황당해하는 나 대신 고맙게도 하르몬이 왕자에게 한마디 해주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전 비위가 좋아서 뭐든지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 고, 언제든지 잘! 놀고 한답니다! 하르몬 선배님이 이렇게 매번 저를 걱정 해주시니 정말 뭐라 감사의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역시 보통 내기의 왕자는 아니었다. 우리들은 급식소로 왔다. 왕자는 언제 이런 곳에 와본 적이라도 있는 듯이 알아서 식판을 들고는 쫄래쫄래 음식을 받는 곳으로 갔다. 그리고 키가 작 아서 고개만 빼꼼이 내놓고 음식을 기다렸다. "음? 아니, 이 꼬마 손님은 누구시지?" 이런, 아무 것도 모르는 식당 하녀가 그만 왕자에게 반말을 해버렸다. 이제 죽었군. 모든 이에게 축복을 내려주시는 신께 한번 빌어볼까. 하녀가 편하 게 죽임을 당할 수 있을 정도로 저 왕자가 자비롭기를 말이다. "네에~~ 카류리드라고 해요. 카류라고 불러주세요. 헤헤... 배고프니까 많이 많이 주세요~!" 그러나 신은 그리 좋지 못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그 왕자가 갑 자기 하녀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하는 걸 보면 말이다. 아주 꼬여도 배배 꼬인 왕자다. 저렇게 가지고 놀다가 트집에 트집을 잡아 때려죽일 심산인 가. 으음, 머리가 좋은 만큼 비천한 아랫것들을 가지고 노는 수완도 뛰어나 구나. 아르윈 왕국의 평민들에게는 정말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군! "에구~ 귀엽기도 하지. 이 아줌마가 많이많이 주마~ 자, 여기 토마토 하나 더 얹어줄 테니 맛있게 먹어라. 그건 그렇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니? 카 류?" "헉! 카류리드 전하? 카린!! 어제 들어온 아이라면 카류리드 전하라구요! 아이고, 전하!! 미천한 것들의 모르고 저지른 짓이니 제발 이 무례를 용서 해 주십시오!!" "괜찮아요, 아줌마. 그보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 혼자 먹기가 쓸 쓸해서 여기서 먹기로 했거든요?" 이제야 눈치를 챈 하녀들이 난리를 쳤지만 왕자는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고 계속 하녀들에게 존댓말을 고수했다. 정말 10살 짜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치밀한 녀석이다. 오싹할 정도인걸. 저 녀석이 천재라는 말 진실인 지도 모르겠다. 아랫사람 괴롭히기 천재. "카류리드 전하께서 괜찮으시다 하지 않나! 모두들 어서 일이나 하거라. 카 류리드 전하께서 원래 장난을 좋아하셔서 그런 것뿐이니 그렇게 두려워 할 필요 없다. 어서 제자리로 돌아가라." 그때 하르몬이 나서 낮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과연 정의롭고 강직한 하 르몬. 그렇게까지 하녀들을 생각해 주다니. 왕자 앞에서도 쫄지 않는 정의 의 기사. 아니, 마법사? 어쨌든 굉장한 놈이다. 저러다 왕자가 홱 돌아버리 면 아무리 공작 가의 아들이라도 트러블이 생길텐데 말이야. "그..그래. 어서 일들 보세...보거라. 이런 일에 신경 쓸 필요 없다. 음.. 그리 고 내일부터 이곳에 온다는 건 사실이니 그렇게 알아라." 그러나 웬일인지 왕자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하르몬도 상당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서 왕자에 대한 적대감이 조금 풀어졌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시녀들을 놀리면서 노시면 참으로 즐거우신 모양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하르몬은 아까 그 일로 기분이 조금 풀어진 것 같았지만 어떻게든 비천한 평민에게는 고귀한 귀족으로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며 자비를 베풀 어야 한다는 사상을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끝까지 왕자의 꼬리를 물 고 늘어졌다. "하...하르몬 선배님..."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강론이 나올까봐 나는 하르몬을 말리려 했다. "전하는 그런 일이 재미있으신 지 몰라도 저들은 전하의 말 한마디로 인해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토록 총명하다고 알려지신 전하께서 왜 그것을 이해 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겐 말릴만한 힘이 없었다. 이제 하르몬은 왕자에게 설교까지 하며 아주 막 나가고 있었다. 귀족인 하르몬의 입에서 저런 재수 없는 대사를 듣자니 아주 귀를 떼어내고 싶을 정도였지만 이대로 왕자에게 대들게 내버려두면 하르몬의 인생을 끝장낼 수 있을 지도 모르니 한번 내 버려둬 보자고 생각하고 나는 입을 닫았다. 그러나 사실 아예즈 공작 가의 장남인 그가 끝장날 리도 없지. 그러니 저렇게 오만 방자하게 나가는 게 아니겠어. "...제가 확실히 잘못했습니다. 나중에 저 시녀들에게 가서 사과 할 테니 지 금은 음식이나 먹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나 왕자는 화를 내는 대신 한마디도 지지 않고 하르몬에게 말했다. 사 과한다고? 고귀하신 몸으로 고개를 숙이겠다 이건가? 그렇지만 '음식이나' 라는 말에 강세를 주는 것 보니 그냥 저렇게 흐지부지 넘어가고 싶은 모양 이군. 빌어먹을 놈 같으니. "카류 전하, 그리고 하르몬 선배님. 진정하십시오. 정 그렇다면 점심식사 후에 카류 전하께서 시녀들에게 사과하시는데 함께 가보는 것이 어떨까요.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떠냐. 왕자야. 이러면 빠져나가기 힘들겠지? 잘못하면 저 왕자에게 밉보여서 어떤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르지만 저 꼴을 보고 그냥 넘어가면 오장육부가 뒤틀려서 3일을 못 견디고 쓰려질 것 같아 하르몬과 왕자의 말싸움에 슬그머니 끼어 들어 순진한 척 말했다. "유...유넨!!" 하르몬은 당황하여 외쳤다. 아마 언제나 귀족들에게 순종적이었던 내가 갑 자기 이런 말을 해서 놀란 모양이다. 게다가 그 웃기지도 않는 정의감에 내가 무슨 일을 당할까 걱정을 한 것이기도 하겠지. "그래요! 그러면 되겠군요!! 어서어서 먹고 주방 아줌마...아니, 시녀들을 찾 아가자고요!! 그걸로 됐겠지요? 하르몬 선배님?" 그러나 언제나 내 예상을 뒤엎어버리는 왕자는 너무나 굉장한 발견을 했다 는 듯 말했다. 그 급식소에서 있었던 사건만이 아니더라도 이 왕자는 정말 상상을 뒤엎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멍청한 왕자라는 말은 사실상 철회해야겠다. 왕자는 10 살 짜리 어린애치고는 정말 머리가 비상했던 것이다. 마법 수업에서 요점 을 정확히 집어내어 질문하는 사고력, 무엇보다 저 하르몬을 말로 눌러버 리는 그 언어 능력!! 말싸움에서 25살의 성숙한 어른을 10살의 어린애가 이긴다는 것은 보통은 정말 어불성설이다. 그것도 상대가 하르몬이라면! 하 르몬은 정의의 기사, 아니 마법사다. 정의의 편에 서서 속 좁은 귀족들을 교화시키기 위해서는 언제나 청산유수 같은 말발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늘도 나는 풀밭에 앉아 그 왕자와 하르몬의 피 튀기는 -솔직히 하르몬만 - 말다툼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것을 삶의 기쁨과 보람으로 여기는 귀족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지금은 하르몬이 있으니 덜 괴롭힐지도 모르겠군. 그러나 저들은 교묘하게 왕자를 걸고넘어 지며 나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2년이나 되는 시간이 흐르니 저 돌덩이와 다름없는 머리에서도 새로운 방법이 하나 둘씩 개발되는 모양이다. "평민?? 유넨 선배님이 평민이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카류 전하. 저는 평민입니다." 나는 놀란 표정의 왕자를 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저 냉철한 입에서 욕지거리가 나오는 장면을 볼 수 있겠구나. 하르몬, 나에게 존경의 표시라도 하는 게 어때. 네가 못했던 것을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룩할 거거든. "우우.... 평민이라... 유넨 선배님이 평민이라니... 혹시 생명의 궁에 들어온 평민은 유넨 선배님이 처음인가요?" 그러나 저 왕자는 나의, 아니 인간의 예측을 불허하는 공간에서 살고 있었 다.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내게 해온 것이다. "아닙니다. 옛날에도 아주 가끔씩 저처럼 평민 출신인 사람들이 들어온 적 이 있었습니다." 일단 내가 아는 대로 그 왕자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들은 전부 어떻게 되었지요?" "대부분 7서클의 마법사가 되셨습니다. 8서클의 대마법사가 되신 하버트 님도 계시지요." "와아~~!! 굉장하네요!! 전 앞으로 평민만 보면 무조건 존경심을 품게 될 것 같아요. 아시다시피 북방의 소수민족국가들의 침략을 1년만에 완전히 일소시킨 레이포드 경도 평민출신이잖아요? 게다가 얼마 전에 아이시스 남 작 작위 받은 게릭이라는 분도 평민 출신인데 엄청나게 박식하신 분이세 요! 제가 그 분을 뵙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게다가 옛날의 평민이었던 마 법사들도 전부 7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되셨다고 하니!! 유넨 선배도 혼자 서 마나를 깨우쳤죠?! 우우응~~ 평민들은 하나같이 너무 대단해요." 왕자는 갑자기 순진한 척하며 그렇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문득 뭔가 생각 난 척하며 나를 괴롭히러 왔던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아하~! 그러니까 제가 이곳에서 유넨 선배님의 마법 공부를 방해할까봐 저를 유넨 선배님에게서 떼어놓으시려고 그러시는군요!! 어쩔 수 없지요. 저는 아직 어리니까요. 제가 부족하다는 거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그렇 다고 그렇게 말을 돌려 비꼬아서 말하시다니... 제가 비록 어리지만 그 정 도 눈치는 있습니다. 정말 섭섭하군요. 최대한 방해하지 않게 유넨 선배님 곁에 있을 테니 그만 가주시겠어요?" 젠장, 미치겠군!! 이 왕자도 하르몬과 같은 부류였구나!! 그것도 하르몬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단수! 속이 다 울렁거려서 어떻게든 자리를 뜨고 싶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생명의 궁의 생활은 그날로 끝이다. 참자. 내가 참아. "예에? 그런!! 전하! 그게 아니라!!" "그만두세요!! 그만 가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렇게도 제게 모욕을 주고 싶으 신 것입니까?" "카...카류리드 전하!!!" "당장 가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들의 일은 잊고 싶은 기억이 되 겠군요!" 그렇게 귀족들이 곤란한 표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하르몬 부 류의 정의 편으로 그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왕자는 우리들에게로 고 개를 돌렸다. "우흠!! 우리도 이젠 공부해요. 공부하려고 모였는데 계속 딴 짓만 하고 있 네요. 방해를 해서 죄송해요. 유넨 선배님." "아..." 그리고 상쾌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네...네... 카...카류 전하... 호의에 감사드..." 그 미소를 보자 눈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냥 내 눈알이 라도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꾸욱 참고 그에게 감사의 표시를 했 다. 그러나 저 얼굴을 보고 자연스럽게 감사의 말이 나온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말을 더듬어 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흐흐흐흐...아하하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하르몬이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아닌게 아니라 진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저것이 고귀하신 공작 가의 장남의 웃음소리란 말인가. 웬 만하면 당황하지 않는 왕자도 이번만은 말을 더듬으며 황당함의 표시를 했 다. "그래...그렇군요. 하하하... 카류리드 님. 하하하... 정말...정말 통쾌했습니다!! 지금까지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제가 오해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네에?" 하르몬은 정말 잘했다는 듯 왕자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정의 편끼리 똘똘 뭉칠 셈이로구나. 아아, 정말이지 자비로우신 신이시여. 젠장!! 아까 그 귀 족 같은 덜떨어진 놈들 사이에 있는 것도 싫지만, 이런 놈들은 더 끔찍하 단 말이다! 하필 이런 놈들 사이에 내가 끼어 있을 건 또 뭐냐. 정말 미칠 것 같다. 대체 귀족들이란 놈들은 평민을 괴롭히거나 아니면 구해주고 우 월감을 느끼는 걸 즐기는 두 부류밖에 없냔 말이다. "대체 생명의 궁에 들어오는 녀석들은 인성교육이 안돼 있어요!! 그래도 이 렇게 전하께서 유넨을 도와주시니 조금이나마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군요. 카류리드 전하는 최소한 생각하는 면에서만은 확실히 생명의 궁에 들어오실 자격이 되시는 분입니다. 지금까지의 무례, 용서를 받고 싶 습니다! 저의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괜찮습니다. 이미 전부 잊었으니까요. 그리고 저도 유넨 선배님을 좋아하 는 걸요. 어서 일어나세요. 으음... 그러면 이제부터 저를 괴롭히지 않으실 거지요?" "후후후... 여부가 있겠습니까." "좋아요. 그럼 하르몬 선배님도 카류라고 불러 주세요. 앞으로 친하게 지냈 으면 좋겠어요. 하르몬 선배님! 그리고 유넨 선배님!!"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 그 말을 거역한단 말인가. 이 빌어먹을 왕자야! 남 을 가운데 두고 멋대로 지껄이지만 말아주었으면 좋겠다. 젠장! "감사합니다, 카류 님." 그날 따라 저주스러워 보이는 태양을 등지고 있는 카류 왕자를 향해 나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셋이서 도란도란 앉아 수식 공부를 하던 햇볕이 상당히 따스하던 날이었다. "맞지요?" "헉!" "허헉!" 하르몬과 나는 헛바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저 말발이 조금 세다고만 생각했던 10살 짜리 어린 왕자가 4서클의 수식을 풀어버린 것이다. 잠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왕자에게 하르몬이 코딱지 만한 꼬맹이 주제에 무리하지 말라고 막말을 했더니 열을 받은 왕자가 몸으로는 안되니까-진짜 로 쪼그마하니까-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소리치며 하르몬이 풀지도 못하면 서 괜히 끼적이고 있던 수식을 뺏어가서는 금세 휙 풀어 답을 보여 주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 수식을 풀어버린 후 우리가 어떻게 4서클 수식 을 그렇게 풀 수가 있었느냐고 추궁하자 카류 왕자는 당황하면서 우연이니 어쩌니 하며 우물거렸다. 그리고 다시는 우리 앞에서 4서클의 수식을 풀어 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곧 카류 왕자가 그 수식을 풀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얼마 후 왕자는 2서클 수식도 풀지 못해 끙끙거리는 나 를 재수 없게 마치 안타깝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곧 이상한 방법으로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너무나 놀랐다. 왕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획기적인 방법으로 단시간에 수식을 풀어 보이는 것이 아닌 가. 사고력? 언어능력? 말발? 그딴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저 왕자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19살이다. 그렇게 떨어지는 머리도 아니다. 그런데도 아직 2서클 수식이 어려워서 2서클 마법사가 되 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왕자는 뭔가. 그저 푸는 것이 아니었다. 새로 운 수식을 개발해내었던 것이다! 나는 이 생명의 궁에서 그 누구보다 진전이 빠른 마법사이다. 마나 유동 능력이 누구보다 뛰어났기에 비록 마법수식을 이해하는 능력이 범인과 비 슷해서 그렇지, 나는 이 생명의 궁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소위 천 재였다. 19살에 1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라니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 르몬만 해도 이제 25살에 1서클의 마법사인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하르몬 같은 귀족들의 역겨운 친절에도 어느 정도 참을 수가 있었다. 하르몬이 저 혼자 무슨 생각을 어떻게 하며 나를 대하든 간에 나는 사실상 하르몬보다 뛰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왕자는 달랐다. 비록 마나를 움직이는 능력이 없었지만 저 녀석 은 정말 천재였다. 녀석은 그런 그 지식을 나에게만 몰래 가르쳐주곤 했다. 내가 수식 하나를 받아들고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뻑일 때마다 카류 왕자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며 웃었다. 저게 누굴 바보로 아나? 아무 것도 아니기는! 아무리 천재라고는 하지만 이 수식을 만들어내기까지 얼마나 큰 노력과 대가가 필요했을지 상상도 못 할 정도인데. 내가 아는 몇 가지만 발표해도 이 시대의 마법은 대 변혁을 일으킬텐데. 나는 그 녀석이 간간이 가르쳐준 몇 가지 수식을 이용해서 획기적인 발전 을 거두었다. 시간을 두고 미친 듯이 이 수식의 개발에 연구에만 몰두한다 면 더욱 큰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좀더 가르쳐 달라고 떼쓰고 싶기 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순진하고 착한 이미지였던 내 모습이 깨질지도 모르 니 그저 왕자가 기분이 나서 가르쳐 줄 때까지 손톱을 깨물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이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마치 그때 같았다. 내가 꼬리를 내리고 세스케인의 친절을 바랬던 그때와 같았다. 나는 힘없고 비참한 존재였고 그래서 세스케인의 친절을 받으며 기뻐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는 세스케인의 우월감을 충족시켜주는 존 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생명의 궁에 와서는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여 느 귀족 따위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천재였다! 그런데 저 왕자 가 온 뒤로는 나는 또다시 귀족의, 저 카류 왕자의 친절을 바라고 있는 것 이다. 나는 도저히 저 녀석처럼 수식을 만들어 낼 수 없었고, 때문에 나에 게 수식을 가르쳐주는 친절을 베풀어 줄 것을 너무나 바라고 있었다. 나는 또다시 추락해 버렸다. 또다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또다 시 저 귀족에게 우월감을 충족시켜주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귀족 중에서도 최고의 귀족인 왕족, 거기에 가공할만한 두뇌. 어째서 신은 저런 녀석에게 저런 축복을 내려주는가. 왜 나는 또다시 귀족들의 발 밑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가. 최근 카류 왕자는 약간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1년이 다되어가고 있는데도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최고 권력을 지닌 왕 자의 신분에, 인간 같지 않은 머리통을 지닌 그런 녀석이 마법 실력까지 갖췄다간 나는 그 자비로우신 신을 소멸시키기 위한 모험을 떠났을지도 모 른다. 그런데 카류 왕자에 대한 마나 유동에 대한 화제가 나의 마나 유동에 대한 쪽으로 뒤틀리면서 다시는 생각하기도 싫은 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몹시 배알이 뒤틀려 그 말을 하기를 약간 망설였지만 이 정도 일로 나의 이미지 를 깰 수는 없는 일이기에 상냥하게 그 왕자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학교? 평민도 학교에 다니나요?" "물론이지요. 기부금만 많이 낸다면 누구든 학교에 다닐 수 있답니다. 모르 셨나요? 카류 님께선 학교에 다니지 않으실 건가요?" 아무나 다닐 수는 있지. 편하게 다니는지 짐승처럼 다니는지는 다르지만 말이야. 나는 약간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그 어조가 약간 심한 듯해서 걱 정이 됐지만 내가 워낙 착하게 행동해와서인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 듯했다. "카류 님은 왕족인데 학교를 다니실 리가 없지 않니, 유넨." "오옷? 저...저도 학교에 다닐 수 있나요??" 갑자기 카류 왕자가 눈을 빛냈다. 대체 학교 같은 곳에 다니는데 왜 저렇 게 기뻐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다. "어찌됐든 왕족도 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학교는 11, 12살부터 입학할 수 있으니 전하께서도 내 년부터는 학교에 들어갈 수도 있으실 것 같군요. 만약 들어 가신다면요." 너무나 기뻐하는 카류 왕자를 보고 나는 약간 말을 더듬었다. 언제나 생각 하는 거지만 저 왕자는 정말 이상한 놈이다. 대체 저 머리통엔 뭐가 들었 기에 저런 예측불가의 행동만 하는지 기회만 된다면 한번 뜯어보고 싶구 나. "...음, 학교에 다닌 다라... 좋은 생각일지도 모르지요. 학교라는 곳엔 의외 로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거든요. 저만해도 학교에 다니면서 있었던 일이 지금까지 추억이 되어 남아 있지요, 후훗." 머리에 든 건 사랑과 정의 밖에 없는 1서클의 견습 마법사 하르몬이 내 말 의 뒤를 이었다. "그렇군요. 학교라, 저 꼭 학교에 다녀보고 싶어요!! 학교에 가면 제 또래 아이들도 많이 만나 볼 수 있겠지요?" "물론이지요. 학교엔 보통은 12살부터 17살까지의 아이들에게 기초적인 검 술이나 지식을 가르쳐준답니다. 그러니 카류 님과 비슷한 또래를 많이 볼 수 있으시겠지요. 아마 전하가 내년에 들어가신다면 가장 어린아이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 하르몬과 카류 왕자는 하하하 거리며 즐겁게 웃었다. 카류 왕자의 얼굴에 서 새겨져 있던 우울이라는 두 글자가 어디로 갔는지 바로 삭제되어 버렸 다. 그리고 얼마 후 카류 왕자가 아무런 성과 없이 생명의 궁을 나갔다. 아니, 이곳에서 수많은 고위마법사들을 대부분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놓고 나 가는 것을 보면 그렇게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군. 어쨌든 나는 그 녀석이 생명의 궁에서 나간 후에도 소식을 꼬박꼬박 챙겨들었다. 다른 마법사에게 정이 많은 척 하며 물어보기도 하고 성을 다니는 시종에게 물어보기도 하 면서 말이다. 그 녀석의 소식은 처음에도 그랬던 것과 같이 상당히 알기가 쉬었다. 카류 왕자는 어디서든 주목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 녀석의 주위엔 항상 많 은 인간들이 모였다. 마치 과거의 세스케인처럼 카류 왕자는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중심에 서있었다. 성내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카류 왕자가 그렇게 착할 수가 없다느니, 그렇게 똑똑한 꼬마는 처음 보느니 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대단하신 카류 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왕궁내 의 모든 이들에게 첫째가는 화젯거리였다. 카류 왕자를 찬양하는 성안의 수많은 평민 시종들의 말을 들어보자니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카류 왕자는 귀족이다. 그에게 있어 시종들은 그저 비천한 평민일 따름이다. 시종들은 카류 왕자 가 자신들에게 약간의 자비를 베풀어주고 얼마나 우월감을 느끼고 즐거워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나는 카류 왕자가 생명의 궁을 떠난 후에도 같은 왕궁에 있었기에 몇 달에 한번씩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렇게 가끔씩 만나게 될 때마다 카류 왕자 는 항상 방글방글 웃으며 나에게 몇 가지 수식을 가르쳐주거나 또 다른 여 러 가지 선심을 베풀었다. 귀족의 친절 따위 정말 끔찍하고 역겨웠지만 마법적 지식이 필요한 나는 그 친절을 바랄 수밖에 없다. 아니, 너무나 그 친절을 갈구했다. 생명의 궁 을 나설 때마다 무의식중에 카류 왕자를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나는 썩어가고 있었다. 나의 바램과는 달리 나는 밑바닥까지 썩어 가고 있었다. 나는 괜히 그 왕자에 대한 생각을 하다가 열을 받아 뜨거워진 머리나 식히 고 그리고 할아버님도 만날 겸 아르디예프 님께 허락을 받고 생명의 궁을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유넨? 네가 유넨이라는 마법사인가?" "...그렇습니다만?" 나는 의아한 눈빛으로 평민차림을 한 키가 큰 남자 둘을 그들을 바라보았 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귀족이다. 저렇게 말끔한 얼굴의 인간들이 평민일 리가 없으니까. 뭔가 내가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나의 가면은 완벽했을 텐 데. 그러나 그들의 용건은 건방진 평민에 대한 응징, 이런 것이 아니었다. 마법 을 이용해 카류리드 왕자와 그에게 빠져버린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 딜트 라엘을 중심으로 일행 전부를 몰살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제1왕자 루블로프를 옹호하는 과격파로 만에 하나라도 제1왕자의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르는 카류 왕자를 완전히 제거하려 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런 그들의 행동이 이상한 것도 아니다. 요즘 카류 왕 자의 인기는 신분 고하를 불문하고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내 생각에도 이 왕자가 정말 마음을 먹고 착실히 일을 꾸민다면 제1왕자에게서 다음 왕위를 뺏는 것은 문제도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제1왕자파는 아마 암살을 위해서 마법사가 필요했지만 신뢰할 만한, 또 의 뢰를 하기 위해 만날 수 있는 마법사 자체가 없었기에, 이렇게 거리를 나 다니는 평민 출신의 마법사를 발견하고 말을 건 것 일거다. 나 같은 예외 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마법사는 생명의 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마법 연구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어느 정도 카류 왕자와 친분이 있다는 것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는지 만약 거절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며, 대신 승락하여 카류 왕자의 암살까지 성공한다면 나중에 제1왕자가 왕위에 오른 후에 나 에게 귀족 작위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신의를 택해 죽음을 맞을 것인지, 신의를 버리고 후일의 영광을 택할 것인 지. 물어보나마나 아닌가! 나에게 처음부터 신의 따윈 없었다. 카류 왕자는 나 에게 있어 역겨운 귀족일 뿐. 이건 기회다!! 내가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비굴해지지 않기 위한 수단인 귀족 작위를 얻을 수 있는 기회일 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쌓여만 가는 짜 증을 내 손을 씻어 내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그들은 뜻밖에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인물들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의뢰인들의 호위를 받아가며 고대유적이 있는 동 굴로 향했다. 그곳에는 카류왕자를 시작해 많은 귀족꼬마들과 호위병로 북 적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의 타이밍을 맞추어 캐스팅하여 4서클의 원거리 공격마법을 완성했다. 그리고 제1왕자파인 학 자가 먼저 그 동굴을 다녀오면서 이미 알아둔 무너지기 쉬운 약한 지반을 목표로 해서 마법을 사용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겨우 몇 년 사이에 그 왕자가 가르쳐 준 몇 가지 수식 덕분에 4서클 수식을 계산할 수 있을 만큼의 수준까지 왔던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벌써부터 이런 고난도의 마법을 쓸 수 있을 리가 없 었다. 동굴의 입구가 완전히 무너졌지만 아쉽게도 그들이 깔려죽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안 죽었어도 저대로 라면 저 안에서 굶어죽을 수밖 에 없을 것이다. 나는 확인 사살을 위해 어릴 적 산 속에서 귀여워했던 어스 웜 가족들까지 추가해 주었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그들이 단지 커다란 지렁이가 아니라 몬스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함부로 그들을 밖으로 나오게 하지 않았지 만 이번만은 이용해 줄 마음이 있었다. 어스 웜은 아주 약하다. 카류 왕자 라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점차 강한 어스 웜 퀸도 내가 만들어 낸 기형 어스 웜도 보내주지. 이로서 저 짜증나는 카류 왕자에게 조금씩, 아주 조금씩 죽음의 공포를 느끼게 해줄 수 있을 것이다 통쾌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드디어 사라졌다. 나의 고뇌와 고통의 근원이 사라졌다. 바로 내가 이 손으로 없애 버렸다! 카류리드 왕자의 그 반반한 면상에다 대고 그깟 우월감 따위를 느껴보려고 나에게 친절을 베푼 게 정말 후회스 럽겠다고 말해주지 못한 게 안타깝긴 하지만. "후후후후..." 나는 하멘 시로 돌아와 조용히 웃었다. 언제나 높은 자리에 서서 웃을 줄 밖에 몰랐던 그 왕자가 궁지에 몰려 공포에 질린 얼굴을 상상하며 나는 몇 년만에 너무나 편한 잠자리를 할 수 있었다. "젠장!" 방금 생명의 궁 밖에 나갔다가 한 시종에게서 죽였다고 생각한 그 재수 없 는 왕자의 무사함을 듣고 말았다. 일행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다나 어쩐다 나 하는 헛소문까지 돌아 원래부터 대부분의 평민 출신인 시종, 시녀들에 게 인기가 좋은 카류리드 왕자는 이제 거의 성자로 칭해지고 있었다. 그리 고 절망적이게도 그 사건으로 인해 카류리드 왕자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그곳의 대 귀족 자제들이 전부 그 녀석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었다는 소식 까지 덤으로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암살을 위해 애쓴 행동들이 완전히 카류리드 왕자를 도와준 꼴이 되 었던 것이다. 정말이지 운이 좋은 놈이다! 그런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다니! 더 욕을 해대고 싶었지만 이 이상은 나의 생활 모토에 어긋나기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확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손톱을 깨물 기 시작했다. 내 주위엔 하르몬을 중심으로 이미 수많은 재수 없는 귀족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분노는 이상할 정도로 오로지 카류 왕자만을 향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귀족들에 비해 비참한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생명의 궁 에서 최연소 마법사가 된 나는 앞으로 충분히 나의 자존심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카류 왕자는 달랐다. 나는 도저히 그보다 우월한 존 재가 될 수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스케인의 친절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또다시 귀족이, 카류 왕자가 나에게 선심을 써주길 기 다리며 꼬리치고 있다. 그만큼 카류 왕자의 친절은 너무나 달콤해서 도저 히 빠져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친절에 감동하는 나를 보며 카류 왕자는 얼마나 우월감을 느끼고 있을까! 그렇게 나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썩어가고 있는 나를 보며 견딜 수가 없었다. 카류 왕자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나를 또다시 비참하게 만든 그 왕 자를 이 세계에서 영원히 없애버리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이를 갈고 있던 사이 여러 번 트로이 후작 가와의 접촉이 있 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카류 왕자를 죽이려 하고 있었고, 그것을 위해 마법 사가 필요했는데, 전에 내가 그들의 의뢰를 받아 암살을 시도했던 일로 트 로이 후작과 연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트로이 후작 쪽은 무서울 정도로 과격한 인간들이었다. 제1왕자의 순탄한 왕위 계승을 위해서, 자신과는 상반되게 카류 왕자를 따른다고 생각되는 정도로 친아들까지 암살을 시도할 정도니까 말이다. 그들은 그 전의 동굴 암살 기도를 빌미로 나에게 또 다시 암살을 할 것을 의뢰했다. 그러나 카류 왕자는 그 동굴 사건 이후로 완전히 성밖으로 출입 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암살의 기회를 잡기는 정말 어려웠다. 내가 아무리 카류리드 왕자와 친분이 있다고는 해도, 또 5서클의 마법사이지만 왕궁 안 에서 증거 없이 제1왕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암살하는데는 나도 트로이 후 작 -후작의 수하- 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앞뒤 보지 않고 성안에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무슨 빌미라도 잡혀 들통이라도 나는 날엔 제1왕자를 위해 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카류 왕자 없 이는 죽고 못산다는 제1왕자 루블로프에게 몽땅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일 이었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트로이 후작도 카류 왕자의 암살에 대하여 몸을 사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트로이 후작은 카류 왕자를 궁지에 몰기 위해 뭔가 꼬투리나 약점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 트로이 후작의 수하는 기가 차게도 혹시 도청 마법이라거나 투시 마법 같은 건 없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지금 우리 세계의 마법은 고대에 비하면 거의 어린애 걸음마라 해도 과언이 아닌 수 준으로 그렇게 많은 마법이 발전하지 못했다. 게다가 마법사는 군대의 가 장 중요한 병력이었다. 따라서 얼마 없는 마법 중에서도 발전한 것은 전쟁 때 쓸 공격 마법과 치료 마법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니 도청 마법이니, 투 시 마법이니 그런 것 따위가 있을 리가 만무했던 것이다. 아무리 마법에 문외한 이라지만 이런 것도 모르다니. 분명 저러고도 고귀하신 귀족이라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녔겠지. 카류 왕자를 지켜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저번처럼 또 다시 나에게 기회가 오기를 그것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믿기 힘들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고 운 까지 좋은 녀석이지만 계속해서 녀석의 행동을 주시하고 지켜본다면 언젠 가 그 기회는 올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 동안 나는 카류 왕자가 가르쳐 준 몇 가지 수식을 나름대로 응용해가며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나는 믿을 수 없게도 25살이 되던 해에 5서클 의 마법사가 되었다. 원래 그 왕자가 가르쳐 준 수식 정도로는 5서클이 되 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아르디예프 님이 단기간 4서클까지 오른 나의 빠른 진전을 보고 자신의 일마저 내팽개치고 매일같이 나의 마법 수련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평소 괴팍한 면만을 보이는 아르디예프 님의 사전에는 신기하게도 시기와 질투라는 단어가 없는 듯 했다. 처음 자신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 나를 선뜻 생명의 궁에 들렸던 것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지도 모 를 만큼 빠른 진전을 보이는 나를 이런 식으로 도움을 주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8서클의 대마법사인 아르디예프 님은 처음부터 귀 족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마법에 대한 연구욕이 너무 컸기에 했던 행동일 뿐일 것이다. "그래, 이런 식으로 풀어 보거라. 허허... 유넨. 정말 대단하구나. 너처럼 대 단한 자질을 가진 자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정말 나의 눈은 틀리지 않았구 나. 허허허." 오랜만이라니, 나 이외에 예전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는 말인가? 뭐, 카류 왕자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지. "그런... 아르디예프 님께서 저에게 너무 큰 은혜를 베푸셔서 가능했던 것 이지 저는 아직 너무 부족합니다." "후후... 그래. 그렇게 대단한 자질을 가지면 보통은 오만하기 마련인데 너 처럼 겸손하니 정말 흐뭇하구나. 그러나 실력이 있으면서도 너무 겸손해서 는 안돼. 자신감을 가져라. 너라면 이 생명의 궁에서 나 다음으로 제 멋대 로 행동해도 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 알겠느냐?" "하하... 아...알겠습니다. 아르디예프 스승님." 나는 순진한 척 곤란한 표정으로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대답했다. 안타깝 게도 아직 출신이 출신인 만큼 하고싶은 대로 행동했다가는 언제 인생이 끝날지 모른다. 최소한 귀족작위를 받아 7서클 마법사는 되어야겠지. "요즘 너를 가르치는 재미에 살긴 하지만 곤란한 점도 없지 않구나. 음, 너 무 너에게만 시간을 뺏기다보니... 아직 연구가 덜 마쳐진 것도 있는데 말 이다." "연구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냥 저는 내버려두시고 연구를 계속 하세요.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나는 너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물론 아르디예프 님이 나를 버리 고 연구 쪽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허허, 됐다. 너를 가르치는 쪽이 더 보람있느니라. 그 연구엔 흥미도 떨어 졌고 말이다. 아, 너도 5서클에 도달했으니 이 연구를 할 수도 있겠구나. 바람과 공기를 이용한 마법인데... 아니다. 시시한 마법이니 그만두자." "아르디예프 님께서 만드시려한 마법인데 어찌 시시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마법인지 들어보아도 괜찮을까요." 시시한 마법이라. 아르디예프 님이 거짓말을 할 리가 없지. 그가 시시하다 면 시시한 것 일거다. 따라서 솔직히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관심 있 는 척 해줘야지. 그도 인간이라 추켜 주면 좋아하거든. "헛헛, 뭐, 한번 지나간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는 마법이다. 그냥, 최근 듣 기 좋은 노래를 하나 들어서 시도해본 것일 뿐이다. 그 노래를 다시 듣고 싶을 때마다 가수를 부르지 않고 마법을 이용해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느냐. 뭐, 솔직히 재미로 한번 연구해 본 것뿐인 시시한 마법이지. 그 냥 지나가자꾸나." 정말 시시한 마법이구나. 역시 괴팍한 아르디예프 님! 겨우 노래를 다시 들 으려고 보통 마법사라면 평생 시도라도 하나 할까말까한 새 마법의 개발을 위한 연구를 했단 말인가? 한번 지나간 소리를 다시 들려주는 마법? 최고 권력자면 권력자답게 아랫것들을 막무가내로 부려 그냥 다시 해보라고 하 면 되잖... 그러나 정말 순간적으로 내 머리 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 도청 마법이라 고 했던가? 이것을 잘 이용하면 충분히 도청 마법 비슷한 것으로 변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번 했던 말을 저장해서 다시 들려줄 수 있으니까 말 이다. "아닙니다. 역시 아르디예프 님이시군요!! 사소한 일상에서 그런 재미있는 생각을 해내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연구 제가 이어받아도 될까요?" "잉? 유넨?" 빙긋 웃고 있는 나를 아르디예프 님이 황당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4,5서클의 수식들을 연구하면서도 틈틈이 짬을 내어 그 마법을 만들 어 내는 연구에 소홀하지 않았다. 실상 아르디예프 님은 그 마법은 거의 다 성공해 놓은 상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발하게 다른 바람의 마법 을 응용한 이 마법은 그렇게 머리가 뛰어나지 않은 나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연구였다. 잠 안자고 죽도록 연구에 매진한다면 충분히 개발해 내 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법적, 지적 호기심과 새로운 마법을 탄생시킨다는 희열을 제외하더라도 나는 이 마법을 개발하는 연구에 너무 흥분되어 그 연구에서 손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이 끝없는 짜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으로 카류리드 왕자의 죽음을 갈망하고 있었던 탓이다. 이것으로 잘하면 카류 왕자를 궁지에 몰아 넣을 수도 있을지 모른다. 계속 트로이 후작에게 협력한다면 그들이 어떻게든 카류 왕자를 없앨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카류 왕자는 동굴 사건 이후 학교에 가는 것을 금지 당했다. 하지만 그 대 신 카류 왕자에게 포섭 당한 학교의 친구였던 귀족 아이들이 일부러 왕궁 에 찾아왔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편이라는 것을 만방에 알려주고 싶기 라도 한 듯이 카류 왕자는 왕궁 내에서까지 그들을 만나며 친목을 다지곤 했다. 트로이 후작의 입장에서는 점점 인기 몰이를 해 가는 카류 왕자를 내버려 두었다가는 언제 자신들이 지지하는 제1왕자의 입장이 뒤집어질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상 카류 왕자가 언제 반역을 저지르기로 마음을 바 꿀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기에 제1왕자를 강력히 지지한다면 카류 왕자의 암살은 정말 필수 코스였던 것이다. 그러나 카류 왕자는 학교 친구들이나 고위 권력자들과의 친분을 쌓는데만 열중하며 여전히 트로이 후작들이 의도하는 그런 반역의 증거가 될만한 제 대로 된 태도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제1왕자파는 차곡차곡 자신의 입지를 쌓아가고 있는 카류 왕자를 매장시켜버릴 기회를 찾지 못해 안달이 돼있었다. 제1왕자 루블로프는 카류 왕자에게 이미 푹 빠져 조금도 자신의 동생을 의 심하지 않고 있었다. 루블로프 왕자는 뼛속까지 카류 왕자를 신임하고 있 음이 틀림없었다. 제1왕자 때문에라도 카류 왕자를 완전히 궁지에 몰려면 어떻게든 그럴듯한 물적 증거가 필요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매년 늦은 봄에 시작되는 왕궁파티에 전국의 대귀족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제1왕자파들에게 이번 파티는 그 언제보다 심한 위화감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이 파티 후 몇 달만 지나면 카류리드 왕자의 성인식도 다 가오게 된다. 카류 왕자가 의도하고 있든 의도하고 있지 않든 반역의 시기 가 가까워져 오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트로이 후작과 제1왕자파가 벌벌 떨고 있긴 했지만, 사실 카류 왕 자의 제6왕자파라는 것이 실재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 카류 왕자의 행동으 로 몇몇 귀족들이 그 녀석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데도 이토록이나 위화감이 심했던 것은 카류리드 왕자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몇몇 귀족들은 놀랍게도 하나같이 거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는 명문 귀족들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현재 카류 왕자의 위치가 단지 머리 좋고 성격 좋은 제6왕자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강하 게 암시하고 있었다. 나는 하르몬과 아르디예프 님을 따라 생명의 궁을 나와 파티가 이루어지는 빛의 궁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아르디예프 님의 보좌이자 동행 이였지만 나는 귀족이 아니라 파티 장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괜히 파티장에서 나오는 시종들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훗훗... 그래, 카류 님께서 내게 힘내라고 그러시더라?" "여전하시네, 그 분은." 어지러운 시종들의 잡담 소리 속에서도 카류 왕자에 관한 한은 절대 놓치 지 않는 나의 귀가 그 소리를 포착해 내었다. "앗. 유넨 님!" 내가 그 시종들에게로 다가가자 그들이 기쁜 듯 내 이름을 불렀다. 생명의 궁 밖으로 가장 자주 나다니는 마법사이기도 하거니와 나 역시 카류리드 왕자만큼이나 시종, 시녀들에게 자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꽤나 알 려져 있었던 것이다. "루이스! 민스트!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되다니!" "아, 정말 반갑습니다. 유넨 님." "유넨 님 이시군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과연 그들은 나의 인사에 굉장히 반갑게 답했다. "후후.. 아, 루이스 미안하네만 시간이 난다면 저 파티장에 대해 대충 말해 줄 수 있겠나? 나는 마법사이긴 하지만 알다시피 평민이라 저 파티장 안으 로는 들어갈 수 없다네. 아르디예프 스승님의 상태도 걱정되고 해서 말이 네." "아! 그 정도야 해드리지요. 유넨 님은 비록 출신만은 평민이시지만 최연소 5서클의 마법사가 되셔서 이렇게나 높은 분이 되셨는데도 옛날과 다름없이 항상 이렇게 저희들에게 상냥하게 대해 주시니 정말 기쁩니다. 유넨 님이 나 카류 님 같은 분들만 계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카류리드 왕자랑 동급 취급당해 상당히 기분이 더러웠지만 나름대로 카류 왕자에 대한 것을 알아볼 기회였기에 그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아, 카류 님은 어쩌시고 계시나? 꽤나 오랫동안 뵙지 못했는데 그 분의 상태도 알고 싶군." "후후, 정말 굉장합니다. 저희들도 그분을 좋아하지만 저희들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도 틀리지 않은 모양이더라고요. 역시 사람에 대한 취향은 귀 족이나 평민이나 같은 것일까요, 후후후." "정말 그렇다니까요. 그 대단한 리아 후작과 레이포드 경, 그리고 수많은 대 귀족의 자제들이 카류 전하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지요. 그 괴팍하신 아르디예프 님마저 카류 전하의 곁에서만은 항상 웃으시더라고요. 역시 카 류리드 전하시라니깐. 하긴, 그분과의 대화에서 퉁명스러워지는 사람이 있 을 리가 없겠지요." 시종들은 신나게 카류리드에 대한 말을 떠들었다. 꼭 그 왕자를 칭찬하는 폼이 자신의 아이가 잘되는 것을 자랑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 정도 로 시종들을 포섭해 놓았다니 정말 눈물나는 노력을 했구나, 카류리드 왕 자! "솔직히 루블로프 태자 전하께서 개밥의 도토리처럼 보일 정도였다니까 요." "나도 그렇게 보이더라. 이러다가 루블로프 태자 전하 대신 카류 님이 왕 이 되시는 거 아닐까? 앗, 이건 비밀이에요! 유넨 님!!" "아아, 물론이네. 걱정하기는... 앗, 그리고 너무 시간을 뺏어서 미안하네." 나는 그들을 향해 평소처럼 빙긋 웃어주며 말했다. 물론 속은 짜증으로 새 카맣게 불타버릴 지경이었지만 말이다. 카류 왕자의 행동은 확실히 점점 왕위 계승과 관계가 깊어지고 있다. 그 왕자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권력의 이동에 민감한 주위의 귀족들은 저절로 파벌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파벌이 이루어지든 말든 마법사인 나와는 전 혀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점점 상황이 카류 왕자에게 유리한 쪽으 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상태로도 만족을 못해서 그 카류 왕자가 후일 왕이 되는 꼴까지 보는 것은 정말 사양이었다. 카류 왕자가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에서 사라지기를 원한다. 나는 하루라 도 빨리 나를 되찾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빠져 나오지 못 할지도 모른다. 카류 왕자의 달콤한 입김에 나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 른다. 그저 귀족의 은혜를 받아먹기를 원하는 그런 진실로 비천한 평민이 되고 말 것이다. 카류 왕자를 궁지에 몰 기회는 정말 우연히 다가왔다. 파티가 끝나고 약 일주일 후 생명의 궁으로 향하던 나는 우연히 카류 왕자의 어머니 아스트 라한과 마주쳤던 것이다. 그녀는 카류와 친하게 지내는 마법사인 나에게 가볍게 안부를 묻는 척하며 뭔가 이상한 말을 꺼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과연 트로이 후작의 예상대로 카류 왕자는 그 파 티를 기점으로 뭔가 일을 시작하려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척하며 언제나 가지고 다니던 조그마한 구슬에 빠 르게 마력을 집중했다. -나이기에 대화하면서 마나를 움직이는 일이 가능 했던 것이다.- 내가 지금 마력을 집중하고 있는 구슬은 아르디예프 님의 도움을 받아 만든 그저 마나를 예정된 만큼 움직여 주는 것만으로 발동하 는 아티펙트로 내가 개발한 녹음 마법이 걸려 있었다. "아직 카류는 어리고 약하다네. 그러니 언젠가 카류가 힘겨운 시련에 부딪 쳤을 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카류의 도움이 되어주길 바라네, 유넨." "여부가 있겠습니까. 아스트라한 님." 힘겨운 시련이라? "강한 바람이 불겠지. 하지만 카류는 결국 그 바람을 이기고 그 시련을 발 판 삼아 누구보다도 강한 자가 되고 말 것이네. 그것을 명심하게. 이미 많 은 구원의 손길이 카류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러면 훗날 당 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야." 불행하게도 아스트라한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분명 언젠가 닥쳐 올 시련, 강한 바람, 누구보다도 강한 자, 이미 존재하는 많은 구원의 손길 등 수많은 노골적인 암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 암시가 담긴 것이 아니라면 아스트라한이 나에게 갑자기 이런 이야기 를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사실 나도 최연소 5서클의 마법사. 카류의 편으 로 끌어들이는데 손색이 없을 정도의 인물이니까. 그러나 카류 왕자에 대해 콩깍지가 쓰이면 이런 대화도 그저 곤경에 빠진 카류 왕자를 도와라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을 테니 이 정도의 대화를 녹음 시키는 것 정도로는 반역의 증거가 될 수 없다. "물론입니다. 그 분과 가까이 하였으며 또한 많은 은혜를 입은 저입니다. 저는 언제나 카류리드 전하의 편이니까요. 저의 마음은 그 분에게서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얼마나 세찰지 예상하고 계십니 까?" "물론이네. 힘들겠지. 그래서 나는 지금이야말로 그 바람을 견디고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해 제대로 된 준비를 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한다네. 벌써부 터 이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 힘있는 자들이 움직여 주고 있지. 유넨, 그대 또한 우리들을 도와준다면 카류는 그 일을 절대 잊지 않을 거라네. 그 아 이는 사리판단이 빠른 아이거든." "네, 명심하겠습니다. 아스트라한 님." 대화는 금세 끝이 났다. 5서클 마법사이긴 하지만 겨우 나 같은 존재와 긴 대화를 한다면 주위사람들과, 무엇보다도 그 아스트라한에 관한 한 질투의 화신인 국왕이 이상하게 볼 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아스트라한은 나의 단호한 대답을 듣고 흐뭇한 듯 웃으며 나를 지나치려했다. 그리고 나는 의 도적으로 몸을 약간 비틀거려 그런 아스트라한과 몸을 부딪쳤다. "앗!" "죄...죄송합니다!! 이런 실수를!! 죄송합니다!!! 요즘 마법수련으로 피곤해진 나머지... 이런!!" 이건 정말 모험이었다. 마법사라고는 하나, 아직 작위도 없는 평민 주제에 국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아스트라한과 몸을 부딪쳤으니 자칫 여 기서 즉결처분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훗, 괜찮네. 그저 나의 말을 명심해주는 것만으로 나는 충분히 그대에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지." "감사합니다. 절대로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아스트라한 님!!" 사실 꽤나 위험했지만 기껏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놓은 듯한 나를 그렇게 가볍게 죽일 정도로 아스트라한이 멍청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시도 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나는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사과의 말을 반 복했다. 그녀는 이 일로 내가 완전히 카류 왕자이 편이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완전히 사라진 아스트라한을 바라보며 나는 웃었다. 내가 마법을 시전해 둔 아티펙트 구슬이 아스트라한의 머리카락에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국왕이 있는 빛의 궁에서 오랜만에 땅의 궁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 을 알았기에 한 짓이었다. 어쩌면 카류 왕자와 뭔가 이야기가 오갈지도 모 르는 일이니까. 저 구슬은 앞으로 적어도 하루 동안은 계속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녹음해 줄 것이다. 운이 좋으면 상당히 직접적이면서도 괜찮은 내용이 녹음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아스트라한이 다시 땅의 궁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뭔가 잊어버린 말을 해주는 척하며 다시 그녀에게 접근해 구슬을 회수하면 될 것이다. 무 슨 이야기를 할지나 생각해 볼까. 나는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두려움 반, 기쁨 반의 전율이었다. 그 구슬을 통해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제1왕자파의 생각대로 카류 왕자를 중심으로 왕위계승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 다. 그리고 또 하나 놀랍게도 그저 사고였다고만 생각한 에렌시아와 아르 멘의 죽음이 사실은 카류 왕자와 관련되어 일어난 암살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고는 카류 왕자의 다음 왕위계승을 위해 아스트라한이 꾸미고 국왕이 한 짓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류리드 왕자가 그 사실을 알면 서도 묵인했다는 것이다!!! 초반에 카류리드 왕자는 아스트라한의 말에 그저 단편적인 대답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엔 확실히 그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죽음을 묵인했다 는 발언을 하고 말았다. 이것을 듣는다면, 카류리드 왕자가 자신의 어머니 의 암살에 관계됐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토록이나 카류 왕자를 믿고 사랑하 는 제1왕자 루블로프도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 외로 너무나 괜찮은 증거를 잡은 나는 그렇게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였다! 기쁨으로 가슴이 요동쳤다. 이것으로 확실히 그 왕자를 저 밑바 닥 나락의 끝까지 내던져 줄 수 있는 것이다. 드디어 그 녀석에 대한 역겨 운 소문을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녀석의 친절에 다시는 속을 태우 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그 길로 트로이 후작을 찾았다. 트로이 후작은 정말 기뻐했고 나에게 계속 자신들을 도와준다면 꼭 보답하겠노라고 호언 장담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함께 빛의 궁의 국왕을 찾았다. "무엇이오? 아스에 대한 이야기라니." 국왕은 약간 흥분한 얼굴로 트로이 후작을 바라보며 물었다. 국왕이 아스 트라한을 누구보다 사랑한다는 것은 확실히 사실인 모양이다. 하긴, 그러니 자신의 전 왕비와 후궁을 살해했겠지. "불행한 소식을 들려드리게 되어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국왕 폐하. 안타 까운 사실이지만 진실로 폐하를 생각한다면 이 사실을 알려야만 한다고 생 각했습니다." "뭐냐고 물었지 않소! 거두절미하고 어서 말해 보시오!" 트로이 후작의 눈짓에 나는 구슬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곧 구슬에서 카류 왕자와 아스트라한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처음엔 놀란 표정의 국왕은 대화를 들으면서 얼굴이 조금씩 구겨졌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스트라한이 흥분하여 국왕이 에렌시아와 아르멘의 죽음을 무능하게 처리했다고 마구 비웃는 부분에 가서는 완전히 얼굴이 시뻘개져 온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아스!! 짐이 그렇게 사랑해주었거늘!! 그토록이나 부족한 것 없이 모든 것을 주었거늘, 짐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을 이런 식으로 말하다니!" 국왕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자신이 전 왕비를 죽였다는 치 부가 드러났다는 사실에도 아랑곳없이 오로지 아스트라한의 말에만 신경을 쏟고 있었다. "정말 슬픈 일입니다. 그토록이나 폐하께서 아스트라한 님을 사랑하셨는데, 그 누구보다도 아스트라한 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한 일임에도 저렇게 폐 하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고 계시는 아스트라한 님의 태도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내가 얼마나 아스에게 많은 것을 해주었는가. 그대도 알겠지? 아니, 모두 알고 있다. 짐이,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짐이 아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말이다!" 트로이 후작은 일단 흥분한 국왕을 부추겼다. 자신을 모욕하고 배신한 아 스트라한에게 화가 난 상태의 국왕에게 너는 잘했고 나쁜 건 전부 아스트 라한이다 라고 부추긴다면 그녀를 향한 화가 더욱 커질 것이 틀림없기 때 문이었다. 지금도 그 의도대로 충분히 흥분하고 있지 않은가. 트로이 후작 의 현재 목적은 오로지 카류 왕자의 제거이니 이왕이면 국왕이 좋게 일에 동참해주기를 바래서 일단 왕비들의 죽음은 덮어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누구보다도 아스트라한 님께 극진했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 그렇기에 폐하께서는 이 무례한 아스트라한 님을 절대로 용서 하셔서는 안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것은 반역입니다! 폐하께서는 아스트라 한 님과 카류리드 전하를 처형하셔야 합니다!" 트로이 후작의 그 말을 들은 국왕은 그제야 번뜩 정신을 차렸는지 말이 없 었다. 그러다가는 문득 생각이 났는지 소리쳤다. "아니, 아니지!! 무엇이냐!! 이것이!! 말도 안돼, 이런 것이 가능할 리가 있 느냐! 어떻게 이런 구슬에서 아스와 카류리드의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단 말 이냐!! 그래... 네놈이 감히 짐을 기만하려 들었군. 네놈의 목을 당장 쳐버 리겠다!!!" 흥분하여 소리치는 국왕을 보고 트로이 후작이 뭔가 말을 해보라는 듯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국왕폐하. 폐하를 기만하였다면 당연히 저의 목을 치셔야 할 것입니다. 그 러나 이것은 아르디예프 님도 알고 계시는 지나간 말을 다시 재생해주는 녹음 마법입니다. 이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는... 슬프지만 분명히 아스 트라한 님과 카류리드 전하의 대화입니다. 의심되시면 아르디예프 님께 물 어보셔도 좋을 것입니다." 나는 슬픔으로 잠긴 듯한 목소리를 내며 국왕에게 말했다. 국왕은 나의 이 런 모습에 잠시 주춤하다가 다시 말했다. "이...이것만으로는 안돼. 이 정도로 간단히 아스를 죽일 수는 없다. 왕위야 어떻게든 짐이 루블로프에게 넘길 것이다. 그러니 이 이상 이 일에 대해 왈가왈부 거리지 마라!" "폐하! 이 마법 구슬에는 폐하께서 에렌시아 님들의 암살에 관여했다는 말 도 녹음되어 있습니다. 폐하께서 이렇게 강경하게 나올 입장은 아니라고 봅니다만?" "내 말이 들리지 않는가! 당장 나가라고 하지 않았는가. 트로이 후작! 겨우 저 정도의 증거로 나를 모함할 생각은 아니겠지?" 강경하게 나오는 국왕을 보며 트로이 후작은 한숨을 쉬었다. 국왕은 왕비, 제1후궁 사건을 막무가내로 종결시켰던 것처럼 이번 일도 그냥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아마 아스트라한까지 죽이라는 대목에서 몹시 찔리는 모양이 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나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군요. 저는 그 동안 왕실의 안위를 위해 카류 왕자에 대한 증거를 잡으려 여러 가지로 수소문을 하다가 정말 우연히 한가지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소리지?" 국왕의 말에 트로이 후작은 잠시 침묵을 지킨 후 말했다. "폐하께서 30여 년 전 왕위 계승 때 하셨던 일에 대한 증거를 잡게되었다 는 말입니다." 갑자기 국왕의 안색이 눈에 띠게 나빠지는 것을 보고 나는 흥미진진하게 트로이 후작의 말을 경청했다. 내가 이런 왕실의 비밀이야기를 듣게 될 줄 이야. 그 동안 트로이 후작의 요청을 거부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답해준 대가를 이렇게 얻게 되는 구나. "제가 이렇게까지 카류리드 전하를 없애려 하는 것도 전부 폐하께서 왕위 계승을 하면서 일어났던 문제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일을 보고 저는 깨 달았지요. 제1왕자가 아닌 다른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방해가 되는 싹이 있다면 일찍부터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 다. 지금 저는 그때 폐하께서 하셨던 일을 이번에 제가 도와드리겠다는 말 입니다. 그 당시 폐하께서 당신의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아우를 내치기 위해 쓰셨던 독을......" "가...감히 짐을 모독하려는 겐가!? 누...누가 그런...!!" 국왕은 눈을 부라리며 트로이 후작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나는 충분히 트 로이 후작의 다음 말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만 국왕이 전대의 왕위계승 문제에서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동생을 독살했다는 것이 틀림없다. 나는 속으로 진한 비웃음을 띄웠다. 최고의 귀족인 왕족. 그러나 그 속은 구역질 이 날 정도로 더럽기 짝이 없는 일족이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정말 유감스럽습니다. 그때의 일에 참여했던 자들 중 처리하지 못한 자가 남아있더군요.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게만 해준다면 어떤 증거든 모두 불겠다고 말했습니다." 트로이 후작의 말에 하만 국왕은 하얗게 질린 채로 손을 가늘게 떨었다. 그로서는 원래대로라면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던 치부 중의 치부를 카류 왕자 덕분에 다시 들추어내게 된 셈이다. 훗, 여러모로 폐를 끼치는구 나. 카류 왕자. "지...짐을 협박까지 하면서 원하는 게 무엇이냐?" "모든 것은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 입니다. 아스트라한 님과 제6왕자 카류 리드 전하를 죽이십시오. 그리고 이일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리아 영주와 레이포드를 죽이고 작위와 영지를 뺏어 확실하게 제6왕자를 따르는 세력을 약화시키십시오. 이 구슬의 내용을 토대로 여러 증거를 조작하고 또 국왕 폐하께서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신다면 얼마든지 일을 실행할 수 있습니다. 이 구슬의 내용을 들어보니 카류리드 전하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이제 막 일에 착수한 상태인 듯합니다. 바로 지금이 아스트라한 님과 카류리드 전 하를 없앨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아르윈 왕국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워 질 것입니다. 저의 충심을 알아주십시오!" "......" 국왕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길은 없을 것이다. 이미 트로이 후작이 국왕 의 가장 큰 약점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알려지면 과거 하만 국왕 의 동생이 죽으면서 어쩔 수 없이 위축되고 힘을 잃었던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아스는...어떻게든 도망치게 할 수 없겠는가. 카류리드는 꼭 죽이겠다. 그 러나 아스만은 안돼!" "...카류리드 전하를 처형한다 하는데 과연 아스트라한 님이 가만히 계실까 요?" "내가 지금 아스에게 가겠다." 하만 국왕은 트로이 후작과 함께 일어섰다. 증거가 되는 구슬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나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바보 같은 일이다. 아스트라한은 카류 왕자를 위해 이런 일을 꾸민 것이다. 게다가 국왕을 증오하는 아스트라한이 국왕의 말을 들을 리가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건만 국왕은 사랑에 눈이 멀어 이미 제대로 사고할 능 력을 잃은 것이다. 아니, 아스트라한이 자신을 따를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 서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트로이 후작을 중심으로 아스트라한과 국왕의 신파극을 보며 나는 쓴웃음 을 흘렸다. 더러운 족속들이다. 자신의 친자식에 대한 사랑도 없다. 남편에 대한 존중도 없다. 아우에 대한 우애도 없다. 그러면서도 평민에게 우월하 게 보이고 싶어하는 아니, 너무나 당연히 우월하다고 여기는 웃기는 종족 이다. "아, 유넨?" 카류 왕자의 반역의 증거가 되는 대화가 들어있는 마법을 시전해 보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세스케인 님." 의외의 장소에서 재회한 불청객에게 나는 얼굴을 구기는 대신 반가운 표정 을 지어 보였다. 아직 나는 신분상으로는 평민일 뿐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가 없었다. "또 만나는 구나. 네가 결정적인 증거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며?" "아닙니다. 겨우 이런 일로..." "아냐, 정말 잘했어. 사실 내 동생 세미르가 완전히 카류리드 왕자의 추종 자 비슷한 것이 되는 바람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몰라. 자칫했으면... 이건 비밀이지만 트로이 후작 가의 딜트라엘 꼴이 날 뻔했다고. 아, 정말 다행이 야. 미우나 고우나 세미르는 내 친동생이니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후훗. 여전히 하구나. 유넨. 너는 너무 착해. 전부 네 덕분에 잘 해결됐어." 세스케인은 나의 어깨를 치며 예전과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착하다라. 너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고 저 면상에 대고 소리쳐주고 싶지 만 참았다. 사실 이제 세스케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나는 더 이상 과 거의 내가 아니니까. 트로이 후작의 신임을 받았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귀 족 작위나 높은 관직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나는 현재로서도 최연 소 5서클의 마법사였다. 게다가 이제 곧 나의 짜증 덩어리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카류리드 왕자가 반역죄로 붙잡힌 곳에 나는 증거를 보여줄 목적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세스케인도 나와 함께 그 곳으로 들어갔다. 그는 카 류 왕자의 조작된 증인 역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카류 왕자는 세스케 인의 증언을 듣고 엄청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황당할 만도 하 겠지. 그 자리에는 나도 있었으니까. 그 때의 그 대화를 이렇게 부풀리고 조작하다니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그 다음 차례에 들어가서는 너무나 당황해 했다. 내가 시전한 아티 펙트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마지막 대화에서 그만 하라고 소리치기까지 했 다. 평소 냉철한 모습과는 달리 이번엔 완전히 자기 무덤을 파는 왕자였다. 그 구슬의 내용을 들은 제1왕자 루블로프와 다른 형제들은 자신들을 배반 하고 일을 꾸몄다는 사실보다 에렌시아와 아르멘에 대한 일이 사실인지를 물었다. 그러나 카류 왕자는 제대로 변명하지 못했다. 변명할 수 있을 리가 있나. 실제로도 그것은 거짓말 하나 섞여 있지 않은 전부 진실이니까 말이 다. 약점을 잡혀 협박을 당한 국왕은 어떻게든 카류 왕자를 죽이려하고 있었 다. 트로이 후작과 후르부크 백작 등의 제1왕자파가 카류 왕자를 계속 추 궁하고 있었다. 온갖 조작된 증거와 증인, 증언이 제시되고 있었다. 아르디 예프 님도 자신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증거물인 구슬을 보고 카 류 왕자를 두둔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이 구슬의 내용 때문에 형제들도 카류 왕자의 편을 제대로 들지 않고 있었다. 이제는 빠져나갈 수 없다!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드디어 나의 고뇌와 고통의 근원이 사라지는 것이다. 나는 지금 국왕의 허락을 받아 카류리드 왕자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걸어 가고 있다. 트로이 후작에게 사정하여 다시 한번 카류 왕자를 만나는 것을 허락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 갑자기 일어난 이 사태에 어안이 벙 벙해져 있을 왕자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줄 날이 온 것이다. 그러고 보면 동굴에서 카류 왕자를 죽이지 못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나는 카류리드 왕자가 갇혀 있을 감옥을 향해 간수의 안내를 받아 어두운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웃음을 띄우고서. 카류리드 왕자를 비웃어주기 위해서. Part. 26 - 처형 ".....리드 전하! 카류리드 전하!!" 누군가 나를 흔들고 있음을 느끼고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얼마나 이대로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눈에 구멍이라도 났는지 나는 아직까 지도 질질 눈물을 짜고 있었다. "카류리드 전하!!" 문득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감옥의 간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나는 그의 부름에 대답해줄 수 없었다. 그냥 고개를 떨구고 줄줄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그렇게 슬퍼하시지 마시고... 어쩌다가 이렇게...." "......" "카류리드 전하..." 나는 그냥 땅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거의 다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 닌 남자가 이렇게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꼴불견일거 라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온 몸이 나른해서 나는 손가 락 하나 꼼짝할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완전히 나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듯 했다. 이렇게 내 눈이 멋대로 나의 의지를 거부하고 열심히 눈물을 뽑아내 고 있는 게 가장 큰 증거다. 내가 그냥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기만 하자 간수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듯 하다가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 전 땅의 궁에서 일하는 시녀를 하나 알고 있습니다. 휘렌이라는 계집 앤데... 저... 그... 그래서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여러 가지 주워 들은 것이 있었습니다." "......" "그래서.... 저는 미천한 몸이라 그런 것은 잘 모르지만... 그래도... 전하 같 은 분이... 카류리드 전하 같은 분이 우리 아르윈 왕국의... 왕이 되어주신다 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시... 시끄러!!" 나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크게 소리질렀다. 나른해서 절대 내 말을 들을 것 같지 않던 내 몸이 그 말에 무섭게 반응했던 것이다. "다...닥쳐.. 나는...나는 왕 같은 건... 왕 같은 건...." 나는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왕! 왕위!! 그게 어쨌다고! 친한 사람들과의 만남이 너무나 행복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왜 그들을 선동해서 왕이 되겠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왜 내가 그런 것 때문에 나의 형제들에게 그런 끔찍한 오해를 받아야 하는 건지. "카...카류리드 전..." "싫어!" 간수가 나의 몸을 건드리려 하자 나는 거의 비명처럼 소리질렀다. 소름이 돋았다. 나는 머리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왕이 되라는 말 같은 건 듣고 싶지 않았다. 왕이라는 단어를 말한 사람의 손길마저 끔찍했다. "저...전하..." "싫어... 시끄러워...." 나는 그가 건드리려 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펑펑 눈물을 흘렸다. 신기하게 도 내 눈에선 아직까지 계속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울 수 있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였다. "...아... 알겠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카류리드 전하. 저... 그런데... 식사하실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제가 음식 을 가져왔으니 어서 식사를 하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건강을 생각하 셔서라도..." 대체 저 간수가 뭐라고 하는 건지. 나는 곧 처형당할 거라는 걸 모르나? 건강을 생각해서 뭘 어쩌라고. "저, 아니... 이게 아닌데... 어..어쨌든 카류리드 전하... 그렇게 앉아 계시지 만 말고 제발 식사를 하십시오. 그러니까 특별히 주방장에게 부탁해 만들 어 온 음식입니다. 식기 전에 드셔 제대로된 맛을 즐기실 수 있으실 텐.... 아니, 그게 아니고... 제발 기운 차리시고... 아직은 이렇게 살아 계시지 않 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나는 조금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없는 말재주로 어떻게든 나를 위로해 주려 하는 그에게 감동 받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 일로 완전 다 죽을 것 같이 그러다가 이런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동해서는 금방 어느 정도 우울한 기분을 푼 것이다. 원래부터가 나는 이런 놈인가 보다. 내가 좋다면 나도 무조건 좋아라 싱글 거리는 정말 웃기는 놈. 아냐, 원래 이건 당연한 거 아냐? 자신을 좋아해 주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잖아. "카...류리드 전하." 나는 처음으로 그 간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험악하게 생긴 큰 덩치를 가진 그는 내 앞에서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쩔쩔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질질 짜면서 소리를 빽빽 지르던 주제에 나 는 그만 베실 웃고 말았다. "식사가...." 나는 겨우 눈물을 그치고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정신없이 소 리를 지르느라 몰랐지만 너무 많이 울어서 목도 맛이 간 모양이다. "아? 아.. 여기 있습니다. 어서 드세요. 카류리드 전하." "응..." 그렇게 그가 나에게 밀어준 음식을 보고 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식들 이 전부 쥐 파먹은 것처럼 조금씩 파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왜 이렇지?" 내가 그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금방 머리를 조아리며 당황하여 말하기 시 작했다. "아...아니, 그건... 혹시나 누가 전하의 음식에 독이나 썼을까 싶어서 제가 먼저... 요..용서하십시오!!" "이런... 아무리 트로이 후작이 날 죽이고 싶어한데도... 곧 처형당할 내게 무엇 때문에 독을 쓴단 말이야..." 나의 말에 간수를 더욱 당황해서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바보같이... 그래도 전하께서 그렇게 죽게 하 는 건 정말 싫어서... 흡! 아니, 죄송합니다. 이런 말은 하는 게 아닌데!! 죄 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그의 더듬거리는 말에 가슴이 찡해왔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단 말 인가.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나를 위해? "왜... 그렇게까지 나를 위해 주는 거야? 만에 하나라도 정말 너의 말처럼 된다면 넌 나 대신 죽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까지 나에게 의리를 지켜줄 필요가 있어?" "그건... 저.... 아주 옛날 일이지만 땅의 궁의 휘렌이라는 시녀가 전하께 상 처를 입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당연히 죽을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전하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휘렌의 약혼자였지 요." "아! 휘렌 말이구나. 그녀의 남편이 너였어?" "예. 전하!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아...아니, 어쨌든 그렇게 도와주 신 후에도 내치시기는커녕 전하께서 휘렌에게 계속 친절하게 대해주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얼마나 전하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전하께서 휘렌에게 해주신 그 은혜는 절대 잊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게 전하를 구해드릴 힘은 없지만 이 정도의 일은 했으면 했던 것입니다. 저는 멍청하지만 은혜를 잊는 그런 못된 놈은 아닙니다." 사실 나에겐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었기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가 4 살 되던 해 있었던 일을 아직까지 저렇게 잊지 않고 은혜라고 말하는 그를 보고 나는 약간 놀랐다. 그는 정말 생긴 것 답지 않게 순박하고 착한 사람 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휘렌이 자기 남편이 얼마나 순진한지 모른다 나 어쩐다나 하며 수다를 떠는걸 들은 기억이 난다. "아... 그건 그냥... 그건 그렇더라도 정말 굉장한 우연이네. 이런 곳에서 만 나다니...." "제가 일부러 지원한 것입니다! 저도 이곳의 베테랑이라서 전하를 감시할 자격은 충분했지요. 아, 그...그게... 감시라기 보다도...전하를 모시려고...그..." "하하, 간수가 죄인을 감시해야지 아님, 뭘 하려고." 나는 드디어 약간 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유가 어떻든 나를 아직까지도 이 렇게 좋다고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많이 나아졌던 것이 다. 그의 호의에 콧등이 시큰해질 정도였다. "고마워. 정말. 이거 맛있게 먹을게. 하지만 내 음식을 먼저 확인하거나 하 는 일은 하지마. 정말 너의 말처럼 독이라도 들어있으면 휘렌이 굉장히 슬 퍼할 테니까. 휘렌이 얼마나 네 자랑하는지 들어본 적이 있거든. 나야.... 뭐... 그다지 슬퍼할 사람도 없으니 상관없지만..." 그냥 간수에게 감사의 말을 하려고 말했다가 괜히 형제들 생각이 나서 금 방 눈에 눈물이 고였다. 사람 쪽팔리게 왜 자꾸 울려고 그러는지 건지 모 르겠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울보가 됐는지 정말...!! ...그만큼 형제들 일이 충격적이었던 거겠지.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이 렇게까지 남에게 미움받아 본적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호의만 받아 와서 오랫동안 미움이 어떤 건지, 증오 가 어떤 건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 동안 나는 믿어 지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놈이었던 거다. 또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정말 부끄럽고 무안해서 고개를 숙이고 빵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렇게 빵을 입어 넣으려 하고 있을 때 간수가 말 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저는 너무 슬플 것입 니다. 휘렌도 그렇고요. 정말입니다. 평소 전하에 대해 아는 시종들도 전부 전하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마세요. 카류리드 전 하.." 나는 그를 바라보고 웃었다. 정말 바보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어버렸다. "카류. 카류라고 불러 줘." 슈만이라는 이름의 간수 덕분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슈만 은 생긴 것 답지 않게 너무 상냥해서 그 덕분에 나는 형제들과의 오해로 절망했었던 것을 조금 잊을 수 있게 됐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나는 거 의 실성한 상태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이틀동안 있었던 일에 충격에 충격 이 더해져 거의 멍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슈만이 없었더라면 나는 아직도 바보같이 질질 눈물을 짜고 있거나 아니면 날뛰면서 엄청 추한 모습을 한 채로 처형당했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생각하니 내가 냉정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준 슈만에게 정말 다시 한번 고마워해야겠다. 그렇게 꼴불견으로 죽다니 소름 끼친다. 실성한 내 모습을 보고 날 궁지에 빠뜨리려 했던 인간들이 얼마나 통쾌할지 눈에 선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발악하는 것보다는 냉정하게 행동하는 편이 여러모로 훨씬 낫다. 나야 죽음에 그렇게 큰 두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 죽기 직전에도 얼마 든지 긴장감 없게 행동할 수 있다. 그런 나를 보면 날 죽이려던 놈들, 특히 유넨은 엄청나게 허탈하겠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 죽기 직전에 벌 벌 떠는 날보고 그들이 즐거워하게 내버려두진 않을 테다. 처형식 날 어떻 게 행동하면 날 죽이려했던 놈들을 무지하게 약올려줄 수 있을까. "카류 님..." 나는 그렇게 바득바득 음모 아닌 음모를 짜고 있을 때 내가 있는 감옥으로 슈만이 다가왔다. 울먹거리는 그의 모습을 보니 아마 처형당할 때가 가까 운 온 것이 아닌가 싶다. "언제 날 죽이겠대?" "카... 카류 님...!!" 대뜸 묻는 나의 말에 슈만은 깜짝 놀라 더욱 울먹이며 나의 이름을 불렀 다. 인상파 아저씨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그렇게 보 기 좋은 모습은 아니기에 이런 직접적인 말은 자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으응... 그러니까 내가 언제 처형당하는지 정돈 알고 싶어서..." "크흑... 카류 님.. 왜 카류 님 같이 좋은 분이...크흐흑..." 그러나 내가 묻고 싶은 말이 변한 건 아니었기에 결국 슈만은 울음을 터뜨 려 버렸다. 나는 정말 곤란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곧 죽을 당사자는 별 시시껄렁한 생각이나 하고 앉아 있는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면 도 없던 사이였던 슈만이 이렇게까지 마음 아파해 주는 모습을 보니 상당 히 양심에 찔렸던 것이다. 솔직히 곧 죽을 나를 위해 진심으로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 은근히 기분 좋아져서 더더욱 양심에 찔렸다. 크으!! 역시 나 는 이런 놈이었던 거다!! "으... 그러지마. 슈만. 어쩔 수 없잖아. 뭐, 날 죽이려 했던 그들을 용서해 준다거나 하는 차원은 아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으니까. 응? 그렇게 울지마. 다 큰 어른이..." "저... 저는 관계없습니다. 그렇지만 카류 님께서.. 카류 님께서...." "난 괜찮아. 걱정하지마. 사실 제일 슬펐던 일은 슈만 덕분에 많이 잊을 수 있었는걸. 이젠 괜찮아. 나 정말 슈만한테 고마워하고 있어. 정말 고마워, 슈만. 나는 괜찮으니 그렇게 울지마." "카류 님... 일부러 그렇게 담담하게 행동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참 으시는 편이 더 힘겨우실 거예요..." 슈만은 내가 안쓰러운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하긴, 슈만은 나에 대해 모르 니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굉장히 불안해하고 있을 거라 생각할 것 이다. 사람은 죽기 전에 그렇게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것이 정상이니까 말 이다. 전생의 내가 죽을 때 그랬었지 않은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다. 죽음은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죽음은 끝 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것을 깨달았기에 나는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슬퍼하지마. 슈만.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리고 죽고 난 뒤의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내가 죽었다고 펑펑 울고 슬퍼하지 말고 예전에 이런 녀석이 있었었지 정도의 회상을 해주는 걸로 족해. 이왕이면 정말 착한 녀 석이었는데 라고 생각해주면 더 좋고. 응? 하하..." 내가 슬퍼하고 있는 슈만을 위로도 할 겸 어떻게든 분위기를 띄워보자는 취지로 장난스럽게 말하자 슈만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우욱, 나는 정 말 바보가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위로를 이따위로 하는지. 어 린애 다루는 건 자신 있는데... "죄송합니다.. 카류 님. 제게... 제게 힘이 있었다면..." "괜찮아. 괜찮다니까. 이렇게... 나를 위해 주는 마음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행복해. 진짜야. 나는 이제까지 이런 사람들의 호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 지 몰랐던 거 같아." 나는 슈만을 보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호의란 것은 정말 기분 좋은 것이 다. 거의 절망했던 내가 그의 몇 마디 걱정하는 말에 기운을 차릴 정도로 그것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드디어 정들었던(?) 감옥과 이별할 때가 찾아왔다. 다른 두 간수와 슈만이 침중한 표정으로 함께 나에게로 왔던 것이다. "카류 님... 마지막은 이들이 함께 할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곳까지 전하를 모시게 되면...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응, 괜찮아. 사람 죽는 게 그렇게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지. 게다가 슈만 이 내가 죽는걸 보고도 담담해 하면 그게 더 싫은 일이 아니겠어. 괜찮아. 괜찮아." "카류 님!!" 슈만은 드디어 펑펑 눈물을 흘렸다. 에휴, 정말 착하고 좋은 사람이다. "슈만... 진정하게. 그리고 카류리드 전하. 마지막은 저희들이 모시겠습니다. 부디 이쪽으로..." "응." 나는 슈만 곁에서 그의 등을 두드려주고 있던 간수의 말에 가벼운 발걸음 으로 감옥을 빠져 나왔다. 슈만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간수도 역시 침울한 얼굴이었기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내가 죽는걸 슬퍼해 준다는 말은 그만큼 나를 소중하게 여겨준다는 말이 되니까 그런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남이 슬퍼하는걸 보고 좋아하다니 의외로 나는 생각 이상으로 사 악한 놈이 아닌가 싶다. "슈만. 정말 고마웠어." 나는 슈만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의 기억 속의 나의 마지막 모습이 울부짖는 모습이 아닌 밝은 모습이길 바랬기에 나는 그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 간수들과 뒤따라붙는 몇몇의 기사들의 감시를 받으며 지하감옥을 빠져 나와 감옥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내가 처형당할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나는 왕궁 안에 16년을 살아왔지만 처형장은 한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처 형장이라는 것에 껄끄럽기도 했고, 한번씩 호기심이 동해 가볼 마음이 생 길 때도 당연히 주위 사람들이 가지 못하게 말렸기 때문이다. 처형장은 경기장을 아주 작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들, 이를테면 내 경우와 같이 반역을 한 왕자라던가 하는 이런 자들을 처형하기 위해 만들어둔 곳이라 그런지 이만큼이나 거창하게 만들 어 놓은 모양이었다. 처형장 주변은 많은 기사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혹이라도 누가 나 를 빼낼까봐 저렇게 엄청난 인원으로 경비를 하게 한 모양이었다. 상당히 낟이 익은 기사들도 있어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 기사들도 그렇게 좋은 기분은 아닌 듯 최대한 나와 시선을 피하려 노력했다. 그들이 최소한 내가 죽는데 쌍수 들고 기뻐하진 않았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천천히 안 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걸어 들어가 드디어 밖으로 통하는 문이 보였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그 문이 열리면서 트로 이 후작이 나타났다. "후후.. 기분은 어떠신지." 트로이 후작은 드디어 골치 아픈 짐을 다 해치웠다고 생각했는지 속이 시 원하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음, 오늘은 바람이 정말 상쾌하더라고요. 게다가 오랜만에 보는 태양을 봐 서 그런지 정말 기분이 좋아요. 트로이 후작 님."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으며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이런 내 행 동에 트로이 후작이 멈칫하며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렸다. 꽤나 황당할 꺼다. 바로 이걸 노렸지. 네 놈만 기분 째지게 내가 가만히 둘 줄 알았냐!! 나는 문 밖으로 나섰다. 처형장 안 쪽으로 들어가자 국왕과 몇몇의 귀족들 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안의 경비는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 형 상대가 상대인 만큼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까지 초빙한 모양이었다. "루브 형들은...." "그분들은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트로이 후작의 말에 나는 약간 섭섭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형제들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내가 죽임으로서 자신들을 배신했다 고 생각하고 나를 증오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형제들을 상상하는 것만으 로도 기분이 가라앉는데 이런 곳에서 직접 그들과 대면한다면 정말 괴로울 것이다. 슬프지만 차라리 보지 못하고 가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헉!!" 그렇게 죽 처형장 안쪽을 구경하던 나는 처형장 중간에 있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교... 교수대...!" 나는 정말 놀라서 약간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교수대를 보고 주춤거리 는 나를 보며 트로이 후작이 그러면 그렇지 라고 말하고 싶은지 약간 비웃 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전하를 위해 특별히 다시 제작한 교수대랍니다." "젠장...!! 참수형이 아니고, 교수형이라니!! 말도 안돼!!" 바로 이어지는 나의 말에 트로이 후작이 약간 비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러나 이번엔 트로이 후작을 골려주려고 한 짓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절실했다. 나는 이제까지 당연히 참수형을 당할 것이라 믿어 의 심치 않았다. 가장 중범죄인 반역을 했으니 당연히 참수형을 당할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기에 있는 교수대를 보면 나는 분명 교수형에 처 해진다는 말이 된다. 칼로 바로 목을 잘라버리는 참수형이라면 목이 잘리는 순간만 빼면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테지만 교수형이라면 죽을 때까지 상당히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당황한 것이다. 내게 사형에 대한 지식 이 있을 리 만무하니 기본적으로 교수형 하면 목을 매어 질식사시키는 것 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여긴 법도 없나요!! 죄목이 반역이면 당연히 참수형을 해야 하는 거 아닙 니까." "...후. 국왕폐하께서 자비를 베풀어 전하의 시체나마 온전히 보존하려 배려 하신 일입니다. 폐하께 감사드리는 것이 어떨까요." 이마에서 맺힌 식은땀을 닦으면서도 트로이 후작은 나에게 반격의 말을 해 왔다. 젠장, 저 인간이 곧 죽을 사람에게 저렇게 나오다니 정말 인간이 못 되 먹었어. 자기 아들인 딜트라엘을 죽이려했다는 소리 들었을 때부터 알 아봤다니까!! "저는 제 시체를 그냥 들판에 버려서 늑대 밥이 되게 해도 아무렇지도 않 은데 평소 할 일도 많으신 분들이 왜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고 그러셨어 요. 제 시체를 고이 모셔두어도 저는 하나도 고맙지 않는데 어쩌죠?" 나는 그렇게 트로이 후작에게 톡 내뱉고는 내 뒤에 서있는 간수에게 고개 를 돌렸다. "있지, 저기에 매달리면 죽을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으윽... 여긴 세세한 시간 개념이 없어서 어떻게 물어야 할지 모르겠네. 이봐, 대충 얼마 나 걸리는지 몰라? 툭 떨어지자마자 죽을 수 있을까?" 나의 말에 내 주위에 서있던 인간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순식간에 차 가워진 공기 속에서 난 혼자서만 애가 탔다. 나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밧줄에 매달렸을 때, 금방 죽지 않고 목에 밧줄을 맨 채로 대롱대롱 매달린다면...흐읍!!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역시 안전 한 참수형이 좋은데 이런 복병이 숨어있었다니!! 마지막까지 신은 나를 버 리시는구나!! "시간이 됐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무엇 때문에 이렇게 시간을 끄시는지는 모르나 슬픈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것이 좋으실 것입니다. 오시면서 이곳 의 철통같은 경비를 직접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어디선가 유넨이 스윽 트로이 후작 곁으로 다가와 안타깝다는 듯 약간 침 울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속으론 곧 죽게될 날 보고 좋아 죽으려하고 있 는 주제에 잘도 저렇게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재능으로 어디 연기자나 했으면 완전 히트 쳤을 텐데, 진로를 잘못 선택하여 자신과 남에 게 고루고루 피해를 주는 대표적인 예 중 하나가 바로 내 눈앞에 서있구 나. "하.하.하. 유넨 선배님. 전 그저 이렇게 반역자를 참형하지 않고 교수형을 하여 아르윈 왕국의 법도가 흔들리지나 않을까 걱정돼서 한 말이었답니다. 왕국에서도 가장 모범이 되어야 할 왕실에서 멋대로 법을 바꾸어 적용하니 백성들이 왕실을 보고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이 기회에 아깝더라도 새로 만든 교수대는 그냥 포기하시고 제 처형 방법을 참수형으로 바꾸시는 게 어떨까요. 참수형은 잘 드는 칼을 하나 가져와서 힘 좋은 기사가 팔을 한 번 휘둘러 주기만 하면 되니 가장 신속하면서도 확실하게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왕실의 기강도 세울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군요!!" 나의 말에 유넨과 트로이 후작의 얼굴이 완벽하게 구겨졌다. 나는 그들이 얼굴을 보며 작게나마 통쾌함을 느꼈다. 내가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냐. 이 나쁜 놈들아!! 아니, 이게 아니라 정말 참수형을 시켜주면 안될까. 정말 미치겠군. 이미 교수형하기로 결정이 난 이상 어떻게든 교수형을 해야 한다는 듯이 간수들은 말없이 나를 교수대 쪽으로 데리고 갔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 만 유넨과 트로이 후작은 그런 말을 한 내가 얄미워서라도 어떻게든 교수 형 해주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것같이 보였다. 나는 교수대로 올라갔다. 그렇게 서서 문득 내 앞으로 내려온 밧줄을 보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지며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나는 진짜로 죽는 것이다. 죽는 건 둘째 치고라도 저기에 매달리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문득 나에게로 많은 사람들이 시선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죽는다! 마음 편히 먹자! 부들부들 떨며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여줘 서 날 죽이려 했던 놈들에게 쾌감을 주는 일 따윈 하지 말자고 결심했잖 아. 교수형이래 봤자 얼마나 오래 걸리겠어. 금방 죽겠지. 설마 어깨에 칼 맞았을 때보다 더 아프지는 않겠지. 믿자. 믿는 거야! 한번 굶어 죽어본 경 험도 있는데 뭘 그렇게 굳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던 나에게 노신관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 로 나를 위해 뭔가 기도문 같은 것을 중얼중얼 읽기 시작했다. 그렇고 그 런 썰렁한 문구였고 또 상당히 길어질 것 같기에 나는 굳은 몸을 풀자는 취지로 교수대를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트로이 후작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는지 교수대에 사용된 나무는 새것 같이 상당히 깨끗해 보였다. 그리고 나의 앞에 걸린 밧줄도 절대로 끊어지지 않 을 튼튼하고 굵직한 것으로 걸려있었다. 일반적인 교수대리면 내가 저 밧 줄에 목을 건 후 발 밑의 문이 열리게 되어 내가 떨어져 목이 졸리게 되는 구조일 것이다. 문득 발 밑에 문이 열릴 것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발을 몇 번 쿵쿵 굴러보았다. 괜히 이 문이 얼마나 튼튼한지 알고 싶어져서였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신관이 잠시 기도문 읽기를 멈추고 이상한 눈길로 나 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를 구경하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긴장을 푼다고 한 짓이 약간 도를 넘었던 것이다. 나는 조금 무안하고 부끄러워서 베시시 웃었다. 정말 무지하게 쪽팔리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추태를 부리다니. "자, 마지막으로 폐하와 다른 분들께 이야기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신관은 그렇게 말하며 물러갔고 국왕이 제일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니까. 감히 루블로프의 자리를 노린 네 잘못이다." "왕이 되려고 진짜로 자기 동생을 죽인 사람에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 군요." 나는 방긋 웃는 얼굴과는 대조되는 재수 없다는 목소리로 맞받아 쳤다. 국 왕은 새파래진 얼굴로 미간 사이를 구겼지만 그냥 말없이 물러났다. 어차 피 곧 죽을 놈인데 라는 생각을 한 것이겠지. "왕실의 평안을 위해 죽어주십시오. 카류리드 전하." "왕실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 참수형시켜 달라니까 정말 말을 안 들으시는 군요. 왕실의 평화을 지키는 정의의 사자로서 실격입니다." 다음 차례로 다가온 트로이 후작에게 나는 또 한번 일침을 놓았다. 트로이 후작은 금방이라도 밥상을 뒤집을 것 같은 얼굴(?)로 씩씩거리다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물러났다. 곧 죽을걸 알고 있지만 이 순간만은 정말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기회만 닿는다면 내 온갖 지식을 전부 동원한 궁극 의 말발로 저 인간의 얼굴을 더욱 납작하게 만들어 주는 건데 정말 아깝 다! "뭘 꾸미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도망치지 못할 것이다. 카류리드." 다음 차례로 유넨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뭔가 꾸미는 게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냐, 유넨.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유넨 선배님. 저는 선배님을 다시는 못 보게 될 걸 생각하니 정말 아쉽거든요. 선배님은 안 그러신가 보네?" 내가 빈정거리며 말하자 유넨이 피식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오, 사람 들 앞에서 저 궁극의 포커 페이스가 무너지다니. 나의 여유로운 행동에 정 말 약이 올랐나 보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마법사들이 지키고 있는지 알아둬라. 마법사들이 전 부 너에게 마음을 돌리지 않는 한 아르디예프 님도 너를 돕지는 못할 것이 다. 고위 마법일수록 캐스팅 시간이 굉장히 길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물론 알지요. 이제 다 포기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에구, 제가 죽고 나면 더 이상 선배님께 수식을 가르쳐 드리지 못하는 것이 가장 안타깝네요. 가 르쳐 드릴 수식이 아직 무궁무진하게 많은데 말이에요. 아세요? 전 3서클 의 수식까지 암산을 할 수 있답니다." 마법사인 그에게 이 수식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충분히 알고있었기에 약올 려 주려고 일부러 이런 소리를 한 것이다. 과연 나의 말에 유넨은 잠시 움 찔거렸다. 그러나 곧 웃기지도 않은 소리라는 듯 빈정거리는 말투로 말했 다. "죽기 전의 발악이구나. 훗, 3서클을 암산? 가지가지 하는군. 거짓말도 그 럴듯한 걸 골라해야 믿어주지." "이제까지 저한테 수식을 배워 가셔놓고 저런 소릴 하시네. 제가 10살 때 생명의 궁에서 4서클의 수식을 얼마나 빨리 풀었는지 되새겨 보시면 아실 텐데... 뭐, 기억 안 나시면 어쩔 수 없고요." 유넨은 잠시 말을 끊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거리다가 그냥 그대로 입 다물고 내려가 버렸다. 더 이상 말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아는 겨우 깨달은 모양이었다. 조금만 더 약올려 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곧 죽을 내가 복수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 몇 사람을 지나고 드디어 아르디예프 님의 차례가 왔다. 아르 할아버지는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심하셨던 모양이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르 할아버지. 몸을 생각하셔야죠." 나는 평소 아르 할아버지에게 하던 대로 베시시 웃어드렸다. 이젠 거의 다 커서 통하지 않을만도 하건만 할아버지는 이렇게 웃으면 여전히 나를 예전 의 그 꼬맹이 보듯 귀여워 해주셨다. 그리고 그것이 나쁘지 않아 나는 아 직까지도 계속 이걸 써먹고 있었던 것이다. "네 걱정이나 해라. 이 멍청한 꼬마야!! 무엇 때문에, 왜 그런 짓을 한 거 냐! 왕 같은 게 뭐가 좋다고 그런 짓을 한 거냔 말이다." "...이제 아무래도 좋잖아요. 여기까지 왔는걸요. 아르 할아버지." 나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고 다시 한번 밝게 웃어 보였다. 자칫했다가는 또 다시 눈물을 터뜨려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그런 것이다. 차라리 방금 전의 저 녀석들만 상대한다면 약이나 실컷 올려주고 당당히 죽을 만도 하겠건만 아르 할아버지의 모습 보니 뻔뻔한 모습을 보여주자는 마음이 흔들렸다. 분명 아르 할아버지도 나를 오해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결국 형제들처럼 나를 믿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 오해를 받은 채로 나는 죽어야만 하는 것이다. "...건강하세요. 할아버지. 제가 미워도 너무 욕하지는 마세요." 아르 할아버지는 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는 천천히 나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하... 할아버지?" 아르 할아버지의 행동에 약간 당황해하다가 나는 문득 할아버지가 나의 목 이 아닌 나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걸이...?" 문득 파티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필요 없는 물건이긴 하지만 언제고 도로 뺏어갈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기억해 내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발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필 지금 그걸 가져가려 할건 뭐냐!! 죽 고 난 다음에 시체에서 빼 가면 될 거 아냐. 아무리 내가 반역을 했다해도 그렇지. "하아, 그 목걸이..." "지금 가져가겠다.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쥔 돌멩이에서 갑자기 눈부신 흰빛이 목걸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 ◆ ◆ ◆ ◆ ◆ ◆ 나는 카류가 교수대 위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인지도 모호할 정도로 지금 이 상 황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처음 10살 짜리 어린애를 생명의 궁에 넣어 마법을 가르치라고 했을 때는 대부분의 마법사들뿐만 아니라 나 역시 큰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어린 나이에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도 마법 수식을 이해하는 것은 절대로 무리였기 때문이다. 얼토당토않은 일을 명령한 그 국왕이라는 작자의 머리 통에 매직 애로우라도 날려주고 싶을 정도로 나는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카류를 만난 후엔 화는 흔적조차 없이 날아가고 오히려 흥미가 생 겨버렸다. 카류는 믿어지지 않게도 마법에 사용되는 수식을 이해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20살이 넘은 어른들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마법 수식을 겨우 10살 짜리 어린애가 술술 풀어 가는 것을 보고는 마법사인 내가 카류 에게 흥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류는 유넨과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천재였던 것이다. 솔직히 마법 이외에 아무 것도 없는 어떤 의미로는 쓸쓸한 생명의 궁에서 만 살았던 노마법사들은 10살의 착실하고 싹싹하기까지 한 귀엽고 조그마 한 어린아이에게 온 신경을 빼앗겼고 그것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르윈 왕국 유일의 8서클의 마법사가 되기까지 나는 수십 년 동안 그저 생명의 궁 안에서 마법 연구만 해왔다. 내가 노력을 거듭할 때마다 마법은 잊지 않고 그에 걸맞은 성과를 가져다주곤 했기에 나는 오랜 세월동안 마 법의 매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십 년이 지나 8서클까지 도달하고 난 후 어느 날, 나는 자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 을 깨달았다. 마법만이 전부였던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보통 마법사 들이 그렇듯 나 역시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아내도 아들도, 그리고 손자도 없었던 나에게 조그마한 어린아이인 카류는 마치 친손자를 보는 것 같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하르몬의 언제나 마법에 성실하게 임하는 태도나 유넨의 뛰어난 마나 유동 능력을 높이 사서 나의 애제자로 둔 것과는 달리, 카류의 경우에는 그런 마법에 관련된 것보다 너무나 귀여운 녀석이라는 생각에 손자로 삼고 싶다 는 그런 훈훈한 느낌으로 제자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1년이 지난 후 카류는 생명의 궁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마나를 느끼는 자질을 없어서 마법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엄청난 수식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데도 마나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나를 포 함한 많은 마법사들이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카류는 보통 인간들처럼 절망하기는커녕 그 후 궁 밖에서 만날 때마다 언제나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그런 유쾌함이 나를 더욱 흐뭇하 게 해주었다. 카류도 이젠 조금씩 나이를 먹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만날 때마다 여전히 귀여운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곤 해서 나는 그 꼬맹이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솔직히 이제는 나도 늙었는지 가족이 생기는 꿈같은 것을 한 번씩 꾸곤 했는데, 거기서 카류가 몇 번이나 내 손주로 등장했는지 모른다. 친인척이 하나도 없는 나에게 유일하게 살갑게 구는 어린 아이였던 카류는 생각 이상으로 큰 의미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다가 느닷없이 카류가 고대 유적의 동굴에 갇혔다는 소 식이 날라 왔다. 그 소식에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 정말 우려곡절 끝에 그 꼬마를 구해놓았지만 걱정과는 달리 카류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팔팔하고 쾌활했다. 그런 곳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으면 그 충격에 조금 침 울해 질만도 하건만 그 조그만 녀석은 그런 걸 아예 모르는 건 아닌가 싶 었다. "그 분이 없었다면 저희들은 모두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 최소한 저는 분 명 죽었겠지요. 그분은 마치 구원자와 같이 저희들을 이끌어 주셨답니다. 카류 님이 그저 마법이나 지식이 뛰어난 제자들보다 훨씬 소중한 아르디예 프 님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저 역시 이렇게 카류 님이 너무 소중해졌으니까요." 리아 후작의 저택에서 함께 동굴에 갇혔다가 구출된 나의 옛 제자인 타스 는 그렇게 카류에 대해 이야기했다. 타스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건만 그 당시 나는 카류가 다른 사람 들을 위해 일부러 자신을 희생했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확실 히 나도 그 동안 카류가 생명의 궁에서 한 행동들을 보며 착하다고 그렇게 똑똑할 수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기는 했으나 아직 13살 어린아이에 불과하건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쉽사리 믿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거친 용병들이, 무조건 자신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대 귀족의 자 제들이 하나같이 카류를 칭송하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 있었다는 그 일을 믿기는 힘들지만 그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이 일을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리아 영지의 중심도시 라누아 시에 놀러나갔을 때 나는 그 동굴에 서 일어난 일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 았던 평민 소매치기 따위의 처벌 장면에 카류는 무섭게 흥분했던 것이다. 약자를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동정할 줄도 모르는 우리들을 질책하는 듯한 말을 하는 카류를 보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성안에서 만 커온 왕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남을 배려할 줄을 아는 착한 아이였다. 수도로 돌아가던 중 오크의 목에 검을 들이대었던 일은 나에게 정말 묵직 한 충격을 주었다. 카류는 오크마저도 죽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러나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자신의 손으로 오크에게 마지막을 선사해 주었 다. 고통스러워하는 오크에게 편안한 죽음을 주기 위해 일부러 자신의 손 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나는 타스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것에 확신을 가 지게 되었다. 카류는 우리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카류에겐 신분이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카류에게 생명체는 누구든 평등 하고 고귀한 존재였다. 상대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보다 더 슬프게 여기는 착한 아이였다. 그래, 그때 나는 카류가 그런 아이라고 확신했다. 남을 위해 쉽게 자신을 희생하려 하는 카류가 항시 걱정이 됐으며... 그리 고... 그만큼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 그저 손자로 삼고 싶었던 귀여운 아이에 불과했던 카류가 점점 나를 매료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그렇기에 그때 그 재판에서 증거물로 제시되었던 구슬에서 나오는 카류와 아스트라한의 대화를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쌓아온 내 마법력을 의심할 정도였다. 그 재판에서 카류는 사형이라는 판결을 얻 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생각나지도 않는다. 카류가 교수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나는 망연히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소중한 아르디예프 님의 사랑스러운 제자가 될 것이라 의심치 않습니다.' 리아 영지에서의 들었던 타스의 말이 주문처럼 내 귀를 맴돌았다. 그의 말 대로 카류는 언제부턴가 이렇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카류는 나에게 있어 마법만큼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카류를 잃는 것을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나는 저 꼬맹이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망연히 카류가 교수대로 가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카류가 곧 죽을 장소에 서는 것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마지막으로 친인과 대화를 해주게 하는 자리에 나는 떨리는 걸음을 옮겼 다.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 나의 부름에 카류는 살짝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카류는 저런 상태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안색이 안 좋아 보이네요. 아르 할아버지. 몸을 생각하셔야죠." 카류는 언제나 나에게 보여주던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카류의 모습을 보자 문득 화가 치밀었다. "네 걱정이나 해라. 이 멍청한 꼬마야!! 무엇 때문에, 왜 그런 짓을 한 거 냐! 왕 같은 게 뭐가 좋다고 그런 짓을 한 거냔 말이다." "...이제 아무래도 좋잖아요. 여기까지 왔는걸요. 아르 할아버지." 나의 질책에 끝까지 담담할 것 같았던 검푸른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하 지만 카류는 눈물을 흘리는 대신 금방 조금 전에 했던 것처럼 살짝 웃었 다. 그리고 그 웃는 표정 그대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건강하세요. 할아버지. 제가 미워도 너무 욕하지는 마세요." 살짝 떨리고 있는 카류의 목소리가 내 귀에 흘러 들어왔다. 내가... 어떻게 너를 미워할 수가 있을까. '언제나 무슨 생각을 하시고 계신 것일까요. 카류 님은.' 문득 오크를 죽이고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디트리온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 다. 정말 저 꼬마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저렇게 웃는 것일 까. 마지막 순간 정도는 죽기 싫다고 울부짖어도 좋을 텐데. 그렇게 안타까 운 표정으로 웃지 않아도 충분하건만.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카류 님은.' 교수대 위에 서있는 카류를 다는 다시금 바라보았다. 이제 카류의 웃는 모 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빛내던 그 맑은 검푸른 눈 동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만은 카류 님을 지키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비록 카류가 정말 반역을 저질렀다 해도... 비록 카류가 정말 자신의 형제들의 어머니들을 죽인 살인자라 해도... 지금까지의 카류를 바라보며 내렸던 나의 판단이 모두 틀렸었다 해도... 나는... "하... 할아버지?" 내가 자신의 목으로 손을 뻗는 것을 보고 카류는 약간 당황스러워 했다. 그러나 나의 목적은 카류의 목에 걸린 돌멩이였다. "하아, 그 목걸이..." "지금 가져가겠다. 카류야." 나는 그 돌에 마력을 집중했다. 그리고 삽시간에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 다. "크흑!!" "아...아르 할아버지?!" 그 돌멩이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우리들이 있는 교수대 주위를 제외하고는 온통 처형장을 가득 메웠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 빛이 내 주위를 통과하면 서 두 번 다시 기억해 내기도 싫었던 충격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나는 빠 르게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마법서를 꺼내어 워프 마법을 캐스팅하기 시작 했다. "마...마나가!!!" "으아악!!" "안돼!! 이럴 수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마법사들의 비명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 마법 을 시전해 갔다. 우연히 얻게된 마나를 느끼지 못하게 하는 빛을 내뿜는 고대의 유산 중 하 나인 아티펙트. 그랬기에 마법사인 우리들에게 그것은 필요 없는 물건이었 다. 아니, 없애버려야 할 물건이었다. 이 아티펙트는 시전한 자의 주위의 작은 범위 외에는 마나를 모조리 정지시켜 버린다. 적군과 아군의 구분이 없어 전쟁에서도 쓸모가 없다. 사실 이 돌멩이는 발견하자마자 없애버려야 했을 마법사의 천적과 같은 극악한 물건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나라도 문책 받을 요소가 다분 했지만 기이하게 빛나는 검푸른 색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에 아직까지 없 애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쓰지 않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감춰두고 있었던 것을 카류에게 넘겨주었다.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는 보통 사람은 이 아티펙트의 마법을 발동시킬 수 없을 테니까 그냥 악세사리 용도로 넘 겼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평생 마나와 함께 살아온 마법밖에 모르는 마법사들에게 마나를 느끼지 못 한다는 것은 자신의 손발을 잃어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의 허탈감을 주게 된 다. 내가 적은 양의 마나로 이 아티펙트를 약간 실험해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방금 아주 잠시동안 빛을 쏘였던 나도 지금 그렇게 충격을 받지 않았는가. 내가 지금 다른 마법사들에게 얼마나 잔인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알지만 지금은 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르 할아버지...." 카류가 다시 한번 당황한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워프 마법의 캐스팅 때문에 그 말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지 않도록 어떻게든 서둘러야만 했다. 마법사들이 정신이 나가있다 해도 곧 처형장 밖의 기사들이 밀려들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멈추십시오! 아르디예프 님!!" 교수대 위로 누군가가 뛰어 들어오고 있다 것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캐스팅을 마친 상태였다. 빠르게 카류의 목을 감싸고 나는 워프를 시전했 다. Part. 27 - 도주 "카류..." 나는 괜히 방안을 어슬렁거리며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또 한번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그런 짓을..." 카류가 이제껏 우리들에게 한 행동은 전부 왕이 되기 위한 뒷공작이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곱씹으면서 나는 계속 방안을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항시 그렇게 친근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카류의 행동이 전부 위선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왕위를 위해 왕비 에렌시 아 님과 제1후궁 아르멘 님을 살해했다는 그런 증거까지 나온 것이다. 그 렇게 사이가 좋았던 카류의 형제들도 믿을 수밖에 없는 확실한 증거가 있 었다. 아버님은 그렇게 가증스런 왕자가 없다면서 거의 울분을 토하며 나 에게 카류에 대해 잊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사실 아버님이 카류를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왕위 는 절대 제1왕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에 카류의 뛰어난 능력을 상당히 문제 삼고 계셨고, 몇 번이나 나에게 카류와 가까이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카류가 그런 왕위에 대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런 아버님의 염려는 무시했던 것이 다. "딜트라엘 님.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알았어." 시녀가 들어와서 식사를 가져다 놓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문을 잠 그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카류가 반역의 죄명으로 처형을 당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광분 해버렸다. 도저히 그것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난리를 쳤다가 그만 방에 갇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렇게 방안에 갇혀 한번씩 나를 만나러 오시는 아버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서 카류의 그 일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사이가 좋았던 형제들까지 외면해 버릴 정도의 증거라면 거의 틀림 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카류가 그 동안 우리들에게 수많 은 학교 친구들에게 그렇게 친근하게 굴었던 것은 전부 위선일지도 모른다 는 그런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 마음은 금세 사그라지고 만다. 동굴 안에서 있었던 그 일을 회상하노라면 카류에게서 돌아서던 마음도 금방 제자리를 찾고 마는 것이 다. 그것은 직접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동굴에서의 일을 겪지 않 는다면 누구도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단지 위선만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우리들을 구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 만에 하나의 확률로 어떤 이유에서든 카류가 정말 왕위를 노렸다 해도 나는 카 류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 동굴에서의 그 일을, 카류에게서 받은 그 은혜를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랬기에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들을 도와주었던 카류처럼 이번에는 내가 카류를 도와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 이 자리가 이렇게 무력한 자리인지 나는 처음 깨달았다. 오늘, 바로 오늘이 카류가 처형을 당하는 날이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터져 나갈 것 같은 가슴을 부여잡고 방을 이리저리 배회하고만 있었다. "젠장!!!" 나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창가 테라스로 나갔다. 그러다가 충동적으로 이 답답한 방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래쪽의 경비병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장식용으로 약간 튀어나와 있는 부분을 밟고 옆방의 테라스로 훌쩍 뛰어 넘어갔다. 어릴 때 에르가랑 어울려 위험한 장난이란 장난은 전부 해보면서 배웠던 이 테라스 뛰어넘기 를 이럴 때 써먹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말이다. 그렇게 옆방으로 빠져 나오자 무엇을 해야할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항시 같이 어울리던 에르가라던가 다른 녀석들은 전부 자기 영지로 내려간 뒤이 고 아직 수도에 남아있는 녀석은 세미르뿐이었다. 그러나 아마 그 녀석도 나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카류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도 움을 받은 것이 바로 세미르니까 카류의 처형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녀석이 어떻게 반응했을지 보지 않아도 눈앞에 선했다. 그렇다고 일부러 빠져 나온 방으로 다시 들어가기도 뭣해서 시종들의 눈을 피하면서 저택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문득 아버님의 서재까지 다다 랐다. 얼마 후면 아버님이 돌아오실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아버님의 서재 로 들어갔다. 어떤 소식이든 빨리 카류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 다. 이대로는 가슴이 타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아버님의 서재로 들어갔지만 초조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괜히 아버 님의 책상 위의 서류를 들여다보기도 하며 이리저리 왔다갔다 거리다가 별 생각 없이 서재에 딸린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제 딜트라엘 형님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요?" 카류에 대한 생각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누군가의 말소리에 그제야 서재로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나는 바로 서재 쪽으로 나가 지 않았다. 대뜸 나의 동생 카마엘의 말소리에서 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 기 때문이다. "이젠 끝이야!! 딜트라엘도 끝이라고!! 일이 이렇게 되지 않기 위해 내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건만!! 그 때 처형장에서 그 놈이 여유 만만하게 굴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저주나 받아라, 카류리드 왕자." 아버님의 분통을 터뜨리는 모습에 나는 깜짝 놀랐다. 대체 카류에 대해 왜 저렇게까지 말하는 건지, 그리고 여기서 내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정말 궁 금해졌다. "카류리드 왕자가 그런 극악한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 습니까. 게다가 아르디예프 님이 그렇게까지 하실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 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알아챘어야만 했다, 카마엘. 절대 카류리드 왕자가 도망치도록 내 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카류리드 왕자를 없애버리기 위해 이 제까지 했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구나. 결국은 내전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아르윈 왕국에 전화의 불길이 덮치게 될 것이다." 아버님은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귀가 번뜩 트였다. 도망쳤 다고? 아르디예프 님이 카류가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단 말인가! 그 말을 듣 자마자 나는 기뻐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일단 살아 있어 주기만 한다면 내 가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카마엘." "예, 아버님. 말씀하십시오." "...딜트라엘은 자기 방에 잘 가둬놓았겠지?" "...네." 그러나 아버님은 나에게 오랫동안 그 기쁨에 젖어 있을만한 여유를 주지 않았다. 갑자기 어두운 분위기로 돌아가 내 이름이 다시 거론되는 것을 들 으며 나는 왠지 불안이 온 몸을 엄습하고 있음을 느꼈다. "카류리드 왕자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분명 딜트라엘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도움을 주려할 테지. 지금 상태를 보면 그러고 도 남을 것이다." "......" "내 손으로 또 다시 그 동굴 사건 때와 같은 일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내 귀에 아버 님의 다음 말이 계속 흘러 들어왔다. "딜트라엘이 트로이 후작 가의 차기 가주가 된다면 아르윈 왕국의 정세는 더욱 불안해 질 것이다. 가장 앞서서 카류리드 왕자를 쳐야 할 트로이 후 작 가가 주춤거리게 된다면 이 내전은 기약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긴 국면 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왕국의 안정을 위해 딜트라엘은... 제거해야겠구 나." "...아버님의 탓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우리 아르윈 왕국을 위해서..." "너의 몸이 약해 파블료프 왕립 학교에 보내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 었는지 모른다. 자칫했으면 너마저 잃어야 했을지 모르겠구나. 카마엘. 너 는 절대 딜트라엘과 같은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직시하고 언제나 아르윈 왕국의 평화를 염두에 두고 행동해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최대한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전과 같은 방법으로 서재가 아닌 반대쪽의 창으로 건너갔다. 가슴이 탁탁 막혀오는 것을 느끼며 나의 말이 있는 마구간까지 뛰어갔다. "딜트라엘 님?" 내가 말을 몰고 나타나자 문을 지키던 병사가 놀라 나를 불렀다. "후르부크 백작 가에 전할 말이 있어 나간다. 아버님의 전언을 알리러 가 는 것이니 막지 말아라. 조금 전에 아버님이 돌아오셨다는 것은 알고 있겠 지?" "그...그건...." "뭐야? 지금 계속 막겠다는 거냐? 아버님이 나에게 일을 맡긴 것은 그만큼 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시가 급하건만, 죽고 싶으냐?" 내가 살기 등등하게 노려보자 병사는 그제야 길을 비켜주었다. 나는 동굴 사건이 있은 후로는 시종이나 보통 병사들에게 한번도 이런 식으로 험하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나에 대해서 마음을 놓고 있었던 병사 는 내가 오랜만에 이런 식으로 나오자 놀랐던 모양이다. 그는 아마 정말 뭔가 심각한 일이 있는가 싶어 얼른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리라. 나는 말을 재촉했다. 남쪽으로. 리아 영지로. 카류도 분명 그곳에 있으리라. 사실 동굴에서 카류가 그렇게 다쳤던 것은 전부 나 때문이었던 것이다. 카 류가 반역자로 몰려 처형당할 뻔한 것도 내 탓이었다. 카류가 고통과 절망 에 빠진 것은 전부 내 탓이었다. 아니, 나의 아버님 때문이었던 것이다. 말을 달렸다. 아버님이 알아채기 전에 수도를 벗어나야만 했다. 어떻게든 리아 영지까지 가야만 했다. 나는 카류를 배신할 수 없었다. 나는 영원히 카류를 배신할 수 없을 것이 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님께 죽을 것이다. 너무도 아르윈 왕국을 사랑하는 아 버님은 이 왕국의 평화의 걸림돌이 되는 존재라면 자신의 친자식이라 할지 라도 '제거'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모든 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미 나는 아버님의 마음속에서 죽어 있었다. 아버님은 내가 그 동굴 여행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 동굴을 무너뜨릴 명 령을 내렸으니 내가 죽을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아버님이 고대 유적의 동굴에 나를 보냈던 순간부터 이미 나는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말을 달렸다. 계속해서 리아 영지로 말을 재촉했다.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붉은 하늘이 물기에 야릇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나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 ◆ ◆ ◆ ◆ ◆ ◆ "아...아르 할아버지!!" 아르 할아버지가 나를 감싸 안자마자 갑자기 주위 풍경이 넓은 들판으로 바뀌었다. 목걸이에 달린 돌에서 빛이 난 후 아르 할아버지가 마법서를 펴 기에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아르 할아버지가 나를 구하려고 워프를 시전 한 것이다. "카류야...에구구.." 아르 할아버지는 곧 신음소리를 내면서 주저앉았다. 나는 당황스럽기도 하 고 너무 의외의 일에 놀라워서 멍하니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어째서..." "휴우... 구해주었는데도 말이 많구나. 이 꼬마." "그...그게 아니라... 어떻게 하시려는 거예요. 잡히면 죽을지도 몰라요..." 나는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쳐봤자 전국 수배자밖에 더 되겠 냐는 현실을 말이다. 게다가 아르 할아버지까지 범죄자가 되어 버렸다. 처 형 직전의 반역자를 도망치게 했으니 8서클 마법사일지라도 잡히면 사형을 당할지 모를 중범죄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실 마음 속 한구석은 너무 기뻤다. 자신이 그렇게 될 것을 아르 할아버지가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 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 것이다. "이리 오거라. 카류야." "......" 나는 조용히 아르 할아버지의 바로 곁으로 가서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아르 할아버지가 조금 몸을 일으켜 다가와서는 앉아 있는 나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걱정 말거라. 내가... 너를 지켜주마." "저는... 반역자인데..."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정말 찡하게 감동 받았지만 괜히 쑥스러워서 입에 바른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아르 할아버지가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됐다. 네가 반역자든 아니든... 이제는 관계없다. 네가 무엇이든 이젠 관계 치 않겠다. 이 할애비가 널 지켜주마.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나는 이제껏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실행하지 않은 적이 없다. 나는 8서클 마법사 아르디예프다. 누가 감히 나를 막겠느냐."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더 꼭 안아주었다.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느낀다. 비록 이렇게 오해를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해주는 아 르 할아버지에게 나는 너무나 감동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이 오해는 영 원히 풀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렇게 억울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 었다. 사람들의 호의라는 것은 이렇게 매력적이고 달콤했던 것이었다. 두 번 다시는 잃고 싶지 않은 그런 무조건적인 호의.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리아 영지로 가야지. 일단은 리아 영지로 간 다음에 결정하자. 리아 후 작도 완전히 궁지에 몰렸으니까 말이다. 제 아무리 영지가 크고 재력이 좋 은 최고의 영주라지만 아르윈 왕국 전체를 상대로 할 순 없을 테지. 일단 같은 처지에 몰린 사람들끼리 작당을 해봐야 할게다." "리아 영지로..." "일단은 가까운 마을로 가서 쉬자구나. 연속해서 위프를 여러 번 남발했다 간 한동안은 마법을 쓰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지금은 이것만 으로도 삭신이 쑤시는구나." "예... 할아버지..." 나는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가까이 보이는 성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 성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문득 한가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 돈 있어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느냐. 바로 도망쳐 나왔는데.. 가진 거라곤 내 목숨 같은 마법서뿐이다." "...그럼 할아버지 옷에 붙어있는 이 보석이랑 테두리의 금박 같은 거 좀 떼어 낼게요. 돈 대용으로 쓰게. 제 옷엔 그런 거 안 붙어 있거든요." "그걸 떼어내면 옷 모양이 안 나지 않느냐." "...할아버지... 우린 도망자라고요. 게다가 이런 옷을 입고 있으면 귀족이란 게 금방 들통날텐데 웬 귀족이 호위병도 없이 이렇게 단 둘이서 다니는가 의아하게 볼 거예요. 그리고 돈도 없으면서 옷맵시 같은 걸 따지게 생겼어 요?" "음, 이 꼬맹이가 크더니 할애비를 잡아먹으려 드네... 그래그래, 알았다. 어 서어서 하거라." 할아버지는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내면서도 내 머리를 싹싹 쓰다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완전히 어린애 취급이지만 그래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자연스럽다고 할까. 나는 아르 할아버지 앞에서는 영원히 어 린애로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마법을 쓰느라 지친 아르 할아버지를 쉬게 하기 위해 가까이 있는 여 관으로 들어갔다. 1층은 식당 겸 주점 같은 곳인지 몇몇의 남자들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음, 좀 좋은 곳으로 가지 그랬니. 이상한 냄새가 나는구나." "할아버지. 리아 영지에 도착할 때까지는 돈을 아껴야지요. 그리고 할아버 지, 피곤하지 않으세요? 일부러 성문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여관을 찾은 거예요." "어서옵쇼. 어떤 방을 마련해 드릴까요? 최고급 방으로 마련할깝쇼?" 주인은 빙긋 웃으며 싹싹한 태도로 우리들에게 물었다. 사실 아르 할아버 지가 입은 옷은 보석 같은 걸 대충 떼어냈어도 옷 자체가 비싼 최고급 옷 이었고, 나도 처형 직전의 죄인이었지만 그래도 왕자라고 보석이 달려있진 않아도 상당히 좋은 재질의 평상복을 입고 있었기에 주인은 우리를 한눈에 대단한 인물이라 판단, 한몫 잡을 생각으로 저렇게 싹싹하게 구는 모양이 다. "아뇨. 보통 방 하나만 주세요." "카류야, 이 정도 여관에서 고급 방에도 못 잔단 말이냐. 이봐, 그냥 최고 의 방으로 하나 준비하거라." "할아버진 정말 금전 감각이 없어요. 할아버진 옷은 심플해서 보석이 하나 밖에 안 달려 있었단 말이에요. 이걸로 리아 영지에 갈 때까지 숙박비, 식 사비로 써야 하는데 그렇게 낭비하면 어떻게 해요." "...대체 어째서 네가 나보다 금전 감각이 좋은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구나. 헐헐헐." 할아버지는 싱긋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주 인은 아깝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는 종업원을 시켜 나와 아르 할아버 지가 묵을 방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식사를 준비해 주세요. 음, 여기서 가장 비싼 것으로요. 부탁인데 좀 고급 스러워 보이게 차려주세요." 나는 그렇게 주인 아저씨에게 귀뜸 해주고 아르 할아버지를 따라 올라갔 다. 사실 자는 것까지는 어떻게 되도 먹는 것까지 이상한 걸 -귀족들 기준 에서- 먹을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혹시라도 돈이 부족하게 될지 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에구구구... 역시 8서클 마법은 함부로 쓰는 게 아닌데..." 아르 할아버지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쓰러지듯 앉아 죽을상을 했 다. 사실 상당히 양심에 찔려 나는 조심스럽게 아르 할아버지께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찮으세요?" "안 괜찮다. 이 꼬맹아. 여기 와서 어깨라도 주물러 봐라." "...으음. 할아버지. 다 좋은데 그 꼬맹이란 말은 좀.. 이젠 저 꽤 커서 그 말은 안 맞는다고요." 나는 피식 웃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주물러 드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지 않으려 자연스럽게 대하시는 할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네 나이에 그 정도 키면 아직 꼬맹이지. 꼬맹이 소리 듣기 싫으면 더 커 서 오거라. 에구에구... 시원하다. 음, 언제 이런걸 배워서 이렇게 잘하는 거 냐? 왕자 주제에 정말 이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구나." "그런가요?" 나는 베실베실 웃었다. 그야 전생에 해봤으니까 그렇지. 아무리 오랫동안 왕자로 살아왔다지만 이 정도도 못할까봐. "카류야." "네?" 장난스럽게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고 있는데 갑자기 아르 할아버지가 내 손을 꼭 잡고는 조용히 말했다. "죽지 말거라. 이 할애비 보다 먼저 죽으면 절대로 용서 안 할거다." "아, 에...?" 나는 할아버지의 말에 얼빠진 대답을 했다. 문득 손으로 할아버지의 따뜻 한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바로 아르 할아버지의 손을 뿌리치고 약간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할아버지!! 이제 식사 준비가 다 됐을 거예요. 저 먼저 내려가 있을 게 요. 배고파 죽겠어요!! 괜찮죠?" "...그래라. 나도 곧 내려가마." "어서 내려오세요!!" 나는 문을 닫고 부리나케 1층으로 뛰어 내려왔다. 그리고 떨리는 양손을 서로 맞잡은 채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아르 할아버지의 말이 내게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처했지만 나는 아직까지 그 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 저쪽 자리로 앉으십시오. 손님. 이제 곧 음식이 나올 것입니다." 주인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나를 안내했다. 보통 방으로 갔지만 최고급 요리로 달라는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 주인 아저씨 가 안내해준 자리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 때 여행하고 나서 이렇 게 수도 밖으로 나온 건 정말 오랜만이라 감회가 새로워졌다. 결코 이런 식으로 나오고 싶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들었냐? 또 왕족들이 치고 박고 한다더군." 그렇게 멀뚱멀뚱 가게 안을 구경하다가 문득 옆자리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다.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부모형제들끼리 원수처럼 으르렁대는지 정말. 그저 가진 놈들이 더 독하다니까."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들어볼 것도 없이 저건 내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 좀 똑똑하다던 제6왕자가 제 형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다더군. 재수 없으면 내전이 터질지도 모른다던데..." "정말, 제6왕잔지 뭔지 정말 보면 머리통을 뜯어놓고 싶다니까. 그렇게 내 전을 일으키면 우리 같은 평민은 어떻게 하라고!! 젠장!! 꼭 그렇게 자기 혈육을 죽이면서까지 왕이 되야 속이 시원한가?" "괜히 왕이 아니지 않나. 왕위가 눈앞에 있는데 형제고 부모고 보이겠는 가." "다른 소문엔 왕이 되려고 다른 형제들의 어머니들까지 죽였다더군. 몇 년 전에 있었던 그 국장, 자네도 기억하지? 솔직히 사실 여부를 생각해 볼 것 도 없지. 왕비와 제1후궁이 함께 죽는 게 그리 흔한 일인가?" "으윽!! 정말 독한 놈이네!! 그것도 제 동생이라고 다른 왕자들이 말을 걸 어주고 그랬겠지? 크으... 그런 놈을 잡아 당장에 찢어 죽이지 않고 뮛들 하는지." "이런 소문이 이만큼 퍼졌다는 건 벌써 잡혔다는 소리나 매한가지 아닌가. 왕도 귀가 있는데 말이네. 여기가 수도랑 조금 멀어서 그렇지 곧 그 왕자 의 처형 공지가 날라 오겠지. 재수 좋아 달아났다 해도 신은 그런 추악한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실 걸세." "그렇고 말고. 그런 배신자에 패륜아를 용서하실 리가 없지!!" 그렇게 열띤 대화를 들으며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는 나의 어깨에 누군가 의 손이 닿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카류야." "아...아르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보고 나는 비실 웃어 보였다. 하지만 얼마 나 어색했을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올라가자... 자, 어서." "...에...." 걸어가면서 약간 비틀거렸지만 어떻게 방까지 올라왔다. 그렇게 조용히 방 의 침대에 앉았지만 머리 속은 온통 그 남자들의 대화로 엉망인 상태였다. "카류야..." 이 소문이 어디까지 퍼진 것일까. 자신의 형을, 혈육을 죽이고 왕이 되려 했다고!? 당장에 쳐죽여야 할 배신자에 패륜아라고? "카류야!!" 누군가 나의 머리를 감싸 안는 것을 느꼈다. 아마 아르 할아버지일 것이다. "나는...." "그래, 그래." "나는...."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냥 아르 할아버지의 등을 껴안았을 뿐 이었다. Part. 28 - 갈림길 아르 할아버지는 리아 영지를 향해 계속 워프를 했다. 추적자들이 워프를 하며 도주하는 우리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모를 비상사태를 위해서 최대한 서둘기 위해 하루에 2번씩 워프를 했다. 그러나 그만큼 아르 할아버지는 녹초가 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그냥 내일부터는 한번씩만 워프해요." "에구에구... 걱정 말거라. 그때 너를 구한답시고 하루에 3번이나 워프를 한 경험도 있지 않느냐. 에구, 하지만 또 한동안 골병 들게 생겼구먼." "끙... 그러고 보면 전부 저 때문이네요..." "그래! 이 꼬마야! 평생 나에게 감사해라. 그러니... 그 때 내가 한말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 알겠느냐?" "....예." 그 때 한 말이란 전에 자신보다 먼저 죽으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 던 그 말이다. 아르 할아버지는 퉁명스럽게 굴면서도 저렇게 계속 나를 위 로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나는 이틀 전 여관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질 못하 고 있었다. 그 이후로 들리는 마을에서도 나에 대한 소문은 엄청난 화제 거리였다. 나는 전국적으로 완전 쳐죽일 놈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든 사 람들이 나를 욕하고 있는 것을 들으며 나는 정말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 딴 소리를 지껄이는 놈들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 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의 형제들조차 믿지 못했을 정도로 나 에 대한 오해는 너무나 깊었다. 저들이 저런 소리를 하는 건 당연한 일이 었던 것이다. 솔직히 정말 죽고 싶었다. 아르윈 왕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있었다. 혈육을 죽이고 왕이 되려한 파렴치한 왕자라고 말이다. 덕분에 내 전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절대로 용서할 수 없 다느니 당장에 찢어 죽여야 한다느니 하며 광분하는 사람들 속에서 몇 번 이나 자살 충동이 일었는지 모른다. 차라리 죽어 새로운 인물이 되어 버렸 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런 나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아르 할아버지는 자꾸 나에게 죽지 말라는 그 말을 강조하고 있었다. 나는 오로지 아르 할아버지의 덕분으로 견딜 수 있었다. 무조건적으로 나 만을 위해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는 그런 아르 할아버지가 없었다면 나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형제들과의 오해로 절망했을 때 감옥의 간 수 슈만의 도움으로 정신을 차렸을 때처럼 이번에는 아르 할아버지의 도움 을 받고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죽지 말라는 그 말에 겨우 얽매여 살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이틀정도 후면 이제 리아 영지에 도착할 것이다..." "예... 모두 잘 있을까요?" "후, 그렇겠지... 각종 극악 범죄자들이 거기에 옹기종기 모여있을 거다." "......" 괜히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비록 같은 처지이긴 하지만 내가 가면 그들에게 폐가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도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을 생각할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사실 내가 의지할 곳은 리아 영지 밖에 없 었다. 아르 할아버지가 함께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도망 쳐 살아갈 집도, 음식도, 돈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약 리아 영지가 없었다면 앞으로의 일이 얼마나 막막했을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괜히 머리 복잡하게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내 일 아침 일찍 떠나야지." "......" "또 그냥 방에서 쉬겠느냐?"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머뭇거리다가 일어났다. 사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정말 가기 싫었다. 분명 또 내 욕이 들려올 테니까. 마주 대고 따질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건만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더 속이 탔다. 그렇다고 이 대로 계속 쫄쫄 굶기도 뭣했다. 이렇게 나를 위해주는 아르 할아버지도 있는걸. 좋은 말만 듣고, 싫은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자!! 무시하자!! 나만 깨끗하면 되잖아!! 나는 굳게 마음을 먹고 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재수 없게도 내려간 식당 은 상당히 사람이 많았다. 저녁 시간이라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괜히 사 람이 많음을 원망했다.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의 화제는 단연 그것밖에 없 기 때문이었다. "제6왕자가..." 나는 또다시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을 안 들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바람 에 약간 몸을 움츠려 버렸다. 그런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지 아르 할 아버지가 말했다. "카류야. 무리하지 말고 올라가거라. 내가 빵이라도 한 쪽 가지고 오마." "...아뇨. 그냥 먹을래요. 이렇게 안 먹고 버티면 누구 손해겠어요. 먹을 수 있을 때 제대로 먹어야지요. 나는 담담한 척 말했다. 하지만 사실 멋대로 내 귀에 들어오는 이야기 소 리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옆에서 내 욕을 하는데 뻔뻔하게 듣고 아닌 척 할만큼 내 얼굴은 그렇게 두껍지 못했다. 이 상황이 정말 부끄럽 고, 그리고 너무 억울했다. "음, 근데 말이야... 내가 아는 녀석이 성안의 시종이거든. 그녀석이 말하기 를 그...이름이 뭐라더라.. 어쨌든 그 제6왕자가 엄청 좋은 놈이라고 마구 칭찬하는걸 들은 기억이 있거든. 침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기에 나는 그 래도 괜찮은 왕자인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렇게 악평만이 있는 나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갑자기 조금 좋은 말이 나 오는 듯 하자 나의 안테나가 그것을 빠르게 잡아내었다. 부끄러운 일이지 만 그만큼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단 한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기 때문이었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그쪽 사내들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왕이 되기 위해 성내의 시종들의 환심을 얻으려는 작업의 일환이 었던 것이 뻔해. 이구, 그 녀석도 지금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을걸. 그런 놈 한테 자기가 마음을 뺏겼구나 하고 말이야.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그 왕 자를 더 증오하고 있겠지. 한마디로 배신당한 거 아니냐. 배신." "음.. 그 녀석도 그렇게 사람 보는 안목이 나쁜 것도 아닌데, 그 왕자라는 놈 정말 대단한 위선자였던 모양이지?" "콜록! 콜록!!" 거기까지 듣고는 나는 헛기침을 했다. 할아버지가 그런 나를 보더니 서글 픈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얼굴이 확확 달아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 나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국가적인 망신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진짜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면 할 말이나 있지.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을 내가 했다고 누명을 씌워서 사람을 이렇 게 비참하게 만들다니! 아무나 붙잡고 벌컥 화를 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억울했다. 어떻게 하면 이 오해를 풀 수 있을지, 오해만 풀 수 있다면 지금 상태에선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흘 동안의 리아 영지로 가는 여행은 정말 지옥 같았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 이야기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르 할아버지는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나 때문에 더욱 리아 영지로 가는 길을 재촉하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솔직한 말로 그렇게 급할 것도 없었건만, 아르 할아버지는 나의 만류에도 매일 하루에 두 번씩 워프를 감행했던 것이다. 나흘 연속으로 하 루에 두 번이나 8서클의 마법을 시전하는 건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그러 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끝까지 아르 할아버지를 말리지는 않았 다. 사실 누구보다도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휴우... 드디어 도착했구나." 아르 할아버지는 식은땀을 닦으면서 말했다. 나흘 동안의 짧고도 긴 여행 끝에 드디어 리아 후작의 저택에 도착한 것이다. "흡! 다...당신들은?!" "카...카류리드 전하!? 아르디예프 님? 어...어떻게..."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갑자기 나타난 우리들을 잘도 금방 알아보 고 소리를 질렀다. 동굴 사건을 계기로 이 곳에서 한동안 머무르며 저택의 병사들과 안면을 익혀둔 상태였기에 금세 알아본 모양이었다. 하긴, 게다가 이렇게 인상적인 모습 -처음 리아 저택으로 왔을 때도 워프를 했다- 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을 쉽게 잊을 리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시끄럽구나. 냉큼 가서 리아 후작이나 불러오거라." 갑자기 나타난 우리들을 보고 놀라 소리를 빽빽 지르는 병사들을 보고 아 르 할아버지가 짜증난다는 투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놀란 얼굴로 머뭇거리며 우리들을 보고 있기만 했다. "어서 프리란트 님을... 그러니까 리아 후작 님을 불러라. 아르디예프 님께 서 몸이 편찮으시니까." 내가 다시 한번 그들에게 말했지만 여전히 병사들은 아르 할아버지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프리란트 님을 부르러 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금방이라 도 아르 할아버지가 쓰러지실 것 같았기에 나는 조금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야? 시키는 대로 못해?" 내가 소리를 지르자 그때서야 겨우 병사 중 한 명이 부리나케 저택 안쪽으 로 달려갔다. 그리고 또 다른 병사가 우리를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들을 안내하면서도 그 병사는 계속 힐끗거리며 우리들을 보고 있었다. 왜 저러는지 약간 짜증도 났지만 일단 아르 할아버지를 쉬게 하는 게 급선무라 그런 곳엔 신경 끄자고 생각하고 할아버지를 부축했다. 그렇 게 내가 아르 할아버지를 자리에 앉혀드리자마자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 서 많은 사람들이 쏟아지듯 들어왔다. "카류우~~!!" "헉!" 누군가의 격렬한 보디 태클(?)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 알 아저씨!!" "크흑! 이...이 나쁜 자식! 내가 몸조심하라고 일렀건만... 크흑....네가 처형당 한다는 말을 듣고 내 심장이 다 튀어나가는 줄 알았다, 이 녀석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는지 예전의 동굴 사건을 계기로 친해졌던 용병 아저씨들이 우글우글 몰려들어왔는데 그 중 한 명인 알 아저씨가 나를 껴 안고는 그 자세 그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에... 알 아저씨... 그리고 허크 아저씨. 골크 아저씨... 모두... 어떻게 여기 까지..." "후우.. 너에 대한 그 이상한 소문을 듣고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려 했는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야지. 경비가 빵빵한 수도의 왕궁으로 쳐들 어가서 널 내놔라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래서 일단 너랑 친분 이 있었던 리아 후작 님에게 와본거다." 허크 아저씨의 말을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시 누군가가 문을 부서져라 열 고 뛰어 들어왔다. "카류!!" "앗, 히노 선배!!" "카류, 카류야아~~!" 히노 선배는 원래 나를 안고 있던 알 아저씨를 파악 밀치고 나를 콱 껴안 은 다음 펑펑 눈물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졸지에 밀려난 알 아저씨가 히노 선배를 보고 잠시 황당해 하다가 곧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약간 우 습기도 하고 그리고 이렇게 반겨주는 히노 선배가 너무 고마워서 항상 그 랬던 것처럼 히노 선배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히노 선배를 달랬다. "히노 선배... 괜찮아요. 저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는걸요. 이렇게 반겨줘 서 너무 고마워요. 그래도 그렇게 울면 보기 안 좋아요. 착하죠, 선배? 자 아." "아아... 카류 님!!" "카류 님! 무사하셨군요." "프리란트 님! 드리크 경!" 곧 이어 리아 후작과 드리크 경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과연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 전부 모여있을 거라는 아르 할아버지의 말이 맞았구나. 나는 일 단 히노 선배를 달래어 떼어놓고 두 사람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하아... 정말 다행입니다. 카류 님. 아르디예프 님께서 도움을 주셨나보군 요." "아, 예... 아르 할아버지께서..." 드리크 경의 말에 나는 잠시 아르 할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할아버지는 됐 다는 표시로 손을 절래절래 흔들었다. 역시 마법의 여파로 상당히 힘겨운 듯했다. "아아. 정말 다행입니다. 이로서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은 생긴 셈이군요. 휴우..."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쉬며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의아해져서 프 리란트 님에게 물었다. "빠져나갈 구멍요?" "명분이 생겼으니까요. 어떻게든 말입니다. 휴, 그대로 카류 님께서 처형 당하셨다면 저희들도 줄줄이 개죽음 당할 뻔했지요." "명분...?" "음, 여긴가?" 내가 잠시 프리란트 님의 말에 의아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 이제는 노인이라 불려도 좋을만한 그 남 자를 보고 나는 약간 웃어버렸다. 그는 나이에 맞지 않게 굉장히 곧고 당 당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는데 재미있게도 예쁜 분홍색 머리카락과 눈동자 를 가지고 있어서 온몸으로 언밸런스의 극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 었던 것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을 깨닫고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리아 영지에 와 나를 반겨주는 많은 사람들을 보자 이렇게 쓸데없는 생각 을 할 여유도 생긴 모양이다. 그렇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노인이 대뜸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음, 네놈이 그 카류리드라는 녀석인가?" 그 할아버지는 초면인 나에게 '놈' 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왕자인걸 아는 모양인데도 저런 호칭을 쓰는 것에 상당히 의아했지만 일단은 어른이니까 하고 넘어갔다. 어차피 아르 할아버지도 이 놈 저 놈 하며 나를 부르니까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네, 제가 카류리드입니다." "과연 교활한 놈이로구만. 무조건 내 말에 발끈하지도 않고 그렇게 조심스 럽게 나오다니. 그래, 내가 누군지 알아챘느냐?" 이래봬도 어른에겐 무조건 공손하게라는 생각을 가진 바른 생활 청소년이 건만 갑자기 교활 이라는 말을 듣게되자 나는 순간 발끈해 버렸다. 뭐 저 딴 할아범이 다 있는지. 아르 할아버지랑 동급으로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 이었다! 사실 리아 영지로 오는 동안 억울한 일로 계속 많은 욕을 먹어왔 기에 지금의 나는 상당히 욕에 민감해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보통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고운 법인데, 상식이 부족한 분이시군 요," "흠흠... 카류 님. 저 분은 8서클의 마법사 류스밀리온이라는 분이십니다." 프리란트 님이 들어오자 허크 아저씨가 어느새 말투를 존댓말로 바꾸고는 전투 태세(?)로 들어선 우리들 사이로 끼어 들어 그 노인에 대해 소개했다. 그러나 나는 잠시 내 귀를 의심했다. 허크 아저씨의 소개 말에 8서클이 어 쩌고 하는 말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기 아르 할아버지가 계신데 왠 8서클.... 류스밀리온?!" "류스밀리온?" 내가 그 이름을 꽥하고 소리 지르자마자 아르 할아버지도 번쩍 고개를 들 고 소리 질렀다. "허... 너도 이제 성능이 다됐구나. 아르디예프." "류스밀리온... 네가 여기엔 왜..." "아르 할아버지. 그와 아는 사이세요?"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게다가 이렇게 지친 아르 할아버지에게 반말 을 하며 함부로 대하는 류스밀리온에게 나는 다시 한번 발끈 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와 아는 사이 같아 보이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고 질문을 했다. 류스밀리온 같은 자와 아르 할아버지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 이다. 류스밀리온은 이르나크 세계의 3개의 대륙 중 우리 아르윈 왕국이 있는 크 로시아 대륙에서 단 5명 있는 8서클 마법사 중 한 명이었다. 다른 8서클의 마법사는 아르 할아버지처럼 전부 이 대륙의 4개의 강대국에 한 명씩 속해 있는데 유독 류스밀리온 만은 나라에 속해있지 않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 니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 속해 있지 않아도 류스밀리온은 5명의 마법사 중 어린애도 다 알만큼 가장 유명했는데 그것은 그가 홀로 그것도 40대에 8서클의 마법사가 된 세기의 천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까 지 유명해진 진짜 이유는 다른데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세상을 떠돌아다니 며 수많은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했다는 사실이었다. 침몰해 가는 배에 서 혼란을 틈타 취미 삼아 사람들을 죽여버렸다는 유명한 야사(?)가 있을 정도였으며, 그 외에도 별별 독한 짓을 다해서 원수가 지천에 깔린 한마디 로 나쁜 놈이라 정의하면 좋을 그런 사람이었다. "...8서클 마법사끼리 대면도 한번 안 해봤을까봐. 저거 왜 저렇게 멍청해? 저거 너희가 말한 왕자가 맞느냐?" 내 말에 류스밀리온이 날 손가락질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거'라 니! 정말 입이 더러운 할아범이다. 더 이상 별 것 아닌 일인데도 욕 비슷한 걸 듣는 건 정말 질색이다, 이 할아범아! "류스밀리온 님은 한번 내린 평가를 일경 -한 시간- 도 지나지 않아 정반 대로 바꾸는 분이시군요. 그렇게 판단력이 부족하시니 일상이 정말 고달프 시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이를 빠득빠득 갈며 그의 말을 되받아 쳤다. 그가 얼마나 잔 인하고 무서운 사람인지 알고 있었지만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용병 아저씨 등 믿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그를 향해 막말을 할 수 있었던 것 이다. "크흠!! 그만하시고 날도 저물어가고 하니 일단은 쉬십시오. 카류 님도 아 르디예프 님도 오랜 여행으로 힘들어 보이시니 이야기는 내일 하도록 하지 요." 우리들의 말싸움에 당황했는지 프리란트 님이 빠르게 중재에 나섰다. 류스 밀리온이 왜 이런 자리에 있는지 여러 가지가 상당히 궁금했지만 아르 할 아버지가 많이 지쳐 보였기 때문에 프리란트 님의 말대로 하기로 마음먹었 다. "할아버지. 가요..." "그래그래, 에구. 더 이상 말할 힘도 없구나." "노인네는 노인네답게 성안에 처박혀 죽을 날이나 기다릴 것이지 무슨 헛 짓은 그렇게 하고 돌아다니나 그래." 할아버지가 나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자 또 그 류스밀리온이라는 망할 영감 탱이가 시비를 걸었다. "그 쪽도 만만치 않은 나이인데 그렇게 돌아다니시지 말고 집에 처박혀서 죽을 날을 기다리며 관이나 짜시지 그러셨어요? 아, 류스밀리온 님의 경우 에는 돌아다니시는 게 좋겠군요. 적이 많으시니 혼자서 사람들이 많은 대 로를 조금만 걸어 다니다보면 공짜로 관을 짜주겠다는 사람이 벌떼같이 몰 려들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관 짜는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습 니까." 나는 류스밀리온을 향해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뱉어냈다. 솔직히 내 가 생각해도 이번의 말은 그냥 따지는 수준이 아닌 굉장히 실례되는 말이 었다. 하지만 아르 할아버지에게까지 저런 식의 독설을 하는 것에 너무 화 가 났기에 나의 양심이 극구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그냥 내뱉어 버린 것이 다. "이 놈이! 새파랗게 어린놈이 감히 뭘 안다고 끼어 드는 거냐!" "아르 할아버지께서 지금 지치신 상태라 자신보다 새파랗게 어린놈에게 모 욕을 받고도 맞받아 쳐주지 못하고 계시니 아르 할아버지의 제자 된 도리 로서 이렇게 끼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뭐야?!" 류스밀리온은 얼굴을 붉히고 빽 소리질렀다. 지금 류스밀리온처럼 이렇게 언성을 높인다는 것은 할말이 막혔다는 증거인데, 그 이후 보통 사람들은 다음에 두고 보자라는 식상한 대사를 읊어대고 사라진다거나 바로 주먹을 사용하는 두 가지 반응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왕자로 환생을 한지라 에 르가 형을 제외하고는 이제껏 후자의 경우는 거의 경험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상대가 상대이니 만큼 바로 주먹...이 아닌 마법이 날라 올 지도 모를 일이라 약간 긴장했다. 우리들의 언쟁에 조마조마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류스밀리온은 한참을 씩씩거리다가는 곧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 "후, 네놈이 혀를 잘 굴리는 놈이라는 소문만은 확실한 듯 하군." 또 다시 발끈 해서 한마디 쏘아주고 싶었지만 아르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 고는 그만두기로 했다. 나 때문에 녹초가 되셨는데 이런 아르 할아버지를 제쳐두고 저런 망할 영감탱이랑 계속 싸울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제게 기대세요. 음, 프리란트 님. 빨리 아르 할아버지께서 쉬실 방을 안내해 주세요. 저 때문에 아르 할아버지가 많이 지치셨거든요. 그리 고 되도록 저 쪽 분과 거리가 먼 방으로 준비해 주세요. 쇠약해진 할아버 지의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서 말이에요." "아... 네. 여봐라. 카류 님과 아르디예프 님을 모셔라." 내가 힐끔 류스밀리온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프리란트 님은 빠르게 시종을 불러 우리들이 나가도록 조치해 주었다. 뒤에서 그 망할 영감탱이가 뭐라 고 소리치는 것이 언뜻 들렸으나 나는 그 소리를 완전히 무시했다. 리아 영지에 도착하고 이틀째 되는 날. 나는 아침해가 뜨자마자 문을 박차 고 아르 할아버지가 쉬고 계시는 방으로 뛰어갔다. 어제 아르 할아버지의 몸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였기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저번에 3번씩 워 프를 하셨을 때도 큰일은 없었으니 아마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래 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순수하게 아르 할아버지를 걱 정하는 마음보다는 아르 할아버지는 얼마 없는 아군이었기에 걱정하는 이 기적인 부분도 상당히 컸다. 속으로 이런 이기적인 자신을 자책하면서 계 속 발을 놀려 아르 할아버지가 있는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카류?" "어? 알 아저씨?"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복도에서 알 아저씨와 따악 마주쳤다. 나는 의 외의 곳에서 만난 의외의 사람을 보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알 아저씨 가 왜 이렇게 이른 아침에 이런 곳에 있는 건지 궁금해 졌던 것이다. "어딜 그렇게 뛰어가는 거냐?" "알 아저씨야말로 여기서 뭐하세요? 저는 아르 할아버지가 걱정이 되어서 할아버지 방에...." "아아, 그랬구나. 어쩐지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어딜 그렇게 부리나케 뛰어 가나 했더니. 그래, 여전히 착하구나. 휴우... 이런 네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 에까지 왔는지... 왕국 내에 퍼져있는 그 재수 없는 소문을 생각만 하면 억 울해서 자가다가도 이가 갈린단 말이다. 젠장, 내가 이런데 넌 얼마나 억울 했겠어." 알 아저씨가 내 편을 들어주며 울분을 토하는 것을 보며 나는 내심 굉장히 기뻐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까지 아침부터 아르 할아버지를 찾는 건 솔직히 아르 할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서라 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조건 내가 착해서 이러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알 아저씨의 말에 약간 양심에 찔려 머뭇거리다가 화제를 돌렸다. "제...제 질문에 대답을 안 하셨잖아요. 알 아저씨는 왜 이런 곳에 계세요?" "아, 그건 일단 내가 너의 호위를 맡게 됐다. 추적자들이 널 덮치기라도 하 면 안되니까. 실력으론 보통 기사들보다 내 쪽이 훨씬 나으니까 내가 맡기 로 한 거다. 설마 내가 널 지키는데 불만이냐?" 알 아저씨는 쑥스러운지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에 약간 언성을 높였다. "아녜요. 너무 기뻐요. 알 아저씨."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알 아저씨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약 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언제나 나의 호위를 해주었던 그림자 같았던 디트 경.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호위 기사였으니 현재 호위 기사의 지위에 서 강등될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고 자칫하면 디트 경의 가문에도 영 향을 미칠지 모르겠다. 디트 경은 자신을 그런 처지로 만든 나에 대해 어 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이제 다시는 디트 경을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 다. 이렇게 대대적으로 반역자가 되어 버렸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와 다시 는 만나지 못하는 편이 디트 경에게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가요. 아르 할아버지께 가봐야죠." 나는 잠시 우울했던 생각을 접고 아르 할아버지의 방으로 걸음을 재촉했 다. 어차피 이렇게 생각해봐야 해결될 문제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쓸데없는 일로 고민하지 말자. 알 아저씨나 아르 할아버지처럼 나를 걱정해주는 사 람들을 위해서라도 침울해져선 안되지. 나는 스스로를 위로하며 알 아저씨와 함께 아르 할아버지의 방으로 갔다. 그런데 아르 할아버지의 방 앞에는 이번엔 허크 아저씨와 골크 아저씨가 서있었다. "어? 허크 아저씨, 골크 아저씨...? 알 아저씨가 저의 호의를 맡으신다더니 혹시 아저씨들은 아르 할아버지를 호위하기로 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니다. 사실 우리 샤크 용병단은 류스밀리온 님의 호위를 맡 고 있는 중이거든." "널 호위하겠다고 나선 알 녀석은 근무 중 이탈이라고. 넌 나중에 급료 없 을 줄 알아라, 알." "야, 골크. 인간이 그렇게 치사하게 나와도 되는 거냐?" "에...? 류스밀리온 님의 호위?" "그래, 우리들이 네 소문을 듣고 흥분하고 있는데 류스밀리온 님이 우리들 을 찾아왔지. 자신을 리아 영지까지 호위해 달라고 말이야. 사실 8서클이긴 해도 그는 마법사에 불과하니 적도 많은 처지에 호위병도 없이 그냥 돌아 다니긴 뭣했을 거다." 허크 아저씨가 거기까지 말하자 알 아저씨가 뭔가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류스밀리온 님과 인연이 있었거든. 그러니 그의 요청을 무시하기도 약간 곤란하고, 또 그 요청이 리아 영지로 데려다 달라는 것이기에 호위를 승낙한 거다. 딱히 류스밀리온 님의 호위 때문에 리아 영지로 온건 아니야. 가장 주요 업무는 네 일을 알아보는 것이었다고. 안 그래? 허크 대장! 골 크!" "아, 그...그래. 좋잖아? 겸사겸사." "그래, 사실 그가 리아 영지로 가겠다고 안 그랬으면 호위를 승락하지 않 았을 거다." 용병 아저씨들은 내가 서운해 할까봐 이런저런 말을 변명을 했다. 그러나 정작 나는 다른 곳에 흥미가 갔다. "알 아저씨가 류스밀리온 님이랑 아는 사이였다고요?" "아? 아아, 그래.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 배에 구멍이 뚫려 죽을 뻔했을 때 나를 구해준 고위 마법사가 다름 아닌 류스밀리온 님이었거든." "류스밀리온 님이요?" "훗, 나 역시 나를 고쳐준 마법사가 스스로를 류스밀리온이라고 소개했을 때 엄청나게 놀랐지.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후 치유 마법 사용료로 엄 청난 돈을 요구하더구나. 크으, 정말... 그게 아니었으면 힐링포션을 하나 더 살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면 그렇지. 그 류스밀리온 님이 공짜로 남 좋은 일 시켜줄 리가 없지. 잠시나마 그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보려 했던 내가 바보였어. "후... 하지만 기이한 인연이구나. 그때 류스밀리온은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힐링포션을 가지고 다니지도 못 했을 거고, 너를 살려내지도 못했을..." "밖에서 시끄럽게 굴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라!!" 허크 아저씨랑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문 안쪽에서 류스밀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헉! 류스밀리온 님이 아르 할아버지의 방에 계신 거예요?" "아, 그렇지. 두 분께서 같이 이야기하시겠다고 말씀하셨거든. 조금 걱정이 됐지만 아르디예프 님도 우리더러 나가 있으라고 하시길래... 뭐..." 그러고 보니 류스밀리온을 호위하는 샤크 용병단의 허크 아저씨와 골크 아 저씨가 아르 할아버지의 방 앞에 있다는 건 그 극악무도한 영감이 아르 할 아버지의 방안에 있다는 뜻이잖아! "아르 할아버지!!" "카류야. 이렇게 일찍부터 어쩐 일이냐?" "그야 아르 할아버지가 걱정되서... 그런데 괜찮으세요?" 왠지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고 나는 어리둥절해 할 수밖에 없었다. 아파서 골골거리며 누워있어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힘들어하셨는데. "내가 리커버리를 썼다. 안 괜찮음 그건 시체지 인간이 아니야." "당신이?" 나는 약간 삐딱한 자세로 불만이냐는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류스밀리온에 게 되물었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얼굴 색이 약간 안 좋아 보였다. 아르 할 아버지가 마법을 쓰면서 피곤해 했을 때처럼 말이다. 어째서 류스밀리온이 아르 할아버지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해준 거지? "뭐, 사실은 사실이니... 그러나 카류야, 고마워 할 필요는 없다. 난 한번도 저 놈에게 리커버리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여전하군. 빌어먹을 영감탱이. 젠장... 곧 죽어버릴 다 늙은 영감탱이한테 이런 마법을 쓴 내가 잘못이지."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은 서로를 바라보고 투닥거리며 악담을 주고받 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 허탈해졌다. 아까 깜짝 놀란 내가 바 보스러워질 정도로 말이다. "아르 할아버지.... 류스밀리온 님이랑 친구 사이세요?" "누가?" "미쳤냐?" 나의 질문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부정의 답을 해왔다. 하지만 류스밀리 온은 같은 부정의 말을 해도 미쳤냐라고 말을 함으로서 사람의 기분을 더 럽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 보니 그는 싫어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원래부터 평소 모든 사람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인 듯 싶었 다. 그러고 보면 어제의 그 일도 시비 걸려고 한 말이 아니라 실은 일상적 으로 쓰는 용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사람처럼 얘기하세요?" "그...그저 몇 번 만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그래, 저 놈이 우리 아르윈 왕국으로 왔을 때 말이다. 44살에 8서클의 마법사가 된 놈이 있다 길래 호 기심이 생겨 만나러 갔었던 것이지." "후, 그 때 나와 만나 마법사는 정치 같은 곳엔 신경 끄고 마법만 생각해 야 한다고 큰 소리 탕탕 치고 돌아갔던 분은 어디의 누구셨더라? 아르디예 프?" "정치에 관련한 것이 아니다. 나는 카류를 도울 뿐이다." "흐음..."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류스밀리온은 여전히 그렇게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나를 훑어보았다. "어쩔 거냐?" "예?" 대뜸 나를 보고 질문을 하는 류스밀리온을 보고 무슨 소린지 몰라 되물었 다. "그 동안 너에 대한 이야긴 많이 들었다. 네가 그렇게 착하다며? 왕자답지 않게 아랫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뭐, 이 곳에서 소매치기 아이를 구해주었다고? 사실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으니 넘어가더라도 저번엔 무 너진 동굴에 갇혔을 때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했다는 이야 기를 들었는데 말이다. 저 바보 용병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감동의 물 결이더구만. 다들 너만큼 착하고 자비로운 왕자님은 다시는 없을 거라고 극찬을 하더군." 나는 그의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의 평소 말투가 말투인 만큼 나를 비꼬 고 있는 건지 아니면 칭찬하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칭찬이라 하더라도 이런 식의 말에는 정말 어떻게 반응해야할 지 감이 안 잡혔다. 게다가 솔직히 나 자신이 그렇게 착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평민들이 나 다른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 고 있어서 성격적으로 완전한 왕족이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 병들을 가장 감동시켰던 동굴에서 다쳤을 때 내버려두고 가라고 한 그 일 도 실상은 모두를 위해 희생하려 한 것이 아닌 너무 아파서 자살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전부 내가 성자같이 너무나 착한 인간이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아... 여기의 모두가 그러더군. 넌 자신의 형을 죽이고 왕이 되려 할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리고 리아 후작에게 자세히 들어보니 재수 더 럽게 없게 제1왕자파에게 누명을 썼다고?" "휴우... 예... 맞습니다."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할거냐?" 류스밀리온은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물었다. 나는 대뜸 질문을 하는 류 스밀리온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무엇을 말입니까?" "음, 저 놈 일부러 순진한 척 하는 거야, 아니면 실은 별로 머리가 좋지도 않은 거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저거 천재라며?" 류스밀리온의 날카로운 지적(?)에 나는 잠시 뜨끔했다. 아니, 내가 왜 뜨끔 해야 하는 건데에!! 내가 언제 나 자신이 천재라고 광고하고 다닌 적 있 나?! "앞뒤 없이 말씀하시면서 너무 많은 것을 바라시는 거 아닙니까?" "흐음, 그으래?" 턱에 손을 얹고는 콧소리를 내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나는 괜히 배알을 뒤 틀렸다. 뭐냐, 꼭 다 안다는 듯한 저 태도는! "그래, 피하고 싶겠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겠지. 그래, 좋다. 앞으로 네 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 클클..." 류스밀리온은 재수 없게 웃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 같으면 그렇게 주어, 서술어 생략하고 앞뒤 대화도 없이 불쑥 물으면 무슨 소린지 알겠냐? 착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뭘 어떻게 할 거냐니? 그의 마지막 말이 굉장히 찜찜했지만 나는 일단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한 사실을 물었다. "...한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류스밀리온 님은 어떤 이유에서 이곳에 오신 거지요?" 그래, 왜 저런 극악무도한 인간이 왜 하필 지금 이곳으로 온거냐고! "알아서 어디에 쓰려고?" "개인적인 호기심을 푸는데 쓰려고 합니다만?" 나는 류스밀리온에게 가는 말이 미우면 오는 말도 미운 것은 당연한 일이 라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내게 앙심이 있어 저런 말투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충 느끼고 있었기에 이런 말투는 너무했나 싶 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가 왜 여기로 왔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컸기에 미 안함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쯧, 쪼끄만 게 한마디도 안 지려 드는군. 좋다! 말해주지. 아까 말했다시피 나는 국가 정세나 정치에 상당히 관심이 많다. 그랬기에 최근 각국의 정치 계 중에서도 꽤나 화젯거리인 아르윈 왕국의 떠오르는 샛별인 제6왕자에 대한 소식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지. 그런데 그 제6왕 자가 처형당한다 하지 않겠어? 그 소식에 호기심이 동해 한동안 아르윈 왕 국에 머물고 있던 차였다."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떠오르는 샛별이라는 수식어를 나에게 갔다 붙이는 류스밀리온을 보고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 로 내가 관심거리였다는 뜻이리라. 우스운 일이다. 그걸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나는 더욱 황당한 놈이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아르디예프의 동향도 들을 수 있었지. 3년 전 동굴에 갇힌 제6왕자를 구하겠다고 하루에 3번씩이나 워프를 사용했다는 미친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말이다. 나도 힘든 일을 죽을 날이 얼마 남지도 않은 늙은 이가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황당해 했는지 알겠냐? 아주 콩깍지 가 쓰여도 보통 쓰인 게 아닌 것 모양이더구나. 솔직히 이런 아르디예프를 보고 너에 대한 흥미가 더 올라간 거겠지만." "콩깍지라니 말조심해라, 류스밀리온!" "남 말하는데 끼어 들지 좀 마, 이 할아범. 역시 이대로 죽게 내버려뒀어야 하는 거였는데!!" 류스밀리온은 굉장히 무례한 말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내뱉었다. 아르 할아 버지가 그보다 10살은 더 많아 보이는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저 말투를 끝 까지 고수하는 것을 보자니 어릴 적 류스밀리온이 대체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을지 궁금증마저 일 정도였다. 대체 류스밀리온을 키운 사람이 누구기 에 그가 저렇게 건방지고 더러운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아니면 역시 천성이라는 건가? "흠흠... 그런데 말이다. 그 늙은이가 아직까지도 안 죽고 살아서는 그 때 죽지 못한 게 불만이라는 듯 가까운 곳에서 하루에 2번이나 워프를 하더 군. 내가 아무리 마나의 움직임에 민감하다고는 해도 설마 또 그런 짓을 할까 싶어 긴가민가했지만 8서클 수준의 마나가 느껴지는 것이 도저히 아 르디예프가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힘들더군. 아르윈 왕국에서 8서클의 마법 을 쓸 수 있는 마법사는 아르디예프뿐이니까." "아... 그건..." 여러 번 워프를 하는 것이 그렇게 위험한 일인 줄 알았다면 쓸데없이 고집 부리지 않는 건데. 일찍 리아 영지에 도착해도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는 데 말이다. 끝까지 할아버지를 말리지 않은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는 아르 할아버지에게 너무나 미안해져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종합해볼까? 하필 제6왕자가 처형당할 시기에 그 나라의 궁정 마법사인 아르디예프가 무리를 해가며 워프를 쓰고 있다. 결국 아르디예프가 제6왕 자가 처형당하는 걸 참지 못하고 제6왕자를 구해내서 남쪽의 제6왕자의 본 거지 리아 영지로 도망치는 중이다라는 결론을 얻은 거다. 마법밖에 모르 는 그 고지식한 할아범이 설마 진짜 그런 짓을 했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게 아니면 이 이상한 움직임은 이해가 불가능하니까. 어쨌든 내 추측이 사실 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여러 가지로 재미있는 면이 많아서 일부러 안면 이 있는 놈이 일하는 용병단을 골라 호위를 부탁하여 리아 영지로 와 본 거다. 저기서 네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빌어먹을 녀석이 바로 그 안면이 있는 놈이지. 나의 호위는 제대로 안하고 감히 딴 짓을 하다니, 생명의 은 인을 무시하는 은혜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고. 언제 손을 봐주던지 해야지." 류스밀리온은 나의 곁에 서있는 알 아저씨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으윽... 같은 저택 내에 있는데 겸사겸사 한다고 생각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그리고 그때 저를 치료해주신 대가로 제게서 거금을 받아가지 않으셨 습니까. " "생명을 구해줬는데 그 정도의 사례비도 하지 않는단 말이냐!? 괘씸한 놈 같으니라고. 어쨌든 그렇게 된 것이다." "아... 그러셨군요. 정확한 추측이셨네요." "이 정도도 추측하지 못하면 그게 현자라 불리는 8서클의 마법사겠냐?" "그러면 절 도와주시러 오신 건가요?" 나는 류스밀리온을 똑바로 바라보며 정말 단도 직입적 물었다. 계속 나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혹시나 그럴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헐~ 미쳤냐? 이게 완전 거만이 하늘을 찌르네. 아직 너처럼 띨띨한 놈은 내 도움을 받을 자격이 안돼. 나는 상황이 궁금해서 온 것뿐이다. 이놈아." "음, 역시 그런 건가요?" 류스밀리온은 투덜거리며 나에게 무안을 주었다. 그러나 그럴 거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으므로 별로 쪽팔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끙, 아침부터 큰일을 했더니 삭신이 쑤시는구만. 나는 이만 나가마. 더 이 상 궁금한 것이 없겠지?"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별로 부축해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아르 할아버지를 치료하기 위해 8 서클의 마법을 써서 지친 것이기에 그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솔직히 할아 버지가 힘든 일을 하고 지쳐 골골거리는데 두 눈 뻔히 뜨고 서서 모르는 척하며 그냥 내버려두기도 뭣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계속 말싸움을 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노인은 공경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는 뼛속까지 건전한 바른 생활 청소년이었던 것이다. "필요 없어! 저 쪼끄만 놈이 사람을 완전 노인 취급하는군. 네 놈은 그냥 여기서 저기 진짜 노인네 말상대나 해줘!" 솔직히 그 정도면 노인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나이이건만 류스밀리온은 자신이 노인이 아니라고 열을 내다가 홀로 당당하게 방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렇게 멍하게 류스밀리온이 나간 자리를 보고 있을 때 아르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을 건네 왔다. "카류야..." "네?" 아르 할아버지의 부름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됐다. 나는 조금 누워서 쉬어야겠구나." "예. 여기 누우세요." 나는 할아버지를 침대에 눕게 도와드렸다. 그리고 잘 쉬시라는 말을 한 다 음 방을 나가려는데 그런 나의 등뒤로 할아버지가 작게 한마디를 덧붙였 다. "그 때 내가 한말은 잊으면 안 된다. 알겠지?" "...? 예에..." 나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여러 가지로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었던 아침이 지나고 오후가 되자 곧 프 리란트 님이 히노 선배까지 포함하여 리아 영지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드 리크 경과 드리크 경 휘하의 몇몇 기사들, 아르 할아버지, 이렇게 나와 관 계되어 궁지에 몰린 각종 주요 인사들(?)을 회의장으로 모았다. 그러나 이 회의장에는 궁지에 몰리지 않은 사람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는데 샤크 용병단의 주요 용병들과 회의장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은 류스 밀리온이 그들이었다. "카류 님. 이제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야지요." "휴우, 그렇겠지요." "아직 시도한 것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들 카류 님을 지지하는 세력은 제1왕자파에 비해 굉 장히 밀리는 상태입니다. 현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리아 영지의 군사와 동남부 전선에 있던 레이포드 경의 군사를 전부 끌어 와 합친다 해도 제1왕자군의 십분의 일에도 미칠까말까한 수입니다." "....." 갑자기 시작된 프리란트 님의 군사 이야기에 나는 멍해졌다. "표정 관리 좀 하는 게 어떠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도를 대폭 추락 시키게 하는구만." "뭐...! 그야 갑자기 군사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랬죠. 그리고 류스밀리온 님 은 이 자리에 왜 계시는 겁니까?" "관중이라 생각해주면 되지. 내가 원래 이런데 관심이 많거든." 괜히 시비를 거는 류스밀리온에게 발끈한 내가 뭐라 맞받아쳐주려 하는데 프리란트 님이 나섰다. "카류 님. 이제 저희들이 가야할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프리란트 님은 나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전하께서 오셨으니 저희들은 최소한 제1왕자군에 맞설 아주 최소한의 명 분이나마 얻게 되었습니다. 카류 님은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반역을 일으 켜야 합니다." "어제 말한 명분이라는 게 그럼...?" "사실 저희들로선 굉장히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옹호하는 왕족도 없이 제1 왕자군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기에 현재 잘못된 소문 때문에 평판이 엉망이긴 하나 카류 님이 계시면 저희들도 어떻게든 제1왕자군과 최소한 대응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말도 안돼!! 제가 이렇게 욕을 먹고 있는 게 무엇 때문인데?!" 리아 영지까지 오면서 들었던 소문을 생각하며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안 그 래도 반역을 일으킨 왕자라고 악평이 자자한데, 진짜로 그 일을 일으키란 말인가? "시인하지요. 전하께서 이런 처지에까지 오게 된 건 저희들 탓도 상당히 큽니다. 저희들이 카류 님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일을 꾸미려 하고 있었으 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거의 정해진 행로나 다름없었습니다. 저희 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카류 님의 파벌이 생겼을 것입니다. 루블로프 님보 다 카류 님이 더 왕에 어울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것 을 트로이 후작도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카류 님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래 서 일을 약간 시작하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이렇게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해 서 카류 님을 함정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두시죠. 누가 그런 거 하겠대요?! 절더러 반역을 일으켜서 루브 형을 죽이라고요?" "아닙니다. 전하. 일이 성공한다해도 꼭 루블로프 님을 처형하는 것이 아닌 귀향이나 유폐시키는 정도로도 끝낼 수 있..." "장난해요?!" 나는 프리란트 님의 말을 끊고 빽 소리질렀다. "그럼 어쩔 거냐? 반역자 주제에 여기에 가만 앉아 놀고먹을 작정이었냐? 대체 여기까지 도망은 왜 왔냐고 묻고 싶구만." 자꾸 빈정대며 끼여드는 류스밀리온에게 발끈하여 뭐라 따지려 했지만 막 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리아 영지에 와서 무 엇을 하려 했지? 리아 영지에 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닐텐데 말 이다. 어쩌면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 리아 영 지에 도착한 후의 일은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카류 님. 카류 님을 위한다는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군 요. 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저질러진 이상 리아 후작 님의 말처럼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처형 직전에 도주까지 한 이상 국왕과 제1왕자를 옹호하는 다른 귀족들이 곧 대대적으로 군대를 편성해 저의 영지로 쳐들어 올 것입니다. 이쪽에서도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반역 이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 다." "난 왕 같은 거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요!! 드리크 경도, 프리란트 님 도 왜 다들...!! 절더러 루브 형이랑 싸우란 말인가요? 전쟁을 일으키라고 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머리 속은 차근차근 생각이 정리되어가고 있 었다. 처형장에서 도망쳐 리아 영지까지 간 후, 다음으로 할 행동은 반역밖 에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나는 반역이란 말에 그렇게 진절머리를 쳐놓고는 제 발로 반역을 하겠다고 걸어온 것이 다. "카류야..." "카류..." 아르 할아버지와 히노 선배가 안타깝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렇게 왕이 되기 싫다니... 반역을 안 하겠다면 어디 국외로 도망이 라도 칠 거냐?" "도주한다 해도 끊임없이 추적자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게다가 의지할 곳도 없이 어디로 피신하신단 말입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겠지. 리아 후작. 저 녀석이 무책임하게 도망치면 너희들 은 말 그대로 개죽음 당하게 되니까가 아니냐." 관중이라고 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류스밀리온은 계속 프리란 트 님의 이야기에 참견을 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가 투덜댄 말은 전부 진실이었다. 내가 도망쳐버리거나 잠적해버린다면 리아 후작들은 싸울 명 분을 잃고 트로이 후작을 중심으로 한 제1왕자군에 의해 꼼짝없이 잡혀 죽 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하더라도 반역 따위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키 면 나는 정말 루브 형과 형제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 텔레비전으로만 봤던 바로 그 전쟁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 있을 줄이야. 반역자 주제에 나는 왕 하기 싫어요 라 고 외치며 리아 영지에 가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1왕자군 에 대응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처형식 때 확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 만 이제는 그냥 죽어버릴 수도 없다. 내가 죽는 건 내가 도망치는 것과 같 은 결과를 낳게 될테니까. 그리고 절대 자신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그렇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셨던, 나를 위해 반역자가 된 아르 할아버지를 위 해서도 그렇게 막 자살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젠장!!"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카류..." 히노 선배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내 쪽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 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히노 선배의 그 귀여운 목소리도 전부 거슬릴 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하 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치 수렁에 빠진 듯 한 느낌을 받으 며 회의장을 나섰다. "카류야." "......" 나의 호위를 맡은 알 아저씨가 뒤를 쫓아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부름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사실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로 혼 자 있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나의 호위를 맡아주고 있는 알 아저씨 에게 꺼지라고 화를 낼만큼의 강철판의 얼굴을 가지진 않았기에 대답하지 않는 선에서 끝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어디를...." 정문을 지키는 병사가 의아하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휘적휘적 정 문 바로 앞까지 갔다. "그냥 밖으로 나가시는 건...." "됐어! 문이나 열어!!" 문을 열지 않고 자꾸 말을 거는 병사에게 나는 드디어 신경질을 부렸다. 나의 말에 병사는 깜짝 놀랐는지 머뭇거렸다. "카류, 그만둬. 그에겐 잘못이 없잖아. 이러는 건 너 답지 않아." "저 다운 게 뭔데요? 이 답답한 곳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에요. 좀 내버려두세요." 나를 말리는 알 아저씨의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 아저씨는 약 간 한숨을 쉬다가 병사에게 문을 열라는 눈짓을 했다. 병사는 그래도 계속 머뭇거리다가는 나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 왕자의 말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뒤에서 조용히 알 아저씨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머리를 식히려고 빠져 나왔는데도 프리란트 님과 류스밀리온이 했던 이야 기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걸까. 앞으로의 일이 이렇게까지 막막해보긴 처음이 었다. 반역을 할 수는 없다. 루브 형의 자리가 될 왕위를 군대를 일으켜 뺏어버 리라니. 내가 어떻게 루브 형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이렇게 반역을 할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트로이 후 작이나 국왕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사실 반역에 대한 일을 시작하 지도 않았는데도 온갖 조작된 증거로 내게 누명을 씌운 인간들이 바로 그 들이니까. 게다가 이제 내가 리아 영지로 도망까지 쳤으니 분명 대대적으 로 군대를 이끌고 나를 죽이려고 쳐들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응해 내가 반역을 하게 된다면 대대적인 내전이 일어나 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아니, 죽음은 문제가 아니다. 고통을 받게 되겠지. 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고통과 두 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끝까지 반역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리 아 영지 사람들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몰살당하게 된다. 나의 편을 들 어 반역의 주동자라고 판정이 난 리아 영지의 사람들은 이미 트로이 후작 등의 제1왕자파의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아 영지 사람들은 어떻게 든 나를 명분으로 반역을 일으켜야만 최소한 살아남을 구멍이라도 모색해 볼 수 있다. 나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실 내가 무슨 재주로 친인척 하나 없이 이곳 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를 죽이려 많은 자객이 몰려 올 것 이다. 무슨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그 추적을 피해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엇보다 내가 도망치면 리아 후작들은 완전히 명분을 잃게 되며 나 를 위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몰살당하게 된다.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 예전엔 나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서 남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나는 죽음으로서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이다. 내겐 죽음 이 아무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다. 내가 죽음으로서 슬퍼할 사람들. 반항도 못해보고 개죽음 당하면서 고통스 러워 할 사람들. 내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걱정 해주며 나를 필요로 하는 그들을 버리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반역을 할 수는 없다. 반역을 안 할 수도 없다.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다. 이제는 궁지에 몰렸다고 그냥 죽어버려 해결할 수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친한 사람들이 족쇄가 되어 나를 얽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 내 머리 속에서는 계속해서 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었다. "어...? 혹시...." 한참동안을 대로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나의 근처를 얼쩡이며 말을 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누구냐?" 언제 다가왔는지 알 아저씨가 나를 자신의 뒤로 밀어두고 낫선 남자를 경 계하며 말했다. "혹시... 카류리드 님이... 아니신지..." 나는 다시금 내 앞에 선 남자를 눈여겨보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조금 큰 키를 가진 갈색머리의 소년이었는데 왠지 낫이 익은 듯도 했지만 역시 모 르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이런 곳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했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해 버린 것이다. "네 놈!! 누구냐고 묻지 않았냐! 죽고 싶으냐?" 알 아저씨가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바득바득 화를 내자 그제야 그 소년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죄...죄송합니다. 나리들의 길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저는 그냥 슈 카라고...." "슈카?" 나는 그 소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슈카라면 예전에 내가 리아 영지에서 구해준 그 때의 조그마했던 소매치기 소년이잖아. "아니, 슈카. 정말 슈카라고?" "카류야, 아는 놈이냐?" "예, 예전에 리아 영지의 그 소매치기... 어쨌든 아는 아이예요. 알 아저씨 도 아시잖아요." 의외의 곳에서 재회한 그에게 나는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다가갔다. "예전엔 나보다도 작고 왜소했는데 이렇게 커버리다니... 정말 슈카가 맞긴 맞는 거야?" "역시... 카류리드 전하셨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붙여보았지만 못 알아보시기에 저 같은 건 역시 잊어버리셨구나하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있 었는데..." "아냐!! 설마!! 하나도 안 잊어버렸어. 설마 내가 슈카를 잊었을까봐. 우리 일단 아무데나 앉자. 아, 저기가 좋겠네." "에.. 그런... 저는 평민이고...함께 앉는 것은...." "괜찮아. 의자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나는 광장의 분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슈카, 그리고 아직은 슈카를 경계하는 알 아저씨 이렇게 세 명은 분수대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슈카. 마침 이럴 때 만났구나." "저야... 뭐... 항상 거리를 돌아다니니까요. 그러다가 마침 카류리드 전하를 발견하고 따라다니면서 망설이다가 말을 걸어보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전 하의 말씀이 생각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데 정말 이렇게 기억해 주실 줄이야..." "으응!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근데... 그리고 보니 나는 내 신분이 뭐라고 말해 준 기억은 없는데?!" 나는 문득 그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알 아저씨도 바짝 경계하고 칼을 뽑아들려 했다. "그... 그러지 마세요. 전 수상한 놈이 아닙니다. 실은 훨씬 예전에부터, 저 를 신전에 데려다 주셨을 때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카류 리드 전하께서 만신창이가 된 저를 구하기 위해 치유 마법을 쓰도록 명하 신 것이 맞지요? 아니면 그렇게 갑자기 다 죽어가던 제가 멀쩡해질 수 없 을 테니까요. 그 때 저는 소문을 들어 리아 영지에 왕자님이 오셨다는 것 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까지 대동하고 밖을 돌아다닐 정도의 분이시라면 왕자님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던 것입니다." 슈카는 알 아저씨의 검을 보자 놀라서 마구 변명을 했다. 가만히 슈카의 말을 들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구나. 미안. 나 요즘 일이 많아서... 헤유.. 의심해서 미안해." "...그 소문 때문이지요?" "......"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내고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 었다. 지금의 나는 전국적으로 파렴치한 반역자라고 자자하게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이다. 슈카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 는 아무 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어도, 정말 반역을 하려 해도 욕을 먹게 돼 있는 것이다. 또 다시 기분이 우울해지려 하고 있을 때 슈카가 말을 이었 다. "저는 어머니를 잃고 갑자기 친척 하나 없는 천애 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친척도 없이 뒷골목으로 흘러들었다가 다른 고아 녀석들을 알게 되 었고 보통 그들이 하는 것처럼 저도 소매치기를 하기로 했지요. 보통은 소 매치기 하다가 잡히더라도 어느 정도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났기에 잡혀서 조금 맞는 한이 있더라도 소매치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 그런 식 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데다가 사실 그것 말고는 저 같은 어린애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갑자기 나오는 슈카의 말에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운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털어야 할지 잘 몰 라서 아무나 소매치기를 하다가 하필 이 거리에서도 난폭하기로 유명한 녀 석을 건드려버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걸려 두들겨 맞으면서 저는 죽는구나 싶었지요. 맞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고 소매치기까지 하기로 결심하며 살 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이런 식으로 죽어버리는 것이 너무 억울했지요. 그 런데 그 때 카류리드 전하께서 절 살려주신 것입니다." "에... 그건... 그냥 당연한 일... 어쨌든 내 입장으론 별 것 아닌 일이었으니 까. 사실 그렇잖아. 난 왕자니깐." 난 슈카의 말에 약간 쑥스러워져서 말했다. 슈카는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나를 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그렇게 도와주셨을 때 저는 굉장히 기뻤지요. 그런데 그 후 그 파렴 치한 신관들이 득실거리린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신전에다 절 그냥 맡겨버 리고는 돈을 몇 푼 쥐어주고 가버리신 후 제가 얼마나 카류리드 님을 욕했 는지 모르실 겁니다. 제가 그 동안 신전에서 얼마나 괴롭힘 당했는지 아십 니까?" "콜록..." 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헉... 저..저렇게 나오다니. 그래도 나름대로 도와 준다고 한 건데. "참 바라는 것도 많구만. 너 같은 소매치기를 구해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 사해야지,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앙?" 알 아저씨가 본인인 나보다도 발끈해서는 슈카를 보고 소리질렀다. "처음엔 마치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뻐기면서 이야기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 도와 주는 듯 하다가는 그렇게 나 몰라라 하고 그런 신전에 맡겨버리는 것에 정 말 실망했던 겁니다." "그런..." 슈카의 질책하는 듯한 말에 나는 약간 발끈 했다. 사실 그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한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문득 못된 신관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면서도 슈카를 그 신전에 그냥 맡겨버린 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주긴 했어도 그 때 그 신관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후 일 신전에서 슈카가 충분히 괴롭힘 당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르 할아버지들을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나쁜 사람 취급을 하면서 보 이는 곳에서 혼자 잘난 척은 다 해놓고는 생각하기 귀찮은 뒷일은 그냥 신 전에 맡기고 나 몰라라 했던 것이 아닐까. 조금만 더 슈카를 도와줄 생각 이 있었다면 그런 신전에 맡겨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나중에 카류리드 전하께 받은 그 보석 덕분에 신관 녀석들에게 도 둑놈 취급만 실컷 당하고 며칠동안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지요. 사실 저 같 은 꼬맹이가 그런 거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런 의심을 받아 마땅 한 일이었으니까요." "아... 그...그것이..." 나는 또 한번 뜨끔했다. 어린애에다가 평민일 뿐인 슈카가 그런 값비싼 보 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어떤 일을 당할지는 조금만 생각해 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뒷일 봐주기 귀찮다고 어린애에게 그냥 보석 하나 달랑 쥐어주고 잘 먹고 잘 살아 하고 가버린 것이다. "카류야, 저런 놈은 상대할 필요도 없다. 사실 거기까지도 누가 해주기나 하냐? 너니까 소매치기 같은 것도 도와주고 그랬지." "사실 그 동안 신전에 살면서 카류리드 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괜히 잘 난 척만 실컷 하고는 사람을 이런데다 맡겨두고 가버렸다고 말입니다. 신 관들이 새로 들어온 지저분한 저를 경멸하고 매일같이 괴롭혔거든요. 그리 고 16살이 되던 해에 도저히 신관의 구박을 못 참고 그 신전을 박차고 나 와버렸지요." "으...음? 16살? 대체 지금 슈카 몇 살인데?" 얼마나 괴롭힘 당했길래 신전을 뛰쳐나왔을까. 나는 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말꼬리를 물고 화제를 바꾸려 애썼다. "17살입니다. 이제 저도 성인이지요." "나...나보다 한 살 많았어? 헉... 그 땐 그렇게 작아서 당연히 나보다 3, 4 살은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그랬던 겁니다. 원래부터 집안이 어려워 근근히 버 텨오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컸을 리가 없지요." "아아... 그렇구나...."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전생에 굶어 죽어본 기억이 있는 나 로서는 슈카의 굶주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며칠 굶은 것에 불과했지만, 슈카는 그렇게 비쩍 마를 때까지 항시 굶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저를 보십시오. 이제는 키가 카류리드 전하보다 컸군요." "으...응. 그렇네. 나야 못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발육부진이라 작은 거 지만... 그래도 지금 많이 큰 건데..." 내가 그렇게 멍하니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슈카가 손을 저으며 말했 다.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휴, 매일같이 저를 때리고 괴롭히는걸 인생 의 낙으로 삼는 더럽고 치사한 신관들이 득실거리긴 했어도 신전에 있을 때는 몇 끼의 밥이 나왔습니다. 신관의 괴롭힘에도 어떻게든 그 음식을 먹 었기에 제가 이렇게 번듯하게 키가 컸지, 아니었으면 저는 그 조그마한 채 로 영양실조 상태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괴롭힘 당하는 데 만 불만이 가득해서 재수 없는 신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음식이 나와 고맙 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 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신전을 뛰쳐나온 후 친한 사람도 없이 1년 동안 떠돌아다니게 되고서야 비로소 신 전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깨달았던 겁니다. 아무리 괴로워도 그렇게 공짜로 밥이 나오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에..." 슈카의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저는 밖으로 뛰어 나가 홀로 1년을 지내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 다. 그렇게 신전에 맡기는 식이라도 카류리드 전하처럼 저를 도와주시는 분은 단 한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까 저분의 말이 맞습니다. 저 같은 생판 모르는 저 같은 더러운 놈을 위해서는 아무리 도와줄 힘이 남아돈다 해도 베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더군요." 이제 슈카는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사실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어요. 전하가 어떤 분인지 말입니다. 그리 고 이렇게 신세 타령도 해보고 싶었고요. 역시 전하는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해도 전혀 화를 내시지 않는군요. 보통이라면 제가 처음 몇 마디 했을 때 이미 건방진 놈이라고 경을 쳤을 텐데 말입니다. 헤헷... 실은 아까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도망칠 준비도 하고 있었답니다." "헤에?"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슈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전하는 소문처럼 그런 분이 아니세요. 저를 그냥 신전에 맡긴 일도 분명 나쁜 마음은 아니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 다. 사실 그래서 지금 리아 후작 님이 모으고 있는 사병에 지원해볼까 생 각 중이었답니다. 얼마동안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주먹은 약간 쓸 수 있으 니까요. 아, 사병에 들어가는데 주먹과는 관계없을지도 모르지만." "슈카...." 나를 위해서 사병에 지원해 준다는 걸까. 나는 그 말에 찡해져서 너무나 감동했다는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슈카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시... 실은 요즘 먹고 살길이 너무 궁해져서 위험하지만 사병에 나 지원해볼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겸사겸사라고나 할까... 하하.. 죄송합니 다.." 슈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와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유 중 어느 쪽이 먼저인 것인지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를 믿어준다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 나는 너무 기뻤다.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냥 고맙다고 말할 것이지 무슨 서론이 그렇 게 길어, 네놈은!" 알 아저씨의 투덜거리는 말에 슈카가 베시시 웃었다. "헤헤... 실은 언젠가 그 때 일은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1년 전 신전에서 만났다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은 너무 고마워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제 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전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런 일 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아니,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정말이야!!" 나는 정말 기뻐서 슈카의 가까이 다가가 소리쳤다. 모두가 날 죽일 놈이라 고 욕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 한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당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하... 전하는 정말 귀족답지 않으시다니까요. 저 같은 평민의 말에 그 렇게 감동하시고 그러세요. 제가 뭐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관계없잖아?" 그 후 나는 계속 의자에 앉아 거의 해가 질 때까지 슈카와 이런 저런 이야 기를 계속 했다. 특히 신전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신 전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슈카의 말에 의하면 신전은 의외로 상당히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 3년 전 나는 슈카를 맡기기 위해서 신관의 돈을 내놓으라는 말에 머리에 스팀 이 받는 것도 꾸욱 참고 순순히 보석을 건넸다. 하지만 사실 신관도 기도 만 해서 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신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들테니 기부하 는 셈치자 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들어보니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신전에는 영주의 영지처럼 그 신전에 딸린 땅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리아 영지에 있는 신전은 고대유적을 신전의 건물로 할만큼 유명하기에 그 어떤 신전보다 넓고 큰 땅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 득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 돈을 빌릴 곳이 없어 대부분의 신전에서 돈을 빌려주는 업무 도 약간 했는데 사람들이 돈을 값을 때는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웃돈을 조금 더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말로 '조금' 웃돈을 받는 거지 사실 고리대금업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 같은 돈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사실, 이르나크 세계에서는 표면적으로 절대 이자라는 것을 받을 수가 없 었다. 전생의 내가 살았던 토이렌에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 자를 받는 것은 여기서는 정말 파렴치한 행위였다. 그것은 이곳 신전에서 퍼뜨리는 교리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일정 이상의 이윤을 취하는 것은 남 이 얻을 이윤을 뺏는다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대부를 해주고도 딱 빌려 준 만큼만 돈을 돌려 받아야지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탐욕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했느냐 하니 그것도 절 대 아니다. 이런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연스레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적 어지게 되었고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몰래 고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빌 려주는 것이었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시선은 상업의 발전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시선 이 발생하게 되는 중심지인 신전마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고리대금 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고아원 일을 하는 건 사회적 시선에 겨우 하는 것에 불과했고 이미 신관들은 충분히 속물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일을 벌려 돈을 벌어 수 많은 사치를 부리고 있었는데 그 수준이 귀족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돈이 없다고 고아들에게 세끼마다 딱딱 음식을 주지도 않았고 잘 곳이나 옷 같은 것도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을 밥벌레라고 욕하며 굉장히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중간에 불쑥 들어온 슈카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괴롭힘을 받는 아이였다고 한다. 언젠 가 기회가 된다면 이놈의 신전을 확 뒤집어 놓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슈 카와 한동안 신전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동안 신전에 한동안 욕을 하다가 우리들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슈카가 지내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슈카가 프리란트 님의 사병에 들어 가기로 결심했다고 말했기에 슈카의 짐을 챙겨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던 것이다. 우리들은 지저분한 골목의 사잇길을 열심히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건물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그 곳의 지하 문을 열고 슈카가 말 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에구, 별건 없지만 그래도 짐을 싸려면 시간이 좀 걸 릴지도 모르겠는데...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말이에요." "내가 들어가서 도와줄까?" "윽, 관두세요. 카류 님은 상상도 못하실 정도로 지저분하니깐... 게다가 여 긴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좀 지루하시더라도 밖에서 기다 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응... 알았어. 어서 나와." 나는 약간 귀찮기도 하고, 사실 여기 바깥도 이렇게나 더러운데 안은 얼마 나 지저분하기에 저런 말을 할까 싶기도 해서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 다. 그렇게 지하로 들어가는 슈카를 보고 있는데 알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마음이 좀 풀렸니?" "예?" 알 아저씨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가만히 생각하니 슈카가 날 이해해 준다는 생각에 기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짜증을 내고 문을 박차고 나왔 던 주제에 금세 그걸 잊어버리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해결된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슈카 가 프리란트 님의 사병에 들어가면 뭐하나. 프리란트 님은 이렇게 모은 사 병으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일 것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인 나는 반역을 일 으킬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슈카가 사병에 들어간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있는 건지 돌이켜보니 정말 황 당해졌다 그렇게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심각하게 나의 정신 상태를 되짚어 보고 다 시금 우울해 하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샤크 용병단의 알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카류리드 전하가 맞으시죠?" "응? 너흰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 아닌가?" 알 아저씨와 나를 아는 척 한 그들은 분명 어제 처음 도착했을 때 보았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이런 곳까지 뛰어 오는 거지?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곳에 있는 겁니까. 빈민가인데..." "뭐... 그러는 그 쪽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병사는 병사답게 문이나 지킬 것이지." "저흰 오늘 비번이거든요. 그리고 허크 대장이라는 사람의 부탁으로 한참 동안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을 당장 저택으로 어떻게든 끌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허크 대장이? 나를 왜?"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악명 높은 대마법사 류스밀리온이 허크 대장에게 마 구 화를 내는 장면을 봤습니다. 자칫하면 허크 대장이 큰 일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부리나케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류스밀리온 님이 허크 아저씨에게?" 나는 병사와 알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혹시 내가 널 호위한다고 저택을 빠져나가서 그 일로 허크 대장에게 시비 를 거는 걸까?" "음, 사실 어제 아침에 자신을 제대로 호위하지 않는 은혜도 모르는 놈이 라고 뭐라 그랬었던 일도 있고... 그러고 보면.. 알 아저씬 샤크 용병단에서 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강한 용병이잖아요. 그런 아저씨가 류스밀 리온 님을 호위하는 일에서 중간에 스리슬쩍 빠져버렸으니 그 삐뚤어진 류 스밀리온 님이 화낼 만도 하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에...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유명한 샤 크 용병단이 계약을 마구 어기고 이 정도 일도 제대로 안한다고 마구 화를 내더군요." 병사는 우리들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쳤다. "으휴... 그 성격에 자신의 말대로 해주지 않으면 어쩌면 저택을 뒤집어 버 릴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빨리 저택으로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아르디예프 님도 있는데 제깟 놈이 뭘 어쩌겠어. 그리고 내가 가면 넌 누 가 호위하냐? 그런 건 내버려둬." "그...그런!! 카류리드 전하의 호위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허크 대장이 그 래서 일부러 저희들을 보낸 겁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니 호위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보세요. 늦었다간 그 류스밀리온이 무슨 일을 낼지..." 류스밀리온이 저택에서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병사들은 흥분해 어서 알 아 저씨를 보고 돌아가라고 사정을 했다. 어휴, 그 류스밀리온이라는 망할 영 감탱이는 왜 하필 이럴 때 리아 영지를 방문해서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알 아저씨, 어서 가보세요. 사실 아직까지 리아 영지에서 제게 무슨 큰 위 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사실 전 워프로 도망쳤기 때문에 수도에서 추적자들이 오려면 멀었잖아요. 전 슈카를 기다렸다 함께 갈 테니 먼저 가 보세요." "야, 아무리 그렇다 쳐도 이런 곳에 저 놈들을 어떻게 믿고 널 맡기고 간 단 말이냐. 그냥 무시해버려. 무시." "알 아저씨... 그런 말은 실례예요. 솔직히 프리란트 님의 저택을 지키게 하 는 병사를 아무나 뽑을 리가 없잖아요? 그들도 그만하면 굉장히 강한 거라 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알 아저씨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는 곧 한숨 을 쉬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휴, 알았다. 알았어. 그렇지만 그 슈카라는 놈이 나오면 당장 저택으로 돌아와라. 괜히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새거나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 와야 한다, 알겠지?." "그런 말 안 하셔도 누가 사탕 준다고 따라간다거나 어른 손놓고 있다가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직까지 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는 알 아저씨에게 나는 생글생글 웃으 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야, 너희들 카류를 제대로 못 지켰다간 그날로 제삿날인줄 알아, 알겠지?" "아...알겠습니다!" 알 아저씨는 그렇게 병사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면 서도 계속 뒤를 힐끗힐끗 보는 알 아저씨에게 나는 파닥파닥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으음... 슈카는 언제쯤 나오려나... 류스밀리온 님이 무슨 큰 일이나 저지르 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고개를 돌려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는 병사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예... 옙?" "응. 별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예에..." 나는 그냥 혼자 가만히 서있기도 뭣해서 알 아저씨 대신 나를 호위하기로 한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했다. 그러나 그들은 왠지 말을 더듬으며 나 와 대화하기를 어색해 했다. 내가 아무리 잡다한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걸 어 보았지만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왕자라서 저렇 게 말을 나누는데 어려워하는 모양이다. "에휴. 그렇게 얼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꽤 말발이 좋긴 하지 만 그것도 반대쪽에서 호응 해주지 않으면 전부 말짱 황이었던 것이다. 사 실 나의 말발은 상대편에서 투닥거리며 잘 받아쳐 주어야 더욱 빛을 발하 게 되는 모양이다. 류스밀리온 님이나 한동안 만나진 못했지만 하르몬 선 배님, 에르가 형의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괜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불굴의 의지로 포기하지 않고 병사들을 보고 한참동안을 대화 하기 위해 씨름했다. 솔직히 그냥 가만히 서서 슈카를 기다리려니 너무 심 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끝까지 곤란해하며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별로 흥미 없어?" "아...예... 아뇨!! 그게... 그...기...기다리는 분은 언제...." "아, 이제 올라오겠지. ...휴우. 보고 올까?" 계속 말을 거는 나와 즐겁게 대화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결국 대화를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슈카가 들어간 지 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그들과 이야기하려 하는 건 그들을 괴롭 히는 것밖에 되지 않는 듯해서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었 다. 사실 병사에 불과한 그들이 갑자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왕자인 나와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지하실 문의 문턱에 서서 지하실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이야 기 상대가 없어져 심심해진데다가 솔직히 이 정도면 슈카가 나올 때도 되 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해도 진데다가 그 지하실이 원래부터 그늘 진 좁은 골목 안에 있는 건물이라 안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어두우면 횃불이라도 하나 걸어둘 만도 하건만 역시 빈민가라 그런지 계단 에까지 횃불을 달 생각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횃불도 나무랑 약간의 기름 이 필요한 돈이 드는 물품이니 말이다. 솔직히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할 일도 없고 괜히 지루해서 나는 계속 문턱에 매달려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리 금방 뭔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자 를 보며 나는 그것이 슈카임이 틀림없을 것이라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조 금 전에 슈카가 말하기를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이 생각 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바로 슈카를 부르기보다 한 손으로 지하실 문 을 잡고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그 그림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림자가 지하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 나의 근처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겨우 스며드는 엷은 빛에 의해 그것이 슈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슈카가 왔구나 싶어 드디어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 다는 생각에 병사들이 있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던 병 사들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렇게 뒤돌아 자신들을 보고있는 나와 눈이 따악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불편해하는 병사들과도 이제 곧 빠이빠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지하실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빈민가에 살면서 뭐가 그렇게 가져올 것이 많은지 슈카는 한 손에 뭔 가 큰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오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 다. 이젠 거의 나의 앞까지 온 슈카를 보고 짐 드는 거라도 도와줄까 싶어 서 손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슈카의 짐 쪽으로 내밀었다. "슈카..." 그러나 나의 말소리에 고개를 든 슈카는 나를 보고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 러뜨렸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앞쪽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잡아 빠르게 자 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나는 잠시 중심을 잃고 슈 카에게 안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젠장, 뭐야!" 나의 뒤쪽에서 갑작스레 알 수 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내가 미처 뭐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갑자기 어깨로 부터 알 수 없는 뜨거운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헉...!!" 나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미 한번 경험 해 본 적이 있는, 결코 잊지 못할 그 끔찍했던 아픔이 다시 한번 왼쪽 어 깨에서부터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으악~~!!" "아악!" 그러나 이런 나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건지 나의 어깨에 고통을 주 고 있는 무언가가 크게 비틀리며 거칠게 등 뒤 쪽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문득 비명 을 지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통 속에서도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그렇게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슴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는 슈카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아아..." 슈카는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리고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가슴을 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놀라움에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신음 소리 한번 못 지르고 눈앞의 광경을 잠시 보고만 있었다. "히익~~!!" 그러나 슈카가 무언가를 놀라 또 한번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뒤쪽을 보았다. 나의 바로 뒤쪽에는 붉게 물든 검 을 치켜들고 당황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아까 그 병사가 서있었다. "맙소사! 제대로 해. 저쪽 놈까지! 빨리!" "기다려봐! 젠장, 안볼 때 깨끗하게 없앨 수 있었는데!" 뒤로 떨어져 있는 병사의 다급한 질책의 말에 이미 검을 들고 있던 다른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토하며 잠시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나는 그제야 겨우 그 병사가 들고 있는 붉은 피가 묻은 검의 목표가 우리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머리 속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져 버렸다. "카류리드!!"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거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병사는 약간 치켜들었던 검을 딱 멈추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알?! 아니, 어째서!!" "히익?!"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알 아저씨를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도 않고 바로 검을 집어던지고 아저씨가 서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이 개자식들!!! 거기서! 죽여버리겠어!! 거기 서!!!" 내 이름을 불렀던 알 아저씨는 욕설을 퍼부으며 검을 빼들고 도망치고 있 는 병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쿨럭... 허억..." 그런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내 앞에 앉아 있는 슈카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나도 피가 뭉클뭉클 배어 나오는 왼쪽 어깨를 더욱 감싸쥐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너무나 아파서 내 입에서도 신음 소리를 나오려 하고 있는데 슈카가 비명 같이 소리질렀다. "싫어!!" 나는 눈을 뜨고 슈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슈카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가슴을 쥐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질렀다. "싫어... 살려줘... 싫어!!! 쿨럭..." "슈...슈카...!!" 나는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슈카는 내가 어깨를 찔리면서 함께 칼에 꿰여버린 것이었다. 나는 슈카 덕분에 그만 균형을 잃어서 원래 그들이 노렸던 곳이 아닌 어깨를 찔렸지만 나의 바로 앞에 있던 슈카는 나 때문에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찔려버렸던 모양이다. 게다가 검을 난폭하게 뽑아내서 그런지 내 어깨도 그렇지만 슈카의 왼쪽부분의 가슴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슈카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숨을 껄떡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쿨럭. 쿨럭... 죽기...싫어...쿨럭.. 살려줘...!!" "슈카! 슈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어깨가 너무 아파서 정신없이 슈카 의 이름만 불렀다. 슈카는 계속 눈물을 쏟으며 나에게 거의 절규하며 말했 다. "살려줘... 제발.... 내가... 왜.... 쿨럭...죽기 싫어!!! 무서워...!!" "슈카!" 나는 자신의 가슴을 보고 절규하는 슈카를 껴안고 소리쳤다. 슈카를 안으 면서 어깨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지만 두려워하는 슈카를 보니 그럴 생 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왜 이런...내가...미쳤지...그런 짓을.... 싫...어...내가 왜... 너 때문에!! 콜록..." 죽는다. 슈카의 짤막짤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피로 범벅이 된 슈카는 얼마나 절망했는지 이제는 나 를 원망하기까지 하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원망을 나는 충 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슈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전생의 내가 죽을 때의 그 끔찍한 두려움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환생에 대해 모를 무렵 자신 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면서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사...살려내...! 나는..쿨럭... 내가 왜!!" "슈카!!" 나는 슈카를 안고 소리쳤다. 내 말이 슈카에게 전해진다면!! 나의 말을 슈 카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무서워하지 않아 도 된다고!! "죽기... 싫...." "괜찮아! 무섭지 않아! 두렵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을꺼야! 슈카!! 슈카!!" "싫어... 죽기 싫..." 슈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슈카를 더욱 껴안았다. 그리고 계속 괜찮을 거라고 소리쳤다. "괜찮아! 무서워하지마! 괜찮아! 괜찮을거야! 괜찮을라고! 슈카!!" "싫..." "별거 아냐!! 무서워 할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슈카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계속 소리쳤다. 어떻 게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전해주고 싶어 나는 끝까지 소리질 렀다. 나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슈카가 이렇게 절망하지 않아 도 될텐데! "슈카!!" 나는 정신없이 슈카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슈카를 도와주고 싶어 한참동안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나의 곁으 로 다가와 살짝 오른쪽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자 어깨에서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극심한 어깨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차려." 가라앉은 차분한 그 목소리에 나는 겨우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 고 그제야 내가 안고 있는 슈카가 힘없이 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슈카를 안은 채로 조금 고개를 들어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 다. 내게 말을 건 자는 정말의 외의 인물이었는데 그는 원래대로라면 저택 에 있어야 할 류스밀리온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감히 카류를 건드려?!" 알 아저씨는 언제 붙잡았는지 맞아서 엉망이 된 병사를 하나 끌고 와서 나 의 앞에 패대기쳤다. 병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알 아저씨 쪽으로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사정을 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쇼..."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야? 말해!!" 알 아저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아닙니다. 사주라니 그런 건 받은 적 없습니다..." "그런데 왜 카류를 노린 거야? 아 자식아! 빨리 안 말해?!" 그 질문에 병사가 대답을 않자 알 아저씨가 흥분해서 그 병사에게 발길질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맞은 후에야 병사는 알 아저씨 앞에서 벌벌 떨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마...말하겠습니다!! 제발... 그러니까 어찌하다가 바...반역을 일으킨 왕자라 는 정보를 입수해서... 쿨럭... 단 둘이서만 저택을 나가는 것을 보고 사...사 실 수급을 들고 수도로 찾아가면 큰 사...상을 받을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 에 그만..." "세상에!! 그것 때문에 슈카까지 죽이려 했다고?!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겨우 그런 돈 몇 푼 때문 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죽이려 들 수 있는 거야? 자기는 죽고 싶지 않아 하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 " 나는 병사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깟 돈 때문에 나의 목숨을 노렸단 말인가? 그리고 슈카까지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들자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서 당장이라도 저 병사에게 달려들어 칼을 박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잘...잘못했습니다... 제...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세요 " "이 자식아!! 내가 갈 때 뭐라고 했는지 그새 까먹었냐? 내가 카류를 제대 로 보호 안 하면 그날이 바로 제삿날이 될거라고 했어, 안 했어! 이 죽일 놈의 자식!! 그런데 감히 카류를 죽이려하고도 네놈이 살기를 바래? 내가 네 놈을 살려둘 것 같이 보이냐?" 알 아저씨는 병사를 향해 그렇게 소리치며 발로 아주 사정없이 병사를 차 댔다. 병사는 알 아저씨의 그 발길질을 어떻게든 참으려고 엎드린 자세에 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비참하게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알 아 저씨는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계속 그를 때리면서 욕을 해 댔다. "살려...커헉!!" 알 아저씨는 발 밑에서 엎드려 너무나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병사 를 보고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었다. 슈카 를 죽인 놈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약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알 아저씨를 말려볼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 들려하는데 바로 그 때 병사가 갑 자기 소리쳤다. "크흑!! 그..그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크헉" 그 병사의 말을 듣고 아주 조금 생겨나고 있던 동정심이 게눈 감추듯 사라 졌다. 사람을 죽이려 해놓고, 아니 이미 한사람을 죽여놓고 자기가 뭘 잘못 했냐고 말하다니. 알 아저씨의 구타에 그렇게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사정하 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 못지 않게 살고싶어한다는 건 모르는 건 가? "하~~ 이 놈 보게?" 알 아저씨는 그의 말에 무척 화가 났는지 발로 그 병사의 안면을 세게 찍 어버리고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뭘 잘못해? 성의 주민을 지켜야할 병사가 감히 왕족을 해하려 했고 무고 한 영주민을 죽였으면서 뭘 잘못해? 너 같은 인간 쓰레기는 당장 죽여버리 겠어!" 알 아저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장 병사를 죽일 것처럼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류스밀리온이 완전히 흥분한 알 아저씨의 뒤통수를 세게 친 다음 그 특유의 말투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호위 대상이 이렇게 다쳤는데 범인에게 분풀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도대 체 네 놈은 뇌가 있기라도 한 거냐? 게다가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알 아보지도 않고 범인을 그냥 죽이려 들어? 자기가 돌대가리 용병이라는 걸 그렇게 티내고 싶은 거냐?" "하지만 저 녀석이 카류를 죽이려 한 주제에 반성은커녕..." 알 아저씨는 류스밀리온의 말이 억울했는지 칼로 병사를 가리키며 변명을 하려 했으나 류스밀리온은 그런 알 아저씨를 보며 더욱 빈정거릴 뿐이었 다. "멍청한 녀석. 어차피 죽을 놈이다. 저 놈이 반성이라도 하면 살려줄 생각 이냐? 게다가 네가 여기서 저 놈을 죽인다면 오히려 녀석에게는 편히 죽는 행복을 선사해줄 뿐이다. 저택으로 끌고 가면 갖은 고문이 저 놈을 기다리 고 있을 텐데 화가 난다면서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니... 네 녀석 멍청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서 데려갈 준비나 해. 이 덜 떨어진 녀석아!" 류스밀리온이 그렇게 말하자 알 아저씨는 투덜거리면서 병사를 데려가기 위해서 그에게 다갔다. 그러나 그 병사는 그렇게 맞고도 아직 힘이 남았는 지 알 아저씨에게 반항하며 병사가 소리쳤다. "좋아! 쿨럭... 크흑.... 죽을 목숨이다 이거지....!! 젠장...좋아!! 나도 할말은 하겠어!" 병사는 갑자기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왕족이라고? ...쿨럭... 누가 모를 줄 알아? 왕이 되겠답시고 형을 죽이려다 가 실패했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저 자식 때문에 곧 전쟁이 일어날 꺼야!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알아? 그런데 나를 비난해? 이미 다른 곳의 많은 사람들이 너 같은 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그러는 걸 알고 있다 이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저런 놈을 죽이려 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이 미친 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 아저씨는 거의 자포자기해서 나를 저주하는 병사를 다시금 병사를 발로 냅다 찼다. 알 아저씨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거 의 죽일 듯이 병사를 구타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번에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바보같이 나는 지금 나 자신이 자신의 형까지 죽이려한 반역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병사는 나를 죽여 그 포상으로 받을 돈도 노렸겠지만, 사실상 나는 나쁜 놈이 되어있기에 병사의 입장에서 나 를 해치우는 일은 나름대로 정의로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적 반하장으로 살인자라고 자신에게 욕을 하고, 알 아저씨가 그렇게 죽일 듯 이 발로 차댔으니 병사의 입장으로는 나의 이 말이 정말 억울하고 분통 터 질 일인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겨우 현실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 들이 나를 증오하고 있으며 언젠가 나를 죽이기 위해 올 것이라고 언제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나는 그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 다. 이제까지 내가 당한 일이라곤 고작 마을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나를 욕하는 것을 듣는 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얼마나 지 독한 사람들의 증오 속에 서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때 나를 죽이려 하는 그 병사의 검을 보고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 다. 죽음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죽음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음엔 아 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죽이려는 행위 자체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다른 사람의 그 지독한 악의에 질려버렸던 것이다. "......" 류스밀리온은 갑자기 멍하니 앉아 있는 나의 팔을 붙들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내가 안고 있던 슈카가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나뒹굴어 버 렸다. 나는 잠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슈카를, 아니 슈카의 시체를 바라보 았다. 슈카가 죽어버렸다. 그렇게 죽기 싫어했는데, 그렇게 살고 싶어했는데 결국 은 죽어버렸다. 괜히 나와 함께 다니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나 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휘말려 나와 아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사실 죽음에 그렇게 큰 감흥은 없다. 지금의 나는 환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다해도 새로 태어날 것을 알기에 나는 죽음에 그렇게 절망 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슈카가 죽 음이라는 것에, 그것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절망했을지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해본 나는 누구보다도 그 감정을 잘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슈카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사실 죽음 따윈 별것 아니라고 가 르쳐주고 싶었다. 죽음은 삶과 삶의 경계선일 뿐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의 마음은 조금도 슈카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나의 목소리에도 슈카는 계속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끝까지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나의 몇 마디 말로 슈카가 나처럼 죽음에 의연해 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슈카의 시체를 보며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죽었다. 내 눈앞에서 진짜 사람이 살해당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계속 생각 없이 행동한다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슈카처럼 이렇게 죽어나가게 될 것이 다. 내가 반역을 하지 않으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슈카처럼 자신의 죽음에 절망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별 것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에서 공포를 느끼며 결코 죽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 의 죽음마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공포를 겪는 것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형제들과 왕위를 놓고 싸워야하는 반역을 내가 할 수 있을까. 나는 결코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서로 이렇게 어긋나버 렸지만 언젠가 오해가 풀릴 수 있을 것이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렇기에 어떻게든 그들과 대립하는 일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다. 자신의 죽음에 절규하는 슈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아껴주는 사람들이 나의 탓으로 그렇게 절규하도록 슈카가 죽 을 때처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사실 죽음 따윈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그냥 그들의 절규를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나는 슈카의 시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류스밀리온이 인 도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나의 탓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끔찍한 불 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생각을 지우려고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얼마 못 가 현기증이 나서 조금 비틀거리고 말았다. 마법 치료 를 받았지만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피를 흘렸기에 아직 이렇게 어 지러움증이 약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자." 류스밀리온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 주면서 그렇게 짧게 한마디를 하고 는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알 아저씨가 뭔가 부시럭거리며 슈카의 시체를 수습하는 듯 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류스밀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말없이 저택으로 돌아갔다. 슈카의 일 이후 프리란트 님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상당히 조심스러워졌다. 아마 슈카에 대한 이야기를 알 아저씨에게 들었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상심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일주일 동 안 반역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솔직히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바뀐 지 오래이기에 슈카의 죽음 자체에 그 렇게 상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슈카의 죽음이 나로 인한 것 이었기 때문에 다른 때처럼 그 죽음에 담담할 수가 없었다. 슈카가 자신의 죽음에 괴로워 한 것이 나로 인한 것이며 슈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완전히 침울해 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에 굉장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당장에 슈카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빨리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도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멍하니 창 밖의 석양을 보며 그 일을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알 아저씨가 들어왔다. "카류야. 잠시 나와봐라." "알 아저씨? 무슨... 일이라도?" "그... 뭐라나. 어쨌든 누가 널 급하게 찾는구나. 혹시 우리를 속이는 걸지 도 모르지만 네 친구라고 하던데..." 나는 친구라는 말에 의아해 하면서도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이런 곳에 나 를 찾아올 친구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 아저씨의 안내 로 내가 들어선 응접실엔 프리란트 님을 시작해서 류스밀리온까지 대부분 주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이들이 전부 모일만큼 대단한 자가 누굴까 싶어 응접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 쪽으로 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나 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카류!!" "디...딜트라엘? 딜티!!"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딜티는 바로 나에게 달려오려 했지만 그를 구속하고 있는 병사들에 의해서 제지를 받았다. 아마 전의 슈카 사건으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경계하기로 한 모양이다. 딜티 가 나의 친한 친구이긴 하지만 사실 그는 나를 매장하려 했던 트로이 후작 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행동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리아 영지까지 찾아온 딜티의 모습은 완전히 엉 망이었다. 귀족 가의 자제답게 언제나 깨끗하고 깔끔한 차림으로만 다녔던 딜티가 이상하게도 먼지를 뒤집어 쓴 지저분한 옷을 입은 상태였고 또 상 당히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딜티... 어떻게 여기까지... 또 모습은 왜 그래?" "카류!! 미안해, 카류." 나는 갑자기 소리치는 딜트라엘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나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딜티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딜티가 뭔가 극도로 불안하고 있는 것 같이 보여서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 었기 때문이다. 내가 딜티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보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 다가가지 못하게 말렸지만 나는 그들의 만류을 뿌리치고 그에게로 다가 갔다. 나는 딜티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물 었다. "딜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차근차근 말해봐. 응? 내가 들어줄게." "그...그게..." 내가 가까이 다가가 말하자 이상하게도 딜티는 더욱 불안해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딜티." 내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딜티는 그제야 입을 열어 조용히 말 을 잇기 시작했다. "미안해!!!" "응?" 나는 앞뒤 없이 갑자기 사과를 하는 딜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삼 년 전의 동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우리 아버님이었어. 그때 네가 죽을 뻔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아버님 탓이었어. 그리고 지금 네가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나의 아버님이 너에게 누명을 씌워 이렇게 만든 거 였어! 역시 네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아버님이... 나의 아버님이!!" 점점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하던 딜티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 다. "이미 알고 있었는걸. 네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니잖아. 트로이 후작 님을 이 해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카...카류야...." 약간 안심한 듯한 딜티를 보고 나는 살짝 웃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나에 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화를 낼까봐 저렇게 떨고 있었던 것일까.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나 그저 의미 없이 덧붙인 나의 말에 딜티는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잠시 우물거리다가 다시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응." "아버님이 나를 죽이시겠대." 갑작스런 딜티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후...후후... 아버님은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 내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수 없대. 그래서 나를 죽이시겠대. 내 동생 카마엘과 그렇게 이야기하시더라 고..." 놀라고 있는 나를 보며 딜티는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3년 전에 동굴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말이야... 그 때 아버님은 나에게 그 여행을 가라고 권유까지 하셨어. 아버님은 내가 죽을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나를 그 동굴에 보내신 거야. 동굴을 무너뜨릴 계획을 하고 있 으면서도 나를 일부러 동굴로 보내셨어. 그래... 아버님은... 그렇게 오래 전 부터... 친아들인 나를 죽이려하고 계셨던 거야!" "딜티...!!"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딜티를 꼬옥 안았다. 트로이 후작이 딜티를 죽이 려 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얽혀 자신 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할 처지에 이른 딜티의 입장 따윈 사실 이 제까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트로이 후작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사실을 알게 된 딜티가 얼마나 절망했을 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카류... 카류야. 나를 용서할 수 있어? 너를 이런 처지에까지 이르게 한 나 를 용서할 수 있어?" "말도 안돼. 네가 그런 것이 아니잖아." "너는 반역자가 됐어. 왕이 되려고 자신의 형을 죽이려한 인륜을 저버린 파렴치한 배신자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형제들에게 오해를 받아버렸고 얼 마 전에 처형당할 뻔하기까지 했잖아? 전부 나의 아버님이 그랬어. 나의 아버님이 너를 그렇게 몰고 갔던 거야. 그런데도 나에게 화가 나지도 않 니? 그런 아버님의 아들인 나를 용서할 수 있어? " "그렇지 않아. 네가 그런 것이 아니잖아?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는 내 소중한 친구잖아. 딜티..." 가늘게 떨리는 딜티의 팔이 내 등을 감싸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날 제거하시겠다고 하시기에 그냥 도망쳐버렸어. 하하... 그래 서 나는 갈 곳이 없어. 내겐 돌아갈 곳이 없어졌어." "걱정 마. 나와 함께 이곳에 있자.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어. 나에게 남은 건 이제 아무 것도 없어." "내가 있잖아!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나의 말에 불안해하던 딜티는 잠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곧 나를 더 꼭 껴안고 얼굴을 파묻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후후....왕실의 평화... 왕국의 평화라..." "딜티." 나는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딜티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조용히 그를 안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딜티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딜티?" "나의 동생 카마엘이 말하기를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 라더군. 나를 죽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래! 정말 그런 거야?" "그렇지 않아. 딜티!" "아버님이 나를 죽이시겠대. 나를 제거하시겠대. 그런 건가? 나는 아버님에 게 다른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돌 위에 난 잡초처럼 제거 할 수도 있 는 그런 존재였던 거야? " "그럴 수 없어. 최소한 나에게 넌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나는 어떻게든 딜티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친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충격은 아마 내가 형제들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딜티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나를 살짝 밀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딜티의 눈동자를 보자 가슴이 아파왔다. 어째서 딜 티가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왜 내가 이런 꼴이 되어야만 했는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어째서 이런 처지에까지 와야만 했는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가 슴이 미어져왔던 것이다. "절대로 잊지 않겠어. 지금 이 순간을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딜티는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너를 배신하지 않겠어. 나는 영원히 너만을 바라 보고 너만을 따를 것이다. 카류." 딜티는 그렇게 말하고 나의 손을 가져가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나는 그 런 어색한 모습을 보고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조용히 딜티를 감싸 안았다. "나도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딜티. 나 역시 네가 너무 소중하니 까... 우리와 함께 있자. 그러면 서로 상처입지 않아도 될 거야." 자신의 부모와 형제에게 배신당한 딜티는 누구보다도 그 배신을 당했을 때 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 이다. 그랬기에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또한 배신하지 말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은 딜티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딜티는 이 곳 리아 영지로 왔고 나를 따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딜티에게 함께 있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지독한 압박감을 느낀다. 나 는 이렇게 홀로 남은 도저히 딜티를 버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마 저 딜티를 버리면 그는 정말 좌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반역을 하지 많고 가만히 있으면 딜티를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니 까. 이미 나 때문에 슈카가 죽었다. 나에게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멍청하 게 현실을 피하기만 하면 슈카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나갈 것이다. 나 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개죽음을 당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나의 형제들과 싸우게 된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반역을 하겠다고 일어난다면 그들은 절 대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정말 왕이 되고 싶어했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그들과 오해를 풀 수 없을지도 모 른다. 나는 영원히 그들의 끔찍한 증오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상냥했던 나의 형제들은 영원히 그 증오의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형제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이런 딜티와 모두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 나의 앞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림길이 놓여져 있었지만 절망적이게도 내가 갈 수 있 는 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초조함에 나는 딜티를 더욱 꼭 껴안았다. Part. 29 - 즐거운 날 "카류. 그렇게 노인네같이 뒷짐지고 걷지 말고 어서 이리로 와!" "아...응, 알았어. 딜티."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내 방으로 쳐들어 온 히노 선배와 딜티와 함께 저택 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방안에 처박혀 골치 아픈 생각만 하다보니 머 리가 용량초과로 터져 나갈 것 같아 친구들의 부름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언제 수도에서 보낸 암살자 비슷한 것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라 저택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서 여기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것으로 만족 해야 했지만 리아 저택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었기에 충분히 산책로가 되 어 주었다. 우리들의 뒤에서는 알 아저씨가 완전히 밀착 취재가 아닌 호위를 하고 있 었는데 아저씨는 저택의 시종이 약간 가까이 오기만 해도 으르렁거리고 있 었다. 저번에 나를 해하려 했던 자가 저택의 병사였기에 그렇게 바짝 긴장 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모두를 의심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텐데 말이다. "알 아저씨.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휴우.. 저번에 바보같이 제가 카류 님의 곁을 떠났 던걸 생각하면 저 자신을 먼지나게 패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걱정 마십시 오!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알 아저씨는 곁에 함께 다니는 히노 선배와 딜티 때문에 나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어색하지도 않은지 상황에 따라 저렇게 자유자재로 말의 높 낮이를 바꾸는 알 아저씨와 다른 용병 아저씨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신 기해 죽을 지경이었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이라 그런 것일까. "고마워요. 아저씨. 그래도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지금 제 실력을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래봬도 내가 용병 계에선 끝발 날 리는 존재라고요. 훗, 사실 왕궁의 웬만한 기사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실 력이죠." "알긴 알지만서도...하하..." 나는 알 아저씨를 보고 오랜만에 살짝 웃었다. 역시 저렇게까지 나를 위해 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준다는 건 너무 기쁜 일이다. "카류야. 이젠 좀 기분이 나아졌니?" 나의 웃음소리에 히노 선배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아, 히노 선배... 그냥..." "에휴, 카류. 아직도 히노 선배야? 여긴 학교가 아니잖아. 게다가 학교를 마친지가 얼마나 오래 지났는데." "하지만 딜티. 갑자기 히노 양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 이상한걸." "나는 아무래도 좋아. 카류." 앞서가던 히노 선배는 내 말에 그 자리에서 뱅글 뒤로 돌아 고개를 왼쪽으 로 살짝 움직이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여워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히노 선배를 꽉 껴안아주었다. 거의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나 할까. "으윽! 히노 선배! 여전히 정말 귀여워요!!" "야아!! 카류!" "허...허헉!! 버...벌건 대낮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의 행동에 딜트라엘과 알 아저씨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흥분하여 소 리를 쳤다. 확실히 3년 사이 히노 선배는 굉장히 귀여워... 아니, 아름다워 졌다. 동굴에서 히노 선배를 보고 그저 어린애라 치부했던 알 아저씨도 지 금 그녀에게 이렇게 넋이 빠질 정도로 말이다. 히노 선배가 사뿐 사뿐 걸 어가면 그 주위의 사람들이 우우우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볼 정도로 그녀는 정말 극도의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히노 선배를 보다가 나는 약간 기분이 우울해졌다. 이렇게 귀여운 히노 선배이니 이런 일이 있지 않았다 면 루브 형이랑 결혼해서 아니, 누구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굉장히 행복하 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아..." 또 다시 골치 아픈 일이 떠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 다가 내게 안겨있던 히노 선배의 걱정스런 눈동자와 따악 마주치고 말았 다. "하...하하... 역시 전 좀 더 커야겠어요. 히노 선배랑 눈 높이가 똑같네요. 이거 남자체면이 말이 아닌걸?" 나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히노 선배에게 괜시리 웃으며 변명을 했다. "이렇게 같이 나왔으니 오늘 하루는 즐거운 생각만 하자. 카류. 그래, 오늘 은 하루종일 즐거운 날로 정하고 마음껏 즐기는 거야." "맞아, 카류야. 이렇게 날씨도 좋잖아? 즐거운 날로 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마!" "즐거운 날? 참, 아직 애들이라 그런가... 하지만 뭐, 나쁘진 않겠지요." "하하... 응." 나는 우울해 하는 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 다. 즐거운 날이라. 에잇, 나도 몰라! 어차피 고민해봐야 당장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내일이 어떻게 되든 오늘 하루만은 그 생각은 그만 하자. 나는 그들과 저택을 아주 한바퀴 뺑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정문으로 다다랐을 때 이상하게 뭔가 시끌벅적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다가갔다. "에, 무슨 일일까?" "잠깐,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마구 다가가시면 안됩니다. 카류 님." "아, 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알 아저씨의 말을 듣고 약간 쑥 스러워져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뒤로 빠졌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자신 의 처지를 모르다니, 이 멍청한 녀석. "무슨 일이냐?" 알 아저씨가 문 밖에서 망토를 둘러쓴 어떤 남자와 실랑이하는 병사를 향 해 큰소리로 물었다. "아,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짜고짜 리아 후작 님을 만나겠다고 소란을 피 워서..." "저...전하?" 병사가 우리들을 보고 뭔가 해명의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망토를 쓴 남자 가 나를 보며 신음소리처럼 짧게 말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들려온 그 목소리에 나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참고 가만히 서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 고 있자 그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쓰고 있는 먼지로 엉망이 된 망토의 후 드를 조용히 뒤로 넘겼다. "아...!" 나는 곧바로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문 바로 앞에까지 다가가 철창을 붙잡고 크게 소리질렀다. "디트 경!!" "아니, 어떻게... 디트리온 경께서 이 곳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디트 경이 바로 나의 앞에 와 서 있 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나의 옆으로 뛰어오는 알 아저씨의 목 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디트 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디트리온 경? 정말 어떻게 이곳까지!!" "아, 이럴 것이 아니라... 이봐, 어서 문을 열어라. 어서." 뒤이어 따라온 히노 선배와 딜트라엘도 놀라서 디트 경을 향해 질문을 던 졌고 병사에게 명령해 문을 열도록 명령했다. "기...기다리십시오. 딜트라엘 님! 갑자기 그렇게 그러시면...!" 딜트라엘의 말에 알 아저씨가 약간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디트 경이라고요! 알잖아요, 아저씨!!"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혹시 모르잖습니까. 일단 처음 딜트라엘 님 이 오셨을 때처럼 구속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아저씨!!" 나는 알 아저씨의 말에 약간 발끈하여 소리쳤다. "제가 여기 철창에 매달려 있는 게 안 보이세요? 저 같으면 이때 칼을 뽑 아서 철창 사이로 콱 찔러버리겠어요." "윽! 카류 님!" 내 말에 알 아저씨가 기겁을 하면서 날 철창에서 떼어냈다. "...아저씨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디트 경이 그럴 리가 없다는 뜻이 라고요." 나는 반쯤 알 아저씨에게 안겨서 중얼거렸다. 나를 위해 주는 것 다 좋지 만 알 아저씨는 정말 너무 과보호다. 하긴 철저한 교육을 받은 병사들까지 배신을 때릴 정도니 알 아저씨가 일일이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 도 상대가 다름 아닌 디트 경인데 말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카류 님. 일단은 그렇게 하세요." 디트 경은 알 아저씨에게 안긴 채로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살짝 웃으며 그 렇게 말했다. "음, 좀 불쾌하시더라도 절차대로 해야 합니다. 일단은 카류 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런 눈으로 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카류 님. 이건 제 의무라고요!" 알 아저씨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째리는 나를 보며 엄포를 놓았다. 그 리고 병사들을 시켜 검 같은 것을 전부 압수하고 다른 병사 4명의 감시를 붙여 전에 딜트라엘과 처음 만났던 그 응접실로 갔다. 알 아저씨는 계속 디트 경을 경계하며 내가 그의 곁으로 가지 못하도록 멀 찍이 떼어놓았다. 아무래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을까. 감시도 4명 이나 붙이고, 칼 종류의 흉기도 전부 압수했으면서 말이야. 하긴 디트 경이 좀 강하긴 강하지. 헷헷. "아, 카류 님!" "프리란트 님. 드리크 경! 오셨네요!" 프리란트 님과 드리크 경이 들어오자 곧 아르 할아버지와 다른 중요인사들 도 하나 둘 씩 응접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류스밀리온도 나의 근 처에 뻔뻔스럽게 떡 하니 앉아 있었는데 8서클 마법사라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별로 관계도 없는 주제에 꼭 끼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프리란트 님은 애써 류스밀리온을 말리지 않았는데 아마 이런 식으로 개입 하게 해서 어떻게든 그를 우리 진영으로 끼어 넣고 싶어서인 듯 했다. 정 말 그가 우군이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류스밀리온이 워낙 감 잡기가 힘든 인간인지라 뭐라 말하기 힘든 상태였다. 정말 소문처럼 괴팍하고 제멋대로 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또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디트리온 경.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여전히 건강해 보이군." "아, 리아 후작 님." 사람이 다 모이자 프리란트 님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 그런 겉치레 인사는 전부 집어치우고 빨리 본론부터 얘기해. 나는 그런 잡소리를 들으면 신경질이 나는 체질이라 말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성질 더 러운 류스밀리온이 끼어 들어 초칠을 했다. "류스밀리온 님! 나이도 지긋하게 드신 분이 웬 참견을 그렇게 잘 하세요? 참견을!" "뭐야? 내가 어디 틀린 말했느냐? 그래, 그런 겉치레 인사를 하면 어디서 돈이라도 떨어져? 눈구멍이 뚫렸으면 저 놈이 팔팔한 건 충분히 알 수 있 는 일을 가지고 무슨 잡소리가 많으냔 말이야." "아, 그것도 모르셨어요? 하긴 류스밀리온 님이 언제 제대로 된 사회생활 을 하셨어야지 말이에요. 그런 겉치레 인사는 처음 대화를 함에 있어 사람 들을 서로 친근하고 기분 좋게 하는 작용을 함으로서 나중에 실제 이야기 의 본론으로 들어갔을 때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게 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답니다. 아시겠어요?" 내가 류스밀리온을 보며 완전히 전투모드로 돌입하자 프리란트 님이 헛기 침을 하며 내게 눈짓을 했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 그러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 마음이 넓은 내가 참자, 참어. "저... 류...류스밀리온... 님?" 그러나 나의 말에 디트 경은 얼굴빛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설마..." "네. 저 분이 진짜 그 8서클의 대마법사 류스밀리온 님이십니다." "에..? 그...그런... 카...카류 님?" 프리란트 님의 확인사살에 디트 경은 류스밀리온과 나를 번갈아 보며 굉장 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디트 경은 내가 류스밀리온과 가까운 자리에 앉 아 있는 게 불안했던지 계속 내 쪽을 보면서 뭐라 말을 하려 하다가 살벌 한 류스밀리온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곧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면 디트 경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세간에 퍼져있는 류스밀리온의 악명은 정말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그 동안 그렇게 류스밀리온에게 계속 대들었던 것도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용 병 아저씨들 등의 믿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지 결코 그의 무서움을 몰라 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지내다 보니 의외로 그는 생각만큼 그렇게 막 나가는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를 본 것이 영광이냐?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류스밀리온이 살벌하게 디트 경을 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또 한번 전투의 지를 불태우며 그의 말을 맞받아 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프리란트 님의 다음 말에 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흠, 그러면 정말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세. 류스밀리온 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니까. 디트리온 경?" "네, 리아 후작 님." "내가 알기로는 카류 님께서 붙잡히신 후 카류 님의 호위기사였던 디트리 온 경도 당연히 함께 구속당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프리란트 님은 날카롭게 디트 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여기에 대해 해명해줄 수 있겠나?" 갑자기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저렇게 디트 경을 의심 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호위 기사이기도 하니 디트 경도 그렇게 쉽게 풀려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기까지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쉽게 리아 영지까지 가 도록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음이 분명한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 던 것일까. "...기사의 서약을 했습니다." "서약?" 기사의 서약이란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하는 서약으로 명예를 자기 목숨 보다 소중하게 여기는 귀족 특히 기사들에게는 절대적인 서약이었다. 기사 가 된 이상 그 서약은 깨어선 안 되는 절대적인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대 체 어떤 서약을 했단 말인지. 나는 약간 불안감을 느끼며 디트 경을 바라 보았다. "왕자님들과 공주님들 앞에서 반역자가 된 카류 님은 잊고 제1왕자이신 루 브 님을 영원히 따르겠다고 정식으로 기사의 서약을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의가 무엇이지!?" 디트 경의 말이 끝나자 응접실 내의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드리크 경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디 트 경을 보고 물었다. "그러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리아 영지로 왔다는 말은...?" 그러나 드리크 경의 질문에 답한 것은 류스밀리온이었다. "기사의 서약을 깨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류스밀리온의 말에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디트 경에게로 모 아졌다. 디트 경은 조용히 눈을 감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는 기사로서의 명예를 버렸습니다. 저는 카류 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예를 위해서 죽어버린다면 저는 더 이상 카류 님을 보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기사의 명예보다 카류 님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나는 정말 놀라버렸다.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디 트 경에게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 문이다. 이 일이 알려지면 디트 경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옳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사의 서약을 깬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고 강직한 귀족 기사들은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서약을 하지를 않았으며, 또 그런 서약을 깰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서약을 깨더라도 그 기사는 서약을 깬 이유야 어찌됐 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된다. 어떤 상황 에서도 결코 깨어서는 안 되는 맹세. 그것이 기사의 서약인 것이다. 그만큼 기사의 서약을 절대적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나 형제 들도 그 서약만을 믿고 디트 경을 내버려두었음이 분명하다. 고지식한 디 트 경이라면 그런 서약을 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할 만도 하건만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해서 결코 해서는 안될 거짓 서약을 하고 후일 있을 모든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리아 영지로 찾아 온 것이다. "디트리온...!!" "그만둬요!" 불쾌하다는 듯이 잔뜩 표정을 구기고 뭐라고 질책의 말을 하려고 하는 드 리크 경을 보고 나는 다급히 끼어 들었다. "드리크 경.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부족한 때가 아닌가요? 그렇게 일일이 형식에 구애받을 여유는 지금 없잖아요?" "카류 님! 기사의 서약을 그렇게 간단히 보시면 안됩니다. 그런 식으로 기 사의 서약을 어기는 것을 내버려두게 된다면 그 서약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서약을 어겨버려도 된다면 애초부 터 이 서약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절대 어길 수 없다는 전제가 있음 으로서 이 서약이 의미를 가지게..." "이론은 나도 알아요!" 나는 일어나서 디트 경 쪽으로 갔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디트 경을 보며 나는 그에게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디트 경." 내가 무릎을 꿇어 그의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그를 올려다보자 디트 경이 놀라 나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카류 님...!!" "내가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 나의 말에 디트 경이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나는 사실 디트 경이 기사의 서약까지 어기고 나를 찾아준 것이 너무나 기뻐."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호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나를 위해 한 나라의 최고 마법사라는 명예를 버리고 반역자가 되어버린 아르 할아버지, 나를 위해 자신의 일을 버리고 나를 호위하겠다고 해준 알 아저씨. 오직 나를 위해 주는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또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해 결코 여겨서는 안될 기사의 서약을 어겨버린 디트 경. 나는 오늘 또다시 새로운 빚을 지게 된다. "디트 경이 나에게 준 만큼 나도 언젠가 꼭 디트 경에게 보답하겠어. 반드 시!!" "카류 님...." 디트 경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정말 디트 경이 나의 곁으로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했지?" 어느새 다가왔는지 히노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 히노 선배." 사랑스러운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도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저녁을 먹은 다음, 나는 디트 경과 조금 전 산책했을 때 나왔던 인원으로 다시 정원으로 나갔다. 드리크 경과 몇몇 사람들이 상당히 좋지 않은 시선 으로 디트 경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시선을 피하느라 잠시 밖으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디트 경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는 하지 만 거짓으로 기사의 서약을 한 디트 경을 곱게도 봐줄 수 없는지라 그렇게 몇몇 사람들이 디트 경과 가까이 하는 것을 계속 꺼려하고 있었다. "디트리온 경! 힘내! 이 세상에는 우선 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맞아.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우리들과 함께 나온 딜티와 히노 선배가 아직까지도 약간 어두워 보이는 디트 경을 보고 말했다. "나도 카류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그런 서약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 울해 하지 말아." "딜티. 그런 말은 하지마. 기사의 서약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잖 아." 나는 사실 속으로 상당히 기쁘면서도 형식적으로 딜티를 만류했다. 솔직히 공공 연연하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건 딜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싫어. 나는 너만 따르기로 했으니까. 기사의 서약 따위가 너보다 더 중요 할 수는 없지. 그 어떤 명예보다도, 나의 목숨보다도 네가 훨씬 더 소중 해." "디...딜티..." "맞아. 나도 그런걸? 카류.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목숨을 바쳐 너를 지키고 싶어." "히노 선배..." 거의 비슷한 또래의 딜티와 히노 선배에게 저런 소리를 듣자 엄청나게 쑥 스러워서 몸이 다 뒤틀릴 정도였다. 저번에 딜티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 를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분위기를 타서 그렇게 어색한 것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벌건 대낮에 갑자기 저런 소리를 듣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알 아저씨라던가 아르 할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지켜 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어른이라고 할까. 어떤 의미로는 원래부터 보호 해주어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까지 쑥스럽지는 않았는 데 이번의 그들의 말은 정말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딜티... 히노 선배... 그... 그런 말은 그만둬요.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는 이런 말하면 안돼? 이야, 쑥스러워 하는 카류리드라니 이거 세기 의 볼거리 아냐?" "맞아, 맞아. 저것 봐, 얼굴이 저렇게 빨개졌어! 신기해라." "딜티!!! 히노 선배!!" 나는 정말 너무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딜티를 보고 빽 소리질렀다. 그러자 딜티와 히노 선배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도망갔다. 잠시 흥분해서 서 라고 소리 지르면서 그들을 쫓아 몇 발자국 뛰어가다가 문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뒤를 돌아보자 정말 쪽 팔리게도 킥킥거리고 있는 알 아저 씨가 눈에 들어왔다. "으...으으....왜 나만 갖고 그래! 정말 미웟!" "푸하하하하!!!" 내가 머리를 쥐고 너무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생각 없이 애들 같은 소리를 지껄이자 그 말을 들은 알 아저씨가 결국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알 아저씨!! 정말 너무해요. 아니, 으... 좀 못들은 척 해주면 안돼요?" "푸할할할.. 그..그래.. 못 들었다. 못 들었어!! 푸하하하!!" 유일하게 내 편이 되 줄 것 같던 디트 경마저 입을 막고 웃음을 참고 있어 서 나는 그만 좌절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씹혀보기는(?) 정말 오랜만이 구나. 디트 경을 위로하는 일이 왜 나를 놀리는 일로 바뀌는 거야! "아하하!! 카류야, 이거 정말 재밌다!! 심심할 때마다 써먹어야겠네? 그쵸? 히노 양?" "정말이야. 딜티." "친구의 호의에 쑥스러워하는 이 순수한 마음을 이렇게 마구 짓밟다니!! 그 러다가 제가 삐뚤어지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예요?" "꺄하하... 이런 부끄럼쟁이를 어떻게 책임을 지지?" 괜히 뾰로통한 척 하는 내게로 다가와 히노 선배가 뒷짐을 진 채 상반신만 약간 앞으로 내밀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보자 나의 몸 어딘가에 장치되어 있는 특수 센서(?)가 빠르게 발동해서 나는 자동적으로 히노 선 배를 콱 껴안았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아주 내 딸로 삼아버릴까 보다!!" "콜록... 카류야.. 그럴 때는 내 아내로 삼아버릴까 보다 라고 해야하는 거 아니냐... 무슨 언어선택을 그렇게 하는 거니?" "뭐, 어때. 귀엽잖아? 자아~ 이리 와~ 귀여운 딜티~ 너도 내 아들 할래? 내 가 히노 선배만 가지고 그러니까 질투하는 거지?" 내가 다음 차례로 딜티를 껴안으러 슬슬 이동하기 시작하자 딜티도 내 생 각을 어느 정도 눈치를 챘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우...웃기지마. 나보다 어린 아버지는 거절이다!" "정신연령은 높다는 게 아니겠니~ 응~?" "푸핫!!! 여러분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노는 겁니까?" 나와 딜티를 보고 알 아저씨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시군요. 카류 님도. 다른 분들도요." 디트 경은 우리들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뭐, 조금 바보같이 굴긴 했지만 그래도 디트 경이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나도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우리들은 계속 장난을 치면서 걷다가 기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쪽으 로 발걸음을 옮겼다. 원래는 정원 비슷한 용도로 쓰였을 듯한 거대한 풀밭 이 병사들의 훈련소로 쓰이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병사들이 전부 구슬땀을 흘리며 검의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아... 리아 후작 님의 사병인가?" "최근 새로 모은 사병이지. 지금 훈련시키는 중이야. 가끔씩 내가 봐주기도 한다고." "딜티, 네가?" "너도 내 검 실력은 알고 있잖아? 게다가 검과 전술만은 제대로 배워두라 고 매일 같이 아버님이... 독촉하셨으니까." 딜티는 아버님이라는 말에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 다. 이렇게 쾌활한 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갑자기 아버지의 일을 잊으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우울해 하는 딜티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디트 경! 어때요? 디트 경도 굉장히 검술을 잘한다고 하시던데."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밝게 해보려고 딜티가 디트 경을 보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어떻게든 맞장구를 쳐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럼! 디트 경이 얼마나 강한데! 왕족의 호위기사를 할 정도인걸. 사실 말 이야, 디트 경은 이런 제6왕자의의 호위 기사 같은 게 아닌 곧 왕이 될 루 브 형의 호위기사가 될 수도 있었다고들...." 나는 말하다가 곧 뒤끝을 흐렸다. "...하더라고....하하.."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고 애써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젠장, 이 바보 같 은 놈... 평소엔 그렇게 말을 잘하다가도 꼭 중요한 순간에서 이렇게 멍청 한 소리를 한다니까. "카류야."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나의 바로 앞으로 히노 선배가 걸어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바싹 당겨온 다음 말했다. "우울한 일은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말했지?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말 이야." 나는 히노 선배의 단호한 금빛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그녀의 이마를 머리로 콩 찍었다. "아얏!" "으음? 못써요, 히노 선배! 외간 남자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 대다니! 그 렇게 대담하게 굴다가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아~아니, 어째서 히노 선배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매 일같이 히노 선배가 시집도 못 가게 안아대는 게 누군데!? 히노 선배가 저 렇게 대담한 것도 알고 보면 다 네 탓이라고!!"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히노 선배를 뒤로 숨기면서 딜티가 나에게 마 구 쏘아댔다. "음, 이것만은 정말 할 말 없는 걸. 어쩌지? 이대로 뒀다가 히노 선배가 어 떤 놈팽이에게 끌려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니깐." 우리들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했다. 그래, 즐거운 날. 오늘은 즐거운 날이 야!! 쓸데없는 일은 생각하지 말자. 우리들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저택 을 뱅뱅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프리란트 님이 너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라 는 말을 듣고서야 저택 안쪽으로 들어왔다. "잘 자요! 딜티! 히노 선배도요." "응, 너도 잘 자." "좋은 꿈 꿔. 카류." 서로 인사를 한 뒤에 겨우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는 히노 선배와 딜티를 보고 프리란트 님이 한숨을 쉬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음? 그런데... 알과 디트 경은..." 프리란트 님은 문득 나의 곁에 서 있는 알 아저씨와 디트 경을 보고 중얼 거렸다. 내가 요즘 굉장히 위험해져 있는 관계로 나의 호위 역인 알 아저 씨도 나의 방에서 함께 침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원래 호 위 역인 디트 경이 돌아왔으니 알 아저씨는... 가만히 생각하니 디트 경이 돌아왔다고 이제까지 날 지켜준 알 아저씨한테 그만두라고 해고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일부러 나를 지키러 온 디트 경에게 이미 나의 호위 자리는 누가 벌써 차지했으니 다른 일을 하라 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같이 가죠, 방이 얼마나 넓은데요! 모두, 괜찮지요?" 나는 프리란트 님이 알 아저씨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보고 대뜸 끼어 들어 그렇게 말했다. 아마 프리란트 님의 입장에서는 이제 그만 알 아저씨 는 떨어지고 디트 경이 나의 호위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 다. 알 아저씨가 아무리 믿을만하고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지만 사실 그는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프리란트 님도 어쩔 수 없이 알 아저씨를 나의 호위 역으로 붙이기로 동의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잘 때도 한 방을 써 야하는 호위병을 평민으로 붙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류 님." "네? 프리란트 님? 왜 그러세요? 저를 호위해주는 사람이 둘로 늘었으니 정말 든든해요. 그렇죠? "예. 그런데..." "이제 디트 경까지 있으니 제가 다치는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 렇게 생각하시죠? 프리란트 님?" 나는 프리란트 님이 알 아저씨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원천봉쇄를 하려고 프리란트 님의 말을 자꾸 끼어 들었다. 내가 계속 자신의 말을 방해하자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쉬고는 결국은 나의 말에 승복하고 말았다. "휴우...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에 경계해 주십시오. 카 류 님." "네. 프리란트 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프리란트 님은 아직 포기하지 못 했는지 계속 알 아저씨를 보고 눈짓을 하다가는 곧 자신의 방 쪽으로 돌아 갔다. 프리란트 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알 아저씨를 빠지라 고 하는 건 정말 미안한걸. 사실 어쩌면 이렇게 유능한 사람을 둘이나 끌 고 다니는 것이 인력 낭비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거야. 나는 혼자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그들과 함께 나 의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부터 저택이 엄청나게 크고 -저택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 곳 도 여러 건물이 모여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규모도 왕궁의 반이나 될 만큼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특히 왕족인 내가 지낼 곳이라 특별히 신경 을 쓴 모양인지,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은 예전의 왕궁에 있는 나의 방 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그리고 방의 구석구석마다 귀족 특유의 장식용 보석들이 잔뜩 박혀있어 처음 이 방에 들어온 알 아저 씨의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확신하건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의 보 석은 분명 몇 개 없어졌을 것이다.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이래저래 빈둥거리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이야... 달 한번 예쁘네에. 반짝반짝 작은 벼얼 아름답게 비치네에... 서쪽 하늘에서도오.. 남 쪽 하늘에서도오.." 창틀에 기대서 괜히 흥얼흥얼거리는 나를 보고 내 곁에 서 있던 알 아저씨 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지요?" "히노 선배가 마법을 걸어줬어요.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나는 뒤로 돌아서서 싱긋 웃었다. 저쪽에 앉아 자신의 갑옷을 손질하는 디 트 경이 보이자 굉장히 기분이 흐뭇해졌다. "카류 님을 그렇게 기분 좋게 해준 사람이 제가 아니라 섭섭한걸요?" 알 아저씨는 디트 경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에고, 알 아저씨가 약 간 섭섭했으려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영원히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말이야. 난 섭섭해하는 알 아저씨에게 매달려서 잠시 애교(?)를 떨어주다가 디트 경 쪽으로 걸어갔다. 다 큰 남자 녀석의 애교 따윈 별로 보고 싶지 않을 만도 하건만 어릴 때부터 나를 알았던 사 람들, 그러니까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용병 아저씨들은 의외로 나의 애교를 꽤 좋아했기에 한 짓이다. "디트 경. 그 동안 건강했어?" 나는 그의 곁에 폴짝 뛰어가서 방실방실 웃어주며 물었다. 정말 그와 이렇 게 보는 것이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와 함께 했기에 잠시동안 의 그의 공백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네... 카류 님은 그 동안 다친 곳은 없으셨고요?" 음, 어깨에 바람구멍이 난적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슈카가 죽었지... 에 잇! 그 생각은 그만 하자! 오늘은 즐거운 날로 하기로 했으니까! "보다시피 이렇게 팔팔해." "다행입니다. 카류 님." 그의 앞에서 팔을 횅횅 돌리며 말하는 나를 보며 디트 경은 부드럽게 웃었 다. "쩝. 오늘은 왠지 잠이 안 오는구만." 알 아저씨가 나의 곁에 서서는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오늘 괜히 기분이 좋아서 벌써부터 자는 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 었다. "우리 밖으로 나갈래요?" "엥? 벌써 자정이 다 되가는뎁쇼? 에구, 호위하는 사람의 사정도 봐주셔야 지. 그런 오밤중에 카류 님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음. 보름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구경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팔을 쭈욱 빼고 애들처럼 웅얼웅얼거리자 디트 경이 살짝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나가고 싶으세요?" "응!" 나는 벌떡 몸을 세우고는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보내기 정말 아까운 날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디트 경이 아니더라도 그 동 안 내내 우울하기만 했던 나는 오늘 이상하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웬 일로 그렇게 나가고 싶어하세요? 평소엔 안 그러시더니..." "음, 왠지요. 왠지~ 그러고 싶어요." "나가지요. 잠시 바로 근처에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디트 경은 낮에 돌려 받은 검을 옆에 차고 일어섰다. 알 아저씨도 투덜거 리며 자신의 단도와 검을 챙겼다. 나는 그런 그들을 양옆에 차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 밤하늘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듯하네. 이렇게 예쁜데 말이야." 나는 이제 기억이 어슴푸레 해졌을 정도인 토이렌의 그 밤하늘을 떠올렸 다. 그곳과 비교하면 이곳 이르나크의 하늘은 공해가 전혀 없어서 아름다 운 달과 빽빽이 들어찬 별자리들이 맨눈으로도 정확하게 보였다. "그렇지요. 저는 밤하늘을 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답니다." "헤에. 디트 경이? 의외로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하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디트 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카류 님의 흑청색 머리색이 생각나거든요. 검지만 달빛 때문에 가끔씩 푸 른빛이 나는 것 같은 밤하늘의 색이 카류 님의 머리색과 정말 비슷하지 요." "에? 그런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보통은 밤하늘은 디트 경의 머리색처럼 까맣다고들 한다고." "후후... 하르트 가 특유의 흑청색 머리색을 밤하늘의 색이라고 한다는 것 을 모르셨나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알 아저씨가 웃으면서 머리카락를 쓰다듬었다. "정말 디트 경 말도 일리가 있군요. 비슷한데요?" "으음, 우리 앉아서 얘기해.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걷다간 넘어질지도 모 른다고." 나는 앞쪽에 보이는 의자로 먼저 쪼르르 뛰어가 걸터앉았다. 그러자 알 아 저씨가 나를 보고 푸념을 했다. "카류 님! 그렇게 혼자 다니지 말라니까요. 에구." "으음... 미...미안해요. 알 아저씨. 얼른 앉아요. 여기. 여기! 디트 경도!" 내가 나의 옆자리를 팡팡 치고 말하자 알 아저씨와 디트 경이 와서 각각 나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휴우. 이 정도면 자정도 넘었겠군요. 이 시간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안 다면 리아 후작 님께서 뭐라고 하실 지..." "끄응~ 별일 없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죠, 뭐. 걱정 마세요. 알 아저씨." 나는 쭈욱 팔을 빼고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예전에 토이렌에 살 때는 새벽 2,3시가 되도록 매일같이 공부하던 수험생이었는데 이곳에 환생하고 나서는 자정이 될 때까지 눈을 뜨고 있은 적은 거의 없었다. 형광등 같은 좋은 조명 시설이 없어서 초나 등불을 켜서 있어야 하기에 오랫동안 밤에 버티고 있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라이팅이라는 멋진 마법도 존재했지 만 라이팅 마법을 유지시켜주는 7서클의 마법을 추가로 써줘야 했고 그 마 법도 일주일이 한계였기에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 마법을 이용한 조명을 쓰는 일은 없었다. "디트 경. 그 동안 성에 있으면서 무슨 큰 일은 없었어?" 나는 약간 신경 쓰이는 일을 물었다. 혹시나 내가 감옥에 갇힌 후 디트 경 이 나를 따르는 자였다고 해서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했던 것이다. "......" 디트 경은 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별로 디트 경이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는가 싶어 나도 굳이 대답을 강 요하지 않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카류 님..." "...응?" 나는 그의 부름에 그를 바라보았다. 디트 경은 계속 하늘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 내가 바보같이 되묻자 디트 경이 다시 한번 조용히 말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반역과 국왕폐하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즉결처분을 당하셨습니다." "아...으으응..."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기에 약간 멍해져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이일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내가 처형당할 것이라는 재판결과를 들었 을 때부터 어머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 다. 증거물로 제시된 그 마법의 구슬에서 흘러나온 대화에서 어머니는 완 전히 반역의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어머니라면 사족 못 쓰는 국왕이 어떻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 가져보기도 했다. 하 지만 아무리 국왕이라도 반역의 주범이었던 어머니를 살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면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일부러 묻지 않았다. 생각하지도 않았 다. 나는 어쩌면 어떻게든 그 무능한 국왕의 능력을 믿어보고 싶었던 걸지 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국왕으로 서는 어머니를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소식을 듣게 되었고 역시 어머니는 돌아가 셨던 것이다. "그래..."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죽음이 그렇게 절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이 기쁜 소식일리가 없었다. 어 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는 만나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 이 힘이 쭉 빠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람이 죽어버릴 수도 있는 걸까. 슈 카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언제부터 살해당하고 처형당하는 이런 일들 이 이렇게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카류 님... 디트 경! 왜 갑자기 지금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알 아저씨는 풀이 죽어있는 나를 보고 디트 경을 책망했다. 사실 디트 경 의 잘못도 아닌지라 알 아저씨를 말리려하는데 디트 경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디트 경은 자신의 무릎 위로 손을 올려 그것을 꼭 쥐고 말했다. "저는 강한 자였지요.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뭐든지 가질 수 있었습니 다. 뭐든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부, 지위, 여자까지.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와 알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디트 경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단 하나만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바랬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디트 경?"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밤하늘 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상냥하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디트 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디트 경이 바랬다는 '그것'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저는 그 분을 바랬지만 그분은 이미 다른 분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 는 그분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저는 조금도 그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디트 경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이미 국왕의 아내였고 디트 경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독 촉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단지 어머니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충분히 루브 형의 호위 기사가 될 수 있을만한 실력에도 나의 호위기사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 대신으로 나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디트 경은 나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스트라한 님을." 디트 경은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간 후 뒤 돌아섰다. "저의 단 하나뿐인 마음의 주군이시여. 용서하십시오." 디트 경은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달빛에 비쳐 그의 검이 스산한 빛을 뿜 어내고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데 나의 옆에 앉아 있 던 알 아저씨가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검을 뽑아들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디트 경!" "비켜라. 너까지 해치고 싶진 않다." "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황당해하는 알 아저씨의 말에 디트 경은 검을 곧추세우고 자세를 취했다. "미안하다." 디트 경이 빠르게 알 아저씨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당황한 알 아저씨도 앞으로 튀어나가며 그에 대응해서 검을 휘둘렀지만 겨우 막는 것에 그쳤 다. 알 아저씨는 디트 경의 빠른 검에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지도 못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카류~!! 도망쳐!! 도망치라고!" 알 아저씨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그냥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앉아 그 들의 행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전부 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정도 로 나는 지금의 상황에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캉! 캉! 그들의 검이 휘둘릴 때마다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이 허공에 그려졌 다. 너무나 빠르고 현란한 그 움직임은 나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캉! 카앙! "카류! 카류리드!!" 검이 마주치는 소리에 맞추어 알 아저씨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리듬감 있게 울리는 그 소리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아 름다운 검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카류!! 제발 도망...!!" 그러나 그 아름다운 광경도 얼마가지 못했다. 곧 음산한 붉은 빛이 검푸른 배경에 수놓아졌기 때문이다. "아..." 알 아저씨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알 아저씨의 뒤로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디트 경의 모습이 나타났 다. "아...아아아...." "카류 님." "아아...아아악!!! 알 아저씨!!!!" 나는 드디어 비명을 질렀다. 제발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디트 경의 검이 위로 치켜드는 것을 보고도 나는 그 자리에 앉 아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내게 그의 검을 피할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있 지 않았다. "카류리드 님...!" 디트 경은 다시 한번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고 아래로 내리쳤다. 그런데 그 날카로운 검이 나를 목표로 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 각건만 이상하게도 검은 나를 비켜나 다른 곳에 꽂혔다. "카...카류를... 절대... 안...돼...." 아래쪽에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알 아저씨가 피투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디트 경의 다리를 잡고 그를 방 해했던 것이다. "알 아저...." 이번에는 나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알 아저씨를 돕기 위해 어떻게든 해보 려고 몸을 일으키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트 경은 빠르게 칼을 세웠고 내 가 말릴 새도 없이 그 검이 알 아저씨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아아아악~~!!" 나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감싸안고 비명을 질렀다. 미칠 것만 같았다. 거짓이길 바랬다. 제발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절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이, 나의 디트 경이 알 아저씨를 죽였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는 이 사실 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은 알 아저씨의 머리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는 내가 있는 쪽을 향 해 천천히 다가왔다. "싫어엇!!!"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질렀다. 그의 검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 두려웠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죽이려 하는지 두려웠다. 그의 생각이 얼굴이 나타났을까봐 두려웠다. "커헉~!" 그러나 그 다음 들린 소리는 나의 비명 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비명소리였 다. "카류!!"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데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나를 감싸 안았다. "카류야. 카류. 괜찮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카류야!! 제발 정신 차리렴!" 머리를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언제나 그랬듯 걱정스러운 목소리 로 아르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르 할아버지는 떨고 있는 나를 더욱 껴안아 주고 안타깝게 나에게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르 할아버지의 목 소리가 듣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귀가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에 반해 나의 눈은 앞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나의 눈에 널브러 진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가 정확히 들어왔던 것이다. "쿨럭...쿨럭..." 나는 어디선가 들리는 기침소리를 듣고 아르 할아버지를 밀어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정말 꼴사납게도 계집애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디 트 경이 나를 죽이려 한 것은 결코 꿈이 아니었다. 나의 앞에 널브러진 고 깃덩어리는 분명 알 아저씨의 시체였다. "카류야..!!"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복부를 감싸쥐고 거칠게 기침을 하고 있는 디 트 경에게로 다가갔다. 중간에 아르 할아버지가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거 칠게 할아버지의 손을 뿌리쳤다. "꿈이 아냐... 그렇지?" 나는 디트 경에게 물었다. 나의 말에 디트 경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날 죽이려 한 건 꿈이 아냐. 그렇지?" 눈물을 흘리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눈물 때문에 목소리가 정확히 나오지 않아서 정말 신경질이 났지만 나의 의지와는 달리 눈에서 자꾸 쓸데없이 눈물이 쏟아냈다. "죽여... 나를 죽이려고 온 거였어...?" 그 말을 하자 턱이 덜덜 떨렸다. 디트 경이. 그렇게 믿었던 디트 경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를... 나를 그만큼. 그만큼 나를 증오했던 걸까. 나를 죽이 고 싶을 만큼 내가 싫었던 걸까!? "그렇게...그렇게 내가 싫었어?" 나는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나를 그렇게 증오했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증오했어? 그래?!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나는 땅에 떨어진 검을 들어서 디트 경에게 쥐어주었다. "카...카류?! 무슨?!" 옆에서 아르 할아버지가 당황하여 말했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 고 디트 경을 향해 외쳤다. "죽이고 싶었어?!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그랬어? 죽여!! 원하는 대로 죽여 버려!! 여기 있잖아! 어서 죽여버려!! 당장! 당장 죽여 버렷!!" 나는 절규했다. 그렇게까지 죽이고 싶었다면 죽어주지. 얼마든지 죽어주겠 어!! "카류... 쿨럭...카류 님...!!" "뭐야!! 죽여!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웠다면 어서 죽여! 나를 죽이려 했잖아! 방해가 된다고 알 아저씨를 죽일만큼 나를 죽이려고 난리를 쳤잖아!! 찔러 버려!! 그걸로 나를 찔러버리란 말이야! 죽여버려! 죽여...!! 죽여...." 나는 주저앉아 바닥에 손을 짚고는 꽉 힘을 주었다. 땅이 거칠어서 손끝이 엉망이 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디트 경에게 뭐라고 좀 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감정이 격양되어 눈물을 얼 마나 많이 흘렀는지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카류...님...쿨럭...아아....카류 님!!" 디트 경은 내가 쥐어 준 검은 어쩌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그런 디트 경의 행동에 신경질이 나서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쳤다. 그렇지만 나는 이 상하게 부상자인 그를 밀어낼 힘도 없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헛손질만 하 며 짜증을 냈다. "놔...놓으라고... 나를 죽이려한 주제에... 나를 죽이고 싶어했으면서.., 싫어... 놔...놓으란 말이야... 싫어... 싫단 말이야..." "카류 님...!!" "싫어... 싫어졌어..?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워졌어? 죽 이고 싶어진 거야..? 그렇게나 내가 증오스러워..?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거야? 그렇게 싫은 거야?" "카류 님!! 카류 님!! 아닙니다... 쿨럭... 아니예요.. 전하!!" "역시...나는 죽어야 하는 거야...? 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나쁜 놈이야?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려야 할 그런 존재인 거야? 디트 경이 당장에 없애버려 야 할 그런 놈이야?"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디트 경에게 물었다. 디트 경은 그런 나를 꽉 껴안 으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류 님!!. 쿨럭쿨럭... 제발...쿨럭... 제발.. 그게 아닙니 다. 카류 님..." 나를 안고 있는 디트 경의 얼굴 쪽에서 뭔가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카이세리온 님은...루블로프 님은... 다른 형제분들께서는.. 너무 변해버렸습 니다.. 콜록.. 너무 변해버리셨어요..." 나는 그제야 다트 경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디 트 경은 그런 나를 놓칠세라 꼭 붙들고 말했다. "그분들께서.. 저를 불러놓고 말하셨습니다. 콜록... 키류 님을 죽이라고. 그 렇지 않으면.. 쿨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를 갈기갈 기 찢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저는 도저히 그것을 보 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멍하니 디트 경의 품에 안겨 그의 말을 들었다. "카류 님...크흑... 저는... 저는...!!" 나의 형제들이 시켰다는 것인가? 나의 어머니의 시체를 빌미로 디트 경을 협박하여 나를 죽이라고 그렇게 명령했단 말인가? 디트 경의 어머니를 사 랑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려고 했단 말인가? 나의 호위 기사인 디 트 경이 나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형...들이...." 나는 중얼거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류야. 정신 차려라.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가 다가와 멍해진 나를 디트 경에게서 빼내와서 자신의 품에 안으면서 걱정스레 말했다. 눈앞의 디트 경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나의 이 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이였다. 아르 할아버지의 마법에 맞은 것 인지 왼쪽 옆구리가 완전히 피투성이였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 을 흘리고 있었다. "전하... 용서하십시오!! 아니, 저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 다. 카류 님! 죄송합니다. 이 죄는... 이 죄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죽음?" 나는 고개를 들고 디트 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를 죽음으로 갚겠다고?" "카...카류 님..." "하~! 죽음? 그딴 걸로 갚겠다고?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디트 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죽음? 용서해 줄까보냐! 누가 그딴 시시한 죽음 따위로 너를 용서해 줄까 보냐!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결코 그런 시시한 죽음 같은 것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디트 경을 등지고 돌아섰다. "카류..." 내가 돌아 선 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히노 선배가 그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에 눈물을 한가득 담고 서 있었다. "마법이 풀려버렸어요. 선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녀의 마법에 걸려 하루종일 너무나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의 효과는 너무나 대단해서 나는 언 제까지고 이 즐거운 날이 계속 될 것이라 믿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 정이 넘어 그녀의 마법의 효과가 다하자마자 나는 이 잔혹한 현실로 되돌 아오고 말았다. 나는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제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시시한 일회용 마법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Part. 30 - 소중한 것 "...네?!" "처형식에서 도주한 카류리드를 찾아 죽이라고 했다. 디트리온." 잠시 나의 귀를 의심했다. 아스트라한 님의 비보를 전해듣고 나는 거의 실 성한 상태에 있었다. 게다가 카류 님마저 처형당한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 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끌려나 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계속 멍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러나 방금 한 카 이세리온 님의 말을 듣고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지금 내 말을 무시하고 있는 건가? 대답하라. 디트리온." 내가 포박 당한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멍하게 앉아만 있자 카이세리온 님 이 앞으로 나서 다시 한번 말했다. 카류 님이 살아 계신단 말인가? 아니, 그렇더라도 나를 보고 그 분을 죽이라고? 아스트라한 님의 단 하나 뿐인 아들인 그분을? 그리고 지금 카이 님이 카류 님을 죽이라고 하고 있는 건 가? 나는 한동안 카이세리온 님을 바라보다가 다른 형제분들을 둘러보았 다. 모두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카이세리온 님을 말리는 분은 없었다. "노...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카이세리온 님. 그분은 제가 지켜야 할 분입니 다. 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너야말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카류리드는 반역자다. 더 이상 네가 지켜야 할 의미도, 지켜야 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카류리드는 죽여야 할 대역죄인일 뿐이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이세리온 님을 바라보았다. 그 동안의 그 심약하고 부드럽던 분위기가 거짓말같이 지금 카이세리온 님의 새파란 눈동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고 차가운 빛 을 띄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카류 님의 반 역 사실만으로 이렇게까지 변하셨단 말인가? "그토록... 그토록 카류 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니까.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그 분을 해치려 할 정도로...." 나의 말에 루블로프 님이 크게 흥분해서 앞으로 나와서 소리쳤다. "네가 뭘 알아?! 네가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가장 소중한 자에게 배신당한 이 기분을 아는가? 그의 모든 행동이 전부 위선이 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의 마음이 어떤지 아느냐고! 너도 봤지? 장례식 때, 자신이 죽인 우리 어머니들의 장례식 날, 카류가 우리들에게 한 그 가 증스러운 행동을!! 자신이 죽여놓고도 그렇게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 끝없는 위선을!!" "틀립니다. 그분을 그런 분이 아닙니다!" "왜 아니라는 거지? 뭐가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틀렸다는 건가? 그래, 너 도 증거를 대봐라. 트로이 후작처럼 증거를 가져와 보라고!! 카류가 우리들 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가져와 봐!!" 나를 보고 소리치는 루블로프 님의 붉은 눈동자가 화 때문에 더욱 붉어지 는 듯한 착각을 가져왔다. 카이세리온 님은 완전히 흥분해버린 루블로프 님을 자신의 뒤로 살짝 물리고 나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오직 그 분을 따를 뿐입니다. 저는 자신의 선택 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또한 앞으로 그 마음은 바꾸는 일도 없을 것 입니다. 저에게 그 분을 배신하라 하시기보다는 저의 목을 치시고 다른 사 람을 찾아보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그래?" 카이세리온 님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왜 네가 그렇게까지 카류리드를 따르는지 알고 있다. 아, 물론 그 녀 석의 위선에 완전히 넘어가 버린 탓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네가 왜 처음부터 루브 형님이 아닌 카류리드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무슨..." 약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러자 카이 세리온 님은 내 쪽으로 몸을 약간 숙이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 설마 네가 아스트라한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 을 줄 알았던 것인가?" "카...카이세리온 님!!" "어차피 공공 연연한 비밀이 아니었더냐. 십 년이 넘도록 한 여자만을 짝 사랑하다니 정말 감탄할 만큼 일편단심이란 말이야. 그래. 그래서 그녀가 죽은 지금 기분이 어떤가? 십여 년간의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 기 분이 어떠냐고." 갑자기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카이세리온 님이라도 나의 이 마음을 조롱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말조심하십시오! 카이세리온 님!!" "역시 흥분하는군. 쓸만하겠어." 카이세리온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위의 다른 형제 분들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카이세리온 님의 다음의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아스트라한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 카이세리온 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 다. "카류리드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아스트라한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들판에 내버려 짐승의 먹이로 주겠다. 사실 솔직히 나는 당장이라도 우리 들의 어머니가 죽인 그 년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무...무슨!! 하...한나라의 국모의 시체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아무리 카이세리온 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터져 나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참으며 카이 님의 말에 소리쳤다. 그러나 카이세리온 님은 냉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년은 한 나라의 국모를 직접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은 것뿐이다. 그러 니 진정한 국모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단지 무엄한 반역자일 뿐인 계집의 시체를 찢어버리겠다는데 누가 나에게 뭐라 할 수가 있단 말이지?" 너무나 무서운 말을 카이세리온 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랭하게 내뱉 었다. 카이세리온 님은 진심으로 아스트라한 님의, 그분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말하고 있었다. "카류리드를 죽여라. 그 놈이 다시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계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다시는 나의 눈에 띠는 일이 없도록. 네가 카류리드를 죽여준다 면 내 자비를 베풀어 아스트라한의 육신에 손상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하지. 그러나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아스트라한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림으 로서 그년에게 다시 한번 비참한 죽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아스트라한이 죽어서도 그런 수모를 받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 그 분의 말에 마치 온 몸의 피가 식어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온 몸 을 엄습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대답해라. 생각할 시간을 줄 마음 따윈 없다. 시간을 질 질 끌다가 루브 형님 대에서 왕위계승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는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까. 카류리드를 죽이러 가겠는가? 아니면 아스트라한의 몸이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고도 카류리드의 편 을 들겠는가." 나는 카이세리온 님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스트라한 님. 그리고 카류리드 님. 17년 전 나는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 같은 것에 한순간 혼을 뺏겨버리고 말 았다. 스스로 그런 바보 같은 자신을 오랫동안 책망도 해보았지만 나의 마 음은 언제나 그녀만을 향하고 있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나의 아스트라 한 님을 갈구하는 마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 던 나는 아무런 권력도 힘도 없는 제6왕자 카류 님의 호위기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카류 님을 지킴으로서 아스트라한 님의 행복을 지켜드릴 수 있었고, 또한 카류 님의 모습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 다. 나는 카류 님을 지키는 일로 대리만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류 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너무나 총명하고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누구보다도 넓게 세계를 볼 줄 알았으며 왕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었 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는 그분을 선택할 것을 정말 기뻐했다. 나는 단 한 번도 이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분을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 다. 이제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이 아닌 나 의 진정한 군주로서 그 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진정으로 그 사랑스러 운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카이세리온 님은 천천히 걸어와 나의 바로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애초부터 네가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스트라한이었나? 카류리드였나? 너 는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카류 님을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맹세했다. 아스트라한 님의 앞에서 카류 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아르디예프 님의 앞에서 어떤 상 황에서도 나만은 카류 님의 편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너의 아스트라한을 지키고 싶다면 맹세해라. 찢어져 엉망이 된 그녀의 몸 뚱이를 보고 싶지 않다면 카류리드를 죽이고 영원히 루브 형님을 따르겠다 고 지금 여기서 기사의 서약을 하라." "......저는..." 부서지는 빛 사이로 신비하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기품 있는 여성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곧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것이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아 직 그 순간을 조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나의 머리 속에 각인된 채 조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바로 손을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생생하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저는..." 턱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거의 이성이 마비된 나의 입에서 멋대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카류... 리드 님을 죽이고... 루브 님을 따를 것입니다. 저의...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그 서약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카이 님은 천천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나의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끊어냈 다. 그리고 그 검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루브 형님 앞에서 기사의 서약을 하라. 네가 그 서약 을 지킨다면 나도 너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검을 받아 들었다. 돌아선 카이 님이 루브 님을 모시고 앞으로 나 오는 것이 나의 눈에 비치자 이제는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스트라한 님이 바라는 일이 아니다. 아스트라한 님은 결코 이것 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수백 번 다시 죽는 일이 있어도 카류 님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카류 님을 다치게 할 바에는 자신의 피와 살을 주겠다고 울부짖을 것이다.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류 님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절대 카류 님을 배신하 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카류 님의 앞에서, 아르디예프 님의 앞에서, 아스트 라한 님의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목숨을 바쳐 그분을 지키겠다고 맹세했 다. 나 역시 진정으로 그 사랑스러운 분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보고 싶 지 않았고 그랬기에 그 맹세들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 심이었다. "디트리온." 카이세리온 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저는..."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쌓아오고 만들어왔던 모든 것 을 전부 뒤집어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사 랑하고 존경했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이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반역자가 된 카류리드 님을 잊고 루블로프 님을 저의 군주로 모실 것이 며, 명하신 대로 반드시 카류리드 님을 찾아 그 분을 제 손으로 죽이겠습 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팔을 그었다. 검붉은 피와 함께 또 다른 투명 한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그 투명한 액체가 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 이 눈물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대로 잊지 마라.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잊지 마라." 멀리서 흐릿하게 카이세리온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라한 님..."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가 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진심으로 기사의 서약을 깰 것인가? 진심으로 카류 님을 따르겠다 고 나의 영지에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리아 후작 님. 그래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대에게 끝나지 않고 그 오명이 그대의 바스라윈 백작 가에도 영향을 미 칠 것인데도 상관없는가?" "그렇습니다.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류 님보다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도 흔들림이 없는 자신에게 말이다. "일단 검은 돌려주겠네. 그러나 카류 님의 호위로 알이라는 용병을 계속 붙여 놓을 생각이네. 그대도 알다시피 신뢰할 수 있고 실력도 꽤나 있는 용병이지. 아직 내가 그대를 믿지 못한다는 사실에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 지는 말게. 이 모든 것은 전부 카류 님을 위한 일이니까." "알겠습니다. 리아 후작 님." 역시 리아 후작 님은 쉽게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덜컥 믿는 다는 것 자체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고 말이다. 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 카 류 님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리아 후작 님이 한 마디 덧붙였다. "저렇게 보여도 카류 님은 지금 굉장히 상심해 계시네. 전부터 수많은 일 로 낙심해 계신데다가 얼마 전에 암살자에게 어깨를 크게 다치기까지 하셨 고, 그 때 카류 님이 잘 아시는 소년이 그 분의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일까 지 있었다네. 카류 님에 대해 잘 안다면 지금 그분이 어떤 상태인지 알겠 지? 그대가 일부러 찾아 와 주었다는 것에 지금 겨우 기분이 나아지셨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나는 일단 리아 후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카류 님에게로 걸어갔 다. "디트 경! 아, 점심은 먹은거야? 여기까지 오면서 힘들었지?" "저는 괜찮습니다. 카류 님." 나의 말에 카류 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카류 님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 였다.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카류 님은 여전히 나를 향해 걱정스 러운 말을 던졌다. 수많은 오해와 증오와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카류 님은 여전히 상냥한 마음과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카류 님은 내가 기사의 서약을 여겼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색한 시 선을 받는 것을 염려하여 밖에서 한동안 산책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리 고 이 산책에 함께 동행이 된 딜트라엘 님과 히노 님과 대화하는 카류 님 을 보며 나는 카류 님이 어떻게 그 많은 일 속에서도 아직 이렇게 버티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직은 이 리아 저택에 카류 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기에 카류 님은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 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리아 후작 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카류 님을 부를 때까지 우리들은 계 속 밖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딜트라엘 님과 히노 님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낸 뒤 리아 후작 님은 계속 알에게 뭔가 말을 전하려 했다. 분명 아 직 믿기 힘든 내가 카류 님의 방에 함께 가는 것이 굉장히 불안한 일이었 기에 알에게 뭐라 충고의 말을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카류 님이 계속 '셋이 함께' 자신의 방에 갈 것을 주장하며 리아 후작 님의 말을 방 해했기에 리아 후작 님은 한 숨을 쉬며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죄악감에 사로 잡혔다. 저 분을 내 손으로 죽여야한단 말인가. 내가 저 분을 죽일 수 있을까. 카류 님이 기거하시는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쪽에 앉아 나는 갑옷을 손질 하며 카류 님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디트 경. 그 동안 건강했어?"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카류 님이 나의 앞에 와 방실 방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네... 카류 님은 그 동안 다친 곳은 없으셨고요?" 나는 그만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크게 다치셨다는 말은 낮에 리 아 후작에게 듣지 않았던가. 카류 님은 잠시 침울해지는 듯하다가 곧 웃으 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이렇게 팔팔해." "다행입니다. 카류 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팔을 횅횅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장난 스럽게 말하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쩝. 오늘은 왠지 잠이 안 오는구만." "우리 밖으로 나갈래요?" 알의 말에 카류 님이 장난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제안을 했다. "엥? 벌써 자정이 다 되가는뎁쇼? 에구, 호위하는 사람의 사정도 봐주셔야 지. 그런 오밤중에 카류 님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음. 보름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구경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카류 님이 팔을 쭈욱 빼고 애들처럼 웅얼웅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약간 웃음이 나왔다. 카류 님의 어리광을 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 다. 정말 오랜만에 대하는 그런 어린애 같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 분 을 쓰다듬어 주고 싶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그렇게 나가고 싶으세요?" "응!" 나의 질문에 카류 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카류 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정겨 운 기분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오래 카류 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카류 님을 보고 조용히 웃고 있다가 갑자기 번뜩 스치는 생각에 나 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를 돌 아보며 나는 자신의 이기심에 소름이 돋았다. 카류 님을 해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카류 님의 변함 없는 미소에 고통과 절망에 찌들었던 마음이 어느새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조금만 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 다. 카류 님을 죽이러 온 주제에, 카류 님에게 절망을 주러 온 주제에, 카 류 님의 미소에서 행복을 얻으려 한 것이다. 정말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이기심이었다. "나가지요. 잠시 바로 근처에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런 기사의 서약을 하면서까지 원했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이 치졸 한 이기심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카류 님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 결심했다. 카류 님의 제안으로 우리들은 한참동안을 정원을 걷다가 정안 안 쪽에 있 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하던 것과 같이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달빛에 비친 검은 밤하늘이 기이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나 그 하늘은 카류 님의 깨끗하고 순수한 흑청색을 떠올리게 한다. "디트 경. 그 동안 성에 있으면서 무슨 큰 일은 없었어?" 그리고 아스트라한 님의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검푸른 색을 떠올리게 한 다. "카류 님..." "...응?"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카류 님을 돌아보았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그 순수한 밤하늘 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 "...아스트라한 님께서 반역과 국왕폐하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즉결처분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분을 향해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흑청색 눈동자에 작 은 파문이 번져가는 것을 보며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안다. 아니, 뒤집을 마음도 없었다. 아스트라한 님의 소식을 듣고 완전히 기운을 잃은 카류 님께 나는 천천히 나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카류 님이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그분에게 이제껏 숨겨왔던 아스트라한 님에 대한 나 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사실 지금부터 할 '일'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 은 것이리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스트라한 님을."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간 후 카류 님을 향해 돌아섰다. "저의 단 하나뿐인 마음의 주군이시여. 용서하십시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나의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 나는 카류 님을 죽일 것이다. 나 자신만의 이기적인 생각을 위해서 저 상 냥한 분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디트 경!" 내가 검을 뽑아드는 것을 보고 알이 빠르게 튀어나와 견제하는 자세를 취 했다. 과연 숙련된 용병인지라 상황 판단이 빨랐다. 아니, 그보다 본능적으 로 카류 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움직인 것이리라. "비켜라. 너까지 해치고 싶진 않다." "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알은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카류 님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알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는 나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검을 세워 자세를 취하고 빠르게 알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빠르게 검을 세워 나의 검을 막았지만 크게 자세가 흐트러졌다. 알은 손꼽히는 강 한 용병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나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카류~!! 도망쳐!! 도망치라고!" 알도 힘의 차이를 직시하고 카류 님을 향해 크게 외쳤다. 카류 님을 도주 시키기 위해 나를 막아서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카류 님 은 멍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알의 목소리에도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알은 그런 카류 님 을 보고 목이 터져라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알을 상대하며 나는 서둘러야 함을 느꼈다. 오래 끌면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다. 이미 누군가가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나는 일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카류! 카류리드!!" 내가 검에 더욱 속도를 붙이자 알은 그것을 막지 못하고 여기저기 얕은 상 처를 입어갔다. 그러면서도 도망가기보다는 더욱 처절하게 카류 님을 불렀 다. 자신의 안전도 생각하지 않고 카류 님을 도망치게 해주고 싶어하는 그 의 마음에 나는 가증스럽게도 야릇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알을 죽일 수 있다. 그는 강한 용병이었지만 왕궁의 기사 중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히는 나를 상대하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사실 처 음 몇 합만에 나는 충분히 그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의 존재가 카류 님을 죽이는데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세웠다. 내가 바라는 것을 생각해라. 내가 원하 는 것을 직시하라. 여기서 실패한다면 나는 아스트라한 님도 구하지 못하 고 카류 님도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카류!! 제발 도망...!!" 나는 검을 내질렀다. 깊게 무언가를 베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져왔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검의 날카로움에 알은 한 합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우측으로 힘껏 검을 그어내자 검붉은 알의 피가 깨끗한 흑청색 하늘에 더해졌다. "아...아아아...." 카류 님은 피를 보고 비로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검붉은 피를 본 아름 다운 흑청색 눈동자에 끊임없이 파문이 일었다. "카류 님." "아아...아아악!!! 알 아저씨!!!!" 카류 님은 그제서야 비명을 질렀다. "카류리드 님...!" 나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나 는 카류 님을 향해 검을 들었다. 절규하는 카류 님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분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비명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카...카류를... 절대... 안...돼...." 그러나 나는 카류 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검을 찍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알이 나의 발을 잡아 방해를 한 것이다. 숨이 꺼져 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카류 님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알 아저..." 카류 님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빠르게 검을 세워 그의 머리에 박았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죽인다. 죽여야 한다.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서, 나 자신을 위해서 죽인다! "아아아악~~!!" 몸을 일으키려던 카류 님은 알의 최후를 보고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비 명을 질렀다. 양손으로 머리를 싸잡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싫어엇!!!" 내가 다가가는 것을 보며 카류 님은 머리를 감싸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 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절규하는 카류 님을 보며 검을 들었다. 이미 알의 피로 흥건해진 검이 다음 재물의 피를 갈구하듯 음산하게 빛났다. 안타깝 게 떨고 있는 카류 님을 보며 심장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말 돌 이킬 수 없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커헉...!?" 그러나 나는 검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옆구리에서 오는 그 강렬한 압력에 나는 검을 놓치고 오른쪽으로 크게 밀려나 나뒹굴었다. 숨을 쉬기도 벅찰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서 그곳을 감싸쥐고 엎드린 채 로 숨을 몰아쉬었다. "카류야. 카류. 괜찮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카류야!! 제발 정신 차리렴!" 가까운 곳에서 어렴풋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아르디예프 님이라는 것을 나 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의 고함소리와 카류 님의 비명 소리를 듣고 이렇게 쫓아 온 것일 것이다. 멍청하게도 안도감이 온 몸을 잦아들었다. 이 렇게 되면 나는 아스트라한 님도 카류 님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아스트라 한 님께는 다시 한번 육체를 찢기는 수모를 카류 님에게는 믿은 자에게 배 신당하는 고통을 줄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 한 구석은 이 상황에 안도 감을 표하고 있었다. 나는 미쳐버린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꿈이 아냐... 그렇지?" 문득 누군가가 나의 앞에 서서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 았다. 밀려오는 고통을 참고 힘겹게 고개를 조금 들었을 때 그것이 눈물로 범벅이 된 카류 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날 죽이려 한 건 꿈이 아냐. 그렇지?" 카류 님은 계속 흘리는 눈물 때문에 약간 목이 메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죽여... 나를 죽이려고 온 거였어...?" 이를 딱딱 부딪히며 말하는 카류 님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자신을 배신 한 나에게 카류 님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배신 한 나를 증오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질책할 것 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그렇게 내가 싫었어?"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카류 님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며 나를 향해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었다. "나를 그렇게 증오했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증오했어? 그래?! 그렇게 나를 죽이고 싶었던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카류 님은 격양된 목소리로 크게 소리 질렀다. 나를 증오하고 질책하는 대 신 그렇게 소리 질렀다. 카류 님은 자신을 죽이러 온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절망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나의 손에 쥐어 주었다, "카...카류?! 무슨?!" 아르디예프 님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카류 님을 나를 보고 외 쳤다. "죽이고 싶었어?!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그랬어? 죽여!! 원하는 대로 죽여 버려!! 여기 있잖아! 어서 죽여버려!! 당장! 당장 죽여 버렷!!" 카류 님은 검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며 소리 질렀다.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 는 카류 님을 보며 나는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죽이려하기보 다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카류 님을 보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카류... 쿨럭...카류 님...!!" "뭐야!! 죽여!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웠다면 어서 죽여! 나를 죽이려 했잖아! 방해가 된다고 알 아저씨를 죽일만큼 나를 죽이려고 난리를 쳤잖아!! 찔러 버려!! 그걸로 나를 찔러버리란 말이야! 죽여버려! 죽여...!! 죽여...."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카류 님을 보고 나는 손에 쥔 검을 내던지고 아 무 생각 없이 그분을 껴안았다. 카류 님을 죽이지 못하면 아스트라한 님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그 분의 안타까 운 절규에 정신이 나가있었다. "카류...님...쿨럭...아아...카류 님!!" 내가 그 분을 껴안자 카류 님은 나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카류 님 은 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계속 헛손질만을 했다. 그 분은 계속해서, 계속해 서 눈물을 흘렸다. "놔...놓으라고... 나를 죽이려한 주제에.. 나를 죽이고 싶어했으면서... 싫어... 놔...놓으란 말이야.. 싫어... 싫단 말이야..." "카류 님...!!" "싫어... 싫어졌어...?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워졌어? 죽 이고 싶어진 거야...? 그렇게나 내가 증오스러워...?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 어? 그런 거야? 그렇게 싫은 거야?" "카류 님!! 카류 님!! 아닙니다... 쿨럭... 아니에요... 전하!!" 카류 님은 나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질문을 해왔다. 자신을 죽이려한 다는데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혐오에 빠져 버린 너무나 착한 나의 주군에게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계속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지 않다 고 외쳐도 그 마음은 카류 님에게 닿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 한 내가 아 무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 봤자 카류 님이 그것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 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그분을 더 힘껏 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역시...나는 죽어야 하는 거야..? 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나쁜 놈이야? 이 세상에서 없어져버려야 할 그런 존재인 거야? 디트 경이 당장에 없애버려 야 할 그런 놈이야?"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류 님!! 쿨럭쿨럭.. 제발...쿨럭... 제발... 그게 아닙니 다. 카류 님..."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카류 님이 그런 사람일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카류 님. 잃고 싶지 않은 카류 님. 그렇지 않다는 것 을, 사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 까. "카이세리온 님은...루블로프 님은... 다른 형제분들께서는.. 너무 변해버렸습 니다.. 콜록.. 너무 변해버리셨어요..." 나는 카류 님을 더욱 껴안고 말했다. 아직 또래의 아이들 보다 작은 그 몸 을 으스러져라 껴안고 나는 슬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분들께서... 저를 불러놓고 말하셨습니다. 콜록... 카류 님을 죽이라고. 그 렇지 않으면.. 쿨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를 갈기갈 기 찢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저는 도저히 그것을 보 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카류 님은 나의 품에 안긴 채 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류 님...크흑... 저는... 저는...!!" "형...들이...." 내게 안긴 카류 님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이야기에 넋이 나간 듯 나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카류야. 정신 차려라. 카류야!!" 아르디예프 님이 나의 품에서 카류 님을 데려가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 러나 카류 님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카류 님에게 나 의 행동은 그저 죽이려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카류 님은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 보다 배신했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큰 고통 을 느끼고 있었다. 상냥한 카류 님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같은 것보다는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훨씬 지독한 절망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다. 내가 한 짓은 생각 이상으로 카류 님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전하... 용서하십시오!! 아니, 저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 다. 카류 님! 죄송합니다. 이 죄는... 이 죄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카류 님께 소리쳤다. 이런 내가 살아있을 이유도 없다. 이런 이기적이고 미친 녀석에게 살 가치도 없다. "죽음?" 그러나 나의 말에 갑자기 카류 님은 고개를 똑바로 들어 나를 보며 한자 한자 분명하게 말했다. "죄를 죽음으로 갚겠다고?" "카...카류 님..." "하~! 죽음? 그딴 걸로 갚겠다고?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고!?" 카류 님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보고 소리쳤다. "죽음? 용서해 줄까보냐! 누가 그딴 시시한 죽음 따위로 너를 용서해 줄까 보냐!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결코 그런 시시한 죽음 같은 것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카류 님은 뒤로 돌아섰다. 나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뒤로 돌아서 어느새 모 인 사람들을 헤치고 천천히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이 메여오는 것 을 느꼈다.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나 자신 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자괴감만이 밀려왔다. "상처나 보여 봐라. 디트리온." 언제 나의 옆으로 아르디예프 님이 와서 마법서를 펴고 나를 보고 있는 것 을 보며 경련이 일어나는 손을 간신히 들어 그의 손길을 거절했다. "저...쿨럭.. 저는... 이제 살 가치도... 없습니다... 그..그냥 내...내버려두십시 오... 아르디예프 님... 쿨럭...." "카류가... 말하지 않았나. 용서하지 않겠다고. 죽음 같은 걸로는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리비리하게 있다가 죽어서 어 떻게 카류에게 죄를 갚을 셈이냐?" 아르디예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마법서를 보고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빠르게 걸어와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조롱조의 목소리로 말 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아르디예프.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려 하다니 완전히 미쳐버렸군." "...말조심해라. 류스밀리온." "무슨 말을 조심하라는 거지? 후, 저런 인간 쓰레기는 일찌감치 세상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최고의 선이니 미친 짓은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은 거 다." "류스밀리온!!" 아르디예프 님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류스밀리온은 내 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신뢰하던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그 서 약에 대해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아스트라한이라는 계집의 시체를 온존히 보존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으면서 네 놈은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나는 타는 듯한 옆구리의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를 바라보았 다. 나의 얼굴을 보자 류스밀리온은 점점 흥분해 격양되어 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지금 장난하나? 여기까지 와서 네 놈이 한 것이 대체 뭐냐?! 카류리드를 죽이지 못해 결국은 아스트라한의 시체는 완전히 넝마가 됐을 거고, 거기 다가 카류리드는 네 놈에게 배신당해 지금 완전히 맛이 간 상태지. 거기다 가 뭐? 실패했으면 끝까지 카류리드를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거나 불가 능하면 그냥 조용히 뒈질 일이지. 거기에 그 놈을 부여잡고 지 형제들 얘 기는 왜 불어? 그걸 불면 카류리드란 놈이 얼씨구나 하고 널 받아들여 줄 것 같아서? 그러면 저 카류리드는 네가 배신한 게 아니라는데 기분이 찢어 져라 하겠냐? 대체 네 놈은 뭐야!!!" 나는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류스밀리온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 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이 혼란스러웠 다. "네 놈은 카류리드를 죽였어야 했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카류리 드의 목을 따버렸어야 했다고! 이제 와서 모두가 보라는 양 여기서 그런 짓을 벌린 이유가 뭐야!?" "류스밀리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닥치지 못해?" 아르디예프 님은 류스밀리온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류스밀리온은 목소리 를 가라앉히고 나를 향해 경멸스럽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가 너 같은 놈이다. 중간에 끼여 이도 저도 아닌 채 망설이기만 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치 자신 이 비극의 주인공인양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놈. 죽음으로 모든 것을 갚겠다고? 후, 그래. 카류리드 놈이 옳지. 죽음 따위로 그것을 갚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너 같은 놈은 죽여줄 가치도 없다." 류스밀리온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류스밀리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디트리온." 아르디예프 님은 조용히 말하며 나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일 어서서 나를 보며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하지만 나는 위로해주지 않겠 다. 너의 소중한 것을 파괴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니까. 너는 어 느 한가지도 지키지 못하고 네 손으로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구나." 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아픈 곳이 없었지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 의 명예도 신뢰도 산산조각이 났다. 나의 아스트라한 님도 지키지 못했다. 나의 카류리드 님에게 절망만을 안겨 주었다. 내가 전부 그렇게 만들었다. "카류 님을..." 나의 말에 돌아서던 아르디예프 님이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카류 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가 아르디예프 님과 십여명의 병사들의 감시 하에 카류 님의 방에 도착 했을 때 카류 님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그 분은 생각 외로 고요 해 보였다. "왜 데려 온 거지?" "디트리온이..." "저를 받아 주십시오." 아르디예프 님의 말을 자르고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은 약간 입술 끝을 비틀면서 조용히 말했다. "받아 줘?" "저를 다시 카류 님의 호위기사 자리로 받아 주십시오." 나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러자 카류 님은 천천히 일어나서 뒷편의 창문 을 열면서 말했다. "내가 왜 너를 받아줘야 하지?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받아줘야 하지?" "저를 받아주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카류 님을 지키기 위해서 만 살겠습니다." "입에 바른 말은 그만둬." 짧은 말로 나의 말을 끊고 카류 님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렇게 뒤돌 아 서서 창틀에 비스듬하게 기댄 그 분은 의외로 살짝 웃음 짓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자신이 있나?" 그러나 곧 카류 님의 입에서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흘러나와 나 는 잠시 경직되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를 도구로 삼을 자신이 있나?" "...." "너는 무엇이 더 소중한가?" 그 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나를 지켜주고 나를 따르는 자가 가장 소중하다. 그들이 나에게 주 는 마음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카류 님은 눈을 천천히 뜨고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을 던졌 다. "너는 무엇이 더 소중하지?" "저의 카류리드 님. 저는 이제 카류 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아스트라한의 몸뚱이와 나의 생명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하지?" 카류 님은 나에게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저는...!!" "갈팡질팡하는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나만을 바라보는 놈이 아니면 나 는 아무 것도 줄 마음이 없다!" "저는 카류 님이 더 소중합니다! 저의 명예, 저의 가족,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까지 이 모든 것을 짓밟고서라도 카류 님을 지키겠습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은 나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우습지도 않다는 표 정으로 나를 보고 말했다. "그게 아니겠지. 너는 어머니의 몸이 더 소중해. 하지만 어차피 어머니는 이제 구할 수 없을 테지. 나를 죽이는데 실패했으니 그녀는 엉망으로 찢겨 고기 밥이나 될 운명이다. 그래, 그렇게 더 이상 그녀를 구할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이제는 나라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가슴에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떨리는 몸을 억제하며 나 는 그 분의 물음에 간신히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린 척하며 카류 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 지만 사실 이제 더 이상 아스트라한 님을 구할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이 렇게 행동한 것이다.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 카류 님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 놓고 이제 아스트라한 님의 일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이렇 게 다시 카류 님에게로 눈을 돌린 것이다.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었다. "참 편리한 사고를 하는군." 카류 님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가며 그렇게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카류야!!" 아르디예프 님이 옆에서 안타깝게 카류 님을 불렀다. 카류 님은 그런 아르 디예프 님을 돌아보며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아르 할아버지. 프리란트 님을 불러주세요. 다른 사람들도 말입니다. 조금 전의 소동으로 전부 잠이 깨어 있는 상태겠지요? 일경이 급한 시기이 니 이제는 저도 제 입장을 제대로 밝힐까 합니다.." 막 동이 트려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카류 님은 말했다. "아름다워요." 그 분은 다시 뒤로 돌아보며 전에 없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 했다. "이것이 내가 지배해야 할 땅이군요." Part. 31 - 새로운 시작 아침해가 미처 뜨기도 전에 회의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화 를 내는 통에 전에 반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만 그 회의장에는 그 때 와 마찬가지의 인원이 약간 긴장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 모이셨군요." "...카류 님. 이번에 하고자 하시는 말은..." "예상하시다시피 그거죠, 뭐. 그 때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 했으면 해서 이 렇게 여러분들을 불렀답니다. 사실 쓸데없이 시간이 너무 보낸 것 같이 정 말 죄송스럽네요." "...흠, 지금까지 좀 모자란 짓을 하고 다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나 보지?" 여전히 류스밀리온이 한 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우리들의 말에 끼어 들었다. "아, 잘 됐습니다. 류스밀리온 님. 전부터 류스밀리온 님께 하고픈 말이 있 었으니까요." "하고픈 말?" 나는 의아한 듯 질문하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단도진입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마법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하아? 얘가 완전히 돌아버렸나?" "아니면 왜 전부터 계속 저를 주시하고 계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제 주위를 뱅뱅 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미친 놈. 과대망상은 거기까지 해라. 나는 단지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체험해보고 싶어 그러는 것이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네 놈 은 내 도움을 받기엔 천년은 멀었어."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려야 저의 마법사가 되어 주시겠습니 까?" 류스밀리온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한동안 나를 째려보았다. 분위기가 점 점 더 살벌해 지는 것을 보고 프리란트 님이 약간 당황하여 우리들을 말리 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곧 류스밀리온이 대답했다. "좋다. 빡 돌더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모양이로구나. 사실 네게 흥미가 많았다. 저 아르디예프가 처형 직전의 널 꺼내오는 미친 짓을 할 정도로, 그리고 귀족이라면 모든 일에 색안경부터 끼고 보는 거칠디 거친 용병들까 지 너에게 빠져있는 것을 보고 나는 혹시 너라면 나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이상향?" "그래! 이상향. 만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을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약간 띵해졌다. 악의 대명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사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는 것을 듣고 있자니 현실과 잠시 괴리감이 왔던 것 이다. "재미있는 이야길 하시는군요. 그런 게 가능할 성 싶습니까?" "불가능하지." "......" 나는 잠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최대한 많은 인간들의 행복이다." "헤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나는 오랜만에 수능 공부를 다시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그래! 멋진 말이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흐음? 그걸 원하시는 분이 잘도 그렇게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혼자 다하 고 다니셨군요?" 나의 말에 류스밀리온의 눈초리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 때 아르디예프 님 이 벌떡 일어나서 마법서를 펼치고 류스밀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류스밀리온!! 네 놈이 지금 여기서 마법을 쓴다면 나는 영원히 네 놈을 나 의 적으로 삼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갑자기 온 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용병들과 기사 들이 완전히 긴장하여 검을 빼들고 류스밀리온을 견제했다. 그러나 여전히 류스밀리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말을 했다. "다 죽어 가는 할아범의 그런 협박 아무리 들어도 콧방귀도 안 나와. 저 빌어먹을 놈에게 내가 예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불만 있나?" "마법을 쓰려 하셨다고요? 마법서도 보지 않고?" "내가 괜히 대마법사 류스밀리온인줄 아느냐? 1서클 정돈 마법서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냥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콰앙! 작은 폭음이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류스밀리온이 이 순간이라고 말하 는 그 순간 나의 뺨에 뭔가 뜨거운 것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긴 일이었다. "류스밀리온!!!" 아르디예프 님은 크게 소리친 다음 완전히 마법서를 펴들고 캐스팅에 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류스밀리온도 마법서를 폈다. 용병들도 빠르게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모두 멈춰! 아르 할아버지도 그만 하세요!" "그렇지만...!!" "카류 님!!" 나의 목소리에 모두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보통 마법사들처럼 마법서를 펴서 마법을 쓴다는 신호를 하지 않고도 마구 공격 마법을 난사할 수 있다 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됐어요.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류스밀리온 님이 절 죽일 생각이 있으셨다면 전 벌써 옛날에 죽었을 테니까요. 뭐, 류스밀리온 님 특유의 거 친 의사소통법의 일종이라고 해두지요." "그 버터 바른 것 같은 혀는 아직도 굳지 않았구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류스밀리온 님. 그런데 말이 왜 이렇게 샜을까요? 그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저의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것을 이루는데 문제가 되는 것일까요?" 잠시 열을 받아서 얼굴이 붉어졌던 류스밀리온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의 말에 대답했다. "좋아. 인정하지. 네놈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제1왕자파 인가 뭔가 하는 놈들에게 이렇게 견제의 대상이 되었겠지. 하지만 한가지 가 글러먹었어! 바로 네 뒤에 있는 저 놈처럼 말이다!" 나는 문득 나의 뒤에 서있는 디트 경을 보며 의아해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 디트 경을 나의 호위기사로 복귀하게 한 것 이다. 다른 사람들도 디트 경이 그런 짓을 저지른 사정을 대충 알기에 그 렇게 큰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일단은 나의 고집을 끝까지 꺾으 려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 같았다. "그래, 물러 터졌어! 제 할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에 질질 끌 려 다니며 갈팡질팡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단 말이지? 주위의 작은 정에 이끌려 진정으로 이루 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너는 아무 것도 손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 런 생기다 만 놈 같은 건 애초부터 내 고려 대상에서 제외야!" 나를 막 손가락질하며 흥분하여 말하는 류스밀리온을 보고 사람들이 눈살 을 찌푸렸지만 감히 뭐라 하지는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슬 쩍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 상 갈팡질팡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웃기고 있군." "무엇이 웃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류스밀리온 님? 함께 즐기고 싶은데 말입니다." "하, 그래 원한다면 가르쳐 주마. 그렇다면 저 뒤의 저 놈은 뭐냐? 너를 죽 이려 한 놈을 살려둔 데다가 다시 호위기사 자리에까지 복귀시키지 않았 나! 이게 정에 질질 이끌려 다닌 게 아니면 뭐야?" 류스밀리온의 질책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해 나갔다. "이런. 류스밀리온 님은 자원 재활용이라는 걸 모르시는 것 같네요." "뭐?" "디트 경이 얼마나 강한지 아십니까? 이 나라 기사 중 몇 손가락 내에 들 정도로 강한 기사입니다. 그런 그를 시시하게 그냥 죽여버리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잠시 열 받는 것을 참고 곁에 두면 훨씬 좋은 일이 생길 것 같 지 않습니까? 버리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이지요." "변명도 가지가지 하는구만. 그러다가 당장이라도 저 놈이 다시 맛이 가서 아스트라한의 그 시체를 망가뜨리기 싫어 너의 뒤에서 등이라도 찌르면 어 쩔 생각이냐? 설마 그런 건 생각 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디트 경은 저보다 그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걸요? 안타깝게도 저는 디트 경의 소중한 사람 순위에서 2위더라고요. 언제 디트 경이 마음 이 돌아가서 저를 죽이려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저도 거기에 대해 생각 해 둔 것이 있죠. 프리란트 님." "에...예?"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들의 대화에 멍해있던 프리란트 님은 나의 부름에 갑 자기 놀랐는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수도에 소식을 흘리십시오. 디트 경이 완전히 제1왕자파를 배 신했다고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어머니의 몸을 완전히 분해 시켜 버리도록 빠른 조치를 취해주셨으면 좋겠군요. 한번 망가진 시체를 다시 붙이는 재주 같은 게 그들에게 있을 리가 없으니 그때가 되면 디트 경이 흔들리는 일도 없겠지요?" 나의 말에 회의실이 완전히 적막에 빠졌다. 류스밀리온은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이건 이건... 젠장, 이번 일로 저 놈이 완전히 미쳐 버렸나 보군. 자신이 어머니를 저런 식으로 말하다니..." "뭔가 듣기 거북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류스밀리온 님. 제가 저의 어머니 에 대해 뭐라고 말했다고 그러시는 거지요?" "분해시키겠다며? 거 참 좋은 소리했다. 이구... 괜찮은 애 하나 버렸구먼. 버렸어...쯧쯔..." "장난은 그만해주세요. 류스밀리온 님. 그것은 저의 어머니가 아니라 저의 어머니의 시체인 것을 왜 제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 요." "시체는 네 어미가 아니냐? 그래 네 놈은 너의 어미의 시체를 찢어버리면 서까지 그 일을 하겠단 말이냐?" "어떻게 시체 같은 것이 제 주위의 사람들 보다 중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류스밀리온 님은 작은 정에 이끌려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잊는 것에 대해 비판 하셨으면서 어찌 정을 줄 가치도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한 한낱 시체 따위에 그런 말을 하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요." 이제 류스밀리온과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나를 보는 시선을 달리하고 있었 다. 나는 그런 그들을 보고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없더 라도 시체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사람은 죽음으로서 새로운 것으로 탄생하게 되므로 그 시체라는 것은 속 내용물이 없는 단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보물단지처럼 모셔두고 공경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환생을 한다는 것을 안다면 제사 같 은 것은 정말 만고에 쓸데가 없는 일이다. "너는 미쳤느냐?" "미친 사람이 미쳤다고 하는 거 보셨습니까?" 나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빙긋 웃었다. "별로 변한 것은 없답니다. 저는 좀더 앞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제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뿐입니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저를 따르고 위해주는 사람들이 상 처 입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와 함께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 류스밀리온은 나를 보고 다시 평소의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배가 폭풍우로 인해서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가 암초에 부딪혀 버 렸지. 그래서 그 배는 점차 가라앉고 있는 상태였다. 모두들 우왕좌왕 했지 만 그곳에는 정의로운 인간들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구명 보트를 꺼내 여 자와 아이들을 태우려 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버리면 그들이 살수 있을 리라 생각했는지 잘도 그런 짓을 하더군. 항해법을 아는 선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구명보트를 타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더군."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이건 분명 그 유명한 침몰해 가는 배의 이 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그들이 있으면 저 멍청한 인간들은 결코 자신들이 구명보트에 타려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능력이 없는 자는 전부 죽였다. 구명보트에 타서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인간 은 전부 말이다. 그리고 태워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인간들만 태웠지. 나의 행동에 멍청한 놈들이 미친 듯이 발광을 하길래 마법으로 몇 방 위협을 했 더니 잠잠해지더군." "그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가? 그런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불가능 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살 수 있는 인간들만이라도 살아야 하는 거 아닌 가?" "흐음.. 최대한 많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은 소수의 자들은 짓밟아도 된다는 생각이신가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디서든 희생은 필수 불가결한 일이지." 모두들 살릴 수 없다. 나도 모두를 도울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 과 백성들 그리고 리아 영지의 사람들. 그러나 나는 이들 모두와 행복한 삶을 살수가 없었다. 나는 궁지에 몰렸고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그들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를 원한다면 형님들 편을 들어 저를 죽이는 편이 쉽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에 빠지게 될텐데요?" "지금의 나라는 쓰레기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랫동안 여행을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다. 부패 와 시름이 나라 곳곳에 퍼져있다. 이 나라는 근본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돼. 나는 이상향을 원한다. 크게 이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기를 원한다. 좀더 많 은 백성들이 잘 살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말이다. 전쟁으로 죽 어 가는 인간들은 다시 만들 이상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다. 최 대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 나는 그 정도는 감수 할 마음이 충분히 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류스밀리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더 이상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 은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저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축복을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당신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정말 기쁘겠군요. 류스 밀리온 님." 류스밀리온의 이상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면 얼마든지 그를 이용할 생각이 있다. 악명 높은 8서클의 마법사. 그는 우 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나의 행동은 네 놈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아마 후회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말하고 있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제대로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정식으로 회의장 테이블에 커다란 지도를 깔 아놓고 프리란트 님은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요?" "예. 카류 님. 아, 그러니까 일단 대부분의 영지에서 수도의 전령들이 각 영지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저희들을 치라는 공문을 대충 받았을 것입니 다. 그들은 중북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트로이 후작 가와 연합을 해서 이 곳 리아 영지로 내려오겠지요. 제대로 대대적인 군사가 내려오기 전에 저희들은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귀족 가문들을 최대한 우리 진영으로 끌어 들여야 합니다." "귀족 가라면..." "동부의 유력 가문인 하르트 가. 그리고 바스라윈 가를 설득해야 할 것입 니다." 프리란트 님의 설명 중 바스라윈 가라는 말에 나는 잠시 디트 경을 바라보 았다. "제가 부모님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분들께는 이미 선택의 여지 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기사의 서약까지 깨고 이쪽 편으로 돌아왔기에 이 미 저희 가문은 몰락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스트라한 님의 하르트 가 또한 사정이 밝혀 진 이상, 에렌시아 님의 이크쟌트 후작 가문과 아르멘 님의 펠렌즈 후작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므로 어떻게든 저희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드리크 경은 리아 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꽤나 큰 영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바스라윈 가와 하르트 가 사이에는 다른 작은 영지들을 뺀다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에스문드 영지가 있습니다. 동남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가문이지요." "에스문드...?" "대대로 카르틴 왕국과 싸워오며 많은 무장들을 배출해온 명망있는 가문입 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에스문드 가의 장남도 검술로 상당히 유명하지요." 문득 그 장난기 많고 때론 심술궂은 에르가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번 이나 그와 검을 겨뤄오면서 엉망이 될 때까지 얻어터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그와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 는데 말이다. "일단은 그들을 회유해 볼 생각입니다만 에스문드 가가 우리들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질 것입니다. 에스문드 가는 그렇게 많은 군사를 가지진 않았지만 강력한 정예의 군사력을 자랑하니까요." "첫 상대가 에스문드 가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반역을 결심하자마자 만나는 상대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현실에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 다시는 슈카와 알 아저씨처럼 의미 없이 죽는 사람이 생기도록 가만히 앉 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에스문드 가가 이 쪽 편을 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 겠지. 가문이 몰락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류스밀리온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만? 저에게 조언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네 행동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리고 도와줄 건더기나 있어야 도와주지." 아무리 8서클의 마법사라 한들 이 10배나 되는 전력 차에 어떻게 할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다가 문득 류스밀리온은 보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 는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뭐냐? 대체." 모두들 시선 집중을 하는 사이에서 류스밀리온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조금 전 류스밀리온 님께서 1서클 수식을 암산하셨던 것 말입니다!! 그것 을 다른 마법사들도 가능하다면 전력이 굉장히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냐?" 류스밀리온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며 아르디예프 님이 한 숨을 쉬고 나를 향해 말했다. "...카류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저 놈이 마법에 관한 한은 정말 천재적이라 서 그런 상식에 어긋나는 일도 가능한 거란다." "뭐야? 이 할아범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아르 할아버지는 류스밀리온이 끼어 들어 뭐라고 그러는 것을 완전히 무시 하며 나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도 나와 류스밀리온 이렇게 둘이 전부가 아니냐? 마법사들 이 아무리 너에 대한 감정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별 소득도 없이 너를 돕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법 연구를 위해 왕이 주는 지원을 잃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마법이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3서클의 수식까지 암산이 가능하니까요. 아르 할아 버지." "뭐야!?" "뭐!!" 나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절대 말도 안돼!!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류스밀리온이 약간 흥분해서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 었다. "사실입니다. 뭣하면 시험해보셔도 좋을 듯 싶군요." 나의 당당한 말에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은 의아해하면서도 약간 상 기된 표정을 지었다. 마법 수식에 대한 얘기에 저렇게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역시 그 둘은 같은 마법사였던 모양이다. "여기 있다. 풀어봐라." 아르 할아버지가 길다란 수식을 한가득 써서 나의 앞에 내밀었고 나는 눈 으로 그 수식을 슬쩍 훑어 본 다음 할아버지에게 살짝 웃고 말했다. "아르 할아버지.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2서클 수식이 잖아요. 길어도 푸는 방식은 간단한 걸요." "이 놈아! 나도 2서클은 암산 못해! 군소리 말고 풀어봐!" "...이거죠?" 류스밀리온이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가볍게 답을 적어서 아 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르 할아버지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가 내 민 답을 보더니 열심히 그 수식을 풀어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이럴 수가!!!" 아르 할아버지는 완전히 경악해서 나를 보았다. 특히 곁에 앉아 있던 류스 밀리온의 표정은 가히 인간이 볼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번개같이 다 려와 나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질렀다. "네 놈!! 인간이 아니지!?" 정말 예측 불허의 류스밀리온의 행동에 나는 다시 한번 식은땀을 흘렸다. "노...놓아주시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알아?! 그래, 사실 너 드래곤의 해츨링이라던가 그런 거 아니냐?!" 나는 잠시 류스밀리온이 개그를 하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류스밀리온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도저히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류스밀리온의 이 반응도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 유넨에게 이 수식들을 가르쳐 줄 때도 이렇게 놀 라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전 제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던 것까지 똑똑하게 기억 하고 있으니까 그런 기대는 버려주세요. 그리고 이것 좀 놓아주시겠어요?" "그런걸 인간이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있냐!! 역시 인간이 아니야!"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곧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류스밀리온에게 풀려날 수 있었다. "설마 10살 때 생명의 궁에 와서 4서클의 수식을 풀었다는 그 소문이 진짜 였느냐?"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류스밀리온은 완전히 쩡하고 얼어버렸다. "사실입니다." "맙소사!!"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요. 저는 원래부터 8서클 수식까지 간단히 풀 수 있 었습니다. 유넨이 그렇게 빠른 진전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제가 그 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지요." "파...파...팔 서클?" 류스밀리온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같은 어린 녀석이 8서클 수식을 풀 줄 안다는 사실에 그는 경악을 넘어 허탈감 까지 느끼는 듯했다. "네가 유넨을 가르쳤다고?" "약간요. 아르 할아버지. 존경하는 선배인지라 그 분이 끙끙거리고 있는 것 을 보기가 힘들어서 그런 짓을 했죠. 지금 굉장히 후회하고 있습니다만." "대체 그 가르쳤다는 것이 뭐지?!" 류스밀리온은 나를 향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나는 더 이 상 두면 그가 참지 못하고 마법을 난사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긴 수식과 짧게 정리된 토이렌의 아주 기초적인 수식을 몇 가지 가르쳐 주 었다. "대충 이런 것이죠. 이곳의 그 복잡한 수식을 풀 수 있을 정도라면 이 정 도는 충분히 이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체계가 완전히 달라서 의외로 다시 배우기가 힘들지도 모르지만..." "...어...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아르 할아버지의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대답해 봤자 아르 할아버지나 류스밀리온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직접 이런 수식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 그들이 얼마나 놀랬을 지 를 상상하니 정말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저 장난스러운 이유로 숨기고 있 었던 이 일이 이렇게 쓰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글쎄요. 자, 이것을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 일까요?" "이건... 이건 마법계의 혁명이다! 이건 그냥 수식을 암산하는 정도가 아니 야! 마법사라면 목숨을 걸고서 가지고 싶어할 정도로 엄청난 수식이다!" "후, 좋군요. 두 분의 반응을 본다면 충분히 마법사들을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나의 말에 프리란트 님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그렇다면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이 저희들의 편이 될 수 있단 말씀이 십니까? 아르디예프 님?" "그래. 최소 반 이상은 설득할 자신이 있다. 이 수식을 보여준다면 말이야. 왕의 지원 같은 것보다 이 수식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 것도 없지. 특히 고위 마법사로 갈수록 마법 수식에 대한 갈 망이 크지. 수식 때문에 진전이 적은 마법사들이 많으니까."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프리란트 님부터 시작해서 이 회의실 안의 사람들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갑자기 생각도 못했던 마법사들이 자신의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완전히 흥분한 모양이었다. "생명의 궁의 고위 마법사가 많이 빠져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제1왕자파의 전력이 줄어드는 것이 되니 일석이조로군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르 할아 버지. 류스밀리온 님. 힘드시겠지만 수도까지 워프를 해주셨으면 감사하겠 습니다. 한시가 급한 시기니까요. 성안으로의 잠입도 워프를 쓴다면 충분히 몰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수도까지 또 다시 그 짓을 시킬 참이냐? 아르디예프에게?" "류스밀리온 님. 저는 류스밀리온 님께도 부탁드렸습니다만? 류스밀리온 님은 저의 수식을 알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지요?" 류스밀리온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 다. "후, 굉장하구나. 네가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만약 마나를 다룰 줄 알았다 면 정말 최연소 8서클 마법사가 탄생하는 거였는데 말이다." 프리란트 님은 황급히 시종들을 시켜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의 여행 을 위한 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기쁨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 워프를 하신다면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돌 아오실 때도 최대한 많은 고위 마법사 몇 분과 함께 오셨으면 합니다. 이 제 시간이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에스문드 가와의 결전을 위 해서는 마법사들이 꼭 필요합니다. 두 분이 어떻게든 해주실 것을 기대하 겠습니다." 나는 몇 가지 기초적인 수식을 더 정리해서 그 분들에게 넘겨주었다. "절대 유넨에게는 들켜서는 안됩니다. 그는 트로이 후작의 수하니까요." "...그 유넨이라는 놈 분명 마나 유동력이 뛰어난 놈이라고 했지? 빌어먹을, 성안으로 잠입할 때는 최대한 먼 곳에서 워프를 시도해야겠군. 아니면 마 나를 느끼고 금세 우리들을 체포하러 달려올 테니 말이다." "괜찮겠습니까? 류스밀리온 님?" "걱정 말거라. 비록 성질이 더럽기는 하나 류스밀리온 놈은 유넨보다 나으 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은 녀석이니까." 아르 할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슥 쓰다듬은 다음 마법서를 펼쳤다. 그러자 류스밀리온이 아르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퍽 쳤다. "헉! 무슨 짓이냐! 이 무례한 놈아!!" "처음엔 내가 먼저 한다. 이 노망난 늙은이야. 너는 준비운동이나 하고 있 어." 류스밀리온은 그렇게 말하고 마법서를 폈다. 아르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것 을 저런 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정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조심하시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그저 가능한 만큼만 해주시면 됩니 다. 아르 할아버지." "...그래.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해주어야겠구나.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안았다. "이 미친 할아범! 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워프할 때 함께 가도록 날 붙잡 고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쯧쯔, 저놈의 말버릇은 언제쯤 고쳐질런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건만." 아르 할아버지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왠지 할아버 지의 말투가 마치 류스밀리온을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져서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녀오마. 카류야." "아, 네. 류스밀리온 님도 크게 무리하지 마세요. 돌아가시더라도 지금 돌 아가시는 건 정말 곤란합니다." "빌어먹을. 알았다." 류스밀리온은 마법서를 보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회의실의 많은 사 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면 일단 하르트 가와 바스라윈 가에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 리고 에스문드 가에는..." "에르가 형의 성질을 감당하려면 담이 큰 전령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입니 다. 프리란트 님." 나는 웃으며 프리란트 님을 향해 말했다. 에르가 형과 싸운다 하더라도 나 는 후회하지 않겠다.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오로지 앞을 바라보고 걸어 갈 것이다. 최소한 머뭇거리고 있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개죽음 당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Part. 32 - 에스문드 백작 문득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종이조각이 눈에 띠여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그 종이 조각에는 반역자가 된 제6왕자 카류리드 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과 그 제6왕자의 편에 선 리아 후작 가와 레 이포드 남작 가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한동안 바라보 다가 잠시 한 숨을 쉰 다음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하앗~!" 연무장에는 큰 기합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그 소리 를 따라서 연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쉬익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상쾌하게 울려 퍼졌다. 매일같이 보는 모습임 에도 그 빠르고 무게 있는 검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나도 언제나 감탄하고 만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움직임을 오래 감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젠장할~!" "에르가 님."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땅에 박고는 숨을 몰아쉬는 에르가 님에게 다 가갔다. "헉...헉... 빌어먹을..." "에르가 님. 진정하십시오. 우선 자리에 앉으셔서 조금 몸을 쉬게 하세요." "시끄러워! 이트!!" 에르가 님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땅에서 검을 뽑아 자신의 허리에 차고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친 동작으로 걸터앉은 그 분은 한 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런 에르가 님 곁 으로 어린 시녀가 머뭇거리며 준비된 수건을 들고 다가와 에르가 님께 말 을 걸었다. "저... 에르가 님. 여기 수건이..." "놔두고 가!" 에르가 님의 짜증스럽다는 호통소리에 어린 시녀는 깜짝 놀라서 머뭇거리 다가 그만 수건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정도 일에 저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아마 이 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녀인 모양이었다. "아...!" 시녀가 땅에 떨어져 더럽혀진 수건에 크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 자 에르가 님이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말없이 직접 허리를 굽혀 수건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수건을 대충 툭툭 털어서 그것으로 땀이 맺힌 이마 를 슥 쓸어 넘겼다. "앗?! 에...에르가 님!" "됐으니까 가봐. 문제 있어?" "에? 아...아뇨. 그...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에르가 님."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시녀를 보고 나는 피식 웃음 지으며 에르가 님을 향해 말했다. "또 다시 귀여운 여자아이를 상사병에 걸리게 만드셨군요." "뭐?"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에르가 님에게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좀 솔직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뚝 뚝한 면이 오히려 매력이라고 모두들 그러더군요." "켁! 대체 뭐라는 거야! 너!" "에르가 님이 요즘 굉장히 인기가 좋다고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우...웃기지 마. 이트... 네 놈 요즘 점점 더 재수 없어지고 있다는 거 알 아?" 에르가 님은 괜히 쑥스러운 듯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매일 한번 이상은 꼭 재수 없는 놈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를 처음 보 셨을 때도 재수 없는 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아직도 없어질 재수 가 남았습니까?" "말꼬리 잡지 마. 젠장. 골방에서 매일같이 책만 읽더니 성격이 점점 더 꼬 이는군. 앞으로 책 읽는 것은 그만두고 그 거지같은 성격 좀 어떻게 해보 는 게 어때!" "평민의 신분에 재수 없기까지 한 저를 이렇게 부관으로 받아주신 마음 넓 으신 에르가 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책을 읽고 에 르가 님께 조언을 드리는 일 뿐인데,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을 막으신다면 이제 저는 단순히 재수 없는 차원을 넘어 무능력하기까지 한 인간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제발 처음과 같은 넓은 마음으로 선처를 베풀어주시지 요." 에르가 님은 나의 말에 약간 멍하니 있다가 곧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는 투 덜거리기 시작했다. "잘도 그렇게 긴 대사를 나불거리는구나.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재수 없 는 말을 막힘 없이 좔좔 나불댈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 마치...." 그러나 그 투덜거림은 곧 신경질로 변해갔다. 쾅! "그 놈처럼!"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주먹으로 거의 부숴 버릴 것 같이 탁지를 세차게 치고는 숨을 약간 몰아쉬었다. "젠장...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계속 욕설을 퍼붓는 주군을 바라보며 나는 괜히 입안이 씁쓸해져 옴을 느꼈다. 어떻게든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보려 했던 것이 다시 그 분을 화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에르가 님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서 다시 연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리고 또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새벽부터 계속된 연습 으로 상당히 지쳐 계신데도 그 분은 거의 쉬려고 하지 않았다. 제 6왕자 카류리드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 에르가 님은 계속 저렇게 하루 종일 검만 휘두르며 분풀이를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을 이용해 신경질을 내며 욕설을 퍼붓고, 그리고 또 다시 검술 연습을 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 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검술과 욕설이 그 분의 일상이긴 했지만 지금은 도 가 너무 지나쳐 에르가 님의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합!" 에르가 님의 검이 크게 호선을 그렸다. 에르가 님은 언제나 검술 연습을 함에 있어서 엄격하지만 항상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 그 분의 표정엔 근심과 고통만이 가득했다. 에르가 님은 전에 없이 너무나 초조해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 분 을 보고 나는 그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에르가 님을 이렇게까지 만든 그 카류리드라는 왕자가 어떤 자인지 정말 궁금해진 것이 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시는 그 카류리드 왕자를 볼일은 없을 것이다. 때 문에 저렇게 에르가 님이 괴로워하고 계신 것이니까.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시종이 연무장으로 뛰어들 어왔다. "휴우... 헉... 뭐야?" 에르가 님이 땀을 닦으며 그 시종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서 묻자 시종이 약 간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 님께서 에르가 님을 급히 서재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보아하니 수도에서 전령이 새로운 공문을 가지고 온 듯했습니다." "수도에서?" 에르가 님은 수도라는 말에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에르가 님. 기분이 안 좋으신 것은 알지만 일단은 백작 님께 가보시는 것 이..." "시끄러, 이트.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이봐. 지금 당장 간다고 아버님 께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시종을 뒷모습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당장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에르가 님..." "시끄럽다고 했지! 곁에서 계집애처럼 자꾸 나불거리지 좀 마! 알겠어?" 에르가 님은 크게 신경질을 내고 탁자에 놓인 수건으로 땀이 흥건한 목을 닦으며 서재로 향했다. 수도에서 온 전령이라는 말에 에르가 님은 보통 불 안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시기에 온 공문이라면 분명히 카류리드 왕자의 사형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리아 영지에 공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 를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 뻔했다. 에르가 님도 그것을 충분히 알 기에 저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에르가 님의 뒤를 따라 백작 님의 서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도 에 르가 님은 몇 번이나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에르가 님을 모신지 그렇 게 오래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에르가 님은 처음이었다. 서재 앞에서 그 분은 거의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다가 방문을 열었다. "아, 에르가. 왔구나!" 에스문드 백작 님이 두루마리 종이를 보고 있다가 에르가 님을 보고는 그 것을 책상에 내려놓고 앞으로 걸어나와 그 분을 맞이했다. 그러나 백작 님 의 표정은 가히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두 분이 서재 중앙에 마련된 의 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에르가 님의 곁으로 가서 섰다. 에르가 님의 부 관의 자격으로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분의 곁에서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 "휴우, 그래. 표정을 보니 이미 수도에서 공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 이구나." "......" 에르가 님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에서 백작 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백작 님은 그런 에르가 님을 보고 크게 한 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휴우... 정말 이런 모습의 너는 처음이구나. 정말...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에르가 님은 고개를 들고 백작 님을 바라보았다. 백작 님은 뭔가 굳게 결 심한 듯한 표정의 에르가 님을 보면서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카류리드 전하께서... 탈출하셨다고 한다." "......" 에르가 님은 아무 말도 않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백작 님을 바라보았다. 정말 의외의 발언에 나마저 띵해질 정도였으니 에르가 님의 저런 에르가 님의 반응도 당연했다. 한참동안의 침묵 끝에 에르가 님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다시 백작 님을 향해 물었다. "...지금... 카류가..." "...탈출하셨다고 한다. 처형 직전에 아르디예프 님의 도움으로 탈출하셨다 는구나." "탈출?!"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게 소리질렀다. "하...하하.. 맙소사. 탈출했다고? 성에서?!" 그 분은 앞에 놓인 탁자를 짚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서려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 할 가치도 없었다. 벌써부터 에르가 님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에르가." "하하... 정말 명줄이 긴 놈 아닙니까! 성에서 처형 직전에 도망친 놈은 아 르윈 왕국 역사 이래로 그 놈이 처음일 겁니다!"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을 보고 기쁘게 말했다. 그런 에르가 님을 보며 백작 님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에르가 그렇게 기뻐만 할 때가 아니다. 카류리드 전하는 이제 전국 적으로 반역자로 수배가 된 것이다. 방금 온 이 공문에도 반역자가 된 카 류리드 님과 그 일당들이 모여 있는 리아 영지를 치라는 내용의 왕명이 담 긴 공문이다. 그 분이 살아나면 무엇 하느냐. 네가 네 손으로 그 분을 쳐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가 왜 제 손으로 그 녀석을 쳐야 하지요?"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의 말에 잠시 웃음을 멈추고 백작 님을 똑바로 바라보 았다. "에르가. 설마 우리 에스문드 가가 카류리드 전하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냐?" "그렇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말하는 에르가 님의 말에 백작 님과 나는 잠시 어안이 벙 벙해졌다. "이미 전국적으로 왕명이 하달되지 않았느냐! 제아무리 리아 후작이 비옥 하고 넓은 영지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다 해도 아르윈 왕국의 모든 귀 족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같은 반역자로 몰려 어쩔 수 없이 카류 리드 전하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리아 후작과 레이포드 경 이외의 어떤 지원세력도 없는 그 분이 이 내전에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 "우리 에스문드 가가 그 지원세력이 되어주면 되겠군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에르가 님을 보고 나는 참지 못하고 그 대화에 끼어 들었다. "에르가 님! 지금 에르가 님은 너무 정에 치우쳐 계십니다. 저희들이 직접 그분을 치는 일은 없더라도 최소한 그 분을 돕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반역은 너무 일찍 일이 들통나는 바람에 속으로 은근히 그 분의 편을 들려하던 자들도 전부 고개를 돌렸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세력도 갖추지 못하고 이미 반역자로 낙인 찍혀 명분도 약한 카류리드 님 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을 부담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정 에 치우쳐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함으로서 수백 년간 명성을 유지해 왔던 에스문드 가문을 망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말을 듣던 에르가 님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카류의 편에 설 것이다. 뒤늦게 그 녀석이 처형당한다는 소리를 듣 고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꼭 그 녀석의 도움이 되어 주겠어." "에르가 님!" "에르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저번 왕궁에서 있었던 파티에서 아스트 라한 님께 카류리드 전하의 반역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분의 편을 들기로 은근히 말을 전하기도 했었지. 너에게 동굴이 무너졌을 때의 있었던 일을 듣고, 그리고 이렇게 변한 너의 모습을 보고 그 원인이 된 카 류리드 님이 왕위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 게 되었지 않느냐! 카류리드 전하에게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이 가문의 존망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더냐!" "카류를 돕는 것이 꼭 가문의 몰락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 히려 카류가 여기서 반역에 성공한다면 얼마 없는 지원 세력 중 하나였던 저희 가문이 크게 부흥할 것입니다." "에르가 님!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카류리드 님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요. 아니, 확실하게 말해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한다 면 에스문드 가문은 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엔 에르가 님도 반역자로 처형당할 것입니다. 저는 절대 그것만은 보고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카류 리드 전하의 편을 드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에르가 님의 그 모습에 너무 답답해서 또 다시 끼어 들고 말았다. 이 런 식으로 자꾸 두 분의 말하는 중에 끼어 드는 것은 큰 실례였지만 지금 만은 백작 님도 크게 나를 책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정말 마음이 급했다. 에르가 님이 카류리드 전하의 일로 크게 상심하 고 계시고 그만큼 그분에 대한 마음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 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그쪽 편을 들겠다고 하다가는 개죽음 당하기 딱 십 상이었다. 나의 주군이 그렇게 되는 것을 손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르가 님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 백작 님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수도에서 전령이 가져온 공문을 들 어올려 그것을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두 말 할거 없어. 벌써 정했다. 나는 카류리드를 왕으로 만들 것이다." "에르가 님!" 나는 정말 의외의 말에 황당해져서 할말을 잃고 에르가 님을 바라보았다. 에르가 님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에르가 님 이 비록 발끈하기를 잘하고 다혈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든 옳은 의견을 들었을 때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것을 받아드릴 줄 아는 분이었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능력을 인정해서 자신의 가까이 두고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던 분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든 상황이 분명하건 만, 이렇게까지 말씀드리고 있건만 에르가 님은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 님의 말을 듣고 할말을 잃은 나를 보고 백작 님이 일어나서 크게 소리쳤다. "에르가! 더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마음은 이해한다면 절대 카류리드 전하 의 세력에 가담하는 일만은 절대로 안돼!" "저도 절대로 승복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에르가 님은 똑바로 백작 님을 직시하며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드디어 백작 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밖의 병사들을 불렀다. 과연 서재 로 들어올 때 이상하게 서재를 지키던 병사가 많다고 했더니 이럴 때를 대 비해서 그렇게 병사들을 준비해둔 모양이다. "에르가를 잡아라. 자신의 방에 가둬!!" 백작 님은 병사들에게 에르가 님을 감금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백작 님의 호통 소리에도 주춤거리기만 할뿐 에르가 님에게 다가가지 않았 다. "뭐 하는 거냐? 어서!!!" "아버님을 붙잡아라." 에르가 님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병사들은 백작 님 과 에르가 님을 사이에 두고 누구를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원 래대로라면 백작 님의 말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과 실질적으로 함께 하며 훈련을 시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에르가 님이었기 때문인 것 같 았다. 아직 에르가 님이 가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스문드 가 내의 하인 과 병사들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지배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것이다. "무...무슨! 에스문드 백작 가의 가주는 바로 나다! 네 놈들은 당장 에르가 를 잡지 않고 무엇을 하는 거냐?" "너희들!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죽고 싶어?" 에르가 님의 큰소리에 병사들은 찔끔하더니 검을 꺼내 백작 님을 포위하는 형식으로 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에르가 님은 예기치 않은 일로 당황하고 있는 백작 님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까지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었다. 에르가 님이 검을 뽑아들어 백작 님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저희 에스문드 가는 제6왕자 카류리드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 에스문드 백작 가의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십시오. 아버 님." "에...에...에르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백작 님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흔들림 없이 말했 다. "용서하십시오. 아버님. 그러나 저는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일 생에 한번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기로에 선다고 하지요. 지금이 그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지금 카류리드 전하의 일에 정신을 빼앗겨 제대 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아니, 어쨌든 제발 그 검은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다급히 에르가 님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에르가 님이 자신의 아버 지에게까지 검을 들이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훗날 에르가 님에게도 괴로운 일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다. "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카류리드 왕자에게 가치가 있느냐?" 그러나 백작 님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에르가 님에게 물었다. "당연합니다. 아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의 저는 카류리드가 있 음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녀석을 부정한다면 저는 저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트. 지금의 네가 있는 것도 모두 카류리드가 있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 녀석을 부정하면 너 또한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르가 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멸을 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에르가 님은 죽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른다는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 신념을 지킨 행동의 결말이 비참한 죽음이 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에르가 님이 그렇게 하도록 어떻게 내 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백작 님과 제가 왜 이렇게까지 에르가 님을 말리 는지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에르가 님의 대답에 나는 흥분해서 끼어 들었다. 이대로면 정말 에르가 님 이 카류리드 전하의 편에 가담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살행 위를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정한 나의 군주가 그렇게 자신의 발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카류리드의 기적을 믿는다." 에르가 님은 나를 보고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동굴 속에서도 그랬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번이 나 죽음의 난관에 부딪혔지. 이런 곳에서 모두 비참하게 죽으리라 생각했 다. 그래, 나는 솔직히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좌절했다. 하지만 결국엔 빠 져 나왔다.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카류리드가 그렇게 만들었다! 카류리 드가 그 기적을 이루어냈다!"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미 에르가 님의 마음 은 카류리드 전하를 따르기로 굳어버린 것이다. 나는 새삼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에르가 님을 따르게 만든 그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전율이 일 었던 것이다. "너는 카류리드 전하가 이길 것이라고 믿는 거냐? 그래서 그 분을 따르겠 다고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저는 카류를 믿습니다. 카류의 기적을 이루어내는 그 힘을, 능력을 그리고... 그 마음을.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적을 이루어 내는 데 저도 힘이 되어줄 것입니 다. 저는 카류를 따를 것입니다." 백작 님은 깊게 한 숨을 쉬었다. 에르가 님은 검을 겨눈 자세로 아무 말도 않고 똑바로 백작 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기도 하 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이런 너의 발견을 축하해주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옳은 것이겠지. 그래, 나는 네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으마. 네가 카류리드 전하를 믿는 것처럼 나는 너를 믿는다. 에르가." "...아버님..." "후우.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단다. 에르가. 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 을 보고 싶지 않아 너를 막은 것이지만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렇게 확 실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이 아버지를 위협하면서까지 그렇게 행동하 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막을 수가 없구나." 백작 님은 주위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흐뭇하게 웃 었다. "후, 그리고 솔직히 네가 이렇게까지 에스문드 가문을 통솔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정도라면 내가 굳이 너에게 에스문드 가의 가주 자리를 넘겨주 겠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문의 가주라 할 수 있겠구나. 좋다! 너의 이런 모습을 보니 흔쾌히 일선에서 빠질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제부터 네가 에 스문드 백작이다. 전 가주가 살아있는데도 새로운 가주가 나오는 정말 희 귀한 일이 생기겠구나. 후후... 물론 중앙에서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중 앙하고는 관계없겠지?" "죄송합니다. 아버님. 결코 아버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너의 성장에 기뻐한다. 그리고 너의 성장에 슬퍼지는구나." 에르가 님은 겨누었던 검을 다시 천천히 자신의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 고 백작 님께 다가가 그 분을 말없이 부드럽게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 에 어색해하면서 또 놀라워하는 백작 님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살짝 웃었 다. "다 크긴 했지만 이렇게 한번씩 서로를 안아주는 것, 의외로 그렇게 나쁘 지 않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아버님." Part. 33 - 거짓과 진실 나는 저택 뒤편의 작은 구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있었던 그 불행한 사건으로 인해 죽은 알이라는 용병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 근처에 평민의 무덤을 만들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끝까지 카류 님을 지키려다가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리아 후작이 선처를 베푼 것이다. "계셨군요. 카류 님." "아,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드리크 경." 카류 님이 다른 용병들 사이에서 빠져 나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약간 떨어진 곳에서 카류 님을 주시하고 있는 디트리온을 보고 나는 약간 씁쓸 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희생을 해주었기에 카류 님이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셨군요. 하지만 시체밖에 없는 무덤에다 대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 지 없는데. 저도 저택 안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알 아저씨 무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온 것뿐이거든요." "왜... 왜 그렇게 변하신 겁니까. 조금쯤은 알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려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알의 무덤 앞에 있던 한 용병이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는 카류 님께 흥분해 서 소리 질렀다. 그러자 카류 님은 용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 고 말했다. "저 무덤은 알 아저씨의 시체가 있는 장소일 뿐. 저런 것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까." 디트리온의 배신이 있은 후, 카류 님은 한번씩 저렇게 잔혹한 말을 내뱉는 다. 마지막까지 자신을 도와준 알의 시체를 모욕하는 발언을 할만큼, 디트 리온이 아스트라한 님 때문에 저질렀던 일의 충격이 그토록 상냥했던 카류 님을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다. 디트리온은 그런 카류 님의 모습을 바라보 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카류 님의 머리카락을 흩날려주었다. 카류 님은 그 바람 의 촉감을 즐기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 아저씨의 말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쉽게 죽지는 않을 거예 요. 그것이 알 아저씨가 마지막까지 하려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카류 님은 용병들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예전과 다르게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조금 전 카류 님의 말에 발끈해 소리를 질렀던 용병은 그런 그 분의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무덤 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사실 그 용병도 카류 님의 사정을 전부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고 카류 님의 고통이 이 중 그 누구보다도 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도 너무 답답해서 한 번 해본 말이리라. "아, 이렇게 드리크 경까지 오셨는데 저에게 단검술에 대해 좀 더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대로 배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까요." "...지금은 디트리온이 있지 않습니까. 카류 님께서 직접 모든 것을 용서하 시고 그를 다시 등용하신 것은 그만큼 그의 실력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 까. 그런데 애써 단검술을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카류 님은 자신의 허리에 찬 단검들을 갈무리하며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했다고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드리크 경. 그리고 언 제나 예기치 않은 일은 있기 마련이죠. 저는 쉽게 죽어줄 마음이 없는데 어찌 디트 경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다가 그가 죽 으면 그 후에 전 어쩌라고요? 누가 절 도와주러 올 시간 정도는 어떻게든 벌어야 할 것 아닙니까." "......"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카류 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뒤에 디트리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분은 말을 함에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디트리온 역시 그 말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카류 님과 디트리온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 실은 그렇게나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의 믿음을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로 너무나 잔인했다. "알겠습니다. 카류 님." "부탁 드립니다. 드리크 경." 사실 근 3년 동안 그 분의 단검술을 봐주면서 카류 님은 상당히 높은 경지 에 이르러 있었다. 카류 님은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웬만한 자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카류 님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들은 모두 믿었던 자들뿐이었기에 카류 님은 한번도 그에 대항해 검을 쓸 기회 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헉헉... 레이포드 남작 님!!" 그렇게 한동안 카류 님의 검술을 봐주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땀을 한껏 흘리면서 뛰어오는 그 시종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류리드!" 카류 님은 던지려던 단검을 내리고 자신을 부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 곧 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르가 형?!" 나 역시 그 의외의 인물을 보고 놀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에르가는 그 것에 아랑곳 않고 저 밑에서부터 단숨에 뛰어 올라와 카류 님의 목에 확 태클을 걸었다. "헉!" "이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진 놈! 그래,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죽다 살아난거냐!?" 에르가 님은 한 팔로 카류 님의 목을 조르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뭐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헉...윽...!! 에..에르가 형...!! 윽... 놔줘...!!" "싫다! 이 자식아! 얼마나 졸라야 네 놈이 죽을지 시험해 봐야겠어!" "헉헉... 에르가 님. 헉.... 정말 큰일 내시기 전에 제발 그만두십시오." 아래쪽에서 허겁지겁 올라온 하늘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말 했다. 그 말을 들은 용병들이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가서 두 사람을 떼어놓 았다. "콜록... 으윽... 혀...형? 에르가 형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카류 님은 목을 감싸고 콜록거리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아닌게 아니라 모 두가 그것이 궁금한지 에르가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에르가가 전령에게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도착하는데는 아무리 빨라도 사, 오일은 족히 걸릴 터인데 전령을 보낸 바로 다음날 이렇게 그가 이 곳에 서있는 것이다. "에르가가 아니다. 에스문드 백작이다. 알겠냐?" "...에?" 카류 님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자 밑에서 에르가를 따라 올라온 하늘 색 머리의 남자가 숨을 고른 다음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말 했다. "선대 에스문드 백작 님이 에르가 님께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셨습니다. 선 대 가주 님은 지금 에스문드 영지의 저택에 계십니다." "...선대 가주가 사망하기 전에 에르가 형이 가주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 는 거야?" 카류 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에르가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실상 그런 일 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이 일이 사실이라 해도 에스문드 가로서는 여러 가지로 불명예스러운 일이었기에 속으로는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네가 알 바 없잖아! 그건 우리 집안 사정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에스문드 백작이 되었다는 사실이고 내가 이곳에 제 발로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안 그러냐?" "전령은... 바로 어제 보냈는데...." "그 놈? 리아 영지로 오는 길에 내가 붙잡아서 도로 데리고 왔다. 됐냐?" 카류 님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똑바로 에르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 르가가 얼굴을 확 구기면서 소리쳤다. "뭘 뚫어지게 쳐다봐! 이 자식아! 네 놈이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정말 기분 이 더려워져! 알았어!? 그 눈깔아!" "에...에르가 님..!!" 옆에 있던 하늘 색 머리의 남자가 크게 당황해서 그를 말렸다. 아무리 친 한 친구 사이라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왕자에게 할 말로는 너무 무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류 님은 그런 에르가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에르가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하네. 에르가 형." "....네 놈이야 말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이 발육 부진아야. 하긴, 네 놈이 그만큼 큰 것도 기적이야. 기적." 에르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키 차이를 가르쳐 주기라도 하고 싶은 듯 한 껏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러나 카류 님은 그에 대답하기보다는 양손을 에르가의 허리에 휘감아 꽉 껴안았다. "허...헉!! 이게 또 시작이네!! 이거 못 놔?!" 에르가가 당황해서 카류 님을 떼어놓으려 하자 카류 님이 금세 살짝 그에 게서 떨어졌다. 에르가는 금방 떨어진 카류 님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듯 양손을 올린 상태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네...네가 웬 일이냐. 이렇게 금방 포기를 다하고..."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 에르가 형. 아니, 에스문드 백작 님. 그렇 지만 나, 에르가 형이라고 계속 불러도 되지?" 카류 님은 에르가의 손길에서 피하기 위해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 다음 방 긋 웃으면서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르가는 쑥스러운 듯 약간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에...에르가 형님이라고 불러. 건방진 자식." 카류 님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한동안 에르가와 여러 가지 이 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에르가가 카류 님의 친한 친구라고는 하나 이렇 게 세력이 부족한 상태의 카류 님 진영으로 에스문드 가가 들어온다는 것 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또다시 카류 님이 슬픈 일을 겪어 야 하는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에스문드 가는 카류 님을 지원하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이로서 카류 님은 첫 번째 싸움을 자신의 친한 친구와 하게되는 불행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끙, 이제 그만 내려가자. 일단 에르가 형과는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어.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지만 사실 나도 곧 올 마법사 들에게 가르쳐 줄 수식을 정리해야하기 때문에 바쁘거든." 카류 님은 엉덩이를 탁탁 털고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에르가가 일 어났지만 뒤 따라 내려가지 않고 대신 카류 님에게 요청했다. "디트리온 경이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 너 먼저 용병들이랑 이트하고 내려가라. 카류." "에...에르가 님?" "됐어. 이트. 토 달지 말고 저 녀석이랑 먼저 내려가. 알았어?" 에르가의 부관으로 보이는 하늘색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그 말에 불복하려 하자 다시 한번 그에게 명령했다. 그 남자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카류 님 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디트 경이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러나 카류 님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에르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 다. 에르가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있다. 불만 있어?" "무슨 얘긴지 나도 들어봐도 괜찮을까?" "웃기지 마라. 내가 왜 널 먼저 내려가라고 했는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 가냐? 당연히 너 듣지 말라고 하는 말 아니냐고!" 카류 님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에르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가 피식 웃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에르가를 향해 말했다. "너무 디트 경을 괴롭히지마. 에르가 형. 디트 경이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라 도 하면 곤란하잖아? 알 아저씨처럼 내 호위를 해줄 만큼 실력이 그럴듯한 사람이 자꾸 죽어버리면 정말 곤란해." 자신의 뒤에 있는 알의 무덤은 아랑곳 않고 카류 님은 냉정한 말을 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저택을 향해 내려갔다. 잠시 에르가가 옴으로서 훈 훈해졌던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버렸다. 에르가는 카류 님의 말을 듣고는 잔뜩 인상을 썼고, 잠시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다른 용병들과 이트 라는 남자는 카류 님을 따라 저택 쪽으로 내려갔다. "...레이포드 경은 내려가시지 않으십니까?" "자네의 성격을 봐서 한 사람 정도는 감시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 각한 것이라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전혀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에르가는 나에게 더 이상 내려가라고는 말하지 않고 천천히 디트리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가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 디트리온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에르가는 더욱 얼굴을 구기고 약간 언 성을 높이면서 말했다. "카류를 죽이려 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가는 겨우 세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디트리온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디트리온은 고개를 움직여 그 주먹을 아슬 아슬하게 피했다. 디트리온이 자신의 주먹을 피하자 결국 에르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벌써 주먹을 휘둘렀으니 이미 화를 낸 것인가. "이 자식!! 네가 그러고도 기사야? 카류의 호위기사냐고!! 3년 전 산길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류를 지키겠다고 아르디예프 님께 한 그 말은 뭐야!!"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르가의 그 질책의 말에도 디트리온은 흔들림 없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가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났는지 디트리온에게 달려들었다. "거짓말?! 지금 장난 하냐, 이 자식아!!" 에르가는 다시 한번 빠르게 디트리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디 트리온은 그것보다 빠르게 그 주먹을 피해냈다. 에르가는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인으로 비록 무술이 전공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강한 축에 속했지만 오랜 세월 노련미를 갖춘 최고의 기사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는지 계속 디트리온을 향해 헛손질만 했다. 에르가는 계속 제대로 맞추지 못하자 신경질을 버럭 냈다. "이 개자식이!! 야! 이럴 때는 가만히 서서 맞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네 놈은 반성도 않는 거냐!!" 에르가는 자시의 주먹을 계속해서 피해내는 디트리온에게 얼마나 화가 났 는지 씩씩거리며 그런 유치한 소리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디트리온은 조금 전과 같은 평이한 어조로 에르가를 향해 말했다. "카류 님을 호위해야하는 몸입니다. 쓸데없는 일로 상처를 입어 그 분을 호위함에 있어 실수가 있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에르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 리기만 할뿐이었다. "저를 보고자 하셨던 용건이 이것이 전부라면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 다." 디트리온이 내려가려 하는 것을 보며 에르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거짓말이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류를 지키겠다는 맹세가 거짓말이라고 한 주제에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카류에게 가도록 놔두겠냐! 네가 카류의 호위 기사라는 건 절대 용납 못해!!" 에르가가 검을 뽑아내는 것을 보고 확실히 남아서 지켜보기를 잘했다는 생 각을 하며 에르가를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디트리온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저는 아스트라한 님을 사랑했습니다. 카류 님 또한 저에게 누구보다도 소 중한 분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카류 님보다 아스트라한 님이 더 소중했 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카류 님을 배신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 류 님만을 지키겠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 "......" 에르가는 검을 뽑은 상태 그대로 입을 쩍 벌리고 디트리온을 바라보고 있 었다. 그는 이제 화를 내야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 었다. "거짓말이었다는 말은 이제는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그들의 대화에 조용히 끼어 들어 물었다. 사실 카류 님이 디트리온을 다시 호위 기사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의 마음이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선다면 카류 님이 위험해짐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이 또 다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아스트라한 님은 돌아가셨으니까요. 저는 카류 님을 지킬 것입니다." 디트리온의 대답에 에르가가 다시금 크게 소리질렀다. "잘도 그런 말을 나불거리는구나!! 카류가 아스트라한 님의 대용이냐? 꿩 대신 닭이다 이거야? 사람을 배신하고 절망하게 해놓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꿔 먹을 수 있는 거냐!?" "저는 그렇습니다." 디트리온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말했다. 에르가는 거의 질렸다는 표정을 지 으며 디트리온을 향해 빈정거리는 말을 던졌다. "아스트라한 님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면 너는 또다시 그렇게 당당한 태도로 카류를 배신하겠구나." "그렇습니다." 에르가를 향해 간단하게 대답한 후 디트리온은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천천히 저택을 향해 내려갔다. 에르가는 그런 디트리온을 보면서도 말없이 멍하게 서있었다. "에르가." "......"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에르가는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서 있 을 뿐이었다. "에스문드 백작. 한 가문의 가주가 이런 일에 혼을 빼면 되겠는가?"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다시금 그를 불렀다. 에르가는 그때서야 정신 을 차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레...레이포드 경." "아..." "바...방금 저와 대화를 한 사람이 바스라윈 가의 그 디트리온이 맞습니 까?"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너무나 많 은 일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절규하고 또 죽 음을 맞았다. 잔혹한 여름의 바람은 상냥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 어버렸다 "젠...장...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 녀석은.. 그 녀석은...!!" "어쩌면 디트리온의 일은 잘 된 일인지도 모르네." "뭐라고요!?" 에르가는 나를 보고 화가 난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카류 님 앞에서는 그렇 게 투닥거리면서도 뒤에서는 저렇게 카류 님을 위해주는 에르가를 보니 마 음 한구석이 훈훈해져 옴을 느꼈다. 비록 그가 다혈질에 화내길 잘하는 면 이 없잖아 있지만 언제나 직선적이고 앞만 바라보며 거기에 돌진할 줄밖에 모르는 그런 성격이 카류 님을 배신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카류 님이 살기 위해서는 반역 이외엔 길이 없네. 하지만 카류 님은 자신 의 형제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아 했고 또한 자신의 탓으로 전쟁을 일으키 는 것이 마음에 걸려 계속 그 일을 머뭇거리고 있었지. 그대로 두었다면 카류 님은 의미 없이 개죽음을 당했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디트리온이 옴 으로 해서 카류 님이 마음을 다잡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 아닌 가." "하지만 녀석의 마음은 완전히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디트리온은 물론이거 니와 자신의 형제들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아직 카류 님은 그렇게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가끔씩 잔혹한 말 을 내뱉곤 하지만 여전히 상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지." "하지만... 카류 녀석...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자신의 뒤에 디트리온이 있는 데... 그리고 여기에 알의 무덤이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 다니..." "하지만 디트리온을 죽이지 않으셨지 않나. 카류 님은 자신을 배신했던 디 트리온에게 말하셨지. 죽음 따위로는 절대 이 일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나 는 카류 님이 디트리온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한 말이라고 믿고 있다네. 얼마 전 회의실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평한 것도, 디트리온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한번 배신한 디트리온을 어떻게든 다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는다네. 그 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잔혹한 말을 내뱉고 또 그때마다 스스로를 상처를 입히고 있 는 것일 테지." "......카류는...." 에르가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 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뼛속까지... 남 을 생각하는 놈이니까요." "...에르가." "하...하하.. 정말 멍청한 놈입니다. 조금쯤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좋을 텐 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몇 번이고 자신을 희생하고 상처 입는 그런 덜떨어진 놈 말이죠." 에르가는 이마에 양손으로 짚고 중얼거렸다. 작은 어린아이가 나의 옷자락을 잡고 방긋 웃으며 멋진 기사 님이라고 부 르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작은아이는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 고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자라났다. 최고 권력자의 아이로 태어났으면서 도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런 상냥한 아이였다.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사랑을 베풀 줄 알았던 그 아이는 당연하게도 많 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상냥한 아이는 이제 그 상냥한 마 음 때문에 너무나 큰 상처 입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상처입고 있었다. "그렇게 멍청한 놈이니 우리가 어떻게든 구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런가?" 나의 말에 에르가는 피식 웃더니 이내 혼자 벌떡 일어났다 "그 멍청한 놈은 워낙 띨띨해서 제 도움 없인 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제 가 괜히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레이포드 경." 에르가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으로 또 어떤 절망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렇게 카류 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분 은 아직 버틸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나는 에르가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마 지막까지 카류 님을 지켜준 알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을 잊지 않 고. ◆ ◆ ◆ ◆ ◆ ◆ ◆ 나는 창 밖의 약간은 분주해 보이는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택 뒤쪽 에서 불어온 바람이 항상 대하는 친근한 손길처럼 부드럽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벌써 카류 님이 내려오셨니? 히노?" "예...예? 아버님! 저는 그냥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나는 아버님의 말에 약간 당황해서 창문을 닫고 서류를 들고 있는 아버님 의 곁으로 걸어가서 앉았다. 아버님은 피식 웃으시는 듯하다가는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너의 카류 님을 향한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면 무리를 해서라도 너에게 루블로프 님의 아내가 되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설득해 볼 걸 그랬구나."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버님...!" 갑작스런 아버님의 말에 나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 이 더욱 무안해서 좀더 뭐라고 반박의 말을 하려 했지만 아버님이 손을 들 어 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자 의외의 일에 약간 당황해 나는 가만히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욕심이 과했다. 사실 너를 왕비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카류 님을 왕으로 등극시킴으로서 그 일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우리 가문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추진시킨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전부 물거품이 되었구나." "아버님!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에스문드 가까지 카류를 위해 힘을 써주 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게다가 아르디예프 님께서 많은 마법사를 데리고 돌아오실 거예요!" 난생 처음으로 아버님의 약한 소리를 듣자 나는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아 버님께 소리쳤다. "솔직히 군사적 차이가 너무 크다. 아무리 에스문드 가나 하르트 가, 바스 라윈 가가 우리 진영으로 들어온다 한들 그 많은 병력의 차이를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니. 아르디예프 님께서 생명의 궁의 마법사를 데리고 온다 면 확실히 얼마동안 버틸 수 있긴 하겠지. 하지만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 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기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단다. 너도 충분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지. 점점 강대해지고 있는 우리 리아 후작 가를 견제하고 있는 가문이 원래부터 굉장히 많았단다. 이때를 틈타 어떻게든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데 공을 세워 그 이득을 챙겨보려는 가문이 생겨 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하다. 특히 지금까지 우리 리아 가문 같은 여 러 후작 가에 밀려 종이 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두 공작 가문은 과거 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미간을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 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가 없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반 역자로 모조리 몰살당하고 말 것이다. 후, 바보 같구나. 이런 곳에 앉아 기 적이 일어나도록 비는 수밖에 없다니..." 아버님의 말을 듣자 왠지 모르게 약간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님을 향해 말했다. "아버님은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에스문드 가가 우리 의 편을 들겠다고 말했어요. 게다가 8서클 마법사인 아르디예프 님과 류스 밀리온 님이 우리편이 되었지요. 곧 생명의 궁의 다른 수많은 마법사들도 곧 우리진영으로 들어올 겁니다. 처음 우리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정말 기 적 같은 일이 아닌가요? 이 기적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카류라고요." "히노...." "아버님도 어제 회의실에서 카류가 한 말을 들으셨지 않아요? 카류가 저렇 게 냉정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우리들을 위해 일어나기로 결심했어요. 그 런데 아버님이 이렇게 축 처지셔서 어린 딸아이에게 푸념이나 하는 모습이 라니, 과히 보기에 좋지 않군요." 아버님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웃음 지었 다. "네가 말도 못하고 매일같이 집안에만 있어 걱정하던 하던 때가 엊그제 같 았는데 이렇게 변해버렸구나. 후후..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구나." "아...아버님!!! 으... 저...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분명 새빨개졌을 거라는 생 각에 다급히 아버님의 서재에서 빠져 나왔다. 아버님은 내가 동굴에 다녀 온 뒤 말을 하게 되고 난 후부터 가끔씩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곤 해서 이 렇게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나는 아버님의 서재에서 나온 후 뒷쪽의 정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끄럽 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전 창 밖으로 카류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저절로 발이 그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 쪽엔 답답한 방에 있 고 싶지 않다는 카류의 말 때문에 일부러 마련한 탁자가 있었다. "아, 카류!" "히노 선배?" 정원 쪽으로 향하던 나는 마침 몇몇의 용병들과 오늘 에르가와 함께 온 하 늘색머리의 남자와 함께 무언가 책과 필기도구를 잔뜩 들고 걸어가고 있는 카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음? 디트 경은...?" 난 문득 카류의 곁에 항시 붙어 있던 디트 경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불안한 생각에 다급히 질문을 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해 디트 경에게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디트 경 혼자 다니다가 는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하자 상당히 불안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카류를 죽이려고 했던, 카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디트 경이 밉 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디트 경 또한 여러 가지 사건에 휩쓸려 이용당한 희생자일 뿐이고, 카류를 미워해서 저지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디트 경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신뢰가 바닥에 떨어져 많은 사 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다. "에르가 형이 디트 경과 할 얘기가 있다고 하기에 저 혼자 먼저 내려왔어 요. 뭐, 에르가 형이 열 받은 얼굴로 디트 경에게 할 얘기야 듣지 않아도 뻔하지만요." "...그...그런데 말리지 않고 그렇게 내버려두고 온 거야? 에르가가 원래 쉽 게 발끈하잖아. 그러다 디트 경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아무리 다혈질인 에르가 형이라도 설마 디트 경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 렇게 하지만 않는다면 에르가 형이 무슨 짓을 하든 전 아무래도 관계없어 요." 카류는 나를 향해 싱긋 웃고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심한 말을 내뱉고 냉 정하게 돌아서는 카류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엔 그 뒷모습이 너무 쓸쓸하 게 비춰졌다. 카류가 디트 경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아니 오히려 누 구보다 디트 경을 걱정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한번씩 그에 대해 일부러 매몰차게 대하는 카류의 모습을 보기가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사실 어 제 사건이 있었던 정원에서라든지 또 아침에 있었던 회의실에서 카류가 한 말이 없었다면 디트 경이 살아남지 못했음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카류 는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디트 경을 미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디트 경을 걱정하는 것도 사실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카류가 가장 슬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 것이 다. 나는 약간 가라앉은 기분으로 카류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리 앉아요. 히노 선배. 하지만 오늘은 함께 놀아줄 수는 없을 것 같네 요. 할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착하죠? 조금 있다가 에르가 형이 오면 그때 에르가 형이랑 함께 놀도록 해요." 카류는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달래듯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 다. 이상하게도 카류는 옛날부터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대할 때 이런 식으 로 아이들 다루듯 행동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기에 너무나 당연하 게 생각된 익숙한 모습이고 아무래도 좋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린애 취 급을 하면 조금 불만스러워져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카류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 책에 빽빽하게 숫자들이 적혀 있었는 데 아르디예프 님이 데리고 올 마법사들을 위해 마법 수식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류가 펜을 들고 글을 쓰려 하던 차에 좀 전부터 곁에 서 있던 에르가를 따라왔던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카류에게 말을 걸었다. "일을 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저는 이트라고 합니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카류는 펜을 들던 손을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지요?" "흐음... 글쎄. 왜 지금 나에게 이런 것을 묻는 거지? 네가 에르가 형과 무 슨 관계가 있다는 것은 상황을 대충 봐서 짐작하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로 서는 너를 신용할 수 없으니 앞으로의 동향에 대해 주절주절 말해줄 생각 은 전혀 없어." "저는 에르가 님의 부관입니다. 저는 에르가 님의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의 동향을 꼭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에르가 님이 개죽음 당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약간은 무례한 이트라는 남자의 말에 카류는 펜대를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 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자기 소개를 할 때 이트라고만 했다는 것은 너, 평민이 맞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트는 카류의 말에 바짝 긴장 한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평민의 신분에 카류의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건만 이렇게 무례한 말까지 했으니 긴장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카류는 그런 곳에 신경을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카류는 내 쪽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히노 선배. 에르가 형 정말 많이 컸죠? 평민을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대요. 평민이라면 냄새가 나니 어쩌니 하고 신경질부터 내던 그 에르가 형이." "카...카류?" "많이 변했다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말 철 들었네. 귀여운 에르가 형. 있다가 내려오면 칭찬해줘야겠다." 카류는 흐뭇하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카류의 저런 모습을 보노라면 카류는 진짜 우리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곤 한 다. 이트는 카류의 말을 듣더니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카류와 우리들의 사이 에 대해 잘 모르는 그는 카류가 이렇게 자신의 주군이 완전히 어린애 취급 한다는데 꽤나 발끈한 모양이었다. "...묻고 싶군요. 카류리드 전하. 전하께서는 그렇게 귀여운 에르가 님께서 당신의 진영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시에 어떻게 하실 작정이셨습 니까?" 이트는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적이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왔다. 그 말을 들은 카류의 얼굴에 띄워진 장난스러운 끼 가 금세 사라졌다. "당연한 일을 왜 묻는 거지? 싸우는 수밖에." "싸운다고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이트는 조금 전 에르가에 대해 했던 카류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 지 고집스럽게 카류의 말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예전의 카류라면 부드럽게 넘겼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카류는 이런 쪽에서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는 상 태였기에 이 질문에 어떻게 반응할지 초조해져 나는 어떻게든 이트를 나무 라면서 대화를 끊으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떼려는 순간 금방 카류가 차갑게 그 말에 대답하고 말았다. "단도 진입적으로 말해서 나의 적이 되겠다면, 나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면 죽인다.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냉담한 카류의 반응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류는 자신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을 호위해 주겠다고 했던 용병, 알이나 슈카라고 한 그 소매치기 소년처럼 죽는 사람 이 나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원하지 않는 싸움이지만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친구나 형제들과 싸우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트는 자신의 주군을 그렇게 간단히 죽이겠다고 말하는 카류에게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에르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까지는 아니었 을지라도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쪽 편을 들어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믿음이 가는 말을 해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 에..에르가 님은 당신의 편을 들기 위해 자신의 아버님인 선대 에스 문드 백작 님께 검까지 들이밀었단 말입니다. 그...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에르가가 에스문드 백작이 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대 에스 문드 백작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가문과 아들을 사지에 내모는 것과 비슷 한 일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카류도 약간 놀라는 표정 을 짓나 싶더니 금세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턱에 손을 올리 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이트를 향해 말했다. "후... 에르가 형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내가 더 소중했나 보지." "다...당신!!" "너는 에르가 형이 굉장히 소중한 모양이구나." 카류는 화가 난 듯 금방이라도 주먹을 뻗을 것 같은 이트를 향해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너는 에르가 형이 몇 번째로 소중하지?" "무...무슨..."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에르가 형이기를 빈다. 그리고 충고하는데 에르 가 형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에르가 형의 곁에서 떠나는 것 이 좋을 것이다." 차갑고 고저 없는 카류의 목소리가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게 들려왔다. 카류는 자신과 디트 경의 일 때문에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끈하는 이트를 보며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리라. "어이! 카류!!"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정원에 난 길을 따라 에르가와 디 트 경이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벌써 내려왔어?" "그건 내 마음 아니냐?" 에르가는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디트 경을 힐끔 보다가 우리가 있 는 쪽으로 뛰어와서 의자를 거칠게 끌어내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인사를 했다. "아..앗! 히노 양.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아니. 에르가. 괜찮아. 아까도 인사했잖아. 아, 나 에르가라고 계속 불러도 괜찮을까? 이제는 에스문드 백작 님일텐데..." "...그...그런...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이신 히노 양인데 당연하죠. 얼마든지 에르가라 부르셔도 좋습니다." "왕자인 나는 에르가 형'님'이라 불러야 하고?" 카류가 한 손으로 턱을 고고는 "님"자에 강세를 주며 피식 웃었다. "시끄러. 넌 나보다도 어리잖아." 에르가가 얼굴을 붉히고 소리치는 것을 보며 카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 고 일어나서 에르가에게로 다가갔다. "어쨌든 빠르게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지? 그만 저택으로 들어가서 씻고 쉬어. 이런데서 병이라도 나면 웃음거리밖에 안된다구." "내가 너처럼 허약한 놈인 줄 아냐? 이 발육 부진아야. 며칠 말 타고 달렸 다고 힘들 리가 있겠어? 세상을 전부 네 기준으로 보지마!" "하하... 자자, 알았으니까. 히노 선배랑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딜티를 불러서 놀고 있어. 알았지? 에르가 형. 저택 안엔 딜트 혼자 있을 거 아냐. 오랜만에 왔는데 이렇게 나 몰라라하면 딜티가 얼마나 섭섭해하겠어." "시꺼. 자식아. 딜티 자식이 죽든말든 내가 알게 뭐냐." 에르가는 화를 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투덜거 리면서도 카류의 말을 듣는 에르가를 보며 몰래 살짝 웃으면서 나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생각하니 아까부터 우리들 때문에 카류가 마법 수식을 전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카류는 손을 들어올려 약간 흐트러진 에르가의 앞머리를 살 짝 넘겨 정리해주면서 말했다. "정말 많이 컸네. 17살인데도 거의 다 큰 것 같아." "너 자꾸 사람을 애 취급할래?" 에르가는 언제나처럼 발끈하며 카류의 손을 내치려했다. 그러나 카류의 다 음 말을 듣고는 약간 얼어버렸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대로 있어 줘. 에르가 형.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마." 카류는 살짝 에르가를 안았다가 금방 떨어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 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 알았지?" 카류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 전에 앉았던 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문득 조 금 전부터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무표정한 디트 경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나와 에르가, 에르가의 부관 이트 이렇게 세 사람은 저택 안 쪽을 향해 걸 었다. 그리고 말없이 저택의 개인 거실까지 와서 각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기에 앉은 채로 그것이 구겨지지 않게 잠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에르가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류...녀석." "에르가..."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약간 인상을 쓰고 있는 에르가를 보고 안타깝 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류의 말에 에르가가 너무 기분이 나빠하지 말아 주었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카류의 마음은... 알고 있어요. 히노 양. 단지... 그 녀석이... 모두가... 왜 이 렇게 되어 버렸나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에르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에르가도 자 신의 표정이 얼마나 어색했는지를 깨달았는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 다. 한참동안 침묵이 방안을 맴돌았다. 그 침묵 속에서 한동안 카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희소식이야!! 모두!!!"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딜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희소식이라니...? "분위기가... 영 이상하네?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래? 왜들 그래요?" 딜티는 조용한 방의 분위기를 보고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우리들을 보고 질문했다. "...별거 아냐. 그러나저러나 무슨 일이냐? 희소식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 야?" "아, 그게 말이야!" 딜티는 기쁜 듯 방글방글 웃으면서 우리가 앉은 소파로 다가와 털썩 주저 앉았다. "후후후... 맞춰볼래?." "뭔데 그래? 빨리 말해봐. 사람 속 뒤집어지게 뜸들이지 말고!" 에르가가 꼭 물어뜯을 것 같이 신경질을 내자 딜티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던 후크와 카멜 알지? 걔네들이 곧 오겠단 다. 너처럼 무대포로 들이닥치지 않고 조신하게 편지까지 보냈더라고." "후크가? 카멜이?" "예. 히노 양. 솔직히 그들이 귀족은 아니지만 아르윈에서는 손꼽히는 거대 상단의 자식들이 아니겠어요. 일단은 정치와는 관계없는 그들이 이 곳 리 아 영지에 들린다는 것은 분명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징조겠지요?" "자금적 지원?!" 에르가가 소리치자 딜티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어 보였다. "글쎄.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겠지만 분명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은 분 명해. 안 그래?" "정말 잘됐다. 리아 영지도 평야가 많아서 물자가 풍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쟁시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자라는 법이지." 에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납득한 듯한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은근히 터져 나오는 기쁨을 참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카류는 어디 있는 거야? 에르가? 너 아까 카류를 찾으러 간다고 바람같이 달려 나갔었잖아." "카류는 밖의 정원에서 마법수식을 정리하고 있어. 우린 방해가 될 것 같 아서 먼저 나온 거야." 나는 딜티의 질문에 에르가 대신 대답했다. "에에. 그렇군요. 참, 그러나 저러나 정말 놀랍지요? 카류 그녀석이 머리가 좋은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카류가 검술이나 전술에 전공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전쟁시엔 가장 도움이 안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제일 큰 도움이 되었군요." 딜티는 에르가도 왔고 오랜만에 후크나 카멜까지 본다는 것에 들떴는지 기 분 좋게 계속 말을 이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분위기가 밝아져 서 한참동안 우리들은 에르가가 모르는 것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앞 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문득 에르가 곁에 서서 한 참동안 우리들의 말을 경청하던 이트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눈에 띠였다. "이트.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 "이봐, 내 앞에선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히노 양 앞에서 그 태도가 뭐야? 물으면 대답해야 할거 아냐!" 나의 말에 대답을 않자 에르가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괜찮다고 에르가를 말리는 사이 이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무 군사적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용병을 아무리 많이 끌어 모 은다 쳐도 지금 이 상태로는..." "마법사들이 올 거야! 마법사 한 명이 군사 수십 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고. 게다가 8서클 공격 마법을 한 방 날리면 이천명 정도는 가뿐히...." "...휴우... 에르가 님. 정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믿으십니까." 이트는 딜티의 말을 끊고 에르가를 향해 물었다. 딜티는 약간 발끈 하는 듯 했지만 솔직히 군사적 차이가 크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냥 조 용히 입을 다물었다. 3년 전에 있었던 동굴 사건을 당하기 전의 딜티였다 면 말하는 도중에 평민에게 무시당하고 이렇게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 이다. "지금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지 않냐. 너 같으면 가만히 앉아서 이만큼이나 세력을 키워낼 수 있겠냐?" "...더 이상 일어날 기적이 있다면 그때부터 정말 기적이겠지요." 이트는 냉정하게 평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카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모 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모인 사람들은 이쪽편이 될 가능성 이 그런대로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사실 아직 후크와 카멜의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쓸데없는 말로 일 하나하나에 초치지마!" 에르가는 약간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지만 마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일 것 이다. 이렇게 우리 진영으로 들어오겠다고 정한 이상 어떻게든 이길 방법 을 생각해야 하겠는데, 지금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리끼리 앉아서 이렇게 고민하면 뭐해! 어쨌든 마법사들과 내일 올 후크 와 카멜을 보고 생각하자고. 에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벌써 하늘이 컴컴해져 가잖아. 일단 자기 방으로 돌아가자. 더 자세한 건 리아 후작 님 이 불러서 제대로 이야기 해주실 테니까." 딜티의 말에 우리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나의 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문득 카류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홀로 카류 의 방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카류의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 았다. 설마 이렇게 어두워지고 있는데 밖에 있는 걸까. 등불 같은 것도 가져가지 않아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는 약간 의아했지만 일단 낮의 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해가 완전히 져버려서 등불도 없이 나온 나는 달빛에 의지해 혹이나 넘어져서 창피 당 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발 밑을 보면서 걸어갔다. 폭이 넓고 긴치마를 입고 있어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엇? 히노 님?" "에?" 발 밑을 보고 가다가 갑자기 낯익은 병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아, 디트 경께서 카류리드 님의 주위를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에 불을 켜고 있으면 주목받기 십상이니까요." "아아, 등불을 가져왔나 보구나. 알았어. 그럼 잘 지키고 있어." 나는 병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주고 멀리서 어렴풋 보이는 등불을 따라 걸어갔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다가 밝은 등불 아래 서 있는 두 사람 의 인영을 발견했다. 탁자에 엎드려 있는 소년과 그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남자. 아마 카류가 마법 수식 정리를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는데 어깨에 검은 망토가 둘러져 있었다. 문득 디트 경의 망토를 두르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고 나는 그것이 디트 경이 카류를 위해 둘러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동안 디트 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 한쪽이 뭉클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손으로 가슴을 꼭 쥐었다. 카류를 바라보고 있는 디트 경의 표정은 정말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냉랭한 분위기 를 풍기는 그런 무표정이 아닌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지어 보이는 그런 따뜻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등불 덕분에 디트 경의 대강의 행동이 보이 기는 했지만 내가 보는 각도에서는 디트 경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세세한 표정까지 확실히 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디트 경이 옛날과 다름없 이 카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기를 바랬기에 이런 환 영이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은 내가 본 것이 진짜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카류가 몸을 살짝 뒤척였다. 그리 고 몸에 둘러진 망토가 기분이 좋았던지 카류는 어깨에 살짝 걸쳐져 있기 만 한 그것을 얼굴 쪽으로 끌어당기면서 살짝 미소를 띠었다. "...트..." 자그마한 카류의 목소리가 아주 얼핏 들렸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자리에 서 카류가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카류가 앉아 있던 의자가 큰 소리를 내 며 땅바닥에 나뒹굴고 어깨에 둘러져 있던 디트 경의 망토도 바닥으로 흘 러내리고 말았다. 카류는 그 망토를 바라보다가 디트 경에게로 고개를 돌 렸다. 의자를 피해 잠시 자리를 옮긴, 불빛에 비친 디트 경의 얼굴은 어느새 무 표정한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디트 경은 떨어진 망토를 주우려는 듯 조금 허리를 굽히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카류가 그 망토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그것을 디트 경에게 넘겼다. "쓸데없는 짓 말고 너나 써. 네가 아파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을 테니까." 고요한 정원에서 카류의 목소리는 의외로 크게 들려왔다. 마치 비꼬는 듯 한 냉랭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카류의 그 말 자체가 진심이라는 느낌을 받 았다. 디트 경은 이번에 있었던 일로 이 저택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미 움을 받고 있었다. 사실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해도 그를 위해 무 언가를 해주려 열심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카류는 그것을 혹시라도 디트 경이 아프기라도 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저는 카류 님을 호위하는 몸입니다. 그런 카류 님께서 밤바람에 병이라도 걸리면 저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런 것뿐입니다." 카류의 말에도 디트 경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레 목이 메여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솔직할 수 없 는 두 사람의 행동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탓이었다. 스르렁. 문득 귀를 시리게 하는 금속음이 귀를 파고들어 나는 손을 얼굴에서 내렸 다. 그 금속음은 디트 경이 검을 뽑아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디트 경이 내 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말없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겸연쩍어서 눈가를 훔치고 천천히 그들의 앞으로 나갔다. "어...히...히노 선배?" 카류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세 평소처럼 상냥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으...응. 어두워졌는데 네가 들어오지 않기에..." "후, 제가 그만 깜빡 졸았나봐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선배." "응... 그래." 카류는 탁자 위의 책과 여러 가지 필기 용품들을 챙긴 후 나의 손을 이끌 었다. 나는 카류의 손에 이끌려가면서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 젠가 꼭 카류와 디트 경이 서로 솔직하게 진심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아 무도 모르게 하늘의 달님에게 살짝 빌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28 갈림길 (2) 여러 가지로 사람을 찜찜하게 만들었던 아침이 지나고 오후가 되자 곧 프 리란트님이 히노 선배까지 포함하여 리아 영지의 주요 인물들, 그리고 드 리크 경과 드리크 경 휘하의 몇몇 기사들, 아르 할아버지, 이렇게 나와 관 계되어 궁지에 몰린 각종 주요 인사들(?)을 회의장으로 모았다. 그러나 이 회의장에는 궁지에 몰리지 않은 사람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었는데 샤크 용병단의 주요 용병들과 회의장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앉은 류스 밀리온이 그들이었다. “카류님, 이제 앞으로의 방향을 정해야지요.” “휴우, 그렇겠지요.” “아직 시도한 것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물 론 알고 계시겠지만 저희들 카류님을 지지하는 세력은 제1왕자 파에 비해 굉장히 밀리는 상태입니다. 현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 리아 영지의 군사와 동남부 전선에 있던 레이포드 경의 군사를 전부 끌어 와 합친다 해도 제1왕자군의 십분의 일에도 미칠까말까한 수입니다.” “…….” 갑자기 시작된 프리란트님의 군사 이야기에 나는 멍해졌다. “표정 관리 좀 하는 게 어떠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신뢰도를 대폭 추 락시키게 하는구만.” “뭐……! 그야 갑자기 군사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랬죠. 그리고 류스밀리온 님은 이 자리에 왜 계시는 겁니까?” “관중이라 생각해 주면 되지. 내가 원래 이런데 관심이 많거든.” 괜히 시비를 거는 류스밀리온에게 발끈한 내가 뭐라 맞받아쳐주려 하는데 프리란트님이 나섰다. “카류님, 이제 저희들이 가야 할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프리란트님은 나를 보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왠지 모를 약간의 불안감을 느꼈다. “전하께서 오셨으니 저희들은 최소한 제1왕자군에 맞설 아주 최소한의 명 분이나마 얻게 되었습니다. 카류님은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반역을 일으 켜야 합니다.” “어제 말한 명분이라는 게 그럼……?” “사실 저희들로선 굉장히 난감한 상태였습니다. 옹호하는 왕족도 없이 제 1왕자군과 싸울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그렇기에 현재 잘못된 소문 때문에 평판이 엉망이긴 하나 카류님이 계시면 저희들도 어떻게든 제1왕자군과 최 소한 대응을 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 말도 안 돼!! 제가 이렇게 욕을 먹고 있는 게 무엇 때문인데?!” 리아 영지까지 오면서 들었던 소문을 생각하며 나는 언성을 높였다. 안 그 래도 반역을 일으킨 왕자라고 악평이 자자한데, 진짜로 그 일을 일으키란 말인가? “시인하지요. 전하께서 이런 처지에까지 오게 된 건 저희들 탓도 상당히 큽니다. 저희들이 카류님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일을 꾸미려 하고 있었으 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거의 정해진 행로나 다름없었습니다. 저희 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카류님의 파벌이 생겼을 것입니다. 루블로프님보다 카류님이 더 왕에 어울린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요. 그것을 트로이 후작도 알고 있었기에 언제나 카류님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래서 일을 약간 시작하는 낌새를 보이자마자 이렇게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해서 카류님을 함정에 빠뜨린 것입니다. 그러니…….” “그만두시죠. 누가 그런 거 하겠대요?! 절더러 반역을 일으켜서 루브 형을 죽이라고요?” “아닙니다. 전하. 일이 성공한다해도 꼭 루블로프님을 처형하는 것이 아닌 귀향이나 유폐시키는 정도로도 끝낼 수 있…….” “장난해요?!” 나는 프리란트님의 말을 끊고 빽 소리 질렀다. “그럼 어쩔 거냐? 반역자 주제에 여기에 가만 앉아 놀고먹을 작정이었냐? 대체 여기까지 도망은 왜 왔냐고 묻고 싶구만.” 자꾸 빈정대며 끼어드는 류스밀리온에게 발끈하여 뭐라 따지려 했지만 막 상 말을 하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도대체 리아 영지에 와서 무 엇을 하려 했지? 리아 영지에 온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건 아닐 텐데 말 이다. 어쩌면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그 리아 영 지에 도착한 후의 일은 생각하려 하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죄송합니다, 카류님. 카류님을 위한다는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고 말았군 요. 하지만 이미 일이 이렇게 저질러진 이상 리아 후작님의 말처럼 길은 그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처형 직전에 도주까지 한 이상 국왕과 제1왕자를 옹호하는 다른 귀족들이 곧 대대적으로 군대를 편성해 저의 영지로 쳐들어올 것입니다. 이쪽에서도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반역 이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 다.” “난 왕 같은 거 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고요!! 드리크 경도, 프리란트님 도 왜 다들……!! 절더러 루브 형이랑 싸우란 말인가요? 전쟁을 일으키라 고요?” 그렇게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머리 속은 차근차근 생각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처형장에서 도망쳐 리아 영지까지 간 후, 다음으로 할 행동은 반역 밖에 없다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나는 반역이 란 말에 그렇게 진절머리를 쳐놓고는 제 발로 반역을 하겠다고 걸어온 것 이다. “카류야…….” “카류…….” 아르 할아버지와 히노 선배가 안타깝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오. 그렇게 왕이 되기 싫다니… 반역을 안 하겠다면 어디 국외로 도망 이라도 칠 거냐?” “도주한다 해도 끊임없이 추적자들이 들이닥칠 것입니다. 게다가 의지할 곳도 없이 어디로 피신하신단 말입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겠지, 리아 후작. 저 녀석이 무책임하게 도망치면 너희 들은 말 그대로 개죽음 당하게 되니까가 아니냐.” 관중이라고 한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지 류스밀리온은 계속 프리란 트님의 이야기에 참견을 해왔다. 하지만 솔직히 그가 투덜댄 말은 전부 진 실이었다. 내가 도망쳐 버리거나 잠적해 버린다면 리아 후작들은 싸울 명 분을 잃고 트로이 후작을 중심으로 한 제1왕자군에 의해 꼼짝없이 잡혀 죽 을 날만을 기다려야 할 테니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반역 따위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반역을 일으 키면 나는 정말 루브 형과 형제들과 싸워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 때문 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전생에 텔레비전으로만 봤던 바로 그 전 쟁 말이다. 상황이 이렇게 꼬여 있을 줄이야. 반역자 주제에 나는 왕 하기 싫어요 라 고 외치며 리아 영지에 가만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1왕자군 에 대응하여 군사를 일으켜 반역을 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처형식 때 확 죽어버렸다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 만 이제는 그냥 죽어버릴 수도 없다. 내가 죽는 건 내가 도망치는 것과 같 은 결과를 낳게 될 테니까. 그리고 절대 자신보다 먼저 죽지 말라고 그렇 게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셨던, 나를 위해 반역자가 된 아르 할아버지를 위해서도 그렇게 막 자살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젠장!!”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카류…….” 히노 선배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내 쪽으로 다가와 걱정스러운 목소 리로 나를 불렀다. 하지만 지금은 히노 선배의 그 귀여운 목소리도 전부 거슬릴 뿐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아무하 고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치 수렁에 빠진 듯 한 느낌을 받으 며 회의장을 나섰다. “카류야.” “…….” 나의 호위를 맡은 알 아저씨가 뒤를 쫓아오며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부름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사실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일로 혼자 있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나의 호위를 맡아주고 있는 알 아저 씨에게 꺼지라고 화를 낼만큼의 강철판의 얼굴을 가지진 않았기에 대답하 지 않는 선에서 끝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어디를…….” 정문을 지키는 병사가 의아하게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고 휘적휘적 정 문 바로 앞까지 갔다. “그냥 밖으로 나가시는 건…….” “됐어! 문이나 열어!!” 문을 열지 않고 자꾸 말을 거는 병사에게 나는 드디어 신경질을 부렸다. 나의 말에 병사는 깜짝 놀랐는지 머뭇거렸다. “카류, 그만둬. 그에겐 잘못이 없잖아. 이러는 건 너 답지 않아.” “저 다운 게 뭔데요? 이 답답한 곳에서 잠시 벗어나고 싶은 것뿐이에요. 좀 내버려 두세요.” 나를 말리는 알 아저씨의 말에 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알 아저씨는 약 간 한숨을 쉬다가 병사에게 문을 열라는 눈짓을 했다. 병사는 그래도 계속 머뭇거리다가는 나의 살벌한 눈빛을 보고는 문을 열어주었다. 역시 왕자의 말을 거역하기는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뒤에서 조용히 알 아저씨와 함께 저택 밖으로 나섰다. 머리를 식히려고 빠져나왔는데도 프리란트님과 류스밀리온이 했던 이야기 들이 계속해서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어 떻게 행동해야 옳은 걸까. 앞으로의 일이 이렇게까지 막막해 보긴 처음이 었다. 반역을 할 수는 없다. 루브 형의 자리가 될 왕위를 군대를 일으켜 뺏어버 리라니. 내가 어떻게 루브 형과 싸울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내가 이렇게 반역을 할 생각이 없다고 아무리 주장해도 트로이 후 작이나 국왕은 콧방귀도 뀌지 않을 것이다. 사실 반역에 대한 일을 시작하 지도 않았는데도 온갖 조작된 증거로 내게 누명을 씌운 인간들이 바로 그 들이니까. 게다가 이제 내가 리아 영지로 도망까지 쳤으니 분명 대대적으 로 군대를 이끌고 나를 죽이려고 쳐들어올 것이다. 그렇다고 거기에 대응해 내가 반역을 하게 된다면 대대적인 내전이 일어나 게 된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다. 아니, 죽음은 문제가 아니다. 고통을 받게 되겠지. 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고통과 두 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끝까지 반역을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리 아 영지 사람들은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몰살당하게 된다. 나의 편을 들 어 반역의 주동자라고 판정이 난 리아 영지의 사람들은 이미 트로이 후작 등의 제1왕자 파의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리아 영지 사람들은 어떻게 든 나를 명분으로 반역을 일으켜야만 최소한 살아남을 구멍이라도 모색해 볼 수 있다. 나는 도망갈 수도 없었다. 사실 내가 무슨 재주로 친인척 하나 없이 이곳 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나를 죽이려 많은 자객이 몰려올 것이 다. 무슨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그 추적을 피해낼 수 있을 리가 없 다. 무엇보다 내가 도망치면 리아 후작들은 완전히 명분을 잃게 되며 나를 위해 주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몰살당하게 된다. 이제는 죽을 수도 없다. 예전엔 나의 목숨을 희생함으로써 남들을 구할 수 있었지만 이젠 나는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피해만 줄 것이다. 내겐 죽음 이 아무렇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겐 그것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아니다. 내가 죽음으로서 슬퍼할 사람들. 반항도 못해보고 개죽음 당하면서 고통스 러워할 사람들. 내게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걱정 해 주며 나를 필요로 하는 그들을 버리고 무책임하게 죽어버리는 짓은 할 수 없었다. 반역을 할 수는 없다. 반역을 안 할 수도 없다. 어디론가 도망칠 수도 없다. 이제는 궁지에 몰렸다고 그냥 죽어버려 해결할 수도 없다. 그 어떤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언제부턴가 친한 사람들이 족쇄가 되어 나를 얽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혀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내 의지와는 달리 내 머리 속 에서는 계속해서 그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었다. “어……? 혹시…….” 한참 동안을 대로를 따라 터덜터덜 걸어가다가 나의 근처를 얼쩡이며 말을 거는 것을 느끼며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누구냐?” 언제 다가왔는지 알 아저씨가 나를 자신의 뒤로 밀어두고 낯선 남자를 경 계하며 말했다. “혹시… 카류리드님이… 아니신지…….” 나는 다시금 내 앞에 선 남자를 눈여겨보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조금 큰 키를 가진 갈색머리의 소년이었는데 왠지 낯이 익은 듯도 했지만 역시 모 르는 사람이었다. 사실 내가 이런 곳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도 만무했기 때문에 그렇게 확신해 버린 것이다. “네놈!! 누구냐고 묻지 않았냐! 죽고 싶으냐?” 알 아저씨가 눈에 살기를 가득 담고 바득바득 화를 내자 그제야 그 소년은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죄… 죄송합니다. 나리들의 길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냥 슈카라고…….” “슈카?” 나는 그 소년의 말에 깜짝 놀랐다. 슈카라면 예전에 내가 리아 영지에서 구해준 그때의 조그마했던 소매치기 소년이잖아. “아니, 슈카. 정말 슈카라고?” “카류야, 아는 놈이냐?” “예, 예전에 리아 영지의 그 소매치기… 어쨌든 아는 아이예요. 알 아저씨 도 아시잖아요.” 의외의 곳에서 재회한 그에게 나는 약간 신기한 기분으로 다가갔다. “예전엔 나보다도 작고 왜소했는데 이렇게 커버리다니… 정말 슈카가 맞 긴 맞는 거야?” “역시… 카류리드 전하셨군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붙여보았지만 못 알아보시기에 저 같은 건 역시 잊어버리셨구나 하고 생각해서 실망하고 있 었는데…….” “아냐!! 설마!! 하나도 안 잊어버렸어. 설마 내가 슈카를 잊었을까 봐. 우 리 일단 아무데나 앉자. 아, 저기가 좋겠네.” “에… 그런… 저는 평민이고… 함께 앉는 것은…….” “괜찮아. 의자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나는 광장의 분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슈카, 그리고 아직은 슈카를 경계하는 알 아저씨 이렇게 세 명은 분수대의 의자로 가서 앉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슈카. 마침 이럴 때 만났구나.” “저야… 뭐… 항상 거리를 돌아다니니까요. 그러다가 마침 카류리드 전하 를 발견하고 따라다니면서 망설이다가 말을 걸어보았던 것입니다. 예전에 전하의 말씀이 생각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런데 정말 이렇게 기억해 주실 줄이야…….” “으응!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근데… 그리고 보니 나는 내 신분이 뭐라고 말해 준 기억은 없는데?!” 나는 문득 그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알 아저씨도 바짝 경계하고 칼을 뽑아 들려 했다. “그… 그러지 마세요. 전 수상한 놈이 아닙니다. 실은 훨씬 예전에부터, 저를 신전에 데려다 주셨을 때부터 어느 정도 알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카 류리드 전하께서 만신창이가 된 저를 구하기 위해 치유 마법을 쓰도록 명 하신 것이 맞지요? 아니면 그렇게 갑자기 다 죽어가던 제가 멀쩡해질 수 없을 테니까요. 그때 저는 소문을 들어 리아 영지에 왕자님이 오셨다는 것 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까지 대동하고 밖을 돌아다닐 정도의 분이시라면 왕자님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했던 것입니 다.” 슈카는 알 아저씨의 검을 보자 놀라서 마구 변명을 했다. 가만히 슈카의 말을 들어보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랬구나. 미안. 나 요즘 일이 많아서… 헤유… 의심해서 미안해.” “…그 소문 때문이지요?” “…….”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나에 대한 소문을 기억해 내고 나는 잠시 한숨을 내쉬 었다. 지금의 나는 전국적으로 파렴치한 반역자라고 자자하게 소문이 퍼져 있는 상태이다. 슈카가 그 소문을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나 는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정말 반역을 하려 해도 욕을 먹게 돼 있는 것이다. 또다시 기분이 우울해지려 하고 있을 때 슈카가 말을 이었다. “저는 어머니를 잃고 갑자기 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친척도 없이 뒷골목으로 흘러들었다가 다른 고아 녀석들을 알게 되 었고 보통 그들이 하는 것처럼 저도 소매치기를 하기로 했지요. 보통은 소 매치기 하다가 잡히더라도 어느 정도 두들겨 맞는 것으로 끝났기에 잡혀서 조금 맞는 한이 있더라도 소매치기를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모두 그런 식 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데다가 사실 그것 말고는 저 같은 어린애는 살아갈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나는 갑자기 나오는 슈카의 말에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그런데 그날은 정말 운이 없었습니다. 누구를 어떻게 털어야 할지 잘 몰 라서 아무나 소매치기를 하다가 하필 이 거리에서도 난폭하기로 유명한 녀 석을 건드려 버렸던 것입니다. 그에게 걸려 두들겨 맞으면서 저는 죽는구 나 싶었지요. 맞는 것이 정말 고통스러웠고 소매치기까지 하기로 결심하며 살기 위해 발버둥 쳤는데 이런 식으로 죽어버리는 것이 너무 억울했지요. 그런데 그때 카류리드 전하께서 절 살려주신 것입니다.” “에… 그건… 그냥 당연한 일… 어쨌든 내 입장으론 별 것 아닌 일이었으 니까. 사실 그렇잖아. 난 왕자니깐.” 난 슈카의 말에 약간 쑥스러워져서 말했다. 슈카는 그렇게 쑥스러워하는 나를 보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처음 그렇게 도와주셨을 때 저는 굉장히 기뻤지요. 그런데 그 후 그 파 렴치한 신관들이 득실거리린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신전에다 절 그냥 맡겨 버리고는 돈을 몇 푼 쥐어주고 가버리신 후 제가 얼마나 카류리드님을 욕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제가 그동안 신전에서 얼마나 괴롭힘 당했는지 아 십니까?” “콜록…….” 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헉… 저… 저렇게 나오다니. 그래도 나름대로 도 와준다고 한 건데. “참 바라는 것도 많구만. 너 같은 소매치기를 구해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 사해야지, 대체 뭘 바라는 거야? 앙?” 알 아저씨가 본인인 나보다도 발끈해서는 슈카를 보고 소리 질렀다. “처음엔 마치 저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겠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뻐기면서 이야기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조금 도와 주는 듯하다가는 그렇게 나 몰라라 하고 그런 신전에 맡겨 버리는 것에 정 말 실망했던 겁니다.” “그런…….” 슈카의 질책하는 듯한 말에 나는 약간 발끈 했다. 사실 그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한 게 아니냐고 말이다. 그러나 문득 못된 신관들이 가득하다는 걸 알면서도 슈카를 그 신전에 그냥 맡겨 버린 건 사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을 주긴 했어도 그때 그 신관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후일 신전에서 슈 카가 충분히 괴롭힘 당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르 할아버지들을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는 나쁜 사람 취급을 하면서 보 이는 곳에서 혼자 잘난 척은 다 해놓고는 생각하기 귀찮은 뒷일은 그냥 신 전에 맡기고 나 몰라라 했던 것이 아닐까. 조금만 더 슈카를 도와줄 생각 이 있었다면 그런 신전에 맡겨 버리는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나중에 카류리드 전하께 받은 그 보석 덕분에 신관 녀석들에게 도둑놈 취급만 실컷 당하고 며칠 동안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지요. 사실 저 같은 꼬맹이가 그런 거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런 의심을 받아 마 땅한 일이었으니까요.” “아… 그… 그것이…….” 나는 또 한 번 뜨끔했다. 어린애에다가 평민일 뿐인 슈카가 그런 값비싼 보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을 때 어떤 일을 당할지는 조금만 생각 해도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뒷일 봐주기 귀찮다고 어린애에게 그냥 보석 하나 달랑 쥐어주고 잘 먹고 잘 살아 하고 가버린 것이다. “카류야, 저런 놈은 상대할 필요도 없다. 사실 거기까지도 누가 해주기나 하냐? 너니까 소매치기 같은 것도 도와주고 그랬지.” “사실 그동안 신전에 살면서 카류리드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괜히 잘난 척만 실컷 하고는 사람을 이런데다 맡겨두고 가버렸다고 말입니다. 신관들 이 새로 들어온 지저분한 저를 경멸하고 매일같이 괴롭혔거든요. 그리고 16살이 되던 해에 도저히 신관의 구박을 못 참고 그 신전을 박차고 나와버 렸지요.” “으… 음? 16살? 대체 지금 슈카 몇 살인데?” 얼마나 괴롭힘 당했길래 신전을 뛰쳐나왔을까. 나는 좀 부끄럽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해서 말꼬리를 물고 화제를 바꾸려 애썼다. “17살입니다. 이제 저도 성인이지요.” “나… 나보다 한 살 많았어? 헉… 그 땐 그렇게 작아서 당연히 나보다 3, 4살은 어린 줄로만 알았는데…….” “제대로 먹지를 못해서 그랬던 겁니다. 원래부터 집안이 어려워 근근히 버텨오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컸을 리가 없지요.” “아아… 그렇구나…….” 나는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전생에 굶어 죽어본 기억이 있는 나 로서는 슈카의 굶주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며칠 굶은 것에 불과했지만, 슈카는 그렇게 비쩍 마를 때까지 항시 굶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런데 저를 보십시오. 이제는 키가 카류리드 전하보다 컸군요.” “으… 응. 그렇네. 나야 못 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발육 부진이라 작은 거지만… 그래도 지금 많이 큰 건데…….” 내가 그렇게 멍하니 쓸데없는 말을 중얼거리자 슈카가 손을 저으며 말했 다. “아닙니다. 그런 말이 아니라… 휴, 매일같이 저를 때리고 괴롭히는 걸 인 생의 낙으로 삼는 더럽고 치사한 신관들이 득실거리긴 했어도 신전에 있을 때는 몇 끼의 밥이 나왔습니다. 신관의 괴롭힘에도 어떻게든 그 음식을 먹 었기에 제가 이렇게 번듯하게 키가 컸지, 아니었으면 저는 그 조그마한 채 로 영양실조 상태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괴롭힘 당하는 데 만 불만이 가득해서 재수없는 신관이 있는 줄만 알았지 음식이 나와 고맙 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겁니다. 아무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신전을 뛰쳐 나온 후 친한 사람도 없이 1년 동안 떠돌아다니게 되고서야 비로소 신전에서 제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 깨달았던 겁니다. 아무리 괴로워 도 그렇게 공짜로 밥이 나오는 곳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입니다.” “에…….” 슈카의 말에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저는 밖으로 뛰어 나가 홀로 1년을 지내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습니 다. 그렇게 신전에 맡기는 식이라도 카류리드 전하처럼 저를 도와주시는 분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까 저분의 말이 맞습니다. 저 같은 생판 모르는 저 같은 더러운 놈을 위해서는 아무리 도와줄 힘이 남아돈다 해도 베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더군요.” 이제 슈카는 부드럽게 웃음 짓고 있었다. “사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싶었어요. 전하가 어떤 분인지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신세 타령도 해보고 싶었고요. 역시 전하는 제가 이런 식으 로 말해도 전혀 화를 내시지 않는군요. 보통이라면 제가 처음 몇 마디 했 을 때 이미 건방진 놈이라고 경을 쳤을 텐데 말입니다. 헤헷… 실은 아까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도망칠 준비도 하고 있었답니다.” “헤에?”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자 슈카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전하는 소문처럼 그런 분이 아니세요. 저를 그냥 신전에 맡긴 일도 분명 나쁜 마음은 아니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 다. 사실 그래서 지금 리아 후작님이 모으고 있는 사병에 지원해 볼까 생 각 중이었답니다. 얼마동안 이 바닥에서 구르면서 주먹은 약간 쓸 수 있으 니까요. 아, 사병에 들어가는데 주먹과는 관계없을지도 모르지만.” “슈카…….” 나를 위해서 사병에 지원해 준다는 걸까. 나는 그 말에 찡해져서 너무나 감동했다는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슈카를 바라보았다. “하… 하하… 시… 실은 요즘 먹고 살길이 너무 궁해져서 위험하지만 사 병에나 지원해 볼까 하고 있었던 겁니다. 겸사겸사라고나 할까… 하하… 죄송합니다..” 슈카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를 위해서와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이유 중 어느 쪽이 먼저인 것인지 조금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나를 믿어준다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 나는 너무 기뻤다.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냥 고맙다고 말할 것이지 무슨 서론이 그렇 게 길어, 네놈은!” 알 아저씨의 투덜거리는 말에 슈카가 배시시 웃었다. “헤헤… 실은 언젠가 그때 일은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음, 그러니까 1년 전 신전에서 만났다면 원수처럼 으르렁거렸을지도 모르지만 이젠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지금은 너무 고마워하고 있거든요. 언젠가 제 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꼭 전하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 그런 일 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아니, 말만으로도 정말 고마워. 정말이야!!” 나는 정말 기뻐서 슈카의 가까이 다가가 소리쳤다. 모두가 날 죽일 놈이라 고 욕하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저런 말 한 마디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당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하… 하… 전하는 정말 귀족답지 않으시다니까요. 저 같은 평민의 말에 그렇게 감동하시고 그러세요. 제가 뭐 큰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건 관계없잖아?” 그 후 나는 계속 의자에 앉아 거의 해가 질 때까지 슈카와 이런 저런 이야 기를 계속 했다. 특히 신전에서 지내면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신 전의 상황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슈카의 말에 의하면 신전은 의외로 상당히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다. 3년 전 나는 슈카를 맡기기 위해서 신관의 돈을 내놓으라는 말에 머리에 스팀 이 받는 것도 꾸욱 참고 순순히 보석을 건넸다. 하지만 사실 신관도 기도 만 해서 돈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신전을 유지하려면 돈이 들 테니 기부하 는 셈치자 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들어보니 그건 완전히 오산이었다. 신전에는 영주의 영지처럼 그 신전에 딸린 땅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이 리아 영지에 있는 신전은 고대 유적을 신전의 건물로 할만큼 유명하기에 그 어떤 신전보다 넓고 큰 땅을 가지고 있으며 거기서 생각 이상으로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다. 게다가 보통 돈을 빌릴 곳이 없어 대부분의 신전에서 돈을 빌려주는 업무 도 약간 했는데 사람들이 돈을 값을 때는 그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웃돈을 조금 더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좋은 말로 ‘조금’ 웃돈을 받는 거지 사 실 고리대금업이나 다름없었고, 그런 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피 같은 돈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사실, 이르나크 세계에서는 표면적으로 절대 이자라는 것을 받을 수가 없 었다. 전생의 내가 살았던 토이렌에서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 이 자를 받는 것은 여기서는 정말 파렴치한 행위였다. 그것은 이곳 신전에서 퍼뜨리는 교리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일정 이상의 이윤을 취하는 것은 남 이 얻을 이윤을 뺏는다는 것으로 생각했고 또한 대부를 해주고도 딱 빌려 준 만큼만 돈을 돌려 받아야지 더 많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탐욕으로 생각 했던 것이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행복했느냐 하니 그것도 절 대 아니다. 이런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연스레 돈을 빌려주는 사람들은 적 어지게 되었고 돈을 빌려주겠다는 사람도 몰래 고이자를 받는 조건으로 빌 려주는 것이었다.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시선은 상업의 발전을 막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시선 이 발생하게 되는 중심지인 신전마저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고리대금 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고아원 일을 하는 건 사회적 시선에 겨우 하는 것에 불과했고 이미 신관들은 충분히 속물들이었다. 그들은 여러 가지 일을 벌려 돈을 벌어 수 많은 사치를 부리고 있었는데 그 수준이 귀족들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돈이 없다고 고아들에게 세 끼마다 딱딱 음식을 주지도 않았 고 잘 곳이나 옷 같은 것도 제대로 마련해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주 제에 아이들을 밥벌레라고 욕하며 굉장히 괴롭혔다고 한다. 특히 중간에 불쑥 들어온 슈카는 그 중에서 가장 많은 괴롭힘을 받는 아이였다고 한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이놈의 신전을 확 뒤집어 놓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 는 슈카와 한동안 신전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동안 신전에 한동안 욕을 하다가 우리들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슈카가 지내는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슈카가 프리란트님의 사병에 들어가 기로 결심했다고 말했기에 슈카의 짐을 챙겨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 던 것이다. 우리들은 지저분한 골목의 사잇길을 열심히 들어갔다. 그리고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건물 근처까지 도착했을 때 그곳의 지하 문을 열고 슈카가 말했 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에구, 별건 없지만 그래도 짐을 싸려면 시간이 좀 걸 릴지도 모르겠는데…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말이에요.” “내가 들어가서 도와줄까?” “윽, 관두세요. 카류님은 상상도 못하실 정도로 지저분하니깐… 게다가 여 긴 저 혼자 사는 것도 아니니까… 차라리 좀 지루하시더라도 밖에서 기다 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응… 알았어. 어서 나와.” 나는 약간 귀찮기도 하고, 사실 여기 바깥도 이렇게나 더러운데 안은 얼마 나 지저분하기에 저런 말을 할까 싶기도 해서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 다. 그렇게 지하로 들어가는 슈카를 보고 있는데 알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이제는 마음이 좀 풀렸니?” “예?” 알 아저씨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가만히 생각하니 슈카가 날 이해해 준다는 생각에 기뻐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짜증을 내고 문을 박차고 나왔 던 주제에 금세 그걸 잊어버리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사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모르겠다. 슈카가 프리란트님의 사병에 들어가면 뭐하나. 프리란트 님은 이렇게 모은 사병으 로 반역을 일으킬 생각일 것이다. 게다가 그 당사자인 나는 반역을 일으킬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무엇 때문에 슈카가 사병에 들어 간다는 말에 이렇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있는 건지 돌이켜보니 정말 황당해 졌다 그렇게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심각하게 나의 정신 상태를 되짚어 보고 다 시금 우울해하고 있다가 문득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정 신을 차렸다. “샤크 용병단의 알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카류리드 전하가 맞으시죠?” “응? 너흰 저택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 아닌가?” 알 아저씨와 나를 아는 척한 그들은 분명 어제 처음 도착했을 때 보았던 정문을 지키던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이런 곳까지 뛰어 오는 거지? “어째서 이런 지저분한 곳에 있는 겁니까. 빈민가인데…….” “뭐… 그러는 그쪽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병사는 병사답게 문이나 지킬 것이지.” “저흰 오늘 비번이거든요. 그리고 허크 대장이라는 사람의 부탁으로 한참 동안 당신을 찾고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을 당장 저택으로 어떻게든 끌고 오라고 하시더군요.” “허크 대장이? 나를 왜?” “잘은 모르겠지만 그 악명 높은 대마법사 류스밀리온이 허크 대장에게 마 구 화를 내는 장면을 봤습니다. 자칫하면 허크 대장이 큰일을 당할지도 모 른다는 생각에 이렇게 부리나케 당신을 찾은 것입니다.” “류스밀리온님이 허크 아저씨에게?” 나는 병사와 알 아저씨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혹시 내가 널 호위한다고 저택을 빠져나가서 그 일로 허크 대장에게 시 비를 거는 걸까?” “음, 사실 어제 아침에 자신을 제대로 호위하지 않는 은혜도 모르는 놈이 라고 뭐라 그랬었던 일도 있고… 그러고 보면… 알 아저씬 샤크 용병단에 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강한 용병이잖아요. 그런 아저씨가 류스 밀리온님을 호위하는 일에서 중간에 스리슬쩍 빠져 버렸으니 그 삐뚤어진 류스밀리온님이 화낼 만도 하겠어요.” “바로 그겁니다!! 에…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아요. 유명한 샤크 용병단이 계약을 마구 어기고 이 정도 일도 제대로 안 한다고 마구 화를 내더군요.” 병사는 우리들의 말을 들으며 맞장구를 쳤다. “으휴… 그 성격에 자신의 말대로 해주지 않으면 어쩌면 저택을 뒤집어 버릴지도 모르겠네요. 일단 빨리 저택으로 찾아가 보는 게 좋겠어요.” “아르디예프님도 있는데 제깟 놈이 뭘 어쩌겠어. 그리고 내가 가면 넌 누 가 호위하냐? 그런 건 내버려둬.” “그… 그런!! 카류리드 전하의 호위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허크 대장이 그래서 일부러 저희들을 보낸 겁니다.” “예, 맞습니다!! 그러니 호위 일은 걱정하지 마시고 어서 저택으로 돌아가 보세요. 늦었다간 그 류스밀리온이 무슨 일을 낼지…….” 류스밀리온이 저택에서 얼마나 난리를 쳤는지 병사들은 흥분해 어서 알 아 저씨를 보고 돌아가라고 사정을 했다. 어휴, 그 류스밀리온이라는 망할 영 감탱이는 왜 하필 이럴 때 리아 영지를 방문해서는 사람을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 “알 아저씨, 어서 가보세요. 사실 아직까지 리아 영지에서 제게 무슨 큰 위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사실 전 워프로 도망쳤기 때문에 수도에 서 추적자들이 오려면 멀었잖아요. 전 슈카를 기다렸다 함께 갈 테니 먼저 가보세요.” “야, 아무리 그렇다 쳐도 이런 곳에 저놈들을 어떻게 믿고 널 맡기고 간 단 말이냐. 그냥 무시해 버려. 무시.” “알 아저씨… 그런 말은 실례예요. 솔직히 프리란트님의 저택을 지키게 하는 병사를 아무나 뽑을 리가 없잖아요? 그들도 그만하면 굉장히 강한 거 라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알 아저씨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는 곧 한숨 을 쉬고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휴, 알았다. 알았어. 그렇지만 그 슈카라는 놈이 나오면 당장 저택으로 돌아와라. 괜히 여기저기 다른 곳으로 새거나 하지 말고 곧장 집으로 돌아 와야 한다, 알겠지?.” “그런 말 안 하셔도 누가 사탕 준다고 따라간다거나 어른 손놓고 있다가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예요.” 아직까지 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하는 알 아저씨에게 나는 생글생글 웃으 면서 장난스레 말했다. “야, 너희들 카류를 제대로 못 지켰다간 그날로 제삿날인줄 알아, 알겠 지?” “아, 알겠습니다!” 알 아저씨는 그렇게 병사들에게 으름장을 놓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면 서도 계속 뒤를 힐끔힐끔 보는 알 아저씨에게 나는 파닥파닥 손을 흔들어 주었다. “으음… 슈카는 언제쯤 나오려나… 류스밀리온님이 무슨 큰 일이나 저지 르지 않으면 좋으련만.” 나는 고개를 돌려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는 병사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예… 옙?” “응. 별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예에…….” 나는 그냥 혼자 가만히 서 있기도 뭣해서 알 아저씨 대신 나를 호위하기로 한 병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왠지 말을 더듬으며 나 와 대화하기를 어색해 했다. 내가 아무리 잡다한 화제를 꺼내 이야기를 걸 어 보았지만 제대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내가 왕자라서 저렇 게 말을 나누는데 어려워하는 모양이다. “에휴. 그렇게 얼지 않아도 되는데.” 나는 머뭇거리는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꽤 말발이 좋긴 하지 만 그것도 반대쪽에서 호응 해주지 않으면 전부 말짱 황이었던 것이다. 사 실 나의 말발은 상대편에서 투닥거리며 잘 받아쳐 주어야 더욱 빛을 발하 게 되는 모양이다. 류스밀리온님이나 한동안 만나진 못했지만 하르몬 선배 님, 에르가 형의 일을 생각하면서 나는 괜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나는 불굴의 의지로 포기하지 않고 병사들을 보고 한참 동안을 대 화하기 위해 씨름했다. 솔직히 그냥 가만히 서서 슈카를 기다리려니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이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끝까지 곤란해하며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데 별로 흥미 없어?” “아… 예… 아뇨!! 그게… 그… 기… 기다리는 분은 언제…….” “아, 이제 올라오겠지. …휴우. 보고 올까?” 계속 말을 거는 나와 즐겁게 대화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결국 대화를 나누는 것을 포기하고 터덜터덜 슈카가 들어간 지 하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이대로 그들과 이야기하려 하는 건 그들을 괴롭 히는 것밖에 되지 않는 듯해서 그냥 입 다물고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었 다. 사실 병사에 불과한 그들이 갑자기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왕자인 나와 대화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지하실 문의 문턱에 서서 지하실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이야 기 상대가 없어져 심심해진데다가 솔직히 이 정도면 슈카가 나올 때도 되 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해도 진데다가 그 지하실이 원래부터 그늘 진 좁은 골목 안에 있는 건물이라 안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로 어두우면 횃불이라도 하나 걸어둘 만도 하건만 역시 빈민가라 그런지 계단 에까지 횃불을 달 생각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횃불도 나무랑 약간의 기름 이 필요한 돈이 드는 물품이니 말이다. 솔직히 너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테지만 할 일도 없고 괜히 지 루해서 나는 계속 문턱에 매달려 아래를 보았다. 그러나 나의 생각과는 달 리 금방 뭔가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림자를 보며 나는 그것이 슈카임이 틀림없을 것이라 거의 확신했다. 그러나 조금 전에 슈카가 말하기를 자신 말고도 다른 사람이 살고 있다는 말이 생각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나는 바로 슈카를 부르기보다 한 손으로 지하실 문을 잡고는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어 그 그림자를 자세히 관찰했다. 그림자가 지하실 계단을 거의 다 올라와 나의 근처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겨우 스며드는 엷은 빛에 의해 그것이 슈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드디어 슈카가 왔구나 싶어 드디어 이 어색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 다는 생각에 병사들이 있는 뒤쪽을 바라보았다. 자기들끼리 쑥떡거리던 병 사들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그렇게 뒤돌아 자신들을 보고 있는 나 와 눈이 따악 마주치자 바로 시선을 피했다. 저렇게 불편해하는 병사들과 도 이제 곧 빠이빠이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지하실로 고 개를 돌렸다. 대체 빈민가에 살면서 뭐가 그렇게 가져올 것이 많은지 슈카는 한 손에 뭔 가 큰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좁은 계단을 올라오는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 다. 이젠 거의 나의 앞까지 온 슈카를 보고 짐 드는 거라도 도와줄까 싶어 서 손을 앞으로 약간 내밀어 슈카의 짐 쪽으로 내밀었다. “슈카…….” 그러나 나의 말소리에 고개를 든 슈카는 나를 보고 얼굴을 이상하게 일그 러뜨렸다. 그리고 갑자기 내가 앞쪽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잡아 빠르게 자 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나는 잠시 중심을 잃고 슈 카에게 안겨버릴 수밖에 없었다. “제… 젠장, 뭐야!” 나의 뒤쪽에서 갑작스레 알 수 없는 욕설이 튀어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내가 미처 뭐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갑자기 어깨로 부터 알 수 없는 뜨거운 통증이 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헉……!!” 나는 갑작스러운 고통에 나도 모르게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미 한번 경험 해 본 적이 있는, 결코 잊지 못할 그 끔찍했던 아픔이 다시 한번 왼쪽 어 깨에서부터 빠르게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으악∼!!” “아악!” 그러나 이런 나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건지 나의 어깨에 고통을 주 고 있는 무언가가 크게 비틀리며 거칠게 등 뒤 쪽으로 빠져나갔다. 덕분에 나는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그러나 문득 비명 을 지른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고통 속에서도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그렇게 눈을 뜬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가슴 주변을 새빨갛게 물들어가고 있는 슈카가 보였기 때문이다. “아… 아아…….” 슈카는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리고 웅크린 채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비명을 지르기보다는 자신의 피로 범벅이 된 가슴을 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고통스러움과 황당함, 그리고 놀라움에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어 신음 소리 한번 못 지르고 눈앞의 광경을 잠시 보고만 있었다. “히익∼!!” 그러나 슈카가 무언가를 놀라 또 한번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어 뒤쪽을 보았다. 나의 바로 뒤쪽에는 붉게 물든 검 을 치켜들고 당황한 듯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아까 그 병사가 서 있었다. “맙소사! 제대로 해. 저쪽 놈까지! 빨리!” “기다려봐! 젠장, 안 볼 때 깨끗하게 없앨 수 있었는데!” 뒤로 떨어져 있는 병사의 다급한 질책의 말에 이미 검을 들고 있던 다른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만을 토하며 잠시 이마의 식은땀을 닦고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나는 그제야 겨우 그 병사가 들고 있는 붉은 피가 묻은 검의 목표가 우리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머리 속이 백짓장처럼 새하얘져 버렸다. “카류리드!!” 그때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거의 찢어지는 듯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병사는 약간 치켜들었던 검을 딱 멈추고 자신의 뒤를 돌아보았다. “알?! 아니, 어째서!!” “히익?!” 병사들은 갑자기 나타난 알 아저씨를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인질로 삼을 생각도 않고 바로 검을 집어던지고 아저씨가 서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쳤다. “이 개자식들!!! 거기서! 죽여 버리겠어!! 거기 서!!!” 내 이름을 불렀던 알 아저씨는 욕설을 퍼부으며 검을 빼들고 도망치고 있 는 병사들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쿨럭… 허억…….” 그런 모습을 보다가 갑자기 내 앞에 앉아 있는 슈카의 신음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나도 피가 뭉클뭉클 배어 나오는 왼쪽 어깨를 더욱 감싸쥐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너무나 아파서 내 입에서도 신음 소리를 나오려 하고 있는데 슈카가 비명 같이 소리 질렀다. “싫어!!” 나는 눈을 뜨고 슈카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슈카는 피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는 자신의 가슴을 쥐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 질렀다. “싫어… 살려줘… 싫어!! 쿨럭…….” “슈… 슈카……!!” 나는 이제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슈카는 내가 어깨를 찔리면서 함 께 칼에 꿰여 버린 것이었다. 나는 슈카 덕분에 그만 균형을 잃어서 원래 그들이 노렸던 곳이 아닌 어깨를 찔렸지만 나의 바로 앞에 있던 슈카는 나 때문에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가슴을 찔려 버렸던 모양이다. 게다가 검을 난폭하게 뽑아내서 그런지 내 어깨도 그렇지만 슈카의 왼쪽 부분의 가슴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슈카는 금방이라도 죽을 듯이 숨을 껄떡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쿨럭. 쿨럭… 죽기… 싫어… 쿨럭… 살려줘……!!” “슈카! 슈카!!”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또 어깨가 너무 아파서 정신없이 슈카 의 이름만 불렀다. 슈카는 계속 눈물을 쏟으며 나에게 거의 절규하며 말했 다. “살려줘… 제발… 내가… 왜… 쿨럭… 죽기 싫어!! 무서워……!!” “슈카!” 나는 자신의 가슴을 보고 절규하는 슈카를 껴안고 소리쳤다. 슈카를 안으 면서 어깨에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지만 두려워하는 슈카를 보니 그럴 생 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딴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런… 내가… 미쳤지… 그런 짓을… 싫… 어… 내가 왜… 너 때문에!! 콜록…….” 죽는다. 슈카의 짤막짤막한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피로 범벅이 된 슈카는 얼마나 절망했는지 이제는 나 를 원망하기까지 하며 힘겹게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런 원망을 나는 충 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슈카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전생의 내가 죽을 때의 그 끔찍한 두려움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내가 환생에 대해 모를 무렵 자신 이 죽어간다고 생각하면서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사… 살려내! 나는… 쿨럭… 내가 왜!!” “슈카!!” 나는 슈카를 안고 소리쳤다. 내 말이 슈카에게 전해진다면!! 나의 말을 슈 카가 이해할 수만 있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무서워하지 않아 도 된다고!! “죽기… 싫…….” “괜찮아! 무섭지 않아! 두렵지 않아!! 아무렇지도 않을 거야! 슈카!! 슈카 !!” “싫어… 죽기 싫…….” 슈카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슈카를 더욱 껴안았다. 그리고 계속 괜찮을 거라고 소리쳤다.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슈카!!” “싫…….” “별거 아냐!! 무서워할 필요 없어!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슈카의 목소리가 조금씩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계속 소리쳤다. 어떻 게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조금이나마 전해주고 싶어 나는 끝까지 소리 질 렀다. 나의 생각이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슈카가 이렇게 절망하지 않아 도 될 텐데! “슈카!!” 나는 정신없이 슈카를 부여잡고 어떻게든 슈카를 도와주고 싶어 한참 동안 계속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군가가 나의 곁으 로 다가와 살짝 오른쪽 어깨를 건드렸다. 그러자 어깨에서 갑자기 따뜻한 기운이 퍼지며 극심한 어깨의 통증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차려.” 가라앉은 차분한 그 목소리에 나는 겨우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었다. 그리 고 그제야 내가 안고 있는 슈카가 힘없이 늘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슈카를 안은 채로 조금 고개를 들어 나에게 말을 건 사람을 바라보았 다. 내게 말을 건 자는 정말의 외의 인물이었는데 그는 원래대로라면 저택 에 있어야 할 류스밀리온이었다. “빌어먹을 자식!! 감히 카류를 건드려?!” 알 아저씨는 언제 붙잡았는지 맞아서 엉망이 된 병사를 하나 끌고 와서 나 의 앞에 패대기쳤다. 병사는 부들부들 떨면서 알 아저씨 쪽으로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사정을 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쇼…….” “대체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야? 말해!!” 알 아저씨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닙니다. 사주라니 그런 건 받은 적 없습니다…….” “그런데 왜 카류를 노린 거야? 아 자식아! 빨리 안 말해?!” 그 질문에 병사가 대답을 않자 알 아저씨가 흥분해서 그 병사에게 발길질 했다. 그렇게 몇 번을 맞은 후에야 병사는 알 아저씨 앞에서 벌벌 떨면서 겨우 말을 이었다. “마… 말하겠습니다!! 제발… 그러니까 어찌하다가 바… 반역을 일으킨 왕자라는 정보를 입수해서… 쿨럭… 단 둘이서만 저택을 나가는 것을 보고 사… 사실 수급을 들고 수도로 찾아가면 큰 사… 상을 받을지도 모를 거라 는 생각에 그만…….” “세상에!! 그것 때문에 슈카까지 죽이려 했다고?! 겨우 돈 몇 푼 때문에?!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그러고도 인간이냐고! 겨우 그런 돈 몇 푼 때문 에 다른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쉽게 죽이려 들 수 있는 거야? 자기는 죽고 싶지 않아 하면서 그런 짓을 하다니!” 나는 병사의 말을 채 다 듣기도 전에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깟 돈 때문에 나의 목숨을 노렸단 말인가? 그리고 슈카까지 죽이려 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들자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라서 당장이라도 저 병사에게 달려들어 칼을 박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 제발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세요 “ “이 자식아!! 내가 갈 때 뭐라고 했는지 그새 까먹었냐? 내가 카류를 제 대로 보호 안 하면 그날이 바로 제삿날이 될 거라고 했어, 안 했어! 이 죽 일 놈의 자식!! 그런데 감히 카류를 죽이려 하고도 네놈이 살기를 바래? 내가 네놈을 살려둘 것같이 보이냐?” 알 아저씨는 병사를 향해 그렇게 소리치며 발로 아주 사정없이 병사를 차 댔다. 병사는 알 아저씨의 그 발길질을 어떻게든 참으려고 엎드린 자세에 서 몸을 최대한 웅크리고 비참하게 살려달라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알 아 저씨는 내가 죽을 뻔했다는 것에 화가 났는지 계속 그를 때리면서 욕을 해 댔다. “살려… 커헉!!” 알 아저씨는 발 밑에서 엎드려 너무나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병사 를 보고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사정없이 구타하고 있었다. 슈카 를 죽인 놈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약간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알 아저씨를 말려볼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 들려 하는데 바로 그때 병사가 갑 자기 소리쳤다. “크흑!! 그, 그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크헉!” 그 병사의 말을 듣고 아주 조금 생겨나고 있던 동정심이 게눈 감추듯 사라 졌다. 사람을 죽이려 해놓고, 아니 이미 한 사람을 죽여놓고 자기가 뭘 잘 못했냐고 말하다니. 알 아저씨의 구타에 그렇게 처절하게 살려달라고 사정 하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도 자신 못지 않게 살고싶어한다는 건 모르는 건가? “하∼ 이놈 보게?” 알 아저씨는 그의 말에 무척 화가 났는지 발로 그 병사의 안면을 세게 찍 어버리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뭘 잘못해? 성의 주민을 지켜야 할 병사가 감히 왕족을 해하려 했고 무 고한 영주민을 죽였으면서 뭘 잘못해? 너 같은 인간 쓰레기는 당장 죽여 버리겠어!” 알 아저씨는 말을 마치자마자 당장 병사를 죽일 것처럼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류스밀리온이 완전히 흥분한 알 아저씨의 뒤통수를 세게 친 다음 그 특유의 말투로 빈정거리기 시작했다. “호위 대상이 이렇게 다쳤는데 범인에게 분풀이나 하고 앉아 있다니 도대 체 네놈은 뇌가 있기라도 한 거냐? 게다가 배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알아 보지도 않고 범인을 그냥 죽이려 들어? 자기가 돌대가리 용병이라는 걸 그 렇게 티내고 싶은 거냐?” “하지만 저 녀석이 카류를 죽이려 한 주제에 반성은커녕…….” 알 아저씨는 류스밀리온의 말이 억울했는지 칼로 병사를 가리키며 변명을 하려 했으나 류스밀리온은 그런 알 아저씨를 보며 더욱 빈정거릴 뿐이었 다. “멍청한 녀석. 어차피 죽을 놈이다. 저놈이 반성이라도 하면 살려줄 생각 이냐? 게다가 네가 여기서 저놈을 죽인다면 오히려 녀석에게는 편히 죽는 행복을 선사해 줄 뿐이다. 저택으로 끌고 가면 갖은 고문이 저놈을 기다리 고 있을 텐데 화가 난다면서 도와주려고 하고 있다니… 네 녀석 멍청한 건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어서 데려갈 준비나 해. 이 덜 떨어진 녀석아!” 류스밀리온이 그렇게 말하자 알 아저씨는 투덜거리면서 병사를 데려가기 위해서 그에게 다갔다. 그러나 그 병사는 그렇게 맞고도 아직 힘이 남았는 지 알 아저씨에게 반항하며 병사가 소리쳤다. “좋아! 쿨럭… 크흑… 죽을 목숨이다 이거지……!! 젠장… 좋아!! 나도 할 말은 하겠어!” 병사는 갑자기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째려보면서 말했다. “왕족이라고? …쿨럭… 누가 모를 줄 알아? 왕이 되겠답시고 형을 죽이려 다가 실패했다는 거 누가 모를 줄 알고?! 저 자식 때문에 곧 전쟁이 일어 날 꺼야! 그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지 알아? 그런데 나를 비난해? 이미 다른 곳의 많은 사람들이 너 같은 건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다고 그러는 걸 알고 있다 이거야! 내가 뭘 잘못했어! 저런 놈을 죽이려 한 것이 뭐가 잘못이냐고!” “이 미친 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알 아저씨는 거의 자포자기해서 나를 저주하는 병사를 다시금 병사를 발로 냅다 찼다. 알 아저씨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는 아까보다 더 심하게 거 의 죽일 듯이 병사를 구타하는 그 광경을 보면서 이번에 나는 그저 멍하니 앉아 있기만 했다. 바보같이 나는 지금 나 자신이 자신의 형까지 죽이려한 반역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 병사는 나를 죽여 그 포상으로 받을 돈도 노렸겠지만, 사실상 나는 나쁜 놈이 되어 있기에 병사의 입장에서 나 를 해치우는 일은 나름대로 정의로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내가 적 반하장으로 살인자라고 자신에게 욕을 하고, 알 아저씨가 그렇게 죽일 듯 이 발로 차댔으니 병사의 입장으로는 나의 이 말이 정말 억울하고 분통 터 질 일인 것이다. 나는 이제서야 겨우 현실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 들이 나를 증오하고 있으며 언젠가 나를 죽이기 위해 올 것이라고 언제나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나는 그것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 다. 이제까지 내가 당한 일이라곤 고작 마을에서 오가는 사람들이 심심풀 이로 나를 욕하는 것을 듣는 일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자신이 얼마나 지 독한 사람들의 증오 속에 서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나에게 칼을 들이미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때 나를 죽이려 하는 그 병사의 검을 보고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죽음 두려워해서가 아니다. 죽음 따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음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나 그 죽이려는 행위 자체에는 많은 의미가 있었다. 나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다른 사람의 그 지독한 악의에 질려버렸던 것이 다. “…….” 류스밀리온은 갑자기 멍하니 앉아 있는 나의 팔을 붙들고 거칠게 일으켜 세웠다. 덕분에 내가 안고 있던 슈카가 아무렇게나 땅바닥에 나뒹굴어 버 렸다. 나는 잠시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슈카를, 아니 슈카의 시체를 바라보 았다. 슈카가 죽어버렸다. 그렇게 죽기 싫어했는데, 그렇게 살고 싶어했는데 결국 은 죽어버렸다. 괜히 나와 함께 다니다가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나 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휘말려 나와 아는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죽어버린 것이다. 사실 죽음에 그렇게 큰 감흥은 없다. 지금의 나는 환생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죽는다해도 새로 태어날 것을 알기에 나는 죽음에 그렇게 절망 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슈카가 죽 음이라는 것에, 그것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절망했을지 이미 한번 죽음을 경험해 본 나는 누구보다도 그 감정을 잘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슈카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다. 사실 죽음 따윈 별것 아니라고 가 르쳐주고 싶었다. 죽음은 삶과 삶의 경계선일 뿐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의 마음은 조금도 슈카에게 전해지지 못했다. 나의 목소리에도 슈카는 계속 죽음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끝까지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고 있었다. 나의 몇 마디 말로 슈카가 나처럼 죽음에 의연해 지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문득 슈카의 시체를 보며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사람이 죽었다. 내 눈앞에서 진짜 사람이 살해당한 것이다. 내가 이렇게 계속 생각없이 행 동한다면 내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슈카처럼 이렇게 죽어나가게 될 것이 다. 내가 반역을 하지 않으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슈카처럼 자신의 죽음에 절망하다가 죽을 수밖에 없다. 죽음은 별것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죽음 에서 공포를 느끼며 결코 죽고 싶지 않아 한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 의 죽음마저 가볍게 여길 수 없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공포를 겪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의 형제들과 왕위를 놓고 싸워야 하는 반역을 내가 할 수 있을 까. 나는 결코 그들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비록 지금은 서로 이렇게 어긋 나 버렸지만 언젠가 오해가 풀릴 수 있을 것이라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 다. 그렇기에 어떻게든 그들과 대립하는 일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신의 죽음에 절규하는 슈카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아껴주는 사람들이 나의 탓으로 그렇게 절규하도록 슈카가 죽 을 때처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걸까. 사실 죽음 따윈 아무것도 아 니라고 말하며 그냥 그들의 절규를 무시해 버릴 수 있을까. 나는 슈카의 시체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몸을 돌려 류스밀리온이 인 도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지금, 누군가가 나의 탓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나는 이제껏 느끼지 못했던 끔찍한 불 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든 혼란스러운 생각을 지우려고 어서 그 자리를 벗어나려 발걸음을 재촉했지만 얼마 못 가 현기증이 나서 조금 비틀거리고 말았다. 마법 치료 를 받았지만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피를 흘렸기에 아직 이렇게 어 지러움증이 약간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자.” 류스밀리온은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 주면서 그렇게 짧게 한마디를 하고 는 저택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뒤쪽에서 알 아저씨가 뭔가 부시럭거리며 슈카의 시체를 수습하는 듯했지만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류스밀리온의 부축을 받으며 나는 말없이 저택으로 돌아갔다. 슈카의 일 이후 프리란트님이라든지 다른 사람들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상 당히 조심스러워졌다. 아마 슈카에 대한 이야기를 알 아저씨에게 들었기 때문이리라. 사람들은 내가 굉장히 상심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일주일 동 안 반역에 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솔직히 죽음에 대한 가치관이 바뀐 지 오래이기에 슈카의 죽음 자체에 그 렇게 상심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슈카의 죽음이 나로 인한 것 이었기 때문에 다른 때처럼 그 죽음에 담담할 수가 없었다. 슈카가 자신의 죽음에 괴로워한 것이 나로 인한 것이며 슈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곧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완전히 침울해진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굉장히 초조해하고 있었다. 당장에 슈카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목격하면서 빨리 무슨 일이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도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일주일이 흘렀다. 멍하니 창밖의 석양을 보며 그 일을 생각하며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알 아저씨가 들어왔다. “카류야. 잠시 나와봐라.” “알 아저씨? 무슨… 일이라도?” “그… 뭐라나. 어쨌든 누가 널 급하게 찾는구나. 혹시 우리를 속이는 걸지 도 모르지만 네 친구라고 하던데…….” 나는 친구라는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이런 곳에 나 를 찾아올 친구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알 아저씨의 안내 로 내가 들어선 응접실엔 프리란트님을 시작해서 류스밀리온까지 대부분 주요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이들이 전부 모일만큼 대단한 자가 누굴까 싶어 응접실 가운데에 놓인 소파 쪽으로 가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나 를 알아보고 이름을 불렀다. “카류!!” “디… 딜트라엘? 딜티!!”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딜티는 바로 나에게 달려오려 했지만 그를 구속하고 있는 병사들에 의해서 제지를 받았다. 아마 전의 슈카 사건으로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무조건 경계하기로 한 모양이다. 딜티 가 나의 친한 친구이긴 하지만 사실 그는 나를 매장하려 했던 트로이 후작 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들의 그런 행동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 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렇게 리아 영지까지 찾아온 딜티의 모습은 완전히 엉 망이었다. 귀족 가의 자제답게 언제나 깨끗하고 깔끔한 차림으로만 다녔던 딜티가 이상하게도 먼지를 뒤집어 쓴 지저분한 옷을 입은 상태였고 또 상 당히 피곤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딜티… 어떻게 여기까지… 또 모습은 왜 그래?” “카류!! 미안해, 카류.” 나는 갑자기 소리치는 딜트라엘의 말에 어리둥절해졌다. “미안. 미안해… 하지만 나는…….” 나는 고개를 숙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딜티에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딜티가 뭔가 극도로 불안하고 있는 것같이 보여서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 었기 때문이다. 내가 딜티에게 가까이 가는 것을 보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 이 다가가지 못하게 말렸지만 나는 그들의 만류을 뿌리치고 그에게로 다가 갔다. 나는 딜티의 앞에 몸을 숙이고 앉아서 그를 올려다보며 부드럽게 물 었다. “딜티…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차근차근 말해 봐. 응? 내가 들어줄게.” “그… 그게…….” 내가 가까이 다가가 말하자 이상하게도 딜티는 더욱 불안해하며 말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딜티.” 내가 조용히 그의 이름을 다시 부르자 딜티는 그제야 입을 열어 조용히 말 을 잇기 시작했다. “미안해!!” “응?” 나는 앞뒤없이 갑자기 사과를 하는 딜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 삼 년 전의 동굴 사건을 일으킨 사람이 우리 아버님이었어. 그때 네가 죽을 뻔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전부 아버님 탓이었어. 그리고 지금 네가 이렇게 된 것도 전부… 나의 아버님이 너에게 누명을 씌워 이렇게 만 든 거였어! 역시 네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는데!! 아버님이… 나의 아버님 이!!” 점점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하던 딜티는 떨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 다. “이미 알고 있었는걸. 네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잖아. 트로이 후작님을 이 해한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카… 카류야…….” 약간 안심한 듯한 딜티를 보고 나는 살짝 웃었다. 혹시 그것 때문에 나에 게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화를 낼까봐 저렇게 떨고 있었던 것일까. “그걸 말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러나 그저 의미없이 덧붙인 나의 말에 딜티는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잠 시 우물거리다가 다시 기어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님이…….” “응.” “아버님이 나를 죽이시겠대.” 갑작스런 딜티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후… 후후… 아버님은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 내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수 없대. 그래서 나를 죽이시겠대. 내 동생 카마엘과 그렇게 이야기하시더 라고…….” 놀라고 있는 나를 보며 딜티는 자조적인 표정을 지었다. “3년 전에 동굴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말이야… 그때 아버님은 나에게 그 여행을 가라고 권유까지 하셨어. 아버님은 내가 죽을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나를 그 동굴에 보내신 거야. 동굴을 무너뜨릴 계획을 하고 있 으면서도 나를 일부러 동굴로 보내셨어. 그래… 아버님은… 그렇게 오래전 부터… 친아들인 나를 죽이려 하고 계셨던 거야!” “딜티!!”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켜 딜티를 꼬옥 안았다. 트로이 후작이 딜티를 죽이 려 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 얽혀 자신 의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해야만 할 처지에 이른 딜티의 입장 따윈 사실 이 제까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단지 트로이 후작이 나쁜 놈이라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사실을 알게 된 딜티가 얼마나 절망했을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카류… 카류야. 나를 용서할 수 있어? 너를 이런 처지에까지 이르게 한 나를 용서할 수 있어?” “말도 안 돼. 네가 그런 것이 아니잖아.” “너는 반역자가 됐어. 왕이 되려고 자신의 형을 죽이려한 인륜을 저버린 파렴치한 배신자가 되어버렸어. 게다가 형제들에게 오해를 받아버렸고 얼 마 전에 처형당할 뻔하기까지 했잖아? 전부 나의 아버님이 그랬어. 나의 아버님이 너를 그렇게 몰고 갔던 거야. 그런데도 나에게 화가 나지도 않 니? 그런 아버님의 아들인 나를 용서할 수 있어?” “그렇지 않아. 네가 그런 것이 아니잖아? 용서하고 말고가 어디 있어. 너 는 내 소중한 친구잖아. 딜티…….” 가늘게 떨리는 딜티의 팔이 내 등을 감싸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버님이… 날 제거하시겠다고 하시기에 그냥 도망쳐 버렸어. 하하… 그 래서 나는 갈 곳이 없어. 내겐 돌아갈 곳이 없어졌어.” “걱정 마. 나와 함께 이곳에 있자.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야.”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어. 나에게 남은 건 이 제 아무것도 없어.” “내가 있잖아!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 나의 말에 불안해하던 딜티는 잠시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그러나 곧 나를 더 꼭 껴안고 얼굴을 파묻으면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후… 후후… 왕실의 평화… 왕국의 평화라…….” “딜티.” 나는 그렇게 계속 중얼거리고 있는 딜티가 너무 안쓰러워서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렇게 조용히 그를 안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딜티가 소리를 질렀다. “내가 왜 죽어야 하지?!” “딜티?” “나의 동생 카마엘이 말하기를 왕실의 평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이라더군. 나를 죽이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래! 정말 그런 거야?” “그렇지 않아, 딜티!” “아버님이 나를 죽이시겠대. 나를 제거하시겠대. 그런 건가? 나는 아버님 에게 다른 숭고한 목표를 위해서라면 돌 위에 난 잡초처럼 제거할 수도 있 는 그런 존재였던 거야?” “그럴 수 없어. 최소한 나에게 넌 그런 존재가 아니야!!” 나는 어떻게든 딜티를 위로하려 애썼다. 그는 자신이 친아버지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 충격은 아마 내가 형제들에게 오해를 받았을 때와 비교해 하나도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죽으라고 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딜티는 자신을 안고 있는 나를 살짝 밀어내고 고개를 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딜티의 눈동자를 보자 가슴이 아파왔다. 어째서 딜 티가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지. 왜 내가 이런 꼴이 되어야만 했는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어째서 이런 처지에까지 와야만 했는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가 슴이 미어져왔던 것이다. “절대로 잊지 않겠어. 지금 이 순간을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 딜티는 눈물을 머금은 눈동자로 나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너를 배신하지 않겠어. 나는 영원히 너만을 바 라보고 너만을 따를 것이다, 카류.” 딜티는 그렇게 말하고 나의 손을 가져가 그 손등에 입 맞추었다. 나는 그 런 어색한 모습을 보고도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조용히 딜티를 감싸 안았다. “나도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거야, 딜티. 나 역시 네가 너무 소중하니 까… 우리와 함께 있자. 그러면 서로 상처입지 않아도 될 거야.” 자신의 부모와 형제에게 배신당한 딜티는 누구보다도 그 배신을 당했을 때 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배신을 당하고 싶지 않았을 것 이다. 그랬기에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또한 배신하지 말 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버림받은 딜티는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딜티 는 이곳 리아 영지로 왔고 나를 따르겠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딜티에게 함께 있자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지독한 압박감을 느낀다. 나 는 이렇게 홀로 남은 도저히 딜티를 버릴 수 없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마 저 딜티를 버리면 그는 정말 좌절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서 반역을 하지 많고 가만히 있으면 딜티를 버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남은 길은 죽음뿐이니 까. 이미 나 때문에 슈카가 죽었다. 나에게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멍청하 게 현실을 피하기만 하면 슈카처럼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나갈 것이다. 나 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과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모두 개죽음을 당하 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대로 나의 형제들과 싸우게 된다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이대로 반역을 하겠다고 일어난다면 그들은 절 대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내가 정말 왕이 되고 싶어했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나는 영원히 그들과 오해를 풀 수 없을지도 모 른다. 나는 영원히 그들의 끔찍한 증오를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상냥했던 나의 형제들은 영원히 그 증오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형제들과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이런 딜티와 모두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나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 나의 앞에는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림길이 놓여져 있었지만 절망적이게도 내가 갈 수 있 는 길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밀려드는 불안감에 초조함에 나는 딜티를 더욱 꼭 껴안았다. 이르나크의 장 Part 29 즐거운 날 "카류. 그렇게 노인네같이 뒷짐지고 걷지 말고 어서 이리로 와!" "아...응, 알았어. 딜티." 나는 점심을 먹자마자 내 방으로 쳐들어 온 히노 선배와 딜티와 함께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 고 있었다. 방안에 처박혀 골치 아픈 생각만 하다보니 머리가 용량초과로 터져 나갈 것 같 아 친구들의 부름에 응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언제 수도에서 보낸 암살자 비슷한 것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이라 저택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서 여기 저택 안을 돌아다니는 것으 로 만족해야 했지만 리아 저택도 정말 어마어마하게 넓었기에 충분히 산책로가 되어 주었 다. 우리들의 뒤에서는 알 아저씨가 완전히 밀착 취재가 아닌 호위를 하고 있었는데 아저씨는 저택의 시종이 약간 가까이 오기만 해도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저번에 나를 해하려 했던 자 가 저택의 병사였기에 그렇게 바짝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모두를 의 심하다 보면 끝이 없을 텐데 말이다. "알 아저씨.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무슨 소리를 하십니까! 휴우.. 저번에 바보같이 제가 카류 님의 곁을 떠났던걸 생각하면 저 자신을 먼지나게 패주고 싶을 정도입니다. 걱정 마십시오! 다시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 다!" 알 아저씨는 곁에 함께 다니는 히노 선배와 딜티 때문에 나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어 색하지도 않은지 상황에 따라 저렇게 자유자재로 말의 높낮이를 바꾸는 알 아저씨와 다른 용병 아저씨들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신기해 죽을 지경이었다. 역시 산전수전 다 겪은 용병 이라 그런 것일까. "고마워요. 아저씨. 그래도 아저씨도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잖아요." "지금 제 실력을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래봬도 내가 용병 계에선 끝발 날리는 존재라고요. 훗, 사실 왕궁의 웬만한 기사도 충분히 상대가 가능한 실력이죠." "알긴 알지만서도...하하..." 나는 알 아저씨를 보고 오랜만에 살짝 웃었다. 역시 저렇게까지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어 준다는 건 너무 기쁜 일이다. "카류야. 이젠 좀 기분이 나아졌니?" 나의 웃음소리에 히노 선배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아, 히노 선배... 그냥..." "에휴, 카류. 아직도 히노 선배야? 여긴 학교가 아니잖아. 게다가 학교를 마친지가 얼마나 오래 지났는데." "하지만 딜티. 갑자기 히노 양이라고 부르는 건 정말 이상한걸." "나는 아무래도 좋아. 카류." 앞서가던 히노 선배는 내 말에 그 자리에서 뱅글 뒤로 돌아 고개를 왼쪽으로 살짝 움직이며 방긋 웃었다. 그 모습이 정말 너무 귀여워서 나는 정말 오랜만에 히노 선배를 꽉 껴안아주 었다. 거의 무의식에서 나온 행동이라고나 할까. "으윽! 히노 선배! 여전히 정말 귀여워요!!" "야아!! 카류!" "허...허헉!! 버...벌건 대낮에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의 행동에 딜트라엘과 알 아저씨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흥분하여 소리를 쳤다. 확실 히 3년 사이 히노 선배는 굉장히 귀여워... 아니, 아름다워졌다. 동굴에서 히노 선배를 보고 그저 어린애라 치부했던 알 아저씨도 지금 그녀에게 이렇게 넋이 빠질 정도로 말이다. 히노 선배가 사뿐 사뿐 걸어가면 그 주위의 사람들이 우우우 고개를 돌려 뒤돌아 볼 정도로 그녀 는 정말 극도의 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문득 히노 선배를 보다가 나는 약간 기분이 우울해 졌다. 이렇게 귀여운 히노 선배이니 이런 일이 있지 않았다면 루브 형이랑 결혼해서 아니, 누구라도 좋은 사람 만나서 굉장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아..." 또 다시 골치 아픈 일이 떠올라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내게 안겨있 던 히노 선배의 걱정스런 눈동자와 따악 마주치고 말았다. "하...하하... 역시 전 좀 더 커야겠어요. 히노 선배랑 눈 높이가 똑같네요. 이거 남자체면이 말이 아닌걸?" 나는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히노 선배에게 괜시리 웃으며 변명을 했다. "이렇게 같이 나왔으니 오늘 하루는 즐거운 생각만 하자. 카류. 그래, 오늘은 하루종일 즐거 운 날로 정하고 마음껏 즐기는 거야." "맞아, 카류야. 이렇게 날씨도 좋잖아? 즐거운 날로 해.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마!" "즐거운 날? 참, 아직 애들이라 그런가... 하지만 뭐, 나쁘진 않겠지요." "하하... 응." 나는 우울해 하는 나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보고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즐거운 날이라. 에잇, 나도 몰라! 어차피 고민해봐야 당장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내일이 어떻게 되든 오늘 하루만은 그 생각은 그만 하자. 나는 그들과 저택을 아주 한바퀴 뺑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정문으로 다다랐 을 때 이상하게 뭔가 시끌벅적하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쪽으로 다가갔다. "에, 무슨 일일까?" "잠깐,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마구 다가가시면 안됩니다. 카류 님." "아, 예."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알 아저씨의 말을 듣고 약간 쑥스러워져 발걸음 을 멈추고 살짝 뒤로 빠졌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 자신의 처지를 모르다니, 이 멍청한 녀 석. "무슨 일이냐?" 알 아저씨가 문 밖에서 망토를 둘러쓴 어떤 남자와 실랑이하는 병사를 향해 큰소리로 물었 다. "아, 그러니까 이 사람이 다짜고짜 리아 후작 님을 만나겠다고 소란을 피워서..." "저...전하?" 병사가 우리들을 보고 뭔가 해명의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망토를 쓴 남자가 나를 보며 신음 소리처럼 짧게 말했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제대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어렴풋이 들려 온 그 목소리에 나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참고 가만히 서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자 그 남자는 천천히 자신의 쓰고 있는 먼지로 엉망이 된 망토의 후드를 조용히 뒤로 넘겼다. "아...!" 나는 곧바로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나는 문 바로 앞에까지 다가가 철창을 붙잡고 크게 소리질렀다. "디트 경!!" "아니, 어떻게... 디트리온 경께서 이 곳에...."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디트 경이 바로 나의 앞에 와 서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지만 나의 옆으로 뛰어오는 알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디트 경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디트리온 경? 정말 어떻게 이곳까지!!" "아, 이럴 것이 아니라... 이봐, 어서 문을 열어라. 어서." 뒤이어 따라온 히노 선배와 딜트라엘도 놀라서 디트 경을 향해 질문을 던졌고 병사에게 명 령해 문을 열도록 명령했다. "기...기다리십시오. 딜트라엘 님! 갑자기 그렇게 그러시면...!" 딜트라엘의 말에 알 아저씨가 약간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괜찮아요! 디트 경이라고요! 알잖아요, 아저씨!!"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혹시...혹시 모르잖습니까. 일단 처음 딜트라엘 님이 오셨을 때처럼 구속시키는 게 우선입니다!" "아저씨!!" 나는 알 아저씨의 말에 약간 발끈하여 소리쳤다. "제가 여기 철창에 매달려 있는 게 안 보이세요? 저 같으면 이때 칼을 뽑아서 철창 사이로 콱 찔러버리겠어요." "윽! 카류 님!" 내 말에 알 아저씨가 기겁을 하면서 날 철창에서 떼어냈다. "...아저씨 ...그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디트 경이 그럴 리가 없다는 뜻이라고요." 나는 반쯤 알 아저씨에게 안겨서 중얼거렸다. 나를 위해 주는 것 다 좋지만 알 아저씨는 정 말 너무 과보호다. 하긴 철저한 교육을 받은 병사들까지 배신을 때릴 정도니 알 아저씨가 일일이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상대가 다름 아닌 디트 경인데 말이야. "저는 괜찮습니다. 카류 님. 일단은 그렇게 하세요." 디트 경은 알 아저씨에게 안긴 채로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살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음, 좀 불쾌하시더라도 절차대로 해야 합니다. 일단은 카류 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니까요. 그런 눈으로 보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카류 님. 이건 제 의무라고요!" 알 아저씨는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째리는 나를 보며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병사들을 시 켜 검 같은 것을 전부 압수하고 다른 병사 4명의 감시를 붙여 전에 딜트라엘과 처음 만났던 그 응접실로 갔다. 알 아저씨는 계속 디트 경을 경계하며 내가 그의 곁으로 가지 못하도록 멀찍이 떼어놓았다. 아무래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할 필요 있을까. 감시도 4명이나 붙이고, 칼 종류의 흉기도 전 부 압수했으면서 말이야. 하긴 디트 경이 좀 강하긴 강하지. 헷헷. "아, 카류 님!" "프리란트 님. 드리크 경! 오셨네요!" 프리란트 님과 드리크 경이 들어오자 곧 아르 할아버지와 다른 중요인사들도 하나 둘 씩 응 접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류스밀리온도 나의 근처에 뻔뻔스럽게 떡 하니 앉아 있 었는데 8서클 마법사라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서 별로 관계도 없는 주제에 꼭 끼어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프리란트 님은 애써 류스밀리온을 말리지 않았는데 아마 이런 식 으로 개입하게 해서 어떻게든 그를 우리 진영으로 끼어 넣고 싶어서인 듯 했다. 정말 그가 우군이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류스밀리온이 워낙 감 잡기가 힘든 인간인지라 뭐라 말하기 힘 든 상태였다. 정말 소문처럼 괴팍하고 제멋대로 인 것 같으면서도 의외로 또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랄까. "디트리온 경. 이렇게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네. 여전히 건강해 보이군." "아, 리아 후작 님." 사람이 다 모이자 프리란트 님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이봐. 그런 겉치레 인사는 전부 집어치우고 빨리 본론부터 얘기해. 나는 그런 잡소리를 들 으면 신경질이 나는 체질이라 말이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성질 더러운 류스밀리온 이 끼어 들어 초칠을 했다. "류스밀리온 님! 나이도 지긋하게 드신 분이 웬 참견을 그렇게 잘 하세요? 참견을!" "뭐야? 내가 어디 틀린 말했느냐? 그래, 그런 겉치레 인사를 하면 어디서 돈이라도 떨어져? 눈구멍이 뚫렸으면 저 놈이 팔팔한 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무슨 잡소리가 많으 냔 말이야." "아, 그것도 모르셨어요? 하긴 류스밀리온 님이 언제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하셨어야지 말 이에요. 그런 겉치레 인사는 처음 대화를 함에 있어 사람들을 서로 친근하고 기분 좋게 하 는 작용을 함으로서 나중에 실제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갔을 때 원활한 의사소통을 하게 해주는데 많은 도움을 준답니다. 아시겠어요?" 내가 류스밀리온을 보며 완전히 전투모드로 돌입하자 프리란트 님이 헛기침을 하며 내게 눈 짓을 했다. 하긴 이런 자리에서 그러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겠지. 마음이 넓은 내가 참자, 참어. "저... 류...류스밀리온... 님?" 그러나 나의 말에 디트 경은 얼굴빛이 완전히 변해버렸다. "설마..." "네. 저 분이 진짜 그 8서클의 대마법사 류스밀리온 님이십니다." "에..? 그...그런... 카...카류 님?" 프리란트 님의 확인사살에 디트 경은 류스밀리온과 나를 번갈아 보며 굉장히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디트 경은 내가 류스밀리온과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불안했던지 계속 내 쪽 을 보면서 뭐라 말을 하려 하다가 살벌한 류스밀리온의 시선과 마주치고는 곧 입을 다물었 다. 그러고 보면 디트 경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다. 그만큼 세간에 퍼져있는 류스밀리 온의 악명은 정말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내가 그 동안 그렇게 류스밀리온에게 계속 대 들었던 것도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용병 아저씨들 등의 믿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지 결코 그의 무서움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금 지내다 보니 의외로 그는 생각만 큼 그렇게 막 나가는 인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 그렇게 나를 본 것이 영광이냐? 말까지 더듬을 정도로?" 류스밀리온이 살벌하게 디트 경을 째리는 것을 보고 나는 또 한번 전투의지를 불태우며 그 의 말을 맞받아 칠 준비를 했다. 그러나 프리란트 님의 다음 말에 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흠, 그러면 정말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세. 류스밀리온 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 니까. 디트리온 경?" "네, 리아 후작 님." "내가 알기로는 카류 님께서 붙잡히신 후 카류 님의 호위기사였던 디트리온 경도 당연히 함 께 구속당할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는데...." 프리란트 님은 날카롭게 디트 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이 곳까지 올 수 있었는지 여기에 대해 해명해줄 수 있겠나?" 갑자기 살벌해지는 분위기에 나는 할말을 잃었다. 저렇게 디트 경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이 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나의 호위기사이기도 하니 디트 경도 그렇게 쉽게 풀려 나오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이기까지 하진 않겠지만 이렇게 쉽게 리아 영지까지 가도록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음이 분명한데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일까. "...기사의 서약을 했습니다." "서약?" 기사의 서약이란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하는 서약으로 명예를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 기는 귀족 특히 기사들에게는 절대적인 서약이었다. 기사가 된 이상 그 서약은 깨어선 안 되는 절대적인 약속인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떤 서약을 했단 말인지. 나는 약간 불안감을 느끼며 디트 경을 바라보았다. "왕자님들과 공주님들 앞에서 반역자가 된 카류 님은 잊고 제1왕자이신 루브 님을 영원히 따르겠다고 정식으로 기사의 서약을 했습니다." "지금 여기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의가 무엇이지!?" 디트 경의 말이 끝나자 응접실 내의 사람들이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도 드리크 경이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서서 약간 화가 난 어조로 디트 경을 보고 물었다. "그러고도 이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리아 영지로 왔다는 말은...?" 그러나 드리크 경의 질문에 답한 것은 류스밀리온이었다. "기사의 서약을 깨겠다는 말로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류스밀리온의 말에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디트 경에게로 모아졌다. 디트 경 은 조용히 눈을 감고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곧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저는 기사로서의 명예를 버렸습니다. 저는 카류 님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명예를 위해서 죽어버린다면 저는 더 이상 카류 님을 보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에 게는 기사의 명예보다 카류 님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나는 정말 놀라버렸다.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겠다는 말을 버릇처럼 디트 경에게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해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일이 알려지면 디트 경은 다른 사람들의 멸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이유가 옳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기사의 서약을 깬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수치스러운 일로 치부되 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고 강직한 귀족 기사들은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애초부터 서 약을 하지를 않았으며, 또 그런 서약을 깰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서약을 깨더라도 그 기사는 서약을 깬 이유야 어찌됐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멸시와 비난을 받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깨어서는 안 되 는 맹세. 그것이 기사의 서약인 것이다. 그만큼 기사의 서약을 절대적으로 여겨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나 형제들도 그 서약만을 믿고 디트 경을 내버려두었음이 분명하다. 고지식한 디트 경이라면 그런 서약을 하느니 차 라리 그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할 만도 하건만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해서 결코 해서는 안될 거짓 서약을 하고 후일 있을 모든 수모를 감수하면서까지 리아 영지로 찾아 온 것이다. "디트리온...!!" "그만둬요!" 불쾌하다는 듯이 잔뜩 표정을 구기고 뭐라고 질책의 말을 하려고 하는 드리크 경을 보고 나 는 다급히 끼어 들었다. "드리크 경. 지금은 한 사람이라도 부족한 때가 아닌가요? 그렇게 일일이 형식에 구애받을 여유는 지금 없잖아요?" "카류 님! 기사의 서약을 그렇게 간단히 보시면 안됩니다. 그런 식으로 기사의 서약을 어기 는 것을 내버려두게 된다면 그 서약은 더 이상 힘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서약을 어겨버려도 된다면 애초부터 이 서약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절대 어길 수 없다는 전제가 있음으로서 이 서약이 의미를 가지게..." "이론은 나도 알아요!" 나는 일어나서 디트 경 쪽으로 갔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디트 경을 보며 나는 그에게 더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디트 경." 내가 무릎을 꿇어 그의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그를 올려다보자 디트 경이 놀라 나를 일으 켜 세우려 했다. "카류 님...!!" "내가 이기적이라는 거 알아." 나의 말에 디트 경이 잠시 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이런 인간이니까. 나는 사실 디트 경이 기사의 서약까지 어기고 나를 찾아준 것이 너무나 기뻐."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호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끊임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나를 위해 한 나라의 최고 마법사라는 명예를 버리고 반역자가 되어버린 아르 할아버지, 나를 위해 자신의 일을 버리고 나를 호위하겠다고 해준 알 아저씨. 오직 나 를 위해 주는 너무나 친절하고 상냥한 또 다른 많은 사람들. 그리고 나를 위해 결코 여겨서는 안될 기사의 서약을 어겨버린 디트 경. 나는 오늘 또다시 새로운 빚을 지게 된다. "디트 경이 나에게 준 만큼 나도 언젠가 꼭 디트 경에게 보답하겠어. 반드시!!" "카류 님...." 디트 경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게, 하지만 약간은 떨리는 손으로 나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정말 디트 경이 나의 곁으로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했지?" 어느새 다가왔는지 히노 선배가 나를 바라보며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예. 히노 선배." 사랑스러운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도 빙긋이 웃어 보였다. 저녁을 먹은 다음, 나는 디트 경과 조금 전 산책했을 때 나왔던 인원으로 다시 정원으로 나 갔다. 드리크 경과 몇몇 사람들이 상당히 좋지 않은 시선으로 디트 경을 보고 있었기 때문 에 그들의 시선을 피하느라 잠시 밖으로 빠져나갔던 것이다. 디트 경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이해는 하지만 거짓으로 기사의 서약을 한 디트 경을 곱게도 봐줄 수 없는지라 그렇게 몇몇 사람들이 디트 경과 가까이 하는 것을 계속 꺼려하고 있었다. "디트리온 경! 힘내! 이 세상에는 우선 순위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맞아. 그렇게 우울해하지 마." 우리들과 함께 나온 딜티와 히노 선배가 아직까지도 약간 어두워 보이는 디트 경을 보고 말 했다. "나도 카류를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그런 서약을 할 수 있어. 그러니까 우울해 하지 말아." "딜티. 그런 말은 하지마. 기사의 서약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잖아." 나는 사실 속으로 상당히 기쁘면서도 형식적으로 딜티를 만류했다. 솔직히 공공 연연하게 저런 소리를 하는 건 딜티를 위해서도 좋은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싫어. 나는 너만 따르기로 했으니까. 기사의 서약 따위가 너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지. 그 어떤 명예보다도, 나의 목숨보다도 네가 훨씬 더 소중해." "디...딜티..." "맞아. 나도 그런걸? 카류. 할 수만 있다면 나도 목숨을 바쳐 너를 지키고 싶어." "히노 선배..." 거의 비슷한 또래의 딜티와 히노 선배에게 저런 소리를 듣자 엄청나게 쑥스러워서 몸이 다 뒤틀릴 정도였다. 저번에 딜티에게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분 위기를 타서 그렇게 어색한 것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벌건 대낮에 갑자기 저런 소리를 듣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알 아저씨라던가 아르 할아버지에게 상습적으로 지 켜주겠다느니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들은 어른이라고 할까. 어떤 의미로는 원래부터 보호 해주어야 할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까지 쑥스럽지는 않았는데 이번의 그들의 말은 정말 견 디기 힘들 정도였다. "딜티... 히노 선배... 그... 그런 말은 그만둬요. 우린 친구잖아요?" "친구는 이런 말하면 안돼? 이야, 쑥스러워 하는 카류리드라니 이거 세기의 볼거리 아냐?" "맞아, 맞아. 저것 봐, 얼굴이 저렇게 빨개졌어! 신기해라." "딜티!!! 히노 선배!!" 나는 정말 너무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딜티를 보고 빽 소리질렀다. 그러자 딜티와 히노 선배 가 재밌다는 듯이 웃으면서 도망갔다. 잠시 흥분해서 서라고 소리 지르면서 그들을 쫓아 몇 발자국 뛰어가다가 문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뒤를 돌아보자 정말 쪽 팔리게도 킥킥거 리고 있는 알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으...으으....왜 나만 갖고 그래! 정말 미웟!" "푸하하하하!!!" 내가 머리를 쥐고 너무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생각 없이 애들 같은 소리를 지껄이자 그 말을 들은 알 아저씨가 결국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알 아저씨!! 정말 너무해요. 아니, 으... 좀 못들은 척 해주면 안돼요?" "푸할할할.. 그..그래.. 못 들었다. 못 들었어!! 푸하하하!!" 유일하게 내 편이 되 줄 것 같던 디트 경마저 입을 막고 웃음을 참고 있어서 나는 그만 좌 절하고 말았다. 내가 이렇게 씹혀보기는(?) 정말 오랜만이구나. 디트 경을 위로하는 일이 왜 나를 놀리는 일로 바뀌는 거야! "아하하!! 카류야, 이거 정말 재밌다!! 심심할 때마다 써먹어야겠네? 그쵸? 히노 양?" "정말이야. 딜티." "친구의 호의에 쑥스러워하는 이 순수한 마음을 이렇게 마구 짓밟다니!! 그러다가 제가 삐 뚤어지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예요?" "꺄하하... 이런 부끄럼쟁이를 어떻게 책임을 지지?" 괜히 뾰로통한 척 하는 내게로 다가와 히노 선배가 뒷짐을 진 채 상반신만 약간 앞으로 내 밀고 함박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보자 나의 몸 어딘가에 장치되어 있는 특수 센서(?)가 빠 르게 발동해서 나는 자동적으로 히노 선배를 콱 껴안았다. "어쩜 이렇게 귀여울까! 아주 내 딸로 삼아버릴까 보다!!" "콜록... 카류야.. 그럴 때는 내 아내로 삼아버릴까 보다 라고 해야하는 거 아니냐... 무슨 언 어선택을 그렇게 하는 거니?" "뭐, 어때. 귀엽잖아? 자아~ 이리 와~ 귀여운 딜티~ 너도 내 아들 할래? 내가 히노 선배만 가지고 그러니까 질투하는 거지?" 내가 다음 차례로 딜티를 껴안으러 슬슬 이동하기 시작하자 딜티도 내 생각을 어느 정도 눈 치를 챘는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우...웃기지마. 나보다 어린 아버지는 거절이다!" "정신연령은 높다는 게 아니겠니~ 응~?" "푸핫!!! 여러분들 언제나 그런 식으로 노는 겁니까?" 나와 딜티를 보고 알 아저씨가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시군요. 카류 님도. 다른 분들도요." 디트 경은 우리들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뭐, 조금 바보같이 굴긴 했지만 그래도 디트 경이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아 나도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우리들은 계속 장난을 치면서 걷다가 기합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 다. 원래는 정원 비슷한 용도로 쓰였을 듯한 거대한 풀밭이 병사들의 훈련소로 쓰이고 있었 는데 그곳에서 병사들이 전부 구슬땀을 흘리며 검의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아... 리아 후작 님의 사병인가?" "최근 새로 모은 사병이지. 지금 훈련시키는 중이야. 가끔씩 내가 봐주기도 한다고." "딜티, 네가?" "너도 내 검 실력은 알고 있잖아? 게다가 검과 전술만은 제대로 배워두라고 매일 같이 아버 님이... 독촉하셨으니까." 딜티는 아버님이라는 말에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다. 이렇게 쾌활한 채 하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렇게 갑자기 아버지의 일을 잊으라는 건 무리일 것이다. 우울해 하는 딜티를 보고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울적해졌다. "디트 경! 어때요? 디트 경도 굉장히 검술을 잘한다고 하시던데." 어두워지는 분위기를 밝게 해보려고 딜티가 디트 경을 보고 말하는 것을 보고 나도 어떻게 든 맞장구를 쳐주려고 입을 열었다. "그럼! 디트 경이 얼마나 강한데! 왕족의 호위기사를 할 정도인걸. 사실 말이야, 디트 경은 이런 제6왕자의의 호위 기사 같은 게 아닌 곧 왕이 될 루브 형의 호위기사가 될 수도 있었 다고들...." 나는 말하다가 곧 뒤끝을 흐렸다. "...하더라고....하하.." 나는 주위의 사람들을 보고 애써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젠장, 이 바보 같은 놈... 평소엔 그 렇게 말을 잘하다가도 꼭 중요한 순간에서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한다니까. "카류야."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는 나의 바로 앞으로 히노 선배가 걸어왔다. 그리고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가까이로 바싹 당겨온 다음 말했다. "우울한 일은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말했지?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말이야." 나는 히노 선배의 단호한 금빛 눈동자를 잠시 응시하다가 그녀의 이마를 머리로 콩 찍었다. "아얏!" "으음? 못써요, 히노 선배! 외간 남자의 얼굴을 그렇게 가까이 대다니! 그렇게 대담하게 굴 다가 누가 잡아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세요?" "아~아니, 어째서 히노 선배가 너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거야!? 매일같이 히노 선배 가 시집도 못 가게 안아대는 게 누군데!? 히노 선배가 저렇게 대담한 것도 알고 보면 다 네 탓이라고!!" 이마를 손으로 감싸고 있는 히노 선배를 뒤로 숨기면서 딜티가 나에게 마구 쏘아댔다. "음, 이것만은 정말 할 말 없는 걸. 어쩌지? 이대로 뒀다가 히노 선배가 어떤 놈팽이에게 끌 려가기라도 할까봐 걱정이라니깐." 우리들은 서로 웃으며 농담을 했다. 그래, 즐거운 날. 오늘은 즐거운 날이야!! 쓸데없는 일은 생각하지 말자. 우리들은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저택을 뱅뱅 돌아다니면서 놀다가 프리란 트 님이 너무 늦었으니 그만 들어가라는 말을 듣고서야 저택 안쪽으로 들어왔다. "잘 자요! 딜티! 히노 선배도요." "응, 너도 잘 자." "좋은 꿈 꿔. 카류." 서로 인사를 한 뒤에 겨우 자신들의 방으로 돌아가는 히노 선배와 딜티를 보고 프리란트 님 이 한숨을 쉬며 우리 쪽을 바라보았다. "음? 그런데... 알과 디트 경은..." 프리란트 님은 문득 나의 곁에 서 있는 알 아저씨와 디트 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내가 요즘 굉장히 위험해져 있는 관계로 나의 호위 역인 알 아저씨도 나의 방에서 함께 침식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원래 호위 역인 디트 경이 돌아왔으니 알 아저씨는... 가만히 생각하니 디트 경이 돌아왔다고 이제까지 날 지켜준 알 아저씨한테 그만두라고 해고 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그렇다고 일부러 나를 지키러 온 디트 경에게 이미 나의 호위 자 리는 누가 벌써 차지했으니 다른 일을 하라고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같이 가죠, 방이 얼마나 넓은데요! 모두, 괜찮지요?" 나는 프리란트 님이 알 아저씨에게 뭐라고 말하려는 것을 보고 대뜸 끼어 들어 그렇게 말했 다. 아마 프리란트 님의 입장에서는 이제 그만 알 아저씨는 떨어지고 디트 경이 나의 호위 를 맡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알 아저씨가 아무리 믿을만하고 실력이 좋은 사 람이라지만 사실 그는 평민이었기 때문이다. 프리란트 님도 어쩔 수 없이 알 아저씨를 나의 호위 역으로 붙이기로 동의한 것이지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잘 때도 한 방을 써야하는 호위 병을 평민으로 붙이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류 님." "네? 프리란트 님? 왜 그러세요? 저를 호위해주는 사람이 둘로 늘었으니 정말 든든해요. 그 렇죠? "예. 그런데..." "이제 디트 경까지 있으니 제가 다치는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시죠? 프리란트 님?" 나는 프리란트 님이 알 아저씨에게 뭐라고 하기 전에 원천봉쇄를 하려고 프리란트 님의 말 을 자꾸 끼어 들었다. 내가 계속 자신의 말을 방해하자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쉬고는 결국 은 나의 말에 승복하고 말았다. "휴우...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에 경계해 주십시오. 카류 님." "네. 프리란트 님.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래도 프리란트 님은 아직 포기하지 못했는지 계속 알 아저씨를 보고 눈짓을 하다가는 곧 자신의 방 쪽으로 돌아갔다. 프리란트 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이제 와서 알 아저씨를 빠지라고 하는 건 정말 미안한걸. 사실 어쩌면 이렇게 유 능한 사람을 둘이나 끌고 다니는 것이 인력 낭비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나를 지키는 일도 중요한 일이다 이거야. 나는 혼자서 자기 합리화를 시키며 그들과 함께 나의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부터 저택이 엄청나게 크고 -저택이라 불리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 곳도 여러 건물이 모여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고 그 규모도 왕궁의 반이나 될 만큼 어마어마했다- 게다가 특히 왕족인 내가 지낼 곳이라 특별히 신경을 쓴 모양인지, 지금 내가 지내고 있는 방은 예 전의 왕궁에 있는 나의 방과 비교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고 화려했다. 그리고 방의 구석 구석마다 귀족 특유의 장식용 보석들이 잔뜩 박혀있어 처음 이 방에 들어온 알 아저씨의 눈 이 휘둥그레질 정도였다. 확신하건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곳의 보석은 분명 몇 개 없어졌 을 것이다. 나는 대충 옷을 갈아입고 이래저래 빈둥거리다가 창가로 다가갔다. "이야... 달 한번 예쁘네에. 반짝반짝 작은 벼얼 아름답게 비치네에... 서쪽 하늘에서도오.. 남 쪽 하늘에서도오.." 창틀에 기대서 괜히 흥얼흥얼거리는 나를 보고 내 곁에 서 있던 알 아저씨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으신가 보지요?" "히노 선배가 마법을 걸어줬어요. 오늘은 즐거운 날이라고." 나는 뒤로 돌아서서 싱긋 웃었다. 저쪽에 앉아 자신의 갑옷을 손질하는 디트 경이 보이자 굉장히 기분이 흐뭇해졌다. "카류 님을 그렇게 기분 좋게 해준 사람이 제가 아니라 섭섭한걸요?" 알 아저씨는 디트 경 쪽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에고, 알 아저씨가 약간 섭섭했으려나.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 영원히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 돌아왔으니 말이야. 난 섭섭해하는 알 아저씨에게 매달려서 잠시 애교(?)를 떨어주다가 디트 경 쪽으로 걸어갔다. 다 큰 남자 녀석의 애교 따윈 별로 보고 싶지 않을 만도 하건만 어릴 때부터 나를 알았던 사람들, 그러니까 아르 할아버지라던가 용병 아저씨들은 의외로 나의 애교를 꽤 좋아했기에 한 짓이다. "디트 경. 그 동안 건강했어?" 나는 그의 곁에 폴짝 뛰어가서 방실방실 웃어주며 물었다. 정말 그와 이렇게 보는 것이 오 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항상 그와 함께 했기에 잠시동안의 그의 공백이 이렇게 길게 느껴 지는 것이리라. "네... 카류 님은 그 동안 다친 곳은 없으셨고요?" 음, 어깨에 바람구멍이 난적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슈카가 죽었지... 에잇! 그 생각은 그 만 하자! 오늘은 즐거운 날로 하기로 했으니까! "보다시피 이렇게 팔팔해." "다행입니다. 카류 님." 그의 앞에서 팔을 횅횅 돌리며 말하는 나를 보며 디트 경은 부드럽게 웃었다. "쩝. 오늘은 왠지 잠이 안 오는구만." 알 아저씨가 나의 곁에 서서는 입맛을 다시며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오늘 괜히 기분이 좋아서 벌써부터 자는 건 정말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밖으로 나갈래요?" "엥? 벌써 자정이 다 되가는뎁쇼? 에구, 호위하는 사람의 사정도 봐주셔야지. 그런 오밤중에 카류 님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음. 보름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구경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팔을 쭈욱 빼고 애들처럼 웅얼웅얼거리자 디트 경이 살짝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정말 그렇게 나가고 싶으세요?" "응!" 나는 벌떡 몸을 세우고는 그렇게 말했다. 오늘은 그냥 보내기 정말 아까운 날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기 때문이다. 굳이 디트 경이 아니더라도 그 동안 내내 우울하기만 했던 나는 오 늘 이상하게 정말 기분이 좋았다. "웬 일로 그렇게 나가고 싶어하세요? 평소엔 안 그러시더니..." "음, 왠지요. 왠지~ 그러고 싶어요." "나가지요. 잠시 바로 근처에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디트 경은 낮에 돌려 받은 검을 옆에 차고 일어섰다. 알 아저씨도 투덜거리며 자신의 단도 와 검을 챙겼다. 나는 그런 그들을 양옆에 차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아, 밤하늘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 듯하네. 이렇게 예쁜데 말이야." 나는 이제 기억이 어슴푸레 해졌을 정도인 토이렌의 그 밤하늘을 떠올렸다. 그곳과 비교하 면 이곳 이르나크의 하늘은 공해가 전혀 없어서 아름다운 달과 빽빽이 들어찬 별자리들이 맨눈으로도 정확하게 보였다. "그렇지요. 저는 밤하늘을 보는 것을 상당히 좋아한답니다." "헤에. 디트 경이? 의외로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하네."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디트 경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카류 님의 흑청색 머리색이 생각나거든요. 검지만 달빛 때문에 가끔씩 푸른빛이 나는 것 같은 밤하늘의 색이 카류 님의 머리색과 정말 비슷하지요." "에? 그런가?" 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보통은 밤하늘은 디트 경의 머리색처럼 까맣다고들 한다고." "후후... 하르트 가 특유의 흑청색 머리색을 밤하늘의 색이라고 한다는 것을 모르셨나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알 아저씨가 웃으면서 머리카락를 쓰다듬었다. "정말 디트 경 말도 일리가 있군요. 비슷한데요?" "으음, 우리 앉아서 얘기해. 이렇게 하늘을 쳐다보고 걷다간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나는 앞쪽에 보이는 의자로 먼저 쪼르르 뛰어가 걸터앉았다. 그러자 알 아저씨가 나를 보고 푸념을 했다. "카류 님! 그렇게 혼자 다니지 말라니까요. 에구." "으음... 미...미안해요. 알 아저씨. 얼른 앉아요. 여기. 여기! 디트 경도!" 내가 나의 옆자리를 팡팡 치고 말하자 알 아저씨와 디트 경이 와서 각각 나의 옆으로 와서 앉았다. 우리들은 그렇게 앉아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휴우. 이 정도면 자정도 넘었겠군요. 이 시간에 이렇게 돌아다니는 걸 안다면 리아 후작 님 께서 뭐라고 하실 지..." "끄응~ 별일 없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죠, 뭐. 걱정 마세요. 알 아저씨." 나는 쭈욱 팔을 빼고 기지개를 펴면서 말했다. 예전에 토이렌에 살 때는 새벽 2,3시가 되도 록 매일같이 공부하던 수험생이었는데 이곳에 환생하고 나서는 자정이 될 때까지 눈을 뜨고 있은 적은 거의 없었다. 형광등 같은 좋은 조명 시설이 없어서 초나 등불을 켜서 있어야 하 기에 오랫동안 밤에 버티고 있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물론 라이팅이라는 멋진 마법도 존재 했지만 라이팅 마법을 유지시켜주는 7서클의 마법을 추가로 써줘야 했고 그 마법도 일주일 이 한계였기에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일상생활에 마법을 이용한 조명을 쓰는 일은 없었 다. "디트 경. 그 동안 성에 있으면서 무슨 큰 일은 없었어?" 나는 약간 신경 쓰이는 일을 물었다. 혹시나 내가 감옥에 갇힌 후 디트 경이 나를 따르는 자였다고 해서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에 아까부터 굉장히 궁금했 던 것이다. "......" 디트 경은 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속 하늘만을 바라보았다. 별로 디트 경이 말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는가 싶어 나도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고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 다. "카류 님..." "...응?" 나는 그의 부름에 그를 바라보았다. 디트 경은 계속 하늘을 바라보다가 내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 내가 바보같이 되묻자 디트 경이 다시 한번 조용히 말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반역과 국왕폐하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즉결처분을 당하셨습니다." "아...으으응..."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될 줄 은 몰랐기에 약간 멍해져버렸다. 그렇다고 내가 이일을 예상 못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내가 처형당할 것이라는 재판결과를 들었을 때부터 어머니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충분 히 예상하고 있었다. 증거물로 제시된 그 마법의 구슬에서 흘러나온 대화에서 어머니는 완 전히 반역의 주동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어머니라면 사족 못 쓰는 국왕이 어떻 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조금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국왕이라도 반역의 주 범이었던 어머니를 살리는 건 불가능할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언제든 누군가에게 물어보았다면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 지만 나는 그것을 일부러 묻지 않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어쩌면 어떻게든 그 무능한 국왕의 능력을 믿어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 던 것이다. 국왕으로서는 어머니를 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듣고 싶 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소식을 듣게 되었고 역시 어머니는 돌아가셨던 것이다. "그래..." 나는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죽음이 그렇게 절망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소식이 기쁜 소식일리가 없었다. 어머니의 아름다운 얼굴을 다시는 만나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온몸이 힘이 쭉 빠졌다. 이렇게 허무하게 사람이 죽어 버릴 수도 있는 걸까. 슈카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언제부터 살해당하고 처형당하는 이 런 일들이 이렇게 나의 삶의 일부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카류 님... 디트 경! 왜 갑자기 지금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알 아저씨는 풀이 죽어있는 나를 보고 디트 경을 책망했다. 사실 디트 경의 잘못도 아닌지 라 알 아저씨를 말리려하는데 디트 경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디트 경은 자신의 무릎 위로 손을 올려 그것을 꼭 쥐고 말했다. "저는 강한 자였지요. 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뭐든지 가질 수 있었습니다. 뭐든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부, 지위, 여자까지. 제가 가질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와 알 아저씨는 갑작스러운 디트 경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단 하나만은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바쳐 바랬지만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디트 경?" "아름다운 분이셨습니다. 밤하늘 색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겉으로는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상냥하신 분이셨습니다." 나는 디트 경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디트 경이 바랬다는 '그것'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저는 그 분을 바랬지만 그분은 이미 다른 분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분을 잊을 수 가 없었습니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났는데도 저는 조금도 그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그제야 겨우 깨달을 수 있었다. 디트 경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나 어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녀는 이미 국왕의 아내였고 디트 경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주위의 독촉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단지 어머니만을 보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충분히 루브 형의 호위 기사가 될 수 있을만한 실력에도 나의 호위기사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 대신으로 나라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디트 경은 나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스트라한 님을." 디트 경은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간 후 뒤 돌아섰다. "저의 단 하나뿐인 마음의 주군이시여. 용서하십시오." 디트 경은 자신의 검을 빼들었다. 달빛에 비쳐 그의 검이 스산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내 가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는데 나의 옆에 앉아 있던 알 아저씨가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검을 뽑아들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디트 경!" "비켜라. 너까지 해치고 싶진 않다." "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황당해하는 알 아저씨의 말에 디트 경은 검을 곧추세우고 자세를 취했다. "미안하다." 디트 경이 빠르게 알 아저씨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당황한 알 아저씨도 앞으로 튀어나가며 그에 대응해서 검을 휘둘렀지만 겨우 막는 것에 그쳤다. 알 아저씨는 디트 경의 빠른 검에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카류~!! 도망쳐!! 도망치라고!" 알 아저씨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그냥 그들의 모습을 보며 가만히 앉아 그들의 행동을 구경 하고 있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전부 영화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할 정도로 나는 지금의 상황에 현실감을 느낄 수 없었다. 캉! 캉! 그들의 검이 휘둘릴 때마다 달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빛이 허공에 그려졌다. 너무나 빠르 고 현란한 그 움직임은 나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캉! 카앙! "카류! 카류리드!!" 검이 마주치는 소리에 맞추어 알 아저씨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리듬감 있게 울리 는 그 소리 속에서 푸르게 빛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다운 검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카류!! 제발 도망...!!" 그러나 그 아름다운 광경도 얼마가지 못했다. 곧 음산한 붉은 빛이 검푸른 배경에 수놓아졌 기 때문이다. "아..." 알 아저씨의 몸이 무너지는 것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진 알 아저씨 의 뒤로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디트 경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아아아...." "카류 님." "아아...아아악!!! 알 아저씨!!!!" 나는 드디어 비명을 질렀다. 제발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또 바랬다. 디트 경의 검이 위로 치켜드는 것을 보고도 나는 그 자리에 앉아 비명을 지를 뿐이었다. 내게 그 의 검을 피할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카류리드 님...!" 디트 경은 다시 한번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검을 높이 들고 아래로 내리쳤다. 그런데 그 날카로운 검이 나를 목표로 하고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건만 이상하게도 검은 나를 비켜 나 다른 곳에 꽂혔다. "카...카류를... 절대... 안...돼...." 아래쪽에서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알 아저씨가 피투 성이가 되어 있으면서도 디트 경의 다리를 잡고 그를 방해했던 것이다. "알 아저...." 이번에는 나도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알 아저씨를 돕기 위해 어떻게든 해보려고 몸을 일으키 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디트 경은 빠르게 칼을 세웠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그 검이 알 아 저씨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아아아악~~!!" 나는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감싸안고 비명을 질렀다. 미칠 것만 같았다. 거짓이 길 바랬다. 제발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절대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이, 나의 디트 경이 알 아저씨를 죽였다는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이 나를 죽이 려 하고 있다는 이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디트 경은 알 아저씨의 머리에 박힌 검을 뽑아 들고는 내가 있는 쪽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 다. "싫어엇!!!" 나는 머리를 감싸쥐고 소리질렀다. 그의 검이 두려웠던 것이 아니라 그의 얼굴이 두려웠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죽이려 하는지 두려웠다. 그의 생각이 얼굴이 나타났을까봐 두려 웠다. "커헉~!" 그러나 그 다음 들린 소리는 나의 비명 소리가 아닌 다른 이의 비명소리였다. "카류!!" 내가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데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나를 감싸 안았다. "카류야. 카류. 괜찮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카류야!! 제발 정신 차리렴!" 머리를 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언제나 그랬듯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아르 할아버지 가 말했다. 아르 할아버지는 떨고 있는 나를 더욱 껴안아 주고 안타깝게 나에게 뭐라고 말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아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듣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귀가 아무 말도 듣지 못하고 있는 것에 반해 나의 눈은 앞을 똑바로 직시하고 있었다.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인 나의 눈에 널브러진 피투성이의 고깃덩어리가 정확히 들어왔던 것이다. "쿨럭...쿨럭..." 나는 어디선가 들리는 기침소리를 듣고 아르 할아버지를 밀어냈다. 눈물이 흘렀다. 나는 정 말 꼴사납게도 계집애처럼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디트 경이 나를 죽이려 한 것은 결 코 꿈이 아니었다. 나의 앞에 널브러진 고깃덩어리는 분명 알 아저씨의 시체였다. "카류야..!!"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자신의 복부를 감싸쥐고 거칠게 기침을 하고 있는 디트 경에게로 다가 갔다. 중간에 아르 할아버지가 나를 만류했지만 나는 거칠게 할아버지의 손을 뿌리쳤다. "꿈이 아냐... 그렇지?" 나는 디트 경에게 물었다. 나의 말에 디트 경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네가 날 죽이려 한 건 꿈이 아냐. 그렇지?" 눈물을 흘리며 나는 그렇게 말했다. 눈물 때문에 목소리가 정확히 나오지 않아서 정말 신경 질이 났지만 나의 의지와는 달리 눈에서 자꾸 쓸데없이 눈물이 쏟아냈다. "죽여... 나를 죽이려고 온 거였어...?" 그 말을 하자 턱이 덜덜 떨렸다. 디트 경이. 그렇게 믿었던 디트 경이 나를 죽이려고 했다. 나를... 나를 그만큼. 그만큼 나를 증오했던 걸까.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내가 싫었던 걸 까!? "그렇게...그렇게 내가 싫었어?" 나는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크게 소리쳤다. "나를 그렇게 증오했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증오했어? 그래?! 그렇게 나를 죽 이고 싶었던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나는 땅에 떨어진 검을 들어서 디트 경에게 쥐어주었다. "카...카류?! 무슨?!" 옆에서 아르 할아버지가 당황하여 말했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말을 무시하고 디트 경을 향해 외쳤다. "죽이고 싶었어?!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그랬어? 죽여!! 원하는 대로 죽여버려!! 여기 있잖 아! 어서 죽여버려!! 당장! 당장 죽여 버렷!!" 나는 절규했다. 그렇게까지 죽이고 싶었다면 죽어주지. 얼마든지 죽어주겠어!! "카류... 쿨럭...카류 님...!!" "뭐야!! 죽여!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웠다면 어서 죽여! 나를 죽이려 했잖아! 방해가 된다고 알 아저씨를 죽일만큼 나를 죽이려고 난리를 쳤잖아!! 찔러버려!! 그걸로 나를 찔러버리란 말이야! 죽여버려! 죽여...!! 죽여...." 나는 주저앉아 바닥에 손을 짚고는 꽉 힘을 주었다. 땅이 거칠어서 손끝이 엉망이 됐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디트 경에게 뭐라고 좀 더 말을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 이다. 하지만 감정이 격양되어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렀는지 말을 제대로 이을 수가 없었다. "카류...님...쿨럭...아아....카류 님!!" 디트 경은 내가 쥐어 준 검은 어쩌고 나를 와락 껴안았다. 나는 그런 디트 경의 행동에 신 경질이 나서 그를 밀어내려 발버둥쳤다. 그렇지만 나는 이상하게 부상자인 그를 밀어낼 힘 도 없었다. 나는 그의 품에서 헛손질만 하며 짜증을 냈다. "놔...놓으라고... 나를 죽이려한 주제에... 나를 죽이고 싶어했으면서.., 싫어... 놔...놓으란 말이 야... 싫어... 싫단 말이야..." "카류 님...!!" "싫어... 싫어졌어..?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워졌어? 죽이고 싶어진 거 야..? 그렇게나 내가 증오스러워..?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거야? 그렇게 싫은 거야?" "카류 님!! 카류 님!! 아닙니다... 쿨럭... 아니예요.. 전하!!" "역시...나는 죽어야 하는 거야...? 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나쁜 놈이야?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할 그런 존재인 거야? 디트 경이 당장에 없애버려야 할 그런 놈이야?"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디트 경에게 물었다. 디트 경은 그런 나를 꽉 껴안으며 소리쳤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류 님!!. 쿨럭쿨럭... 제발...쿨럭... 제발.. 그게 아닙니다. 카류 님..." 나를 안고 있는 디트 경의 얼굴 쪽에서 뭔가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카이세리온 님은...루블로프 님은... 다른 형제분들께서는..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콜록.. 너무 변해버리셨어요..." 나는 그제야 다트 경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디트 경은 그런 나를 놓칠세라 꼭 붙들고 말했다. "그분들께서.. 저를 불러놓고 말하셨습니다. 콜록... 키류 님을 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쿨 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저는... 저는 도저히 그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것만은 참을 수 가 없었습니다!" 나는 멍하니 디트 경의 품에 안겨 그의 말을 들었다. "카류 님...크흑... 저는... 저는...!!" 나의 형제들이 시켰다는 것인가? 나의 어머니의 시체를 빌미로 디트 경을 협박하여 나를 죽 이라고 그렇게 명령했단 말인가? 디트 경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서 나를 죽이 려고 했단 말인가? 나의 호위 기사인 디트 경이 나를 죽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단 말인 가? "형...들이...." 나는 중얼거렸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카류야. 정신 차려라.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가 다가와 멍해진 나를 디트 경에게서 빼내와서 자신의 품에 안으면서 걱정스 레 말했다. 눈앞의 디트 경은 계속 눈물을 흘리며 나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는 피투성 이였다. 아르 할아버지의 마법에 맞은 것인지 왼쪽 옆구리가 완전히 피투성이였지만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전하... 용서하십시오!! 아니, 저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류 님! 죄송 합니다. 이 죄는... 이 죄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죽음?" 나는 고개를 들고 디트 경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를 죽음으로 갚겠다고?" "카...카류 님..." "하~! 죽음? 그딴 걸로 갚겠다고?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고!?"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디트 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죽음? 용서해 줄까보냐! 누가 그딴 시시한 죽음 따위로 너를 용서해 줄까보냐!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결코 그런 시시한 죽음 같은 것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디트 경을 등지고 돌아섰다. "카류..." 내가 돌아 선 곳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히노 선배가 그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에 눈물을 한가득 담고 서 있었다. "마법이 풀려버렸어요. 선배."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는 그녀의 마법에 걸려 하루종일 너무나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의 효과는 너무나 대단해서 나는 언제까지고 이 즐거운 날이 계속 될 것이라 믿어버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자정이 넘어 그녀의 마법의 효과가 다하자마자 나는 이 잔혹한 현실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저택 안으로 걸어갔다. 나는 이제 결코 뒤돌아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 시시한 일회용 마법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0 소중한 것 "...네?!" "처형식에서 도주한 카류리드를 찾아 죽이라고 했다. 디트리온." 잠시 나의 귀를 의심했다. 아스트라한 님의 비보를 전해듣고 나는 거의 실성한 상태에 있었 다. 게다가 카류 님마저 처형당한다는 사실에 나는 완전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 참동안을 감옥에 갇혀 있다가 끌려나왔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계속 멍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러나 방금 한 카이세리온 님의 말을 듣고 갑자기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감히 지금 내 말을 무시하고 있는 건가? 대답하라. 디트리온." 내가 포박 당한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멍하게 앉아만 있자 카이세리온 님이 앞으로 나서 다 시 한번 말했다. 카류 님이 살아 계신단 말인가? 아니, 그렇더라도 나를 보고 그 분을 죽이 라고? 아스트라한 님의 단 하나 뿐인 아들인 그분을? 그리고 지금 카이 님이 카류 님을 죽 이라고 하고 있는 건가? 나는 한동안 카이세리온 님을 바라보다가 다른 형제분들을 둘러보 았다. 모두 하나같이 어두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카이세리온 님을 말리는 분은 없었다. "노...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카이세리온 님. 그분은 제가 지켜야 할 분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너야말로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카류리드는 반역자다. 더 이상 네가 지켜야 할 의미도, 지켜야 할 필요도 없다. 지금의 카류리드는 죽여야 할 대역죄인일 뿐이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하고 냉정한 목소리로 말하는 카이세리온 님을 바라보았다. 그 동 안의 그 심약하고 부드럽던 분위기가 거짓말같이 지금 카이세리온 님의 새파란 눈동자는 믿 기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고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카류 님의 반역 사실만으로 이렇게까지 변하셨단 말인가? "그토록... 그토록 카류 님과 사이가 좋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는 겁 니까. 여러분의 손으로 직접 그 분을 해치려 할 정도로...." 나의 말에 루블로프 님이 크게 흥분해서 앞으로 나와서 소리쳤다. "네가 뭘 알아?! 네가 우리들의 마음을 아는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가장 소중한 자에게 배 신당한 이 기분을 아는가? 그의 모든 행동이 전부 위선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우리들의 마음 이 어떤지 아느냐고! 너도 봤지? 장례식 때, 자신이 죽인 우리 어머니들의 장례식 날, 카류 가 우리들에게 한 그 가증스러운 행동을!! 자신이 죽여놓고도 그렇게 뻔뻔하게 행동할 수 있는 그 끝없는 위선을!!" "틀립니다. 그분을 그런 분이 아닙니다!" "왜 아니라는 거지? 뭐가 아니라는 거야? 우리가 틀렸다는 건가? 그래, 너도 증거를 대봐라. 트로이 후작처럼 증거를 가져와 보라고!! 카류가 우리들의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 를 가져와 봐!!" 나를 보고 소리치는 루블로프 님의 붉은 눈동자가 화 때문에 더욱 붉어지는 듯한 착각을 가 져왔다. 카이세리온 님은 완전히 흥분해버린 루블로프 님을 자신의 뒤로 살짝 물리고 나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래서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는 오직 그 분을 따를 뿐입니다. 저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 하지 않으며 또한 앞으로 그 마음은 바꾸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에게 그 분을 배신하라 하시기보다는 저의 목을 치시고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것이 빠를 것입니다." "그래?" 카이세리온 님은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왜 네가 그렇게까지 카류리드를 따르는지 알고 있다. 아, 물론 그 녀석의 위선에 완전 히 넘어가 버린 탓도 있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네가 왜 처음부터 루브 형님이 아닌 카류리 드를 선택했는지 그 이유를 말이다." "무슨..." 약간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면서 고개를 약간 들었다. 그러자 카이세리온 님은 내 쪽으로 몸을 약간 숙이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냉랭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후, 설마 네가 아스트라한을 사랑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줄 알았던 것인 가?" "카...카이세리온 님!!" "어차피 공공 연연한 비밀이 아니었더냐. 십 년이 넘도록 한 여자만을 짝사랑하다니 정말 감탄할 만큼 일편단심이란 말이야. 그래. 그래서 그녀가 죽은 지금 기분이 어떤가? 십여 년 간의 짝사랑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 기분이 어떠냐고." 갑자기 가슴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카이세리온 님이라도 나의 이 마음을 조롱하는 것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말조심하십시오! 카이세리온 님!!" "역시 흥분하는군. 쓸만하겠어." 카이세리온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위의 다른 형제분들의 불안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카이세리온 님의 다음의 이야기를 듣기가 두려워질 정도였다. "아스트라한의 시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는가?" "......!" 카이세리온 님은 천천히 눈을 뜨고 그 새파란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카류리드를 죽여라. 그렇지 않으면 아스트라한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들판에 내버려 짐 승의 먹이로 주겠다. 사실 솔직히 나는 당장이라도 우리들의 어머니가 죽인 그 년에게 분풀 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니까." "무...무슨!! 하...한나라의 국모의 시체를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까., 아.. 아무리 카이세리온 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터져 나갈 것 같은 심장의 고동을 참으며 카이 님의 말에 소리쳤다. 그러나 카이세리 온 님은 냉정하게 나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년은 한 나라의 국모를 직접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은 것뿐이다. 그러니 진정한 국모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단지 무엄한 반역자일 뿐인 계집의 시체를 찢어버리겠다는데 누 가 나에게 뭐라 할 수가 있단 말이지?" 너무나 무서운 말을 카이세리온 님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냉랭하게 내뱉었다. 카이세리온 님은 진심으로 아스트라한 님의, 그분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말하고 있었다. "카류리드를 죽여라. 그 놈이 다시는 자신의 의지로 이 세계에 발을 딛지 못하도록. 다시는 나의 눈에 띠는 일이 없도록. 네가 카류리드를 죽여준다면 내 자비를 베풀어 아스트라한의 육신에 손상이 가는 일이 없도록 하지. 그러나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아스트라한의 육체를 갈기갈기 찢어 버림으로서 그년에게 다시 한번 비참한 죽음을 내릴 것이다. 너는 아스트라 한이 죽어서도 그런 수모를 받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 " 그 분의 말에 마치 온 몸의 피가 식어버리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이 온 몸을 엄습했다. "어떻게 하겠는가? 대답해라. 생각할 시간을 줄 마음 따윈 없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루브 형님 대에서 왕위계승 때문에 내전이 일어나는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으니 까. 카류리드를 죽이러 가겠는가? 아니면 아스트라한의 몸이 넝마처럼 갈기갈기 찢기는 것 을 보고도 카류리드의 편을 들겠는가." 나는 카이세리온 님의 물음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스트라한 님. 그리고 카류리드 님. 17년 전 나는 여인의 아름다운 외모 같은 것에 한순간 혼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그 런 바보 같은 자신을 오랫동안 책망도 해보았지만 나의 마음은 언제나 그녀만을 향하고 있 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나의 아스트라한 님을 갈구하는 마음은 도저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민하던 나는 아무런 권력도 힘도 없는 제6왕자 카류 님의 호위기사가 되기 로 마음먹었다. 나는 카류 님을 지킴으로서 아스트라한 님의 행복을 지켜드릴 수 있었고, 또 한 카류 님의 모습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카류 님을 지키는 일로 대리만족을 얻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류 님은 정말 좋은 분이었다. 너무나 총명하고 보통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으 로 누구보다도 넓게 세계를 볼 줄 알았으며 왕족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정말 사랑스러운 분이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는 그분을 선택할 것을 정말 기뻐했다. 나는 단 한번도 이것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분을 보면서 나는 행복을 느꼈다. 이제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모습을 보는 것만이 아닌 나의 진정한 군 주로서 그 분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진정으로 그 사랑스러운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준 비가 되어 있었다. 카이세리온 님은 천천히 걸어와 나의 바로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애초부터 네가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스트라한이었나? 카류리드였나? 너는 그것을 잊지 않 는 것이 좋을 것이다." 카류 님을 지키겠다고 몇 번이나 맹세했다. 아스트라한 님의 앞에서 카류 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다짐했다. 아르디예프 님의 앞에서 어떤 상황에서도 나만은 카류 님의 편이 되 겠다고 맹세했다. "너의 아스트라한을 지키고 싶다면 맹세해라. 찢어져 엉망이 된 그녀의 몸뚱이를 보고 싶지 않다면 카류리드를 죽이고 영원히 루브 형님을 따르겠다고 지금 여기서 기사의 서약을 하 라." "......저는..." 부서지는 빛 사이로 신비하게 푸른색으로 빛나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기품 있는 여성이 천 천히 뒤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렇게 곧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말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것이다. 벌써 십여 년이 지났건만 아직 그 순간을 조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나의 머리 속에 각인된 채 조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다. 바로 손을 뻗으 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생생하게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저는..." 턱이 덜덜 떨려왔다. 그러나 거의 이성이 마비된 나의 입에서 멋대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 다. "카류... 리드 님을 죽이고... 루브 님을 따를 것입니다. 저의... 기사로서의 명예를 걸고.... 그 서약을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카이 님은 천천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나의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끊어냈다. 그리고 그 검 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다시 한번 정식으로 루브 형님 앞에서 기사의 서약을 하라. 네가 그 서약을 지킨다면 나도 너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 검을 받아 들었다. 돌아선 카이 님이 루브 님을 모시고 앞으로 나오는 것이 나의 눈에 비치자 이제는 온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것은 아스트라한 님이 바라는 일이 아니다. 아스트라한 님은 결코 이것을 바라지 않을 것 이다. 자신의 수백 번 다시 죽는 일이 있어도 카류 님이 죽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카 류 님을 다치게 할 바에는 자신의 피와 살을 주겠다고 울부짖을 것이다. 이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류 님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절대 카류 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맹세 했다. 카류 님의 앞에서, 아르디예프 님의 앞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앞에서 나는 몇 번이고 목숨을 바쳐 그분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나 역시 진정으로 그 사랑스러운 분이 피투성이 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랬기에 그 맹세들은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다. "디트리온." 카이세리온 님의 차가운 목소리가 나의 귀를 파고들었다. "저는..."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쌓아오고 만들어왔던 모든 것을 전부 뒤집어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했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이것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이 행동이 얼마나 이기적인 행동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도저히 이것만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반역자가 된 카류리드 님을 잊고 루블로프 님을 저의 군주로 모실 것이며, 명하신 대로 반 드시 카류리드 님을 찾아 그 분을 제 손으로 죽이겠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거칠게 팔을 그었다. 검붉은 피와 함께 또 다른 투명한 무언가가 땅에 떨어졌다. 그 투명한 액체가 나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눈물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대로 잊지 마라. 네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잊지 마라." 멀리서 흐릿하게 카이세리온 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스트라한 님..." 모든 것이 파괴되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의 세계가 완전히 파괴되어 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다시는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진심으로 기사의 서약을 깰 것인가? 진심으로 카류 님을 따르겠다고 나의 영지에 온 것인가?" "그렇습니다. 리아 후작 님. 그래서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그대에게 끝나지 않고 그 오명이 그대의 바스라윈 백작 가에도 영향을 미칠 것인데도 상관 없는가?" "그렇습니다. 상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카류 님보다 소중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놀라고 있었다. 이렇게 거짓말을 하고도 흔들림이 없는 자신에게 말 이다. "일단 검은 돌려주겠네. 그러나 카류 님의 호위로 알이라는 용병을 계속 붙여 놓을 생각이 네. 그대도 알다시피 신뢰할 수 있고 실력도 꽤나 있는 용병이지. 아직 내가 그대를 믿지 못 한다는 사실에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게. 이 모든 것은 전부 카류 님을 위한 일이니 까." "알겠습니다. 리아 후작 님." 역시 리아 후작 님은 쉽게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덜컥 믿는다는 것 자체도 가당치 않은 일이었고 말이다. 내가 검을 허리에 차고 카류 님 쪽으로 다가가려 하자 리아 후작 님이 한 마디 덧붙였다. "저렇게 보여도 카류 님은 지금 굉장히 상심해 계시네. 전부터 수많은 일로 낙심해 계신데 다가 얼마 전에 암살자에게 어깨를 크게 다치기까지 하셨고, 그 때 카류 님이 잘 아시는 소 년이 그 분의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일까지 있었다네. 카류 님에 대해 잘 안다면 지금 그분 이 어떤 상태인지 알겠지? 그대가 일부러 찾아 와 주었다는 것에 지금 겨우 기분이 나아지 셨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하네." 나는 일단 리아 후작에게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고 카류 님에게로 걸어갔다. "디트 경! 아, 점심은 먹은거야? 여기까지 오면서 힘들었지?" "저는 괜찮습니다. 카류 님." 나의 말에 카류 님은 부드럽게 웃었다. 카류 님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도 카류 님은 여전히 나를 향해 걱정스러운 말을 던졌다. 수많은 오해와 증 오와 죽음의 절망 속에서도 카류 님은 여전히 상냥한 마음과 웃음을 간직하고 있었다. 카류 님은 내가 기사의 서약을 여겼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색한 시선을 받는 것을 염 려하여 밖에서 한동안 산책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리고 이 산책에 함께 동행이 된 딜트 라엘 님과 히노 님과 대화하는 카류 님을 보며 나는 카류 님이 어떻게 그 많은 일 속에서도 아직 이렇게 버티고 있는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아직은 이 리아 저택에 카류 님을 진심으 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었기에 카류 님은 여전히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리아 후작 님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카류 님을 부를 때까지 우리들은 계속 밖에서 이야기 를 나누고 있었다. 딜트라엘 님과 히노 님을 각자 방으로 돌려보낸 뒤 리아 후작 님은 계속 알에게 뭔가 말을 전하려 했다. 분명 아직 믿기 힘든 내가 카류 님의 방에 함께 가는 것이 굉장히 불안한 일이었기에 알에게 뭐라 충고의 말을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러나 카류 님이 계속 '셋이 함께' 자신의 방에 갈 것을 주장하며 리아 후작 님의 말을 방해했기에 리 아 후작 님은 한 숨을 쉬며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죄악감에 사로 잡혔다. 저 분을 내 손으로 죽여야한단 말인가. 내가 저 분을 죽일 수 있을까. 카류 님이 기거하시는 방으로 돌아온 나는 한쪽에 앉아 나는 갑옷을 손질하며 카류 님과 마 주치는 것을 피하고 있었다. "디트 경. 그 동안 건강했어?" 그러나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어느새 카류 님이 나의 앞에 와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네... 카류 님은 그 동안 다친 곳은 없으셨고요?" 나는 그만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말았다. 크게 다치셨다는 말은 낮에 리아 후작에게 듣지 않았던가. 카류 님은 잠시 침울해지는 듯하다가 곧 웃으며 대답했다. "보다시피 이렇게 팔팔해." "다행입니다. 카류 님."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팔을 횅횅 돌리며 아무렇지 않은 듯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 분을 보며 나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쩝. 오늘은 왠지 잠이 안 오는구만." "우리 밖으로 나갈래요?" 알의 말에 카류 님이 장난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제안을 했다. "엥? 벌써 자정이 다 되가는뎁쇼? 에구, 호위하는 사람의 사정도 봐주셔야지. 그런 오밤중에 카류 님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음. 보름달은 아니지만 그래도 달구경하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카류 님이 팔을 쭈욱 빼고 애들처럼 웅얼웅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약간 웃음이 나왔다. 카류 님의 어리광을 보는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에 대하는 그런 어 린애 같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 분을 쓰다듬어 주고 싶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그렇게 나가고 싶으세요?" "응!" 나의 질문에 카류 님은 벌떡 일어나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카 류 님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정겨운 기분을 조금만 더 느끼고 싶었 다. 조금이나마 오래 카류 님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렇게 카류 님을 보고 조용히 웃고 있다가 갑자기 번뜩 스치는 생각에 나는 정신을 차렸 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스스로를 돌아보며 나는 자신의 이기심에 소 름이 돋았다. 카류 님을 해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카류 님의 변함없는 미소에 고통 과 절망에 찌들었던 마음이 어느새 부드럽게 녹아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조금만 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다. 카류 님을 죽이러 온 주제에, 카류 님에게 절망 을 주러 온 주제에, 카류 님의 미소에서 행복을 얻으려 한 것이다. 정말 눈뜨고 봐주기 어려울 정도의 끔찍한 이기심이었다. "나가지요. 잠시 바로 근처에 나가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입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졌다. 내가 원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그런 기사의 서약을 하면서까 지 원했던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나의 이 치졸한 이기심은 이것 하나만으로도 족하다. 카류 님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흔들리는 자신을 다잡고 결심했다. 카류 님의 제안으로 우리들은 한참동안을 정원을 걷다가 정안 안 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하던 것과 같이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달빛에 비친 검 은 밤하늘이 기이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언제나 그 하늘은 카류 님의 깨끗하고 순수한 흑청색을 떠올리게 한다. "디트 경. 그 동안 성에 있으면서 무슨 큰 일은 없었어?" 그리고 아스트라한 님의 신비하면서도 아름다운 검푸른 색을 떠올리게 한다. "카류 님..." "...응?"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카류 님을 돌아보았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그 순수한 밤하늘 색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스트라한 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아?" "...아스트라한 님께서 반역과 국왕폐하를 시해하려 한 혐의로 즉결처분을 당하셨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그 분을 향해 잔혹한 말을 내뱉었다. 흑청색 눈동자에 작은 파문이 번져가 는 것을 보며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제 와서 모든 것을 뒤집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 을 안다. 아니, 뒤집을 마음도 없었다. 아스트라한 님의 소식을 듣고 완전히 기운을 잃은 카류 님께 나는 천천히 나의 모든 것을 고백했다. 카류 님이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두 손을 꽉 쥐고 그분에게 이제껏 숨겨왔던 아스트라한 님에 대한 나의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사실 지금부터 할 ' 일'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아스트라한 님을."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발자국 걸어간 후 카류 님을 향해 돌아섰 다. "저의 단 하나뿐인 마음의 주군이시여. 용서하십시오." 나는 검을 뽑아들었다. 죽이겠다고 맹세했다. 나의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 나는 카류 님을 죽 일 것이다. 나 자신만의 이기적인 생각을 위해서 저 상냥한 분에게 깊은 상처를 줄 것이다. "대체 뭘 하려는 거요? 디트 경!" 내가 검을 뽑아드는 것을 보고 알이 빠르게 튀어나와 견제하는 자세를 취했다. 과연 숙련된 용병인지라 상황 판단이 빨랐다. 아니, 그보다 본능적으로 카류 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를 움직인 것이리라. "비켜라. 너까지 해치고 싶진 않다." "뭐!? 지금 제 정신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알은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보고 말했다. 카류 님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알을 죽이 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는 나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미안하다." 나는 검을 세워 자세를 취하고 빠르게 알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빠르게 검을 세워 나의 검 을 막았지만 크게 자세가 흐트러졌다. 알은 손꼽히는 강한 용병이었지만 불행하게도 나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다. "카류~!! 도망쳐!! 도망치라고!" 알도 힘의 차이를 직시하고 카류 님을 향해 크게 외쳤다. 카류 님을 도주시키기 위해 나를 막아서며 있는 힘을 다해 소리 질렀다. 그러나 카류 님은 멍하게 우리들을 바라보고만 있었 다.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알의 목소리에도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알은 그런 카류 님을 보고 목이 터져라 도망치라고 소리쳤다. 알을 상대하며 나는 서둘러야 함을 느꼈다. 오래 끌면 사람들이 몰려 올 것이다. 이미 누군 가가 이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하면 나는 일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카류! 카류리드!!" 내가 검에 더욱 속도를 붙이자 알은 그것을 막지 못하고 여기저기 얕은 상처를 입어갔다. 그러면서도 도망가기보다는 더욱 처절하게 카류 님을 불렀다. 자신의 안전도 생각하지 않고 카류 님을 도망치게 해주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에 나는 가증스럽게도 야릇한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당장이라도 알을 죽일 수 있다. 그는 강한 용병이었지만 왕궁의 기사 중에서도 몇 손 가락에 꼽히는 나를 상대하는 것은 절대 무리였다. 사실 처음 몇 합만에 나는 충분히 그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애초부터 그의 존재가 카류 님을 죽이는데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세웠다. 내가 바라는 것을 생각해라. 내가 원하는 것을 직시하라. 여기서 실패한다면 나는 아스트라한 님도 구하지 못하고 카류 님도 구하지 못하게 되는 것 이다.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카류!! 제발 도망...!!" 나는 검을 내질렀다. 깊게 무언가를 베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져왔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 른 검의 날카로움에 알은 한 합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우측으로 힘껏 검을 그어내자 검붉은 알의 피가 깨끗한 흑청색 하늘에 더해졌다. "아...아아아...." 카류 님은 피를 보고 비로소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검붉은 피를 본 아름다운 흑청색 눈동 자에 끊임없이 파문이 일었다. "카류 님." "아아...아아악!!! 알 아저씨!!!!" 카류 님은 그제서야 비명을 질렀다. "카류리드 님...!" 나는 더 이상 그 모습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카류 님을 향 해 검을 들었다. 절규하는 카류 님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그 분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가슴을 파고드는 비명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기에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내리쳤다. "카...카류를... 절대... 안...돼...." 그러나 나는 카류 님이 아닌 다른 곳으로 검을 찍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죽은 줄 알았던 알 이 나의 발을 잡아 방해를 한 것이다. 숨이 꺼져 가는 가운데서도 그는 끝까지 카류 님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알 아저..." 카류 님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빠르게 검을 세워 그의 머리에 박았다. 이제 돌 이킬 수 없다.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죽인다. 죽여야 한다.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서, 나 자 신을 위해서 죽인다! "아아아악~~!!" 몸을 일으키려던 카류 님은 알의 최후를 보고 다시 한번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양 손으로 머리를 싸잡고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싫어엇!!!" 내가 다가가는 것을 보며 카류 님은 머리를 감싸고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절규하는 카류 님을 보며 검을 들었다. 이미 알의 피로 흥건해진 검이 다음 재물의 피를 갈구하듯 음산하게 빛났다. 안타깝게 떨고 있는 카류 님을 보며 심장이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커헉...!?" 그러나 나는 검을 내리칠 수가 없었다. 옆구리에서 오는 그 강렬한 압력에 나는 검을 놓치 고 오른쪽으로 크게 밀려나 나뒹굴었다. 숨을 쉬기도 벅찰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옆구리를 타고 올라와서 그곳을 감싸쥐고 엎드린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카류야. 카류. 괜찮다.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카류야!! 제발 정신 차리렴!" 가까운 곳에서 어렴풋 들려오는 그 목소리가 아르디예프 님이라는 것을 나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알의 고함소리와 카류 님의 비명 소리를 듣고 이렇게 쫓아 온 것일 것이다. 멍청 하게도 안도감이 온 몸을 잦아들었다. 이렇게 되면 나는 아스트라한 님도 카류 님도 구할 수 없게 된다. 아스트라한 님께는 다시 한번 육체를 찢기는 수모를 카류 님에게는 믿은 자 에게 배신당하는 고통을 줄뿐이다. 그런데도 나의 마음 한 구석은 이 상황에 안도감을 표하 고 있었다. 나는 미쳐버린 것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꿈이 아냐... 그렇지?" 문득 누군가가 나의 앞에 서서 나를 향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밀려오는 고통을 참고 힘겹게 고개를 조금 들었을 때 그것이 눈물로 범벅이 된 카류 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네가 날 죽이려 한 건 꿈이 아냐. 그렇지?" 카류 님은 계속 흘리는 눈물 때문에 약간 목이 메인 목소리로 다시 한번 물었다. "죽여... 나를 죽이려고 온 거였어...?" 이를 딱딱 부딪히며 말하는 카류 님을 보며 나는 절망했다. 자신을 배신 한 나에게 카류 님 이 얼마나 화가 났을지 짐작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배신 한 나를 증오로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며 질책할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그렇게 내가 싫었어?"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카류 님은 계속해서 눈물을 쏟아내며 나를 향해 가까스로 그 말을 내뱉었다. "나를 그렇게 증오했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나를 증오했어? 그래?! 그렇게 나를 죽 이고 싶었던 거야? 그래?! 그런 거야!?" 카류 님은 격양된 목소리로 크게 소리 질렀다. 나를 증오하고 질책하는 대신 그렇게 소리 질렀다. 카류 님은 자신을 죽이러 온 나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 절망해버린 것이다. 그리 고 땅에 떨어진 검을 주워 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카...카류?! 무슨?!" 아르디예프 님의 당황한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카류 님을 나를 보고 외쳤다. "죽이고 싶었어?! 그렇게 죽이고 싶었어? 그랬어? 죽여!! 원하는 대로 죽여버려!! 여기 있잖 아! 어서 죽여버려!! 당장! 당장 죽여 버렷!!" 카류 님은 검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며 소리 질렀다. 처절하게 눈물을 흘리는 카류 님을 보 며 나는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를 죽이려하기보다 자신을 죽이라고 소리치는 카 류 님을 보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카류... 쿨럭...카류 님...!!" "뭐야!! 죽여!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웠다면 어서 죽여! 나를 죽이려 했잖아! 방해가 된다고 알 아저씨를 죽일만큼 나를 죽이려고 난리를 쳤잖아!! 찔러버려!! 그걸로 나를 찔러버리란 말이야! 죽여버려! 죽여...!! 죽여...." 더 이상 말을 잊지 못하는 카류 님을 보고 나는 손에 쥔 검을 내던지고 아무 생각 없이 그 분을 껴안았다. 카류 님을 죽이지 못하면 아스트라한 님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부 잊어버릴 정도로 나는 그 분의 안타까운 절규에 정신이 나가있었다. "카류...님...쿨럭...아아...카류 님!!" 내가 그 분을 껴안자 카류 님은 나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하지만 카류 님은 나를 밀어내지 못하고 계속 헛손질만을 했다. 그 분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눈물을 흘렸다. "놔...놓으라고... 나를 죽이려한 주제에.. 나를 죽이고 싶어했으면서... 싫어... 놔...놓으란 말이 야.. 싫어... 싫단 말이야..." "카류 님...!!" "싫어... 싫어졌어...? 내가 그렇게... 미워?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워졌어? 죽이고 싶어진 거 야...? 그렇게나 내가 증오스러워...? 내가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거야? 그렇게 싫은 거 야?" "카류 님!! 카류 님!! 아닙니다... 쿨럭... 아니에요... 전하!!" 카류 님은 나의 품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질문을 해왔다. 자신을 죽이려한다는데 화를 내기 는커녕 오히려 자기 혐오에 빠져 버린 너무나 착한 나의 주군에게 나는 그것이 아니라고 계 속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지 않다고 외쳐도 그 마음은 카류 님에게 닿지 않았다. 자신 을 죽이려 한 내가 아무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해 봤자 카류 님이 그것을 믿을 수 있을 리 가 없었다. 너무나 안타까워 나는 그분을 더 힘껏 안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역시...나는 죽어야 하는 거야..? 나는 죽어야 할 정도로 나쁜 놈이야? 이 세상에서 없어져 버려야 할 그런 존재인 거야? 디트 경이 당장에 없애버려야 할 그런 놈이야?" "아니에요. 아닙니다. 카류 님!! 쿨럭쿨럭.. 제발...쿨럭... 제발... 그게 아닙니다. 카류 님..." 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카류 님이 그런 사람일리가 없지 않은가. 너무나 사랑하는 나의 카류 님. 잃고 싶지 않은 카류 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실 내가 이렇게 당신을 사랑 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카이세리온 님은...루블로프 님은... 다른 형제분들께서는..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콜록.. 너무 변해버리셨어요..." 나는 카류 님을 더욱 껴안고 말했다. 아직 또래의 아이들 보다 작은 그 몸을 으스러져라 껴 안고 나는 슬픈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분들께서... 저를 불러놓고 말하셨습니다. 콜록... 카류 님을 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쿨 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고 그렇게 말씀하 셨습니다. 저는... 저는 도저히 그것을 보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도저히 그것만은 참을 수 가 없었습니다!" 카류 님은 나의 품에 안긴 채 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카류 님...크흑... 저는... 저는...!!" "형...들이...." 내게 안긴 카류 님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이야기에 넋이 나간 듯 나의 품에 안긴 채 멍 하니 중얼거렸다. "카류야. 정신 차려라. 카류야!!" 아르디예프 님이 나의 품에서 카류 님을 데려가서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카류 님은 멍 하니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카류 님에게 나의 행동은 그저 죽이려 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카류 님은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 보 다 배신했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큰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상냥한 카류 님은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같은 것보다는 믿었던 사람의 배신에 훨씬 지독한 절망을 경험하고 있 는 것이다. 내가 한 짓은 생각 이상으로 카류 님에게 고통을 주는 일이었다. "전하... 용서하십시오!! 아니, 저를 용서하라고 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카류 님! 죄송 합니다. 이 죄는... 이 죄는 죽음으로 갚겠습니다!!" 나는 밀려오는 죄책감에 카류 님께 소리쳤다. 이런 내가 살아있을 이유도 없다. 이런 이기적 이고 미친 녀석에게 살 가치도 없다. "죽음?" 그러나 나의 말에 갑자기 카류 님은 고개를 똑바로 들어 나를 보며 한자 한자 분명하게 말 했다. "죄를 죽음으로 갚겠다고?" "카...카류 님..." "하~! 죽음? 그딴 걸로 갚겠다고?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고!?" 카류 님은 벌떡 일어나서 나를 보고 소리쳤다. "죽음? 용서해 줄까보냐! 누가 그딴 시시한 죽음 따위로 너를 용서해 줄까보냐! 용서 못해! 절대로 용서 못해! 결코 그런 시시한 죽음 같은 것으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카류 님은 뒤로 돌아섰다. 나에게 그렇게 소리치고 뒤로 돌아서 어느새 모인 사람들을 헤치 고 천천히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목이 메여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하나도 남지 않 고 모든 것이 파괴되어 버렸다. 나 자신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자괴감만이 밀려왔다. "상처나 보여 봐라. 디트리온." 언제 나의 옆으로 아르디예프 님이 와서 마법서를 펴고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보며 경련이 일어나는 손을 간신히 들어 그의 손길을 거절했다. "저...쿨럭.. 저는... 이제 살 가치도... 없습니다... 그..그냥 내...내버려두십시오... 아르디예프 님... 쿨럭...." "카류가... 말하지 않았나. 용서하지 않겠다고. 죽음 같은 걸로는 절대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비리비리하게 있다가 죽어서 어떻게 카류에게 죄를 갚을 셈이 냐?" 아르디예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마법서를 보고 캐스팅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가 빠 르게 걸어와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조롱조의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아르디예프. 저런 쓰레기 같은 놈에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려 하다니 완전히 미쳐버렸군." "...말조심해라. 류스밀리온." "무슨 말을 조심하라는 거지? 후, 저런 인간 쓰레기는 일찌감치 세상에서 치워버리는 것이 최고의 선이니 미친 짓은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류스밀리온!!" 아르디예프 님의 호통에도 아랑곳 않고 류스밀리온은 내 쪽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신뢰하던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고, 기사의 명예를 버리고 그 서약에 대해 거짓말 을 하면서까지 아스트라한이라는 계집의 시체를 온존히 보존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왔으면서 네 놈은 지금 대체 뭘 하는 거야?" 나는 타는 듯한 옆구리의 통증을 참으며 고개를 들어올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나의 얼굴을 보자 류스밀리온은 점점 흥분해 격양되어 가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지금 장난하나? 여기까지 와서 네 놈이 한 것이 대체 뭐냐?! 카류리드를 죽이지 못해 결국 은 아스트라한의 시체는 완전히 넝마가 됐을 거고, 거기다가 카류리드는 네 놈에게 배신당 해 지금 완전히 맛이 간 상태지. 거기다가 뭐? 실패했으면 끝까지 카류리드를 죽이기 위해 기회를 노리거나 불가능하면 그냥 조용히 뒈질 일이지. 거기에 그 놈을 부여잡고 지 형제들 얘기는 왜 불어? 그걸 불면 카류리드란 놈이 얼씨구나 하고 널 받아들여 줄 것 같아서? 그 러면 저 카류리드는 네가 배신한 게 아니라는데 기분이 찢어져라 하겠냐? 대체 네 놈은 뭐 야!!!" 나는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느꼈다. 류스밀리온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머리가 부서질 것 같이 혼란스러웠다. "네 놈은 카류리드를 죽였어야 했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카류리드의 목을 따버 렸어야 했다고! 이제 와서 모두가 보라는 양 여기서 그런 짓을 벌린 이유가 뭐야!?" "류스밀리온!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닥치지 못해?" 아르디예프 님은 류스밀리온의 말에 놀라 소리쳤다. 류스밀리온은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나 를 향해 경멸스럽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조용히 말했다. "내가 가장 경멸하는 부류가 너 같은 놈이다. 중간에 끼여 이도 저도 아닌 채 망설이기만 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고 마치 자신이 비극의 주인공인양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눈물을 흘리는 놈. 죽음으로 모든 것을 갚겠다고? 후, 그래. 카류리드 놈이 옳지. 죽음 따위로 그것을 갚을 수 있을 리가 있나. 너 같은 놈은 죽여줄 가치도 없다." 류스밀리온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류스밀리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디트리온." 아르디예프 님은 조용히 말하며 나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그리고 일어서서 나를 보며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너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하지만 나는 위로해주지 않겠다. 너의 소중한 것 을 파괴해 버린 것은 다름 아닌 너 자신이니까. 너는 어느 한가지도 지키지 못하고 네 손으 로 모든 것을 파괴해버렸구나." 나는 고개를 숙였다. 더 이상 아픈 곳이 없었지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나의 명예도 신뢰도 산산조각이 났다. 나의 아스트라한 님도 지키지 못했다. 나의 카류리드 님에게 절망만을 안 겨 주었다. 내가 전부 그렇게 만들었다. "카류 님을..." 나의 말에 돌아서던 아르디예프 님이 잠시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카류 님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내가 아르디예프 님과 십여명의 병사들의 감시 하에 카류 님의 방에 도착했을 때 카류 님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있었다. 그 분은 생각 외로 고요해 보였다. "왜 데려 온 거지?" "디트리온이..." "저를 받아 주십시오." 아르디예프 님의 말을 자르고 나는 그분에게 말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은 약간 입술 끝을 비틀면서 조용히 말했다. "받아 줘?" "저를 다시 카류 님의 호위기사 자리로 받아 주십시오." 나는 흔들림 없이 말했다. 그러자 카류 님은 천천히 일어나서 뒷편의 창문을 열면서 말했다. "내가 왜 너를 받아줘야 하지?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받아줘야 하지?" "저를 받아주십시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카류 님을 지키기 위해서만 살겠습니다." "입에 바른 말은 그만둬." 짧은 말로 나의 말을 끊고 카류 님은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그렇게 뒤돌아 서서 창틀에 비 스듬하게 기댄 그 분은 의외로 살짝 웃음 짓고 있었다. "어머니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릴 자신이 있나?" 그러나 곧 카류 님의 입에서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이 흘러나와 나는 잠시 경직되고 말았다. "그녀의 시체를 도구로 삼을 자신이 있나?" "...." "너는 무엇이 더 소중한가?" 그 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나를 지켜주고 나를 따르는 자가 가장 소중하다. 그들이 나에게 주는 마음이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리고 당연히 나는 그 마음을 잃고 싶지 않다. 그래. 나는 처음부터 고민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카류 님은 눈을 천천히 뜨고 다시 한번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무엇이 더 소중하지?" "저의 카류리드 님. 저는 이제 카류 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아스트라한의 몸뚱이와 나의 생명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하지?" 카류 님은 나에게 약간 큰 소리로 물었다. "저는...!!" "갈팡질팡하는 너 같은 놈은 필요 없어! 나만을 바라보는 놈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줄 마음이 없다!" "저는 카류 님이 더 소중합니다! 저의 명예, 저의 가족,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까지 이 모든 것을 짓밟고서라도 카류 님을 지키겠습니다!" 나의 말에 카류 님은 나에게 가까이 걸어왔다. 그리고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말했다. "그게 아니겠지. 너는 어머니의 몸이 더 소중해. 하지만 어차피 어머니는 이제 구할 수 없을 테지. 나를 죽이는데 실패했으니 그녀는 엉망으로 찢겨 고기 밥이나 될 운명이다. 그래, 그 렇게 더 이상 그녀를 구할 수 없을 거 같으니까 이제는 나라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 는 게 아닌가?" 나는 가슴에 무언가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떨리는 몸을 억제하며 나는 그 분의 물음 에 간신히 대답했다. "...그...그렇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린 척하며 카류 님을 위해 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이제 더 이상 아스트라한 님을 구할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이렇게 행동한 것이다. 아스트라한 님을 위해 카류 님을 죽이겠다고 난리를 쳐 놓고 이제 아스트라한 님의 일이 늦었다는 것을 깨닫 자마자 나는 이렇게 다시 카류 님에게로 눈을 돌린 것이다. 나는 끝까지 이기적인 놈이었다. "참 편리한 사고를 하는군." 카류 님은 피식 웃더니 뒤돌아 가며 그렇게 내뱉었다. "마음대로 해봐라. 네가 어디까지 가는지 보자." "카류야!!" 아르디예프 님이 옆에서 안타깝게 카류 님을 불렀다. 카류 님은 그런 아르디예프 님을 돌아 보며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 아르 할아버지. 프리란트 님을 불러주세요. 다른 사람들도 말입니다. 조금 전의 소동으 로 전부 잠이 깨어 있는 상태겠지요? 일경이 급한 시기이니 이제는 저도 제 입장을 제대로 밝힐까 합니다.." 막 동이 트려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카류 님은 말했다. "아름다워요." 그 분은 다시 뒤로 돌아보며 전에 없던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이것이 내가 지배해야 할 땅이군요." 이르나크의 장 Part 31 새로운 시작 아침해가 미처 뜨기도 전에 회의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내가 화를 내는 통에 전 에 반역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만 그 회의장에는 그 때와 마찬가지의 인원이 약간 긴장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 모이셨군요." "...카류 님. 이번에 하고자 하시는 말은..." "예상하시다시피 그거죠, 뭐. 그 때 하다 만 이야기를 계속 했으면 해서 이렇게 여러분들을 불렀답니다. 사실 쓸데없이 시간이 너무 보낸 것 같이 정말 죄송스럽네요." "...흠, 지금까지 좀 모자란 짓을 하고 다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나 보지?" 여전히 류스밀리온이 한 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우리들의 말에 끼어 들었다. "아, 잘 됐습니다. 류스밀리온 님. 전부터 류스밀리온 님께 하고픈 말이 있었으니까요." "하고픈 말?" 나는 의아한 듯 질문하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단도진입적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의 마법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하아? 얘가 완전히 돌아버렸나?" "아니면 왜 전부터 계속 저를 주시하고 계셨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제 주위를 뱅뱅 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미친 놈. 과대망상은 거기까지 해라. 나는 단지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체 험해보고 싶어 그러는 것이다.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네 놈은 내 도움을 받기엔 천년은 멀 었어." "아, 그렇군요. 그럼 제가 어떻게 해드려야 저의 마법사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류스밀리온은 미간을 잔뜩 구기고는 한동안 나를 째려보았다. 분위기가 점점 더 살벌해 지 는 것을 보고 프리란트 님이 약간 당황하여 우리들을 말리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곧 류스밀리온이 대답했다. "좋다. 빡 돌더니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모양이로구나. 사실 네게 흥미가 많았다. 저 아르디 예프가 처형 직전의 널 꺼내오는 미친 짓을 할 정도로, 그리고 귀족이라면 모든 일에 색안 경부터 끼고 보는 거칠디 거친 용병들까지 너에게 빠져있는 것을 보고 나는 혹시 너라면 나 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인간이 아닌가 싶었다." "이상향?" "그래! 이상향. 만인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이상향을 말이다." 나는 그의 말에 약간 띵해졌다. 악의 대명사라 불려도 손색이 없을 사람의 입에서 저런 말 이 나오는 것을 듣고 있자니 현실과 잠시 괴리감이 왔던 것이다. "재미있는 이야길 하시는군요. 그런 게 가능할 성 싶습니까?" "불가능하지." "......" 나는 잠시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고 다시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것입니까?" "최대한 많은 인간들의 행복이다." "헤에?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나는 오랜만에 수능 공부를 다시 한다고 생각하며 그를 보았다. "그래! 멋진 말이군!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흐음? 그걸 원하시는 분이 잘도 그렇게 못된 짓이란 못된 짓은 혼자 다하고 다니셨군요?" 나의 말에 류스밀리온의 눈초리가 갑자기 바뀌었다. 그 때 아르디예프 님이 벌떡 일어나서 마법서를 펼치고 류스밀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류스밀리온!! 네 놈이 지금 여기서 마법을 쓴다면 나는 영원히 네 놈을 나의 적으로 삼고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르디예프 님의 말에 갑자기 온 방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용병들과 기사들이 완전히 긴장 하여 검을 빼들고 류스밀리온을 견제했다. 그러나 여전히 류스밀리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르디예프 님을 보고 말을 했다. "다 죽어 가는 할아범의 그런 협박 아무리 들어도 콧방귀도 안 나와. 저 빌어먹을 놈에게 내가 예절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하는데 불만 있나?" "마법을 쓰려 하셨다고요? 마법서도 보지 않고?" "내가 괜히 대마법사 류스밀리온인줄 아느냐? 1서클 정돈 마법서를 보지 않아도 충분히 그 냥 마법을 펼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이다!!" 콰앙! 작은 폭음이 회의장 안에 울려 퍼졌다. 류스밀리온이 이 순간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 나의 뺨에 뭔가 뜨거운 것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 생긴 일이었다. "류스밀리온!!!" 아르디예프 님은 크게 소리친 다음 완전히 마법서를 펴들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 에 류스밀리온도 마법서를 폈다. 용병들도 빠르게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보고 나는 소리쳤다. "모두 멈춰! 아르 할아버지도 그만 하세요!" "그렇지만...!!" "카류 님!!" 나의 목소리에 모두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보통 마법사들처럼 마법서를 펴서 마법을 쓴 다는 신호를 하지 않고도 마구 공격 마법을 난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사람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었다. "됐어요. 그렇게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류스밀리온 님이 절 죽일 생각이 있으셨다면 전 벌써 옛날에 죽었을 테니까요. 뭐, 류스밀리온 님 특유의 거친 의사소통법의 일종이라고 해 두지요." "그 버터 바른 것 같은 혀는 아직도 굳지 않았구나." "칭찬에 감사드립니다. 류스밀리온 님. 그런데 말이 왜 이렇게 샜을까요? 그 최대다수의 최 대행복과 저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저의 무엇이 부족하기에 그것을 이루는데 문제 가 되는 것일까요?" 잠시 열을 받아서 얼굴이 붉어졌던 류스밀리온은 잠시 숨을 가다듬고 나의 말에 대답했다. "좋아. 인정하지. 네놈이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제1왕자파인가 뭔가 하는 놈 들에게 이렇게 견제의 대상이 되었겠지. 하지만 한가지가 글러먹었어! 바로 네 뒤에 있는 저 놈처럼 말이다!" 나는 문득 나의 뒤에 서있는 디트 경을 보며 의아해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 디트 경을 나의 호위기사로 복귀하게 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디트 경이 그 런 짓을 저지른 사정을 대충 알기에 그렇게 큰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일단은 나의 고집을 끝까지 꺾으려하지 않고 내버려 둔 것 같았다. "그래, 물러 터졌어! 제 할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것저것에 질질 끌려 다니며 갈팡질 팡 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류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단 말이지? 주위의 작은 정에 이끌려 진정으로 이루어야 하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너는 아무 것도 손에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기다 만 놈 같은 건 애초부터 내 고려 대상에서 제외야!" 나를 막 손가락질하며 흥분하여 말하는 류스밀리온을 보고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감 히 뭐라 하지는 못하고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슬쩍 웃으면서 그에게 말했다. "확실히 그랬다는 것을 인정하지요. 그렇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더 이상 갈팡질팡하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웃기고 있군." "무엇이 웃긴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류스밀리온 님? 함께 즐기고 싶은데 말입니다." "하, 그래 원한다면 가르쳐 주마. 그렇다면 저 뒤의 저 놈은 뭐냐? 너를 죽이려 한 놈을 살 려둔 데다가 다시 호위기사 자리에까지 복귀시키지 않았나! 이게 정에 질질 이끌려 다닌 게 아니면 뭐야?" 류스밀리온의 질책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해 나갔다. "이런. 류스밀리온 님은 자원 재활용이라는 걸 모르시는 것 같네요." "뭐?" "디트 경이 얼마나 강한지 아십니까? 이 나라 기사 중 몇 손가락 내에 들 정도로 강한 기사 입니다. 그런 그를 시시하게 그냥 죽여버리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잠시 열 받는 것을 참고 곁에 두면 훨씬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지 않습니까? 버리기보다는 활용하는 것이지요." "변명도 가지가지 하는구만. 그러다가 당장이라도 저 놈이 다시 맛이 가서 아스트라한의 그 시체를 망가뜨리기 싫어 너의 뒤에서 등이라도 찌르면 어쩔 생각이냐? 설마 그런 건 생각 못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설마요. 디트 경은 저보다 그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걸요? 안타깝게도 저는 디트 경의 소중한 사람 순위에서 2위더라고요. 언제 디트 경이 마음이 돌아가서 저를 죽이려 할지 알 수 없는 일이라 저도 거기에 대해 생각해 둔 것이 있죠. 프리란트 님." "에...예?" 빠르게 진행되는 우리들의 대화에 멍해있던 프리란트 님은 나의 부름에 갑자기 놀랐는지 더 듬거리며 대답했다. "지금 당장 수도에 소식을 흘리십시오. 디트 경이 완전히 제1왕자파를 배신했다고 말입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형제들이 어머니의 몸을 완전히 분해시켜 버리도록 빠른 조치를 취해주셨으 면 좋겠군요. 한번 망가진 시체를 다시 붙이는 재주 같은 게 그들에게 있을 리가 없으니 그 때가 되면 디트 경이 흔들리는 일도 없겠지요?" 나의 말에 회의실이 완전히 적막에 빠졌다. 류스밀리온은 완전히 질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말했다. "이건 이건... 젠장, 이번 일로 저 놈이 완전히 미쳐 버렸나 보군. 자신이 어머니를 저런 식 으로 말하다니..." "뭔가 듣기 거북한 말씀을 하시는 군요. 류스밀리온 님. 제가 저의 어머니에 대해 뭐라고 말 했다고 그러시는 거지요?" "분해시키겠다며? 거 참 좋은 소리했다. 이구... 괜찮은 애 하나 버렸구먼. 버렸어...쯧쯔..." "장난은 그만해주세요. 류스밀리온 님. 그것은 저의 어머니가 아니라 저의 어머니의 시체인 것을 왜 제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군요." "시체는 네 어미가 아니냐? 그래 네 놈은 너의 어미의 시체를 찢어버리면서까지 그 일을 하 겠단 말이냐?" "어떻게 시체 같은 것이 제 주위의 사람들 보다 중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류스밀리온 님은 작은 정에 이끌려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잊는 것에 대해 비판 하셨으면서 어찌 정을 줄 가 치도 없는 고깃덩이에 불과한 한낱 시체 따위에 그런 말을 하시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군 요." 이제 류스밀리온과 다른 사람들은 완전히 나를 보는 시선을 달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 들을 보고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이 없더라도 시체에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생각은 예전부터 하고 있었다. 사람은 죽음으로서 새로운 것으로 탄생하게 되므로 그 시체 라는 것은 속 내용물이 없는 단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보물단지처럼 모셔두고 공경할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환생을 한다는 것을 안다면 제사 같은 것은 정말 만고에 쓸데가 없는 일이다. "너는 미쳤느냐?" "미친 사람이 미쳤다고 하는 거 보셨습니까?" 나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빙긋 웃었다. "별로 변한 것은 없답니다. 저는 좀더 앞을 확실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제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뿐입니다. 앞으로는 쓸데없이 주위를 둘러보 다가 저를 따르고 위해주는 사람들이 상처 입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모두와 함께 행복해지 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단지 그것뿐입니다." "......" 류스밀리온은 나를 보고 다시 평소의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배가 폭풍우로 인해서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가 암초에 부딪혀 버렸지. 그래서 그 배는 점차 가라앉고 있는 상태였다. 모두들 우왕좌왕 했지만 그곳에는 정의로운 인간들이 정말 많았다. 그들은 구명 보트를 꺼내 여자와 아이들을 태우려 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여자와 어린아이들만을 구명보트에 태워 보내버리면 그들이 살수 있을 리라 생각했는지 잘 도 그런 짓을 하더군. 항해법을 아는 선원들은 눈물을 머금고 여자들과 아이들이 구명보트 를 타는 것을 보고 있기만 하더군." 나는 조용히 그의 말을 들었다. 이건 분명 그 유명한 침몰해 가는 배의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여자와 아이들을 전부 죽여버렸다. 그들이 있으면 저 멍청한 인간들은 결코 자신들이 구명보트에 타려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능력이 없는 자는 전부 죽였다. 구명보 트에 타서 살아 남을 수 없을 것 같은 인간은 전부 말이다. 그리고 태워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인간들만 태웠지. 나의 행동에 멍청한 놈들이 미친 듯이 발광을 하길래 마법으로 몇 방 위협을 했더니 잠잠해지더군." "그것이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그들을 모두 살릴 수 있는가? 그런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 하지만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 대한 살 수 있는 인간들만이라도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흐음.. 최대한 많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은 소수의 자들은 짓밟아도 된다는 생각이신 가요?"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어디서든 희생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지." 모두들 살릴 수 없다. 나도 모두를 도울 수 없었다. 사랑하는 나의 형제들과 백성들 그리고 리아 영지의 사람들. 그러나 나는 이들 모두와 행복한 삶을 살수가 없었다. 나는 궁지에 몰 렸고 이번 일을 계기로 나는 그들 중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를 원한다면 형님들 편을 들어 저를 죽이는 편이 쉽지 않습니까? 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고통에 빠지게 될텐데요?" "지금의 나라는 쓰레기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랫동안 여행을 했다. 그러나 이미 모든 나라는 썩을 대로 썩었다. 부패와 시름이 나라 곳 곳에 퍼져있다. 이 나라는 근본부터 고치지 않으면 안돼. 나는 이상향을 원한다. 크게 이 나 라를 새롭게 개혁하기를 원한다. 좀더 많은 백성들이 잘 살수 있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 해 말이다. 전쟁으로 죽어 가는 인간들은 다시 만들 이상향을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양이 다. 최대의 행복을 만들기 위해 나는 그 정도는 감수 할 마음이 충분히 있다." 나는 비릿하게 웃으면서 류스밀리온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더 이상 쓸데없는 일에 휘말려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 다. 또한 저를 따르는 자들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축복을 내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 입니다. 저에게 새로운 이상향을 만들기 위한 당신의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면 정말 기쁘겠군요. 류스밀리온 님." 류스밀리온의 이상 따윈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얼마든지 그를 이용할 생각이 있다. 악명 높은 8서클의 마법사. 그는 우리들에게 큰 도움이 되어 줄 것이 다. "나의 행동은 네 놈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가에 달렸다." "아마 후회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말하고 있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제대로 아침 식사를 한 다음 정식으로 회의장 테이블에 커다란 지도를 깔아놓고 프리란트 님은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지요?" "예. 카류 님. 아, 그러니까 일단 대부분의 영지에서 수도의 전령들이 각 영지에 도착해서 본격적으로 저희들을 치라는 공문을 대충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북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트로이 후작 가와 연합을 해서 이 곳 리아 영지로 내려오겠지요. 제대로 대대적인 군 사가 내려오기 전에 저희들은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귀족 가문들을 최대한 우리 진영으로 끌 어들여야 합니다." "귀족 가라면..." "동부의 유력 가문인 하르트 가. 그리고 바스라윈 가를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프리란트 님의 설명 중 바스라윈 가라는 말에 나는 잠시 디트 경을 바라보았다. "제가 부모님들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아니, 그분들께는 이미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기사의 서약까지 깨고 이쪽 편으로 돌아왔기에 이미 저희 가문은 몰락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으니까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아스트라한 님의 하르트 가 또한 사정이 밝혀 진 이상, 에렌 시아 님의 이크쟌트 후작 가문과 아르멘 님의 펠렌즈 후작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 므로 어떻게든 저희 편을 들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드리크 경은 리아 영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꽤나 큰 영지를 가리키며 말했 다. "그 바스라윈 가와 하르트 가 사이에는 다른 작은 영지들을 뺀다면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에스문드 영지가 있습니다. 동남부에서 가장 큰 세력을 자랑하는 가문이지요." "에스문드...?" "대대로 카르틴 왕국과 싸워오며 많은 무장들을 배출해온 명망있는 가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현재 에스문드 가의 장남도 검술로 상당히 유명하지요." 문득 그 장난기 많고 때론 심술궂은 에르가 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몇 번이나 그와 검을 겨 뤄오면서 엉망이 될 때까지 얻어터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런 그와 이런 식으로 재 회를 하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말이다. "일단은 그들을 회유해 볼 생각입니다만 에스문드 가가 우리들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질 것입니다. 에스문드 가는 그렇게 많은 군사를 가지진 않았지만 강력한 정 예의 군사력을 자랑하니까요." "첫 상대가 에스문드 가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반역을 결심하자마자 만나는 상대가 가장 친한 친구가 되는 현실에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 다시는 슈카와 알 아저씨처럼 의미 없이 죽는 사람이 생기도록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솔직히 에스문드 가가 이 쪽 편을 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가문이 몰락 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니까." 류스밀리온이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중얼거렸다.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만? 저에게 조언을 주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네 행동을 보고 결정하겠다고 했을 텐데? 그리고 도와줄 건더기나 있어야 도와주지." 아무리 8서클의 마법사라 한들 이 10배나 되는 전력 차에 어떻게 할말이 없는 듯했다. 그러 다가 문득 류스밀리온은 보며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뭐냐? 대체." 모두들 시선 집중을 하는 사이에서 류스밀리온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나를 보며 말했다. "조금 전 류스밀리온 님께서 1서클 수식을 암산하셨던 것 말입니다!! 그것을 다른 마법사들 도 가능하다면 전력이 굉장히 올라가지 않을까요?"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있냐?" 류스밀리온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며 아르디예프 님이 한 숨을 쉬고 나 를 향해 말했다. "...카류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저 놈이 마법에 관한 한은 정말 천재적이라서 그런 상식에 어 긋나는 일도 가능한 거란다." "뭐야? 이 할아범이!?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해!" 아르 할아버지는 류스밀리온이 끼어 들어 뭐라고 그러는 것을 완전히 무시하며 나에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법사도 나와 류스밀리온 이렇게 둘이 전부가 아니냐? 마법사들이 아무리 너에 대 한 감정이 좋았다고는 하지만 별 소득도 없이 너를 돕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마 법 연구를 위해 왕이 주는 지원을 잃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마법사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마법이지."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3서클의 수식까지 암산이 가능하니까요. 아르 할아버지." "뭐야!?" "뭐!!" 나의 말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완전히 집중되었다. "절대 말도 안돼!!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다!!" 류스밀리온이 약간 흥분해서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입니다. 뭣하면 시험해보셔도 좋을 듯 싶군요." 나의 당당한 말에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은 의아해하면서도 약간 상기된 표정을 지었 다. 마법 수식에 대한 얘기에 저렇게 비슷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역시 그 둘은 같은 마 법사였던 모양이다. "여기 있다. 풀어봐라." 아르 할아버지가 길다란 수식을 한가득 써서 나의 앞에 내밀었고 나는 눈으로 그 수식을 슬 쩍 훑어 본 다음 할아버지에게 살짝 웃고 말했다. "아르 할아버지. 저를 위해 일부러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2서클 수식이잖아요. 길어도 푸 는 방식은 간단한 걸요." "이 놈아! 나도 2서클은 암산 못해! 군소리 말고 풀어봐!" "...이거죠?" 류스밀리온이 바락바락 소리지르는 것을 보고 나는 가볍게 답을 적어서 아르 할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아르 할아버지는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내가 내민 답을 보더니 열심히 그 수식을 풀어대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보고만 있었다. "이럴 수가!!!" 아르 할아버지는 완전히 경악해서 나를 보았다. 특히 곁에 앉아 있던 류스밀리온의 표정은 가히 인간이 볼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는 번개같이 다려와 나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소리질렀다. "네 놈!! 인간이 아니지!?" 정말 예측 불허의 류스밀리온의 행동에 나는 다시 한번 식은땀을 흘렸다. "노...놓아주시죠. 죄송합니다만. 저는 인간입니다." "어떻게 알아?! 그래, 사실 너 드래곤의 해츨링이라던가 그런 거 아니냐?!" 나는 잠시 류스밀리온이 개그를 하는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류스밀리온의 표정 이 너무나 진지해서 도저히 농담이라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솔직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류스밀리온의 이 반응도 그렇게 놀라운 것은 아니었다. 처음 그 유넨에게 이 수식들을 가르 쳐 줄 때도 이렇게 놀라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말이다. "죄송합니다만 전 제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던 것까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 런 기대는 버려주세요. 그리고 이것 좀 놓아주시겠어요?" "그런걸 인간이 기억할 수 있을 리가 있냐!! 역시 인간이 아니야!" "......"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이 상황을 어떻게 돌파하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곧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류스밀리온에게 풀려날 수 있었다. "설마 10살 때 생명의 궁에 와서 4서클의 수식을 풀었다는 그 소문이 진짜였느냐?"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류스밀리온은 완전히 쩡하고 얼어버렸다. "사실입니다." "맙소사!!" "장난은 여기까지 하지요. 저는 원래부터 8서클 수식까지 간단히 풀 수 있었습니다. 유넨이 그렇게 빠른 진전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제가 그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 문이지요." "파...파...팔 서클?" 류스밀리온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나 같은 어린 녀석이 8서클 수식을 풀 줄 안다는 사실에 그는 경악을 넘어 허탈감까지 느끼는 듯했다. "네가 유넨을 가르쳤다고?" "약간요. 아르 할아버지. 존경하는 선배인지라 그 분이 끙끙거리고 있는 것을 보기가 힘들어 서 그런 짓을 했죠. 지금 굉장히 후회하고 있습니다만." "대체 그 가르쳤다는 것이 뭐지?!" 류스밀리온은 나를 향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급하게 물었다. 나는 더 이상 두면 그가 참 지 못하고 마법을 난사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긴 수식과 짧게 정리된 토이렌의 아주 기초적인 수식을 몇 가지 가르쳐 주었다. "대충 이런 것이죠. 이곳의 그 복잡한 수식을 풀 수 있을 정도라면 이 정도는 충분히 이해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체계가 완전히 달라서 의외로 다시 배우기가 힘들지도 모르 지만..." "...어...어떻게 이런 생각을 한 거지?" 아르 할아버지의 놀라워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내가 대답해 봤자 아르 할아버 지나 류스밀리온이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내가 직접 이런 수식들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 그들이 얼마나 놀랬을 지를 상상하니 정말 우스울 따름이었다. 그저 장난스 러운 이유로 숨기고 있었던 이 일이 이렇게 쓰일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글쎄요. 자, 이것을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에게 보여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건... 이건 마법계의 혁명이다! 이건 그냥 수식을 암산하는 정도가 아니야! 마법사라면 목 숨을 걸고서 가지고 싶어할 정도로 엄청난 수식이다!" "후, 좋군요. 두 분의 반응을 본다면 충분히 마법사들을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나의 말에 프리란트 님이 놀랍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그렇다면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이 저희들의 편이 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아르디예 프 님?" "그래. 최소 반 이상은 설득할 자신이 있다. 이 수식을 보여준다면 말이야. 왕의 지원 같은 것보다 이 수식이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할 것도 없지. 특히 고위 마법사로 갈수록 마법 수식에 대한 갈망이 크지. 수식 때문에 진전이 적은 마법사들이 많으 니까."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프리란트 님부터 시작해서 이 회의실 안의 사람들의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갑자기 생각도 못했던 마법사들이 자신의 편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완전히 흥분한 모양이었다. "생명의 궁의 고위 마법사가 많이 빠져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제1왕자파의 전력이 줄어드는 것이 되니 일석이조로군요. 그럼 부탁드립니다. 아르 할아버지. 류스밀리온 님. 힘드시겠지만 수도까지 워프를 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시기니까요. 성안으로의 잠입도 워프를 쓴다면 충분히 몰래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겠지요." "...수도까지 또 다시 그 짓을 시킬 참이냐? 아르디예프에게?" "류스밀리온 님. 저는 류스밀리온 님께도 부탁드렸습니다만? 류스밀리온 님은 저의 수식을 알고 싶지 않으신 모양이지요?" 류스밀리온은 아니꼽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후, 굉장하구나. 네가 이 정도까지일 줄이야. 만약 마나를 다룰 줄 알았다면 정말 최연소 8 서클 마법사가 탄생하는 거였는데 말이다." 프리란트 님은 황급히 시종들을 시켜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의 여행을 위한 준비를 시 켰다. 그리고 그들을 보면서 기쁨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 워프를 하신다면 빠른 시일 내에 가능할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돌아오실 때도 최대 한 많은 고위 마법사 몇 분과 함께 오셨으면 합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있 을지 모를 에스문드 가와의 결전을 위해서는 마법사들이 꼭 필요합니다. 두 분이 어떻게든 해주실 것을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몇 가지 기초적인 수식을 더 정리해서 그 분들에게 넘겨주었다. "절대 유넨에게는 들켜서는 안됩니다. 그는 트로이 후작의 수하니까요." "...그 유넨이라는 놈 분명 마나 유동력이 뛰어난 놈이라고 했지? 빌어먹을, 성안으로 잠입할 때는 최대한 먼 곳에서 워프를 시도해야겠군. 아니면 마나를 느끼고 금세 우리들을 체포하 러 달려올 테니 말이다." "괜찮겠습니까? 류스밀리온 님?" "걱정 말거라. 비록 성질이 더럽기는 하나 류스밀리온 놈은 유넨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는 않은 녀석이니까." 아르 할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슥 쓰다듬은 다음 마법서를 펼쳤다. 그러자 류스밀리온이 아 르 할아버지의 뒤통수를 퍽 쳤다. "헉! 무슨 짓이냐! 이 무례한 놈아!!" "처음엔 내가 먼저 한다. 이 노망난 늙은이야. 너는 준비운동이나 하고 있어." 류스밀리온은 그렇게 말하고 마법서를 폈다. 아르 할아버지를 걱정하는 것을 저런 식으로밖 에 표현하지 못하다니 정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다. "조심하시고 너무 무리는 하지 마세요. 그저 가능한 만큼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르 할아버 지." "...그래.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아니라 너에게 해주어야겠구나. 카류야." 아르 할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안았다. "이 미친 할아범! 대체 뭐하는 거야! 내가 워프할 때 함께 가도록 날 붙잡고 있어야 할 것 아니야!" "쯧쯔, 저놈의 말버릇은 언제쯤 고쳐질런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건만." 아르 할아버지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왠지 할아버지의 말투가 마치 류스밀리온을 예전부터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져서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다녀오마. 카류야." "아, 네. 류스밀리온 님도 크게 무리하지 마세요. 돌아가시더라도 지금 돌아가시는 건 정말 곤란합니다." "빌어먹을. 알았다." 류스밀리온은 마법서를 보고 캐스팅을 시작했다. 그리고 회의실의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들은 홀연히 사라졌다. "그러면 일단 하르트 가와 바스라윈 가에 전령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에스문드 가 에는..." "에르가 형의 성질을 감당하려면 담이 큰 전령을 보내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프리란트 님." 나는 웃으며 프리란트 님을 향해 말했다. 에르가 형과 싸운다 하더라도 나는 후회하지 않겠 다.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이제는 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 해서 나는 오로지 앞을 바라보고 걸어갈 것이다. 최소한 머뭇거리고 있다가 주위의 사람들 이 개죽음 당하도록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2 에스문드 백작 문득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종이조각이 눈에 띠여 나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종이 조각에는 반역자가 된 제6왕자 카류리드의 사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과 그 제6왕자의 편에 선 리아 후작 가와 레이포드 남작 가에 대한 정보가 적혀있었다. 나는 그것 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잠시 한 숨을 쉰 다음 연무장으로 내려갔다. "하앗~!" 연무장에는 큰 기합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그 소리를 따라서 연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쉬익 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상쾌하게 울려 퍼졌다. 매일같이 보는 모습임에도 그 빠르고 무 게 있는 검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지한 나도 언제 나 감탄하고 만다. 그러나 나는 그런 움직임을 오래 감상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젠장할~!" "에르가 님." 나는 욕설을 내뱉으며 검을 땅에 박고는 숨을 몰아쉬는 에르가 님에게 다가갔다. "헉...헉... 빌어먹을..." "에르가 님. 진정하십시오. 우선 자리에 앉으셔서 조금 몸을 쉬게 하세요." "시끄러워! 이트!!" 에르가 님은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땅에서 검을 뽑아 자신의 허리에 차고 의자가 준비되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거친 동작으로 걸터앉은 그 분은 한 쪽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잔뜩 인상을 구겼다. 그런 에르가 님 곁으로 어린 시녀가 머뭇거리며 준비된 수건을 들고 다가와 에르가 님께 말을 걸었다. "저... 에르가 님. 여기 수건이..." "놔두고 가!" 에르가 님의 짜증스럽다는 호통소리에 어린 시녀는 깜짝 놀라서 머뭇거리다가 그만 수건을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 정도 일에 저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아마 이 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시녀인 모양이었다. "아...!" 시녀가 땅에 떨어져 더럽혀진 수건에 크게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있자 에르가 님이 그 모습을 힐끗 보더니 말없이 직접 허리를 굽혀 수건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그 수건을 대충 툭툭 털어서 그것으로 땀이 맺힌 이마를 슥 쓸어 넘겼다. "앗?! 에...에르가 님!" "됐으니까 가봐. 문제 있어?" "에? 아...아뇨. 그...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에르가 님."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시녀를 보고 나는 피식 웃음 지으며 에르가 님을 향해 말했다. "또 다시 귀여운 여자아이를 상사병에 걸리게 만드셨군요." "뭐?" 미간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나를 올려다보는 에르가 님에게 나는 빙긋 웃어 보였다. "좀 솔직하고 부드럽게 대해주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무뚝뚝한 면이 오히려 매력이라고 모두들 그러더군요." "켁! 대체 뭐라는 거야! 너!" "에르가 님이 요즘 굉장히 인기가 좋다고 말씀드리는 거랍니다." "우...웃기지 마. 이트... 네 놈 요즘 점점 더 재수 없어지고 있다는 거 알아?" 에르가 님은 괜히 쑥스러운 듯 신경질을 부렸다. 나는 그 모습에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매일 한번 이상은 꼭 재수 없는 놈이라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를 처음 보셨을 때도 재수 없 는 놈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런데 아직도 없어질 재수가 남았습니까?" "말꼬리 잡지 마. 젠장. 골방에서 매일같이 책만 읽더니 성격이 점점 더 꼬이는군. 앞으로 책 읽는 것은 그만두고 그 거지같은 성격 좀 어떻게 해보는 게 어때!" "평민의 신분에 재수 없기까지 한 저를 이렇게 부관으로 받아주신 마음 넓으신 에르가 님을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매일 책을 읽고 에르가 님께 조언을 드리는 일 뿐인데,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을 막으신다면 이제 저는 단순히 재수 없는 차원을 넘어 무능력하기까 지 한 인간이 되어버리지 않겠습니까. 제발 처음과 같은 넓은 마음으로 선처를 베풀어주시 지요." 에르가 님은 나의 말에 약간 멍하니 있다가 곧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 다. "잘도 그렇게 긴 대사를 나불거리는구나. 대체 뭘 먹으면 그렇게 재수 없는 말을 막힘 없이 좔좔 나불댈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하군. 마치...." 그러나 그 투덜거림은 곧 신경질로 변해갔다. 쾅! "그 놈처럼!"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주먹으로 거의 부숴 버릴 것 같이 탁지를 세차게 치고는 숨을 약간 몰아쉬었 다. "젠장...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양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계속 욕설을 퍼붓는 주군을 바라보며 나는 괜히 입안이 씁쓸해져 옴을 느꼈다. 어떻게든 기분을 좀 나아지게 해보려 했던 것이 다시 그 분을 화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에르가 님은 아무 말 없이 벌떡 일어나서 다시 연무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또 다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미 새벽부터 계속된 연습으로 상당히 지쳐 계신데도 그 분 은 거의 쉬려고 하지 않았다. 제 6왕자 카류리드의 처형 소식을 들은 후 에르가 님은 계속 저렇게 하루종일 검만 휘두르 며 분풀이를 하다가 잠시 쉬는 동안을 이용해 신경질을 내며 욕설을 퍼붓고, 그리고 또 다 시 검술 연습을 하는 것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검술과 욕설이 그 분의 일상 이긴 했지만 지금은 도가 너무 지나쳐 에르가 님의 몸이 상하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가 없었다. "합!" 에르가 님의 검이 크게 호선을 그렸다. 에르가 님은 언제나 검술 연습을 함에 있어서 엄격 하지만 항상 즐거운 표정을 하고 있었으나 지금 그 분의 표정엔 근심과 고통만이 가득했다. 에르가 님은 전에 없이 너무나 초조해하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런 그 분을 보고 나는 그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에르가 님을 이렇게까지 만든 그 카류리드라는 왕자가 어떤 자인지 정말 궁금해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시는 그 카류리드 왕자를 볼일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저렇게 에르가 님이 괴로워하고 계신 것이니까.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 시종이 연무장으로 뛰어들어왔다. "휴우... 헉... 뭐야?" 에르가 님이 땀을 닦으며 그 시종이 있는 쪽으로 다가와서 묻자 시종이 약간 다급한 목소리 로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 님께서 에르가 님을 급히 서재로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보아하니 수도 에서 전령이 새로운 공문을 가지고 온 듯했습니다." "수도에서?" 에르가 님은 수도라는 말에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에르가 님. 기분이 안 좋으신 것은 알지만 일단은 백작 님께 가보시는 것이..." "시끄러, 이트. 그 정도는 내가 알아서 해. 이봐. 지금 당장 간다고 아버님께 전해라." "네, 알겠습니다." 빠르게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시종을 뒷모습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당장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입술을 깨물었다. "에르가 님..." "시끄럽다고 했지! 곁에서 계집애처럼 자꾸 나불거리지 좀 마! 알겠어?" 에르가 님은 크게 신경질을 내고 탁자에 놓인 수건으로 땀이 흥건한 목을 닦으며 서재로 향 했다. 수도에서 온 전령이라는 말에 에르가 님은 보통 불안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런 시기에 온 공문이라면 분명히 카류리드 왕자의 사형이 끝났으니 본격적으로 리아 영지에 공 격을 가하기 위한 준비를 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을 것이 뻔했다. 에르가 님도 그것을 충분 히 알기에 저렇게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에르가 님의 뒤를 따라 백작 님의 서재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도 에르가 님은 몇 번이 나 가다가 멈추기를 반복했다. 에르가 님을 모신지 그렇게 오래 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는 에르가 님은 처음이었다. 서재 앞에서 그 분은 거의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다가 방문을 열었다. "아, 에르가. 왔구나!" 에스문드 백작 님이 두루마리 종이를 보고 있다가 에르가 님을 보고는 그것을 책상에 내려 놓고 앞으로 걸어나와 그 분을 맞이했다. 그러나 백작 님의 표정은 가히 즐거운 표정은 아 니었다. 두 분이 서재 중앙에 마련된 의자에 앉는 것을 보고 나는 에르가 님의 곁으로 가서 섰다. 에르가 님의 부관의 자격으로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그 분의 곁에서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님." "휴우, 그래. 표정을 보니 이미 수도에서 공문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구나." "......" 에르가 님은 아무 말도 않고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에서 백작 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백 작 님은 그런 에르가 님을 보고 크게 한 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휴우... 정말 이런 모습의 너는 처음이구나. 정말... 이 소식을 알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말씀하십시오. 아버님." 에르가 님은 고개를 들고 백작 님을 바라보았다. 백작 님은 뭔가 굳게 결심한 듯한 표정의 에르가 님을 보면서 계속 망설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카류리드 전하께서... 탈출하셨다고 한다." "......" 에르가 님은 아무 말도 않고 잠시 멍한 표정으로 백작 님을 바라보았다. 정말 의외의 발언 에 나마저 띵해질 정도였으니 에르가 님의 저런 에르가 님의 반응도 당연했다. 한참동안의 침묵 끝에 에르가 님은 가까스로 입을 열어 다시 백작 님을 향해 물었다. "...지금... 카류가..." "...탈출하셨다고 한다. 처형 직전에 아르디예프 님의 도움으로 탈출하셨다는구나." "탈출?!"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크게 소리질렀다. "하...하하.. 맙소사. 탈출했다고? 성에서?!" 그 분은 앞에 놓인 탁자를 짚고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 웃음에 얼마나 큰 기쁨이 서려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벌써부터 에르 가 님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으니 말이다. "에르가." "하하... 정말 명줄이 긴 놈 아닙니까! 성에서 처형 직전에 도망친 놈은 아르윈 왕국 역사 이 래로 그 놈이 처음일 겁니다!"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을 보고 기쁘게 말했다. 그런 에르가 님을 보며 백작 님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에르가 그렇게 기뻐만 할 때가 아니다. 카류리드 전하는 이제 전국적으로 반역자로 수배가 된 것이다. 방금 온 이 공문에도 반역자가 된 카류리드 님과 그 일당들이 모여 있는 리아 영지를 치라는 내용의 왕명이 담긴 공문이다. 그 분이 살아나면 무엇 하느냐. 네가 네 손으로 그 분을 쳐야 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제가 왜 제 손으로 그 녀석을 쳐야 하지요?" 에르가 님은 백작 님의 말에 잠시 웃음을 멈추고 백작 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르가. 설마 우리 에스문드 가가 카류리드 전하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 냐?" "그렇습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말하는 에르가 님의 말에 백작 님과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미 전국적으로 왕명이 하달되지 않았느냐! 제아무리 리아 후작이 비옥하고 넓은 영지와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한다 해도 아르윈 왕국의 모든 귀족들을 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같 은 반역자로 몰려 어쩔 수 없이 카류리드 전하의 편을 들 수밖에 없는 리아 후작과 레이포 드 경 이외의 어떤 지원세력도 없는 그 분이 이 내전에 이길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 "우리 에스문드 가가 그 지원세력이 되어주면 되겠군요." 싱긋 웃으며 말하는 에르가 님을 보고 나는 참지 못하고 그 대화에 끼어 들었다. "에르가 님! 지금 에르가 님은 너무 정에 치우쳐 계십니다. 저희들이 직접 그분을 치는 일은 없더라도 최소한 그 분을 돕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반역은 너무 일찍 일이 들통나는 바람에 속으로 은근히 그 분의 편을 들려하던 자들도 전부 고개를 돌렸습니 다. 이렇게 제대로 된 세력도 갖추지 못하고 이미 반역자로 낙인 찍혀 명분도 약한 카류리 드 님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은 너무나 큰 위험을 부담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정에 치우쳐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함으로서 수백 년간 명성을 유지해 왔던 에스문드 가문을 망하 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나의 말을 듣던 에르가 님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카류의 편에 설 것이다. 뒤늦게 그 녀석이 처형당한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얼마나 후 회했는지 모른다. 이번에는 꼭 그 녀석의 도움이 되어 주겠어." "에르가 님!" "에르가!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저번 왕궁에서 있었던 파티에서 아스트라한 님께 카류리 드 전하의 반역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분의 편을 들기로 은근히 말을 전하기도 했었지. 너에게 동굴이 무너졌을 때의 있었던 일을 듣고, 그리고 이렇게 변한 너의 모습을 보고 그 원인이 된 카류리드 님이 왕위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 않느냐! 카류리드 전하에게 호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가문의 존 망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더냐!" "카류를 돕는 것이 꼭 가문의 몰락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카류가 여기 서 반역에 성공한다면 얼마 없는 지원 세력 중 하나였던 저희 가문이 크게 부흥할 것입니 다." "에르가 님!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카류리드 님의 세력에 가담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요. 아니, 확실하게 말해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한다면 에스문드 가문은 망할 것입니 다! 그리고 결국엔 에르가 님도 반역자로 처형당할 것입니다. 저는 절대 그것만은 보고 있 을 수 없습니다! 절대 카류리드 전하의 편을 드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나는 에르가 님의 그 모습에 너무 답답해서 또 다시 끼어 들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자꾸 두 분의 말하는 중에 끼어 드는 것은 큰 실례였지만 지금만은 백작 님도 크게 나를 책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나는 정말 마음이 급했다. 에르가 님이 카류리드 전하의 일로 크게 상심하고 계시고 그만큼 그분에 대한 마음이 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그쪽 편을 들 겠다고 하다가는 개죽음 당하기 딱 십상이었다. 나의 주군이 그렇게 되는 것을 손놓고 가만 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에르가 님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천천히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까 백작 님이 들 고 있던 두루마리를, 수도에서 전령이 가져온 공문을 들어올려 그것을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두 말 할거 없어. 벌써 정했다. 나는 카류리드를 왕으로 만들 것이다." "에르가 님!" 나는 정말 의외의 말에 황당해져서 할말을 잃고 에르가 님을 바라보았다. 에르가 님이 이렇 게까지 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에르가 님이 비록 발끈하기를 잘하고 다혈질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에게든 옳은 의견을 들었을 때는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것 을 받아드릴 줄 아는 분이었다.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능력을 인정해서 자신의 가까이 두고 조언을 구하기까지 했던 분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든 상황이 분명하건만, 이렇게까 지 말씀드리고 있건만 에르가 님은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 는 것이다. 에르가 님의 말을 듣고 할말을 잃은 나를 보고 백작 님이 일어나서 크게 소리쳤 다. "에르가! 더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마음은 이해한다면 절대 카류리드 전하의 세력에 가담하 는 일만은 절대로 안돼!" "저도 절대로 승복할 수 없습니다. 아버님." 에르가 님은 똑바로 백작 님을 직시하며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여봐라! 누구 없느냐!!" 드디어 백작 님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밖의 병사들을 불렀다. 과연 서재로 들어올 때 이상 하게 서재를 지키던 병사가 많다고 했더니 이럴 때를 대비해서 그렇게 병사들을 준비해둔 모양이다. "에르가를 잡아라. 자신의 방에 가둬!!" 백작 님은 병사들에게 에르가 님을 감금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백작 님의 호통 소 리에도 주춤거리기만 할뿐 에르가 님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뭐 하는 거냐? 어서!!!" "아버님을 붙잡아라." 에르가 님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병사들은 백작 님과 에르가 님을 사이에 두고 누구를 따라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백작 님의 말을 따르 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들과 실질적으로 함께 하며 훈련을 시켰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에르가 님이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직 에르가 님이 가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스문드 가 내의 하인과 병사들에게 미치는 실질적인 지배력이 생각 이상으로 강했던 것이다. "무...무슨! 에스문드 백작 가의 가주는 바로 나다! 네 놈들은 당장 에르가를 잡지 않고 무엇 을 하는 거냐?" "너희들! 내 말이 들리지 않아?! 죽고 싶어?" 에르가 님의 큰소리에 병사들은 찔끔하더니 검을 꺼내 백작 님을 포위하는 형식으로 섰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에르가 님은 예기치 않은 일로 당황하고 있는 백작 님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나까지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었다. 에르가 님이 검을 뽑아들어 백작 님에게로 향했던 것이다. "저희 에스문드 가는 제6왕자 카류리드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저에 게 에스문드 백작 가의 가주의 자리를 넘겨주십시오. 아버님." "에...에...에르가?!?"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한 백작 님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흔들림 없이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아버님. 그러나 저는 절대 물러설 수 없습니다. 사람은 일생에 한번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게 될 기로에 선다고 하지요. 지금이 그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지금 카류리드 전하의 일에 정신을 빼앗겨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계십니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주십시오! 아니, 어쨌든 제발 그 검은 거두어 주십 시오!" 나는 다급히 에르가 님을 향해 소리쳤다. 이렇게 에르가 님이 자신의 아버지에게까지 검을 들이대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일은 훗날 에르가 님에게도 괴로 운 일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정도로 카류리드 왕자에게 가치가 있느냐?" 그러나 백작 님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고 에르가 님에게 물었다. "당연합니다. 아버님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지금의 저는 카류리드가 있음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 녀석을 부정한다면 저는 저 자신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리고 이트. 지금의 네가 있는 것도 모두 카류리드가 있음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 녀석을 부정하면 너 또한 부정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에르가 님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멸을 해야만 한단 말입니까? 에르가 님은 죽을 것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따른다는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그 신 념을 지킨 행동의 결말이 비참한 죽음이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인데 에르가 님이 그 렇게 하도록 어떻게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백작 님과 제가 왜 이렇게까지 에르가 님을 말리는지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에르가 님의 대답에 나는 흥분해서 끼어 들었다. 이대로면 정말 에르가 님이 카류리드 전하 의 편에 가담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자살행위를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정한 나의 군주가 그렇게 자신의 발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 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카류리드의 기적을 믿는다." 에르가 님은 나를 보고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동굴 속에서도 그랬지.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몇 번이나 죽음의 난관에 부딪혔지. 이런 곳에서 모두 비참하게 죽으리라 생각했다. 그래, 나는 솔직히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좌절했다. 하지만 결국엔 빠져 나왔다. 단 한 사람도 죽지 않고! 카류리드가 그렇게 만들었다! 카류리드가 그 기적을 이루어냈다!" "에르가 님..." 에르가 님은 돌아서지 않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이미 에르가 님의 마음은 카류리드 전하 를 따르기로 굳어버린 것이다. 나는 새삼 전율을 느꼈다. 이렇게까지 에르가 님을 따르게 만 든 그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전율이 일었던 것이다. "너는 카류리드 전하가 이길 것이라고 믿는 거냐? 그래서 그 분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냐?" "그렇습니다. 저는 카류를 믿습니다. 카류의 기적을 이루어내는 그 힘을, 능력을 그리고... 그 마음을. 저는 그것을 믿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기적을 이루 어 내는 데 저도 힘이 되어줄 것입니다. 저는 카류를 따를 것입니다." 백작 님은 깊게 한 숨을 쉬었다. 에르가 님은 검을 겨눈 자세로 아무 말도 않고 똑바로 백 작 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다는 것은 축복된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도 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내가 이런 너의 발견을 축하해주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구나. 하지만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네가 옳은 것이겠지. 그래, 나는 네 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믿으마. 네가 카류리드 전하를 믿는 것처럼 나는 너를 믿는다. 에르 가." "...아버님..." "후우. 나는 너를 너무나 사랑한단다. 에르가. 네가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것을 보고 싶지 않 아 너를 막은 것이지만 네가 그렇게 정했다면, 그렇게 확실한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이 아버지를 위협하면서까지 그렇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다면 나는 더 이상 너를 막을 수가 없구 나." 백작 님은 주위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병사들을 둘러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후, 그리고 솔직히 네가 이렇게까지 에스문드 가문을 통솔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 정도 라면 내가 굳이 너에게 에스문드 가의 가주 자리를 넘겨주겠다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가문의 가주라 할 수 있겠구나. 좋다! 너의 이런 모습을 보니 흔쾌히 일선에서 빠질 수 있을 것 같 구나. 이제부터 네가 에스문드 백작이다. 전 가주가 살아있는데도 새로운 가주가 나오는 정 말 희귀한 일이 생기겠구나. 후후... 물론 중앙에서 인정하지 않겠지만 이제는 중앙하고는 관 계없겠지?" "죄송합니다. 아버님. 결코 아버님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너의 성장에 기뻐한다. 그리고 너의 성장에 슬퍼지는구나." 에르가 님은 겨누었던 검을 다시 천천히 자신의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백작 님께 다가 가 그 분을 말없이 부드럽게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어색해하면서 또 놀라워하는 백 작 님을 보면서 에르가 님은 살짝 웃었다. "다 크긴 했지만 이렇게 한번씩 서로를 안아주는 것, 의외로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아버님." 이르나크의 장 Part 33 거짓과 진실 나는 저택 뒤편의 작은 구릉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있었던 그 불행한 사건 으로 인해 죽은 알이라는 용병의 무덤이 만들어져 있었다. 저택 근처에 평민의 무덤을 만들 어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지만 끝까지 카류 님을 지키려다가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리 아 후작이 선처를 베푼 것이다. "계셨군요. 카류 님." "아,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드리크 경." 카류 님이 다른 용병들 사이에서 빠져 나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문득 약간 떨어진 곳에서 카류 님을 주시하고 있는 디트리온을 보고 나는 약간 씁쓸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알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희생을 해주었기에 카류 님이 살아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셨군요. 하지만 시체밖에 없는 무덤에다 대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까지 없는데. 저도 저 택 안에만 있기가 답답해서 알 아저씨 무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온 것뿐이거든 요." "왜... 왜 그렇게 변하신 겁니까. 조금쯤은 알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려줄 수도 있는 것 아 닙니까!" 알의 무덤 앞에 있던 한 용병이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는 카류 님께 흥분해서 소리 질렀다. 그러자 카류 님은 용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약간 돌리고 말했다. "저 무덤은 알 아저씨의 시체가 있는 장소일 뿐. 저런 것에 무슨 가치가 있다고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린단 말입니까." 디트리온의 배신이 있은 후, 카류 님은 한번씩 저렇게 잔혹한 말을 내뱉는다. 마지막까지 자 신을 도와준 알의 시체를 모욕하는 발언을 할만큼, 디트리온이 아스트라한 님 때문에 저질 렀던 일의 충격이 그토록 상냥했던 카류 님을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이다. 디트리온은 그런 카류 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부드럽게 카류 님의 머리카락을 흩날려주었다. 카류 님은 그 바람의 촉감을 즐기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 아저씨의 말은 잊지 않을 겁니다. 저는 쉽게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것이 알 아 저씨가 마지막까지 하려했던 일이었으니까요." 카류 님은 용병들 쪽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예전과 다르게 너무나 슬프게 느껴졌다. 조금 전 카류 님의 말에 발끈해 소리를 질렀던 용병은 그런 그 분 의 모습을 보고 슬그머니 무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 용병도 카류 님의 사정을 전 부 알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고 카류 님의 고통이 이 중 그 누구보다도 깊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도 너무 답답해서 한 번 해본 말이리라. "아, 이렇게 드리크 경까지 오셨는데 저에게 단검술에 대해 좀 더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 습니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제대로 배워두는 것이 좋을 것 같으니까요." "...지금은 디트리온이 있지 않습니까. 카류 님께서 직접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그를 다시 등 용하신 것은 그만큼 그의 실력을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런데 애써 단검술을 배울 필요 가 있겠습니까." 카류 님은 자신의 허리에 찬 단검들을 갈무리하며 피식 웃었다. "누가 누구를 용서했다고 그러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드리크 경. 그리고 언제나 예기치 않은 일은 있기 마련이죠. 저는 쉽게 죽어줄 마음이 없는데 어찌 디트 경에게 모든 것을 맡길 수 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다가 그가 죽으면 그 후에 전 어쩌라고요? 누가 절 도와주러 올 시 간 정도는 어떻게든 벌어야 할 것 아닙니까." "......" 가슴을 후벼파는 듯한 말에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카류 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뒤에 디 트리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분은 말을 함에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 고 디트리온 역시 그 말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었다. 카류 님과 디트리온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나 사 이가 좋았던 두 사람의 믿음을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로 너무나 잔인했다. "알겠습니다. 카류 님." "부탁 드립니다. 드리크 경." 사실 근 3년 동안 그 분의 단검술을 봐주면서 카류 님은 상당히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었 다. 카류 님은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렇지 웬만한 자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러나 카류 님에게 칼을 겨누었던 자들은 모두 믿었던 자들뿐이었기에 카류 님은 한번도 그 에 대항해 검을 쓸 기회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헉헉... 레이포드 남작 님!!" 그렇게 한동안 카류 님의 검술을 봐주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시종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 다. 땀을 한껏 흘리면서 뛰어오는 그 시종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이내 뒤에서 따라오 는 사람 때문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카류리드!" 카류 님은 던지려던 단검을 내리고 자신을 부르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곧 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에...에르가 형?!" 나 역시 그 의외의 인물을 보고 놀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에르가는 그것에 아랑곳 않고 저 밑에서부터 단숨에 뛰어 올라와 카류 님의 목에 확 태클을 걸었다. "헉!" "이 바퀴벌레 같은 생명력을 가진 놈! 그래, 지금까지 대체 몇 번이나 죽다 살아난거냐!?" 에르가 님은 한 팔로 카류 님의 목을 조르면서 말했다. 그 모습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뭐 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헉...윽...!! 에..에르가 형...!! 윽... 놔줘...!!" "싫다! 이 자식아! 얼마나 졸라야 네 놈이 죽을지 시험해 봐야겠어!" "헉헉... 에르가 님. 헉.... 정말 큰일 내시기 전에 제발 그만두십시오." 아래쪽에서 허겁지겁 올라온 하늘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 말을 들 은 용병들이 그제야 그들에게 다가가서 두 사람을 떼어놓았다. "콜록... 으윽... 혀...형? 에르가 형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카류 님은 목을 감싸고 콜록거리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아닌게 아니라 모두가 그것이 궁금 한지 에르가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에르가가 전령에게 소식을 듣고 여기까지 도착하는데는 아무리 빨라도 사, 오일은 족히 걸릴 터인데 전령을 보낸 바로 다음날 이렇게 그가 이 곳에 서있는 것이다. "에르가가 아니다. 에스문드 백작이다. 알겠냐?" "...에?" 카류 님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똥그랗게 뜨고 있자 밑에서 에르가를 따라 올라온 하늘 색 머리의 남자가 숨을 고른 다음 그들 사이에 끼어 들어 말했다. "선대 에스문드 백작 님이 에르가 님께 가주의 자리를 물려주셨습니다. 선대 가주 님은 지 금 에스문드 영지의 저택에 계십니다." "...선대 가주가 사망하기 전에 에르가 형이 가주 자리를 넘겨받을 수도 있는 거야?" 카류 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에르가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실상 그런 일이 불가능한 일이 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게다가 이 일이 사실이라 해도 에스문드 가로서는 여러 가지로 불 명예스러운 일이었기에 속으로는 상당히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네가 알 바 없잖아! 그건 우리 집안 사정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에스문드 백작이 되었다 는 사실이고 내가 이곳에 제 발로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안 그러냐?" "전령은... 바로 어제 보냈는데...." "그 놈? 리아 영지로 오는 길에 내가 붙잡아서 도로 데리고 왔다. 됐냐?" 카류 님은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똑바로 에르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에르가가 얼굴을 확 구기면서 소리쳤다. "뭘 뚫어지게 쳐다봐! 이 자식아! 네 놈이 그런 식으로 쳐다보면 정말 기분이 더려워져! 알 았어!? 그 눈깔아!" "에...에르가 님..!!" 옆에 있던 하늘 색 머리의 남자가 크게 당황해서 그를 말렸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지 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왕자에게 할 말로는 너무 무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류 님은 그런 에르가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리고 에르가 쪽으로 다가갔다. "여전하네. 에르가 형." "....네 놈이야 말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이 발육 부진아야. 하긴, 네 놈이 그만큼 큰 것도 기적이야. 기적." 에르가는 허리에 손을 올리고 키 차이를 가르쳐 주기라도 하고 싶은 듯 한껏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그러나 카류 님은 그에 대답하기보다는 양손을 에르가의 허리에 휘감아 꽉 껴안았 다. "허...헉!! 이게 또 시작이네!! 이거 못 놔?!" 에르가가 당황해서 카류 님을 떼어놓으려 하자 카류 님이 금세 살짝 그에게서 떨어졌다. 에르가는 금방 떨어진 카류 님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듯 양손을 올린 상태 그대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네...네가 웬 일이냐. 이렇게 금방 포기를 다하고..."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반가워. 에르가 형. 아니, 에스문드 백작 님. 그렇지만 나, 에르가 형이라고 계속 불러도 되지?" 카류 님은 에르가의 손길에서 피하기 위해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친 다음 방긋 웃으면서 말했 다. 그 모습을 보고 에르가는 쑥스러운 듯 약간 얼굴을 붉히고 말했다. "...에...에르가 형님이라고 불러. 건방진 자식." 카류 님은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서 한동안 에르가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리 에르가가 카류 님의 친한 친구라고는 하나 이렇게 세력이 부족한 상태의 카류 님 진 영으로 에스문드 가가 들어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또다시 카류 님 이 슬픈 일을 겪어야 하는 것인가 하고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에스문드 가는 카류 님을 지원하기로 정한 모양이었다. 이로서 카류 님은 첫 번째 싸움을 자신의 친 한 친구와 하게되는 불행은 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끙, 이제 그만 내려가자. 일단 에르가 형과는 대립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으니 그걸로 됐어.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지만 사실 나도 곧 올 마법사들에게 가르쳐 줄 수식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거든." 카류 님은 엉덩이를 탁탁 털고 먼저 일어났다. 그 뒤를 따라 에르가가 일어났지만 뒤 따라 내려가지 않고 대신 카류 님에게 요청했다. "디트리온 경이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다. 너 먼저 용병들이랑 이트하고 내려가라. 카류." "에...에르가 님?" "됐어. 이트. 토 달지 말고 저 녀석이랑 먼저 내려가. 알았어?" 에르가의 부관으로 보이는 하늘색 머리색을 가진 남자가 그 말에 불복하려하자 다시 한번 그에게 명령했다. 그 남자는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카류 님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다. "디트 경이랑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러나 카류 님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에르가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에르가도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있다. 불만 있어?" "무슨 얘긴지 나도 들어봐도 괜찮을까?" "웃기지 마라. 내가 왜 널 먼저 내려가라고 했는지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당연히 너 듣지 말라고 하는 말 아니냐고!" 카류 님은 잠시동안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에르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피식 웃고는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에르가를 향해 말했다. "너무 디트 경을 괴롭히지마. 에르가 형. 디트 경이 스트레스로 쓰러지기라도 하면 곤란하잖 아? 알 아저씨처럼 내 호위를 해줄 만큼 실력이 그럴듯한 사람이 자꾸 죽어버리면 정말 곤 란해." 자신의 뒤에 있는 알의 무덤은 아랑곳 않고 카류 님은 냉정한 말을 했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저택을 향해 내려갔다. 잠시 에르가가 옴으로서 훈훈해졌던 분위기가 일순간 얼어버렸 다. 에르가는 카류 님의 말을 듣고는 잔뜩 인상을 썼고, 잠시 그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다른 용병들과 이트 라는 남자는 카류 님을 따라 저택 쪽으로 내려갔다. "...레이포드 경은 내려가시지 않으십니까?" "자네의 성격을 봐서 한 사람 정도는 감시자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이라네. 자 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전혀요." 그렇게 말은 했지만 에르가는 나에게 더 이상 내려가라고는 말하지 않고 천천히 디트리온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바로 근처까지 다가가서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는 들었다." "......" 디트리온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에르가는 더욱 얼굴을 구기고 약간 언성을 높이면서 말 했다. "카류를 죽이려 했다고?"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에르가는 겨우 세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디트리온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 둘렀다. 그러나 디트리온은 고개를 움직여 그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디트리온이 자신 의 주먹을 피하자 결국 에르가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벌써 주먹을 휘둘렀으니 이미 화를 낸 것인가. "이 자식!! 네가 그러고도 기사야? 카류의 호위기사냐고!! 3년 전 산길에서 무슨 일이 있어 도 카류를 지키겠다고 아르디예프 님께 한 그 말은 뭐야!!"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르가의 그 질책의 말에도 디트리온은 흔들림 없는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가 는 그 말에 더욱 화가 났는지 디트리온에게 달려들었다. "거짓말?! 지금 장난 하냐, 이 자식아!!" 에르가는 다시 한번 빠르게 디트리온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디트리온은 그것보다 빠르게 그 주먹을 피해냈다. 에르가는 어린 나이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춘 무인으로 비록 무 술이 전공은 아니라 할지라도 충분히 강한 축에 속했지만 오랜 세월 노련미를 갖춘 최고의 기사를 상대하기는 무리였는지 계속 디트리온을 향해 헛손질만 했다. 에르가는 계속 제대로 맞추지 못하자 신경질을 버럭 냈다. "이 개자식이!! 야! 이럴 때는 가만히 서서 맞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네 놈은 반성도 않는 거냐!!" 에르가는 자시의 주먹을 계속해서 피해내는 디트리온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며 그런 유치한 소리까지 내뱉었다. 그러자 디트리온은 조금 전과 같은 평이한 어조로 에르가 를 향해 말했다. "카류 님을 호위해야하는 몸입니다. 쓸데없는 일로 상처를 입어 그 분을 호위함에 있어 실 수가 있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뭐...!!" 에르가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지만 말문이 막혔는지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리기만 할뿐이었 다. "저를 보고자 하셨던 용건이 이것이 전부라면 저는 이만 내려가 보겠습니다." 디트리온이 내려가려 하는 것을 보며 에르가는 소리를 빽 질렀다. "거짓말이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카류를 지키겠다는 맹세가 거짓말이라고 한 주제에 내가 널 어떻게 믿고 카류에게 가도록 놔두겠냐! 네가 카류의 호위 기사라는 건 절대 용납 못 해!!" 에르가가 검을 뽑아내는 것을 보고 확실히 남아서 지켜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에르가 를 말리기 위해 앞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디트리온의 말에 나는 걸음을 멈 추었다. "저는 아스트라한 님을 사랑했습니다. 카류 님 또한 저에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분이었지만 불행하게도 저는 카류 님보다 아스트라한 님이 더 소중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저는 카류 님을 배신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카류 님만을 지키겠다는 말은 전부 거짓말이었습니다. " "......" 에르가는 검을 뽑은 상태 그대로 입을 쩍 벌리고 디트리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제 화를 내야할지 말아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었다는 말은 이제는 아니라는 말인가?" 나는 그들의 대화에 조용히 끼어 들어 물었다. 사실 카류 님이 디트리온을 다시 호위 기사 로 받아들였을 때부터 그의 마음이 정말 궁금했던 것이다. 그가 다시 돌아선다면 카류 님이 위험해짐은 물론이거니와 그분이 또 다시 절망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으니 말이다. "...아스트라한 님은 돌아가셨으니까요. 저는 카류 님을 지킬 것입니다." 디트리온의 대답에 에르가가 다시금 크게 소리질렀다. "잘도 그런 말을 나불거리는구나!! 카류가 아스트라한 님의 대용이냐? 꿩 대신 닭이다 이거 야? 사람을 배신하고 절망하게 해놓고 상황이 바뀌었다고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마음을 바 꿔 먹을 수 있는 거냐!?" "저는 그렇습니다." 디트리온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말했다. 에르가는 거의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디트리온을 향해 빈정거리는 말을 던졌다. "아스트라한 님이 되살아나기라도 하면 너는 또다시 그렇게 당당한 태도로 카류를 배신하겠 구나." "그렇습니다." 에르가를 향해 간단하게 대답한 후 디트리온은 그에게 살짝 목례를 하고 천천히 저택을 향 해 내려갔다. 에르가는 그런 디트리온을 보면서도 말없이 멍하게 서있었다. "에르가." "......"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에르가는 검을 든 자세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에스문드 백작. 한 가문의 가주가 이런 일에 혼을 빼면 되겠는가?" 나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면서 다시금 그를 불렀다. 에르가는 그때서야 정신을 차렸는지 천천 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레...레이포드 경." "아..." "바...방금 저와 대화를 한 사람이 바스라윈 가의 그 디트리온이 맞습니까?"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많은 사람이 절망하고 절규하고 또 죽음을 맞았다. 잔혹한 여름의 바람은 상냥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버렸다 "젠...장...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 녀석은.. 그 녀석은...!!" "어쩌면 디트리온의 일은 잘 된 일인지도 모르네." "뭐라고요!?" 에르가는 나를 보고 화가 난 듯 소리를 빽 질렀다. 카류 님 앞에서는 그렇게 투닥거리면서 도 뒤에서는 저렇게 카류 님을 위해주는 에르가를 보니 마음 한구석이 훈훈해져 옴을 느꼈 다. 비록 그가 다혈질에 화내길 잘하는 면이 없잖아 있지만 언제나 직선적이고 앞만 바라보 며 거기에 돌진할 줄밖에 모르는 그런 성격이 카류 님을 배신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카류 님이 살기 위해서는 반역 이외엔 길이 없네. 하지만 카류 님은 자신의 형제들과 대립 하고 싶지 않아 했고 또한 자신의 탓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마음에 걸려 계속 그 일을 머뭇거리고 있었지. 그대로 두었다면 카류 님은 의미 없이 개죽음을 당했을 지도 모르지. 하 지만 디트리온이 옴으로 해서 카류 님이 마음을 다잡게 되었으니 차라리 다행인 일이 아닌 가." "하지만 녀석의 마음은 완전히 황폐해져 버렸습니다. 디트리온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형제 들 일까지 알게 되었으니..." "아직 카류 님은 그렇게 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네. 가끔씩 잔혹한 말을 내뱉곤 하지만 여전히 상냥한 마음은 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이지." "하지만... 카류 녀석... 그런 소리를 하다니... 자신의 뒤에 디트리온이 있는데... 그리고 여기 에 알의 무덤이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다니..." "하지만 디트리온을 죽이지 않으셨지 않나. 카류 님은 자신을 배신했던 디트리온에게 말하 셨지. 죽음 따위로는 절대 이 일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나는 카류 님이 디트리온을 죽이고 싶지 않았기에 한 말이라고 믿고 있다네. 얼마 전 회의실에서 아스트라한 님의 시체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평한 것도, 디트리온에게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는 것도 한번 배신한 디트 리온을 어떻게든 다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는 것을 믿는다네. 그 분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 해 잔혹한 말을 내뱉고 또 그때마다 스스로를 상처를 입히고 있는 것일 테지." "......카류는...." 에르가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꼭 쥐었다. "그 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원래... 그런 놈이니까요... 뼛속까지... 남을 생각하는 놈이 니까요." "...에르가." "하...하하.. 정말 멍청한 놈입니다. 조금쯤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도 좋을 텐데 그렇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몇 번이고 자신을 희생하고 상처 입는 그런 덜떨어진 놈 말이죠." 에르가는 이마에 양손으로 짚고 중얼거렸다. 작은 어린아이가 나의 옷자락을 잡고 방긋 웃으며 멋진 기사 님이라고 부르던 기억이 아직 도 생생하다. 그 작은아이는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자라났 다. 최고 권력자의 아이로 태어났으면서도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그런 상냥한 아이였다. 신분의 고하에 관계없이 사랑을 베풀 줄 알았던 그 아이는 당연하게 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 상냥한 아이는 이제 그 상냥한 마음 때문에 너 무나 큰 상처 입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상처입고 있었다. "그렇게 멍청한 놈이니 우리가 어떻게든 구제해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 그런가?" 나의 말에 에르가는 피식 웃더니 이내 혼자 벌떡 일어났다 "그 멍청한 놈은 워낙 띨띨해서 제 도움 없인 되는 일이 없을 겁니다. 제가 괜히 이곳에 찾 아온 것이 아닙니다. 레이포드 경." 에르가는 그렇게 말하고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앞으로 또 어떤 절망이 닥칠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렇게 카류 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분은 아직 버틸 수 있으리라 믿는 다. 나는 에르가를 따라 산을 내려갔다. 마지막까지 카류 님을 지켜준 알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을 잊지 않고. ◆ ◆ ◆ ◆ ◆ ◆ ◆ 나는 창 밖의 약간은 분주해 보이는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택 뒤쪽에서 불어온 바람 이 항상 대하는 친근한 손길처럼 부드럽게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벌써 카류 님이 내려오셨니? 히노?" "예...예? 아버님! 저는 그냥 바람을 쐬고 있었던 것뿐이라고요." 나는 아버님의 말에 약간 당황해서 창문을 닫고 서류를 들고 있는 아버님의 곁으로 걸어가 서 앉았다. 아버님은 피식 웃으시는 듯하다가는 곧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너의 카류 님을 향한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 도 너에게 루블로프 님의 아내가 되는 것을 생각해보라고 설득해 볼 걸 그랬구나."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아버님...!" 갑작스런 아버님의 말에 나의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더욱 무안해서 좀더 뭐라고 반박의 말을 하려 했지만 아버님이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자 의외의 일에 약간 당황해 나는 가만히 아버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욕심이 과했다. 사실 너를 왕비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카류 님을 왕으로 등극시킴 으로서 그 일의 중심 세력이 되었던 우리 가문을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한 권력을 가진 가문 으로 만들고 싶었기에 추진시킨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전부 물거품이 되었구나." "아버님! 왜 그런 소리를 하세요! 에스문드 가까지 카류를 위해 힘을 써주겠다고 하지 않았 나요. 게다가 아르디예프 님께서 많은 마법사를 데리고 돌아오실 거예요!" 난생 처음으로 아버님의 약한 소리를 듣자 나는 괜히 마음이 불안해져 아버님께 소리쳤다. "솔직히 군사적 차이가 너무 크다. 아무리 에스문드 가나 하르트 가, 바스라윈 가가 우리 진 영으로 들어온다 한들 그 많은 병력의 차이를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겠니. 아르디예프 님께 서 생명의 궁의 마법사를 데리고 온다면 확실히 얼마동안 버틸 수 있긴 하겠지. 하지만 기 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우리가 이기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단다. 너도 충 분히 알고 있겠지?" "하지만...."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지. 점점 강대해지고 있는 우리 리아 후작 가를 견제하고 있는 가 문이 원래부터 굉장히 많았단다. 이때를 틈타 어떻게든 우리 가문을 망하게 하는데 공을 세 워 그 이득을 챙겨보려는 가문이 생겨날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뻔하다. 특히 지금까지 우 리 리아 가문 같은 여러 후작 가에 밀려 종이 호랑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두 공작 가문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이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님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미간을 누르면서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돌파구가 없구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우리들은 반역자로 모조리 몰 살당하고 말 것이다. 후, 바보 같구나. 이런 곳에 앉아 기적이 일어나도록 비는 수밖에 없다 니..." 아버님의 말을 듣자 왠지 모르게 약간 울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버님을 향해 말했다. "아버님은 너무 모르시는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서도 에스문드 가가 우리의 편을 들겠다고 말했어요. 게다가 8서클 마법사인 아르디예프 님과 류스밀리온 님이 우리편이 되었지요. 곧 생명의 궁의 다른 수많은 마법사들도 곧 우리진영으로 들어올 겁니다. 처음 우리의 상황과 비교한다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요? 이 기적을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카류라고요." "히노...." "아버님도 어제 회의실에서 카류가 한 말을 들으셨지 않아요? 카류가 저렇게 냉정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우리들을 위해 일어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이렇게 축 처지셔서 어린 딸아이에게 푸념이나 하는 모습이라니, 과히 보기에 좋지 않군요." 아버님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살짝 웃음 지었다. "네가 말도 못하고 매일같이 집안에만 있어 걱정하던 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이렇게 변 해버렸구나. 후후.. 역시 사랑의 힘은 대단하구나." "아...아버님!!! 으... 저...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분명 새빨개졌을 거라는 생각에 다급히 아버 님의 서재에서 빠져 나왔다. 아버님은 내가 동굴에 다녀온 뒤 말을 하게 되고 난 후부터 가 끔씩 저런 말을 서슴없이 하곤 해서 이렇게 나를 당혹스럽게 한다. 나는 아버님의 서재에서 나온 후 뒷쪽의 정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해 조금 전 창 밖으로 카류가 그쪽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저절로 발이 그 쪽을 향하 고 있는 것이다. 그 쪽엔 답답한 방에 있고 싶지 않다는 카류의 말 때문에 일부러 마련한 탁자가 있었다. "아, 카류!" "히노 선배?" 정원 쪽으로 향하던 나는 마침 몇몇의 용병들과 오늘 에르가와 함께 온 하늘색머리의 남자 와 함께 무언가 책과 필기도구를 잔뜩 들고 걸어가고 있는 카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음? 디트 경은...?" 난 문득 카류의 곁에 항시 붙어 있던 디트 경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약간 불안한 생각에 다 급히 질문을 했다. 어제 있었던 일로 인해 디트 경에게 불신과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디트 경 혼자 다니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를 생각하자 상당히 불안해졌던 것이다. 처음에는 카류를 죽이려고 했던, 카류를 이렇게 변하게 만든 디트 경이 밉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디트 경 또한 여러 가지 사건에 휩쓸려 이용당한 희생자일 뿐이고, 카류를 미워해서 저지른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디트 경을 미워할 수 없었다. 오히려 신뢰가 바 닥에 떨어져 많은 사람들의 눈총을 받고 있는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걱정이 되었 다. "에르가 형이 디트 경과 할 얘기가 있다고 하기에 저 혼자 먼저 내려왔어요. 뭐, 에르가 형 이 열 받은 얼굴로 디트 경에게 할 얘기야 듣지 않아도 뻔하지만요." "...그...그런데 말리지 않고 그렇게 내버려두고 온 거야? 에르가가 원래 쉽게 발끈하잖아. 그 러다 디트 경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해." "아무리 다혈질인 에르가 형이라도 설마 디트 경을 죽이기야 하겠어요? 그렇게 하지만 않는 다면 에르가 형이 무슨 짓을 하든 전 아무래도 관계없어요." 카류는 나를 향해 싱긋 웃고 탁자 쪽으로 걸어갔다. 심한 말을 내뱉고 냉정하게 돌아서는 카류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눈엔 그 뒷모습이 너무 쓸쓸하게 비춰졌다. 카류가 디트 경을 진심으로 증오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아니 오히려 누구보다 디트 경을 걱정한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한번씩 그에 대해 일부러 매몰차게 대하는 카류의 모습을 보기 가 너무 안타까웠던 것이다. 사실 어제 사건이 있었던 정원에서라든지 또 아침에 있었던 회 의실에서 카류가 한 말이 없었다면 디트 경이 살아남지 못했음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카 류는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디트 경을 미워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솔직히 말해 내가 디트 경을 걱정하는 것도 사실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누구보다도 카류가 가장 슬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 것이다. 나는 약간 가라앉은 기분으로 카류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이리 앉아요. 히노 선배. 하지만 오늘은 함께 놀아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할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착하죠? 조금 있다가 에르가 형이 오면 그때 에르가 형이랑 함께 놀도록 해요." 카류는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나를 달래듯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이상하게도 카 류는 옛날부터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대할 때 이런 식으로 아이들 다루듯 행동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기에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된 익숙한 모습이고 아무래도 좋긴 하지만 그 래도 너무 어린애 취급을 하면 조금 불만스러워져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카류는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다. 그 책에 빽빽하게 숫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아르디예프 님 이 데리고 올 마법사들을 위해 마법 수식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카류가 펜을 들고 글을 쓰려 하던 차에 좀 전부터 곁에 서 있던 에르가를 따라왔던 하늘색 머리의 남자가 카 류에게 말을 걸었다. "일을 하시는데 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저는 이트라고 합니다. 사실 묻고 싶은 것이 있 는데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카류는 펜을 들던 손을 멈추고 그를 향해 고개를 들어올렸다. "뭐지?" "앞으로 어떻게 하실 작정이신지요?" "흐음... 글쎄. 왜 지금 나에게 이런 것을 묻는 거지? 네가 에르가 형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은 상황을 대충 봐서 짐작하겠지만 일단 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신용할 수 없으니 앞으로 의 동향에 대해 주절주절 말해줄 생각은 전혀 없어." "저는 에르가 님의 부관입니다. 저는 에르가 님의 미래를 위해서 앞으로의 동향을 꼭 듣고 싶습니다. 저는 아무런 대처도 못하고 에르가 님이 개죽음 당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 니다." 약간은 무례한 이트라는 남자의 말에 카류는 펜대를 다시 제자리에 꽂아두고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 자기 소개를 할 때 이트라고만 했다는 것은 너, 평민이 맞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트는 카류의 말에 바짝 긴장 한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평민의 신분에 카류의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건만 이렇게 무례한 말까지 했으니 긴장이 되는 것은 당연 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카류는 그런 곳에 신경을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카류는 내 쪽을 바 라보며 피식 웃었다. "히노 선배. 에르가 형 정말 많이 컸죠? 평민을 자신의 부관으로 삼았대요. 평민이라면 냄새 가 나니 어쩌니 하고 신경질부터 내던 그 에르가 형이." "카...카류?" "많이 변했다는 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말 철 들었네. 귀여운 에르가 형. 있다가 내려오면 칭찬해줘야겠다." 카류는 흐뭇하다는 듯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씩 카류의 저런 모습을 보노라면 카류는 진짜 우리들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의문이 들곤 한다. 이트는 카류의 말을 듣더니 약간 인상을 찌푸렸다. 카류와 우리들의 사이에 대해 잘 모르는 그는 카류가 이렇게 자신의 주군이 완전히 어린애 취급한다는데 꽤나 발끈한 모양이었다. "...묻고 싶군요. 카류리드 전하. 전하께서는 그렇게 귀여운 에르가 님께서 당신의 진영에 들 어오지 않겠다고 선언했을 시에 어떻게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이트는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적이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 왔다. 그 말을 들은 카류의 얼굴에 띄워진 장난스러운 끼가 금세 사라졌다. "당연한 일을 왜 묻는 거지? 싸우는 수밖에." "싸운다고요? 그 후에는 어떻게 하실 참입니까?" 이트는 조금 전 에르가에 대해 했던 카류의 말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고집스럽게 카 류의 말끝을 붙잡고 늘어졌다. 예전의 카류라면 부드럽게 넘겼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카류는 이런 쪽에서 상당히 날카로워져 있는 상태였기에 이 질문에 어떻게 반응할지 초조해져 나는 어떻게든 이트를 나무라면서 대화를 끊으려했다. 하지만 그렇게 입을 떼려는 순간 금방 카 류가 차갑게 그 말에 대답하고 말았다. "단도 진입적으로 말해서 나의 적이 되겠다면, 나의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면 죽인다. 당 연한 것이 아닌가."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듯 냉담한 카류의 반응에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카류는 자신이 머뭇거리다가 자신을 호위해주겠다고 했던 용병, 알이나 슈카 라고 한 그 소매치기 소년처럼 죽는 사람이 나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이 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원하지 않는 싸움이지만 우리들을 위해 자신의 친구나 형제 들과 싸우는 고통을 감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트는 자신의 주군을 그렇게 간단히 죽이겠다고 말하는 카류에게 상당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에르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쪽 편을 들어준 자신의 주군을 위해 믿음이 가는 말을 해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 에..에르가 님은 당신의 편을 들기 위해 자신의 아버님인 선대 에스문드 백작 님께 검까지 들이밀었단 말입니다. 그...그런데..." 나는 그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에르가가 에스문드 백작이 된 건 알고 있었지만 그런 일 이 있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선대 에스문드 백작이 그렇게 쉽게 자신의 가문과 아들을 사지에 내모는 것과 비슷한 일은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쳤다. 카 류도 약간 놀라는 표정을 짓나 싶더니 금세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턱에 손을 올리고는 재미있다는 듯이 이트를 향해 말했다. "후... 에르가 형은 자신의 아버지보다 내가 더 소중했나 보지." "다...당신!!" "너는 에르가 형이 굉장히 소중한 모양이구나." 카류는 화가 난 듯 금방이라도 주먹을 뻗을 것 같은 이트를 향해 가볍게 한마디 던졌다. "너는 에르가 형이 몇 번째로 소중하지?" "무...무슨..." "너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 에르가 형이기를 빈다. 그리고 충고하는데 에르가 형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에르가 형의 곁에서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차갑고 고저 없는 카류의 목소리가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깝게 들려왔다. 카류는 자신과 디 트 경의 일 때문에 저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의 일을 마치 자신의 일처럼 발끈하 는 이트를 보며 그들이 자신과 같은 일을 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리라. "어이! 카류!!" 갑자기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정원에 난 길을 따라 에르가와 디트 경이 이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 벌써 내려왔어?" "그건 내 마음 아니냐?" 에르가는 자신의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디트 경을 힐끔 보다가 우리가 있는 쪽으로 뛰어와 서 의자를 거칠게 끌어내어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다가 뒤늦게 나를 보고는 깜짝 놀라서 인 사를 했다. "아..앗! 히노 양.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아니. 에르가. 괜찮아. 아까도 인사했잖아. 아, 나 에르가라고 계속 불러도 괜찮을까? 이제 는 에스문드 백작 님일텐데..." "...그...그런... 리아 후작 가의 외동딸이신 히노 양인데 당연하죠. 얼마든지 에르가라 부르셔 도 좋습니다." "왕자인 나는 에르가 형'님'이라 불러야 하고?" 카류가 한 손으로 턱을 고고는 "님"자에 강세를 주며 피식 웃었다. "시끄러. 넌 나보다도 어리잖아." 에르가가 얼굴을 붉히고 소리치는 것을 보며 카류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일어나서 에르 가에게로 다가갔다. "어쨌든 빠르게 여기까지 오느라 많이 피곤하지? 그만 저택으로 들어가서 씻고 쉬어. 이런 데서 병이라도 나면 웃음거리밖에 안된다구." "내가 너처럼 허약한 놈인 줄 아냐? 이 발육 부진아야. 며칠 말 타고 달렸다고 힘들 리가 있겠어? 세상을 전부 네 기준으로 보지마!" "하하... 자자, 알았으니까. 히노 선배랑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딜티를 불러서 놀고 있 어. 알았지? 에르가 형. 저택 안엔 딜트 혼자 있을 거 아냐. 오랜만에 왔는데 이렇게 나 몰 라라하면 딜티가 얼마나 섭섭해하겠어." "시꺼. 자식아. 딜티 자식이 죽든말든 내가 알게 뭐냐." 에르가는 화를 내면서도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제나 그렇듯 투덜거리면서도 카류의 말을 듣는 에르가를 보며 몰래 살짝 웃으면서 나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생각하 니 아까부터 우리들 때문에 카류가 마법 수식을 전혀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 이다. 우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카류는 손을 들어올려 약간 흐트러진 에르가의 앞머 리를 살짝 넘겨 정리해주면서 말했다. "정말 많이 컸네. 17살인데도 거의 다 큰 것 같아." "너 자꾸 사람을 애 취급할래?" 에르가는 언제나처럼 발끈하며 카류의 손을 내치려했다. 그러나 카류의 다음 말을 듣고는 약간 얼어버렸다. "앞으로도 영원히 이대로 있어 줘. 에르가 형. 절대로 나를 배신하지마." 카류는 살짝 에르가를 안았다가 금방 떨어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 다. "어서 들어가. 알았지?" 카류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 전에 앉았던 의자로 돌아가서 앉았다. 문득 조금 전부터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무표정한 디트 경이 눈에 들어왔다.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 는 듯한 느낌에 나는 고개를 돌려 빠르게 걸어갔다. 나와 에르가, 에르가의 부관 이트 이렇게 세 사람은 저택 안 쪽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말없 이 저택의 개인 거실까지 와서 각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았다. 풍성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 기에 앉은 채로 그것이 구겨지지 않게 잠시 정리를 하고 있는데 에르가의 중얼거리는 소리 가 들려왔다. "...카류...녀석." "에르가..."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약간 인상을 쓰고 있는 에르가를 보고 안타깝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카류의 말에 에르가가 너무 기분이 나빠하지 말아주었으면 했기 때문이었다. "카류의 마음은... 알고 있어요. 히노 양. 단지... 그 녀석이... 모두가... 왜 이렇게 되어 버렸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에르가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억지 웃음을 지었다. 그러다가 에르가도 자신의 표정이 얼마 나 어색했는지를 깨달았는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참동안 침묵이 방안을 맴돌 았다. 그 침묵 속에서 한동안 카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희소식이야!! 모두!!!"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딜티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희소식이라니...? "분위기가... 영 이상하네? 이렇게 좋은 날에... 왜 그래? 왜들 그래요?" 딜티는 조용한 방의 분위기를 보고 약간 주눅이 들었는지 우리들을 보고 질문했다. "...별거 아냐. 그러나저러나 무슨 일이냐? 희소식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아, 그게 말이야!" 딜티는 기쁜 듯 방글방글 웃으면서 우리가 앉은 소파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후후후... 맞춰볼래?." "뭔데 그래? 빨리 말해봐. 사람 속 뒤집어지게 뜸들이지 말고!" 에르가가 꼭 물어뜯을 것 같이 신경질을 내자 딜티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네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던 후크와 카멜 알지? 걔네들이 곧 오겠단다. 너처럼 무대포 로 들이닥치지 않고 조신하게 편지까지 보냈더라고." "후크가? 카멜이?" "예. 히노 양. 솔직히 그들이 귀족은 아니지만 아르윈에서는 손꼽히는 거대 상단의 자식들이 아니겠어요. 일단은 정치와는 관계없는 그들이 이 곳 리아 영지에 들린다는 것은 분명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징조겠지요?" "자금적 지원?!" 에르가가 소리치자 딜티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어 보였다. "글쎄.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겠지만 분명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것은 분명해. 안 그래?" "정말 잘됐다. 리아 영지도 평야가 많아서 물자가 풍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쟁시엔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모자라는 법이지." 에르가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자 납득한 듯한 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은근히 터져 나오는 기 쁨을 참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카류는 어디 있는 거야? 에르가? 너 아까 카류를 찾으러 간다고 바람같이 달려 나 갔었잖아." "카류는 밖의 정원에서 마법수식을 정리하고 있어. 우린 방해가 될 것 같아서 먼저 나온 거 야." 나는 딜티의 질문에 에르가 대신 대답했다. "에에. 그렇군요. 참, 그러나 저러나 정말 놀랍지요? 카류 그녀석이 머리가 좋은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카류가 검술이나 전술에 전공을 한 것도 아니었으니 이런 전쟁시엔 가장 도움이 안될 것 같았는데 의외로 제일 큰 도움이 되었군요." 딜티는 에르가도 왔고 오랜만에 후크나 카멜까지 본다는 것에 들떴는지 기분 좋게 계속 말 을 이었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어두웠던 분위기가 밝아져서 한참동안 우리들은 에르가가 모르는 것에 대해 설명해주기도 하면서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문득 에르가 곁에 서서 한참동안 우리들의 말을 경청하던 이트가 한숨을 내쉬는 것이 눈에 띠였다. "이트. 무슨 할말이라도 있어?" "......" "이봐, 내 앞에선 그렇다 치더라도 감히 히노 양 앞에서 그 태도가 뭐야? 물으면 대답해야 할거 아냐!" 나의 말에 대답을 않자 에르가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괜찮다고 에르가를 말리는 사이 이트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무 군사적 차이가 크지 않습니까. 용병을 아무리 많이 끌어 모은다 쳐도 지금 이 상태로는..." "마법사들이 올 거야! 마법사 한 명이 군사 수십 명은 거뜬히 상대할 수 있다고. 게다가 8서 클 공격 마법을 한 방 날리면 이천명 정도는 가뿐히...." "...휴우... 에르가 님. 정말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 믿으십니까." 이트는 딜티의 말을 끊고 에르가를 향해 물었다. 딜티는 약간 발끈 하는 듯 했지만 솔직히 군사적 차이가 크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3년 전에 있었 던 동굴 사건을 당하기 전의 딜티였다면 말하는 도중에 평민에게 무시당하고 이렇게 쉽게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기적이 일어나고 있지 않냐. 너 같으면 가만히 앉아서 이만큼이나 세력을 키워낼 수 있겠냐?" "...더 이상 일어날 기적이 있다면 그때부터 정말 기적이겠지요." 이트는 냉정하게 평했다. 사실 지금까지는 카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 모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모인 사람들은 이쪽편이 될 가능성이 그런대로 높은 사람들이었다는 뜻 이다. 사실 아직 후크와 카멜의 일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고 말이다. "쓸데없는 말로 일 하나하나에 초치지마!" 에르가는 약간 화를 내며 고개를 돌렸지만 마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우 리 진영으로 들어오겠다고 정한 이상 어떻게든 이길 방법을 생각해야 하겠는데, 지금의 상 태에서는 그것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리끼리 앉아서 이렇게 고민하면 뭐해! 어쨌든 마법사들과 내일 올 후크와 카멜을 보고 생각하자고. 에구,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벌써 하늘이 컴컴해져 가잖아. 일단 자기 방으 로 돌아가자. 더 자세한 건 리아 후작 님이 불러서 제대로 이야기 해주실 테니까." 딜티의 말에 우리들은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나의 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문 득 카류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홀로 카류의 방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카류의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이렇게 어두워지고 있는데 밖에 있는 걸까. 등불 같은 것도 가져가지 않아서 아무 것 도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야. 나는 약간 의아했지만 일단 낮의 그 곳으로 가보기로 했다. 해가 완전히 져버려서 등불도 없이 나온 나는 달빛에 의지해 혹이나 넘어져서 창피 당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조심 발 밑을 보면서 걸어갔다. 폭이 넓고 긴치마를 입고 있어서 더욱 신경이 쓰였다. "엇? 히노 님?" "에?" 발 밑을 보고 가다가 갑자기 낯익은 병사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야?" "아, 디트 경께서 카류리드 님의 주위를 지키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두운 곳에 불을 켜고 있으면 주목받기 십상이니까요." "아아, 등불을 가져왔나 보구나. 알았어. 그럼 잘 지키고 있어." 나는 병사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해주고 멀리서 어렴풋 보이는 등불을 따라 걸어갔다. 그렇 게 조심스럽게 걸어가다가 밝은 등불 아래 서 있는 두 사람의 인영을 발견했다. 탁자에 엎드려 있는 소년과 그 뒤쪽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는 남자. 아마 카류가 마법 수식 정리를 하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는데 어깨에 검은 망토가 둘러져 있 었다. 문득 디트 경의 망토를 두르고 있지 않은 모습을 보고 나는 그것이 디트 경이 카류를 위해 둘러준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동안 디트 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갑자기 가슴 한쪽이 뭉클해져 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손으로 가슴을 꼭 쥐었다. 카류를 바라보고 있는 디트 경의 표정은 정말 부드러웠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 런 무표정이 아닌 마치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에게 지어 보이는 그런 따뜻한 표정 이었다. 어쩌면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등불 덕분에 디트 경의 대강의 행동이 보이기는 했지만 내가 보는 각도에서는 디트 경의 얼굴에 그늘이 져서 세세한 표정까지 확실히 볼 수는 없었기 때 문이다. 내가 디트 경이 옛날과 다름없이 카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계속 간직하고 있기 를 바랬기에 이런 환영이 보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만은 내가 본 것이 진짜라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카류가 몸을 살짝 뒤척였다. 그리고 몸에 둘러진 망 토가 기분이 좋았던지 카류는 어깨에 살짝 걸쳐져 있기만 한 그것을 얼굴 쪽으로 끌어당기 면서 살짝 미소를 띠었다. "...트..." 자그마한 카류의 목소리가 아주 얼핏 들렸다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자리에서 카류가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카류가 앉아 있던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나뒹굴고 어깨에 둘러 져 있던 디트 경의 망토도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다. 카류는 그 망토를 바라보다가 디트 경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의자를 피해 잠시 자리를 옮긴, 불빛에 비친 디트 경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한 상태로 돌 아가 있었다. 디트 경은 떨어진 망토를 주우려는 듯 조금 허리를 굽히려 했지만 그보다 먼 저 카류가 그 망토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거칠게 그것을 디트 경에게 넘겼다. "쓸데없는 짓 말고 너나 써. 네가 아파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을 테니까." 고요한 정원에서 카류의 목소리는 의외로 크게 들려왔다. 마치 비꼬는 듯한 냉랭한 목소리 였지만 나는 카류의 그 말 자체가 진심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디트 경은 이번에 있었던 일 로 이 저택에 있는 여러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었다. 사실 디트 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다해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 열심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랬기에 카류 는 그것을 혹시라도 디트 경이 아프기라도 할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리라. "저는 카류 님을 호위하는 몸입니다. 그런 카류 님께서 밤바람에 병이라도 걸리면 저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그런 것뿐입니다." 카류의 말에도 디트 경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갑작스레 목이 메여오는 것을 느끼며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솔직할 수 없는 두 사람의 행 동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탓이었다. 스르렁. 문득 귀를 시리게 하는 금속음이 귀를 파고들어 나는 손을 얼굴에서 내렸다. 그 금속음은 디트 경이 검을 뽑아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디트 경이 내 쪽을 향해 검을 겨누고 말없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약간 겸연쩍어서 눈가를 훔치고 천천히 그들의 앞 으로 나갔다. "어...히...히노 선배?" 카류는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금세 평소처럼 상냥하 게 웃으며 물었다. "이렇게 어두운데 왜 여기까지 온 거예요?" "으...응. 어두워졌는데 네가 들어오지 않기에..." "후, 제가 그만 깜빡 졸았나봐요. 이제 그만 들어가요. 선배." "응... 그래." 카류는 탁자 위의 책과 여러 가지 필기 용품들을 챙긴 후 나의 손을 이끌었다. 나는 카류의 손에 이끌려가면서 잠깐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언젠가 꼭 카류와 디트 경이 서로 솔직 하게 진심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아무도 모르게 하늘의 달님에게 살짝 빌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4 상인 "카멜 도련님. 이제 곧 리아 후작 가입니다." "음, 알았어. 그런데 그 도련님 소린 제발 그만해." 나는 마부의 말에 대답하고 반대편에 앉아 조금 전부터 계속 마차 밖을 바라보고 있는 후크 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후크. 밖에 뭐 좋은 거라도 있어?" "시꺼. 카멜. 나는 너와는 달리 너무나 예민하다고. 제발 우울해져 있는 나를 건드리지 말아 줘." "우울해져 있는 사람치고는 상당히 말이 많은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반대쪽의 창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숨막힐 정도로 높고 푸르렀다. 그 하늘 중간에 홀로 덩그라니 떠있는 태양 은 일찍 여름을 가져오려는 것인지 약간 뜨겁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열을 만들어내고 있었 다. 물기가 많은 과일이 꽤나 잘 팔릴 듯한 날씨로군. "날씨 한번 우라 지게 좋군. 원래 이렇게 기분이 우울한 날엔 비라도 쫙쫙 내려야하는 게 아닌가? 태양이여, 네가 지금 감히 쟈스칼 상단의 차기 주인이 될 이 후크 님의 의지에 반 항하겠다는 거냐? 네가 진정 뇌물의 참 맛을 보고 싶은 것이냐?" 날더러 우울하니 조용히 하라고 말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후크가 금새 홀로 투덜투덜 대 기 시작했다. 후크가 정말 우울해하는 있다는 것을 아는 만큼 지금 녀석의 행동을 보자니 녀석의 입이 다물어 질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날씨에 맞춰서 멋진 기분을 내는 게 어때? 날씨더러 네 기분에 맞추라고 억지를 부리 지 말고." "제발 나의 감상을 깨지 말아다오. 카멜. 내가 생각하기로 넌 감수성이 병아리 눈물정도밖에 되지 않을 듯 싶구나. 아니, 병아리 눈물도 너무 많아!" "상인더러 감상적으로 되라는 것은 그날로 망하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는 거 몰라?" "...훗, 그런가? 며칠 못 보던 사이 꽤나 레벨 업 했구나, 카멜. 그러나 나의 말발을 따라오려 면 한참 멀었다. 멀었어." "그러냐?" 나는 그냥 후크를 무시하기로 하고 팔을 고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어렴풋이 거대한 리아 후작의 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말발의 원조를 꼽으라면 역시 카류겠지. 카류의 말발은 너도 못 따라가는 거 아니냐? 후 크." "...그래, 그래서 지금 나의 사부 님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겠어." 후크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카류의 이름을 들먹여서 그런지 후크는 약간 얼굴이 상기되었 다. 동굴 사건이 있은 후로 녀석을 만나는 것은 거의 3년 만이다. 3년이 지났건만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몇 번이나 죽을 뻔하고 피투성이가 되어가면서 도 우리들을 삶으로 이끌어 주었던 작은 꼬마의 뒷모습을 말이다. "카멜 도련님. 후크 도련님." 문득 들려오는 소리에 마차가 멈춰 섰다는 것을 겨우 깨닫고 마차에서 내렸다. 리아 후작의 저택은 저번에 한번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르게 살벌한 호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금도 우 리들의 마차와 마차를 호위하는 병사들을 보고 완전히 경계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리아 후작 님께 여쭈어라. 힐튼 상단의 카멜과 쟈스칼 상단의 후크가 왔다고 하면 알아들 을 것이다." 나의 말에 가장 지위가 높아 보이는 병사가 다가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멜 님. 후크 님. 안으로 드시지요." "조치가 빠른데?" "그만큼 우리들을 기다렸다는 뜻이겠지." 나는 후크의 말을 가볍게 받아주며 그 병사의 뒤를 따라 저택의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은 우리들은 커다란 응접실로 안내했다. 과연 리아 후작 가의 저택답게 그곳은 굉장히 아름답 고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었다. 곳곳에 우리 상단을 통해 들여온 물건들도 눈에 띠여 나는 슬쩍 웃었다. "뭐가 우스워?" "그냥, 여기저기 우리 상단에서 나온 물건들이 있잖아." "음... 과연.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것을 따지다니, 굉장한 상인정신이군. 이러다가 내 대에 이르러 힐튼 상단에게 우리 상단의 자리를 뺏기는 거 아냐?" 후크는 칭찬하는 건지 비아냥거리는 건지 알 수 없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아마 짐작컨대 둘 다 일 것이리라. "자...잠시만요!!" 콰당!! 밖에서 누군가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리나 했더니 곧 큰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고 보니 응접실 문짝에 옅게 여러 개의 발자국이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군. 나의 착각인 가? 리아 후작 가에서 감히 문을 발로 차고 들어오는 인간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후크! 카멜!!" 나는 익숙한 목소리의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짧게 자른 녹색머리카락의 남자가 왠지 모 르게 건방져 보이는 자세를 취한 채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르가!? 어째서 네가..." 후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에르가를 보고 외쳤다. "후... 에스문드 백작이라고 불러라. 이 건방진 녀석아." "에스문드 백작? 설마... 에스문드 백작 가가 제6왕자군에 가담하기로 한 거야?" 에르가는 천천히 우리 쪽으로 걸어와 자리에 털썩 앉으면서 불만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 다. "그래, 불만이냐?" "풋,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 말투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나는 에르가를 보고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3년 전의 일이 있은 후 카류에 의해 가장 크 게 변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에르가이다. 그런 에르가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카 류의 편을 들었다는 것이 그렇게 의외의 일도 아니었다. 비록 험한 말투나 솔직하지 못한 성격은 조금도 바뀌지 않은 듯하지만 말이다. "왔구나." "와, 정말 반갑다! 너희들!!" 금빛의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여성과 연갈색의 짧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가 함 께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히노 양. 그리고 딜티?" "딜티? 넌 어떻게..." 오랜만에 만난 아름다운 히노 양의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의외의 인물에 이번에는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제껏 들은 정보에 의하면 카류 를 반역자로 만든 데는 트로이 후작 가와 후르부크 백작 가가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들었 는데, 딜트라엘은 트로이 후작 가의 장남이니 우리들이 이렇게 놀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이다. "뭐, 그렇게 놀랄 것도 없어. 너희들도 아직 기억하지? 그 동굴 사건 말이야. 그 때 몇 번이 나 카류가 나의 목숨을 구해주었잖아. 그러니 나 역시 은혜를 갚아야지. 내가 이 자리에 있 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딜티의 말에 나는 정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설마 카류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홀로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얘기인가? 트로이 후작가의 차기 가주라는 자리도 버리고, 자신 의 가족들까지 전부 버리고 카류를 찾아왔다는 것인가!? "...라는 건 솔직히 전부 뻥이다. 푸훗." "뭐라는 거야? 딜티! 너 이 자식!" 에르가가 신경질을 부리자 딜티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의자를 하나 골라잡아 털썩 앉았다. "동굴 사건 있지? 그거 우리 아버님이 일으킨 거였대. 제1왕자파였던 아버님은 카류와 녀석 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전부 생매장을 시켜버리려 했던 거야. 물론 친아들인 나도 함께 말이 지. 뭐, 그것 까진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는데 카류가 처형식에서 도망치자마자 나를 죽이겠 다지 뭐냐. 내가 카류 편을 들면 곤란하다나? 그 일을 우연히 듣게 된 난 신경질이 나서 가 출한 거고 생각 없이 가출하고 나니까 갈 곳이 없잖아. 그래서 카류에게 온 거야." 딜티는 심각한 내용의 말을 별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쏟아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고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카류라면 나를 받아줄 줄 알았거든. 자신을 이런 절망에 빠뜨린 원흉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류는 나를 받아들였지. 거기에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약속 까지 해줬다." 나는 갑작스레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뭐, 그냥 그렇다는 거지." 딜티는 다시 가볍게 웃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응접실 안으로 약간 살벌한 공기가 감돌았다. "후크, 카멜. 너희들이 카류를 찾아온 이유가 기쁜 이유였으면 좋겠구나." 히노 양은 마치 이름 난 조각가의 최후의 걸작품인 듯한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만들어 내 며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동굴 사건 후 제대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카류 를 제외한 우리들에게 먼저 말을 건다 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던 조용한 히노 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분명하면서도 단호했다. 그만큼 그녀에게 카류는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던 것이다. "모두들 정말 오랜만이구나." 입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응접실 내의 일동은 빠르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리아 후작 님과 다른 많은 사람들을 뒤에 두고 한 소년이 앞으로 걸어나오며 부드 럽게 미소지었다. "카류..." 후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반가워. 후크. 카멜. 거의 3년 만이구나." 결국 후크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류에게로 뛰어나갔다. 언제나 잘난 척 말은 혼자 다하 면서도 후크는 겉보기와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상당히 감정적이다. 카류는 마치 자상한 아버지같이 후크를 안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정말 이상한 장면이다. 오 랜만에 만나는 사람들끼리 포옹을 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이건 그런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고 할까. "카멜은 안 와? 이제 다 컸다고 내가 싫어진 거야?" 후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면서 카류는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싫어진 게 아니고 네게 안기는 게 싫어진 거야. 다 컸는데 그러면 정말 쪽 팔리잖아." "정말? 이거 아쉽네. 하지만 지금 안아주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고집부리지 말고 이리 와. 응?"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카류는 피식 웃으며 후크를 떼어놓고 약간 흥분해 보이는 그를 달래 듯 붉은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음,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자기보다 키도 큰데다가 나이도 많은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는 이상한 버릇을 가진 꼬맹이를 말이다. 아, 이제는 꼬맹이까지는 아니군. "아, 너는 영원히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키가 조금 컸구나. 카류." "카멜... 아주 저주를 걸어라, 저주를. 나도 이제 곧 너희들만큼 클 거야. 지금도 하루가 다르 게 쑥쑥 크고 있는 중이거든." 카류는 겨우 진정한 듯 보이는 후크의 손을 이끌어 원래 자리에 앉히고 자신도 중앙에 비치 된 의자에 앉았다. 카류가 앉는 것을 보자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야겠군. 카멜, 후크. 나를 찾은 이유가 있을 테지?" "아, 물론 있지." "간단하게 말하자. 앞으로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은 어떻게 할 예정이지?" 카류는 우리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카류는 조금 전 우리들 대하면서 웃던 때와는 사 뭇 달라진 느낌이었다. 왠지 모르게 날카롭고 차가워진 느낌. "우리는 상인이다. 뼛속까지 말이야." 나의 대답에 리아 후작이 몸을 약간 앞으로 내밀면서 진지하게 물어왔다. "힐튼 상단과 쟈스칼 상단에서 원하는 것이 뭐지?" "아직 구체적인 이해타산을 따져볼 시기는 아닌 듯 합니다. 리아 후작 님. 일단 현재의 전체 적인 상황을 보건 데..." 그러나 내가 전부 답하기도 전에 카류는 팔짱을 낀 채로 입을 열었다. "궁극적으로 손해를 볼 것이 뻔한 사업엔 투자할 수 없다는 뜻이로군." "카류 님...!" 리아 후작은 카류를 보며 약간 인상을 썼다.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할 우리들 을 어떻게든 회유하려 하지 않고 그냥 직설적으로 말하는 카류의 행동이 못마땅했던 모양이 다. "우리 사인데 뭐 어떤가요? 그리고 저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제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은 데." "...카류 말이 옳습니다. 리아 영지가 넓으니 여러 가지로 이득을 챙길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랬다가 나중에 리아 영지가 망하면 뒤에서 도움을 주었던 우리 상단은 좀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되겠지요. 뭐, 그런 것입니다. 저희들은 저희 상단을 망하게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 도 없습니다." 쾅! "그렇다면 대체 여기엔 뭣 하러 온 거야!?" 갑자기 뭐가 부서지는 듯한 시끄러운 소음이 나의 귀를 자극했다. 다혈질인 에르가가 흥분 하여 탁자를 내려지면서 났던 소리였다. "...뭐, 작은 도움이나 줄까 싶어서......" "도움?" "밖에... 마차에 돈이 실려 있을 거다. 친한 친우이자 생명의 은인인 네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다." "마차에 실린 돈 정도로 전쟁에 도움이 될까?" 카류는 입술을 비틀었다. 나의 곁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눈동자만을 굴리던 후크가 처음 보 는 카류의 모습에 그대로 몸을 경직시켰다. "...개인...적인 감정에 휩쓸려 나의 가족과 상단의 모든 사람들을 곤란에 빠뜨리게 할 수는 없어." "그런 것이군. 뭐, 나보다 가족과 상단이 더 소중하다는 말이었군. 그런 이야기라면 편지로 했어도 충분했을 텐데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일부러 찾아오다니, 정말 수고가 크구나." 카류의 목소리는 한기가 묻어날 정도로 차가웠다. 그 말을 들은 후크는 이제 몸을 약간 떨 기까지 했다. 평소 하는 짓과는 달리 후크는 의외로 정말 마음이 여린 놈이다. 생명의 은인 이 가장 궁지에 몰렸을 때 그것을 무시하는 결정을 내리면서 후크는 끊임없이 죄책감에 시 달렸고 나는 그것을 달래느라 무진 애를 써야만 했다. 사내녀석 주제에 후크는 이 일로 인 해 몇 번이나 눈물을 터뜨렸는지 모른다. "뭐, 도와주는 척하다가 배신하는 쪽 보단 이 편이 훨씬 낫겠지. 너희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면 그건 거짓말이겠지만 말이다." 카류는 큭큭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게 조금 전에 안아보자고 하지 않았니, 카멜. 이젠 다시는 너희를 안아줄 일은 없겠구 나. 잘 가라. 나의 귀여운 친구들." 카류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후크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네...네가 제1왕자 파에게 조금이라도 맞설 가능성이 보인다면 그때 꼭 너를 도와주겠어!" "...음, 뭐랄까. 그 말을 다시 해석하면 지금은 맞설 가능성이 조금도 안 보인다는 뜻으로 들 리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내가 도움을 받아야하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 아니던가? 내가 죽기 직전의 고비에 처했을 때는 눈뜨고 지켜보기만 하다가 내가 맞설 만 할 때 도와주는 게 무 슨 큰 자랑이라고 그렇게 소리치는 거야?" 후크는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카류의 말이 너무나 잔혹한 사실이었 기 때문이리라. "물론 자랑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야. 하지만 그 때나마 도움을 줌으로서 다시 너의 친구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러면 다시 너에게 안길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오늘 너에게 안기는 걸 거부했던 건 그 언젠가를 위해서야." 그 특이한 포옹을 뺀다면 카류의 친한 친구라고는 할 수 없으리라. 카류가 우리들을 껴안겠 다고 다가올 때마다 징그럽다고 난리를 치긴 했지만 사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그에게 안기는 것이 그렇게 어색하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동굴에서 있었던 그 일 이후로는 카류의 껴안기는 더욱 익숙해지고 있었다. 외모 상으로 치자면 우리들 중 카류는 그 누구보 다도 자그마한 꼬맹이에 불과했지만 그 녀석의 품은 이상하게도 마치 우리들을 보살펴주는 부모님이나 큰형의 품 같은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엔 의외로 재미있는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참 많구나. 가장 중요한 시기 에 내게서 등을 돌렸다가 겨우 설만할 때 손을 좀 내밀었다고 내가 너희들을 다시 사랑하는 친구로 맞아줄 것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착해 보이나? 그렇게 자비로워 보였어?" "그래. 너는 그런 녀석이지." 나는 아직 동굴에서 보았던 너의 뒷모습을 잊지 않고 있으니까. 몇 번이나 죽음에 기로에 서면서 너의 진정한 모습을 보았으니까.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뻔뻔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류는 나의 말에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이 내 빙긋 웃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아, 그거 말이구나. 나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쉽게 목숨을 바쳐주지 않아. 나는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는 자를 위해 살아남기로 했거든. 나는 그들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거야. 따 라서 나를 가장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는 너희들에게 그다지 자비롭지 않을 거다." 카류는 의자에서 일어나 완전히 몸을 돌렸다. "카...카류...!" 후크가 앞으로 나가려 하는 것을 나는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후크, 이 바보녀석. 여기서 카류를 따라 뛰쳐나가면 그게 무슨 꼴불견이냐. 우리가 당장 카 류를 도와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게 목덜미를 잡힌 후크는 나를 바라보다가 카류를 바라보았다가 하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카류가 완전히 밖으로 나가버리자 딜트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최악의 재회가 됐구나. 나는 내 가족보다 카류가 더 소중해서 따라 나가봐야겠다." 히노 양도 카류가 나간 문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슬픈 표정으로 우리들에게 말했다. "안타깝구나. 기쁜 일이 있기를 바랬는데. ...그래도 언젠가 만날 날이 있다면 좋겠구나." "....히노..." "저도 나가볼게요. 아버님." 리아 후작은 너무 급작스러운 전개에 조금 당황했는지 우리와 문 쪽을 번갈아 보았다. 아마 이렇게 중요한 일에서 교섭의 여지도 없이 바로 나가버린 카류에게 약간 황당했나 보다. 하 지만 이 상태에서는 우리가 교섭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니 카류의 행동이 그렇게 황당한 일도 아니다. "...언젠가 너희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다. 그 동안 너희들이 카류에게 검을 들이대지 않는 다면 말이야." 의외로 그 말을 한 것은 에르가였다. 바로 우리들에게 주먹이라도 한방 날릴 것 같던 녀석 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때 진짜 제대로 된 재회를 하자." "그래...." 나는 에르가의 말에 답했다. 왠지 목소리가 약간 잠겨오는 듯 해서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카멜..." 후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목소리를 이상하게 변하게 만든 원흉 은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이었나 보다. 나는 신경질 적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빌어먹을... 그래..." * * * 나는 후크와 카멜에게 한껏 짜증을 부려준 다음 방으로 돌아왔다. 가족을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없다는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그렇다고 내게 등을 돌린 그들을 마음 속 깊 이 이해하기엔 내 이해심은 완전히 바닥을 드러낸 상태였던 것이다. 곧 딜티와 히노 선배가 나를 뒤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후크와 카멜을 만나고 내가 상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말을 빙빙 돌려가며 나를 위로하려 했다. 사실 후크와 카멜에게 심 한 소리를 한 것은 다름 아닌 나였는데 이런 식으로 나를 위로하기 위해 애쓰는 그들을 보 자니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그만큼 이들이 나를 착한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한동안 두 사람의 위로의 말에 간간이 대답을 해주며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방으로 리아 후작 님이 들이닥쳤다. "카류 님! 그들은 앞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중요한 손님들입니다. 그런 식 으로 대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리아 후작 님은 몹시 못마땅해하는 표정으로 다가와 언성을 높이며 나를 질책했다. "죄송합니다. 리아 후작 님. 하지만 어차피 저의 편으로 들어오지 않을 이들인데 친절하게 대해줄 필요는 없잖아요?" "그들을 회유하는 최소한의 말도 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저는 후크와 카멜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걸요. 여기가지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은 마 음을 바꿀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제가 아무리 회유의 말을 해도 듣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한 짓이니 용서해 주십시오." "곤란합니다. 이렇게 큰 일에서 그런 식의 어림짐작은 말입니다!!" "저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었기에 그런 것뿐입니다. 다른 자들을 대함에 있어 그런 짓을 하 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프리란트 님은 어지간히도 화가 났던지 계속 쏘아 붙여 왔지만 계속 내가 담담하게 말을 받 아내자 겨우 질책하기를 멈추었다. 그리고 잠시동안 아무 말도 없이 앉아 있다가 평소에 사 용하던 톤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신기한 상황이더군요. 손을 벌려야 할 쪽은 우리들인데 오히려 카류 님 께서 화를 내고 저 쪽에서 곤란해하는 모습이라니, 역시 카류 님은 인덕 하나는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제 인덕도 참 대단하죠? 그런데 결정적인 곳에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이걸 어쩌면 좋죠?" 나는 피식 웃으면서 프리란트 님의 말에 응수했다.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의 일은 차후로 미루어지게 되는군요. 그들이 완전히 돌아 선 것은 아니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다른 상단과의 일도 있으니 언제가지나 거 기에 연연할 수만은 없겠지요." "다른 상단이라 함은..." "저는 3년 전부터 카류 님의 의견을 받아들여 상업의 부흥을 꾀해보고자 리아 영지의 관세 를 줄이고 정기시장을 만들도록 지원함으로서 상인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그러 니 그것을 빌미로 일단 리아 영지를 주무대로 삼고 있는 상인들을 회유해볼 생각입니다." "하지만 쉽게 넘어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되는군요. 후크와 카멜에게 은혜를 베푼 건 저도 다르지 않거든요. 그런데도 저를 외면했지 않습니까." 나는 약간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그렇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는 생각 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어지고 있으니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프리란트 님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그렇겠지만 일단 이야기는 해봐야지요. 이번에 만날 상인들에겐 절대 친구 분들에게 한 것 과 같은 태도를 취하셔서는 안됩니다." "물론입니다. 저도 그렇게 분별이 없지는 않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 다." "후우, 알겠습니다. 카류 님. 내일 리아 영지의 상인들 중 가장 세력이 큰 자의 집으로 찾아 갈 예정입니다. 다른 상인들도 모이도록 조치해 두었으니 준비해 두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프리란트 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프리란트 님을 마중했다. 문득 곁에서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히노 선배와 딜티가 눈에 들어왔다. "왜 그래요. 걱정하지 말고 이제 그만 모두들 그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요." "...힘내, 카류." "물론 힘내서 상인들을 회유해 봐야지요. 걱정하지 마세요. 히노 선배." 나는 히노 선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면서도 말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히노 선배는 더 이 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일이라면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우리들은 그만 돌아갈게." "그래, 딜티. 쉬어." 나는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이 복도 끝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나는 방 의 중앙에 마련된 의자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탁자에 팔을 고고 그 사이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왠지 모르게 머리가 무거워져 왔기 때문이다. "...디트 경." 원래 그림자 같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림자가 되어버린 듯한 그의 이름을 아주 작 게 읊조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귀도 좋군. 밖에 나가 있어 주겠어? 혼자 쉬고 싶거든." "위험하므로 그 명령에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죄송합니다. 혹시라도 있을 위험 때문..." "귀찮아! 나가!!" 나는 몸을 일으켜 그를 향해 소리질렀다. 그러나 디트 경은 꿈쩍도 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 고 말했다. "불복하겠습니다." "......" 나는 잔뜩 인상을 찡그리고 디트 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런 나의 행동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듯 디트 경은 얼굴 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겉옷 을 벗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그리고 침대 옆의 창으로 고 개를 돌렸다. 창은 통해 보는 바깥 세상은 구름 한 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뿐이었다. "멍청한 놈." 누구를 향해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양팔을 접어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다. 다음날, 나는 엄중한 호위를 받아가며 리아 영지에서 가장 세력이 크다는 상인의 집을 방문 했다. 그 저택은 과연 리아 영지에서 가장 부강한 상단의 본가답게 여느 귀족들의 저택 못 지 않은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저택의 주인은 헤이료우라는, 왠지 아르윈 왕국에서 쓰는 단어와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세운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멀미를 하는 관계로 마차가 저택 앞으로 서자마자 뭐에 쫓기기라도 하듯 부리 나케 마차에서 내렸다. 남은 아파 죽겠는데 프리란트 님은 그런 나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한 눈빛을 하기까지 했다. "리아 후작 님! 아, 혹시 카류리드 전하십니까?" 나의 앞으로 갑작스레 웬 중년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거는 것을 보고 멀미로 인해 일그러뜨린 얼굴 표정을 최대한 가다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머리색을 보니 카류리드 전하가 분명한 듯 하군요. 반갑습니다. 저의 저택까지 일부러 찾아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 나는 인상 좋게 생긴 검은색 머리카락의 중년을 보고 약간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크레베르. 상인들은 모두 모였는가." "물론입니다. 벌써 다들 홀에 모여있는 중이지요. 준비를 해두었으니 드시기만 하면 됩니 다." "알겠네. 카류 님. 가시지요." "그러죠. 프리란트 님." 프리란트 님이 크레베르라고 부르는 것을 보니, 우리들을 안내하고 있는 그가 아마도 이 헤 이료우 상단의 주인인 듯 했다. 그는 일부러 저택 밖으로 나와 우리들을 마중하면서 생각 이상으로 우리들에게 호의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의 속마음이라는 건 알 수 없는 것이니 안심하기는 이르다. 특히 이런 쪽으로 성공한 상인들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여러분, 리아 후작 님과 카류리드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크레베르는 커다란 홀로 들어서며 우리들을 소개했다. 많은 상인들이 우리들에게 시선을 집 중했다. "이렇게 그대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네. 일단은 연회를 즐기도록 하게." 프리란트 님은 천천히 말을 하려는 듯 일단 단도 직입적으로 용건에 꺼내지는 않았다. 그리 고 나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상인들에게 나를 소개를 하고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해 차츰차츰 상업 쪽으로 화제를 돌려갔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최대한 내가 자신들에게 얼마나 이득을 줄 것인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 내가 얼마나 상업에 대해 관심이 많으며, 또 아는 것이 많은지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껏 프리란트 님과 상업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은 그저 포괄적인 상 업 이론이나 큰 원칙 정도에 불과했다. 왕궁에서만 살았던, 게다가 아직 성인도 아닌 내가 상업의 실무에 대한 것까지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 상인들과의 대화에서 나름 대로 아는 척 떠들어대기 위해 꽤나 진땀을 빼야만 했다. 다행히 지금 대화를 하는 자들이 리아 영지를 주무대로 삼는 상인들이었기에 그 동안 프리란트 님과의 대화에서 흘려들었던 여러 이야기들을 섞어가며 큰 막힘이 없이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 이제껏 상업에 대한 토 론을 나누었던 상대가 리아 영지의 영주인 프리란트 님이 아니었다면 약간 곤란할 뻔했다. 역시 학문을 파고드는 것과 실제 실무는 꽤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상인들은 이 정도로도 충분히 나의 지식에 감탄했다. 아직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어 린애-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가 하는 말치고는 상당한 수준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 도 아르윈 왕국이 농업을 나라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만큼 왕족인 내가 상업에 관한 그 정 도의 지식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대한 관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을 더 들뜨게 만든 것 같았다. "정말 의외로군요. 왕족인 카류리드 전하께서 이렇게나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을 줄은 상 상도 못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평소 이 쪽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차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계신 프리란트 님을 만 나서 여러 가지 지식을 쌓게 되었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오. 사실 아직 실무 쪽으로는 그다지 아는 것도 없고......" "그렇지 않습니다. 보통 귀족들은 상업을 천한 직업이라 생각하며 업신여기기만 할뿐이죠. 왕족인 카류리드 전하께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상업계의 큰 행운입 니다." 상인들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 끊임없이 나의 칭찬을 늘어놓았다. 내가 왕자이기에 흔히 하는 아부이기도 하겠지만, 실제로 이런 식으로 상업을 옹호하는 식의 말을 하는 귀족은 정 말 드문 일이므로 모르긴 몰라도 그 말에 진심도 상당수 섞여 있었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 프리란트 님과 대화에서 생각해 두었던 이야기를 꺼내가며 나의 편을 들었을 때 자신들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 갈 것인 지를 은근히 강조해 주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프 리란트 님을 통해 많은 이익을 보았기에 그 말에 꽤나 주의를 집중하는 듯 보였다. 사실 나만큼 상업의 진정한 중요성을 알고, 관심이 많은 귀족도 드물지 않겠는가. 굳이 이렇 게 그들을 끌어들여야만 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나는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입 장이 되었을 때 상업의 중흥을 도모해 볼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기게 된다면 누구보 다도 그들에게 가장 큰 이득이 돌아갈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한동안 홀에 가득 모인 상인들을 차례로 돌아가며 대화를 나누었다. 거의 대부분의 상 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고 생각했을 때 크레베르가 못 보던 젊은 남자와 함께 우리들에게 다가왔다. 그는 조금 전처럼 같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 연회는 즐거우신 지 모르겠군요." "덕분에 즐겁게 지내고 있네. 여기 저기 사소한 부분까지 꽤나 신경을 쓴 모양이더군. 내 그 대의 수고를 잊지 않도록 하겠네." "음, 그런데 그대의 곁에 그 청년은 누구인가?" 나의 물음에 크레베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하, 실은 이 아이를 소개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켈레인이라 하는데 제 아들자식이죠. 부 족하나마 헤이료우 상단의 다음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공부를 시키려고 이곳에 데리고 나온 것이랍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리아 후작 님." 우리들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는 크레베르만큼이나 인상이 좋아 보이는 상당히 잘 생긴 남자였다. 외견만으로는 그저 마음씨 좋은 잘 생긴 형 정도의 인상이었지만 이런 대상 의 아들인 만큼 외견처럼 그런 자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크레베르가 켈레인을 꽤나 자랑 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분들의 말을 들어보니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상업에 대한 지식이 굉장히 풍부하시더군 요. 또한 왕족답지 않으신 가치관을 가지고 계시고 말입니다. 사실 지금껏 저희들은 리아 후 작 님께서 펼친 정책 덕분에 크게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감안했을 때 만약 카류 리드 전하께서 왕이 되신다면 저희들은 이곳 리아 영지뿐만이 아니라 아르윈 왕국 전 국토 에서 그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군요." 켈레인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처음부터 꽤나 직접적으로 말을 해왔다. 나는 그 말의 의도가 진정 호의인지 파악하기 위해 그의 맑은 남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구도를 보더 니 곁에 서 있던 프리란트 님이 말을 거들어왔다. "사실 내가 3년 전부터 이런 식으로 상업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카류 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서였지. 그대들도 대화해봐서 알겠지만 카류 님은 아직 나이가 어리심 에도 그런 쪽으로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네." "확실히 그런 것 같습니다. 정말 솔직히 말해서 저희들은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이런 전하의 모습이 더욱 저희들을 놀라게 하고 있 지요." 켈레인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것을 좋은 의도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나는 조용히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켈레인은 자신의 아버지인 크레베르를 잠시 돌아본 다음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실 조금 어렵군요. 사실 저희는 결코 카류리드 전하와 리아 후작 님을 잃고 싶지 않습니 다. 오히려 두 분을 어떻게든 옹호해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이 계시다면 저희들이 큰 이득을 얻은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지금 상태는 너무 어렵군요." "그대들의 도움이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르네. 상인이라면 한번쯤 자신의 재산을 크게 부풀 리기 위한 도박을 해야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지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승산이 0%인 도박에 손을 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요." 나는 한숨을 쉰 다음 켈레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쉽게 넘어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실망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후, 0%라는 말이 나오다니 정말 재미있군. 이 세상 어디에도 표준화된 승률을 표로 짜놓은 곳은 없다. 그런데 그 승산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불은 손을 대어보지 않고도 뜨겁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자신의 판단은 과신하는군. 그대들에게 있어서 상업은 자연현상과 같이 당연하고 쉬운 일 이었나? 호오, 그래서 그대의 상단이 이렇게 대성을 한 것인가 보지? 그대들은 별 노력을 하지 않아도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듯이 투자할만한 자리를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을 테니 까." 켈레인은 잠시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크레베르가 입을 열었다. "틀립니다. 상업이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요. 저희 헤이료우 상단도 조상 대대로 시장의 물 가와 소비자들의 수요, 다른 상인들의 움직임 등 수많은 요소들을 분석하여 지금의 모습을 이루어 낼 수 있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수많은 실패도 겪어야 했지요. 결코 그렇게 쉬운 일 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감히 0%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가? 어디서든지 의외의 변수가 있을 수 있는 데 말이네." "그렇군요. 조금 전의 저의 말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실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가르침을 받게 되어 기쁘군요. 카류리드 전하." 켈레인이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 것을 보고 곁의 프리란트 님이 어느 정도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일단은 그들이 어느 정도 더 호의가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안 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니 저희들에게 조금 더 정확한 승률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받을 시간을 주 셨으면 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정확한 투자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고 켈레인은 뒤에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기간이라. 대체 어느 정도의 기간을 말하는 것인가. 도박을 하기 전에 정보를 얻는답시고 어물거리다가 돈을 걸 타이밍을 놓쳐버린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가?" "물론 저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앞으로 두어 번 정도의 전쟁을 통해 카류리드 전하께서 리아 영지를 사수할 수 있다면 저희들도 전하의 능력을 믿고 전하 의 편에 서겠습니다." 크레베르가 켈레인의 뒷말을 이어 자신들의 입장을 보충해주었다. "사실 리아 영지는 부강합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아직까지 자금 이 부족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그 기간동안은 저희들이 돈을 걸 상대를 타진해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투자를 결심하는 시기가 빠르면 빠를수록 배당도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좋을 걸 세." 나는 계속 그들에게 나의 편을 들라는 식으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숙련된 상인이라 그런지 나의 몰아붙이는 말에도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 이리저리 교 묘히 빠져나가 당장 우리들을 돕겠다는 대답을 받아낼 수가 없었다. 연회는 정오쯤부터 시작되어 어두운 밤이 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문득 오랫동안 지속된 대 화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려 옴을 느꼈다. 그래서 프리란트 님에게 잠시 바람을 쐬고 싶다 는 말을 하여 양해를 구하고는 디트 경 하나만을 데리고 슬그머니 연회장을 빠져 나왔다. 나는 밖으로 빠져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여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밤임 에도 바깥 공기는 전혀 쌀쌀하지 않고 약간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나는 몇 번 숨을 들이 켜 준 다음 주위의 정원을 한번 쭉 둘러보았다. 이 저택의 정원은 토이렌 식으로 말하자면 동양적인 분위기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상당 히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보통의 정원은 중앙에 분수가 있고, 통로에 의한 기하학적 화단과 회랑, 그리고 그에 둘러싸인 장방형의 공간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이곳은 분수대 대 신 작은 연못이 만들어 주위에 나무와 풀 등을 심어놓고 그 사이에 편편한 돌을 박아 길을 만들어 두고 있었다.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약간이나마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의 결을 따라 연못 가까이 걸 어갔다. 파랗고 투명할거라 생각했던 연못은 하늘의 색을 받아 기분 나쁜 검푸른 빛을 발하 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말없이 검푸른 색 물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참방. 나는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연회가 한창 진행 중인 이 저택의 이 정원에 는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갑작스레 들린 물소리에 놀랐던 것이다. 그러나 금세 그 물소리가 조금 떨어진 연못가의 조그마한 그림자가 있는 곳에서 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에 그쪽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참방. 내가 본 그 그림자의 정체는 자그마한 몸집의 소년이었다. 몹시 부드러워 보이는 아름다운 쪽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아이가 연못가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넣었다 뺏다하며 물소리 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누구지?" 내가 그 소년에게로 다가가려 하자 디트 경이 나의 어깨를 붙잡아 그 행동을 방해했다. 잠 시 짜증이 나서 그냥 확 뿌리쳐버릴까 했지만 혹시나 모를 일이므로 일단은 그 자리에 서서 그 소년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우리가 다가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도 없이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손으로 연못에 계속 파문을 그려놓고 있었다. "뭘 하는 거야?" 다시 한번 말을 걸어보았지만 아이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나는 그때서야 디트 경의 손을 뿌리치고 아이에게로 다가갔다. 디트 경은 더 이상 나를 방해하기보다는 바싹 나의 뒤를 따 랐다. "뭘 하니?" 나는 그 소년의 곁에 쪼그리고 앉아서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그러나 역시나 반응이 없었 다. 단지 멍한 표정으로 손을 물 속에 넣어 참방거릴 뿐이었다. 나는 그 소년이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의 끝엔 조금 전에 내가 바라보고 있던 연못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저 불길한 검푸른 색의 연못이 아닌 아름답게 빛나는 달과 무수한 별이 잔뜩 박힌 연못이 있었다. 나의 곁에 쪼그리고 앉은 아이는 마치 그 별을 잡기라도 할 듯이 손을 움직이고 있 었던 것이다. "별을 가지고 싶니?"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년은 멈칫 움직임을 멈추더 니 그제야 내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애를 써서 움직이게 만들었으니 그 기쁨에 아 이를 향해 미소를 지어 줄만도 하건만 나는 그렇게 하는 대신 멍한 얼굴로 약간 입을 벌렸 다. 고개를 비스듬히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소년은 아무렇게나 기른 것 같이 보이는 길다란 머리카락이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어서인지 여자아이인가 하는 의문이 잠시잠깐 스칠 정도 로 귀엽고 예쁘장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몸집이 나와 비슷해서 내 또래거나 나 보다 조금 어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훨씬 앳된 얼굴이었다. 소년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나를 똑바로 주 시했다. 그러나 그 아이를 은은하게 비추어주던 달이 구름에 가려 어둠을 만들어 지는 바람 에 그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동자는 짙은 쪽빛으로 변해버렸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고 있자 아이는 자그마한 입을 살짝 벌렸다. "손 치워."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의외의 말에 나는 잠시 멍해졌다. 소년은 굉장히 신경질을 내며 나의 손을 자신의 머리에서 쳐냈다. 그리고 다시 연못 속에 손을 참방거리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정신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던 나는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아이 를 향해 다시금 말을 걸었다. "너는 누구지?" "......" "어떻게 이런 곳에 있는 거지?" "......" "이름이 뭐야?" 일단 어떻게든 그 아이의 반응을 끌어보고자 나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걸어보았다. 아 이는 완전히 내 말을 무시하고 한동안 연못에 손을 첨벙거리다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 어났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죽어." 그러나 아이는 또 한번 예기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 귀여운 입으로 살벌한 말을 내뱉으며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발로 확 차버린 것이다. 덕분에 나는 균형을 잡지 못하고 그만 연 못에 빠져버렸다. "헛?! 이 놈!" 약간 당황한 내가 연못가로 올라왔을 때 그 소년은 디트 경에 의해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 다. 그러나 제대로 된 반항도 못하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걸 보니 암살자로써 그런 짓을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됐어. 그 아이를 놔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시끄러워! 풀어 주라고 했잖아!! 또 한번 내 말을 무시하면 가만두지 않겠어!" 나의 고함소리에 디트 경은 겨우 그 소년을 제압하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도 이 소년이 그 저 홧김에 한 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 말에 따른 것이리라. 아니었다면 이번 말도 무시했을 것이 뻔하다. 그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의 팔을 주무르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쪽으로 걸 어가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말을 걸었다. "너도 내가 싫으니?" 이번에는 내 말을 무시하지 않고 몸을 비스듬히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의외로 그 소년의 쪽 빛 눈동자는 아직 소년의 그것답지 않게 굉장히 깊게 느껴졌다. 잠시동안의 정적이 정원 을 감돌았다. 그러나 무언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 줄 알았던 그 소년은 아무 말도 않고 그냥 몸을 돌려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완전히 나무들 사이에 가려져 완전히 사라지 는 것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완전히 젖어버린 옷을 대충 툭툭 털고 저택 안 으로 향했다. 물에 한껏 젖어서 디트 경의 망토를 둘둘 말고 들어온 나를 보고 프리란트 님과 상인들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다. 내가 발을 헛디뎌 연못에 떨어져 버렸다고 거짓말을 해서 얼버무리 자 크레베르가 바로 새 옷을 준비하라고 시종들에게 명했다. "내게 맞는 옷 같은 게 이 집에 있단 말인가? 그대의 아들인 켈레인과도 상당히 몸집에서 차이가 많이 나는데 말이네." "아... 예......" 크레베르는 왠지 눈에 띄게 어색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에 비해 곁에 선 켈레인은 왠지 조금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들이 왜 저러는지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굳이 그런 세세한 것까지 캐물을 것은 없다는 생각에 나는 그냥 옷을 갈아입기 위해 크레베르의 안내 를 받아 연회장 밖으로 나왔다. "곧 새 옷을 가져 올 테니 이곳에서 갈아입으십시오." "그러지." 나는 크레베르의 말에 답하면서 푹 젖은 머리카락을 한번 쓸어 넘겼다. 그리고 그가 안내해 준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득 복도 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멀리서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 는 익숙한 얼굴을 보게 되었다. "어? 저 아인......" 나는 바로 그 아이가 있는 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가리키는 쪽으로 시선을 옮 기던 크레베르는 그 아이를 보더니 약간 놀란 듯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큰 소리로 그 아이 를 향해 소리쳤다. "힐레인!" "...힐레인?" 크레베르는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그 아이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이끌고 내게로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저의 또 다른 아들 녀석입니다. 힐레인, 카류리드 전하시다. 인사드려라." 나는 자신의 아이라고 소개하는 크레베르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높으신 중요 인사들이 잔뜩 몰려있는 이 저택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정도였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힐레인, 인사를 드리라니까!" 그러나 힐레인은 멍하게 선 채로 인사를 하지 않았다. 크레베르는 진땀을 흘리며 곤란해 하 다가 나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죄...죄송합니다. 후우, 원래는 굉장히 명석한 아이로 제 자랑거리였는데 언제부터인가 갑자 기 이상해져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하더군요. 이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도 혹이나 무례를 범할까봐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도 제 자식인데 없는 아이취급하기가 뭣 하여 이렇게 인사라도 시킬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렇게 무례를 범하게 되는군요. 용 서해주십시오." "그다지 큰일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나는 크레베르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면서 그 꼬마, 아니 힐레인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 개를 약간 삐딱하게 한 채로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아마 조금 전 일로 화가 나서 저러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동안 힐레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누 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여기 옷을 가져왔습니다." 시녀가 공손히 두 손으로 내게 옷을 내밀었다. 아직 문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았건만 동작도 참 재빠르다고 생각하며 그 시녀에게서 옷을 받아들었다. 그 순간 힐레인이 아주 약간 눈썹 을 꿈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순간적이었지만 충분히 기분 나쁘다는 표시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옷과 힐레인을 번갈아 보다가 그제야 이 옷이 힐레인 의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옷을 빌려서 미안한걸? 힐레인. 옷 좀 빌릴게." 나는 살짝 웃으면서 힐레인의 머리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옷 하나에 심통이 난 듯한 힐레 인이 귀여워서였기도 했고, 불빛이 가득한 실내에서 그의 길고 새파란 머리카락이 너무나 보드라워 보여 한번 만져보고 싶어서였기도 했다. 타악!! 그러나 나의 그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힐레인이 잔뜩 인상을 쓰며 나의 손을 쳐냈기 때 문이다. "히, 힐레인!! 무, 무, 무, 무슨 짓을!!" 크레베르는 거의 패닉 상태로 엄청 말을 더듬으며 힐레인을 질책했다. 뭐, 자신의 아들이 감 히 왕자를 쳤으니 저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만약 힐레인이 나를 발로 차서 호수에 밀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면 그 자리에서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소, 힐레인을 너무 어린애 취급한 내가 나빴으니까." 나는 정말 화가 난 건지 인상을 팍팍 쓰면서 노려보고 있는 힐레인을 향해 쓰게 웃었다. 그 리고 옷을 들고 바로 문안으로 들어갔다. 힐레인이 그 파란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는 것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옷을 갈이입고 나왔을 때 힐레인은 어디로 간 것인지 사라지고 크레베르만 서있었다. 그는 연신 내게 죄송하다고 허리를 굽히며 사과를 했다. 잠시동안의 해프닝 뒤에 나는 곧 연회장으로 돌아가 조금 더 상인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 었다. 그리고 꽤나 밤이 깊어졌다는 생각이 들어서야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랐 다. 이미 어두워진지 오래되었기에 사람들은 모두 집안으로 들어간 상태였고 고요한 거리를 달리는 마차는 평소보다 더욱 시끄러운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한동안 가만히 앉아있던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애를 썼지만 그렇게 큰 성과는 없군요." "상인들이니까요. 가장 계산이 치밀한 자들이 그들이지요. 으음... 일단은 눈앞에 닥친 전쟁 에서 이길 생각만 해보도록 해요. 그들의 말처럼 지금 크게 돈이 부족한 것은 아니니 어느 정도 능력을 보여준다면 그들도 합세해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후우, 레이포드 경과 이야기를 나눠봐야겠군요. 아르디예프 님과 류스밀리온 님께서 어서 빨리 돌아오셔야 할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자세한 이야기까지 해볼 수 있을 테니까요." "네... 그렇겠지요..." "...멀미가 심하신 모양입니다. 쉬도록 하십시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으며 창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곧 그곳으로 보이는 풍경에 자조적인 웃음이 떠올랐다. 밤하늘에 빽빽하게 들어찬 별들을 보노라니 나를 노려보던 힐레 인의 얼굴이 생각났던 것이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 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바쁜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 정말 오랜만에 컴백입니다. 돌 던지셔도 진짜로 할 말 없슴돠...-_-;;; 상인 편은...아...정말... 카류의 말투 때문에 미치고 팔짝팔짝...-_-;;; 너무~너무~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어떻게 괜찮은 말투 없을끄아아아!! 완전 반말도 이상하고.. 존댓말을 할 리는 없고... '~오', '~소', '~네' 체(??)는 너무너무 이상해 보이고...T-T;;; 아비스라라의 메일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카페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런 허접한 글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에궁...삭신이야... 그런 즐거운 하루 되세요. 이르나크의 장 Part 35 전운 날이 점점 더워지고 있었다. 태양은 무언가에 화가 나기라도 한 듯 올해 따라 유난히 뜨거 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덩그러니 떠있는 태양을 잠시 올 려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마법사들에게 새로운 수식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들이 모여 있을 서재로 향하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무사히 리아영지로 돌아온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이 고위 마법사들은 데리고 왔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당장에 수식을 보여달라고 난리를 쳤다. 아르 할아버지의 제안에 승낙을 했다고는 하나 계속 긴가민가하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솔직히 새로운 마법수식 이 적힌 종이를 보았다고는 하나, 나 같은 어린 녀석이 마법수식을 창조해 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푸는 것을 직접 본 류스밀리온과 아르 할아버지마저 믿 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마법 수식에 대한 욕구가 큰 그들 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내가 만들었든 아니던 간에 이 수식을 풀 줄 아는 사람이 나의 진영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일 테니 속는 셈치고 아르 할아버 지의 제안에 따라 이곳에 온 것이리라. 아르 할아버지는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 중 수식 때문에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마법사 들만 모아서 이 일을 제안했다고 한다. 혹이라도 따르지 않겠다고 말하는 마법사가 나온다 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나의 진영으로 넘어오지 않겠다고 말하는 마법사들 중에 이 일을 국 왕에게 알리려 하는 인간이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그런 마법사들은 제거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솔직히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기에 류스밀리온을 아르 할아버지와 함께 보낸 것이기도 하다. 반역자인 나를 구해내기까지 할 정도로 꽤나 정이 많 은 아르 할아버지가 오랫동안 함께 생활해왔던 마법사들에게 해를 입히는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을 테지만 류스밀리온이라면 확실히 그것을 처리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러나 다행히 그렇게 심하게 반발하는 마법사들은 없었다고 한다. 약간 망설이는 자들이 있 긴 했지만 어차피 이 나라의 권력자가 누가 되든, 그런 일은 원래부터 정치에 중립을 지키 고 있었던 마법사들에게 별다른 관심 사항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어려운 수식으로 인해 진전 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에게 획기적인 쉬운 수식을 배우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이의 심정만큼이나 절실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그렇게 아르 할아버지가 모든 생명의 궁의 반 수 정도 되는 수의 마법사들이 전부 나의 진영으로 넘어오기로 약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들 중 대부분은 고위 마법사들이고 말이다.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은 처음부터 이쪽으로 넘어오기를 상당히 망설였던 자들을 우선 몇 명 데리고 리아 영지로 워프 해왔다. 나머지 마법사들은 기회를 봐서 넘어오는 것으로 하고 말이다. 아무리 8서클의 마법사가 둘이나 있다고 해도 그 많은 수의 마법사들을 모두 데리고 워프 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리아 영지에 새로 도착한 마법사들과 아르 할아버지, 류스밀리온에게 마법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렇게 분주하 게 돌아다녀야 했다. 솔직히 나는 처음엔 고위 마법사들에게 수식들을 가르쳐 주면 이르나크 세계의 그 복잡하고 어려운 수식들을 6서클 이상 습득해 낸 사람들인 만큼 류스밀리온처럼 1서클의 기초적인 마법 정도는 캐스팅 없이 바로 사용하는 등의 엄청난 진전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완전히 수학의 체계가 달라서 그런지 가르쳐 주는 대로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사소한 것부 터 찬찬히 가르쳐주어야 하다보니 생각보다는 상당히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물론 토이렌 세계의 학생들이 배울 때 이해하는 속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지만 말이다. 마법사들 중 가장 빠른 진전을 보인 것은 단연 류스밀리온이었다. 원래부터 그 복잡한 수식 을 암산하기까지 했던 수학의 천재이니 만큼 이해가 빠를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류스밀리온의 이해력에 나는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수식을 가르쳐 준지 이주 일 정도밖에 안됐건만 1서클은 물론이거니와 벌써 2서클 마법을 암산하는 수준에 이르러 있 었다. 내가 3서클의 마법수식을 암산할 수 있었던 것도 전생에 토이렌에 살면서 오로지 수 능을 위해 12년 동안 매일같이 죽도록 반복 학습하면서 너무나 친숙해진 수학공식들을 생명 의 궁에서 열심히 복습하며 외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류스밀리온은 처음 배우는 낮선 수 식을 너무나 간단히 이해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암산해내기까지 하 는 것이다. 그 모습에 아르 할아버지를 제외한 주위 사람들은 완전히 혀를 내둘렀다. 내가 지금 새로운 수식을 가르쳐 주러 가는 것도 순전히 류스밀리온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 들은 아직 내가 가르쳐 준 수식들을 반복해 풀어보며 실전에서도 금방 사용할 수 있도록 완 벽하게 이해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지만, 류스밀리온만이 이젠 더 이상 할게 없다며 짜증을 냈기에 밤을 새워가며 부리나케 다음 단계의 수학 공식들을 정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전생에 공부를 잘하지 않았으면 이런 식으로 수식을 정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유넨을 가르쳤다고 하나, 그것은 단지 기분 내키는 대로 단편적인 지식을 몇 개 전해주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토이렌 방식의 수학에 완전히 무지한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 참고할만한 책도 없이 혼 자만의 힘으로 수학 교과서를 한 권 편찬해내는 것이나 다름없는 작업을 해야 했기에 무척 이나 힘들었던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또 마법사 분들께 가시는 것입니까?" "아?" 딴 생각에 잠겨 있다가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레 들려오 는 말소리를 놓쳐버리고 얼빠진 소리를 냈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가 최근 들어 상당히 익 숙해진 얼굴의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디슈켄트 님이셨군요."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아뇨, 어제 밤을 새서 그런 것뿐입니다." "무리하셨다가 자칫 병이라도 얻으시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조금은 쉬는 게 좋을 듯 싶 군요. 카류리드 전하." "며칠 잠을 자지 않은 정도로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래봬도 건강 체질이니까요." 나는 염려의 말을 건네는 디슈켄트 님에게 괜찮다는 뜻으로 빙긋 웃어 보였다. 그리고 나에 게 말을 걸면서도 조금 전부터 뒤쪽의 디트 경을 계속 힐끗힐끗 곁눈질하고 있는 그를 향해 질문을 했다. "디트 경에게 할 말이 있으십니까, 디슈켄트 님? 잠시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아, 아닙니다. 그것보다 마법사 분들께 들린 다음 리아 후작 님이 계신 곳에 가보십시오. 언제나 있던 서재에 계신답니다. 카류리드 전하께 하실 말씀이 많으신 모양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내가 헤어지기 전에 정중하게 인사를 하자 디슈켄트 님은 다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그는 내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는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내 행동을 살폈 다. 몇 번이나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건만 그렇게 간단히 되지 않는 모 양이다. 디슈켄트 님은 디트 경의 친형이다. 그는 디트 경이 카이 형들과 한 기사의 서약을 어겼다 는 소식에 어쩔 수 없이 나이가 지긋한 바스라윈 백작 님을 대신하여 리아 영지로 왔지만, 도착해서도 그 일에 대해 믿기가 힘들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디트 경이 단순히 기사의 서약을 어긴 것이 아닌, 사실 처음에는 그 기사의 서약에 따라 나를 암살하려 했다 가 다시 마음을 돌린 것으로, 이중으로 배신을 한 것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는 말도 안 된다 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평소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디슈켄트 님 역시 디트 경을 고지식한 동생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으로 디트 경의 시인하는 말을 듣고는 완전히 사색이 되었 다. 그렇게 모든 일의 진상을 알게 된 그는 디트 경이 나를 죽이려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나에게 굉장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디트 경의 일로 인해 국왕 쪽의 제1왕자파에게서 도 버림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바스라윈 백작 가가 나의 진영에서까지 적이 된다면 완 전히 궁지에 몰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나 역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정도로 세력이 부족하기에 바스라윈 백작 가를 내칠만한 상황은 아니었으므로 신경 쓰 지 말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평소 마법사들이 모여 수식을 연구하고 있을 서재 앞에 도착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서재는 나나 프리란트 님, 드리크 경 등의 중요 인물이 머물고 있는 건물과는 다른 건물에 위치해 있었다. 언제나 조용한 생명의 궁에서 생활해온 마법사들이었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이 드나드는 분주한 곳은 질색이라고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쪽 건물에서 저쪽 건물로 건너다니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류스밀리온 님. 새로운 수식 가져왔어요." "마침 왔구먼." 내가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류스밀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의 곁에 하르트 백작 님이 서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조부 님? 왜 여기에 계시죠?" "연무장에서 병사들을 훈련시키다가 돌아오는 길에 카류리드 전하께서 언제나 이때쯤에 이 곳에 들리시던 것을 기억나더군요. 당신을 마중하여 함께 리아 후작 님께 가볼까 싶어 기다 리고 있던 참입니다." 하르트 백작 님은 그 특유의 냉랭하고 무뚝뚝한 어조로 나의 질문에 답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함께 돌아가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말에서 약간의 의아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대로라면 외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가고 싶었다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보통 사람이 말했 다면 애초부터 함께 가려고 기다렸다는 말에 무슨 일이 있냐고 묻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나 하르트 백작 님은 나에게서 어머니에 대한 비보를 확인했을 때마저 무표정을 일관했 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었다. 이미 예감하고 있는 일이었다고는 하나,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에 저렇게까지 냉정해 질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하르트 백작 님은 그런 냉정한 이미지답게 하나뿐인 외손자인 나에게 애정표현은커 녕 딱히 용무가 없으면 말을 거는 일조차 없었다. 그런 분이었기에 현재 그 분의 행동이 이 상하게 생각되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조용하게 연구하겠다고 일부러 다른 건물을 달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던 마법사들이 잘도 하르트 백작 님을 방에 들어오도록 허락해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번에는 성질 나쁜 류스밀리온까지 있는데 말이다.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멋대로 마법사들의 서재에 난입한 놈이다. 파이어 애로우라도 써서 내쫓을까 싶던 참인데 마침 타이밍을 맞춰서 왔군. 빨리 데리고 나가." 아니나 다를까 류스밀리온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수식을 적어 둔 책을 홱 뺏어서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르트 백작 님은 험한 말을 쓰는 류스밀리온에게 화가 났는지 눈을 약간 가늘게 떴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르 트 백작 님도 오랜 연륜을 쌓은 꽤나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원래부터 8서클의 마법사인데다 가 나의 수식으로 인해 엄청난 레벨 업을 한 류스밀리온과는 접근전이라 하더라도 승산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싸움의 승패를 따져봐야 할만큼 하르트 백작 님이 화가 난 것처럼 보 인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여러분들의 일을 방해하여 죄송합니다. 원하시는 대로 이만 나가보도록 하지요. 카류리드 전하. 가시지요." "네? 아니, 저는..." 나는 갑자기 나가자고 권유하는 하르트 백작 님의 말에 약간 당황했다. 좀 더 여기 있으면 서 마법사들의 수식을 봐 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은 상당히 다르니 말이다. "괜찮다, 카류야. 류스밀리온과는 달리 아직 우리들은 하던 수식을 더 연구해봐야 할 거 같 으니까 리아 후작에게 들렀다가 오늘은 좀 쉬거라. 얼굴 색이 안 좋아 보이는 구나." "아... 네."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쉬기를 권유하는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나는 겸연쩍게 대 답했다. 겨우 이틀 밤을 샌 것뿐인데 그렇게 티가 많이 나는 것일까. 하긴, 적은 분량이긴 하나 저 수식을 정리한 책을 만드는데 상당히 골치가 아팠으니까.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 밤을 샜더니 조금 잠이 오네요. 아르 할아버지도 너무 무리 는 하지 마세요. 거기 다른 분들 도요~!" "에? 아..." 내가 약간 소리를 높여 인사하자 다른 마법사들은 그제야 겨우 책에서 눈을 떼고 나에게 손 을 흔들어 보였다. 자신들을 가르쳐 주는 선생 뻘인 내가 왔는데 시선도 제대로 주지 않고 상기된 얼굴로 펜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 새로운 마법 수식을 익히는 것이 너무 흥분되어 내 가 들어왔는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아마 하르트 백작 님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있었으리라. 나는 아르 할아버지와 다른 마법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하르트 백작 님과 함께 밖으로 나왔 다. 건물의 그늘에서 벗어나자 뜨거운 열기와 눈부신 직사광선이 얼굴을 덮쳐왔다. 나는 조 금이나마 그것을 피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손으로 얼굴을 가려 그늘을 만들었다. 작은 그늘 로 겨우 눈을 제대로 뜰 수 있게 된 나는 프리란트 님의 서재가 있는 건물을 향해 다시 걸 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을 못 가 곧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부터 뒤쪽에 서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괜히 사람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그 시 선 때문에 나는 약간의 짜증을 느끼며 그 시선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뒤로 홱 돌렸다. 그러 나 나는 또 한번 의아함을 느껴야했다. 나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친 사람이 하르트 백작 님이었던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당황하며 시선을 피할 만도 하건만 하르트 백 작 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계속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르트 백작 님이 괜히 저런 식으로 나를 바라볼 리는 없다는 생각에 의아해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얼굴이 약간 달아올랐 다. 나는 얼굴을 더듬으며 심각하게 물었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습니까?" "아닙니다. 카류리드 전하." 내 말에 대답하는 하르트 백작 님은 아주 잠시동안이긴 했으나 그 수려하게 생긴 얼굴로 살 짝 미소를 만들어냈다. 그런 그 분의 행동에 꽤나 놀랐지만 그 미소에서 떠오르는 익숙한 누군가의 얼굴 때문에 나는 그냥 앞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나 머리에서 느껴지는 손 길에 다시 시선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르트 백작 님은 서투른 동작으로 나의 머리카락 을 살짝 쓸어 넘기고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스를 닮으셨군요." 놀랍게도 그의 입에서는 꽤나 사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르트 백작 님은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익숙한 검푸른 색 눈동자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번 안아봐도 좋을까요?" 하르트 백작 님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기에 나는 금방 질문에 대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하르트 백작 님은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바로 나를 껴안았다. 그분 은 황당해하는 나의 귓가에 얼굴을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나의 딸을 죽인 놈들의 얼굴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당신의 어머니가 왜 죽어야만 했는지 잊지 말아주십시오." 거기까지 말한 하르트 백작 님은 바로 나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나를 놓은 그분의 얼굴 은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내용만으로는 충분히 감정이 격양된 상태라고 추측할만한 발 언이었건만 그분은 조금 전부터 계속 무뚝뚝한 어조와 무표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것을 잊지 않으시는 한, 하르트 가는 마지막까지 당신의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굳이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나라의 왕이 되고 말 테니까요." 나는 입술 끝을 비틀며 하르트 백작 님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를 기다리지 않고 바 로 프리란트 님이 있는 서재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진 않았지만 기척으로 하르트 백작 님이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던 그분을 보고 너무나 냉 정한 분이라 생각했건만 내가 완전히 오판을 한 모양이다.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감 정 표현이 서툴렀던 것뿐이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항시 냉랭하고 분위기를 보이고 있지만 그 속은 어머니의 죽음에 원인을 마련했던 자들에 대한 복수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으리 라. "프리란트 님." "드디어 오셨군요. 정말 얼굴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카류 님." 서재로 들어서자 창가 쪽에 놓인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프리란트 님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마법사들에게 가르쳐줘야 할 수식들이 많아서 말이죠. 솔직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야 이 정도뿐이니까요." "그런! 엄청난 도움이 되고 있으니 그런 말씀은 하시지 마십시오. 아, 하르트 백작도 함께 오셨군요.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나는 프리란트 님의 안내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하르트 백작 님까지 모두 자리를 잡고 앉 자 프리란트 님은 내가 마법사들을 가르치느라 듣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딱히 상황을 뒤집을 만한 좋은 방안은 없었는지 프리란트 님이 하는 말들은 전부터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을 정리하여 이야기하는 정도였다. "제1왕자파는 북서부에, 그리고 우리 세력은 동남부에. 전체적 구도가 재미있게 짜여 있는데 요?" "저희 세력은 리아 후작 가, 그리고 하르트 백작 가, 에스문드 백작 가, 바스라윈 백작 가의 군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니까요. 아, 동남부 전장에 있던 레이포드 경의 군도 포함해야겠군 요." 프리란트 님이 지도에서 동남부 쪽의 전장을 짚으며 말했다. "레이포드 경의 군사를 빼와도 괜찮은 건가요? 아직은 그 지역의 상태가 불안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말입니다." "지금은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는 것이 시급한 만큼 어쩔 수가 없죠. 어차피 그 지역에서의 전투는 카르틴 왕국과 매번 있는 사소한 시비에 지나지 않았고, 소강상태가 된지도 꽤 시간 이 흘렀으니 보통 수준의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으로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르윈 왕국이 내전에 들어갔다는 사실에 그렇지 않아도 계속 시비를 걸 어오고 있던 카르틴 왕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크로시아 대륙의 4대 왕국 중 단지 카르틴 왕국만을 접하고 있는 우리 아르윈 왕국과는 달 리 카르틴 왕국은 동쪽에 리샤스 왕국과 에베리아 왕국까지 접하고 있으니 그들 두 나라의 이목 때문에라도 대대적으로 움직이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그 두 나라는 현재 한창 전쟁 중인지라 카르틴 왕국을 견제할만한 상태가 아닌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게다가 아직까지 큰 움직임이 없었다고는 하지만, 카르틴의 현 국왕이 전에 없이 용맹하고 뛰어나 카르틴 왕국이 국왕을 중심으로 점차 강대해지고 있다는 소문까지 있고..." 나는 프리란트 님에게 말을 하며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드는 듯한 기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카르틴 왕국과의 견제에 신경을 써야함은 물론이거니와 국왕군에 비해 심각한 군사적 열세,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분까지 없었다. 누명을 썼다는 그런 명분 같지도 않은 명분을 내세우 고는 있었긴 했지만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카르틴 왕국이 저희 나라를 먹게되면 대륙의 정세가 크게 바뀌게 되는 것이 니 리샤스 왕국과 에베리아 왕국도 싸움만 계속하고 있지는 않겠지요. 지금으로서는 그들의 전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군요." 그 심정은 나와 다르지 않았는지 프리란트 님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고고했던 프리란트 님이었으나 요즘 들어 자주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 "매일같이 봉화, 파발, 국경 근처의 전서구를 확인하고 있지만 아직은 뚜렷한 소식이 들어오 지 않고 있군요. 얼마나 대군을 끌고 오려고 이렇게 오랫동안 시간을 끄는 건지..." 똑똑똑. 한참을 이야기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것을 방해하면서까지 들어오려는 자가 누구인지 나는 의아해졌다. "들어와라." 프리란트 님의 말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 남자가 뛰어들어왔다. 그 남자는 가문 대대로 리아 후작 가에 충성을 바치는 무장이었다. 전생에 내가 살던 토이렌과는 달리 여러 가지 이유로 심심찮게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나는 곳이다 보니 아르윈 왕국은 자연스럽게 무를 더 중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왕국의 최고 권력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리아 후 작 가는 의외로 문가였다. 그러나 무가가 아니라고 해서 리아 후작 가가 병사를 많이 데리 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옥하고 거대한 영지를 통한 튼튼한 자본력을 바탕으 로 그 어떤 귀족가보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아 후작 가는 자신을 대신하여 군을 통솔할 무장을 데리고 있었는데 눈앞에서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바로 그였다. "테잘렌, 무슨 일인가?" "드디어 움직였다고 합니다. 방금 제1왕자파의 연합군이 군대를 이끌고 리아 영지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테잘렌의 보고에 프리란트 님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수는?" "...어림잡아 9만 내외인 듯 합니다." "......" 프리란트 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분의 낯빛을 보니 듣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 군이 동원할 수 있는 병사들은 주요지역을 지키는 병사들까지 모조리 끌어 모아봐야 6만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할말을 잃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프리란트 님에게 정신을 차려보라는 의미에서 말을 건넸다. "그래도 9만이 어딥니까. 트로이 후작이라면 한번에 승기를 잡기 위해 10만은 족히 넘게 끌 고 올 것이라 짐작했건만 오히려 다행이라 할 수 있겠군요. 제1왕자파가 병사들을 총동원하 면 30만까지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하하... 네." 긍정의 말을 하고 있긴 했지만 프리란트 님은 굉장히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프리란트 님은 테잘렌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테잘렌. 지금 당장 레이포드 경과 다른 분들을 회의장으로 모셔 와라." "이미 부하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고 오는 길입니다. 리아 후작 님." "후우, 그래." "유능한 사람을 부하로 두셨군요. 프리란트 님. 이렇게 인재가 많으니 군사적 면에서 밀린다 하더라도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양보다 질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프리란트 님을 향해 괜히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이제껏 아무 말 없이 곁에서 지켜보고 있기만 하던 하르트 백작 님도 자리에서 일어나 프리란트 님을 향 해 입을 열었다. "그럼 표정으로 앉아 있는 것보다는 생산적인 일을 하도록 합시다. 회의실로 가시죠, 리아 후작 님." "알겠습니다." 프리란트 님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는 먼저 문밖으로 향했다. * * * 출정 준비는 굉장히 빠르게 이루어졌다. 프리란트 님이 나의 처형 소식을 듣자마자 이렇게 될 것을 짐작하고 예전부터 많은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 전장에 따라 나가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해야했다. "무거워." "풋," 전장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갑옷을 입은 나의 모습을 보고 에르가 형은 조금 전부터 계 속 재밌다는 듯이 계속 피식피식 웃었다. 그러나 에르가 형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 은 아니었다. 내가 봐도 나의 갑옷을 입은 모습은 정말 어색했기 때문이다. 나는 운동신경이 그렇게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검술에 완전히 흥미를 잃 었다. 최근에서야 깨닫게 된 것인데 전생에 살 때부터 언제나 일등만을 해와서 그런 것인지, 재능이 없어 아무리 노력해도 최고가 될 수 없다고 추측되는 일에는 금세 흥미를 잃고 손을 놓아버리는 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학교를 그만 둔 후로 단검던지기가 아닌 정통검 술연습은 거의 하지 않았고, 덕분에 지금 입고 있는 것과 같은 전신갑옷을 입어볼 기회는 한번도 없었다. 게다가 예전의 땅꼬마의 모습에서 탈피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몸집이 또래보 다 작은 편에 속하다 보니 더더욱 갑옷이 무거웠고 움직이기 힘들었다. "이건 정말 안되겠어요. 좀 더 가볍고 움직이기 편한 게 없을까요? 이대로는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은 갑옷 때문에 도리어 큰 상처를 입게 될 것 같네요." "조금...그렇군요. 카류 님은 경장을 하셔야겠습니다." 곁에서 내 꼴을 지켜보던 드리크 경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수긍의 뜻을 밝히고 주위의 시종 을 시켜 다른 갑옷을 가져오라고 명했다. "카류는 정말 갑옷이 안 어울려. 너무 이상해." 지금 이 자리에는 각자 출전 준비를 끝낸 몇몇 사람들이 내가 마지막으로 갑옷을 챙기는 모 습을 보고는 그것을 구경하며 웅성대고 있었는데, 어떻게 안 것인지 히노 선배까지 이 자리 에 끼여있었다. 그런데 웬일로 그녀마저 무거운 갑옷으로 인해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나를 보고 한마디 던졌다. "한창 크고 있는 중이니 좀 더 크면 입을 수 있겠죠." "나는 카류의 키가 큰다해도 어울리지 않을 거라 생각해. 그러니 어울리지도 않는 갑옷 같 은 건 영원히 입지 않았으면 좋겠어." 히노 선배의 말에는 은근한 안타까움이 배어나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챈 나 는 살짝 웃으며 그녀의 말에 답했다. "앞으로는 자주 전쟁에 나가봐야 할 테니 그건 불가능하겠죠. 이젠 갑옷에 익숙해져야 한다 고요." "......" 말이 없는 히노 선배를 뒤로하고 나는 시종들이 새로 가져온 갑옷을 입기 위해 지금 입고 있는 것을 벗으려 했다. 그러다가 문득 곁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히노 선배?" "정말 전장에 나가는 거야? 카류는 약하잖아." "에에, 너무해요.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상처받는다고요. 그리고 에 르가 형이나 딜티가 너무 강해서 그렇지, 저도 보통 이상의 실력은 된다고요. 단검 던지기는 꽤나 수준급이라고 드리크 경이 말씀하셨는걸요." 내가 장난스럽게 대답해주자 히노 선배의 황금빛 눈동자에 금새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 "언제부터 히노 선배가 이렇게 울보가 됐을까." 나는 그녀를 꼭 끌어안고 토닥거려 주었다. 내가 그녀를 끌어안았음에도 웬일로 주위의 사 람들은 아무 말도 않고 쳐다보고만 있었다. 히노 선배가 꽤나 심각해 보여 장난을 칠 엄두 를 내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카류..." "왜 그래요, 히노 선배?" "......" 히노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물기를 머금은 금빛 눈동자를 들어 오랫동안 나 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그녀가 너무 걱정이 큰 나머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인 줄 알고 나는 위로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히노 선배 너무 걱정하지..." "좋아해." "예?" 대뜸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는 뜻으로 되묻자 히노 선배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단어 마다 힘주어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너를 사랑해, 카류." 나는 잠시 입을 쩍 벌렸다. 그렇게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에서 '흡', '큭'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너는 내가 싫어?" 나는 잠시 패닉 상태에 빠졌던 정신을 겨우 수습하고 히노 선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녀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었을 뿐이었다. 몇 년 전의 그 소극적이던 히 노 선배를 생각한다면 정말 엄청나고도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도 그녀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한번도 다른 의미 로 좋아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아무리 아름답게 성장했다고는 하나 그녀는 여전히 너무나 사랑스러운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들어보는 사랑고백인 만큼 조금 쯤은 얼굴이 달아오를 만도 하건만 나는 잠시 놀란 것 말고는 아무런 감회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어이없어 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도 벌써 사랑을 할 나이가 됐 구나 라는 생각에 흐뭇함을 느끼고 있었다. 히노 선배는 내가 말이 없자 조금 초조했던지 양손을 꼭 쥐었다.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히 노 선배의 불안한 금빛 눈동자가 너무나 귀엽고 깜찍하게 느껴져서 저절로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제가 설마 히노 선배를 싫어하겠어요." 나는 약간 발돋움을 하여 귀여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주었다. 껴안거나 머리를 쓰 다듬는 행동은 매일같이 해왔지만, 친구들도 어느 정도 나이도 있다는 생각에 이마나 뺨에 키스를 해주는 짓까지는 최대한 자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닌지라 히노 선배는 내가 이런 식으로 키스를 해도 크게 얼굴을 붉힌다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나는 그만 떨어지기 위해서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런데 이번엔 히노 선배가 손 으로 나의 뺨을 붙들고 떨어지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면 가지마. 이곳에 남아 있어 줘." "그건 곤란해요. 선배." 나는 다시 한번 귀여운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하면서 나의 뺨에 올려진 그 가는 손을 부드 럽게 떼어냈다. "여기서 기다려요, 히노 선배. 곧 돌아올테니까." "...좋아해. 카류." "저도 좋아해요. 선배."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나의 행동에 히노 선배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 다. 그 모습을 보자니 조금 미안한 기분도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다. "...기다릴게. 여기서." "그래야 착한 아이죠." 나는 달래듯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에 키 스해주기 위해 다가가는데 갑자기 히노 선배가 손을 들어 나의 얼굴을 붙잡았다. "히노...!!" 히노 선배의 다음 행동엔 나도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가 나의 얼굴을 당겨 이마가 아닌 입에 키스를 했기 때문이다. 그냥 입술이 잠시동안 닿은 것에 불과했지만 갑자기 일어 난 일에 나는 완전히 굳어버렸다. "꼭 돌아와야 해. 기다릴거니까." 그녀는 나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냥 방을 횅하니 나가버렸다. 문닫는 소리가 들려와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허...허허허..." 허크 아저씨가 황당함과 놀라움이 섞인 웃음소리라 정의하기는 힘든 이상한 소리를 냈다. 비단 허크 아저씨만이 아니라 드리크 경까지도 누구에게 한방 맞은 것 같은 띵한 표정을 하 고 있었다. "...저렇게 안 키웠는데 언제 저만큼이나 적극적인 성격이 된 거지?" "뭘 그렇게 안 키워. 네가 매일같이 상습적으로 껴안는 둥의 짓을 하면서 그런 분위기를 조 장했잖아." 나의 중얼거림에 언제 다가왔는지 바로 곁에 선 딜티가 한마디 보탰다. 히노 선배를 좋아했 던 것은 저기에 완전히 넋이 나간 에르가 형만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딜티의 목소리엔 약간 의 심술이 배여 있었다. 그런 그들을 보노라니 괜히 웃음을 나와 딜티를 향해 싱긋 웃으며 장난스럽게 그의 말에 응수해 주었다. "내가 나쁜 건가?" "그래! 이 나쁜 놈아!!" 그러나 그 말에 답을 한 것은 딜티가 아니었다. 언제 정신을 차렸는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완전히 넋이 빠져 있던 에르가 형이 소리를 빽 질렀던 것이다. "뭐냐! 꼭 자기는 아무 것도 안한 것처럼! 그녀에게 먼저 이상한 짓을 한 건 너잖아!!" "에르가 형. 이마에 하는 키스정도는 형에게도 몇 번 해줬잖아." "닥쳐~~~엇!" 에르가 형은 새빨개진 얼굴로 방이 떠나가라 소리치고는 문을 박차고 방을 빠져나갔다. "에르가도 참... 저렇게 반응하면 더 쪽팔리잖아. 하지만 남의 일이 아니니..." 딜티는 에르가 형이 나간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 다. 나와 가까웠던 친구들은 모두 보통 한두 번 정도 내게 키스를 받은 경험이 있었고, 딜티 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너무 귀여워서 그런 것 뿐이야. 딜티가 봐도 지금 에르가 형의 행동, 정말 귀엽지 않았어?" "...별로라고 말하고 싶군. 에르가를 가지고 장난하는 건 그만둬. 열 받은 에르가로 인해 고 생하는 건 너만이 아니란 말이야." "뭐 어때, 한동안은 이렇게 장난을 칠 시간도 없을 테니까." 나는 시종에게서 흉갑을 받아들고 씁쓸하게 웃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6 여름의 시작 용서 없이 내리쬐는 태양이 땅을 뜨겁게 달구어 주고 있었다. 지독한 복사열로 인해 공기가 어른거려 마치 투명한 파도 안에 갇혀 있는 듯했다. 나는 비오듯이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뒤를 돌아보았다. "후, 정말 올해는 너무 덥군요. 저도 이런 더위는 처음 경험해보는 것 같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말을 타고 가던 드리크 경이 말했다. 나는 군 총사령관인 드리크 경이 맡고 있는 제1군에 속해 있었는데, 전장에 대한 경험은 드리크 경을 따라갈 자가 없다 는 공통된 의견에 따라 그와 함께 있으면 가장 안전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잖아도 병사가 부족한데 이대로 계속 낙오자가 생겨도 괜찮을지 모르겠군요." 말을 타고 있는 나도 이렇게 지칠 정도인데 이 긴 거리를 무장까지 한 채, 계속 걸어오고 있는 병사들은 어떨지를 생각하니 절로 걱정의 말이 흘러나왔다. "날씨마저 네 편이 아닌 모양이구나." 유일하게 말을 타고 있는 마법사인 류스밀리온이 밉살스러운 말을 하며 끼어 들었다. 그는 언제나 떠돌아다니던 사람이라 그런지 다른 마법사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르 할아버지와 다른 마법사들은 마차를 타고 가고 있음에도 완 전히 파김치가 되어 있는데 그는 나보다도 쌩쌩해 보였던 것이다. "류스밀리온 님은 정말 정정하시군요." "네 놈이 너무 나약한 거다. 젊은 놈이 벌써부터 혀를 빼물다니... 왕궁에서 곱게만 살던 놈 한테 이런걸 바란 내가 잘못이지." 류스밀리온은 나를 아래위로 훑으면서 빈정거렸다. 그의 말이 그다지 틀린 말도 아니라 평 소처럼 반발하는 대신 그냥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정오가 가까워져 갈수록 태양은 더욱 뜨겁게 내리쬐며 땅에 반듯하게 깔린 돌에서 올라오는 반사열과 함께 우리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마침 주변은 푸른색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을 정도로 황량한 곳이었기에 실제의 온도보다 더욱 뜨겁게 느껴졌 다. 온몸을 끈적끈적하게 만드는 땀으로 인해 나의 불쾌지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져 있었다. "하아." 나는 짜증스러움을 날려버리고 싶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문득 또 다시 시선이 말 등에 달린 수통으로 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마른 입술을 콱 깨물었다. 여기에서 물을 가 장 많이 마신 사람은 나였음에도 작렬하는 태양으로 인해 자꾸 말라오는 목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사실상 나는 왕자이며, 이 부대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자이니 내가 물을 한 드 럼 전부 퍼마시든 말든 그것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부족한 물 을 마구 마셔버릴 만큼 뻔뻔한 인간은 아니었기에 물을 덜 마시기 위해, 그러니까 최대한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마시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물 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신경질적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지평선을 거의 노려보다시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카류 님." 나의 표정을 보았는지 드리크 경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 왔다. 평소라면 괜찮다고 말해줄 만도 했으나 지금은 짜증스러운 더위에 입을 떼기도 귀찮았다. 그러나 곧 버거운 전쟁을 치 러야 할 판인데도 여름의 무더위 같은 것에 불만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향해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보내주고 다시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한동안 말없이 나아가고 있는데 전방에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전방의 지평선이 약간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호수가 나타났던 것이다. 너 무 목이 말라서 헛것까지 보이나 싶어 나는 눈을 비볐다. "저건?" 아마 내가 헛것을 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곁에서 드리크 경도 신음성같은 소리를 냈기 때 문이다. "어째서 길 한가운데 호수가 있는 거죠? 드리크 경?" "아...글쎄요. 저도 이런 호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드리크 경은 황당하다는 듯이 머리를 긁었다. 우리들뿐 아니라 근처에 있던 다른 병사들도 그 호수를 보았는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가보면 알겠지." 류스밀리온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스윽 둘러보더니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는 먼저 앞 으로 튀어나갔다. "어어? 류스밀리온 님!" "그분 말씀대로 일단 가보지요. 조금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예기 않은 곳에서 물을 보충 할 수도 있게 되었으니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아무 것도 없는 길 한가운데에 호수를 만들어놓다니 누군지 몰라도 참 할 일이 없었나 보군요. 뭐 하러 저런 짓을 했나 몰라." 어느 정도나 시간과 능력이 남아돌면 저런 짓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며 나는 말을 호수가 있는 쪽으로 몰았다. 그러나 앞으로 가면서 계속 눈을 비빌 수밖에 없었 다. 호수가 점차 희미해지더니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뒤따라오던 병사들도 그에 놀랐는지 웅 성거렸고 전체적으로 대열이 흐트러져 약간의 무질서상태가 되었다. 드리크 경이 병사들을 질책하고 있는 사이, 약간 떨어진 앞에 말에서 내려 우두커니 서 있 는 류스밀리온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류스밀리온 님?" 그의 이름을 부른 나는 그의 앞에 작은 물웅덩이가 있음을 깨달았다. "신...기루?" 내가 중얼거리자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내 쪽으로 홱 돌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시 선에 답했다. "정말 덥긴 더운 모양이네요. 신기루까지 보이고 말입니다." "...카르틴 왕국과 리샤스 왕국의 사막에서 본적은 있었지만 아르윈 왕국에서 이런 것을 보 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구먼." "길에 깔려있는 돌 때문에 땅의 온도가 더욱 뜨거워져서 그랬나보네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도 이런 비슷한 걸 본적이 있는데 바보같이 깨닫지 못하고 있었군요." "뭐? 네가 언제, 어디서?" 류스밀리온이 물음에 나는 제대로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전생을 살면서 차를 타고 가다 가 아스팔트 위에 떠 있는 물웅덩이의 신기루를 본적이 있다고 어떻게 말해준단 말인가. "카류 님. 류스밀리온 님." 다행히 우리들 곁으로 다가온 드리크 경에 의해 이 대화는 그냥 넘어갈 수가 있었다. 드리 크 경은 아직도 그 호수에 대해 얼떨떨했는지 우리들에게 질문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누군가 조화라도 부린 것입니까." "신기루다. 들어본 적이 있겠지? 사막에서 종종 볼 수 있다는 그 환상을 말이다. 공기층의 온도가 달라서 일어나는 현상같더군." "와, 류스밀리온 님. 어떻게 그걸 아셨어요?" "카르틴 왕국을 돌아다니다가 알게 됐다." 나는 그의 말에 감탄했다. 왕궁의 도서관의 책을 거의 섭렵하고 있는 나이지만 대부분의 책 에는 사막에 신기루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정도만을 기록하고 있을 뿐,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것들은 전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류스밀리온은 정확히 그 원 리를 집어내어 말한 것이다. 아마 사막이 거의 전무한 아르윈 왕국과는 달리 카르틴 왕국에 는 황야도 많고 동쪽 부근에는 적게나마 사막도 위치해 있기에 그런 지식이 더 발달해 있는 모양이다. "너도 아느냐?" "예. 책에서 읽어 알고 있었지요." 전생에 살던 토이렌 세계의 일반적 상식이라 말해줄 수는 없는 관계로 일단 책에서 읽었다 고 거짓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사이로 드리크 경이 끼어 들었다. "아까 그것의 원리를 아신다고 하셨습니까? 실례가 아니라면 한번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드리크 경은 조금 전 그 신기루가 굉장히 신기했는지 그답지 않게 상당히 호기심 어린 눈초 리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마 그런 그를 모른척하기가 뭣해서 나는 그에게 아는 대로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다. "빛은 직진을 하는 성질이 있는데 다른 물질 사이를 지날 때는 그 경계면에서 꺾이게 됩니 다. 그리고 같은 공기 중이라 하더라도 온도 차이가 심할 경우에는 다른 물질을 지날 때처 럼 꺾여지지요. 사막에서는 강렬한 태양 때문에 모래가 뜨거워지고 모래 위의 공기는 모래 의 영향으로 상층의 공기보다 더 온도가 높아져요. 그때 빛은 그 사이를 굴절하게 되고 그 로 인해 우리는 원래 있는 장소와는 다른 곳에 있는 물체를 보게 되지요. 그게 바로 신기루 예요." "으음, 좀 어렵군요. 빛이 꺾여서 저런 환상이 보인다고요?" "물이 든 컵에 스푼을 넣으면 이상하게 굽어보이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예요." "...그런...것입니까?" 드리크 경은 턱을 감싸고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이곳은 과학이 상당히 뒤쳐져 있기 도 한데다가 애초부터 드리크 경은 문관이 아닌 무관이었기에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곤란해하는 드리크 경에게 슬쩍 웃어주고 길을 재촉하기 위해 말에게 다 가갔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쩍 벌리고 나를 바라보는 류스밀리온이 시야에 잡혔다. "너...너는 그런걸 누구에게 들은 거냐?" "...책...에서 읽었다니까요."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류스밀리온은 그냥 온도차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책은 무슨 책! 사실 방금 한 말도 우연히 내가 알아낸 것에 불과했다. 사막에서 살아가는 토박이 카르틴 왕국의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이 아르윈 왕국 도서관의 책 같은데 적혀 있을 리가 있나! 당장 바른 대로 안 말해?" "좋습니다. 솔직히 말해 그냥 혼자서 알아냈습니다. 불만이신가요?" 나는 아주 뻔뻔스럽게 그를 향해 말했다. "...그래. 그랬군." 류스밀리온은 저번처럼 나의 멱살을 붙잡고 재차 확인을 한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 다. 단지 재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뭐라고 투덜거렸을 뿐이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거 그냥 할 말을 다해버리자고 생각한 나는 그에게 한마디 던졌다. "하지만 류스밀리온 님도 정말 대단하군요. 신기루의 그 원리에 대해 정확히 말하셨지 않습 니까. 공기 중의 온도차가 신기루의 결정적인 원인이니까요." "됐다! 내가 우연찮게 그 원리를 발견하고 일루젼 마법까지 만들어내어 스스로에게 감탄했 던 일이 엊그제 같건만 저런 코딱지보다 작은 꼬맹이가 더 자세하게 그 원리를 알고 있었다 니..." "예?" "네 놈은 코딱지도 과분해! 불만이면 키나 더 키워서 와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일루젼 마법요?" 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런 나를 보더니 류스밀리온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 했다. "...그래.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다." "그거! 이번 전쟁에서 적군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요?" "거참, 신기루의 원리를 응용한 마법이라 하지 않았느냐! 멀리서 봐도 흐릿하게 보이는데다 가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져버리는 이걸 뭐에 써먹는단 말이냐? 물론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처음에야 아주 약간 혼란스러워 할지도 모르지. 그러나 금세 아무 것도 아닐 거라 생각하고 원래위치를 되찾을 거다. 어차피 나도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냈다는데 의의를 두고 있을 뿐 이야." 전쟁에 써먹을 수 있겠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곁에서 눈을 빛내며 우리들의 말을 경 청하던 드리크 경이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적은 바보가 아니니까요. 트로이 후작까지 있다고 하니 그것으로 그들에게 혼란을 주는 것은 무리일 듯 싶습니다. 조금만 더 그럴듯한 환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좋았을 텐 데 말입니다." 그들의 말을 듣자니 틀린 말도 아니라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어차피 먼 곳에서 가만히 떠 있기만 할뿐인 환상으로는 적에게 별다른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 이다. 지금 우리 병사들도 조금 당황해 했을 뿐 금세 제자리를 찾았지 않은가. "대체 여기서 뭣들 하는 게냐? 예정한 장소에서 전투를 치르기 위해 어서 진군해야하는 게 아니었느냐?" "아! 아르디예프 님. 지금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아르 할아버지가 앞에서 너무 오래도록 꾸물거리는 우리들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직접 부르러 온 모양이다. 우리들 중 드리크 경이 가장 먼저 본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 고 류스밀리온도 다시 말에 타기 위해 아르 할아버지 곁에 서 있는 자신의 말에게로 다가갔 다. 그러다가는 아르 할아버지를 슥 훑어보고는 빈정거리는 소리를 했다. "살아있었군, 아르디예프. 며칠동안 말도 없기에 나는 그 마차 속에서 시체가 된 줄 알았지 뭐겠어." "...고약한 놈.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너 같은 놈은 당장에 내쳤을 것이다." "후, 감사할 줄을 모르는군. 그 누가 이 류스밀리온이 아르윈 왕국의 내전에 끼어 들어 제6 왕자파에 가담할거라 생각했겠어. 모르긴 몰라도 내가 있다는 이쪽에 사실을 놈들에게 알리 기만 해도 어느 정도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걸? 까놓고 말해 내가 이쪽 편을 들기로 한 것은 하늘의 축복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군요." "그래. 이래봬도...뭐?" 류스밀리온은 대답을 한 상대가 나라는 것을 깨닫고는 상당히 띠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 다. "네 놈이 웬일이냐? 그렇게 바른 말을 다하고?" "사실이니까요. 제가 언제 류스밀리온 님을 상대로 틀린 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지랄 맞을 놈." 류스밀리온은 상당히 상스러운 욕을 여운으로 남기고 자신의 말에 올랐다. 아르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젓다가 나에게로 다가왔다. "어서 가야지. 이런 곳에 계속 서있다가는 일사병 걸리기 딱이겠구나." "그래야죠, 아르 할아버지. 하지만 저보다는 아르 할아버지의 몸을 더 생각해 주세요. 나중 에 중요한 일을 하셔야할 듯 하니까요." 나는 약간 고개를 갸웃하는 아르 할아버지와 말을 타고 본진으로 돌아가고 있는 류스밀리온 을 한번씩 바라보고 짙게 웃음을 띄웠다. * * * 하늘의 정 중앙에서 작렬하고 있는 태양으로 인해 땅은 불에 달군 철판처럼 뜨겁게 달아오 르고 있었다.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닦아내다가 곁에서 새로운 수통을 가져오라고 명하는 이크쟌트 후작이 눈에 들어왔다. "그쯤 하는 게 어떻습니까. 덥다하여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무기력해질 것입니다." 조금 전부터 끊임없이 물을 마시는 이크쟌트 후작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트로이 후작." 이크쟌트 후작은 나의 충고를 받아들여 병사에게 받아든 새 수통을 말의 안장에 걸었다. "그러게 왜 익숙하지도 않은 원정에 참가하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 빌어먹을 놈들을 내 손으로 갈가리 찢어버리지 않고는 내 영원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이크쟌트 후작은 이를 박박 갈며 화를 냈다. 그는 무관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전투에는 검 을 제법 쓰는 아들이나 다른 대리인을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번만은 원정에 참여하겠 다고 말하여 이렇게 나의 제1군에 함께 동행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딸이 죽음으로 몰고 간 제6왕자에 대한 증오가 보통이 아닌 모양이었다. "트로이 후작 님." 그때 한 젊은 남자가 우리들 곁으로 다가와 공손히 인사를 건네었다. "어떤가, 마법사들은?" "꽤나 지쳐있습니다. 나이를 드신 몇 분은 더위에 쓰러지기까지 하셨습니다." "후, 체력이 약한 마법사들이니 어쩔 수가 없군. 그렇다고 진군을 쉴 수도 없으니, 최대한 정중하게 모시도록 병사들에게 일러두어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는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뒤쪽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갑자기 이크쟌트 후작이 불러 세우는 바람에 걸음을 멈추어야했다. "네가 유넨이라는 마법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알고 있는가? 마법사들이 새로 만들어냈다는 그 마법에 대해서 말이다." 이크쟌트 후작은 전부터 그것이 상당히 궁금한 듯했으나 딱히 친분이 있는 마법사가 없어 그저 마음속으로만 지니고 있다가 마침 유넨을 발견하고 이때다 싶었는지 질문을 던졌다. 이번 출전에는 많은 마법사들이 속해 있었다. 웬만해서는 전쟁에 나가지 않으려 하는 마법 사들이 자진하여 전쟁에 참가하고 싶다고 국왕폐하께 간청을 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기만 한 카류리드 왕자에게 화가 난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이 그를 처단하는데 자신들도 도움이 되고 싶다는 것이 그 주된 이유였으며 그 중에는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고 말을 해놓고서 카 류리드 왕자를 구해 도주한 아르디예프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이렇게 출전을 자청한 것은 이번 전쟁에서 자신들이 새롭게 고안한 공 격 마법을 사용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공공 연연히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마법인지 그 자세한 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대도 생명의 궁의 마법사가 아닌가? 그런데 왜 모른다는 거지?" 이크쟌트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유넨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약간 숙이며 답했다. "아르디예프 님께서 처형식 때 카류리드 전하를 탈출시키며 성을 떠난 이후로 나름대로 조 화롭게 흘러가던 생명의 궁이 조각 조각으로 나뉘어버렸습니다. 현재 7서클의 마법사인 네 야드 님께서 총책임자로 생명의 궁을 통괄하고 계시긴 하지만 아르디예프 님만큼 모든 마법 사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기에 제대로 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고, 그로 인해 마법사들이 각자 자신의 할 일만을 하며 마음이 맞는 자들과 패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그 리고 자신의 패에 속한 자들끼리만 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자진한 그분들과 가깝지 못한 저로서는 그 마법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후우, 그런가." 이크쟌트 후작은 아쉬운 듯 말했다. 그러다가 무언가가 생각이 난 듯 나를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언제나 서로 똘똘 뭉쳤던 생명의 궁의 마법사들이 분열되다니 믿어지지가 않 는군요. 마법사 하나 하나가 중요한 국력이건만 이대로 내버려두면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릴 것 같습니다." "옳으신 말입니다. 아르윈 왕국의 평화를 위해 온 나라의 원흉인 그 제6왕자를 어떤 수를 쓰더라도 꼭 제거해야만 할 것입니다." 나는 긍정의 대답을 하고 고개를 돌려 뜨거운 열에 의해 일렁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제6왕자군과의 접전에 예상되는 관문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마지막 회의를 위해 주요인물들 이 모였다. "드디어 내일 그놈의 목을 따버릴 수 있겠군요." "이제서야 우리 딸의 복수를 해줄 수 있게 됐습니다! 이크쟌트 후작!" 이곳에 모인 자들 중 가장 흥분한 자는 이크쟌트 후작과 펠렌즈 후작이었다. 애초부터 그들 은 자신의 딸인 에렌시아와 아르멘을 죽인 자로 아스트라한과 카류리드 왕자를 의심하고 있 었으나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기에 오랫동안 이만 갈고 있어야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카류리 드 왕자를 죽일 기회가 찾아왔으니 저렇게 흥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며칠 후의 싸움은 승리가 확정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비록 험한 산지 사이에 위치한 철옹의 관문이긴 하지만 마법사 분들의 도움을 얻으면 어떻게든 출입구를 부술 수 있을 테고 3배가 넘는 전력으로 밀어붙여 충분히 점령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을 돌파하 면 한동안 제대로 된 관문이나 성이 없으니 리아 영지의 상당부분을 손쉽게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말에 다른 장군들은 수긍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들을 주욱 둘러본 다음, 한쪽에 앉아 있는 마법사들의 대표인 7서클의 노마법사에게 말했다. "게다가 또 한가지. 비록 상대의 병사가 우리편에 비해 극히 적다고는 하나 불행하게도 그 쪽에는 8서클의 마법사이신 아르디예프 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마법사 분들의 협조는 필 수 불가결한 것이지요. 사정이 이러니 그만 새로 만들어내셨다는 그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가르쳐 주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그 전에 요구가 하나 있소." 계속 침묵을 지키던 7서클의 노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이번 관문을 돌파하기 위해 우리들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공성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그 다음 전투가 예상되는 곳에서 평야전을 치를 때 우리들 마법사를 최전방에 서게 해주시오." "...예?" "우리들을 최전방에 세워달라고 했소."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방어력과 기동력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마법사들은 보통 후방에서 원거리 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렇지 않고 전방에서 마법을 쓰다가는 뒤 쪽에서 빠르게 밀려드는 병사들에게 죽음을 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것입니까." "이번에 새로 만들어낸 마법을 사용해 보려고 그러는 것이오." "대체 어떤 마법이기에 그러시는 것입니까?" 나의 뒤에 서 있던 유넨이 도저히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했는지 불쑥 끼어들어 질문을 던졌 다. 노마법사는 그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고 소리쳤다. "무례한 놈! 평민 주제에 이런 자리에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건만 감히 내가 하는 말에 끼어 들기까지 해? 게다가 이 마법의 자세한 원리에 대해 말해봤자 너 따위가 당장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제 얼굴을 봐서 그의 잘못은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유넨도 마법사이니 궁금하 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확실히 이런 곳에서 금세 원리까지 이해하기는 힘들다 할 지라도 대충 어떤 마법인지 정도는 가르쳐 주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후르부크 백작의 곁 있던 세스케인이 마법사를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마법사는 그의 말에 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한동안 계속 유넨을 노려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흠, 6서클 수준의 마나를 움직여주기만 해도 거의 8서클 수준의 위력을 보여주는 마법이지. 화계의 마법으로 인시너레이트 급의 위력을 낸다." "세상에..." 유넨은 조금 전의 일 때문에 이번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들떠있었다. 나는 다시금 마법사를 바라보고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그런 마법이 있다면 가히 마법계의 혁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군요." "그러나 8서클 마법처럼 원거리 마법은 불가능하오. 사정거리가 굉장히 짧기 때문에 최전방 에 서야하는 위험부담이 있지. 내가 우리들을 최전방에 배치해달라고 말하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이오." 8서클 마법사 없이도 그 정도 수준의 위력을 보여주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 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장 마법사들을 전방에 배치시키자고 입을 여 는 자는 없었다. 노마법사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 대단한 일이겠지만, 그것만 믿고 마법사 들을 최전방에 세웠다가 일이 잘못되는 날에는 나라의 중요한 국력인 생명의 궁 마법사의 반이 전부 개죽음 당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솔직히... 한번도 실전에서 써본 적이 없는 마법이 아닙니까.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성공할 자신이 있으니까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오? 마법에 실패했을 때 죽는 것은 당 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이란 말이오. 아니면 우리가 집단 자살이라도 하려는 것 같이 보이 오?" "......" 나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지 고민이 되어 턱에 손을 올렸다. 노마법사는 나의 태도 를 보더니 차근차근 자세한 일을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말해 이 마법은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최근 어떤 계기에 의해 우 연히 개발된 것이오. 그렇기에 아르디예프 님조차 이 마법의 존재를 모르고 계시지. 일단 우 리들이 최전방에 서서 적군에게 마법을 사용할 것이오. 그러면 상대는 의외의 마법으로 인 해 굉장히 놀라게 될 것이오. 그때의 혼란을 틈타 우리들은 뒤로 빠지고 나머지 병사들이 상대를 괴멸하면 될 것이오." "그러나 정공법으로 나가도 우리 군은 충분히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위험을 감수 해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곳에서 마법사분들을 잃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 니다." 나의 말에 노마법사는 얼굴을 구기고 화를 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우리 마법사들은 이 전투에 조금도 협조하지 않을 것이오!"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오시면 곤란합니다." "그렇소? 싫으시면 그 압도적인 병력이라는 걸로 그 관문을 돌파해 보시오. 아르디예프 님 은 괴팍하긴 하나 기본적으론 친절하신 분이니 아마 8서클 마법이라는 화려한 환영 선물을 그대들에게 보내주실게요." "무슨 소릴 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이런 전시에 저런 식의 빈정거리는 소리를 하는 독단적인 마법사에게 화가 나서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게 싫다면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 될 것이 아니오. 이 더운 날씨에도 짜증을 참아 가며 여기까지 온 것은 물론 카류리드 왕자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함도 있지만 이 마법의 위력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서란 말이오. 원정하는 도중 더위 때문에 마법사들이 몇 명이 나 실신을 했었는지 그대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주위의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나 역시 어떻게 답해야할지 곤란해하고 있는데 노마법사가 조 금 전보다 진정된 목소리로 찬찬히 말했다. "우리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시오. 그렇게 하면 싸움도 훨씬 수월해질 것이 아니오. 바로 며칠 후면 결전이건만 이런 일로 분열이 되어도 좋소?" "......" 나는 뒤쪽의 마법사인 유넨을 돌아보고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유넨?" "아, 예. 솔직히... 새로운 마법을 개발해냈다면 저라도 그 결과를 확인해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이 마법사의 천성이니까요. 그리고 저분의 말씀처럼 정말 8서클 수준의 위력을 내는 마 법을 만들어냈다면 말할 것도 없겠지요. 저분들은 끝까지 이 마법을 시험해보고 싶어하실 것입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작게 속삭였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노마법사를 돌아보았다. "정말 이 마법을 성공할 자신이 있으십니까." "물론이오. 사람을 그렇게 믿지 못해서야 어디에 쓰겠소?" 완전히 표정이 밝아진 그를 보고 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 저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저 역시..." 여기까지 와서 마법사들과의 관계가 틀어진 수도 없는 일이고, 또 저렇게까지 강력하게 나 오는 것을 보면 웬만한 일이 없는 한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모두 동의의 의사를 밝혔다. "...좋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조심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저희 왕국이 큰 힘이 라는 것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물론이오. 내 목숨보다 중한 것 없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것이오. 우리들의 마법 에 당한 병사들이 얼이 빠져 허둥대는 모습을 보게 해주지." 노마법사는 싱긋 미소를 띄우며 답했다. * * * 이크쟌트 후작은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을 손을 가려 눈앞의 대치하고 있는 적군을 보며 짜 증스럽게 말했다. "대체 저놈들이 무슨 심산으로 저러고 있는 것일까요? 관문에서 우리들을 상대해도 질 판인 데, 지금 저렇게 떡 하니 성밖으로 나와 진을 치고 있는 저의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트로 이 후작 님?" "...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을 듯 싶습니다. 저쪽엔 가히 전쟁의 천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레 이포드가 있으니까요." "아무리 그가 뛰어난 장군이라 하더라도 이렇게 병력의 차이가 극심할 때는 그것도 무용지 물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체 뭘 어쩌겠다고 저러는 것인지..."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이크쟌트 후작은 조금 전부터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평범한 싸움이었다면 제6왕자군은 이곳에서 좀 더 남쪽에 위치한 산지 사이에 있는 관문에 서 공성전을 벌렸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방어력은 약하더라도 리아 영지 경계에 설치된 바로 뒤편의 관문을 사수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공성전을 벌려도 이기기 힘 든 판에 제6왕자군은 이상하게도 관문에서 방어태세를 취하지 않고 밖으로 나와 있었던 것 이다. 예측을 벗어난 그들의 행동에 이크쟌트 후작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장군들도 불안감을 엿보 였다. 어쩌면 이런 불안을 예견하고 저렇게 나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정도의 혼란을 주는 것으로는 3배나 되는 군사적 차이를 메울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더욱 의아해졌다. 레이포드가 그것을 모를 리가 없을 터인데 말이다. "트로이 후작 님. 마법사 분들이 준비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았다." 유넨이 다가와 내게 보고하는 것을 듣고 나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처음에는 마법사들을 최 전방에 서게 하는 일에 불안한 감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지금 상태를 보노라니 그것을 허 락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쪽이 알 수 없게 나온다면 이쪽도 의외의 방법을 쓰 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던 것이다. 우리편의 마법사들이 시전할 공격 마법은 아르 디예프조차 모르는 마법이라 하지 않았던가.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이 앞쪽으로 걸어나가자 건너편은 물론이거니와 이쪽의 병사들도 약간 술렁였다. 특히 상대편은 어찌할 줄을 몰라하는 듯이 보였다. 마법사들이 전방에 선다는 것 은 생전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일 테니 당연한 결과이리라. 마법사들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마법 시전이 끝난 후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배치 해둔 최전방의 중기병과도 상당히 떨어지는 것 같아 약간 염려스러웠지만 일단은 그들을 믿 어보기로 하고 상황을 그대로 지켜보았다. 긴장된 공기를 타고 병사들의 술렁이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마법서를 펴는 순간, 드디어 제6왕자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속셈이든 간에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커다란 함성과 소음이 뜨거운 대지에 울렸다. 제6왕자군은 최전방의 마법사들을 죽이기 위 해 가장 기동성이 빠른 경기병을 선두로 내세우고 있었다. 제6왕자군의 경기병이 물밀듯이 쳐들어오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최전방에 선 마법사들의 캐스팅은 계속 되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마법사들의 캐스팅은 쉽사리 끝마쳐지지 않았다. 나는 땀에 흥건해진 손을 꽉 쥐었다. 금방이라도 제6왕자의 기병들의 검에 우리 진영의 마법사들이 두동강이가 나버 릴 것만 같아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초조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아니?! 괜찮은 겁니까?!" 경기병이 거의 마법사들에게 근접했을 때 이크쟌트 후작이 완전히 사색이 된 얼굴로 내 쪽 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제6왕자의 경기병은 거의 코앞에까지 다가서 있었다. "궁수부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궁수부대에게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순간적으로 마법사들을 최전방에 세웠던 것에 미칠 듯한 후회가 일었다. 여기서 활 공격을 해서 경기병 에게 피해를 줘봤자, 무력한 마법사들은 살아남은 몇몇의 경기병만으로도 충분히 큰 피해를 받을 것이 자명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콰앙!! 땅을 울리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덥다못해 뜨겁기까지 한 이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마법 사들이 사용한 화속성의 마법은 얼마나 그 위력이 대단했던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 던 나에게까지 견디기 힘든 뜨거운 열풍을 선사했고, 나는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곧 어떻게 상황이 바뀌었는지 알아봐야 한다는 생각에 뜨거운 열기를 맞받으면서도 정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계획대로 마법이 시전되었으니 마법사들을 잃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안도감을 느끼며... 우와아아아아아아~~!! 사기가 충전한 병사들의 함성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나는 혼란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내게 영향이 미칠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 성공을 거두었건만 그 함성소리가 우리군 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법의 여파라고 생각되어지는 모래 먼지가 가라앉으며 시야가 대충 확보되자 그제야 열기가 그렇게 가까이에서 느껴진 이유가 마법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지독한 탄내와 뜨거운 불길은 제6왕자군이 아닌 우리군의 진영 에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마법사들의 바로 뒤에 서 있던 중기병의 대부분이 생각지도 못한 마법을 정면으로 받아 대부분이 전투불능이 되어 미친 듯이 땅을 뒹굴고 있었으며, 그 공격 에 영향을 받지 않은 병사들도 갑작스러운 일에 놀라 완전히 혼비백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들을 죽일 듯이 달려들고 있던 제6왕자의 경기병들은 아 군의 마법사들을 뒤에 태운 채 빠르게 본진으로 후퇴하고 있었다. 곧 마법사들을 태운 경기 병들의 추격을 방해하기 위해서인지 제6왕자의 중기병이 바로 밀려들었다. 그들은 혼란에 빠진 전방의 우리 진영의 기병을 손쉽게 박살내고 있었다. "이...이, 이게 대체!!" 이크쟌트 후작은 턱을 덜덜 떨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와 함께 마주보고 얼빠진 소리 를 하는 대신 크게 소리쳤다. "궁수부대!! 전방의 경기병을 겨냥해라!! 마법사들을 죽여!" 앞뒤 사정은 모르나 일단은 마법사들이 제6왕자군에게 넘어가려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 렇지 않아도 현재 생명의 궁에서 데려온 마법사들 중에는 고위마법사가 많았다. 그런 그들 이 이런 식으로 넘어가 버린다면 어이없게도 제6왕자군의 전력을 엄청나게 증강시켜주는 결 과를 맞게된다. 소중한 마법사들이긴 하나, 그런 식으로 제6왕자의 힘이 되게 만들 바에야 차라리 죽여버리는 것이 훨씬 낫다는 순간적인 판단을 했기에 나는 바로 궁수부대에게 마법 사들을 노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모래먼지로 때문에 시야를 확인하는 그 짧은 사이를 틈타 경기병은 상당히 멀어져 있는 상태였고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한 혼란으로 궁수부대가 나의 명령에 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던 탓에 즉시 명령을 내렸음에도 궁수부대의 화살은 가장 후방에서 후퇴를 하고 있던 소수의 몇 명에게 피해를 주었을 뿐, 대부분 별 소득 없이 땅에 꽂혀버리고 말았다. "이런 빌어먹을!!" 경기병의 말에 탄 마법사들이 유유히 제6왕자군의 본진 쪽으로 후퇴하는 것을 보고 유넨을 향해 신경질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것이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대체 마법사들이 무슨 이득이 있다고 우리들을 배신하고 제6왕자군을 돕느냔 말이야!!" "...저...저도 무슨 일인지...!!" 그러나 유넨 역시 이크쟌트 후작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하고는 말을 더듬었다. 나는 계속 그를 질책하는 대신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참으며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창병은 앞으로 나가 중기병의 전진을 막아라!! 허둥대지 말고 방어진형을 갖춰라! 거기서 넋 놓고 서있지만 말고 제2군, 제3군의 경기병은 양측으로 나뉘어 중기병의 퇴로를 막아!" 다른 군의 장군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병사들을 향해 소리치며 병사들을 질책해서 적 군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최전방에서 아군을 마음껏 유린하고 있던 제6왕자군의 중기병은 그제야 후퇴를 하기 위해 말꼬리를 돌렸다. "놓치지 마라!! 최소한 제6왕자군의 중기병이라도 몰살시켜!" 장군들의 명령에 따라 경기병이 빠르게 뒤로 돌아 적군의 중기병의 퇴로를 막았다. 중기병 이 경기병에 비해 전투력이 강하기는 하나 스피드 면에서는 뒤떨어졌기에 적군의 중기병은 금새 경기병에 의해 퇴로를 차단 당했다. 소수정예로 파고들었던 적군은 비록 전투력은 뒤 떨어지지만 압도적인 병력 차를 이용해 끊임없이 밀려드는 아군의 경기병에 의해 제대로 후 퇴를 할 수가 없었고 그 사이를 틈타 본진의 보병들이 적군을 추격해 들어갔다. 덕분에 제6 왕자군의 중기병은 거의 포위되다시피 한 상태가 되었다. 완전한 갑옷으로 무장한 기병은 키우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금과 기간이 필요하다. 그러니 여기서 적군의 중기병을 전멸시켜버린다면 제6왕자군에게 상당한 손실을 줄 수 있을 것이 다. 그러나 이미 우리 쪽의 중기병도 전멸 당한 상태였고 그 수많은 마법사를 어이없이 그 대로 넘겨주었으니 굳이 표면적인 숫자로서의 손익을 따지자면 이쪽의 손해가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는지라 적군의 중기병이 당하는 모습에도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막기는 역부족이었 다. "레이포드는 마법사들을 얻기 위해 중기병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인가?" 나는 포위 당한 제6왕자군의 중기병을 보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중얼거렸다. 확실히 마법 사들이 대단한 존재이긴 하나, 병력에서 크게 밀리는 제6왕자군이 중기병을 모조리 잃는 대 신 마법사들을 얻었다고 해서 수백배의 이득을 얻었다고 하긴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다. 과아아아아아앙!! 그러나 나는 금세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 조금 전에 들렸던 그 폭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 을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귀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정면에서 날려오는 거친 모래가 섞인 뜨 거운 바람 때문에 이 혼란스러운 전장에서도 잠시동안 손으로 얼굴을 가려야만 할 정도였 다. "아르디예프 님...!" 곁에 서있던 유넨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6왕자군의 중기병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경기병이 몰려있던 자리에 어디선가 아르디예프가 시전한 8서클 공격마법이 직격한 것이다. 뜨거운 열기와 모래바람이 가라앉고 난 뒤에 나타난 것은 아직 후끈한 열기를 지닌 황량한 모래바닥뿐 시체 조각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 전 7서클 마법사까지 끼인 그 수많은 마 법사들이 한꺼번에 공격마법을 썼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건만 8서클의 마법사라 불리우는 아르디예프 단 한사람의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병사 이천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르디예프의 힘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던 일이며 카 르틴 왕국과의 싸움에서 몇 번 본적도 있었건만 그 마법을 당하는 상대가 자신이 되어 보니 잠시동안 가슴이 서늘해졌다. 마법의 영향으로 경기병의 한쪽에 완전히 구멍이 뚫려버렸고 제6왕자군의 중기병은 그곳을 기점으로 퇴로를 막고 있는 나머지 경기병들을 해치우며 재빠르게 후퇴하기 시작했다. 원래 부터 계획했던 일이었는지 그들의 행동은 굉장히 일사불란했다. "쫓아라!! 어차피 8서클 마법이래 봤자 하루 두 번 이상은 무리다! 그들이 관문 안으로 쥐새 끼처럼 숨어 들어가 버리기 전에 어서 추격하라!" 나는 아르디예프의 가공할만한 마법에 잠시 얼어있는 병사들을 질책하여 추격을 명했다. 제 6왕자군의 뒤를 가장 먼저 따라붙은 것은 후르부크 백작의 제5군이었다. 왼쪽에서 공격을 해 들어가던 그들은 아르디예프의 마법으로 인한 충격에도 다른 군처럼 오랫동안 머뭇대지 않고 금새 진열을 추격전에 맞는 대열로 바꾸어 빠르게 그들의 뒤를 쫓았다. "빠르군!" 나는 후르부크 백작의 빠른 조치에 감탄하며 제6왕자군을 추격했다. 그러나 리아영지를 경 계로 한 관문이 가까워 오자 갑자기 후르부크 백작의 제5군이 추격을 멈추었다. 보아하니 제6왕자군이 완전히 관문 안으로 들어가 버린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인가 싶어 저러는가 의아 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병사들도 걸음을 멈추고 웅성대기 시작했다. 문득 나는 그들이 하나같이 하늘을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대체 뭐...헉?!" 고개를 든 나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내 인생에서 그렇게 놀라본 적은 난생 처 음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드...드...드래곤?" 나의 곁에서 바짝 붙어 따라오던 이크쟌트 후작이 조금 전 마법사들이 배신을 했을 때처럼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놀라움은 마법사들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 라. "...어째서 드래곤이? 드...래곤이 맞는 건가?" 놀라움이 약간 진정된 나는 멀리 남쪽 하늘에 가만히 떠있는 드래곤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 리고는 지금 우리측에 있는 유일한 마법사인 유넨을 바라보았다. 유넨은 나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즉시 대답했다. "저...저도 직접 본적이 없는지라 모르겠습니다만... 그런데...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 까?" 유넨의 말을 들은 나는 다시 그 붉은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평소 익히 들어왔던 드 래곤과 흡사했다. 마치 검붉은 도마뱀을 연상시키는 외형. 그러나 도마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몸집과 날개를 가진 마법의 생물 드래곤! "그렇지만..." "국왕군은 들어라!!" 나는 의심쩍은 드래곤을 보고 홀로 중얼거리다가 앞쪽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고개 를 번쩍 들었다.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시선이 닿자 저절로 이가 갈렸다. 목소리의 주 인공은 다름 아닌 모든 일의 원흉인 제6왕자, 카류리드였기 때문이다. 그 놈은 무슨 짓을 할 셈인지 말을 타고 본진의 가장 앞으로 나와 검을 빼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나는 위대한 파이어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 바로 드래곤이 나의 결백함과 정당성을 인정해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무모한 저항은 그만두고 죽고 싶지 않으면 모두 물러나라!!" "허, 결백함!?" 나는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시 놀라고 말았다. 그 목소리는 다름 아 닌 유넨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항시 온화했던 유넨이었기에 방금 들린 말이 그의 입에서 나 왔다고 믿기가 힘들었다. "유넨?" "아?! 아...아니, 죄...죄송합니다. 사실...사실 저...저는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유넨은 굉장히 허둥대며 나의 말에 대답했다. 나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그를 향해 되물었다. "마법사인 그대가?" "마...마법은 직접 사용해봐야 그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 렇기에 그것을 제약 없이 몇 번이라도 남발할 수 있다는 그런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더더 욱 믿어지지 않는 것이죠. 사실상 소문만이 무성할 뿐 수 백년 동안 드래곤이란 생물을 실 제로 봤다는 인간은 거의 없었지 않습니까." 유넨의 말을 듣고 나는 미동도 없이 하늘 위에 가만히 떠있는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는 하늘에 떠있는 거대한 생물에 지레 겁먹고 놀랐지만 지금 보니 왠지 모르게 흐릿해 보이 기까지 하는 것이 영 두려운 생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이상 다가오면 드래곤의 분노를 받게 될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자는 당장 이 곳을 떠 나라!" 다시 한번 카류리드 왕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하늘에 멍하니 떠있는 물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유넨이 그 드래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자란 식견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드래곤의 수 호라는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정통 왕위 계승자이며 카류리드 전하의 탓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신 제1왕자 루블로프 님께서 받아야 마땅하지요." "...흐음, 그런 것을 떠나 카류리드 왕자가 드래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건 나도 절절이 동감이다. 그리고 그런 드래곤이 있었다면 마법사들을 빼내 가는 짓을 할 필요도 없 이 처음부터 그냥 드래곤을 보였으면 되었을 일이 아닌가." 나의 단호한 말에 곁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던 이크쟌트 후작이 물었다. "확실히 그...그렇긴 하지만... 그...그러나 그렇다면 저건 무엇입니까? 분명 드래곤의 형상을 한 무언가가 하늘에 떠있지 않습니까?" "일루젼 마법이 아닐까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주위에서 얼핏 그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모두 유넨에게 로 시선을 집중했다. "환상을 만들어내는 마법이 있단 말인가?!" "아니오, 제가 아는 한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6왕자군의 진영에는 아르디예프 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그분이라면 이런 마법을 하나 창조해 내셨을 지도 모르지요. 솔직히 마법을 만들 어내는 것이 말처럼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지만, 사실상 카류리드 전하를 체포할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녹음 마법도 아르디예프 님께서 새로 개발해내신 마법이었으니 말입 니다." "...그렇군." 나는 대충 그 정도로 스스로를 납득시키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유넨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후퇴를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검을 뽑아 카류리드 왕자를 향해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저런 어설픈 환상으로 우리들을 속이려 들다니 어지간히도 궁지에 몰린 모양이구나! 진정 으로 저것이 영명한 마법의 생물인 드래곤이라면 누가 가호를 받아야할 만한 존재인지 알고 오히려 아군에게 도움을 줄 것이다. 자신의 가족을 해하려 들고 왕국의 평화를 어지럽힌 너 같은 파렴치한 놈에게 드래곤의 가호 따위가 가당키나 하겠느냐, 카류리드 왕자여! 전군!! 앞으로!!" 내 고함소리가 울려 퍼지자마자 후르부크 가의 제5군부터 시작하여 각 군이 다시금 제6왕자 군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눈에도 하늘에 떠 있는 그 형상이 이상하다고 생각 되었는지 약간 웅성거리기만 할뿐 별다른 반발 없이 착실하게 명에 따랐다.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도 스스로 그것을 차버리는구나! 좋다!! 죽고 싶다면 어쩔 수 없지!! 드래곤이시여!!" 카류리드 왕자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하늘을 향해 높게 치켜들었다. "장난도 거기까지..." 나는 그 놈을 비웃어주기 위해 맞받아 소리쳐주려 했다. 그러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져 내 리는 거대한 불덩어리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콰아아아아앙!! 조금 전 아르디예프가 8서클의 마법을 썼을 때와 같이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조금 전보다 훨씬 더 뜨겁고 거친 모래바람이 밀려들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마에 손을 얹어 실눈을 뜨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불덩어리는 나의 제1군 정 중앙에 직격했고 수 많은 병사들을 한줌의 먼지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마법사들이 있었다면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여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마법사가 유넨 단 한 명밖에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우리쪽 병사들은 8서클의 대마법을 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내야만 했다. 화염마법의 영향에서 살아 남은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듯 비명을 질렀다. "히이익! 드래곤이!!" "드래곤이 분노하셨어!" 나는 혼란스러워하는 병사들은 향해 크게 소리쳤다. "멍청한 놈들!! 조금 전에 당했던 아르디예프의 8서클 마법이 아니냐?! 저것이 드래곤이라면 왜 드래곤 피어나 브레스가 아닌 8서클 마법 같은 걸 쓴단 말이냐!!" "그래, 이제 더 이상 8서클의 마법은 쓸 수 없을 것이다! 당황할 것 없이 계속 추격에 들어 간다!" 이번에는 이크쟌트 후작도 함께 병사들에게 질책의 말을 던졌다. 병사들도 이 말에 상당한 설득력을 느꼈는지 웅성거림이 곧 그쳤다. 그리나 유넨이 모래바람으로 인해 완전히 헝클어 진 머리카락을 거칠게 넘기며 소리쳤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크쟌트 후작 님!! 아르디예프 님께서는 무리를 하시면 하루 3번까지도 8서클 마법을 쓰실 수 있습니다! 아직 한번 더 남았습니다!" 나는 눈앞의 카류리드 왕자를 보고 이를 갈았다. 이쪽은 마법사가 없기 때문에 또 한번 마 법이 올 것을 안다해도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군의 혼란스러움을 정열하며 제6왕자군을 상대하기 위해 계속 앞으로 진군을 명했다. 가장 앞에서는 조금 전부 터 상당히 훌륭한 솜씨로 군을 지휘하고 있던 후르부크 백작의 제5군은 그 사이에 아르디예 프의 마법에 대비해 대열을 벌리면서 계속 앞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온다!!" 제일 앞에서 진군하던 제5군의 위로 이번에는 몇 개의 거대한 불의 덩어리가 쏟아져 내렸 다. 대열이 벌어져 있어서 한번 불덩어리를 떨어뜨리는 것으로는 큰 피해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이번 공격에서도 이천에 가까운 군사들이 상처를 입고 죽어버리 는 피해를 입었지만, 처음의 큰 불덩어리로 거대한 황야를 만드는 것에 비해서 시각적으로 훨씬 덜 위협적으로 보이기에 병사들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진격해 들어갔다. "이제 마법 공격은 끝이다! 전군 전속력으로 돌격!!" 나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하늘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함성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제6왕자 군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장 큰 위협이었던 8서클 마법공격이 드디어 끝났다는 말에 병사들 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그들은 계속 당하기만 했던 그 분풀이를 해주고 싶은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적군을 향해 달려나갔다. 고오오오오오...... 그러나 우리들은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또 한번 하늘에서 생겨난 거대한 불의 덩어리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내가 망연히 중얼거리고 있는 사이 그것은 가장 밀집한 형태의 진형을 취하고 있던 펠렌즈 후작의 제3군이 있는 곳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아아아앙! "8서클의 마법! 인시너레이트!! 이럴 수가!! 말도 안돼!" 곁에서 거의 패닉상태가 된 유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향해 얼굴을 찌푸리고 신 경질적으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것인가! 또 8서클 마법이 날아오잖아!" "이럴 수가! 말도 안됩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제가 아는 한 아르디예프 님은 하루에 3 번이 최고라고...!! 아니,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 8서클 수준의 마나인데!!" 유넨은 거의 패닉 상태인 듯 소리쳤다. 그러다가 하늘을 바라보고 중얼거렸다. "...드래곤?!" "말도 안돼!" 그러나 나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또 다시 붉은 불덩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리고 이번에는 땅에 불덩어리가 떨어지며 폭발하는 것과 동시에 강대한 바람이 들이닥쳤다. 두 마법은 서로의 공격력을 더욱 높여주며 불의 회오리를 만들어내었고 그 마법의 영향 아 래 있었던 인간은 한낱 벌레만도 못한 존재가 되어 태워지고 찢겨져 나갔다. 두 번이나 8서 클의 마법을 맞아 이미 상당수의 군사를 잃었던 펠렌즈 후작이 맡고 있는 제3군은 거대한 불의 폭풍으로 인해 2/3 이상이 한줌의 먼지로 변해버렸다. "거짓말! 8서클에 속한 풍계 마법!! 아르디예프 님이 아닙니다! 그 어떤 인간도 8서클 마법 을 동시에 두개나 사용할 수는 없어요!! 이건... 이건 절대 불가능합니다!" 유넨은 그 광경을 보고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머리를 쥐고 소리쳤다. 이제는 더 이상 군의 전열을 챙기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모든 병사들은 완전히 혼란상태로 들어가 있었 다. 아르디예프가 8서클 마법을 이렇게 많이 남발할 수 없다는 사실은 무지한 병사들이라도 충분히 알고 있는 일이었다. 8서클 마법을 무한대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애초부터 전 쟁이란 것은 성립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들은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치기 시작했 다. "멈춰!! 멈추라고 했잖아!" 아무리 그들을 위협해도 완전히 미쳐버린 병사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트...트로이 후작 님!!" "빌어먹을!!" 새파랗게 질려 나를 부르는 이크쟌트 후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이렇게 압도적인 군사가 있는데, 승리는 기정사실과 다름없었건만 이렇게 되어버리다니!! 드래곤의 가호라니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저런 쳐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수호를 받을 리가 없지 않은가!!" "트로이 후작 님! 후퇴하셔야 합니다!! 사람은 물러나야만 하는 시기도 알아야하는 법입니 다!" 무질서 속에서도 후르부크 백작의 제5군이 상당히 전열을 맞춰 후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 고 있는데 그 전열의 가장 앞쪽에 서 있던 청보랏빛 머리카락이 청년이 나를 향해 소리질렀 다. "세스케인!?" "서두르십시오!! 트로이 후작 님!" "알겠네!"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즉시 후퇴 명령을 내렸다. "맙소사!!" 갑자기 유넨이 거의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더니 말을 멈추었다. 나는 의아함에 급박함 속에 서도 말을 세우고 유넨을 돌아보았다. 상황이 급하다는 것은 유넨도 알고 있을 테니 그가 괜히 저런 짓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뒤쪽의 유넨은 이를 악 문 채로 마법서를 펴고 무언가를 캐스팅을 하고 있었다. "유넨?" 함께 후퇴를 하고 있던 세스케인도 말을 멈추고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유넨의 행 동에 의아해하며 입을 떼는 찰나, 갑자기 위쪽에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 본 나는 한순간 숨을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하늘에 거대한 불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보호했다. 끔찍한 열 풍이 몸을 훑는가 싶더니 곧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팔을 스치는 달궈진 모래 알 하나하나가 나의 살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귀를 멍하게 하는 굉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나는 계속 양팔로 얼굴을 감싼 자세로 있었다. 어느 정도 잠잠해졌다고 생각되어 주위를 살피기 위해 팔을 내렸다. 뜨거운 열풍에 시달린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겨우 억제하며 힘겹게 고개를 든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나의 앞쪽에서 먼저 퇴각하고 있었던 병사들은 온데간데없고 거대한 황야가 펼쳐져 있었던 것이 다. "...큭." 문득 신음소리가 들려 나는 그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창백한 얼굴을 한 유넨이 있었다. 그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더니 곧 말에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유넨!" 세스케인이 다급히 말을 몰아 그에게로 뛰어갔다. 그는 유넨의 상태를 보더니 그를 안아 자 신의 말에 태우고 자신도 말에 올라 고삐를 쥐었다. "트로이 후작 님!" 세스케인의 다급한 외침에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나는 곁에서 멍하게 있는 이 크쟌트 후작을 다그쳐 다시 말을 몰았다. 주위에는 병사들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불덩이 가 떨어진 곳은 내가 있던 곳과 그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대로라면 마법에 직격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강한 마법의 여파로 생겨난 불의 소용돌이로 인해 반쯤 타버렸 어 옳았다. 그러나 주위에 있던 인간들은 신기하게도 대부분 멀쩡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마 법이 떨어지기 전 유넨이 무언가 마법을 시전하여 그 피해를 줄인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퇴각! 퇴각하라!!" 더 이상 망설일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8서클의 마법이 하루에 무려 7번이나 시전되는 것 을 보고 하늘에 떠 있는 그것이 드래곤이 아니라는 것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계 속 이대로 전장에서 싸우기를 고집한다면 병사들은 저 거대한 생물의 마법에 벌레처럼 죽임 을 당하고 말리라. 나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하늘에 흐릿하게 떠 있는 그 화이어 드래곤을 향해 이를 갈며 퇴각을 명했다. * * * 국왕군이 여전히 2배가 넘는 전력을 가지고도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치고 있는 장면을 보 며 나는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카류 님!" "연극이 꽤나 잘 먹혀 들어갔군요, 드리크 경."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뒤쪽의 관문에서 말을 몰고 뛰어나오는 드리크 경의 부름에 답했다. 매캐한 연기가 주위를 메우고 있어서 눈이 약간 따가웠지만 얼굴을 찡그리는 대신 비릿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연기의 대부분이 국왕군 병사들의 몸뚱이를 태워버린 불꽃의 부산물이었 기 때문이다. 이런 연기가 기분 좋게 느껴질 줄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던 일이었으나 지금의 나는 분명 이 연기에서 은근히 유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내린 명령 하나에 바로 눈앞에서 2만에 가까운 인간이 불에 타죽었다. 내가 그토록 어 려워했던 살인이란 실은 이렇게 간단한 일이다. 나는 그들의 죽음에 조금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나는 그들의 죽음에서 희열을 느낀다. 그들의 죽음은 곧 나의 소망을 이루는 발판이 될 것이며 내가 사랑하는 소 중한 사람들의 행복이 될 것이다. 애초부터 환생에 대한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로 인해 인간이 느끼는 그 근원의 두려움과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어차피 새로 태어날 뿐이다. 무엇이 두렵겠는 가! "어서 남쪽의 관문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일단 그들을 속이긴 했지만 언제 마음을 바꿔 다 시 쳐들어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아르디예프 님과 류스밀리온 님께서 더 이상 8 서클 마법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니 더 이상은 저 환상으로 국왕군을 속일 수 없겠지요." "네, 돌아가야죠. 하지만 정말 아깝군요!! 트로이 후작을 날려버릴 수 있을 듯도 했는데 말 이에요. 마법을 조금만 더 정교하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이 정도로도 고맙게 여겨야겠지요. 제1왕자군은 충분히 타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2만은 족 히 죽었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으니까요. 반면 저희 군사의 손실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고 마법사까지 얻었지요." "후후, 이 정도면 완승이라 할 수도 있겠군요." 나는 드리크 경을 향해 씨익 웃어주고 말을 돌렸다. 우리들은 이번 전투에서 꽤나 활약을 한 중기병들과 함께 관문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은 관문으로 들어서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이 렇게 작은 병력으로 저 많은 군사들을 내쫓았다는데 기뻐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리라. 게 다가 이번 속임수에 대해서 병사들에게 설명을 해주지 않음으로써 우리편의 병사들까지 내 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곳에 오기 전에 보았던 신기루의 일과 류스밀리온의 존재를 통해 이미 눈치를 챈 자들도 어느 정도 있을지 모르지 만- 현재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굉장하군. 진짜 후퇴해버렸어." 바스라윈 백작 가의 디슈켄트 님이 맡고 있던 제3군에 속해 있던 딜티가 내 쪽으로 다가오 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그야 우리 쪽의 8서클 마법사는 당연히 아르 할아버지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그 들로서는 믿고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겠지. 8서클 마법을 7번이나 남발 할 수 있는 인 간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야." "정말 멋졌습니다. 이로서 땅에 떨어졌던 카류 님의 평판도 조금 더 올라가게 되겠군요. 뭐 니뭐니해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이니까요." 딜티의 뒤쪽에서 어느새 다가왔는지 디슈켄트 님도 화사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기뻐하는 것은 너무 이릅니다. 류스밀리온 님의 존재에 대해 새어나가는 즉시 제1 왕자군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여전히 군사적으로 수세에 몰려있는 우리들은 또 다시 곤란에 빠질테니까요. 까놓고 말해 지금의 승리는 시간을 번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해도 일단은 승리했으니까요." 내 말에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디슈켄트 님은 이내 빙긋 웃어 보였다. 디트 경의 일로 인해 항상 조심스러운 모습만을 보느라 모르고 있었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꽤나 유쾌한 성 격을 가진 사람인 듯 싶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 님께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아... 그렇군요. 그럼 저도 병사들을 정비하러 가보겠습니다." 나는 디슈켄트 님과 딜티에게 인사를 하고 디트 경을 데리고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이 쉬고 있는 곳을 향해 약간 빠른 걸음으로 갔다. 이번에 드래곤의 흉내를 내기 위해 그들은 8서클의 마법은 쉬지 않고 자신의 한계까지 계속 시전해야만 했고 그로 인해 완전히 지쳐버 려 지금 관사에서 쉬고 있었던 것이다. "계세요?" 나는 문을 열고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고개를 내밀었다. "카류리드 전하." 그 방에는 다른 마법사들이 모여 있었다. 리커버리까지 사용할 수는 없더라도 힐은 사용할 수 있으니 조금이나마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을 치유하기 위해 모인 모양이다. "괜...찮으십니까?" 침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류스밀리온을 보고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 보이냐?" 류스밀리온은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움직여 답했다. 류스밀리온은 4번이나 8서클의 마법을 시전해 보이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과연 세기의 천재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다시 한번 통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그런 짓을 하고 나서 도 그가 멀쩡할 리가 만무했다. 곧 죽어버릴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을 하고 말없이 맞은 편 의 침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나는 류스밀리온의 맞은 편에 놓인 침대에 누워있는 아르 할아버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르 할아버지는 마법을 3번까지 시전하고 실신해버린 후에 아직까지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 다. 전에도 나를 구하기 위해 하루 3번 워프를 했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어느 정도 쉬어 가면서 시전을 했던 것으로 이번에는 거의 연속적으로 마법을 사용해야 했기에 아르 할아버 지로서는 그 부담을 견디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괜찮으실까?" "...괜찮으실 겁니다. 저희들이 그때 이후로 몇 번이나 힐링을 사용했으니까요." "......" 마법사들의 대답을 듣고 나는 한동안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됐어요. 이렇게 이겼으니 아르 할아버지도 기뻐해 주실 테지요." "...저 좋을 대로... 말하는군. 그러다가... 저 할아범이 죽으면 어쩌려고?" 류스밀리온은 약간 신경질이 담긴 말을 했다. "매일 아르 할아버지더러 곧 죽을 할아범이라고 욕하시면서 정작 아르 할아버지가 이렇게 힘들어하고 계시면 걱정하는 말을 하시는군요? 어린애같이 굴지 마시고 아르 할아버지가 깨 어 계실 때 좀더 잘 행동해보세요." "...걱정 좋아하시네... 나는 지금 너를 비꼬는 거다." "뭐, 마음대로 하세요. 하지만 이건 류스밀리온 님의 사상과 맞아떨어지는 일 아닙니까? 대 를 위해 소를 희생시키는 것." "크크크. 뭐... 네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류스밀리온은 클클거리고 웃다가는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의 힐링을 받고 겨우 기침을 멎은 류스밀리온은 완전히 진이 다 빠졌는지 앉은 자세에서 상체도 가누지 못 하고 비틀거렸다. "그만 누우세요. 그렇게 강한 척은 그만하시고." 나는 류스밀리온을 부축하여 자리에 눕는 것을 도와주었다. 보통 때라면 노인네 취급 말라 며 신경질을 부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조용히 나의 부축을 받았다. 이 더위에도 류스밀리온 이 추위를 느끼는지 약간 몸을 떨었기에 나는 그에게 얇은 모포를 가져다 덮어주며 말했다. "바로 남쪽에 위치한 관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차로 모실 테지만 침대만큼 안락하지는 못하겠지요. 조금만 견뎌주세요." "...저 할아범이나 잘 처리해." 류스밀리온은 조금 전의 기침 때문인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르 할아버지는 저에게나 우리 군에서나 소중한 분이니까." 나는 그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7 기나긴 여름 (1) 가까운 곳에 서있는 이크쟌트 후작이 조금 전부터 끊임없이 거칠게 욕을 내뱉고 있다. 실상 나 역시 그처럼 욕설을 내뱉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작전회의를 하기 위해 모인 공적인 자리 임을 생각해 간신히 참고 있는 상태였다. 제6왕자가 보여준 드래곤으로 인해 아군은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제대로 전열도 가다듬지 못 한 채 꼴사나운 모습으로 급히 후퇴를 했다. 그러나 우리들이 한참을 퇴각해도 제6왕자군은 추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우리들은 관문으로 척후병을 보냈고, 그들이 뒷쪽 산지의 관문으로 완전히 퇴각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후사정은 알 수 없으나 드래곤 의 수호를 받고 있다던 제6왕자가 그냥 퇴각할 이유가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니, 그 드래곤 이 가짜였다는 결론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작전회의에 모인 나를 포함한 모 든 장군들은 하나같이 짜증을 내며 제6왕자에 대한 욕을 퍼붓고 있었다. 한동안 그런 실속 없는 말로 시간을 끌고 있자 세스케인이 나서서 귀족들을 향해 말했다. "그만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그렇게 짜증만 낸다고 해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 아 닙니까. 이렇게 모였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편이 훨씬 좋지 않겠 습니까." 그러나 금새 성질 급한 한 귀족이 짜증스럽다는 듯이 소리쳤다. "제6왕자의 손안에서 완전히 놀아난 꼴이 되었는데 어떻게 짜증이 나지 않을 수가 있나! 정 말 수치스럽네!" "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르디예프 님께서 홀로 8서클의 마법을 7번이 나 쓰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드래곤이 아니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죠. 제6왕자군이 아군을 추격하지 않고 남쪽의 관문으로 퇴각한 것이 의심스럽기는 하나, 그때 본 7번의 8서 클 마법을 생각한다면 카류리드 왕자가 보여주었던 그 드래곤이 완전히 허상이었다고 판단 하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세스케인은 신중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확실히 아르디예프가 하루동안 7번이나 8서클 마법 을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은 믿기가 힘들다. 오랜 신화 속의 영웅들에 대한 기록을 적어둔 영 웅록 중에서 가장 근래의 기록으로 남아있는 아르윈 왕국 출신의 9서클 마법사이자 검사 카 뮤리안도 하루에 5번 이상 8서클 마법을 쓰지는 못했다고 한다. 무한한 마법의 시전은 오로 지 드래곤의 전유물인 것이다. "그냥 심증으로 간단히 넘어갈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상 저희 군은 그 마법으로 인해 2만에 가까운 수의 병사들을 허무하게 잃었으니까요." "...드래곤이 실존할 가능성도 따져봐야 한단 말인가." 내가 턱에 손을 올리고 말하자 주위의 다른 장군들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생각했는지 불만을 터뜨리던 입을 다물었다. "미력하나마 저의 의견을 드리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조용한 막사 안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정중한 어투의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옮겼다. 가장 말 석에서 흘러나온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게릭 혼 아이시스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레이포드와 같은 평민출신의 귀족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평민 출신인 그는 예전부터 레이포드와 함께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자였다. 그러나 그가 평민답지 않게 굉장히 비상한 인물이라는 사 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기에 그냥 무시해버리지 않고 그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말해보게." "이번 전투에서 생포한 마법사를 잊으신 듯해서 말입니다. 이 회의를 시작하기 조금 전 그 마법사가 깨어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이 배신을 할 계획이었다는 것은 제6왕자 진영에게 어떤 경로로든 이번 전투에 대한 계획을 들었다는 말이 되니, 그 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을 듣더니 세스케인이 빙긋 웃으며 답했다. "확실히 그렇군요. 그렇지 않아도 마법사들이 무엇 때문에 배신을 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 던 차였는데 잘 됐군요. 트로이 후작 님. 지금 당장 생포한 마법사를 이 자리에 불러들여 심 문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흠, 그러나 허약한 마법사가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지기까지 하는 바람에 꽤나 심한 중 상을 입은 모양이던데 제대로 심문을 할 수 있을지..." 내가 중얼거리듯 말하자 게릭이 손으로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또 한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안이하게 대처해도 될 만큼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조금 전 세스케인 님께서 하 신 말씀은 옳으신 말씀이지만 사실 이야기의 초점이 약간 엇나갔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 요. 현재 중요한 것은 드래곤이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가 아닙니다. 그 파이어 드래곤 이 실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한번 저번 전투에서처럼 8서클 마법을 여러 번 사용할 수 가 있다면, 아군은 현재 남아있는 8만의 병력만으로는 다음 전투를 치러야 할 관문에서 제6 왕자군을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제6왕자군이 또 한번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가 없는가가 되겠지요.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포한 마법사의 입에서 그 마법의 정체를 밝혀내어야 합니다." "아, 그렇군요. 핵심을 찌르는 말씀을 해주시는군요. 듣고 보니 드래곤의 존재 유무 따위는 애초부터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민에게 설교를 들은 듯한 느낌이라 조금쯤은 심사가 뒤틀릴 만도 하건만 세스케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띄우며 게릭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시스 남작의 의견을 받아들이시죠. 한시라도 빨리 마법의 정체를 밝혀내야 앞으로의 방향도 결정할 수 있을 듯 하니 말입니다." "좋다. 여봐라. 생포한 마법사를 끌고 와라." 나의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이 거의 초죽음이 된 마법사를 끌고 왔다. 몸과 두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채로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제대로 정말 제대로 대답을 할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다른 마법사가 있다면 저 정도 상처는 금새 고쳐 심문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들에게 남은 마법사는 막사에서 쉬고 있 는 유넨 단 한명 뿐이고 유넨은 아직 5서클의 마법사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리였다. "자, 일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지금부터라도 서로 좋게 일이 처리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니 순순히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시지요." 나는 일단 그 마법사에게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비단 아르윈 왕국뿐만이 아니라 이르 나크 세계에서는 마법사의 수가 극히 적었고, 그 때문에 각국은 그들을 굉장히 소중한 존재 로 여기며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다른 죄인들보다는 훨씬 정중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통례 였다. 그래서 아군을 배신한 그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저번의 전투에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그런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자신의 나라에 속한 그 수많은 마법사들에게 활 을 겨누게 한 것은 전대미문의 일이었을 것이다. "우선 무엇 때문에 제6왕자파의 진영으로 들어가려 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대답해 주시겠습 니까?" 나의 질문에 마법사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창백한 입술을 움직여 떠듬거리며 말했다. "대...대답을... 하면... 하아하아... 나를... 어떻게 하겠소...?" "물론 폐하께 부탁드려 최대한 선처를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예전처럼 생명의 궁에 서 편히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말입니다." 나의 대답에 그는 거의 포기한 듯 고개를 떨구고 입술을 잠시동안 지그시 깨물었다. "후우... 어쩔 수... 쿨럭... 없지... 자신을 돕기 위해...쿨럭... 배신까지 했던 나를... 죽이려 했 던 왕자 놈에게... 지킬만한 의리도 없고...쿨럭......" 거의 자포자기한 마법사는 큰 상처로 인해 가빠져오는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나의 질문에 답해나가기 시작했다. 아군에 큰 피해를 입히고 생포되어 버렸으니 이렇게 해서라도 어떻게 든 선처를 받으려는 듯했다. 게다가 저번 전투에서 활에 맞아 낙마했을 때 더 이상 데려가 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경기병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것에 상당히 분노했는지 그는 자신이 아는 대로 나의 질문에 성심 성의껏 답했고 덕분에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심문은 상당히 손 쉽게 이루어졌다. 심문은 꽤 오랫동안 이루어졌고 큰 상처를 입었던 마법사가 지쳐서 거의 반쯤 기절 상태가 된 후에야 나는 더 이상 질문을 하는 것을 그만두고 그에게 휴식을 허락하고 밖으로 내보냈 다. 마법사가 밖으로 나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이크쟌트 후작이 제일 먼저 감상을 내뱉었다. "제 6왕자가 새로운 마법수식을 만들어냈다고? 정말 요즘 들어 별의별 헛소리를 다 듣는군.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있나! 차라리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하면 믿지." "그렇게 쉽게 단정지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대강의 어림짐작 정도로는 마법사들이 그렇게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목숨을 걸고 제6왕자에게로 넘어가려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마법사들에게 몇 가지 새로운 수식을 보여주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마도 그 새로 운 마법수식 건은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는 세스케인이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주위를 한차례 죽 둘러 보며 웅성거리는 분위기를 환기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어찌되었든 일단 다행이라 할 수 있군요. 제6왕자군이 8서클 마법을 7번이나 쓸 수 있었던 것은 제5왕자가 또 다른 8서클 마법사 류스밀리온을 포섭했기 때문이었으니 말입니다. 결국 그 드래곤이라는 것은 허상이었던 모양입니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만의 하나의 확률이라도 제6왕자가 드래곤의 가호같은 걸 받고 있다는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치가 떨리는 일이었기에 마법사의 말 을 통해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자 내심 굉장히 기분이 좋아졌던 탓이다. "그렇다는 것은 아르디예프 님과 류스밀리온이 드래곤의 흉내를 내기 위해 각각 3, 4번씩 8 서클 마법을 남발하며 굉장한 무리를 했다는 뜻이니 다음 전투 때는 이번 전투처럼 8서클 마법의 난사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졌다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게 많은 마법을 쓰고 멀쩡 할 리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세스케인이 나서 지금까지 문제로 제시되었던 내용을 시원하게 정리해주었다. "역시 그런 놈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을 리가 없지! 하하하..." 펠렌즈 후작이 기분 좋게 웃으며 통쾌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귀족들은 모두 하나 같이 펠렌즈 후작의 말에 동의하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기쁘십니까?" 그때 갑자기 말석에 앉아 있던 게릭이 앞뒤 없이 그렇게 한마디 내뱉었다. 그가 괜히 허튼 소리를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는 질문을 던졌다.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가?" "느끼지 못하신 겁니까? 저는 그 마법사의 말을 듣고 카류리드 전하의 엄청난 능력에 전율 을 느꼈는데 말입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그는 이런 나의 표정을 보지 못한 것인지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정말 무서운 분이십니다. 마법수식을 만들어냈다는 사실도 엄청나지만, 그것이 사실이 아니 라는 가정을 붙인다해도 생명의 궁의 반수나 되는 마법사들에게 배신을 하도록 설득시키는 일을 실제로 이루어 내었습니다. 그리고 류스밀리온이 비록 소문이 좋지 않은 자이긴 하나 8서클 마법사라는 사실 때문에 각 나라에서 그를 초빙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카류리드 전하는 그 수많은 제의에도 지 금까지 끄떡도 하지 않았던 8서클의 마법사 류스밀리온을 손쉽게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 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이야기를 듣고도 전율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 게릭의 말이 끝나자 웅성거리며 기뻐하던 귀족들이 금새 조용해졌다. 그러나 게릭은 그것으 로 말을 끝내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여러분들은 그런 일을 해낼 자신이 있으십니까? 그런 상황에 처해서도 그만한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될까요."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예찬을 할 장소라면 잘못 골라잡았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이시스 남 작."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카류리드 왕자에 대한 칭찬 비슷한말을 하자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게다가 그가 제6왕자와 꽤 친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제6왕자는 왕위찬탈의 밑거름으로 쓰기 위함인지 평소 성내의 평민들과 친하게 지 내고 있었는데 게릭 역시 평민 출신으로 제6왕자와 상당히 가까웠던 것이다. 현재 게릭이 제6왕자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는 명분을 대고 원정에 참가하고 있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저런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그런 감정적인 이유로 자신의 병사를 내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들에게 배신을 당해 크게 피해를 입은 상태라 혹시나 저 놈도 배신을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에 더더욱 기분이 나빠진 내가 당장이라도 저 녀석을 이 막사 밖으로 끌어내라고 말하려는데 세스케인이 끼여 들었다. "트로이 후작 님. 아이시스 남작의 말은 그만큼 제6왕자를 경계해야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카류리드 왕자가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뛰어난 인물임이 조금 전 그 마법사 의 말로 밝혀졌으니까요." 세스케인의 중재에 나는 화로 인해 일그러뜨렸던 표정을 어느 정도 풀었다. 예전부터 나쁘 지 않은 청년이라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저번 전투 때 겪었던 여러 행동으로 인해 그에 대 한 호감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는 상태였기에 그의 중재에 쉽게 응할 마음이 생긴 것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게릭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가 진정 세스케인이 말한 것과 같은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궁금하군." "물론입니다, 트로이 후작 님. 조금 전 마법사가 실토한 말은 아군이 더 이상 마법을 무서워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카류리드 전하가 생각 이상으로 유능하다는 것을 시 사해주기도 합니다. 그러니 단순히 기뻐하기보다는 좀 더 카류리드 전하의 행동 하나 하나 에 좀 더 많은 경계를 기울여야한다는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 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게릭의 백금색 눈동자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조금 살벌해 져가자 세스케인이 미소를 띄우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이제 상황 파악은 대충 된 것 같으니 다음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지 새로이 정해야 하지 않 겠습니까. 지난번의 전투에서 마법사들을 빼앗겼기고 2만이나 되는 병력을 잃어버렸기에 원 래의 예정에서 상당히 벗어나 버렸으니까요." "흐음..." 나는 그제야 게릭에게서 시선을 떼고 손으로 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군 이 다음으로 제6왕자군을 상대해야 하는 곳은 산지 사이에 끼여있었기에 꽤나 방어력이 높 은 관문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들이 몇 개의 길 중에서 이 길을 택한 것은 그 관문을 지날 때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으면 성문 정도는 충분히 파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 다. 상대편에도 아르디예프라는 대마법사가 있긴 하지만 혼자서 아군의 몇백이나 되는 마법 사들이 끊임없이 시전하는 마법을 계속 막아낼 수는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투로 인해 아군은 그 전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마법사들을 전부 빼앗겨 버렸다. 그러니 그냥 정공법으로 나가는 수밖에 수가 없는데 그런 식으로 공성전을 치른다 면 엄청난 손실을 입을 것이 뻔하다. 게다가 아군은 원래 제6왕자군에 비해 3배에 달하던 9 만의 군사 중 2만을 잃음으로서 전력이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고 사기도 꽤나 떨어져 있었 다. 반면 제6왕자군에게는 우리들에게서 빼내간 여러 마법사들로 엄청난 전력 증강을 꾀했 으며 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어 사기가 엄청나게 올라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상태에서 관문으로 막무가내로 쳐들어가서 명장 레이포드가 지휘하는 제6왕자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 른다면 승리를 거두지 못할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문제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여전히 골치로군." "저번 전투에서 손실이 너무 컸습니다. 확실한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원군을 요청하거나 다 른 길로 행로를 바꾸는 것이 옳은 길이겠지만..." "그럴 수는 없네." 세스케인은 거기서 말끝을 흐리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단호한 거절의 말을 하는 것으로 그의 말에 답해주었다. "훗... 확실히 9만이나 되는 병사를 끌고 와서는 제대로 된 승전보 한번 얻어내지 못하고 여 기서 되돌아가는 것은 총사령관의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이니 그럴 수는 없겠지요." 아예즈 공작이 빈정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내가 총사령관이 된 것이 보통 마음에 들 지 않는 것이 아니었는지 이때를 기회 삼아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그들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공동의 적을 치고 있는 상황임에도 저런 식으로 행동하 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딱딱한 어투로 아예즈 공작을 향해 말했다. "아예즈 공작 님. 이대로 돌아간다면 제6왕자군의 사기만 키워주는 꼴이 될 것은 자명한 일 입니다. 또한 아직까지 제6왕자군의 토벌에 참여하는 시늉 정도만 하며 눈치를 보고 있는 중립 귀족들에게 제6왕자군은 얼마안가 완전히 토벌될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후퇴나 원 군 요청은 가장 뒤로 미루어야 할 사안이 아니겠습니까?" 아예즈 공작과 파나인 공작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미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 를 돌렸다. "저 관문을 돌파할 만한 좋은 작전을 없겠습니까? 생각이 있으신 분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 군요." 예상대로 좋은 의견이라고 제시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대군을 이끌고 관문이 아닌 산 을 넘을 수도 없는 일이니 말이다. "이건 어떨까요?" 잘난 아들을 둔 탓에 이제껏 제대로 발언 한번 해보지 못한 후르부크 후작이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뭐든지 말씀해보십시오." "언제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급이지요. 그러니 침입자를 보내 군량미를 불태우는 작전을 써보면 어떻겠습니까? 대군을 이끌고 산을 넘을 수는 없지만 소수의 병사들만 산을 넘게 함으로써 관문 뒤편으로 잠입시킬 수는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곧 세스케인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버님. 제6왕자군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주변과 특히 식량창고 의 경계를 그렇게 허술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그래도... 한번쯤은 시도해 볼만도 하지 않겠니, 세스. 만에 하나라도 군량을 없애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은 쉽게 그곳을 점령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버님. 그 관문의 이남은 모두 리아 영지입니다. 관문에 저장해둔 식량을 당한다해도 금새 남부의 다른 지방에서 어떻게든 보급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저희들은 고립된 성을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 후르부크 후작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이크쟌트 후작이 나서 탁자 위에 올려진 지도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네. 내가 아는 한 제6왕자군이 3만에 가까운 병사들의 식량을 공급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틀은 걸리는 곳에서 보급을 받아야 하지. 소식을 알리고 보급을 받기까 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네. 이 무더운 날에 사흘은 굉장히 긴 시간이지.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비축 식량을 못쓰게된다면 며칠은 굶주려야 할 것이네." 이크쟌트 후작이 오랜만에 제대로 된 의견을 말했다. 문관이라 무력으로는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없을 듯하니 그 대신으로 리아 영지의 지형에 대한 나름대로 어느 정도 연구를 해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떤 방식이든 적은 병력으로 아군에게서 승리를 거둔 현재 제6왕자군의 사기가 굉 장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병사들은 자신의 장군이나 제6왕자의 지도력에 믿음을 가 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겨우 사흘 음식을 먹지 못한다해서 병사들이 제6왕자나 다른 장군들의 명령을 듣지 않고 금방 불만에 차 혼란을 야기할 가능성은 적지 않을까요. 같은 이유로 그들이 배고픔을 참다못한 병사들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관문에서 나와 여전히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아군과 승부를 겨루려한다거나 관문을 그냥 포기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식량이 없는 동안 우리들이 공격을 가하면 병사들도 크게 지치지 않겠나? 그 충만 한 사기도 어느 정도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 사실상 지금 우리들과 적군의 전력은 비슷하다 고 할 수 있는 상태이니 그 정도로도 승산이 상당히 높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크쟌트 후작은 세스케인의 반론에 대답을 해주고 알게 모르게 슬쩍 웃음을 흘렸다. 어쩌 면 그는 조금 전부터 계속 나서는 세스케인에 대해 약간의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한동안 가만히 있던 게릭이 또 다시 끼여들어 말했다. "외람 되지만 한 말씀 올리자면 애초부터 이런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식량창고에 불을 지를 수 있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조금 전 세스케인 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가 생각하기로 제6 왕자군의 식량을 못쓰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제6왕자군에 가담하고 있는 레이포드 등의 다른 유능한 자들을 모두 제쳐놓고서라도, 조금 전 마법사의 이야기에서도 밝혀졌듯이 범인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상한 머리를 가진 카류리드 전하라면 소수정예 의 침입자가 산을 넘어 기습을 할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인식하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그 것을 그렇게 간단히 불을 지를 수 있도록 내버려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제6왕자가 마음에 든다면 제6왕자군으로 넘어가지 그러나?" 나는 게릭을 향해 불쾌하다는 느낌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심기를 불편하게 해드렸다면 사과 드립니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해도 인정할 것 은 인정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미간을 확 구겼다. 감히 평민 주제에 나를 설교하려드는 그 건방진 놈에게 짜증이 났 기 때문이다. 내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려하고 있는 찰라, 세스케인이 다급히 나를 설득했다. "트로이 후작 님. 아이시스 남작의 말을 너무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주십시오. 그는 순전 히 아군을 위해 한 말일 것입니다." "......" 나는 일단 세스케인의 말을 받아들여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그러진 미간을 쉽게 펴 지는 못했다. 그러나 곧 지금까지 제6왕자군에게 승리를 거두기 위한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 왔다는 생각이 들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이런 일로 발끈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어떻게 수가 없을까..." 다른 귀족들도 웅성거리며 어떻게든 괜찮은 의견을 생각해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별다른 해결책이 나지 않는지 선뜻 나서는 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한동안 턱을 만지작거리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제6왕자군의 식량을 못쓰게 만들면 이길 가능성이 훨씬 커진다는 말인가." 나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가까운 곳에 서있던 이크쟌트 후작을 제일 먼저 질문을 던졌다. "무슨 좋은 수가 있으십니까?" "뭐, 좋은 수라고까지는 힘듭니다만 이것을..." 나는 귀에 끼고 있던 작은 귀걸이를 떼어냈다. "후우... 아깝지만 이것을 쓰도록 하죠. 운이 좋으면 제6왕자군의 식량창고에 불을 지르는 것 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자그마한 루비가 박힌 피어스를 바라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곁 에 선 이크쟌트 후작이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흐음, 어쩐지 언제나 그 피어스를 사용하시더니 역시 그랬었던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런 일 에 그런 귀중한 물건을 사용하실 작정이십니까?" "원래부터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구해둔 것입니다. 따져보면 지금도 충분히 비상시죠." "현재 고위 마법사들이 거의 대부분 제6왕자군으로 넘어간 상태라 더 이상 그런 것을 만들 어내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습니까." "어쩌겠습니까. 이것이라도 사용해야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까요. 일개 침입자들이 이 런 물건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테니 그 허를 찌른다면 이번 작전도 가 능할지도 모릅니다. 아, 여러분들은 대부분 아르윈 왕국의 내놓라 하는 귀족이시니 비상시를 대비해 하나쯤은 가지고들 계실 것으로 믿는데 이번 작전의 성공을 위해 내어주실 생각이 있으신 분은 없으신 지요?" 내가 말하자 귀족들은 하나같이 입을 꽉 다물었다. 행여 내가 자신에게 말이나 걸까 나의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게 시선을 피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비록 이런 물건이 있으면 작전을 성공할 가능성 훨씬 더 커지긴 하겠지만 굳이 싫다고 하시는데 제가 그런 소중한 물건을 내놓으라고 강요 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나의 말에 귀족들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세스케인이 후르부크 백작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지만 후르부크 백작의 표정을 보 아하니 아무래도 내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트로이 후작 님께서 너무 큰 대가를 치르시는 것은 아닐지요. 제 생각에는 그것을 사용한 다해도 이번 작전에는 무리가 많은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런 말을 하기보다는 도움이 될만한 행동을 하는 것은 어떤가?" 나는 또 다시 끼여들어 토를 다는 게릭을 지그시 노려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남작의 신분밖에 되지 않는지라 그런 대단한 물건은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럼 입이나 다물게." "트로이 후작 님." 내가 게릭을 향해 한마디 쏘아주고 있는데 갑자기 세스케인이 나의 이름을 불렀다. 또다시 게릭과의 사이를 중재하려나 싶어 이번에는 조금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세스케인이 있는 쪽 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이번에 세스케인은 웬일인지 어색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는 청색 피어스를 내밀며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 후르부크 후작 가에서도 이것을 내놓겠습니다. 트로이 후작 님께서 가지고 계신 것과 보석만이 다를 뿐 똑같은 종류의 것입니다." 나는 그 피어스를 보다가 후르부크 백작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로서는 내주고 싶지 않았 던 모양이나 여기서 세스케인에게 피어스를 뺏어들고 절대 안 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일인지라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홀로 뭐라고 작게 중얼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그의 손에서 피어스를 받아들었다. "고맙군요. 후르부크 백작. 백작께서 아군의 승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셨다는 것을 아신다 면 분명 폐하나 제1왕자전하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내가 짙게 웃음을 띄우고 있는데 또 한번 불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진실로 두개나 되는 아티펙트를 사용하실 생각인 것입니 까?" "이것으로 인해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도 사실이다, 아이시스 남작." "글쎄요..."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말끝을 흐리는 게릭에게 나는 크게 소리쳤다. "아이시스 남작! 지금 나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의 미력한 소견으로는 그 아티펙트가 낭비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 각되었기에 안타까웠기에 후작 님의 심기를 어지럽힐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했던 말입니 다. 결코 나쁜 뜻이 아니니 용서하십시오." "그러면 다른 좋은 수라도 있나?" "......" 게릭은 아무 말도 않고 그저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더욱 불쾌 감을 밀려왔다. 마치 손으로 자신의 표정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입만 시끄러운 놈이군. 이득 없이 잃게 된다해도 적은 가능성이나마 걸어보겠다. 아군 은 아르윈 왕국을 위해 꼭 승리를 거둬야 하니까."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나는 단호히 말했다. 왠지 모르게 손안의 피어스가 불길한 빛을 내뿜 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것을 들고 있는 손을 꽉 쥐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7 기나긴 여름 (2)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쯤 고개를 내밀고 있던 달이 금새 구름에 의해 감추어졌다. 그믐날은 아니었지만 구름이 잔뜩 끼여있었기에 우리들이 움직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어둠이 사방 에 퍼져있었다. 우리들은 어제 저녁 트로이 후작 님의 명을 받고 꼬박 하루만에 산을 넘어 겨우 제6왕자군 의 진영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했다.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기 위해 신까지 전부 벗어 던지고 꼭 필요한 물건만을 소지한 다음, 우리들 8명은 2명씩 조를 짜서 명령에 따라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기 위해 발소리를 죽이고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뚜둑. "......?!" 나는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내 파트너라는 녀석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있었는데 아마 나뭇가지를 밟아버린 모양이다. 간간이 횃불이 타는 소리만이 들리는 쥐 죽 은 듯 조용한 장소였기에 그 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크게 울린 듯한 기분이 들어 나는 두근 거리는 심장을 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누군가가 눈치챈 사람이 없는가를 확인했다. 다행 히 이 소리를 들은 자는 없었는지 주변은 별다른 소동 없이 조용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 쉰 다음 파트너를 향해 한번만 더 그런 짓을 하면 죽여버리겠다는 뜻으로 손으로 목을 슥 그어 보였다. 솔직히 이곳에 침입한 모두는 거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기에 굳이 따진다면 그런 협박은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작은 주의의 표시는 되었을 것이다. 우리들은 보초의 눈을 피해가며 그늘이 있는 곳을 골라 거의 기어가듯 전진했다. 지나 온 길에 있던 막사들을 일일이 살펴보며 제6왕자군의 진영이 대충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을 지에 대한 것이 어느 정도 머리에 그려지고 있을 즈음에 우리들은 천만 다행으로 무사히 식 량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는 막사가 거의 눈에 보일 만큼 가까운 장소까지 접근할 수가 있었 다. 그러나 멀리 떨어진 그 식량창고를 보고 나는 이를 악 물 수밖에 없었다. 창고는 다른 막사와 상당거리 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누군가가 그 근처로 다가오면 바로 눈치챌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는데 주변을 수십 명의 병사들이 돌아가며 철통같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 다. 지키는 병사들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긴 했지만 저 수는 정말 지나칠 정도였다. 저기에 불을 지르느니 차라리 겹겹이 호위를 하고 있을 기사들의 눈을 피해 제6왕자의 암살 을 기도하는 것이 훨씬 쉽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든 그것을 성공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잡고 최대한 숨을 죽이고 다른 동료 들이 먼저 일을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우리들은 각자 다른 루트로 침입을 한 후 다른 3조가 우리와는 반대쪽의 식량창고 주변에서 일부러 보초들의 눈에 띠여서 침입자가 있다는 사실로 그들에게 신경을 집중하게 만드는 사 이에 우리들이 경계가 가장 허술한 쪽을 파고들어 불을 지른다는 식의 꽤나 평범한 작전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창고로 다가갈 수 있을만한 아주 순간적인 기회만 있다면 내가 가지 고 있는 아티펙트로 충분히 식량을 불태워버릴 기회가 있기에 이런 작전을 택한 것이다. "오옷? 여기 있네." "!?" 난데없이 뒤쪽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긴장감 없는 목소리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계속 놀라고 있는 대신 그 즉시, 거의 반사적으로 빠르게 허리의 단검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럼 안 돼지. 술래에게 들켰으면 게임이 끝난 거라고. 둘 다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그러나 내가 단검을 채 뽑아내기도 전에 무언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또 한번 그 목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촉감에 낭패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식량 창 고까지 거의 다 숨어들어 왔는데 지금 와서 붙잡혔다는데 억울함마저 몰려왔다. 그러나 목 의 검이 더욱 바싹 목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양손을 들어올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허리 근처에 손을 대고 있던 내가 단검을 뽑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내 목에 검을 들이미는 것이나 우리들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기척을 숨기고 가까이 다가온 것을 생각해 보면 분명 내게 검을 겨누고 있는 자는 보통이 아닐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반격을 해봤자 목이 몸에서 분리되는 체험을 할뿐이리라. 내가 양손을 위로 올리고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을 때 의외로 그곳에는 아직까지 소년의 티 가 남아있는 갈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홀로 서있었다. 양손의 검으로 우리들을 겨눈 채로 서 있는 그 청년은 왠지 모르게 낯이 익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그 청년의 얼굴을 보고 있는데 곧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딜트라엘 님!! 그렇게 홀로 다니시면...!" "디...딜트라엘 님?!" 병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신음성처럼 중얼거렸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그 갈색 머리 의 청년이 알 수 없는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호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다니... 아버님이 키운 공작원인 모양이지?" "어째서... 어째서 이 나라와 당신의 가문을 배신하신 것입니까! 당신은 트로이 후작가 의......!" "후후, 배신이라... 이런 말 아나? 배신은 배신으로 갚는 거라는 말을 말이다. 네가 만약 살 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아버님께 그렇게 전하는 것도 좋겠군." 딜트라엘 님은 얼굴에 띄우고 있는 그 웃음을 그대로 유지한 채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리고 곧 주변에서 웅성대는 병사들을 향해 명했다. "누구 한 명 먼저 가서 이쪽에서 여덟 번째를 찾아냈다고 전해라." "여...여덟?" 나는 자신도 모르게 당황하여 되물었다. 여덟이라면 전부 다 잡혀버렸다는 뜻이 아닌가. 나의 표정을 보더니 딜트라엘 님이 피식 웃었다. "그래, 다른 자들은 진작에 잡혔지. 너희들, 숨바꼭질에 상당한 재능이 있는걸? 평민이라면 숨바꼭질이 뭔지 알겠지?" 그는 계속 빙글빙글 웃으며 내게 말하다가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이봐, 웅성거리며 서있지만 말고 어서 이 놈들 수색이나 시작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병사들은 곧 몸수색을 시작했고 나와 동료는 품속에 숨기고 있던 여러 암기들을 전부 빼앗겨야만 했다. 우리들은 샅샅이 수색을 당한 뒤에 밧줄로 포박되어 어딘 가로 끌려갔다. 이번 작전을 수행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아티펙트만은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어떻게든 기회를 잡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많 은 병사들이 주변을 웅성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티펙트를 사용해봤자 금새 잡힐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포기해야만 했다. 내가 끌려간 곳은 척 보기에도 높으신 어른들이 계실법한 막사였다. 막사를 뒤덮고 있는 천 에 다른 막사와는 다르게 은근히 화려한 무늬로 수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변 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는 노련해 보이는 기사들이 더더욱 그 생각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었 다. "왔구나, 딜티. 다친 데는 없어?" 막사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여러 무장들 사이에 앉아있던 자그마한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연행해온 그에게 반갑게 말했다. 그 소년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천막 안에 걸린 램프 에서 어른거리는 불빛에 비쳐 기이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날 너무 과소 평가하는 거 아냐, 카류? 설마 내가 저런 피라미한테 당할까봐." 딜트라엘은 싱긋 웃으며 작은 소년을 카류라고 불렀다. 나는 그제야 긴가민가하던 나의 생 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내 눈앞에 서있는 저 자그마한 소년이 제6왕자 카류리 드였던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자기 몸이 굳었다. 저 소년을 죽이면 모든 것이 쉽게 끝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그런 생각을 지울 수밖에 없었다. 천막 안쪽에 앉아 있는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눈에 예기를 띄운 채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마법사를 보자니 내가 그것을 발동시켜봤자 괜히 아까운 그것만 낭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카류 왕자의 바로 곁에 존재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기척 없이 서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더욱 나를 신중하게 만들어주고 있 었다. 아마도 그가 제6왕자를 호위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자라고 들 었던 디트리온이리라. 사실 그의 존재를 빼더라도 나로서는 눈앞의 딜트라엘 님도 이길 자 신이 없었다. 아무리 그것을 사용한다해도 이렇게 대단한 무장들까지 우글거리는 장소에서 도저히 제6왕자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냥 원래의 임무만을 생각하자고 마음을 굳 히고 긴장으로 굳은 몸을 풀었다. "여덟이라... 꽤나 샅샅이 뒤졌는데 이 정도면 전부가 아닐까?" "아직은 안심할 수 없어. 재수가 없어서 잔당에게 허를 찔릴 수도 있으니까. 딜티가 나가서 병사들에게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전해주고 오겠어?" "알겠어." 딜트라엘 님은 천막 밖으로 나가면서 병사들에게 손짓을 했다. 병사들은 나와 동료를 구석 으로 밀어 넣었다. "큭!" 밧줄로 상체가 꽁꽁 묶인 상태의 나는 병사들의 난폭한 힘에 중심을 잃고 땅으로 나동그라 졌다. 그러나 땅바닥의 딱딱한 촉감대신 푹신한 느낌과 함께 익숙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뒤쪽에는 함께 이번 잠입에 참여했던 자들이 묶여서 있었는데 내가 그들의 위로 넘어 진 것이다. "에구, 아무리 포로라도 별로 멀지도 않은 곳인데 그냥 데려다주지 그렇게 밀어버릴 필요 있었어? 밀더라도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밀어야지." 카류리드 왕자는 서로 엉켜있는 우리들을 보더니 약간 병사를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 다. 그것이 포로가 된 우리들을 비꼬는 것인지 걱정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 이다. 어찌됐거나 병사들은 왕자의 명에 따라 우리들을 잡아온 순서대로 차례로 일렬로 무 릎을 꿇게 도와주었다. "물을 것이 있다. 바라건데 한번만에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으면 좋겠군." 왠지 모르게 깊은 연륜이 느껴지는 푸른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한번 도 직접 얼굴을 본적이 없지만 분위기만으로도 그가 그 유명한 기사 레이포드라는 것은 확 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왜 이런 침입자를 심문하는데 왕자부터 시작해서 군의 최고사령관까지 나와 있 는 것인지 의아함이 생겼다. 중간인이 대충 심문을 하여 최고책임자에게 보고하는 형식이 보통이 아닌가. "너희들 이외에 다른 침입자들이 있는가?" "......" 당연하게도 레이포드의 질문에 답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우리들 같은 공작원이 생포 당했다고 저런 물음에 쉽사리 말을 해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대로 입 을 열지 않으면 아마도 우리들은 고문 끝에 죽게 될 것이다. 아직 우리들에게는 마지막 희망인 아티펙트가 남아 있다. 그러니 끝까지 버티는 것보다는 적당한 시기에 못 견디는 척하며 협조를 하면서 어떻게든 기회를 잡는 편이 좋을 것이다. 거기까지 판단한 나는 주위의 동료들을 힐끗 바라보았다. "한번만 더 묻지. 다른 침입자가 있는가?" "......" 또 한번 레이포드가 우리들을 향해 질문을 해왔다. 우리들이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자 레이포드는 미간을 찌푸렸다. 곧 주의에 서있던 병사에 의해 발길질이 날아들 었다. "컥!" "레이포드 경의 명이 들리지 않는 거냐? 대답을 하라고 했잖아!"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발길질의 대상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를 대상 으로 잡은 덩치 좋은 병사의 발에 턱을 얼마나 세게 차였는지 이가 몇 개 부서져 버리기까 지 했지만 이 정도로 굴복하고 진실을 실토하기엔 강도가 약했기에 나와 동료들은 이를 악 물고 그것을 참아냈다. 한동안 계속된 발길질에도 작은 신음소리만을 낼뿐 입을 여는 자가 없자 병사들은 레이포드 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 레이포드는 역시나 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폭 내쉬고는 카류리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고개 를 반쯤 돌리고 눈살을 찌푸린 채 우리들 쪽을 보고 있던 왕자는 레이포드의 시선을 받더니 곧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원래대로 다시 얼굴을 폈다. "카류 님. 잠시 나가주시겠습니까?" "예?" "죄송하지만 카류 님은 당신의 막사에 돌아가 기다려 주십시오. 저희들이 심문을 끝마치면 전하께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왜 절 더러 나가라고 하시는 거죠?" 카류리드 왕자는 불만이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레이포드를 올려보았다. 그때 한쪽에 다리를 꼬고 건방진 포즈로 앉아 있던 녹색 머리카락의 청년이 그 자세만큼이나 건방진 말 투로 왕자를 향해 말했다. "네 놈이 있을 자리가 아니야. 나가." "무슨 소리야, 에르가 형?"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 나가라니까?!" 에르가는 자신의 상관인 왕자에게 거의 명령조로 소리쳤다.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는 화를 내지 않고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돌아보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나가면 뭘 하실 거죠?" "...나가라면 나가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에르가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카류리드 왕자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손 목을 낚아채서 밖으로 통하는 문 쪽으로 걸어갔다. 황당하게도 카류리드 왕자를 강제로 내 보내려는 모양이다. "뭐...!! 이거 놔!" "시끄러!" 카류리드 왕자는 에르가에 비해 훨씬 몸집도 작고 힘도 약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반항도 못 하고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 군의 최고 지휘자가 일개 무장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모 습을 보면서도 주변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말리지 않고 있었다. 현 상황을 지켜보고 있 자니 대체 이 군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 황당함에 아연해질 정도였다. "놓으라고 했다! 에스문드 백작!!" 거의 문 앞까지 끌려왔을 즈음, 갑자기 카류리드 왕자가 조금 전처럼 장난스럽고 친근한 말 투가 아닌 완전한 명령조로 크게 소리쳤다. 에르가는 그것이 상당히 의외였는지 잠시 움찔 하고 왕자를 쳐다보았다. 카류리드 왕자는 당황한 그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신경질적으로 거칠게 빼내었다. 잠시 천막 안에 알 수 없는 적막이 감돌았다. 카류리드 왕자는 천막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그리고 안쪽으로 다시 걸어 들어오려다가 살짝 한쪽 눈을 찡그리며 자신의 손목을 바라 보았다. 아마도 조금 전에 강제로 끌려나갈 때 붙잡혔던 손목이 약간 쓰라렸던 모양이다. 그 의 손목은 선명한 손자국과 함께 붉게 물들어 있었는데 그 손목이 상당히 아팠던 것인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다른 손으로 붉게 변한 손목을 말없이 감싸쥐었다. "내가 나가면 뭘 하려고?" 카류리드 왕자는 손목을 감싸쥔 자세 그대로 질문을 던졌다. "그......" "저들에게서 대답을 듣기 위해 몇 가지 과정을 거치려는 것입니다. 카류 님께서 굳이 그런 장면을 지켜보고 계실 필요는 없으니 부디 다른 막사에서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뭐라 말을 하려고 하는 에르가를 대신하여 레이포드가 나섰다. 카류리드 왕자는 계속 자신 의 손목을 주무르다가 고개를 들고 레이포드를 향해 말했다. "고문을 하겠다는 뜻입니까?" "...대답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이런 침입자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으니까요." 레이포드는 잠시 말하기를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겨우 대답했다. 사실 우리들 같은 종류의 침입자를 붙잡았을 때 정보를 듣기 위해서 고문은 거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었다. 그 런데도 레이포드는 마치 뭔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대답을 하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 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고문을 당할 당사자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아함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카류리드 왕자는 레이포드를 똑바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붉게 변한 자신의 손목을 들어올려 그들에게 내보이면서 말했다. "이거, 꽤 아프네요." "사내자식이 무슨 엄살이 그렇게 심해?!" 갑자기 뒤쪽에서 에르가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카류리드 왕자는 슬쩍 웃더니 처음의 그 친 근한 어투로 에르가를 향해 말했다. "형도 한번 당해 봐. 진짜 아프다고." 거기까지 말한 왕자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놓여있던 의자를 끌고 우리들과 상당히 가 까운 곳까지 끌고 왔다. 다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의아해하고 있는데 카류리드 왕자가 입을 열었다. "역시 안되겠어요. 아까는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보고만 있었는데, 역시 고문은 반대입니다. 저는 겨우 이 정도로도 이렇게 아픈 걸요. 이들에게 이 이상 더욱 혹독한 고문 을 가한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요." "카류 님! 저희들은 어떻게든 그들에게서 정보를 들어야 합니다. 저희들도 즐거워서 그런 짓 을 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알고 있습니다. 레이포드 경. 제가 그걸 이해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는 않아요. 하지만 지금 은 꼭 이들을 고문하여 그걸 알아내지 않아도 계속 보초를 강화하고 있으면 잔당이 있다해 도 충분히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솔직히 이들이 거짓 자백을 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해본다면 그편이 훨씬 낫죠." 거기까지 말한 카류 왕자는 의자의 등걸이를 우리들 쪽으로 향하게 해서 그곳에 걸터앉았 다. 그리고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냈다. 사실 조금 전부터 그가 허리에 보통 검이 아닌 여러 개의 단검을 차고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하고 있었는데, 지금 그가 그렇게 검을 꺼내자 더욱 궁금증이 일었다. 대체 저 왕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닌지 천막 안의 무장들을 포함해서 나의 동료들까지 모두 카류리드 왕자의 행동을 주시했다. 그는 자신의 단검의 날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 날카로움을 가늠 해보는 듯 하더니 곧 우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조금 전에도 말했다시피 고문은 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물어보자." 왕자는 그렇게 말한 다음, 단검을 한바퀴 뱅글 돌려 고쳐 쥐고는 가장 왼쪽에 있는 자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너부터. 다른 침입자가 있어?" "......" "그러지 말고 협조를 해주면 안될까? 어차피 잡혔잖아. 그러니 자백을 하는 식으로 협조를 하면 좀 좋은 대우를 해줄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내가 보증하지." 말할 것도 없이 질문을 받은 동료는 입을 열지 않았다. 솔직히 저런 말에 이실직고를 한다 면 지나가는 개가 비웃을 것이다. 카류리드 왕자는 입에 자물쇠라도 채운 것처럼 말을 않고 있는 그를 보고 다시 한번 질문을 했다. "정말 말 안 할 거야?" "...카류 님... 그들은..." 레이포드가 차마 그 꼴을 보다못해 카류리드 왕자를 말리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카류리 드 왕자가 취한 다음 행동으로 인해 하던 말을 멈추었다. 카류리드 왕자가 자신이 들고 있 던 단검을 심문하던 가장 왼편의 병사를 향해 던졌기 때문이다. 나는 속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왕자를 슬쩍 비웃었다. 그렇게 검을 던져 우리들을 위 협해볼 생각인 모양이지만 그 검으로 몸의 일부를 잘라버린다 해도 우리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훈련이 되어 있었다. 보통 이런 중요한 임무를 띠고 잠입을 할 정도의 자들이 라면 그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커...커헉...!!" 그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았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천 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본 것이 진실인지 의심스러워 눈을 다시 한번 끔 뻑이기까지 했다. 그저 위협용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던 그 단검은 나의 동료의 목줄기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가장 치명적인 급소에 정확하게. 동료는 한동안 자신의 목에 박힌 검을 보고 입을 벌린 채로 말을 못하고 벙긋 벙긋거리기만 하다가는 곧 땅으로 꼬꾸라지고 말았다. "카...카류 님!! 이 무슨!!" 레이포드가 거의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는 개의치 않고 다음 남자를 향 해 질문을 했다. "또 다른 침입자가 있어, 없어? 말해." "카류!!" 아직까지 문 곁에 서 있던 에르가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왕자는 그 말을 무시하고 조금 전 죽어버린 동료의 곁에 앉아 있는 자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말 안해?" 그 목소리는 조금 전 헤실거렸던 자와 동인인물이라고는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로 차가웠다. 거의 상황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입만 조금 벌리고 있는 그에게 또 한번 카류리드 왕자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 그 왕자의 단검은 놀랄 만큼 정확했다. 그 단검이 조금 전에 죽은 동료와 거의 같은 부위에 검이 꽂혔던 것이다. 이번의 동료도 그다지 오랜 시간 고통을 느껴보지도 못하고 금새 절명 해 버렸다. 카류리드 왕자의 행동에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 왕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엉망이 된 머리를 쉽게 수습하기가 힘들었다. 고문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 해놓고는 갑자기 그들을 죽여버리다니! "카류리드!!" 에르가가 뛰어와서 카류리드 왕자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나 왕자는 세게 그 손을 뿌리치 고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원 위치로 돌아가라. 에스문드 백작." "헛소리 마, 이 자식아! 뭐가 에스문드 백작이야!? 너 미쳤어?" "토 달지 말고 자리로 돌아가! 지금 명령 불복종으로 끌려가고 싶은 건가?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 에르가는 카류리드 왕자의 행동이 너무나 의외였는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서있었다. 곧 레이포드가 다가와 에르가에게 왕자의 말대로 원 위치로 가라는 듯이 팔을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렇게 에르가를 달래면서도 레이포드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 을 약간씩 움찔하고 있었다. "그럼 너에게 묻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다시 카류리드 왕자 쪽으로 돌렸다. 카류리드 왕자는 무표정하게 그리고 조금 전 보다 더욱 차가운 목소리로 다음 차례의 동료를 향해 물었다. "다른 침입자가 있나?" 질문을 받은 동료가 불안한 표정으로 우리들 쪽을 바라보았다. 우리들에게는 아직 마지막 희망인 아티펙트가 남아있다. 그러니 이대로 죽기보다는 적당히 대답을 하며 기회를 살피는 편이 나을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금새 입을 열면 뭔가 우리들에게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의심을 할 것이 당연한 일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견 디다가 계속되는 심문에 마지못해 입을 여는 척하기 위해 모두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눈앞의 왕자는 제대로 심문하지도 않고 우리들을 그냥 죽여버리고 있었다. 마 지못해 어쩌고 할 여유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우리들이 죽을 각오라고는 하나,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은 너무 허무한 일이었기에 동료가 그렇게 불안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 본 것이리라. "컥!" 그러나 내가 아주 잠시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또 한번 격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왕 자는 대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우리들에게 생각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너는 대답할 거야?" 왕자는 허리의 혁대에서 가볍게 단검을 빼들어 위로 높게 던지면서 다음차례의 동료를 향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그는 대답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자 는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것을 받아들자마자 바로 그를 향해 던졌다. 왕자의 검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 검은 너무나 정확하게, 그리고 순식간에 동료의 목 숨을 앗아갔다. 천막 안은 완전히 질려버린 인간들로 인해 적막에 휩싸였다. 그러나 왕자는 전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는 단검을 뽑아내어 마치 리듬을 타듯 한번 짧게 던져 검을 던지기 쉽게 고쳐 잡은 다음 또 다시 조금 전처럼 위로 높게 던지고 4번째 동료를 향해 물었다. "잔당이 있어, 없어?" "그...그건!!" 질문을 받은 동료는 대답을 하기로 결심을 했는지 조금 입을 열었다. 그러나 금방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순식간에 죽어버린 3명의 동료들로 인해 당황해 있었던 데다가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대로 말을 해야하는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도 않았을 테니 그랬을 것 이리라. 그러나 왕자는 위로 던진 검을 받아들자마자 대답을 하려하고 있던 동료를 향해 검 을 던져버렸다. "카류!! 어째서!!" 에르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치 비명같은 목소리가 천막 안에 퍼졌다. 그러나 왕자는 그 말 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신이 던진 검에 맞은 동료가 꼬꾸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음 차 례의 동료에게 물었다. "있어?" "어...없습니다! 없어요! 없습니다!" 이번에 동료는 조금 전 그와 같이 더듬지 않고 카류리드 왕자가 검을 위로 던지기도 전에 바로 그 즉시 소리지르듯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왕자는 단검을 살짝 위로 던지며 물었 다. "사실인가?" "사실입니다!" 질문을 받은 동료는 왕자가 단검을 받기 전에 소리쳤다. 혹이라도 그 전에 대답을 하지 않 았다고 죽여버릴까봐 그랬을 것이다. 사실 나 역시 그 왕자가 단검을 위로 던질 때 가슴이 철렁했었으니, 그것을 당하는 당사자의 심정임에야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왕자는 단검을 받아든 다음, 다시 위로 던지면서 말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예?" 왕자는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단검을 가볍게 받아들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네가 우리들을 속이고 잔당으로 허를 찌르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겠 냐고." 질문을 받은 동료는 아주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왕자의 단검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다 급히, 정말 거의 혀가 꼬일 정도로 빠르게 말했다. "사, 사실입니다! 트로이 후작 님의 명을 받고 잠입한 것은 저희 여덟 명뿐입니다!! 이런 상 황에서 제가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왕자는 단검을 사뿐히 받아들었다가 리듬에 맞추듯 또 한번 위로 던졌다. 과연 왕족이 쓰는 물건답게 그 단검의 미려한 검날은 누군가의 손에 의해 티 하나 없이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 었다. 왕자는 막사 내의 등불 빛을 받아 아름다운 은빛 호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그 단검을 받자마자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못 믿겠어." 조용한 막사에 작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불쾌한 소리 도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컥......!" "......!!" 막사 안은 이제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으로 가득 찼다. 그 깨끗한 은빛 검날이 어느새 동료 의 목에서 나온 검붉은 피로 더럽혀져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에 그 일을 당하는 우리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켜보고 있던 다른 자들까지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자신의 허리춤에 꽂힌 다른 단검을 뽑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덜컥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저 왕자는 애초부터 우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고문은 하지 않니 어쩌니 하며 웃기지도 않는 말로 우리들을 조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몰려오는 가슴을 졸이는 급박함에 등줄기에서 저절로 식은 땀이 흘렀다. 우리들은! 아니, 최소한 나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같은 조의 파트너만 은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아직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인의, 트로이 후작 님의 명령을 따르는 공작원으로서 언제든 임무를 수행하다가 죽 을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릴 수는 없었다. 임무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상황도 아닌 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빌어먹을! 어쩌다가 저런 놈을 만나서!! 침입자를 붙잡으면 제대로 심문을 해야할 거 아냐!! 체포해서 묶어두는 것이 보통이 아니냐고!! 빌어먹을, 빌어먹을!! 저런 놈이니 제 형제나 아 비까지 죽이려 들었겠지!! 빌어먹을! 저런 주제에 평소 그렇게 헤실헤실 웃고 다녔단 말인 가?! 이 가증스런 위선자 같으니! 찢어 죽일 패륜아 같으니!! 내가 속으로 갖은 욕을 하며 입술을 콱 깨물고 있는데 카류리드 왕자가 또 다시 검을 위로 높게 던지며 말했다. "다른 침입자가 없다는 게 사실이야?" "제...발... 없습니다. 없다고요!" 질문을 받은 동료가 거의 절규하다시피 말했다.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의 눈에는 조금의 흔 들림이 없었다. 무섭도록 차가운, 그 흑청색의 눈동자에는 죽음을 앞둔 자에 대한 일말의 자 비심도 들어있지 않았다. 카류리드 왕자가 단검을 받아드는 그 모습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굉장히 천천히 눈에 들 어왔다. 그 모습을 보는 짧은 순간에 나의 심장이 터져 나갈 것처럼 날뛰었다. 제발 그 왕자 가, 카류리드 왕자가 마음을 바꿔서 나의 동료의 말을 믿어주기를 바랬다. 최소한 다시 한번 그의 말을 신중하게 다시 생각해주길 바랬다. 나는 그것을 간절히 바라며 피가 나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입술을 세게 물고 카류리드 왕자의 손을 쳐다보았다. "못 믿겠다니까." 카류리드 왕자는 음의 고저 없이 그렇게 말했다. 허공에서 그의 손에 들어온 단검은 너무나 간단하게 나의 다섯 번째 동료의 목줄기에 가 박혔다. 그 단검은 확실하고도 신속하게 그의 숨통을 끊어놓았다. "...카류......" 에르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왕자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카류리드 왕자는 표정을 바꾸지 않고 나의 바로 곁에 앉아 있는 동료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허리춤을 더듬 으며 조용히 말했다. "침입자는..." "없다고 했잖아! 이 자식아!" 나는 거의 짜증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 미친 왕자 놈 때문에 이렇게 죽어야 한다고 생 각하니 너무 화가 났던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몸, 이제는 아주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왕자를 향해 험한 말을 퍼부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웃기지 마! 없다고 말했잖아! 그럼 우리더러 어쩌란 말이야! 애초부터 죽일 거였으면 그냥 죽일 것이지 재수 없게 사람을 갖고 놀아?! 네 놈 눈엔 우리가 그렇게 간단하게 보이냐?! 그렇게 벌레보다도 못하게 보이냐고!!" 내가 숨도 쉬지 않고 그 왕자에게 이 말을 쏟아내자 왕자는 허리춤에 손을 댄 자세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는 눈을 돌리지 않고 숨을 몰아쉬며 그 왕 자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정말 너 같은 썩을 놈의 자식은 난생 처음 봤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는다면 어떻게든 네 놈을 저주하고 말 테다! 죽어서도 네 놈을 저주하겠어!!" 나는 이를 갈면서 다시 한번 신경질 적으로 소리질렀다. 그러나 왕자는 그 자리에서 피식하 고 웃었다. 나는 그 모습에 한순간 멍해져 버렸다. "죽은 사람은 저주 같은 거 못해." 마치 광장에 서있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굳어 있다가 갑자기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피식 거리며 웃던 카류리드 왕자는 고개를 돌려 레이포드를 향해 조금 전까지의 그 무겁고 냉랭 한 목소리가 아닌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없는 듯 한데요? 드리크 경."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머리가 완전히 식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왕자는 설마 이 런 식으로 우리들에게 대답을 들어내려 했던 것일까!? 대답을 기다리지 많고 무조건 죽여버 림으로서 공포심을 극도로 자아내게 만들어 자백을 하게 했던 것일까!? 애초부터 조금이나 마 대답할 생각이 있는 자라면 이런 심문으로 충분히 대답을 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리고 대답을 듣지 못한다해도 처음 레이포드에게 말했던 것처럼 어차피 그냥 대비를 철저히 하면 그것으로 좋았으니까 고문 같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방법보다는 이런 짓을 한 것이란 말인가!? "마침 잘됐네. 나도 단검이 다 떨어진 상태였거든." 왕자는 아무 것도 없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우리들 쪽으로, 정확히는 자신이 죽여버린 나의 동료들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장 왼쪽 에 꼬꾸라진 시체의 머리를 들어올려 목덜미에 꽂힌 자신의 단검을 뽑아냈다. "윽, 피 튈뻔했네." "카류!! 너......!!" "비싼 명검이야, 그냥 이대로 일회용 해버리긴 아깝잖아." "무슨 소리하는 거야!! 너는......!!!" 에르가는 거의 사색이 되어 조금 비틀거리기까지 하며 한두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러자 카류 왕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에르가를 향해 상냥하게, 믿어지지 않게도 정말 상냥하 게 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는 거야, 에르가 형. 안색이 안 좋아. 나가서 쉴래?" "시끄러! 시끄럽다고!! 넌!! 너는......!!" 에르가가 완전히 혼란에 빠졌는지 머리에 손을 얹고는 혼잣말처럼 소리치자 카류리드 왕자 가 천천히 그가 서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에르가는 머리를 흔들면서 중얼거리다가 한쪽 손 에 피칠갑을 한 검을 들고 자신의 쪽으로 걸어오는 왕자를 보더니 한발자국 뒷걸음질까지 쳤다. "무서워하지마. 형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지 아니까." 왕자는 검을 들지 않은 손을 들어 에르가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내가 저들을 죽인 것이 놀라운 거지?" "......!!" 에르가는 마치 겁먹은 어린 아이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직 어려 보이긴 있었지만 충분히 한 명의 건장한 무장이었던 그는 카류리드 왕자의 손안에서 완전히 어린아이가 되어 버렸다. "뭘 두려워 해? 나는 저번 전투에서 이만명을 죽였어. 나의 손짓 하나로 이만이나 되는 인 간들이 불에 타죽었어.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훨씬 양호하잖아? 고통도 없이 한번에 죽였는 걸." "다...달라!!" "뭐가?" 가볍게 되묻는 왕자는 웃고 있었다. 너무나 부드럽게... 에르가는 그런 모습이 더욱 혼란스러웠는지 더욱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다르다고! 그건 전쟁이야! 지금 상황과는 전혀 틀리다고!!" "지금도 전쟁 중이잖아. 병사들과 병사들이 검을 맞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전쟁이 아니야? 내 손의 검으로 직접 그들의 멱줄을 따주지 않았다고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그건......"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에르가를 등지고 우리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카류리드 왕자는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보통 이런 곳에 침입한 자라면 죽을 각오를 하는 것이 보통이겠지. 그러니 고문을 한다 손 쳐도 대답을 듣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 그거 괜한 시간 낭비 아냐? 그러나 충분히 죽을 각 오가 되어 있지 않은 자라면 이 정도의 협박에도 충분히 대답을 해줄 거야. 봐, 지금도 저렇 게 대답을 들었잖아? 괜찮은 방법 아냐? 모두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 대답을 못 듣는다 해도 조금 전 말한 것처럼 그냥 방비를 잘하면 되니까 굳이 고문 같은 짓을 할 필요도 없 지." 카류리드 왕자는 조금 전 내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말을 했다. 처음의 그 모습으로 그저 순 진한 소년정도로 판단했던 것과는 달리 그 왕자는 생각 이상으로 냉혹한 자였던 것이다. "괘...괜찮은 방법이라니... 너...너는......!!" 그러나 나의 이런 생각과는 달리 에르가는 질렸다는 표정으로 계속 말을 더듬었다. 솔직히 카류리드 왕자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에르가뿐만이 아닌 이 천막 안의 대부분의 이들이 왕자의 냉혹한, 그러나 보통 군의 책임자로서는 당연하다 할 수 있는 말에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을 고문하려 했으면서 내가 너무하다고 말하려는 거야? 그들이 고 통스러워하는 게 싫어서 일부러 이렇게 죽여준 거야. 나는 예전의 그 카류리드 그대로라고." 에르가는 입을 반쯤 연 채로 어떻게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갈팡질팡하고 있었 다. 카류리드 왕자는 그런 에르가를 보더니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표정 짓지마. 우리 이겨야 하잖아. 그지?" "...아......" 에르가는 순간 꽤나 떨어져 있던 나의 눈에도 띌 만큼 크게 몸을 움찔했다. 카류리드 왕자 는 껴안고 있던 손을 풀더니 마치 자신의 어린 아들을 대하듯 한쪽 손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살짝 넘겨주었다. 나는 그들의 행동에서 너무나 기이함을 느꼈다. 어째서 저런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 지 않았다. 저 왕자는 조금 전부터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만을 했다. 처음에는 자신 보다 계급이 낮은 무장에게 마구 휘둘릴 정도로 마치 철모르는 어린애처럼 행동하다가 그 다음에는 마치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처럼 행동하고 이제는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분위기 를 풍기고 있지 않은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저 이상한 왕자는 에르가에게서 떨어져 우리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 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가 한발자국, 한발자국 우리들을 향해 내딛을 때마다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지독한 압박감을 느껴야만 했다. "남은 건 너희들뿐이구나." 왕자는 웃음을 띤 표정 그대로 우리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리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당황하며 눈을 아래로 깔았다. 우리들을 이렇게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당황하게 인간은 눈 앞의 이 왕자뿐일 것이다. "...머리카락이 조금 길구나. 꽁지머리를 하고 있네?" 그는 우리들을 유심히 보더니 그렇게 말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갑작스러운 그 말을 듣고 그만 심장이 멈춰버리는 줄 알았다. "그렇게 길다고 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내가 듣기론 이런 일을 하면 머리카락이 거추장스 럽기 대문에 다들 짧게 자르고 다닌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야." "......" 우리들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제대로 대답을 안 했다고 또 단검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있는 상황도 아닌지라 그냥 입 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다.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왕자의 시선에 나는 괜시리 억울한 마음이 복받쳐 올랐다. 사실 그 머리가 상당히 찔리는 곳이기는 하나 어쨌든 간에 우리들 같은 공 작원 중에서도 이 정도의 길이라면 머리를 기르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떤 놈이 그런 말을 지껄인 건지 걸리기만 하면 그 목을 비틀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카류! 병사들에게 말하고 왔어."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조금 전 우리들을 연행했던 딜트라엘 님이 들어왔다. 그리고 카류 리드 왕자에게 빙글빙글 웃으면서 다가갔다. "병사들에게 오늘 하루는 최대한 주의를 기하라고 말을 해두고 왔......" 딜트라엘 님은 계속 웃는 얼굴로 왕자를 향해 말하다가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말을 멈추었 다. 아마 카류리드 왕자 뒤쪽에 꼬꾸라져 있는 자들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왕자가 한번에 목의 급소를 맞추어 동료들을 너무나 깨끗하게 죽였기에 언뜻 보아서는 그저 앞으로 넘어져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왼편에 꼬꾸라진 자는 그 왕자가 검을 뽑아내면서 다 량의 피를 쏟아냈기에 딜트라엘 님은 아마도 그것을 본 모양이다. "저건......" "딜티. 저들에게 자백을 받아냈어. 더 이상 침입자는 없는 모양이야. 정말 미안한데 보통 경 계태세로 바꾸라고 말해주고 올래?" 딜트라엘 님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고 카류리드 왕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평소처럼 - 그러니까 우리들이 처음 붙들려 왔을 그때 딜트라엘 님에게 지어 보였던 표정- 그저 부드 럽게 웃고 있는 그를 보더니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러고 오지." 딜트라엘 님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다가 그들은 우리들 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덕분 에 그와 시선을 딱 마주친 나는 급하고 고개를 내렸다. 다행히 조금 전 딜트라엘 님이 들어 오신 덕분으로 그냥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이 왕자가 다시 그것을 들먹이면 낭패이기에 가슴 이 또 한번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뛰었다. "......" 그러나 다행히 왕자는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레이포드들이 있는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가 는 길에 병사들에게 꼬꾸라져 있는 나의 다른 병사들의 목에서 자신의 단검을 빼내오길 명 했다. 문득 곁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보자니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한숨이 나왔 다. 이런 일을 하면서 동료들의 죽음 따위야 몇 번이고 보던 일이었지만 이번처럼 황당한 심문으로 인해 죽은 것은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저 왕자는 대체 이들을 죽이면서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어떻게 그런 두 가지 얼굴을 가질 수가 있는 걸까. 얼마 후 병사들에게 소식을 전부 전했는지 딜트라엘 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부터 레 이포드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카류리드 왕자는 미안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분을 맞 이했다. "이런 일 자꾸 시켜서 미안해. 하지만 네가 직접 말해주는 게 병사들에게도 더 좋을 거 같 아서. 원래 높은 사람이 직접 말해야 말을 더 잘 듣잖아." "됐어. 별 것도 아닌데 뭐. 더워서 땀 좀 뺐지만 내 인심 써서 그 정도는 참아주지." 왕자는 그의 말에 빙긋 웃었다. 친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보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군은 위계질서가 정말 엉망인 것처럼 보였다. 이러고도 군이 제대 로 돌아가긴 하는 건지... 하지만 원체 저 왕자가 종잡을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에 그런 가 정은 접어버렸다. 카류리드 왕자는 딜트라엘 님을 레이포드 등이 있는 쪽으로 데려가서 지금까지의 경과를 이 야기를 하는지 무언가를 말했다. 그러자 딜트라엘 님이 지긋한 눈초리로 우리들 쪽을 보더 니 입을 열었다. "그냥 죽여버리지, 살려두려고?" "내일 날이 밝으면 다른 여러 가지를 더 물어보게. 내가 심문해보니까 저들은 그냥 죽을 생 각은 없는 모양이더라고." 왕자는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마치 비웃음이라도 당한 것 같 아 불쾌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지만 어쨌든 당장 죽이지 않는다는 말에 나는 띌 듯한 기 쁨을 느꼈다. 운이 좋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딜티. 따악 한번만 더 부탁하자. 저들을 어디 다른 막사에다가 가둬 놓아줘. 저들이 저렇게 잡히긴 했어도 꽤나 깊은 곳까지 눈에 안 띄고 잠입을 했을 정도의 실력자잖아. 그러니 딜 티가 직접 연행해줘야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 "저기 에르가도 있고 다른 사람 많은데 왜 하필 나야?" "하하, 그냥 딜티가 계속 문 근처에 서있잖아. 한번만. 응? 진짜 마지막이야." "...알았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딜트라엘 님은 입을 조금 삐쭉 내밀었고 카류리드 왕자는 그의 머리 카락을 살살 쓰다듬어 그분을 달래었다. 저들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현 상황이 마치 애들 소꿉장난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딜트라엘 님의 명령으로 우리들 둘은 어딘가로 연행되어갔다. 그 막사에서 어느 정도 떨어 질 만큼 한동안 걸어가다가 문득 우리들이 먼 곳에서 언뜻 보이는 식량 창고를 보고 곁에 서 있는 동료와 잠시 잠깐 눈빛을 주고받았다. "크흑!!" "뭐야?" 갑자기 곁의 동료가 신음 소리를 내자 딜트라엘 님이 소리를 낸 동료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돌리며 짜증스럽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으아악!!" 신음소리를 내던 동료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몸을 밧줄로 꽁꽁 묶여 병사들 의 손에 지탱하고 있었기에 땅바닥을 뒹굴지는 않았지만 그가 너무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자 붙잡고 있는 병사들은 조금 당황한 표정이었다. 딜트라엘 님은 의아해하면서도 그 즉시 주 변을 살피며 검을 빼들었다. "크헉...컥...머...머리가.......!!" 곁의 동료는 입에서 침까지 질질 흘리며 애써 그렇게 말했다. 주위의 병사들이 고개를 갸웃 하며 그의 머리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컥...크헉...제발...컥컥!! 사...살려......!!" "이봐, 저 녀석의 머리 한번 살펴봐. 그러고 너희들 둘은 주변에 또 누군가가 있는지 살펴보 고." 딜트라엘 님은 혹시 이 곳에 잠입한 또 다른 누군가가 비밀 유지를 위해 우리들에게 위해를 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그런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나의 얼떨떨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나서는 곧 눈앞에서 죽을 듯이 몸을 비트는 병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아악~! 머리가...제발......!!" 병사들은 또 한번 발작을 하는 그를 보더니 의아해하며 그의 머리를 살폈다. "대체 머리가 어쨌기에 저러는 거야?" 병사의 손이 그의 머리를 몇 번 뒤적이다가 뒤로 묶은 머리줄로 손이 닿는 순간 동료의 표 정이 변했다. "아이스 스피어!" 순간 갑자기 알 수 없는 냉기가 느껴졌다. 올해는 이상기후로 인해 이런 한밤중에도 땀이 흐를 만큼 굉장히 더웠는데, 믿어지지 않게도 마치 한순간 겨울이라도 된 것 같이 주변의 온도가 내려갔던 느껴진 것이다. 무엇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는 나였으나 직접 그것을 피부로 느끼자니 잠깐동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랬으니 주변의 다른 자 들이 어땠을 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의 동료를 중심으로 갑자기 나타난 수십 개의 생성된 가늘고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순 식간에 사방으로 쏘아졌다. "크학!" "으악!!"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날아든 그 얼음 조각을 맞은 병사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땅바닥에 쓰려졌고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최소한의 피해를 입기 위해 몸을 재빠르 게 날리긴 했으나 나를 붙들고 있던 병사들의 탓으로 왼팔에 몇 개를 맞아버리고 만 것이 다. 팔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단순히 그런 얼음 조각이 몸에 꽂힌 것 정도로 이 정도의 아픔이 느껴진다는 것에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의아함을 느끼고 팔을 바라보았고 순간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 마법은 얼음 조각을 맞은 부분을 중심으로 일정부분이 얼게 만 드는 작용을 하는 모양으로 덕분에 나의 팔은 완전히 얼음 덩어리가 되어있던 것이다. "이봐, 어서!!" 동료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나를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나는 그 조각을 맞아 팔 한쪽 을 잃긴 했으나 덕분에 밧줄이 대충 풀린 상태였지만 마법을 쓴 그는 여전히 밧줄에 묶인 상태였기에 빨리 포박을 풀어내라는 뜻으로 그랬던 것이다. 나는 이를 악 물고 한 손으로 곁에 쓰러진 병사의 허리에 꽂힌 단검을 뽑아내어 동료의 밧줄을 잘라냈다. "네 놈!!" 그때 갑자기 노기 어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반쯤 무릎을 꿇고 있던 딜트라엘 님이 밧줄을 끊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 소리 질렀던 것이다. 식량창고 근처에서 사 로잡힐 때도 느꼈던 것이지만 딜트라엘 님의 검술실력은 정말 감탄사가 나올 정도였다. 예 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순간적으로 검을 휘둘러 자신에게 날아드는 그 조각들을 검으로 전부 베어버린 모양으로 바닥에 부서진 얼음 조각이 흩어져 있었던 것이다. 딜트라엘 님은 왼쪽 허벅지가 아주 조금 얼어있는 것을 빼면 거의 멀쩡한 상태처럼 보였다. 그분이 몸을 일으키 려하자 동료는 팔에 힘을 주어 반쯤 끊어진 밧줄을 자력으로 풀어내고 식량창고 쪽으로 곧 장 뛰었다. 덕분에 아직까지 밧줄을 완전히 풀어내기 위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끙끙대고 있는 나는 그의 팔에 부딪혀 또 한번 땅에 나뒹굴어야만 했다. "크아아아악!" 나는 자신도 모르게 그만 비명을 질렀다. 단순히 땅을 굴렀다면 이런 비명을 지를 일은 없 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땅을 뒹굴면서 얼음 덩어리가 된 팔을 바닥에 부딪혀버렸고 믿어 지지 않게도 그 팔은 마치 유리그릇처럼 부서졌던 것이다.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나는 계속 비명을 내질렀다. "이런 제길! 거기 서!!" 딜트라엘 님은 창고 쪽으로 뛰는 그를 보더니 손으로 땅을 굴러 고무줄 퉁기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크지 않은 부상이라고는 하나 얼어버린 다리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를 추 격하기 시작했다. "너희 둘은 저놈을 감시해! 나머지는 저놈을 잡아라! 절대 식량창고로 다가가지 못하게 해!!" 딜트라엘 님은 소동으로 인해 이쪽으로 몰려든 병사들에게 나와 창고 쪽으로 뛰어가는 동료 를 차례로 손가락질하면서 명령하고는 다시 창고 쪽으로 뛰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에서 홀로 살아남은 나는 엎드린 상태 그대로 땅에 얼굴을 꾹꾹 처박았다. 깨져버린 팔이 너무 고통스러워 눈물이 찔끔 새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사적으로 참아 그런 상황은 막을 수 있었으나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흑...크흑......!!" 그들은 끙끙거리는 나를 보더니 저마다 감상을 하나씩 내뱉었다. "저것 봐. 팔이 찢어진 것도 아니고 도자기처럼 깨져버렸어. 우웩... 차라리 막 빠져나온 따 끈한 내장 쪽이 더 비위에 좋을 것 같구만. 이게 빙계 마법이라는 건가? 지독한 놈들... 동료 까지 저런 꼴로 만들고는 저 혼자 튀어버리다니..." "말은 바로 하라고, 튄 게 아니라 식량창고를 노리고 간 거 아냐. 그건 그렇고 어떻게 저런 놈들이 마법을 쓰는 거지? 마법사가 저렇게 민첩할 수가 있는 거냐?" 그들은 서로 뭐라 꿍얼거리며 나를 다시 포박하기 위해 다가왔다. 오른쪽에 있던 자의 손이 나의 몸에 닿는 순간 나는 몸을 돌리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단검을 그를 향해 휘둘렀다. "...어?" 오른 편의 병사 놈이 목에서 분수같이 피를 뿜는 장면의 잔상이 눈에서 지워지기도 전에 왼 쪽 병사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그 놈은 앞의 병사가 쓰러지는 장면을 보면서 당황하다가 미처 자신이 몸에 꽂힌 검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했는지 가슴의 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는 그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재빠르게 검을 뽑아 오른편의 그 놈처럼 목을 그었다. "헉...헉......." 순식간에 두 놈을 죽인 나는 주변을 살피며 또 다른 병사가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조 금 전 동료가 뛰어간 창고 쪽이 시끄러울 뿐 이쪽으로 더 이상의 병사들이 오지는 않았다. 창고 쪽으로 도망간 동료 때문에 그쪽으로 신경이 집중된 탓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마법에 당한 내가 중상으로 큰 반항은 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서 방심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에 게는 안타깝게도 나는 팔 하나에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릴 만큼 그렇게 쉬운 훈련을 받아온 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를 악 물고 완전히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는 나머지 팔의 ‘조각’을 완전히 떼어 냈다. 다행이라 해야할지 불행이라 해야할지 빙계 마법에 당해 절단된 팔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나는 곁에 쓰러져 있는 병사가 입고 있는 것 중 가장 그럴듯한 군복을 벗겨 내어 대충 위에 걸친 다음, 떨리는 다리에 젖 먹던 힘까지 주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 고 가능한 한 최대한 숨을 가다듬으며 몸을 숙여서 그늘을 타고 창고 쪽으로 조심스럽게 숨 어들었다. 내가 어두운 곳을 골라 조심스럽게 식량창고 근처까지 왔을 때 동료는 주변의 다른 병사들 과 대치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쪽수로 밀어붙여 그냥 잡아버렸을 테지만 또 다시 마법 을 쓸까 싶은지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대치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의 동료는 마법사이기에 마법을 쓴 것이 아니라 아티펙트를 이용하여 마법을 쓴 것이다. 그리고 그 아 티펙트는 보통 아티펙트가 그렇듯 일회용이었다. 나는 머리를 묶고 있는 줄을 풀어내어 붉은 빛의 피어스를 꺼내 오른손에 꼭 쥐었다. 이 아 티펙트는 피부에 닿인 상태에서 정해진 시동어를 말해주는 것으로 발동되게 되어 있었다. 보통은 악세사리용으로 귀에 걸고 있는 상태에서 급할 때 시동어를 말하는 것으로 끝이었지 만, 우리같은 침입자가 이런 화려한 귀걸이를 끼고 있다가 만에 하나라도 생포 당했을 때, 병사들이 수상해 할 것이 틀림없고 그 즉시 빼앗겨버릴 것이 당연지사이기에 이렇게 머리끈 속에 숨겨온 것이었다. 나는 왼쪽 팔의 고통 때문에 잔뜩 구기고 있던 얼굴을 최대한 평상시대로 펴고 동료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한눈을 팔고 있는 병사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어? 너는?" 내가 어느 정도 식량창고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한 병사가 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왼 쪽 소매가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리지 않도록 주머니에 대충 쑤셔둔 상태이긴 하나 조금만 눈여겨봐도 팔이 없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는 상태였고 게다가 군복의 목 주변 이 피로 인해 엉망으로 더럽혀진 상태였다. 이제야 내가 수상한 놈이라는 것을 눈치챈 병사 는 크게 소리지르며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집중되는 수십에 달하는 병사들의 시선 속에서도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 다. 내 손에 쥐어진 아티펙트를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식량창고와 가까운 거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파이어 필드가 들어있는 아티펙트. 이 마법을 사용하면 굳이 창고에 기름 을 뿌린다거나하지 않아도 순식간에 창고를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조 금이나마 마법의 영향을 크게 받으라는 뜻으로 앞으로 뛰어가며 소리질렀다. "파이......!!!"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말을 하기 위해 입을 뻥끗거 렸지만 목에서는 타는 듯한 고통만이 느껴질 뿐 이상한 비음만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리 고 곧 하나 남은 오른손에 또 한번 알 수 없는 아픔이 전해졌다. 어디선가 많이 본 단검이 갑자기 날라 와서 오른손에 박혔던 것이다. 나는 다리가 풀리는 것을 느끼면서 오른손에 쥐 고 있던 피어스를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거로군. 손에 쥐고 시동어를 말하면 되는 건가?" 곧 몇몇의 사람들이 내가 꼬꾸라진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가 땅 에 떨어진 피어스를 집어들었다. 그는 앞쪽으로 넘어져 있는 나를 발로 차서 바로 뒤집었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자는 횃불을 등진 채로 서 있어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져서 있었는데, 그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빛이었다. 그러나 일렁이는 불빛에 따라 이따금씩 푸른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카류리드 왕자, 어째서......!! "어째서 이곳에 있느냐고?" 그는 붉은 피어스를 자신의 입가로 가져다 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허 리에서 다른 단검을 빼들며 말했다. "곧 죽을 자에게 그런 것을 가르쳐 줘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그는 단검을 위로 짧게 던져 바로 고쳐 잡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잘 가라." 이르나크의 장 Part 37 기나긴 여름 (3) 눈앞의 침입자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준 나는 저쪽에서 다른 침입자와 대치를 하고 있는 딜 티를 향해 소리질렀다. "딜티! 끝났어. 거기 녀석도 끝내버려!" 내 말을 들은 것인지 딜티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더니 한걸음에 대치하고 있던 그에게 달려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그 빠르기와 기술을 보자니 절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 돼버렸다. "과연 대단해. 딜티는." 내가 놀랍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리고 있는데 에르가 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냥 그때 뺏어버렸으면 됐잖아. 머리 묶는 곳에다가 숨겨두었다는 거 너 눈치채고 알고있 었지?" "조금 전에도 말해 듯이 그 밀서엔 어떤 방법으로 발동되는지에 대한 것까지는 모른다고 나 와 있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아티펙트인지도 모르고 그냥 마구 손을 대는 건 위험하단 말 이야. 그리고 솔직히 사용하는 법을 확실하게 알아두었다가 써먹고 싶기도 했었고 말야." "겨우 이런 아티펙트 하나 얻겠다고 이런 위험을 감수해야 할 필요 있었어?" "형이 모르니까 하는 말이지, 이거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우리 진영에 아무리 고 위 마법사가 많다고 해도 쉽사리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힐링포션과는 달리 고대 문명을 통해 만드는 법이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 만드는데도 몇 년이 걸린다 고. 특히 이것처럼 1서클도, 2서클도 아닌 4서클 파이어 필드가 들어있는, 무엇보다도 마나 가 뭔지 모르는 평범한 사람도 쓸 수 있게 만든 아티펙트는 몇 개 되지도 않아." "......" 내가 이렇게 말하자 에르가 형은 고개를 저쪽의 딜티 쪽으로 돌렸다. 나도 형을 따라 시선 을 옮겼다가 딜티가 왼쪽 약간 다리를 저는 것이 보여 곧 얼굴에서 웃음기를 없앴다. "...어..... 딜티가... 다친 건가? 딜티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에르가 형이 다시 나를 보고는 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저 녀석이야 미리 아티펙트가 있으니 주의하라고 언질을 해주었고 실력도 있으니까 충분히 무사했겠지. 하지만 다른 병사들은? 보다시피 저렇게 죽어버렸잖아." "그들 몇 명보다 이 아티펙트가 전쟁에서 이기는데 훨씬 더 큰 가능성을 가져다주지. 그러 니 좀 조용히 해줄래, 형?" 나는 작은 피어스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형의 말에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차피 주위 정 리를 하느라 시끄러운데다가 나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디트 경을 비롯한 기사들로 인해 우리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리는 없을 테지만, 혹이라도 소수의 병사들을 소모품으로 사 용했다는 이런 말이 새어나가는 것은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르가 형을 질책한 다음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다가 딜티가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수 있었다. 그런데 딜티는 다리를 다쳤다는 것을 일부러 감추려는 듯이 조금 전에 절고 있던 다리를 지금은 거의 절고 있지 않았다. "딜티. 괜찮으니?" "뭘?" 딜티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것을 보고 나는 피식 웃었다. "왜 그래? 내 앞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돼." "뭘?!" 오기가 들어간 건지 욱하는 표정으로 소리치자 나는 또 한번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거 그럼 딜티가 가져. 딜티가 중요한 일을 해줬으니까. 끼고 있다가 혹시라도 궁지에 몰 릴 일이 있을 때 써먹으라고." "됐어. 너나 써." "딜티, 너 역시 이 군의 중요한 전력이야. 그러니 그렇게 다치면 곤란하다고. 알았어?" 나는 딜티의 왼쪽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나 딜티는 지지 않고 큰 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 사실 이 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너이고, 이 군에서 가장 허약한 것도 너잖 아!? 비상시에 가장 죽을 가망성이 높은 게 누구겠어? 생각할 것도 없이 만날 비실거리기나 하는 너라고! 그러니 네가 쓰는 게 당연해. 내 말에 어디 틀린 곳이라도 있어?" "...내가 언제 비실거렸다는 거야......" 나는 괜히 심술이 나서 작게 투덜거렸다. 이럴 때는 약하다는 게 좀 서럽다고 할까. 사실 나 도 단검 던지기라는 특기가 있는 만큼 완전히 약한 편은 아니며, 지금껏 제대로 큰 병 한번 앓아본 적 없는 건강체질이건만 친구들 앞에서는 비실거리는 놈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응?" "그건 트로이 후작의 것이야. 뭐, 대대로 트로이 후작가문에 내려오는 아티펙트지. 한마디로 가보랄까?" 딜티는 장난기 가득한 말투와는 달리 차가운 눈초리로 내 손위의 붉은 피어스를 내려다보았 다. "바보구나, 딜티. 물건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하지만 네가 꼭 그렇다면 언젠가 네가 트로이 후작이 되었을 때 이걸 넘겨주지." "...카류.......!!" 에르가 형이 나의 말에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딜티는 흔쾌히 내 말에 긍정의 대답 을 했다. "그래주면 고맙겠어, 카류. 하지만 난 껍데기라도 상관없으니 위험할 땐 얼마든지 사용하라 고.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다름 아닌 너니까 그런 쓸데없는 것이 너의 발목을 잡는 것은 원치 않아." "우...웃기는 자식들! 그렇게 중요한 물건을 너네 맘대로 소유여부를 결정하겠다 이거야?" 우리들의 대화를 듣다 못했는지 에르가 형이 끼어 들어서 말했다. 조금 전부터 형의 표정이 영 평소 같지가 않아서 나는 일부러 그의 말을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내가 가진다면 아무 말도 없을걸? 그건 그렇고 에르가 형의 입에서 그런 모범적인 말이 나 오다니 나 정말 놀랐어. 형 정말 많이 컸구나?" "젠장할, 죽을래?" "하하, 여기서 날 죽여서 어쩌겠다고?" 금새 발끈한 표정으로 돌아간 형을 보고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그때 조금 전부터 주위를 둘러보고 있던 드리크 경이 우리들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에 쥐어진 피어스를 보며 말했다. "그 정보는 정확했군요. 전하." "그렇네요. 이제 내일 새벽까지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건가?" "이대로 믿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는 굉장히 이성적인 자입니다. 그런 그가 단순히 전하와의 친분을 이유로 우리 진영으로 들어오길 청하다니... 이 정보가 사실이 긴 했지만 역시 미심쩍군요." "저는 드리크 경과도 친한 줄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친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드리크 경은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가 오려는 시점에 먼저 척후병을 보내서 뒤통수를 맞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경계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가 왜 우리 진영으로 들어오길 청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자고요. 그때 사 실여부를 정해도 늦지 않겠지요." "예, 카류 님. 저는 조금 더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모쪼록 조심해주십시오." "걱정 마세요, 드리크 경. 이 것도 있는 걸요." 나는 피가 묻어서인지 더욱 붉게 빛나고 있는 피어스를 보이며 말했다. 묘하게 시야를 자극하는 횃불의 불길만이 아군의 진영에 붉게 비추어 주고 있었다. * * * 새벽바람이 땀으로 진득하게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살짝 흩날려 주었다. 그러나 그 바람마저 뜨거운 기운을 머금고 있어 유쾌한 기분이 되도록 만드는데 그다지 큰 도움이 되어주지 못 했다. "새벽녘마저 이렇게 덥다니......" "이 더위 덕분에 나타난 신기루 때문에 우리가 저번 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 그걸 생각한다면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화장실 들어갈 때 기분이랑 나갈 때 기분 다르다고 그렇게 간단히 감사하다는 마음 만 품을 수는 없는 거라고요." "화장실... 거참 마음에 드는 비유로군. 허허허허." 류스밀리온은 그 말을 듣더니 진짜로 마음에 들었는지 통쾌하게 웃어젖혔다. 그게 그렇게 마음에 드는가? 이곳 관문에 도달한지도 일주일, 류스밀리온은 홀로 이곳저곳을 훌훌 돌아다닐 수도 있을 정도까지 건강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아르 할아버지는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막사 안에서 안정을 취하며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저번 전쟁에서 8서클 마법을 더 많이 쓴 것은 다름 아닌 류스밀리온임에도 새벽녘부터 나와서 이렇게 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그의 능력은 치가 떨리 정도다.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워낙 욕을 많이 먹은 나머지 명이 질겨져 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젠 거의 완쾌하신 것 같은데 이번 전투에서도 8서클 마법을 써주실 수 있나요?" "이 놈아! 아주 날 말려 죽이지 그러냐!? 절대로 1번 이상은 못쓴다. 아니, 안 써! 나는 이런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할 생각은 개미눈물만큼도 없다." "그렇군요. 하지만 이번엔 그런 사기를 치지 않아도 충분하니까요. 그리고 드래곤의 환상을 보여주는 마법이야 꼭 류스밀리온 님이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쓸 수 있을 테니까 괜찮겠죠? 저번 전투에서 마법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그들이니 또 드래곤이 나타나 있는 상태에 서 8서클 마법을 경험한다면 한두 번 정도만 당해도 금새 혼란스러워 할거예요." "하지만 저번 전투에서 낙마한 마법사들 중 혹이라도 생포 당한 자가 있다면 이번 사기행각 도 끝인 셈이지." "허약한 마법사가 그런 북새통 속에서 활을 맞고 낙마까지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재수 없으면 살았겠지." "그렇네요." 우리들은 썰렁한 대화를 나누며 성밖을 내다보았다. 전투 도중 마법사들이 생포 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인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류스밀리온을 아군 내에서 마치 없는 존재처럼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더불어 이번 계획의 가장 큰 맹점이었으나 사실 그 상황 속에서 뒤쳐진 마법사를 일일이 따라다니며 정확하게 죽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넘어간 것이다. 경기병들에게 만약 뒤쳐지게 된다면 마법 사들을 죽여버리라고 명령하긴 했지만 그 명령을 수행할 경기병이 당해버린다면 끝이므로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졌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엇? 저건?" 한동안 멍하니 앞을 보며 딴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시작이군." 류스밀리온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연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작게 말했다. "트로이 후작도 참 재수도 지지리 없군요. 이런 곳까지 와서 두 번이나 같은 편에게 당하게 되다니......." "사람마다 타고난 인복이라는 건가?" "저의 수많은 땀과 노력이 만들어낸 결정체! 인.덕.이라고 해줘요, 류스밀리온 님." "이게 웃기고 자빠졌네. 인간이 점점 발랑 까져 가는 게 영 심상치가 않군." 류스밀리온은 보란 듯이 노골적으로 얼굴을 콱 구기고는 투덜투덜거렸다. 너무나 자연스럽 게 빡 돌았다느니, 발랑 까졌다느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을 보면 류스밀리온의 어휘 체계는 너무나 다채로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까지 말하지는 않는 데 왠지 모르게 류스밀리온의 말에만 이렇게 토를 달아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질 않는다. 예전에 하르몬 선배에게만 틱틱거렸던 것과 비슷한 원리일까? 그러고 보면 하르몬 선배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구나. 이번에 우리 진영으로 들어왔던 마법사들 중에 하르몬 선배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원체 하르몬 선배가 거짓말이나 배신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아르 할아버지가 애초 부터 하르몬 선배를 설득하는 마법사들에 포함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아르 할아버지는 아끼 던 제자와 직접적으로 대치하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고민 끝에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나 싶다. 나는 조금 더 그 자리에 서서 류스밀리온 님과 나름대로 알차다면 알차다고 할 수 있는 대 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한 병사가 부리나케 달려와 나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카류리드 전하. 척후병이 돌아왔습니다." "그래, 뭐라고 보고하던가?" "보고에 따르면 적군의 식량 창고로 추정되는 곳에서 불길이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불길 이 오르자마자 대략 육백기 정도 되어 보이는 기병이 적군 진영을 빠져 나왔다고 합니다." "호오, 식량 창고에서?" 류스밀리온은 재미있다는 듯이 콧소리를 냈다. "알았다고 전해라." 나는 병사에게 그렇게 말한 다음 여전히 재밌다는 표정으로 먼 곳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연 기를 바라보고 있는 류스밀리온을 독촉했다. "류스밀리온 님, 저희도 그만 가보죠. 저런 보고까지 도착했다는 것은 곧 그들이 도착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만일을 대비해 힘을 좀 빌려주셔야죠." "쩝, 그러지." 류스밀리온 님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순순히 나의 요청에 따라 성곽에서 내 려왔다. 점점 커지는 말발굽소리가 마치 몸이 아래위로 흔들리는 듯한 착각을 가져오게 했다. 상당 한 수의 기병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곧 활짝 열려진 관문 안쪽으로 드디어 여러 필의 말이 빠르게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가지 못해 다급히 말을 세워 야만 했다. 아군의 창병들이 넓은 원을 그리며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워~워워!!" 가장 앞에 서서 흥분한 말을 달래어 세운 청년은 꽤나 자그마한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드 리크 경은 일단 내게 나오지 말라는 눈짓을 하고 먼저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 자그마한 몸 집의 사내는 드리크 경을 보더니 머리를 푹 덮고 있는 투구를 벗어냈다. "카류리드 전하께 투항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 나는 투구를 벗어낸 그를 보고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익숙한 백금발의 앳된 얼굴을 하고 있는, 청년보다는 아직 소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 아이. "일라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 있던 딜티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는 것이 나의 귀로 들려왔 다. 그때 뒤쪽에서 또 다른 한 필의 말이 천천히 걸어나와 일라트의 곁에 섰다. 그는 부드럽 게 웃으면서 드리크 경을 향해 말했다. "드리크 경. 오랜만이군요." "게릭." 게릭 님은 주위에서 자신들을 향해 창을 곧추세우고 있는 창병들을 한바퀴 슥 둘러보더니 슬쩍 웃으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환영인사가 과격하시군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쉽게 저희들을 믿고 그냥 들여보낸다면 그것 또한 저를 실망시키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저희들이 어떻게 했으면 하고 바라십 니까?" "우선은 말에서 내리게. 그리고 일단 무장해제를 했으면 좋겠군. 그대들이 진실로 아군에 들 어올 마음이 있다면 곧 되돌려 줄 것이네." 게릭 님은 그 말을 듣더니 바로 병사들에게 명하여 말에서 내리도록 했다. 병사들은 게릭 님이 지시에 따라 차례로 허리에 찬 검을 벗어 주변의 병사들에게 건네었다. 그들의 움직임 은 꽤나 질서정연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드리크 경도 나와 마찬가지의 생각을 한 것인지 몸수색을 받고 있는 게릭 님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병사들의 훈련이 꽤 잘 되어 있군." "소수 정예를 목표로 키워낸 저 영지의 사병들이죠. 그들을 훈련시키는데 수많은 돈을 퍼부 었는데 지난 전투에서 제5군에 속해 있다가 마법 공격을 맞고 한순간에 숫더미가 되어버릴 뻔했습니다. 뭐, 재수 좋게도 우리들을 지휘하던 장군이 꽤나 유능한 분이셨기에 피해를 최 소를 죽일 수 있었지요." "그러셨군요. 그런데 적군에 유능한 장군이 있었다는 말에 다행한 일이었다고 말해도 괜찮 은 건지 좀 헷갈리네요." 나는 빙긋 웃으면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드리크 경이 왜 벌써 다가왔냐는 뜻으로 얼 굴을 약간 찌푸렸지만 굳이 이 자리에서 나를 책망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카류 님. 그저 이런 식으로 재회를 하게 되어 유감을 표할 뿐입니다." "그렇네요. 게릭 님. 그리고... 일라트." "...에, 예... 카류...리드 전하." 게릭 님의 0곁에 서있던 일라트는 예전처럼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충동적으로 그 백금색의 머리카락를 쓰다듬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조용히 마음속으로 삼키 고 일라트를 향해 웃어 보였다. "이젠 카류 선배라고 불러주지 않는구나?" "그...그러나 이곳은 학교도 아니고......" "그럼 카류 님으로 해. 그렇게 길게 부르는 건 닭살이야." "예...에? 닭살이요?" "일라트. 아마 카류 님의 말씀은 낯간지럽다는 말씀일게다. 그런 말은 느낌으로 대충 알아들 어야지." 게릭 님은 엷은 웃음을 띠며 자신의 순진한 아들에게 질책 아닌 질책을 했다. 그 모습을 보 자니 게릭 님은 일라트를 상당히 사랑하는 모양이다. 하긴, 그게 원래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이지. 그 동안 원체 비정상적인 아버지들만을 보아오다 보니 이런 것이 신선하게 느껴지기 까지 하는구나. "이런 곳에서 이야기하기보다는 안으로 들어가죠. 그리고 테잘렌, 저들을 감시하고 있다가 모두 들어오거든 성문을 닫고 척후병을 보내 국왕군의 동정을 살펴라. 특별한 움직임이 감 지될 시엔 즉시 보고하도록." 드리크 경은 테잘렌에게 모든 임무를 전담시킨 후, 우리들과 함께 회의장으로 쓰이는 막사 로 향했다. 그 회의장에는 중간급 이상의 중요 장군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내가 탁자 제일 가운데 앉자 양쪽 가에 길게 서있던 다른 사람들이 지위대로 차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럼 빠르지만 바로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이런 어색한 분위기는 게릭 님도 원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물론입니다, 카류 님. 얼마든지 물음에 답해드리겠습니다." 게릭 님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일라트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을 받자 항시 그랬 듯 굉장히 쑥스러워하며 그 조그만 얼굴이 빨갛게 붉혔다. 저렇게 다른 성격의 부자라니... 아니, 어쩌면 일라트는 어머니를 닮은 것일지도 모르지. "밀서에는 게릭 님이 저와의 친분을 생각하여 아군의 진영으로 들어오고 싶다고 적혀있었습 니다만, 진심이십니까?" "제가 설마 그런 밀서에 거짓을 고하여 보내었겠습니까." "게릭. 장난은 그만하게. 그대가 겨우 그 정도의 이유로 아군에 투항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내가 믿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나? 그대가 얼마나 냉철하고 이해 타산적인 인물인지는 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네." 드리크 경이 꽤 딱딱한 어투로 말하자 게릭 님이 입가를 손으로 살짝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나는 자세를 바로 고치고 그가 할 다음 말에 신경을 집중했다. 입술을 매만지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뭔가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때 자주하는 게릭 님의 버릇이었다. 그리 고 저런 행동을 할 때는 으레 핵심을 찌르는 날카롭고 논리적인 말을 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카류 님과의 친분을 생각해서가 맞긴 하지만 좀 더 여러분을 제대로 납득시킬만한 말이 필 요한 모양이군요." "밀서에는 길게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드리기로 하지요. 그럼 어떤 이유인지 상세 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저는 평민 출신입니다. 그러나 카류 님께서는 저희들 같은 평민에게 항상 친절 히 대해주셨지요. 그 친분으로 인해 드리크 경과도 이렇게 인연을 맺게 되신 것이고요. 저 역시 항상 전하의 그런 행동에 호감을 가지게 되었지요. 그러니 저의 이런 행동도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다인가?" 드리크 경은 꽤나 딱딱한 말투로 게릭 님에게 되물었다. 이번의 드리크 경은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게릭 님을 경계하고 있었다. 게릭 님도 그것을 충분히 느꼈는지 입술을 매만지 던 손을 내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자리를 생각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피하고 싶었는데 역시 무례를 범하더라도 그 냥 말해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그편이 여러분께 믿음을 드리기에 더 좋을 듯 하니까요." "이 자리에 계시는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아해와도 같은 마음씨를 가지고 계시어 웬만한 무 례정도는 코웃음도 안치시니 네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주절대도 상관없다." 게릭 님이 뭐라 말을 이으려 하는데 난데없이 류스밀리온이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불쑥 끼어 들었다. 게릭 님은 그를 보더니 이채롭다는 눈빛으로 류스밀리온을 뚫어져라 바 라보았다. "뭘 보는 거냐?" 류스밀리온이 그 시선을 재수 없다는 느낌을 가득 실은 시선으로 맞받아쳐주자 게릭 님은 입가에 웃음을 띄우고는 말했다. "안하무인격의 행동과 무엇보다 아름다운 핑크빛 머리카락. 당신께서 바로 류스밀리온 님이 시로군요." "푸훗~~!!" 내가 새어나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소리를 내어버리자 류스밀리온이 바로 나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나는 웃음을 쉽사리 멈출 수가 없었다. 게릭 님의 입에서 나온 ‘아름다운 핑크빛 머리카락’이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류스밀리온의 그 분홍색 머리 카락이 중년 남자의 머리카락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곱게 아름답다는 것은 사실이 다. 그 예쁜 머리카락이 얼굴이나 나이에 너무나 안 어울린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어깨를 조금씩 떨고 있는데 게릭 님이 다음 말을 이었다. "놀라울 따름입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이곳에서 류스밀리온 님을 뵙게 되다니......" "네놈 지금 시비 거는 거냐?" 류스밀리온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열 받았는지 게릭 님의 말을 끊고 으르렁거렸다. 그는 자신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게릭 님을 매섭게 째 려보았다. "그게 아니라 류스밀리온 님의 특징을 그렇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8서클의 마법사라는 사실은 그냥 봐서는 드러나지 않으니까요." "흥, 내가 어떤 놈인지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 텐데? 지금 이 자리에서 죽고 싶은 거냐?" 열 받은 류스밀리온이 금방이라도 마법을 쓰며 난동을 부릴 것 같아 어떻게 이들을 말려야 하나 하는 생각에 잠깐 고민에 빠져 있는데 게릭 님이 여전히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류 스밀리온을 향해 말했다. "저는 류스밀리온 님께서는 조금 무례한 면이 없진 않으시지만 소문만큼 악한 분은 아니시 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생각하여 소문을 걸러듣는다면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지 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 배 사건의 실제 생존자를 알고 있으니까요." "......" 류스밀리온은 더 이상 으르렁거리지 않고 그저 눈을 가늘게 뜨고 게릭 님을 가만히 바라보 았다. 아마 류스밀리온으로서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 사람을 만난 것은 처음이 아니었 을까 싶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니 잠깐!" 나의 고함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내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나는 게릭 님만을 바라 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류스밀리온 님의 존재를... 예상하고 있었다고?" "왜 그래? 류스밀리온 님이라면 우리 아르윈 왕국뿐만이 아니라 이 크로시아 대륙에서 모르 는 자는 드물 정도잖아. 그러니 아이시스 남작이 류스밀리온 님에 대해 아는 것은......" 에르가 형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그의 뒤에 서있던 형의 부관인 이트가 그제야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급히 형이 말하는 중간에 끼어 들 었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왕군에 속해 계셨던 아이시스 남작 님께서 어떻게 류스밀리온 님이 아군에 속해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어찌됐든 그렇다는 것은 설마 지 금 국왕군은......!!" "후후... 그냥 제 말을 지나쳐버리는 줄 알고 여러분의 능력에 실망하고 있던 차였는데 다행 이로군요. 역시 카류 님이십니다." 게릭 님이 그렇게 말하자 드리크 경이 발끈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게릭! 지금 자네가 감히 전하를 시험하려 든단 말인가!! 지금 그대의 처지를 알고나 있는 건가?" "하지만 저도 저의 목숨을 맡길 분인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솔직히 의도한 것도 아 니었고 말입니다. 여러분들께서는 별것도 아닌 일로 웃으시느라 군의 중요한 정보를 지나쳐 버리시더군요. 이대로 계속 몰랐다면 분명 제6왕자군은 큰 낭패를 보았겠지요." "......" 그 말을 들은 막사 안의 사람들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게릭 님 은 그런 사람들을 보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실은 그 정보는 제가 국왕군에게 가르쳐 준 것이나 다름이 없는지라 양심에 찔려서 그랬던 부분도 조금 있었습니다." "그대가?" 류스밀리온 님은 곧바로 발끈하지 않고 신중하게 게릭 님에게 되물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 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실은 생포한 마법사를 심문하여 그 드래곤의 진상에 대해 알아내자는 의견을 제가 가장 먼 저 꺼냈지요. 카류 님께서 진실로 화룡의 가호를 받은 것인지 정말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아군의 산통을 전부 다 깨셨다?" "류스밀리온 님. 그다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일지 모르나 국왕군에도 세스케인 님을 비 롯한 유능한 장군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그러니 제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해도 언젠가는 생포한 마법사에게서 그 사실을 알아낼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개 인간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것 자체가 정말 얼토당토않은 말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국왕 군에게 그것을 믿도록 만드셨으니 제가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거기까지 말한 게릭 님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마법사를 통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고 저는 카류 님의 진영에 가담할 결심을 굳힐 수 있었습니다. 류스밀리온 님이나 다른 마법사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그 능력을 보 고 카류 님이시라면 충분히 저의 군주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 칭찬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것보다는 조금 전 왜 저의 편에 설 마음 이 생기셨는지에 대해 하려고 하셨던 말씀이나 마저 해보시죠. 설마 그냥 슬쩍 이렇게 넘어 가려던 생각은 아니셨겠죠?" "물론 아닙니다. 전하. 그럼 원하시는 대로 말씀드리죠." 게릭 님은 여전히 입술을 손으로 매만지며 입술을 거의 전부 가리고 있었다. 그러나 순간적 으로 그 손 사이로 그가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저는 국왕군에서 설자리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저의 의견은 다른 고위 귀족들의 화를 자초할 뿐이었죠. 그것은 저의 의견이 틀린 것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제가 평민 출신 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6왕자군은 다릅니다. 카류 님께서는 보통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평민에게도 친절하게 대해주시니까요. 제가 평민 출신이라는 사실은 오히려 득이 될 수 있지요." "제가 평민 출신을 옹호하기 때문에 아군의 진영으로 넘어올 결심을 하셨단 말씀인가요? 그 래서 밀서에 저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온 것이라고 적으신 것이고요?" "뭐, 그런 것이죠." 나는 거기까지 듣고는 조금 의아해졌다. 확실히 평민 출신인 그가 보수적인 귀족들 사이에 서 크게 출세를 하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러나 확실히 나라면 그가 평민이라고 무 시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게릭 님이 아군으로 들어올 생각이 확실하다면 그의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높은 직위에 앉혀 줄 용의도 있다. 따라서 확실히 그의 말은 틀린 말 이 아니었다. 그러나 게릭 님은 처음 이 말을 할 때 무례한 말이라 그 정도에서 끝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말의 어디가 그렇게 무례하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 뿐만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단순히 카류 님의 인격을 믿고 제6왕자군에 가담하기엔 저의 미래가 너무 불확실하지요. 그러나 카류 님의 중심세력 은 리아 후작 님,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시는 드리크 경입니다. 그리고 드리크 경은 다름 아닌 평민 출신입니다. 만약 카류 님께서 평민들을 박대하는 일이 생기는 날에는 카류 님은 드리크 경과의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겠지요. 따라서 카류 님은 좋든 싫든 평민 출신의 신하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형편입니다. 아니, 드리크 경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 해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좋은 대우를 해주어야만 할 것입니다. 카류 님은 아무리 평민 출신인 제가 아니꼽고 귀찮다하더라도 드리크 경의 눈치가 보여서라도 저를 내치거나 냉대 하실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게릭!! 더 이상의 무례한 언행은 삼가게!! 카류 님께서 눈치를 본다니 그 무슨......!!"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드리크 경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리는데 보증수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최소한 제가 가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만한 기회를 얻게 되겠지 요." 게릭 님은 이런 자리에서 잘도 저런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말했다. 그러나 확실히 그의 말 엔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다. 계속 불신의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있던 드리크 경도 그의 무례 한 언행으로 언짢은 표정을 짓고 있긴 하나, 그의 거짓 투항에 대한 불신은 많이 풀린 상태 인 듯 보였다. "후후, 역시 꽤나 무례한 말이었지요? 혹시나 카류 님께 미운 털이라도 박히지 않을까 해서 말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게릭 님은 제대로 나의 표정도 살피지 않았다. 아마도 그는 내가 이 정도의 말로 자신을 내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 묻지. 현재 상황이야 아군이 유리하다고는 하지만 드래곤에 대해서 도 들통난 상태이며 전체적으로 봐서 아군이 병력은 국왕군의 새발의 피에도 못 미친다는 것을 그대도 충분히 알거라 믿는다. 그런데 네가 이곳에서 그 정도의 보증수표를 얻었다고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이쪽이 완전히 망하면 너 역시 끝장이지 않은 가?" 웬일로 그 긴 이야기를 토 하나 달지 않고 말없이 듣고 있던 류스밀리온이 오랜만에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게릭 님을 향해 현실적인 질문을 했다. 그러나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눈 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류스밀리온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이기 때문에 아군이 굉장히 밀리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은 은연중에 터부시되고 있 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도 생각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카류 님의 진영으로 넘어오 지 않고 눈치를 보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카류 님께서는 저의 기대를 저버리시지 않고 저번 전투에서 3배가 넘는 군사와 대적하여 마법사들을 빼오고, 예기치 않은 속임수로 대승 리를 거두는 쾌거를 이룩하셨습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모든 귀족이 적극적으로 전 하를 치기 위해 병사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음 전투에서 또 한 번 국왕군을 물리치신다면 그들 중립 귀족들의 생각도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제6왕 자군에 가담해도 괜찮을지 모른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들을 어떻게든 설득하 여 영입하게 된다면 카류 님은 이 불리한 형세를 상당수 만회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가 여 곳에 오기 전에 식량창고에 불을 질렀으니 보급이 여의치 않은 국왕군이 이대로 후퇴를 할 가능성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후퇴를 하여 재정비를 하거나 원군을 부른다 면 아군의 승리는 불투명해질 것이 뻔하고 네가 말하는 중립귀족들의 영입도 어렵게 될텐 데?" "국왕군은 여러 귀족들이 참여하고 있는 만큼 권력 다툼이 심합니다. 여기서 국왕군이 후퇴 를 한다면 이번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트로이 후작은 다른 귀족들, 특히 양대 공작가에 게 꼬투리를 잡히게 되겠지요. 따라서 트로이 후작은 중립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라이벌 격이라 할 수 있는 다른 고위 귀족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후퇴하지 않고 바로 관문을 공격하여 승리하려고 할 것입니다. 카류 님께서는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반드 시 승리를 이끌어내셔야 합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얻어내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카류 님께 희망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겠지요. 이번 전쟁은 단순한 국지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게릭 님은 거기까지 말한 뒤에 입술에서 손을 내렸다. 왠지 그 행동에 지금껏 잔뜩 굳었던 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만큼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군의 현 상태를 정확하게 집어 내는 날카로운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좋은 충고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심하도록 하지요." "저야말로 저의 무례한 말에도 화를 내지 않으시고 그대로 받아들여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뭐, 속 시원히 말을 하고 나니 오히려 좋군요. 게릭 님." 나는 기분 좋게 말했다. 게릭 님의 말이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 의 무례한 말투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 짧은 대화를 하면서 아군의 방향을 제시해주 기까지 했던 그가 아군으로 들어오려는 마음이 확실하다면 우리들로선 상당히 큰 전력을 얻 게 되는 셈이다. 그의 비상함은 권위적인 귀족들도 내심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의 지식 이 아군의 승리에 큰 도움을 줄 것이 틀림없다. "그건 그렇고 아주 작정을 하고 나오신 모양이군요. 일라트까지 이곳에 데려오신 것을 보면 말입니다." "일라트도 이제 성인식을 거친 어엿한 성인이니까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일라트가 조금 숫 기가 없어서 제대로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게릭 님은 애정이 듬뿍 담긴 눈길로 일라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날카로움이 들어있는 조금 전의 말과는 다르게 이번 말은 너무나 부드럽고 상냥한 느낌이었다. 일라트는 그의 말에 어 쩔 줄을 모르고 더욱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귓볼까지 빨개진 일라트를 보자니 오랜만에 보는 그 귀여운 모습에 절로 웃음이 배여나왔다. "좋습니다. 게릭 님. 하지만 한동안은 자숙해 주십시오. 개인적으로 이번 대화에서 나름대로 게릭 님의 결심에 믿음을 가지게 되긴 했지만, 투항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게릭 님을 바로 전 투에 참여시키는 것은 조금 곤란하군요." "물론 충분히 이해하는 바입니다. 일단 저는 후방으로 물러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곳 을 나서기 전에 식량창고를 불을 질렀기 때문에 국왕군이 들이닥칠 시기는 아마도 멀지 않 았을 테지요." "훗, 트로이 후작도 자신의 꾀에 자신이 넘어갔으니 기분이 꽤 묘하겠군요." 나는 트로이 후작이 열 받아 펄펄 뛰는 모습을 상상하며 낮게 웃었다. ------------------------------------- 아아.. 허접허접... T-T 용서하세요오~~!! 아비스라라의 메일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카페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난데없이 외전 - 후르부크 백작의 별장 귀족들의 별장이 즐비한 거리를 화려한 보석들로 치장된 마치가 달리고 있 었다. 그리고 그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민 조그마한 아이가 바람에 자신의 갈색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엉키는 것도 아랑곳 않고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딜티!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지 말거라!! 위험하지 않느냐! 그리고 트로 이 후작가의 장남이 그런 품위 없는 짓은 하는 것이 아니다!!" 의자 위로 쭈그리고 앉아 창틀에 양손을 올리고 수도의 거리를 구경하던 딜트라엘은 자신의 아버지인 트로이 후작의 호령에 찔끔하여 얼른 다리를 내리고 바른 자세로 앉았다. 그러나 올해로 5살이 된 딜트라엘의 앉은키로 는 그냥 고개를 돌리는 것 정도로 창 밖으로 내다볼 수가 없었다. 처음으 로 온 수도인 탓에 밖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늘같은 아 버지의 말이 떨어진지라 딜트라엘은 엄지손가락을 꼬물꼬물 움직이며 고개 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트로이 후작은 그런 자신의 아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가 그냥 시선을 창 밖으로 옮겼다. 곧 마차는 거대한 어느 저택에 멈추어 섰다. 철제 대문에 새겨진, 아름다운 처녀가 커다란 구슬을 곱게 품고 있는 문양이 후르부크 백작의 저택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트로이 후작 님. 제 초대에 응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트로이 후작이 대문을 내려서 안뜰을 어느 정도 걸어들어 왔을 때 후르부 크 백작이 자신의 아내와 함께 걸어나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아니오, 어차피 수도에 계속 머물러야 할 참이었으니까 그대와 저녁을 함 께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그건 그렇고 다른 자들은 아직 당도하지 않은 모양이군." "예, 후작 님께서 가장 먼저 오셨습니다. 일단은 안으로 드시지요." 트로이 후작을 안내하기 위해 발을 옮기려던 후르부크 백작은 후작의 곁에 서 눈치를 보며 이곳저곳을 힐끔거리고 있는 딜트라엘을 보고 빙긋 웃었 다. "딜트라엘 님이신 모양이지요? 못 본 사이에 많이 성장하셨군요." "아아, 그렇다네. 딜트라엘! 뭘 그렇게 힐끔거리는 것이냐! 똑바로 앞을 보 거라!!" "예?! 죄…죄…죄송합니다, 아버지……." 후르부크 백작의 말에 긍정의 말을 해준 트로이 후작은 이내 못마땅하게 딜트라엘을 향해 소리쳤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딜트라엘은 그만 말을 더 듬었다. 말을 더듬는 것을 아버지가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에 딜트라엘은 또 한번 떨어 질 불호령이 두려워 눈을 꼭 감았다. "자제 분을 엄하게 키우시는군요." "후… 그만 들어가세." 트로이 후작은 잔뜩 얼어있는 딜트라엘을 보고 포기했다는 듯이 한숨을 쉬 었다가 저택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후작 님. 제 아들 녀석들입니다. 어서 인사들 드리거라." 트로이 후작을 귀빈실로 모신 후, 후르부크 백작은 당연한 차례로서 자신 의 아들을 데려와 인사 시켰다. 청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두 명의 아이들 이 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고 후작은 그만 앉아도 좋다는 말을 전했다. 딜트라엘은 자신의 맞은 편에 앉는 아이 중 한 명을 보고 눈을 빛냈다. 난 생 처음 보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였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10살이 좀 넘 어 보이는 자신의 형의 옷자락을 꼭 쥐고 조금이라도 떨어질 새라 바짝 붙 어있었다. 잠시동안 간단한 이야기를 건네던 후르부크 백작은 지루해 하는 아이들을 슬쩍 돌아보고는 빙긋 웃었다. "딜트라엘 님과 아이들은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특히 세미 르는 딜트라엘 님과 동갑이니 어울리기 좋을 것입니다." 후르부크 백작의 말에 트로이 후작은 영 미덥지 않다는 표정으로 딜트라엘 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던 건지 딜트라엘은 주눅이 들어 고개를 폭 숙였다. "…그렇게 하도록 하지." "세스케인. 잠시 딜트라엘 님과 세미르와 함께 정원 구경이라도 하고 있거 라." "예, 아버지." 아버지와 트로이 후작에게 인사를 한 후, 세스케인은 동생들의 손을 꼭 잡 고 정원으로 걸어나왔다. 키가 작은 세미르와 딜트라엘은 세스케인이 한걸 음 걸을 때마다 작게 몇 발자국씩 빠르게 걷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세스케인은 연신 빙긋 웃음을 지었다. 세스케인은 정원 안쪽에 배치된 탁자까지 걸어나온 후, 그들을 안아 올려 앉혀주었다. 아직 어린 그들이 정원의 경관에 맞추어 조금 높게 디자인 된 의자에 품위 있게 앉기가 힘들었던 탓이다. 세미르와 정면으로 마주보는 곳에 앉게 된 후에도 딜트라엘은 말없이 의자 에 앉아 있기만 했다. 속으로는 처음 보는 같은 또래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인 그는 먼저 입을 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 던 것이다. 세미르 역시 세스케인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기 에 둘은 쉽사리 말문을 트지 못했다. "세미르, 같은 나이잖니? 형 곁에만 있지 붙어말고 딜트라엘 님께 한마디 라도 해봐." "싫어. 난 형아하고 놀래.!" "모두가 함께 놀면 더 재미있을 거 같지 않니?" "난 형아하고 둘이 있는 게 더 좋아." 아무래도 딜트라엘이 먼저 입을 열기는 힘들 것 같다고 생각한 세스케인은 세미르를 부추겨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끌어보고자 했다. 그러나 세미르 는 딜트라엘과 친해질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어느새 의자에서 뛰 어내려 자신의 곁으로 뛰어와 옷자락을 꼭 잡는 동생을 보며 세스케인은 한숨을 쉬었다. 세스케인은 자신보다 6살이나 어린 자그마한 세미르가 너무 귀여워서 아주 어릴 때부터 끼고 다니며 돌봐 주곤 했었다. 그랬기에 세미르가 자신을 따 르는 것이 꽤 흐뭇해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붙어 늘어지면 곤란한 감도 없지 않았다. 한동안 둘을 친하게 만들어보려는 노력을 해보았지만 영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딜트라엘은 위풍당당한 트로이 후작의 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굉장히 소심했고, 세미르는 너무 자신만을 따랐던 것이다. 한동안의 진땀나는 노력 끝에 결국 그들을 친하게 만드는 것을 포기한 세스케인은 둘의 손을 꼭 붙들고 하릴없이 정원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문 근처로 당도했을 때 세스케인은 약간의 소란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또 다른 마차가 후르부크 백작가의 별장에 도착한 것이다. 전체를 백색으 로 칠한 다음, 녹색 계통의 보석들로 치장한 그 마차는 척 봐도 대단한 사 람이 타고 있을 것 같이 기품이 넘쳤다. 후르부크 가의 시종들은 마차 안 의 귀빈들을 맞이하기 위해 부리나케 그쪽으로 달려가서 예를 차리며 조심 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러나 미처 다 열기도 전에 녹색머리의 꼬마가 문을 박차고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야 도착인가?" "에르가! 문이 전부 열리기를 기다려도 되지 않느냐! 대체 왜 그렇게 성급 하게 구는 것이냐!" 말없이 세스케인의 곁에 가만히 서있던 딜트라엘은 마차에서 내리며 소리 치는 누군가의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항상 듣던 아버지의 호통과 비슷했 기 때문이다. 그러나 꾸지람을 들은 녹색머리의 꼬마는 자신처럼 찔끔하여 고개를 숙이지 않고 문고리를 쥐고 있는 시종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이 놈이 문을 거북이처럼 천천히 여니까 그랬던 거죠! 네놈!! 그것도 빨랑 열지 못하는 거냐?! 이봐, 너희들, 이놈을 끌어내!! 그리고 다시는 게으름을 피지 못하게 손가락을 잘라버려!!" 지명을 받은 시종과 손가락을 자르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은 놀라고 말았 다. 마차의 문양은 분명 그 유명한 남부의 무가 에스문드 백작 가의 것이 었다. 아무리 5살 어린 꼬마가 한 말이라고는 하나, 이런 대귀족이 하신 말 씀인 만큼 하늘에서 별을 따오라는 억지도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녀석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놀라지 말고 그냥 물러가거라. 에르가!! 정말 그만둘 수 없겠니!" "뭘요!?" 자신의 명령이 아버지에 의해 묵살 당하자 에르가는 입이 다발만큼 튀어나 와 빽 소리질렀다. 에스문드 백작은 뿔난 망아지같은 자신의 아들을 어떻 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하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땅을 발로 툭툭 차며 불만스러워 하던 에르가는 멀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을 발견했다. "어, 저건?" 에르가 역시 보통 귀족들이 그렇듯 에스문드 영지의 거대한 저택에서만 살 면서 자신의 또래를 제대로 만나보지 못했기에 처음 보는 자신과 비슷한 몸집의 아이들에게서 금방 호기심을 느꼈다. 에르가는 본능이 명령하는 바 에 따라 그 즉시 그들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에스문드 백작은 갑자기 어디론가 뛰어가는 자신의 아들 때문에 또 한번 처절하게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너희들 누구야?" 항상 에스문드 영지의 저택에서만 살았던 에르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들을 향해 반말을 사용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딜트라엘은 본능적으로 반발심을 느꼈다. 아버지가 매일같이 하던 말이 바로 ‘너는 아르윈 왕국 최고의 귀족가인 트로이 후작가의 장남이다’가 아니었던가. 그런 자신이 누군가에게 반말을 듣는 것은 절대로 용납 받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무…무례하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딜트라엘은 비장한 얼굴로 한두발자국 앞으로 걸어나가며 나름대로 엄한 목소리로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 정도로 쉽게 무너질 만큼 상식적인 녀석이 아니었다. "이게 누구한테 무례하대! 맞아볼래?" 에르가는 경고의 말이 무색하게 그 즉시 주먹을 들어올려 딜트라엘의 머리 를 세게 내려쳤다. 어린애가 친 것치고는 상당히 묵직한 타격음이 정원 내 에 울려 퍼졌다. "아악!!" 딜트라엘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이제껏 야단을 맞은 적은 많아도 직접 맞 아본 적은 없었던 딜트라엘에게 그 일격은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다. 눈물 을 흘리는 것을 수치로 생각하는 트로이 후작의 오랜 교육 탓에 용케 울음 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욱신거리는 머리를 감싸안고 땅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헉? 딜트라엘 님!!" 세스케인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스라치게 놀라 딜트라엘을 일으키는 도중에 에스문드 백작이 뒤늦게 뛰어왔다.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또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예감하고 에르가를 거칠게 자신의 곁으로 끌어내고 가장 말이 통할 것 같은 세스케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난 에스문드 백작이라고 한다. 그런데… 또 이 녀석이 무슨 짓을 저질렀 느냐?" "…아… 그러니까... 이쪽 분은 트로이 후작님의 아드님이신데… 그것 이……" "으이구!! 이놈아. 이젠 후작님의 아들에게까지 손을 대느냐!!" 에스문드 백작은 세스케인의 말을 조금 듣더니 바로 사태를 짐작하고 에르 가의 머리를 꾹꾹 짓눌렀다. "뭐예요! 으윽!! 이거 놓으라구요! 내가 뭘 어쨌다고!!" "어서 사과하거라! 그리고 깍듯이 존댓말을 사용하란 말이다!!" "내가 왜요? 내가 미쳤어요? 에스문드 백작가의 장남인 내가 존댓말을?!" "후작은 백작보다 한단계 더 높은 작위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 히 존댓말을 써야하는 거야!" "……!!" 에르가는 그 말에 여간 충격을 받은 것이 아니었는지 입을 조금 벌리고 주 먹을 얻어맞고 눈물을 글썽거리는 갈색머리 꼬맹이를 쳐다보았다. 에르가 로서는 저런 꼬맹이가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 쉽게 용납되지가 않 았다. "에스문드 백작님." 한창 에르가에게 설교를 늘어놓으려던 에스문드 백작은 뒤쪽에서 자신을 부르는 시종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창 말씀 중이신데 정말 죄송합니다. 귀빈실로 모셔오라는 후르부크 백 작님의 분부가 있으셨습니다." "후우, 그래. 지금 곧 가지." 시종의 말에 대답을 해준 에스문드 백작은 에르가를 지긋이 노려보았다. "어서 사과하지 못하겠느냐!!" "치잇!!" 에르가는 입을 삐죽삐죽거리다가 에스문드 백작의 손에 강제로 딜트라엘의 앞에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부모님이 아닌 자에게 처음으로 고개를 숙인 에르가는 발끈 화가 나서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손에 도 불구하고 이를 악 물고 목에 힘을 주어 고개를 억지로 들어 올렸다. 에 스문드 백작은 아들의 그 오기와 힘에 질려 더 이상 사과를 강요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딜트라엘 님. 아직 어려 분별이 없답니다. 하하하. 그건 그렇고 한동안 보지 못했던 사이에 늠름하게 크셨군요." 딜트라엘은 에르가의 일격이 상당했던 모양인지 아직 눈물을 끔쩍이며 세 스케인의 손에 붙어 있었다. 에스문드 백작은 겸연쩍은 표정을 짓다가 에 르가의 손을 팍 끌어당겼다. "들어가자! 후르부크 백작과 트로이 후작님께 인사를 올려야지!" "그냥 여기서 놀면 안돼요? 한 달이나 마차에만 앉아 있느라 지루했단 말 예요." "누가 널 더러 따라오라고 했느냐? 네가 수도에 오고 싶다고 졸라서 마차 를 탄 것이지 않느냐!" "수도에 가고 싶댔지 누가 마차를 타고 싶댔나?" "에르가!!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에스문드 백작은 투덜거리는 아들을 보고 엄하게 불호령을 내렸다. 그러나 에르가는 콧방귀도 끼지 않고 에스문드 백작의 손을 팩 뿌리치더니 곧장 정원의 안쪽으로 도망가버렸다. "저 녀석이!! 대체 누굴 닮아서 저렇게 버르장머리가 없는 건지!!" "하하… 제가 따라갈 보겠으니 에스문드 백작님께서는 먼저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아, 저는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라고 합니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 니다." 세스케인은 정원 안쪽으로 도망치는 에르가의 뒷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뜨 리다가 곧 표정을 바꾸고 에스문드 백작을 향해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아아, 세스케인. 오랜만이구나. 그러고 보면 파블료프 왕립학교에 다닌다 고 했었지." "예, 그래서 일년 전부터 이곳에 머물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 후우, 여전히 예의가 바르군. 후르부크 백작이 정말이지 부럽네, 부러워." 에스문드 백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종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안쪽 으로 걸어 들어갔다. 세스케인은 완전히 안쪽으로 사라진 에르가를 찾기 위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느 정도 들어갔을 때 조금 전에 자신들이 있던 의자에 앉아 있는 에르가를 발견했다. 세스케인은 저 높은 의자에 무 슨 수로 올라간 건지 궁금해하면서도 일단은 친근한 느낌을 주기 위해 빙 긋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갔다. "여기 있었구나. 반갑다. 나는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라고 해. 세스케인 형 이라고 불러 주겠니?" 부드럽게 말을 거는 세스케인을 삐딱한 시선으로 돌아보던 에르가는 의자 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자세로 도도하게 말했다. "난 에르가 혼 에스문드. 에스문드 백작가의 차기 가주가 될 몸입니다. 에 르가라고 불러도 좋아요." "하하. 그래." 세스케인은 겨우 5살 난 조그마한 아이가 고개를 빳빳이 들면서 말하는 모 습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의 소개말에 웃음을 흘리는 세스케인을 영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에르가는 세스케인 곁에 붙어있는 두명 의 아이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는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려 말했다. "너흰 이름이 뭐야? 입 없어? 벙어리야?" "……." "이쪽은 내 동생 세미르야. 세미르 어서 인사해. 친구해야지." 조금 전의 일격(?)으로 주눅이 든 동생을 보고 세스케인은 대신 소개를 시 켜주었다. 그리고 에르가와 악수라도 하라는 의미에서 에르가 쪽으로 슬쩍 밀어보았지만 세미르는 깜짝 놀라며 형의 뒤쪽으로 쏙 숨어버렸다. "웃기는 놈이네. 뭐야, 너? 지금 계집애처럼 숨은 거냐?" 세스케인은 귀족답지 않게 입이 험한 에르가를 보고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 레 저으면서도 딜트라엘을 마저 소개하기 위해 그를 슬쩍 앞으로 밀었다. 딜트라엘은 자신을 에르가 쪽으로 밀자 또 한번 그 엄청나게 아픈 주먹이 날아올 것만 같아 주춤하고 말았다. 그러나 트로이 후작가의 아이라면 언 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라 비장한 각오로 순순히 그의 손길에 따라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쪽은 트로이 후작가의 차기 가주가 되실 딜트라엘 님이야. 트로이 후작 가라면 리아 후작가와 함께 아르윈 왕국에서 실질적으로 최고의 세력을 가 진 대단한 가문이지." 세스케인은 속으로 피식피식 웃으며 조금 전 에르가가 하던 식대로 딜트라 엘을 소개했다. 그 소개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에르가는 인상을 찌 푸리며 딜트라엘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그리고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반갑, 습… 니다." 딜트라엘을 보면서 말하는 에르가의 존댓말은 어디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 이 하는 말처럼 어색했다. 세스케인은 그 모습이 너무 우스워서 에르가가 보지 못하게 고개를 들리고 웃음을 참기 위해 잔뜩 인상을 찡그려야만 했 다. 그러나 딜트라엘은 에르가의 존댓말을 듣고 기가 확 살았다. 저 녀석이 드 디어 자신에게 고개를 숙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 반갑다. 자……." 딜트라엘은 성큼성큼 에르가에게 걸어가서 악수를 하자는 의미에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에르가는 그 손에 불만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가히 동물 적인 감각으로 상대가 자신에게 기어오르려(?) 한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탁! "앗!" "에…에르가!!" 에르가가 딜트라엘이 내민 손을 난폭하게 쳐내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깜 짝 놀랐다. 그는 에르가가 딜트라엘이 자신보다 높은, 대단한 가문의 아이 라는 것을 충분히 깨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퉁명스러운 말은 하되, 직접 폭력을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라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또 이렇게 일 을 저지른 것이다. 딜트라엘의 새빨개진 손을 살피다가 에르가에게 질책의 시선을 던졌지만 에르가는 도리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왜요? 나도 손 아프단 말야. 왜 저 녀석만 싸고도는 건데요!!" "에르가, 앞으로 절대 그런 짓은 하면 안돼. 자칫하면 트로이 후작님께 크 게 혼쭐이 날 수도 있다고. 알겠니?" "안 하면 되잖아요, 안 하면!! 참나. 겨우 이 정도 가지고……." 에르가는 입을 삐죽이더니 조금 떨어진 곳에 만들어진 호수를 발견하고 곧 장 그쪽으로 뛰어갔다. 아르윈 왕국의 정원에는 분수를 만들어 두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이 곳 별장에만 새로운 분위기를 내보고자 후르부크 백작이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세스케인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 호수 안의 물 고기들을 바라보는 에르가에게 다가갔다. "예쁘지?" 그러나 에르가는 들은 채도 않고 호숫가 근처의 조금 큰 돌멩이를 들어올 렸다. "에르가?" 세스케인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는데 에르가가 그 돌멩이를 호수를 힘 껏 집어던졌다. 덕분에 호수 가까이에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세스케인에게 물이 크게 튀어버렸다. "우왁!!" "에익!! 도망갔다!" 상당량의 물이 튀었기에 세스케인은 약간 인상을 쓰며 그것을 손으로 털어 냈다. 그러나 에르가는 세스케인의 행동 따윈 눈곱만치도 신경 쓰지 않고 호수를 바라보며 안타깝다는 듯이 발을 동동 굴렀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물고기 잡으려고요!!" "뭐?" 에르가가 다시 커다란 돌을 집어드려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다급히 그를 말렸다. "그만둬. 물고기들이 놀라잖아. 왜 물고기를 잡겠다는 거니?" "저거 잡아서 구워 먹으려고요!" "무슨 소리야? 생선이 먹고 싶으면 요리사에게 부탁하면 되잖아." "싫어, 내가 직접 할거야!!" 세스케인은 막무가내로 돌을 집어드는 에르가를 보고 뭐라 할말을 잃어 버 렸다. 잘 있다가 갑자기 남의 집의 관상용 물고기는 왜 잡아먹겠다는 건 지… "그만둬. 그런 식으로 아무리 돌을 던져도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다고. 그 리고 너 생선 요리를 할 줄이나 아니?" "그냥 불에 구우면 되지!! 좀 내버려둬요! 천한 평민도 하는걸 나라고 못할 까봐?" 세스케인은 눈앞의 꼬마에게는 좋은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 았다. 그래서 화를 내는 척하며 에르가에게 소리쳤다. "에르가! 여기는 에스문드 영지가 아니야. 그러니 네 마음대로 행동해서는 안돼! 알았어? 어서 자리로 돌아가!" "싫어! 누구한테 명령이야?" "어서 돌아가지 못해?!" 계속 빙글빙글 웃던 사람이 갑자기 무서운 얼굴을 하며 화를 내자 에르가 도 잠깐 움찔했다. "빌어먹을… 나이만 많으면 다야?! 별 꼴을 다 봤네! 에이, 재수 없어." 에르가는 순순히 돌을 내려놓고 의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노골 적으로 세스케인에게 들으라는 듯이 상스러운 욕을 중얼댔다. 에스문드 백 작의 수많은 꾸지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에르가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던 것이다. 의자로 돌아온 다음에도 세스케인은 한동안 에르가와 신경전을 펼쳐야만 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에르가는 눈만 떼면 탁자 위에 올라가려 하지를 않나, 괜히 가만히 있는 세미르나 딜트라엘을 툭툭 치지를 않나, 온 갖 말썽이란 말썽은 혼자 다 피우며 그 짧은 시간동안 세스케인을 혼을 빼 놓고 있었다. 처음 그 당돌함을 귀엽게 생각했던 자신이 놀라울 정도였다. "에르가! 제발 좀!!" "으아∼!! 정말! 세스케인 형도 좀 그만해요!! 시끄러워 죽겠네!!" 세스케인이 의자 위에 서서 펄쩍펄쩍 뛰는 에르가를 말리기 위해 나무라는 말을 했으나, 에르가는 오히려 자신이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이 버럭 신경 질을 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이런 상황이 유지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세 스케인은 용케 아직도 화다운 화를 내지 않고 에르가를 돌보고 있었다. 세 스케인이 13살이라는 어린 나이답지 않게 참을성이 있고 사려 깊은 자가 아니었다면, 에르가는 작위에서도 나이에서도 꿇릴 것이 없는 그에게 몇 방 얻어맞고도 남았을 것이다. "세스케인 님." "아? 휴거?" 에르가를 붙들고 겨우 자리에 앉히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의 시종이 자신 에게로 다가왔다. "후르부크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조금 전에 다른 분들께서 더 오셨는데 아마 인사를 시켜드리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휴거는 세스케인을 향해 말하며 부드럽게 웃었다. 세스케인이 수도의 학교 를 다니느라 1년이 넘도록 이 별장에 머물기는 했지만 지위도 그다지 높지 않은 시종에 불과한 자신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는 것에 흐뭇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세스케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는 조금 전 느꼈던 것 과 같은 온화함뿐만이 아니라 명민함과 품위까지 자연스레 배어 나왔고, 그에 대해서는 별장 내의 하인들까지 괜스레 자랑스럽게 생각할 정도였다. 휴거는 후르부크 백작이 굳이 지금 세스케인을 부를 필요가 없음에도 일부 러 그런 명을 내린 것은 다른 귀족들에게 훌륭하게 자란 자신의 아들을 자 랑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세스케인은 휴거의 양 곁에는 서있는 세미르 또래의 아이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스나일 백작가의 제르카인 님과 에나르츠 백작가의 엘시온 님이십니 다. 후, 이번에는 꽤 많은 자제 분들이 함께 오신 듯 하군요. 이분들은 제 가 돌보고 있을 테니 세스케인 님께서는 어서 후르부크 백작님께 가보십시 오." "음… 그래. 그럼……." "형아!!" 휴거의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옷자락을 꼭 쥐고 있던 세미르가 불안 하게 그를 불렀다. 세스케인은 귀여운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 다. "형은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세미르와 함께 있어줄 수가 없어. 그러니 여 기서 놀고 있으렴. 착하지, 우리 세미르?" "그치만……." 세미르가 괜히 에르가를 힐끔거리며 어물거리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머 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동생을 달랬다. 세스케인에게서 착하다는 말 을 듣는 것을 가장 좋아하는 세미르였기에 세스케인이 계속 달래자 순순히 손을 옷자락에서 떼어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세스케인은 잔뜩 불만에 찬 에르가를 힐끗 보고는 휴거에게 걱정스러운 말을 건넸다. "휴거. 힘들겠지만 잘 좀 돌봐 줘. 아직 어린아이들이니까." "예, 심려 놓으십시오." 휴거는 자신에게 그런 말까지 건네는 세스케인에게 찡하게 감동을 받아 비 장하게 대답했다. 세스케인이 왜 그렇게까지 자신을 걱정하는지 현재의 휴 거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세스케인이 완전히 나무 사이로 사라지자마자 가장 먼저 활동을 개시한 것 은 에르가였다. 더 이상 자신을 제재할 수 있을만한 것이 하나도 남아 있 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의 눈동자는 새벽아침의 이슬처럼 초롱초롱 하게 빛났다. "이봐, 너희들. 이리로 와봐!" 에르가는 씨익 웃으면서 4명의 아이들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휴거의 손에 이곳에 이끌려온 검은색 머리카락의 아이, 제르카인이 가장 먼저 항의했다. "네가 뭔가 오라 가라야? 그리고 이렇게 처음 만나면 자신이 누군지 부터 밝혀야 하는 거 아냐? 분명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제르카인의 말을 들은 에르가는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나 에르가는 나름대로 자신의 또래를 많이 만난 것에 기뻐하고 있었기에 천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제르카인을 향해 말했다. "좋아. 나는 에스문드 백작가의 에르가다. 너희들 이리로 와서 한명씩 자기 이름을 밝혀!" 그러나 에르가의 말은 여전히 완연한 명령조였다. 최고의 상전대접을 받고 자란 아이들에게 그의 말은 반발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단 한 명도 자 신이 말하는 대로 따르지 않자 에르가는 이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서있는 세미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너! 세미르라고 했냐?" 조금 전부터 에르가의 폭력 현장을 여과 없이 고스란히 보고 있었던 세미 르는 에르가가 가까이 오자 움찔하고 말았다. 에르가는 그런 모습을 보더 니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비웃으며 세미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형아, 형아라고? 푸핫!! 너 계집애지? 그렇지? 야, 또 한번 해봐. 형아∼라 고." "하…하지마! 세스 형한테 이를 거야." "푸하하하!! 이를 거라고? 그래, 어디 한번 일러봐라!! 어디서 계집애 같은 게 굴러와서 형한테 일러바칠 꼬야 라고? 으이그, 이걸 콱!! 그러고도 네놈 이 남자냐? 엉?" 에르가는 계속 빈정대다가 주먹을 확 들어올려 세미르를 위협했다. 세미르 는 그 주먹에 깜짝 놀라 한두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이들의 행동을 지켜보며 그냥 조금 심한 장난 정도로 생각했던 휴거는 에르가가 정말 세미르를 칠 것 같이 나가자 그들을 말리러 다가갔다. "에르가 님. 사이좋게 지내셔야죠." "닥쳐! 천한 것이 어딜 끼어 드는 거냐!!" 그러나 휴거는 에르가의 일갈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 다. "또 한번 참견했다가는 봐라. 그 건방진 혀를 뽑아버릴 테니까!" 이를 바득 갈며 자신을 노려보는 에르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거는 세스케 인이 자신을 걱정하고 간 이유를 조금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가는 세미르의 멱살을 잡고 앞으로 끌고 나와 소리쳤다. "말해! 이름은?" "…세…" "뭐? 이게 정말… 맞을래? 죽어볼래? 엉? 고추 확 따버린다?" "세미르야! 세미르……." 난생 처음 겪어보는 폭력에 세미르는 처절하게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순 순히 대답을 하는 세미르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에르가는 다음 타겟으로 딜트라엘을 잡았다. 사실 조금 전부터 자신에게 존댓말까지 쓰게 했던 건 방진 놈에게 보통 불만이 쌓인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에르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것을 깨닫자마자 딜트라엘은 몸이 딱 굳는 것을 느꼈다. 처음 그에게서 맞은 주먹은 정말 아팠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 파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던 것 같았다. 딜트라엘은 에르가가 자신이 후작 가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말을 듣지 않으면 에르가는 또 한번 저 단단해 보이는 주먹 을 마구 휘둘러대리라. 그렇다고 그의 말에 쉽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었다. 그 일을 들켰다가는 아버지가 얼마나 화를 낼지 충분히 알고 있었기 때문 이다.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이 다름 아닌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아닌가. "딜트라엘 님?"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에르가는 착실하게 자신의 이름에 ‘님’자를 붙이 며 다가왔다. 그 말에 아주 잠시 마음을 놓고 있는데 갑자기 에르가가 딜 트라엘의 얼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내∼가 꼭 존댓말을 써야겠습니까? 예?" "당…연하지." 딜트라엘은 첫 글자의 뒷말을 간신히 이을 수 있었다. 이미 한번 눈물나게 얻어맞은 딜트라엘의 눈에 비친 에르가의 표정은 너무나 무서웠기 때문이 다. "그러지 말고. 우리 친구잖아요? 그쵸?" "너 깡패야?" 휴거의 곁에서 둘의 행태를 지켜보던 엘시온이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에르가는 그 말에 바로 고개를 쳐들고 엘시온을 째렸다. "뭐라고 했냐? 깡패? 너 일루 와!!" "엣?!" 에르가는 곧장 엘시온에게로 달려갔다. 엘시온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는 에르가를 보고 그대로 쫄아서 휴거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휴거는 이 사 태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엘시온을 뒤쪽으로 감쌌다. "이 건방진 자식아! 끼어 들지 말라고 했지? 이 빌어먹을 놈이!?"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는 것은 그것이 아버지일지라도 쉽게 넘어가지 못하 는 에르가다. 그런데 지금 감히 천한 평민 놈이 자신의 일(?)을 방해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신의 녹색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정원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크게 소리쳤 다. "네 놈!! 감히 내 말을 무시하다니! 갈아 마셔 버리겠어! 여봐라!! 누구 없 느냐!! 누구 없느냐니까!! 당장 이 놈을 끌어내!" "에…에르가 님!!" 휴거는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화난 에르가의 얼굴이 정말 장난이 아 니었기 때문이다. 대귀족을 이만큼이나 화나게 했으니 자칫하면 크게 잘못 한 것도 없음에도 토막 시체가 되어버릴 수도 있었다. 귀족들에게 평민의 목숨 한 두개 정도는 땅에 굴러다니는 돌만큼이나 하찮은 것이니까. "사…살려주십시오. 에르가 님.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휴거는 그 즉시 땅에 얼굴을 처박고 비굴하게 살려달라고 사정을 하기 시 작했다. 한동안 소리를 치던 에르가는 휴거의 모습을 보더니 그제야 소리 치는 것을 멈췄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사정없이 그의 머리를 짓밟으 며 말했다. "오늘 기분이 좋으니 큰마음 먹고 살려주겠다. 그러나 한번만 더 내 말을 거역했다간 그냥 가죽을 벗겨주겠어. 알겠나? 대답해!" "명심…하겠습니다… 에…르가 님……." 휴거는 거친 맨땅바닥에 정면으로 안면을 박고 있던 상태에서 머리를 짓밟 히고 있었기에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명령을 하는 자가 귀족인 만 큼 얼굴이 뭉개지더라도 대답을 해야만 했다. 정말 치욕적인 상황이었지만 이게 힘없는 평민의 일상인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나 휴거의 그런 사 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가는 발로 그의 머리를 계속 짓이기며 아이들을 쭉 둘러보았다. "너희도 이렇게 되고 싶냐? 일루 와서 자기 소개 얼른 안 해?" 살벌한 현장(?)을 목격한 그들은 에르가의 고함소리에 아이들은 움찔거리 면서 하나씩 세미르의 곁으로 붙었다. "시꺼먼 너! 조금 전 그 건방떨던 말은 내 잊어주지. 이름이 뭐라고?" "…제르카인 혼 스나일." "그 다음! 노랑머리, 네 녀석은?" "엘시온 혼 에나르츠…라고 해……." "내가 아직도 깡패로 보이냐?" "아니!!" 엘시온은 엉겹결에 평생(?)하지 않던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그토록 도도하 던 아이들이 주먹에 그대로 주저앉고 만 것이다. 매엔 장사 없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흐음… 그리고……." 에르가는 드디어 휴가의 머리에서 발을 치우고 딜트라엘에게로 걸어갔다. 제 아무리 에르가라고는 해도 오등작에 관해 나름대로 인지하고 있기에 유 일한 후작가의 아이인 딜트라엘의 존재가 정말이지 껄끄러웠던 것이다. "딜트라엘…이라고 불러도 되겠지?" 에르가는 딜트라엘의 곁을 맴돌며 은근슬쩍 협박을 했다. 그가 스스로 그 래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가 계속 자리를 맴돌며 주먹으로 툭툭 건드리자 딜트라엘은 그만 눈 을 찔끔 감았다. 그리고 그것은 에르가의 기를 350% 상승시켜주는 작용을 했다. "하하핫! 그렇지? 괜찮지? 우리가 동갑이 아니냐! 딜트라엘!! 아니, 딜트라 엘은 기니까 딜트라고 부르면 되냐?" "딜티…라고 부르는데……." 딜트라엘은 너무나 얼어버린 나머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말하고 말았다. 에르가는 피식 웃으며 딜트라엘을 향해 말했다. "조오∼아! 딜티!! 분명 네가 딜티라고 부르라고 한 거다? 나중에 딴말하면 콱 목을 비틀어서 뒷산에 묻어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에르가는 기쁘게 웃으면서도 딜트라엘을 위협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휴거 는 엉망으로 까진 얼굴을 감싼 채로 에르가의 행동을 보며 저 꼬마가 정말 귀족이 맞는지 의심을 해야만 했다. 품위가 철철 넘치는 사람들과 폐쇄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인 만큼 보통은 저렇게 거친 말투와 행동은 쉽게 배 울 수 없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하인이나 병사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들을 놓치지 않고 재빨 리 기억하여 이룩한 에르가의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뭐 눈엔 뭐밖에 안 보 인다고 에르가의 눈에는 그 상스러운 말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 던 것이다. 결국 에르가는 그 멋진(?) 말들을 배우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개시했고 생 각 이상으로 머리가 좋았던 탓에 듣는 대로 바로바로 단어를 머리에 입력 하여 결국 혼자서 이런 언어 체계를 이룩하기에 이른 것이다. "자, 그럼 날 따라와!" 에르가는 군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에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명령 했다. 그들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면서도 쫄래쫄래 에르가의 뒤를 따랐다. "끙차." 호수 근처까지 온 에르가는 커다란 돌멩이를 집어들었다. "너희들도 던지라고. 이걸로 저놈들을 잡는 거야! 오늘 저녁은 생선구이 다!!" 그렇다. 세스케인의 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섰지만 아직 에르가의 마 음 속 깊은 마음에는 낚시(?)를 위한 집념이 불타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세스 형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게 진짜!!" 에르가는 작게 중얼거리는 세미르의 말을 잽싸게 캐치하여 고개를 홱 돌렸 다. 세미르는 깜짝 놀라 곁에 서있던 딜트라엘의 뒤로 숨었고 원치 않은 방패막이가 된 딜트라엘은 세미르를 끌어내려고 애를 썼다. "이것들이 아주 꼴값을 떨어요." 돌덩이를 호수에 대충 던진 에르가는 둘에게 다가가 머리를 한방씩 쥐어박 았다. 저번 것보다 강도가 약하긴 했지만 이번 것 역시 충분히 아팠기에 둘은 짧게 비명을 질렀다. 에르가는 보통 아이들보다 훨씬 힘이 강했고, 여기에 에스문드 영지에서 하인들을 괴롭히면서 어떻게 때려야 가장 아프게 때릴 수 있는지를 스스로 습득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에르가의 주먹은 딜트라엘이나 세미르같 이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들이 상대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위력적이었다. 아이들이 에르가의 주먹에 굴복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행로(?)였던 것이다. 딜트라엘과 세미르가 잔뜩 겁에 질려있자 에르가는 더욱 기가 살아서 그들 을 완전히 똘마니 취급하기 시작했다. "딜티, 세미르. 너희들은 저기로 가서 쓸만한 돌들 좀 모아 와. 얼른!! 그리 고 제르하고 엘은 나하고 같이 돌을 던진다, 알았지?" 에르가는 어느새 아이들의 이름을 멋대로 줄여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미 폭력에 굴복한 아이들은 뭐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풍덩!! "크아!! 아까워라!!" 물이 몸에 튀는 것도 아랑곳 않고 커다란 돌을 호수에 집어던진 에르가는 혼비백산하여 흩어지는 물고기들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안타깝 게도 그런 돌에 깔려 줄만큼 멍청한 물고기는 이 호수에 존재하지 않았다. "야!! 너네도 던져! 하나라도 잡아야 저녁을 먹을 거 아냐!! 저녁 굶고 싶 어?" 이미 에르가의 머리에 음식은 오로지 저 물고기밖에 없다고 결정되어 버렸 다. 휴거는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보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갈피를 잡 지 못하고 있었다. 풍덩!! 풍덩!! "에이 참!!" 호수에 돌을 던지느라 물로 범벅이 된 엘시온은 저쪽으로 흩어지는 물고기 들을 보고 짜증을 냈다.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물고기들이 너무 얄 미웠던 탓이다. 게다가 한번 돌을 던지면 물고기들은 멀리 도망가 버리기 때문에 현재 있는 곳에서 다시 먼 곳까지 걸어가야만 했던 것이다. 엘시온을 따라다니며 돌을 집어주던 딜트라엘은 그 모습을 보고 입맛을 다 셨다. 자신이 던지면 그보다 훨씬 잘 던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는 한참 엘시온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에르가의 곁으로 걸어갔다. "뭐야?" 에르가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꼬나보자 딜트라엘은 또 다시 얼어버렸다. 그러나 에르가는 괜히 다가와서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서있는 딜트라엘 을 보고 버럭 신경질을 냈다. "지금 바쁜 사람을 불러 놓고 지금 뭐하자는 거야? 앙?" "그…그게… 나…나도 던지고 싶어……." "나…나…나…나도." 에르가는 딜트라엘의 말 더듬는 것을 따라하다가 피식 웃었다. "너 같은 말더듬이가 할 수 있겠어?" 그 말을 들은 딜트라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러나 에르가는 사정 없이 그의 아픈 곳을 팍팍 질러댔다. "그…그럼… 하…한번 더…더…던져보셔. 푸하하하." "시…시끄러워!" 그래도 마지막 프라이드는 남은 딜트라엘은 빈정거림에 발끈하여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같은 또래의 꼬마에게 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에르가 가 아니었다. 녀석은 한걸음에 달려가 딜트라엘의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 을 내다 꽂았다. 퍼억!! 또 한번 살벌한 소리가 정원을 메웠다. 휴거는 그들의 모습을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얻어맞은 상대가 트로이 후작의 자 제인 딜트라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도 행동을 중단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에르가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디서 큰소리야? 죽는다!?" "아…아아… 콜록콜록……." 딜트라엘은 배를 감싸고 주저앉아 심하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 에르가가 또 자신을 때릴까봐 잔뜩 몸을 움츠렸다. 딜트라엘의 뇌리 속으로 괜히 대 들었다는 후회가 마구마구 몰려왔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는 에르가 역시 영 마음이 편치가 못했다. 저 허약한 놈이 겨우 한방밖에 치지 않았는데 다 죽을 것처럼 난리를 피우고 있는 것 이다. 지금껏 영지에서 하인들을 괴롭힐 땐 자신의 주먹 한방 정도는 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이제껏 단 한번도 맞아본 적이 없는 딜트 라엘에겐 그 주먹은 처음 겪어보는 엄청난 공포였다. 에르가는 계속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찔끔 짜는 녀석을 보고 괜히 신경질이 나서 이를 박박 갈았다. 그러나 더 이상 성질대로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상대는 후작가의 아이니까. 세스케인이 말한 바에 의하면 그것도 아르윈 왕국 최고의 세력을 가진 가문이라 하지 않았던가. "…야… 딜티……." 에르가는 땅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슬그머니 들어올려 딜트라엘의 앞에 보이며 말했다. "돌 던지게 해줄게.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 …일어나라니까!! 네가 그러고도 트로이 후작가의 장남이냐? 엉?" "끅……." 딜트라엘은 ‘트로이 후작가의 장남’이라는 대목에서 정신이 번뜩 들었 다. 딜트라엘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자 에르가는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어 머리 속에 아∼주 조금 남겨두었던 불안감을 하늘 멀리 날려보낼 수 있었 다. 에르가는 한쪽 손으로는 그 무거운 돌을 든 채로 나머지 손으로 딜트 라엘의 팔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그렇게 찔끔찔끔 짜는 거 창피하지도 않아?! 얼른 가서 돌이나 던져, 얼른 얼른!!" "으…응……." 딜트라엘은 눈가를 슥 훔친 후에 에르가에게서 돌을 받아들고 호수 쪽으로 뛰어갔다. 호수에 돌을 던지는 녀석을 유심히 바라보던 에르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있지… 나도 하면 안돼?" 언제 다가왔는지 세미르도 에르가에게 허락을 구했다. 그도 제르카인이 돌 을 던지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어 보였는데 에르가가 돌을 주워주라고 명 령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시킨 일만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러 다가 딜트라엘이 돌을 던지는 것을 허락 받는 것을 보고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왜? 형아가 던지지 말랬다며?" "으음……." 에르가의 말을 들은 세미르는 그제야 형의 말이 떠올라 저 나름대로 심각 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짓을 하면 형이 자신을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던 것이다. 세미르의 세계에서 형이 차지하는 비율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니까. 세미르가 우물쭈물하는 것을 보고 에르가는 가소롭다는 듯 코방귀를 꼈다. "남자답지 못한 놈!" "그래두… 우리 형은 맞는 말만 한단 말이야." "형아는 이랬단 마랴, 형아가 저랬다 마랴. 형아형아형아∼" 에르가는 여자애들처럼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콧소리를 내며 세미르의 흉내를 냈다. 그 모습을 보고 세미르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전히 세스케인 형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지만 저런 식의 빈정거림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지금까지의 자신이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졌던 것이다. 세미르는 괜히 울컥해서 에르가를 향해 소리쳤다. "나두 던질래!" "흥! 별꼴……." 에르가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홱 돌리는 걸 보고 세미르는 그의 옷을 잡아 당겼다. "나도 한다구!! 할꺼야!!" "알았어, 알았다고. 너네 형한테 앵기듯이 나한테도 앵길꺼냐? 이거 놔!!" "끙." "한번만 더 형아∼ 그러면 넌 앞으로 계집애야! 알았어?" "으응……." "좋아! 어서 가서 물고기 잡아와! 게으름 피우는 녀석은 오늘 저녁 없을 줄 알아!!" 에르가가 무슨 수로 아이들에게 저녁을 줄 권리를 얻었는지는 멀리서 찍 소리도 못하고 멀뚱멀뚱 눈만 뜨고 있는 휴거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부단히 움직이며 큰돌을 가져와 물고기를 목표로 돌을 집어던지 고 있었다. "왓!" 딜트라엘은 근처에 서있던 제르카인이 던진 돌 때문에 튄 물벼락을 맞고 후줄근하게 젖고 말았다. 원래부터 흠뻑 젖어있었으면서도 딜트라엘은 왠 지 약간 울컥하여 복수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했다. 그래서 자신도 돌 을 주워들어 제르카인이 있는 호수 쪽으로 세게 집어던졌다. 풍덩!! "하하하!! 넌 아직 멀었어. 움하하하!!" 그러나 그 돌은 그다지 큰 물보라를 만들어내지 못했고 제르카인에겐 거의 물이 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더니 제르카인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경박한 웃음소리를 냈다. "으이구, 이것들아! 누가 너네 보고 놀라고 했냐!! 빨랑 고기 안 잡아?" "앗, 한다구, 해!!" 에르가의 목소리에 아이들은 또다시 우르르 흩어졌다. 그러나 호숫가를 빙 빙 돌아다니다 보면 서로 몇 명씩 만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윽? 아쭈? 나한테 물을 튀겼어?" 에르가는 엘시온이 던진 돌멩이 때문에 일어난 물벼락을 맞고는 돌을 던져 복수를 시작했다. 남이 장난을 치는 건 화를 내면서도 자신이 물벼락 맞는 데 복수하는 것엔 화를 내지 않았기에 물고기를 잡는 일은 곧 물싸움으로 변해갔다. 첨벙!! "와아앗?!" "움하하하하! 이것들아, 잘 봤지? 이렇게 하는 거라고!! 기술이 필요한 거 야, 기술이!!" 물싸움에 끼어든 에르가는 돌을 집어던져 세미르와 엘시온에게 물을 흠뻑 덮어씌우고는 크게 웃었다. 그것을 보고 제르카인이 자신이 들고 있던 돌 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나도 한다! 이잇∼!!" 첨벙!! "우오!! 제르! 재능 끝발인데, 너∼!" "헤헷, 그런가?" 에르가의 칭찬을 들은 제르카인은 괜히 뿌듯함을 느끼고 어깨를 폈다. 아 이들은 본능적으로 에르가에 의해 이 그룹의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확실히 그 사실을 인지한 것은 아니지만 에르가에게 잘 보 이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 것이다. "이것 좀 봐봐, 에르가! 난 물 위로 돌을 막 튀게 할 수 있다?" 세미르는 납작한 돌을 집어들어 호숫가로 비스듬히 던졌다. 세스케인이 하 는 것을 처음 본 후, 피나는 노력 끝에 이루어낸 세미르 나름대로의 고난 이도 기술이었던 것이다. 에르가는 그것을 보더니 눈을 빛냈다. "오오, 형아밖에 모르는 계집애 같은 녀석인 줄 알았더니 이런 것도 할 줄 아는구만!!" 그다지 칭찬같지 않은 칭찬이었음에도 세미르는 괜히 스스로가 자랑스러워 졌다. 한편, 멀리서 계속 걱정스럽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휴거는 다행히 아이 들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대로 누군가가 다 치기라도 하는 날엔 에르가에게 죽지 않더라도 후르부크 백작의 손에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 않는가. "휴거?" 한동안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곁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휴 거는 화들짝 놀라 급히 고개를 숙였다. "세…세스케인 님!" "아니, 휴거. 왜 이렇게 다친 거야? 얼굴 좀 보자." "아…아닙니다. 저……." 풍덩!! "아하하하하∼." 세스케인은 멀리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그 쪽으로 옮겼다가 잠시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다. 호숫가가 한바탕 전투라도 치른 것처럼 엉망이었 기 때문이다. 장식용으로 배치되어 있던 돌이 대부분 뽑혀 나갔으며, 그 주 변의 길은 물이 튀어 온통 질퍽하게 진흙탕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아이들 은 흠뻑 젖은 상태로 호숫가 한쪽에 모여 뭐가 좋은지 깔깔대고 웃고 있었 다. "맙소사… 에르가 녀석……." 그 장면을 보고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에스문드 백작이었다. 자신의 아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았나 걱정 이 되어 세스케인과 함께 이곳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 장면을 보자 마자 모든 것이 에르가로 인해 이루어진 것임을 직감했다. "에르가!!" 아이들은 깔깔거리고 웃다가 누군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 이들의 중앙에 서서 거만을 떨고 있던 에르가가 가장 먼저 그를 알아보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버지." "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것이냐! 꼴이 그게 뭐냐고! 남의 집에 와서 창피 하지도 않느냐!" 그 호통소리를 들은 일동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님에도 일순 입을 다물 었다. 특히 딜트라엘은 한동안의 밝은 분위기에 들떠 있던 마음이 팍 가라 앉아 버렸다. 에스문드 백작의 호통 소리에서 아버지의 호통소리를 떠올렸 던 탓이다. "왜 저보고만 그러는데요? 쟤네들도 같이 했다고요!!" 그러나 에르가가 딜트라엘처럼 주눅이 들어 잘못했다는 용서를 비는 모습 을 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스문드 백작은 실핏줄이 불거지 는 것을 손으로 살포시 누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에르가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말고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이 어딨느냐! 네 녀석이 아이들을 선동한 것이라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느냐?!" "아씨, 맨날 나만 갖고 그러네. 울 아버지 맞아?" 객관적으로 상당히 무서워 보이는 호통 소리였음에도 에르가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았다. 시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귀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 에서 에스문드 백작은 인내심이 점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음을 느꼈다. "후우… 그래… 좋다. 어서 돌아가자. 옷을 갈아입어야지. 그런 꼴을 하고 어떻게 저녁을 먹을 작정이냐." 에스문드 백작은 세스케인 등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마지막 남은 인내심 을 쥐어 짜내어 에르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에르가는 에스문드 백작이 내미는 손을 탁 치더니 빽 소리 질렀다. "내가 무슨 어린앤가? 아버지 손잡고 쫄쫄 걸어가게?" 에스문드 백작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이 에르가는 홀로 저택 쪽으로 뛰 어가 버렸다. "하하… 자립심이 강한 아이군요." 세스케인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에스문드 백작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고개를 내젓다가 저택 안으로 돌아가자고 말 했다. 그러나 아직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에르가를 보고 눈을 빛내는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르나크의 장 난데없이 외전 - 후르부크 백작의 별장 (2) 오늘 후르부크 백작가의 시종들은 완전히 비상경계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후르부크 백작이 트로이 후작부터 시작하여 이름을 듣기만 해도 살이 떨릴 정도로 엄청난 명문 귀족들을 수도의 별장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오늘 같 은 날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는 날엔 곱게 죽는 것도 힘들리라는 것을 충분 히 인지하고 있었다. 쨍그랑! 쟁반이 바닥을 드러내기가 무섭게 새로운 과일들을 나르던 시종들은 갑자 기 들린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들은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그릇을 깨는 실수를 한 시종에게 신의 가호를 기원하며 소리가 들린 곳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그 시끄러운 소리의 근원지에는 시종이 아닌 5살 정도 돼 보이는 자그마한 녹색머리의 꼬마가 있었다. "에르가… 좀 조심할 수 없겠느냐." "어쩌다 실수 할 수도 있는 거지……." 에르가는 아버지의 질책에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 람이 그런 실수를 했더라면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가 귀 족이었다면 조롱을, 평민이었다면 끌어내 손목이라도 자르라고 말했으리라. "아이들이라 이런 자리가 지루한 모양이군요. 오늘 낮의 사건도 들어보니 꽤나 활발한 성격을 가진 듯 하던데 이런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가 힘에 부쳤겠지요." 에나르츠 백작이 가벼운 농담조로 이야기를 꺼냈지만 에스문드 백작은 어 색하게 웃으며 그 말에 답했다. 자신의 아들이 보통 활발한 성격이 아니라 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간단히 넘기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럼 밖에 나가서 놀아도 되나요?" 에르가는 그 말을 놓치지 않고 눈을 빛내며 에나르츠 백작을 바라보았다. "벌써 하늘이 어두워지려 하고 있는데 어딜 나간단 말이냐!" "어두워지면 바로 들어오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라고 하시죠. 한창 뛰어 놀 나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에르가는 에나르츠 백작의 말에 반색을 하며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말했다. "야, 나가자!! 안 놀 거야?" 그 말에 제르카인과 엘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에서 뛰어내려 에르가 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세미르는 힐끗 세스케인의 눈치를 보았지만 곧 에르가에게로 뛰어갔다. 세스케인은 세미르가 자신과 그냥 떨어지려 한다 는 사실에 약간 놀라움을 느꼈다. "딜티. 너는?" "에…에르가! 딜티라니……." 에스문드 백작은 진땀을 뻘뻘 흘렸다. 그렇게 후작가에 대해 못박아 주었 건만 이런 자리에서 저런 반말을 하다니!! 그 때 딜트라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했다. "제가… 그러라고 했어요… 친구니까." 에스문드 백작에게 그렇게 말을 한 딜트라엘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도… 나가도 괜찮을까요?" 트로이 후작은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딜트라엘이 먼 저 말을 거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말에 깜짝 깜짝 놀 라기만 하던 소심한 아들이었기에 이번에도 역시 자신이 같이 나가 놀라고 하지 않으면 묵묵히 곁에 앉아 있기만 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저……." 딜트라엘은 정말 큰마음 먹고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가 아무 말도 없자 그대로 쫄아 버렸다. 사실 딜트라엘은 이대로 에르가의 말을 듣지 않고 앉 아 있었다가 나중에 옴창 얻어맞을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 것 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에르가의 행동을 보고 용기를 얻었던 면도 아주 조금 있었다. "그렇게 하거라." 트로이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주자 딜트라엘은 하늘을 날것만 같은 기쁨을 느꼈다. 항상 꾸지람만이 나오던 아버지의 입에서 뭔가 긍정의 말 이 나온 것이 정말 오래간만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어나자 후르부크 백작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후후, 또래 친구를 만나니 여간 기쁜 게 아닌가 봅니다. 사실 세미르가 너 무 세스케인만을 따라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나 보 군요." "확실히 그렇군요. 저도 엘시온을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르 가 군이 참 활발해서 다른 아이들도 전염이 된 것 같군요." 에나르츠 백작이 사람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네자 에스문드 백작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나르츠 백작. 최소한 제 아들 녀석이 있는 앞에서 그런 종류의 말은 제 발 삼가해 주십시오." "예? 무슨 말씀이신지……." "후우, 아닙니다." 에스문드 백작은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에르가가 밖에서 또 어떤 사 고를 칠 지에 대해 상상했다. 녀석에 대한 생각만 하면 그냥 나이를 배로 먹는 듯한 느낌을 받는 에스문드 백작이었다. 그 숨막히는 곳에서 탈출에 성공한 에르가는 크게 기지개를 폈다. 폼 잡고 앉아서 조용조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무거운 분위기는 에르가의 성 격엔 절대 맞지 않았다. 그 곳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단연 트로이 후작이었는데, 그 무거운 분위기가 전부 트로이 후작에게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원래부터 트로이 후작이 엄한 사람이기도 한데다가, 자신보 다 높은 후작이라는 것에 반발을 품고 있었던 탓에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 리라. "에르가. 이제부터 뭘 할거야?" "또 물고기 잡아? 아까 딴 짓 하느라 하나도 못 잡았잖아." "호숫가로 갈까?" 뒤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자 에르가는 딜트라엘을 쫙 째렸다. 트로이 후작 탓에 수많은 아이 중 딜트라엘이 희생양이 된 것이다. "이미 저녁을 먹었는데 물고기는 왜 잡아? 너희들 바보냐? 또라이 같은 녀 석들이……." "그…그럼 뭘 할건데?" 정원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에르가는 앞쪽의 나무들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리고 뭐라 말 한마디 해주지 않고 그쪽으로 냅다 뛰어갔다. 아이들은 별 다른 말이 없었음에도 거의 의무적으로 에르가의 뒤를 따라 우르르 뛰었 다. "여기에 올라가자!" "뭐?" "나무에 올라가자고! 한번 올라가 보고 싶지 않냐?" 아이들은 에르가의 말에 서로 불안하게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리고 제르 카인이 용감하게(?) 에르가의 말에 토를 달아보았다. "저런 곳에 올라가면 위험할 텐데?" "바보야! 그러니까 올라가는 거지! 스릴 있잖아!" 누가 바보인지 모를만한 말을 하며 에르가는 나무에 손을 댔다. "겁쟁이는 안 올라와도 좋아. 하지만 바보에 멍청이에 겁쟁이는 콱 죽여버 려야 한다고 그러더라." 에르가는 어디서 주워들은 말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해준 다음 끙끙거리며 나무에 오르기 시작했다. 식당에서 귀빈실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하던 에스문드 백작은 벌써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 지 않은 듯하여 불안하게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야기 도중 죄송합니다만… 밖에 한번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에스문드 백작은 드디어 초조함을 참지 못하고 에르가를 찾아보기 위해 그 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 말을 들은 후르부크 백작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에스문드 백작을 바라보다가 슬쩍 웃었다. "용맹하기로는 따를 자가 없다고 온 나라에 명성을 떨치고 계신 에스문드 백작도 친아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입니다." "딱 하루만 제 아들 녀석과 있어보신다면 제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실 겝니 다. 그럼……." 에스문드 백작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고뇌 어린 한 숨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해주는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는 세스케인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럼 나도 함께 나가보도록 하지." 트로이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까지의 트로이 후작의 행동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아들을 찾기 위해 직접 걸음을 하겠다는 것은 에스문드 백작이 팔불출이라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그가 직접 나가보려 하는지 사람 들이 하나같이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트로이 후작은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 리며 말했다. "한번쯤은 이렇게 해도 나쁠 것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그게 그렇게 놀랍소?" 사실 후작은 약간의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그렇게 했을 뿐이었지만 사람 들은 그가 크게 화가 난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저도 나가보도록 할까요? 제 아들 녀석도 찾아보게 말입니다." "으음, 저도 바람이나 쐴 겸……." 스나일 백작이 그냥 분위기 환기를 위해 한 말이 어느새 모든 귀족에게 웅 성거림으로 퍼져 어느새 대귀족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게 되는 사태가 벌어 졌다. 트로이 후작은 속으로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굳이 그들을 말릴만한 생각은 없었기에 말없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저택 밖으로 나왔을 때 밤바람을 타고 무언가 작은 소리가 들려왔 다. "무슨 소리지?" 앞장서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가던 에스문드 백작은 꽤나 높은 키의 나무 위에 다닥다닥 붙은 익숙한 그림자를 보게 되었다. "이야호!! 아아 시원해!!" "와아아아~~!!" "끝내준다!! 아하하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어렴풋이 들리던 목소리가 더욱 명확하게 들려왔 다. 그 웃음소리는 확실히 나무 위쪽의 그림자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에, 에르가아아아아아∼∼∼∼!!" 근처까지 다다랐을 때 에스문드 백작은 복받쳐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전부 나무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가지를 붙 잡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에르가가 올라가자고 했으리라. "오오, 아버지!!" 에르가는 멀리 떨어진 곳에 드문드문 보이는 불빛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아 버지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을 깨닫고 손을 흔들었다. "이 놈아! 위험하지 않느냐! 대체 거긴 왜 올라간 거냐!!" "여기 야경이 끝내줘요! 아버지도 올라와 보세요." 멀리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에스문드 백작과 에르가를 바라보던 트로 이 후작은 다른 아이들과 같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빙글빙글 웃고 있는 딜 트라엘을 발견했다. 저 소심한 아들이 감히 나무에 올라갈 생각을 다했다 는 것에 그는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장 내려오지 못하겠느냐, 에르가!!" "싫어요! 여기가 얼마나 좋은데, 그치? 얘들아?" "응!! 여기 바람이 진짜 시원해요!" 이 중 가장 소심했던 딜트라엘까지 신이 나서 에르가의 물음에 대답했다. 처음엔 어른들의 말처럼 위험하고 별것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올라오고 나니 나무 잎사귀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서 펼쳐지는 야경이 굉장 히 멋졌던 것이다. "제발 내려오거라. 그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위험하지 않 느냐! 넌 어째 항상 그 모양이냐!!" "뭐가 위험해요! 이것 봐요. 하나도, 하나도, 안, 위험, 하다고요!!" 에르가는 친구들의 호응에 힘입어 더욱 기가 살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호 통에도 나무를 마구 흔들면서 잘난체를 하기 시작했다. "에…에르가!!" "봐요, 전혀 안 위험…" 제 아무리 나무가 튼튼하다 해도, 또한 에르가가 몸집이 작은 어린애라 해 도, 저렇게 설치는데 나무가 강철이 아닌 이상은 버티기가 힘들었다. 결국 에르가가 앉아 있던 나무 줄기는 기괴한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우아아악∼!!" "에르가!!" 에스문드 백작이 놀라서 에르가를 받으려 했지만 나무에서 어느 정도 거리 가 있는 곳에 서있던 그의 손이 거기까지 닿기는 완전히 역부족이었다. 와지직! 쿠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밤 공기를 진동시켰다. 눈앞에 있던 에르가가 갑자기 사 라지듯 땅바닥으로 떨어지자 나무 위의 아이들은 사색이 되었고 멀리서 그 장면을 보고 있던 귀족들 역시 놀라 빠른 걸음으로 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에르가! 에르가!!" 에스문드 백작은 에르가가 그 높은 곳에서 떨어져 버리자 가슴이 오그라 붙는 듯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부리나케 달려갔다. "크…크흑!! 아아……." 신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래도 에스문드 백작은 그래도 아주 조금 안심이 되 었다. 그대로 목이 부려져 즉사할 수도 있을만한 높이였으니까. 신음소리가 들린다는 건 그래도 살아있기나 하다는 뜻 아닌가. "에르가. 괜찮니." "으…으윽……."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물음을 들으면서도 에르가는 대답해줄 마음이 없었 다. 온 몸이 욱신거려 신경질이 팍팍 나는데, 이런 생황에서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를 안심시킬 만한 말을 하기엔 에르가의 심성은 그렇게 곱지 못했던 것이다. 나무에 깔려 낑낑거리는 아들에게 다가간 에스문드 백작은 큰 부상은 없는 지 신중하게 살폈다. "아아아악… 크흑……." 에르가는 아버지가 자신을 건드리자 이제까지 느끼지 못했던 극심한 아픔 이 몰려옴을 느꼈다. 천만다행으로 큰 상처는 없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부 러져 버린 모양이었다. 에르가는 다리가 너무 아파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 다. 사실 겨우 5살짜리 꼬맹이가 이 정도에서도 눈물을 안 흘린 것도 정말 용하다 할만 했다. "에르가가 우는 거야?" "으와……." 그때 에르가의 귓가로 작은 목소리들이 흘러 들어왔다. 에르가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란 아이들이 부리나케 땅으로 내려왔다가 아버지의 품에 반쯤 안겨 있는 에르가를 보고 중얼거린 것이다. 아이들 딴에는 얼마나 아팠으 면 저 에르가가 우는 것일까 라는 의미였지만, 에르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 미로 다가왔다. "이…이거 놔!!" 에르가는 이를 악 물고 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쳤다. "아…아무렇지도 않다고… 나는……." 에르가는 아랫입술을 꽉 물더니 곁의 나무를 짚고 혼자 일어나려고 용을 쓰기 시작했다. 에스문드 백작은 그 모습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원래부 터 자기 아들의 성질이 보통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다리가 부러지고도 저 렇게 오기를 부리다니… "큭! 크흑… 이익!!" 에르가는 계속 신음소리를 내면서도 나무를 짚고 반쯤까지 일어났다. 겨우 5살짜리 아이가 다리가 부러지고도 혼자 힘으로 일어나려고 하는 애쓰는 모습을 보는 아이들과 귀족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에르가는 아이들에게 무시를 당할까봐 괜한 고집을 부리는 것이었다. 그 아픈 와중에서도 자기가 올라가자고 했다가 이렇게 떨어져서 다쳤으니 애들이 얼마나 자신을 우습게 보고 있겠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렇게 어 림에도 자기 과시욕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있는 에르가였다. 에르가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참을 낑낑거리다가 결국은 그 자리에 꼬꾸 라지고 말았다. 모든 이가 에르가의 모습에 대견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정 작 당사자는 엄청나게 쪽팔려하고 있었다. 에르가가 새빨개진 얼굴로 또 한번 이를 악 물고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에스문드 백작이 한숨을 푹 내쉬 었다. 유일하게 에르가의 진정한 사고를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는 사람이 었기 때문이다. "됐다. 에르가! 데려다 주마." "시…싫어… 나 혼자… 헉헉… 걸어갈 수 있어!" "그래, 안다. 네가 괜찮은 거 다 아니까 가만히 좀 있거라." 에스문드 백작은 한동안의 투닥거림 끝에 겨우 에르가를 안아들 수 있었 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먼저 저택 안으로 걸어들어 갔다. 에르가의 모습을 보던 딜트라엘은 왠지 자신의 마음속에서 뭔가 뭉클 하는 것을 느꼈다. 한마디로 영웅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보면 볼 수록 남 자답고(?) 강하고(?) 늠름한(?) 에르가는 완벽한 자신의 이상형이었던 것이 다. 말이나 더듬는 소심한 자신에 비한다면 에르가는 너무나 멋진 남자였 다. 그런 생각은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에르가의 뒷모습 ―에르 가를 안은 에스문드 백작의 뒷모습― 을 보는 아이들의 눈망울에는 동경의 빛이 가득했다. "대단한 아이군. 장래에 무엇이 될지 기대가 되는군." 트로이 후작의 깊은 목소리가 한동안의 적막을 깼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부리나케 자신의 아들에게 달려가서 다친 곳은 없느냐고 묻 기 시작했다. 트로이 후작은 그들을 둘러보다가 천천히 딜트라엘에게로 걸어갔다. 딜트 라엘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위험한 나 무에 올라가 장난을 쳤으니 크게 혼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딜티." 보통이라면 찔끔해서 고개를 숙였겠지만 에르가를 보고 분위기를 탄(?) 것 인지 딜트라엘도 이번만은 똑바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소심한 딜트라엘에겐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는 그런 사소한 행동도 엄청 난 에너지를 소비하는 일이었기에 고개를 든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 알게 모르게 식은땀을 뻘뻘 흘려야만 했다. 트로이 후작은 딜트라엘을 무표정하 게 계속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나무에 올라가는 일이 없도록 하거라." "예. 아버지……." 역시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질책의 말이었기에 딜트라엘은 풀이 죽어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딜트라엘은 더 이상 예전처럼 말을 더듬지 않 았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드는 에르가의 빈정거림과 폭력에서 기인한, 딜 트라엘 딴에는 나름대로의 획기적인 발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변화를 누구보다도 확연히 느끼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으 니, 그는 다름 아닌 트로이 후작이었다. 후작은 고개를 숙이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아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다친 곳은 없느냐?" 딜트라엘은 익숙한 목소리를 고개를 들었다. 알 수 없는 다정함이 느껴지 는 그 목소리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 리지 않았다. "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말꼬리가 조금 흐려지긴 했지만 그래도 딜트라엘에게서 이런 식의 당당한 대답을 듣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인지라 트로이 후작은 잠시 얕은 미소 를 만들어냈다. 아버지의 얼굴에 떠오는 작은 웃음을 보고 딜트라엘은 정말 너무나 기뻐서 함박 웃음을 지었다. 항상 화난 표정으로 자신에게 꾸지람만을 늘어놓던 분이어서 그런지 딜트라엘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아버지의 부드러운 웃음 을 보는 것이 제일 좋았다. 오늘처럼 아버지에게서 조금이나마 상냥한 말 을 듣는 날엔 딜트라엘은 세상이 전부 제것이 된 것만 같은 기쁨을 느꼈 다. "들어가자." 다른 아이들은 전부 걱정을 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가고 있었지만 트 로이 후작은 아들에게서 손을 내미는 대신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딜 트라엘은 조금 전의 그 일이 너무나 기뻐 계속 방긋방긋 웃으면서 아버지 의 뒤를 쫄쫄 따랐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본 트로이 후작의 얼굴에 아주 잠깐 잔잔한 미소가 배어 나왔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딜트라엘은 작은 목검을 쥐고 그것을 힘껏 아래로 휘둘렀다. 그의 바로 옆 에서는 세미르도 똑같은 크기의 목검을 들고 검술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나 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던 딜트라엘 자신과는 달리 세미르는 한숨을 폭폭 내쉬며 검을 '흔들고' 있었다. 그런 세미르의 모습을 보면서 딜트라엘도 요 령을 피우고 싶다는 욕망을 느끼고 있었다. "욥욥!! 이엽!" 한동안 힘들게 목검을 내려보던 딜트라엘은 옆에게 들려오는 힘찬(?) 기합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자리에 앉은 채로 자신과 똑같은 목검을 쥐고 아래위로 열심히 내려치기를 하는 에르가가 있었다. 그 성실한 모습 에 딜트라엘뿐만이 아니라 세미르나 제르카인, 엘시온까지 조금 전부터 신 기함을 느끼고 눈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며칠 전 왼쪽 다리가 부러진 후로 에르가는 계속 후르부크 가의 별장에 머 물고 있었는데, 계속 에르가와 놀고 싶어하는 아이들만은 계속 이 별장에 서 머무르기로 한 것이다. 다른 귀족들도 계속 성에 용무가 있어 수도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일단 아이들이 이곳에 머무는 것을 크게 반대할 이 유는 없었다. "힘들지 않니?" 딜트라엘은 잔뜩 땀을 뽑으면서도 성실하게 내려치기 연습을 하는 에르가 를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리가 부러지고도 에르가는 아침마다 이렇게 나와서는 검술연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딜트라엘도 그때마다 함께 나와서 내려치기 연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트로이 후작이 그에게 그 렇게 하라고 명령을 했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딜트라엘에게 이 목검은 너 무 무거웠고, 그래서 딜트라엘은 이 힘든 검술 연습이 정말 싫었다. 사실 주변 사람들도 어린애를 너무 혹사시킨다는 생각에 조금은 딜트라엘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내주기도 했었다. "얍! 말, 시키지, 마!!" 검을 내려치며 에르가는 갸르르 이를 드러냈다. 그 위협(?)에 찔끔한 딜트 라엘은 계속 자기가 할 연습을 계속했다. 에르가도 아버지인 에스문드 백 작이 시켜서 하는 것일까 하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지만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에르가가 이렇게나 열심히 검술 연습을 하고 있다는 데서 딜 트라엘이 쉽게 호기심을 버리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며칠간 계속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딜트라엘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에르가도… 실은 아버지가 무서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에르가는 딜트라엘을 향해 눈을 쫙 째렸다. 그 리고 목검을 까딱까딱하면서 딜트라엘을 불렀다. 딜트라엘은 그 시선에 조 금 쫄았지만 시키는 대로 안 하면 더욱 얻어맞는다는 걸 경험상으로 알고 있었기에 결국 에르가에게 다가갔다. 따악! "아앗!!" 에르가에게 목검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딜트라엘은 머리를 부여 쥐고 비명 을 질렀다. 하지만 눈물을 찔끔거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동 안 얼마나 많이 얻어맞았는지 벌써부터 면역이 생긴 거라고 할까. 사실상 남자다움(?)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으며 우물쭈물하는 걸 제일 싫어하는 에르가였기에 네 명의 친구들 중 가장 많이 얻어맞은 것은 딜트라엘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이 몸을 뭐로 보는 거냐? 자식이 말이야!!" 딜트라엘은 욱신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이미 맞은 거 아주 죽어 보자고 비장하게 결심을 했다. 며칠동안 에르가의 남자다운(?) 모습을 보면 서, 또 여러 가지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으면서 정말 어마어마한 발전을 거둔 딜트라엘이었다. "그럼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 거야? 이렇게 땀 흘리면서……." "이게, 남이사!?"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또 한번 에르가의 검을 날아들었다. 따악! "윽……." 딜트라엘이 맞은 곳을 또 맞고 인상을 잔뜩 구겼지만, 에르가는 그런 것은 조금도 아랑곳 않고 목검을 쥔 손을 쭉 뻗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후후훗, 이 몸은 말이다. 검술의 천재란 말이야. 나는 곧 이 나라 최고의 검사가 될 거야." "천재하고 열심히 연습하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이 중 그래도 가장 성숙하고 어른스러운 사고를 하는 제르카인이 탁자에 턱을 곤 채로 의아하게 물었다. "검술의 천재니까!! 최고의 검사니까 검술을 하는 거 아냐!!" 제르카인은 까만 눈동자를 귀엽게 데굴 굴리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천재는 연습 안 해도 잘해야 하는 거 아냐?" "이씨!! 이 자식이 죽을라구!!" 괜히 말문이 막히자 에르가는 성을 내면서 부러진 다리도 아랑곳 않고 자 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르카인은 깜짝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도망을 쳤고 다친 다리 때문에 제르카인을 쫓아갈 수가 없자 에르가는 씩 씩 숨을 몰아쉬었다. "내 맘이다!!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자식들아! 이 몸이 천재면 천잰 줄 알아!!" 에르가가 소리치는 것을 보고 딜트라엘은 에르가에게 작게 물었다. "에르가는 이거 하기 싫지 않아?" "흥, 내가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안 해! 이 몸을 강제할 수 있는 것이 있 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자 세미르도 신기하다는 듯이 에르가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이런 게 재밌단 말야?" "이 새X들이!! 내가 이거 하는데 보태줬어? 이 쓰벌!!! 전부 다 죽여버린 다!?" 에르가는 괜히 아이들이 자신이 하는 일에 토를 다는 것 같자 너무나 화딱 질이 나서 최종단계(?)의 욕까지 하며 그 자리에서 흉흉하게 검을 휘둘렀 다. 아직 상대를 배려할 만한 나이가 아니라고는 하나 이쯤 되면 밴댕이 소갈딱지 보다 치사하고 쫀쫀한 성품을 가졌다 해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 다. 하지만 그런 에르가의 억지를 보면서도 딜트라엘은 찡하게 감동을 받고 있 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말에 못 이겨 억지로 하고 있는 것뿐이었지만 역시 에르가는 자신과는 달랐던 것이다. 툭. "뭐야?" 딜트라엘이 검을 내던지자 에르가가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 다. 그러자 딜트라엘이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나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야. 나는 이거 하기 싫어!" 아이들은 입을 조금 벌리고 폭탄 선언을 한 딜트라엘을 보았다. 그 검술 연습은 에르가와는 달리 트로이 후작이 직접 시킨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이다. 모두들 그 용감무쌍한 발언을 한 딜트라엘에게 두려움(?)의 눈빛을 보냈다. "그럼 나도 안 할래!! 재미없어!" 곧 세미르도 검을 땅바닥에 내던졌다. 사실 세미르의 경우는 후르부크 백 작이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형인 세스케인이 하 는 것을 보고 괜히 한번 따라해 봤다가 칭찬을 들은 이후로 이렇게 매일의 일과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세미르도 거의 의무감에서 하고 있었지 이런 검술연습이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모든 아이들은 뿌듯함을 느끼며 하늘의 태양을 향해 자신이 이룩한 거룩한 (?) 행위를 자랑이라도 하듯 가슴을 활짝 폈다. 그러나 그 많은 아이들 중 에서 유일하게 입을 삐쭉거리면서 궁시렁거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별 웃기는 놈을 다 봤네. 이것도 나름대로 재밌는데……." 조금 전부터 아이들이 하나같이 검술연습은 재미없다는 듯한 발언을 했기 때문인지 에르가는 '나름대로' 재밌다고 평하고 있었다. 결국 그날 하루 딜트라엘과 아이들은 전부 검술 연습을 하지 않고 땡땡이 를 치는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 물론 그 후에 트로이 후작에게 눈물 이 쏙 빠질 때까지 밤새도록 설교를 듣고 다시 아침 검술연습을 시작해야 만 했지만 말이다. * * * 아이들이 놀기에 딱 좋은 화창한 날. 세스케인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되 새기며 그와 관련된 책자를 서재에서 꺼내와 유심히 훑어보고 있었다. 그 다지 공부가 즐거운 것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후일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막연하게 인지하고 있었기에 세스케인은 이런 일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스케인이냐?" "아, 아버지. 좋은 책을 발견했거든요." 세스케인이 책을 들고 부드럽게 웃는 것을 보고 후르부크 백작은 열심히 하라는 말을 전해주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세스케인의 그런 모습을 볼 때 마다 후르부크 백작은 정말 저 아이가 자신과 같은 핏줄을 가진 아이가 맞 을까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에스문드 백작도 에르가를 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자주 하곤 했지만 그 생각의 진짜 내용은 전혀 딴판이었다. 세스케인은 책을 가져와 탁자에 놓고 다른 종이에 중요한 부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세스케인이 책을 외우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서재 안에는 세스케인이 움직이는 펜 소리 외에는 고요했다. 그렇게 아무 도 없는 서재 안에서 한동안 공부에 정신을 쏟고 있던 세스케인은 갑자기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 인기척의 주인공은 세스케인이 놀란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펜대를 쥐고 있는 그의 오른팔에 얼굴을 턱 얹었다. "형, 놀자." 자그마한 동생이 방글방글 웃으면서 말하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조금 전 까지 깜짝 놀랐던 사실 따윈 완전히 잊어버리고 싱긋 웃었다. "세미르구나. 하지만 형은 지금 바쁘거든. 학교에서 배운걸 복습하는 중이 야." "복습 같은 건 재미없잖아. 그냥 놀면 안돼?" 세미르가 조르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그의 머리카락은 살살 쓰다듬어주 었다. "지금 하는 일이 다 끝내면 오늘은 하루 종일 세미르랑 놀아줄게. 알았 지?" "하지만 난 지금 놀고 싶은데……." "금방 끝나니까… 착하지, 우리 세미르?" 착하다는 말까지 해주었는데도 세미르는 곧장 대답이 없었다. 세스케인은 약간 놀라워하면서도 일단은 펜대를 잡고 있는 오른팔을 움직였다. 덕분에 거기에 턱을 얹고 있던 세미르의 고개가 끄떡끄떡 움직여졌고 그것이 의외 로 재미있었던 건지 세미르는 생긋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세스케인은 너 무 귀엽기도 하고 나름대로 세미르가 그걸 즐기는 것 같기도 해서 좀 힘들 긴 하지만 세미르의 얼굴을 계속 팔에 얹진 채로 글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럼 거기서 조용히 있어야 해. 알았지?" "……." 세미르는 말없이 팔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펜이 움직이는 대로 까만 줄이 만들어지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세스케인은 피식 웃으면서 계속 펜을 움직 이기 시작했다. 형의 팔에 얼굴에 얹고 그가 쓰는 꼬불랑 글씨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세미 르는 지루함을 느꼈다. 팔의 움직임을 그대로 느끼는 것도 처음에는 나름 대로 재미있었는데 이제는 어지럽기만 했다. 형이 하는 일은 영 끝날 것 같지가 앉자 세미르는 뺨을 불룩하게 부풀렸다. 한편, 한 집중력 하는 세스케인은 팔이 얼얼한 것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다 시 책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책 한 권에서 원하는 부분을 전부 정리한 듯 하자 다른 책으로 왼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 책을 펴려는 순간. "으악!!" 세스케인은 갑자기 팔에서 몰려오는 거센 통증에 깜짝 놀라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두근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고개를 팔이 있는 쪽으 로 향했다. "세…세미르……." 그는 세미르가 자신의 팔을 꽉 물고 있는 것을 보고 황당함을 느꼈다. 세 미르는 세스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한동안 그의 팔을 꼭 물고 있다가 는 곧 눈을 살포시 뜨고 형을 바라보았다. "놀아 줘……." 세미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세스케인은 피식 한번 웃었다. 언제부터 세미 르가 이렇게 고집스러워졌는지 놀랍기도 했지만, 이렇게나 자신과 놀고 싶 어했을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세스케인은 세미르를 혼내기로 걸 정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준다면 세미르가 잘못 버릇이 들지도 모른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미르. 형은 할 일이 있어. 공부가 끝난 후에 놀아주겠다고 했잖니. 이런 짓을 하면 안돼." 세스케인은 약간 엄하게 세미르를 질책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뉘우칠 것이라 생각했던 세스케인의 예상과는 달리 세미르는 입을 삐쭉하 고는 크게 소리쳤다. "형아 싫어! 미워!! 바보 멍청이!" 세스케인이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사이 세미르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서 재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 세스케인이 그 정신적 쇼크를 극복하는 데 엔 상당한 시간을 필요로 해야만 했다. * * * "세미르!! 이게 무슨 짓이야!!" 세스케인은 책상 위에 올라서서 그 위에 올려진 책을 창 밖으로 집어던지 고 있는 세미르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 책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 도 자신이 공부를 한답시고 읽고 있던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도중이라 놀아 달라는 세미르의 요청을 거절했다가, 그후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온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스케인의 말소리를 들은 세미르는 마지막까지 얇은 책을 한 권 집어던지 고 곧장 창문으로 뛰어갔다. "세미르! 어딜 가는 거니!! 우와앗?!" 세스케인은 세미르가 창문 밖으로 훌쩍 뛰어내리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록 1층이지만 세미르의 키에서는 꽤나 높은 거리였기 때문이다.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서 부리나케 그곳까지 뛰어갔을 때 세미르는 수풀 위에서 떨어져 내려 책들과 함께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르고 있었다. "세미르, 맙소사!!" 거친 땅바닥이 작은 동생의 몸에 온통 작은 생채기를 만드는 것을 보고 세 스케인은 조금 전의 일은 새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리고 곧 창가에서 뛰어 내리기 위해 다급히 한쪽 다리를 창틀에 얹었다. 그러나 멀리 데굴데굴 굴 러가던 세미르는 세스케인의 걱정이 무색하게 그 자리에서 빨딱 일어났다. 그리고는 울지도 않고 곧장 정원 안쪽으로 도망가버렸다. 세스케인은 거의 얼이 빠져서 창틀에 발 한쪽을 얹진 채로 한동안 세미르 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 저택을 나서다가 우연찮게 그들 형제의 모습을 보게된 후르부크 백작과 에 스문드 백작은 그 자리에 딱 굳어버렸다. 특히나 에스문드 백작은 알게 모 르게 식은땀까지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세미르가……." 후르부크 백작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에스문드 백작은 뜨끔했다. 다 리가 똑 에르가가 이 저택에 머문 지도 두 달이 훌쩍 넘은 지금, 그 시기 동안 세미르와 아이들은 정말 획기적인 변화를 거두었다. 문을 열 때는 발 로 차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심심하면 창문을 깨뜨리고, 지금처럼 책을 집 어던지는 둥… 차마 그것이 대귀족인 자신의 아들이 한 짓이라고 말하기도 창피한 개구쟁이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이다. "참… 활발해졌군요……." 후르부크 백작은 마치 먹구름이 낀 듯 어두운 얼굴을 하고 말을 이었다. 에스문드 백작은 입 한쪽을 실룩이며 너무나 어색한 웃음으로 그 상황을 무마해 보려다가 후르부크 백작의 짜릿한 시선에 입 운동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만… 가지요. 이제껏 귀엽다고 너무 내버려두기만 해서 그런가 봅니다. 오늘 왕궁에서 돌아온 후에 따끔하게 혼을 내주도록 하지요. 그러면 세미 르도 정신을 차리겠지요." 후르부크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마차로 올라섰다. 그러나 에스문드 백작은 그 말에 쉽게 동의해주지 못했다. 이미 세스케인이 여러 번 세미르를 야단 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세미르에게 후르부크 백작 보다 훨씬 더 깊은 신뢰를 받고 있는 세스케인의 호통도 듣지 않을 정도이니 이미 세미르도 에르가 과(?)로 완전히 진화해 버린 것이리라. 최소한 에스문드 백작만은 그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갔다, 갔어!!" "에르가, 갔대." 수풀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던 딜트라엘이 말하자 에르가는 그제야 쩔 뚝거리면서 나무 뒤에서 걸어나왔다. "이에씨. 아버지는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다리만 멀쩡했 어도 이런 짓은 안 해도 되는데……." 에스문드 백작은 에르가를 만나기만 하면 잔소리를 해댔고 에르가는 그 잔 소리가 끔찍하게 싫었다. 물론 그 잔소리가 무서워서가 아니고 시끄럽고 귀찮았기 때문이다. 다리가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제대로 도망을 칠 수 없었던 에르가에게 아버지를 만나는 것은 정말 엄청난 재앙이었기에 탐탁 치는 않지만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이렇게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에르가의 다리는 한 달이면 완치가 되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 부터 한달 전, 이제 다 나았다고 자신을 한 녀석이 이층의 테라스 사이를 건너다니면서 놀다가 바닥에 떨어져 또 한번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계속 저 모양을 하고 다니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 오늘은 뭘 하고 놀 거야?" "후후후, 이 몸이 이미 좋은 걸 봐뒀지. 후후훗." 에르가의 음흉한 웃음에 아이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냈다. 에르가의 말을 따라해서 지루해 본적은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에르가의 장난은 언제나 스릴만점(?)에 흥미만점(?)이었다. "에르가! 가져왔어!" 세미르가 횃불을 들고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을 보고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 했다. "좋았어. 아, 그리고 너 아까 끝내주던데? 세스케인 형이 얼이 다 빠져서는 멍하게 널 쳐다보더라고. 푸하핫." "흥, 같이 놀아주지도 않는 형 따윈 이제 미워!" "그건 그렇고 횃불 하나밖에 없어?" "응. 아까 전부터 아무리 찾아도 비슷한 게 없더라고. 하지만 내가 누구야. 주방에 있던 불씨를 생각해 내고 몰래 가서 확 뺏어왔지!" 세미르는 횃불을 들어올리며 잘난 척을 했다. 그 모습은 이미 에르가의 그 것과 흡사해져 있었다. "좋아. 그럼 어서 마구간으로 가자!! 우후후후. 마침 귀여운 흑마가 있더라 고." 에르가의 말에 아이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쪼르르 마구간을 향했다. 최근 들어 이 별장에 파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꼬맹이들이 우르르 마구간으 로 몰려오는 것을 보고 마구간지기 중 하나인 하늘색 머리카락의 젊은 청 년, 프란은 불안감을 느꼈다. 횃불을 들고 있는 에르가 때문에 그의 불안은 더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들. 무슨 볼일이 있으신지요. 이런 냄새나는 곳은 도련님들께서 오 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프란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최대한 정중하게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그랬 음에도 에르가는 눈앞에서 자신의 갈 길을 막고 있는 시종에게 약간 발끈 했다. "꺼져. 미천한 것이 감히!! 냄새는 너에게서 난다고!! 이 더러운 놈아!" 에르가는 그렇게 톡 뱉어주고는 횃불을 들고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우리 일을 방해하면 죽여버릴 거야!" "건방진 놈!" 다른 아이들도 에르가의 그 행동에 동조해 프란을 발로 퍽 차면서 불만을 터뜨렸다. 그렇다고 한낱 마구간지기에 불과한 프란이 어떻게 할 수도 없 는 일이라 그는 묵묵히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문득 자신 같은 평 민에게도 항상 상냥했던 세스케인 첫째 도련님의 얼굴이 떠올라 더욱 서러 웠다. 아이들이 전부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아이들에게 차인 다리를 손으 로 주물렀다. 꼬마들이 찬 것치고는 꽤나 아팠기 때문이다. 최근 두 달 동 안 아이들이 에르가에게서 하인 괴롭히는 법을 전수 받고 레벨 업을 했다 는 사실을 프란이 알 리가 없었다. "아, 맞어!!" 그러다가 그는 번쩍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마구간 안에는 후르부 크 백작이 세스케인을 위해 새로 들린 흑마가 있었다. 멀리 카르틴 왕국의 황야에서 잡아 데려왔다고 하는 그 흑마는 아직 어렸지만 척 봐도 굉장히 멋진 준마가 될 법한 말이었다. 그런데 만약 아이들이 그 말에 무슨 장난 이라도 하는 날에는 큰일이 아닌가. 프란은 다급히 마구간으로 달렸다. 사실 세스케인의 말이라는 것이 더욱 그를 사명감에 불타게 만들고 있었다. 프란이 다급히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이들은 아니나 다를까 그 흑 마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린 흑마의 뒤쪽으로 돌아간 아이들은 서로 뭐라 속삭이다가 키득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 살며시 그 흑마의 꼬리 쪽으로 횃불을 가져갔다. 에르가가 말한 재미있는 놀이라는 것은 말 의 꼬리에 불을 놓는 놀이였던 것이다. "으아아악! 도련님들!! 안됩니다!! 그만하세요!!" 프란은 그냥 온 몸에서 핏기가 확 가시는 것을 느끼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조용한 마구간에 안에 갑작스레 들려온 큰 목소리에 에르가는 깜짝 놀라 횃불을 그만 놓쳐 버렸다. "우앗?!" 프란은 짚에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해 그곳까지 달려갔 다. 그리고 에르가와 아이들을 난폭하게 밀치고 그 불을 끄기 위해 발로 짚을 열심히 밟았다. 프란의 빠른 조치로 금새 불을 끌 수 있었지만 자칫 여러 명마가 있는 마구간에 불이 날 수도 있는 정말 아찔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 따윈 에르가나 아이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이 평 민에게 밀려나 땅바닥을 굴렀다는 사실에 그들은 완전히 열 받고 말았다. 특히나 비천한 평민에 대한 확고한 이론(?)을 정립시키고 있는 에르가는 보통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녀석은 이를 바득 갈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 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한편 프란은 완전히 꺼진 불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름대 로 세스케인의 말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에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갑자기 다리에서 극심한 아픔을 몰려와 그 자리에 꼬꾸라지고 말았다. "죽일 놈… 네놈이 감히……." 프란은 기다란 막대기를 손에 들고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거 있는 에르 가를 보고 또 한번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꽤 어둑해진 저녁, 세스케인은 아이들이 아직까지 저택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그 아이들을 찾기 위해 별장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어차피 시종들에게 시켜봤자 아이 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이들을 찾아오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시종들을 일부러 괴롭힐 마음은 추호에도 없었다. 세스케인은 한동안 정원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아이들의 주 된 아지트(?)인 정원을 아무리 뒤져도 그들의 그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세스케인은 등불을 든 채로 고개를 갸웃하며 마구간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 문득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와 세스케인은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신음소리라는 것을 깨닫자 그의 걸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세미르!" 세스케인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마구간 뒤로 전력 질주하여 크게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그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세…세스…케인 님…크흑…큭…." 하늘 색 머리카락이 온통 흙과 피로 엉망이 되어 땅에 쓰러져 있던 젊은 남자가 자신을 보더니 눈물을 흘리며 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의 움직임은 기다란 막대기를 든 작은 꼬마의 손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세미르가 막대기로 그의 등을 확 내려찍었던 것이다. "마…맙소사! 세미르!! 프란!!" 세스케인은 그 장면에 너무나 놀라 바로 세미르에게로 달려가서 그의 막대 기를 뺏어들었다. 프란은 드디어 나타난 구세주를 보고 벌벌 떨며 그의 발 밑으로 기어갔다. 얼마나 그의 존재가 기뻤던지 당장이라도 그의 발에 키스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 마구간에서 에르가는 가만히 맞고 있으면 살려줄 테지만 혹시라도 반 항을 하거나 도망을 가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았 다. 그래서 프란은 어쩌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그들의 몽둥이에 맞을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래도 5살 짜리 애들이 하는 거라 어느 정도 하고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은 절대 못 참는 집요한 에르가 때문에 프란의 오늘 하루 겪어야 한 고통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오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얻어맞았으니 아무리 혈기왕성한 성인남자라도 몸 이 성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도망갈까하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이대로 에르가와 아이들이 모두 한마음으로 후르부크 백작에게 그 무례한 놈을 죽여달라고 요구하면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은 거의 희박했다. 프란에 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프란, 괜찮니? 세상에… 누구 없느냐! 누구 없느냐니까!!" 세미르는 완전히 엉망이 된 프란을 보고 너무나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다 급히 다른 시종을 불렀다. "뭐예요!! 저 놈이 감히 나를 밀어 땅에 나뒹굴게 만들었단 말예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았는데……." 그때 에르가가 나타나더니 불만스럽게 세스케인을 향해 말했다. 사실 이제 그만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세스케인이 방해를 하자 괜히 심술이 나서 한 말이었다. "에르가!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니! 한번쯤은 너그럽게 용서해줄 수도 있었잖아!!" "내가 미쳤어요? 저런 천한 놈에게 너그러운 일을 하게?" 에르가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세스케인이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곧 세스 케인의 목소리를 들은 시종들이 몰려와서 그는 일단 프란을 숙소로 데려가 치료를 하게 하라고 명했다. 그들이 모두 물러가는 것을 보고 세스케인은 엄한 얼굴을 하고 에르가에게 말했다. "에르가. 앞으로는 절대 그런 짓은 그만둬!!" "왜요! 왜 그러는 건데요?! 왜 맨날 내가 하는 일만 마음에 안 드는 거죠? 천한 놈 하나 때려놨다고 이렇게 시비를 걸다니!" 에르가는 악을 바락바락 쓰며 세스케인에게 대들었다. 그러자 세스케인은 한숨을 푹 쉬고 그의 앞에 천천히 걸어가서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아이들 과 눈높이를 맞추고 말했다. "모두들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 그들이 천한 건 맞아. 그러니 까 네가 잘 대해줘야 하는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에르가는 인상을 확 썼다. 녀석은 세스케인이 자신에게 괜히 태클을 걸려 고 억지를 쓰는 것이 틀림없다고 규정해버렸다. 그런 에르가의 생각을 아 는지 모르는지 세스케인은 계속 진지하게 자신의 말을 이었다. "너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잖아? 하지만 저들 평민들은 너무나 천한 자들 이야. 그러니 네가 좋은 길로 이끌어 줘야지. 에르가라면 그들의 어리석음 을 이해하고 좀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지 않겠니? 어때, 딜티 님도, 세미르도, 제르도, 엘도. 모두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세스케인은 나름대로 어려운 말을 아이들에게 이해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 지만 에르가는 이미 세스케인에게 콩깍지를 쓰고 있었기에 그의 말을 조금 도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흥, 벌레 같은 놈들에게 가르칠 것이 뭐가 있어?" "네가 벌레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도 멋지잖아?" 세스케인은 에르가만은 어떻게든 이 말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 했다. 에르가의 행동이 모든 아이들의 모범(?)이 되고있다는 것을 익히 알 고 있었기에 에르가만 이것을 납득한다면 만사오케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에르가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벌레는 밟으라고 있는 거야! 바보 세스케인!!" 에르가는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세스케인의 발로 확 차서 밀어버렸다. 덕분에 세스케인은 그 자리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 았다. "푸하하, 바보, 바보. 그것도 몰라? 어떻게 벌레를 사람으로 만들어? 바 보!!" 에르가는 도망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세스케인을 놀려댔다. 두 달 동안의 경험으로 세스케인은 그냥 화를 내는 척 만할 뿐 진심으로 화를 내거나 무 섭게 굴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만은 세스케인도 화가 나고 말았다. 사실 이 정도까지 왔는데 화가 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리라. 세스케인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에르가에게 걸어갔다. 그때까지 도 에르가는 앞에서 깡총깡총 뛰며 그를 놀리고 있었다. "바보, 바보. 맨날 잘난 척 하지만 실은 바보인 거지? 바아보∼!!" "그만해. 에르가……." 세스케인은 아주 잔잔한 목소리로 에르가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러나 어린 에르가가 그 말이 경고라는 것을 깨닫는데는 무리가 많았다. "뭐라고요∼? 안 들려요오∼ 바보 형아씨∼." "에르가 너!!" 결국 세스케인은 주먹을 꽉 쥐고 반쯤 쳐들었다. "세스케인?" 그러나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세스케인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막 왕궁에서 돌아온 에스문드 백작과 후르부크 백작이 아이들이 이쪽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와본 것이었다. 그들은 반쯤 주먹을 쳐든 세스케인을 이 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세스케인은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에르가가 건 방진 행동을 했었다고는 해도 겨우 5살밖에 안된 아린 아이를 때리려 했다 는 데서 수치심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는 치켜들었던 손을 내려 다른 손으 로 그 손을 감싸쥐며 붉어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나 그렇게 숙인 그의 시야에는 안타깝게도 자그마한 에르가가 있었다.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스케인을 올려다보다가 그의 가슴에 대못을 꽂는 한마디를 했다. "형이 날 때리려 한 거야?" 세스케인은 더더욱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거의 본능적으로 뭐라 변명을 하 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렇게 변명을 하는 건 더더욱 옳지 않은 일이 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에르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에스문드 백작은 그들의 모습에서 또 에르가가 뭔 짓을 저질렀다는 것을 예감하고 소리쳤다. 그 말소리를 들은 에르가는 인상을 쓰며 세스케인과 자신의 아버지를 번갈아 돌아보다가 곧장 저택으로 절뚝거리며 뛰었다. 그 리고 아이들도 에르가의 뒤를 따라 우르르 저택으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구, 저 녀석이 정말……." 에스문드 백작은 곧장 에르가를 따라가고 싶었지만 뭔가 세스케인의 상태 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일단은 녀석의 뒤를 쫓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세스케인." 후르부크 백작은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세스케인을 보고 걱 정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세스케인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그래도 고개 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토록이나 자랑스럽던 아들이 갑자기 이상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고 후르부크 백작은 정말 애가 탔다. 혹시라도 에르 가 때문에 세스케인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에스문드 백작과 한판 붙겠 다는 결심까지 하고 있었다. 그때 세스케인이 작게 입을 열었다. "에르가가 너무…얄미워서…" "뭐?" "죄송합니다. 제가 에르가를 때리려고 했습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렇 게 어린 동생을 치려고 하다니……." 세스케인의 말을 듣고 두 명의 백작은 잠시 굳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일 에도 완벽주의자 세스케인에게는 몹시 수치스러운 일로 각인되고 있었다. "하…하하하하…." 갑자기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세스케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 웃음소 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에스문드 백작이었다. "후후훗. 그 마음 이해하네. 아니, 사실은 나는 두 달 동안이나 에르가를 돌보면서도 이제껏 주먹을 들지 않은 자네에게 정말 경의를 표하고 있었다 네." 세스케인과 후르부크 백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을 보고 에스문드 백작 은 헛기침을 하더니 약간 붉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사실 진실을 토하자면… 에스문드 영지에서는 항상 몽둥이를 들고 다니며 에르가를 쫓아다니곤 하지. 그리고 말썽을 피우면 그날 하루 흠씬 패주기 도 하고 말이지. 그래도 저 모양 저 꼴인 걸 어쩌겠나." 후르부크 백작과 세스케인은 그의 폭탄선언에 입을 쩍 벌렸다. 사실 귀족 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폭력 비슷한 것과는 일체 단절된 생활을 한다. 공부 를 가르칠 때도 매 맞는 동자를 들릴 정도니까. 그러나 사실 그런 것이 가 능한 것은 대부분의 귀족 아이들은 아무리 성질이 더럽더라도 기본적으로 는 기품 있는 존재이기에 말썽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기 때문이 다. "하…하하. 뭐, 사실이 그러하니 언제든 에르가가 말썽을 피우면 뒤집어서 엉덩이를 때려주게나. 그렇게 하면 하루 이틀 정도는 잠잠해지거든." 에스문드 백작의 말에 세스케인은 겨우 부끄러워했던 자신을 잊을 수 있었 다. 하지만 차마 그의 말대로 에르가를 패줄 결심을 하지는 못했다. "후우, 저대로 에르가가 크면 어떻게 될지… 정말 걱정이네." "그런 걱정은 그만 두세요. 아직 어린아이지 않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를 내던 제가 할말은 아니지만 좋은 친구들을 사귀고 여러 경험을 하다 보면 에르가도 언젠가 철이 들것입니다." "에르가를 길들일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에게 라면 정말 내 모든 걸 줘도 아깝지 않겠네." 에스문드 백작은 하늘을 보고 허탈하게 웃었다. 에르가를 철들게 만드는 길은 저 하늘의 끝에 이르는 거리만큼이나 멀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검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썽쟁이 아들의 치여 고생을 하는 아버지의 한을 알아달라는 탄원 아닌 탄원을 했다. 그리고 후르부크 백작과 세스케인과 함께 어느새 왁자지껄 소란스러워 진 후르부크 백작의 별장을 향해 걸어갔 다. ---------------------------------- 싸가지 5인방의 어린 시절을 다룬 「난데없이 외전 - 후르부크 백작의 별 장」입니다. 그들 중 넷은 원래부터 싸가지가 아니었죠. 그러다가 운명의 장난으로 그들도 결국 에르가 과(?)로 진화(-퇴화가 아닐까…)를 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아아, 그리고 이렇게 보니 에르가 정말 못된 놈이네요. 딱히 주된 에피소드 가 없었지만 에르가의 손에 불구가 된 하인이 부지기수거든요. 물론 동굴 에 들어갔다 온 뒤엔 굉장히 반성을 하고 있지만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 겠죠? ^^++ 3인칭이라는 걸 처음 써봐서 정말 어색해요. 이상한가요? 하지만 원체 할 말이 많아서 다중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는 도저히 모든 내용을 다 쓰 지 못할 거 같더라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손에 익지 않은 3인칭을 한 번 써봤어요. 이 난데없이 외전 편은 그냥 쓸데없이 한번 써본 것으로 아마 책에는 들어 가지 않을 듯합니다. 내용이 좀 썰렁했을까요? 그래도 그냥 너그러이 용서 를… ^^;;; 기나긴 여름의 중간부분에서 전쟁 묘사를 못해서 슬럼프에 빠진 중에 외도 를 하면서 쓴 거죠. 이 많은 분량을 딱 삼일만에 썼다는 소문이… 쿨럭… 곧 기나긴 여름 본편도 올라갑니다. 진짜예…일…겁니다…… --;;; 리플, 감상 부탁!! *^^* hongik1999@hanmail.net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37 기나긴 여름 (4) 과연 게릭의 말대로 국왕군은 다음날 바로 몰려왔다. 식량 창고가 불에 타 버린 이상 오랜 시간 머물 수가 없게 되었기에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빠른 결판을 지어야만 했을 것이다. "몸 사리지 말고 제대로 조준하지 못해? 네 놈이 서있는 탑까지는 아직 화 살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몇 번 이야기해야 알아듣겠냐! 아무리 무서워도 최소한 앞은 보고 마법을 시전해야 할거 아냐! 그러다 진짜로 활 맞고 뒈 지는 수가 있어!!" 류스밀리온은 잔뜩 몸을 웅크린 채로 몸을 사리고 있는 마법사들에게 소리 질렀다. 그는 아직까지 완쾌되지 못해 막사에서 쉬고 계시는 아르 할아버 지를 대신하여 마법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조금씩 은 불만에 찬 얼굴들이었지만 전투를 치르기 전에 류스밀리온을 따르라는 아르 할아버지의 당부나 8서클의 마법사라는 실질적인 능력을 때문인지 순 순히 그의 지휘에 따랐다. "젠장 손이 안가는 놈이 없구만!" "류스밀리온 님, 저기 하나 올라오는데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네 놈은 어디 한쪽 구석에 짱 박혀 있어!" 류스밀리온은 성벽 위로 간신히 기어올라온 한 병사에게 가볍게 매직 애로 우를 날려주며 나의 말에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나에게 마법 수식을 배워 간 뒤로 그에게 1서클 마법 정도는 손을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쉬워진 모양 이다. "좀 꺼져 있으라니까. 뒈지고 싶으냐?" "류스밀리온 님! 신경질은 그만 부리세요. 제가 병사들의 눈에 보이는 전장 에 나와 있는 게 군의 사기를 올리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잖아요. 완전히 후방으로 물러나 있기만 할거였다면 여기까지 따라나올 이유도 없었죠." "젠장, 최소한 말이라도 걸지마! 산만하단 말이다! 마법 시전을 하면서 거 기에 겁쟁이들 지휘까지 하는 게 얼마나 골 빠개지는 일인 줄 알아! 어차 피 네놈이 검을 들고 나가 싸우는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않아도 힘든 군대의 통솔에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까지 겹쳐 더러운 성질에 불이 붙은 것인지 그는 아주 대놓고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소에서 왕자를 모욕하는 것은 결코 쉽게 용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님에도 그런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는 그를 보면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온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어쨌든 현재 류스밀리온은 아군에게 상당히 중요한 전력이기 때문에 나는 주변에서 명령만 내리면 당장에 칼을 뽑겠다는 무언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호위기사들을 말리면서 그와 약간 떨어진 뒤쪽으로 물러났다. 류스밀리온 과 어느 정도 멀리 떨어지자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전하! 저자를 이대로 두고만 본다면 전하의 위신이……. " "그가 저러는 것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 않은가?" "전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금 그의 태도는 그 자리에서 목을 쳐..." "그의 목을 치면? 그럼 경이 8서클의 마법을 쓰고 마법사들을 지휘할 건 가? 아니면 마법사들의 도움 없이도 이 전쟁을 승리 할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건가?" "전하 그런 뜻이 아니오라……." "나도 경의 마음을 잘 이해하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는 그의 도움이 절 실히 필요하지. 그의 도움이 없다면 이 전쟁을 이길 수가 없어. 그의 태도 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우선 그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의 힘을 키워야 하네. 그 다음에야 그의 태도에 대해 벌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그 일에 대한 언급은 그만 하도록 하지." 나의 의지가 확고한 것을 읽었는지 아니면 자신의 주장이 현실성이 떨어진 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류스밀리온의 처벌을 주장했던 기사는 다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사실 지금의 류스밀리온은 예상보다 훨씬 더 우리전력에 도움이 되고있었 다. 8서클 마법사라는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홀로 떠돌아다니면서 생활했 기에 생명의 궁 출신, 아니 4대 왕국에 하나씩 배치되어 있는 마법사 양성 소 출신이라면 의례 배울 마법사의 지휘에 대한 교육을 받은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군의 많은 장교들은 자칫 그가 전장에서 서투른 모습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걱정과는 달리 그의 지휘실력은 내가 봐도 상당했다. 일부 마법사들을 시켜 성문 외벽에 기본적인 보호 마법을 지속시키면서 국 왕군의 공성 병기가 다가올 때마다 고위마법사들의 대마법을 퍼부어 주는 기본적인 말할 것도 없고, 캐스팅으로 인한 딜레이로 인해 자칫하면 일반 병사들의 공격과 제각각이 되어 비효율적으로 운용될 수도 있는 마법사들 의 공격을 나름대로 드리크 경의 총지휘에 보조를 맞춰가고 있었던 것이 다. 하지만 그런 류스밀리온의 지휘 능력이 가미되었음에도 생각 이상으로 후 작군의 공격은 매서웠다. 그로 인해 조금 전부터 자연히 류스밀리온의 지 휘도 잘 먹혀 들어가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 또한 그가 내게 짜증을 낸 원 인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상황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군요. 지휘부로 내려가서 상황을 알아봐 야겠습니다." 한동안 좀 더 그 자리에 서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휘부 쪽으로 내려갔다. 그곳은 공격을 받은 벌집 마냥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아무도 내가 지휘부에 왔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전장의 소식을 전하러 들어온 전령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서는 큰 소리로 예를 취했고 그로 인해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 다. 드리크 경은 급히 나에게 다가와서 정중히 예를 취했다. "바쁜데 찾아온 것 같아서 미안하군요. 드리크 경." "아닙니다. 어서 이리로 드시지요." 드리크 경은 나를 중앙으로 안내한 후, 여러 전령들에게 보고를 받고 그들 에게 일일이 어떤 명령을 내렸다. 상황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드리크 경은 그제야 겨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실례를 범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 역시 마법사 전용 망루에 있다가 전황이 궁금해서 미처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내려왔으니까요. 그런데 전황이 상당히 어떻게 진행 되고 있나요?" "국왕군은 관문 쪽에 소수의 병력을 투입하고 대부분의 주력을 좌우측 성 벽에 집중시켜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아군 역시 중앙병력의 일부를 좌우측 성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국왕군이 우측성벽에 발석차를 동원한 대규모 기습공격을 시도하여 두개의 탑을 모두 붕괴시켰고 그쪽에 배치되어 있던 발석차 부대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현재 우측성벽은 장 거리 지원공격 없이 적과 교전하고 있는 상태라 상당히 많은 피해가 발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문드 백작에게 우측성벽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 하고 후방에 대기하고 있던 대기병력중 상당수도 우측 성벽 쪽으로 이동시 켰습니다." "탑에 있던 마법사들은 어떻게 되었죠?" "그들은 탑이 붕괴되기 직전에 모두 무사히 탈출해서 현재 이동식 망루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마법사의 안전을 고려해서 망루를 우측 성벽에 접근시키지 못하지 크게 도움이 되고 있지는 못합니다."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다 이긴 전쟁이라고 마음놓 고 있었는데 역시 전쟁은 만만한 것이 아니다. "상황이 제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군요." "우측 성벽에 집중되어 있는 후작군의 발석차 부대가 문제입니다. 이미 마 법사들의 힘으로 국왕군의 발석차를 상당수 파괴한 뒤이긴 하나, 남아있는 발석차들의 공격 때문에 이동식 망루가 성벽으로 접근하지 못하여 성벽 위 의 병사들은 큰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중앙에 있던 발석차는 이미 우측성 벽으로 이동한 터라 지원해 줄 여력이 없고 좌측의 발석차를 움직이자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좌측의 방어마저 소홀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만약 적 이 아군의 이러한 상황을 알고 우측성벽에 집중공격을 하게 된다면 2,3경 안으로 성벽이 함락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대책은 있나요?" 나의 질문에 드리크 경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곧 얼굴을 굳히고 대답했다. "제가 미끼가 되어 적의 공격을 관문 쪽으로 돌려볼 생각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서 이런 불리한 상황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 라 생각합니다." "과연 국왕군이 우리의 의도대로 움직여 줄까요?" "국왕군은 아군처럼 여러 영주들이 연합하고 있는 형태의 병력이지만 후작 과 동급의 위치에 있는 일부 귀족들 또한 합류하고 있기 때문에 아군처럼 일사불란한 명령체계를 가지기 힘듭니다. 그들이 지금 한가지 목적으로 인 해 후작의 명령을 듣고 있긴 하지만 눈앞에 큰 이익이 닥친다면 그들은 명 령체계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얻으려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우측성벽에 계속해서 병력을 보충시키고 있기 때문에 저들은 우측성벽이 함락될 위험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함락하기 어려워 보이 는 우측성벽보다는 관문 위에 있는 저를 노릴 가망성이 더 큽니다." "음, 한가지만 고치면 완벽한 작전이 되겠군요?" "무슨 좋은 의견이 있으십니까?" 관문위로 올라온 나는 한 차례 격렬한 전투를 치르고 나서 호위기사에게 내 깃발을 관문 위에 걸 것을 명령했다. 과연 적들이 의도대로 움직여 줄 지 걱정도 되었지만 그러나 드리크경보다 더 먹음직한 나라는 먹이가 있으 니 적들은 틀림없이 이쪽으로 공격을 할 것이다. 관문 위에서 치르는 전투는 내가 실제로 전쟁터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내게 적의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나를 죽이려 달려 들었으며 하나의 위험을 넘겼다고 생각한 순간 또 다른 위험이 다가왔다. 몇 번의 전투를 치르고 나자 국왕군은 내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아니면 우측성벽의 점령이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대규모의 병력을 관문 쪽 으로 파견했다. 그들은 어느 정도 관문 쪽으로 접근하다가 화살공격을 했 는데 아군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대형방패로 그 공격을 막아 큰 피해를 입 지 않았다. 화살 공격이 끝나자마자 국왕군은 바로 대규모의 보병부대를 돌격시켰다. 수많은 병사들의 움직임은 마치 성난 파도처럼 격렬했다. 그러 나 믿기지 않게도 그런 그들의 움직임이 거의 일순간 멈추어버리고 말았 다. "곧 내 차례로군." 나는 국왕군의 시선을 따라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국왕군뿐만 아니라 아군의 병사들까지도 시선을 모으고 있는 그곳에는 날개를 지닌 도 마뱀의 형상을 한 거대한 생물이 떠있었다. 그것은 오랜 서적이나 민담으 로 전해내려 오는 파이어 드래곤과 흡사한 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호위기사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와 국왕군의 앞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 낸 후 크게 호통을 쳤다. "국왕군의 병사들이여! 순순히 항복하라. 그러면 너희들의 목숨을 살려주겠 다. 그러나 반항한다면 드래곤의 불길이 너희 모두를 태워버릴 것이다!" "저것이 가짜라는 것을 모를 줄 아느냐!?" "그쯤 해두지 그러냐. 창피한 줄 알아라, 카류리드 왕자!" 아래쪽에 우글우글 모여있는 국왕군의 진영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들려 왔다. 그 목소리에 드래곤의 환영에 놀라 잠시동안 움직임을 멈추었던 국 왕군의 병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진을 하는 병사들 중 몇몇이 더 합세하여 나와 드래곤에 대한 조롱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슬쩍 웃어 주면서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드래곤이 거짓인 것은 분명하지만 8서클 마 법까지 거짓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열사의 땅에 뜨거움의 더 해주는 거대한 불덩이가 후작군의 진영에 작열했다. 콰아아아아아앙---!! 관문 위에 있던 내게도 약하지만 땅을 울리는 진동과 뜨거운 열기가 전해 져왔다. 마법 공격을 받은 아래쪽의 국왕군의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다. 관 문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새로이 진격을 명 받고 달려나오던 부대에 반수 정도의 병사가 한순간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짐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상처 입은 수많은 병사들이 벌레처럼 땅에서 꿈틀대며 그 주변일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백 여명에 달하는 인간들이 불에 타 문드러진 팔과 반쯤 잘려나간 다리를 부여잡고 비명을 내지르는 괴기스러운 장면이 펼쳐졌다. 영화에서나 보던 지옥이 눈앞에서 펼쳐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그 지 옥을 본 아군의 병사들은 더더욱 큰 힘을 얻어 환호성을 올렸다. "나의 병사들이여! 이번에는 너희들의 힘을 보여줄 차례다!! 아군엔 드래곤 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라!" 와아아아아아--------!!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함성이 나의 독려에 화답하듯 울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관문과 좌우성벽에서 마법사와 궁수, 발석차의 공격이 일제히 국왕 군에게 쏟아졌다. 전진해있던 후작군의 발석차들은 그 공격으로 인해 모두 부서졌고 관문 앞에 모여있던 후작군의 부대도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우측성벽에는 이동식 망루가 배치되어있고 저들에게는 더 이상 성벽 위를 공격할 수 있는 발석차가 없었다. 잠시 후 국왕군의 2진이 다시 공격 해왔지만 아군의 방어진은 완벽하게 갖추어진 상태라 그들의 맹렬한 기세 는 더 이상 위협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방어선이 완전하게 구축되어 국왕 군이 더 이상 관문 위까지 올라오지 못하게 되었다. "전하! 이제 탑으로 돌아가시죠. 이곳은 너무 위험합니다." 원하는 대로 작전이 성사되자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나에게 탑으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그러나 한창 달궈지고 있는 아군의 기세를 보자니 조금 더 이곳에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만 더 이곳에 있도록 하지. 좌우측 성벽의 방어선이 형성된 이상 좀 전만큼 위험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리고 내가 이곳에 있다면 아군의 사기 도 크게 오를 테고 국왕군도 나를 잡기 위해 이곳을 계속 공격하려 할 테 니 아군도 보다 쉽게 싸울 수 있지 않을까?" "하오나 전하 작전이 성공한 이상 더 이상 전하께서 위험을 무릅쓰고 계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장 만약 불운하게도 전하께서 해를 당하게 된다면 백 번의 전투를 승리한다 해도 소용없게 되옵니다." 호위기사의 요청을 거절할 뚜렷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슬쩍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무언가 내게로 날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온 몸의 신경 하나하나에 빠르게 퍼져나가는 적신호에도 불구하고 나는 제대로 그 위험에서 벗어날 만한 제대로 된 움직임을 취하지 못했다. "아!" 그때 무언가가 빠르게 다가와 나를 감싸면서 땅바닥을 뒹굴었다. 갑작스러 운 일인지라 무의식중에 눈을 감아서 앞을 보지는 못했지만 몸으로 전해지 는 그 익숙한 느낌에 나를 감싸고 있는 무언가가 디트 경이라는 것을 깨달 을 수 있었다. 디트 경은 나를 깔고 있다가 곧 땅을 짚고 천천히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괜히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밀어내려다가 축축한 것이 내 손을 적시 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트경의 팔을 감싸고 있던 갑옷의 틈새로 피가 흘러나와 내 손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겨우 이 정도에 그렇게 다쳐서야 어디 날 제대로 보호 할 수나 있겠어?" 나를 위해 몸을 던져준 사람이니 한번쯤 좋음 말을 해줄 만도 했건만 나는 언제나와 같이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이 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온 몸으로 확인해준 꼴이 되었기에 나는 그 즉시 그곳을 내려올 수밖 에 없었다. "전하! 적들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내가 죽을 뻔했던 사건으로 인해 나는 탑에 있는 지휘부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디트 경에게는 치료를 하고 나를 호위하라고 했지만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자신의 위치를 떠날 수 없다면서 그 자리에서 상처를 대충 치료 하고 다시 나를 따라왔다. 내가 지휘부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조 금 전까지 죽자살자 공격하던 적이 퇴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황 당해 할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죽자살자 덤비더니 왜 저렇게 갑자기 물러나는 것이 죠?" "아마 전하가 탑에 들어오셨기 때문에 저들에게 더 이상 승기가 없다고 판 단한 것일 겁니다. 여러 차례 파상 공세로 아군을 공격해보았지만 이미 아 군의 방어체제는 완벽하게 구축되어 오히려 저들의 피해만 커지고 있는 상 황이었고 전하께서 관문 위에서 물러나셨으니 전하를 죽여 전세를 뒤집을 가능성도 없어졌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흠… 내가 관문 위에 있었던 것 때문에 아군의 승리가 늦어진 꼴이었나 보군요. 좀 허탈한 걸요?" "하지만 그 덕에 국왕군에게 좀더 많은 피해를 줄 수 있었으니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나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을 해주던 드리크 경은 마지막으로 매우 화사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역시 드리크 경도 사람이니 승리가 기쁜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나는 그제야 진정으로 아군이 승리를 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 다. 나는 적군이 퇴각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발코니 앞으로 나가 갔다. 그리고 막 아래를 내려다보려는데 한 기사가 다급히 나오더니 내 앞 에 무릎을 꿇었다. "전하! 아군이 승리했다고 하지만 아직 적들에게는 많은 병력들이 있습니 다. 이번에야말로 소신이 기병들을 이끌고 퇴각하는 적들을 추격하여 숨통 을 끊어놓고 오겠으니 허락해 주십시오." "…드리크 경.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적이 비록 퇴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아군보다 병력이 많습니다. 그리 고 후미에 경기병과 중보병을 배치하여 아군의 추격에 대비하면서 천천히 후퇴하고 있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아군의 기병들이 크게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비록 후퇴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군보다 병력이 월등하게 많습니다. 자칫 아군이 성문을 여는 순간에 기습해 들어 와 성문을 닫지 못하게 한다면 크게 위험할 수도 있으니 그냥 이 정도의 승리에서 만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드리크 경의 말이 옳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고 여러분 과 병사들도 크게 힘들었을 텐데 좀 쉬도록 하세요"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나는 류스밀리온이 걱정이 되어 마법사들이 있는 꼭대기 방에 올라갔다. 8서클 마법을 쓴 후에도 계속 마법사들을 지휘했으 니 아무래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과연 그곳으 로 올라갔을 때 류스밀리온은 시체처럼 창백한 혈색을 한 채 이마에서 흐 르고 있는 땀을 닦으면서 한쪽 벽에 기대에 서있었다.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그만 쉬어도 좋습니다." 류스밀리온은 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상사태를 대비한 몇몇의 마법사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는 그만 후방으로 물러가도 좋다고 명령을 내렸다. 이 번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해주었던 대부분의 노 마법사들은 오랜 전투로 굉장히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인지 그 명령을 듣고도 일반 병사들처럼 환호 성을 지르며 날뛰지는 않았다. 대신 창백한 얼굴에 힘들어 보이는 웃음을 띄우는 것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마법사들이 하나 둘 대부분 후방으로 물 러나자 류스밀리온은 한숨을 푹 쉬고는 아주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 습에 나는 그를 부축하면서 나름대로 근심 어린 말을 건넸다. "힘내세요, 류스밀리온 님." "네놈 같으면 힘내라는 말 한마디에 곰 같은 힘이 마구 솟을 것 같으냐? 앙?" 그러나 류스밀리온은 몸이 좋지 않은 것 때문에 짜증이 난 것인지 좋게 걸 어오는 말에도 괜히 시비를 걸었다. 조금 전에도 류스밀리온의 이런 무례 한 행동에 반발하여 그의 처단을 주장했던 그 호위기사가 또 한번 발끈했 는지 반걸음 걸어나오기에 나는 손을 조금 들어 그들의 행동을 막았다. 내가 투덜거리는 류스밀리온과 함께 후방에 있는 최고 사령관들이 모이는 막사로 들어갔을 때, 의외의 사람이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다. 아르 할아버 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는 웃는 얼굴로 반가움을 표했 던 것이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이렇게 돌아다니셔도?" "그래, 걱정할거 없다. 카류야. 후후, 승리를 거둔 모양이더구나. 축하한다." 아르 할아버지는 인자하게 웃으며 정말 오랜만에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 다. 그 모습을 보니 정말 괜찮으신 듯해서 절로 흐뭇한 웃음이 배여 나왔 다. "에구, 며칠 쓰다듬지 않은 것뿐인데 왠지 머리 높이가 다른 것 같은 느낌 이구먼." "아닌게 아니라 정말 컸을 거예요. 요즘엔 너무 급속도로 키가 자라서 뼈 마디가 다 삐끄덕거릴 정도인 걸요." 아르 할아버지와 오랜만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있던 류스밀리온이 느닷없이 퉁명스럽게 끼어 들었다. "확실히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구만, 아르디예프. 하지만 여기서 마법 한 번 쓰면 또 골로 가니마니하며 사경을 헤매겠지. 허약해빠진 늙은이." 곱지 못한 눈초리로 아르 할아버지를 향해 비꼬듯 말하는 류스밀리온을 보 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심 어린 충고를 해주었다. "류스밀리온 님. 그냥 무리하지 마세요∼ 라고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그게 그렇게 힘드세요? 자, 그럼 절 따라해 보세요. 무리하지 마시고 그만 쉬세 요, 아르디예프 님∼ 이라고." "이게 미쳤나!?" 류스밀리온은 눈을 부릅뜨며 정말 화가 났는지 나에게 달려들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르 할아버지가 오랜만에 소리를 내어 즐겁게 웃었다. 비 록 류스밀리온에게 붙잡혀 상당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지만 할아버지의 미 소가 기분이 좋아서 나도 빙긋 웃을 수 있었다. "이게 웃어? 정말 죽고 싶으냐!?" "에휴, 그만하세요. 류스밀리온 님. 꼭 에르가 형을 대하는 것 같네요." "내가 뭐?" 류스밀리온과 투닥거리고 있을 때 에르가 형이 다른 무장들과 함께 우르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에르가 형은 무슨 이야기인지는 듣지는 못했던 듯 했지만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쪽이라는 것을 예감했던 것인지 인상을 잔뜩 구기고 있었다. "아아, 오늘따라 류스밀리온 님이 에르가 형처럼 너무나 순수해 보인다고." "뭐?" "뭐얏?!" 나의 대답에 류스밀리온 님과 에르가 형이 동시에 눈살을 찌푸렸다. 순수 라는 말은 좋은 뜻인데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건지… "이렇게 즐거운 때에 왜 화를 내시고 그러십니까! 겨우 3만의 군대로 10만 대군을 물리쳤으니……!! 솔직히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군요. 꼭 꿈이라도 꾼 것 같습니다." 디슈켄트 님께서 흥분하셨는지 뺨에 약한 홍조까지 띄며 줄줄 말을 늘어놓 았다. 저분은 저렇게 활기찬 성격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 동안 어떻게 과묵 한 척 입을 다물고 계셨나 모르겠다. 나는 고정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임 이 없는 디트 경에게 괜히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승리의 기쁨에 싱글 벙글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했다. "그건 그렇고 드리크 경은 아직 안 오셨나? 지휘부에 안 계시던데?" "전후 처리를 위해서 나가셨어. 그런 건 부관들 시키셔도 될텐데… 후방에 대기하던 병사들로 경계병들을 교체한 후, 피해상황을 점검해서 다음에 있 을 국왕군의 침임에도 대비해야한다고 나가셨어. 내가 이곳에 와있다고 전 령을 보냈으니 금방 오실 거야." "음……." 딜티의 말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고개를 미처 다 끄덕이 기도 전에 드리크 경이 막사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아? 드리크 경? 오셨네요. 정말 금방이네." 나의 작은 웃음에 드리크 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드리크 경의 표 정이 재밌긴 했지만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웃음을 거두고 드리크 경을 향 해 말했다. "드리크 경, 게릭 님은 어디에 계시죠? 이번 일에 큰 도움을 주신 분은 다 름 아닌 게릭 님이 아닌가요. 저희끼리 이러면 섭해하시지 않겠어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여봐라, 너희들은 가서 아이시스 남작을 모셔오도 록 하라." 드리크 경은 밖의 병사들에게 명하여 게릭 님을 데려오도록 조치했다. 게 릭 님은 혹시나 전쟁하는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싶어 후방의 다른 막사에 몇 명의 병사들의 감시를 붙여 가둬둔 상태였다. 그 당시 게릭 님 도 웃으며 당연한 조치이니 괜찮노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렇게 전쟁이 무 난히 끝난 이상 더 이상 그를 가둬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실 이번 전투가 이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라 하긴 어렵다. 아직 국왕군 에게는 많은 병력이 있기에 그저 병사들을 재정비하기 위해 잠시 본진으로 돌아간 것일 뿐, 다시 한번 쳐들어 올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국 왕군이 지난 전투에 이어 아군에 비해 상당한 병력을 잃었고, 또한 이번 식량 창고가 불에 탄 것까지 감안한다면 지금쯤 철수를 하는 것이 저들에 게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그래서 아군이 이렇게 거의 다 이긴 것처럼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에르가 형. 그리고 딜티. 둘 다 어디 다친 데는 없어? 에르가 형은 우측성 벽을 지원 갔었는데 괜찮았어?" 게릭 님이 이곳으로 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딜티와 에르가 형의 안 부를 물었다. 외견으로 보기엔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둘 다 지기 싫어하고 기대지 않으려 하는 깡이 보통이 아닌지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자 에르가 형이 가장 먼저 눈을 부릅뜨고 불만스럽게 소리쳤다. "대체 날 뭘로 보는 거냐? 네 놈은 눈을 폼으로 가지고 다니는 거냐? 보면 몰라?" "여기 피가 배어 나온 거 보이지? 화살이 스쳤거든. 잘 살펴보면 다른 것 도 있을지 모른다고." "이 자식이!? 그러는 딜티, 네 녀석은?" 에르가 형과 딜티는 승리로 인해 완전히 풀어졌는지 많은 장군들이 있는 앞에서도 시끄럽게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확실 히 다친 곳은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 안심이 되었다.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군대도 참 드물 거라는 생각이 들 었다. 군 최고 책임자에게 저런 폭언을 심심찮게 내뱉고, 또 그것을 아무렇 지도 않게 바라보는 장교들이 있는 군대가 또 어디 있겠는가? 좋게 말하면 가족적인 군대, 나쁘게 말하면 상급 지휘자들의 군기체계가 엉망인 군대랄 까? 그러나 이중 가장 문젯거리(?)라 할만한 에르가 형도 병사들이 보고 있는 공식적 장소에서는 내게 깍듯한 존댓말과 전하라는 제대로 된 호칭을 사용 한다. 형도 그렇게 경우가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런걸 생각해보면 밖에 서도 내게 있는 짜증 없는 짜증 다 부리는 류스밀리온은 정말… "이게 뭐지!?" 잠시 그런 생각을 하며 류스밀리온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슥 돌리는데, 의 자에 축 늘어져 삐딱하게 앉아 있던 그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는 잔뜩 인상을 일그러뜨린 채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바라보 고 있었다. "류스밀리온?" 아르 할아버지가 왜 그러냐는 의미에서 류스밀리온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 는 할아버지의 물음에 답해주지도 않고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밖으로 뛰 어나갔다.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류스밀리온으로 인해 승리의 기쁨으로 화가애애하던 막사 안은 잠시 적막에 빠졌다. "저 놈은 상대에 대한 배려라는 게 전혀 없다니까……." 아르 할아버지는 다짜고짜 행동하는 류스밀리온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그러나 곧 자신도 한쪽 손을 머리에 얹고는 미미하게 미간을 찡 그렸다. "…어? 이건……?" "아르 할아버지, 왜 그러세요?" "누가 마법을 쓰려는 건지 근처에서 대량의 마나가 움직이고 있구나. 이건 거의… 5서클 수준인데……." 고옹-. "뭐!?" 나는 멀리서 들려오는 작음 폭발음에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며 소리쳤다. 상황에 거기까지 왔는데 더 이상 가만히 막사 안에 노닥거리 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의 변화에 불안해진 우리들 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밖으로 뛰쳐나가려 하는 찰나 한 병사가 부 리나케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레이포드 경! 아…아이시스 남작이… 사라졌습니다!!" "뭣?! 그렇게 감시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더냐!!" "죄송합니다!! 아군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에 조금 주의가 산만해진 틈 을 타 도주한 모양입니다!!" 병사는 크게 화를 내는 드리크 경을 보더니 눈을 찔끔 감으며 대답했다. 나는 불쾌한 감각이 몸을 훑는 것을 느끼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곧 뭔가 알 수 없는 검은 연기가 성문 쪽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 었다. "대체……." "이런 썩을!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이야?!"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머리 위에서 류스밀리온의 신경질적인 목소리 가 들려왔다. 나는 이상한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생각에 고개를 위 로 들어올렸다. 놀랍게도 류스밀리온은 하늘에 떠있었다. 이 곳에서 관문이 그렇게 먼 것은 아니었지만 한번에 눈에 들어올 정도로 탁 트인 곳에 위치 한 것도 아니었기에 높은 곳에서 한눈에 그곳을 살피기 위해 플라이 마법 을 사용한 모양이다. 플라이 마법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붙어있기는 하나 단지 바람의 기류를 이용해 잠시동안 몸을 하늘에 띄우는 정도일 뿐, 그 마법이 사람을 새처럼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러나 생각 이상으로 그 바람의 컨트롤이 쉽지 않아 플라이 마법은 6서클에 속해 있었는데, 류스밀리온은 전투로 인해 지친 몸을 하고도 잘도 그 짧은 시간에 저런 고위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카류리드 전하!!" 류스밀리온이 내려와 자세한 상황 설명을 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성문 쪽 에서 한 병사가 다급히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왔다. 그러나 그 병사의 말 은 나 대신 뒤쪽 막사에서 나오고 있던 레이포드 경이 받았다. "보고하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보고 드립니다! 성문의 교체병력 중의 일부가 갑자기 공격을 가해 성 문을 점거했습니다. 너무 의외의 일인지라 우왕좌왕하다가 그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디슈켄트 경! 테잘렌!!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성문을 되찾게! 국왕군이 눈 치를 채고 되돌아오기 전에 어떻게든 성문을 다시 닫아야 하네!! 그리고 에스문드 백작! 경은…" 드리크 경은 병사의 말을 끝나자마자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그는 갑작 스러운 상황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숙련된 기사답게 보고를 듣는 즉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하늘에 떠 있던 류스밀리 온이 거의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쪽으로 내려왔다. "문을 연 놈들은 이미 관문 밖으로 도망쳤다!" "예? 그게 무슨?" 드리크 경이 에르가 형에게 명령을 내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류스 밀리온을 향해 되물었다. 그렇게 되묻고 싶은 심정은 나도 다르지 않았다. 보통은 문을 연 무리들이 계속 버티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야 퇴각했던 국왕군이 침입해 들어오기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 "누군가가 열려진 성문에 공격 마법을 시전했다. 빌어먹을… 최고위 마법 을 사용한 것은 아니라 위력이 약해서 문 자체가 완전히 날아간 것은 아니 지만 여닫는 연결부위 쪽이 중점적으로 망가졌어! 앞뒤 가리지 않고 닫으 려고 용썼다간 영원히 문짝이 떨어져 나갈 거다!" "뭐라고요!?"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류스밀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류스밀리온은 인상을 쓰며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성문이 부서졌다! 활짝 열린 채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 같이 덜렁 거리고 있다고!!" 그렇게 말한 류스밀리온은 너무나 초조한 기색으로 자신의 분홍색 머리카 락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이번만은 드리크 경도 잠시동안 굳어버리고 말 았다. 나는 울컥하는 마음에 류스밀리온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보호 마법은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 마법사들이 몇 남아 있었잖아 요!" "젠장할!! 내부자의 소행이다! 성의 내부에서 사용해서 보호 마법도 무용지 물이었던 거다! 대체 누가 마법을 쓴 거야!? 이 마나의 움직임은 아티펙트 를 쓸 때 나타나는 급한 마나의 소용돌이와는 다른 마법사의 힘이라고! 아 군의 마법사들 중에 배신자가 있었단 말인가!?" 나는 머리를 박박 긁어댔다. 불과 며칠 전에 목숨 걸고 이쪽으로 넘어온 주제에 갑자기 이제 와서 배신을 하겠다는 속셈은 뭔지… 그러나 나는 곧 그 마법사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국왕군 중에 유넨이라는 마법사가 한 명 남아 있지요. 정말 게릭 님이 첩자라면 그가 데리고 온 몇백의 병사들 중에 유넨이 끼어 들어오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썩을! 그저 글 읽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비실거리는 마법사를 배후를 치 는 침입자로 이용했단 말이냐?! 이렇게 민첩함을 요하는 일에?!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걸 생각해낸 거야!!" 나와 류스밀리온의 대화를 듣던 드리크 경은 곧 고개를 돌려 에르가 형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에스문드 백작! 당장 병사들을 이끌고 후방에 주둔하고 있는 게릭의 군대 를 경계하게! 그들이 정말 거짓 투항을 한 것이라면 분명 아군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움직임을 개시할 테니까." "레이포드 총 사령관 님!!" 그러나 아군은 곧 다급히 뛰어오는 병사에게서 또 한번 유쾌하지 못한 소 식을 들어야만 했다. "보고 드립니다! 조금 전의 폭발음이 들림과 동시에 후방에 있던 병력중 일부가 아군을 공격했습니다. 어느 부대인지는 지금 알아보는 중입니다." "빌어먹을!! 게릭군이다. 철저히 준비를 하고 왔군. 에스문드 백작, 지금 즉 시 그곳으로 가서 무기를 버리라고 명령하고 명령에 저항하는 병사들은 항 명죄로 모조리 베어버리고 퇴로를 확보하게 서두르게!!" "예, 레이포드 경!" 드리크 경은 어울리지 않는 욕설까지 내뱉으며 에르가 형에게 명령했다. 그리고 성문이 부서져버린 이상 더 이상 이곳을 지키기는 힘들 것이라며 망설이지 않고 바로 나의 탈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는 에르가 형이 뛰어가고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수선하게 움직 이는 병사들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게릭에 향해 치를 떨면서. * * * 남쪽 하늘에서 검은 연기가 작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저 연기는 나의 화계 마법에 직격 당해 부서진 문에서 나는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 5서클 마법사였기에 내 실력으로는 아군의 병사들이 돌격 하여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성문을 완전히 부셔 버릴 수가 없었다. 중노동 각오하고 연속으로 여섯, 일곱 발정도 날리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제6 왕자군이 내가 문을 부셔버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줄 위인들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인 보호 마법에 의해 굳게 닫혀진 성문을 공 격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전혀 보호마법이 닿지 않는 내부에서 활짝 열려 진 성문을, 그것도 문짝 자체가 아닌 연결부위를 집중 공격함으로써 나의 부족한 마법력으로도 성문이 제구실을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성문에 마법을 시전하려고 했을 당시, 제6왕자군의 마법사들은 오랜 싸움으로 크게 지쳐있었고 대부분 후방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그래서 내가 캐스팅을 시작했음에도 성문의 병사들은 한창 문을 열고 날뛰는 다른 침입 자들 쪽에 정신을 팔려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덕분에 나는 집중 공격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고 몇몇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어느 정도 마음놓고 마법을 시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사실 그 작전을 실행하는 동안 몇 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기도 했지만 나야 허약 한 귀족 출신 마법사와는 조금 틀리지 않겠는가. 게다가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좀 더 시간을 투자해 6서클 마법을 썼다면 성문을 좀 더 확실히 부셔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 한 마법을 무리하게 썼다가 지난 전투에서처럼 쓰러지면 나만 손해이므로 간단히 5서클 마법을 사용했다. 어차피 아군의 마법사는 나 혼자니까 내가 몇 서클 마법을 썼는지 지들이 알게 뭐겠냐고 생각했던 것이다. "후후…후후후후……." 나는 힐끗 뒤를 돌아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낮게 웃음소리를 내어버렸 다. "유넨 님?" "아, 아니, 아무 것도." 곁에서 서있는 병사들의 시선을 느끼고 나는 얼른 이미지 관리 차원으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당한 변고에 카 류 왕자가 얼마나 얼이 빠졌을지 생각하니 너무 통쾌해서 웃음이 번진 얼 굴을 평상시대로 만들기가 힘에 부쳤다. 사실 아이시스 남작의 불확실한 태도 때문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꽤 나 마음을 졸여야만 했다. 아이시스 남작이 내놓은 계획은 꽤 가능성이 있 는 작전이었지만, 그가 카류 왕자와 친했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이었기에 그대로 제6왕자군에 붙어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 게 되면 병사로 변장하여 제6왕자군의 진영으로 숨어든 나는 카류 왕자의 반역 계획에 초를 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만큼 죽은목숨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 처음 그 계획을 들었을 때는 트로이 후작 역시 쉽게 아이시스 남작을 믿지 못하여 그가 데려온 친아들인 일라트를 인질의 용도로 남겨두고 가라고 명 령했다. 그러나 아이시스 남작은 자신이 무관이 아닌 이상 군을 이끌만한 장군으로써 일라트가 꼭 필요하며, 일라트를 데려가면 더욱 카류 왕자에게 신뢰를 줄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며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일라트를 두고 가라고 명한다면 그 작전은 처음부터 없던 것으로 하겠다며 강경하게 나왔 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카류리드 전하의 진영으로 투항을 했을 때 제게 오는 이익은 상당합니다. 그러나 이번 전투가 작전대로 이루어져 아군이 승리를 했을 때 역시 어마어마한 공을 움켜쥐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굳이 열세인 제6왕자군의 편에 붙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아니면 단지 카류리드 왕자와의 친분만으로 그들의 진영에 들어가려 할만큼 제가 그렇 게 감상적으로 보이십니까?" 아이시스 남작이 트로이 후작 앞에서 입가에 웃음을 띄운 채 하던 말이 떠 올랐다. "그럼 단도 직입적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트로이 후작 님께 이런 말을 올리지 않고 진짜로 배신을 했을 시에 아군이 어떻게 되었을지 한번 상상 해 보시죠." 트로이 후작이 평민 출신인 자신을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기는 줄 알면서도 그의 말에는 여유가 담겨있었다. 트로이 후작이 당장에 끌어내라고 말해도 이상치 않을 만큼 아르윈 왕국 최고의 대귀족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은근 슬쩍 상당히 무례했다. 그러나 트로이 후작은 아이시스 남작을 내쫓아 버 리는 대신 그 작전을 허락했다. 그토록 끊임없이 아이시스 남작에게 불쾌 함이 담긴 말을 내뱉더니 이렇게 불확실한 계획을 별다른 담보도 없이 허 락을 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트로이 후작의 심정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이시스 남작의 말은 마치 잘 갈아둔 명검의 칼날 같았다. 아마 트로이 후작은 아 이시스 남작의 그 날카로운 말에서 아군은 승리를 확신을 했던 것이리라. 트로이 후작이 비록 보수적인 자이긴 하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자임에도 마음에 들지 않은 더러운 평민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치는 자는 아니었다. 나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제6왕자군은 아군보다 병력이 한참 부족했지만 현재 그 병력을 커 버해 줄만한 관문을 가지고 있었고, 명장 레이포드와 수많은 마법사들까지 합세한 상태다. 따라서 제6왕자군이 갑자기 미쳐서 관문 밖으로 뛰쳐나오 지 않는 한 아군이 그들에게서 승리를 거두기란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때문에 트로이 후작은 그냥 600의 병사를 버리는 셈치고 아이시스 남작의 말을 허락한 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작전은 카류 왕자와 인연이 있으며 여러모로 배신을 할 만한 유인이 있는 아이시스 남작이 아니면 안 되는 일 이었으므로. 그리고 나 역시 트로이 후작의 버림 수로 아이시스 남작의 병사들 틈에 끼 여 잠입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꽤 짜증나는 일이긴 하나, 카류 왕자에게 또 한번 찬물을 끼얹어 줄 수 있었다는 것으로 나름대로 만족하기로 마음 먹었다. 솔직히 현재의 내 위치로는 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문득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아군의 기병이 폭발음을 듣고 다시 돌아오는 소리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곧 익숙한 깃 발을 세운 기병의 무리가 나타났고, 그 중에서 제일 앞에 서 있던 한 남자 가 잘빠진 흑마를 빠르게 몰아 나의 앞으로 달려왔다. "유넨! 다친 곳은!?" 나는 다급한 느낌이 실린 어투로 나를 부르는 눈에 익은 청보랏빛 머리칼 의 남자로 인해 조금이나마 즐거워했던 기분을 싹 날려버릴 수밖에 없었 다. "예, 세스케인 님. 생각 이상으로 아이시스 남작 병사들의 움직임이 꽤나 재빨랐습니다." "아아, 정말 다행이야. 아이시스 남작이 미덥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으니 까. 혹시라도 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마음을 졸이고 있었거든. 그대 로 아이시스 남작이 우리들을 배신했다면 넌 제6왕자의 재물이 되는 것이 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애초부터 나를 그 일에 가담시키지 말라고 트로이 후작을 말려야 했었던 거 아니냐! 이제 와서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하면 다냐!? 비천한 평민에게도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그 사상은 어디다 팔아먹은 거 야? 나는 속으로 이를 박박 갈면서도 세스케인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당연 한 일이었다는 말을 해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나의 말을 듣더니 그는 언제나 그랬듯 단정한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을 만 들어내며 말했다. "이해해달라고 말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해주니 정말 고맙다, 유 넨. 언제나 너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고 있구나. 너같이 좋은 녀석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세스케인 님께 받은 은혜에 비한다면 발끝에도 미 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빌어먹을이라는 단어를 계속 곱씹으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곧 다른 기병들이 근처로 다가오자 그는 말을 몰아 다시 선두에 서며 소리 쳤다. "몸조심해라! 유넨!! 이 보답은 언젠가 꼭 하지!" 그는 기병들을 지휘하여 관문 쪽으로 달렸다. 아직 작위도 물려받지 못한 파릇한 청년임에도 선봉에 선 기병의 지휘관 역할을 맡은 모양이다. 지난 전투에서 그렇게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겠다. 내가 봐도 그 는 검술 면에서도 지휘 면에서도 그 수많은 명문 귀족들 중에서 단연코 뛰 어났다. 선봉을 맡은 자가 세스케인인 만큼 제6왕자군은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좋은 녀석이라……." 나는 이를 바득 갈며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좋겠지. 어쨌든 지금은 카류 왕자를 없애는 것이 중요할 뿐." 이미 북쪽 땅에서는 자욱한 먼지와 함께 국왕군의 본진이 몰려오고 있었 다. ------------------------------- 이글은 출판 시 엄청난 변화를 겪을 수도 있고 안 겪을 수도 있는 과도기의 글임을 밝혀드립니다. -_-;;; 이르나크의 장 Part 37 기나긴 여름 (5) 성문이 열리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국왕군의 기병부대가 쏜살 같이 성문 안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성벽에 붙어 있던 아군이 화살을 열심 히 쏘아댔지만 예상치도 못하게 갑작스레 성문이 망가지면서 이미 기가 한 풀 꺾인 아군의 공격은 제대로 먹히지 못했다. "전군, 퇴각한다!! 퇴각하라!!" 드리크 경의 급한 목소리에 나는 복장을 대충 점검하고 디슈켄트 님의 제3 군 기병단에 보호받고 있는 마법사들과 함께 말을 다그쳤다. 현재 나는 드 리크 경의 요청에 의해 일반 병사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있었는데, 최대한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어딜!!" 디트 경이 슬그머니 내 말 근처로 접근하는 병사의 머리에 자신의 검을 휘 둘렀다. 디트 경의 검이 한 병사의 머리를 박살내 놓는 것을 보며 나는 잔 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관문 쪽에서는 국왕군의 기병부대가, 뒤쪽에서는 게릭의 부대가 오로지 나 를 죽이기 위해 필사적으로 이쪽으로 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나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이 전쟁을 빠르게 끝내기 위한 지름길이니 그들의 행동은 짜증 스럽지만 현명하다 할만했다. "경계를 늦추지 말라!! 수상한 자들은 사정 봐주지 말고 목을 쳐라!" 디트 경은 머리카락을 피에 젖은 손으로 쓸어 넘기며 주변의 기사들을 향 해 소리쳤다. 이 혼란 속에서 나를 지켜야만 했기에 비단 디트 경 뿐 아니 라 모든 기사들이 자잘한 상처를 입고 있었고, 또한 피와 땀으로 엉망이었 다. "이쪽이다! 여기에 있다!!" "죽여라!! 죽여!!" "제6왕자를 죽여라!!" 불타오르고 있는 막사들 사이로 나를 죽이기 위해 눈이 벌개진 병사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손에 익지 않은 검은 예전에 다시 검집에 꽂 아버리고 한 손에 단검을 꼭 쥔 채로 말을 몰고 있었다. 몸이 불쾌할 정도 로 예민해져 왔다. 지금까지의 전투와는 다른, 생전 처음 겪어보는 혼전에 나는 불안감을 감추기가 정말 힘들었다. "아, 에스문드 백작!!" 한참 기사들의 호위에 몸을 맡기며 도주하다가 에르가 형의 모습을 발견하 고 나는 반가움을 표했다. 피를 흠뻑 머금은 검을 휘두르며 병사들을 향해 뭐라 명령을 내리던 형은 나를 보더니 급히 소리쳤다. "전하! 후방의 퇴로를 확보했습니다. 그러니 어서!!" 에르가 형이 빨리 내게 도주할 것을 요청하는 것을 듣고 나는 말을 독촉했 다. 생각 이상으로 빠르게 게릭군을 없애주었다는 생각이 스쳐 에르가 형 의 지휘력과 그 부대의 공격력에 나는 은근히 감탄을 표했다. 하지만 뒤쪽 에서 치고 있는 게릭의 군대는 애초부터 들어온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고, 성문을 열기 위해 빠져나간 수도 꽤 있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뒤쪽에서 큰 함성을 들려왔다. 기마대뿐만이 아니라 국왕군의 본진 까지 관문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초조함으로 인해 손끝으 로 짜릿한 감각이 밀려드는 경험을 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제야 상황이 현실이 되어 피부 로 다가왔던 것이다. 복받치는 신경질을 참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닌지라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단검에 아플 정도로 힘을 주었다. "전하!!" 속도를 늦추는 나를 보고 디트 경이 질책하듯 소리쳤다. 나는 자꾸만 욕설 이 입술이 삐쳐 나오려는 입을 막기 위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말의 등자 를 세게 쳤다. 많은 말들이 달리면서 만들어낸 자욱한 먼지가 목을 따갑게 했다. 전속력 으로 말을 몰아 도주를 하며 나는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군의 본진이 있던 관문의 주변은 마치 피를 뿌린 것처럼 붉게 타오 르고 있었다. 병사들이 얼마나 살아 나올 수 있을지를 생각하니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갔 다. 한시가 급한 때에 게릭의 군대에 의해 방해를 받아 아군의 퇴각이 더 욱 느려졌고, 거기에 국왕군의 기마 부대가 굉장히 신속하고 재빠르게 움 직이며 아군의 진영을 쓸고 다니고 있었기에 피해는 보통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듯 싶었다. "전하!! 조금 후의 나오는 샛길로 빠져야하니 앞을 잘 보고 계십시오!" "뭐라고?" 디트 경이 갑자기 나를 향해 소리치는 것을 듣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되물었다. "전하를 샛길로 피신시키라는 레이포드 경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테잘렌, 자네도 함께다!! 서둘러라!! 호위기사들 말고 재빠른 기사들을 몇 더 뽑아!" "그런…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시라는 전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왕건 같은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나 있을 법한 일을 내가 직접 체험하게 될 줄이야!! 이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계속 비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나는 최대한 입을 꾹 다문 채로 말을 달렸다. 곧 오른 편으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길 같지도 않은 작은 길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나는 아르 할아버지 등의 마법사와 디슈켄트 님을 향해 크게 소 리쳤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들과 눈물의 이별을 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기에 나는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갑자기 이번 전투로 인해 꽤 많은 마법사들을 잃을 것이라는 생각 이 스쳤다. 그러나 류스밀리온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쉽사리 당하지만 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무엇보다 마법사들은 어 떻게든 수식을 필요로 하고 있으니 흩어지더라도 꼭 다시 나를 찾아오리라 는 믿음도 있었다. 곧 나를 포함한 이십 여명의 기사들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다행히 들어가 는 입구와는 달리 안쪽은 어느 정도 폭이 넓었지만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 인지 바닥에는 잡초가 수북했고, 길가로 작은 나뭇가지가 몇 개씩 삐쳐 나 와 말이 달리기엔 그다지 좋지 못한 길이었다. 잔가지에 스쳐 생채기가 난 팔에서 쓰라림이 전해져 왔지만, 그런 것에 신 경을 쓰면서 이 거친 길을 달리기엔 내 승마 실력이 그렇게 능하지 못했 다. 최대한 신경을 말을 모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포즈를 쉽사리 고치기가 힘들었다. 신경질적으로 변한 나의 표정을 보 았는지 디트 경이 소리쳤다. "곧 작은 다리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 관문에서 상주하는 병사에게서 얻 은 정보이니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리를 끊으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으니 힘을 내십시오!!" 대체 누구를 믿을 수 있다는 건데? 나는 속으로 짜증스러운 의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입을 꾸욱 다물었다. 삐이익--!!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휘파람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너 무나 놀라 그만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겨우겨우 말에 몸을 의지하여 앞쪽 을 바라본 나는 곧 누군가가 말을 타고 서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카류 님!" 디트 경은 크게 소리를 치며 나의 앞으로 달려나왔다. 그리고 테잘렌을 포 함한 다른 기사들이 바리 케이트를 치듯 주위로 둘러섰다. 곧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번뜩이는 검을 쥔 병사들이 하나씩 몸을 드러냈다. 오십 여명 정도 되어 보이는 그들을 보고 나는 망연자실하 여 입을 벌렸다. "늦으셨군요. 카류리드 전하."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곧 오른 편에 서 있던 병사들이 자리를 물리며 말을 탄 한 남자가 나타났다. 이 어둑한 수풀 길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그 남자는 살 짝 입꼬리를 올린 입술을 한쪽 손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 는 머리에 열이 확 뻗쳐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게릭!! 네가……!!"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이를 바득 갈았다. 말을 할수록 스스로가 추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전부터 나는 이 추잡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 추잡함은 아무리 몸을 씻어내도 쉽게 지워버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의 모습을 지켜보던 게릭은 무장이 아니라서 인지 더 이상 가까이 다가 오지 않고 조금 떨어진 그곳에 선 채로 말을 조용히 이었다. "위선에는 위선으로 배신에는 배신으로 답해드리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니 겠습니까." "빌어먹을! 웃기지 마! 누가 배신을 했다는 거야?" "어쩔 수 없는 분이시군요.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해 보시길……." 그 말을 하면서 게릭은 손을 들었다가 천천히 내렸다. 그와 동시에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지듯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테잘렌, 양쪽을 맡아라. 나는 전하를 모셔 앞쪽을 돌파하겠다." "예! 디트 경!! 들었나!? 목숨을 걸고 전하를 지켜야 한다!" 테잘렌과 열 명의 기사들이 두 패로 나눠져 병사들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리아 영지의 선별된 최고의 기사들인 만큼 금방 무너지진 않았지만 다섯 배가 넘는 병사들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라는 것은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때 기사의 포위망을 어떻게 뚫은 말을 탄 한 병사가 누런 이를 사납게 드러내며 내게로 달려들었다. 나는 당황하여 반사적으로 말의 고삐를 왼쪽 으로 당겼다. "흑!" 왼쪽 어깨에서 뜨거운 기운이 몰려들었다. 돌발적 움직임에 정말 운 좋게 큰 상처를 입진 않은 모양이지만 그의 검에 어깨를 베인 것이다. 하필 재수 없게 또 왼쪽이냐!! 순간적으로 터져 나오는 불평을 속으로 삼 키며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단검을 날렸다. 히이잉--!! 그 단검이 제 역할을 확실히 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소리가 나의 귓가로 전 해졌다. 단검에 목을 찔린 말이 제 자리에서 난동을 부리는 사이에 나를 지키는 또 다른 기사가 달려들어 이빨을 자주 씻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는 그 병사의 목을 대신 따주었다. 아주 잠시 숨을 돌릴 여유를 가지게 된 나는 어깨의 상처를 살피기보다는 새로 단검을 꺼내들며 전방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어깨가 아프지 않은 것 은 아니었다. 예전에 슈카와 함께 칼에 꿰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괴 로웠다. 그러나 이를 악 물고 앞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너무나 화가 나서 어깨의 고통 따윈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죽이려는 놈들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눈앞이 화끈거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절대로, 결코! 네 놈들이 원하는 대로 되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절대로!" 나는 화를 참지 못해 잠시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고 전방을 바라보았다. 앞쪽에서는 디트 경과 다섯 명의 기사들이 앞쪽의 말을 탄 병사들을 상대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디트 경은 혼자 넷이나 되는 놈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검이 얼마나 빠른지 나의 눈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번쩍이는 빛 말고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디트 경이 아무리 강하다 고는 해도 그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인지라 수에 밀려 자잘한 상처를 입어가 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전 전투에서 나를 보호하다가 다친 팔을 치료하는 것을 뒤로 미뤄두고 있다가 갑자기 퇴각을 해야만 했기에 더더욱 그가 밀 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기사들의 보호에 이리저리 몸을 피하다가 우연찮게 디트 경 쪽으로 달려드는 병사에게 시선을 집중하게 되었다. 그 병사는 디트 경이 검을 크 게 쳐 올려 한 병사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사이 그의 배후를 노리고 검을 치켜들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를 악 물고 그 병사의 뒷 목덜미를 향해 두 번째 단검을 날렸다. 갑자기 예기치 못한 재앙을 받은 그 병사는 그 자리 에서 몸을 움찔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 병사는 엑스트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근성을 발휘했다. 그대로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치켜들었던 검을 디 트 경에게 마저 내려치고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디트!!" 병사의 검이 디트 경의 왼쪽 등을 베고 지나가는 것을 보고 나는 반사적으 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디트 경은 예기치 못한 상처를 입고도 아 주 조금 움찔했을 뿐 그대로 다음 병사를 향해 달려갔다. 아무리 오른손잡 이라고는 해도 저런 부상을 입으면 어느 정도는 자세가 흐트러질 만도 하 건만, 그는 어디서 신경마취제라도 맞았을까 싶을 정도로 날렵하게 움직여 전방의 병사들의 골통을 쪼개놓고 있었다. 그의 몸은 오로지 상대를 없애 버리기 위한 아주 극도의 필요한 반응만을 내보이고 있었다. "카류 님!!" 한 병사의 목줄기에 피를 뿜게 만들자마자 디트경의 고개를 돌리며 다급히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미 고삐를 꼬나 쥐고 앞으로 달려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디트 경이 한 놈을 죽이자 끝없이 나타날 것만 같던 병사의 모 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도움도 안 되는 녀석이 머뭇거리기까 지 해서 기사들의 짐이 될 생각은 없었기에 길이 뚫렸다는 생각이 들자마 자 나는 말을 독촉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테잘렌 등의 기사들을 뒤로 한 채 나는 디트 경과 나머지 다섯 명의 기사 들과 함께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조금 굵은 나뭇가지에 눈가가 심하게 긁 혔지만 눈을 조금 찔끔하는 것으로 그 아픔을 참으며 말을 모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곧 눈앞에 세월의 흐름에 거역하지 못해 잔뜩 헐은 다리가 나타났다. 이대 로 말을 타고 달렸다가 저 다리가 끊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몰려왔 지만 말의 속도를 늦추지는 않았다. 쩔그덕, 끼이익!! 금방이라도 끊어질듯 기괴한 소리가 들려와서 나의 심장을 철렁철렁 내려 앉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걱정과는 달리 우리들은 모두 다리를 완전히 건 널 수가 있었다. 보기 보단 실한 다리라는 생각을 하며 계속 말을 달리던 나는 갑자기 디트 경이 말을 멈추는 것을 보게 되었다. 덕분에 나 역시 말 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디트 경은 말에서 내리자마자 다리 쪽으로 뛰어가 삭아 보이는 밧줄을 검 으로 내려찍었다. 숙련된 기사의 날카로운 검에 공격당한 밧줄은 금새 투 두둑 소리를 내며 자신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거의 무의식중에 소리쳤다. "그걸 자르면 테잘렌은……!" 그러나 더 이상 뒷말을 잇지는 않았다. 빈깡통 굴러가는 듯한 멍청한 소리 를 계속하고 나자빠져 있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와지끈!! 다리를 이루고 있던 밧줄 중의 한 개가 완전히 끊어지자 다리는 더 이상 자신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디트 경이 다시 말에 오르는 동안 나는 그 요란한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류 님! 서두르십시오!!" 디트 경의 말이 나의 귓가에 닿기가 무섭게 나는 말고삐를 돌렸다. 그리고 또 숲이 우거진 소로를 향해 말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펼쳐진 길은 조금 전의 길보다 훨씬 더 좁았는데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야트막한 오르막 이었다. 나는 그 길을 보고 괜히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재수가 없으려니……." 삐이이익--! 그러나 어디선가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나는 불평을 마저 내뱉지 못하고 터질 듯이 고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전방에는 갑자 기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수십 명의 병사들이 이쪽으로 활을 겨누고 있었 다. 그리고 그 궁사들과는 조금 떨어진 뒤쪽에서 백금색 머리카락의 지휘 관이 그의 머리색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백마를 타고 있었다. 그는 왜인지 말머리를 조금 비스듬하게 돌린 채로 서 있다가 우리들이 달리는 말의 속 도를 제어하지 못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자 크게 소리질렀다. "전원!! 조준!" "일라트!!" 병사들이 활시위를 당기는 것을 보고 나는 갑자기 머리 속이 뜨겁게 달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전하!!" 디트 경은 더욱 말을 빠르게 몰아 앞으로 튀어나가는 나를 보고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곧장 앞으로 말을 몰 았다. "쏴라!!" "파이어 필드!!" 내 목소리가 떨어짐과 동시에 주변으로 화끈한 열기가 몰려들었다. 우거진 나무가 만들어낸 서늘함까지 송두리째 집어삼킨 그 불꽃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는 빠른 기동력을 가진 화살도 예외가 되지 못하고 한순간 공중에서 한줌의 먼지로 화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전에 침입자에게서 빼앗은 트로이 후작가의 가보인 피어스 형태의 아티펙트를 사용한 것이다. 비록 강력한 힘을 자랑하기는 하지만 원료도 없이 마법의 힘으로만 만들어 진 것이라 그런지 그 불꽃은 금새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들이 전방의 시야를 확보할 수가 있었다. "드디어 아티펙트를 사용하셨군요." 갑자기 가슴 한쪽에서부터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허탈감이 몰려들 었다. 나의 귀로 흘러 들어오는 그 익숙하고 앳된 목소리에, 최후의 무기였 던 아티펙트를 이용하여 녀석들을 한꺼번에 숯가루로 만들어주려 했던 나 의 의도가 철저히 뭉개지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라트와 병사들은 옷차림이 조금 흐트러지고 여기저기 그을음이 묻은 것 만 빼면 거의 멀쩡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차피 나야 아무런 힘도 없으니 앞으로 뛰쳐나가도 그냥 구경만 할 줄 알고 기습적으로 아티 펙트를 사용한 것인데 우습게도 그들은 내 마음을 전부 읽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멀찍이 떨어진 뒤쪽으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내가 이 아티펙트를 사용하기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왜 저런 재수 없는 대사를 나불대겠는가. 이 아티펙트를 가지도록 도와준 사람이 다름 아닌 게릭 자신이니 이것에 대한 것도 충분히 예상하 고 있었던 것인가? 일라트는 말머리를 돌려 다른 병사들과 함께 내가 있는 쪽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들을 보고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미 다리를 완전히 무너 뜨려 버린 후라 그쪽으로의 도주는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현재의 포위망을 뚫는 것도 불가능했다. 이쪽은 겨우 다섯 명밖에 없었지만 상대는 일라트 를 포함해 마흔 명이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새삼 게릭의 능력에 치를 떨었다. 사람이 마음을 놓을 때마다 불쑥불 쑥 나타나 초를 치고 염장을 지르는 그 능력에 말이다!! "잘도… 그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서 사람을 배신하는구나……." 나의 말에 일라트는 조금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바 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 역시 당신의 상냠함이, 당신의 다정함이 전부 위선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뭐?" 내가 인상을 쓰며 되묻자 일라트는 눈을 꼭 감았다가 나를 다시 바라보았 다. "그렇게 왕이 되고 싶었습니까? 이복 형제들의 어머니를 살해하면서까지 왕이 되고 싶었습니까? 수많은 평민들이 내전에 휘말려 고통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왕이 되고 싶었습니까?" 나는 이를 바득 갈았다. 더 이상 저런 물음에 눈물을 흘려가며 사정 설명 을 할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었다. "그래!! 정말 왕이 되고 싶어 미칠 거 같다! 됐냐!? 이 짜증나는 자식아!" 내 말을 듣더니 일라트는 슬픈 표정으로 웃기는 소리를 지껄였다. "…물론 저에 대한 상냥함도 전부 거짓이었겠죠? 당신처럼 고귀하신 분이 저 같은 평민을 진심으로 대해주실 리가 없으니까." "아주 혼자 땅 파고 관 만들어서 스스로 무덤에 기어들어 가버리지 그랬 냐! 빌어먹을 놈아!!" 일라트는 내 말에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아마 순진함이 도가 넘은 녀석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일라트는 손을 입에 대 고 잠시동안 말없이 있다가 곧 그 손을 위로 들고 말했다. "시간이 없으니까 이야기는 그만하지요. 제1조, 공격하라!! 기사들을 모두 무력화 시켜라!" 그의 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맨 앞줄에 서 있던 말을 탄 스무 명의 병사 들이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모습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락바락 화를 내 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딱 굳어버렸다. 이대로 죽어야 만 한단 말인가?! 이런 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전하! 최대한 뒤쪽으로 물러나 계십시오!!" 디트 경은 그렇게 말하고는 검 한 자루를 빼들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나 갔다. 그리고 곧 디트 경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도 검을 쥐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완전히 절망해버릴 만도 하건만 그들은 크게 기합소리를 내며 병사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아…윽……."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답답해져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었다. 절 대로 이길 수 없다! 절대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을 피부로 느끼자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끔찍한 절망이 몰려왔던 것이다. "크헉!!" 익숙한 한 기사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말에서 떨어진 그 기사는 말 위에 서 찔러 박은 날카로운 창끝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 던 병사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역겨운 미소를 띄우며 그 창을 거칠게 비틀었다. "크아악!!" 고막을 울리는 그 비명소리를 듣자 갑자기 눈앞이 새하얘지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나는 말을 곧장 몰아 가장 나와 가까이 서 있던 병사에게로 달려 갔다. 그리고 빠르게 혁대에 꽂아둔 세번째 단검을 던졌다. 카앙!! 그러나 그 단검은 그 병사의 검에 가로막혀 땅에 떨어졌다. 가늘게 찢어진 눈을 가진 주제에 엄청난 동체시력과 순발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 니, 어쩌면 나의 단검은 기습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이렇게 쉽게 가로막힐 종류의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더 이상, 나 자신마저도 믿을 수가 없 었다. 나의 단검을 가로막은 병사는 그대로 달려와 내 말의 다리 쪽 근육을 베어 냈다. 덕분에 나는 비틀거리던 말과 함께 땅으로 꼬꾸라졌다. 거세게 땅에 처박힌 나는 곧 팔에서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끼고 비명을 지르 기도 못한 채 몸을 잔뜩 움츠렸다. "크흐흐, 아프냐?" 한참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잔뜩 비웃음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 려왔다. 그 말에 울컥 화가 치민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거의 오기로 눈을 뜬 시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는 나의 오른팔이었다. 나는 이를 바득 갈며 바로 고개를 쳐들었다. 내가 자신을 똑 바로 노려보자 그 새우눈 병사는 검을 아래위로 슬슬 흔들며 피식피식 웃 었다. "크크… 가장 맛있는 요리는 제일 마지막에 즐겨주려 했더니… 컥!!" 그러나 나를 비웃던 그 병사는 곧 눈을 부릅뜨며 말에서 떨어졌다. 아마도 나를 지키는 기사들 중 하나에게 당한 것이리라. "큭…크크크." 나는 그 아픈 와중에서도 키득 웃었다. 간신히 움직이는 왼팔로 땅을 짚으 며 허탈하게 웃었다. 문득 눈앞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머리가 굉장히 욱신거리는 것으로 봐 서는 깨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눈에 들어가기라도 한 모양이다. "카류 님!!" 나의 귀로 다급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이런 상황에서 키 득거리니까 내가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했다고 생각했는지 너무나 귀에 익어 있는 그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만 웃음을 그치고 대신 입을 비틀었다. 그리고 눈물로 피를 씻어내 기 위해 눈을 깜빡거리면서 그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시선을 옮겨갔다. 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빨간 사람이 있었다. 반쯤 뜬 나의 눈에 비친 세 상은 온통 빨갰지만 그 사람은 유독 더 빨간 것처럼 보였다. 빨간, 새빨간 피를 뒤집어쓴 그는… "디트 경!!" 나는 크게 소리질렀다. 디트 경의 왼쪽 어깨에는 아무 것도 붙어 있지 않 았다. 그저 새빨간 피만이 진득하게 그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나 는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서는 디트 경 쪽으로 다가가기 위해 왼팔과 다 리를 버둥거리며 움직였다. 그의 팔을 붙들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팔은 어디다가 팔아먹고 온 거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렇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들게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세 명의 병 사가 동시에 디트 경에게로 달려들어 공격을 개시했던 것이다. 디트 경은 하나 남은 팔로 잘도 두 명의 검을 걷어냈지만 나머지 한 놈이 말을 공격 하는 바람에 조금전의 나처럼 말과 함께 그대로 땅으로 꼬꾸라지고 말았 다. "저…전하! 부디… 무사히……!!" 말에서 떨어지는 것은 디트 경이었지만 그 쇳소리 같은 목소리는 다른 곳 에서 들려왔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 말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 렸다. 그것은 알렌스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한 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 의 등을 뚫고 나온 검을 하나 남은 손으로 꽉 붙들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 었다. 검을 쥔 병사는 알렌스가 검을 쥐고 놔주지 않자 인상을 찡그리며 검에 힘을 주어 사정없이 반바퀴 비틀었다. 그리고 그가 움찔하여 손아귀 힘이 약해진 사이 검을 왼쪽으로 힘껏 그어냈다. 알렌스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온갖 내장을 전부 쏟아내다가 결국 그 자리에 꼬꾸 라졌다. 문득 나는 이미 모든 기사들은 한차례 분해를 겪은 뒤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디트 경과 나를 제하고 온전하게 숨을 유지하고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기사들을 전부 쓸어버렸다고 생각한 병사들 중 몇몇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왼쪽 얼굴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겨우겨우 말에서 기어 나오고 있 는 디트 경 쪽으로 걸어갔다. "키키, 귀하신 기사나리께서도 벌레같이 땅을 기시는구먼. 크크크. " "오오∼ 눈알이 빠졌냐? 잘생긴 얼굴이 그렇게 되어 버렸으니 어쩌나? 마 누라가 도망가도 나를 원망하진 말라고." 그들은 디트 경 주위에서 키득키득 그를 비웃기 시작했다. 뇌가 마비될 듯 머리가 뜨거워졌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너무나 화가 났다. 그 모습에 얼마나 화가 나던지 주먹을 쥐고 있는 왼쪽 손바닥이 손톱에 찍혀 피가 흐 를 정도였다. 하지만 무력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떨어진 곳에 멀뚱 멀뚱 그것을 지켜보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때 갑자기 디트 경이 그 자리에서 잽싸게 몸을 한바퀴 굴리더니 아직까 지 놓지 않고 있던 검으로 자신을 비웃고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의 종아리 를 베어냈다. "우아아아악! 내 다리!!" 뼈가 보일 정도로 살이 베인 남자는 뒤쪽으로 나자빠졌다. 그 모습을 보고 뒤쪽의 남자가 검을 빼들고 달려와 디트 경에게로 검을 내리찍었다. 그러 나 디트 경은 잘도 그 성치 않은 몸을 재빠르게 굴려 그의 검을 피했다. 그렇게 땅바닥을 구르면서 곡예 아닌 곡예를 보여주던 디트 경이었지만 얼 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그렇게 날렵하게 바닥을 구르며 병사들의 검을 피 할 수 없게 되었다. 주변에서 몰려든 다른 병사가 디트 경의 다리에 검을 내려찍어 그를 땅바닥에 고정시켰던 것이다. 병사는 잔인한 웃음을 짓다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아내어 다리한번 다리에 내려찍었다. "크하악!" 나는 처음으로 그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수많은 상처를 입으면서도 신음소 리 한번 내지 않던 그가 처음으로 비명을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인간의 몸에 붙어있어야 할 다리가 거짓말처럼 혼자 땅을 뒹굴면서 언제까 지고 어둑한 녹색일 듯 싶던 바닥을 순식간에 질척한 붉은색으로 만들었 다. 디트 경의 오른쪽 다리가 영원히 그의 몸에서 분리되며 고통스럽게 피 를 토해냈던 것이다. "비…빌어먹을… 죽일 놈… 이 썩을 놈!!" 조금 전에 방심하다가 디트 경에게 한쪽 다리를 잘린 남자가 쩔뚝거리며 디트 경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만큼이나 지저분한 욕설을 내 뱉으며 검을 거꾸로 쥐어 자기 힘닿는 데까지 높게 치켜들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수풀 속을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 비명소리는 디트 경의 것이 아니었다.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였다. "헉…흐헉!!" 비명은 금방 멈췄다. 그러나 대신 왼손이, 아니 나의 몸 전체가 덜덜 떨리 는 것을 느꼈다. 나의 눈에서 뇌로 빠르게 전해진 정보가 나의 온 몸을 사 시나무 떨리듯 떨리게 만들었다. 병사는 디트 경을 죽이지 않았다. 단지 하나 남은 오른 팔을 그의 몸에서 강제로 떼어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훨씬 더 큰 충격이었다.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미칠 듯한 충격이었다! "내 다리… 내 다리를 이 꼴로 만들고 가만 놔둘 줄 알았냐!!" 병사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디트 경의 오른팔을 자른 검에 몸을 지탱 한 채 헉헉 숨을 몰아 쉬었다. "적당히 해! 무슨 짓이야!!" 그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라트의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여전히 스무명의 병사들과 함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있었다. 순백의 말을 타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일라트의 표정은 역겹게도 안타까움에 잔뜩 물들어 있었다. 역겹다. 역겨워 미쳐버리겠다!! "우욱…우웩……." 나는 결국 그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해버렸다. "저…전하……." 벽을 긁는 듯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팔, 다리와 한쪽 눈을 잃은 디트 경 이 겨우 헛구역질을 하는 것 정도로 떨리는 입을 간신히 움직여 나를 걱정 스럽게 불렀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참 재밌는 사람이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나를 죽이려 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저러고도 잘도 나를 죽이려고 했구나. "키힉…크흐흐흐흐." 내 기괴한 웃음소리에 사람들은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키 득키득 웃었다. 더 이상 다른 인간들이 시선따윈 나의 행동 고려범위에 들 어있지 않았다. 난 척 봐도 상당히 추해 보일 포즈가 디트 경이 있는 쪽으 로 엉금엉금 기었다. 병사들은 완전히 무방비인 나를 보고도 왠지 바로 검을 찔러 박지 않았다. 이제 와서 내 모습에 측은함이라도 느낀 거냐? 그러고 보면 저놈들도 참 웃긴다. 저렇게 쪽수가 많으니 기회를 봐서 바로 나부터 죽였어도 좋았을 걸 왜 저렇게 차례차례 기사들부터 죽이려 했는지 말이다. 그러고 보면 기 습을 할 때도 꼭 뭔가 소리를 내서 우리들이 알아차리도록 만들었었지. 그 냥 조용히 숨어 있다가 활을 우루루 쏘았으면 아티펙트고 뭐고 나 같은 건 예전에 비명횡사했을 텐데 말이다. 난데없이 게릭의 행동에 대한 의문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그러나 게릭에 대한 의구심을 쉽게 버리지 못하면서도 나는 계속 디트 경에게로 기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겨우겨우 그의 가까이로 기어갔을 때의 일이었다. "왔다!! 잡아라!" 나는 갑자기 들리는 병사들의 말소리에 깜짝 놀랐다. 뭐가 왔는지, 그들이 뭘 잡으려는 건지는 잘 몰랐지만 온 몸을 휩쓰는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류야!!" 갑자기 이곳에서는 들릴 수 없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아르 할아버지……!!" 나는 떨리는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 그리고 몇 명의 마법사들이 서있었다. 두두두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리 떨어진 위쪽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일라트와 다 른 병사들이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설마 지금까지의 이상한 행동은 전부 이것 때문이었나!? 직선거리로 따지 자면 어차피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거리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꼭 류스밀리온이 아니더라도 마법사라면 이 아티펙트를 사 용하면서 생겨난 마나의 움직임을 충분히 느꼈을 것이다. 내가 아티펙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금새 눈치 채고 나를 구하기 위해 머리를 짜내었으리라. 실제로 아르 할아버지들이 이렇게 워프를 사용해 여기까지 오지 않았던가. 게릭은 그것을, 거기까지 생각했단 말인가!? 처음부터 나를 배신할 작정이 었던 그가 내게 그렇게 귀한 아티펙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운 것은 믿음을 주기 위한 희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위한 초석이었단 말인가? 나뿐 만이 아니라 고위 마법사들까지 확실하게 사로잡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란 말인가?! "사로잡아라!!" "덮쳐! 캐스팅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된다!!" "으랴아아압!" 병사들의 기합소리와 고함소리가 숲을 시끄럽게 했다. 주변의 병사들은 마 법사들과 거의 지척에 서있었다. 그들이 아르 할아버지들에게 달려드는 것 을 보고 나는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크헉!!" 그러나 우르르 몰려들었던 병사들 중 몇몇이 그 자리에서 뒤로 붕 뜨면서 나자빠졌다. 말을 타고 번개같이 달려들던 몇몇 병사들도 마찬가지로 크게 퉁겨 땅에 떨어졌다. "이 류스밀리온이 너희들 같은 피라미에게 잡혀줄 줄 알았더냐?!" 류스밀리온이 그 말을 함과 동시에 또 다시 대여섯 개의 빛의 줄기가 만들 어졌다. "크아악!!" "뭐야?! 대체! 저게 뭐야?!" "어떻게 마법을 저렇게나 빨리 시전할 수 있는 거야?!" 그는 엄청나게 안색이 좋지 않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하면서도 계속해서 1서클 마법인 매직 애로우를 다발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매직 애로우를 한 번 시전하면 딱 한 개의 빛의 화살이 나타난다. 결국 그는 한번에 대여섯 개의 수식을 계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속도가 얼마나 경이적인지 나도 잠시 모든 것을 잊고 입을 쩍 벌릴 정도였다. 곧 길이 뚫림과 동시에 아르 할아버지가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와 내게 한 쪽 손을 갖다 댔다. 그리고 뭐라 말을 하지도 않고 바로 마법서를 펼쳤다. "안돼!! 절대 놓치면 안 된다!! 잡을 수 없다면 차라리 사살하라!! 상처를 입혀도 좋다!" 일라트가 다급히 소리쳤지만 마법서를 보지 않고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는 류스밀리온 혼자가 아니었다. 세 명의 고위 마법사가 함께 오로 지 1서클 마법만을 시전해 내면서 병사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1서클 마 법도 일단 맞으면 갑옷도 뚫을만한 위력이 있었기에 병사들은 매직 애로우 를 이리저리 피하기만으로도 바빠 보였다. "으악!" 그때 갑자기 한 고위 마법사 할아버지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 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뒤쪽에서 말을 탄 병사가 활시위를 겨누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말을 탄 병사들도 뒤쪽으로 물러나 다급히 활을 꺼내 고 있었다. 나는 다급함을 느꼈다. 아무리 류스밀리온의 마법시전이 빨라도 1서클뿐이 다. 대단위 마법이 아닌 만큼 그 마법만으로는 화살을 막을 수는 없지 않 은가! "류온!! 어서!!" 그때 갑자기 아르 할아버지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쳤다. 그리고 류 스밀리온과 고위 마법사들이 너나 할 꺼 없이 아르 할아버지를 덮치듯 몰 려들었다. 나는 직감적으로 워프를 한다는 것을 느끼고 곁의 디트 경의 몸에 손을 뻗 었다. 그리고 무언가 닿는 촉감이 느껴지자마자 주변의 풍경이 서늘한 풀 숲에서 뜨거운 벌판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익숙해져 있던 나무그 늘이 갑자기 사라진 덕분으로 강렬한 빛이 여과 없이 눈에 파고들어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카류!!" "전하!" 곧 에르가 형의 얼굴이 흐릿한 시야에 잡혔다. 그곳에는 에르가 형을 포함 한 몇 명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있었다. 아마 뿔뿔이 흩어져 도주 중에 만들어진 그룹이 아닌가 싶다. "헉헉… 수명이… 삼십 년은 줄었겠다…헉헉헉…" 류스밀리온은 나의 곁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그렇게 말하다가 그냥 맨 땅 바닥에 털썩 누웠다. 몸 한구석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노라니 찌푸렸던 눈살이 저절로 풀어졌다. 류스밀리온의 익숙한 투덜거 림에서 드디어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몸을 덮쳐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안 도감을 미처 제대로 즐겨보지도 전에 갑자기 아르 할아버지의 떨리는 목소 리가 나의 귀로 흘러들었다. "아아…어서 치유 마법을……!!" 나는 아르 할아버지 말을 듣자마자 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의 왼손이 닿은 곳에 가쁜 숨을 몰아쉬는 디트 경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내고 뜨겁게 날뛰 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서둘러 시선을 그곳으로 옮겼다. 하지만 시야에 디 트 경의 영상이 완전히 잡힘과 동시에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던 몸이 차갑 게 굳어오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피범벅인 디트 경의 몸에는 왼쪽 다리와 머리만이 간신히 붙어 있었다. 그 의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과 다리의 조각에는 워프의 힘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디트 경은 아직까지 살아서 얕게 숨을 쉬고 있었다. 단지 고통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쥐어 짜내듯 힘겹게 숨을 토하고 있었다. 곧 몇몇의 마법사가 달려와 나와 디트 경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따뜻한 기 운이 몸을 감싸면서 나의 비틀린 팔이 곧 제자리를 찾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또 다른 두 명의 고위 마법사에게 힐을 시전 받은 디트 경도 점차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낀 건지 격한 숨이 조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디트 경의 몸에 난 상흔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어갔다. 그 신비한 마법의 힘은 어느새 크고 작은 나무줄기에 긁힌 자잘한 상처까 지 빼놓지 않고 새살이 돋아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흉측하게 잘려나간 그의 팔다리가 자라나지는 않았다. 엉망으로 뽑 혀나간 그의 눈이 돌아오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아…아르디예프 님!! 어…어떻게 안되나요? 그래! 나중에 리커버리를 사용 해서 그를 원래대로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시죠?" 갑자기 에르가 형이 아르 할아버지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나 는 그제야 디트 경에게서 눈을 떼고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르 할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으로 자 신의 얼굴을 감싸는 것을 보고 나는 류스밀리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 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바득 이를 갈더니 부들부들 떨면서 자 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조각난 부위가 없으면 리커버리도 소용이 없다. 손가락 한 개 정도라면 또 모를까 이 정도로 잘려나간 몸을 완전히 재생시키는 건 9서클 마법 리 잘렉션 정도는 되야 가능해. 아니, 리잘렉션으로 모자랄게다." "그…그럴 수가… 말도 안돼!" "닥쳐!! 뭐가 말이 안돼?!" 에르가 형이 사색이 되어 말하자 류스밀리온이 더욱 크게 소리쳤다. "살았잖나! 저래도 살았으니 된 거 아냐?! 다른 놈들은 전부 뒈졌단 말이 다!" 류스밀리온의 외침에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단지 멀리서 왕왕 거 리는 병사들의 외침만이 들릴 뿐이었다. "크윽……." 왼손에서 디트 경의 작은 움직임이 전해져와서 나는 류스밀리온에게서 천 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느 푸줏간의 돼지고기처럼 부위별 로 토막이 나서 앙상하니 몸만 남은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그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나름대로 잘생긴 축에 속했던 그 의 얼굴은 왼쪽 눈이 힐로도 치료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다치는 바람에 흉측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 손으로 새빨갛게 물든 그 를 안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차갑고 진득한 피가 얼굴에 닿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그를 안기 위해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몸을 열심히 움 직였을 뿐이다. 원래 그는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그마한 체구의 내가 그를 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양팔이 잘려나간 그의 몸은 나의 품에 너무나 쉽게 안겨왔다.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가벼워진 그의 몸을 끌어안아 반쯤 앉혔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얼굴을 꼬옥 묻었다. "카류…님……." 다 갈라진 그의 목소리엔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일은 그만두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에게 손이 있었다면 나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양팔에 힘을 꽉 주어서 그를 안았다. 그는 괴로운지 작은 신음소리를 냈지만 나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에게는 더 이상 이런 힘없는 꼬맹이의 손에서 벗어날 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주변은 아주 고요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를 뺀다면 주변 사람들은 뭘 하는 건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나는 그의 귓가에 얼굴을 한번 부볐다. 피로 목욕을 했다해도 믿을 정도로 범벅이 되어 있었는데도 이렇게 얼굴을 비비자 피비린내가 아닌 디트 경의 냄새가 났다. "…컥……!!" 디트 경이 몸을 크게 움찔했다. 나의 몸으로 전해지는 그 떨림을 느끼면서 나는 그를 더욱 꼭 안았다. 그리고 그의 몸에 더욱 꼭 얼굴을 묻었다. "카…류……." "네가 싫어." 나는 왼손에 힘을 더했다. 단검을 쥐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아……!!" "네가 너무 싫어…디트……." 나는 중얼거렸다. 그의 귓가에 대고 작게 중얼거렸다. "부디…" 문득 다 쉬고 갈라진 그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나의 고막을 얕게 울리고 있 음을 깨달았다. "당…신…께… 신의… 가호를……." 나는 디트 경의 등을 찌르고 있는 단검을 크게 비틀었다. 그가 또 한번 움 찔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조금 전보다 더욱 그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아 프도록 얼굴을 그의 목가에 묻었다. "싫어……." 나는 마지막으로 중얼댔다. 디트 경이 축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으 로 그렇게 중얼댔다. 털썩!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의 품에 안겨 있던 디트 경의 껍데기가 땅에 처박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반쯤 벌리고 굳어 있었다. 난 그들을 죽 둘러보다가 잔뜩 땀이 배어 나온 왼손을 옷에다가 슥슥 닦았 다. "카류리드!!" 나는 예상대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르가 형은 손을 조금 떨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대체 그…그런 짓을…아니…대체…왜!!" 형은 나의 행동이 얼마나 쇼크였는지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계속 더 듬거렸다. "못 고친다고 하잖아." 생각 이상으로 나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굉장히 담담했다. 스스로가 놀 랄 정도로 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뭐라는 거야!! 왜 그를 죽인 거냐고!! 대체 왜! 이게 무슨 짓이야!!" "아무렴 어때. 벌써 죽었잖아. 그것 보단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안돼는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고 걸어가자 에르가 형이 뛰어와서 나의 멱살을 잡아챘 다. 그리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소리쳤다. "닥쳐! 닥쳐!!! 네가, 네가 어떻게 디트 경을 죽일 수가 있어! 그것도 네 손 으로!!!" 갑자기 울컥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즉시 손으로 거칠게 형의 손을 쳐내며 소리쳤다. "너야말로 닥쳐! 날더러 병신을 호위기사로 데리고 다니란 말이야!?" "이 개자식!!" 에르가 형은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먹으로 나의 안면을 내려쳤 다. 덕분에 그의 무지막지한 주먹에 얻어맞은 나는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 히고 말았다. "전하! 에스문드 백작, 이 무슨……!!" "카류 님!!" 곧 정신을 차린 마법사들이 에르가 형을 질책하는 말소리가 들려왔고 몇몇 이 나에게로 몰려왔다. 그러나 나는 나를 부축하는 자들의 손을 거부하고 혼자의 힘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입안으로 피가 고이는 것을 느끼고 나는 땅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 얻어맞은 뺨으로 감싸고 형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손에 붙들린 형은 이미 분노로 숨을 격하게 쉬고 있었다. 자리에 서 일어선 나를 본 형은 주먹을 쥔 손을 가늘게 떨었다. "훗……." 나는 형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고 형이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 지만 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천천히 그에게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미안. 기분이 언짢아서 그만 막말을 해버렸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형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먹 쥔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을 가늘게 떨었다. "디트 경이 가엾지 않아? 이대로 평생 움직이지도 못하고 살아가야만 하다 니, 끔찍하지 않냐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형은 앞으로 튀어나오기 위해 용을 썼다. 그러 다가 무리일 것 같자 그 자리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가… 그가 이대로 평생 불행할지는 몰라도 네가 딱 한마디만 상냥한 말 을 해준다면… 그도… 그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거야!! 그에겐 이제 네가 전부였으니까!!" "정말?" "……!!" "정말 좋아? 내가 전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오는데 편안한 방에 누워 아무 것도 못하고 단지 누워서 나의 따뜻한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게 좋 아?" 나의 반문에 형은 여전히 숨을 거칠게 쉬며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디트 경은 말이지……." 나는 디트 경의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등에 검을 꽂고도 왠지 평안한 표정 을 하고 있는 그 몸뚱이를 바라보고 피식 웃었다. "디트 경에게 남은 건 나뿐이지. 아니, 나를 지키는 것뿐이었어." 나는 형의 바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말이야, 굉장히 고지식한 사람이거든. 그런 그가 나를 배신하고 나서 도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서였어. 그것으로 나에 게 용서를 구한 거야. 내가 죽음 따위로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랬거 든. 무슨 소린지 알겠어?" 에르가 형은 굉장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그러나 뭐라고 말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겠는지 계속 입을 움찔거리기만 했다. 나는 그런 형의 행동을 전부 무시하고 말을 계속 이었다. "그런데 디트 경은 말이야. 나를 지킬 팔을 잃었거든. 나를 따를 다리도 잃 었거든. 나를 바라볼 눈도 잃었어. 아무 것도 없어! 그는 아무 것도 못해!! 완전히 병신이 되어버렸어!!" 점점 격해지는 내 목소리를 들은 에르가 형은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찔했 다. "죽기 전에 디트 경이 그랬어. 내게 신의 가호가 있길 바란대. 내가 자신을 찔렀는데도 내가 잘 됐으면 좋겠대. 그의 표정을 봤어? 그가 얼마나 평안 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지 봤어? 그는 나를 위해 죽은 것에 만족했던 거라 고!!" 에르가 형은 정말 어울리지 않게 바들바들 떨었다. 나는 그런 형이 너무 안돼 보여서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착한 우리 에르가 형……." 그리고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형도 언젠가 나를 위해 죽어줄래?" "닥쳐!" 형은 내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멱살을 잡고 크게 소리쳤다. "누가! 누가 너 따위를 위해 죽어 줄까봐!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늘 이 무너져도!! 너 같은 걸 위해 죽어주는 일 따윈 없을 거다!! 제대로 알아 처먹었냐, 이 개자식아!!" 혼자 하고 싶은 말을 끝낸 형은 나를 내팽개치듯 아주 거칠게 밀어냈다. 그리고 내가 또 한번 땅에 뒹굴거나 말거나 저 혼자 자신의 말이 있는 쪽 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에르가 형의 뒷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리고 땅을 구르며 엉망이 된 옷을 정리하기 위해 손으로 가볍게 탈 탈 털었다. "카류야… 가자꾸나… 흩어진 다른 사람들과도 만나야지……." 언제 다가왔는지 아르 할아버지가 나의 어깨를 꼭 안았다. 나는 할아버지 를 향해 씨익 웃어 보이고 할아버지의 인도에 따랐다. 문득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는 태양이 여전히 뜨겁다는 것을 느꼈다. 이 상하게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길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아르 할아버지의 뒤에 올라탔다. 그리고 지겹게 피어오르는 열의 파도 속을 달리기 시작했 다. ----------------------------------------- 오로지 전반부 전투 씬 때문에 늦어졌습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 다. 곧 뒤편도 올라갈 겁니다. 곧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라고 밖에… (쿨럭) 그렇지만 마감에 맞춰 머리에 쥐나도록 글쓰고 있기 때문에 정말 금방 올라갈 겁니다. 어찌됐든 제가 지금 절실히 하고 싶은 말은 좋은 하루 님 감사합니다, 감 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뿐입니다. ^^;; 아, 그리고 일단 카류의 행동이나 생각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__~) 이르나크의 장 Part 38 증오의 고리 와글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난 공불락처럼 보였던 관문을 차지하게 된 아군이 병사고 장교고 할 것 없이 모두가 한 마음으로 기쁨을 표하고 있었던 것이다. "놓쳤다고?!" 하지만 내가 서있는 막사 안에서는 조금 살벌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카류 님과 고위 마법사들의 생포에 실패했기 때문에 트로이 후작님이 잔뜩 화가 난 것이다. 나는 그 성난 목소리에 찔끔하고 고개를 좀 더 숙였 다. "죄송합니다. 트로이 후작님. 하지만 이것은 일라트의 탓이 아닙니다. 사전 정보의 오류 때문에 생긴 일이지요." "오류!?" 아버님의 말소리에 트로이 후작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버님이 내 가 생포해온 유일한 마법사에게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경이롭게도 마법사들이 마법서를 보지 않고 마법을 시전했다고 하더군요. 비록 1서클 마법이었지만 그 중 류스밀리온은 한번에 대여섯 개의 매직 애 로우를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카류리드 왕자의 수식으로 마법사들이 능력 이 상승했을 것이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법서를 보지 않고 마법을 시전해? 한번에 매직 애로우 여섯 개를 만들 어냈다고? 그걸 날더러 믿으라는 건가?" 트로이 후작님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불신의 시선으 로 아버지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아버지는 손으로 아랫입술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계신 마법사 분이 증거입니다. 일라트가 말하기를 이 분도 매직 애로우를 시전할 때 마법서를 보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사실 저도 그 장면 을 보고 싶던 참이었는데 한번 시켜보심은 어떠하신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 노 마법사에게로 향 했다. 그는 허약한 마법사답게 화살을 한 방 맞은 정도로 쇼크를 받고 기 절을 했다가 조금 전에 눈을 뜬 상태였다. 화살에 상처를 입은 곳이 아직 도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보더니 입꼬 리를 올려 비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그 비웃음이 어색해 보여 나는 조금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에… 어…어떤 마법사가 마법서도 보지 않고 마법을 쓴단 말이오. 뭐… 세기의 천재라 불리는 류스밀리온 님이라면 모르지만 난 보통 마법사 요. 그…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그 짧은 시간에 그만큼이나 획기적인 발전 을 거둔단 말이오. 한 달 남짓 되는 시간동안 제6왕자에게 수식을 좀 배운 것 정도로?"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그들이 마법서도 보지 않고 순식간 에 매직 애로우를 난사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저런 이야길 들으니 정말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의 비웃음을 듣던 아버 지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 말에 대답했다. "믿어지진 않지만 그런 모양이더군요." "하…하하… 마음대로 하게. 자네가 뭐라고 한들 불가능 한 건 불가능 한 거니까." 나는 식은땀이 배어 나온 손을 꼭 쥐었다. 이대로 라면 아버지가 궁지에 몰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닌게 아니라 모든 귀족들이 언짢은 표정을 하 고 있었다. 트로이 후작님은 그 모습을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후, 됐네. 자네의 힘으로 이번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이 이상 추궁은 그만두지." 그분의 말을 들으니 안타까움에 가슴이 타는 것만 같았다. 어떻게 그걸 증 명할 수는 없을까!! 아버지의 작전은 너무나 완벽했는데! 정말 카류 님과 고위 마법사들을 생포할 수 있었는데! 그런데도 미숙한 나 때문에 아버지 가 이런 상황을 겪어야만 하다니… 또 아버지의 짐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에 나는 눈을 꼭 감았다. 항상 누군가 에게 폐만 끼치는 스스로가 너무나 미웠다. 그리고 문득 이런 자신이니 그 누구도 나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추궁을 하지 않아 주신다니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너무 성급한 판단 이 아닐까요. 제 아들은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거짓말을 할만큼 약 은 성격이 못되니까요. 저는 제 아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말을 믿을 바엔 차라리 제6왕자가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말을 믿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아버지는 조금의 흔들림 없이 트로이 후작님을 향 해 말했다. 그리고 마법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난 전투에서 사로잡힌 마법사분과는 다르게 상당히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시는군요. 하긴 그 마법사분과는 달리 그 정도로 엄청난 수식을 직접 체험하셨으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시 제6왕자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으시 겠죠. 혹시 도망갈 기회라도 잡으려고 이러시는 것입니까? 팔다리가 묶여 있어도 마법을 쓰는 것이 가능하니까?"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눈에 띄게 몸을 움찔했다. 그는 거짓말에 굉장히 서툰 사람인 모양이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고 트로이 후작님에게로 다 시 고개를 돌리고 정중히 말했다. "지금까지의 마법사들에 대한 태도를 조금 바꾸시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 다. 트로이 후작님." "무슨 뜻이지?" "좋은 말로는 그들이 진실을 내뱉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마법사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은 신경을 쓰지도 않는지 눈을 크게 뜨고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떤 상황에서고 좋은 대우만 해주니 마법사들이 이렇게 뻔뻔해진 것입니 다. 지금 이들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쫓으며 자국의 평화 따윈 생각하 지도 않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생명의 궁의 모든 마법사들은 정치에 중립 을 지키는 것을 기본 자세로 하며 나라에 더 큰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때문에 이런 예우도 가능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 제는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이미 생명의 궁은 내전에 끼어 들어 두 패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후작님!! 후작님이시라면 반드시 저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트로이 후작님은 아버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분은 원래부터 과거의 전통이나 관습은 분명 이유가 있기에 생겨난 것이 며 때문에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대표적인 강경 보 수파였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해왔던 마법사들에 대한 정중한 태도를 쉽사 리 바꾸려 하지 않을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런 보수적인 트로이 후작님도 지금 눈앞에 서있는 마법사가 거짓 말을 하고 있으며 이대로는 그가 진실을 실토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 분히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마법사를 끌어내서 제6왕자군에 대한 정보를 실토하도록 심문하라. 그 리고 심문이 끝났을 때 반드시 그의 숨이 붙어있지 않아도 좋다는 말을 전 하라." 결국 트로이 후작님은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인 것인지 마법사를 끌어내어 고문을 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고 말았다. 곧 병사들이 다가와 마법사를 일 으켜 세우자 그가 다급히 소리쳤다. "이…이러고도 다른 마법사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소?! 그…그래! 이렇게 나 마법사들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니 그…그대들 편에 서있던 마법사들도 이 소식을 듣는다면 제6왕자편을 들겠다고 할지 모르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버지가 바로 나섰다. "옳으신 말씀이군요. 하지만 이곳엔 마법사가 한 명도 없습니다. 당신이 죽 어도 다른 마법사들이 그 일을 알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뭘 그 렇게 두려워하시는 것입니까. 그저 순순히 제6왕자군에 대한 정보를 말씀 해 주시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을 말입니다." "그…그건!!" "말싸움은 그만하고 마법사를 그만 끌어내라." 마법사가 바들바들 떨면서 변명을 하려했지만 트로이 후작님이 냉랭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 트로이 후작님까지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듯 하자 마법 사는 정말 급했는지 다른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저렇게까지 눈에 띄게 행 동하면 더욱 자신에게 좋지 않게 될 뿐인데도 그는 너무나 당황해서 제대 로 사고할 능력을 잃은 모양이다. 급소도 아닌 곳에 겨우 화살 하나 맞은 정도로 기절을 할 정도로 심약한 사람이 고문을 당해야만 한다는 소릴 들 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있소! 할 줄 안단 말이오! 기다리시오!! 지금이라도 해 보이면 될게 아니 오!!" 거의 문 밖으로 다 끌려나갔을 때 그 노 마법사가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 은 트로이 후작님은 이채롭다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멋지군." 아버지를 바라보는 트로이 후작님은 싱긋 웃고 있었다. 항상 아버지를 바 라봄에 있어 불만이 가득했던 그분의 눈빛에 놀랍게도 웃음이 서려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정중하게 대답했다. "저 마법사 분이 너무 순진해서였을 뿐입니다." "확실히 그런 면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인정할 것은 해야겠지. 상대의 행 동패턴을 미리 파악하여 적당히 태도를 바꿔가며 사람을 다루는 자네의 능 력을 말이네. 그럼 잔뜩 얼어버린 마법사를 달래 그 놀라운 광경을 구경이 나 해볼까." 트로이 후작님은 정말 어울리지 않게 농담 비슷한말까지 하며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리고 몸소 마법사에게 다가가 직접 마법의 시전을 명했다. 그리 고 그 모습을 보기 위해 조금 전부터 계속 흥미로운 시선으로 상황을 지켜 보고만 있던 다른 귀족 분들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막사 밖으로 향했다. 그 제야 나는 겨우 안심을 하고 제대로 숨을 폭 내쉴 수 있었다. 노 마법사의 마법시전을 직접 눈으로 보고, 또 제6왕자군에 대한 정보를 얻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는 자신이 속한 제5군의 막사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마법사와의 볼일이 전부 끝난 후에도 트로이 후작님이 아버지에게 뭔가 이것저것 계속 자문을 구했기 때문에 나도 함께 그곳에 머물러야만 했던 것이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막사의 바로 앞까지 다다랐을 때 나는 아버지를 올려 다보고 말했다. "저… 아버지." "왜 그러니, 일라트?" 듣기 좋은 부드러운 음색이 나의 귀를 간지럽혔다. 그것은 나와 어머니에 게만 들려주는 아버지의 상냥한 목소리였다. 나는 부드럽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그게… 혼자 땅파고… 그리고 관…을 만들어서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버 리라는 말이 무슨 뜻이죠?"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얼굴을 조금 굳혔다. "누가 네게 그런 소리를 했더냐?" "아…아뇨……." 나는 엉겁결에 그만 거짓말을 해버렸다. 그러자 아버지가 조금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섭섭하구나. 네게서 거짓말을 들어야 한다니……." "아녜요, 그게 카류 님께서……." 나는 당황하여 고개를 들고 아버지에게 금새 진실을 토로했다. 하지만 계 속 당황하기보다는 그대로 고개를 똑바로 들고 빨리 대답을 해달라는 시선 을 보냈다. 금방 나의 눈빛을 이해한 아버지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손으 로 만지작거렸다. "말이라는 것이 참 미묘한 것이라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를 가져오기도 한단다. 그러니 그렇게 간단히 뭐라 말하기는 어렵구나." "그래도 본 뜻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그렇지 않으면 말을 통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래 그래. 그렇게 검술연습을 하는 중에도 열심히 책을 읽은 모양이구나. 기특하기도 하지." "아버지!" 말을 돌리려 하는 아버지의 의도를 눈치채고 나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말 했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고 그분답지 않게 약간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 셨다. "대충… 너 같은 녀석은 직접 죽여줄 가치도 없으니 스스로 무덤에 들어가 죽어 버려라 쯤이 되겠구나." 나는 역시라는 생각에 고개를 숙였다. 아무리 내가 그런 종류의 말을 이해 하는데 약하다고는 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일 이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자 어깨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 았다. "일라트."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부드러운 손길을 느꼈다. 아버지는 나의 머리를 끌어당겨 꼭 안아주시며 말을 이었다. "제6왕자에 대한 것은 잊거라. 왕위에 눈이 멀어버린 놈이다. 아무리 직계 핏줄이 아니라고는 해도 그토록 사이좋게 지냈던 형제들의 어머니까지 살 해하는 막돼먹은 놈이 아니더냐. 아니, 그 사이좋음도 전부 거짓이었을 게 다. 아니면 그렇게 뻔뻔하게 고개를 쳐들고 형제들과 웃고 다녔을 리가 없 지. 그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위선으로 똘똘 뭉쳐진 놈이었다." "저는 아직도 믿겨지질 않아요. 그렇게 상냥했던 분이… 그렇게 다정했던 분이… 자고 일어나면 아직까지도 이 모든 게, 이 모든 것이 나쁜 꿈일 것 만 같아요." 나는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항상 어린아이 대하듯 하시는 아 버지의 손길을 부끄러워하며 피하곤 했지만 지금만은 그 손에서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너무나 가슴이 차가워져서 아버지의 따뜻한 온기를 나눠 받고 싶었다. "후… 모든 것이 안타까운 진실이지. 아니, 굳이 따지자면 카류 왕자의 반 역에 대한 그 모든 증거는 실은 트로이 후작이 꾸며낸 것이었다. 그러나 유넨이라는 그 마법사가 가져온 증거만은 진실이었다. 사실 그 증거에 대 한 자세한 내막을 알아내기 전까진 나 역시 카류 왕자 자신만은 반역을 할 생각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토록 술렁이는 왕국의 분위기를 알고 있었음에도 카류 왕자 그만은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결국에는 그의 형제들마저 고개를 돌려버렸을 정도로… 그는 지독한 위선자였다." "알고 있어요. 알고 있지만… 그치만 재판장에서 그 아티펙트가 진짜라고 증언하신 아르디예프 님은… 결국에는 카류 님을 구해 내셨어요. 그리고 이번에도 카류 님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달려오셨구요. 실은 그 아티 펙트도 거짓이 아니었을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왜……." "아르디예프는 우리 나라 유일의 8서클 마법사다. 그를 강제하는 것은 국 왕 폐하라 해도 어려운 일이지. 그럼에도 아르디예프는 끝까지 그 아티펙 트가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단다. 우습지 않느냐. 처형 직전에 위험천만하 게 카류 왕자의 탈출을 시도할망정 유넨의 아티펙트가 진짜가 아니라는 증 언은 하지 않은 것이 말이다. 아마 수십 년간 마법사로 살아온 아르디예프 는 자신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아티펙트를 부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 지만 정이 많은 아르디예프는 카류 왕자에 대한 애정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거다. 손자 같이 여기던 카류 왕자의 죽음을 앞두게 되자 그가 지독한 위 선자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그런 것엔 상관하지 않겠다고 결 심한 것일 게다." 왠지 갑자기 목이 메여와서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숙 이자 아버지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슬퍼하지 말거라, 일라트. 내가 너에게 상처를 준 그 왕자를… 가만히 내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갑자기 가늘게 떨려오는 손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러나 나의 서툰 행동은 금새 아버지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아버지는 주먹을 쥔 나의 손을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 꼭 감싸주며 말했다. "그리고 카류 왕자를 처단하면서 얻는 그 모든 부를 너에게 주마. 네가 평 민 출신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무시를 당하는 일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하는 일도 없게 하겠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 평선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이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 * 창 밖 너머로 보이는 건물들이 하나하나 차례로 핏빛으로 물들어 가는 듯 한 착각을 받고 나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러세요, 루브 형님?" 문득 아직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듯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가 만들어내는 존댓말이 지독히 어색했지만 이번에도 차마 그러지 말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곧 나의 곁으로 작은 인기척이 느껴져 나는 그 쪽으 로 시선을 옮겼다. "빨갛군요. 저 풍경처럼 카류리드 놈도 온통 빨갛게 되어버렸으면 좋을 텐 데 말예요." 이쪽으로 다가온 카이가 금방이라도 파란물이 떨어진 것만 같은 커다란 눈 동자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뭐라 입을 열려다가 그냥 한 숨만 내쉬고 키가 낮은 소파로 가서 몸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 방에 각자 떨어진 채 말없이 앉아 있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원래라면 한창 시끌시 끌했어야 할 인원이었지만 우리들은 이렇게 모인 채로 아직까지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양손을 깍지끼고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엄지손가락을 잘근 잘근 물어뜯기 시작했다. 초조함으로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서져버릴 정 도로 몸이 예민해져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 다. "그만 두세요. 형님." 카이가 나의 깍지 낀 손을 자신의 작고 하얀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의 행동을 그만두고 고개를 들었다. 카이는 여전히 아기처럼 뽀얗 고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어쩔 줄 몰라하며 얼굴을 붉히던 그 순진한 얼굴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카이를 보고 입을 조금 열었다가 곧 고개를 돌리고 입을 닫아버렸다. 그러자 카이는 나의 앞에 쪼그려 앉더니 어린애처럼 내 무릎에 얼굴을 묻 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 한번 몸을 괴롭히는 저릿함을 느꼈다. 카류는 형제들 중 막내인데다가 실제로 몸집도 가장 작은 주제에 형제들에 게 무릎베개 같은 걸을 해주길 좋아했다. 그리고 한창 장난을 치다가 자신 의 무릎에서 잠든 형제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토닥여주기까지 하는 둥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자주 했다. 그리고 아 직까지 어린 티가 나는 얼굴을 간직하고 있는 카이는 귀엽다고 난리를 치 는 카류에 의해 거의 반강제적으로 그 무릎베개를 가장 많이 경험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실 카이도 은근히 그것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건 누구나 알 고 있는 일이다. "이러고 있으니까 카류리드의 생각이 나죠?" 대뜸 카이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조금 움찔하자 그 떨림을 느낀 건지 카 이가 살짝 웃었다.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그러지 마시고 무엇이든 말씀해보세요. 우리들은 형제잖아요?" 나는 카이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카이가 더욱 방 실방실 웃으며 강아지처럼 스스로 그 손의 느낌을 즐겼다. 마치 카류에게 하던 것처럼… "카류가… 카류가 정말… 어머니를 해한 것일까." 내 말을 들은 카이는 약간 가라앉은 듯했지만 여전히 나의 손아래에서 부 드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계속 말을 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이상하지 않니. 그 카류가… 그렇게 똑똑했던 카류가 갑 자기 환생이니 뭐니 하는 그런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것이 말이야. 카류라 면 훨씬 더 괜찮은 말로 우리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카이?" 나는 조금씩 말이 격해지는 걸 느끼고 말을 다급히 마무리 지었다. 그때 카이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카류가… 카류가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나는 그 말에 놀라서 잠시 손을 멈칫하고 카이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카 이는 나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계속 중얼거렸다. "카류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데… 그렇게 오랫동안 함께 한 사랑스러운 아 이였는데… 그 아이가… 얼마나 상냥한 아이인데, 절대 그럴 리가 없어… 절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 카류는… 나의 동생은 절대로 그런 짓을 할만한 아이가 아니야… 결코 그럴 리가 없어… 믿을 수 없어… 믿지 않을 거야… 절대 믿지 않아. 절대로… 절대로……." 카이의 중얼거림은 점점 작아졌다. 이미 방안의 모든 형제들이 쥐죽은듯이 입을 다물고 카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카류리드의 재판이 있고 난 그날 밤. 제가 얼마나 그렇게 곱씹었 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몇 번이고 다른, 새로운 가 능성을 꼽아 보았지요. 트로이 후작과 바보 같은 귀족 놈들이 저희들끼리 정권싸움을 하다가 카류에게 누명을 씌운 것이다. 유넨이라는 놈이 실은 그들 귀족들의 명령으로, 아니면 그냥 카류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거짓 아 티펙트를 만든 것일 거다. 아르디예프가 귀족들에게 매수 당해서, 아니면 카류가 곤란해하는 게 좋아서 그 아티펙트가 진짜가 아니라는 말은 끝끝내 하지 않은 것이다. 생명의 궁의 그 수많은 마법사들이 전부 갑자기 정치가 하고싶어서, 아니면 카류가 너무 미워서 마지막까지 그 아티펙트가 진짜라 고 증언했던 거다." 나는 그만 카이의 머리에 얻어두었던 손을 움찔했다. 나의 치부가 전부 드 러나 버린 것과 같은 불쾌하면서도 부끄러운 느낌이 몸을 휩쓸었다. "진실을 볼 눈을 가리고, 진실을 들을 귀를 막고, 진실을 말할 입을 다문 채로 나는 끊임없이 카류의 결백만을 갈구했지요." 카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시릴 정도로 새파란 눈으로 나를 바 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저는 현실로 돌아왔어요. 영원히 그 포근한 꿈속에서 살고 싶었지만, 영원히 그 환상 속에서 행복을 만끽하고 싶었지만 저는 현실로 돌아오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 어요. 그렇게 해야만 했으니까. 그것이 옳은 일이었으니까." 갑자기 잔뜩 목이 메여왔다. 나는 스스로의 볼썽 사나운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서 카이를 꼭 껴안았다. 카이 역시 우리들과 다르지 않은 아픔을 느끼 고 있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록 그 행동을 말리지는 않았지만 마음 한쪽 구석에서는 카이의 차가운 말과 행동에 항상 서운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의 멍청함을 자책하면서, 은근히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나는 더욱 카 이를 껴안았다. 카이는 그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자신의 손으로 내 등을 꼭 감싸안았다. 그러고 보면 카이는 그토록 카류를 증오하면서도 여전히 카류에게 했었던 것처럼 껴안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사람들 앞에서 서슴없이 차가운 말 을 내뱉다가도 금새 우리들에게 쉽게 안겨오고, 그리고 스스로 껴안기를 원한다. 그 모든 것이 카류에 의해 이루어진 습관이었음에도… 그런 나의 생각을 눈치 채기라도 한 것인지 카이는 나를 꼭 안으면서 말했 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참 좋아요. 따뜻해서… 서로의 온기를 느낄 수 있어 서…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을 표현해 줄 수 있어서 이렇게 껴안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카이……." "카류리드가 주었던 것까지 거부하지는 않겠어요. 비록 카류리드의 그 모 든 것이 거짓과 위선이었다 할지라도 녀석에게서 배웠던 것까지 거부하지 는 않겠어요. 제가 형님이나 누님들에게 했던 건 전부 진실이었기 때문이 예요." 나는 나의 품에 꼭 안긴 자그마한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는 여전히 어리 고 조그마했지만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따뜻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여전 히 딱딱한 존댓말을 쓰고 있었지만 그 서툴고 어색한 말에는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바보같이 마치 장례식 때처럼 나는 또 다시 위로를 받고 있었다. 그때 카 류에게 위로 받았듯 지금은 카이에게 위로를 받고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 은 맏형인 주제에 나는 항상 가장 어린 동생들에게 위로를 받고 만다. "미안하다. 카이."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카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를 도와주세요. 루브 형님." "응?" 카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다른 형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형님들과 누님들도 제가 아버님을 설득할 수 있도록 좀 도와주세 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뭘 도와달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 문이다. 하지만, 아직 카이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지 알지 못하면서도, 나 는 카이의 그 말에서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껴야만 했다. 카이는 옆으로 두발자국 걸어간 다음 나의 옆의 소파에 쓰러지듯 털썩 앉 았다. 하지만 너무나 자그마하고 가벼운 몸집을 가진 카이의 움직임이었기 에 이런 격한 움직임에도 거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곧 카류리드의 생일이예요." 카이는 무릎을 옹크려 팔로 감싸안고는 귀엽게 방긋 웃었다. "녀석에게 생일 선물을 보내야지요." ---------------------------------------- 냠냠냠… 이벤트 메일 잘 받았습니다. 정말 재미있는 메일도 많아서 읽는 게 즐거웠어요. 그렇다고 이벤트 끝난 건 당연히 아니니 더 보내줘요∼^^* 그런데 세스케인을 미워하는 당신!! 미워하는 건 아무래도 좋지만요∼! 대 체 언∼제 세스케인이 뒤로 호박씨를 까고 위선을 떨었단 말입니까!! 세스케인은 말이죠∼ 나는 위대한 귀족, 유넨은 비천한 평민, 그러니까 귀 한 존재인 내가 참고 천한 평민인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야만 한다 라는 자 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유넨에게 자비를 베풀었지 않습니까. 세스케인은 유넨을 벌레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짓밟지 않았고 상냥하게 대해줬습니다. 게다가 친구들에게 이 사상을 전파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얼마나 괜찮은 놈이란 말입니까!! -_-;;;; 민주주의 입장에서 인간을 벌레라 칭하는 놈은 나쁜 놈이지만 이런 계급 사회에서 그 어떤 미췬 귀족이 평민이랑 자신이 평등하다 생각했겠습니까. 평민 자신도 자신을 천하다 여기고 있었을 겁니다. 평민의 입버릇이 바로 ‘저 같은 천한 놈에게도 어쩌고저쩌고(?)’ 아닙니까!! 단지 유넨이란 놈이 좀 또라이 같은 놈인 겁니다. 평민인 주제에 귀족과 자신이 다를 바 없다 는 인간평등 사상을 가지고 있었지요. -_-^ 일단 세스케인은 위선자, 두 얼굴의 싸나이 이런 거 절대루 아닙니다! 이런 것을 이유로 미워하심 미워할꾜~~!! 다른 이유로 미워하면 인정해 드려요!! (인정 안 하면 우짤건데? ……역시 나는 바보인가? -,.-;;;) 또 한가지 이벤트 시에 점수 배분에 관해서 입니다만… 10점을 갈라서 점 수를 분배해 주셔야죠. 예를 들어 5점, 3점, 2점 이런 식으로 주셔야죠, 무 조건 10점 이하로 주시는 게 아녜요. 어떤 분이 [좋아하는 캐릭터 - 카류 리드 10점 만점!, 에르가는 아쉽게 9점, 아스트라한은 7점…] 이런 식으로 10점 이하로 마구 분배하시던 데요, 그게 아니고 모든 점수의 합이 10점이 되게 해달라는 뜻이었어요. 자신의 의견이 투표결과에 포함되게 하고 싶으 시다면 꼭 다쉬 보내주세요~!! 이벤트 기간은 길게 잡겠습니다. ^^;; 이벤트 참가법 1.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이벤트 참가법 2. 카페의 이벤트란.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벤트 참가법 3. 리플, 꼬리글. 귀찮아하시는 분이 계시기에 나중에 제가 쫙 확인하겠습니다. ^^;; 그래도 확실히 점수 분배하지 않으시면 힘들어요∼. 이르나크의 장 Part 39 휴나르 성 (1) 테라스로 걸어가 아침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 나 아침 공기답지 않은 후덥지근한 기온에 나는 더 이상의 심호흡은 그만 두기로 했다. 문득 저 태양이 하늘 위로 완전히 떠오르면 더욱 더워질 것 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잖아도 유래 없는 폭염이 계속되고 있는데다가 제대로 된 비 한번 내리지 않아 더욱 더 후덥지근한 느낌이었다. "카류리드 전하." 나는 누군가의 부름에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디트 경을 대신하여 새로이 뽑힌 나의 호위기사와 함께 상당히 익숙한 얼굴을 한 중년 남자가 서있었다. "헤이료우 상단에서 사람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전하." "고마워요. 허크 아저씨. 그것 때문에 일부러 여기까지 와주신 거예요?" 내가 빙긋 웃으며 말하자 허크 아저씨는 조금 쓴웃음을 만들어 냈다. 아마 내가 무리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그 표정이 그리 탐탁한 것도 아니지만 굳이 아무렇지도 않다고 그에게 해명을 해줄 생각도 없었기에 나 는 바로 밖으로 걸어나갔다. 얼마 전 아군은 1차 방어선이었던 관문에서 참패함으로써 3만의 군사 중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병력 보충을 위해 다급히 새로 용병들을 모집했고 그 중 샤크 용병단이 통째로 영입되면서 허크 아저씨가 2차 방어선인 이곳 휴나르 성에 머물게 된 것이다. 아저씨들은 정말 고맙 게도 원래 수급의 9할만 받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서 나를 감동(?)시 켜 주었다. 하기야 이걸로 먹고사는 용병들이고, 샤크 용병단에 허크 아저 씨나 쟈츠 아저씨 등 나를 아는 사람들만 있는 것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 는 일이겠다. 나는 허크 아저씨와 몇몇의 기사들과 함께 아랫층의 응접실로 가기 위해 복도를 걷다가 맞은편 복도에서 막 밖으로 나오는 프리란트 님과 정면으로 마주치게 되었다. 지난 전투에서 약 9천 정도 되는 병력을 제외하고는 나 머지 2만의 병력을 고스란히 잃었기 때문에 프리란트 님이 직접 나머지 3 만의 병력을 박박 끌어 모아 이곳 휴나르 성까지 원정을 온 것이다. "이렇게 아침부터 일을 하고 계셨나요?" "예. 후우, 여러 가지로 처리할 것이 많아서 말입니다. 재정도 점점 바닥을 드러내는 데다가……." 프리란트 님은 굉장히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리아 영지가 부유하고 쌓아놓은 재물이 많다고 해도 계속해서 용병을 모집하고, 군수물 품을 대고 하다보면 금새 바닥을 드러내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말꼬 리를 흐리던 프리란트 님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분이 매일 분주 하게 움직이며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고 있지만 저런 표정을 보노라면 거 의 체념 상태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류!" 갑자기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듯한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계단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는 금발머리의 여성은 나를 보더 니 이내 살포시 웃었다. "어서 와. 모두 기다린다구." "알겠어요, 히노 선배. 그런데 여긴 프리란트 님도 계신다구요." "에…에? 아버지?" 히노 선배는 얼굴을 빨갛게 붉히면서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그대로 계단 밑으로 뛰어내려가 버렸다. 다 큰 여성답지 않은 시끄러운 발소리가 들려 오자 프리란트 님도 조금 웃음을 만들어냈다. "카류 님이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입니다. 사실 저 아이가 여기까지 따라오 겠다고 했을 때 제가 얼마나 골치가 아팠는지… 전 제 딸이 저렇게 고집이 센 줄은 난생 처음 알았습니다. 카류 님 덕분에 제가 제 딸에 대한 새로운 면을 참 많이 알게 되는군요." "하하……." 나는 어설프게 웃으며 그분과 함께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히노 선배가 여 기까지 온 것이 그렇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이렇게까지 히노 선배가 고집을 부리면 곤란한 감도 없지 않았다. 사실 히노 선배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존재는 거의 방해만 될 뿐이라고 할까? 만약 재수가 없어 이곳까지 점령당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인질이 되어 버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기회가 되면 빨리 라누아 시의 저 택으로 돌아가라고 말해야겠다. "카류리드 전하. 리아 후작님." "휴나르 성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예. 응접실까지 모셔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계단을 전부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이곳 휴나르 성의 성주가 집사와 함께 서있었다. 리아 후작 님 밑에서 성을 하나 관리하고 있던 그가 나나 리아 후작 같은 대단한 사람들을 접대하게 된 것이 얼마나 영광이었던지 별의별 사소한 일에도 직접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려 했다. 지금도 그냥 자신의 곁에 서있는 집사 정도에게 시켰으면 되는 일일텐데 말이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휴나르 성주가 계속 고개를 꾸뻑이며 정작 안내는 하지 않고 있자 그의 곁 에 서있던 젊은 집사가 말했다. 그 집사는 보통의 지긋한 나이를 가진 집 사답지 않게 굉장히 젊어 올해로 겨우 30살을 넘겼다고 한다. 휴나르 성주 가 말하기를 그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는 바람에 일을 배우던 그가 물려받는 형식으로 집사를 맡았다던데,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이렇 게 큰 성을 총 관리하는 집사로―집사라 부르지만 휴나르 성주의 부관 비 슷한 것이다―저렇게 젊은 남자를 들일 정도면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기 때 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접실에는 드리크 경을 시작하여 모든 중요 인물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다행히 최고 지휘관 중에서 테잘렌을 제외하고는 사로잡히거나 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리아 영지의 병사들의 총책임을 맡아왔으며 이번 원정에서도 꽤나 중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테잘렌 준남작이 사로 잡혀버렸으니 아군의 여러 가지 정보가 술술 빠져나갈 것은 거의 확실했 다. 프리란트 님에 대한 충성심이 깊은 테잘렌이 쉽게 입을 열고 싶지는 않겠지만 고문이라는 것이 괜히 존재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어느 때보 다 고문 기술이 발달한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 그 마법과도 같은 심문 기술 (?)은 웬만한 악바리가 아닌 자에게는 열에는 열 효능을 발휘하게 되어있 었다. 내가 우연히 병서 중간에 심문을 위한 고문법 비슷한걸 적어둔 부 분―장군이 고문하는 법까지 알아야 하나?―을 발견하고는 호기심이 동해 몇 장 읽다가 오웩 헛구역질을 하며 지르며 그대로 책을 내던져 버렸을 정 도니 말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건강하셨습니까." 응접실의 가장 안쪽에 선 크레베르와 켈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레베 르는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을 한 채로 아들인 켈레인과 함께 웃고 있었지 만 그의 손이 어디선가 많이 본 아이의 머리를 꽉꽉 누르느라 영 어색한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반갑군. 힐레인까지 이곳에 온 것인가?" "에, 예.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 까진 없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떻게든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지 않으려고 용을 쓰 는 힐레인을 보았다. 녀석은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한 나에 대한 그 앙금이 사라지질 않은 모양인지 그 자그마한 몸으로 자신의 아버지의 손에 서 아둥바둥 필사의 힘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씁쓸하기 도 해서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인사는 그만하고 앉지. 크레베르. 켈레인. 그리고 힐레인도." "예, 감사합니다." 크레베르는 진땀을 뻘뻘 흘리며 힐레인의 손을 이끌고 자리에 앉았다. 그 리고 다른 자들도 모두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중 다시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으니… "히…힐레인!" 크레베르는 아들을 어떻게든 잡아보려 했지만 재빠르게 빠져나가는 바람에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가 처절하게(?) 힐레인을 불렀지만 녀석은 혼자 성 큼 성큼 방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 다. 하나같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은 권력을 가진 귀족들 앞에서 잘도 저런 무례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크레베르는 정말 당황해 하며 힐레인의 손을 잡고 길다란 탁자에서 가장 먼 곳에 강제로 앉혔다. 그리고 품에서 뭔가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나는 호기심이 동해 대체 저게 뭔가 싶어 시선을 고정했다. 그러나 그 주 머니에서 나온 것은 우습게도 알록달록한 비스킷이었다. 그것을 꺼내 보여 주자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아우성을 치던 힐레인은 금방 움직 임을 멈추었다. 크레베르는 자신의 손에 든 주머니를 힐레인의 손에 꼭 쥐 어주었고, 힐레인은 그 주머니 안에 든 비스킷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그 것을 하나 둘씩 꺼내먹기 시작했다. 나는 문득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은 어이가 없는지 약간 입을 벌리고 그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중요한 자리에서 대체 저게 무슨 짓인가. 힐레인이 조용해진 것을 보던 크레베르는 한숨을 푹 내쉬는 것 같더니 천 천히 뒤쪽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창백해지다 못해 새파래 보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 아들 녀석이 무례한 짓을 저질러서 ……." 그는 거의 90도 각도로 계속 꾸벅이며 용서를 빌었다. 그것을 보고 프리란 트 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저 아이를 데려온 것이지? 정말 불쾌하군. 지금 자네가 우리 들을 우롱하려는 겐가?" "그렇지 않습니다! 리아 후작님!! 죄송합니다!! 사실 저 힐레인도 원래부터 저런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세상에 둘도 없을 천재라는 말을 들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되어버려서… 이렇게 실무에 데리고 온다면 혹시라도 예전의 모습을 되찾지 않을까 해서였습니다." "웃기지도 않는군. 하필 이런 자리에서 미쳐버린 아들의 제 모습을 찾아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인가?" 프리란트 님은 그렇잖아도 영 심기가 편치 못한 상태에서 이런 어이없는 장면까지 보자 굉장히 짜증이 난 것인지 험한 말까지 하며 크게 화를 냈 다. 그리고 크레베르도 변명할 말이 없다는 듯이 조금은 비굴할 정도로 계 속 고개를 꾸벅이며 용서를 빌었다. 뭐, 지은 죄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 다. 그러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앉아있던 켈레인은 ‘미쳐버린’이라 는 말을 듣자 눈에 띨 정도로 어두운 표정으로 변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어느새 힐레인은 과자를 전부 해치우고 또다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크레베르는 완전히 사색이 되어버 렸다. 최후의 보류(?)였던 과자가 없어졌으니 이제 힐레인을 막을 것은 없 어진 것이 아닌가. "시종을 시켜 과자를 더 가져오게 하지. 이야기야 천천히 시작하면 될 터 이고 말이네."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힐레인을 보고 싱긋 웃었다. 뺨에 과자부스러기를 묻히고 있는 폼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애 취급하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하는 짓은 영락없는 어린애이지 않은 가. 아니, 몸집이나 얼굴로 보아할 때 14, 5살 정도로 추측되니 완전한 어 린애라고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현재 힐레인은 너무 나이에 맞지 않는 행 동만을 하고 있었다. 지난 번 일이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이런 중요 하고 엄숙한 자리에서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 보면, 에르가 형처럼 간이 팅팅 부었다기보다는 좀 생각이 모자란다고 하는 쪽이 맞을 것이다. 원래 는 똑똑했다던데 왜 저렇게 되어버린 걸까? "…여봐라, 과자를 가져와라." 곧 휴나르 성주가 나가서 하인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의 말에 한두 명쯤은 말도 안되니 당장 쫓아버려야 한다고 반론이 나올 줄 알았지만 의외로 내 말에 토를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조금 의아해 하며 고개를 갸웃거 리던 나는 문득 자신이 이렇게 제대로 웃은 지가 꽤 오랜만이라는 것을 깨 달았다. 힐레인을 향해 불쾌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나의 억지스런 말에 별 말 없이 동의해 준 것은 아마도 조금이나마 내 기분을 환기시켜주자는 취 지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요즘 들어 주변 사람들이 지나칠 정도로 나의 행동에 민감해진 듯한 느낌이다. 하인들이 힐레인이 먹을 과자를 가져올 동안 나는 한쪽 손으로 턱을 고고 녀석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힐레인은 이곳까지 온다고 신경을 쓴 것인지 전에는 아무렇게나 흩트리고 다니던 길고 새파란 머리카락을 단 정히 묶고 있었다. 그래서 힐레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도자기나 물건 들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릴 때마다 그 머리카락이 강아지 꼬리처 럼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렇게 좋으면 가서 껴안아 주지 그러십니까?" 퉁명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으로 얼굴을 긁적이 며 말했다. "힐레인에게 미움받았거든요. 에스문드 백작." "…겨우 그런 걸로 포기를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드리크 경의 곁에 앉아있던 에르가 형이‘그렇게 끈질긴 네가?’라는 표정 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째리고 있었다. 나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딜 티와 히노 선배, 그리고 여러 사람들이 마찬가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글쎄… 훗… 저도 은퇴할 때가 됐나보군요." 나는 피식 웃으며 그들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미묘한 표정 을 하고 나를 보고 있는 크레베르와 켈레인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아무 사정도 모르는 그들이 이런 대화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할 지에 대한 생각이 스쳤다. 힐레인이 아무리 허리에 닿을 만큼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또 얼굴이 예쁘장하다고 해도 조금만 자세히 보면 남자아이라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도 그 힐레인을 껴안아주니, 그 정도로 포기를 하니, 이제는 은퇴(?)니 하는 말을 지껄여댔으니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나를 저런 의 미심장한 얼굴로 바라보는 건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내가 아이들을 좋아해서 말이네. 이상한 생각은 그만둬 주게." 내 말을 들은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자신들이 너무 노골적인 표정을 지었나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얼핏 보이는 그들의 표정 은 더욱 심상치가 않아져 있었다. 문득 나의 대사가 더더욱 이상한 쪽―예 를 들면 로리콘이라거나…―으로 흘러간 것인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스쳐 다급히 상황 수습을 위해 입을 열었다. 달그락!! 그러나 무언가가 갑자기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힐레인이 작은 공예품을 만지다가 땅에 떨어뜨리면서 나는 소리였 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공예품을 도로 주워들기 위해 허리를 굽힌 힐레인의 표정은 꼭 똥이라도 밟은 것처럼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공예품을 집어들면서 고개를 드는 잠시잠깐의, 그 찰나의 순간! 힐레인이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째렸던 것이다. 정말 순간적인 일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미미하게 미간을 찌 푸리고 있는 리아 후작님이나 다른 사람들을 보아하니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힐레인은 어린애 취급하는 걸 제일 싫어하지 않는가. 그 런데 내가 어린애가 좋다고 했으니 엄청 발끈한 것이리라. 어쨌든 그 이후로도 힐레인은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커튼을 뒤져보기 도 하고, 물건을 만져보기도 하며 혼자 장난을 쳤다. 그러나 여전히 얼굴이 잔뜩 구겨진 채였고 물건을 건드릴 때도 거칠게 손을 움직여 험하게 다루 고 있었다. 더더욱 힐레인이 무례하게 나오자 크레베르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유일하게 힐레인을 옹호(?)해주었던 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고개를 힐레인이 아닌 다른 쪽으로 옮겼다. 힐레 인의 짜증스러운 얼굴이 너무나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에게 일 부러 다가가지 않은 것도 내가 가까이 가면 힐레인이 싫어할 것을 알고 있 었기 때문에 한 일이다. 잔뜩 화가 난 힐레인의 새파란 눈동자는 나를 너 무나 초조하게 만든다. 내가 웃지 않자 곧 응접실은 살벌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누구 한마디 말이 없는 이 응접실 안은 힐레인의 발소리와 물건을 건드리면서 달깍거리는 소 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침묵이 방안을 지배하고 있 는데 조금 전 나를 안내해 주었던 그 젊은 집사가 힐레인에게 줄 과자접시 를 들고 들어왔다. "저쪽 끝에 두고 가라." 내 말을 들은 집사는 고개를 꾸뻑 숙여 대답하고 나의 지시에 따라 우리들 과는 멀리 떨어진 탁자 끝에 놓았다. 이제야 힐레인이 제 자리에 앉겠구나 싶었지만 그는 계속 방안을 싸돌아다니며 과자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내가 의아하게 크레베르를 바라보자 그가 송구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 고는 힐레인의 손을 붙잡고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힐레인의 양손에 과자 를 쥐어주고 우리들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직접… 손에 쥐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서요……." "지금 우리들과 장난하자는 건가!?" 프리란트 님은 결국 조금 언성을 높였다. 아마 이 자리에 왕자인 내가 있 지 않았다면 벌떡 일어나서 집이 떠나가라 고래고래 성을 냈음이 틀림없 다. 다른 사람들 역시 정말이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하는 크레베르가 계속 힐레인에게 과자를 먹여주어야 한다는 말이니 그럴 만도 했다. 크레베르는 백짓장같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우리들을 향해 꾸벅꾸벅 용서 를 빌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아버지의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힐레인 은 크레베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곧장 한쪽 손의 과자를 한입에 전 부 털어 넣었다. 그리고 아기처럼 하얗고 뽀송뽀송한 뺨을 발그스름하게 상기시킨 채로 입안 가득한 과자를 오물오물 씹어 꼴깍 넘기고는 이내 활 짝 함박 웃음을 지었다. 잔뜩 짜증을 내고 있던 그 표정은 어디론가 사라 지고 더 이상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풋!"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기분에 분위기를 잡고 있던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집사. 자네가 힐레인을 좀 맡아주겠나? 직접 손에 과자를 집어줘야 한다 는군." "……. 예? 아, 죄송합니다.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응접실 밖으로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고 있던 집사는 나의 부름을 듣지 못 했는지 잠시동안 멍하게 있다가 뒤늦게 대답을 하고 크게 당황하여 고개를 꾸뻑였다. 내가 괜찮다고 하자 그는 겨우 사과를 하는 것을 멈추고 힐레인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잠시 집사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문 득 그가 은근히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그 실수를 용 서해주었던 것이 그렇게 기뻤던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저쪽 말 석에서 사람 좋게 웃고 있는, 나쁘게 말하면 실없이 웃고 있는 휴나르 성 주에게 저절로 시선이 갔다. 좀 맹해 보이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의외로 휴나르 성주는 하인들의 작은 실수를 쉽게 용서하지 않는 굉장히 엄한 사 람인가 보다. 너무 높은 사람들 앞이라 얼어있는 것일까? "흠흠……." 프리란트 님은 당장 힐레인을 내쫓기 위해 벼르고 있던 모양으로 내가 또 힐레인을 감싸는 말을 하자 약간의 불쾌함이 담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대로 찡그린 미간을 꾹꾹 누르며 깊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여기까지 온 거 그냥 될 대로 되라고 생각했나 보다. "그럼 용건을 들어볼까." 나는 집사가 힐레인에게 과자를 하나씩 집어주는 것을 보고 겨우 사태(?) 가 진정된 듯 하자 그때서야 본론을 꺼냈다. 크레베르는 나의 행동에 너무 나 고마워하면서 자리에 앉아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의도한 건 아니지 만 나름대로 크레베르에게 은혜 아닌 은혜를 입혔으니 좋은 게 좋은 거겠 지.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럼 본론을 꺼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와놓고 설마 불쾌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은 아니겠지?" 힐레인의 일을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모양이지만 역시 프리란트 님은 불 쾌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크레베르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앉아서 조 용히 진땀을 뻘뻘 흘렸고, 그 모습을 보던 켈레인이 나서서 아버지 대신으 로 말을 이었다. "좋지 못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리아 영지의 상인들이 돈을 모아 전하 께 자금을 대어 드릴 테니까요."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은 나 역시 상당히 놀랐지만 그냥 펄펄 뛰며 기뻐하기보다는 신중하게 켈레인에게 질 문을 던졌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제의를 하는 거지?" "지난 전투에서의 자세한 사정은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깝다고 밖에 할 수 없겠더군요. 내부의 배신자로 인해 다 이긴 전쟁을 그렇게 져버리다니 ……."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그 일로 안타까웠던 것은 저희들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죠. 일단 저희 들은 리아 후작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으며 그만큼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 다. 그리고 사실 이대로 국왕군이 승리를 거둔다면 이제껏 리아 영지에서 저희들이 누리고 있던 모든 이익이 사라짐은 생각할 필요도 없고, 다음 영 주님의 정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니 미래가 몹시 불확실해질 것입니다. 그랬기에 저희들은 사실 그 누구보다도 이번 전투에서 후작님의 승리를 염 원하고 있었답니다. 물론 후작님께 너무 미래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있어 처음부터 대놓고 후작님을 돕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말입니다." 나는 빙빙 돌려가며 하는 그들의 말을 대체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물론 그 런 것을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도 싫어하는 류스밀리온이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그래서? 왜 돈을 내놓겠다는 거야?" "저희들은 카류리드 전하와 리아 후작님의 강제에 못 이겨 내드리는 것뿐 입니다. 저희들도 좋아서 자금 조달을 해드리는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주 십시오." "뭐?" 나는 갸웃했다. 대체 저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 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에게서 강제로 돈을 뺏어볼까 하는 극단적인 생 각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랬다가 나름대로 마음만은 우리들에게 우호적인 그들이 반발을 하여 제1왕자파 쪽으로 붙어버리겠다고 용을 쓰면 아군은 안과 밖에서 공격을 당할 가능성도 있기에 그 생각은 접어버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우리가 언제 너희들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강요를 했다는 거냐? 더 이상 말을 돌렸다간 네 머리통에 매직 애로우를 선물해주마!" 류스밀리온은 인상을 확 쓰면서 켈레인과 크레베르에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 화를 내고 있는 그의 모습이 상당히 흉흉하여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하기까지 했다. 사실 이것은 약간의 흥분과 초조함이 그의 오리지널 더러운 말투에 더해져 생겨난 것일 뿐으로 별로 무서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더 이상 켈레인이 말을 돌리는 걸 듣고 싶은 마음 은 없는지라 류스밀리온의 행동에 대한 해명을 해주지는 않았다. 어쨌든 켈레인은 정말 류스밀리온에게 매직 애로우를 맞을까 싶었는지 다 급히 말을 이었다. "리아 후작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조금의 자금을 빌려드 리겠습니다. 지금이 후작님께 최대의 위기일 테니까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은혜를 갚겠다고?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튕기다가 이제 와서 돕겠다는 그 의도는 또 뭐냐? "물론 전폭적인 지지는 아니고, 일시적인 자금조달일 뿐입니다. 임시방편 정도로 써주셨으면 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대들이 그런 원조를 해준단 말인가?"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고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저희들은 이익을 좇 는 상인이지만 자그마한 의리 정도는 있습니다. 지금까지 리아 후작님께 여러 덕을 본 저희들이 후작님의 위기를 본체만체 하는 것이 그렇게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을 도저히 보다못한 저희들이 작게나마 이렇게 도움을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아무래도 국왕군에게 패 했을 때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외견상으로 저희들은 후 작님의 강제에 어쩔 수 없이 돈을 빼앗기는 식을 취해서 말입니다." 켈레인의 말에 나는 입을 좀 벌렸다. 몇 만의 군사가 부딪히는 이런 전쟁 에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만한 자금 조달을 해주려면 아무리 리아 영지 모 든 상인들이 똘똘 뭉친다 해도 엄청난 대출혈을 각오해야만 한다. 지금 이 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무리 봐도 우리들이 질 가능성을 굉장히 높게 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두 푼도 아니고 그 정도의 거금을 버릴 각 오를 하면서 단지 의리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런 생각을 했단 말인가? 그들이 우리들에게서 달리 바라는 것이 있어 이러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지만, 아무래도 우리들이 그들에게 줄만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니, 실상 줄 것이야 리아 영지의 여러 이권 등, 많긴 하지만 이대로 전쟁 에 지면 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전부 처형 당할 테니까. 모두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건지 응접실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그들 을 보던 크레베르는 약간 헛기침을 하여 자신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다음 말을 이었다. "흠흠, 솔직히 말하자면 며칠 전에 이 아르윈 왕국 최대의 상권을 자랑하 는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의 주인을 만났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차기 주인도 함께였지요." "후크랑 카멜?" 딜티가 약간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는 꽤나 소원해진 그들의 이름을 말했 다. "예. 전하의 참패에 대한 소식이 들려올 때 즈음, 그분들이 저희들에게 리 아 후작님께 받은 은혜에 최소한의 보답은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강력하게 설득을 하시더군요. 몇몇은 그 말에 동의하여, 몇몇은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 일에 동참한 것일 것입니 다. 그리고 사실 이 자금의 2/3 정도는 그들 두 상단의 돈입니다. 솔직히 저희들만으로 그만한 돈을 구해야만 했다면 손해가 너무 막심하기 때문에 아무리 그분들의 말이 있었다 해도 참여하지 않았겠지요." 그 말에 사람들은 일제히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를 이상스런 눈빛에 나 는 괜히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크레베르는 곧 조금 전 과는 다른, 꽤나 엄숙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그리고 그분들께서 이것도 전하라 하셨습니다. 국왕군의 원군 3만이 현재 세레스트 성으로 진군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세레스트 성으로?!" "예, 아마도 곧 그에 대한 보고가 들어올 것으로 사려됩니다. 쟈스칼 상단 의 정보통에 의해 알게 된 사실이라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조금 희색을 띄고 있던 얼굴을 곧 일 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에 아군이 대패한 1차 방어선이었던 관문 에서 리아 영지의 중심지인 라누아 시를 목표로 바로 아래로 내려오지 않 고, 대신 동쪽으로 비스듬히 내려가면 리아 영지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번 화한 곳인 세레스트 성이 나온다. 그 성의 북쪽에는 삼 백년 전 세계를 구 한 아르윈 왕국의 전설적인 영웅, 카뮤리안이 마지막으로 숨을 거둔 장소 라고 전해지는 세레스트 산이 위치해 있어 역사적으로나 민간신앙 면―카 뮤리안을 수호신(?)으로 섬긴다, 원체 신화적인 인물인지라 유일교인 신전 에서도 내버려두는 편이다.―에서나 굉장히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그곳이 번화한 이유는 그것 때문만이 아니다. 세레스트 성은 하르트 영지나 에스 문드 영지 등 동남부의 주요 영지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해 있었기 에 번화하지 않을래야 번화하지 않을 수가 없는 장소인 것이다. 물론 그런 지역인 만큼 방어를 위한 성벽이 굉장히 높고 탄탄하며, 자체 상주 병력도 상당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아군이 국왕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어느 정도 의 대비 병력을 배치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아군이 이만큼이나 궁지에 몰 린 이상 국왕군이 바로 아래로 쳐들어 올 것이라 생각하여 당연히 주된 병 력을 2차 방어선인 이곳 휴나르 성에 몰아두고 있었다. 따라서 세레스트 성의 병력만으로 3만이나 되는 국왕군을 막아내기는 역부족도 보통 역부족 이 아니었다. 나는 몇몇 사람들의 얼굴이 완전히 흙빛으로 변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남부에 영지를 두고 있는 디슈켄트 님, 하르트 백작 님이 바로 그들이었 다. 세레스트 성을 빼앗기면 딱히 영지를 지킬만한 병력이 남아있지 못한 그들의 영지가 점령당하는 것이 시간문제임은 생각할 여지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 때문에 국왕군이 그쪽으로 군을 보내는 거지? 1차 방어선에 있는 5 만 남짓의 병력이 그 3만의 원군과 합세하여 그대로 이쪽으로 밀고 들어오 면 아군은 휴나르 성을 지키기가 굉장히 벅찰 텐데, 뭣 때문에 그런 짓 을……!!" 에르가 형이 잔뜩 굳은 얼굴로 그렇게 소리쳤다. 자신의 영지가 그곳에 있 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리라. 에르가 형이 에스문드 백 작이 되어 형식상―쉽게 말하면 주민등록상(?)으로―으로 선대 에스문드 백작님은 죽은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실제로 돌아가신 것은 아니니까. "아군을 불안에 빠뜨리려고 그런 짓을 하는 건가?" 내가 중얼거리자 드리크 경이 나서서 이야기했다. "그때 게릭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아직 국왕군의 편을 들지 않고 있는 중립귀족들이 많다는 말을 말입니다. 물론 동부에 영지를 둔 분들께 불안 을 주기 위함도 있겠지만, 이렇게 동부를 동시에 공격함으로써 의외를 변 수를 전부 제거하려는 면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의외의 변수라는 건……." "제6왕자의 편을 들면 너희 영지도 이렇게 쓸어버릴 테니 깝쭉거리지 마 라, 라는 게 아니겠느냐?" 류스밀리온이 불쑥 튀어나와 입을 이죽거리며 말했다. 드리크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충 설명 차 말을 이었다. "류스밀리온 님의 말씀대로 혹시나 중립 귀족들이 아군에게 포섭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레스트 성을 쳐서 위협을 가하려는 것일 듯 싶습니다. 아군이 비록 지난 전투에서 패하기는 했으나 예상외로 크게 선전을 했기 때문에 작은 일 하나하나에도 상당히 신중해진 모양입니다." "하긴. 그 게릭이 우리들에게 좋은 정보를 주고도 그냥 넘어갈 위인은 아 니겠지. 지난 전투에서 아군을 지게 만들어 중립 귀족들의 포섭 건에 찬물 을 끼얹은 것으로 모자라 아주 마무리 차 소금까지 뿌리는군." 나는 입술 끝을 비틀며 말했다. 덕분인지 응접실 안의 분위기는 거의 침체 되듯 조용해졌다. 한동안 턱을 고고 가만히 있던 나는 무의식중에 작게 와 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힐레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힐레인의 앞에 앉아 과자를 집어주는 집사의 넓은 등짝과 머리 때문에 제대로 보이 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조금 비스듬히 하니 볼을 볼록하게 만들고 입을 오 물거리는 녀석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약간의 이상 함을 느꼈다. 힐레인이 웬일인지 자신에게 과자를 집어주는 집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 집사는 뭘 생각하는지 그것을 알 아채지 못하고 멍하게 과자를 집어주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힐레인을 발견했는지 약간 움찔했다. 그러나 자신을 뚫어져 라 쳐다보면서도 끊임없이 과자를 입으로 운반하는 힐레인을 보고 웃는 듯 한 동작을 취하며 녀석의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헉……." "으악!!" 나의 작은 신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응접실에 시끄러운 소음이 퍼졌 다. 그리고 당연한 반사 작용으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에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그 비명 소리의 주인공은 힐레인에게 손을 물리고 있는 젊은 집사 였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려 한 집사에게 힐레인이 자신이 현재 할 수 있는 궁극의 처단을 내린 것이다. "아악… 죄…죄송…악!!" 집사는 힐레인에게 물리고 있는 손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이 자리의 높으 신 분들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눈물나는 노력을 보였다. 그러나 힐 레인은 그의 손가락을 놓으려 하기는커녕 있는 힘껏 문 채로 아주 얼굴을 흔들어 비틀기까지 했다. "힐레인!!" 크레베르의 가히 처절하다 할 정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즉시 자리 에서 일어나 힐레인을 떼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힐레인은 집사의 손 가락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 귀여운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데도 녀석은 정말 살벌할 정도로 집사의 손을 물어뜯었다. "제발, 과자는 여기 있잖니! 제발 그만하거라!! 힐레인!! 힐레인!!" 크레베르의 안타깝다는 말이 어울리는 절규에도 힐레인은 참 끈질겼다. 켈 레인까지 다가가서 어르고 달래고 때리기까지 하며 애를 썼지만 힐레인은 콧방귀도 하지 않고 집사의 손을 물어뜯는 것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곧 몇몇의 기사와 시종이 소란스러움을 듣고 다급히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이 어이없는 장면을 보고 결국 그들까지 합세를 하여 힐레인을 떼 어놓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힐레인은 그렇게 쪼그마한 몸을 가진 주제 에 엄청난 턱힘을 자랑하며 응접실을 한참동안 소란스럽게 했다. "놔…헉헉…이거 놔아…헉헉…싫엇……." 겨우 집사의 손에서 떨어진 힐레인은 숨을 몰아 쉬면서도 집사에게 달려가 려고 하인들의 손에서 바둥바둥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보다가 문득 등줄기에 약간의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 내가 머리를 쓰 다듬으며 말을 걸었을 때 발에 채이기만 한 것은 엄청 운이 좋았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집사! 저 놈을 끌고 나가라! 그리고 눈을 떼지 말고 지켜! 또 한번 소란을 일으키면 내 저 놈은 물론이거니와 네 놈까지 책임을 물어 가만두지 않겠 다!" 곧 프리란트 님이 완전히 열 받은 얼굴로 힐레인을 손가락질하면서 괜히 집사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 더 이상 내 기분을 살피 는 일조차 무시하기로 한 모양이다. 나도 차마 여기서 어린애니 좀 봐달라 는 말을 하긴 뭣해서 대신 가엾은 집사를 잠시 불러 충고를 해주었다. "그냥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는 일은 하지 말고 묵묵히 과자만 줘. 그러면 지금 같은 일은 없을 테니까." "아. 저…전하의 말씀이 맞다네. 힐레인은 그런걸 제일 싫어하니까… 그냥 과자만 주면 일주일동안이라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아이라네." 크레베르도 창백한 얼굴로 집사에게 충고해주었다. 집사는 거의 뼈가 다 보일 정도로 다친 손을 하고서도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는 곧 힐레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적막이 방안을 감돌았다. 크레베르는 완전히 죽상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이번에는 켈레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반면 프리란트 님을 위시한, 특히 나이가 많은 분들이 엄청 살벌한 광선을 그들 부자에게 쏘아보내고 있었다. "내 묻지……." 곧 프리란트 님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분의 목소리는 화를 못 이겨 약 간 떨리기까지 했다. 저 분의 저런 모습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대들이 나름대로! 좋은 소식을 가져왔다는 것은 인정하지. 인정하지만! 저런 놈을 데려온 이유가 뭔가! 분명 그대들은 저 아이가 미.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터였을 텐데, 그런데도 이런 자리에 데려온 이유가 뭔가 말이 네!! 지금 그 쪼가리 군사자금을 빌미로, 감히 이 나를 우습게 보겠다 이건 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게 아닙니다, 리아 후작님!!" 프리란트 님은 점점 격해지더니 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게 소리를 질렀 다. 크레베르는 완전히 시퍼렇게 질려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프리란트 님 의 화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가 않았다. 어린애를 좋아하는지라 그저 좋게만 넘어가려 하고 있었지만 가만 생각해 보니 프리란트 님의 말도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도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힐레인의 그 행동이야 귀엽게 봐준다 치지만, 힐레인을 항상 보 아온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녀석이 무례를 저지를 것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 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자리에 힐레인을 데려오지 않았는가. "죄송합니다. 리아 후작님. 후작님의 화나신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 는 그런 생각으로 아들을 데려온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뭐가 아니야!!" "리아 후작님. 진정하십시오. 일단은 그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 싶 습니다." 프리란트 님이 소리를 빽 지르자 드리크 경이 좋은 자리가 완전히 망가지 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프리란트 님을 말렸다. 그러나 그의 얼굴도 영 탐탁치가 못한 얼굴이었다. 어찌됐거나 크레베르는 겨우 살았다는 듯이 안 도의 한숨을 쉬고는 급히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힐레인이 뭔가 사정이 있어 저렇게 바보짓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 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나 중요하신 분들이 계신 곳이면 헤이료우 상단이나 저희들을 생각해서라도 제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 생각하여 힐레인을 데려 온 것입니다. 이렇게 예상이 전부 빗나가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세상이 자신의 소망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대상인인 자네 라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프리란트 님은 정말 어울리지 않게 비꼬는 말까지 내뱉었다. 하지만 그 분 의 말에는 나도 동감을 표해주고 싶었다. 아들이 미쳤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서 이런 중요한 곳에 힐레인을 데려왔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렇게 변한 뒤에도 힐레인은 뭔가 큰일이 있 을 때마다 여러 가지 간접적인 행동을 하여 예전처럼 저에게 도움을 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일이 굉장히 많았기에… 그 모든 일들이 전부 우연이라고 치기엔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였기에, 결국 저는 이런 일생일대의 모험을 한 것입니다. 다시 저 아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으 면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허… 기가 차지도 않는군." 프리란트 님은 아주 고개를 돌려버렸다. 너무나 화가 나지만 성질대로 화 를 냈다간 군사자금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 일 것이다. "궁지에 몰린 군에 가서 원조를 해주겠다는 이야기를 하며 일생일대의 모 험을 시도하는 걸 보면 자네들은 정말 주도면밀에 있어서는 극한의 경지에 오른 모양이구먼. 참 대단하네. 정말 감탄의 말이 저절로 나오는구먼" 류스밀리온도 불쾌했는지 빈정거리기 시작했고,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고개 를 푹 숙였다. 그들을 보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크레베르와 켈레인의 생각의 진의는 일단 뒤로 미뤄두고서라도 프리란트 님에게 자격지심 비슷 한 것이 생긴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고고했던 분이 이렇게까지 몰리게 되다니, 정말 우스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힐레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하지. 이젠 더 이상 말을 끊을 사람도 없으니 원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해보게." "예. 너그러이 용서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크레베르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얼굴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두루마리 문서를 열어 보이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39 휴나르 성 (2) 한동안 살벌함이 감도는 응접실에서 크레베르와 켈레인의 설명이 이어졌 다. 간간이 프리란트 님의 엄청 불쾌한 어조로 자세한 내역의 질문을 던졌 고, 그때마다 크레베르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을 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죄송하지만 저희들을 강제하여 돈을 빼앗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어느 정도의 행동은 취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 만 분명히 해주시면 방금 제가 말씀 드린 자금을 확실히 대어드리겠습니 다." "그렇잖아도 내 평판이 장난이 아닌데 상인을 못살게 굴었다는 말까지 퍼 지면 위험하지 않을까. 이왕 의리를 지키는 거 눈 딱 감고 그냥 도와줄 수 는 없는가?" 거기까지 말한 나는 턱을 곤 상태로 그들을 바라보며 실없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해줄 리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 다. 아니나 다를까 곧 크레베르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런 위험한 요소도 있긴 하지만 일단 지금은 발 밑의 불부터 끄고 보아 야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레스트 성으로의 원군도 보내야 하니 분명 자 금이 굉장히 부족하시겠지요. 그러니 일단 저희들의 요구에 따라주십시오. 그게 불가능하면 저희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 역시 절대 원조를 해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 그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약간의 허탈감을 느끼며 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내 모습을 보더니 켈레 인이 나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한시가 급한 때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국왕군은 세레스트 성으로 진군 하고 있을 테니까요. 부디 저희들의 호의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그 호의를 냉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 더 큰 병을 얻을 수도 있으니 그게 문제지. 그럼 솔직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말해보지. 혹시 자네들 그런 소문이 크게 퍼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완전히 제1왕자파에게 눈 을 돌려 나를 궁지에 몰기 위해 수를 쓰는 게 아닌가 말이네." "그런!!" "그럴 수가!" 그 말을 들은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거의 동시에 소 리쳤다. 그러나 나는 입을 비틀며 손으로 이마를 긁적였다. "뭐,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지금껏 당한 게 너무 많아서 쉽게 그대 들을 믿기가 힘이 드네. 자네들도 게릭이라는 놈이 배신하는 바람에 아군 이 대패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덕분에 내 오랜 호위기사도 팔다리 가 토막이 나서 죽었거든. 아, 상처 때문에 죽은 건 아니지. 내가 직접 죽 여버렸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 응접실은 순간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적막에 빠졌 다. 크레베르와 켈레인을 제외한 사람들은 전부 하던 일을 멈추고 침울한 얼굴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홀로 어깨를 으쓱이다가 문득 에 르가 형이 나를 잡아먹을 듯 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디트 경의 친 형인 디슈켄트 님도 그냥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는데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먹구름을 씌운 듯한 이 어두운 적막을 깬 것은 켈레 인이었다. 그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향해 말했다. "제1왕자파에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일 치곤 너무 번거로운 일이라 생각하 지 않으시는지요. 그냥 용병을 고용하여 전하를 치는 편이 훨씬 더 간단하 고 빠르지 않겠습니까. 부디 저희들을 믿어주십시오. 또한 쟈스칼 상단과 힐튼 상단의 차기 대표들을 믿어주십시오. 제가 보기에 그 친구 분들은 너 무나 진실해 보였습니다." "진실한 사람치곤 이것저것 따지는 게 많군." "…그들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저희들도 마찬가지이고 요." 켈레인의 말에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뭐, 솔직히 내 평판이 원체 개판인지라 상인들을 조금 못살게 굴었다는 말 정도로는 끄떡도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긴 했다. ‘파렴치한 반역자 놈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정도로 생각할 것 같다고 할까? 나는 생각을 정리하며 거칠게 머리를 긁었다. 전쟁을 위해 첫째로 필요한 것이 명분인데, 현재의 나는 그것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병력이 쪼들 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명분까지 없으니, 그들이 진실로 나를 돕고 싶어 도 이 정도로 몸을 사리는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 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부족한 제가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겠지요. 생각들 해보시길. 방안이 조금 답답하군요." 나는 사람들에게 툭 말을 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서 창문가로 걸어갔다. 그 리고 창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다가 문득 이상한 장면을 보고 눈을 약 간 가늘게 떴다. 저택 밖에서 작고 새파란 무언가가 굉장히 날렵한 몸놀림 으로 하인들의 손을 피해 정원의 중앙으로 냅다 뛰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곧 꽤 많은 수의 하인들이 저택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저 정도면 꽤 소란스러워 질만도 했건만 그들은 하나같이 손발을 흔들어 신호를 주고 받으며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힐……!!" 나는 그 황당한 장면을 보고 무의식중에 입을 작게 열었다가 뒤쪽의 사람 들이 들을까 싶어 손으로 다급히 입을 막았다. 그리고 내가 입을 막음과 동시에 파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정원을 질주하고 있던 힐레인도 그 하인 들에게 잡혀버리고 말았다. 힐레인이 발버둥을 치며 하인들의 손에서 벗어 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하인들은 그에게 할큄을 당하면서도 단 한마디도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마 프리란트 님이 소란을 피우면 책임을 물어 전부 죽여버리겠다는 불호령을 내렸기 때문이리라. 하인들에게는 목숨을 건 필사의 노력이었을 테지만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 보자니 너무나 우스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나 역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분위기를 잡고 있었던 관계로 차마 여기서 폭소를 터뜨리지 는 못하고 창문 고리를 쥔 채로 작게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다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할 수준까지 되자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창문을 소리가 나게 활짝 열면서 아주 크게 심호흡을 했다. "흡∼푸하∼!!" 곧 등 뒤쪽에서 따가운 사람들의 눈초리가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약간의 쪽팔림을 감수하며 시선을 그대로 창문 밖으로 고정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꽤 컸던 건지 아래쪽의 하인들도 전부 나에게로 시 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들은 얼마나 놀란 건지 힐레인을 붙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렸고 몇몇은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기까지 했 다. 아마도 이렇게 들켜버렸으니 이제 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조금 곤란해하던 나는 문득 힐레인이 하인들에게 해방되고서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힐레인은 새파란 눈동자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번에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은 조금 전의 그 불만과 짜증에 찬 눈동자와는 전혀 다른, 마치 빠져들 것만 같이 깊은 눈동자였다. 도저히 어린아이의 것 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깊이 있는 눈동자를 보며 나는 문득 헤이료우 저 택에서 마지막으로 힐레인에게 질문을 했을 때의 그 눈동자를 떠올렸다. 나는 힐레인을 말없이 주시했다. 힐레인이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힐레인과의 그 말없는 대화는 곧 끝나고 말았다. 뒤늦게 저택 안에서 뛰어나오던 여러 하인들 중 손에 붕대를 둘둘 말은 검 은 옷의 집사가 나타나자 힐레인이 그 즉시 고개를 내리고 또 다시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잠시 나갔다 오지." "예?" 갑작스러운 나의 말에 한창 뭐라고 이야기를 하던 프리란트 님이 되물었 다. 나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고 그대로 문을 나섰다. 뒤쪽에서 호 위기사와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일단 힐레인이 있 는 저택 밖으로 다급히 걸어갔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정원에서 힐레인을 달래고 있던 하 인들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곧 뒤쪽에서 크레베르가 튀어나오며 거의 절규하다시피 말했다. "힐레인!! 맙소사! 무엇 때문에 이곳에?! 그렇게 소란을 피우면 안 된다 고……!!" "그건 일단 뒤로 미루도록 하지." 나는 크레베르는 뒤로 물리며 힐레인과 집사에게로 걸어갔다. "집사. 프리란트 님은 분명 너에게 힐레인을 직접 돌보라고 명하셨다. 그런 데 너는 그 명을 어기고 어디를 다녀왔는가?" "정말 죄송합니다! 한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나의 큰소리에 하인들과 집사는 어찌나 놀랐던지 어깨를 크게 움찔했다. 집사는 고개를 숙이고 다급히 말을 이었다. "소…손 때문에 아주 잠시 다른 하녀에게 이 분을 맡겼습니다. 건드리지 않고 그저 과자만 주면 괜찮다는 말을 들었기에……." "다른 하녀가 누구지?" 나의 말에 곧 여러 하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한 하녀가 걸어나왔다. 그녀는 정말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서는 눈물을 터뜨리기 직 전이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어요. 집사 님이 나가신 뒤로 계속 과자를 쥐어주고만 있었는데 갑자기 아이가 과자를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리고 결국… 흐흑… 죄송합니다. 용서해주십시 오. 전하… 흐흑……." "과자를 내팽개쳤다고? 힐레인이?" 결국 눈물을 터뜨린 하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귀에 크레베르의 약간 떨 리면서도 확연한 의문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힐레인에게로 시선을 옮겼지만 녀석은 이미 퉁명스럽고 생각 없는 꼬맹이 가 되어있었다. "집사. 그럼 너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감히 프리란트 님의 명을 어기면서 까지 누구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냔 말이다." "손의… 치료를 받기 위해 의사와 함께 있었습니다." "이봐, 그게 사실인가? 의사와 함께 있는 장면을 본 사람이 있는가?" 나는 주위의 하인들에게 집사의 말의 진위를 물었다. 그러자 한 하인이 의 아해 하면서도 앞으로 조금 걸어나와 정중하게 말했다. "예, 제가 집사 님께서 의사선생님과 함께 맞은 편 방으로 들어가시는 것 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의사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그는 어디에 있지? 집사, 당장 안내하라." "예? 그…그는……." "그는?" 내가 말꼬리 하나하나를 다 찝어가며 계속 집사를 추궁하자 사람들이 이상 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영 집사에 대해 석연찮은 마음을 계속 지울 수가 없었다. 그가 바로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 리며 크게 소리쳤다. "조금 전 집사와 함께 있었다는 의사를 잡아들여라! 그리고 집사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그 행방을 아는 자도 모두 잡아들여라! 어서!!" 나의 말에 집사는 눈에 띌 정도로 새파랗게 질렸다. 그의 모습을 보고 나 는 더욱 병사들을 독촉했다. 한동안 시끌벅적한 가운데 드리크 경이 다가 와 나에게 조용히 물었다. "전하? 도대체 왜 그러시는지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글쎄요. 저도 알고 싶습니다." 나의 대답에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하면서도 일단 그 자리를 지키고 보고를 기다렸다. 덕분에 정원에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하인들의 손에 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강아지처럼 깽깽거리는 힐레인의 소리만 이 뺀다면 말이다. 마치 무언가를 말하듯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그 녀석과 동일인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조금 전부터 계속 내가 지금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몰려왔지만, 힐레인의 그 이상한 모습도 그렇고, 또한 의심나는 곳을 확실 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 의문은 지워버리기로 했 다. 그렇게 길지는 않은 시간이 흐르자 곧 한 병사가 뛰어나와 나에게 보고했 다. "전하께서 잡아오라고 하신 그 의사는 방금 저택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명령대로 그를 잡아들이기 위해 병사들을 풀었습니다!" "뭐라? 대체 경비를 어떻게 하기에 그런 의사가 빠져나가는 것도 몰랐단 말이냐!" "그분은 항시 저택의 출입이 자유롭게 허락이 된지라… 성 아래의 마을에 중요한 환자가 있어서 나가보는 거라고 말했답니다. 오늘 내로 돌아오신 다기에……." 그의 말을 듣고 나는 휴나르 성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휴나르 성주는 찔 끔해서는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죄…죄송합니다. 하지만 성안의 의사가 그렇게 풍족하지 못해서… 그것 이… 네…네 놈들, 이런 비상시에 내가 의사를 밖으로 내보내도록 허락했 을 거라고 생각했느냐! 이 곳에 계신 분께 일이라도 있을 때 의사가 제 자 리에 박혀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휴나르 성주는 나의 눈빛에 잔뜩 쫄아서는 안절부절못하며 변명을 하더니 갑자기 보고를 해온 병사에게 화풀이를 시작했다. 덕분에 그 병사는 자신 의 잘못도 아니면서도 용서를 빌어야만 했다. 병사의 사과를 듣다가 슬그 머니 이쪽을 돌아본 휴나르 성주는 내가 여전히 자신을 째리고 있음을 느 꼈는지 고개를 숙이며 잔뜩 기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성의 기강이 해이하여……." "됐네! 일단 그 의사를 잡아들이고 보지! 병사들을 더 풀어서 의사가 우리 들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진찰하려 했다는 그 중요한 환자에 대해서도 알아 보도록 하라. 이번에도 허술하게 하면 그때는 진짜로 목을 쳐버릴 테니 사 소한 것 하나 놓치지 말고 확실히 조사하라! 그리고 집사를 포박하여 끌고 들어 와라!! 내가 직접 심문하겠다!" 나의 말에 집사는 당황하여 하인들의 손을 뿌리치며 약간의 발악 아닌 발 악을 했다. 그러나 수많은 병사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지라 곧 그들의 손에 포박 당하고 말았다. 프리란트 님이나 드리크 경 등의 놀랍다는 시선 을 뒤로 한 채 나는 그와 함께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후우……." 어둑한 장소에서 빛이 가득한 방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이곳의 공기를 들 이마시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집사를 심문하려 간 지하에서 끊임없 이 퀴퀴한 냄새가 계속 풍겨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불쾌지수 만땅으 로 폭발 직전이었다. 그 집사가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을 때 내가 어떻게 되었을 지는 하늘만이 알 것이다. "카류. 어떻게 그 집사가 배신자라는 걸 알았어? 응?" 쪼르르 따라와서 바로 옆자리에 털썩 앉은 딜티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 에게 질문을 해오기에 나는 기분전환 삼아 여전히 귀여운 녀석을 꽉 안아 주었다. "헉! 야, 뭐해?" "아무 것도 아냐. 우리 딜티." 프리란트 님이나 드리크 경 등 조금 전과 비슷한 인원의 사람들이 와글거 리는 곳에서 한 짓이라 딜티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내게서 떨어지려고 난동을 피웠고 그래서 나는 딜티의 사정을 봐주는 셈치고 녀석을 놓아주었 다. 딜티가 깜짝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는 동안 드리크 경이 다가와서 진 지하게 딜티와 같은 질문을 했다. "왜 집사를 의심하셨지요? 저 역시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만……." "글쎄요. 그냥 집사가 영 마음에 안 들어서 꼬투리를 잡아주고 싶었다고 해두죠. 일단 배신자를 색출했으니 잘된 일이잖아요?" 나는 대충 그의 말을 넘겨버렸다. 어차피 진실을 말해봤자 크게 달라질 것 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집사를 심문하여 그의 정보를 뜯어낸 후 나는 힐레인에게 다가가 어떻게 그것을 알았는지, 왜 너의 입으로 직접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지 등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내가 가까이 다가가 기만 해도 녀석이 물어뜯을 기세로 화를 내는 바람에 결국 나의 의도는 무 산되고 말았다. 애초부터 힐레인은 나와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 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럴 생각이 있었으면 그렇게 간접적인 행동을 해주 기보다는 직접 그 집사를 색출했을 테니까. "후, 다행히 전하의 덕분으로 잘 넘어가긴 했지만 참 짜증스럽군요. 이렇게 계속 배신자가 속출하니……." 프리란트 님은 한숨을 쉬었다. 나 역시 그것에 대해서는 너무나 동감이었 다. 게다가 이번에 배신을 한 그 집사가 그냥 자기 이익이나 챙기겠다고 배신을 때린, 소설 속에서나 나오는 그런 악당이 아니라는 게 더욱 기분이 더러웠다. 그 집사는 나름대로 선조 대대로 돌봐온 저택과 성을 걱정해서, 승산도 없는 아군이 휴나르 성을 방패막이로 삼아 공성전을 벌리다가 이곳 이 황폐화되는 건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다는 나름대로 멋지구리한 생각을 가지고 제1왕자파에게 상인들의 원조에 대한 정보를 넘기려 했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성에서 싸움을 벌리려는 나는 왕이 되려고 인륜을 저버린 파렴치한 놈이지 않은가. 그러니 오랫동안 이 성을 지켜온 그 의사 도 나름대로 정의를 수호하기 위해 집사의 일에 동참했다는 것이다. 간수의 몽둥이에 얻어터지고 인두에 문드러진 살에서 진물을 질질 흘리면 서도 제발 이 성을 엉망으로 만들지 말아달라는 놈들을 보자니 그냥 가슴 이 찡한 게 눈물이 다 나올 것만 같았다. 물론 내가 무지하게 감동하여 녀 석을 용서해준 것은 절대 아니지만 말이다. 아마도 내일 엉망이 된 녀석의 몸에서 분리된 목이 본보기로 성문에 걸려있게 되리라. "휴우, 이래서 명분이란 게 필요한 거군요. 그러고 보면 전에도 리아 영지 에서 병사들에게 습격을 당하는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네? 아 아, 집사가 온 몸을 바쳐 다시금 제게 그것을 일깨워주었군요. 이거 감사해 야 하나?" "쓰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도저히 이런 장소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될 상 스러운 욕이 튀어나왔다. 그런 충격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 사람은 다름 아닌, 류스밀리온 다음으로 간이 팅팅 부은 에르가 형이 었다. 형은 욕을 한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를 바득 갈면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에르가 형, 이 갈면 안 된다고 내가 그랬지? 한동안 안 갈더니 또 왜 그 래?" "시끄러!"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르가 형은 빽 소리를 질렀다. 잔뜩 찌푸려진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형, 아직도 삐졌어? 남자답지 못하잖아." "빌어먹을!!" 에르가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발을 쿵쾅 울리며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저 정도면 누구 한사람 화를 낼만도 하건만 그래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기만 할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프리란트 님까지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다. "최근 말이 너무 험하신 것 같군요. 카류 님." 그리고 야단 비슷한걸 맞은 건 도리어 나였다.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드리크 경에게 말했다. "예? 제가 말을 험하게 썼나요? 그다지 욕을 한 기억은 없는데……." "…아닙니다. 그만 올라가서 저녁 식사가 나올 때까지 쉬도록 하시지요. 안 색이 그다지 좋지 않아 보이시는군요. 직접 심문하시느라 많이 피곤하신 모양입니다." "저야 입만 뻥끗했을 뿐인데 뭐가 힘들겠어요. 힘든 거야 집사랑 의사를 고문한 그 간수겠지." 나는 마지막으로 토를 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왠지 침울해 보 이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드리크 경의 말대로 그만 방에 들어가서 쉬기 위해 밖으로 걸어나갔다. 응접실 밖으로 나온 나는 계단으로 올라가기 위해 호위 기사들과 함께 일 층의 복도를 몇 발자국 걸었다. 그러다가 저녁 식사를 차리기 위해 식당과 주방을 분주히 오가는 시종들을 볼 수가 있었다. 올라가 봤자 곧 내려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괜히 그 장면을 보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여러 음식 냄새 중에서 유독 약간의 탄내와 고기냄새만이 나의 코를 자극 했다. "…음." 나는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왠지 그 냄새들이 속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 다. 임산부도 아닌데 하는 생각에 그 상황을 피식 웃어 넘겨버린 후,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을 것을 포기하고 금방 내려오더라도 올라가서 쉬기 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층에 위치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계단을 한발자 국 디뎠다. "어?" 몇 발자국 올라가기도 전에 나는 갑자기 계단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에 빠 져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거의 굴러 떨어질 정도로 불안한 자세가 되었지만 손으로 계단을 짚어 균형을 잡기보다는 다급히 입 을 막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비릿하고 느끼한 무언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난 그 자리에서 차마 듣기 민망한 소리를 내며 붉은 융단이 깔린 바닥에 토악질을 하기 시작했다. "우웨엑! 쿨럭…우우욱!!" "카류리드?" 계단 위쪽에서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정신없이 계속 구토 를 했다. 너무 괴로워서 고개를 조금 들어 볼 정신도 없었다. 위벽을 긁어 내는 음식들이 나의 온 몸에 짜릿한 고통을 선사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만 멈추고 싶어 가슴을 쥐어뜯듯이 옷을 꽉 붙들었지만 음식을 아래로 내려보 내야 할 위가 갑자기 고장이라도 난 건지 계속 그것을 위쪽으로 역류시키 고 있었다. "커헉…쿨럭…우우웩……." 나를 붙들고 등을 토닥여 주는 기사와는 또 다른 우악스런 손이 몸에 닿았 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괴로워 죽겠는데 그 손은 난폭하게 팔을 끌 어당기며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덕분에 나는 마지막까지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려 버렸다. "카… 야! 정신……!!" 내가 계속 토하면서 눈물까지 질질 짜니까 그 어렴풋한 목소리의 주인공이 아주 내 한쪽 어깨를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 아, 빌어먹을! 정말 환자 다룰 줄을 모르는 놈이다!! 나를 흔드는 그 놈의 면상에 주먹이라도 날려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 정신을 붙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흉한 모습을 하고 있을 지에 대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떴을 때 내가 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은은한 연녹색의 덩쿨 무늬 가 그려진 벽지와 녹청색 크리스털로 치장된 화려한 촛등식 샹들리에가 보 이지 않아 나는 한동안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 낮선 광경에 의아함을 표 했다. 그러나 점점 그 천장이 눈에 익어 가는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무의식중에 왕궁에서의 내 방의 천장을 찾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곧 현실 을 되돌아오며 이곳이 휴나르 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가자 나는 자신이 꼴사납게 토악질을 하다가 쓰러졌다는 사실도 기억해냈다. 그러나 속이 좋지 않을 거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몸 은 오히려 더 개운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 내리며 고개를 갸 웃하고 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귀를 살짝 닿았다. "이제 일어났니, 카류?" "히노 선배……." 히노 선배는 침대 곁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작고 도톰한 입술로 살포시 웃 음을 그렸다. 그녀가 지금껏 이 자리에 앉아 이렇게 간호를 해주었다는 것 을 깨닫고 나는 감사의 말을 하러 입을 열었다. 그러나 히노 선배가 먼저 내 말을 가로막고 말했다. "나는 별로 한 일이 없어. 마법사 분들이 애 쓰셨지. 네가 쓰러진걸 보고 아르디예프 님이 직접 힐을 써주셨어." "아르 할아버지께서……." 저번에 나를 구하느라 또 한번 워프를 시전했기에 몸이 그렇게 좋지 못할 텐데도 또 고위 마법을 쓰셨다니… 사실 난 그냥 구역질 좀 한 것에 불과 했는데… "그분께서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어.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으시대." "아……." "웃기지도 않는 자식." 나의 말을 가로채며 갑자기 방의 한 구석에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소리에 나는 조금 놀랐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방 한쪽 구석에 비스듬히 서있는 바람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이 방에 있다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 다. "에르가 형도 히노 선배랑 같이 날 간호해 준거야?" "웃기지 마라." "아까 웃기지도 않는다며?" "좀 닥쳐." 형은 내게로 다가오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히노 선배가 앉은 의자 곁으로 다가온 뒤에 허리에 손을 얹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디트 경을 제 손으로 죽일 때도, 훨씬 전에 침입자들을 죽여버릴 때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놈이 토악질을 해?" "하하… 글쎄 말이야. 전쟁을 할 때 무더기로 쌓였던 시체랑 디트 경이 토 막 나는 것까지 봐서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지 뭐겠어. 다음부터는 내가 직접 심문하는 건 웬만하면 피해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달 까?" 내 장난스러운 말에 에르가 형은 입술을 조금 움찔했다. 엄청난 불쾌함의 표현이었다. 아마 당장이라도 한 방 날리고 싶은 것을 극도의 인내심을 발 휘해서 참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형이 뭐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 을 열었다. "농담이 아냐. 나는 아픈 게 이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아." "후, 그래. 넌 그래서 고통스러운 것보다 죽여주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 거냐? 그래? 그래서 침입자들을 벌레 잡듯 죽이고, 그래서… 그래서! 디트 경을 니 손으로 죽였냐!!!" "그렇다고 말했잖아."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던 형은 나의 간단한 대답에 바로 입을 다물었다. 그 리고 나는 형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며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덕분 에 이 방안은 무언가가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적막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 나 얼마 못 가 에르가 형의 숨소리가 점점 더 커지면서 그 적막은 금방 깨 졌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형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곧 더욱 크게 소리쳤다. "어떻게, 그렇게도 이성적으로 말할 수가 있지?! 어떻게 그걸 진짜로 행동 에 옮길 수가 있지? 그건… 그것은 디트 경이었다고… 그는 너의……!! 하…하물며, 자신이 키우던 말도 그렇게 간단히 되지는 않아!!" "막 이 세계에 태어날 때부터 깨달은 게 있었거든. 나밖에 모르는 거야." "뭐?" "게다가 머리가 차가워졌어. 이 안쪽이 말이야, 얼음처럼 아주아주 차가 워." 나는 한쪽 손으로 머리를 꼭꼭 누르며 말했다. 그리고 빙글빙글 웃으니까 에르가 형은 더욱 숨이 격해졌다. "네가 뭔데… 감히 누군가의 죽음을 결정하겠다는 거야.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데 네가 그들을 죽이겠다고? 아파 보이니까 죽이겠다고?! 고통스러워 보이니까 죽여주겠다고? 네가 뭔데!! 니가 대체 뭐길래!!" 형이 눈에 물기가 어렸다. 아니,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 다. 단지 형이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다. 나는 에 르가 형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면의 창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히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그래도 죽일 거야." "장난 하냐?!"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면 언제든지 그를 죽일 거 야. 상대의 의지 따윈 생각하지도, 상상하지도 않겠어." 나는 흥분하는 에르가 형에게 그렇게 툭 뱉어준 다음에 다리를 접으며 베 개에 의지하고 있던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정∼말 멋지구나. 그렇게 나가다간 아주 세상의 모든 생물을 죽여버릴 지 도 모르겠구만?" 에르가 형의 핀잔에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웅크려서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덕분에 방안은 또 한번 무거운 정적으로 가라앉 았다.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그 정적을 이기지 못해 에르가 형 이 조금 숨을 몰아쉬기에 나는 그 자세에서 고개만 에르가 형에게 돌렸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설마. 나 혼자 무슨 재미로 살라고?" 내 목소리의 장난기를 눈치챈 형은 뭐라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죄 없는 바 닥을 세게 굴러 화풀이를 하면서 그대로 몸을 돌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긴 저 에르가 형이 물건을 집어던지지 않고 저 정도로 끝내는 것도 정말 용하다 했다. "에르가 형……." 에르가 형이 난폭하게 문을 여는 것을 보고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냥 화만 팍팍 내다가 나갈 줄 알았던 형은 의외로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나는 하지 않으려 했던 말을 입 밖으로 내고 말았다. "형… 아직도 삐졌어?" 이상하게 목소리가 좀 메여있기에 나는 실없이 베실 웃었다. 나를 보던 형 은 조금 인상을 찌푸리면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거칠게 한발자국을 바깥 복도로 내딛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붙잡히기라 도 한 듯 더 이상 걸음을 잇지 못하고 그 자세에 왠지 고개를 조금씩 움찔 거리며 서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형은 이내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고는 소리를 꽥 질렀다. "대체 어떤 사내놈이 삐지는 짓거릴 한단 말이야. 웃기는 소리 그만해!" 쾅!! 말을 끝내자마자 형은 밖으로 걸어나가 문을 부셔버릴 것 같이 닫아버렸 다. 그리고 무슨 전쟁이나 난 것처럼 시끄럽게 발소리를 내며 자신의 방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 발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또 한번의 요란한 문닫는 소리가 울려오자 괜시리 혼자 작게 중얼댔다. "웃기지도 않는다며……." "카류는 에르가가 너무 소중한가봐." "어, 히노 선배." 나는 그제야 히노 선배의 존재를 눈치채고 다리 사이에 묻어두고 있던 얼 굴을 번쩍 들었다. 선배는 조금 쑥스러워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조금 안 타까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카류의 그 귀엽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거 같아. 에르가는 정말 귀여 워." "예?" "에르가가 부럽다고."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이해 할 듯도 하고 안될 듯도 한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네가 쓰러졌을 때 가장 먼저 발견한 게 에르가였거든. 그런데 얼마나 당 황했는지 환자인 너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고 있더라구. 그리고 뒤늦게 뛰어나온 우리들을 보더니 ‘이 죽일 놈 빨리 좀 살려내!!’라고 소리쳤다 는 게 아니겠니." 히노 선배는 그 모습을 상상하는 건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쿡쿡 작게 웃었 다. 역시나 예상대로 나를 그렇게 짤짤 흔들어 댔던 건 에르가 형이었던 모양 이다.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여전히 변한 것이 없는 아이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히노 선배가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앙 증맞은 고양이 색 눈동자로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의아함 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문득 내가 잔잔하게 웃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 다. 왠지 조금 전의 그 발언도 그렇고, 히노 선배가 에르가 형을 질투하고 있 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피식 웃으면서 별다른 치장 없이 허리까지 단정히 풀고 있는 선배의 긴 생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 주었다. "왜 그래요. 선배도 너무 귀여운 걸요. 사실 에르가 형처럼 다 큰 남자보단 히노 선배가 훨씬 더 귀엽죠." "…이 손을 꽉 깨물어 버릴까?" "예?" 히노 선배는 내 손을 확 끌어내리더니 자신의 입 근처에 두고 나를 바라보 았다. "힐레인처럼 꽉 깨물어버리면 나를 사랑해 줄 거야?" "…에…예?" "카류는 언제나 나를 보고 귀엽다고 말해주지만… 하지만 실은 난 더 이상 에르가나 힐레인처럼 귀엽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싫은 거야?" "……." 정말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등뒤로 주륵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이런 썰 렁한 소리를 하면서도 히노 선배의 눈동자는 굉장히 진지했다. 그만큼 자 신의 감정에 진심을 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저…선배……." 나는 약간 곤란해하며 그녀를 불렀다. 비록 히노 선배가 착하고 아름답기 는 하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내가 돌봐온 히노 선배는 여전히 내게 어린아 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귀여운 동생이고 딸 같은 존재일 뿐 사랑할 대상으 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내가 그 누구보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그만큼이나 그들에 대한 확고한 관념이 잡혀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으리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를 바라보던 히 노 선배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득 담겼다. "내가 뭐가 부족해? 역시 귀엽지 않아서 그래? 키가 너무 커서? 가슴이 너 무 커서?" "……!!" 나는 깜짝 놀라 크게 몸을 움찔했다. 그러자 히노 선배가 결국 울먹이면서 말했다. "역시 이런 말하는 것도 귀엽지 않겠지……." "바…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 얼굴이나 행동이 좀 귀엽다고 무조건 사랑한 다니 말도 안돼요. 제가 그런 이상한 놈으로 밖에 안 보여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어떻게 하면 되냐구!" "선배……." 내가 어쩔 줄을 몰라하자 히노 선배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미안… 카류가 힘들어하는 거 아는데…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이기적인 지 오늘 처음 알았어……." "그렇지 않아요. 우리 히노 선배가 얼마나 착한데……." 나는 의자 쪽으로 좀 더 가서 히노 선배를 꼭 안아주었다. 한순간의 열병 정도로 생각했는데, 항상 조심스럽게 사람의 기분을 살피며 배려하려하던 히노 선배가 이런 상황에서까지 나에게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보면, 선배의 그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심각한 것인 모양이다. 항상 대하던 작고 귀여운 히노 선배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라 나는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의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히노 선배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알고 있어. 이대로 나간다면 결국엔 카류가 나를 아내로 맞이 해야 한다는 것. 아버지가 카류의 가장 큰 조력자이니까 싫어도 나를 아내 로 맞이해야만 하는 거. 나 전부 알고 있어. 그렇기에 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웃고 있었어. 어차피 카류는 내꺼라고 웃고 있었다고!" 히노 선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 물을 펑펑 흘리며 잔뜩 메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그런 자신이 너무 싫어서 이렇게 카류에게 억지를 부리는 거야. 나를 봐달라고. 진심으로 나를 보아달라고. 나를 더 이상 추하게 만들지 말 아달라고. 카류가 힘들어하든 말든 자신만 편해지겠다고… 나는… 나는 자 기밖에 모르는 못된 계집애야!!" "……." 히노 선배는 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계속 눈물을 쏟아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고 난 뒤라서 인지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을 굉장히 버거워하며 조금씩 떨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하하……." 갑작스런 나의 웃음을 듣고 히노 선배는 눈에 띄게 몸을 움찔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습에도 나는 계속 실소를 터트렸다. 머리가 다 가라앉은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그녀가 어린애로 보이든 말든 나는 히노 선배를 안아야 하지 않던가. 내가 생각이 어떻든 그녀를 나의 왕비로 맞이해야만 하지 않는가. 그런데 무슨 잡생각을 그렇게 했던 건지 모르겠다. 이미 내겐 애정싸움 같은 것을 할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와의 미래는 이렇게나 당연한 일이고, 당연히 그랬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주 옛날부터 모든 사람들이 기정 사실화하고 있었던 일 이었으리라. "하하, 미안해요. 선배. 아무래도 제 지능지수가 많이 떨어지나 봐요. 머리 를 굴릴 때마다 나는 건 깡통소리뿐이니……." "에? 무슨 소리야… 카류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걱정 말아요. 나는 선배를 사랑할거니까. 꼭 그렇게 될 테니까."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 하는 히노 선배를 다시 한번 꼭 안았다. 그리고 황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그녀의 뽀얀 이마에 키스해주면서 말했다.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그때는 꼭 입술에 키스해 줄 테니까 조금만 기다 려 줘요. 알았죠?" "카류……." "언젠가 히노 선배를 나의 비로 삼겠어요. 그게 옳은 일이니까." 나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꼭 눌러 완전히 품에 안았다. 나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그녀는 놀라워하며 고개를 들기 위해 몸을 조금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나의 마지막 말을 듣더니 뭘 생각하는지 곧 움직임 멈췄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녀의 생각을 추측하려 하지 않았다. 왠지는 모르지만 그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해… 카류……." 히노 선배가 작게 말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굳이 되묻기보다는 그냥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하얀색 벽 지에 청동과 금박으로 간단히 치장된 샹들리에가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 만 나름대로 잔잔한 기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 천장에서 거짓말 같은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 다음 편도 곧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셔요. 이벤트 참가해주시구요. ^^ 이벤트 참가법 1.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이벤트 참가법 2. 카페의 이벤트란.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벤트 참가법 3. 리플, 꼬리글. 귀찮아하시는 분이 계시기에 나중에 제가 쫙 확인하겠습니다. ^^;; 그래도 확실히 점수 분배하지 않으시면 힘들어요∼. 이르나크의 장 Part 40 악마의 성 우물가에는 오늘도 사람들이 많았다. 옆집 로이와 로이네 아줌마도 있고, 건넛집 해리도 있고, 방앗간 집 챌린 아저씨도 있다. 나는 여전히 토라져 있는 삐짐쟁이 로이에게 안녕이라고 말해준 다음에 우물가를 한바퀴 빙 돌 았다. 하지만 한바퀴 전부 다 돌고 그 다음에 세바퀴나 더 돌았는데도 내 가 찾는 사람만은 우물가에 없었다. 한동안 물을 긷는 사람들 곁으로 기웃거리다보니 조금 숨이 차기에 그늘이 있는 구석으로 가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곧 내가 찾던 다테 아 줌마가 오는 것을 보여서 나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면서 깡총 깡총 뛰었다. "다테 아줌마!!" "네이. 벌써 왔니?" "예. 네이는 부지런해요! 물이요, 물!" 나는 다테 아줌마의 옷깃을 붙잡고 우물가를 가리켰다. 아줌마는 그런 나 를 보다가 왜인지 한숨을 푹 쉬고 사람들 뒤에 섰다. 그리고 나는 차례가 될 때까지 아줌마 곁에 바짝 붙어 기다렸다. 꼬르르르륵.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났다. 뱃속의 거지 요정이 또 난동을 부리는 모양이다. 이 놈들이 난동을 부리면 시끄러운 소리가 날뿐 아니라 뱃속이 꼬이는 것처럼 괴롭다. 그래서 나는 이 세상에서 이 놈들이 제일로 싫다. 내가 배를 움켜쥐고 인상을 쓰고 있는데 갑자기 다테 아줌마가 나를 보다가 이상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이. 힘내거라. 가을이 되면 네이도 빵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정 안되면 이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네게 구해주마." "우와아∼!" 나는 너무너무 좋아서 폴짝 뛰었다. 역시 나는 이 세상에서 다테 아줌마가 제일로 좋다! 맨날 나 대신 물도 떠주고, 어떨 때는 정말 가끔씩 설탕도 준 다. 다테 아줌마는 아마 천사일 것이다. "자, 여기. 이걸로 거지 요정들을 처리하거라. 알았지?" 다테 아줌마가 빙긋 웃으면서 내가 준 바가지에 물을 나누어주었다. 그 물 을 한번에 반이나 꼴깍꼴깍 마시니까 뱃속이 조용해졌다. 내가 물로 못된 요정들을 전부 익사시켰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은 뜨거운 죽으로 태워 죽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이렇게 찬물로 익사시켜준다. 한번씩 그 요정들이 응아로 나오는가 확인도 해보는데 이상하게 한번도 본적이 없다. 아줌마 말에 의하면 너무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는 거라고 한다. 그렇게 작은 녀석 들이 이만큼이나 큰 소리를 낸다는 것이 정말로 신기하다. 물을 반쯤 마시고 나자 눈이 간질간질했다. 너무너무 오랫동안 비가 안 와 서 입이 아닌 곳에는 물을 대어본적이 없었다. 나는 힐끗 다른 곳을 보다 가 바가지의 물을 손가락으로 푹 적셔서 눈을 박박 긁었다. 딱!! "앗!!" "네이! 이렇게 귀중한 물로 무슨 짓이니!" 다테 아줌마가 나를 때렸다. 그것도 아주아주 세게. 내가 머리를 쥐고 올려 다보자 아줌마의 남자처럼 굵은 연두색 눈썹이 위로 많이 치켜 올라갔다. 아줌마는 갑자기 귀신같이 변해버렸다. "으앙!!" "네이, 우물가에서 시끄럽잖니! 어서어서 집으로 돌아가." "다테 아줌마가 제일로 싫어!" 나는 아줌마가 미워서 굉장히 크게 소리쳐주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그 리고 물이 조금 든 바가지를 꼭 쥐고 좁은 골목을 따라 우리 집으로 곧장 달려갔다. 다테 아줌마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니고, 엄마가 오늘은 꼭 집 으로 바로 들어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건 비밀이지만, 엄마가 말하기를 오늘은 악마가 오는 날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집안에 가만히 있어야만 무시무시한 저주를 피할 수 있다고 했다. 집으로 가기 위해 나밖에 모르는 지름길을 가로질러 큰 거리로 빠져 나왔 을 때 이상하게 많은 사람들 그 곳을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이렇게 많은 사람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사람 들이 많은지 그들은 도로가로 전부 밀려나와 있었다. "아저씨. 뭐해요?" 나는 키가 제일 커 보이는 아저씨를 붙잡고 아주 예의바르게 물었다. 예의 가 바르지 않으면 다테 아줌마도 우물에서 물을 떠주지 않는다. "뭐야, 거지 녀석! 저리 꺼져!!" 그런데 그 키가 큰아저씨는 예의가 발랐는데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아 저씨가 나를 밀치는 바람에 바가지의 물을 쏟아버릴 뻔해서 나는 몰래 건 물 뒤쪽으로 숨어 들어가서 키가 큰아저씨의 욕을 퍼부었다. 정말이지 못 된 아저씨다. 다테 아줌마가 봤다면 분명 그 아저씨에게 술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름이 뭐냐, 꼬마야?" 갑자기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 곳에는 이상하게도 뽀얀 얼굴을 한 남자가 서있었다. 우리 아빠도, 옆집 로 이의 아빠도 저렇게 하얗지는 못한데… 아! 우리 세레스트 성곽을 지켜주 는 멋진 기사 아저씨만큼 하얗다. "네이입니다. 아저씨." 조금 전에 키가 큰 아저씨한테 핀잔을 들었지만 네이는 착한 아이라서 또 한번 예의 바르게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 뽀얀 아저씨가 피식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흥, 꼭 계집 같은 이름이군." "네이는 계집앤데요." 나는 뽀얀 아저씨에게 대답했다. 보통 사람들은 네이가 계집애인 걸 잘 모 른다. 머리카락도 허리만큼 길고 팔다리도 가느다라한데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한번도 나를 계집애라고 말해준 적이 없다. "쩝, 해골바가지 같으니 성별이 뭔지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있나. 꼬마야, 혹시 저쪽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지 않냐?" "와, 알고 싶어요!" 나는 너무나 좋아서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그 아저씨가 다가와서 말했다. "훗, 이 아저씨가 직접 보여주마. 뭐가 있는지 말이다."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내 지저분한 손 을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웬만큼 잘 아는 사람이 아니면 손은커녕 몸의 한 부분도 잘 잡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저씨는 이상한 천을 꺼내 손을 둘둘 만 다음에 끝끝내 내 손을 붙잡았다.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하기에 나도 물이 담긴 바가지를 좁은 골목에 잘 숨겨놓고 햇빛이 쨍쨍 비 치는데도 사람들이 우글우글 거리는 큰 거리로 나왔다. "야, 뭐야!" "비켜!" "죽을라고! 으앗!!"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고 빽빽한데도 뽀얀 아저씨는 그 사람들을 마구 밀쳐 버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도 사람들의 다리에 이리저리 채이긴 했지만 오로지 아저씨의 손에 붙들려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어?" 안쪽으로 전부 들어왔을 때 이상하게도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거리 가 전부 사람들로만 바글바글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리의 중간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양쪽에만 사람들이 서있었던 것이다. "좀 기다려 봐라. 굉장한 게 나올 테니까."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꼬물대자 아저씨가 들릴랑 말랑할 정도의 작은 목 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거리 중간을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그렇게 한동안 서 있으려니까 또 배가 꾸르륵해서 바가지를 골목 에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물이나 마시면서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웅성웅성… 갑자기 저쪽 끝에서부터 빨래가 바람에 맞춰 하나씩 펄럭펄럭 하듯이 사람 들의 웅성임이 전해졌다. 그 소리에 나도 고개를 들어 거리의 이쪽저쪽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성문 쪽이다. 왼쪽 말이야." 내가 왼쪽 오른쪽 고개를 왔다갔다 거리자 뽀얀 아저씨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을 동그랗게 만들고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리고 실눈 을 뜨고 왼쪽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곧 멀리 떨어진 거리 속에서 달칵달칵 철렁철렁하는 소리와 함께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우와아아아……." 점점 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번쩍번쩍하는 옷 을 입은 사람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옷은 단 한도 본적이 없는 너무너무 아름답고 보드라워 보이는 옷감이었 고, 위에 걸친 갑옷도 햇빛에 비쳐 은빛으로 신비하게 반짝였다. 그들이 탄 말들도 치즈를 나르는 레니 아저씨의 마차의 말하고는 전혀 다르게, 다리 도 튼튼하고 털에 윤기가 좔좔 흘러서 나보다도 깨끗해 보였다. 나는 그들을 보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 확신을 내렸다. 아마도 그들이 이 세상에 가장 귀한 사람들이라는 귀족일 것이다. "와…와아아!!" 내가 처음 보는 귀족들의 행차에 너무너무 신기해서 계속 탄성을 내지르고 있을 때 눈부신 햇살 사이로 털이 몹시 보드라워 보이는 갈색의 말을 탄 파란 머리 남자아이가 근처까지 다가왔다.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굉 장히 어려 보였고, 또 그렇게 두꺼운 갑옷을 많이 껴입지도 않았다. 그럼에 도 그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으로 그 사람들의 가장 앞에 서서 말을 몰고 있었다. 내 생각으로는 그가 이중에서도 제일로 귀한 사람인 모양이다. 햇빛에 비쳐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나는 발을 동동 굴렀다. 이중 에서 가장 귀한 사람의 얼굴을 꼭 한번만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한 내가 정면으로 뛰어들어 빤히 쳐다보면 크게 혼날 것을 알기 때문에 발뒤꿈치를 들고 최대한 얼굴을 빼꼼 내미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어…악!!" 그때 누군가가 등뒤에서 나를 확 미는 것이 느껴졌다. 덕분에 나는 앞으로 떼굴떼굴 굴러서 아무도 없는 길의 중간으로 굴러와 버렸다. 갑자기 튀어 나온 나 때문에 말이 깜짝 놀라서 히히힝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당황하여 다시 사람들 안으로 뛰어가려고 일어나는데 갑자기 커다란 말을 탄 한 기사 아저씨가 내게로 두두두 뛰어와서는 크게 소리쳤다. "이 무례한 놈!!" "아악!!" 기사 아저씨가 엄청 기다랗고 번쩍거리는 칼을 뽑는 것을 보고 나는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엎드렸다. 그리고 몸을 쪼끄맣게 웅크리고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계속 꽥꽥 소리를 질렀다. 저 아저씨가 분명 나를 벌주기 위해 저 칼로 온 몸을 마구 찔러버릴 것이다! 푸줏간 집 냐리안 아저씨가 돼지 고기를 다질 때처럼 말이다! "그만둬! 검을 거둬라!!" "그렇지만 전하!" "됐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를 일으켜 줘." 내가 계속 엎드려 있는데 위쪽에서 그런 대화가 오갔다. 그런데 두개의 목 소리 중에 명령을 하는 쪽의 목소리는 굉장히 듣기 좋고 고운 노랫소리 같 았다. 그 목소리 때문에 나는 소리 지르는 걸 멈추고 고개를 아주 조금 들 어 눈을 위로 힐끔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하늘로 집어던질 듯이 위로 휙 들었다. "악!" "조심해! 어린애잖아!!" "죄송합니다." 소년은 자그마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보다 두배는 커 보이는 아 저씨를 마구 야단쳤고 기사 아저씨는 놀라서 나를 아기 안듯이 제대로 안 았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일행 중 가장 앞에 서 있는 어린 그 분의 얼굴 을 볼 수 있었다. "괜찮니?" "……." 그 분이 빙긋 웃는 것을 보고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얼굴을 살짝 움 직이자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까만색이 됐다가 파란색으로 바뀌었던 것이 다. 그렇지만 곧 까만색이랑 파란색의 중간색이 되기도 했다. "천사다……." 나는 그분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얼굴은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본적이 없을 정도로 너무너무 하얀색이었고 아주 조그마한 상처나 티끌마저 없었다. 신 기하게 변하는 검은색과 파란색 눈동자는 크고 깨끗했고, 코도 입술도 너 무너무 예뻤다. 우리 집 근처에서 가장 예쁜 료나도 저렇게 아름답지는 못 했다. "카류리드 전하. 서두르셔야죠." 곧 그 아름다운 천사의 곁으로 녹색머리의 기사가 다가왔다. 그런데 그 기 사마저 우리들의 수호신 카뮤리안 님처럼 엄청 잘 생겼고 굉장히 강해 보 였다. 나도 친구들과 나들이를 가면서 성곽을 지키는 멋지고 잘생긴 병사 아저씨들을 많이 봤지만 한번도 저렇게 멋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분명 그 도 신의 사자일 것이다! 아마 천사를 지키라고 신이 보낸 것일 거다! 신의 사자의 목소리를 들은 검고 파란 천사는 나를 보더니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조심해야지. 여자아이인데 몸에 상처라도 나면 안되잖아? 그렇지?" "아……." 곧 나를 안은 기사 아저씨가 나를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데려가는 바람에 나는 더 이상 그 아름다운 천사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그 까맣고 파란 머리의 천사가 곧 갈색 말을 몰아서 앞으로 걸어가 버려서 더 더욱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조금만 더 보려고 고개를 뒤 쪽으로 비틀면서 몸을 움직이자 그 기사 아저씨가 나를 땅바닥에 내던졌 다. "악!" "에잇, 냄새나잖아! 지저분한 것이 감히 왕족의 앞길을 막다니! 이곳을 지 나는 분이 전하가 아니었다면 너 같은 건 벌써 가죽이 벗겨졌을 거다!" 그 무서운 기사 아저씨는 손을 코에 대어보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에게 화를 냈다. 나는 잔뜩 쫄아 있다가 그 아저씨가 멀리 가버리는 걸 보고 훌 쩍거리면서 일어났다. "훌쩍… 네이는 로이보단 냄새 덜 나는데……." 팔이랑 어깨랑 다리가 심하게 긁혀서 욱씬욱씬했지만 나는 쩔뚝거리면서 아까 물이 담긴 바가지를 숨겨둔 곳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 라고 쑤근덕거려서 나는 바가지를 뺏길까봐 재빠르게 골목 안으로 숨어 들 어갔다. 다행히 내가 숨겨둔 바가지는 조금 전 그대로였다. 나는 그 바가지를 꼭 안고 빙긋 웃었다. 좀 아프긴 하지만 천사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기뻤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꼭 엄마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하며 나는 다시 거리로 나가려고 발을 옮겼다. "뭘 그렇게 웃는 거냐, 꼬마?" "에?" 그러나 그 골목 앞을 조금 전 뽀얀색의… 아니 그 천사랑 비교하면 이 아 저씨는 정말 시커맷다. 그러니 후드 쓴 아저씨라고 불러야겠다. 어쨌든 내 가 가려는 길을 조금 전에 나를 길가까지 데려다 주었던 후드 쓴 아저씨가 가로막고 있었다. "천사를 봤거든요." "천사?" "아까 그 까맣고 파란 사람." "하!" 내가 말하자 후드 쓴 아저씨가 갑자기 이상하게 웃었다. 그리고 허리를 숙 이고 내게 말했다. "그건 천사가 아니야." "에? 하지만 너무너무 예뻤는데요? 얼굴이 뽀얗구요∼ 손도 예쁘고, 머리 카락이랑 눈동자 색이 예쁘게 변했어요!!" "예쁘면 전부 천사냐? 수도에 계신 대귀족 나리들은 전부 천사겠구먼." "게다가 내가 계집애인 것도 알아 맞췄어요! 천사가 아니면 알 수 있을 리 가 없어요!!" "확실히 그건 좀 놀랍더군." 그 아저씨는 턱을 긁적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곧 후드로 얼굴을 좀 더 가린 다음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굉장한 사실을 가르쳐 줄까?" "…굉장한…거요?" "그래… 아주아주 굉장한 거지." 아저씨는 그렇게 말하며 쭈그리고 앉아 나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실 그건 말이야… 악마야." "에?!" 나는 깜짝 놀라서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자 그 아저씨가 무서운 얼굴로 작게 말했다. "하얀 얼굴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너의 정신을 홀린 다음에… 네 몸 속에 있는 혼을 확 빼먹어버리는 무시무시한 악마라고." "그…그런……." "악마이기 때문에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거야. 악마의 능력으로 너의 마음속을 훔쳐봤기 때문에 네가 계집애라는 걸 알아챈 거지. 천사가 그런 짓을 할거 같아?" "앗…그러고 보니… 엄마가 오늘은 악마가 나온다고 곧장 집에 오라고 했 는데……!!" 나는 바가지를 꼭 쥐고 떨었다. 그러자 후드 쓴 아저씨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바보구나. 이곳의 모든 사람들은 전부 다 알고 있단다. 아까 그것이 사람 의 혼을 빼먹는 무시무시한 악마라는 걸. 그러니까 네 엄마도 그렇게 말한 거야." "어…어떻게 하지… 나 악마의 얼굴을 봐버렸는데……!!" "크크, 얼굴만 본 정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일단 그 놈의 정체가 악마라 는 것을 잊지만 않으면 돼." "정말요?"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계속 안절부절못하고 있자 그 아저씨가 품 에서 뭔가 작고 동그란 것을 꺼냈다. "뭐,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어쩔 수 없지. 웬만하면 그 땅을 피칠갑으로 만들어서 이 성의 주민들을 각성시켜주길 원했지만, 감히 왕족 이 가는 길을 막고도 이렇게 살아버렸으니 그것도 네 천운이 아니겠냐. 이 건 네가 다치면서까지 수고해준 것에 대한 보상이다. 자, 이거 받아라." "사…사탕!!" 나는 알 수 없는 말에 조금 의아해 하다가 아저씨가 건네준 동그란 것을 보고는 크게 소리쳤다. 손에 조금 달라붙는 달작지근한 냄새가 나는 그것. 방앗간 집 루나가 자기 생일날 그걸 가지고 엄청나게 자랑하는 것을 본 뒤 로 지금까지 한번도 잊어 본적이 없는 그 꿈같은 음식이 지금 내 손안에 있다니!! "빌어먹을. 무슨 쥐방울만한 애새끼가 이렇게 소리가 커. 그래, 사탕이다!" 아저씨가 귀를 막고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나는 그 아저씨의 모습과 떨리는 손에 꼭 쥐어진 사탕을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호…혹시 아저씨는 신의 사자예요? 제게 그 악마에게 홀리지 말라고 말을 전해주러 온 진짜 신의 사자요!!" "하하?" 내가 눈을 마구 빛내자 아저씨는 피식 웃더니 내 머리를 툭 쳤다. "그래, 내가 신의 사자다. 너희들이 악마의 잔꾀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 해 이렇게 일부러 온 거지. 하지만 이건 비밀이다. 알았냐?" "에, 예! 그…근데요… 왜 그렇게 못생겼어요?" 내 말에 아저씨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찔끔 놀라서 두 걸음 정도 물러섰다. 그러자 곧 아저씨가 한숨을 푹 내쉰 뒤에 손을 절 래절래 흔들며 말했다. "봐라. 내가 악마처럼 널 홀릴 이유 같은 것도 없는데 이뻐서 뭣에 쓰겠 냐? 그리고 사람은 외모로 판별하는 게 아니야. 너도 그런 소리 들어봤겠 지? 인간은 마음이 중요한 거라고! 이 마음이 말이다!" "아!! 그렇구나!!" "알겠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 "예! 사…사탕 정말 너무 고맙습니다!!" 나는 크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에 집을 향해 뛰었다. 정말 뒤도 돌아 보지 않고 두근두근하는 가슴을 안고 곧장 뛰었다. 숨이 차서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계속계속 뛰었다. 물이 조금 쏟기는 것도 모를 만큼 엄청 빠 르게 집으로 뛰어갔다. "엄마!!" 나는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그게 소리쳤다.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던 엄마 는 나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네이! 물을 먹고 나면 빨리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지 않았니! 그리고 시끄 럽잖아!" "엄마, 엄마. 이것 봐, 이것 봐. 사탕이야!! 사탕이라고!!" "뭐?" 엄마는 내 손의 동그란 사탕을 보더니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빠르게 나에게 다가와 그 사탕을 뺏어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진짜 사탕이라는 것을 확인한 건지 손을 벌벌 떨며 말했다. "이…이걸 어디서 훔친 거냐! 주인이 쫓아서와서 널 벌주려고 하면 어쩌려 고 그래!! 요즘 얼마나 사람들이 날카로운지 아니!? 네가 죽으면 이 엄마보 고 어떻게 살라고!" "아니야! 훔친 거 아니란 말이야! 후드 쓴 아저씨가 준거야! 나 먹으라고 공짜로 준거야!" "줬다고? 공짜로?" "응!! 정말이야, 진짜야. 네이는 거짓말 안 해!"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조금 가늘게 뜨고 나를 보다가 곧 그것을 작은 선반 위에 놓고 불가로 다가가 속이 텅텅 비인 커 다란 냄비를 들어올렸다. "됐다. 어찌됐든 훔친 건 아니라니 엄마가 물을 떠오마! 국을 끓여먹자꾸 나!" "국?" "그래, 이걸 한꺼번에 먹는 아까운 짓을 할 수야 없지! 세레스트 성산(聖 山)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먹을 것도 없던 참이었는데 아주 이걸 물에 녹 여서 두고두고 먹자꾸나. 아버지도 오면 기뻐하실게다!" "아빠가? 아빠가 기뻐해? 와아아!!" 항상 새까만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짓기만 아빠의 웃는 모습을 상상하니 너무 기뻐서 나는 꺅꺅 소리를 질렀다. 아빠가 곡식을 일구는 땅은 엄청나 게 먼 곳에 있어서 아빠는 아주아주 이른 새벽아침에 나가서 하늘이 깜깜 해져도 한참은 더 있어야 들어오는데, 그렇게 잠시 얼굴을 보는 동안에도 맨날 비가 오지 않았다고 투덜거린다. 우리 아빠는 올 여름동안 단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다. 나는 엄마가 물을 떠올 때까지 방안에서 이쪽저쪽으로 뒹굴뒹굴 굴러다녔 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땀이 줄줄 흘러서 기분 나빴기 때문이다. 집 한쪽 구석에 있는 화덕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더욱 덥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괜히 그 화덕을 째렸다. 하지만 그걸 한번 꺼뜨리면 다시 불을 피우기 위 해 불씨를 얻으러 여러 집을 돌아다녀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방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곧 눈을 내려 깔았다. 화덕의 요정이 내 시선을 눈치채면 영원히 불씨를 가져가 버릴지도 모르니까. "후우, 기다렸지. 우리 네이." 한참 시간이 지나자 엄마가 땀을 흘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냄비를 불가 에 얹고 불씨가 잘 있는지 확인을 하는 엄마를 보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서 말했다. "엄마. 나 다테 아줌마한테 갔다 올래!" "뭐? 다테에게? 무엇 때문에? 오늘은 위험하단 말이야! 이 엄마가 이야기 해주었지 않니." "사탕 얻었다는 얘기하고 올래. 응? 엄마∼." "하아,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릴 테니… 그럼 큰길가 쪽으로는 절대 가면 안 된다. 알겠지?" "응!!" 나는 방긋 웃고 바가지의 마지막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서 기운을 재충 천한 다음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테 아줌마의 술집은 큰길가를 통하지 않 아도 갈 수 있다. 하지만 가는 길이 좀 위험하다. 땅바닥이 거칠고 위험한 쓰레기들이 널려있기 때문에 자칫하면 맨발인 나는 크게 다칠 수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거의 매일같이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웬 만해서는 크게 다치는 일이 없다. "다테 아줌마!" 나는 다테 아줌마의 술집의 뒷문으로 뛰어 들어가 아줌마를 불렀다. 커다 란 드럼통에서 나무 컵으로 술을 퍼담던 다테 아줌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 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네이. 왜 여기까지 온 거니?" "헤에, 저요. 사탕을 얻었어요. 후드 쓴 아저씨한테서요." "사탕을?" "응! 내가 다쳐서 주는 거래요." 나는 기사 아저씨가 날 땅에 집어던지는 바람에 바닥에 긁혀서 벌겋게 부 어오른 오른쪽 다리랑 오른쪽 팔을 보여주면서 씨익 웃었다. 다테 아줌마 는 송충이 눈썹 사이를 조금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곧 숨을 폭 내쉬었다. "후, 뭐, 마음씨 좋은 부자 아저씨였나 보지. 알았으니 이만 집으로 가보거 라. 아줌마는 좀 바빠서 말이다. 요즘엔 오전에도 이렇게 손님이 많구나. 뭐, 아줌마야 좋지만……." "저 아저씨들은 일 안해요?" "후, 비도 안 오는데 논을 일군들 뭐하냐고 자포자기한 사람들이지. 전쟁이 시작된 통에 세율이 높아져 어차피 가을에 수확한 쥐꼬리만한 곡식도 전부 빼앗길 테고……." "으음? 그치만 아빠는 열심히 일하는데……." "그래, 남은 거라도 가꿔봐야지. 네 아빠가 옳은 거야." 아줌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를 담아 선반에 담아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한쪽에 있는 내 전용 발판에 올라가 카운터 밖의 사람들을 내다보았 다. 정말 아줌마의 말대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유독 중앙의 탁 자에만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모여있었다. "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다테 아줌마가 사람들에게 맥주를 나누어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중앙의 사람들이 잔뜩 모인 곳을 손가락질하며 아줌마에게 질문을 했다. "아줌마! 저거, 저거 뭐예요? 뭐하는 건데요? 왜 저렇게 사람이 많아요?" "응? 아 외부에서 온 점술사란다." "점술사?" "그래, 굉장히 점을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하더구나. 이번엔 사람들의 요청 으로 언제 비가 올 건지 점을 치는 모양이다. 거의 한 달도 넘었던가? 어 쨌든 그쯤부터 우리 세레스트 성으로 흘러들어 와서는 계속 이곳저곳 술집 을 돌아다니며 점을 치더구나. 거의 돈도 받지 않고 공짜로 점을 쳐주는 모양인데, 대체 뭘 먹고사는 건지 원……." "비…비가 오는 날을 맞춘다고요? 저도 가봐도 돼요!?" "그래…뭐…다들 아는 사람들이니……." 나는 다테 아줌마의 허락을 받자마자 발판에서 뛰어내려 카운터 밖으로 냅 다 뛰어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고개를 기웃거렸다. 그 곳에는 아빠처럼 비쩍 마르고 기운이 없어 보이는 아저씨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저씨들은 내가 오는 것을 보더니 피식 웃으면서 나를 안쪽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덕분에 나는 탁자 위로 눈을 겨우 내밀어 그 점술사님 의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자, 그러면 시작하지." 탁자에 어른 주먹만한 크기의 굉장히 크고 동그란 검은 구슬을 놓아둔 그 점술사님은 흑갈색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음침해 보였지만 사람 들에게 말하는 모습을 보니 전혀 음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 골목의 대장인 쟈나트 오빠 같이 앞장서서 명령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그분은 점을 치기 위해선지 구슬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눈을 감았 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그의 까만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구슬 위의 얹어진 점술사님의 손이 굉장히 곱다는 것을 깨달았 다. 물론 약간의 굳은살이 박혀있어서 조금 전 큰길에서 봤던 그 까맣고 파란 악마만큼 곱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빠의 그 거칠고 상처투성이 의 손과는 전혀 달랐다. "으음……." 한동안 가만히 있던 그는 작게 신음소리를 냈다. 나는 깜짝 놀라 뒤꿈치를 들고 그 점술사님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 고 점술사님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지독하다. 태초의 혼돈보다도 깊은 사악함이다." "무…무슨 뜻입니까, 점술사님." "아르윈 왕국을 뒤덮는 사악한 기운 때문에 신이 노하신 것이다. 그 사악 함이 지속되는 한 신은 더 이상 대지의 마른 목을 달래주시지 않을 것이 다. 그 근원을 풀지 않으면 아르윈 왕국은 영원히 신에게 버림을 받게 되 리라." "하지만… 저희 성에는 세레스트 성산(聖山)이 있습니다. 카뮤리안 님께서 저희들을 지켜주고 계신데 그 어떤 마물의 기운이 감히 이곳으로 파고 들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간악한 마물 역시 그것을 눈치채 버렸다. 자신의 힘이 이곳까지 미치지 않는 것을 깨달은 놈은 이곳까지 직접 자신의 일부를 들여놓았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어둠을 퍼뜨리기 위해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더욱 발돋움하여 그 점술사님에게 질문을 했다. "점술사님!! 혹시 그 마물이 까맣고 파란색인가요? 그리고 무지무지하게 아름답구요!" 나의 말에 그 점술사님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것은 여기까지다. 내가 이 검은 구슬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멀고 추상적인 이미지일 따름이다. 나의 능력은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하물며 그것이 그 근원을 추정할 수 없 을 정도로 사악한 마물의 정체라면 말할 것도 없겠지. 후, 어쨌거나 신의 노여움을 산 아르윈 왕국에 비가 내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 듯 싶군." 조금 어려운 말들이라 나는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어쨌든 우리 나라가 사악한 마물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점술사님은 동네 아저씨들에게 동전을 한 닢을 받더니 할 일이 있다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분이 나가자마자 아저씨들은 서로 모여서 그 마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도 뭔가 대단한 것을 들을 수 있 을까 싶어 그 자리에 끼여서 아저씨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물이 이 성에 들어왔다고? 우리 세레스트 성을 수호해주시는 카뮤리안 님의 힘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사악한 놈이……?" "혹시 그거 아닐까. 오늘 제6왕자의 군대가 입성했다던데 말이야!!" "그 패륜아 왕자? 아, 너희들 이거 들었나? 사과 가게 집 레후가 말하던데 그 왕자가 우리 리아 영지의 상권을 빌미로 상인들을 위협해서 돈을 빼앗 기까지 했다더군." 나는 아저씨들이 수근거리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패륜아가 뭔지 는 잘 모르겠지만 뭘 뺏었다는 걸로 봐서는 그 왕자님이 엄청 못됐다는 뜻 이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왕자님은 굉장히 귀한 분이고 멋진 분이 아닌가? "아저씨들. 그 왕자님이 그렇게 못됐어요?" "못됐다 마다. 아주 인간이 되다만 짐승 같은 놈이란다! 악마가 따로 없지! 하…하지만 이런 소리는 함부로 하면 안 된단다. 알겠지?" "에……." "이봐, 그런데 상인들은 왜 가만히 있대? 그쯤 되면 상인들이 반발하고 들 고일어나 제6왕자를 공격할 만도 한데 말이야." "우리 리아 후작님께서 특히 상인들에게 잘 대해 주셨잖아. 그래서 꾹 참 고 있는 게 아닐까? 아이고, 우리 영주님은 어쩌다가 그런 몹쓸 놈한테 엮 여서… 원래 이렇게 가뭄이 심할 땐 세율도 낮춰주시는 좋은 분이셨는데 이젠 세율을 더 올리셨다고. 분명 그 왕자 놈이 올리자고 했을 게 분명해!" "제6왕자가 전쟁이 일으켜서 더 그렇지, 뭐." "빌어먹을!! 이게 전부 그 제6왕자 때문이야! 분명 점술사님의 말처럼 그 놈의 악행에 하늘까지 노하신 게 틀림없어! 아니면 왜 이렇게 비가 안 온 단 말이야! 게다가 내 평생 이렇게 더워보기는 처음이라고!! 이젠 여름도 거의 다 지나가는데 이게 무슨 꼴이야!" 더 이상은 아저씨들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나는 그냥 조용히 그 자리 를 벗어났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조금 전의 그 마물과 악마랑 왕자님 이라는 건 한 인물인 듯 싶다. 그리고 그가 우리 세레스트 성으로 왔기 때 문에 비가 안 오고, 이렇게 먹을 게 없다는 뜻인 것 같았다. 어찌됐든 나는 카운터의 다테 아줌마에게 가서 이만 집에 가겠다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늦게 돌아가면 엄마가 혼낼 테고, 그리고 혹시나 그 악마를 다시 만나지는 않을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엄마!" "네이!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니!" "엄마엄마, 엄마는 알아? 우리 성에 온 악마 말이야!" 나의 말을 들은 엄마는 다급히 뛰어와 내 입을 확 틀어막았다. 덕분에 엄 마의 손에서 바둥바둥대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벗어날 수가 있었다. 하지 만 그러고도 엄마는 여전히 화를 내며 내게 큰 소리를 질렀다. "쓸데없는 소리하지마! 또 한번 그런 소리하면 엉덩이에 불이 나도록 때려 줄 테니까!" "엄마… 왜 그러는 거야……." 엄마가 너무 큰 소리를 내서 나는 그만 눈물을 찔끔했다. 그러자 엄마가 한숨을 푹 내쉬며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꼭 안아주면서 작게 말했다. "생각해봐. 악마가 자신의 정체가 들켰다고 생각되면 널 잡아갈지도 모르 잖아. 그러면 굉장히 아플 텐데 우리 네이는 그래도 좋으니?" "아…아니!" "그러니까 조용∼히. 알았지? 조용해야 한단다. 쉬이∼" "응. 조용히. 쉬잇∼쉬잇∼" 나는 엄마를 따라 입술 앞에 검지 손가락을 세우고 작게작게 말했다. 엄마 는 그렇게 계속 쉬쉬를 하다가 그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조그맣 게 말했다. "하늘이 노한 거다. 그 악마 때문에 하늘이 노한 거야. 그런데도 그 악마는 분명 높은 성에 앉아서 기름진 밥을 먹고 있을 게다. 우리 네이는 먹을 죽 한 그릇 없는데도 하늘을 노하게 한 그 파렴치한 패륜아는 높디높은 성에 앉아서 맛난 고기와 빵을 먹고 있을 테지." "엄마… 역시 엄마도 알고 있었던 거야? 그 악마 때문에 비가 안 온다는 거?" "알다마다. 모두들 쉬쉬하고 있지만 모르는 자가 있을까. 그 왕자의 악행 때문에 하늘마저 노해버렸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단다. 후… 아니다. 자, 여기 설탕물이나 마시렴." 나는 엄마가 떠준 설탕물을 받아서 자리에 앉았다. 이미 엄마는 악마에 대 해 알고 있으니까 남은 것은 아빠뿐이다. 아빠도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 서 악마를 만나면 나처럼 홀려버릴 지도 모른다. 나는 신의 사자를 만나서 다행히 그게 악마라는 걸 알게 되었지만 아빠는 신의 사자를 못 만날지도 모르잖아? 오늘 밤 아빠에게 꼬옥 그 이야기를 해줄 것을 다짐하며 나는 그릇을 꼭 쥐었다. "앗!" 침대에서 한바퀴를 딩굴 굴렀다가 땅바닥에 떨어질 뻔했다. 난 가슴이 벌 렁벌렁하는 것을 참으며 다시 바른 자세로 누웠다. 너무너무 덥고, 그리고 잠이 왔지만 눈을 부릅뜨고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아빠가 원래 예전부터 늦게 들어오긴 했는데 요즘에는 더욱 늦게 들어온 다. 그래서 나는 며칠 전부터 아빠의 얼굴을 한번도 보질 못했다. 오늘도 그렇게 늦게 들어오려나 보다. 내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볼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건 밤에 늦게 자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 같아서 오늘만 은 자지 않고 꼬옥 아빠를 만나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래서 방의 문을 활짝 열어 이렇게 침대에 누워있어도 거실에서 아빠가 들어오는 게 보이게 해두고 있었다. "네이. 아직도 안 자니?" "응. 네이는 꼭 아빠를 만나야 해. 아빠가 보구 싶은 걸." "후우, 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마렴……." 엄마는 대문을 좀 열어두고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의 돈을 받고 대신 바느질 해주기로 한 방앗간 집 아줌마의 옷인 거 같다. 지금 엄마가 문가 에서 바느질을 하는 건 최근 들어 우리 집에 너무 가난해져서 초를 살 돈 이 떨어졌기 때문에 저렇게 달빛을 촛불 빛으로 삼아서 하고 있는 거다. 우리 집이 이렇게까지 된 건 얼마 전에 성주님이 성밖으로 나가고 들어오 지 못하게 성문을 막고 세레스트 성산에도 아무나 마구 오르지 못하게 명 령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성산에 오를 수 있게 해 주셔서, 여름이 되면 항상 산에 올라가 작은 과일이나 산나물같은 음식을 구하고 그것을 남겨 팔기도 했는데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거다. 오늘 저녁에 밥을 먹다가 엄마에게서 들었는데 성주님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전부 악마 때문이라고 한다. 악마가 자신을 무찌르러 오는 용사들이 안쪽으로 들어오면 바로 추려내어 죽이기 위해 밖으로 통하는 길도 막고 세레스트 성산(聖山)으로의 출입도 막았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못되고 사악 한 악마다!! 아빠에게 꼭 이 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텐데……!! 나는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 다. 아빠는 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이쪽으로 뒹굴 저쪽 으로 뒹굴 하며 야금야금 나의 정신을 갉아먹는 잠의 요정을 퇴치하기 위 해 안간힘을 썼다. "…자네는 왜 그러나!!" "어?!"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두리 번 둘러보았다. "에… 나 자 버렸나봐……." 나는 방안으로 어슴푸레 들어오던 달빛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몸을 일으켰 다. 아마도 내가 자니까 엄마가 방문을 쾅 닫아버린 모양이다. 내 방은 작 은 벽창고를 뜯어서 만든 것이기 때문에 창문이 없다. 그래서 주위는 온통 새카맷다. "하지만… 그건… 하지…… 않나!!" 밖에는 여러 사람이 있는지 시끄러웠다. 나는 손으로 땅을 더듬더듬 짚으 며 방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나는 조금 화난 것 같은 아저씨들의 목소리 가 들려와서 문을 아주 쪼끔만 열고 그 안쪽을 바라보았다. "오, 아빠다!" "자네는 우리 성이 엉망이 되도 상관없나!? 수 백년간 우리들을 사악한 기 운으로부터 지켜주었으며, 또한 온갖 과실과 목재로 은혜를 베풀어 준 카 뮤리안 님의 세레스트 성산(聖山)이 그 놈 탓으로 이대로 계속 비가 오지 않아서 완전히 더럽혀져도 상관없는가 말이네!" 아빠를 보고 좋아서 밖으로 뛰어나가려는데 어떤 아저씨가 갑자기 크게 소 리를 치는 바람에 나는 그 자리에 굳고 말았다. 소리를 지른 그 아저씨는 저쪽 앞에 커다란 만물상 가게를 하고 있는 유안 아저씨였다. 유안 아저씨 는 만물상을 하는 만큼 아는 것이 굉장히 많은 분이라 곧잘 유식한 말을 하곤 한다. 지금도 뭔가 어려운 단어를 마구 섞어가며 아빠에게 소리를 치 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아저씨는 왠지 굉장히 화가 나신 거 같다. 이럴 때 아저씨의 가까이 가서 일을 방해하면 엉덩이를 엄청나게 많이 두들겨 맞는다. "벌써 많은 사람들은 이에 동조하고 있다고! 왜 그런 약한 소리만 하는 건 가!! 내 말을 들어보게. 우리들을 이끌어주는 사람도 있다네! 그들을 따르 면 분명히 그들을 물리칠 수 있을 거야! 일단 자네와 같은 각 동네의 대표 들을 모아서……!!" "그만두게!! 상대는 왕족이란 말이야! 그들에게는 칼도 있고 활도 있네! 하 지만 우리들에게는 이 쟁기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그런데 우리가 뭘 어떻 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제발…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게. 나는 아내의 목이 성문에 걸려 있는 꼴은 절대로 보고 싶지 않네. 내 딸이 본보기로 가 죽이 벗겨져 꼬챙이에 꽂히는 것을 절대로 원하지 않는다고!" 아빠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괴로워했다. 나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 지는 잘 모르겠지만 꼬챙이에 찔린다는 말에 깜짝 놀라서 눈만 빼꼼 내놓 고 아빠와 유안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도에서 그 왕자를 치기 위한 병력이 온단 말이네! 그들이 왕자를 공격 할 때 우리들도 안쪽에서 다 함께 일어나서 공격을 시작하면 이 쟁기 정도 로도 그 왕자를 이 성에서 내쫓을 수 있을 거야! 왜 그걸 모르는가!" "말도 안돼!! 우리가 쟁기는 드는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우리들의 목을 모 조리 베어버릴 걸세! 그들의 힘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 수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의 검에 자네가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제발 정신 좀 차리게, 정신 좀!! 그저 농사나 지을 줄 아는 우리같이 천한 것들 이 뭘 할 수 있다고 그러는 건가 말이네!!" "그러면 이대로 앉아서 악마의 검 앞에 목을 내밀겠다 이 말인가? 여기에 앉아서 내리지 않는 비를 기다리며 말라죽어 가는 가족들을 가만히 바라보 고만 있겠다 이건가?" "그만해……." "그 악마가 살아있는 한 이 땅에 비는 내리지 않을 걸세!! 자네도 알고 있 지 않나! 차라리 그렇게 굶어 죽을 바에야 차라리 한번 덤벼보고 죽는 편 이 낫지 않나!?" "아빠!!" 나는 유안 아저씨가 말하는 것을 듣고 바로 밖으로 튀어나갔다. 나를 보고 아빠랑 아빠의 뒤에 가만히 서있던 엄마가 눈을 크게 떴다. 조금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유안 아저씨에게 맞을까봐 겁도 쪼끔 났지만 나는 가슴에 주먹을 쥐고 크게 소리쳤다. "네이는 하나도 무섭지 않아! 카뮤리안 님처럼 우리도 악마는 물리쳐야 해!" "네이!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아빠가 화를 냈다. 그리고 곧 엄마가 곤란한 얼굴 을 하고 다가와 나를 꼭 안았다. 그러는 동안 유안 아저씨가 주먹을 꾹 쥐 고 아빠에게 소리쳤다. "보게! 저렇게 작은아이도 우리 성을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찌 그런가!" "제발… 불가능한 건 불가능 한 거야. 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들에게 덤빌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 같은 천한 것들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 야……." 유안 아저씨는 굉장히 오랫동안 아빠를 설득했다. 하지만 아빠는 끝까지 악마에게 대항하지 않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악마가 너무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유안 아저씨 말대로 악마는 꼭 물리쳐야만 하는 게 아닐까. 항상 동화책 속의 주인공들이 그랬으니까. 나는 안달이 났지만 엄마의 손에 매 달려 있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밤에 유안 아 저씨는 그냥 우리 집을 나서야만 했다. * * * 오늘도 햇빛이 쨍쨍. 그리고 오늘도 배가 너무너무 아프다. 거지 요정들을 죽일만한 음식이 없어서 그런 거였다. "히잉… 배고파… 엄마아……." 이런 말하면 엄마가 철딱서니 없는 것이라고 마구 때리는 거 알고 있었지 만 너무 배가 아파서 나는 징징 눈물을 흘려버렸다. 그러자 내가 우는걸 어떻게 알았는지 엄마가 내 방으로 큰 소리를 내며 뛰어들어왔다. 너무너 무 놀라서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그래서 미처 눈물을 닦지도 못했다. 근데 내가 우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의외로 엄마는 화를 내지 않고 굉장히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네이!! 조금만 기다리거라!! 이 엄마가 곧 먹을걸 만들어 주마!!" "에…에에?" 뺨이 빨갛게 상기된 엄마를 보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본성에서 곡식을 풀었단다! 맙소사!! 어쩌면 그 왕자도 악마는 아닐지도 몰라!!" "에?" 엄마가 작은 주머니에 든 곡식을 보여주며 말했다. 그것을 보고 나도 너무 좋아서 엄마에게 뛰어가서 그 주머니를 같이 들고 팔짝팔짝 뛰었다. 악마 가 준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오랜만에 뜨겁고 색깔 있는 죽을 먹을 수 있었다. 엄마는 죽을 먹는 나를 보고 계속 빙긋빙긋 웃었다. 그리고 나도 계속 방글방글 웃었다. 그 죽은 이제까지 먹었던 그 어떤 죽보다도 맛있는 것이었다. 그날 하루동안 나는 얼른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기다렸다. 아빠에게도 빨리 이 맛있는 죽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 유안 아저씨!!" 오늘도 아빠는 유안 아저씨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아마 유안 아저씨가 악마 이야기를 하느라 아빠를 설득하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음식에 더 기뻐서 악마를 물리치자는 말보다는 죽 이야기를 먼저 해버렸다. "아빠, 이거 봐!! 먹을 거야!" "아니? 이건?!" 아빠는 죽을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아마 아빠는 일을 하느라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나보다. 성에서 곡식을 풀었다는 말은 이미 소문이 자 자한데 말이다. 하지만 유안 아저씨는 이 죽을 보고는 얼굴을 콱 구기며 소리쳤다. "설마 악마가 풀고 있는 그 곡식을 받아 온 것은 아니겠지!!" 나는 깜짝 놀라 엄마의 뒤로 가서 쏙 숨었다. 유안 아저씨의 저런 말투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을 때 쓴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 만 아빠는 그에 상관하지 않고 엄마에게 물었다. "성에서 곡식을 풀었단 말인가? 이런 전시에? 군량미도 부족할 판인데?" "예, 그랬다니까요. 비록 아주 적은 양이지만… 이거라도 어디예요!! 덕분에 우리 네이도 며칠은 배를 곪지 않아도 되게 됐다구요, 여보!!" 엄마가 그릇을 보고 기쁜 듯이 말했다. 하지만 유안 아저씨는 이런 맛있는 음식을 보고도 계속 화만 냈다. "그런 쥐꼬리만한 곡식 좀 받았다고 소란 떠는 꼴이라니!!" "그만두게. 사…사실 어쩌면 악마가 아닐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어떤 악마 가 이런 전시에 곡식을 푼단 말인가!?" "사실 우리들을 애초부터 이렇게 굶게 만든 것이 누군가! 그는 이런 식으 로 작은 은혜를 베풀어 우리들을 길들이려는 속셈인 게야! 그건 악마의 씨 앗임이 분명하네!! 그러다 후회해도 난 모르네!! 악마의 저주를 받게 될 게 야!!" 유안 아저씨는 귀신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크게 호통쳤다. "그…만 두게. 이만 나가주게." "정신 차리게!! 정신 차리라고! 나는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악마의 씨 앗 따윈 먹지 않을 것이네!" 아빠가 밖으로 끌어낼 때까지 유안 아저씨는 문 바로 근처에서 계속 소리 쳤다. 나는 무서워서 엄마의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혹시 내가 먹은 게 정 말 악마의 씨앗이면 어쩌지? 오늘따라 죽이 엄청 맛있었던 것도 전부 악마 가 술수를 써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엄마…엄마……." "괜찮다, 괜찮아. 네이." 내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엄마의 옷자락에 매달리자 엄마가 머리를 살살 쓰 다듬어 줬다. 그래서 겨우 울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엄마 품에 꼭 안겨서 내 방까지 간 다음에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오랫동안 계속 내 옆 에 앉아서 토닥토닥거려 주었다. 엄마의 말소리를 들으니까 굉장히 초조하 고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엄마는 꼭 마법사 같다. "우리 공주님.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응……." 엄마가 방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보자니 또 불안해지는 것 같아서 원래는 더워서 잘 덮지 않는 이불을 나는 코 바로 밑에까지 끌어당겼다. 내 모습 을 보고 엄마는 이마에 카뮤리안 님의 축복에 담긴 키스를 해주었다. 보통 이런 키스를 하면 어떤 사악한 악마도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탁. 작게 문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엄마가 방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닫 았기에 방이 깜깜해졌다. "……." 부스럭. "……." 하지만… 점술사님이 말하기를 이번의 악마는 너무너무 사악해서 카뮤리안 님의 힘도 미치지 않는다고 그랬다. 그러면 이 축복도 먹히지 않는 게 아 닐까? 나는 침대를 뒹굴 굴렀다. 하지만 자꾸자꾸 뱃속에 들어있는 악마의 씨앗 생각이 났다. 그리고 카뮤리안 님의 힘도 이 씨앗을 막을 수 없을 지도 모 른다는 생각 때문에 점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닭고기 10마리를 계속계 속 반복해서 세었다. 신성한 힘은 스스로가 믿지 못하면 효력이 약해진다 고 전에 엄마가 말했기 때문이다. 잘은 몰라도 가만히 있으면 계속 카뮤리 안 님의 힘을 의심할 것만 같아서 나는 계속 닭고기를 반복해서 세었다. "…히잉……." 눈물이 찔끔 나왔다.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흘렀는데 아직 잠이 오지 않았 던 것이다. 너무 땀을 많이 흘러서 침대가 엄청 축축하게 되어버렸다. 나는 도저히 못 참고 침대 밖으로 슬며시 빠져 나왔다. 엄마아빠 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제 네이도 다 컸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그랬지만 이번 만은 도저히 혼자서 못 잘 거 같았다. 그래서 나는 내일 엉덩이를 엄청 맞 아도 오늘만 같이 자달라고 말하기로 결심했다. 밖으로 나오자 엄청 어두워서 나는 손을 더듬더듬하며 엄마아빠 방을 목표 로 살살 기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오줌을 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서 오줌누는 것까지 같이 가달라고 하면 엄마는 오늘밤에 절대 같이 안 자 준다고 할지도 모른다. "엄마……." 나는 눈물을 줄줄 흐르는 걸 소매로 닦으면서 밖으로 기어갔다. 혹시나 악 마를 만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무서웠다. 이렇게 어두운 밤 은 사악한 악마들의 시간이라고 엄마가 말했다. 그래서 나 같은 아이는 한 밤중에 멀리멀리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했다. 물론 오줌누는 것 같이 바 로 집 앞에서 해도 되는 것은 다르지만 말이다. 끼익. 문을 조금 열자 달빛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깜깜한 것보다 오히려 그것이 훨씬 더 으시시해서 나는 오줌을 찔끔 지려버렸다. 이 이상 했다간 진짜로 엉덩이를 맞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는 조금 앞으로 나가서 옷을 슬 며시 내렸다. 휘이잉-. 뜨뜻한 바람이 얼굴을 슥 훑고 지나갔다. 나는 너무너무 기분이 나빠서 빨 랑 끝나기를 빌었다. 오줌 누는데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처음이 었다. 부스럭. "……!?" 그때 갑자기 로이네 집 근처에서 뭔가 스르륵 나오는 시꺼먼 그림자가 보 였다. 근처로 다가오는 어떤 사람 형태의 그림자를 보고 나는 입을 벌려 쉰소리를 냈다. 악마다!! 악마다!!! 새까만 악마다!!! 시꺼먼 그림자를 보고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목에서는 이상 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몸도 완전히 얼어버렸다. 악마가 그림자를 타고 숨으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걸 보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 만히 앉아 있었다. 움직여지지도 않는데 단지 눈물만 펑펑 쏟아졌다. "계집?" 작은 바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나는 그만 오줌을 눈 바닥에 주저앉 을 뻔했다. 하지만 달빛에 얼굴이 자세히 보이자 갑자기 몸이 풀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신의 사자님!!" "조용!" 내 작은 외침에 사자가 양손으로 나의 뒤통수를 쥐고 입을 콱 틀어막았다. 아마도 조용히 하라는 뜻이 아닐까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행동을 보더니 그 사자는 머리 쪽의 손을 슬그머니 뗐다. 그리고 그 손을 뒤쪽 허 리춤으로 슥 숨겼다. 뭘 하려는가 싶어 나는 그 모습을 계속 멀뚱멀뚱 보 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머리에 갑자기 어떤 생각이 번뜩 스쳐지 나갔다. 나는 그 즉시 고개를 들어 신의 사자님의 손에서 입을 떼고 아주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몸에 있는 악마의 씨앗을 빼주러 오신 거예요?" "뭐?" "오늘 성에 사는 악마가 곡식을 줬잖아요. 근데 제가 배가 고파서 그 악마 의 씨앗을 먹었어요." 내 말을 듣더니 그 악마 아저씨는 허리춤에 숨기고 있던 한쪽 팔을 움찔하 다가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그 손에 뭐가 있는가 궁금해하고 있는데 이 상하게 그의 손엔 아무 것도 없었다. 아무 것도 없으면서 왜 손을 뒤로하 고 있었던 걸까? "그래, 오늘 악마가 사악한 씨앗을 마구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보고, 내가 직접 이리저리 다니면서 사람들을 정화해주고 있는 거란다." "저…정말요?" "그래. 그러니 조용하거라. 아무에게도 이 얘기를 알려서는 안 된다. 악마 가 주변에 수많은 자신의 수하를 심어 두었으니까 네가 말을 하면 나는 들 키고 말 거야." "응!! 죽어도 말 안 할 거야."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아저씨는 피식 웃으며 내가 속삭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씨앗은 제거했단다. 하지만 아직 남은 사람들의 마저 구해야 하니 나는 이만 가봐야겠다. 악마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씨앗을 심어서 다 제거할 수 있을 지 걱정이구나." "꼭 다 빼주셔야 해요!" "힘내보마. 하지만 내게도 실수가 있을지도 모른단다. 지금 이 넓은 구역을 정화할 수 있는 사람은 현재 나뿐이거든. 하지만 너만은 확실하게 정화했 으니 걱정 말고 들어가 자거라." "예!!" 나는 아저씨랑 거의 바람소리로 작게 속삭이다가 헤어졌다. 신의 사자 님 이 실수가 없어야 할텐데 정말 걱정이다. 왜 하필 우리 성에 악마가 들어 온 것일까. 나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내 방의 침대로 들어왔다. 신의 사자님이 씨 앗을 빼주었기 때문에 무서움이 많이 사라져서 혼자서도 잘 수 있을 것 같 았던 것이다. 나는 이불을 또 한번 코밑까지 끌어당겼다. 그런데 이불을 덮 자마자 곧바로 잠이 쏟아지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신의 사자 님이다!! 나 는 속으로 신의 사자 님께 다섯 번이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눈을 꼭 감 았다. 신의 사자를 만나고 난 다음날, 나는 엄청 이른 아침에 아빠랑 같이 우물 가에 물을 뜨기로 했다. 아빠가 직접 나를 깨워 함께 가지고 한 것이다. 엄 마 말이 어제 저녁 일로 내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란다. 신의 사자에게 악마의 씨앗을 제거 받았기 때문에 이제 난 하나도 안 무서운데 말이다. 하지만 아빠랑 같이 물을 뜨러 가는 건 너무 기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사실 신의 사자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기도 했었으니 까―아빠를 따라나섰다. 근데 아침부터 유안 아저씨가 찾아와 아빠를 설득 하는 바람에 나는 아빠와 한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자네!! 이 구역의 장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나? 악마의 종이 되어버리다 니!!" "이제 그만 좀 포기하게!!" 유안 아저씨와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악마 를 퇴치하기 위한 일인데 내가 방해하면 천벌을 받을 지도 모른다. "어? 로이 아줌마!" 우물가로 가는 길에 나는 옆집의 로이네 아줌마를 발견하고 소리질렀다. 아줌마도 우리처럼 물을 뜨러 가는 모양이다. "어머, 네이!! 네이 아버님도 오셨군요. 그런데 유안 씨까지 함께 어쩐 일이 시죠?" "내가 있으면 안 되는 일이라도 있나?" "설마요." 로이 아줌마는 언제나와 같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근데 왠지 로이 아줌마 의 얼굴이 좀 파래 보여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빠도 같은 생각을 했 는지 아줌마에게 말을 건넸다. "로이 어머니.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 군요. 어디 안 좋은 곳이라고 있으십 니까?" "뭘요, 아침에 물을 좀 마시고 난 뒤부터 몸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이 정 도야 아무 것도 아니죠!! 전 지금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인 걸요!" 로이 아줌마는 아프다고 하면서도 손에 입을 대고 조금 크게 웃었다.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하고 물었다. "아줌마, 왜 기분이 좋아요?" "호호, 그래. 어제 내가 남편과 같이 본성에서 주는 곡식을 두 번이나 받아 왔단다. 호호호, 한번 이상 받는 건 절대로 안 되는데 운 좋게 통과가 됐지 뭐겠니. 한동안 음식 걱정은 안 해도 되게 생겼구나!" 로이 아줌마의 말을 듣고 유안 아저씨는 눈살을 크게 찌푸렸다. "이런 몰상식한 계집 같으니!! 그렇게 악마의 씨앗이 좋은가!! 그래, 그렇게 계속 악마의 씨앗을 쳐 먹어 보게! 놈의 저주에 걸려 후회하는 날이 올 테 니까!" "어머, 무슨 말씀을 그리 하세요?! 아무리 유안 씨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마구 하셔도 되는 거예요!?" 로이 아줌마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머리가 아픈 것인지 잠시 손 으로 이마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곧 자신의 짧은 팔 소매를 더욱 걷어붙이 고 유안 아저씨에게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안 아저씨는 그 무서운 모습에 약간 움찔했지만 곧 눈썹을 치켜 뜨고 로이 아줌마를 노려보았다. "흥! 그러면 내 말이 틀렸는가? 악마의 꾀임에 넘어간 거 아닌가 말이네!!" "뭐예요!! 정마알∼∼!!" 로이 아줌마는 손을 치켜들었다. 나는 아줌마가 그 손을 유안 아저씨에게 확 내려치기 직전에 눈을 꼭 감았다. 로이 아줌마는 팔 힘만은 굉장히 좋 아서 우리 마을에서도 싸움 잘하기로 되게 유명하다. 그렇지만 유안 아저 씨는 빼빼 마른 꼬챙이 아저씨다. 로이 아줌마의 그 주먹에 맞으면 휘익 날아갈 지도 모른다. 그러면 무지무지하게 아플 거 같아서 눈을 꽉 감은 것이다. 쿠당!! "아악!!"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언가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건 남자의 목소리 가 아니고 여자의 목소리였다. 유안 아저씨가 소리를 지르면 남자 목소리 가 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꼭 로이 아줌마가 비명을 지른 거 같다. 나는 이상함을 느끼고 찔끔 감고 있던 눈을 사알짝 떴다. "쿠엑…끄으으윽!!!" 나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 너무너무 놀라 몇 걸음 물러섰다. 로이 아줌마 때문이었다. 아줌마가 물 밖으로 끌어낸 물고기처럼 막 허리를 뒤틀고 하 더니 입에서 이상한 거품을 물기 시작했던 거다. "마…맙소사!! 네이! 보면 안돼!!" 갑자기 아빠가 나의 눈을 가렸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끄윽, 끄윽하는… 또, 우드 득, 우드득하는… 그런… 악마의 소리!! 악마의 씨앗이!! 악마의 씨앗이 아 줌마의 몸 속에서 자라버린 것이다! "로…로이, 로이 아줌마아∼!!" 나는 깜짝 놀라서 아줌마를 불렀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대답하는 것은 뭔 가가 이해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네이! 네이, 괜찮다. 아무 것도 아니란다!" "으아아아앙!! 로이 아줌마아∼∼!! 흐어어엉!!" 아빠가 나를 꽉 껴안으면서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악마의 씨앗이 자라버린 거라는 거. 어젯밤에 신의 사자가 우리 동네 를 돌아다니며 그 씨앗을 없애줬지만 로이 아줌마 것은 빼주지 못한 거다. 어쩌면 너무 빼줄게 많아서, 그리고 로이 아줌마가 씨앗을 너무 많이 먹어 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꾸에엑…끄으으윽……." "맙소사!! 맙소사! 신이시여!! 카뮤리안 님이시여! 제발 저희들에게 가호 를!!" 이상한 소리가 더 커지자 아빠가 나를 더욱 끌어당기며 그렇게 말했다. "세상에… 저주다……. 악마의 저주야!! 자네… 이래도 그냥 가만히 있자고 할 건가!! 자네 딸도 아내도 언제 저 꼴이 될지 모른단 말이네!!" 문득 유안 아저씨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빠는 그 말에 나의 얼굴을 더욱 세게 품에 안고 유안 아저씨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떻게… 유…유안! 로이 어머니를 부탁하네!! 나머지는 다음에 얘 기하세!!" "도망가지 말게!!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가! 분명 연이어 이런 일이 벌어질 거야!! 네이가 저런 꼴을 당하면……!!" "제발! 알았단 말이네!! 아이가 있지 않나!" 아빠는 신경질을 내듯 유안 아저씨에게 소리쳤다. 아빠가 나를 너무너무 세게 안아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나도 아빠 품에 얼굴을 꼭 묻 었다 계속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너무 무서웠던 것이다. 나는 엉엉 울면서 로이 아줌마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신의 사자를 불렀다. 제발 우리 로이 아줌마를 살려 달라고. 화도 잘 내고 주먹질도 잘하는 아 줌마지만 그래도 정말 좋은 아줌마라고… 아주 가끔씩이지만 내게 우물물 을 대신 떠주기도 했었던 천사 같은 아줌마였다고… 그렇게 빌었다. 로이 아줌마의 몸에서 나는 그 이상한 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그 소리 가 멀어질 때까지… 계속 해서 신의 사자에게 빌었다. * * * 창 밖으로 내다본 성안은 조용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사람들이 원래 해 야만 하는 일 때문에 길을 걷고 있었다. 조금 다른 거라면 악마의 수하들 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분주하게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 아줌마 말고도 이곳저곳에서 몇몇 사람들이 이상하게 몸을 비틀며 죽 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의 시체는 먼 곳으로 옮겨서 그 연기가 세레스 트 성산으로 스며들지 못하게 남풍이 부는 때 태워버렸다고 한다. 엄마는 악마에게 받았던 곡식을 여러 개의 헝겊으로 꽁꽁 싸서 창고의 아 주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다. 그냥 밖에다가 그냥 버렸다가 들키면 큰 봉변 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매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지 만 아무도 그 곡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아빠는 매일 밤낮으로 유안 아저씨와 함께 어딘가를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이 동네의 대표로서 다른 동네 사람들과 함께 어떤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여러 가지 계획을 짠다고 한다. 한번씩 집에서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었 는데 그때마다 아빠는 쟁기나 특히 낫 같은 것을 굉장히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숯돌에 갈고 있었다. 그 일을 하는 아빠는 항상 불안해했지만 그 반 대로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굉장히 의연하고 단단해 보이기도 했다. 옆집의 로이는 매일매일 운다. 원래부터 로이는 삐짐쟁이에 울보였지만 이 번에는 며칠이 지나도 그치질 않는다. 밤만 되면 울음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려올 정도다. 잘못 들으면 꼭 귀신소리 같아서 로이를 때려주고 싶기도 했지만 엄마가 말렸기 때문에 그냥 꼭 참고 눈을 감곤 한다. 다테 아줌마는 술집 문을 닫았다.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아줌마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모른다. 나는 예전과는 달리 밤마다 엄마의 품안에 꼭 안겨서 잠을 잔다. 그리고 더 이상 사람이 죽지 않기를 매일매일 빈다. 모두모두 상냥한 사람이니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성안은 아주 아주 조용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용하게 시간이 흘러 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이 성에 새까만 악마가 살고 있다는 것을… 이곳은… 악마의 성이라는 것을……. 이르나크의 장 Part 41 세레스트 성산(聖山) 짙푸른 하늘이 유난히도 드높은 날이었다. 대지에 대한 신의 축복이 다한 것인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비구름은 여전히 단 한 점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부터 신은 땅에 발을 딛고 순결한 빗물에 의존하여 간신히 삶을 연명 하는 한낱 미천한 존재들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뜨거움만이 존재하는 땅에 수많은 인간들이 빼곡이 대열을 이루고 회 색 빛의 성을 마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성을 방패로 삼은 아군도 비장 한 각오로 무장을 하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약 만오천에 달하는 아 군의 병사들은 이 회색빛의 돌로 둘러싸인 세레스트 성의 위용 때문인지 눈앞에 보이는 삼만의 병사들에게서도 어느 정도의 자신감은 갖추고 있는 듯 했지만, 성스러운 산이 보호해주고 있는 성답지 않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위화감에 이상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아니, 병사들이 아니라 바로 이 내가, 그런 불쾌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카류리드 전하. 적군의 사령관은 아무래도 아예즈 공작인 듯 싶습니다. 중 앙 본대의 저 깃발은 아예즈 공작가의 문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도 나름대로 꽤 익숙한 문장이니까요." 나는 곁에서 조용히 말을 건네는 카나스 님에게 대답했다. 생명의 궁에서 철없이 지내던 시절에 자주 보았던 문양. 하르몬 선배가 바로 아예즈 공작 가의 장남이었기에 볼 수 있던 문양이었다. 아예즈 공작이 마법사 세력을 자신의 정치세력으로 끌어들일 겸 하르몬 선배를 다시 공작가의 일원으로 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뼛속까지 정의파였던 선배는 대부분의 마 법사들이 그랬듯 그 말들을 전부 무시하고 오로지 마법에만 전념했었다. 하지만 아르 할아버지가 처형장에서 나를 구출하고 나서부터, 그리고 나의 수식이 마법사들에게 알려지면서부터 더 이상 마법사들은 정치에 무관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문득 하르몬 선배가 저 군의 어딘가에서 나를 적대 하며 올려다보고 있을까 하는 소소한 의문이 떠올랐다. 증오에 불타는 하 르몬 선배라니,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뭐, 또 다른 눈에 띄는 깃발은 보이지 않는군요. 상대가 트로이 후작이나 아이시스 남작은 아니니 나름대로 다행이라 해야할까요." "카나스 님. 1차 방어선에서 국왕군을 상대할 때 분명 아예즈 공작가의 깃 발이 있었습니다. 결국 1차 방어선에서 원군과 함께 이쪽으로 내려왔다는 뜻이겠지요. 그 아이시스 남작이라면 분명 아예즈 공작이 1차 방어선을 떠 날 때 뭔가 남다른 자문을 구해주었을 것으로 사려됩니다." 에르가 형의 곁에 서있던 부관 이트가 카나스 님을 향해 조금 고개를 숙이 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자 카나스 님이 손으로 약간의 새치가 보이는 연 녹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쪽 눈을 작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았 다. "그 아이시스 남작과는 별다른 친분이 없었기에 직접 겪어보지 않아 그 속 까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아예즈 공작에 대해서라면 잘 알고 있지. 평민 출 신의 말 따위를 들을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카나스 님. 그들을 쉽게 보는 것은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군이 세레스트 성의 방어를 위해 원군을 보낸 것을 국왕군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병사들의 수를 그대로 고수하고, 최고 사령관을 큰 공적도 없는 아예즈 공작으로 임명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걸리는군요." 갑자기 에르가 형이 고개를 돌려 평소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은 신중론을 펼쳤다. 카나스 님은 에르가 형의 모습을 슥 돌아보고는 깊은 미소를 만들 어냈다. "에스문드 백작님의 입에서 그런 신중한 말이 나오는 것을 보자니 이미 천 군만마를 얻은 것 같소이다." "…저도 항상 성질만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스스로가 성질만 부렸다는 것을 알고 계셨단 말입니까?!" "……." 에르가 형은 입을 다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이런 자리에서 농담까 지 하는 카나스 님의 의외의 모습을 보고 고개를 약간 갸웃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런 면이 그를 더욱 용맹한 장군으로 보이게 했을 지도 모르겠다. "아예즈 공작이 그렇게 무능한 인물은 아니나, 그 이상으로 탐욕스럽고 권 력욕이 강한 인물입니다. 그러니 트로이 후작이나 아이시스 남작이 기가 막힌 작전을 알려준다 해도 그 권력욕에 눈이 먼 그 작자는 반드시 무모한 짓을 하게 될 것입니다. 분명 작게나마 그 덕을 볼 수 있을 테니 미리부터 크게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동은 하지는 않 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중론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군의 총 지휘관은 자신 에 가득 찬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법입니다." 카나스 님은 다시 아래쪽의 군을 내려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들 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에르가 형의 눈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나나 딜티와 는 달리 에르가 형에게 있어 아버지라는 존재는 너무도 당연한 신뢰를 주 는 그런 존재인 모양이다. 여전히 1차 방어선에 5만의 국왕군 병력이 눈을 부릅뜨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은 휴나르 성의 방어도 소홀히 할 수 없었고, 덕분에 레이포드 경이나 다른 많은 장수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어려워졌다. 결국 프리란트 님 다음으로 많은 군사적 원조를 대어주고 있는 에스문드 백작으 로서 에르가 형이 이 곳 세레스트 성의 원군의 최고 지휘자로 임명을 받게 되었으나, 형은 아직 전쟁 경험이 적었고 결정적으로 아직 많이 어려 그런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 원래 카르틴 왕국과의 일전에서 항상 용맹한 무장으로 이름을 떨치셨 던 에르가 형의 아버님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카나스 님은 더 이상 에스문드 백작도 그 무엇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서 계신 분이기에, 이번 원군에서 자신의 이름에 걸 맞는 자리를 차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에도 카나스 님은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에르가 형의 성장 에 뿌듯해하며 기뻐하는 모습이랄까. 곧 아래쪽에서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한 개의 덩어리 같던 군대에서 작은 부스러기가 떨어져 나오듯 누군가가 앞으로 나온 것이다. "인륜을 져버린 파렴치한 왕자여!! 내 마지막으로 경고하니 당장 그 성문 을 열고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빌어라! 더 이상의 악행으로 하늘을 노 하게 하지 말라!!" 아예즈 공작가의 깃발 아래 눈에 띄게 화려한 갑옷을 입고 있는 그 중년 남자의 말을 들으며 나는 류스밀리온을 힐끗 돌아보았다. "류스밀리온 님. 저기까지 어떻게 마법이 닿지 않을까요? 나 죽여주셔요 하고 혼자 밖으로 걸어나왔는데 말예요." "5서클 마법 정도면 닿을만한 거리지만 적군의 마법사가 보호 마법을 여러 겹 쳐주고 있어서 최소 7서클은 써야할 거 같구먼. 쓰읍, 영 꼴 뵈기 싫은 면상을 가진 놈인데 부담을 감수하고서라도 한번 써볼까?" "그만두시죠. 류스밀리온 님의 힘을 그런데 낭비해서야 쓰겠습니까. 저쪽도 나름대로 머리라는 것을 이고 있는데 나올만하니까 나왔겠지요." 뭔가 이 진지한 상황에 걸맞지 않는 대화가 나와 류스밀리온, 그리고 카나 스 님의 사이에서 오갔다. 그 동안 아예즈 공작은 홀로 뭐라 목청을 올리 며 끊임없이 꽥꽥 소리를 질렀다. 문득 혼자 원맨쑈하는 그가 약간 가엾다 는 생각이 들어 나도 약간의 대답을 해주기로 마음을 먹고 앞으로 조금 나 갔다. "제6왕자여! 성문을 열고 모두에게 악행을 빌어라!! 은혜와 신의를 모르는 너 같은 놈이 인간이라는 사실이 믿을 수가 없구나!! 네가 정녕 인간이냐!? 악마가 아니더냐!?" "피는 속일 수가 없음이니 내가 악마라면 나를 낳은 국왕 폐하 또한 악마 겠구나! 또한 그의 피를 나눈 왕자들 역시 악마이니 이 나라는 악마의 나 라로구나! 이 무례한데다 우둔하기까지 한 공작이여!! 국왕 폐하께서 이 소 리를 들었다면 너 같은 놈은 당장에 쳐죽여 버릴 것이다!!" 나의 일침에 그 공작은 잠시 움찔했다. 그리고 괜히 악마 소리를 꺼냈다고 생각했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주위 사람들과 뭔가 쑤근쑤근거리던 공작 은 또 한번 주먹을 들어올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악마에게 피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너는 그 자체로서 악의 덩 어리다! 비가 오지 않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더냐!! 너의 사악함에 하늘의 신까지 노했음이 틀림없다!!" "네가 어찌 감히 신의 뜻을 헤아리려 한단 말인가!!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그 뜻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들이 모시고 있는 신은 그렇게 하잘 것 없는 존재였단 말인가!! 네 정녕 왕실의 핏줄을 욕보 인 것으로 모자라 신마저 모독하려는 속셈이냐?" 또 한번 국왕군의 진영이 조용해졌다. 류스밀리온은 큭큭 소리를 내며 어 깨를 들썩였고 에르가 형도 입가가 움찔움찔하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전령 을 시켜 궁병들의 준비를 명했다. 아군의 다른 병사들도 대책 없이 당하는 적장의 모습에 나름대로 즐거워하고 있었지만 그 둘은 훨씬 더 진한 기쁨 을 표하고 있었다. 아마도 항상 자신들이 내 말발에 당하다가 남이 당하는 걸 보니까 그 기쁨이 남보다 2배인 모양이다. "네 놈이 그렇게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이 짐 승보다 못한 파렴치한 왕자여!" 아예즈 공작은 그제야 말빨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괜히 한소리 꽥 지르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저 공작은 좀 실없 는 사람인 듯 싶다. 내가 말발이 세다는 것은 왕궁을 좀 드나드는 사람이 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이런 곳까지 와서 개쪽을 까고 갈건 또 뭐냐. 뿌우우우우우웅-----. 온 성을 울리는 길다란 뿔고둥 소리가 들려왔다. 보통 이렇게까지 큰 신호 음을 내지는 않는데 라는 생각이 스치는 순간 아군과 국왕군의 접전은 시 작되고 있었다. 큰 함성과 함께 세레스트 성의 유일한 출입구인 남문을 향하여 돌진하는 국왕군을 내려다보며 아군의 병사들은 숨을 죽이고 활시위를 겨누었다. "조준∼∼∼∼ 쏴라!!" 각 부대의 장교의 명령이 길게 꼬리를 잇다가 곧 긴장을 끊어버리듯 활을 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마치 밀물처럼 밀어닥치던 그 깨끗한 파도의 흐 름이 활 공격으로 인해 지저분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국왕군은 그에 아랑 곳 않고 전우의 시체를 밟고 앞으로 돌격을 했다. "목표는 정면의 다중 보호 마법이 걸린 성문 쪽의 발석차다! 샤리온, 렌체, 그리고 내가 차례로 6서클 플레어 블래스트를 시전해서 보호마법을 깰 것 이다. 다른 마법사들은 렌체의 마법이 완전히 시전됨과 동시에, 그러니까 내가 손을 내림과 동시에 4서클 파이어 필드의 캐스팅을 시작한다. 알겠 나? 뒤로 빌빌 기어 들어가면 가만 안둘테니까 명심해!!" 곧 류스밀리온이 이곳 지휘부에 모인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 많은 마법사가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곳으로 몰아둔 것이다. 휴나르 성 에도 마법사가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사실상 아르 할 아버지보다 마법적 능력이 높은 류스밀리온을 이 곳으로 보내는 대신 전체 마법사의 수를 좀 줄인 것이다. 류스밀리온은 앞으로 전진하는 발석차를 보며 거리를 재다가 곧 손을 들었 다. "캐스팅…" "전하!!" 그러나 그의 명령은 갑자기 들이닥친 전령의 탓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모 두가 눈살을 지푸리는 가운데 소리를 질렀던 그 전령이 예를 갖추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다급히 말했다. "동쪽 성벽으로 성내의 주민들이 아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제대로 무기도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한 놈들이라 후방에 있는 적은 수의 병사들로도 막아내고 있긴 하지만 그 수가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동쪽 성벽만을 중점적으로 치고 있는 모습이 이상할 정도로 조직적 입니다!!" "뭐라고?!" 에르가 형이 크게 소리치는 가운데 후방에서 어렴풋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 다. 나는 약간 느림 걸음걸이로 뒤쪽을 내려다보았고, 곧 가옥 사이사이로 개미떼처럼 터져 나오는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악마는 우리 성에서 물러나라!!" "카뮤리안 님을 위해 악마의 피를 바치자!" "찾아라! 악마를 찾아서 찢어 죽여라!!"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그저 헛웃음을 흘렸다. 더 이상 저런 일에 놀라 안절 부절 할 정도의 순진함은 내게 남아있지 않았다. "뭐야!! 저 또라이 같은 것들이!! 누가 이 성을 지키는지 모르나!!" 에르가 형은 그 모습을 보더니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얼굴은 이미 새파랗 게 질린 채였다. "처음 입성할 때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 때문 에 군량미까지 풀고, 감시병도 돌렸지 않습니까. 국왕군이 저렇게 적은 수 의 병력을 유지한 채 그대로 밀고 들어 온 것은 이것을 미리 준비해 두었 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하늘을 찌르던 백성들의 불만을 저에게 전가시킨 모양이군요. 원래부터 제가 그렇게 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모든 책임이 내게 있다고 그들을 부추기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을 겁니다." "……." 나의 담담한 목소리에 지휘부가 침묵에 빠졌다. "퇴각하십시오." "아버님! 아니, 카나스 님!! 조금은 더 상황을……." "이렇게 된 이상 이 성을 사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내의 주민들에게 반발을 받고 있는 군대가 그 성을 지키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밖으로 국 왕군을 상대하고 안으로 성내의 주민을 상대하겠단 말씀입니까?" 퍽-! 둔탁한 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완전히 화가 난 류스밀리온이 주 먹으로 벽을 친 것이다. "장난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는 앞으로도 절대로 승산이 없어!! 8서클 마법 사가 10명, 20명이 있다 한들 왕국의 백성들이 우리들을 거부하는데 어떻 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단 말인가!?" 그때 여러 명의 전령들이 거의 한꺼번에 우르르 뛰어 들어왔다. "사령관님! 보고 드립니다! 주민들이 계속적으로 쏟아져 나와 동쪽 성벽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카류리드 전하!! 중앙거리의 주민들이 곧장 몰려나와 성문을 공격 중입니 다!" "사령관님! 수천에 달하는 주민들이 동쪽 성벽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고 있 으며 이미 동쪽의 병사들 중 몇몇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중입니다! 이대로 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 성벽의 방어선이 완전히 무너질 것입니다!!" 그들은 봇물 터뜨리듯 말을 쏟아냈다. 그것은 하나같이 아군의 분통을 터 뜨려 놓는 소식들뿐이었다. 더 이상은 어떻게 상황을 보고 말고 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에르가 형이 다급히 전령들을 향해 소리쳤다. "전군에게 알려라!! 퇴각하라!! 성을 포기한다!" "여기다!! 여기에 악마가 있다!" 에르가 형의 퇴각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른 또 한 명의 전령이 불안한 기색 뛰어들어왔다. "전하! 주민들이 지척까지 다가왔습니다!! 성 밖에는 국왕군이 있고, 안쪽 으로는 주민들이 있어 도주할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주민들이 거의 미친 듯이… 항복하는 자들까지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제 발 명령을……!!" "병사들에게 북쪽의 세레스트 산 쪽으로 퇴각하라고 일러라!! 서쪽 대로로 길을 뚫는다! 어서! 서둘러라!!" "예!" "전하 동쪽의 방어선이……!!" "흩어지지 말고 서쪽으로 길을 뚫어 세레스트 산으로 퇴각하라고 전해!!" 에르가 형은 거의 짜증을 내듯 새로이 뛰어들어온 다른 전령을 향해 소리 쳤다. 그리고 즉시 나를 향해 소리쳤다. "어서 서두르십시오!! 카류리드 전하! 최악에는 혼자서라도 류스밀리온 님 과 함께 단 두 분이라도 성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확실히 할 테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나는 단검을 빼들며 시니컬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이건만 그다지 가슴이 일렁이지도 않는다. 곧 검을 빼드는 여러 호위 기사들을 확인하며 나는 최 대한 류스밀리온의 곁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추악한 악의가 가득한 인간 들 사이로 빠져들 듯 뛰기 시작했다. * * * 눈이 시뻘겋게 된 채로 쟁기자루를 꼬나 쥐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천한 것들을 내려다보다가 곧 작은 수건으로 꺼내들고 코를 막았다. 그렇지 않 아도 비가 내리지 않아 바짝 마른 모래 위를 더럽고 꼬질꼬질한 놈들이 뛰 어다니니 엄청나게 먼지가 일었던 것이다. 먼지정도야 평범한 전쟁터에서 도 마찬가지로 나는 것이지만 지금은 이쪽이 훨씬 더 불쾌한 느낌을 가져 왔다. "천한 놈들이……." 내가 불쾌함을 참지 못하고 작게 중얼거리는 사이 한 전령이 나의 말 아래 에 무릎을 꿇고 보고를 시작했다. "사령관님! 제6왕자군이 서쪽 대로를 통해 세레스트 산으로 도주하고 있다 고 합니다. 그쪽으로도 주민들이 상당수 대기하고 있었지만, 주민들은 무기 도 없이 농기구를 든 무력한 자들에 불과했고 또한 용서를 모르는 주민들 의 앞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도주를 시도했기 때문에 결국 길이 뚫려버리고 말았습니다." "전군은 빠른 속도로 세레스트 산을 향해 진군한다. 입만 산 쥐새끼에게 쓴맛을 보여주는 거다." "알겠습니다!" "너희 둘은 주민들에게로 가라. 그리고 악마의 졸개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모조리 죽여야만 다시 비가 내릴 수 있을 거라 부추겨! 이곳에 주둔했던 제6왕자군의 병사들을 완전히 전멸시킬 수 있도록 저 놈들을 더욱 부추겨 라!!" "옙!" 나의 명령을 받은 전령이 주민들 사이로 뛰어갔다. 곧 뒤쪽에서 시끄러운 함성소리가 울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혀를 찼다. 겨우 몇 마디 말에 쉽게 미쳐버리는 놈들에 대한 조롱이었다. 역시나 저 천한 것들은 어찌 구제해 줄 방도가 없을 만큼 미련하고 멍청한 존재다. 하지만 딱 하나, 영 평민 같지 않은 그 놈 때문에 이번 전투에서 시시할 정도의 압승을 거두고도 나는 영 시원한 기분을 누릴 수가 없었다. 사실상 이 모든 결과가 아이시스 남작 때문이라는 것을 아는 나로서는 현 상황이 영 탐탁치 않았다. 그 놈은 무슨 예언자라도 데리고 사는 것인지, 아군이 제6왕자의 1차 방어선에서 전투를 치르던 그때 벌써 이쪽 세레스트 성으로 달변인 인물들을 몇몇 보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달 남짓되는 기간동안 그들이 제6왕자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을 퍼뜨리며 가뭄과 전쟁통에 팽 배한 사람들의 불만을 더욱 고조 시켰고, 결국 세레스트 성의 주민들은 자 신의 성을 지켜주기 위해 온 군대를 악마의 수하로 규정하고 공격을 개시 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다. "젠장, 음흉한 놈 같으니… 이러다가 내가 뒤통수를 맞을 지도 모르겠군. 아무래도 파나인 공작과 의논해서 그놈을 쳐내는 것을 신중히 검토해봐야 겠……." "으아아악!! 살…려줘, 으아악!" 세레스트 산 쪽으로 말을 달리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스쳐 지나가던 나의 시야에 비친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구타를 당하며 질 질 끌려가는 병사의 모습이었다. 그 복장은 생각할 것도 없이 제6왕자의 병사들의 것. "아아아악!!" "끄아악!" 서쪽 대로를 지나치며 시내 곳곳에서 지저분한 비명소리가 더욱 커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거의 미쳐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성의 주민들이 제6왕자 의 병사들에게 온갖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곳곳에서 힘없는 병사들을 둘러싸고 칼부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떤 주민은 제6왕자군 병사의 몸에 밧줄을 옭아 매여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갈갈이 찢겨나간 팔다리에서 흘러나오는 있는 피로 땅바닥에 그림을 그려 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쌓아올렸던 불만을 더 이상 자비를 베 풀 필요가 없는 악마의 수하에게 마음껏 해소하면서 자신의 잔인함을 한껏 뽐냈다. "더러운 것들." 천한 놈들의 추한 행동에 필요 이상으로 장단을 맞춰줄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곧바로 말을 산으로 몰았다. 세레스트 산의 근처까지 다다르고 나서 도 어느 정도 괜찮은 길이 만들어져 있었기에 아군의 기병들은 상당부분까 지 말을 타고 오를 수 있었다. 이미 수많은 성 주민들의 터전이었기에 이 렇게 깊은 곳까지도 저절로 길이 만들어졌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길을 통 해 제6왕자군 역시 빠르게 퇴각했을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유쾌한 것만도 아니었다. "저쪽이다!! 쫓아라!!" "악마가 서쪽 기슭으로 향했다!! 잡아라!" 이미 그곳에도 상당수의 주민들이 제6왕자를 쫓아 바글대고 있었다. 그리 고 산아래 마을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처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힌 병사와 기 사들이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었다. 특히 제대로 된 갑옷을 갖춰 입은 기 사들은 더더욱 잔인한 대우를 받았다. 산채로 배가 갈라져 그 속의 내장은 쓰다버린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다져졌고, 그 내용물 없는 몸뚱아리마저 도 멀쩡한 형체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수많은 병사들의 피가 땅을 적셨다. 비릿한 냄새가 자욱한 세레스트 산에 서 더 이상의 성스러운 자태를 찾아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를 짜서 서쪽 기슭을 뒤져라. 그리고 단 한 놈도 살려두지 말고 피와 내장을 뽑아내라! 더러운 악마의 수하들을 영원히 아르윈 왕국에서 없애버 려야만 신의 축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와아아아---!! 나의 외침에 주민들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굳이 세세한 명령을 내 리지 않아도 스스로 팔을 걷고 아군의 병사들을 인도하여 제6왕자군의 뒤 를 쫓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누구보다 이 산을 잘 알고 있는 주민들 이니 비록 천한 놈들이긴 하나, 나름대로 괜찮은 도움이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그 행동이 제6왕자에게 처절한 절망을 가져다 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1 세레스트 성산(聖山) (2) “카류리드 전하!!” “야! 한눈 팔다 엎어지면 어쩌려고 지랄이냐!!” 류스밀리온의 짜증에 겨운 목소리에 나는 잠시 하늘을 보기 위해 살짝 들 어올렸던 고개를 내렸다. 우아아아아아-----!! 증오와 미움이 가득한, 악의에 찬 고함 소리가 나의 귀를 타고 흘러 온 몸 을 아주 짜릿하게 자극한다. “악마를 몰아내라!! 저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비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모조리 찢어 죽여라! 살려두지 마라! 악마의 손이 닿은 자는 단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된다!” “사악한 마물의 피를 카뮤리안 님께 바쳐라! 마물의 내장을 세레스트 성 산에 뿌려라!” 시끄러운 구호 소리가 좀 더 가까이 들려오는 것을 느끼고 나는 류스밀리 온의 곁에 더욱 바짝 붙었다. 어떻게든 최소한 나만은 살아남아야 했기 때 문에 아무리 주변이 혼란하더라도 절대로 그를 놓칠 수는 없었다. 류스밀 리온만이 워프 마법을 시전할 수 있으니까. “빌어먹을… 성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을 하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이렇게까지…….” 에르가 형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나를 힐끗 보고 금새 입을 다물었다. 그 리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도주를 서둘렀다. 형은 지휘자로서 병사들 을 다독이며 철수를 돕는 대신 완전히 나의 호위병 비슷한 것이 되어 주변 으로 달려드는 국왕군 병사들을 죽여나가고 있었다. 서쪽 대로를 뚫자마자 아군의 모든 병사들은 악마 사냥에 완전히 미쳐버린 성의 주민들의 손을 피해 지휘자고 뭐고 생각하지도 않고 산을 타고 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과 연 모든 이에게 은혜를 베풀어준다는 세레스트 성산(聖山)은 우리들 같은 악마의 군대에게도 깊은 그늘로 숨을 곳을 마련해 주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안되겠습니다! 다른 지휘자들은 무시하고 전하께서는 그냥 워 프를 하셔야……!!” “이쪽이다!! 제6왕자가 이쪽에 있다!!” “서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카나스 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과 주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이 상태로는 워프를 할 시간적 여유를 잡기는 것마저도 힘들어 보였다. 차 라리 조금 전 성벽에서 퇴각 명령을 내릴 때 병사들이고 지휘관들이고 다 내팽개치고 류스밀리온과 단 둘이서 워프를 해버릴 것을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수풀과 수풀을 거치는 도주가 계속되었다. 항복이란 것이 없는 추 격전에서 도망자의 역을 맡은 아군의 병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산을 올랐다. “헉헉… 뭐야!! 대체! 저것들은……!!” 에르가 형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국왕군의 추격은 무서울 정 도로 매서웠다. 모든 군인들이 마치 이 산에서 수십 년간 살았던 사람이나 된 것처럼 이곳저곳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왔던 것이다. 아무리 검술의 달인 인 에르가 형이라고 해도 이 정도로 궁지에 몰리면 힘에 부칠 수밖에 없었 다. “헉… 여기가 대체… 어디쯤이지?” 에르가 형처럼 칼부림을 하지 않았음에도 나 역시 숨을 조금 몰아쉬며 중 얼거렸다. 얼마나 되는 병사들이 죽어 났는지 파악도 되지 않는 상황 속에 서 아군은 계속 국왕군의 추격을 피해 앞이 보이는 곳으로 달렸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아군이 국왕군과 성의 주민들에 의해 어떤 장소를 중심으로 이리저리 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었다. 상당시간 계속되는 그 추격전 속에 허약한 노마법사들이 하나 둘 뒤로 쳐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그들을 부축해 줄 수도 없 는 일이었다. “여기서 죽자고 아군으로 넘어온 거냐! 저 썩을 왕자 놈에게 나머지 수식 을 더 배워보고 죽어야 할거 아니냐!!” 류스밀리온은 한 노마법사의 뒤쪽에서 나타나는 버썩 마른 남자를 향해 손 을 한번 휘두르며 소리질렀다. 그의 손을 따라 생성된 무언가가 작게 고막 을 울리며 날아가 그 남자의 앙상한 뱃가죽에 말끔한 구멍을 내놓았다. 곧 뒤쪽에서 막대기와 쟁기를 들고 나타났던 주민들은 그 광경에 놀라 크게 주춤했고, 우리들이 도주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우습게도 이런 혼전 속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에르가 형도 또 다른 호위기사들도 아닌 류스밀리온이었다.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그의 경이로운 1서클 마법 난사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눈을 한번 부라리는 정도로 금새 두어개의 위협적인 바람의 화살이 만들어졌고, 기습적으로 아군을 공격해오는 주민들과 국왕군의 병사들도 예고도 없이 날라드는 그것을 재빠르게 피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화살의 정체가 단지 1서클 마법, 매직 애로우에 불과했기에 수십 번 그 마법을 난사한다 해도 쉽게 류스밀리온이 지치는 일은 없겠지만 그렇더라 도 전속력으로 도망을 치면서 저렇게 수식 계산을 한다는 게 정말 믿기지 가 않는다. 대체 류스밀리온이 인간이 맞기는 한 건가? 예전에 토이렌의 수식을 보고는 날더러 드래곤의 해츨링이 아니냐고 눈을 부라렸지만 실은 그가 진짜로 드래곤은 아닌지 모르겠다. “헉?!”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나는 갑자기 한창 주위를 뒤덮던 나무들이 사라짐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가 미처 그 놀라움을 완전히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 거 대한 함성소리가 나의 고막을 찔러들었다. “이…이럴 수가!” “뭐야!?” “으아아악!! 대체 뭐야!?” 곧 수풀 속에서 아군의 복장을 한 병사들이 우르르 튀어나왔다. 생각 외로 그렇게 많은 자들이 죽지는 않은 모양인지 상당히 많은 수의 병사들이었 다. 그러나 나와 그들이 튀어나오 곳은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 둔 상당히 폭이 넓은 오르막길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군은 그 오르막길 의 우측에 위치한 숲에서 빠져 나온 상황이었다. “예상대로 왔구나, 제6왕자여!!” “대…대체……!” 불과 4, 500미터정도 떨어진 아래쪽에서 아예즈 공작을 비롯한 국왕군의 병사들이 기세 등등하게 서있는 것을 보고 나는 작게 소리쳤다. 그 말을 듣지도 못했을 텐데 아예즈 공작은 언제 독심술을 배운 것인지 돌격 명령 을 내리기에 앞서 목청을 높여 친절하게 사정설명까지 해주었다. “이쪽은 카뮤리안 님의 사당으로 향하는 또 다른 길이다! 자신이 어디로 도망가고 있었는지도 몰랐나 보지!? 전군, 돌진하라!! 그리고 싸그리 잡아 목을 뽑아버려라! 저 사악한 악마 놈과 그 수하의 피를 제물로 바쳐야만 또 한번 이 땅에 신의 축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죽여라--!!” “악마를 없애라!” 수많은 국왕군의 병사들이 돌진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나는 도주를 하면서도 류스밀리온만 있으면 어떻게든 여 기서 탈출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조금은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게 아니라면 왜 조금 전 수풀에서 다른 기사들을 방패 삼아서 라도 류스밀리온의 캐스팅을 요구하지 않았겠는가! 나는 뒤늦게 스스로의 무름을 뼈저리게 자책했다. 이렇게까지 되면 도저히 캐스팅 시간을 잡을 수가 없다. 저 많은 병사들을 상대로는 호위기사들도 방패가 되어 줄 수 없을 테니까. “으아악!!” 갑자기 맞은 편 숲에서 어렴풋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아예즈 공작의 잡설 따윈 예전에 무시하고 재빨리 맞은 편 숲으로 뛰어들어갔던 몇몇의 병사들 의 비명소리였다. 덕분에 나는 맞은 편 숲에도 국왕군의 병사가 포위망을 좁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발을 놀렸다. 불가항력으로 위쪽으로 올라가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쪽으로 우리들을 유인했다면 이쪽으로 도주해도 더 이상 의 길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동시에 스쳤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래쪽에 서 평소와는 다르게 류스밀리온이 재빨리 움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 다. “류스밀리온 님! 빨리요!!” 그러나 나의 목소리를 들은 못 들은 것인지 류스밀리온은 뭔가 의아한 표 정으로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더듬더듬 오르막길을 오르고 있었다. 저렇게 뛰다가는 삽시간에 잡힐 것이 뻔하다. 설마 저 류스밀리온이 이 상 황에 절망을 해서 도망을 갈 의지를 버린 것인가? “류스밀리온 님!! 지금 뭐하는 거예요!! 죽고 싶어요!?” 『인간들이여…』 “잉?” 류스밀리온을 향해 소리를 지르던 나는 갑자기 고막을 울리는 중후한 소리 에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문득 앞쪽의 류스밀리온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병사들이 한번에 움직임이 멈춘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모든 자 들의 시간이 멈추고 나 혼자만이 살아 움직이는 듯, 아니, 수풀 이쪽 저쪽 에서 작은 소리들이 간간이 들려오긴 했지만 시끄러운 함성소리와 비명소 리가 가득했던 이 곳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이다. 『더 이상 이 산을 더럽히지 말라. 지금이라도 이곳을 떠난다면 용서해 주 겠다.』 또 한번 들려오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깊은 목소리에 나는 천천 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지휘관으로서의 체면이고 뭐고 생각지도 않고 추하게 입을 짝 벌렸다. 『떠나라, 인간들이여. 당장 그 무기를 버리고 산을 떠나라. 이곳은 너희들 만의 산이 아니다. 더 이상 산을 더럽히는 행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을 향해 ‘말’을 건넨 그 존재는 하늘에 떠있었다. 아마도 등에 달 려 있는 거대한 피막의 날개가 그를 하늘에 띄워주고 있는 듯 했다. 그러 나 그 날개는 거의 움직이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생물은 거의 미동 도 없이 하늘의 중앙에 태양과 함께 자신의 그 붉은 몸체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우리들이 일루젼 마법의 사용을 위해 붉은 도마뱀을 골자로 따서 만든 작 은 나무토막 상과는 달랐다. 그 존재의 몸은 거무틔틔한 붉은 색이 아닌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과도 같은 화려한 붉은 색이었고, 앞발은 생각 이 상으로 더 길었으며, 뒷다리는 훨씬 더 굵고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그 화 려하고 두꺼운 비늘로 덮인 머리에는 거대한 뿔이 3개나 나있었다. 희고 날카로운 이를 번뜩이던 그 존재, 드래곤은 그 모습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깊고 잔잔한 목소리로 우리들을 향해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그렇게 크지 않으면서도 직접 사람의 머리 속에 이야기를 건네는 듯, 우리들의 고막을 확실히 울려주고 있었다. “류…류스밀리온 님…….” 에르가 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류스밀리온을 불렀다. 그리고 나 역시 그 말 소리를 따라 류스밀리온을 돌아보았다. 말하지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일 루젼 마법을 그가 더 개량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던 것이다. 아 니, 왠지 모르게 그러기를 바라고 있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그만큼 눈앞의 존재는 끔찍하게도 위압적이었던 것이다. “신이시여……!!” 그러나 류스밀리온이 손을 떨면서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게도 그의 입에서 신을 부르는 소리가 나왔다. 『돌아가라. 더 이상 너희들의 피와 살로 이 산을 더럽히지 말고 그 무기 를 거두어라. 그리고 어서 이 산에서 떠나라.』 붉은 몸을 가진 드래곤이 몸을 한번 움직였다. 작은 움직임에 불과했음에 도 그 존재가 너무나 거대하여 한차례 엄청난 강풍이라도 몰아칠 것 같았 지만 의외로 그 어떤 바람 같은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느껴 지는 것은 그저 후덥지근한 기운이 물씬 풍기는 작은 산들바람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나의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나는 멍하게 있는 류스밀리 온의 손을 낚아챘다. 그리고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도망가요! 여기서 국왕군에게 죽으나 저놈한테 죽으나 마찬가지 아냐?” 나의 작은 외침에 에르가 형이나 사람들이 마치 뭐에 홀리기나 한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류스밀리온이나 다른 마법사들이 멍한 상태이 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기 보다는 계속 발을 놀렸다. 그리고 그 작은 움직임을 시작으로 마치 떠밀리듯 아군의 병사들이 하나 둘 도주를 위한 움직임을 개시했다. 완전히 침묵에 빠졌던 산에 곧 하나 둘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아군은 말 할 것도 없고 우리들을 추적하던 국왕군과 마을 주민들 역시 서로 뭐라 말 을 건네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웅성거리면서도 아군과는 달리 국왕군은 그 자리에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파…파렴치한 제6왕자야! 이제 지겹지도 않느냐!!! 또 그런 속임수로 우 리들을 속이려 하다니, 창피하지도 않느냔 말이다!! 진정 마지막까지 네 놈 이 추한 꼴을 보이는 구나!! 네가 아무리 그런 사악한 술수를 쓴다해도 아 군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큰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나는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것이 아예즈 공작의 목소리라는 것은 충 분히 알 수 있었다. 곧 그 목소리를 시작으로 아래쪽에서 어마어마한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땅을 울리듯 수많은 사람들의 발울림이 시작되었 다. 『돌아가라, 인간들이여! 더 이상 산을 더럽히지 말아라!』 이런 상황에서도 계속 담담한 투로 말하던 드래곤의 형상을 한 그 존재가 드디어 약간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돌아가라는 말 을 할뿐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것이 더욱 국왕군과 아군의 움 직임에 박차를 가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죽여라---!!” “악마의 수하를 없애라!” “끄아아아아악---!” “환영에 속을 것 없다!! 모조리 죽여라!!” 마치 호수에 파문이 그려지듯, 고요했던 산이 아래쪽에서부터 위쪽으로 삽 시간에 비명소리와 고함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류스밀리온을 끌어당기면 서 어떻게든 워프를 할만한 시간을 벌기 위해, 국왕군과의 거리를 벌리려 고 애썼다. 그 때 또 한번 크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산을 너희들의 추악함으로 더럽히지 마라!! 돌아가라!!』 “까불지 마라!! 추악한 것은 오히려 너희들이 아니더냐!!” “악마를 없애라, 그래야 저 환영도 사라질 것이다!! 민중의 마음을 혼란스 럽게 하는 저런 놈은 가만히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찢어 죽여라!” 아래쪽에서 시끄럽게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저 드래곤이 우리편이라 한 적도 없는데 저들은 그대로 저것이 우리들이 만든 환영이라 단정짓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아군의 병사들도 그 드래곤이 우리편의 환영이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눈을 시뻘겋게 하고 쫓아오는 국왕군 때문인지 이 산에서 그만 꺼지라는 드래곤의 말을 듣고도 계속 산의 위쪽으로 도주해갔 다. “윽!!” 죽도록 산의 위쪽으로 뛰는데 갑자기 주변의 온도가 확 올라갔다. 반사적 으로 하늘을 올려다 본 나를 그만 넘어질 뻔했다. 태양만으로도 충분히 이 땅을 달구어 주고 있건만 또 한 개의 거대한 불덩이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로 멈추지 않고 천천히 두개, 세 개로 불어났다. “이…인시너레이트?!” 류스밀리온이 뛰면서 소리쳤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캐스팅 속 도에 전율을 느끼는 듯 그는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돌아가라. 더 이상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너희들에게 이 재앙이 떨어 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어서 떠나라!!』 드래곤은 날개를 한번 크게 퍼득여 조금 하늘 위로 오르면서 소리치듯 말 했다. 산의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였으나 이상하게도 그 음색은 우 리들의 귀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또한 거대한 날개의 격한 움직 임에도 이 산에는 그 어떤 파동도 일어나지 않았다. 『떠나라! 무기를 버려라! 산에서 내려가라!! 더 이상의 경고는 없을 것이 다, 인간들이여!』 인시너레이트는 바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불덩이는 하늘에 떠있는 상태로 고정되어 단지 후끈한 느낌만을 전해주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들은 별다른 위협도 되지 않는 그런 영상 따윈 무시하고 서로 뒤쫓고 도망가기 시작했 다. 어느새 나 역시 그 드래곤의 모습에서 아무런 위압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로지 살기 위해, 도망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혼신의 힘을 쏟 았을 뿐이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았음에도 산의 아래쪽은 미처 도망치지 못한 아군의 병사들의 피와 시신으로 엉망이 되었다. 그럼에도 국왕군과 성의 주민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우리들을 따라 산을 올랐다. 아군의 병사들 은 역시 필사적으로 위쪽으로 뛰었다. 국왕군과 주민들의 무조건적인 악의 가 하늘의 드래곤보다 수천만배는 더 큰 두려움을 주었던 것이다. 『인간이여!!』 그 목소리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더욱 강해졌다. 하늘의 불덩이 중 하나가 땅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불덩이가 떨어지고 있는 장소는 내가 있 는 곳과 너무나 가까웠기 때문에 나는 너무나 놀라 한쪽 손으로 땅에 짚고 거의 쓰러지듯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직격이 아니라도 이런 상황에서 는 그 여파로 일어나는 불기둥에 통구이가 되어 버릴 것이 틀림없다. 저것 이 진실로 인시너레이트라면 나는 물론이거니와 아군도, 국왕군도 모조리 그 여파로 타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그 짧은 상황에서도 머리를 스치는 의문 때문에 미칠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일이,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모든 일이 이 런 식으로 끝나버린다 말인가? 콰아아아앙---. “크으으…윽?” 뜨거운 열기가 팔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신음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 신음소리는 몇 초 지나지도 않아 금방 의문으로 바뀌었다. “잉?” 나와 같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류스밀리온도 우스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리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공터가 펼쳐져 있었지만 보통 인시너레이트를 시전했을 때 일어나는 불의 폭풍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불덩이는 단지 깨 끗한 공터만을 만들어놓고 아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게다가 인시너레 이트는 거의 사람이 없는 쪽에 떨어져서, 덕분에 아군도 국왕군도 그다지 많은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하하하…아하하하하!! 다급하여 제대로 조준을 할 시간도 없었나 보 구나! 아르디예프!! 게다가 인시너레이트인 척하며 아군의 눈을 속이려 하 다니 멍청하기 짝이 없군! 아군이 인시너레이트의 위력 정도도 모를 줄 알 았더냐!? 전군 전진해라!! 더 이상 저놈들에게 캐스팅 시간 같은 걸 주지 마라!!” 아예즈 공작의 커다란 웃음소리에 이어지는 명령을 듣고, 국왕군의 병사들 역시 크게 비웃음을 흘리며 산을 타고 올랐다. 이 자리에 아르 할아버지는 없다고 소리질러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나는 계속 산을 타고 올 랐다. 『돌아가라… 인간이여…』 문득 또 한번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드래곤은 더 이상 인간들의 관심 범위 밖에 있었다. 하늘 위의 영상은 전설 속의 드래곤답지 않게, 어찌 들 으면 사정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의 음색으로 우리들에게 돌아가라는 말을 전했다. “너나 꺼져라, 이 마물아!!” “저놈들이 사당으로 간다!! 쫓아라!! 배를 갈라 그 피를 바치자!” 시끄러운 소음이 가득 찼다. 조롱을 하는 자들의 목소리, 근원을 알 수 없 는 정의감에 물든 자들의 구호 소리, 그들의 정의감에 채워주기 위해 자신 의 피를 뿜어내고 비명을 지르는 자들의 소리. 그리고 그 소리들을 간신히 뿌리치며 산의 위쪽으로 도주하던 사람들은 어 렴풋 먼 곳에서 단출하게 생긴 자그마한 건물과 함께 막다른 길이 나타나 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더 이상 성스러운 산마저도 우리들에게 길을 마 련해주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류스밀리온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덕분 에 그의 손을 잡아 끌 듯 산을 오르고 있던 나는 그만 뒤로 나자빠질 뻔했 다. 그러나 이게 무슨 짓이냐고 류스밀리온에게 신경질을 부리지는 않았다. 위쪽에서 작게 느껴지는 단 한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상한 울림 때문 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하늘에는 드래곤은 무언가를 빨아들이듯 조금씩 그 입을 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입을 더 크게 벌릴 때마다 알 수 없는 기운이 마치 압축되듯 붉은 빛이 되어 모여들었다. 나는 그 기운에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도주하고 추격하던 모든 존재들이 그 자리에서 멈춰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기운은 더더욱 짙은 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빛이 모여들며 단순한 공기의 울림으로 인한 소리가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나는, 아니, 모든 사 람들은 그것이 무언가 우리들에게 엄청난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을 알고 있 었다. 그 붉은 기운에서 일초라도 빨리 도망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러나 사람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수많은 전장에서 그토록 용맹을 떨쳤던 장수마저도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수만에 달하는 인간들 중 단 한사람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서서 그 끔찍한 자극에 몸을 내맡긴 채로 있었다. 드래곤의 입에 모여드는 그 기운의 움직임이 인간과 모든 생명체 의 가슴 깊숙한 곳의 무언가를 자극하며 우리들의 발목을 완전히 묶어버렸 기 때문이다. 이상한 울림. 이상할 정도의 생소한 감각,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 각.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모르는 존재는 한 명도 없었다. 눈앞에 들이대어진 칼을 보았을 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강대한 마법을 앞두었을 때 인간들은 죽음을 예감하고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달랐다. 그 런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 붉은 빛의 울림은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위협보다도 생생하게 죽음을 느끼게 만들고 있었다. 몸 깊숙한 곳의 본능은 그 울림이 가르쳐 주는 것을 느끼며, 움직이기는커녕 비명도 지르지 못할 정도로 지 독한 경계를 표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드래곤 피어. 지고한 존재 드래곤만이 가진 신에 가까운 능력. 그것은 그 어떤 생물도 결국엔 그러할 수밖에 없는 죽음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던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크학!!” “으아아악!!” 갑자기 그 붉은 기운이 터져 나가듯 뜨거운 불기둥이 되어 뿜어져 내렸다. 그것을 계속 바라보고 있던 인간들은 눈을 파고드는 강렬한 빛에 비명을 질렀다. 여전히 굳어 있는 채로 그렇게 간신히 비명만을 질렀다. 거짓말 같이 뜨거운 기운이 느껴짐과 동시에 땅을 긁는 시끄러운 땅울림이 귀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미 정체불명의 이상한 울림이, 드래곤 피어가 끝나버렸음에도 산을 메우는 커다란 소음과 단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광경으로 인해서 또 한번 몸서리쳐지는 공포를 느꼈다. 우우웅……. 그러나 그 거짓말 같던 소음은 금방 그쳤다. 또한 처음 인시너레이트가 그 랬듯 이번의 것도 인간을 발기발기 찢어버릴 뜨겁고 난폭한 바람을 가져오 지는 않았다. 몸에서 전해지는 그 느낌을 뇌가 받아들임과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을 느꼈다.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아직까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뜨거움에 이상한 기쁨을 느끼며 나는 주변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눈 동자를 움직여 시야를 넓히고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 하지만 눈동자를 움직인 것도 잠깐, 나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렇게 입을 열긴 열되 그 어떠한 소리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드래곤 피어의 영향도 조금 있었고, 무엇보다 눈앞의 광경에 목과 혀가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닿는, 대로(大路)의 아래 부분에는 넓적한 타원 모양의 공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그 근처에서 바글거리던 만명이 넘는 국왕군의 무 리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시너레이트를 쓰면 의례 나타날 그 지저분한 시체나 파편마저 없었다. 화계 공격이었던 만큼 주변 의 나무 몇몇이 불에 타고 있을 만도 했건만 그런 것 역시 찾아볼 수가 없 었다. 꼭 거대한 숟가락이 한차례 얕게 파고 지나간 듯 그곳은 너무나 깨 끗했다. 단지 국왕군이 한덩이로 모여있던 그 자리만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그 공터와 불과 몇 걸음 떨어져 있던 병사와 주민들에겐 상처 하나 없을 정도로 깨끗한 일격이었다. 곧 드래곤은 날개를 펄럭여 몸을 약간 뒤쪽으로 물려 조금 방향을 바꾸었 다. 저 거대한 존재가 우리들을 향해 국왕군에게 했던 것과 같은 공격을 하려하고 있음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자리 에 서있는 채였다. 힉힉 하는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부들부들 떨기만 할뿐 조금도 움직이지를 못했다. 조금 전의 그 드래곤 피어로 인한 여파가 아직 까지도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그만해!!” 작은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마치 죽어버린 듯한 산에 찢어지는 목소리가 작게 퍼져나갔다. 덕분인지 드래곤은 순간 입을 조금 열려던 것을 멈추며 움찔했다. 그리고 세로로 가늘게 찢어진 동공을 가진 새빨간 눈동자가 목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향했다. “아…아니, 저…저, 저희들이 지금, 지금 다…당장 산에서 내려가겠습니다! 그, 그러니 더 이상의 공격은 거두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위대하신 드 래곤이시여!! 저희들의 어리석음을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정말 간신히 다듬으며 목청 돋워 크게 소리쳤다. 그 거대한 몸집이 작아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떠있는 드래곤에게 나의 목소 리가 들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삶을 갈구한다. 이대로 허무하게 이 세계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하지만 실은 언제든 죽어도 아무래도 상관없다. 죽음 따윈 조금도 두렵지 않다. 그것이 나의 진심이기에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뭔가가 미묘하게 모순적 인 말이었지만, 삶을 갈구한다는 자체가 죽음을 두려워하며 거부한다는 뜻 이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무언가가 달랐다. 내가 직접 경험한 죽음과, 환 생이라는 것이 미세하면서도 근원적인 차이를 만들어 주며 나에게 움직일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 용감한 인간이여.』 그러나 나의 혼신의 힘을 다한 외침에 돌아오는 것은 단호한 거절의 말이 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토록 인간을 죽이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드래곤이었기 에 이렇게 스스로 나가겠다고 말한다면 들어줄 것이라 어렴풋 생각하고 있 었던 모양이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꼭 쥐고 또 한번 크게 소리질렀다. “어, 어째서!! 지금, 지금 당장 돌아가겠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군을 전부 물리겠습니다! 다시는 이 산으로 찾아오지 않겠습니다!!” 내 모습을 보던 드래곤은 천천히 그 거대한 입을 벌렸다. 다행히 그 입에 서 나온 것은 붉은 색의 이상한 기운이 아니라 처음 우리들을 향해 건넸던 그 잔잔한 목소리였다. 『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는 정도로, 마법을 조금 시전해 보이는 정도 로도 너희들이 퇴각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너희들은 나를 환상이라 여기고 물러서지 않았다. 그 연유가 무엇이든 간에 수 백년 의 세월동안 나에 대한 너희들의 두려움은 다한 듯 싶구나. 인간이란 본디 의심이 많고 포기를 모르는 종족이다. 따라서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정도 의 확연한 힘의 증거를 보여주지 않는 한, 너희들이 또 다시 나의 존재와 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게 될 것은 생각할 여지도 없다. 결국 이대로 너 희들을 살려보낸다면, 이 나라에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니 만 큼, 나는 머지 않은 시기에 이 산을 더럽히는 너희와 같은 인간들과 또 다 시 대치해야만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바에야 차라리 지금 이 자리에서 너 희들을 몰살시킴으로서 이 살육을 끝내겠다.』 드래곤의 긴말을 듣자 그냥 핏기가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우리들이 드래 곤의 환상을 남발해서 국왕군에게 드래곤 따윈 전부 거짓이다라는 인식을 굳게 심어주었기에 이번과 같은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확실히 아군 이 여기서 살아나간다면 국왕군은 이 드래곤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특히 이 곳은 상당한 요지에 있는 장소이니, 여의치 않은 상황에는 또 한번 이 세레스트 산으로 다시 쳐들어올 수도 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렇다고 여기서 ‘역시 위대하신 드래곤, 옳으신 말씀입니다.’ 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고스란히 죽어줄 마음은 절대로 없었다. 나는 더욱 고개를 하늘 을 향해 쳐들고 절박한 마음으로 소리질렀다. “당신의 존재가 허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온 나라에 알리겠습니다!! 또 한 그 어떤 자도 이 산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군 을 돌려보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제발 아군의 병사들을 살려주십시 오!!” 『…….』 드래곤은 입을 다물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드래곤이 상당히 높은 하늘 위 의 떠있었기에 그의 눈동자 따윈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 언제보다 강렬하게 드래곤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나의 피어(faer)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너의 굽힐 줄 모르는 신념에 경의 를 표하며 대신 한가지 제의를 하마.』 “제…제의?” 나는 드래곤의 말에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한 발자국 걸어나갔다. 잘은 몰라도 용기 있는 나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내놓는 것 인만큼 좋은 제의가 아니겠는가. 나의 모습을 가만히 보던 드래곤이 그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보기에 너는 이곳에 남은 대부분의 병사들의 책임자인 듯 싶구나. 그렇 다면 네가 죽는 것은 이 전쟁에서 너의 군의 패배를 뜻하며, 따라서 이들 병사들의 전멸을 뜻하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자, 택하거라. 너 혼자 죽음으 로서 나머지 병사들을 살리겠는가. 아니면 그들과 함께 죽음으로서 실질적 인 전멸을 하겠는가.』 “뭐?” 나는 잠시 머리 한쪽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뭘 택하든 간에 나는 죽은 목숨이 아닌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이 어딨냐! 내 용 기에 경의를 표해 제안을 내주겠다던 주제에 저런 제안을 내놓는 속셈은 대체 뭐냐고!! 『택하거라.』 드래곤의 목소리가 내 귀를 찌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잠시 움찔했다. 그리 고 쓸데없는 잡생각은 멀리멀리 날려버렸다. 순간적으로 국왕군이 소멸 당 했던 텅 빈 공터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 혼자 죽겠다고 말해야 하나? 그렇지만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결 국 아군은 망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나 혼자 안 죽겠다고 그러면? 어 차피 나도 죽잖아. 결국 아군은 망하는 거다. 대체 뭐냐, 대체 왜 이런 생 황에 처해야하는 건데? 머리 속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공방전에 나는 머리카락을 꽉 쥐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죽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고 싶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하려했던 남은 일을 꼭 이루고 싶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시작된 일인지, 누구를 위해서 시작된 일인지도 점점 불분명해져 가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최소한 현재의 나는 살아 남아서 그것을 이루 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밟고서라도 그 것을 이루고 싶었다. “제…제가 꼭 죽어야만 하는 겁니까?! 그런 것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결국 나는 주먹을 쥐고 그 드래곤에게 사정하듯 외쳤다. 『그렇구나. 내가 오판을 한 모양이구나.』 “예, 예? 무…무슨 뜻이죠?” 자세한 뒷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드래곤이 불쑥 오판을 했니 어쩌니 하고 말하자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땡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나를 보던 드래곤은 자상하게도 차근차근 뒷말을 풀어내며 나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너는 피어를 물리친 연후에 바로 병사들을 살려달라 사정했다. 나는 그 것을 보고, 네가 이렇듯 죽음을 거부하는 생명체의 당연한 본능마저 초월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병사들 중 어떤 특정인에 대한 깊이를 측정할 수 없 을 정도의 애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존재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것이라 섣부른 추측을 하여 이런 제의를 내놓은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의 피어를 극복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인 모양이구나. 네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생전 무엇을 이루기 위해 나의 피어마저 이겨낸 것인지는 모 르겠지만 나의 제의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니 그것은 철회하겠 다.』 “그…그러면 어떤 제의를…….” 내가 조금 기뻐하며 다시금 그에게 새로운 제의를 해줄 것을 기대했다. 그 러나 그 드래곤이 나의 기대와는 완전히 어긋나는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현재의 내 입장에서 이 이상의 제의를 내놓을 수는 없다. 따라서 너와의 거래는 끝났다.』 “뭐…뭐, 뭐? 자…잠깐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런 법이 어디 있 습니까!!” 드래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서 뛰어나갔다. 그리고 고래고 래 소리를 지르며 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그 드래곤이 있는 곳을 향해 깡총깡총 뛰었다. 저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란 말인가!!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진 나를 왠지 모를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바라보던 드래곤이 입을 열었다. 『몇 백년 만에 나의 피어(fear)를 극복한 인간에게 경의를 표하지는 못할 망정 그 신념에 방해가 되는 일밖에 할 수밖에 없다니 스스로도 안타까울 따름이구나. 하지만 나에게도 스스로의 터전을 지킬 권리와 더 이상의 인 간을 해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있다. 그러니 너희들을 살려 줄 수는 없 다. 특히 이 군의 최고 지휘관인 네가 살아 돌아간다면 나의 힘에도 실수 가 있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의 압도적인 힘을 다 시 한번 가르쳐줌과 동시에 내가 너희들이 만들어낸 환상이 아님을 증명하 여 인간들을 산에 들리지 못하게 하기 위한 나의 의도는 물거품이 될 테니 어쩔 수가 없다.』 “아…안돼…….” 드래곤이 날개를 약간 움직여 우리들을 향해 조준하듯 몸을 고정하는 것을 보며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점점 심장이 터져 나갈 듯 뛰는 것을 느끼며 피를 토하듯 소리질렀다. “제발…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 또 다른 기회를 주십시오!! 드래곤이시여!! 제발!!! 좀!!!” 하지만 드래곤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계속 나의 말에 꼬박꼬박 대답을 해 주던 드래곤이었으나 더 이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저 드래곤은 완전히 결심한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우리들을 완전히 전멸 시키기로, 그렇게 단단히 결심을 해버린 모양이다. 용기 있는 인간이니 어 쩌니 하며 사람을 기대에 부풀게 만들어 놓고 저렇게 간단히 나를 죽여버 리겠다는 것이다. 가슴이 날뛰었다. 대체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지 금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살려고 하는 것인지 아직까지도 모르겠 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금 전 거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한순간 소멸 당해버린 아예즈 공작처럼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조금 전에 저 드래곤이 했던 그 제의 를 받아들여 뒤쪽의 병사들이나마 살리는 것이 최선이라고 나의 이성이 그 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가슴이 울부짖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 고! 살고 싶다고!! 조금 전과 같은 제의 같은 건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드래곤이 조금 전처럼 피어 겸 브레스를 뿜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입을 조 금 벌리려는 것을 보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리쳤다. 이게 아니라고 생각 하면서도, 절대로 이럴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의 의무감 같은 것에 그를 향해 소리쳤다. “기다려, 이봐, 제 말 좀… 빌어먹을!! 빌어먹을 !! 안타깝다고 말만 하면 다냐!! 이잇 빌어먹을!! 죽어준다고!! 나 혼자 죽겠어!! 죽으면 되잖아!! 야, 내 말 좀 들으란 말이야!! 내가 죽겠다니까!!! 나도 인간인데 잠시 흔들릴 수도 있는 거지!! 나 혼자 뒈지면 될 거 아니냐!!” 너무너무 억울해서 반말에 험한 욕지거리까지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이상 내가 감정을 조절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했다. 여기서 나에게 허무한 죽 음을 가져다 준 저 드래곤에게 좋은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 한 일이었다. 『뭐라고 했느냐?』 한동안 고래고래 소리치던 나는 갑자기 들려오는 드래곤의 목소리에 딱 굳 었다. 드래곤이 그대로 피어와 브레스를 뿜지 않았다는 것은 나름대로 다 행이라 할만 했지만 대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 영 이상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구나. 네 진정 나의 피어(fear)를 극복한 자가 맞느냐?』 드래곤은 도마뱀의 얼굴을 한 주제에 잘도 이상하다는 식의 표정을 만들어 내며 내가 있는 족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힉……!!” 문득 공포에 질린 인간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 중에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나를 지켜주던 기사의 목소리도 있었다. 드래곤 피어의 영향은 저렇게 용감했던 사람에게도 아직 까지 유효한 채였다. 드래곤은 주변의 햇빛을 전부 가릴 정도로 굉장히 가까운 곳까지 내려왔 다. 생각 이상으로 그 존재는 너무나 거대했다. 뒷다리에 붙은 발톱 한 개 의 크기가 내 몸뚱아리의 2/3정도였으니까. 『작구나.』 내가 작은 게 아니라 니가 큰 거다. 이 기형 도마뱀아. 나를 보며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 드래곤을 향해 미미하게 입을 이죽 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고 자포자기 상태인 것인지, 아니면 그 피어라 는 걸 완전히 극복했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이상한 자신감이 붙은 건지 나 는 더 이상 그 드래곤에게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별 것 아닌 말에도 괜히 속으로 핀잔을 터뜨리던 나는 곧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또 한번 놀라움을 느껴야만 했다. “어!? 뭐, 뭐야?” 나는 드래곤의 몸이 점차 작아지는 것을 보며 깜짝 놀라 몇 걸음 물러섰 다. 그 드래곤은 급속도로 몸이 줄어들며 그 자체의 색마저 변해갔다. 드래 곤이 거의 내 수준의 자그마한 생명체로 변해버린 것을 보고 나는 정말 추 하게 입을 쩍 벌렸다. “그 망토를 빌려주겠나?” 새하얀 손등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가 살포시 뒤집어졌다. 조각상의 일 부 같은 그 손을 내게로 내민 존재는 허벅지까지 기른 화려한 붉은 머리로 나신의 몸을 정말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망토를 빌려주었으면 좋겠는데, 무리인가?” “아!!”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빠르게 어깨에 걸치고 있던 망토 를 떼어냈다. 엄청나게 당황한 차라 나 혼자서 그 망토를 떼어내 데는 굉 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불쑥 그 망토를 내밀자 그 존재는 천천히 손을 움 직여 그 망토를 가져가 자신의 몸을 두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의 손길 하나하나에서 마치 천상의 것과 같은 우아함이 배어 나와 나는 그만 머리 까지 완전히 얼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카뮤르·카이야. 조금 전의 그 화룡이 바로 나다. 이것은 폴리모프 라 하여 드래곤만이 가지는 형질을 변화시키는 능력이다. 그러니 그렇게 놀랄 것 없다.” “여…여자?” 아직까지 완전히 녹지 못한 머리 때문이었을까. 나는 부드럽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만 멍청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그 드래곤은 긴 속 눈썹을 살짝 깔았다가 다시 들어올리며 붉은 기가 도는 진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모든 드래곤은 양성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양성이 없었기에 나는 한가 지 성별을 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네가 남자임을 감안해 여자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것이다.” “그…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얼굴을 확 붉혔다. 내가 남자니까 여자의 모습으로 나왔다니, 그런 이상한(?) 말을 이런 자리에서 하는 저의가 대체 뭐냐?! “대부분의 생명체는 이성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그 이상의 깊 은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여.” 별 다른 음의 고저가 없음에도 왠지 모르게 깊이가 느껴지는 그의, 아니, 그녀의 목소리가 나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곧 그녀는 아무 것도 신지 않은 새하얀 맨발로 거친 땅으로 한발자국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반대 쪽의 발을 내딛으며 내게로 조금씩 다가왔다. 단지 한 인간의 걷는 모습임 에도 나는 뭔가 굉장히 신비로운 광경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너의 존재는 불합리하다. 나의 사고와 감성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존재다.” 불과 세네 발자국의 거리를 남겨두고 멈춰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한동안 그녀의 외모에 얼이 빠져 있던 나는 그제야 그녀의 말에 정신을 집중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무슨 뜻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다지 좋은 소리라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고 추측되었기 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그녀를 향해 되물었다. 그러자 그녀 가 망토를 요구했을 때처럼 천천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는 나의 피어(fear)를 극복했다. 보통은 삶의 어떤 한 부분을 완전히 초월했을 때 가능해지는 일이지. 특정 상대에 대한 사랑과 같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세상을 구하겠다는 그런 큰 결심까지, 자기 나름대로의 초월한 신념…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거부하는 생명체 본연의 본능 까지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 바로 나의 피어를 극복한 자다. 그러나 너는 아니다. 피어를 극복한 자임에는 틀림이 없건만 너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 “뭐…뭐라는 거야…….” 나는 알 수 없는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며 중얼댔다. 그러자 그녀가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떤 신념을 이루기 위해 살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너는 극한 상황 이 몰리게 되자 그 신념을 포기해 버렸다. 조금 전에 네가 한 그 행동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뭘 자꾸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나를 내몬 거잖아!! 그 럼 그 상황에서 뭘 더 어쩌란 말이야!!” 나는 짜증을 느끼며 소리쳤다. 내가 죽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바로 자신이 주제에 저 딴 소리를 하는 저의가 뭐 냐!! 나라고 죽고 싶어서 죽겠다고 말했는 줄 아냐!? “너의 주위를 보아라. 나의 피어를 이겨내는 것은 범인들로서는 이룰 수 없다. 유구한 세월동안 드래곤 피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변하지 않 는 삶의 깨달음과 신념을 가진 자만이 이겨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는 아니다. 어떻게 그런 불합리한 일이 가능하지? 너는 대체 무엇을 알 고 있기에 나의 피어를 극복한 것이지?” 갑자기 그녀의 말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올랐다. 겨우 그 몇 마디가 내 가슴 속 깊은 곳을 끓어오르게 만들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에게서 어떻게 자신의 피어를 극복했는지에 대해 묻는 말이 내 신경을 굉장히 날 카롭게 자극시켰다. “뭐가 불합리하다는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내가 살아온 십 만년이라는 세월이 그렇게 짧았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 세월의 연륜이 너와 같은 존재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너는 대체 무엇이기에 나의 피어를 극복했는가. 어떻게 나의 피어를 극복 할 수 있었는가.” “빌어먹을…….”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아주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내가 여기서 환생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과연 저 도마뱀은 어떻게 반응할까. 어차피 여 기서 꽥하고 죽어도 지옥에 가거나 소멸하는 것이 아닌 단지 다른 생명체 로 태어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걸 직접 겪어 봤기 때 문에, 사실 나는 토이렌에서 19년 동안 살다가 죽었고 다시 이 이르나크 세계에 태어난 것이라는 말을 하면!! 저 도마뱀은 내게 뭐라고 말할까……. 정말… 그 우습지도 않은 상황에 눈에 선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얼마나 내가 그것을 되새겼는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하지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수십 번, 수백 번 그것에 대해 말해본들 직접 겪어보지 못한 그들로서는 나의 마음을 일고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 에 내가 이런 지경에까지 오게 된 것이니까.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이따 위로 꼬이게 된 것이니까. 환생 따위를! 전생 따위를 그 누가 믿어주겠는가!! “다시 한번 물으마. 나의 피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지?” “시시한 잡설로 사람을 짜증스럽게 만들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게 뭐였지? 나의 죽음이 아니었어?! 그럼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죽여버려!!” 저 드래곤이 나에게 흥미를 보이고 있으니 이것저것 말을 둘러대며 사정 설명을 하면, 그러면 어쩌면 목숨을 구걸할 수도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 도 이상하게 나의 머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이상의 바닥이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생각했던 머리가 하필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고 장이라도 난 듯 이상 고온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마도… 그토록이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위대하신 존재에게서 받는 추궁이었기에, 그러나 그런 존재마저도 나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이 더욱 나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무엇을 화내고 있는가. 나는 단지 너에게 질문을 했을 뿐이다. 다른 곳의 감정을 이곳까지 끌어다 붙이지 말아라.” “젠장할이라고 대답해주지! 빌어먹을 변신 도마뱀아.” 나의 험한 말에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떠서 불쾌감을 표했다. 도마뱀인 주제 에 잘도 인간 흉내를 내어 표정 관리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언제까지나 좋은 태도로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폭언을 들을 만큼 내가 무언가를 잘못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더 이상 나의 질문에 답 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폭언만을 퍼붓는다면…….” “하면?” 나는 도마뱀의 말꼬리를 자르며 비웃었다. “죽이기라도 하려고?”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한쪽 손을 그 도마뱀의 앞에 휘휘 저어 보였다. 아 무래도 현재의 나는 반쯤 미쳐 버린 것이 틀림없다. 이 세상 그 어떤 놈이 저 지고한 존재에게 제 정신으로 이 딴 식의 행동을 취하겠는가. 나는 참으로 여유작작하게 스스로의 행동을 평가하기까지 하며 계속 실실 웃음을 흘렸다. 그때 갑자기 눈앞의 그녀가 사라지듯 없어졌다가 갑자기 나의 코앞으로 나타났다. 아니,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만큼 그녀가 빠르게 움직였던 것이다. “태고 적부터 전해오고 있는 아주 보편적인 방법을 쓰겠다.” 나의 면상에다 대고 조금 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나를 껴안듯 가늘고 새하얀 팔을 허리에 둘렀다. “헉?” 나는 너무나 의외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 헛바람을 삼켰다. 그러나 그 녀는 내가 미처 그 촉감을 느낄 새도 없이 즉시 나를 세게 뒤로 떠밀었고 덕분에 나는 뒤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양팔을 휘저으며 버둥거려야만 했다. 그렇게 손을 버둥거리다가 발을 뒤쪽으로 한 걸음 움직여 겨우 균형을 잡 던 바로 그 때, 나는 순간적으로 그녀의 손에 혁대에 꽂혀 있던 단검이 들 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아아아아악!!” 갑작스럽게 왼쪽 어깨가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기에 나는 본능에 따라 자지 러지듯 비명을 질렀다. “더 이상 험한 꼴을 보기 전에 대답을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의 어깨에 단검을 박고 있던 그녀가 또 한번 담담한 목소리로 내게 경고 를 했다. 그러나 나는 어깨의 아픔 때문에 금방 정신을 차라고 이성적인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싫은가?” 뭐든지 다 알 것 같이 설치던 그 드래곤 자식은 이런 건 이해를 못하는 건 지 짜증날 정도로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어깨에 박고 있던 그 단 검을 무자비하게 비틀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왼쪽 귓가로 무언가 우드득하며 부서지고 비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고 그 소리는 내게 조금 전의 그 드래곤 피어 따위보다 수백 배의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떨리는 손으로 그 단검을 잡으려 하자 그 빌어먹을 파충류 자식이 단 검 째로 나를 뒤로 떠밀었다. 거의 정신이 나가있는 상태에서 떠밀리자 나 는 대책 없이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크아아아악!! 흐악!! 크윽!! 으아아아아악!” 왼쪽 어깨부터 땅에 처박혀 미칠 듯한 고통에 땅을 뒹굴었다. 정말, 예전의 어스웜에게 당했을 때도 이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수많은 병사들이 지켜보고 있는 앞에서 꼴사납게시리 나는 눈물이 쏟아냈 다. 더 이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나의 몸이 머리의 명령을 거부하고 제 멋대로 눈물을 쏟아냈던 것이다. “가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구나. 어서 대답을 하는 것이 어떤가? 나 역 시 이런 짓은 유쾌하지 않다.”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징징 짜는 나를 내려다보며 그 도마뱀 자식이 정말 이지 신경질 나게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계속 나를 내려다보기 보다는 그 즉시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나는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무슨 말이든 하기 위해 입을 열 려고 입술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그 자식의 발이 훨씬 더 빨랐다. “컥! 으아아아악!!!” 놈이 내 왼쪽 어깨에 꽂힌 단검을 발로 짓밟았기에 나는 또 한번 목이 터 져라 비명을 질러야만 했다. 자유로운 손으로 그 발을 할퀴기도 하고 몸을 비틀기도 하며 그 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지만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었 고 오히려 그 행동은 나의 고통을 가중시키기만 했다. 그 썩을 놈은 그 가 냘픈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을 과시하고 있 었던 것이다. “그…그만둬!! 이 도마뱀 자식!!” 시끄럽게 비명을 지르면서도 나는 금방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판별할 수가 있었다. 에르가 형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떨리는 몸을 간신히 억제하며 드래곤을 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숨을 몰아쉬며 서있던 형은 내가 감동을 느끼고 말고 할 새도 없이 곧장 파충류 자식에게로 달려 들었다. 곧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둔탁한 소음이 들려와 나는 그대로 기뻐하고 나자빠져 있을 수만은 없었다. “흐…컥!!” 에르가 형이 짧게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공중에 붕 뜬 모습이 나의 눈에 순간적으로 각인 되었다. 계집의 탈을 쓴 드래곤이 자식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른 스피드로 형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고 그 위력이 얼마나 어마 어마했던지 상당한 무게의 갑옷을 입고 있는 형이 저렇게 공중에 뜨게 된 것이다. 쿵!! “참견하지 말거라.” 그 모습은 아주 순간이었고 곧 형은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놈은 마치 숙련된 무술가 처럼 안정된 자세로 주먹을 쥐고 그 모습을 보다가 또 한번 그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저 고저 없는 목소리는 영영 바뀌지 않을 듯하다는 짜증이 몰려왔다. 놈은 몸을 비틀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미 흙과 눈물로 범벅인 나 를 보며 물었다. “아직도 말할 생각이 없는가?” “헉…흑…아흑…….” 나는 우는지 신음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나는 간신히 그 놈의 얼 굴을 올려다보았다. 도저히 지상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그 반반한 면상을 보자니 저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내 어깨를 찌른 빌어먹을 놈에 대 한 화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와 그렇게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나는 울면서, 그렇게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잔뜩 메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 다. “흑…크흑… 네 놈 따위가… 네놈 따위가 알 수 있을 것 같으냐… 빌어먹 을… 네놈 따위가!! 너 같은 놈이!! 겨우 기형 도마뱀 주제에! 흑… 내가 말한다고… 너 같은 게 알 수 있을 것 같으냔 말이야!! 이 죽일 놈의…훌 쩍… 자식아…….” 말을 하자 더더욱 눈물을 쏟아져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왼쪽 어깨가 너무나 아팠다. 그리고… 그리고 너무나 억울했다. 지금 내가 저 드래곤에게 이 모 양 이 꼴로 당하고 있는 이유가 그 무엇도 아닌 환생, 전생 때문이라는 것 이 더더욱 억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유야 어찌 됐든, 목놓아 엉엉 울고 싶을 정도로 무지하게 억울하고 서러웠다. 서럽고 서러워서 자 꾸 자꾸 눈물이 터져 나왔고 덕분에 나는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자박. 문득 그 빌어먹을 놈이 다가오면서 내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깨닫 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서럽니 어쩌니 하면서도 역시 아픈 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원래 이렇게 웃기지도 않는 짜증스런 놈이다! 어쩔 테냐!! 어 쩔 거냐고!! 이런 빌어먹을! 빌어먹을!!!! 내가 알 수 없는 대상을 상대로 계속 속으로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사이에 그 놈은 나의 가까이로 다가와 왠지 상냥한 손길로 나를 일으켜 앉혔다. 하지만 상냥한 손길이니 뭐니 해도 나는 어깨 때문에 아파 죽을 것 같았 고, 그 상냥한 손길에 짜증을 느꼈으면 느꼈지 고마움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크아악!” 아니나 다를까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이 내 어깨 깊이 박혀 있는 단검 을 한번에 뽑아냈고 나는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며 나를 일으키기 위해 안고 있다시피 하던 그 놈의 품에 얼굴을 확 파묻었다. 그 러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너무 괴로워서 아무 데나 머리를 쳐 박고 싶 어서 그랬던 거다. “윽…크윽…으윽…….” 어깨에서부터 온몸으로 짜릿하게 전해지는 고통을 참기 위해 나는 피 맛이 날 정도로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모자라 계속 그 놈의 품에서 머리를 꾹꾹 짓눌렀다. 그 때 또 한번 왼쪽 어깨에 그놈의 손 이 느껴졌다. 나는 크게 몸을 움찔했다. 또 무슨 짓을 할까 싶어 몸이 본능 적으로 그 손에 경계를 표한 것이다. “……?!” 그렇지만 어깨에서 느껴진 건 고통이 아니었다. 그냥 세게 움켜쥐고 비틀 기라도 할 줄 알았던 놈의 손에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기운이 감돌고 있 었다. 그 따듯함은 조금 전에 느꼈던 고통만큼이나 빠르게 온 몸 구석구석 으로 전해지면서 잔뜩 굳어진 내 몸을 풀어주고 있었다. 그 따뜻함이 완전 히 사라지고 나자 그 놈이 나를 슬며시 떼어냈다. 문득 내가 왜 저런 놈에게 안겨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고통이 가시고 나자 인간이 또 한번 맛이 간 것이다. 왜 이렇 게 고통이 가셨는지에 대한 의문에는 아주 조금도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용서해다오.” “…뭐……?” 내내 살기 등등하게 검을 휘두르던 놈이 아니 실상은 전혀 살기 등등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그 자식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놈은 무릎을 꿇고 있으면서도 전혀 비굴해 보이지 않는, 뭔가 알 수 없는 기품을 풀풀 풍기면서 입을 열었다. “네가 옳다. 십만 년의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알지 못했던 사실을 너의 입 에서 몇 마디 말을 듣는 정도로 깨닫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테지. 삼 백 년 동안 생각 없이 은둔했던 것이 나의 머리를 굳게 만들었나보구나. 나를 용서해주겠는가.” “…….” 나는 조금 멍해졌다. 하지만 이렇게 멍한 상태에서도 차마 네놈을 용서해 주겠다는 말을 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직도 어깨의 아픔이 잔상처럼 남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난 하지마. 남의 어깨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고 용서해 달라면 다야!? 설마 힐을 써줬으니 쌤쌤이다 라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 이 죽일 놈아!!” 나는 곧 본능이 시키는 대로 입을 열고 바락바락 놈에게 대들었다. 갑자기 간이 팅팅 붓기라도 했는지 그렇게 당하고도 계속 그 지고한 존재의 앞에 서 무례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직까지 제 정신이 돌아오 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스스로 자신이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서도 왜 계속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몸이 저절로 이 렇게 움직이는 건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는 물론이거니와 너의 병사들에게도 손을 대지 않겠다. 이것으로는 어 떤가.” 그러나 다음으로 이어지는 그 놈의 말에 바락바락 대들던 나는 입을 꼭 다 물었다. 어느새 나는 빠른 속도로 스스로의 몸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고 있 었다. 그만큼 그 제안은 너무나 솔깃한 것이었다. “정…말?” 나는 놈을 살짝 올려다보며 물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띨띨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으나 그 놈은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이 산을 터전으로 삼지 않을 것이니 그럴 필 요도 없어졌다.”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그 계집으로 둔갑한 드 래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너를 보고, 너를 들으며 내가 스스로 느끼고 깨닫겠다. 사실 애초부터 그 것이 깨달음을 얻는데 있어 가장 당연하면서도 바른 방식이니까." "뭐…뭐? 나…를 따라다니겠단 뜻이야?" "그렇다." "내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지켜보겠다고?" "그렇다." 나는 그놈의 말을 듣고 좀 멍해졌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멍청한 짓만 하던 내 머리가 갑자기 불꽃이 튈 정도로 재빠르게 돌아가며 그에 대 한 대응책을 내놓고 있었다. "나를 통해 깨달음을 얻겠다면서 그냥 넘어갈 생각은 아니겠지?" "너의 군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장난해? 그건 내 어깨에 구멍을 뚫어 놓은 대가잖아!! 십 만년을 살 았다는 놈이 설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아니겠지?" 내가 소리를 꽥꽥 지르며 대들자 드래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가 곧 천천 히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의 그 고문 비 슷한 걸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현재의 나는 그런 것을 모두 초월해 있었다. 나는 북서쪽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올리며 크게 말했다. "북서쪽 리아 영지 경계에 있는 관문에 너의 그 드래곤 피어 겸 브레스를 두세 방 뿌려버려! 어차피 네겐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겠지?" "거절한다." 그러나 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드래곤 놈이 입을 열었다. 내가 눈살 을 확 찌푸리자 그 놈이 자신의 몸에 둘러진 내 망토를 손으로 다독이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여전히 그 재수 없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내게 있어 피어를 쓰는 것은 그저 격한 숨을 내쉬는 정도에 불 과하다. 또한 조금 전에 사용한 그 브레스조차 최대한 힘을 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의 요청을 거절한다." "무슨 소리야?" "나의, 드래곤의 힘은 단 며칠만에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수 있을 정도 로 너무나 강대하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같은 드래곤에게 극도로 무관심하 며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일조차 드물기 때문에 타종족 처럼 서로 힘을 쓰 며 충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드래곤들이 무분별하게 타종족 과의 이해관계에 얽히게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어느 순간 분명히 우리들 은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 때가 올 것이며 결국 전투가 벌어지게 되겠지. 너는 드래곤들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있는가?" 나는 그 말에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과 같은 브레스와 8,9서클 마 법을 동시다발로 날려대며 싸우는 거대한 생명체 같은 건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의 요청을 거절한다. 그것은 스스로와의 당연한 약 속이며, 우리 일족의 영원한 깨달음이자 맹세다." "맹세 좋아하시네. 조금 전에 네가 죽인 이만의 병사는? 그리고 지금 죽이 려 했던 만 명에 가까운 아군의 병사는 인간이 아니냐? 벌써 타 종족의 일 에 간섭을 했잖아." 나는 그 말을 듣다가 곧 입을 이죽이며 태클을 걸었다. 드래곤이 무슨 말 을 하려는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언젠가 다가올 지 모를 먼 미래 세계의 멸망 같은 것을 일일이 생각하며 살만큼 내 삶은 그렇게 여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이 세계에 살아가는 이상 타 종족과의 완전한 단절은 있을 수 없다. 이번 일은 삼 백년 전부터 살아왔던 나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이 었을 뿐이다. 실상 나는 다른 인간들이 이 산에서 과실을 따거나 나무를 베어 가는 행동에 제재를 가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단지 너희들이 도를 넘 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내가 나선 것이다." "…나를 뒤쫓겠다며? 그건 불가항력이 아닌 너의 의지잖아. 그것도 간섭 아니냐?" "드래곤으로서 타종족과의 접촉을 않는 것이 기본 원칙이기는 하나, 나 역 시 삶을 살아가는데 최소한의 행동을 할 권리는 있다. 그 최소한의 행동이 너를 지켜보는 일이다." "헛소리 마!! 이유 따윈 다 집어치우고 어쨌든 결론적으로 내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는 거잖아! 내가 미쳤냐? 너 같은 변신 기형 도마뱀에게 공짜로 내 모든 것을 보여주게?"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질러댔다. 사실 드래곤이 스토킹(?)하겠다면 스 토킹(?)하는 것이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그것을 말리겠는가. 하지만 그 럼에도 조금 전부터 나는 완전히 막나가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스스로가 미쳐버렸나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상은 눈앞의 드래곤이 아무리 막나가도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을 깊은 곳으로부터 깨닫고 있었기에 그 랬던 모양이다. "너에게서 깨달음을 취해 가는 대신 한가지 대가를 치르마. 내 숨이 붙어 있는 한은 네가 죽음의 위협에 시달리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 "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너는 오래 살아봤자 앞으로 50년이겠지. 사실 진정한 깨달음을 얻기에는 너무도 짧은 기간이다. 그럼에도 네가 중간에 살해라도 당해 죽어버린다면 조금 곤란하다. 그러니 내가 그런 일이 없도록 지켜 주겠다." "뭐야? 결국 저 좋으라고 하는 거잖아!! 대가라면 당연히 내가 원하는 것 으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아직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지만 일단 너는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살 고싶어했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너를 지킨다면 너의 군은 지휘관을 잃을 상황에서, 순식간에 패배를 할지도 모르는 불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 게 된다. 그것을 생각해 본다면 상당한 대가가 아닌가?" "그……!! 조…좋아! 나를 지켜주겠다면 수도로 날아가서 나를 노리는 놈들 을 싸그리 없애 버려. 그게 결국 나를 지키는 일이 될 테니까!" 내 말에 도마뱀 자식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까는 것으로 감정 표현을 했다. 무슨 감정 표현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 한심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심히 유쾌하지가 못했다. 어쨌든 그 놈은 다시 나를 바라보며 찬찬히 말을 이었다. "너에게 직접적으로 검을 들이대는 자, 너에게 직접적으로 독을 먹이려는 자. 나의 간섭은 거기까지로 끝낼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곤란하다. 어떤 방식으로라도 너의 군대의 일에 나를 끌어들일 생각은 말아라. 현재의 이 인간의 모습으로 너라는 존재, 그 자체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행동 외에 는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단지 강력한 호위기사를 하나 두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실 이 정도도 지나친 접촉이라 생각하지 만 최대한 너의 입장을 고려하여 제안하는 것이다." "아, 빌어먹을! 완전히 저 좋을 대로 아냐!! 그래, 너 대단한 드래곤이다!! 제가 어찌 감히 당신의 말을 거역하겠습니까!! 위∼대하신 드래곤이시여!!" 나는 고개를 홱 돌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물론 내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것, 엄청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에 둘도 없는 지고한 존재인 드래곤을 주변인으로 둘 수 있다는데 겨우 그 정도밖에 단물을 빼먹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나를 짜증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죽네사네 하던 상황이 이렇게까지 뒤집어졌으니, 충분히 감지덕지하 며 감동의 눈물을 흘릴 만도 했건만, 나도 간사한 인간인지라 그렇게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저 도마뱀의 힘을 사용하면 아무리 아군의 병력이 딸 려도 단 하루만에 승리를 거둘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문득 아군의 대부분의 병사가 그 드래곤 피어의 공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의 살아있는 모 든 인간들이 흙먼지로 엉망이 된 몸을 추스를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약 간씩 입을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하나같이 경 이로움과 존경, 그리고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열렬한 충성심 같은 것 이 철철 넘쳐흘렀다. 아마 그 위대한 존재인 드래곤에게 큰소리를 꽥꽥 질 러대는 내 행동에 찡하게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아 니라 다른 사람이 이렇게 건방지게 땍땍거려도 이 드래곤은 웬만해서는 눈 도 깜짝 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을 받아넘기지 않을까 싶다. "아……." 나는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짧게 탄성을 지르며 드래곤이 서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소리쳤다. "나를 지키겠다고 했지?" "그렇다." "그렇다면 맹세해. 저 인간들 앞에서! 이 성의 주민들 앞에서! 이 나라의 모든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네가 나를 지키겠다고!! 내가 너의 맹세를 믿을 수 있도록 드래곤의 모습으로 만인의 앞에서 맹세해라!!" 드래곤은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그것이 불쾌함의 표현이라는 것을 충분 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 아랑곳 않고 소리쳤다. "뭐야? 설마 드래곤은 거짓말은 안 한다 라는 웃기지도 않는 말로 때우려 는 생각은 아니겠지? 너같이 위대한 존재에 비하면 나는 벌레 같이 미천한 존재에 불과하니, 네가 등쳐먹고 홀랑 튀어버려도 나는 대책이 없잖아! 그 러니까 내가 완전히 너를 믿을 수 있도록 인간들 앞에서 얼굴 도장을 찍으 란 말이다!" "……." 지금까지와는 달리 드래곤은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대신 기분 나쁘다는 뜻인지 눈을 약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래서 주변은 마치 돌덩이가 깊은 호수의 바닥으로 가라앉듯 무거운 침묵에 빠져버렸다. 하지 만 그 침묵 이상으로 팽팽한 긴장이 주변을 감돌았다. 애초부터 인간의 일 에는 최대한 상관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드래곤이다. 그러니 이렇게 계속되는 나의 억지에 화를 내거나 아예 모든 것을 그만두겠다고 말할 지 도 모른다. 문득 몸에 작게 닭살이 돋는 것을 깨달았다. 드래곤이 어떤 말 을 할지, 어떤 반응을 보일 지에 대한 상상이 어느새 몸을 미칠 듯이 예민 하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삼 백년……." 굳게 다물어져 있음에도 어딘지 모를 우아한 곡선을 그리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삼 백년 만이었다……. 또 다시 목적을 가지고 이 몸을 움직 일 수 있도록, 그 동기를 가져다준 너에게… 지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단 한번, 이용당해 주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붉은 눈동자를 나를 향해 똑바로 고정했다. "이름이 무엇인가?" "카,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 잔뜩 긴장해 있다가 갑작스럽게 날라 온 질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물 음에 답했다. 그 말을 끝나기가 무섭게 드래곤이 자신의 몸에 둘러진 내 망토를 확 벗어내며 사람들이 없는 아래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황홀한 나신에 얼굴을 붉힐 새도 없이 그녀는 점차 부풀어오르며 순식 간에 거대한 존재가 되어갔다. 막 화로에서 나와 잔뜩 달구어진 검신 만큼 이나 새빨간 비늘이 온 몸을 덮으며 어느새 본디의 모습을 되찾은 그 존재 는 단숨에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거대한 존재의 격한 움직임에 흙먼지를 동반한 엄청난 강풍이 일어날 만도 했지만, 처음 저 드래곤이 나타날 때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의 주변은 이상할 정도로 너무나 잔잔했다. 그 순간 나는,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그것이 저 위대한 존재의 우리들 을 위한 깊은 배려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들에게 고하노라!!』 "크흐흑!!" 나는 순간적으로 귀를 막으며 크게 신음했다. 그렇게 신음하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의 그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그 소 리가 닿는 곳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귀를 쥐어뜯다시피 하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 카뮤르·카이야는 목숨이 다할 때까지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 을 지킬 것이다!! 나의 숨이 붙어 있는 한 그 어떤 존재도 결코 그를 해하 지 못하리라!!』 어마어마한 그의 목소리가 천지를 격하게 진동시켰다. 순간, 나는 깨달았 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 같은 것과는 달리, 웬만해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저 먼 곳에까지 퍼지게 되리라는 것을. "후…후후……." 『나 카뮤르·카이야가 고하나니……!!』 "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귀청을 때리는 그 지독한 파동에도 아랑 곳 않고 목청을 다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미칠 듯한 자극을 도저히 참 을 수가 없었다. 아니, 참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혀 자지러질 듯한 광소를 터뜨렸다. 수많은 일의 원인이 되었던 그 환생이란 것이 드래곤이라는 지고한 존재에까지 인연을 닿게 해주었는데 어찌 우습 지 않으랴!! 그로 인해 다시 한번 주도권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어 찌 즐겁지 아니하랴! 『이 세계에 발을 붙이는 모든 생명체들이여!! 나의 숨이 다할 때까지 카 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을 해하지 못하게 하리라!! 그것은 거짓 없는 영원한 나의 맹세이다!!』 "하하하하…큭큭… 하하…아하하하하하하하하!!" "카…카…류……." 너무 고개를 젖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면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터 뜨리던 나에게 놀랍게도 희미하게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조금 전에 드래곤에게 얻어맞고 땅에 처박혔던 에르가 형이었다. 형은 드래곤의 조금 전의 타격과 이 거대한 고함소리로 인해 새파랗게 질려있으면서도 잘 도 그 입술을 움직여 나를 부른 것이다. "힉…히힉…히히히… 혀…형…하하하하…아하하하… 자…잠깐…나…지금… 하하하……." 형을 향해 뭐라 말을 전해주고 싶었지만 너무 우스워서 말을 이을 수가 없 었다. 나는 계속 배를 잡고 눈물까지 찔끔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 아도 큰 소음이 나의 귀를 마비시키고 있는데다가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 린 바람에 균형감각이 무너져 한두 발자국 뒤쪽으로 뒷걸음질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의 어깨를 잡는 것을 느꼈다. "이런 소음 속에서도 웃는 생명체는 네가 유일할 듯 싶구나.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이여." "큭…크후후후…하하하…아하하…그래……? 키히히힉……." 어마어마한 소리에도 귀를 막지 않고 낄낄거리던 나였기에 귀가 굉장히 얼 얼하여 그 드래곤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겨우 주워들 은 몇 개의 단어로 대강 추측하여 그의 말에 답했다. 얼마나 심하게 웃었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나는 고개를 돌 리고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그걸로도 모자라 상당시간 심호흡을 한 뒤에 야 겨우겨우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렇게 웃음을 멈추게 되자 나는 목 청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후…후우… 카류라고 불러. 음… 그렇게 길게 부르면 피곤하지 않아?" "그다지 피곤하지 않다." 보통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미친놈 이상으로는 봐주기 힘들 듯한 내 행동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그 드래곤은 참으로 썰렁한 반응을 해왔 다. 하지만 충분히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인지라 나는 애초에 그랬던 것처 럼 그 지고한 존재에게 하고 싶은 대로의 말을 줄줄 해내기 시작했다. "내가 피곤하니까 카류라고 불러. 아, 그리고 너는 카뮤르·카이야라고 했 던가. 카뮤르가 이름이고, 카이야가 성이야?" "드래곤에게는 서로의 소속감을 나타내기 위한 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 는다. 나를 칭하는 단어가 바로 카뮤르·카이야다." "…아니, 그러고 보면… 카뮤르라는 거 어디선가 참 많이 들어본 이름 같 은데……." 나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리고 나보다도 키가 큰,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을 한 드래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세레스트 성산(聖山)의 카뮤리안하고 무슨 관계라도 있냐? 카뮤리안이 죽은 시기와 네가 살았다는 시기도 일치하고 말이야." "카뮤리안이 바로 나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움찔했다. 혹시나, 설마설마했는데, 정말이라니……. 그러나 금방 정신을 추스른 나는 또 한번 빈정거림 모드로 돌입하여 입을 삐죽거렸다. "무엇 때문에 영웅놀이를 한 거지? 역시 너도 인간들에게 떠받들어 지는 것이 좋은 건가?" "단지 이덴과 다른 동료들과 여행을 다니다가 때마침 미쳐버린 드래곤 나 뮤르·나이야를 만나 우연찮게 그를 퇴치하면서 영웅으로 추대된 것일 뿐 이다. 무엇보다 카뮤리안이 9서클의 마법사이며, 검사이긴 했지만 어디까지 나 한계를 가지는 인간이었다. 카뮤리안은 카뮤르·카이야지만, 카뮤르·카 이야가 아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 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어 나는 약간의 겸연쩍음에 손을 입술 쪽으로 가져오며 조금 입을 열었다. "혹시… 나뮤르·나이야라는 드래곤… 네 가족이었어?" "나뮤르·나이야는 테뮤르·테이에의 아이다. 한가지 말해두자면 타 종족 과는 달리 드래곤에게 있어 핏줄이란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드래곤의 언어에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단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에에, 그래? 그런데 들어보니 드래곤들은 이름이 전부 비슷한 식으로 쓰 이는 거 같은 데 혹시 아뮤르·아이야 이런 것도 있어?" "리샤스 왕국의 달룬샤 사막에 아뮤르·아이야라는 이름의 지룡(地龍)이 살고 있다." "혹시 이름의 앞부분은 남자 모습을 할 때 쓰고, 뒷부분은 여자 모습을 할 때 쓰기 위해 그렇게 짓는 거야?" "단지 의미 없는 관습일 뿐 그렇게 쓰기 위해 만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드래곤이 그런 식으로 쓰고 있긴 하다." 조금 전부터 쓸데없이 계속되는 나의 질문 러쉬에도 그 드래곤은 무척이나 성실하게 진지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이 정도면 짜증을 부릴 만도 하건 만 그 담담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하긴, 처음부터 이 녀석은 이런 식이었으 니까. 아마도 그녀는 그 오랜 옛날부터 이런 식이었으리라. 그리고 아마… 나라는 존재가 죽어 그 육체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의 먼 미래에 가서도… 마치 내 머리 위의 하늘이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런 목소리를 내고 있을 것이다. 우리들 같은 인간들과는 달리……. "어쨌든 그렇단 말이지……."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눈동자를 살짝 드는 것으로 시야를 넓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얕은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산바람과는 달리 뜨겁고, 불쾌한 눅눅함까지 담겨진 바람이었다. 그럼에도 그 가운데의 드래곤은 아무런 반 응을 내보이지 않고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새하얀 얼굴을 한 채로, 그 어떤 자극에도 영원히 그러할 것만 같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었다. 단지 가늘 고 길다란 붉은 색의 실타래가 바람의 결에 내맡겨져 조금씩 흩날릴 따름 이었다. "카뮤르·카이야, 카이야… 카이야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곳 에서 아름다운 그녀를 보았다. 망설이지 않고 똑바로 앞을 향하는 눈동자 를, 순식간에 진실을 꿰뚫을 것 같이 날카롭지만 세상의 그 어떤 추한 것 도 전부 담을 수 있을 것만 같이 깊디깊은, 그런 붉은 색의 눈동자를 보았 다. "카이라고 불러도 좋을까?" 그리고 어느새 나는 생각지도 않은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2 비오던 날 창 밖을 바라보기 위해 옮긴 나의 시야를 뿌연 물안개가 흐릿하게 방해하 고 있었다. 그 물안개는 굵은 빗줄기가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그 비는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고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추 적추적하니 내리며 땅을 적시고 있었다. 덕분에 내 옷은 물론이거니와 온 저택이 지독한 습기로 가득 차 눅눅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불쾌함 은 느끼는 자는 상당히 드물었다. 여름 동안의 미칠 듯한 갈증을 말끔히 해소시켜주고 있는 비를 보고 화를 낸다면 아무래도 좀 문제가 있는 놈이 리라. 그렇지만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그런 문제 있는 인간들이 꽤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바로 트로이 후작이나 게릭 등의 국왕군 패밀리들이 바 로 그들이다. 이번 비는 일전의 세레스트 성에서 화룡 카뮤르·카이야가 나를 지키겠다 는 공표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린 것이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카이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은 국민들이 긴가민가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고대하 고 고대하던 비까지 내렸으니 이 절묘한 타이밍의 기적을 경험한 왕국의 백성들이 나에 대한 인식을 바꾸기에는 차고도 남을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비를 헤치며 휴나르 성으로 입성한 나는 더 이상 하늘을 노하게 하여 아르 윈 왕국에 저주를 가져온 악마가 아닌, 드래곤의 가호를 받아 마른 대지에 비까지 내리게 만든 신성한 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이 가능하겠지만 이 비는 우리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준 만큼 국왕군에게 불운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국왕군은 세레스트 성을 간단 히 점령한 후, 그들 3만의 군과 합세하여 휴나르 성으로 치고 들어올 작전 이었던 모양이었으나 하필 그곳에 카이가 사는 바람에 3만의 군대를 홀랑 까먹고 만 것이다. 물론, 실제로 죽은 것은 1만이 조금 넘는 수에 불과하지 만 나를 가호하겠다고 소리치는 드래곤의 모습을 직접 보고도 다시 국왕군 에게 돌아가려 한 병사들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군대를 허 무하게 잃은 것만으로도 억울한 판인데, 순식간에 나에 대한 세간의 평판 까지 뒤집어지지 않았던가. 게다가 이런 우기(雨期)는 군사들을 움직이기에 도 적절치 않은지라 국왕군의 군대는 제1방어선에서 아직까지 움직 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이 상황이 그들에게 유쾌할 수가 있겠는 가. 아무리 아르윈 왕국의 대지를 회생시키는 기적의 비라고는 해도 그것 을 보고 좋아라 하는 것은 나라도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다. "……."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창에서 거실의 안쪽으로 시선을 옮겨 그곳을 한번 죽 둘러보았다. 그리고 침묵에 빠진 사람들을 보고 한숨을 폭 내쉬었 다. 여전히 군사적으로 열세이긴 하나 아군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명분을 어느 정도 되찾은 셈이 되었으니, 원래부터 상당히 가족적인(?) 분 위기의 아군인 만큼 지금쯤이면 왁자지껄하게 떠들 만도 했다. 그러나 오 랜만에 아는 사람들끼리 여유를 갖고 단출하게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를 즐기기 위해 모인 이 방은 상당히 고요했다. 나는 그들을 죽 둘러보다가 에르가 형마저 약간의 긴장한 자세를 취하고 있음을 보고 머리를 긁적였 다. "제발 긴장 좀 풀어요. 제가 몇 번이나 그렇게 굳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잖 아요. 특히 에르가 형, 그 포즈가 얼마나 웃긴 줄 알어? 그렇게 움츠려 있 지 말고 어깨 좀 펴봐." "시끄러… 네 놈이 이상한 거야……." 에르가 형은 여전히 굳어 있으면서도 끝끝내 입을 열어 내게 짜증스런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아름다운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리석처럼 새하얀 피부를 살짝 덮는 새빨간 머리카락으로 고혹적인 매력을 풍기고 있었지만 반면 신성한 성자처럼 깊이를 모를 정도의 기품도 동시에 풍김으로서 그저 미인이라 불 리는 자들과는 다른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화려한 외모에 비해 그 몸을 덮고 있는 옷은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드레스 가 아닌 간단한 셔츠와 바지였으며, 또한 가느다라한 허리에는 부담스러워 보일 정도의 장검이 달려 있었다. "카이, 어깨에 힘 좀 빼면 안돼? 너 때문에 전부 굳어 있잖아." 내가 그녀,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화룡 카뮤르·카이야를 향해 퉁 명스레 한마디를 내뱉자, 주위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온갖 제슈쳐와 원망 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뜻을 전해 왔다. 카이를 만난지도 꽤나 시간이 흘렀건만 여전히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드래 곤이라는 사실에 끝없는 존경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류 스밀리온은, 지금 내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원래의 하늘 무서운 줄 모 르고 무례의 극치를 달리던 그 류스밀리온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예 를 갖추고 있었다. 하긴, 그의 경우에는 꼭 무서워서라기보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거의 신과도 같은 존재인 드래곤을 직접 대면했기에 그런 것이겠지 만…….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저절로 한숨이 폭 나왔다. 사실 카이는 상상 속의 드래곤과는 달리 엄청나게 자비로운 성격을 가진지라 저렇게 두려워 할 필 요는 없으니, 지금과 같은 행동은 너무 과잉의식인 것이다. 지금만 해도 머 리에 피도 안 마른 애새끼―물론, 카이의 입장에서―에 불과한 나 같은 놈 이 반말을 찍찍 쓰고 있는데 그냥 내버려두고 있지 않은가. 문득 카이의 작은 움직임이 느껴져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시선을 고정했 다. 주변 사람들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가만히 팔짱을 낀 채로 눈을 감고있 던 카이가 내 말에 듣고 겨우 다시 눈을 뜬것이다. 그녀는 언제 봐도 신비 로운 붉은색 눈동자를 내게로 고정시키며 입을 열었다. "딱히 나를 의식하고 예를 차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면 되겠는가?" "응! 바로 그거야. 역시 드래곤!! 한번에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봐요, 본인 이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잖아요." 나는 카이를 향해 저 좋을 대로 나불나불 말하다가,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제발 긴장 좀 풀라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특히 몇몇 사람들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송 글송글 맺힌 식은땀을 슥 닦기까지 했다. 내 말투가 좀 많이 건방진 탓이 리라. 확실히 내가 카이를 대하는 태도는 좀 심한 감이 없지 않다. 다른 사람들 처럼 그렇게 기 죽어있을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십만년이나 산 위대한 존재이니 조금쯤은 예를 취해주어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나 는 여전히 그녀를 옆집 친구 대하듯 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있었다. 사실 지금 이 말투와 행동은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여러 복합적 이유(?) 로 쓰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이후로도 카이가 딱히 나의 말투에 제동을 걸지 않았기에 어쩌다 보니 이렇게 말투를 계속 고수 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니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 나는 도로 눈을 감아 버린 카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한동안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 다가 손을 입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기형 변신 도마뱀." 작은 목소리였지만 원체 조용한 방이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갑작스레 딸꾹 질을 하고 헛바람을 삼키는 둥의 행동으로 자신이 무지하게 놀랐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그 말의 당사자인 카이는 다시금 천천히 눈을 뜨고 무표정을 유지한 채 말했다. "왜 그러지?" "……." 그 변함없는 반응에 나는 조금 멍해져서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다시 정신을 수습하고 약간 흥분하여 입을 열었다. "열 받지 않아? 이런 모욕을 받고 화나지 않냐고. 세레스트 산에서야 상황 이 상황이니 만큼 그냥 넘어갔다 손 쳐도 말이야." "현재의 네가 나를 모욕하기 위해 그런 말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확실히 하자면 그 말은 틀린 말도 아니다." "틀린 말이 아니라고? 자신을 그런 하찮은 도마뱀과 비교한단 말이야?" 나는 거의 경악에 가까운 심정으로 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카이 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들은 도마뱀에서 기형적으로 나뉘어진 종족이며, 현재의 나는 변신을 하고 있으니 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도마뱀 역시 이 세계를 이 루는 하나의 훌륭한 생명체다. 이 세계에 하찮은 생명체 같은 것은 존재하 지 않는다고 말해두고 싶군." "…그…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너만큼 강한 존재가 되면 아무래도 자신이 가장 고귀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법이잖아. 인간만 해도 스스로가 만 물의 영장이라고 으스댔었고……." 나는 거의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카이를 힐끗 올려다봤다. 물론 예전에도 눈앞의 그녀가 지고한 지혜의 생물이라는 것을 마음 속 깊이 느끼고 있었 지만 그 말을 듣자니 새삼스레 그 사실이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그런 감동보다는 말초적인 호기심을 훨씬 더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몇 마디를 던지고야 말 았다. "그럼… 여보셔요, 바보 드래곤 씨." "쿨럭!!" "푸웃―!!"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격렬한 기침소리와 추하게 마시던 차를 뿜어내 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그런 모든 것을 무시하고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녀는 곧 속눈썹 을 약간 깔았다. 그런데 왠지 그 표정이 불쾌하다기보다는 정말 한심한 놈 이라고 통탄하는 듯한 느낌이어서 나는 괜한 짓을 했나 싶은 마음에 약간 의 쪽팔림을 느껴야만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미…미안… 그냥 좀… 정말 화를 안 내는지 궁금해서……. 근데 원래 드 래곤들은 그렇게 인간성이 좋아? 나 같으면 이렇게 어린놈이 반말을 찍찍 하고 대들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을 텐데……. 예전에 내 어깨에 구멍을 뚫었던 것도 내가 건방진 말을 해서라기보다는 묻는 말에 대답을 안하고 버텼기 때문이라는 느낌이 강했거든." 나는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괜히 뺨으로 손을 가져가 긁적 거렸다. 그러자 웬 일로 카이가 나를 향하고있던 시선을 아주 조금 옆으로 옮겼다. 항상 대화를 할 때는 상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던 그녀였기에 나는 뭔가 특별한 말이 나올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그 정도로는 그다지 화가 나지 않는다." "헤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저렇게 오래 살면 자연히 인간성이―조금 전 부터 걸리는 건데 이거 용성이라고 해야하는 건가?―좋아지는 건가하는 생 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는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계속 입을 열었 다. "그리고… 그다지… 기쁘지도 않다. 그다지 슬프지도 않다. 그다지 즐겁지 도 않다. 단지 그것뿐이다." "어…째서?" "너도 만년 정도 살아보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나는 뺨을 긁적이던 손을 내리고 다시 무표정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긴 십만 년이나 되는 세월동안 못해본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말 이 십만 년이지 그게 어디 보통 세월인가? 게다가 최강의 힘을 자랑하는 종족이니 만큼 이루어지지 않는 일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인 생이 엄청나게 권태로울 만도 하겠지. "그러고도… 어떻게 지금까지 살았어?" "십 만년 동안 딱히 죽을만한 분명한 명분이 없었다. 죽지 않았으니까 살 아있는 것이다." "……." 그녀의 말이 끝나자 원래부터 조용했던 방안이 더욱 조용해지며 밖에서 들 리는 빗소리가 더욱 커지는 듯한 착각을 가져왔다. 꼭 죽을 명분이나 찾는 것 같은 뉘앙스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도 있고, 그리고 나름대로 다시 분위기나 띄워볼까 하는 취지에서 다시 말을 걸어보 았다. "그럼 말이지∼ 나나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너를 모욕해도 화를 안낼 거라 는 소리야? 그럼 나 함부로 막말을 해도 돼? 그렇게 한다?" "…화가 나지는 않지만 화를 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너 의 행동이 정도를 넘는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번에 카이가 한 대사는 어찌 들으면 약간 살벌한 말이었다. 그러나 말을 하기 전에 운을 띄우는 동안 약하게 한숨을 내뱉는 것으로 이렇게 한심한 놈도 따로 없을 거라는 식의 표현을 함으로서 분위기를 그렇게 굳게 만들 지는 않았다. 나는 그 모습에 슬쩍 웃다가 손으로 턱을 괴었다. "후후, 농담이야. 설마 이 이상으로 무례해 질까봐. 그런데 결론적으로 넌 의무적으로 화를 낸다는 뜻이구나. 정말 화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 는 건 정말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지만, 어떻게 생각해보면 너 같은 경우 도 나름대로 고달픈 일일 것 같아." "……." 그녀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그녀에게 있어 이 문제는 나름 대로 민감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구한 세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힘 을 소유한 종족이니 만큼 그들에게도 고민이란 것은 없을 것으로 생각했지 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든 조금 전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은 조금 긴장이 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 나 에르가 형이었다. 형은 창 밖을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비도 정말… 끝발나게 오는군. 이걸로 가뭄이 완전히 가셔서 가을 추수에 큰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군." "에르가 형은 요즘 들어 점점 더 어른스러운 말을 하는구나. 내가 정말 뿌 듯하다니까." "동감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먼 곳에 앉아 계시던, 에르가 형의 아버지인 카나스 님이 농담조로 나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담을 가장한 카나스 님 의 말에 정말이지 징∼한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미미한 웃음을 지으며 조금씩 얼굴을 펴기 시작했고, 딜티 는 작게 소리내어 웃기까지 했다. "…제길……." 분위기를 띄우는데 희생타가 된 에르가 형은 평소처럼 화를 내고 싶었던 모양이었지만 카이 때문인지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딱 한마디만을 내뱉 었다. "카류… 곧 네 생일이잖아. 이번에는 성인식도 겸하게 되는 중요한 날인 데……." 약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프리란트 님의 곁에 조용히 앉아있기만 하 던 히노 선배가 작게 말했다. 그녀는 카이가 나와 함께 휴나르 성으로 온 뒤로 눈에 띄게 우울한 얼굴을 하며 말도 잘 하지 않고 있었다. 언제 시간 을 내어 히노 선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휴나 르 성에 도착한 뒤부터 여러 가지 일로 굉장히 바빠서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그녀가 정말 오랜만에 입을 연 것이다. 내가 조 금 반가운 마음에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갑자기 프리란트 님 이 깜짝 놀라 선배의 말을 끊고 내게 용서를 빌었다. "아, 죄송합니다. 카류 님! 원래대로라면 지금쯤은 세레스트 성에 계실 것 으로 생각되어 그곳 성주에게 맡겨놓은 일이었는데… 이런, 지금부터 파티 준비를 해도 시간이 많이 부족하겠군요." "아닙니다, 프리란트 님. 전시인 걸요. 그냥 조촐하게 하세요. 그러잖아도 돈이 부족한데 그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퍼부어야 되겠어요?" 나의 말에 프리란트 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때인 만큼 제대로 된 파티를 열어야 합니다. 허영 이라 생각하실 지도 모르지만 원래 대외적인 눈을 생각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아군의 상황이 크게 호전된 만큼 더욱 화려한 파티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흐음, 그것도 그렇겠군요. 무엇보다 이런 모습을 보면 국왕군이 상당히 배 가 아프겠지요?" 나는 트로이 후작 등의 모습을 상상하며 킥킥거리다가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괜히 실실거리며 입을 열었다. "카이, 그날 네가 사람들 앞에 드래곤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한번만 더 나 를 지킨다고 말해주면 안될까?" "거절한다." "한번만 더 해주면 덧나? 내 성인식이 겹친 기념비적인 17번째 생일인데, 축하 선물로 해주면 좋잖아."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미안하지만 선물은 없을 것이 다." 카이는 아주 감고 있는 눈을 뜨지도 않고 내 말을 받았다. 그녀가 이런 부 탁을 영 불쾌하게 생각하며, 또한 거절할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카이 에게 들러붙어 떼를 썼다. 이러다가 만에 하나라도 카이가 해주겠다고 승 낙을 하면 정말 대박이 터진(?)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도 이렇게 말을 거는 것이 나름대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은 계속 진담을 뻘뻘 흘 리며 이 아슬아슬한 대화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처음보다는 많이 익숙해진 모습이다. 고요한 빗소리를 배경음으로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만담이 오 고갔다. 밖에서 내리고 있는 비로 인한 우중충한 음색도, 방에 가득 찬 눅 눅한 공기도 아군의 사람들에게는 기쁨만을 줄뿐이었다. 나 역시 그 동안 의 열세에 큰 힘을 실어주는 비라는 생각에서인지 이 눅눅한 공기에 이상 한 유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듯 하여 나는 아쉽지만 사람들을 향해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자는 권유를 던졌다. 이런 권유가 가장 높은 사람이 하는 것이 보통이니까. 우리들끼리는 그다지 예의를 따지지 않지만 그래도 가능 하다면 그런 것을 따르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럼 이만 일어나지요. 할 일도 많은데 이런데서 계속 시간을 보낼 순 없 을 테니까요." "예, 카류 님." 내 생일 겸 성인식 파티라는 문제 때문에 가장 할 일이 많아진 프리란트 님이 제일 먼저 나의 말에 답했다.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곁에 앉아있던 카이도 나를 따르 기 위해 약간 느린 움직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아 도로 자리에 앉히고는 말했다. "너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 테니까."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절한다. 나의 목적에도 어긋나며 너를 지 키겠다는 약속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단호한 대답을 듣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하지만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비장하게 그녀를 향해 말했다. "좋아. 단도 직입적 말해서, 화장실 갈 땐 안 따라오면 안돼? 내게도 사생 활이란 게 있다고!" 내가 그다지 큰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가 카이를 붙잡고 뭔가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 하니까 밖으 로 나가는 척 하면서도 힐끔힐끔 내 행동을 훔쳐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문 득 에르가 형이 나를 향해 인상을 팍 쓰면서 히노 선배에게 어서 방에서 나가기를 권유하는 모습도 보였다. 사실 전부터 내가 화장실―평민들은 밖에서 마구 볼일을 보지만, 귀족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의 위생관념은 있어서 아주 깨끗한 푸세식 변소 비슷한 것을 사용한다.―가는 데까지 그녀가 따라오는 바람에 얼마나 쪽팔렸는지 모른다. 물론 카이가 성별 없는 드래곤이란 걸 알지만 나도 외견에 홀리는 인간인데 눈앞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저건 도마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지 않겠는가. "사생활을 침해하는 대가로 너를 지켜주기로 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매섭게 한마디 던지고는 어깨를 누르는 내 힘에도 아랑곳 않고 자 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야 했다. 에르가 형을 한방에 눕혀버릴 때도 생각했던 거지만 정말 무지막지한 힘이다. 정 체가 드래곤인 건 알지만 그래도 저렇게 가는 몸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 는지 자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신 이렇게 하지." 그런데 갑자기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한마디 던졌다. 내가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데 갑자기 그녀의 몸이 부 풀어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그녀가 드래곤으로 변할 때 저런 장면을 본적 이 있는 것 같아 더 더욱 의아해졌다. 그러나 나는 그 의아함은 곧 놀라움 으로 바뀌어버렸다. "뭐…뭐?" 카이의 모습을 본 딜티가 얼마나 놀랐는지 놀라 무의식적으로 짧게 한마디 를 내뱉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지 자리에 굳어서 카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되겠나?" 카이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지만 더 이상 카이의 머 리카락은 허벅지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머리카락이 짧아져 나와 비슷한 길이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려한 얼굴 곡선은 어느새 시원하게 각진 선으로 바뀌어 있었고, 날씬한 몸매 탓에 약간 헐렁했던 옷 은 어느새 적당히 잡힌 근육에 꽉 끼어 있었다. "내가 여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곤란해했던 것이 아닌가. 이러면 좀 낫겠 지." 굵고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인 카이는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에서 시원한 이 미지의 훤칠한 미남으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 그녀, 아니,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이는 내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단지 바라보기만 했다.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뜻인 모양이다. 한동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겨우 손으로 추하게 벌린 입을 닫았 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역시 넌 드래곤이었구나." "……." 내가 홀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 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좋은 생각은 아닐 것이라 는 느낌에 그 생각을 차단할 요량으로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그냥 여자 모습으로 돌아와 줘. 당연한 말이지만 난 여자가 더 좋거든. 게다가 그 모습을 보니까 영 기분이 안 좋아. 너무 잘 생겨서 질투가 날 것 같거든." "…그렇게 하지." 그녀가 잠시 운을 띄우다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시 여자의 모습 으로 돌아가려는지 몸이 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바 로 손을 들어 제동을 걸었다. "잠깐!!" "…뭐지?" 줄어들던 모습이 단번에 남자의 본 모습으로 복원되는 것을 보고 나는 정 말 신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대로 눈을 멀뚱히 뜨고 있기보다 는 본론을 꺼냈다. "여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보다는 남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 더 강하지 않 아? 물론 네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무지막지하게 세다는 것 알고는 있지만 그냥 혹시나 해서 묻는 거야." 내 말을 끝까지 듣던 카이는 아무 말도 않고 바로 여자로 돌아갔다. 웬일 로 나의 말을 무시하는가 싶어 불쾌함보다는 신기함을 느끼고 있었다. "폴리모프를 하면 그 모습만큼의 한계를 가지며 드래곤의 힘을 쓸 수 없 다. 결국 지금의 이 가는 팔로는 남자만큼의 근력을 낼 수가 없다는 뜻이 다." "엥? 그렇지만 에르가 형을 하늘에 띄워버릴 정도로 힘이 셌잖아." 내 말에 맞은 편에 있던 에르가 형이 기억하기 싫은 과거를 꺼냈다는 듯이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뜨렸다. 솔직히 형이 그렇게까지 한번에 깨진 것은 아마 처음 있는 일이리라. 그때 갑자기 그녀가 팔을 덮고 있는 셔츠를 천천히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고 미끈한 팔을 내게 보여주며 말했다. "그건 이렇게 한 것이다." 카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그녀의 팔이 갑 자기 불끈 하며 근육질로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굵고 엄청난 근육질 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하얀 팔에 작게나마 단단한 근육이 생겼다 는 것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필요한 근육들을 가장 이상적이며 효율적인 형태로 변화시킨 다. 그러니 내가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뭐… 걱정했다기 보다는……." 사실 아∼주 약간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 은 알지만 혁대에 걸린 장검의 무게를 못이기고 똑 부러질 것만 같은 개미 허리를 가진 그녀를 보다보니 자꾸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쨌든 나가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문으로 돌렸다. 그러자 놀란 눈으로 나와 카이 를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도 겸연쩍어 하다가 내게 먼저 나가라는 듯이 길 을 비켜주었다. 보통은 이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다함께 왁자지껄 이야 기하며 나가는 편인데 카이 때문에 신경이 쓰여 이러는 모양이다. 신경 쓰지 말라고 조금 전처럼 열변을 토할 생각은 없어서 나는 그대로 밖 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쪽팔리지만 카이랑 함께 화장실에 들린 다 음, 내 방으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약간의 여유가 생겼으니 하늘을 찌를 듯한 마법사들의 불만을 풀어주기 위해 오랜만에 마법 수식 정리나 할까 싶었던 것이다. "카이, 내가 마법수식을 정리하려 하는데 말이야. 좀 도와줄 수 있어?" "거절한다." "정말 치사하네. 좀 도와주면 안돼?" "내게 무언가를 원하지 말아라. 그리고 어차피 내가 아는 수식은 너희들 인간이 알고 있는 것들과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카이의 말을 듣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십 만년이나 살았다면서 우째 인간들 수준의 마법밖에 모른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왜? 너 드래곤이잖아. 고대의 수식 같은 거 몰라? 아버지나 할아버 지 대에 배웠어도 알 수 있겠다." "드래곤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지식을 전수하는 사회적 행동 같은 것은 하 지 않는다. 따라서 전대의 드래곤이 습득하고 있었던 수식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대체 드래곤들은 어떻게 하고 살아가는 건지 모르 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아는 것을 전수해 주는 것은 단순한 동물도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전에는 어머니, 아버지라는 말조차 없다고 했었 지. "그럼 십 만년 동안 놀고먹기만 한 거야? 스스로 한번 개발시켜보지도 않 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마법을 개발할 수 있다. 그것이 개발을 할 의욕 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리고 너희들이 쓰는 마법의 반은 유적에서 발견 한 것이지만, 나머지 반은 유사인종으로 변하여 마법사로서의 삶을 살던 드래곤들이 개발한 것이다." "뭐?" 나는 갑자기 띵한 느낌에 카이를 바라보았다. 대체 저 드래곤이랑 얘기를 하면 미지의 세계를 탐방하는 듯한 느낌이다. "카류." 카이와 단 둘이―카이가 온 뒤로 항상 2,3명씩 붙어 다니던 호위 기사들을 전부 물렸다.―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3층의 복도를 걷는데 갑자기 익 숙한 목소리를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하늘색의 여름 드레스가 너 무나 잘 어울리는 금발의 여성이었다. "히노 선배?" 나의 방문 앞에서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선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최소한 나와 있을 때만은 항상 방긋 웃던 선배였는데 지금은 영 얼굴에 기 운이 없었다. 최근 들어 이상한 모습만 보이는지라 그녀의 생각을 알아보 자는 생각에 빠른 걸음으로 그쪽으로 걸어갔다. "선배, 같이 방에 들어가요. 할말이 있죠?" "……." 나의 질문에 선배는 말없이 있다가 내 뒤쪽의 카이를 힐끗 돌아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선배가 왜 이렇게 힘이 없어 하는지 바로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들여 주는 말을 하지 않고 있는데 아름다 운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카이와 가깝게 지내니까 불안이라도 느낀 것이 리라. 여전한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미처 그 말을 꺼내기도 전에 히노 선배가 입을 열어 카 이를 향해 말했다. "죄송합니다. 위대하신 드래곤이시여. 아주 잠깐동안이라도 좋으니 저에게 카류와 단 둘이서만 이야기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미안하지만 거절한다." 히노 선배로서는 용기를 짜내어 겨우 내뱉은 말로 보였지만 당연하지만 카 이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목욕탕은 물론이거니와 화장실까지 따라오는 녀 석인데 겨우 그런 말 한마디에 물러설 리가 없지 않겠는가. 사실… 예전의 호위기사였던 디트 경도 거의 그 수준이긴 했다. 아무리 꺼 지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무표정한 얼굴로 하고서는 아주 잠깐동안 의 틈에 내가 어떻게 될 수도 있다나 어쩐다나 하는 이유를 달아 물러서지 않곤 했었던 것이다. "화룡이시여!! 제발 딱 한번만……!!" 문득 격한 목소리가 나의 귀를 찌르는 것을 느끼고 나는 약간의 상념에서 벗어났다.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히노 선배가 끊임없이 카이를 향해 사정 하고 있는 것이다. "히노 선배……." 나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를 불렀다. 히노 선배가 왜 이렇게까지 흥 분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일단 나는 그녀의 불안을 궁극적으로 풀어 줄 만한 행동을 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히노 선배… 선배도 봤잖아요.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카이는 드래곤 인 걸요.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말했잖아요? 저는 히노 선배 를 아내를 맞을 거라고 말이에요." 그것을 알고 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은 이 정도뿐이었다. 이런 말이 아니라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히노 선배뿐이라는 식의 말을 해 준다면 아마도 그녀는 웃는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리라. 하지만 그 렇게 그녀를 기만하고 싶지는 않았다. 의미는 다르지만 내가 너무 사랑하 는 아이니까. "……." 선배는 내 말에 새빨갛게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동안을 말없이 그 자세로 서있었다. 카이라면 이 잠깐동안의 대화와 히노 선배의 표정만으로도 대충 무슨 연유로 이런 대화가 오고가는 것인지 충분히 이해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 않고 여전히 무표정을 유지하 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웬만하면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운다는 식의 행동 을 할만도 하건만 말이다. 하지만 왠지 그편이 훨씬 더 마음이 편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카류." 아주 잠시 카이의 얼굴을 살피는 동안 언제 고개를 들었는지 히노 선배가 나를 불렀다. 내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눈물을 글썽이거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얼굴은 의외로 단지 약간의 비 장함만이 담겨 있을 뿐 평소의 표정을 담고 있었다. "히노 선배, 전……." "됐어. 더 이상 선배라고 부르지 말아 줘." "예?"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자 그녀가 다시 한번 똑바로 말했다. "저는 더 이상 파블료프 왕립 학교의 히노 선배가 아니예요. 저를 선배라 고 부르지 말아 줘요. 그리고 존댓말도 쓰지 말아 줘요. 저는 리아 후작가 의 외동딸 히노일 뿐입니다." "선배……." "예전이라면 저도 카류 님의 사랑을 얻으려는데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 거 예요.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달라졌어요. 어차피 카류 님에게 선택의 여지 가 없으니까 저는 얼마 안가 카류 님의 아내가 될 거예요. 그 누구보다도 그것을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가증스럽게 사랑 을 얻으려는 히노 선배를 연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히노 선배라고 부르지 말아주세요." 히노 선배의, 그녀의 말에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해 뻗으려 했던 손이 굳는 것을 느꼈다. 혀까지 굳어버리려는 것을 겨우 막으면서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 "별로 상관없잖아요… 그런 호칭 같은 거 그냥 예전대로 써도……." "카류 님에게는 별로 상관없으니까 이제부터는 바꿔서 불러줘요. 그냥 히 노라고." "……." 잠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이내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 "꼭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요. 히노 양. 하지만 존댓말은 내버려두죠. 사 실 조금 어색하기도 하고, 리아 후작가의 외동 따님이신 히노 양에게 라면 원래대로라도 존댓말을 써야 했을 테니까요." "예, 그럼 실례했습니다. 카류 님." 히노 선배… 아니, 히노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뒷모습 을 바라보다가 완전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가 책장에 꽂힌 마법 수식 책들을 잔뜩 뽑아내서 탁자로 가져갔다. "너는 변화를 싫어하는 모양이구나." 갑자기 들려오는 고요한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거의 기척 도 없이 침대 곁에 서있던 카이의 목소리였다. 나의 세세한 사정도 모르는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인 만큼 큰 의미를 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다. 단지 내가 히노 선배의 호칭을 바꿔서 부르는 것을 약간 망설인 것을 그렇게 평하는 것뿐이리라. 그럼에도 그 말은 내 가슴을 파고들며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실없이 피식 웃은 다음 하지 않아도 될 말 을 툭 내뱉었다. "글쎄, 하지만 나는 언제든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 더 이상 시 시한 과거의 일에 미련을 두고 뒤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거든. 아 윽∼ 귀찮아라, 이걸 어느 세월에 다 정리하지?" 쓸데없이 내뱉은 말을 수습이라도 하듯 나는 기지개를 크게 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수식 정리를 시작하기 위해 펜과 잉크를 꺼내들었다. 지금부터 시작해도 그렇게 많이 정리를 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기로 했지만 언제나 뒤를 돌아보기를 갈망하고 있다고 해석해도 되겠는가?" 뒤에서 또 한번 카이의 말이 들렸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창 밖으로 향했을 뿐이다. 저런 헷갈리는 말은 나로서는 무슨 소린지 절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켜 입 을 봉했기 때문이다. 카이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내가 그저 창 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던 탓에 방안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고요함 속에 나는 김이 서리지 않 은 부분을 통해 좀 더 확실히 창 밖을 보기 위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렇게 창 밖의 풍경을 보며, 그리고 마성(魔性)을 가진 그녀, 카이에게 했던 말을 곱씹으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닫고 만다. 나에게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내디딜 수 있도록 마치 기적과도 같은 힘을 가져다 준,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변혁의 비가 내리고 있다는 것을. ------------------------------------------------ 잡설. 마성이란 거 악마의 "마"자가 아니고, 요술·마술의 "마"자...-_-;;; 이벤트 결과는 다음편 올릴때... 이르나크의 장 Part 43 생일파티 하기 전에-_- (1) 물방울이 바닥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를 제하고는 몹시도 고요한 방이었 다. 그래서 도저히 이 방 안에 두 사람이나 자리잡고 있다고는 상상이 되 지 않을 정도였다. 시키는 말 이상의 것이나, 불필요한 움직임은 절대 하지 않는 카이 덕분이었다. 그녀는 어제저녁부터 침대 맡의 의자에 자리를 잡 고 눈을 감은 채로 앉아 마치 여느 광장의 동상이나 된 것처럼 꼼짝도 하 지 않고 있었다. 나는 카이를 힐끗 보다가 다시 눈앞의 백지로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푹 내 쉬었다. 책상 위에 반듯하게 놓여진 하얀 종이들은 4서클의 수식을 정리하 기 위해 내가 꺼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종이는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 에도 여전히 백지인 채였다. 점점 수준이 높은 쪽으로 올라가니 수학 교과 서 편찬 작업(?)이 전보다 더욱 어려워졌던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져 연습용의 작은 종이를 꺼내 이것저것 끼적거리기 만 하고 정작 본 종이에 생각을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수 학 문제집을 무수히 쌓아놓고 풀라고 한다면 그쪽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손에 든 펜대를 잉크병에 계속 콕콕 찍어댔다. 그리고 괜히 죄 없는 마법 수식들을 한껏 노려다가 곧 몸을 뒤로 젖히며 지끈거리는 허리를 크 게 폈다. 똑똑. 그때 갑작스레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고개를 젖힌 상태 그대로 문을 바라보았다. "…들어와라." 앉은 자세를 바로 하며 그렇게 말하자 곧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 해 상당수의 시녀들이 허리를 굽혀 정중히 예를 갖추며 들어왔다. 방안으 로 완전히 들어온 그들은 나와 카이에게 차례로 조심스럽게 인사를 올렸 다. 특히 카이를 향할 때 그녀들은 나를 대할 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고, 얼굴이 거의 사색에 가까울 정도로 창백해 졌다. 아마도 카이가 드래곤이 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에 대해 신신당부를 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시녀들의 인사가 떨어지자마자 졸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미동도 않고 있던 카이가 금방 눈을 뜨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 로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시녀들의 인사 따윈 귀찮게 여기며 그냥 눈 을 감고 가만히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녀석은 참으로 친절했 다. 위대한 드래곤의 인사를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거의 백짓장 같았던 시녀들 의 얼굴에 확 홍조가 돌았다. 나는 그녀들의 표정을 보다가 조금 피식 헛 웃음을 흘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리아 후작 님께서 연회복을 맞추기 위해 치수를 재어 오라 하셨습니다." "아아." 그러고 보면 나도 생일 때마다 수많은 옷을 맞추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키 도 꽤 컸으니 확실히 치수를 재야 하겠지. 다시 보니 저 시녀가 줄자 같은 걸 잔뜩 들고 있군. 나는 그녀들의 요청에 따라 치수를 재는 것을 도와주기 위해 자리에서 천 천히 일어났다. 수식 정리도 막혀서 머리에 스팀이 오르던 중이었는데 마 침 잘됐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내가 그녀들에게로 다가가자 가장 지 위가 높아 보이는 시녀가 굉장히 곤란해하며 우물 쭈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의아해 하며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내 질문이 떨어지자 그녀는 뭔가 결심을 한 듯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를 들어올렸다. "드…드래곤 님의 것도 재어오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회장에 나가실 때 갑옷을 입으실 것인지, 아니면 드레스를 입으실 것인지도 알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 카이가 평소에 셔츠나 바지만 달랑 입고 있긴 하지만 내 파티장에서도 그 런 식으로 입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항시 내 곁에 붙어 다니는 카 이가 설마 그날 파티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말할 리는 없을 테고. "카이, 어떻게 할거야? 드레스? 아니면 나를 지키는 수호자답게 갑옷?" "드레스로 하지." "오오, 정말? 드레스를 입고 치장을 한 너라니… 정말 엄청날 것 같아. 상 상이 안 되는데?" 내가 빙긋 웃으면서 말하자 그녀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툭 한마 디 던졌다. "어제 본 히노라는 여성도 나 못지 않게 아름다웠는데 어째서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거지?" "으…음? 그야……." 나는 문득 할 말이 없어져서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히노는 만인이 인정 하는 절정의 미인이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 역시 엄청난 미녀가 아니었던 가. 생각해보면 사람의 외모에 딱히 급수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는데, 내 가 알게 모르게 드래곤이라는 사실로 카이를 높게 치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그렇게 한동안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갑자기 카이가 자리 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를 향해 대뜸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을 만나고 싶군. 지금 안내해 주겠나?" "엥? 에르가 형을?" 나는 갑작스런 그녀의 말에 눈을 땡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녀들을 향해 말했다. "금방 돌아올 테니 바쁘지 않다면 여기서 기다려 주겠나?" "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녀는 참으로 위대한 존재답지 않게 시녀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와 문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에게로 안내해다오. 그에게 할 말이 있다." "뭔데?" "그에게 가서 이야기하지." 카이는 그렇게 이야기하며 사뿐사뿐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띵하게 서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따라 걸음을 조금 빨리하여 밖으로 걸어나왔다. "에르가 형이라면 아마 연무장에 있겠지? 비가 오니까 실내에 있는 연무장 일 테고… 으음, 이쪽이야." 나의 안내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어갔다. 연무장으로 가기 위해 복 도를 걸으면서 나는 카이를 몇 번씩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모든 행동에서 주체는 항상 나였고, 카이는 단지 따라다니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카이의 용무로 인해 내가 따라가는 식이었기 때문에 어색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녀가 나에게 붙어 다녀야만 한다고 생각 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행동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카이일 수도 있겠 구나. 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여전히 그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안내에 따라 연무장까지 걸어갔다. 우리들이 연무장으로 들어가자 구슬땀 을 흘리며 연습을 하던 기사들이 놀라며 검을 갈무리하고 인사를 했다. 나 는 연무장을 죽 둘러보며 괜찮으니 이만 연습을 계속하라는 말을 전했다. 그러다가 곧 익숙한 얼굴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소리쳤다. "에르가 형! 어, 딜티도, 다른 분들도 많이 계시네요." 연무장에는 중간 장교들부터 시작하여, 드리크 경까지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마 짬을 내서 실력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대련이라도 할 참이었나 보다. 어쨌든 나를 본 그들은 의아해 하면서도 일단 예를 취했다. 카이 덕분에 인사치레가 정확해지는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하지만 카이가 왜 에르가 형을 만나고자 하는지 굉장히 궁금했기에 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에르가 형. 카이가 형에게 할말이 있대." "뭐?" 에르가 형은 조금 전 방에서 카이에게 보였던 나의 반응과 비슷하게 눈을 크게 떴다. 드래곤이 직접 할말이 있다는데 얼마나 놀랍겠는가. 카이는 에 르가 형의 반응을 보더니 한 발자국 나오면서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의 성(姓)을 빌리고 싶다." "에?" "뭐?" 에르가 형과 내가 거의 동시에 소리치듯 되물었다. 그러자 카이는 자신의 허리에 걸린 검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에스문드 백작가라면 근 백년 동안 이 나라에서 용맹한 무장을 많이 배출 하기로 유명했던 무가다. 여러 가문 중에서 여검사가 나온다해도 가장 이 상하지 않을 만한 곳이지." 그녀의 말에 에르가 형은 의아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희색을 감추지 못했 다. 지고한 존재에게서 자신의 가문에 대한 칭찬을 들었으니 누가 기쁘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곧바로 얼굴을 확 구겼다. 그리고 금방 전투모드로 돌입하여 그녀의 말을 자르며 끼어 들었다. "뭐야, 설마 카이야 혼 에스문드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 "대외적으로 그런 식으로 칭할 생각이다. 너는 이번 파티에서 항시 너의 곁에서 함께 하는 나를 뭐라고 소개할 작정이었지?" 나는 찔끔해서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이번 파티에서 그녀를 드 래곤이라고 당당히 소개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당장 믿지 않는다 해도, 일단 주변 사람들이 그녀에게 취하는 정중한 태도나 앞으로 그녀가 선보일 눈부신 검술실력 등으로 대충 증명하면 그것으로 좋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잘도 그걸 눈치 까고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나는 다급히 그녀의 행동에 태클을 걸기 위해 입을 열었다. "에스문드 가에는 형을 포함해서 남자아이만 셋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갑자기 없던 여자가 어디서 생겨?" "검술에 재능이 있는 아이를 뒤늦게 양녀로 삼았다고 하면 크게 문제가 되 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이 성에서 네가 드래곤이라는 걸 모르는 자는 한 명도 없어. 정 숨기고 싶었으면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할거 아냐? 얼굴도 바꿀 수 있으 면서 말이야." "너의 군에 속한 많은 병사들이 세레스트 산에서 내가 폴리모프 하는 장면 을 보았기 때문에 얼굴을 바꿔봤자 항시 너의 곁에 붙어 있는 나의 정체를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먼 곳에서 찾아오는 자들까지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은 그들의 힘이고 자유겠지만 일단 스스로를 드래곤이라 칭하지는 않겠다." 나는 머리를 벅벅벅 긁었다. 그리고 발로 땅을 팍팍 차다가 다시 고개를 확 들고 카이를 향해 소리치듯 말했다. "정말 그렇게 치사하고 쫀쫀하게 나올 거야? 일단 현시점에서 대부분의 국 민들이 너의 존재를 믿고 있기는 해도 머리를 좀 쓴다는 놈들은 달라! 너 의 권능을 직접 보여주지 않으면, 네가 스스로의 입으로 드래곤이라고 말 해도 안 믿을 놈들이 부지기수란 말이야! 그냥 좀 넘어가 주면 안돼?" "카류여." 내가 짜증을 부리다시피 하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엄한 느낌이 드는 어 조로 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 나는 선생님에게 혼난 학생이 된 것처럼 찔끔하면서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하지. 너는 그 어떤 방식으로든 드래곤으로서의 나의 힘을 이용하 려 하지 말아라. 이를테면 너희들이 지금 계획하고 있는, 나를 믿고 네가 무모한 장소로 파고드는 작전 같은 것, 용납하지 않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너를 따라다니기만 하겠지만 필요하면 너를 위험한 곳에 가지 못하도록 강 제할 수도 있다." "저…전쟁을 치르다 보면 미끼가 되기 위해서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로 내 가 무모한 일을 해주어야 할 때가 있어! 그러니 강한 호위기사가 필요한 거잖아!" 나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의 끝 부분에 가서는 소리를 빽 질렀다. 카이 가 최대한 드래곤으로서 권능을 사용하지 않아 한다는 것은 나 역시 충분 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가능한 한, 최∼대한 그 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우려먹고 이용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고, 은 근슬쩍 그것을 추진(?) 중이었기에 양심에 찔려서 필요 이상으로 더 소리 를 지른 것이다. "내가 드래곤이 아닌, 강한 검술실력을 소유한 한 명의 인간이라는 가정 하에서만 움직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말하겠는데, 더 이상의 억지는 부리지 말아라. 네가 나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 다." 카이는 경고의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을 딱히 억제할 필요를 느끼지 못 했다. 결국 나는 입을 이죽이며 그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 었다. "마법도 못 쓰는 인간의 힘 정도를 가지고 나를 지킬 수 있을 거 같아? 지금은 다 썩은 시체가 되어버린 내 호위기사도 검술만 따지자면 인간 중 에서 가히 최강이었어, 알아?" "물론 네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안전한 곳으로의 피신을 위해 워프 등의 마법을 쓸 생각이 있다.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해주마. 나는 너를 지키겠지 만, 그것은 소극적인 행동에 그칠 것이다. 만약의 경우가 닥치면 너는 드래 곤인 나의 힘에 혜택을 받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님에도 네가 스스로의 성 공을 위해 그 힘을 이용하지는 못한다." "이잇!!" 나는 고개를 돌리고 죄 없는 땅을 차며 투덜투덜거렸다. 저렇게까지 확실 히 원천봉쇄를 하니 일단 저질러 놓고 잘 몰랐다고 변명을 하는 건 먹히지 않을 것 아닌가! "말이 너무 길어졌군. 에스문드 백작. 내게 너의 성을 빌려주겠는가?" 에르가 형은 자신의 아버지인 카나스 님을 힐끗 바라보며 조금 곤란한 표 정을 지었다. 솔직히 드래곤인 카이가 자신의 가문의 사람이 된다면, 그들 로서는 엄청난 영광일 것이다. 그리고 일단 드래곤이 아니더라는 가정이 붙더라도 끝내주는 실력을 보유한 아름다운 여검사라는 것은 틀림없으니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좋아라 하고 받아들였다가는 카이를 어떻게든 이용해 먹으려는 아군의 사람들에게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것이 틀림이 없기 때문에 망설이는 것이다. 에르가 형은 카나스 님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곧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곤란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가문은 아버님께서 살아 계심에도 불구 하고 제가 가주의 자리를 이어받은 일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문제를 안 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력도 모르는 여자를 가문에 들였다는 사실까지 알 려진다면 너무 큰 수치를 안게 됩니다. 따라서 그 부탁은 받아들일 수 없 습니다." 에르가 형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카나스 님까지 눈에 띄게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에르가 형의 말이 무례의 정도를 훌쩍 넘어섰 기 때문이다. 확실히 좋은 이유이긴 하지만 드래곤인 카이를 내력도 모르 는 여자라고 칭한 것이 아닌가. 모두가 알다시피 에르가 형은 세레스트 성산에서 카이의 드래곤 피어를 직 접 경험했으며, 거기에 잠시 하늘구경을 할 정도로 얻어맞은 적도 있다. 그 런데도 그 짧은 사이에 벌써 겁을 상실했는지 잘도 저런 말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원래 형의 언어순화 능력이 빵점이라는 면도 작용했겠지만 여기까 지 온다면 기본적으로 간의 상태를 의심해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형이 원래 간이 띵띵 불은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 이야. "그 수치를 충분히 덮을 수 있을 정도의 공을 너의 가문에 안겨다 주겠다. 그럼 된 것이겠지?" 카이는 그렇게 말하고 더 이상의 반론을 차단이라도 하듯 바로 몸을 돌렸 다. 그 모습을 보자니 더 이상 카이를 이용해 먹는 것은 전부 글러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발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지 못하고 그녀의 뒤통수에다 대고 소리를 질렀다. "카이야 혼 에스문드가 되시겠다고? 하아, 좋아! 너 그럼 앞으로 에스문드 가의 주인인 에르가 형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를 갖춰야 해. 알어? 나한테 존댓말 써야 한다고!!"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녀가 곧장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움 직임을 미처 따라잡지 못한 붉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몸을 감싸며 아름다운 원을 그렸다. 황홀하게 춤추던 그 머리카락이 제자리를 찾아 사뿐히 가라 앉았을 때, 불쾌해 하는지 아닌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무표정의 카이 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약간 정도를 넘는 말을 한 것 같아서 긴장이 되었 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기에 나는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그녀의 목소 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헉!" 믿기지 않게도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존댓말이었다. 덕분에 그녀의 말 을 들은 나는 너무나 놀라서 저도 모르게 짧은 비명(?)까지 내질렀다. 그런 심정은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제대로 된 반응도 보이지 않 고 완전히 얼어 버렸다. 그런데 카이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인사라도 하 려는 듯 고개를 숙이려하기에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들어서 어깨를 확 붙들었다. "그만해!! 정말 그렇게까지 하고 싶어?" "전하의 말씀대로 카이야 혼 에스문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이런 행동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행동이 드래곤인 채라면 에스문드가의 이름을 쓰 는 것에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요." "으아∼악! 제발 존댓말 쓰지마!! 알았어, 알았다고. 꼭 필요할 때만 에스문 드 가의 카이야가 되라고." 그녀의 존댓말을 듣자니 얼굴이 저절로 화끈 달아올라서 나는 꽥 소리를 질렀다. 지금만 해도 내가 싸가지 없이 반말을 찍찍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녀에게 발 밑에 두게 됐다고―존칭을 들었다고―희열을 느낄 정도는 아니 었던 것이다. 카이는 나의 말에도 금방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빨개진 나를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며 말없이 서있기만 할뿐이었다. "…네 말대로 하지." 카이가 한참만에 겨우 원래의 어조로 답을 하는 것을 듣고 나는 거의 멈추 다시피 하고 있던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얼굴이 화끈 거리는 것을 손으로 탁탁 때려 환기시킨 다음, 다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맨날 반말을 해대는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나이도 엄청 많으면서 그런 행동은 좀… 그렇잖아." "인간의 생활을 하기 위해 인간의 관습을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타종족 으로 폴리모프하여 정체를 숨길 때는 언제나 이렇게 해왔다. 별로 특이한 일도 아니다." "으음……." 하긴, 카뮤리안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도 국왕이나 지위가 높은 귀족들 앞 에서는 무릎을 꿇었겠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역시 적응하기가 힘든 일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당사자인 카이보다 더 쪽팔려해야 하는 건데?! 나는 속으로 투덜대며 아직까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느라 손으로 부채 질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이는 평소보다 훨씬 진지함이 담긴 얼 굴로 내게 말했다. "드래곤이 타종족의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로 하는 것은 너의 생각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부탁하건대, 네가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주었으 면 좋겠다." 그녀는 나를 향해 굉장히 정중하게 부탁의 말을 전했다. 그 말을 듣자니 갑자기 가슴 한켠이 따끔따끔해 와서 나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현 시점에서 나는 카이에게 어마어마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 도 나는 고마워하기는커녕 그녀의 최소한의 요구를 전부 무시하며 어떻게 든 조금이라도 더 이용해 먹으려고 눈이 벌개져서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하 지만 카이는 그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인내를 보이며 정중하게 이런 부탁 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문득 그런 상황을 돌아보자니 뒤늦게 양심이 콱콱 찔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나도 여유가 있어야 양심의 사정을 봐주고 말고 하지,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 따졌다가는 제명에 죽을 수 있겠는가. 어차피 막 나가기로 한 인생인데 이제 와서 착한 척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말 이다. "세레스트 산에서 나를 지킨다고 소리친 것만으로도 인간들의 생활엔 이미 어마어마한 파장이 생겼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확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뒷수습하겠다고 나서는 거, 좀 그렇지 않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결국 솔직하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빈 정거리는 말을 툭 내뱉었다. "몇 번이고 말했지만 그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고, 또한 마지막이 될 것이 다. 다시는 그런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 억지소리를 듣고도 그녀는 그저 시선을 조금 아래로 하며 그렇 게 대답했다. ‘네 놈이 해달라고 했잖아!!’라고 소리치며 주먹을 날리지 는 않더라도 조금은 불쾌하다는 표현을 할 것으로 예상했던 나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러다가 예전부터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것이 또 한번 의 문으로 떠오르기에 이때를 기회 삼아 진지하게 그녀를 향해 물었다. "사실 내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너는 왜 신념을 저 버리면서까지 나를 위해 그런 일을 해준 거지? 단순히 내가 삼 백년만의 흥밋거리라는 이유는 너무 부족하지 않아? 뭔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어?" 이렇게 직접 질문을 하자니 더더욱 궁금해져서 나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십 만년 동안 그녀에게 새로운 흥밋거리라는 게 나 하나 뿐이었겠는가. 흥밋거리가 생길 때마다 부탁을 들어줬다가는 세계는 벌써 예전에 드래곤과의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텐데? "십 만년을 사는 동안 나는 너무나 많은 경험을 했고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부터 모든 것이 점점 무감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쌓여 최근의 삼 백년이라는 시간동안에 끔찍할 정도의 권태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때문 에 마침 그 시기에 나타나 내게 새로운 흥미를 느끼게 해준 너는 아주 특 별하고 또한 고마운 존재였다. 나는 그 보답을 하기 위해 단 한번, 너의 요 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흐음." 나는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내가 세레스트 산에 가서 누 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된 거로군. 엄청나게 운이 좋았구만. 세레스트 산 에 살았던 드래곤이 저런 녀석이 아니었으면 아마도 국민들에게 나를 지키 겠다는 공표를 해달라는 내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을 테지. 그런데… 내가 정말 운이 좋은 게 맞나? 나는 싱거운 생각을 하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그때 카이가 고개를 천 천히 움직여 사람들을 죽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나의 의도는 모두가 알아들었을 것으로 알겠다. 카류여, 이만 돌아가 지." 잠시 본론에서 삼천포로 빠져 딴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카이가 몇 발자국 옮기는 것을 보고 금방 제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드래곤으로서의 힘을 최 대한 우려먹으려는 계략(?)이 사전에 모조리 차단 당해 버린 현 상황을 인 식하자마자 또다시 카이를 향해 입을 비죽이며 퉁명스럽게 토를 달았다. "밖으로 나와서 숨도 제대로 못 돌렸는데 뭐가 그리 급해?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 봤자 머리털 빠지도록 일하는 건 나뿐이고, 넌 눈감고 앉아있기만 할거잖아. 꼭 자기가 급한 사람처럼 움직이고 있어." 내 투덜거림을 들은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얕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그 사이에 너의 방에 시녀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는가?" "엉? …아…아…아니……." 나는 더듬거리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그러다가 무안함에 얼굴이 다시금 확 달아오르는 것을 깨닫고 카이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먼저 연무장의 밖 으로 통하는 길로 거의 뛰다시피 후다닥 걸어갔다. 그러나 뒤늦게 사람들 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되돌아 와서 사람들에게 먼저 가겠다는 말을 전해야만 했다. 키득거리는 에르가 형과 딜티를 보며 앞으로는 카이에게 성질을 낼 때도 좀 심사숙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 다. * * * 하늘을 가득 메운 회색의 구름을 바라보던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습기 가 가득한 공기였지만 전과는 달리 약간의 서늘한 기운을 담고 있어 훨씬 숨을 쉬기가 좋았다. 창문을 그대로 열어둔 채로 책상에 앉은 나는 그 동안의 헤이료우 상단을 운영하면서 수입과 지출이 정리된 장부를 들어올리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근 3년간 리아 영지에서 시작된 상업 부흥 정책에 따른 수확은 상당한 것 이었다. 그랬기에 최소한 리아 영지에서의 혜택을 입어본 상인들이라면 제 6왕자군을 옹호하고 싶어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제6왕자군은 명분도 없고, 병력 역시 국왕군에 비해서는 턱도 없이 부족했기에 우리들 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리아 영지의 모든 상인들 이 그들을 도와본들 전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칸아. 여기 있느냐?" "아버님?" 갑작스레 들려오는 말소리에 상념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한참 딴 생각을 하느라 어떤 말이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나를 켈레인 이 아닌 칸이라는 불렀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목소리의 주인 공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바로 그렇게 반응을 한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나가며 아버지를 맞이했다. 그러나 방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아버지는 뭔가 바쁜 용무라도 있는 것인지 나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했다. "칸아, 혹시 현이를 보지 못했느냐?" "예? 아뇨. 무슨 일이라도……?" 아버지는 손으로 새치가 보이는 남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다가 불안하 게 말을 받았다. "하루 종일 현이 보이지 않기에 하인들에게 물어보니 그들 역시 본적이 없 다더구나.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버린 모양이다." "또 말입니까?" "휴우. 그래. 비도 이렇게 오는데 왜 자꾸 나가려는 것인지. 녀석이 하는 일이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역시 불안하구나. 저러다가 큰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 생각을 할 때마다 가 슴이 답답해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비를 보다가 안타깝게 입을 열었다. "단순히 나의 비약일지도 모르겠지만… 현이 정상적인 몸으로 태어났다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상단의 일을 하 는 동안 당했던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견디기가 힘들어서… 그래서 모자란 척 행동하여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 그저 집에 머물며 사람들과의 접촉을 끊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후우… 역시… 현이를 그렇게 낳은 내 탓 이 큰 것 같구나."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아버님의 탓이 아닙니다……." 상심한 아버지를 향해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금새 말끝을 흐리고 말았 다. 아직 어리석고 부족했던 시절에 저질렀던 잘못이 다시금 나를 괴롭혀 왔기 때문이다.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와 아버지로 인해 방안의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곧 아버지는 그 상념을 털어 버리려는 듯 손 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내가 보던 그 장부를 보았는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흠. 장부를 보고 있었나 보구나." "예……." 아버지는 장부를 들어올려 말없이 그것을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제6왕자의 반란으로 인해 내전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한창 호황을 누리던 상황이 적힌 페이지에서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칸아. 너는 우리 헤이료우 상단이 제6왕자군의 편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 하느냐?" "드래곤의 가호라는 그 소문이 진실이든 아니든, 일단 제6왕자군은 백성들 에게서 믿음을 받아냈고, 인심을 되찾았습니다. 가장 큰 약점이었던 명분을 되찾았으니 최소한의 승산은 되찾은 셈이지요." "그래, 최소한의… 승산은 말이다……." 아버지는 고개를 젖다가 장부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책상에 몸 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병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 많은 병력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지?" "반란군을 치라는 국왕폐하의 명령이 있었음에도 카류리드 전하를 치는 것 을 망설이는 가문이 여럿 있었을 정도로 그 분의 영향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잘만 되면 그들 귀족들을 영입하여 병력을 늘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나는 말끝을 흐리며 시선을 동쪽으로 뚫린 창을 향했다. 내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래도 카르틴 왕국의 움직임이 이상하구나. 이런 상황을 가만히 보고 넘어갈 만큼 카르틴의 왕이 그렇게 만만한 자가 아님에도 이렇게 조 용하게 지켜보고만 있다니……." 확실히 아버지의 말대로 카르틴 왕국의 움직임은 이상했다. 아르윈 왕국에 내전이 시작된 지도 벌써 5개월이 훌쩍 넘었건만, 그 동안 항시 앙숙 관계 에 있었던 동부의 카르틴 왕국은 아직까지 아무런 움직임도 개시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크로시아 대륙 서부에 위치하여 주로 동쪽의 카르틴 왕국만 경계하면 되는 아르윈 왕국과는 달리,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카르틴 왕국의 입장에 서는 서쪽의 아르윈 왕국은 물론이거니와 동부에 리샤스 왕국과 에베리아 왕국까지 접하고 있기에 그들 나라의 눈치도 봐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직접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아르윈 왕국으로 침략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다. 아무리 현재 리샤스와 에베리아 왕국이 전쟁 중이라 해도, 카르틴이 아 르윈 왕국을 삼켜 거대 제국으로 발전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면서까지 싸움을 계속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카르틴의 현 국왕,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은 신진 귀족들 사이에 서 암암리에 황금의 성왕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뛰어난 자다. 그런 그가 리샤스와 에베리아의 눈치를 보느라 자국을 더욱 강대하게 만들 절호 의 기회를 그대로 넘겨버릴 만큼 무능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무엇보다 제6왕자군의 본거지는 주로 동남부에 위치해 있다. 동부의 카르 틴 왕국이 움직였을 때, 일단 서북부의 국왕군보다는 제6왕자군 쪽이 더 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명분이라는 점이 해결되었다고는 하나, 제6왕자 군은 어느 면에서 보나 너무나 불안한 상태구나." "…하지만 그 지리적 상황이 나름대로 제6왕자군에게 도움이 되어 줄 수도 있습니다. 아버님도 아시다시피… 10여 년 전 아르윈 왕국 최북단의 리투 아니아 산맥과 오테사 산맥으로 쫓겨난 북방민족, 해룡족이 있으니까요. 곡 식을 추수할 시기도 다가오니 그들도 이때를 기회 삼아 움직이기 시작하겠 지요. 동부의 카르틴 왕국이 제6왕자군을 위협하고 있다면 북부의 해룡족 이 국왕군을 방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하지만 그들을 척박한 땅으로 내쫓은 것은 다름 아닌 제6왕자군의 기둥 중 하나인 레이포드 경이다. 그러니 해룡족과 제6왕자군이 긴밀한 관계를 갖고 서로 협조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 것이다. 또한 그것을 어떻게 넘긴다 하더라도 사실상 제6왕자군과 국왕군에 미치는 위협의 정도는 그 차원이 다르다. 아무리 해룡족이 그 동안 힘을 키웠다고 는 해도, 그것이 크로시아 대륙의 4대 왕국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카르틴 왕국에 비할 만큼 강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지 않느냐." 아버님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제6왕자군의 승리를 기원하는 마음은 한결같았지만 뚫고 나갈 방도가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카르틴 왕국의 본심을 알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이렇게 망설이지 않고 바 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을… 이럴 때 현이 있었다면 좀 더 좋은 조언을 해주었을 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아버지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시선을 창 밖으로 옮겼다. 그래서 나도 아 버지를 따라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빗줄기로 흐려진 나의 시야 로 뭔가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현?"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면서 확인이라도 하듯 창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 리고는 곧 확신을 한 것인지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언제든 품위를 지키 셨던 분이었으나 지금은 큰 발소리가 나는 것도 아랑곳 않았고 현관으로 곧장 뛰고 있었다. 내가 뒤늦게 아버지를 쫓아 일층 현관까지 내려갔을 때 그곳에는 여러 하 인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가 현관으로 비를 흠뻑 맞 은 아버지와 그의 손에 붙들린 조그마한 소년이 들어왔다. "이렇게 몸이 차갑게 될 때까지 밖에서 대체 뭘 하는 거니. 왜… 이렇게까 지… 현아……." 아버지는 말끝을 흐리며 그를 품에 꼭 안았다. 그리고 당신의 품에 폭 들 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아이의 파란색 머리카락을 안 타까움이 묻어나는 손길로 천천히 쓸어 넘겼다. 나 역시 걱정의 말을 전하 고 싶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조금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아버지……." 그 때 아버지의 품에서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가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은 너무도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기에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 었다. 그런 심정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는지 다급히 품에 안고 있던 그의 어깨를 잡고 떠밀듯 떼어냈다. 그리고 숨을 거의 멈추다시피 하며 눈을 크 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한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우리들의 귀에 들려온 것은 예전과 같은 칭얼거림이나 짜증 어린 투정이 아닌, 너무도 정중한 부탁의 말이었다. 언제나 아래를 향하던 새파 란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물론이거 니와 이 자리에 서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눈앞의 작 은 소년이 어느새 과거의 당당함과 기개를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혀…현아. 네가 정말… 돌아온 거냐?"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변화를 믿지 못 하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는 하얀 얼굴을 쓸어 내렸 다. 그는 아버지를 향해 긍정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전히 자그마한 손 을 천천히 들어올려 북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비를 맞아 새파랗 게 변한 입술을 열어 자신의 의지를 전했다. "저를 휴나르 성으로… 며칠 후에 있을 제6왕자의 파티에 데려가 주십시 오." ------------------------------ 끝마무리가 영 어색하네요. 제목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모르겠구… 보통은 장소나 날씨를 제목으로 때웠는데… 쿨럭;; 나중에 다 써놓은 다음에 제목을 정하고, 끝마무리를 다시 해야겠어요. 제 목보고 의아하게 생각하신 분, 계실까나? -_-;; 며칠만에 와서 겨우 요것만 올리고 또 사라지는군요. 보통 잠수 타다가 돌 아오면 연참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별로 글이 진행되지도 않았군요. 제가 슬럼프 아닌 슬럼프라서요. 글이 막힌 것도 아닌데 왠지 글쓰기가 즐겁지 않은 거 있죠? 그래서…중얼중얼… 사실 마감에서 탈출한 다음, 자유를 만 끽하겠다고 일주일 넘게 펑펑 놀아버린 탓도 좀 있죵. (퍽!) -_=;;; 마지막으로… 이벤트 집계하는 거 넘넘 힘들었어요. 흑흑흑. 이벤트 함부로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음. --;; 그럼 빠이∼. hongik1999@hanmail.net -제가 주로 쓰는 메일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제가 자주 노는 카페 -Warning- 영어로 메일을 보내면 바로 휴지통으로 직행입니다. 바이러스 메일일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거니 용서하시고 영어로 메일 보내지 마셔요. 이르나크의 장 Part 44 성인식 ----------------------------------------------------------- 삐익∼잠시 멈춤! 본 편에 들어가기 앞서 너무나 오랜 공백기간 동안 앞부 분 내용을 까먹은 분들을 위해 여기서 앞부분의 줄거리를 공개합니다! 옛날옛적에 어떤 고딩이 살았는데, 그 고딩은 어린애를 좋아하는 변태였습 니다.(별표 다섯개) 그런 주제에 꽤나 성실한 생활에 임하던 녀석은 딱 한 번 부모에게 개겼다가 천벌을 받고 아사하고 말았습니다. -도입: [교훈] 부모님 말씀 잘 듣자. 그 고딩은 전생의 기억을 갖고 이르나크 세계의 제6왕자로 환생을 했답니 다. 그 고딩, 카류리드는 어린애의 몸을 가진 19살이었기 때문에 천재소리 를 들으며 희희낙락하였고, 또한 그 특유의 변태기질을 발휘하여 도성 안 의 온갖 귀족 자제들을 찍쩝거리고 다닙니다. 한편, 제1왕자파는 인기순위 탑텐에서 항시 상위를 기록하는 카류리드가 왕위계승에 방해물이 된다 확 신하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유넨이 라는 자가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되었고, 생각 없이 여기저기 뺄뺄거 리며 돌아다니던 카류리드는 난데없이 반역자가 되어 사형선고를 받습니 다. 콩깍지 씌인 아르 할배에 의해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요. -전반부: [교훈] 좆도 없는 놈이 까불다간 큰코다친다. 반역자가 되었으면서도 내내 땅만 파며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민폐를 끼 치던 카류리드는 호위기사 디트리온의 배신을 겪고 땅은 조금만(?) 파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쟁… 첫째 전투에서 카류리드는 드래곤이 있다 고 사기를 쳐서 적군에게 승리를 거둡니다. 그러나 뿌린 대로 거둔다 했던 가요? 두번째 전투에서 적장 게릭에 의해 반대로 사기를 당함으로서 대패 하고 호위기사까지 잃습니다. 한편, 그러던 중에도 카류리드에 대한 소문은 완전히 개판 오분전이 된 상태였습니다. 그 상태에서 세번째 전투에 임한 카류리드는 당연히 죽일 놈으로 몰려 산으로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게 됩 니다. 그렇게 완전 다 죽을 판이 되었는데 갑자기 드래곤이 짠하고 나타나 서 적군을 싹 쓸고는 뭔가 알 수 없는 소리를 주절주절 지껄인 후에 평생 카류리드를 지켜주겠다 맹세합니다. 드디어 카류리드에게도 볕뜰날이 온 것일까요? 그러나 드래곤은 군을 위한 일에는 일절 도움을 안주겠다고 개 깁니다. 틱틱거려 보지만 드래곤에게는 당연 쨉도 먹히지 못했습니다. 카류 리드의 성인식 날이 다가오자 드래곤은 아주 에스문드가의 이름을 빌려 인 간 행세를 하겠다고 합니다. -중반부?: [교훈] 재수 없는 놈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한편, 헤이료우 상단의 저택에서는 현(힐레인)이라는 꼬맹이 놈이 갑자기 카류리드가 있는 휴나르 성으로 데려다 달라고 쪼르는데… ----------------------------------------------------------- 이르나크의 장 Part 44 성인식 어둑한 밖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내가 앉아 있는 이 넓은 홀의 내부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다. 그리고 그곳의 안쪽 가운데에 위치한 화려한 의 자에 자리잡은 나는 오랜 시간동안 끊임없이 웃음을 띄우며 사람들을 맞이 하고 있었다. 오늘이 나의 생일 겸 성인식이기에 여러 귀족들과 부유한 재 력가들이 많은 선물을 보낸 것이다. 내가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신성한 자 라는 소문이 온 나라에 자자하게 퍼진 이상, 그것을 믿든 믿지 않든 나의 존재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꽤나 살벌한 분위 기로 넘어갔을 성인식이 카이 덕분에 꽤나 시끌벅적해진 셈이다. 생각이상으로 많은 사신들이 참석해온 관계로―잠시 소강상태일 뿐 한창 전쟁 중인데다가 국왕군의 눈도 있기에 귀족들이 직접 오지는 못했다―나 는 그들이 건넨 선물들을 받으며 상당히 긴 시간동안 상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야 했다. 웃는 얼굴로 한 명을 보내자마자 또 한 명의 사신이 앞 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 나는 알게 모르게 한숨을 폭폭폭 내쉬 었다. 그런데 그 사신은 다른 사신들과는 다르게 상당히 많은 양의 재물을 선물로 가지고 온 듯 했다. "에나르츠 백작가에서 보내는 자그마한 성의입니다. 성인이 되신 것을 경 축 드린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아… 에나르츠. 그래. 백작님께 감사하다고 전하게." 나는 그 선물들을 훑어보며 옅은 미소를 띄웠다. 에나르츠 백작가라면 에 르가 형과 함께 몰려다니던 싸가지 5인방 중의 한 명인 엘시온의 가문이 다. 내가 알기로 에나르츠가는 국왕의 어명을 받들어 반란군―아군을 부르 는 또 하나의 호칭으로 영 유쾌하지 못한 단어였지만 굳이 따지자면 틀린 말도 아니다.―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연합군에 참여하지 않은, 이른바 중립귀족 중 하나였다. 아마도 4년 전, 고대 유적이 무너지면서 경험했던 일로 나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에르가 형처 럼 당장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무대포로 뛰어오지는 못하더라도 직접 공격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리라.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에나르츠 가를 대표하여 찾아온 사신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그리고 뭔가 다른 말은 없던가?" "예. 진정 제6왕자 전하께서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계시다면, 저희 가문도 응당 그에 따라야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우며 지고한 존재 의 인정을 받은 당신께서 선택하신 길에는 분명 진실이 있을 테니까요." 그의 말이 떨어지자 아군의 사람들은 물론이거니와 축하의 메시지를 전하 러 온 다른 사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에나르츠 백작가는 왕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큰 권세를 가진 유명한 가문이다. 따라서 그들 가문의 움직 임은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거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꽤나 호의적인 느낌의 에나르츠 가의 태도에 다른 귀족들도 상당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나는 크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아군을 돕겠 다는 분명한 의지의 표명이 아니라 ‘진짜로 드래곤의 가호를 받고 있다 면,’ 이라는 가정을 달면서 은연중에 드래곤의 존재를 증명해내라는 식의 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사신을 바라보다가 아주 잠시동안 내 곁에 서있는 카이에게 힐끗 시선을 보냈다.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하얀 드레스에, 마찬가지로 붉은 계열의 보석들 로 치장한 그녀의 존재는 조금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붙들고 있었 다. 카이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어머니나 히노처럼 온 나라에 소문이 자 자하게 퍼졌을 만도 하건만 그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이 파티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그 때문에 이 곳에 당도한 수많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카이의 존재에 의문을 표했다. 그 의문에 일단 나는 예정된 대로 그녀를 에스문드가의 영양이라고 소개했 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녀의 앞에만 서면 무슨 약점이나 잡힌 사람들처럼 제대로 말을 못하고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일부러 한 짓이기 도 했고, 사실상 드래곤에게 하대를 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무엇 보다도 사신들도 귀가 있다면 주변 지역과 휴나르 성내에 자자하게 퍼져 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둔갑하여 제6왕자를 지키고 있다는 화룡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먼 곳에서 찾아온 사신들은 너무나 하얗고 가냘픈 인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카이를 차마 드래곤이라 생각지는 못하는 것 같 았다. 사실 나도 그녀가 도마뱀의 모습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할 때 얼마 나 놀랐던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인데, 단순히 우리들의 태도나 뜬소문을 근거로 에스문드가의 이름을 쓰면서 내게 존댓말까지 쓰 고 있는 그녀를 드래곤이라 믿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카이를 직접 사람들 앞에 보여주지 않는 한 귀족들을 아군의 진영으로 끌 어들이기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전부터 예상하고 있던 것이었지만 직접 그런 상황을 대면을 하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미신을 쉽게 신봉하는 백성들이 나를 신성한 존재라고 착각(!)하면서 나름대로의 그럴듯한 명분 이 섰지만, 국왕군에 비해 하잘것없는 병력을 가진 아군의 불리한 상황이 뒤집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드래곤이 또 한번 나타나 브레스라도 뿌 려주지 않는 한, 당장 나의 편을 들기보다는 내게 괜찮은 승부수가 생길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나는 손으로 앞머리를 슥 쓸어 넘긴 다음,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에나르 츠 가의 사신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분들께 부디 빠른 시일 내에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빈다고 전하게. 그 럼 자네도 에나르츠 영지로 돌아가기 전에 이곳에서 마음껏 즐기도록 하 게." "감사합니다, 전하." "아, 그리고!" "예. 말씀하십시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물러나려던 그는 나의 뒤 늦은 말에 조금 당황하여 다시 무릎을 꿇었다. 사자가 제대로 자세를 잡는 동안 나는 잠시 손으로 턱 주변을 쓸어 내리다가 곧 입을 열었다. "엘시온에게 전하게. 진정한 친구로 남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이네." 내 목소리의 억양이 조금 전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사신은 나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잠깐 동안의 행동이었을 뿐, 그는 다시 고개를 깊이 숙여 그렇게 전하겠다고 답하고 일 정 거리를 뒷걸음질 쳐서 뒤로 물러났다. 곧 다음 타자로 사신이 걸어 들어왔다. 그 역시 엘시온의 가문에 만만치 않은 재물 보따리들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 선물들의 한쪽에 새겨진 금 빛의 문장을 보고 금새 그것이 어느 가문의 것인지 눈치챌 수 있었다. "성인이 되신 것을 경축 드립니다. 스나일 백작님께서 경사스러운 날을 축 하하는 뜻에서 보낸 작은 성의이오니 부디 받아주십시오." "물론이 기쁘게 받아들이겠네. 성의의 표시를 이유 없이 거절하는 무례를 범할 수야 없는 일이지. 스나일 백작께 감사하다고 전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나일 백작가의 사신은 고개를 깊이 숙여 정중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내 가 계속 지긋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자 그 시선의 의미를 깨달은 것인 지 다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한가지 제르카인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말해보게." 드디어 원하던 말이 나올 듯 하여 나는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스나일 백작가 역시 에나르츠 백작가와 마찬가지로 국왕군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 친구들 중 국왕군에 참여 한 것은 딜트라엘의 트로이 후작가와 세미르의 후르부크 백작가 뿐으로 그 들 두 가문을 제하고는 나름대로 최소한의 의리는 지켜주고 있었던 셈이 다. "예, 제르카인님께서 말씀하시길, 가장 신에 가까운 존재의 의지와 영광이 제6왕자 전하와 함께 하는 한 스나일 백작가 역시 그에 따라야만 할 것이 라고 하셨습니다." "내 그 말을 스나일 백작가가 나를 따르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했다는 뜻으 로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이번에도 역시 조금 전처럼 조건문이 달려 있었지만 나는 한번 밀어붙여 보자는 생각에 직선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 섭게 주변이 사람들이 작은 웅성거림을 만들어 내며 스나일 가의 사신에게 로 시선을 집중했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던 그는 고개를 조금 숙 이며 즉시 답을 했다. "그러나 스나일 백작가는 밝히기 힘든 개인적인 사정으로 여력이 없는 상 태인지라 전폭적인 지지를 하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셨습니 다. 전하의 뜻을 펼치는데 빠른 도움을 드리지 못해 송구스러울 따름입니 다." "그런가……. 하지만 내게 영원한 가호를 약속한 화룡께서 마치 자신의 존 재와 힘을 의심하여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그대들을 어떻게 평가할 지는 나로서도 장담을 할 수가 없다네. 오랜 친우의 가문에 불미스러운 일 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부디 스나일 가가 빠른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네." "예, 백작님께 반드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전하." 나는 듣기에 따라서는 꽤나 협박성이 짙은 쪽으로, 그러니까 계속 의심하 면서 우물거리면 기분이 상한 드래곤이 확 날아가서 몽땅 쓸어버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스나일 가의 사신 은 그것을 협박이라 단정한 것인지 ‘반드시’ 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빠르 게 대답했다. 인사치레를 끝내고 뒤로 물러나는 스나일 가의 사신을 보던 나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카이를 힐끗 돌아보았다. 하지만 카이는 여 전히 앞쪽으로 시선을 둔 채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괜히 카이를 끌어 들여 과장된 이야기를 하고 나니 도둑이 제발 저리는 것처럼 그런 느낌을 받은 모양이다. 그들이 지난 후에도 여러 귀족 가문의 사신들과의 상견례가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고대유적사건이나 여러 가지 일 등으로 예전부터 내게 흥미가 가 지고 있던 자들로, 나의 반역이 조기에 들키지 않았다면 이른바 제6왕자파 라 불리는 파벌을 형성했을 그런 자들이었다. "에밀튼 자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게. 자네도 오랜 여정에 힘들었을 테 지. 짧은 시간이나마 이곳에서 편히 즐기도록 하게."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의 뜻은 제가 빠짐없이 자작님께 전해 올 리겠습니다." 나의 부드러운 권유의 말에 에밀튼 자작의 사신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퇴장과 동시에 마침내 귀족과의 대면이 끝났 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직 지방의 유력 재력가들의 선물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다. 내가 지난 16년 동안 왕궁에서 생일을 치를 때는 국왕이나 형제들 같이 나 보다 높은 사람들이 잔뜩 참석했던 관계로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기나 했었 지, 이렇게 상석이 앉아 선물을 받으면서 인사를 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도 상황이거니와 내가 이 중 가장 높은 사람이기에 이런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오랜 시간 유지해야만 했던 영업용(?) 스마일로 인해 거 의 경련이 일어날 것 같은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눌러주며 매년 이런 식의 생일을 견딘 국왕의 그 인내심 하나만큼은 인정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후우……." 나는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작게 한숨을 내쉬며 숨이나 돌리자는 취지로 고개를 조금 들어 가까운 곳에 서있는 주변인들에게서 홀 전체로 시야를 넓혔다. 그리고 손으로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듯 쓸어 넘기고 있 는데 갑자기 기사 한 명이 파티장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 기사는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빠른 걸음으로 프리란트 님께 다가가 다급히 말을 전했다. 이런 시기에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홀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프리란트 님은 말을 모두 전 해 듣자마자 내게로 가까이 다가와 조금 전 그 기사가 했을 것으로 예상되 는 말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번… 뭐라고 하셨지요?" 그분의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라 잠시동안 눈을 크게 뜨고 있다가 스스로 의 귀를 의심하여 다시 한번 되물어 재확인까지 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마자 시종을 통해 휴식을 핑계삼아 잠시동 안 인사를 뒤로 미루겠다는 명을 내렸다. "예?" "네?" 막간 작전 타임을 이용하여 다른 아군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때, 드리크 경과 카나스 님은 거의 동시에 얼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다 른 사람들도 이렇게까지 소리를 치지는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불쾌함을 드 러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왜 이곳에 온 것인지에 대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들이 그것에 대해 제대로 몇 마디 나누지도 못 했건만 시종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목소리를 돋워 홀 내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신의 도착을 알렸다. "카르틴 왕국에서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예상치 못한 손님의 등장을 예고하는 폭탄선언과도 같은 말에 사람들은 크 게 술렁였다. 그리고 그 웅성임 속으로 풍채 좋은 몇몇의 기사와 직접 용 무를 전하기 위한 사신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물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해 약간 젖어있었는데, 아마 시간을 맞춰 들어오느라 비 에 젖은 머리카락을 완전히 말릴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최소한의 격식은 지키기 위해 홀 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새로 갈아입었던 것인지, 옷만은 물기하나 없이 아주 깨끗한 상태였다. "저들이 카르틴 왕국의 사람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카르틴 왕국의 사신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강한 호 기심을 느꼈다. 평생 왕궁 안에서만 살았으며, 국민감정으로 인해 카르틴어 를 배울 때도 원어민이 아닌 사람에게 배웠던 나였기에―그래도 선생님이 카르틴 사람 이상으로 유창하여 나도 할 건 다한다.―외국인은 이제껏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의 존재에 흥미를 느낀 것이 다. 물론 딱히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의 생김새가 우리들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피부색이 우리들보다 조금 노르스름한 편이었지만 개인차를 감안하자면 그리 큰 차이로 보기는 어렵다고 할까. 그러나 그들 이 입고 있는 복장들이 하나같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고, 바로 그것이 나에게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르윈 왕국의 남성 귀족들의 주로 입는 복장은 차이나 식에 가깝게 깃을 빳빳이 세운 셔츠 위에 조끼를 입고, 또 그 위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자켓을 하나 더 걸치는 형식이다. 물론 지금 홀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 는 카르틴 왕국의 사신이 입고 있는 옷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하 지만 옷의 무늬나 장식용 보석 등이 미묘하게 차이를 보였고, 무엇보다도 가장 위에 걸치는 자켓이 앞쪽은 짧고 뒤쪽만 길게 내려오게 되어있어 격 하게 걸어도 거치적거림이 훨씬 적을 것 같은 형식이었다. 그리고 자켓의 안쪽에 모양으로 두르는 스카프(?) 역시 우리들처럼 길게 내려뜨리는 대신 깨끗하게 묶어 남은 부분은 조끼 안으로 밀어 넣어 전체적으로 단정하고 활동적인 느낌을 주었다. 카르틴 왕국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그들의 복장을 낮추어 초라하고 경박한 옷이라 칭하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을 책의 그 림이 아니라 직접 눈앞에서 보자니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 다. "저는 크로시아 대륙의 영원한 ‘루―’이신 에뮤 폐하의 명을 받들어 라 느옌 자작가의 켈랴니가 아르윈 왕국의 제6왕자, 카류리드 전하를 뵈옵니 다." 카르틴 왕국 사절단 중의 대표로 보이는 라느옌 자작이 그 자리에 선 채 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깊게 허리를 숙이는 것을 보며 나는 눈을 가 늘게 떴다. 그들이 우리 나라의 신하가 아닌 만큼 무릎을 꿇지 않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방금 라느옌 자작이 유창한 아르윈 어로 내뱉은 한마디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루’라는 단어는 카르틴어로 빛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자기 나라의 왕을 카르틴 왕국의 빛이라 칭하지 않고 크로시아 대륙의 빛이라고 칭함으로써 다른 나라는 모두 자국보다 한 수 아래라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나라든 곧잘 자신의 나라를 추켜 올리는 말을 하곤 하지만 카르틴과 우리 나라의 사이가 극도로 나쁜 관계로 심심하면 서로의 수식어를 트집잡 아 격렬한 논쟁을 벌일 정도로 이런 곳에 굉장히 날카로운 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별 쓸데없는 곳에 정력을 낭비한다고 냉소를 보내던 나였으 나 직접 당하고 보니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마음이 샘솟았다. 자각하지 못 하고 있었는데 나도 꽤나 국민감정(?)에 깊게 물들어 버린 모양이다. 어쨌 거나 더 이상 사신들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서 나는 화답의 인사를 위해 입을 열었다. "12세계의 위대한 진리가 머무는 아르윈 왕국을 방문한 것을 환영하네. 그 대들도 나의 생일을 축하하러 와 준 것인가?" 내가 쪼잔하게시리 겨우 크로시아 대륙을 대표하는 라느옌 자작을 향해 12 세계를 들먹이며 진정한 스케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자 그은 미간을 미 미하게 찌푸렸다. 그러나 내 말을 맞받아 치며 애들 싸움을 할 생각은 없 었던 모양으로 바로 화제를 돌렸다. "예. 저희 폐하께서 전하의 탄생일과 성인식을 경축 드리며 이것을 선물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왕국의 왕자 전하께 드리는 양치고는 너무나 약 소한 양인지라 염려되었으나 여기까지 당도하는 길이 너무나 길고 험했기 에 더 이상의 재물을 가지고 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부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라느옌 자작은 뒤로 줄줄이 들어오는 엄청난 재물들을 가리키며 아주 약소 하다는 말에 강하게 악센트를 붙였다. 거 참, 허풍이 거세기도 하여라. 저 게 약소한 양의 재물이라면 그 흘러 넘친다는 돈으로 아주 이 대륙을 사버 리지 그랬냐.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은근히 재수 없게 구는 라느옌 자작을 향해 불만 을 토로했다. 그런데 홀 안으로 끊일 줄 모르고 들어오는 막대한 재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온몸을 지배하고 있던 불쾌함이 자기 마음대 로 스르르 사라지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저 돈이라면 화려하게 파티를 여느라 깨진 돈을 메워 놓고도 철철 넘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는 진심을 내보이는 대신, 라느옌 자작이 떨던 허풍을 무단으로 도용하여 대답을 해주었다. "물론 이해해 드려야지. 카르틴 왕국의 수도와 이곳과의 거리가 그리 가까 운 것도 아니니 말일세. 폐하께 당신의 마음만은 확실히 받았노라 전해드 리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진심을 보이는 대신 어쩔 수 없어서 용서하겠다는 투의 목소리를 내 었다. 하지만 내 태도를 보면서도 라느옌 자작은 고개를 숙여 정중히 답을 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단지 아주 잠시동안 옅은 웃음을 띄울 뿐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을 포착한 나는 순간적으로 엄청난 짜증을 느꼈 다. 아군이 굉장히 쪼들린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라느옌 자작은 굳이 따져들기 보다는 비웃음을 날리는 것으로 간단히 나의 말에 답했고, 내가 그 모습에 굉장히 약이 올랐던 것이다. 말싸움은 많은 말을 막힘 없이 늘어놓는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결코 아 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상대에게 더 많은 약을 올린다면 승리의 깃발은 바로 그 사람의 것이 된다. 그런데 이 내가 장장 삼십년 동안 단 한번도 져본 적이 없는 말싸움에서 패자가 된 것이다. 말싸움에서 지는 것, 직접 당해보니 정말 짜증나는 일이었구나!! 문득 스스로가 꽤나 발끈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흥분을 진정시키며 대신 싱긋 웃음을 띄웠다. "그런데 나의 형님 대에 있었던 성인식은 물론이거니와, 지난 16년 동안 단 한번도 받아 본적이 없는 에뮤 폐하의 생일 축하의 전언을 어떤 연유로 지금 받게 된 것인지 참 궁금하네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에 대해 이야기 해 줄 수 있겠는가?" 내 말이 떨어지자 라느옌 자작은 조금 건방지게 고개를 들어올려 나를 똑 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국왕폐하께서는 최근 저희나라에까지 퍼진 소문을 들으시고 그 즉시 서둘 러 저에게 이런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르나크 세계의 그 어떤 생명체보 다 완벽에 가까운 존재이며 수십 만년동안 모든 생명체의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 동시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 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마나의 위대한 흐름과 조화 속에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아아, 그러셨는가." 나는 온갖 수식어를 덕지덕지 가져다 붙인 그의 말을 들으며 싱긋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전혀 웃고 있지를 못했다. 카르틴 왕국은 상당시간 지속 된 우리 나라의 내전에도 지금껏 꼼짝도 않고 지켜보기만 하면서 굉장히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불안했건만 의도를 헤아 릴 수 없는 그 말이 더욱 불안감을 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라느옌 자작은 그것만으로 끝내지 않고 또 한번 입을 열었다. "그 때문에 올리는 요청입니다만… 저희들에게 드래곤의 본디 모습을 보여 주실 수 있을런지요. 국왕폐하께서 당신의 대신으로 그 거대한 존재의 위 용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각인 시켜 두었다가 다시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뜨끔하며 무의식중에 카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이제껏 그토록 피하려 했던 화제가 드디어 직접적으로 화두에 오른 것이다. 저것들이 날 골탕먹 이러 여기까지 왔는가 싶은 생각에 눈살이 찌푸려지려는 것을 필사의 의지 로 막아내고 난 후,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이 빗속을 불철주야하고 달려온 자네들에게는 참으로 안 된 일이나 그것 은 불가하네. 나의 수호를 약속하신 화룡은 그 어떤 생명체도 근접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지고한 존재. 따라서 조금 독단적인 면을 가지고 계시지. 그분이 비록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가지고 계시며 그로 인해 영원한 수 호를 내리겠노라는 맹세까지 하셨으나 그 분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 할 수 는 없는 일이네." "그러셨군요. 제가 부덕한 탓에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부디 무리한 요구를 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라느옌 자작은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사과를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보 란 듯이 싱글싱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확신하건데 역시나 드래곤 따윈 없는 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그 모습을 보자니 짜증의 화살이 괜히 카이에게로 날아갔다. 그냥 자신이 드래곤이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아직 많은 분이 기다리고 계신데 중간에 불쑥 끼어들어 이렇게 오랜 시간 을 뺏어서 죄송합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저희 위대하신 국왕폐하께서 제6 왕자 전하께 드리는 말씀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말해보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저 사신 놈과의 대화를 끝내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 끼면서도 일단은 본론이 나올 듯 하여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 도 마찬가지인 듯 홀의 내부는 상당히 조용해졌다. 라느옌 자작은 뒤쪽의 다른 사신에게 고급스러운 금색 천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를 받아들고는 그것을 풀어내어 읽기 시작했다. "우선, 나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은 천하에 존재하는 만물의 눈과 귀를 가려버릴 정도의 재간과 12세계를 관장하는 유일신마저 탄복시킬 그 천운 으로 마침내 위대하신 드래곤의 가호까지 받아낸 아르윈 왕국의 제6왕자 카류리드에게 끝없는 경의를 표하노라."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살을 확 찌푸리…려다가 자리가 자리인지라 간신히 참았다. 저들은 세레스트 산에 나타난 드래곤에 대한 소문을 전부 내가 꾸 며낸 속임수라고 단정하고 잘도 백성들을 속였다며 비꼬면서, 때맞춰 내린 비까지 싸잡아 참으로 운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내를 보이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미소를 띄우면서 계속해 서 이어지는 라느옌 자작의 전언을 말없이 경청했다. "짐은 아르윈 왕국의 내전을 지켜보면서, 반역자로 알려진 제6왕자가 실은 억울한 누명을 썼으며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는 사실 을 진작부터 깨닫고 있었노라. 그리고 지금, 드래곤의 등장으로 그 모든 것 이 진실임이 명명백백해졌다. 따라서 짐은 진정한 정의를 추구하는 당연한 인간의 도리로서, 제6왕자가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길에 동참하여 언 제든 심적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겠다."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계속해서 반어법을 쓰며 배배 비꼬는 말 때문에 그냥 밥상이라도 확 뒤집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마지막에 우리들을 돕겠다는 한마디는 그런 심정을 모조리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 역시 나처럼 눈을 크게 뜨고 그의 발언에 놀라움을 표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안가 다시 불쾌함이 담긴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나 의 양쪽으로 길게 놓여진 자리의 한쪽에 앉아 계시던 카나스 님은 아주 빈 정거리는 어조를 숨기지 않으며 라느옌 자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후, 그대의 국왕께 가서 자국의 정의 실현에나 신경을 쏟으시라 전하게. 위대하신 드래곤의 지원이 따르는 아군은 그런 도움이 없이도 충분히 승리 할 수 있네." 카르틴 왕국과 수많은 일전을 치른 에스문드 가의 가주였던 만큼 카나스 님은 카르틴 왕국에 엄청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덕분에 도움을 주겠다 는 말을 굉장히 고깝게 들은 모양이다. 사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아군의 사람들은 예전에 카르틴에게 정복당하면서 쌓인 앙금이 가장 많이 잔존하 고 있는 동부에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런 옛날이야기를 제하고서라도 최근까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카르틴 왕국과 심심하면 크고 작 은 시비를 붙고 있었기에 다른 지역의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감정이 좋지 못했다. 동남부의 영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드리크 경도 불과 얼마 전에 자신의 병사를 카르틴의 병사들에게 잃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아군 사람들이 그들의 도움을 좋아라 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로 무리였 다. 카나스 님의 비아냥을 들은 라느옌 자작은 두루마리를 뒤쪽의 문관에게 넘 기고 다시 고개를 들어 말을 이었다. "어찌 그리도 사고의 폭을 좁게 두십니까. 물.론. 여러분께서는 위대하신 드래곤의 지원을 받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드래곤 께서는 독단적인 존재이신 지라 당신께서 마음대로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 하다 말씀하셨으니 이 전쟁을 치르는 것이 그리 쉽지 만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미천한 인간이 벌이는 일에 일일이 그 위대한 존재의 거동을 종용하 는 것도 상당히 불미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우리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라느옌 자작의 말이 전부 진실은 아니었지만 일단 카이가 우리들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리 라는 것만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드래곤의 힘으로 이긴다는 것은 절대로 불 가능하다. 따라서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말이 없는 우리들을 보는 라느옌 자작의 얼굴의 걸린 웃음이 점점 더 짙어졌다. "제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전하께서는 약 5개월간의 전투에서 많은 병 력을 잃으시고, 현재 각 영지와 국경선의 방어를 모조리 포기하고도 3만이 채 안 되는 병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물론 상대의 병력도 상당히 줄어든 상태이나, 장기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수를 비교한다면 여러분의 병력은 조금… 부족한 숫자지요." 라느옌 자작은 조금이라는 단어에 잠시동안 여운을 주더니 뒷말을 이으면 서 이내 부드럽게 웃었다. 잘도 우리 병력을 조사를 한 듯 하지만 3만은 넘는다, 이놈아…라고 말해봤자 아군의 병력이 쪼달린다는 사실에는 변함 이 없으리라. 나는 배알이 배배 고이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며 계속 그를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의 문서를 통해 전해드린 국왕폐하의 의지대로 저희 카르틴 왕국 은 정의를 되찾기 위해 전하의 동반자가 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니 언 젠가 제6왕자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를 달성하신다해도 저희들이 그리 큰 대가를 바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심을 버리고, 단지 인간된 도리에 따라,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뿐이니까요." 나는 저들의 말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이 어떤 것인 지를 절실히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들이 곧장 우리 나라를 침략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긴 하지만, 지금 이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도 궁지 에 몰린 아군에게 손을 내민 다음 후일 승리를 거두면 그 대가로 내정간섭 이라도 하려는 모양이다. 리샤스 왕국과 에베리아 왕국의 눈치가 보여 직 접 침략이 어려우니 대신 나를 이용하여 우리 나라를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생각인 것이다. "…국왕께 그 마음만은 잊지 않겠다고 전하게." "드래곤의 가호를 받게된 유일한 인간이신 전하의 현명함을 의심하는 것은 당.연.히 아닙니다만, 청컨데… 저희들이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때 올바른 선택을 하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조금 전부터 계속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놈 때문에 나는 왼편의 히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고 참을 인자를 그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갑자기 라느옌 자작이 갑자기 실실 웃음을 흘리면서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한가지 사족으로 말씀드리자면 국왕폐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저희 왕 국 최고의 미녀이신 옐루니얀 공주님을 전하의 비(妃)로 보내드릴 생각이 있으십니다. 서로간의 돈독한 관계를 다지기 위해 왕가간의 혼인은 필수적 인 일이니까요." 나는 라느옌 자작이 대체 무슨 뜻으로 저런 소릴 하나싶어 고개를 갸웃했 다. 그러다가 그가 보내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따라 양쪽을 슬쩍 둘러보았 다. 나의 왼쪽과 오른쪽에는 각각 앞으로 내가 왕비로 삼게될 히노와 호위 기사 역인 카이가 앉아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 둘은 쉽게 찾아보기도 힘 들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이 아닌가. 나의 어머니 역시 왕국 최고 의 굉장한 미인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세상의 모든 미녀란 미녀는 전부 움켜쥐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추 측컨대 크는 내가 엄청난 미색가라도 되는 줄 안 모양이다. "자네가 잘 모르는 모양이군. 이쪽은 오랜 옛날부터 나의 반려로 예정되어 있었던 리아 후작가의 히노 양이며 이쪽은 나의 호위기사인 에스문드가의 카이야 양이네. 굳이 내가 미색가인지라 그녀들을 찾아 헤맨 것은 아니었 다네." "…호위 기사?" "왜, 여성이 기사라는 사실이 놀라운가?" 나의 대답에 그 라느옌 자작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카이를 뚫어져라 바라보 았다.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카이는 예의 상인지 무표정한 얼굴에 입술을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새하얀 왼손을 들어 올려 오른쪽 가슴에 얹고 살짝 목례를 했다. 나의 상식에 따르면 그것은 카르틴 왕국에서 사용하는, 만나서 반갑다는 뜻이 내포된 인사법이었다. 그 런데 가볍게 인사를 받은 것뿐인 라느옌 자작이 갑작스레 멀리서 봐도 금 방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확 붉혔다. 그리고 오른손을 어색하게 움직여 왼쪽 가슴에 얹고―인사를 할 때 여자는 왼손을, 남자는 오른손을 사용 한다―고개를 지나치게 깊게 숙이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금방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움찔하면서 자세를 바로 했다. 아마도 카이의 뇌쇄적 인(?) 미소를 보고 한방에 빡 가버린 모양이다. "갑자기 미인계라니… 저런 타입이 취향이야?" 내가 입을 조금 삐죽하며 쓰잘데기 없는 말을 작은 목소리로 건넸지만 카 이는 아무런 대답도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카이에 게 내심 실망(?)을 하며 나는 다시 라느옌 자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 데 그는 아직까지 벌겋게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계속 보자니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와서, 나는 그것을 참기보다는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조금 저으며 못 말리는 사람이라는 뜻을 은근히 내 비췄다. 그리고 나의 반응을 본 라느옌 자작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당하면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속이 후련하게 뚫리는 느낌에 아주 폭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아 나는 아주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 구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카르틴의 다른 사신이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했는지 앞으로 나서 말을 꺼냈다. "여성을 방안에 가둬두기만 하는 아르윈 왕국에도 여검사가 존재하리라고 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아르윈 왕국의 여검사는 저희 왕국의 용맹 한 여검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군요. 저 여성분께서 진정 전하의 호위를 책임지기 위해 검을 휘두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조금 전 카이 때문에 개 쪽을 당했던 라느옌 자작과는 달리 이 젊은 사신 의 억양에는 약간의 어색함이 묻어있었다. 물론 크게 어색한 것은 아니지 만 우리말을 하면서도 카르틴 특유의 강한 억양을 완전히 지우지 못해 뭔 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만든 것이다. 아마도 이제껏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직까지 아르윈어 실력이 완벽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 싶었 다. 나는 그 젊은 사신을 향해 알게 모르게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겉으로 는 담담한 척 대답을 해주었다. "외모로만 판단하기엔 이르다네. 이래봬도 그녀는 아군의 그 어떤 남자들 보다도 강하니 말이네." "제6왕자군의 인력난이 이렇게까지 심각한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선천적으로 힘이 약할 수밖에 없는 여성을 이길 수 있 는 남자가 단 한사람도 없다니… 하긴, 아랫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왕 족이 검술에 능하지 못하니 당연한 일일까요?" 이 젊은 사신은 라느옌 자작으로 인해 잠시 비웃음 당한 원한이 고새 뼈에 사무치라기도 한 것인지 굉장히 노골적인 모습을 보이며 비아냥거리기 시 작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발끈한 것은 역시나 아군 최 고의 다혈질인 에르가 형이었다. 형이 팔걸이에 탕 치면서 벌떡 일어나려 는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형의 뒤에 서있던 부관인 이트가 잽싸게 어깨를 눌러서 방해공작을 취해주어 다행히 큰 소동은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며 이트에게 고마움이 담긴 눈빛을 잠시 전하고는, 곧장 카르틴의 젊은 사신을 향해 내려다보며 반격의 말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사신의 신분으로, 자신이 파견되는 나라의 언어에도 능하지 못한 문관에 게 그런 말은 듣고싶지 않네! 이런 사절단에 자네와 같은 자를 포함시키다 니, 카르틴 왕국의 학문 수준이 정말 의심스럽군. 진정 카르틴 왕국에는 아 르윈 어를 완벽히 구사할만한 능력을 가진 자가 라느옌 자작밖에 없단 말 인가?" "……!!" "물론 자네의 말처럼 나는 선천적인 신체조건이 따라주지 않아 타인의 모 범이 될 정도의 무장은 되지 못했네. 하지만! 그 대신이라 말하기는 부족할 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문관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 교양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네!" 내 말에 이름 모를 젊은 사신은 얼굴을 붉히며 말문을 열지 못했다. 거기 까지 말한 나는 평소 사용하던 아르윈어가 아닌 카르틴어로 입을 열었다. 『대륙 극동에 위치한 어떤 소국에 이런 격언이 있다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자네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그들을 깔보듯 내려다보며 완벽한 카르틴어를 구사했다. 그리고 나의 비웃음의 대상이 된 사신은, 저도 명색이 문관이라 고 그 격언이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차린 모양으로 조금 전 카이에게 빡 갔을 때의 라느옌 자작 못지 않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 다. 드디어 기선을 잡았다고 생각한 나는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언성을 높여 엄하게 소리쳤다. "한 나라의 대표로 이웃나라에 건너온 사신이 담판을 지어야 할 상대나라 의 언어조차 제대로 습득하고 있지 못한데, 내 어찌 우리 왕국보다 이만큼 이나 수준이 뒤떨어지는 그대들의 나라에 힘을 빌릴 생각을 할 수 있겠는 가. 조금 전 그대들이 꺼낸 제안은, 사실 그 성의만은 참으로 고마운 것이 나 실질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많은 고려를 거쳐야 할 듯 하네." 나는 일단 지금까지 당한 것을 모조리 되돌려 주겠다는 취지로 자그마한 꼬투리를 빌미 삼아 카르틴 왕국 전체를 마구 씹어댔다. 하지만 그러면서 도 그들이 내놓은 제안을 완전히 거절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마 음 같아서는 ‘덜 떨어지는 놈들은 꺼져!’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현재 아군이 처한 상황을 감안했을 때 이런 식으로 가시 박힌 말은 할지언정 조 금 전의 카나스 님처럼 이 자리에서 바로 거절해버리는 것은 현명한 처신 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카르틴의 모든 사신들은 나의 말 때문에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엄청나 게 열을 냈다. 그때 한창 잘나가다가 카이로 인해 잠시동안 추태를 보였던 라느옌 자작이 이제서야 얼굴을 원상복귀 시키고 앞으로 한발자국 나섰다. "그의 발언이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혀 드린 듯하여 정말 죄송스럽습니다. 영면하신 전하의 말씀대로 그가 아르윈어를 완벽히 습득하지 못했습니다만 에베리아어나 리샤스어는 저 이상으로 능하며 외교학에도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인재이옵니다. 그래서 제가 후일을 위한 연륜을 쌓아주고자 일부러 이번 일에 동행을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 이상으로 그가 스스로를 다 스리는 법에 미숙하여 결국에는 전하께 무례한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부디 그의 동행을 허락하여 이런 일이 생기도록 만든 저의 부덕함을 탓하 시고, 저희 카르틴 왕국에 대한 오해는 풀어주셨으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내가 카르틴 왕국 자체를 모욕한 만큼, 내 말꼬리를 잡아 따져들 줄로만 알았던 라느옌 자작은 의외로 저자세로 나오며 정중히 사과를 했다. 그 모 습을 보고도 내가 여기서 속 좁게 틱틱거릴 수는 없는 일이므로 그렇게 하 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며 카르틴을 씹었던 것을 철회해야만 했다. 라느옌 자작은 비록 자신이 조금 욕을 보더라도 ‘우리보다 수준이 낮은 카르틴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탐탁지 않다.’ 라는 나의 문제성 발언을 큰 소란이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수월히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를 까 내리는 방 법을 택했던 것이다. 뭔가 대화가 의도대로 풀리지 않아 이래저래 불쾌해하는 내 속마음이 그만 얼굴에 드러나 버린 것인지 라느옌 자작은 승리의 미소라도 띄우듯,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일이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은 저 희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리가 아닌 조용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곳에서 저희 국왕폐하의 더욱 자세한 의지를 밝히겠습니다." "…알겠네. 시종에게 짧은 시간이나마 그대들이 머물기 위한 방을 준비하 라 이를 터이니 잠시동안 파티를 즐기도록 하게." 나는 사람들의 귀를 의식하여 ‘짧은 시간이나마’ 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라느옌 자작에게 말을 전했다. 카르틴과 손을 잡는다는 것은 국민감정을 감안했을 때 주변 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아군의 사람들에게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비춰질게 뻔했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카나스 님이 무슨 소리냐며 격렬한 항의의 시선을 내게 보내고 있으니 할말 다 한 거다.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라느옌 자작은 처음 했던 것처럼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깊이 숙여 인 사를 하고 다른 사신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일군들이 홀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던 재물들을 다시 낑낑대며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생긴 약간의 시간동안 나는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나는 이제껏 카르틴이 언제 쳐들어올지, 아니면 최소한 국경선의 어디쯤에 군대를 대어 위협을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만을 했을 뿐, 설마 정반대로 아군을 돕겠다는 식으로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 에베리아와 리샤스처럼 국가간 전투를 벌일 만큼 큰 트러블이 없었던 것이 너무나 신기할 정도로 카르틴과 우리 나라의 감정은 극도로 나빴던 것이다. 따라서 도움을 받는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도움을 주는 쪽 역시 기분이 더러울 것이 틀림 없다. 이유야 어쨌든 잠시동안 협력관계가 되는 것이 아닌가. 특히 나이 많 은 고지식한 원로 귀족들은 더하리라. 현 카르틴 국왕이 너무나 잘난 나머 지 선왕인 케시뮈르 3세의 시대 때부터 시작하여 삼십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왕권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런데 우리나라는 내전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반대가 극심할 원로들을 찍소 리도 못하게 눌러버리고 이런 사절단을 보낸 것을 보면 아무래도 그게 진 짜인 모양이다. "전하……." 문득 나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정신을 차렸다. 히노가 멍하 니 딴 생각을 하는 나를 부른 모양이다. 나의 앞에는 그새 카르틴의 사신 들이 전부 물러나고 새로운 자가 인사를 올리기 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러나 이번에 들어오는 자들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은 리아 영지에서 가장 큰 상권을 가진 헤이료우 상단의 일가였는데, 그 구성 원 중에는 크레베르와 켈레인 외에 힐레인까지 끼여 있었던 것이다. 저번 일로 그렇게 혼이 나고서도 또 힐레인을 데려왔다는 것에 나는 약간 의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힐레인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 은 알고 있었지만, 녀석은 분명 정상적인 행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도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또 다시 힐레인을 이런 중요한 자리에 데려온 곳 이다. 힐레인에 대한 악감정이 절정에 달해 있는 프리란트 님은 아주 얼굴 을 확 구기고 그들의 모습을 째리다시피 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카류리드 전하께서 한사람의 굳건한 성인이 되심을 저희 헤이료우 상단 의……." 크레베르는 나의 앞으로 다가온 후에 무릎을 꿇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 나 왼편에 서서 이쪽을 빤히 바라보며 힐레인으로 인해 말을 끝까지 이을 수가 없었다. 그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어서 예를 드리라는 듯이 힐레인의 손을 잡아끌었지만 녀석은 무정하게도 그의 손을 뿌리쳤다. "히…힐레……?!" 크레베르는 어찌나 당황했던지 말의 끝을 잊지도 못하고 입을 조금 벌린 채 자신의 무례한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파티장 의 다른 사람들 역시 웅성거리며 이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했다. "네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드디어 프리란트 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호통을 쳤다. 하지만 힐레 인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나 프리란트 님의 호령까지 전부 무시하며 천천 히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문득 힐레인의 행동이 예전의 그 모자란 행동의 할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두 번, 집사를 잡도록 도와주었을 때와 내가 헤이료우 저택에서 말을 걸었을 그 때처럼 진지한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 고 그것을 깨달음과 동시에 녀석의 깊디깊은 파란색 눈동자가 내가 아니라 카이에게로 가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부디 저에게 당신의 가지신 광대한 지식의 일부를 취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힐레인이 갑자기 내가 아닌, 카이에게로 무릎을 꿇으며 소리치듯 말했다. 조그마한 소년이 갑자기 카이를 향해 위대한 존재니 어쩌니 하며 소리치는 모습에 사람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펄펄 뛰며 화를 내 던 프리란트 님까지 입을 다물고 그 돌발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고 있었다. "무슨 뜻이시온지……." 나와 홀 안의 여러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힐레인이 왠지 모를 절박함이 느껴지는 음성으로 카이를 향해 말했 다. "저라는 존재가 너무도 미천하고 보잘것없어 홀로 완전한 존재인 당신께서 상대할 가치도 느끼지 못할지 모르겠으나… 그러나 단 한번, 부디 한번만 크나큰 자비를 베푸시어 저의 작은 의문에 해답을 내려주십시오. 저의 일 생일대의, 너무도 간절한 소원입니다!!" 힐레인의 말이 끝나자 녀석에게로 모여있던 시선이 한꺼번에 카이에게로 몰렸다. 카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 는 힐레인의 앞에 몸을 낮추며 살포시 앉았다. 그리고 녀석의 자그마한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얻고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어찌하여 그토록 스스로를 비하하시며 또한 저를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봐주시는 지는 모르겠으나 제가 무언가 도움이 될만한 것을 알고있 다면 언제든 만족하실만한 대답을 해드릴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카이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들은 힐레인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붉은색 눈동 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상황이 지속되는 것을 보자니 대체 무슨 일 이 일어나는지 궁금해 온몸이 근질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 아 그 상황은 종식되었다. 힐레인이 얼굴에 함박 웃음을 활짝 피우며 자리 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 당신께서 저의 질문에 답을 해주시겠다는 확신을 들었으니 말씀대로 일어나겠습니다. 제게 베푸신 이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아는 것을 가르쳐드릴 뿐인데 은혜랄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한가 지, 저는 카류리드 전하의 호위기사인지라 한시도 그분의 곁에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게 무언가를 듣고 싶으시다면 전하께 요청을 드 려 시간을 내보도록 하시지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힐레인은 고개를 꾸벅이며 카이에게 인사를 하고서 방글방글 웃으며 크레 베르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카이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드레 스를 정리하며 천천히 앉았다. 덜컥―! 그 때 갑자기 큰소리가 시끄럽게 홀 안을 메웠다. 덕분에 그 시끄러운 소 리에 놀란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난 문을 향해 쫘아악 집중되었 다. 돌발상황으로 인해 한동안 이 홀 안이 차가운 물을 끼얹진 것처럼 적 막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냥 단순한 문소리에 불과했던 것이 굉장히 크게 들렸던 것이다. 때마침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예기치 않게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그 기사는 굉장히 놀랐는지 한동안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특별 할 것 없는 평범한 기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가까 이 있는 사람과 웅성거리며 이야기를 시작했고, 기사는 금방 정신을 차리 고 발을 놀려 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흐음… 저…정말 죄송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멍하니 기사를 따라 시선을 옮기고 있는데 갑자기 크레베르의 말이 들려와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힐레인이 자신의 곁에 완전 히 자리잡고 서자 그가 말을 더듬으며 내게 용서를 빌었던 것이다. 하지만 크레베르의 표정을 가만히 보자니 그도 힐레인이 대체 카이와 무슨 소리를 한 것인지 모르는 듯 했다.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해 힐레인을 향해 질문을 던지기 위해 입을 열었다. "힐레인……." "전하. 아마 그에게 피치 못할 사연이 있는 듯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후에 개인적으로 그를 불러내어 물어보시는 것이 좋을 듯 하니 이런 자리에서 추궁을 하는 것은 그만둬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미처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카이가 끼어 들어 요청을 했다. 오늘 하루 동안만 해도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한번도 없었던 그녀가 갑자 기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카이의 태도나 지금까지 의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힐레인은 카이가 드래곤인 것을 아는 것이 분명 했다. 그래서 카이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냥 이대로 빡빡 밀어붙이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으나 그랬다가 나중에 카이에게 어떤 보복(?)을 당할 지 모르는 일이었기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구도를 빤히 쳐다보던 힐레인은 마지못해 한다는 느낌이 철철 흐르 는 태도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조금 전 카이를 향해 말했을 때처럼 그 앳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문장을 구사하며 내게 입을 열 었다. "죄송합니다. 전하께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순서이겠지만 혹시나 저분 께서 저의 요청에 답해주시지 않을까 너무나 염려되어 그만 실수를 저지르 고 말았습니다. 물론 전하시라면 저의 무례를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은 것은 카이의 정체를 안다는 가정 하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하는 말에도 높은 사람을 상대로 머 리를 조아리는 그런 느낌은 거의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힐레인, 이 녀석은 대체 뭘 믿고 이렇게 무례한 짓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진짜 멍 청한 녀석이야 아무 생각도 없으니 그런 무례한 태도를 고수할 수 있다지 만, 이 녀석은 그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도저히 화를 참지 못하고 죽여 버리라고 명하면 어쩌려고? 사실 내가 평범한 귀족 같았으면 힐레인은 예 전에 황천행이었을 것이다. 내가 여러가지로 의심스러운 저 꼬맹이의 정체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프리란트 님이 다급히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프리란트 님?" -쾅! 내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찰라 갑자기 문이 격하게 열 리며 큰 소리가 파티장을 메웠고 덕분에 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고 말 았다. 심장이 펄떡이는 것이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아 나는 눈살을 찌푸 리며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갑자기 열린 문에서는 당황한 표정의 시종과 질퍽하게 젖은 남자들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새로운 사신들인 듯 했는데, 아마도 나의 생일 파티에 시 간을 맞추느라 방금 전까지 빗속을 달렸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빗속을 뚫고 뒤늦게 도착하고도 최소한 옷은 갈아입었던 카르틴의 사신들 과는 달리, 그들은 수건으로 옷을 대충 닦기만 하고 들어온 것인지 후줄근 한 모습이었다. "전하……." "에, 프리란트 님?" 갑자기 나타난 손님들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프리란트 님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수도에서 사신을 보냈습니다. 알려드리는 것이 너무 늦어버린 듯 하지 만……." 막 홀 안으로 들어선 그 남자들을 힐끗 보며 프리란트 님이 작게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작스럽게, 이유도 없이 가슴이 착 가라앉는 것을 느꼈 다. "수도에서 루블로프 태자 전하의 사신이 도착했습니다." 곧 프리란트 님 못지 않게 뒤늦은 시종의 알림이 전해졌다. 덕분에 시끄럽 게 들어온 새로운 사신들을 향해 불쾌함을 시선을 던지던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카르틴 왕국의 사신 이상으로 예상치 못 한 손님에 사람들은 굉장히 놀란 것이다. 형이 보냈다는 그 사신들은 인상을 찡그린 채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소리가 나도록 혀를 찼다. 그리고 일부러 저벅저벅 발소리를 내어 굉장히 무례한 태도로 내 앞으로 걸어왔다. 문관 둘과 기사 여섯으로 이루어진 꽤나 적은 수의 사신단은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하나같이 굉장히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러나 기사들의 무장상태를 보건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검이나 흉기들을 전부 빼앗긴 듯했기에 일단 주위 사람들은 그 태도에도 얼굴을 찌푸리기만 할 뿐 일단 병사들을 시켜 나의 호위를 명하지는 않았다. 사실, 카이가 있 기에 그런 쪽으로는 영 긴장이 풀어진 것이리라. 어쨌든 갑자기 나타난 그들로 인해 내 앞에서 인사를 하려던 헤이료우 상 단의 일가는 어쩔 수 없이 옆으로 슬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 크레베르들 의 차례를 빼앗기까지 하며 내 앞에 완전히 내 앞에 자리를 잡은 그들은 무릎을 꿇지도 않고 오히려 고개를 더 치켜들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사신 들 중 가장 앞에 선 자가 익히 알고 있는 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지 없 이 항시 수도에 머물고 있는 중앙관료 중 하나인 텐스틴 준남작으로 왕실 에 무조건 충성하는 고지식한 자였던 것이다. 그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 곧 그가 지금부터 어떤 식의 태도를 취할지가 선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언성을 높여 소리쳤다. "정말 경악의 경악이로군요! 탐욕에 눈이 어두워 혈육에게 칼을 들이댄 것 으로 모자라 이제는 적국에게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생각이십니까!?" 나는 화를 낼 기운도 없어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그의 말과 꼴을 보아하 니, 카르틴 왕국이 보낸 재물이라도 보고 뭔가 오해를 하여 시종이 자신들 의 등장을 알리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무례한 놈!! 당장 꺼져라! 이 자리는 너 같은 놈이 감히 멋대로 지껄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모르는 사실은 아니었지만 카나스님은 카르틴 왕국에 대한 악감정은 완전 히 극에 달해있는 모양이다. 카르틴의 이야기를 들먹이자, 에르가 형도 가 만히 앉아있는데 카나스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빽 질렀던 것 이다. 그러나 텐스틴 준남작은 아주 죽기로 작정을 한 것인지 허리에 손을 얹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카르틴 왕국과 수많은 결전을 펼치며 그토록 용맹을 떨치셨던 에스문드 백작님께서는 이런 매국노들의 사이에 앉아 계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 십니까? 사람이 타락하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로군요! 통탄스러울 따름입니 다!" "저런 놈이!! 여봐라! 당장 저 무례한 놈들을 끌어내라!" 카나스 님은 의자의 팔걸이를 거의 부셔버릴 듯 세게 내려치며 역정을 냈 다. 그러나 사신은 주변에서 병사들이 달려들든 말든 그에 아랑곳 않고 뒤 쪽에 서있는 또 다른 사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상 자를 받아든 다음, 내게로 불쑥 내밀었다. 덕분에 카나스 님의 명을 받들고 우루루 몰려들었던 병사들은 일단 그들을 포박하지는 않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경계만 했다. "루블로프 태자 전하와 여러 전하 분들께서 당신의 생일을 잊지 않으시고 이렇게 선물까지 보내셨습니다. 저의 임무는 이것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에 스문드 백작님께서 그렇게 쫓아보내려 애쓰지 않으셔도 저 역시 이런 냄새 나는 돼지우리에는 한시도 붙어 있고 싶지 않습니다." "저 죽일 놈……!" 아군의 모든 자들이 무례의 극을 달리는 그 사신을 향해 이를 갈았다. 그 러나 그는 당당하게 나에게로 몇 발자국 더 걸어온 뒤에 바닥에 그 상자를 내려놓았다. 온통 젖어있는 사신들과는 달리 검푸른빛―내 머리색처럼 빛 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닌, 검은색과 파란색의 중간색―의 비단으로 싸여 진 그 상자는 비를 맞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가져온 듯 아주 깨끗했다. 나 의 손짓에 의해 가까운 곳에 서있던 기사 한 명이 앞으로 걸어나가 그 상 자를 가져왔다. 그런데 기사에게서 받아든 상자가 이상하게도 굉장히 차가 웠기에 나는 약간 의아함을 느꼈다. "카이세리온 전하께서 제게 특별히 이 말을 전하라 이르셨습니다. 여러 형 제분들을 설득하여 애써 준비한 것이니 부디 이것을 받아보고 기뻐하였으 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텐스틴 준남작은 내게 그렇게 말한 다음 인사도 하지 않고 그 즉시 몸을 돌렸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가운 기운을 뿜고 있는 상자를 잠시 만지 작거리던 나는, 마치 그 상자의 차가움에 전염이 되기라도 한 것인지 저도 모르게 냉랭한 목소리를 내어 그에게 말했다. "가서 똑똑히 전하게. 잘도 이 날을 잊지 않고 선물을 보내주신 것에 정말 이지 감사했다고 말이네." 내 말을 들은 텐스틴 준남작은 잠시 멈칫하고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는 입술 끝을 올려 비웃으며 말했다. "정통 왕위 계승자인 루블로프 태자 전하께서 손수 하사하라 명을 내리시 었는데 당연히 감사하셔야죠. 그런데 제6왕자전하시여, 더 이상 이런 자리 에 있다가는 구역질이라도 해버릴 것 같습니다만 그런 추태를 보이기 전에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이 무례한!!! 당장 저놈을 잡아라!! 전하의 위신을 생각해서라도 내 결코 네놈을 살려보내지 않겠다!!" "그만두십시오, 카나스 님. 귀족으로 태어나 수많은 교육을 받고도 저 나이 가 되도록 예의범절 하나 제대로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그 잘못 을 따져 꾸짖는다 한들 스스로의 과오를 깨우칠 수 있겠습니까. 본디 저렇 게 머리가 모자란 자들을 대할 때는 호통을 치기보다는 이해하고 포용해주 는 것이 덕이랍니다." 나는 카나스 님이 사신을 붙잡으려는 것을 막으며 사신을 비꼬았다. 그러 자 사신은 발끈하여 이제는 아예 반말로 소리쳤다. "인륜을 져버린 패륜아에, 나라를 팔아먹을 매국노인 네놈에게 예의범절이 통할 듯 싶더냐!" "내가 실로 패륜아에 매국노라 하여도 네가 사신의 신분으로 이곳에 걸음 을 한 이상, 사신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절은 지켜야 했을 것이다. 지금 네 행동이 너를 보낸 루블로프 형님까지 욕보이는 짓이라는 것을 어찌 모르느 냐." "네가 루블로프 님의 존함을 들먹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제 주인까지 욕보이는 너의 끝없는 어리석음을 탓한 것이다. 그렇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가? 하, 정말이지 너 같은 놈을 사신으로 보내다니… 형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래야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군." 내가 싸늘하게 말하자 그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 엇보다 루브 형이 모욕당했다는데서 더욱 화를 느꼈을 것이다. 나는 팔걸이에 두고 있던 손으로 이마를 짚고 분개하는 사신들과 주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사신들을 제외한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잔뜩 숨을 죽이고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문득 이 고요함이 알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내 머리 속을 묵직하게 가라앉히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은 말하고 싶지 않으니 꺼져라." 지금까지와는 달리 홀 안을 낮게 울리는 나의 목소리에 사신은 약간 움찔 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다시 찌푸리고는 거세게 콧방귀를 꼈다. 그리고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전하." 아직 나의 곁에 서있는 상태였던 프리란트 님이 작게 내 이름을 불러 나는 사신들이 나간 문에서 시선을 뗄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손에 들고 있던 그 상자를 다른 곳에 잠시 보관해두라는 의미로 뒤쪽의 기사에게 넘겼다. "다음 사람을 들리십시오. 아, 크레베르. 그대들의 차례였었지." 나는 근처에서 눈을 굴리고 있는 그들을 보고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다 문 득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힐레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린애답 지 않게 깊이가 느껴지는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의아하게 만들었지만, 그 보다는 나에게 무언가가 언짢은 것이라도 있는 듯 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로 미미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린 녀석의 표정이 먼저 눈에 들어왔기에 나는 시선을 녀석에게서 켈레인에게로 옮겨버렸다. 어쨌거나 크레베르들은 못 다한 인사를 마치기 위해 내 앞으로 걸어나와 무릎을 끓었고, 다행히 힐레인이 말썽을 피우지 않고 예의를 갖추었기에 그들의 상견례는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4 성인식 (2) 수도에서 형제들이 보낸 사신들이 일으킨 해프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별다른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의 생일파티는 무난히 막을 내릴 수 있 었다. 이번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새롭게 나타난 의외의 변수들이 정국 에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꽤나 심각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카르틴의 사신이 가장 큰 변수였고, 무언가가 여러 가지로 수상쩍은―심증은 있지만 물증은 없달까?―나의 호위기사 카이의 존재도 상당한 관심거리였다. "……." 나는 지금 여러 친인들과 함께 조용한 방안에서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들이 생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내게 보낸 상자를 아르 할아버 지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상자가 보통 상자들과는 달 리 이상하게 차가운 기운을 머금고 있었고 그것의 정체가 아무래도 마법인 것 같아 내가 아르 할아버지에게 요청을 한 것이다. "음, 마나가 저절로 머물고 있는 것을 보면 마력보존마법이 걸려있는 듯 싶구나. 상자가 이렇게 차가운 것은 냉각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인데, 그것을 마력보존마법으로 지속시키고 있는 것이란다." 할아버지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4년 전에 고대 유적이었 던 동굴에 갇혔을 때 구세주 같았던 물통에 그런 마법이 걸려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것이다. "이것을 그냥 열어봐도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마력보존마법은 다른 마법의 효과를 계속 유지시켜주기 때문에 잘만 사용하면 굉장히 유용한 마법일 수 도 있지만, 실상은 공격이나 방어 계열로는 아주 걸리지도 않고 냉각 마법 이나 라이팅 같이 쓸데없는 쪽으로만 상성이 맞아 거의 폐품 취급을 받고 있지. 그렇지 않아도 쉽게 도달하기 힘든 7서클에 속한 마법인데 노력하여 습득한 것에 비해 그 효용도 적기 때문에 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자는 굉장히 적단다. 현재 생명의 궁에 남아있는 마법사들 중 이것을 시전할 수 있는 자라면 네야드 정도가 전부일텐데… 그를 직접 불러 마법시전을 명하 였다면 장담하건대 별 것 아닌 물건은 절대 아닐 게다." "…그렇다는데 열어보지 않을 거냐?" 아르 할아버지의 긴 설명에 저쪽에서 삐딱하게 앉아 있던 류스밀리온이 툭 한마디를 건넸다. 카이의 등장으로 인해 한동안 예의를 차리며 조용하게 생활했던 그였으나, 카이 본인이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으면 딱히 바라 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부터 점차 본색을 드러내다가 최근에 이르 러서는 완전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어쨌든 류스밀리온의 그 말이 떨어지자 여러 사람들이 내게로 시선을 모았 다. 그리고 나는 아르 할아버지가 탁자에 내려놓은 상자를 한동안 빤히 바 라보다가 카이를 향해 말했다. "네가 보기엔 이게 무엇일거 같아?" "글쎄." "위대하신 드래곤도 모르는 것이 있어?" "내게 물건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리고 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다가 류스밀리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류스밀리온 님. 이 상자 주변에 실드를 씌워주십시오. 설마 그 사이에 실 드마저 뚫을 정도로 강력한 암기나 내지는 공격용 아티펙트가 개발되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이것이 공격용 아티펙트일 가능성을 생각하여 류스밀리온에게 실드의 시전을 요구했다. 6서클의 보호마법 실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형의 막 이 생성되어 일정한 강도 이상의 충격을 흡수한다. 그것의 지속 시간은 대 략 5시간 정도로 6서클 공격마법 이상의 충격을 가면 그 전에도 깨어버릴 수 있지만, 이중 삼중으로 겹겹이 덧씌워서 그 위력을 배로 증강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보호 마법이 다양화되어 있지 못하며―사실 3종류밖에 없다.―, 실드 이상의 강한 내구성을 지닌 보호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9서클 매직 실드가 있지만 논외―현시점에서도 충분히 강력한 고위 마법에 대비할 수 있 는 굉장히 가치가 높은 마법이다. 그리고 아티펙트들 역시, 마나를 움직여 주지 않고 여러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가치가 엄청나지 만 4서클 이상의 마법이 새기는 법은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위력이 강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이어 필드가 새겨진 피어스가 아르윈 최고의 세력을 가진 트로이 후작가의 가보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상자에 실드를 친다면 이것이 아티펙트라 할지라도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내 경우야 카이가 어떻게 보호해준다 손 쳐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 수 있을 것이 아닌 가.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아르 할아버지는 안타까움이 잔뜩 묻어나는 시선 을 나에게로 향하며 말했다. "카류야. 단지 중요한 것이 들어 있을 것 같다고 했을 뿐 그런 무기가 들 어있을 거라고 말한 건 아니란다." "물론 무기가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상자를 보낸 것이 아무래도 카이 형인 듯 하니 그런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죽이려고 안달이라는 것 은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 내 말을 듣더니 할아버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 대화를 듣던 사람들까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고 덕분에 방안은 조용하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전부터 계속 이런 분위기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에르가 형이 이번에도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쳇, 땅 파고 있네." "에르가!" 형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딜티가 형을 나무라는 듯 이 소리를 쳤다. 그러나 에르가 형이 그런 말 한마디에 자신의 발언을 철 회할 만큼 녹록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이 자리에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 다. 아니나 다를까 형은 딜티를 향해 인상을 확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뭐 틀린말 했냐?" "하, 그럼 까놓고 말해서 카류는 뭐 틀린말 했어? 네가 뭘 안다고 자꾸 끼 어 드는 거야?" "너 보단 많이 알아, 자식아!" "헛소리 마! 뇌가 근육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대포 로 행동하는 주제에!!" "뭐야!? 죽고 잡냐? 지금 너 죽고 나 죽자 이거야?" "죽고 싶음 너 혼자 죽어!!" 에르가 형과 딜티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장이라도 서로 멱살을 잡 고 주먹질을 할 것 같이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잘 아는 사람들끼리 있다고 해도 나이 많으신 분들도 있는데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겠다 싶어 나는 그들을 말리기 위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쾅! 그때 무언가 탁자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류스밀리온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탁자를 내려쳤던 것이다. 그는 새치가 조금 보이기 는 하지만 여전히 찰랑거리는 핑크빛 머리를 아무렇게나 벅벅 긁다가는 곧 입을 열었다. "정말 시끄럽구만. 하지만 나 역시 저 초록색 놈과 마찬가지 의견이다. 너 혼자 불행한 척 궁상떠는 건 그 정도로 해두는 게 어떠냐?" "류스밀리온!" 아르 할아버지가 호통을 쳤지만 그는 코방귀를 끼는 것으로 할아버지의 말 에 답했다. 그리고 얼굴 한쪽을 일그러뜨려 엄청 불만스럽다는 표정을 만 들어내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가 실드를 시전해주겠다고 허락했냐? 나도 마법을 쓰면 숨이 차 고, 지치는 인간이란 말이다. 이게 아주 날 말려 죽이기로 작정을 한 모양 이군." "그런 의도로 요청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뭐… 제 수식이 필요 없으 시다면 시전해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냥 아르 할아버지께 부탁드리죠." "빌어먹을… 이제 겨우 애기 티를 벗을까말까하는 녀석이 성인식 한번 했 다고 고새 싸가지를 밥말아 먹었나… 말이나 귀엽게 하면……." 류스밀리온은 그 동안 못했던 욕을 싸그리 해치우겠다는 의도인지 프리란 트 님처럼 엄하신 분들은 아주 얼굴을 크게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심하게 투덜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르 할아버지에게 일을 미루고 싶지는 않은 듯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상자 앞으로 걸어왔다. "으음, 실드…실드라… 젠장… 저 놈이 사람을 골병 들리게 만들려고……." 하지만 그는 마법서 중에 실드 마법이 적힌 페이지를 펴기 직전까지 투덜 거리면서 내게 불만을 표했다. 사실 지금껏 류스밀리온은 여러모로 힘든 마법을 많이 시전했고 그 이후로도 그리 긴 휴식기간을 가지지도 못했기 때문에 누적된 피로가 상당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 시전하려는 마법 또한 6서클의 고위마법이니 그가 투덜거릴 만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류스밀리온에게 무리를 시킬지언정 다른 마법사에게 부탁하겠다는 말 은 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상자의 내용물을 보여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결국에는 이런 억지스런 요구를 하도록 만든 것 이다. 사실 조금 전부터 눈앞의 상자에서 느껴지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 이 나에게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은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었다. 류스밀리온은 마법서에 빼곡이 적힌 길다란 수식을 손으로 차근차근 짚어 가며 캐스팅을 시작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자 상자에 작은 빛이 확 감돌 았다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4서클의 보호마법 라이트 실드―고대유 적 입구가 무너질 때 써버렸던 아티펙트 팔찌에 이 마법이 걸려있었다.― 와는 달리, 실드는 완전한 무형의 막이었기에 때문에 우리들의 눈에는 전 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됐다. 좀 작게 만들었지만 상관없겠지?" "음, 된 건가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외견으로 보기에는 마법을 걸기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상자를 보며 나 는 류스밀리온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천천히 상자로 손을 뻗었 다. 보통이라면 아무리 실드가 쳐져있다 손 쳐도 이런 위험한 물건을 내가 직접 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혹시나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의 정체가 실드로는 막을 수 없는 독 같은 것일 수도 있으니―카이를 철썩 같 이 믿고 있었기에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형제들이 보낸, 어떤 면으로는 좀 민감한 물건을 남이 풀어준다는 것도 그렇게 탐탁치는 않은 일이니까. "……." "……." 내가 상자를 곱게 감싸고 있는 비단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것을 사람들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느끼며 상자를 풀어내다가 문득 나는 자신이 굉장히 망설이고 있음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자꾸 상자를 열기를 거부하는 손 때문에 나는 상황에 맞지 않게 스스로의 정신상태를 심각하게 되돌아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러 잡생각을 하면서도 그것을 남에게 들키 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의 손은 착실하게 상자를 싸던 검푸른색 비단을 풀 어내고 있었다. 작게나마 차단막 역할을 하고 있던 비단이 완전히 떨어지면서 마법으로 만 들어진 차가운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나의 손으로 스며들었다. 딸깍―. 양손으로 상자의 윗 부분을 쥐고 그곳을 천천히 들어올렸을 때 나는 그 자 리에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금새 자조적인 웃음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내 가 망설인 것도 이 선물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놀라는 거냐. 그때 주위 사람들이 나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몸을 조금 내밀 며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고, 일단 나는 그 뚜껑을 아무렇지도 않게 상자의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용물의 보호를 위해 상자 안에 가득히 채워놓 은 천 같은 것을 오른손으로 밀어내며, 왼손으로는 가운데에 고이 모셔져 있었던 그것의 아랫부분을 감쌌다. 왼손에서 느껴지는 촉감이 영 좋지 못 했지만 윗부분만 잡고 확 끄집어내면 모양이 좀 그럴 것 같았기에 작은 불 쾌함을 감수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왼손을 위로 끌어올리면서 남은 손으 로 상자 밖으로 나온 뒷부분을 감싸서 일단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정중한 방법으로 그것을 천천히 밖으로 꺼내어 들었다. "이런 것을 보내기 위해 그렇게 대단하다는 마법을 사용하다니 좀 놀랍네 요. 아니, 어머니께서 처형되신 지 꽤 오래되었으니 그 동안 계속 마법을 시전하도록 시켜 지금껏 시체를 보존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치만 형들의 힘으로는 그렇게 오랜 기간 고위마법사를 제약하기가 힘들었을 텐데… 음. 국왕이라면 가능도 하겠지만… 아아∼! 오늘 낮에 텐스틴 준남작이 전했던 카이 형의 그 말은 이것을 국왕에게서 뺏어오느라 애를 썼다는 뜻이었나 봐요." 내가 꺼내든 그 물건, 그러니까 어머니의 목을 보고 사람들은 굳어버렸다. 그리고 내가 가볍게 내뱉은 대사에 더 더욱 굳어버렸다. 그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자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흘 러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그 생리적 현상을 참지 못해 피식 웃어버린 나는 차갑게 얼어있는 어머니의 얼굴을 오른손에 얹고 그 손을 앞으로 내밀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후후. 디트 경을 죽여버리길 참 잘했죠? 제게 선견지명이 있나봐요." "야!!" 갑작스런 큰 소리에 나는 그만 한 손에 올려둔 목을 땅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다. 내가 겨우 양손으로 그것을 받쳐들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는 깜 짝 놀란 사람들과 얼굴이 새빨갛게 붉히고 있는 에르가 형이 있었다. "당장… 당장 손에 든 그… 어쨌든 빨리 내려놔!!" 형이 숨을 몰아쉬면서 말하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한마디를 던 져주었다. "왜?" "야! 내려놓으라면 내려놔!" "흥분하지 마, 형. 흥분하라고 이런 걸 보낸 모양인데 진짜로 흥분하면 우 리만 손해잖아? 사실 형제들이 이런 것을 보낼 정도로 변했다는 것이 좀 놀랍긴 했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데 어쩌겠어." "닥쳐!" 에르가 형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형이 너무 흥 분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으로 간단하게 형의 움직 임을 피할 수 있었다. 에르가 형이 엉망으로 소파에 처박혀 버리기에 혹시 다치지는 않았는가 싶어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에르가 형……." "내 이름 부르지 마! 그거 내려놔! 당장 내려놓으라고 했어!!" 형은 소파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 채 내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사실 언제든 내려놓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왠지 그 모습을 보자니 오기 비슷한 것이 생겨 나는 오른손에 든 그것을 가볍게 왼손으로 넘기며 말했다. "흥분하면 손해라니까 그러네." 쾅―!! 에르가 형은 부셔버릴 듯 주먹으로 세게 탁자를 내려쳤다. 그리고 이번에 는 정말 그 힘 때문에 그 단단한 나무 탁자에 작게마나 금이 가 있었다. 형은 피가 흐르는 주먹을 들면서 나를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경고한다……. 그거 내려놔." "에르……." "내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어! 그거 내려놔! 당장 내려놓지 않으면 네 놈 과는 끝이야!! 너 같은 놈이 내 이름 부르는 거 영원히 용납하지 않겠다 고!!" 나는 형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얼굴을 기울임으로 해서 자 연히 시선이 닿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피부에 약 간 파란 기가 감도는 것이 좀 그랬지만, 아직도 과거의 아름다운 형태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봐줄 만 했다. 하지만 에르가 형은 정 말이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에르가 형에게로 한번, 어머니의 목으로 한번,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 를 반대쪽으로 갸웃했다. 어차피 껍데기일 뿐. 어머니의 영혼이 머물다 간 껍데기 중에서 윗부분만을 따로 잘라낸 것일 뿐. 이렇게 시시한 것이건만, 이렇게나 시시한 물건이 에르가 형에게 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기에 저렇게 까지 화를 내도록 만든 것일까.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형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에르가 형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를 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왜 형 에게 저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통 이해할 수 없 는 것 투성이다. 갑자기 머리 속이 하얗게 변해 가는 느낌이라 나는 이 생 소한 느낌에 의문을 표하며 다시 한번 머리를 갸웃했다. "카…카류… 에르가!"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이름을 말하는가 싶더니 이내 크게 화난 목소리로 에르가 형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이쪽으로 걸어왔지만, 내가 아니라 에르가 형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를 갈면서 형의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 "뭐……?!" "당장 사과해! 그 말 취소하란 말이다! 이 자식아!!" 에르가 형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는 딜티를 향해 조금 당황한 표정 을 했다. 그러나 딜티는 다짜고짜 주먹을 들어 에르가 형의 얼굴을 세게 후려쳤다. "큭!" 평소라면 그리 호락호락하게 맞아주지 않았을 주먹이었건만 에르가 형은 그것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땅바닥을 뒹굴었다. 하지만 금새 자리에서 일어 나서 얼굴의 상처를 돌보지도 않고 딜티에게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취소하긴 뭘 취소해?" 부웅―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에르가 형의 주먹이 딜티의 코앞으로 스쳤다. 간신히 그의 주먹을 피해내며 몇 발자국 뒷걸음친 딜티는 자신의 행동을 방해하는 의자를 발로 세게 차서 밀어버리며 소리쳤다. "이 송충이만도 못한 자식아!! 니가 그러고도 뇌를 가진 인간이냐?! 마음 내키는 대로 내뱉으면 단 줄 아느냔 말이다!" "시끄러워! 그럼 저 자식이 저 딴 짓을 해도 가만히 내버려두자는 말이 냐!?" "뭐가 저 딴 짓이야!!" 딜티는 그렇게 소리치며 단숨에 에르가 형에게로 파고들어 짧게 주먹을 내 뻗었다. 형 역시 그 주먹을 피하려고 움직였으나 엉망으로 헝클어져 있는 의자들 때문에 방해를 받아 그 주먹을 완전히 피하지 못하고 스치듯 맞으 면서 뒤쪽으로 쓰러졌다. 나는 어머니의 목을 왼손에 든 채로 그들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 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버린 듯했다. 머리 속에 남아있는 게 없어서인지 눈 앞에 벌어지는 상황에 그 어떤 감정도 생겨나질 않았다. 나는 아무런 여과 도 없이 친구들의 싸움을 단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카류."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흥분된 목소리도 아니었고, 놀란 듯한 목소리 도 아니었고, 안타까움에 물든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담담한 목소리였 다. 곧 그 담담한 목소리의 주인이 내 어깨에 따뜻한 손을 올렸다. 그런데 그 따뜻함은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았다. "카이……." 나는 스스로가 ‘자신(自身)’을 되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마자 고개를 들어 흔들림 없는 붉은색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뭔 가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는데도 그녀는 여전히 별다른 감정의 변화가 없 어 보였다. "그것이 네 친어머니의 목인가?" 그리고는 잘도 저런 질문을 내뱉었다. "아, 응." 나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에 그것을 탁자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 리고 아직까지도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만해. 많은 분들이 보는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나의 만류에 한창 주먹질을 하던 두 사람은 움찔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나 는 일단 가까운 곳에 있던 딜티의 손을 잡아 먼저 일으키고 그 다음으로 에르가 형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피를 흘리고 있는 딜티의 입가를 닦아 주면서 말했다. "엉망이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아직까지 애들처럼 싸우냐며 놀리겠어." "……." 딜티는 물론이거니와 에르가 형까지 엉거주춤하며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아직까지 도 멍해져 있는 사람들을 죽 둘러보았다. "조금 피곤하군요. 먼저 방으로 돌아가 쉬어도 괜찮을까요?" "……." "……." 하지만 나의 말에 류스밀리온 님까지 입을 다물고 앉아있기만 했다. 나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해주고 동의도 없이 문 쪽으로 걸어갔 다. 어차피 이대로 그들에게 동의를 얻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 생각했기 때 문이다. "전하……!!" 내가 거의 문 근처까지 걸어갔을 때 드디어 프리란트 님이 입을 열었다. 나는 그 목소리에 고개를 조금 돌려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의 목은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프리란트 님께 맡겨도 괜찮겠죠?" "에, 예……." 프리란트 님은 말을 더듬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시 한번 고개를 꾸뻑여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뒤를 그림자처럼 카이 가 뒤따랐다. 방안으로 들러온 나는 그 즉시 답답한 웃옷을 벗어 탁자 위로 내던졌다. 몇 겹으로 입고 있던 정장을 전부 벗어 던지고 셔츠 하나만 남게 되었을 때 겨우 숨이 트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풀썩―. 부드러운 시트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그곳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그리고 별다른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눈을 꼭 감았다. 조금 전 프리란트 님께 했던 말은 그냥 방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한 핑계 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정말 피곤했었던 것일까. 눈을 감자마자 거짓말처럼 쏟아져 내리는 잠 기운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시트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카류." 그러나 사르륵 잠이 드려는 찰나에 들려온 목소리로 인해 나는 잠이 확 달 아나는 것을 느끼고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침대 맡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카이가 나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확실히 그 목소리를 들었음에도 나 는 바로 일어나지 않고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내 이름을 부름으로써 잠을 깨운 것이 화가 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울리는 듯한 그 고요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나를 불러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카류여." 한동안 손발을 꼼지락거리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또 한번 들리자, 그때 서야 몸을 뒹굴 굴려서 얼굴을 위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움직이지 는 않고 그냥 눈동자만 굴려서 그녀가 있을 방향으로 시야를 넓혔다. "왜." "네게 물어 볼 것이 있다. 피곤한 듯 보이지만 이해해 주길 바란다." 건방지게 툭 내뱉는 나의 말에도 그녀는 변함없는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나는 그녀의 말이 완전히 떨어진 후에도 한동안 가만히 누워있다가 숨을 훅 들이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리를 꼬고 앉아 양손을 다 리에 탁 얹고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머니 목을 들고도 히히덕거린 내가 이상하다 이거지?" 카이는 내 모습을 보더니 항시 꼬고 있던 팔을 풀었다. "네 각오가 남달라서, 너의 감정이 완전히 메말라서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너는 보통 사람들과는 무언가가 달라 보인다. 나의 피어를 극복했 을 때처럼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듯 해서 묻는 것이다." 나는 키득 웃다가 그녀에게로 몸을 조금 내밀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기 울여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어떻게 너의 피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예전부터 궁금해했었지? 내 가 가르쳐 줄까?" 그녀는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지금 상황이 한편의 희 극 같아 나는 계속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난 말이야. 실은 17년 전까지만 해도 토이렌에 살았는데∼ 딱 한번 삐뚤 어진 길을 걸었다가 그만 굶어 죽었거든? 좀 엽기적이었지. 푸훗. 근데 죽 고 깨어나 보니 내가 글쎄 이르나크라는 세계에 다시 태어난 것이 아니겠 어. 그것도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로. 그러니까 말이야∼ 생명체는 죽으면 새로 태어나거든? 나는 이미 한번 죽어본 적이 있고, 그리고 살아있는 존 재가 환생을 한다는 것도 안다고. 그러니까 네 피어 같은 것은, 죽음을 관 장하는 목소리 같은 것은 쬐끔도 두렵지 않다 이거라고. 시체 같은 단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은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단 말이야." "……." 고개를 앞뒤로 끄떡끄떡하며 줄줄 내뱉는 나의 말을 그녀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또한 말이 전부 끝났음에도 평소처럼 바로 입을 열지 않고 시선을 약간 아래로 하고 생각에 잠기었다. 말없이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는 흥미 진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에게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새로운 생명을 얻을 것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이미 한번 죽어본 경험이 있으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시체란 이미 영혼이 떠난 껍데 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다룬 것이다. 그런 뜻인가?" "응."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앞뒤가 맞는 듯 하지만 믿을 수 없다." "풋, 하하하하하!"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땅을, 아니 시트를 손으로 치며 폭소를 터뜨렸다. 한참동안을 자지러지듯 웃으며 침대 위의 시트를 엉망으로 만든 다음에 다 시 제자리에 앉은 나는 너무 웃느라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 다. "봐, 내가 분명 말 해줘봤자 모를 거라고 했지? 역시 이해 못하잖아." "솔직히 황당한 이야기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아니면! 아님 내가 어떻게 네 피어를 극복했을 거 같아? 난 평범한 인간 에 지나지 않아. 상황이 조금만 달라지면 손바닥 뒤집듯 금방 변해버리는 허약해 빠진 인간이라고!" "확실히 내가 보기에는 너는 평범한 인간인 듯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미 죽어본 적이 있다는 그런 허황된 말을 믿으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그럼 평범한 내가 네 피어를 극복한 건 허황된 이야기 아냐? 내가 피어를 극복한 게 말도 안 되는 일이라서, 너무 황당해서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고 있는 거 아냐? 아니냐고!" "……." 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숨을 약간 깊게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한 말의 진위에 대한 것은 오늘 낮에 보았던 파란 아이에게 물어봐 도 좋을 터. 하지만 지금 나의 눈에도 네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군." 파란 아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카이의 이어지는 말에 그런 의문은 금새 잊어버리고 약간의 흥분과 함께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 지만 그녀의 얼굴에 나의 말을 믿겠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지는 않았다. 아 니나 다를까 그녀는 입을 열어 다음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너의 말을 이해하라는 것은 무리다. 내가 죽음을 경험하 지 못한 살아있는 생명체인 이상 그 어떤 증거가 나온다 한들 너의 진실을 마음 속 깊이 이해하며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문득 무언가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물론 못 믿겠지. 나 같 아도 못 믿겠다. 당연하지. 당연한 일이고 말고. 하지만, 하지만 그것을 알 기 때문에 더욱 짜증이 몰려왔다. "흠. 그렇지. 그렇겠지. 하, 그래도 어때. 나는 아니까. 환생이 실재한다는 사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 나는 알고 있으니까. 실은 너희들은 별 것도 아닌걸 가지고 벌벌 떨고 난리를 치는 거라고! 피어? 드래곤 피어라 고? 정말 우습지도 않은 일이지!" 카이는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더 욱 마음에 들지 않아 나는 제 풀에 더 언성을 높였다. "거짓말 같아? 거짓말이라고? 죽음 따윈 내게 아무 것도 아냐. 그 증거로 나는 이미 수만에 달하는 병사들을 죽였어! 내 손으로 직접 포로들을 죽여 본 적도 있어!! 내가 던진 칼이 그 놈의 목에 가 꽂혔다고!! 내가 못할 거 같아?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은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어. 언제든, 몇 번이 고, 디트 경까지도! 몇 번이고 죽여주겠어!" "전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지만, 디트 경은 정확히 어떤 자였지?" 내가 흥분해서 멋대로 말을 줄줄 내뱉고 있었지만 카이는 조금도 그에 휩 쓸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담담하게 물어왔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움직여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디트 경이 누구냐고? 짜증나는 놈이야.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호위기사였 던 놈인데, 하, 그런데 심심하면 목숨을 바쳐 날 지키겠다 해놓고는 내 어 머니에게 반해서는 나를 배신했던 놈이라고. 그 주제에 고지식한 기사노릇 을 하겠다고 난리를 친 진짜로 짜증나는 놈!!" "그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주겠는가? 그의 존재가 너를 이해하는데 조금 이나마 도움이 될 거 같군." 나는 흥분하여 욕을 하는데도 그에 조금도 동조해주지 않는 그녀를 보고 조금 허탈감까지 느꼈다. 그러나 이내 자세를 바로 하고 키득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아아. 그래. 말해주지. 그러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러니까 내가 반역 자로 몰리긴 했어도 아직까지는 참 착한 어린이였을 때인데 말이지. 그가 나를 찾아왔어.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여기까지 찾아와 준 줄 알고 정말 기 뻐했거든. 그런데 알고 보니 형들의 사주를 받아 나를 죽이러 온 거야. 내 어머니의 시체를 볼모로 잡혀서! 겨우 시체 같은 걸 손상시키고 싶지 않다 고 나를 죽이러 온 거라고! 그리고 나를 지키려 했던 그래… 알 아저씨도 죽이고… 하… 정말 난장판이었지……." "그런데 뭐가 문제였지?" 내가 고개를 떨구고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며 그녀가 몸을 조금 내밀어 나 의 표정을 살피며 질문을 해왔다. 나는 입술 끝을 올리고 우물거리다가 그 녀의 눈에 시선을 맞추고 피식 웃었다. "문제? 문제… 많았지. 훗… 나는… 나는 착한 어린이고 싶었거든. 현실이 야 어떻게 되든 모든 걸 전부 외면하고 계속 착한 채로 살고 싶었거든. 그 런데 디트 경이 와서는 가르쳐 줬지. 착한 아이일 수 없다고… 나를 배신 하고, 알 아저씨를 죽이고, 그리고 내 형제들이 더 이상 어쩔 수 없을 만큼 변해버렸다는 것을 내게 가르쳐 주면서! 당장 현실을 받아들이라고 내게 강요한 거야!!" 나는 시트를 세게 내리쳤다. 조용한 방안에 단지 나만이 흥분하여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점점 숨이 격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카이를 향해 소 리치듯 말했다. "싫어. 그가 정말 싫어. 징그러워! 끔찍해! 어차피 이렇게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절대로 싫어! 절대로 용서해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그래서 그에 게 죽음으로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했지. 죽여서 간단히 그를 해방시켜주 자니 너무 억울하잖아! 그가 얼마나 고지식한 인간인지 아니까, 이 말로 그 를 묶어서 괴로운 삶을 살도록 만든 거야! 그와 얼굴 마주칠 때마다 심한 소리를 했지. 그가 그것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을 줄 알았기 때문에 매일 그를 향해 소리를 질렀던 거라고!! 너도 한번 괴로워 해보라고 말이야!!" "그렇게 싫었다면 왜 그를 죽였지? 네가 큰 상처를 입은 그를 죽여주지 않 았나." 그녀의 질문을 들으며 나는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심장이 터져 나갈 듯 해서 다른 손으로는 가슴 근처의 셔츠를 찢어버릴 듯 꽉 쥐었다. 그리고 입술을 씰룩여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어차피 병신이 된 놈이잖아. 하아… 그래도 나도 양심이 있는데, 불쌍해서 죽여줬지. 인생이 불쌍하잖아. 하아… 아…안 그래?" 왠지 자꾸 숨이 차와서 나는 정말 간신히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숨을 헐떡이면서도 아주 성실하게,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이상하게 도 현재의 나는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인지 그 누구에도 하지 않았던 말 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그를 용서하기로 한 건가?" 카이의 짧은 물음에 턱이 덜덜 떨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켜 고개를 아래 로 내렸다가 다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불끈― 하며 갑자기 머리에 열이 뻗 쳐왔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열을 받은 내 얼굴이 붉게 변해버렸을 거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결국 그 짜증스러운 감정을 참아내지 못하고 곁 의 놓여진 베개를 카이에게로 확 집어던지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뭐가! 뭐가 용서야!! 누가 그렇대? 누가!! 누가 그런 놈!! 그런 놈!! 빌어먹 을! 짜증나! 절대로 싫어! 그렇게 지 멋대로인 놈은 절대로 싫어!! 지가 뭔 데!! 지가 뭔데 감히, 내게 자길 죽이게 만드는 건데? 세상 그 어떤 인간이 그런 더러운 병신 놈을 지 손으로 죽이고 싶어하겠냐고! 죽으려면 저 혼자 구석에 가서 죽어버릴 것이지! 눈에 안 띄는데 가서 접시물에 코라도 박고 조용히 뒈져버릴 일이지! 뭐가 잘났다고 저 혼자 난리를 치다가, 하! 신의 가호 좋아하시네! 빌어먹을 놈!! 그래, 죽어버려! 죽어버려!! 전부, 모조리 죽어버려! 죽어… 헉!"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몸을 낮추었다. 숨을 쉬 지 못할 정도로 가슴이 꽉 막혀버려 나는 혀를 빼물고 컥컥 소리를 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카이가 평소와는 달리 빠른 동작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일단 내 등에 손을 얹고 나의 상태를 살폈다. "욱!" 그때 갑자기 막혀버렸던 가슴이 한꺼번에 뚫리듯 입으로 무언가가 치솟아 올랐다. 나는 본능에 따라 침대 밖으로 몸을 내밀었고, 바로 입까지 올라온 그것들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내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들이 밖으로 나 오면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러댔다. 너무나 더럽고… 그리고 역겨운 냄 새였기에 바로 지금 한창 구역질을 하면서도 모조리 토해버리고 싶다는 생 각을 할 정도였다. 정신없이 흉하게 토악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 손에 의아해 하던 나는 앞머리를 조용히 쓰다듬는 또 다른 손길에 그것 이 카이의 것이라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커헉……." 시트 끝을 잡고 있던 양손 중에 한쪽을 들어 뜨거운 가슴을 쥐었다. 차갑 게 식어버린 손과 발에 비해 누군가를 느끼는 가슴과 누군가를 생각하는 머리는 끔찍히도 뜨거웠다. 그래서인지,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역시 굉장 히 뜨거웠다. "우……." 위 속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음식물까지도 전부 게워냈을 듯하다는 생각을 했을 때, 시트를 꽉 붙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 손만 이 아니라 이미 온 몸에 남아있던 아주 작은 힘까지도 전부 누군가에게 흡 수당하듯 빠져나가 버려서 나는 그 자리에 축 늘어져 버렸다. 이상하게도 눈앞이 어둑어둑하여 잘 보이지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멈추 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나는 큰 불안은 떨칠 수 있었다. 설사 하 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져 버린다 해도 카이만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안심시켰던 것이다. 나는 아주 잠시동안 그녀에게 자신을 맡기자고 생각하며 천천히 눈꺼풀을 내렸다. *** 카류리드 전하께서 방을 빠져나가고도 안은 계속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움직이고 있는 리아 후작님은 수도에서 다른 형제분들 이 보내었다는 그 물건을 다시 상자 속에 고이 집어넣는 중이었다. "하아……."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아르디예프 님이 크게 숨을 내쉬 었다. 그리고는 조금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꼭 감쌌다. "모든 것이 다 저 놈 팔자다. 다 늙어 빠져서는 뭘 그렇게 질질 짜는 거 냐." 아르디예프 님의 모습을 보았는지, 류스밀리온 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 지만 그분도 시선을 사람들이 없는 창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딜트라엘 님과 함께 아직까지 멍하니 서있는 에르가 님에 게로 다가갔다. "에르가 님. 딜트라엘 님도 그만 상처를 치료하셔야지요." "…알겠다. 이트." 에르가 님은 순순히 그 요청에 따라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러면서 아직까 지 가만히 서있는 딜트라엘 님의 곁을 지나게 되었다. 에르가 님은 그분을 힐끗 바라보았지만 말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다. 퍼억―!! "에…에르가님!" 그러나 카류리드 전하가 밖으로 나가버리면서 종료되었다고 생각했건만 딜 트라엘 님이 갑자기 주먹을 휘둘렀다. 덕분에 완전히 무방비였던 에르가 님은 그대로 의자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내가 다급히 그쪽으로 뛰어가 일 으켜드리기 위해 팔을 붙들었으나 그분은 그것을 뿌리치고 혼자 일어서며 소리를 질렀다. "비…빌어먹을! 이 비겁한 자식이!! 죽고 싶어!?" 에르가 님은 당장이라도 그분에게 덤벼들듯이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딜트 라엘 님은 별다른 반박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지금 나하고 뭘 어쩌자는 거냐. 엉?" "다시는 카류를 건드리지 마라." 에르가 님이 발을 쾅 구르며 다시 한번 소리치자 딜트라엘 님은 그제야 입 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운을 띄웠다가 주먹을 쥐어 에르가 님에게로 향하 면서 다음 말을 이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갔지만, 다시는 그렇게 카류를 몰아세우지 마라. 또 한번 그랬다가는 비겁이고 뭐고 없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빌어먹을! 아, 그래서 저 놈을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자는 말이야? 저렇게 맛간 놈으로 계속 내버려두라고!?" "두 번 말하게 하지마! 아무 것도 모르는 놈은 구석에 가서 처박혀 있으라 고!!" "이 개자식! 뭘 모른다는 거야!?" 에르가 님은 얼굴을 붉히기까지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모습에 딜트라 엘님은 더욱 화가 난다는 듯 얼굴을 구기고 말했다. "네가 가족에게 버림받는 게 뭔지 알아? 네가 카나스 님께 검을 들이댔다 는 것은 들었지만 결국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잖아. 하, 솔직히 카나스 님께 달려든 것도 그 이후의 일은 생각지도 않고 무대포로 저지른 일이었 을 것이 뻔하지." "뭐… 너……!!" 이번의 그분의 대사는 나까지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였다. 에르가 님 은 정말 못 참겠다는 듯이 주먹을 쥐며 딜트라엘 님에게로 발을 한걸음 뗐 다. 그러나 딜트라엘님은 입을 이죽이며 그분께 계속 조롱을 던졌다. "지금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너 정말 카나스 님을 베어버 릴 자신이 있어? 카나스 님께서 끝끝내 카류의 편을 드는 것을 거부하고 병사들을 일으켰을 때 너는 그분과 대치하여 실제로 목숨을 걸고 검을 부 딪힐 자신이 있냔 말이다!" 딜트라엘 님의 말에 에르가 님은 더 이상의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조금 굳 었다. "알아? 네가 카류에 대해 안다고?" 딜트라엘님은 손을 허리에 얹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에르가님은 그 런 말을 듣고도 곧장 반박의 말을 하지 못했다. 실상 딜트라엘님이 하는 말은 그 어느 쪽도 명예로운 일이 아니었다. 카류리드 전하를 진실로 따를 자신이 있다는 것은 친아버지를 진실로 해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고, 카 나스 님을 해할 수는 없다는 말은 결국 카류리드 님에 대한 의지가 얕다는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마도 카류리드 님과 가장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는 딜트라엘 님이 에르가 님의 말에 화를 느끼고 이런 말을 한 것 이리라. "그만두게. 지난 일이니까." 상황을 보다못한 것인지 카나스 님이 잔잔한 목소리로 딜트라엘님을 만류 했다. 덕분에 상황은 대충 흐지부지되며 넘어갈 듯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르가 님이 다시 한번 딜트라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 다. "그래… 난… 나는 몰라.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놈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니야? 저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둬야만 한다는 거냐?!" "시끄러워! 뭐가 저런 짓이야!?" 카나스 님의 말에 따라 돌아서려 했던 딜트라엘 님이 돌아서며 소리를 질 렀다. 하지만 이번에는 에르가 님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아니면 저게 잘하는 짓이야?" "네놈은 아무 것도 몰라. 작은 줄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티며 살아가는 사 람의 심정 같은 것은 너 같은 무쇠신경을 가진 행복한 놈으로서는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 "빌어먹을! 뭔 소리야!!" "그렇지 않아도 저 선물 때문에 충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네놈이 돌아 서겠다는 발언이 카류에게 어떻게 들렸을 거 같아? 주위 사람들의 힘으로 간신히 버티고 서있는 놈에게 어떻게 들렸을 거 같으냐고! 자식아!!" 딜트라엘님은 굉장히 흥분한 듯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사실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을 정도였다. 조금 전 에르가 님 이 용서하지 않겠다고 소리쳤을 때 카류리드 전하의 상태가 많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드래곤 카이야 님의 덕택으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듯 했지 만 자신의 어머니의 목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 모습에 한순간 소름 이 돋았을 정도였다. 그분이 이런 시기에 정신이 이상해진다거나 하면 아 주 작은 희망마저도 완전히 부서지고 마는 것이니까. 하지만 그 모습을 제 대로 보지 못했던 에르가 님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 다. 딜트라엘 님은 에르가 님을 향해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목소리 를 낮게 깔고 입을 열었다. "카류를 몰아세우지 마. 녀석이 부서지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 해도, 그것이 누구라 해도 결코 용서하지 않아." "…그렇지만 그 놈은……." "말했어! 분명 경고했다. 카류가 어떻게 변해버리든 상관없어. 녀석이 자신 의 어머니의 시체로 회를 쳐 먹는다 해도 상관없어! 하지만 카류는 부서지 면 안돼. 나는 녀석이 없으면 안돼! 너와는 달리 내게는 그 녀석밖에 없어! 그 놈이 없으면 숨도 쉴 수 없다고!! 알아 처먹었어!?" 딜트라엘님은 크게 소리쳤다. 에르가 님을 노려보는 그분의 갈색 눈동자는 거의 살기에 가까운 기운을 띄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며 한동안 말없이 서있던 그분은 그 자리에서 돌아섰다. 그리고 크게 발소리를 내며 문가로 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도 없이 문을 열고 밖 으로 걸어나가 버렸다. 사실 딜트라엘님이 트로이 후작가와 대립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 던 일이지만, 평소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고 있었기에 그분에 대해서 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다지 큰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피를 나눈 가족과의 대립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임에 도 항시 자연스럽게 웃는 얼굴에 그분이 마음을 정리한 것이라 믿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분도 카류리드 전하와 같았다. 카류리드 전하가 불 안한 것과 같이 그분 역시 전하만을 의지하여 그렇게 간신히 견디고 있었 던 것이다. 시끄럽게 닫히는 문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에르가님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딜트라엘님의 말에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 양이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대로 움직이셨던… 솔직히 말해 딜트라엘 님의 말씀대로 생각 없이 무대포로 움직이셨던 그분 에게 이런 상황은 큰 혼란인 듯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는 나 역시 뭐 라 말을 해드릴 수 없어서 난 에르가님의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볼 수밖 에 없었다. "에르가." 카나스 님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정말 오랜만에 에스문드 백작 대신 그분의 이름을 직접 불렀다. 갑자기 에르가 님의 친아버님 되시는 분이 카나스 님 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조금이라도 친아들의 뜻보다 가 문이나 명예를 더 중시했다면 에르가님이 이렇게 이 자리에 서 있기는 힘 들었을 것이다. "에르가님?" 카나스님의 부름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하던 그분이 갑자기 발걸음을 빠르 게 하여 문 쪽으로 걸어나가기에 나는 당황하여 그분을 불렀다. 하지만 여 전히 대답이 없어 나는 일단 다른 분들께 인사를 올리며 그분의 뒤를 따랐 다. 나의 인기척을 느낀 것 같았지만 에르가 님은 내게 따라오지 말라는 호통은 치지 않았고, 그것을 보며 카나스 님은 내게 눈짓으로 에르가 님을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먼저 밖으로 나가버린 그분을 따라 문밖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에르가님은 동편 복도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쪽은 빛이 잘 들지 않아 수많 은 빈방이 있음에도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는 장소였다. 아마 혼자 생각 을 하기 위해서 사람이 없는 곳을 택한 모양이다. 나는 말없이 그분의 뒤를 따랐다.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성품이 에르가님의 장점이라 생각하지만, 한번쯤은 저분도 이렇게 생각에 잠기는 일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간간히 들리는 시종들의 움직임만 빼고는 아주 고요한 복도였다. 그 속에 두 사람의 작은 발자국 소리가 울렸다. 한동안 직선으로 걷자 곧 동편 복 도의 끝이 보였다. 하지만 에르가님은 그 벽의 바로 직전까지 걸어갔고 나 는 혹시 그분이 너무 깊은 생각에 잠겨 벽을 있는 것을 모르는가 싶어 손 을 조금 내뻗었다. "이트." "에, 예!" 그 때 갑자기 에르가님이 내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라 뻗고 있던 손을 도로 원위치 시켰다. 그분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건가?" "……." "내가 틀린 건가? 그런가, 이트?" 내가 바로 대답을 않았음에도 에르가님은 짜증을 부리지 않고 다시 한번 고요한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조금 웃으면서 그분께 대답을 하는 대신 질문을 던졌다. "틀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내 질문에 에르가 님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무수히 내려오는 빗줄기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감수성과는 거리가 먼 그분이 어둑한 창 밖 의 풍경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것이 왠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팍―! 역시나 그런 장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에르가 님이 창턱을 차듯 그곳에 왼 발을 얹은 것이다. 그리고 몸을 앞으로 쭉 기울여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다 가 내게 소리치듯 말했다. "내가 알게 뭐냐!!" "그런가요?" 내가 싱긋 웃자 에르가 님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그래. 난 머리가 나빠서 그런 건 잘 모른다 이거야! 하지만 그 놈이 하는 꼬락서니는 도저히 못 봐주겠다! 난 그런 건 절대로 못 참아!!" "제가 보기에 에르가 님께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암기 력만 해도 상당한 수준이신걸요." 단지 밑바탕에 깔린 사상이 너무 단순해서 그렇지. 나는 굳이 뒷말을 전부 잊지 않고 중간에서 말을 끊었다. 그것을 눈치채기 라도 한 듯, 에르가 님이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조금 전부터 짓고 있던 표정을 바꾸지 않고 계속 싱글싱글 웃었다. 곧 그 분은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손을 하나 빼내어 머리를 확 긁어 넘기며 말했 다. "됐어! 남에게 뭐라 한마디 들었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생각을 뒤집어버리 는 것은 사나이답지 못한 일이다! 카류리드 그놈으로 인해 한번 바뀐 걸로 충분해!!" 나는 그분다운 결론을 듣고 그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왔다갔다하는 것 이 보기 좋은 일은 아니지만, 잘못된 일을 과감하게 고치는 것도 충분히 사나이다운 일이라는 충고를 잠시 곁들여 드리고 싶었지만 에르가 님의 생 각에 아주 작은 혼란이나마 피하게 해드리기 위해서 일단은 후일로 미루어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과 같은 일에는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 정답이 나와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원래의 에르가님의 성격대로 밀고 나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그리고 아마… 카류리드 전하도 자신이 원인이 되어 에르가님의 성격이 조심스럽게 바뀌어 버리는 것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사 그로 인해 조금 전과 같은 그리 좋지 않은 결과가 빚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가자!" "예?" "카류와 딜티. 그놈들에게 한방씩 먹이러 말이야!" 에르가 님의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평소처럼 약간 거친 발걸음으 로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가는 그분의 모습에 다시 웃어버렸다. 나 는 그분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 자리에 머물 것이라고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 따뜻했다. 따뜻한 빛이 나의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온 몸을 감싸는 따뜻함 속에서도 유독 머리카락에서 느껴지는 따뜻함이 더욱 기분 이 좋았다. 나는 그 기분 좋음에 취해 고개를 조금 움직였다. 그런데 나의 뺨에 닿는 것은 폭신한 시트와는 달리 약간 까슬까슬한 천이었다. 나는 그 촉감에 약 간의 의아함을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깨어났군." 가늘게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붉은 실타래가 내 얼굴을 덮쳐왔다. 하지만 금방 하얀 손가락이 다가와 그 실타래를 옆으로 넘겨주 었다. 다시금 시야를 되찾은 나는 눈앞의 아름다운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무릎 위에 나를 누인 채로 아직까지 앞머리를 쓰다듬어 주 고 있는 카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계속 이렇게 해주고 있었던 거야?" "네가 그러기를 원하는 것 같더군." 그녀의 말에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그러다가 곧 한숨을 폭 내쉬며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으음, 요즘 들어 건강체질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계속 비실거리기만 하네." "정신이란 생각 이상으로 육체에 큰 영향을 미치지. 너도 그런 경우일 것 이다." 카이는 그렇게 말하며 계속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것이 굉장히 기분이 좋아서 나는 눈을 감고 그녀의 따뜻한 손길을 즐겼다. 그러다 문득 웃음이 새어나와 나는 히죽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나 얼마나 자고 있은 건데?" "반경―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았네? 그렇다고는 해도 계속 이렇게 해주고 있었다 니, 오늘은 굉장히 서비스가 좋은걸." "네가 그렇게 된 데는 내 탓도 조금 있으니까." 건조한 음성이었건만 이상하게도 나의 귀에는 아르 할아버지의 자상한 음 성만큼이나 기분 좋게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 하나 하나를 귀에 새겨 넣 던 나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자 눈동자를 굴려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낀 것인지 카이는 내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를 얼굴 쪽으로 쓸어 내리는 식으로 손을 움직이다가 이제는 반대로 위쪽으로 쓸어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가리던 몇 가닥의 머리카락까 지도 모두 치워 내 시선을 받았다. "……." "……."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평 범한 사람들이라면 적정 선에서 피했을 만도 한 내 시선을 카이는 정말 아 무렇지도 않게 받아내고 있었다. "있지……." 나는 상당 시간의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한꺼번에 전부 말을 해버리지 않고 끝을 흐렸다. 가만히 뒷말을 기다리던 그녀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또 한번 작게 말을 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꿈을… 꿨거든……." "어떤 꿈이지?" 내가 상당히 망설이는 듯한 태도를 취했지만 그녀는 별다른 배려 없이 직 선적으로 물어왔다. 덕분에 나는 소리를 내어 키득 웃었다. 그리고 계속 그 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파란색 풀이 가득한 곳에서 웃고 있었어. 그리고 나의 바로 곁에 는 루브 형도 함께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지. 세라 누나는 바구니를 안고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나의 주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미르 누나도 있 었고, 보라돌이 형도 풀밭에 큰 대자로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었고… 그리 고… 내 무릎에 누운 카이 형도 있었어. 그 때 나는 카이 형의 얼굴에 햇 빛이 닿지 않게 해주려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있는 형이 방긋 웃고 있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는 디트 경이 별 이상한 꼬맹이를 다 봤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하는 모 습을 보고 나는 히죽이 웃었어……." "…그리고?" "으음… 얼마 안 있어 어머니랑, 에렌시아 님. 아르멘 님이 정원으로 직접 찾아와 우리들에게 다 함께 식사를 하자고 말하거든. 형제들이 좋아라 하 면서 팔짝거리면 나는 그들을 챙겨서 땅의 궁내에 있는 화려한 식당으로 향하지." "……." 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인지 그녀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그 대신 조금 전부터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카이의 눈동자에는 변화가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그 붉은 눈동자에는 아 주 작은 흔들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정말… 행복하더라……." 유치한 한마디. 그 말 한마디를 뱉어내고 나자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쏟아 졌다. 한번 눈물을 흘리자 봇물 터지듯이 눈물이 쏟아져 나와서 나는 몸을 조금 돌려 그녀의 몸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눈물이 그녀의 옷을 묻어 버리든 말든 상관치 않고 한 손으로 그녀의 옷을 꼭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 로 말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꾸지 않았던 꿈인데… 그런 유치찬란한… 꿈같은 건… 한번도 꿔본 적이 없는데…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그런 꿈을 꿔버 렸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옹크렸다. 그리고 그녀의 품에 얼굴을 더욱 꼭 묻었다. 사실 너무도 쪽 팔리는 짓이었지만, 다 큰놈이 할만한 짓이 아니었 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 그녀의 품에서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카이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주절거 리기 전에 쓰다듬고 있었던 그 동작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그렇게 계 속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향해 마음 속 깊이 동정을 하지도 조롱을 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단지 내 이야기를 듣기만 할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이렇게… 울어버릴 수 있었던 거다. "처음에는…흑…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 사람들을 위해서 살려고 했어… 훌쩍… 나를 싫어하는 놈들만 살아남으면 기분 나쁘니까 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왕이 되려고 했어." 나는 잔뜩 메인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카이가 묻지도 않았는데 멋대 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래서… 방해가 되는 인간들을 죽였어. 어차피 환생할 뿐이니까! 죽어도 다시 태어날 뿐이니까, 게다가… 게다가 말이야, 내 소중한 사람들 위해서 도 죽여야만 했다고. 죽여야만 살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해야만 했으니까. 원래부터 전쟁이란 게 서로서로 죽여 가는 것이잖아! 봐! 누구라도 다 그 렇게 죽였을 거야!! 안 그래?"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었지?" 내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언성을 높이며 묻자 그녀가 내게 간단 하게 질문을 던져주었다. 그 물음을 받으며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하고 변명거리를 찾아 머리를 굴렸다. "카류." 그러나 카이의 말 한마디가 내 생각을 멈추게 만들었다. 변명을 해야만 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나는 그녀를 올려다보느라 목 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빼며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떨어뜨렸다. "그냥… 좀……." "뭐지?" "미안…하잖아……." 썰렁한 말을 한마디하고 나자 조금씩 멈추어 가던 눈물이 또 한번 왈칵 쏟 아졌다. "나는…훌쩍… 환생하는 거 아는데, 그들은 모르잖아. 킁… 그러니까…훌 쩍… 죽기 싫을 거 아냐…훌쩍. 그리고 솔직히 환생을 한다해도 죽는 거 그렇게 좋은 일도 아니잖아. 당장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헤어지는 것도… 싫을 거 아냐. 어쩌면 지금 생에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을 지도 모르잖아." 최소한 콧물이 흐르는 것만은 막아보고자 끊임없이 훌쩍거리며 말을 하던 나는 그 말을 전부 마치자마자 애들처럼 입을 울먹거렸다. 턱이 마구 떨려 왔지만, 눈물이 펑펑 터져 나왔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흑… 그리구… 훌쩍… 다른 놈들을 죽여서라도 에르가 형이랑 틸티랑 히 노 선배랑… 모두… 디…디트 경까지… 전부 함께 살아보려고 했는데… 왕 이 돼보려고 했는데… 그런데… 자꾸… 죽잖아. 아마… 에르가 형도 죽을 지 몰라. 아니, 이렇게 계속 싸우다보면 언젠가는… 디트 경처럼 칼침 맞 고… 죽어버릴걸? 나를 위해서라고 말하면서…훌쩍… 그렇게 장렬히 피를 뿜으면서 말이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괴로운 것인가?" "근데! 근데 우스운 건 말야. 내가… 아직까지도 내가 왕이 되고 싶다는 거 야. 디트경이 죽어도, 에르가 형이 죽어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모조리 발 판으로 삼고서라도 왕이 되고 싶다는 거야!! 왕이 되려면 내 아들 같은 형 제들도 죽여야 하는데 말이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정말이지 왕이 되고 싶 어 미칠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카이의 말을 무시하고 소리쳤다. 카이의 하얀색 셔츠자락을 쥐고 마 치 그녀를 향한 불만 때문에 대들기라도 하듯 바락바락 소리쳤다. "완전히 미쳐버린 것 같아! 더 이상 누구를 위해서 시작했고,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지도 이제는 더 이상 모르겠어! 내가 뭘 하고 있는지, 뭘 하려는 지도 모르겠어! 나는 뭐지? 나는 미쳤어? 그런 거야? 미친놈은 그냥 지금 죽어버릴까!? 말해봐. 너는 알지? 네가 하라는대로 할게!" 나는 끊임없이 눈물을 쏟아내면서 카이에게 물었다. 문득 내 머리카락에 닿는 따뜻함을 느꼈다. 카이는 아직까지도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변함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너와 같은 존재는 얼마든지 있다. 어느새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린 채로 자기방어 본능과 오기로 살아가는 인간들. 스스로의 약함이 만들어낸 갈등으로 서로 슬퍼하고 증오하고… 그리고 사 랑을 하는 평범한 인간." 갑자기 눈앞이 어두워졌다. 카이가 앞으로 몸을 숙이기 시작하자 그녀의 어깨에 머물고 있던 붉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면서 주변을 가렸던 것이다. 나는 멍하게 눈을 뜨고 천천히 다가오는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보았다. "……!!" 하지만 나는 이내 눈을 크게 떴다. 입술에 닿는 보드랍고 촉촉한 느낌 때 문이었다. 입술에 닿은 그것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눈을 땡그랗게 든 채로 있었다. 꼴사납게 완전히 굳어서는 얼 굴을 간질이는 붉은 색의 긴 속눈썹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마 예전의 나라면 이런 감정을 가졌을 테지." 난데없는 키스씬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내게 카이가 잔잔한 목소리 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가 말을 할 때마다 따뜻하고 습기 찬 입김이 내 입 술에 와 닿았다. 입술을 약간 떼어냈을 뿐, 여전히 그녀가 얼굴을 내게 가 까이 댄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아 본격적으로 혼란 상태에 돌입하려는 내게 카이가 또 다시 입을 열었다. "너무나 나약하고 불완전한, 그렇기에 아름다운 존재인 인간에게 이렇게 키스해주고 싶었을 테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던 나는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듣고 그제야 제정 신을 차렸다. 여전히 그녀의 눈동자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다는 것 을 깨닫고 겨우 커다랗게 키우고 있던 눈에 힘을 풀어버릴 수가 있었다. 쾅―! 그 때 갑자기 방문이 확 열리며 소란스럽게 벽에 가 부딪혔다. 덕분에 고 요했던 방안에 시끄러운 소리가 가득 찼다. "야! 카류리……!!" 나는 익숙한 목소리에 눈동자를 굴려 왼편에 위치한 문으로 시선을 옮겼 다.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커튼의 틈 사이로 그 목소리의 주 인공이 에르가 형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형은 발을 조금 든 채로 석화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 다. 하지만 그렇게 굳은 상태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검지 손가락을 간 신히 펴서 나와 카이를 가리켰다. "너…너…너……." 에르가 형은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뻐끔거리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카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때서야 이쪽을 가리키던 손목을 비틀어 콱 주먹을 쥐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색∼마 자식이∼∼!!!" 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번개같이 내게로 뛰어왔다. 그리고 카이의 무릎에 여전히 누운 채로 있는 내 멱살을 확 잡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이 죽일 놈아! 이런 상황에서 여자를 꼬셔?! 히노 양이 두 눈 뻔히 뜨고 같은 층에 머물고 있는데 이 자식이!! 내 옛날부터 네놈 싹수가 노란 걸 알고 있었건만!!" "혀…형!! 앗… 제발……!!" 구역질을 하고 한동안 펑펑 우느라 진이 빠져 있던 상태에서 에르가 형이 정말 사정 봐주지 않고 내 멱살을 흔들자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내가 양손을 마구 저으며 형의 손에서 벗어나려 애쓰자 누군가가 형을 말렸고, 나는 간신히 형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워서 정신이 없 었지만 언뜻 들리는 목소리를 듣자니 형의 부관인 이트라는 자인 듯 싶었 다. "윽……." 형의 손에 의해 반쯤 앉은 자세가 되었던 내가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끼고 다시 폭 쓰러지려는데 에르가 형이 갑자기 잠시동안 놓았던 내 멱 살을 다시 확 잡았다. 그리고는 무지막지하게 앞으로 끌어당겨 카이의 품 에서 완전히 떼어놓았다. "자식이 은근슬쩍 어딜 엉겨 붙으려고! 내 눈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 도 절대로 그 꼴은 못 봐줘! 이 색마 자식아! 그런 짓은 최소한 히노 양이 없을 때 하란 말이다!!" 침대 모서리의 기둥까지 끌려간 내가 쪼그리고 앉은 채로 기둥에 몸을 의 지하고 있는데 갑자기 에르가 형이 바락바락 화를 내며 그렇게 소리쳤다. 나는 질질 짜느라 침침해진 눈으로 형을 올려다봤다가 그제야 지금 벌어지 고 있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풋―." 내가 짧게 웃음을 터뜨린 다음, 기둥을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자 에르가 형 이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런 형의 얼굴을 보면서도 계속 키득키득 웃기 만 했다. 기둥을 붙잡고 있는 손 중의 하나를 움직여 찝찝한 눈가를 조금 문지르는 작은 행동을 더했을 뿐이다. 마치 내게 비웃음을 당하는 듯한 현 상황에서도―짐작컨데 에르가 형의 시 각에서만―에르가 형은 벌컥 화를 내지 않았다. 아마도 내가 하고있는 꼬 락서니를 제대로 본 모양이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는 않았지만 상당시 간을 펑펑 울어서 이미 눈이 팅팅 불어있을 테니까. 처음에는 내가 카이랑 삐리리한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막무가내로 움직였지만, 내 모습을 보 고 그제야 뭔가가 틀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야……." "아하하하하하!!" 에르가 형의 겸연쩍음이 담긴 목소리에 나는 완전히 폭소를 터뜨려 버렸 다. 그리고 기둥을 잡고 낄낄대다가 시트와 함께 쭈르륵 미끄러져서 거의 엎드리다시피 한 상태가 되고서야 겨우 웃음을 조금씩 멈추었다. 내가 일어나지 않고 조금은 흉하게 납작 엎드린 상태 그대로 어깨만 들썩 이고 있자 누군가가 다가와서 다짜고짜 목 뒷덜미를 잡고 확 일으켰다. 그 렇게 난폭한 행동으로 나를 일으킨 것은 당연히 에르가 형이었다. 아마도 내 면상에다 대고 그만 웃으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그랬던 모양이다. 하지 만 에르가 형은 내 얼굴을 보고서는 입술을 조금 연 채로 굳어버렸다. "에르가 형……." 나는 목이 좀 아프긴 했지만 계속 에르가 형이 당기고 있는 옷에 의지하여 몸을 축 늘어뜨린 상태에서 단지 고개만을 조금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눈에서 주륵 한 방울이 흐르는 것을 느꼈을 때, 에르 가 형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 소리쳤다. "뭘 질질 짜냐!" 나는 베실 웃으면서 몸에 남은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형에게 다가가 어깨로 팔을 둘러 그는 꽉 안았다. 형은 여전히 기분 나쁘 다는 투의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평소처럼 머리라도 한방 쥐어박아 피하지 는 않았다. "나 바보 같지?" "이제 알았냐?" 에르가 형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고개를 조금 움직이는 형의 얼굴에서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언가 위로 비슷한 것을 해주어야 할 듯 한데, 자신의 성격과는 맞지 않으니까 나름대로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는 것이리 라. 나는 그런 형이 너무 귀여워서 그를 더욱 꼭 껴안고 속삭였다. "내가… 자꾸 멍청한 짓만 하고… 자꾸 미운 짓만 하지?" "아, 빌어먹을!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 네 놈 끝까지 궁상 떨 거야?!" 결국 형은 나를 확 밀어내며 귀가 따갑도록 소리를 질렀다. 나는 아직 줄 줄 눈물을 흘리는 상태였지만 있었지만 그럼에도 헤죽 웃었다. 그리고 손 을 들어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면서 물었다. "그럼 또 삐칠 거야?" "이 자식! 언제! 누가! 어떤 놈이 삐쳤다는 거냐! 엉? 말해봐라! 엉!?" 에르가 형이 발끈해서는 또 한번 내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덕분에 머리가 땡땡 울리는 것이 굉장히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렇게 싫지 는 않았다. 에르가 형의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도 형이 삐치는 척은 많이 할지 몰라도 아마도 진짜로 삐쳐버리는 일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트가 다가와서 에르가 형을 뜯어말리고서야 나는 형의 손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제 자리에 앉아 몸을 비틀거리던 나는 더 이상은 힘이 남아 있지 않음을 느끼며 왼쪽으로 무게를 실어 쓰러지듯 침대 위에 늘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조금 떨어진 침대 머리맡의 아래쪽에 내가 토해버린 음식물 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시 시시한 대화를 하는 동안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 았을까 하고 생각했던 그 더러운 오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남겨져 그 곳을 지저분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가 여전히 모순투성이에 오기로 똘똘 뭉쳐진 것처럼 내 속에서 나온 그것들도 여전했다. 하지만 에르가 형과 이트가 투닥거리는 것을 보자니 흐뭇한 기분이 들었 다. 그리고 나의 뒤쪽에 덩그러니 앉아있는 카이의 기척을 느끼자니 이상 하게 더욱 기분이 좋았다. 정말 이상하게도 예전과는 달리 훨씬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효과(?)인 듯 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의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생각을 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한동안 머리를 굴렸음에도 여전히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몇 번이고 사람들을 죽여야 할 것이다. 어쩌면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사실 그들 이 죽든 말든 나는 여전히 왕이 되길 갈망하고 있다. 멍청하게도, 그게 전 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만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나는……. 투두둑― 투둑―. 작은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부서질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창문에 부딪혀 오는 그들을 보며 오랫동안 웃었다. ---------------------------------------- 쿨럭… 아이고 삭신이야… 이르나크의 장 Part 45 다음날 -_- 내가 성인이 되고 난 다음날이 밝았다. 오랜만에 개운함을 느끼고 기지개 를 폈지만, 마찬가지로 참 오랜만에 늦잠이란 것을 자버려서 아침동안 분 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내가 성인식을 하는 동안 그 무엇보다도 궁금하 게 여겼던 힐레인과 오늘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힐레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방의 앞으로 다급히 걸어온 나는 잠시 주방이 있을 복도 쪽을 바라보았다. 그랬다가 피 식 웃고는 여러 시종들의 인사를 받으며 문을 열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내 가 안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정중히 일어나서 예를 갖추었다. 어제의 일 로 친인들이 꽤나 염려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기에 나는 그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싱긋 웃음을 띄웠다. 이 웃음을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인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아마도 제대 로 이해해 주었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곧 주변을 둘러보며 나의 친인이 아닌 오늘의 직접적인 용건을 가진 사람들을 찾았다. 그리고 약간 안쪽의 의자에서 정중히 예를 취하고 있는 힐레인을 발견하고는 상당한 충격(?)을 먹었다. 어제 생일 겸 성인식을 치 르면서 녀석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녀석의 그 런 행동이 익숙해지지 않았던 것이다. "제가 저 분과 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시지 않으시겠습 니까." 내가 자리에 앉고 차례로 모든 사람들이 자리를 잡자마자 힐레인은 바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궁금증에 가득 찬 많은 사람들이 잔뜩 자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은 카이와 단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힐레인을 보며 싱긋 웃어주었다. "아마 카이는 나와 떨어져 너와 단둘이 이야기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걸? 안 그래, 카이?" 내 질문을 들은 카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왜냐는 의미가 실 린 시선을 보내고 있는 힐레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카류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한바 있기 때문에 한순간도 그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내 비록 타종족에 비해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눈에 보 이지 않는 존재의 안전까지 책임질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 다. 미안하다만 그대와 단 둘이서만 대화하는 것은 힘들 듯 싶구나." "들었지? 카이와 대화하려면 최소한 내가 참관인으로 붙어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지금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이 이 자리에 없다 해도 네가 한 말은 고스란히 그들에게 이야기 해줄 거야. 그러니까 굳이 이들을 밖으 로 내보내 달라고 요청은 하지 말아 줘." 나는 힐레인을 향해,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얄밉게 들리는 말을 했다. 그 리고 아니나 다를까 힐레인의 표정이 조금 구겨졌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 은 녀석의 표정을 보고 가만히 보고 있던 난 문 밖에서 노크를 하는 소리 를 듣고 반갑게 들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사람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는 시종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전하. 명하신 것을 가져왔습니다." "그래. 저기에 내려놓아라." 나는 싱긋 웃으면서 힐레인 앞쪽의 탁자를 가리켰다. 나의 명을 받든 그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힐레인에게로 다가가 내가 시킨 비스킷이 가 득 담긴 쟁반을 내려놓았다. 시종이 완전히 밖으로 나가자 나는 다시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특별히 주방장에게 명해 만들게 한 거야. 맛있을 걸?" 내 말에 아군의 사람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한 눈빛을 내게로 보냈다. 힐레 인의 곁에 앉아 있던 크레베르와 켈레인도 나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그들 은 내 친인들과는 달리 금방 그 시선을 힐레인에게로 옮겼다. 힐레인은 눈앞에 놓인 비스킷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초조하기도 하여 손으로 턱을 괴었 다. 힐레인이 무슨 사정으로 인해 모자란 짓을 했다는 것이 명실공히 해지 긴 했지만, 과자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것만은 진짜일 것이라는 그런 알 수 없는 직감이 들었다. 그래서 일단 과자를 준비함으로서 녀석이 불쾌해하는 얼굴을 최대한 보지 않고자 했던 것이다. "…히…힐레인……." 크레베르의 불안한 음성이 들리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힐레인이 입을 조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힐레인이 어느 정도는 불쾌함을 풀었을까 하고 녀석의 입에서 조금은 나아진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와삭. "……." "……." 와삭와삭. "……." "……." 한동안의 침묵. 아니, 와삭거리는 비스킷 부서지는 소리와 사람들의 숨소리 가 들리기는 했다. 뇌물(?)과 비슷한 과자를 본 힐레인이 어쩔 수 없다는 척 기분을 풀고 본론을 꺼내거나, 최악에는 이런 것으로 자신을 구슬릴 생 각은 말라는 말과 함께 비웃음을 당하는 쪽으로 생각했건만, 녀석은 내 예 상을 와장창 깨고 그대로 과자를 향해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먹기 시작했 던 것이다. 그것이 한개에서 그치지 않고 두개, 세개로 늘어나는 것을 보며 방안은 썰렁함으로 가득 찼다. 곧 보다못한 크레베르가 그 과자가 든 쟁반을 확 뺏어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어가 방 한쪽 구석에 위치한 선반에 올려두 었다. 과자를 힐레인의 눈에 보이지 곳으로 치워두고 자리로 돌아오는 그 의 표정에는 민망함이 가득했다. 그러나 힐레인은 이미 예전으로 돌아가 버린 것인지 크레베르의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손에 쥐고 있던 마지막 과자를 입에 톡 털어 넣고 볼을 옴싹옴싹 움직였다. "…힐레인……." 크레베르가 허탈하게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힐레인은 입에든 과자 를 꼴깍 삼키고도 그 여운(?)을 느끼기라도 하는지 눈을 꼭 감고 굉장히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힐레인!" 크레베르가 조금 언성을 높여 이름을 부르자 녀석은 그제야 눈을 뜨고 사 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힐레인은 조금 전의 그 표정은 어 느새 홀랑 날려버리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주방장의 솜씨가 멋지군요." "그…랬어?" 나는 넋이 나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그 때 프리란트 님이 주먹 으로 탁자를 팍 치더니, 카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크게 화를 내며 소리를 쳤다. "네 놈이 지금 진정으로 우리들을 조롱하겠다 이건가? 네 놈이 지난번 휴 나르 성에서 우리들을 기만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쳐죽일 만한 죄이건만!! 어떤 연유가 있는 듯 싶어 아량을 보여 넘어가 주려 했더니 네놈이 감 히……!!" "어찌하여 제 행동이 리아 후작님과 다른 분들을 기만하는 행동이라는 것 입니까. 분명 전하께서 저의 앞에만 과자를 가져다 두시며 저를 향하며 먹 어도 좋다는 투의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힐레인이 프리란트 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담담하게 그것을 받아내고 있었 다. 나는 그 둘이 완전히 감정싸움을 벌리기 전에 조용히 그들을 말리기로 결심했다. "그만 두십시오. 프리란트 님." "그러나 전하!! 저 놈은……!!" "일단은 제게 맡겨 주시죠." 나의 단호한 말을 들은 프리란트 님은 불만스럽긴 했지만 입을 닫고 거친 동작으로 몸을 소파에 묻었다. 나는 그 분께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힐레 인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래. 내가 먹으라고 해서 먹은거라고?"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내 말이 그렇게 직접적인 뜻 은 아니며, 이런 자리에서 그런 식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힐레 인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히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 도 이것은 우리들을 우습게 여기고 조롱하는 것이라 밖에 생각할 수 없었 던 것이다. 아무리 어린애라고 해도 이 정도까지 심하게 행동한다면 나도 끝까지 좋게만 나갈 수는 없는 일이다. "저…전하 그것이……!!" 내 표정을 보았는지 크레베르가 진담을 빼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힐레인이 손을 들어 그를 막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모여있다는 것 을 확인하자 곧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말했다. "제대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 조롱을 하려던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니면?" 내가 약간의 냉랭함이 담긴 목소리로 묻자 힐레인은 고개를 들어 건방지게 도 내 눈을 똑바로 향하며―그렇게 건방지단 생각이 든 것은 아니지만, 통 속적으로는 건방진 일이다.―말했다. "저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최고의 걸작품이 과자라 믿어 의심치 않 습니다." "…뭐?" 내가 머리에서 띵하게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되묻자 힐레인이 고개를 숙 이며 말했다. "그렇기에 과자를 보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 "……." 갑자기 썰렁한 냉기를 품은 바람이 방안을 훑었다. 그 냉기에 얼어버린 사 람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크레베르는 힐레인의 가족이기에 그에 대한 면역이라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그냥 얼굴만 조금 붉힐 뿐, 금방 입을 열어 해명을 하여 꽝꽝 얼어버린 방안을 녹여주었다. "죄송합니다. 힐레인이 어릴 때부터 과자라면 사족을 못 써서……." 크레베르의 말을 듣고 나는 손을 들어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는 어깨를 들썩이다가 이내 중심을 잃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폭소를 터뜨리고 싶은 심정은 나만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숙인 나의 귀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위대하신 존재이시여. 기다리게 해드리어 죄송합니다. 아직도 제게 답을 해주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내가 계속 그러고 있자 힐레인은 아주 나를 무시해버리기로 한 것인지 바 로 카이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뺨을 발그레하게 붉히 고 과자를 먹던 주제에 저렇게 진지모드로 카이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 다. 어쨌든 일단은 그 물음을 듣고 바로 고개를 들어 카이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카이는 여전히 썰렁하게 무표정이었다. "아니다. 생의 시름을 모두 잊을 정도로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은 축복 받은 일이지." "저를 꾸짖지 않고 그리 말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는 그들의 문답에 황당함을 느끼며 입을 쩍 벌렸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카이의 말도 꼭 틀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도 정말∼ 얼핏 드는 것 같아 서 그러려니 이해해주자고 생각하며 애써 벌렸던 입을 닫았다. 한동안의 개그 아닌 개그가 펼쳐지던 방안은 힐레인과 카이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눌 듯 하자 다시 고요해졌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던 힐레인 이 카이를 향해 말했다. "이런 질문은 부질없을 지 모르겠으나 살아 생전 당신이라는 존재를 직접 대면할 수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확인 차 질문을 드립니다. 당신께서는 진정… 드래곤이십니까?"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힐레인의 물음에 몸을 움찔하며 눈을 커다랗게 키웠 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아군의 사람들은 그렇게 눈을 키우진 않더라도 나 름대로 이채로운 눈빛으로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힐레인이 카이에 대해 알 고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확인을 하고 나니 다시금 놀라 웠던 것이다. "네 생각대로 나는 카뮤르·카이야라 불리는 화룡이다. 사정상 카이야 혼 에스문드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나, 너의 앞에서 정체를 숨기는 것은 무용 지물이라 생각하여 밝히는 것이다." 카이의 대답을 들은 크레베르와 켈레인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무의식중에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나나 여러 사람들에게 해명을 요구했다. 그러 나 힐레인은 ‘역시 그렇군.’ 이라는 식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카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면 우선 한가지를 묻겠습니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힐레인은 드디어 입을 열어 수많은 사람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던 그 질문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저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는 것입니까." 나는 힐레인의 물음을 듣고 깜짝 놀라 카이에게로 옮기려 했던 시선을 다 시 힐레인에게로 고정시켰다. 아직 살날이 창창하게 남은 꼬마의 입에서 나올만한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불안함을 느끼며 카이의 대답을 듣 기 위해 다급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웬만한 것이 아닌 다음에야 표정만으로는 절대 그 속내를 추측을 할 수가 없는 카이가 크레베르와 켈레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이 너의 친 아비이며 형제인 것이겠지?" "예. 그렇습니다. 이쪽 분이 저를 낳으신 친아버지이며, 그가 저와 피를 나 눈 친형제입니다." 힐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중히 답했다. 확답을 들은 카이는 눈을 잠시 감았다가 천천히 뜨며 대답했다. "어림잡아 천년 정도겠구나." "잉?" "천년?!" 나의 얼빠진 목소리와 함께 힐레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힐레인의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처절하게 들려서 나는 카이를 보기보다는 힐레인에게 로 시선을 던졌다. 힐레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할말을 잃고 있다가 곧 몸을 좀 내밀며 카이에게 물었다. "그…그렇다면 전 언제까지 이런 몸이어야 합니까!" "너는 이백살이 되는 해에 장년기에 돌입할 것이다. 또한 장년기 중 단 일 곱번, 백년 단위로 며칠동안만 후계를 가지기 위한 생식기에 들어갈 수 있 으며, 약 천년에 가까운 생을 마치기까지 십여 년 정도의 시간이 남았을 때 급속도로 노년기에 접어들게 되지." "예에? 하지만 힐레인은!!" "이백년이라니, 그…그럴 수가!" 이번에는 힐레인이 아니라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크레베르와 켈레인이 황당하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나 역시 그들 못지 않게 황당한 심정이었다. 지금 카이와 힐레인이 둘이 짜고서 어울리지 않는 개 그를 하는 것인가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반응과는 달리 힐레인 당사자는 하얗게 질린 작은 손을 안쓰럽게 떨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심정에 카이를 향해 질문을 했다. "대체……." "부탁드립니다. 위대하신 드래곤이시여… 저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해주십시오." 그러나 나의 의도는 처참히 부서지고 말았다. 힐레인이 내 말허리를 댕강 자르고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대로 이야기를 듣는 것도 나쁘지 않 을 듯 싶어 나는 일단 다시 입을 꼭 다물었다. "나로서는 네가 왜 이런 상식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는지 의아하다. 일단 네가 아는 것부터 말해보거라. 그것을 알아야만 내가 너에게 가르쳐 줄 수 있을 듯 싶구나." 도리어 카이에게 질문을 받은 힐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크레베르 를 살짝 보다가 다시 카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제가 아는바에 의하면 저의 조부님께서 상점에 내다 팔 중요한 물건을 가 지고 카르틴의 페류얀 산맥을 넘다가 산적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큰 상 처를 입은 채로 그들의 손을 간신히 피해 도주하던 중에 길을 잃으셨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셨다고 합니다. 바로 그분이 저의 조모님 되 시는 분으로, 그 당시 그분은 자신을 푸른 달의 작은 엘프…라고 소개하셨 지요." "확실히 페류얀 산맥의 깊은 숲에 푸른 엘프 족이 은거하고 있다. 하지만 너의 조부는 참으로 특이한 엘프를 만났구나. 드래곤 다음으로 오랜 수명 을 가진 엘프들은 이십만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과거의 원한을 잊지 않고 있거늘……." "잠깐잠깐잠깐∼∼!!" 나는 손을 들어 카이의 말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내게로 시선을 향하고 있는 그녀에게 침착하게 물었다. "그럼… 그럼 힐레인이 혹시 에…엘프의 피를 가졌다는 뜻이야?" 카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의 경악하여 눈을 크게 뜨고 힐레인 부자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들의 시선을 받은 힐레인만 빼고 전부 겸연쩍은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러다가 켈레인이 곧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들으셨다시피 저희 조모님께서는 엘프셨습니다. 결국 아버님께서는 하프 엘프인 셈이지요. 하지만 엘프의 피는 아버님도 저도 아닌 바로 여기 계신 힐레인 형님께서는 가장 짙게 물려받으셨습니다." "형님?" 나는 켈레인의 말을 듣다가 이상한 소리를 듣고 바로 언성을 높이며 되물 었다. 그리고 켈레인은 그 즉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 힐레인 형님은 올해로 세른셋이 되시며 저보다 여섯살이 더 많으십니 다." "서…서른 셋!" 나는 헛바람을 삼키며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힐레인은 사람들의 호 기심 어린 시선을 몽땅 무시하고 진지한 얼굴로 카이를 바라보며 조금 전 에 하다만 이야기를 이었다. "드래곤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조모님을 제외한 모든 엘프들은 무슨 이유에 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인간인 조부님께 적대적이기에 두 분께서는 다른 엘 프들의 손을 피해 이곳 아르윈 최남단의 리아영지로 도주해야만 했습니다. 겨우 엘프들의 추격을 따돌린 두 분은 이곳에서 원래부터 조부님께서 생업 으로 삼고 계시던 바에 따라 상점을 열었습니다. 그 상점은 조모님이 가지 신 능력 덕분에 엄청난 호황을 누렸고 카르틴 변경의 작은 상점에 지나지 않았던 헤이료우의 이름을 이만큼이나 커지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 습니다. 그리고 저희 조부님께서 오십대 후반이 되셨을 때 드디어 조모님 께서 첫번째 생식기에 들어가시어 그렇게 고대하던 아이를, 아버님을 간신 히 얻으시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모님께서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눈부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자 처음에는 그토록 그 아름다움에 찬사를 보내던 자들이 점차 곱지 않은 시선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이고 조 모님을 엘프라 해명하였으나 그들의 적대감을 지우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결국에는 저의 상단의 급속한 성장을 시기한 어떤 자가 불만을 가진 사람 들을 선동하였고, 아버님께서 태어나시고 며칠 지나지도 않아 조모님께서 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혼혈인 자신이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몰랐던 것은 그것 때문인가?" 카이는 힐레인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조모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저와 같은 혼혈에 대해 미처 언급해주 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하프 엘프인 아버님은 아무런 능력도 가지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그에 대한 관심은 점차 흐려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인 어머님을 가진 제가, 아버님 보다 훨씬 엘프의 피가 흐릴 터인 제게 이렇게 엘프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 는 계속 인간으로서 이곳에 남고 싶어 오랜 시간 사람들의 시선을 참아가 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저로 인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은 켈레인의 원망 어린 소리를 듣고 나의 이기심이 가족들에게 큰짐이 된다는 것을 깨 달아 평생 저택에서만 몸을 숨기고 살 것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믿 어지지 않게도 당신께서 가까운 곳에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이곳까 지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켈레인, 너 대체!!" 힐레인이 말이 끝나자마자 크레베르가 켈레인을 향해 벌컥 화를 내며 질책 을 하려했다. 그러나 크레베르의 질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켈레인이 고 개를 들어 힐레인을 향해 소리지르듯 말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은, 더 이상은 형님의 이런 모습을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렸고, 그래서 너무도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언제나… 언제나 후회하고 있었습 니다. 형님께 심한 소리를 했던 것을……." "아니, 너를 탓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들의 적의를, 이 끔찍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인간이라고… 그렇게 믿 으며, 자신이 다른 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그렇게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너의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의 적의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조모님 때와 같은 일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몸을 숨긴 것이다." 힐레인이 고개를 저으며 어린아이의 얼굴로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안타 까운 미소를 띄웠다. 그 모습을 보던 카이가 끼고 있던 팔짱을 풀면서 사 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엘프들이 너희 조부와 조모를 쫓았던 것은 인간에 대한 악의도 있지만, 너와 같은 존재가 태어날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엘프는 다름 아닌 진실을 느끼며 조화를 추구하는 종족. 따라서 그 어떤 종족보다도 너와 같은 존재 가 태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드래곤이시여, 어찌……!" "아버님!" 힐레인은 크레베르의 항의를 하려 하는 것을 손을 들어 막아서 카이가 계 속 이야기를 이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카이도 조금 전의 계속 이야기 를 시작했다. "하프 엘프라는 것은 1세대 혼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엘프의 혼혈 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과 엘프가 결합하여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는 완전 한 엘프나 인간, 둘 중의 하나가 태어나지만 완전한 인간으로 태어난 자라 할지라도 엘프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너희들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인간인 크레베르가 같은 인간여성과 결합을 하였 음에도 인간을 낳지 못하고, 엘프인 힐레인을 낳았으니까… 인간과 서로 교합이 가능한 모든 유사인종의 혼혈에게 하프라는 말을 붙이며, 하프라는 말 대신 피를 더럽히는 자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그런… 엘프 좀 낳으면 어떻다고 그런 심한 소리까지 붙이는 건데?"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조금 발끈하여 이해가 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 다. 뭔가 인종차별적인 발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답지 않은 정의감을 발 휘한 것이다. 그러자 카이는 눈을 살짝 깔아 항시 그랬던 것처럼 한심한 놈이라는 뜻을 은연중에 표하며 입을 열었다. "너는 힐레인의 괴로움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힐레인은 비록 몸은 엘프일 지 모르나, 오랜 세월 인간들의 손에 키워졌고 인간들의 사이에서 커왔기 에 당연히 인간의 사고를 하며 앞으로도 계속 인간들 사이에서 살기를 원 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백년도 채 살지 못하는 종족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끊임없이 죽어 가는데도 여전히 어린아이 의 모습을 한 채 살아남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느끼겠는가." 카이의 말에 나는 움찔하며 눈에 주고 있던 힘을 빼고 고개를 조금 숙였 다. 생각이 너무 짧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쪽팔림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꼬 리를 감춘 것이다. "인간들 속에서 엘프가 태어나고, 엘프들 속에서 인간이 태어난다. 그것은 수명에 대한 문제를 제하더라도 끊임없는 불행만을 불러올 뿐이다. 혼혈에 게 피를 더럽힌다는 말이 붙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같은 종족은 같은 종 족과 함께 어울리며 기본 바탕을 두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또한 행복한 일이다. 그것은 깊은 사고를 하는 유사인종을 대상으로 한 다음에야 말할 것도 없다." "……." "……."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전부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힐레인과 켈레인, 그리 고 크레베르는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힐레인이여." 조용한 방안에 고운 목소리가 퍼졌다. 카이의 부름에 힐레인은 여전히 어 두움 얼굴을 하고 있음에도 고개를 들어 그 부름에 응했다. 힐레인이 완전 히 자신을 향하자 그때서야 카이는 말을 이었다. "네가 인간으로서 살고자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최소한의 도움을 주고 자 한가지 충고를 하마. 네가 더 이상 고독을 견디지 못할 것 같거든 네 조모의 고향인 페류얀 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돌아오지 못하는 숲으로 가거 라. 그곳에 은거하는 푸른 엘프족과 함께라면 조금이나마 고통을 덜 수 있 으리라."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힐레인은 얼굴이 창백해지다 못해 파랗게 질려버렸 다. 힐레인은 손을 가늘게 떨며 말없이 가만히 있다가 곧 자조적인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제가 그곳으로 간다하더라도 그들이… 저를 받아주겠습니까. 저는 피를 더럽히는 혼혈입니다. 또한 엘프들은 인간을 증오하고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저를 그 들이 받아주겠습니까." "엘프들은 혼혈을 증오하는 것이 아니라 혼혈로 인해 파생되는 불행을 배 격할 뿐이다. 네가 더 이상 후손을 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들이 너를 내 칠 이유는 없다. 또한 엘프들이 인간을 증오하는 원인은, 자신과 다른 존재 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고대인간들에게 수많은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와 마찬가지인 이유로 핍박받는 너를 거부하며 해를 가하지는 않 을 것이다. 엘프들이라면 너의 고통과, 너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가깝게 느 낄 수 있을 테니까." 힐레인은 거의 자포자기인 듯 고개를 떨구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로 카이를 향해 작게 말했다. "저에 대해서… 엘프에 대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십시오. 다시 한번 요청 드립니다……." 카이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힐레인의 요청에 따라 친 절하게 엘프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엘프는 겉보기에는 일단 인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인간들과는 달리 아무리 노력해도 근육이 생기는 일이 없기 때문에 힘이 약하며 항시 호리 호리한 몸매를 유지한다. 대신 인간에 비해 오감이 월등히 뛰어나며 몸놀 림이 굉장히 재빠르다. 그리고 자잘한 것이라면 머리카락이 급속도로 빠르 게 자란다는 것이다." 카이의 그 말이 떨어지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힐레인의 길다란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이 저렇게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것 은 머리카락이 너무 빨리 자라서인 모양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엘프가 진실을 듣고 조화를 추구하는 종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 이상한 감지능력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그래… 모든 세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마나에 대해서라면 너 역시 알고 있는 일이겠지?" 힐레인을 향해 카이가 난데없이 마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르 할아버지와 류스밀리온이 눈에 불똥이 튀기며 카이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법사다운 호기심이 발동한 모양이다. 어쨌든 힐레인은 카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안다는 표시를 했고, 그녀 는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그 마나는 생명체의 감정 변화에 따라 그 느낌이 미묘하게 변한다고 알려 져 있는데, 타종족과는 달리 엘프들은 그것을 감지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엘프들에게는 거짓이 통하지 않으며, 서로에게 통하지 않을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면서부터 당연히 진실만을 접했기에 그들은 타종족에게마저도 진실한 종족이 된 것이다." 내가 신기함에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것으로 끝이 아닌지 카이가 계속 이 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마나는 생명체들의 감정뿐만이 아니라 유구한 세월 당연히 그러해 야만 할 자연의 조화가 무너졌을 때 역시 변화한다. 결국 엘프들은 태어나 면서부터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 해도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자연 히 깨닫고 그것에 익숙해지기 때문에 조화의 종족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번 것은 힐레인도 확실히 몰랐던 눈치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좀 전과 조금 달랐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카이는 짧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것은 원리를 모른다 해도 엘프라면 손발을 움직일 줄 알듯 자연히 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네가 나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된 것도 인해 세레스 트 산에서 나의 피어에 놀란 수많은 생명체들의 격렬한 마나파장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야기가 전부 끝난 모양으로 카이는 더 이상의 말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으나 곧 힐레인이 입을 열어 가장 먼저 말문을 트게 만들었다. "역시 저는 인간이로군요. 제가 확실히 타인의 감정을, 진심을 감지하는 능 력을 가지고 있지만, 상대에게… 그러니까 상대가 인간이기에 자신의 거짓 이 통할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언제든지 거짓말을 합니다. 그 리고 아주 어렸을 때야 이 감각이 명하는 것에 따라 움직였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조화가 무너지는 것을 알면서도 제 이득 을 위해서라면 다소의 부조화 따윈 언제든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니 진실 과 조화라는 수식어 따윈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군요." 힐레인은 자조적인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말을 하는 녀석의 목 소리에는 작지만 깊은 즐거움이 배여 있었다. 그 정도로 힐레인은 너무도 인간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언젠가 괴로울 것을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에게 큰 슬픔을 가져다 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카류 님." 그때 난데없이 프리란트 님의 말이 들려와 나는 의아하여 그분께 시선을 주었다. 프리란트 님은 고개를 살짝 숙여 카이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용건 을 꺼냈다. "무례한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질문도 모두 끝난 듯 하니 무엇보다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크레베르와 힐레인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중요한 사실? 그것이 무엇이죠?" 이렇게까지 말하는 프리란트 님에게 순간적으로 지대한 호기심을 느끼며 질문을 던졌다. 프리란트 님은 눈을 지그시 뜨고 힐레인과 켈레인, 그리고 크레베르를 한 명씩 훑어보고는 곧 입을 열었다. "자네들 카르틴 왕국 사람이었나?" "……!!" 프리란트 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힐레인을 제외한 크레베르와 켈레 인은 몸을 움찔하며 아차하는 얼굴로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다가 문득 그들 상단의 이름인 헤이료우라는 이름에 대한 것이 떠올렸다. 처음 그 이름을 들을 때부터 영 아르윈틱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 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르틴의 것이라 하기에도 영 핀트가 맞지 않는 느낌 인데……. "대답하라. 카르틴인이냐고 물었다!" 그 모습을 본 프리란트 님은 더욱 언성을 높였다. 이렇게 카르틴과의 긴장 이 팽팽한 상태에서 우리들의 중요한 아군이 될법했던 이들이 카르틴 왕국 인이라는 것은 불안한 일인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이들이 언제 애국심이 발발하여 되돌아설지 모르는 일 아닌가. 프리란트 님의 호통을 듣고 크레베르들이 진담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카 이와의 이런저런 대화로 인해 그다지 좋은 표정이라 할 수 없을 얼굴을 하 고 있던 힐레인이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불안해하시는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미 저희들은 거의 백 년이 넘는 세월동안 아르윈에 뼈를 묻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희들의 심장과도 같은 헤이료우 상단의 터전은 바로 이 아르윈 왕국의 리아 영지 입니다. 아르윈 왕국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큰 국난이 일어나기라도 한다 면, 저희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그 이윤들을 전부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 러한데 저희들이 출신이 어디인들 그것이 중요한 흠이 되겠습니까." 힐레인은 어느새 우울했던 얼굴을 버리고 사무적인 태도로 프리란트 님에 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할 수 있다는 데 작게나마 힘을 얻은 모양이다. "글쎄. 사정에 따라서는 상단보다 국가가 우선될 수도 있으며 또한 카르틴 을 위해 큰공을 세운다면 그대들은 헤이료우 상단은 더욱 큰 번영을 누리 게 되겠지." 애초부터 힐레인에 대한 감정이 영 좋지 못했던 프리란트 님은 굉장히 적 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사실 지금껏 헤이료우 상단에게 상당한 도움을 받 았고, 그들이 카이가 실제 드래곤이라는 것을 아는데다가 또한 방금 전까 지 힐레인의 정체와 모든 사생활이 전부 까발려진 이상 우리들에게 방해가 될만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힐레인의 반응이 궁 금해서 일단은 프리란트 님의 행동을 지켜보기로 정했다. 프리란트 님의 악의를 느낀 것인지 힐레인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분 을 향해 고개를 들고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조금 전 조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카르틴에 대해 숨기지 않았던 것은 이번에 전하께 한가지 제안을 하면서 어차피 말씀 드릴 것이 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안?"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힐레인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했다. 그리 고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도무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어투를 사용하여 말했다. "저희들은 출신지는 카르틴 왕국이 아닙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아르윈 왕국도 아닙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 갑자기 크레베르와 켈레인이 당황하여 힐레인을 바라보 았다. 하지만 힐레인은 그들을 향해 마치 안심하라는 듯이 손을 들고는 다 시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저희들은 과거 레이포드 경께서 북방 리투아니아 산맥과 오테사 산맥으로 내쫓아버렸던 그들 북방소수민족의 후예입니다." "뭐?" "그들 소수민족들은 이야닌 해-아르윈 왕국의 북해-에 살던 드래곤의 유지 를 이어받았다 하여 스스로를 해룡족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저희 상단의 헤이료우라는 이름은 바로 그 해룡을 아르윈 식으로 고친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니라 저희들은 해룡족 식의 이름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현’이며, 제 동생은 ‘칸’, 그리고 아버님은 ‘가렴’이십니다."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힐레인의 말에 그다지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애매 모호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특히 그들과 큰 싸움을 벌였던 레이포드 경 은 영 탐탁치 못한 표정이었다. 소수민족들이 워낙 승마술이 재빠르고 노 련하여 이제껏 제대로 잡지 못하고 레이포드 경도 완전 소탕은 하지 못하 고 그냥 쫓아버리는데 그치긴 했으나, 실상은 언제든 싸그리 없애버려야 할 이른바 더럽고 천한 오랑캐(?)였던 것이다. 그러나 힐레인은 우리들의 표정을 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저희들이 이렇게 일부러 해룡족 식의 이름을 만드는 이유는 솔직히 조상 을 잊지 말자는 그런 뜻도 있었으나 실지로는 해룡족과 최대한 좋은 관계 를 맺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희들은 과거의 핏줄을 핑 계삼아 그들과 서로 얼굴을 익혀두고, 지금까지 레이닌 해-아르윈 왕국의 서해-에 발견된 물길을 통하여 그들과 작은 규모의 밀무역을 하고 있었습 니다." "뭐라? 감히 그런 짓을!!" 프리란트 님은 감히 자신의 영지에서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른 그들에게 크게 화를 냈다. 그렇잖아도 미움받고 있는 힐레인이 대체 왜 저런 소리까 지 해서 프리란트 님의 심기를 어지럽히나 싶어 의아해졌다. 그러나 힐레 인은 조금도 쫄지 않고 여전히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리아 후작님.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작님께서 크게 화를 내실 것을 알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드리는 것은 바 로 지금 그것이 여러분께 큰 도움이 될 것이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 다." "도움?" 프리란트 님이 눈살을 찌푸린 채로 묻자 힐레인은 정중히 고개를 끄덕였 다. "일단 저희들이 알고 있는 해룡족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해룡족은 척박한 북쪽 지방을 터전으로 살아가고 언제든 그곳에 뼈를 묻을 결심을 가지고는 있으나, 땅이 척박하여 언제나 식량이 부족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아르윈 왕국으로 쳐들어가 식량을 빼앗아야만 했고, 그런 침략을 하 자니 서로 독자적인 생활과 영역을 가지는 ‘종’이라 불리는 마을 단위로 는 벅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필요에 따라 연합을 하여 매년 가을마다 아 르윈으로 쳐들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의 영향력이 서로 엇 비슷하여 일사불란한 지휘체계를 가지기가 어려웠습니다. 레이포드 경께서 바로 그것을 간파하고 이용하시어 그들을 크게 대패시킨 것이지요." 드리크 경은 유쾌하지 못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 덕여 주었다. "그런데 레이포드 경의 힘으로 패퇴하여 물러난 그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 이하게 됩니다. 강한 종이 여럿 난립했던 시기와는 달리 그 전투로 인하여 큰 종들의 세력이 줄면서 결국에는 강대한 하나의 종이 해룡족을 지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십수년의 세월동안 해룡족은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종인 아남종의 우두머리이자 해룡족의 새로운 족장이 된 ‘규’라는 자의 지도 아래 획기적인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난폭하고 저돌적이 었던 그들이 밀무역을 시작하며, 그 동안 아르윈 왕국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발전을 하기 위해 고분고분 공물을 갖다 바친 것도 그의 수완이었지 요. 레이포드 경의 그 전쟁이 해룡족의 발전을 위한 발판 비슷한 것이 되 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것을 이제껏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단 말인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오로지 힐레인을 향해 불만을 터뜨리기만 하시던 프리 란트 님은 완전히 안색을 바꾸고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삼 년마다 착실히 공물을 보내며 고분고분한 척 움직였으며, 사실 상 아르윈 왕국은 지금껏 해룡족의 힘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천 한 오랑캐 놈들이 일을 벌여봤자 거기에서 거기일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지요. 솔직히 후작님께서도 그리 생각하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듣자니 어디선가 썰렁한 냉기가 불어오는 듯한 느낌이었 다. 나는 이 분위기가 환기시키고자, 그리고 궁금한 것을 묻고자 그들 사이 에 끼어 들었다. "힐레인. 네 말은 그들을 이용하자는 거야?"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해룡족은 추수기를 이용하여, 그리고 많은 병력이 이곳 남부로 빠져나갔을 때를 기회 삼아 침략을 개시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해룡족의 힘이 미약한 편이니 그 정도로는 여러분께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저희 상단이 전하와 그들 사이에 다리를 이어드릴 터이니 부디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국왕군에 대항하십시 오."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이지? 카르틴 왕국이 아군을 무시하지를 않나, 이제 는 오랑캐들과 손을 잡으라고?" 그때 조용히 계시던 카나스 님이 굉장히 불만스러운 어조로 몇 마디를 불 쑥 내뱉었다. 그분의 성격상 이런 방법은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 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안하무인의 대명사인 류스밀리온이 빈정거 렸다. "흥, 정공법이 안 통하니 편법을 강구하는 거지. 당연한 것을 왜 묻는 거 냐? 그리고 최소한 승마술이나 궁술 실력, 그리고 무엇보다 근성만큼은 해 룡족인가 뭔가하는 놈들이 너희들보다 훨씬 낫다. 시시껍절한 우월주의에 물들어서는……." "취소하십시오! 아무리 류스밀리온 님이라 하여도 아르윈 왕국을 그런 미 천한 오랑캐들에 비교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도 아르윈 왕국인이 아니다. 그것을 아느냐? 불만이라면 당장이라도 이 군을 나가주마." 류스밀리온의 말에 카나스님은 딱 굳었다. 그러고 보면 류스밀리온은 출신 지는 물론 계급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류스밀리온이라는 5 자나 되는 거창한 이름이 있는 만큼 평민은 아닐 거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는 있지만, 일단 그는 무엇 하나 알려진 것이 없는 정체불명의 사나이인 것이다. 오로지 8서클의 마법사라는 사실이 그런 류스밀리온을 이만큼이나 대접받게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몸을 앞으로 내밀어 힐레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힐레인, 만약 네 말대로 한다 손치더라도 해룡족 입장으로서 절천치 원수 와도 같은 드리크 경이 아군에 계시다. 그런데 해룡족이 아군과 동맹을 맺 으려 하겠어?" "물론 약간의 희생은 감수하셔야 합니다. 레이포드 경의 유감의 말씀은 물 론이거니와 후일 그들에게 약간의 땅을 할애하시고 무역을 허락하십시오. 레이포드 경의 활약으로 빼앗은 땅은 사실 아르윈 왕국으로서는 불모지나 다름없이 취급되고 있으니 그 지역을 지키는 군대를 물려 해룡족이 내려와 도 좋게끔 해주는 것으로 쉽게 끝낼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그들 에게 식량을 주는 대신 저희들은 질 좋은 활과 특산품을 받아오는 식의 무 역을 한다면 해룡족도 굳이 식량을 얻기 위해 침략을 할 필요가 없어질 테 니 피차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역을 허락하라니, 네놈이 우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속셈이냐?" 힐레인의 말을 듣고 카나스 님께서 굉장히 발끈하여 소리쳤다. 사실 그것 이 꼭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무역을 허락한다는 것은 해룡족을 하나의 나라로 인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실상 지금까지 우리 나라는 크로시아 대륙 서부 전체를, 해룡족들만이 사는 리투아니아 산맥과 오테사 산맥까지 자신의 영토라 명하며 해룡족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실 제적으로는 그곳은 아르윈 왕국인이 단 한 명도 살지 않는 해룡족의 땅이 며 십수년간 그들에게 공물까지 받아오고 있었지만 일단 표면적으로는 인 정치 않고 있던 그들을 힐레인의 말처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만 큼 우리 나라의 영토가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공무역을 허락하라는 것도 아니고 저희들과 같은 상인들의 무역을 모르는 척 눈감아 주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의 해룡족을 완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존재가 더욱 공공연연해지긴 하겠지요." 힐레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영 편치 못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 나 의 생일파티에서도 보았듯이 무언가 결정적인 승부수가 생기지 않는 한, 중립귀족들이 아군의 편을 드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대로 간다면 아무리 백성들의 인심을 되찾는다해도 너무도 극악한 병력의 차이로 인해 아군은 패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병력증강을 위해 해룡족과의 동 맹을 하며 그런 약속을 하여 아르윈 왕국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게 되는 것도 그렇게 탐탁치는 못한 일이다. "이렇게 된 김에 나머지도 전부 말씀 올리겠습니다." 그러나 힐레인은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람들의 시선 을 모았다. 그리고 손을 깍지껴서 무릎 위에 올린 다음 파란색 눈동자를 살짝 들어 카나스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카르틴 왕국에 관한 일입니다. 부족한 자의 소견일 뿐이오니 부디 큰 화 는 내지 말아주십시오." 힐레인은 정중히 양해를 구했지만 카나스님은 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완연한 거절의 표시였지만 힐레인은 그것을 모르는 척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미 예상하고 게시겠지만, 카르틴은 아르윈의 내전에서 열세인 제6왕자 군에게 군대를 대어주고 후일 내정간섭을 하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정간섭을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카나 스님의 태도를 보셔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아르윈 왕국인들의 카르틴에 대한 감정은 극도로 나쁩니다. 그러기에 카르틴 왕국은 내전이 시작되자마 자 이런 제의를 하기보다는 여러분들이 완전히 빼도 박도 못할 만큼 궁지 에 몰리기를 오랜 시간 기다린 것이지요. 여러분께서 여러모로 선전하셨으 나 실상은 국왕군과는 달리 병력의 보충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병력이 절반 으로 줄었으며, 리아 영지의 일부도 빼앗겼으니 카르틴의 생각대로 된 셈 입니다." 힐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말을 끊으며 약간 흥분한 듯한 사람들의 심기를 살피는 듯 했다. 하지만 크게 화를 내는 사람들이 없었기에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여러분께서는 드래곤의 가호라는 획기적인 명분을 얻으셨습니다 만, 제가 듣기로 드래곤께서는 카류리드 전하를 지켜주겠다 하시었지 제6 왕자군을 지켜주겠다 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상황을 미 루어 볼 때, 드래곤께서 여러분의 작전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시는 것 이 확실한 듯 하더군요. 결국 드래곤의 힘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지요." "그래서! 결론은 무엇이냐!!" 카나스 님이 불쾌하게 묻자 힐레인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전하와 각별한 사이였던 에나르츠가와 스나일가조차 전하에게 적극적인 협조의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으니 다른 귀족 분들 역시 전하의 진영에 들 어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라면 제6왕자군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승리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면 전하께서는 반 드시 카르틴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셔야만 합니다." "죽일 놈!!" 카나스 님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주먹으로 탁자를 세게 치며 욕설까지 했다. 카나스 님이 카르틴에 대한 적대감이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던 지라 조금 당황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중재에 들어갔다. "기다려 주십시오. 카나스 님. 일단은 진정하십시오." 나의 요청을 들은 카나스님은 스스로가 조금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별말 없 이 몸을 소파에 깊게 묻었다. 하지만 엄청나게 구겨진 얼굴을 펴지는 못하 고 있었다. "좋아. 힐레인. 하지만 이렇게 카르틴 왕국을 싫어하는 것은 카나스님만이 아니야. 그런데 아군이 카르틴과 손을 잡고 국왕군과 맞선다면, 표면적으로 카이… 그러니까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는 한 백성들의 평판이 다시 나빠지 고 말 거야. 그리고 귀족들은 사람들의 눈 때문에라도 결코 아군에게 가세 하려 하지 않을 거다. 거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어?" 나의 물음에 힐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이 전과는 달리 한자한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이번에 카르틴의 병력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코 카르틴과 손을 잡는 따위 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지고한 존재, 드래곤의 의지를 받든 카류리드 전 하께서 백여 년 간 서로 증오하며 적대하였던 카르틴 왕국마저 당신의 깃 발 아래 머리를 조아리겠다는 뜻을 밝히도록 만든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 다!" "……." 나는 그 말을 듣고 황당함에 입을 조금 벌렸다.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 지로 비슷한 현상을 보이자 힐레인은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전쟁에서 카르틴의 군대에게 자국의 깃발을 세우지 못하도록 하고 표면적 으로 이렇게 주장한다면 백성들이나 귀족들에게 최소한 반감을 줄일 수 있 을 것입니다. 물론 후일 카르틴의 간섭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겠 지만 말입니다." "어찌 오백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르윈의 왕실이 황야에서 굴러먹던 야만 스러운 놈들의 발 밑에 굴복할 수 있단 말인가!! 내 핏덩이가 되어 더러운 흙바닥을 구르는 한이 있어도 결코 그리는 못한다! 전하, 결코 저런 파렴치 한 놈의 말을 결코 귀담아 듣지 마십시오!" 힐레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 한번 카나스님이 화를 내다가 곧 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레이포드 경도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카류 님, 저도 카나스 경과 같은 생각입니다. 만약 저자의 말대로 하신다 면 전하께서는 역사에 길이 매국을 한 왕으로 낙인찍힐 것입니다. 죽는 한 이 있어도 카르틴의 도움 같은 것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됩 니다." "솔직히 저도 동감입니다. 저는 카르틴 왕국과의 접전에서 여럿 전우를 잃 었습니다. 그러한데 어찌 그들과 한배를 타고 싸움에 임할 수가 있겠습니 까. 승리를 거둔다 해도 내정간섭이라는 결과는 너무도 치욕적입니다." 레이포드 경의 말에 이어 디슈켄트 님까지 가세하여 반대론을 펼쳤고, 그 여러 사람들의 웅성임이 묵직했던 방안을 조금 소란스럽게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카르틴의 도움은 받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창 술렁이는 분위기 속에 힐레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여러분께서 정 그렇게 애국자이시라면 차라리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국왕군 에게 가서 목을 베어달라 하십시오!" "뭐라? 이 무엄한 놈이!?" 발끈 한 카나스 님이 말을 무시하며 힐레인은 굳은 얼굴로 말을 계속 이었 다. "지금 카르틴은 황금의 성왕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을 중심으로 왕권을 다지며 날로 번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르윈 왕국은 발전은커녕 반년에 가깝게 지속되어 온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이래서야 이 나라가 4대왕국의 자리를 지킬 수나 있겠습니까. 진정으로 여러분께서 나 라를 생각하신다면 더 이상 이렇게 열세인 군대를 붙잡고 전쟁을 지속시켜 백성들을 도탄에 빠지게 하지 마시고 그 한 몸 희생하여 이 전쟁을 종식시 키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피를 발판으로 카르틴 따위는 발도 못 붙일 정도 의 강대국이 되라고 말씀하십시오!" 힐레인은 굉장히 극단적인 말로 사람들을 몰아 붙였다. 그리고 말발이 딸 리는 카나스 님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반박의 말을 찾지 못하고 있 었다. 내가 뭐라 한마디 꺼내볼까 하다가 일단은 힐레인의 말을 전부 들어 보자는 심산으로 입을 다물었다. "물론 그런 일은 불가능하시겠지요. 어차피 그럴 생각이시라면 비록 치욕 적인 일이 되더라도 승리를 위한 길을 찾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라! 대체 네놈의 속셈이 무어냐?" "그렇다면 카나스 경이여, 그대는 속셈은 무엇인가? 근성으로 버텨보자 이 건가? 혹시라도 정의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식의 재미없는 농담을 하 려는 것은 아니겠지?" 여전히 발끈발끈 화를 내는 카나스 님을 보며 류스밀리온이 그 특유의 비 아냥거림을 시작했다. "아니, 그럼 류스밀리온 님께서는 저놈 말대로 아군이 카르틴 왕국의 손을 빌려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까놓고 말해서 카르틴을 거절하고 나서 대체 어쩌자는 거냐? 병력은 잽도 안 되는 데다가 중립귀족인지 뭔지 하는 놈들도 드래곤을 보여주지 않으면 병력을 대주지 않겠다고 버팅기고 있는데! 그리고 카르틴을 거절하면 그것 을 끝이냐? 바로 코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는 카르틴이 대대적인 침략은 않더라도 소규모 침략을 자행하며 아군에게 적대적으로 나올 수도 있는 일 이 아니더냐?" "어찌되었든 카르틴의 도움 같은 것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정론이야 카르틴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결코 불가한 일이겠지." 류스밀리온의 말에 막무가내로 답하는 카나스 님을 향하여 또 다른 누군가 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랍게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평소의 침착한 얼 굴로 돌아온 프리란트 님이었다. 지금껏 힐레인의 말이라면 가장먼저 펄펄 뛰며 화를 냈던 분이 그의 말에 동의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시오. 아군은 병력은 물론이거니와 군사자금에 이르 기까지 모든 면에서 너무도 부족하오. 아무리 국경선에 군대가 있었고, 아 르윈에서 손꼽히는 가문의 도움이 있었다 해도 겨우 5개의 가문만으로 이 루어진 아군이 다른 대부분의 귀족들과 상대하여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 던 것은 기적 같은 일이었소. 사실 지금껏 나는 아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생각은 거의 않고 있었소. 카류 님께서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신 것에 아주 잠시동안 일말의 희망을 걸어보기도 하였으나, 드래곤께서 아군의 승리를 위한 일체의 도움을 주시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다시금 절망하던 차였소." "아니, 후작님께서 지금껏 그렇게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었단 말입니까!" "그것이 현실이고 진실인 것을 어쩌겠소. 꿈을 꾸는 사춘기 시절은 이미 한참 지난 상태요." 디슈켄트 님의 반박에 프리란트 님은 언성을 높이는 대신 목소리를 낮게 깔아 화를 냈다. 그 동안의 모습을 보고 대강 추측하고는 있었지만 역시 프리란트 님은 이 싸움의 결과를 패배로 거의 확정짓고 계셨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 논쟁이 끝없이 계속될 듯 하여 나는 그들의 중재를 하기로 마음 먹었다. "일단 여기까지로 하시지요. 이 자리에서 간단히 그렇다 아니다로 단정하 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입니다. 최소한 카르틴의 사자에게 더 자세한 이 야기를 들어보고 결정하도록 하지요." "…예." 불만에 가득 찬 얼굴들이긴 했지만 사람들은 일단 나의 말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상황이 잠시 마무리가 된 듯하여 나는 힐레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힐레인, 카르틴에서 온 사자와의 대담에 너도 참석해 주었으면 한 다." 카나스 님의 따가운 시선이 뺨을 마구 찌르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는 힐레 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의외로 힐레인은 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와 같은 미천한 자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런 자리에 동석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부디 그 청은 거두어 주십시오." "글쎄?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보면 너는 상대의 마음을 속속들이 읽는 것 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대략적인 기분만은 알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말이지. 이런 담판에서는 그렇게 상대의 진심을 파악하는 것만으로도 굉장 한 도움이 될 거야. 그렇지?" "……." 힐레인은 잠시동안 고개를 숙이고 침묵을 지켰다. 왜 그렇게 나의 말을 거 절하려는 것인지 그 연유를 묻기 위해 내가 입을 열려는 찰라 힐레인이 고 개를 들었다. "저는 천한 상업을 생업으로 삼는 평민일 뿐인데 무슨 명분으로 그런 자리 에 자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사실 이런 몸으로 동석을 했다가는 전하께 욕을 보일 뿐입니다. 이번 일도 전하와 자리를 함께 한 것을 계기 로 삼아 마지막으로 아버님과 동생에게 도움이 되고자 미력한 소견을 밝혔 을 뿐, 더 이상 이렇게 앞으로 나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힐레인……." 크레베르는 자그마한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들을 보며 미 안함을 금치 못했다. 사실 같은 하프 엘프임에도 크레베르는 인간으로 태 어나 이렇게 무난한 생애를 살았으면서, 힐레인은 저런 몸으로 낳아 고생 을 시켜야만 하니 마음이 편할 리가 있겠는가. 나는 그들을 가족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힐레인을 향해 물었다. "그렇다면 힐레인. 너는 앞으로도 계속 저택에 머물며 시간을 무익하게 보 낼 거야? 미안하지만 정말 까놓고 이야기해서 너에게는 일경이 아까운 시 기 아니야? 너의 가족들이 살아있을 때, 너를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존재 하고 있을 때 밝은 양지에 서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싶지 않냐 고." 나의 말에 힐레인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소망대로 움직였다가는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줄뿐 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저를 쉽게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조모 님의 일에서나 과거의 경험으로 몇 번이고 증명된 바가 있으니까요." "내가 너에게 당당히 행동할 수 있는 기회를 줄까?" "네?" 힐레인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것을 보며 나는 씨익 웃었다. "힐레인 혼 리아가 되라." "예??!" 내 말에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다름 아닌 프리란트 님이었다. 소파에 묻고 있던 몸을 스프링 튀기듯 일으키며 내게 되물었던 것이다. "리아 후작가에는 아직 장자가 없지 않습니까. 이제껏 경황이 없었고, 또한 눈에 차는 아이가 없어 들리지 않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힐레인 정도로 똘 똘한 아이라면 나쁘지 않을 듯 싶은데요? 굉장히 당차지 않던가요?" "아니, 말도 안됩니다. 방금 힐레인이 서른셋이라 하였는데, 저는 올해로 마흔입니다. 겨우 일곱살 차이인 자를 양자로 들리란 말씀이십니까? 그리 고 후계에 대한 것은 또 어쩌고요? 아니, 하루동안 말해도 차고 남을 그 모든 문제들을 제하고라도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프리란트 님께서 보시기에 힐레인이 어디로 봐서 서른셋으로 보이세요? 그냥 어린애라고 밀어붙이면 되잖아요. 그리고 힐레인이 앞으로 살날이 창 창한데 벌써부터 후계자에 대한 걱정을 하세요? 게다가 양자가 괜히 있는 게 아니라고요. 힐레인이라면 분명 괜찮은 애를 양자로 들려줄 거예요." "전하!!" 프리란트 님은 경기라도 하듯 몸서리를 치며 언성을 높였다. 그리고 이번 에는 힐레인도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표정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저는 그다지 저의 가족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만? 그리고 리아 후작가의 양자가 된다고 해서 제가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설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리아 후작가에 큰 오점만을 남기게 될 뿐입니다." "후후, 지금 내가 무슨 명분으로 이번 전쟁에 임하고 있는지 기억해?" "예?" 내 말에 힐레인은 무슨 소리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힐레인이 오랜만 에 너무나 얼굴에 어울리는 행동을 한지라 나는 저도 모르게 싱글벙글 웃 으며 말했다. "나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성스러운 자라고. 그렇다면 드래곤께서 영원 히 늙지 않는데다가 상대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으며, 또한 현자급의 지식 을 지닌 어린애를 측근으로 내려주실 수도 있는 일 아니겠어?" "……." 항상 나를 놀래키기만 했던 힐레인이었지만 이번에는 녀석이 놀랄 차례였 는지 입을 짝 벌렸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너무나 귀여워서 나는 얼굴에 띄운 웃음을 지우지 못하고 말했다. "바로 네가 드래곤의 존재를 증명하는 증거품 중 하나가 돼줘야겠다. 일단 이 나라는 귀족이 아니면 아무 것도 못하니까 리아 후작가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내려주겠어. 요는 네가 얼마나 잘하느냐야. 너는 그 귀여운 얼굴에 맞지 않게 절대적으로 유식해야 하고, 어느 정도 기분을 파악하는 것을 이 용하여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뻥을 튀겨야 해. 그리고 영원히 사 는 거야 시간이 증명해줄 문제겠지. 아, 뛰어난 오감이라든가 엄청나게 빠 르게 자라는 머리카락도 애용하면 좋겠군." 쉴새 없이 내뱉는 나의 말에 힐레인은 조금 머뭇거렸다. 하지만 금방 얼굴 을 들고 대답을 했다. "확실히 나쁘지는 않은 생각이라 사려됩니다. 하지만 성이 없다하여도 저 는 저의 가문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님과 켈레인을 버리고 리아 후작가로 가는 것은……." "힐레인!" 힐레인이 마침 거절의 말을 하려는데 갑자기 크레베르가 말허리를 끊고 끼 어 들었다. 그리고 녀석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나는 이제껏 네게 해준 것이 없다. 하지만 나 같은 한낱 천한 상인 나부 랭이의 아들밖에 될 수 없었던 네가 아르윈 불굴의 명문가인 리아 후작가 의 양자가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여한이 없겠구나. 우리들의 사정은 봐줄 필요 없다. 당장 전하의 은혜를 받아들이거라!" "아…아버님." 당황한 힐레인을 보며 켈레인도 잔뜩 흥분하여 끼어 들었다. "저 또한 같은 생각입니다. 형님께서 저택에서 숨어사시며 자신의 기개를 펴지 못하고 계시는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어차피 같은 리아 영지 이니 멀리 떨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겠습니까? 형님이라면 저와 아버님이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거짓을 말하는 것인지 분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 웅성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저기에 얼어 계신 프리란트 님께 동의도 얻어야 하구요, 여러 가지 일이 많답니다." 나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얹고 양손을 깍지를 그 위에 턱을 얹은 후 얼굴을 기울였다. 그리고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이제부터 시작이군요." ------------------------------------------------- 쩝… 또 제목 못 정했음. -_-;;; 최종 이벤트 집계…는 다음에 올릴게요.;; 따라서 아직 이벤트 중이니까 꼭 보내고 싶은 분들은 얼마든지 보내셔도 됩니다. ;;; 아비스라라의 메일 심심하실 때 저에게 감상&비평 메일이라도 한편∼★ hongik1999@hanmil.net -이르나크의 장 카페 심심하실 때 들려 아무 글이나 써주시길∼☆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한 줄씩 띄우려니 분량이 꽤 되는 관계로 힘들어서 못하겠어요. 글이 다 다닥 붙어서 읽기 힘들다 하시는 분은 드래그 하셔서 한글 문서에 복사해 넣고 "줄 간격"을 띄워서 보시길 바랍니다. T-T;; 그리고 글이 너무 길어서 읽다가 지친다는 분이 계셔서 편당 분량을 약 10 장 정도로 해서 올립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6 한가한 날의 오후 (1) "끄으으윽……." 방으로 들어온 나는 양팔을 크게 기지개 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며칠 동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바쁘게 보내다가 간신히 얻은 자유였지만 생각 이상으로 그리 피곤하다거나 하진 않았다. 똑똑-. 이제부터 뭘 할까 하고 고민하던 차에―솔직히 마법수식 정리를 해야하지 만 오늘 하루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갑자기 들려온 문소리에 나 는 고개를 갸웃하며 들어와도 좋다고 허락을 내렸다. "실례합니다. 카류리드 전하. 카이야 님." 깊게 고개를 숙이며 내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은 의외로 휴나르 성주였다. 그가 웬일로 나를 보러 왔는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의 뒤로 시녀 한 명이 더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녀의 손에는 슬쩍 봐 도 굉장히 탐스러워 보이는 복숭아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가?" 나의 물음에 휴나르 성주는 특유의 실없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 실은 성의 주민이 전하를 위해 과실을 바쳤습니다. 아주 달아서 드래 곤의 가호를 받으시는 전하께 바치고 싶었다고 하더군요." "주민들이?" 나는 약간의 황당함을 느끼며 무의식중에 카이를 바라보았다. 내 평판이 좋아졌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까지 일 줄이야. "여기 복숭아들은 전하를 위해 가장 맛이 좋은 것으로만 추려낸 것이라 합 니다. 전하께서 기뻐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휴나르 성주는 마치 자기가 바친 것처럼 이야기하며 시녀에게 손짓으로 그 복숭아 바구니를 나의 옆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금방 향기로운 복 숭아의 향기가 나의 코끝을 자극했다. 나는 일단 휴나르 성주에게 빙긋 웃 으며 인사를 했다. "고맙군." "아닙니다. 하하… 주민들이 겨우 요것만을 가져와 전하께 바치고 싶다기 에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렸는데, 먹어 보니 정말이지 대단한 일등품이더군 요!" "하아?" 휴나르 성주가 흥분하여 말을 줄줄 늘어놓는 것을 보며 나는 그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왕자에게 보내는 진상품을 먼저 맛봤다는 뜻이 아닌가. 먹으려 면 나 모르게 먹을 것이지 내 앞에서 굳이 그 이야기를 할 건 또 뭔가. 내 게 바칠 물건을 먼저 먹었다는 사실 자체가 화가 나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건 멍청함―멍청하다는 건 좀 심한 말 같지만―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앗! 그것이… 이 복숭아를 꼭 바치고 싶다고 한 자들이 비루먹은 듯 비 쩍 마른 농노들이기에… 아무 물건이나 올려서 전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 기 위해 한 일입니다. 딱 한 개 맛보자마자 곧바로 이렇게 가져온 것입니 다." "…됐네." 나는 완전히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휴나르 성주를 보고 숨을 폭 내쉬며 괜 찮다고 말해주었다. 뭐, 저 사람이 그리 교활한 자는 못되니 아마 저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자기 먹을 것도 없어 비쩍 마른 농노들이 이런 것을 가져왔다니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악마라 불리고 있었는데 이것 참 획기적인 변화지 않은가. "아, 그렇다면 프리란트 님이나 다른 분께는?" 나는 문득 생각이 나서 휴나르 성주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멋쩍게 머리 를 긁적이며 답했다. "그것이… 양이 겨우 저것밖에 안 돼서 다른 분들께 드리기는 좀……."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스무 개가 조금 넘는 복숭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 다. 확실히 대 귀족인 그들에게 겨우 복숭아 같은 걸 쪼잔하게 한 개씩 건 네주는 것도 별로 예의는 아닐 듯 했다. 그럴 바에야 나에게 몰아주는 편 이 나았겠지. 또 주민들이 내게 바친 것이라 하니……. 부스럭. 나는 별 생각 없이 복숭아를 하나 집어들었다. 그리고 몰랑한 백도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엇?" 입안으로 달콤하게 퍼지는 향기에 저도 모르게 멍한 소리를 냈다. 복숭아 가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달았기 때문이다. 설탕에 아주 절여놓은 것은 아 닐까 싶을 정도로 달작지근한 복숭아의 맛을 느끼자니 휴나르 성주가 왜 저렇게 흥분하여 푼수처럼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말 굉장히 달군!! 대단한데?" 나는 입안에 든 것을 꼴깍 삼키자마자 그 즉시 바구니에 담긴 복숭아를 하 나 들어서 카이에게 들이댔다. "카이. 한번 먹어봐! 진짜 대단해!" "아니. 과실의 수도 얼마 없는데 네가 즐기거라. 그것이 아무리 맛이 좋다 하더라도 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이왕이면 진정으로 그 과 실을 즐길 수 있는 자가 먹는 것이 좋겠지." "그래도! 딱 하나만! 요거 딱 하나만! 정말 달다니까? 나도 땅의 궁에서 별 의별 과일들을 다 먹어봤는데 이거만큼 맛있는 건 처음이야." "……." "진짜라니까? 응? 먹어봐. 어서." 카이는 내가 포기하지 않고 복숭아를 들이밀면서 계속 권유하자 곧 한숨을 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로 자신의 뺨처럼 뽀얀 부분을 한 입 베어먹었다. "…달군." "그치?" 조금 전의 말처럼 카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헤죽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휴나르 성주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명령했다. "휴나르 성주. 지금 나가서 에르가 형, 아니, 에스문드 백작과 딜트라엘 경, 히노 양과… 그리고 힐레인도 불러 주게!" "그분들을요?" "그래! 지금 당장!" 내 말이 떨어지자 성주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곧 그렇게 하겠다고 인사를 하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일단은 손에 든 복숭아 를 마저 베어먹었다. 나와 카이가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를 전부 다 먹고 구석에 치워버렸을 때쯤에 약간의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노크도 없이 문 이 벌컥 열렸다. "이게 감히 누구더러 오라 가라야?" "에르가 형, 딜티." 나는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화를 내는 에르가 형과 그 뒤를 따라 걸어 들 어오는 그들을 향해 반갑게 인사했다. 차림새가 가벼운 것을 보니 아마도 함께 대련이라도 한 모양이다. 그러나 들어올 때부터 영 표정이 좋지 못하 던 딜티는 에르가 형을 죽 보더니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저렇게 뇌가 없다는 것을 티내고 싶을까." "뭐야?" "에구, 자자! 여기들 봐." 요즘 들어 미묘하게 사이가 안 좋아 보이던 두 사람이 또 한번 싸움을 시 작하려 하자 나는 그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친 후, 예고도 없이 두개의 복 숭아를 한꺼번에 그들에게 던졌다. "엇?" "응?" 과연 절정의 무인들답게 그들은 기습적으로 던진 과일들을 가볍게 받아냈 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빠르게 그들에게 다가가 두 사람의 손을 하나 씩 잡고 방의 왼쪽 한켠에 놓인 소파로 데려가 나란히 앉혔다. 조금 얼떨 떨하게 내게 끌려온 에르가 형은 이내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뭐냐?" "뭐긴. 여기 앉아서 복숭아 먹으라는 거지." "……?" "……?" 에르가 형과 딜티는 별 이상한 녀석을 다 봤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 며 내 행동에 의아함을 표했다. 그러나 내가 탁자를 빙 돌아 맞은 편 자리 에 앉으며 계속 먹으라는 듯이 손짓을 하자 어깨를 으쓱 이면서도 곧 손에 든 복숭아를 한입씩 깨물기 시작했다. "오?" 에르가 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딜티가 작게 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나 는 기분 좋게 웃었다. "맛있지?" "정말이네……." "음……." 두 사람은 긍정의 표시를 하면서 입안의 것을 넘기고 다시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복숭아를 우물우물 씹으며 은근슬쩍 내비치는 표정을 보니 그들도 이렇게 맛이 좋은 복숭아는 처음 먹는 모양이었다. 둘이서 나란히 앉아 볼을 움직이며 복숭아를 먹는 것을 보자니 오랜만에 보는 그 귀여움을 참기가 힘들었다. 나는 너무너무 귀여운 두 사람의 모습 을 보다가 창가의 책상 위에 올려진 복숭아 바구니를 번쩍 들고 그들의 앞 으로 걸어갔다. 쿵-. 약간은 무게를 가진 복숭아 바구니가 탁자 위에 놓이며 약간 둔탁한 소리 를 냈다. 덕분에 복숭아를 먹던 두 사람은 조금 얼떨떨하게 나를 올려다보 았고, 난 복숭아 바구니의 손잡이를 쥔 자세에서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 또 있으니까 많이 먹어. 하지만 있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줘야 하 니까 너무 많이 먹으면 안돼, 알았지?" 내가 싱글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어느새 복숭아를 반이나 해치운 딜티가 고 개를 갸웃하며 내게 말했다. "너는 안 먹어?" "응? …이구, 생각을 해봐. 당연히 내가 먼저 먹고 너희들을 부른 거지." "뭬야? 이런걸 저 혼자 먹다가 이 몸에게 남은 찌꺼길 준단 말이야?" 내가 딜티의 질문에 대답해 주고 있는데 에르가 형이 입에서 복숭아 파편 을 튀겨가며 빽 소리를 질렀다. 나는 소리나게 웃으며 형을 향해 말했다. "하하하… 찌꺼기라니 너무하네. 이게 찌꺼기처럼 보여?" 내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형은 인상을 팍 쓰며 복숭 아를 쥐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확 쳐냈다. 그리고 동시에 복숭아씨를 탁 자에 팍- 소리가 나게 내려놓는 터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짧은 시 간에 벌써 한 개를 다 먹어치운 것이다. 사실 에르가 형이 그렇게 단 과일 을 좋아한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복숭아는 단순히 단 차원을 떠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게 만들 정도로 굉장히 맛이 좋았던 탓이었다. 나 는 어느새 잔뜩 일그러뜨렸던 인상을 펴고 새로운 복숭아를 끄집어내는 형 을 보며 다시 한번 피식 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음, 진짜 달다." 에르가 형과 마찬가지로 딜티 역시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복숭아를 해치웠 고 바구니에 손을 넣어 새로운 것을 꺼냈다. 그리고 작은 미소까지 띄우면 서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을 보고 나는 흐 뭇한 기분에 그들을 향해 말했다. "봐, 이렇게 웃으니까 얼마나 좋아. 앞으로도 싸우지 말고 이렇게 사이좋게 지내. 알았지?"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은, 특히 에르가 형은 엄청 발끈한 건지 나를 확 째 렸지만 복숭아를 먹으면서 말을 하는 것이 귀찮았던 것인지 그냥 입을 삐 쭉이기만 했다. 딜티도 내게 애 취급당한 것에 가히 조건 반사적으로 불만 스러운 표정을 내 비췄지만 형처럼 그렇게 투덜거리지는 않고 금방 시선을 내렸다. 똑똑-.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 나는 고개를 들고 새로운 손님을 맞이했 다. 내가 들어오라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시선을 보낸 곳에서는 의 외로 히노와 힐레인이 함께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로 오면서 만난 거야?" 내가 그들을 소파로 데려오며 묻자 히노가 고개를 젖더니 예전과는 다른 조금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지금껏 그와 함께 있다가 전하의 부름을 받고 온 것입니다." 벌써부터 형제들끼리 우애를 다지는 건가? 하지만 그러기엔 히노의 성격이 그렇게 사교적이지가 못할 텐데… 내가 사소한 의문에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조금 떨어진 곳에 있 던 에르가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야? 힐레인! 네놈 대체 히노 양과 무슨 짓을 한 거냐?" "에르가 형!! 매사에 좀 조심하라고 그랬지? 자세한 이야기도 듣지 않고 화를 내면 어떻게 해? 어서 앉아. 어서." 에르가 형은 내 말에 고개를 돌리고 불만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히노 양과 힐레인을 모두 에르가 형과 딜티가 있는 쪽의 소파에 앉히고 내가 복숭아 를 건네주려는데, 문득 에르가 형이 아직까지도 지긋한 시선으로 힐레인을 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형도 참… 그게 그렇게 신경이 쓰여? 히노 양과 힐레인은 이제 형제인데 웬 불순한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시꺼! 며칠 전만 해도 완전히 남남이었는데 형제는 무슨!! 네 놈이야 말로 히노 양이 정혼자면서 뭐가 그리 담담해?" 에르가 형의 으르렁거림을 듣고 나는 문득 히노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그 녀의 표정이 영 굳어 있음을 깨닫고 내가 약간 실수를 한 듯 하다는 느낌 을 받았다. "히노… 양이 직접 그런 말을 하였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었겠어? 자신의 입으로 잘못을 폭로할 만큼 히노 양의 생각이 부족하다고 생각지는 않아." 나는 일단 이 자리를 무마시켜보고자 별 생각 없이 했던 말에 억지로 이유 를 갔다 붙였다. 그리고 입에 익지 않은 ‘양’이라는 칭호에 어색함을 느 끼며 히노의 얼굴을 살폈다. 히노와 나는 여전히 서로에게 존칭을 쓰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이런 자 리에서까지 서로에서 존대를 하는 우리들에게 이상한 시선을 주었지만 상 당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별다른 말없이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 다. 에르가 형도 히노의 일이기 때문인지 바로 달려들어 빽빽대지 않고 얌 전히 있는 눈치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히노에게 예전처럼 선배라고 부르게 해달라고 솔직하게 말을 꺼내볼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그렇다고 근 본적인 문제가 풀어지는 것도 아니었기에―내가 갑자기 히노를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었기에―그냥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기로 했다. 하지만 최대한 그 녀를 정혼자로서 보고 잘 대해 주자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며칠도 채 안되어 와륵 무너진 것이다. 약간의 불편한 공기가 감도는 사이, 무표정을 고수하던 힐레인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탁자에 내놓으며 입을 열었다. "히노 양… 누님께서 제게 이곳 휴나르 성의 도서관을 안내해 주시고 계셨 습니다. 오해를 가져다 드릴만한 행동을 하여 죄송합니다. 신의 이름을 대 고 맹세하건대 누님께 손을 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사소한 행동에도 조심을 기하겠습니다." "물론 걱정 안 해! 나는 히노 양도 믿고 힐레인도 믿는걸! 자, 그런 건 신 경 쓰지 말고 이거 받아." 나는 일단 화제를 바꾸고자 그들에게 복숭아를 하나씩 건넸다. 처음 에르 가 형과 딜티가 그랬듯 그 둘도 의아한 표정을 했다. "복숭아 처음 봐? 어서 먹어 보라구." 나의 요구에 그들은 말없이 복숭아를 한입 베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금방 놀라운 얼굴을 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기분이 좋아서 그들을 보고 헤죽 웃었다. "달지? 성의 주민들이 내게 바친 거래." "흠… 상당한 당도군요. 그 동안 가뭄이 있었다고는 해도 비가 내리는 바 람에 당도가 많이 떨어졌을 텐데……." 그러나 히노와는 달리 힐레인은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와 꽤나 객관적인 시 선으로 복숭아를 평가하여 약간의 실망을 가져다주었다. "어쨌든 이건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맛있지?" "뭐, 그렇군요." 힐레인은 조금 전에 여러 사람들에게 취하던 그 정중한 태도와는 달리 굉 장히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더니 별 감흥 없이 복숭아를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르가 형이 약간 눈을 가늘게 뜨고 질문을 던졌다. "설마 이런 것보다는 과자나 하나 더 먹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 지?"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향의 차이이니 너무 나 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에스문드 백작님." "거참, 물론 과자를 좋아하는 걸 나쁘다는 평할 수는 없는 일일 테지만 너 무 광적인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닌 듯 한데?" "다른 분들께 이상한 시선으로 비춰진다는 것은 저 역시 알고 있는 일이 나, 이것은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딜트라엘 경." 딜티는 못 말린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더니 다시 입으로 복숭아를 가져갔 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힐레인에게 몸을 조금 내밀고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힐레인. 시종을 시켜 과자를 가져오게 할까?" "마음대로 하시지요." 내 물음을 들은 힐레인은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듯 했지만 나는 그 미묘한 행동에서 확연한 차이를 느 꼈다. 힐레인이 유독 나에게 심한 거부감 내지는 악의를 가지고 나와의 대 화를 싫어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힐레인을 리아 후작가의 양자로 들리는 일을 추 진하게 위해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 일을 성사시키는데 있어 가장 큰 장 애라면 당연히 첫 만남부터 계속 힐레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프리란 트 님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힐레인은 평민답지 않게 굉장 히 명석하여 리아 후작가의 장자로 삼는다해도 손색이 없으며, 아군의 승 리에 나름대로 상당한 도움이 될만한 일을 거절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에 프리란트 님은 곧 허락을 할 수밖에 없었다. 히노 역시 별다른 반응이 없 었기에 힐레인은 무난히 힐레인 혼 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 데 나로 인해 여러 가지 이득을 얻은 힐레인이 조금쯤은 내게 호의를 가져 줄 것이라 생각했건만, 이상하게도 녀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던 것 처럼 계속 퉁명스러운 오로라(?)를 보내며 나를 예전과 같은 우울함의 구 렁텅이 속으로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끼며 시선을 조금 아래로 주었다가 땅은 그만 파자는 생각에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맛있게 복 숭아를 먹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거친 말을 한 두 마디씩 건네며 투닥거리면서도 나름대로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들을 보자니 흐뭇해져서 나는 턱을 괴고 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아, 맞다!! 이거 먹었다는 거 다른 분들께는 비밀이다. 알았지?" "응? 왜?" 딜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을 하기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 다. "으응… 양이 이것밖에 없어서 너희들에게밖에 못 나눠 주겠더라고… 그러 니까 이건 무조건 비밀로 해야 해, 알았지?" "별스러운 놈… 왕자가 저 좋을 대로 하겠다는데 뭐라 할 놈이 어딨냐? 게 다가 겨우 복숭아 몇 개 정도로……." 에르가 형이 입안의 복숭아를 우물거리면서 나를 향해 투덜거렸다. 나는 여전히 애들 같은 형을 보고 속으로 남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좋은 걸 자기 안주고 나 혼자서 먹었다고 화 낸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에르가가 생각 없이 제멋대로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이야? 게다가 이거 너 한테 바친 복숭아라며? 네 맘대로 하는 게 당연하지 뭘 그러냐?" 딜티까지 의아하게 묻기에 나는 그에게 새로운 복숭아를 건네며 대답했다. "그야 뭐라 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그냥 평범한 복숭아면 몰라도 이렇게 좋은 건데 우리끼리만 쓱싹 해치우면 미안하잖아. 편찮으신데도 매일 나만 걱정해주시는 아르 할아버지도 계시고 한데… 어쨌든 비밀 지켜. 이건 기 분상의 문제라고." "역시 왕자답지 않은 놈이야, 넌……." 딜티가 복숭아를 물더니 나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히죽 웃다가 가히 살인적인 속도로 네번째 복숭아를 해치우고 다시 바구니 안으로 손을 넣는 에르가 형을 보고 나무랐다. "에르가 형! 좀 천천히 먹어. 속도를 좀 맞춰줘야 히노 양이 먹을 것도 남 을 거 아니……." -쾅!! 나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울리는 문소리에 그 자리에서 딱 얼어버렸다. 이 런 식으로 내 방문을 열만한 사람은 이제 딱 한사람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 이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6 한가한 날의 오후 (2) "카류리드!" 감히 왕자의 이름을 존칭 없이 마구 불러대는 그 목소리에 나는 조금 어색 한 웃음을 띄우며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류스밀리온 님… 헉! 아르 할아버지까지?" 나는 류스밀리온의 뒤쪽에 함께 들어오고 있는 아르 할아버지를 보고 도둑 이 제발 저리듯 깜짝 놀랐다. 호랑이도 제말 하면 온다더니… 특히 아르 할아버지는 요즘 들어 더욱 몸이 좋지 못하여 중요한 일이 없는 한은 돌아 다니는 일은 없었는데 하필 이런 상황에 들이닥친 것을 보면 역시 옛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는 듯하다. 나는 이 상황을 우찌 타개하나 싶어 머리를 긁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아르 할아버지는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는데도 평소처럼 나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지 않고 대신 류스밀리온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걸었다. "류스밀리온… 카류도 좀 쉬어야 할게 아니냐." "하루가 멀다하고 강요당하는 고위마법의 남발에 수식 연구까지! 나보다 더 쉬어야할 인간이 어디에 있단 말이냐?" "나도 가만히 있는데 너같이 젊은 놈이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난리더냐?" "뭐가 힘드냐고? 나는 지금 죽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치도 없다! 겨우 저 꼬맹이 놈을 리아영지로 데려오겠다고 매일 8서클 마법을 난사하는 둥의 미친 짓만 골라 하는 너와는 동급으로 취급을 말라고, 아르디예프!" 나는 여전히 무례의 극치를 달리는 류스밀리온의 말을 들으며 어쩔 수 없 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류스밀리온의 한 말처럼 아직까지 아르 할아버지의 상태가 좋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혹사시킨 근본 원인인 나도 잘한 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류스밀리온의 행동을 좋게 봐줘야 할 이 유는 없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류스밀리온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째렸다. 하지만 내가 시선을 피하고 딴청을 피우자 그는 잠시 동안 약간의 (?) 불만을 터뜨리기만 하고 용건을 전해왔다. "다음 수식 건은 어떻게 됐냐. 왜 꿩 꿔먹은 소식이야?" "예? 얼마 전에 넘겨드린 걸 그새 다 익히셨어요?"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대강은 안다. 정말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획기적인 방법들뿐이더군! 손이 근질거려 복습만 하고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온 거 다. 일단은 다 배워놓고 완벽히 익히도록 말이다. 빌어먹을… 너 같은 꼬마 놈이 이런 수식을 만들어내다니… 인정하긴 싫지만 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로 네놈은 천재다!" 흔치 않은 류스밀리온의 칭찬을 듣고 나는 양심이 지긋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조금 전에 앉아 있었던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던 류스밀리온과 아르 할아버지도 유일하 게 비어있는 나의 왼편 옆자리에 가 앉았다. 어지간히도 내 수식을 더 배 우고 싶은 것인지―당연한 일이겠지만―류스밀리온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눈을 부라렸다. 아르 할아버지도 더 이상은 못 말린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나는 입을 열었다. "류스밀리온 님. 제 머리에 여러 수식이 담겨 있긴 하지만, 그것을 체계적 으로 써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예요. 곧 큰일도 있으니 짧은 시간 이나마 쉬게 해주심 안될까요?" "나의 발전이 곧 이 군의 발전이 아니더냐! 지금이라도 당장 일해!" "그러지 마시고 이거나 한번 먹어보세요. 굉장히 맛이 좋아요." "말 돌리지 말고 수식이나 내놔!" "에이, 말 돌리는 거 아니예요. 저기 에르가 형을 봐요. 얼마나 맛있게 먹 는지 안보이세요?" 내 말이 떨어지자 여러 사람들이 시선이 에르가 형에게로 몰렸고, 형은 움 찔하더니 이내 겸연쩍은 표정을 하고 복숭아에서 입을 뗐다. "웬 백도(白桃)더냐, 카류야?" "아, 성의 주민들이 제게 바친 거래요. 어쨌든 먹어보세요. 정말 맛이 좋아 요." 아르 할아버지의 질문에 나는 베실 웃으며 대답하고는 복숭아를 하나씩 두 분께 집어 드렸다. 류스밀리온은 신경질적으로 한입 확 베어 물고는 다시 내게 독촉을 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 맛에 놀랐는지 다시 시 선을 복숭아에게로 주었다. "오, 이것 참 대단하군." "그렇죠? 여기에 있으니까 더 드세요." 나는 은근슬쩍 이 위기들을―우리끼리 복숭아를 쓱싹하려 한 것을 들킬 뻔한 것 과 마법 수식의 독촉 건―넘기고자 그들에게 바구니를 밀면서 말했다. 류스밀 리온은 복숭아의 맛에 잠시 수식건을 잊은 건지 계속 그것을 먹으면서 가 볍게 질문을 던졌다. "맛이 좋은데… 근데 이거밖에 없느냐?" "네? 에…헤헤… 예. 이게 전부예요. 하하. 어서 드세요. 맛있죠? 그죠?" 나는 그 대답을 하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조금만 생각이 발전하면 자신들에게는 주지 않고 우리들끼리 먹으려했다는 것을 그대로 뽀록날만한 질문이었기에 나는 최대한 그의 사고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무진한 노력 을 했다. 그 때 아르 할아버지가 복숭아를 먹다말고 나를 향해 의아하게 물었다. "너는 먹지 않느냐? 이것밖에 없는데 괜히 우리들이 와서 빼앗는 게 아닌 가 싶구나." "하…하하. 절대 아니예요. 전 벌써 먹을 만큼 먹었구요. 하하… 하… 시… 실은 친구들 주려니까 좀 부족해서… 이런 것이 있는데 부르지 않아서 죄 송해요……." 나는 아르 할아버지의 말에 대답하다가 너무나 양심에 찔린 나머지 곧 손 가락으로 탁자에 원을 그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진실을 밝혔다. 그러자 아 르 할아버지가 자상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됐다. 나는 그다지 복숭아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뭘 안 좋아해? 이렇게 말랑하고 달콤한 백도라면 사족을 못 쓰잖냐." 류스밀리온이 팩 내뱉는 말에 아르 할아버지는 그의 뒤통수를 딱 때렸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류스밀리온을 엄한 얼굴로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언제 이것을 그렇게 좋아했단 말이냐?" "흥, 그 옛날 할아범 취향이라고 놀려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발뺌할 사람에게 발뺌을 해야지. 이걸 사양할 정도로 그렇게 저 꼬맹이 놈이 귀엽 더냐.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진다 이거냐?" "류스밀리온! 그만 못하겠느냐." 아르 할아버지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그만 웃어버 렸다. 왠지 할아버지와 내가 비슷한 것 같아서였다. 남이 먹는 것만 봐도 흐뭇해지는 것이라면 나도 이해할 수 있을 듯 했으니까. "어서 드세요. 할아버지. 전 많이 먹었어요. 류스밀리온 님두요." "나는 누구랑은 달라서 먹지 말래도 먹어준다." 류스밀리온은 퉁명스럽게 그렇게 내뱉더니 험하게 복숭아를 먹기 시작했 다. 그러고 보면 언제부터인가 그와도 참 많이 친해진 듯한 느낌이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싱긋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면 모두들 서로 애칭을 부르는데 비해 류스밀리온 님만 이렇게 정식이름을 부르네요. 실은 알게 모르게 소외감 느끼셨죠?" "뭐? 아르디예프. 이게 대체 뭐라고 하는 거냐?" 류스밀리온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시네요. 제가 앞으로는 류스 님이라 불러드릴게요. 얘들아, 너희들도 그렇게 해. 알았지?" 나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멋대로 류스밀리온의 이름을 줄여 부르겠다고 선 언했다. 그리고 친구들까지 끌어들여 그 일에 동참시키기 시작했다. 덜컹-! 그러나 갑자기 탁자가 크게 들어졌다 떨어지며 큰 소리가 났고, 나는 조금 놀라서 그 소리의 진원지인 류스밀리온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아 는 사람들끼리라고는 해도 왕자 앞에서 탁자를 차버린 것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무서운 표정을 한 채 탁자에 발을 올리고 있는 그를 보자니 의아함이 먼저 다가왔다. "나를 한번만 더 그딴 식으로 부르면 그냥은 안 넘어간다……." 류스밀리온은 이까지 드러내며 낮게 깔린 목소리로 내게 경고를 넣었다. 나는 심하게 화를 내는 그를 보며 엄청난 무안함을 느꼈다. 애칭을 부르겠 다는 말을 저렇게나 과격하게 거부하는 것은 별로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괜히 나서서 친한 척하지 말라…는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가 문득 얼굴이 화끈하고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고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 는데 갑자기 힐레인이 소리가 나게 복숭아씨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사람들 의 시선을 모았다. "류스는 카르틴어로 빌어먹을 놈, 죽일 놈 등의 뜻을 가진 심한 욕입니다. 그런 식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은 확신컨대 굉장히 드물겠지요." "음? 아, 그…그래?" 나는 조금 놀라서 힐레인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카르틴어에 능하기는 하 지만 당연히 욕까지 배울 기회는 없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간 나는 고개를 들어 류스밀리온의 표정을 파악했다. 그리고 여전히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미미한 겸연쩍음이 묻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모 습을 보자니 그가 내 생각처럼 친한 척 하지 말라는 뜻으로 화를 낸 것은 아닌 듯 했다. 문득 잔잔함 안도감 같은 것이 떠올라 다시금 살짝 웃으려 는데 아르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류스밀리온을 나무랐다. "쯧쯔. 매사에 무식하기는… 카류가 일부러 그렇게 부를 리가 없잖느냐. 어 린 카류가 저렇게 마음을 써주는데 그게 할 짓이더냐." "빌어먹을… 성인식도 치렀는데 저거면 다 컸지, 뭐가 어려? 그리고 나 는… 정식…이름을 부르는 쪽이… 훨씬 낫다……." 류스밀리온은 잘 나가다가 갑자기 조금씩 말소리가 줄이더니 결국에는 말 끝을 흐렸다. 그리고 홱 고개를 돌려 아르 할아버지를 피하듯 시선을 옆으 로 옮겼다. 아르 할아버지도 그 모습을 보더니 알게 모르게 시선을 다른 쪽으로 향하게 했다. 두분 사이에 알 수 없는 뭔가가 있는 듯 하다는 느낌 이 팍팍 들었지만 일단은 그를 보며 조금 전에 하던 이야기의 연장을 했 다. "그럼… 계속 류스밀리온 님이라고 불러드려요?" "…그렇게 내 이름을 줄여 부르고 싶거든 류온이라고 불러라." "류온이요?" 내가 목소리를 조금 키우며 묻자 류스밀리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뭐가 불만이냐?" "아…아뇨… 방금 생각난 건데요, 전에… 음, 게릭의 함정에 빠져서 마법사 분들이 저를 구하러 왔을 때, 아르 할아버지께서 워프하기 직전에 류온이 라고 부른 기억이 나서요. 그땐 경황도 없었고, 뭔가 암호인가 싶었죠. 그 런데 그게 류스밀리온 님의 애칭이었어요?" 내 말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눈에 띄게 몸을 움찔하여 이 자리에 있는 사 람들의 호기심을 만빵으로 자극시켰다. 내가 눈을 반짝이며 두 분을 바라 보자 류스밀리온은 얼굴을 조금 붉히기까지 하며 머뭇거리다가 이내 내게 고개를 돌리고 소리를 빽 질렀다. "네놈은! 네놈은 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으냐! 엉? 짜증스럽게!! 바 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죽어라하고 제 무덤만 파던 주제에 누굴 생각해준 다고 난리야, 난리가! 불만이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식이름으로 불 러!" "아뇨……. 그냥 류온 님이라고 부를게요." 나는 엄청나게 오버하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이 이상 깊은 곳까지 물었다가 는 큰일이 나겠다 싶어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궁금하긴 매한가지로 보였지만 그냥 입을 다물고 있기로 한 것인지 별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저것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너무 실례가 되 는 요청이었다면 정중히 사과 드리겠습니다." 그때 힐레인이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약간 지저분해 보이는 딜티 의 손수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마도 복숭아의 물이 묻은 손을 닦고자 하 는데 손수건이 없었던 모양이다. 딜티는 흔쾌히 허락을 했고 힐레인은 앉 은 자세에서도 고개를 숙여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한 다음 손수건으로 손 을 닦았다. 나는 녀석의 모습을 보다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마워. 네가 말해줘서 류스라는 말이 나쁜 말이라는 것을 알았어. 자칫했 으면 오해가 생길 뻔했지 뭐야." 힐레인이 나의 당황해하는 기분을 읽고 도움을 준 것이라 추측하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녀석이 저렇게 행동하긴 해도 나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은 아 니었던 모양이다 싶어 내심 기분이 흐뭇했다. "류스밀리온 님께서 화가 난 겉모습과는 다르게 감정이 변하기에 무언가 사정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별것도 아닌 일이 니, 이런 일에 카류리드 왕자 전하께서 친히 말씀을 걸지 않으셔도 됩니 다!" 그러나 힐레인은 찬바람이 쌩쌩 불어올 정도로 툭 내뱉더니 눈에 띄게 거 친 동작으로 수건으로 손을 팍팍 닦아냈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 주려해도 ‘너랑은 얘기하기 싫으니 나한테 말 걸지 마라.’ 라는 뜻같이 느껴져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절로 착잡해지는 마음을 숨기지 못 하고 고개를 조금 떨어뜨리자 방안의 분위기가 조금 어두워졌다. "…그런데 말이지, 카류, 너 정말 카르틴의 사자가 요청한대로 시크 국경선 으로 갈 거야?" 어색한 분위기를 전화시키자는 생각인지 딜티가 갑자기 새로운 화제를 가 지고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딜티의 질문에 답해주었 다. "후우, 글쎄……. 하지만 아무래도 그래봐야 할 듯 싶어. 의심쩍은 점이 너 무도 많지만, 일단 아군은 카르틴의 적대를 받고 살아남을 수가 없으니까." "참 이상한 국왕이네. 왜 굳이 너를 만나겠다는 거지? 얼마든지 대리인을 통해 결정할 수 있는 일을 위험천만하게 카르틴 중심부에 있는 수도에서부 터 시크 관문까지 직접 암행까지 하겠다니 말이야. 원래 카르틴은 국왕이 그렇게 쉽게 움직여도 되는 나라인 건가?" 딜티가 고개를 갸웃하자 에르가 형이 입을 삐죽하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냐?" "토달기는… 내가 너냐? 당연히 그냥 한번 해본 말이지. 그러니까, 국왕이 직접 움직인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함정이 있 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단 말이야." 딜티의 말에 나는 몸을 소파에 깊게 묻었다. 바로 며칠 전에 있었던 카르 틴 왕국 사신과의 대담에서 그들은 내게 엄청나게 황당한 요청을 해왔다. 이주일 뒤에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날더러 시크 국경선으로 무조건 나와 달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에뮤 국왕이 그곳에서 직접 나와 이번 일에 대해 대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주일 후라는 것은 오늘 당장 출발하여 시크 국경선까지 열나게 말을 타고 가도 도착할까 말까한 시간이 었다. 군의 최고 수뇌가 움직이는 일을 그렇게 간단히 결정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그러나 카르틴의 사자들은 그 일을 승낙하지 않을 시에는 이번 교섭을 완 전히 결렬이며 자신들은 무조건 아군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될 것이 라 말했다. 우리들이 황당해 하는 모습을 보더니 카르틴의 사신들도 자신 의 왕이 이렇게나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했던 것은 처음이라고 솔직히 털어 놓으며 식은땀을 닦기까지 했다. "카르틴의 국왕이 나를 왜 그렇게까지 내게 집착을 하는지는 사신들도 정 말이지 궁금해하는 눈치라고 힐레인이 감정해주었으니까 알 수 없지. 하지 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기서 나를 함정에 빠뜨려 죽인다고 카르틴에게 무 슨 이득이 돌아갈까 싶기도 하구 말이야……."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이상하다고… 실상 카르틴의 수도에서부터 시크 국경선까지의 거리는 이곳 휴나르 성에서부터의 거리보다 무려 3배는 걸리는 긴 거리니 위험은 너보다는 카르틴의 국왕 쪽이 훨씬 더 크잖아? 그리고 위험에 대한 것을 전부 제쳐놓더라도, 그 국왕도 이주만에 시크 국 경선에 오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대답을 사신들에게 전해 듣지도 않고 출발 할 거라는 뜻 아냐. 아니면 전서구라도 받은 다음, 자신의 나라의 마법사를 시켜 워프를 하려는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전부 황당의 극치를 달리는 가정들뿐이군. 그 국왕… 뭘 하려는 거지?" 딜티는 손에 든 복숭아를 만지작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사실 그에 대해서는 나도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으니 딜티의 그런 의문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뭐, 여러 가지 경우를 신중히 검토해 봐야 할거다.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 틴. 황금의 성왕이라고 불리는 그놈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단한 놈이다. 신흥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보통 때는 왕의 이름조차 모르는 온 나 라의 백성들까지 절대적으로 추앙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다." "그 정도예요? 대체 그 케시뮈르 4세, 에뮤 국왕은 어떤 사람이죠?" 갑자기 끼어 드는 류스밀리온, 아니 류온 님의 말에 나는 몸을 조금 내밀 고 흥미를 보였다. 류온 님은 복숭아를 한입 깨물어 전부터 먹던 것을 완 전히 해치운 다음, 자신의 손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에뮤 국왕에 대한 이 야기를 계속 이었다. "카르틴 왕국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 에뮤 국왕은 정실 인 료테이나 왕비에게서 태어났지만 이미 측실인 카를로샤 후궁이 라스냔 왕자를 낳은 상태였기에 제1왕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관습대로라면 왕이 되 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료테이나 왕비를 사랑했던 케시뮈르 3세는 에뮤 에게 태자자리를 넘기려 했고… 뭐, 예상되다시피 카를로샤 후궁이 일을 저질렀지. 카르틴의 오랜 관습대로 1살이 되던 해에 아크라 호수의 세례로 이름을 받기 위해 왕궁 밖으로 나온 에뮤를 암살하려고 했던 거다. 하지만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몇 년 동안 평민출신인 노부부의 손에서 크게 되었지. 후일 이런 저런 일로 카를로샤 후궁의 행각이 발각되어 뒤늦게 케 시뮈르 3세에 의해 다시 태자의 자리로 되돌아가 왕이 되기에 이른 것이 다. 그가 백성들에게까지 큰 추앙을 받고 있는 이유는 평민으로 지내는 동 안 수많은 선행을 쌓고,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 때문이다." "기적?" "그래, 별 말도 안돼는 시시한 소문들이다. 어린 나이에 뛰어난 검술 실력 으로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다 죽어 가는 병자를 치료하고… 훗, 웃기지도 않는군. 그 국왕이 평민으로서 살았던 것 때문에 자신의 지위가 흔들리는 것을 염려하여 퍼뜨린 소문일 테지. 솔직히 그 점에 제일 마음에 안 든다 는 거다. 그 놈은 평민들을 위해 한 일이 거의 없으니까. 어차피 카르틴의 평민들 중에도 극도로 굶고 헐벗는 놈들이 있고 친자식을 사창가에 팔아치 우고 길바닥에 버리는 둥의 짓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나는 조금은 감정이 담긴 듯한 류온 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하지만 곧 고개를 바로 하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에뮤 국왕의 신상에 대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카르틴 왕국의 여러 실정 에 대해 잘 아시네요? 카르틴에 오래 머무셨나 봐요?" "네 놈! 한번만 더 말꼬리 잡았단 봐라!!" 질문은 별 것 아니었지만 내 어투가 굉장히 의미심장하였기 때문인지 류온 님은 눈살을 확 찌푸리면서 소리를 바락 질렀다. 나는 깜짝하며 몸을 뒤로 했지만 류온 님의 행동에서 어렴풋 직감 같은 것을 느꼈다. "류온 님, 제가 류온 님에 대한 것을 물어보면 큰 실례가 될까요?" "실례가 되겠지요. 어찌하여 남의 치부를 그리 쉽게 들추어보시려 하십니 까. 전하께서 류온 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분께서 언 젠가 스스로 이야기를 하여주실 때까지 기다려주실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 습니까." 나는 문득 들려오는 앳된, 그러나 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목소리 를 듣고는 고개를 돌려 파란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33 살이라고 주장하는 꼬마, 힐레인이 내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그렇게 말 했던 것이다. "…제 얼굴에 무엇이 묻었다면 지적을 해주시고 그것이 아니라면 부디 그 시선은 거두어 주시지요. 무례한 말로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식으로 빤히 쳐다보는 것은 상대에게 꽤나 실례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내가 잠시동안 힐레인에게 시선을 두고 있자 녀석이 파란색 눈동자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정도를 넘어선 차가운 그 눈동자에서 나는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너 말이야. 대체 뭘 믿고 그렇게 틱틱대는 건데? 내가 아무리 그런 일에 관대하다고 해도 이거 너무 하는 거 아냐?" 상대가 33살이라는 것을 어렴풋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나는 진짜 어린 애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투정을 부렸다. 그러나 힐레인은 작게 인상을 쓰 더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힐레인이 굉장히 차갑게 말하는 것을 보며 나는 가슴이 한쪽이 저리는 것 을 느꼈다. 하지만 더 이상 솔직하지 못하게 행동하여 이런 마음으로 속으 로 삭히고만 있는 짓은 그만두자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힐레인의 옷을 붙잡고 소리쳤다. "좋아. 그럼 한번 물어보자!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기에 그렇게 나를 미워 하는 거야? 처음에 머리 쓰다듬었던 거 정돈 그냥 잊어주면 안돼? 더 이상 은 그런 짓 안 할……." 타악-!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힐레인은 마치 더러운 것에라도 닿인 듯 거 세게 내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를 갈았 다.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자신의 빨개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손등에서 밀려오는 화끈한 아픔에 이것이 현실임을 깨닫자마자 몸이 조금 씩 경직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내가 그 자리에 굳어있자 힐레인은 얼굴을 찌푸리다가 곧 고개를 홱 돌리고 내 면상에 소리쳤다. "말하지, 빌어먹을… 제발 그 귀여워 죽겠다는 오로라를 풀풀 풍기면서 내 게 다가오지 좀 말란 말이다! 짜증나는 변태자식! 으윽, 이 소름 돋아. 뭘 보는 거냐? 이렇게 욕했다고 날 잡아 가둘 거냐? 지금만 해도 내게 조금 거절당했다고 완전히 절망한 듯한 감정을 날리는 주제에 나를 벌할 수나 있겠느냐? 빌어먹을, 내가 어쩌다가 저런 변태 같은 놈을 군주로 모시게 됐는지……." 힐레인은 씩씩거리면서 나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가만히 녀석의 이야기 를 듣다가 힐레인이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몸은 물론이거 니와 마음까지 굳어버릴 듯 했던 나는 금방 기분을 풀고 피식 웃음을 흘리 면서 힐레인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뭐가 어때서? 애들 귀여워하는 사람이야 얼마든지 있다고. 모든 생물은 아기 때가 제일 귀엽다는 말이 왜 나왔겠어? 솔직히 과자가 세상에게 가장 좋다는 말을 하는 너보다는 훨씬 더 정상적이지 뭘 그래?" "지금 누굴 속이려고 드는 거냐? 그냥 귀엽다 정도로 끝나면 말도 안 한 다! 그렇게 끈적끈적하고 애절한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주제에 뭐가 어 린애가 귀엽다냐! 말만이라도 네놈의 그 변태적인 취미와 나의 과자들을 동급으로 취급하지 마라! 으으윽! 또 저런 감정을……!! 너의 애들 취향을 말릴 생각은 없다만 나는 그 범위에서 빼달란 말이다!! 내가 이렇게 어린 애의 몸을 가지긴 했어도 네놈보다 2배는 살았다고!" 힐레인은 정말 심한 소리를 내뱉으며 뒷걸음질까지 쳤다. 지금까지 내숭(?) 을 떠느라 눈치를 못 채고 있었는데 지금 하는 행동을 가만히 보니 힐레인 도 실은 류스밀리온만큼이나 입이 더러운 축에 속하는 모양이다. 하긴, 처 음 만날 때의 일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한 일인가? "으윽… 옛날부터 귀여운 애들이라면 사족을 못 쓰더니 드디어 저쪽 취향 으로……." 나와 힐레인의 대치 상태를 멍하게 보고 있던 사람 중에서 갑자기 에르가 형이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바로 목구멍까 지 웃음이 몰려왔다. "풋…푸…하하하하하하하!!" 나는 더 이상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기가 힘들어서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내가 가슴까지 쥐고 낄낄거리자 모든 사람들이 ‘저 게 미쳤나…’ 라는 뜻이 역력히 묻어난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 는 계속 자지러지게 웃다가 비틀하여 오른쪽 옆자리에 앉은 카이에게 거세 게 부딪히고 나서야―물론 카이는 잽싸게 손을 들어 내 몸을 막았다.―겨우 웃 음소리를 그치고 자리에 앉았다. "후훗, 그냥 일단 좀 앉아 봐." 나는 너무 웃어서 어질어질한 머리를 붙잡고 힐레인에게 손짓을 했다. 그 러나 힐레인은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며 탁자를 크게 빙 돌아서 굳이 멀 리 떨어진 에르가 형의 곁인 의자의 가장 끝자리로 가서 어색하게 앉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실은 말이지……." "변명할 생각일랑은 마라! 으윽!! 돌아버리겠군……." 힐레인은 내게 소리를 빽 지르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가볍게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너는 내가 아는 사람이랑 닮았어. 그래서 그런 거야." 내 말이 떨어지자 질색을 하며 얼굴을 가리던 힐레인이 곧 나의 진지한 감 정을 읽은 것인지 다시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 일그러뜨린 표정을 완전히 펴지는 못했어도 조금은 심각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귀엽게 배치된 눈코입도, 얼굴이 작고 하얀 것도, 훗… 동안(童顔)인 것 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커다랗고 파란 눈동자랑 머리카락이 카이 형이 랑 굉장히 많이 닮았어." 내 말이 떨어지자 아무 것도 모르는 힐레인은 내 곁의 카이를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은 조금 얼굴을 굳혔다. 난 손을 흔들어 힐레인의 시선을 내게 로 향하게 한 다음 빙긋 웃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아니, 그 카이가 아니고 수도에 있는 나보다 1살 많은 형이야. 굉장히 귀 엽고 착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삐쳐버려서 나와는 말도 안 하려고 해." 힐레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조금 갸웃했다. 나는 그 귀여운 모 습에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우리 형은 항상 그렇게 귀여운 표정을 지었거든. 삐치 기 전에는 말이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힐레인은 다시 인상을 확 찡그렸다. 아마도 귀 엽다는 말이 몹시도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모습에 웃음을 조금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삐치고 나서는 항상 그런 무서운 표정이었지. 차가운 눈동자로 나 를 바라보고 인상을 쓰면서 너무 무서운 말만 했어." 힐레인은 인상을 쓰던 것을 조금 풀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기라도 하듯 나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덜컹-.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몇 걸음만에 힐레인에게로 걸어갔다. 녀석이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보기에 나는 기습적으로 녀석 의 볼을 확 잡고 옆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웃어! 웃으라고!!" "욱! 뭐화눈 궈냐!!" 힐레인은 내게 볼을 잡히자마자 양팔을 휘저으며 내게 벗어나기 위해 난동 을 부렸다. 그러나 나는 포기하지 않고 녀석에게 달라붙어 보이는 것만큼 이나 촉감까지 뽀송뽀송한 볼을 쭉쭉 잡아당겼다. 황당하다면 황당하다 할 수 있는 그 상황은 다른 사람들이 달려들어 나를 떼어놓을 때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다. "윽… 빌어먹을… 아파……." "좀 웃어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정말 이러기 야!?" 힐레인이 자신의 빨개진 뺨을 부여쥐고 잔뜩 인상을 쓰며 낑낑거리는 것을 보고 나는 딜티의 손에 붙들린 채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다. 그러자 힐레인이 화를 내면서 나 이상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니가 뭘 했다는 거냐?! 저걸 갖다가 그냥… 왕자만 아니면 다리몽둥이를 확 분질러 놓는 건데!" "정말 너무하네! 내가 불쌍치도 않아?" "불쌍이 얼어죽었느냐? 주접떨지 말고 나가 뒈져버려, 이 변태 놈아!!" 내가 고개를 저으며 애절하게(?) 말하자 힐레인은 잘도 왕자인 내게 그런 욕설을 와르륵 내뱉었다. 이로서 힐레인이 류온 님 과(?)가 확실하다는 결 정적인 증거가 나온 셈이다. 뭐, 내 진심을 꿰뚫고 있기에 그런 행동을 해 도 될 것이라는 자신감이 붙은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썩을… 재수가 없으려니 별 해괴한 꼴을 다 당해보는군… 젠장 씹어먹 을……." 힐레인은 뺨을 문지르며 끊임없이 욕설을 내뱉었다. 조금 전부터 녀석이 왕자 앞에서는 있을 수 없는 엄청난 말을 내뱉으며 아주 배째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류온 님까지 거의 얼어버리다시피 했다. 나는 녀석을 가만히 보다가 일단 멍해져 있는 딜티의 손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허리 에 손을 얹고 힐레인을 향해 말했다. "그 험한 말투 좀 고칠 수 없어? 너무 무례하잖아. 결정적으로 너의 그 귀 여운 얼굴과는 너무 안 어울려!" "저 놈이 진짜! 남 이사 어울리던 말던!!! 정 그렇게 불만이면 고운 말만 들을 수 있게 네 귀를 뜯어 고쳐라!! 그리고 무례하다고 했느냐? 그래서 어쩔 거냐? 왕족 모독죄로 날 죽일 것이냐? 하아? 어디 한번 죽여보시지?" 내 기분을 읽은 것인지 힐레인이 가히 안하무인격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조금 굳혔다. "나는 분명 너를 굉장히 좋아하고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다 고 내가 널 죽이지 못할 거라 확신하는 것은 너무 비약 아니야? 내가 못 죽일 거 같아?" "그래? 죽일 수 있겠느냐? 그래. 어디 한번 죽여봐라, 죽여……." 힐레인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몸을 굳히고 인상을 잔뜩 쓴 채로 나를 올려 다보았다. 너무도 모순된 나의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물론 이런 일로 죽이진 않을 거지만." 나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힐레인은 여전히 인상을 쓴 상태로 나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힐레인?" "네 놈은 엉망진창이다." "그래?"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 녀석들이 복숭아 먹는 건 또 뭐가 그렇게도 흐 뭇한 건지… 너무도 소중하다면서 당장이라도 싸잡아 죽일 수 있다는 듯한 그 심보는 뭔지… 뭘 어쩌라는 것이냐? 도무지 이해를 못할 놈이다." "내가 원래 좀 그래." 나는 웃으면서 힐레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녀석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 심한 틈을 타서 꽉 껴안았다. "으아악∼!!" 힐레인이 얼마나 놀랐는지 내 품에서 아주 비명까지 질렀다. 겉은 어린애 이나 속은 30대이니 타인에게, 그것도 남자에게 안기는 것이 그리 익숙하 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 상관치 않고 쉽게 오지 않을 이 기회 를 놓치지 않으리라는 굳은 결심 하에 품에 쏙 들어오는 녀석을 열심히 안 아댔다. 흔치 않은 한가한 날의 오후는 조그마한 어린애가 내지르는 소프라노성의 비명을 끝으로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7 황금의 성왕 (1) 벌써 가을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인지 살랑 이며 불어오는 바람에서 작게 나마 서늘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막바지 여름에 너무도 달콤했던 단비를 내려준 하늘은 끝이 없을 듯 보일 정도로 높았고, 아주 작은 티끌 하나 없 이 깨끗한 파란색을 띄고 있었다. 지금 나는 힐레인과 류온 님, 그리고 우리들을 보호하기 위한 기사들과 그 들의 책임자인 딜티가 작은 행렬을 이뤄가며 말을 몰아가고 있었다. 물론 카이가 동행을 하고 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길다란 머리카락을 하 나로 질끈 묶고서 가벼운 셔츠와 바지 위에 여행용 망토를 걸친 그녀의 모 습은 어디서든 엄청난 시선 집중을 가져왔다. 아르윈의 여성들이 조용하고 다소곳한 면이 많긴 하지만, 성격이 활발하면 승마 정도는 얼마든지 했었 고, 그렇게 승마를 할 때는 그녀처럼 치마가 아닌 바지를 입기도 했다. 그 래서 딱히 복장의 이상함으로 시선을 끈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눈부신 아름다움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이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시선을 앞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드 디어 어렴풋 보이기 시작하는 작은 건물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윈 왕국과 카르틴 왕국의 국경선, 시크 지역에 위치한 작은 건물. 평소 엔 거의 사용되지도 않던 이 허름한 건물이 크로시아 대륙 4대 왕국의 초 거물들을 맞이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착이군. 그들은 와 있을까?" "그런 모양이군요." 곁에서 말을 몰고 가던 힐레인이 나의 혼잣말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어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참 후에야 들려오는 사 람 소리를 듣고 귀가 밝은 힐레인이 그것을 들은 모양이라고 추측하며 고 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이 그곳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가벼운 복장을 한 몇몇의 남자들 이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 이쪽을 쳐다보지는 않았고, 대신 양손을 모아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나는 산사람들이나 입는 허름한 옷을 입은 그 남자들을 자세히 내려다보았 다. 균형 잡힌 몸이라든지, 그로 인해 풍기는 미묘한 분위기를 보아할 때 검 꽤나 휘두르는 엄청난 거물임이 분명해 보였다. 아마 암행을 위해 일부 러 옷을 저런 식으로 입은 것이리라. 실상 나도 여느 돈 있는 집 상인의 아들이 입는 복장이었으니까. "우리들을 몹시 경계하고는 있지만 살의와 같은 종류의 감정은 전혀 느껴 지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는 안심해도 좋을 듯 싶군요." 힐레인이 몸을 조금 옮기더니 내게 작게 속삭였다. 녀석의 말이라면 그 누 구의 것보다 신용할 수 있었기에 나는 마음 깊이 눌러두고 있었던 불안감 을 조금이나마 덜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든 예기치 않는 변수는 있는 법이라 생각하며 긴장을 늦추지는 않았다. 만약을 위해 몇몇의 기사들을 밖에 남기고 나는 일행들과 함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들이 안쪽으로 들어가서 어떤 남자가 어색하게 웃음을 띄우며 다급히 일행을 맞이하였다. "어서, 어서 들어오십시오. 소인은 이 산채의 관리인인 루크라고 합니다. 부…부디 저의 처신이 부족하더라도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주십시오. 에, 그럼 저를 따라 회의실로 드시지요. 이 산채에서 그마나 나은 방을 최대한 개조해 두었습니다. 여, 여봐라. 먼저 도착하신 분들께도 이분들의 도착을 알리고 예의 그 방으로 모셔라!" 루크라는 자는 우리들의 정체를 알고 완전히 얼어버린 것인지 약간 말소리 를 떨기까지 했다. 루크의 곁에 있다가 명을 받은 어떤 남자 역시 엄청나 게 굳어 있다가 명을 듣자마자 몸을 번쩍 들고 엄청나게 빠른 걸음걸이로 위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마도 그가 카르틴의 국왕 일행을 회의장으로 안내해 오리라. 루크가 우리들을 향해 꾸뻑이며 자신의 안내에 따라 올 것을 청하는 것을 보며, 나는 그의 진심을 파악하기 위해 힐레인을 살짝 바라보았다. 그리고 힐레인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들어 그를 따라 갈 것을 권 유했다. "……." 조용한 복도를 따라 일행은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말없이 루크의 안 내를 따랐다. 밖에서 보았을 때 이미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지금 걷고 있 는 복도는 상당히 좁고 허름했다. 그러나 최대한 예의를 차리기 위해서 얼 마나 청소를 해댄 것인지 주변은 먼지 하나 없이 아주 깨끗했다. 나는 걸음을 조금씩 내딛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약간씩이나마 초조해 옴 을 느꼈다. 그냥 정상적인 상황에서 만났어도 약간은 흥분될만한 인물인데, 지금 상황이 여러모로 비정상적인 상황―양국의 수뇌가 갑작스레 암행을 하여 만나는 것―이기도 했기에 그 초조함은 더욱 컸다. 황금의 성왕이라고까지 칭해지는 그 국왕은 대체 어떤 인물일까. 뚜벅뚜벅―. 한참을 걷다가 문득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맞은 편에서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 박자가 빠른 그 소리는 그 발자국의 주인들이 상당히 빠른 걸음걸이로 걷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나를 지키기 위한 임무를 띤 딜티와 여러 기사들, 그리고 류온 님까지 잔뜩 경계를 하며 조 금 전부터 훨씬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들의 행동을 보다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별 반응이 없는 카이를 힐끗 바라보고 피식 웃으며 당당 하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뚜벅, 뚜벅―. "앗! 버…벌써 오시는군요." 우리들을 안내하던 루크가 굉장히 당황하며 나를 향해 말했다. 이 발자국 의 주인공들은 예상대로 카르틴 국왕 일행인 모양이었다. 나는 맞은 편 복도에서 어렴풋 보이는 그 사람들을 자세히 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 중 확연히 나의 시선을 잡아끄는 사람은 가장 앞에서 걸어오고 있는 중년 남자였다. 4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그는 검은색계통 의 단출한 옷을 입고 있긴 했으나 언뜻 보기에도 디트 경만큼이나 단단하 고 멋진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허리에 찬 장검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무인이었다. 나는 점점 그를 가까이 할 수록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탄탄하게 균형 잡힌 몸매뿐만이 아니라, 고상하고 귀족적이면서도 시원하 고 호탕한 느낌을 주는 얼굴은 저절로 부럽다는 소리가 나오게 만들만큼 미남이었으며, 결정적으로 가볍게 커트한 황금색 머리카락은 마치 후광이 라도 되는 듯 그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엄을 실어주고 있었다. "황금의 성왕……!" 나는 남모르게 아주 낮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수식어가 왜 나 왔는지 너무도 절실히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저런 사람이라면 나도 졸졸 따라다니고 싶을 정도로 그에게서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나뿐만이 아니라 이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서 그런 감정을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직접 그런 감 정을 표출시키지는 않았지만, 뭔가 은근히 그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오던 황금의 성왕이라 불리는 그는 점차 걸음이 느려지는 우리들과는 정 반대로 상당히 빠른 걸음걸이로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조금 전에 루크의 지시로 소식을 전하러 갔던 남 자의 안내를 완전히 무시하고는 회의실일 것 같은 문까지 지나쳐버렸다. "폐…폐하?" 카르틴의 국왕이 회의실 앞에서 서지 않고 아주 빠른 걸음걸이로 걸어가 버리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뒤쪽에서 따라오던 자들과 거리가 생겼다. 덕분 에 주변 사람들은 굉장히 당황하여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 국왕은 대답하 지도 않고 거의 뛰다시피 이쪽으로 걸어왔다. 우리들은 그 모습에 이상함 을 느끼며 자리에서 걸음을 완전히 멈추었고 딜티와 기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오려고 포즈를 취했다. 무슨 일인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지만 일단 나는 딜티들의 행동에 협조하기 위해 뒤로 물러서기 위해 몸을 조금 돌렸다. 그러다가 순간적으 로 무표정이었던 국왕의 얼굴이 이쪽으로 걸어오면서 점차 표정이 일그러 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허리의 장검으로 손을 뻗으며 굳게 다물어 진 입을 열기 시작했다. "카뮤르……." 에뮤 국왕이 그런 말을 했는지 확실치는 않았다. 그러나 아주 어렴풋 들려 오는 그 소리와 그의 입 모양이 나에게 강렬한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뒤로 물러서라는 기사들의 다급한 권유도 무시한 채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그 순간 에뮤 국왕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이쪽으로 돌진하면서 허리에 달 린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 은빛의 날이 검집에서 빠져 나오며 바람을 가 르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국왕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죽어라!!" 부웅―! 비스듬히 하늘을 보고 있던 검이 이쪽으로 떨어지는 것을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카이가 나를 확 덮쳤다. 그녀는 굉장한 힘으로 내 어깨를 잡으며 안 다시피 하더니 빠르게 반바퀴를 빙글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나를 놓으 며 옆으로 밀어버렸고, 그녀의 품에 벗어난 나는 나머지 반 바퀴를 혼자 돌면서 벽에 가서 철푸덕 부딪혔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움직임으로 그 힘있는 검을 피해낸 그녀는 어느새 허리의 검을 빼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나 때문에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던 듯 그녀의 탐스러운 붉은빛 머리 카락이 한 뭉텅이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일단 물러서 주십시오." 허벅지까지 오던 머리카락의 끝이 어느새 등줄기에 닿을 정도로 짤막해졌 지만 그녀는 그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고 몸을 바른 자세로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묵직한 경고를 보냈다. 딜티와 기사들은 이 이해 불가 능한 상황에 엄청나게 당황한 듯했지만, 드래곤의 명령이라 그런 것인지 무의식중에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이 미친 년!!" 그때 검을 헛 휘두른 국왕이 자신의 품격에 너무도 안 어울리는 천한 욕설 을 퍼부으며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검술은 당장이라도 가녀린 카이를 당장에라도 두 동강 낼만큼 힘있었고, 또한 빨랐다. "검을 거두어주십시오." 카이는 국왕의 공격에 뒤로 물러서며 다급히 말했다. 그러나 쉽게 피하는 것은 무리라 생각했는지 검을 들어 그의 공격에 대응했다. 카아앙― 키기기기긱―!! 두 사람의 검이 거세게 부딪히면서 듣기 괴로운 마찰음을 냈다. 검을 맞대 고 힘 겨루기를 하고 있는 그때 카르틴의 일행들이 엄청나게 당황한 목소 리로 그들을 불렀다. "폐하!! 국왕 폐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고정하십시오……!!" 자신의 일행이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도 국왕은 힘줄이 보 일 정도로 양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쥐어짜듯 목소리를 내며 말했 다. "닥쳐라… 당장 이 년을… 죽이지 않으면 미래는 없으리라!"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더니 검을 미묘하게 어긋나게 하여 한창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의 검에 굉장한 악력으로 버 티고 있던 카이도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 템포를 유지했던 평 소와는 다르게 약간 빠르게 입을 열어 그를 향해 말했다. "일단 제 말을 들어……!" "미친 계집의 말을 들을 귀 따윈 없다!!" 국왕은 카이의 말허리를 확 자르며 소리치더니 한발자국을 크게 내딛었다. 그리고 다시 한발자국 내딛음과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몸을 반 바퀴 들리 며 약간 떨어져 있던 카이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 경이적인 속도에 멍히 바라보고 있던 나는 국왕에게 말을 걸기 위해 검을 내리고 있던 카이가 완 전히 두동강이 났나 싶어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만하십시오." 그 순간 카이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며 나의 놀란 가슴을 약간 진정시켜 주었다. 그녀는 셔츠의 앞쪽에 약간 잘린 것만 빼면 별다른 상처도 없었다. 국왕만큼이나 엄청난 속도로 아슬아슬하게 그의 검을 피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국왕은 가만히 있지 않고 복도 전체가 크게 울릴 정도로 발을 구르며 그대로 검을 내질렀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흉흉하게 들릴 정도 로 무지막지한 힘이 실려있는 검이었건만 카이는 곧 검을 꽉 쥐며 그 검을 크게 퉁겨냈다. "카르틴의 국왕이시여……!!" "닥쳐!! 네가 아직도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면 반항하지 말고 이 자 리에서 죽어라!!" 카이가 또 한번 에뮤 국왕에게 공격을 멈추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그는 계 속 화를 내며 검을 내질렀다. 내게는 거의 보이지도 않는 공격을 검으로 흘려 잘도 피해내며 카이는 훌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점점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쪽에 서있던 딜티와 기사들은 더욱 뒤로 물러나 아주 왼편의 계단 쪽까지 밀려났다. 부우웅―. "흐아압!!" 에뮤 국왕이 크게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꺾어 올리는 것을 보며 나는 약간 멍해졌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싸우면서도 검의 날카로움과 움직임에는 조금도 떨어짐이 없었다. 이런 생각은 미안하지만, 그의 매서운 검술은 디 트 경이나 에르가 형과는 수준이 달라 보였다. 그들이 검술의 달인이라면, 지금 눈앞의 에뮤 국왕은 검술의 신쯤 될까? 그렇지만 카이도 당연히 쉽게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방어를 하면서 계속 물러나고 있었지만, 검술은 쥐뿔도 모르는―물론 그 정도 까진 정도는 아니지 만―나의 눈에도 결코 그녀가 실력이 부족하여 그렇게 물러나는 것으로 보 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한번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검풍을 동반하는 국왕 의 검을 그다지 격렬한 움직임 없이 걷어내는 모습이 그녀가 에뮤 국왕보 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듯 했다. 『이럴 수가! 폐하의 검을……!』 『한낱 계집이 검황(劍皇)이신 그분과 대등하게 싸우다니!!』 그때 카르틴의 신하들이 자신의 나라 말로 인간 같지가 않은 둘의 모습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처음에 카이가 나를 밀어버리며 반대편의 벽에 찰싹 달라붙는 바람에 뒤로 물러난 일행들과 떨어져 있다가 이쪽으로 걸어 온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나는 문득 그들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흉흉하게 싸우고 있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만 두십시오! 이런 자리에서 싸움을 거는 것이 카르틴의 관습입니까?" 내 말이 끝나자마자 좁은 복도 끝까지 몰렸던 카이가 모서리의 벽을 두 번 크게 차고 마치 날아가듯 반대쪽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그리고 에뮤국왕 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뒤쪽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날렸다. 그 국왕은 내 말에는 조금도 안중에 없었다. "그만 좀 하지 못하겠습니까!! 가만히 있는 나의 호위기사에게 밑도 끝도 없이 검을 들이대다니……!!" "시끄럽다!!" 내가 계속 바락바락 소리치자 그 국왕이 카이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리고 조금씩 그녀를 검으로 밀어붙이며 더욱 큰 소 리로 언성을 높였다. "이런 미친년은! 당장에 죽여 버려야……!!" 그가 숨가쁘게 말을 하는 동시에 검을 내지르며 점차 가까이 다가오자 카 르틴의 신하들은 다급히 멀찍이 떨어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나는 황당 함을 느끼며 오히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누가 미쳤다는 겁니까!! 상대의 말도 들어보지 않고 검부터 휘두르는 주 제에 대체 당신이 뭘 안다는……!!" "미련한 왕자여!! 지금에야!! 이 년에게 도움을 받는다고!! 기뻐할지 모르 나!! 결국에는 그로 인해 멸망을 얻게!! 될 뿐이다!!" 에뮤 국왕은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말을 딱딱 끊어서 말하다가 이내 이 를 악 물고 카이를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실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로 인해 카이의 짧아진 머리카락이 더욱 잘려나가며 복도를 무수히 수놓 았기 때문에 대충 그렇게 짐작한 것이다. "맙소사, 그만하지 못해?" 나는 주먹을 쥐고 아예 반말로 에뮤 국왕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그 때 약 간 떨어진 곳에서 싸우던 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도무지 보이지도 않는 연속기술로 순식간에 내가 서있는 쪽으로 덮쳐왔다. 어느 정도는 떨어져 있었기에 약간 안심하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버렸다. "전하……!!" 검을 맞받으며 뒤쪽으로 빙글 돌았던 카이는 짧게 말하면서 나를 감싸안았 다. 스피드가 너무 엄청나서 솔직히 나로서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고 그 저 카이의 보호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크흑!!" 카이와 반바퀴 돌며 곧장 바닥에 처박힌 나는 작게 신음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카이는 내 허리춤에 꽂힌 단검 중 하나를 꺼내어 몸을 뒤집음과 동시에 그것을 에뮤 국왕에게로 날렸다. 챙―!! 정말 순간적인 공격이었음에도 국왕은 도무지 인간 같지 않은 스피드로 카 이가 던진 단검을 아슬아슬하게 쳐내고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도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날 수 있도록 하는데는 충분했다. 국왕은 어울리지 않게 이를 바득 갈면서 나의 뒤로 멀리 떨어진 카이를 노려보았다. "끝까지 반항할 참이냐!! 네가 진정 이 세계를 말아먹을 작정이더냔 말이 다!!" "일단은 먼저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카르틴의 국왕이시여." "네 년의 변명 따윈 듣고 싶지 않음이다!!" 에뮤 국왕은 손가락질까지 하며 크게 화를 냈다. 나는 두 사람의 격렬한 전투 사이에 끼인 형세로 앉아 있다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일어나려 했 다. 그러나 옷의 왼쪽에 잔뜩 묻어 있는 붉은 액체에 깜짝 놀라 고개를 뒤 로 돌렸다. "카…카이!!" 고개를 뒤로 돌려 카이를 본 나는 더더욱 놀랐다. 언제나 무표정했던 카이 의 얼굴에 약간의 고통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은 것이다. 정면에서 보는 것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등의 오른쪽부터 시 작하여 팔까지 비스듬하게 베인 듯 했는데, 그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벌써 부터 피가 그녀의 하얀 셔츠의 오른편의 대부분을 붉게 만들고 있었다. 그 녀는 오른팔을 축 늘어뜨린 채로 언제나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왼손에 쥐고 있었다. "카이……." "잔소리 말고 당장 목을 대라!!" 에뮤 국왕이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고 돌진하려는 듯 하여 나는 고개를 홱 그를 향해 돌렸다. 그리고 속이 부글부글 끓을 정도로 잔뜩 화가 난 감정 을 모조리 실어 그를 향해 복도가 쩌렁쩌렁하게 울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질 렀다. "멈춰!! 에뮤르·에이에!!" "……!!" 나의 외침을 들은 그는 아주 잠시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러나 곧 검을 반 바퀴 돌려 거꾸로 잡으며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무슨 잡소리더냐! 저년을 잡아죽이는데 방해가 되니 당장 거기서 비켜 라!!" 그의 호통소리를 들으며 나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긴가민가하고 있던 나의 짐작에서 거의 확신을 느끼며 입을 이죽이며 빈정거림을 시작했다. "니가∼ 니가 그러고도 위대하신 존재이신가? 엉? 어떻게 같은 존재인데도 이렇게나 인성이 다르냐?" "무슨 소린가! 무례하다!!" "웃기지마!! 카이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런 자리에서 검을 휘두르는 주제에 네가 무례를 논할 자격이나 있느냐! 엉? 이∼∼ 썩을 도마뱀아!!!" 콰앙――!! "닥쳐라!!" 그는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복도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가져올 정 도로 발을 거세게 구르며 크게 소리쳤다. 그의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참 빈정 모드로 돌입했던 나는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카이의 상처가 떠오르자 금방 신경질이 팍 나서 금방 제정신을 차리고 입 을 열었다. "목소리만 크면 장땡이냐? 에뮤르·에이에!!" 그는 인상을 완연히 찌푸리고 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엄청나게 살벌한 얼굴이었으나 나는 조금도 쫄지 않고 주먹을 콱 쥐고 소리쳤다. "뭐야? 내 말이 어디 틀렸어? 네가 그러고도 최고의 지성을 가진 생명체라 고 할 수……?!" 나는 거기까지 말을 했다가 갑자기 에뮤 국왕… 아니, 에뮤르·에이에가 내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것을 보며 조금 놀라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그는 갑자기 내 팔을 확 잡아끌었다. "뭐…뭐야!! 이거 놔!! 이 도마뱀……!!" "닥치라고 했다! 따라와라! 개인면담이다!!" "뭐?" 내가 황당한 얼굴을 하고 되묻는 사이 그는 내 팔을 잡고 걸어가기 시작했 다. 내가 그의 무지막지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몇 발자국 질질 끌려가자 멀리 떨어져 있던 일행들이 어느새 가까이로 다가와 검을 뽑아 든 채로 소 리쳤다. "경고합니다! 당장 그 손 놓으십시오!!" 딜티와 여러 기사들, 그리고 류온 님까지 모든 일행들은 상당히 긴장하여 에뮤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야 조금 전에 카이와 엄청난 대결을 보여주었 는데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의 일행이 당장이라도 뛰어들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카르틴 측의 신 하로 보이는 자들 중 유일한 노인이 앞으로 나와서 다급히 에뮤를 향해 요 청했다. "폐하, 제발 고정하시고 일단 그 손을 놓아주십시오. 어찌하여 그렇게 이성 을 잃으신 것입니까. 일을 이렇게 망쳐버리라고 이 늙은이가 죽을힘을 다 해 워프를 해드린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눈앞의 남색눈동자를 가진 이 할아버지가 카르틴 유일 의 8서클 마법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에뮤의 땡깡으로 워프 마법을 시전한 모양인데, 척 보기에도―조금 전에서는 경황이 없어서 전혀 모르고 있었 다.―안색이 엄청나게 안 좋아 보였다. "여기서 기다리시오. 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오? 에키네일이여." 나는 에키네일이라는 그 마법사를 엄하게 꾸짖는 에뮤를 보다가 너무나 기 가 막힌 나머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를 꽥 질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앞뒤 없이 검을 휘두르며 날뛰었던 주제에 누구더러 믿으래? 너 같으면 믿을 수 있겠냐?" 나는 일단 소리를 지른 다음, 에뮤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나름대로 팔다리 를 열심히 바동거렸다. 그러나 그의 악력이 얼마나 센지 나의 힘 정도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하를 놓으십시오! 더 이상의 경고는 없을 것입니다! 카르틴의 왕이시 여!" 류온 님이 앞으로 나서며 손을 내밀고 있자 카르틴 측은, 특히 에키네일이 라는 마법사는 깜짝 놀라 에뮤의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류…류…류스밀리온이시오? 헉… 잠시! 잠시 기다려 주시오! 이런 식으로 마법을 쓰면 당신들에게나 우리들에게나 좋을 것 하나 없지 않겠소!" 마나의 움직임을 느끼는 에키네일은 류온 님이 마법서도 보지 않고 마법을 쓰려했다는 것을 느낀 것인지 굉장히 경악하고 동시에 당황하여 양손을 앞 으로 내밀고 류온 님을 만류했다. 그러나 여전히 에뮤가 여전히 나를 붙잡 고 있는 채였기에 류온 님은 흉흉한 기를 거두지 않았다. 양측이 금방이라 도 큰 일을 저지를 듯 팽팽한 긴장 상태로 있는데, 갑자기 카르틴 측의 사 람들이 조금씩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만, 부디 카르틴의 국왕께서 하신 요청을 허락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그 자리에 저도 함께 할 터이니 잠시만 시간을 내어 주십시오." 우리들에게로 천천히 다가온 자는 상당량의 피를 흘려 창백한 얼굴을 한 카이였다. 그녀는 팔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약간 고개를 숙이고 우리 들을 향해 부탁을 했다. 다른 사람의 부탁도 아니고 카이의 부탁인 지라 우리측의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곧 검을 거두고 몇 발자국 뒤 로 물러났다. 카르틴 측의 사람들은 우리 일행이 카이의 말에 너무 쉽게 복종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의아한 얼굴을 했다. "따라와라." 그러나 사람들이 뭘 어쩌거나 말거나 에뮤는 그렇게 툭 내뱉은 후, 다시 내 팔을 잡은 채로 질질 끌고 걸어갔다. 그리고 당연히 카르틴 측의 사람 들이 황급히 그를 막으려고 나섰다. "폐…폐하!!" "이곳에서 기다리라고 했지 않은가!! 어떤 상황에서도 짐을 따르겠다하였 던 그대들의 맹세는 어찌되었는가! 그토록 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당장 이 곳을 떠나라! 짐도 그런 자는 필요치 아니하다!!" 에뮤는 고개를 들고 자신의 신하들을 내려다보며 바로 곁에 있는 내가 깜 짝 놀랄 정도로 크게 호통을 쳤다. 어딘지 모를 강렬한 카리스마가 실린 그 말에 카르틴 측은 신하들은 움찔하고는 곧 옆으로 우르르 물러났다. 나 는 그 사람들 사이에 에키네일이라는 8서클 마법사까지 끼여있다는 사실에 약간 놀랐다. 결국 그 마법사도 에뮤의 앞에서 절대 복종하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뜻이 아닌가. 어느 나라에서든 굉장히 귀한 존재인 마법사들은 왕 실이나, 여느 귀족들에게 굴복하는 일은 결코 없다. 물론 왕국이 이익에 따 라 일하지만 저렇게 개인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 다가 원래 8서클 마법사는 그 권위가 가히 국왕과 맞먹을 정도이니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니다… 상대는 기형 도마뱀인데 놀랄 일도 아니지……. "앗!" 나는 잠시 에키네일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다시 에뮤 국왕이 성큼성큼 걸어 가는 바람에 팔에서 약한 아픔을 느끼고 작게 신음했다. 그러다가 여전히 내 곁에서 피를 철철철 흘리고 있는 카이를 보고 머리에 열이 확 뻗쳐올라 소리를 빽 질렀다. "이거 놔! 가주면 될 거 아냐!!" 나의 외침에 에뮤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제야 팔을 놓았다. 나는 얼얼한 팔 을 주무르며 이를 갈았다. 그리고 에뮤를 슬쩍 흘겨보다가 먼저 앞으로 저 벅저벅 걸어가 회의장 문을 열었다. "위∼대한 존재이시여, 어서 들어오시죠. 그리고 개인 면담이라니 다른 분 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다려 주시길!" 배배꼬는 내 목소리를 들은 에뮤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지만, 침착하게 주 위의 사람들에게 그 누구도 절대 이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을 내리고 회의장 쪽으로 걸어왔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7 황금의 성왕 (2) 회의장의 안쪽은 상당히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바닥에는 금색의 고풍 스런 무늬가 새겨진 붉은색 천이 입구에서부터 반대편 끝까지 일차로 길게 깔려있었고 중앙에 배치된 긴 직사각형의 탁자 역시 상당한 고급품이었다. 우리들을 맞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여 꾸민 모양이다. 쾅―! 내가 회의장 안을 둘러보고 있는 그 짧은 시간을 참지 못하고 에뮤가 탁자 에 주먹을 내려쳤다. 그리고 살벌한 눈빛으로 카이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 다. "카뮤르·카이야.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감성은 물론 이거니와 모든 이성까지 전부 마비되어 버린 것이더냐!" 사람들이 없어지자 그는 아주 대놓고 카이의 풀네임을 불렀다. 사실 나를 수호하는 화룡의 풀네임 정도야 이미 세레스트 산에서 한 맹세로 인해 모 르는 사람이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카이가 카뮤르·카이야라는 증거는 없 지 않은가. 그럼에도 지금 눈앞의 에뮤는 그녀를 단 한번 본 것만으로 카 뮤르·카이야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뮤에게 질책을 받은 피투성이의 그녀는 조금 어지러운 것인지 의자를 하 나 꺼내 앉았다. 아무리 드래곤이래도 저렇게 내버려둬도 괜찮은가 싶어 약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그녀가 오른쪽 팔을 왼손으 로 감싸며 입을 열었다. "그런 것은 아니다." "뭐가 아니냔 말이냐! 아르윈 왕국의 제6왕자를 수호한다는 화룡에 대한 소문이 우리 나라에까지 자자하다! 설마 십만년이나 자아를 지킨 네가 그 런 짓을 할까 싶었으나 카뮤르·카이야라는 이름까지 인간들이 알고 있으 며 무엇보다 네가 진실로 저 놈의 곁에 있으니, 결국 드래곤으로서 인간들 의 일에 간섭을 했다는 뜻이 아니더냐!" 나는 멍하니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한숨을 쉬었다. 지금 에뮤르·에이에라 는 드래곤으로 추측되는 그는 카이가 나를 수호해주는 일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아마도 드래곤으로서 타종족과의 일에 연계를 맺는 일을 꺼리는 그것 때문인 듯 싶었다. "후우, 그런 일이라면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카이는 나를 지키는 아주 최소한의 일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드래곤으로서의 권능을 쓰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으니까. 지금만 해도 카이야 혼 에스문드라는 이름을 쓰면서 인 간 행세를 하고 있다고." "멍청한 소리 말아라! 네 놈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그 작은 권능의 발현만으로도 이 세계는 얼마든지 붕괴될 수 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기가 막혀서 맞받아 소리쳤다. "아니, 개인적으로 나를 좀 보호해 주는 게 뭐가 그렇게 세계의 멸망을 불 러올 일인데?" "무지한 왕자여. 그렇다면 이 내가 드래곤으로서의 권능을 사용하여 너 하 나만 죽이도록 도와달라는 인간의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했을 때는 어떻게 될 것 같으냐."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서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에뮤는 주먹으로 탁자를 또 한번 세게 치며 소리쳤다. "타종족과 연계를 가지게되면 극도로 무심했던 드래곤들의 사이에 이해관 계가 생겨난다! 우리들이 전투를 벌인다면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이 세계 의 모든 존재들이 한줌의 먼지가 되어 버린단 말이다! 고대의 그 발전되었 던 문명들이 왜 붕괴되었는지 아느냐? 단 두 마리의 드래곤이 상반된 입장 을 취했기 때문이다. 하나는 자신의 힘으로 인간들에게 핍박받는 엘프들을 돕겠다는 맹약을, 하나는 사랑하는 어떤 인간을 보호하겠다는 맹목적인 신 념을 가지고 싸움을 시작했고 단 3일만에 세계는 완전히 붕괴될 위기에 처 했다. 드래곤의 힘은 같은 드래곤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하 여 수많은 드래곤이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개입하였음에도 그 싸움을 오히 려 커질 뿐이었다. 어느 순간, 그 둘이 천만다행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버리 고 종적을 감추었기에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이 세계는 예전에 멸망 당했을 것이다." 에뮤는 화로 인해 붉어진 얼굴로 소리치듯 말했다. 나는 그 믿기지 않는 이야기에 입을 조금 벌리고 카이와 에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고대 마법왕국의 멸망이 단 두 마리의 드래곤이 싸웠기 때문이라는 건가? 그들이 그 정도로 강하단 말인가? 한동안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카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에뮤를 향해 전과 다름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말대로 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너의 말처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도록, 드래곤으로서의 나의 권능을 최소한으로 발현하겠다." "어떻게 십 만년이나 되는 세월을 살아왔던 네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 가! 모든 드래곤이 너처럼 나 하나 정도라면,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했다면 이 세계는 예전에 무너졌을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마지막 남 은 이성마저 완전히 삭아버린 모양이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카이에게로 다가가 또 한번 검을 쳐들었다. "죽어라. 네게 아직 이 세계를 보고 듣고 느낄 눈과 귀가 있다면 더 이상 저항하지 말고 순순히 목을 내밀어라!" "그…그만해!!" 나는 미처 반론의 말을 찾지는 못했지만 일단은 에뮤에게로 후닥닥 달려가 서 그를 저지했다. 그가 인상을 확 쓰고 나를 밀쳐내려는 듯 왼손을 드는 찰나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나의 말을 듣거라." 카이의 말소리에 에뮤는 잠시 검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채로 당장이라도 한번 달려드려는 태세였다. 카이는 그의 행동을 저지하기라도 하듯 왼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너의 염려만큼 나의 이성이 마비된 것은 아니다. 나는 네 뜻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세계를 멸망시키고 싶지도 않다. 맹세하건대 이 아이를 지키 는 일로 인해 다른 드래곤과의 충돌이 일어나는 일은 결코 없게 하겠다. 물론, 그런 보장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 이런 일을 저지르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나는 카이의 이야기를 듣고 슬그머니 에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않고 카이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다가 두 드래곤의 팽팽 한 눈싸움 사이에 끼여버린 나는 이 사태를 어찌 해결해야 하나에 대해 심 각하게 고민에 빠졌다. "…알았다. 의외로 염려했던 것만큼 네가 미쳐버린 것은 아닌 듯 하니 더 이상의 추궁은 그만두겠다. 무슨 생각이 있는 것이겠지." "너의 믿음을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칼부림을 하며 강하게 나왔던 에뮤는 갑자기 물러나겠다고 선 언하더니 바로 검을 내렸다. 그리고 카이도 그에 간단히 대답을 해준 뒤 자리에 도로 앉았다. 크게 한판 벌어질 줄 알았던 나는 그 모습을 보고 머 리를 긁적였다. 엘프처럼 감정을 읽는 것도 아니면서 눈빛만 주고받다가 허무하게 결말을 맺는 것이 무지하게 황당했던 것이다. 서로가 지고한 지 성을 가진 존재이니 혹시라도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는 인간과 같은 불신은 없다는 걸까? 그들의 행동에 신기함을 표하던 나는 검을 자신의 검집에 갈무리하는 에뮤 를 보고 머리에 두고 있던 손을 내리며 문득 머리를 스치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난 드래곤들은 전부 카이처럼 무표정하고 매사에 담담할 줄 알 았는데, 널 보니까 그것도 아닌 모양이네? 엄청 다혈질이잖아?" "…누가 다혈질이라는 것이냐. 그리고 카뮤르·카이야는 이 세계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생존한 생명체다. 만년만 살아도 세상만사가 전부 물릴 정 도인데, 십만 년을 산 그녀에게 발랄한 감정 같은 것이 남아있을 리가 없 지 않겠느냐." "뭐? 그럼 넌 몇 살인데?" 원체 처음부터 말투가 말투인지라 당연히 카이보다 나이가 많을 줄로만 알 았던 나는 의외로 자신이 카이보다 어리다는 사실을 밝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했다. 그리고 에뮤는 자신의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 기며 가볍게 대답했다. "마흔여섯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입을 있는 대로 짝 벌렸다. 그리고 동시에, 거의 무의식중 에 에뮤의 다리를 발로 퍽 찼다. "뭐…뭐냐! 이 무례한 놈!!" 에뮤가 황당해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면서도 나는 그 자리에 다리를 약간 든 채로 굳어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태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 자…식…이……? 누구더러 무례하대!! 마흔 여섯이라고 했냐? 마흔 여섯!? 그 주제에 카이를 그딴 식으로 대하면서 검을 휘둘렀다 이거야? 네 놈은 위아래도 없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누구한테 대들고 난리야 난리가!?" 나는 한순간 발끈 하는 마음을 묶어두지 못하고 주먹을 불끈 쥐고 고래고 래 소리쳤다. 그렇잖아도 카이가 큰 상처를 입어서 악의에 가득했던 감정 에 경로사상을 밥 말아먹은 싸가지 없는 태도까지 플러스 알파가 되면서 아주 폭발해 버린 것이다. 나의 말을 한동안 말없이 듣고 있던 에뮤는 곧 같잖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 고 피식 웃었다. 내가 더욱 발끈하여 소리를 지르려는데 에뮤가 고개를 돌 려 나를 보며 먼저 선수를 쳤다. "정말 머리에 피가 마르지 않은 꼬마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화를 낼 기운 도 없구나. 무엇보다도 그것을 지적하는 네 태도에는 예의라는 것이 있느 냐? 조금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지만, 우리들의 실체가 드래곤임을 알 면서도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놈이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로다." "아르 할아버지보다 어린 게 말이 많아!! 당장 카이에게 머리 박고 사죄해! 카이의 갓난아기 뻘도 못되는 주제에 대체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 거야?!" "너야말로 뭘 믿고 그렇게 까부는지 궁금하구나. 내 한가지 이야기를 해주 자면, 드래곤은 태어나 얼마 되지도 않아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완전 히 성숙하며, 특히 신체적인 면에서는 영원히 약해지지도 강해지지도 않는 다. 1살 짜리 드래곤이나 수억년을 산 드래곤이나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는 것이다. 게다가 카뮤르·카이야는 화룡(火龍), 나는 광룡(光龍)이다. 큰 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은밀히 따지자면 내가 그녀보다 더 강하다. 알겠느 냐?" 나는 깜짝 놀라서 입을 다물고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카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가 설명까지 덧붙여 주었다. "나이와 강함에 관계없이 모든 드래곤은 서로 동등하다. 아니, 동등함을 따 질 만큼 관계를 가지지도 않는다. 드래곤과 인간은 엄연히 다른 존재이거 늘 어찌 인간의 관습을 드래곤에게 적용할 수가 있겠는가." 카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름을 느꼈다. 한동안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있던 나는 곧 이 쪽팔리는 상황을 모면하고자 뒤 쪽에 서있는 에뮤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슬그머니 카이의 뒤쪽으로 걸어 갔다. "너!!" 슬프게도 에뮤는 이 쪽팔리는 심정을 이해해주지 않고 나를 크게 불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피눈물을 머금으며 에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왜……." "경고하마. 나를 다시는 에뮤르·에이에라고 부르지 마라." "…에뮤르·에이에를 에뮤르·에이에라고 부르는 게 뭐가 잘못인데?" 조금 전의 일로 엄청난 쪽팔림을 당하고도 아직까지 그에 대한 악감정을 버리지 못한 나는 끝까지 틱틱대며 말대답을 했다. 그러자 에뮤가 인상을 쓰며 크게 소리쳤다. "나는 드래곤, 에뮤르·에이에가 아니라 카르틴의 국왕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이다! 한번만 더 내 경고를 무시하고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다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에뮤 국왕이 화를 내는 것을 보며 어이가 없어 빈정대기 시작했다. "뭐가 에뮤라는 건데? 대체 그 어떤 인간이 처음 보는 카이를 더러 세상을 멸망시키는 미친 계집이라고 칼부림을 하겠어?" "시끄럽다! 카뮤르·카이야가 미쳐버려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내버려두는 짓만은 할 수 없어서였을 뿐이며, 그것은 모 든 드래곤이 당연히 그리했었어야 할 일이었다. 경고하건대 나를 드래곤으 로 취급하지 마라!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은 나는 완전한 인간이다!!" "거참 별꼴을 다 봤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은 네가 완전한 드래곤으로 보이는구만. 도대체 그 어떤 인간이 저런 식으로 행동을 하겠어? 안 그래, 카이? 저 놈의 정체가 정말 궁극의 지능을 가진 드래곤인 게 확실해? 왜 저렇게 지능이 딸려?" 에뮤가 귀가 따갑도록 화를 내기에 나는 너무 황당해서 카이를 바라보았 다. 그러자 카이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은 아직 성룡이 되지 못한 미숙한 해츨링들이 가끔씩 저지르는 오류 이다. 그는 스스로가 인간의 탈을 쓰고 인간을 연극하고 있는 드래곤임을 부정하며 짧은 시간이나마 진실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 래봐야 진실은 변할 수 없음을, 자신의 모순됨을 알면서도 그 소망을 이루 고자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그는 이대로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어느 순간 자신이 사랑했던 작은 인간들은 물론이거니와 귀찮아했던 벌레들 하 나까지 모두 소멸해버렸음에도 자신만은 그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는 것을,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와도 생을 함께 할 수 없는 영원불 멸의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극복하는 해츨링 은 성룡이 되고, 극복하지 못하는 해츨링은 미쳐버리게 된다. 지금 하는 행 동을 보니 그도 얼마안가 그렇게 미쳐버릴 가능성이 다분해 보이는구나." 카이의 말을 들은 에뮤는 조금 굳어 있었다. 여러 가지로 이해하기 힘든 말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종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말이 너무 노골적으로 들리는지라 은근히 그 부분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카이의 말은 그것으 로 끝나지 않았다. "에뮤르·에이에여. 경고하니 항시 스스로를 되돌아 보라. 그리고 조금이라 도 스스로의 정신상태에 의심이 가거든 그 즉시 목숨을 버려라. 미련을 버 리지 못하고 자신을 붙들고 있다가 나뮤르·나이야와 같이 세계에 민폐를 끼치는 일은 삼가토록 하라." "카…카이… 미…민폐라니… 당사자가 듣고 있는데 그건 말이 좀 심한 게 아닐까." "세계에 영향을 미치지만 않는다면 그가 미치든 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따라서 그를 위한 배려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실상 그도 나의 배려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기껏 작게 말했음에도 카이는 평상시의 목소리를 사용하여 에뮤가 그 살벌한 말을 전부 들을 수 있게 만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고 있지 만 실제로는 에뮤에게 무지하게 화가 난 것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나는 남 모르게 식은땀이 삐질 흘렀다. 의외의 상황에 내가 한참 당황하고 있는데 카이가 나의 모습을 지긋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카류여. 인간의 시각으로 드래곤을 보지 말아라. 나는 에뮤르·에이에를 미워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다. 애초부터 드래곤에게 있어 드래곤은 땅에 흩어진 작은 풀 한 포기에게서 느끼는 감성조차 줄 수 없는 존재다. 모든 드래곤이 지금 한낱 먼지로 변해버린다 해도 내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세계가 멸망하는 것은 언제나 굉장히 걱정했잖아.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타종족들이 멸망당하는 것에 대해서는 노심초 사하면서 같은 종족인 드래곤은 어떻게되든 아무래도 좋다는 거야?"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네 말 대로다. 우리들에게는 같은 드래곤보다는 타종족의 안위가 훨씬 더 소중하다. 그것은 우리들이 같은 드래곤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 는데 반해 타종족에게는 수많은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비틀어진 감 성은 많은 드래곤들이 폴리모프를 하여 다른 종족과의 삶을 함께 하도록 만들지. 하지만 드래곤이 다른 존재로 폴리모프는 할 수 있되 결코 진정한 그들이 될 수는 없다. 영원히 불노(不老)하며 반 불사(不死)하는 존재인 드 래곤은 자신이 마음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존재와도 생을 함께 할 수 없 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모든 생명체는 같은 종족끼리 삶을 영위하고 기본 바탕을 두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건만 드래곤들은 천성적으로 비틀린 감성 을 가지고 있기에 단 한 마리도 그 길을 따르지 못한다." 나는 가만히 카이의 말을 듣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탁자로 죽 돌아 가서 의자를 빼어 앉은 다음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하나도 모르겠어. 게다가 인간 따위가 뭐가 좋지? 인간은 약하고 불안한 데다가 금방 변해버려. 하지만 너희들은 언제나 강하고 당당하고 영원하지. 이렇게나 완벽하고 아름다운데, 왜 엉망진창인 인간의 생활에 끼어 들고 싶다는 거지?" "단순히 타고난 감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굳이 그런 감성을 타고나게 된 원류를 따지자면 드래곤은 홀로 선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뭐?" "드래곤은 무언가를 행함에 있어 힘이 부족할 일도 없고, 갓 태어난 아이 역시 혼자서 살아갈 수 있으며, 후계를 생산할 때마저 배우자를 필요로 하 지 않는다. 모든 일을 홀로 행할 수 있는 드래곤들이기에 서로를 사랑할 일도 없고 질투할 일도 증오할 일도 없다. 하지만 타종족들은 다르다. 자신 들이 가진 불완전함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 으로 인해 서로를 증오하고 괴로워하는가 하면, 반대로 사랑하며 기쁨을 느낀다. 우리들은 너희들을 상대하면서 그 폭발적인 감성을 배우고 부러워 하며, 결국 그 생활에 동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는 이해할 듯 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입을 움찔거렸다. 불안전함 을 예찬하는 그 말이 몹시 거슬렸다. 불완전함을 원동력 삼아 언제나 도우 면서 행복하게 살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으로 인해 지저분하고 슬픈 일이 훨씬 많이 일어난다. 그렇게 괴로워하고 힘들어 할 바에는 차라리 서 로 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편이 나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긋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의 안색이 거의 백짓장이라는 것 을 그제야 눈치채고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카이!! 아직 팔을 내버려두고 있었어? 왜 마법을 써서 치료하지 않는 거 야?" "여기서 마법을 사용하여 치료해 나가면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일단은 내 버려뒀다가 류스밀리온을 만나거든 치료하도록 하지." "아…아프지 않아?" "물론 아프다." 나는 띵해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 다. "내게는 고통조차 무감각하다. 너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당연한 아픔이 ‘싫다’는 감정조차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네가 그리 걱정할 필요는 없 다." 나는 황당하게 그녀의 말을 듣고 서있었다. 그러나 이해 못할 말은 그냥 넘겨버리기로 하고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어쨌든 너무 피가 많이 난다고.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너무 과신했다가 순간적으로 과다출혈 쇼크사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진담을 뻘뻘 흘리자 에뮤가 숨을 푹 쉬며 말했다. "드래곤들이 왜 반 불사(不死)하는 생명체라고 불리겠느냐? 죽고 싶다는 생각이 없으면 절대로 죽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무슨 소리야?" 내가 입을 뽀루퉁하게 하여 괜히 태클을 거는 에뮤를 향해 소리지르자 그 는 갑자기 내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갑자기 그의 굵고 탄탄했던 손이 길다랗게 늘어나며 마치 나뭇가지처럼 변했다. 덕분에 나는 얼마나 놀랐는지 의자와 함께 완전히 뒤로 넘어갈 뻔했다. "뭐, 뭐, 뭐야!?" "폴리모프라는 것은 자신의 모든 부위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하물며 공기 중의 티끌로까지 변형시킬 수 있는 신의 능력에 가까운 강대한 힘이다. 그 런데 피가 좀 흐르고 살이 좀 갈라진들 대수겠는가? 의지만 남아있다면 얼 마든지 몸을 변형시켜 피를 늘리고 살을 복구할 수 있는 것을." 어느새 그의 손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는 것을 보며 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 시키고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경 악의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정말 황당하네… 대체 너희들은 어떻게 죽는 건데? 큰 상처를 입으면 다 시 몸을 변형하면 되겠네? 게다가 사실 너희들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 는 존재가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조금 전에 불노한다고, 늙지도 않는다고 했잖아." 문득 굉장한 의문이 떠올라 나는 에뮤에게로 몸을 조금 내밀며 물었다. 그 는 오른쪽 손으로 얼굴을 괴고 나를 지긋이 보다가 곧 피식 웃으면서 대답 했다. "드래곤들은 단 한 마리의 예외도 없이 모두 자살을 함으로서 생을 끝낸 다." "…뭐?" "생이 너무 지루해졌을 때. 오감에서 전해지는 모든 사건에서 더 이상 아 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 때.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토록 되기를 염원했던 타종족들이 몰살당한다해도 아무래도 관계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되었 을 때… 그 때 드래곤들은 스스로의 목숨을 버린다. 때문에 드래곤의 생은 대부분 만년이 한계다." "…거짓말… 믿기지가 않아. 이 세계의 전무후무한 최강의 힘을 지닌 지성 체의 최후가 다른 것도 아닌 자살이었다니… 아, 그리고 너희들은 다른 드 래곤이 정신이 나갔을 때 그들을 처단하기도 하는 거 아냐? 그건 자살이 아니잖아." 내가 황당하게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묻자 이번에는 에뮤가 아닌 카이가 대신 대답을 해주었다. "의지만으로 육체를 변형시키는 폴리모프라는 힘으로 인해 타의로 드래곤 을 죽이는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상대해 보았던 모 든 드래곤들은 전투도중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스스로가 사라져야 할 그릇 된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순간에 재생의 의지를 잃고 소멸 당했다. 비록 그들은 내 손에 죽었지만 실은 충분히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럼에도 그 의지를 버렸으니 결국에는 자살인 셈이다." 나는 카이의 말이 신기하게 들려서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뮤는 피식 웃으면서 손을 들어 내 주의를 끌었다. "하지만 드래곤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자살 방법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다 른 존재로 폴리모프를 하는 거다." "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우리들은 뭐든지 폴리모프 할 수 있지만, 유사인종이라 불리는 존재들만 큼 사고할만한 뇌를 가지지 못하게 되면 더 이상 ‘나’로, 드래곤으로 남 지 못한다. 결국 이대로 공기중의 티끌로 화해버린다거나 거대한 고목이 되어도 자살을 하게 되는 거지. 내 듣기로는 리샤스 왕국의 생명수라 불리 는 헤룸 거목은 원래 드래곤이었다고 하더군." "헉! 정말?" 실체는 상당히 심각한 이야기였건만, 그것이 피부에 닿지 않아서인지 나는 저도 모르게 흥미진진한 얼굴을 하고 몸을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보고 에뮤 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오며 말했다. "그런데 티끌이나 나무 같은 것으로 폴리모프하는 드래곤은 극히 드물다." "그럼? 뭘로 변하는데?" 내가 눈을 깜빡이며 묻자 바로 코앞에 온 에뮤는 잘생긴 얼굴로 부드럽게 웃었다. 그때 그의 몸이 갑자기 스르륵 작아지기 시작했다. 거의 180㎝ 정 도 되어 보였던 훤칠했던 그가 순식간에 땅꼬마의 키로 줄어드는 것을 보 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헉!!" 미지의 세계를 접한다는 것에 재미를 붙이고 있던 나는 에뮤가 완전히 변 한 것을 보고 자리에서 짧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넘 어진 의자 소리가 방안을 시끄럽게 울렸지만 그것은 이미 나의 고려범위가 아니었다. "무…무, 무슨!!" 나는 눈앞에 서서 말을 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뒷걸음질까지 쳤다. 165㎝를 간신히 넘을까말까 한 작은 키와 커다란 흑청색의 눈동자로 인해 전체적인 인상이 묘하게 어려 보이는 또 하나의 내가 싱긋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나와 옷가지가 다를 뿐,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의 모양도, 그 이마에 난 아주 작은 흔적마저도 완전히 똑같았다. 눈앞의 존재가 완전한 나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존재에 대한 완강한 거부감이 몰려와서 나는 더욱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또 다른 나의 모습을 한 에뮤는 더욱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손을 잡아 뒤로 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드래곤들이 언제나 너희들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은 너도 조금전의 이야기 를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 지긋하게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거는 에뮤의 목소리는 완전히 나의 목소리 였다. 나는 한순간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음을 느꼈다. "봐라. 이 손도 이 피부로 아주 똑같지?" "노…놔!!" 나는 너무나 기분이 나쁜 나머지 기겁을 하며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그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 마라. 이 몸 속에 흐르는 피까지 너와 똑같지만 결코 네가 아니다. 이미 너와 나는 서로 완전히 다른 사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 카뮤 르·카이야의 말대로 너의 탈을 쓰고 있을 뿐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내가 나에게 그 런 일을 당하니까 무지막지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어깨를 조금 움츠 리고 잔뜩 쫄아 있으니까 그는 싱글 웃으며 내게 말했다. "놀랐느냐? 뿔난 망아지같이 날뛰기에 벌이나 한번 줘보려 했던 것인데 효 과가 확실하군." "윽!! 빨랑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내가 발끈 하여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그는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지만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고 다시 한번 내 앞머리를 쓸어 내렸다가 그 끝에서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확실히 내가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렇게 할 수는 있지." 그가 싱긋 웃는 것을 보며 대체 또 뭔 짓을 하려나 싶어 인상을 찌푸렸다. "우아악!!!" 그러나 나는 곧 아주 비명까지 지르며 에뮤를 손과 발로 힘껏 밀어버렸다. 내 머리끝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갑작스레 변하면서 내 머리카락과 동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 끔찍스러운 광경에 나는 가히 본능적으로 에뮤의 반 경에서 후다닥 떨어졌다. 내게 채여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에뮤는 피식 웃더니 갑자기 순식간에 커져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조금 전의 경험으로 완전히 쫄 아버린 나는 계속 뒷걸음질쳐서 최대한 카이의 곁에 바짝 붙었다. "훗, 의외로 귀엽게 나오는군." "끄아악!! 기분 나빠!! 대체 무…무슨 짓이야?!" 나는 또 한번 비웃음 비슷한 걸 당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빽 소리를 질렀 다. 그는 어느새 원래의 크고 굳은살이 조금 박힌 검사의, 에뮤 국왕의 것 으로 돌아온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조금 전처럼 하면 나는 진짜 네가 될 수도 있지." "뭐…뭐…뭔데! 그건!" "내가 너의 머리카락이 되거나, 피가 되거나, 살이 되어 동화할 수 있다는 거다." "동화?" 내가 조금 전에 잠시 그의 일체가 되었던 앞머리를 손으로 살살 만지며 고 개를 갸웃했다.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마지막으로 되고자 염원했던 존재의 일부로 동화한 다. 어떤 자는 인간과 어떤 자는 엘프와… 실상 자신은 완전히 사라질 뿐 이지만, 조금이마나 그 존재로서 살고 싶다는 소망의 발현인 것이지." "아……." 의외로 로맨틱(?)한 그들의 이야기에 나는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이런 식이면 팔이 없는 자에게는 그 팔이 되어 줄 수도 있고, 피가 부족 한 자에게는 피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 동화는 거의 만병통치약의 수준이 라 죽은 지 얼마 되지 않는 자는 되살릴 수도 있을 정도지. 게다가 우리들 이 그들의 일부로 동화됨으로 하여 그 부품의 능력을 조금이나마 강화시켜 줄 수도 있으니 여러모로 많이 애용되는 거다." "오오? 정말?" "그렇게 신기한가?" 내가 눈을 반짝이자 그가 작게 입꼬리를 올리며 되물었다. 나는 그의 웃음 을 보다가 새삼스럽게 에뮤와 카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깨닫고 슬그머니 몸을 낮추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도 심각한 문제이건만 무례하게도 나는 그것을 흥밋거리로 취급하며 재미있어 한 것이다. "이봐, 꼬마." "욱! 내겐 카류라는 멋진 이름이 있어! 애기 도마뱀 주제에 누구더러 꼬마 래? 너랑은 달리 나는 성인식도 치렀단 말이다!" "참으로 당돌한 녀석이로다. 드래곤인 내가 두렵지도 않느냐?" "기형 도마뱀의 어디가 무섭겠어? 그리고 네가 정중하게 나왔으면 나 역시 다소곳했을 거야.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너를 위해 존재하는 명언이니 부디 새겨들어 주었으면 좋겠어." 내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는 것을 보고 에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내게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도 더 욱 큰 믿음을 주는 일이므로 그의 발언은 오히려 역효과였다 하겠다. 솔직히 카이와는 달리 에뮤는 다혈질이라는 말까지 나오게 만들 정도로 감 정이 굉장히 풍부하며, 따라서 이렇게 대들다가는 발끈한 그에게 크게 한 방 먹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드래곤들은 웬만한 일 이 아니라면 굉장히 관대할 것이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이상한 확신이 있었 다. 때문에 카르틴의 국왕과 아르윈의 왕자로서 자리하고 있지도 않은 상 황에서, 드래곤인 그를 향해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 딱딱함을 내세울 이유 는 전혀 없었다. 아마도 나는 뭐든지 포용할 수 있을 듯 한 그들에게 어리 광이라도 부리고 싶은 모양이다. "좋다, 카류여. 지금 이 자리에서 정중히 부탁하지. 어차피 네가 뭐라고 말 해보았자 그것을 믿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그렇더라도 부디 나를 카르틴 의 국왕으로 대해다오. 내가 에뮤의 탈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은 최 대한 에뮤가 되고 싶다." "…노력해보지, 뭐. 나는 최대한 착한 아이가 되고 싶기 때문에 어떤 순간 에도 너를 카르틴의 국왕으로만 대할 거라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혀를 삐죽 내밀면서 말하는 것을 보며 에뮤는 화낼 힘도 없는지 허탈 한 웃음과 함께 손을 이마에 얹었다. 왠지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 이 풀어지는 듯 해서 나도 히죽 웃었다. 아니, 조금 전부터 그들과의 대화 를 하는 동안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포근한 착각에 빠진 느낌이었다. 나 의 투정 아닌 투정에 한동안 고개를 젖던 에뮤는 손을 내리면서 한숨을 폭 쉬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좋다. 이미 사실이 발각된 이상 무엇을 어찌한다해도 이미 네 앞에서 나 는 에뮤르·에이에일 수밖에 없을 테니 더 이상은 강요하지 않기로 하지. 그러면 화제를 바꾸어서, 네가 여기까지 오면서 오랫동안 고민했을 그것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보도록 하지." 나는 그의 말을 듣다가 조금 몸을 경직시켰다. 사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계속 피할 수만은 없는 문제였 기에 얼굴에 웃음을 지우고 그를 바라보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우리들의 지원을 거절하는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것을 빌미로 내정간섭을 함으로서 너의 카르틴 왕국이 우리 나라를 집어삼킬 발판을 만들어 주라고?"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지. 이 제의를 거절한다면 너는 결코 승리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해봐야 아는 거 아냐? 사실 질 거였으면 아군은 첫번째 전투에서부 터 전멸했어야 마땅했어." 나는 괜히 세게 나오며 콧방귀를 끼었다. 그러자 에뮤는 다리 한쪽을 꼬고 그 위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으며 웃었다. "뭐, 이야기 해주마. 아마 황금의 성왕은 네가 그런 기회를 획득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앞으로 너에게 주어지는 모든 기회는 그가 만 들어 준 것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뭐?"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묻자 그는 고개를 조금 들고 영 마음에 안 드는 포 즈를 취하며 말했다. "네가 이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우리 나라가 바로 침략을 자행하지 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북부 전선에 군대를 대어 국왕군을 압박할 것이다. 너를 이용해 내정간섭을 할 수 없다면 최대한 너희들이 발버둥칠 수 있도 록 도와줌으로서 아르윈의 국토를 황폐하게 만들도록 해야겠지." "……." "하지만 그로 인해 너에게 승산이 돌아온다고 해도 결코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이 승기를 잡는 순간 남부 전선에 대기 중이던 군대가 너희 들을 방해하기 시작할 테니까. 국왕군에게 승기가 있다면 국왕군을, 너희들 에게 승기가 있다면 너희들을 방해를 할 것이라는 말이다. 무슨 소린지 알 겠느냐?" 내가 신경질적으로 그를 째리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가지 가르쳐 주지. 리샤스와 에베리아가 전쟁을 시작한 것도 오랜 시간 을 두고 내가 그들을 이간질해왔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로서는 그들 나라 에 조심스럽게 원조까지 해주고 있는 실정이지. 전쟁물자가 부족하지 않도 록 말이다." "각 나라의 진을 빼게 만들어서 대륙 통일이라도 할 셈이야? 실체는 드래 곤이면서 너무 하는 거 아니야?! 이건 뭐 인간의 생활에 간섭하는 거 아니 냐고!" "강대한 힘을 가진 드래곤의 개입은 절대 사양이지만, 이것은 다르다. 내가 에뮤르·에이에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표면상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은 드래곤으로서의 에뮤르·에이에가 아니라 카르틴의 국 왕인 에뮤다. 에뮤라는 이름을 가진 나는 머리가 비상하고 강한 검술을 구 사하지만 마법을 쓰지 못하는 등의 한계를 가진다. 실상은 뭐든지 가능하 면서도 그렇게 한계를 주며 인간인 척 너희들과 생활하는 것이다. 인간인 나, 카르틴의 국왕, 에뮤가 대륙 통일을 꿈꾸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 아니겠 는가?" 에뮤의 설명을 듣던 나는 자리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아윽! 인간이니 뭐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아!! 그딴 것은 하나도 이해 못한다고! 좋아! 다 젖혀놓고 인간은 썩어날 정도로 많은데, 왜 하필 짜증 스럽게 카르틴의 국왕이 된 거야?!" "사실 내가 왕자였다는 것은 전혀 모르던 사실이었다. 인간들의 생활에 매 료되던 차에 우연찮게 갈기갈기 찢겨져 살해당한 어린아이를 보았고, 그 기회를 빌어 그 아이로서 삶을 살기로 했던 것이니까. 하지만 시작이야 어 찌됐든 에뮤로서의 삶을 살던 나는 결국 나의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내 조국을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으로 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여 짧은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것을 알아둬라." 에뮤는 나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곧 화가 울컥 밀려와서 짜증스럽게 발을 쿵쿵 구르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 고 풀 곳 없는 화를 삭히기 위해 탁자를 손으로 북북 긁으며 한참동안 시 간을 보내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좋아. 원망하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거니까 ……."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지원을 받아들이겠는가?" 에뮤의 질문에 나는 울컥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원 안 받으면 아군을 못살게 굴겠다며? 멍청한데다가 할 줄 아는 것은 시건방진 말발뿐인 내가 뭘 어쩌겠어? 가자, 카이!! 일단은 류온 님을 만나 서 치료부터 하자고!" "하하하, 의외로 스스로에 대해 아주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구나." 에뮤는 내 말꼬리를 잡으며 아주 큰소리로 웃었다. 내가 곧장 그에게 대들 기 위해 전투태세로 들어가 있는데 에뮤가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이렇게 만나 것도 인연이니 개인적으로 너를 위해 한마디하지. 네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반드시 너희 제6왕자군을 승리하게 만들 것이 다. 그러니 승리한 후에 나의 카르틴에게서 어떻게 자신의 나라를 지킬 지 에 대한 걱정을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웃기셔! 에뮤르·에이에라면 몰라도 일개 인간의 힘밖에 쓸 수 없는 주제 에 뭘 믿고 그렇게 큰소리 뻥뻥치는 거야?" "후후, 글쎄다. 오히려 네가 대(大)제국이 될 카르틴 왕국과 그 땅의 주인 인 나, 에뮤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 아니더냐?" 에뮤는 고개를 거만하게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의 자신만만한 말에 더욱 발끈해서 나를 따라 카이가 의자에서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발을 쿵쿵 울리며 방문 앞까지 곧장 걸어가 문을 벌컥 열어 젖혔다. "앗, 카류리드 전하!" "전하!! 무사하십니까?" 내가 반쯤 문을 열고 한발자국 나오자마자 여러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목소 리가 들려왔다. 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러 사람들이 노심초사하며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폐하!" 문득 카르틴 측의 신하들까지 희색을 띄며 말하는 것을 보고 나는 뒤쪽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리고 바로 나의 뒤에서 여유로운 표정으로 서 있는 에 뮤를 보고 울컥 화가 치밀어서 발 한쪽을 뒤로 빼서 바깥쪽에 있는 사람들 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그의 발을 혼신의 힘까지 다하여 세게 밟았다. "윽! 이 녀석!" "녀석이라니요? 또 그렇게 무례하게 나오시군요. 처음 만날 때부터 생각했 던 것인데, 카르틴의 법도는 그 정도 밖에 안됩니까?" "……." 에뮤가 나를 지긋하게 째리기에 나도 지지 않고 그를 열심히 째려주었다. 하지만 에뮤는 곧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고 반쯤 열려있던 문을 완전히 열어 젖히며 나의 옆으로 비켜서 먼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사람들을 둘 러보며 말했다. "개인적인 이야기는 끝났네.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로 인해 혼란스러워 보 이니 잠시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회담에 임하도록 하지. 카류 왕자여, 나 의 이 제안에 동의하겠는가?" "…그러도록 하지요. 카르틴의 국.왕.이시여!" 내가 국왕이라는 말에 악센트를 주며 계속 틱틱거렸으나, 그는 재수 없게 한번 웃어주고는 자신의 신하들과 함께 먼저 걸어가 버렸다. 내가 은근히 무례함에도 에뮤가 계속 웃기만 한다는 것에 여러 사람들이 놀라움을 표했 다. "카류 님… 설마 그가……?" 그들이 멀리 떨어지고 나자 에뮤의 정체를 거의 확신한 듯한 힐레인이 약 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더 이상은 아군에 게 유리한 쪽으로 교섭을 할만한 여지마저 거의 사라진 듯한 현 상황이 다 시금 상기되어왔다. 에뮤 놈! 마법을 못쓰는 쪽이 아니라 멍청한 쪽으로 한계를 설정했으면 좋 지 않았느냔 말이다!! "전하?!" "가자… 일단은……."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상대에게 커다란 태클이 걸리자 진심으로 욕을 쏟아 부을 수도 없어서 나는 눈물을 머금고 조용히 그들을 불렀다. 저절로 기분 이 좋아질 만큼 날씨가 창창하건만 나의 위는 왜 이다지도 쓰린 것인지 모 르겠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7 황금의 성왕 (3) 중앙의 의자에 자리하는 폐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제껏 그 분을 모시면 서 한번도 품어본 적이 없던 불안을 느꼈다. 처음부터 제6왕자에게 이상할 정도의 집착을 보였던 일과 이 곳에 도착하여 가타부타 말도 없이 제6왕자 의 호위기사에게 검을 휘둘렀던 일, 그리고 그 무례한 왕자의 행동을 그저 웃어넘기기만 했던 일 등,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던 그 제6왕자와 관련된 일에서는 무엇하나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없었다. 나는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먼저 그분을 향해 질문을 드렸다. "폐하, 대체 그 왕자와 무슨 말씀을 나누셨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이야기 해주기가 곤란하니 양해해 주길 바라오, 에키네일. 그러나 염려하던 일이 해결되었으니 더 이상 그대들에게 불안하게 만들 일 은 없을 것이오. 지금 이 자리를 빌어 그 동안 짐이 독단적으로 행했던 일 들에 대해서 사과하리다." "그리 말씀하시지 마시옵소서. 부족한 신으로서는 폐하의 깊으신 속내를 알 길이 없었고, 그 무지의 소산으로 그리 불안을 느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 에키네일은 단 한번도 폐하를 따르겠다는 신념에 의의를 가한 적이 없 었습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소. 다시는 그대들에게 염려를 가져다 줄 일은 하지 않겠소." 폐하는 부드럽게 웃으며 황금빛 후광으로 가득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부드 럽게 넘겼다. 알게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셨던 그 분이 다시 본 디 모습을 되찾으신 듯하여 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자들 역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같이 안도의 미소를 띄우기 시작했 다. "루인 공작. 아니, 셰인트 경." "예, 폐하!" 폐하께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것을 듣고 루인 공작이 얼굴에 완연히 희색을 띄며 몸을 빳빳이 세웠다. 그는 강렬한 빛(선)을 상징하는 루인 공 작 가에서 태어나 1살이 되던 해에 아크라 호수에서 고결함을 뜻하는 셰인 트라는 이름을 택한 자였으나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을 만큼 잔인하며 포 악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모두가 포기하다시피 했던 안하무인의 그를 단 1년만에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신의 사람으로 바 꾸어 놓았다. 지금의 경우만 해도, 여전히 그 난폭한 천성을 버리지 못하는 루인 공작이 폐하께 단지 자신의 이름을 불리는 것으로 흥분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이번 아르윈의 내전에서 자국은 제6왕자군의 원조를 해줄 듯 하 다. 짐은 그 원정군을 자네에게 맡기고 싶군." "신, 셰인트 혼 루인!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루인 공작은 양손을 꽉 맞잡고 폐하의 명령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분을 바라보았다. 루인 공작은 카르틴에 서 손꼽히는 뛰어난 무인임과 동시에 폐하의 오른팔과도 같은 존재. 그를 이런 원정군에 참여시킨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던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 인 생각을 한 것인지 헬뮨트 후작은 약간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폐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조금 전의 대화에서 제6왕자에게 이번 제의에 대한 승낙을 받아내신 것입 니까?" "겸사겸사 그와 비슷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자세한 조건 등은 조금 후에 있을 회담에서 들어보아야 알겠지만, 일단 카류 왕자가 나의 제안을 받아 들일 것은 확실할 듯 싶더군." 나는 폐하의 말에서 잠시 몸을 굳혔다. 그리고 루인 공작은 특히 그 반응 이 심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릴 정도였다. 그것은 폐하께서 아르윈의 제6왕 자를 몹시도 친근하게 ‘카류왕자’라 칭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헬뮨트 후작은 고개를 조금 숙이고 최대한 정중하게 그 뜻을 물었다. "폐하. 어찌하여 오만 방자하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적국의 왕자를 그리도 친근히 부르시는 것입니까." "짐이 오해로 인하여 먼저 검을 휘둘렀고, 그의 호위기사에게 심한 상처까 지 입혔기에 그리 행동한 것이지 자네들의 생각처럼 무례한 자 같지는 않 았다. 사실 당돌한 면이 없진 않았다만……." 폐하께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게 웃음 짓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놀랐 다. 대체 그 왕자가 무슨 짓을 했기에 그분께 이토록 호감을 산 것인지 의 아했던 것이다. "폐하의 영면하신 판단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디 그 왕자에 대한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대의를 그르치는 일은 없도록 해주십시오." "무례하오! 헬뮨트 후작! 그대가 감히 폐하를 가르치려 드는 것이오?" 루인 공작은 그 즉시 자리에서 헬뮨트 후작을 향해 따지기 시작했다. 한마 디의 의문도 없이 폐하께 절대 복종하는 불과 같은 루인 공작과, 물론 그 충성의 정도는 다를 바가 없음에도 정반대로 작은 일에도 냉철하게 의문을 드러내는 얼음과 같은 헬뮨트 후작은 언제나 극과 극이었다. 그들의 격돌 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짐도 감정을 가진 존재이니 얼마든지 그로 인해 일을 그르칠 수 있 을 터. 헬뮨트 후작, 짐이 틀린 길로 발을 들일 것처럼 보이거든 언제든지 그 말을 되새길 수 있도록 해다오." "그리 하겠습니다. 신의 무례를 넓으신 아량으로 덮어 주시어 감사드립니 다." 언제나와 같이 폐하의 한마디는 두 사람의 논쟁은 한순간에 가라앉혔다. 그들이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을 보며 폐하는 숨을 조금 깊게 내쉰 다음 말 을 이었다. "그대들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짐의 의사를 밝히겠다. 짐은 이번 아르윈 왕국의 내전에서 제6왕자군을 확실히 승리시키기 위해 힘을 기울이 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제6왕자의 존재로 인해 내려진 용단이십니까?" 헬뮨트 후작은 폐하를 향해 날카롭게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도 역시 루인 공작이 못마땅하게 따져들 기세였으나 폐하께서 고개를 끄덕이는 바람에 그것은 성사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짐은 그 당돌한 왕자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로 인해 카르 틴을 대제국으로 만들겠다는 짐의 다짐이 흐지부지되는 일은 없을 것이나, 그 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카류 왕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일 을 연계시켜 주고 싶다." "……." "……." 폐하의 직접적인 발언에 모든 사람들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언젠가는 반 드시 굴복시켜야 할 적국의 왕자에게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이 그리 좋은 소식이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고 만인의 빛과도 같았던 그분께서 이토록 마음에 주신 제6왕자에 대한 치졸한 질투도 상당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여 주시니 신은 더 이상 의문을 품지 않고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신 역시 따를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원군을 끌고 가서 제6왕자군을 올해 안에 반드시 승리토록 만들겠습니다." 헬뮨트 후작의 말이 떨어지자 이에 질세라 루인 공작도 손을 불끈 쥐고 자 신의 의사를 밝혔다. 루인 공작이 천성적으로 그리 우둔한 사람이 아님에 도 폐하의 말씀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그 성격으로 인하여 성급한 소리를 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를 향해 충고해주었다. "그것은 안될 말이오, 루인 공작. 폐하께서 제6왕자에 대해 도움을 주겠다 말씀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겸사로 하는 것일 뿐, 최우선은 어디까지나 카 르틴 왕국의 영향력을 전 대륙으로 넓히는 것이 아니겠소. 따라서 제6왕자 군을 승리로 이끌되 내전을 최대한 오래 끌도록 하여 아르윈 왕국 자체의 힘을 약화시켜야 할 것이오." "현명한 판단이었소, 에키네일. 그리고 셰인트 경, 그대는 그 성급함으로 인해 후일 큰일을 그르칠 수도 있는 일이니 항시 무언가를 시행하기 전에 뒤를 되돌아보며 성격을 고쳐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루인 공작의 말을 들으며 폐하는 고개를 끄덕이고 깍지 낀 손을 탁자 위에 얹으며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짐이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잇도록 하지. 만약 이번에 카류왕 자가 나의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이번 원정군의 총 사령관은 셰인트 경으 로, 그 부사령관으로 헬뮨트 후작을 임하겠다. 셰인트 경의 용맹과 헬뮨트 후작의 냉철함이라면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했기 때문이니, 그 명을 받들도록 하라." 나는 자신의 오른팔과 왼팔이라 할 수 있는 루인 공작과 헬뮨트 후작을 둘 다 원정군에 참여시키겠다는 폐하의 말에 또 한번 크게 놀랐다. 아니나다 를까 헬뮨트 후작은 심각하게 의의를 제기했다. "신들의 역할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한다면 폐하께 너 무 큰 위험부담이 가는 것은 아닐지 염려가 됩니다." "짐이 적진 한가운데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짐의 곁에는 현자 에키네일 과 수많은 마법사들, 그리고 수많은 충신들이 함께 할 것이니 그대들이 염 려할 필요는 없다. 이번 원정은 짐의 뜻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포석이 될 터, 따라서 그대들은 더 이상 짐을 실망시키지 말고 이에 따르도록 하라!" "신, 제이라느 혼 헬뮤트. 폐하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헬뮨트 후작은 더 이상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 두 손을 맞잡고 고개를 깊이 숙이며 그에 따르기로 했다.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가 대충 끝났을 듯 했을 때, 루인 공작이 조금 눈치를 보는 듯 하다가 큰 결심이라도 한 듯 한쪽 주먹을 꽉 쥐며 폐하를 향해 질문을 올렸다. "폐하! 무례한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폐하께서는 그 왕자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드신 것입니까?" 헬뮨트 후작까지 원정군에 참여시키겠다는 그 뜻에 루인 공작은 제6왕자를 향한 치기 어린 마음을 참을 길이 없었는지 얼굴을 약간 붉힌 채, 처음으 로 폐하의 뜻에 반(反)하는 듯한 의문을 제기했다. 폐하께서는 손을 턱에 얹고 한동안 말이 없으시다가 그 손을 탁자로 내리며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나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달려드는 카류왕자의… 후후, 그래. 그 악의 없는 투정이 귀엽게 느껴지더군. 아마도 처음으로 대해보는 타입이라 신선함을 느낀 모양이다. 그리고 셰인트 경, 감정이란 것은 본디 냉철한 판단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니 그런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다." "예… 죄…죄송합니다." 폐하는 그 왕자에 대해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이내 작게 웃음소리까지 내 셨고, 루인 공작은 굉장히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후에 폐하의 말씀에 답할 때는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하지만 루인 공작의 그런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자신을 ‘짐’이라 칭하지 않고 ‘나’라 고 칭하신 것, 그리고 겨우 한번 얼굴을 마주한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웃음을 흘리신 것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약간 불안해하는 표정을 본 것인지 폐하께서는 얼굴에 옅게 깔려 있던 웃음을 지우고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짐은 카르틴의 주인,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이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신의 본질을 잊고 방종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바 로 짐이, 이 생을 걸고 카르틴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내고야 말 것이다!" 그분은 우리들을 향한 말보다는 마치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도 같이 그렇게 말하고는 사람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창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곧 창 가에 머물던 빛이 이내 그분의 주위에 가득히 황금빛을 끌어내며 익히 알 고 있었던 기품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꼈던 그 누구도 근 접할 수 없을 듯한 그 위엄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리고 그분을 향해 양손을 꼭 맞잡고 자신의 진심을 전해 올렸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생 폐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저의 영원한 군주, 황금의 성왕이시여." "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황금의 성왕이시여!" 나의 말에 따라 모든 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외치듯 다짐하자, 창 밖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폐하께서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마치 신의 섬세한 손길로 만들어진 듯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자신을 황금의 성왕이 라 칭하도록 만든 그 고결한 웃음을. 이르나크의 장 Part 48 해룡족 (1) 얼마 떨어지지 않은 레이닌 해―아르윈의 서해―의 소금기를 담은 바람이 잔잔하게 머리카락을 흩날려 주었다. 저번처럼 긴 머리카락이 끝이 뒤쪽에 서 나를 호위하는 기사의 갑옷에 닿아 엉키는 일이 없게 나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감싸쥐었다. 잠시동안 창 밖으로 분주한 항구의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누군 가 새로운 인간의 인기척을 느낀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가 자세를 바꾸자 마자 굵은 눈썹이 믿음직한 인상을 주는 한 남자가 여러 명의 아랫사람들 을 거느리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쓴 직사각형 모양의 모자가 약간 높 고, 색이 짙은 고동색인 것으로 보아 해룡족에서 지위가 상당한 자인 듯 했다. 모자의 높이가 높을 수록, 색이 검은색에 가까울 수록 지위가 높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힐레인님이십니까?" "처음 본 사람 앞에서는 일단 자기 소개부터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 가?" 내 말을 듣던 그 남자는 웬 어린애가 이런 곳에 책임자로 왔는가 싶어 황 당함과 의아함이 교차되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내가 리아 후작가의 장남 이라는 사실을 들어서인지 더 이상은 지체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 다. "실례를 범했습니다. 저는 해룡족의 얕은 풀인 호안종의 융이라 하며 이곳 의 책임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족장님이 계시는 아남종의 마을까지 안내하여 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한동안 익숙하지 못한 이방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이에 있던 기사 들은 융이 유창한 아르윈어를 구사하자 이채로운 눈빛을 했다. 그들에게 있어 한낱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 해룡족이 아르윈어를 구사한다는데 신기 함을 느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들의 시각에서 해룡족은 곡도를 들고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를 줄 밖에 모르는 저능아의 집단이었을 것이다. "헉… 여기서 꽤 지위 있어 보이는 놈 같은데 촌스럽게 옷이 저게 뭐지? 위에 걸치는 자켓이 간당간당 하는 것이 허리띠가 다 보이려 하는구만." "그뿐인가. 저기 저 바지를 양말 안으로 밀어 넣은 것 좀 보게. 누가 야만 족 아니랄까봐……." 그 안내인이 약간 떨어지자 전부터 끊임없이 소근거리던 수다스러운 두 기 사들이 또 한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물론 보통 사람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아주 작은 말소리였지만, 미안하게도 엘프의 능력을 지닌 나에게는 바로 곁에서 들리는 것만큼이나 생생하게 들려와 조금 전부터 짜증이 보통 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떠는 수다들의 대부분이 자신의 멍청함을 방패로 삼아 해룡족을 야만족으로 까 내리며 험담을 하는 일들 뿐이라 더욱 더 그 랬다. 남자는 물론이거니와 여성까지 날 때부터 말을 이용하는 활동적인 해룡족 에게 아르윈 왕국의 귀족들이 입는 종아리까지 오는 긴 웃옷은 당연히 어 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은 겉옷을 허리까지만 내려오도록 짧게 만 들었으며, 바지나 안에 입는 긴 웃옷의 경우 끝단을 바람에 흩날리지 못하 도록 부목이라 불리는 끈으로 단단히 동여매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부목 은 추운 지방에 사는 그들이 조금이나마 체온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기 위 한 작은 지혜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 멍청한 것들이 촌스럽니 경박스럽 니 하며 자신들의 시각에서 해룡족의 전통 의복을 씹어대고 있는 것이다. 기회만 되면 저것들의 모가지를 비틀어 놓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융을 따라 밖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바람이 느껴질 정도로 이른 오전에 레이닌 해에 위치한 항구에서 출발하여 거의 쉬지 않고 전속력으로 말을 달린 나와 일행들은 하늘이 붉 게 물이 들 무렵에야 먼 곳에서 어렴풋 보이는 마을을 발견했다. 물론 유 목생활을 하며 자리를 자주 옮기는 해룡족인 만큼, 아르윈의 돌과 나무도 지어진 집들이 빽빽이 세워진 그런 마을과는 달리, 하얀색의 원형 천막집 들이 모여 만들어진 마을이었다. "해룡족의 갈색 대지인 유란종의 마을입니다. 해룡족 중 두번째로 강대한 힘을 지닌 종이지요. 오늘은 날이 어두웠으니 여기서 여독을 푸십시오. 내 일 일찍 출발하여 아남종의 마을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융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그렇게 말하고는 능숙한 솜씨로 말을 몰아 우 리들을 안내했다. "두번째로 강대한 부족의 마을이라는군." "허헉… 제대로 된 집 한 채 없다니… 해룡족은 빈민들의 소굴인 건가?" 융를 따라 말고삐를 잡고 있는 찰나, 또 한번 자신들의 무식함을 자랑스럽 게 토해내는 그 인간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해룡족의 일원인 융과 다른 자들이 보는 앞에서 저것들을 족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조용히 그들 을 향해 지긋한 시선을 보내주었다. 저들 나름대로는 굉장히 작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가 나의 시선을 받자 그들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자신들의 마음이라도 읽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일단 나는 평범한 어 린애가 아니라 드래곤의 뜻을 받들어 제6왕자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찾아 온 위대한 현자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의식적으로 몇 번 살벌한 눈빛을 주며 그들의 기를 죽이는 동안 어느새 일행은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마을에는 융과 비슷한 복장을 한 여 러 사람들이 신기함과 경계의 눈빛으로 이방인인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 다. 지금껏 헤이료우 상단이 그들과 교역을 가지기는 했어도 초반에 시작 했을 때만 제하면 모든 것은 비밀항구에서만 이루어졌을 뿐, 이렇게 마을 까지 직접 들어온 일은 드물었다. 게다가 실상 그들은 한창 아르윈 왕국으 로의 습격을 준비하고 있었을 터이니 그 경계는 당연한 일이었다. 융은 우리들을 연한 회색의 실로 수를 놓아 은근히 화려한 천으로 감싸진 중앙의 거대한 천막 쪽으로 안내했다. 천막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여러 사 람들을 뒤에 거느린 60대는 되어 보이는 남자와 20대의 초반의 젊은 남자 가 가장 먼저 나의 시선을 끌었다. 그 둘의 모자가 상당히 높고, 색이 거의 검은색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이 유란종의 부족장과 후계자이 리라. "민·유란, 수·유란. 나와 계셨군요." 나와 대부분의 기사들이 말에서 내리자 융이 고개를 숙이며 그들에게 인사 를 올렸다. 해룡족은 ‘님’과 같은 말 대신 부족의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존칭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그가 그리 부른 것이다. "이분께서 아르윈 왕국에서 오신 리아 후작가의 힐레인 님이십니다." 나는 융이 소개를 마칠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앞에 서있는 두 사 람의, 특히 민·유란이라 불렸던 늙은 부족장의 감정이 격하게 변하고 있 다는 것을 깨닫고 얕게 한숨을 쉬었다. 아주 짜증스럽고 아니꼬운 그런 감 정. 아마도 자신들을 얼마나 얕보았으면 이런 어린애를 대표로 보냈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는 그런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옅게 웃으며 말했다. "해룡족의 땅에 발을 디딘 것을 환영하오. 나는 해룡족의 갈색 대지인 유 란종의 장(長) 민이라 하오이다." 그는 발음이 상당히 어색하지만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의 아르윈 어를 구사하고 있었는데, 완전한 존대어가 아닌 반 낮춤말을 사용했다. 기 사들이 발끈하여 앞으로 나오려했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어 약간의 살벌한 상황을 종식시켰다. "그대들의 환대에 감사를 표하오. 하지만 그보다도 우선적으로 한가지 말 해드리고 싶은 것은 제6왕자전하께서는 결코 그대들 해룡족을 얕보거나 무 시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오." 나의 말이 끝나자 유란종의 부족장 민과 그의 곁에 서있던 훤칠한 키를 가 진 후계자, 그리고 여기까지 안내를 해왔던 융의 눈빛이 약간 흔들렸다. 나 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띄우며 손을 들어 천막을 가리켰다.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소? 내 짧게나마 화룡의 가호 를 받으신 나의 군주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알려드리겠소." 민은 나의 말투에서 자신의 상상과는 무언가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느낀 듯 의아함과 미심쩍음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곁에 선 검은색 머리카락을 가진 굉장히 무뚝뚝해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살짝 건드 리자 그때서야 정중히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귀한 손님을 두고 실례를 범하였소. 일단 들어가십시다." "그러도록 하지."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함께 저녁을 들며 상당시간 이야기를 나눈 민은 나의 정체―드래곤이 내리 신 꼬맹이 현자―에 대해서는 당연히 미심쩍어하며 믿지 않았으나, 확실히 내가 보통 어린애와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듯 우리들 사신단에 대한 악 의는 완전히 지우고 다시 말투를 반올림하여 존대어를 쓰며 나를 접대하고 있었다. 한가지 문제가 될만한 점이라면 얼굴에 맞지 않게 늙은이 티가 나 는 말투를 쓰는 나에게 그가 약간의 거부감―쉽게 말해 닭살스러움―을 느끼 고 있다는 정도뿐이다. "힐레인 님. 저희들은 외지에서 손님을 맞이할 때 담주라 불리는 명주를 대접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술을 즐기는 편이십니까?" 문득 칼로 찔러도 피 한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로 무뚝뚝한 검은색의 눈동 자를 지닌 남자가 나를 향해 질문을 해왔다. 그는 얼굴만큼이나 몹시도 딱 딱한 어투의 말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마나가 순수한 호의로 내게 요청하 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즐기지는 않으나 수·유란께서 권한다면 거절할 수 없는 일이 아니 겠소. 이 기회에 해룡족의 명주를 즐겨보십시다." 나는 수라는 이름을 가진, 유란종의 차기 부족장이 될 남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이 말을 듣던 민은 호탕하게 웃더니 우리들을 향해 말했다. "그럼 자리를 옮기시지요. 본디 술잔을 달을 보며 기울이는 것이 제 맛인 법이니까요." "좋은 자리라도 있으시오?" "예. 제가 처음의 그 무례를 사죄하는 뜻에서 원하시는 만큼 담주를 대접 하여 드릴 터이니 수와 함께 그곳으로 올라가 달을 즐기시지요. 사실 저 같은 노인네보다는 젊은 사람들끼리여야 더 술맛이 나실 테니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그런 소리 마시오. 오히려 민·유란의 깊은 연륜을 접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그 어느 때보다 이 대화가 즐거웠소." "후후,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힐레인 님." 민은 웃으며 손을 저은 후에 자신의 아들인 수를 향해 명했다. "수야. 어서 힐레인 님을 모시거라. 내가 여자들을 시켜 술상을 봐 올리라 고 명하겠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힐레인 님, 가시죠. 산을 조금 오르면 절경인 곳이 있습니다." 아주 작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내게 권하는 그를 보며 나는 어깨를 들썩했다. 그의 마음은 호의로 가득했건만, 겉보기에는 너무나 사무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감정표현이 서툰 사람이라는 생각 이 들어 조금 안됐다는 동정을 해준 것이다. 수와 함께 밖으로 나온 후, 나를 호위할 두어 명의 기사만을 동반하여 수 의 안내를 따라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다. 기사들이 혹시나 함정이 아닐까 하고 불안해했으나, 유란종의 사람들 중 그런 강렬한 살의를 품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불안은 완전히 무시했 다. 하늘을 속일 망정 엘프의 힘을 가진 나를 속일 수는 없는 일이므 로……. 한동안 말을 타고 걸어 언덕의 중턱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가지가 저 좋 을 대로 꼬부라진 거대한 고목이 한 그루 서있었고, 그 옆에 거대하고 편 편한 돌이 놓여 있었다. 수는 그 돌 위로 나를 안내한 다음, 별 다른 말도 없이 멀리 보이는 웅장한 산과 그 사이에 걸린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태 도는 어찌 생각하면 상당히 무례했으나, 실상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에 나는 불쾌함이 담긴 말 대신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다시는 잊지 못할 절경이오." "보름이 되면 달이 손에 닿을 듯 굉장히 커진답니다. 그 때가 되면 족장이 신 규·아남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장(長)들께서 이 곳에 모여 술을 기울이 기도 하시지요." "장들의 회합장소라… 해룡족의 중요한 장소에 이방인인 내가 발을 들여도 되는 것인지 걱정이 되는군."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이 장소는 해룡족의 모든 사람들이 즐기는 곳입니다.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일에 사람을 가리게 할 수야 없는 일 이 아니겠습니까." 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몇 명의 여인들이 술상을 봐들고 이쪽 으로 올라왔다. 하얀 살결이 몹시 아름다워 보이는 미인들이라 민·유란이 꽤나 신경을 썼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들은 편편한 돌 위에 술상을 바로 놓자마자 먼저 휘리릭 내려가 버렸다. 그녀들이 곁에 붙어 술이라도 따라줄 것이라 생각했다가 의외로 그냥 내려가 버리는 것을 보고 괜스레 입맛을 다셨다. 내가 어린애라 그런데는 관심이 없을 것이라 생각한 것일 까. "힐레인 님. 잔을 받으시지요." "고맙소." "약간 도수가 있는 술이온데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술을 따르며 담담하게 그 말을 내뱉었다. 그의 말투가 워낙 굳어있어 마치 나를 깔보는 듯 한 느낌을 주었고, 그로 인해 뒤쪽의 기사들이 불쾌 해 하는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수의 말은 거짓하나 들어있지 않 은 순수한 걱정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술내기라도 해보겠소? 나는 평생동안 단 한번도 술에 취해본 적이 없다 오." "아닙니다. 전 술에 약하여 내기를 그리 즐기지 않습니다." 수는 손을 들어 완곡히 나의 청을 거절했다. 오기를 부리는 듯한 나의 요 청에 괜히 응하여 실례를 범할 것을 막으려는 그의 배려였던 것이다. 하지 만 사실 지금껏 나는 엘프의 피를 가졌기 때문인지 배가 터질 정도로 술을 들이마시고도 취해본 적이 없었다. 홀로 멈춰진 듯한 33년의 시간동안 나 의 고통을 잊게 해주는 것은 오로지 과자들뿐이었다. 그것들이 없었다면 나는 견디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힐레인 님." 수의 말소리에 나는 잡념을 떨치고 수의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그리고 그와 건배라도 할 겸 술잔을 들어올렸다. "……?!" 하지만 나는 그와 술잔을 부딪히기도 전에 술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섰 다. 그리고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는 수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왼편의 풀 숲을 가리키며 말했다. "누가 온다!" 내 말에 사람들은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주위를 돌러보았다. 그러나 먼 곳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나와는 다른 평범한 인간들인 그들로서는 나 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는지 금방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돌바 닥에서 내려와 풀숲에서 떨어지려는 찰라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말발굽 소 리가 드디어 보통 사람들의 귀에도 들릴 만큼 커졌다. "누…누구냐?" "힐레인 님! 어서 이쪽으로!!" 나는 재빨리 기사들의 뒤로 피신했다. 하지만 기사들이 어떤 대처를 기하 기도 전에 갑자기 풀숲에서 거대한 물체가 크게 점프를 하며 뛰어올랐다. 히히힝―!! 은색의 달 속으로 뛰어오른 그 물체는 검은색의 털이 몹시도 아름다운 거 대한 흑마였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아름다웠던 것은 달의 파편이 부서져 나온 것처럼 시린 은빛을 띄는, 흑마의 주인이었다. 『수! 역시 여기 있었… 아아앗?!』 풀숲에서 뛰어내리며 해룡족의 언어를 쓰던 말의 주인은 우리들의 존재를 눈치채자마자 높은 고음의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불어온 바람이 길다란 은색의 머리카락을 허공 에 황홀하게 흩날렸다. "연." 이런 상황에서도 표정의 변화 없이 있던 수는 그 말의 주인을 보자마자 그 렇게 외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연이라 불린 긴 은발의 소유자는 다름 아 닌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보통 해룡족 여성들이 입는 소매통이 약간 크고 무늬가 조금 더 화려한 옷 대신 수와 같은 남성의 복장을 하고 있었 다. 그러나 자신의 흑마와 같은 검은 일색의 남장에 대비되게 몹시도 흰 살결과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어 얼핏 스쳐본 사람일지라도 그녀를 남자라 오해하지는 못할 것이라 추측되었다. 충분히 절색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우 면서도 가녀리다는 느낌보다는 활동적이고 탄력적인 느낌의 얼굴을 가진 그녀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빠르게 말에서 내려왔 다. 그리고 수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와 기사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소녀를 용서하시옵소서. 구름이 적은 날이면 수·유란께서 이곳에 올라 술을 기울이는 것을 즐기는지라 오늘도 당연히 그러할 것으로 생각하여 이 렇게 움직인 것으로, 결코 먼 곳에서 걸음을 하신 귀한 손님들께 무례를 범하려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나와 기사들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음에도 아름다운 은발의 여성은 그 즉시 아르윈어를 사용하여 용서를 빌었다. 물론 자신들과 다른 낯선 복장 을 하고 있는 것으로 우리들이 이방인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겠 지만, 이쯤 되면 꽤나 당황했을 만도 한 돌발 상황이 틀림없음에도 그녀는 상당히 재빠른 판단을 내려 침착하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직 갓 성인이 된 젊은 처녀가 이 정도로 아르윈어를 능숙히―존대어가 약간(?) 이 상하긴 하지만―구사하고 있는 것 역시 그녀가 몹시 총명한 여인이라는 것 을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있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빙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그리 대단치도 않은 한번의 실수를 꼬투리 삼아 죄를 물을 만큼 옹졸하지 않으니 고개를 드시오. 무엇보다 규·아남의 사랑스러운 따님께 해를 끼쳐 서야 첫인상이 나쁘지 않겠소." "…무례를 범한 소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어 감사드리나이다." 나의 말소리가 떨어지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 다. 하지만 놀라움이 잔뜩 묻어있는 그녀의 감정이 전해져오는 것을 느끼 며 나는 자신의 추측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은색으로 빛나는 듯한 그녀의 살결을 검게 감싸고 있는 것은 옷뿐만이 아 니라, 마치 숨기듯 허리 뒤 춤에 걸어둔 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검은빛의 모자가 해룡족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을 지닌 아남종의, 그것도 부족장의 친 혈족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처음 나타났을 때 함 부로 수의 이름을 불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아마도 연인 내 지는 친한 친구인 모양이다. "소녀는 해룡족의 거대한 파도인 아남종의 연이라 하나이다. 말씀하신 대 로 규·아남께서는 저의 아버님 되시옵니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지고 계 시는 분이시군요." 연은 어린아이로만 보이는 내가 이상하게 유식하며 또한 말투까지 어른스 러운 것에 의아한 감정을 표했으나, 그런 감정은 곧 지워버리고 무릎을 살 짝 굽히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하며 해룡족의 여성들이 주로 하는 귀여 운 인사를 했다. 그녀는 매력적인 성숙한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방 긋 미소를 지음과 동시에 왼쪽 뺨에 살짝 들어가는 보조개가 몹시 깜찍한 느낌을 자아내며 그 인사를 전혀 어색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날카로울 것까지야 있겠소. 그런데 어떤 연유로 이런 야심한 시각에 홀로 이런 곳까지 달려오시었소?" "아, 별것은 아니옵니다." "내게 말하기가 힘든 일이오?" "그런 것은 아니옵고, 저는 그저 이것을 수·유란에게 전해 드리기 위 해……." 연은 내게 불쾌함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더 이상 숨기지 않고 자신의 용 건을 밝히며 자신의 잘록한 허리를 감고 있던 검은색의 끈에 걸려있던, 마 찬가지로 검은색의 천으로 만들어진 작은 자루를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 자루는 끈이 엉켜버린 것인지 애써 움직이는 그녀의 손에도 잘 떨어지 지 않았다. 한동안 끙끙거리던 그녀가 아주 힘으로 떼어 내기 위해 이를 악 무는 것을 보고 피식 웃던 찰나, 그 자루의 끈이 투둑― 소리를 내면서 떨어지며 그 순간적인 반동에 의해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버렸다. "아앗?" 검은 자루가 하늘로 붕 떴다가 나와 연의 사이에 파삭하는 소리를 내며 떨 어졌다. 순간 나는 무언가가 부서지는 그 소리가 몹시도 익숙한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 부서져버렸어……." 연은 울상을 지으며 속 내용물과 함께 엉망으로 흐트러진 자루가 있는 곳 으로 허리를 굽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보다 내가 먼저 쪼그리고 앉아 그곳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속의 부서지고 엉망이 된 갈색의 물체를 집어들었다. 와삭. "…힐레인…님?" 몹시도 황당해 하는 사람들의 감정과 말소리가 전해져왔지만 나는 지금 하 고 있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나의 눈앞에 비스킷들이 놓여진 이상 그것 들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비스킷이 좀… 아니, 심각하게 달아서 혀가 얼얼할 정도였지만 그 정도로 나를 굴복시키는 것은 절대로 무리였다. 자루에 든 비스킷들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빠른 시 간 내에 그것들을 모조리 해치울 수 있었다. 무아지경에 달콤한 비스킷들 과 행복한 시간을 나눈 나는 곧 입가를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 "……." 항시 그랬던 것처럼 눈앞의 사람들 역시 완전히 얼이 빠진 듯한 얼굴을 하 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감정을 느끼며 나는 약간 자조적인 웃음 을 띄웠다. 그리고 그들에게 해명 아닌 해명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했다. 그 때 갑자기 얼이 빠진 사람들 중 한 사람의 감정이 급격히 바뀌어 갔다. 굉장히 심각한 얼굴을 한 채로 자신의 양손을 꽉 쥐고 있는 연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흥분된 가슴을 진정이라도 시키듯 천천히 심호 흡을 하더니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맛은… 어떠셨나이까?" "……."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녀의 강렬한 발언에 한순간 몸을 움찔했다. 하지 만 그녀는 그 흥분된 감정을 억제하느라 아랫입술까지 꽉 물다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부탁드리나이다. 부디 소녀에게 숨김없이 가르쳐 주시옵소서." "…약간 단 편이었지만 충분히 맛있었소." "어∼머님∼∼!!!"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양손을 하늘로 높게 뻗고 난데없이 어머 니를 불렀다. 그리고 또 한번 얼어버린 사람들의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굉 장히 빠른 스피드로 한걸음에 벼랑의 끝까지 달려가 한 손을 다시 높게 뻗 어 올리고 달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드디어 소녀가 해내었사옵니다!! 어머님! 부디 편히 눈 감으시옵소서!!" "…그녀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아시오?" "아, 예. 그것이……." 수는 여전히 무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꽤 당혹해 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 를 저으며 아직까지 하늘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연에게 다가가 그녀 의 등을 건드렸다. "그쯤 하시오. 가까운 곳에 유란종의 마을이 있는데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나 난 줄 알겠군." "아… 그렇군요. 소녀가 그만 정도를 넘어버렸사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 서." 나의 말을 듣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인지 연은 고개를 숙여 사죄를 했 다. 그러나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엄청난 뻔치를 보이기도 해서 나는 웃 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함께 술이나 한잔하겠소? 연·아남과 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술잔을 따라 주신다면 여한이 없을 것 같소만." "귀한 손님께서도 저의 잔을 채워 주신다면 그에 따르겠나이다." 연은 고개를 약간 기울이며 꽤나 당돌하게 내 말을 받아쳤다. 나는 문득 그녀가 남자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으며 흑마의 등에는 활까지 달려있다는 것을 생각해내었다. 아마도 그녀는 말투와는 달리, 남자들의 험한 일이나 사냥 같은데도 참여를 하는 굉장히 활발한 여성인 모양이다. 그래서 이번 에도 자신을 동등한 존재로 취급해 주길 원한 것이다. "좋소. 함께 술을 나눕시다. 수·유란은 이에 동의하시오?" "물론입니다. 원래 그녀와는 술친구이기도 하니 동의랄 것도 없을 것입니 다." 수는 그렇게 말하며 술상이 봐져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 랄 것도 없이 함께 자리에 앉아 서로 술잔을 채워주었다. "귀한 손님께서는 술을 드셔도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후후, 연·아남께서도 드시는데 내가 마시지 못할 것은 무엇이겠소. 그리 고 귀한 손님이라는 말 대신 현이라 불러주시오. 드래곤의 의지에 따라 리 아 후작가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굳이 해룡족 식으로 말하자면, 현·리아쯤 으로 불러주시면 되겠군." "현… 말씀이옵니까?" "나는 오랜 옛날부터 드래곤의 유지를 이어받은 해룡족에 대한 호의를 가 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해룡족의 이름을 만들어 쓰고 있었소." "후후, 그러셨나이까." 연은 의미심장한 말투를 쓰며 잔에 가득한 술을 한번에 마셨다. 믿지 않겠 다는 뜻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그녀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라 나는 빈 술잔을 채워주며 일단 궁금한 것을 물었다. "연·아남께서는 어찌 이 곳에 풍토와는 어울리지 않는 비스킷을 만드시었 소?" "그것은 소녀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님께서 불행한 사고로 돌아가시기 직 전에 가르쳐 주신 특별한 음식이었사옵니다. 살아생전 어머님께서는 항시 소녀가 부엌일에 서툴다고 걱정을 하시었나이다. 그래서 늦게나마 어머니 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부엌일까지는 안되더라도 어떻게든 비스킷을 만 드는 법을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옵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소녀가 만든 음 식을 맛보아 주시는 수·유란의 도움을 받으며 오랜 세월 노력하였으나 지 금껏 이 비스킷을 성공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나이다. 그런데 이번에 이렇 게 성공을 하게 되었으니 소녀가 어찌 기쁘지 아니하겠나이까!" 그녀는 처음에는 슬픈 듯이 굉장히 무거운 기분을 하고 있다가 점점 그 감 정이 변하더니 끝에는 그것이 완전히 뒤집혀 기쁨의 도가니에 빠져 내게로 몸을 들이밀기까지 했다. 저렇듯 감정 변화가 굉장한 사람은 또 처음인지 라 나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연이 또 한번 정도를 넘을 듯 하자 떨어진 곳에 앉은 수가 그녀의 등을 두 드리며 자신의 빈 술잔을 들이밀었고 그녀는 그제야 겨우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연은 그런 짓을 하고도 여전히 강철의 얼굴가죽을 자랑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수의 술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연·아남께서는 참 재미있는 분이시군." "이런 자리에서 제 비스킷을 한번에 해치우신 현·리아께서 하실 말씀이 아닐 것이라 생각하옵니다만?" 지긋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를 보고 나는 피식 웃으면서 알아모시 겠다는 뜻으로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그녀는 하얀 얼굴을 가만히 기울이 며 진지하게 질문을 했다. "현·리아께서는 어찌하여 그토록이나 과자를 좋아하게 되셨나이까. 사실 저의 비스킷이 맛이 좋아서 그렇게 드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사려되옵 니다. 그렇다고 현·리아께서 생각 없는 어린아이이라 그랬다는 생각도 하 기 힘드나이다." "글쎄……." 내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웃어버리자 그녀는 수를 바라보며 날더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수·유란. 저분께서는 술자리의 친구와는 숨기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규 칙을 모르시나 보옵니다." "연·아남……." 수는 곤란하다는 심정을 풀풀 날리면서도 여전히 무뚝뚝한 어투로 말했다. 연은 그런 수의 심정을 아는 듯 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술잔을 얼굴 앞에 서 이리저리 돌리며 말했다. "소녀가 현·리아의 임무에 대한 질문을 한 것도 아니 온데 그리도 이야기 해주시기가 꺼림직 하시옵니까? 소녀는 소녀의 가장 아프고 소중한 기억까 지 이야기했사옵니다만, 너무하신 것은 아니온지요." 그녀의 당돌한 말에 나는 또 한번 웃음을 내 비췄다. 그녀의 말투에 다른 뜻이나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랬던 것이다. "후, 내가 기억하는 것은 이 정도요. 내가 태어나 5살 되던 해, 그 당시 나 는 아직 어렸으나 이미 범인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들을 수 있었고 알 수 있었소. 그리고 깨달은 것은 이 세상은 내게 몹시도 암울하고, 또한 쓰다는 것이오." "5살에 말씀이십니까?" 수·유란이 믿지 못하겠다는 심정을 풍기며 질문했다. 그러나 어차피 이해 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나는 그대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었 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께서 내게 동그랗고, 네모난 모양을 한 어떤 것을 가져다주시고 먹으라고 하셨소. 나의 눈에 들어온 그것들은 이상하리 만치 귀엽고 유쾌한 모양이었지.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일만 모아둔 듯한 그것 들이 나는 몹시도 마음에 들었소. 그래서 오랫동안 그것들을 먹지 않고 꼭 품에 안고 다녔소." "아앗, 귀여워라!" 연이 눈을 꼭 감고 도리질을 치며 좋아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 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이왕 말하기 시작한 것이라 그대로 이야기를 잇기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나는 실수로 그 비스킷 중에 하나를 부서뜨려 버렸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버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한번 먹어보기로 결정했소. 그 런데 의외로 그것은 지금까지 먹어보았던 그 어떤 음식들보다도 굉장히 달 았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것들만 가득히 모아둔 듯한 그것들은 나의 입 에 닿일 때마다 자신의 달콤함을 한껏 내게 전해주었지." "아하! 그래서 현·리아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유쾌하고 달콤한 과자들을 그토록 좋아하게 되셨던 것이었군요!" 연은 손을 딱 마주치면서 범인이라면 조금 이해하기 힘들 듯한 나의 말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여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왼쪽 뺨 에 살폿 보조개를 띄우며 깜찍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나는 문득 그녀가 지 금까지 본 그 어떤 여성보다 귀엽고 유쾌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저도 모르 게 환하게 미소를 띄웠다. "아마 그랬나 보오." 나는 한동안 기분 좋게 웃고 있다가 연이 가만히 고개를 기울이며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내가 의아해 하며 슬그 머니 웃음을 지우고 있는데, 그녀가 몸을 일으켜 내게로 걸어왔다. 여전히 연이 순수한 호의로 가득했기에 나는 별다른 움직임 없이 그녀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연은 내게로 다가온 뒤에 조금 쪼그리고 앉아 또 한번 나를 가만히 바라보 았다. 한동안 그런 상태가 유지되자 내가 조금 무안함을 느끼고 옆자리로 약간 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려던 찰나였다. "여…연·아남!!" 나는 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의 뺨에 닿는 보드라운 촉감에 한순간 몸을 경직시켰다. 나의 뺨에 살짝 입술을 대었던 그녀는 몸을 조금 떼더니 겸연 쩍은 얼굴로 뺨을 긁었다. "하하… 소녀가 이토록 조그마한 분께 입술을 내어드릴 줄은 몰랐나이다." 나는 예상치 못한 사건에 완전히 놀라 얼굴이 조금 붉혔다. 하지만 금새 인상을 찌푸리며 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룡족에게 있어 이성의 뺨에 키 스를 하는 것은 좋아한다는 간접적인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어린애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의 무엇이 그리도 마음에 드셨단 것이오? 또한 우리들은 만난 지 겨우 일경밖에 되지 않았소." "제 눈에는 현명함과 날카로움을 고루 갖춘 현·리아가 전혀 어린애로 비 추어지지 않나이다. 그리고 어차피 사람의 마음이란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온데 시간이란 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되겠사옵니까. 무엇보다도 소녀의 비 스킷을 맛있게 드셔주셨을 때부터 현·리아께서는 소녀의 운명적인 분이셨 나이다. 당신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소녀가 만든 비스킷을 진심으로 맛있 게 드셔주시지 않을 테니 말이옵니다." "우습군. 비스킷만 먹을 수 있다면 누구라도 좋다는 것이오?" "그것이 어째서 우습다는 것이옵니까? 소녀는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가르 쳐 주시었던 비스킷을 성공시키기 위해 아주… 아주 오랜 세월 노력을 기 울였나이다. 그러나 천성적인 문제인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이룰 수가 없었나이다. 모든 사람들이 소녀에게 그만 포기하라 말씀하시었고, 아버님 조차 소녀의 이런 막무가내 식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하였나이다. 하지 만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해도 소녀는 이것만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 었나이다. 너무도 오랜 세월, 그것이 소녀의 가슴에 멍울이 지어졌기 때문 이옵니다. 그때 저의 이런 비스킷도 진정으로 즐겨주실 분께서 나타나셨고 소녀는 그 어느 때보다 기뻤고 감동했나이다. 대체 현·리아께서는 어떤 것이 충족되었을 때, 사랑을 느끼는 것이 옳은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이옵 니까?" 나는 잠시 할말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가 나의 이상한 취미 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었다는데서 몹시 기뻐했다는 것을 기억해냈기 때문 이다. 분명 그 당시의 그녀는 너무도 귀여웠고 아름다웠으며… 그리고 사 랑스러웠다. 이런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영원히 곁에서 함 께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연·아남이 수·유란과 연인 사이일 것이라 상상하였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무심히 그렇게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런데 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의 감정이 급격히 변했다. 여전히 무표정이지만 연의 한마디 한마디에 수가 몹시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그제야 그가 연 을 몹시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범인에게 는 꽤나 괴로울 듯 했던 연의 과자를 지금까지 계속 먹어주었다 하지 않았 던가. 내가 잠시 스스로가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손으로 입을 가리는데 연이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현·리아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옵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소녀 와 절친한 친구였으며 예전에는 혼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기도 했었나 이다." "그…러고도 내게 그런 짓을 해도 좋은 것이오? 무엇보다도 나는 이방인일 뿐이오." 나는 괜히 냉랭하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연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내 말에 대답했다. "소녀는 단지 처음으로 느낀 이 가슴 벅찬 감정을 표현했을 뿐으로, 결코 소녀를 받아달라는 뜻은 아니었사옵니다. 소녀는 스스로의 위치와,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나이다. 이것은 후일 과거를 회상하며 빙긋이 웃음 지을 수 있도록 아주 잠시나마 행복한 꿈을 꾸는 것에 불과하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고개를 저어 자신의 은 빛의 머리카락을 경쾌하게 흩날리며 아름답게 웃었다. "현·리아께서는 이런 소녀가 미우시나이까?" 연은 그렇게 말하더니 대답을 듣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잠시 꿈을 꾸는 것일 뿐인 그녀에게 있어 대답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던 것이다. 아니, 그녀는 이미 나의 마음을 깨닫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눈 깜빡할 새에 가벼운 몸놀림으로 흑마에 오른 그녀는 방긋 웃으며 말했 다. "기분 좋은 술자리를 망쳐버린 못난 소녀는 그만 물러나겠사옵니다. 그럼, 두분 모두 내일 아남종의 마을에서 정식으로 뵙도록 하겠나이다." "연·아남. 밤길을 달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부디……!!" "이 흑마는 소녀의 발과 같고, 이 들과 황야는 소녀의 앞마당과 같사온데 무엇이 그리도 걱정이신지요, 수·유란?"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수의 반론을 눌러 버리고 말고삐를 고쳐 쥐었다. 달 빛이 그리 밝지도 않았건만 연의 흑마는 마치 그녀의 의지를 그대로 전해 받기라도 하듯 발을 움직였고 풀숲에도 아랑곳 않고 이내 전속력으로 달리 기 시작했다. 연이 처음 나타났을 때만큼이나 빠르게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며 나는 수와 함께 그 곳에서 한동안 멍하니 서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8 해룡족 (2) 미처 새벽 이슬이 흩어지기도 전에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빠르게 아남종의 마을로 향했다. 우리들이 하는 일 자체가 시각을 다투는 일인만큼 오래 지 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남종의 마을에 아름다운 그녀가 있으 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의 걸음이 더욱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아남종의 마을은 유란종의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컸고, 말이나 가축의 수도 굉장해 보였다. 과연 해룡족의 첫째가는 부족이라는 생각에 나는 작게 감탄을 하며 융의 안내를 받아 중앙의 거대한 천막으로 들어갔 다. 내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는 이미 수많은 해룡족의 어른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이미 융이 이곳저곳으로 나에 대한 소식을 알려 이렇게 모여든 모양이었다. 나와 함께 이곳까지 온 유란종의 대표인 민과 수가 가까운 자리에 먼저 가서 서자, 융이 고개를 숙이면서 양손을 마주 잡고 머리위로 올리며 중앙에 선 중년남자를 향해 말했다. "해룡족의 거대한 파도인 아남종의 위대한 장(長)이시여. 소인 융이 귀한 손님들을 모시어왔습니다."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시었소. 융, 그대는 귀한 손님들을 마지막까지 정 중히 자리에 모시도록 하라." "그리 하겠습니다." 나는 융의 안내에 따라 한쪽에 마련된 상석에 앉으면서 연의 모습을 찾았 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풍채 좋은 해룡족의 족장의 곁에 선 여러 남 자들과―족장의 아들이며, 연의 오빠들인 모양이다―함께 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변함없는 그녀의 모습에 약간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며, 원래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시선을 돌려 해룡족의 족장을 자세히 살펴보았 다. 규는 연과는 달리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이 얼마나 뻣뻣한 것인지 그를 주체를 못해 엉망으로 뻗쳐 있었는데, 의외로 그 모양새가 굉장히 위압적 으로 보였다. 또한 온몸을 감싼 구릿빛의 근육과 자잘한 상처들은 그의 연 륜과 용맹을 그대로 드러내어 주고 있었다. 그는 어린아이인 나를 보면서 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약간의 거만함까지 느껴지는 어투로 단호 히 입을 열었다. "아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오만, 나는 해룡족의 족장인 규라 하오." "나는 위대한 파이어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시는 아르윈 왕국의 제6왕자, 카류리드 전하의 명을 받든 리아 후작가의 힐레인이라 하오. 소문만 무성 하였던 해룡족의 족장을 직접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소이다." 나의 대답에 갑자기 이 천막 안에 있던 사람들의 감정이 한순간 소용돌이 치듯 변했다. 얼굴에 맞지 않는 말투 때문일 것이라 확신했지만, 굳이 그것 을 바꾸지는 않았다. "나는 이 몸으로 화룡, 카뮤르·카이야 님의 뜻을 직접 받든 자요. 부디 단 순한 어린아이라는 생각은 버려주시기 바라오." "일순간도 그대를 보통 어린애라 생각한 적은 없으니 염려는 놓으시오. 일 단 자리에 앉으십시다." 규가 손을 내밀어 자리를 권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제일 먼저 의자에 앉았 고, 규를 시작하여 서열대로 천천히 사람들이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사람 들이 전부 자리에 앉자 규는 내게 날카로운 시선을 주며 입을 열었다. "먼길을 오신 분들께 너무 성급한 이야기가 될런 지는 모르겠소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힐레인 경이 해룡족의 땅에 직접 걸음을 한 이유를 듣고 싶소." "물론 그리 할 참이오. 우리들 역시 그리 한가하지는 못하니 말이오." 나는 거기까지 말한 다음, 잠시 다리를 꼬면서 운을 띄웠다. 그리고 의미심 장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해룡족의 눈에 크로시아 대륙의 4대 왕국 중 하나인 이 아르윈 왕국이 제 대로 영토도 갖추지 못한 이민족의 침략을 허락할 만큼 그리 녹록해 보이 오?" "…어찌 우리들에게 그런 질문을 하시오?" 천막 안의 대부분의 사람들의 감정이 몹시 흔들렸건만 규는 조금도 당황하 지 않고 침착하게 너의 질문에 대답했다. 해룡족을 이만큼 발전시킨 자인 만큼 나의 존재에 대해 전해들었을 때부터 내가 무슨 용건을 가지고 있는 지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후, 좋소. 역시 해룡족의 수장이시군. 까놓고 말하지. 나는 그대들이 아르 윈 왕국을 보다 효과적으로 침공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함이오." "그리 보이지 않는데, 참으로 과격한 발언을 하시는군. 어찌 자신의 나라를 침략하라는 말을 하시는 게요? 또한 우리들이 어찌 아르윈 왕국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소?" 규는 의도적으로 인상을 크게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가 은근히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기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 말을 돌려 이야기를 길게 끌지 마십시다. 그대가 나의 의도를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 바요. 드래곤의 대행자인 나의 앞에서 속마음을 숨기는 것은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알아두셨으면 하오." 속을 꿰뚫는 나의 말에 이번에는 규의 감정도 아주 약간 흔들렸다. 물론 겉은 평소와 다름없는 위엄 있는 표정이었지만, 나를 속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탁자를 손으로 소리나게 치면서 언성 을 높였다. "그 불쾌한 의심은 그만 좀 하는 것은 어떻소? 나는 ‘혹시’ 그러한 존재 가 아니라 ‘분명’ 드래곤의 의지를 받든 존재요. 인간이 본디 불완전하 게 창조되어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는 종족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 었으나, 이건 밑도 끝도 없으시군. 절대자에 대한 의심은 허무한 패망을 부 를 뿐이오. 무슨 뜻인지 아시었소?" "좋소!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지! 결국 그대는 국왕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제6왕자군과 해룡족과의 동맹을 추진하러 온 것이겠지?" 규는 나의 말을 바로 끊고 아주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자신이 의심을 한 순간과 내가 호통을 친 순간의 타이밍이 너무도 절묘하여 이 이상 이야 기를 했다가는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천막 안의 사람들이 완전히 넘어갈 듯 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실상 지금까지의 대화만으로 따지자면 단순 히 독심술을 배운 놈일 것이라 추측하는 것으로 넘어갈 수도 있을 정도였 지만, 지금 규는 직감적으로 내게 그런 단순한 독심술 같은 것이 아닌 무 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나는 그의 동물적인(?) 감각에 찬사를 보 내며 더 이상을 그를 괴롭히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후, 그렇소. 그대의 말대로 나는 제6왕자군을 돕기 위해 그대들 해룡족의 힘을 빌리고자 함이오." "몇 번이고 드래곤의 의지를 받든다는 말을 하시고 어찌 저희와 같은 미력 한 존재들의 도움을 받고자 하셨습니까?" 내 말을 끊고 끼어 드는 자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꽤 가까운 상석에 앉 은 얍삽하게 생긴 노인의 말을 향해 고개를 조금 들고 말했다. "지금껏 드래곤이 세계를 정복하였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시오? 그토 록 이나 강대한 힘을 가지신 존재이건만 어찌하여 지금껏 인간과 이 세계 의 모든 종족들이 드래곤의 발 밑에 무릎을 꿇지 않았는지는 생각해 본 적 이나 있으시오?" 나의 질문에 노인과 사람들은 몸을 조금 경직시켰다. 나는 입을 비틀어 은 근히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실상 그분의 힘이면 단 하루만에 이 세계를 굴복시켜 전하의 발아래 두게 하실 수 있으나, 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고고하신 그분께서 진흙탕 같은 인간들의 일에 직전 손을 대실 수야 없는 일이 아니겠소? 지금 그분께서는 한발 뒤로 물러나 이 상황을 내려다보시고 계신 것이오. 하지만 카류리드 전하와 처음 약조한 것을 생각하여 최소한의 도움 정도는 주고자 나를 보 낸 것이지." 약간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찌하겠소? 그렇게 계속 나를 의심하며 이 회담을 질질 끌 작정이시오?" "아니오. 그럼 이야기를 해보십시다." "역시 나의 판단대로 범인보다 현명한 판단을 하시는군." 나는 한번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규의 곁에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연에게 아주 잠깐 스치듯 시선을 주었다가 이미 준비해 왔던 본론을 천천히 이야 기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나의 이야기를 듣던 규는 레이포드 경의 유감성명이나 북쪽의 영토 를 일부 나누어 주겠다는 것에 대해서는 담담히 받아들였으나, 무역을 허 가하겠다는 말에는 꽤나 놀라워했다. 우리들이 이 정도로 파격적인 제안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리 놀랄 것 없소. 제6왕자 전하께서는 자신의 뜻을 따르는 자들은 그가 어떤 존재이든 너그러이 대해 주실 생각이시니 말이오." 규는 놀란 상태였음에도 표정으로는 조금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가 내가 또 한번 그것을 지적하자 은근히 불안해했다. 하지만 그것을 천막 내 의 사람들에게 보여 혼란을 야기하는 실수는 범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나 의 존재에 대해 이리저리 미심쩍은 생각을 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담담히 말을 이었던 것이다. "…좋소이다. 하지만 10여 년의 세월동안의 굳어왔던 앙금이 그 정도로 쉽 게 사그라지는 걸 바라는 것은 무리일터. 우리들도 한가지 생각해둔 제의 가 있소." "한번 들어나 보십시다." 내가 깍지를 쥔 채로 모든 것을 다 아는 척, 짐짓 여유롭게 행동하자 그는 더욱 불안해하며 입을 열었다. "나의 딸 연을 제6왕자 전하의 비로 맞아주시오. 물론 그분께 이미 정혼자 가 있다는 것을 아는 바이니 후궁으로 들여도 좋소. 내 눈에 넣어도 아프 지 않을 사랑스러운 딸이라 먼 곳으로 보내는 것이 가슴 아프긴 하오만 서 로의 굳은 앙금을 푸는 것에는 혼인만큼 제격인 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 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오." 규의 말이 떨어졌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그만 연이 있는 곳으로 시선 을 돌렸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지금껏 만들어 두었던 나의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한번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진실로 내가 모든 것을 다 꿰뚫는다면 이런 일에 놀라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규는 지금껏 품 고 있던 작은 의심을 한번에 날려 버리고 어느새 위압 그 자체의 존재로 되돌아와 있었다. 그는 약간의 웃음까지 띄우며 말했다. "역시 드래곤의 의지를 받드신 힐레인 경께서도 그리 생각하셨던 모양이 오! 전쟁 중이라 큰 예물은 갖추기는 힘들겠으나 작게나마 준비를 갖출 터 이니 이번에 돌아가시는 길에 당장이라도 연을 데려가시오. 물론 정식으로 식을 치르는 것은 이 전쟁이 끝난 후가 되겠으나 혼인을 치르기 전에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의 지아비 될 분과 함께 하는 것이 연에게도 좋지 않겠소! 허허. 두 나라의 큰 경사가 있게 생겼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구려!!" 규의 호탕한 웃음을 보며 나는 낭패감을 느꼈다. 그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딸인 연을 내게 딸려 보내어 후일 아르윈 왕국의 국왕이 될 카류리드의 비 로 삼게 함으로서, 오랑캐로서 취급받고 아주 없는 존재처럼 무시당했던 해룡족의 위치를 표면적으로 상승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의 신비감도 완전히 날라 가버린 이상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는 결코 아군과 의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던 기회를 날려버린 자신의 실수를 크게 자책했다. 그리고 뒤늦게 어떻게든 수습을 해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무언가 착각하고 계신 것은 아니오? 나는……." "힐레인 님." 나는 문득 귀에 익은 부드러운 음색에 시선을 은발의 여성에게로 돌렸다. 전과는 달리 연분홍빛의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연은 살포시 웃으면서 붉은색 연지를 곱게 바른 입술을 열었다. "소녀, 부족하나마 제6왕자 전하의 뜻을 따를 각오로 몸과 마음을 가꾸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런데 드래곤의 의지를 받드신 힐레인 님의 눈에 소녀의 어디가 그리도 부족해 보이시나이까."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저도 모르게 울컥 불쾌감이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 꼈다. 바로 어제 저녁에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서 저럴 수가 있느냐는, 그런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연의 가슴에 담긴 것은 아 주 티끌 같은 거짓도 담기지 않은 순수한 진실이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 는 이미 각오를 끝낸 듯 굉장히 단호했다. 그 순간 연이 스스로의 위치와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다고, 이 순간은 단지 꿈일 뿐이라고 말하며 웃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는 순간적으로 이상한 욕망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었던 가슴을 짓이기는 듯한 격한 욕망이었다. 하지만 나는 남모 르게 이를 악 물어 그것을 참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 쉰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가 부족하다 생각지는 않소." "황공하옵니다." 그녀는 함박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또 한 번의 참기 힘들 정도로 심하게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기 위하여 한 동안 말없이 있다가 깍지 낀 손을 풀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좋소. 그러면 이쪽의 조건도 이야기하지." "무언가 달리 특별한 조건이 있으시오?" 규가 미심쩍게 묻는 것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특별히 이용할 곳이 있어서 하는 말이니 해룡족의 뛰어난 궁기병 2천 을 빌려주시오. 여기로 오는 길에 10여 척의 배를 끌고 왔으니 이동에 대 해서는 걱정할 것 없소." "우리들이 10만 대군을 가진 것도 아닌데 2천이나 빼내 드린다면 국왕군을 상대할 때 전력이 부족해질 것이라 생각지는 않으시오?" "해룡족이 그리도 나약한 부족이었다면 그만 두시오. 그대들 한 명 한 명 이 모두 용맹한 전사라 생각했거늘 그것이 완전히 틀렸던 모양이구려. 내 해룡족과의 동맹 자체를 심각히 재검토해보아야겠소." 내가 강하게 나오자 규는 이 정도는 양보하자고 생각했는지 얕게 숨을 내 쉬고 단호히 말했다. "좋소. 얼마 남지 않은 큰일을 위해 우선적으로 집결시켜두었던 2천의 기 병을 바로 내어 드리겠소. 천, 네가 힐레인 경께서 원하시는 별동대의 총 대장을 맡거라." 규가 자신의 가장 큰아들인 듯한 천이라는 은발의 사내에게 명을 내렸다. 하지만 천은 그 명령에 순간적으로 싫다는 것을 표정으로 표현했다. 아마 도 자신의 부족과 떨어져 위험천만한 전선으로 파견된다는 것이 못내 못마 땅했던 모양이었다. "…소자, 해룡족의 위대한 족장이신 규·아남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천은 약간 느림 걸음으로 걸어나와 고개를 깊이 숙여 맞잡은 손을 머리 위 로 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명을 받들겠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절대로 싫다 는 감정이 확연하여 저런 놈은 영 도움이 안되겠다는 생각에 규에게 이의 를 제기하려 했다. "규·아남이시여." 그때 갑자기 꽤나 익숙한 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몹시도 무뚝뚝한 검은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다. "왜 그러는가? 유란종의 수여." "건방진 말로 들릴 줄은 알고 있으나, 부디 그 부대의 책임자를 저로 바꾸 어주십시오." 수의 말에 사람들은 갑자기 그와 왜 저런 말을 하는가 의아해하며 몹시 술 렁였다. 하지만 나는 미어질 듯한 수의 감정을 느끼며, 그가 아르윈 왕국으 로 내려갈 연을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그런 부탁을 했음을 깨달았다. "진심인가? 비록 그대가 유란종의 피를 잇긴 하였으나 내 그대를 유력한 차기 부족장으로 꼽고 있음이다. 그런데도 위험한 타지의 땅에 갈 생각인 가?" "진정한 한사람의 전사가 되기 위해, 이 순간을 기회 삼아 먼 타지의 땅에 서 경험을 쌓고자 함이니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 규는 무표정하게 수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수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내심 굉장히 감탄하는 중이었다. "아버님, 그의 의지가 저토록 확고하니 부디 청을 들어주시지요." 그때 수의 말을 들은 천이 푼수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규에게 책임자 를 바꾸어 줄 것을 원했다. 규는 수와는 달리 나약하고 패기 없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한탄이라도 하는 듯 엄청나게 괴로운 심정으로 천을 바라보았 다. 아마 그는 자신이 아들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 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종이 아닌 수를 차기 후계자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력의 중심이 유란종으로 넘어갈지도 몰랐건만, 규는 그것을 전부 감수할 각오를 할 정도로 해룡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자인 모양이었 다. "…좋다. 2천의 별동대의 총 책임자는 유란종의 수로 임할 것이니 그대는 맡은 바 임무를 마치고 반드시 해룡의 은혜가 담긴 이 땅으로 되돌아오도 록 하라." "감사합니다. 규·아남께 심려를 끼쳐드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는 조금 전에 천이 했던 것처럼 규의 명을 받들겠다는 인사를 했다. 사 실 나로서는 천이라는 놈보다 수가 훨씬 더 믿음직했으므로 이 건은 충분 히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부터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 한 기분에 제대로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유란이라면 분명 힐레인 님께서 하실 일에 큰 도움이 될 거라 믿나이 다. 그의 실력과 인망은 저의 해룡족에서도 자자하옵니다. 아, 결코 친한 친구라 추켜 올리는 것이 아니오니 믿으셔도 되나이다." 연은 그렇게 말하더니 여전히 깜찍한 보조개를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나 에게 전해져오는 그녀의 감정은 아주 조금 슬픈 듯 했지만, 카류리드의 비 가 되겠다는 결심에는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듯 몹시도 당당했다. "연……." 나는 작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당당하며 올곧은, 그래서 더 욱 아름다운 그녀를 가슴에 새기는 대신 가슴 한쪽 구석에 담아두었던 치 졸한 욕망을 버렸다. 이미 그녀의 결심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 기에, 그녀의 결심을 방해하는 것이 추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랬던 것 이다. 아니, 아니다. 실은 그것은 자신을 깨끗하게 보이려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 다. 그녀가 나이를 먹어 끝내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 해도 여전히 어린아이 인 채로 변하지 않을 나로서는 아이를 낳게 해줄 수도, 그 무엇도 해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것을 누 구보다도 잘 알기에 그녀를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카류리드 왕자가 좀 괴상망측한 놈이긴 해도 그리 나쁜 놈은 아니지 않은 가. 또한 이 나라의 국왕이 될 놈이니 아마도 연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아니, 내가 이 손으로 그렇게 되게 만들고야 말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규와 연, 그리고 모든 해룡족의 사람들을 바라 보며 말했다. "나의 군주이신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해룡족의 영원한 우방이 될 것이오. 그대들 해룡족은 어찌 하시겠소?" "물론 우리들 해룡족 역시 이 땅에 해룡의 은혜가 지속되는 그 순간까지 제6왕자 전하의 우방으로 남을 것을 약조하오." 우리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어떤 자의 손에 의해 양피지와 잉크가 앞에 놓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맹의 증거를 문서 로 남기기 위해 규가 있는 중앙으로 걸어갔고, 규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동맹이 영원할 수 있다면 좋겠나이다." 연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올곧은 의지는 이루어지기 마련이라오. 연·아남." 나는 단호한 은색의 눈동자를 가진 연을 바라보며,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유쾌하고 달콤한 그녀를 향해 다짐하듯 이야기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49 적색 가을 (1) 세레스트 성에서의 전투가 황당하게 일단락 나고 장마가 끝나갈 무렵, 트 로이 후작님의 명으로 많은 사람들이 회의장에 모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 전선에서 가까운 남부 지방에 위치한 영지에서 급히 조달하였던 3만의 원군이 믿기지 않게도 완전히 공 중 분해된 사실과, 그 동안 아군를 크게 애먹였던 그 드래곤이라는 것이 실제라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면서 백성들이 제6왕자에 대한 시선을 바 꾼 것 때문이었다. 물론 명분이 좀 생겼을 뿐, 제6왕자군에게 별달리 뾰족한 수가 생긴 것은 아니다. 최고 20만까지 추가 병력의 투입이 가능한 아군과는 달리, 병력의 보충이 거의 불가능한 제6왕자군이 3만 5천의 병력만으로 갑자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지금이 가을로 접어들려는 시기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추운 겨울동안 대군을 움직이는 것은 자살행위이 기 때문에 최고 11월 중반에는 월동지역까지 가야만 한다. 그런데 아군이 현재 집결해 있는 6만의 병력에 북부·중부지방에서 새로이 병력을 보충하 고, 휴나르 성까지 진군한 다음, 제6왕자군을 완전히 패퇴시키는 일을 겨울 이 오기 전에 전부 끝내는 것은 굉장히 빠듯하며 사실상 거의 불가능했다. 결국 올해 안에는 대규모 전투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번 내전은 올 해를 넘겨 장기전으로 치달을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나라에 큰 부담을 주 는 내전을 오래 끄는 것이 달가울 사람은 당연히 한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되는 일이 없구나. 이 나라가 어찌 되려고 일이 이 렇게 꼬이는 것인지……."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과거를 탄식만 하며 미리부터 믿음을 버리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입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다가올 미래를 바로 대비하 기 위해 반성을 하는 선에서 끝내야 할 것입니다." "그래… 세스케인." 아버님께서 고개를 끄덕이는 찰나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멎었다. 드디어 트로이 후작님께서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셨던 것이다. 그분은 사람 들을 돌아보며 짧은 인사말을 한 후에 그 즉시 본론을 꺼냈다. "카르틴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트로이 후작님의 한 마디에 장내의 많은 장군들이 안색을 바꾸었다. 그분 은 술렁이는 사람들이 조용히 시키기 위해 손을 들었다가 곧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전서구를 통해 카르틴이 중남부 국경지방의 병력이 이상한 움직 임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아직 병력이 모이는 중이라 확실한 병력은 아직 예측하기 힘들지만 적게는 5만, 크게는 10만까지도 동 원할 듯 보입니다. 아이시스 남작의 의견에 따라 그 부분에 정보력을 집중 하고 있었기에 빠른 정보의 입수가 가능했습니다만……." 사람들을 향해 그 이야기를 하는 트로이 후작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 다. 이야기를 듣던 아버님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하면서 후작님께 질문을 던졌다. "카르틴이 북부가 아니라 중남부의 병력을 집결한다면 오히려 아군에게는 좋은 일이 아닙니까? 이런 형세라면은 아군과 카르틴군에게 동시 공격을 받을 제6왕자군은 오래 버틸 수 없을 테니 이 내전은 금방 종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르틴에 대해서는 제6왕자군을 완전히 없애버린 후에 총력을 기울여 격퇴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소. 후르부크 백작." 트로이 후작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한 다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있 는 아이시스 남작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지난번 관문을 차지했을 때의 공 로와, 얼마 전에 있었던 세레스트성에서의 공로―비록 드래곤의 등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패하긴 했으나 일단 기본적인 작전을 짠 것―를 인정받아 그는 트로이 후작님의 큰 신임을 얻은 상태였다. 그래서 이번 일의 설명도 그가 맡게 된 모양이었다. "카르틴 왕국군은 동부의 영지들을 침략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 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파나인 공작님은 아이시스 남작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인상을 쓰며 말 했다. "단순한 침략일 뿐이었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이 반년에 가까운 시기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이제서야 병력을 움직이겠습니까. 카르틴이 식량이 극도로 부족한 불모지를 영토로 삼고 있는 것도 아닌데, 식량 수탈을 위해 서 가을이 되기를 기다린 것도 아닐 테지요."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사실 카르틴의 동향에 대해 서는 항시 의심스럽게 생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그의 말은 굉장히 흥미로 웠다. "카르틴은 지금 제6왕자군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결국 지금 움직이고 있는 그들 병력은 제6왕자군의 적군이 아닌 원군인 것입니 다." "뭐라고? 그렇다면 그 쳐죽일 제6왕자가 카르틴과 손을 잡았다는 것인가?! 제 혈육을 해하려 한 것으로 모자라 나라까지 팔아먹겠다는 심산인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계시던 이크쟌트 후작님이 언성을 높였다. 에렌 시아 님의 일로 그 누구보다 제6왕자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한 그분은 실핏 줄이 붉어져 나올 만큼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크쟌트 후작님의 말이 끝나 기를 기다리던 아이시스 남작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다시 이야기를 이었다. "추측컨대 카르틴은 제6왕자군이 완전히 벼랑으로 치달을 때까지 기다렸다 가 손을 내밀어 자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든 것입니다. 후일 그것을 빌미로 간섭을 하기 위함이었겠지요. 제6왕자로서도 그리 달갑지는 않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드래곤의 가호라는 명 분을 내세워 백성들의 신임을 얻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병력 차원에서 심각 한 열세이니 말입니다." "제6왕자군을 완전히 패퇴시킬 듯 하면 이상한 기적이 일어나고, 완전히 몰아세웠나 싶으면 새로운 원군이 나타나고… 정말 미칠 노릇이로군!!" 아버님은 고개를 저으며 또 한번 탄식했다. 하지만 나는 별다른 말없이 아 이시스 남작의 말을 계속 경청했다. 그의 말을 듣는 편이 탄식하는 것보다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라면 이번 내전은 쉽게 끝나지 못할 것입니다. 에베리아와 리샤스 왕국이 버티고 있는 이상, 카르틴이 위험을 감수하고 전력(全力)을 기울여 반드시 제6왕자군을 승리시키려 들지는 않겠지만 이 내전을 가능한 한 길 게 끌기 위해 여러 가지 획책을 꾸밀 것만은 분명합니다. 아르윈 왕국의 국력을 소진시켜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이지요." "맙소사!! 결국 제6왕자로 인해 이 나라가 완전히 먹힐 지경에 이르는군!!" "처형식 때 그 죽일 놈을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아이시스 남작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크게 술렁였다. 나는 별 소득 없이 제6왕자를 욕하는 사람들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아이시스 남작 덕분으로 카르틴의 움직임을 빠르게 잡을 수 있었으 니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일경이라도 빨리 부대를 파견해야 하지 않겠습니 까. 겨울까지는 3개월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카르틴이라고 해서 추운 겨울 동안 최소 5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돌아다닐 재주는 없을 터이니, 겨울이 되기 전에는 무조건 병력을 월동지역으로 이동시켜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군이 최고 2개월 동안 카르틴 왕국군을 저지할 수 있다면 그들은 카르틴 왕국 내나 국경 지역에서 월동을 해야합니다. 그렇게 올해 안에는 카르틴 이 제6왕자군과 합류할 수 없도록 저지할 수 있다면, 아군은 올해동안 가 능한 한 많은 병력을 리아 영지 부근에 집중시켜 두었다가 겨울이 지나자 마자 대공세를 펼쳐 카르틴이 도착하기 전에 제6왕자군을 완전히 격퇴시키 거나 최소한 유리한 입장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군! 세스케인 경!! 이렇게 손을 놓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부대를 편성하도록 하세!!" 완전히 죽을상을 하고 있던 이크쟌트 후작님이 갑자기 희색을 띄며 말했 다. "제가 하고픈 말을 대신 해주시는군요. 역시 세스케인 님이십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이시스 남작이 웃음을 띄우며 말했다. 그리 고 트로이 후작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 말대로 아군은 이곳에서 제6왕자군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함과 동시 에 국경지대로 3만의 별동 부대를 보내 카르틴을 저지할 것이네. 그리고 그 별동 부대의 책임자로 자네를 임할 예정이니 내 명을 받들도록 하게."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트로이 후작님!! 반드시 카르틴 왕국군을 저지해 보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그분의 명을 받들었다. 상당히 중요한 임무였고, 반대로 생각하면 공을 세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내가 책임자가 되는 것에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옆자리의 아버님께서 잘 해보 라는 듯이 알게 모르게 등을 두드리는 것을 느끼고 살짝 웃어 보이려던 찰 나에 순간적으로 아이시스 남작이 입술로 손을 가져가는 것이 나의 시선을 자극했다. 아이시스 남작에게 있어 그 행동은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신 호였던 것이다. "아이시스 남작. 내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세스케인 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저지하실 생각이십니까?" 그의 물음에 아버님께서는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평민 주제 에 건방지다고 생각했던 것이리라. 하지만 나는 불쾌함보다는 약간의 의아 함을 느끼며 그의 물음에 답을 해주었다. "일단 기사단이 없는 측면과 후위를 기습하여 카르틴의 기사들이 도달하기 전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힌 후 후퇴하는 기본적인 방법을 쓸 것이네. 그리 고 카르틴 군의 행군 예상로에 임시 요새를 설치해 카르틴 군의 전진을 방 해할 생각이지. 항시 우리 나라를 상대로 크고 작은 침공을 계속해왔던 카 르틴인 만큼 압도적인 공성기를 가졌을 터이지만, 비교적 허술한 요새라도 몇 일은 카르틴 군의 행군을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 아니겠나. 또한 행군 로에 요새를 다수 건설해 첫번째 요새가 무너지면, 두번째 요새에서 재집 결해 다시 카르틴 군을 상대하는 식이면 충분히 카르틴 군의 행군을 지연 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네." "현명하신 판단이시군요." 아이시스 남작은 옅은 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입술을 만지고 있는 손을 떼 지는 않고 있었다.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카르틴이 최남단에서 국경을 넘은 후에 리아 영지를 통해 위로 북 상해 올라온다면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제6왕자군이 병력을 휴나르 성에 집중시키고 있으며 여유병력이 부족하다고는 해도 리아 영지의 남단은 완 전히 제6왕자의 세력권입니다. 물론 저희들이 이곳에서 제6왕자군을 저지 할 터이지만 마음대로 활기를 치고 돌아다니면서 요새까지 건설하기는 약 간 불안하지 않으실 지 걱정이 되는군요." "그렇다면 뭔가 더 좋은 계획이라도 있는가? 자네에게 도움을 구하고 싶네 만." 나는 아버님께서 금방이라도 건방지다며 소리를 지르시려는 것을 손을 들 어 막으면서 아이시스 남작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는 비록 평민이었지만, 최소한 머리를 쓰는 것에서만은 나보다 뛰어난 자다. 어떤 상황에서든 예 외는 존재하며, 마찬가지로 평민 중에서도 가끔씩 귀족들의 능력을 상회하 는 특별한 재주를 가진 자들이 태어날 수 있다. 그리고 아이시스 남작은 스스로 귀족의 자격을 움켜쥠으로서 그것을 증명해 보였다. 사실 아이시스 남작과 같은 예외적인 자가 아닌, 대부분의 천한 무지렁이 평민들이라도 내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그들보다 비교적 뛰어난 인간일 뿐이지, 결코 모든 면 에 있어 절대적으로 뛰어난 인간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렁이 도 꿈틀대는 재주가 있듯 평민들에게도 그것이 무엇이든 한가지씩 뛰어난 부분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 사실들을 무시하고 경솔하게 움직일 생 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한낱 벌레가 한 행동이라 할 지라도 도움이라는 것 은 고마워해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내가 별달리 화를 내지 않는 것으로 보이자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무례 함을 사해달라는 뜻을 밝힌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르틴이 최대 10만 대군을 집결하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방관만 하는 척 했지만 실상 뒤로는 병 력을 투입할 준비를 해왔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인데다가, 무엇보다도 그 들이 아르윈의 국경에 있던 병력을 그대로 제6왕자군의 원군으로 투입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시스 남작은 계속 말 을 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내전으로 인해 한창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게다가 제6왕자군의 쪽에서는 아군을 상대하느라 아예 카르틴과의 국경선 을 포기하다시피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카르틴 왕국 측에서는 우리 아르윈 왕국과의 국경선을, 특히 동남부 전선을 크게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때문에 국경의 병력을 그대로 원군으로 투입할 생각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네 말은……." "카르틴의 병력을 저지를 하는 방법이 단순히 그 앞길을 막는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세스케인 님의 역량이라면 무슨 뜻인지 깨달으 셨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는 싱긋 웃으며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잇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더 이상 그리 자세한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무슨 뜻인지 깨 달았기 때문이다. "고맙네. 자네의 조언을 참고삼아 반드시 카르틴의 병력을 저지시켜 보이 겠네." "저의 미력한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니 기쁠 따름입니다. 세스케인 님." 나의 진심 어린 감사의 인사에 아이시스 남작은 그렇게 말하면서 입술에서 손을 뗐다. 중요한 이야기는 끝났다는 신호였다. 그 모습을 보던 트로이 후 작님이 다시 나서 이외의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미 이에 대해 서는 아이시스 남작과 이야기가 마쳐진 상태였던 모양이다. 회의는 그 이후로도 가을동안 제6왕자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소모전 과 여러 작전에 대한 화제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그 회의가 무사히 끝나고 날이 어둑해졌을 무렵, 나는 아버님과 헤어져 나의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복도를 걷다가 눈에 익은 갈색의 문이 굳 게 닫힌 방의 앞에 섰을 때, 나는 약간 큰 목소리로 그 방의 주인을 불렀 다. "세미르. 안에 있니?" 나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그리고 그 문을 통해 천천히 걸어나온 세미르는 나와 똑같은 색의, 하지만 약간은 탁한 느낌을 주는 청보랏빛의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다보았다. "세스 형……." "들어가도 되겠니?" "당연한 걸 왜 묻는 거야. 들어와." 세미르는 조금 웃으며 나를 안으로 안내했다. 그 모습에 나는 안도감을 느 끼며 손으로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누가 보면 쪽팔린다고… 내가 몇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이와는 관계없이 넌 나의 귀여운 동생이지 않니. 게다가 당연히 아무도 없으니까 한 짓이지." 나는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반쯤 열린 문을 완전히 열어 세 미르의 옆을 비켜 먼저 안으로 들어왔다. 세미르 역시 나를 멍하니 바라보 다가 곧 방문을 닫고 나를 따라 안쪽으로 걸어왔다. 방의 한쪽에 비치된 의자에 몸을 맡긴 나는 맞은 편에 세미르가 앉는 것을 보며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여 세미르에게로 가까이 했다. "이제 마음은 완전히 정리한 거니?" "응. 정리했어." 예전과 같은 활기참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그의 말에서 어떤 의지 같은 것 이 느껴져 나는 겨우 안심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약하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아무래도 카르틴 국경선으로 나가보아야 할 것 같다. 너는 그 동안 제 6왕자군과의 소모전을 치르기 위한 병력에 백인장 정도의 직책으로 투입될 거야. 물론 아버님의 힘으로 연대장까지도 가능하지만 넌 전장에서 뛰어본 경험이 없으니 그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좋을 듯 싶어서 일단은 그렇게 하 도록 내버려뒀단다. 섭섭한 것 아니지?" "섭섭하긴, 세스 형의 말이 맞아. 무작정 지위만 높다고 좋은 것은 아니니 까." 세미르는 싱긋 웃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하지만 이번의 웃음은 조금 어색 했기에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세미르, 어쩌면 내가 너를 너무 강요하는 것일지도 몰라. 하지만 너를 이 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네가 나를 원망하는 것 은 슬프지만 너를 위한다면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는 거야." "됐어. 내가 형을 원망할 것 같아? 내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 알잖아." 세미르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 동안의 일로 녀석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것 을 느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고는 세미르가 내게 직접적으로 좋아한 다는 둥의 말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세미르." "형이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어차피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겠 지……." 세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올려둔 팔 위에 고개를 얹었다. 아직 어린 그의 눈동자가 벌서부터 탁하디 탁한 슬픔이 담고 있는 것을 느끼며 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나는 말이야… 언제나 형처럼 되고 싶었어. 나는 공부나 검술 연습 같은 것은 정말 싫었고 금방 실증을 느끼고 내팽개쳐 버렸지. 하지만 형은 달랐 어. 싫은 일이든, 귀찮은 일이든 자신이 해야만 한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조 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 즉시 행동을 가했으니까. 그런 형은 정말 남자답고 멋있었어." "바보 같구나. 내가 그렇게 대단하다 생각지는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언제 든 그렇게 될 수 있는 일이야. 아니,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지." "그럴까……?" 세미르는 얼굴을 더욱 파묻으며 말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머리 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흔들리지 마라. 네가 옳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은인을 저버리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닐 테지만, 그것으로 인해 이 나라의 아무런 죄도 없는 수많은 백성들을 오랜 내전으로 괴롭히는 것 역시 옳은 일은 아니다. 너라 면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지 알 것이라 생각해." "…그만…하자, 세스 형. 그런 얘기 자꾸 들으면 골이 빠개질 거 같아. 사 실 난 머리가 그리 좋지도 못하잖아." 세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홀로 피식 웃어버리더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나 도 굳이 말을 하기보다는 계속 세미르를 쓰다듬어 주었다. 세미르에게 무 척이나 모질 가을이 시작되기 전에 조금이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 스토리가 너무 끌리는 듯 해서 한숨이 폭폭 나와요. 사실 여기까지가 6권 분량이지만, 이것저것 늘어지는 문장들을 줄여서 더 끼워넣을 예정입니다. 과연 아비스라라가 마감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아!!! T0T hongik1999@hanmail.net http://cafe38.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49 적색 가을 (2) 황금색의 독수리가 수놓아진 깃발이 창공을 가득 메웠다. 그것은 8만에 이르는 카르틴의 용맹한 전사들이 하나같이 굳은 충성을 맹세한 위대한 군 주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깃발은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는 내려져야만 하는 운 명이었다. 제6왕자가 아군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신의 수호룡 아래에 있음 을 나타내는 붉은 드래곤의 깃발을 세울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명예스 러운 카르틴의 기사로서는 탐탁치않은 제안이었지만, 저들의 반발을 무마 시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한동안 나의 군주를 상징하는 그 깃발을 아쉽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내렸다. "후, 아르윈이라……." 점점 넓어지는 갈색 빛의 아름다운 대지에 입술이 저절로 비틀어졌다. 크 로시아 대륙의 4대 왕국 중 가장 유리한 지리적 조건과 그에 못지 않은 비 옥한 영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반대로 가장 약한 국력을 가진 얼간이들 의 나라. 리샤스와 에베리아의 견제 덕분으로 지금까지 명을 유지할 수 있었을 지 모르나 폐하가 계시는 한 놈들이 우리 카르틴 왕국에 머리를 조아릴 날도 멀지 않았으리라. "루인 공작님. 아르윈을 너무 얕보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론 어느 면 으로 보나 상대가 안 되는 나라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나 지나친 과 신은 실수를 불러오실 수 있습니다." 곁에서 함께 말을 타고 가던 헬뮨트 후작이 내가 던진 그 중얼거림을 들 었던 것인지 쓸데없는 말을 달아왔다. 매사에 의심과 불만이 차고 넘치는 헬뮨트 후작 덕분에 작은 짜증이 몰려왔지만, 폐하의 명을 경솔하게 처리 할 생각은 없었기에 그냥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폐하의 명으로 하는 일이니 당연히 신중을 기할 것이오. 그러나 갑작스 럽게 나타난 우리들 8만의 원군에 아르윈의 놈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 둥댈 것이 분명할 터. 실상 평시에도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진군을 막기에 만 급급했던 허약해 빠진 놈들이지 않소?" "예, 맞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가셔서 호칭을 조금 조심해주십시오. 자칫 큰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헬뮨트 후작이 내 말에 토를 달았다. 하지만 그 역시 아르윈의 놈들이 하찮은 놈들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피 식 실소를 머금었다. 나는 그대로 헬뮨트 후작과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제6왕자의 본군과 합류하기 위한 길을 이어갔다. 적군과 조우할 가능성이 적은 최남단의 국 경을 넘는 중이었기에 가능했던 여유였다. 게다가 불과 한달 전까지만 해 도 뜨겁게 내리쬐던 폭염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선선한 바람이 우리들을 맞이함으로서 이번 진군은 그 어느 때보다도 편한 길이 되고 있 었다. "이것이 아르윈에서 가장 비옥하다는 리아 영지인가." "우리나라의 북동부지방 상당부분이 건조한 황야로 뒤덮여 있으며 에베리 아도 그리 사정이 다르지 않은데다가 리샤스는 거의 사막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아르윈은 축복 받은 나라죠." "훗, 아무리 축복 받으면 뭐하나. 그곳에 사는 놈들이 머저리 같은 놈들인 것을. 우리 카르틴 왕국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면 그 나라는 예전에 대 제 국으로……." 곧 우리나라의 영토가 될 비옥한 토지들을 한번 죽 둘러보며 느긋하게 웃 고 있던 도중 멀리서 한 마리의 말이 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눈 에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파발의 모습에서 불쾌함을 느꼈다. 본능 적으로 저 놈이 가져오는 것이 그리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라는 확신이 섰 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급히 다가온 전령의 보고는 내 예감이 적중했 음을 알려주었다. "레안츠 요새 수비대 대장이 총사령관님께 보고 드립니다! 팔월 이십오일 새벽 아르윈 국왕군의 침공으로 인해 국경 지방의 주요 보급기지인 레얀츠 요새가 고립됐습니다! 현재 요새에 병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요 새를 지키기가 힘든 상황이지만 자랑스런 카르틴의 기사답게 목숨을 걸고 끝까지 요새를 사수해 보이겠습니다. 카르틴에게 영광을!" "뭐라고?!" 내가 그 전령의 보고를 듣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크게 소리 치 자 헬뮨트 후작이 옆에서 나에게 조언을 해왔다. "진정하십시오! 총사령관님께서 이 정도 일로 부하들 앞에서 동요하는 모 습을 보이는 것은 군 사기 상 좋지 않습니다." 헬뮨트 후작의 말에 일단 화를 가라앉힌 나는 강하게 말고삐를 거머쥐었 다. "왕위를 두고 저들끼리 집안싸움을 하는 주제에, 감히 우리나라를 침공 해?!" 거기까지 말한 나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내전을 하느라 진을 빼고 있는 그놈들이 감히 우리나라를 침략할 생각은 못할 거라 판단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레얀츠 요새를 공격한 그놈들의 목적은 점령이 아니다. 놈들은 올해 안에 아군이 제6왕자군과 합류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직접 아군의 앞길을 막는 방법 대신, 우리나라 국경지방의 중요 거점을 공격하는 것으로 아군 의 회군을 유도하여 시간을 지체하게 할 요량인 것이다. 나와 마찬가지인 생각을 한 것인지 주위의 장군들까지 낭패인 얼굴을 하 고 있는데, 헬뮨트 후작이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 었다. "그러기에 저들을 얕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갑자기 머리에 열이 뻗쳐오르는 것을 느끼고 크 게 소리쳤다. "당장 전군에 알려라! 레얀츠 요새를 향해 회군한다!! 내 당장에 그놈들을 쓸어버리리라!" "곤란합니다. 국경에 붙은 벌레들을 처리하기 위해 너무 시간을 지체하면 올해 안에 제6왕자군과의 접선이 어려워 질 터인데……." "시끄럽소! 그놈들을 모가지를 쳐내는 데는 하루면 족하오!" "이번 일은 폐하께서 완전을 기하기 위해 직접 저희들에게 하명하신 것입 니다. 따라서 폐하의 믿음에 금이 가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셔야 할 것입니 다. 만약 이번 일로 인해서 작전에 차질을 빚게 된다면 총사령관께서 모든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헬뮨트 후작의 말이 들려오는 순간 완전히 흥분했던 머리가 순식간에 확 식어 내렸다. 그러나 자랑스런 카르틴왕국의 기사로서 자국의 영토가 적국 의 발아래 놓이는 것을 이대로 좌시할 수는 없었다. 좋다!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진다!! 나는 국왕폐하께서 하사하신 보검을 힘주어 잡으며 조금 전의 명령을 반 복했다. "총사령관으로써 명령한다. 전군은 레얀츠 요새를 향해 회군한다! 이는 시 간 싸움이니,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놈들을 섬멸시키기 위해 서둘러야 할 것이다!!" "예. 총사령관님!" 이제 막 국경을 넘어 진군을 하려던 차에 그 놈들의 의도대로 회군을 한 다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리 만무했지만 그대로 국경지방이 초토화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조금 전의 그 명령을 반복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려 곁에 서있던 부관에게 소리쳤 다. "그리고 너는 지금 당장 수도로 날릴 전서구와 가장 빠른 전령을 대기시 키도록!" "옙." 명을 받은 부관 중 하나가 재빠르게 말을 몰아가는 것을 보자니 절로 이 가 갈렸다. 부득이 하게 폐하께 증원을 요청해야만 하는 사실이 내 자신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 같아 화가 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동안 앞을 노려보고 있던 나는 문득 명을 받지 못해 대기하고 있던 부관들이 내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나약한 태도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라 뭐라 한마디하려고 하던 중에 유일하게 담담한 표 정이던 헬뮨트 후작이 내게 짜증스런 충고를 던졌다. "저희들이 아르윈 왕국을 너무 과소 평가하여 부주의하게 움직였습니다. 공작님의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니 그 살기는 아군의 장군이 아닌 적군의 병사들에게 써 주십시오." "건방지군, 헬뮨트 후작." "용서하십시오. 제가 너무 무례하였습니다. 사령관님." 내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경고하자 헬뮨트 후작은 허리를 깊게 숙여 사과 를 했다. 하지만 그의 메마른 회색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이나 두려움 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아주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지만, 그 이상 으로 화를 가라앉혀 주는 작용도 했다. 최소한 나를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놈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생각만큼 제6왕자군과의 합류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듯 하다는 생각과 함 께 나는 고개를 들어 북쪽을 향했다. 감히 카르틴 왕국을 침략한, 레얀츠 요새에 주둔하고 있을 그 놈들에게 쉬운 죽음을 내려주지 않으리라. ======================================================= 복귀입니다. =_=;;; 전쟁은 재미없어요. ㅜ.ㅜ;;;;;;;;;;;;;;;;;;;;;;;;;; 쿨럭쿨럭................. 허접스런 글이지만 즐독하시길 바래요.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49 적색 가을 (3) 시야에 잡히는 것은 강렬한 색의 불길. 나의 마력에서부터 비롯된 그 위험한 화염들은 끊임없이 힘없는 인간들의 뼈와 살을 씹어 삼기며 타오르고 있었다. "체라스 이스!" 이제 막 불길이 일기 시작하고 있는 집들의 사이로, 이 마을의 주민으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다급히 뛰어 나왔다. 그의 시선은 말발굽에 밟혀 넝 마와 다를 바 없는 남자아이의 시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사내가 외친 말과 나의 짧은 카르틴어 실력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도 시체로 변한 아이는 그 남자의 아들인 모양이다. 머리와 상반신이 완전히 짓뭉개져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작은 몸을 꽉 껴안은 그 중년 남자는 붉은 눈물을 쏟아내며 이쪽을 향해 소리질렀다. "카 테이라느, 류스, 류스!" '류스' 라. 나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되새기며 흑마를 탄 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카르틴의 진군을 저지하기 위해 편성된 3만 대군의 젊은 사령관. 그는 너무도 고귀한 성품을 가지시어 땅을 기는 더러운 벌레들에게도 선 뜻 손을 내미는 존재였지만, 추잡한 욕지거리를 들으면서도 자비를 담은 손길을 그대로 계속 유지할 지는 미지수인 것이다. 나의 흥미로운 시선 가운데 그는 입을 조금 열었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 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가엾게도." 이런, 내가 정말 멍청했다! 비록 '벌레' 라고는 하나 저 남자가 새끼를 잃은 부모임에는 틀림이 없지 않은가. 따라서 저 남자가 주제를 모르고 감히 인간님을 향해 이를 드러냈 다고는 해도 그것은 화를 낼 소재이기보다는 동정의 대상인 것이다. 그가 얼마나 자비로운 존재인지, 내가 벌써 그 사실을 잊었단 말인가?! "류스!! 테이라느 칼랴!" 문득 들려오는 시끄러운 고함소리에 나는 산만하게 머리 속을 떠돌던 생 각을 끊고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조금 전 그 카르틴의 남자가 주변에 떨 어진 나무 막대기를 들고 이쪽으로 돌진하며 낸 소리였다. 내 수준에서 류 스 이상의 말을 해석해 내는 것은 절대 무리였지만, 아군의 총사령관인 그 를 저주하는 내용임은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적국의 평민 나부랭이에게 끊임없이 욕을 먹으면서도 단지 안타까운 표정일 뿐! 역시 그의 마음 씀씀이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렷!" 순간, 그가 흑마의 고삐를 당겨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동시에 검집 속에 안전하게 보관해두고 있던 애검의 위험한 검날을 하늘 높이 쳐들었 다. 그가 비록 비단결 같이 곱고 하해에 비견될 정도로 넓은 마음씨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 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이라는 임무를 가진 이상 저 사내 를 살려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곧장 자신에게로 돌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도 카르틴의 사내는 이쪽으 로 전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사랑했던 작은아들의 처참한 최후에 공 포까지 마비되어 버린 모양이다. 투칵-!! 눈을 부릅뜬 머리가 허공에 피를 흩뿌리며 날아올랐다. 용맹하며 노련미 넘치는 장군들마저 감탄하는 그의 검술 실력 덕분에 사내는 자신이 죽는 순간도 깨닫지 못했으리라. "세스케인님?" 앞서 뛰쳐나갔던 세스케인이 다시 되돌아 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는 자 신이 죽인 사내의 시체 앞에 선 채 이쪽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았다. 그 덕 분에 나는 불가항력으로 말을 몰아 그에게로 직접 다가가야만 했다. 군 총 사령관의 직속 마법사인 내가 그의 곁에 오랫동안 떨어져 있는 것은 직무 태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트로이 후작이 세스케인의 후르부크 백작가가 친밀하지 않았더라면, 아니, 세스케인의 능력과 신념이 조금만 덜 미더웠어도, 트로이 후작이 단 하나 신임할만한 마법사인 나를 마음놓고 세스케인에게 맡기는 일은 없었을 터 이고, 지금 이렇게 내 발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야 할 이유도 생기지 않 았을 텐데!! "세스케인님." 이번에는 나의 부름을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처음 내게 보인 세스케인의 얼굴은 그 가엾은 사내에 대한 동정 때문인지 몹시도 안타깝다는 식의 표정이었다. 그러나 주위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니 는 다른 병사들의 눈 때문인지 그는 곧 평소의 근엄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내게만은 자신의 진짜 심정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인가. 나도 참 굉장한 신임을 받고 있군. "후, 유넨… 나도 의외로 무른 면이 있군. 반성해야겠어." 세스케인은 단번에 절명한 남자의 시체를 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 다. 그가 하고 있는 같잖은 꼬락서니에 몹시도 비위가 꼴렸지만 이 정도로 페 이스가 무너졌다면 나는 이미 열백 번은 토막나서 들판을 뒹굴고 있을 것 이다. 이럴 때는 그렇지 않다고, 당신은 무조건 잘났다고 말하며 눈물이 날 정도로 절대적인 충성심을 나타내 보여야지. "그렇지 않습니다… 세스케인님은……." "체라스!! 야난!!" 내가 언제나와 같이 그에게 침 바른 거짓말을 해주려는데 갑자기 어떤 여 자의 고음이 나의 말을 가로채었다. 조금 전 세스케인이 죽였던 사내의 집 에서 또 다른 중년 여자가 크게 소리를 지르며 튀어나왔던 것이다. 일가가 한곳에서 몰살당하려는 것인가. 차라리 가능한 한 멀리 도망가는 것이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위해 좋았을 것. 나는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존재에 작게 한숨을 쉬었다. "꺄아아아아!!" 바로 우리들 앞에 쓰러진 아들을 향해 달려온 여인이 세스케인의 검에 팔 을 잘리고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세스케인은 검은 멈추지 않고 그녀의 복부에 검을 찍어 횡으로 그었고 산채로 뱃가죽이 갈린 여자는 몸을 껄떡 대며 스스로 내장을 밖으로 쏟아냈다. 하지만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내장과 팔까지 잃고도 그녀는 아직까지 그 질긴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있 었다. 이번에 세스케인은 조금 전의 그 남자에게 했던 것과 같이 깨끗하게 그녀 의 목을 치는 예의 그 '무른 모습' 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대신 이를 악 물 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러 그녀의 몸을 참혹하게 난도질했다. "병사들이여!!" 세스케인이 여인의 피로 흥건한 검을 하늘 위로 쳐들며 소리쳤다. 그리고 목청을 돋워 주변의 모든 병사에게 들리도록 다시 한번 자신의 명령을 번 복했다. "곡식과 재물을 약탈하고,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내 어 목을 쳐내라! 여자와 어린아이까지 팔다리를 잘라내고 산채로 불구덩이 에 던져라!! 수백 년간 우리 아르윈 왕국의 이웃과 형제를 살해해 왔던 카 르틴이다! 그 추악한 놈들에게는 일말의 자비도 필요하지 않다!! 그들이 우 리들에게 했던 것만큼 되돌려 줘라!" "오오오옷!!" "쥐새끼 같은 것들! 여기 있다!! 더러운 카르틴 놈들!!" 세스케인의 외침에 이미 흥분해 있었던 병사들이 더욱 흥분하여 환호성을 질렀다. 세스케인은 몇 번 더 그 명령을 반복하다가 지나칠 정도로 착실하 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병사들을 바라보며 소리 치는 것을 멈추었다. 더 이상의 명령은 의미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잔당이 있나 돌아보도록 하지……." "예, 세스케인님." 나는 그의 뜻에 따라 함께 말을 몰았다. 카르틴의 국경에 위치한 작은 마을. 제6왕자군의 원군이 되기 위해 대부 분의 병사들이 떠난 이곳에 변변찮은 실력을 지닌 잔당 같은 것은 남아있 을 리가 없을 터. 말은 잔당을 처치한다는 것이지만 세스케인도 실상이 그렇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호위기사도 달지 않고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다. "캬스테이나! 체라스 이즈!!" 수많은 소음들 중 찢어지는 듯한 고음이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그쪽에는 갓난아이를 꼭 안은 여인이 병사들의 손에 거칠게 머리채를 붙들 린 채로 밖으로 끌려나오고 있었다. 거친 병사들은 그 갓난아이를 떼어내 려 했고, 그녀는 자신의 아들로 보이는 아이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 부림쳤다. 그러나 여인의 몸으로 병사들의 억센 손에서 갓난아이를 보호하 는 것은 무리였다. 번들번들하게 기름이 끼인 병사는 그 여인을 바로 죽이 지 않고 대신 허름한 치마를 찢어내기 시작했다. 그 여인은 너무나 놀라서 발버둥을 쳤지만, 곁에 있던 자신의 어린 아들이 다른 병사의 검에 의해 토막이 날 위기에 처하자 자신에 대한 일은 잊어버리고 옆으로 손을 뻗으 며 아이만은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시끄러워!! 계집아!!" 카르틴어를 모르는 병사는 그녀의 하반신을 깔고 앉으면서 크게 소리쳤 다. 하지만 카르틴어를 안다해도 이성을 잃은 병사들이 잔인한 손속을 멈 추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음……." 작게 신음을 한 세스케인이 미미하지만 분명 안타까움을 담은 표정을 얼 굴에 떠올리며 그 광경에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을 병사들 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웠고 세스케인의 표정을 제대 로 본 것은 나 하나 뿐이었다. 분명 눈앞에서 죽어 가는 평민들을 벌레 이상 개 이하 정도로 밖에 인식 을 하지 않고 있지 않음에도 그들이 당하는 장면에도 저토록 연민의 감정 을 내비치는 것을 미루어 볼 때……!! 아무래도 어린 시절 세스케인은 잠 자리 같은 벌레를 토막내는 장난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을 듯 싶다. 아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마음씀씀이던가! 어찌됐든 그가 괴로워하고 있는 바였으므로 나는 충실한 심복답게 조심스 레 그의 상태를 걱정했다. "세스케인님. 잠시 자리를 옮기심이 어떠하신지요. 이런 일은 다른 장교들 과 병사들에게 시키셔도……." "아니, 이곳에 있겠다. 내가 내린 명령인데 홀로 물러나 깨끗한 곳에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 너 정말 잘났다- 라고 말해주는 대신 나는 그의 말에 감동 받은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역시 세스케인님이시군요. 하지만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적국의 백성들 에게도 이렇게나 마음을 써주시다니……." "그렇게 생각하나?" "예… 사실 카르틴은 지겨울 정도로 우리나라를 침범하는 절전치 원수와 같은 자들이지 않습니까." "글쎄. 비록 이 마을의 주민들이 적국인 카르틴 왕국의 백성이긴 하나, 이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존재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선량한 양민일 뿐이다. 우리나라를 침범하기를 원했던 자들도, 무장을 한 군인도 아닌 이들이 저 토록 잔인한 처우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양민학살이 내키지 않으면 작전이고 뭐고 다 때려 치던가! 어차피 저런 변방의 평민 같은 거, 인간이라 생각지도 않는 주제에… 정말 웃기지 도 않는 놈이다. 나의 빈정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속으로 빈정대고 있으니 모르겠지-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국경 지대에서 어렵사리 생활을 영위하며 죄 같은 죄 한번 짓지 않고 살 아왔을 그들을 입에 담기도 끔찍할 방법으로 처참하게 살해하는 것을 옳다 할 수는 없는 일.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릇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더욱 큰 가치를 위해서, 우리 아르윈 왕국을 위 하여 해야만 하는 일이다. 비록 절대적으로 옳은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스 스로가 해야만 한다고 판단한 일에는 가슴이 아플지언정 티끌의 망설임도 있을 수 없다." 그는 거창한 말을 길게 늘어놓아 그렇지 않아도 배배 꼬이고 있는 사람의 뱃속을 더욱 아니꼽게 만들어 주었다. 뭐, 그 같잖지도 않은 연민의 감정에 이끌려 다니지 않고 현실을 바라본 다는 것은 칭찬할만하다만. 세스케인이 영 내켜하지 않으면서도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후에 마을에 도착할 카르틴군 때문이었다. 아군이 퇴각한 후 마을에 도착한 카르틴의 장군과 병사들이 비참하게 죽 은 동포들을 보고 크게 흥분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이대로 국경지방이 초토화되는 것을 지켜볼 수만도 없는 그들은 분명 상당수의 추격대를 보낼 것이다. 아마도 추격대는 우리들을 따라잡기 위해 기병으로 이루어 질 것 이며 아군의 학살이 심하면 심할 수록 그 수는 더욱 많아진다. 기병대를 떼어내는데 성공한 아군은 그 즉시 내가 속한 고위 마법사와 정 예 장궁병을 태운 기병을 파견, 카르틴 본진의 후미와 측면을 공격한다. 그 리고 기사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밀집 진형을 취한 중장보병들에게 대단위 마법을 시전함과 동시에 장궁병들의 화살공격을 시킨다. 이렇게 되면 적은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은 물론, 끊임없는 기습 속에 진군 속도가 느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카르틴 원정군의 발목을 잡아 올해 안에 제6왕자군과 화합하지 못 하도록 만들기 위한 우리들의 작전이었던 것이다. 화르륵- 쿠웅! 강렬한 마나의 흐름과 함께 묵직한 파괴음이 들려왔다. 얼마 떨어지지 않 은 곳에서 다른 마법사들이 화계의 마법을 시전한 모양이었다. 대체적으로 조용하고 얌전한 마법사들이건만, 전쟁 속의 광기에 휩쓸려버린 것인지 그 들은 양민학살 겸 마을파괴공작에 필요 이상으로 분발해 주고 있었다. 그다지 강요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상황에서 혼자 가만히 서있기도 뭣 하여 나는 바로 근처에서 쓰러지지 않고 건들거리는 건물을 목표로 간단한 마법을 시전하기로 마음먹고 가볍게 내 마법서의 앞 페이지를 폈다. "그만둬." "…세스케인님?" 세스케인이 손을 들어 마법을 쓰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었기에 나는 조금 의아해 하면서도 다시 마법서를 덮었다. "곧 있을 카르틴과의 접전에 큰 역할을 해야 하니 이런 일에는 크게 열을 쏟지 않는 편이 좋아. 지속적으로 무리를 하다가 후에 몸이 크게 상할 수 도 있음을 주의하도록." 네가 말하지 않아도 쓸데없는 일에 무리를 할 마음은 전혀 없음이다! 친 한 척 걱정스러운 말을 거는 것은 제발 그만둬 주지 않겠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세스케인님께서 일부러 걱정의 말씀을 건네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속마음이야 어쨌든 나는 아주 정중히 그의 말에 답했다. 내 말에 세스케인은 재수 없게도 흐뭇한 표정을 짓더니 가만히 고개를 들 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서부터 제6왕자의 반역 건, 수 차례의 전투. 그리고 지금 이 자리까지, 너와는 정말 인연이 깊은 것 같 군." "예, 확실히……." 그래, 확실히… 끔찍스러울 정도의 질긴 인연이다. "최근, 네게 생각지도 못한 도움을 많이 받았지. 일이 이렇게 꼬여버리긴 했지만 네 증거가 없었다면 제6왕자를 몰아세우기도 힘들었을 테고, 분명 제6왕자의 추종을 주장했을 동생 세미르도 유폐·감금 등의 불미스러운 일 을 겪어야 했을 거다. 관문에서 있었던 전투 역시 마찬가지였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래… 언제나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젠장, 빌어먹을! 뭘 그렇게 웃는 거냐! 너를 위해서 한일이 아니야!! 네 놈 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한일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흐뭇하게 말하는 세스케인을 보며 나는 속으로 미칠 듯이 이를 갈았다. 속마음을 삼키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었지만 이 번의 말만은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것이 정말이지 천추에 한이 될 듯하다. "곧 카르틴과의 접전이다. 중요한 임무이며, 반드시 성공해야만 하는 일이 니 무리하지 말라고는 않겠어." 세스케인은 언제나 깔끔한 채인 그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외 모에 비중을 크게 두는 여자라면 단번에 반해버릴 만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죽지 마라. 내가 너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 "에……!"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어서 나는 순간 조금 굳어 버렸다. "네가 언제나 내 뒤를 따라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으니까." 뒤를 따른다라. 그래, 아무리 뛰고 날아봤자 나의 위치는 너의 '곁' 이 아니라 '뒤' 인 것 이겠지. 그 옛날 세스라 부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는 그것을 당연하 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세스케인은 실지로 나에게 깊은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언제든 베풀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 터이지만 그 이전에 나는 애초부터 그와는 종족 자체가 틀리지 않은가. 지금 그가 내게 주는 호의는 평민이라는 하등한 종족에게 내리는 것이니 까. 말 잘 듣는 개를 귀여워하고 소중하게 여기듯이. "저를… 저를 이토록 신임해 주신다니… 결코 세스케인님의 기대에 어긋 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나 세스케인님을 따를 것입니다!" 나의 다짐에 세스케인은 순수한 기쁨을 담아 웃었다. 자신의 손짓 하나에 도 쉬이 목숨을 내 걸 충직한 개가 한 마리 생겼다고 생각할 테니 기쁠 만 도 할 것이다. 나와의 대화를 마친 세스케인이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 았다. 그리고 하늘 높이 검을 세우고 다시금 병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모든 병사들은 들어라!! 해가 서쪽의 산에 걸리기 전까지 이 마을을 완 전히 불태우고 다음 마을로 진격해야 하니 빠르게 움직여라!" 쿠르릉-.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마을의 한쪽 구석에서 또 다른 불길이 치솟아 올 랐다. 황혼을 대신하여 이 마을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기 위해서. ========================================================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__);; 허접한 글 들고 또 이렇게 뵙게 되는 군요. 쿨럭... 글이 이게 전부는 아니구요, 비축분이 조금 더 있어요. ^^;; 오늘부터 하루 한, 두 편 씩 꾸준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없는 글이지만 즐독하시길 바래요.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아, 카페 회원이 5000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래서 기념으로 이벤트를 했음해요. ^^;; 이번 이벤트엔 책을 상품으로 걸 예정 ^^ 인기투표 이외의 괜찮은 이벤트 아이디어 있으신 분들은 리플 또는 메일로 의견 주시길 바래요! (그래봤자, 패러디글, 그림 보내기 정도일까...;;) 이르나크의 장 Part 50 접전 (1) 카르틴과 해룡족 등, 빠르게 돌아가는 최근의 상황에 눈코 뜰 새 없이 바 빴던 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쉬는 시간 틈틈이 마법수식까지 정리해야 했기 때문에 말 그대로 골 빠개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런데 일이 잘 돌 아가기라도 하면 기쁘기라도 하겠건만 상황이 잘 풀리지를 않아서 더 더욱 뒷골이 땡겨왔다. 조금 전 카르틴 측과의 비상 연락용 전서구가 유쾌하지 못한 소식을 가지고 날아왔던 것이다. "아군과의 합류가 늦어지겠다라… 그래서, 카르틴의 원군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 거죠?" 나의 물음에 앞에 나와 있던 드리크 경이 탁자 위에 크게 펼쳐진 지도에 서 카르틴과의 남부 국경선을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예, 전하. 이곳에 위치한 레얀츠 요새를 되찾기 위해 회군을 한 카르틴군 이 며칠 새에 그곳에 당도하자, 국왕군의 별동대는 무리하여 맞서지 않고 빠르게 퇴각했습니다. 그런데 국왕군은 단순히 퇴각에만 그치지 않고 국경 선을 따라 북상하며 그 주변에 산재한 카르틴의 마을을 모조리 초토화시켰 습니다. 그 때문에 카르틴 측은 그들을 그대로 방치할 없어 추격대를 파견 하였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기병을 추격대로 파견, 나머지 보병대는 계속 이곳 휴나르 성을 목표로 진군 중입니다." "카르틴의 원군으로 병력문제는 대충 해결된 줄 알았더니……." 나는 필요이상으로 분발해주고 있는 국왕군에 대한 소식을 듣고 초조함을 느꼈다. 자칫하면 별동부대에 발목이 잡힌 카르틴군이 겨울이 되기 전에 아군과 합류하지 못하고 그대로 국경선에 머무르게 될 수도 있다. 반면 국왕군은 가을 동안 바로 진척에 대군을 집결시킬 것이다. 그것은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자마자 봇물처럼 쏟아지는 국왕군의 대군 에 의해 그대로 당할 수밖에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1차 방어선에 진을 치고 있던 국왕군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 다." 재수 없는 소식은 그것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드리크 경의 심각한 표정은 나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국왕군이 아군의 보급을 막기 위해서 성밖 마을을 약탈하기 시작했습니 다. 그리고 휴나르 성 주변의 주요간선 도로에 임시요새를 짓고 있다는 소 식입니다. 이 상황이 지속되면 겨우내 필요한 식량을 제대로 비축하지 못 할 지도 모릅니다." "예에? 그건 정말 큰 일이잖아요! 그렇잖아도 병력이 부족한 아군인데, 이 대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요?" "국왕군이 3만의 병력을 국경으로 보낸 상태이므로, 지금 현재 이 접전 지역에서의 상황만을 봤을 때는 오히려 아군의 병력이 약간 더 우세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대책 없이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니 크게 걱정하지 마시고 맡겨주십시오." 흥분하여 약간 언성이 올라간 나의 발언에 드리크 경이 딱딱하게 답하였 다. 그러고 보면 국왕군도 하루만에 병력 보충을 할 수는 없을 테니 당장 에는 병력이 부족한 형편이겠지. 어휴, 내가 아무래도 일이 자꾸 꼬인다는 것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나는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기고 가만히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듣기로 했 다. 사실 불리해진 상황에 초조한 사람은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나야 병 력 운용에 큰 지식이 없으니 이럴 때는 입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일 테지. "국왕군의 움직임이 포착된 곳은 이곳과 이곳입니다만, 카나스 경께서 는……." 나는 드리크 경이 다른 장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을 가만히 보며 한숨 을 폭 내쉬었다.일단 대규모 전투가 아닌 이상 내가 그 전투에 참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장인 에르가 형이나 딜티는 분명 병사들을 이 끌고 나가야만 한다. 저렇게 작은 아이들도 -사실 전혀 아이가 아니지만- 위험천만한 전장에 나가 피를 튀기며 싸울텐데 안에서 편안한 곳에서 혼자 놀고 먹으려니 -물론 나도 할 일이 쌔고 쌨지만- 마음이 씁쓸해지는 것이 다. 하다못해 내가 전략전술에 능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을 것을. 한가 했던 시절 아무 책이나 마구잡이로 다독(多讀)하는 대신 그 시간에 병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음……." 한동안 뒤늦은 후회를 하던 나는 문득 곁에 앉아 있는 카이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살짝 접어올린 소매 아래로 보이는 가는 팔. 하지만 나로서는 감히 흉내 도 내지 못할 폭발적인 힘이 나오겠지. 역시 드래곤이니까. 잠시 부러움을 섞인 시선을 보내던 나는 새삼스레 그녀를 드래곤이 아닌, 강한 검술실력을 보유한 인간으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흐음." 나는 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운 후, 기회를 보다가 드리크 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드리크 경. 저도 전투에 참가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예? 아니, 그러나……." "저번 전투에서 제가 아주 훌륭한 미끼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러니 이번 전투에서도 이를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이…번과 같은 소규모전에 전하께서 목숨을 내건다는 것은 말도 안됩 니다." 드리크 경이 은연중에 카이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하지만 나 는 그것을 알면서도 활짝 웃으며 뻔뻔스럽게 말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해도 좋지 않을까요? 뭐니 뭐니해도 제게는 최강의 호위기사가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이번에는 다른 사람들까지 카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승리를 위 해 드래곤인 자신을 이용할 생각일랑은 말라는 것이 카이의 18번 대사였으 니 당연한 일이겠다. 카이가 천천히 눈을 뜨고 뭐라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내가 먼 저 말머리를 잡아챘다. "또 '거절한다.' 라고 택 내뱉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면 이쪽에서 묻지. 드래곤인 내가 지켜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너는 이런 소규모 전투에 직접 출진을 하겠는가?" "물론!" 나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카이는 말이 안 통하는 저런 뻔뻔한 놈은 그냥 무시하자는 생각인지 그 즉시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내가 뻔치 하나만 믿고 이런 말을 꺼냈을 리가 있겠어? "장난하는 것이 아니야! 카이야 혼 에스문드인 너는 강해! 카르틴의 검황 (劍皇) 에뮤 국왕마저도 제압하는 극강의 검사라는 설정이라고! 지금 아군 이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것은 너도 알잖아? 이러한 상황인데, 그만큼 강한 실력을 가진 호위기사로 데리고 있으면서 이 정도의 모험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돼?" "……." "나는 단지 궁극의 검술 실력을 가진 여검사 카이야 혼 에스문드로서 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 달라는 거다. 드래곤 카뮤르·카이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 카이야 혼 에스문드의 실력을 믿는 거야! 내가 언제 막무가내 로 적진 한가운데로 뛰어들겠다고 했어? 네게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 의 초능력을 사용해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야. 쏟아지는 화살폭우를 몽땅 막아달라는 것도 아니고, 무조건 돌진해서 적 진영을 일도양단 해달라는 것도 아니라고." "알았다." 카이는 망설임도 없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돌아온 승낙의 말이라 나는 잠시동안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침묵을 지켰다. "…어…어? 정말? 승낙한 거야? 출진하겠다고?" "그렇다. 그러나 위험도가 지나친 곳이라 판단되면 제재를 가하겠다." "뭐, 좋아."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껏 카이에게 한 부탁의 말에서 돌아오는 것이라곤 대부분이 '거절한다.' 라는 말 뿐, 물론 내가 절대 들어주지 않을 무리한 부탁만 골라했긴 했었지만서도 말 이다. 어쨌든 그동안 계속 거절의 말만 들어와서 이번에도 어떤 장황한 설명조 의 이유와 함께 거절당할 것만 같았는데 의외로 승락을 받아낸 것이다. "들으셨죠? 드리크 경? 카이가 확실히 지켜주겠다고 했으니 저도 적당한 부대에 끼워주세요." "예…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드리크 경은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카이의 기분을 살폈다. 많이 완화되긴 했어도 여전히 카이는 사람들에게 있어 존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이니 까. 어쨌든 불행 중 다행이라는 생각에 나는 조금이나마 나아진 기분으로 회 의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 간만에 카류 등장. 하지만 여전히 전쟁은 재미없어요. ㅡ.ㅜ;;; 이르나크의 장 Part 50 접전 (2) 방어진형을 편 채 간선도로를 막고 있는 국왕군의 중장보병들을 피해 멀 리 우회하여 온 아군은 드디어 국왕군의 요새가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다. 좁은 소로를 이용해서 이곳까지 오는 중간에 여러 번 보초들을 만났지만 카이와 기사들의 빠른 대처로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요새의 주변은 땅을 파고 나무를 옮기는 농노와 말단 병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기술자들에 의해 상당히 분주해 보였다. "카류리드 전하." "전진한다." 나의 짧은 대답과 함께 카이는 위로 높게 들었던 새하얀 손을 힘차게 앞 으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손짓에 따라 최전방의 기사들이 긴 마창을 앞 으로 비스듬히 쥐고 빠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적이다!" "우앗-!" 밖에서 열심히 일을 하던 일꾼들이 뒤늦게 아군의 습격을 깨닫고 혼비백 산하여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재성채 안쪽에서 수십의 궁병이 허겁지겁 뛰쳐나와 돌진하는 기사들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그러나 겨우 그 정도의 화살로 가속도가 붙은 아군의 돌진을 막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끄아아악!!" 기사들이 휘두른 창에 꿰인 적병들이 굴러 떨어지면서, 반쯤 파다 만 해 자의 안쪽은 물이 아닌 다른 것으로 메워지고 있었다. 지저분하게 내장이 비져나온 시체와 비릿한 향내를 풍기는 핏물로. 이런 전쟁터에 서있노라면… 사실, 아주 가끔씩은 가슴 한쪽이 답답해져 오곤 한다. 스스로를 차가운 가면으로 철저히 휘감았음에도, 마지막까지 잔 존하고 있는 얄팍한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예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살인. 환생을 하고 죽음에 초월해진 후에 도, 결코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살인이므로. 그러나 불과 몇 달 전의 그 마음가짐에 비하자면 그 살인에 담담해진 것 도 사실이다. 어떤 일이든 자주하면 익숙해진다고 하였던가? 그것은 살인 에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어쩌면 적병의 시체에 진정으로 환호하며 희 열을 느낄 때가 올 지도. "우와아아아--!!"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한참 목재성채를 태우고 있을 때, 도로 쪽 을 지키고 있던 오백의 적 보병부대가 그 불길을 보고 다급히 되돌아오는 것을 보였다. 그들의 모습을 본 아군은 흔쾌히 적군을 맞이해 주기로 했다. 상대가 소수의 장교들을 빼고 나면 대부분이 중장보병임에 반해, 아군은 최정예의 기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게다가 적은 갑작스러운 아군의 기습 에 당황해 대열을 유지하지 못한 채 급히 전진해 오고 있었고, 아군은 반 대로 사기가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비록 기습을 위해서 소수의 병력을 데려왔지만 대열이 무너진 중장보병쯤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곧 각 지휘관들에게 진격 명령이 떨어졌고, 기사들이 창을 들고 적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하, 조심하십시오!" "알아." 나는 가까운 곳에 바짝 붙어 주의를 요하는 미성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실지로 나는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을 정도로 긴장감이 없었다. 흙먼지와 피로 이루어진 전장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미모의 여인. 내가 이렇게 마음 깊은 곳까지 느긋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녀의 존재 덕분이었다. "전하." 진형의 중앙에 위치한 주제에 느슨히 고삐를 쥐고 가벼운 마음으로 말을 몰아가고 있으니까 카이가 다시 한번 엄하게 나를 불렀다. 내가 너무 느긋 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전부터 그런 주의 의 말을 보낸 것이리라.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이 아닌 척, 인간인 척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해도 나는 그녀가 드래곤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나를 죽게 하 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이미 알고 있다. 이 사실들을 종합했을 때 도 출되는 결론은 내게 만약의 사태 같은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 이다. 이러하니 내 태도에서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하 겠다. "우와아-!!" 내가 미적거리고 있는 동안 얼마 없는 적의 기사 중 하나가 가까운 곳까 지 들이닥쳤다. 위험한 창날에 말에 의한 가속도까지 붙여 내게로 뛰어드 는 기사를 보고도 나는 이 곳까지 잘도 포위망을 뚫고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며 여유롭게 단검을 꺼내들었다. 적병의 흉흉한 기세가 순간적으로 사람 에게 경계심을 가져오게 만들만도 했지만, 카이에 대한 나의 믿음은 그 이 상으로 대단했으므로. 평소와는 달리 몸이 긴장으로 굳지 않자 단검이 꽂혀야 할 길이 눈앞에 선명히 드러났다. 이 한방이면 그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이 세상을 뜨게 되리라. 어차피 벌어진 판이다. 자신이 죽을 마음이 없다면 상대를 죽여야만 하는! 나는 최소한 그 기사의 행복한 내세(?)라도 기원해주자는 생각과 함께 왼 손을 위로 조금 들어올렸다. 슈욱-. 그러나 나의 손에 든 단검은 금방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카이 의 검이 순식간에 그 병사의 목줄을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움 직임은 너무도 빨라서 병사가 목 언저리에서 분수같이 피를 뿜어내는 것을 보고서 그제야 그녀가 그곳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카이가 주변의 기사들에게 경고하며 내 주위로 적의 접근을 막도록 명했 다. 그녀가 조금만 더 적극적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굳이 무한한 드래곤의 힘을 빌리지 않는다 해도 적병 중 열댓 타스 정도는 더 화려하게 피를 뿜 으며 다음 세상 구경을 할 텐데… 후우, 아무리 저들이 내게 칼을 들이대 는 적에, 안면 없는 인간들이라지만 정말 가벼운 생각이군. 나도 이젠 이런 생각을 할 수준에 도달한 건가. "위험합니다!" 잠시 딴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또 한번 격한 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검을 쳐들어 내게로 덮쳐오던 창을 순식간에 두동강 내놓았다. "헉, 거짓말… 저런 게 가능할 줄이야……!" 나는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는 창을 보며 중얼거렸다. 검술이 절정에 달한 사람이라면 날아오는 화살도 눈앞에서 두 조각 낼 수 있다는 소리를 듣기 는 들었지만 그보다 훨씬 두꺼운 창을 두 조각 내다니! 나는 마치 묘기 같은 광경을 실제로 보고 조금 흥분했다. 아니, 내가 보지 못해서 그렇지 어쩌면 에르가 형이나 딜티도 저런 것이 가능할지도? "다시 한번 말씀드리건대! 전장에서 경계를 풀지 말아주십시오!!" 내가 창에 꼬치구이가 될 뻔하고도 제정신을 차릴 기미를 보이지 않자 카 이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강하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점점 적의 이목이 내가 있는 이곳으로만 집중되고 있었기에 더 이상 나와 말을 나눌 시간이 아니라 판단, 그 즉시 몸을 앞으로 돌려 주위를 살폈다. 전투가 개시되고 시간이 어느 정도 흘렀다. 전투가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 내 주변의 상황이 상당히 급박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아군의 돌진 속도 가 조금 늦어지는 바람에 적진을 돌파하는데 실패를 하여 상황이 난전으로 접어들었는데, 이 혼란함 속에서 나를 발견한 병사들이 공을 세우고자 하 는 마음에 불을 보고 달려드는 나방처럼 이쪽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적은 몇 차례의 렌스 차지 -기병이 길다란 마창을 들고 돌진하는 공격방식- 에 이미 굉장한 피해를 입었고, 이미 숫적으로 아군이 훨씬 우 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적은 여전히 대형을 취하지 못한 혼란한 상태였 으니 전반적인 상황은 아군에게 확실히 유리했다. 사실, 내 주변이 혼란하다고는 해도 카이의 실력이 플러스 된 덕분인지 기사들은 생각 이상으로 주위를 잘 가드해 주었기에 나는 변변히 검을 휘 둘러보지도 못했다. "핫!" 카이의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또 한 명의 가엾은 병사가 피를 뿜었다. 그 러나 순간의 틈을 탄 몇 개의 창이 이쪽을 향해 쏟아지면서 카이는 잠시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검을 움직여야만 했다. 팍-파악-! "와, 정말 끝내준다!" 서너 개의 창이 카이의 검에 의해 일순간 공중분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밀물처럼 몰려드는 적들의 속에서도 경계할 생각은 않고 가벼운 목소 리로 그녀의 실력에 감탄을 표했다. 카이는 그런 나의 행동을 나무라고 싶 은 지 고개를 조금 돌려 뭐라 말을 하려다가 곧장 이쪽으로 달려드는 근육 덩어리 기사를 저지하느라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챙- 카가각-! 엄청난 거한이 있는 힘껏 내리친 검이었지만, 연약한 여성의 몸을 한 카 이는 그 검을 받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다. 자신의 검을 버텨낸 카이의 어 마어마한 악력에 놀랐는지 덩치의 기사가 약간의 동요의 빛을 보이자,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이가 순간적으로 검을 누여 상대의 검을 흘려내었 다. "끝이군!" 갑작스레 대치상태에서 벗어난 기사가 균형을 잃는 것을 보며 나는 그 기 사가 지금 이 순간 허망하게 이번 생을 마칠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예상대로 카이의 검이 상대 기사를 목표로 위험한 빛을 번뜩였다. "전하!!" 그러나 다음 카이의 행동은 그 검을 내려치는 것이 아니라, 다트라도 사 용하듯 그 검을 내게로 집어던지는 일이었다. 내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굳어버린 사이에 카이가 던진 검은 나를 스쳐 뒤쪽으로 날아갔다. 잠시동 안 혼란에 빠져있던 나는 금방 귓가를 어지럽히는 비명소리에 그 검이 다 른 적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생각대 로 나의 곁에는 언제 이만큼이나 접근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국왕군의 병사 가 땅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난 짧은 시간동안 수월하게 의문을 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뒤늦게 카이의 손에 검이 없다는 것을 떠올렸다. 물론 여분의 검이 안장에 붙어 있지만, 거한의 기사가 바로 정면에서 대치중이지 않았던가. "윽-!" 남자들의 굵직함과는 전혀 다른, 가는 목소리의 신음을 들은 것은 그 생 각을 마친 직후였다. 카이가 재기불능의 큰 상처를 입는 대신 몸을 비틀어 오른쪽 팔을 희생한 것이다. 팔에 감싸인 견고한 갑옷의 덕분인지 팔 자체 가 잘려나가지는 않았으나, 육중한 파공음이 들려올 정도로 강한 힘이 실 린 검을 맞받았으니 인간의 몸을 한 이상 결코 가벼운 상처는 아닐 것이 다. 하지만 그 상처를 입고도 카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왼손으로 뒤쪽 안장에 꽂힌 검을 뽑아내어 상대의 갑옷사이를 절묘하게 베어냈다. "카이!" 그녀의 이름을 부름과 동시에, 아직 살아 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그 기사 의 말을 향해 빠르게 단검을 던졌다. 그가 놀라 날뛰는 말에서 땅으로 심 하게 처박히는 것을 확인하며 난 다급히 상처 입은 카이에게로 말을 몰았 다. "카이……!!" "이곳은 놀이터가 아닙니다! 과연 평소의 당신이라면 이런 장소에서 이렇 게 멍하니 다른 곳을 바라보며 계실런지요!" 나의 걱정이 담긴 말에도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뱉어내고 고개를 앞으 로 홱 돌렸다. 물론 그렇다고 카이가 크게 화가 난 듯한 표정은 아니다. 적 병이 자꾸 몰려와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한 행동이 랄까? 내가 노닥거린 덕분에 카이가 상당한 상처를 입는 것을 본 이상, 양심이 남은 인간으로서 더 이상 풀어져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다른 단 검을 뽑아내면서 의식적으로 긴장을 하는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 내 부주의로 큰 상처를 입은 후부터 카이는 말 위에서 전투를 하며 균형 을 잡기가 힘이든지 계속 잔 상처를 입어갔다. 덕분에 나도 상황을 봐가며 틈틈이 단검을 던지는 것으로 위태위태한 카이를 도와야만 했다. "카이, 이러다가는 네가 죽겠어!" 잠시 여유를 가진 나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 독촉하듯 속삭였다. 끝까 지 인간흉내를 내며 무리하는 것이 걱정도 되고 불만스러워서였다. "무엇을 원하시는 것인지 저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군요. 그리고, 전하께서 조금만 더 주의를 하셨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다치는 것이 싫으시다면 제발 평상심을 되찾아주십시오." "그건 정말정말 미안해. 그런데 말야,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약간이나마 팔을 복구시키는 것 정도의 권능은 사용해도 좋지 않아? 그 정도는 다른 자들의 눈에 띄지 않을 테고, 네가 드래곤임을 눈치채는 인간도 없을 거 야." "전혀 좋지 않습니다. 수 차례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저는 당신을 지키는 과정에서 위기의 순간이 닥치기 전까지 드래곤으로서의 그 어떤 권능도 사 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체 그 위기의 순간이 언젠데? 어느 정도로 위기에 몰려야 권능을 사용 할거냐고. 이 정도면 충분히 위기 상황 아냐? 정체를 숨긴답시고 인간 흉 내를 내다가 나를 지키기 전에 너부터 죽겠다. 카뮤르·카이야씨는 정말 날 지켜줄 마음이나 있대?" "물론 약속은 지킵니다. 제 몸을 모두 바쳐서라도 당신에게 상처가 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본연의 모든 능력은 저나 전하의 목숨 이 끊어지기 직전에나 사용될 것입니다. 전하의 태도를 봐서라도 그 방침 은 결코 바꾸어서는 안될 듯 싶군요." "켁?" 한동안 작게 속닥대던 나는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경악했다. 저렇게 독한 말을 하다니!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는 건 너무 심하잖아! 사실 난 죽는 것 보다 아픈 게 더 싫단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괜히 뺀 질거리지 말 껄∼! 내가 패닉(?)에 빠지던 말든 카이는 고개를 들어 능숙한 솜씨로 호위기사 들을 지휘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 역시 금방 정신을 추스리고 적이 없나 열심히 주변을 살폈다. 저 카이가 허언을 하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지 않은가. 상처를 입는 일이 라면 무조건 질색을 하는 나이니 -누구든 마찬가지겠지만- 카이나 나 자 신을 위해서라도 이렇게 하는 수밖에… 크흑. "전하! 적입니다!! 기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로 그 수는 이천에 달합니다." 건설 중이던 간이요새와 함께 이 요새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던 중장보병 들도 거의 정리했을 무렵 척후병으로부터 적의 원군이 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나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적이 사용할 만한 기물들이 있는지 확인하여 철저하게 파괴시키다가 적의 지원군이 시야에 들어오자 망설임 없이 소리 쳤다. "전군, 퇴각한다!" "퇴각한다!" "퇴각하라!!" 나의 명을 전하는 다른 병사의 외침과 함께 병사들이 휴나르 성 방향으로 퇴각을 시작했다.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적과 싸우던 삼백에 불과한 병력 으로 새로이 밀려오는 이천의 기병과 맞서 싸울 수는 없는 일. 애초부터 아군의 주요 행동방침은 뒤통수 냅다 후려치고 불리하면 똥줄 빠지게 도망 치기였던 것이다.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루고 눈앞에서 느긋하게 후퇴를 하는 우리를 보고 국 왕군은 더욱더 속도를 높여 추격해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힐끗 돌아본 후, 고개를 돌려 하늘높이 치솟은 내 전용 깃발을 확인했다. 이 깃발과 조 금 전 있었던 전투에서 적들은 분명 나의 존재를 깨달았을 것이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반역자가 저기 있다!" "잡아라!! 죽여 없애!" 땅을 울리는 말발자국 소리에 휩쓸려 시끄러운 적군의 소리가 들려왔다. 속도를 조금 조절하며 후퇴하다 보니 어느새 적군이 자신들의 함성을 내 귀에 전달할 수 있을 위치까지 추격해온 상태였다. 예전이라면 나를 향한 저 살기 어린 목소리에 아주 약간이나마 우울해 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좋아! 조금만 더 따라오라고. 그러면 내가 뜨거운 선물을 줄 테니! 나는 지금 상태 그대로 유지된 채, 적군이 추격을 계속해줄 것을 바라며 말을 계속 몰았다. 곧 나타날 건조한 수풀 지역 주변에는 미리 병사들과 마법사를 매복해 두 고 있는 상태다. 깃발을 세우고 느긋하게 후퇴한 것은 나의 존재를 확인시 켜 적의 지원군을 유인, 섬멸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한동안 말을 재촉하여 달리자 멀리서 아군이 대기하고 있을 수풀이 나타 나기 시작했다. "됐다! 거의 다 왔어!" 나는 무의식중에 기쁜 얼굴로 카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카이가 내 말에 동의해주지 않았다. "적군이……." "군이?" 나는 카이의 말을 미처 다 듣기도 전에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허무하 게도 적들은 끝까지 우리들을 추격하지 않고 그대로 요새로 되돌아가고 있 었다. ======================================================= 클클클................ 별의별 생고생을 다 해서 써야 하는데다가, 그렇게 겨우겨우 다 써놓고 보 면 지지리도 재미없는 신이 바로 이르나크의 전쟁씬이죠......-_-;;; 여러분. 그냥 한 줄로 적으면 안될까요? 카류, 유인책을 써봤지만 실패했다. 라고. -_=;;; 난 다시 태어나도 전쟁이 들어가는 글은 안 쓸 것이여........;;;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아, 카페 회원이 5000명을 돌파했습니다! 그래서 기념으로 이벤트를 했음해요. ^^;; 이번 이벤트엔 책을 상품으로 걸 예정 ^^ 인기투표 이외의 괜찮은 이벤트 아이디어 있으신 분들은 리플 또는 메일로 의견 주시길 바래요! 이르나크의 장 Part 50 접전 (3) "후, 내가 있으면 조금 깊숙한 곳까지라도 잘 따라와 줄줄 알았더니… 갑 자기 나의 가치가 폭락하진 않았을 터인데, 대체 언제부터 국왕군 패거리 들이 공을 세우는 일과 이렇게 소원해졌지?" 하얀 대리석의 탁자에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나는 허탈감에 중얼거렸다. 작전회의장 내에 있던 아르 할아버지나 에르가 형 등의 사람들이 나의 말 소리를 들은 듯 했지만 그것이 단지 푸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굳이 대답을 해주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이고 내가 속한 부대가 건설중인 임시 요새를 공략, 원군이 오면 적 을 유인하면서 서서히 퇴각을 했지만 국왕군은 적당히 우리들을 추격하다 가 금새 요새로 되돌아가 버렸다. 내가 목숨을 걸어가며…가 아니라 상처 를 입을 것을 감수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건만 그동안의 얻은 소득은 나 의 기대치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전하와 여러 지휘관 여러분께 현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이번 몇 몇 전투로 인한 적의 태도 변화는 현 상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들이 공을 다투지 않는 다는 것은 그들의 지휘체계가 확립되어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 에는 그들이 아무리 병력이 많아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못해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전투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사라져 아군이 더 욱 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비록 위험부담이 크지만 지금보다 더욱더 많은 밀정을 보내 적들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기를 건의하는 바입 니다." 평소처럼 회장의 맨 앞에서 작전회의를 이끌어나가던 드리크 경이 먹구름 이라도 낀 듯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내 얼굴은 그보다 더 어두우면 어두웠지 결코 덜하진 않으리라. 앞날에 빛이 보이질 않는데 어 떻게 밝은 얼굴을 하고 앉아있을 수가 있겠는가. 국왕군의 끊임없는 약탈시도와 주요도로 상의 임시요새 난립으로 아군의 보급이 계속 막혀가는데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카르틴 쪽에서 아직까 지도 연락이 없다는 사실이다. 카르틴의 대군만 와준다면 간이요새 따위는 금방 무너뜨릴 수 있을 터인데… 그런데 어쩌면 그 카르틴이 올해 내로 오 지 못할 수도 있다니! 회의장 내의 사람들은 무거운 분위기로 간간이 앞으로의 대책에 대해 대화 를 나누었지만 뚜렸한 대책을 내 놓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요새를 짓지 못하도록 불시에 습격하여 방해를 하거나 추수 작물을 거둬드릴 주변 영지의 방어를 강화하는 일 정도일 뿐, 현 상 황을 타게할 만한 돌파구는 쉽사리 마련되지 못했다. 똑똑-. 한동안 우중충한 분위기 속에 작전회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누군가의 노 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곧 문이 열리며 한 시종이 들어왔고 그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깊이 숙여 내게 인사를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전하, 힐레인경께서 오셨습니다." "힐레인이?" 나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그의 소식에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동맹을 맺기 위한 교섭 시간이 꽤나 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배로 해룡족의 땅으 로 왕복하는 시일 정도밖에 걸리지 않다니… 해룡족과 이야기는 제대로 끝난 걸까? 소식을 전한 시종이 나가고 한동안 시간이 흐르자 그 시종의 알림과 함께 힐레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힐레인…경. 드디어 왔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반갑게 그를 맞이하려고 했다. 그런데 힐레 인이 혼자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들어오는 바람에 말끝을 흐렸 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카류리드 전하." "아아, 음… 그런데……." 나는 힐레인에게 인사를 받다가 그의 뒤에 서있는 다른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검은색머리를 한 남자 쪽이야 해룡족에 관계된 사람이라 생각하고 넘어간다 해도 그 옆에 서있는 눈부신 은발의 미녀는 대체 누구 란 말인가? 나는 물론이거니와 대부분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몰리자 힐레인이 작게 헛기침을 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의 쪽으로 돌린 다음 입을 열었 다. "흠, 일행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분은 해룡족 내에서 강대한 세력을 가진 유란종의 차기족장, 수·유란입니다. 이번에 해룡족 출신 별동 부대를 이끌기 위해 직접 이곳까지 함께 와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힐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끝을 흐렸다. 출신이 평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누구 앞에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말을 늘어놓던 힐레인이었기에 나는 그가 왜 그렇게 곤란해하는지 의아해졌다. 잠시동안 침묵을 지킨 힐레인은 고개를 약간 들어 그녀를 다시금 소개했 다. "그녀는 해룡족 족장의 영양인 연·아남입니다. 해룡족은 이번 동맹이 조 건으로 연·아남과 카류리드 전하와의 혼인을 첫째 조건으로 내세웠고 그 때문에 이분께서 함께 오신 것입니다." "……." "……." 이번에는 회의장 내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나에게로 쏟아졌다. 그러 나 나는 갑작스런 소식에 멍해져 있느라 그들의 시선에는 신경을 쓰지 못 했다. 뻥 쪄버린 내 표정 때문인지 회의장 내의 그 누구도 먼저 말을 못하고 있 는데, 연·아남이라는 미인이 앞으로 한발자국 걸어나와 침묵을 깼다. "처음 뵙겠나이다. 카류리드 전하. 힐레인경께서 소개해 주신대로 소녀는 연·아남이라 하옵니다. 소녀가 미력하여 전하의 눈에 차지 않는다 할지라 도 부디 내치지 말아주시옵소서." 만면에 함박 웃음 띄운 그녀는 농담처럼 경쾌하게 말하며 풍성한 치마를 살짝 들고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런데……." 나는 조금 당황하여 힐레인을 바라보았다. 해룡족을 만나러 갔다가 갑자 기 중매쟁이(?)가 돼서 돌아오다니!? 지금으로선 히노만으로도 벅찬데 말 이다! 내가 이렇게 불만을 터뜨린다고 해서 연·아남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 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남자라면 한번쯤 뒤돌아보고 침을 흘릴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게다가 평범한 미인에서 느껴지는 힘없고 가녀 림이 아닌 발랄하고 활동적인 분위기를 풍겨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한 얼 굴 하는 귀족부인 사이에 끼워 넣는다 해도 분명 시선을 끌만한 외모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녀를 데려온 힐레인을 계속 원망하고 있었다. 아 주 어릴 때부터 주변에서 함께 했던 여인네들이 하나같이 보통이 아닌 미 모를 가지고 있었기에 이런 미인도 차버릴 만한 담이 생긴 것일지도. "해룡족 측에서 혼인을 통해 단결의 의지를 다지기 전에는 쉽사리 동맹을 수락할 수 없다고 하여, 갑작스럽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 다." 힐레인이 약간 곤란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연·아남을 힐끗 바라보았 다. 갑자기 늘어난 아내후보 때문에 잠시 삼천포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는 그제야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냈다. 이것은 해룡족 측에서 혼인을 통해 자 신의 입지를 높이겠다는 의지가 아닌가. 야만인에 불과했던 해룡족에서 왕 비든 후궁이든 공식적으로 한 명의 비가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잖아도 카르틴의 도움을 받으면서 후일 그들의 간섭을 받게 될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있는데, 해룡족까지 저렇게 나온다면……. 후우, 만약 내가 승리한다면 우리 아르윈은 아무래도 거대왕국의 대열에 서 한참은 밀려날 듯 하다. 국왕군 패거리가 심심하면 내뱉는 말 그대로 정말 내가 이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흉은 아닌지? 후, 이제 와서 무슨… 몰랐던 것도 아니면서. 가능하다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도 좋겠지만 나는 궁지에 몰렸고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게 남겨진 여유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사람이 아니면 나도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얼굴도 모르는 만백성을 위해서 내 친인들을 포기할 순 없단 뜻이다. 이기적이라 도 내게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전하. 연·아남과 관계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것 보다 지금은 궁지에서 벗어날 대책에 대한 논의부터 하는 것이 옳다고 사 려됩니다. 항구에서 이곳 휴나르 성까지 오는 도중 주변 도로망에 진을 치 고 있는 국왕군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거친 길을 크게 우회해서 와야 했 습니다만. 안내를 해주었던 주둔병사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어보니 그동안 상황이 급박해진 모양이더군요." "옳은 말이다. 일단은 급한 불부터 끄고 보지." 오늘따라 웬일인지 퉁명스런 말 한마디 않고 조용히 있던 류온님이 고개 를 끄덕였다. 나는 가만히 류온님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가 침묵하는 것과 는 달리 잔뜩 흥분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럼 소녀는 물러나 있겠나이다." 그때 연·아남이 우리들에게 물러나겠다고 말하며 인사를 했다. 자신이 낄 분위기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는지 그녀는 즉시 다른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밖으로 빠져나갔다. 꽤나 판단이 빠른 여자군. 몇 초 보고 있지도 않았지만 총명한 여인일 듯 싶다는 느낌을 물씬 풍긴달까? 말투가 좀 이상한 게 좀 걸리지만……. 수·유란이 빈자리에 앉자 힐레인이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약간의 오차가 있긴 했지만, 해룡족과의 동맹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북부의 해룡족이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국왕군에 게 전력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적게나마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흠……." 그나마 나은 소식에 나는 약간 굳어진 마음을 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카르틴이 올해 안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그것도 전부 끝입니다. 북부의 해룡족은 몇 만의 병력을 북부에 묶어놓는 구실을 할 뿐입니다. 여 전히 국왕군이 동원할 군세는 10만을 넘어섭니다. 카르틴의 원군이 없으면 아군은 4만 병력만으로 봄에 있을 그들의 총공세를 막아내야 하는데 그것 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카르틴 측에 대해서는 저희들이 어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일단 척후병과 전서구를 더 보내 끊임없이 정확한 상황을 알아보기로 하고, 아군은 그 동안 보급을 공고히 해야 하겠지요." "하아,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보급 전선을 혼란시키고 있는 국왕군이 쉽사리 당해주지 않기 때문에 아군이 이렇게 심각해 하고 있는 거다. 그것 은 힐레인 경도 알 것이라 생각하는데? 거두절미하고, 어쩌자는 거야?" 나는 '당장 본론을 말해, 본론을∼.' 라는 무언의 압력이 실린 광선을 마구 쏘아보냈다. 힐레인의 태도가 뭔가 해결책이라도 있는 듯한 분위기였기에. "딱히 해결책이랄 것은 아니지만, 해룡족의 부대가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 는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 같군요." 힐레인은 정말 내 속마음을 그대로 읽은 듯이 대답하더니 주위를 돌아보 며 차근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해룡족은 크로시아 대륙에서는 드물게도 궁기병의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기병 특유의 기동력과 궁병의 장거리 공격력을 이용한 그들의 치고 빠지는 작전 때문에 십여년 전 해룡족의 침략당시 아르윈 왕국은 평소 상대한 것 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군을 상대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실상 레이포드 경께서 부임하시기 전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었지요. 하 지만 사실상 그들을 패퇴시킨 레이포드경께서도 실은 꽤나 고전하셨을 것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드리크경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수·유란이라는 해룡족 남자 때문인지 대답하기를 약간 망설였으나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대답을 들은 힐 레인은 설명을 계속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대하기가 어려운 해룡족이건만, 해룡족을 직접적으로 친 경험이 있는 레이포드 경의 부대는 지금 국왕군이 아닌 아군의 진영에 계십니다. 결국 국왕군에게 있어 해룡족은 상당히 생소한 부대인 것이지요. 따라서 아군이 해룡족의 특성을 살려 치고 빠지기를 계속하면 국왕군은 상 당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흐음." 나는 힐레인의 말을 들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궁극적인 해결 책은 되지 못할지라도 아군의 피해를 줄이며 상대 기사를 격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듯 했다. 휴우, 그것만으로도 어디냐? 이대로 버티면서 카르 틴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좋아. 그럼 그대로 하기로 하고 세부계획은 레이포드경과 상의하도록 하 지. 그리고, 수·유란 경?" 나는 먼 곳에 말없이 앉아 있는 해룡족의 남자에게로 시선을 주며 말했 다. "해룡족에서는 성을 뒤쪽에 붙이는 것으로 포괄적인 존칭의 의미를 담습 니다. 수·유란으로 충분하니 그렇게 불러주십시오." "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일단 해룡족의 궁기병들에게 기사에 준하는 대우를 해주고 그대에게는 기사단장과 같은 대우를 하기로 하죠. 나머지 세부적인 것은 차후에 결정하기로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카류리드 전하의 은혜에 용맹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그럼 처우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수·유란!" "예, 전하." "부디 과거의 불미스러운 일은 잊고 레이포드경의 지휘에 따라 전력을 다 해주기 바라겠습니다!" "물론입니다. 과거의 일에 연연하여 일을 그르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무뚝뚝하다못해 차가움까지 풍기는 인상을 풍기던 그는 그 외모만큼이나 딱딱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때문에 실은 영 아니꼽고 싫은데도 억지로 대 답한 것은 아닌지,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가 잠시 회의가 들었다. 그러자 힐레인이 빙긋 웃으며 일부러 날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수·유란도 흔쾌히 레이포드경을 따르겠다 하였으니 참으로 잘 되었군 요." "아…그렇군. 그럼 부탁하겠네." 힐레인이 일부러 내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수를 향해 싱긋 웃었다. "그럼 그 부대에 나도 끼어볼까 싶군." "예?" 나는 갑작스런 류온님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마법사인 류온님이 왜 해룡족의 부대에 끼인단 말인가? 기동력을 특성으로 하는 해룡족의 부대와 류온님의 마법공격은 그 성질이 천지차이인 것을. "무엇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류스밀리 온님." 힐레인의 진지하게 질문을 했다. 류온님의 말이 단순히 그냥 해본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낸 모양이다. "아아, 그동안 카류 왕자에게서 배운 수식건 때문에 말이지." "제 수식요?" "그래! 네 수식!!" 류온님은 강하게 그 말을 하다가 갑자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더니 갑 자기 몸을 부들부들 떠는 것이 아닌가? "류…류온니임?" "내가!" 류온님은 강하게 한마디를 내뱉고 나를 째려보았다. 수식 한부분을 잘못 전해주기라도 한 걸까?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나 싶어 잠시 회상모드에 접어들려니 류온님이 뒤늦게 말을 이었다. "내가 오늘 3서클을 암산할 수 있게 됐다!!" 그 말이 끝나자 좌중의 시선이 전부 그에게로 쏠렸다. 말이 필요 없을 정 도로 극명한 경악의 시선이. "3…서클……?"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곁에서 눈을 감고 있던 카이까지 눈을 뜬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처럼 놀라움이 가득한 눈 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누가 말을 건 것도 아닌데 그녀 스스로 감 고 있던 눈을 떴다는 것은 그만큼 류온님의 발언이 그녀의 관심을 모았다 는 증거이리라. 나는 비식 웃음을 흘리며 류온님을 바라보았다. "축하드려요. 역시 진전이 빠르시네요." "큭!" "윽!" 경악할만한 소식과는 달리 너무도 가볍게 들리는 나의 축하의 메세지 때 문인지 사람들이 숨넘어가는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류온 님에게로 향해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쏟겼다. 그 중 류온님의 시선 은 거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날카로웠다. "진전이 빨라? 자…장난이 아니다!! 네게 수식을 배우기 시작하고 이제 겨우, 겨우 반년이 흘렀어! 그런데 3서클의 암산을 이뤘단 말이다!!" "예. 류온님은 수학의 천재이시니 5서클까지도 가능할지 몰라요." "마…마…마…말도 안되는 소리… 5…5…5…5서클?!" 류온님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막 더듬으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분들을 향해 말했다. "대충이나마 제 수식을 훑어 보셨잖아요. 수학을 전문적으로 하셨던 분들 이시니, 충분히 가능한 사안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으셨나요?" 장내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한동안 그 침묵에 참여하고 있던 아르 할 아버지가 뒤늦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그래. 언제나 생각하고 있단다. 스스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마음 에 도저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지만……. 네가 가르쳐 준 것들은 수 십 세기를 뛰어넘어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치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 같구나." "하, 말이라고 하는가?!" 조금 전부터 흥분에 완전히 발동이 걸린 류온님이 아르 할아버지의 말을 가로채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법사들에게 있어 가장 큰 단점이 뭐였나? 어려운 수식으로 인한 딜레 이와 시끄러운 전장 속에서도 어려운 수식풀이에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이 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뒤집어진다! 암산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마법 캐스팅의 딜레이가 반, 아니 십분의 일로 줄어들 터이고! 정신력? 이런 간 단한 수식을 푸는데 정신력이 웬 말이더냐! 말을 타고 뛰어가면서도 충분 히 마법 난사가 가능해질 거다! 기동력을 갖춘 마법사단이 만들어지는 거 야!" 류온님은 연설이라도 하듯 소리쳤다. 그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크게 웅성거렸다. 내 수식으로 마법사들이 발전할 것이라 는 생각은 했어도 이 정도일 줄은 차마 생각하지 못한 것일 거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 경우엔 마법사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레벨업에 대해 당연히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그렇지만 당장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 는 것이 문제일까? 아직 고위 마법에 관련된 수식은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 니까. 물론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1서클을 초고속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으 니, 당장이라도 마법사로 이루어진 기병부대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겨 우 업그레이드판 궁수부대의 역할로 쓰기 위해 금쪽 같은 마법사들을 말에 태워 보내서 사망자 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법사란 쉽게 조달할 수 있 는 성격의 부대가 절대 아니며, 그 수 또한 아주 적으므로 다른 부대와는 달리 그들 한명 한명의 죽음은 굉장한 타격인 것이다. 따라서 큰 이득이 오지 않는 한 그들을 쉽게 전장 한가운데로 내몰 수는 없다. 마법사들이 말을 탄 상태에서도 대단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 기병부대에 대한 생각은 뒤로 미뤄둘 수밖에. 뭐니뭐니해도 마법사는 대단위 마법을 날려 틈을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인 것이다. "확실히 장기전이 될수록 마법사들이 크게 발전할 테니 아군에게 유리해 질 것입니다. 어쩌면 제 수식으로 인해 8서클 마법사가 더 나타날지도 모 르는 일이죠. 하지만 1년 후가 될지 10년 후가 될지, 어쩌면 영원히 불가능 할 수도 있는 그 가능성을 기다리며 무작정 장기전술을 펴기도 그렇게 않 을까요? 그동안 아군이 버텨줄지도 생각해볼 문제니까……." "단순히 아군의 승리에 대한 차원을 넘어서서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문제 다. 조금 더 미래를 생각해서 수십 년 후, 이떠한 경로를 통해서든 너의 수 식이 보편적으로 퍼지게 된다면? 이 수준이라면 분명 어려운 수식이라는 걸림돌로 인해 많이 나타나지 못했던 7,8서클 마법사들이 속출하겠지! 8서 클 마법의 위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너도 알고 있지 않은가? 만에 하나라도 8서클 마법사가 한나라에 열 명 정도 나타났다고 상상해봐라! 그 들이 두번씩만 인시너레이트를 시전하면 눈앞의 백만 대군이 무서울쏘냐?" "어…음……."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긁었다.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만을 생각하 느라 거기까진 차마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5서클을 암산할 수 있는 마법사라는 건……. 후우, 지금은 마법을 시전함에 있어 마법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상대 중 누가 마법사이며 그 가 마법을 사용할 순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2서클도 아닌, 자신 이 목표한 수십 여명의 인간을 공격할 수 있는 5서클을 아무런 징후 없이 순식간에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검사와 같이 검을 쥐고 준 비동작을 취할 필요도, 궁수처럼 활을 사용할 필요도 없다. 단지 생각할 머 리와 보이지 않는 마나를 움직일 능력이 필요할 뿐이지." "적은 도저히 암살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가 없겠네요." 나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었다. "암살뿐인가? 그를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게다가 마법을 배우는데 큰 노력이 들지 않게 되었으니 그 사이에 검술 등을 배워둘 수도 있을 테고… 검을 휘두르며 마법을 써대는 인간이라. 완전히 무적철인이 따로 없구만. 허허!! 이게 단지 수십 년 내에 이루어질 것을 생각하자니 자 다가도 소름이 돋는다!" "음……." 나는 조금은 심각하게 앞으로의 미래를 상상해봤다. 확실히 마법사들이 점점 무적이 되어 가는 반면 그들을 막아 줄만한 수단은 전혀 발전하지 않 는다. 순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전하지 않고 나라는 인간에 의해 비정상 적인 방법으로 발전을 거두니까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지금 그걸 걱정할 시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당장에 카르틴이 오 지 않으면, 그리고 보급을 원활히 하지 않으면 우리들은 당장에 다가올 봄 까지도 버티지 못하고 몰살당한다구요. 몇 십년 후의 일까지 생각하기엔 우리들에게 너무 여유가 없다고 생각지 않으세요?" "허, 점점 더 제 멋대로로군. 내가 너의 진영에 가담한 일에 대해 회의를 빠지도록 만들지 마라." "이런, 저는 여전히 평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양손을 걷어 붙이고 뛸 각오를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내 주변 사람들이 살아있다는 대 전제 하에 말예요." 나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잔뜩 흥분한 분위기를 환기시켰 다. "그건 그렇고. 류온님께서 해룡족부대와 함께 나서시겠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기 위해서인가요? 그건 너무 위험한……." "…크윽! 3서클 암산이라는 세기의 위업을 달성했는데 어떻게 실전을 거 쳐볼 생각을 않을 수가 있겠느냐!? 게다가 나무성채를 상대라면 일정 부분 에 3서클 마법을 여러 번 집중시전 함으로서 타격을 줄 수도 있을 거다. 마법서를 볼 것도 없이 마상 위에서 가볍게 마법공격이 가능해졌으니 기사 들 사이에서 공격을 하면 내가 마법공격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도 힘들 고! 혼전의 낌새가 보여 조금만 위험할세라 쳐도 그 즉시 빠져버리면 되는 거고!!"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약간 흥분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생각해 보니 정말 엄청난 도움이지 않는가? 뭐, 그렇다곤 해도 저 류온님이니까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3서클 암산 같은 것이 가능해진 것일 테지만. 문득 류온님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에 대한 것이 떠올랐다. 역시 류 온님 같은 마법사를 얻기는 무지하게 힘들 거다. "정말 그렇군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것도 있는데, 8서클 마법사이신 류 온님을 보낸다는 것은……." "어디에 있든 만에 하나라는 사태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일정 수준의 안 전이 보장된다면 만에 하나라는 가정은 잊는 편이 좋아!"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지간히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나보 다. 그도 마법에 목숨거는 마법사니까. 결국 작전회의는 기사로 변장한 류온님 -눈에 띄는 분홍색머리는 확실히 투구로 가리고- 과 해룡족 부대를 중심으로 편성되기는 것으로 결정이 났 다. 조금이나마 살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아서 그래도 좀 났다고 할까? =========================================================== 이번껀 좀 길다.... 냠냠쩝쩝.... 미역국 먹는 중. 아.....더워.................................. 이르나크의 장 Part 51 브리첼 혼 존스의 일기 빌어먹을 만큼 화창한 날씨다. 이런 날엔 계집 하나 꼬셔서 교외라도 돌 아다니면 딱일 텐데 남자냄새나 나는 막사 안에 앉아 대기하고 있어야 한 다니. 제6왕자 놈은 대체 언제까지 이 전쟁을 질질 끌 건지 모르겠구만. 어 서 빨리 죽어서 만백성을 위해 좋은 일 할 생각은 않고. 나는 나무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손 부채질을 했다. 그리 더운 날씨는 아 니었지만 무거운 갑주를 입은 채여서인지 약간의 더위를 느낀 것이다. "또 당한 모양이더군." "또 말이오? 대체 그 부대는 뭐지?" "마법사 문제는 빼고서라도, 아무래도 그것 같지 않소?" "그거라니?" 가까운 곳에 앉아서 수근거리는 클라오경과 멜라니스경의 이야기를 귓등 으로 흘려듣다가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말이 있어 앞뒤 없이 툭- 질문을 던졌다. 고개만 삐딱하게 돌린 내 자세에 고지식의 대명사인 멜라니스경이 불쾌한 얼굴을 했지만 클라오경은 온화한 얼굴로 친절히 대답을 해주었다. "10년 동안 잠잠했던 해룡족이 최근 북부영지를 침략하기 시작했지 않소? 그것 때문에 최상부에선 초비상 상태이고." "우리나라가 내전 상태이니 이때다 싶었겠지. 야만족 놈들도 목 위에 머 리라는 걸 이고 있을 테니. 그런데?" 전부터 내 말투를 계속 문제삼던 멜라니스경이 아주 따져들고 싶은지 몸 을 일으키려했다. 그러나 클라오경이 다음 말을 시작하자 그 이야기를 놓 치지가 싫었던 것인지 다시 앉은 자세를 정리했다. "그런데 이번에 아군을 애먹이고 있는 그 부대가 보통 기병과는 달리 가 벼운 갑주를 입고 화살을 날려대는 궁기병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기동력을 따라잡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고 하더이다. 그 부대의 특징이 익히 들 었던 해룡족의 부대와 굉장히 흡사하지 않소?" "…그건……." 멜라니스경은 클라오경의 말을 듣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소. 결국 제6왕자군이 해룡족과도 손을 잡은 거지. 대체 어떤 방법으 로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최북단의 해룡족의 땅까지 가서 교섭을 벌인 것 인지 신기할 따름이더군. 최상부가 난리도 아닌 것이 다 그 때문인 듯 싶 더이다." "그놈도 참. 쪽수가 부족하니 상대를 보지도 않고 여기저기에 손을 벌려 대는군. 절천지 원수 카르틴에 이어 야만인에게까지?" 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이 끝나자 멜라니스경이 크게 맞 장구를 치며 격분했다. "그러게 말이오! 제6왕자에겐 아르윈 왕국 인으로서의 자존심 같은 게 존 재하지 않는 건가? 그놈의 측에 가담한 다른 귀족들도 그렇고." "그런데 제6왕자군에 레이포드경과 에스문드가까지 가담해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 않소? 십여년 전 해룡족을 친 것이 레이포드경이고, 대대로 카르틴과의 결전에 가장 큰공을 세운 것이 에스문드가이건만." "제6왕자에게 휘말려서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 아니겠소." "그렇군." 곧 클라오경과 멜라니스경이 쳐죽여 마땅한 제6왕자에 대한 격렬한 논의 를 벌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벗어나 몸을 길게 펴며 기지개 를 했다. 땡전 한푼 나오지 않는데 무엇하러 그런 놈을 욕하는 일에 내 입 을 혹사시키겠는가. 스륵-. 내가 다리를 쭉 뻗고 편한 자세를 잡고 있는데 이제 막 아기 티를 벗은 꼬마녀석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 꼬마의 모습을 본 클라오경과 멜라 니스경이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미르경." "별 탈은 없으셨는지……." "아, 일부러 신경 쓰실 것 없습니다. 하던 이야기를 계속 하십시오." 세미르는 손을 들어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해도 상대가 상대인 만큼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 가장 부상하고 있는 가문이 다름 아닌 트로이 후작가와 후르부 크 백작가가 아닌가. 라이벌 격이었던 리아 후작가와 반역자로 몰리면서 트로이 후작가는 그 권세가 차마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다. 그리고 후르부크 백작 가도 트로이 후작가와 함께 반역자인 제6왕자의 실상을 밝혀내는 일을 주 도했으며, 최근 들어 세스케인인가 하는 그 젊은 장군의 공 때문에 다른 후작가 못지 않게, 그 이상으로 떵떵거리고 있는 실정이다. 소문엔 트로이 가는 공작가로 후르부크가는 후작가로의 격상이 확실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르부크 백작가의 차남이 바로 저 세미르라는 꼬마놈인 것이다. 그는 아직 실전 경험도 적고 어린 나이 때문이라는 명목으로 나와 같은 백인대장의 직위에 배속되어 있었다. 자신의 백그라운드를 잘 살린다면 부 대의 연대장정도는 따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뭐, 그걸 생각하면 저 꼬마도 약간은 분별이 있는 놈일까? 대 귀족 자제 답지 않고 거만하지 않고 의외로 사근사근한(?) 맛이 있는 것만 봐도……. 그래도 역시 그의 말대로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지내기는 무리다. 하필 저 꼬마 놈이 이 부대로 배속되어 사람을 귀찮게 만든담. "오셨습니까." "예……." 세미르는 어느새 바른 자세를 취하고 인사를 하는 내게 살짝 고개를 숙여 주고 한쪽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변으로 다른 장교들이 무리를 지어 우 우 앉아 세미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세미르의 주변에는 그의 환심이라도 한번 사보고자 졸 졸 따라다니는 자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연대의 사령관까지도 저 꼬마의 눈치를 보고 있을 정도인 것이다. 참 이놈이고 저놈이고… 인간이란 하나같이 권력에 아첨하는 생물이라니 까. 뭐, 권세 있는 집안 아들과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난 영 그런 쪽과 맞지 않아서 말이야. 척 보기에도 엄청 비굴해 보이잖아? 물 론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적당량의 비굴함도 필요하지만 저건 나의 적정선 기준을 초과했다고. 나는 그대로 세미르 외 기타 등등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편한 자세를 취할 수 없게 된 것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그러나 얼마 지니자 않 아 그런 투정은 호강에 겨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렙츠 요새에 적의 습격입니다! 출진 준비를 서두르라는 연대장님의 명령 입니다!!" 전령 놈이 바로 근처에 건설 중인 요새에 적의 습격이 시작되었다는 사실 을 통보해온 것이다. 결국에는 이런 화창한 날씨에 칼부림을 하러 나가야 한단 말인가아∼?! 속속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을 보며 나는 남몰래 한숨을 팍팍 쉬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출진이 내키질 않는 건지. 그러나 내 섬세한 기분에 신경을 써 줄 상부가 아니므로 나는 곧 갑옷을 챙겨들었고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빠져나갔다. 렙츠 요새의 원군으로 다급히 파견된 우리들은 싸움이 일어나는 전장을 가까이 두고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잠시 멈추었다. 렙츠 요새의 놈들이 하는 꼬락서닐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 자애로운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줘야할 듯 한데 왜 이렇게 멈춘 건지? 나는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조심스럽게 연대장의 낌새를 살폈다. 의외로 연대장 역시 진군을 멈춘 것에 대해 곤란해하고 있 는 눈치였는데, 보아하니 세미르라는 꼬마 때문에 이렇게 중간에 진군을 멈춘 모양이었다. "기다리십시오." "어…어째서… 세미르경… 한시가 다급한 시점입니다!" 아아, 연대장이라는 사람이 일개 백인대장에게 쩔쩔 매는 꼴이라니. 그건 그렇고 저 꼬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진군을 멈추게 한 거지?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일단은 이곳에 멈춰 상황을 지켜보도록 하지요." "생각이라니, 대체 어떤……?!" "……." 세미르는 풀이라도 바른 듯 입을 꼭 다물었다. 그리고 연대장은 어쩔 줄 을 몰라하며 세미르와 아래쪽 전장을 번갈아 보았다. 우리들이 이렇게 지체하고 있는 동안 아래쪽의 전장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아군의 피로 점철되어가고 있었다. 적은 원거리에서는 간단한 갑옷을 입은 놈들이 화살을 날리다가, 필사적으로 돌진한 아군의 중보병과 간격이 가까 워지면 앞선 기사들이 뒷편의 궁기병들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내 궁기병들 도 활을 치우고 시미터 같은 곡도를 뽑아들고 전장에 참여했다. 그러나 무 엇보다 놀라운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이 소란스런 전장을 누비 며 마법을 날려댄다는 것이다. 아무리 살펴봐도 자리에 가만히 선 채 마법 을 캐스팅 하는 놈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대단위 공격 마법 이 아닌 듯 위력이 아주 약했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양상의 마법공격이 었기에 렙츠 요새의 놈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제기랄--!! 왜 도와주러 오지 않는 거냐고!?" 렙츠 요새의 몇몇의 병사들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한 모양인지 이쪽을 보고 삿대질을 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욕설 덕분에 우리측의 병사들 불 안해하며 얕은 웅성거림을 만들어냈다. "대…대장님……!!" 처음엔 가만히 있던 다른 백인대장들도 지체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곤란한 얼굴로 연대장에게 세미르의 말은 무시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 나 연대장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끝까지 진격의 명령을 내리지 않았 다. 아이고, 답답해!! 대체 누가 연대장인 건지. 여긴 군대가 아니냐. 아무리 저놈이 대단한 뒷배경을 가지고 있다해도 여기서 지위가 높은 것은 너란 말이다! 이 또라이야! 군대의 기본자세는 상명하복!! 한 연대의 대장인 주 제에 그것도 아직 못 배웠냐!! 인생 그렇게 비굴하게 살았다간 콩고물 얻 어먹으려다 오히려 뜨겁게 한방 먹을 거다!! 나는 차마 입 밖으로 그 말을 꺼내지는 못하고 권력 앞에 쪽을 못쓰는 연 대장을 향해 이를 박박 갈았다. 하지만 사실 한쪽 구석으로는 저 세미르라 는 꼬맹이에게 일말의 기대감이 없진 않았다. 이렇게까지 하는데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 속을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저놈 의 대갈통 속에 든 것이 맹물이 아닌 다음에야 괜히 심심해서 이곳에 기다 리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저놈의 형도 명장으로 소문이 자자하다지!! 그런 놈의 동생이니까 뭔가 획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다!! 믿자! 믿는 자에게 복이 오나 니∼!! "세미르경!!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시는 겁니까!!" 그때 멜라니스경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 연대장을 무시하고 앞으로 서 나서 크게 호통을 쳤다. 시골 한구석에 코딱지 만한 영지를 둔 이름뿐 인 남작의 신분에 백그라운드가 전무하다시피 한 멜라니스경으로서는 그야 말로 목숨을 내 건 행동이라 할 만 했건만, 김 빠지게도 세미르는 끝까지 입을 다문 채였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든 것이, 그 의 얼굴은 어느새 심각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세미르의 살벌한 얼굴을 보고 멜라니스경은 거창하게 나선 것이 무색하게 입을 다물고 조용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도 먹여 살려야 할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새끼들이 있는 몸인 것이다!! 우리들이 세미르라는 걸림돌에 막혀 계속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렙츠 요 새는 거의 전멸지경에 이르러 군의 전열은 완전히 흩어지고 병사들은 꼴사 납게 뿔뿔이 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대비되게 상대는 별달리 피 해도 입지 않을 듯 보였다. 아직 건설 도중이던 렙츠 요새에 주둔한 병사 의 수는 대략 사백 여명으로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고, 설상가상으로 상대 가 이제껏 접해보지 못한 전법으로 나왔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뻔 히 보고 있으면서도 도와주러 오지 않는 우리 부대에 대해 더욱 신경이 쓰 여 더욱 그랬을 것이다. 완전히 전멸 당한 아군의 모습을 보고 웅성거리던 병사들은 완전히 침묵 했다. 그리고 주변 병사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세미르에게로 몰렸다. "가죠." 그때 침묵을 깨고 난데없이 세미르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나도 동시에 입을 짝 열었다. 아군이 전멸한 직후에 가자니, 그게 웬 소리냐? 대체 저 놈이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이 맞기는 한 거야? 사실은 저능아인데 후 르부크가가 체면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내보냈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겠 지이!?!? "세미르경, 그전에 먼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들어야만 하겠습니 다!!" 권력 앞에 비굴함은 필수라는 이념을 가지고 있던 연대장도 드디어 세미 르를 향해 대들기 시작했다. 끝까지 와서 보니 이 상황이 기가 막혔던 것 이리라. "진격하시지요. 다시 한번 말씀드릴까요?" 세미르는 차가운 눈초리로 연대장을 노려보며 강하게 경고했다. 이상한 박력으로 인해 -아마도 그 박력의 출처는 후르부크가라는 거대한 백그라운 드일 것이다- 순간적으로 기 싸움에 눌린 연대장은 차마 불만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 하고 이를 악 물었다. 그러다가 곧 자포자기라도 하듯 크게 한 숨을 쉬고 병사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전군, 전진한다!!" 뒤늦은 진군에 병사들은 크게 웅성였다. 그러나 어찌하랴. 우리들의 상층 부가 이토록 엉망인 것을. 그저 힘없는 아랫것들은 이래저래 그들이 굴리 는 대로 흙탕을 뒹굴 수밖에. 아군은 천천히 폐허 비슷한 것으로 변한 렙츠 요새로 다가갔다. 적들은 우리들의 행적을 영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활시위를 당긴 채 경계를 하고 있었다. 사실 눈 씻고 둘러봐도 사면이 탁 트인 이곳에 함정이라 할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지금 왜 전진하고 있는 걸까? 저들과 정면대결을 하기 위해서? 도 저히 이해 불가한 이 상황으로 인해 사기고 뭐고 완전히 죽어버린 이 상태 에서 말인가? 아니다. 그래도 세미르라는 꼬마놈, 뭔가 생각이 있겠지. 저놈도 생각이 있으니까 이러는 것일 거라고. 머리 속을 왱왱 도는 생각 때문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동안 벌써 아군은 적과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다가가고 말았다. 적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활을 쏘아 최전열을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세미르가 이 부대의 대표라도 되는 양 연대장을 제치고 제일 앞으로 말을 몰아나갔다.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이의 주목을 받은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 이렇게 소리쳤다. "항복하겠다!" "푸웃---!!" 나는 한 무더기의 침을 튀겨냈다.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그의 선언에 병 사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황당함의 대 물결을 만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진 세미르는 그에 그치지 않고 우 리들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이미 승산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을 터. 무단히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 면 얌전히 그들을 따르라." "노…농담이겠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는 한가?!"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아주 막말로 그를 향해 소리쳤다. 더 이상은 백그라운드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나의 질책을 들은 것인지 세미르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게로 향했다. 그리고 묵직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농담이 아니다." "제에--기랄-------!!" 나는 검을 뽑아들고 아주 괴성을 질렀다. 내가 미친 게지!! 저런 놈을 믿고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내 목소리를 시발점으로 병사들이 하나 둘 검을 꺼내 쥐고 공격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선 나는 머리꼭대기까지 뻗친 열 을 감당하지 못하고 누구라도 당장에 쳐죽여 버리겠다는 기세로 눈을 부라 렸다. "으악!!" "크학!!" "헉!" 그러나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촉은 그런 열기를 완전히 식혀버렸 다. 나는 불행 중 다행의 케이스로 화살 비를 피했으나, 운이 나쁜 축에 속 하는 놈들은 이미 본보기로 땅을 뒹굴고 있었다. 살기 등등하게 활을 겨누고 있는 적병을 보며 나는 손아귀의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오늘따라 영 내키지를 않더라니!! 전쟁터에서 뼈가 굵었던 브리첼 혼 존스. 황당하게 포로신세가 되다. 크아악! 거짓말이겠지---------!!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제목 지을만한게 없어서.......;;; 비축분이 뚜욱뚜욱 떨어져가고 있습니다. ^^*********** 이벤트... 뭘로 할까나....... (~-_-)~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2 투항자 (1) "뭐?" 나는 딜티를 향해 다시 한번 되물었다. 스스로의 귀를 의심하여 되묻기를 벌써 세 차례. 나의 반복되는 질문에 딜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후- 세미르가 자의로 항복해 들어왔어. 너를 만나고 싶다더군." "세미르가……." 나는 딜티의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차가워진 입가를 가져갔다. 약간의 초 조함이 몸을 엄습해 들어왔다. "가보지 않을 거야?" 딜티가 내게 대답을 독촉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내 기분을 생각해주기 위해서인지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러고 보면 이 일이 신경 쓰이는 것은 나뿐만이 아닐텐데. 딜티는 세미 르와 아주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였지 않은가. 그런데 내가 딜티를 배려하 진 못할망정 그 반대로 딜티에게 위로 받는 꼴이라니. "미안해. 물론 가봐야지. 다른 사람을 챙겨줄 줄도 알고, 딜티도 많이 컸 네." 나는 딜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빙긋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닭살이라며 난리를 피울만한 상황이었지만 딜티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세미르가 감금되어 있을 장소로 가는 동안 우리들은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고 걷기만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행동하려고 했지만 머릿속을 맴도 는 생각들 때문에 내 얼굴은 금방 굳어져 버렸다. 아군의 최고 책임자는 다름 아닌 나. 세미르의 처분은 내가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전에도 이와 같은 자가 있었다. 게릭 혼 아이시스라는 투항자가……. 하지만 그는 진실로 투항한 것이 아니었고, 아군은 그로 인해 대패하여 수많은 병사를 잃었다. 국왕군이 똑같은 수법을 두 번이나 사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세미르는 게릭과는 달리 대귀족 후르부크가의 자제이다. 그런데도 세미르를 버림 수로 사용할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세미르는 장손이 아니 며, 이미 후르부크가에는 세스케인이라는 뛰어난 남자가 존재하므로 마음 을 독하게 먹는다면 버림 수로 사용할 수도 있다. 같은 작전을 다시 한번 쓰는 것에 대한 의심도 그를 역이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역시 아군에겐 더 이상의 불안한 투항자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일층까지 내려왔을 때 그곳에는 프리란트님과 드리크경 등의 분들이 계셨 다. 내가 계단에서 완전히 내려서자 프리란트님이 나서서 말했다. "카류님." "기다리셨나요?" "…일단 카류님께서 친구 분들과 함께 먼저 이야기를 나눠 보십시오. 저 희들은 그 이후로 미루겠습니다. 에스문드 백작은 먼저 그곳에 내려가 있 습니다." "예…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그분들의 배려에 감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딜티와 함께 천천히 지하의 감옥을 향해 걸어갔다. "왔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 사이에 벌써 여기까지 내려온 모양이 었다. "누가 상(喪)이라도 당했냐? 뭘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이야!" 지하로 통하는 문 옆에 에르가 형은 내 얼굴을 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하 지만 그의 얼굴에는 '나는 세미르가 굉장히 신경이 쓰여요.' 라고 쓰여져 있었다. 5살 때부터 함께 했던 죽마고우인데 당연한 일이겠다. 나는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더 이상 고민은 집어치우기로 했다. 처음 군을 지휘함으로서 간접적이긴 해도 수많은 인간을 죽여봤다. 그 다 음엔 내가 직접 검을 썼다. 그리고 결국에는 디트경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나의 손은 분명 사람의 피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 언젠가 올 차례가 돌아온 것에 불과한 것이다. 비록 너무나 갑작스 러워 조금 당황스럽지만. "어서 들어가시죠." "그래… 어서 들어가……." 나는 멍하니 누군가의 말에 대답하다가 문득 그 목소리가 딜티나, 에르가 형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기에 친구가 아님에도 이 자리에 끼어있는, 카이의 목소리도 아 니었다. -히노도 세미르의 친한 친구이지만 감옥은 그 아이가 올만한 장소 가 아니었기에 제외인 상태였다.- 내가 의아한 시선을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보내자, 우리들 또래라곤 생 각할 수 없는 그 앳된 목소리의 주인이 크고 파란 눈동자를 데굴 굴려 나 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제가 필요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만. 불쾌하시다면 저는 여기서 기다리 도록 하지요." 나는 가만히 힐레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앞에 불이 번쩍 튀는 것을 느 꼈다. "그래! 네가 있었지!!!" 나는 뒤늦게 힐레인의 존재를 깨닫고 그의 어깨를 잡고 앞뒤로 짤짤 흔들 었다. 평소 같았으면 그 즉시 내 손을 뿌리치고 자기 성질대로 쌍 욕을 퍼 부었겠지만, 힐레인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날 생각해주겠다는 것인지 짤짤 흔드는 내 손안에서 반항 없이 가만히 서있었다. "후우-." 나는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힐레인을 놓아주었다. 엘프의 피를 이어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파악하는 일이 가능한 힐레인이 라면 세미르가 진실을 말하는지 거짓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미 르가 진짜 첩자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일테지만, 그래도 조금 전과는 달리 일말의 기대감을 가질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것도 생각 않고 여기까지 온 거냐? 어쩐지 다 죽을 것 같은 얼굴이더 라니. 너 바보 아냐?" "아? 음. 좀 당황해서……." "이런데도 네가 마법사들이 경악해마지 않는 세기의 대 천재라니!!" "형도 정말… 난 단지 수학에 능한 것에 불과하다구. 류온님만 해도 평소 에 종종 실수를 하시잖아?" 나는 에르가형의 핀잔을 맞받으며 밝게 웃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현재의 나는 완전히 붕 뜬 기분이었다. 형도 그런 나의 기분에 동승하고 싶은 것 인지 화사한 얼굴로 내 말을 받아주었다. "…너무 들뜨지는 말아주십시오. 저는 단지… 진실을 가르쳐드릴 뿐입니 다. 냉정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기대가 클수록 되돌아오는 좌절도 큰 법 입니다." 힐레인이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투닥거리는 에르가형과 나를 굳은 목 소리로 제지했다. 그제야 우리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심각한 얼굴로 되돌 아갔다. "들어가지." 에르가형과는 달리 가벼운 분위기에 동참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 던 딜티가 짧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에게 눈짓을 하여 문 을 열도록 명했다. 곧 문이 열리고 우리들은 안쪽을 지키던 다른 병사의 안내를 받아 걸어 들어갔다. 우리들이 가는 곳은 반 지하로 빛도 어느 정도 들어왔으며 보통 감옥하면 떠오르는 지저분한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살벌한 철창만 뺀다면 토이렌 의 원룸이 생각날 정도로 쾌적한(??) 공간이랄까? 사실 전에 처형당하기 직전 왕성 어딘가의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곳은 어 느 정도 품위유지가 가능한 곳이었다. 전에 휴나르성의 집사를 심문할 때 의 감옥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감옥도 신분에 따라 따로 가두는 곳이 나 뉘어져 있는 모양이다. 세미르 역시 거물이라 칭할 만 한 인물이니까 이곳 에 가두어졌겠지. "이곳입니다." 병사는 어느 철창 앞에 멈추어 그렇게 말하고 내게 열쇠를 건네주었다. 원래 문을 열고 닫는 것은 그의 소관이었지만, 우리들이 이야기를 하는 동 안에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나를 뺀 모든 인간들이 대 단한 실력을 가진 자들이므로 호위에 대해서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 다. 병사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다가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시 선을 천천히 쇠창살 너머로 옮겼다. 침대 위의 앉은 누군가는 뒤쪽 창에서부터 스며든 은은한 빛을 등지고 있 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러운 청보랏빛 머리칼이 단번에 그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세미르." 우리들의 기척을 느끼고도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세미르가 나의 목소리가 끊어지자마자 고개를 들었다. 그는 왠지 힘이 없어 보이는 웃음을 띄우며 나를 향해 말했다. "카류구나." 쿵- 쿵-. 심장이 격하게 뛰어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곁에 선 딜티에게 그 고동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조금 얼굴이 붉어져 왔다. 아,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 겨우 그까짓 것이 부끄럽더냐!! 좋아! 애 태우 지 말고 속전속결하자!! "세미르……." "못 보던 새에 키가 굉장히 컸다, 너……. 지난 몇년동안은 계속 그대로더 니 요 반년 사이에 그렇게 변해버렸어……." 내 말을 가로챈 세미르가 그렇게 말하며 철창너머에 서있는 나를 가만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작게 쉬며 고개를 돌려 철창이 쳐진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에르가형을 필두로 한 싸가지 5인방 -그리운 말이로군- 대부분이 그랬듯, 예전의 세미르는 독백이나 명상 같은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다. 어딘지 모를 그 생소한 모습에, 우리들은 에르가형까지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한동안 말없이 있던 세미르가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변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지?" "……." "왜 투항했지?" 내가 뭐라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딜티가 나섰 다. "카류의 편이 되겠다는 건가? 스스로 네 가족을, 네 형을 등지고?" 세미르가 말 없이 가만히 듣고만 있자 딜티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몹시 직설적으로 말했다. "네가 세스케인을 등질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너도 좀 변한 거 같다. 딜티." 세미르는 대답을 하는 대신 딜티의 현재 모습을 평했다. 그러자 딜티는 한 손으로 철창을 잡고 얼굴을 내밀면서 싱긋 웃어 보였다. "난 잘 모르겠는걸?" 세미르와 딜티가 철창을 가운데 두고 이상한 눈싸움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를 절대 참아주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이것들이 둘이서 무슨 야리꾸리한 분위기를 만드는 거야? 당장에 본론으 로 들어가!" 에르가 형이 이내 참지 못하고 한발자국 걸어나와 소리쳤다. 그 모습을 본 세미르가 이내 피식 웃었다.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전에 너무 획기적인 변화를 거쳤기 때문인가?" "뭐야?" 잔뜩 인상을 찡그린 에르가 형이 대들려 했지만 세미르는 그에게서 관심 을 끊고 날 쳐다보았다. "넌 얼마나 변했을까? 아직도 너는 그렇게… 착해빠진 녀석일까?" 착해? 전혀. 그 날을 계기로 완전히 삐뚤어지기로 결심해서, 결국에는 디트경까지 죽 여본 나이다. 환생이란 면죄부가 있어도, 상대의 삶을 동의 없이 함부로 빼 앗아 버리는 결코 좋은 일이라 평할 수 없는 살인을 이미 밥먹듯이 저질러 왔다. 사실 내게도 꽤나 정당한 이유가 있다. 나는 누명을 썼고 이대로 죽기는 너무 억울하다. 나나 친구들만 죽는 것은 싫다. 이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당연히 남을 죽여야 한다. 그렇다. 그렇지만. 그래도 역시 살인이 좋은 일 은 아니다. 더 이상 나를 순진 만빵에 착한 녀석이라 칭해줄 만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나는 원래부터 네 생각만큼 그렇게 착한 놈이 아니었어."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녀석이?" 세미르는 손으로 왼쪽어깨를 긋는 시늉을 했다. 트로이 후작과 유넨의 수 작으로 동굴에 갇혔을 때 내가 어스웜퀸의 손에게 세미르를 구하면서 났던 상처자리를 뜻하는 것이다. 물론 마법으로 치료해 지금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지만. "나도 내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기에 그런 일도 가능했던 거지. 말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맞아. 자신의 몸을 불살라 남을 돕는 것을 너무도 당연히 여기는 녀석의 사고 같은 건 이해하기 힘들 거야." 세미르는 농담이라도 던지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말없이 있으려니 그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네가 반역자로 몰린 뒤로 내가 매일 방에 처박혀서 있으려니까 어느 날 형이 나를 찾아와 고백하더라. 형이 널 반역자로 몰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실로 모함했다며?" "…그래……." 나는 그 당시 황당했던 세스케인의 증언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말하기를 네가 반역을 저지를 것을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줄 수만은 없었대. 듣자하니 네가 반역을 위해 에렌시아님과 아르멘님의 사건을 그냥 묵인했었다며? 내게 직접 그 아티펙트를 가져와 보여주기까지 하더라고. 들어보니까 그게 딱 네 목소리인 거 있지? 너 정말 아스트라한 님께서 그분들께 위해를 가할 일을 알고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고 내버려두 었니?" "그런 일은 없었어." 나는 또박또박 한자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러자 세미르는 다시 말을 이 었다. "너는 사실 어찌할 수 없는 위선자래. 왕족임에도 학교에 나온 것이나, 계 급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살갑게 지낸 것. 이게 실은 전부 우연이 아니 라 아스트라한님과 함께 왕위찬탈을 하기 위해 밑거름을 쌓은 것이였대." "절대 아니야." 나는 다시 한 번 강하게 말했다. 그러자 세미르가 안타까운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넌 반역을 했을 거래." "대체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다혈질의 에르가형이 말도 안 되는 것을 주절거 린다며 짜증을 냈다. 그러나 세미르는 아랑곳 않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네가 태자이신 루플로프 전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은 공공연연한 사실이지. 게다가 너는 그분이 세력에 위협이 될 만큼 대단한 사람들과 인 연을 맺고 있었어. 대마법사인 아르디예프님과 여러 마법사들. 레이포드경 과 리아 후작님. 그리고 너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많은 친구들의 가문……. 네가 비록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았어도 사람들은 결코 너를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래. 그리고 언젠가는 반역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라더라." "……." 내가 대답을 하지 않아서 잠시 기분 나쁜 침묵을 떠돌았다. "카류리드 전하는 분명 뛰어나지만 루블로프 태자전하도 충분히 성왕이 되실 분이다. 그러니 굳이 제6왕자파에 가담하여 제6왕자가 왕이 되는 실 례를 낳아 왕위 계승의 불안을 야기 시키기 보다는 제1왕자파에 서는 것이 바르다. 그렇다고 해서 카류리드 전하를 실각시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 을 꾸며 모함한 것을 잘한 짓이라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나 는 쪽보다는 거짓말로 모든 것이 끝날 수 있는 쪽을 택했다. 내가 분명 옳 았던 것은 아니지만, 해야할 일을 했던 것이다." 세미르는 잠시 운을 띄웠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라고 그러더라. 꼭 틀린 말 같지도 않기에 말이지……." "지금 너희형을 변호해주기 위해 여기에 온 거야? 나라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도 좋다는 의견에 너도 동의한단 말이지? 하지만 그 희생자가 자 신이 되어도 계속 그런 말을 하고 앉아 있을까?" 갑자기 딜티가 그의 말에 끼어 들었다. 그의 처지에 감안했을 때 꽤나 의 미심장한 내용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처음과 같은 평이한 어조로 흥분된 감 정 같은 것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꼭 자신이 희생되어야만 이룰 수 있다면, 세스 형이라면 진짜 그러겠다 고 할지도 몰라. 원래 형은 신념을 밀어붙이는 의지가 대단한 사람이거든." "이쪽은 사양이라고 전해." 딜티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형의 말이 너무 그럴듯해서 말이지, 난 거의 형에게 설득 당해 있었지. 하아… 그런데… 그런데 자꾸만, 자꾸만 네가 눈에 밟히는 거야." 어느새 세미르는 딜티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자기는 죽어 가는 데도 우리에게 그렇 게 말했지." 세미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짐일 뿐인 자신은 버리고 식량을 가지고 먼저 가버리라고 했지." "세미르……." "네가… 나를 살려주었지……." 곧 그의 얼굴에서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다. "형의 말이 맞는 거 같아서 너를 잊으려고 했는데도, 그런데도 내가 의지 박약아라서 그런 건지 자꾸 네가 눈앞에 나타나는 거야. 조그만 녀석이 날 좀 봐 날 좀 봐 하면서… 하하하……." 세미르는 그렇게 말하고 손으로 머리를 긁으며 이내 멋쩍은 웃음을 터뜨 렸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웃음기가 아닌 이상한 괴로움이 엿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카류에게로 오겠다고? 네가 투항하겠다고 하면 아군이 너를 덥석 받아들여줄거라 생각했어?" 어색해진 분위기에 사람들이 전부 침묵을 지켰지만 딜티만은 아무렇지도 않게 직설적으로 세미르를 향해 물었다. "아… 나도 알고 있어. 아이시스 남작에 대한 것도 있고… 그래… 뭐… 그래도… 그래도 이대로는 버티지 못하겠더라. 가슴이 답답해서, 도저히 이 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그냥 무작정 부딪혀 부기로 했지. 아무래도 에르가 에게 옮았나봐." 순간 에르가 형이 미간을 있는 대로 구겼다. 그러나 심각한 분위기였기에 당장에 들고일어나지는 않았다. 세미르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희미한 미소 를 지었다. "네 편이 될게.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었어. 결과야 어떻게되든, 이것으로 나는 홀가분해 질 수 있을 테니까." 이상하게 목이 바짝바짝 메여와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요한 실내였 기에 그 소리를 모두가 들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이 부끄러웠던 것인지는 몰라도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라 왔고, 더 이상 얼굴을 친구들에게로 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더 이상은 생각하 지 않고 그 즉시 힐레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힐레인은 이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가 닿자 마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진심입니다." 힐레인의 짧은 말 한마디가 몸을 찌르르 울리게 만들었다. "…저 꼬마는… 누…구……?" 지금껏 우리들에게 시선을 주느라 미처 힐레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는 지 세미르가 그를 가리키며 물었다. 갑자기 진심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하 는 저 꼬마의 정체가 몹시도 궁금했으리라. "후후. 그는 말이지. 나의 수호룡께서 내리신 현자야." "하아?" 세미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도 나를 수호하는 드 래곤의 소문을 들었음이 틀림없지만, 당연히 믿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래서 저런 얼굴이 된 것이리라. 그러나 나는 피식피식 웃는 얼굴로 계속 말을 이었다. "드래곤의 현자가 네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확인해 주었으니 네 처분은 좋은 쪽으로 흘러가게 될 거야." "장난하지 마! 대체 무슨……!" 내가 조금 전과는 다르게 얼굴에 화사한 웃음을 띄우며 말하자 세미르가 황당함과 불쾌감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겨우겨우 내뱉은 자신의 진심이 얼토당토않은 말로 비웃음 당한 듯한 느낌인 모양이다. "미안.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말해줄게.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줄래? 지금 당장 너를 이곳에서 꺼내주고 싶지만, 다른 분들께도 이야기해야 하니까." "……." 세미르는 내 말에 눈을 약간 가늘게 떴다. 아군에 가담하기 위해 투항했 지만 우리가 자신을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라 거의 확신하고 있었던 모양 으로, 갑작스레 자신을 받아들일 듯이 이야기하자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 굴을 했다. 나는 천천히 세미르가 갇힌 철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철창 사이로 팔을 넣어 녀석에게 이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세미르는 복잡 미묘한 얼굴을 했지만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 왔다. 그러나 내 손이 닿기 직전, 녀석은 엉거주춤 자리에 서서 망설였다. 순간 나는 팔을 있는 대로 뻗어 세미르의 옷깃을 잡아챘다. 그리고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끌어 동원하여 녀석을 끌어 당겼다. 방심을 한 것인 지 세미르는 나보다 한참은 건장한 체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쪽으로 끌 려오고 말았다. 그러나 아무리 순간의 틈(?)을 노렸다고는 해도 내게 세미 르를 번쩍 들어 몸 째로 이쪽으로 끌어올 수는 없는 일이었으므로 내 쪽으 로 끌려온 것은 세미르의 상반신에 불과했다. 중심이 무너진 세미르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철창에 얼굴을 박는 것만 은 피할 수 있었다. 곧 녀석은 엉거주춤한 자신의 자세를 바로 잡으려고 움직였다. 그러나 나는 그의 목둘레를 양팔로 확 껴안아 녀석의 행동을 방 해했다. "…앗…잠깐……." "이것도 정말 오랜만에 하는 거잖아. 이거 거의 내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이 없는데 우리 세미르는 내 포옹이 그립지 않던?" 세미르가 마구 발버둥쳐 내게서 빠져나오려 길래 나는 정말이지 서운하다 는 식으로 중얼댔다. 그러자 세미르가 몸의 움직임을 딱 멈추었다. 옷, 웬 일로 이렇게 약빨이 잘 듣는 거지……?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세미르는 긍정이라도 하듯 미동을 않았다. 웬일로 요 녀석이 이렇게 솔직(?)하냐 싶어 기특하게 세미르를 바라보았을 때, 녀 석은 두 눈을 꼭 감고 이를 악 문 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미르가 나까지 민망해질 정도로 부끄러워해서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왠지 주위의 분위기까지 영 껄끄러워지는 것 같아 이 뒤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난 금방 결정을 내 리고 곧 과장되게 콧소리를 내며 목을 두르고 있던 오른손으로 그의 머리 를 쓰다듬었다. "아구∼∼ 우리 세미르!! 안 보던 사이에 더 귀여워 졌네!! 그게 그렇게 쑥스러워?" "시…시끄러! 보통은 다…다들 부끄러워한다고!! 당장 이거 놔!" "싫어! 어떻게 붙들었는데!!" "이거 놓지 못해! 야!! 너 맞고 싶어?!" 세미르는 에르가 형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불같이 열을 내며 발버둥쳤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빠져나온 듯 하자 나는 미소지으며 목소리를 가라앉히 고 말했다. "이건 아무에게나 해주는 게 아니야. 네가 내 친구로 돌아왔음을 나타내 는 증표라고." "…알…고 있어……." 한창을 발버둥치던 세미르가 손을 멈추고 작게 말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않다가 다시 한번, 이번에는 더욱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하고싶은 거야……." 쥐어짠 듯 겨우겨우 내뱉은 세미르의 그 말이 무척이나 따스함을 느꼈다. 그 말은 두꺼운 눈밭에 내려오는 봄빛보다도 빠르게 내 가슴속으로 스며들 기 시작한다. 나는 팔에 힘을 주어 다시 한번 세미르를 꼬옥 안고, 중얼거렸다. "고마워… 세미르……." ========================================================= 쪼오매 긴데 짜를 부분이 없네요. ^^ 전쟁이 아니라 해피데이~ 이르나크의 장 Part 52 투항자 (2) 지하에서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며 나는 웃는 얼굴로 힐레인을 바라 보았다. "정말 고마워. 네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 정 반대의 기분을 느끼고 있었을 테지." "…확실히… 제가 고마워 하실만한 일을 했죠. 말 한마디로 끝내실 것이 아니라 좀 더 진중히 감사의 표시를 하는 것은 어떠신지?" 힐레인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퉁명스러운 내 말에 답했다. 아아, 조금 전 내가 자신의 멱살을 붙들고 딸딸 흔들었던 일에 원한을 품 고 있다가 상황이 해결된 듯 하자 드디어 본디 성깔이 내보이는 모양이다. "니 놈도 참 대단한 녀석이다." 힐레인을 향해 에르가 형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댔다. 그리고 에르가 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심정이라는 듯 딜티도 고개를 조금 젓고 있었다. 에르가 형이나 딜티도 마찬가지로 내게 툴툴대지만, 힐레인은 어릴 때부 터 친구였던 그들과는 그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지금은 리아 후작 가의 장남이지만, 원래 그 출신은 평민에 불과했다. 평민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언제나 고분고분한 평민 내지는 정반대로 극도의 반항적 인 평민들만을 보아왔고, 그 때문에 왕자인 나에게 너무도 자연스럽게 심 통 맞은 말은 하는 힐레인에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가만히 되돌아보면 힐레인은 프리란트 님이나 고지식한 분들 앞 에선 결코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힐레인은 상대의 기분을 살 피는 능력을 몹시 얍삽하게 사용하고 있는 듯 하다. 에잇, 지금 그게 문제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정말이지 고맙다!! 어떤 상을 내렸으면 좋겠어?" "됐습니다. 그 손만 치워주시면 억만금의 보상을 받는 것보다 훨씬 기쁘 겠습니다." 힐레인은 그렇게 팩 내뱉고 빠른 걸음으로 먼저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나는 급히 힐레인의 작은 손을 붙들었다. "세미르는… 어땠어?" 나는 다시 한번 그에게서 세미르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와 같은 질 문을 했다. 가슴이 두근거려 그 말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힐레인이 그 자리에 서서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상당히 추상적인 그 질문에도 차근히 대답해주었다. "그는 당신께 받은 그 은혜를 갚겠다는 결심으로 굳어져 있습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당신을 향한 고마움과 애정이 담겨 있었으니까요. 따 라서 전하께서는 그가 했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지 금 이 자리에서 그의 영입을 권하는 바입니다." "으…응……." 나는 고개를 조금 숙여 끄덕였다. 어느새 내 입가에는 미소가 배여 있었 다. "그리고……." 의외로 힐레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한가지. 세스케인이라는 형제분에 관해서인데……." "인데?" 나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끼고 그를 향해 빠르게 되물었다. 세미르가 친형 인 세스케인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은 전부터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 다. 내편이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세스케인의 존재는 상당한 괴 로움으로 작용했으리라. 빨리 말해달라는 나의 시선을 맞받으면서도 힐레인은 곧장 말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됐습니다." 한동안의 침묵에 내가 갑갑함까지 느끼고 있을 때, 힐레인이 갑자기 그렇 게 툭 내뱉고는 몸을 돌렸다. 그의 행동이 너무 돌발적인지라 나는 미처 그를 붙잡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거기 서! 나는 되지 않았어." 모두가 멍해져 있었지만 딜티만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낮은 목 소리로 힐레인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뒷말은 뭐지?" "……." 힐레인은 몸을 우리들 쪽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 즉시 대답하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딜티는 다시 한번 대답을 촉구했다.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 "전하께서 너무 기뻐하시는 것 같아 굳이 이 사실을 각인시켜 드림으로서 마음을 상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요. 진실을 아는 것도 필요하실 테니까요." 힐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가슴에 얹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을 조금 쥐면서 입을 열었다. "세스케인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단지 제3자의 입장에서 바라볼 뿐인 저의 가슴까지 미어지게 만들 정도로, 그는 너무도 깊은 슬픔을 느끼 고 있었습니다. 그가 당신을 배신할 일은 없을 터이지만, 당신을 따르는 동 안은 언제고 그 슬픔을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힐레인은 그렇게 말하고 바로 몸을 돌렸다. 더 이상 내 표정은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있었다. 알고 있었다. 세미르가 괴로워 할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 정은 아무래도 좋았다. 단지 그가 가족을 버리고 내편을 들어준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을 따름이다. 세미르가 괴로워하든 말든 그가 내 편을 들어주 기만 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좋았던 거다. "카류." 누군가가 내 어깨를 붙드는 것을 느끼고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나 잠시 세미르에게 가보고 올게." "어?" 딜티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딜티는 씨익 웃으면서 엄지손가락 을 뒤쪽으로 가리켰다. "세미르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할만한 사람이 누구겠냐? 아, 걱정마. 나는 그 우울한 녀석과는 다르니까. 어쨌든 내가 가서 세미르를 위로해 주고 올 게." "디…딜티! 그…그런!" "걱정 마! 나만 믿으라고." 딜티는 빙긋 웃더니 그대로 아래쪽으로 뛰어내려가 버렸다. 어느새 그림 자까지 완전히 사라진 계단의 중간에서 나는 멍하니 아래를 내려보았다. ====================================================== 대신 이건 짧아요. ^^;;; (너무 짧잖아!!) 세미르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아쉬운 분 손~~? ^_^+++ 이르나크의 장 Part 52 투항자 (3) 빛의 기울기를 보니 정오가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점심 식사가 나오 것이라 생각하며 나는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침대의 촉감은 집에 있던 나의 침대만큼 푹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대로 누워 줄만 했다. "푸훗, 그러고 보면 감옥에 갇힐 것을 상상했을 땐 굉장한 곳일거라 걱정 이었는데, 괜찮은 침구류와 꽤나 먹을만한 세끼 식사가 재깍재깍 나오는 것을 보면 감옥도 그리 나쁜 곳만은 아닌 듯 하네. 이곳 생활을 버티기가 힘든 나머지 카류에 대한 마음을 바꾸는 일은 없겠구만." 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괜스레 중얼거렸다. 카류에게 마음을 굳히 기는 했으나 쉽게 나를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카류는 드래곤이니 어쩌니 이상한 소리를 하며 나를 바로 풀어주겠다는 식 으로 반응했다. 카류가 나를 조롱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카류가 원래 그 런 짓을 할만한 녀석도 아니고, 만약 그동안 카류가 변해버렸다 할 지라도 나는 그의 품에서 이상한 진실을 느꼈다. "정말 나를 풀어주려는 걸까?" "아마 그렇게 될 거다." 한동안 정신을 빼고 있다가 나는 뒤늦게 누군가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 다시 왔지." "딜티구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우리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창의 바로 앞에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무슨 얘기?" "아아, 세스케인에 관해서." 딜티는 전과는 달리 세스형에게 '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고 있었다. 하긴, 적인데 존칭을 붙일 필요는 없을 테지. "형에 대해서? 어떤?" "나는 세스케인을 죽일 수 있다." 그는 내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쇠창살을 붙잡 은 양팔의 사이로 천천히 몸을 숙여 나를 향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말해봐라." 웃고 있던 딜티의 얼굴에 더욱 짙은 웃음이 걸렸다. "카류를 위해 세스케인을 죽일 수 있는지 어떤지 말해보라고." 나는 몸이 경직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딜티의 웃음은 비웃음이나 증오가 담긴 눈길보다 훨씬 더 소름이 돋았다. 나의 굳어 가는 표정을 보았을 터임에도 딜티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세 웠다. "못해?" 딜티는 고개를 조금 들고 눈을 내려 깔아 노골적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 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미소와 목소리 로 다시 한번 물었다. "못하시겠다?" "……." 나의 가슴이 뜨겁게 뛰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잊고 싶어하던 것. 그 것이 아무런 준비 없이 벌거벗겨져 진흙밭에 내팽개쳐졌기 때문이다. "나는……." "나는?" 딜티가 다정하게 되물었다. "나는 세스 형을 죽일 수 있다." "뭐라고?" "나는 세스 형을 죽일 수 있다!" 나는 크게 소리 지르고 양손으로 목을 거머쥐었다. 이 한 문장을 끄집어 내느라 나의 목이 타버리기라도 한 듯. 한참을 헐떡이던 나는 이를 악 물었다. 딜티를 향한 화가 북받쳐 올라왔 다. 몸 속이 화로 들끓어 나는 당장이라도 녀석을 향해 주먹을 날릴 태세 로 고개를 확 들어올렸다. 내가 딜티에게로 모든 신경을 향했을 때, 녀석의 얼굴에 걸려있던 미소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그곳에 선 채로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깔아보는 느낌과는 다르게 건조하기 짝이 없 는 무표정으로. 딜티의 무표정을 가만히 보노라니 갑자기 화가 확 식었다. 잠깐의 시간동 안 이 모든 것이 내가 스스로 정한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딜티." "하하하." 내가 조심스럽게 딜티를 부르자 갑자기 딜티가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한 손으로 창살을 잡고 한동안 계속 웃음을 흘 렸다. "뭐가 그리 웃기냐." 나는 손을 뻗어 딜티의 갈색 빛 머리카락을 툭툭 치며 퉁명스레 물었다. "하하, 하하하. 정말 놀라워. 하하하… 너… 정말 대단하구나?" "…무슨……." "아냐. 하하… 네가… 네가 이렇게 정의로운 놈일 줄이야." 내가 인상을 찌푸렸지만, 딜티는 저 좋을 대로 웃으며 내 표정 따윈 조금 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했다. 상당시간동안 지속시켰던 웃음을 멈춘 딜티는 앉은 자세로 몸을 끄덕이다가 등받이가 없어 불편한 것인지 나를 등지고 창살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말을 이 었다. "내가 왜 카류의 곁에 있는 줄 알아?" "아아∼ 물론 알지! 세스 형이 말해줬어. 이번 일은 몹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도 트로이 후작가의 딜트라엘처럼 쫓겨나게 될지도 모 른다고. 그러니 제발 말 좀 들으라고." "쫓겨나다라?" 나의 노골적인 퉁명스러운 답에 딜티는 어깨를 으쓱였다. 약간의 미안한 마음도 생겼지만 나는 입을 삐죽였다. "내가 뭐 잘못 안 거 있어?" "넌… 진짜 대단해. 은인을 위해 자의로 집을 박차고 뛰쳐나오다니……. 그토록 좋아했던 세스케인 형까지 등지고서… 후후, 네가 이렇게 정의로운 줄 난 오늘 처음 알았어." 딜티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내가 더욱 울컥 해서 딜티에게 핀잔을 줄 일을 찾고 있는데 딜티가 먼저 말을 이었다. "나 말이지… 매일 밤마다 생각해보는데… 나라면… 나라면 말야… 카류 가 눈에 밟히긴 해도… 아마 집안에 가만히 박혀 있었을 텐데… 만약 아버 지가 나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기 그 전에, 자신과 카류를 택하라고 물어봐 주었다면 나는 아마 집에서 안주하는 편을 택했을 텐데……." 딜티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잠시동안의 고요함 속에서 나는 자신이 큰 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어쩔 줄 몰라하며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딜 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싶더라?"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을 줄 알았던 딜티는 빙긋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죽이기로 했지. 나는 도망쳤고. 갈 곳 없는 나를 조건 없이 받아들여 준 것은 카류였지. 자신에게 그런 괴로움을 겪게 만든 자의 친아들에게도 녀석은 예전과 다름없이 아주 다정해." 딜티는 미소짓고 있었다. 나는 그 순간 갑자기 딜티의 미소에서 끔찍스러 울 정도의 차가움을 느꼈다. "아아, 카류가 너무 소중해. 나는 카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거다. 나는 카류만을 위해서 살 거야." "딜티." "내가 요즘 부쩍 생각이 많아졌는데 말이야." 딜티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몸을 더욱 돌려 얼굴을 바싹 들이댔 다. "만약 내가 아이를 낳아서, 그 아이랑 카류를 선택하라면 난 무엇으로 할 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 그럼 답은? 난 망설임 없이 내 아들을 버릴 거 야. 나는 의외로 그를 많이 닮았나봐." "딜티!" "그러니 '그' 를 용서할까?" 딜티는 손으로 입술을 짚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이내 빙긋 웃으며 검지를 저었다. "훗, 그럴 순 없지.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고. 기회만 되면 이 검을 그의 심장을 박아넣고 말 거야. 그럼 카류에게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딜…티……." 턱이 약간 떨려왔다. 딜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차가워 내 몸을 얼 려버리는 듯 했던 것이다. "그럼 또 보자. 사랑하는 내 친구. 아, 경고하는데 이 얘기 카류에겐 하지 마. 그리고 너도 세스케인에 대해 신경 끈 것처럼 행동하라고. 카류 녀석, 가끔씩 냉기를 뿌리며 차가워진 척 하고 있지만 실상은 애기 만큼이나 마 음이 여린 녀석이거든. 너도 카류가 큰 충격을 먹는 건 싫지?" 딜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홀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는 너무 차가워졌구나." "차가와?" 밀폐된 조용한 공간이라 나의 작은 중얼거림이 그의 귀에 닿았던 모양이 다. 딜티는 피식 실소를 머금더니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헛짚었어. 나는 이 심장의 안쪽까지 아주 뜨겁지. 카류에 대한 집 착과 놈에 대한 증오로." 딜티는 더 이상 되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타오르는 횃불이 딜티의 말에 동조하기라도 하듯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려 주고 있었다. =================================================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전쟁이 아니라서 해피~데이~ 이벤트 뭘로 할까요...-_-;; 비축분도 떨어져가는데.. 아니, 거의 다 떨어졌죠.;;; 빨랑 정해야 하는데.. 사실 그림이나 패러디로 하면 저는 볼 것, 읽을 것이 많아 좋지만, 그러면 모든 분들이 참여하실 수 없으니까 그게 좀 걸려요. 소설 내 인물과 이미지가 가장 잘 어울리는 애니 캐릭터. 소설 내 인물과 이미지가 가장 잘 어울리는 연예인. 이런 것들도 있던데....^^;; 전 연예인은 장나라, 양동근 말고는 아무도 모르걸랑요.;;; 아, 네 멋대로 해라 너무 재밌지 않나요? 하지만 장나라 언뉘 나오는 팥쥐는 정말 기대 이하... ㅜ.ㅜ 말이 샜다.... 이게 아니고 이벤 뭘로 할까용? ㅜ.ㅜ;;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3 마음이 닿는 곳 (1) 가을의 막바지. 황금색으로 비옥했던 땅의 대부분이 갈색으로 헐벗게 되 었을 즈음이었다. 아군의 진영은 그 어느 때보다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 었는데, 그것은 칠만명의 대인원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름 대로 어마어마하다 할만한 그 숫자는 현재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 영 탐탁 치가 않았다. "일만이나 되는 병사를 잃게 되다니……." 나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건드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왼쪽 두 번째 자리에 앉아 있던 카르틴군의 부사령관인 헬뮨트 후작이 살짝 고개를 숙이 고 깍듯이 말했다. "면목 없습니다." "올해 안에 당도해준 것만으로도 저희들로서는 기뻐해야 할만한 일입니다 만, 이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은 조금 의외군요." 그렇다. 정말 의외였다. 카르틴은 처음 출발했을 당시 8만의 병력을 이끌 고 있었다. 그런데 근 3달 동안 겨우 3만의 별동 부대에 이리저리 끌려 다 니다가 1만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고 이곳에 당도한 것이다. 사실 그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에뮤가 자신의 근위 기사단까지 동원 해 발 빠르게 3만의 병력을 국경지대로 보내주었기 때문으로 자칫하다간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뻔한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상대를 얕보아 방심한 탓입니다. 당장에 여러분과 합류해야 한다는 조급 함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어이없이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헬뮨트 후작의 말을 들으며 보이지 않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래, 항시 얕보던 아르윈에게 실력으로 호되게 당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겠 지. 그때 대부분의 상황보고를 헬뮨트 후작에게 위임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카르틴군의 총사령관 루인 공작이 약간 묵직한 힘을 실어 탁자를 치며 혼 잣말 아닌 혼잣말을 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경이 쓰이는군!!"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오른쪽 줄에 앉아있던 세미르가 입을 열었다. "그 별동 부대의 사령관은 제 형님이신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입니다. 제 형님이기에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실력은 국왕군 중에서도 단연코 뛰어 나며, 그 이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형님이 중요 임무인 별동 부대를 맡 을 때 반박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겠지요." "…형님? 그대는 뭔가?" 류인 공작은 이상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세미르를 쳐다보았다. 정보를 가르쳐주는 것은 고맙지만, 왜 쓸데없는 말까지 하는 건지……. 나는 세미르를 보고 곤란하게 머리를 긁었다. 하지만 뭐, 그가 후르부크라 는 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고 알려지게 될 테니 오히려 이 자리에 서 말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지. "저는 국왕군의 주류세력인 후르부크가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카 류리드 전하를 따르기 위해 집안과 연을 끊은 상태입니다. 일단, 세스케인 형님에 대한 것이라면 제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궁금한 점이 있으 시다면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하하?" 루인 후작은 세미르의 말을 듣더니 가소롭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 리고 맞은 편에 앉은 아군측의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나를 삐딱하게 쳐다보 며 말했다. "아르윈은 재미있는 나라로군요. 듣자하니 트로이 후작가의 장남도 가문 을 배신하고 이곳에 가담하고 있다 들었는데……. 아! 혹시 아르윈 왕국에 백정의 아들은 백정일 수밖에 없다는 격언이 있지 않았습니까?" 나는 약간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서로 왕위를 쟁탈하려 싸우는 왕가의 분 란과 이 일을 들먹이며 아르윈 전체가 패륜을 저지르는 나라인 것처럼 까 내리려는 그의 의도를 느꼈던 것이다. 헬뮨트 후작이 경솔한 말은 그만두 라는 듯 그에게 눈치를 주고 있었지만 루인 후작은 내게 무슨 원한이 그리 도 많은지 빈정거림의 시선을 멈추지 않았다. 혈기가 왕성한 에르가형이나, 카르틴이라면 이를 가는 카나스님의 심줄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는데 갑자기 딜티가 의자 당 기는 소리를 내어 사람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고개를 돌렸을 때 딜티의 표정은 조금 굳은 채 였다. 어쩌면 조금 전의 그 말이 거슬렸던 것일까. 이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무슨 일이라도 날 듯 하여 녀석을 말려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딜티가 입을 열었다. 그의 어조는 화가 난 목 소리가 아니라, 상대를 엄하게 질책하는 그런 투의 목소리였다. "루인 공작님께서는 어째서 이해하지 못하시는지요. 가족과 적이 되는 한 이 있어도 자신이 정한 군주의 뒤를 따르겠다는 굳은 의지를 말입니다. 제 입으로 말할만한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 저희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국왕군 의 가장 큰 세력인 트로이가와 후르부크가의 자제를 완전히 자신의 사람으 로 만드신 분입니다.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은 분이라면, 지금쯤 전하께 비 웃음의 시선이 아닌 존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을 터이죠." 나는 언제 딜티의 말발이 저렇게 좋아졌나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나도 역시 아르윈 왕국인인 것인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상대를 한방 먹였다는 사실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닌 듯 싶습니다. 일단은 세스케인에 대해 서……." 한창 달아오르는 분위기인데 갑자기 프리란트 님이 끼어 들어 그 선을 끊 었다. 덕분에 굉장히 통쾌해하며 몇방 더 먹여주라는 듯 응원의 시선을 보 내고 있던 에르가형과 카나스님이 동시에 노골적으로 프리란트 님을 향해 너무 한다는 표정을 보냈다.-이럴 때는 그 두 사람이 가족이라는 것을 실 감하게 된다- 하긴, 우린 적이 아니고 앞으로 함께 해야할 동료인데 이런데서 싸움질을 해서는 안 되는 일 아닌가. 으으, 나도 정말 멍청하기는……. 나는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프리란트 님의 말에 동조해 상황을 수 습하려 했다. 하지만 루인 공작이 손을 들어 소리나게 탁자를 내려치는 바 람에 그 의도는 무산되고 말았다. "헛?! 고…공작님!" "지, 지, 진정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일단은 진정하십시오! 루인 공작님!" 그 때 갑자기 조용하던 카르틴 측의 장군들이 혼비백산하기 시작했다. 처 음 볼 때부터 쇳조각을 연상시키던 회색 머리칼의 헬뮨트 후작을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사색이 되어 너도나도 루인 공작을 말리려 애썼다. 저 인간, 얼마나 성깔이 더러우면 같은 진영의 부하가 저렇게까지 당황하 는지……. 루인 공작의 반응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저도 모르 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잘못하다가 동맹이 쪽박 나는 거 아냐?! 사람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루인 공작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고 개를 조금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봐도 그는 화를 주체 못하고 있 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므로. "하하하! 마음에 들었어!" 루인 공작은 갑자기 호탕하게 웃었다. 그리고 딜티를 향해 가지런한 치열 을 드러내며 유쾌하게 말했다. "확실히 제가 너무 성급하였습니다! 자신이 정한 주군께 평생 충성을 바 친다는 것은 멋진 일이지요! 저 역시 폐하께 충성을 바치고 있는 몸! 폐하 께서 원하신다면 내 아들놈의 가죽을 벗겨서 바칠 수도 있습니다! 하하하 하!" 루인 공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이마엔 식은땀이 맺혔다. 그라면 진짜 아들의 가죽을 뜯어 바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늘같은 주군을 따르는데 그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카류리드 전하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아버님의 목숨을 취하여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훗,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오! 그것이 진정한 신하의 자세인 것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살벌한 상황을 만들어 내던 딜티와 루인 공작이 갑자 기 의기투합을 하더니, 서로 마주보고 씨익 웃었다. "흠! 흠!" 나는 영 지금 상황이 떨떠름해서 헛기침을 하여 두 사람을 떨어뜨리려고 애썼다. 덕분에 두 사람은 각자의 위치에 바로 앉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은근히 좋은 무드(?)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저런 일로 의기투합하는 것은 전혀 기쁘지 않은데……. "사실 지금까지 카류리드 전하에 대해 얕보던 감이 없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그 생각을 고쳐야 하겠습니다. 하긴, 폐하께서 의미 없이 그런 말씀을 하실 리가 없지." 루인 공작은 기분이 좋은 듯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무언가 에뮤에 대해 혼잣말을 했다. 에뮤가 대체 나에 대해 뭐라고 그랬기 에 저러나? 그때 딜티가 또 한번 나서서, 이번에는 꽤나 상쾌한 웃음을 날리며 루인 공작을 향해 말했다.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분명 케시뮈르 4세와 같은 그런 대단한 풍채를 가 지고 계시진 못합니다. 그러나 실은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숨겨진 힘을 가지셨지요. 케시뮈르 4세께서 무언가 말씀을 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영면하신 그분의 심안으로 전하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시고 하신 말씀일 것 입니다." "그렇군! 내 비록 부족하여 한눈에 카류리드 전하의 진정한 힘을 깨닫지 는 못하였으나, 분명 그럴 것이오. 내 이번 기회에 폐하께서 탄복하신 카류 리드 전하의 숨겨진 진면목을 직접 느끼고 가야겠소." 딜티와 루인 공작이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서로의 주군에 대한 칭찬을 늘 어놓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들의 모습에 조금씩 어색한 얼굴을 했지만, 원수지간끼리 한 탁자를 두고 마주보고 있느라 -혹은, 주로 루인 공작의 비웃는 듯한 눈초리 덕분으로- 살벌했던 분위기는 그들 덕분에 나름대로 화기애애하게 바뀌어져 갔다. 앞으로 서로 협력을 해야 하는 사이이니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나는 루인 공작과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딜티를 바라보았다. 새삼스레 딜티에 대한 걱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 와이~ 우후후후훗, 이럇샤이~ (의미불명^^) 이르나크의 장 Part 53 마음이 닿는 곳 (2) 회의가 끝나고 카르틴의 장군들과 다른 분들이 각자 쉬는 곳으로 나누어 져 가기 시작했다. 딜티는 마지막까지 루인 공작과 이야기하다가 오래 사 귄 친구라도 되듯 아쉽게 그와 헤어졌다. 나는 조심스레 그들의 동향을 살피다가 먼저 쉬겠다고 하며 카이와 함께 후닥닥 3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딜티의 방을 지나 꺾이는 복도의 모서리 에 숨어서 얼굴을 조금 내놓고 딜티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명색이 왕자인 주제에 참으로 주책 맞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모습을 루인 공작이 봤다면 조금 전에 한 말 -내게 숨겨진 진면목이 있 다든지 하는 말- 을 당장에 철회시켰으리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딜티가 친구들과 헤어져서 자신의 방 쪽으로 걸 어왔다. 나는 딜티가 문고리를 열려는 순간 후다닥 뛰어나가 잽싸게 녀석 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딜티!!!" "왜 그래, 카류?" 딜티가 나를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내가 자신을 기습(?)할 것을 이미 알 고 있었다는 말투였다. 여유롭게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보자니 갑자기 우울함이 몰려옴을 느꼈 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지켜보지 않으면 에르가 형들과 몰려다니며 하 루가 멀다하고 일을 저지르던 개구쟁이였는데……. 그렇게 귀엽던 녀석이 벌써 이렇게 다 커버려서 나를 내려다보다니.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겠지만, 딜티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은 단순히 나이를 더 먹어서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딜티 너…….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나는 더 이상의 장난스러운 기분은 완전히 버리고 진지하게 녀석에게 물 었다. 고민을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저 홀로 마음 속에 쌓아두기만 하다보면, 그 고민은 어느새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풀어 스스로에게 독으로 작용한 다. 그리고 오랫동안 마음 속에 구겨놓고 있던 고통은 다른 사람에게 이야 기하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법이다. 그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나였기에 오늘 딜티와 직접 이야기를 하기 위 해 시간을 낸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협박을 해서라도 딜티에게 속마음을 듣겠노라 다 짐했다. 그리고 해결책은 못 내주더라도 '힘내자!' 라는 구호라도 질러보고 자 했다. 그동안 내 일에 벅차 딜티에게 신경 써주지 못한 것을, 아니, 오 히려 이상한 방향으로 부추기기까지 했던 것에 대해 서도 사과하고 말이 지. 나는 딜티의 목에 두른 팔을 당겨 녀석을 방으로 이끌었다. "따라와! 내가 상담해주지!" "잠깐 기다려. 네가 왜 이러는 지 아니까." 딜티는 피식 웃으면서 손으로 자신에 목에 두른 내 팔을 떼어냈다. 당연 히 나는 팔이 안 풀려고 발버둥 쳤지만 딜티의 힘이 너무 강해서 찍소리도 못하고 허무하게 녀석에게서 떨어져나가고 만 것이다. "내가 걱정되는 거지? 루인 공작과 이상한 부분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게 신경 쓰이는 거잖아." "으… 응……." 딜티 쪽에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오자 나는 뭐라 해야할 지 몰라 겸연 쩍게 머리를 긁었다. "걱정하지마. 조금 전에 한 말은 진심이 아니니까. 이대로 루인 공작과 사 이가 계속 비틀어지면 아군에게 좋을 게 하나 없잖아? 그래서 일부러 장단 을 맞춰 준거라고." "딜티!" 나는 한발자국 앞으로 나서서 딜티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에 하려 했던 그것을 다시 시행하기 위해 녀석의 팔목을 붙들었다. "역시 넌 상담이 필요해!" "아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 일단 내 방에 들어가자. 루인 공작이 이 모 습을 보면 조금 전에 했던 네 칭찬을 취소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딜티는 조금 전에 내가 했던 생각과 똑같은 말을 하며 먼저 방문을 열었 다. 왠지 내가 떼를 쓰는 애 같고, 딜티가 어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나 는 순간 약간의 어색함을 느꼈다. 내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딜티는 윗옷을 벗어 의자에 걸쳐놓고 그 의자를 끌어내어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래, 아직까지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는 건 사실이야. 그 상황에서 아무 렇지도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성자가 아니겠어? 사실 꽤나 혼란스러웠 지. 하지만, 이젠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잖아……."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딜티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었다. 딜티가 무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런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딜티가 양 손을 앞으로 내밀어 나를 저지하는 듯한 포즈를 취했다. "아니. 나는 정말 괜찮아. 왜냐하면 내겐 네가 있으니까. 나는 아버지에게 실망했지만, 너에게서 감동 받았지. 이걸로 쌤쌤이 된 거야" "딜티. 내 앞에선 무리하지 않아도……." 역시 강경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며 난 그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딜티는 목소리를 훨씬 더 크게 해서 내 말을 묻어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이어나갔다. "어차피 지금 생각해봐야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아. 난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리기 힘든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어. 그러다 보면, 집에서 도망 나와 갈 길이 막막했을 때 너라는 존재가 나를 구원해주었듯이, 언젠가 내 가 두려워하는 때가 왔을 때도 그때처럼 어떻게든 될 거라 생각해. 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미래를 믿기로 했어." 나는 잠시 굳어 말없이 딜티를 바라보았다. 정말, 정말 의외였다. 딜티가 나처럼 고민하며 땅을 파고 있을 거라 생각 했던 것과는 달리, 녀석은 훨씬 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앞을 향해가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게. 자신의 말을 끝까지 관철시킨 딜티는 등뒤에서 부서지는 태양빛을 등지고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앞으로 내밀고 있던 손을 옆으로 조금 벌리며 말 했다. "안 안아줄 거야?" "…어…엉?" 조금 전부터 의외의 발언만이 튀어나와 나는 결국 말을 더듬었다. 그러자 딜티가 쿡-하고 웃었다. "넌 언제나 형이나 된 것처럼 항상 우리를 보살펴 줬잖아. 이쯤 되면 날 더러 기특한 녀석이라면서 꼭 안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말야." "으…응. 그렇지……." 나는 엉거주춤 녀석에게 걸어가서 딜티를 꼭 안았다. 그러다 자신이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 다시 딜티의 어깨를 잡고 녀석을 확 밀어냈다. "역시! 역시 너 이상해! 변했어!!" "맞아. 변하긴 변했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나 그동안 조금 생각이 깊어졌거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딜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러자 그 갈색 눈동 자가 이상하리 만치 따뜻한 기운을 담고 나의 의심 어린 눈빛에 답했다. "카류. 내가 네게 절대 충성하고 있다는 말만은 진짜야." "……." "정말인걸? 거짓말 같아?" "무리해서 충성하지 않아도 돼. 그저 내 친구로서 영원히 곁에 남아있으 면 되는 거야." "무리 같은 건 하지 않아. 그냥 영원히 친구도 하면서 충성도 해줄게." 딜티는 천진난만하게 히죽 웃었다. 녀석을 보며 나는 그제야 한숨을 폭 내쉬며 몸을 바로 일으켰다. "좋아. 네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하니까 한번만 봐주지." "후후, 안 봐주면 어떻게 하려고 했는데? 네가 날 저지할 수나 있어?" "…혼…자가 아냐! 내 곁엔 드래곤인 카이가 있다고. 네가 드래곤을 이길 수 있어? 힘이 딸리면 그녀에게 부탁하면 되지. 안 그래, 카이?" "…매번 하는 말이지만 그런 일에 내 힘을 사용할 마음은 없다. 차라리 드래곤인 나란 존재를 뇌리에서 지워다오." "……." 창문을 통해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쌀쌀해도 아직은 엄연히 가을이라 생각했는데, 벌써 겨울이 다가온 모양이다…가 아니고! 아씨, 상황을 봐가 면서 거짓말 좀 해주면 엉덩이에 뿔이라도 난대냐!? 내가 카이를 째리면서 이를 박박 갈고 있으려니 딜티가 고개를 돌리고 어 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오랜만에 애들(?) 앞에서 한껏 쪽을 판 나는 슬그머 니 몸을 돌렸다. "가려고?" 난 차마 얼굴 들기가 민망하여 고개만 쫴끔 돌렸다. "…그래… 간다……." "일부러 날 걱정해서 이곳까지 들려줘서 정말 고맙다." "…별로."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가볍게 대답했다. 녀석이 부담 갖지 않고 지금까지 와 같이 잘 지낼 수 있도록. 달칵-. 딜티의 방밖으로 나온 나는 문에 기대서 한숨을 폭 내쉬었다. 왠지 나보 다 몇 수는 높은 어른과 상대한 느낌이라 진이 쏙 빠졌다. 애들은 갑자기 어른이 된다더니 딜티가 딱 그 경우인 것이다. 하지만 딜티의 경우 좋은 쪽으로 성장한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유쾌했다. 무거운 짐을 하나 벗어 던진 듯 가벼운 기분∼. 그래, 딜티의 말처럼 그때 가 되면 뭔가가 될 거야! 나도 딜티의 플러스 사고를 본받아야지∼! 나는 혼자 헤실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내 방을 향해 경쾌한 박 자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몇 초. 나는 곧 자리에 서서 머리를 쥐어 싸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우아---악!! 그러고 보면, 조금 전 딜티에게 드래곤인 카이가 아니라 '에 뮤까지 물리친 내 호위기사 카이야를 이길 수 있어?' 라고 말했으면 됐을 걸! 으아, 언제부터 내 혀가 이렇게 굳은 거야!! 나도 이제 일선에서 물러 나야 하는 것인가!! -라는 시시한 내용의 비명을. *** "역시 속 내용물은 그대로야." 카류가 방문 밖으로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한 나는 입가를 만지며 피식 웃었다. 그동안 디트경을 죽이고, 어머니의 시체를 함부로 다루며 차가워진 척을 했지만, 역시 카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동굴에서 보았던 그 녀석 그대로이다. 어쩌면 녀석은… 그동안 사람들 앞에서 강한 척하다가 방안으로 돌아와 어쩔 줄 몰라하며 혼자 울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치 나처럼. 나는 또 한번 피식- 헛웃음을 흘리며 창가로 걸어갔다. 창 밖은 어수선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나도 제6왕자군의 요직을 맡고 있으니 이렇게 한가하 게 있을만한 입장이 아니다. 곧 밖으로 나가봐야 할 테지. 병사들을 둘러보 고, 힐레인이라는 꼬마 놈도 만나야하고……. 그래, 힐레인. 그는 위험하다. 상대의 감정을 읽는 엘프의 능력이란 것. 자칫하다간 나의 위선을 들키고 만다. 오늘 카류가 힐레인이란 놈과 함께 오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 할만한 일이다. …하지만. 힐레인이 오늘 함께 왔다 해도 그는 카류에게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전에 세스케인을 걱정하는 세미르의 마음을 숨기려 했던 것 처럼. 그로서도 이 군의 지도자인 카류가 침울함에 빠지는 일을 기뻐할 리 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내가 실제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그것을 알면 카류는 분명 슬퍼할 것이다. 괴로워 할 것이다. 잘잘못이야 어찌됐든 자신이 원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놈이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 카류를 속여야 한다. 내가 긍정적으로 앞을 보고 있다고 생각한 카류는 분명 흐뭇해 할 것이 다. 그의 어깨에 짊어진 수많은 짐 중 하나가 덜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내 속에 꽁꽁 묶어 조금도 녀석에게 내 비춰선 안 된다. 겉을 밝 게 포장해서 녀석을 기만하는 거다. 이 모든 것은 카류를 위해서-. 언젠가 에르가 녀석을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마음이 가는 대로 행 동하는 그녀석이 가는 곳에는 길이 있었다. 어떤 때는 바보 같지만, 녀석은 무척이나 자유롭고 행복한 존재다. 그래, 마음이 가는 곳으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진리일지도 모른다. 나는 카류에게 감사하고 있다. 그렇다. 망설일 것은 없다. 나는 그를 위해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나의 모든 신경은 나를 버린 '그' 에게로 몰려 있다. 나는 나의 몸이 가는 대로 나의 감정을, 나의 증오를 모조리 그에게 쏟겠 다. 그리고 언젠가 그 증오가 가르치는 대로 그의 심장을- 후벼파고 말리라. ======================================================== 오, 해피~ 모드~ 그쵸? (~^-^)~ 학교 가기 전에 올리고 갑니다. 저 착하죠? -_-+ 어이~ 거기의 당신~ 리플 달고 가요오~! 학교 갔다 와서 보게. ;;;;;;;;;;;;;;;;;;;;;;;;;;;;;;;;;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4 류스밀리온 (1) 쌀쌀한 날씨 속에서도 휴나르 성을 둘러싼 아군의 진영은 크게 활기를 띄 고 있었다. 그것은 카르틴의 7만 대군이 휴나르 성으로 도착했던 탓이었다. 비록 상당수의 병사를 잃었지만, 7만이라는 수는 결코 작은 수가 아니었고 그 덕분에 주변에 요새를 짓고 산재해 있던 국왕군의 조무라기들은 재빨리 후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이래저래 애를 먹고 있던 아군은 보 급을 원활히 진행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이 술술 잘 풀려간다고는 해도, 사실 아군의 실제적인 분위기가 그렇게 화기애애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이 원군으로 참 여한 카르틴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던 적군이 아니었던가. 그런 두 나라 사람들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으니 트러블이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다행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루인 공작의 엄명 으로 분위기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가라앉을 수 있었다. 카르틴 측 병사들 이 먼저 시비를 거는 일을 완전히 그만둔 것은 물론, 우리 쪽 병사들이 먼 저 시비를 걸고 신경을 건드려도 그 분함을 못 이겨 홀로 허벅지를 찌를지 언정(?) 대놓고 맞서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가능해졌던 사건에 발단은 이랬다. 전에 루인 공작이 나와 다른 장교들과 함께 병사들이 지내는 막사를 걷다 가 우리나라 병사들과 카르틴 측의 병사들이 싸우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 다. 그는 얼굴을 확 일그러뜨리더니 그쪽으로 걸어가서는 다짜고짜 자기 병사의 머리를 잡아 던지듯 땅바닥에 내꽂았다. 어떻게 한 손으로 사람 머 리만 잡고 그렇게 매칠 수 있는지 그의 악력에 놀라고 있었는데, 루인 공 작은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불안정한 자세로 쓰러져 있는 그의 목을 사정 봐주지 않고 거세게 밟았다. 와그작-. 온 몸에 소름을 돋게 만드는 소리와 함께 그 병사는 목이 비틀어져 절명 하고 말았다. 한마디 변명을 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루인 공작은 침묵한 주위의 병사들을 살벌한 눈초리로 내려다보며 또 한 번 자신의 명을 어기고 아르윈 출신 병사들과 싸우는 자는 이유를 불문하 고 이놈과 같이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카르틴 측이 완전히 침묵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루인 공작의 잔인한 행각 에 대한 소문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부풀어 퍼져나가면서 -본보기로 삼기 위해 죄 없는 병사를 천 명 정도 끌고 가서 가죽을 벗기고 기름에 튀겼다 던가 하는 식으로- 병사들이 완전히 쫄아 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저 루인 공작은 이쪽 방면(?)으로 엄청 유명한 사람인 듯 싶다. 보아하니 쫄병들뿐만이 아니라 상당한 지위를 가진 주변의 다른 장교들도 루인 공작이 조금만 뭐라고 할라치면 확 쪼는 것이 아닌가. 루인 공작을 향해 아주 당당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말을 전할 수 있는 자는 오로 지 헬뮨트 후작뿐일 듯 싶었다. 그러고 보면 저런 사람과 완전히 친해져 버린 딜티는 정말 대단하다 말하 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딜티 덕분에 루인 공작이 우리들에 대한 앙금 을 많이 풀고, 호의적으로 나왔으니 녀석에게 대고 큰절이라도 올려야 할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내가 에뮤의 몇마디에 토라진(?) 루인 공작의 그 살벌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지 않아도 되게 생겼으니 이 얼마나 감사해 마 지않을 일이겠는가! "아∼아∼, 어쨌거나 상황이 잘 풀려가니 됐지, 뭐. 그치?" 나는 팔을 쭉 뻗고는 곁에 선 카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밑도 끝도 없이 던져진 나의 말에 보통 사람들은 의아해했을 테지만, 카이는 천천히 고개 를 끄덕여 주었다. 그녀의 존재에 무척이나 기분 좋은 안정을 느끼며 나도 헤실 웃었다. "음, 딴 생각은 그만하고 류온님이나 찾아야지. 대체 어디 계신 거야?" 무작정 저택 바깥으로 나온 나는 여러 갈래의 길을 보며 머리를 긁었다. 그렇게 수식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하기에 며칠 밤을 새서 몇 가지를 완성 을 시켜 새벽 같이 수식을 들고 왔더니,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때마침 류 온님이 어디론가 나가버린 것이다. 아르 할아버지와 다른 고위 마법사 할 아버지들도 함께. 그들의 행방이 궁금하기도 하고, 아직 새벽이라 한가한데 산책이라도 할 까 해서 류온님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어디부터 가야할지 막막해 져서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고요한 새벽 안개 사이로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로 수건을 잔뜩 들 고 가는 소녀가 눈에 띄였다. 복장을 보니 이 성의 시녀인 모양이다. "이봐, 잠깐 거기 서 봐." "예? 앗! 전하. 카이야님!!" 생각 없이 돌아보았다가 그 상대가 의외로 왕자와 드래곤이자 -이 저택의 주요 심부름꾼에게 있어 카이의 정체는 공공연연한 사실이다.- 시녀는 굉 장히 당황하여 잔뜩 든 수건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든 수건이 전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재빨리 손을 뻗어 수건을 양 손을 받쳤다. "인사는 됐다. 깨끗하게 빤 수건 같은데 땅에 떨어져서 더러워지면 안되 잖아." "에, 예……." 시녀는 그제야 어색한 동작으로 몸을 바로 했다. 겨우 그녀가 진정한 것 같기에 나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혹시 류온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니? 아니면 아르 할아… 아르디예프님이 라도." "대마법사 류스밀리온님과 아르디예프님 말씀이세요?" "맞아." 그녀가 그분들의 행방을 아는 눈치인지라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던 시녀는 갑자기 얼굴을 조금 붉히더니 이내 고개 를 약간 숙이고 작게 말했다. "두 분께서는 지금 다른 마법사 분들과 연무장에 계십니다. 제가 지금 그 곳으로 가는 도중이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법사 분들이 연무장에? 뭘 하시려고 그런 곳엘 가신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함을 표했다. 하지만 여기서 궁금해하기보다는 직접 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 거라 현명할 것이라 판단하고 당 장에 걸음을 옮겼다. "좋아. 어서 가자고." "예……." 나는 그 빨강머리 시녀와 함께 몇발자국 걸어갔다. 그러다 문득 걸리는 게 있어 그 자리에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전…하……?" "그거 이리 줘." "예?" "네가 들고 있는 수건 이리 달라고. 전부." 시녀가 굉장히 당황하고 있는 사이 나는 그것의 반 정도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하며 시녀를 다시 한번 독촉했다. "나머지도 여기에 얹어." "에에? 어째서… 아니, 이건 제가 해야할 일입니다, 전하께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은……." "됐으니까 얹기나 해. 사실, 같이 걸어가는 여자아이가 이걸 들고 낑낑거 리고 있는데 뻔히 보면서도 도와주지 않는 건 좀 그렇잖아? 내 양심상 연 무장까지만 들어주지." 내 말에 그 시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는 또 한번 열성적으로 거부하기에 내가 약간의 협박을 가해서 나머지도 내 손위에 쌓 게 만들었다. 그리고 괜스레 긴장으로 굳은 시녀에게 이것저것 말을 걸면 서 연무장으로 향했다. 쾅-쿠쿵--. "응? 이게 무슨 소리야?"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폭발음 같은 것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나는 다급히 발을 놀려 그 소리가 들려오는 연무장 쪽으 로 뛰어갔다. 폭발음은 불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들려오고 있었다. 내가 연무장에 가까이 갔을 때 그 입구에는 육중한 몸집을 가진 기사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덕분에 안쪽을 볼 수가 없어진 나는 살짝살짝 뛰며 -수건 때문에 팔짝팔짝 뛸 수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야야, 너도 한번 봐라. 이거 정말 장난이 아니… 커허헉! 카류리드 전 하!!!" 그 기사는 언뜻 보기에 내가 무언가를 잔뜩 들고 있으니까 친구 내지는 아랫사람이나 되는 줄 알고 가볍게 말했다가 뒤늦게 나를 알아보고 우렁찬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그의 성악가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멋진 성량으로 인해 웅성대던 주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 "……." 수많은 기사들이 굳어서 뚫어져라 이쪽을 보기에 나는 엉겹결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내 행동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기사들이 갑자기 모세의 바다처럼 쫘아악 양가로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냈다. 조금 머쓱했지만, 딱히 거절할만한 이유도 없는지라 카이와 조금 전의 그 시녀와 함께 기사들 사 이를 통과해서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연무장의 안쪽은 기관총이라도 난사한 듯 군데군데 망가지고 홈이 파져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기관총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니 까 저건 아무래도 마법의 흔적일 것이다. 매직 애로우인가? 음, 2서클 파이어볼 쯤 되는 흔적도 보이는데? "오셨습니까! 전하!" 내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잔뜩 지친 기사들이 헐떡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예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유독 한 남자가 예를 갖추지 않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땀에 흥건해 있는 그의 머 리카락은 예쁜 핑크색이었다. "류온님!" "카류님이 아니신지? 그 수건은 뭡니까?"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인지 류온님이 어울리지 않은 존댓말을 사용했다. 물론 그의 존댓말은 조금도 존경심이 묻어 있지 않았으며 시건 방진 느낌이 물씬 풍겼다. "오다가 이 시녀에게 류온님의 거처를 들었거든요.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수건을 들고 있기에 그냥 지나치기도 뭣하고 감사의 표시도 할 겸 제가 들 고 왔죠, 뭐. 아, 이거 어디다 두면 되지?" "아닙니다! 제가 가져다 두겠습니다! 이렇게까지 폐를 끼치다니……." "하하… 별로 무거운 것도 아닌데 생색내는 것 같네. 이왕 가져온 거 끝 까지 가져다 줄게. 말해봐. 어디야?" "…그게… 저…저기… 기사분들이 쓰실 수건을 두는 곳에……." "알았어. 내가 가져다 놓을 테니 넌 가서 네 할 일 봐." "예……." 나는 시녀의 인사를 뒤로하고 연무장 한쪽에 쌓여진 수건들 옆에 내가 가 져온 수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수건들이 내 손을 떠나자마자 그 즉시 류 온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류온님! 그런데 지금 뭐하고 계시는 거예요? 혹시 기사들이 건방지게 군 다고 마법으로 겁주고 계시는 거 아니죠?" "…대체 나를 뭘로 보는 거냐. 네놈은……." 그 즉시 말투가 달라지는 류온님. 역시 그와 존댓말은 영원한 상극관계란 말인가. "…그러고 보니 옷이 로브가 아니네요. 대체 뭐하신 거예요?" 류온님은 원피스 같은 로브가 아닌 간단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류온님이 마법사치고 정정한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땀에 물든 그를 보자니 한사람의 검사로 봐주어도 무리가 없을 듯 했다. 내가 그를 처음 다른 기 사들과 한 무리로 느꼈던 것도 이 때문이었으리라. 내가 입을 조금 벌리고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으려니 류온님이 영 불쾌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나의 물음에 대답해 주었다. "기사들과 대련 중이었다. 로브는 거치적거려서 벗었지." "예에? 대련?" 나는 눈을 땡그랗게 떴다. 상식적으로 기사와 마법사들과의 대련은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 둘은 성질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기사들의 파괴력은 마법사들에 비해 아주 보잘 것 없지만 대신 아주 빠르 며, 마법사들은 거대한 파괴력을 내는 대신 그를 사용하는 시간이 굉장히 느리다. 그러니 이렇게 조그마한 연무장에서 싸운다면 보통 몇 초만이 빠 르게 돌진해 들어오는 기사의 승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상식적인 상대가 아닌 류온님. 나는 동그랗게 키웠던 눈을 제대로 뜨고 류온님을 바라보았다. "네 눈으로 직접 봐라. 앞으로 마법사들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류온님은 그렇게 말하고 옆에 놓인 검을 들었다. 검을 드는 마법사라니!! 정말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지만 주위 사람들 의 눈은 굉장히 진지했다. 어? 그러고 보니 저쪽에 마법사 분들이 계셨네. 앗, 아르 할아버지다! 나는 뒤늦게 아르 할아버지를 발견하고 시합이 시작하기 전에 연무장 한 쪽으로 도도독 뛰어갔다. 수많은 마법사들 중 유일하게 의자에 앉아 계시 는 아르 할아버지도 빙그레 웃으시며 나를 맞아주셨다. "할아버지! 이렇게 이른 아침인데도 여기까지 나오셨네요. 몸은 괜찮으세 요?" "괜찮다마다. 흐음, 그건 그렇고 요즘 카류가 날 완전히 늙은 폐인 취급하 는 듯 하구나. 이 늙은이보다 뛰어난 류온이 있으니 할애비는 필요가 없어 진 게냐?" "허헉?! 그럴 리가요!! 성깔 나쁜 류온님과 어떻게 할아버지를 비교하겠어 요! 음, 아니, 그렇다고 류온님이 밉다는 건 아니구요……." "허허, 농담이란다, 농담. 이런! 시작겠구나!" 내가 아르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류온님은 기사들이 모여있 는 쪽에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분은 비식 웃음을 내비 추더니 검을 들어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와라! 열 놈 정도는 더 덤벼. 내 넓은 마음으로 1서클만 사용해주지." 류온님의 말에 비장한 얼굴을 한 기사들이 열다섯 명 정도 자리에서 슥 일어났다. 이…일 대 십오인가? 이렇게 좁은데서? 저들이 서는 것만으로도 무대가 꽉 차겠다. "시작-!" 곧 심판으로 보이는 기사가 시작 신호를 보냈지만 기사들이 바로 류온님 에게로 달려들지 않았다. 류온님이 최대한 몸을 낮추었고 그 순간, 무려 네 개의 매직 애로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조금 전의 대련 을 보고 바로 류온님께 달려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캉-, 챙! 바로 얼굴 옆으로 매직 애로우를 맞받은 두 명의 기사가 자리에 주저앉았 다. 그러나 나머지 매직애로우의 표적이 되었던 기사들은 굉장한 몸놀림으 로 그것을 피하거나, 검이 부서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그를 막아냈다. 남은 것은 열 셋. 류온님은 바로 검을 쥐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흐음?" 의외로 류온님의 검을 쓰는 모습이 꽤나 능숙해 보여서 이 흥미진진한 광 경 속에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류온님이야 워낙 이곳저곳 떠돌아 다녔고 평소에 적도 많았던 분이니 호신용으로 검을 배웠다 해도 고개를 끄덕일만 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쓰는 검은 용병들의 변칙적인 검술이 아닌, 귀족들이 쓰는 정식 검술의 느낌이었다. 역시 류온님은 귀족인 건가? 사실 저 길고 거창한 이름도 그렇고, 힐레인 같은 능력이 없음에도 아주 당당하게 왕족과 맞먹는 평민은 아무래도 보기 힘들잖아? "크악!" "엣?" 멍하니 앞을 보며 딴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 을 번쩍 들었다. 무대 위의 인원은 순식간에 여섯 명의 기사와 류온님으로 줄어있었다. 난 그 모습을 보고 통탄을 금치 못했다. 으아! 이런 아까운 장 면을 놓치다니!! "으아압!" 동시에 세 명의 기사가 정면과 왼쪽 오른쪽에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류온 님은 능숙하게 검을 들어 한 기사의 검을 막고 두개의 매직 애로우를 생성 해 나머지 기사들의 움직임을 방해했다. 아마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중 이라 류온님도 조금 전처럼 한꺼번에 네 개씩 만들어내긴 어려운 모양이었 다. 하지만 류온님이 애써 만들어낸 매직 애로우는 두 기사들을 완전히 무 력화시키진 못하고 단지 그를 피하느라 몇 걸음 물러서게 하는 것에 그쳤 다. 흐음, 아마 매직 애로우라는 건 기습이 아닌 이상 노련한 기사들은 충분 히 피할 수 있을만한 수준인가보다. 물론 내 수준에선 절대로 무리인 사안 이지만. 매직 애로우에 대한 심각한 고찰을 하는 동안 류온님과 대치하고 있던 기 사가 노련한 몸놀림으로 검을 흘려내며 허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저러다 진짜 베면 어쩌려고!! 너무 집중하고 있는 것 아냐∼∼∼? 하지만 내심 예상했다시피 내 걱정은 전부 헛것이었다. 류온님의 옆구리 쪽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한 개의 매직 애로우가 기사의 검을 부셔놓은 것 이다. 회심의 일격을 날린 것 같이 보였던 그 기사는 허무하게 뒤로 퉁겨 나가고 말았다. 검이 오는 방향을 눈으로 보고 분산시켰던 정신을 집중하여 아주 찰나의 시간에 매직 애로우를 원하는 곳에 생성, 검을 부러뜨린다. 정말 놀라운 일 이다. 저런 것까지 가능하다면 기사들은 바로 코앞에 서있어도 류온님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인가? 류온님은 몇 분도 안돼서 그곳에서 남은 다섯 명의 기사들도 가뿐히 해치 워 버렸다.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상황을 봐가며 절묘하게 매직 애로우를 날리느라 골이 당기는지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지만, 땀이 조금 난 것 빼고 류온님은 옷자락 하나 상한 곳이 없었다. 무려 열다섯 명을 상대로! "이건… 대체……!!" 그때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두가 그 경악한 광경에 입 을 벌리고 있었기에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고 그 즉시 얼굴에 띄우고 있던 덜떨어진 표 정을 없애고, 고상하고 귀족적인 느낌이 풍기는 영업용 스마일(?)을 띄웠 다. "아, 이렇게 이른 아침인데 검술 연습을 하러 오셨군요. 루인 공작님, 그 리고 헬뮨트 후작님." "예. 그랬습니다만… 이…이건……!" "지금 류스밀리온님께서 열다섯 명의 기사들을 상대해 이긴 것이 사실인 지 저의 눈을 의심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 었지만, 이렇게까지 대단한 마법 실력을 가지고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루인 공작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면서 도저히 믿지 못할 광경을 봤다 는 듯이 말을 더듬자, 헬뮨트 후작이 나서서 그 말에 바톤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후작은 여전히 무표정한 그대로였는데, 카이랑 누가 더 무표정하나 시합이라도 시켜보고 싶은 심정이다. "글쎄. 내 실력이라기 보다는 아르윈 왕국의 마법 수준이 높은 것이라 하 겠지." 무대에 있던 류온님이 피식 웃으며 이쪽으로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것은 나에 대한 간접적인 칭찬?! 갑자기 씨잘데기 없는 생각이 떠올라 헤실∼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런 내 띨띨한 표정을 봤는지 헬뮨트 후작이 눈을 가늘게 했다가 내게 두고 있 던 시선을 그대로 류온님께 향했다. 으음, 요즘 들어선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서 자꾸 얼굴이 풀어지네. 이렇게 체통 없이 나가면 안 되는데……. "그것이 아르윈 왕국의 보편적인 마법 수준이라면 어째서 저희들이 힘 따 윌 빌리려 하시는지요?" 그렇잖아도 냉랭한 끼를 풍기는 헬뮨트 후작이 더욱 딱딱하게 류온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류온님은 피식 실소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래, 솔직히 내가 아닌 이상 이렇게 까진 못할 터이지. 하지만 앞으로 십 년! 십 년 이내에 아르윈 왕국의 마법 수준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상승 하게 될 것이네. 내 사십년의 마법력을 걸고 장담하지." "그러십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헬뮨트 후작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무 언가 미묘한 분위기가 꽤나 이 사안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는 직감 을 실어주었다. ======================================================== 훗, 이상한 부분에서 짤렸져? 애매하지만 연참 하는 것처럼 보일려고 두 편으로 확 짤랐답니다. ;; (아녜요~ 실제로도 10장 넘는단 말예요~! 한편으로 몰면 아깝(?)잖아요~!) 으음, 그동안 제지리 해 놓은 거 뒷수습하자니 요렇코롬 길어지네요. 또 질질 끌리는 듯한 느낌........... 아직 쓸 거 더 있는데.... =ㅁ=;; 출판했을 때의 쪽수 신경 안 쓰고 내가 쓰고 싶은 것 그대로 적을 수 있었음 좋겠어요. ㅜ.ㅜ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4 류스밀리온 (2) 조금 분위기가 진지해져가고 있을 때, 루인 공작이 꽤나 굳은 얼굴로 나 섰다. 그리고 류온님께 강하게 요청했다. "류스밀리온님! 저와 한번 대련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역시 열 다섯 이나 되는 기사들을 상대하면 어느 정도 지치는 법이건만……." "내 패배가 확실하니 거절하겠네. 케시뮈르 4세가 크로시아 대륙 전체의 검황(劍皇)이라면, 루인 공작은 카르틴의 검왕(劍王)이라는 소문을 들은 바 가 있지. 그와 같은 초고수의 검은 이 눈으로 따라잡을 수조차 없을 테니 일 대 일로 맞붙어도 자신이 없네." 류온님은 그렇게 말하며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검집에 갈무리해 넣었다. 그러자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던 헬뮨트 후작이 한발자국 나서서 류온님을 향해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류스밀리온님. 제가 전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 있었는 데 답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류온님은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승락했다. 헬뮨트 후작은 그 말에 감사 의 표시를 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분께 질문을 던졌다. "류스밀리온님은 카르틴 왕국인이십니까?" 순간 류온님은 눈살을 찌푸렸다. "다짜고짜 그 말을 하는 이유는? 아아, 그래. 내 능력이 꽤나 위협이 될 것 같으니 동질감이라도 일으켜 카르틴으로 끌어 들여보려는 속셈인가? 훗, 그것 참 치졸하시군." 뭔가 정도를 넘는 반응인지라 나는 약간 불안하게 류온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헬뮨트 후작이 작게 코웃음을 내비추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게 아니라 상황을 고조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 듯 굉장히 딱딱한 느낌의 코웃 음이었다- 말했다. "후. 항상 생각했었지요. 당신은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일까? 류스밀리 온. 상당히 화려한 이름입니다. 아무래도 귀족에게나 붙일 이름이지요. 그 런데 이상하게도 류스밀리온님께서는 성을 내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가문과 어떤 사정이 있어서 숨기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 만 저는 또 다른 가정도 세워 봤습니다. 당신께선 애초부터 성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어색할 정도로 거창한 이름은 실은 자신의 진짜 이 름을 감추기 위해서가 아닐까 라고." "그래서?" "우리나라에 '류스' 라는 저속한 말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꽤나 일상다 반사로 쓰이는 말입니다만." 헬뮨트 후작은 점점 일그러져 가는 류온님의 표정을 보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문화적 소양이 있는 귀족이라면 '류스' 의 뜻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으로 사려됩니다. 그런데 아들의 이름을 그토록 거창하게 지으시는 분께서 하필 류스라는 애칭이 만들어지도록 내버려두었다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기…기다리세요! 저도 카르틴어에 능한 편이지만 류스라는 말은 전혀 몰 랐다구요. 귀족의 문화적 소양에 욕도 포함되는 겁니까?" 나는 류온님이 곤란해하실 것 같아 재빨리 끼어 들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자 헬뮨트 후작이 입꼬리를 비식 올리면서 -이것도 쇼맨쉽의 일부인 듯 했다, 꼭 로보트 같이 딱딱한 웃음이었으므로- 나를 보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적은 단서로 추측을 하자니 터무니없는 곳에까지 생각이 미 치게 되더군요. 그러니 부디 류스밀리온님께서 자신의 출신을 밝히시어 저 의 잘못된 생각을 제대로 잡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는 헬뮨트의 의도를 깨달았다. 현재 상황은 대충 류온님이 카르틴 왕국 인 일 듯 하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류온님은 꽤나 성질이 불같으신 분이므로 이렇게 약을 올리다보면 제 입으로 사실을 불어버릴 지도 모른 다. 게다가 확정이 내려지지 않더라도 아군의 중요한 재원인 류온님이 적 국인 카르틴 왕국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꼬리표가 계속 붙어 다니게 될 테니 그로서는 최소한의 이득을 보는 셈이다. 그때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진 류온님이 고개를 조금 들어 헬뮨트 후작을 꼬나보며 반 낮춤이었던 말투를 완전히 까내리면서 말했다. "그래, 좋다. 나는 카르틴 왕국 출신이다. 그리고 너의 그 터무니없는 추 측은 전부 사실이다. 어쩔 테냐?" 그의 말에 주변이 술렁댔다. 나는 류온님의 성급한 성격에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이런… 그게 사실이었다니……." "그래서 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예.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리 그 권위가 국왕에 맞먹는 8서클 마법사라지만, 카르틴 측을 상대 로 저렇게 막 나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걱정스레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헬뮨트 후작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류스밀리온님은 어디서 마법을 배우신 것이죠?" "뭐?" 류온님은 미간을 더욱 좁히며 되물었다. 하지만 나로서도 그 질문의 의도 가 의아했다. 류온님이 순수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8서클에 올랐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류스밀리온님께서는 분명 누군가에게 마법을 배우셨습니다. 직접적인 가 르침이 없더라도 누군가에게서 마법서를 건네 받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 고서 이렇게 마법을 쓰고 계실 리가 없습니다. 자신을 지도해줄 그 무엇도 없이 혼자의 힘으로 마법을 깨우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만 두세요. 세상엔 상식을 뛰어넘는 천재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죠." "물론입니다. 카류리드 전하. 류스밀리온님께선 분명 그런 존재이시죠. 하 지만 류스밀리온님께서 과연 혼자서 마법을 깨우치셨을까요? 그분은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이 매직 애로우를 시전하고, 인시너레이트를 시전합니다. 그 모든 것을 혼자 깨우치신 분이 어찌하여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은 종류 의 마법을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혼자 마법을 깨우치셨다면 류스밀리온님 만의 독창적인 마법을 시전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 나는 저도 모르게 류온님을 바라보았다. 그랬다가 그분이 더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아차 싶어 다시 고개를 원상복구 시켰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류스밀리온님은 카르틴인. 따라서 저희 케팀의 궁 -카르틴의 마법사 양성소- 누군가가 당신을 가르쳤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 가르치지 않았더라도 누군가가 기존의 마법서를 당신께 주었 다는 것이 되는 겁니다. 케팀 궁 내에 보고하지 않고 밖에서 아무에게나 마법을 가르친다거나, 마법서를 케팀 궁 밖으로 빼돌리는 것은 중요한 범 죄입니다. 이는 어느 나라나 똑같이 적용하고 있는 바일 것입니다." 확실히 헬뮨트 후작의 말은 사실이다. 이곳에서 새로운 마법사의 탄생은 토이렌으로 치자면 소형 미사일이 하나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 법사들은 그 출신이 이름 없는 지방귀족의 자제였다 할지라도 현재의 서클 에 따라 높은 지위를 가지며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보통은 이것이 이루 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평민일 경우는 좀 달라진다.- 하지만 대단한 병기 (?)인 만큼 그들은 무조건 생명의 궁에서 속박되어 있어야한다는 제약을 가진다. 나 역시 왕자임에도 누군가가 나와서 개인 교습을 해주는 대신 직 접 그 안에 들어가 마법사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를 싫어하고 갑갑해하는 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실제로 한번도 못봤다.- 나가고 싶을 땐 얼마든지 나가는 것이 허락되고, 마법이란 것이 원체 어려워서 서로의 도움 없이는 익히기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회가 되도 나가지 않으려 한달까? 그리고 또 한가지,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하나 만들어내는 경우, 그것은 최신형 미사일 만드는 법이 하나 개발되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마법 을 다른 나라에 마구 퍼뜨림으로서 국력이 상승시킬 기회를 버릴 수는 없 는 일. 따라서 어느 나라에서든 마법의 연구성과가 적힌 마법서를 밖으로 빼돌리는 것은 매국이나 다름없는 짓으로 취급한다. 생각해봐라. 가까운 예로, 아군의 전력에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될 터인- 나의 마법수식, 그 수식들을 빼곡이 적은 마법서를 밖으로 빼돌려 국왕군 측에 넘겨준다면 그것이 배신이 아니고 뭐겠는가. 나는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주위를 두 리번거렸다. 이쪽을 관망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뭐라고 서로 웅성대고 있었 는데, 간간이 들려오는 말들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류온님의 사부에 대해서 는 공공연연한 비밀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너무 대단한 존재로 컸기에 더 이상 터치를 못한 것이겠지. "만약 류스밀리온님께서 케팀 궁의 누군가에게 마법을 배우셨다면 그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십시오. 이제 와서 류스밀리온님까지 처벌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저희들의 입장에서 최소한 그자만은 색출해 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또 어떤 짓을 저지를 지 알 수 없을 테니까요. 자, 제게 협조해 주시 겠습니까?" "…시…끄럽군. 내가 왜 너에게 협조해야 하지?" "이것은 우리나라에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런 일로 서로 얼굴을 붉혀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할 현 상황을 어긋나게 만들어서야 되겠습니까?" 헬뮨트 후작의 말대로 류온님은 협조하지 않으면 안 될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류온님은 그것을 말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자신의 스승님이 처벌을 받을텐데 말하고 싶을 리가 없겠지. 으아,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꼬인 거 야!? "나다." 그때 갑자기 옆에서 몹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 아르디예프가 생명의 궁에 보고하지도 않고 마법을 가르치고, 최신 정보까지 꼼꼼히 적힌 마법서를 작성해 어린 류온에게 주었다. 이걸로 된 건가?" 그 말에 사람들은 다시 한번 술렁였다. 헬뮨트 후작도 의외라는 듯 고개 를 들어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헬뮨트 후작의 표정은 거 의 변하지 않고 있었는데, 안면 근육 자체에 문제가 있는 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어쨌거나 나 역시 굉장히 놀랐던 바였으므로, -두 분이 무언가 연관이 있 을 것이라 추측을 했지만 이런 관계였을 줄은 몰랐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분에게 물었다. "아르 할아버지. 아…아니, 아르디예프 님. 정말이세요?" "…그래. 류온은 어떤 사유로 카르틴에서 우리나라로 흘러온 꼬마였는 데… 어쩌다가 마나 유동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저택으로 데려왔 단다. 그리고 아주 잠시 1서클 수식을 가르쳐보았지. 놀랍게도 류온은 겨우 16살의 나이에 가르치는 족족 마법을 익혀버리더군. 나는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고, 류온을 가르치는데 심취하느라 결국엔 내 본분을 잊었던 거다." "그럼 혹시 류온님께서 사용하시던 그 검술은……?" "…우리 클레모어 가의 검술이란다. 마법에의 재능이 그렇게 대단하면서 도 한 때 옆길로 새서 검술을 하겠다고 난동을 부릴 때 어떻게 배운 것이 지." "아앗-! 그럼 생명에 궁에서 자주 말하시던… 저나 유넨 만큼이나 천재이 긴 한데, 싸가지가 영 밥맛이라던 또 다른 제자가 류온님?" "뭐라?" 류온님의 말을 듣고 나는 찔끔해서 딴청을 피웠다. 그때 촐싹촐싹 참견하 는 내 존재는 완전히 무시하고 아르 할아버지만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헬뮨트 후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류스밀리온이라는 이름을 주신 것도 아르디예프님이셨나 보군 요." "…그래… 마법사에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니까……." 헬뮨트 후작은 또 한번 침묵했다. 그리고 나와 류온님, 그리고 아르 할아 버지를 한명씩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째서 류스밀리온님께서 갑자기 제6왕자군에 가담하였는지, 그것도 왜 하필 가장 감정이 좋지 못한 적국에 가담하였던 것인지 궁금하던 차였는 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군요." 헬뮨트 후작의 말을 듣자니 갑자기 내 눈앞에 불이 튀겼다. 아아, 말은 이 래저래 많았지만 실은 스승님이신 아르 할아버지가 걱정이 돼서 이렇게 일 부러 찾아와서 계속 주변을 맴돌고 계셨던 거구나. 그리고 디트 경의 일과 내 수식 건을 계기로 삼아 아군에 들어오게 된 것이고. "멋대로 넘겨짚지 마라." 내 마음을 예상하기라도 한 류온님의 발언에 나는 움찔했다. 하지만 아마 모든 사람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움찔하고 있으리라. "물론 제6왕자군에 들어오게 된 데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지. 하지만 이 군의 지도자가 카류리드 왕자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군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의외의 발언에 입을 동그랗게 모았다. 사실, 뭐… 스스로 생각해도 난 그리 대단할 것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전에 디트 경의 사건이 있은 후, 류온님은 내가 무슨 대단한 유토피아라 도 만들어줄 수 있을 듯이 이야기하며 내 편을 들어주기로 했었다. 하지만 솔직히 잘 찾아보면 나보다 유능한 존재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카르틴 의 왕 에뮤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 내 무엇이 그리도 좋았는지 -음, 왠지 어감이 이상하군- 점점 더 궁금해 져서, 나는 귀를 쫑끗 세우고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류온님의 말을 기다렸 다. 그리고 나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받으며(?) 류온님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었다. "이 나라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의 90%는 바로 평민이다. 하지만 백성을 생각하니 어쩌니 해도 진심으로 그들의 생활에 관심을 기울이는 자는 하나 도 없어. 이 나라가 썩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카류리드 왕자는 다 르다. 그에게는 뼛속까지 그들을 위하는 자세가 있다. 어떨 때는 나조차 깜 짝 놀래킬 정도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행하고 있다." 류온님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내가 갖다 놓았던 수건을 바라보았다. 나는 조금 전에 시녀를 돕는답시고 가져다 놓았던 그 수건들을 보고 쑥스러움을 느꼈다. 진짜 별것도 아니었는데……. 여자애가 부피가 상당한 물건을 들고 있기 에, 그냥 보고 있기도 뭣해서 도와준 것으로……. …그래……,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키포인트 것이야∼!! 귀족이면서도 시 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인간은 아마 엄청, 굉장히 드물 거다. 당연한 거겠지? 하긴, 여기 사람들 입장에서 날 보면 꼭 성자 같을 거야. 그래∼ 그런 거였어∼! 나는 다 알고 있던 사실을 새삼스레 들추며 자화자찬을 했다. 덕분에 입 가에 저절로 미소가 번져 나는 그것을 참으나 안간힘을 써야했다. 좋은 소리 좀 들었다고 바로 헤실거리면 날 뭐라 생각하겠냐고. 하지만 난 원래 칭찬 받으면 좋아하는 무지하게 평범한 놈이라… 안돼, 어서 말을 돌리자. "역시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신 분이네요. 호…혹시 류온님도 이런 것도 생각하고 계세요? 만인이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라던가 하는 거." "뭐?" "그 왜 신분제에 얽매여 억압받는 사람이 없는, 평민도 왕족도 귀족도 없 는 그런 세상 말예요. 그래도 완전히 구분이 없어지는 건 불가능할 테지만 이른바 유토피아론으로… 하하……." "누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소릴?" 그러나 류온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다. 게다가 주위 사람 들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었다. 나는 괜히 말 돌리자고 한마 디했다가 썰렁한 분위기를 깨닫고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스스로의 권위를 까뭉개는 그런 말씀을 하시다 니……!" "저희 귀족과 왕족이 무지한 평민들을 이끌어 주고 있음인데, 전하께서는 이 지배구조를 억압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입니까?" 루인 공작이 발끈 화를 냈고, 헬뮨트 후작도 반발했다. 아르 할아버지도 그리 좋은 얼굴은 아니기에 나는 잠시 머리를 굴리다가 곧 얼굴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들었기에, 혹시 그런 불순한 생각을 하시는 것이 아 닌가 시험해 본 것뿐입니다. 성급하시군요." 내 말이 떨어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얼굴 표정을 제대로 풀었다. 하긴 여 긴 신분제 사횐데, 그딴 소릴 하면 몰매 맞겠지? 한국에서 '공산당이 좋아 요~' 라고 말하는 수준일까? 그때 류온님이 그런 날 보더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 다. "내가 아무리 막나간다지만 설마 그런 생각까지 할 리가 있겠는가. 신분 제를 폐지하자는 웃기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이 있다니. 그런 불순한 사상 을 가진 놈은 당장에 잡아 들여야 할 것이야." "아? 에. 그게… 그럼 류온님은 대체 뭐예요? 비슷한 뉘앙스였으면서 ……." "나는 단지 하층민들을 다스릴 지배자의 위치에 서있다면, 그만한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아량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하 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입을 부루퉁하게 했다. "그럼 말이죠. 류온님은 평민이라면서요. 그런데 자신이 천하고 무지하다 는 말에 동의하시는 건가요?" "흥, 나는 8서클 마법사가 되었다. 더 이상 그런 평민들과 달라." 우욱, 난 능력이 있으니까 귀족이나 다름없다 이거구만. 평민을 위하고는 있지만, 그들이 천한 존재이라는 걸 인정하고 있구나. 류온님까지 저런 소 릴 하다니 정말 의외네, 이거……. "뭐… 어쨌든 좋습니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닐 테니까. 그럼 아르디예프님 과 류스밀리온님이 서로 사제지간인 것을 감춘 것은 이 일로 인해 아르디 예프님께서 징계 받으실 것을 걱정하셨기 때문인 모양이군요." 나는 싱글거리며 두 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역시 서로를 아껴주는 분들이 었어!' 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던 것이다. 그러나 류 스밀리온님은 영 퉁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전혀! 아르디예프야 이미 아르윈의 유일무이한 8서클의 마법사인데, 그 일로 징계 받아야봐야 얼마나 대단한 징계를 받는다고……. 게다가 아르디 예프는 내 스승이 아니다. 사제지간의 연 같은 건 예전에 끊었어!" "예?" "…과거의 일이란다. 놈이 정치에 가담하고 싶다기에 내가 반대했고, 그러 다가 어긋나게 된 것이지. 그래도 일시적으로 조금이나마 가르친 은혜가 있건만 인사도 없이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 버리다니. 배은망덕한 놈." 아르 할아버지는 류온님을 흘겨보며 그렇게 말했고, 류온님도 만만치 않 은 얼굴로 아르 할아버지를 꼬나보았다. 하긴, 아르 할아버지는 마법사란 국가적 대립이 아니고서는 어떤 일이 있 어도 절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계시니까. 내가 없었다면 아르 할아버지가 내전에 끼어 드는 일은 절대 없었을 거다. 하지만 류온님 은 정 반대로 이런 정쟁에 굉장히 관심이 많지. 보기에 서로를 그렇게 싫어하고 계신 것 같진 않은데, 이념 대립으로 인 해 어긋난 일로 아직까지 으르렁거리고 계시는 거구나. "이제 됐잖아요. 결국에는 이렇게 한자리에 모이셨는데, 더 이상은 그렇게 으르렁거리실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닌가요?" "훗, 그래. 자기발로 내전에 뛰어들었으니 결론적으론 아르디예프의 패배 가 된 거지. 그만 꼬리를 내리시는 게 어떤가?" "류스밀리온!" "어휴, 두분!! 진정하세요! 그리고 류온님 정말 너무하시네요! 그 말투 좀 어떻게 해보세요!!" 나는 전적으로 그 책임을 류온님께 떠넘기며 아르 할아버지를 옹호했다. 물론 대세가 나와 아르 할아버지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쳇, 시끄럽군……." 류온님은 주위의 기류가 영 좋지 않자 인상를 찌푸리더니 그대로 몸을 돌 려 연무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류온님의 사라진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헬뮨트 후작이 내게 고개 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단지 류스밀리온님께 대해 궁금한 것이 많았을 뿐인데, 무 례한 말씀만 드린 것 같아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군요." "뭐, 류온님께서 그렇게 옹졸하신 분은 아니니 금방 마음을 푸실 겁니다. 하지만 다음부턴 조심해 주시길." 내가 분위기를 바꾸고 차갑게 말하자 헬뮨트 후작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사과했다. 잠시간의 해프닝 때문인지 루인 공작과 헬뮨트 후작은 아무것도 하지 않 고 그대로 연무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꽤나 진지한 대화 를 나누는 것으로 봐서 아마도 아군의 마법력에 위협을 느낀 모양이었다. 당장 에뮤에게 서신이라도 보내려나. 그건 그렇고-. "아르 할아버지." "응? 왜 그러니?" 나는 조금 전의 일 때문인지 여전히 편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아르 할 아버지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류온님이 저래도 악의는 없어요." "후." 아르 할아버지는 조금 창백해 보이는 얼굴을 살짝 미소를 띄우며 자신의 손을 내 머리 위에 폭 얹었다. 보는 사람이 꽤 있는데 이래도 돼나?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런 나의 걱정을 녹여버릴 정도로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보다는 내가 류온을 더 잘 안단다." "헤에. 그렇네요." 류온님이 거친 걸음으로 빠져나갔던 길을 보며 나는 빙긋 웃었다. 시야를 가리던 뿌연색의 아침 안개는 어느새 감쪽같이 사그라져 있었다. ======================================================== 아직은 비축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거의 다 떨어졌지만...) 주말동안의 공백은 인터넷에 올리기 귀찮아서 그랬던 거예요. 퍼억-----!! 독자여러분들께 올립니다. 이르나크의 장에서 전쟁신의 의의. 첫째 전투는 드래곤의 환영으로 암시 비스그무리한 걸 위해.;; 둘째 전투는 디트를 죽이기 위해! 셋째 전투는 카이를 만나기 위해! (호위기사 멤버 체인지=_=) 넷째 가을동안의 소규모전은 세미르를 끌어들이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한창 대치 중에 세미르가 저벅저벅 걸어오긴 그럴 테니까..;; 사실 이 글에서의 전쟁은! 전쟁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이벤트를 일으키기 위한 전쟁인 것임다! -_=;;; 저도 써야할 이야기가 없으면 전쟁은 일단 생략하고 보는 겁니다! =_=;;;;;;;;;; 쿨럭..................... 전쟁에 무지한 (주제에 글 쓴다고 날뛰는) 작자여!! 이 얼마나 허접스러운가!? 제가 좋아하는 말을 수정해봤슴다. =_=;;;;;;;;;;;;;;;;;;;; 이야, 잡담 길~~~다!! 본문도 평균치보다 길다니깐용?! ;;;;;;;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5 비(妃) (1) 확실히 괜찮은 여자이긴 하다. 아니, 솔직히 말해 몹시 매력적이다. 나는 맞은 편에 앉은 은발의 여성을 바라보며 그렇게 평가 내렸다. 티타임에 함께 한지 이 경이 조금 넘었을 이 시각. 연·아남은 당돌하지 만 건방지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그 화술로 뭍 남성들의 마 음을 휘어잡고(?) 있었다. 처음의 그 이상했던 말투도 지금은 영 귀엽게만 느껴진달까? "정말 그런 나라가 있단 말이오? 연·아남?" "어머, 이 소녀가 카나스 님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못된 여자로 보이시나 이까?" "하하. 그럴 리가." "벌레를 음식으로 삼는다니, 야만적이군." "루인 공작님. 그들은 고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벌레를 먹음으로서 영양을 채우는 것이옵니다.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하여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지혜 인 것이옵지요. 야만이라는 말 하나만으로 치부하기엔 아까운 일이 아닐까 사려되나이다." "후-. 뭐, 좋겠지." 저 흉포한 루인 공작마저도 연·아남의 앞에서는 한 발자국 물러서는 듯 한 느낌. 평범한 사람이 같은 말을 했었더라면 당장에 불호령이 떨어졌을 텐데 말이다. 화기애애한 사람들의 말소리 속에서 순간 연·아남과 눈이 마주쳤다. 나 의 또 다른 비(妃)가 될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조금 거북해했던 나는 버릇 처럼 영겹결에 그녀의 시선을 피했고, 그런 모습에 연·아남은 한숨을 폭 쉬었다. "아아. 소녀의 입으로 말하면 자화자찬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소녀는 스스로의 외모에 꽤나 자신이 있었나이다. 하지만 이곳에 온 뒤로 이 크로시아 대륙은 소녀의 작은 그릇으로는 헤아릴 수 없 을 정도로 넓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나이다." 연·아남의 시선은 내 양옆에 앉은 히노와 카이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는 또 한번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잖아도 달리 내세울 것이 없는 소녀이온데, 저토록 아름다우신 분들 이 계시니 소녀는 더 이상 어찌해야 하올지 답답하나이다." "외모만이 전부는 아니지 않소? 그리고 사실 그대에겐 외모를 제하고도 얼마든지 장점이 있……." "아버지!" 카나스님이 은근슬쩍 연·아남의 편을 들다가 에르가 형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아직 히노를 좋아하고 있으니 외모만이 전부가 아니 라는 말이 엄청 거슬렸을 것이 틀림없다. 아, 그렇다고 우리 히노에겐 외모 밖에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허, 그러고 보면 카류리드 전하께선 여복이 굉장하시군요.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미녀이신 리아가의 히노 양과 에스문드가의 카이야 양은 말할 것도 없고, 연·아남 또한 비로 맞아들이기로 약조되어 있지 않습니까? 거 기에 저희 카르틴의 손꼽히는 미인이신 옐루니얀 공주님까지 비로 맞이하 게 생겼으니……." 나는 루인 공작의 허탈한 말을 듣다말고 무의식중에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는 에스문드가의 영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그리고 그 에스문드 가는 나의 큰 조력가문. 이는 에스문드가와의 친목을 위해 -특별한 것이 없어도 친목이 돈독할 터 이지만, 겉으로 보여주기 위한 친목도 있으므로.- 카이가 나의 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황당한 결론을 내리고 눈알을 또글또글 굴리고 있는데 히노가 갑자 기 의자를 당겨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덕분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히노 에게 시선을 집중시켰고, 나 역시 카이에게 고정시키고 있던 시선을 그녀 에게로 옮겼다. 이 따가운 시선의 속에서도 히노는 굉장히 침착한 얼굴이었다. 도저히 예 전의 수줍은 그녀와 한 인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저질러서……. 그런데 루인 공작님. 옐루니얀 공주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흠, 현명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지. 4왕자 2공주 중 가장 폐하를 빼닮은 분이시라는 평을 듣고 있소." "에뮤와 닮았……?! 케…케시뮈르4세와 닮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순간 흥미진진함에 반짝 고개를 들었다가 크나큰 실수를 하고서 고 개를 약간 숙였다. 심심하면 에뮤, 에뮤 하고 부르다보니 그만 입에 붙어버 렸나 보다. 이렇게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나 너무 풀어진 거 아닌가?! 나는 루인 공작과 헬뮨트 후작의 살벌한 시선을 받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헬뮨트 후작은 내게 살벌한 시선을 보내면서도 오른손으로 곁에 앉 은 루인 공작을 말리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고, 덕분에 그 사건은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잠시간의 해프닝으로 멈춰진 이야기는 흥분한 루인 공작 대신 헬뮨트 후 작에 의해 이어졌다. "옐루니얀 공주님은 평소 품위 있고 자애로우시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여 느 남자들보다 강한 기개와 총명함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주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그분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폐하를 연상하곤 하지요. 게다가 그 분의 후광과도 같은 금발이야말로 황금의 성왕이라 불리시는 위대한 페하 의 기품을 그대로 빼닮으셨습니다. 히노양께서도 아름다운 금발을 가지고 계시지만, 저희 공주님께 비견할 바는 아닐 것입니다." 에르가 형이 당장이라도 반론을 하고 싶은 듯 얼굴을 붉히고 입을 뻥끗댔 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는지 당장에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 다. 나도 우리 히노 편을 들어주고 싶긴 했지만, 사실 에뮤의 그 금발과 똑 같은 느낌이라면 히노가 한 수 뒤지는 것은 사실이지 싶다. 옐루니얀 공주라. 에뮤를 쏙 빼닮았다는 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호감이 가 는 여인이다. 게다가 연·아남도 충분히 매력적이지. 히노나 카이는 두말하 면 입 아프고……. 나는 그제야 복잡하게 꼬인 상황을 무시하고 단순히 남녀관계만을 생각해 서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짧게 실소를 머금었다. 허, 객관적인 시각에서 난 정말 여복이 터졌구나. 내 어머니까지 고려범위 에 넣어볼 때, 대륙의 최고 미인은 전부가 내가 독점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니 말이다. "후후, 같은 남자의 입장으로 볼 때 카류리드 전하께선 정말 부러우신 분 입니다. 저의 주군이 아니셨다면 지금쯤은 질투에 못 이겨 무슨 일이라도 내지 않았을까 싶군요." "왜 아니겠소. 나로서는 옐루니얀 공주님 만으로도 감지덕지 하겠소만 그 와 같은 분들이 한둘이 아니니……." 딜티가 웃으며 말하자, 루인 공작이 그에 맞장구를 쳤다. 그들이 화기애 애∼하게 농담을 나누는 것을 보며 카르틴 측의 몇몇 장군들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하지만 나도 며칠동안 루인 공작의 그 포악하고 무식 과격한 모습을 보았기에 그들의 감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 그만하시옵소서. 소녀. 이야기를 듣자니 더 이상 미래를 접하기가 두 렵나이다." 갑자기 연·아남이 뺨에 양손을 얹고 자지러지며 그들의 농담에 제동을 걸었다. 그런데 과장되게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귀여워 보여 몇몇 남자들이 벌써부터 얼굴을 붉히고 있을 정도였다. "걱정 마십시오.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외모로 상대를 판단하는 분이 아니 십니다." 오늘따라 영 말이 없던 힐레인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연·아남을 옹호하 는 그의 목소리에 이상하게 퉁명스러운 끼가 엿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었다. 내 기분 탓일까? "맞습니다. 저 역시 힐레인경과 같은 생각이니 그렇게 주눅들어 하지 마 십시오." 이번에는 원래부터 과묵했던 수·유란까지 나섰다. 그리고 수·유란을 시 작으로 연·아남을 위로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 다. 카류리드 전하는 외모로 상대를 판별하는 자들과는 다른, 좋은 사람이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근데 사실 나도 아리따운 외모를 보면 조금 흥분되는데 말이지……. 난 슬그머니 카이를 돌아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다 치고 연·아남이 그렇게까지 주눅이 들어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대단한 호 응이다! 단순히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였음은 누구라도 알 수 있었을 텐 데 말이야. 하긴 남자들의 저런 반응도 나름대로 분위기를 띄우려는 의도 라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한동안의 사람들이 연·아남을 두고 웅성거리고 있을 때, 루인 공 작이 피식 웃음을 내보이다가 곧 손을 저으며 나섰다. "걱정 마시오. 연·아남. 혹시 카류리드 전하께서 외모로 상대를 판별하시 는 분이라 할지라도 그대는 주눅들 필요가 없을 듯 하오." "감사드리옵니다. 루인 공작님께선 허언과는 어울리지 않으시는 분이시니 이 소녀 굳게 그 말씀을 믿어보겠나이다." "하하. 카류리드 전하께서도 뭐라 한마디 해주시지요." "그렇습니다. 정작 당사자께서는 아무 말씀도 않고 계시니 연·아남이 얼 마나 무안하겠습니까." 헉?! 화…확실히 그녀가 아름답고… 그리고 뭐, 귀엽고 매력적이라는 건 동의하지만 그걸 내 입으로 말하란 말이야? 당사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쪽팔리게!?!? 닭살 돋게!?!?!? 어릴 때부터 키워오던(?) 여자애들이 아닌 연·아남과 같은 제대로 된 여 성(??)을 상대로 그런 말을 줄줄 해댈 자신이 없었던 나는 여러 사람들의 독촉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입 꼭 다물고 가만히 있자니 연·아남의 체면이 구겨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약간 쪼그라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처음엔 갑작스러운 이야기로 인해 조금 어색함을 느꼈으나, 사실은 연· 아남을 몹시 아…아름다운 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으윽, 말 더듬었다. 아으∼ 사람들이 전부 보고 있는데에∼ 젠장, 쪽 팔려 라∼. "눈치 줘서 대접을 받자니 소녀 부끄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하하. 미… 미안하군요, 연·아남. 하지만 조금 전 그 말은 진심이랍니 다." "후후, 아니옵니다. 미안하시다니요. 하지만 약간 의외이옵니다. 소녀는 카 류리드 전하께옵서 여성을 상대하는데 몹시 능숙하실 줄로 생각했사온데 그런 부분에서 쑥스러워 하시다니……." 연·아남은 말끝을 흐리며 히노와 카이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말뜻 을 알아듣고 멋쩍게 웃었다. "히노양은 어렸을 때부터 친한 사이라 부담이 없고, 카이야 양도 대하기 가 쉬운 여성이라 그렇답니다." "대하기 쉬운 분이시옵니까… 카이야양은 무게 있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굉장히 애교 있고 귀여운 여성이신 모양이나이다." "풋-!" "흠, 흐음……." "쿨럭……." 연·아남의 말이 떨어지자 프리란트님과 드리크경, 카나스님 등등… 카이 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이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의아해 하는 연·아남 과 카르틴 측의 사람들을 보고 괜스레 키득거리던 나는 문득 카이가 어떤 표정일까 궁금해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그 랬듯 무표정 일색이었다. 역시 이 정도로도 감정이 무뎌진 그녀를 웃기는 데는 역부족이었나. "제가 보기엔 연·아남이야말로 무척 귀여운 여성 같군요. 연·아남의 앞 에서라면 그 어떤 무뚝뚝한 남자라도 금방 녹아버릴 듯 싶습니다." 나는 문득 그 말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 활발하지 못한 성격 탓에 거의 말을 않고 있던 히노가 방긋 웃으며 입을 연 것이다. "히노양의 앞에서 그런 말을 듣자오니 부끄럽나이다. 사실 같은 여자인 저도 히노양께 반해버릴 것만 같사온데 어찌 소녀의 그것과 비견하시나이 까." "하하하, 연·아남은 정말 재밌으신 분이군요." 연·아남이 히노를 보며 얼굴을 약간 발그레하게 붉히기에 나는 결국 크 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 이후로도 연·아남은 계속 이 티타임의 주역 처럼 분위기를 밝게 이끌어갔고, 나 역시 그녀의 재치에 빠져 연신 웃음을 지으며 그 시간을 즐겼다. "그럼 후에 뵙겠나이다. 비록 소녀가 지나가는 시녀와 혼동할 정도로 흔 한 외모를 가지긴 하였으나 헤어지자마자 소녀를 잊어버리진 말아주시옵소 서." "하하하. 너무 자학하는 거 아닌가요? 사실 연·아남 정도면 수준급이라 확신하는데 말입니다." 예정보다 티타임을 세시간이나 길게 끌다가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무 렵. 나는 연·아남에게 상당히 가벼운 농을 던질 수 있을 수준에 이르렀다. "후훗, 농담이나이다.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전하께선 상냥한 분 이시니 소녀를 쉽게 잊지 않으실 것을 확신하옵니다." "연·아남이 저를 이토록 높게 평가해주시니 누구에게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군요. 그럼 정말 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아, 히노양도 있다가 보죠." "예.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히노도 방긋 웃으며 내 인사에 답했다. 히노와 연·아남이 같이 걸어가는 것을 보며-둘 다 거물급(?) 여성이므로 방이 같은 쪽에 있다- 나는 일단 내 방으로 돌아가 위해 카이와 반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같은 쪽에 방이 있는 에르가 형과 딜티, 세미르도 함께였다. "에르가. 연·아남 굉장히 귀엽지 않아?" "뭐가? 세미르 네 수준은 그 정도 밖에 안되냐?" 에르가 형이 입을 삐죽거리는 것을 보고 딜티가 고개를 저었다. "또 왜 그렇게 뿔이 난 거야? 사실 그 정도면 충분히 귀엽지. 나도 기회 가 있으면 사귀어보고 싶더라. 아, 우리 위대한 주군의 비가 되실 분께 음 흉한 마음을 먹었으니, 불손죄에 해당하는 건가?" "그래, 불손죄다. 이 무엄한 녀석." 딜티가 나를 보고 조금 뒤로 물러서기에 나도 웃으며 손으로 녀석의 머리 를 살짝 쥐어박아 줬다. 그렇게 한동안 떠들며 거의 내 방 가까이 걸어왔 을 때였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힐레인?" 언제 온 것인지 힐레인이 우리들의 뒤쪽에서 어딘지 모를 살벌한 시선을 내게 던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의 사이를 헤치고 성큼성큼 내쪽으로 걸 어오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열었다. "꼭 충고 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바쁜 시간을 조각조각으로 쪼개내어 왔 습니다만! 이야기를 위해 전하의 방에 잠시 함께 들어가도 괜찮으시겠습니 까?" "응? 응… 뭐… 상관없지." 안 된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밥상을 엎어버릴(?) 듯한 말투인지라 나는 얼 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내가 힐레인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니, 원래 내 방으로 들어올 예정이 없었던 친구들까지 사전 동의 없이 다 함께 우루루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 길어집니다. ㅎㅎㅎㅎㅎㅎㅎ 7권도 질질 끈다는 소리 듣지 싶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T_T 아, 그리고 다음편은 12금(禁)?! 입니다. =_=;;;;;;;;;;;; 언어순화 시키려고 노력했지만.....쿨럭..... 출판 시 어떻게 언어순화 시키면 전 연령층 판이 될 수 있을 지 리플 남겨주셈. =_=;;;;;;;;;;;; 이르나크의 장 Part 55 비(妃) (2) 경고했다시피 12금(禁)?! 입니다. =_=;;;;;;;;;;;;;;;; 전혀 조금 그럴 수도 있고, 전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가 그렇고 아닐까요?;;) 안 쪽에 배치된 탁자에 모두가 자리를 잡고 앉고 난 후 나는 힐레인이 무 슨 말을 그렇게 하고 싶어했는지 곧장 질문에 들어갔다.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뭐지?" "카류리드 전하의 비(妃) 문제입니다." "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본 힐레인은 고개를 약간 옆으로 돌린 후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꼬아 그 위에 양손을 깍지 낀 손을 올려놓은 뒤, -진짜 건방진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거의 째려보다 시피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당장 제 누님을 안아주십시오." "풋-!" "켁!!" "쿨럭!" 앞뒤 없이 떨어진 힐레인의 충격적인 발언에 모든 친구들이 사레에 걸려 켈록였다. 나 역시 잠시 놀랐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웃음을 떠올리며 말 했다. "아, 친구들에게 하는 것처럼 히노양을 안아주라고 말하는 건가? 나와 히 노양이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이니 걱정이 되는 모양이네? 너도 누나 사랑이 각별하구나." "그런 어린애 놀음 말고! 가서 그분과 섹스를 하란 말입니다!" "컥! 야! 이 자식이?!" 에르가 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힐레인에게 삿대질을 했다. 하지만 이 번만은 나 역시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로 형의 행동에 동조했다. "그…그…그…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쪼그만 게 못하는 소리가 없어!!" "누가 작다는 겁니까! 세기의 천재시라는 분이 제가 33살이라는 것을 잊 으신 것은 아닐 테지요!?" "시…시꺼! 33살이래도 넌 엘프고, 엘프 선상에서는 어린애잖아! 그리고 그 뭐시냐, 생식기라는 것도 300년 후에나 온다며!!"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뿐이지 다른 것은 충분히 혈기왕성한 33살입니다. 절 뭘로 보시는 겁니까? 이미 알 것, 모를 것 다 알고 있고, 경험도 충분한 사람입니다." "헉? 경험? 그런 몸으로? 게다가 그동안 저택에서만 살았다며?" "비밀리에 창녀를 부를 수도 있고, 다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죠." "오오, 자세히 얘기 좀 해봐!" "그래! 방법이란 게 뭐냐?" 갑자기 친구들이 흥분하며 몸을 내밀기에 나는 얼굴을 붉힌 채로 바락 소 리를 질러 그들을 제지했다. "이봐! 그만두지 못해?!" "허, 겨우 그 정도에 그토록 부끄러워하시다니, 17살이면 아주 적은 나이 도 아닌데 여자 경험이 전무한 사람처럼 행동하는군요. 의외로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인기가 없었던 모양이지요? 휴나르 성내의 시녀들 사이에서 귀 엽느니, 친절하니 하며 입담에 오르내리기에 왕성의 귀부인들에게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귀…귀엽! 이래봬도 키가 꽤 컸는데……. 게다가 왕자체면에 귀엽다는 말 이거 문제가 있는 거 아냐!? 내가 쓸데없는 곳에 신경을 집중시키며 홀로 분개하고 있는 동안 딜티가 고개를 기울이며 힐레인의 말을 이어 받았다. "인기라. 내가 아는 한 카류의 인기라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지. 파블료 프 왕립학교의 여자란 여자는 전부 카류리드의 추종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 었고, 파티라도 있을라치면 카류와 춤을 추기 위해 여자들이 서로 불꽃 튀 기는 경쟁을 했었으니까." "맞아, 하지만 정작 사귀지는 않으면서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녔지. 내가 사귀던 리벤다가 말하던데 카류는 다 좋은데 그것 때문에 평판이 안 좋다나 어쩐다나. 그래도 일단 얼굴을 보면 녹을 수밖에 없는 남자니 어쩌 니 그러는데… 생각해보면 내가 리벤다랑 쪽박난 건 전부 카류 때문이라니 까." "엉? 아니, 그게 무슨……." 나는 딜티의 말에 이은 세미르의 말에 당황하여 끼어들었다. 하지만 내 발언권을 먼저 딜티가 빼앗아가 버렸다. "그러고 보면 달콤한 말을 속삭여서 여자들을 대량으로 유혹하고도 항상 가벼운 포옹이나 뺨에 하는 키스 정도로 끝내는 것 같더라고. 그런데 우스 운 건 여자들은 그것에 더 맛이 가곤 한다는 거지. 간신히 꼬셔서 막판까 지 가려했던 여자애가 카류에게 이마에 키스를 받자마자 그 즉시 변심을 한 적도 있었다니까? 그 당시 내가 아주 고단수라고 속으로 얼마나 욕을 했었는데……." "너만 그랬겠어? 나 역시……." "이봐, 기다려! 지금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그렇다면 너희들 여자애들과 그…그런 종류의 일을 했었단 말이야? 어…언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이 쪼그만 것들이 벌써부터 책임 못질 짓을 저지르고 다닌 거였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쑥덕대는 아이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의 행동 이 여자애들을 꼬시기 위한 행동으로 와전되었다는 사실도 놀랍긴 했지만, 일단은 '막판까지 가려했던' 이라는 딜티의 말이 더욱 신경이 쓰였기에 때 문이다. 그렇게 소리친 내 말이 방안을 왕왕 맴돌았을 즈음, 친구들이 일시에 말 을 딱 멈추고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지긋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들 중 에르가 형이 나서 이를 바득 갈면서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쪼그만 것들? 누가 조그맣다는 거지? 내 이제껏 신체적으로나 연령적인 면으로나 너보다 작아본 기억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순간 뻘쭘해서 딴청을 피우며 자리에 슬그머니 앉았다. 환생을 했기 에 같은 친구이면서도 그들을 애들처럼 대하며 귀여워했지만, 이들은 그걸 모를 테니까. 그때, 나와 친구들이 하던 말을 가만히 듣던 힐레인의 눈이 가늘게 변했 다. 그는 곧 몹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히노… 아니, 누님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연인 비슷한 사이라고 들었는 데, 설마 그분께도 가벼운 키스 밖에 한 적이 없으신 것입니까?" "글쎄? 우리들이 없는데서 했을지도 모르지." "전하∼?!" 힐레인이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내게 독촉을 하기에 나는 조금 주춤했다. 그런 계열(?)의 일이라면… 최근에 내가 히노의 입술에 키스한 적은 있다. 하지만 그건 엄연히 그녀를 달래기 위한 일로서 삐리리한 짓을 하고자 그 랬던 건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하긴 했으니……. "했……." "경험이 없으시군요." 힐레인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확 돌렸다. 아마 잠시잠깐 망설이는 내 감정을 읽고 그렇게 단정한 모양이다. 왜인지는 몰라도 이상하게 부끄러워 져서 얼굴을 붉히고 있는데 힐레인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 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미루어볼 때, 카류리드 전하는 성 미숙아 내지는 불감증일 가능성이 크군요." "커허헉! 무…무슨 소리야! 걔들은 아직 어린애들이라고! 애들을 상대로 이상한 짓을 할 순 없잖아!! 애초부터 나를 흥분시킬 상대가 아니라고! 전 혀 틀리단 말이야∼∼!!" 나는 차마 듣지 못할 얘기까지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광분했다. 머리를 싸쥐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고 있으려니 힐레인이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시군요?" "……." "누님은 전하보다 2살은 더 연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전하 께서는 진심으로 누님을 어린애라고 생각하시는군요?" "……."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추하게 머리를 쥔 채로 잠시 굳었다. 그렇게 힐레인 이 눈싸움이 아닌 눈싸움을 한지 몇 초가 흘렀을 때, 녀석이 손으로 머리 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돌림으로서 그 대치 상황은 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힐레인이 자리에 앉으려는 내게 고개를 다시 돌리고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유부녀 취향이십니까?" "야!! 힐레인!! 아, 증말 미치고 팔짝 뛰겠네!!" "…그것도 아니시면 대체 뭡니까! 설마 할머니들에게 성적 욕구를 느낀단 말입니까?" "그게 아냐! 아니라고! 좋아. 나…나는 말이지.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보아 왔던 여자애들만 아니면 돼. 그걸로 족하다고!!" 나는 숨까지 헐떡이며 힐레인의 말에 항변했다. 하지만 당연히도 이 방안 의 청중(?)들은 이해 못하겠다는 듯이 침묵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왜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여자애들은 어린애인 겁니까? 그러고 보면 저 친구 분들께도 귀엽다는 오로라를 풍기며 애들 어르듯 대하는 것이, 누님 과 마찬가지로 어린애 취급을 하시는 듯 하던데……." 힐레인의 말이 떨어지자 친구들의, 특히 에르가 형의 눈빛이 아주 살벌해 졌다. 하지만 나는 성미숙아 내지는 할머니에게 욕구를 느끼는 변태라는 억울한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로 머리가 꽉 차여 있어 그들의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런 줄 알어! 원래 천재라 불리는 자들의 정신세계는 심오한 법이라고! 네가 내 정신세계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그래! 내가 천재인 것도 다 환생했기 때문이잖아? 그리고 어린 시절 같은 또래의 애들을 귀여워하고 돌봐온 것도, 아직까지 그 감정이 이어져 친구 들을 어린애 취급하고 있는 것도 환생 때문이고. 이게 다 환생이라는 매개 체로 인해 만들어진 심오한(?) 정신세계 때문이라고! "…글쎄… 실로 그런 이유란 말씀이십니까……." "글쎄는 무슨 글쎄야! 범인으로써 이 천재님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없 다면 내가하는 말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거야!" 힐레인에 비해 한 열 배는 머리가 뒤쳐지는 주제에 난 뻔뻔스럽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물론 나 역시 천재까진 아니더라도 머리가 좋은 편에 속한 다. 하지만 힐레인이 책을 구하기가 힘든 평민이었으면서도 -활자기술이 발전하지 않아 손으로 책을 집필하기 때문에, 아무리 부자라도 귀족이 아 니면 좋은 서적을 구하기가 힘들다.- 몹시 박식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그렇다는 거다. 하지만 내가 천재라는 사실은 원래부터 상류층 에 꽤나 소문이 자자했던 일이고, 최근 마법사 수식건도 있으니 반박할 여 지는 없으리라. …아… 찔린다……. 내가 천재 운운하며 반박을 하자 힐레인은 아니꼽다는 표시를 팍팍 내며 입을 이죽거렸다. 하지만 이내 그런 표정은 지우고 조금씩 얼굴을 굳히다 가 곧 굉장히 진지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그럼 좋습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말씀대로라면 연·아남에게는 연애 감 정을 품으실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겠군요?" "아? 아… 뭐… 그렇지……." 나는 뭔지 모를 껄끄러운 느낌을 받으면서 더듬더듬 긍정의 대답을 했다. 힐레인은 내 대답에 약간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 했다. "그럼 상황이 조금 더 심각하군요." "…대체 왜 그러는 건데? 갑자기 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뭐야?" 나는 그제야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힐레인을 향해 제대로 질문했다. 이 유없이 히노를 아…안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 아닌가. "좋습니다. 말씀드리죠. 지금 아군 진영에서는 좋지 않은 소문이 돌고 있 습니다. 전하와 누님간의 사이가 벌어졌으며, 반면 카이야님과는 밤마다 동 침까지 같이하고 있다는 소문이 말입니다. 아, 이것은 카이야님의 정체를 모르는 자들과, 안다해도 그를 믿고 있지 않는 자들이 퍼뜨리고 있는 것입 니다만." "…그…그런데?" "그런데라뇨! 지금 스스로가 일군의 지도자라는 인식이 갖춰져 있기나 한 겁니까? 이러한 소문은 리아 후작가와의 불화설에 대한 가정으로 이어지게 되며, 결국엔 군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의 호통 소리에 찔끔했다. 확실히 히노와는 뭔가 살벌한 바람이 부는데 비해 카이와는 동침 -이상하게 들리지만 순수한 그 말뜻 이상의 일 은 결단코 없었다!- 까지 하고 있다. 그러니 속사정이야 어찌됐든 사람들 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는 일이다. "에스문드 백작님이 계시긴 하지만 그냥 솔직히 말씀드리죠. 실제로 리아 후작… 아니, 아버님께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금씩 불안을 느끼고 계십니다. 전과 달리 전하의 총애가 누님께 떠난 듯 한데 비해 에스문드가에는 드래곤인 카이야님까지 계시니, 자칫 전하의 변심으 로 인해 제6왕자군 내의 세력판도가 흔들릴 수도 있는 것이죠. 아버님의 불안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엇? 그런! 난 그럴 뜻은……!!" 나는 변명을 하러 일어났다가 할말이 없어 입만 두세번 뻥끗거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주위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 닌가. "게다가 이제는 연·아남까지 성에 있게 되었고, 전하께서 그녀에게 관심 을 보일 수 있다고 하셨으니 더 큰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그건 당장에 그녀에게 반했다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가지지 않습니까! 누님은 어린애! 카이야님은 드래곤! 하지만 연·아남은 유일하게 가능성을 가진 제대로 된 여성입니다. 그녀와 친하게 지내다가 진짜 그녀에게 빠지거나 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소문일 뿐이었던 불화설을 진실로 만드실 작정이십니까?" "……."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던 나는 침묵을 지켰다. 힐레인은 엉거주춤 굳은 자세가 된 나를 보고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설교모드에 들어갔다. "어디까지나 전하의 첫번째 비(妃)는 저의 누님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리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렇게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아군의 가장 큰 이점이 무엇입니까? 체계적이고 긴밀한 유대관계가 아닙니까? 저희 리아 후작가는 전하의 첫째가는 지지 가문이며 그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전하와 누님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이 전쟁이 끝나 정세 가 안정될 때까지도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혹시 전하께서 누님을 진절머리 가 날 정도로 싫어하신다 할지라도, 손안에 들어온 금궤 다루듯 소중히 대 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말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앞으론 히노를 향한 내 행동 하나에 신경을 쏟겠다 고. 하지만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원래부터 히노는 한낱 금궤 같 은 것엔 결코 비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어." "…흠… 제가 상인이었던 지라… 비유가 좀 그랬던 것에 사과드리겠습니 다." 힐레인은 그제야 설교모드에서 벗어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뭔가 잔뜩 달아올랐던 분위기까지 같이 가라앉는 듯 하여 나는 작게 한숨을 쉬 었다. "좋습니다. 어쨌든 제 말뜻은 알아들으신 듯 하군요. 그럼 오늘밤 당장 그 것을 실행에 옮기십시오." "엉? 오늘밤? 뭘?" 난 눈을 댕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힐레인이 다시 인상을 팍 쓰고 소리쳤다. "누님을 안으라 하지 않았습니까!" "커헉!" 대충 일이 끝났다고 안심하고 있던 나는 또 한번 예기치 않은 일격에 사 레가 걸려 기침을 했다. "누님과 동침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전하와 누님의 관계가 건재하다는 것 을 증명하라 이 말입니다." "…으……." 나는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고 진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힐레인 저 녀석! 아주 날 쪽 까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고 온 거 아냐!? "조…좋아……. 하…하지만 꼭 도…동침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결혼도 하기 전에 속도위반이라고……." "무슨 소립니까? 대체." "그…그러니까 그런 일은 원래 결혼 후에나 해야하는 거잖아." "하하하. 재미있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결혼해야만 행위를 할 수 있다 라……. 그럼, 왕족이나 되시는 분께서 평생에 혈기를 누르고 정실과 한 두 명의 첩만 안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다…당연한 거 아냐……? 바람피우는 건 배우자인 상대에게 실례잖 아……." 난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힐레인의 너무도 당당한 태도에 쪼그라 붙어 속삭이듯 작게 말했다. 그러자 힐레인이 갑자기 딱 굳어 침묵하더니 딱딱한 움직임으로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무서울 정도로 순진한 분이 이곳에 계십니다. 그야말로 살아있는 고대 의 산물이군요." 친구들이 멍하니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나는 더더욱 얼굴을 뜨거워져 옴을 느끼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으아, 미치겠다. 이 문란한 성의식을 보라∼∼!! 아니, 진짜 내가 너무 순 진한 건가!? 난 정말 부끄러움에 몸둘 바를 몰라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썰렁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가고 있을 무렵, 갑자기 에르가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힐레인도 있는데 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 쳤다. "너희들! 잘도 저놈에게 속아 넘어 가는구나! 저놈, 저 순진한 척 하는 거 하곤!! 으윽, 가증스러!!" "혀…형……!!" 그렇잖아도 패닉에 빠진 내게 에르가형의 발언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대체 내가 뭘 어쨌길래!! 형이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저 런 말까지 하는 거냐고? "…음, 그러고 보면 그럴지도… 그렇게 많은 여자애들을 꼬시던 녀석이 사실은 이런 순진한 놈이라고 생각하긴 좀……." "맞아. 그런 생각을 하는 녀석이 대낮에 아무 여자나 안아대고 했다는 것 도 우습지?" "하지만 순진한 척 해서 남는 게 뭐지?" 세미르의 발언을 끝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또 한번 내게로 쏠렸다. 나는 더 이상의 발악을 포기하고 인생무상을 깨달은 허무한 시선을 창 밖 푸르 른 하늘로 던졌다. ====================================================== 푸헐헐~ 몇 금(禁)이 적당할까요? 현대의 실태-_-를 보자면 전연령판을 해도 손색이 없겠지만, 일단 보는 눈이란 게 있으니 -_-+ 언어순화에 도움을 주실 분을 찾습니다~ (농담) 잠시 잡담. 귀족들(내지는 부유한 평민층)은 아내가 있어도 하인이나 창녀 같은 여자 를 찍접대곤 한답니다. 물론 사랑해서가 아니고, 혈기를 누르지 못해 그냥 한번 하-_-는 거죠.;; 그런 쪽에 깨끗한 남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 은 당연히도 너저분~ 하답니다. 그런데 카류는 원래 일부일처제의 땅에서 살던 놈이잖아요? 따라서 카류는 본부인이 아닌 첩이라는 존재도 대단하게 여기며, 하렘이라도 만든 것처럼 생각을 하지요. 하지만 이쪽 사람들에게 하렘은 그런 범주가 아니랍니다. 본부인과, 정식으 로 집안에 들여온 몇 명의 첩은 '기본!' 인 거죠. 여긴 일부다처제니까. 카류가 원래 순진빵~인 놈이기도 하지만, 그런 인식의 차이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쓰고 보니 왠지 분하네요. 싹 지워 버렷? =_=;;;;;;;;;;;;;;;;;;;;;;; 쩝... 요새 영 감상이 적어용... 잠수가 너무 깊었나? ㅜ,.ㅜ 리플줘용.....................................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5 비(妃) (3) 또각- 또각-. "카류리드 전하께옵서는 굉장히 친절한 분이시나이다. 그렇지 않사옵니 까?" "그렇지요." 또각- 또각-. "오늘이 날이 참 쾌청하지 않나이까?" "그렇군요." 또각- 또각-. 침묵이 이어졌다.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는 히노양의 뒷모습을 보며 나 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난 아마 그녀에게 미움을 받아 버린 모양이다. 그녀와 껄끄러워지면 이곳에서의 생활에 차질에 클 텐데. 하지만 그건 피 해갈 수 없는 일일까. 내 목표는 카류리드 전하의 환심을 사는 것이니까. 그녀와는 이를테면 적과 같은 관계인 것이지. 고요한 복도를 걸어 우리는 드디어 히노양의 문 앞에 도착했다. 난 내심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기뻐하며 그녀를 향해 인사를 올렸 다. "그럼 먼저 들어가시옵소서. 후에 또 뵙겠나이다." "왜지요?" "예?" "연·아남은 왜 그런 말투를 쓰시는지요? 귀여워 보이기 때문인가요?" 히노양은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화사한 웃음 뒤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것은 단지 소녀가 아르윈어가 서툴기 때문에 그런 것이나이다." "그런 것치고는 단어와 문법이 너무나 정확하군요?" "…이번에 소녀가 카류리드 전하의 비로 채택되기 전까지, 저희 해룡족의 높으신 분들께옵서 여자에게는 정식으로 외국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셨나이다. 그래서 소녀는 다른 오라버니들처럼 정식으로 아르윈어를 배우지 못하였사옵니다. 지금 소녀가 아르윈어를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홀로 어떤 문서를 읽고 독학을 했기 때문이옵니다. 그런데 보시다시피 그 문서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나이다. 소녀가 현재 쓰고 있는 말어미에 대 해서는 기실 버릇이 되어 당장에 고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되오나, 어떻 게든 빠른 시일 내에 고치도록 노력하겠나이다." "장황하게 변명하느라 힘드시겠군요." 히노양은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보기에 그렇게 과격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초반부터 이렇게 나오다니 앞으로의 일상에 차 질이 크겠는걸? "변명이라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럼 나중에 뵙겠나… 습…니다." 난 말을 더듬어 억지로 말끝을 다듬었다. 그리고 치마를 사뿐 들고 다소 곳이 허리를 숙여 아르윈식 인사를 했다. "아니, 그 전에 일단 제 방으로 들어오시겠습니까?" "…예?" "연·아남은 귀가 좋지 않으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계속 이야기를 반복하 게 하면 조금 짜증이 나는 법입니다." "…말씀대로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나이다." "하겠습니다. …겠죠?" 히노양은 대리석 조각 같이 하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그렇게 말하고 는 방문을 열었다. 아름다운 꽃엔 가시가 있는 법이라더니, 딱 이 경우구 나. 히노양의 방안은 과연 카류리드 전하의 왕비후보가 사용하는 방답게 몹시 도 화려했다. 내가 지금 쓰고 있던 방도 화려하긴 매한가지지만, 이쪽이 훨 씬 넓었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품위라는 것이 흘렀다. "무엇을 그리도 둘러보시나요? 꼭 시골에서 올라온 아가씨라도 되듯 그렇 게 두리번거리지 마시고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아, 그러고 보면 시골에 서 올라왔다는 표현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죠?" "……." 해룡족을 욕보이는 말 때문에 순간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난 필사 적으로 그를 참으며 빙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곳은 아르윈이다. 앞으로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로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에 일일이 반응해 서야 이곳에 적응 할 수 없겠지. 내 반응이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지 그녀는 더 이상 내게 말 거는 것을 그 만두었다. 그리고 창가의 의자를 하나 빼내어 내게 권한 다음,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도 일단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신경을 써서 의자에 바르게 앉았다. 역시 이렇게 풍성한 치마를 입고 의자에 앉는 건 너무 불편하다니까. 아 르윈의 여인들은 이렇게 대단한 치마를 입고 어떻게 생활하는 건지 모르겠 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역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렇게 해주시겠나이까. 소녀는 말을 돌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사옵 니다. 무엇이든 단순 명쾌한 것이 최고인 법이 옵지요." "그럼 말씀드리죠." 히노양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 기에 저렇게 숨까지 고르는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있을 때, 히노양이 약 간 떨리고 있는 입술로 나를 향해 매섭게 소리쳤다. "암코양이처럼 카류에게 달려드는 게 아니야! 천한 것이!!" "……." 하-. 너무나 전형적인 한마디라 뭐라 반응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삼류소설 의 한 장면에서나 볼 수 대사가 아닌가. 내가 전과 다름없는 얼굴로 말을 않고 있으려니 히노양이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악 물다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또 한번 카류에게 꼬리를 쳤다간 용서하지 않겠어!" "너무하시옵니다. 제가 언제 전하를 유혹하려했다 그러시나이까?" "……!!" 내가 고개를 조금 돌리고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이번에 그녀는 아주 귓가 까지 새빨개졌다. 아마 확신은 있는데 내가 발뺌을 하니까 어떻게 대응해 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모양이다. 잘은 몰라도 이런 일을 자주 해본 여인 같지는 않았다. 하긴, 리아 후작가라는 어마어마한 가문에 저렇게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 졌으니 누굴 질투하고 시기하는 일은 드물었을 테지. 그럼에도 내가 이만 큼이나 그녀에게 위협을 주었다는데 기뻐해야 할까? "히노양. 너무 성급하신 듯 하나이다. 어울리지 않는 말은 그만두셨으면 하옵니다." "성급? 네가 진정 카류를 유혹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더냐? 하늘 을 속여도 내 눈은 속이지 못해!!" 히노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대로는 그대로 달려들어 내 머리칼이라도 쥐어뜯을 기세였다. 물론 해룡의 땅에서 수·유란과 함께 사 냥을 하던 나이니 저렇게 연약한 소녀 정도야 얼마든지 메쳐버릴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 그런 짓을 저질러 해룡족에 피해를 가게 할 수는 없는 일. "후, 알겠나이다. 잘못을 시인하겠나이다. 소녀 실은 카류리드 전하에게 딴 뜻이 있었사옵고, 그 때문에 히노양의 말씀대로 꼬리를 쳤다는 그 표현 을 부인할 수 없사옵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오니 부디 넓으신 마음으로 용서해 주실 것을 청하나이다." 나는 일단 솔직히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빌었다. 보통 상대가 이런 식 으로 나오면 할말이 없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현 상황을 빠져나가는데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카류리드 전하를 유혹하지 않겠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수룡께서도 나를 용서해 주시겠지? 고개를 숙인 내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던 히노양은 한숨을 작게 쉬며 다 시 자리에 앉았다. 아, 됐다, 처음이긴 하지만 내 연기실력도 꽤 되는 모양이네. "훗, 유혹하지 않겠다라. 그걸 내가 곧이곧대로 믿을 거라 생각했나요?" "……." 내 말에 넘어가 주지 않는 것을 보며 나는 조금 놀랐다. 질투에 심한 말 을 하긴 해도 나름대로 순진한 요조숙녀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연·아남은 자신의 행위를 전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그러하 니 이렇게 잘못을 시인한들 언젠가는 카류리드 전하에게 또 그런 짓을 할 수밖에 없겠죠. 제 버릇은 남 못 준다고들 하니까." 발끈-. 어디선가 내 몸 속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아주 날 창녀 취급하는 그녀를 향한 분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작게 숨을 가다 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히노양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소녀로서도 어쩔 수 없나이다. 마음껏 소녀를 책하시옵소서. 그럼 소녀 먼저 일어나겠사옵니다." 난 '욕 할 테면 해라-' 는 식으로 말해두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렇게 히노양을 등지고 뒤로 돌아섰을 때,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실소가 담겼다. 이렇게 먼 나라까지 와서 세상물정 모르는 공녀의 시시한 질투를 상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우스웠으므로. "거기 서!!" 몇 발자국 걷지도 못했는데 히노양이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소리질렀다. 정말 생긴 것 답지 않게 행동하는 공녀다.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향했고, 그녀도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굉장히 화가 난 듯 예쁜 얼굴을 크게 일 그러뜨리고 있었다. "무례한 것!!" 그녀는 내 앞에 바로 서자마자 손을 높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니 또 한번 내 얼굴에 실소가 떠올랐다. 사악-. 그녀의 작고 하얀 손이 내 뺨을 스치듯 때리며 지나갔다. 여기서 그녀의 손을 피하거나 손목을 잡아 제지하면 더더욱 그녀를 화나게 만들 것이 뻔 하므로, 두 눈을 뜨고 보면서도 얼굴을 그대로 대어준 것인데 역시 폭력과 거리가 먼 소녀였던지 정확히 조준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약간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뺨 을 때린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고 몸을 조금씩 떨고 있었다. 얼굴은 이미 새빨갛게 변해버린 뒤였다. 이런, 맞은쪽은 나인데 누가 보면 저쪽이 당한 줄 알겠네. "화가 풀리셨다면 소녀는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나는 물러나도 좋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 나는 히노양을 보며 약간 인상을 찡그리고 말았다. 그녀의 끈질김이 같은 여자로서 몹시 추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에 자신이 유리한 고지라도 잡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히노양 은 얼굴에 억지로 비웃음을 떠올려 빈정거림을 시작했다. "훗, 연·아남은 해룡족에서도 이 남자 저 남자를 유혹하고 다녔던 모양 이지요? 보아하니 수·유란이라는 분도 연·아남에게 빠져 헤어 나오질 못 하고 있던 모양인데요?" 어쨌거나 그녀의 말을 전부 무시해주자고 생각했던 나는 순간 조금 멈칫 했다. 수까지 욕보이려 하는 그녀에게 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기 때문이 다. 아니, 신경 쓰지 말자. 이제 와서 화내면 지금까지 참아온 것이 아깝잖아. 수에 대한 일 때문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던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발을 한 발자국 옮겼다. 그러자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그녀가 나를 따라 한발자국 나서며 더욱 소리로 소리쳤다. "해룡족의 차기족장 후보쯤 되는 수·유란이 당신과 같은 여자의 치마폭 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으니, 후일 해룡족이 어떻게 될 지는 보지 않 아도 뻔하군요." "…지나치신 게 아니온지요." 두세 걸음을 옮기던 나는 또 한번 걸음을 멈추고 작게 그녀를 향해 경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더욱 기가 산 것인지 또 한번 수를 모욕하고 나 섰다. "무엇이 지나치단 말인가요? 제 말이 틀렸단 말입니까? 수·유란이……." "너무도 치졸하시옵니다." 나는 드디어 마음 속의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내 인내심의 한 도를 넘고 있었으므로.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언제나 나의 곁에서 소리 없이 도움을 주곤 했던 소중한 친구. 그가 속 좁은 공녀의 질투 따위에 휩 쓸려 욕을 보아만 한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이토록 중요한 시기에 간신히 동맹을 맺은 해룡족을 폄하하는 것이 대 리아 후작가의 외동딸께옵서 하실만한 짓이옵니까? 카류리드 전하의 비로 써 그분을 도울 생각은 아니하시고, 그 일에 오히려 재를 뿌려서야 되겠느 냔 이 말이나이다!" "네가 먼저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어쩌면 그렇게 생각이 짧고 이기적이시나이까? 공녀께옵서는 단순한 평 민의 아녀자가 아니시옵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첫째가는 조력자인 리아 후 작가의 외동딸이란 말이옵니다. 그러한데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한낱 개인 의 애정문제 따위로 해룡족과의 동맹의 끈이라 할 수 있는 저를 이토록 핍 박하시어도 된다고 생각하시나이까?" "하, 그러면 네가 카류를 유혹한 것은 잘한 일이라 이것이더냐?" 히노양은 얼굴을 빨갛게 붉힌 상태에서도 눈을 날카롭게 흘기며 소리쳤 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도 그 눈빛을 맞받아 주며 소리쳤다. "소녀는 해룡족의 대족장이신 아버님의 맏딸로 태어나 그동안 주변의 여 러 사람들에게 떠받들어지며 많은 혜택을 누렸사옵니다. 덕분에 세상의 척 박함을 모르고 살아온 소녀였지만, 그럼에도 그러한 혜택의 이면에 반드시 어떠한 의무가 따라붙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나이다. 소녀의 의무는 외교의 한 수단으로 카류리드 전하의 아내가 됨으로서, 해룡족을 드넓은 대지의 위로 끌어올리는 것이었지요! 좋사옵니다. 소녀, 카류리드 전하를 유혹할 마음이 있었나이다. 하지만 그것은 후일 저희 해룡족에게 좀 더 큰 도움이 되고자 소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을 방안을 택한 것이지, 공녀와 같이 개인의 감정에 빠져 치졸한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단 말이옵 니다!" "그건……." "소녀가 만약 공녀와 같았다면 영원히 해룡의 땅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아버님과 오라버님께 눈물로 사정을 했을 것이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소녀가 마음을 주었던 그분께 달려가 어디론가 도주하자고 떼를 썼을 것이옵니다! 그러나 소녀는 그러지 않았나이다. 남자들이 자신의 목숨 을 걸고 활과 검으로 그 의무를 다하듯 소녀 역시 정략결혼을 통하여 스스 로의 의무를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나이다!" 히노양은 쉴새없이 쏟아지는 내 말에 크게 분노한 것인지 작게 떨려오는 아랫입술을 악 물었다. 그러나 나는 잔뜩 열이 오른 가슴을 주체 못하고 끝까지 그녀를 몰아붙였다. "작금은 뜨거운 혼란의 시기옵니다. 이미 수많은 자들이 자신의 피와 살 을 맞바꾸어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나이다. 그러한데 지금 공녀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나이까!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으시나이까? 그런 모습을 하고서도 카류리드 전하의 사랑을 받기를 바라 고 계신단 말씀이옵니까? 훗, 경멸받지나 않으면 차라리 다행이겠나이다."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옆으로 홱 돌렸다. 더러운 오물이라도 보았다는 식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고 나자 응어리진 가슴이 풀리는 듯 기분이 가 뿐해졌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아주 잠시였을 뿐, 금새 후일 있을 봉변에 대해 생각이 미쳐 걱정이 몰려왔다. 아아, 바보 같아. 나도 수행이 부족해. 이를 어쩐담. 이제 와서 사과해봤자 돌이킬 수 없음은 뻔했지만 그래도 역시 신경이 쓰 이는 것이라 나는 어쩔 수 없이 슬그머니 고개를 되돌려 히노양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만 같은 표정이 었다. 아직 오기를 담고 나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었지만, 고양이의 그것 을 연상시키는 금빛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문득 그녀가 조금 가엾어 보였다. 역시 그녀는 조금 철없는 아가씨일 뿐인 모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남을 모욕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실은 마음씨 고운 아가씨였을 것 이다. 그래. 내게 심한 말을 할 때도 손을 떨면서 갓 익은 사과같이 얼굴을 빨 갛게 붉히곤 하지 않았던가. 겉으로 보이는 행동과는 달리 마음 속 깊은 곳으론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라 그랬던 것이리라. 그만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쭉 빠져버렸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 진 심으로 화를 낸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문을 향해 성큼성큼 빠른 걸음을 옮겼다. 내가 나가도 좋다는 허락도 받지 않고 밖으로 통하는 문 바로 앞까지 걸 어갔음에도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조금 전 그 자리에 선 채로 아기 고양이처럼 잔뜩 움츠러들어 떨고 있으리라.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내가 하 고픈 말을 이었다. "비록 방해물이 많은 길이긴 하지만, 그래도 히노양께선 사랑하고 있는 사람과 미래를 약조하지 않으셨나이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나는 그 즉시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그녀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달칵-. 『후우, 내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소릴 한 거지? 그냥 참았으면 좋았을 걸.』 밖으로 나온 나는 문에 기대어 작게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여 공녀의 문에서 몸을 바로 일으키고, 내 방과 반대 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금 기분이 우울해서 지금은 방안으로 들어 가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걸음을 옮긴 것은 동쪽 건물의 복도였다. 시녀에게 들어 이곳이 한 적한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각- 또각-. 딱딱한 바닥에 구두의 굽이 부딪혀 작은 울림을 만들어냈다. 생활의 모든 부분이 흙과 친숙한 해룡족의 땅에서는 듣기 힘든 소리였다. 조용한 가운 데 그 발자국 소리가 시원한 느낌으로 다가와 나는 어느새 다른 생각을 잊 고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곳에서 넋을 빼고 걷다니 연·아남답지 않군요." "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 려 했지만, 그러지 않아도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 세에서 빙긋 미소를 띄웠다. "힐레인경. 어떻게 이곳까지 오셨나이까?" "후후, 그냥 기분이 조금 가라앉아서 사람이 없는 곳에서 농땡이를 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곳에서 연·아남의 발자국 소리와 마주하게 되더군요." "왠지 기분이 이상하나이다. 힐레인경께 존대어를 듣는다는 것이 말이옵 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비가 되실 분께 어찌 말을 낮출 수가 있겠습니까." "이곳은 단 둘 뿐인데 예전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떠하온지요. 사실 소녀, 힐레인경이라는 말에 어색함을 느끼고 있었사옵니다. 현·리아라 불러도 괜찮으시겠나이까?" "훗, 좋겠지. 어차피 주위에 아무도 없으니까." 그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리고 나를 힐끗 올려다보며 미소지었다. "내게서 듣는 존대어가 어색하다는 사람은 그대가 처음이오. 좀 걷겠소?"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좋을 대로 내뱉은 그는 먼저 복도를 걸어갔다. 나 는 그런 그의 모습에 별다른 거부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길게 뻗은 복도의 왼쪽에 빼곡이 들어선 우아한 창을 통해 따스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덕분에 인적이 드문 쌀쌀한 복도를 걸으면서도 추위는 거의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큰 추위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말없이 내 앞을 앞서 가고 있는 그의 탓도 조금 있으리라. 난 내 가슴 언저리에 닿을까말까한 그를 기분 좋게 바라보다가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입을 열었다. "저……." "저기……." 무언가 하고픈 말이 있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나보다. 나와 동시에 입 을 연 그는 커다란 푸른색 눈동자를 더욱 커다랗게 키우며 의아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런 그의 얼굴 앞에 손을 내밀고 당당하게 말했 다. "그럼 소녀가 먼저 말하겠나이다." "이럴 땐 상대에게 먼저 말하라고 하는 게 보통이 아니던가?" "꼭 그걸 따라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나이까. 하지만 꼭 그러시다면 소녀 는 보통이 아니라고 해두겠나이다." "하하. 그래,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이오?" 그가 벽에 몸을 기대고 내게 묻는 것을 보며 나는 그의 옆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풍성한 드레스의 아랫단을 손으로 감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마 치마폭이 심하게 구겨질 터이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실은, 그러니까… 소녀가 조금 전 현·리아의 누님과 싸움을 해버렸나이 다." "아아? 누님과?" 그는 정말 의외의 말을 들었다는 듯 과장된 움직임을 보였다. 내가 어깨 를 으쓱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원래 누님은 굉장히 조용하고 소극적인 분이시오. 그런데 요 최근동안 카류리드 전하와 사이가 조금 틀어지고 나서는 완전히 변해버리셨더군. 오 늘 역시 전하께서 그대와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심상치 않은 분 위기로 바라보더라니, 싸움까지 거셨단 말이오?" "제가 싸움을 걸었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옵니까?"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는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 다. "이렇게 멋진 남자를 버려두고 정략결혼을 위해 해룡의 땅을 떠나 이곳까 지 건너온 그대가 누님과 싸움을 벌여 일을 틀어지게 만들지는 않았을 터 이지." "후후, 자신감이 대단하시옵니다." "내가 그대의 진심을 느끼기 때문이오." 그는 고개를 숙여 땅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하고 앳된 얼굴로.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길고 아픈 세월을 바라보는 푸른색의 눈동자로. 나는 그의 눈동자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분위기가 너무 진지해지는 것 같 아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팔을 쭉 내뻗으며 조금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조 금 전에 하려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아, 소녀는 말이옵니다. 카류리드 전하의 총애를 받아서 해룡족에 도움 이 되는 일을 하고자 하였나이다. 헌데 히노양과 싸우는 도중 그만 그 이 야기를 전부 말해버렸나이다. 하아, 뭔가… 소녀 자신이 한심해서……. 후 에 카류리드 전하의 총애를 받는 일에 큰 장애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옵니 다." "나 역시 이 군의 군사이오만 내게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좋은 것이오?" "어차피 벌어진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소녀는 단지 하소연이 하고 싶었을 뿐이나이다. 그런데 이 타국의 땅에서 아는 분은 현·리아뿐인지라 그랬던 것이나이다." "수·유란이 있지 않소? 둘도 없는 친구 사이 아니었소?" "그는 소녀를 좋아하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카류리드 전하의 총애를 받기 가 어려워 졌니 어쩌니…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의 마음이 아프지 않겠사 옵니까?" "수·유란의 마음을 알고 있었소?" 현·리아는 의외라는 듯 나를 돌아보고 물었다. 나 역시 거의 표정의 변 화가 없는 수의 마음을 그가 알고 있었다는데 대해 조금 놀랐지만, 곧 싱 긋 웃음을 띄웠다. "소녀, 그렇게 둔하지는 않사옵니다." "그러면서 잘도 수·유란이 보는 앞에서 내게 키스 따윌 했구려." "하지만 첫사랑이었나이다. 평생 단 한번 있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 겠사옵니까? 소녀는 곧 카류리드 전하의 아내가 될 터이니까요. 그리고 수 는… 원래 다정한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저를 용서해 줄 것이라 생각했사옵 니다." 그래, 그럼에도 나를 위해 일부러 이곳까지 따라와 주었으니까. 수는 원래 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나는 수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었는데, 그는 언제나 나를 위해 주는 일만을 생각한다. 내가 수에 대한 생각을 하며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현·리아가 갑자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찌하여 수·유란만이 그대에게 걱정 받을 가치가 있는지 묻고 싶군. 알고 있지 않소? 나 역시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설마 몰랐다고 하 지는 않을 테지?" 입을 조금 내밀고 잔뜩 불만을 터뜨리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사실 그의 외견과 어울리는 표정이었지만, 내게 비춰지는 그의 모습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었으므로. "어린애 같이 투정을 부리시는 것이옵니까?" "…후, 내게 '어린애 같이' 라는 수식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그대가 처음이 오." "아아, 기쁘옵니다. 소녀는 언제나 현·리아에게 특별하게 기억이 될 것 같나이다." 내가 기분 좋게 말하자 그는 입을 다물고 내게로 향하고 있던 고개를 퉁 명스럽게 창 쪽으로 돌렸다. 그 모습을 보자니 어쩌면 진짜로 그가 삐쳐버 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남자들은 어린애 같은 구석도 있 다고 하니까. "현·리아께는……." 내가 진지하게 입을 열자 그는 금세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저도 모르게 작은 웃음이 배여나왔다. "현·리아께는 소녀의 마음을 드리고 있지 않나이까? 하지만 수에게는 아 무것도 주질 못하옵니다. 소녀는 그를 가족 이상으로 좋아하지만, 사랑하지 는 않기 때문이나이다." "그래서? 그래서 내게는 카류리드 전하와의 연애 상담을 해도 좋다는 것 이오?!" "……." 나는 상당히 거친 그의 말에 조금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라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해했기에 내가 카류리드 전하 께 가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오 늘따라 그는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이상하게도 조금 전까지는 느끼지 못했 던 추위가 엄습해와서 나는 몸을 조금 움츠렸다. 그때 갑자기 현·리아가 오른손으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을 거칠게 긁기 시작했다. "에잇, 좋소. 솔직히 말하겠소! 사실 조금 전까지 난 카류리드 전하의 방 에 있었소. 그곳에서 전하께 누님과의 관계를 맺으라고 부추기고 왔지." "예?" "그대가 티타임동안 카류리드 전하를 유혹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질투가 나서 견디질 못하겠더군. 그래서 카류리드에게 가서 그럴듯한 핑계를 짜내 어 누님을 안으라고 부채질을 했소. 그대의 일에 훼방을 놓으려고 말이오. 사실 지금도 그것 때문에 심술을 부리고 있는 거요." 그는 고개를 휘휘 젓다가 다리에 힘을 풀며 쭈르륵 미끄러져 나와 같이 땅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어린 아이처럼 양손으로 다리를 붙잡고 그 속에 머리를 묻었다. "그대가 동족을 위해 홀로 이 먼 땅으로 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데 도, 그럼에도 참을 수가 없었소. 질투의 화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이 다……." 그는 다리 속에 얼굴을 묻은 채로 작게 말했다. 지금까지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 나는 조금 울컥했다. 타악-! 내가 갑자기 등을 세게 치자 그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난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방금 그건 벌이나이다. 그럼 지금 맹세하시옵소서, 다시는 소녀의 일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말이나이다." 내 손을 가만히 보던 그는 이내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의식적으로 입을 조금 내밀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글쎄……. 사실 말이오. 난 아르윈의 미래를 생각해야 할 군사인데, 그 대 마음대로 해룡족이 날뛰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일 아니오?" "질투의 화신이 될 정도의 열정이 있으신데, 젊은 혈기로 실수한 셈 치시 고 한번만 소녀의 사정을 봐주시옵소서." "하하, 솔직히 질투에 눈이 멀기 전에는 그러려 했소이다. 이걸 알게 되면 순해빠진 카류리드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서 펄펄 뛸 거요." "…자신의 주군을 그렇게 부르셔도 괜찮으신 것이옵니까? 왕족 모독죄로 큰 처벌을 받게되실 수도 있사온데……." "상관없소. 너무 착하고 순해빠진 놈이라 이 정도엔 눈 하나 깜짝 안한다 오. 실제로도 그를 삿대질하고 욕을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지. 하지만 괜히 말만 높인다고 주군에 대한 존경심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오. 사실 카류리드는 지나칠 정도로 착한 그 점이 매력으로 작용하는 듯 하더 이다. 이곳에 모인 자들 중 대부분은 그의 선함에 감복한 자들이지. 겉으로 는 존경심이 없어 보인다 해도 모두가 한결같이 그에게 충성하고 있소." 난 현·리아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카류리드 전하가 사 람이 좋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소문도 있고, 사람을 겉보기만으 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일단 판단을 보류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렇지만 그가 그렇다면 진실인 모양이지. "그런 분이니……." 카류리드 전하에 대한 평가에 대한 확정을 내리고 있는데, 내 모습을 보 던 현·리아가 몸을 조금 옹크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곧 시선 을 조금 옆으로 피하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그대는 그리 불행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될 거요." 내뱉듯 말을 끝낸 그는 시선을 바로 창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따라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변의 공기는 몹시 쌀쌀했지만, 창에서 작게 스며드는 빛이 내 몸을 위 로해 주었기에 나는 그리 괴롭지 않았다. 조용한 복도의 한 켠에서 나는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 흐미, 팔 아파. ㅜ.ㅜ 10장 넘어요~ 하지만 귀차니즘의 압박으로 한꺼번에 올림. ㅜ.ㅜ;; 연참은 계속 됨다. 이르나크의 장 Part 55 비(妃) (4) 아, 정말… 힐레인 녀석. 쓸데없는 소릴 해서는. 아니, 쓸데없는 소리만은 아니지만. 친구들이 모두 밖으로 나간 후, 나는 탁자에 몸을 쭈욱 뻗어 엎드리고 심 각한 고민에 들어갔다. 정말… 해야 한단 말인가? 히노와? 그 작은 아이와? 언젠가 해야한다는 건 알았지만, 너무… 갑작스럽잖아. "카이." 나는 엎드린 자세에서 곁에 앉아있는 카이를 불렀다. 그녀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무슨 일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난 그녀를 보고 조금 망설이다가 조금 전부터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 을 물었다. "있지. 너 혹시… 히노랑 내가 뭐…뭔 짓을 할 때도 곁에 있겠다며 밖으 로 나가지 않을 거야?" "너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네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이 최 선이다." "그…그래? 그렇겠지." 이상하게 얼굴이 마구 뜨거워져 와서 나는 고개를 탁자에 묻은 채로 웅얼 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응?" "네게 도움이 되진 않을지언정, 그녀와의 동침이 꼭 필요한 일임에도 그 런 식으로 방해를 해서는 안되겠지. 나는 네 옆방에 가 대기하고 있겠다. 그동안 이 방에 프로텍션 실드를 쳐놓도록 하지." "프로텍션 실드?" "프로텍션 실드는 마법적 방어는 물론이거니와 물리적 방어까지 가능한 3 서클의 보호마법이다. 일정시간동안 어떤 물체도 실드의 안쪽으로 침입할 수 없으며 3서클 화이어 스피어 이상의 충격이 가해져야만 부서진다." "옷, 물리적 방어가 가능한 마법도 있어? 그것도 3서클? 과연 십만 년을 산 드래곤!! 그거 쓰면 화살 따윈 무섭지도 않겠네! 프로텍션 실드라는 거 좀 가르쳐 주면 안돼?" "거절하겠다." "…쪼잔하게……." 난 입을 쭉 빼고 투덜거렸다. 카이가 저런 마법 몇 개만 가르쳐 주면 전 세는 그대로 뒤집어 질 텐데. 이렇게 밀고 당기는 일도 없이 말이다. 한동 안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확 열이 뻗쳐와서 카이를 확 돌아보고 소리쳤다. "차라리 그런 게 있다고 가르쳐주지를 마! 그게 있으면 내 친구들이 크게 상처를 입을 일도 없을 거란 생각에 울화통이 치민단 말이야." "그러지. 내 경솔함을 용서해다오."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나는 그제야 조금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흔들었다. 히노 생각에 골머리를 앓다가 괜히 그 화를 카이에게 푼 꼴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쳐도… 이 정도는 언제나 있는 일인데 왜 하필 오늘따라 이렇게나 울컥 한 거지? 똑-똑-. 잠시 카이와의 대화가 끊기던 그때 누군가가 내 방을 노크했다. 누군가 싶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던 찰나에 카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나는 먼저 가있겠다." "엉?" 갑자기 카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문을 벌컥 열어 젖 혔다. "어? 히노?" "앗, 전하……. 카이야님?" 때마침 내 방에 들어오려 하던 중이었던지 바로 문 앞에 선 히노가 나와 카이를 돌아보며 눈을 깜빡였다. 카이는 그런 그녀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다음 밖으로 나가버렸다. 히노는 그런 카이를 굉장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도 닫지 않은 채 빠른 걸음으로 내게로 걸어왔다. "저…저기, 카이야님께서 왜 다른 곳으로 가버리시는 것이죠?" "에? 아… 그…그게……." 난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어 말을 더듬다가 일단은 어색함을 모면하 기 위해 저리에서 일어나 활짝 열려진 문을 닫았다. 그리고 거의 무의식적 으로 히노가 서있는 탁자 쪽을 피하여 걸음을 옮겨 눈앞에 위치한 침대 가 에 걸터앉았다. "하아……." "저어… 전하?" 내가 크게 한숨을 쉬고 있자, 히노가 굉장히 불안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아아! 그래! 카이가 이렇게 내 곁을 떠나는 걸 보는 건 처음이겠지! 그녀 가 완전히 내 곁을 떠나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녀는 그저 옆방에 있을 뿐이니까." "예……." 내 대답에 그제야 히노는 조금 안심을 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 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목이 바짝바짝 타 올뿐이었다. "…이…일단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겠어요?" "예, 전…하……." 내가 간신히 속마음을 감추고 자리를 권하자 히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으로 와서 살포시 앉았다. 하지만 빙긋이 웃으며 히노를 바라보던 나는 곧 내 입을 몽둥이로 마구 패주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다. 이놈이 미쳤지! 난 지금 침대에 앉아있잖아!! 멀쩡한 의자 놔두고 여기 와 서 앉으라고 한 이유가 뭐야!! 이 망할 놈의 입아! "……." "……." 굉장히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사실, 지금까지 히노와 싸우기는 할 망정 이렇게 썰렁한 분위기를 경험해 본적은 없었다. 내가 항상 무슨 이야기를 꺼내어 분위기를 주도했으므로. 그러나 지금은 힐레인이 한 말 때문에 완 전히 머리가 마비되어 버린 것인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가 없었다. 으아, 대체 무슨 말을 하면 좋지? 그…그래! 이럴 때는 날씨 이야기를 하 는 거야!! 날씨 이야기야 말로 대화의 물꼬를 트는데 가장 널리 쓰이고 있 는 화제이지 않은가!! "저기……." "전하……." 내가 고심하여 겨우 입을 열었건만 때마침 히노도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중이었나 본지 나를 불렀다. 동시에 말이 겹치자 히노는 조금 당황했지만 금방 자연스런 동작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전하께서 먼저 말씀하세요." "…아? 예……. 오늘 날씨가 참 좋죠?" "……." "……." 히노는 조금씩 어둑어둑해져 가는 창 밖을 한번 돌아보았다가 미간을 약 간 좁히며 고개를 기울였다. 크아~~~~~~~!! 정말 요놈의 입이 왜 이런다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입에 처절한 응징을 가하고 싶었지만, 일 단은 어색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히노가 이상하게도 아 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가락을 불안스럽게 움직였다. "…저기……." 내가 그 행동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히노가 작게 입을 열었다. 하 지만 그 한마디를 내뱉자마자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에 물기가 흥건히 고였 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눈물방울을 떨어뜨릴 듯한 얼굴을 아래로 떨구고는 작게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을 꺼냈다. "전하께서는… 저와… 함께 있는 것이 싫은가요?" "에……?" "제가… 너무 제 멋대로니까… 진절머리가 난 건가요? 경멸하는 거예 요……?" "예? 히노선…양……."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그제야 히노의 속마음을 깨달았다. 아 마 자신에게 다가가지 않고 어색한 분위기를 자아내다가 평소답지 않게 별 이상한 말까지 지껄이니까 내가 자신을 피하려고 그런다고 생각했나보다! 나는 뒤늦게 그녀의 기분을 살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불안하게 떨리는 입가로 손을 가져다 대면서 말을 이었다. "전에… 리아 후작가의 히노로서 대해달라고 말했었지요. 전, 저는 전하의 마음을 얻어내고 싶었지만 전하는 그럴 생각이 없었고… 그리고… 그게 화 가 나서 저는 전하가 힘든 시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투정을 부리지 않고서 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히노 양……." 한편에서는 그녀가 왜 갑자기 이렇게 나오는 것인지 의아함을 느꼈지만 나는 일단 작게 떨고 있는 그녀를 어색한 움직임으로 다독였다. 하지만 그 녀는 손톱을 세워 입가에 상처를 내기 시작했고 나는 당혹스러워 그녀의 손을 막았다. "그만해요, 왜……." "사실, 실은 저 연·아남을 불러 모욕을 주기까지 했어요. 소중한 사람인 데, 전하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임에도 그런데도 그녀를 타박했어요. 추한 질투에 사로잡혀 전하를 괴롭힌 것으로 부족해 전하의 일에 방해까지 했다 구요." "연·아남에게 모욕을?" 순간 나는 딱 굳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남을 타박 하고 모욕을 주는 히노란 상상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나의 잔뜩 놀란 표정을 보자마자 히노의 얼 굴이 금방 파랗게 질렸다. 내가 연·아남에 대한 일로 더욱 자신을 경멸하 게 된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결국에는 그녀의 눈동자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륵 흘러내렸다. "생각 한적 없어요. 저를 사랑해주지 않는 전하에 대한 생각은 많이 했지 만, 저를 미워하는 전하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래서 그랬던 거예요. 생각 없이. 멍청하게!" "……." "더 이상 제게 마음을 주시지 않아도 좋아요. 하지만… 하지만 전하께 미 움을 받는다면 저는……!" 난 히노를 꽉 안아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더 이상 그녀가 말을 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될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말에 화가 나서 듣고 싶지가 않았다. 아직 작고 순수한 아이였는데, 그랬던 이 아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구차해 져야만 했던 걸까. 그를 생각하자니 히노를 이렇게 만든 놈에게, 나 자신에 게 너무 화가 났다. 내가 이 작은 아이를 사랑한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이 작고 순수한 아이 를 이렇게 만들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지금 이 생각 역시 그녀에겐 너 무도 비참한 동정이겠지. 나는 더욱 그녀를 꼭 안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해주기 위해 고 개를 조금 숙였다. 하지만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 무 안타까워서 조금 더 고개를 내려 그녀의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었다. 내 키스를 받은 히노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들었다. 나는 조용히 웃 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히노양의 생각은 얄미웠지만 틀리지 않았어요. 저는 절대 히노 양을 미 워할 수 없거든요. 사실, 연·아남보다 저는 히노양이 훨씬 더 좋은 걸요. 그녀를 괴롭힌 일 정도로 제가 당신을 경멸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정말인가요? 훌쩍." 히노는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가 펑펑 쏟아낸 눈물 덕분에 콧물이 흐 를 듯 했는지 큰소리로 훌쩍이는 소리를 냈다. "에…음… 훌쩍." 히노는 약간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코 주위를 문지르며 다시 훌쩍거렸다. 말할 것도 없이 얼굴은 이미 새빨개진 뒤였다. "귀여워-." 나는 피식 웃으며 오랜만에 히노를 향해 그 말을 내뱉었다. 얼굴이 엉망 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딜티가 그러더라구요. 미래를 믿는다고, 때가 오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 "……." "너무 그렇게 울지 말아요. 사실 제가 당장 히노양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히노양을 아주 많이 좋아하잖아요. 우리들도 두 사람이서 오래오래 함께 있다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 분명 남들이 질투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해질 수 있을 거예요." 히노의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은 어느새 조금씩 말라가고 있었다. 나는 눈 을 깜빡깜빡하는 그녀를 보고 베실 웃었다. "키스해줄까요? 이번에는 제대로." "에?" "어떻게든 될 그 날을 위한 기원으로." 그리고 힐레인과 친구들에게 최소한의 변명거리라도 말들어야 하고 말이 지. 조금 얼굴이 화끈하는 것도 같았지만, 분위기가 많이 밝아져서 지금이라 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곧 조금 당황해하고 있는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조금 열려진 그녀의 도톰한 입술에 시선을 집중시키고 전에 없는 굳은 결심(?) 으로 계속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내 얼굴이 바로 코앞에까지 닿자 히노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역시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에 눈을 꼭 감았다. 딱-. "읍!" "…아…….' 하지만 1초도 지나지 않아 나와 히노는 동시에 작은 신음을 지르며 얼굴 을 떼어냈다. 키스를 하려던 순간 윗니가 정면으로 맞부딪혔던 것이다. 게 다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확실히 들려오지 않겠는가? 사실 이가 부딪힌 것 이 그리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당황스럽고 쪽팔렸기 때문에 신음소 리까지 낸 것이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는 홀로 피눈물을 뽑아 냈다. 오늘따라 나 혼자 쪽이란 쪽은 다 파는구나!! 19년, 아니, 전생에 살았던 세월까지 합해서 그 오랜 세월을 살고서도 키스 하나 제대로 못한단 말이 냐!! 사실 경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만서도… 어쨌든!! 이래서야 친구들 과 힐레인에게 비웃음을 당해도 할말이 없지 않겠냐고!! "쿡." 내가 한창 못난 자신을 책하고 있는데, 갑자기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노가 우스워 폭소를 터뜨리고 싶음에도, 떨리는 아랫입술을 윗니로 작게 물고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잖아도 충격 비슷한 것을 먹은 내게 그녀의 웃음은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하얀 재가 되어 있을 즈음, 겨우 내 모습을 눈치챈 그녀가 내게로 다가왔다. "미…미안해요." 사과해도 때는 이미 늦었음이야~~!! 마음 같아서는 눈물을 흩뿌리며 밖으로 튀어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러나 나는 서글프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히노가 조금 당황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예요. 전하께서 키스 하나 제대로 못한다고 비웃은 게 아니 고……." "큭… 아니, 됐어요. 히노 양… 위로는 그것으로 됐어요……." 나는 악의 없는 히노의 대사의 적지 않은 타격을 받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히노는 더욱 당황하여 아주 내게로 바짝 다가와 빠르게 말했다. "그게 아녜요! 저 사실, 전하께선 원래 인기도 많았고, 여자애들 다루는데 도 능숙하시니까, 그러니까 키스도 굉장히 능숙하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 그게 진실이 아니란 걸 알았어요. 사실 전하는… 그러니까……." 숫총각인걸 알아서 좋아죽겠다 이거겠지. 나는 기뻐해야 할 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심 그녀의 말 을 수긍했다. 히노는 곧 기쁨으로 발그스레해진 뺨과 눈물로 빨갛게 익은 눈동자를 한 채로 내게 인사를 했다. 힐레인의 말대로 중요한 건수(?)를 해치우지는 못 했지만 어쨌든 그녀와 확실히 화해 비슷한 것을 한 것 같았기에 그대로 그 녀를 방문까지 마중했다.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전하." "잠깐." "예?" 금빛 눈동자를 동그랗게 만든 히노를 보며 나는 귀여운 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히노 선배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요?" 내 말을 들은 히노의 얼굴에 곧 그녀만의 화사한 웃음이 떠올랐다. "저도 다시 카류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물론이예요. 선배." 어떻게든 될 그 날을 기원하며 계속 미소할 수 있도록. 나는 그녀를 향해 오랜만에 진심 어린 미소를 띄웠다. ========================================================== 많은 것을 기대하셨던 분들께 사죄 드립니다. 제가 원래 낯 을 가려서 공개적으로 올리는 글엔 이상한 장면을 넣기가 꺼 려집니다. 노골적인 장면을 좀 썼지만 결국엔 수정해버렸지요. 하지만 반드시 히노와 카류의 씬! 을 봐야겠다는 분들은 개인 적으로 메일을 보내주십시오. 무수정 통신 연재본을 보내드리 겠......(뻑!) 어쨌든 졸라 마음에 들지 않는 파트군요. 저는 저런 삽질걸 은 딱 질색입니다.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 더 싫네요.== 제가 왜 저런 여자애를 만들어냈죠? 이거야 영 감정이입(??)이 안 되니....== 이거 쓰느라 2주 넘게 시간을 끌었슴다. 지금까지 올리지 못 하고 있었던 것은 이 부분이 무쟈게 안 써져서 요 부분만 홀 랑 빼먹고 뒷 부분을 먼저 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 을 빼놓고 인터넷에 올릴 순 없잖아요. 그래서 지금까지 잠수 탔던 겁니다. 그러니 사시미를 던지시려면 제가 아니라 저 얼빵한 삽질걸 인 히노에게나 던지세요. ==;; (컥, 히노의 팬에게서 짱덜이...) 그냥 너무 안 써져서 한번 투덜거려봤습니다. 덕분에 30이 넘는 페이지를 한번에 띄어쓰기를 해야하는 귀차니즘까지 합 세해서...==;;; 이르나크의 장 Part 56 봄을 위하여 -1 "후우."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켰다. 기쁜 일이 너무나 많이 겹쳐서 그것이 무 언가 현실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카류." 하지만 그것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 친숙한 목소리로 인하 여. "괜찮아요." 다소곳이 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히노에게 살짝 시선을 준 나는 곧 고 개를 돌려 탁자 주변에 둘러앉은 그들을 바라보았다. "싸가지 5인방의 집합이구나." 나는 그들을 향해 씨익 웃음을 내보이며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을 향해 싸가지 5인방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내 말이 떨어지자 싸가지 5인방에 해당되는 아이들만이 한결같이 얼굴을 구겼 다. "에르가 형." "뭐냐?" 이제는 에스문드 백작인, 그들 중의 리더격이었던 에르가 형.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은 그는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기고 싫은 소릴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금방이라도 들고일어날 듯한 표정을 했다. "딜트라엘." "응?" 아버지인 트로이 후작과의 틀어짐으로 내게 오게 된 딜티. 조금 전 나의 말로 얼굴을 구기고 있었지만, 내가 애칭이 아닌 풀네임으로 자신을 부르 자 금방 얼굴을 펴고 고개를 갸웃했다. "세미르." "왜 부르기만 하고 말을 안 해?" 그토록 좋아하는 세스케인 형을 배반하고, 스스로 후르부크 백작가와 의 절을 하면서까지 나를 찾아온 세미르. 그 역시 청보랏빛 눈동자를 동그랗 게 만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엘시온." "…이상한 녀석일세." 정말이지 오랜만에 보게 되는 싸가지 5인방의 다른 멤버인 엘. 카르틴과 해룡족의 가세로 아군의 군세가 국왕군에 비할 정도로 강해지자, 중립세력 에서 망설이고 있던 엘시온의 가문인 에나르츠 백작가가 아군의 세력에 가 담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은 '제르카인' 이겠지? 오랜만에 모인 우리들을 보고 감상에 빠지 는 건 좋지만 왜 나를 제일 나중에 부르는 거야? 마치 저놈들의 쫄다구라 도 된 거 같잖아! 문가(文家)라고 무시하는 거야, 뭐야? 우리 스나일 백작 가가 문가이긴 해도 병력 규모는 에나르츠가에 비견해 손색이 없다 이거 야!" 제르카인이 자신의 검은색의 머리카락을 흔들며 분개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 나는 헤죽 웃었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친구들인지라 나는 그 감동을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던 탓이었다. "그 다음은 '카멜' 이겠지?" "이런이런, '후크' 임이 당연하잖아? 현실을 직시하렴, 카멜. 꿈을 꾸는 상 인은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너도 알지 않니?" 제르카인의 말 때문일까. 탁자의 맞은 편에 앉아있던 후크와 카멜이 투닥 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지만, 일단은 손을 들어 그들 을 만류했다. "그만들 해. 앉은 차례대로 부른 것 뿐이야." "흐음? 정말 그런 거야?" "아니길 바라는 거야? 난 이미 5명이나 불렀다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카멜을 향해 입을 동그랗게 모으 며 핀잔을 주었다. 하지만 이내 안면근육이 풀어져 나는 또 한번 헤죽이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러자 카멜이 한숨을 크게 쉬고는 몸을 소파에 깊게 묻으며 입을 열었다. "저 헤실대는 꼴이라니… 팔다리에 힘이 다 풀리는구만." "아니? 내 미소가 꼴 보기 싫다는 거야? 이래봬도 심심찮게 귀엽다는 소 릴 듣는 백만 골드짜리 미소인데 말이지. 아니면 내가 상판을 있는 대로 구기고 있었으면 좋겠어?" "그래! 아닌게 아니라 왜 이제 와서 편들어 주러 왔냐며 엄청 욕먹을 줄 알았다! 전에는 그렇게 살벌하게 굴었잖아. 내가 너를 만나러 오면서 얼마 나 긴장을 했는지 알아? 사실, 아주 네 발 밑에서 엎드려 싹싹 빌 각오까 지 했었다고." "솔직히… 나도 그랬지." 카멜이 소리치자 후크도 손으로 턱을 긁으며 머쓱하게 말했다. 나는 문득 그들을 마주했던 초여름을 떠올리며 작게 실소를 머금었다. 그 해 늦봄에 일어났던 수많은 일로 궁지에 몰려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할 것 같이 달아올라 있던 때였다. 아주 꼬일 대로 꼬여 있었달까? 물론 지금이라고 상황이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내가 그렇게 바래마지 않 는 왕이 되어 형제들을 만났을 그때를 위한, 딱히 좋은 해결책이 발견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다. 그래. 내가 성인이 그 날부터. 나는 기분 좋은 시선을 카이에게 던졌다. 그녀라는 계기가 없었다면, 아마 나는 아직까지도 꽉 막힌 채로 있었으리라. 뭐,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좋 은 일밖에 없었다는 것도 내가 이렇게 미소를 띄울 수 있는 추가 이유가 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무슨 일이 닥친다 해도 어떻게든 해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다. "뭐 하는 거야?" 내가 싱글싱글 웃고만 있자 카멜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제야 나는 상념에 서 벗어나 머리를 긁으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때는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너희들, 세레스트 성 전투에서 힘을 빌려주기도 했었잖아?" "뭐… 그랬지……." "그땐 비꼬기만 했었지만, 실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어." 내 솔직한 감사의 말에 둘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머쓱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내 후크가 나서서 검지를 펴고 설교조에 들어갔다. "그래, 사실 말이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 쟈스칼 상단은 아르윈에 서 첫째가는 전국적인 거대 상단 아냐. 카멜의 힐튼 상단도 다섯 손가락 안에는 반드시 드는 거대 상단이고. 그런 우리 상단이 국왕군의 압력에서 중립을 지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아무리 네가 우리들의 은인이라 고는 해도, 부모님과 상단의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데 한계가 있고 말이지. 우리 부모님께서 의리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어 봐. 약간의 이득을 챙기고 바로 국왕군을 지원하고 나섰을 거라고." "흐음? 그랬어?" 내가 일부러 눈을 가늘게 뜨고 날카롭게 묻자 말을 줄줄 늘어놓던 후크는 조금 움찔해서 소파 안쪽으로 몸을 묻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굳힌 얼 굴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알고 있어. 네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 후크는 그제야 내게 속았다는 것을 알고 애들처럼 입을 쭉 빼냈고, 카멜 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피식 웃으면서 후크의 등을 툭툭 쳤다. 항상 후크 쪽이 먼저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부분에선 카멜 쪽이 더 어른스럽게 나오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 모양이다. "어쨌든 간에 카류 네가 뒤늦게 찾아온 우리들을 반가이 받아주었으니 나 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지. 지금부터라도 전에 너를 돕지 못한 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으마!" "좋∼아! 자금력은 물론이거니와 아르윈 각지에 퍼져있는 우리 쟈스칼 상 단의 정보력을 보여주지!" "오오! 믿어보겠어!" "얼씨구? 저희들끼리 다 해먹으시려고? 정작 전장에 나가 쌔빠지게 검 휘 두르는 게 누군데?" 주먹을 불끈 쥐는 후크의 행동에 맞추어 나 역시 주먹을 들고 있자니, 에 르가 형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조금 전에 말했던 싸가지 5인방이라 는 말이 못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아마 한동안은 그의 비위를 맞 추기 위해 고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옛날로 돌아온 것 같지?" 곁에 앉아있던 소녀가 금빛 눈동자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여운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예, 히노 선배." 그리고 마법과도 같이 지난 봄을 꿈꾸며 빙긋이 웃음 지었다. ===================================================== 카류 놈... 행복에 겨워 죽겠는 모양입니다. 카류를 나락으로!!! (퍼걱!) 쥬륵...................................... 이르나크의 장 Part 57 봄을 위하여 -2 (1) "쑤시는군." 무의식중에 그렇게 중얼거리던 난 팔목이 얼얼함을 깨닫고 한창 종이 위 를 휘갈기던 펜을 잉크통에 던지듯 집어넣었다. 아주 처음 마법을 배우던 그 해 봄으로 되돌아간 듯 하군. 이렇게 마법 수식에 열중해본 것이 얼마 만인지… 39살에 8서클 마법사가 된 이래로, 간간이 새로운 마법을 연구할 때 빼고는 이렇게 수식을 풀어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책상 위에는 내가 실전에 쓸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지기 위해 마법수식을 재확인하고 풀이하며 휘갈겨 써놓은 종이들로 엉망인 상태였다. 그리고 책 상의 가장 상단에 고정되어 있는 깨끗한 글씨의 수식들. 카류리드 왕자가 직접 집필해준 수식들이었다. 올해로 17살이라. 역시 그 왕자 놈은 괴물이다. "으음……." 문득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들려왔다. 아르디예프가 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었는데, 얼굴색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여러 사람 있는데서 이상한 소리내서 분위기 우중충하게 만들지 말고 그 냥 네 방으로 꺼져." "류스밀리온님! 몸도 좋지 않으신 분께 너무하시지 않습니까!" "정말 입니다. 게다가 나이 차도 있는데 어떻게 그런 말씀을……." 나는 아르디예프를 향해 말했는데 몇 명의 마법사들이 더 분개하여 자리 에서 일어나 내게 소리쳤다. 아아, 그래. 항상 나쁜 놈은 나다 이거지? "쯧쯧, 그만들 두거라. 저놈의 말버릇은 평생 고쳐지지 않을 거다. 어렸을 때 버릇을 잘 들여놨어야 하는 건데." "웃기고 자시고 있네. 누구 버릇을 누가 들여?" 내가 이를 갈자 아르디예프는 머리를 휘휘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엉? 정말 가겠다고?" "네 입으로 꺼지라 하지 않았더냐?" 아르디예프의 앞에 어질어져있는 수식들을 보고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광이라는 수식어도 부족할 그가 마법수식을 풀다 내팽개쳐 두고 방으 로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었으므로. "아르디예프님!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방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여기 제 팔을 잡으십시오!" "아니, 오늘은 됐다." 자기도 늙어 비틀어져 몸 가누기 힘들어 뵈는 노마법사까지 자리에서 벌 떡 일어나 아르디예프를 돕겠다는 꼴을 보자니 헛웃음을 나왔다. 게다가 무슨 바람이 든 건지 주제에 어울리지 않는 남을 생각한답시고 그를 거절 하는 아르디예프의 꼴 역시 실소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훗, 도와준달 때 고이 받아들이는 게 어때? 그러다 복도 바닥에 쓰러져 뒈지기라도 하면 청소하는 시종들에게 민폐라는 걸 알아야지. 내 충고하는 데 죽으려면 곱게 죽어라." "…저런 걸 내가 제자라고 받아들였었지." "누가 받아달라고 했어!? 네 멋대로 마법사로 만들어 주겠다며 끌고 간 거잖아." "그래그래. 그랬었지." 아르디예프가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렸다. 이럴 때는 더욱 귀찮게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마법사들을 헤치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 리고 아르디예프를 제치고 앞으로 걸어가 문을 활짝 열었다. "자, 나가시지. 죽을 때가 다 된 거 같은데 한때나마 제자였던 자의 도리 로서 스승이 죽는 모습을 이 눈으로 봐둬야 하지 않겠어." "네 놈 때문에 복장이 터져서 내 당장이라도 절명할 듯 싶구나." 아르디예프가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나 역시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우리들이 나오자 문밖을 지키고 있던 네 명의 기사들이 차례 자세로 빳빳이 인사를 하고 그 중 두 명이 우리들의 뒤를 따랐다. 호위 명 목이겠지. 사실 암살자 같은 것이 오면 오히려 내가 저들을 호위해 주게 되겠지만 말이다. "카류가……." 한동안 걸어가던 아르디예프가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따라 밖을 바라보았다가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죽거리며 새로이 온 친구들 과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는 카류 왕자를 발견했다. "요즘 들어 녀석이 전과 달리 많이 부드러워 진 듯 하지 않더냐?" "부드러워? 아주 정도를 넘어 푼수끼가 철철 넘치더군. 하지만 뭐, 그럴만 도 하지. 해룡족과 카르틴의 동맹으로 군세가 공고해졌고, 몇몇의 대귀족가 와 거대 상단의 조력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래… 다행이군……." 아르디예프는 카류 왕자를 따라 시선을 옮기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그 모습이 퍽 이나 아니꼬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 꼬맹이가 그리도 좋으냐?" "……." "하긴. 정치에 관심 끄라고 그렇게 소리쳤으면서 저놈 하나 때문에 선뜻 내전에 발을 담그었으니 알만 하지, 알만 해." "지금 질투하는 것이더냐?" "뭐!?" 지나가던 개가 웃다 까무러칠 개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아르디예프 로 인해 나는 그렇지 않아도 인상을 쓰고 있던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 다. 그러나 아르디예프는 저 좋을대로 말을 내뱉고는 계속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씁, 죽으려면 곱게 죽을 일이지. 벌써부터 정신이 나간 거냐?" "나도 벌써 늙은 모양이다……." "…뭐?" 갑자기 아르디예프가 앞뒤도 없이 동문서답했다. 그리고 남의 사정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저 하고 싶을 말을 계속 이어갔다. "뭘까… 젊은 시절 마법 이외의 것은 아무래도 좋았는데, 그런데 이렇게 나이가 들어 작은 카류와 함께 있다보니 문득 가족이 그리워지더구나. 그 래서 처형당하던 그 아이를 보자니… 그 아이가 어떤 아이든, 실은 천사같 이 착한 아이든 그 이면에 검은 속내를 감춘 아이든 간에 관계하고 싶지 않더구나. 내전에 휘말린다 해도 마찬가지로 상관하고 싶지 않더구나. 단지 손자 같은 그 아이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만이 들 뿐. 아마 예전의 나라 면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이지." "……." "그래……. 사실… 지금 네가 정치에 개입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내 울며 겨자 먹기로 널 돕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떠나 보내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 각이 든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그런 시시한 말에 감동을 받아서 그런 게 아니 라 순간 아르디예프의 뒷모습이 굉장히 늙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거 유언이더냐? 지금 죽음의 예감이라도 느끼는 거냐?" "…무례한 놈 같으니……." 아르디예프는 거기까지 말하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그런 그의 모습 을 보고 서있자니 기분이 굉장히 더러웠다. "훗, 원했던 건 아니지만 이렇게 제자 같지 않은 옛 제자도 곁에 있게 되 었는데, 하르몬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하르몬이라는 녀석, 카류 왕자와 유넨이라는 놈과 함께 굉장히 아끼던 제자라 하지 않았나? 그렇게 아까우면 처음부터 마법사들을 설득할 때 그 놈도 끼우지 그랬더냐? 설득에 실패해서 적이 되나, 애초부터 설득하지 않 아 아군으로 넘어올 기회를 놓침으로서 적이 되나 똑같은 일이 아니냔 말 이다. 오히려 설득을 해서 적은 가능성이나마 승부를 걸어보는 편이 낫지." "하르몬은 정의감이 투철하고 꽉 막힌 녀석이라 분명히 내 제안을 거절했 을 게다. 그리고 나는 당장에 아끼던 제자를 공격해야 했겠지. 그렇게 위험 한 승부를 걸어 볼 정열은 이미 식은 지 오래다. 내 늙었다 하지 않았더냐. 늙으면 안정을 원하는 법인 게야." "언젠가는 닥칠 일이건만 안정을 핑계로 피하려 들다니… 너는 늙어서 오 히려 멍청해졌군." "그래… 그런 모양이다……." 아르디예프의 대답을 듣고 나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너무 인상을 써서 미간이 다 아플 지경이었다, 원래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지만, 오늘 따라 그는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다 왔군." 아르디예프의 방 앞에 도착한 나는 그가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서는 것 을 보며 친절히 안부를 물어주었다. "쓰잘데기 없는 생각말고 그저 잠이나 자라. 한물 간 폐물은 방 한구석에 처박혀 내가 하는 것이나 보고 있는 게 최선인 거다. 알겠냐?" "듣자듣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구나! 그 폐물에게 마법서를 받은 놈은 네 놈이 아니더냐?!" "그래도 마법사로서 자존심은 남아있군." "무례한 놈! 당장 꺼져라!!" 쾅-! 아르디예프가 바로 코앞에서 세차게 문을 닫는 것을 보고 비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천하의 아르디예프는 바로 저런 인간이지. 그 주제에 감상에 빠지는 건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다. 잠시동안 아르디예프의 방문 앞에 서있던 난 문득 함께 따라왔던 기사들 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다. 또 아르디예프에게 무례하니 어쩌니 하고 투덜 거리고 있을 테지. 하루 이틀 겪는 일도 아니지 않은가. 저런 놈들 상대하기보다는 카류 왕 자의 수식이나 하나 더 익혀두는 것이 나을 것이다. 폐물의 몫까지 두 배 의 역할을 하려면 아무래도 왕자 놈의 수식이 꼭 필요할 테니 말이다. 아르디예프의 방을 지키는 호위기사를 남겨두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주 변의 차가운 기온을 느낄 새도 없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류온님∼♡ 중년의 정열을 보여줘잉∼♡ 이르나크의 장 Part 57 봄을 위하여 -2 (2) 화려하고 긴 장식용의 칼이 어깨를 한번씩 스치고 지나갔다. 붉은 융단의 위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나는 이 길고 지루한 의식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 았다. "하르몬 혼 아예즈. 짐이 크레티야 2세의 이름으로 그대에게 아예즈 공작 의 작위를 내리겠노라." 무심하게 느껴지는 폐하의 목소리가 의식의 끝을 선언했다. 내가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서 물러나자, 곧 장중한 음악이 퍼지기 시작 했다. 나는 뒤로 물러난 채, 눈부신 샹드리에의 빛에 감싸인 홀의 내부를 바라 보았다. 힘겨운 내전이 지속되고 있음에도 홀의 곳곳에는 풍요롭고 사치스 러운 음식이 향긋한 향내를 풍겨내고 있었다. 실질적인 세력은 두 후작가에 밀리고 있다지만 아르윈의 양대 공작 중 하 나인 아예즈 공작의 임명식이다. 아무리 현 상황이 어렵다 할지라도 이 정 도의 허례허식은 필수 조건일 수밖에 없었다. 곧 사람들이 하나 둘 이 파티의 주인공인 내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덕 분에 나는 한동안 그들과 함께 그리 즐겁지 않은 사치품에 대한 대화를 나 누어야만 했다. 사실 생명의 궁에서 마법 이외의 것에 관심이 없었던 지라 나는 그 대화에서 주로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편에 속해 있었다. "아예즈 공작." 한동안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으려니 멀리서 루블로프 전하의 모습이 보였 다.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고 이쪽으로 다가오시는 그분께 예를 갖춰 인사 를 드리자 태자전하께서 옅은 미소로 내 인사에 답했다. 지금 그분의 미소 에 힘이 없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200년 만에 작위를 가진 마법사가 탄생하는 순간이군요." "예……, 이번 일로 마법사들이 내전에 뛰어들게 되면서 중립을 지키는 마법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마법사들도 파벌을 형 성하고 권력다툼에 휩쓸리게 되겠지요. 저 혼자 가문과 의절하고 중립을 지킨다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기에, 고민 끝에 아버님의 뒤를 이어 작위를 물려받을 결심을 하게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전투에서 그분이 돌아가셨다지요? 정말 안타깝게 되 었습니다." "아니… 그로 인해 오히려 마음을 다잡을 수가 있었습니다. 더 이상의 피 해자를 내지 않기 위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 내전을 마무리지어야 한다, 망 설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크나큰 죄악이다, 라고 느꼈지 요." "그렇군요." 내 말을 떨어지자 루블로프 전하께서 눈에 띄게 자조적인 웃음을 머금었 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우리들 사이의 대화가 조금 뜸해지는 듯 싶자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린츠 자작의 차남이 싱글싱글 웃음을 띄우며 말을 걸었다. "그건 그렇고, 이젠 아예즈 공작가의 위세가 대단해지겠군요. 뭐니뭐니해 도 공작님께서는 마법사, 그것도 아르디예프님의 굳은 신임 받던 애제자가 아니셨습니까. 그러니 다른 고위 마법사 분들과의 연계도 아주 긴밀할 테 지요." "그렇군요. 마법사 세력을 등에 업게 되었으니 이보다 대단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루블로프 전하." 역시 그들의 첫번째 관심사는 그런 것이었다. 마법사들의 위치변화로 인 해 앞으로의 정세가 어떻게 바뀌게 될지는 관심도 없었다. 권력이라는 단물을 찾아 꼬여드는 파리들. 문득 아르디예프님께서 질색을 하며 말씀하시던 그때의 일이 생각났다. 갑자기 주위 사람들이 점점 더 모여드는 것을 보자니 이루 말하기 힘든 불쾌감이 몰려왔다. 그런 내 모습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루블로프 전 하는 사람들에게 살짝 곁눈짓을 주었다가 가볍게 내 팔을 잡아 이끌었다. "이곳은 조금 시끄럽군요. 저와 함께 테라스 쪽에서 바깥바람이라도 쐬시 겠습니까?" "예." 난 고개를 살짝 끄덕여 그분께 작은 고마움을 표하며 소위 파리라 불리는 자들을 피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아직 9월 중순임에도 테라스의 아래에 위치한 몇몇 나무는 벌써부터 드문 드문 단풍이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얼마 안 되는 붉은 색 단 풍에서 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은. "남부에선 전투가 한창이겠군요. 듣자하니 카르틴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라던데." 테라스에 몸을 기댄 그분은 남쪽을 바라보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전하께서는 내년 봄을 위해 파견되는 이번 원군에 함께 하시지 않을 작 정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물론이거니와 키예프와 카이세리온 역시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원군의 총대장은 아예즈 공작께서 맡아주시길." "모든 왕족 분들께서 이대로 계속 출전하지 않으시고 왕성에만 계시면, 좋지 않은 소문이 돌 것이라 생각됩니다만……." "지금은 그런 것에 마음을 쏟을 여유가 없답니다." 멀리 남쪽을 바라보고 있던 루블로프 태자전하께서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 을 내쉬며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었 다. "카류를 치기 위한 병사를 보낼지언정, 그와 직접 검을 맞대고 싶지는 않 습니다. 역시 미련을 버리는 것은 쉽지 않더군요." "카류…리드 전하에 대한 미련이십니까……." "그렇답니다. 섬뜩할 정도로 카류에 대한 증오를 표하는 카이 녀석도 정 작 이 전쟁엔 참전하지 않게 되는군요. 사실 카이가 군의 운용에 대한 지 식이 전무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이지만, 한번씩은 카이 역시 카류에 대한 미련이 남았기 때문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루블로프 전하의 말에 나는 즉시 대답을 하지 않고 시선을 약간 옆으로 빼냈다. 카류리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아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 이, 그 꼬마 왕자님에 대한 것을 생각했다. 정말 그 작은 아이가 왕비님들 의 살인을 알면서도 그를 막지 않고 묵인할만한 인물인지. 왕족임에도 평 민인 유넨을 향해 순수하게 웃고, 남을 챙기던 그 작은 아이가 정말 그런 일을 했을지. 내가 내렸던 그 카류 왕자에 대한 평가는 실로 잘못된 것이 었는지. "그럼 미련이 남은 형제로서 한가지 질문을 드리지요." "저에게 말씀이십니까? 대뜸 루블로프 전하께서 내게 말을 거시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리고 의아한 내 눈빛을 맞받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유넨이란 평민은, 믿을만한 자입니까?"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루블로프 전하의 목소리엔 희망이 담겨있 다. 아주 작고, 서글픈 희망이. 미련인가……. 나는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며 그분의 질문에 대답했다. "믿을만한 자입니다. 상냥하고 좋은 녀석이지요." "…그렇군요." "하지만." 난 루블로프 전하의 허탈한 답을 끊으며 다시 그분을 돌아보았다. "카류리드 전하도 믿을만한 분이었습니다. 상냥하고 착한 분이셨지요." "……." 그분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 자조적인 웃음으로 그분의 시 선에 답했다. "무엇이 진실이었는지, 저는 바르게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상황은 이만큼이나 크게 벌어지고 말았고, 그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었으며, 또 다른 수많은 은원(恩怨)이 생겼 습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이 오해였다며, 지금껏 있었던 모든 일을 없 던 것으로 돌리겠다고, 반년 동안의 내전으로 들썩였던 나라 안에 공표를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그렇군요. 당연한 사실입니다." 루블로프 전하는 피식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분명,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음에도, 나는 전하의 그 자그마한 감정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아직 여리고 부드러운 가슴을 가진 그분에게 더 큰 상처를 주고 싶진 않 았지만, 난 원래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 할 수 있는 최 선의 방책은 단 하나.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내전을 종식시키고 분쟁의 씨앗인 카류리드 전하를 붙잡아 처형하는 것뿐이라고, 오랜 시간의 고민 끝에 그렇게 느끼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시선을 멀리 남쪽으로 던졌다. 그곳에는 비록 마음이 맞지는 않았지 만 그럼에도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던 아버님, 아니, 그분의 시체와, 내 둘 도 없는 단짝이었던 유넨, 그리고 얄밉게 쏘아대는 말투가 몹시 귀여웠던 카류 왕자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르디예프 님." 내 중얼거림을 들은 루블로프 전하께서는 고개를 가만히 기울이다가 조용 히 질문을 던졌다. "아르디예프님께서는 아예즈 공작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설득하지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공작께서는 그분께 섭섭한 감정을 가지고 계신 것입 니까?" 나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르디예프님께서는 생명의 궁에 속한 모든 마법사들의 성격과 그들이 처한 상황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분은 왕가를 배반할 만한 사람들만을 추려내어 설득을 하셨지요. 누군 필요하고 누군 필요하지 않아서…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을 현재 이곳에 남아 있는 마법사들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루블로프 전하는 괜한 질문을 했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조금 돌려 그분께 들리지 않을 정도 로 작게 말끝을 흘렸다. "그래도 역시… 섭섭하군요……." 그 어떤 분보다도, 사실 아버님보다도 존경하고 의지했던 분이었으므로. 마치 버림받은 새끼라도 되듯. 나는 안타까운 슬픔을 느낀다. "그만 들어가 봐야지요. 이 파티는 저를 위해 열려진 것이니, 제가 없다면 상황이 좀 곤란해지겠지요. 그리고 기실, 태자전하 또한 중요한 분이시니 말입니다." "그렇군요." 루블로프 전하는 가볍게 대답하며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고 있는 몸을 세 워 홀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분의 발자국을 따라 밟기라도 하 듯 나 역시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쌀쌀한 가을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하르몬 재등장! 하지만 너무 늦어서 아무런 감회가 없음. ㅜ.ㅠ;; 슬프다................................ 아, 사정상 시기가 앞쪽과는 달리 초가을로 되돌아갔는데, 좀 이상한가요?;; 이르나크의 장 Part 57 봄을 위하여 -2 (3) 지루하다. 언제까지 이들의 사이에 끼여 박자를 맞춰주고 있어야 하는 건 지. 트로이 후작과 세스케인이 개인적인 이야기로 담소를 나누는 것을 보며 나는 남몰래 몸 이곳저곳을 배배 꼬았다. 내가 트로이 후작이 신임하는 유 일한 마법사이자, 세스케인이 아끼는 직속 부하이기에 어쩌다보니 이런 자 리에 끼여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과 대등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는 관계로 그저 한 두 마디 맞장구만 쳐주고 있자니 얼마나 심심하 겠는가. 이 시간에 마법 수식이라도 하나 더 익히면 너희들에게도 내게도 이익일 것을! 한동안 시간이 지나 내가 지루함을 참기가 벅차질 때 즈음, 구원자와 같 이 아이시스 남작이 꼭 드릴말씀이 있다며 방문해왔다. "세스케인님과 유넨도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말씀 중에 방해를 드린 것 같아서." 그는 세스케인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마침 더 잘되었다는 듯한 얼 굴을 했지만, 입으로는 형식적인 인사를 올렸다. "됐네. 일단은 앉지."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잠시 이 지도를 빌려도 좋겠습니 까?" 아이시스 남작은 조금 떨어진 탁자 위에 놓인 작은 지도를 가리켰다. 트 로이 후작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이시스 남작은 그 지도를 가져와 지금 사 람들이 앉아있는 탁자 위에 폈다. 아마 할말이라는 것이 군사 작전 비슷한 것인가 보다. 이로서 트로이 후작이 신임하고 있는 뉴 페이스가 모두 모인 게 아닌가! 하는 의미 없는 잡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밖의 병사가 새로운 사람의 방문 을 알렸다. 갑자기 웬 방문자가 이렇게 줄줄이 잇는 거야? 트로이 후작에게 개인적인 일을 전할 자가 일을 전할 자가 이렇게도 많은 가 의아해하고 있을 때 새로운 방문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예즈 공작님? 어쩐 일로?" 트로이 후작이 예를 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서 검붉은색 머리카락의 젊은 청년을 맞이했다. 그 방문자는 이번에 십만의 군세를 중북부에 대기시키고 얼마 전 이곳 관문까지 내려온 하르몬이었다. 아, 이젠 아예즈 공작인가? 자리를 잡고 앉은 하르몬은 한동안 쓸데없는 잡 얘기로 화기애애하게 이 야기꽃을 피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로이 후작은 양손에 깍지를 끼고 의미심장한 눈빛을 하르몬에게 보냈다. "아무래도 아예즈 공작님께서는 특별히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으신 모 양이군요. 이런 의미 없는 대화는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얼굴이신데……," "…말씀 대로입니다." 오, 하르몬. 눈에 힘이 들어가는군.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도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러기를 원하시는 모양이시군요. 원하시는 대로." 사실 예를 몹시 따지는 트로이 후작이지만, 그래도 상대가 명색이 공작이 라서인지 그 말을 거부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눈에 잔뜩 힘 을 주고 있는 하르몬은 트로이 후작을 향해 강하게 말했다. "무례를 무릅쓰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트로이 후작께 서 저의 아예즈 공작가의 권세를 의식하여 공을 세우기 위해 무모한 짓을 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노라고, 그렇게 맹세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저 역 시 트로이 후작가를 의식하여 군 전체를 생각지 않고 개인행동을 하지 않 을 것입니다." "……." 아무리 듣는 사람이 적다고는 하지만, 하르몬은 참으로 건방진 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정의의 마법사인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입이 더러워졌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공작이 되고 나니까 드디어 귀족 특유의 건방진 본성이 용솟음 치는 건가? 어찌됐던, 그 덕분에 하르몬의 맞은 편에 앉은 트로이 후작의 미간은 형 편없이 구겨졌다. 하지만 하르몬은 그에 개의치 않고 계속 자기하고 싶은 말을 나불대기 시작했다. "제가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으면서 마법사 세력을 등에 업게 되었으며 그 로 인해 아예즈 공작가의 권세가 과거에 비견할 데 없이 비대해 질 것이라 는 사실을 모르시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트로이 후작께서 만약 저에게 경 쟁의식을 불태워 공을 세우고자 하신다면, 군의 단합이 어려워져 제6왕자 군을 진압하는 일은 어렵게 될 것입니다. 지금 제가 트로이 후작께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입니다." "훗, 그런 걱정을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아예즈 공작님. 저 역시 제6왕 자를 잡아들이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을 예정이니 말입니다." 트로이 후작은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리고 몹시 아니꼬운 어조로 답했다. 그 모습에 하르몬은 몸을 조금 앞으로 내밀고 강하게 트로이 후작을 밀어 붙였다.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단순히 트로이 후작께 시비를 붙고자 이 런 말씀을 드린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러는 아예즈 공작님께선 저를 무엇으로 보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 니까?" 갑자기 트로이 후작이 강하게 나오며 하르몬에게 일격을 먹였다. 하르몬 이 조금 당황한 듯 앞으로 내밀고 있던 몸을 누그러뜨리자 트로이 후작은 강렬한 눈빛으로 하르몬을 노려보듯 하며 입을 열었다. "물론 트로이 후작가가 권세를 탐하지 않는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 지만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저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아예즈 공 작님께서는 제가 권력에 눈이 멀어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는 그런 소인배 로 보인단 말이십니까?" "……." 와, 하르몬의 패배다! 내가 봐도 트로이 후작의 눈빛에선 진심이 팍팍 뿜 어져 나오거든. 사실 트로이 후작이 과격하긴 해도 나라사랑에 뜨겁게 불 타는 남자가 아니겠어? "휴전 협상이 이루어진 것이군요. 그럼 권력 쟁탈을 위한 각축전은 이 내 전을 끝내고 제6왕자를 체포한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이 기회를 타서 조금 전에 말씀드리고자 했던 화제로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치 사회자라도 된 듯 아이시스 남작-게릭-이 상황을 종결시켰다. 하르 몬과 트로이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지만 기가 막히게도 아이시스 남작은 전 혀 주눅이 든 기색이 없었다. 하르몬은 그렇다 치더라도 트로이 후작까지 있는데 간이 팅팅 부었다 평하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트로이 후작에게 전폭적으로 받고 있는 자신의 신임도를 믿고, 너그러이 넘어갈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한 행동임이 틀림없다. 봐, 실제로 트로이 후작은 눈살만 찌푸리고 그냥 넘어가 주고 있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카르틴의 병력을 국경선에 묶어두는 작전은 실패하고 말았습 니다. 물론 1만의 병력 손실을 준 것은 상당히 큰 전적이라 할 만 했지만, 작전의 실패로 인하여 결국 제6왕자군은 아군에 맞먹는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제6왕자군은 본래 휴나르 성에 주둔해 있던 4만의 군세 에 카르틴의 7만 군세가 더해져 11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에 중립세력으로 판단되던 몇몇 귀 족가와 거대 상단세력이 더해져서 그 군세가 약12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 고 있습니다." "제가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일이 이렇게 커지고 말았군요" 아이시스 남작의 말이 떨어지자 내 앞에 앉아 있던 세스케인이 침중한 목 소리로 기가 막히는 소릴 했다. 젠장, 잘난 척은 혼자 다해요! 1만이나 죽였으면 됐지 그 이상으로 어떻게 더 잘한단 말이냐?! 작전을 시행하고 2달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어디 하 늘에서 솟았는지 3만이나 되는 새로운 지원 병력이 바람같이 국경으로 날 아왔는데, 거기서 더 뻗대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니겠어? 카르틴의 국왕이라는 놈도 참 징그러운 놈이다! 갑작스런 소식에 새로이 3만대군의 병력을 모으고 사단을 구성하는 시간이 그것밖에 안 걸릴 수가 있는 거냐? 소식을 전해 받기까지의 시간도 있을 테고, 그 원군이 국경까 지 오는데 만도 보름은 족히 걸리는데 말이다! "됐네. 카르틴이 그렇게 빠른 대처를 할 줄 누가 알았겠나. 그리고 자네였 으니 카르틴에 1만이나 되는 손실을 안겨다 준 것이겠지." "…후우……." 트로이 후작이 나의 생각과 비슷한 말로 세스케인을 위안했다. "후작님의 말씀 대로이니 세스케인님께서는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이시스 남작은 세스케인을 향해 그렇게 말한 다음, 다시 지도를 짚으며 설명에 들어갔다. "제6왕자군의 군세가 비약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이 협소한 휴나르 전선에 서 수십만에 이르는 대군이 맞붙는 것은 어려울 전망입니다. 또한 이대로 휴나르 성을 두고 전투를 계속하게 되면 똑같이 대군을 이끌고 있음에도 그 본거지가 리아영지이기에 상대적으로 보급이 쉬울 터인 제6왕자군 측에 게 상황이 더 유리하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안타깝지만 이곳을 버리고 중남부로 전선을 옮길 것을 건의하는 바입니다." "이 곳을 얼마나 어렵게 얻었건만, 이대로 포기해야 하다니!" "진정한 승리를 위한 작은 부분을 내어준다고 생각하십시오." 트로이 후작은 영 탐탁치가 않은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이시스 남작 이 저렇게 주장하고 있는 만큼 가까운 시일 내에 전선이 중북부로 옮겨지 지 않을까 싶다. 유쾌하지 못한 사실에 방안이 조금 조용해졌다. 그때 하르몬이 나서 트로 이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류리드 왕자에겐 확실히 천운이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군이 하 나가 되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 한 제6왕자군을 물리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명심해 주십시오, 트로이 후작님." 상당히 끈질기군, 하르몬. 그 건은 조금 전에 끝이 났을 텐데 말이다. 게 다가 하르몬은 카류 왕자를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니었던가? 왜 갑자기 카류 왕자를 잡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처럼 나오는 거야? "…그러는 저야말로 묻고 싶군요. 제가 알기로 아예즈 공작님께서 카류리 드 왕자와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태도가 돌변하셨는지 말입니다." 트로이 후작은 나의 의문과 똑같은 내용의 질문을 하르몬에게 던졌다. "긴 망설임의 시간이 있었지만, 아버님의 일을 계기로 상황이 더 이상 돌 이킬 수 없는 곳까지 치달았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분란의 씨인 카류리드 왕자는 제거되어야만 한다는 것 역시." 하르몬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저 말을 신용해도 되는 건지 참으로 고민되는 일이다. 최근에도 저와 비슷한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가 크게 한 방 먹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트로이 후작의 시선이 그리 좋지가 못한 것을 보고 하르몬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피차 문제가 있음은 마찬가지인 상황이군요. 말씀대로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서는 꺼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트로이 후작은 속 좁게 그 일을 꼬투리 잡지 않는 대신 가볍게 대답하는 것으로 상황을 무마시켰다. 그 이후로도 한동안 아이시스 남작의 주도로 앞으로의 군사적 동향에 대 한 이야기가 상당시간 오갔고, 나는 상당시간이 흐른 후에야 트로이 후작 의 개인실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바깥의 날씨는 꽤나 쌀쌀했다.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니 당연한 일이겠다. 지금 내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세스케인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 않 고 어딘가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 자유시 간을 가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그의 뒤를 따라 이 추운 바깥을 헤매는 중이었다. 세스케인은 현재 자신이 어디로 간다고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나 는 그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짐 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추운데 그곳에서 괜찮겠나, 유넨?" 젠장, 당연히 안 괜찮지! 너와는 달리 난 이곳에 멍하니 서있어야 하니 까!! 속마음과는 달리 내가 고개를 숙이고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 를 끄덕이고 곧 허리에 찬 검을 천천히 빼들기 시작했다.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자그마한 공터. 요즘 그가 자주 찾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그가 신들린 듯 검 연습을 하기 시작하면 나는 조금 떨어진 공 터의 한쪽에서 말없이 그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최근의 일상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스르렁-. 빛에 반사된 검이 은빛의 긴 사선을 그렸다. 그러나 내 각막에 남은 사선 의 잔상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새로운 호선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그리고 화려하다. 스피드와 기술에 중점 을 두는 검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검술을 구사한다 할지라도 그의 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최고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다. 그다지 인정 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내가 봐도 그의 검은 다른 기사들의 것과는 수 준이 달랐다. "음……." 문득 몸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영 재수 없는 생각을 하는 바람에 소름 이 돋은 탓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상당 시간 차가운 바람을 맞받았기 때문이다. 세스케인은 나처럼 추위에 떨지는 않았지만, 오래 검을 휘두르느 라 숨이 차는지 어깨를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제기, 이대로는 도저히 못 참겠다. "만약……." 난 세스케인의 주의를 끌 수 있을 만큼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지루한 광경을 끝낼 겸 전부터 궁금하게 여겼던 것을 물어보기로 한 것이 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검술에 몰입하기는 하되, 주위의 경계를 흐리지 않는 것이 고수의 자세. 세스케인 역시 다르지 않았던 것인지 금방 내 말에 반응을 해왔다. 그가 검을 내리고 나를 돌아보기에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일부러 얼굴에 어 두운 기운을 띄웠다. "만약 전장에서 세미르님을… 만나신다면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세미르, 세스케인의 동생녀석. 아군의 편을 드는 척 하다가 배신을 때리고 카류 왕자에게 투항을 한 놈이다. 게다가 대담하게도 한 연대를 통째로 제 물로 가져다 바치면서 아군의 뒤통수를 크게 한방 먹이기까지 했다. 이 일 로 인해 후르부크 백작과 세스케인이 한동안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 야만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세스케인 놈,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면 이렇게 한적한 곳으로 와 지칠 때까지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뭐, 동생과 적이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이거겠지. 내게 질문을 받은 세스케인은 작게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것도 잠시 곧 청보랏빛 눈동자를 똑바로 뜨고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죽여야겠지." 그의 대답이 너무 직설적이라 뭐라 대답을 하면 그에게 충실한 부관으로 보일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 잠시 침묵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세스케인은 힘없이 웃었다. "세미르는 그것을 알고 있을 거다. 알면서도 그 길을 택한 거겠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길을." "……." "그리고, 나 역시 택할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길을. 그를 행하는데 있어서는 가슴이 아플지언정 일고의 망설임도 존재하지 않는다." 세스케인은 언젠가 한번 했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내뱉고서 몸을 돌렸 다. 곧 아래를 향하고 있던 검이 다시 한번 생명을 받아 화려한 빛의 잔영을 그려냈다. 세스케인의 하얀색의 입김은 그 짧은 시간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하고 빠르게 교차되는 검에 조각 조각이 나고 만다. 막 서쪽으로 지기 시작하는 석양에 반사된 검광은 빠르게 허공을 교차하여 더욱 화려한 느낌 을 자아내었다. 사람을 홀려버릴 듯한… 짜증스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검 무. 그리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신념…인가……. 문득- 새삼스러운 의문이 솟구쳤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내가 왜 세스케인의 곁에 서서 이따위 생각이나 하고 있는 것인지. …카류리드……. 그 왕자를 죽이기 위해서. 그렇다. 나는 지금 그 놈이 이끄는 제6왕자군을 파멸로 몰아넣기 위해 트 로이 후작에게 힘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트로이 후작과 가까운 사이인 세스케인의 직속 부하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카류 왕자.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다. 귀족, 아니, 왕족인 주제에 날 생각해 주겠다며 나서서는 제 멋대로 우월 감에 빠져 짓곤 하던 그 짜증나는 미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놈의 능력! 신의 재능을 가진 마법사, 그 어떤 귀족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만한 능력 을 갖춘 자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음에도. 그럼에도 결국에는 땅에 엎드려 굴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카류 왕자의 그 능력이. 나를 또 한번 비참한 그때로 되돌려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카류 왕자는 내게- 생각하기 싫은 '과거' 를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래. 분명 카류리드를 향한 나의 증오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합!" 세스케인의 강한 기합과 함께 앞으로 내질러진 검이 허공의 공기가 갈라 지는 듯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그의 검은 내 눈이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 로 느리게 아래쪽으로 이어지는 반원을 그렸다가 한순간 사라지듯 빠르게 상단으로 사선을 그었다. 강하다. 비단 검술뿐만이 아니라, 신중하며 융통성 있는 군대 운용력, 고위 장교에 서부터 하급 병사에까지 이르는 넓은 인망, 스스로의 길을 정하는 굳은 신 념. 지금 내 앞에 선 세스케인은 오히려 그 옛날에 비해 훨씬 더 높은 곳에 서있다.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뛰어난 존재가 되었지만. 그는 그 이상으로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과거' 와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후, 오늘은 이만 하지. 추운 곳에서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하다, 유넨." 세스케인이 검을 거두며 구석에 우두커니 서있는 내게 미소지었다. 검을 갈무리하며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추위로 인해 파랗게 질린 내 모습을 보 고 검술연습에 뜨겁게 달아오른 손을 내 귀에 가볍게 가져다 대었다. "이런, 굉장히 차갑군. 날 신경 써주느라 말하지 못한 건가?" 나는 순간 딴 생각에서 벗어나 세스케인에게 그게 아니라며 손과 고개를 저었다. 충성스런 부하란 모름지기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법이므로. 덕분에 세스케인은 빙긋이 웃으며 내 등을 툭 쳤다. "네 사정을 눈치채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앞으로는 이렇게 기다리지 말 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명령이다. 군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 세스케인은 강하게 말하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내 몸을 생각해주겠다는 것이다. 나 따위는 어차피 벌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지만, 세스케인은 그 런 존재를 상대함에 있어서도 넓은 마음으로 포용할 줄 아는 아량을 갖추 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좋겠지. 어쨌든 지금은 카류 왕자를 없애는 것이 중요할 뿐." 나는 주먹을 쥐며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곧 눈살 을 작게 찌푸렸다. 언젠가 세스케인의 뒷모습을 보고 똑같은 말을 내뱉은 적이 있었던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깊게 생각할 것은 없다. 어찌되었든 나는 진실로 카류 왕자가 죽기를 희 망하고 있으므로. 카류 왕자의 존재가 그 무엇보다 심하게 내 신경을 자극 하고 있으므로.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면 카류 왕자를 제거한 이후로 미루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생각을 마친 나는 차가운 바람을 사이로 걸음을 내딛었다. 카류리드 왕자 에게 최후의 철퇴를 가할 새로운 봄을 기대하며. ======================================================= 아이고....... 나 죽네......... ㅠ.ㅠ 아래쪽 방향키와 엔터를 졸라게 연타했더니 검지가 마비될 거 같습니다. 동시에 눈알이 멍~하니 빠져 버릴 것만 같군요. 이로서 7권 분량 끝입니다. 겨우겨우겨~~~우 마감에 맞추었습 니다. 사실 몇 번이고 미루었던 마감이지만요. ㅡ.ㅜ 얼마안가 곧바로 삭제될 예정이니 얼렁얼렁 읽으시고 갈무리 해두실 분은 해두시고 하세요~ 아, 한가지!! 또 다시 이야기를 질질 끌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 하아....................... 왜 이렇게 질질 끌리지? 돌아버리겠네............ 아, 또 한가지! 이벤트 참가하시는 분들, 자신이 작품이 모자라서 부끄럽다고 참가 안 하지 마시고, 그냥 팍팍 올려주셔요. 그래서 이벤트 란에 들러보는 저와 카페 손님 분들께 즐거움을 주시길. ^^;;;; 안녕히~~~!!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1)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1) ------------------수능 대맞이 응원 구호!!------------------------ ------------누구나 딸 수 있다!! 사백점 만점 따윈!!--------------- 갈색빛의 풀밭이 희끗희끗 돋아 나온 잔디들도 조금씩 녹색을 띄기 시작 하고 있었다. 중앙 정원 한쪽에 배치된 의자에 앉은 채 잔디밭을 가만히 바라보던 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줄기를 뿜어내는 분수도, 잔디밭을 둘러싼 푸른 수목도 작년과는 하나도 다를 바 가 없음에도 이상한 황량함이 느껴졌다. "루브 형님." 깍듯한 예를 갖춘 말소리가 나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풀밭 너머의 도보에 방긋이 웃고 있는 카이가 있었다. "카이구나. 여기까지 오다니, 무슨 급한 용건이라도 있는 거니?" 순간 카이의 푸른 눈동자가 가늘게 변했다.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로 곧장 이쪽으로 걸어오는 카이의 모습을 보자니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카이는 몇 걸음 걸어오다 말고 자리에서 몸을 숙였다. 그리고 그 자세로 저 홀로 길게 자라난 잎을 뜯어냈다. 단순히 정리되지 않은 정원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을 뿐인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자신이 뽑아낸 풀잎을 바라보던 카이가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일이 없으면 정원에 들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아… 그렇군……. 바보 같은 질문이었나." 나는 그제야 카이의 뜻을 깨달았다. 얼마 전까지는 그 어떤 일이나 약속 없이도 너나할 것 없이 모여들던 정원이었다. 그런데 카이의 얼굴을 보자 마자 용건부터 묻는 모습이라니…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고 보면, 카류리드가 상당히 분발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남쪽으로 시선을 주면서 카이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아도 카류 생각이 떠올라 기분이 가라앉던 차였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자. 카류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아." "걱정이 되십니까?" 어느새 내 눈앞으로 다가온 카이가 자신의 작은 손으로 내 손을 맞잡으며 조용히 물었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자 카이는 손을 당기며 따라오라는 표시를 하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제가 만약을 위해 준비를 해둔 것이 있습니다." "아?"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나온 카이의 말에 고개가 기울어졌다. "작전상 후퇴라고 말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아군의 전선이 뒤로 밀려난 것이니 그런 불안도 당연합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 패륜아가 승리하여 이 곳 왕궁에 그 뻔뻔스런 얼굴을 내민다고 생각하니 치가 떨리는군요. 형님 께서도 카류리드와 직접 대면해야만 하는 불쾌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으 시겠지요?" "으…음……." 당당하게 그렇다고 대답했으면 좋았을 것을 애매한 대답이 입가를 맴돌았 다. 카류에 대한 미련은 이리도 끈질겼다. 그러나. 카이와는 다르게, 나 역시 카류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전이 끝나 카류와 마주하게 되는 날을 상상하노라면 끝끝내 버리지 못한 동생을 향한 애정과, 살해당한 어머니를 가진 아들의 도리와, 일국의 태자가 가져야 할 의무가 머리 속을 지독히도 어지럽혀 놓 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도 너를 그리워하고 있다며 카류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게 될까? 어머니의 죽음을 방조한 패륜아라고 욕설을 퍼붓게 될까? 내전의 불씨를 놓아 나라를 어지럽혔다고 매도하며 바로 검이라도 뽑아들 게 될까? 그 해답을 상상하는 것조차 버거운 의문. 차라리… 카류와 만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끔씩은 이 내전이 영원히 끝나지 않고 지속되어, 애매하지만 그 나름의 안정된 이 상태가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자신을 깨닫는다. 나는 이토록이나 이기적인 존재인 것이다. 카이는 말없이 나를 물의 궁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까지 안내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난 여기까지 와서야 카이가 무슨 일을 하려하는 것인지 에 대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준비를 해두었다고 했었던가? 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기 위한 준비란 말인 가? "들어오시죠. 형님." 카이는 문을 열며 빙긋 웃었다. 지금 하고 있는 생각 때문인지 그의 웃음 이 이상하리만치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집무실 안쪽에는 못 보던 남자가 있었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초리는 그 를 날카롭고 냉정한 인상으로 보이게 했다. 그는 우리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한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나를 중앙의 상석으로 인도한 카이는 왼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뒤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카이의 부름을 받은 그 남자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 큼 조용히 걸어와 조금 떨어진 의자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걸을 때만큼이 나 앉을 때의 행동 또한 절제된 움직임이었다. "시킨 일은?" 잠시간의 적막을 깨고 카이가 이름 모를 남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 러자 그 남자가 다시 한번 예를 갖추어 목례를 한 뒤 입을 열었다. "완전히 잠입에 성공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이를 향해 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자초지종을 듣고 싶군. 카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단지 수개월 전, 그러니까 지난 가을이 시작 되기 전부터 휴나르 성에 사람을 몇 명 보낸 것뿐입니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지금은 완전히 휴나르 성의 시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이 듣자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카이가 직접 이런 일을 계획 하고 있을 줄이야. 아스트라한님의 일로 이미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카이의 변화에 적응을 하기가 힘들다. "지금쯤이면 휴나르성에 잠입한 자도 내 뜻을 전해 받았을 터이지?" 카이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시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혹시라도 가능 한 상황이라면 일이 제대로 수행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체의 일부를 잘 라 오라는 명까지 따로 전해 두었……." "됐다." 카이가 갑자기 손을 들어 남자의 말을 제지했다. "증거물 따윈 필요 없다. 속일 수 있을만한 성질의 일도 아니니까.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차라리 그놈의 시체를 태워 없애버려라. 두 번 다시 카류 리드가 내 눈앞에 뜨이는 일이 없도록. 그놈이라면 머리칼 한올 보는 것조 차 불쾌하다." 카이의 말에 남자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고개를 조금 기 울이며 그 남자와 한 마음으로 의아함을 표했다. 물론 카류가 실제로 죽었다면 그것을 숨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을 철썩 같이 믿었다가 시간이 지나 구사일생으로 카류가 살 아남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화근의 불씨가 남는 법. 확실한 일 처리를 위 해서는 남자의 말대로 가능한 한 증거를 챙기거나, 후일 확인이 가능하도 록 시체라도 남겨놓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카이의 명령은 차라리 카류의 시체를 없애버리라는 것.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침입자를 심어놓은 것에 반해 뒷처리에 관한 명령은 너무나 허술했다. 하지만 노련한 남자는 카이에게 대답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곧 깊게 고 개를 숙여 주인의 명을 받들었다.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만 일어나도 좋다." 카이의 가벼운 손짓과 함께 남자는 빠르게, 그러나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작은 흔적 하나 남겨놓지 않고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 일이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기는 이르지만, 운이 좋다면 모든 일이 간 단히 끝날 수도 있을 겁니다. 형님과 우리 형제들의, 아니,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의 고통과 혼란의 근원이 말끔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 남자가 나간 방문에서 내게로 시선을 되돌리며 카이는 그렇게 말했다. 진심으로 잘된 일이라는 듯, 귀여운 카이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가득했다. 문득 나의 머리 파고들었던 카이의 말이 메아리처럼 되울려왔다. 간단히 끝이 난다. 이대로 카류가 사라진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누군가의 손에 의해 그렇게… 어쩌면 너무도 허무하게……. "그래… 오히려 그게 좋을지도……." 내 시야에 닿지 않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 다. 암살자에게 당한 상처에서 쏟아져 나오는 피도,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 지른 절규도, 어쩌면 우리들을 향해 퍼부을지 모를 저주도… 그 어느 것 하나 보지 못한다. 이 황량하고 거대한 성안에서 고개를 돌리고 침묵하고 있으면, 비겁자가 될지언정 보다 큰 고통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슬프게 웃었다. 알 리가 없는 내 속마음에 긍정이라도 하듯 카이가 마주하고 부드럽게 웃 어주었다. ================================================== 안녕하세요. 아비스라라입니.... (퍼걱!) 헉쓰, 등장하자마자 짱돌을 던지시다니!! ㅠ.ㅠ 잠수를 끝내...ㄴ 것은 아니고, 그냥 전~에 써놓은 거 올려봅니다..=_=;; 콜록.. 솔직히...제가 그동안 좀 현실도피를 했습니다..쿨럭.. 죄송합니다. 오늘부터라도 열심히 쓸게요. (퍼걱!) 흑흑흑.......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2)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2) ------------------수능 대맞이 응원 구호!!----------------------- ------------시험지를 받았더니! 아는 것만 나왔더라!-------------- 시종이 가져다 준 녹차가 거의 다 식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난 거친 동 작으로 찻잔을 집어든 후, 맛을 음미하지도 않고 녹차를 그대로 원샷했다. 타악-! "에이씨! 하나도 모르겠잖아! 뭐부터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죄 없는 잔을 거세게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결국에는 불평을 쏟아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나는 지금 마법수식을 정리하는 중이다. 정말이지 교 과서, 참고서 편찬자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때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리고! 저기서 하릴없이 빈둥대고 있는 카이에 대한 무한한 질투가 피어오르는 때라 아니할 수 없겠다! 카이는 오늘도 여전히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왠지 자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 게 든다. 아니, 분명 자고 있을 것이다! 크으윽! 남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 고 있는데 너무해!! 나는 괜스레 카이를 째려보며 억지에 가까운 망상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괜스레가 아니고 이것도 내 나름대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다. 그때 갑자기 미동없이 있던 카이의 눈이 번뜩 열렸다. 빛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붉은 눈동자는 여전히 그 속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낸 것일까. 그녀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친 나는 나름대로 그렇게 추측해보며 슬그머 니 입을 가렸다. 하지만 카이는 금방 나와 마주하고 있던 시선을 내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이?" 자리에서 일어선 카이는 창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눈을 뜬 것이 내 말소리 때문이 아니라는 강한 직감을 느꼈다. 지금껏 누가 말을 시키기 전까지는 결코 움직이지 않던 카이가 아닌가. 나는 호기심을 넘어 불길함까지 느끼며 그녀의 행동을 주시했다. 벌컥. 카이는 단번에 창문을 열어 젖혔다. 창을 통해 들어온 바람이 상당히 떨 어져 있는 내 피부에까지 와 닿았다. 시기는 봄에 접어들고 있었지만 가끔 씩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까지도 많이 쌀쌀한 채였다. 하지만 카이는 전혀 아랑곳 않고 멀리 남쪽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라루트 섬인가……." 얼핏 카이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라루트 섬은 크로시아 대륙의 최남단, 아 르윈과 카르틴의 중간쯤에 위치한 섬이다. 급한 급류 때문인지, 정말 소문 대로 무시무시한 괴물이 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 발을 딛고 살아나온 자가 단 한사람도 없었기에 죽음의 섬이라는 말로도 더욱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카이가 왜 그 섬에 대해서? 한참 카이의 진의를 추측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의 하얀 손이 공기를 퍼 올리기라도 할 듯 살짝 들려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 는 손을 시작으로 몸 전체를 천천히 창 밖으로 내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시선을 주고 있는 먼 곳을 향해 떠나버릴 것 같이. "카이!" 호기심 반 불안감 반에서 이제는 완전히 불안감에 휩싸인 내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게 있어 변치 않은 그 모습대로 영원히 함께 할 존재였 던 카이의 이 돌발적인 변화는 내 가슴에 불길한 파문을 만들기에 충분했 다. "카이!!!" 다시 한번 강한 나의 부름에 카이가 그제야 손을 원위치 시키고 몸을 내 게로 돌렸다. 그리고 평소의 걸음걸이로 다시 소파로 되돌아가 앉았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그녀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대체 무슨 일이야?" 아직 흥분기가 남아있었는지 언성이 조금 높아져 있었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카이는 담담한 붉은 색의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불안하게 한 것 같군. 말도 없이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인 것에 사 과하지." 카이의 눈동자와 어조에 흔들림이 없다는 확신을 받은 나는 그제야 약간 안심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심을 하고 나자 곧 조금 전에 있었던 그 행동에 대한 의문이 새록새록 피어올랐다.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이야?" "세뮤르·세이에가 나를 부르는 듯 하다." "세…뮤르? 누구? 다른 드래곤?" "거의 삼만년 가까이 생존해 오고 있어 나와도 몇 번 정도 얼굴을 맞대본 적이 있는 암룡이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 못하겠다는 시선을 보내자 카이가 어린애 가르치듯 처음부터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조금 전, 나는 이상한 감각과 전해져 옴을 느꼈다. 그것이 지금껏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었기에 확인을 위해 그 감각에 전해져 오고 있는 방향의 창을 열어 본 것이다. 그 결과 어떠한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세뮤 르·세이에가 나를 부르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드래곤들은 서로 떨 어져 있어도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모양이다." "뭐…뭐야… 꼭 남 얘기처럼… 십만년이나 살고도 그런 것 하나 몰랐어?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 산 드래곤 아니야?" "그렇다." 난 황당해서 카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또 한번 그녀가 친절히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드래곤은 같은 드래곤을 스쳐 지나는 작은 흙알갱이 보다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간에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는다. 애 초부터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저 홀로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도 이유가 되겠지." "그건 알고 있어. 그런데?"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은 드래곤이 드래곤에게 '용건' 을 가지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실제로 십만 년을 살아보았지만 이번 경우처럼 드래곤이 일부러 먼 땅에 떨어져 있는 다른 드래곤을 부르는 일 같은 것은 단 한번 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으음~ 그렇구나……."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순간 몸이 경직되어 오는 것을 느꼈다. 있을 수 없는 일. 그녀의 사고범위로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 일어났다는 것은? "…그… 드래곤에게 갈 거야?"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녀가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모두 내가 호 기심을 자극하는 이상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닌가? 그러니 이번에도 그렇게 하지 않을까? 내 곁을 떠나 그에게 가버리는 것은 아닐까? "가지 않는다." 그녀가 무척이나 간단히 그 말을 내뱉었다. 이런 저런 불길한 예상안을 잔뜩 늘어놓고 있었기에 기뻐해야 할 만한 일임에도 은근히 허탈감이 밀려 옴을 느꼈다. 기분 탓인지 그 허탈감과 함께 욱신거리기 시작하는 머리를 한 손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실, 네가 알고자 했던 나의 비밀도 다 알아냈잖아. 이대로 떠난다 해도 네겐 아쉬울 것도 없지." "너의 비밀이라는 것은 나로서는 수용하지 못할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또 한 너를 지켜보며 진실을 구하는 대가는, 내 숨이 다하지 않는 한 너를 계 속 지켜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내가 진실을 알아냈다고 떠난다면 그것은 약속 위반인 셈이지." "…양심적이네." "현재 군의 역전세가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네 신변이 가장 위험한 시기이 다. 잠시라도 너의 곁을 떠나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만에 하나라도 세뮤르·세이에가 미쳤을 가능성을 생각해 하루쯤 시간을 내어 들려 보아 야할 의무는 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나는 나름대로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그 말에서 기분 나쁜 모순이 느껴졌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말 하고 있지만, 카이는 이미 종족의 금기이자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고 있는 중이 아닌가. 폴리모프를 하여 타종족과 관계를 맺을 때엔 힘의 크기에 선을 긋고, 어 떤 상황에서도 결코 본연의 힘을 전부 발휘해서는 안 된다. 이 세계의 존 속을 위해서 결코 깨어서는 안될 금기! 하지만 세계의 멸망까지 거론되는 저 거창한 금기에 비해 한 인간과 한 약속 따윈 솔직히 너무도 사소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한데도 평소 만인의 안전을 부르짖는(?) 카이가 그 금기를 깨고 무조건적으로 나 의 목숨만은 지켜주겠다 맹세했다. 이렇듯 내 경우를 감안했을 때, 카이는 오랜 시간 변화 없는 상황에 무료 해진 덕분으로 특이한 존재나 호기심이 샘솟는 상황에 상당히 약하다는 결 론이 나온다. "종족의 금기를 깨고 내게 수호를 약속한 이유도 내가 꽤나 특이한 존재 였기 때문이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역시 나와의 약속을 깨버리고 당장에 그 드래곤에게 날아가고 싶어 엉덩이가 근질근질한 거 아냐?" "전혀." "쳇, 거짓말. 가고 싶은 주제에." 내 심각한 고찰의 결과를 무참히 짓밟고 카이가 또 한번 정반대의 대답을 하자, 나는 퉁명스럽게 그녀를 향해 톡 내뱉었다. 그러나 이내 내 얼굴에 떠올랐던 그 불만은 자취를 감추었다. 카이가 거짓말 따윌 할 리가 없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벼운 허 세를 위해서라던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거짓말을 할 만큼 감정적 여유가 남아있는 존재도 아니었다. 약간의 혼란함. 가볍게 욱신거리던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나는 고개를 한 번 저은 다음 이번에는 아주 진지한 어조로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왜 알고 싶지 않다는 거지? 상당히 궁금한 일텐데?" 내 물음이 떨어졌음에도 카이는 평소와 같이 금방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 실수를 했다는 눈치였다. 그녀의 행동이 이상하게 불안하게 느껴져 나는 아랫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긴 하다." "근데?" 또 다시 그녀가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참을성이 이미 바닥난 내가 날카 롭게 눈꼬리를 세우며 다시 한번 '근데?' 를 반복하자 카이는 결국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내게 있어 이상한 일이 궁금한 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직설적으 로 말해, 다른 감정들과 마한가지로 호기심이라 불리는 진실을 갈구하는 열정 또한 오랜 세월에 삭아 이미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뭐… 뭐?"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나는 어떠한 연유에서 그런 일이 발생하였는지 알아보기 위해 움직이곤 한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이 무슨 일인지 궁금해 견딜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지. 전에도 이야기한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일이 그리 즐겁지도, 슬프지도, 화나지도 않는다고. 하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심한 모욕을 받으면 화를 낼 것이다. 진정으로 화 가 난 것은 아니지만, 그저 상황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위 상황도 마찬가지……." "쓸데없는 설명은 거기까지!! 누구 맘대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말이 다 르잖아! 내 경우는 그럼 뭐야? 지금 한 말대로라면, 그렇다면 왜 내 비밀을 빌미로 곁에 붙어있기로 한 거지? 호기심 따위 말라버린 지 오래인데! 별 로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나' 라는 신기한 존재에 종족의 금기까지 깰만한 가치가 있을 리 없잖아?" 잔뜩 흥분한 내가 카이를 향해 빽 소리질렀다. 역시 조금 전 카이가 곧바 로 대답을 하지 않고 망설인 것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눈을 부리 부리하게 뜨고 노려보듯 하고 있자 카이가 이내 약간 한숨을 쉬고 이야기 를 시작했다. "그래, 보통이라면 금기를 깨면서까지 네 특이점을 알아보기 위한 거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네 진실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그것은 단지 만남의 계기일 뿐이지. 너만이 특별대우인 것이다." "특별?" 그 말을 하자 머리가 더욱 욱신거려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이해하지 못할 말만하니까 뒷골이 이렇게 땡기잖아!" 유쾌하지 못한 모든 상황을 전부 카이의 탓으로 떠넘기며 큰소리로 신경 질을 한번 내던 나는 의자를 뒤로 밀어내고 책상에서 완전히 비켜 나왔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번 카이에게 물었다. "왜 나만이 특별하다는 건데?" "이야기는 거기까지다. 더 이상은 답하지 않겠다." "뭐야!?" 나는 순간 울컥하여 버럭 소릴 질렀다. 이상하게도 그 특별이라는 단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갑자기 속까지 거북해져와서 기분은 최악으로 다 다르고 있었다.. "사람 찜찜하게 만들지마! 나에 대한 것인데 뭘 말하지 않겠단 거야?" "언젠가 말해줄 때가 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말해!" "거절하겠다." "너……!! 좋아! 카르틴의 에뮤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물을 테다! 완전히 화가 나서 날뛰던 에뮤가 갑자기 생각이 있겠지 어쩌니하며 그냥 물러났었 지? 그때는 그러려니 했었는데 분명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거야!! 그래, 대답 안 해주면 네가 인간으로 둔갑한 드래곤임을 확 까발려버리겠다고 협 박해서……." 완전히 스팀을 받은 나는 저 혼자 천장을 향해 소리치며 짜증을 부렸다. 하지만 갑작스레 가슴이 굉장히 답답해져 와서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크 게 구부렸다. "으… 뭐야, 빌어먹을… 체했나……?" 난 손으로 가슴을 매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우…윽!!" 갑자기 격한 신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별 것 아닌 두통이라 생각했 던 것이 갑자기 극심한 고통으로 바뀌었던 탓에 의도하지 않은 신음소리를 자신도 모르게 내버린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아픔에 혼란에 휩싸인 내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간신히 머리에 얹자마자 그저 갑갑한 정도였던 가슴 이 탁 막혀왔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두통도 두통이지만 갑자기 숨 을 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곧 본능에 따라 나는 공기를 들이키기 위해 턱에 힘을 주어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신맛의 위액만이 입가를 타고 흐를 뿐 나의 몸은 전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생각조차 허용치 않는 고통이 머리를 타고 온몸을 지배하기 시작했 다. 덕분에 전력을 다해 버티고 있던 나의 몸은 힘없이 땅바닥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토록 괴로운데도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항 밖에 끌려나온 횟집 생선 마냥 입을 뻐끔거리면서 미친듯 이 몸을 비틀어대는 것이 다였다. "리커버리." 고통과 함께 묘하게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조용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숨을 쉬어, 카류리드." 뭔가 몸 속으로 뜨거운 기운이 지나갔다고 느꼈을 때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급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 이것은 분명… "커허헉!!!" 카이의 목소리라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 숨이 터졌다. 나는 어깨까지 들썩 이며 아주 깊게, 그리고 빠르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뱉었다. 그 행동엔 얼마 동안 숨이 막히면서 들이키지 못한 산소를 이 기회에 모조리 먹어치우겠다 는 일념이 담겨 있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일일 줄이야!! 하지만 숨쉬는 행복을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희미한 두통과 가슴의 답답 함이 밀려왔다. 사람을 한순간 횟감거리 생선 수준으로 전락시켜버리는 고 통이 또 다시 시작되려하고 있다는 예감을 느꼈다. 그때 왼쪽 어깨에 따뜻한 기척이 닿았다. 잘은 모르지만 카이가 손을 얹 은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왼쪽어깨로부터 기분 좋은 해방감이 찾아들기 시작했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근원의 마수가 떨어져나간 듯한 느낌이랄까? "괜찮은가?" 차분히 상태를 묻는 카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겨우 정신을 추스려 땅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어올렸다. 내가 일어나려고 용을 쓰는 것 을 보고 카이가 조용히 나를 부축하여 앉도록 도와주었다. "달리 이상한 곳은 없는가?" "으…응……." 나는 목을 간신히 움직여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하지만 곧 온몸에 소름 이 돋기 시작했다. "왜… 왜 갑자기 이런… 나… 나 혹시 벼… 병이라도 있는 건가……?" 조금 전의 그 끔찍한 감각을 떠오르자 저절로 몸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자니 이런 내 불안감을 달래주 려는 듯 카이가 다정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따스한 감촉이 나는 조금씩 안정시켜갔다. 한동안 몸을 동그랗게 말고 그녀의 손길을 느끼던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 은 듯 하자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대답을 해달라는 뜻으 로 카이에게 시선을 보냈다. "네게 병이 있어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아…아니야? 그…근데 왜… 무지 아팠는데……." "독이다. 리커버리를 시전해 몸을 치유해도 체내에 남는 맹독이었기 때문 에 해독주문까지 사용해야 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마법으로 치유할 수 도 있다는 가정 하에 완전한 독살을 계획하기 위해서 신중히 독을 선별했 을 가능성이 크다." "독?"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결국 내가 누군가에게 독살 당할 뻔했다는 뜻 이 아닌가? "국왕군 측에서 날 노리고……." 쿵쿵쿵- 시끄러운 발소리가 나의 말을 방해했다. 내 거처 주변에서 이렇게 큰 소 리를 내는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였다. 누군가의 방문을 예감한 나는 카이의 품에서 떨어져 재빨리 얼굴과 몸을 정돈했다. "전하!! 잠시……." "들어와라!" 문 밖의 남자의 말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나의 허락을 떨어졌다. 이상할 정도로 빠른 대답에 병사는 좀 주춤한 기색이였으나 이내 다급히 문을 열 고 들어왔다. 그 병사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이었다. "전하, 아르디예……." "뭐야?!" 바로 조금 전 독이 든 차를 마시고서 바둥댔던 만큼 병사가 무엇을 말하 려 했는지 예상하고도 남았다. 아르 할아버지도 독에 당한 것이리라! 이번에도 끝까지 말을 맺지 못한 병사가 황당하게 눈을 키웠지만 내겐 더 이상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나는 엉거주춤 서있는 병사를 밀어내고서 전속력으로 복도를 뛰었다. 마법사 분들이 거처하고 있 을 옆 건물을 향해. ======================================= 가끔씩 상황 설명을 위해 대사가 길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골치가 아파요. '이 대사는 확 뺄까?' 싶다가도, 이걸 빼면 의문을 가지는 분들이 있지 않을까 싶고, '저걸 뺄까?' 해도 마찬가지고.... 후우, 슬픕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3) 이르나크의 장 Part 58 암살 (3) ------------------수능 대맞이 응원 구호!!---------------------- --------------------껜또(?) 대박 나셈!!!----------------------- 마법사분들의 거처인 건물은 아무 일도 없는 듯 고요했다. 대마법사인 그 분이 당했다는 소문이 퍼져서는 안되니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모양이 었다. 덕분에 품위고 뭐고 다 내팽개친 채 달려가고 있는 내 발자국 소리 는 더욱 시끄럽게 복도를 울렸다. 이 건물의 어디쯤에 그분들이 계신지 듣지는 못했지만 나는 무작정 아르 할아버지의 침실로 뛰었다. 나의 예상이 맞았는지 그곳은 고요한 장소 중 에서도 유일하게 여러 병사들과 시녀들로 웅성대고 있었다. "할아버지!" "시끄러워. 조용히 해." 작지만 강한 어조로 그렇게 말한 사람은 류온님이었다. 그분은 무엇을 한 것인지 안색이 좋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의자에 앉은 채로 침대에 누워있 는 사람에게 불안이 담긴 시선을 주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괴로운 듯 간간히 흘러나오는 신음소리, 그리고 무척이나 불규칙적인 숨소리. 침대에 누워계신 분은 바로 아르 할아버지였다. "맙소사! 할아버지께서 중독되신 거예요?!" "…네놈은 아무렇지도 않으냐? 우리들에게 이런 독이 보내졌다면 너도 예 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서 사람을 보냈는데." "아, 저도 중독되긴 했는데… 류…류온님은요!?" "뭐야? 중독됐다고!?" "전 괜찮아요! 어쨌거나 류온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무언가 정리정돈 되지 않은 대화가 시끄럽게 오갔다. 내가 너무 흥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온님은 일단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주지 않고는 제 대로 된 대화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하셨는지 차분히 숨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좋다! 나는 네 수식을 푸느라 정신이 없어서 저 빌어먹을 차를 마시지 않았고 덕분에 중독되지 않았다. 하지만 젠장! 아르디예프는 멍청하게 앉아 창 밖을 보면서 저걸 몽땅 마셔버렸단 말이다. 놈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내가 리커버리까지 시전해 몸을 치유했지만, 무슨 일인지 또 다시 점점 상 태가 나빠져 오고 있어. 리커버리로는 완전히 없애버릴 수 없는 독을 사용 한 모양이다!" 류온님은 말하는 동안 신경질을 섞어가며 내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간략히 이야기 해주었다. 역시 예상대로 적은 나뿐만이 아니라 8서클 마법사인 두 분까지 노린 것이다. "장난이 아니야. 무한대로 리커버리를 시전할 수는 없어! 해독약을 찾지 못하면 내가 지쳐 쓰러져버리는 순간 아르디예프는 죽은 목숨……!!" "해독할 수 있어요!!" 갑자기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어 류온님의 말을 끊었다. 내 곁에 느 껴지는 인기척이 이 문제를 해결해줄 실마리였다. "카이! 내게 했던 것처럼 아르 할아버지에게도 해독주문을 써 줘. 빨리!!" 난 고개를 빠르게 돌려 카이의 손을 냉큼 잡았다. 내가 말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가는 바람에 뒤늦게 출발한 카이가 지금에서야 이곳에 도착한 것이 다. 내 의도를 눈치챈 순간 분주하던 주위가 기대감으로 고요해지며 모든 시 선이 카이에게로 쏠렸다. "카이! 한시가 급하다고! 빨리!!" 난 다시 한번 다급히 그녀를 독촉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이는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만들어냈다.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해독주문 같은 것은 알고 있지 않습니다." "카…카이……." "고명하신 고위 마법사분들도 모르는 마법을 어찌하여 제가 알고 있다고 말씀하시는지요? 그리고 알고 있다한들 일개 검사일 뿐인 제가 어찌 그런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겠습니까." 카이는 어느새 카이야 혼 에스문드로 되돌아가 있었다. 나의 생명에 직접 적으로 관계된 일이 아닌 이상, 일정 선을 넘는 힘을 발휘하지 않겠다는 선언이 새삼 머리를 강타했다. "하…한번만! 이번 한번만 도와줘! 절대 이런 부탁 따윈 하지 않을 테니 까! 그렇지 않으면 아르 할아버진……!!" "전하, 안타깝지만 저는 마법을 시전할 줄 모르는 평범한 무인입니다." "제발!! 이러면 네가 곤란하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딱 한번만!! 제발!!" 끊임없이 나의 사정이 이어지자 곤란함을 가득 담고 있던 카이의 눈동자 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공손한 호위기사에서 위압적인 드래곤의 모 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 변화에 일말의 기대감이 송글 샘솟고 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자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카이야 혼 에스문드로서 일 정 범위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이것을 다르게 해석하면, 실제로 너의 소중한 자들을 구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대로 그들의 죽음을 방 관만 할 것이라는 뜻이다. 이 힘의 한계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너뿐이다." "왜, 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좋은 일인데, 왜 방관하겠다는 거야!!" "너에게는 좋은 일이겠지만, 적에게는 다르지 않겠는가? 나의 해독주문 하나로 상황은 큰 반전을 맞을 수도 있다. 너의 소중한 사람에게 모두 구 원의 손길을 뻗을 바에는, 애초부터 너를 이 전쟁에서 승리시켜 주는 편이 나았겠지." 카이를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녀가 결코 내 부탁을 들어 주지 않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진 방안에서 유일하게 아르 할아버지의 거친 숨 소리만이 들려왔다. 잠시동안 멍하니 그분에게 시선을 주던 나는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등뒤에 서있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주방에 관련된 일을 하는 자들을 모아라! 나와 마법사분들에 게 차를 가지고 온 시종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을 순회하는 병사, 음식재 료를 운반하는 일꾼까지 모조리!" 내 명령이 떨어졌을 때 문 쪽에서 한 차례 시끄러운 발소리가 울렸다. 자 연히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진 그곳에는 파란색 머리의 어린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아르디예프 님! 이런……!!" "때맞춰 왔군, 힐레인. 드래곤의 현자인 네 힘이 필요하다!" "예? 예! 알겠습니다!" 내 갑작스런 말에 힐레인이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긴 했지만, 이내 무슨 생각을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힐레인과 함께 빠르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당수의 하인들이 널따란 뒷마당에 모였다. 영문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 람들은 창을 들고 주위를 지키고 있는 병사들 덕분에 더욱 불안에 떨며 웅 성대고 있었다. "조용히 하라!" 내 강한 외침에 한순간 술렁임이 멈추었다. 나는 힐레인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녀석이 무언으로 준비가 되었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다시 시종들 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왜 너희들을 이곳에 모이게 했는지 궁금할 것이다." 바람을 타고 내 목소리가 광장을 크게 울렸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 까, 덕분에 그 목소리는 상당히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아는 사람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말하지. 8서클의 대마법사이신 아 르디예프님께서 너희들 중 누군가의 소행으로 독을 당하셨다. 발견이 늦어 져서 나의 수호자이신 드래곤께오서도 어찌 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고 결 국 그분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크게 술렁였다. "조용히 해라!" 다시 한번 그들의 술렁임을 진정시킨 것은 내가 아닌 힐레인이었다. 녀석 은 일단 내게 허리를 숙여 허락을 구한 다음, 두 명의 기사들과 함께 하인 들의 사이를 헤치고 걸어갔다. 하인들은 하나같이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들의 곁을 지나가는 힐레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번째 줄 중간쯤까지 걸어갔을 때 힐레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른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잔뜩 굳어있는 통통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겉보기엔 별달리 특기할 것이 없음에도 힐레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무엇이 그렇게 기쁘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하인이 몸을 움찔했다. 그는 그대로 몇걸음 물러서며 도리질을 치기 시작했다. "요…용서해주십시오! 그…그저 전……!! 용서해주십시오!!" "끌고 가라!" "히에엑!!" 힐레인의 말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달려들어 그를 포박했다. 남자는 듣기 괴로운 비명을 지르다가 눈물까지 흘리며 힐레인에게 소리쳤다. "살려주십시오! 확실히 기뻐하긴 했지만……!!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제 발!! 그저 마법사가 죽었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랬을 뿐입니다! 그게!! 그러 니까 평소 잘난 체 하는 마법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발 용서 를……!!" "궁색한 변명이라니, 우습지도 않구나! 드래곤께서 직접 보내신 내 앞에서 거짓이 통할 줄 알았더냐?" 힐레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냉랭하게 말했다. 그리고 고개를 조금 들어 하 인들을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카류리드 전하께오서는 드래곤의 비호를 약속 받으신 분! 전하의 심기를 어지럽힌 자는 드래곤의 노여움 또한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힐레인의 말에 하인들의 대부분이 창백해졌다. 힐레인은 주변을 돌아다니 며 또다시 몇 명을 더 추려내었다. 특별히 이상한 기색을 나타내는 자들을 빼낸 것이다. 힐레인이라고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을 완전히 읽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기분을 읽을 뿐이다. 그러니 조금 전의 그 통통한 남자처럼 무언가 나름대 로의 사정이 있어 재수 없게 이 일에 걸려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남 은 방법은 이런 식으로 범인을 추려내어 집중적으로 심문하는 것뿐이었다. 범인이 아닌 자에게는 정말 못할 짓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안면도 없는 그들보다는 아르 할아버지 한 분이 살아남길 원한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 더라도 이 군을 지휘하는 왕자인 나는 하인 따윈 몇백명을 희생시키는 한 이 있어도 8서클 마법사인 할아버지를 구해야 할 의무가 있다. 높은 자리 에 오만하게 서서 사람의 생명을 골라내고 솎아내는 짓에 익숙해 져야만 하는 것이다. 힐레인의 손에 골라내진 하인들은 평범하게 보이는 자들 뿐으로, 모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애걸복걸하고 있었다. 하지 만 나는 냉정하게 고개를 돌리고 다른 하인들까지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 리로 명령했다. "저들을 모조리 지하 고문실로 끌고 가라! 감히 주제를 모르고 아르디예 프님께 위해를 가한 놈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주겠다!" "히이익!!" "제가 한 게 아닙니다!!" "으아악!! 살려줘!!" 고문이라는 말이 나오자 그들은 더욱 질려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내 말 에 이어지는 힐레인의 말에 그들은 더욱 사색이 되었다. "저놈들의 피붙이들을 모조리 체포해와라! 일주일 후 동이 트는 그때, 그 들도 함께 처형시킬 것이다!!" 가족들에게 거액의 돈을 쥐어주고자 의뢰인의 청탁에 따라 목숨을 걸고 나와 할아버지들이 마실 차에 독을 푼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기에 그런 자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내려진 명령이었다.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진실을 실토하게 만들 수도 있으리라. "말도 안돼!!" "그럴 수는 없어요!!" 젊은 남자와 여인이 거의 동시에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둘 다 신혼으로 어린 자식을 한 둘 정도 가지고 있을 법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작은 악마 와도 같이 힐레인은 비웃음으로 그들에게 답했다. "드래곤의 노여움을 사고서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단 말이더냐!? 나의 진실된 주인이신 드래곤께서는 그것만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하셨다! 당장이라도 이 주변을 초토화시키려는 그분의 노여움을 이 정도로 막을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알아야 할 것이야!!" 힐레인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들은 병사들의 손에 의해 지하감옥으로 끌려 갔다. 감옥으로 끌려가는 자들은 아주 처절했지만, 이곳에 남은 자들의 대 부분은 반대로 얼굴에 화사한 기색을 드리우고 있었다. 저 그룹에서 자신 은 제외될 수 있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이었으리라. "기뻐하긴 이르다고 해두고 싶군. 이봐, 저놈도 끌어내라!" 그때 갑자기 힐레인이 눈이 찢어진 남자를 하나 더 골라내었다. 병사들이 힐레인이 지적한 남자를 끌어내는 위해 뛰어가는 동안, 하인들은 또 한번 공포의 도가니에 빠져 거의 숨도 쉬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지막에 새로이 지적해낸 자를 보고 있으려니 힐 레인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자신이 제외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의 주변 마나가 잔뜩 비웃음을 띄더군요. 상당히 유력한 놈입니다." 힐레인의 해명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힐레인에게 다시 한번 당부 했다. "힘들겠지만 부탁한다. 이런 일을 계획할만한 놈들이라면 고문에도 쉽사 리 입을 열지 않을 거야. 하지만 고문이 지속되다보면 잠시나마 마음도 약 해지는 순간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 순간을 잡아 낼 수 있을 거야. 그때 적절히 회유책을 사용해서 어떤 독을 썼는지 실토 하게 만들어야만 해! 한시라도 빨리!"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힐레인은 작은 주먹을 굳게 쥐어보인 다음 재빨리 병사들의 뒤를 쫓아 지 하감옥 쪽으로 뛰어갔다. 끔찍한 고문을 지켜봐야 함에도-나는 그 장면을 보고 나중에 꼴사납게 구역질하다가 기절하기까지 했다- 녀석은 흔들림이 거의 없었다. 사실 이 세계에 고문이란 것이 크게 드문 일도 아니니, 힐레 인도 예전에 상단 일을 하거나 주변을 돌면서 이런 장면을 봤을지 모르는 일이다. "돌아간다……." "예. 전하." 혼잣말이나 다름없는 내 말에 카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내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도록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주제에. "잘도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구나. 내 기분이 더럽다는 것을 알텐데, 나를 자극하려는 건가?" "그럴 의도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카이야 혼 에스문드가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답했다. 나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자박 자박 하고 나의 뒤를 따르는 그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동안 그 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자니 잔뜩 힘을 주어 일그러뜨리고 있던 얼굴이 저 도 모르게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인상을 쓰는 것도 그리 녹록 한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 솔직히 인정하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았던가. 사실, 조금 전 카이에게 했던 그 말은 진심이 아니다. 인 상을 쓰고 짜증을 내면서도 실제로는 카이의 뻔뻔한 대답이 되돌아오기를 바랬다. 우습게도 나는 변함 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안심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예."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결코 변하지 않을 위대하 신 드래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떠나지 않을 테지?" "……."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아무렇지 않게 내 곁에서 있겠지?" 다시 한번 내 물음이 떨어지자 그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 덕였다. "…나의 숨이 다하지 않는 한, 내가 너의 곁에서 완전히 떠나는 일은 결 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세계의 존속까지 걸어가며 맹세하건대 그 약 속은 절대적이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작게 흘러나온 카이의 말을 듣자 비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 사람들 앞에서 웃음 따윌 보였다간 곤란하기 때문에 얼 른 고개를 들었다. 해가 서산을 넘고 있었다. 문득, 오늘따라 하늘에 가득한 노을이 이상하리 만치 강하게 나의 눈을 사로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매혹적인 붉은 빛으로. ======================================== 드디어 한달 반에 걸친 이벤트 결과를 발표합니다. 원래 이벤트 결과란 것이 글과 함께 올리는 건데, 제가 워낙 심심찮게 잠수를 깊게 타서 항상 이벤트 결과를 늦게 발표하는군요. ㅠ.ㅠ;; 어쨌거나 많은 분들이 참가해주셨고 좋은 그림과 패러디가 많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딱 두명이 아니라 여러명을 뽑아 책 전질 이 아닌, 한두 권씩만 상품으로 보내드리는 방법도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몇 명을 뽑을지도 애매하 고, 커트라인의 경계도 모호하고.. 발송시의 문제도 있고... 어쨌든 좀 그렇더군요.;; 그래서 결국 수준급의 작품들 중 과감히 연필굴리 기! 를 했습니다. 쿨럭... 용서하세요. 그림 부문은 히노, 카이, 연을 그리신 프지님! 패러디 부문은 불면증을 쓰신 디세님! 으웃, 다른 후보분(?)들 안타까워요!! 전부 멋진 그 림과 패러디였는데 연필굴리기로 당락이 결정되다 니..=_=;; 어쨌건 이 두 분은 제게 메일을 주세요. 상품을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전질이 아니고, 2권이 없는 거 아시 져? ;;; 그리고 마지막으로!! 수능 잘 치세욥!!!!!!!!!!!!!!!!!!!!! 설마 수능 보시는 분들 중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있을까 싶지만, 만약 그런 님이 계시거든 어서어서 컴터 끄고 공부하러 가시길~~~~~~~!!! ^^;; 파팅~ ^0^/ 메일 hongik1999@hanmail.net 카페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이르나크의 장 외전 -류스밀리온과 아르디예프의 청춘! ---- 띄워 쓰기 안해요~ 드래그해서 한글에 옮겨 보시던지 하세요;;; ---- 길게 꼬리를 끈 여섯 사람의 그림자가 어둑해져 가는 수도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모두가 가벼운 차림으로 마차 대신 직접 걸음을 옮기고 있었지만, 길을 걷는 사람 중 그 일행이 상당한 신분일 것을 짐작하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앞 선 두 남자의 뒤를 따르는 네 명이 번쩍거리는 은색의 갑옷과 검을 소유하고 눈을 부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멈춘 곳은 '붉은 열정' 이라는 간판이 달린 3층의 건물로 주로 귀족 들만을 상대하는 최고급 여관이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 던 작은 키의 주인장이 재빠르게 튀어나왔다. 거의 날듯이 일행의 앞에 선 여관 주인장이 흑발의 청년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아이고, 로베리스님! 오셨습니까!!" "아, 준비는 잘해두었겠지?" "어떤 분의 명이신데 소홀히 했겠습니까! 예의 그 방에 귀여운 아이를 데 려다 뒀습니다요!" 로베리스는 흡족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곁에선 남자에 게 음흉한 미소를 보였다. "후후후, 아르디예프 선배님! 생명의 궁에서 지내기도 지루하셨텐데 여기서 특별한 재미를 느껴보시죠. 애들 수준은 제가 보장해드리겠습니다." "물론입죠! 제가 주인장이긴 하지만, 저희 집 같이 수준 높은 애들을 보유 한 곳도 드물답니다!!" 여관 주인장이 호기 좋게 맞장구를 쳤다. 아르디예프라 불린 청년은 어깨 까지 길게 자란 금발을 옆으로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그도 알 것 다 아는 20대의 청년인지라 이곳이 어떤 곳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다더니 사창가 얘기였나. 내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진짜 특별한 것을 보여주리라 예상했건만.' 아르디예프는 겨우 24살의 젊은 나이에 아르윈 유일의 8서클 마법사이신 레그시안님의 유일한 수제자가 된 자였다. 그것은 그의 마법적 재능이 범 상치가 않으며, 또한 미래의 새로운 8서클 마법사가 될 것임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마법사들이 작위를 포기하고 정치권력에 소원한 덕에 생명의 궁이 마 치 속세와는 전혀 별개의 신성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지만, 사실 그 곳에서 도 고위 마법사와 하위 마법사라는 권력구도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여느 인간집단이 다 그렇듯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그에게 갖은 아부성 발언을 일삼으며 따라다니는 존재들이 있었다. 아르디예프는 그런 자들은 시끄러운 날파리라고 치부해버리곤 했다. 그럼 에도 '날파리' 로 분류되는 이 후배의 감언이설에 넘어간 듯 따라온 것은, 최근 생명의 궁에서만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문득 색다른 일을 찾고 싶은 욕망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뭐, 여자를 안는 것도 오랜만이니… 나온 김에 그냥 즐기다 가야겠군.' 아르디예프는 그저 고개를 저으며 후배의 뒤를 따랐다. 기사 둘을 1층에 남겨 보초를 서게 한 두 사람이 남은 두 기사들 대동하고 위층으로 걸어 들어갔다. 1층은 휴게실 겸 식당, 2층은 단순한 여관방이었 지만 3층부터는 특별한 손님을 위한 최고급 방만이 준비되어 있었다. 아르 디예프를 위해 주인장이 준비한 곳은 3층에서도 특히 안쪽에 위치한 장소 였다. "여깁니다. 사실 준비된 아이가 약간 성질이 있는지라… 하지만 철저히 방 음처리가 되어있으니, 조금쯤은 소란을 피우셔도 상관없답니다. 안심하고 즐기십시오." "그럼 선배님, 특별한 시간 보내시길. 후후……." "뭐… 그러지……." 평소보다 더욱 음흉해 보이는 주인장과 후배의 얼굴이 뭔가 심상치가 않았 다. 그러나 사창가 일이 원래 다 이런 것 아니겠는가. 그들의 얼굴을 보고 도 달리 심각한 생각은 하지 못한 아르디예프는 바로 방문을 열었다. 방안은 은은히 스며드는 달만이 빛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밤일(?)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밝기가 최적이라 할만했다. 그는 나머지 기사 한 명을 밖에서 대기시킨 후 문을 닫았다. 여느 대저택에도 뒤지지 않을 화려한 방의 한켠에 베일에 쌓인 커다란 침 대가 놓여 있었다. 아르디예프는 그 안에 작게나마 인기척을 확인하며 걸 음을 옮겼다. 조용했다. 보통은 속옷 차림을 한 여인이 나타나 요사스런 웃음을 흘리며 그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아르디예프는 약간 난감했다. 베일을 걷어 침대안 쪽으로 들어간 그는 어정쩡하게 있다가 먼저 겉옷을 벗어 침대 곁에 놓인 탁자 위에 걸쳤다. 그때까지도 침대시트를 머리끝까지 푹 눌러쓴 여자 쪽 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말이 없군." "……." 어색한 상황에 억지로 짜낸 한마디에도 여전히 침묵이 계속되자 아르디예 프는 고개를 저으며 나머지 셔츠까지 벗기 시작했다. 탐탁치는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색다른 연출이겠거니 하면서. 그러나 셔츠를 채 벗기도 전에 이불 위로 보이는 굴곡이 상당히 작다는 것 을 깨달았다. 역시 이상하다. 아르디예프는 옷 벗는 작업을 멈추고 시트 위 로 손을 옮겼다. 그렇게 막 침대시트를 걷어내는 순간이었다. "으아악!!" 갑작스런 고함소리에 아르디예프는 적지 않게 놀라고 말았다. 하지만 이불 안쪽에서 튀어나온 작은 물체가 손을 마구 저으며 뒤로 물러서다가 침대 아래로 쿠당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반사적으로 침대위로 뛰어올라가 아래 쪽을 내려다보았다. "타테르 카르메나! 아즈 테세즈나!" 신기하기까지 한 짙은 분홍빛의 머리카락을 한 인영이 카르틴어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아르디예프의 카르틴어 실력이 완벽했다면 그 뜻은 분명, '가까이 오지마, 이 변태 자식아!' 였다. 작다. 손이 묶인 듯 양팔을 오므린 채로 휘젓고 있는 여인을 본 감상이었 다. 아니, 그건 분명 여인이 아니라 이제 막 10살을 넘긴 듯 보이는 소녀였 다! "허… 특별한 걸 보여주겠다더니… 맙소사……." 아르디예프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일부러 특별한 것을 준비한 로베리스에게는 안타깝게도 아르디예프는 최소한의 성도덕 관념은 잡혀진 남자였다. "로베리스 녀석!! 이런 아이에게 그런 일을 시키다니!" 게다가 아이의 동의도 받지 못한 상태인 듯 했다. 아르디예프는 치를 떨며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소녀를 위해 일부러 어색한 카르틴어를 사용해 말을 걸었다. "이리 와라. 아무 짓도 않을 테니……." "너 같은 놈의 말을 믿을 거 같아!? 저주나 받아라! 변태놈아!!" 과연 주인장의 말대로 소녀의 성질은 보통이 아니었다. 먼 카르틴에서 여 기까지 끌려왔으니-카르틴어를 쓰기에 그렇게 추측했다, 아마도 희귀한 핑 크색 머리카락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온 것이 아니었을까.- 어떤 순서로든 기가 죽었을 만도 한데 살기 등등한 얼굴로 그의 손을 내쳤던 것이다. 사정은 동정했으나 평민에게 저런 소릴 듣자니 아르디예프의 얼굴도 금새 일그러졌다. 사실, 사창가에 팔려왔으니 평민은커녕 천민일 가능성이 더욱 높았다. 평소 평민이나 아랫사람에게 충분히 여유를 베푸는 그였으나, 귀족 으로서 천민에게 정면으로 상욕을 들으면서까지 그런 자세를 유지할 이유 는 하등 존재하지 않았다. "앗-!!" 아르디예프는 소녀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잡아 거칠게 끌어당겨 소녀 를 침대 위로 내팽개치듯 던졌다. 손목의 고통에 짧게 신음을 낸 소녀였지 만 침대에 뉘여 지자마자 미칠 듯이 발광을 시작했다. 아르디예프로서는 좀 거칠기는 했으나 그저 침대위로 올려줄 작정이었건만 소녀는 본격적으 로 일이 시작될 것이라 추측했던 것이다. "이것 놔! 변태! 개자식!!" "아니! 기다려……!!" 아르디예프가 뭐라 상황설명을 할 틈도 없이 소녀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난 동을 부렸다. 덕에 아르디예프는 소녀의 팔다리에 맞는 것을 피할 수가 없 었다. "윽!" 짧은 비명이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 소녀의 주먹이 아르디예프의 콧등에 직격했던 탓이었다. 시큰거리는 고통과, 또한 이를 데 없는 모욕감이 밀려 왔다. 언제 그가 천민 따위에게 얻어맞을 일이 있었겠는가! 그것도 얼굴을 말이다. 거의 충동적으로 왼손을 뻗어 소녀의 몸을 힘껏 누른 아르디예프가 나머지 손을 높이 쳐들었다. 짝! "류스!!" 소녀의 뺨이 크게 돌아갔음에도 아르디예프는 카르틴어로 짧게 욕설까지 뱉어주며 다시 한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화를 참지 못해 한껏 힘을 주고 있던 그 왼손은 금새 딱딱히 굳어 멈추었다. 소녀를 누르고 있던 오 른손 덕에 아르디예프의 안색은 이미 완전히 백짓장으로 변해 있었다. "마…맙소사……." "죽어버려… 변태놈……." 소녀는 어느덧 찔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 아이를 누르던 아르디예프의 왼손이 우연찮게 다리 쪽(?)에 가 있었기에 알 수 있었던 일이었다. 아르디예프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몇 번이나 사창가를 드나들었고 이미 알 것 다 안다고 했지만 아르디예프도 실은 순진한 편이었다. 무료한 귀족 들이 가끔씩 색다른 재미를 위해 미동(美童)을 찾는 일은 흔한 편에 속했 지만 그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사안인 것이다. "이 파렴치한 놈들! 어린아이로 부족해서!!" 아르디예프는 소년을 놓고서 그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칠게 뛰어가 방문을 열어 젖혔다. 방밖에서 대기하던 기사가 깜짝 놀랐지만 아 르디예프는 상관치 않고 크게 소리질렀다. "로베리스!! 당장 나오지 못해!?" 아르디예프와 가까운 방에서 막 일을 치르려던 로베리스가 불화와 같은 노 성을 듣고 겨우 바지와 셔츠만 챙겨 입은 채 밖으로 튀어나왔다. 마찬가지 로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주인장까지 빠르게 그쪽으로 튀어 올라왔다. 아르 디예프는 완전히 붉어진 얼굴로 그들에게 삿대질을 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어린애를, 그것도 소년을 데리고서!!" "하하… 아르디예프 선배님, 처음엔 좀 어색할지 모르나… 가끔씩은 이런 것도 괜찮답니다." "시끄럽다! 내 다시 너 같은 놈을 상대했다간 내 성을 갈아치우겠다!" "서… 선배님!!" 완전히 당황한 로베리스가 사색이 되어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 까지도 가증스럽다는 듯 아르디예프는 완전히 일그러뜨린 얼굴로 몸을 돌 렸다. 그때였다. 아주 익숙한 방식으로 공기의 흐름이 달라진다고 느낀 것은. 퍼걱! "헉!" 본능이 시키는 대로 몸을 비튼 그는 어깨에 닿는 뜨거운 고통에 절로 신음 을 흘렸다. 무언가가 그의 어깨를 스치며 상당히 큰 상처를 낸 후였다. 단 한번도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정신이 아찔해져왔지만 아르디예프는 결코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상처의 돌봄도 잊은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정면을 직시했다. "헉헉… 죽어……."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분홍색의 눈동자가 아르디예프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숨을 격하게 쉬면서. "뭐…뭐야! 저 꼬마는!! 아, 아, 아, 암살자!?" 로베리스도 1서클 유저이긴 하나, 명색이 마법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눈으로 상황을 살핀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이 아르디예프에게 어떤 방식으 로 상처를 입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매직 애로우! 직전에 있었던 짧은 마나의 파동과 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는 그 마법이 었다. 비록 제대로 시전된 매직 애로우에 비해 훨씬 그 힘이 약했고, 시전 자의 상태도 심히 불안정해 보였으나… 그럼에도 저렇게 어린 나이로 마법 이라니! 로베리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치 않을 수가 없었다. "다가… 오지마!!" 아르디예프가 상처에도 아랑곳 않고 방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모습에 소년은 발작적으로 소리치며 뒤로 물러나고자 했다. 그러나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지쳐 그저 침대 위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상반신을 비틀 거리기만 했다. "으아악!" 아르디예프가 자신의 팔을 붙들자 소년은 비명을 질렀다. 정말 마지막이라 고 생각했기에. "어디서! 누구에게 그것을 배웠느냐!!" "……!!" 막 계속해서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에 카르틴어로 물어오는 아르디예프의 얼굴을 보고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자신에 의해 굉장히 심한 상처를 입었는데도 그딴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질문을 해오 고 있었던 것이다. "말해보라니까! 누가! 어떤 분이 네게 이런 대단한 힘을 물려주었느냐!!" "무…뭘! 아무도… 주지 않아… 내…내 힘이야……." 재차 반복되는 아르디예프의 질문에 소년이 울컥하여 대답했다. 어려서부 터 무언가를 뺏기기는 하되 무언가를 받은 기억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한 데 자신만의 이 특별한 힘이 누군가의 물려받음이라니! 그 대답을 들은 아르디예프는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이 내 정신을 차리고 소년을 한번에 번쩍 안아 올렸다. 오른쪽 어깨의 상처에 서 피가 철철 흘러, 작은 어린애를 들어올리는데도 힘이 부쳤지만 아무래 도 좋았다. 꿈에서라도 이런 아이를 놓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아이는 내가 맡겠다! 로베리스! 너는 돌아갈 마차라도 준비해라!!" "에? 이… 이 놈을? 아니, 근데 상처를……." "시끄러워!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진정 나와 대적이라도 해보겠다는 것 이냐?!" 횡설수설하는 로베리스를 다그치기 위해 위협까지 곁들였다. 아르디예프에 게 잘 보이는 것이 최대의 목적인 로베리스는 혼란스런 가운데서도 반사적 으로 아래층으로 뛰어내려갔다. "그, 그런데 나으리… 일부러 카르틴에서 비싼 값을 치르고 여기까지 데려 온 아이입니다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주인장은 갑작스런 상황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아이의 값을 챙기는 일을 잊지 않았다. 한껏 불쾌한 표정을 한 아르디예프가 소리쳤다. "클레모어 백작가에 하인을 보내라! 후에 아이의 돈을 지불하겠다!" "예이, 예이, 알겠습니다요." 더 이상 높으신 분의 비위를 거슬릴 필요는 없었다. 주인장은 완전히 허리 를 숙이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동작이 빠른 하인들을 시켜 응급처치를 할 약품과 가까운 곳의 의원을 불러오길 명령했다. 그때까지도 아르디예프는 무슨 상황인지 의아해하는 소년을 안은 채로 서 서 자신의 상처 따윈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 햇빛이 따사로왔다. 폭삭한 시트가 깔린 침대 위에 10살 가량의 아이가 멍 하니 앉아 있었다. 허리까지 기른 결 고운 분홍색 머리카락과 동색의 동그 란 눈동자, 조금 거칠지만 뽀얀 뺨을 가진 모습이 영락없는 소녀였으나, 실 은 상당히 난폭한 성질을 가진 남자아이였다. 곧 방문이 열리며 그 조용한 방안으로 금발에 인상 좋아 보이는 남자가 들 어섰다. "깼느냐?" "……." 소년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디예프라 했던가. 바 로 어제저녁, 자신에게 그렇게 상처를 입고도 깨끗한 잠자리와 따뜻한 음 식을 제공하며 미소하고 있는 이 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좋단 말인 가. 어린 소년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문제였다. "깨…깼어……." 소년은 다시 눈을 내리깔며 작게 대답했다. 아닌 척 하면서도 그는 주눅이 들어 있었다. 상대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도 한 몫 했고, 또한 빈민가에서 굶주리며 자라다가 사창가에 팔리기까지 한 소년에게 부유한 백작가의 저 택은 너무도 거대했다. "말버릇이 그게 무엇이냐. 무례한 놈 같으니……." 아르디예프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년이 앉은 침대 맡에 엉덩이를 걸쳤 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대단한 분노가 아님을 소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었다. 그때 가만히 시선을 주던 아르디예프가 소년의 머리에 오른손을 올렸다. 한대 맞기라도 할까봐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던 소년이었지만 아르디예프 가 그저 자신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기만 할 뿐이라는 것을 깨닫고 겨우 몸 을 폈다. 아르디예프는 한동안 말없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만 했다. 유일한 피붙이인 아버지에게서도 항상 욕만 들어오던 소년은 이런 경험이 굉장히 얼떨떨했다. "…어? 그러고 보니 팔!" 문득 아르디예프가 너무나 자연스레 오른쪽 팔을 움직이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대맡에 앉은 그가 빙긋 미소했다.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기는 했느냐? 이미 다 나았다, 이 녀석아." "어…어떻게… 바로 어제 그랬는데……!!" "그게 바로 위대한 마법의 힘이지." 팔을 내린 아르디예프가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팡팡 치며 대답했다. 차 기 8서클 마법사의 소질이 보이는 귀한 존재였던 탓으로, 밤새 생명의 궁 에서 6서클 고위 마법사가 부리나케 달려와 그를 치료해주고 갔던 것이다. 아르디예프의 대답을 들은 소년의 눈이 가득 흔들렸다. "마…법……?" 소년이라고 마법을 모르겠는가. 불덩이를 만들고 천둥을 치게 만드는가 하 면 순식간에 상처를 고치고 죽은 자도 살려낸다는-어디서나 과장은 있기 마련이다- 그 꿈과 같은 마법사의 이야기를!! 그 짧은 반응으로 충분히 소년의 속내를 알아챈 아르디예프가 빙글 웃으며 몸을 내밀었다. "내가 바로 그 마법사다." "거…거짓말……." "미안하구나, 진짜라서. 아직은 미숙한 단계이지만 정 뭣하다면 보여줄 수 도 있다." "그…그런……." 혼란스러워 하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아르디예프가 입 을 열었다. "그리고 너도 마법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단다. 이 믿을 수 없는 꼬마야." "내가!?" "먼저 물어보자. 어제 내게 날린 그 바람화살을 어떻게 만들어낸 것이지?" 소년의 앞에 바짝 달라붙은 아르디예프가 질문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조금 물러나며 곧장 대답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그러나 아르디예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의 압박 같은 것을 보내자 소년은 그제야 우물거리며 입 을 열었다. "조…좋아… 네가 이상한 짓도 안 했고… 빵도 줬으니까… 너한테만 말해 줄게……." "그래! 말해다오!!" "실은… 넌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 허공엔 보이지 않는 이상한 게 가득 차여있거든. 그럼 그걸 일정량 긁어모으는 거야. 그러다가 뭔가가 딱 맞아 떨어진다는 느낌이 오면 그 뭉글거리던 것이 이상한 막대기로 변해. 그걸 꼴 보기 싫은 놈한테 확 던져버리는 거지! 물론 정확히 맞으면 죽을지도 모르니까 살짝 비껴서… 이게 얼마나 대단하다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공 격하기 때문에 남들은 내가 그런 건 줄 모르거든. 그러니 재수 없는 놈을 혼내주는데 딱이지 뭐겠어! 물론 어제 넌 알아챘지만… 뭐, 그런데 꼭 좋은 것만도 아냐. 어떤 때는 잘 안되기도 하고, 일단 하고 나면 굉장히 힘드니 까……." 소년이 허공에 손을 저으며 애써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보며 아르디예프는 경악하고, 또한 그 이상의 희열을 느꼈다. "이것이, 이것이 느껴진단 말이냐! 그것을 네가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냐?" 아르디예프가 일부러 마나를 움직여 보이며 묻자 소년이 뜨악한 표정을 했 다. "윽! 나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내 비장의 무기가……." "이 꼬마야!! 그것이 바로 마법이다!!" "아?" 아르디예프는 소년의 어깨를 콱 쥐었다. 그리고 그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소년의 몸을 짤짤 흔들어댔다. "맙소사! 네가 정말 인간이더냐!! 선배의 도움 없이 마나를 느끼는 것만으 로도 놀랍건만 그저 육감만으로 마법의 구현을 가능케 하다니!! 이런 엄청 난 놈을 봤나!!" "헉, 윽! 이거… 놔!! 우왓!" 아직 어려서인지 아르디예프의 속뜻을 이해 못한 소년이 전날의 연속이라 도 재현되려나 싶어 몸을 비틀어댔다. 그제서야 아르디예프는 소년에게서 손을 딱 떼어냈다. "미안하구나. 하하… 네가 너무 영특해서 그랬다." "그… 여…영특……?" 겨우 영특이란 말의 의미도 몰랐다. 고등 교육을 마친 자들도 마법수식을 앞에 들면 고개부터 저어버리건만, 저런 무지한 아이가 벌써 1서클 유저라 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아니다!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아직 교육을 받지 못해서지 보통 귀족아이들보다 훨씬 명석한 아이리라! "꼬마야! 내가 앞으로 네게 마법을 가르쳐 주마! 그래서 네가 아르윈의 역 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9서클의 대 마법사가 되는 것이다!!" "대 마법사?" "그래! 근 4백년 동안 한번도 나타나지 못했던 9서클 마법사! 너라면 분명 히 가능할 것이다!! 내가 장담하마!" 소년은 한순간 꿈에 부풀어올랐다. 시궁창에서 그저 사는 것만을 생각하며 10살을 겨우 넘긴 아이였다. 언제나 노골적으로 뺏겨만 왔을 뿐이지-그를 사창가에 팔아넘긴 아버지도 매일 폭행을 일삼던 자인지라 소년은 충분히 그런 날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허를 찔려 배신당하는 등의 일은 당 해본 적이 없었다. 갑작스레 베푸는 자에게 사람에게 다른 속내가 있을 자 도 모른다는 고려 따윈 떠올리지도 않았다. 소년은 아르디예프의 호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눈을 빛냈다. "내가 진짜 위대한 마법사가 돼?" 소년의 얼굴에 생기가 들어가는 것을 보며 아르디예프가 미소했다. "못될 것도 없지! 아마 후대의 역사책에 이렇게 기록될 거다. 위대한 9서클 마법사이신… 아니… 아직 네 이름도 모르는구나." 막 소년의 이름을 호칭하려던 아르디예프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순간 소 년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조금 의아했지만 아르디예프는 바로 질문 했다. "이름이 무엇이냐?" "……." "언제까지나 꼬마녀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 "…몰라도 돼." 다시 반항적으로 돌변한 소년을 보고 아르디예프는 인상을 슬그머니 일그 러뜨렸다. 아무리 하늘의 재능을 부여받은 아이라 한들 코딱지 만한 천민 꼬마에게 계속 반말을 듣거나 건방진 소리를 듣는 것이 그리 유쾌한 것만 은 아니었다. "내 참고는 있었다만 천민 놈이 너무나 건방지구나." "아냐! 천민 아냐! 평…민이야……." 그래도 평민이라고 천민 취급당한 것에 발끈하던 소년이 아르디예프를 보 고 슬그머니 말꼬리를 흐렸다. 자신이 평민이면 상대는? 소년의 시선이 힐끔 위를 향했다. 아르디예프의 머리카락은 빛에 반사되어 아름다운 황금빛에, 그리 미남은 아니었으나 단정하여 귀족 특유의 고귀함 을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또한 그의 어조나 몸동작부터가 평소 보던 자들 과는 전혀 다른 우아함을 보였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내지는 주인 아들-이 바로 그가 아닌가! 사실 소년이 귀족에게 막말을 할 만큼 생각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런 짓을 했었다면 예전에 황천으로 떠나 이 자리에는 있지도 못했으리라. 그 저 어젯밤 일로 위기의식을 느껴 반말을 사용하게 된 것이, 지금에 와서 싹 존댓말로 바꾸기가 어색하고 해서 끝끝내 반말을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 다. "류스……." 기가 팍 죽은 소년이 고개를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이쯤까지 오자 아르디 예프의 안색도 확 바뀌었다. 그토록 상냥하게 대해주었더니 끝끝내 나오는 말이 욕지거리라니. 류스는 카르틴말로 빌어먹을놈, 등으로 쓰이는 일반적 인 욕이었던 것이다. "꼬마야! 내 언제까지고 네게 호의적으로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판이 다!" 호의적으로 나오지 않으면 고문을 하거나 죽일 것인가? 물론 그럴 수는 없 었다. 그럼에도 아르디예프는 소년의 버릇을 고치기 위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나오는 대로 협박을 시도했다. 사색이 된 아이가 아랫입술을 꽉 문 채로 고개를 팩팩 흔들었다. 아르디예 프가 의아하게 보고 있자니 소년이 겨우 고개를 들어올렸다. "내 이름……." "뭐?" "내 이름이 류스다! 술주정뱅이 울 아빠가 그렇게 불렀어!" 아르디예프가 입을 벌리고 있자 류스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이 입술을 우물 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크레샤도 탈펜도 천민주제에 류스라고 부르고… 검은 고양이 놈도 그 래……. 난… 류스니까……." 아르디예프는 문득 어젯저녁 소년이 왜 목숨을 걸어가며 자신에게 마법까 지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젯저녁 자신이 소년을 때리며 한 욕이 바로 '류스' 였다. 소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름을 증오하는 듯 보였다. "곤란하군……." 아르디예프의 작은 중얼거림에 류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며 눈을 깜빡였 다. 류스의 시선을 받으며 아르디예프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류스밀리온으로 하자." "아?" "미래의 9서클 대마법사의 이름이 류스가 뭐냐! 그러니 네게 류스밀리온이 라는 이름을 주마. 이것은 얼마 전 유적에서 발견된 고어인데, 앞서나가는 고고한 자라는 뜻이란다. 아, 물론 정확한 것은 아니지. 아직 고위 마법사 님들께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 그저 그 문자와 함께 석판에 새겨진 음각의 그림을 보고 내가 그렇게 추측하는 것뿐이니까. 하지만 쯧이 조금 엇나간 다 해도 충분히 멋진 어감이라 생각지 않느냐?" 소년은 할말을 잃었다. 언제나 자신의 이름을 들은 자들은 비웃음과 조롱 을 던졌다. 그러한데 새 이름을 주겠다니! 무엇이 이 사람을 이토록이나 상 냥하게 만들었을까! 아르디예프는 웃으며 소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이마를 조용 히 맞대며 말했다. "우선 교양 있는 아르윈어를 배워야겠구나. 너는 더 이상 류스가 아닌 류 스밀리온이니 새로이 아르윈 왕국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 제자가 되어 최고의 마법사로 거듭나는 거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마." 아르디예프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조용히 류스밀리온의 머리를 울렸다. 아 직 혼란했지만 소년은 이 손을 쉽사리 놓칠 수가 없을 것을 아련히 짐작했 다. ====================================================== 압니다, "외전 따위 필요 없어!" 라고 외치시는 당신! 그 맘 왜 모르겠습니까;; 본편에 대해서는... 곧 올리긴 할 건데요, 현재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꽃피고 있는 관계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이건 대대적인 수정의 가능성은 전혀 없는 외전! 정말 할 일 없으신 여러분들을 위해 먼저 올립니다. 아, 그리고 이 외전 말인데요, 종니 깁니다!! 캬캬캬캬!(퍼걱!) 아주 각오하고 보세요~ 흘흘흘~ 제목은 상관치 마세요. 아직은 미정이고... 그냥 심심해서...;; 아, 각종 사소한 미스지적 환영합니다!! 나이라든지 머리카락 길이라든지;; 정신없이 쓴 글이라... 이르나크의 장 외전 -류스밀리온과 아르디예프의 청춘! (2) 길게 기른 분홍색 머리카락 덕에 성별이 모호해 보이는 소년이 3층의 복도 를 종종걸음쳐 가고 있었다. 다름 아닌 반가운 사람이 저택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류스밀리온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를 마구 휘날리며 뛰어 나가고 싶었지만 복도에서 천박하게 뛰어서는 안 된다는 불호령을 여러 번 들은 차라 마음만이 다급하게 앞서나가고 있었다. 그때 맞은 편에서 누군 가가 거친 발자국 소리를 내며 류스밀리온에게로 뛰어왔다. "류온!" "와!!" 얼굴에 닿는 화려한 금발머리에 류스밀리온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그를 번쩍 들어올려 거리낌 없이 애정표현을 해준 사람은 거의 3주일만에 생명 의 궁에서 나온 아르디예프였다. "잘 있었느냐? 아픈 곳은 없었고?" "옙! 나는 건강이 있어!" 존댓말 섞인 반말에 문법까지 틀렸지만 제법 괜찮은 아르윈어를 구사하고 있었기에 아르디예프는 나무라기보다는 흐뭇하게 웃었다. 13살 무렵 시작 한 아르윈어가 겨우 1년 남짓한 시간에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 로 늘었다. 아르디예프도 16살의 어린 나이에 카르틴어를 완전히 마스터했 지만-억양까지 완벽하진 못하다-, 이 작은 꼬마아이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이해력이 뛰어났다. "근데 아르 스승님! 내 것 보여 줄게." "응?" 아직은 류스밀리온의 아르윈어 실력이 부족해 저 짧은 말만으로는 도통 무 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카르틴어로 말해보라고 하던 차에 류스밀리온이 씨익 웃음을 띄우며 품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이것 보여 줄게!! 헤헤헤헤……." 음흉한(?) 웃음과 함께 무언가가 가득 적힌 종이조각이 내밀어졌다. 류스밀 리온의 경박한 웃음을 나무라려던 아르디예프는 일단 한 손으로 녀석을 품 에 기대듯 안은 채 다른 손으로 그 종이를 폈다. "……!!" "어때. 아르 스승님." 류스밀리온이 분홍빛이 담긴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지만 아르디예 프는 한동안 답이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계속되어 류스밀리온이 약간 불안감까지 느끼고 있을 때였다. "이걸… 너 혼자서 풀었다는 거냐!!!" 얼굴을 가까이 댄 채로 예고도 없이 빽 소리를 질렀기에 류스밀리온은 한 동안 가슴이 벌렁벌렁했다. 하지만 아르디예프가 그저 호통을 치려는 의도 로 그런 것이 아님을 금방 눈치채고 우쭐하여 말했다. "옙! 아르 스승님 보여주려고 여기다가 깨끗하게 했어. 일주일 전에 내가 했어. 이젠 책 안 보고 전부 다 한다? 히히히." 그동안 클레모어 가의 저택에서 생활하며 배운 교양은 전부 어쨌는지 류스 밀리온이 입을 죽 찢으며 히죽히죽 웃었다. 그 폼을 가만히 보던 아르디예 프가 갑자기 류스밀리온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높이 들어올렸다. "류온! 이 믿을 수 없는 꼬마녀석! 과연 내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구나!! 하하하하." "아르 스승님! 우왓!" 류스밀리온이 깜짝깜짝 놀라는데도 아르디예프는 아랑곳없이 그 자리를 빙 빙 돌았다. 주변에 있던 하인들이 그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마저 개의치 않은 채로, 체면 차리지 않고 그는 연신 웃음을 보였다. "겨우 1년 새에 1서클을 마스터해버리다니! 네가 정말 내 제자가 맞느냐!" "아르 스승님이 스승하고 싶다고 했다, 했잖아." "요 맹랑한 놈!! 내가 너를 가르쳤으니 당연히 스승인게지! 그리고 언제까 지 반말을 고수할 참이냐!" "높임말이 잘 몰라. 나는 아르윈어 공부가 싫고 마법 공부가 좋아." 류스밀리온이 입을 동그랗게 말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아르디예프가 귀여워 죽겠다는 듯 그를 아래로 내려 품에 꼭 안아 머리카락에 얼굴을 한번 부볐 다. 류스밀리온이 싫다며 손을 내밀었지만 그도 내심은 아르디예프의 애정 표현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았다. 한참 후에야 류스밀리온을 땅에 내려놓은 아르디예프는 어느덧 엉덩이에 닿을 만큼 길어버린 긴 분홍색 머리를 슥슥 쓸어내렸다. "좋아! 네가 장차 위대한 마법사가 될 것을 감안한다면 그 정도는 봐줄 수 도 있겠지! 아르윈어는 천천히 배워도 좋다." "정말? 야호!" "하지만 최소한의 교양은 갖춰야 하지 않겠느냐! 사람이란 모름지기 몸가 짐에서 그 품격이 드러나는 법이다. 좀 얌전해지거라." "…예… 알았어……." 한바탕 팔을 휘두르고 있던 류스밀리온이 슬그머니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류스밀리온의 출신을 알고 있는 백작과 백작부인, 그리고 저택의 하인들이 아주 작은 꼬투리만 보여도 천박하다는 말과 함께 눈을 흘겼기에 그 역시 최소한 행동만이라도 조심하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저 지금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르디예프가 돌아왔기에 조금(?) 들뜬 것 뿐이었다. "류온. 점심은 먹었느냐?" "아니요. 안 먹었어."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이 꼬마가 할 줄 아는 존댓말은 예, 아니오 정도였 다. 어색한 그 말투가 조금 더 귀엽게 느껴져 아르디예프의 얼굴에 다시금 미소가 돌았다. "나도 레그시안님-현재 아르윈 유일의 8서클 마법사-께 간신히 허락을 얻 어 생명의 궁을 빠져나오느라 아침도 먹지 못했단다. 오랜만에 같이 점심 이나 먹을까?" "예! 오랜만에 먹을래!" 마법사인 아르디예프가 클레모어 가의 저택에 머무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 았다. 류스밀리온은 자주 오지 않을 기회를 놓칠세라 강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빙긋 미소를 머금은 아르디예프는 다시 한번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 손을 꼬옥 잡고 중앙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저택의 식당은 1층의 거 대한 홀에서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 위치했다. "마중을 못해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르디예프님. 식사를 하시겠습니 까." 그들이 막 1층 홀이 보이는 곳까지 계단을 내려갔을 때, 검은색의 깔끔한 정장을 입은 집사가 나타나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아르디예프가 방문을 하였음에도 뒤늦게 나타나 인사를 하게 된 것을 죄송스러워하는 눈 치였다. 하지만 아르디예프가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바람같이 류스밀리온을 보러 뛰어올라갔던 탓에 벌어진 일이라 집사는 무죄였다. "오랜만이군, 집사. 좀 이른 시간이지만 간단하게 식사를 준비해……." "안냐-세요-." 막 이야기를 하던 아르디예프는 곁에 선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숙여 집사에 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말을 멈췄다. 그는 곧장 손을 뻗어 류스밀리 온의 작은 머리통을 콱 잡아 위로 당겼다. "억?" 본의 아니게 고개를 위로 높이 쳐든 류스밀리온이 눈동자를 데굴 굴려 아 르디예프를 올려다보았다. 아르디예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이…인사하는데… 앗……." 아르디예프의 손이 가볍게 류스밀리온의 머리를 때렸다. "겨우 하인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고개까지 숙일 필요는 없다." "에? 하지만 나는……." 평민인데… 라는 말이 아르디예프의 험한 시선에 쏙 들어가고 말았다. 아 르디예프가 저러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류스밀리온은 눈만 깜빡거렸다. 집사는 거대한 백작저택을 관리하는 자인만큼 귀족은 아니었지만 많은 교 양을 가진 지식인이다. 보통 평민에게 있어 귀족은 아닐지라도 충분히 상 류층의 범주에 드는 것이다. 때문에 류스밀리온뿐만이 아니라 집사 역시 이 작은 아이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디예 프는 그 일에 곧장 제동을 걸었다. "너는 선택받은 자, 곧 마법사다. 비록 하늘의 실수로 천한 신분으로 태어 났다고는 하나 내 손에서 그 재능에 빛을 본 이상 하인 따위에게 굽실거릴 필요가 없다. 말도 필요 이상으로 높이지 말거라." "그…그래도……." 집사 나으리 앞에서 어떻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반말로 인사를 한단 말인 가? 사실 다른 하인들을 볼 때도 항시 고개 숙여 인사하는 류스밀리온이었 거늘. 아르디예프는 고개를 저었다. "내 앞에서는 천방지축인 놈이 무엇을 그리 머뭇대느냐. 네가 가진 힘만큼 적당 선까지는 거만해져도 좋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눈앞에서 은근히 불편한 표정을 한 집사를 보며 류스밀리온은 잠시 망설였 다. 하지만 아르디예프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칠 것이 있으랴. 소년은 본디 소심한 부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랜만이군!" 류스밀리온이 오른손을 슥 들어 아르디예프의 흉내를 냈다. 덕에 풋- 하며 아르디예프가 웃음을 터뜨렸다. "곤란한 일만 벌이는구나, 아르." 문득 주변을 가득 채운 라벤더 향기가 세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풍성한 금발을 위로 틀어 올린 우아한 중년 여인과, 마찬가지로 짧게 커트한 금발 의 청년이 중앙계단의 가운데쯤에 서있었다. "어머님. 제이넨." "오셨군요, 아르 형님." 제이네프-제이넨의 정식이름-가 빙긋 웃으며 오랜만에 저택에 걸음을 한 형을 반겼다. 하지만 천천히 계단을 걸어내려 오는 백작부인은 눈을 가늘 게 뜨며 불만부터 내뱉었다. "사창가의 아이를 집 안으로 끌어들여 마법을 가르치겠다 선언한 것으로 부족해,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까지 취하게 할 셈이냐." "…사실 저도 어머님과 비슷한 생각입니다, 형님." 제이네프 조금 늦게 계단을 내려와 그들의 곁에 서며 말했다. 그러나 아르 디예프는 그 즉시 강하게 반발했다. "류온은 그저 단순한 평민아이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 1년 동안 1서클을 완전히 마스터하였단 말입니다! 그도 이제 엄연히 대우를 받아 마땅한 마 법사입니다!" 아르디예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상당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르디 예프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임에도 쉽사리 그것을 믿기가 힘들었다. 하지 만 그것도 잠시 백작 부인이 엄하게 아르디예프를 질책했다. "저 아이가 대단하다는 것은 내 인정하마! 하지만 네 행태가 그것이 무엇 이냐! 이젠 아주 어미에게까지 눈을 부릅뜨는구나! 생명의 궁에서 지낼 터 이니 더 이상 부모도 형제도 필요 없다 이것이더냐?" "그…그런… 너무 과민 반응이십니다." "아니면 무엇이더냐! 거의 한달 만에 저택에 오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 만난 사람이 저 아이라니! 제이넨이나 아버지야 일로 자주 부재중이니 그 렇게 손치더라도, 어찌하여 2층에 위치한 이 어미 방에 들리기도 전에 3층 까지 뛰어올라가 저 아이를 찾았더란 말이냐." "…그…것이… 류온의 성취가 얼마나 되었을지… 궁금함을 참지 못하 여……." 변명을 하던 아르디예프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실제로 이 집에 올 때까지 아버지나 어머니, 동생들에 관한 일은 까맣게 잊고만 있었다. 그저 류온이 어찌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만 왱왱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생명의 궁에 발 을 들이고 난 후, 아르디예프의 머리는 마법에 관련된 일로만 가득 차서 어느덧 가족조차도 한 단계 아래로 분류하고 있었다. 아르디예프가 곤란해하고 있자 백작부인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못마땅한 시선을 류스밀리온에게로 주었다. 너무 긴 이야기라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 했지만, 대강의 핵심은 이해한 류스밀리온이 슬그머니 아르디예프의 뒤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아르디예프는 당장에 그를 앞으로 끌어냈다. "모든 일은 내 잘못이니 네가 주눅이 들것은 없다. 아직 인사도 올리지 않 았지. 앞으로 나와 배운 대로 인사를 드리거라." "에, 예……. 아, 안냐-세요-. 점심 식사가 하였나-." 류스밀리온이 넙죽 고개를 숙이고 제 나름대로 정중함을 담아 인사를 했 다. 심기가 불편했던 백작부인이었으나 애써 안나오는 아르윈어로 어색하 게 인사를 하는 아이를 보자니 얼굴이 스르륵 풀렸다. 사실 그녀도 그리 독한 성격을 가진 여인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 집 안 사람들은 예외 없이 기본적으로 /부드러운/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 지 않았다면 아무리 아르디예프의 부탁이라 한들, 천한 신분의 류스밀리온 이 저택의 한쪽 방을 차지하고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으리라. "되었다. 아르, 너의 그런 면을 1, 2년 겪은 것도 아니니 더 이상 말은 않 으마. 뭐, 저 아이 덕에 네가 자주 집을 드나들게 되었으니 어떤 면에선 감 사해야 할까?" 고개를 저으며 미소하는 그녀를 보자 아르디예프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저로서는 감사할 따름입니다. 부디 앞으로도 제가 없는 동안 류온을 잘 부탁드립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류스밀리온의 입궁을 허락 받지 못한 모 양이구나. 벌써 1년이나 흐르지 않았더냐. 이 정도면 아이가 생명의 궁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을, 언제까지 규칙을 깨고 생명의 궁도 아닌 이곳에서 이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칠 셈이냐? 네가 자칫 벌이라도 받지 않을까 걱정되는구나." "류온이 그 몸에 지닌 재능은 신분 따위에 제한을 받을 종류의 것이 아닙 니다. 머지 않은 시일 내에 제가 반드시 레그시안님을 설득시켜 보일 것입 니다." 생명의 궁의 실권을 쥔 8서클의 마법사 레그시안은 로베리스를 통해 류스 밀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의 입궁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그냥 평민에게 마법을 전수하는 것도 껄끄럽거늘, 사창가까지 갔었던 아이에게 마법을 가르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덕에 류스밀리온은 생명의 궁이 아닌 아르디예프의 저택에서 거의 1년 동안을 어정쩡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일단은 식당으로 가시죠. 형님께서 식사를 하실 작정이셨던 모양인데. 그곳에서 음식도 기다릴 겸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뭐, 그러지… 그런데… 류온도……." 제이네프의 제안에 아르디예프가 잠시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함께 점심 식사를 하자며 바로 몇 분 전에 한 약속을 어길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아르디예프의 그런 행동을 본 백작부인의 고운 미간이 살풋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곁에 선 제이네프 역시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마지못했지만 둘 다 허락의 의미였다. "자, 가자꾸나, 류온." "예." 불안히 상황을 보고 있던 류스밀리온이 그제야 방긋 웃었다. 맘씨 좋은 금 발의 가족 사이에 끼인 분홍색의 꼬맹이가 그저 행복에 겨워 쫄래쫄래 걸 음을 옮겼다. 아르디예프는 오랜만에 저택에 들렸음에도 하루도 묵지 않고 생명의 궁으 로 돌아가 버렸다. 겨우 25살의 나이에 2서클을 마스터하자, 8서클 마법사 인 레그시안의 관심이 모조리 그에게 쏠려 잠시라도 놔주길 꺼려했던 것이 다. 최근 레그시안은 매일같이 아르디예프를 곁에 붙들어두고 여러가지 수 식들을 가르쳤다. 보통의 고위 마법사들은 비약적으로 빠른 성취를 이루는 자가 나타나면 도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은근히 그 제자를 경계를 하곤 하 였으나 레그시안은 올해로 이미 50세를 넘긴 차라 그런 치기는 삭으라든지 오래였다. 오히려 재능 있는 자가 나타나질 않아 초조함이 극도에 달한 상 태에서-그가 죽으면 아르윈 왕국은 4대강국 중 유일하게 8서클 마법사가 없는 나라가 된다.-아르디예프는 구세주와도 같았다. 하지만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류스밀리온은 약간 심통이 났다. 생명의 궁 으로 떠나는 아르디예프에게 작별인사를 할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잠시 투덜거려보기도 하였으나 맛나는 꿀밤을 몇 대 얻어먹었을 뿐이다. "치… 나쁜 아르……." 퍽-. 석양을 등지며 할일없이 홀로 정원을 걷던 류스밀리온이 뿔이 난 것을 참 지 못하고 괜히 자신의 오른쪽에 놓여 있던 정원석을 걷어찼다. 물론 주변 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 추측하고 한 화풀이 행동이었다. "이 놈이 귀한 정원석에 무슨 짓이야!" 류스밀리온은 깜짝 놀랐다. 조금 떨어진 곳의 나무를 비껴 걸어나온 것은 이곳의 정원사였다. 물론 그냥 나무를 가지치기하는 정원사와는 다른, 거대 한 정원을 총 관리하는 이른바 '높은 사람' 이었다. 잠시 그의 등장에 움찔했던 류스밀리온이었으나 곧 어깨를 당당히 폈다. 아르디예프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미안하다. 다시는 안 그럴게." 류스밀리온의 말을 들은 정원사의 얼굴이 대번에 구겨졌다. 반말이야 아르 윈어를 잘 못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저 뻣뻣이 든 고개는 뭐란 말인가. 그 역시 대부분의 하인들과 마찬가지로 저택을 싸돌아다니는 저 천한 놈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차였다. 덕에 류스밀리온의 이 행동은 그의 가슴에 불 을 질렀다(?). "이 놈이 감히 누구에게… 반반한 얼굴로 큰 도련님께 잘 보이고 나니 눈 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로구나!" "얼굴이 아니고 나는 대마법사가 된다!" 허리에 손을 얹고 류스밀리온이 당당히 외쳤다. 물론 사정을 모르는 사람 이라면 고개를 갸웃했겠지만 뒷 사정을 알고 있는 정원사는 류스밀리온이 무슨 말을 하려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사실, 얼굴 이야기는 언제나 하인들 사이에서 하는 비꼬는 말일 뿐, 아르디예프가 이 소년의 마법적 재 능을 높이사 곁에 두려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흥, 겨우 괜찮은 재능 하나 지녔다고 천한 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 쭐해 있군." "우쭐해? 그것은 뭐다?" "하하하, 우리말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이!" "하! 하! 하! 카르틴 말도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것이!" 예기치 못한 반격에 정원사는 움찔했다. 어려서부터 천재라 불리던 큰도련 님-아르디예프-에게까지 인정을 받을 만큼 영리한 꼬마라는 사실을 간과 한 것이다. 대답을 못하는 상대를 보고 류스밀리온이 씨익 웃자 그의 얼굴 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빌어먹을 놈!" "악!"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든 정원사 덕에 류스밀리온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내 반항적인 눈으로 정원사를 노려보며 외쳤다. "아르 스승님 오면 말한다? 전부 다! 이주일 후는 온다고 했어!" "이……!!" 금방이라도 한대 칠 기세로 있던 정원사는 이를 깨물었다. 아르디예프가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닌데 감히 류스밀리온을 쳤다는 사 실을 당당히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정원사는 던지듯 류스밀리온을 땅에 내려다 놓았다. 잠시 균형을 잡지 못 하고 비틀대던 류스밀리온은 아까운 셔츠가 구겨질까 손으로 탁탁 털어 깨 끗이 했다가 째릿한 시선으로 정원사를 노려보았다. 류스밀리온이 어떤 반 응을 보이거나 간에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뜨던 정원사가 마지막으로 이를 갈며 협박성 짙은 말을 했다. "흥, 그 잘난 척이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지." "죽을 때까지 두고 봐라! 나는 영~원히 잘났다 할 것이다!" 류스밀리온이 기죽지 않고 맹랑히 대답하며 한껏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정원사는 생각 이상으로 성격이 좋지가 못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정원사가 다시 류스밀리온의 멱살을 붙들어 조금 전 그 정원석에 밀어붙였다. 잠시 숨이 막혀 말을 못하고 있는 류스밀리온에 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댄 그가 이를 갈며 낮게 말했다. "천한 놈… 지금이야 네놈이 큰도련님의 총애를 받았다고 잘난 척 하고 있 지! 하지만 네놈에게 그런 재능이 없었어봐! 너 같은 것을 그분이 쳐다보 기나 했을 것 같아!? 그 얼굴에 침이나 뱉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니, 클레 모어가의 분들은 한결같이 좋은 분들뿐이니 아마 가엾다며 동전이나 몇 푼 던져주었을까!!" 말이 빠르고 길어서 류스밀리온은 정원사의 말을 듣는데 애를 먹었다. 하 지만 몇 마디 단어를 놓치고도 짧은 시간에 정확히 그 요점을 파악할 수가 있었다. 확실히 아르디예프가 그를 향해 기쁘게 이야기하는 것은 마법에 관한 것뿐 이지 않던가. 곧장 말을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류스밀리온을 보며 정원사가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흥, 그분께서 네놈이 좋아 지금까지 데리고 있으신 줄 알았냐! 네 주제를 알아, 이 더러운 자식아! 사창가에서 굴러먹던 게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어 디서 감히 얼굴을 쳐들고 다녀!" "너…너는 그런 재능도 없으면서!" 류스밀리온이 뒤늦게 고함을 질렀지만 정원사는 비웃을 따름이었다. 그때 그들의 뒤로 검은 인영 하나가 나타나 조용히 그들의 행동을 저지했다. "그쯤하고 류스밀리온님을 놓아드려라, 로페." "엇, 지…집사님!!" 익숙한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던 정원사의 눈이 휘둥 그레해졌다. 방금 그가 류스밀리온 '님' 이라 하지 않았던가? "집사님… 어째서……." "아르디예프님께서 말씀하셨다. 류스밀리온님께서 저택에 머물 동안은 클 레모어가의 일원과 같이 대해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백작 부인과 제이네 프님의 공인도 받은 일이니 로페 너 역시 그분의 말씀에 따라 지금과 같은 행동은 삼가야 할 것이다." 정원사, 로페는 쩍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천민이나 다를 바 없는 저 런 놈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니 그런 청천벽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클 레모어 가에 하인으로 있음을 언제나 행운으로 알았던 그였지만 이번만은 마음씨 좋은 자신의 주인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로페가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반쯤 넋이 나가있을 때쯤 땅에 주저앉아 있던 류스밀리온이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약간 풀이 죽어 말 없이 저택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때 눈을 가늘게 뜬 집사가 그의 뒤로 바짝 다가와 낮게 말했다. "나 역시 로페와 다를 바 없는 생각이다. 그러니 우쭐해 해 봤자 네 스스 로가 우스울 뿐이라는 것을 알아라. 내 주인의 명을 거스를 생각은 없으니 앞으로는 너를 그분들과 같이 소중히 모시겠다. 그러나 몸가짐을 조심하는 것이 좋아. 네가 천박한 자신의 천성을 숨기지 못하고 그분들의 명예에 누 가 되는 일을 저지른다면 이 내가 용서치 않을 테니!" 섬뜩할 정도로 강한 경고를 들은 류스밀리온은 한발자국 뒷걸음질 쳤다가 곧장 저택으로 뛰었다. 꼴사납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도망쳐버릴 수밖 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 반박을 할 수 없었던 탓이다. 류스라는 이름을 듣고도 비웃지 않았다. 자신에게 멋진 이름까지 지어주었 다. 조금 건방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고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엇이 아르디예프를 그토록 상냥하게 만든 것일까?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언제나 궁금해하던 것이었다. 오늘 그 해답을 들 었지만 류스밀리온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그 날도 아르디예프는 곧장 3층의 복도를 뛰고 있었다. 백작부인에게 그토록 야단을 맞고서도 도무지 고쳐지지 않는 버릇 이었다. 3층 복도 끝의 마지막 방 앞에 선 아르디예프는 괜히 엄한 얼굴을 만들고서 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류온! 스승님이 오셨는데 오늘은 마중 나오지 않는 것이냐! 소식을 듣지 못했어도 직감으로 뛰어나왔어야지!" "에, 왔어… 아니, 어서 오셨어요. 아르 스승님." 책상에 앉아 펜을 끄적이고 있던 류스밀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뒤가 맞지 않는 어법은 여전했으나, 그와는 별개로 미묘하게 전과는 다른 느낌 을 주는 반응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던 아르디예프는 먼저 무슨 일이 있었 냐고 질문을 하기 위해 류스밀리온에게로 다가갔다. 하지만 책상 위에 널 린 종이들에 얼핏 시선을 지나치고서 눈을 크게 떴다. "아니, 겨우 한 달이 지났건만, 그 사이에 벌써 이걸 익히는 것이냐?" "예. 아직 책 안 보고 풀 수는 없는데, 그래도 대충은 알아……." "아니, 그래도 이해를 했다는 것이 어디냐! 세상에!! 조금 설명을 해준 정 도로 이렇게 진전이 빠르다니! 기특한 녀석!" 아르디예프가 활짝 웃으며 류스밀리온을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가 그를 품에 꼭 안았다. "정말 대단하구나! 내가 매일 곁에 붙어서 일일이 가르쳐 준다면 얼마나 대단할지 상상하기도 벅찰 정도다! 내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너를 생명의 궁에 들어가도록 만들고 말겠다!" 미소하던 아르디예프가 마지막 말에서 조금 씁쓸한 일을 떠올리고 안타까 운 표정을 했다. 스승이신 레그시안이 생각이상으로 굉장히 강경했던 탓이 었다. 게다가 고위 마법사중 반 수 이상이 마찬가지로 류온의 입궁을 강하 게 반대했다. 제 아무리 마법사들이 호기심이 풍부하다 한들, 천민에게까지 -실제로는 평민이지만 그 처지는 천민에 가까웠다- 마법을 전수할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 류온이 그토록 대단한 아이라면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던 자신의 입지가 한 단계 밀려나는 꼴이 아닌가? 그것도 자신 들이 그토록 무시하던 한낱 천민 꼬마놈에게! 마법사도 권위를 알고 시기 질투를 하는 사람인지라 아르디예프처럼 순수하게 류온의 성장을 기뻐할 수 있는 자는 드물 수밖에 없었다. 아르디예프는 품에 안고 있던 류스밀리온을 책상 위에 앉혔다. 그러다가 문득 이 아이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류온, 정말… 어디가 아픈 거냐?" 말을 하고 나자 왈칵 걱정이 밀려오는 아르디예프였다. 솔직히 그는 이 꼬 마가 가족들보다도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을 정도였다. 이 비상한 꼬마가 얼마나 대단하게 성장할지, 환상의 경지라는 9서클을 실제로 돌파할 수 있 을지!-떠오르는 별로 찬사를 듣는 아르디예프였지만 그로서도 9서클에 도 달할 자신은 없었다- 그것만이 아르디예프의 관심사였던 것이다. 걱정돼서 못살겠다는 표정의 아르디예프를 보던 류스밀리온이 가만히 고개 를 저었다. 그제야 아르디예프는 조심이나마 안심을 하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서만은 천둥망아지 같던 꼬맹이가 너무 풀이 죽어 있자 여전히 걱정을 씻을 수가 없었다. "류온. 내게 말해보렴. 도대체 무엇이 너를 그렇게 우울하게 만들었지?" "아니요, 그냥……. 나도 가끔은 우울해……." 겨우 허리에 닿을 작은 키의 꼬맹이가 하는 말을 듣고서 아르디예프는 기 가 막히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그가 그 정도 말에 어물쩍 상황을 넘길 만큼 만만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보자보자 하니 이놈이 아주 내 앞에서 거짓말까지 하는구나." "난 진심인데… 왜 거짓말이라는 건데?" "스승인 내가 네 천성도 모를 것 같더냐. 건방지고 제멋대로에 천방지축이 라는 것을." "아냐!" "뭐가 아니냐! 되려 그 단어들이 너를 위해서 탄생한 것이 아닌가 싶거늘!" 검지를 세워 고개를 삐죽 내민 류스밀리온의 머리를 꾹 눌렀다. 잔뜩 뿔이 난 류온이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것도 잠시 곧 고개를 크게 숙였다. 이쯤 되자 아르디예프는 정말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러느냐. 말이라도 해보거라." "…아르 스승님은 내가 마나가 없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할거야?" 끝까지 머뭇거리던 류스밀리온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직 아르윈어 실력 이 부족해 생각을 그대로 말로 전할 수 없는게 조금 걸렸지만 일단은 불안 히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아르디예프가 이상하다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마나를 느끼는 재능이 갑자기 사라질 리가 있겠느냐. 만약 그렇게 되더라 도 다시 그 힘을 되찾기 위해 배로 수련을 해야지." 뭔가 자신이 예상한 대답과는 핀트가 어긋나고 있었다. 류스밀리온은 손을 저으며 아예 카르틴어를 사용해 질문했다. "아니, 그것말고 만약에 내가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녀석이었다면 어떻게 할거냐고." 아르디예프는 눈을 가늘게 하고 류스밀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이미 마나를 느낄 수가 있지 않느냐. 무엇 때문에 그런 가정을 내려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냐?" "그…그게……."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아르디예프에게 전하는 것이 창피했다. 마법의 소질 을 제하고 나면 그저 하잘 것 없는 버러지에 불과하다는 것을 스스로의 입 으로 인정하는 것 같았으므로. 한동안 말이 없던 아르디예프가 먼저 카르틴어로 입을 열었다.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째서 너와 너의 재능을 따로 구분하여 논해야하는지 모르겠구나." "그치만……." 그의 손이 류온의 눈동자를 향했다가 차례차례 아래로 내려갔다. "자 봐라. 이 독특한 색의 눈동자, 이 작은 손가락, 팔딱거리는 심장 전부 너의 것이겠지?" "응……." "그럼 똘똘한 생각이 가득 담긴 이 머리와 마나를 느끼는 재능은 네 것이 아니더냐?" "으으응… 하지만… 하지만 아르 스승님은 내가 아니라 내 재능만 보고 있 잖아! 나는 '류온' 이지, '마나를 유동시키는 사람' 이 아니야." 드디어 류스밀리온이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그러나 아르디예프 는 엄격한 표정으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너의 굉장한 가장먼저 재능에 눈길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재능 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너다. 나는 굉장한 재능을 가진 '류 스밀리온' 이라는 존재를 아끼고 있는 것이다. 사람 없이 재능이 존재할 수 는 없는 법이거늘 달리 무엇을 생각할 것이 남아있단 말이냐." "음……." 뭐라 반박하고 싶었는데 아직은 생각이 짧아 그럴듯한 말이 생각나질 않았 다. 책상 위에 앉은 류스밀리온이 손발을 꼼지락거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 자 아르디예프가 자세를 낮추어 그와 눈을 맞추려 했다. 그러나 류스밀리 온을 창피해하며 고개를 그저 더 깊게 숙이기만 했다. 아르디예프가 한숨 을 한번 쉬었다가 손을 조심스레 분홍색 머리카락 위에 얹었다. "뭐, 네가 가진 수많은 부분들 중에서 마법적인 재능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까지 좋아해 주길 바라고 있는 것이라면, 요즘 들어 생명의 궁에만 들어 가면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꼬맹이의 건방진 말투가 금새 그리워진다고 말하고 싶구나." 그제야 류스밀리온은 살짝 눈을 들었다. 아르디예프가 웃고 있었다. 깜짝 놀랄 만큼 상냥하게. 그래서 류스밀리온은 조금 두근두근하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진짜?" "바라는 것도 많지. 내 제자가 제자로 삼은 꼬맹이는 건방지고 제멋대로에 천방지축으로 모자라서 아주 욕심쟁이로구나." "아냐!" "뭐가 아니냐!" 조금 전과 똑같은 문답을 한 두 사람이 딱 입을 다물고 눈을 맞추었다. "풋!" 먼저 웃음을 터뜨린 것은 아르디예프였다. 류스밀리온 역시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다가 신발을 신은 채로 책상 위에 바로 서 허리에 양손을 짚었다. "에이 기분이다! 그럼 난 열심히 하고 대 마법사는 되야지! 이왕이면 10서 클까지 해야지!" "잘도 가능하겠다." 어느새 아르윈어로 되돌아와 자기 좋을 대로 지껄이는 꼬맹이를 보며 아르 디예프가 웃음기 어린 얼굴을 절래절래 저었다. 류스밀리온이 까르르 웃으 며 책상 위에서 훌쩍 뛰어 저쪽 소파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괜히 소파 위 에 올라가 펄쩍펄쩍 제자리 뛰기를 하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잔뜩 호통을 쳤을 아르디예프였지만 류온이 많이 기뻐하고 있음 을 알았기에 그리 크게 나무라지는 않았다. 대신 뜀박질을 하고 있는 그를 공중에서 낚아채듯 꼭 안아들었다. "이놈아! 장난이 지나치지 않느냐!" "에헤헤헤." "거참 경박하구나. 몇 번을 말해야 그 웃음소리를 바꾸겠느냐." 품속에서 달아나려고 바둥거리던 류스밀리온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아르디예프가 고개를 갸웃하자니 류온이 작은 손을 들어 그의 금발머리 끝 을 살짝 잡아당겼다. "아르 스승님." 얼굴을 바짝 마주댄 형상이 되자 류온이 방긋 웃었다. "나도 너무너무 좋아." 좀 부끄러운지 끝내 그의 팔에서 도망쳐버리는 류온을 보자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쁘지만도 않아 아르디예프도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 된 감에 이 제자를 끝까지 책임지자고 다짐하는 그였다. 이르나크의 장 외전 -류스밀리온과 아르디예프의 청춘! (3) 3번의 봄이 지났다. 클레모어 저택에 군식구로 살고 있는 12살의 소년도 어느새 사리분별을 정확히 하는 15살의 청년이 되었다. 허벅지까지 닿는 고운 분홍빛의 머리카락은 여전했으나, 키가 훌쩍 큰데다가 통통하고 뽀얀 젖살이 빠져 어느덧 완연한 남자의 얼굴로 변모하면서 더 이상 지나가는 이야기로라도 여자아이로 오해받는 일은 사라졌다. -물론 뒷모습만 보았을 때는 말이 달라진다.- 펜을 입에 문 채로 의자에서 몸을 끄덕이고 있던 류스밀리온은 아래에 어 질어진 종이들을 보고 씨익 미소했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한참을 만족 스럽게 싱글거리고 있는데 노크와 함께 자주 들어보던 하인의 목소리가 누 군가의 방문을 알렸다. "류스밀리온님-." "됐다. 너는 물러가 있거라." "에, 예……." 금발의 남자가 하인의 말도 채 끝나기 전에 그를 물리며 방문을 열고 안쪽 으로 들어왔다. 올해로 스물여덟이 되었지만, 마법에 열중하느라 오히려 전 보다 더 말라버린 아르디예프였다. "스승님, 이번에는 굉장히 일찍 오셨군요!" "아. 레그시안님을 아주 들들 볶아댔지. 일주일 정도 지속되니 그분도 진절 머리가 난 모양인지 출궁을 허락해 주시더구나." 뒤에서 그들의 만남을 슬쩍 보던 하인이 방문을 완전히 닫고 물러났다. 그 러자 자리에 서서 정중히 아르디예프를 반기던 류스밀리온의 얼굴이 능글 맞게 바뀌었다. "후후후, 아르 스승님! 내가 그동안 뭘 했는지 보겠어?" 줄줄이 흘러나오던 존댓말은 어디로 사라지고 반말이다. 밖에서는 사람 보 는 눈이 있어 차마 말을 낮추지 못했지만, 둘만 있게 되면 이렇게 예전의 버릇이 나오곤 했다. "이젠 어린아이도 아니건만, 그 말버릇 좀 어찌할 수 없느냐? 귀엽다귀엽 다 했더니 이놈이 위아래를 모르는구나." "에잇, 그런 것보다 이것 좀 보라니까! 분명 보면 놀라 까무러칠걸!?" 류스밀리온의 보챔에 아르디예프는 야단치는 것은 그만두고 곧장 종이들을 집어들었다. 이 놀라운 제자가 또 얼마나 성장해서 자신을 놀래킬지 궁금 했던 탓이었다. "아……!!" 아르디예프가 짧게 신음까지 내지르며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예상 대로의 반응에 류스밀리온이 자신만만하게 히죽 웃으며 물었다. "후후후, 놀랐지?" 그 종이에 적힌 것은 깨끗하게 새로 정리된 3서클의 마법이었다. 류스밀리 온이 2서클을 마스터한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3서클까지 마스터해버린 것 이다. 원래라면 서클이 높아져가며 마법을 배우는 속도가 급속도로 느려지는 것 이 일반된 현상이다. 그러나 류스밀리온의 경우는 너무 어릴 때부터 마법 을 시작했기에 적당히 나이를 먹자 더욱 사고력이 좋아져 도리어 2서클을 마스터할 때보다 시간이 적게 걸리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빠른 성 취가 가능할지는 미지수이나 이와 같은 결과만으로도 경이롭다는 말이 아 깝지 않을 정도였다. 류스밀리온은 빙글빙글 웃으며 아르디예프의 반응을 기다렸다. 언제나처럼 벙긋 웃으며 체면 차리지 않고 자신을 번쩍 안은 채 빙글빙글 자리를 돌 것이라고 믿었다. 이미 류스밀리온은 아르디예프의 가슴께까지 닿았지만 아르디예프는 여전히 그런 방식으로 기쁨을 표현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듯 한데도 아르디예프의 굳은 얼굴은 좀처 럼 펴지지 않았다. "내가… 3서클의 마스터가 되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걸렸건만……." 아주 작은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모든 신경에 아르디예프에게로 쏟고있던 류스밀리온은 그 순간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똑똑히 들을 수가 있었 다. 류스밀리온은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벅찬 기대 에 차있었던 감정은 갑자기 큰 잘못을 했다는 낭패감으로 뒤바뀌었다. 아르디예프는 17살 때부터 마법을 배우기 시작하여 28살이 된 현재 3서클 의 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그도 역사에 기록될 만큼 빠른 진전을 보이는 중이었으나, 류스밀리온은 그 정도야 우습지도 않다는 듯 4년의 시간동안 3서클을 단번에 돌파해 버렸다. 그리고 지금 잘난 척 뻐기면서 그에게 칭 찬을 듣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이렇게 생각을 짧았던 것일까!! 이젠 더 이상 철모르는 어린 아이 도 아닌 것을! 종이에 얼굴을 파묻듯 하고 있던 아르디예프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에 류스밀리온이 당장 손을 저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아직 책을 안보고 완전히 풀어낼 정도는 아니고……." "너답지 않게 뭘 그렇게 겸손을 떠느냐." 엷게 미소를 띈 아르디예프가 종이를 책상 위에 두며 말했다. 그에 류스밀 리온을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아냐, 아직 완벽하게 익힌 건 아니야." "왜 말을 번복하는 것이지? 네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이토록 자랑스 레 보여준 것이라면 생각할 것도 없는 일이거늘." 류스밀리온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 자리에 서있었 다. 아르디예프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주었다. "내 여태껏 몰랐는데 우리 류온도 꽤나 착한 아이로구나. 내 혼잣말을 듣 고 마음을 써주는 모양이지?" "아…아니……!" 류스밀리온의 말을 막으며 아르디예프가 그의 분홍색 머리카락을 마구 흩 뜨렸다. "하지만 역시 무례하기가 끝이 없는 놈이로구나! 내가 단 하나뿐인 제자의 성장에 시기라도 할 줄 알았더란 말이냐!" "아, 아니야!" "뭐가 아니냐!" 그 날의 일이 있은 이후로 자주 쓰는 문답이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두사 람은 입을 꼭 다물고 서로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훗……." 이번에도 먼저 아르디예프가 웃음보를 터뜨렸다. 그는 미소하고 있던 얼굴 그대로 류스밀리온에게 말했다. "막상 나를 뛰어넘는 너를 대하자니 조금 분한 마음도 없지 않다. 하지만 내 재능의 모자람이 잘못인 것이지 너의 뛰어남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더 냐. 이 정도 일로 시기를 할 작정이었다면 너를 여기까지 데리고와 마법을 가르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 "그런… 재능이 부족하다니… 아르 스승님은……." 류스밀리온은 조금 혼란스러워 고개를 저었다. 아르디예프의 그 말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젊은 스승의 과보호 속에 자란 그는 어느덧 누구의 앞에 서도 스스로가 잘났다고 당당히 고개를 쳐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최고의 마법사라 칭송 받는-아직 3서클 마스터지만 그 재능이 누구 못지 않게 대단했기 때문이다- 아르디예프의 자리까지 빼앗으며 잘나고 싶 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였다. 물론 지금까지의 과정만 으로도 충분히 아르디예프를 추월하고 있었으나, 스승인 그가 언제나 활짝 웃으며 제자의 발전을 기뻐해 주었던지라 단 한번도 그에까지 생각이 미치 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류스밀리온이 한참을 생각에 빠져있을 때, 아르디예프가 갑자기 그를 손 으로 힘껏 안아들어 전처럼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돌았다./ 그동안 체력이 너무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류스밀리온이 너무 큰 탓인지, 숨을 몰아쉬며 한바퀴만으로 그 일을 끝낸 아르디예프가 류온을 꼭 품에 안았다. "마음 쓸 것은 없다. 나는 네 성장에 아주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단 다. 약간의 분함 정도는 금방 묻혀버릴 정도로 말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 하였으니 나를 위해서라도 더욱 빠른 성취를 보여야 할 것이야." "으…응……." "대답이 시원찮구나!" "아, 알았어! …요……." 류스밀리온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심각해진 분위기 덕에 마지막에 작게 존 댓말을 붙이면서. "어머님과 제이네프에게 인사를 하지 않고 올라왔으니 잠시 내려갔다 오 마. 다시 한번 말하는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말고 마법을 익히는데만 열 중하거라. 알겠지?" "응……." 류스밀리온을 땅에 내려준 아르디예프가 전처럼 상냥하게 웃어주고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류스밀리온이 말 없이 그가 나선 방문을 바라보았다. 아르디예프가 클레모어 저택에 머무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이틀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첫날 있었던 일이 조금 걱정이 되어 일부러 삼일을 묵다 가 생명의 궁으로 떠났다. 그의 마음씀을 류스밀리온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르디예프를 마중하고 1층 홀까지 들어온 류스밀리온은 작게 한숨을 쉬었 다. 뭔가, 마음 한쪽이 꽉 막혀 답답해진 기분이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니? 류온." 그와 함께 형님을 마중하고 들어오던 제이네프가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물었다. 류스밀리온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아르 형님만큼 의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곤란한 일이 있으면 말을 해보렴." "아뇨,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이예요." 정말이라는 말을 너무 강조한 듯 하여 류스밀리온을 입을 다물었다. 더 수 상해 보이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그, 그럼 먼저 방에 올라가 있겠습니다." 다급히 인사를 한 류스밀리온은 빠르게 발을 놀려 그 자리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렇게 그가 홀을 벗어나 중앙계단에 발을 올렸을 때였다. "류온……!" 다급한 제이네프의 부름에 류스밀리온이 뒤늦게 발을 멈추었다. 무슨 일인 지 의아해하며 몸을 돌리자 홀의 중앙에 선 제이네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만… 지금 이야기 좀 하겠니?" "…예……." "그래… 그럼 내 서재로 가자……." 제이네프가 억지로 웃는 듯 간신히 미소했다. 류스밀리온은 그의 표정에서 조금이지만 불안함을 느꼈다. 제이네프의 서재에서는 미리 준비된 녹차 덕분인지 은은한 풀잎의 향기가 배여 있었다. 온화한 그의 성격에 딱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류스밀리온은 맞은 편의 소파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류스밀리온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제이네프는 탁자 위에 올려진 찻잔을 양손으로 쥔 채로 바로 말을 꺼내는 것을 망설였다. 하지만 곧 고 개를 한번 저은 그가 류스밀리온을 바로 쳐다보았다. "삼일 전, 티타임 시간에 형님에게 들었다. 벌써 3서클을 마스터했다고?" "에? 예……." /"그분이… 아주 기뻐하시더구나. 그렇게 흥분하시는 모습은 또 오랜만이었 단다. 역시 제자를 잘 두었다고 하시면서……."/ 말의 내용과는 달리 제이네프의 얼굴은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류스밀리온 도 그리 밝지 못한 표정으로 가만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형님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어려서부터 정말 머리가 좋으신 분 이셨고… 17살에 레그시안님의 눈에 들어 수제자가 되셨을 때는 모두가 놀 라버렸지. 하긴, 그분은 이런 작은 영지의 영주가 되는 것보다는 전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8서클 마법사 쪽이 훨씬 어울릴 거다. 형님께서 마법사가 되 신 덕에 클레모어 백작가의 작위를 내가 물려받게 되었으니 뻔뻔스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아니요, 제이네프님께서도 훌륭하신 분입니다. 마법사는 아니지만 검술도 뛰어나시고… 클레모어 백작위에 어울리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류스밀리온은 진심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저 아르디예프의 비호를 믿고 건 방지게 날뛰는 감이 없지 않았으나 한없이 온화한 제이네프나 엄하지만 곧 은 백작부인의 앞에서만은 솔직하고 예의바르게 행동하고 싶었다. 제이네프는 작게 웃었다. 하지만 다시 떠오르는 그 '일' 덕에 미소는 금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제이네프는 궁지에라도 몰린 듯 정 말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형님을 아주 존경하고 있어. 그렇기에 형님을 뛰어넘어 성장하고 있 는 네 모습이… 네 모습이 아주… 못마땅하다. 최소한 그분의 앞에서 만이 라도 어떻게……!!"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던 제이네프가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시선을 아래로 한 채 약간 붉어진 그의 얼굴은 차마 못할 말을 했다는 표정이 역 력했다. 가만히 말을 듣기만 하던 류스밀리온이 마찬가지로 시선을 약간 아래로 내렸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스승님은 제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자신을 신경 쓰느라 제 발전이 느려진다면 아마도 크게 화를 내시며… 그 이상으 로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리를 아시는 분이니까요." "그…그래… 그렇겠지… 분명 그러실 분이지……." 말을 한참 더듬던 제이네프는 더욱 얼굴을 붉히며 아예 고개를 옆으로 돌 렸다. 손으로 입가를 가린 그는 말없이 창 밖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류 스밀리온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제이네프님… 그럼 전 먼저……." 침묵 속의 답답함을 참지 못한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넙죽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자 제이네프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손을 저었다. "아니, 그래도 남은 차는 마시고 가야지. 괜히 네 마음을 상하게 만든 것 같구나. 내 말 따윈 잊어버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하렴. 쓸데없는 소릴 해서 정말 미안하다, 류온. " "아니요… 아닙니다……." 류스밀리온은 그가 권한대로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찻잔에 시선을 고 정시킨 채로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하지만 몇 번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하늘에 구름 하나 없이 해만 덩그라니 홀로 떠있던 날, 류스밀리온은 저택 뒤에 위치한 작은 산에 올랐다. 그 중턱쯤에는 아르디예프가 가르쳐 준 장 소가 있었는데, 약간의 절벽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저택과 가까운 마 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특이한 것은 오랜 세 월 그 자리를 지켰을 것으로 추측되는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였다. 아르디 예프가 어려서 동생인 제이네프와 키재기 놀이를 했었다며 이를 산중의 제 일가는 보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대로네……." 나무의 앞에 쌓여진 돌맹이들을 보며 류스밀리온은 중얼거렸다. 그가 2서 클을 마스터한 날, 축하도 할 겸 기분전환도 할 겸 아르디예프와 함께 올 라왔다가 기념으로 만들어둔 돌탑이었다.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건 만 그동안 아무도 이곳에 올라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류스밀리온은 그 돌탑의 곁에 앉았다. 문득 아무 생각 없이 기뻐하던 꼬맹 이의 모습이 겹치며 떠올랐다. 탁- 투두둑-. 저도 모르게 울컥한 류스밀리온이 돌탑을 손으로 쳐서 무너뜨려 버렸다. 그 소년의 무지가 원망스러웠고, 또한 그 이상으로 부러워 질투가 나서였 다. 품에서 종이를 꺼냈다. 하얀 종이가 거의 까맣게 될 정도로 한가득 쓰여진 숫자와 공식들은 전부 4서클의 마법공식이었다. 멍하니 그를 내려다보던 류스밀리온이 종이 속에 얼굴을 묻었다. 오랫동안 함께 하여 익숙해진 야 비크 산 잉크와 종이냄새가 났다. 아르디예프가 일부러 그를 위해 구해준 질 좋은 필기용품이었다. "이젠 충분히 즐겼잖아." 혼자 중얼거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돌탑을 완전히 흐트러뜨려 그 자리를 깨끗이 만들고는 손으로 땅을 차기 시작했다. 여름의 습기를 머금 은 땅은 수년간 펜만 잡아왔던 약한 손에서도 쉽게 속을 내보였다. 처음 쌓여있던 돌탑의 높이만큼 깊은 구덩이가 생겼다. 이 정도까지 파고 나니 류스밀리온의 손은 엉망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아니 그런 곳에 신경을 줄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맞겠다. "잘 가라, 아무래도 그게 좋을 거 같다." 사람에게라도 말하듯 중얼거린 그가 구덩이 속에 종이들을 집어넣었다. 마법은 그만두기로 했다. 최소한 아르디예프가 더욱 강한 마법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는 그를 다짐하기 위한 의식인 거다. 어디서 굴러먹은 지도 알지 못하던 놈이 스승을 제치고 3서클의 마법사가 되었지만 아무도 그를 향해 욕을 하지 않았다. 집사를 포함한 몇몇의 하인 들이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정작 클레모어의 성을 가진 사람 들 중 그를 향해 비난의 말을 쏟은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스스로도 뻔뻔스러운 성격이라 생각했던 자신이 이 렇게도 쉽사리 흔들리고 마는 것은. 류스밀리온은 천천히 그 위에 흙을 덮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줌한줌 흙을 뿌리던 그는 곧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이를 악 물며 발까지 사용해 단 숨에 구덩이를 막아버렸다. 숨이 찼다. 겨우 종이를 하나 묻는 일이 이토록 힘에 겨울 줄은 생각도 하 지 못한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에 류스밀 리온은 곧장 몸을 돌렸다. 그리고 큰 걸음으로 빠르게 그 자리를 떠나고자 했다. 타박. 타박. 모래를 스치는 발소리가 유난히 컸다. 분명 맨땅 위에 서있었건만 마치 늪 지대처럼 그의 발을 잡아끌었다. 앞으로 크게 세걸음을 더 내딛은 순간 가 슴이 심하게 뛰었다.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그대로 몸을 되돌린 류스밀리온이 한걸음에 종이를 묻었던 그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막 파헤쳐졌던 땅 위에 이마를 세 게 박았다. 소중한 것을 빼앗겨 당장이라도 되찾고자 애원하는 아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아주 미쳐버린 건가!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집착이 강했단 말이야!" 혼자 소리를 지르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럼에도 마음은 당장 땅 속의 종 이를 끄집어내어 모든 것은 없었던 일로 해버리고 싶었다. 그래, 어차피 아르디예프도 원하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제이네프님도 신경 쓰지 말고 열심히 하라고 말했었다! 그냥 관둬 버릴까! 괜히 착한 척 이런 짓 해봤자 나만 손해인 것이 아닐까!!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남을 생각했 다고! 문득 뜨거워진 이마를 통해 한기가 올라왔다. 한낮의 태양 빛을 받은 곳임 에도 흙바닥 특유의 차가움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아르디예프가 상냥하게 미소하며 그와 이마를 마주 댄 채로 이야기 한 적 이 있었다. 따뜻한 온기였고,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류스밀리온은 그때까 지 단 한번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르디예프를 만나지 못했 다면 아마 영원히 느끼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군……." 류스밀리온은 몸을 바로 일으켰다. 그리고 엉망으로 파헤쳐진 땅을 고르게 다지기 시작했다. 땅을 평평하게 만든 후에는 곧 주변에 흩어진 돌을 모아 한개 한개 정성스럽게 쌓았다. 시간이 상당시간 흐르자 그 위에 처음과 똑같은 돌탑이 생겼다. 누가 땅을 파헤친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족스럽게 변하자 류스밀리 온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산을 내려오는 도중 그는 단 한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뭐야!? 검!?" 오랜만에 집을 찾은 아르디예프는 /너무나 황당한 소리를 듣고/ 언성을 높 였다. /하지만 자신을 경악하게 한 제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 고 있었다./ "벌써 반년이나 지났는데 마법에 전혀 진전이 없다고! 그래서 검이라도 배 워 보고 싶다는 거야. 왜? 안돼?" "당연히 안되지! 될성부른 말을 해라!!" 아르디예프가 완전히 인상을 일그러뜨리고 소리쳤다. 그러나 류스밀리온은 아예 배 째라는 태도로 더 소리를 높였다. "그럼 날더러 어쩌라는 건데? 3서클 마스터 따위로 뭘 한다고! 생명의 궁 에 들어가는 일도 4서클 마법사나 된 후에야 고려보겠다고 레그시안님이 말씀하셨댔잖아. 어차피 마법사는 완전히 글러버린 것 같은데 한사람 몫을 하려면 검이라도 배우는 게 좋지 않아?" "이놈이!" 짝! 류스밀리온은 오른쪽 얼굴이 화끈해져옴을 깨달았다. 처음 만난 날 이후 정말 오랜만에 받아본 손찌검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르디예프가 소리쳤다. "네가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바가 아니다! 네가 진정 그런 식으로 날 실망 시킬 셈이더냐!" "알고 보니 빛 좋은 개살구라 나도 할말은 없어. 내 재능이 딸리는 것을 아르 스승님이 실망을 했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너무 흥분하여 숨까지 몰아쉬던 아르디예프가 다시금 건방진 제자를 호통을 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류온!" "그만둬! 그냥 검 좀 배우게 해주면 안돼?/ 마법을 완전히 안 하겠다는 것 도 아냐. 검을 배우면서 마법도 함께 병행할게. 진전도 없는데 이것만 붙들 고 있자니 머리가 빠개질 거 같다고……." "……." 아르디예프는 말이 없었다. 약간이나 /이야기가/ 통한 것이라 믿은 류스밀 리온이 재빨리 그에게로 다가갔다. "난 진심이야. 검을 배우면서 신체를 단련시키다보면 또 머리가 팽팽 돌아 갈지도 모르잖아? 응? 한번만 내 /주장/을 받아주면 안될까?" "…됐다… 너와는 더 이야기하기 싫구나." 진정으로 화가 난 아르디예프의 말소리는 몹시 낮고 탁했다. 그대로 돌아 서는 모습이 오싹할 정도였지만 류스밀리온은 끝내 그의 뒤에서 고집스럽 게 소리쳤다. "언제까지 당신의 욕심에 나를 붙들어둘 셈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은 무슨 짓을 한들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날더러 어쩌라는 거야!" 막 문을 열려던 아르디예프가 멈칫 자리에 섰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류스 밀리온이 손으로 입을 가렸다가 다시 이를 악 물고 소리쳤다. "검을 배우겠어!!" "좋을 대로 해라." 고개만 조금 돌려 짧게 말을 마친 아르디예프가 그대로 문을 나섰다. 달칵 - 하는 작은 소리와 동시에 방안을 적막이 감싸안았다. 류스밀리온은 그 자리에 아주 오랫동안 못이 박힌 듯 서있었다. 클레모어가의 연무장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었다. 백작가라고는 하나, 그 세도는 자작가에도 미치지 못해 기사와 병사들의 수가 적었던 탓이다. 현 재 클레모어가의 장남인 아르디예프가 대단한 주목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마법사의 특성상 그것은 가문의 세력과는 아무런 연관도 가지지 못했다. 오늘도 조금 한산한 모습을 보이는 연무장의 한쪽에 세 사람이 모습이 보 였다. 한사람은 자주 연무장을 이용하는 제이네프였지만, 남은 두 사람은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들뿐이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소년 을 곁에 두고 후리후리한 체격을 가진 금발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류온에게 검을 가르쳐주었으면 한다. 괜찮은 기사나 하나 붙여주거라." "검을… 말씀이십니까?" 아르디예프의 난데없는 소리를 들은 제이네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들 의 사이에 끼어든/ 류스밀리온이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했다. "마법에 진전이 너무 없어 아주 검을 배워볼까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 다!" "뭐, 이런 사정이다." 아르디예프가 무심히 대답했다. 최근 류스밀리온의 성적이 부진하여 걱정 이 태산이라던 그의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설마 이런 결과로까지 치달 을 줄은 몰랐던 제이네프가 잠시 머뭇거렸다. "제이네프님, 아니, 클레모어 백작님! 부탁드립니다!! 어떠한 분의 가르침이 라도 최선을 다해 따르겠습니다." 류스밀리온의 대답을 들은 제이네프가 불안히 입을 열었다. "그럼 마법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제 입으로 두 가지를 병행하겠다더구나. 하, 잘도!" 아르디예프는 더는 말하기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류스밀리온은 그저 시선을 약간 내려 깐 채로 그 자리에 서있을 따름이었다. 제이네프는 어찌해야 할지 망설였다. 하지만 아르디예프가 크게 성을 내며 아무 /기사나/ 하나 집어내어 붙이라고 독촉하자 겨우 결심이 선 듯 고개 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류온의 지도는 제가 맡겠습니다." "제이넨, 네가 직접?" 이때만은 아르디예프도 류스밀리온도 놀라서 사이좋게 눈을 동그랗게 키웠 다. 한번에 시선집중을 받은 제이네프는 조금 웃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넌 바쁘지 않느냐? 영지의 일도 봐야하고 여러 가지로……." "저도 검 수련을 해야 하니, 그 동안 봐주면 될 것입니다. 제 실력이 변변 치 않아 좋은 선생이 될지 어떨지는 좀 걱정스럽습니다만." /말없이/ 미소하는 제이네프의 얼굴은 아르디예프와 닮은꼴이다. 류스밀리 온은 그렇게 느끼며 앞으로 한발자국 나섰다. "제이네프님의 검은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제이네프님께 검을 배울 수 있 다면 저로서는 그 이상의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영광은 무슨. 형님의 지도를 받던 네가 아니더냐. 비록 분야가 다르기는 하나 형님만큼 네게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흥, 잘들 해봐라." 괜히 제이네프에게까지 화를 내며 아르디예프가 획 돌아섰다. 그가 휘적휘 적 걸어 연무장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제이네프가 류스 밀리온을 가만히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에, 저?" "아니, 당황하지 말거라. 그저 검술을 하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길다는 생각 이 들어서 말이다. 시종을 시켜 끈이라도 하나 가져오게 해야겠구나." "아……." 류스밀리온이 새삼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른 머리카락은 저택에 온 후로부터 단 한번도 손을 대지 않아 이젠 아주 종아리에 닿을 정도였다. 여자들 중에서도 이 정도까지 머 리카락을 기르는 자는 드무리라. 하지만 류스밀리온의 경우, 길렀다는 말보 다는 그냥 방치해두었다는 말이 훨씬 잘 들어맞았다. "제이네프님. 어떤 것이든 좋으니 검을 빌려주시겠습니까?" "물론 괜찮은 검을 골라 주마. 하지만 그런 뜻으로 말을 한 것은 아닌 듯 싶구나. 내 검으로도 충분할까?" "아뇨, 그런 일에 제이네프님의 검을 쓸 수는……."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저었지만 제이네프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그에게 내 밀었다. "무인에게 검은 소중히 다루어야 할 물건이지만 실상은 찌르고 베는 도구 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나를 무시할 생각으로 이 검을 땅에 내팽개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빌려줄 용의가 있단다." 류스밀리온은 약간 머뭇대다가 양손으로 그의 검을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칼이라고는 과도 밖에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장검의 감각이 어색했다. 손 잡이를 고쳐 쥔 류스밀리온은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한웅큼 쥐었다. "거추장스러운 머리를 자르겠습니다. 비록 마법의 대신으로 시작할 마음을 먹었지만 검술에서도 역시 최선을 다하겠다는 제 의지입니다." 소리 없이 머리카락이 잘려나갔다. 갑자기 날아갈듯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었다. 겨우 머리카락 정도가 이토록 무거웠을 줄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 데. "자, 그럼 당장 지금부터라도 시작할까?" "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 쉽지만은 않을 거다." 제이네프가 류스밀리온에게서 검을 받아들며 조금은 엄한 표정을 만들어 보였다. 류스밀리온도 지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꼭 쥐었다.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외전 -류스밀리온과 아르디예프의 청춘! (4) "헉…헉……." "아직 멀었어. 이백마흔네번 남았다. 제대로 서라!" 제이네프의 날카로운 고함소리에 류스밀리온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생 각 이상으로 제이네프의 가르침은 강도가 높고 엄격했다. 그가 온후한 성 격의 소유자이긴 하되, 그 성격을 공적인 일에까지 끌어들여 지지부진하게 만들 정도로 무능한 자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천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지만 할 때는 딱 부러지게 하는 추진력 정도는 충분히 갖춘 그였다. 겨우 내려치기 천번을 달성한 류스밀리온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검을 땅에 꽂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고 어깨가 빠질 듯이 뻐근해져 왔다. "여전하구나. 아직 체력이 약해." "예… 헉… 그래도… 전보다는… 헉… 나아지지 않나요?" 백번도 채 달성하기 전에 널브러지던 것이 엇그제 같건만. 류스밀리온은 혼자 피식 웃었다. 제이네프도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인지 같이 부드럽게 미 소지었다. "시간도 참 빠르게 흐르는구나. 네가 갑자기 검을 시작하겠다고 한지도 벌 써 3년이라니." "예, 정말… 후우… 그러네요." 숨을 가다듬으려 노력하며 류스밀리온이 대답했다. 이미 성인식까지 치른 그는 제이네프만큼이나 큰 키와 어느 정도 자리잡힌 근육으로 완전한 한 명의 청년이 되어있었다. 그저 단정히 자른 머리에 어울리지 않는 강렬한 분홍빛만이 문제라면 약간의 문제였지만. 하늘의 해를 보며 시간을 가늠해보던 제이네프가 나머지는 그만 류스밀리 온에게 맡기고자 생각하며 검을 갈무리했다. "그럼 조금 쉬다가 나머지 기본기도 전부 하고 들어가거라. 설마 내가 없 다고 /게으름을/ 피우지는 않겠지?" "그랬다가 들켜서 두배로 기본기 연습을 하게 되는 것은 절대 사양입니다. 후우, 그럼 이번에는 찌르기 천번인가요?" "그래." 3년여 동안 생각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워 곧잘 영지의 기사들과 대련도 하곤 했지만, 이쯤에 와서도 제이네프는 기본 동작을 천번씩 반복하는 연 습은 매일 빠지지 않고 반복하게 했다. 거의 4년 동안 꼼짝도 않고 마법만 파고드느라 약해진 체력을 보강하기 위해서였다. 확실히 그의 판단대로 류스밀리온의 체력은 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강해지 고 있었다. 깡마른 팔과 다리에도 근육이 단단히 붙어 보기가 좋았다. 하지 만 그와는 대조적으로 이 3년 동안 류스밀리온의 마법 실력은 조금도 발전 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했다. 딱히 마법을 멀리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 아도 검술 연습만으로 기진맥진하여 딱히 그에 열정을 쏟을 만한 체력이 남아있지를 않았다. 다른 기사들과 같은 양의 수련양이었다면 모를까 지금 과 같은 체력보강 스케줄을 그대로 따르며 다른 일까지 병행하는 것은 도 저히 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불만은 없었다. 그가 이렇게 되길 바란 일이 었으므로. 막 제이네프가 연무장을 떠나려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있을 때 멀리서 한 하인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듯 얼굴은 잔뜩 미소를 담고 있었다. "제이네프님. 류스밀리온님. /헉헉/… 아르디예프님께서 방금 도착하셨습니 다!!" "아, 형님께서?" "스승님이……." 제이네프와 류스밀리온의 얼굴도 밝아졌다. 하지만 아직 남아서 해야할 수 련양이 많은 류스밀리온은 금새 한숨을 쉬었다. 마법공부를 거의 중단하다시피 한 이 3년 동안 아르디예프의 얼굴을 보기 가 굉장히 힘들어졌다. 그가 아예 저택을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전 처럼 아르디예프 쪽에서 직접 류스밀리온의 얼굴을 보러 오지도 않았고, 류스밀리온이 직접 찾아가려 해도 대체 어디를 그렇게 가는 것인지 이 제 한된 저택 안에서 쉽사리 그의 행방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처 럼 딱 저택을 방문한 시간에 맞추어 검술 수련을 중단하고 인사라도 할라 치면 아르디예프는 뭐든 제대로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며 크게 화를 내었 다. 조금 우울해하는 류스밀리온을 본 제이네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은 햇살이 너무 강하구나. 남은 기본수련은 칠백번만 하고 들어가거 라. 처음으로 얻은 소중한 제자가 일사병에라도 걸리면 곤란하니까." "에? 저…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내가 허튼 소리나 하는 실없는 사람으로 보였더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 정말… 감사합니다." 류스밀리온은 그의 배려에 깊이 감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이네프는 부드 럽게 미소를 띄우며 류스밀리온을 격려하고 연무장을 떠났다. 류스밀리온은 바로 검을 고쳐 쥐었다. 빨리 끝내지 않으면 이번에도 아르 디예프와 이야기 한번 제대로 나눠보지 못할지 모르는 일이다. 자세를 잡 고 검을 내지르는 팔에는 그도 모르는 사이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헉…헉… 또 어딜 간 거지?" 2층 복도에 선 류스밀리온이 숨을 몰아쉬었다. 평소보다 두시간은 빨리 수 련을 끝내고 전속력으로 달려왔으나 이번에도 아르디예프는 자신의 방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실례를 무릅쓰고 백작부인의 침실과 제이네프의 서재 까지 찾았건만 그들도 방금 전까지는 이곳에 있었다는 정보밖에 전해주지 못했다. 어디를 더 찾아보아야 할지 두리번거리던 그는 곧 한숨을 푹 내쉬며 복도 에 몸을 기대었다. 평소보다는 강도가 약했지만 그래도 격한 수련을 마친 후였다. 이렇게 돌아다니자니 상당히 힘에 부쳤다. 벽의 서늘함이 기분 좋아 머리까지 바짝 기대고 있을 때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누가 보고 손가락질을 할까 심려되는군요. 이 저택에서 그런 행동은 삼가 해주십시오." "집사……." 인상을 찌푸린 중년의 남자에게 시선을 주며 류스밀리온은 몸을 바로 일으 켰다.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집사는 작은 일에 서까지 깐깐하게 굴었다. "후, 어차피 이 저택에서 나를 삿대질 할만한 자는 한정되어 있지. 내 전부 터 그 괘씸한 놈들을 해고시켜버릴까 생각 중이었다만 어떻게 생각하나?" "원하는대로 하십시오. 그럼 이만." 집사는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그를 지 나쳤다. 류스밀리온 역시 무시해주려 했으나 문득 스치는 생각에 다시 그 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 "무슨 일이십니까?" 집사가 그 자리에서 몸을 돌려 겉모습만은 정중히 물었다. 내키지는 않았 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류스밀리온이 껄끄럽게 물었다. "혹시 아르 스승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는가?" "……." 집사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가만히 들어올렸다. 지체 높은 집안의 하인으로서 취할 자세가 아니었다. 류스밀리온은 그의 무례한 태도에 크게 발끈하고 말았다. "네가 끝까지 나를 무시할 셈인가본데, 진정 해고라도 당하고 싶은가!? 내 가 지금까지 방법을 몰라서 널 그냥 내버려둔 줄 알아?" "죄송합니다. 제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집사는 허리까지 깊이 숙여 사죄했다. 여전히 발끈한 기가 남은 류스밀리 온이었지만 일단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저 급한 것부터 다시 질문했다. "그래서, 스승님은 어디에 계시지?" "저도 어디 계신지 확실히 알지는 못합니다." "…제길!" 잔뜩 사람을 약올려놓고 결국 말한다는 것이 모른다라니! 류스밀리온의 입 에서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가까운 곳에 제이네프와 백작부인의 방이 위치하고 있어 이 부근에선 항시 몸가짐을 조심했지만 이쯤 되니 그의 인 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류스밀리온의 욕지거리에 살풋 인상을 찌푸리던 집사였지만 누구 때문에 그가 저렇게 격분하는지 모르지 않았으므로 꼬투리를 잡지 않고 바로 고개 를 숙였다. "저는 이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꺼져. 빌어먹을……." 욕설은 하되, 류스밀리온 역시 더 이상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집사를 보내주었다. 머리카락을 북북 긁던 류스밀리온은 힘없는 다리를 놀 려 3층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복도가 조금씩 붉은 기를 머금었다. 어느새 해가 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류스밀리온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아르디예프는 하루를 채 머물지 않는다. 이번에도 얼굴을 보는 것은 저녁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이 전부일 듯 했다. 왜 이다지도 그를 보기가 힘이 든 것일까.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기에! 탕! 류스밀리온은 괜히 울컥하여 발을 세게 굴렀다. 하지만 몇 발자국 못 가 그의 걸음은 추를 단 듯 느려졌다. 어쩌면… 아르디예프는 더 이상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질기게도 말을 듣지 않는 제자에게 진절머리가 나서 아주 만 나는 것 자체를 피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긴, 당연한 일일까……." 류스밀리온의 머리가 땅으로 푹 떨구어졌다. 그저 추측을 해보는 것만으로 도 가슴이 저릿하게 당겨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만에 하나 이곳을 떠나 전과 같은 생활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해도… 두 번 다시 그를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그는 언제까지고 아르디예프가 다시없을 최고의 마법사로 남아 있어주기를 바랬다. 그것은 아주 비밀스러운 소망이고 결심이었다. 피곤에 지친 류스밀리온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3층의 복도가 어느덧 완전 히 붉은색이었다. 평소와는 달리 약간 어수선한 아침. 연무장 한쪽에 삼삼오오 모인 병사들 가운데 두 사람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차앙-! 우람한 덩치를 가진 기사가 강하게 내려친 검을 힘겹게 받아낸 류스밀리온 이 이를 악 물어 검을 옆으로 꺾어 내렸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기사는 덕에 잠시 비틀하며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류스밀리온의 얼굴이 씨익 미소가 돌았다. "우후후… 어때? 루터니스 경."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루터니스라 불린 기사가 울컥한 얼굴로 곧장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류스 밀리온은 재빠르게 몸을 꺾으며 검을 올려쳤다. 한차례 격렬히 부딪쳤던 검이 잠시 대치하다가 떨어졌다. "너무 방심하는 거 아냐? 내가 아직 애송이로 보이나?" 류스밀리온이 호기롭게 소리치며 몸을 낮추었다. 그와 동시에 빠르게 튀어 나가 상대를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완력은 루터니스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 했지만 상당한 빠르기와 탄탄한 기본기로 그를 보완하고 있었다. 바로 1년 전만 해도 진짜 애송이에 불과했건만! 루터니스가 속으로 그렇게 억울함을 토하며 제대로 검을 고쳐 쥐었다. 이래봬도 기사들 중 제법 한다 는 실력을 가진 자였다. 이렇게 새파랗게 어린 도련님(?)에게 진다면 그 체 면이 말이 아니었다. "으랴-----아압!" 챙캉! 루터니스의 무지막지한 기합이 연무장을 가득 메우는가 싶더니 류스밀리온 의 검이 크게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졌다. 몇 번이고 재치 있는 류스밀리 온의 기습에 궁지에 몰렸지만 끝은 결국 루터니스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강한 힘에 밀려 아예 땅에 나동그라져 있던 류스밀리온이 땅에 떨어진 검 을 허무하게 보다가 땅에 주먹을 팍 내질렀다. "에잇, 제길!! 거의 다 이겼는데!!" "이런! 류스밀리온님! 이번 건 그냥 들어 넘기기 힘들군요. 엄연히 저의 압 도적인 승리였슴다!" "뭐가! 몇 번이고 내가 밀어붙였잖아!!" 확실히 괜찮은 검격을 보이긴 했지만 아직 루터니스의 상대까지는 아님이 자명했음에도 그저 목에 핏줄을 세우고 바락바락 대드는 류스밀리온이었 다. 그때 사람들의 가운데 서 있던 우아한 금발의 남자가 그들의 사이를 중재했다. "자자, 그만하지. 그리고 류온, 패배를 시인하는 것도 무인이 가져야 할 자 세란다." "우욱! 예……." 제이네프의 말에 고대로 기가 팍 죽어버린 류스밀리온이 멀찍이 떨어진 검 을 주워 자리에서 일어섰다. 류스밀리온이 그저 아무한테나 시건방진 태도 를 고수하고 다니면서도 제이네프나 백작부인의 앞에만 서면 금새 순한 양 이 되어버리곤 하는 것은 이 저택을 드나드는 자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 었다. "류온. 오늘은 특별히 할말이 있다만……." "예, 말씀하십시오." 류스밀리온이 바른 자세로 서자 제이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3월의 첫째 날에 월튼 자작과 함께 사냥을 하기로 했단다. 그런 데 그가 어린 동생을 함께 데려오는 모양으로, 거의 네 또래인 듯 싶더구 나. 그래서 말인데, 너도 함께 사냥에 나가보겠느냐?" "예? 제가요?" 깜짝 놀란 류스밀리온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영지 내에서야 상전 대접을 받고 있다지만 밖으로 나가면 그 사정이 좀 복잡해지지 않은가. 스스로는 당당하다 손치더라도 자신의 행동이 클레모어가에 해가 가는 것은 절대 사 양이었다. 그러한데 귀족끼리의 사냥이라니! "걱정 말거라. 월튼 자작은 좋으신 분이니까. 네 이야기는 여러 번 들어 알 고 계신단다." 제이네프의 말을 들은 류스밀리온은 그제야 약간 안심을 했다.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걱정할 것도 없으리라. 아니, 어쩌면 그가 너무 좋은 사람인지라 개나 소까지 전부 좋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그러면 좀 곤란한데… 괜히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하며 류스밀리온을 빙글빙글 웃었다. 그때 검 을 갈무리하던 루터니스가 그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니 한번 가보십시오. 그리고 이번에 월튼 자작가의 분들 앞에서 실력을 한번 보여주십쇼! 허허, 뭐 솔직히 말해 실력이 꽤나 느셨으니까요." "내가 보기에도 그러하더군." 루터니스가 시원스레 칭찬을 하자 제이네프도 웃으며 그에 동의해주었다. 그들의 말을 듣자니 왠지 머쓱해져 류스밀리온이 머리를 긁었다. "그야 4년 동안 밤낮 가리지 않고 죽어라 했으니까요. 그런데도 아직 이 수준이니… 제게 검술에 재능이 있긴 한 건가요?" "답지 않게 웬 겸손이십니까?" "시꺼! 루터니스 경, 당신 들으라고 말한 거 아냐!" 루터니스를 향해 바락 소리지르던 류스밀리온이 제이네프의 앞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슬그머니 입을 닫았다. 그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고 있자 제 이네프가 빙긋 웃었다. "후후, 사실 4년 동안 이 정도면 발전이면 상당한 수준이지." "정말인가요? 제이네프님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믿을 생각인데!" 류스밀리온이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가 옆에 선 루터니스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보고 펄쩍 뛰며 분개했다. 한동안의 소동 끝에 겨 우 제자리로 돌아온 류스밀리온을 앞에 두고 제이네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류온이 검에도 재능이 상당하구나. 내 장담하건대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남부럽지 않은 기사가 될 수 있을 거다." "오옷, 그러면 저는 기사가 되는 건가요?" "그럼, 기사가 되는 거……." 뒷발로 루터니스의 다리를 차며 류스밀리온이 아무 생각 없이 되물었다. 그에 빙그레 미소한 채로 대답하던 제이네프였으나 무슨 일인지 갑작스레 그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가기 시작했다. 류스밀리온이 그 변화를 알아챈 것은 루터니스를 한참 발로 차서 분풀이를 끝낸 후였다. "제이네프님?!" 안색이 창백해진 그를 보고 류스밀리온이 소리쳤다. 루터니스와 다른 기사 들도 뒤늦게 제이네프의 이상함을 깨닫고 잔뜩 불안한 얼굴로 모여들었다. "제이네프님, 어디가 안 좋으세요? 예?" 초조해진 류스밀리온이 제이네프의 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다급한 마음에 그의 얼굴에 무슨 표라도 나지 않았나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 나 손으로 입가를 가진 제이네프는 바로 고개를 돌려 류스밀리온의 얼굴을 피했다. 그 행동이 너무 노골적이라 루터니스와 기사들까지 의아하게 생각 했을 정도였다. "제, 제이네프님……." 영문을 알지 못하면서도 조금 충격을 받은 듯 류스밀리온이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제이네프는 그냥 고개를 돌린 채로 대답을 않고 서있 기만 했다. 물이 끼얹은 듯 침묵이 맴돌았다. 기사들은 침도 한번 제대로 넘기지 못하 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고, 그 누구보다도 불안한 표정으로 류스밀리온이 그들의 가운데 서있었다. "됐…다…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사람들을 등 진 채인 제이네프가 거의 쥐어짜듯 말을 내뱉었다. 그 러고서도 한참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아주 조금 고개를 돌렸다. "류온… 사냥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예? 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지만, 제이네프님이……!!" "아니, 피곤한 것 뿐… 됐다… 그냥 다음에 이야기하자……." 손으로 머리를 짚던 제이네프가 조금 휘청이며 자리를 뜨려했다. 류스밀리 온은 반사적으로 튀어나가 그의 팔을 붙들어 부축했다. "됐다!! 그만! 하아… 따라…오지 말거라……." 별안간 소리를 지르며 손을 뿌리치는 제이네프의 덕에 류스밀리온은 너무 나 놀라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어버렸다. 그럼에도 제이네프는 말 한마 디 더 건네지 않고 그대로 휘적이며 저택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들뿐. 제이네프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며 류스밀리온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3월의 봄이 찾아들고 있었다. 월튼 자작가와의 사냥은 제이네프 혼자 참석 했다. 물론 류스밀리온은 그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것 이 아니었다. 그 날 일이 있은 이후로 제이네프는 몸이 좋지 않다며 아르 디예프의 검술지도를 완전히 다른 기사에게 맡겨버렸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류스밀리온이 일부러 제이네프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류스밀리온의 방문을 거절했다. 쌀쌀한 밤바람이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새어 들어왔다. 그러나 류스밀리 온은 낮 동안 검술 훈련을 하며 입던 얇은 셔츠의 차림으로 창가의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제도 아르디예프가 저택을 방문했지만 식사시간에 얼굴을 한번 본 것을 제하고는 대화 한번 나눠보지 못했다. 게다가 현재 월튼가와의 친목사냥 덕에 이곳에 없기는 하지만 제이네프와도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 다. 손에 모였던 소중한 것이 하나둘 모래알처럼 빠져나는데도 류스밀리온 은 그저 지켜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팔을 모아 몸을 웅크렸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지만 따뜻하게 데워주 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는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음을 느끼며 가만 히 눈을 감았다. "…온님… 류스밀리……!!" 멀리서 어렴풋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밤새 찬바람을 잔뜩 맞 고 몸이 꽝꽝 얼어버린 류스밀리온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만도 엄청난 노력이 필요했다. "으음… 아침인가……." 한번 몸을 부르르 떤 그는 따가운 햇볕에 눈을 비볐다. 웬만해서는 자신을 깨우러 오지 않는데 이렇게 하인이 서있는 것을 보니 상당히 늦잠을 잔 모 양이다. "저기… 류스밀리온님……." 멍한 시선을 올린 류스밀리온은 하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정신이 번쩍 든 그가 불안하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라도……?" "어제저녁에 백작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만……." "제이네프님께서 벌써?" 사냥을 나선 지 아직 이틀 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귀환은 시기가 너무 빨랐다. 류스밀리온이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세한 사정을 독촉하자 하인이 안타까운 얼굴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크게 다치셔서 돌아오셨답니다. 일핏 듣기로는 말 에서 떨어지셨다고……." "뭐, 뭐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어제 바로 깨우지 않았어?!" "주무시고 계신다면 일부러 깨우지 말라고… 그분께서 말씀하셔서……." 흥분해 있던 류스밀리온이 털썩 자리에 앉았다. 그런가. 그렇지 않아도 꼴 보기 싫은 녀석인데 병상에서까지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겠지. 양손을 모아 입가를 가렸다. 몸이 조금씩 떨려와 최대한 팔을 웅크렸다. 그 런 그의 모습에 영문을 모르고 의아해하던 하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제이네프님을 만나 뵈러 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니… 안가는 편이 좋을까?" 류스밀리온이 간신히 대답하자 하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불만스럽게 물었 다. "예? 백작님께서 류스밀리온님이 깨시거든 천천히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만… 가지 못하겠다고 전하란 말씀이십니까?" "에? 오라고?" 당장에 눈이 번쩍 띄였다. 하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자마자 류스밀 리온은 당장에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같이 방을 나섰다. 어제 따로 옷을 갈 아입지 않고 잠들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천만 다행이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금새 2층에 위치한 제이네프의 침실에 다다랐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류스밀리온은 노크를 하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그냥 들어오렴." 막 손이 방에 닿으려는 찰라 방안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지 오 랜만에 듣는 제이네프의 목소리였다. 아마 시끄러운 그의 발소리 덕분에 먼저 알아챈 모양이었다. 약간 머쓱해하며 류스밀리온은 방문을 열었다. 그의 방에 들어서며 류스밀리온이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옅은 약품 냄새 였다. 다치셨다더니 그 상태가 심한 것일까!? "제이네프님! 몸은 어떻게!!" "별거 아니다. 왼쪽 팔목에 작게 금이 간 것 뿐… 그리고 약간의 타박상이 지. 그것보다 먼저 자리에 앉겠니?" 빛을 받으며 하얀 시트 속에 파묻히듯 앉은 제이네프의 얼굴은 창백했고 상당히 초췌해져 있었다. 스스로의 입으로 괜찮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류스 밀리온은 불안감을 쉽게 감출 수가 없었다. "제이네프님…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아니… 그건 다른 일 때문이란다… 일단 앉으렴. 앉아서 이야기하자." 류스밀리온은 일단 그가 권한대로 침대 맡에 놓인 간호용 의자에 앉았다.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정작 이렇게 자리를 잡고 나니 무슨 말을 해 야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로 하고 갈팡질팡하는 류스밀리온 을 가만히 바라보던 제이네프의 얼굴이 돌연 크게 어두워졌다. "미안…하구나……." "예?" 난데없는 사과의 말에 류스밀리온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제이네프의 얼굴 에는 깊은 슬픔이 들어차 있었다. "제이네프님. 어째서……." "미안하다… 내가… 네게 정말 몹쓸 짓을 했다." "대체 무슨……." 눈을 동그랗게 뜬 류스밀리온을 앞두자 제이네프는 참지 못하고 시선을 돌 려버렸다. 이미 그의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워 그토록 피했건만, 직접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니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다. "알고 있느냐. 내가 왜 너의 검술 선생을 자처했는지… 왜 체력부진을 핑 계로 그토록 힘든 훈련을 강행하게 했는지……." 제이네프는 거기까지 말하고 손을 들어 눈가를 감쌌다. 류스밀리온은 문득 가슴 한쪽이 뜨끔해 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지금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 지, 이 정도의 말만으로도 류스밀리온은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었다. 잠시 말을 끊고 있던 제이네프가 붉어진 얼굴을 간신히 류스밀리온에게로 향했다. "네가 마법사가 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다. 네가 마법을 익히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네가 검술을 배우겠다고 선언했을 때, 아마 그 때였을 거다. 나는 그를 기회라고 생각한 거야!" "제이네프님……." 류스밀리온이 안타깝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시금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제이네프가 조금씩 떨었다. "그 행동이… 어찌나… 더럽고 추접스러운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아니… 맞다… 네가 형님을 위해서 일부러 마법을 버리고 검을 배우려 한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그를 모를 리가 없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어! 그럼에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네 그 마음을 이 용하고 있었지! 나라는 놈은……!!" "제이네프님!" 류스밀리온은 크게 소리쳐 제이네프의 말을 끊었다. 그러나 제이네프는 눈 을 꼭 감았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그는 자신도 모르게 저지른 잘못에 수치감을 견딜 수가 없었다. 막상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나자 류스밀리온 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렇게 류스밀리온을 피하며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월튼가와의 사냥 도중 그만 실수를 해버려 이런 상처까지 입은 것이다. "틀…립니다… 제이네프님의 탓이… 아니예요……." 고개를 저으며 류스밀리온이 안타깝게 말했다. 사실, 모르는 바는 아니었 다. 제이네프의 행동에 담긴 그런 속뜻을. 무의식중에 형인 아르디예프를 위해 자신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류스밀리온은 굳이 그런 그를 거부하 지 않았다. 마음을 정했음에도 끝없이 눈앞에 어른대는 마법을 잊는 일에 제이네프가 주는 혹독한 훈련방식은 가장 좋은 처방약이었다. 또한 자신을 이용하는 이면으로는 모든 열정을 쏟아 성실히 지도를 해주는 그의 덕분에 검술 실력도 일취월장할 수 있었다. 실은 류스밀리온도 제이네프를 이용한 것이나 진배없었다. "미안…하다… 류온……." "그런! 그만두세요!!" 제이네프가 류스밀리온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당황한 류스밀리 온이 당장에 그를 잡아 일으켰다. 류스밀리온의 심장이 격하게 방망이질 쳤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나 상냥한 것일까. 그냥 모른 척 했어도 좋았을 것을. 뒤늦게 진실이 보였다한들, 그대로 모르는 척 엎어두 었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 않을 것을. "이제… 그만 돌아가거라… 류온." "네?" 류스밀리온이 고개를 들자 제이네프가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분홍색 머리를 쓸어 내렸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 그만 돌아가야지." "제이네프님……?" "그분이… 기다리실 거다……." 그 짧은 한마디에 류스밀리온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제이네프가 끊어질듯 미소를 지으며 문을 가리켰다. "그만 나가보렴." 류스밀리온은 사양하지 않았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선 그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홀린 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류스밀리온이 정신 없이 중앙계단을 내려와 1층 홀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갑작스런 라벤다의 향기가 그의 걸음을 멈추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백작부 인과 집사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서있었다. "제이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가 네게 몹쓸 짓을 했던 모양이더구 나." 연녹색의 정갈한 드레스에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가 진 여인이 안타깝게 말했다. "내 그 아이의 어미 되는 자로서 함께 사죄하마. 부디 용서해다오." 그녀의 고운 머리가 가만히 숙여졌다. 류스밀리온은 누군가의 손에 붙잡히 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고개를 든 백작 부인이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미소했다. "아르를 찾고 있지?" "어디에 계시죠?!" 류스밀리온이 예를 차릴 생각도 못하고 소리를 높여 물었다. 그러자 이번 에는 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언젠가 아르디예프님께서 당신의 상황을 물으셨던 날, 제가 말씀드린 적 이 있습니다. 손과 얼굴에 온통 흙을 묻힌 채로 뒤편 산에서 내려오신 적 이 있다고 말입니다." "아……!!"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겨우 그런 곳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한 자신이 그렇게 어리석을 수가 없었다. 그래, 전에 집사에게 아르디예프의 행방을 물었을 때도, 확실히 알지는 못 한다고 했지 아예 모른다고는 말하지 않았었다. 저렇게 얄미운 놈이 있을 수가! 그러나 집사, 그가 다름 아닌 아르디예프의 편이었기에 그런 행동도 가능했었던 것이리라. 무엇보다도 이 저택과 그곳의 주인들을 소중히 여기 는 자이므로. 집사와 백작부인에게 뭐라 감사의 인사도 드리지도 않고 류스밀리온은 그 대로 저택을 뛰쳐나갔다. 이상한 흥분에 가슴이 맹렬히 고동쳤다. 얼마 뛰 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에까지 차 올랐다. 하지만 류스밀리온은 풀을 짚고 나뭇가지를 잡으며 잠시의 쉼도 없이 산을 뛰어올랐다. 어느덧 무성한 나무들이 하나둘 엉성해지며 거대한 아름드리 나무가 그 모 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옆에는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변함 없는 자그마한 돌탑이 있었고, 또 하나 전에 본적 없는 석상과도 같은 인영이 있었다. "스승님!!" 산이 떠나가라 류스밀리온이 소리질렀다. 가만히 절벽 아래를 바라보고 있 던 인영이 소리 없이 몸을 돌렸다. "이제야 왔구나." "헉! 헉!" 류스밀리온은 숨을 마구 몰아쉬면서 비틀대는 걸음으로 앞으로 걸어갔다. 얼마 만에 듣는 목소리였던가! 얼마 만에 보는 미소였던가!! 비척대던 류스밀리온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버리자 아르디예프 가 쪼그리고 앉아 함께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 위에 손을 얹으 며 심통 맞게 말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마법에서 손을 놓고서도 살만하더냐?" "헉, 헉… 아니! 헉, 전혀! 꿈에도 막… 헉헉… 마법 수식이 나오더라고!" 숨을 격하게 토해내며 류스밀리온이 대답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거짓말을 해왔는데 저도 모르게 진심을 말해버렸다. "그럼 함께 파낼까? 이것 말이다." 아르디예프가 작은 돌탑을 가리켰다. 류스밀리온이 겨우겨우 숨을 가다듬 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의 돌탑과 조금도 다름없이 완전히 똑같게 만들 어뒀다고 생각했는데 들켜버리고 말았다. 이러쿵저러쿵해도 역시 그는 자 신의 머리 꼭대기에 선 스승이란 말인가. 류스밀리온은 얼굴을 조금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빙그레 웃은 아르디예 프가 품에서 작은 꽃삽을 두개 꺼내들었다. "맨손으로 땅을 파는 건 무식한 놈이나 할 짓이지." "…남 이사……." 아르디예프에게서 뺏어내듯 삽을 얻어낸 류스밀리온이 먼저 돌탑을 손으로 와르륵 무너뜨리고 마구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르디예프도 그 옆에 앉아 찔끔찔끔 흙을 퍼내며 간간이 그 일을 도왔다. "참 깊이도 팠구나. 그런데 대체 여기다 뭘 묻은 거냐?" 한참을 파내고 있자니 아르디예프가 고개를 기울이며 질문했다. 그 말에 류스밀리온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뭐 묻은 지 몰랐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느냐? 네놈과 함께 파보려고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거 늘." "……." 하긴 스승도 인간이다. 추측에도 한계가 있는 법. "푸훗- 푸하하하." 류스밀리온이 죽어라 땅을 파면서 동시에 낄낄대며 웃어댔다. 그 꼴이 꼭 미친놈 같아 아르디예프가 잠시 멈칫거렸을 정도였다. 삽을 이용해서인지 땅은 금방 파헤쳐져 그 안의 보물을 드러냈다. 4년 동 안을 기다린 탓인지 아르디예프가 적지 않게 기대에 찬 얼굴로 먼저 그 물 건의 정체를 확인하고자 했다. "음? 웬 걸레조각들이 이렇게……?" "…종이야." 빗물과 흙에 엉망이 되어 완전히 형태를 잃은 종이들을 보며 류스밀리온이 중얼거렸다. 아르디예프는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그것들을 돌려보고 뒤집 어보고 하다가 그 안에 흐릿하게나마 남은 글씨의 흔적들을 보고 눈을 크 게 떴다. "이건 4서클의 공식이잖아! 류온, 너 설마 4년 전 그때 벌써 4서클의 마스 터가 되어 있었던 것이냐!?" "아니. 그건 그냥 책보고 베껴 적은 건데……." "저런 놈이… 여기까지 와서 또 그런 거짓말을 하느냐!!" "아니라니깐!" "뭐가 아니냐!!" 말이 딱 멎었다. 마주보고 입을 꼭 다물던 두 사람이 이번에는 동시에 웃 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무식한 제자 놈 덕에 잔뜩 고생만 하는구나." "하하하… 하하… 제길, 자꾸 무식하다고 그러네… 내 반만큼이라도 머리 좋은 놈 있음 나와보라고 해!" 웃던 도중 괜히 하늘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친 류스밀리온이 숨이 모자란지 한숨을 팍 쉬었다. 아르디예프도 그제야 겨우 웃음을 멈추고 오랜만에 보 는 제자의 얼굴을 다시금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시선을 눈치챈 류 스밀리온이 입을 삐쭉 내밀며 말했다. "뭘 봐? 이젠 예쁘지도 않은 얼굴이구만." "이런 못되먹은 놈, 말버릇 좀 봐라. 제이넨과 어머님껜 껌뻑 넘어가는 주 제에 정작 스승에겐 그런 막말을 쓰는 것이냐." "남 이사? 나도 이제는 내 갈 길을 간다. 스승님은 스승님의 갈 길을 가 라!" "이놈 이거 말하는 거 하고는……!" 아르디예프의 주먹이 류스밀리온의 머리를 멋지게 갈겼다. 그래도 안 된다 고는 말 안 하는 스승이 류스밀리온은 무엇보다도 가슴 저렸다. 쏴아아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새 봄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 드디어 끝~ ^^;; 기본기 연습 천번.. 과연 말이 되는 소리인가! 여러분의 의견을 묻습니다!! ^^;; 책으로 나올 땐 뒤에 뭐가 좀더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이놈들이 왜 틀어졌는지에 대해서 말이죠. 하지만 넘 길어져서 그만둘까 싶어요. 이것만으로도 40페이지 가까이 된다죠. (뭔 놈의 외전이... ㅡ.ㅡ;;;) 그럼 빠링~ hongik1999@hanmail.net 메일주세요~ -마감에 허덕이는 아비스라라놈 올림 * 글 올립니다. 금방 지울 것 같으니 글이 올라왔다고 여기저기에 홍보 좀 해주세요. 삭제일은 오늘 내로 출판사에 물어 얼른 적어놓겠습니다. 그리고 양이 너무 많으니 만큼 하루 이틀 내로 다 못 읽을 것 같으신 분은 끝까지 인터넷으로 보는 걸 고집하지 마시고 워드패드나 한글에 안전하게 붙여넣 기 해두세요. 보기에도 훨씬 나을 겁니다;; 청어람에 계신 분들은 펌이 안 되니 제 카페를 찾아주세요. http://cafe.daum.net/fantasylovelove <- 주소 이르나크의 장 Part 59 생포 작전 생포 작전 "조금만 더 가면 '그'가 있는 보급소가 있겠군요." "후크가 빼내온 정보가 확실하다면." "에르가님은 친구를 믿지 못하시는군요." 어깨까지 기른 하늘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재수없는 소리를 하는 이트의 모습에 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녀석은 전혀 주춤한 기색 없이 씨익 웃음을 보일 뿐이었다. "능글맞은 놈." "귀족이든 평민이든 돈의 힘에 굴복하지 않는 자는 드문 것이 현실입니 다. 그러한데 아르윈 왕국 제일의 자금력을 자랑하는 쟈스칼 상단의 정보 력을 믿지 못하면 어디를 믿는단 말씀이십니까?" "누가 모른대? 입 좀 다물어!" 나는 성질을 죽이지 못하고 언성을 조금 높였다가 뒤늦게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현재 나의 부대가 매복을 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이트는 정말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트 저놈, 건방짐의 수위를 완전히 뛰어넘었지 않은가! 빌어먹을, 언젠가 반드시 구린 꼬투리를 잡아내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본때를 보여주고 말 테다!! "사령관님." 먼저 상태를 살피라고 보내었던 척후병이 돌아와 내 앞에 부복하는 것을 보고 일단 이트를 향한 복수는 뒤로 넘기기로 했다. "적 진영의 상태는?" "예, 빈틈없이 경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머지않은 시간에 이쪽으로 정찰병이 보내질 듯싶습니다." "그런가? 알았다, 계속 상황을 살피도록." "예!" 일단 척후병을 물린 나는 남쪽 녘을 향해 곱지 못한 눈초리를 던졌다. 일 라트 놈, 비리비리하고 유약해 뵈는 주제에 그래도 제 할 일은 다하는 모 양이다. "씁, 일라트가 조금만 멍청했어도 일이 훨씬 수월해질 것을."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살며시 자리에서 물러났다. 안전한 매복을 위해 조 금 더 뒤로 물러나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들의 존재를 들킬 수도 있었다. 카류 놈이 기뻐할 만한 선물을 가져다 주려면 신중해야 할 것이다. 아, 딱히 그놈에게 선물해 주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고, 이만한 작전 역시 수월하게 완수하고 마는 내 위∼대한 능력에 감탄을 할 그놈의 모습이 보 고 싶다는 거다. "에르가님, 시작되는 듯합니다." "아아." 이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보급소에 소란이 일 어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쪹 쪹 쪹 창을 통해 스며드는 햇살이 따갑다. 여름에 접어들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 이다. "전하께서는 이 작전의 성공 여부를 확신하십니까?" 나는 힐레인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모르지. 나도 신이 아니니까." 힐레인의 고운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실 이런 나약한 말은 군의 총책 임자로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종류의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이 자리엔 나와 힐레인뿐이고, 엘프인 녀석에게 진심을 숨겨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었 기에 나는 뻔뻔스레 그렇게 내뱉고는 힐레인의 반발을 그대로 무시했다. 왠지 빠직― 한 느낌의 힐레인.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탁자를 탕탕 치며 언성을 높였다. "국왕군이 전선을 중남부로 물린 후부터 대치 상태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4개월이 흘렀습니다. 동맹을 맺은 해룡족이 북부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가 하고 있으며 카르틴의 우수한 병사들 덕으로 아군의 전력 또한 국왕군에 밀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구원자였던 그 둘은 오히려 큰 문제가 야 기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레스트 산에서 비롯된 드래곤의 권위가 명분 이 되고 있다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에 해룡족은 야만인이며 카르틴 인 철천지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전이 오래 지속되어 땅이 황폐해질수 록 드래곤의 권위는 점차 사라지며 백성들은 아군에게서 고개를 돌릴 것입 니다." "하아……." "때문에 지금이 중요한 순간입니다. 이 대치 상태에서 어느 쪽에 흐름이 오느냐가 관건인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승리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 황이지요. 그러한데 그런 무른 말씀이라니요." 힐레인이 하얀 목에 핏줄까지 세우며 설교를 했지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어쩔 수 없잖아. 사실 네가 직접 게릭과 일라트를 보았더라면 이런 고민 을 할 필요도 없을 텐데 정말 아깝단 말이지. 그러게 왜 좀 더 빨리 아군 에 합류하지 않았어?" "하아, 사실 제가 원하는 건 이 작전의 성공 여부를 장담받는 것이 아닙 니다. 저는 단지 전하께서 좀 더 강인한 면모를 보여주셨으면 하는 겁니 다." "아하∼! 미안. 하지만 난 애들 앞에서는 장난을 치고 싶어져." "죽고 싶냐?!" 완전히 열받은 힐레인의 입에서 멋지구리하게도 막말이 튀어나왔다. 그러 나 내가 의도한 상황이었기에 입술에 빙긋 웃음이 걸렸다. 전에는 힐레인 의 화내는 모습이 그렇게도 싫었는데 이제는 이렇게 미소까지 지을 수 있 게 된 것이다. 어차피 힐레인은 카이 형이 아니니까. 이럴 때면 무언가 나 자신이 훨씬 더 긍정적인 자세로 바뀌어가는 것을 느 끼게 된다. "자, 들어봐, 힐레인. 일라트라는 녀석은 말이지! 학교에 다닐 적 녀석을 본 바로는 아이들의 따돌림 때문인지 몹시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그럼에도 메마르지 않고 상냥한 아이라는 느낌이었어. 후에 일라트를 향하면 당장에 눈빛부터 부드럽게 변하는 게릭의 모습을 보고 그 이유가 게릭의 끔찍한 아들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지. 부모의 따뜻한 관심도 없이 일라트처럼 그렇게 따돌림받고 그러면 보통 아이들은 좀 삐뚤어지거든. 나, 어린아이들 에 대한 것이라면 좀 아는 편이니까 믿어도 좋아. 알고 보면 유치원 교사 가 꿈일 정도였으니까." 조금 전 힐레인의 물음에 대답을 지금에서야 조금씩 말해 나갔다. 금방이 라도 앞에 놓인 탁자를 뒤엎을 듯하던 녀석도 곧 나의 말에 귀를 기울였 다. 물론 유치원 교사라는 부분에서 고개를 조금 갸웃했지만 일부러 그 말 을 묻기 위해 내 이야길 끊지는 않았다. "게릭이 매사의 모든 행동에 신중을 기하는 자이긴 하지만 극진한 부성애 만큼은 거짓이 아닐 거야. 분명히 일라트가 위험에 처하면 물불 가리지 않 고 뛰어들겠지. 때마침 후크가 일라트의 거처에 대한 정보를 가져다 주었 으니 한번 써먹어봐야 하지 않겠어?" "게릭 정도 인물이라면 뒷일이 어떻게 될지는 훤히 꿰뚫고 있을 터. 사실 그가 아닌 누구라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작전입니다. 그럼에도 게릭이 아 들의 위기에 군을 내팽개치고 제 발로 함정에 걸어 들어올 것이란 말인가 요?" "응!" 내가 간단히 대답하자 힐레인이 진지하게 질문했다. "전하께서는 스스로의 안목에 자신이 있으십니까?" 나는 웃었다. 사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디트 경에게 도, 유넨에게도, 게릭에게도 나는 완벽하게 속고 말았다. 디트 경이야 나를 죽이려 하긴 했어도 실제로는 굉장히 나를 아껴주었으며, 게릭의 경우도 처음부터 나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유넨의 경우는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속았다고 할까? 우습게도 나는 아주 짧은 순간도 유넨이 이상하 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일라트의 경우도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의 이 우습 지도 않은 사람 보는 안목이 또 한 번 아군을 발칵 뒤집히게 만들지 모르 는 일.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내가 싱긋 웃으며 무책임한 말을 하자 힐레인이 이내 발끈하여 주먹을 불 끈 쥐었다. 그러나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나야 아이디어를 냈을 뿐이고, 힐레인과 레이포드 경이 물샐틈없이 작전 을 짰으니까 분명 성공할 거야!" "하.하. 물론 그래야겠지요. 작전이 실패하면 아군은 주요 요새 하나를 잃 게 될 테니!" 한쪽 입술을 올리고 힐레인이 딱딱하게 웃음소릴 냈다. 어지간히도 열받은 모양이다. "그만 화 푸는 게 어때? 지금까지도 계속 그랬잖아? 알고 보면 난 예전에 황천에 갔어야 옳았지. 그럼에도 언제고 '어떻게든 돼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어?"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힐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나 쁜 표정은 아닌 걸로 봐서 내 말이 먹힌 걸지도. "긍정적인 자세야 좋습니다만, 너무 대책없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 다. 부디 자중해 주시길." "당연!" 아주 시원스럽게 나는 대답했다. 쪹 쪹 쪹 찻잔에 입을 대자 투명한 적색을 띠는 차가 옅은 입김에 호선을 그렸다. 곧 부드러운 차의 향이 입 안으로 가득 퍼져 갔다. 수많은 귀족들이 마법사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뇌물의 일종으 로 아르디예프님께 귀한 차를 선물하곤 했는데, 나는 그분의 수제자였던 덕분으로 선물 처리반으로 임명받아 여러 종류의 차들을 접할 기회가 있었 다. 그 결과 조금 과장하여 크로시아 대륙의 차란 차는 모두 섭렵했다고 자신까지 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트로이 후작이 건넨 이 차는 아주 생소 한 것이었다. "좋군요. 실례를 무릅쓰고 어떻게 구하셨는지 캐묻고 싶을 정도입니다." "겨우 차 이름을 묻는 일에 실례를 따질 것이나 있겠습니까. '엘'이라 고 불리는 에베리아 왕국 극서부의 엘 지방에서 나는 차입니다. 향과 맛이 일품이지만 엘 지방과 우리 아르윈 왕국은 대륙의 극과 극인지라 거리가 너무 멀어 구하기가 조금 힘든 편입니다." "그렇군요. 좋은 차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드리겠습니다, 트 로이 후작." "별말씀을. 원하신다면 시종을 시켜 아예즈 공작님께 가져다 드리라 명하 겠습니다." 오후의 티타임에 어울리는 평화로운 대화가 오갔다. 평소라면 그리 친하지 도 않고 연배도 같지 않은 트로이 후작과 티타임을 즐길 일은 없을 테지 만, 이런 식으로라도 평화적인 분위기를 보임으로써 아군의 편 가르기가 조금은 누그러들었으면 하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우 리 두 가문이 맞서지 않을 것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음에도 아군은 은근히 아예즈 공작파와 트로이 후작파로 나누어지는 분위기였다. 뭐,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이 바닥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똑똑― 작게 들리는 노크 소리에 트로이 후작이 빠른 동작으로 찻잔을 내려놓았 다. 트로이 후작과 내가 티타임을 즐기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을 터임에도 이 시간을 방해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임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후작 각하, 아이시스 남작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들어와도 좋다고 일러라." 후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무례하게도 벌컥 하는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기사가 당황스런 얼굴을 했지만, 정작 문을 열고 들어 온 장본인은 그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티타임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전령을 통해 급한 연락을 받고 말씀드릴 것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아예즈 공작님도 계셨군요. 인사가 늦 어 죄송합니다." 아이시스 남작(게릭)은 거의 건성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나는 개의 치 않고 손을 저으며 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인사는 아무래도 좋다. 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시스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의 빈자리 위에 자신이 가져온 작은 지도를 꺼냈다. 그곳엔 아군의 크고 작은 요충지, 보급 기지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으며 척후병을 통해 알아낸 제6왕자군의 대략적인 거점 역시 표 시되어 있었다. 아이시스 남작은 제6왕자군의 중요 거점 중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델라스 요새를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제6왕자군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척후병의 보고에 따르면 일만의 병 력이 델라스 요새를 떠났다고 합니다." "어디로 향하고 있다고 하던가?" "일만의 병력이 함께 진군하지 않고 반으로 갈라져 그중 오천의 병사가 다른 방향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들의 행방까지는 적의 방해에 의해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나머지 오천의 진군 방향은 확실히 '이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아이시스 남작의 손이 천천히 서북쪽으로 향했다. "그곳은?" "제12대 보급 기지입니다." 트로이 후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 또한 트로이 후작과 마찬가지로 그 소 식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제12대 보급 기지는 갑작스럽게 대군이 중남부에 몰리면서 급히 만들어진 소규모의 보급 기지다. 물론 그 보급소도 원활한 보급을 위해 필요한 곳이 긴 하지만 가까운 곳의 제7대 보급 기지를 이용하면 완전히 보급이 끊기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는다. 아군에게는 제12대 보급 기지를 잃어도 그리 큰 피해를 입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면 제6왕자군의 입장에서 일만이나 되는 병력을 공략에 투입하면 예상 주둔 병력이 일만오천에 불과한 델라스 요새는 그 방비가 몹시 허술해지게 된다. 보급 기지를 점령하려다가 도리어 아군의 역습을 받아 주요 거점 중 하나인 델라스 요새를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라면 대단한 이득이 돌아오는 것이 아님에도 상당한 위험을 감 수하며 제12대 보급 기지를 공략하러 나설 이유가 없다. "혹시 제6왕자군이 제7대 보급 기지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해서 제12대 보급 기지의 공략에 나선 걸까요? 하지만 적이 그 정도로 사전 조사를 허 술하게 했다고 보긴 어렵지 않습니까? 제7대 보급 기지는 전부터 존재했던 대규모 보급소 중 하나인데……." "제12대 보급 기지라……." 트로이 후작의 중얼거림에 나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그의 다음 말 에서 이 일의 실마리가 나올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그곳에 그대의 아들이 책임자로 가 있었지." 트로이 후작이 지긋한 눈초리로 아이시스 남작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제 야 제6왕자군의 의도를 어렴풋이 짐작하며 입을 열었다. "제6왕자군은 지금 아이시스 남작이 아들을 구하기 위해 델라스 요새의 역습을 제쳐 두고 제12대 보급 기지로 달려오기를 바라는 것이군요. 결국 행방이 묘연한 나머지 오천의 적병은 제12대 보급 기지 주변에 매복해 있 을 테고 말입니다." "동감입니다, 아예즈 공작님. 장기전이 되면 불리할 것을 예상한 놈들이 얕은꾀를 쓰는군요. 백성이 야만족과 적국에 나라를 판 매국노를 언제까지 나 인정하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아르디예프님까지 잃은 마당이 니……." 내 말에 긍정을 표하던 트로이 후작이 제6왕자군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런 후작의 마음에 완전히 동조해 줄 수가 없었다. 다름 아닌 아르디예프님의 이야기가 거론되었으므로. 네 달 전 카이세리온 5왕자의 명으로 보내진 암살자가 독살을 시도했다. 그 결과 카류 왕자와 또 한 명의 마법사 류스밀리온은 살아남았지만 아르 디예프님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은밀히 전해졌다. 생각지도 못하게 아르디예프님의 비보(悲報)를 전해 받았지만 나는 아버지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그 사실을 실감하지 못했다. 눈앞의 시체나 다른 증 거물도 없이 전령에 의해 전해진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그 사실을 느끼도 록 만들기는 한참이나 역부족이었다. 아버지, 그리고 또 한 명의 아버지와 같았던 분인 아르디예프님. 모두가 이 종잇조각 하나에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이란 이토록 쉽게 사라지는 존재였던가. 그분들의 죽음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은 그 정도였을 따름으로 지금에 와서 는 때때로 그 사실이 되새겨질 때마다 이렇게 기분이 약간씩 가라앉는 정 도다. 트로이 후작의 짧은 한마디에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남모르게 탁 자 밑의 주먹을 꼭 쥐었다.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 있을 시기가 아니지 않 은가. 나는 고개를 저어 상념은 완전히 떨쳐 내며 아이시스 남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자세히 그의 반응을 살폈다. 군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친아 들을 버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그에게는 보통 곤란한 일이 아닐 것이다. "물론 보통이라면 아예즈 공작님과 같이 생각하겠지요. 저의 아들을 인질 로 삼은 함정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6왕자군이 그렇게 눈에 뻔히 보이 는 작전을 시도할 것인지 심히 의문스럽군요." 그러나 남작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 를 으쓱이며 가볍게 이야기를 꺼낸 그는 곧 손을 입술로 가져갔다. 평소의 버릇을 미루어볼 때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모양이었다. "제6왕자군은 아군의 예상을 거꾸로 뒤집어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제12 대 보급 기지로 가는 오천의 병사는 미끼에 불과합니다. 보시다시피 델라 스 요새로 통하는 길에는 수풀 지역이 여럿 존재하지요. 아마 중간에 방향 을 튼 오천의 병사는 제12대 보급 기지가 아니라 델라스 요새 어딘가에 교 묘하게 매복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군이 역습을 위해 델라스 요새로 진군 할 즈음에 공격하려는 속셈인 것입니다. 만약 아군이 그대로 델라스 요새 로 진군한다면 매복하고 있는 오천의 병사와 요새 내에 주둔 중인 군의 협 공을 받아 대책없이 당하고 말 것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 미간을 짚었다. 확실히 남작의 말은 상당히 그럴 듯했지만, 신중히 바꾸어 생각하면 너무 앞서 생각하는 듯도 했다. "너무 앞서 생각하는 거 아닌가?" 솔직한 감상을 그대로 밝히자 아이시스 남작의 눈이 웃는 듯 마는 듯 살짝 호선을 그렸다. 손이 입술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은 상당히 읽기가 힘들었다. "내전 초기에만 해도 사람들은 이를 전쟁이 아닌 진압 정도로 생각했습니 다. 그만큼 전력의 차이가 압도적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적은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히려 아예즈 공작님께서 그들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계신 것이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글쎄… 하지만 나는 제6왕자군이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생각지 않네. 지 금까지 그들이 버텨온 것도, 크게 성장한 것도 전적으로 우연이라고 생각 하네만? 불가사의한 드래곤의 소문이나 때맞춰 내린 비. 그들을 지금까지 지탱하게 해준 천운이었지. 또한 그들의 비약적인 성장도 때마침 카르틴과 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지 않은가." "과연 그럴까요? 첫 번째 전투에서 보여준 드래곤의 환영은 상당히 기발 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세레스트 성산에서의 일도 천운이 있었다고는 하나 아군은 분명 그곳에서 삼만의 전력을 잃었습니다. 단순히 불가사의한 소문 을 뛰어넘어 무언가 대단한 작전을 펼쳐졌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이시스 남작의 반박을 듣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것은 직감. 그가 어떻게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강 한 직감. 세레스트 전투. 제6왕자에 대한 불길한 소문을 풀어 성안과 밖에서 동시 공격하게 하는 안은 분명 아이시스 남작이 계획한 일이었다. 세레스트 성 에서의 전투를 예감하여 한 달 전부터 주도면밀하게 준비를 갖추어두었다 는 말에 아군은 다시 한 번 그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작전은 알 수 없는 적의 술수로 실패로 돌아갔다. 좋은 계획이 었지만 분명 그것은 실패한 안이었다. 이는 아이시스 남작에게 잊고 싶은 사건일 터였다. 하지만 현재 남작은 그 일을 몹시 강조하고 있었다. 아니, 강조하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아이시스 남작은 단순히 진실을 말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외 면할 수 없는 지난 사실을 말하며 더 나은 계획안을 제시하려는지도 모른 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이 직감을 떨칠 수가 없었다. "흠." 곁에서 남작의 말에 수긍을 한다는 듯 트로이 후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 고 있었다. 그 모습에 다급해진 나는 당장 아이시스 남작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졌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나는 자네의 말이 무언가 석연치가 않네. 세레 스트 성의 패배와 같은 잊고 싶은 자신의 허물까지 드러내어 그토록 강조 하며 우리들을 설득하다니, 마치 절박한 일에 부딪쳐 체면이고 뭐고 모두 내팽개친 사람 같군.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네만, 자네 지금 보급 기지에 있을 아들을 구하기 위해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아이시스 남작을 자세히 주시했다. 이 말을 듣고 만에 하나라도 찔리 는 곳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표정의 변화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 다. 아주 미세한 변화까지도 잡아내기 위해 나는 이목의 신경을 모두 남작 에게로 쏟았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내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입술 주변을 매만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보았을 뿐이었다. 잠시 표정의 파악을 방해하는 그의 손에 작은 짜증이 밀려왔다. 아이시스 남작은 입술에 닿은 손을 내리지 않고 그대로 이야기를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유감입니다, 아예즈 공작님. 그러나 조금 서운한 느 낌도 없진 않군요. 제가 진정 친아들 단 한 명을 구하기 위해 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그토록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 르는 자로 보이십니까?" "글쎄… 지난 몇 개월 동안을 되돌아보면 아이시스 남작, 자네의 아들에 대한 애정은 상당한 것이었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공과 사라는 간단한 공식으로 흘려 넘길 수 있다는 말인가?" 또 한 번 시작된 내 반박에 남작은 트로이 후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트로이 후작님께서도 하신 일입니다. 제가 하지 못할 것이라 보십니 까?" "무례하군!!" 당장에 트로이 후작의 언성이 높아졌다. 왕의 권위에 버금가는 트로이 후 작의 호통에도 아이시스 남작은 대단한 담력으로 무장을 하고서 보통 사람 처럼 화들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허리를 굽혀 깎듯이 사 죄를 올리는 반응까지 보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물론 아예즈 공작님의 말씀도 완전히 틀 린 것은 아닙니다. 저는 분명 제 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부정하 겠습니까? 처음으로 얻은 그 아이에 대한 애정을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 에서 분명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들 일라트는 그 어떤 것에도 비견 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임이 틀림없습니다.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그 아이 의 곁으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렇지만 이 세계의 모든 것이 희생 될지도 모른다면 저는 단호히 그 아이의 손을 놓겠습니다. 어떻게 이토록 이나 당연한 진리의 여부를 물을 수가 있단 말씀입니까?" "…인간이란 본래 그를 알면서도 망설이는 존재이지." 확연한 불신을 담은 시선을 들며 트로이 후작이 차갑게 말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 역시 쉽게 아이시스 남작을 믿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 모 양이다. 어쩌면 조금 전 아이시스 남작이 한 말이 성직자들이나 입에 담을 정도의 너무도 훌륭한 말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자 아이시스 남작은 고개를 저었다. "또 한 가지. 제가 어떻게든 아들을 구하고 싶은 마음에 제6왕자군이 제 아들을 미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의견을 말했다고 가정 해 보겠습니다. 저는 델라스 요새로의 역습을 포기하고 제12대 보급 기지 를 도우러 갈 것입니다. 그리고 매복을 하고 있는 적군의 습격을 받아 영 락없이 그들의 손에 붙잡혀 아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겠지요. 운 좋게 살아 아군으로 되돌아온다 한들 저는 잘돼봤자 현 직위의 박탈, 상황에 따라선 가문의 몰락으로까지 치닫게 될 것입니다. 단지 아들 하나만을 위해 목숨 을 걸어가며 지금까지 쌓아 올린 수많은 지위와 명예, 그 신뢰를 망쳐 버 릴 이 길을 선택할 정도로 제가 그렇게 어리석고……." 아이시스 남작은 말을 잠시 끊고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우리들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야망이 없는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후우… 좋다, 그 의견을 수락하도록 하지. 델라스 요새로의 공격은 포기, 사천의 병사를 내어줄 터이니 제12대 보급 기지를 원호하도록 하라." 잠시 동안의 침묵이 있었지만 트로이 후작은 조금 전과 달리 누그러진 얼 굴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후작님. 한시가 급한 사안이기에 실례하겠습니다."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아이시스 남작은 바람처럼 방을 빠져나갔다. 물 론 당장이라도 습격받을 보급 기지를 원호할 시기를 맞추기 위해 이 사안 은 시간을 다투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급한 움직임에 또 한 번 아 주 깊은 불신을 느꼈다. "후작, 그렇게 간단히 그의 말을 받아들여도 좋은 것입니까?" "아예즈 공작 각하,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실제로 아이 시스 남작의 아들을 미끼로 한 습격안은 너무도 뻔히 눈에 보이는 작전입 니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저는 승복할 수 없습니다! 아이시스 남작은 현재 너무도 수상한 움직임 을 보이고 있습니다."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어, 어쨌든 그의 말을 이렇게 쉽게 믿다가는 큰 봉변을 볼 것입니다." "아예즈 공작님께서는 오랜 시간을 생명의 궁 안에서 보내 세상 경험이 적어 그러신 것인지 말투가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애 같군요. 좀 더 논리적 인 말씀으로 저를 설득시켜 줄 순 없으신지." 살짝 인상을 찌푸린 트로이 후작의 말은 아주 직접적이었다. 순간적으로 얼굴이 확 붉어져 옴을 느꼈다. 확실히 트로이 후작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이시스 남작에 비해 나는 그야말로 떼를 쓰는 어린애와 다를 바가 없었 다. 그렇지만……. "현재 델라스 요새는 빈집과도 같은 상태! 이런 호기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당장 이십여 명의 고위 마법사와 이만의 병사를 내어 델라스 요 새를 치겠습니다!" "아예즈 공작님!!"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트로이 후작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언성을 높였 다. "이곳은 어린애 놀이터가 아니라 사람의 목숨 위에 만들어진 전장입니다. 그러한데 이 무슨 어리석은 행동이란 말씀입니까? 저는 아이시스 남작에게 사천의 병사를 차출할 것을 허락했습니다. 여기서 이만이나 되는 군사를 더 빼낸다면 이 성의 방비는 크게 허술해질 것이며 도리어 역습을 당하는 것은 아군이 될 수 있습니다! 생각이 있으시다면 이런 행동은 자제하셔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자리에 굳어 입을 열지 못했다. 머리 속이 뜨겁게 달구어져 갔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 이 의문을 놓고 나의 머리가 한계 이상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두 가문에 있어 다툼을 최대한으로 줄이자고 말씀하신 것은 아예즈 공작 님이었습니다. 그러한데 여기까지 와서 이런 행동은 모순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기 위해 애쓰는 트로이 후작의 말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델라스 요새를 함락시키기 위해 출진하겠습니다." "공작님!!" 나는 단호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뒤쪽에서 크게 화가 난 트 로이 후작이 소리쳤다. "그대가 제아무리 공작이라 한들 국왕 폐하께서 직접 명하신 진압군의 총 사령관은 이 트로이 후작입니다! 지금과 같은 행위는 군법 위반임을 아셔 야 할 것입니다! 그에 대한 뒷감당을 어찌하시려는지요!!" "제가 패전한다면 이곳으로 돌아와 목숨을 내놓겠습니다." 짧지만 강한 나의 한마디에 트로이 후작은 할 말은 잃은 듯했다. 그러나 그에 개의치 않고 나는 그 즉시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한시가 급했으 므로. 이 호기를 아군의 유리한 상황으로 붙들어매기 위해서는. 쪹 쪹 쪹 목책의 너머로 무수히 붉은 깃발이 비쳤다. 푸른 바탕에 금빛의 사자를 새 긴 아군의 깃발과는 전혀 다른 모양의 것, 포효하는 붉은 용은 다름 아닌 제6왕자군의 표식이었다. 그 깃발의 아래에 뜨겁게 달아오른 오천의 적병 이 함께 포효하며 공격해 들어오고 있었다. 현재 아군이 지키고 있는 이곳 제12대 보급 기지는 갑작스러운 대군의 징 집으로 보급을 공고히 하기 위해 새로이 추가로 설치된 보급소다. 하지만 이 일대 보급은 가까운 곳의 제7대 보급 부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이곳 은 그를 보조하는 업무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결국 필요하긴 하되 없어도 당장에 대단한 곤란은 없는 곳으로 다른 보급 기지에 비해 그 중요도가 많 이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것은 달리 말해 적습을 받을 일은 전무할 것이라 봐도 무리가 없을 장소란 이야기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약 5천의 병력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진 군해 왔고 아군은 완전히 비상 태세에 들어가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있을 적습에 대비해 척후병을 제때 보낸 것이 다행이라면 천만다행이었다. 현재 기지 내에 있는 인원은 겨우 합해야 5백, 게다가 임시로 만들어진지 라 보통의 정식 보급소와 같이 견고한 돌 벽으로 둘러싸여져 있지도 않았 다. 아직 해자조차 파여져 있지 않은 6m 높이의 낮은 목조 성을 방패로 한 아군이 5천의 적병을 상대하기에는 절대적으로 힘이 부쳤다. 하지만 이곳이 보급소인만큼 물품이 떨어지는 일은 없을 테니 죽을 각오로 필사적으로 싸운다면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터. 사실 현재 아군이 이 만큼이나 흔들리는 데는 다른 곳에 그 이유가 있었다. "대체 원군은 언제쯤 오는 거야?!" 내가 가까운 곳까지 온 것을 모르는 병사가 궁병의 뒤쪽에서 화살을 보충 해 주며 신경질에 가깝게 소리쳤다. 대부분은 나의 존재를 눈치 채고 있었 기에 말없이 일에 충실했지만 확실히 그들도 동요하는 눈치였다. "조금만 더 버텨라! 곧 원군이 올 것이다!! 그리고 한 번만 더 그런 말로 불안을 조장하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일라트 사령관님의 말씀이 옳다! 지척에 크로일 성이 있음을 잊었는 가!" 이 주변을 총괄하고 있던 백인장이 연대 책임이라도 물을까 싶었는지 재빨 리 끼어들어 병사들을 독려했다. 어찌 되었든 움직이는 병사들의 손에 한 층 힘이 들어간 것을 보면 장교들의 말이 병사들에게 작지만 힘을 주긴 했 던 모양이었다. 이 주변은 아군의 영역이다. 때문에 그들은 나와 하급 장교의 말대로 원군 이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멀리 서쪽을 돌아보았다. 원군이 온다면 필시 크로일 성 이 있는 이쪽 방향에서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그 안에 부 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왜 적들이 이곳을 공격하고 있는지, 그에 대 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 탓이다. 조금이라도 머리 회전이 빠른 자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 이것은 미끼. '나'라는 미끼를 던져 아버지를 붙들기 위한 함정. 하지만 아버지는 오시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뻔히 아버지가 함정에 걸릴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구원을 바랄 수는 없다. 또다시 아버지 의 발목을 붙잡는 존재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스스로를 다스리며 고개를 돌리던 중 한 병사가 갑자기 팔을 길게 뻗었다. 그리고 내 가슴을 철렁 떨어뜨릴 만큼 놀라운 내용의 말을 소리쳤다. "원군이다!! 우와아아아!! 원군이 왔다!!" 설마. 나는 조금은 망설이며 시선을 서편으로 향했다. 먼 지평선에 낯익은 깃발 이 하나둘 나타나고 있었다. 확실히 보일 정도는 아니었으나 푸른빛을 띠 는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아군의 것이었다. "소대장님! 말씀대로 원군이 왔습니다!! 봤느냐, 이놈들아! 온다 하지 않았 더냐! 빨리 활이나 쏴!!" 조금 전 그 백인장이 크게 흥분하여 격식도 잊은 채 소리쳤다. 곧 크게 사 기가 오른 아군의 움직임에 박차가 가해졌다. "원군이 온 이상 일말의 불안감도 느낄 이유가 없다. 지금부터는 적병 사 냥만이 있을 뿐이다! 쏴라!!" "와아아아아아아―!!" 아군을 돕기 위해 달려온 4천의 원군이 휩쓸고 들어오자 목책을 공격하던 적군은 잠시간 버티다가 금방 흐지부지되어 후퇴하기 시작했다. 비록 원군 의 등장에 사기가 떨어졌다고는 하나 믿기지 않을 정도의 허무한 퇴각이었 다. 보급소 안에 있는 아군까지 상대하려면 조금 벅차기도 하겠지만 그렇다고 는 해도 적 역시 마찬가지로 5천의 대부대였다. 충분히 맞설 수 있을 만한 병력이었건만 그들은 너무도 쉽게 물러서고 있었다. 모든 것이 의심스럽기만 한 전투가 일단락된 듯하자 굳게 닫혀 있던 성벽 의 문이 열렸다. 원군이 그를 통해 안으로 들어오자 병사들이 뜨거운 환호 를 보냈다. 원군의 총대장은 어렴풋이 한 예상대로 아버지였다. 내가 이 상황을 그대 로 받아들이며 기뻐해도 좋을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장교들과 함께 아버 지를 맞이하러 가자 말에서 내린 그분이 강하게 소리쳤다. "일라트 소대장, 방심은 이르다. 병사들에게 계속 경계 태세를 갖추라고 명하라!" "아, 예!" 한참 환호성을 지르던 병사들은 다시 경계 태세가 되자 많이 아쉬운 분위 기였다. 하지만 별 이의 없이 그 명에 따랐다. "일라트 소대장, 잠시." "아, 예?" 한동안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갑자기 나를 개인적으로 불 러냈다. 사람들의 눈을 생각해서라도 공과 사는 분명히 해야 한다는 아버 지께서 이런 전장에서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내는 것은 약간 의아한 일이었 다. "일라트, 이번 침공이 이상하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아버지의 진지한 물음에 나는 머뭇거리다 결국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만에 하나지만… 함정은 아닐지……." "그래, 나를 잡기 위한 함정일 가능성이 크다. 만약 그렇다면 곧 일만의 대군이 이곳을 재침공하기 위해 쳐들어 올 테지. 부디 제6왕자군이 한 수 위에서 내려다보고 이곳이 아닌 델라스 요새의 매복을 택했다면 좋겠지만 어느 쪽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다. 아니, 조금 전 그 허무한 퇴각으로 미루어보건대 이곳 주변에 매복하고 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역시……." 내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악 깨물자 아버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일라트! 이번 전투 동안 너는 어떠한 비상 사태가 생겨도 허락없이 나의 주변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 하물며 병사들 지휘를 위한 행동조차도 나의 시야 아래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너를 개인적으로 부른 것은 이것을 말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겠나? 대답해!" "에, 예… 알겠습니다." 평소 그분답지 않은 격한 어조였기에 나는 잠시 놀라서 주춤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기에 더 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인 이상 무언가 중요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판단하고 뒤늦게나마 자세를 갖추고 그렇게 하 겠다고 대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아버지는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 깨를 놓았다. "좋아, 곧 적병이 올 것이다. 순간의 방심도 허용되지 않는 상황이니 준비 를 철저히 하도록!" "예!" 짧게 대답한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무언가 미심 쩍은 기분이 계속 엄습해 들어오는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예상대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제6왕자군의 재침공이 시작되었다. 어디서 원군을 얻은 것인지 이번에는 5천이 아니라 1만에 달 하는 대병력이었다. "동요할 것 없다! 식량이나 보급품도 충분하니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얼마 든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다!!" 아버지의 소리에 어수선하던 군기가 금방 잡혔다. 왠지 내가 있을 때와는 그 자세가 많이 다른 듯하여 조금 씁쓸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아버지가 자 랑스러워지기도 하는 순간이었다. 뿌우우우웅! 뿔고둥 소리가 길게 울렸다. 그와 함께 다시 한 번 적군의 돌진이 시작되 었다. "우와아아아아―!!" "막아라!!" 적의 공격은 동편의 성벽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갔다. 적병이 사다리와 갈 고리를 던져 성벽을 기어오르려 하면 아군은 그를 잘라내며 활을 내리 쏘 아댔다. 목조 성의 높이 6m가 겨우 될 만큼 낮은 높이인지라 끝없이 밀려 들어 오는 적병들 중 가끔씩 성을 넘어오는 적병이 발생했고, 그때마다 대 기하고 있던 창병들이 다급히 그들을 제거해 나갔다. "동편 성벽에 병력을 보충하라! 그리고 고위 마법사를 보내 무리를 해서 라도 동편 성벽에 실드를 치라고 명해라!!" 아직 제대로 된 마법 공격이 없었던 것을 감안한 아버지가 마법사를 보내 실드를 칠 것을 명했다. 이곳에 배치된 고위 마법사는 아버지가 함께 데려 온 자를 포함해 6서클을 마스터한 3명뿐―이곳에의 중요도나 평소 주둔 병 력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이다. 그들로서는 각각 3개의 성문에 여 러 겹 실드를 치고 그 효능이 사라질 때마다 재시전을 하는 것만으로도 꽤 나 벅찼지만, 이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기에 무 거운 몸을 끌고 아버지의 명령에 따랐다. 뒤편 망루로 걸어가는 마법들이 너무 지쳐 보이는 것 같아 나는 조심스레 그들에게로 다가갔다. "부디 아군의 모든 병사들을 위해 힘내주십시오." "알겠소, 소대장."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전한 나의 격려에 한 노마법사가 살짝 웃음을 전했다. 곧 세 명의 마법사들이 각자의 마법서를 펴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중 에는 이 혼란통에서도 펜과 잉크통을 들고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는 사람 도 있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마법이란 그 신비한 효과와는 달리 사용법이 전혀 신비롭지가 못했다. 펜을 들고 끄적이던 마법사가 가장 먼저 캐스팅을 끝낸 듯 마법서를 덮으 며 격해진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동시에 성벽의 바깥쪽으로 옅은 빛이 퍼 져 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아군의 병사들이 환호성 을 질렀다. 그것이 화살을 막아준다거나 적이 성벽을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레벨에 따라서는 초대형 투석기보다도 위력적인 마 법 공격에서 안전해졌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다. 곧 이어 조금 전 나에게 말을 걸어주던 마법사도 어깨에 잔뜩 주고 있던 힘을 빼는가 싶더니 비틀하며 벽에 손을 짚었다. 연속된 고위 마법의 시전 에서 오는 피곤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의 수고로 조금 전 마법사가 친 실드의 범위에서 반은 겹치고 반은 오른쪽으로 약간 벗어나게 한 그의 실 드가 완성되었다. 마지막 실드까지 완성됨으로써 동편 성벽의 대부분이 실 드에 의해 보호받게 되었다. 그때였다. 가장 늦게 캐스팅했던 남자가 눈을 크게 키우며 소리쳤다. "헉! 이건 플레어 에리어잖아! 맙소사! 겨우 이런 보급소를 치기 위해 7서 클 마법사까지 투입하다니!!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그들이 이런 데서 죽 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대체 저놈들은 무슨 생각인 거야!!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거의 패닉 상태처럼 고개를 젓는 그의 고함 소리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 른 두 명의 고위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로 질렸다는 얼굴로 적이 있을 방향 을 바라보았다. 아직 별다른 징조가 없음에도 마나의 파동을 느끼고서 먼 저 적이 플레어 에리어를 시전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마법사가 있다!" "저기도!! 저기에도 마법사다!" 이제는 육안으로도 마법사의 존재가 확인된 것인지 여기저기서 고함 소리 가 터져 나왔다. 분주히 움직이는 수천의 병사들 속에서도 방패에 보호를 받으며 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무언가를 하고 있는 존재. 바로 그가 마법 사라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병사들이 그렇게 소리친 것이다. "누가 마법사입니……!!" "3번 구역에서 일직선으로 300m 전방!" 나의 짧은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마법사가 다급히 대답했다. 나는 그 즉시 망루를 빠져나와 병사들에게 크게 소릴 질렀다. "가장 먼저 3번 구역에서 일직선으로 300m 정도에 선 저자를 겨냥해라!! 7서클 마법사다!! 캐스팅이 끝나기 전에 빨리!!" 나의 이런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군의 병사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필 사적으로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존재는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들에게 가장 큰 재앙이 되는 법이다. 비처럼 쏟아지는 그 화살 속에 그 마법사는 정말이지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캐스팅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슬아슬함은 짜증이 날 정도로 깨 어지지 않고 장시간 지속되어 끝끝내 마법의 완성을 허용하고야 말았다. "실드가 깨진다! 몸을 숙여!!" 조금 전 그 노마법사가 망루 밖을 향해 크게 소리치곤 팔로 머리를 감싸며 몸을 땅에 숙였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영문을 모르는 주변의 병사들까지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무조건 그의 말에 따라 몸을 바닥에 엎드렸다. 투웅―!! 이상한 파공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약간의 진동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주변 을 가득 채웠다. 거대한 사정 범위를 가진 공격 마법 플레어 에리어가 세 명의 마법사가 광범위하게 펼쳐 놓은 실드를 단번에 깨버린 것으로도 부족 해 목조로 이루어진 성벽에 묵직한 충격을 준 것이다. 게다가 화계 마법이 다 보니 나무로 이루어진 성벽에 일부분이지만 불이 붙어버렸다. "소화 작업을 진행하라! 빨리!!" 충격이 가라앉자마자 재빨리 몸을 일으킨 내가 크게 소리쳤다. 사태의 심 각성을 아는 병사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불을 끄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래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적의 궁병들이 활을 쏘아대며 집요하게 그를 방해했다. 또한 실드가 사라진 때를 틈타 다른 마법사들이 마찬가지로 화계 마법을 난사하여 충격을 주면서 불을 더욱 번지게 만들고 있었다. 쿠우웅―! 갑자기 다른 마법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강한 충격이 엄습해 왔 다. 중보병들의 거대 방패로 위태롭게 보호를 받으며 이곳저곳에서 마법을 쓰고 있는 자들 중 6서클의 고위 마법사도 끼어 있었던 것인지 길게 뻗은 강력한 불길, 플레어 블래스트가 실드의 엄호가 되어 있지 않은 성벽에 정 면으로 부딪친 것이다. 생각 이상으로 튼튼한 목재 성벽이 끈질기게 버텨 주었지만 나는 물론이거니와 성벽 위 병사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질려 버린 순간이었다. "움츠리지 말고 빨리 움직여라! 궁병은 계속 마법사를 겨냥하고……!!" "일라트,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너무 떨어지지 마라. 내 곁에 붙어서 움직 여." 다급해진 내가 목청껏 지시를 내리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가 가까이 와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분은 조금씩 물러나고 있는 7서클 마법사 에게로 짐짓 시선을 주다가 살짝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7서클 마법사까지 투입이라…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을 아예 확신하고 있 었군. 내가 그 정도로 정에 약하게 비춰졌던가?" "아버지……?" "어서 움직여라! 빨리 동편 성벽의 궁병을 보충하라!"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던 아버지가 그 즉시 몸을 돌려 장교들과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급한 상황에 찜찜한 기분까지 지우지 못하 며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고위 마법사는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다시 실드를 치시오!" 아버지가 성벽을 가로지르며 망루 쪽을 향해 지시를 내리자 고위 마법사 하나가 가쁜 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하아… 잠시 시간을……." "시간 따윈 없소! 지쳤다고 말하고 싶거든 차라리 죽여달라고 말하시 오!" "하아, 그렇게… 무리인 말을……." 펜을 들고 있던 마법사가 수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머지 두 명 의 마법사들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빠르게 마법서를 펴고 캐스팅에 들어갔 다. 비록 약하긴 하지만 최소한의 방어는 가능한 실드가 동편 성벽 전체에 넓게 둘러지는 것을 확인한 후 아버지와 나는 계속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 리며 성벽 위를 가로질러 걸었다. 그렇게 다음 구역의 마법 사용 망루까지 왔을 때, 간간이 공격 마법으로 도움을 주고 있던 중급 마법사가 다급한 얼굴로 소리쳤다. "게릭 사령관님! 단번에 끝내겠다는 속셈인지 적이 또다시 7서클 마법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직격당하면 정말 위험합니다!!" "방향을 확실히 말하라! 궁병은 마법사가 지시하는 자를 겨냥한다!" "마찬가지로 조금 전 3구역! 이번엔 350m가 조금 넘는, 플레어 에리어의 사정거리로는 꽤나 아슬아슬한 거리입니다. 놈들이 조금 전 집중 사격으로 위기의식을 느낀 모양으로……." "3구역 전방 350m의 마법사를 겨냥하라! 어서!!" 조금은 수다스러운 마법사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을 그대로 잘라내 고 아버지가 소리쳤다. 또다시 대마법이 온다는 소리를 듣자 병사들이 다 급히 활을 들고 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발 빠르게 대형 석궁까지 동원되 었다. 하지만 적병들도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들도 필사 적으로 화살을 쏘며 마법사의 저격을 막으며 대형 방패로 7서클 마법사를 몇 겹으로 둘러싸 보호했다. 또한 중급 마법사들이 원거리 마법을 시전하 여 발리스타의 공격을 저지했다. "쏴라!! 마법사를 죽여라!!" "막아라!! 마법사를 보호하라!!" 정반대의 명령이 시끄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마법사의 캐스팅은 계속되어 갔다. 쉴 틈 없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변의 긴장은 한계까지 당겨진 실처럼 더욱 팽팽해져 갔다. 파앙!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 하나가 마법사들의 방해를 뚫고 7서클 고위 마법사 에게로 날아갔다. 직격은 아니었지만 마법사의 왼쪽 편의 병사들이 꼬치가 되어 무너지며 인간 바리케이드가 중심을 잃어버렸다. "이때다! 쏴라!" 다급히 병사들이 무너진 쪽을 방패로 막으며 보완했지만 짧은 순간일지라 도 필사적으로 쏘아댄 아군의 화살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뚫린 부분을 막 으려 했던 몇 명의 병사들이 나가떨어지며 그 중앙의 마법사가 수많은 화 살 중 하나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와아! 맞았다!!" 몇몇 눈이 좋은 자들이 얼핏 나와 마찬가지의 광경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 며 계속 활을 쏘았다. 활을 맞았으니 정신이 흐트러졌을 테고 마법 캐스팅 은 무산되었을 터, 잠시나마 시간을 번 셈이니 이대로 밀어붙여 마법사를 완전히 제거하자는 투지에 불탄 것이다. "아!" 그러나 그 마법사는 무참히 아군의 기대를 져버렸다. 후끈한 열기를 담은 화염덩어리를 보며 나는 짧게 신음했다. 투우웅―!! 불길한 소음이었다. 세 명의 마법사가 애써 두른 실드가 모조리 깨어짐과 동시에 목재 성벽에 강한 충격이 가해졌다. 그리고 화염이 순식간에 불길 의 세기를 더해주었다. 아군이 분주히 진화 작업에 나섰지만 여러 공격을 막아내 주던 성벽은 결국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아악! 무너진다!!" 서편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혼비백산이 되어 자리를 떴다. 내가 망연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나를 붙들었다. "일라트! 피하자!" "아, 아버지! 이제 어떻게 하면……!!" 아버지가 곁에 있어서였을까. 자신도 모르게 약한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 다. 화들짝 놀란 내가 자신을 자책하고 있으려니 아버지가 나의 어깨를 한 손으로 꼭 잡았다. "넌 걱정할 거 없다. 그것을 위해 내가 왔으니까." 아버지는 지나가는 듯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대피 명령을 내렸다. 잠시 멍 해져 있던 나는 아버지를 믿자는 생각에 마음을 굳게 먹고 재빠르게 움직 이기 시작했다. 아버지라면 분명 무언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으리라! 성벽이 무너지자 중무장을 한 적의 기사들이 빠르게 안으로 돌진해 들어왔 다. 더 이상 이곳에서 버틸 수 없게 되었다고 판단한 아군은 창병과 바리 케이드로 최대한 그들을 막는 한편 재빨리 보급 물품을 태우고 퇴각의 준 비를 서둘렀다. 다급히 장교들을 모은 아버지가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퇴각은 북문과 서문을 통한다. 전군을 각각 1천5백씩 3부대로 나누어 각 기 다른 방향으로 퇴각할 것이다. 모든 부대가 대장기를 들어 적을 혼란시 킨다." "그럼 아이시스님과 일라트 경은 어느 부대로……." "나는 고위 마법사 분들을 모시고 서문을 이용한다." 아버지의 말을 들은 마법사 하나가 불쑥 초췌한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이시스 공, 현재 적의 포위망은 북문이 가장 약합니다. 어째서 서문 을……!" "북문이든 서문이든 적의 매복을 피하기는 힘들 것이오. 그럴 바엔 최단 거리로 퇴각이 가능한 서문을 통하는 것이 좋겠지." 아버지는 쏘아붙이듯 그 마법사의 불만을 눌러 버렸다. 아주 짤막한 작전 회의를 마친 후 말에 올라서던 아버지는 내게 고개를 돌리고서 무슨 확신 이라도 받아내듯 강한 눈길을 보냈다. 짐작이지만 조금 전 자신에게서 떨 어지지 말라는 말의 다짐을 다시 한 번 받기를 원하시는 모양이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아버지는 말 허리를 세게 찼다. "북문과 서문을 열어라! 퇴각한다." "퇴각하라!" 아버지의 말을 다른 장교들이 메아리처럼 전했다. 뜨거운 말발굽 소리와 함께 아군의 퇴각이 시작되었다. 나는 최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눈으로 좇 으며 말을 내달렸다. 당연하게도 밖에서 대기 중이던 적병이 아군의 퇴각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 다. 아군은 아버지의 직속 렌스 기사들을 선두로 빠르게 돌진해 갔다. 나 역시 검을 빼 들고 마상 전투에 능숙하지 못한 아버지를 엄호하듯 말을 달 렸다. 가장 포위망이 약한 전방의 보병단을 목표로 아버지가 크게 소리쳤다. "돌진! 단번에 돌파한다!" 카아앙! "우와아아!" 가속도가 붙은 정예의 기사들의 앞에서 적병들의 머리가 피를 흩뿌리며 땅 을 뒹굴었다. 물론 개미 떼같이 달라붙는 적들 앞에서 아군의 기사들이 부 지기수로 목숨을 잃었으나 한동안의 격전 끝에 최전방의 기사들은 간신히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후방의 상태는 거의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약간 숨을 돌렸다고 생각하던 차에 불과 몇백 미터를 못 가 아군은 불길한 징조를 맞닥뜨렸다. 부웅― 부웅― 부웅―!! 그것은 가늘고도 길게 퍼지는 음색이었다. 우리 부대의 뒤에서 누군가가 뿔피리 같은 것을 불어대고 있었다. "제길! 첩자가 있었나. 첫 번째 접전에서 기어들어 왔나 보군. 그렇게 부 대 관리를 철저히 하라 했건만……." 아버지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가까운 곳에서 본의 아니게 그 말을 들어버린 나는 불안히 전방을 주시하며 고삐를 꽉 쥐었다.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얼마 가지 않아 아군은 오늘 하루 진절 머리나게 보아온 깃발과 마주해야만 했다. 붉은 용의 깃발, 더 더욱 불길한 것은 녹색의 문양이 새겨진 은빛 갑주의 기사단이었다. "나 에르가 혼 에스문드가 몸소 상대해 주겠다! 살고 싶은 놈은 당장에 땅에 엎드려 머리를 처박는 편이 좋아!" 나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진격하는 적의 기사단 중 가장 전 방에서 호기 좋게 검을 쥐고 달리는 존재를 보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르가 선배……." 한때나마 그와 검을 대한 적이 있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 나이임에 도 노련한 상급 기사들마저 우습게 여길 정도의 검의 귀재였다. 그런 그가 지금 누구를 노리고 돌진하고 있는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 성격만큼이 나 강렬하게 이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그의 돌진력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어쨌거나 아버지는 무인이 아니다. 이런 전장에서 주변의 호위병이 무너질 시엔 잠시도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사령관님! 부디 무사히 퇴각을!!" 무섭게 아군의 기사들을 격파해 가며 돌진하는 적의 기사단을 보며 나는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나라면 잠시나마 그를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최대한 시간을 끌겠다는 심산이었다. "일라트!"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뒤로하고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앞으로 나설 것도 없었다. 피에 젖은 검으로 기사들을 도륙하는 그의 모습을 지척 에서 마주할 수 있었으므로. "합!" 작게 기합을 내지르며 그 즉시 그를 상대로 돌진했다. 마상전으로 대하는 것은 처음이니 어쩌면 내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 에르가의 시선이 뒤 늦게 나에게로 닿을 즈음 나는 빠르게 그의 갑옷 사이를 노렸다. 카캉―! 그의 검과 나의 검이 부딪치며 쇠 마찰음을 냈다. 나는 그제야 잠시 잊고 있던 것을 생각해 냈다. 내가 속도 위주의 빠른 검을 구사하지만 쾌검을 스타일로 삼지 않는 그가 나 이상의 빠르기를 가졌다는 것을. 에르가 선배 가 내 검을 막으며 씨익 미소하는 것에 순간 오싹 소름이 돋음을 느꼈다. "너 오늘 잘 걸렸다!" 강한 힘으로 내 검을 걷어 내친 그가 말의 고삐를 돌렸다. 부웅 바람 소리 와 함께 그의 검이 나의 어깨 부분을 노렸다. 언젠가 경험한 듯한 상황임 을 떠올리며 나는 다급히 검을 들어 그의 검을 흘려보냈다. 예상한 결과라 는 듯 검을 내리며 뒤쪽으로 물러서던 그가 입술 끝을 살짝 올렸다. "이번에는 막았군, 꼬맹이!" 파블료프 왕립학교의 시합에서 그에게 마지막으로 당했을 때와 똑같은 방 식의 검.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렸지만 나는 그의 도발에 대꾸하지 않고 최대한 몸의 감각을 긴장시켰다. 그러자 장난스럽게 미소하던 그의 녹색 눈이 곧 날카로워졌다. "각오해라! 이번에는 코앞에서 검을 멈추는 일 따윈 없을 거다!" 경고하듯 소리친 그가 크게 검을 횡으로 돌렸다. 이미 주변이 적군으로 혼 전이 된 상태임에도 에르가 선배 이외의 적은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듯 나 의 신경이 그에게로만 집중되었다. 그렇지 않고는 단 일 격도 막아내기 힘 들 것이라고 나의 본능이 시끄럽게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앙! "으윽!" 제대로 들어오는 그의 검은 굉장히 무거웠다. 강한 충격이 검을 타고 팔로 전해 들어오자 절로 신음이 흘렀다. 힘이 약하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약 점이기도 했지만 에르가 선배는 거대한 체격을 가진 기사들에 못지않은 파 괴력을 내고 있었다. 그것 또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 렇다고 물러설 때가 아니다! "하아압!" 말을 좌측으로 움직이며 힘껏 검을 내질렀다. 오랫동안 함께해 왔던 백마 가 나의 손에 자연스럽게 움직여 주었고 나는 충분히 제 실력을 내어 그의 빈틈을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나 못지않은 승마 실력을 가진 그가 말의 기수를 틀며 내 검을 쳐 올렸다. 검이 튕겨지며 아주 순간적으로 비틀하는 틈을 노려 그가 나의 팔에 검을 휘둘렀다. 이미 방어하기에는 늦었음을 깨달은 나는 빠르게 말의 머리를 틈과 동시에 최대한 몸을 비틀어 그의 공격을 피했다. 카각! "크흐흑!!" 에르가 선배를 상대로는 그 또한 쉽지 않았다. 보통의 기사였다면 충분히 피할 수 있을 만한 그의 공격이 나의 갑옷을 강하게 스친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쉴 틈 없이 들어오는 그의 검을 막는 것만으로도 벅찼기에 얼마 나 대단한 손상을 입었는가에 대해 신경 쓸 여유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다려!" 그때였다. 익숙한 목소리가 한창 정신없이 검을 마주하고 있던 우리들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너희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나겠지." 잔뜩 당황한 호위 기사를 제쳐 두고 아버지가 이쪽으로 말을 몰아 오고 있 었다. 다른 방향으로 피신하셨어야 할 분이! "아버지! 이쪽으로 오시면……!" "시끄러워! 너야말로 허락없이 내 주변을 떠나지 말라고 하던 소릴 듣지 못했더란 말이냐!" 처음으로 듣는 아버지의 호통 소리인지라 나는 깜짝 놀랐다. 그때 에르가 선배가 검을 든 채 나와 아버지를 경계하며 피식 웃었다. "잘 알고 있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너다. 마지막 발버둥도 여기까지인 가?" "그 말 그대로." 짧은 대답이었지만 나와 주변의 기사들에게는 그보다 강한 충격이 없었다. 내가 계속 저항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무언의 항의를 보냈지만 아버지는 그 저 에르가 선배의 뜻대로 체포당하라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좋다! 대장의 목숨을 내가 받았다! 네놈들도 무익한 저항은 멈추는 게 어떠냐!!" 자신의 호위 기사들에게 나와 아버지의 체포를 명하며 아직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는 기사들에게 검을 휘두르는 그였다. 아버지와 나의 생포 소식을 들은 병사들은 크게 술렁였고, 그렇지 않아도 무너져 가고 있던 아군의 진 형은 금세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이는 처음 그들의 침공을 보고 예측하고 있었던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나를 미끼로 아버지를 잡는 함정. 이런 나조차도 충분히 추측이 가능한, 너 무도 뻔한 함정에 여지없이 걸려든 꼴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어째서……." 기사들의 손에 묶이며 그분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 즈음 에르가 선배가 우 리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도박 운이 좋군, 아이시스 남작." "무모한 도박을 하시는군요. 제가 당신들의 짐작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았 다면 델라스 요새는 예전에 점령당했을 테고 당신들은 아군의 영역에 고립 되었을 테니 말입니다. 작전을 수행하시는 에르가 경께서는 그 부담이 대 단하셨겠습니다." 아버지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에 말고삐를 고쳐 쥐던 에르가 선배가 가볍 게 응수했다. "내 믿는 바가 있었기에 부담 따윈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에스문드 백작이 라 불러라, 알겠나?" "알겠습니다, 에스문드 백작님." 아버지는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그에 대답했다. 에르가 선배 역시 나와 마 찬가지인 심정인지 조금 의외라는 듯 시선을 주었지만 곧 말머리를 돌려 빠르게 군의 퇴각을 명했다. 목적을 달성한 이상 아군의 영역에 오래 머물 러서 좋을 것은 없다는 생각이리라. 곧 빠르게 나와 아버지를 생포한 제6왕자군의 퇴각이 시작되었다. 검은 불 길과 자욱한 연기,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의문만을 남긴 채로. 이르나크의 장 Part 60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목에 꽉 끼는 빳빳한 셔츠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런 화창한 날씨에 정복은 너무 더웠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왕자 주제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 셔츠만 하나 달랑 입고 훌라훌라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옷매무새가 흐트러집니다, 카류리드 전하." 시녀장이 내 행동을 완곡한 표현으로 제지했다. 더 이상 그들의 일을 방해 하지 않기로 한 나는 한숨을 살짝 쉬며 손을 내렸다. "끝났습니다." 드디어 귀찮은 정복을 완전히 챙겨 입었음을 알리는 소리에 나는 만면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해방의 미소를 가득 흩뿌리며 고개를 돌렸다. "많이 기다렸지, 우리 딜티?" "별로. 그런데 이런 데서 그런 호칭은 제발 그만둬라 좀……." 딜티가 시녀들의 눈을 의식하는지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벽에 상반신을 기대고 서 있는 딜티에게로 다가갔다. "겨우 이 정도 가지고 과민 반응하기는. 그건 그렇고, 왜 일부러 와서 이 렇게 기다리는 거야?" "그냥… 갑자기 네가 보고 싶어서……." 벽에서 몸을 떼며 말끝을 흐리는 딜티의 모습에 나는 헉! 숨 넘기는 소리 를 내며 주춤 물러섰다. 언제부터 딜티가 이런 고단수의 농담을 할 경지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가 허옇게 질려 있자 이번엔 딜티가 피식 웃었다. "자기도 이런 농담을 하면 질리는 주제에." "당연하지! 캐릭터 성의 차이라는 게 있잖아!" 나의 불같은 반응에도 딜티는 끄떡도 않고 웃을 뿐이었다. 딜티 저 녀석, 요새 들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시작하더니―정신적인 면으로 말이다―결국은 저런 어른이 되고 마는구나. 무지 기분 나쁜 어른 으로! 귀엽기만 하던 녀석이 어느새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서 능글맞게 웃는 재수탱이로 돌변하고야 말다니! 내가 커다란 상실감(?)에 머리를 부여잡고 있으려니 딜티가 다가와 내 어 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아?" "엉? 뭐가?"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라 나는 제자리 돌기를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의 의아해하는 반응을 보며 딜티는 손을 내렸다. "아니, 아무것도." "왜 그래? 내가 머리를 싸 쥔 것 때문에? 그냥 장난으로 그런 건데?" "그랬어?" 딜티가 씨익 웃었다. 왠지 혼자 원맨쇼를 한 것 같아 머쓱함이 밀려왔다. 하긴, 이제 친구들도 한 사람 분의 어엿한 어른이니만큼 이렇게 온몸으로 장난을 치는 일도 없으려나. 어린 아이들과 유치하게 노는 게 취미이니만큼 섭섭함과 아쉬움이 밀려오 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니, 아직 방법은 남아 있다! 나도 곧 결혼 적 령기이니―게다가 어쩌다 보니 신부 후보도 줄줄이 따라붙어 있다―자신의 몸으로 직접 아이들을 조달(?)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래,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자세다, 긍정적인 자세! "카류야, 그만 가자." "응? 응." 딜티의 독촉에 그제야 고개를 휘휘 젓던 것을 관두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거의 있는지도 확신하기 어려울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카이에게 따라오라 고 손짓하며 딜티가 있는 쪽으로 쫄래쫄래 뛰어갔다. 그런데 이 상황… 딜티가 성장하다 못해 아주 과거와 완전히 입장이 뒤바 뀌어 저쪽에서 나를 돌봐주는 듯……. "쳇! 이 건방진 녀석!" 내가 울컥하여 녀석의 허리를 주먹으로 퍽 치자 딜티가 허리를 문지르며 의아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나는 녀석이 더욱 의아하도록 화사하게 웃어주 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냐." 의도대로 딜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은 가볍게 미소했다. "뭐, 장난 거는 걸 보아하니 정말 괜찮은 모양이네. 빨리 가자." 딜티는 그렇게 말하며 성큼성큼 걸어 문을 열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고개가 갸웃해졌지만, 그보다는 딜티의 어른스러운 대처가 훨씬 더 신경이 쓰였다. 한마디로 쇼∼크랄까. "으으, 우리 깜찍한 꼬맹이가 벌써 늙다리가 다 됐어……." 내가 비틀비틀하며 녀석이 열어놓은 문밖으로 걸어나가자 딜티가 피식거리 며 나의 곁으로 따라붙었다. 내가 약간 삐친 관계로―아니다, 누가 삐쳤다는 거냐!―일층으로 내려올 때 까지 우리 두 사람은―굳이 따지자면 세 사람(?)이지만 원래 카이는 말을 시키지 않는 한 입을 여는 일이 없으니 제외다―별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 만 회의장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딜티가 목소리를 조심스럽게 깔며 입을 열 었다. "그래서, 그런 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아이시스 남작을 생포해 어떻게 할 작정이니?" "응?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 정보를 불게 만들어야지!" 주먹을 불끈 쥐고 그렇게 말하자 딜티가 지긋한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 다.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서도… 참을 수 있어?" 대체 뭘 참는다는 거지? 딜티의 행동에 그런 질문을 내뱉으려 할 즈음이었으나 어느새 우리들이 회 의장의 문 앞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 의도는 성사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 우리들을 안으로 맞이했다. 방은 포로의 심문을 위한 장소치고는 굉장히 화려했다. 특히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바닥에 깔린 붉은 융단이 안쪽으로 들어서는 나와 딜티, 카이의 발 소리를 완전히 흡수하고 있었다. 양쪽으로 죽 늘어선 아군의 수뇌부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는 방의 끝, 정중앙에 위치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이번에도 부탁한다, 힐레인." "예, 카류리드 전하." 바로 곁에 자리 잡은 힐레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요청에 답했다. 이번 심문 중에 게릭과 일라트가 하는 말의 진실을 가려달라는 뜻이었다. 녀석 에게 확답을 들은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이시스 남작을 데려오라." 밖에서 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이 내가 들어선 정문 과는 다른 작은 문을 통해 밧줄에 단단히 포박당한 두 사람을 감시하며 안 으로 들어왔다. 같은 색의 물감을 떨어뜨려 놓은 듯 똑같은 백금발을 한 자들. 어린 시절 과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로 풋풋하고 순수해 보이기만 하는 일라트, 그리 고 날렵한 인상의 게릭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기 직전까지만 해도 미소가 끊이지 않았던 내 얼굴이 별 안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들의 앞에서 위엄을 보이기 위한 의도적인 표 정 관리뿐만이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뭉클 내 속을 비집고 올라온 덕이었다. 아주 미묘한 정도지만 살짝 날카로워진 듯한 기분. 그러는 와중에 게릭과 일라트가 병사들의 손에 의해 나의 앞에 무릎이 꿇 려졌다. 나는 남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쉽게 붙잡혀 오다니 너도 대단하진 않군." "그렇군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어쩌면 도발과도 같은 나의 짧은 한마디에 게릭이 자연스럽게 수긍했다. 얼굴 표정도, 몸에서 나오는 은근한 분위기도 굉장히 순종적인 느낌이었다. 상당히 의외인 반응인지라 주의를 기울이며 신중히 질문했다. "좋다, 게릭 혼 아이시스. 지금부터 하는 나의 물음에 있는 그대로 대답하 라." "그전에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게릭이 고개를 들었다. 비록 적의는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예기를 띤 눈 빛이었다. "네가 부탁 따윌 할 만한 처지라고 생각하나?" 내 입에서 바로 조금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냉랭한 어투가 흘러나왔다. 덕 분인지 몇몇 사람들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이 렇게 행동하는 것인지, 그것은 자신조차도 의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점점 더 불쾌해지고 있음은 분명했다. 또한 이 유는 모르지만 그 불쾌감의 근원은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내 눈 앞에 나타난 닮은꼴의 저들. "부탁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 개 숙여 간청하는 바입니다." 게릭이 포박당한 상태에서도 불안정하게 몸을 숙였다. 곁에서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일라트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입을 벌렸다. 이 회의실 안의 모두가 매한가지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모습에 놀라면서도 한편으 로 속이 심하게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처 그 속을 숨기지 못한 내가 한껏 빈정거림을 담아 게릭에게 질문했다. "아, 그래? 이 귀로 한번 들어는 보겠다. 무슨 부탁이지?" "충분히 예상하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전하의 모든 요구에 협조를 하는 대신 일라트의 목숨과 자유를 보장받는 것입니다." "하. 하." 나는 짧게 숨을 끊으며 웃었다. 갑자기 변해 버린 나의 태도에 점차 회의 장 내의 사람들 대부분이 불안하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돌변한 나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릭이 거의 땅에 닿을 듯 더욱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의 노여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부디 일라트에게만은 자 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어째서 내가 그래야만 하지?" 이를 갈듯 내가 물었다. 게릭이 아주 신중히 입을 열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바는 제게 있을 것입니다. 부디 관계없는 일라트에게 는 자비를……." "네가 원하는 바는 나에게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그가! 고깃덩이마냥 토 막이 나야 했을까? 그 사실에 대해 너의 그 잘난 입으로 지껄여 보겠는 가!?" 팔걸이 위에 얹어진 나의 손이 어느새 굳게 주먹이 쥐어진 채 떨리고 있었 다. 갑작스레 완전히 기억 속에 잊혀졌던 어떤 장면이 생생히 눈앞에 펼쳐 졌다. 힘없이 굴러다니는 팔과 다리, 그 아래에 검고 붉은 풀, 인간의 모양을 잃 은 인간. 내 생애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그 충격. 죽음보다 더욱 끔찍한 잔인 함! 믿어지지 않는다. 어떻게 저들의 생포 소식을 듣고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을 칠 수가 있었던 것일까! 어떻게 그 일을 없었던 일인 양 까맣 게 잊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 나의 디트 경을! 신기할 정도로 맹목적이었던 그의 일을 떠올리던 동시에 심장이 급속도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손의 떨림은 이미 멎었다. 그 속에 깃들었던 온기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 다. 중앙의 높은 의자에서 게릭과 일라트를 내려다보는 내 모습에 사람들 은 숨을 죽였다. "전하, 고정하십시오." 잔뜩 굳은 분위기 속에 대담하게도 곁에 선 누군가가 아무렇지도 않게 충 고했다. 불쾌함을 가득 담아 살짝 고개를 돌린 시야에 한가득 붉은빛이 들 어찼다. 너무나 선명한 붉은색인지라 여러 불길한 것들을 연상해 낼 만도 하건만 어쩐지 그것은 몹시도 부드러운 색조였다. 무덤덤한 눈동자를 한 여인, 카뮤르·카이야. "중요한 자리입니다. 부디 냉정해지시길." 냉정함?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지 않은가. 위대한 드래곤이 하는 충고치고는 몹시도 하찮았다. 그래서 고개를 비틀고 핀잔이라도 줘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을 직접 행동으로 내보이는 것은 의외로 쉽지가 않았다. 작은 파문… 같은 것이 나의 안쪽으로 퍼져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심경의 변화를 읽기라도 했는지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충고했다. "과거를 되새기는 것은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이지, 그 망령에 사로잡히 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떠올려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녀가 나를 진정시키고자 사용한 말은 너무도 흔하고 상투적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번 퍼져 나가기 시작한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넓어지 며 가슴을 뒤흔들었다. 어째서? 흔들리는 자신을 용납하기 힘들어 끝없이 그렇게 되뇌었다. 그 반응을 지 켜보던 카이가 조금 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짧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 "당신은 어째서 저를 카이라고 부르십니까?" "…카이……." 생각없이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내가… 그렇게 이름 붙였었다. 여자인 그녀에게 하필이면 카이라고. 무의식 중에 무언가가 그리워서 그랬던 것도 같다. "그렇군, 내가 너무 흥분했소." 살짝 고개를 끄떡이며 대답했다. 나는 어느새 평소의 자신을 되찾은 채였 다. 별것 아닌 짧은 충고에도 오랫동안 돌이키지 못했을 감정을 금세 추스를 수가 있다. 오랜 호수처럼 한없이 위대하고 또한 고요하여, 그 무엇보다도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진정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인지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게 릭이 그제야 고개를 조금 들며 조금 전의 그 말을 이었다. "다시 한 번 간청드리건대 일라트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뭐, 모르는 바는 아니다. 소중한 존재를 지키고 싶다는 거겠지. 그러나 너희들이 과거에 무슨 짓을 했는지 기억한다면 그런 뻔뻔한 부탁은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냉정하게 말했다. 조금 전과는 달리 이성적인 상태에서 일부러 차가 움을 실은 것이었다. 그러나 게릭은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일라트는 그저 제가 명한 작전을 수행했을 뿐입니다. 부디 자비를." "그 말뜻, 일라트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너는 어떻게 해도 좋다는 뜻인 가?" 딱 잘라내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게릭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그것만 약조해 주신다면 예의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제게 벌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추호의 원망도 않겠습니다." "그럴 수가! 아버지!!" "조용히 해라! 네가 함부로 입을 열 자리가 아니다!" 조금 전부터 입을 움찔거리던 일라트가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소리치 자 게릭이 낮고 강하게 그를 나무랐다. 그러나 평소라면 이쯤에서 금방 기 가 죽어 고개를 숙일,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던 일라트가 웬일로 대담하게 소리쳤다. "그만두십시오. 저 하나 때문에 그에게 협조하여 이 나라에 재앙을 뿌려 서는 아니 될 것입……." "일라트!" 게릭의 나직한 나무람에 일라트는 잠시 주춤했다. 게다가 회의장의 사람들 이 전부 노기가 깃든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기에 더욱 기가 죽은 느낌이다. 하지만 주눅이 든 기색을 보이면서도 일라트는 이를 악물고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갔다. "아버지! 제 목숨 따윈 연연해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시끄럽다고 하지 않았느냐!" "시끄러워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죽음 따윈 두렵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죽는다 해도 좋습니다!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쉽게 죽음을 거론하지 마라!" 지금껏 계속 낮은 목소리를 고수해 오던 게릭이 크게 언성을 높였다. 깜짝 놀란 일라트가 드디어 입을 다물자 게릭이 나를 보며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전하의 앞에서 언성을 높여 죄송합니다. 제 아들놈의 말은 어린 녀석의 무지함이라 생각하시고 화를 푸십시오." "아버지, 왜 그렇게까지!" 일라트가 계속 반항하는 것을 보고 난 한숨을 쉬었다. 저렇게 당연한 것을 묻다니. "진실로 머리가 굳어서 모르는 거냐? 오직 너를 살리기 위해 뻔히 보이는 작전에 걸려들어 주고 이렇게 머리 숙이고 있다는 것을?" 내가 하고자 하던 말을 누군가가 대신 나서서 이야기해 주었다. 다름 아닌 무심한 표정의 딜티였다. 딜티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꽤나 불유쾌할 것이라는 생각에 약간 걱정이 되었지만 현 상황만으로는 큰 심경의 변화는 없는 듯했다. 오히려 흥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놀란 일라트였다. 안절부절못하 는 일라트를 보고 게릭을 고개를 저었다. "너는 걱정할 필요 없다. 그를 위해 내가 온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 을 전부 실토한다면 생포당한다 해도 너 하나 정도는 살릴 수 있을 테니 까." "맙소사! 그것이 그런 뜻이었습니까? 궁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다는 것 이 아니라?!" "너는 그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만약 이곳에서 풀려나는 것이 가능해지거든 네 어머니를 찾아라. 그리고 그 즉시 이 나라를 떠나라." 일라트가 하얗게 질렸다. 녀석은 사색이 된 채로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하며 불안하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몸 을 조금 일으키며 소리쳤다. "진심이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그런 행동을 하시면 이 나 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카류 전하가 저지른 일 같은 것은 모두 제쳐 놓고서라도, 당장에 그의 협조 병력은 모두가 외세이지 않습니까! 그 가 승리한다면 우리 나라는 카르틴의 속국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겨우 저 하나 때문에 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려도 괜찮다는 말씀이십니까? 무 엇이 진정 우선되어야 할지 모른단 말씀이십니까?!" 일라트가 포로가 된 상황에서도 당당히 아군의 구린 부분(?)을 까발리며 너무도 훌륭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천만다행으로 이 자리에 카르틴의 장군까지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주변 분들의 인상이 크게 찌푸려졌 다. 일라트가 원래 소심하면서도 순수하고 정의로운 녀석―디트 경의 일도 겪은 마당에 이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야 할지…―이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새삼 감탄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살벌한 상황에서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있던 게릭이 굳은 얼굴로 일라트 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너다. 명예와 권력은 물론 일용할 양식, 하물며 발을 디딜 수 있도록 하는 대지마저도 모두가 너와 네 어머니를 위 해 존재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더 이상의 말은 듣고 싶지 않다." "그런……." "시끄러워!! 살아남으라고 하지 않느냐! 어디선가 비참한 최후를 맞기라도 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테다!!" 게릭이 소리 지르자 마지막까지 반항하던 일라트가 거의 눈물을 쏟아낼 듯 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그때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어 그 분위기를 깨었다. "모든 것은 전하께서 정하실 일인 것을, 너무 앞서가는군." 게릭이 고개를 들어 그 목소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딜티가 차분히 고개를 기울이며 그의 시선에 응답했다. "그대답지 않은 처사로군, 아이시스 남작. 그런 이야기라면 미리 일라트에 게 이야기를 해뒀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지금 그런 이야기를 나누 는 것은 이를 통해 전하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서처럼 보이는군. 내 말 이 틀렸나?" 상황이 흐지부지될 것을 날카롭게 잡아낸 질문이었지만, 그 말을 꺼낸 사 람이 다름 아닌 딜티였기에 나는 불안히 상황을 주시했다. 에르가 형이나 세미르 등 딜티의 속사정을 아는 친구들 또한 나와 마찬가지 심정인 듯했 다. 게릭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만약의 상황이 닥친다면 나를 담보로 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일라트의 성격상 제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껏 숨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딜트라엘님의 말씀이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닙니다. 제게 있어 최우선의 목 표는 일라트를 살리는 것이기에 수단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딜티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계속 지켜보기만 하던 나는 상황을 정리 해야 하겠다는 생각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좋다, 아이시스 남작. 일라트의 처우에 대해서는 보류해 두기로 하지. 그 는 네가 얼마나 잘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전하의 승리를 위해 협조 할 것입니다." "이미 한번 속은 전적이 있는데 그 말을 쉽게 믿어야 할지 의문이군." 처음부터 일라트를 인질로 게릭에게 정보를 뜯어내는 것이 아군의 목적이 었다. 또한 힐레인이 곁에 있기에 거짓말 따윈 통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순순히 게릭의 말에 넘어가 주고 싶지는 않아 괜히 그를 떠보았다. "어차피 지금 전하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일라트를 살 릴 수 없습니다. 제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겠지요. 아니, 단순한 정보 제공 의 차원을 넘어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협조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거의 억지를 쓰다시피 무리하게 트로이 후작님을 설득하여 일라 트를 도울 원군을 차출해 냈습니다. 그리고 당연한 결과로 패배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크게 경을 칠 일인데 전하께 생포당한 후 어중간히 정보를 실토한 상태에서 국왕군이 승리라도 하는 날엔 저는 물론이거니와 일라트 까지도 배신자로서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 의 약속이라도 보장받기 위해서는 카류리드 전하께서 반드시 이 아르윈 왕 국의 국왕으로 등극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 국왕군이 패배하는 것도, 내가 국왕이 되는 것도 모두 일라트를 위함 인가? 세상의 중심이 마치 일라트라도 되는 듯하군." "최소한 제게는 그렇습니다." 게릭이 그 즉시 대답했다.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일생 동안 걸어온 모든 것을 한순간에 포기하는 일에 진실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어 보였다. 인간이라면 작은 안타까움 정도는 느낄 법도 하건만. "아버지, 제발!! 대의를 위해서입니다. 차라리 저를 버려주십시오!" 우리들의 대화 사이로 다시 한 번 일라트가 초조하게 끼어들었다.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는 아버지의 모습에 감동할 수도 있을 것을, 일라트는 그로 인해 초래될 일들에 대한 것이 더욱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문득 시선이 딜티에게로 고정되었다. 어쩌면 이리도 다른 상황이란 말인가. 그때 게릭이 단호히 일라트의 말을 잘라내며 내게 요청했다. "전하, 일라트가 함께 있어서는 이야기의 진행이 더뎌질 듯싶습니다. 다른 분들의 심기를 위해서라도 일라트는 잠시 내보냈으면 합니다." "그렇군." 십분 동감하는 말인지라 나는 바로 일라트를 밖으로 내보내도록 조치했다. 당연히 일라트는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고, 그 덕에 병사 4명이 동원 되어 약간의 소란이 일었다. 디트 경의 일로 여전히 그들에 대한 좋지 못한 감정이 잔존한 채였음에도 은근히 그 장면을 보기가 거북스러워 고개를 가만히 돌렸다. 그러다 우연 히 왼쪽에 선 힐레인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게릭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도 물어보지 않은 상태였군. 어 쩌면 저 행동이 전부 연극일 수도 있는 일인데. "힐레인." 별다른 말 없이 짧게 호명한 것만으로도 내 의도를 눈치 챈 힐레인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진실입니다.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서라면 무엇이든 할 자세입니다." 게릭은 힐레인의 모습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나는 몸소 그의 궁금 증을 풀어주고자 손을 뻗어 힐레인을 가리키며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나의 수호자이신 드래곤께서 내려주신 현자시다. 그의 앞에서는 한 치의 거짓말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시군요." 게릭은 힐레인에게 살짝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조금은 황당하다는 느낌. 드래곤의 현자라는 말을 믿기가 쉽지 않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때 계속 순종적인 태도로 수긍만 하던 게릭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저를 믿는 것이 쉽지는 않으실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제가 그만큼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아실 터인데… 언뜻 지나 듣기로 저를 생포하는 과 정에서 델라스 요새를 빼앗겼다고 하더군요. 확실치는 않지만 아예즈 공작 님께서 움직이신 것으로 추측됩니다만… 델라스 요새가 희생된 마당이니만 큼 확실히 저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양자에게 그리 득 될 일 이 없는 이런 연극은 그만두시는 것이 좋지 않을지요." "글쎄." 드래곤의 현자라는 건 거짓이지만 그 능력은 진짜다. 전혀 거칠 것이 없었 기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게릭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끄떡도 않는 나를 향해 게릭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실리를 따져 보았을 때, 그 여름날 관 문에서의 전투에서 저는 그대로 전하께 투항한다 해도 그리 손해 될 것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적진 한가운데서의 탈출이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 하의 일을 방해하여 국왕군에게 승리를 선사했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싶어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게릭이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잠시 화제를 바꾸지요. 국왕군의 측에서 '반역'이라 일컫는 일련의 사 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저는 지금껏 당신께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 한 분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죠. 아닌 척하 면서도 전하의 모든 행동은 왕위 계승을 위해 예견되고 계획되어진 것이었 습니다. 저의 눈조차 완벽하게 속일 정도로 전하께서는 치밀한 분이었습니 다." 말도 안 되는 착각이 어느새 진실인 양 그의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고 있었 다. 아니, 이미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단 지 나만이 그것을 몰랐고, 나만이 그렇게 어리석었던 것이다. 내 표정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게릭은 이야기를 계속할 생 각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딜티에게 시선을 주며 게릭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트로이 후작님은 다릅니다. 그분은 보수적이고 과격한 분이시되,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 움직이시는지 금세 알아챌 수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런 것이죠. 트로이 후작님 정도라면 저 자신의 실리를 위한 의견 을 내놓는다 해도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며 따라주실 만한 존재이셨지만 전하께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 "이런 건방진 놈을 보았나! 감히 누구를 조종하려 들어! 일개 평민이었던 놈이 약간 인정받은 것으로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모양이구나!"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친 것은 프리란트님―리아 후작―이었다. 게릭이 조종하려 들었던 존재가 자신의 가장 라이벌 격―이젠 거의 원수 급이랄까―이었던 트로이 후작에 대해서였음에도 대귀족의 프라이드라는 것에 가장 민감한 그분을 건드렸던 것이다. "제가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가 국왕군을 택한 것은 그런 연유였다는 것입니다. 달리 전하께오서 전 왕비 전하를 해치었 다거나 평소 가식적인 태도를 취하신 것에 염증을 느껴서가 아니었습니다. 제 아들은 그 부분에 심히 실망을 금치 못한 듯하였으나 오히려 저는 감탄 할 지경이었지요. 그 어린 나이에도 먼 미래를 준비하여 신중히 움직이시 는 모습이."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칭찬 같지 않은 칭찬을 계속 듣고 있을 마음이 없어 그의 말을 잘라내고 물었다. "전하께 믿음을 드리기 위해 무례함을 무릅쓰고 저의 진실을 알려 드리고 자 하는 것입니다." 말을 마친 게릭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얼핏 고개를 끄덕이는 힐레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릭이 진심이라는 신호였다. 이야기가 대충 끝난 듯하자 아주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레 인의 반응을 본 자들이 저마다 곁에 있는 자들과 의견을 주고받았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그 작은 소란은 금세 멎었다. 최종 결정 권한은 나에게 있 었으므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몸을 바로 하고 어깨를 폈다. 마지막으로 목을 가 다듬은 나는 근엄히 게릭을 향해 말했다. "나는 에렌시아님과 에르멘님께 해를 가한 적이 없다. 지금 확실히 해두 건대 모든 일들은 오해였으며, 나는 실로 어리석게도 트로이 후작과 그 파 벌의 간계에 말려든 것이었다. 알겠는가?" 나의 어조가 이상하리만큼 당당한 탓이었을까? 조금은 놀란 듯 게릭이 조 금 머리를 들었다. 내 진심을 파헤칠 의도라도 담은 것인지 그의 백금색 눈동자가 가만히 나를 향했다. 나는 한번 숨을 내쉬고 이번엔 다소 강하게 감정을 실어 말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과오를 범할 일은 없으리라. 이 전쟁의 승리를 움켜 쥠과 동시에 치졸한 계략을 꾸민 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것이다. 그리 고 그 죗값을 받게 할 것이다. 반드시!" 망설일 것은 없다. 상황이 어떻든 증거가 어찌 되었든 나는 당당히 그렇게 결백을 주장하리라. 그리고 그들의 앞에 왕이 되어 서는 것이다. 게릭은 물론이거니와 장내의 모든 사람들이 가만히 나만을 주시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레이포드 경과 힐레인을 향해 최종적으로 명령을 내렸 다. "드래곤의 현자가 내린 판정에 따라 아이시스 남작에게 다시 한 번 기회 를 주도록 하겠다. 그가 이대로 충실히 아군에 협조한다면 내 자비를 베풀 어 그의 아들의 생사만은 보장하도록 하겠다. 레이포드 경과 힐레인 경은 지금 즉시 아이시스 남작을 데려가 국왕군의 병력, 보급망, 주요 전선 등을 상세히 작성하여 보고하도록 하라." "예." "예, 전하." 레이포드 경과 힐레인이 고개를 숙여 내 명을 받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 서는 것으로 그 짧은 심문은 마무리되었다. 간단한 심문이 끝나고 저마다 바쁘게 자신의 일을 찾아 흩어지는 와중에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찾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익숙한 갈 색의 머리카락을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딜… 트라엘 경." 일단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정식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딜티가 고 개를 돌렸다가 내 얼굴을 발견하고선 살짝 웃음기를 보이며 고개를 숙였 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잠시 할 말이 있는데 시간이 어떤가 모르겠군." 내 시선에 딜티와 함께 있던 동료 장교들이 충분하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다른 자들의 동의를 얻어 딜티와 함께 잠시 자리를 빠져나온 나는 복도를 걷다가 밖으로 이어진 테라스로 걸어나왔다. 여름날치고는 드물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색의 하늘이 드높았다. 잠시 위를 올려다보던 내가 딜티에게 시선을 줄 즈음 녀석이 빙긋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아주 강해졌던데?" "에?" "네가 아주 단단해졌더라고." 나의 뒤쪽에 말없이 선 카이에게로 시선을 주며 딜티가 말했다. 한동안 무 슨 말인지 갈피를 못 잡고 멍해 있던 나는 뒤늦게 그 말뜻을 깨닫고 은근 히 머쓱해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이 무엇 때문에 딜티를 불 러내었는지 깨닫곤 휘휘 고개를 저으며 딜티의 어깨를 잡았다. "딜티! 너는……!!" "알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 아마 모두가 마찬가지의 심정이겠지." 자리에 곧게 선 채로 딜티가 그렇게 말했다. 결코 흥분하지 않는, 평안한 그의 얼굴을 보자 걱정 때문에 손에 가득 쥐어져 있던 힘이 스르르 빠져나 갔다. 어깨가 풀리자 딜티는 몸을 돌려 테라스의 난간에 팔을 기대고 몸을 조금 내밀었다. 멀리 수풀로 시선을 주며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아이시스 남작, 그리고 일라트 녀석. 어쩌면 이렇게 다를까 하고 생각했 지. 처음 게릭의 생포 작전을 고안할 때부터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어. 사실 은근히… 아니, 아주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 "딜티……." 한 발자국 딜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곁에서 가만히 손을 올려 바람 에 흩날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 내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까지 나 의 손이 녀석의 머리를 어루만졌을 때 딜티가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네가 해주는 위로는 기분이 좋아. 평소와는 달리 이상하게 어른스럽거든. 게다가 상냥하고. 하하, 이런 소릴 하니 왠지 엄청 낯간지러운데?" "당연한 걸 가지고 쑥스러워하긴! 나는 어린애들을 무척 좋아해서 아이들 이 외로워 보이면 견디질 못하지. 언제든지 어리광을 부려도 좋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게 딜티는 의심할 여지 없는 어린아이였지만 이젠 더 이상 어린애라고 느껴지지도, 어리광을 부릴 것이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느새 딜티는 부쩍 커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녀석을 향해 능청스럽게 말하며 그의 머리를 흩뜨렸다. 계속 녀석의 형 같지 않은 형 노릇을 하고 싶어서. 딜티는 소리없이 이를 보이며 웃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을 감 으며 말했다. "사실 그들 때문에 아주 화가 났었지만 이젠 괜찮아. 괜찮을 거라고 스스 로 납득했거든. 최선을 다해 계속 달려가다 보면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거 라고 확신하고 있어." "나도 믿어. 지금까지도 계속 그래 왔으니까. 그러니까 힘내, 우리 딜티!" 쓰다듬던 딜티의 머리를 조금 강하게 내려치며 말했다. 무방비로 있다 내 일격에 난간에 기대고 있던 팔이 미끄러지면서 삐끗한 녀석이 울컥한 얼굴 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딜.티.가 3층 아래의 바닥으로 곤두박질쳐도 좋아?" "겨우 그 정도 일격에 쓰러질 녀석이라면 애초부터 내 동생으로 삼지도 않았어!" "내가 언제부터 네 동생이었냐! 나보다 나이도 어린 것이!!" 내가 손으로 근엄하게 손가락질하며 말하자 딜티가 예전처럼 발끈하여 소 리쳤다. 마치 학교 시절로 되돌아간 듯 누가 형이니 동생이니 하며 말싸움 을 벌어졌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약간의 위화감. 아마 전과는 달리 딜티의 행동엔 크게 진심이 들어 있지는 않으리라. 그저 나의 장난에 장단을 맞춰주는 것뿐. 직접 딜티가 말하진 않았지만 그럴 것 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까. 다시 한 번 피부로 전해져 오는 것이 새삼 시원섭섭했다. 그래도 초여름의 바람에 기분이 좋아서 웃었다. 이 바람이 멀리멀리 북쪽에 있을 커다란 성 까지 다다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61장 전야(前夜) 전야(前夜) 어스름한 달빛이 겨우 종이에 닿았다. 램프의 불빛만으로 서류를 살피기란 상당히 피로한 일이었으므로 보름달이 뜬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평소라면 단 한 군데 뚫린 작은 크기의 창 사이로 빛이 스며들기가 꽤나 힘이 들었을 것이다. "만약을 대비해 이쯤에 그분을 배치해 두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적들도 마지막 힘을 짜낼 테니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테지. 네 의견은 레이포드 남작님과 류스밀리온님께 전해 상의하도 록 하겠다." 파란 머리카락의 어린 소년이 능숙히 책상 위의 서류 뭉치를 정리하여 자 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어린 나이에 맞지 않게 명석하고, 또한 이상한 독심 술을 쓰는 것은 분명한 듯하나 드래곤의 현자라는 말까지 믿어야 할지는 수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개가 저어진다. "아들 녀석이 걱정된다면 내가 없다고 편히 쉬는 쪽보다는 더 좋은 작전 을 구상해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이시스 남작." 앳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성 짙은 말을 끝낸 힐레인 경이 몸을 돌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고개를 숙여 그의 말에 응하는 모습을 취하면서도 그리 가슴이 초조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카류 리드 전하가 일라트에게 심한 처우를 내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 문이다. 사실 내가 제6왕자에게 한 짓을 생각한다면 그 분풀이로 일라트에게 고문 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상황이었건만 다행스럽게도 카류리드 전하 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내게 최대한의 정보를 뜯어내기 위해 이용 가치가 있을 동안 너그러운 척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가능성 이 있다손 치더라도 내게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카류리드 전 하에게 협조하며 후에 그가 약속을 지켜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똑똑똑― "실례합니다만……." 문득 들려오는 말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힐레인 경이 밖으로 나가지 않은 상태에서 문을 지키던 기사가 누군가의 방문을 알린 것이다. 기사의 안내로 안으로 들어온 자의 옅은 갈색 빛 머리카락이 눈에 익었다. 바로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내가 주군으로 삼고 있던 트로이 후작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었던 탓이다. 막 이곳을 나서려던 힐레인 경이 자리에 멈춰 선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딜트라엘 경이 무심히 말했다. "아직 여기에 있었군." "막 나가려던 차였습니다만……." "아." 딜트라엘 경이 대충 흘리듯 수긍하며 힐레인 경을 지나쳐 내게로 걸음을 옮겼다. "막아서지는 않겠지만 부디 지나침이 없도록 하시길." 얼핏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기 전 힐레인 경이 딜트라엘 경 을 향해 그렇게 속삭였던 듯했다. 극도로 생략된 대화였기에 상황을 파악하기엔 모자람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는 바였다. 나는 최대한 신중을 기하며 자리에서 일어 섰다. 바로 직전까지 걸어온 딜트라엘 경이 고개를 들어 나를 내려다보았다. 훤 칠하게 뻗어 큰 키와 검술에 다져져 날렵하고 다부진 체격, 무엇보다 대귀 족의 핏줄에 어울리는 고압적인 분위기가 그 나름의 긴장감을 실어주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팽팽해진 선을 먼저 끊어내며 입을 열었다. 살짝 그의 눈가가 좁혀졌다. "그로부터 5개월, 꽤나 분발하고 있더군. 하루아침에 충실한 개로 돌변해 서." "……." 딜트라엘 경의 말을 듣는 순간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예감했다. 지 금껏 겉으로 표를 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은근히 그의 적 의를 깨닫고 있었던 탓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조금 도움이 됐다고 해서 무사히 살아 나갈 수 있을 거란 희망 따윈 버 리는 것이 좋아." "말씀대로 딴생각을 품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지막한 톤의 경고에서 그의 악감정이 상당한 수위에 이르렀음을 그 자리 에서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나는 그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도록 최대한 숨 을 죽이고 복종의 자세를 내비치었다. 딜트라엘 경이 책상의 한 귀퉁이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았다. 피식- 하고 숨 을 내뱉은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어떻게 하고 있었지?" "예?" 대뜸 던진 한마디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나 사실 무슨 영문인지 몰라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네가 측근으로 있을 무렵 트로이 후작의 동향에 대해 묻고 있는 거다." 잔뜩 비틀어진 미소를 담고 그가 물었다. 그림자에 가리어 퇴색한 듯 어두 운 갈색 눈동자가 아주 노골적으로 자신을 버린 아비에 대한 적의를 표현 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트로이 후작님께서는 당신에 대해 생각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약간의 도박을 감수하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말했다. 예상대로 단번에 딜트 라엘 경의 인상이 구겨졌다. 나는 아예 그 반응을 보지 못한 척 고개를 램 프의 빛으로 향하며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물론 트로이 후작님께서 개인적인 일을 타인에게 노출할 만큼 허술한 분 은 아니시기에 그 사실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일라트의 일로 출진을 하기 직전 들었던 말은 그 추측에 확신을 가져다 주 었습니다." "……." 딜트라엘 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한동안의 침묵이 계속되 어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타다탁. 램프의 심지 타 들어가는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불길하게 들려왔다. 붉은 색의 빛이 일렁이며 딜트라엘 경의 눈동자가 이글거리는 듯 보였던 것이 다. 내 눈의 착각만이 아니라 그의 분노가 위험 수위에 다다른 것이 분명 했다. 문득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에 회의감이 일었다. 작은 동정심이 모든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를 알고 있음에도 외면할 수 없는 것은 전 혀 다른 상황에서도 느껴지는 동질감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바로 아버지 와 아들이라는 구도. 결국 나는 마지막으로 단 한 마디만을 내뱉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제 지각(知覺)이 닿는 한 친자식을 생각하지 않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습 니다." 타앙! "컥!" 한순간 머리로 밀려오는 통증에 비명조차 제대로 지를 수가 없었다. 번개 같이 날아든 딜트라엘 경의 주먹에 머리를 얻어맞고 책상에 그대로 처박혀 버린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의 손놀림조차 제대로 보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내가 하잘것없는 무력을 갖추었다지만 그의 몸놀림은 놀라울 정도 로 빨랐다. 그가 대단한 무장이라는 사실과 함께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 가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딜트라엘 경이 사납게 손을 뻗는 것이 얼핏 보였다. 그대로 내 멱살을 잡 아챈 그가 엄청난 힘으로 나를 들어 올리듯 벽에 밀어붙이며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대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 이 손으로 네 지각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 확 인해 볼까?" "제가… 주제넘은… 발언을 했습니다. 부디 용서를……." "주제넘은 줄 알면서 잘도 그 혀를 놀리는군!" "용서… 하십시오……." 조금 전 책상에 부딪치며 입 안 어딘가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고통은 둘째 치고서라도 턱의 움직임이 영 부자연스러웠다. 찝찌름하게 고이는 피 맛을 애써 목구멍 뒤로 넘겨 버리며 간신히 말을 잇 자니 딜트라엘 경이 스르르 옷을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자신이 정도를 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평상시 사람들의 앞에서는 아무렇 지도 않은 듯 밝게 행동하는 것이 그의 최우선과제인 듯 보였으므로 크게 의심이 될 만한 상황은 원치 않을 터였다. 엉거주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나를 향해 딜트라엘 경이 씹어뱉듯 입을 열 었다. "이 전쟁이 끝나면 내 반드시 너를 쳐 죽여주겠다. 언젠가 카류가 너를 용서하겠다 말하더라도 결코! 살아 나가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살아남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버리고 있었습니다." 얼얼한 턱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어차피 카류리드 전하가 그렇게 너그 러운 존재라고는 생각지도 않는다. 똑똑. 딜트라엘 경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도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하리 만치 사람들의 방문이 잦은 밤이었다. 기사들의 손에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인자한 인상을 가진 노 인이었다. 조금 창백해 보이는 낯빛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의 존재에 딜 트라엘 경은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여기까지… 아, 아르디예프님……." 딜트라엘 경이 조금 물러서며 예를 갖추었다. 나와 딜트라엘 경을 가만히 번갈아 보던 그분이 입을 열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 딜트라엘 경?" 뻔히 보이는 상황에서도 아르디예프님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아마 못 본 척 묵인해 주겠다는 뜻이리라. 그 뜻을 알아챈 딜트라엘 경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아르디예프님께서 천천히 소파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 소파의 앞에 다다른 그분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이쪽으로 와서 앉게나." "아, 예." 나는 그제야 제대로 옷이나 얼굴을 정리하며 아르디예프님께서 권하는 자 리로 걸어가 앉았다. 약간 비틀린 듯한 턱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있으려니 그분이 씁쓸히 미소했다.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단순한 인사치레였을까, 아니면 조금이나마 진심이 든 말이었을까. 묘하게 애매한 느낌을 주는 그 말에 나는 일단 형식적인 말로 대꾸했다. "아들 같은 녀석을 위해서라면 못할 짓이 없지. 안 그런가?" 아르디예프님이 옅게 미소하고 있었다. 뒤늦게 말뜻을 깨달은 나는 마주 보고 함께 씁쓸히 웃었다. 아마 그것은 나를 향한 말이기도 했지만 그분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할 것 이다. 근 1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르디예프님 역시 일라트를 생각하는 나 못지않게 카류리드 전하를 아끼며 모든 것을 바치지 않았던가. 아르디예프님께 그런 말을 들은 탓인지, 1년 전 왕궁에서 뵐 때만 해도 위 풍당당하기만 했던 8서클 대마법사의 얼굴이 어느새 부쩍 늙어 보였다. 수 세에 몰린 카류리드 전하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도 힘을 아끼지 않은 데다가, 특히 수개월 전에 있었던 카이세리온 전하의 암 살 건은 타격이 아주 컸던 듯했다. "실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다네, 저 건너편의 이야기를……." 늦은 밤에 움직여 피곤함을 느낀 것인지 말을 잠시 멈추고 한참 눈가를 누 르던 아르디예프님이 겨우 금색의 눈동자를 들었다. "아예즈 공작… 하르몬이 공작위를 받은 것 같더군." "…예." "8서클 마법사라는 자가 앞장서서 제6왕자 파의 손을 들어주었으니 당연 한 대세일 테지. 이제 영주 간의 세력 다툼에서도 마법사들의 대단위 공격 이 등장하겠군. 나라가 얼마나 황폐해질지……." 그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떠돌았다. 하지만 아마, 그 상황이 되돌아온다 해도 아르디예프님은 똑같이 카류리드 전하를 구출해 내리라. 내가 뻔히 몰락의 길을 걸을 것을 알면서도 일라트 를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남은 마법사들은… 하르몬은 무어라고 하던가?"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특히나 하르몬이라는 아끼던 수제자에 대해서는. 아르디예프님께서 먼저 숨김없이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나는 그 질문 에 대해 솔직히 소견을 털어놓았다. "딱히 아르디예프님을 책망하는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까놓고 말씀드려서 마법사들이 존경한 것은 당신의 책임감이나 인간성보다는 당신의 위대한 마법력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리고 아예즈 공작님께서… 아르디예프님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없어 그리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만, 언젠가 당신께서 명을 달리하셨다는 정보가 돌았을 적 상당히 상심하신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 아르디예프님은 옛 제자를 떠올리는 듯 가만히 눈을 아래로 내려깔았다. 그렇게 한동안을 침묵하던 그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군이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물론 승리할 것입니다." 일말의 망설임없이 나는 바로 대답했다. 물을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카류 리드 전하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 제6왕자군에게는 결정적인 히든 카드가 있었다. 은밀한 곳에서 아주 소중히 지켜온 그 카드는 마지막 승부를 가릴 최종적인 전장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할 터였다. "그래… 이기게 되겠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니까……." 아르디예프님은 조금 전의 나와 똑같은 생각을 입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작은 움직임에 맞추어 하얗게 센 그분의 백발이 힘없이 하늘거렸다. 마치 머리카락이라는 녀석이 제 의지로 자신의 주인에겐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려는 듯. 조금 전 힐레인 경을 통해 아르디예프님께 전하려 했던 말을 가만히 곱씹 었다. 빙 돌려 어렵사리 그 말을 전하거나 아예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때 이 자리에서 말해 버리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동안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던 나는 결국 그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 내전에서 카류리드 전하께서는 반드시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만일의 사태가 닥친다 해도 당신께서 이곳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국왕군은 아르디 예프님께서 돌아가신 것으로 단정 짓고 있으니 그 허를 찌른다면 적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아군과 적 양측이 총력을 가하는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부디 힘드시더라도 승리의 열쇠가 자신에게 있음을 상기 하여 마지막까지 힘을 다해주셨으면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내 있는 힘을 전부 쏟아 부을 것이네. 단지 내 가 상대해야 할 적들 중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존재들이 다수 있다는 것 이 조금 씁쓸할 뿐이지." 말을 마치고 한 듯 아닌 듯 희미하게 미소하던 아르디예프님이 나를 정면 으로 쳐다보았다. 얼굴을 샅샅이 훑는 그 시선에 조금 곤혹스러움을 느낄 즈음 그분이 입을 열었다. "이리로 오게. 힐을 써주지." "예? 조금이라도 힘을 비축해 두실 때입니다. 이 정도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으니……." 내가 부어오른 턱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으나 아르디예프님은 손을 저었다. "힐을 한번 쓰는 정도로 쓰러질 만큼 나약해지진 않았네. 게다가 꼭 자네 만을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네. 오늘 보니 카류의 친구 녀석이 평소 생각 했던 것만큼 밝아 보이지가 않더군. 그렇게 자네가 상처를 입고 있으면 자 칫 그 사실을 들켜 버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카류가 알았다간 신경 쓰게 될 테니까……." "그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간단한 변명으로 충분히 넘길 수 있는 일입니다." "일어서게. 할 수 있는 건 확실히 해두고 싶다네. 막 땅을 딛고 일어서고 있는 카류에게 잠시라도 그 평안을 지속시켜 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이해 하지 못하겠나?" "그렇군요." 나는 바로 수긍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은 일 하나까지 카류리드 전하 를 위하여 마음을 쓰는 그분의 모습은 일라트라는 아들을 가진 나로서는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짙은 구름에 가리어 달빛이 완전히 차단된 이 방 안을 작은 램프의 불이 어슴푸레한 붉은색으로 똑같이 물들이고 있었다. 쪹 쪹 쪹 "이곳에서 기다리겠나?" "아… 아닙니다. 저도 함께……." 쏟아지는 졸음에 한차례 꾸뻑 머리를 끄덕이던 나는 뒤늦게 세스케인의 목 소리를 듣고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가볍게 웃 음이 일었다. "어젯밤 마법사들과 회의를 하느라 잠을 못 잤다고 들었다. 비록 일이 바 빠 쉬라고 하진 못하겠지만, 내가 잠시 나갔다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여 기서 눈을 붙이도록." "아닙니다. 어찌… 세스케인님의 집무실에서……." 내가 바로 문 앞까지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세스케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 다. "신경 쓸 것 없다. 유넨, 너라면 이 방을 맡겨도 안심할 수 있으니까." "아, 그런… 시…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가 자신의 뜻을 관철할 걸 알았기에 못 이기는 척 그의 말에 따랐다. 사 실 나도 피곤해서 그를 뒤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그의 상냥한 척하는 면이 참 유용하게 쓰여지지 않겠는가. 간단한 복장에 작은 서류철을 든 세스케인이 가볍게 문을 나섰다. 그가 완 전히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아무렇게나 몸을 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이시스 남작 놈이 제6왕자군에 포로로 잡힌 후 별의별 군사 기밀을 전부 불어댄 덕분에―게다가 단순한 정보 누설뿐만이 아니라 전술 조언까지 하 는 등 아주 전폭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나 어쩐다나. 쳐 죽일 놈 같으 니…―최근 5개월 동안 아군은 계속 수세에 몰려야만 했다. 당연한 결과로 매일같이 회의다 뭐다 비상 체제에 들어갔고, 그것은 나도 예외가 아닌지 라 어젯밤도 밤을 지새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피곤이 겹치고 겹쳐 세스 케인 앞에서 결코 보이지 않을 실수마저 저질러 버린 것이다. 이러다가 내 포커페이스마저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물론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세스케인의 말대로 어디에 잠시 앉아 눈이라도 붙일 요량으로 몸을 돌렸 다. 방의 주인인 그가 원체 깔끔을 떠는 녀석이라 이 바쁜 통에도 그리 어 질러진 것은 없었지만, 책상과 탁자 주변만은 몇 가지 서류가 널려진 상태 였다. 폭신한 소파 위로 몸을 던졌다가 생각없이 탁자 위에 올려진 그 서류들로 시선을 가져갔다. 가만히 보니 그가 직접 작성하던 중요 문서들이 따로 감 춰져 있지도 않은 채였다. 실수로 챙겨놓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니었다. "……." 조금 멍해져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몇 번이고 신임한다는 소리를 듣고는 있었지만… 세스케인이… 이 정도로 나를 믿는단 말인가. 짝! 막 그 생각을 떠올리는 동시에 양손으로 세게 뺨을 쳤다. 뺨이 얼얼했지만 다시 한 번 세차게 그 행위를 반복했다. 어느새 해이해져 버린 자신을 다 스리기 위해서였다. 방금 세스케인의 저 행동은 그가 인간적으로 나를 믿기 때문이 아니라, 그 만큼 자신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충실한 개가 되었음을 확신했기 때 문이다. 상냥함이라는 먹잇감으로 완전히 나를 길들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길!" "실례하겠소, 세스케인 경……." 작게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던 나는 화들짝 놀랐다가 곧 정신을 챙기고 황급히 자리 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뛰어갔다. "아, 유넨."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 목소리로 예상하고 있었다시피 하르몬이 었다. 대충 길러 뒤로 질끈 묶고 있던 검붉은색 머리가 짧게 잘려져 단정 한 모습. 보통 마법사와는 달리 다른 장군들처럼 직접 전장에서 뛰고 있었 기에 긴 머리는 거추장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세스케인님께서는 지금 다른 용무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그럼 안에서 기다리도록 하지. 널 여기서 기다리게 한 걸 보면 오래 걸 리지는 않을 것으로 보이니……." "예, 그러십시오." 나는 정중히 문을 열어 그를 맞이했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는 조금 전 내 가 앉았던 소파로 걸어가 풀썩 소리가 나게 앉았다. 나도 문을 닫고 하르 몬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소파에 앉아 있던 하르몬이 탁자 쪽으로 고개를 향하는 것을 보았다. 그곳에는 세스케인이 작성하던 중요 서류들이 조금 전처럼 그대로 어질러 진 상태였다. "이건……." 느긋이 있던 하르몬이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류들을 자세 히 훑어볼 양인지 그의 시선은 탁자 위로 계속 고정된 채였다. 타앙―!! 하르몬이 몸을 숙이는 순간 빠르게 팔을 뻗어 종이 뭉치들 위에 손을 얹었 다. 손과 탁자가 부딪치는 소리가 생각 이상으로 크게 울렸음을 깨달을 즈 음, 내 행동 덕에 서류를 보지 못한 하르몬이 멍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죄, 죄송합니다. 세스케인님께서 정리를 부탁하셨던 중요 서류들을 미처 치우지 못해서… 기분 나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거의 반사적인 행위였던지라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그 덕인지 저도 모르게 없는 일까지 지어내며 변명을 쏟아냈다. "……." 내가 안 하니만 못한 구차한 변명을 마치고 고개를 푹 숙일 때까지도 하르 몬은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주룩― 등허리로 식은땀이 흘렀다. 비록 생명의 궁 안에서는 친근히 대해주었다지 만 공작위를 받고 귀한 분이 되셨는데 태도가 변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실제로 생명의 궁에서였다면 이 정도는 내가 사과하는 즉시 괜찮다고 웃음 을 터뜨렸을 것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피식 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조금 든 나는 하르몬이 나를 보고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정색을 하다니… 세스케인 경과 꽤나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섭 섭한걸, 유넨은 나의 아예즈 공작파가 아니라 세스케인 경과 함께 트로이 후작파를 택한 모양이니 말이지." "그, 그런! 무슨 말씀을… 전 다만……." 나는 손을 저으며 그의 말을 강력히 부정했다. 그러자 장난스레 웃던 하르 몬이 몸을 소파에 깊게 묻으며 말했다. "하지만 나의 등장으로 아군이 두 파로 분열되어 있다는 것은 진실이다. 뭐, 세스케인 경이 나를 경계의 대상으로 삼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 하르몬의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나는 그제야 손을 내렸다. 세스케인이 잘 지내니 어쩌니 하는 말에 반응하고 있었던 나와는 달리 하르몬은 아군이 파벌 싸움을 하고 있다는 데 더 신경을 썼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내가 세력 확장 따위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어도 사람들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은 막을 수가 없군. 아버님과 아르디예프님께서 비웃으 시겠어……." 거의 혼잣말같이 중얼거리던 하르몬이 어느새 어두워진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 자리에 선 채로 한동안 하르몬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아르디예프님께서 내 가 치를 떨어 마지않는 귀족이라는 사실이나 아군의 커다란 적이었다는 사 실에 앞서 위대한 마법사였던 분이었기에, 나 역시 그분의 죽음에 대해서 는 씁쓸함을 느끼는 바였다. "새삼스레 감상에 빠졌군. 유넨, 네 앞이라서 긴장이 풀어졌나 보다." 하르몬이 다시 가벼운 미소를 보이며 손을 저었다. 요즘 저런 말을 자주 듣는 듯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예즈 공작님께서 저를 그렇게 신용해 주시니 기쁠 따름입니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라면 공작이라는 말은 그만두지. 그리 익숙하지가 않아서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 같거든. 선배님이라는 말이 훨씬 정감있어 서 좋아." 그렇게 대단한 자리에 있으면서도 이러쿵저러쿵 불만이 많군. 마음 같아서 는 얼굴을 찌푸려 주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기쁘다는 듯 그의 말을 수락했 다. 하르몬은 예전처럼 친근한 표정으로 앉으라고 말했고, 난 일단 탁자 위 의 서류를 챙겨 책상 위쪽에 가지런히 치워둔 후 그의 말에 따랐다. "지금쯤이면 죽어라 수식 연구를 하고 있었을 텐데 전쟁통에 진도가 많이 떨어지겠군. 역시 전쟁이란 만사의 해악만 가져올 뿐이지." "동감입니다." 하르몬은 생명의 궁에 있을 적에 대한 이야기나 크게 생산적이지 못한 잡 담을 끄집어냈다. 내가 할 일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말상대가 되어주는 것. 원래 잠시 동안이나마 눈을 붙일 예정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생긋 미소 짓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반경-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즈음이었다. 심심한 공작님에게 열심히 말동무가 되어주다가 문득 밖에 약간의 소란함을 느끼고 고개를 문 쪽으로 돌리며 입을 다물었다. 하르몬도 조금 늦게 그 사실을 눈치 챈 듯 내 행동을 탓하지는 않았다. 작게 들려오던 발소리가 바로 문 앞에서 멎었다. 나는 그제야 문밖에 선 존재가 사람들과 헤어져 제 방으로 향하는 세스케인의 것이라는 것을 짐작 할 수 있었다. 드디어 이 귀찮은 하르몬을 세스케인에게 떠넘길 수 있겠다 는 기쁨과 함께, 결국엔 한숨도 못 잤다는 허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문이 작은 소리라도 날세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열리 는 것을 보고 나는 몸을 긴장시키며 그 즉시 마법서를 폈다. 세스케인이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데 뭐 저렇게 꺼릴 게 있겠는가. 물론 그 가 문을 여는 일에 심혈을 기울일 만큼 소심한 성격의 위인도 아니었다. 어느 도둑고양이 같은 놈이 감히 세스케인의 서재에 침입하려 했는지 가소 로움을 느끼며 나는 간단한 1서클의 마법의 캐스팅에 들어갔다. 그러나 조금 열린 문 안으로 살며시 몸을 들인 자는 내 예상을 와장창 깨 고 있었다. 요즘 들어 매일같이 함께 지내느라 눈에 박혀 버릴 정도인, 청 보랏빛 머리카락이 살짝 이쪽을 향해 원을 그렸다. "어? 유넨? 아예즈 공작님까지……." "세스케인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가 살금살금 움직였던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으므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자신의 방을 이렇게 조심스럽게 출입하다 니, 난 무슨 첩자라도 들어오는 줄 알았네." 나와 달리 허리에 찬 검으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던 하르몬이 검집에서 손을 떼며 나의 궁금증을 그대로 말로 옮겨주었다. 세스케인은 서슴없이 이쪽으로 걸어오며 빙긋 웃었다. "전 유넨이 자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생각보다 용건이 일찍 끝났기 에 조금 더 눈을 붙이게 해주려고 그랬던 겁니다." "하아?" 하르몬의 시선이 내게로 닿았다. 원래는 내가 세스케인의 같잖은 아량으로 여기서 졸고 있을 예정이라는 걸 모르는 놈이었기에 조금 의아해하는 얼굴 이었다. 하지만 곧 무슨 말인지 눈치를 챘는지 어색히 웃으며 손을 저었다. "이런, 그럼 내가 유넨의 잠을 방해한 꼴이 됐군. 진작 말을 하지 그랬 나."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는 하르몬을 제치고 세스케인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 록 옆으로 비켜섰다. 한창 뜨고 있는 공작나리를 앞에 두고 잠을 자야 하 니 나가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얼마나 되겠냔 말이다. 제일 윗사람인 하르몬이 먼저 자리에 앉자 세스케인 역시 자리를 잡고 앉 으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곧 무언가 생각나는 것이 있는 듯 멈칫 움직 임을 멈추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짧은 말로 양해를 구한 세스케인이 창가 쪽에 배치된 책상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서 그가 들고 온 것은 조금 전 내가 하르몬에게 무례를 범하면서 까지 일부러 치워놓은 지도와 서류들이었다. "때마침 의논드리고픈 일이 있었습니다. 일단 이 보고서들을 봐주시겠습 니까?"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서류들을 보던 하르몬이 벙찐 표정의 나에게 시선 을 주었다. 목숨을 걸다시피해서―좀 과장인 표현이지만―일부러 감추었는 데 그것이 실은 하르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니. "풋, 유넨, 너도 앉지 그래." 세스케인의 곁에 미처 앉지 못하고 서 있는 나를 향해 짧게 웃음을 터뜨린 하르몬이 서류를 집어 들었다. 우리 두 사람의 표정에 의아함을 느낀 세스 케인이 내가 보조 의자에 자리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저… 공작 각하……." "자신의 서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심복을 위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라, 자네가 그렇게까지 유넨을 생각해 주니 유넨도 몇 년 동안이 나 함께 친구로 지낸 나보다 자네를 더 따르는 모양이네." 내가 개냐! 이놈을 따르고, 저놈을 따르게!! 아니, 최소한 겉으로는 그런 충 직한 개로 보이는 것이 내게 유리하겠지만…….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서 하마터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언제나처 럼 초인적인 의지로 그것을 참아냈지만. 하르몬의 말을 들은 세스케인이 고개를 저었다. "겨우 문을 여는 것 정도로 대단한 것처럼 말씀하실 필요가 있겠습니 까." "후후, 실은 말이네, 유넨이 무례함도 각오하고 이것들을 내 손에서 지키 려 애썼다네. 자네의 중요한 서류이니 말이야." "아, 그런 일이 있었던가요……."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슬쩍 흐뭇해하는 세스케인 얼굴이 내 시야에 여과없 이 그대로 잡혔다. 아아… 자비로운 신이시여……. 젠장! 한순간의 실수가 이런 시련을 낳는구 나!! "사실 유넨을 향해 여전히 친구라고 말씀해 주시는 아예즈 공작님께서 더 욱 너그러우시지요. 생명의 궁에서와는 전혀 입장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 고……." "내가 공작이 됐다고 해서 그것이 변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후후, 물론 그렇게 생각합니다. 단지 제 의견과는 달리 행동하시는 분들 을 많이 보아왔기에 그렇게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하르몬과 세스케인이 황송한 척 눈을 내려깐 나를 중간에 두고 서로 추켜 주기에 들어갔다. 대체 원래의 본론―수세에 몰린 아군을 위한 대책 등―은 어디다 버려두고 무슨 생각으로 저런 같잖지도 않은 일로 의기 투합을 하는 건지… 짜증나 는 것들. 뭐, 예전부터 하르몬은 내게 잘해주는 놈이라면 껌뻑 넘어가는―카류 왕자 때도 그랬었다―이상한 성격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의외로 자네와는 생각이 잘 통하는군. 평소 그대에 대한 소문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야." "솔직히 최근의 분위기 덕에… 아예즈 공작 각하께 적게나마 색안경을 끼 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지금 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 었습니다." 하르몬의 웃음 섞인 칭찬의 말에 세스케인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하르몬이 기분 좋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딱딱하게 공작님이라 칭할 것 없이 하르몬님, 정도로 해주겠나?" 하르몬이 갑작스레 꽤나 파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두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제대로 나눈 것은 그리 많지 않을 텐데 갑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을 허락해 버리다니. 내가 조금 놀라고 있을 무렵 세스케인이 진지한 얼굴로 나섰다. "마법사들은 본디 작위를 거부하고 평생 마법에 매진하는 것이 신념이라 들었습니다. 실례인 질문일지 모르겠지만, 아예즈 공작님께서는 그 신념에 따라 공작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고 싶으신 것입니까?"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내 위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 네. 일일이 내 말의 속뜻을 파헤칠 것도 없이 그냥 호의의 표시로 받아들 여 줄 순 없겠는가?" "하지만 실례되게도… 공작님과 제가 그리 많은 면식을 가졌던 것도 아니 지 않습니까." 신중하면서도 당당하게 세스케인이 물었다. 하르몬이 흐뭇한 듯 미소했다. "난 세상 물정 모르고 생명의 궁에서만 살아서인지 권력을 향해 날파리처 럼 달려드는 속물에 익숙지가 않아. 최근에 만난 인간들은 내게 실망만 가 져다 주었을 뿐이지. 그러던 와중 유넨을 아껴주는 그대를 보고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자를 만나 기뻤던 거라네." 사람 좋은 척 말하고 있는 하르몬의 모습에 밸이 비비 꼬이는 것을 느꼈 다. 할 수만 있다면 눈과 귀를 막고 싶은 역겨운 심정이었다. 이젠 철도 들 만큼 든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저렇게 정의의 사자인 척하고 싶을까? 좋다! 내 과거 모든 사심을 떨치고 이 상황을 바라보도록 하지! 하지만 본 인을 앞에 두고 저런 소릴 지껄이는 놈은 두 번 정도는 꼬아 보고 세 번 정도는 그 본성을 의심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내가 속으로 끝없이 투덜거리는 동안 세스케인이 입을 열었다. "유넨은 유능하고 충실한 저의 수하입니다. 그를 아끼는 것은 당연한 일 이지 않겠습니까?" "단지 평민이라는 이유로 당연한 일을 당연히 여기지 않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는가? 자네에게 호감이 가는 것은 그런 상대적인 이유이네." "어디서든 상대성은 적용되는 법이로군요." 세스케인과 하르몬이 마주 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뒤늦게 가 운데 덩그라니 앉은, 이 화제의 당사자인 나를 향해 말을 걸어주었다. 물론 나는 그 즉시 궁시렁거리던 입을 싹 닦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들의 말에 황송함을 표현했다. 아, 이 얼마나 훌륭한 직업 정신인가! 평민이란 무릇 윗분이 먹다가 던져 준 빵 찌꺼기 하나에도 온몸을 떨어가며 기쁨을 표해야 하는 것! …제길. "그럼 무례를 무릅쓰고 사석에서는 하르몬님이라 불러드리겠습니다. 추후 에 그 일을 후회한다 해도 이미 때는 늦은 겁니다." "하하,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왠지 후회하고 싶어지는군!" 이젠 아주 유쾌하다는 듯이 하르몬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함께 소리 내어 웃던 세스케인이 그 소리가 잦아지자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하르몬님의 호의에 응답을 해야 하겠군요." "무언가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니네만 그대가 준다니 한 번쯤 받아보고 싶 군." "제게 직접 칭하는 것을 허락하셨으니 하르몬님께서도 저를 세스라 줄여 부르셨으면 합니다. 갑자기 너무 친한 척해 버리는 것이 아닌지 조금 신경 이 쓰이는군요." "하하,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먼저 친한 척 추근덕거린 것은 내 쪽이 되 는군." "그건 조금 다르군요. 공작 각하이신 당신께서 퍼스트 네임의 호칭을 허 락하시는 것과 손아랫사람인 제가 이름을 줄여 불러주시길 요청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니까요."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자신들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대화의 가운데에서부터 멍하니 앞으로 시선을 둔 채 버릇 처럼 속으로 그들을 짓씹는 일까지 잊고 있었다. 순간 어떤 대사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탓이었다. 비웃음을 띠고라도 싶은 듯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과연… 과연 우습지 않은가. '세스'라 부르도록 허락하는 것은 저토록 간단한 일이었다. 생명의 궁에서 두문불출한 데다가 나이 차이도 있었던 덕에 몇 번 안면 터보지도 않은 하르몬과 몇 마디 말을 나눴다고 그 즉시 자신의 애칭을 허락해 버리는 거다. 냉기가 밀려오는 손을 감추듯 조심스럽게 주먹을 꼭 쥐었다. 이미 알고 있 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했음에도 한 번 터져 나온 불쾌함은 걷잡을 수가 없었다. 과거에 세스케인의 애칭 한번 불러보는 것을 소원으로 삼다가 단박에 거절 당하고서는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던 자신이 그 얼마나 구차하고 꼴불견인 지! 어느덧 분노가 세스케인과 모든 귀족들을 거쳐 자신에게까지 닿고 있었다. "유넨, 왜 그러지?" "예? 아, 아닙니다." 내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 챈 것은 세스케인이었다. 온통 자신의 생각에 몰두해 있던 난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버렸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 굴을 하고 내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며칠 동안 무리를 해서 좋지 않은 곳이라도 생긴 건가?" "아닙니다,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다행히 세스케인이 독심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약간 안심을 하며 고 개를 저었다. 그때 하르몬이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유넨은 너무 무리하는 경향이 있어. 조금쯤 쉬게 해주는 것이 어떤가?" "하지만 유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서류들이 많아서… 하긴, 이런 변명을 늘어놓기엔 하르몬님과 잡담한 시간이 너무 길었군요." 세스케인은 고개를 젓더니 내게 시선을 보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서 소홀했던 몸 관리라도 하도록. 한창 나이에 그렇 게 체력이 약해서야 되겠는가." "후후, 유넨은 허약함의 대명사인 순수 마법사가 아닌가. 좀 봐주게, 세스 경." 하르몬의 말 마지막에 따라붙는 단어에 또 한 번 울컥함이 밀려왔다. 나는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공손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히… 먼저 자리를 뜨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실례를 범 하겠습니다." "인사는 됐다. 안색이 정말 나쁘군. 그만 돌아가 쉬어도 좋아." "죄송합니다……."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서재를 빠져나왔다. 달칵― 하고 문을 닫는 소리 가 들려오자마자 얼굴이 그대로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좋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네놈들을 뛰어넘어 주마! 하 다못해 대등한 인간이 되어주겠어! 끔찍스런 분노를 입 밖으로 토로해 내는 것마저 금지당한 것은 너무나 당 연한 평민의 현실이었다. 손톱에 살이 찍혀 나가는 것도 무시한 채 나는 차가운 회색의 복도를 걸었다. 쪹 쪹 쪹 달빛을 받아 옅은 아이보리 빛이 나는 복도를 되돌아 나오는 길에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이 주변에 카이 이외에는 사람이 없음을 포착한 나는 폴짝 폴짝 가볍게 뛰며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미르∼ 우리 귀염둥이∼" "컥! 카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작은 발코니로 통하는 유리 문 앞에 서 있던 세미 르가 순간적으로 품위없는 기침을 토해냈다. 기다렸던 즐거운 반응이라 나 는 빙글빙글 미소를 띠며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아이구∼ 귀여워라!"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세미르가 갑자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셔츠의 양 소매를 끝까지 걷어 올리더니 오른쪽 팔에 힘을 주어 꾸욱 접었다. 멋 들어진 알통이 불룩 튀어나왔다. "귀엽지?" "응!" 내가 고개를 끄덕끄덕하자 이번에는 왼쪽 팔까지 들어 동시에 접어 보였 다. 각도를 조금 돌려 포즈까지 잡으며 세미르가 다시 한 번 물었다. "이 포즈도?" "응! 넘 깜찍해서 깨물어주고 싶어!" "음후후후, 너도 마음의 눈을 깨쳤구나!" 왼쪽 팔을 허리에 탁 얹은 세미르가 여전히 오른팔로 알통을 과시하며 말 했다. 나는 깔깔 웃으며 녀석의 청보랏빛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거참, 내 장난에 잘도 호응해 주네! 우리 세미르가 제일이야!" 까치집 머리를 한 세미르가 그제야 팔을 내렸다. 그리고 검지손가락을 가 만히 세우고서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이것도 의외로 참 재밌더라. 에르가나 딜티 녀석들이 휘둥그레하는 꼴도 웃기고 말이지. 카류, 네가 왜 이 짓을 하는지 알겠어." "이 짓이라니! 이래 봬도 반은 진심이란 말이야. 부모 품에 한번 아이는 영원한 아이거든!"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오는 거지?" "우리 아기는 몰라도 돼요∼" 한 번 더 손을 얹어 세미르의 머리카락을 힘껏 부볐다. 머리카락이 완전히 엉망이 되어버리자 이제는 세미르도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한바탕 웃은 나 는 유리 문을 열고 달빛이 드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난간의 아래로 이파리 무성한 나무들이 보였다. 간간이 그 사이로 경비를 도는 병사들도 눈에 뜨였다. 팽팽한 긴장이 가득했던 예전과는 달리 조금 은 여유를 찾은 얼굴이다. 탈레스 요새를 뺏긴 탓에 초반에 약간 고전을 했지만, 게릭이 제공한 각종 군사 기밀과 크고 작은 조언을 바탕으로 끝임 없이 허점을 찌르며 승승장구하여 어느덧 국왕군에 모자람이 없는 세력으 로 급성장한 것이다. "잘도 여기까지 왔구나." "아, 새삼 네 능력에 감탄해." 세미르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손을 내저었다. "말도 안 돼. 내 능력이라 봤자 마법 수식 정도잖아? 그것도 아직까지는 크게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고……. 돌아보면 그저 상황에 끌려다니기 만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 같아." "나는 괜히 겸손한 척하는 사람이 제일 얄밉더라. 네가 아니면 누가 드래 곤의 가호까지 받는다는 말이지?" 세미르의 시선이 슬쩍 카이에게로 갔다가 다시 테라스 밖으로 향했다. 나 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동안 고 요가 찾아왔다. "많이 괴롭지?" "응?" 내 물음에 세미르가 영문을 몰라 하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눈치 빠 른 녀석은 금세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뭐, 아니라고는 말 못하고… 형은 아주 옛날부터 내 우상이었으니까… …." "후방으로 빼내줄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조금 전 유리 문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세 미르의 얼굴은 사실 굉장히 애달팠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장난을 쳤지만 더 이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세미르는 에스문드 가의 기사단에 소속된 돌격대장이다. 에르가 형 못지않 은 무력으로 다른 장교와 기사들에게 인정받은 그는 비록 소규모의 전장에 서였지만 몸을 아끼지 않고 적진을 꿰뚫으며 충분히 그 역할을 소화해 주 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사정이 조금 달라진다. 국왕군이 최후의 방어선인 네므 라 평원에서 속속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군도 마찬가지만. 양군 간의 대규모 접전이 머지않았다는 징조였다. 이대로 세미르가 다음 전투에 나선다면 그는 틀림없이 전장의 중간에서 국왕군의 주요 수뇌 중 한 명인 세스케인을 마주하게 되리라.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던 세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제 와서 후방으로 물린다고 말해도 그게 마음대로 될까?" "내가 이래 봬도 왕자거든?" 내가 얼굴을 삐쭉 내밀고 말하자 세미르가 푸웃― 하고 웃었다. "누가 모른대? 그저 카류, 네가 자신의 지위를 담보로 하여 제멋대로 군 의 편성을 뒤집을 만한 녀석이 아니니까 그랬지. 하지만 그런 소릴 들으니 까 또 우습네. 넌 정말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녀석이야. 전혀 왕자답지 않고 소박하다고나 할까? 뭐, 그것도 친한 사람들 앞에서뿐이지만……." "에휴, 그렇잖아도 힐레인에게 자주 잔소리를 들어. 친구들에게 편안한 태 도를 보이는 것도 좋지만 가끔은 목 굵은 소리도 해보라고 말이지. 그리하 면 더욱 왕자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나 어쩐다나. 애들 앞 에서까지 가슴을 뻣뻣이 내밀고 살다가 허리라도 삐면 어쩌라고 그러는지 몰라." 나는 괜히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이 귀여운 아이들 앞에서 진지해질 날은 찾아오기 힘드리라(먼저 말장난을 걸 고 싶어지니까). "일부러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 피하기만 한다고 해결될 문 제는 아니니까." "응……." 세미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끌려 시선 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밝은 상현달이었다. 충만한 만월은 아 니었으되, 적당히 주변을 비추어주고도 남을 밝음을 지녔다. 가만히 달을 올려다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분명히 잘될 거야." "그럴까?" "응… 이건 어때? 아군이 승리한 후 세스케인을 생포하게 되면 내가 반드 시 설득해 다시 아군에게로 마음을 돌리도록 할게. 내가 왕이 되는 것이 완전히 확정된 후라면 더 이상 반항하는 것은 그저 나라를 황폐하게 만드 는 일일 뿐이지 않겠어? 그러니 배신에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나라의 재건 을 위해 힘이 되어달라고 하는 거야." "오, 그럴듯한걸?" "그렇지?" 조금이나마 세미르의 얼굴에 희망이 되돌아오는 듯하여 나는 마주 보며 흐 뭇해했다. 하지만 세미르는 곧 얼굴을 굳혔다. 청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똑 바로 바라보던 녀석이 무슨 비장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전쟁에 승리하여 네가 왕이 되면 너의 소중한 형제들은 어 떻게 하지?" "……." 진심을 훑어내듯 깊은 눈동자에 시선을 피할 수가 없어 침묵했다. 어떻게 하나… 나는 생각에 잠겼다. 오랜 내전이었다. 내가 승리한다 해도 만약의 불씨가 될 형제들을 그냥 왕 궁에서 생활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국왕군의 전면으로 내 세우고 있는 루브 형의 경우엔 그저 유배나 유폐만으로 끝내지 못하리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가장 큰 문제가 다시금 상기되었다. 하지만 내가 엷은 미소를 떠올리는 데 그리 긴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괜찮아, 그때가 되면 좋은 수가 생길 테니." "…그래?" "응, 분명히!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니 사니 하며 목숨이 간당거리던 내가 이렇게 쌩쌩한 얼굴로 서 있는 것이 그 증거야."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그 자리에 선 세미르는 동의도 부정도 않았다. 나 는 가볍게 뛰어올라 난간에 엉덩이를 걸쳤다. 조금 위험스러운 자세였지만 만약 떨어질라손 쳐도 카이가 잽싸게 나를 구원해 주리라. 든든한 호위 기사가 있고, 너무나 다정한 사람들이 있다. 남은 것은 온 힘 을 다해 방해물을 헤치고서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일뿐이 다. 난 유쾌하게 벙긋 웃었다. "이것들! 여기 있었네!!" 문득 유리 문 안쪽 복도 쪽에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감히 왕자를 향해 '이것'이라고 칭한 자가 숨을 몰아쉬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뭔가 화가 난 듯 보이는 그를 향해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르가 형, 무슨 일이라도?" "카류, 너! 일이 끝났으면 빠릿빠릿하게 제 방으로 돌아가야지! 네 행방을 놓친 하인들이 백지장이 되어서 지나가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 단 말이다! 귀찮게시리!!" "엇, 그래? 그렇게 오래 이야기하지도 않았는데……." "잠시라도 네 행방이 묘연해지면 아군이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카이야님께서 함께 계셔서 생명의 위협은 없으니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거지." "알았어, 알았어. 미안." 난간에서 내려선 나는 양손을 딱 모으며 사과했다. 그에 에르가 형은 콧김 을 팍 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일에 에르가 형의 충고까지 듣게 되다니… 우리 에르가 형, 정말 철이 잘 들었단 말이야." "이 크다가 만 쬐끄만 놈이 누구한테 철이 들었니 말았니야!" "나 이제 세미르보다 아주 조금 작을 뿐인데? 아직도 크고 있어." 세미르의 곁으로 쪼르르 달려간 내가 눈을 깜빡깜빡하며 말했다. 에르가 형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꼴을 보던 세미르가 못 참겠다는 듯 끼어들었다. "에르가, 카류가 저렇게 애 취급을 하면 '그래, 어떤 종류의 철이 어느 정도 들었는지 자세히 말해다오'라는 식으로 대처해야지. 뻔뻔하면서도 어른스럽게." "다… 닥쳐, 세미르!" "아하하, 세미르, 에르가 형한테는 그런 말재간이 없어." "이것들이?!" 에르가 형이 완전히 열받은 표정으로 번쩍 주먹 쥔 손을 들었다. 가만히 있다간 왕자라도 매타작을 면치 못할 것 같아 나는 잽싸게 세미르를 끌고 카이의 곁으로 피신했다. 간 큰 에르가 형도 감히 드래곤인 카이에게 손을 대지는 못하니까. "형, 형, 화는 그만 내고∼ 그만 돌아가야지. 에르가 형이 그랬잖아, 잠시 라도 내가 없으면 아군이 돌아가질 않는다고." "…제길, 알았다!" 한참 씩씩거리던 에르가 형이 이를 바득 갈며 자리에서 돌아섰다. 양팔을 조금 든 채 쿵쿵거리며 걷던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와 세미르를 쫙 한번 째려보다가 다시 복도로 걸어나가 버렸다. "쿠쿡― 아, 저런 걸 보고 귀엽다고 그러는 거구나." 곁에 있던 세미르가 부들부들 떨기까지 하며 웃었다. 나는 괜시리 잘난 척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알았어? 우리 에르가 형이 얼마나 귀여운데!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막 나가는 단순한 면이 최강 포인트지!" "푸훗… 응… 그래… 후후… 참… 부러운 놈이야……." 잔뜩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세미르가 어느덧 진지해진 얼굴로 조용히 말했 다. 그의 시선 끝이 막 에르가 형이 나선 복도를 향해 있었다. "가야지!" 세미르의 등을 탁 치며 내가 말했다. 조금 놀란 듯 움찔했던 녀석은 씨익 웃고 있는 내 얼굴을 보고 그제야 굳혔던 얼굴을 폈다. 난 마지막으로 뒤에 기척없이 서 있는 카이의 손을 꽉 붙들어 당겼다. "카이도 가자. 방패로 이용해서 미안해." "아닙니다. 재미있어 보이시는군요." 여전히 무표정한 카이가 말했다. 왠지 쑥스러워진 내가 이번에는 베실 웃 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달빛이 은은히 테라스를 비추고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2 결전 네므라 평원으로 총력을 집중시킨 국왕군과 아군이 대규모 접전을 벌이기 시작한 지 이틀째. 길게 펼쳐진 평야의 아래로 양군이 어지러이 맞붙어 있 었다. 귀를 때리는 고성과 함께 거친 혼전. 어느 쪽에서도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막상막하의 전장이었다. 적군도 아군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는 전 선이었기에 양측이 모두 필사의 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쿠웅― 혼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앙의 전장 뒤편, 적군의 후진이 대기하고 있는 곳 으로부터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나는 바로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위험을 감수하고 은밀히 파견된 류스밀리온님이 8서클 마법을 시전한 것이다. 적 군에 비해 아군의 우세한 점이 바로 마법사의 존재이기에 이번 작전에 대 한 기대는 몹시 컸다. "적의 피해는 어떤가?" 오랫동안 울리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후 마법사 진영 쪽에서 분주히 뛰 어나오고 있는 자들 중 한 명을 불러세워 질문했다. 잠시 자리에 멈춰 서 대답하는 병사의 얼굴은 그리 밝지가 못했다. "에예, 에스문드 백작님! 실드 덕에 기대치만큼의 피해는 주지 못한 것으 로 보입니다. 적 측이 마법사단의 열세를 인정하고 아예 마법을 이용한 공 격은 포기, 방어를 위한 실드 마법 시전에만 총력을 가하기로 결정한 모양 입니다. 지금도 공격으로 깨어짐과 동시에 곳곳에 새로운 실드가 시전되고 있다고 마법사 분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알겠다." 병사가 다시 분주하게 보고를 위해 뛰어갔다. 그 다급한 뒷모습에 씁쓸했 다. 류스밀리온님께서 직접 나서기까지 했음에도 이런 결과라니. 물론 제 아무리 많은 마법사가 실드 시전에 동원된다해도 상대가 8서클 마법인 이상 완벽하게 그분의 공격을 막지는 못한다. 상당한 피해를 받았 음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하지만 분명 군의 지휘자나 나머지 중요 부분은 전혀 손상을 받지 않았을 터이다. 게다가 8서클 마법이라는 어마어마한 재 앙아래 입은 피해가 겨우 그 정도에 불과하다면 그는 오히려 적의 기를 살 리는 역할이 할 뿐이다. "와아아아!!" 적의 함성 소리가 시끄럽다. 저대로 적의 기세가 치솟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법. 이쯤에서 우리들 기사단이 나가 직전을 한번 뚫어주는 것도 좋으리라. 곧 내가 나갈 차례가 올 것을 예감하고 말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주위에 정렬한 기사들은 언제든 돌격 명령에 뛰어나갈 수 있도록 단단히 무장을 갖춘 채로 있었다. "에스문드 백작님, 카나스님께서 잠시 부르십니다." 막 전장으로 뛰어들려고 마음의 준비까지 하고 있는데 한 전령이 다가와 의외의 소식을 전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이것저것 캐물을 시간은 없다. 그 즉시 고개를 끄덕인 나는 부대의 관리를 잠시 이트에게 부탁한 후 말을 돌려 아버지가 대기하고 계신 막사로 향했다. 현재 내가 속한 2진은 반수 이상이 에스문드 가문의 병력으로 이루어져 있 다. 때문에 2진의 총대장은 에스문드 백작인 이 몸이 되어야 마땅하였으나 검술은 강하되 아직은 대군을 이끌 재목은 되지 못한다 하여 여전히 아버 지께서 그 직책을 맡고 계신다.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에 비 해 군 운용력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니……. "오셨군요, 에스문드 백작님." "네, 카나스님의 부르심을 받고 뛰어왔습니다. 엇? 세미르 경까지……." 수뇌부 막사로 찾아와 아버지―공적인 자리에선 아버지를 카나스님이라 부 른다. 또한 아버지께서 백작위를 물려주신 후 공식적으로는 나보다 직위가 낮아졌기에 존댓말을 붙여주신다―를 뵙고 인사를 드리다가 문득 그 곁에 세미르가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제3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대기하고 있어야 할 텐데. 세미르에게 시선을 계속 주고 있자니 아버지께서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여기까지 불러들였는지 의아해 보이는군요. 일단은 들어보십시 오. 보다시피 현재 전장은 우열을 가리기가 힘든 상태입니다. 류스밀리온님 과 그 외 마법사 분들이 노력해 주시고 계시지만 적의 모든 고위 마법사들 이 아주 실드 시전에만 투입된 것인지 그 또한 큰 이득을 얻지 못한 상태 이고……." "색다른 작전이라도 있으신 것입니까?" 이미 아는 현 상황이 다시 언급되자 말이 끝날 때까지 참지 못하고 먼저 나서서 질문했다.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 대단한 작전이랄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 을 테지요. 메르카트 경." 메르카트라는 부관이 다가와 새 지도를 펼쳐 보였다. 그 지도 위의 한 지 점을 짚던 카니스님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선 세미르에게로 닿았다. "동쪽에 수풀 지대가 있는 것을 알 것이네. 세미르 경, 자네는 부대를 이 끌고 아군의 후방을 우회하여 수풀 지대에 숨어 기다리게. 그리고 때가 되 면 적의 측면을 공격하면 되네." "적도 충분히 그쪽을 경계하고 있을 텐데요?" 너무나 뻔한 작전에 내가 고개를 기울이자 아버지가 말했다. "에스문드 백작님의 말씀대로입니다. 때문에 저 역시 큰 이득을 바라고 내세운 계획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대로 소모전만이 계속되고 있으니 간단 한 우회 전술을 써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측면 공격은 언제쯤이면 되겠습니까?" 오래 시간을 끌 것 없다는 듯 세미르가 단도직입적으로 계획의 상세 내용 을 물었다. 아버지가 하늘의 중앙에 걸린 해를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에 전투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 해가 거의 떨어 질 때쯤이면 적군도 슬슬 물러나게 될 것이네. 물론 아군도 그리하겠지. 자 네는 그때를 기다렸다가 적군의 기세가 흐려지는 때를 틈타 그들의 측면을 노리면 되네. 그리고 에스문드 백작님께서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계시다가 세미르 경의 신호가 울리는 즉시 적군을 치러 달려나가십시오."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세미르 경, 적 측이 파견한 척후병 덕에 금세 들켜 버릴 가능성 도 높네. 먼저 발이 빠른 병사를 보내 최대한 신중을 기해 움직이되 적이 보낸 정찰병의 눈에 들키고 말았다면 뿔고둥을 길게 한 번 불어 기습이 실 패했음을 알리고, 자칫 수풀 지대에 상당한 수의 적이 있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고 말았다면 두 번을 불고 최대한 지형지물을 이용해 적을 상대하 게. 그리고 경우에 따라 지원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내는 것도 잊지 말고."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나와 세미르는 막사를 나섰다. 특히 세미르의 경우엔 예정 에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했기에 서두르려는 듯했다. 그렇게 서로 헤어져 각자의 부대로 가기 전, 세미르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목례를 하고는 말도 없이 바로 돌아섰다. 조금 내 인상이 구겨졌다.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보는 사람도 없는데 개 인적인 인사 한마디 전하지 않는 녀석이 괘씸하지 않은가. 게다가 어제부 터 녀석의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잔뜩 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제 딴에 좀 잘해보겠다고 굳어 있다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마저 자칫 그르칠까 걱정이군요. 모쪼록 아군에 민폐가 가는 일은 삼가시길, 세미르 경." 세미르가 두세 발자국 정도 멀어졌을 때 다른 병사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목소리로 녀석을 비꼬아주었다. 확연히 티가 나는 것은 아 니지만 평소 세미르와 안면을 텄거나 눈치가 빠른 자들에겐 충분히 들통날 만한 얼굴, 그런 놈의 우울한 얼굴이 아주 마음에 안 든다. 저놈이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은근히 짐작 가는 바가 있어 더욱 그랬다. 세스케인. 어릴 때부터 아주 입에 달고 살았던 그 친형에 관한 일이라는 것, 나라도 짐작하고 남는다. 세미르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굳어 있다고……?" "아아, 완전히 굳어서는 손과 발을 동시에 내밀며 걷고 있었다고. 네놈은 몰랐지?" 물론 그런 적은 없었지만 일부러 과장까지 하여 세미르 녀석에게 투덜거려 주었다. 손을 들어 입을 가리며 가만히 서 있던 세미르가 오른손과 오른발 을 함께 들어 한 발자국 걸었다. "이렇게 불편한 움직임이건만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만큼 자연스럽게 걸 어다녔었다니 놀랍군요!" "아… 하……." 세미르의 능청스러운 말에 내가 입술 끝을 씰쭉대고 있자 녀석이 빙긋 웃 어 보였다. "제가 정말 아군에 민폐 끼치는 일을 저지를 뻔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걷 는 장교가 있다면 제6왕자군의 명예에 먹칠을 하게 됐겠지요. 에스문드 백 작님의 충고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머지 말까지 마친 녀석이 성큼성큼 걸어 어느새 저만큼 자신의 부대 쪽 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황당하니 서 있던 내가 뒤늦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제길, 카류와는 다른 차원으로 세미르 녀석도 은근히 말로 상대하기가 힘 들어졌다. 어떤 말을 해봐도 능구렁이처럼 넘겨 버리는 카류 놈의 말발도 기분 나쁘지만 저놈 같은 뻔뻔스러움도 생각 이상으로 기분 나쁘단 말이 야. 세미르의 표정에서 느꼈던 약간의 불안함은 어느새 완전히 잊은 채로 말다 툼에 은근히 눌렸다는 사실에만 신경을 쏟으며 나는 부대로의 걸음을 옮겼 다. 쪹 쪹 쪹 "길이 험해진다. 조심해라, 유넨." "예, 알겠습니다." 니가 걱정 안 해도 승마술 정도는 충분히 배웠다. 평민 놈이 하는 일이라 그렇게 못 미덥더냐? 버릇처럼 속으로 궁시렁대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규칙적인 말발굽 소리가 수풀을 스친다. 아군은 앞서 나간 병사의 지속적인 보고를 받으며 조심스 럽게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오늘따라 세스케인의 얼굴이 굉장히 비장해 보인다. 그야 이 작전이 조금이라도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막상막하로 혈전 을 벌이고 있는 이 전투에 승기를 잡을 수 있을 테니. 뭐, 국왕군의 마법사인 나로서도 바래마지 않는 사항이긴 하나, 솔직히 세 상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을 듯하다. 동쪽 숲을 이용한 측면 공격. 누구라도 생각 가능한 작전이 아닌가. 아무래도 미리 잠복하고 있던 적의 척후병에 게 들켜 버릴 가능성이 어림잡아 8할은 넘을 듯. 아, 역시나 앞쪽에서 다급히 한 병사가 뛰어오고 있다. 그동안 내가 머리를 한 방 맞아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았다면 저놈은 분명 세스케인이 정찰을 보낸 병사다. "적의 정찰병이 있었나?" "네, 그것도 있습니다만……." 세스케인의 물음에 병사가 보고했다. 뒷말을 듣기가 영 껄끄러운 시작이었 다. "적도 아군과 마찬가지로 우회 작전을 시도할 모양으로 이천에 가까운 적 군이 이쪽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아직 아군의 존재를 적에게 들키지는 않았습니다만……." 아, 이번 작전은 끝이라는 소리다. 거참 절묘한 타이밍이어라. 어째 딱 이 때에 양군이 마주친다냐. 하긴 가까운 곳의 엄폐물이라고는 이 수풀과 그 로 이어지는 산밖에 없는 상황에서 해볼 만한 작전이 이 정도 빼고 또 뭐 가 있겠는가. 거의 소득없이 이틀이 지났으니 때마침 적도 이를 시도해 보 고자 했으리라. 나는 세스케인을 돌아보았다. 아예 회군할 것인가, 아니면 이 주변에서 적 을 맞이할 것인가. 적은 이천. 아군의 숫자가 훨씬 많은 데다가 세스케인이 이끄는 부대는 10만 국왕군에서도 따를 자 없이 빠르고 용맹하다 정평이 나 있다. 아무래도 지휘하는 놈이 세스케인 놈이다 보니 애들 군기가 빠릿 하게 잡혀 그런 거다. 뭐, 결론을 말하자면 웬만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소리 다. 하지만 내가 대대장도 아니니 결론은 위대하신 세스케인님께서. "저, 그리고 한 가지 더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적장이……." 보고를 끝마쳤나 싶었더니 아직 남은 말이 있었던 모양이다. 정찰병의 주 저하는 모습에 명령할 것을 생각하던 세스케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강하게 호통을 쳤다. "개인적인 생각에 임무를 소홀히 할 작정이었던가! 사소한 것 하나 빼놓 지 않고 상세히 보고하라!" "에예, 현재 적군을 이끌고 있는 장군이 세미르님이라고 합니다! 이 사실 을 확인했던 병사가 전에 세미르님을 뵌 적이 있기에 확실한 정보입니 다." "……." 예상 못한 발언에 나는 굉장히 놀랐다. 주변에서 함께 보고를 듣고 있던 다른 장교들과 호위 기사들까지 한순간 숨을 삼켰다. 이번만은 세스케인도 제때 말을 못한 채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절묘한 타이밍이라 했던가… 이거야 무서울 정도로군. 고개를 조금 돌려 남모르게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문득 보고를 한 정찰병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놈도 세스케 인의 열렬한 추종자인가 보다. 하급 병사 주제에 세미르와 세스케인의 관 계에 대해 좀 아는 것이 있었는지 꼴에 그를 생각해 준다고 이 보고를 망 설인 것이 아닌가?! 이젠 비웃음도 안 나오는군. 그래, 내 얼굴에 침 뱉기 나 마찬가지니 삼가토록 하자. 제길. "…좋다! 전군은 적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 무언가 생각하던 세스케인이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그리고 몇 명의 장교 들을 불러 먼저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의 명이 떨어지자 고요히 진군 하기만 하던 부대가 바쁘게 움직였다. 때가 온 것인가? 무표정인 채 바로 앞만을 주시하는 세스케인의 모습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자 거침없는 빠른 진군이 시작되었다. 쪹 쪹 쪹 부웅― 뿔고둥이 길게 두 번 울렸다. 측면 공격은 실패했음을 카나스님께 알리는 소리였다. 안타깝게도 상당수의 적이 지척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만 것이다. 두두두두두두……. 정찰병의 보고를 듣고 난 후로부터 그들의 모습을 직접 보는 데까지는 그 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을 듯했다. 시끄러운 군마의 발자국 소리가 금세 귓가를 때렸다. 수천에 달하는 대군이 맞붙는 데 이곳은 그리 적합한 장소 가 아님에도 적은 망설임없이 돌진하고 있었다. "세미르님!" "준비하라!" 부관의 다급한 부름에 미리 주변의 나무 사이에 숨겨두었던 궁병들에게 신 호 내릴 준비를 했다. 선기는 이쪽에서 잡고 시작하도록 하지! 적의 선두마가 얼핏 눈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나는 크게 명령을 내렸다. "쏴라!" 퓽― 핑―! 화살이 바람을 가르며 적을 노렸다. 그러나 나는 황당함에 인상을 찌푸렸 다. 명령에 따라 적을 겨눈 화살은 내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였다. 비라 도 내리듯 쏟아져야 할 화살은 겨우 몇십 개만이 하늘을 날았을 뿐, 첫째 화살 공격에서 거의 대부분이 무사히 살아남은 적군이 쏜살같이 돌진해 오 고 있었다. 궁병들은 전부 어쩌고 있기에! "세미르님! 궁병들이 공격받고 있습니다! 기병에 앞서 먼저 파견된 적의 경보병들에게……!!" "뭐? 그놈들이 몰려들 때까지 정찰병은 뭘 한 거냐!!" "보고가 없었습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먼저 당한 모양입니다!" 빠득― 손에 힘이 들어가자 가죽 고삐가 작게 소리를 냈다. 나는 즉시 검을 꺼내 며 소리쳤다. "창을 세워라!" 이미 앞서 있던 창병이 긴 창을 땅에 박아 비스듬이 세우고 몸을 숙였다. 하지만 명령을 내리면서도 그것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알았다. 이 창병은 화살 공격에서 적이 상당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세운 것으로 적을 모두 막기엔 그 수가 부족했다. "크아악!!" "와아악!" 기세 좋게 돌진하던 적의 기마병이 창병에 찔려 땅에 꼬꾸라졌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창병들이 기병의 창에 찍히고 말발굽에 밟혀 널브러졌다. 창 병 부대는 금세 뚫려 기마병에게 길을 내주고 말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돌격! 적을 막는다! 용맹한 에스문드 가의 기사라면 물러서지 마라!" 여의치 않게 기병과 기병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아르윈의 첫째 가는 기사 단을 말하라면 대부분이 에스문드 가의 기사들을 꼽곤 하지만, 미리 준비 한 바리케이드가 허무하게 무너지자 기세가 많이 꺾이고 말았다.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내 탓이다!! 창―! 캉!! "크아악!!" 금세 혼전의 양상이 만들어졌다. 주위의 호위 기사들이 분주히 내 주위를 막아주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간간이 검을 휘둘러야 할 상태가 되었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한 기사가 누군가의 검에 맞아 땅으로 꼬꾸라지는 장면이 눈에 잡혔다. 그 기사와 딱히 다른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수 없이 상처를 입어가는 병사들 중에 이상할 정도로 그 모습만이 내 오감을 강렬하게 자극했다. "아……!!" 이유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죽은 기사에게 검격을 가한 자의 빠르고 화려한 검술은 익히 보던 것. 그가 탄 거대한 흑마 역시 너무도 익히 보아 왔던 것! "세미르님!!" 부관이 식은땀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나는 멀리 고정시키고 있던 시선을 주변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전군! 후퇴한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던가. 가능성은 낮지만 어쩌면 부관은 내가 지레 겁을 집어먹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객관적인 눈으로 일천이나 수가 부족한 이 부대로 그에게 승리는 거두는 것은 무리다. 순간적으로 내 린 후퇴 명령은 분명 옳았다. 하지만… 지레 겁을 먹었다는 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후퇴하라! 전군은 후퇴한다!!" 거친 금속음을 배경으로 다급한 퇴각 명령이 전해졌다. 그러나 이미 혼전 에 접어들었고, 길이 좁아 재빠른 조치가 이뤄지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물대는 동안 전방에서 달리던 한 기병의 무리가 내 지척까지 닿았다. 그 속에는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그가 속해 있었다. 그자, 바로 세스 형이! 검을 내려쥔 형이 최대한 몸을 낮추고서 주변의 호위 기사들은 자신의 다 른 기사들에게 맡긴 채 곧장 나에게로 말을 몰아 왔다. 그 익숙한 청보라 색 눈동자가 똑바로 나를 향했다. 하지만 전과 같은 부드러움은 그 어디에 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적장'을 베겠다는 차가운 의지뿐! "으아―합!!" 기합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나 역시 검을 쥐고 달려나갔다. 가 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고동쳤다. 하지만 이대로 꼬리를 빼고 도망치는 것도 꼴사납고, 사실 마음대로 도망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카강―! 허공에서 나와 세스 형의 검이 세게 맞부딪쳤다가 떨어졌다. 가히 본능적 으로 팔이 움직여 그의 검을 막아낸 것이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세스 형 의 검을 튕겨냈는지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한번 스쳐 지나간 세스 형이 다시 말머리를 돌려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는 단 한 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았으며 그 흔한 기합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캉! "흡!" 팔로 치고 오는 공격을 검을 뉘여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일 리가 없다! 예상대로 연속 공격을 시도하려는 것인지 세스 형이 몸과 함께 팔을 비틀듯 숙여 허리 쪽으로 검을 내질러 왔다. 탕! 세스 형의 검은 튕겨져 나갔다, 내가 빠르게 내민 검의 가드에 의해서. 순식간에 이루어진 3합. 결코 봐줌이 없는 세스 형의 검을 완벽하게 막아 냈다. 잠시 떨어져 대치 상태가 이루어졌을 무렵 그 사실을 깨달은 내가 놀란 가슴에 숨을 몰아쉬었다. 세스 형이 검을 조금 내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베일 듯 날카롭던 눈 동자가 고요히 가라앉아 보였다. "많이 성장했구나." 대견한 듯 여기는 말이 들렸다. 하지만 부드럽게 격려를 하는 세스 형의 모습 대신 곧장 내게로 달려들어 검을 내지르고 있는 그를 보고 깜짝 놀라 버렸다. 내가 들은 것은 환청이었다. 당연히 그렇게 격려해 주리라 믿고 있 었기에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크흑!" 미처 검을 막지 못했지만 몸을 비틀어 간신히 피할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왼쪽 팔에 그의 검이 스쳐 버렸다. 뜨거운 기운과 함께 옅게 피가 솟았다. 그 순간, 나는 검을 고쳐 드는 형을 보았다. 슬픔도 없고 고통도 없는 극도 로 절제된 무표정이었다. 아직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입은 굳게 다물어 져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결의한 얼굴이다. 죽는가! 죽일 생각인가! 나를! 죽이는가?! 머리 속 갑작스러운 질문들이 홍수같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 질문에 답을 알고 있었다. ―죽인다!! 카각! 어깨의 가드 덕에 간신히 세스 형의 검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 식간에 연속하여 이어지는 찌르기는 쉽게 피할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간 신히 그의 검을 막아냈지만 남은 공격으로 왼팔과 허리에 깊은 절상(切傷) 을 입었다. 특히 허리의 상처는 아주 커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 나왔다. 조금 움직이자 고통보다는 출혈로 머리가 아찔해졌다. 신이 나를 위해 내리신 기적은 첫 3합으로 끝이 났음을 깨달았다. "크흑!" 다시 한 번 왼쪽 어깨의 갑옷에 세스 형의 검을 스쳤다가 튕겨져 나갔다. 어깨와 가슴 부분은 갑옷으로 완전 무장 상태인데 좀 전부터 형은 계속 상 반신 쪽을 노리고 있었다. "세미르님!!" 내 부상이 크다는 것을 안 호위 기사가 다급히 소리 지르며 우리들의 결투 에 끼어들려 했다. 하지만 이내 세스 형이 함께 끌고 온 호위 기사가 재빨 리 그를 막았다. 자신의 부하들을 믿겠다는 듯 세스 형은 뒤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고 검을 찔러왔다. 슉― 이미 한 번 당한 허리에 다시 한 번 검이 스쳤다.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대신 교차해 막 지나쳐 가는 순간 검은 돌려 쥐어 형을 향해 검을 휘둘렀 다. 순수한 검 실력에서도, 이와 같은 마상전에서도 내 실력이 월등히 뒤진 다. 그를 이기고 뼈를 취하기 위해서는 내 살을 한 움큼은 내주어야 할 것 이다. 그는 나를 죽인다. 그리고 나도… 형의 등에 검을 꽂는다. 어리석게 망설일 만한 순간이 아니다! 샥― 조금 무언가를 벤 느낌이 왔다. 목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비릿한 피 냄새 에 이를 악물며 고개를 들었다. 오른팔, 형의 오른팔에 상처가 났다. 하지 만 찰과상에 불과할 정도로 너무도 미미했다. 중상을 입고 겨우 말 위에서 버티고 있을 뿐인 나에 비하면 그는 긁힌 상처 하나 입은 채로 여전히 숨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오랜 우상이었던 형과 나의 차이인가. 원래부터 보통 전투마보다 몸집이 컸던 세스 형의 흑마가 평소보다 더욱 거대해 보였다. 엄청난 중압감이 몸을 사정없이 짓눌렀지만 끝까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약간 멀리까지 떨어져 갔던 형이 돌진해 오기 시작했다. 크게 가속도를 붙 이려는 듯 등자로 흑마를 세게 차며. 나도 그에 맞대응해 말을 재촉했다. 오른쪽인가? 아니면 왼쪽? 그가 노리는 곳은 어디!? 쉽사리 해답이 나올 리 없음에도 정신없이 세스 형의 의도를 가늠해 보았 다. 그러던 중 검을 어깨와 평행하게 위로 들어 올리는 형의 모습을 보았 다. 나는 대량으로 피가 흐르는 상처까지 모조리 무시하며 마지막 힘을 짜 내 검을 꼬나 쥐었다.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다. 그저 본능에 의지하기 로 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신이 기적을 이루어주길 기원하며! 바로 교차하기 직전 빠르게 말을 모는 도중 세스 형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 쳤다. 그 순간 형의 생각이 내 머리로 흘러 들어오기라도 하듯 어떤 말이 강렬히 머리를 스쳤다. [목이다!!] 투각―! 기이한 소리와 함께 세상이 크게 뒤집혔다고 생각했다. 곧 이어 시야를 가 득 메우는 붉은색의 피와 그리고 또 다시 피, 그리고 피……. 나는… 이것으로 좋았을까. 지금껏 제대로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보았으니 잘된 것일지도 모르지. 나는 카류도 좋지만… 실은 우리 형도 정말 좋거든. 그래서 죽이고 싶지 않아. 칵! 무언가가 입 안으로 강하게 찍혀 들어왔다. 그것이 뿌득― 하며 내 마지막 사고의 끈을 끊어버렸다. 순식간에 고요가 찾아들었다. 쪹 쪹 쪹 "조심해 주십시오, 유넨님." 세스케인의 명으로 나를 호위하는 기사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법사 인 내가 전장의 중앙으로 들어가는 것이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우스울 뿐이다. 난 현재 카류리드 왕자의 수식 덕에―전에 생포한 마법사를 협박, 심문하 여 알아냈다―1서클 정돈 마법서 없이도 사용할 수준이 되어 있었다. 근접 전에 들어가서도 웬만한 검사쯤은 내 상대가 아닌 것이다. 하지만 두어 번 그 장면을 보았으면서도 이 기사님의 걱정은 꺼질 줄을 모른다. 뭐, 귀중한 마법사인 내가 죽으면 자신에게 돌아올 문책이 엄청날 테니 당연한 일일 테지. "전진한다!" 진군이 시작되었다. 세스케인은 거의 최전방에서 달리고 있었으며 나는 최 소한의 안전을 위해 약간 뒤떨어져 그를 따랐다. 계속 나아가고 있자 양쪽 나무숲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예상한 대 로 매복하고 있던 적의 궁병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화살 공격은 그리 큰 빛을 보지 못했다. 세스케인이 먼저 보내놓은 경보병들을 상대해야 할 테 니 중앙의 길을 가로지르는 기병에게 활을 쏠 여력이 없으리라. "우와와―!" 앞서 포진하고 있던 창병들 역시 순식간에 무너지며 상황은 금세 기병 대 기병의 혼전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주변으로도 적 의 기병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직선 거리 의 한 명을 타깃으로 정해 캐스팅에 들어갔다. 퍼걱! "크악!" 번쩍 하는 빛과 함께 날아든 매직 애로우를 맞고 그 병사는 말에서 떨어지 고 말았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 그 영문도 모른 채일 것이다. 곧바로 내 쪽으로 달려드는 기사가 보였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도 그자 가 이렇게 가소로울 수가 없었다. 내가 말고삐를 쥔 양손을 놓지도 않고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그 기사는 황당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감정에 흐트러져 검을 놓을 정도로 무능한 놈도 아닌 모양이다. "위험합니다! 유넨님!!" 순간 조금 전 내게 걱정의 말을 늘어놓던 기사가 나의 앞을 가로막으며 적 병사의 검을 막아냈다. 다급히 끼어드느라 검을 막은 모습이 아주 불안정 해 보였다. 거참 쓸데없는 짓을 하네. "사트르 경도 위험합니다." "에?" 사트르라는 호위 기사는 나를 치려던 적 기사를 상대하느라 뒤에서 달려드 는 다른 자를 미처 눈치 채고 못하고 있었다. 내가 눈을 살짝 가늘게 만듦 과 동시에 사트르 경을 공격하려던 적이 붕― 하고 하늘로 떴다가 곧바로 땅에 처박혔다. "왓!" "헉……!!" 사트르 경이 깜짝 놀랐는지 보기 흉하게 어깨를 움찔했다. 하지만 그 앞에 서 대치하고 있던 덩치 좋은 적병사의 반응보다는 훨씬 나았다. 가슴 중앙 에 갑옷과 함께 반쯤 구멍이 뚫린 동료를 보고서 입을 쫙 벌리고 굳어 있 지 않은가. 난 피식 웃었다. 저 정도의 무방비 상태라면 '나 죽여주세요'라는 말과 똑같은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순식간에 또 한 번의 캐스팅이 끝났 고 그 남자 역시 몸에 바람 구멍이 뚫린 채로 세상을 하직했다. "마음을 써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만, 너무 제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 니다, 사트르 경." 내가 부드럽게 말하자 사트르 경은 머쓱한 듯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본분에 충직한 기사님이 새로운 적을 상대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즈음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나는 남모르게 쓱 입꼬리를 올렸다. 마법의 힘이란 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정식 기사들이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롱 소드를 휘두를 때 나는 여유만만하게 말 위에 앉아 쉬운 수식을 계산한 다음 마나를 조금 움직여 주면 된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저 머리로 생각하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 사트르 경 같은 정 식 기사들조차 내 앞에서 한 수 아래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다. 자신만만하게 매직 애로우를 시전해 내 호위 기사들을 도우며 앞으로 나아 갔다.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사람이 하나둘 죽어 나가자 처음에는 당황하 던 적들도 이제는 마법사인 나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서 이쪽으로 집중 공격해 들어왔다. 물론 대부분이 내 마법 앞에서 그 명을 달리했으며 가까스로 뚫은 자들도 사트르 경 등의 호위 기사들이 휘두른 창과 검에 막혀 내 말의 꼬리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픽픽 죽어 나갔다. 최 소한 내 주변만은 참으로 거칠 것 없는 진군이 이어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말을 달리다 적진의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다다르게 되었 다. 장군 급이 이쯤에 있는지 상당한 실력의 호위 기사들이 다수 몰려 혼 전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빠르게 검을 휘두르는 세스 케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돌격을 하는 도중 전열이 벌어져 상당히 거리가 멀어져 있었는데 벌써 저 재수없는 얼굴을 보게 되는군. 가까이 있는 기사에게 매직 애로우를 선사해 주며 평소처럼 세스케인을 씹 어댔다. 하지만 그런 투덜거림은 곧 멈추었다. 세스케인이 곧장 목표로 하 여 돌진하는 적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잊을래도 잊지 못한다. 아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배신을 때린 그놈. 세스케인과 똑같은 머리털을 한 그놈. 세미르! 캉! 검이 부딪쳤다. 그리고는 튕겨져 나갔다. 그냥 검의 잔영만이 번쩍 하고 끝 이 나버렸을 정도로 빨랐던 세스케인의 베기를 세미르 놈이 완벽하게 걷어 내었다. 한차례 맞붙었던 세스케인이 말머리를 돌리며 다시 한 번 검을 내 려쳤다. 이번에도 세미르 놈은 그 공격을 쳐냈다. 그쯤에서 잠시 떨어지려 나 했지만 세스케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바로 몸을 꺾어 내리며 허리 쪽 으로 검을 찔렀다. 순간의 틈을 이용한 연속 공격이었지만 세미르는 지지 않고 검의 가드를 이용하여 깨끗하게 그 공격을 막아냈다. 드디어 엉켜 있던 두 사람이 떨어졌다. 찰나의 시간 동안 3번에 걸친 검의 격돌이 끝이 났다. "……." 내가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잠시 눈을 찔끔 감았다가 떴다. 아니, 실제론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들의 공격이 너무나 순간적이었고 빨랐기 때문이 다. 소설책 따위에서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이라고들 말하지 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눈대중으로 그들 을 훑어보고 있는 탓도 있겠지만 놀라운 검술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도리 가 없었다. 세스케인이 혼자 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고, 전장에서 검을 휘 두르는 걸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거물들이 목숨을 걸어 맞붙는 모습 은 보지 못했다. 그리고 결과는 이런 것이었다. 이것이 왕국에서 손꼽히는 자들의 진짜 실력인 것이다! 갑작스레 가슴이 크게 뛰었다. "유넨님!" "우왓?!" 순간 누군가 빽 소리치며 내 앞으로 뛰어들었고, 그 덕에 내 말과 그가 탄 말의 몸이 세게 부딪쳤다. 갑자기 말이 흔들려 그만 땅으로 곤두박질 쳐버 리려다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하지만 이렇게 말을 부딪쳐 온 자를 탓할 수는 없었다. 내가 한눈을 파는 사이에 정면으로 뛰어드는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오늘로 벌써 두 번째로 불안한 자세를 취한 채 적을 막고 있는 사트르 경 을 보며 약간 미안함을 느꼈다. 바로 마법을 시전해 적을 제거한 내가 어 색하게 웃었다. "한눈을 팔았군요. 죄송합니다, 사트르 경……." "그런! 당신을 지키는 임무를 소홀히 한 제 탓입니다!" 사트르 경이 다른 적 기사를 상대하기 위해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보통이 라면 버럭 불평을 늘어놓을 다른 기사들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너그러운 기사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더 이상 그에게서 머물러 있지 못했다. 난 곧 장 고개를 돌려 조금 전 격돌이 있던 세스케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이 때마침 다시 맞붙고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조금 방심해 있던 세미르가 처음과는 달리 정말 간신히 세스케인의 찌르기를 막 아내었다. 하지만 놈의 분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세미르가 차가운 검에 팔과 허리를 베이고 크게 휘청했다. 허리의 부상이 상당한지 이 먼 곳에서 도 세미르의 허리에서 흐르는 피가 확연히 보였다. 세미르가 중상을 입는 장면을 보자마자 순간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걱 정스레 세스케인의 얼굴을 살피게 되었다. 아니다, 자신의 친동생을 거의 죽음의 벼랑까지 몰고 간 놈이 얼마나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 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했다. 그래, 애써 비통함을 삼키는 놈의 모습을 보고 비웃어주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너무나 통쾌한 나머지 크게 웃어버리면 어쩌나?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세 스케인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는 곧 웃을 듯 말듯 일그러뜨리고 있던 얼굴을 멍하게 만들었다. 비참할까, 처절했을까? 아니, 세스케인의 얼굴은 극도로 무표정했다. 아마 도 몹시 사랑했을 친동생을 똑바로 보고 곧장 말을 몰아 정확하게 검을 휘 둘렀다. 세스케인의 모습은 잔인했지만 결코 천박하지 않고 오히려 장중했 다.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라도 했는지 호위 기사들도 최대한 형제들만의 결투를 이루어주기 위해 끼어들려 하는 적의 기사를 혼신의 힘으로 막아 섰다. 몇 차례 빠른 검의 맞물림이 있었다. 세미르의 자세가 크게 흐트러졌다. 잠 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한 번 큰 상처를 입은 이후로는 밀리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의 3합도 방어만 있었을 뿐 지금까지 제대로 된 공 격 한번 펼치지 못했다. 다시 한 번 세스케인에게 허리를 당함과 동시에 세미르가 발악이라도 하듯 검끝을 뒤로 쳐 올리며 기습 공격을 시도했다. 그 광경에 멀리서 지켜보던 나까지 깜짝 놀라 버렸지만 세스케인은 순간적으로 팔을 빼내 그 검을 피 했다. 세미르는 분명 강하지만 세스케인은 더욱 강하다. 소름이 끼치도록 강하다. "빌어먹을……."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가 황급히 입을 닫았다. 주변의 사람들은 분 주히 적들을 상대하느라 내 말을 듣지 못한 듯싶었다. 형식적으로 움직이 며 매직 애로우를 시전하던 나는 다시금 시선을 그들 형제에게로 주었다. 한번 공격을 가하며 상당한 거리까지 멀어졌던 세스케인이 강하게 등자를 쳐 말을 재촉하며 세미르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으로 마무리 를 할 생각일까? 검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나였지만 무언가 그런 생각이 강하게 소용돌이쳤다. 그럼에도 세미르는 여전히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 이며 정면으로 세스케인에게 달려들었다. 투각. 세스케인이 검을 조금 높게 들었다고 생각되는 순간 기이한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교차하여 지나갔다. 무의식 중에 세스케인만을 따라 움직이던 시선이 나중에야 천천히 세미르에게로 향했다. 붉은 피가 치솟았다. 목에서부터 시작된 핏물은 허공을 붉게 적시다가 순 식간에 갑옷에 떨어져 흘러내렸다. 완전히 잘려 나가지 못한 세미르의 머 리가 안쪽의 벌건 살을 드러낸 채 목에 반쯤 붙어 뒤쪽으로 꺾여 있었다. 바로 그의 형인 세스케인이 목을 한 번에 절단 내버린 것이다. 멀리 달려나갔던 세스케인이 말을 몰아 아직 말 위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세미르의 시신 쪽으로 되돌아왔다. 지금까지의 일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벌 렁거리고 있는데 세스케인은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세미르의 곁으로 스치던 세스케인이 검을 들어 뒤로 넘어간 채 있는 세미 르의 얼굴에, 정확히 말하자면 반쯤 열려 있는 그의 입속으로 검을 꽂아 박았다. 그리고 검을 비틀어 머리통을 있는 힘껏 그 몸에서 뜯어내었다. 뿌득 하고 들릴 리 없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몸이 순간적으로 석화되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저 내 시선은 세스케인과 그가 높이 치켜든 검, 그 검의 끝에 꽂혀 있는 머리만을 향했다. "무모한 저항을 하는 적들은 보아라! 너희 지휘관의 목이 바로 이곳에 있 다!! 너희들은 패배했다! 내 강하게 확언하건대 인륜을 져버린 패륜아를 따 르는 자에게는 하늘의 순리에 따라 패망만이 뒤따를 것이다!" 세스케인의 큰 외침이 전해지자 적들은 심하게 동요되었다. 원래부터 후퇴 하고 있던 적들이었으나 이쯤 되자 정식 기사들을 제하고서는 진짜 무기까 지 내버리고 도망치는 자들까지 하나둘 나타났다. "추격한다!!" 세스케인의 그 외침을 마지막으로 번뜩 정신이 들었다. 다행히 내가 한눈 을 파는 사이에 달려들던 적들은 다른 호위 기사들이 잘 처리해 준 모양이 었다. 병사들의 움직임에 맞추고자 얼른 고삐를 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세스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름답게 날이 선 고고한 은색 검신에 탁하게 바랜 피가 흘러내리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유넨님!" 예의 그 사트르 경의 부름을 받고 나는 고개를 저어 바로 말을 재촉했다. 쪹 쪹 쪹 불안하다.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뿔고둥이 두 번 울린 뒤로 아직까지 세미르에게서 소식이 없었다. 아직 후퇴하는 중이라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불안하다! 제기랄, 조금 전 세미르 놈이 궁상맞게 굴 때 목덜미를 붙들어서 화끈하게 몇 방 두들겨 패줬으면 좀 나았을 것을! "에스문드 백작님, 조금 표정 관리를 하시는 편이……." "시끄러! 원래부터 더러운 인상이니 상관하지 마라. 게다가 무수히 적병의 목을 베어야 할 장군더러 베실베실 웃고 있으란 말이냐?" 꼴에 보좌관이라고 곁에 선 이트가 계집애처럼 쪼잘거리기에 일침을 놓아 주었다. 하지만 꼭 이렇게 인상을 구기고 있어서 좋을 일도 없을 듯해 조 금 얼굴 근육에 힘을 가해 평소만큼의 표정을 만들어냈다. 이트 놈이 피식 웃는 모습에 금방 다시 일그러지긴 했지만. 어느새 해가 저만큼이나 져서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예정대로 양군의 기세가 조금씩 누그러지며 물러나려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원래라면 이 때쯤이 되어 세미르의 도움을 받아 그대로 적진을 돌파하는 것이 계획이었 으나 아쉽게도 그는 단순한 계획으로만 끝날 듯 보였다. 별 생각 없이 가만히 동편 수풀 쪽으로 시선을 주고 있을 때였다. "와아아아!" 순간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었다. 적군이고 아군으로 다 물러나고 있는데 갑자기 이렇게 기세 좋은 함성 소리가 들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좀 떨어진 동편 수풀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적군의 모습 덕이었다. 황야의 중앙에서 막상막하로 벌어지고 있던 전장은 유일한 엄폐물이었던 동쪽 수풀에서 튀어나온 적의 측면 기습 공격 덕에 한순간 그 균형이 무너 졌다. 날이 저물면서 조금씩 물러서고 있던―어쩌면 물러서는 척하던―중 앙 전장의 적병들도 이때다 환호성을 지르며 곧장 진격해 들어왔다. 이미 한차례 측면 돌파를 당하고 전열이 무너져 버린 아군은 아비규환으로 조금 씩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어, 어째서… 세미르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아군이 시도하려 했던 작전 을 영락없이 빼앗긴 꼴이 되었다. 적들이 저런 행동까지 취할 동안 세미르 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들을 완벽히 막지는 못해도 최소한 그들의 발목 을 붙잡을 정도는 되어야 할 게 아닌가. "어떻게 되는 거야?" "왜 저렇게 쉽게 뚫린 거지?!" 나와 함께 대기하던 기사들마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세미르를 책망하 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하지만 그에 앞서 이상하리만큼 불길한 기분이 엄 습해 와서 세미르는 탓할 마음은 금세 수그러들고 말았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나는 동편 수풀을 멀리 보이는 곳에서 가까운 데까지 빠르게 훑어내 렸다. 그래,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세미르는 어디에? 놈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이지?! 나의 행동은 어느새 세미르의 존재를 찾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던 도중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적군의 마지막 대열쯤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어 떤 남자를 발견했다. 거대한 흑마를 올라탄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법 안면을 익히고 있었기에 이곳에서 얼핏 스쳐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자는 바로 세미르가 그토록 만나기를 두려워 하던 세스케인이었다. 불길함은 이제 더 이상 겉잡을 수가 없었다. 세미르가 동편 수풀 안에서 대치했을 적은 세스케인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세미르는 대 체……!! 한참 복잡한 생각이 소용돌이치던 중 세스케인이 이쪽을 향해 무언가를 박 은 채의 검을 번쩍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자동으로 시선이 그 검의 끝 을 향하였다. 세스케인이 이곳까지 쟁쟁하게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자신이 할 의무와 도리를 잊고 겁없이 날뛴 배신자의 목이 바로 이곳에 있다! 보아라!! 그리고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희들 또한 이런 운명 을 면치 못하리라!!"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저것은 무엇?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시선을 그쪽 으로 향했다. 누군가의 머리가 반쯤 열려진 입을 통해 검의 끝에 꿰어진 채 허공에 휘둘 러지며 있었다. 이미 죽어 싸늘히 식은 시체였지만 그와 같은 행동은 지독 한 모독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욕을 받고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세미르, 믿어지지 않게도 세미르였다. 전장에서 존경했던 형인 세스케인을 만나 검 을 겨누어야 할 것을 두려워하여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굳은 채 다니던 그 세미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세미르의 머리를 꿴 검을 높게 쳐든 세스케인이 비웃 듯 소리쳤다. 의무와 도리를 잊은 어리석은 놈, 무능한 주제에 겁도 없이 날뛴 배신자!! "에스문드 백작님! 카나스 사령관님께서 후퇴 명령을……!!" "돌격한다." "예?" 곁에서 다급히 소식을 전하던 전령이 깜짝 놀랐다. 이트가 다급히 내 팔을 붙들었다. "백작님! 진정하십시오!!" "닥쳐!!" 억제하기 힘든 분노가 강한 일갈로 터져 나왔다. 내 외침에 이트는 순간 크게 놀라며 팔에 얹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 따윈 아 무래도 좋다.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다!! "전군은 들어라! 돌격한다!! 당장에 놈들을 쓸어버리고 말겠다!!" 곁의 기사는 머뭇대었지만 곧 내 명을 뒤로 멀리 전달했다. 명령이 전해지 고 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즉시 등자를 세게 찼다. 그리고 검을 빼내 어 앞장서 내달렸다. 목표는 단 하나, 세스케인! 그놈이 있는 곳으로!! 동쪽 수풀에서 빠져나온 세스케인의 부대는 이미 아군의 측면을 파고들어 완전히 돌파한 뒤였다. 하지만 정작 세스케인은 자신의 동생인 세미르의 머리를 들고 가증스런 연출을 벌이느라 그에 합류하지 못하고 몇 명의 호 위 기사와 함께 수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남아 있었다. 물론 그대로 혼자 일 리는 없다. 때에 맞춰 후방의 본진에서부터 지원해 들어오는 자신의 기 사단을 등진 채였으니.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달려나갔다. 중앙의 본진이 적의 기습에 당 황하여 많이 밀려나 있었기에 나의 위치가 아군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떨 어진 듯했지만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정면으로 부딪쳐 모조리 쓸어버리리라! 전속력으로 돌진한 덕에 금세 세스케인의 지척에 닿을 수 있었다. 세미르 의 머리는 여전히 검의 끝에 꽂힌 채로 있었다. 다시금 머리가 뜨겁게 달 아올랐다. 터질 듯한 분노로 목구멍이 터져 나가라 외쳤다. "세스케인!!" 조금 전부터 이쪽을 보고 있던 놈이 그 외침과 동시에 이쪽으로 튀어나왔 다. 그리고 검신을 들어 허공에서 땅 쪽으로 힘껏 휘둘렀다. 검끝에 걸려 있던 머리가 빠져나가며 흙바닥을 내던져졌다.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며 굴러가던 그것이 바로 내 곁을 스쳤다. "이 개자식!!!" 시선을 바닥 쪽으로 돌리진 않았다. 대신 씹어 먹을 듯 기합을 지르며 곧 장 세스케인에게 달려들었다. 죽인다! 죽여 버리겠다! 죽여 버리고 말겠다, 세스케인!! 카캉―! 양쪽 모두 굉장한 가속도로 달려들고 있었기에 지나치며 맞부딪친 검에 팔 이 다 얼얼해져 왔다. 그러나 혹시라도 부상이 있을지 모를 몸을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세미르! 세미르!! 그리고 세스케인!! 단지 그것만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그것 말고 다른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은 적어도 이 순간만은 결코 불가능 했다. 다시 검을 강하게 쥐고서 곧장 말을 몰았다. 세스케인도 마찬가지였다. 벌 써부터 숨이 거칠게 밀려 올라왔다. 일말의 흔들림조차 없는 놈의 무표정 한 얼굴이 내 이성의 깊숙한 곳까지 격노하게 했던 탓이다. "죽어!" 있는 힘껏 그대로 검을 내려쳤다. 혼신의 힘을 바쳤기에 이 일검으로 세스 케인의 머리통을 반으로 갈라놓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크게 검을 헛휘두르고 잠시 얼이 빠졌다. 세스케인이 말과 한 몸이라도 된 듯 움직여 허무할 정도로 쉽게 내 공격을 피한 것이다. 게다 가 그 정도에 그치지 않고 즉시 검을 내질러 고삐를 쥔 내 손을 노렸다. "큭!" 거의 무의식 중의 몸을 비틀어 움직인 덕에 간신히 손이 잘리는 것은 면했 다. 그저 살짝 스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짧게 신음했다. 세스케인이 너무나 간단히 내 공격을 피하는 순간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며 겨우 정신 을 차리게 된 것이다. 상처를 통해 손끝으로 작게 스며드는 피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일목요연이 알려주었다. 세스케인은 왕국 내의 유명한 검사다. 실전 경험도 충분히 거친 자이다. 아무리 나라 해도 한계 이상의 힘까지 끌어내지 않는 한 결코 승리할 수 없는 상대이다. 그러한데 최상의 컨디션으로 차분히 검 을 맞대어도 힘들 것을 이렇게 흥분한 상태에서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단 말인가! 눈동자만 돌려 힐끔 눈질을 했다. 아군은 적의 기습을 맞이해 후퇴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끄는 부대만이 앞으로 튀어나와 세스케인 과 맞대결함으로써 고립된 듯한 양상이 되었다. 순간적인 감정에 의존한 내 모든 행동이 하나같이 적을 유리하게만 만들어주고 있었다. "우와아아아아―!!" 순간 뒤쪽에서 들리는 정체 모를 함성에 불안함이 배로 커져 갔다. 더 이 상은 참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바로 뒤편의 떨어진 수풀 에서부터 무수히 밀려들고 있는 적 부대를 보았다. 처음 세스케인이 끌고 나온 병력이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으로 수풀을 통해 더 멀리 돌아서 나오 던 놈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세스케인은 나나 다른 자들 을 조금이라도 유인해 내기 위해 그런 짓을 했었던 것일까!? "합!" 말발굽 소리와 함께 들리는 세스케인의 짧은 기합 소리에 곧장 고개를 돌 린 나는 이를 빠득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앞뒤로 공격받기 전에 빠 져나가야 한다! 세스케인의 검끝에 시선을 주었다. 한순간도 놓치기 않기 위해 신경을 극 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나 역시 검을 들어 준비를 갖추었다. 마주하는 순간 세스케인의 검이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어졌다. "윽……!!" 조금 늦었다. 검으로 막지 못해 몸을 비틀었으되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여 다리 한쪽에 긴 혈선이 그어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나 역시 소기의 목적 을 달성할 수 있었다. 세스케인이 타고 있던 말에 약간의 상처를 입혀 놀 라게 만든 것이다. 흑마와 함께 세스케인이 잠시 멈칫거리고 있을 때를 기 회로 삼아 난 바로 말머리를 돌렸다. 치욕스러웠지만 망설일 시간이 없었 다. 이대로 그와 결투 따윌 하고 있는 동안 아군은 전멸해 버리고 말리라. "머… 멈춰!" 그대로 등을 내보이고 달리는 나를 보고 세스케인이 크게 당황하여 소리쳤 다. 설마 내 성격에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것이라고는 생각 못한 모양이다. 하지만 실제로도 말을 달리는 도중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그냥 세스케인의 말대로 멈춰 버리고 싶은 마음이 울컥울컥하는 것을 겨우 참았다.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이미 혼전이고 아군의 본진으로 되돌아가기는 늦어버렸다. 이 무슨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에스문드 백작님!" "이트!" 눈에 익은 하늘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손을 들며 소리쳤다. 검 실력도 변변 찮은 놈이 그래도 보좌관이라고 이 혼란통까지 뚫고 뒤따라온 것이 기특했 다. 뭐, 그 주위를 호위하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내가 먼저 번개같이 튀어나가는 통에 나 대신 이트를 호위하며 뒤늦게 달 려온 기사들이 그제야 자기 자리를 잡았다. 이트가 다급히 소리쳤다. "의외로 쉽게 제정신을 차리셨군요! 어서 후퇴 명령을!!" "제길, 면목없다! 어디로 후퇴를 하지?" 이트가 적들이 나왔던 수풀 쪽을 가리켰다. 녀석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내 가 먼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쪽에도 이미 적이 깔렸을 거다! 그리로 가서야 본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나?!" "어느 쪽으로도 어렵다면 추격이 힘든 수풀을 통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 다. 곧 해가 지니 숲의 그늘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게다가 수풀을 계속 가로지르면 산이 나오지 않습니까? 제아무리 적이 날고 긴 대 도 산 전체에 군을 포진시켜 두진 못했을 것입니다." "빌어먹을!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군!" 그냥 정면으로 달려들어 세스케인의 면상을 구긴 후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졸개들의 사이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것도 하나의 방책이었지만 이곳에는 나 혼자만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게다가 나는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이 털 끝만치도 없다. 최소한 저 후방에서 계집애처럼 손만 꼽고 있을 그 녀석이 뻔히 살아 있을 때까지는. "그리 호락호락하니 죽어주지 않아!"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적 기사를 검으로 날려 버리고 소리쳤다. 주위에서 적을 맞이해 상처 입는 기사들을 보자 정말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하지 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더 적을 베어 명령을 내리는 편 이 나으리라! 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의 죗값은 후에 치르겠다! 고립된 적진의 중앙에서부터 필사의 도주가 시작되었다. 막사 안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어두웠다. 드리크 경이 나와 그 동안의 상황을 보고했다. "이번 전투에서 적의 기습에 말려들어 1만이 넘는 병력의 피해를 입었습 니다. 그리고 작전 수행 도중 제2기병단의 세미르 경이 전사하였고, 에스문 드 백작이 중간에 명을 어기고 3천의 기사단을 이끈 채 부대를 이탈, 다행 히 전멸은 면한 모양이나 그 행방이 완전히 묘연해져 버렸습니다." 중앙의 의자에서 상세히 보고를 들으며 귓가가 멍해진 느낌을 받았다. 세 미르가 죽고, 에르가 형이 적진 한가운데 고립된 채로 행방 불명이다. 바로 이틀 전만 해도 해맑게 웃던 녀석들이었는데 그중 한 명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나머지 한 명 역시 다시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단다. 그때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카르틴의 장군, 루인 공작이 얼굴을 완 전히 일그러뜨리고 언성을 높였다. "그들이 맡은 중책에 비해 나이가 너무 어렸던 거요! 검술만 뛰어나다고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잖소! 특히 에스문드 백작의 경우는 어이가 없군요! 겨우 그 정도의 시시한 도발에 흥분하여 명령을 위반하고 뛰어나가다니!" "시시한 도발이라고 하기는 힘들군요. 세스케인의 행동은 저로서도 꽤나 충격적이었으니 친한 친우였던 에스문드 백작의 분노도 이해하기 어려운 바는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작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 지만 말입니다." 에르가 형의 아버지인 카나스님이 상당히 공격적인 어투로 루인 공작에게 말했다. 성격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루인 공작이 대번에 인상을 찌 푸리며 뭐라고 불쾌하게 입을 열려던 차였다. "전 믿어지지 않습니다. 세스케인과는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제가 아는 한 그는 그렇게 냉정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가 아군을 도발 시키기 위해 친동생인 세미르를 죽여 그런 모욕적인 언사를 행했단 말씀이 십니까?" 의아하게 질문한 것은 딜티였다. 그는 2진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탓에 최전 방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을 직접 보지 못했던 것이다. 카나스님이 마찬가 지라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나도 놀랐네. 그가 그렇게 잔인해질 것이라고는……." "죄송합니다만, 세스케인님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멍하게 있던 나도 습관적으로 목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향했다. 가장 말석에서 두 기사의 흉흉한 감시의 시선을 받으며 앉아 있던 아이시스 남작이었다. 그의 조언은 항시 큰 도움이 되었 고, 일라트가 포로로 잡힌 이상 허튼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에 최고 사령부 회의에도 이렇게 동참시켜 주던 차였다. 아이시스 남작이 일그러뜨리듯 웃으며 말했다. "비록 알고 지낸 세월은 짧았다고는 하나, 그 본질은 제가 더 잘 알고 있 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본디 온화한 성품이나 결코 무르지 않으며, 자신 의 정한 바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감정은 언제든 깨끗하게 내칠 줄 압니다. 비록 그것이 아끼던 혈육의 일이라 할지라도 물러섬이 없을 테 지요. 저 같은 자와는 정반대의 인물로, 일군의 지휘자로서 적합한 인물이 라고 할까요." "…생각해 보니 그대의 말도 옳군. 확실히 세스케인은 그런 자였던 것 같 다. 보다 큰 이상을 위해, 군의 승리를 위하여 가까운 혈육의 목마저 손수 따버린다라… 하긴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리는 장군 따윈 꼴불견이지." 아이시스 남작의 말을 딜티가 받았다. 녀석은 겉보기엔 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나, 실은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기 위해 애를 쓰려는 기가 역력했다. 문득 의아해졌다. 그러고 보면 딜티는 전부터 계속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 다. 왜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을까, 녀석의 이러한 속내를. 딜티의 말을 끝으로 사람들이 저마다 의견을 주고받으며 조금 웅성이기 시 작했다. 분위기가 약간 어수선해지기에 나는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내려 입을 열었다. "화제에서 벗어난 이야기는 거기까지. 그러한 논의를 하기에 앞서 우선 승리하기 위한 방법부터 제시하십시오. 잊으셨습니까? 지금 우리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현재 직면한 과제의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지 금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한다면 당장에 들이닥칠 적의 손에 떨어져 나가고 말 것을 명심하십시오." 겨우 막사 안이 조용해졌다. 내가 가만히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자니 아이 시스 남작이 다시 나섰다. "두 친우를 잃으신 전하께는 외람되지만 최후의 카드를 뽑으심이 옳을 것 이라 생각됩니다. 이 전투에서의 승리가 곧 전쟁의 승리로 직결될 것을 잊 지 말아주십시오." 아이시스 남작은 나의 결단을 서두르는 눈치였다. 최후의 카드라 함은 바 로 아르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는 카이 형의 암살 건에서 사망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막판에 그 암살자가 독의 종류를 실토 한 덕에 정말 구사일생으로 그분은 살아나신 것이다. 하지만 독의 후유증 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눈에 보일 정도로 쇠약해져 가고 있는 할아버지 에게 마법을, 그것도 부담이 큰 8서클 마법을 시전하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그저 단순히 '무리한' 부탁을 하는 수준을 넘어선 일이다. 지금 아르 할아버지는 최대한 자신의 생존을 알리지 않기 위해 최고 사령 부 회의에도 불참하여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계신다. 있을 리 없는 그분의 자리에 가만히 시선을 주며 나는 입을 열었다. "좋다. 이 회의가 끝나거든 밀사를 보내 아르디예프님께 힘이 필요하다 알려라." 류스밀리온님과 함께 마법사단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7서클 노 마법사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의외로 류온 님은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류스밀리온님은 의외로군요." "무엇이 말씀입니까?" 류온님은 그래도 사령부 회의라고 예의를 지켜 존댓말을 써주고 계셨다. 평소 그의 태도를 생각해 본다면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만 했다.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기세 좋게 큰소리를 치실 줄 알았더니 의외 로 별 말씀이 없으시니 말입니다." "…뻔히 눈에 보이는 일에 막무가내 의견을 밀고 나갈 만큼 어리석지는 않습니다. 흥, 그 수백의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나의 힘을 두려워하여 무조 건 실드만을 시전하며 꽁무니를 뺀다면, 제 마법력이 아무리 뛰어다 한들 기대만큼의 대단한 피해는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르디예프님에게는 무리 한 요구일 테지만 군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류온님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나는 씁쓸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가 맞는 말이다. 이대로 아르 할아버지를 숨겨두고만 있다면 한차례 기세 에서 밀린 아군은 패배의 쓴잔을 마실 가능성이 크다. 어차피 이번 전투에 서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 패배의 끝엔 이곳에 모인 전원에게 죽음만이 기 다리고 있을 뿐. 보다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희생이 필요하다. 티끌의 아픔 없는 깨끗한 손으로 단 과실을 따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는 항상 류온님이 하던 말이 었다. 문득 고개가 기울여진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이 옳다면, 아니, 내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면, 세미르를 죽인 세스케인의 행동도 마찬 가지로 바른 일이었던가. 나는 승리를 위해 할아버지를 진실로 목숨을 잃 을지 모를 사지로 내몰고 있으며, 세스케인 또한 마찬가지의 이유로 세미 르의 목을 베었다. 그 강도는 다르지만 나와 세스케인의 모습은 무척 흡사 해 있다. 그러고 보니 또 한 사람… 이와 흡사한 일을 겪은 자가 이곳에 있었던가. "아르디예프님이 계신 그곳으로 적을 끌어들여야겠군요. 적은 이미 아군 의 기세를 한풀 꺾였을 것이라 여기는 상태이니, 류온님의 마법 공격이 끝 난 후 못이기는 척 대대적인 후퇴를 감행한다 해도 수상히 여기지 않고 따 라붙을 것입니다. 문제는 아르디예프님께서 얼마나 버텨주시나 하는 것이 군요." 딜티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로부터 약간 숙연해진 분위기로 계속 회의가 진행되어 삼경이 지난 뒤에 야 자세한 작전안이 완성되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횃불의 힘으로도 바로 가까운 곳 이외에는 먼 곳을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어두웠다. 구름이 심하여 달빛 을 모조리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차라리 좋은 징조다. 이 그 늘이 어딘가에 숨어들어 있을 에르가 형의 도움이 되어줄 테니. 하지만 내 작은 친구에게 작별을 고할 하늘치고는 너무 우중충하기도 하다. "이젠 두 번 다시 세미르를 보지 못하는구나. 아직 시신을 보지 못해서인 지 얼떨떨하네." 자박자박. 발소리에 작게 나의 말소리가 섞여 나왔다. 이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바 로 뒤쪽의 카이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별말이 없었다. 나는 평소대로 막사 안까지 걸어 들어갔다. 바로 문 앞에서 경비를 보고 있는 기사에게 심심한 수고의 말도 건넸다. 하지만 뒤쪽에서 문이 닫히는 기척이 느껴지자마자 바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삐쭉 말 했다. "나 상심했는데 위로 안 해줘?" "울고 싶은가? 비밀로 해줄 테니 소리 내서 울어도 좋다." 막 막사의 문을 닫은 카이가 무표정한 얼굴을 내게로 돌리더니 툭 말했다. 황당해서 웃음도 안 나왔다. "허, 별로 안 울고 싶어. 디트 경 때와는 달리 이번엔 세미르가 죽는 장면 같은 것도 못 봤는걸. 그냥 멀리멀리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갔다고 생각하면 시원섭섭할 뿐이야. 단지 나 때문에 원치도 않는 애를 강제로 떠나보내게 만든 것이 미안한 거지." "이민이라고? 또 그 환생에 대한 이야기인가?" "그래, 환생. 세미르는 다른 나라로 이민간 거야. 거기서 새출발하는 거지! 해결책 없는 괴로운 고민을 엄청 안고 있던 녀석이니 모든 것을 잊고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축복일지도 몰라." 조금 크게 말한 나는 씩씩하게 내 침대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카이도 이 쪽으로 걸어왔다. "왜 여기로 와? 나 그만 잘 건데?" 카이의 지정석은 내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의자다. 내가 입을 쭉 빼며 물 었지만 카이는 멈추지 않고 끝내 바로 곁에까지 와 앉았다. 내게 무심한 시선을 준 그녀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내렸다. 그제야 카이의 의도를 눈치 챘다. 아직 내가 할 말이 남았음을 알고 계속 들어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뜨끔하여 어떻게 해야 할지 머뭇댔다. 하지만 카이의 눈동자가 계속 나를 향하고 있자 결국에는 우울한 나머지 삐뚤어져 버릴 것 같은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했다. "세미르 녀석…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와 형 사이에서 굉장히 고민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나는 그런 세미르에게 고민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해 주지 않았지. 왜냐 하면 형보다 나를 선택해서 곁에 있어준다는 사실이 기 분 좋았거든! 그러다가 결국은 우려하던 일이 일어났지. 생각해 봐, 바로 검을 들고 형과 마주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막 울고 싶었겠지? 그 리고 굉장히 아팠겠지? 여기, 여기가 말이야." 내가 자신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괜히 카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그러한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 그러한 일에 대해 동의 를 구하려 하지 마라." "…굉장히 냉정하네. 내가 그렇게 미워? 막 틱틱거려 주고 싶어?" "곧 동이 트자마자 전장에 나서야 할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그냥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말해 봐라. 일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나는 중립 에 멈추어 서서 네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다. 기실, 네가 원하는 것도 아무 런 뒷탈없이 속내를 털어놓을 존재이지 않은가?" 꽁꽁 뭉쳐 둔 속마음을 물가에 완전히 내보인 것 같아 얼굴이 확 붉어졌 다. 하지만 그러한 부끄러움도 잠시일 뿐이었다. 완전히 발가벗겨진 대도 어떤가, 어차피 내 모든 것을 그녀에게 알려줄 생각이다. 나의 전부를 펼쳐 보여도 카이는 단지 무감각할 뿐이다. 내 친우들처럼 슬퍼하며 걱정하지도 않고, 내 형제들처럼 비난하며 저주하지도 않는다. 가슴이 뜨겁다. 아아, 그래서 시작된 감정이었을 것이다. "세미르에게 굉장히 미안해. 아주 토막이 나서는 내게 죽임을 당한 디트 경에게는 정말로 미안하고… 행방 불명된 에르가 형에게도 그렇고… 어쩌 면 진짜 돌아가실지 모를 아르 할아버지에게는 고개도 들지 못하겠고… 뭐, 왕궁에 있을 형제들에게도 조금… 하…하, 가만히 보면 다 나 때문이지 않겠어? 나만 없었다면 만사가 좋았을 것을 말이지. 그걸 생각하니까 솔직 히… 좀 울고 싶기도 해." 몸을 조금 움츠리고 말했다. 순간 콧등이 찡해졌다. 정말 엉엉 울어버릴까 고민하고 있을 때 카이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쓸어주었다. 생명의 온 기를 품어 따스하지만, 아르 할아버지와 같은 온정(溫情)은 느낄 수 없는 그녀의 손이 이상하게 기분이 좋다. 고개를 들어 붉은 눈의 그녀를 보았다. 감히 손을 내밀기도 두려울 정도로 고고한 그녀가 어쩌면 그리도 아름다운지……. 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너를… 정말로 사랑해, 카이." "알고 있다." 그녀가 쉽게 대답했다. 나는 웃어버렸다. 겨우 물가에 내어놓은 내 소중한 감정을 발에 차이는 돌멩이 정도로 치부하는 태도가 많이 섭섭했지만, 실 은 모순되게 기쁘기도 했다. 내가 그 어떤 어리석은 짓을 저지른다 해도 그녀는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 을 것이며 어떠한 변화도 없을 것이다. 그것으로 나는 좋다. 이 두 눈에 뜨 겁게 눈물이 흐를 정도로 그 사실이 소중하였다. 깊은 밤이 흐르고 있었다. "엇……." "아르디예프님! 조심하십시오!" 돌 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가 불안정하게 서 있자니 갓 6서클에 돌입한 젊은 마법사―그래 봤자 40대 중년이지만―가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와 호 들갑을 떨었다. 그의 걱정이 너무 지나쳐 보여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괜찮네, 트란체이스. 겨우 이 정도에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가?" "…그래도 조심해 주십시오." "물론이네. 최소한 아직은 다쳐서는 안 되겠지." 마지막 말은 들리지 않도록 작게 말했다. 목적지에 다다라 고개를 돌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아래로 펼쳐진 길이 보인다. 이곳이 추격전을 벌리는 병사들로 가득 찼을 때가 내가 나설 차례이다. 그러고 보면 참 오랜만이군. 백이면 백 이 몸보다 뛰어난 류온 녀석 덕에 뒤로 밀려나 그동안 진짜 폐물이 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더니, 정말 오랜만에 큰 역할을 맡지 않았나. "아르디예프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저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제발,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조금부터 걱정이 끊이질 않던 트란체이스가 백짓장의 얼굴로 물었다. 이래 서 마음이 약한 자는 곤란하다. 내가 조금이라도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면 힘으로라도 밀어붙어 내 마법 시전을 막을 기세이니. "이거야 곧 죽을 사람을 앞에 둔 자도 아니고, 자네 표정이 그게 뭔가? 걱정 말게. 제아무리 8서클에 부담이 크다 한들… 뭐, 한 번 정돈 어떻게든 되지 않겠나. 거의 매일같이 8서클 마법을 날려대는 류온 놈에 비하자면 창피할 정도이니……." "그런 것은 비교의 경우가 아닙니다! 아르디예프님께서는 지금 편찮으시 지 않으십니까!" "아니, 류스밀리온은 아주 뛰어나지.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아네. 이제 말은 그만 하지. 멀리서라도 상황을 지켜보고 싶네만." 쿠웅― 내 말에 때를 맞추어 굵직한 폭음이 들려왔다. 시선을 멀리 먼지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던졌다. 이미 가늘게 떨려오는 마나의 파동으로 류온의 8서클 마법이 시도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의아할 것은 없었다. 오늘로 연속 세 번째의 공격이던가. 어제도 8서클 마법을 시전했었던 류온 으로서는 한계 이상의 힘을 짜낸 것이리라. "…하지만 성과는 시원찮군." 강렬한 마나의 격돌에 그렇게 짐작했다. 이번에도 적의 필사적인 실드 시 전에 가로막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차피 적의 마법사 전력은 아군의 반도 따라오지 못한다. 어느 정도 상대 가 될 만한 전력이라면 모를까, 이쯤 되면 완전 방어 태세로 돌입하는 것 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비록 공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아군의 마 법사들에게 계속해서 자잘한 피해를 입어 나가겠지만, 대처하지 못할 극심 한 피해까지는 받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 어떤 부대보다 강대한 파괴력 으로 활약을 하던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이니 어떻게 보면 파격적이라고도 할 만한 방식인데 누가 이런 작전을 밀고 나가려 했던 것일까. 현 국왕군 마법사들의 최고 책임자라면 오래전 7서클을 마스터한 네야드가 되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작위를 받기 시작한 이상, 그 지위 가 가문의 권세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단지 마법력이 높은 것만으로는 총 지휘자로서 모든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기는 힘들어졌을 수도 있다는 뜻 이다. 아니, 이미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네야드의 성격상 그가 총지휘를 맡았다 면 이런 식으로 나오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아마 그 녀석이리라, 네야드를 대신하여 꽤나 기특한 방식으로 마법 사단을 이끌고 있는 자는. 고개를 저었다. 더 이상 그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멈추기로 했다. 상대는 그저 평범한 적이 아닌, 나의 옛 제자와 친우들이다. 많은 생각은 마음을 약하게 만들 뿐이다. 그저 얼마나 더 많은 수의 인간을 죽일 수 있 을지, 그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바람은 단 한 가지, 부디 카류가 무사할 수 있기를……. 그 이상의 바람은, 적의 모양을 한 내 제자들 또한 어떻게든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일은 영원히 부질없을 것을 안다. 땅울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큭!" 비정상적으로 뜨거운 열풍이 뺨을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마법 공격의 여 파로 생긴 돌풍이다. 하지만 궁극 공격 마법 인시너레이트의 결과가 그저 뜨거운 바람을 맞받는 정도에 그친다면 오히려 감사할 만한 일이다. 잠시 움츠렸던 몸을 펴 검을 높이 들었다. "보아라! 8서클 마법도 아군에게 피해를 주지 못한다! 전군 돌진하라! 반 역자의 무리를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 뽑아라!" 우와아아아―!! 심장의 내부까지 뜨겁게 차 오르는 환호성이 땅을 뒤흔들었다. 이미 아군 의 기세는 하늘에 닿아 있었다. 세 번에 걸친 8서클 공격에도 그저 3천에 가까운 군사를 잃었을 뿐이다. 물론 평범한 격전이었다면 상당 수준의 피 해였지만, 그 상대가 인시너레이트였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진다. 보다시피 모든 병사들이 당장 승리라도 거둔 듯이 흥분해 있는 것이다. "아예즈 공작,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류스밀리온이라도 이 이상 8서클 마 법을 시전하는 것은 무리일 테니 더 이상의 인시너레이트는 없을 것이오. 이제 우리들도 공격을 위한 진형을 짜도 좋은 것이 아니오?" 잔뜩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넨 것은 네야드님이었다. 방어만을 고수 하는 현 체제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셨던지 아직까지 얼굴을 피지 못하고 계셨다. 그분도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음을 아셨기에 이 작전에 따라주기 는 하셨지만 역시 속마음은 곱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을 모 르는 것도 아니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아직입니다. 전에도 류스밀리온은 연속하여 4번이나 인시너레이 트를 선보인 전적이 있습니다. 비록 그때와는 달리 축적된 피로가 상당하 여 그만큼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 예상합니다만, 이번 전투 를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면 또 모르는 일인 것입니 다." "신중함이 지나친 것 아니오? 그가 드래곤이 아닌 다음에야 그렇게 마법 을 남발할 수가 있겠느냔 말이오. 3번의 시전으로도 이미 나가떨어졌을 것 이라 생각하오만……." "그대로 실드를 유지해 주십시오. 이대로 인시너레이트가 떨어지지 않는 다면 마법사단의 전력을 낭비하는 꼴이 되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또 한 번의 공격이 끝난 후라면 그 때는 공격으로 전환하셔도 좋습니다. 그럼 네야드님을 믿고 뒤를 맡기겠습 니다." 말다툼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그대로 네야드님의 의견을 묵살해 버리며 조금 강압적으로 말했다. 순간 불쾌감에 얼굴을 잔득 일그러뜨렸던 그분이 겨우 분을 삭히며 마법사들에게 명을 전달했다. 나는 마법사단의 총책임자였으나 그와 동시에 2진을 지휘하는 사령관이기 도 했기에, 마법에 대한 나머지 세세한 지휘는 네야드님께 맡기고 곧장 진 격을 서둘렀다. 상승하고 있는 이 흐름을 그대로 밀어붙일 필요가 있었다. 네므라 평원의 남쪽으로 가히 십만이 넘는 대군이 격돌했다. 하지만 어제 있었던 세스케인의 활약으로 아군은 병력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사기 또한 끝을 모르고 높아져 있었다. "사령관님, 위험합니다." "아니, 충분해." 해가 하늘의 중앙에서 어느 정도 넘어갈 즈음이 되자 아군의 기세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그랬기에 나는 최고 사령관임에도 상당히 전방까지 나서서 천천히 남쪽으로 밀려나고 있는 적의 부대를 보았다. "왠지 이상해……." 적의 동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다가 결국 조금 전부터 의문스러워하던 것을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 그리 이상할 것도 없다. 이런 상태에서 적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왜일까……." 직감 같은 것이었다, 무언가 꺼림칙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은. 마치 아이시스 남작이 막 배신을 하기 전, 그의 행동에서 이상함을 느꼈을 당시 의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부웅― 뿔 고둥 소리가 울렸다. 그와 동시에 한참을 고전하던 적이 후퇴하기 시작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은근한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또 한 번 적이 군단을 재정비할 시간을 줄 수는 없었다. 네므라 평원의 끝까지 적을 몰아붙여 이번에야말로 이 전투의 끝을 보는 거다. "쫓아라! 따라붙어 적을 섬멸한다!" 이제는 나도 상당히 앞으로 나섰다. 말의 고삐를 쥐고 앞장서 직접 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베어 나갔다. 뒤를 보이며 후퇴하는 적들이 찢어진 살을 붙들고 비명을 지르다 죽어갔다. 대군의 후퇴는 신속하지가 못해 끝에 엉켜 있던 적의 병사는 어김없이 아 군의 검에 제물이 되었다. 추격전의 뒤로는 검날에 찢기고 군화에 짓밟힌 인간의 시체가 즐비했다. 거진 네므라 평원의 막바지까지 이르렀다. 사실상 마법 공격은 끝이 났다 고 봐도 무방하므로 상황을 크게 뒤집을 만한 어떠한 요소도 없다. 이제는 거의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분명 그러했다. "그런데 왜……!!" 한창 추격을 하면서도 여전히 불안감을 씻지 못하던 나는 막 하려던 중얼 거림을 멈추고 고개를 바로 쳐들었다. 멀리 떨어진 전방에서부터 대기가 떨고 있었다. 크게 진동하는 이 파동에 크게 심장을 뛰었다. 이것 때문이었던가. 그 불안감은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라는 경고였던가. "으아아!! 어떻게 또!! 오늘로 벌써 몇 번째야!!" 가까운 곳에서 한 병사가 자지러져라 비명을 질렀다. 그는 마나의 진동은 느끼지 못해도, 상공에서부터 전해지는 후끈한 열기만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인시너레이트. 더 이상은 시전되지 못할 것이라 예상했던 강대한 8서클의 마법이 또 한 번 눈앞에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몇 번이고 필사적인 아군 의 실드에 가로막혀 그 진가를 발휘하지는 못했지만, 이 마법은 그저 시전 되기 직전의 광경을 마주하기만 해도 온몸에 털이 곤두선다. 그 병사의 히 스테리적인 경악도 당연한 일이다. 쿠우웅― 거대한 불의 덩어리가 조금 떨어진 상공에서 곧장 하강해 내려왔다. 뜨거 운 열기가 주변을 삼켜가며 두려운 장관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보기만큼 대단한 피해를 입지 않을 것을 알았 던 탓이다. 병단의 곳곳에 위치한 깃발을 중심으로 시전된 실드는 나의 명령에 의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채이다. 또한 부대마다 산재되어 배치된 마법사들이 막 인시너레이트의 징조를 느끼고 재빨리 실드를 추가해서 시전해 올리고 있었다. 8서클인 인시너레이트에 비해 6서클 실드의 캐스팅 속도는 배는 빨랐고, 이미 상대가 시전을 시작한 이후에 캐스팅을 시작해도 충분히 시 간을 맞출 수가 있다. 우웅웅― 예의 그 열기를 머금은 바람이 지나고 긴 땅 울림도 멈추었다. 이틀 동안 꾸준히 시도된 공격에 오늘 하루만 네 번이나 8서클 마법을 쏟아내는 류스 밀리온의 능력은 당장 머리를 박아 무한한 존경의 표시를 해주고 싶을 정 도였다. 하지만 이만한 능력을 펼쳐 보이고도 류스밀리온은 허탈감을 감추 지 못했으리라. 목숨을 걸어 쓴 마법이 일개 경보병을 몇백 증발시키며 실 드를 무력화시키는 정도로 그쳤으니. "후." 스스로도 지나치지 않았나 싶었던 노파심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깨닫고 쓴 웃음을 흘렸다. 어찌 되었든 이로서 더는 두려울 것이 없어졌다! "가라! 적의 발악도 이로서 마지막이다!! 모든 마법사는 실드 시전을 멈추 고 곧장 공격 진형으로 변경한다!" "추격한다!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들은 모조리 베어버려라!" "죽여라!!" 대형 마법의 앞에 잠시 죽은 듯이 잠잠해졌던 전장이 다시 뜨겁게 달아올 랐다. 병사들의 환호성과 각 장교들의 부지런한 명령 체계는 모두가 하나 로 같았다. 패배한 적을 재기 불능으로 쓸어내는 것, 이 전쟁에 완벽한 승 리를 거머쥐는 것! "쥐새끼들, 모조리 죽어버려!" "뒈져라!!" 뜨거운 추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 역시 검을 빼 들고 곧장 앞으로 나섰 다. 호위기사가 바짝 따라붙었긴 하였으나 누구 하나 말리는 자는 없었다. 이미 승리는 예정된 바였다! 그러나 말을 재촉하던 움직임은 조금씩 느려졌다. 고삐를 굳게 쥐고 있던 손에서는 어느새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시선이 멀리 떨어진 언덕께로 향했다. "무례한 자들! 언제까지고 나의 수호룡께서 네놈들의 만행을 지켜보아 주 실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누군가가 크게 목소리를 돋우어 소리쳤다. 그 외침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애써 언덕 쪽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내려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을까. 고개를 내저을 정도로 똘똘한 말을 내뱉던 꼬마 녀석을. "그 어리석은 눈으로 보아라! 그 미력한 몸으로 느껴라! 나 카류리드는 드래곤의 뜻에 힘입어 이 나라의 정점에 선 유일무이한 왕이 될 것이다!" 매일 함박웃음을 매달고 다니던 귀여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치고는 꽤나 박력이 있었다. 보지 못했던 이 2년 새에 많이도 변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가 얼마나 장성했을지 확인하기 위해 멍하니 언덕을 향한 시선을 무리하여 돌리려 하지는 않았다. 어린 왕자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내가 시선을 주고 있는 그곳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에 의해 흐름이 뒤틀리며 초자연적인 현상이 벌어지려는 중이었다. 멈추고 있던 마나가 움직인다. 그 작은 변화는 어느덧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은 고요하고 평온한 느낌이며 왜 인지 다소 느린 박자로 이루어진다. 언젠가 국경에서 카르틴 왕국과의 전투가 일어난 적이 있었다. 소소한 일 에서 시작된 작은 싸움이었건만, 우리 쪽은 물론 적국의 8서클 마법사까지 참여하여 상당한 규모로 커졌던 기억이다. 그때 나는 겨우 3서클을 마스터 한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의외로 촉망받는 재능을 가진 마법사로서 견습차 그 전투에 참여했었다. 그때였다, 이와 똑같은 파동을 느낀 것은. 사실 마법을 시전할 때 사람에 따라 별다른 기운이나 특색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주변의 마나를 움직이고 다룰 뿐이다. 하지만 왜일까, '그분' 이 시전한 8서클 마법만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일 은. 그저 흥분하여 감상적이 되었던 탓일까, 아니면 아직 젊어 동심에 가득 했던 탓일까. 그리고 지금 역시 그때와 똑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아르디예프님… 무사하셨나 보군요……." 확신도 없으면서 그곳을 바라보며 기쁘게 웃었다. 하지만 이 미소에 반 정 도는 섭섭한 기운도 배여 있었다. 아니, 괜찮은 척하고 있지만 실은 그 이 상으로 섭섭해하는지도 모르겠다. 순식간에 바로 머리 위 하늘색의 창공이 뜨거운 기운으로 붉게 메워졌다. 바쁘게 후퇴하고 있는 아군의 선두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원래대로 라면 이 즈음에서 카류가 앞으로 나서서 호통을 친 후 내가 마법을 퍼부어 주는 것이 순서였다. 굳이 카류가 나서는 이유는 단순한 마법 공격으로 피 해만 주기보다는 이 공격이 드래곤의 분노로 생긴 일이라 속임으로써 병사 들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러한 작전은 초반부터 어긋나고 있었다. "맙소사! 아르디예프님, 적의 실드가 아직… 빌어먹을! 왜 실드를 해제하 지 않는 거야!?" 트란페이스가 끝에는 신경질까지 내며 소리쳤다. 주변을 지키던 기사 중 한 명이 그 말을 듣고서 다급히 내게 말했다. "저, 적들이 아르디예프님의 생존을 알고 있었던 걸까요? 허를 찌르기 위 해 역으로 그 사실을 모르는 척하여 아군을 속이고……!!" "아니, 아닐 거다……."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류스밀리온이 하루 동안 네 번이나 마법을 시전한 전적이 있지. 적은 아 직 류스밀리온의 힘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그런… 전과는 달리 류스밀리온님은 요 며칠간 몇 번이나 인시너레 이트를 시전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마법을 시전하는 것은 상식적으 로라도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실제로 이미 힘이 다하셨다는 보고도 들어 왔고……." "이번 전투는 최후의 승자를 가늠 짓는 결정적인 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류스밀리온이 한계까지 다시 한 번 힘을 짜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 을 테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하더라도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자는 것일 거 다. 그만큼 인시너레이트는 위력적이니까." 내 설명에 트란체이스와 호위 기사들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사태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느냐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국왕군이 이 정도까지 류스밀리온을 과대평가 하고 있을 줄은 몰랐 군……." 제아무리 류온이라도 며칠간 쉬지도 못하다가 오늘만 세 번이나 마법을 퍼 부었으니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국왕 군은 여전히 류온의 힘이 남아 있을 것으로 믿고 실드 시전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카류도 본진의 마법사를 통해 적의 실드가 건재함을 알고 있기에 미리 짜여진 작전대로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어쩔 수 없군." 마법서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그리고 뒤쪽의 기사를 향해 말했 다. "왕자 전하께 인시너레이트가 한 번 떨어진 후 적의 실드가 사라지거든 그때 작전대로 움직이시라고, 이 아르디예프가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노라 고 전하라." "예? 어쩔 생각이십니까, 아르디예프님!" 트란체이스가 바로 끼어들어 소리쳤다. 하지만 그 말을 무시하며 강하게 말했다. "지금 당장 전하라! 시간이 부족하다!" "예, 예!" 기사는 곧장 뛰어가 말에 올라탔다. 다급히 언덕 아래로 말을 모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그제야 다시 내가 목표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 다. 적은 인시너레이트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선 상태였다. "아르디예프님." "정신 산만하게 떠들지 말게. 불안정한 상태에서 마법을 시전하도록 만들 어 나를 죽이고 싶은 겐가?" 그제야 트란체이스가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말을 거는 정도로 정신이 흐트 러져 불안정한 시전을 펼칠 만큼 허투로 마법을 배운 것은 아니지만 최대 한 침묵을 지켜주는 것이 나를 돕는 일임은 분명한 사실이니. 마법서 위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수식의 계산에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인 시너레이트의 시전에 필요할 것이라 예상되는 적당량의 마나를 끌어 모았 다. 적진의 너머 저 먼 곳에 펼쳐진 마나까지 이 광범위한 공간에 펼쳐진 마나가 내 의지에 응하였다. 그렇게 어느 한 점을 기준점으로 아주 느리게 마나의 소용돌이가 생성될 무렵, 수식의 계산이 끝나 완벽한 마나의 양이 정해졌다. 마법서에서 박고 있던 얼굴을 들고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주변을 맴도는 마나 중 딱 필요한 만큼 양으로 정교하게 나의 의지를 빚었다. 내가 원하 는 것은 불의 모습을 빌려 가공할 파괴를 보여줄 존재. 순식간에 하늘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거대한 불덩이가 적진의 바로 상공에 나타난 것이다. 순간 머리가 아찔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원하는 대로 마법 의 시전에 성공했지만 그 부담이 직접 몸으로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예상 못했던 바는 아니나 생각보다는 격한 반응이 아닌가. "아르디예프님!" 순간 다리가 풀려 뒤로 넘어질 뻔한 것을 트란체이스가 당장 달려들어 붙 들어주었다. 그대로 맨땅에 머리를 처박을 것을 막아주었으니 이번만은 감 사를 표해야 할까. 그보다는 저 걱정 많은 마법사를 위해 아직 버틸 만하 다고 말해 주는 편이 더 나으려나. 트란체이스를 향해 괜찮다고 말하며 손을 저어 보이려고 팔을 들었다. 그 러나 반쯤 손을 들다가 심하게 경련을 하는 팔을 보고 잠시 움직임을 멈추 었다. 상황에 맞지 않게 피식 웃음이 튀어나왔다. "…도저히… 괜찮다고는… 쿨럭… 말… 못하겠군……." 그렇지 않아도 숨에 찬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 러나 용케 그 말을 알아듣고 트란체이스가 아랫입술을 악 물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정말, 이 이상은!" "…내가 무엇… 때문에… 후우… 여기까지 왔는지… 쿨럭… 알고 있지 않 나……. 막을 생각을… 하기보다는… 헉… 도울 생각이나… 쿨럭… 하 게……." 나를 보던 트란체이스가 이 상황을 외면하기라도 하듯 고개를 적진으로 돌 렸다. 나도 함께 아래로 시선을 주어 상황을 살폈다. 예상대로 적진에는 그리 대단한 피해가 없어 보였다. 미처 실드의 힘이 미 치지 못한 일부가 화염의 돌풍에 조금 휩쓸렸을 따름으로 저것이 인시너레 이트로 인한 피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우와아아아아― 적이 환호했다. 하늘을 뒤집기라도 하듯 미친 듯이 기쁨의 함성을 올렸다. 그리고 그 울림이 미처 가시기도 전에 곧장 아군을 쓸어내려기 위해 추격 을 개시했다. 적진에 더 이상의 실드 시전은 없었다. 대신 삼 일간의 전투 중 단 한 번 도 보이지 않았던 마법 공격이 개시되었다. 모든 것이 예상대한 대로였다. "마지막… 쿨럭… 이로서 마지막이다……. 트란체이스… 헉… 바로 앉을 수 있게… 좀… 도와주겠나……." 트란체이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엉거주춤하게 앉아 있는 나를 도와 바 른 자세로 앉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마법서를 펴 꼬고 앉은 다리 위에 얹 었다. "흡, 후우……." 크게 두 번 심호흡을 했다. 불안정한 상태에서 하는 마법은 더욱 부담이 크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이를 악물고 감수할 만도 하건만, 자칫 마법 시 전이 실패로 돌아갈 가능성마저 있다. 수많은 자들의 오랜 노력을 수포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그만 끝을 맺자……." 아무도 듣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작게 말했다. 캐스팅이 시작되었다. "무례한 자들! 언제까지고 나의 수호룡께서 네놈들의 만행을 지켜보아 주 실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그때였다. 카류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복잡하게 캐스팅하며 마나 를 움직이는 중에도, 애써 목을 돋우어 어울리지 않는 위엄을 보이려는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어리석은 눈으로 보아라! 그 미력한 몸으로 느껴라! 나 카류리드는 드래곤의 뜻에 힘입어 이 나라의 정점에 선 유일무이한 왕이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될 것이다. 내 소중한 그 아이가 바로 이 나라의 왕이 되리라. 수식의 계산이 끝나 고개를 들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후의 마법 이다. 작은 실수라도 않기 위해 인시너레이트를 떨어뜨릴 지역을 정확히 선정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사실 인시너레이트가 매직 애로우처럼 세심한 컨트롤이 가능한, 그런 종류 의 마법은 아니다. 하지만 평소에도 그랬던 것처럼 최소한의 조정은 가능 하리라 믿으며, 나는 마지막까지 인시너레이트의 생성을 막은 채로 꿈틀거 리는 마나를 붙들었다. 어디인가? 좀 더 크게! 좀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는 곳은!! 얼핏 어떤 깃발이 보았다. 그리고 그 깃발 아래의 누군가를 보았다. 평소라 면 결코 발견하지 못할 먼 거리였음에도 나는 어째서인지 정확하게 그를 찾아내고 말았다. "아아……!" 갑자기 공기가 뜨거워졌다. 곧장 보이는 깃발 위로 인시너레이트가 완성되 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아니, 막지 않았다. 다름 아닌 바로 내가 그 깃발의 위에, 그 녀석의 머리 위에 거대한 불덩이가 떨 어져 내리도록 만들었다. "하르몬……!!" 쿠우우우우우― 그 어느 때보다도 화염의 폭발이 장엄하였다. 미친 듯이 날뛰는 심장과 손 발은 이미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듯한데, 어째서 저 광경을 바라보는 이 눈과 귀는 멀쩡히 남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우욱!" 갑작스레 울컥 목구멍 끝까지 피가 몰려왔다. 미처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 고 그대로 핏덩이를 토해내고 말았다. 무릎에 얹어두고 있던 내 마법서가 그대로 핏물에 범벅이 되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자 이번만큼 은 엉망이 된 내 몸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우악! 마법서가!!" 그때 누군가가 내 무릎의 마법서를 빼내어 채갔다. 트란체이스였다. "쿨럭……!" 한번 더 피가 물려와 앞으로 꼬꾸라지며 피를 토했다. 그제야 내 마법서에 먼저 걱정을 보였던 트란체이스가 몸을 부축했다. "앗! 아… 아르디예프님! 앗… 저……!!" "쿨럭… 됐… 네……." 잔뜩 당황하고 있는 트란체이스에게 아주 조금이었지만 고개를 저어주었 다. 사실 나도 내 마법서가 제일 먼저 걱정이 되었으니 그에게 뭐라고 할 입장은 못 되었다. 원래 마법사란 다 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특히 고위 마 법사였던 자의 마법서는 웬만한 아티펙트에 버금가는 물건이니……. 아아!! 이미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상황… 쿨럭… 어… 떤… 가……." "어, 엄청납니다! 이건 상상 이상입니다! 보세요! 딱 적의 수뇌부 쪽에 인 시너레이트가 떨어졌습니다! 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갈팡질팡하고 있다 구요!!" "하… 르몬… 까지……." 얼굴을 오만상 찌푸려 겨우 웃었다. "모… 쿨럭… 모조리… 죽었… 겠… 지……?"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사실 별로 듣고 싶지도 않았다. 나라는 인간도 참으로 우습다. 무엇을 그리 놀라는가. 어째서 그렇게 비통 해하는가. 어차피 결과는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손자같이 귀여운 그 작은 아이가, 카류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카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카류의 적이라면 선악의 유무를 가지지 않고 그 어떤 존재 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보다 카류가 소중했으니 상대가 오래 아끼 었던 제자 하르몬이라 할지라도 서로의 이해가 상충된다면 언제고 이렇게 해주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뜨겁게 붉었던 하늘은 어느새 티끌도 없이 짙푸른 색으로 되돌아가 있었 다. 그 색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지친 몸의 요구에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암흑의 세상은 의외로 편안하였 다. "병사들이여! 아군의 진정한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 가라! 나아가 나와 나의 수호룡의 앞에 너희들의 충성을 보여라!!" 카류가 높이 팔을 들어 소리치자 계속된 후퇴에 잔뜩 기가 죽어 있던 병사 들이 홀리기라도 한 듯 환호했다. 눈앞에 보이는 붉은색의 폭발 현장은 실 로 두려웠지만, 정반대로 아주 황홀하다. 그것은 우리들을 도와 적을 친 위 대한 드래곤의 힘이지 않은가! "딜트라엘님!" "좋아! 우리도 추격한다! 혼란에 빠진 적을 잡아라!" 명령이 떨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 내 부대는 그 즉시 적을 쫓았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한 채 맨몸으로 8서클 마법을 맞받은 적은 피해를 받은 부분이 커다란 공백으로 남아 진영이 반으로 나뉘다시피 했다. 게다 가 적의 수뇌 계통을 정확히 마비시킨 것으로 보이니 이보다 더욱 좋은 기 회는 없었다. 앞장서 달려나온 내 부대가 제대로 진형도 갖추지 못하고 도망치는 적의 꽁무니까지 따라잡았다. 조무래기들의 목을 계속 쳐내며 이대로 앞으로 달 려나가 공터가 생긴 부분까지 진영을 꿰뚫을까 생각하던 차였다. "아!?" 문득 시선이 한쪽에서 멈추었다. 분산되어 도망치고 있는 여러 적들 중 눈 에 익은 자들의 뒷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으로 믿기지 않는 쾌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내가 찾아낸 것은 가까 운 곳에서 아버지를 직접 호위하는 정예의 기사들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 지만 해도 트로이 후작가의 후계자였기에 아버지의 호위기사라면 하나에서 열까지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랬기에 나만이 일견은 다른 무리와 다를 바 가 없어 보이는 그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가 있었다. 아니,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들을 찾아내었을 것이다. 몇 번이나 되 씹어왔던가. 꿈에서도 잊지 않았다. 바로 그,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일을!! 그러한데 내가 아니면 또 누가 그를 찾아낸다는 말인가!! 입술 한쪽을 위로 잡아당겨 소리없이 웃었다. 드디어 그토록 염원하던 일 을 내 손으로 이루어낼 순간이 왔다. "저쪽으로 간다!" "예? 왜 갑자기……." "에스문드 백작과 같은 실수는 않을 테니 잔말 말고 따라와!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부관이 갑작스레 방향을 비튼 나를 보고 당황했다. 하지만 내 마지막 말에 무언가 생각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그 어느 때보다도 내 명에 발빠르게 응 했다. 제6왕자군에 가담하여 상당시간 함께 다녀왔지만 이런 일에선 꽤나 감이 좋은 놈이다. "멈춰라! 트로이 후작!!"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그들을 따라잡았을 때 내가 크게 소리쳤다. 급히 후 퇴하던 적들 중 몇 명이 흠칫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아버지의 정예 기사들 중 내 목소리를 모르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이 한마디로도 그들 대부분이 추격해 오는 자가 나라는 것을 단숨에 알아챘으리라. "몰아세워라! 트로이 후작은 반드시 우리가 잡아들여야 한다!" 부관이 갑자기 소리쳤다. 우리가 추격하는 존재가 트로이 후작이라는 것을 알아챈 순간 그의 눈에 불이 번쩍 들어왔다. 트로이 후작이 누구인가! 현재 아예즈 공작―하르몬―과 함께 국왕군의 실제적인 총사령관이 아니던가! 그를 사로잡거나 죽일 수 있다면 출세는 잡아놓은 당상이었다. 의욕에 불 타는 것은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 비웃음을 떼어낼 수가 없어 여전히 입술 끝을 올린 채로 소리쳤다. "간다!" 필사의 추격전이 펼쳐졌다. 그러나 신이 나 힘껏 달리는 우리들과는 반대 로 적은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초조하게 말을 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생쥐라도 된 듯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유쾌하다! 이렇게 유쾌할 수가!! 도망쳐라! 계속 도망쳐 봐라! 그러나 무력 한 생쥐는 결국 이 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열광하는 추격자들의 앞에 그들은 점차 힘이 부족함을 느끼는 듯했다. 몇 명의 기사들이 그 자리에서 멈춰 말머리를 돌렸다. 아버지를 위해 시간을 끌겠다는 속셈이다. "하하하! 우습군!" 검을 들었다. 내겐 일이 터지기 전에도 충분히 그들과 일 대 일로 겨룰 수 있을 만한 실력이 있었다. 게다가 이 이년, 전장을 통해 실전을 겪으며 훨 씬 더 강해져 있었다! 그랬다. 우스웠다. 생쥐들의 마지막 발악이 너무나 가소로웠다. 카앙! 강하게 타격음이 지나갔다. 정면에 있던 한 명의 기사를 말 아래로 떨어뜨 리며 그대로 앞으로 내달렸다. 뒤쪽으로 내 기사들이 나머지 적 기사들을 처치해 버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미 수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무엇이 망설일 게 있으랴! 몇 번 정도 하찮은 생쥐의 발악을 마주해야 했으나 트로이 후작의 뒤꽁무 니를 보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법의 여파에 그을려 엉망인 아버지를 보는 일은 뒷모습만으로도 전율 그 자체였다. "언제까지 도망치기만 할 셈인가! 트로이 후작!" "…딜트라엘!" 고개를 조금 돌려 내 이름을 부르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여전히 엄하였 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목소리 하나에 움츠러들고 또 반대로 기뻐하 는 5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말을 달려 아버지의 바로 직전까지 따라잡았다. 그의 호위기사들은 이미 나와 내 주변 기사들에 의해 거의 정리된 후였다. 검을 들어 그에게로 휘 둘렀다. "큭!" 말머리를 돌리려던 그가 스쳐 나가며 내 검을 피했다. 그러나 별로 아쉽지 는 않았다. 그렇게 쉽사리 한 번만에 나가떨어져서야 오히려 그의 앞에서 쩔쩔 매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여흥은 이것으로 끝을 내지!" 검을 들어 달리고 있는 말을 향해 강하게 내려그었다. 미처 피하고 크게 상처를 입은 말이 전속력으로 달리던 가속도를 견디지 못하고 아버지를 태 운 채 그대로 앞쪽으로 나동그라졌다. 그제야 나와 우리 부대는 말의 속도 를 줄였다. "잡았다! 트로이 후작을!!" 어떤 기사가 땅에 꼬꾸라진 그를 보며 경망스럽게 환호했다. 그러나 조금 생각이 있는 자들은 일단 상태를 지켜보기만 했다. 내가 트로이 후작의 아 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최소한 이 자리의 정예 기사들 사이에서는 드 무니까. 말과 함께 나동그라진 것치고는 상처가 적었는지 아버지가 끙끙거리며 깔 린 말의 아래서 빠져나왔다. 나는 천천히 바로 그의 앞까지 말을 몰아 검 으로 그를 겨누었다. 땅에 엎드린 그가 고개를 들었다. 오른쪽 얼굴이 땅바닥에 심하게 긁혀 있 었다. "…네 손으로 아비를 죽일 셈이냐?" 순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실소가 터졌다. 심장은 격하게 방망이질 치고 손과 발끝은 짜릿짜릿하게 달아올랐다. "하하, 누가 먼저 혈육의 피를 탐하였던가. 당신은 진정 그 가슴에 손을 얹어 한점 부끄럼이 없었나?" "없다고는 않겠다. 그저 네가 그 손으로 직접 나를 죽이는 것이 가능하겠 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뭐라고?" 내가 미간을 좁히고 되묻는 사이 아버지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리고 자리에 다리를 꼬아 바로 앉았다. "쳐라." 무엇 하나 두려울 것이 없다는 당당한 그의 태도에 얼굴 근육이 꿈틀했다.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날려 버리고픈 욕망이 용솟음쳤다. "아니, 죽이지 않는다." 검을 내렸다. 이대로 죽이지는 않겠다. 일선에서 물러섰다고는 하나 아버지 도 무인이다. 저런 자를 전장에서 죽게 해준대서야 너무 사치스럽지 않은 가! 더러운 감옥에서 낱낱이 그 죄를 물어 직접 그 뻔뻔한 얼굴에 침을 뱉 어주겠다. 그리고 모든 이가 보는 앞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하게 하겠다. "트로이 후작을 포박하라! 그를 끌고 본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나머지 는 모든 병사들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쳐라! 트로이 후작은 이미 아군의 손에 생포당했노라고!!" 내 말에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조금 들떠 보이는 기사들의 가운데서 나만이 차갑게 가라앉은 채였다. 하늘이 푸르렀다. "하르몬님!" 전방에 엄청난 폭발을 보던 세스케인이 신음성처럼 말했다. 인시너레이트 가 바로 하르몬의 위에서 작열한 것이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돼." 나도 얼이 빠졌다. 더 이상 8서클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렇 지 않다면 정말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것인가? 아니면 류스밀리온이 이렇게 나 많은 8서클 마법을 혼자 터뜨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마법사였다는 것인가? 만약 이게 류스밀리온의 짓이라면 바로 그가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수긍하고 말겠다. 기사와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마법이 하르몬, 아예즈 공작을 비롯한 각계 고위 귀족들이 몰린 2진의 중앙, 수뇌부에 떨어졌다는 것은 아주 큰 타격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는 트로이 후작도 마 법에 휩쓸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지도 계층을 잃은 선두진영은 이미 혼란 에 휩싸인 채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치고 있었다. 조금 뒤에서 추격을 하 고 있던 우리들 3진은 그리 큰 피해를 받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패배 주의에 짙게 물들게 하기 충분했다. 그때 갑작스레 세스케인이 고개를 돌려 크게 소리쳤다. "적의 허튼 말에 동요할 것 없다! 이는 드래곤이 아니라 아르디예프님이 생존해 계셨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보 수집의 미숙함으로 뼈아픈 실책을 거두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기회가 있다! 아군에겐 여전히 8만의 군마가 버 티고 있지 않은가! 후퇴한다! 그리고 전열을 가다듬어 다시 한 번 기회를 노린다!" 웅성거리던 기사들의 말이 일순 멈추었다. 이제 완전히 끝이라는 분위기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세스케인의 말은 옳다. 아르디예프님의 생존이 사실인 지 아닌지는 모르나, 어쨌든 아군이 전멸당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 세스케인이 살아 있었다. 지금껏 수많은 공을 세워 아군을 끌어온 그 이니, 세스케인이 있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모든 병사들이 그렇게 생 각하는 것 같았다. "후퇴한다! 전군은 북쪽으로 후퇴하라!" "기회는 아직 있다! 빨리 움직여!" 후퇴는 재빠르게 시작되었다. 선두진영의 꼴불견에 비한다면 세스케인이 지휘하는 3진으로부터 그 후방진영은 착실히 진형을 갖추고 있었다. 한방 먹고 말았지만 이 상태를 보면 세스케인의 열혈 추종자가 아니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남았다고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두두두―. "벌써 적의 추격인가." 입을 비죽이며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세스케인은 처음 아군이 유리 할 때 적을 추격하느라 3진의 최전방까지 나와 있었다. 때문에 상황이 역 전되어 후퇴를 하게 되자 물어서는 진영의 가장 끝에 붙은 꼴이 되었다. 적의 추격이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칼침을 받을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기병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조금 놀랐다. 경장을 한 병사가 말 위에서 활을 겨누고 있지 않은가. "야만족!" 들어 알고 있다. 제6왕자군과 손을 잡은 해룡족의 부대에 아군이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그들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기동력. 핑― "우왁!" 야만족의 화살에 맞은 말이 난동을 부려 한 기사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몇몇의 기사가 점점 그렇게 떨어져 나가자 초조해져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유넨, 말을 모는 데만 정신을 집중해!" 제길, 이런 상황에서 그게 그렇게 간단히 되냐? 일단 수긍의 표시로 고개 를 끄덕였지만 나는 금세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해룡 족은 말에게 어디 특별한 풀이라도 먹이는 건지 어느새 벌어져 있던 거리가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때 적들 중 가장 앞서 달리던 어떤 자가 활시위를 당겼다. 왜인지 알 수 그 표적을 있었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저놈이 누구를 노리는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 군의 총사령관인……! "세스케인님! 위험……!!" 내 말에 힐끔 뒤쪽으로 시선을 주며 세스케인이 방향을 바꾸었다. 다행히 활은 그를 비껴나갔다. 그러나 나는 금세 전혀 다행스럽지 못한 상황에 직 면했다. "거짓말… 이겠지……." 허리가 뜨끔했다. 그 주변에 꽂힌 화살을 보자니 아픔보다는 어이없음이 더욱 컸다. 세스케인 걱정을 해주다가 정작 내게 오는 화살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내가 그리 마술(馬術)에 능숙한 것은 아니니 이 화살을 피할 수 있었을지 없었을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그래도 세스케인 따위 신경 끄고 내 자신만 살폈다면 약간 비켜 가는 정도로 끝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 는데. 비틀― 겨우 이까짓 막대기 하나 뱃가죽에 박힌 정도로도 더 이상 말 위에서 균형 을 잡을 수가 없었다. 한 박자 조금 늦게 내가 활에 맞은 것을 본 세스케 인이 소리쳤다. "유넨!" "세… 세스케… 컥……!" 또 한 개의 화살이 정확히 어깨에 박혔다. 그와 함께 몸이 허공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안 돼! 유넨!!" 말에서 곤두박질치는 나를 뒤돌아보며 세스케인이 소리쳤다. 금방이라도 나를 위해 그 자리에 멈출 기세였다. 그때 곁에 함께하던 기사가 동시에 소리쳤다. "세스케인님! 당신만이 아군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제발 피해주십시오!!" 왼쪽 어깨부터 땅에 처박혔다. 순간적인 충격이 얼마나 큰지 비명도 지르 지 못했다. 하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그리고 세스케인이 이를 악물고서는 그대로 도망쳐 버리는 모습을 보았다. 두두두― "크왁!" 금방 뒤따라붙던 야만족의 궁기병대가 내 위를 덮쳐 왔다. 본능적으로 웅 크려 머리를 감싸려 했지만 무언가가―아마 적의 말발굽이겠지―내 팔을 짓이기고 지나가는 바람에 비명만을 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 위를 지나치는 말들의 발자국이 멈추기까지 천 년 의 시간이라도 흐른 것 같았다. 이것도 천운인지 큰 일은 없었으나 아주 약간이나마 여유가 돌아오자 말에 짓밟힌 왼쪽 팔과 화살을 맞은 두 곳이 견딜 수 없이 아파왔다. 나는 몸을 웅크려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며 잠시 그 고통을 삼켰다. 하지만 곧 눈을 뜨고 몸을 추스렸다. 화살을 맞았다지만 급소는 아닌 것 같았다. 다리는 멀쩡하니 아직 걸을 수도 있다. 후발 추격 부대가 오기 전 에 도망칠 수 있다! "일단… 저… 쪽으로……." 억지로 몸을 반쯤 일으켜 오른 편의 수풀로 향했다. 대략 500미터쯤 되는 그 거리가 이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냥 두 발로 뛰기가 힘들자 손 까지 놀려 최대한 빨리 움직이려 애썼다. 다른 적이 당도 때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확인 사살을 당하거나 최악의 경우 생포되었을 때 카류 왕자의 손에 서 곱게 죽지 못할 수도 있다. 빨리… 좀 더 빨리! 돌아가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세스케인 놈이 있는 본진으로! "빌어먹을……." 수풀이 가까워오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아마 세스케인 놈은 이렇게 생 각하겠지? 자신을 위해 내가 목숨을 던졌을 거라고 말이다! 그 충심 어린 마음을 내 결코 잊지 않겠노라고, 그 따위 같잖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지!? "빌어먹을… 빌어먹을……!!" 두두두……. 땅울림이 시작됐다. 후발 추격 부대였다. 아직 수풀 안쪽 깊이 숨어들지 못 한 상태라 깜짝 놀랐다. 하지만 거의 수풀에 가까운 장소였기에 못 보고 지나칠 수도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다급히 안쪽으로 뛰어가고 있을 때였다. "저기 웬 놈이 도망친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바로 이런 것일 거다. 어리석은 짓인 줄 알 면서도 그 자리에 쩡 하고 얼어 붙어버렸다. "패잔병 한 마리 따윈 그냥 내버려 둬!" 천상의 소리인가!? 그 걸걸하고 굵은 목소리가 감미로운 음유 시인의 목소 리보다 더 고왔다. 하지만 처음 소리 질렀던 놈이 다시 소리쳤다. "저거 마법사라고!" "뭐야? 그럼 얼른 잡아들여야지!! 너희들이 쫓아가서 생포해!!" 빌어먹을! 무겁더라도 최소한 일반 병사들 만큼은 무장을 할 것을! 이를 악물고 단 하나 움직이는 오른팔로 수풀을 뒤져 가며 도망쳤다. 하지 만 고함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머리는 이미 마비된 듯했다. 그저 앞만 보고 생각도 없이 뛰기만 했다. 조금 더 가자 경사와 수풀이 심해졌다. 말을 타고는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마법사님! 그냥 얌전히 잡히십쇼!" "그 몸으로 우리들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포기하고 투항 하십시오!!" 어느새 말에서 내려 뛰어오는 자들의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하지만 한마 디 대꾸도 없이 나는 뛰기만 했다. 사실 말을 할 힘도 없었다. 팔 한쪽은 힘없이 덜렁이는 데다가 몸뚱이엔 활이 두 개 박혀 있었다. 그런데도 내가 무슨 힘으로 이렇게 내달리고 있는지도 정말 의심스러웠다. 그저 이것만이 내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주었다. 저들이 완전 무장을 한 채라 나무가 우거진 수풀 길을 뛰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 말이 다. "거기 서요! 헉… 마법사는… 웬만하면… 안 죽인단 말이야!!" 어떤 미친놈이 헐떡이며 하는 말에 버럭 소리 질러 가르쳐 주고 싶었다. 내가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카류 왕자의 반역 사실을 조기에 폭로한 장본인이 바로 내가 아닌가? 팍―! "우와악!!" 막 오른손으로 수풀을 제칠 때였다. 쉽게 걷어냈다고 생각한 나뭇가지가 다시 제자리로 원상복귀하며 허리에 박힌 화살대를 세게 치고 지나갔다. 어찌나 고통스럽던지 나는 그대로 땅에 머리를 박고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배를 양팔로 꼭 붙들고 이를 악 물었다. 이때만은 고통이 온몸을 지배해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마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자! 헉! 겨우 잡았다……." 바로 근처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내가 지금 어떤 상황 에 처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으와, 이 몸으로 잘도 여기까지… 왜 이렇게까지 도망친 거지?" "으, 이 집념… 정말 마법사 맞아?" "정말이야, 게다가 너무 젊잖아?" 나를 쫓던 자들 중 두 명의 병사가 먼저 도착했다. 그리고 내 꼴을 보고 먼저 저희들끼리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이야기가 계속 지속되기를 바랬다. 그래야 내가 보다 똑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테니. "마법사님, 포로가 되셔도 마법사인 당신께 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걱 정 놓으십쇼." 마법사인지 아닌지 여전히 의심하면서도 한 병사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흙바닥에 한쪽으로 누워 있던 나는 힐끔 그의 얼굴을 쏘아보았 다. 퍼걱― 조금은 생소한 소음이 울렸다. 후두둑 뜨거운 물방울 같은 것이 튀었다. 매 직 애로우에 얼굴이 박살나 버린 병사의 피였다. "으… 으아악! 네, 네놈! 죽어!!" 나머지 한 병사가 그 모습을 보고 자지러졌다가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 검을 미처 내려찍기도 전에 심장 근처부터 어깨까지 반 쯤 패인 구멍이 뚫린 채로 뒤로 꼬꾸라져 버렸다. "헉! 크윽……." 찰나에 마법을 두 번 쓰고 나자 온몸이 이리저리 비틀어지며 요동 쳤다. 방금 쓴 마법은 1서클에 불과했지만 중상을 입은 몸에 마법을 쓰다 보니 그 여파가 평소의 수십 배는 되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나무 기둥에 몸 을 기대앉아 똑바로 앞을 보며 다시 한 번 매직 애로우를 시전할 준비를 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더 이상 도망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면 이놈들처럼 내 힘으로 직접 처치해 버리리라. 어차피 마법사 하나 잡으러 오는 것에 불과 하니 아무리 많아봤자 열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 편이 훨씬 살아 남을 가능성이 높다! 와라! 하나씩 죽여주마! "이게 웬 비명 소리……!?" 다른 놈들의 도착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내가 나무 기둥에 제대로 앉자마자 새로운 놈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난 결심한 대로 망설이지 않고 매직 애로우를 쏘아보냈다. 완벽하게 안면 중앙을 저격당한 병사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뒤로 나자빠졌다. "뭣?!" 조금의 쉴 틈도 주지 않고 새로운 놈이 나타나기에 내장이 다 뒤틀리는 것 도 참으며 또 한 번 매직 애로우를 날렸다. 그러나 이 남자는 무언가 심상 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으로 무언가가 번쩍이며 날아오자 날 렵하게 몸을 피했다. "크아아아아아악! 내 귀!" 물론 쉽게 그를 피하지는 못했다. 오른쪽 얼굴을 스쳐 귓가가 완전히 날아 가자 그 병사가 땅을 뒹굴며 시끄럽게 소리쳤다. 다급히 다시 한 번 그의 가슴에 마법을 날렸다. 고통에 겨워하던 병사는 단번에 즉사했다. "제길… 이런… 쿠헉!" 마법을 5번 연속으로 난사하고 나자 입 안에서 울컥 피가 몰려왔다. 특히 조금 전 나뭇가지에 부딪혀 비틀어졌던 화살대 덕에 허리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아직 몇이나 남아 있을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지쳐 버린 다면!! "……." 문득 주변이 고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혹시 이들 네 명이 추격자의 전부 였던가? 아니면 내가 공격을 한다는 것을 알고 피해 있는 것일까? 귀를 기울였다.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몸 상태 가 그리 좋지도 못했던 데다가 의외로 숲 속이란 시끄러운 곳으로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 같은 것이 내 정신을 심히 산만하게 만들었다. "……." 이를 악물고 소리에 집중한 지 상당 시간이 지났다. 확실히 알 수는 없었 지만 사람의 움직임으로 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 마법사 하 나 잡는 데 그렇게 많은 자들을 보냈을 리도 없으니 저 네 놈이 끝인 모양 이다. 사실 나 같은 자가 아니라면 이토록 필사적으로 도망을 칠 마법사도 드물지 않나. "풋." 피식 웃었다. 추격자가 없어졌다고는 하나 몸의 구석구석 경련이 일어나 어디 하나 안 아픈 곳이 없었음에도,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이 눈앞이 가물거리고 있었음에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내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불안정하지만 치료 마법인 힐을 시전할 수 있 다는 사실 말이다. 추격자만 없다면 일단 힐로 몸을 대강 치료한 후 조심 스레 본진으로 되돌아가면 되는 거다. "좋아… 마법서가……." 오른쪽 허리춤에 꽂아두었던 마법사를 꺼내기 위해 겉옷의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바로 그때였다. 파삭―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였다. 바로 나무 뒤쪽에서 나는 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작은 동물이거나 그냥 나뭇잎이 혼자 부서졌을 가능성도 있었지 만, 생사의 기로에서 그런 가능성까지 세심히 따져 가며 움직일 수는 없었 다. 나는 반사적으로 매직 애로우를 만들었고 그대로 그것을 뒤를 향해 날 렸다. 퍼걱― 하며 누군가가 마법에 명중된 소리가 났다. 어떤 병사가 뒤에서 나 를 노렸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놈… 죽어……!!" 쉭! 위기의 순간이기 때문이었는지 꼼짝도 못할 듯한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럼에도 그 썩을 놈이 내려친 검이 왼쪽 팔을 파고들었다. 다행히 그놈의 의도대로 목이 날라가진 않았으나 검이 어깨에 반이나 찍어 들어왔다. 너 무나 아프고 놀라 조금 전처럼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자세로 움찔하여 굳은 채로 있었다. 쿵―! 내게 검을 내려친 놈으로 추측되는 어떤 병사가 내 바로 옆으로 고꾸라졌 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이 다급하고 아픈 와중에서도 기가 막혔다. 아니, 죽 으려면 그냥 죽지 왜 날 이렇게 치고 죽느냔 말이……!! 툭. "크아아악!!" 팔에 불안히 꽂혀 있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상처 입은 부 위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끔찍한 고통에 생각을 하다 말고 크 게 비명을 질렀다. 온몸이 벌벌 떨려왔다. 내가 생각해도 이런 몸으로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니다! 이건 살아남으라는 신의 뜻인 거다!! 조금 전부터 품에 넣고 있던 손을 꿈지럭거려 겨우 마법서를 꺼냈다. 이렇 게 아픈데도 마법서가 손에 닿자 짜릿한 희열이 느껴졌다. 힐, 힐만 시전할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나는 결코 죽지 않는다! 살 아남는 거다! 그러나 마법서를 땅에 내려놓은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허 리의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마법서의 일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던 탓 이다. 떨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힐의 수식이 담긴 페이지를 찾아 종이를 하 나둘 넘겨갔다. "…하……." 마법서에 얼굴을 엎드리듯 박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 리고 붉은색의 페이지를 보았다. 잉크에 번져 더러운 검붉은 색이었다. 조 금이라도 보여질까 싶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떨리는 손을 더듬었다. 그 러나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허리로 시선을 주었다. 화살이 부러져 있었다. 복부의 옷가지는 이미 바지 까지 붉은 피로 흥건히 젖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나 다급해서, 추적 자만 죽이면 끝이라고 생각해서 이런 상태도, 고통마저 잊고서 신들린 듯 움직였던 것이다. "거짓말이지……." 떨리는 손이 더욱 경련했다. "거짓말이잖… 카학!" 너무나 억울해서 크게 소리 지르려다가 피를 한 움큼 토해내었다. 그렇잖 아도 피에 젖어 있던 내 소중한 마법서가 완전히 핏덩이가 되어버렸다. 손으로 마법서를 더듬댔다. 그 고통스러운 와중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 이 왈칵 쏟아졌다. "허… 헉… 아냐… 난 죽지 않아……." 마법서에서 고개를 돌려 옆으로 기어나갔다. 의외로 멀쩡한 두 다리와 오 른쪽 팔을 움직여 계속 기어갔다. 본진으로, 북으로 가면 세스케인이 다시 군을 재정비하고 있을 거다. 세스케인이……. "빌어먹을―!!"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머리 속 뜨겁게 분노가 일었다. 하필 왜 그런 상황 이었지!? 왜 이런 식으로 위기가 닥쳐 온 거냐! 내가 마치 세스케인 놈을 위해 몸을 날리다가 이렇게 죽어가는 거 같잖아! 그놈, 세스케인 그놈. 안타까워하면서도 한편으로 흐뭇해하겠지? 오래 길러 온 개에게 열렬한 충성심을 확인받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 "죽지 않아……." 손발을 버르적거렸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아직 세스케인의 앞에서 내가 너 못지 않은 우수한 인간이라 외쳐 보지도 못했다. 언젠가 이 신의 재능으로 역사에 남을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 당당히 앞에 나타나 줄 예정이었단 말이다! "아직이다… 아직은 죽지 않아……." 그래, 재능… 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인가. 내 나이 스물여덟에 6서클 유저 란 말이다! 이게 어디 천 년 안에라도 쉽게 있을 만한 일이냐! 멍청한 귀 족들이 제 아무리 폭언을 퍼붓는다 한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거 다!! 위대하신 아르디예프님께서도 나의 재능을 인정하셨지 않던가! 너는 천재라고! 너는 너무나 대단하다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나는 8서클 마법사가 돼. 귀족 작위는 물론이거니와 생명의 궁을 지배할 수도 있게 될 거야! 단지 그를 위해서 그 모든 치욕을 참고, 죽기를 각오하고 연구하지 않았나! 그래! 그랬다! 그랬었다!! "그랬는데……." 입속의 웅얼거림과 함께 손과 발이 멈추었다. 멍하니 앞을 보았다. 깊은 숲 의 어둠이 갑자기 검푸른 색으로 변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떠 올리도록 해주었다. "카류… 리드 왕자……." 그때도 그놈은 이렇게 갑작스레 나타났다. 그리고 귀여운 얼굴로 웃으며 이렇게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평민의 힘 따윈 하질 것 없다고. 결코 자신들을 뛰어넘을 수 없을 것이라고 그 뛰어난 머리와 그 경이로운 재능으로 내게 말했다. 하, 우습게도 그것은 틀리지 않았다. 뒤늦게 재회한 세스케인은 나 따윈 닿지도 못할 재능을 가지고 서 있었다. 비굴하게 헐벗고 까치발을 해서 밤낮으로 따라잡아도 어느새 저만치 올라 섰다. 그 어떤 노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세스케인을 압도하여 당당히 서는 것. 또는 세스케인과 대등하게 서는 것. 그것이 그리도 허망한 소망이었단 말인가?! "아!" 때에 맞지 않게 작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래서 카류리드 왕자가 싫었다. 그래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질투했다. 이미 나는 소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라 는 인간은 진실로 하잘 것 없는 존재가 아닐까? 이 손으로 세스케인이나 그런 귀족들과 같은 자리에 서는 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럴 리 없다고 곱씹으면서도 실은 몇 번이나 그렇게 묻고 있었던 거다. 그때 이 비천한 존재와는 비교도 되지 못할 고귀한 왕자님께서 친히 왕림 하시어 말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고! 직접 그렇게 말하진 않았으되 그 왕 자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것을 각인시켜 준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는 이미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사실을 부정 하고만 싶었다. 추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뛰어난 카 류 왕자의 존재를 말살하려고만 했다. "안 돼……." 손발이 차가워지기에 멈추었던 팔다리를 다시금 더듬거렸다. 내 본능이 죽 음의 전조라는 것을 알린 것이다. "죽고 싶지 않아." "이대로는 죽을 수 없단 말이야!!" 문득, 하늘이 잿빛이다. 흙바닥 역시 잿빛이다. 눈앞이 모두 잿빛이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자 보이지 않는 눈에 왈칵 물기가 서렸다. "그저……."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그저 인간이 되보고 싶었을 뿐인데……." 멀게만 느껴지는 목소리라 무슨 말이 흘러나오는지도 확실치 않았다. 그럼 에도 왠지… 아주 많이 서러웠다. 어느덧 서러움마저 묻어버리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2 결전 (2) 전방이 먼지로 자욱했다. 이틀 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해 입안이 씁쓸했지만 나는 씨익 미소했다. “죽이는 타이밍이군!” “예, 에르가님. 역시 아르디예프님이 계신 곳을 기점으로 삼은 것 은 바른 판단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트의 쫑알쫑알 잔소리도 그리 나쁘게만 들리진 않았다. 다른 기 사들도 이틀동안의 도주로 상당히 지쳤지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얼 굴에 생기가 돌았다. 기세를 몰아 추격했던 적군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아르디예프님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졌다. 적 진영은 마지막 마법공격을 기점으 로 반으로 갈라져 있다시피 했는데 뒤쪽의 부대는 이미 지휘계통 이 완전히 마비되었는지 군대라고 불러주기가 아까울 정도로 꼴사 납게 도망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 앞 서 후퇴하고 있는 부대는 상당히 일사분란하게 질서가 지켜져 있 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한번 뜨거운 것을 떨어뜨려 줄 필요성이 있겠지.” 가만히 시선을 내려 상황을 살폈다. 본진과 떨어져 수풀 사이에 숨어들어 있는 나의 부대는 이천이 좀 안 되는 기병들로 이루어져 있다. 비록 정예이긴 하되, 수가 부족한 만큼 결정적인 기회를 잡 을 필요가 있었다. 신중해야 한다. 실수는 용납 받지 못한다. 아니, 이번 일로 지난번 의 실수까지 전부 만회해 보이겠다. 우리들의 앞으로 적군이 계속 지나쳐갔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 자 기사들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 아닌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 했다. 순간 아득히 멀리서 눈에 익은 깃발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 다. “간다! 지금이다!” “적의 퇴로를 끊는다. 전방의 후르부크가의 대장기를 목표로 돌진 한다!” 번쩍 손을 들어 그 깃발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 짧은 말을 이트 가 알아서 해석하여 소리쳐 주었다. 이천의 기사단이 앞으로 돌진해나갔다. 한참 후퇴를 하고 있던 적 들은 아군의 출현에 깜짝 놀라 그 자리에서 후퇴를 멈추거나 옆으 로 튀어나가 진영을 흐트러뜨렸다. “쳐라!” 가장 선두에서 적들을 쳐내가며 돌진했다. 평소보다 배는 손에 힘 이 들어가 있었다. “히이익!” 돌진하는 말의 기세에 놀라 한 병사가 팔로 머리를 가렸다. 그러 나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 말을 계속 몰며 검으로 가슴과 목의 사이를 쳐올렸다. 잘려나간 목이 하늘로 크게 튀어 올랐다. “빌어먹을... 세미르......!!” 잘려진 목은 잊고 싶은 기억을 되살려 놓는다. 그리고 반드시 해 야 할 일을 재차 다짐시킨다. 이를 바득 갈고 앞을 바라보았다. 점점 후르부크가의 대장기가 가 까워져 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기사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 다. 며칠 전 세스케인을 칠 때 그 주변에서 호위를 한답시고 얼쩡 거리고 있는 것을 눈대중으로 보았던 놈들이다. “이번에는 그냥 끝나지 않는다. 세스케인!!” 조무래기들 때문에 시간을 빼앗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기사들이 속력을 더해 앞으로 나왔다. “에르가 님! 여기는 저희들에게 맡기시고 마음껏 휘저어버리십쇼!” 클레이 놈이 이런 상황에서도 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그딴 소릴 지껄였다. 이트를 비롯해서 기사단의 놈들이 점점 기어오르고 있 음을 느껴지는 것은 내 착각인가? “하지만 사양하지 않지!” 수치스러운 실수를 저지른 상관을 불평 한마디 없이 끝까지 따라 와 준 것은 저놈들이 아니면 못할 일이라고 본다. 그래서 고삐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고 말을 달렸다. 세스케인은 금세 볼 수 있었다. 왜냐하니, 그쪽에서 먼저 나를 찾 아왔기 때문이다. “네놈도 한번 죽어봐라!” 여전히 깨끗한 그 면상을 보자마자 버럭 소리 질렀다. 세스케인은 대꾸하지 않고 상체를 조금 숙여 앞으로 달려왔다. 얼굴은 완전히 굳어버린 듯 무표정이었다. 나 역시 마음을 가라앉히기로 했다. 아래로 내려진 듯 늘어뜨려져 있는 검 끝에 신경을 집중했다. -캉! 검이 맞부딪히는 순간 강렬한 충격이 팔로 찌릿하게 전해져왔다. 자칫 검을 떨어뜨릴 것 같은 고통을 겨우 참았다. 전력으로 질주 하면서도 놈은 물론 나까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으니. “엣!?” 그러나 검을 한번 마주하고 조금 떨어진 후 말머리를 돌리는 순간 멀찍이 도망가는 세스케인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황 당했는지. 며칠 전, 일기토에서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 척 하다가 도망치던 내 뒷모습에서 세스케인이 느꼈을 그 허무감을 나도 느 낄 수 있었다. “도망가는 거냐! 겁쟁이 놈! 서라!” 물론 겁쟁이라 도망가는 게 아니라는 것, 나도 안다. 어쨌거나 세 스케인은 최후까지 살아남아 군을 이끌어야 할 놈인 거다. 한순간 의 수치를 참음으로서 더 큰 것을 생각해야 하는 직위였다. 다행히 세스케인은 필사적으로 막아선 내 기사들의 저지선에서 멈 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3명을 상대로도 세스케인은 전혀 밀리 는 구석이 없었다. 오히려 우리 기사들 측이 삼대 일로 싸워 낙마 하는 꼴사나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네놈들은 다른 떨거지들이나 상대해!!” 내가 소리 지르자 낙마하지 않은 두 기사들은 알았다는 듯 세스케 인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금방 달려드는 적군 측의 기사를 상대 했다. 세스케인도 곧장 고삐를 꺾어 내 쪽을 향했다. 퇴로를 막힌 이상 대장급인 나를 꺾어 길을 만들겠다는 속셈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될 성 싶으냐!?” 전력으로 질주해 들어오는 나를 본 세스케인이 검으로 막을 생각 인지 손에 힘을 바득 주고 있었다. 하지만 네놈이 제 아무리 날고 긴대도 결코 쉽사리 막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제자리에 서있는 놈에 비해 나는 달려가는 상태다. 기병에게 어마 어마한 파괴력을 주는 가장 큰 요인이 뭔지 아나? 바로 가속도로 붙은 힘이다! 내가 검을 치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몸을 약간 앞으로 하며 검 으로 막는 척 하던 놈이 몸을 순간 퉁기며 크게 뒤로 누었다. 내 검이 부우웅- 하며 세스케인 놈의 몸통 바로 위를 지나 허공의 공 기만을 거세게 가르고 지나갔다. “제--기랄!!” 순간적으로 짜증이 나서 크게 소리쳤다. 고삐를 당겨 속도를 줄이 다가 다시 세스케인이 보이는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아예 말 뒤로 눕다시피 했던 세스케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마찬가지로 내 쪽으로 말을 돌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 갑옷을 입고 잘도 저런 움직임을! “우와으, 역시 세스케인......” “시끄럿!!!!” 주변의 누군가가 중얼거리기에 지나치는 길에 버럭 소리 질러주었 다. 그리고 지체 않고 곧장 앞으로 말을 몰아나갔다. 갑옷의 무게 로 완전히 자세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내가 먼저 팔과 어깨 사이의 갑옷 틈을 노리고 찌르기를 시도했 다. 세스케인도 다급히 검을 들었다. 한 박자 늦었지만 세스케인의 특기가 빠른 검격이었기에 먼저 공격한 나와 그의 방어는 거의 동 시에 이루어졌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한 상태라 일단 내 검을 막아내긴 했지만 금방 튕겨나고 말았다. 놈이 비틀한 상태를 놓치지 않고 또 한번 팔꿈 치 쪽의 갑옷 틈을 노렸다. “큭!” 제대로 맞았다!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찰나이지만 검 끝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검을 써야하는 오른팔을 당 했으니 이제부터의 우위는 내가 점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게 자신만만해 하는 순간이었다. 세스케인이 오른쪽에 쥔 검 을 왼손으로 빠르게 옮겨 쥐더니 그대로 나를 향해 질러왔다. 마 지막까지 설마하고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 움직임은 아주 정확했 다. “헉!” 왼쪽 어깨에 검 끝이 약간 박혀 들어갔다가 내가 몸을 비트는 순 간 튕겨지며 빠져나갔다. 가히 본능에 입각한 순간적인 움직임으 로 큰 상처를 피한 것이다. 그래도 아주 작은 상처는 아니었다. “야, 양손잡이?!” 왼손으로 다시 공격해 들어오는 놈을 보며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 다. 빠르다. 거기에 정확함까지, 오른손을 사용할 때와 전혀 차이 가 없었다. 양손을 연마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도! 파칵-! 검이 불통을 튀기며 금속음을 냈다. 나는 왼쪽 팔을, 놈은 오른쪽 팔을 다쳤으니 서로 같아진 셈이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도 왠지 내 쪽이 더 힘이 부침을 느꼈다. 익 숙하지 않은 왼손잡이를 상대하다보니 미묘하게 타이밍이 어긋나 고 마는 것이다. 몇 번이나 스치는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왼손잡이인 것도 어색한 데, 찌르는 척 하며 베기, 흘리는 척 하며 내려치기 등 그야말로 짜증을 울컥울컥 유발하는 식으로 공격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 면 세미르의 검술도 정말 짜증나는 타입이었지!!! “미숙한 녀석이 감은 좋군!”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던 세스케인이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야 몇 번이나 결정적인 공격했는데 내가 당할 듯 하면 서도 순간의 감각을 이용해 피해내고 마니 그쪽도 열이 받친 모양 이다. 아니, 다급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내가 당장에 놈을 이기지 못한다 해도, 단지 막아서고 있는 것만 으로 세스케인은 궁지에 몰리고 있다. 당연한 일 아닌가? 우리 본 진에 있는 자들이 전부 닭대가리가 아니라면 추격부대를 보냈을 것이다. 당장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세스케인이 자신 의 수많은 부하를 장애물로 남겨 희생시킨 결과이리라. 그러나 이 미 시간이 어느 정도 지체했으니 추격부대의 도착도 멀지는 않았 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나를 누르지 못하는 세스케인은 이제 마지 막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세미르 처럼 너 역시 내 검을 피할 생각이냐?” 세스케인이 고개를 조금 들어 내게 말했다. 그놈의 입에서 세미르 의 이름이 나오자 자신도 모르는 새에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 다. 그러나 침착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를 충동질하고자 하는 그의 술 수에 말려들 수는 없었다. 두 번이나 같은 수법에 말려들 것 같은 가!? “세미르는 어리석은 놈이었다.” 세미르를 모욕하지 않을까 싶었었지만,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의 얼굴은 차분했다. 입술 끝이라도 올리고 비웃지 않을까 싶었는 데... “그래, 어리석었지. 어찌나 어리석은지 애초에 나를 상대할 실력도 되지 않는 놈이 마지막 순간 내 앞에서 검을 내리기까지 하더군. 세미르의 목을 치는 일이 얼마나 쉬웠는지 가르쳐줄까? 마치 비루 먹은 노새의 목을 치는 것 같았다! 발악하는 카르틴 놈들의 목을 칠 때가 훨씬 더 어려웠다는 말이다!!” 세스케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갔다. 그것은 마지막에 크게 고 함을 지르기에 이르렀다. 견딜 수 없는 분노가 이상하게도 내게로 전해져 옴을 느꼈다. 세스케인과의 마상전으로 격해져 있었던 숨이 조금씩 더 차올라 온다. 내렸다고... 검을 놓았다고?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까 말까 한 상대 를 앞두고서!? “어째서?” 혼자 중얼거려 보았다. 어째서 일 거 같나? 그것을 모른다면 그놈 은 진짜 바보다! 세미르! 말해봐라! 세미르! 내가 어찌해야 하는지! 그 뻔뻔스런 입으로 이야기 해보란 말이 다!! “빌어먹을---!!”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그딴 거 알게 뭐냐! 내가 아는 건 세스케인 네놈이 세미르를 죽 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완전히 막무가내였다. 세스케인이 검을 옆으로 들었다가 비스듬히 내렸다. 갑옷의 틈이 정확하게 베여나간다. 내장까지 모조리 잘려나간 듯 고통이 속을 뒤집는다. 그러나 손에 준 힘을 빼지 않는다. 애초부터 막을 생각 도 하지 않던 검이었다. 그 정도 상처 따위에 놀랄쏘냐?! 키기긱 하며 내 검과 그의 갑옷 사이에서 금속음이 일어났다. 내 검은 갑옷을 긁으며 위로 올려갔다가 투구에 걸려 위로 크게 올려 졌다. 이제는 빛바랜 친구인 세미르의 것과 같은 청보라빛이 하늘 에 휘날렸다. “천국에 있을 세미르에게 가서 사과해!!” 몸을 돌리며 아예 검을 후려치다시피 휘둘렀다. 투구가 벗겨져 세 스케인의 표정이 훤히 허공에 드러났다. 내장이 터져 나올 정도로 뱃가죽이 잘려나갔는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내게 놀란 얼굴이다. 그것이 곧 귀 쪽에서부터 박혀 들어온 검에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대로 검을 놓치며 몇 발자국 떨어져갔다. 실은 목을 치려던 것 이었는데, 능숙하게 움직여지지 않아 얼굴에 박혀 버린 것이다. 세스케인이 어떻게 고삐를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의 흑마가 천 천히 이쪽으로 몸을 돌렸다. 괴기스럽게도 머리에 검을 박은 그가 나를 보며 입을 꿈뻑거렸다. “그렇다면... 나도... 천국에 간다는 건가.” “...그래... 천국에서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이를 악 물며 대답했다. 별로 의도하고 시작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해석된다면 좋은게 좋은 거겠지. 피식 웃음을 머금어 보인 세스케인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단지 주인의 마음을 너무 잘 아는 커다란 흑마가 푸르릉거리고 있 었다. 우아아-! 멀리서 함성소리가 들린다. 아군의 본진이 있는 뒤쪽이 아닌 앞쪽 에서 소리가 나서 놀라 고개를 드니 이미 도주했던 몇몇 부대가 오합지졸인 상태로 되돌아 달려오고 있었다. “세스케인님을 도와라!” “패륜아 졸개들의 마음대로 내버려둘 거 같으냐!!” 그래, 세스케인 놈이 원래 인망은 대단했지. 도망갔던 놈들까지 되 돌아오게 만들 정도로. 하지만 광분한 저들과는 달리 이미 주변의 적병들은 침묵 상태였 다. 세스케인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세스케인의 카리스마는 대단해서 그 어떤 막다른 곳에서도 병사들에게 포기하 지 않도록 힘을 주었지만, 반대로 그의 죽음은 낭떠러지 끝에서 밀려난 것과 같은 절망을 주었다. 말허리 뒤에 꽂혀있던 여분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흑마 위 에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는 세스케인에게로 다가갔다. 손에 힘을 주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도록. 퍼걱-! 바람과는 달리 허리의 상처가 심각한데다가 목주변의 보호대가 방 해가 되어 목이 제대로 잘려지지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주변의 눈치를 보다가 결국에 한 번 더 검을 쳐서 머리를 떼어냈다. 잔인하다고 말할 거냐, 세미르. 하지만 어쩌겠냐. 너희 형제들의 목은 하나같이 이용가치가 너무 높지 않아. “여기를 봐라! 네놈들의 그 세스케인은 이렇게 내 손에 죽음을 맞 이했다! 알겠느냐!? 세스케인은 죽었다! 바로 나 에르가 혼 에스문 드의 손에!!” 소리를 지를 때마다 피가 왈칵왈칵 쏟아졌다. 이미 정신은 아득해 져 있었다. 하지만 단 한마디로 떨지 않고 당당히 소리쳤다. 멋모 르고 소리 지르던 놈들이 하나씩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 멈추었 다. 어느덧 전장은 고요한 바람소리만이 남았다. 너무나 피곤해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물론 팔은 내리지 않았다. 적들이 세스케인의 목을 잘 봐야 하니까. “빌어먹을! 네놈들이 감히 세스케인님을!!” 분노하여 날뛰는 몇몇 병사와 그들을 막아서는 기사가 휘두르는 검소리가 귓가에 왱왱 울린다. 하지만 팔을 들고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숨을 골랐다. 아아, 뒤는 똘마니 놈들이 알아서 잘 해주겠지. 지금은 너무 피곤 해서 말이야. 핏내가 나는 공기가 마지막을 알리고 있었다. ============================================= 이 부분이 가히 두 달 동안 고심해서 쓴 글! ........................ㅡ ,. ㅡ;;;;; 실제로 마상전 비스그무리한 거 나오는 부분은 한 쪽도 채 안 된다죠? 바로 고 부분이 너무너무 안 써져서... 아니, 못 쓰겠어서 이토록 오랜 시간 을 끌었습니다. 에효에효, 어쨌든 대강 쓰고 넘어 갔습니다. ㅠㅠㅠㅠㅠ 말도 안 되는 개구라지만 우리 모두 그냥 넘어가 도록 하죠~? ^_^ / 아, 하지만 좀더 괜찮은 씬을 제시하여 수정에 도 움을 주실 분이라면 당연히 환영해드리고 사랑해 드립죠~ 그냥 “이런거 말도 안되요,” 이렇게 태 클만 거실 거라면 보내지 말아주세요. 분명히 신 경이 쓰여서 또 이 부분만 붙잡고 한 반년 끌 겁 니다. 엉엉엉.....ㅠㅠ;; 어쨌거나 이 부분 넘어갔으니까 이제부턴 빨리 지겠죠? 그렇겠죠? 그럴 겁니다~ 음하하하~ (뭘 믿고 이딴 소릴 쓰는 거냐? - _-;;;;;;;;;;;;;;) (뻔뻔하지만) 헤이~ 거기~ 리플 달고 가욥~ - _ -;; 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Part 62 결전 (3) 소란스러운 소리가 가득하다. 카이의 호위를 받으며 급히 세워진 천막 사이로 걸음을 옮기자니 병사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예를 올 렸다. 기쁘게 고개를 숙이는 병사들의 태도에 들뜬 분위기를 실감 했다. 아예즈 공작의 사망, 트로이 후작의 생포, 세스케인 혼 후르부크의 사망. 국왕군 주요수뇌부의 전멸로 인하여 이 전쟁은 사실상 아군의 승 리로 막을 내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직 수도와 왕성의 탈 환이라는 만만치 않은 과제가 남아있었으나 그 사실을 상기하고 있는 자는 최소한 이 주변에서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좌우로 갈라지는 병사들이 만든 길을 지나쳐 흰색의 막사 앞에 섰 다. 나보다 한발 앞서 이 안으로 들어가려던 노마법사가 지친 얼 굴을 소매로 닦으며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가 표정을 숨기듯 깊 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말을 않고 한참 막사의 입구를 쳐다보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 법사가 출입구로 사용되는 긴 천을 들어 길을 열어주었다. 둥근 모양의 내부 왼쪽 끝에 급조된 나무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 다. 그 주변으로 의원과 고위 마법사가 둘 더 있었는데 나를 발견 하고는 침대의 양끝으로 걸어가 머리를 조아렸다. 천천히 침대 맡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분을 내려다보았다. “아르 할아버지…….” 감겨 있던 할아버지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분이 고통스러워 보 이지는 않지만 힘없어 보이는 창백한 얼굴로 억지로 미소했다. “카류가 왔구나…….” 나도 억지 미소로 그 말에 답했다. 곁에 놓인 의자를 일부러 외면하고 바닥에 무릎을 끓고 앉았다. 그리고 팔과 얼굴을 침대 위에 걸치듯 올렸다. 사람들에게 보여주 기 곤란한 자세였지만 그냥 이렇게 있고 싶었다. 문득 시트 위에 올려진 할아버지의 손이 눈에 밟히기에 손으로 꼭 쥐었다. 그저 볼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맞잡게 되자 가늘게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네… 잘못이라고… 생각지는 말거라……. 쓸데… 없는 생각을… 마음 속에… 품고 살지 않아도 된다…….” 할아버지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 듯 조금씩 입을 열었다. 고위 마 법사들에게 여러 번 힐을 시전 받은 덕인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 만 숨이 차 오르는 덕에 간간이 끊겼다. 갑자기 콧등이 찡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작별 인사를 하리라 마음먹은 것이 크게 흔들렸다. 조금만 더 하면 정 말 목놓아 울어버릴 거 같아서 얼굴을 엉망으로 일그러뜨려 웃었 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에 왼쪽 뺨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정말 내 탓이 아니에요?” 할아버지의 빛 바랜 금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주름진 눈가가 피식 미소하는 덕에 더욱 깊게 골이 파였다. “아주… 아니라고 말하자면…후우… 너무… 거짓말인 티가 나겠 지.” “그렇다고요. 저도 생각이 있는데…….” 일부러 쿡쿡 웃고는 손에 뺨을 댄 채 가만히 있었다. 냉기가 전해 졌다. 언제나 따스했던 할아버지의 손은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웠 다. “큰 승리를… 거두었으니… 곧 왕성을… 점령하게 되겠구나.” “예, 실질적인 수뇌부가 죄다 목숨을 잃거나 생포 당했으니 저항 도 약할 거라고 봐요. 입성도 멀지 않았지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 표정이 일그러졌다. 왕궁에 있을 나의 형제들. 드디어 그들을 맞이할 때가 온 것이다. ‘열심히 하다보면 모든 일이 잘 해결될 날이 올 것이다.’ 딜티가 가장 처음 그렇게 말했고,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매일 웃어왔다. 하지만 진실로 그러한가? 아니, 애초부터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나는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이렇게 살아남았고,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 해나갈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틀렸다. 그 전에도 디트 경이 참혹하게 최후를 맞이했고 할아버지가 크게 지쳐 있었다. 이미 어찌 손 쓸 도리가 없는 일이 도처에 존재하고 있었다.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게 된 스스로를 뿌듯하게 여겼지만, 실은 아 픈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했던 것뿐이다. 디트경의 일도, 할아버지 의 일도,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에 대한 일도. “엇? 할아버지?” 갑자기 할아버지가 억지로 몸을 움직여 내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 렸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도우려 했지만 할아버지가 고개를 저 으며 움직임을 멈추는 바람에 다시 원래 자세로 쪼그려 앉았다. 비스듬한 자세에서 나를 바로 마주보던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했 다. “고의로… 한 일이든… 어쩔 수 없었던 일이든… 누군가를 다치게 했던… 네 과오는 모조리 잊으렴. 그리고… 딱 한번… 네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여 보렴. 괜찮아… 주위 상황 따윈 어떻게 되든 상관치 말고… 그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딱 한번이라면 이 내 가 용서해 주마.” 조금 멍하니 아르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할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오직 나만을 위한 오랜 걱정 끝에 나온 그 충고가 가슴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했다. “정말…이요? 그래도 돼요? 할아버지가 전부 책임 져줄 거예요?” 아랫입술을 악 물었다가 웃으면서 물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실 은 끔찍스러울 정도로 이기적인 진심이었다. “허허… 그렇다니까… 쿨럭쿨럭!” 할아버지가 피식 웃다가 거세게 기침을 했다. 순간적으로 다급함 을 느꼈다. 피를 토하는 등의 큰 움직임은 없는 단순한 기침이었 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두근 고동쳤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 물러나자 의원이 진맥을 하고 고위 마법사 두 명이 힐을 번갈아 가며 몇 번이나 시전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의 기침은 멈출 기색이 없었다. “카…쿨럭… 카류…….” “저, 저 여기 있어요.” 환생이니 뭐니 해도 역시 죽어 가는 사람을 눈앞에 두는 것은 굉 장히 싫은 느낌이었다. 그것도 오로지 나 때문에 죽어 가는 너무 나 사랑하는 사람! 보지 않는다면, 듣지 않는다면 훨씬 더 마음 편할 텐데. 여기서 도 망가 버린다면 세미르 때처럼 섭섭함과 안타까움 정도로 마지막을 고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다시 조금 전과 같은 자세로 무릎꿇고 앉아 아르 할아버지 의 오른손을 쥐었다. 이번에는 아주 꼬옥 쥐었다. 할아버지가 격한 기침 사이로 간헐적으로 말했다. “류…류온에게 전…쿨럭! 해… 쿨럭쿨럭… 말주변 없는… 쿨럭… 놈에게…쿨럭… 너무 야박하게 굴어서… 쿨럭, 미안하다고… 쿨럭 쿨럭.” “알겠어요. 꼭 전할게요, 걱정 말아요.” 할아버지의 얼굴 가까이로 고개를 기울이고 달래듯 말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남기려는 다급한 모습이 굉장히 애처로웠다. 그때 갑자기 아르 할아버지의 떨리는 왼손이 허공에 들어올려졌 다. 시선도 마찬가지로 허공의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 할아버지가 무언가 두려운 듯 몸을 뒤로 빼며 움찔거렸다. “하…하르몬… 쿨럭… 용서…해다오… 쿨럭… 나는… 쿨럭쿨럭… 나는……!!” 아르 할아버지가 보고 있던 곳에 시선을 주었다가 그 말을 듣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하르몬 선배를 부르짖으며 눈물을 쏟아내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바들바들 떨며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가 몇 번 이고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했다. 심장이 누군가의 손에 잡힌 듯 꽈악 조여왔다. 목이 메인 덕에 숨 을 멈추고 있다가 겨우 한숨을 내뱉었다. 그제야 알았다. 할아버지가 하르몬 선배를 죽인 일에 얼마나 죄책감을 느끼며 괴 로워했는지. 하지만 이런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나에 대해서라면 아주 작은 일까지 전부 알고있었고 오로지 나만을 위해 따뜻하게 이야기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겉으로 보이는 할아버지의 일만 걱정했을 뿐, 다른 사정 따윈 사 실 그리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두근두근 고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잔 뜩 땀에 배인 손으로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할아버지의 왼손을 낚 아챘다. 왜소한 할아버지의 손을 부서뜨릴 듯 꽉 쥐고 소리쳤다. “이쪽을 봐요! 전부 환상이라구요! 할아버지가 만든 환상이예요! 유령 따윈 존재하지도 않아!” 조금 멈칫했지만 할아버지는 여전히 하르몬 선배의 망령에서 벗어 나지 못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다시 한번 소 리를 질렀다. “할아버지!” 그제야 할아버지의 말이 멈추었다. 왜인지 기침 소리까지 거의 멎 었다. 그러나 숨이 훨씬 격해져 있었다. 손목으로부터 날뛰는 심장 박동이 내 손에까지 전해졌다. 이제 작별이다. 자신도 모르게 깨달았다. 뺨으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주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한번 훌 쩍 해버린 다음 몸을 낮추어 헐떡이는 할아버지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남들이 듣지 못하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할아버지… 사람은 죽으면 환생을 해요… 하르몬 선배도… 어딘 가에서 새로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매정하게도 할아버 지와 있었던 일은 벌써 옛날에 잊어버리고 행복감에 취해 있을걸 요?” 크게 눈을 뜬 채로 숨을 몰아쉬는 할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귓가에 속삭였다. “이거 믿어도 되는 정보예요. 제가 직접 봤거든요… 못 믿겠다고 요? 하지만 진짜인걸요… 제가 우연히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버렸 거든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알아버렸어요. 죽은 생물은 유령 따위가 되는 게 아니라 또 다시 태어난다는 거.” 말을 하고 있는 동안 곁에서 숨이 잦아드는 것을 느꼈다. 작게 움 찔거리며 물러나려던 움직임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의외로 내 허황한 말이 도움이 된 듯, 다소 안정된 할아버지 의 얼굴이 보였다. 쭈그려 앉아 오랫동안 멍하니 그 모습을 보다가 어깨까지 침대 위 로 올려 굽힌 팔에 얼굴을 올렸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옆얼굴에 기대었다. 아직 따뜻했다. 하지만 움직이고 있진 않았다. “행복하세요, 할아버지.” 내 목소리가 귓가에서 오래 맴돌았다. 눈을 감고 온기를 더 느끼 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눈을 감지는 못하고 계시기에 손을 뻗어 눈을 감겨 드렸다. 잠시 터졌던 울음은 예전에 멎었다. 하지만 눈물 자국이 남아 있 을 것 같아서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이러고 나니 어느새 평소의 단정한 자신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르디예프!!” 누군가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안으로 쳐들어왔다. 목소리로 금 방 알아챘다. 류온님이 몸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면서 비틀거리 며 아르 할아버지를 찾아온 것이다.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고요를 깨고 입을 열었다. “아르 할아버지께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말주변 없는 놈에게 너 무 야박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시끄러워.” 류온님이 무례하게 소리치고 쿵쿵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곁, 아르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이는 침대의 바로 앞으로 와 섰다. 가까이서 그를 보니 창백한 얼굴은 식은땀 투성이에 팔과 다리는 조금 전 아르 할아버지처럼 경련이 일고 있었다. 당장 쓰 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이렇게 마구 돌아다닐 만한 상태가 아님이 분명했다. 하지만 달리 충고하지 않고 류온님을 등진 채로 걸어갔다. 등뒤의 그가 무척 쓸쓸하게 느껴졌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호위 를 위해 따라붙는 카이의 작은 기척만이 위안이 되었다. “내 친히 리커버리를 시전 해주러 왔더니… 벌써 뒈졌나… 허약한 늙은이…….” 막 천막을 나서기 전, 류온님의 그런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목소리 에 잔뜩 물기가 서린 것이 어쩌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펑펑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혼자 씁쓸히 웃어버리고 밖으로 나왔다. 강렬한 햇살에 눈앞이 한순간 검어졌다.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대고 눈을 깜빡이자 겨우 시야가 회복되었다. 문득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란스러움을 느꼈다. 고개를 내려 그쪽 을 향하고 있자니 한 병사가 다급하게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에스문드 백작님께서 귀환하셨습니다! 지금 왕자 전하께 보고를 드리기 위해 이쪽으로 오고 계시는 중입니다.” 병사의 얼굴은 붉게 흥분되어 있었다. 세스케인과 정면으로 맞대 결하여 승리를 거둔 영웅의 개선이었다. 현 시점에서 세스케인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트로이 후작과 아예즈 공작을 잃은 국왕군에게 세스케인은 최후의 보루였다. 게 다가 애초부터 세스케인은 국왕군 내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군이 다. 그런 자가 죽고 말았으니 국왕군 측의 병사들의 사기가 완전 히 꺾여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사이로 한 무리의 기사가 보이기 시작 했다. 유일하게 말을 탄 선두의 기사는 너무도 낯익은 초록색 머 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를 보았는지 고삐를 이끌고 있 던 견습기사의 도움을 받아 천천히 말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에르가 형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이내 한쪽 다리가 크게 꺾이며 비틀했다. 그러다 견습기사의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자리 에서 제대로 섰다. 이 먼 곳에서도 불안함이 눈에 보였다. “내가 가지.” 얼마 기다리지도 않고 짧게 말한 채 앞으로 걸었다. 여러 호위기 사들 중 카이만이 재빠르게 뒤를 따랐다. 에르가형은 팔이며 다리에 크고 작은 상처로 엉망이었다. 언뜻 보 기에도 안색이 몹시 나빴고, 숨도 제대로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나라에서 첫째 둘째 하는 세스케인을 상대하는 것이 그렇게 쉬웠을 리가 없다. 조금 빠른 걸음으로 가자니 내 존재를 눈치챈 형이 견습기사를 밀 어내고는 바로 섰다.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한쪽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이며 기사의 예를 표했다. 숨을 몰아쉬며 그가 띄엄띄엄 말했다. “에르가 혼… 에스문드…헉헉… 지금… 귀환했습니다… 쿨럭… 군 율을 어기고… 헉헉… 무단 이탈하여 군을 위태롭게 한 죄는… 달 게…후우… 받겠습니다…….” 형의 상태를 걱정하면서도 이 말을 끝까지 듣자니 내심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에르가형의 실책에 신경을 쓰고 있는 자 는 없다. 형은 적의 수장을 베어 아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 다 줌으로서 전의 실수를 만회하고도 남을 엄청난 공을 세운 것이 다. 백 번을 양보해도 순진함과는 거리가 먼 에르가형이니, 그런 사실 을 모르고 있진 않으리라. 그럼에도 뻔뻔하게 실수를 벌해 달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금 웅성대던 주위가 고요해졌다. 딱히 에르가형을 책망하는 자는 없었지만, 실질적인 처우는 내가 내릴 일이다. 군중들은 내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한숨을 폭 내쉰 다음 에르가형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제법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령부의 지시를 어기고 진영을 이탈한 것은 목을 쳐야 마땅한 죄이나, 그 과오를 발판으로 아군의 승리에 큰 기여를 했으니 더 이상의 과거는 묻지 않겠다. 그러나 앞으로 며칠간은 스스로 근신 하며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내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긴장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내 앞이라 시끄럽게 떠들지는 않았지만, 아마 그럴 줄 알았다거나, 다행이라 는 말들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에르가형이 균형을 잡기 위해서인지 닿을 듯 말듯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가슴에 올렸다. 그리고 고개를 더욱 숙여 말했다. “전하의… 너그러우신 처우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헉헉… 이 에르가 혼 에스문드…는… 카류리드 전하를 위해… 큭…….” 형이 비틀하며 균형을 잡지 못하고 앞으로 양손을 짚었다. 흉부의 갑옷에서부터 투툭 하고 땅으로 피가 떨어져 내려왔다. “혀… 에스문드 백작! 어서 의원과 마법사를 불러라!” 먼저 곁의 호위기사에게 그렇게 소리친 후, 몸소 한쪽 무릎을 꿇 고 몸을 낮추어 형의 팔을 붙들었다. 가만히 살피고 있자니 언뜻 어두운 망토와 옷가지에 가려있던 상처가 보였다. 왼쪽 옆구리에 심하게 배인 상처가 있어 그곳에서 피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일부러 내 앞에서 보고를 하느라고 힘을 써서 이 렇듯 상처가 더욱 크게 벌어져 버린 것이다. “헉헉… 크…….” 형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땅을 짚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자존심과 오기 빼면 시체인 그로서도 상처의 아픔을 쉽게 견디기가 힘든 모 양이었다. 조용히 그 모습을 보다가 가늘게 떨리는 어깨로부터 왼팔을 쓸어 내렸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들리지 않도록 속삭였다. “형까지 죽고 나면 난 아마 엉엉 울고 말 거야.” 고통에 잔뜩 찡그린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인지 깊게 고개를 숙이 고 있던 형이 힐끗 눈을 들었다. 이를 악 문 그가 이런 상황에서 도 입가를 이죽였다. “누굴… 멋대로 죽여?” “하지만 피가 이렇게 나오잖아.” 손을 허리 쪽으로 향하며 말했다.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목소리 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피를 보고 있자니 에르가형 역시 아르 할아버지처럼 금방 숨이 끊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가슴이 아려온다. 아버지의 뜻마저 거역하며 나를 위하여 아군에 가담해 주었다. 원래라면 전쟁의 전면에 나서기에는 아직 어린 그 가 이렇게 큰 상처를 입을 정도가 된 것은 근원적으로는 내가 원 인이었다. 이렇게 상냥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라는 놈은 어쩌면 이렇게도 이 기적일까. 두 번 다시 형을 만나지 못할 가능성보다 나 때문에 그 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더 신경 쓰고 있지 않겠는가. 그때 에르가형이 땅을 짚고 있던 손을 조금 움직여 근처의 내 옷 자락을 콱 쥐었다. 그리고 사나운 눈초리를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못마땅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에도…말했지… 헉… 너 같은 놈을… 위해… 이 몸이… 죽을 거 같아?!” 속마음이라도 읽은 듯 꿰뚫는 대답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래로 깔고 있던 시선을 들어 정면의 형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인상을 쓴 그는 화가 난다는 듯 이를 바득 갈고 있었다. 놀라움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대신 생각지도 못한 미소가 피어올 랐다. 언제나 그랬다. 인상을 쓴 얼굴로 아닌 척하면서도 항상 나를 위 해주었던 형인 것이다. 그때도, 디트경이 나를 지키다 처참한 모습 으로 떠나갔을 때도, 화를 내면서 그렇게 소리쳐 위로해주었다. ‘너 따위를 위해 죽어주지 않아.’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말보다 그 편이 몇 천 배는 기쁜 것 이다. 손을 들어 에르가형의 머리카락 위에 올렸다. “어쩌면 이렇게 착할까.” 앞머리만 한번 슥삭 쓰다듬어 준 뒤에 재빨리 손을 내렸다. 마음 같아선 꼭 안아 주고 싶지만 그래도 주위에 보는 눈이 있으니까. 에르가형은 순간이나마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애 취급을 받은 것 때문인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주먹을 쥔 손을 움찔 거리는 모양이 아무래도 나중에 두고보는 신호를 보내는 듯 했다. 당장이라도 펄펄 뛸 듯한 모습이 바로 연상되는 것을 보면 죽진 않을까 노심초사 할 필요는 없겠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으로 부는 상냥한 바람들이 머리카 락을 흩날려 주었다. =============================================== 에르가는 살았쭁? - _ -;;; 이놈은 신의 가호를 받은 넘입니다. 바로 아바스라라의 가호를...(퍼걱!) 쪽팔리지만 말도 안 된다 싶은 건 지적해주시고...;;; 에르가가 하는 대사를 좀더 멋지게 바꾸도록 도와주실 분을 찾고... - _-;; 으움우움;; 리플 좀 달고 가시고......;; 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Part 63 얽매인 연극 (1) 수도로의 진입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본디라면 7만에 가까운 군사와 굳건한 방어성벽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를 감수해야 했겠지 만, 적의 수뇌부가 스스로 붕괴함으로서 무혈입성 비슷하게 들어 가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우선 수도를 포위한 나는 게릭의 충고대로 국왕군에게 항복 권고 를 보내었다. 그 문서에는 이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투항한다면 그 이상의 죄는 묻지 않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트로이 후작의 생포와 아예즈 공작의 사망으로 국왕군엔 병력을 한 손에 쥐고 통솔할만한 자가 사라졌다. 서열에 따라 파나인 공 작이 총사령관이 되었지만, 그는 모든 귀족들을 말 한마디로 누를 수 있을 만한 권력도, 하물며 세스케인과 같은 개인적인 카리스마 도 없었다. 게다가 왕성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국왕은 그렇다 치더 라도, 이즈음 되면 루브형이 태자로서 나설 만도 한데 말이다. 어찌되었건 지휘를 할만한 인재가 없어진 이상, 국왕군의 패배는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 권고에 흔들리는 자가 생겨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남문으로 입성하여 말을 몰았다. 약 3년만의 수도는 전과 거의 변 한 것이 없었다. 왕성을 향해 곧게 뻗은 도로. 일렬로 늘어선 회색 의 반듯한 건물들. 다만 대군의 진입으로 분위기가 좀 살벌한 정 도가 다르달까. 왠지 감회가 새로워져 왔다. 어느덧 아르윈 왕국의 중심부인 왕성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성 벽을 감싸듯 깊게 파인 해자로 짙은 녹색의 물이 흘렀다. 왕실 친 위기사와 병사들이 성벽 위에서 아군을 향해 불안히 시선을 떨구 었다. 일부러 위압감을 주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대군을 포진해 둔 후 카이를 비롯한 몇몇의 기사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활의 사정거 리 바로 직전까지 말을 몰고 나갔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은 다음 최대한 크게 소리쳤다. “긴말 하지 않겠다! 성문을 열어라! 내 나라의 왕성을 허물고 싶지 는 않다!” 메아리가 무거운 적막 속에 길게 울렸다. 그러나 왕성 너머의 상 대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에 선전포 고를 하고자 다시금 목을 흠흠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드드드득… 무거운 마찰음이 울려왔다. 해자 위로 천천히 내려오는 다리를 보 고 나는 멍해졌다.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에 선 호위 기사를 바라 보았다. 그러자 호위 기사도 황당하다는 듯 나를 마주 쳐다보았다. 물론 1초도 안돼서 깜짝 놀라 금방 고개를 숙였지만. 하지만 그 심정 충분히 이해한다. 문을 열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진짜로 열어줄 줄 누가 알았으랴. 저항 한번 하지 않고 항복할 줄 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병사들이 술렁이고 있는 가운데 성문이 해자 위에 완전히 내려졌 다. 성 안쪽에서부터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중앙에 선 붉은 머리 카락의 남자를 선두로 총 세 명의 기사들이었다. 문득 그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눈에 익음을 깨달았다. 물론 직위 가 높은 왕실기사라면 모르는 자가 없었지만, 그 중에서도 굉장히 친숙한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어머니의 호위기사였던 탓이다. “레드라스경…….” 반란인가. 상황이 내 쪽으로 기울어지자 레드라스경을 주축이 되 어 친위기사들이 일어나 국왕을 배신한 것인가.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국왕이 나의 아버지라고 해서 어떤 애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렇듯 그들이 배신을 해준 덕분에 힘 들이지 않고 입성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하지만 역 시 배신이라는 상황 자체만 본다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 다. 게다가 전에 보았던 레드라스경은 죽음을 두려워한다거나 부귀영 화를 노리는 부류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였다. 항시 무표정한 그는 고지식한 디트경과는 다른 쪽으로 꽉 막힌 인간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주군을 배신하고 성문을 열다니, 역시 열길 물 속은 알아 도 사람 속은 모른다는 건가. “레드라스 혼 데네이트. 카류리드 전하를 뵙습니다.” 나의 바로 앞까지 걸어온 그가 짧은 인사말과 함께 무릎을 꿇었 다. 남은 2명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었다. 레드라스경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었는데 자연히 나의 관심이 그에 쏠렸다. 둥그런 모양이 흉기는 아닌 듯 했지만, 만에 하나를 생각한 것인지 카이를 제외한 호위기사들은 조심스럽게 검집에 손 을 대었다. 세 명이 모두 바르게 무릎을 꿇고 예를 취하고 나자 레드라스경이 고개를 뒤쪽으로 슬쩍 돌렸다. 뒤에 있던 기사가 자리에서 일어서 내게로 걸어왔다. 카이가 나의 앞쪽으로 걸어나와 그를 경계했다. “전하께 드릴 용무는 나를 통해서 하라.” “이것을 전하께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유넨이라는 평민 마법사가 남겨두었던 아티펙트입니다.” 유넨이라는 말에 귀가 쫑긋 했다. 조금 고개를 기울여 보자니 기 사가 작은 구슬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카이를 통해 구슬을 받 아들었다. 유넨이 나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사용했던 녹음 구슬 이 틀림없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무릎꿇고 있던 레드라스경이 자리에서 일어났 다. 그리고 제법 먼곳에 있는 자들에게도 들릴 만큼 소리를 돋우 워 말했다. “모든 진실이 아티펙트에 증거물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국왕은 감 히 전하를 심판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뻔뻔하게 패륜을 벌하겠노라 군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국왕의 그 치졸한 본심을 깨 닫고 반기를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시선을 투명한 구슬로 향했다. 내 가 어머니와 함께 역을 꾀했으며, 에렌시아님과 아르멘님의 죽음 을 묵인했다는 사실까지는 이 구슬을 통해 만인의 앞에서 밝혀진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두 분을 죽인 사람이 국왕이라는 부분 만은 폭 빼놓은 채 넘어가 버렸다. 레드라스경의 말대로 이 구슬 의 뒷 내용까지 완전히 알린다면, 국왕에게도 마찬가지로 명분이 없다는 사실로 내 입지가 한층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를 밝히는 것도 탐탁치는 않다. 구슬에 녹음된 내 용대로라면, 나의 어머니가 에렌시아 님과 아르멘님을 죽이도록 사주하였고, 내가 그 일을 묵인한 것으로 모자라, 아버지가 그녀들 을 직접 죽였다는 새로운 사실까지 알려지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나와 어머니의 배신-진실이야 어찌되었든 간에-으로 상처 입은 형제들의 가슴을 더욱 헤집는 꼴이 아닌가. 마음이 괜히 무거워졌다. 그때 당당히 연설을 하던 레드라스경이 손에 고이 들고 있던 무언가를 앞으로 내밀었다. 문득 붉은 천에 싸인 그것의 실루엣이 예전에 보았던 어떤 것과 비슷하다는 느낌 을 받았다. 한발자국 더 앞으로 나선 그가 단번에 붉은 천을 벗겨 냈다. “헉!” “저런!!” 붉은 천을 안에서 나타난 물건을 가장 먼저 본 주변이 호위기사들 이 놀라 신음성을 냈다. 나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그 물건을 바라 보았다. “보십시오! 전하께 바치기 위해 제가 직접 빛의 궁을 점거하여 그 파렴치한 국왕의 목을 쳤습니다! 태자와 다른 왕자들의 신변 역시 거의 제압된 것이나 다름없으니 전하께서는 그저 입성하시기만 하 면 됩니다!” 무엇하나 두려울 것 없다는 듯, 무척이나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는 듯 레드라스경이 당당히 소리쳤다. 그의 손위에 짙은 주황색의 머 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 경악에 물든 얼굴로, 아직 눈조차 감지 못했다. 나의 아버지였던 자의 예기치 못한 최후를 보고 나는 뭐 라 할말을 잊었다. 국왕을 살려줄 생각은 없었다. 개인적인 감정 때문이 아니라, 나의 즉위를 반대할 것이 뻔한 그를 살려두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일단은 강제로 양위를 하도록 만들 예정이지만, 내가 왕 좌에 오른 이후 아버지가 다른 잔당과 손을 잡는다면 큰 후환이 될 수 있다. 내게 양위를 한 후, 아버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암살당 하게 되리라. 사실 형제들과의 왕위 쟁탈전은 일상다반사인지라 그러려니 넘어 가는 일이지만, 친아버지인 국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다는 사 실-국왕의 암살 건은 은밀히 이루어지겠지만, 공공연연이 소문으 로 퍼지게 되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은 대외적으로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게는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몹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아버지에게 털끝만큼의 애정도 없다고 생각했다. 경멸하기조차 했다. 그런데, 분명 그랬음 에도 아버지의 잘려진 목에서 전혀 유쾌함을 느낄 수 없었다. 그 보다는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가 이렇게 잔혹한 죽음을 맞이 했다는 것이 몹시 착잡했다. 레드라스경이 빠르게 한발자국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입이 보 이지 않게 고개를 조금 숙인 후 이 주변으로만 들릴 정도의 목소 리로 말했다. “제 목을 치십시오.” “……?!” 그의 말과 함께 머리 속에 복잡하게 얽혀 있던 생각이 확 휩쓸려 나갔다. 내 호위 기사들도 놀라 레드라스경을 주목했다. 레드라스 경과 함께 온 기사들만이 미리 이야기해 둔 것이 있었는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스트라한님을 지켜드리지 못한 일,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저 는 무력하여 이런 것 외에는 전하께 도움을 드릴 방도가 없습니 다. 전하께오서는 사욕을 위해 감히 국왕의 목을 벤 이 무례한 자 를 단칼에 심판하십시오. 그리고 아스트라한님의 뜻대로 아르윈의 위대한 왕이 되십시오.” 그는 그렇게 말한 후 아버지의 머리카락을 왼손으로 쥐어 하늘위 로 들어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국왕의 목에 동요하던 군중이 더욱 크게 술렁였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척 레드라스경은 오만하게 모든 병사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전하를 위해 이렇게 이 자의 목을 따왔습니다! 이런 자를 평생의 주군으로 삼고 있었다니 치가 떨립니다! 저는 애초부터 전하께 정 의가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는 부디 저의 진심을 받아주십시오!” 뒤쪽에서 은근히 좋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만큼 레드라스 경의 연극은 최고였다. 자신의 사욕을 위해 한나라의 왕이 되는 자의 목까지 쳐서 아부를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만인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허리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장식용이나 다름없던 검을 뽑았다. 검날이 스르릉- 하며 유난히 차가운 소리를 내었다. 다시 한번 레드라스경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붉은 눈이었다. 입과 행동으로는 역겹게 아부를 펼치고 있음에도, 그 눈만은 자신의 시 체를 밟고 앞으로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이… 파렴치한 놈! 무엇이 정의이며 무엇이 진심이라는 말이냐! 비록 안타까운 사정이 수없이 얽혀 있었지만, 그분은 나의 둘도 없는 아버님이었다! 그러한데 네놈이 감히 그분을 상처 입히고 자 랑스레 입을 놀리고 있는 것이냐!?” 주먹을 세게 쥐고 언성을 높여 호통을 쳤다. 길게 말을 내뱉고 나 자 숨이 벅차올랐다. 재밌지 않은가. 이 정도면 내 연기실력도 제법 괜찮은 수준이라 인정해 줄만 하리라. 레드라스경이 뒤로 주춤 물러서며 말했다. “저…전하… 어찌…….” “내 저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어서 붙들어라!” 돌발 상황에 조금 혼란해하던 호위 기사들이었지만 내 명이 떨어 지자 재빠르게 뛰어가 레드라스경의 양팔을 붙들었다. 그리고 나 머지 두 명의 기사에게도 검을 들이밀어 움직이지 못하게 포위했 다. “왜 이러십니까. 살려주십시오! 전 죽기 싫습니다! 전하~!” “닥쳐라! 이 치졸한 놈!” 고개를 저으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대상을 잃은 목소리가 하늘 위에 붕 떠올랐다. 양손으로 검을 쥐어 비스듬히 들었다. 겁에 질린 척 비굴하게 소 리치던 레드라스경이 고개를 높게 들었다. 단단한 목이 길게 보였 다. 그가 마지막으로 짧게 말했다. “그분의 아이에게 영원의 축복이 함께하길.” 팔을 휘둘렀다. ========================================= (1) 이 파트에 얽힌 뒷이야기. 원래는 유넨의 구슬을 까발릴 생각이 없었습니다. 영원 히 암흑의 묻힌 채로 넘겨버리려 했지요. 그런데 각종 리플 메일, 패러디에 이르기까지! 유넨의 구슬 뒤쪽의 이야기가 밝혀지면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잖어!” 하고 절규하던 저는 결국 이렇게 예정 에 없던 이야기를 끼워 넣게 됩니다. -_-;; 가만히 생각해보니 레드라스의 반란, 기타 등등에 꽤 좋 은 이유가 될 거 같아 자연스럽게 끼워 넣었다는 뒷얘 기가 있습니다; 어디서 구슬이 났냐? 하면 나중에 트로이 후작의 한패 이던 엑스트라 마법사가 유넨 대신 보관하고 있다가 그 가 죽자 무서워서 내놓았다고 해버릴랍니다. (본문에 구 구절절 적자니 너무 길어져서 생략 중;) (2) 이 파트에 얽힌 뒷 이야기. 레드라스 경은 첨부터 이럴려고 리메할 때 만들어낸 캐 릭입니다. 3권쯤에 살폿살폿 나와서 아스트라한의 신경 을 긁었는데(...) 아마 기억도 못하실 듯 -_-;; 그가 등장한 이유. 카류가 직접 국왕을 처치하면 안 된 다고 제 친구들이 난리를 쳤기 때문이죠. 그 경우엔 명 분 없이 구테타를 일으켰을 때처럼 신하들이 반란을 일 으킨다구요. 전쟁 이야기가 계속되는 도중 나름대로 비중있게 다뤄 볼까 싶었지만, 안 그래도 길어지고 있는 애기 더 길게 만들고 싶지 않아 지금껏 침묵을 지키던 놈입니다. -_-;; 이르나크의 장 Part 63 얽매인 연극 (2) 다리를 건너 왕궁으로 들어서자 병사들이 무기를 내려놓고 일렬로 무릎을 꿇어 나를 맞이했다. 반란의 수뇌인 레드라스경이 죽었던 탓인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성문의 책임자는?” 기사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말을 몰며 스쳐지나가며 짧게 한마디 던지자 맨 앞에 서있던 자가 재빨리 튀어나왔다. 그가 당장에 무 릎을 꿇고 용서를 빌려하기에 검으로 불쑥 내밀어 그 행동을 저지 했다. 검신을 타고 핏방울이 툭 떨어지자 그의 얼굴이 더욱 백짓 장이 됐다. “성내 모든 친위기사들을 죽일 수는 없으니 문책은 레드라스와 나 머지 두 놈의 목숨으로 끝내겠다. 그럼 묻지. 너희들은 왕성내의 모든 기사와 병사들을 제압한 상태인가?” 순간 얼굴이 환해진 기사가 허리를 곧게 펴고 차려 자세로 당당히 대답했다. “왕실기사단장인 라인경이 소수의 기사들을 이끌고 태자전하께서 머무시는 방 주위로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으나 얼마 지나지 않 아 금방 진압될 것입니다. 그 외의 왕자전하와 공주전하 쪽은 막 완전히 제압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고개를 돌려 길게 뻗은 왕궁의 길을 바라보았다. 깊은 숨을 한번 얕게 쉬었다가 말했다. “태자궁으로 간다.” 짧은 말 한마디로도 내 주변 사람들은 빠르게 움직였다. 태자궁의 이층으로 들어서자 아직 굴복하지 않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즉시 에르가 형-마법으로 짧은 시간에 완치되었다-과 직속 기 사들이 나서 그들을 막았다. 특히 류스밀리온님이 나서자 그들은 몇 초 버티지도 못했다. 붉은 융단이 깔린 길 위로 검에 베이고 마법에 구멍을 뚫린 시체들이 픽픽 쓰러졌다. 에르가 형이 잔당을 처리를 해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대강 정 리가 되면 몇 발자국 앞으로 걸었다. 그러면 내 호위 기사들이 한 발 앞서 나가 땅에 흩어진 시체들을 양쪽 귀퉁이로 끌어당겨 길을 내주곤 했다. 레드라스경의 목을 쳤다. 루브 형의 목마저 치게 될지 모르는 일 이다. 그런데 별 인연도 없는 자들의 시체 좀 밟는 게 뭐가 대수 일까. 아니, 이미 내 머리는 불안과 불안으로 포화상태가 되어 그 런 곳에 신경을 써줄만한 여력도 남아있지 않다. 문득 그들의 행 동이 우스워 보여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카류리드 전하! 이것이 진정 당신의 뜻입니까!?” 입술 끝을 비틀어 올린 채로 고개를 들었다. 라인경이었다. 반역이 들통 난 날, 나를 연행해 갔던 기사다. 나를 연행하면서도 믿지 못 하겠다는 얼굴을 했던 자였다. “형님을 만나러 왔다. 길을 비켜라.”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라인경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장 검을 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물론 그 행동은 에르가 형의 검 에 가로막혔다. 라인 경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인륜도 모르는 놈! 마지막까지 너의 양심에 한 가닥 실낱같은 희 망을 버리지 않았건만!” “마음대로 지껄이지 마라!” 에르가 형이 검을 쳐올리며 대신 화를 냈다. 라인경은 형 또한 똑 같은 놈이라는 듯 그를 쏘아보았다. 창-! 에르가 형이 검을 힘껏 내리며 한발자국 물러서서 먼저 대치상태 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곧장 뒤로 뺏던 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라 인경도 쉽게 지지 않고 검을 위로 들어 그를 쳐올렸다가 반격에 들어갔다.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금세 상황을 놓쳐버릴 정도로 빠 른 공방이 오갔다. 거의 막상막하였지만 둘 다 쉽게 틈을 보여주 지 않았다. “흡, 역시 기사단장인가. 이제부터 제대로 가주지!” “오만하다! 새파란 애송이가 쉽게 범접할 영역이 아니야!” 잠시 소강상태가 되었을 때 에르가 형과 라인경이 소리쳤다. 어쩐 지 둘 다 그럴듯한 상처를 입지 않더라니 지금까지는 그저 탐색전 이었던 모양이다. 먼저 라인경이 검을 들고 뛰어나갔다. 에르가 형도 자신만만히 검 을 들어올렸다. 그때 그들의 사이로 장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깜 짝 놀란 두 사람 중 라인경이 난데없이 날아온 검을 쳐냈다. 에르 가 형은 그 빈틈을 칠 생각은 않고 발끈하여 소리 질렀다. “누구야!!” “나다, 새파란 애송이.” 류스밀리온님이 검을 빼앗겨 당황한 기사의 곁에서 퉁명스럽게 말 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주변에 백색의 화살을 띄워냈다. 매직 애 로우는 총 다섯 개가 완성되자마자 일제히 라인경을 향해 쏟아졌 다. “헉!” 즉시 몸을 왼편으로 날렸지만 남은 두개의 애로우는 피할 수가 없 었다. 검을 들어 나머지 하나까지는 어떻게 막아냈지만, 마지막 하 나가 검을 들고 있던 그의 오른쪽 팔꿈치에 박혔다. 차캉-! “크-윽--!” 매직 애로우에 방패가 된 은색 칼날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땅 에 흩어졌다. 그와 함께 검을 쥔 오른팔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바 닥에 떨어졌다. 오른팔을 잃은 라인경이 겨우 비명을 참으며 잘려 나간 팔을 싸쥐었다. “류스밀리온님! 정정당당히 겨뤄도 충분합니다! 어째서!” 류온님이 거친 걸음으로 에르가 형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슬쩍 내 쪽을 보더니 바득 이를 갈며 작게 말했다. “멍청한 놈, 지금이 이것저것 따질만한 상황이냐? 네 검술실력을 자랑하고 싶다면 장소를 잘못 골랐다!” 그제야 에르가형은 입을 다물었다. 라인경은 다른 기사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그 몸으로도 끝까지 내 게 욕설을 퍼붓자 내 호위기사중 한명이 다가가서 그의 목덜미를 쳐서 기절시키기까지 했다. 사람들을 지나쳐 눈에 익은 문 앞에 섰다. 군데군데 금색으로 문 양을 새겨 우아한 맛을 더한 백색의 문이었다. 내가 직접 문을 열 려고 하자 류온님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남은 잔당에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 전하께서는 뒤에서 조금 기다려주십시오.” 라인경의 욕설까지도 무심히 들어 넘겼던 나였지만 이 말을 듣자 니 은근히 반발하고 싶어졌다. 드디어 왔다. 붉은 피의 강을 건너, 드디어 나의 사랑하는 루브 형 을 만나러 온 것이다. 내게 있어 그를 만나는 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과도 같은 일이다. 나는 결코 이 일을 병사들의 흙발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들어가겠습니다.” “절대 안 됩니다.” 류온님이 바로 말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 듯 말했다. “감상에 빠지지 마라. 이곳에 있는 자는 태자, 최대의 정적이다. 혹여 라도 살려 두겠다는 생각은 않는 게 좋아. 지금껏 헤쳐 온 피에 얼룩진 땅을 다시 한번 걷고 싶지 않다면!” 고개를 돌리자 굳건한 얼굴의 류온님이 보였다. 감상에 빠지지 말 라. 필요한 만큼의 잔혹함은 오히려 선이다. 몇 번이나 스스로의 입으로 강조했던 것처럼 류온님이 나라면 분명 냉정히 대처할 것 이다. 아르 할아버지의 죽음을 예견하고도 막지 않았던 그때와 마찬가지 로. 좀 더 큰 것을 위해, 좀 더 많은 것을 위해.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개를 조금 들고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들어가는 것은 나와 카이 두 사람만이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이 명을 어긴다면 8서클 마법사라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류온님은 눈썹을 실룩했지만, 일단 카이와 함께 들어간다는 말에 나서서 따지지는 않았다. 그녀와 함께 하는 한, 방안에 있을 몇 명 의 조무래기 따위는 문제가 아닐 테니까. 카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한 움큼으로 질끈 묶인 머리카락의 붉은 색이 그 무엇보다 눈가에 남았다. 이제 곧 만날 형제 역시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문이 열리고 카이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바로 그녀의 뒤 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과는 달리 방의 안쪽에서부터 튀어 나오는 병사는 없었다. 단지 방안의 정 가운데에 빛을 등지고 단 한명의 남자가 서있었을 뿐이다. 탕-! 곧장 뒤로 돌아서 열려진 문을 닫았다. 류온님이나 에르가 형, 다 른 기사들이 당황하는 듯 했으나 완전히 무시했다. 이미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던 탓이다. 심장이 전력질주라도 한 듯 두근거렸 고 손이 작게 떨렸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자 옅게 식은땀에 배여 나왔다. 심호흡을 두 번 한 다음 다시 몸을 돌렸다. 가까운 곳에 카이가 있었고, 조금 더 떨어진 곳에… 루브 형이 있었다. “결국에는 이렇게 재회하게 되는군. 다시는 그 얼굴을 볼 일이 없 기를 바랐건만, 내 천운도 다했던 모양이다.” 루브 형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단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부드러웠고, 그 안타까 운 오해의 감옥에서도 혼란스러운 목소리만을 보였다. 그러나 지 금은 차가웠다. 충분히 그럴 것이라 예상했고, 몇 번이나 이런 장면을 상상해보았 기에 어느 정도는 진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떨리는 입가를 조금 당겨 올려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루…브 형.” “그 입으로 형이라는 말을 담지 마라!!” 검을 빼들고 있었는지 형이 검날을 들어올린 채 내게로 달려들었 다.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두발자국 뒤로 주춤하는 사이 카이가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카…카이!” 카이를 걱정했기 때문이 아니라, 혹시라도 이대로 카이가 형을 두 동강 내버릴까봐 손을 내밀고 다급히 소리쳤다. 창-!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그녀는 강하게 형의 검을 쳐내며 그를 밀어냈다. 형은 여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녀의 실력에 적지 않게 놀랐는지 곧장 다시 공격하지 않고 일단 그 자리에 머물렀다. 하 지만 이내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카이?” “아, 아… 그녀의 이름이 ‘카이야’ 라서…….” 머리를 긁으며 머쓱하게 그의 물음에 답했다. 루브 형의 얼굴에 조금 의외라는 표정이 잠시 떠올랐으나 금방 차갑게 굳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아주 잠시 침묵이 오갔다. 그동안 내 시선은 루브형을 지나쳐 방 안의 천장과 벽, 가구로 빠르게 옮겨졌다. 귀여운 형을 쓰다듬어 주기 위해 막무가내로 쳐들어오곤 했던 어린 그때나 전혀 변한 것 이 없었다. 천장의 사방으로 고급스런 나무가 박혀 있다. 창문가의 커튼은 아 름다운 덩쿨이 수놓아진 연녹색이고, 그 곁으로 놓여진 탁자에는 두개의 날씬한 의자가 짝 지워져 있다. 그 아래의 바닥은 사박사 박 부드러운 느낌이 나는 양탄자다. 아아! 나는 진정으로, 영원히 이들이 변하지 않기를 빈다. “후우.” 내가 먼저 한숨을 푹 내쉬어 침묵을 깼다. 그리고 한발자국 조용 히 걸음을 내딛어 입을 열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다듬으며 최 대한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루브형.”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루브형!” 형이 크게 화를 냈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그리고 양손 을 내밀었다. 바들바들 떨리고 있어서 부끄러웠지만 있는 힘껏 팔 에 힘을 주어 그에게로 향했다. “이리와.” “뭐?” 한쪽 눈을 일그러뜨리고 되묻는 그에게 다시 한번 말했다. “이리와. 괜찮아. 다치게 하지 않아.”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형은 그 자리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 꼼짝을 하지 않았다. 나는 무안한 손을 그대로 내민 채로 말했다. “이리와. 함께 되돌아가자. 그때는 그저 마주보고 웃기만 해도 행 복했었잖아?” 루브형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가 멀리서도 확연히 떨려 보 이는 왼손을 들어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다가 이내 악에 받친 듯 손을 주먹 쥐어 내리며 바락 소리쳤다. “행복을 망친 것은 바로 너잖아!”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언제나 그러겠다 다짐한 것처럼 당당히 대답해주었다. 그러나 루 브형은 더욱 발작적으로 외쳤다. “헛소리 집어쳐! 나의 어머님이, 상냥하셨던 아르멘님이! 그깟 왕 좌 때문에 목이 꺾이고 팔다리가 부러져서 죽어야만 했지!! 하하! 아닌 척 했지만 실은 아버님까지 한통속이었다지? 아름답다고만 여겼던 이복 어머니에, 그 무엇보다 사랑하였으며 믿어 마지않았 던 그녀의 아들에, 이제는 친아버지까지! 멋지군, 이렇게 멋질 수 가!” 루브형은 몸을 조금 굽히며 허탈하게 웃었다. 레드라스경이 왕궁 을 손 안에 넣기 위해 반란을 일으킬 때 명분삼아 미리 루브 형에 게도 그 소식을 통고한 모양이다. 형의 모습을 보자니 불안한 가 슴에 더욱 심한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더욱 이를 악 물었다. 루브형이 비틀거리더니 손으로 붉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나를 쏘 아보았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 혹시나 싶어서 불안히 손톱이나 물어뜯었지. 하지만 이제는 비난해주겠다. 이 패륜아여! 영원히 저주할 형제 여!!” “죽이지 않았어.” “그래, 죽이지 않았겠지. 단지 죽을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했을 뿐이겠지.” “그런 사실 따윈 잠작조차 못했어.”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무엇 을 노리고 있지? 마지막까지도 형을 생각했다는 후일담!?” “말하고 있잖아. 오해라고. 말실수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야.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다. 죽이지 않았다고! 그분들의 죽음의 실체 따윈 짐작조차 못했다고! 진심으로 그분들을 사랑했다고!! 진심으로 내 형제들을 아꼈다고!!” 앞으로 내민 주먹을 꽉 쥐고 눈까지 꼭 감은 채 마지막에는 바락 소리를 질렀다. “원하는 것이 뭐지?” 문득 담담한 루브형의 목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의 처음으로 서린 차가움은 변함이 없었다. 눈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그를 향해 한발자국 더 걸어가며 말했 다. “이리와. 화가 나는 일이 있겠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우리 사이 좋게 지내자. 내가 매일 꼭꼭 안아줄게.” 한발자국 더 걸어갔다. 루브 형은 말없이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오른쪽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렀다. “같이 가자.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 권한으로 어떻게든 형이 살 아남을 수 있게 해주겠어.” “호, 어떻게?” 루브 형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나는 조금 당황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혀…형이랑 꼭 닮은 시체를 찾아놓고 형은 죽었다고 공표하는 거 야. 이러면 형은 자유의 몸이 되는 거지! 하하… 이거 좋은 생각이 지?” 그냥 말해놓고 보니 상당히 그럴듯해서 저도 모르게 헤헤 웃었다. 그러자 형이 삐뚤어진 웃음을 보이며 또 물었다. “그래?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나갔다가 너처럼 반란을 일으킨다 면? 정통 계승자는 네가 아닌 바로 나다. 나를 옹호하려는 자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을 터! 네 측근들이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데 동의할거라 생각해?” “동의하게 만들겠어!” 내가 바락 소리치자 그의 웃음이 더욱 일그러졌다. “너는 전쟁에 휩쓸려 죽는 자들의 목숨이 아주 쉬운가 보구나. 아 니, 멀리 갈 것도 없지. 이번 전쟁으로 네 호위기사인 디트리온과 아르디예프님이 죽었다지? 내가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켜 남은 친우 들마저 죽음의 강으로 끌어낸대도 너는 가뿐한 모양이구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은 후에 활짝 웃었다. 웃으며 얼굴을 일 그러뜨리자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왼쪽 눈의 눈물도 주륵 흘러 나왔다. “형이 반란에 동조하지 않으면 되잖아?” “하하, 세상에…….” 형이 이마에 손을 짚으며 웃었다. 그런 그를 앞두고 조금씩 걸어 간 나는 겨우 열 발자국도 안 될 정도 가까운 곳까지 다다랐다. “아르 할아버지께서, 딱 한번만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고 하셨어. 그 어떤 일도 용서해주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함께 가자. 형을 죽이지 않을게. 누가 뭐래도 절대 우리 루브형을 해치 지 못하게 할 거야.” 긴장하여 조금 오므리고 있던 팔을 다시 한번 곧게 폈다. 나의 사 랑하는 루브형을 향해서 넓게 벌렸다. “이리와. 함께 가자.” 순간 누군가가 내 등덜미를 잡아 뒤로 세게 당겼다. 덕에 내 어깨 를 노리고 날아오던 검날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분노에 어린 루브형의 붉은 눈을 보았다. 쿠당-! 균형을 잡지 못해서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찍었다. 순간적으로 무 척이나 아파 고개와 몸을 잔뜩 앞으로 움츠렸다. 캉! 캉!! 두어 번 정도 되는 금속음이 들렸다. 그리고 다닥- 하며 맞붙었던 두 사람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작게 숨을 고르더니 경멸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그 오랜 옛날부터 위선을 떠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지. 아직도 기억해.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어머님들의 무덤 앞에서, 그 분들은 천국에 계실 것이라 우리들을 위로했었지? 아아, 이번에도 역시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 대사였다. 만족하나?” 고개를 숙인채로 주저앉아 가만히 있었다. 형도 카이도 가만히 내 반응을 지켜보고만 있는 거 같았다. 고요한 가운데 들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꼬고 앉은 다리 위서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손을 조금 들었다. 그리고 멍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투두둑 눈물을 흘려내고 있는 눈으로는 그것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피식 헛웃음을 내었다. “알아.” 쿡쿡 소리 내어 웃으며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늘어진 형태 그대로 땅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형이 내게로 오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다고.”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을 생각도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미소한 채 말했다. “그냥 한번 제멋대로 말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형은 조금 주춤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겠다는 듯 또 다시 인상 을 확 쓰며 내게로 돌진했다. 카이가 내 앞으로 나섰다. “죽이겠다. 동의하는가?” “으으응…….” 불분명한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카이는 앞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일부러 두어 번 루브형의 검을 받아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 라면 일합도 못 되 간단히 형을 죽일 수 있었을 테니까. 카캉-! “윽!” 카이가 크게 검을 걷어내자 루브형이 버티지 못하고 검을 놓쳐버 렸다. 튕겨나간 검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가 신기하리만치 정확히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졌다. 루브형이 카이의 검을 목 앞에 두고 수치스러운 얼굴로 이를 갈고 있었다. 멍하니 형의 모습을 보던 나는 땅에 박힌 검으로 시선을 주었다. “목을 쳐라! 더 이상의 수치는 사양하겠다!” 형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카이는 꿈쩍도 없고 목에 검 을 대고 있을 뿐이다. 몇 번 목석같은 카이에게 소리를 지르던 형 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내게 뭐라고 한마디 던지려 고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찡그려져 있던 눈은 순간적으로 커다 랗게 떠졌다. “카……!” 그의 비명을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검을 쥐느라 귀를 막을 수 가 없어 대신 눈을 꼭 감았다. 내 손에 쥐어진 루브형의 검은 아주 날카로운 것이었다. 그래서 살과 뼈를 꿰뚫고 쉬이 깊게까지 파고들었다. 어느덧 가드를 잡은 왼손에 루브형의 옷자락이 느껴질 만큼 검이 깊숙이 박혔다. 겨우 눈을 떴다. 형의 붉은 눈동자에 비쳐진 내 얼굴이 보였다. 친 형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은 자가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고서 울고 있었다. 세상엔 열심히 노력해도 결코 불가능 한 일이 있다. 한번 꺾여진 나뭇가지는 제 아무리 애를 써도 전과 같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그와는 영원한 작별을 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찔렀다. 검에 심장을 꿰뚫린 몸이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아 가드를 받치고 있던 왼손을 형의 등 뒤로 돌려 꼭 껴안았다. 마지막 말을 속삭여 주기 위해 귓가에 고개를 묻었다. 이번에는 디트경 때처럼 거짓말은 않으리라. “사랑해. 루브형… 형을 정말 사랑해.”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그러나 형의 숨은 간헐적이지만 계 속 이어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이 검이 형의 심장에 정확히 박 히지 못한 채 고통을 연장시켜주고 있는 듯 했다. 그때 루브형의 손이 나의 뒤쪽 머리카락을 콱 쥐었다. 이를 악 물 어 고개를 조금 들어올리던 그가 무서울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 “카, 카류… 카류리드… 너를……!!” 루브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에 쥐고 있던 검을 크게 비틀었 다. 말을 하던 형이 몸을 크게 경직시키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 다. 무척이나 아파보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나올 저주의 말이 두려웠던 탓이다. 마지막이 될 텐데 끝끝내 그런 말을 듣고 가슴 아파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렇잖아? 난 형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는 게 싫단 말이야. “사랑한단 말이야…….” 내가 중얼거리는 새에 형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며 갑자기 무거 워지기 시작했다. 나 역시 버틸 힘이 없어져 그와 함께 뒤로 기우 뚱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에 정면으로 머리를 부딪치는 일 은 카이가 재빠르게 뒤를 붙들어줌으로서 겨우 면할 수가 있었다. “훌쩍…….” 아직 따스한 루브형의 시체를 꼭 안고 훌쩍거리며 울었다. 손을 들어 뺨을 쓰다듬어 보다가 어린애인줄만 알았던 그의 얼굴에 턱 수염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피식거리기도 했고, 머리카락을 쓸 어내리다가 예전만큼 형의 머리카락이 곱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나 때문에 신경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일지 모르니까. “벌써 반경이 지났는데, 언제까지 울고 있을 참인가?” 무뚝뚝한 여인이 등 뒤에서 말했다. 나는 입을 삐죽이 내밀고 말 했다. “우리 형이 죽었단 말이야. 나는 아주 슬프다고. 위로는 못해줄 망 정 하는 말하곤… 좀 더 기다려.” “나는 천년이고 만년이고 기다려 줄 수 있다만, 밖에 대기하고 있 는 네 측근들은 아닌 모양이다.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이니 주의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형의 시체를 땅에 뉘여 주고는 자리에서 부시시 일어 났다. 침대로 걸어가 시트 위에 얼굴을 슥슥 부벼서 눈물을 닦아 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은 것까지는 어찌 감 출 수가 없었다. “카이, 내 눈 좀 고쳐주지 않을래? 한번만…….” “거절한다.” “치사하게…….” 양 손으로 두 눈덩이를 문지르며 투덜거렸다. 얼얼했지만 더 이상 은 눈물이 흐리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카이가 내 뒤에 서 말을 걸어 주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카이, 일부러 내게 형을 죽이도록 부추겼지?” 하필 루브형의 검이 내 앞에 떨어진 것부터가 수상쩍었다. 지긋한 시선을 카이에게로 보내자 카이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스로 확실히 끝맺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에 배려한 것이다.” “감정 따위는 잊은 지 오래라는 도마뱀이 아는 척 끼어들기는.” 땅 발로 차며 투덜거리자 카이가 대답했다. “나는 스스로 감정을 느끼지 못할 뿐, 감정 자체에 대하여 무지한 것이 아니다.” 그녀가 땅에 뉘어진 형의 시체에 시선을 잠시 주었다가 고개를 조 금 저었다. 차분했던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살짝 떠올라 허공에 흩날렸다. 그것은 무척이나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소중한 사람과 같은 빛이라 평소와는 달리 슬픈 느낌이었다. ========================================== 뭐, 그렇죠. 당장에 신이 나타나 해명이라도 해주지 않 는 한은 어찌 오해를 풀겠사옵니까. 허무하죠? 카류여..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라~ 음하하하~ (각종 흉기 무조건 반사 모드) 리플 좀.... hongik1999@hanmail.net 라다가스트에서 읽으시는 분들께 알립니다. 라다는 4연참 한계이기 때문에 다음 편은 카페나 삼룡에서 읽으시길 바랍니다 ^^ 물론 내일이나 라다에 남은 편은 더 올릴 생각이니 참으셨다가 내일 읽으셔도 말리지는 않습니다. ^^;;;;;;;; 이르나크의 장 Part 63 얽매인 연극 (3) 사람을 믿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왜냐 하니, 사람은 마음먹 기에 따라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해맑은 미소 뒤로 끔찍한 저주를 퍼붓고 있을 수도 있고, 사랑한 다고 속삭이면서도 깔보고 짓밟을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왜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지금까지 외면하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야 해맑은 미소와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이 진실이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 라인경이 방 안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 나간지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서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창- 하며 깨끗한 소리가 울렸다. 허공에 들어올리자 곧게 뻗은 날씬한 검신 위에 빛 그림자가 흘러내렸다. 이것이 단 한번도 사람을 찔러 본 적이 없는 겁쟁이 태자의 검이었다. “마지막으로 너에게 피를 먹일 수 있을까.” 글쎄. 아마도 무리일 것이다. 녀석이야 수많은 부하들의 중앙에 서 있을 것이다. 머리털 한 올 건드리는 것도 불가능 하리라. 갑자기 문이 열리며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들어섰다. 갑옷을 입었 지만, 미려한 얼굴선과 혀를 내두를 미모를 보건대 여자임이 분명 했다. 어째서 이런 상황에 여자가 들어서나 싶었더니 곧장 그 뒤 로 누군가가 따라 들어왔다. 아르윈 왕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여기사의 등장으로 의아해 할 시 간도 없었다. 내 모든 신경은 뒤따라온 그 남자에게로 향했다. 눈과 머리카락이 그림자에 가려 검었다. 하지만 얼핏얼핏 푸른빛 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것은 참으로 신비롭기까지 하여 많은 자들 에게 칭송받고 있는 밤하늘 빛이다. 카류. 키가 컸다. 전에 볼 때는 카이보다 조금 큰 정도였는데, 이제는 키 옌과 비슷할 정도로 보였다. 큰 편인 눈 덕에 어린 티가 남은 얼 굴이지만, 이제는 완연한 청년이다. 쾅-. 그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돌아서더니 순수 열려진 문을 닫아버렸다. 뒤로 줄줄이 다른 병사들이 따라 들어올 것이라 생각했건만 호위는 저 여기사 한명으로 끝낼 모양 이었다. 그러고 보면 녀석의 진영에 굉장한 실력을 가진 여기사가 나타났다고 했던가. 역시 주도면밀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었다. 나와의 대 화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좋을 일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의 호 위는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문을 향해 등을 보이고 있던 카류를 향해 냉랭하게 말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재회하게 되는군. 다시는 그 얼굴을 볼 일이 없 기를 바랐건만, 내 천운도 다했던 모양이다.” 그제야 카류는 나를 향해 돌아섰다. 의외로 녀석은 불안한 얼굴이 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이상 자신의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어도 충분했을 것을, 여전히 순진한 동생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었다. 머뭇거리다가 어색히 입꼬리를 들어올린 녀석이 말했다. “루…브 형.” 목소리가 살짝 떨려있었다. 순간 확- 머리끝으로 열이 뻗쳐올랐 다. 이런 상황에서 녀석에게 많은 것을 바란 건 아니다. 무능한 나를 비웃든, 안타깝다며 그 나름의 동정을 보이든, 그저 진실한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랬기에 더 화가 났다. 녀석이 마지막까지 착한 동 생의 얼굴로 나를 기만하려하고 있었으므로. “그 입으로 형이라는 말을 담지 마라!!” 이를 악 물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후회가 눈앞을 가린다. 원래 이 런 녀석이었던 거다. ‘혹여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어찌 내 손으로 사 랑했던 동생을 칠 수 있다는 말인가.’ 결코 의심할 필요도, 동정할 필요도 없었다. 주변사람들이 떠들어 대던 것처럼 나는 가장 먼저 전장에 나서 카류의 목을 베어야 했 다. 그때 뒤로 물러선 카류의 앞으로 여기사가 뛰어들었다. 금속음과 함께 검이 맞부딪혔다. 그러나 상대 여기사는 꿈쩍도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위에서 내려치는 내 검을 받아냈다. “카…카이!” 카류가 그렇게 소리치자 여기사는 검을 쳐올려 나를 밀어내며 뒤 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문득 ‘카이’ 라는 말이 의아하여 인상을 쓰며 물었다. “카이?” “아, 아… 그녀의 이름이 ‘카이야’ 라서…….” 무엇 때문에 하필 ‘카이’ 인가. 여성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 을 일부러 사용하는 의도는……? 그러나 곧 얼굴을 굳혔다. 아무려면 어떤가. 카류 역시 이름 따위 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대화가 끊기자 잠시 동안 침묵이 오갔다. 먼저 입을 연 것이 카류 였다. “후우.” 한숨을 내뱉은 녀석이 한발자국 걸어 나왔다. “루브형.”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 녀석이 여전히 조금 전과 같은 태도를 고수하고 있자 벌컥 화가 나서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루브형!” 그러나 카류는 그보다 더 크게 소리 질러 내 이름을 불렀다. 이쯤 되자 화가 나기보다는 착잡했다. 녀석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면 을 벗을 생각이 없는가. “이리와.” “뭐?” 카류가 양팔을 앞으로 내밀고 마치 예전처럼 안아주기라도 하겠다 는 듯 말하고 있었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 한쪽 눈살을 찌푸리고 되묻자 녀석이 다시 말했다. “이리와. 괜찮아. 다치게 하지 않아.” 놈이 다시 말했다. “이리와. 함께 되돌아가자. 그때는 그저 마주보고 웃기만 해도 행 복했었잖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조금씩 떨려오는 손을 들어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착잡한 분노가 눈물이 되어 터져 나오려 했기 때 문이다. 숨을 한숨 훅 들이켰다가 주먹을 콱 쥐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행복을 망친 것은 바로 너잖아!” “내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야.” 카류가 뻔뻔스레 대답했다. 그래서 다시금 울컥하고 말았다. 내가 정말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긴 멍청한 녀석이라 는 것은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니 무시하는 것도 당연할지 모른다. 과거로 돌아가자. 아버지는 아스트라한님을 극진히 아끼고 있었다. 어느 정도냐 하니, 그녀의 부탁 한마디에 우리들의 두 어머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 버릴 만큼이었다. 어머니들의 죽음은 반역 에 기반이 되었으며 아스트라한님과 카류의 은밀한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갔다. 이 계획에는 아버지 역시 든든한 아군이었다. 후일 반역을 일으킨 카류가 왕위를 자신에게 물려 달라 요청했을 때, 아버지는 쉽게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그것은 아스트라한님의 요청 이기도 하였을 테니.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반란을 막고자 했던 트로이 후작의 등장에서 부터 어긋났다. 아버지는 자신의 약점을 쥔 트로이 후작 덕에 옴 짝달싹 못하게 되어 아스트라한님과 카류에게 등을 돌리고 용서하 지 못할 반역자라고 말하며 토벌령을 내렸다. 의붓어머니와 동생의 음모에 가슴아파하고 있었더니, 이제는 아버 지까지 더해져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오랜 세월 우리들을 속여 온 카류 못지않은 아주 비열한 방법으로. 올해 봄, 증거물인 아티펙트 구슬과 각종 서류가 펼쳐진 탁자를 가운데 두고 나는 레드라스경을 통해 그 모든 진실을 들을 수가 있었다. 어쩌면 레드라스경은 처음부터 카류 측의 첩자로, 새로운 사실을 듣고 내가 흔들리기를 바랐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국왕의 비리를 밝히고 성을 뒤집어엎은 것을 보면 틀림이 없었다. 물론 나는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카류나 적들이 원하는 대로 움 직였다. 아군이 계속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보고를 들었다. 더 시 간이 지나 트로이 후작 등의 주요 수뇌부가 모두 전사하거나 생포 당해 대군을 지휘할만한 인재가 없다는 보고까지 들었다. 그러나 병사들을 독려하며 당당히 출진하는 대신, 모든 대신들을 권유를 뿌리치고 그냥 태자궁에 틀어박혔다. 겁쟁이라는 소문이 들려와도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들의 권력놀음에 끼어들려니 자신의 꼴이 너무 우습지 않겠는가. 카류를 향해 있는 대로 장황하게 속을 털어놓은 후 비틀거리며 웃 었다. 나라는 인간은 어쩌면 이렇게도 어리석은가. 카류의 일만 해 도 그렇다. 수많은 증거가 카류를 기만자라 증명하는데도 도저히 믿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에 희망을 가 진 자의 최후는 이렇게 비참한 법이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카류를 쏘아보았다. “몇 번이나 망설였지. 혹시나 싶어서 불안히 손톱이나 물어뜯었지. 하지만 이제는 비난해주겠다. 이 패륜아여! 영원히 저주할 형제 여!!” “죽이지 않았어.” 또 저렇게 말한다. 끝내 자신의 입으로는 말하지 않을 것 같기에 내가 말을 정정해주기로 했다. “그래, 죽이지 않았겠지. 단지 죽을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 했을 뿐이겠지.” “그런 사실 따윈 잠작조차 못했어.” “빌어먹을! 이런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싶어? 이번에는 무엇 을 노리고 있지? 마지막까지도 형을 생각했다는 후일담!?” 옆에 선 카이라는 여기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증인이 한명 정도 있었으니 말을 꾸며볼 생각인가? “말하고 있잖아. 오해라고. 말실수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야. 몇 번이고 말해줄 테다. 죽이지 않았다고! 그분들의 죽음의 실체 따윈 짐작조차 못했다고! 진심으로 그분들을 사랑했다고!! 진심으로 내 형제들을 아꼈다고!!” 눈을 꼭 감은 녀석이 힘껏 소리쳤다. 꼭 쥐어진 주먹이 바르르 떨 렸다. 오해라고 호소하는 모습이 마치 진짜 같다. 애쓰는 모습이 꼭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운 모양을 하고 있다. “원하는 것이 뭐지?” 마음을 냉정히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어서 물어 보았다. 본성을 드 러내도 좋을 법한 상황에서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이유정도 는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내 말에 갑자기 카류의 두 눈에 눈물이 왈칵 고였다. “이리와. 화가 나는 일이 있겠지만 그냥 잊어버리고… 우리 사이 좋게 지내자. 내가 매일 꼭꼭 안아줄게.” 내게로 걸어 나오며 카류가 말했다. 노려보고만 있자 드디어 그렁 그렁한 눈동자에서 눈물이 주륵 흘려내렸다. “같이 가자.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내 권한으로 어떻게든 형이 살 아남을 수 있게 해주겠어.” “호, 어떻게?” 비웃으며 묻자 카류는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곧 좋은 생각이 났 다는 듯 빠르게 대답했다. “혀…형이랑 꼭 닮은 시체를 찾아놓고 형은 죽었다고 공표하는 거 야. 이러면 형은 자유의 몸이 되는 거지! 하하… 이거 좋은 생각이 지?” 카류가 대답해놓고는 헤벌쭉 웃었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꼬 투리를 잡아 다시 질문했다. “그래? 내가 자유의 몸이 되어 나갔다가 너처럼 반란을 일으킨다 면? 정통 계승자는 네가 아닌 바로 나다. 나를 옹호하려는 자는 도처에 존재하고 있을 터! 네 측근들이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면서 나를 자유의 몸이 되게 하는데 동의할거라 생각해?” “동의하게 만들겠어!” 녀석이 온몸을 발딱 세우며 억지소리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놈 의 아픈 기억까지 찔러가며 또 질문했다. “너는 전쟁에 휩쓸려 죽는 자들의 목숨이 아주 쉬운가 보구나. 아 니, 멀리 갈 것도 없지. 이번 전쟁으로 네 호위기사인 디트리온과 아르디예프님이 죽었다지? 내가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켜 남은 친우 들마저 죽음의 강으로 끌어낸대도 너는 가뿐한 모양이구나.” 카류는 도리도리 고개를 젓다가 방긋 웃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흐르는 것이 보였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녀석이 말했 다. “형이 반란에 동조하지 않으면 되잖아?” “하하, 세상에…….” 뻔뻔한 면상을 대고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느꼈다. 이마를 짚으며 웃는 도중 카류가 앞으로 걸어 나오는 것을 얼핏 보았다. 양손을 활짝 벌린 녀석은 어느새 바로 내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아르 할아버지께서, 딱 한번만이라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좋다 고 하셨어. 그 어떤 일도 용서해주겠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함께 가자. 형을 죽이지 않을게. 누가 뭐래도 절대 우리 루브형을 해치 지 못하게 할 거야.” 아아, 무슨 짓을 하든 자신만은 용납하겠다니. 어쩌면 그렇게도 헌 신적이실까. 아르디에프님께서 그런 소리를 하셨다는 말인가. 그러 나 어찌하면 좋을까. 나와 형제들에게는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해 주지 않는다. 왜인지 아는가, 나의 동생이여. 네가 모두 죽여 버렸 기 때문이다! “이리와. 함께 가자.” 자신의 말이 나를 더욱 화나게 한 줄 모르는 녀석이 손을 활짝 벌 리고 바로 코앞에까지 다가왔다. 반은 검은색인 푸른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리 는 중이었다. 얼굴은 물기로 흥건해져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었 다. 그럼에도 활짝 웃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아는 착한 동생의 얼 굴이다. 문득 그 모습이 너무나 소중해 보여서 한번쯤은 다시 생각해본다. -진실 따윈 어찌되든 어때? 어쩌면 기회인 것도 같은데 그의 손을 잡을까? 배신자니 살인자니 하지만 실은 굉장히 좋아하잖아. 대답은 바로 나왔다. ‘싫어.’ 거창할 것 있겠는가. 나는 쭈욱 토라져 있었다. 카류는 나보다 왕 위가 더 좋다고 말했다. 그게 분해서 아무래도 그 손을 잡기가 싫 었다. 순간적으로 몸을 낮췄다. 옆으로 내리고 있던 검을 남은 한손으로 함께 쥐었다. 그리고 튕겨 오르듯 검을 들어 카류의 목을 노렸다. 녀석은 제 연극에 제가 심취해버린 건지 내가 검을 들고 있다는 사실은 의식하지도 않고 완전히 방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여기사가 재빨리 카류의 목덜미를 잡아 뒤로 당겼기에 내 검을 허공만 가로질렀다. 어쩐지 그렇게 온몸으로 허점을 보이고 있더라니 이 기사의 실력을 믿고 있었던 것일까. 과연. 과연 카류리드! “너는 그 오랜 옛날부터 위선을 떠는데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지. 아직도 기억해. 스스로의 손으로 죽인 어머님들의 무덤 앞에서, 그 분들은 천국에 계실 것이라 우리들을 위로했었지? 아아, 이번에도 역시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 대사였다. 만족하나?” 여기사와 몇 번 대치하다가 떨어져 나오며 비아냥 거렸다. 카류는 저쪽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앉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 었다. 이제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쿡쿡-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본 모습을 보이려나 싶어 조금 긴장했다. 비틀대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류가 땅을 보며 중얼거렸다. “알아. 어차피 형이 내게로 오지 않을 거라는 거 알고 있었다고.” 카류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여전히 울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전처럼 활짝 웃었다. “그냥 한번 제멋대로 말해보고 싶었을 뿐이야.” “…….”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아, 녀석의 연기가 너무 완벽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저렇게나 완벽한 연기라면 그냥 진실이라고 받아 들여도 좋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검을 들고 있었다. 오기가 생겨 카류에게로 돌진했다. 이제 와서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짓은 하기 싫었다. 카이라는 여기사가 카류를 보호하듯 앞을 막았다. 전혀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덤벼들었다. 그야 상대가 강하다고 바 로 꼬리를 말고 뒤로 물러서면 진짜 겁쟁이가 되지 않겠는가. 카캉-! “윽!” 내가 내려친 검을 막는 순간 여기사가 검 끝을 휘감아 위로 쳐들 었다. 거구의 기사에게서도 느낀 적 없는 강력한 힘에 나는 창피 스럽게 검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카이라는 기사는 바로 나를 죽이지 않고 목가에 검을 들이댔다. “목을 쳐라! 더 이상의 수치는 사양하겠다!” 그녀가 무엇을 기다리기에 이렇게 시간을 끄는지, 이제는 신경질 마저 나서 소리 질렀다. 하지만 여기사는 꼼짝도 않았다. 하긴 주 인의 명도 없이 움직이긴 힘들 것이다. 그 생각이 나는 즉시 고개 를 돌려 카류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다 검을 들고 달려드는 카류의 모습을 봤다. 내가 놓쳐버린 검을 양손으로 들고서 똑바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굉장히 놀라고 당황해서 가슴으로 검이 파고드는 촉감도 한동안 깨닫지 못했다. “카……!” 저도 모르게 입을 열다가 말을 멈추었다. 왜인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빨리 죽이라고 소리치던 주제에, 이런 카류의 행동에 왜 이 렇게나 놀라고 말았는지. 아마 녀석의 착한 동생 역이 너무 실감났기 때문에. 그런 녀석이 나를 찌르지는 못할 것만 같아서. 가슴팍 주변에서 고개를 숙인 카류의 모습을 보았다. 검을 쥔 손 너무 힘을 주어 뼈가 나온 마디 부분이 아예 하얗게 변해 있었다. 팔과 손은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심장 부근에서 오는 고통도 무시하고 시선을 간신히 아래로 내리 고 있자니 드디어 카류가 고개를 들었다. 흉하게 입술을 일그러뜨 려 울먹이는데다가 지금 보니 눈물로 얼굴이 꼬질꼬질했다. 먼지 가 날리는 밖에 있다가 울어버린 덕에 이렇게 된 모양이다. 몸을 껴안는 촉감을 느꼈다. 왠지 온 몸이 물 먹은 듯 힘이 없었 다. 오감도 굉장히 무뎌지고 있었다. 그러나 죽음의 경고에 두려워 하기 보다는 귓가에 얼굴을 묻는 카류의 움직임을 쫓기 위해 애를 썼다. 녀석의 말소리가 드디어 작게 들렸다. “…랑해. 루브형… 형을 정말 사랑해.” 카류는 그 말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갔 다. 정말이지 감미로운 거짓말이었다. 카류 녀석은 최후까지도 착 한 동생의 가면을 벗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 가증스런 행동은 어쩌면, 도리어 감사할 일일지도 모른 다. 카류가 나쁜 녀석이라는 증거는 어디에고 있었다. 그럼에도 착한 동생의 존재를 믿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일은 계속 저질렀느냐고 묻는다면, 착한 동생이 진짜 있었으면 하고 끝 없이 바랐기 때문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바람은 너무 깊고 카류의 눈물은 너무 사실적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진실’ 따윈 더 이 상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마지막 힘을 짜내어 손을 들어올렸다. 이미 눈앞이 암흑인데도 어 디서 솟은 힘인지 카류의 머리카락 같은 것을 잡을 수가 있었다. 이를 악 물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하는 것마저도 힘에 부쳐 온 인상을 일그러뜨려야했다. “카, 카류…….” 말이 제대로 전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카류리드…….”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주고 싶었다. “너를…….” 말을 이으려는 순간 가슴이 이상하게 휘저어졌다. 차마 말로 표현 하지 못할 아픔이 내 의지와 생각을 모조리 휩쓸어갔다. 본능적으 로 입이 크게 벌려졌지만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아… 이대로 죽 는 모양이다. 두려움보다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사랑한다.’ 이 말을 전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오기 따윈 버리고 솔직 해졌으면 좋았잖아. “…한단… 말…야…….” 잘 들리지 않는 말소리만 쓸쓸히 귓가에 남았다가 사라졌다. =========================================== 각종 흉기무조건 반사모드 최고치 발동 아잉~ 리플 하나 달고 가요 *^ㅇ^* 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Part 64 카뮤르?카이야 (1)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인 서류들을 보고 한숨을 폭 쉬었다. 왕성을 점령하고 났더니 가장 먼저 밀려드는 것이 각종서류. 가장 대표적 인 각 귀족들의 처분 등에서부터 시작하여 내게 쏟아지는 일은 한 계가 없었다. 그래그래, 힘이 없으니 이런 사무직에서라도 분발해야지. 하지만 그런 결심도 잠깐, 종이 위에 펜을 끼적이다가 툭 던져놓 고 허리를 쭉 뻗었다.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휭휭 검을 휘두 를 때 뒤에 숨어 기다리기만 한 주제에 뭐 한 게 있다고 팔다리 근육이 우둑우둑거렸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청색 계열의 보석들로 치장된 3단 샹들리에 가 엄청나게 화려하다. 땅의 궁 -전에 내가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궁- 에 치장된 각종 가구나 장식장들도 무지 화려한 편이었지만, 이곳은 한 단계 더 우아한 맛이 나는 것 같다. 사실 내가 보석이 나 귀중품 같은데 눈썰미가 없는 관계로 확신은 못하겠지만, 그래 도 이곳은 빛의 궁. 그 중 최중심부인 국왕이 사용하는 서재다. 당 연히 더 비싸고 좋은 걸로 치장하고 꾸몄겠지. 덜컥.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다. 곁에 붙어 조언을 해 주는 힐레인이 잠시 밖으로 나간 상태라 이 서재 안에 있는 것은 나와 카이뿐이었다. 나는 의자에서 팔다리를 쭉 뻗고 꿈틀대고만 있었으니 창문을 열 사람은 카이밖에 없었다. 그러나 카이는 웬만 한 자극이 없는 한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 “왜 그래? 자객이라도 있어?” 그럴듯한 추리를 해내며 몸을 돌려 뒤편의 카이를 보았다. 그러나 가볍게 생각하고 움직였던 나는 얼굴을 굳히고 아주 자리에서 일 어났다. 카이는 언젠가 보았던 것과 같이 몸을 앞으로 내밀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또 세뮤 머시기라는 드래곤이 널 불러?” 그녀의 곁으로 걸어가서 불만스럽게 물었다. 카이는 고개를 저었 다. “굳이 말하자면 틀렸다. 세뮤르?세이에는 그날부터 계속 나를 부르 고 있었으니까.” “그래? 참 오래도 무시했구나. 세뮤르도 엄청 기분 나쁘겠다. 너한 테 앙심이라도 품는 거 아닌가 몰라.” “앙심을 품을 만큼 서로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드래곤들이 이리 개인적으로 나돌지는 않았겠지.” 장난으로 흘리며 한 말에 카이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창밖으로 좀 내밀고 있던 몸을 되돌린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다녀오지.” “뭐?!?” 짧은 한마디에 얼마나 놀랐는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귀를 쩌렁 울릴만한 목소리였으나 카이는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대답했다. “왕성을 진압하였으니 위기는 넘겼다고 본다. 내가 떠나있어도 큰 위험이 닥칠 가능성은 낮겠지. 또한 세뮤르?세이에가 이리 오랫동 안 나를 부르는 데는 이유가 있을 터. 혹여나 중요한 일이 있을지 도 모르니 다녀오겠다.” “가지마.” 카이의 셔츠 끝자락을 꼭 쥐고는 부탁했다. 내 스스로를 보진 못 했지만, 엄마를 떠나보내는 어린아이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은 폼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가, 가지마. 내가 지금 이러고는 있어도 속으론 굉장히 불안해하 고 있는 것 알잖아? 어제는 루브형도 죽었고… 오늘은 카이형과 다른 형제들을 만날 예정이란 말이야. 네가 없으면 안돼. 응?” “그렇게 오래 걸릴 것이라 생각지도 않지만, 일단은 해가 지기 전 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하마. 그리고 정 불안하다면 형제들과의 만 나는 시간을 좀 더 늦춰라. 그 정도는 네 권한으로 충분하겠지.” 정오가 지났으니 해가 질 때까지는 최대 5시간. 하지만 그 시간도 싫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카이는 그런 나를 잠시만 말없이 쳐다보다가 자신의 오른손을 옷자락을 쥔 내 손 위에 올렸다. 손 등 위가 따스해져왔다. “그 맹세를 잊었는가. 이 카뮤르?카이야의 숨이 붙어있는 한 그 누 구도 너를 해하지는 못하리라. 나는 이 능력이 닿는 데까지 너를 수호하며 마지막까지 그 곁에 머무를 것이다.” 음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내용 탓인지 이번만큼은 강렬하게 들렸 다. 온몸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던 긴장이 한번에 스르륵 풀렸다. 과연 지고한 드래곤이신 그녀는 보다 효과적으로 내 기분을 풀어 줄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제야 옷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허리를 조금 숙인 후, 내 손등 위에 올려진 카이의 손까지 함께 들어 살짝 입 맞췄다. 따스 함이 입술로 전해져올 무렵 조용히 그녀의 앞에서 기원했다. “변하지마. 영원히 이대로 있어줘. 사랑해주지 않아도 좋고 특별히 소중하게 여겨주지 않아도 좋아. 대신 나 때문에 아파서도 안 되 고 슬퍼해서도 안돼. 관조의 여신인양 그 위에서 나를 무심히 내 려다봐줘.” 카이의 손이 내 머리를 쓸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가 굳게 다물어 진 입술을 열어 단호히 말했다. “내가 현재와 다르게 변화할 수 있다면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일 도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사랑했다. 그녀를 의심하는 일 자체가 모순되는 일인 것이다. 카이는 내 손을 놓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워프 마법 시전을 위한 캐스팅이라도 하려는 듯 눈을 살짝 내려 깔았다. 아 르 할아버지나 류온님은 워프 마법 하나 시전하는데 마법서 펼치 고 입을 중얼거리며 한동안 애를 써야하는데 말이다. 강한 그녀가 좋다. 몸은 물론 마음까지 바윗돌 같은 그녀는 누군 가에게 -나에게?- 휩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랑해.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아래로 차양처럼 드리워 있던 붉은 속눈썹이 살짝 들렸다. 그 순 간 방안의 중앙에 서 있던 그녀의 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워프를 사용해서 라루트 섬-세뮤르?세이에가 살고 있다는 섬-까지 가려는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부터 넓은 방안이 더 넓어보였다. 이렇게 혼자가 된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아, 불안해라. 그동안 애가 다 됐어.” 머리를 긁적이며 히죽 웃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그녀 를 의지로 삼았기에 평소의 나로 생활할 수가 있다. 아니면 양심 의 가책에 짓눌려서 예전에 스트레스성 위 질환으로 사망했을 것 이다. 정말 나 때문에 죽은 사람이 몇 명이야? 한번 세볼까? 괜히 스스로의 머리를 꽁꽁 쥐어박으며 의자로 걸어갔다. 아직은 처리할 서류가 한 무더기다. 힐레인이 오기 전에 나 혼자 할 수 있는 건 다 해둬야 그 잔소리에서 벗어나겠지. *** “이거 좋네.” 에민 차의 향이 오늘따라 묘하게 더 좋게 느껴져 잔을 내리려다 말고 한 모금 더 홀짝였다. 맛이 독한 차이기에 조금만 들이켜서 맛을 음미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오늘은 계속해서 한 모금씩 한 모금씩 마시다가 한번에 반이나 들이키고 말았다. 마실 때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느낌이랄까? 힐레인 녀석이 오 면 이 차 좀 많이 들여놓으라고 해야지. 똑똑. “전하. 힐레인공이 오셨습니다.” 힐레인은 양반되긴 그른 모양이다. 생각하자마자 바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그런데 이미 양반(귀족)이 되지 않았던가?- 내가 들어와도 좋다고 말하자 문이 열리며 힐레인이 안으로 들어 왔다. 그러나 녀석은 들어오자마자 내게 인사할 생각은 않고 인상 을 팍 찌푸린 채 방을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힐레인경? 뭘 하는 거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직접 물었지만 녀석은 무례라는 것은 생 각지도 않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문의 뒤쪽까지 샅샅이 훑어 보고 있었다. 난 조금 뒤늦게 힐레인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깨달았 다. “아아, 카이를 찾는가?” “아, 예…….” 그제야 힐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닫고 들어왔다. 무슨 일 이 있는가 싶어 심각해진 표정을 보자 웃음부터 나왔다. “카이는 다른 드래곤과 잠시 볼일이 있다고 나갔어. 하지만 날 지 키겠다고 맹세한 것이 있으니 금방 되돌아 올 거야.” “그렇군요.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했습니다.” “조금이 아닌 것 같던데.” 쿡쿡 웃으며 말하자 힐레인은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 소리를 냈다. 하긴, 화장실 갈 때도 따라붙는 카이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그런 놀라움도 무리는 아니다. 힐레인을 놀리는 것은 그만두지. “그건 그렇고, 카류리드 전하.” 내가 한번쯤은 봐주자고 생각하며 웃음을 지을 때 쯤, 녀석이 갑 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중요한 이야기가 나 올 것 같아서 손에 쥐고 있던 펜을 잉크통에 집어넣고 바로 녀석 을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만, 세렐리아 전하 및 다른 전하분들을 만나시기로 예 정해두신 시간이 되어갑니다. 전하를 뫼시러 이렇게 찾아왔습니 다.” “어?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해를 가늠해보았다. 카이가 나간 지 3시간 은 지난 듯 했다. “아직 카이가…….” 카이 없이 형제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조금 불안했다. 물론 지금 부터 만나러 가는 형제들이 루브 형처럼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벼랑 끝에 몰린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 있지는 않다. 유폐나 감시 등은 어쩔 수 없는 처분이지만, 그나마 여유가 있다고 할까. 하지만 카이세리온 형의 나에 대한 증오는 그 어떤 형제들보다 강 하다. 게다가 루브 형의 죽음을 접했을지 모를 그들이 나를 향해 무슨 말을 하게 될지. 역시 불안하다. 당장에 들을 말이 무서워 영원히 그들을 만나고 싶지 않을 정도다. “아, 카이야님께서 오실 때까지 시간을 미루시겠습니까?” 힐레인이 엘프 답게 먼저 내 속을 알아채고 제안했다. 나는 손을 입가에 대고 생각에 들어갔다. “아니, 그냥 만나겠어.” 결심은 금방 섰다. 카이 없이는 너무 불안해서 어떻게 튀어나갈지 알 수 없는 나이지만, 조금은 홀로 설 연습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되돌아 올 것이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몇 시간만 참으면 그녀의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가지.” 고개를 한번 끄덕 인 후 걸음을 옮겼다. 힐레인은 한발자국 물러 서 내가 먼저 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왔다. 뒤를 따르는 자가 카이가 아닌 것이 조금 이상한 느낌이었다. 바로 문 직전까지 걸어갔을 무렵 깜빡 잊은 것이 생각나서 책상 위에 마시다 만 차를 가리켰다. “아, 맞어. 저거 있지? 매 시간마다 차는 저것으로 들려주겠어? 맛 이 좋군.” “에민차 말씀이십니까? 강한 향의 차는 그리 좋아하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오늘 굳이 에민차를 권해드린 것은 안정에 효과 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안정이라. 그게 효과가 있긴 있나봐. 영 기분이 가뿐한걸.”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힐레인의 대답을 들으며 가뿐히 방을 나섰다. ============================================== 뒷부분은 좀 더 쓴 다음에 올릴게욥 ^^; 그.. 그리고 리플 달구가요.......-_-;; 흑의 황제 쓰다보니 이 말이 입에 붙었드아; 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Part 64 카뮤르?카이야 (2) 형제들이 감금된 곳은 세렐리아 누나가 있던 바람의 궁이었다. 본 래는 각자가 거처하던 궁에 감금된 채였으나 나와 만나기 위해 한 쪽으로 모인 상태였다. 그들이 감금되어 있다는 방을 향해 복도를 걷노라니 살벌하게 서 서 감시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거기까진 그러려니 하 고 넘어가겠는데 조금 먼 곳에서 벽에 기대선 류온님과 에르가 형 의 모습까지 보이지 않겠는가. “철저하군. 무슨 마지막 전장에 임하는 것도 아닌데 류스밀리온님 까지 모실 필요는 없지 않아?” “만약을 위해서입니다. 게다가 전하께는 마지막 전장과도 같은 곳 이 아니신지요.” 힐레인이 뒷말은 내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뭐, 틀리지 않은 말이긴 하지만 에르가 형이나 류스밀리온님이 와서 할 일이 란 게 뭐가 있다고. “카이야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신 것입니다. 혹 여나 불순한 무리가 생겼을 때를 위한 대비책으로.” 힐레인의 말을 들은 후에야 나는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 다. 하긴,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겠지. 형제들이 갇힌 방은 물의 궁에 모일 때 자주 사용했던 응접실 같 은 곳이었다. 조금 떨어진 벽에 불량하게 기대고 있던 류온님이 일어나서 인사했다. 그나마 에르가 형도 제대로 서있는데 이 나라 유일의 8서클 마법사라고 뵈는 게 없는 건가. “오셨습니까. 그건 그렇고 카이야님께서는 무슨 용무로 갑자기?” “카이가 전부터 다른 드래곤이 부르고 있던 것을 무시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일이 대강 정리된 듯하자 잠시 그를 만나러 간 것입 니다. 곧 되돌아오겠지요.” 에르가 형과 류스밀리온님도 막 카이가 없음을 깨달은 힐레인처럼 불안한 듯 얼굴을 하다가, 내가 가볍게 말하자 그나마 숨이 놓인 다는 표정을 했다. 그야 카이가 떠나 가장 아쉬운 사람은 바로 내가 아닌가. 내가 괜 찮다고 말한다면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대충 그분과 이야기가 끝난 듯하자 일단 뒤로 정렬하고 있던 기사 들을 향해 돌아섰다. 곧은 자세로 내 명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손 을 내밀어 말했다. “먼저 말하겠지만 이번에도 들어가는 것은 나 혼자다.” “예? 하지만 그건…….” 이곳의 호위를 책임진 에르가 형이 당장 반발했다. 류온님도 인상 을 잔득 찌푸리고 반대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 부분만은 고 집을 꺾을 생각이 없었다. “먼저 방안의 상황이나 형제들의 몸을 철저히 수색해두었겠지. 그 렇다면 나 홀로 들어간다 해도 큰 문제는 없는 것이 아니던가? 그 렇지 않다면 자신의 임무에 소홀히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에르가 형이 힐끗 옆으로 눈길을 주며 류온님에게 도움을 요청했 다. 참으로 건방지게 팔짱이나 끼고 있던 그분은 한숨을 팍 쉬더 니 말했다. “전처럼 일경-1시간-이 넘도록 말없이 방안에 머무셔서 신하들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지 마시고 이번 이야기는 빨리 끝내도록 하십 시오.” “류스밀리온님의 충고, 잊지 않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을 듯 하면 바로 부르도록 하죠.” 웃으면서 대답한 후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가볍게 시작한 걸음 과는 달리 차가운 문고리의 촉감이 촉매라도 된 듯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려오기 시작했다. 심장의 박동이 머리에까지 닿아 쿵쿵 울 렸다. 달칵-. 고리가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자마자 중앙에 자그마한 탁자를 보았다.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 듯 놓여진 소파로 낯익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탕. 문을 닫은 후 천천히 걸어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내가 보이는데서 정면으로 앉은 것이 카이세리온 형과 블라디미르 누 나. 그리고 왼편으로 앉은 것이 키예프 형과 세렐리아 누나였다. 키옌형은 화가 난 얼굴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고, 세라누나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채, 미르누나는 비스듬히 기댄 카이형을 보호 하듯 안은 채로 있었다. 카이형은 고개를 푹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카이…형. 어디 아픈 거야?” 금방 카이형이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간신히 말을 뱉고 나자 손발이 짜릿해져온다. 그래, 바로 눈앞에 앉은 그가 진정한 ‘카이’ 라는 이름의 주인이었 다.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그토록 안타까워했던. 가장 많이 변했고, 그만큼 상처받았을 사람이 바로 카이형인 것이 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나가! 걱정하는 척 할 필요 없어!” 카이형의 어깨를 꼭 붙든 미르누나가 날카롭게 소리 질렀다. 굳게 각오하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 걸어서 중앙의 소파까지 걸어갔다. 하지만 차마 그들과 가까운 자리까지는 다가갈 수가 없 어서 가장 떨어진 문가의 자리로 향했다. “우리들에게 원하는 것이 뭐야!” 소파에 앉을까 하던 쯤에 키옌형이 말했다. 일단은 앉기라도 한 후에 이야기를 하자 싶어 말없이 자리에 앉았더니 이번엔 세라누 나가 히스테릭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렇게 모이게 한 이유가 뭐냐고! 이렇게 모아서 한꺼번에 없애 버리려고? 루브 오빠를 죽인 것처럼?” 세라누나의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나도 움직임이 잠시 멈추어버렸 다.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어찌 변명한 거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침묵했다가 안타깝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더 이상은 죽이지 않아…….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원 히 보지 않을 수는 없는 거잖아.” “…….” 대답은 없었다. 대신 형제들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답으로 받았다. ‘더 이상은 죽이지 않는다.’ 이 말이 형제들을 크게 분노시킨 듯싶었다. 루브형을 죽였다는 사 실을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형제들이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당장이라도 뒤돌아 뛰쳐나가고 싶 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뻔뻔히 앉아 있을 만큼의 철면피가 되기엔 아직 갈 길이 먼 모양이다. 그때 카이형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리고 미르 누나의 어깨에 쓰러진 듯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 다. 물먹은 듯 죽 늘어져 힘없는 움직임이었다. “죽였다고 말한 거지?” 카이형이 질문했다. 직설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아 내가 우물주물 하고 있자 그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루브…형님을 죽여?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모자라… 형님까지 죽 였어?” 추궁하듯 묻고 있는 형의 어투는 예전과는 달리 조금 느릿했다. 그러나 말소리보다는 겉모습의 이상함을 먼저 깨달았다. 카이형은 이 이년동안에도 거의 성장한 티가 없어 다소 왜소해진 것만 빼면 그대로였다. 그러나 크고 깨끗했던 눈동자는 잔뜩 핏발 이 서 무서울 정도로 인상이 변해있었다. 근 며칠간 잠도 자지 못 한 채, 무언가에 미치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는 증거였다. “카이형… 괜…찮은 거야?”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런 마음에 질문을 던지자 형이 한쪽 눈을 일 그러뜨리며 비웃음을 보였다. “하, 하… 네가… 나를 걱정해?” 그가 한쪽 손으로 소파를 짚어 몸을 지탱하며-그마저도 몹시 불안 해보였다- 앞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아직 내겐… 이용할 가치가 남은 모양이지?” “삐뚤게 보지 마. 그저 순수하게 걱정한 것뿐이니까.” 그럴듯한 타개책을 낸다거나 변명을 하지는 못하되, 솔직한 마음 이나마 전해보자. 루브형에게 했던 것처럼 그런 마음가짐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좋 은 의도에서 시작된 것과는 달리 카이형의 인상은 대번에 일그러 졌다. “또 해볼 셈이야? 루브형의 죽음도 오해라고 소리치며 네가 죽인 것이 아니라고 말할 테냐?” “루브 형은… 내가 죽인 것이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자마자 목이 바짝 타며 머리가 욱신거려왔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을 해서 그런 것일까. “루브 형은 내가 죽였어?” 카이형이 내가 한말을 그대로 따라하며 되물었다. 마지막 말끝을 올릴 때는 거의 쉰 듯한 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카이형의 숨이 장거리 달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를 보고 미르누나가 걱정스럽게 카이형의 등위로 손 을 얹었다. 그러나 카이형의 숨은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 히려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혀…형……!” “시끄러워!!” 내가 불안함을 참지 못하고 말을 걸려하자 그가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다. 목소리가 오랫동안 고함이라도 지른 사람처럼 목소리가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제발 이야기를…….” “죽였다고? 네가…헉헉… 네놈이 감히 우리 앞에서 그딴 소리를 지껄여!?” 어떻게든 그를 진정시켜보려고 말을 걸어보았지만 오히려 역효과 인지 카이형은 그저 바락 소리를 지를 뿐이었다. 분노에 절정에 달한 그가 멱살이라도 잡겠다는 태세로 소파를 강하게 치며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내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 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카이!” “카이형!” 형제들의 걱정스런 외침 속에 나 역시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일어 나 카이형에게로 다가가려 몇 발자국을 옮겼다. 그러자 카이형이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비명처럼 말했다. “다가오지 마!” “의원을 불러줄게. 어디가 아픈 거야?” “닥쳐! 사라져! 꺼지라고!” 강하게 거부하는 카이형의 얼굴색이 점차 백짓장처럼 변해갔다. 미르누나도 무언가 형이 이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양팔 로 카이형의 어깨를 껴안았다.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그녀 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저 카이형을 보호하듯 안고 웅크 리기만 했다.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죽였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두 번 다시 놈을 볼일도 없었을 텐데… 죽여 버렸어야… 죽여 버렸어야….” 카이형은 무서운 것을 본 아이처럼 푹 숙인 머리를 꼭 감싸 쥐고 그저 같은 말만을 중얼댔다. 계속해서 그의 입에서 이어지는 것은 ‘죽여야 했는데.’,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 어떤 장황한 저주의 말보다도 이 짧은 말 한마디가 아프게 가 슴으로 꽂혀든다. 욱신욱신-. 두통이 조금씩 더 심해져오는 것 같아 싸늘히 식은 손으로 뜨거운 이마를 감쌌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쉽게 고통이 가라앉지 않는다. 어찌하면 좋을까. 가엾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좋을까. “있지…….” 내가 손을 들어 말하자 카이형을 제외한 미르누나, 키옌형, 세라누 나가 이쪽을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한번 웃어 보인 다음, 소파에서 일어나 뒤쪽으로 돌아 나왔다. 형제들이 내 행동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카이형과 미르누나가 바로 앞에 섰다. 미르누나가 옷자락도 닿기 싫다는 듯 최대한 다리를 소파 쪽으로 웅크렸지만, 카이 형은 아 랑곳 않고 계속 무서운 중얼거림만을 계속하고 있었다. “카이형. 내 말 들어볼래?” 내 말이 떨어지자 미르 누나 품에 안겨 있던 그의 몸이 크게 움찔 했다. 거의 무아지경으로 혼자 중얼거리느라 내가 가까운 곳으로 오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무서워 하지마.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좋은 제안 하나 하려고.” 내게 저주를 거는 동안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인지 카이형이 머리에 대고 있던 손을 조금 치웠다. 하지만 떨리는 손이라던가 거친 숨 소리는 여전했다. 가여운 형의 모습에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말했다. “날 죽이고 싶지? 그러니까 형의 손으로 죽이게 해줄게.” 과연 솔깃한 제안이었을까. 이번에는 반응이 있었다. 카이형이 잔 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닥쳐......” “거짓말이 아냐. 지금 당장은 그렇지만, 앞으로 내 후계자가 생기 고… 한 십년, 아니, 십 오년 정도 후에는 꼭 죽어줄게.” “이 이상 우리들을 우롱하지 마라.” 이번에 한 대답은 키옌형이었다. 약간 떨리고 있는 낮은 톤의 목 소리가 극도로 화가 났음을 반증했다. “놀리는 것 아냐. 이런 시기에 죽으면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너 무 미안해지는데다가, 힘겹게 해쳐온 길이 억울하기도 하고 말이 지… 그래서 지금까지 왕이 되어보겠다고 살아온 거지만... 하지만 정말, 아주 마음 속 깊은 곳의 진심은 죽어도 별로 상관없다고 생 각하고 있어.” “빌어먹을! 닥치고 꺼져!!” 카이형이 벌떡 몸을 일으켜 내 멱살을 잡았다. 순간 내가 멱살을 잡은 작은 손을 꼭 쥐어 형을 붙들었다. “나를 봐.” “이것 놔!” 질색을 하는 놈에게 붙들렸으니 당연히도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있는 대로 힘을 주어 그를 속박하며 형을 바라보았다. 핏발이 선 푸른 눈동자가 겨우 나를 향했을 무렵 단호하게 말했다. “약속이야. 이 손에 검을 쥐어줄게. 뼈까지 갈라낼 수 있는 날카로 운 검을 줄게. 아픈 것은 질색이지만 딱 한번이라면 형이 분을 풀 릴 만큼 내 피를 보여주겠어.” “놔!!” 카이형이 조금 전까지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대던 사람의 힘 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만큼 강한 힘으로 내 손을 떨쳐냈다. 덕에 나까지 뒤로 중심을 잃으며 비틀대야 했다. 뒤로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 에 선 형이 잡혔었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으스러져라 강하게 쥐고 떨고 있었다. “형......” “꺼지라고!!” 카이형이 크게 소리를 지른 순간이었다. 갑자기 코 주변이 후끈해 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옷 주변에 피가 한 방울 떨어져 있었다. 코피가 난 듯 했다. “하하, 웬 코피?” 손등으로 코 주변을 슥하고 닦아냈다. 그런데 손등에는 이상할 정 도로 엄청난 양의 피가 묻어나왔다. “어?” 한손으로 코 아래를 만져보고서야 코피가 그냥 흐르는 정도가 아 니라 아주 펑펑 쏟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주위의 형제들도 갑작 스러운 상황에 굉장히 놀란 얼굴로, 카이 형도 얼굴을 감싸고 있 던 손을 내리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에, 이게 왜 이래? 어?” 내가 생각해도 이 출혈은 너무 이상했다. 그러다 귓가가 조금 따 끔해서 만져봤더니 거기에서도 피가 나고 있는 게 아닌가? “설마... 또......?” ‘독살?’ 이라는 말은 밖으로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갑자기 머리가 심하게 아파오기 시작했기에 더 이상의 사고를 지속할 수가 없었 다.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땅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것 역시 피였다. 눈알이 빠질 것만 같아 억지로 눈꺼풀을 닫았다가 열었다. 코와 귀도 마찬가지라 손으로 꾹 눌러주고 싶었지만 비명을 지를 여유 도 없는데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 하하......” 문득 상황에 어울 리가 않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 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반사적이었다. 카이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웃고 있었다. 입술을 움찔움찔하다 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조금씩 웃음소리를 내었다. “카... 카.......” 떨리는 턱으로 그를 부르려 했다. 그런데 ‘카이’ 라는 한마디도 하 기가 벅차 벌벌 떨기만 했다.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서......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작게만 키득거리던 형이 점점 소리를 키우다가 곧 광소를 터뜨렸 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젓더니 다시 이마로 손을 가 져가며 크게 웃었다. 아파. 아프다. “형......” 눈가로 무언가가 주륵 흘렀다.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붉은빛 이 갑작스럽게 옅어지는 것이 아마 피가 흘려 내린 모양이다. “하하, 하하하!!” 웃음소리가 욱신거리는 귓가를 심하게 때렸다. 그것에 더 고통을 느낀 양 머리에 더욱 강한 충격이 몰려왔다. 서있기도 벅차서 비 틀거리며 앞으로 걸었다. 걸었다기보다 쓰러지고 있다는 말이 옳 았다. “형......”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형......” 광소에 나의 부름은 묻히고 만다. 그가 웃고 있다. 그저 웃는 것 외에는 어찌 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이다.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했다가 다시 고개를 저으며 웃는다. 아프다. 아프다. 견딜 수 없이 아프다...... “형......” 소용없음 알면서도 다시 한번 그를 불렀다. 동시에 균형을 잃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박았다. 입이 그의 옷에 닿아 그렇지 않아도 우 울한 목소리가 더욱 음울하게 들렸다. “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 다리의 힘이 풀려 천천히 쓰러져 내렸다. 카이형의 옷에 가려 더 이상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아프다. 견딜 수 없을 만큼. 견디고 싶지 않을 만큼. 어쩌면 이리도 가슴이 아픈지. 커다란 울림은 천천히 작아져갔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4 카뮤르?카이야 (3) 이상한 광경에 눈을 크게 키웠다. “에, 이게 왜 이래? 어?” 카류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얼굴로 코를 닦아낸 손등을 바라보았 다. 대량으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코에서 끝나지 않고 귀 로 이어졌다. “설마... 또......?” 카류는 말을 잇지 못했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 다. 크게 치 뜬 눈에서도 어느덧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뿜으려는 듯. 독살? 그런 생각이 스치는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려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 생각을 미처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내 이성을 그것을 붙잡는다. 무엇을 하려고? 카류가 독을 당했으니 도와달라고 말하려고? 살려 달라고 말하려고? 앞선 카이의 등을 지나 카류를 다시금 올려다보았다. 피다. 눈, 코, 귀에서 온통 피가 흐른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로 고통에 겨 워 온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죽어, 이대로는 죽을 거야! 도움을 요청해야 해! 카류를 구해야 해? 구하고 싶어? 하지만! 정말 구해야 하는 건가!? 우리들의 어머니를... 루브오빠를 죽인 녀석을!? “하... 하하......” 찰나의 시간 동안 끝없이 이어졌던 의문의 꼬리가 누군가의 웃음 소리로 인해 끊어졌다. 음산한 웃음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 리고 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보이는 등이 살짝살짝 떨려왔다. 카이가 피식피식 웃고 있 었던 탓이다. 이미 옷깃까지 피로 축축이 젖은 카류를 보고 카이 가 웃었다. “카... 카.......” 꼼짝도 못할 듯 그 자리에 박혀 있던 카류가 고개를 들어 카이를 부르려 했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는지 끝내 말끝을 맺지 못했다. 대 신 머리를 쥔 손에 힘을 더욱 꽉 주었다. “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큰 웃음소리 바뀌었다. 고개를 저었다가 이마로 손을 가져가며 큭큭 웃었다. 무척이나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듯한 행동이다. 그래, 그렇잖아. 우리들의 어머니와 상냥한 루브오빠를 죽인 녀석 이 죽어가고 있지. 처참하게 피를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지. 즐거운 일이잖아. 통쾌한 일이잖아. 자, 웃어. 웃는 거야. “하... 하......” 그러나 웃음은 입안에서 맴돈다. 웃음소리를 뱉어내려 할 때마다 온몸의 피가 싸늘히 식는다. 차가운 손과 발은 바싹 말라 먼지로 사그라질 것 같다. 세라도, 키옌도... 우리들은 그 누구 하나 감히 웃을 수가 없었다. “형......” “하하, 하하하!!” 카류의 작은 부름이 나를 깜짝 놀라게 한다. 카이의 커다란 광소 는 더욱 놀라도록 만든다. 작은 등이 웃음소리에 맞춰 들썩들썩 움직인다. 더욱 더 고통스러 워 해보라고 말하는 것일까. 어서 내 눈앞에서 죽어보라고? 그래? 정말 그런 거야? 카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웃을 수가 있지? 이토록 가슴이 아픈데. 피라도 토할 것 같이 괴로운데. “형......”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형......” 카류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카이에게로 걸어갔다. 그러나 이내 힘 을 잃고 앞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얼굴을 카이의 품에 묻은 채로. 애처롭게 형을 부르는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방안에 웃음소리만이 가득 찼다. 간간히 들려오던 카류의 목소리 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은 탓이다. 갑작스레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이 상 황이 믿기지 않아서 눈을 끔뻑거렸다가 앞을 다시 보았다. 카이의 앞에 무릎을 꿇은 자세로 카류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조 금 전부터 일으키던 경련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거친 숨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 “하하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카이가 자신의 다리에 기대고 있던 카류를 발로 차듯 밀어 보내고 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소파에 걸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카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웃음소리는 어느덧 비명이 되어 있었다. 비웃듯이 이마에 대고 있던 손으로 살을 쥐어뜯었다. 다리와 팔로 온몸을 보호하듯이 웅크리고 할 줄 아는 것은 비명지 르기 뿐인 양 소리를 지른다.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 역시 우리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 고. 어찌 감히 카류의 죽음 앞에서 웃을 수가 있을까. 심장이 갈가리 해지고 말 것이다. 조각조각 흩어져 흔적조차 남지 못할 것이다. 카이는 몇 번이고 수하들을 불러 카류의 암살을 명령했다. 그러나 결코 그의 시체를 가져오지 못하게 하였다. 입에서 나오는 말로야 몇 번이고 상대를 죽일 수 있다. ‘저주하겠 어, 사지를 찢어줄 테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그러나 실제로 그의 죽음을 담담히 견딜 수 있는 자는 몇 명이나 될까. 카이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알았다. 카류의 죽음 앞에서 자신이 견디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만약 시체가 있다면 없애버리라고 했 다. 자신의 눈으로는 결코 그의 죽음을 확인하지 않고자 한 거다. “우리 가엾은 카이......” 아직까지 비명을 지르고 있는 카이를 팔로 감싸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야!!” 카이의 비명소리가 몹시 커서 밖에서 대기하던 자들이 우루루 안 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중 분홍색의 노 마법사가 카류의 시체 를 가장 먼저 발견하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갔다. 코밑에 손을 댔다가 목을 짚었다. 그 다음엔 귀를 왼쪽 가슴에 가 져다대었다. 눈을 크게 뜬 후에 일어나서는 멍한 움직임으로 카류의 뺨을 짝 하고 때렸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기겁을 했으나 다시 한번 손을 들어 그만 일어나라는 듯 뺨을 한번 더 쳤다. “류스밀리온님!” “말도 안돼!!” 에르가라던 초록머리의 기사가 팔을 붙들자 마법사가 대뜸 크게 소리를 질렀다. “말도 안돼!!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 고!!!!!!!!!” 카류의 얼굴을 향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그의 비명을 듣더니 이번에는 에르가가 카류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법사가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코밑에 손을 대고 가슴에 귀를 대었다. 차 차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갔다. “이럴 수는 없어.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아르까지 죽여 가며 여 기까지 왔는데! 그런데 네놈이 죽는다는 말이냐!! 어떻게 지금 네 가 죽을 수가 있단 말이야!!!!” 마법사는 거의 이성을 잃은 듯 했다. 카류의 죽음은 제일먼저 숨 겨야 일일 텐데도 소리를 높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에르가도 조 금씩 떨고만 있다가 우리들을 발견하고는 무서운 얼굴로 이쪽으로 걸어왔다. 하지만 이내 그러한 자세도 조금씩 누그러들고 말았다. 자신들이 들어온 것은 카이의 비명 때문이었다. 그리고 카이는 여 전히 쉰 목소리로 웅크려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자신이 화를 풀 어야 할 상대가 우리가 아님을 금방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떨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가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크 게 화가 난 얼굴로 다시 카류 쪽을 돌아보았다. 류스밀리온이라는 마법사처럼 뺨이라도 쳐볼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카이가 지쳐 기절해버리고 나자 주변은 완전한 침묵으로 바뀌었 다. 그렇게 숨소리도 들리지 않은 고요 속에서 상당한 시간이 흘 렀다. “카이야님!” 갑자기 가장 문에 가까이 서있던 어떤 기사가 무언가를 보더니 다 급히 소리쳤다. 그 말소리가 ‘카이’ 와 비슷해서 나는 물론 형제들 이 어리둥절하여 품안에 기절해 있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류의 시체 곁에 있던 류스밀리온과 에르가는 이쪽이 아닌 문 쪽 을 쳐다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문으로 누군가가 오고 있었다. 우리들의 카이가 아닌 또 다른 카 이가. 붉은 색의 긴 머리카락이 루브오빠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미인이 었다. 아마도 소문의 여기사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일개 기사일 뿐 인 그녀는 나라제일의 8서클 마법사나 우리들을 보면서도 고개를 뻣뻣이 세운 채로 거만히 서있기만 했다. 단지 눈만 아래로 내려 카류의 시체를 보기만 하던 그녀의 입에서 무덤덤한 말이 흘러나 왔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로 죽어버렸군. 내가 떠나고 4경도 채 지나지 않았을 텐데.” 깜짝 놀란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당장에 에르가가 튀어 나가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카뮤르?카이야!!” “놓고 이야기 하지.” 강한 힘을 가진 남자가 멱살을 잡는데도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조 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이상하리만치 고압적인 자세로 말 을 하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여기사가 아니었던 것일까? “닥쳐! 카류를 지키겠다고 맹세했잖아! 그 어떤 위험에서도 지키겠 다고 맹세했지 않나!! 드래곤의 맹세라는 것이 고작 이런 것이었 나!? 살려내! 도로 살려내란 말이다!!!!” “알겠다. 살려내지.” 우리들이 드래곤이라는 말에 놀랄 틈도 없이 그녀가 에르가의 손 을 떼어내며 너무나 간단히 대답했다. 카이의 멱살을 잡던 자세로 양손을 멍하니 들고만 있던 에르가가 홱 고개를 돌리며 소리쳤다. “사, 살려줘? 정말? 드래곤이란 죽은 자도 살려낼 수 있다는 말 야!?” “그렇다.” 눈을 크게 뜨고 여기사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무지 믿기지 않 는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거짓말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기쁨 때문인지 아쉬움 때문인지 심장이 격하게 날뛰었다. “자리를 좀 비켜주겠나?” 여기사의 간단한 여청에 노마법사가 깜짝 놀라 카류의 곁에서 물 러났다. 모두가 고요히 지켜보는 가운에 여기사가 한쪽 무릎을 굽 히고 앉았다. 카류의 몸을 손으로 슥 한번 훑던 그녀가 말했다. “뇌가 가장 많이 상했군. 하필 융합되면 가장 곤란한 부위라니... 운이 없는 듯 하면서도 운이 좋은 녀석이로구나.” 보통사람이라면 어깨라도 한번 들썩일만한 느낌이었지만, 그녀는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오직 무표정만을 고수했고 말투 또한 그 어 떤 음의 고저도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내려 카류를 향해 이야기라도 하듯 말을 시작했다. “너는 대단히 특이한 존재다. 십 만년을 살았지만 너처럼 이상한 녀석은 본적이 없지. 드래곤 피어를 극복하는 평범한 소년이라니, 그보다 흥미가 동하는 일이 또 있을까. 어쩌면 수십 세기 동안 무 감각해져 온 나마저도 흔들리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홀로 질문해보던 그녀가 무심히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없지.” 단호한 부정의 말에 영문을 모르면서도 깜짝 놀랐다. “분명히 너의 특이한 사상이나 말 따위는 몹시 흥미로울 것이다. 부서질 듯한 약함 속의 모순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가슴은 동하지 않는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한 겹의 막 으로 씌워진 회색의 세계에 너 역시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는 하나의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그녀가 검지를 들어 카류의 팔을 꾹 눌렀다. 진실로 무슨 고기라 도 만져보듯이. 이제 곧 이 나라의 왕이 될 그에게 있어 이보다 심한 모욕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주위 사람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그 행동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지고한 드래곤이라 믿고 있기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눈을 감았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무언가 를 회상하기 위한 움직임 같았다. “십 만년을 살아왔다. 만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고통의 ‘싫음’ 마 저 느낄 수 없는 무감각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무감각함은 내 게 생의 의미를 빼앗아 갔다. 근 삼백년간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 지 않았을 정도이지. 그러한데도 무엇 때문에 살아왔냐고 묻는다 면 죽을만한 일이 없었던 탓이다.” 눈을 뜬 그녀가 카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카류의 머리카 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자, 이제 맹세를 지키마.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네가 죽는 일은 없다고 말했었지? 그러니 지금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나의 목숨 을 너에게 주겠다. 알겠느냐. 너를 살리기 위해 나는 죽는다. 나는 너의 탓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뭐, 뭐라고!?” 문가에 서있던 에르가가 앞으로 몇 발자국 걸어 나오며 소리 질렀 다. 그러다 감히 드래곤인 그녀의 목깃을 잡아당기며 다시 한번 소리 질렀다. “무슨 이야기가 그렇게 돼? 그게 무슨 헛소리야!?” “말 그대로다.” 무표정한 얼굴을 돌려 에르가를 올려다보며 그녀가 말했다. 에르 가는 한동안 할말을 차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로 서있었다. 점점 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수치심이 아닌 분노로 인한 것이었다. 어 느새 귓가까지 새빨갛게 변한 그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화를 토해내듯 버럭 소리 질렀다. “제기랄---!! 처음부터 카류를 이용할 셈이었구나!! 무감각한 생을 끝내기 위해!! 죽을 이유를 만들기 위해! 이 빌어먹을 도마뱀!! 네 놈, 네놈이 어떻게!!” 그의 입에서 폭언이 쏟아져 나왔다. 덕에 나는 물론 주변의 사람 들이 저도 모르게 헉- 숨을 삼켰다. 에르가의 화남을 이해하면서 도 감히 그러한 행동을 용이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행히 드래곤은 에르가의 폭언에 화내지 않고 담담히 고개만 저었다. “오해하지는 말거라. 무감각하기에 생의 무의미함에 괴로울 것도 없다.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나는 맹세를 했고, 카류는 겨우 3경이라는 시 간동안 죽음을 맞이했다. 분명 그 짧은 시간동안 카류가 죽을 수 도 있으며, 그것을 이용하여 이 삶을 끝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었다만, 그 모든 일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오로지 카 류의 운이다.” 말을 끝낸 그녀가 자신의 옷깃을 움켜쥐고 있는 에르가의 손을 잡 아 확 떼어냈다. 에르가는 얼이 빠진 것처럼 뒤로 주춤 물러난 채 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녀가 다시 카류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결코 듣고 있을 리 없 는 시체를 향해 조금 전처럼 말을 건네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 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때문에 이것은 너에게 꽤나 유 감스러운 일일 테지. 목숨을 바칠 필요 없다고 울부짖을 것이 눈 에 훤하구나. 아주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그녀가 몸을 숙였다. 어깨위로 붉은 머리칼이 스르륵 흘러내리며 카류의 얼굴을 덮었다. 얼굴을 바짝 카류의 얼굴 가까이로 내린 잠시 멈추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머리카락에 가려 카류와 그녀가 잘 보이지 않자 저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조금 내밀었다. 그녀가 카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 기 직전, 가만히 말했다. “그다지 미안하지도 않구나.”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 가슴이 순간 철렁할 정도로 차가운 말이었 다. 진실로 그녀가 카류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파삭-. 키스가 조금 이어지나 싶었는데 갑자기 카이의 몸이 가루와 같은 입자로 흩어졌다. 그리고 맞닿아 있는 카류의 입술로 빨려 들어가 듯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 있던 옷가지들이 후두둑 땅 에 떨어져 내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걸음, 한걸음 걸어 앞으로 걸어갔다. 가슴이 올라간다. 그리고 조용히 내려온다. 눈은 뜨지 않았지만 편 안한 잠에 빠져있는 카류가 홀로 그곳에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5 부활 햇볕이 따가워 침대시트를 젖히고 부스스 일어났다. 어딘지는 딱 히 모르겠지만 온몸에 이물질이 낀 것 같이 이상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딱히 불쾌하다는 느낌은 아니랄까? 어제저녁 내가 뭘 했었는지를 멍하니 생각해보다가 일단은 먼저 기지개를 펴며 길게 하품을 했다. “으아아아암~” “깨어나셨습니다!!” 하품을 잘 하다가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턱이 턱 빠지고 말았다. 고개를 돌리자 류스밀리온님에 에르가 형, 딜티에 히노 선 배. 기타등등...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웅성웅성거리고 있는 거다. 순간 너무너무 황당했지만 금방 자신의 추함을 깨닫고 침착 하게 오른손으로 턱을 탁 쳐서 도로 끼워 넣어주었다. 아, 턱 아파라... “괘...괜찮으십니까!!”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전하!” “카류리드님!!” 나는 영문을 몰라 미간을 좁혔다. 턱이 잠시 빠졌다가 들어온 것 으로 이렇게 호들갑을 떨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먼저, 왜 이들이 이렇게 내 방에 모여 있는가 하는 것에 더 문제의 초점을 맞추었다. 단체로 이런 무례한 행동을 감행하는 저의가 뭔지. “잉?” 하지만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깨어날 때부터 느꼈던 것. 주위에 낀 이물질이 잠이 깨면서 좀 더 분명히 피부에 와 닿았던 것이다. 이것은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랜 옛날에 몇 번 경험한 적 이 있는 것, 바로 마나였다. 그때는 남이 일부러 움직이게 해주어 야 겨우 그 존재를 깨닫곤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없어도 충분 히 자각이 가능했다. 어째서 이런 당연한 것을 못했는지 의문까지 들었다. 시트를 완전히 밀어내고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렸다. 어딘가 심각 해 보이는 내 표정에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내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들을 마주바라보아 주다가 고개를 갸 웃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저러나 하는 얼굴을 했고, 몇몇은 함께 고개를 갸웃했다. 더 이상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손을 내밀었다. 짧은 공식을 계산 해낸 다음에는 바로 마나를 움직였다. 내 손에 모인 그것들이 소 용돌이치며 짧은 빛줄기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쾅-! “으악!?” “에엑!?!” “아아아니!?” 사람들이 순간적인 폭발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중 류온님은 경악의 경악을 했다. 그가 뭐라 말도 못하며 떨리는 손 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제 곧 왕이 될 자에게 저 무슨 무례한 짓인가. 그러나 관계없었다. 머릿속으로 무언가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 고 있었다. 처음에는 밑도 끝도 없는 짧은 단어. 그것은 빠르게 자 신의 조각을 찾아 좀더 의미 있는 말을 만들어내고, 또 다시 모여 문장을 만들었다. 손이 떨려왔다. 눈이 점차 크게 떠졌다. [ 너의 탓으로 ] [ 특이한 존재 ] [ 한낱 고깃덩이 ] [ 죽는다 ] “아...아아아......” 입으로 신음소리인지 비명인지 분간이 안 되는 목소리가 새어나왔 다. 히노 선배가 눈물을 그렁그렁 단채 바로 내게 달려와 어깨를 붙들었다. 괜찮으냐고 소리치는 목소리에 왜 그런 소리를 하느냐 고, 더 이상은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 세뮤르?세이에를 만나보자 ] [ 카류리드 혼자만으로는 위험할지도 모른다 ] [ 죽어버린다면 그것으로 좋다 ] [ 죽어라. 맹세는 지킨다 ] “카뮤르......” 내 입에서 새어나온 말에 어깨를 잡고 있던 히노 선배가 흠칫했 다. [ 카이, 나를 버리지 마 ] [ 나약하고 가엾은 인간... ] “...카이야......” 침대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지막으로 강렬히 남아있던 그 녀의 의식이 나의 과거가 뒤죽박죽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그 복잡 한 정보를 금방 하나로 묶어 냈다. 침착하게 대응하자니 그리 어 려울 것도 없었다. 처참할 정도로 빠르게, 나의 의식이 그것들을 이해해 나간다. 그리 고 가르쳐 주었다. “카뮤르... 카이야!!!!!!!” 히노 선배를 옆으로 밀어내며 허공에 대고 소리 질렀다. “카이야!!” 아아, 증오한다! “카이야......” 어찌도 그리 잔인한가!! “카이......” 너는 알고 있었지 않아! 소중한 이의 이름을 가진 여인이여. 그보다 더욱 소중한 존재여. 너 없이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너는 맹세를 지키는 일이 더 중요했나. 그 목숨으로 나 를 되살려 주었나! [ 기껏 되살려 주어도 도로 죽겠다고 통곡 할지 모르겠구나 ] 그녀의 의식이, 과거에 그녀가 생각했던 것이 잠시 수면 밖으로 떠올랐다. [ 그럼 죽어버려라 ] 그것은 짧게 답을 해주고 다시 의식 속으로 가라앉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은색의 벽지가 깊은 눈물에 일그 러졌다. 강하며 변치 않는 그녀를 사랑했다. 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태 도의 그녀가 좋았다. 그녀라면 나 같은 것 때문에 괴로운 일을 겪 을 리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영원히 행복하게만 해줄 수는 없 는 노릇이라면 오히려 목석과 같은 존재가 더 좋았다. 하지만 실은... 아주 조금만이라면, 나를 사랑해주길 바랐던 것일지도 모른다. 단 한 방울의 안타까운 눈물뿐이라면, 나의 죽음 앞에서 흘려주어 도 좋지 않을까. “카이......” 아침 해가 창안으로 빛을 들여다 놓았다. 마치 그녀처럼 무심한 태양의 분신들이 침묵의 방안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비추었다. ================================================= = 네네~ 그리하여 카이는 죽고 드디어 카류는 고대하고 고대하던 먼치킨이 되었습니다!! 너무너무 해피하죠? ^ㅇ^* 지금까지 시간을 끌어온 이유는요. 사실 카류 죽는 부분이 너무 묘사가 안되서요. 뭔가... 영 느낌이 안 온달까요? ㅠ_ㅠ 그래서 너무너무 초조해진 나머지 휘휘휘휙 대강 쓰고 넘어갔습니다. 클라이막스 비스그무리한 부분에서 어찌 그런 극악한 짓을... -_-;;; 수정을 해야 할 텐데;; (일주일동안 씨름해도 얻은 것이 없었기에 이미 의욕이 잃음;;) 꿀꿀한 장면도 지나갔으니 오늘부터 일일연재에 들어갑니다! 아마도......(이 대사가 안 들어 가면 아비스라라가 아님 -_-;) 저의 거대한 목표를 보십시오! 하루 10장 이상 쓰기! 우리의 소원은 연~참~ 꿈에도 소원은 연~참~ 이르나크의 장 Part 66 회귀 카뮤르?카이야에게 새 생명을 받고 깨어난 카류는 피곤하다고 말과 함께 사람들 에게 그만 물러날 것을 명했다. 카류가 완전히 부활한 것에 안심한 자들은 대부 분 고개를 끄덕이며 그 명에 따랐다. 하지만 오직 나만은 불안을 참을 수 없어서 몇 번이고 카류의 말에 불복하며 남기를 원했다. 알고 있었으니까. 누구보다도 카류를 지켜보고 있었기에 나만은 알고 있었으니 까. 카류가 그 위대하며 아름다운 붉은 드래곤을 그저 자신의 수호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을. “문을 열어라.” “히노님. 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이......” “열라면 열어!” 내 강압적인 명령에 호위 기사들이 또 시작이라는 듯 곤란한 표정을 했다. 어제 아침 그의 말에 불복하고 거의 끌려나오다시피 한 후로부터 카류는 점심이 고 저녁이고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에 불안을 느낀 나는 번번이 쫓겨나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이곳을 찾아왔다. 사람들이 수치도 모 른다며 수군거리도 상관없었다. 방안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는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카류는 이미 많은 사람 들의 죽음에 충분히 상처를 받아 있었다. 그러한데 이번에는 ‘그녀’ 마저 죽어버 렸다. 나라면 살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들면 곧장 발이 카류의 방으로 향하게 된다. 거절의 대답이라도 아직 카류가 살아있다는 기척이 되기에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카류리드 전하! 제발 문을 열어 주세요!!” 양손을 모으고 간절히 요청했다. 기사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안쪽에서 나 올 거절의 답을 기다렸다. “들어오라.” 의외의 대답에 기사들은 물론 나까지 깜짝 놀랐다. 저, 정말 그가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도록 말한 건가? 내 원이 너무 강해서 들은 환청이 아닐까 싶어 고개를 돌려 기사들을 보았다. 그 들은 나를 향해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방문을 열 자세를 취했다. 심장 이 두근거려왔다. 손을 가만히 가슴에 얹고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안으로 발을 들여 가장 먼저 시선을 보낸 곳은 침대였다. 하지만 카류는 그곳에 없었다. 그의 존재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탁자 옆 찬문 턱에 앉아 밖을 바라보 고 있는 그가 있었다. “카류......” 존칭은 붙이지 않았다. 카류가 그러한 격식 따윈 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 럼에도 안타까운 그의 뒷모습만을 보며 그와 나의 사이에 벌어진 거리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녀’ 만큼의 존재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창밖만을 쳐다보고 있던 카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에 창 쪽으로 걸어가던 나도 열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그 자리에 멈추었다. “히노 선배.” 카류는 무표정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노곤한 느낌이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은근히 느릿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갑작스레 가슴이 철렁해왔다. “카류!! 죽으면 안돼!!” 달리 말을 돌려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직설적으로 소리쳤다. 가슴에 얹은 손을 꼭 쥐고 간절히 그를 바라보았다. 카류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세로 앉아 있다가 고요한 어조로 물었다. “내가 없으면 안 되겠죠?”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 그에게로 빠르게 걸어갔다. 격해진 감정에 숨을 몰아 쉬다가 고개를 저으며 소리쳤다. “안돼! 절대로 안돼! 다른 사람들이라면 어떨지 몰라도, 최소한 나는 너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어!!” 카류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내 대사는 조금도 그의 마음을 동하게 하 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그의 코앞에까지 가서 선 나는 이를 악 물고 손을 뻗어 그의 옷깃을 쥐었 다. 그리고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죽을 거야? 그럼 나도 죽을 거야! 너는 죽는 순간, 나까지 죽이게 되는 거라고!! 살인이나 다름없는 짓이야! 알겠어!?” 그제야 카류도 표정에 변화가 있었다. 눈을 조금 키우고는 놀랍다는 느낌으로 나 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그에게 활력을 줄 거 같아서 다시 한번 소리 질러보려 고 했다. 바로 그때 카류가 피식 웃으며 드디어 제대로 말문을 열었다. “너무 못됐어요, 히노 선배. 언제부터 이렇게 나쁜 성격으로 변한 거예요?” “네가...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카류의 손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그 감촉에 떨려오는 턱을 억지로 참아내며 대답했다. 창틀에서 내려온 그가 가만히 나를 안아주었다. 나도 손을 뻗어 강하게 그의 등 을 끌어안았다. 훌쩍 커버린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아아, 얼마만인지. 그의 따스함을 나누어 받은 것이 얼마만인지! “실은 저도 그녀가 없으면 한시도 못살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카류가 작게 이야기했다. 금방 카이야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되고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네요.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으 니.” “난 틀려!!” “과연 그럴까요? 사실 제가 죽는다고 히노 선배의 심장이 멈추는 것도 아니지 않나요?” 고개를 홱 들어 소리 지르자 카류가 내 가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내 결심을 가볍게 취급하는 카류가 이때만큼은 그렇게 야 속할 수가 없었다. 카류가 다정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이마에 키스했 다. “미안해요. 하지만 전 누군가가 저 때문에 나쁜 꼴을 당하는 것이 가장 싫거든 요. 그러니 제가 죽는다고 따라죽지는 말아요. 우리 선배는 실은, 아주 착한 사람 이니까 제 말을 들어줄 거죠?” 손을 들어 그를 확 밀어냈다. 그리고 위협이라도 해보이고자 주위를 둘러보며 칼 이 될만한 것을 찾았다. 아쉽게도 그럴만한 흉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두 주먹 을 꽉 쥔 후 내게 밀려 뒤로 엉거주춤 물러서고 있는 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내가 착하다고!? 정말 그럴 것 같아!? 절대 싫어! 네가 죽으면! 너를 괴롭히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고 말거야!! 죽어가면서 마지막까지 너를 원망할거라고!!” 카류는 피식 웃었다. 나의 결심이 우습게 여겨졌던 것일까. 그래, 카류는 어차피 여리고 힘없는 나밖에 모를 테니까! “이거 아니!? 실은 나 알고 있었어. 네가 카이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죽이고 싶을 정도로 질투했지! 카이야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말이야. 실은 나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그 때문에 네가 괴로워 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 도, 한편으로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어! 아아, 카이야님께서는 나의 사 랑하는 사람을 살리고 죽어주시다니, 어쩌면 그리도 기쁜 일만을 골라 해주셨을 까!!!” 말을 하고 나니 너무나 부끄러워 눈물이 다 왈칵 솟아올랐다. 지금까지 한 말이 단순한 협박이 아닌 티끌 하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이 견디기 힘든 수치를 가져 다준다. 그래도 말을 중간에 끊지는 않는다. 카류가 나를 경멸한다 해도, 경멸하는 그라도 필요하니까. “네가 그녀의 죽음에 괴로워 한데도 상관없어! 평생을 괴로워 한데도 놓아주지 않겠어!! 나는 너를 가지고야 말거야!!” 숨을 몰아쉬고 마지막 말까지 쏟아내었다. 이를 악 문 뒤에는 눈을 찔끔 감아 손 등으로 거칠게 눈물을 훔쳤다. 악녀가 된다면 약한 모습 따윈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카류는 그곳에 선 채로 계속 웃고 있었다. 내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듯 잠시 침 묵했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까지 저를 필요로 한다면, 역시 계속 살아봐야겠네요.” 생각 외로 쉽게 내 말에 응하는 것에 어리둥절해졌다. 카류가 손으로 콧등을 긁 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야 이야기를 계속했다. “역시 이런 짓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하지만 카이가 너무 냉정하게 가버 리고 나니까 역시 나를 위해 슬퍼해주는 사람이 한 둘쯤은 있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카류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옆으로 걸어갔다. “선배. 저도 실은 굉장히 이기적인 놈이예요. 방금만 해도 제가 선배를 도발시킨 거지요. 선배가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말이죠. 하아! 이렇게 나쁜 놈이 또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위해 죽겠다는 인 간들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했던 주제에... 역시 제 복에 겨워 어린애 투정을 했 던 거죠.” 몸을 돌려 나를 스쳐지나간 카류를 바라보았다. 가볍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있는 그는 그저 뒷모습뿐이었음에도 왠지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조금 변한 것 같죠?” 카류가 돌아서며 대뜸 말했다. 속마음을 너무 쉽게 읽힌 것 같아서 움찔하니 카 류가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빙긋 웃었다. “은근히 눈치가 빨라졌어요. 어딘지 모르게 뻔뻔해진 거 같기도 하고. 카이가 죽 으면서 내 머리가 되었거든요. 그것이 조금씩 제게 영향을 주는 모양이네요.” 놀랄만한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던 카류가 내게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내 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함께 카이형과 다른 형제들을 보러가요. 그때는 제가 죽어버리느라 제대로 이야 기도 하지 못했으니. 하하, 이거 말이 이상하네?” 카류는 장난스럽게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나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 어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서있기만 했다. 내가 손을 잡을 생각을 앉자 카류가 직접 다가와 내 손을 붙들었다. “걱정 말아요. 괜찮아요. 아마, 괜찮을 거예요. 카이의 덕으로 한층 얼굴 가죽이 두꺼워졌으니까... 전보다는 훨씬 괜찮겠죠?” 앞을 바라보는 카류는 이야기하는 도중에 말끝을 조금 흐렸다. 카이야님의 덕으 로 조금 강해진 모습을 보였지만, 역시나 여전히 예전의 카류다. 상대의 아픔에 자신마저 상처 입는 상냥한 아이. “가지마.” 카류의 손에 이끌려 방문까지 걸어왔던 내가 대뜸 멈추며 그를 막았다. 하지만 카류를 고개를 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솔직히 아주 내키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얼굴을 보여주고 건강 하다는 것도 알려줘야죠. 아, 그러고 보니 이거 카이형 염장 지르는 일쯤 되겠네. 그래도 나 죽을 때 마구 웃어서 약 올렸으니 이정도 복수는 괜찮겠죠?” 유쾌한 어조로 말한 그가 자신의 말에 도로 상처 받았는지 씁쓸한 얼굴을 보였 다가 다시 피식 웃었다. “솔직히 나라도 카이 형처럼 그렇게 웃을 것 같네요. 어쩔 수 없죠. 어서 가요.” 카류의 이끄는 손을 더 이상은 말리지 못했다. 어차피 지금 당장 이 사실을 속여 봤자 그에게 알려지는 일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어째서 가지 못하게 말리냐는 그 의 물음에 직접 내 입으로 사정을 설명해줄 용기도 없었다. 따뜻한 카류의 손을 꼭 붙들고 빛의 궁을 나섰다. 바람의 궁으로 들어서자 아닌 척 하면서도 흥미가 동한 수많은 기사들과 시녀들 의 시선이 이쪽으로 쏟아졌다. 한창 바쁠 이 시기에 빛의 궁에 틀어박혀 하루 동 안 꼼짝달싹도 않았던 덕에 병이라도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자자했던 카류가 -물론 한번 죽었다 살아났다는 말은 함구해둔 상태다- 갑작스레 이곳에 나타났으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1층 복도를 걷던 카류가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이곳에 있나 보군요. 혹시 그 일 때문에 심문이라도 받고 있나요?” “아니... 어제 하루 동안의 조사와 힐레인공의 증언에 따르면 최후까지 굴복하지 않았던 왕실 친위 기사 라인경을 따르던 시종의 짓이래. 일단 이번 일은 카이세 리온님의 사주는 아니라고 했어.” “정말 다행이네요. 심문 따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응......” 내 대답은 시원치 않았다. 이제는 카류도 단순히 형제들과의 껄끄러운 관계로 내 가 이리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까지 알아챈 모양이다. 그의 손에서 조금 이지만 식은땀이 배이고 있었으므로. “역시 조금 떨리는군요.” 먼저 카이세리온님이 계신 방의 앞에 도착한 그가 나를 향해 말했다. 하지만 바 로 고개를 돌려 앞을 보고 당당히 말했다. “문을 열어라.” 카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사들이 정중히 문을 열었다. 푸른 톤의 벽지에 자그 마한 방이 나타났다. 누군가가 창문가에 앉아 있었다. 카류가 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그가 우리들을 발견하고 발딱 자리에서 일어났다. “와앗! 카류다!!” “에?” 푸른 머리카락의 소년이 사뿐사뿐 뛰어왔다가 카류의 앞에서 멈추었다. 조금 수 줍은 웃음을 얼굴 한가득 매달고 있는 그는 카이세리온 전하였다. “카, 카이 형?” “왜?” 고개를 한번 갸웃하며 순진하게 묻는다. 카류의 입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카류......”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을 꼭 쥐어주며 작게 이름을 불렀다. 무어라 이야기를 해주 어야 할지... 하지만 카류는 내게 질문을 하지 않고 그냥 카이세리온님에게로 걸어갔다. 손으 로 그의 머리카락을 한번 살포시 쓸어내리던 그가 말했다. “카이 형?” “응... 그런데... 왜 부르기만 하고... 이야기를 안 해?” 카이세리온님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불안한 얼굴을 한다. 카류가 조금씩 떨리 는 손으로 계속 그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러다 곧 나를 올려다보며 어색한 웃 음을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우리 카이 형... 꼭 옛날의 형으로 돌아온 것 같네.” “...응.” 목이 매여서 그 이상의 대답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카류는 더 이상의 대답을 요 구하지는 않았다. 카이세리온님이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이야기야?” “아냐! 아무것도 아냐! 그, 그런데 우리 형. 올해로 몇 살이었더라?” 카류가 손을 휘휘 젓다가 묻자 카이세리온님이 조금 뾰로통한 얼굴로 대답했다. “카류는... 내 나이도 모르는 거야?” “에게? 그냥 다른 이야기를 꺼낼 겸 물어본 것뿐인데 왜 말을 돌려? 오히려 형 이 자기 나이를 잊어버린 거 아냐?” “아냐... 12살이야......”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카류가 손뼉을 탁 치며 환호성이라도 지르듯 말했다. 너무나 의외에 반응에 나는 그저 말도 못하고 굳어만 있었다. 카이세리온님은 실은 올해로 21살이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을 12살로 믿는다. 그것은 에렌시아님과 아르멘님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을 무렵. 그 어떤 불행의 징 조도 없었을 무렵이다. 어려진 그분은 왜 12살 밖에 안 되는 자신이 그리도 큰 것인지, 11살인 카류가 청년의 육체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환하게 웃고 있는 카류를 바라보았다. 카이세리온 전하의 불행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씁쓸한 미소정도는 띄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카이형. 나 비밀이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이미 나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 카류가 카이세리온님의 앞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응. 들을래.” “정말? 후회 안 해?” “안 해......” 큰일이라도 일어날 듯 표정을 바꾸는 카류 덕에 카이세리온 전하가 뒤늦게 불안 해진 모양으로 전보다는 작게 대답했다. 엄한 얼굴을 했던 카류가 빙긋- 웃더니 카이세리온님을 확 끌어안아 하늘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난 우리 카이형을 정말로 사랑해!” “아앗!?” 갑작스레 허공에 들어올려진 카이세리온님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카류의 말을 듣더니 얼굴을 조금 붉힌다. 우물쭈물 하던 그분이었지만 이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나도.” 그분의 대답을 듣고 카류가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서있었다. 카이세리온님은 그 런 카류를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짧은 손을 뻗어 그의 얼굴 앞에 흔들 었다. “하... 하하... 아하하하하하하하하!!” 카류의 턱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목을 젖히며 크게 웃었다. 깜작 놀란 카이세리온님을 든 채로 방을 빙글빙글 돌다가 가까운 곳의 침대 위로 픽 하고 쓰러졌다. “하하, 아하하하. 카이형! 카이형!!” 카류에게 들어 올려진 채 있다가 침대로 꼬꾸라진 카이세리온님이 은근히 아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카류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깜빡깜빡하며 의아함을 표현했다. 카류가 그런 카이세리온님의 머리를 양손으로 확 끌어당겨 자신의 품으로 안았 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하하하, 진짜라고! 형은 내 말 믿지?” “웅... 응... 당연히 믿는데... 아파......” 카류는 바로 손을 뗐다. 그리고 폴짝 뛰어오르는 듯 몸을 일으켜 앉았다. 침대 위에 쓰러져있던 카이세리온님도 일으켜주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얼굴 로 다시 그의 머리를 꼭 껴안아주었던 그가 카이세리온님의 손을 맞잡더니 말했 다. “우리 놀러가자!” “지금?” “햇빛이 쨍쨍하거든? 다른 형이랑 누나도 불러서 같이 놀자!” “응... 놀자.” 갑자기 일치단결한 두 사람이 침대에서 뛰어내려왔다.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자 카류가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해보였다. 물론 나는 더욱 어떻게 해야 할 지 갈피를 잡기가 힘들었다. 카류는 어떻게, 바로 저런 행동을 할 수가 있는 것 인지. 카류가 카이세리온님과 손을 잡고 나오자 기사들이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카류 가 엄한 얼굴로 함구할 것을 명하자 그들은 곧 물러서 머리를 조아렸다. 카류는 휘파람까지 불며 한손에는 나를, 또 다른 한손으로는 카이세리온님의 손 을 잡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그리고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응접실의 문을 벌컥 열 어젖혔다. 그곳은 카이세리온님을 제외한 전하 분들이 낮 동안 모여 있는 장소였 다. 우리들이 들어서자 당연한 결과로 그들이 하던 행동을 멈추고 크게 놀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카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당당히 말했다. “놀자! 용사 놀이 하자!” “......” 방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오직 혼자 그 고요함을 이해하지 못한 카이세리온님 만이 불안히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한쪽에 앉아있던 블라디미르님께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조금 숨이 격해진 상 태로 소리쳤다. “카류! 너......!!” “카이형은 올해로 12살, 난 11살. 그럼 미르누나랑 세라누나는 14살, 키옌형은 13살. 멀리 사냥나간 루브형은 15살. 계산이 맞나?” 카류가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블라디미르님이 어이가 없 어 하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하지만 그분의 시선이 잠시 순진한 표정의 카 이세리온님에게로 가 닿자 금방 눈물이 고였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고 그분이 나서 크게 소리 질렀다. “카이가 저렇게 되었는데! 카류 넌......!!” “그게 그렇게 중요해!?” 상황이 이런데도 더욱 역정을 내며 큰소리를 지른 것은 오히려 카류였다. 블라디 미르님은 미처 하던 말을 끝내지도 못하고 그의 말에 흠칫했다. 카류가 곁에 선 카이세리온님의 어깨를 손으로 꼭 안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나는 카이 형을 좋아해! 용사 놀이 같은 거 꼭 다시 해보고 싶었어! 드디어 그 염원이 이루어 진 거야! 그런데 다른 사실이 그렇게 중요해? 그 따위 것, 더 이 상 알 필요도 없고 생각할 필요도 없어!!” 두 번째의 침묵이 우리들을 짓눌렀다. 어쩌면 더 이상 화를 낼 힘도 없다는 듯 꽉 쥔 주먹을 힘없이 떨군 블라디미르님, 정말 황당하다는 표정의 키예프 전하, 그리고 손으로 입가를 가린 세렐리아님. 침묵이 조금 더 오래 이어졌을 때였다. 카류의 곁에 서 있던 카이님이 움직여 카 류의 옷자락을 꼭 쥐며 작게 말했다. “...뭔진 몰라도... 나도 그렇다고 생각해......” “카이!!” 키예프 전하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카이세리온님은 그에 움찔하여 고개를 카류의 옷깃에 얼굴을 숨겼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얼굴을 쏙 빼내고 있는 힘을 다해 말했다. “나도 카류가 좋아! 다른 건 필요 없어!” 키예프 전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 나오며 손을 내밀어 말했다. “이리와. 그런 곳에 있지 마. 네가 뭘 모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카류 저 녀석은......!!” “그만해.” 키예프 전하의 말을 블라디미르 전하가 막았다. 카이세리온 전하와 카류를 한번 씩 찬찬히 바라보던 그분이 다시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것도 모를 때는 정말 행복했었잖아? 그러니 일부러 기억해내게 하지 마. 그 가 잊고 싶어서 잊은 거니까.” 키예프 전하와 세렐리아 전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왠지 카류가 한번 죽는 장면 을 직접 본 후부터 그분들은 한 풀 기가 꺾인 느낌이었다. 그 때문인지 예전이라 면 말도 안 된다고 했을 일에 어쩌면 동의와도 같은 침묵을 지켰다. 블라디미르님이 카이세리온님에게 지나치듯 시선을 주었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부럽다... 우리들, 모두 바보가 될까?” 갑자기 카류가 손가락을 탁 튕기며 소리쳤다. “미르 누나! 명안이야!” “뻔뻔스러워! 죽다 살아나더니 철면피가 됐니?” 블라디미르님이 발끈해서 화를 냈지만 카류는 계속 방글방글 웃었다. 그러다가 후다닥 뛰어가 그분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돌렸다고는 하기 힘든 블라디미르님이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카류를 더욱 손에 힘을 주어 놓아주지 않았다. “괜찮아! 바보를 경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 혹이나 위험하다고 해치려는 사람 도 없을 거야! 그러니까 같이 나가자.” “......” 블라디미르님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얼굴을 조금 붉히고 있었다. 결코 그 래서는 안 된다는 이성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카류의 요청에 응하고 싶어 하는 그분의 의도를 확연히 느낄 수가 있었다. 카류의 이끌림에 블라디미르 전하가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때 내내 침묵 만 지키고 있던 세렐리아님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루브 오빠가 없어! 루브 오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좋아! 다른 건 아무래도 상 관없다고 쳐! 하지만 오빠 없이는 절대로 싫어!!” 그 말에 블라디미르님도 움찔 멈추어 섰다. 이번에는 카류도 말없이 그녀를 바라 보기만 했다. 그때 카이세리온님이 머뭇거리다가 살짝 걸어 나왔다. “나는 알아... 우리끼리 놀아도... 루브 형은 화내지 않을 거야......” 아무 것도 모르는 카이세리온님이 순수하게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결국 세렐 리아님은 눈물을 왁 터뜨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카류가 그 모습을 보고 블라디 미르님의 손을 놓고 조금씩 조심스럽게 세렐리아님에게로 다가갔다. 살며시 손을 뻗었다가는 은발을 한번 쓰다듬었다. 그 손길의 주인을 깨달은 세렐리아님이 등 을 크게 움찔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뿌리치지는 않았다. 카류가 가만히 그녀의 등에 뺨을 기대며 말했다. 작게 미소하며 그가 말했다. “미안... 그래도 같이 가서 놀자. 누나가 좋아하는 옛날이야기 많이많이 해줄 테 니까.......” 이제는 아무도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직까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는 세렐리아님을 부축해 일어난 후에는 키예프님의 손을 붙잡았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만 있다가 슬며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닫고 나니 알 수 없는 미소가 배여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나마 그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것으로 좋지 않을까. 호위 기사들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다물라는 말을 살짝 언질을 해준 다음 사뿐사뿐 빛이 들어선 복도를 걸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쪽으로 큰 소 리가 들려왔다. “앗, 용사님 파티에 사람이 모자라! 히노양! 그냥 가버리는 법이 어딨어요?” 카류의 목소리다. 후후 하고 웃은 다음에는 기분 좋게 뒤로 돌아섰다. “지금 가요!” ================================================ 아아... 형제들 어머니들이 언제 죽었드랬죠? =ㅅ=; 2권을 상품으로 모조리 보내버린 덕에 그게 몇 살 때 일어난 일인지 알 수가 없게 됐습니다. 인터넷본은 책 있다고 모조리 지웠거든요 -_-; SOS 요청~! 어제 10장을 달성하려 했는데 역시 힘드네요. ^_^;;; 쓰다가 멈추었던 8번째 장 마지막 부분 지금 메꿔서 올립니다. -ㅅ- 아, 허접스러... 어쨌거나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화해 비슷한 것이 이루어졌으니 됐다고 믿어요. ;;;;; 으악! 나도 몰라! 얼렁 써야지. 빨랑 써야지... 중얼중얼....... - _-; 이르나크의 장 Part 67 카르틴 붉은 융단이 길게 깔린 자리의 끝, 그 중앙의 화려한 옥좌에 유구한 세월동안 새 겨져 있던 금빛 사자는 붉은 드래곤의 포효로 바뀌어졌다. 이제는 이곳에 없는 나의 수호룡 때문이다. 왕의 자리에 앉아 열 계단 정도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를 내려다보았다. 우 리들과 비슷하지만 다소 활동성을 강조한 그 차림은 카르틴의 것이다. 에뮤의 사 자로 온 자들은 예를 갖추긴 했으되 아주 당당한 태도였다. 아니, 당당함을 넘어 거만한 태도일까. “카르틴 왕국의 주인이신 폐하를 대신하여 경축 드립니다. 오랜 공을 들여 드디 어 바라시던 바를 이루셨으니 얼마나 마음이 가뿐하시겠습니까.” “다 케시뮈르4세께서 도움을 주셨기 때문이네.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한다고 전하 게.” “아아, 겸손의 말씀을! 그 뜻 반드시 폐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 참으로 기다렸다는 말이라는 듯 검은 머리칼의 사자가 씨익 웃었다. 드디어 본론 을 꺼낼 생각인가 보다. “그러한데, 전하. 남동에 위치한 베넬 지방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아직 왕정이 바로 잡히지 않은 이 상태에서 그 먼 지방까지 통치하시려다가 불온한 무리의 간계에 위험해지시지는 않으실지 걱정이 되옵니다.” 옥좌의 아래, 양쪽으로 죽 자리 잡고 앉은 귀족들에게서 작게 웅성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의도는 뻔했다. 베넬은 오래전부터 카르틴이 넘보고 있던 땅 으로 크고 작은 다툼이 많았던 지방이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드리크 경이 그곳에서 수비를 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카르틴 측에서는 군사를 내어 준 대가로 베넬 지방을 내놓으라고 하고 있었다. 물론 요구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남의 나라 국정에 마음대로 참견하며 감 놔라 대추 놔라하다가 언 젠가 쇠약해진 아르윈을 잡아먹을 속셈인 거다. 에뮤 녀석, 서로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지. 아직 제대로 왕위도 계승하기 전 에 이런 사자를 보내는 거야. 이 똥색 도마뱀! 내 대답을 기다리는 사자의 시선을 느끼고 에뮤의 험담은 일단 관두었다. 그리고 일부러 거만하게 보이도록 팔짱을 척 끼었다. 한번 노골적으로 피식 웃어준 다음 그를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왕정이 바로 잡히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네. 어찌하여 베넬 지방을 언급하는 것이지? 카르틴 왕국이 걱정할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하네만?” 드래곤의 현자라는 명목으로 옥좌의 바로 곁에 선 힐레인이 작게 기침소리를 냈 다. 슬쩍 눈을 돌려보니 ‘너 돌대가리? 아니면 미쳤냐?’ 정도의 의미가 들어간 시 선을 내게로 쏟아내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긴 하지만, 원래부터도 우리 아르윈은 카르틴의 침략 아래 근근이 방어만 하고 살던 나라였다. 그러한데 약 3년동안 내전까지 벌여댔 으니 더 이상 카르틴의 앞에서 개길만한 국력이 없는 것이다. 저쪽에서 베넬 지 방을 달라면 싫은 얼굴로나마 넘겨야 하는 것이 이치라면 이치. “호오, 전하께서는 그 광대한 국경을 바로 지키실 자신이 있으시다는 말씀이십니 까?” 사신이 ‘말 안 들으면 바로 국경으로 쳐들어간다?’ 라는 뜻이 내포된 말을 했다. 그러나 보통의 식은땀을 삐질 흘리는 반응 대신 팔걸이를 손으로 탁탁 치며 크 게 웃었다. “우리나라 국경에 인접한 나라라고 해봤자 카르틴 하나인데 뭐 그리 신경 쓸 게 있겠소! 하하하!” “으, 음! 전하......” 내 얼빵한 짓을 보다 못한 힐레인이 헛기침을 하며 내게 귓말을 하려 했다. 나는 바로 손을 들어 그를 막으며 고개를 들어 씩 웃어보였다. 그제야 힐레인이 눈을 크게 뜨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내가 무척이나 당당히 말하고 있는 것이 단 지 사신의 말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일 거다. “직선적으로 말해보지. 베넬 지방이 가지고 싶은가?” 내가 깍지를 끼고 거만히 묻자 카르틴의 사신이 미간을 찌푸리고 얼굴을 삐딱하 게 만들었다. 믿을 만한 구석도 없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개기는지 의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카르틴의 사자는 곧 바른 자세로 당당히 대답했다. “전하께서 호쾌한 이야기를 원하시니 무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폐하께 서는 전부터 베넬 지방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부디 전하께서 큰 성 의를 보이시어 폐하를 기쁘게 해드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들의 긴장된 시선에 내게로 닿았다. 카르틴이 베넬 지방을 요구하리라는 것 은 이미 예상된 일이었고, 많은 분들이 절대 그렇게는 못한다고 아우성을 쳤었 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내가 혹여나 거절을 할까봐 하나같이 마음을 졸이고 있는 모습이다. 속마음은 미워 죽겠을 야만인 카르틴이지만 실제로는 떠받들어야 할 초강대국 카르틴이니까. 그랬다. 본디라면 그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면 베넬 지방 하나쯤은 밉더라도 건네주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 “미안하네만 그건 곤란하군. 멀쩡한 지방하나를 그리 쉽게 선물로 넘길 수는 없 는 일 아닌가?” 알현실의 분위기가 싸악 식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지느냐는 대신들의 소리 없는 압박이 나를 누른다. 사신은 아주 비웃는 느낌. 어린애가 왕이 되어서 인지 사리분별을 못한다는 얼굴. “하하. 그리 간단히 말씀하셔도 되겠습니까? 베넬 지방을 선물 받지 못하신 폐하 께서 화가 나신 나머지 아르윈의 공격을 명하실 지도 모릅니다?” 내 예상이 딱 들어맞는 생각을 한 것인지 사신이 어린애 어르듯 이야기했다. 나 는 오히려 쿡- 웃어주고 손을 저으며 말했다. “전에 만나 뵈었을 때는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네만, 의외로 케시뮈르4세께서도 귀여운 면모가 있으신 모양이네. 선물을 받지 못했다고 그리 삐치신다는 말인 가?” 당장에 사신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구겨졌다. 대신들의 얼굴도 구겨지기는 마찬가 지. 현실적인 문제의 불안함이 은근한 통쾌함은 저리 뒤로 밀려났을 것이다. “그러한 태도로 좋겠습니까? 전하께서 하신 말씀 저는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폐하께 전해 올릴 것입니다!” “오호? 왜 그리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가? 설마 지금까지는 자의로 말을 고쳐 전 할 생각이었나?” “저, 전하!!” 내가 계속 빈정빈정거리고 있자 프리란트님-리아 후작-이 기겁을 하여 소리쳤 다. 다른 대신들도 꾀병이라도 걸렸다는 핑계로 이 알현을 끝내야 하는 거 아닌 가 웅성거리는 차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든 사신이 진지하게 말했다. “카르틴의 협력 덕에 간신히 승리를 거둔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대가로 우선, 베넬 지방을 폐하께 바치십시오!” 사신은 물론 다른 대신들까지 얼른 똑바로 답변하라고 압박을 보낸다. 이거야 내 나라의 왕성인데도 아군 하나 없는 살벌한 분위기가 아닌가. 아, 다들 너무해. 내 가 그리 못미더운가? 하긴 그렇겠지. 스스로 긍정하면서도 한번 배알이 꼬였다. 그래서 사신을 내려보다가 괜히 더욱 뻔뻔스러운 얼굴로 대뜸 말했다. “헛소리 그만하고 너네 나라로 떠나라. 너 같으면 바치겠냐.” 사신이 발을 쿵 구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엄청 무례한 짓이었지만 한동안 은 주변의 누구하나 말리는 자가 없었다. 같이 온 카르틴의 사신은 당연한 행동 이라 믿었고, 우리 측은 충분히 이해한다는 심정일 것이다. “감히!! 카르틴을 거역하고 살아남으리라 생각했는가?” “전하! 이번에는 전하께서 지나치셨습니다. 부디......” 오른편 귀족 줄의 가장 앞에 서 있던 드리크 경이 다급히 내게 요청해왔다. 그러 나 들어주고 싶은 마음은 코딱지만큼도 없었다. 오른손을 활짝 펴서 앞으로 쭉 내뻗었다. 돌연한 행동에 의아한 사람들의 사이로 사신을 내려다보며 내가 이야기했다. “사신이여, 보아라. 이 손은 그 흔한 검 하나 들려 있지 않아 너무도 무력해 보 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물의 겉핥기만이 가능한 짧은 시각에만 의존했기 때문이 다. 진실을 꿰뚫을 눈이 없기에 어리석은 너는 수천 년이 걸려도 결코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사신은 애로만 보았던 내가 갑자기 돌변하여 어른스런 이야기를 하자 놀란 모양 이었다. 피식 웃은 다음에 팔걸이를 손으로 탕 치며 일어났다. 그리고 사신을 내 려다보며 크게, 단호히 소리쳤다. “와라! 내 직접 너희들에게 진실을 볼 기회를 주겠노라! 지체할 것 없이 너의 왕 에게 가서 그리 전하라!” 끝자락을 잡아 힘차게 젖혀 긴 망토를 구김 없이 허공 위로 날리며 뒤로 돌아섰 다. 내가 몇 걸음 나서자 황당함에 얼이 빠진 나머지 말을 할 타이밍을 놓친 사 신이 뒤늦게 시끄럽게 소리쳤다. 수많은 대신들의 웅성거림도 함께였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고 당당히 걸어 그대로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알고 있었다. 찔끔 돌아보는 것 보다는 이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것이 훨씬 더 신비롭고 멋져 보인다는 사실을! 막강 뽀대로 이름을 날린 국민의 영웅 세계 의 영웅 카뮤리안이 자신을 우습게 여기던 허접 기사들을 상대로 이미 한번 해 본 장면이기에 그 사실은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전하! 카류리드 전하!!” 알현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저벅저벅 걷고 있는데 내 뒤로 힐레인이 도도도 뛰어 왔다. 인기척으로 그 외에 익숙한 사람 몇 명을 제하고는 달리 뒤따라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안 내가 입주변의 근육을 스르륵 풀고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나 어땠어?” “예?” “아냐... 별로.” 류온님이 오신 줄은 알았는데 리아 후작님까지 함께 계시기에 바로 입을 다물었 다. 그분은 우아한 자태에 대한 시시덕거림이 통할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따로 믿으시는 것이 있다니,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찌 저희들에게 먼저 알려주 시지 않으시고......!!” 리아 후작님이 흥분한 듯 말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일단은 딴청을 부렸다. 아 무도 모를 때 한꺼번에 터뜨려야 더 멋있어 보이니까 그랬다고는 절대 말 못한 다. “정말 카르틴을 상대로 이 아르윈을 지키실 수 있으십니까?” 류온님이 진지하게 물었다. 때마침 뒤따라온 사람이 류온님이라 잘되었다는 생각 이 들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키는 것은 물론 우주 정복까지 가능할 것 같아서 더 문제죠.” 류온님이 숨을 한번 훅 들이켰다. 그분은 의아해하는 사람들 중 유일하게 짐작 가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손을 입가에 가져다댄 그분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 다. “9서클의... 마법사가 된 것입니까!?” “마스터는 아니고 유저.” 손가락을 세우고 간단히 대답하자 류온님이 그대로 달려들어 내 옷깃을 확 움켜 쥐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크게 흡뜬 눈에 핏줄이 도드라 나올 것만 같아서 좀 무서웠다. “그냥 해본 말은 아니겠지요? 이제 와서 농담이라는 소리 따윌 한다면 흠씬 두 들겨 패주겠습니다!”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리아 후작님도 들뜬 목소리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본분을 잊지 않고 류온님 을 나무랐다. 류온님의 손을 톡톡 쳐서 그만 놓으라는 신호를 보내 겨우 풀려났 다. 옷을 다듬어 정리한 후 류온님을 향해 말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마나를 느낄 수 있는 체질로 바뀌었습니다. 아니, 마나를 느끼 는 것이란 체질이라기보다는 자각의 한 종류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그 문제는 일 단 넘어가고! 본래 저는 류온님을 가르칠 정도로 수식에 강했잖아요? 마나를 느 낄 수 있게 된 순간 전 8서클 마스터가 된 것이죠. 그리고 9서클도 잠시 끄적여 보았더니.......” “잠시 끄적여!?” 류온님이 빽 소리 질렀다. 복도로 ‘여여여여...’ 하는 메아리가 길게 울려왔다. 잠 시 말을 멈추었던 내가 고개를 저으며 류온님에게 말했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밤낮으로 노력하신 류온님이나 다른 마법사 분께서 죄송한 말이지만, 카이와 융합한 후로는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 될 정 도로 머리가 좋아졌어요.” “그 머리에서 더욱 좋아지셨다는 말씀이십니까?” 류온님이 버럭 묻는다. 사실 난 류온님에 비할 정도로 그리 천재적이지는 않은데 말이지. 어쨌거나 어깨를 으쓱하며 그분의 물음에 답했다. “카이야는 목숨을 바쳐 나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뇌를 가장 크게 다쳤고, 카이야의 대부분이 저의 머리가 되었지요. 그 덕에 카이의 기억이나 지 식이 잔류하고 있고 자체적으로 본래의 제 머리보다 좀 더 성능이 좋아진 느낌 입니다. 주로 제가 주의를 기울이던 수학적인 면에서요.” “아니, 그렇다면 설마, 진실로, 전하께서는 드래곤의 지식을 모조리 가지고 계신 것이로군요!? 무려 십만 년에 달하는 세월동안 축척해 올린 그 방대한 지식을 공 짜로!!!” 류온님이 불끈 쥔 주먹을 허공으로 들어올리며 벅차오르는 감격을 온몸으로 보 였다. 힐레인과 리아 후작님도 함께 전율하며 나를 향해 존경과 부러움의 눈빛을 보였다. 그녀의 죽음은 내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이득에 나의 카이를 바꾸자고 할 수가 있을까? 그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이라 믿었을 정도로 깊이 의지하고 사랑했던 나인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내가 얻은 이득을 보고 ‘저렇게 운이 좋은 놈이 또 있을까’ 는 둥의 생각만 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 솔직히 싫지는 않다. 이 뛰어난 지식이. 그리고 우수한 두뇌가. 게다가 카이가 융합한 영향으로 나약하던 내가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정도로 강해졌다. 우습게도, 결코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터였는데, 그녀 가 죽음으로서 그녀의 죽음에 견딜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죽기 전 카이가 했던 말대로 운이 나쁜 것 같으면서도 좋은 놈이 바로 나다. 씁쓸히 웃은 다음 고개를 들었더니 아직 그들이 감격에 차서 아예 다른 사람이 라도 부르러 갈까 이야기를 나누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그에 나는 다급히 손 을 흔들며 말했다. “저기! 하지만 여러분의 생각처럼 완전히 지식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예요. 아주 약간 정도일까?” 류온님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윗입술을 죽 올린 그분이 띠꺼운 얼굴로 말했 다. “네? 아주 약간?” “그 많은 정보를 제 것으로 만드는 것은 무리예요. 그녀의 지식은 대부분이 너무 흐릿하거든요. 굳이 예를 들자면 아주 옛날에 힐끗 스쳐본 엄청 어려운 영상 같 은 느낌이랄까... 그런 것은 쉽게 이해하고 기억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만 약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된다면, 그때 저는 단순히 똑똑한 카류리드가 아니라 만물에 초월한 카이야가 되어 있을 겁니다." 완연히 실망이 가득한 그들을 보고 마지막 말을 슥 덧붙였다. “하지만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어쨌거나 저는 9서클의 마법사이니까......” 내 말을 미처 끝나기도 전에 또 류온님이 내 어깨를 꽉 붙들었다. 9서클이라는 말에 또 다시 흥분한 모양. 하지만 어깨를 붙든 채로 딸딸 흔들지는 않고 금방 손을 놓고 바로 섰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이며 크게 말했다. “제게 9서클의 마법을 전수해 주십시오!” 그러고 보면 류온님은 마법사인 것이다. 9서클이란 처음 마법사를 시작했을 때부 터 정말 염원의 염원이었겠지. 하지만... “죄송합니다. 그건 곤란해요.”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설마 거절할지는 몰랐던 듯 놀란 류온님이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몸을 낮추었다. “제 태도가 건방졌다고 생각하신다면 예를 갖추겠습니다!” “아니예요, 그런 건 아니구요.” 후다닥 뛰어가서 류온님이 무릎을 꿇기 직전에 겨우 막아낼 수가 있었다. 그분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달라는 눈치에 어쩔 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가르쳐 드리는 방식은 여러분이 천천히 알아냈어야 하는 일이었어요. 하지 만 저라는 이상한 존재 때문에 단 한번의 이야기로 쉽게 퍼져나가고 말았지요. 좀 더 정상적인 발전 방식이었다면 그 와중에 마법에 대한 대책이나 새로운 의 식도 많이 전파되었을 테지만, 지금은 전무한 실정이군요. 이것은 현재의 인류로 서는 감당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본래의 저는 좀 무식해서 그런 것은 전혀 심각 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 것 따위!!” “좋은 나라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9서클 마법만은 안돼요. 8서클은 그나 마 현재 존재하는 최고의 방어마법 실드의 방어에 어느 정도 대비가 된다지만, 어떤 9서클 마법은 9서클 마법으로도 막기가 힘듭니다. 파괴 범위는 무려 산 하 나를 깎아지르기에 이르지요. 개나 소나 9서클 마법사가 된다면, 정말 이 나라가 안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지금까지 배출된 9서클 마법사가 모두 은거를 시 작한 것도 모두 자신의 힘이 지나치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류온님은 할말을 잃은 모양이다. 그가 뛰어난 마법사가 되기보다는 좋은 나라를 만들기를 우선으로 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항할 말을 찾 아서 움찔움찔하고 있었다. 9서클 마법사라는 매력적인 자리를 쉽게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다. “9서클 마법사가 되고 싶다면 혼자의 힘으로 올라가 보세요. 9서클이란 본디부 터 대단한 마법이지만, 깨달음의 경지라 불릴 정도로 달성하기가 어려웠기에 더 욱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제 편법으로 별다른 노력도 없이 9서클에 달성한 것이 라면 아르 할아버지도 그리 대단한 제자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류온님이 눈썹을 꿈질했다. 아마 정곡을 찔렸을 거다. 9서클 마법사가 되려던 것 은 자신의 순수하게 발전을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아르 할아버지를 위한 것이기 도 한 것이다. 이까지 보이며 괜히 능글맞게 웃어준 내가 그들을 등지고 돌아섰 다. “마법사들을 모아주세요. 그리고 강한 기사들도 모아주십시오. 아, 요즘 크게 유 명세를 타고 있는 에스문드 백작이 좋겠군요. 마법사단을 근본부터 개편해야 할 소지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얼떨떨한 힐레인의 대답이 들으며 나는 본디 가려던 복도를 가볍게 걸어 나갔다. =================================================== 다음편을 쓰는 중입니다만, 12시내로 못 쓸 것 같기도 해서... 그럼 또 일일연재 안한다고 리플달리니까 ㅠ_ㅠ 일단 이것만 올립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7 카르틴 (2) 거의 장식용으로만 달고 있던 검을 사용해보기로 결정했다. 거추장한 망토는 벗 어던졌다. 걸리적거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검만 이용해 저를 상대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일단은 급하게 불려온 덕에 급하게 가벼운 갑옷을 챙겨 입은 에르가 형이 황당 한 표정을 한다. 나의 명령으로 불려나온 마법사들과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 “일단 한번 해보지.” 에르가 형이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며 투덜거리다가 가볍게 검을 빼들었다. 그를 보고 나도 검집에 손을 대었다. 음, 이렇게 하는 건가? -스창! 위로 길게 뽑은 후 반원을 돌려 내리며 양손으로 바로 잡았다. 내 자세를 본 에 르가 형이 조금 눈가를 좁혔다. 과연 초고수라 불리는 형이기에 겨우 이정도 움 직임에도 무언가 위화감을 받은 모양이다. 하지만 허점투성이인 대기자세를 보아 하니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간다!” 과감하게 내가 먼저 달려들었다. 아주 가까이까지 달려왔는데도 형은 멍하니 서 있을 뿐이다. 그동안의 내 실력 보아왔던 형이기에 너무나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 이다. 검을 위에서 휘두르자 형이 쉽게 한번 흘려보냈다. 상대적으로 힘이 부족한 내가 주춤하고 있자 그가 어느새 자세를 갖추며 어깨를 노려 검을 내려쳤다. “억!?” 당연히 내가 맞을 것이라 생각했던 눈치다. 끝까지 검의 끝을 지켜보던 내가 약 간의 차이로 그것을 피해내자 에르가 형이 아주 소리까지 질렀다. 게다가 당연히 명중할 거라 생각했던 검이 허공에 휘둘러지자 자세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렇-게!” 기합 같지 않은 기합을 지르며 주춤하고 있는 그의 뒤로 반 바퀴 돌아 그대로 검을 돌려 쳤다. 마음과는 달리 몸이 이상하게 옆으로 비틀어지는 느낌이었지만, 그런대로 하고자 하는 바를 달성했다. 그러나 역시 만만한 에르가 형이 아니라 몸을 옆으로 돌리며 뒤도 보지 않고 내 검을 걷어 올렸다. 쳐올리는 힘이 너무 강해서 이번에는 내가 균형을 잃으며 뒤로 깡충깡충 밀려났다. 에르가 형이 무서운 기세로 내게로 뛰어오고 있었다. 평소의 나와는 다르다는 것 을 깨달은 그는 아주 사정 봐주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리 무섭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 기억 속의 있던 자들은 에르가 형보다 몇 배는 강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이겼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내가 이긴 것은 아니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따라하다 보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 같 았다. 에르가 형이 강하게 땅을 굴렀다. 다시 한번 내 어깨를 노릴 심산이다. 조금 전 과 똑같은 공격이지만 이번의 것은 훨씬 빠르고 강력하리라. 형은 물론 내 생각대로 움직여왔다. 예상치 못하는 검의 움직임이라면 완전히 놓 칠 만도 한 빠르기였지만, 충분히 예상하는 경로에서 휘둘러 오는 검은 내 동체 시각으로도 충분히 잡아낼 수 있었다. 한 박자 빨리 움직여 있는 힘껏 그의 검을 옆으로 쳐냈다. 또 다시 검이 걷어내 어지자 에르가 형이 눈을 크게 떴다. 팔을 크게 위로 올린 채 있는 그를 향해 씨 익 웃어 보이며 바로 허리를 노렸다. 내 앞에서 이렇게까지 무방비인 형이라니... 하지만 좋아라하며 검을 휘두르는 동작을 하는 순간 이미 형은 검을 되돌린 채 로 있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지만 완벽하게 내 검을 받아냈다. 순간 절로 억 소리가 나왔다. 뭐가 저리 빨라?! 아니! 내 몸 왜 이렇게 느려!? “합!” 형이 강하게 검을 쳐올렸다. 나는 그 정도 충격도 버텨내질 못하고 뒤로 휘청휘 청하다가 결국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에르가 형이 내 코앞으로 검을 겨눔으로서 대련은 싱겁게 끝을 맺었다. 상대의 움직임을 한 박자 먼저 꿰뚫는 것으로 실력을 차를 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 몸은 두뇌의 이점을 모조리 무용지물로 만들 정도로 느렸다. 느 릴 것을 아예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내 몸뚱이가 얼마나 허접했던지 아주 내 상상 반경을 초월해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내가 검 한번 내려치려 우 물쭈물 하는 사이 에르가 형은 두세 번은 내려치지 싶다. “제길. 역시 안 되네... 몸이 머리를 안 따라주는 구만.” 투덜투덜 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실은 나의 승리 내지는 막상막하의 멋진 승 부를 펼칠 지도 모른다고 약간이마나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인 정하자니 슬프지만, 제 주제도 모르고 꿈이 너무 거대하였다. “한 번 더 상대해주십시오.” 에르가 형이 불쑥 내게로 손을 내밀며 말했다. 형은 아주 진지한 얼굴이었다. 주 위를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 특히 기사들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 다. 하긴 내 주제에 나라에서 손꼽히는 기사인 에르가 형의 검을 몇 번이나 피했 으니 그럴 만도 하다. “에스문드 백작. 그리 정색하지 마십시오. 다시 싸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 을 것입니다.” “확실히 약해빠진데다가 느려터진 움직임이었습니다만 순간순간의 반응은 보통 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그것을 확인해보고 싶습니다!” 약해빠진데다가 느려터졌다라... 아주 노골적인 대사를 읊는 그를 향해 저거 고의 가 아닌가 지긋한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아닌 척 하며 남을 약 올릴 재주를 구 사할 정도로 에르가 형의 재치가 넘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후 검을 바 로 갈무리한 후 말했다. “좋습니다. 원래 다시 한번 대련을 신청할 생각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순수한 검의 싸움이 아닙니다. 경고하건데 전력을 다하시길.” 당장은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하던 에르가 형이 조금 후에야 무슨 이야기인지 깨 달은 얼굴로 검을 꽉 쥐었다. 그가 제대로 자세를 잡는 것을 보고 빙긋 웃었다. “갑니다. 마법에 익숙하지 않으실 테니 사용하기 직전에 어떤 마법을 쓸 것인지 예고해 드리지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봐주겠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인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에르가 형이 삐딱 하게 나온다. 하지만 그 항의는 그대로 무시해주고 크게 소리쳤다. “매직 애로우!” 형이 여유롭게 피하더니 나를 향해 뛰어온다. 그가 뛰어오는 것을 보며 또 한번 소리쳤다.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매직 애로우!” 한꺼번에 세 개가 쏟아졌지만 형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훗- 웃으며 모조리 피해 냈다. 그런 형을 보며 나도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매지익---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애로우!” 그야말로 무식한 매직 애로우 다발 공격이었다.-아니다, 이것도 무식하면 못 한 다- 에르가 형이 윽! 하고 신음소리를 내다가 옆으로 틀며 공격을 피해냈다. 그 리고 직전으로 돌진하는 방법은 포기하고 크게 원을 그리는 형식으로 뛰며 점차 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를 중심으로 형을 향해 쏘아지는 매직 애로우는 허무하게 그의 뒤쪽으로만 박히며 애꿎은 흙만 뒤집었다. 기특한 우리 형. 역시 아주 멍청하지는 않다니까. 숨이 찰 정도로 매직 애로우만 쏟아내다가 형이 상당히 열 걸음 정도의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다가 왔을 때야 켈록거리며 매직애로우 난사를 그만두었다. 그 리고 일부러 손을 내밀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무언가를 보여줄 것을 암시했 다. 에르가 형이 경계하느라 약간의 주춤하는 사이를 잡아 소리쳤다. “파이어--- 스피어 스피어 스피어 스피어 스피어!!” “허헉?” 파이어 스피어는 한번 시전에 약 10여개의 파이어 애로우가 만들어지는 것을 말 한다. 내가 그것을 또 한번 무식하게 다발로 시전해 냈으니 수십여개의 파이어 애로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에르가 형이 내 주변에 무수하게 떠다니는 파이어 애 로우를 보고 아예 걸음을 멈추고 망연히 섰다. 내가 음흉하게 눈웃음만 치자 순간적으로 울컥한 에르가 형이 버럭 소리 질렀다. “이 비겁한! 그게 뭐야! 그런 걸 어떻게 상대하라는 거냐!?” “바로 그거야!” 손을 딱 튕기며 내가 소리쳤다. 그리고 이번에는 마법사들과 기사들을 향해 돌아 서며 말했다. “방금 보셨지요? 이 나라 제일의 기사도 상당한 근접전에서 시작된 일 대 일 대 련에서 패배를 시인했습니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파괴력 에서는 마법사에게 비견되지 못하나 근접전에서만은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사 실에서 상당한 명예를 가졌던 기사가 완전히 저 바닥으로 추락했음을 의미하지 요!” “뭐라고... 읍!!” 발끈한 에르가 형이 또 다시 반말로 소리쳤다가 이번에는 자기 손으로 빠르게 입을 가렸다. 하지만 에르가 형처럼 반말로 소리 지르진 않았으되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불쾌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들을 죽 둘러 본 후 이마에 주륵 흐르는 땀을 닦았다. 주위에 불덩이가 50개나 둥둥 떠다녀봐라. 땀 안 흐르고 배기나. “물론 저처럼 수여개의 스피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은 드물겠지요. 하지만 저는 예고를 함으로서 에스문드 백작에게 피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습니다. 불시 에 아무런 징조도 없이 허공에 나타난 매직애로우를 상대로 한다면 웬만한 고수 가 아닌 다음에야 어이없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는 이미 류스밀리온님 과의 대련을 통해서도 한번 밝혀진 바가 있었지요.” 주르륵 흐르는 땀을 한 번 더 닦은 다음 조금 고민했다가 손을 한번 들어올렸다. 그러자 50개의 파이어 스피어가 한꺼번에 하늘로 솟아올라 저 먼 곳으로 사라져 갔다. 겨우 주위가 서늘해져 한숨을 돌린 내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기사 여러분들은 더 이상 검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바야흐로 마법의 시대 가 도래하여 마법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하 지만 마법사분들도 마찬가지. 마법수식의 간편화로 여러분들은 더 이상 마법에만 파고들지 않아도 충분히 상당 수준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도 보다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방어를 위해 검이나 승마술을 배워한 다는 것입니다.” 웅성웅성거리던 사람들 중 류스밀리온님이 나서 말했다. “마법사가 검을 배워야 한다는 말씀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기사들도 마법을 배워 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마법이란 것이 그리 간단히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은 전하께서 가장 잘 아시는 사실이 아닙니까. 실상은 마법수식의 어려움은 둘째문제이며 마나를 느끼는 체질이 드물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틀린 말이 될 것입니다.” 한발자국 나서 내가 당당히 말했다. 류스밀리온님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사실 그는 이미 내가 이렇게 대답할 것을 알고 있었고, 어떤 방법이면 모든 이가 마법 을 배울 수 있게 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마나는 느끼는 것은 체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본래 마나를 느끼지 못하던 제가 갑자기 이렇게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을 리가 없지요. 저는 그저 모르던 지식이나 경험을 좀 더 축척하게 된 것에 불과한 상태 이니 말입니다.” “그럼 보통 인간들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기사가 흥분하여 질문 했다. 자신이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될지 모른다 는 흥분 때문이리라. “마나를 느끼지 못했던 자들은 그저 좀 무뎠을 따름입니다. 생소한 존재인 마나 를 접촉하는 시간이 너무 짧아서 그것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결국 좀 더 시간을 두고 그들에게 마나 유동을 해주었더라면 그들도 혼자의 힘만으로 계속 마나의 존재를 자각할 수 있었을 일이었다는 것이죠.” 이 말이 끝나자 희색이었던 류스밀리온님의 얼굴이 대번에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그가 일그러진 얼굴로 아주아주 불만스럽게 말했다. “뭡니까. 보통의 마법사들은 후배들의 앞에 붙어 앉아 1년이 넘는 시간동안 매일 같이 마나 유동을 해준단 말입니다. 설마 10년이고 20년이고 그들이 혼자서 마 나를 느끼게 될 때까지 마나유동을 계속 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류스밀리온님! 당신의 눈에는 제가 그리 어리석게 보입니까?” 류온님에게 시선을 줄 때 일부러 고개를 조금 들어올려 다소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때 목소리는 낮게 깔아 엄격한 느낌이 적격이다. 가벼움과 장난스러 움 속에서 이따금씩 튀어 오르는 카리스마와 그에 걸 맞는 지혜로움은 관중들을 들뜨게 만든다. 성큼성큼 걸어간 후 가장 가까운 곳에 선 기사의 이마에 대뜸 검지와 중지만 편 손가락을 얹었다. 실은 별로 손 같은 거 안 가져다 대어도 되는데 뭔가 있어 보 이는 듯 보이기 위해 쇼맨십을 택한 것이다. 손을 살짝 떼어낸 후 빙긋 웃으며 얼떨떨한 얼굴의 그에게 물었다. “어떤가?” “예? 뭐... 뭔가 기분이......” “상쾌하지?” “예! 게, 게다가 이상한 것이......!!” 기사가 조금 흥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자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궁금해 못살겠다는 류온님과 사람들의 시선을 느껴졌다. “체내의 마나를 유동시켜 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계신 사실 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심하게 지치기 때문에 오히려 마법사들의 지상 최대 의 목적은 자연의 마나만을 이용하며 체내의 마나만은 유동시키지 않는 것이지 요.” “그, 그런데 어떻다는 말씀이십니까?” 서론은 집어치우라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는 류온님이 보인다. 그 마음 은 알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기사들을 위해서는 서론이 필요한 법 아닙니까. 좀 참으세요. “방금 제가 기사에게 사용한 마법은 마인드 컨트롤이라 하여 체내의 마나를 움 직여 마음을 상쾌하게 해주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마법입니다. 물론 기분을 좀 좋아보겠다고 사용했다가 몸이 녹초가 되어버리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아주 소량의 마나만을 유동시키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기분을 편 안히 해주는 효력도 미미할 따름이지요. 하지만 이 만고에 쓸데가 없어 보이는 마법은 1서클에 불과하며 지속시간이 3경에 달한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마법을 사용하면!!” 뜸을 들여 이야기 하려는데 류온님이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 이며 대답했다. “지금까지는 크게 지칠 것을 염려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기존 마법사들의 시 간문제로 인하여 마나 유동시간을 두세 시간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간 단히 1서클 마법을 시전해 주는 것으로 반나절까지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강하 고 굵은 편보다는 약하게 지속적인 것이 더 효과도 뛰어나지요.” 마법사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이는 획기적인 사실이다. 마법사 양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카이 녀석. 참 너무한다. 이렇게 좋은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저만 알고 다른 사람에게 뿌리지 않다니. 물론 세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드래곤으로서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규 칙 때문이었겠지.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드래곤이 아니다. 세계를 뒤집 을 만한 지식을 마음껏 뿌리면서도 당장의 이익만을 찾는 어리석은 인간인 것이 다. 그래! 9서클 수식처럼 극악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제하고는 마구 뿌려버리자! 마법사들은 너무 강해졌다. 소수의 사람들이 그러한 강대한 힘을 소유하게 하기 보다는 차라리 만인에게 퍼뜨려 방비를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 아닙니다. 지금 저는 중대 발표를 위해 여러분을 이렇 게 모이도록 한 것입니다.” “이 보다 더 대단한 이야기가 또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중대 발표가 있겠다는 선언에 류온님이 기겁을 한다. 긍정의 표시를 해준 내가 팔을 크게 벌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말했다. “더 이상 마법사분들을 국가의 소유로 하여 생명의 궁에 속박시키지 않겠습니다. 다시 말해, 오늘부로 생명의 궁은 해산입니다. 마법사 여러분의 행보는 자유입니 다. 귀족에게 고용될 수도 있으며 왕궁 마법사라는 직책으로 다시 되돌아 와 일 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에에?” 자유로이 해주겠다는데 반응하고는...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점으로는 당연한 일이 겠지? “더 이상 마법사는 희귀한 존재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이러한 말을 내놓 은 것이지요. 하지만 한동안은 마법사의 수가 적은 이 상태가 지속될 터이니 모 든 분들은 어느 정도의 시일동안은 나라에서 지원할 마법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일해 주십시오. 여러분은 그곳에서 신진 마법사를 양성하고 스스로 연구를 하며 전과는 달리 타국의 마법사들과도 정보를 공유하고 의견을 나누실 수 있을 것입 니다.” “아니, 다 좋습니다. 하지만! 타국, 다른 나라라고 하셨습니까?” 네야드님이 바로 반발해왔다. 그는 류온님을 제하면 마법사 중 가장 높은 서열을 가진 7서클의 마법사였다. 의리에 따라 나의 수식 대신 국왕군을 선택했을 정도 로 보수적인 그가 생명의 궁을 해산시킨다고 할 때부터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다 가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소리쳤다. “하필 이 시기에 타국과 마법학을 공유하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내전으로 국력이 피폐해진 지금, 전하께서 손수 내놓으신 혁신적인 선진 마법만이 아르윈 왕국을 4개 강국의 일원으로 유지시켜 주게 할 것입니다. 이를 독점하지 않고 공 유해버린다면, 마법적 수준은 결국 평준화되어 카르틴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네야드님의 말에 수긍하여 웅성였다. 하지만 단 한사람 류온님만 은 여유롭게 웃었다. 나 역시 그를 힐끗 시선을 마주치며 피식 웃었다. 마법사와 기사들을 등지고 돌아 몇 걸음 걸어 나갔다. 겨우 이정도 행동에 벌써 부터 흥분한 사람들의 숨소리가 느껴졌다. 아! 멋들어지게 젖혀 넘길 망토만 있 다면 완벽한 연출을 통해 영원히 저들의 가슴속에 전설로 남을 명장면을 각인시 켜줄 수 있었을 텐데! 깊게 숨을 몇 번 들이켰다 내쉰 후 눈을 감았다. 아무리 내 머리가 업그레이드되 었다고는 해도 지금부터 사용할 마법까지 간단히 사용할 만큼 좋아지지는 않았 다. 이런 식으로라도 마음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심신을 차분히 가라앉힌 다음에는 목소리를 내려 깔아 고요히, 하지만 강하게 말 했다. 크게 소리치지 않아도 기대감에 가득 찬 사람들이 숨도 쉬지 않고 내 목소 리를 쫓고 있었기에 충분했다. “이 나라는 영원히 신성불가침의 땅이 될 것입니다. 아르윈은 그 어떤 나라도 침 략하지 않으며, 그 어떤 나라에도 침략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나 라의 주인인 나 카류리드 드 크레티야 아르윈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뒤편으로부터 동시다발적으로 침음성이 들려왔다. 그것 은 따로 볼 것도 없이 마법사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꿈에서도 상상해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마나의 소용돌이를 직접 체험하고 있을 테니까.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까지도 경악함에 묻혀 고요해졌을 즈음 천천히 눈을 떴다. 마법을 시전하느라 지친 몸을 견디다 못해 격한 숨을 토해내면서도 허공을 향해 시선을 두며 씨익 미소했다. 똥색 도마뱀. 미안하지만 너의 야망에는 내가 태클을 걸겠다! ========================================================== ...............................=ㅅ=; 설명이 너무 길어져서 좀 그렇군요.. 하지만 뭐......... ‘에라이~ 나도 몰라~’입니다. -_-; 지루하셨더라도 용서하세요. 카류가 사람들 앞에서 유식한 면모를 보이는 장면이잖아요. 좋죠? 그죠? (퍽퍽퍽퍽!!) 어제부터 쓰던 장면인데 왠지 쓰기가 싫어져서 빈둥거리다 잠들어버렸답니다.;; 하루 10장 쓰기 목표는 점점 멀어져만 가고.. ㅠ_ㅠ 출판사 담당언니에게 한 약속은.... 어떻하지...... 흑흑.... 이르나크의 장 Part 67 카르틴 (3) 국경선을 맞대고 우리 카르틴과 아르윈의 대군이 집결했다. 내전에 이어 또 한번 대규모의 전쟁이 터질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연한 결과로 아르윈의 모든 국민들이 불안에 떨었다. 이번 전쟁은 패배할 경우 우리들 카르틴에 먹힐 수도 있는, 사활을 건 전쟁인 것이다. 인심이 흉흉해져서인지 제6왕자는 즉위식을 뒤로 미루었다. 그러한데 황당하게도 그가 내세운 기간은 무려 ‘카르틴 왕국과의 전쟁이 끝난 후’ 였다. 전쟁이란 것이 그리 금방 끝날 일이 아닐 것을 왕위를 그렇게나 오래 비워두겠다고 만인의 앞 에 공표한 속셈이 뭔지 한번쯤 머릿속 뇌를 파내보고 싶어진다. 예닐 평원에 맞은편으로 아르윈의 5만 대군이 내려다 보였다. 아군의 10만 대군 을 비한다면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 웃기지도 않는 오합지졸 집단의 사이로 눈에 익은 꼬맹이, 카류리드 왕자를 보았다. “폐하. 아르윈의 6왕자입니다.” “아... 좀 멍하게 있었던 모양이군. 고맙네, 루인 공작.”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폐하께 말을 전해 올렸다. 그분은 음의 고저 없이 대답한 후 그저 고개만을 끄덕였다. 막 전투가 시작되려는 상황이니만큼 호쾌하게 웃으 며 병사들을 독려할 만도 했을 텐데. “이제 알 수 있겠군요. 사신이 전해온 그 말의 진위를.” 폐하의 너머에 정렬하고 서있던 헬뮨트 후작이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꼬이 던 심사에 그의 말은 불을 질렀다. “진위는 무슨! 그런 힘이 있었다면 왜 그 오랜 내전동안 계속 쓰지 않고 자국의 힘까지 빌렸다는 말이오!” 이를 바득 갈고 앞을 내려다보았다. 카류리드 왕자. 내전에서 그를 도왔을 때도 힘없고 위엄도 부족한 꼬맹이에 지나 지 않았다. 도무지 어떤 면모가 폐하의 마음에 들었는지도 이해되지 못할 정도로 무능한 놈이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그놈이 갑작스레 폐하께서 보낸 사신의 앞에다 대고 사라 지라고 큰소리를 탕탕 쳤다고 한다. 물론 그 정도라면 무능하기만 하던 놈이 드 디어 머리꼭지까지 돌았거니 하고 넘어가도 좋았는데 돌아온 사신이 손과 발을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던 것이다. 그날, 왕성의 아래서 천지를 갈아엎을 거대한 바람의 소용돌이를 보았노라고. 6 왕자를 거역한다면 지옥의 강림을 보게 될 것이라고. “6왕자가 만들어낸 지옥은 땅에 강림하지 않고 그대로 허공으로 스러졌다고 했 지. 전에도 그들은 드래곤의 환영을 만들어 보인 적이 있었소. 생각할 것도 없이 분명 그런 종류의 것일 것이오.” “제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에키네일공!” 앞으로 걸어 나오는 에키네일을 향해 손을 탁 튕겼다. 고상한 척만 하는 8서클 마법사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지 않는가! 그에 헬뮨트 후작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저도 에키네일공과 마찬가지의 생각입니다. 루인 공작님의 말씀대로 그러 한 힘이 있었다면 일전에 있었던 내전에서 우리의 손을 빌릴 이유도 없이 단기 간에 승리를 거둬낼 수 있었을 테니까요. 우리나라가 지레 겁을 먹고 쳐들어오지 않기를 바라는 헛된 소망이 담긴 행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헬뮨트 후작의 시선에 폐하께로 옮겨졌다. 그분은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아직 한마디도 않고 앞을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폐하께서는 달리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그때가 되어서야 폐하께서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저... 루인 공작과 헬뮨트 후작이 짐에게 직접 전한 이야기가 있었지. 아르윈 왕국의 마법수준이 우리나라에 비교해 월등히 강력해 보인다고. 그 사실을 감안 했을 때 혹여나 다른 변수가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 것이오.” “네.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헬뮨트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도 에키네일도, 그리고 나마저도 폐하 께서 그러한 이유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직감을 받고 있었다. 사신의 전언 이후 아르윈 6왕자의 진의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물론 대부분이 헛소리에 현혹될 것 없이 당장 출진해서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견이었으 나, 폐하께서는 그동안 옥좌의 가운데에서 계속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단 한마디 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모아진 귀족들의 의견에 허가를 내어주었 을 뿐이다. ‘어째서인가?’ 그날 폐하의 태도에 나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귀족들이 똑같은 의문을 가졌다. 그 리고 그날의 의문은 전쟁의 시작에서 막연한 불안감을 안겨다 주었다. 아주 조금이라면 집히는 부분도 있긴 했다. 폐하께서 카류리드 왕자를 꽤나 마음 에 들어 하셨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심히 불쾌한 일이다. 그의 나라를 파멸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인가? 진실로 나의 왕이 그리도 나약한 분 이었다는 것인가? 적장 따위를 걱정하여 공식 석상에 자신의 감정을 쉽사리 드 러내는 분이라는 말인가!? 제6왕자가 말을 몰아 홀로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검술이 뛰어나 맨 앞에서 적을 칠 것도 아니면서 무슨 생각인지... 설마 자신의 입바른 몇 마디에 아군이 위축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겠지. “역시... 호위기사가 없군.” 문득 중얼거리는 그분의 목소리가 들려와 잠시 고개를 돌렸다. 폐하의 행동에 바 짝 신경을 쏟고 있던 헬뮨트 후작과 에키네일도 잠시 똑같은 행동을 했다. 호위기사라면 비공식석상에서 처음 만났을 때 폐하께서 크게 화를 냈던 그 여자 말인가? 아름다운 붉은 실타래의 머리칼에 폐하에 비견되는 검술을 지닌 이상한 여자. 우리들이 잠시 시선을 폐하께로 주고 있는 사이 6왕자가 어느 정도 거리에서 멈 추어 섰다. 목을 흠흠 가다듬던 그가 크게 소리쳤다. “어리석은 카르틴이여! 내 너희들에게 단 한번의 기회를 주겠다. 지금 당장 말머 리를 돌려 너희들의 땅으로 되돌아가라! 그리하면 재앙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오른편 4군단에서 어떤 기사가 걸어 나와 크게 소리쳤다. “입을 놀릴 줄 밖에 모르는 아르윈의 패륜아야! 네놈은 상대를 속여 넘길 생각밖 에 하지를 않지!! 약해빠진 네게 정정당당히 싸울 힘 따윈 존재치 않으니!!” “옳소! 멍청한 아르윈 놈들!” “와하하! 명답이다!!” 기사의 대답에 아군의 진영에서 점차 웃음소리가 번져갔다. 비웃음이 높아져 가 는 가운데에 카류리드 왕자는 조용히 서있기만 했다. 입을 놀리는 재주만은 뛰어 난 것으로 아는 저 놈이 웬 일로 저런 이야기를 듣고도 받아치지 않는 것인지 오히려 불안해졌다. 상대가 받아치지 않았기에 곧 웃음소리는 가라앉았다. 주위가 잠잠해지고서야 카 류리드 왕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놈이 한손을 높이 쳐들었을 즈음이었다. [ 우매함의 죄는 죽음으로 치르게 될 것이다. ] 갑작스레 울리는 목소리에 흠칫하여 귓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저 멀리서 말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6왕자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 려오고 있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인지 굉장히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 렸다. [ 스스로의 손으로 살 기회를 차버렸으니 나를 원망하지는 말라. ] 또 한번 같은 방식으로 카류리드 왕자의 말이 전해졌다. 순식간에 병사들이 혼란 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에키네일을 돌아보니 그가 감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왕자가 4서클의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아르윈 측에서 새로이 개발한 확성 마법 의 일종인 것 같습니다.” 아아, 확성 마법이라는 것인가. 그의 대답을 들으니 내심 놀랐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확성 마법일 뿐이다! 동요하지 마라!!” “놈들의 특기가 별 것도 아닌 것으로 겁을 주는 것 아니더냐!? 허약해 빠진 놈들 앞에서 당황하지 마라!” “별 볼일 없는 마법에 흔들릴 것 없다!” 마법사들의 진언을 듣고 지휘관들이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은 금방 진정하는 모 습이었다. 흡족히 웃으며 전방의 카류리드 왕자를 향했다. 어떠냐. 아군은 너희들 처럼 그런 시시한 것에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 가련한 자들... ] 그때 또 한번 확성 마법을 통해 카류리드의 목소리로 들려왔다. 그 마법은 얼마 나 성능이 좋은지 말에 담긴 씁쓸한 느낌까지도 전달해주고 있었다. 왕자가 나머지 한손까지 마저 하늘위로 올린 후 고개를 들며 눈을 감았다. 아르 윈을 다녀왔던 사신이 말했었던 것처럼, 하늘에 지옥의 불구덩이라도 소환해보겠 다는 느낌이다. “이제 와서 신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기원이라도 하는 거냐!” “그저 나태한 놈들이 신의 구원이나 바라지! 와하하하!!” 카류리드 왕자가 그 자세로 움직이질 않자 여기저기서 또 한번 비웃음의 목소리 가 터져 나왔다. 나 또한 즐겁게 그 소리를 들으며 가소로움에 피식 웃었다. 짧 은 시간 여흥이라도 삼게 아주 그 자세로 계속 비웃음이나 먹어라. “크...흑!!!” 갑자기 상황에 맞지 않는 신음소리가 들렸다. 하필 어떤 놈이 이런 상황에 초를 치는지 짜증스러워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의외로 신음성을 낸 것은 에키 네일이었다. “아... 아아아아...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앞을 바라보던 그가 고개를 절래절래 젖기 시작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서 에키네일을 보좌하던 다른 마법사들도 난데없이 경기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신이시여!!” “이것은 꿈이야!!” 시간이 지나자 목소리는 멀리 오른쪽에서 터져 나오기도 했고, 저 뒤쪽에 떨어진 부대에서 들려오기도 했다. 군의 요소요소에 배치된 모든 마법사 놈들이 전부 겁 에 질려 비명을 지르고 믿을 수 없다고 소리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미친놈의 마법사는 부대의 밖으로 튀어나가 벌벌 떨며 머리를 땅에 쿵쿵 처박기도 했다. 순식간에 아군은 불안의 도가니로 바뀌었다. “아아, 현명하신 나의 주군이시여! 당신은 알고 계셨던 것입니까!! 그리하여 이 전쟁이 그리 내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까!” 에키네일이 떨리는 양손을 꼭 맞잡고 말했다. 폐하는 말없이 카류리드 왕자를 쳐 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안타까움과 괴로움을 애써 숨기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저... 불안했을 뿐이다. 짐이 무슨 수로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을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인가. 미리 알고 있었다면... 애초에 강경히 출진을 반대했을 터이 지......” 그분이 천천히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 곁에 서있던 에키네일은 잠시 눈을 찔 끔 감았다가 이를 악 물고 고개를 쳐들었다. 나도 고삐를 쥔 손에 강하게 힘을 준 후, 그들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지옥의 강림 앞에 모든 존재가 돌이키지 못할 한줌의 먼지가 될지어다. 그대들 은 이 재앙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 영원의 시간 속에 마지 막으로 구현될 권능이길 바라노라. ] 머리카락이 거칠게 날리고 있었다. 어느덧 시커멓게 변해버린 하늘이 거칠게 날 뛰는 바람을 토해내며 이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 웅웅거리는 소음의 안에서 도 카류리드 왕자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선명하게 들려왔다. “9서클의 헬 윈드... 그야말로 전설 속에나 실존했던 마법이오......” 두려움일까. 아니면 전설의 마법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에 대한 희열일까. 도무 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에키네일이 두 눈으로 눈물을 주륵 흘리며 말했다. 거칠게 날뛰던 하늘이 쏟아져 내렸다. 무슨 이유인지 마법은 직전에 천천히 오른 쪽으로 움직이며 아군의 진영을 점차 비켜나가기 시작했고, 덕분에 폐하나 내가 있던 곳은 다소 안전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천운인지 고의인지 적의 마법이 사 정을 봐주고 있는 상태였는데도, 무려 3만이 넘는 대군사가 스쳐지나가는 짙은 바람의 칼날에 휘말려 찢겨져나갔다. 인간들을 비켜 주된 목표가 된 푸른 수목들 은 아주 뿌리 채 뽑혀나가 조각조각 부서졌다. 사정 범위로 보면 대규모의 도시 가 단번에 폭풍 속으로 잠겨가는 것과 같았다. 우리들에게 진언하였던 사신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아르윈의 왕성을 모조리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폭풍이 생겨났다던 그 콧방귀도 안나오는 헛소리는 황당 하게도 진실이었던 것이다! 손의 떨림을 멈출 수가 없다. 저 마법이 자국의 수도와 곡창지대에 한 번씩만 떨 어져도 우리 카르틴은 무너진다. 아니, 겨우 카르틴 하나가 문제겠는가. 일년 안 에 크로시아 대륙은 물론 전 세계를 제패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십만 대군? 백만의 병사? 철옹의 성벽? 아무런 소용없다. 단 한사람! 아르윈의 6 왕자만 있으면 그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미쳤다... 어찌하여 신은 저런 애송이에게 이처럼 거대한 권능을 주신 것인가.” 저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신 따윈 믿지 않았지만, 여기까지 오 자 더욱 믿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 미친 것이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것은 폐하의 목소리였다. 헬 윈드라 불리는 그 마법은 단순히 진정되는 데까지도 긴 시간이 걸렸다. 아직 까지도 웅웅거리는 귀 울림이 사라지지 않았다. 용맹한 우리들의 군사들은 이미 싸울 기력을 잃었다. 많은 수가 무기를 버린 채 자리에 주저앉았고, 아주 소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는 자도 있었다. 적진의 병사들 역시, 자신이 당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넋이 빠져 있는 모습이었 다. 단 혼자만의 힘으로 초목과 풀, 그리고 인간이 있던 대지를 폐허로 만들어버린 6 왕자가 드디어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의 움직임 하나에 무려 15만 명에 이르는 인간들이 오금을 지리는 모습은 삼류 희극의 한편보다도 더욱 기가 찼다. 그때였다. 크게 화가 난 표정의 폐하께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고 있었다. 모든 인간들이 강대한 파괴의 앞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그분만이 당당히 앞으 로 나섰다. 아아! 그것이다! 이래야만 하는 것이다! 황금의 성왕! 당신이 이런 인간이기에 나 의 주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류리드 왕자의 힘은 화가 나지만 어찌 부정할 도리 없이 강대하여 나까지도 굳어버리게 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말고삐를 당겨 폐하를 호위하기 위해 그 뒤를 따랐다. 폐하께서 힐긋 나를 돌아보았다가 말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나와 폐하를 보고 카류리드 왕자도 앞으로 나왔다. 그는 어떤 호위기사도 대동하 지 않은 채 오로지 혼자였다. 대군을 양쪽으로 두고 그 가운데에 카류리드 왕자와 폐하께서 마주섰다. 고요가 가득 찼다. 수많은 인간들이 선 이 거대한 평야에는 그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 다. 순간이었다. 허리의 검을 뽑아낸 폐하께서 기습적으로 카류리드 왕자를 향해 휘 둘렀다. 설마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하여 나까지 흠칫하여 놀라고 말았 다. 카류리드 왕자는 가벼운 갑옷도 착용하지 않은 채다. 폐하의 검이라면 몸통까지 두 조각으로 만들지 모르는 일이었다. 탕-!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절호의 기회같이도 보였던 그 공격은 폐하의 검이 허공에서 튕겨나가며 막을 내렸다. 카류리드 왕자가 손을 들어 허공을 한번 슥 훑어내자 태양빛에 반사되며 투명한 원 같은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물리방어용 프로텍션 실드. 3서클이라 사용도 간편~이라고 할까요.” 왕자 놈이 얄미운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제야 조용하던 주변에서 조금씩 웅 성웅성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한숨을 훅 쉬더니 검을 다시 검집에 갈무리했다. 갑작스레 생소한 마 법에 가로막혔음에도 그리 놀라거나 하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 가 난 얼굴의 그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카류리드 왕자를 향해 말했다. “짐의 소중한 백성들이 한낱 먼지로 변하는 광경을 무력한 채로 그저 지켜보기 만 하는 심정이란 실로 참담하군! 짐은 검사가 아니라 마법사가 되어야 하나? 그 리하여 세계를 위협하는 너를 이 손으로 쳐야만 하는가?” 카류리드 왕자가 그에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 분개하지 말아주십시오. 저 또한 수만의 인간을 몰살시키는 일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았답니다. 그러나 저는 곧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자로서 제 나라 를 지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 방법 이외에는 당신들을 물러서게 설득시키는 일 이 불가능했음을 케시뮈르 4세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이해할 것 같더냐?! 제 이익에 눈이 멀어 9서클 마법을 남발하는 마법사란 아무 데서나 권능을 행사하는 미친 드래곤과 다를 바가 없다! 깨달음은 얻어 9서클마 저 통달한 마법사라면 제 힘이 낳을 결과를 모르지는 않을 터! 너는 왕위를 버리 고 이곳을 떠나야 했다! 어찌 국가간의 다툼 따위에 몸을 담아 그 권능을 사용한 다는 것인가!?” 약간 불안한 심정으로 이를 강하게 물었다. 물론 지금까지 배출되었던 모든 9서 클 마법사들이 세계의 균형을 생각하여 은거를 택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르윈을 침략하려했던 폐하의 입장에서 카류리드 왕자에게 은거를 하지 않음을 질책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카류리드 왕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폐하의 말에 동조하며 차근히 대답을 해나갔다. “모두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군요. 이 힘은 그저 우연으로 얻게 된 것 일 뿐입니다. 오랜 세월 고심하여 깨달은 분들과는 달리, 저는 소인배에 불과하 기에 뻔히 펼쳐진 인과율을 보면서도 오랜 세월 얻은 왕위와 소중한 이들이 있 는 나라에 여전히 깊은 미련을 가지고 힘을 빌려주고자 합니다.” “역시 나는 너를 처단해야만 하겠군!!” 문득 폐하께서 ‘짐’ 이 아니라 ‘나’ 라고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단순한 실수를 넘어서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느낌을 줬다. 하지만 그보다도, 폐하께서는 무슨 수로 검도 통하지 않는 저 놈을 처단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시는 것일까. 물론 강자 앞에 움츠린 그분이란 상상도 하지 못할 일 이지만, 허풍을 떠는 그분도 그리 내키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갑자기 6왕자가 양손을 크게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깜짝 놀란 내가 혹시 무슨 마법을 사용해 폐하께 해를 입히지 않을까 경계하여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 다. 그때 6왕자가 나를 슬쩍 바라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무슨 뜻으로 저렇게 웃는 것인지 의아해졌다. 비웃음은 아닌 듯 보였다. 그래, 그 것은 어쩐지... 걱정할 것 없다고, 쓸데없이 걱정 따윌 한다고 말하는 듯한 느낌 이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그는 다시 시선을 폐하께로 옮겼다. “이 손에 머물고 있는 것은 위협하기 위한 힘이 아닌 지키기 위한 힘. 전대에 위 대하셨던 분들과 같이 은거를 택할 수는 없어도, 이 나라를 지키는 일 외에는 결 코 이 권능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해 케시뮈르 4세께서 아 르윈 왕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두 번 다시 9서클 마법을 사용할 일이 없을 것임 을 뜻합니다. 어떻습니까? 약간의 양보만으로 해결될 일에 카르틴의 제국주의를 버리기가 아까워 이 덧없는 생명 하나를 앗아갈 피의 전쟁을 일으킬 생각은 아 니시겠지요?” 폐하께서 미간을 좁히다가 고개를 돌리며 짧게 말했다. “약은 놈!” “그냥 운 좋은 녀석이라고 해주시죠. 제가 원래 아닌 듯 하면서도 운이 좋습니 다.” 역시 이 대화, 어딘가가 이상하다. 아무리 폐하라고는 해도 9서클 마법사가 된 6 왕자를 저지할 힘이 있을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런데 왜 폐하께서 6왕자의 위 에 군림한 듯한 느낌이 되는 거지? “무책임하게 벌인 일에 수습을 나서려는 참입니다. 9서클 마법사의 자리에 등극 하게 될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가지게 된 이상, 아주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지는 못하더라도 그 나름대로 현자다운 짓도 좀 해볼 생각입니다. 한번쯤은 기회를 주 고 지켜봐 주십시오. 사활을 건 다툼은 제가 해가 되는 일을 저지르기 시작하는 그때로 미룬다 해도 좋을 것입니다.” 빙글빙글 웃으며 이야기를 마친 그가 말머리를 돌려 자신의 본진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폐하는 눈을 좁힌 채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 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알 수 있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모종의 비밀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거에 폐하께서 카류리드 왕 자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에는 다 그런 이유에 함축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일 까. 하긴, 폐하께서 단순히 뭣도 모르고 시건방지게만 하는 꼬맹이 따윌 그냥 마 음에 들어 했을 리가 없지! “뭣도 모르고 시건방지기만 하던 것이 저리 커버렸군. 그래도 순수해 보였던 옛 날이 좋았거늘......” 갑자기 폐하께서 작게 한마디를 중얼거리시더니 말을 돌아 서셨다. 내가 입을 좀 벌리고 망연히 서있자 그분이 뒤를 좀 돌아보고 말했다. “루인 공작. 무엇을 멍하니 서 있는가? 퇴각이다. 9서클 마법사와 맞설 수는 없 는 일이니.” “예. 네.......” 뒤늦게 그분의 말을 듣고 조금은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대한 힘으로 일그러져있던 하늘은 이미 맑게 갠 후였다. ===================================================== 태클 걸린 똥색 도마뱀과 그의 졸개. <-부제목 아 맞다! 아루시님 매번 꼬박꼬박 감상 보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 이번에는 적고 말았도다!! 음하하하~~!! 그럼 저는 이만~ ^^ 이르나크의 장 Part 68 즉위 내전이 끝나고 나자 처리해야 할 서류들이 눈덩이 불어나듯 카류의 앞으로 쏟아 졌다. 국왕군에 속했던 귀족들의 처분, 그리고 아군에 속했던 귀족들을 치하하는 것도 그 수많은 일들 중 하나에 속했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임시 귀족 소집회에는 내전 이후 강한 영향력을 가지게 된 자들만이 참석한 상태였다. 트로이 후작가문의 일원이라 상황이 애매하긴 하지만 나 역시 이 귀족들 중 상석에 자리하게 되었다. 중앙의 옥좌에 앉아 서류를 뒤집 던 카류가 그리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간단히 말했다. “아예즈 공작가와 파나인 공작가는 백작위로 격하. 영지의 반을 몰수하겠습니다. 투항한다면 사정을 봐주겠다고 공언했지만 이 정도 처분이야 그들도 각오하고 있겠지요?” “물론 피를 보지 않은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드래곤의 현자로서, 리아 후작가의 장남이라는 위치와는 별개로 재상의 자리에 서있던 힐레인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카류는 빙긋 웃은 다음 서류를 다음 장 으로 넘기며 이어지는 귀족들에 대한 처분을 계속 말해갔다. “후르부크가는 이번 내전에서 백작과 뒤를 이을 단 둘 뿐이었던 자손이 모두 전 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랜 역사를 가진 명망 높은 후르부크가는 멸문하였군 요. 하지만 세미르경의 공을 보아 백작부인께서 타개하실 때까지 영지를 맡기고 몰수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불만 있으신 분?” 서류에서 얼굴을 들어 카류가 귀족들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모든 귀족들은 입 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옥좌에 앉은 카류는 그저 고개를 조금 기울이고 있을 뿐 인데도 이상하게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불만은 결코 용납지 않겠다는 뜻과 같았다. “천만다행히도 불만이 있는 분은 없는 모양이군요.” 한동안 좌중을 살피던 카류가 빙긋 웃어보였다. 회장을 감도는 팽팽한 긴장이 증 명해 주듯 녀석의 입에서 나온 ‘천만다행’ 이라는 단어를 특히나 의미심장하게 생각하는 자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불만이 있다면 달리 어찌 해보기라도 하겠다 는 협박과 비슷한 종류의 냄새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역시 변했다. 카류는 전과 달리 사람을 다룰 줄 알게 되었다. 가공할만한 힘을 지닌 9서클의 마법사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가끔씩 접하 다 보면 그보다는 아주 근본부터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곤 한 다. 카류는 어떻게 움직여야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지, 반대로 우러러 존경하는 지를 깨달은 듯 보인다. 그렇기에 때때로 나오는 한마디 말이나 손동작이 숨이 막힐 정도로 우아하며 동시에 위엄 있다. 몇몇 행동은 단순히 겉멋만 늘어 저러 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주지만, 그러한 것들마저 너무나 적시적기에 행해져 사람들로 하여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전율 하여 무릎을 꿇게 만든다. “그 다음. 이크쟌트 후작가는 자작가로 격하시키겠습니다. 영지의 반을 몰수합니 다.” 서류를 뒤집으며 카류가 다음 이야기를 계속해갔다. 그 뒤로 계속 여러 귀족가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트로이 후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국왕군의 중심과 같은 일을 했었지만, 내가 작위를 이을 예정이기에 트로이가의 작위는 그대로 둘 생각인 모양이다. “그럼 처분에 대한 것은 여기까지로 하고, 공을 치하할 일에 대해 논해볼까요?” 지금껏 들고 있던 서류를 옆으로 내려놓은 후 새로운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 말 에 주위의 분위기가 한결 들떠 올랐다. 위험을 무릅쓰고 카류의 편이 된 것은 바 로 이 순간을 위해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물론 실질적인 치하와 작위식 은 카류가 즉위한 후에나 천천히 이루어지겠지만. “이렇게 되면 아무래도 양대 공작가라는 말은 사라지겠군요.” 카류의 짧은 한마디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양대 공작가가 사라진다는 것은 셋 이 상의 가문이 더 생기거나 아니면 단 하나의 가문만이 공작위를 받게 될 것이라 는 뜻. 드래곤의 현자인 힐레인과 왕비후보인 히노양이 존재하는 리아 후작가가 공작위 를 가지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물론 결정적인 순간에 큰 힘을 실어준 에스문드 백작가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에스문드 백작가의 이름을 빌려 여기 사로서 움직인 카이야님이나 내전의 승리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에르가의 소문 은 어느새 부풀려질 대로 부풀려져서 음유시인의 노래가 될 수준이다. 두 가문의 공작위 수여는 이미 예정된 일. 그렇다면 셋 이상의 가문이 공작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우측의 상석으로 간다. 이 상황에서 새로 들어갈 사람이라 면 단 한사람 밖에 없다. 레이포드경. 현재는 남작위를 가지고 있지만 본디는 평 민의 신분이었기에, 의심할 여지없는 이 나라 최고의 기사이며 어마어마한 공을 여럿 세웠지만 큰 작위는 받을 수 없었던 인물, 바로 그다. 아무래도 이번 인사는 참으로 파격적이 될 것 같다. “아무래도 공작가가 될 가문은 리아 후작가, 에스문드 백작가, 그리고 레이포드 남작가.” 카류의 입에서 나열된 가문의 이름은 내가 생각대로였다. 레이포드경은 미소하고 있었고,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대부분 귀족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하지만 아직은 누구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레이포드경은 애초부터 어느 정도의 작위를 가져도 충분할 정도의 공을 세운 자 였다. 이번 내전에서는 아예 아군의 총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카류가 신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성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주 당연한 인사이며, 웬만 한 일이 없고서는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 반론을 내는 것은 미운털 박히는 짓이며 긁어 부스럼 내는 짓일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로이 후작가, 이렇게 넷이 될 것 같군요.” 순간 웅성이던 회장이 싸늘히 식었다. 그에는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충격적인 발언을 마친 카류가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무슨 불만이라도?” “저, 전하. 트로이 후작가까지 공작위를 수여한다는 것은......” 침묵을 깨고 가장 먼저 나선 것은 리아 후작이었다. 나를 힐끔 보긴 했지만 어쩔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뭐,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오랜 세월동안 대대로 우리 트로이 후작가는 리아 후작가의 라이벌이었고, 오늘 이 자리는 리아 가에게 있어 드디어 한 걸음 앞설 기념비적인 날이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카류가 대뜸 던진 한 마디에 무산 이 되었다. 사실은 나도 황당할 지경인 것이다. “전하의 판단을 의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트로이 후작가의 건만은 다시 한번 재고해 주실 수 없을는지요.” “트로이 후작 덕에 이 내전에서 빠른 승리를 거둬낼 수 있었다는 것은 리아 후 작도 아실 거라 믿습니다. 그 외에도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생각합니다만......?” “트로이 후작 덕이라니... 물론 딜트라엘경이 있긴 합니다만 현 트로이 후작 은......” 탕-! 카류가 서류를 세게 내려놓으며 리아 후작의 말을 끊었다.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 시키는 듯 잠시 시간을 끌던 그가 강하게 말했다. “내가 치하하는 것은 현 트로이 후작이 아니라 미래의 트로이 후작입니다. 어찌 하다가 상황이 복잡하게 꼬이긴 했으나, 저의 판단까지 복잡하게 꼬여 나올 필요 는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쓸데없는 겉치레는 집어치우고 직설적으로 말하도 록 하겠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큰 힘이 되어준 자만이 공작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즉위하는 날 딜트라엘경은 트로이 공작위를 수여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리아 후작! 내 입에서 나올 말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공의 반론에 대답 하기 전에 묻지요! 내게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번복하게 할 심산입니까?” “......” 카류의 자세가 굉장히 강압적이라 리아 후작은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가장 강력 한 세력을 가진 리아 후작이 침묵함으로 인해 이 자리의 다른 모든 귀족들도 불 만을 토로할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다. 카류는 리아 후작을 비롯한 여러 귀족들의 추대로 간신히 왕이 되 었지만, 마지막에 와서는 모든 귀족들의 추대가 없어도 충분히 왕으로서의 위엄 과 기개를 갖추게 되었다. 오히려 이 나라는 9서클의 마법사인 카류가 있음으로 해서 겨우 존속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그가 독단으로 나간다 해도 그 누구하나 반론을 펴낼 수 없다. 실제로 귀족들의 의사를 무시한 카류만의 단 독 결정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추세인 것이다. 하지만 왜일까. 세간에 그가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다고 지탄하는 평은 듣기가 힘 들다. 이제 막 왕도를 걷기 시작했을 뿐인 카류가 모든 일에 임하여 이상할 정도 로 능숙하게 처리해 나가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드래곤이신 카이야님의 힘... 그렇다면 이번 일도 사사로운 정에 얽매여 제멋대로 행한 결정 따위가 아닌, 미래를 내다본 냉철한 판단이라고 판단 해도 되는 것일까? “그럼 스나일 백작가에 대해서입니다만......” 카류의 목소리가 이어지며 내 의문을 덮어간다. 사람들의 힐긋거리는 시선에 무 표정을 유지하며 회의를 계속했다. ====================================================== 쓰다가 끊습니다. 잠 와서 도저히 못 쓰겠습니다; 오늘 내로 다 쓰려고 했는데 안 되는군요. 먼저 말씀드립니다. 지난 토요일부터 시작하여 시험기간에 돌입했습니다. 물론 지각결석을 밥 먹듯이 하는 불량 대학생의 당연한 본 분으로 성적에는 아주 신경 끊고 살지만, 백지로 낼 수준까 지 다다르면 쪽팔림으로 인한 심각한 정신적 타격을 입기에, 조금이나마 끄적일 지식을 축척하기 위해 당일치기 공부를 시작합니다. 월요일 목요일 시험이고 화요일까지 홈페이지 레포트 내야 합니다. 아마 글 계속 못 올릴 듯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짧게라도 웬만하면 올리는 방향으로...... 그럼 안뇽히....... 이르나크의 장 Part 68 즉위 (2) “그럼 있다 보지. 공작.” “그래, 공작.” 에르가 녀석이 어깨를 툭 치며 말하기에 나도 똑같이 대답해주었다. 녀석은 피식 웃고서는 아버지인 카나스님과 함께 동편 복도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얼마 못가 다른 귀족들의 인사에 걸음을 멈추고 만다. 최근 검사로서 대단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다가 공작위까지 약속된 녀석이다. 친분을 쌓고자 하는 자들은 차고도 넘 쳤다. “딜트라엘경. 축하드립니다. 이제 곧 공작님이 되시겠군요!” 물론 그것은 나도 예외는 아니다. 에르가와 헤어지자마자 다가오는 것은 크로첼 자작. 그 외에도 다른 귀족들이 하나 둘 내게로 모여들 듯한 태세다. 하지만 난 그런 부류들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큼 여유로운 기분은 아니었다. “축하는 고맙네만 잠시 볼일이 있어서... 실례하지.” 아쉬운 얼굴의 크로첼 자작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내게 다가오려던 다른 귀족들 도 웅성거리다가 달리 빌붙을 자를 찾아 떠나간다.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는 인사에 사람들이 대부분 회의장 안이나 그 주변에 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강한 세력을 가진 자에게 빌붙어야 할 테니까-, 그 덕분에 복도는 꽤나 한산했다. 공기의 서늘함을 즐기며 복도를 천천 히 거닐었다. 이렇게 걷노라면 어딘지 비틀린 기분이 약간이나마 가라앉는 느낌 이다. “공작이라고?” 코너를 돌기 전 우뚝- 걸음을 멈췄다. 절친한 친우로 보이는 젊은 귀족이 두 명. 누군가에게 빌붙는 데는 그리 관심이 없는 이른바 청정한 족속들이 따로 빠져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불쾌한 듯 들리는 목소리를 보아하건대 그들이 누구를 향해 입담을 나누고 있는지 금세 판단이 섰다. “트로이 후작가라면 태자파의 우두머리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정말 전하께 서 트로이 후작가에 공작위를 내리겠다고 말씀하셨다는 건가?.” “그렇다니까. 뭐, 트로이 후작님과는 달리 딜트라엘경은 전하의 편에 서 오히려 여러 가지 공을 세우지 않았나. 내전의 종결에 결정적인 승부수를 거머쥐도록 도 운 것도 바로 그분이었으니......” “흥! 그래, 트로이 후작님을 생포한 일로 큰 공을 세웠었지. 제 친 아버지를 사로 잡아 바쳐서는 출세라니.” “이 사람이 왜 이래! 말조심하게나, 누가 들으면......” 말을 하다말고 눈이 휘둥그레진 젊은 귀족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 뒤로 나를 험 담하던 남자 역시 놀라 뒤집어질 것 같은 얼굴로 한걸음 물러섰다. 한동안 말없이 그들을 쳐다보다가 슥 웃었다. 결코 비웃음이 아닌 평범한 웃음이 었는데도 그들이 화들짝 놀랐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아, 그래. 찔리는 데가 많으니 어찌 일상만사가 편할 수 있겠나. “자메스경은 내게 불만이 많은 모양이로군.” 잊혀질 듯 말 듯 머릿속에 희미해져 있던 이름을 꺼내어 내 험담을 했던 그 젊 은 귀족에게 말했다. 그는 우스민츠 남작가의 차남으로 비록 그의 가문이 카류의 편을 들었으되, 조금 전 있었던 귀족회의에 참석도 하지 못할 신분의 자였다. 구석진 곳에서 남 험담을 하는 자 치고는 우직한 곳이 있는지, 그는 내 말에 따 로 변명은 않고 단지 고개만을 숙이고 있었다. 그런 자메스의 앞으로 손을 내밀 며 내가 질문했다. “하지만 그 불만은 아무래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바로 호통이 쏟아지지 않는 것이 의외라는 듯 그가 힐끗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대는 내가 아버님을 잡아들인 것에 불만을 가진 모양인데, 그렇다면 자메스경 은 내가 사사로운 정에 휘말려 그분을 놔주어야만 했다는 것인가?” “......” 자메스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거기까지는 차마 생각해보지 않았다는 얼굴. “친 아버지를 잡아들여 출세를 했다는 사실에 부정을 하진 않겠네. 하지만 과연 그 사실이 잘못된 일인지는 생각해볼 일이군. 가문과 결별하여 카류리드 전하의 힘이 되기로 결정을 한 나네. 그런데도 자메스경 그대는 내가 계속 미련을 버리 지 못하고 혈육의 앞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야만 한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그 것이야 말로 바른 길이라고,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가?” 자메스는 머뭇거렸다. 꼴을 보아하니 아주 할말이 없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머쓱한 모양으로 우물쭈물하며 입을 꾹 다물 고 있었다. 그러다가 괜한 일로 이 대화에 끼이게 된 한 귀족이 자메스의 허리를 쿡 찌르자 그때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제가 어리석어 일의 단면만을 보고 섣부른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 다. 당연히 그리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고개를 깊이 숙이는 자메스를 보며 짙게 웃었다. 내 웃음을 무엇이라 판단했는지 는 몰라도, 곁에 있는 젊은 귀족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듯 함께 미소했다. 짧은 대화를 끝낸 그들이 최대한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뒤로 돌아섰다. 그러나 막 이곳을 떠나기 직전 자메스가 다시 이쪽을 향해 되돌아섰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깊게 감사드립니다. 이런 자에게 험담을 들으시고도 넓은 마음으로 용서를 베푸시며 도리어 제 어리석음을 깨닫 게 해주셨으니 그 보다 더 감사를 표해야 할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 자메스, 오 늘 있었던 딜트라엘님의 대화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네. 이 정도 일에 그리 대단스럽게 말을 늘어놓을 필요 있는가. 친구가 기 다리는 것 같은데 먼저 가게. 나는 이 근처에 볼일이 있으니.” “예.” 자메스는 다시 한번 머리를 조아려 인사를 한 후 다른 귀족과 함께 복도를 걸어 갔다. 한동안 완전히 안심한 그들이 멀리 떨어져가는 것을 부드러운 미소로 지켜 봐주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미소는 짙은 비웃음으로 완전히 일그러졌 다.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한껏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고서는 낮게 깔려진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레짐작하기가 극상의 수준이로군. 내가 언제 용서해주겠다고 했다는 거지? 내 신경을 건드린 대가는 확실하게 치르게 해주지......” “우에~ 무서워.”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 라 돌아섰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한 복도였다. 이런 장소에서 내가 누군가가 가까이 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에구~ 자메스경의 대답이 우리 딜티의 성질을 건드려 버렸나 보네.” 나의 뒤편에 서 푸른빛을 담은 머리카락을 절래절래 흔들고 있는 것은 카류였다. 녀석이 맞은편 복도로 이미 멀어져버린 자메스를 보고 있다가 내게로 시선을 돌 렸다. 눈이 딱 마주치자 카류가 자메스를 어쩔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하듯 고개를 가만히 기울였다. “아, 아니. 자메스경과는 상관없는 다른 이야기야. 그건 혼자 딴 생각하다가 말한 거라고.” “응? 그런 거야?” 일단 대강 얼버무리자 카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해주자 카 류는 자메스의 뒷모습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이기를 반복했다. 다 섯 번을 마지막으로 나를 향해 완전히 돌아선 카류가 다섯 손가락을 꿈틀꿈틀 움직여 보이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상하네. 저 남자에게로 향하는 너의 오오라가 뭔가... 굉장히 캬글캬글 하고 움찍움찍한 느낌인걸? 오오, 이거 깔측깔측하기까지!” “...무슨 소리야?” “마음의 눈으로 느껴봐. 너도 할 수 있어! 네 몸에서 나오는 오오라인걸!?” 카류가 바싹 달라붙어 바로 내 얼굴 앞에 오른쪽 손가락을 꿈틀꿈틀 해보였다. 나는 눈가를 좁히고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한심하다는 듯 일부러 크 게 한숨을 한번 쉬어주며 몸을 휙 돌렸다. 뒤쪽으로 카류가 너무한다며 팔짝팔짝 날뛰었다. 하지만 카류의 장난에 아무렇지도 않게 장단을 맞추며 완전히 돌아섰을 때, 내 얼굴은 완전히 굳어져 있었다. 바보가 아니라면 알 것이다. 카류가 겉보기처럼 그렇게 순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녀석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미소하는 내 얼굴가죽이 가면일 뿐이라는 것 을 완전히 꿰뚫고 있다. 그러면서 모르는 척 뻔뻔스럽게 내 앞에서 장난을 치고 있는 거다. 어째서 갑자기 저렇게 변한 거지? 본래의 녀석은 그리 눈치가 빠른 편이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웃어 보이면 쉽게 믿고 안심해버리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내 직감 이 하나같이 소리높이기를 더 이상은 녀석을 속일 수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카이야님께서 목숨을 준 덕일까. 아니, 확실히 그것 밖에 없다. 빌어먹을! 이번만은 정말 성가신 짓을 했다고 말해드리고 싶군! 뒤쪽에서 따라오던 카류가 불쑥 내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쓸데없음을 이미 깨 달았으면서도 거의 반사적으로 미소를 만들어냈다. 카류 녀석도 마주보며 빙긋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떡끄떡거리며 앞서가다가 뒤돌아서 말했다. “딜티. 너 같으면 이럴 때 어떻게 할 거 같아?” “응? 무슨?” 내가 의아하게 묻자 카류가 손가락을 두개 꼽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옛날 옛날 아주 작은 동산 마을에 부모님께 버림받은 불쌍한 꼬마가 있었어. 오 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그 꼬마는 어느날 지나가는 동네의 다른 꼬마를 붙들고 이렇게 물었지.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대의를 그르쳐서야 되겠느냐고, 정말 그런 짓이 용납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이지. 하지만 그리해서는 안 된다며 설득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 행동의 이면엔 그렇게 해도 좋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본심이 있었지. 대의라는 어떤 것이든, 혈육의 정보다 우선시 될 수는 없다고 말해주기 를 바란 거야. 하지만 질문을 받은 꼬마는 좀 둔해서 그저 동네 어른들에게 들은 대로 당연히 대의를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했어. 결국 작은 꼬마는 크게 화가 나 고 말았지. 이런 상황에서 나는 화가 난 꼬마를 달래주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글쎄? 어린애 문제는 내 관심 영역이 아니라서 말이야.” 얼굴을 굳히거나 하지는 않았다. 미소를 지어 녀석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카류 도 여전히 본심은 보이지 않은 채, 그것도 모르냐며 실망했다고 콧소리를 쟁쟁 내어 장난을 쳤다. 카류와의 대화는 긴 복도를 전부 지나칠 때까지 계속되었다. 눈을 깜빡이며 장난 을 걸어오는 녀석에게 내가 웃으며 대답해 준다. 무척 일상적인 오랜 친구의 대 화. 그러나 가벼운 미소 뒤에는 단 한마디도 그냥 지나치지 못할 뼈가 숨겨져 있 다. “이쪽이야, 딜티.” 복도에서 세 갈래 길이 나오는 곳까지 도착했을 때 카류가 돌연 우뚝 서서는 손 을 내밀었다. 어리둥절히 바라보기만 하자 카류가 먼저 내 손을 잡아 끌어당겼 다. “지하 감옥이야. 오래묵은 빚을 청산하러 가야지.” 타악-! 자신도 모르게 카류를 강하게 뒤로 밀어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카류가 내 힘 에 크게 밀려 넘어질 듯 말 듯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카류를 쳐낸 손을 꼭 쥐었다. 왜 이렇게 놀란 거지. 뭐가 그리 대단할 것이 있다 고. “아파라~ 딜티가 날 때렸어~ 그래도 난 포기 안하지!” 과장되게 아픈 시늉을 하던 카류가 이내 빠르게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리 고 깽깽거리며 나를 원하는 쪽으로 끌어당기려 애를 썼다. 일부러 카류의 말을 거부하자니 내 모습이 우스워지는 느낌이었기에 또 다시 녀 석을 쳐내는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다 큰 남자들끼리 손을 꼭 붙잡고 가는 꼴 을 보이긴 싫으니 평범하게 걸어가자고 요청했다. 카류는 180린츠(cm와 비슷)의 근육 잡힌 내 몸을 위아래를 훑어보다가 잠시 동안 슬픈 표정을 보인 후 알았다 고 말했다. ================================================== 업그레이드 먼치킨 카류와 다크 딜티(어디서 이런 용어가;)의 만남. 둘 다 화사하게 웃으면서도 속으로 음흉한 생각을 품고 있는 부류랄까요? 분량이 애매하지만 상황이 그렇기에 일단 자릅니다. ^^ 이르나크의 장 Part 68 즉위 (3) “저. 전하! 어찌 연락도 없이 이런 곳엘!! 호위기사도 없이!” “어두운 곳에서 수고가 많어~. 다른 건 신경 쓸 것 없고 열쇠부터 주겠어?” 감옥에 이르러 문지기를 앞둔 카류가 여전히 유쾌한 음성으로 손을 내밀었다. 간 수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허리춤을 뒤져 열쇠를 넘겨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 에게로 통하는 열쇠.” “그렇게 말하니 굉장히 낭만적인 느낌인데?” 카류가 열쇠를 들어 내게로 보이며 말하기에 웃으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카류는 내 손 위에 그 열쇠를 얻어주었다. 그리고 길게 뻗은 복도의 안쪽을 가리키며 말 했다. “저쪽으로 계속 들어가다 보면 있어.” ‘그래서 어쩌라고?’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어 카류를 쳐다봐 주었지만 녀석은 말없이 계속해서 빙 글빙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잠시간의 침묵. 카류가 지금 안으로 들어가라고 무언의 압박을 넣고 있다는 사실 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몸을 돌리려던 차였다. 카류가 빙글거리던 미소를 조금 누그러뜨리 며 말했다. “나는 이제 곧 왕이 될 거야. 그 옥좌의 위에서 나를 따르던 자들에게 많은 상을 내릴 거고, 나를 적대한 자들에게 많은 처벌을 내릴 테지. 오랫동안 재회를 미루 어왔지만 딜티에겐 더 이상 시간이 없어.” “......” 내 얼굴의 웃음기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말없이 카류를 쳐다보았다. 녀석은 내 시선은 피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죄책감이라도 느껴 예전에 고개를 돌렸을 녀석이다. 아니, 애초부터 이렇게 뻔뻔스레 이야기를 나누며 나를 이곳까지 끌고 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뭐라 말하기 힘든 애매한 얼굴로 카류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다녀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숨을 한번 고른 후 등을 돌려 복도를 걸었다. 옆으로 보이는 감옥은 그리 습기 차지도 않고 지저분하지도 않다. 지나치게 깨끗 한 주변에는 은은한 빛이 드리워 있다. 단지 바닥이 차가운 돌바닥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기분을 약간씩 가라앉히고 있을 뿐이다. 내가 목적한 곳에는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복도의 막다른 곳 장면으로 보이는 철창의 사이로 보이는 사람. 아버지... 아니, 현 트로이 후작. 철컹-! 손에 들고 있던 열쇠로 문을 열었다. 무의식으로 그와의 재회를 피한 것 사실이 믿어지지 않게도 이 재회는 아주 침착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나는 약간 가라앉는 느낌만 빼면 충분히 평상시와 다름없는 기분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허술한 침대 위에 다리를 꼰 채 앉은 그를 보았다. 다소 어두운 불빛아래 천천히 갈색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살기등등했던 것 치곤 찾아오는 것이 느리군. 내가 감옥에 갇힌 즉시 찾아와 욕 설이라도 퍼부었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제멋대로 말을 내뱉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불쾌한 시선으로 나를 훑어보 다가는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역시 네게 그런 패기는 없는가? 예나 지금이나 나약하기 짝이 없는 놈.” 지금 누굴 설교하려 드는 거야!? 울컥하여 입을 열었다. 그러나 하고자 했던 말은 나오지 않았다. 갑작스레 목구 멍에 걸린 것처럼 밖으로 뱉어내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어째서 갑자기!! 충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그를 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 내 꼴을 보던 그가 옆으로 고개를 조금 돌리며 크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말이나 더듬던 4살적 옛날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몸을 움찔했다. “제 할 말도 확실히 못하는 한심한 놈을 앞두자니 그나마 대화라도 해줄까 싶었 던 마음이 깡그리 사라지는군. 당장 꺼져라!” “헛소리 마라! 그 주제에 누구 더러 꺼져라 말라야!?!?” 답답하게 막혀있던 말문이 분노에 순식간에 터져 나왔다. 한걸음에 그의 코앞에 서 거칠게 멱살을 쥐었다. 당장이라도 주먹을 들 듯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저항하 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은 채 조금 전과 별 다를 것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말해봐라. 달리 내게 하고픈 말이 있었을 텐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에 무언가, 이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에 스르 륵 손을 놓았다.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갈색의 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갈색의 눈. 어째서냐! 왜 내가 떨어야만 하지. 두려워해야 하지!? 왜 그는 한 점 부끄러울 것 없다는 표정이며, 나는 이리도 죄지은 것이 많은 양 무서워하고 있나? “아버지는, 아니, 당신은! 무슨 배짱으로 그리 뻔뻔스럽게 앉아 있는 거지? 당신 이, 당신이 그리 잘났어!? 무엇 하나 잘못한 것이 없다고 느끼는 거야!? 진정 그 래?”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중간에 튀어 올라 어색하게 나왔다. 그것이 견딜 수 없 이 창피해 손으로 다급히 얼굴을 가렸다. 그는 내 행동에 비웃음이나 호통을 던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대답만 했다. “후회할 일을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당시 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 고, 그 때로 되돌아간다면 똑같은 일을 할 것이다.” “아, 그래? 또 다시 친 아들을 두 번이나 살해하겠다고!?” 내가 빈정대며 묻자 드디어 그도 언성을 높였다. “제1왕자가 아닌 자가 왕좌를 차지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내전이 일어난다! 내 몇 번이나 네게 충고하지 않았더냐! 제6왕자와 친분을 만들지 말라고! 그놈은 아르 윈에 태어난 재앙의 씨앗! 반드시 솎아내야 할 놈이었다. 그럼에도 내 경고를 어 기고서 아주 제6왕자의 충실한 추종자가 된 주제에 이제 와서 나를 탓한다는 것 이냐!?”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거야? 그 잘난 대의를 위해서라면 나라는 존재는 그리 망설이지도 않고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존재라는 건가? 아이 시스 남작을 봐! 반의 반만 그 부정(夫情)을 본받아 보라고!” “그놈이 그리도 부러우냐!? 박쥐처럼 이쪽저쪽으로 몸을 옮겨 다닌 그런 꼴불견 이 그리도 대단케 보이더냐!? 그놈의 돌연한 배신에 얼마만큼의 병사가 혼란과 죽음을 겪어야 했는지 아느냐? 나를 더러 그런 놈과 같은 짓을 하라는 거냐!? 단 지 자신의 아들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수천의 백성이 죽어가는 꼴을 지켜보라는 것이냐!?” “물론이다!! 당신은 수천, 아니, 수만의 백성이 내전에 휩쓸려 사라진다 해도 나 를 선택했어야 했어!!!!!” 내 목소리가 쩌렁쩌렁 감옥 안을 울렸다. 그 말을 끝으로 시끄럽던 논쟁도 끝이 났다. 손과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왔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염원했고 생각했던 단 한 가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세상의 그 모든 진리가 틀렸다 하더라도 이것만은 참된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것을 바로 아버지의 앞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리도 떨리는 것일까. 내가 틀렸나? 내가 그릇되었나? 그때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그가 짧게 말했다. “역시 너는 후작의 그릇이 아니다.” 왜인지 순간 심장이 철렁 떨어져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그 속마음을 숨기기 위해 비웃음을 띄우며 소리쳤다. “하! 물론! 나는 후작의 그릇이 아니지. 공작쯤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거 아나? 당신이 죽으면 나는 트로이 공작이 된다고!” “공작?” “아, 그래. 바로 오늘 발표가 났지. 위대하신 나의 주군께서 리아 후작가, 에스문 드 백작가, 레이포드 남작가, 그리고 나의 트로이 후작가를 4대 공작가로 봉하시 겠다고 약조하셨다!” 내 대답에 그는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냐. 나 같은 것이 공작이 되어 나라가 걱정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제6왕자는 아직도 멀었군. 갑작스레 9서클의 마법사가 되었다느니 현자 급의 인물로 등극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려오기에 혹시나 했건만, 겨우 공 사도 하나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다니... 네 오늘 가서 이야기해라. 트로이가는 후 작으로 충분하다고.” “좋을 대로 지껄이시는군! 내가 아직 당신의 말에 떨기만 하는 그 어린애로 보이 나? 무엇보다도 나의 주군은 진실로 완벽해. 거짓말 않고 진실로 드래곤의 축복 을 받았으니까. 아니면 무슨 수로 하루아침에 9서클의 마법사가 되서 대군을 이 끈 카르틴을 단번에 내쫓았겠나?” 턱을 들어올려 한껏 그를 비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는 달리 화를 내거나 반박하지 않고 평상시의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제6왕자에게 현안이 있어 진실로 모두를 납득시킬 수 있을만한 이유를 보인다면 그에 따라라. 하지만 그것이 부족하다면 네 스스로 공작의 자리 를 물려라. 머리가 있고, 사정을 아는 자라면 누구든 제6왕자가 패륜아라는 사실 을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서까지 완벽한 인심을 되찾기 위해 서는 바로 지금, 9서클의 마법사이자 현자가 된 이때에 행하는 일들이 가장 중요 하다. 크나큰 과오를 모조리 덮을 만큼 현명한 언행만을 보일 수 있도록 도와라. 한 치의 실수도 내비치지 않도록 바로 네가 그를 보좌해라.”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그의 말이 너무 황당해서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그가 어쩔 수 없다 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조건적으로 제1왕자만을 왕위에 봉함으로서 미래의 내전까지 막기를 원했다 만 나나 나와 같은 신념을 가진 자들은 패배하고 말았다. 끝내 이렇게 돼버리고 말았다면 차라리 제6왕자가 제대로 된 왕이 되기를 원한다. 이 내전과 미래에 또 있을지 모를 내전에 보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위업을 이 아르윈에 심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 질문에 대답은 할 수 없었다. 항상 나의 눈앞에서 선명하게 보이고 있던 강렬 한 분노의 근원은 언제부터인가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조금씩 거칠어진 숨을 몰 아쉬며 저도 모르게 한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누가 옳았던 것일까. 당연히 그가 틀렸을까. 아니면 혹시나 내가 틀렸을까. 내 가... 틀렸던 걸가. ‘수만의 백성이 불에 타 죽는다 해도 당신은 나를 선택했어야 했어!’ 영원한 진리라고 여겼던 그것은 입 밖으로 내었던 그 순간부터 재로 만든 인형 처럼 하염없이 부스러져가고 있었다. 그것이 완전히 부스러지고 나면 더 이상은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아서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것들을 주워 모았다. 나쁜 것은 그인 것이다. 나를 분노케 만든 그만이 오직 잘못된 것이다. 이대로 죽임을 당해 마땅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뭘 하는 거냐!!” 그가 버럭 호통을 쳐 번적 정신을 차렸다. 지금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몇 달 을 감옥 안에서 보냈는데도 그의 눈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이제 곧 죽음을 맞이 하게 될 텐데도 그 신념은 아직도 죽지 않는다. 바로 나의 앞에서 야생의 맹수처럼 번득이는 눈으로 쏘아보며, 아버지가 소리쳤다. “네놈은 어리석고 나약해! 애초에 될 그릇이 작은 너는 그저 앞으로 나가는 것만 도 역부족이다! 그러니 다른 생각은 하지마라! 지금 돌아서!! 그리고 가라!! 두 번 다시 뒤 돌아 보지 마라!!” 숨을 몰아쉬며 뒤로 계속 물러섰다. 그렇게 물러서다 문득 뒤편 등으로 철창이 느꼈다. 철컹 하면서 철로 된 경계선이 차가운 금속음을 내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를 등지고 돌아섰다. 뒤로 뻗은 손으로 철창의 문을 당겨 닫 아버리며 부리나케 그 장소를 빠져나왔다. 숨도 쉬지 않고 뛰었다. 이 주변의 공 기를 마시지 마자 지금껏 쌓아올린 그 모든 인내가 한번에 무너질 것 같아 복도 의 끝, 출입구가 보이는 곳까지 조금도 쉬지 않았다. “왔구나.” 간수와 보초병은 없었다. 카류만이 철문 앞에서 빙긋이 웃고 있었다. 그와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추어서야 크게 숨을 들이켰다. 카류가 내게로 다가왔다. 바로 내 직전에 선 그가 갑자기 손을 들어 엄지손가락 으로 내 오른쪽 눈가를 훔쳐냈다. 오른쪽과 왼쪽을 한번씩. 그 다음엔 양손을 들 어 내 뺨을 쓸어내듯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손을 들어 내가 직접 눈가를 문질렀다. 두세 번 눈을 꾹꾹 누르자 아쉬운 대로나 마 눈물이 멈춘 듯 했다. 카류는 말없이 내 행동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숨을 몇 번 들이켜 목을 가다듬은 다음 카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물었 다. “카류. 트로이 후작가는 왜 공작가가 되지?” 카류는 머리를 긁적였다. 헤죽 순진한 웃음을 보였다가 입을 열었다. “트로이 후작가는 공작가가 될 거야. 객관적인 시선에서 트로이 후작의 방해는 심히 지나친 정도였지만, 공을 치하하는 서류상에 딜티만 빠뜨리자니 찜찜해서 그냥 어거지로 끼워 넣어버렸지.” “하하?” 이런 상황에서도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아버지의 앞에서 저런 녀석을 완벽하다 고 주장했던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잠시 흘러나온 웃음을 지운 다음에는 카류를 보았다. 그리고 단호히 이야기했다. “그런 자리라면 필요 없어! 나는......!!” “나는 많은 진리를 알지만 언제나 그에 따른 길을 내딛지는 않아. 아직은 사람들 위에 군림한 자의 의무보다 내 곁에서 장난을 받아주는 꼬마들이 더 가깝게 느 껴지기 때문이지. 어리석은 나는 언제나 공사를 무시하고 그 귀여운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 준비를 하고 있어. 하지만 그것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범인들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심스럽게 이루어질 거야.” 공작위를 거절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카류가 나의 말을 막으며 이야기 했다. 바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 순간 녀석은 내 판단을 뒤집어 놓았다. 카류가 내 이마에 달라붙은 앞머리를 떼어내 주며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이었다. “트로이 후작은 틀리지 않았지만 딜티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통의 세상은 검은색도 백색도 아닌 흐릿한 회색이거든. 그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사람을 심판 하지.” 카류는 조금 전부터 계속 웃고 있었지만 이번에만은 참으로 어색하게 웃는다. 그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을 나의 머리와 심장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라 느꼈다. 그것은 다소 현명해진데다가 굉장히 뻔뻔해졌지만 여전히 변치 않은 가슴으로 타인의 고통에 슬퍼하는 카류의 탓으로. 그리고 어리석고 나약하여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나의 탓으로. “가자.” 짧게 말한 카류가 먼저 등을 돌려 앞서 걸었다. 철문의 손잡이를 잡고 잠시 걸음 을 멈춘 그가 말했다. “이곳을 나서면 즉위식이야.” 이것은 두 번 다시 아버지를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아주 강렬한 경고. 꿀꺽- 소리가 날 정도로 한번 숨을 삼킨 다음, 나는 대답했다. “두 번 다시 망가진 과거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나가 는 것뿐.” 카류는 작게 웃는 것 같았다. 그것에는 자조와 슬픔, 어쩌면 아주 약간의 대견함 과 흐뭇함까지 섞여있을 것이다. 떨리는 손을 뻗어 문을 짚고 흔들리는 다리로 간신히 땅을 지탱해 앞으로 나섰 다. 어느덧 터져 나온 눈물을 훔치면서도 지하의 어둠이 완전히 가실 때까지 단 한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나의 오랜 친우이며 하나뿐인 주군의 즉위식이다. ============================= 소제목... 잘못 지었다 싶죠? =ㅅ=;;;;;; 셤 끝났습니다. 다시 연재재개에 돌입! 특집! 당신의 환상을 깬다! 현재 카류의 인상착의! 16세에 160센티로 시작한 이 넘은, 18세가 된 지금 무려 키 173센티의 장신(까 지는 아니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좀 크고 있다지요? 에르가나 딜티에 비해 꿀리지 않는 키지요!(아니, 좀 꿀리나?) 키만 컸을까요? 물론 어깨도 넓어지 고 얼굴도 길어(!)졌겠지요! 눈이 좀 크고 동그래서 귀여운 맛도 있어요. 하지만 청년이라니까요, 청년! 앗! 전에 카이세리온을 20세라고 적었는데, 가만 보면 19세군요. 고쳐야지....=ㅅ=;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그 후의 이야기- 에르가의 수난 왕국력 521년 아르윈 왕국은 300년 만에 나타난 9서클 마법사 카류리드를 왕으로 옹립한다. 그는 보통의 9서클 마법사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 의 지식을 세계에 전파했고, 그 영향 아래 세계는 바야흐로 혁명의 시기를 맞이한다. 어렵던 마법수식은 한결 쉬운 방법으로 재해석되었고, 선택된 자 들만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마나는 더 이상 제한된 힘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의 지식은 비단 마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쇄술의 제시하여 새로운 교육법에 활용할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도록 종용하는가 하면, 내전 으로 황폐해진 국토에 가장 시급해진 식량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농작법까 지 내놓았다. 카류리드는 자신의 획기적인 지식들을 이용하여 혁신적인 국정 개혁을 지 속하고 있다. 그가 즉위한지는 아직 5년여의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 에 수많은 계획안은 아직 큰 결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용의 가호를 받는 마법 왕―이른바 마룡왕이라 찬양하며 이 아르윈을 세계 의 중심지로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마룡왕이란 놈이 바로 저 놈이란 말이지.” 전체적으로 백색 톤으로 꾸며진 화려한 응접실의 한쪽에서 턱을 꼬고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시선이 닿는 맞은편 자리에는 양 옆으로 3~4살 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한 명과 남자 아이 둘에 둘러싸여 헤벌쭉 웃음을 흘 리는 카류리드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모조리 흑청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심할 여지없는 녀석의 아들딸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히노 양과 옐루니얀, 연·아남이 앉아 있었지만, 누가 봐도 아내들은 뒷전이다. 카류가 오른 편에 얌전히 앉아있는 루크레이브를 번쩍 안아들고 나의 앞으 로 종종 걸어왔다. 루크레이브는 카류에게 안기는 것이 어색한 듯 약간 굳 은 표정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류 놈이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완전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가형! 여기 좀 봐!! 우리 루브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어? 이제 막 5살 이 됐는데 벌써부터 글을 좔좔 읽기 시작했대! 아주 천재야, 천재!” “소문에 폐하께서는 막 2살이 되던 경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셨다 던데 그 에 비하면 루크레이브는 미천한 수준이 아니겠습니까.” 루크레이브는 왕비인 옐루니얀이 낳은 제1왕자. 때문에 옐루니얀이 겸손하 게 미소하며 말했다. 그러나 카류는 고개를 팩팩 저으며 소리쳤다. “에이! 그건 제가 좀 비정상적인거고, 이 정도는 되어야 정상적인 인간으 로서의 천재성이라 볼 수 있지요! 루브야, 아빠∼ 해봐, 아빠∼.” 그 말처럼 참으로 비정상적인 대답을 해대며 카류리드가 초롱초롱한 눈길 로 루크레이브를 주목했다. 그러나 루크레이브는 무엇을 고민하는지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침묵했던 아이가 고개를 들어 단호히 대답했다. “아버지.” “끄∼아! 아빠라니깐! 벌써부터 무슨 아버지야, 아버지가∼” 국왕인 주제에 아이에게 아빠라는 말을 강요하는 네가 이상한 거다. 땅바 닥을 떼굴떼굴 구를 듯 자지러지는 카류리드를 앞두고 여전히 요지부동인 루크레이브도 엄청나긴 마찬가지고. 그때 소파에서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츠민이 폴짝 뛰어 내 려와서 애교 있게 말했다. “나는 할 수 있지! 아빠∼. 나 좀 봐봐. 아빠∼.” “그래그래, 아르. 흑흑……” 방긋 웃으며 아빠라고 말하는 아르츠민을 본 카류 녀석이 와락 아이를 껴 안으며 징징 짜기 시작했다. 그리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다만, 어쨌든 아르 츠민은 그나마 어린애답게 애교가 있다. 역시 히노양의 아들이라 참 착하 단 말씀이야. 저 녀석이 1왕자로 태어났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필 카르틴 의 여자에게서 첫 번째 아이가 태어나서는! …하지만 그래야 옐루니얀과의 혼인도 의미가 있겠지. “나도 할 줄 아는걸. 아빠∼ 아빠∼.” “아이고∼ 우리 디트까지!” 카류리드가 연·아남의 딸인 디트민트까지 싸고도는 사이 루크레이브는 터 벅터벅 걸어가서 옐루니얀의 옆자리에 가 털썩 앉았다. 옐루니얀은 조금 곤란한 표정이다. 그런 얼굴을 보자니 거의 버릇처럼 삐딱한 태도가 내 몸 에서 배여 나왔다. “옐루니얀님. 카류리드 녀석의 행동이 아주 장난이 아니죠? 마룡왕에 대 한 환상이 깨어져 실망이 대단할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르윈에 온 것이 심 히 후회가 되시지요? 당장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 뼈가 박힌 말이 튀어 나왔다. 그러나 옐루니 얀은 약간의 불쾌한 느낌도 없이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었다. “그럴 리가요. 막상 아르윈 왕국에 와서 보니 폐하의 능력은 오히려 떠도 는 소문보다 더욱 전설이 가깝더군요. 그럼에도 티끌의 거만함 없이 이토 록 스스럼없이 행동해 주시니 저는 도리어 탄복할 따름이겠습니다.” “하아, 그러십니까.” 고개를 돌리며 퉁명스레 말했다. 그러나 내심은 이 짓도 아주 버릇이 되었 구나하는 생각에 후회가 밀물처럼 몰려왔다. 예전에 옐루니얀과의 혼인은 단순히 카르틴의 정복 야욕의 밑거름과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카류가 9서클의 마법사가 되고 나서는 상황이 역전, 카르 틴은 오히려 침략을 받지 않기 위해 옐루니얀과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 다. 그저 언약만이 아니라 혼인으로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한 것이 다. 당연하지만, 혼인을 거부한다는 것은 지금은 아닌 척 해도 언젠가는 너 희나라를 잡아먹고 말 것이라는 예고와도 같은 느낌을 주고 만다. 카류가 깊이 원하는 평화를 위해서 옐루니얀과의 혼인은 필수였다. 그 때문에 히노양을 지지하고 있는 나로서도 옐루니얀의 왕비 건에는 반대 의사를 밝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옐루니얀의 탓으로 히노가 왕비에서 후 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을 하니 아무래도 옐루니얀에게 좋은 감정을 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주 만남을 가져본 결과 재수 없게도 옐루니얀은 그리 심성이 나 쁜 여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는 카르틴 출신인 덕으로 나를 제하고도 많은 자들에게 좋지 못한 소리를 듣고 있었다. 가만히 보면 내 행동은 그 질 나쁜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나쁜 놈 그 이상 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에르가형도 정말… 그 말투 어떻게 좀 안돼? 아직까지도 히노 선배를 잊 지 못하는 것은 알겠지만, 옐을 못살게 구는 것은 좀 그렇잖아? 그렇지 않 아도 말 꺼내놓고 맨날 후회만 하면서.” “누, 누가!?” 깜짝 놀라서 히노양과 옐루니얀 쪽을 쳐다보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옐루니 얀이 과장되게 입을 오므렸다. “어머, 에스문드 공작님께서 히노 양을! 그러셨던 건가요?” “하하, 옐도 참! 꼭 몰랐던 것처럼 맞장구를 치셔요!” 카류리드와 옐루니얀이 마주 보고는 함께 빙긋 웃었다. 악의를 가진 자들 의 앞에서 모르는 척 말을 넘기는 능력은 둘 다 비슷한 급수인지라 마음이 맞은 모양이다. “이런 농담은 그만두세요. 혹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렵습니 다.” 이야기가 자신에게 좋지 못하게 흘러가자 히노 양이 걱정스럽게 이야기했 다. 그러나 카류리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에르가형이 감히 히노 양에게 접근할 사람도 아니고 뭐 어떻습니까. 게 다가 이렇게 인기가 대단한 여인이 저만을 사랑해주니 이 보다 더 흐뭇한 일도 없죠!” “아니, 카류리드 너 끝까지! 글쎄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는 거야!?! 왜 이 렇게 헛소리가 심해!!” “에르가형이 흥분했네요. 여러분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요?” 아, 저 니글니글한 카류리드의 면상! 최소한 옐루니얀과 연·아남만 없었어 도 단번에 날려버리는 건데!! 그때 연·아남이 입술에 손을 대고 괜히 과장하여 흐느끼는 동작을 보이기 시작했다. “흑. 전 달리 인기도 없고 첫 번째로 낳은 아이도 딸이어서 사랑이 식으 시겠군요. 이를 어쩌면 좋을까.” “연! 딸이라서 싫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버리세요! 무엇보다 디트가 보는데서 그런 소릴 하면 쓰나요! 그리고 연에게도 연심을 품는 남자가 아 주 없는 것 같지 않던데요?” “어머, 정말인가요?” 연·아남이 조금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 사실에는 나도 흥미가 동해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럼요. 있고말고요. 옐도 카르틴에 열렬한 팬들을 한 부대 거느리고 있 다고 하니! 훗훗, 이리도 인기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전 얼 마나 행복한 남자일까요.” 연을 좋아한다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분명히 거론하지는 않았다. 카류는 그 대로 아이들의 이마에 키스를 쪽쪽 하며 딴청을 부렸다. 가만히 돌아보니 카류 녀석, 딱히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없 애고 그녀들을 똑같이 대우해주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것 같다는 느낌인 걸? 아, 느글느글한 놈. “루브야∼ 엄마한테만 있지 말고 아빠한테도 오렴, 응?” 카류가 잠시 그녀들에게 관심을 주나 싶었더니 또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 을 돌린다. 녀석이 손을 내밀며 징징거리자 루크레이브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카류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역시 애교가 없는 꼬맹이다. 그럼에도 카류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온통 흐트러뜨렸다. “에구에구, 아빠라고 안 불러도 좋으니까 미워하지만 말아주렴, 알았지? 아빠가 우리 루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모르니? 가르쳐 줄까? 에구, 우리 루브! 너 왜 이렇게 귀엽니. 뭐 믿고 이렇게 귀여워!!” “사실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인 것 같은데요? 전 요즘 제 아이인 아르에게 질투를 느낄 지경이예요.” 히노양이 조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앗, 역시 히노 양. 평생에 홀로 가슴 속에 간직하려 했던 비밀을 들켜버 렸네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니까 너무 질투하진 말아줘요.” “잘도 자랑처럼 말을 늘어놓는군. 이 어린애 취향 변태 녀석아!” 카류가 버터발린 입인 양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에 옐루니얀, 연·아남의 시선 전부 제쳐놓고 핀잔을 던졌다. 그랬더니 카류 놈이 도리어 혀를 차며 나를 향해 말했다. “쯧쯧… 에르가형. 형도 애 한번 낳아봐. 나 같은 취향이 아니더라도, 없 으면 죽고 못 사는 게 자기 애라고! 딜티도 2년 전에 아들 하나 낳아서 알 콩달콩 살고 있는데 형만 혼자서 그게 뭐야?” “내 눈에 차는 여자가 없어서 그런다. 내버려 두셔!”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 히노 선배보다 더 예쁜 여자는 찾기 힘들 걸. 눈 좀 낮춰.” “야! 카류리드! 자꾸 헛소리 할 거냐!?” “와앗, 못된 형이 아빠를 때리러 오네요. 루브, 아르, 디트! 나 좀 도와 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카류리드가 아이들을 앞으로 밀면서 꺅꺅 소 리를 질렀다. 그에 아이들이 하나씩 앞으로 나서며 나를 향해 소리치기 시 작했다. “아빠를 때리지 마세요!” “아빠 때리면 깨물어줄 거야!” “너무 무례하십니다.” 조금 떨어져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히노 양 등이 쿡쿡 웃음을 터뜨린 다. 괜히 나만 저 또라이 같은 카류리드와 한 떠리로 취급된 기분. 아, 힘 빠져… 그건 그렇고 루크레이브는 천재라는 말보다 애늙이라는 말이 더 어 울리겠구만. 아이들을 지긋한 시선으로 내려보다가 팔을 뻗어 애들 너머에 고개를 숙이 고 있는 카류리드의 머리를 꾹꾹 눌러주었다. 머리를 살포시 들어올린 녀 석이 역겹게도 눈을 깜빡이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죽고 싶지?” “아니.” “죽고 싶잖아. 응? 그냥 속 시원히 말해봐라. 내 원 없이 널 팰 수 있도록 죽고 싶다고 말해.” “진짜 죽기 싫은데. 난 지금이 최고로 행복하단 말이야. 안 죽을래. 안 죽 을래.”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놈의 모습에 속이 느끼해져 옴을 느끼고 기어코 머 리를 한방 때려주면서 뒤로 돌아섰다. 내가 소파를 그대로 지나쳐 걸어가 자 등뒤에서 카류가 소리쳤다. “어디 가? 오랜만에 성에 왔는데 오래오래 있지 않고서.” “오늘 낮에 아예즈 백작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는데 꼭 자기 집에 들러달 라고 성화라서 말이야.” “혼자서 가는 거야? 오늘 아침에 이야기 들어보니 딜티는 거절했다고 하 던데.” “제길! 말하지마! 딜티 놈, 금방이라도 허락할 것처럼 싱글벙글 웃다가 자 기 혼자 스르륵 빠져나가다니.” 카류의 말에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나는 처음부터 아예즈 백작의 요청에 거절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딜티가 계 속 미소를 지으며 우호적인 대사만 늘어놓기에 백작에게도 실은 괜찮은 점 이 있는가 싶어 마지막쯤에 그 청을 수락했던 것이다. 그랬는데 딜티 그놈 이 저 혼자서 슥 거절을 해버리는 것이 아닌가. 딜티 녀석. 언제부터인가 마음에 안 드는 놈을 보아도 결코 싫은 티를 내 지 않고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놈으로 변했다. 그것 만이라면 차라리 나을 지도 모르겠건만 웃다가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만 하면 안면을 싹 바꾸 고 살벌하게 상대를 씹는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이중인격 저리 가라 할 정도가 아닌가! 카류도 전보다 훨씬 더 능글맞은 놈으로 변해버렸지. 으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하나같이 뭣 때문에 저렇게 희한한 성격이 되어버린 거 냐!! “에구, 힘들겠네. 아예즈 백작의 아부에 성질 난다고 밥상 뒤엎지 말고 열 심히 상대해주다가 오라구. 자아∼ 루브, 아르, 디트. 저기 공작 형아 한테 빠이빠이 해야지.” 카류가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위로 들어주며 말했다. 빠직 열 받은 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헛소리말고 너나 잘해. 네 아이들 이름만 해도 말이지! 아르츠민은 그렇 다 쳐! 루크레이브는 다들 루크라 부르고 마는데 저 혼자서 루브라고 부르 고 말이야, 디트민트도 민트라 부르면 될 것을 여자애 이름이 디트가 뭐 냐?” “뭐 어때서! 이렇게 부르면 꼭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난 것 같아서 참 좋잖 아. 다음 차례는 세이스미르야. 세미르.”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혀를 차다가 히노 양과 옐루니얀, 연·아남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완전 히 돌아섰다. 카류 놈과 이야기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여서인지 오늘은 아무 래도 상당히 일진이 안 좋을 것 같은 예감이다. ***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을 닫고 커텐까지 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 를 낸 서재. 아예즈 백작의 작위를 물려받은 오빠가 책상의 귀퉁이에 엉덩 이를 걸친 채,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섰다. "오늘 저녁 에스문드 백작이 방문한다. 이틀 정도 묵어가게 될 것이야." "알고 있습니다." "네가 할 일은 알고 있겠지?" "물론이예요." 굳은 다짐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대답을 들은 오빠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끊었던 말을 이었다. "은밀히 따지면 그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아버지와 형님의 절천지 원수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님도 우리 가족이 복수를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을 원치는 않으실 것이다. 가슴 아프지만 우리들은 어찌할 수 없는 생존 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야만 한다." 나를 등지고 돌아선 오빠의 감정이 내 심장을 옥죄일 정도로 진하게 전해 져왔다. 그러나 약한 마음을 버리고 강하게 그에 대답했다. "오빠의 잘못이 아니예요! 아버지도, 하르몬 오빠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 해요! 분명!" "고맙구나, 리케! 이제 남은 희망은 너 뿐이야. 알고 있지?" "네! 이 리플리케! 부족하게나마 최선을 다하겠어요!" 주먹을 꼭 쥐고 대답하자 오빠가 나를 향해 뒤돌아 섰다. 안타까운 감정을 가득 싣고 오빠가 나를 향해 팔을 쫙 폈다. "리케!" "위튼 오빠!" 와락 오빠의 품에 안겨 얼굴을 묻었다. 오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려 다독여 주었다. 지금부터 있을 아픈 시련 에 위로라도 해주려는 듯. 부드러운 오빠의 손길을 느끼며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에스문드 공작… 반드시 이 손 안에 넣고 말 것입니다." ================================================= 냐냐냥... =_=;;;; 사실 이 부분은 외전이나 마찬가지죠. 본편은 앞쪽 파트에서 끝이 났다해도 과언이 아니구요. 지금부터는 9권 분량을 메꾸 기 위해 카류의 즉위, 그 후의 이야기를 적는 식입니다. 에르 가 다음은 딜티, 마지막으로 카류가 되겠지용. ^_^; 카류리드 성격이 바뀌어서 절망하시는 분이 아주 많이 보이는 군요. 만약 2부가 나와서 카류가 등장한다면 당연 저런 성격 이겠지요? 그래도 좋으시다면 2부 연재하라고 리플 다세요.;; 게다가 금안의 마법사랑 흑의 황제를 쓰고 있는 만큼 이르나 크 2부는 당연히 뒷전이 될 것입니다. 결론은 아마도 굉장히 느린 속도로 연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죠. 그래도 좋으시다 면 리플 다세요; 결과에 따라 연재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책으로는 안 나 옵니다. 전~에 2부 안 쓰겠다고 출판사에 말했걸랑요.;;) * 지금 책으로 나온 2부는 어쩌다가 나뉜 것일 뿐, 실제로는 그냥 1부의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말하는 2부는 진짜 2부(?). =ㅅ=; hongik1999@hanmail.net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그 후의 이야기- 에르가의 수난 (2) =================================================== 으, 으음......;; 어찌해야 좋을지...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거의 동 떨어진, 외전이나 다름없는 부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ㅠ_ㅠ; 무려 24장. 전 왜 이렇게 분량 조절이 안 되는지. 글의 호흡이 이상해지잖아~ 게다가 스토리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어떤지요?;;) 몇 번이나 그만두려다가 결국은 끝까지 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오래 걸렸답니다. 다 쓰고 난 뒤에 돌아오는 것은 왠지 허탈감 뿐... ㅠ_ㅠ; 괴롭다, 괴로워...... 리플 달아주고 가세요~ ㅜ_ㅠ; ======================================================= 날이 조금 어둑해 질 때쯤 아예즈 백작의 저택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니 20 대 중반의 청년과 15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맞이하러 나왔다. 아예즈 백작 과… 그의 여동생쯤 되려나? “에스문드 공작님. 어서 오십시오. 시장하시지요? 쉽게 맛볼 수 없는 진미들을 갖추고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지나칠 정도로 미소를 실실 띄우며 아예즈 백작이 말했다. 그 모습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굳힌 채로 대답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예즈 백작은 여전히 배알 없어 봬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옆에 선 소녀를 가리켰다. “공작님은 처음 보시죠? 이쪽은 막내둥이인 리플리케랍니다. 제 동생이지만 아주 예쁘지 않습니까?” 아예즈 백작의 소개에 힐끗 그녀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동그란 연보랏빛 눈동자 와 자그마한 다홍빛 입술을 보건대 좀 더 크면 대단한 미인이 될 듯 하다. 그러 나 아직은 풋내 나는 꼬맹이. 나는 애들 취향이 아니라서 말이다. “저희 리케가 아직 15살이긴 하지만 2년만 있으면 성인식을 치를 예정입니다. 어른이 되는 것쯤이야 금방 이라는 거죠! 하하하!” 왠지 아예즈 백작의 말에서 뼈가 느껴지는 듯 하다. 설마 저 꼬맹이랑 나를 이어 서 몰락한 아예즈 백작가를 어떻게든 다시 부흥시켜보겠다는 수작은 아니겠지. 뒷 속내도 재수 없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카류리든 줄 아나! 저런 젖내나는 꼬맹 이에게 눈길을 주게!! “리플리케 너도 인사드리거라. 에스문드 공작님이시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검사 이시지!” 백작의 같잖은 아부에 더욱 짜증이 나서 시선을 돌렸다. 최소한 아부를 하려면 좀 더 그럴듯한 말을 사용해봐라. 아휴. 짜증스런 한숨을 팍 내쉬었을 때 리플리케가 백작의 말에 다소곳이 한발자국 걸 어나왔다. 살짝 미소한 그 아이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리플리케가 인사 올립니다. 아, 공작님은 매사에 귀찮으신 것을 싫어하신다죠? 제 이름이 다소 긴 편이니 그냥 리케라고 간단히 불러주세요. 오~호호호호.” 이 꼬맹이가 인사를 하더니만 닳고닳은 중년 귀부인들이나 쓸법한 목소리로 목 을 길게 뽑아 웃어 넘겼다. 덕분에 나는 약간 움찔해서 그대로 무시하고 지나치 려던 리플리케를 지긋이 내려보았다. 그 어색한 음색을 보건대 조금 전 웃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일부러 만들어낸 소리가 틀림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애칭을 불러달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던가?” “에에, 싫으세요? 전 공작님께서 귀찮으신 나머지 진짜로 짜증을 내실까 봐 그랬 죠.” 리플리케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깜빡깜빡 했다. 그러다가 내가 계속해서 눈 을 가늘게 뜨고 지켜보자 갑자기 수줍은 척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어머, 공작님도 참. 그리 노골적으로 뜨거운 시선을 보내시니 저는 부끄럽습니 다. 하지만 공작님의 마음도 이해는 합니다. 결혼 적령기의 남자가 여자를 안고 자 하는데 나이 따위야 아무런 소용도 없겠죠. 오~호호호.” 아니 그건 또 무슨 뜻이냐? 내가 무슨 발정난 동물이라도 된다는 거야? 결혼 적 령기라고 나이도 안 가리고 아무 여자나 안게? 더욱 열을 받은 내가 아주 인상까지 일그러뜨렸지만 리플리케는 모르는 척 또 다시 그 간드러지는 웃음을 뽑아내었다. 조그마한 계집애가 사람들 다 보는 앞에 서 누구를 안니 어쩌니 하는 말을 꺼내는데도 아예즈 백작 놈은 옳다구나 맞다 구나 하며 열심히 맞장구를 쳐댔다. 아, 빌어먹을. 낮 동안에는 카류리드 놈에게, 오늘밤부터는 아예즈 백작 놈들의 사이에서 치여야 하는 거냐. 그 날 저녁 식사는 예정된 대로 아예즈 공작과 리플리케와 함께 했다. 단순히 저 녁상만 본다면 웬만한 날에도 쉽게 먹지 않을 진미들이었지만, 주변 환경이 내게 똥 씹는 듯한 기분만을 안겨다 주었다. 말발도 딸리는 주제에 서툰 아부만 해대 는 아예즈 공작 덕에 당장 식탁을 뒤엎고 싶은 욕망이 울컥울컥 치밀었고, 리플 리케의 재수 없게 비꼬는 웃음소리 덕에 먹던 음식을 그대로 토해버리고픈 충동 이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깽판을 쳐놓고 돌아가면 사람들의 시선도 있 고, 무엇보다 카류리드의 그럴 줄 알았다는 눈웃음을 피할 수가 없을 듯 해서 그 냥 이 악 물고 저녁 시간을 버텼다. 아아, 이 놈들! 정신공격만은 참 대단하다 칭찬이라도 해주고 싶다!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들어왔다. 새큼한 과일로 입을 축이고 있는데 아예즈 백작 이 니글니글하게 웃으며 내게 질문을 해왔다. “공작님. 저녁식사가 입에 맞으셨는지요?” 씁헐 놈! 저녁에 입에 맞았냐고!? 체할 것 같이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던 것을 못 봤냐!? 저걸 당장 뒤집어 놓고 죽기 직전까지 패버려? “별로 입맛에 안 맞더군!” 아쉬운 주먹을 내리고 불만스러운 한마디만을 내던졌다. 예전이라면 현실적인 제 약 따위 무시하고 예전에 뒤엎었을 일인데, 내 인내심의 획기적인 발전을 확인한 순간이라 하겠다. 나의 불쾌한 대답을 들은 아예즈 백작은 크게 실망하여 어두운 얼굴을 했다. 하 지만 아니나 다를까 리플리케 계집이 곧장 바톤 터치하여 입을 열었다. “오~호호호호. 에~이, 농담도! 입에 맞으셨을 텐데 그러세요. 일부러 양서지방 에서 들여온 최고급 양고기랍니다. 세계의 미식가들이 하나같이 극찬하는 환상이 맛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있으나마나한 혀죠. 오~호호호호.” 눈을 가늘게 뜨고 리플리케를 노려봐 주었다. 하지만 리플리케는 아무것도 모르 는 순진한 여자아이인 척 시치미를 떼다가 내 시선과 마주치고서는 얼굴을 살짝 돌려 수줍은 듯 눈을 깜빡깜빡 했다. 이런 빌어먹을! 이놈들이 아주 날 조롱하려고 작당을 했구나! “미안하지만 최근 그러한 양고기를 너무 자주 먹어서 천상의 맛도 텁텁하기만 하군. 하지만 아예즈 백작가는 아무래도 그런 양고기를 쉽게 먹을만한 형편이 아 니겠지?” 최대한 비꼬는 목소리로 그 꼬마계집의 말에 답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꽤나 제대 로 받아쳤다는 느낌이다! 내 생각대로 이번만은 리플리케도 크게 열을 받았는지 아주 잠시동안 나를 흘겨보며 차 스푼을 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리플리케 춥니? 왜 그렇게 떠느냐?” 우리들의 공방을 초조한 얼굴로 지켜보기만 하던 아예즈 백작이 문득 리플리케 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아, 그게 어디 추워서 떠는 것 같이 보이냐, 이 멍 청한 백작아. “아뇨, 별로…….” “그럼 왜 그렇게 떨었지?” “그게… 그렇네요. 실은 좀 춥네요.” 아예즈 백작이 집요하게 묻자 리플리케는 결국 춥다고 시인하고 말았다. 백작은 더욱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러면 안되지’ 라고 중얼거리며 하인이라도 부르기 위 해 손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잠시 손을 든 자세로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을 탁 튕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리플리케를 향해 선 아예즈 백작이 유쾌하게 말했다. “리플리케가 덮을만한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단 둘이서 재미나게 이야기라도 나 누시죠!” 황당하여 입을 쩍 벌렸다. 아무래도 저 백작, 나와 리플리케를 이으려는 심산인 모양인데, 이건 너무 노골적이지 않냐? 인상을 찌푸린 내가 훌훌 밖으로 나서는 아예즈 백작의 뒤통수로 물었다. “덮을 것이라면 하인을 시키면 될 것이 직접 가려는 이유가 뭐요?” “예? 아, 그것이… 그러니까… 어, 어쨌든 제가 가지러갔다 오겠습니다!” 고개를 꾸뻑 숙인 아예즈 백작이 후다닥 밖으로 빠져나갔다. 황당하리 만치 변명 을 못하는 그를 보니 왠지 내 쪽에서 더 걱정스러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저런 놈이 가문의 주인이니 아예즈 백작가도 볼 장 다 본 거 아니냐. 시선을 좀 들어 리플리케를 쳐다보았다. 그 계집애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눈이 딱 마주치자 재빨리 시선을 내렸다. 그러다 다시 눈을 들어 날 쳐다보고는 귀여 운 척 눈을 깜빡깜빡거렸다. 잠시 손에 든 차 스푼을 저 꼬맹이의 이마에 집어던 져 주고픈 욕망이 솟구쳤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리플리케도 귀여운 척 하고 있지만 완전히 전투태세였 고, 나 역시 맞받아 칠 기세였기에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 다. 하지만 얼마 안가 리플리케가 성난 고양이 같던 자세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작게 한숨을 쉰 다음 다소곳이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세요?” “결혼 적령기인 남자에게 타입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안 그래?” 리플리케가 좋게 나와준다고 해서 나도 좋게 나와주라는 법은 없다. 지금까지 당 한 게 얼만데 제 계집애가 꼬리를 내렸다고 나까지 당장 저자세로 나와준단 말 이냐! 리플리케는 열 받은 얼굴로 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곧 흠흠 목을 가다듬어 다 시 다소곳이 자세를 바꾸었다. 꼬맹이가 또 한번 상냥하게 물었다. “공작님께서는 귀여운 타입을 좋아하세요, 아니면 청초한 타입을 좋아하시나요? 아니면 가슴이 큰 누님이 취향이실까?” 리플리케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잠시 정신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꼬맹이가 말 을 하는 도중 상반신을 살짝 들어 자기 가슴을 슬쩍 움직이는 것이다. 쪼끄마한 주제에 가슴이 있어 가지고 진짜 출렁이는 모양새가 생기더라. “…하… 하하하…….” 입술 끝을 움찔움찔하며 웃다가 고개를 돌렸다. 꽤나 야한 동작이건만 그저 헛웃 음 밖에 안나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내 반응을 본 리플리케가 자세를 바로하며 쳇- 코방귀를 끼었다. 내가 고개를 돌 리고 있다고 방심하고 한 짓인 모양인데, 다 보인다 이 꼬마야. 고개를 돌려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리플리케의 오버로 느끼해진 속이나 달 랠 겸 탁자의 과일이나 하나 집어들었다. 그때 갑자기 리플리케도 소파에서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과일을 집는 척 팔을 길게 뻗으며 상반 신까지 앞으로 내어 숙였다. “아… 머네…….” 녀석은 그 자세에서 잠시 중얼거리며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드레스의 아래로 슬쩍 보이는 리플리케의 가슴. 그리고 하얀 살결의 긴 목선. 하지만 색기를 느끼긴 커녕 또 한 번 정신이 멍해지기만 했다. 조금 굳었다가 겨 우겨우 사과를 집어 다시 제자리에 앉았다. 리플리케도 과일을 짚어 제자리로 돌 아갔다. 꼬맹이가 슬쩍 나를 올려다본다. 나는 최대한 평상심인 척 고개를 돌려 무심히 사과만 베어 물었다. “씁.” 리플리케가 또 몰래 짜증스러운 한 마디를 내뱉는다. 봐라, 저게 본성인데 어찌 저런 꼬맹이한테서 색기 따윌 느낄 수가 있겠냐. 리플리케가 과일을 모두 씹어 넘긴 다음, 새삼 바른 자세로 앉아 나를 쳐다보았 다. 왠지 불길함이 느껴지는데… “공작님, 혹시 여자엔 관심이 없으세요?” “뭐?” 이건 또 무슨 토끼가 개고기 뜯어먹는 소리냐. 리플리케가 입술을 손으로 살살 쓸어 내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거 있잖아요. 아, 너무 수치스러워는 마세요. 저도 가치관이 넓은 여자랍니다. 위대한 세데밀 경께서도 동성애로 유명했으니.” “뭐라고?! 이 꼬맹이가 보자보자하니!” 탁자를 쾅 치고 일어나니까 리플리케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역시나 성깔 계집애인지, 금방 대들 태세로 인상을 쓰고서는 뭐라 말할 심산으로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 태세가 또 한번 변했다. 꼬맹이가 벌렸던 입을 조금 오므리며 인상도 누그러뜨렸다. 조금 있자 눈에 갑자기 물기가 그렁그렁 맺혔다. 손을 입 가로 가져가 대어 울먹거리며 리플리케가 가늘게 뽑아낸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서워요…….” “…….” 그 자리에서 굳었다.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 계집애의 연약한 척 하는 목소리는 내 정신을 잠시동안이나마 마비시켜놓기에 충분했다. 그 상태로 침묵이 흘렀다. “어, 어디가세요, 공작님!?”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리플리케가 놀 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울먹였냐는 듯 얼굴은 어느새 멀쩡한 채다. 뽀송뽀 송한 계집애의 얼굴을 보다가 굉장히 불쾌하게 말했다. “피곤해서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문제 있나?” “어머, 그러세요? 그럼 제가 공작님을 모시겠습니다.” “필요 없어!” “어머, 건강에 안 좋게 왜 소리는 지르고 그러세요? 방도 모르시잖아요.” “지나가는 하인 붙들어 물어보면 돼!” 리플리케가 입을 뾰로통하게 하고 있는 사이 재빨리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저 뻔뻔함으로 무장한 이중인격 계집애가 안 보이는 곳에 처박혀 있는 것이 내 정신 건강에도 좋으리. 다음날, 해가 하늘 정 중앙에 걸렸을 즈음에 정원으로 나왔다. 웬만하면 내일 해 가 밝을 때까지 그냥 방안에서 틀어박혀 있고 싶었지만 끈질긴 아예즈 백작의 애원과 리플리케의 비꼬기 공격으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 꼬맹 이 말대로 남의 집에 초대받아 와서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웃긴 일이고. “아하하. 그럼 저는 잠시 일이 생겨서 갔다 오겠습니다.” 정원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예즈 백작이 또 황당한 소릴 하고 일어나려 한다. 무려 공작을 제 집에 초대해놓고 일 때문에 접 대를 하지 않겠다니. “그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이기에 날 내팽개 쳐두고 가려는지 들어볼까?” 오늘은 아예즈 백작은 그냥 가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잔뜩 비꼬는 음성으로 묻자 아예즈 백작은 굉장히 당황해했다. 나는 자리에서 좀 선 채로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그를 최대한 불쾌한 시선으로 노려봐 주었다. “에스문드 공작님, 위튼 오라버니는 공작님께서 자신과 같은 남정네보다는 요런 풋풋한 소녀가 상대를 해드리는 편이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랬던 거랍니다. 결 코 악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니 화 푸셔요. 네에?” 예상대로 리플리케가 살짝 끼어 들어 산통을 깬다. 고 계집애가 양손을 꼭 모으 고 눈을 깜빡깜빡하는 모습에 고개를 홱 돌리며 이를 부득 갈았다. 날카로운 시 선으로 아예즈 백작을 째리며 소리쳤다. “좋아. 네 일 보러 꺼져.” “네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시길.” ‘꺼져’ 라는 모욕적인 말까지 사용했는데 아예즈백작, 저 배알도 없는 놈이 생글 생글 웃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건 정말 바보 아니야. 이쯤 되면 아무리 권력 이 딸려도 조금 화를 낼만도 하잖아! 의자 뒤로 몸을 돌려 아예즈 백작의 뒷모습을 보다가 문득 등뒤로 따가운 시선 을 느꼈다. 누군지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 습적으로 몸을 돌렸다. 리플리케가 온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채 양 주먹 을 꾹 쥐고 있다가 내 시선에 반사적으로 활짝 웃었다. 주먹 쥐고 있던 손은 쫙 펴서 마사지 하 듯 양 뺨을 살짝 살짝 두드렸다. 그렇게 딴청을 부리다 나와 눈 이 마주치자 또 한번 귀여운 척 눈을 깜빡깜빡했다. 아아… 살의가 인다, 이 꼬맹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이놈들을 상대해줄 필요를 못 느낀다. 남들이 뭐라건 돌아가고 말 테다. “앗, 왜 그러세요?” “난 돌아갈 테니 그런 줄 알아.”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돌아가신다는 거예요. 그러지 마시고 저와 정원 산책이 라도 좀 해요. 정 지루하셔서 이러시는 거라면, 얼마 전에 귀여운 강아지가 태어 났대요. 그거 보러가죠!” “개새끼에겐 흥미없… 이거 못 놔!?” 리플리케가 단숨에 탁자를 돌아 나와서는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어디 다 큰 계집 애가-좀 덜 컸긴 하지만- 남자한테 들러붙는 거야! “이거 놓지 못해!” “싫어욧! 정원에 개 구경하러 가욧! 개 구경! 개 구경만 하고 가욧!” “싫다는데 왜 이래 끈질겨! 이거 놔! 이 계집애가!!” 팔에 끝까지 들러붙은 계집애의 머리통을 손으로 밀어내며 버럭버럭 소리쳤다. 그런데 이 계집애가 정말 계집애가 맞긴 한 건지 힘이 무서울 정도로 세서 어지 간한 힘으로는 쉽게 떼어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애를 때리거나 메쳐버릴 수도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이 계속 실랑이만을 벌였다. “이 계집애야! 넌 창피한 것도 몰라? 이거 놔!!” “이이익! 개, 개 구경 할 때까진 못 놔요! 이대로는 절대 못 보내!!” “아, 미치겠네. 야!!” 소리를 지르려다 문득 은근히 술렁이는 분위기를 느꼈다. 비록 많은 사람이 다니 진 않았지만 소수의 하인은 항시 부름을 받고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 이 이 꼴을 보고 자기들끼리 뭐라 말을 주고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 상황에서 창피해야 할 것은 리플리케다. 리플리케일 것이다. 하지만 왜 나까 지 창피해지는 것일까. 크아, 그동안 성질 많이 죽었구나. 에르가! “…알았다. 그 강아지만 구경해주면 된다 이거지?” 잠시 실랑이를 멈추고 시선을 내리며 리플리케를 향해 말했다. 그제야 핏대를 올 리고 내 팔에 붙어있던 계집애가 겨우 힘을 풀었다. “아, 아뇨. 헉헉… 그거말고… 정원 산책도 좀 더 하고… 저녁 식사도 같이… 헉 헉.” 리플리케가 팔을 축 내린 채 헐떡대며 말했다. 예쁘게 말아 올린 머리는 내가 밀 어대는 바람에 산발이 되었고 섬세한 드레스도 달라붙어 용을 쓰느라 마찬가지 로 엉망이다. 가만히 보니 저런 꼬맹이라도 일단은 여자인데 좀 못할 짓을 했나 싶은 생각도 아주 약간 들어서 곧장 거절하지 않고 서있었다. 내가 대답을 않자 리플리케가 그나마 희망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엉망인 꼴로 방긋 웃었다. “그럼 승낙으로 알겠습니다. 그만 가죠!” 한숨을 푹 쉬고 계집애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래, 애초부터 그렇게 웃지 왜 목은 빼내서 간드러지게 웃는 거야.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그 후의 이야기- 에르가의 수난 (3) 마구간 근처까지 갔을 때 리플리케가 하인을 불러냈다. 하인은 리플리케의 엉망 인 꼴을 보고 깜짝 놀랐으나 최대한 모르는 척 하기 위해 애 쓰는 것 같았다. 하 지만 이랬거나 저랬거나 정작 리플리케 본인은 아무 생각도 않은 채 당당히 하 인을 향해 말했다. “체르히. 르만이 강아지를 낳았다지? 보고 싶으니까 르만이랑 강아지를 좀 데려 오겠어?” “네? 아… 하지만 분만한지 얼마 안 되어서 르만의 신경이 날카로운데.” 체르히라는 하인이 곤란한 얼굴을 했고, 리플리케도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아 차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가 다시 손가락을 펴고 꽥 소리 쳤다. “에잇, 우리 공작님께서 개새끼의 비위를 맞추어야 한단 말이냐! 얼른 데리구 와! 얼른!!” 개새끼라… 여자애의 입에서 참 자연스럽게도 나오는구나. 가만히 들어보면 리플 리케 말투는 꽤나 험한 구석이 있다. 역시 이런 이상한 계집애는 최대한 멀리하 는 것이 좋은데 말이야. 체르히가 커다란 검은색의 사냥개와 작은 강아지들을 안고 나왔다. 르만이라는 사냥개는 체르히에게는 큰 거부감이 없어 보였지만 우리들을 보자 금방 이를 드 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보통 여자애들이라면 꽤나 무서워 할만한 사나운 모양이었 는데도 리플리케는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 나를 향해 으르 렁대는 르만을 향해 날카롭게 소리질렀다. “르만! 조용해! 공작님 앞에서 태도가 그게 뭐야! 감히 이를 드러내다니!!” 글쎄. 개보다는 리플리케 네 태도부터 고쳐야 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리플리케가 소리를 한번 버럭 지르자 의외로 르만이 꼬리를 살짝 내렸 다. 이 계집애의 압박이 저 커다란 사냥개한테까지 통한다는 것에 상당한 놀라움 을 느꼈다. “에스문드 공작님. 됐답니다. 한번 쓰다듬어 보셔요.” 리플리케가 개를 소개하며 방긋 웃었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저었 다. 리플리케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눈웃음을 실실 치며 말했다. “에이, 겁먹으신 거예요? 괜찮아요. 우리 르만도 알고 보면 착한 갠데요~.” “누가 겁먹었다는 거냐! 날카로워진 사냥개를 건드려서 뭘 어쩌자는 거야. 게다 가 애초부터 난 개 따윈 관심 없다고.” “에휴, 안되겠네요. 제가 직접 우리 르만이 얌전한 개라는 것을 보여드리죠.” 사람 말을 들어라, 이 계집애야. 남의 말 따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무시하며 리플리케가 르만에게로 걸어 갔다. “르만. 만져봐도 괜찮지?” 르만의 앞에 살짝 쪼그려 앉은 리플리케가 방긋 웃었다. 그런 후 당당히 오른손 을 내밀었다. 하지만 리플리케의 당당한 자신감과는 달리 이미 사냥개는 조금씩 주둥이를 일그러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자세라서 체르히라는 하인도 몹시 불안한 얼굴이었고, 나 역시 저 계집애를 말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쳐들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리플리케는 당당히 팔 을 뻗더니만 결국 사냥개의 머리위에 척하니 손을 올렸다. “크와아앙-!” 아니나 다를까였다. 사냥개가 당장에 흥분해 그 자리에서 날뛰어 리플리케의 손 을 세게 물었다. 리플리케의 작고 하얀 손이 사냥개의 날카로운 입안에서 와그작 소리를 냈다. “리, 리케 아가씨!!” “리플리케!!” 나도 그 하인도 이때만은 소스라치게 놀라 리플리케에게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단 두발자국만 뛰고 그 자리에서 굳었다. 리플리케가 이렇게 소리치고 있었다. “이 썩을 개새끼!!” 손이 물린 상태에서 리플리케가 주먹을 들더니만 사냥개의 머리에 강하게 내리 꽂았다. 머리를 맞은 사냥개가 리플리케의 손을 잠시 놓았고 리플리케가 손이 자 유로워지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냅다 사냥개를 발로 찼다. 대형견은 아니더라도 중형견 정도는 되는 개였는데 한번에 드높이 하늘을 날더니 저쪽 짚더미까지 날 려가 풀썩 떨어졌다. 머리에 피가 싹 가셨다. 어쩐지 팔에 매달릴 때부터 보통이 아니다 했더니. “저게 죽을라고 대들고 앉았어. 아으, 아파라. 아파 죽겠네.” 리플리케가 짚더미에서 완전히 꼬리를 내리고 낑낑대며 기어 나오는 개를 보고 중얼거리다가 참으로 뒤늦게 오른손에 아픔을 느끼고 몸을 크게 움츠렸다. 황당 한 웃음을 내며 그 꼬맹이에게 말했다. “하, 하하. 괜찮나?” “예, 뭐…….” 리플리케는 오른손을 꼭 쥐고 대답하다가 문득 눈을 뜨고 날 쳐다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딱 마주치자마자 갑자기 웅크리고 있던 몸에서 힘을 쭉 빼며 털썩 주저 앉았다. 그 꼬맹이가 거의 쓰러지다시피 앉은 자세에서 갑자기 흐느끼며 말했다. “아아~ 아파. 흑흑. 아아, 뼈가 부러진 거 같아. 흑흑흑.” “리, 리플리케 아가씨… 아, 이걸 어쩌나.” 체르히가 리플리케의 앞에 앉아 어설픈 동조를 해주었다. 하지만 힐끔힐끔 내 눈 치를 보는 폼이 아무리 잘 봐주어도 도무지 이 상황이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어찌 이 집안은 주인보다 하인이 더 낫냐. 성큼성큼 걸어 리플리케의 정면으로 걸어갔다. 요 계집애는 여전히 엄살을 피우 며 홀짝이고 있었다. 나는 화사하게 미소하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 아픈가?” “예.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려서… 흑흑… 공작님께서 좀 업어주시면…….” 꼬맹이의 말을 채 듣지도 않고 휙 돌아섰다. 그리고 리플리케를 향해 한마디 던 졌다. “걷지 못 한다고 했으니 누가 올 때까지 거기 있거라. 난 돌아갈 테니.” 이 기회에 리플리케의 마수를 피해 그대로 사라져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 택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금새 뒤에서 어두운 기운을 느끼고 슬금 고개 를 돌렸다. “공작님… 아직은 가시면 아니되옵니다.” 등뒤의 음울한 리플리케의 얼굴을 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못 걷는다며?” “이것은 필히 공작님을 모셔야만 한다는 저의 투혼에서 비롯된 기적의 힘입니 다.” 리플리케가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더니, 약간 풀린 눈으로 ‘으흐흐흐흐’ 이러며 웃 었다. ‘오호호호’ 도 장난 아니었지만, 이것 또한 보통이 넘는다. 가까이로 따라 붙은 체르히라는 하인이 재빠르게 허리를 콕 찝어주자 리플리케는 겨우 그 웃음 소리를 지웠다. 어쨌거나 이로서 결국 이박 삼일을 채우게 되는 건가. 달도 구름에 가려져 어두운 밤이었다. 저녁식사를 끝내고 아예즈 백작과 리플리 케의 애원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방안에 처박혀들었지만, 가만히 있자니 좀이 쑤 셔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트라도 좀 데려올 것을 그랬다. 사람들이 거의 잠에 빠져든 듯 해서 몰래 산책이나 할 겸 밖으로 나섰다. 여름이 가까워오는 즈음이라 공기는 조금 텁텁했지만 시원한 바람이 있어 기분이 좋았 다. 낮 동안에 있었던 리플리케의 사이코 같은 행동에 드글거리던 나의 마음이 가라앉음을 느낀다. 아아… 이래서 평화란 좋은 것이구나. “엇? 여기는?” 멍하니 정원을 걷다가 문득 자신이 마구간까지 오게되었음을 깨달았다. 오늘 낮, 리플리케가 개를 날려버린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 도무지 여자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 괴력에 감탄하고, 도무지 여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 폭언에 경악한다. 역시 기피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리플리케. 고개를 절래절래 젓고 그 자리를 떠나려던 순간이었다. 문득 어디선가 작은 목소 리가 흘러나옴을 깨달았다. 한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이 늦은 밤에 마구간에서 이야기 따윌 나누는 자가 누구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 즉시 발소리를 죽이고 살며시 소리가 새어나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러니까 …일 놈이라니까!” 이야기 소리는 3채의 마구간 중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마구간에서 들려오고 있 었다. 밖에서도 대강의 소리는 들리는 듯 하여 일단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마 구간 밖 한쪽에 자리잡았다. 그리 멀지 않은 내부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왠지 귀에 익은 목소리들이었다. “죽어라~ 채소머리 공작! 나도 참 성질 많이 죽었다! 으아, 내 가엾은 주먹이 운 다, 울어!” 채소머리 공작? 설마 나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 테지. 무엇보다 이 목소리는… “우리 리케 아가씨, 가엾기도 하셔라. 다 권력이 원수죠. 흑흑.” “정말 장난이 아니야, 멜리사!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내가 그렇게 성질을 죽이고 착하게 나와줬는데도 그 채소머리 놈이 끝까지 틱틱거리며 나온다니까. 대체 부 족한 게 뭐야? 뭐냐고? 으아~ 힘을 키우려면 초록 채소를 많이 먹어야 한다던데 내 오늘 밤 쳐들어가서 그 머리통을 다 뜯어 먹어버려?” 더 이상 채소머리 공작에 대한 말에 의문을 품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 저 건방진 꼬마 계집의 버릇을 고쳐줄까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던 차였다. “저도 조금 봤습니다만, 리케 아가씨께서 첫 만남부터 비꼬는 말투로 말씀하셨잖 아요. 그러시면 누구라도 싫어할 밖에요.” 오오, 누구냐! 이 목소리는 분명 오늘 낮에 개 끌고 나왔던 체르히라는 마구간 지기 놈이지. 그래, 그때도 이 집안에 유일하게 뇌를 가졌으리라 믿었던 놈이 바 로 너였다. 역시 기대를 버리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 채소 놈이 우리 오빠에게 모욕을 주었는 걸. 그까짓 인사하나 제대로 받아주면 어디 덧나? 지가 권력만 있으면 다냐고! 에잇, 누가 저 성질 더럽고 싸 가지 없다고 안 수근거릴까봐 그러나? 너도 다 봤잖아. 체르히. 그런데도 내가 그 정도 반격을 한 게 그리 큰 잘못이야?” “그래도 이왕 에스문드 가에 빌붙기로 한 거 그렇게 나오면 안되죠.” “야, 체르히! 같은 말이라도 좀 곱게 해라, 엉?” 잠시 ‘쿵쿵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추측을 해보건대 리플리케가 체르히라는 마구간 지기의 목을 붙잡고 벽에 쿵쿵 박아대는 듯 했다. 그건 그렇고 마구간 지기 놈, 간도 크다. 그 신분에 잘도 저런 소릴 나불대는구 나. “아, 정말 열 받아. 어쨌거나 난 정말 최선을 다했단 말이야. 내가 속이 느끼해지 는 것까지 참고 얼마나 열심히 이쁜 척을 했는데. 안 그래?” “아우 머리야… 하지만 리케 아가씨. 솔직히 연극이 너무 서투시던데요.” 마구간지기의 대답이 들리자마자 쾅 하는 울림이 마구간 벽에 닿아있는 내 손에 까지 전해져왔다. 리플리케가 거칠게 벽을 후려 찬 느낌이다. “서툴다니! 내가 얼마나 참고 분발했는데!” “맞아, 체르히. 무리한 소리 말어! 리케 아가씨! 제가 보기에도 정말 대단한 참을 성이었어요. 가문을 위해 그 포악한 본성을 거기까지나 숨기시다니. 이 멜리사는 정말 감동하고 말았답니다!” “그렇지? 멜리사! 너는 알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나 그 야채 공작의 앞에 서 단 한마디도 쌍욕을 내뱉지 않았어! 항상 생글생글 웃었는걸.” “저는 알아요! 리케 아가씨!!” “멜리사!!” 뭔가 와락 껴안는 듯한 효과음이 들려왔다. 참, 그놈들 하는 말과 행동이 전부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약간은 생각해볼 부분도 있다. 리플리케 꼬맹이, 하인들 이랑 어쩌면 저리도 친하게 지낼 수가 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작가의 영 양이었을 텐데 저건 하루 이틀 친한 사이가 아닌 것 같다. “이제 곧 공작님께서 되돌아가실 것 같던데 리케 아가씨 어쩔 생각이세요? 유혹 해야하잖아요.” “에이, 나도 몰라. 나도 최선을 다해 유혹해 봤는걸. 내 성격은 이래도 얼굴은 예 쁘잖아. 가슴도 크고 말이지. 남자들 가슴 큰 거 좋아하지 않아? 그런데 내가 요 렇게 가슴을 흔들었는데도 그 공작이 하하 웃고는 치우더라니까.” 어이어이, 거기에 네 또래의 남자녀석도 있는 거 아니었냐, 리플리케. 아무한테나 막 가슴을 흔들어? “리, 리케 아가씨. 저도 남자입니다만.” “봐봐! 체르히! 흥분돼지? 막 안고 싶다는 충동이 일지 않아? 그런데 그 공작은 요지부동이었다 이거야! 내가 슬쩍 가슴을 보이는 필살기까지 써먹었는데도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 그런 고로 내 추측하건대 말이지, 그 야채머리 공작은 아 무래도 호모야!”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장에 이 요망한 꼬마 계집을 끌어내리기 위해 그놈들이 있는 곳으로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그 순간에도 이야기는 계속 되고 있었다. “에이, 호모는 아닙니다. 전에 파블료프 왕립학교에 있을 때 여러 여자 후렸다는 소문이 있던데요.” 잠시 걸음이 느려졌다. 역시 체르히 녀석 마음에 든단 말이야. “그래? 그럼 전쟁에서 큰 상처를 입어 고자가 된 거야! 너희도 들었지? 야채머리 공작이 세스케인님과 일전을 벌이며 엄청난 상처를 입었었다는 사실!” 이제는 걷는 수준이 아니라 완벽 전력질주로 바뀌었다. 이 꼬마 계집~ 죽여버릴 테다!! “리플리케------------!!” “힉!?” “헉!” “꺄악?” 온 마구간이 쩌렁쩌렁하게 울릴 정도의 내 고함소리에 세 놈들이 한 마음이 되 어 놀라움의 신음을 삼켰다. 인상을 잔뜩 쓰고서, 지푸라기 위에 아무렇게나 앉 아있는 그놈들에게로 걸어갔다. 하지만 정작 리플리케의 앞에 서서는 씨익 미소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뜬 리플리케에게 손을 내민 다음 입을 열었다. “따라와. 그리 안기고 싶다면 내 자비를 베풀어 하룻밤 정도는 안아주마.” 상큼하게 미소한 얼굴에 목소리는 최대한 살벌한 느낌을 실었다. 체르히와 멜리 사가 리플리케의 양쪽에서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이 보였다. 팽팽히 긴장된 분위 기를 만족스럽게 느끼고 있을 때였다. “좋습니다!! 지금 당장 공작님의 방으로 가지요!” 빠르게 달려온 리플리케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이 꼬맹이는 내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전혀 모르는 듯 반짝이는 눈망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따라와…….” “네!” 조금은 께적지근한 기분으로 걸음을 옮겼다. 리플리케는 따라오다가 나 몰래 뒤 쪽의 두 하인들에게 엄지손가락까지 들어 보였다. 물론 나는 다 보고 있었다. “리, 리케님…….” “아가씨…….” 그나마 상황 파악을 하고 있는 두 하인들의 불안한 음성을 뒤로하고 일단은 나 의 방으로 향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그 후의 이야기- 에르가의 수난 (4) 털컥. 먼저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 곁으로 걸어갔다. 뒤쪽에서 리플리케가 문을 닫는 소 리가 들린다. 남자 무서운 줄 모르는 꼬맹이에게 본때를 보여주고자 한 것인데, 걸어오는 도중 생각할 시간이 생기자 은근히 망설여진다. 이런 식으로 하룻밤을 지내고 버림받으면, 지금이야 철이 없어 아무 생각도 없을 지 모르지만 후에 굉장한 상처로 남지 않을까. 빌어먹을, 하지만 저쪽에서 먼저 시작한 일이지 않아? 내가 왜 저 계집애의 사정 따위 생각해줘야 하냐? 도리어 생각을 해준답시고 그냥 나가라고 한다면 오히려 나를 바보 취급할 계집인 거다. 하지만… 제길, 저래도 저 꼬맹이는 여자인데. 한번의 실수에 평생이 망가지는 건 좀 불쌍하지 않나? 소문이 나면 후에 결혼하는 것도 힘들 테고. “리플리케!” 짜증스러운 생각의 소용돌이에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대로 돌 려보내진 않겠다. 대신 이게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그래서 겁을 먹게 한 다음 쫓아보내는 거야. 그럼 나중에라도 이런 짓은 함부로 못하겠지, 라고 결 론을 내리던 중이었다. 하지만 몸을 돌리다말고 굳었다. 문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리플리케가 드 레스를 홀랑 벗은 채로 있었기 때문이다. 낮에 입던 화려한 드레스 그대로였기 에, 방금 벗은 옷의 아래로도 아직 코르셋 등 여러 속옷이 한참 남은 상태였지만 그것들이 전부 벗겨지는 것도 이미 시간문제인 듯 했다. 리플리케가 제 손으로 열심히 코르셋 중을 풀다가 내 시선을 눈치채고는 끙끙거리며 말했다. “공작님은 왜 안 벗어요. 빨랑 벗어요.” 황당하게 서 있다가 리플리케가 코르셋의 첫 번째 끈을 다 풀었을 무렵 정말 겨 우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다급히 뛰어갔다. “뭐, 뭐 하는 거야?” “뭐 하다뇨? 이잇, 안 풀리네. 밤일은 옷을 전부 벗고 하는 거라구요. 그것도 몰 라요? 여자 여럿 후렸다더니, 역시 헛소문이었어.” 어디선가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나는 어떠한 중대한 진리를 깨달았다. 어린애다. 어린애다! 눈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 이 꼬맹이는 진실로 어린애다!!! “멍청한 꼬맹이가!!” 당장 리플리케의 손을 잡아채며 소리쳤다. 리플리케가 당장 인상을 찌푸리며 팔 을 뿌리치더니 버럭 대들었다. “꼬마라니? 15살이면 어엿한 숙녀죠! 이래봬도 저 생리까지 한다구요! 아기도 낳 을 수 있는 나이인데 일 치르기 전 어린애 취급이 웬 말이래? 그보다 빨랑 옷 벗으라니까요!” 이 꼬맹아!! 제 입으로 그딴 소릴 내뱉는 것부터가 어린애인 거다! 아예즈 백작 은 이런 어린애를 내보내서 나를 유혹하도록 시켰다는 거냐? 그 썩을 놈이! “빌어먹을! 정말 농담이 아니군.” “뭐하세요, 공작님. 아아, 제가 벗겨드려야 하는 건가요? 그래요? 제가 처음이라 잘 모르니까 좀 봐주세요.” 리플리케가 코르셋까지 풀어 옆으로 홱 던지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어린애의 윙 크에 아연해 하던 나는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시 리플리케의 팔을 붙들 었다. “그만 벗어! 계집애인 주제에 몸을 막 굴리고 난리야! 이건 장난이 아니라고!” “누가 장난이래요? 당연히 장난이 아니죠! 한 큐에 아기까지 뽑아서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 거니까! 음훗훗훗.” 리플리케는 그야말로 음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왼손으로 코르셋을 홱 던지더니만 갑자기 온 몸을 이용해 나를 밀어냈다. 이미 한번 몸으로 경험하고 또 한번 직접 눈으로 보았음에도 어린 계집애라는 선입관 때문에 리플리케가 엄 청난 괴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힘에 균형을 잃고 그만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쿠당-! “윽!!” “훗훗훗, 전~부 벗겨줄 테니 가만있어요!” 리플리케가 내 배 위에 올라탄 다음, 웃옷을 확 잡아 젖혔다. 깜짝 놀란 내가 꼬 맹이의 팔목을 잡고 소리쳤다. “야, 야! 뭐, 뭐, 뭐, 뭐 하는 거야! 계집애가 못하는 짓이 없어!”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몸 하나 버리는 것쯤이야!! 에잇, 이거 놔~욧!” “허, 헛소리말고 내려와! 이것 놔! 이 계집애야!” “에~잇! 웬 남자가 이리 반항이 심할까!! 살살 해줄 테니 너무 겁먹지 마요!” 리플리케가 또 한번 엄청난 괴력으로 내 팔을 뿌리치고 다시 안쪽 셔츠까지 손 을 대었다. 경악스럽기도 하고 쪽팔리기도 하고, 어쨌든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질… 뻔한 순간이다. “보자보자 하니까 이 계집이!!” 허리에 힘을 주어 몸을 크게 튕겨 일으키며 리플리케를 강하게 쳐냈다. 더 이상 은 봐주고 말고도 없었다. 아무리 리플리케가 괴력을 가졌대도 내 힘 앞에서 통 할만큼은 아니었기 때문에 꼬맹이는 금방 내 위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게 죽을려……!!” 욕설이라도 거하게 내뱉으려는데 리플리케가 저쪽으로 떼굴떼굴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리플리케는 몇 바퀴 뒤로 구르다가 장식장의 모서리에 머리를 강하게 부 딪히고 멈추었는데, 그 장식장 위에 있던 꽃병이 흔들거리다가 그대로 꼬맹이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막 부스스 이어나려던 리플리케는 그 꽃병에 정통으로 머 리를 맞고 도로 “꽥!” 하고 여자애 답지 못한 비명을 지르고 고대로 고개를 떨구 었다. “…….” 엉거주춤 앉은 채로 조금 떨어진 방구석을 쳐다보았다. 문득, ‘이거 내 탓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머리에 정통으로 꽃병을 맞았으니 어쩌면 정말 크게 다쳤 을 지도 모를 일인데 왠지 그 이상의 심각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그그.” 아니나 다를까 리플리케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내 본능이 인정할 정도로 정말 건강한(?) 여자애다! 어쨌든 자리에서 일어난 리플리케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며 내게로 뛰다시피 걸어왔다. 나도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 다. “여기까지 와서 왜 이래요! 살살 해준다는데 다 큰 남자가 왜 이렇게 겁이 많아 요!” “입 좀 닥쳐! 어린애 주제에 어디서 그런 말을 입에 담고 난리야!” “에에잇! 어린애어린애하며 핑계를 다는데, 그러지 말고 직접 눈으로 보시죠! 어 디 계속 그런 말이 나오나!!” 리플리케가 자기 속옷의 어깨 끈을 한꺼번에 손으로 쥐었다. 단번에 전부 벗어내 려는 찰라 꼬맹이의 손을 붙들었다. 그리고 남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당돌한 그 뺨을 아주 강하게 내려쳤다. 짜악-! “악!” 큰 소음과 짧은 신음. 뺨을 맞은 리플리케의 옆으로 쓰러질 뻔했다가 내 손에 고 정되어 간신히 비틀거리는 상태로만 그쳤다. 크게 화가 난 목소리로 설교를 늘어 놓으려던 즈음이었다. “왜 때려요!!” 리플리케가 눈에서 불통을 튀기며 바락 대들었다. 크게 마음을 먹고 여자애의 뺨 을 때렸는데, 그 각고의 노력은 조금도 빛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대로 멍하니 있지는 않고 나도 목청을 돋우어 맞받아 쳤다. “이 계집아! 아무데서나 그렇게 옷을 벗다니 무슨 짓이야! 네가 창녀냐? 그래?” “누가 아무데서나 옷을 벗어요! 공작님하고 썸씽을 일으키기 위해 벗은 거지! 옷 도 안 벗고 어떻게 일을 치러요?” “야! 죽은 네 아버지, 오빠에 우러러 창피하지도 않아? 내게 빌붙기 위해 그리 옷까지 벗어 던지며 난리를 피우는 것이 그리도 자랑스럽냐고 이 천박한 계집애 야!” “이 제기랄!” 리플리케가 괴력으로 잡힌 손을 뿌리쳐 내며 드디어 욕설을 입에 올렸다. 곧 이 어 손가락으로 나를 확 가리키며 소리쳤다. “니가 뭘 안다고! 유일한 희망이었던 하르몬 오빠도 죽어버려서 더 이상 우리 가 문엔 인재가 없어! 위튼 오빠도 사실 착하다는 것 빼면 무능력하고 나도 성질이 이래서 귀부인으로서 사교능력은 제로다. 어쩔래? 어차피 이대로 가면 우리 아예 즈 가는 백작가로 밀려난 데 그치지 않고 망해버릴 거다! 그 무엇보다도 가문을 생각하셨던 아버지야! 이대로 몰락하고 만다면 하늘에서도 땅을 치고 통곡하실 거라고!” “그래서, 네 아버지와 오빠의 죽음에 일조했던 내게 빌붙겠다고?” 잔뜩 비꼬아 물음을 던졌다. 하지만 리플리케는 전혀 기죽지 않고 한층 더 강한 기세로 몰아붙이며 소리쳤다. “그래! 빌붙으려 한다, 어쩔래? 어차피 너도 운이 좋아서 이긴 편에 붙었던 것뿐 이잖아! 잘난 척 하지마! 우린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이렇게 비굴하게라도 좀 잘 살고 싶다는데 그게 그렇게 잘못이야?” “어, 어디서 반말 짓거리냐? 그리고 네 오빠가 착해? 간, 쓸개 다 빼놓은 것으로 부족해 어린 여동생을 남자 유혹하는데 내보내질 않았나!” 아주 조금 리플리케의 기세에 밀려서 논지와 조금 빗나가는 말을-하지만 반말의 경우는 내가 아니라면 보통 가장먼저 크게 문제삼았을 것이다.-내뱉었다. 리플리 케는 더욱 화가 난 얼굴로 주먹까지 휘둘렀다. 물론 가볍게 피했지만, 리플리케 는 그 덕분에 더욱 화가 난 듯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목에 핏줄까지 돋워가며 소리쳤다. “위튼 오빠 욕하지 마---! 네가 우리오빠 무시하고 그래도 이제껏 참았지만 이 젠 못 참아! 네가 뭔데 우리 오빠 욕하는 건대! 네가 뭘 안다고 마음대로 말하는 건대!! 오빠는 내가 너네 가문 같은 곳에 시집가면 행복해 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란 말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당장 떠오르지 않아 주저하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조금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보고 리플리케가 화들짝 놀라 내게 달려들었다. “어딜 가! 못 가! 날 안아! 날 안으란 말이야!!” “우, 웃기지마!” 내 허리에 와락 안겨든 리플리케의 모습에 기겁해서 그 머리통을 있는 힘껏 밀 어냈다. 하지만 리플리케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달라붙 었다. “싫어어어어어. 날 안게 하고 말 테다아. 아기 낳고 말고야----앗!” “누구 마음대로!!” 온 힘을 내어 확 밀어내자 리플리케도 별 수 없이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그대로 돌진해 들어와 다시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정말 화가 나서 리플리케의 팔을 떼어 잡아당기며 뺨을 세게 때렸다. 짜악하는 큰 소음과 함께 리플리케의 뺨이 돌아갔다. “내 뺨이 동네 드럼이냐!!” 그러나 몇 초 안 되어 리플리케가 다시 고개를 들고 바락바락 대든다. 더욱 화가 치밀어서 이를 악물고 꼬마의 뺨을 한번 더 때렸다. 비틀거렸던 리플리케가 다시 고개를 들고 소리지르려 한다. 이번엔 그 기회도 주지 않고 또 한번 뺨을 때렸 다. 질리지도 않은지 리플리케가 또 다시 고개를 든다. 그렇게 네 번째로 리플리 케의 뺨을 때려주었을 때였다. “…….” 리플리케는 고개가 돌아간 채로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그제야 포기인가 싶어 몰 래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슬아슬한 전선을 넘나들 때보다 훨씬 더 힘든 경험 을 한 듯, 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아, 정말 독한 계집이로다! “우…….” 문득 작은 소리가 들려서 리플리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내가 잡고 있는 리플리 케의 왼팔이 조금씩 떨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플리케가 고개를 천천히 돌 렸다. 커다란 연보랏빛 눈동자에서 처량하게 눈물이 뚜욱뚜욱 떨어지고 있었다. 리플리 케는 입을 울먹울먹거리다가 코를 작게 한번 훌쩍였다. 그 후로부터는 급속도로 서러운 얼굴이 되어 더욱 심하게 울먹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히잉…….” 순간 크게 당황한 내가 숨을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손을 놓았다. 리플리케는 자 유로워진 손을 얼굴에 가져가 눈물을 훔쳤다. 곧 꼬맹이의 입에서 커다랗게 서러 운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잉~ 에에에에엥~ 내가 뭐 잘못했다고~ 으아앙~ 나만 때리고~ 허어어엉. 오빠야아~ 허어엉. 엉엉엉~.” 목놓아 울고 있는 꼬맹이를 앞에 두고 나는 그저 굳어버린 채로만 있었다. 황당 하기도 하고, 어떻게 해서 달래야 할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떠오르는 것 은 내가 너무 심했나보다 하는 생각뿐. 이런 빌어먹을! 카류리드라면 알아서 잘 달래고 얼러서 설득시켰을 텐데! 리플리케가 엉엉 울면서 한 손으로는 자기 옷자락을 잡고 한 손으로는 자기 얼 굴을 훔치며 어기적어기적 걸어 방문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너무 당황해서 그 자리에 굳어있기만 하던 나는 리플리케가 문고리를 잡고 돌릴 즈음에야 화들 짝 정신을 차렸다. “헛?! 야, 야!! 그 꼴로 어딜 나가!! 리플리케!! 이 계집애야---!!” 내가 다급히 달려 나갔지만 리플리케는 이미 문을 열어버린 뒤였다. 속옷 바람으 로 복도로 걸어간 리플리케가 내가 쫓아오는 것을 보고 더욱 서럽게 울었다. “으아앙~ 또 때리려고~ 오빠야~ 위튼 오빠~ 어딨어~” “일단 들어와! 이제 안 때릴 테니까 그만 울어!!” 다급히 리플리케의 허리를 안아들고 들어가려 했지만 이미 주위엔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온 하인들로 바글바글했다. 등에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것을 느꼈다. 최대한 이 상황을 수습하고자 리플리케를 끌고 들어가려 했는데 이 꼬맹이가 온 몸으로 발버둥치며 반항을 해서 그것도 쉽지가 않았다. “리, 리케 아가씨!!” 대부분이 아직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가운데에서도 누군가가 과감하게 이쪽으로 달려오기에 고개를 드니 조금 전 보았던 멜리사라는 시녀였다. 그녀가 리플리케 의 손을 잡으려 하기에, 이대로 리플리케를 빼앗겼다간 나만 곤란해진다는 생각 에 꼬맹이를 와락 안아들고 소리쳤다. “아, 아무것도 아니니까 돌아가서 일보고 있어!!” “이거놔~! 싫어어어~ 오빠~ 오빠야아아~~ 으아아앙~~!!” 내 팔에 들린 리플리케가 아둥바둥대며 목놓아 울어 젖힌다. 어떻게 봐도 아무것 도 아닌 일이 아니다. “하, 하지만!!” “시끄럽다! 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 당연한 결과로 멜리사가 토를 다는 것에 최대한 살벌한 시선으로 꺼지라는 압박 을 가한 다음 일단 리플리케를 안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완전히 닫았는데 도 싸하게 가라앉은 이 심장은 쉽게 원래대로 되돌아오질 않는다. 미쳐버리겠다!! 대체 하인들이 뭐라고 생각했을까!! “어어어엉~! 오빠야~ 오빠야~” 여전히 서럽게 울고 있는 리플리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금 망설였다가 머 리카락을 쓸어주며 최대한 상냥하게 말해보았다. “괘, 괜찮아. 이젠 안 때린다니까. 네가 원하는 거 뭐든지 해줄 테니까 제발 그만 울어라. 응?” “으아아앙~” 내가 어울리지 않게 상냥한 발음까지 만들어냈는데도 리플리케는 전혀 들리지 않는지 여전히 눈물을 그칠 생각을 않았다. 대체 어린애는 어떻게 달래면 좋은 거야. 카류리드한테 이야기 좀 들어놓을 것을!! 쾅-! 그때 바로 뒤쪽에서 문을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겨 우 그 정도 일에도 심장이 멈춘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리케 아가씨----!!” 문을 박차고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멜리사라는 하녀였다. 결의에 가득 찬 얼굴인 그녀가 방안을 훑다가 리플리케를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리플리 케를 꼭 안은 채 내게 소리쳤다. “아가씨를 죽이려면 저부터 죽이세요!!” “뭐야?” 내가 무슨 악당이라도 된 듯한 상황이 너무 황당해서 조금 일그러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랬더니 멜리사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꼭 감고 소리질렀다. “죽이려면 날 죽여욧!! 우리 아가씨는 못 죽여!” 얼이 빠져서 쪼그린 자세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그때 엉엉 울기만 하던 리 플리케가 멜리사의 외침에 조금 정신을 좀 차린 것인지 옷자락을 붙들고 말했다. “훌쩍. 메, 멜리사.”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제가 아가씨를 지켜드릴게요!” “아, 안돼. 훌쩍. 저, 저리가. 상대는 공작이란 말이야.” “그래도 지켜드릴 겁니다! 반드시 지킬 거예요!!” 멜리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리플리케의 머릴 꼭 안아 숨기듯이 자기 품에 묻었다. 그때 또 한 명의 인간이 뛰어들어 리플리케의 앞을 가로막았다. 헐떡거 리고 있는 것은 조금 전 보았던 그 체르히라는 마구간지기였다. 그가 무릎을 꿇 고 앉아 머리를 땅바닥에 쿵쿵 찍으며 소리쳤다. “공작님! 제발,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저희 아가씨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습니 다! 착한 아가씨예요! 제발, 한번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미천한 놈의 부탁이 라 무시하지 마시고 제발 일생에 한번뿐일 청을 들어주십시오. 제발!!” “이, 이봐.” 손을 조금 내밀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쿵쿵 소리를 내고 뛰어 들어오며 내 말을 막았다. “리케에~!!” 아예즈 백작이 리플리케, 정확히는 리플리케는 꼭 안은 멜리사를 와락 껴안았다. 그리고 리플리케가 속옷만 입은 채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더니 나를 향해 있는 대로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이럴 수가!! 아직 어린앤데 어떻게 이런 짓을!!” 이번엔 진짜 할말이 있었다. 계속 당하고만 있는 듯한 상황이라 화가 차오르고 있었기에 나는 있는 대로 짜증과 불쾌함 기타 등등의 검은 오오라를 모조리 실 어 거칠게 소리쳤다. “닥쳐! 이 개자식아! 네가 발 벗고 리플리케와 나를 붙이려 들었으면서 이제 와 서 무슨 헛소리야!!” 내 기세에 아예즈 백작은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눈물이 찔끔 나온 얼굴을 들고 그 답지 않게 참으로 과감히 말대답을 했다. “그,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성인식이 올 때까지 참았다가 해도 되잖습니까!! 저 희가 힘이 없다고 정말 너무하십니다!!” 정말로 굳었다. 황당함에 말도 안나왔다. 성인식이 될 때까지 참으라니, 그럼 리 플리케와 붙여놓은 다음에도 2년 동안 손가락만 빨게 할 생각이었다고? “리케, 흑… 이 오빠가 무능해서…….” “아니야, 오빠… 내가 더… 훌쩍.” 아예즈 백작이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멜리사의 팔 사이로 겨우 얼굴을 내민 리플 리케의 뺨을 쓸었다. 리플리케는 고개를 잘래잘래 저으며 같이 울먹였다. 곧 뜨 거운 시선을 주고받던 남매가 눈물이 왈칵 터뜨리며 서로를 꼭 껴안았다. “리케!” “위튼 오빠!!” 아예즈 백작과 리플리케 사이에 낀 멜리사는 참 감동적인 장면을 보았다는 듯 얼굴과 오른손만 내어 눈을 훔쳤다. 앞에서 용서해달라며 머리를 박고 있던 체르 히는 언제 고개를 들었는지 식은땀을 조금씩 흘리며 그들 남매를 바라보았다. 밖 에서 웅성거리던 하인들은 불안함과 때 아닌 희극 앞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는 턱이 빠진 것도 모르고 그들의 앞에서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그 후의 이야기- 에르가의 수난 (5) “딜티. 시간 있어?” 복도를 걷는데, 카류가 불쑥 맞은편 복도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대체 어떻게 움 직이기에 이 내가 기척조차 읽기가 힘든 건지… 한숨을 내 쉰 후 고개를 끄덕였 다. “마룡왕 폐하께서 급한 용무로 찾으시지만 않는다면 오늘 하루 반나절 정도는 시간을 낼 수도 있지.” “호오~ 되게 한가한가 보네. 그럼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자.” 카류가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으려 하기에 옆을 보는 척 하며 사뿐히 몸을 뒤 로 뺏다. 다 큰 남자랑 사이좋게 손을 맞잡고 걷는 것은 아무래도 사양이다. 하 지만 카류 녀석은 이 나이가 되서도 어딜 갈 때면 꼭 손을 내민다. 이 어린애 취 급이 장난인지 아니면 정말 반쯤은 정말 나를 어린애로 보는 것인지, 요즘 들어 서는 확신이 잘 서질 않는다. 어쨌거나, 딴청을 부리며 슬그머니 피했음에도 카류가 먼저 내 의도를 눈치 채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냐아냐. 이번엔 다른 게 아니라, 워프할 거니까 내 손을 잡으라고 그런 거야.” “워프? 왕궁 밖으로 나갈 셈?” “응. 에르가 형이 또 아예즈 백작가에 갔대. 우리도 거기 가보자.” “아예즈 백작가에?” 황당한 음성을 담아 물었다. 카류가 눈을 초생달처럼 둥글게 말아 음흉하게 웃었 다. “너도 알지? 수많은 엽기행각으로 단 이틀동안 에르가 형의 혼을 쏙 빼놓았다는 그 리플리케라는 여자아이 말이야. 요즘 에르가 형이 입만 열었다 하면 리케의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겠어. 이건 말이야~ 아무래도 냄새가 난다고, 냄새가~ 음 후후후.” “확실히 에르가가 리플리케양의 이야기를 자주 했지. 비록 그것이 목에 핏대를 올리며 진절머리를 치는 모양새를 띄긴 하지만 미운 정도 결코 무시 못할 일이 니.” “그냥 무시 못할 정도가 아니야. 에르가 형의 경우는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오히 려 고운 정보다 미운 정에 더 강하게 끌리거든! 나만해도 그렇지 않았겠어?” 카류가 괜히 정색을 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문득 과거의 에르가를 떠오른다. 입 만 열었다하면 카류의 욕을 뱉어내던 모습. 그 투덜거림은 겉보기만으로 따진다 면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경우는 좀 틀리지만 일 리가 있군.” “그렇지? 그러니까 가자. 한번 가보자고, 딜티!” “알았다고… 그런데 아예즈 백작가에 방문하겠다는 말은 건네뒀어?” “아니.” 카류가 무책임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며 눈을 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순간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엄마!! 세상에!!” 정말 아예즈 백작가의 저택에 도착했는지 주변을 둘러보려 했는데, 바로 뒤에서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허공에서 갑자기 인간들이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하다. 당황한 하녀의 앞으로 카류가 나섰다. “놀래켰나 보구나. 미안하다만 아예즈 백작에게 알려주겠나? 짐과 트로이 공작이 개인적인 일로 방문을 하였노라고 말이다.” “예!? 예에에!! 아, 저기.” 하녀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일어서서 한발자국 걸었다하며 어쩔 줄을 몰라했다. 워프라는 것도 처음 봤을 텐데, 그 상 대가 마룡왕과 트로이 공작이라고 말하니 어련할까. “폐하의 노여움을 받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뒤돌아보지 말고 아예즈 백작에 게로 가라. 굳이 뛰어갈 필요는 없고 천천히 걸어가서 천천히 알리면 될 것이 다.” 당황한 하녀를 위해 세세히 부분까지 명령해주었다. 하녀는 그제야 내 말에 따라 고개를 들고 정말 천천히 걸어 아예즈 공작을 찾아갔다. “그럼 우린 에스문드 공작과 리플리케를 찾으러 갈까? 아마 2층 응접실쯤에 있 겠지?” 카류가 빙긋 웃으며 먼저 걸어갔다. 달리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에 그의 뒤를 따랐다. 2층 응접실로 향하는 길은 꽤 험난했다. 이미 2층에 도착해 있었기에 거리는 그 리 멀지 않았지만, 도처에 산재해있는 하인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쓰러지고 엎어 지고 하며 장애물을 만들었다. 덕분에 몇 초면 도착할 거리를 수분으로 늘렸다. “휴. 그럼 들어가 볼까?” 카류가 문고리를 잡으며 씨익 웃었다. 노크는 안 하냐고 물어보려다가 저렇게 장 난기가 발동한 얼굴인데 굳이 방해할 필요 있을까 하는 생각에 관두기로 했다. “에르가 형……!!” 카류가 기세 좋게 문을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하지만 장난스러운 카류의 움직임 은 그 자리에서 멎었다. 나도 카류의 등 너머로 방안의 광경을 보고는 황당함을 느껴야만 했다. 정면으로 보이는 소파에 에르가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에르가의 무릎위로 연보 랏빛 머리카락의 소녀가 올라타 입술을 쭉 뺀 채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에르 가는 입술 공격을 피하기 위해 소녀의 얼굴을 잡고 뒤로 밀어냈지만, 소녀는 얼 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린 상태에서도 끝까지 입술을 내밀어 뻐끔뻐끔 거리며 버 티었다. “허, 허헉!! 카류!! 딜티!!!” 에르가가 약간 늦게 카류와 나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에르가 위에 올라탄 소녀, 아마도 리플리케일 그 여자아이도 우리들을 보고 잠시 입술공격을 멈추었다. “뭐, 뭐, 뭐, 너, 너희들이 어, 어, 어떻게!!” 에르가의 크게 말을 더듬으며 자신이 얼마나 놀랬는지를 온 몸으로 가르쳐주었 다. 그러다가 문득, 새삼스럽게 자리 무릎 위에 올라탄 리플리케를 발견하고 얼 굴을 확 붉혔다. “절로 꺼져! 이 계집아!!” 에르가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강하게 밀어냈다. 우리들의 등장에 조금 방 심하고 있던 리플리케가 그 힘에 한순간 균형을 잃으며 뒤로 넘어갔다. 콰앙!! 나와 카류는 화들짝 놀라 숨을 헉- 멈추었다. 에르가가 밀어낸 리플리케가 뒤로 넘어져 뒤쪽의 탁자에 머리를 부딪쳤다. 굉장한 소리였기 때문에 가냘픈 소녀의 머리 따윈 예전에 박살이 났을 것만 같았다. “아그그, 아이씨, 아파라.” 하지만 리플리케는 꿀밤이나 맞은 것처럼 뒤통수를 긁으며 금방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리고 곧장 에르가에게 돌진해서 멱살을 잡았다. “이제 안 때린다면서요! 왜 또 때려요? 왜 한 입으로 두 말 해요?” “우, 웃기지마! 내가 언제 때렸냐! 니가 멋대로 탁자에 머리를 갖다 박은 거지!” “핑계는 좋아! 그래~ 또 때려보시지. 때려봐 때려봐 때려봐!” 리플리케가 머리를 마구 밀어대며 소리쳤다. 이번에 에르가는 차마 조금 전처럼 밀어내지도 못하고 자신의 얼굴 앞에 간신히 리플리케의 머리를 막은 채 곤란한 얼굴만 했다. “풋!” 카류가 피식 웃었다. 그와 동시에 나도 웃었던 것 같다. “정말 재미있게 노네.” 카류가 싱글벙글 웃으며 에르가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나도 문을 닫고 녀석의 근처 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리플리케는 새로운 손님을 의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슬그머니 에 르가의 무릎에서 내려와 옆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하지만 꼴은 이미 산발이 된 머리에 장난이 아니다. “아, 건방진 꼬맹아! 넌 네 나라 왕과 공작 앞에서도 태도가 그 따위냐?” 에르가가 짜증스러운 소리로 리플리케를 향해 소리쳤다. 리플리케는 입은 다문 채, 눈만 크게 떠서 나와 카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눈 모양만으로 ‘정말인가?’ 했다가 ‘정말이잖아.’ 라는 느낌을 표현했다. “하하, 정말 재미있는 아가씨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니 봐주도록 하지 뭐. 게다 가 그거 에르가형이 할말이 아니지 않아?” “내 입으로 내 하고 싶은 말을 하겠다는데 네가 무슨 상관이냐!!” “아이참~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알아들어~. 마찬가지로 윗사람 앞에서 예를 지키 지 않은 무뢰배 주제에 감히 귀여운 아가씨 앞에서 설교를 늘어놓느냐고 직접적 으로 말하고 싶진 않단 말이야.” 카류가 시침 뚝 떼고 생기발랄하게 말했고 에르가는 어쩔 수 없이 이만 바득 갈 았다.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카류를 이길 수 없는 녀석이니까. 한동안 가벼운 이야기가 오갔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되었냐는 질문에 워프를 타고 왔다고 하자 리플리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마주쳤다. “와아, 정말 폐하시군요! 워프로 여기까지 오셨다니, 신기해요! 정말 대단해요! 과연 마룡왕!” “자리에 앉아! 웬 계집애가 이렇게 수선스러워!” 에르가가 소리쳤지만 리플리케는 조금도 기죽음 없이 입술을 비죽거려주고 자리 에 슬쩍 앉았다. 에르가의 고함 소리 정도엔 이미 완전히 면역이 된 듯 하다. 카류는 그런 리플리케를 가만히 보다가 살짝 웃었다. 문득 녀석의 웃음이 지금까 지 계속되어왔던 쾌활한 느낌과는 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덧 완전히 진 지해진 얼굴로 카류 리플리케를 향해 말했다. “리케양은 나나 에스문드 공작, 트로이 공작이 밉지 않니? 은밀히 말해 너의 아 버지와 오빠의 원수일 텐데.” 나와 에르가는 조금 놀랐다. 한창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할 만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직접적인 방식의 질문은 예전의 카류라 면 모를까, 전혀 그답지 않다. 리플리케는 입을 뾰족이 내밀고 그 위에 손가락을 대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은 것이 불만스럽다는 듯 우물거리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하르몬 오빠는 제가 어렸을 때 생명의 궁에 가서 일년에 몇 번 얼굴 보기도 힘들어서 소연하고요. 아버지도 하르몬 오빠만 알고 저나 위튼 오빠에겐 관심도 주지 않았거든요. 평소 생활하던 건물까지 다를 정도여서… 사실 돌아가 셨다고는 해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아요.” “그랬어?” 카류가 살짝 웃으며 약간은 밝은 분위기를 보이자 리플리케가 평소의 기운을 찾 은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게다가 사실 폐하나 공작님께서 직접 칼을 들고 아버지와 오빠를 살해한 것도 아니잖아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 전쟁을 일어났고 그 와중에 전사한 것인데 꼭 복수를 갚아야 하나 싶어요. 그리고 말이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남은 대로 열심히 살면 안 되나요? 꼭 죽은 사람을 못 잊어 침울하게 있어야만 착한 사람 인가요? 죽은 사람을 잊어버리는 것이 그렇게 나쁜 일이예요?” “조금 매정한 일이긴 하지.” 말은 그렇게 해도 카류는 기뻐하는 듯 했다. 리플리케는 어두움 따윈 티끌만큼도 담겨있지 않은 유쾌한 대답을 한다. 거짓으로 긍정적인 척 했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지나칠 정도로 순진한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카류는 리플리케가 이런 대답을 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래서 이 런 자리에서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건가. “생각이 그렇다면 달리 걱정할 것은 없겠는 걸?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리플리케양은 에스문드 공작의 어디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지 가르쳐주지 않겠 니?” 카류가 완전히 분위기를 바꾸어 눈웃음을 치며 질문했다. 리플리케는 에르가를 살짝 쳐다보았다가 양손을 다소곳이 모아 뺨에 대고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척 말했다. “그야 에스문드 공작님의 늠름함과 강인함 때문이죠. 제가 항상 동경하던 분이셨 는걸요? 그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제 꿈이었어요.” “내숭 떨고 앉았네! 네가 아예즈 백작가를 부흥시키기 위해 나를 이용하려고 용 쓴다는 거 저놈들도 다 알아!” 한쪽눈살을 찌푸린 에르가가 같잖지도 않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예쁜 척 하던 리플리케가 이를 드러내며 에르가를 확 째려보았다. 물론 에르가도 그에 지지 않고 바로 인상을 쓰며 맞받아 쳤다. “아쭈? 그 주제에 누굴 야려? 네가 잘했냐? 아주 가지가지 하네.” “에르가 형도 참 너무하네. 가문을 위해 제 한 몸 희생하겠다는 정신이 얼마나 대단해? 난 그렇게 강인한 여인이 좋던데.” 능청스럽게 말한 카류가 리플리케를 보며 말했다, “어때? 리플리케양. 에스문드 공작은 내버려두고 내 아내가 되지 않겠어? 가문을 위한 결혼이라면 공작부인보다는 후궁이라도 왕비 쪽이 더 낫지 않겠어?” “예에?” “뭐라고?” 리플리케와 에르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사정없이 눈을 키우고 카류를 쳐다보았다. 나도 무슨 꿍꿍이로 이러는지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속 내를 알기 힘든 카류가 빙긋 웃었다. “리플리케양을 시험하려고 이러는 것은 아니니 걱정 말고 솔직히 내 제안을 생 각해보렴. 음흉한 흉계일 수밖에 없는 그 의도가 이리도 즐겁게 느껴지는 것은 본디 그 사람의 천성이 밝고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때?” “뭐, 뭐야? 너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이런 황당한 꼬맹이를 후궁으로?” “후, 후궁?” 에르가가 카류를 향해 바락바락 화를 내다가, 멍하게 중얼대는 리플리케를 바라 보고 더욱 인상을 구겼다. 리플리케는 카류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에르가를 돌아 보고, 다시 카류를 쳐다보다가 에르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자세에서 에르가를 지긋이 노려보며 ‘끙~’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어디서 고민하는 얼굴이야! 이 계집애가!”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열 받은 듯 에르가가 방이 떠나가라 소리 지르더니 갑자기 다리를 들어 리플리케를 말 그대로 뻥- 하고 차버렸다. 허벅지쯤을 차인 리플리 케가 거의 날려가듯 옆으로 쓰러져 엄청난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리, 리플리케!” “에르가!!!” 이번에는 나도 카류도 너무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어린 여자애를 저렇게 폭행하다니. 에, 에르가 녀석, 이건 정말 심각한 성격 파탄 아닌가? 하지만 카류가 다급히 몇 걸음 걸어 나가지도 않았는데 리플리케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깜짝 놀랐다. 탁자에 머리 박을 때도 그랬지만, 여 자아이가 어떻게 저리 터프할 수가. 몸을 활처럼 튕겨서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난 리플리케가 에르가에게로 돌진했다. 그냥 평범하게 돌진 하는 것이 아니라, 불끈 쥔 주먹을 들어 ‘우오오오’ 하는 기 합을 내지르면서였다. 내 착각일 지도 모르지만 눈에서는 불길이 이는 것 같았 다. 부웅-! 에르가가 사뿐히 피하긴 했지만 무섭게도 여자아이의 주먹질에 파공음까지 실렸 다. 이젠 거의 이성을 상실한 듯한 리플리케가 탁자를 박차고 발돋움 하여 공중 뒤 돌려차기(!)까지 시도하며 목청껏 소리쳤다. “더는 못 참아~!!!! 어딜 도망가~!!” 에르가가 뒤로 훌쩍 물러서면서 황당하게 소리쳤다. “이게 간을 빼놓고 왔구만! 어디 공작을 앞에 두고 주먹질 발길질이야?!” “공작이면 다냐?! 안 때린다 해놓고 왜 또 때려? 그래, 때려라 때려라! 아주 때려 죽여~!” “때리라면 못 때릴 줄 알아? 이 꼬맹이가!!” 에르가가 주먹을 콱 쥐는 것에 드디어 카류가 나서 그를 붙들었다. 하지만 가공 할만한 마룡왕의 말도 철없는 애들 앞에서는 씨도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반은 웃고 반은 식은땀을 흘리며 카류가 혼자 열심히 분발한 덕분에 싸움은 간신히 휴전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드,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겨우 분위기가 좀 진정되나 싶을 즈음 밖에서 흥분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플리 케가 귀를 쫑끗 세우는 것으로 보아할 때 아예즈 백작일 듯싶다. 그 하녀에게 천 천히 불러오라고 말했더니 정말 천천히 불러온 듯. 카류의 허락이 떨어진 후, 아예즈 백작까지 합세하여 범상치 않은 철없는 대화는 조금 더 오랫동안 이어졌다. 날이 저물었을 무렵에나 되어서 우리들은 아예즈 백작가를 나서기로 했다. 응접 실에서 나와 복도까지 걸어 나온 후, 카류가 리플리케를 향해 애들이나 대하듯 가볍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했다. “잘 있으렴~ 돌아갈 때도 마찬가지로 워프를 사용할 생각하니.” “오오, 그렇군요!” “과연 폐하시군요! 8서클 마법을 그리 간단하게 말씀하시니!!” 아예즈 백작과 리플리케가 호들갑을 떤다. 그런 남매들을 보고 에르가가 퉁명스 럽게 쏘아대었다. “시끄럽게 굴기는!” “하하, 그럼 돌아가지.” 카류가 빙긋 웃으며 나와 에르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다 문득 손을 흔들 며 인사하던-국왕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라니- 리플리케의 눈빛이 갑자기 의미심 장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기분 탓인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눈을 번뜩이던 리플리케가 한발자국 살며시 걸어 나왔다. 마지막으로 워프를 하기 직전이었다. “하압!!” 리플리케가 갑자기 힘찬 기합을 지르며 방심하고 있는 에르가의 복부에 날카롭 게 주먹을 메꽂았다. 에르가는 순간 헉- 숨을 삼키며 허리를 크게 구부렸다. 아 무리 기습이었다고는 해도 저 에르가에게 신음소릴 내게 하다니. 돌발 상황에 잠시 놀랐지만 곧 피식 웃었다. 아마 리플리케는 워프하기 직전에 그동안 구타당한(?) 분풀이를 하고 가볍게 헤어질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멈춰!!!!!!” “와아악? 에르가형?” 하지만 리플리케의 뜻은 무산되었다. 에르가가 워프를 시전하고 있는 카류를 뒤 로 세게 밀어내어 막 완성 직전에까지 왔던 워프를 실패하게 만든 것이다. 에르 가가 커다란 괴성을 지르며 이미 복도 저 끝으로 내뺀 리플리케를 쫓아 달려 나 갔다. 바닥에 쓰러진 제 주군 따윈 안중에도 없다. 창밖으로 찬바람이 불어온다. 차가운 복도의 한편에 바닥에 주저앉은 마룡왕과 멍청한 백작 한명, 그리고 얼이 빠진 하인들, 마지막으로 내가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내가 가서 에르가를 잡아오지.” “됐어, 딜티. 나중에 알아서 오겠지. 정말 장난 아닌 커플이네.” 카류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미 아예즈 백작가에서 체면을 차릴 생각은 없 는 것인지 헤실헤실 웃고만 있다. “우리들끼리 돌아가지.” “에, 예. 리플리케가 폐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뭐. 재밌기도 했고… 하하.” 카류가 웃으며 아예즈 백작의 진땀어린 사과를 받았다. 그렇게 결국에는 두 사람 만 가볍게 워프를 하여 왕성으로 되돌아왔다. “이야~ 에르가 형의 성질에 맞먹는 여자애는 처음이라니까.” 카류가 팔다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내가 진 지하게 물었다. “에르가와 리플리케를 이어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유가 뭐야?” “응? 무슨 소리야? 안간힘을 쓰다니.” “마룡왕 폐하께서 그냥 호기심만으로 구경만 하기 위해 아예즈 백작가에 걸음을 하시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네 사소한 행적도 귀족들 사이에 큰 반향이 되는 것 을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내 질문을 들은 카류가 헤죽 웃고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피웠다. 그에 나도 마 주보며 빙긋 웃어주며 손을 들어 카류의 머리를 잡아 강제로 나를 보게 만들었 다. 어쩔 수 없이 카류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맞아. 네 말대로 난 둘을 이어주고 싶어. 에르가형이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않고 혼자잖아. 첫사랑인 히노 선배를 잊게 만들만큼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가 나타났 으니 이건 가히 운명이라 불릴만한 일이 아닐까나?” “정말 그것뿐? 그것 때문에 네가 없는 시간 쪼개내어 직접 나서기까지 해서 그 들을 붙여주려고 하는 거야?” 녀석을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카류는 검지 양 끝을 살짝살짝 마주 대다가 다시 한번 헤죽 웃고 이야기를 이었다. “그리고 사실 아예즈 공작가라면 하르몬 선배의 가문이거든. 비록 내전에서는 서 로 적이었지만 생명의 궁에서 마법 공부를 할 적에는 신세도 많이 졌었지. 그리 고 아르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특히나 하르몬 선배를 많이 마음에 걸려하셨 거든.” “그래서 이런 식으로 에르가와 리플리케를 이어서 하르몬님의 아예즈 백작가를 그나마 부흥시켜 주고 싶다? 이런 맙소사. 에르가는 완전히 진퇴양난이로군. 카 류의 마수에 걸렸으니 빠져나오려야 나올 수도 없겠어.” “으윽, 이용하는 게 아냐. 리플리케같이 강인하고 다소는 과격한 아이라야 에르 가형의 막 나가는 성격에도 잘 견뎌내지. 지금은 철이 없어서 그렇지 분명 착하 고 좋은 여자가 될 거야. 게다가 네가 보기에도 에르가 형이 리플리케를 그 나름 대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 않았어?” 깡총깡총 뛰며 변명을 하는 그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나도 딱히 리플리 케를 거부할 이유는 없고. “하지만 역시 에르가가 좀 불쌍하군. 모든 사실이 다 들통 난 상태에서 말싸움을 나누는 덕인지 사악한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은밀히 따져서 리플리케는 여 전히 에르가를 이용하려는 것 아냐?” “아냐아냐, 내가 후궁이 되겠냐고 물었을 때 리플리케가 고민하는 얼굴을 했잖 아? 단순히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라면 생각할 것도 없이 내게로 와야지 그렇게 에르가 형의 얼굴을 노려보며 고민할 거 뭐있어? 투닥거리고 있지만 분명 자신 도 모르는 새에 에르가 형에게 마음이 가있는 거야! 둘이 솔직하지 못한 게 성격 이 참 비슷하지 않아? 이거야 말로 천생연분이지!” “들어보니 그것도 그렇군.” 눈을 지그시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카류가 ‘그렇지?’ 라고 반복하여 물으며 손뼉 을 짝짝 쳤다. 어지간히도 아예즈 백작가를 붙여주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확 실히 두 사람, 잘 어울리는 것도 같으니까…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혈압이 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은근히 기분이 나빠 져옴에 따라 얼굴에 점점 더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보통 사람은 알아챌 수 없 는 심경의 변화를 카류만은 정확히 알아챘다. “뭐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마음에 안 들게 뭐 있어. 그저 카류가 네가 정 그렇다면 나도 리플리케를 이어 주기 위해 힘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이왕이면 그 사랑이 불타오를 수 있도 록 수많은 장애를 주는 것이 좋겠어. 후후후후.” “굳이 딜티가 나서지 않아도 리플리케와 함께할 에르가 형의 앞날은 참 험난할 거 같던데?” “너무 무르구나, 카류. 정략결혼을 한 우리들과는 달리 에르가는 사랑을 바탕으 로 한 결혼을 할 듯하니, 좀 더 확실하게 그들의 사이를 관철시켜줄 계기가 필요 하지 않겠어?” 경쾌한 어조로 묻자 카류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좀 질투 나네. 난 카이랑 영원히 헤어져 버렸는데 형 혼자서 만 제 짝을 찾았으니. 그럼 딜티, 진심으로 할 셈이야? 계속 약 올렸다가는 에르 가 형에게 복수당할 지도 몰라. 형 성질 알지?” “물론 티 안 나게 할 테니까 맡겨둬. 겉으로 웃으면서 뒤로 염장 지르는 것이 내 특기 아니겠어?” “하긴! 그쪽 방면으론 딜티가 고수지! 그럼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얘기 해줘야 해.” 카류가 뽀송뽀송한 얼굴로 방긋 미소하면서 음흉한 제안을 한다. 전혀 말릴 생각 이 없는 카류를 보자니 에르가도 어쩌면 복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 다. 하지만 알게 뭔가. 나는 나의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비밀리에 굳은 뜻을 관철할 뿐. 에르가 녀석도 그토록 끔찍하다고 외쳐댔던 수난의 나날이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것은 전혀 모를 것이다. 내일의 거친 일상을 준비하기 위해 해가 일찌감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고 있었 다. ============================================= hongik1999@hanmail.net 완결을 향해 어서어서~ ㅠ_ㅠ;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 그의 짧은 방문 (1) ========================================= 오랜만 ^_^;;;;;;;;;;;;; 69, 70 두개의 파트가 나가면서 진짜로 완결입니다. 에르가의 수난은 몽땅 지우고 새로 시작입니다. 아깝지만 마음에 안 들어서 도저히 안되겠더군요. 하지만 완전 황은 아니고, 그 즈음에서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에르가는 자기랑 비슷한 성격의 난폭한 여자애랑 눈이 맞아 결혼했답니다. ㅎ_ㅎ; 지금 이 69파트는 마지막 마무리로 집어 넣을랬다가 수정해서 즉위 다음날에 일어난 일로 바꾸었답니다.- _-; 덕에 뭔가 밸런스가 쫌 안 맞는 듯한 느낌. 그래도 이 이상 끌기는 좀 그래서.......ㅡ,.ㅡ; ========================================= 대리석의 기둥에 신화의 조각이 가득 그려져 있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스탠드 글라스에도 마찬가지. 생소한 아르윈의 왕성이 꽤나 화려하다고 느낀다. 4대강국 중 항상 소국에 머물렀던 아르윈이지만, 실용성보다는 전통을 고집하는 덕에 왕 성의 내부 장식만은 가장 사치스럽게 꾸민 것 같다. 지금 아르윈 왕국은 전례가 없는 즉위식을 치르려는 순간이다. 많은 신하와 백성 들이 도열한 장관이 내려다보이는 테라스. 그곳의 맨 상석에는 카르틴의 국왕인 나, 그리고 에베리아, 리샤스 왕국의 국왕이 각자 자리 잡고 있다. 오랫동안 4대 왕국의 사이가 결코 좋았다고 말할 수 없었던 관계로 각 나라의 국왕이 타국의 즉위식에 참석했던 전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달 랐다. 카류리드는 각국의 국왕에게 서신을 보내어 자신의 즉위식에 참석해 달라 는 의사를 보냈다. 말이 권유이지, 아무리 보아도 그것은 강요이다. 9서클 마법 사인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붉은 융단의 끝으로 드디어 그 꼬마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대체적으로 붉은 색으로 통일된 긴 망토를 두르고 왕의 상징인 왕관과 홀을 든 그가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에베리아와 리샤스 왕국의 국왕이 껄그러운 기분이면서도 가식적 인 축하를 보냈다.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류리드는 빙긋 웃어 우리들 세 사람에게 인사를 보내고 테라스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우와아아아!” 카류리드의 모습이 태양 아래로 조금 드러나자 하늘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드래곤의 수호자라는 소문이 퍼졌어도 여전히 패륜아라는 오명을 떨치기 어려웠던 카류리드는 우리 카르틴 왕국의 대군을 물리쳤다는 소식이 들림에 따 라 국민의 영웅이 되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 정도로 만백성의 적이었던 카 르틴의 국왕이 즉위식을 축하 하러 와야 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마룡왕!” “마룡왕!” 카류리드가 완전히 테라스의 앞으로 나가 섰을 때 무질서하던 함성은 곧 다르게 바뀌었다. 내가 가진 황금의 성왕이라는 그것과 같은 카류리드의 별칭이다. 거창 하게도 마법의 왕이며 용의 왕이라는 뜻이다. 상당 시간동안 백성들의 함성에 미소로 답하던 카류리드가 손을 들어올렸다. 소 란스럽던 군중이 조금식이나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카류리드는 그들이 완 전히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 나 크레티야 3세는 이 나라를 신성불가침의 왕국으로 선포한다. 아르윈은 침략 하지도 않으며 침략 당하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무한한 권능은 피와 전쟁이 아 니라 평화와 번영을 위해 쓰일 것임을 알리노라! ] 카류리드가 사용한 것은 전에 본 적이 있던 확성 마법이었다. 절대 들릴 리 없는 먼 거리의 말소리가 또렷이 들려오는 것에 군중들이 크게 놀라 한꺼번에 침묵했 다. 심하다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쉽고 간소한 연설이 완전히 끝난 것으로 보이 는데도 환호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생소한 마법이 도리어 역효과를 불렀다. “무지한 백성들 앞에서 너무 지나치셨군.” 에베리아 국왕이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리샤스 국왕에게 한 말처럼 보였 으나 주변에 도열하고 있던 아르윈의 귀족들까지 그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들이 이러거나 말거나 에베리아 국왕과 리샤스 국왕은 이심전심으로 몹시 흐뭇하게 미소했다. 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목숨까지 내놓고 전투 를 벌이던 관계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다. 하기야 아르윈의 즉위식 에 거의 강제되다시피 참석하게 된 것에 얼마나 많은 앙심을 품었을까. “와-------------!!” 그때 갑자기 땅을 울릴 정도로 강한 함성이 쏟아지며 성의 내부에서 신경전을 벌이던 자들을 덜컥 놀라게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에베리아 국왕의 바람은 비켜 나갔다. 자신의 왕의 경이적인 능력에 잠시 할말을 잃었던 백성들이 한꺼번에 감 탄을 해서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잠시간의 침묵이 도리어 극적인 장면을 연 출하고 있다고 할까. 에베리아 왕과 리샤스의 왕이 동시에 똥 씹은 표정이 됐다. “우와아아아아!!” “마룡왕! 마룡왕!” [ 이로서 즉위식을 끝내겠다. ] 큰 함성을 뒤로하고 카류리드가 팔을 젖히며 몸을 돌렸다. 즉위식에 사용되는 묵 직한 망토가 잘도 구름 하나 없는 하늘에 크게 휘날린다. 팔 힘이 강한 내가 젖 혀 넘긴다 해도 저렇게 날리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의식하고 일 부러 한 행동이라고 밖에 안 보인다. 하지만 눈치가 빠르지 못한 백성들과 귀족 들이 그 모습에 크게 감탄을 터뜨렸다. 요령이 좋은 꼬마라고 해주어야 할까. 아르윈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3국의 국왕들의 떨떠름한 축하의 속에서 식이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날이 어느 정도 저물어갈 때쯤 즉위식을 축하하는 파티까지 대충 끝마쳤다. 대기 실 한쪽에서는 에베리아 국왕과 리샤스의 국왕이 카류리드에 대해 사이좋게 의 견을 나누고 있다. 아무래도 저 모습에는 영영 적응이 되질 않을 것 같다. 그만 쉬기 위해 방으로 올라가 볼까 싶던 차였다. 갑자기 대기실 문이 열리며 카 류리드가 호위병 하나 거느리지 않은 채 단신으로 훌훌 내게로 다가왔다. 빙글빙 글 웃는 그의 얼굴을 보다가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나라의 국왕께서 호위를 너무 허술히 하시는 것은 아닌지?” “프로텍션 실드 하나만 걸면 검과 활로 장전한 백만 대군의 중앙에서도 두려울 것이 없고, 마법사를 상대로라면 더욱 말할 것도 없는데 호위가 무슨 의미가 있 겠습니까. 하지만 걱정의 말씀을 건네주시니 기쁘군요.” “하아. 그러시군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카류리드의 이야기를 들은 에베리아와 리샤스의 국왕이 혀 를 내두르는 것이 얼핏 보인다. “그건 그렇고, 잠시 개인적으로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옐루니얀 공주의 이야 기를 할까 하는데, 잠시 시간을 내주시지요. 물론 내일쯤 시간을 내어 만나보시 면 될 일이지만 아내가 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다급해져서 말입니다.” “…그러지요.” 크게 거절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카류리드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에 나의 호 위 기사들도 뒤를 따랐지만, 카류리드는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거부했다. 미심쩍 은 표정으로 내가 물었다. “엘루니얀의 일이 그렇게 숨겨야 할 이야기라는 말씀입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하긴, 저야 별로 상관없지요. 자, 갑시다.” 카류리드가 순진한 소년처럼 천진난만이 말했다. 하지만 ‘저야 별로 상관없다’ 는 말 때문에 생각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도 자신에게는 상관없을 지라도 내 게는 상관이 있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 거다. “기다려라. 크레티야 3세와 개인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 “…네, 알겠습니다.” 호위기사들은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감히 내 말에 이이를 달지는 않았다. 카류리 드는 원래 있던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테라스로 안내했다. 산 너머가 조금씩 붉은 빛을 띄기 시작하고 있었다. 날이 곧 저물 듯 하다. “에뮤.” 테라스에 몸을 기댄 카류리드가 나를 보더니 대뜸 한마디를 던졌다. 그것은 카르 틴 국왕의 본명을 부르는 것이라기보다는 에뮤르?에이에의 앞 글자를 따서 부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바로 내 본성을 드러내진 않았다. 대신 드래곤의 일 따윈 모르는 척 눈살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낮게 깔아 물었다. “갑작스레 이 무슨 무례이신지? 선전포고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와~ 많이 발전했네. 드래곤으로 대했다고 바로 발끈하지도 않고 끝까지 국왕인 척 이리도 침착하게 대응하다니. 우리 에뮤도 성룡이 될 날이 멀지 않은 건가? 그건 그렇고 에뮤, 내가 부탁이 하나 있걸랑.” 내가 진지하게 대답했지만 카류리드는 촐랑거리며 내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카이야의 모습 기억하지?” “부탁이 있다면서 갑자기 그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꺼내는 거냐?” 더 이상 놈에게 카르틴의 국왕인 척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해서 한숨을 푹 쉬고 에뮤르?에이에로서 대답했다. 카류리드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나를 보며 입을 조금 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먼저 내 머리 한쪽으로 스쳐 가는 생각 이 있었다. “있지. 내 부탁이 뭐냐하면 말이야.” “싫다! 무조건 거절한다!” “응?” 말을 하다가 내가 대뜸 거절한다고 말하자 카류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놈이 의아해하거나 말거나 나는 단호히 손을 내저었다. “네놈, 날더러 카이야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해달라고 부탁하려는 게지? 헛소리! 꿈도 꾸지 마라! 절대로 거절이다.” “왜! 너무하잖아. 내가 카이야 좋아했다는 거 알면서 어쩜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가 있냐. 얼굴이라도 한번 보게 해주면 어디 덧나?” 역시나 생각대로 였나 보다. 카류리드가 콧김을 팍팍 내뿜으며 불만을 터뜨렸다.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카류리드가 징징거리며 애걸복걸하기까지 해서 어쩔 수 없이 이유를 설명하기로 했다. “나는… 아무래도 남자 놈은 취향이 아니다.” “엥?” 이 간단한 한마디로는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 카류리드가 또 한번 눈을 댕그랗게 떴다. 왠지 그 모습이 열 받아서 이번엔 좀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내가 폴리모프하면 괜히 감상에 빠져서 진짜 카이야를 상대하고 있는 양 내게 엉겨붙을 거 아니냐!” “무, 무슨 소리야.” “아니면, 포옹 한번 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자신 있냐? 네가 그리 사랑했다던 카뮤르?카이야의 앞에서?!” 내가 질색인 얼굴로 소리치자 카류리드가 고개를 좀 돌리고 심각하게 생각에 들 어갔다. 찔리는 곳이 아주 많은지 놈은 금방 대답을 하지 모하고 우물쭈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도리어 볼을 불룩하게 해서 빽 소리쳤다. “뭐야! 포옹 한번쯤 어때! 그리고 너! 남자이기도 하며 여자이기도 한 드래곤이 잖아! 양성인 주제에 남자가 싫니 어쩌니 그러는 자체가 비정상이라고!” “시, 시끄러워.” “너는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이라는 남자가 아니야! 알고 있어? 언제까지 그 가면을 진짜 자신과 동일시하며 살 셈이야? 에뮤르?에이에와 에뮤 드 케시뮈르 카르틴의 경계를 확실히 자각하고 있어야지! 정말 성룡이 되지 못한 채 미쳐버리 려고 그래? 주변의 소중한 인간들이 죽어가는 것을 견디지 못해 드래곤으로서의 권능을 모두 발현하여 세계의 균형을 깨버리려고?” 확실히 아픈 곳을 따져드는 카류리드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벌써 쉰 살이 가까 워 오는데 나는 아직 성룡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내 소중한 자들이 곤란에 처한 모습을 보노라면 본래의 힘을 모조리 꺼내어해 그들을 돕고자 하는 싶은 충동을 느낀다. 9서클의 마법아래 3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죽어갔을 때도 그랬다. 충분히 그 재 앙을 막을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구경만 할 수밖에 없는 심경은, 본래부터 무 력한 자보다 더욱 참담하다. 이제 와서 카류리드를 책할 마음은 없지만 말이다. “에뮤르?에이에 군! 내 말 알겠어?” “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누구더러 ‘군’ 이라는 거냐. 내가 아무리 어리다 고는 해도 너만큼은 아니다.” 마치 깐깐한 선생님이라도 된 듯 하는 말에 허탈하게 웃음을 흘렸다. 살짝 가벼 워진 분위기에 카류리드도 함께 웃었지만, 이내 양손을 모아 애원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응? 카이야로 변해봐. 아무리 양성이래도 기분이라는 게 있으니까 뽀뽀까진 안 바라고 그냥 딱 한번 안아보기만 하자.” “싫다!” “아~아니, 지금까지 내 말을 뭘로 들은 거야! 드래곤과 폴리모프 때의 경계를 확실히 구분해야 한다고 그랬잖아! 드래곤인 주제에 남자가 싫다는 턱도 안 되는 소릴……!!” “그게 아니라도 네 술수에 휘말려 드는 건 거절이다! 이 건방진 꼬맹아!” “끄악~ 정말 너무하네!” 카류리드가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지만 당연히 무시해주었다. 상당한 시간이 지 난 후에야 곁에서 애원하던 카류리드가 테라스 난간에 축 늘어졌다. “이제야 포기한 거냐.” “제길, 나빴어. 언젠가 이 원한은 에뮤르?에이에에게 확실히 갚아주고 말 테다.” “이런, 무섭군. 무서워.” 피식 웃으며 멀리 아래의 정경을 내려다보았다. 아래쪽에서 병사들이 왔다갔다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지만, 이미 카류리드가 우리들의 주변에 어떤 마법이 쳐 놓 은 상태라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어도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순수한 마법기 교만 본다면 드래곤인 나보다 오히려 놈이 강한 수준일 거다. “후우, 9서클의 마법사가 지배하는 아르윈이 최강대국 행세를 하는 것은 당연하 다 생각한다만, 그래도 너무 심한 것 아니냐? 제 즉위식을 위해 각국의 왕을 모 조리 왕성에 불러들이다니. 우리들에게도 최소한의 체면 정도는 차리게 해줘야 지.”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 나도 국왕들과 직접 얼굴을 보고 할 일이 있어. 이를테 면 그들의 눈으로 직접 왕성 내의 마법사 연구실이라던가 새롭게 마법을 배운 자들을 소개해서 아르윈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고 …….” 카류리드가 테라스 밖으로 팔을 늘어뜨리며 말끝을 흐렸다. 잠시 침묵을 지켰던 놈이 말을 이었다. “내일 우리 카이 형아 생일이거든.” “…….” 고개를 내려 카류리드를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카류리드가 혼자 멋 쩍은 듯 웃었다. “하하. 생일파티에 루브 형만 빠지면 너무 쓸쓸할 거 같아서 일부러 즉위식을 핑 계로 에뮤 너를 여기까지 불렀는데…….” “…….” 내가 계속 말을 않고 있자 카류리드가 가만히 손을 뻗어 북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겨울의 별궁이 있어. 내가 즉위한 후로 형제들은 모두 그곳에 유폐되어 살아. 내가 가끔씩 시간을 내서 찾아가는데… 형제들은 마음이 답답할 땐 종종 화를 내기도 하지만 보통은 아주 예쁘게 웃어 줘.” “날 더러 전 태자인 루블로프로 폴리모프 해달라는 뜻이냐?” 카류리드가 그제야 몸을 추스려 일어났다. 조금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었던 카류 리드가 양손을 탁 모아 고개를 숙였다. “루브형의 전신 초상화가 있어. 틀린 부분이나 다른 자세한 것은 내가 조언해줄 테니까 한번만 부탁하자! 상황을 내가 잘 꾸밀게. 큰 영향이 미치도록 하진 않을 거야. 꿈에서 본 것 같은 느낌이나마 그들에게 줄 수 있도록, 부탁이야.” 카이야로 변해달라고 말할 때와는 달리, 고개를 깊이 숙인 녀석은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장난기 어린 협박이나 어설픈 설교 등으로 나를 꼬여내지 않고 진정으로 자신의 마음을 들어달라고 원하고 있다. 한동안 놈을 바라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싫다. 네 형제들 중에 남자도 있을 거 아니냐! 오랜만에 돌아온 형이라고 엉겨 붙을게 뻔해!” 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을 듣고 카류리드가 눈을 반짝 뜨고 나를 올려다보 았다. 내 뒤로 피식 웃음을 터뜨린 놈이 내 앞쪽으로 쪼르르 뛰어왔다. 약간이지 만 우울했던 얼굴은 어느덧 생기에 반짝이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놈이라며 그 냥 지나치고 있는데 난데없이 카류리드 녀석이 내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에잇! 허락해 줘! 허락 안 해주면 이거 놓지 않을 테다! 영원히 엉겨붙어 특제 남자 번데기가 되어 버릴 테다! 해줘~ 그냥 해주세요~ 존경하는 에뮤님~ 한번 만 해줘요~.” 문득 주위에 쳐져있던 마법의 막 같은 것이 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카류리 드의 애원하는 소리에 아래쪽에서 호위하는 병사들이 놀라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 놈의 이마를 밀어내며 최대한 작게 소리쳤다. “이놈! 장난은 그만해! 이미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다 아는 주제에!” “뭘 알아? 말로 직접 안 하면 난 몰라. 음하하. 역시 거머리 작전이 최고로구나!” 저 하고 싶은 대로 웃던 카류리드가 유쾌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이리와.” 물론 나는 그런 손 따윈 그냥 지나쳐 걸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무안한 듯 손만 내밀고 있는 놈에게 말했다. “안내하지 않고 뭘 하는 거냐?” =================================== 즉위식 장면이 몹시 허접하죠. 이럴 줄 알고 일부러 몇년을 훨쩍 넘긴거였는데... ㅠ_ㅠ; 이르나크의 장 Part 69 즉위 - 그의 짧은 방문 (2) 겨울의 별궁은 의외로 굉장히 큰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카류리드의 명령으로 몇 번이나 신축공사를 하여 새로운 궁을 세우고 땅을 넓힌 모양이었다. 나는 붉은 머리칼의 루블로프로 폴리모프하여 사이즈에 맞는 간단한 셔츠와 바 지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짙은 어둠의 아래에 숨어 계획을 재정리 하다가 카류리 드가 손을 하나 꼽으며 신신당부를 했다. “은신 마법 알아? 모르니? 내가 어설프지만 쓸만한 마법 하나를 알거든? 그거 가르쳐 줄 테니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다가 내가 신호하면 나와. 알았지?” 카류리드가 원래 당돌한 꼬마였지만, 이런 모습이어서 그런지 더욱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모습이다. 아니, 루블로프라면 가장 큰 형일텐데 왜 어린아이 대하는 느낌이지? 의아한 기분으로 겨울의 성 안쪽으로 숨어 들어갔다. 모습을 잠시 안보이도록 하 는 이 은신 마법은 누군가가 어렴풋 존재하고 있다고 느끼기만 해도 금방 본신 이 드러나게 된다. 지금처럼 아무도 이런 마법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실용적일지 몰라도 널리 보편적으로 퍼졌을 때는 쓰레기가 되어 버릴 마법 이다. “폐하.” 궁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자 책임자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재빨리 튀어나와 깊 이 고개를 숙였다. 카류리드는 손을 들어 간단히 그 인사를 받고 성큼성큼 걸어 어딘가로 향했다. 나 역시 모습이 보이지 않는 상태 그대로 숨을 죽이며 녀석을 따라 걸었다. “형들! 누나들!” 녀석이 문을 벌컥 열자마자 대뜸 소리쳤다. 안쪽으로는 꽤나 화려한 머리색의 사 람들이 각자 소파나 의자 등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유일하게 푸른 머리칼의 소년만이 폴짝 뛰어내려 카류에게로 뛰어왔다. “카류!” “왓! 우리 카이형!!” 카류리드가 다리를 조금 굽혀 그를 와락 안아들었다. 그는 자신의 친형을 마치 동생처럼 꼭 안아 이마에 키스를 몇 번 해준 후, 형제들을 향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자정이야! 그럼 우리 카이형의 생일이 시작되지!” 남은 3명의 남녀들 중 주황색 머리칼의 여자, 아마도 블라디미르일 그녀만이 조 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머지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보아하니 카류리드가 저리 까불 만큼 아주 친해진 상태는 아닌 모양이다. 나는 일단 문 앞에 자리잡고 앉아서 그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기로 했다. 이 방의 중앙에는 작지만 화려한 탁자가 준비된 상태다. 그 위에는 작은 꽃병 하 나를 가운데 두고 각종 술들이 빼곡이 놓여 있다. 카이세리온을 땅에 내려놓은 카류리드는 예정된 대로 냉큼 그 탁자의 앞으로 가 서 꽤 도수가 높은 술병을 하나 집어들었다. 그 자리에서 코르크 마개를 뽑은 다 음에는 망설이지 않고 병째로 벌컥벌컥 다섯 모금 정도 마셨다. 주위에서 카류리 드의 행동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던 형제들이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크아! 아고, 내 목 탄다!” 술병을 내려놓은 카류리드가 그 자리에서 동동 발을 굴렀다. 겨우 진정된 후에는 형제들을 돌아보고 씨익 웃었다. “술 먹자!” “갑자기 왜 술이야?” 블라디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기울였다. 카류리드는 난데없이 그녀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팍 폈다. “기분 내는데 최고잖아! 생일파티 하기 전에 그냥 팍팍 마셔버리자!” “…난 술에 약해서 싫어.” “나도 별로…….” 세렐리아와 키예프가 고개를 돌리며 싫은 티를 역력히 냈다. 그러나 카류리드는 단호히 말했다. “오히려 약한 게 좋아! 완전히 취할 때까지 먹어야 하니까! 카이형의 생일날이 오기 전까지 취해버리자! 진짜 바보가 되어버릴 정도로! 그럼 진심으로 웃으면서 놀 수 있을걸?” “조오~아! 마셔버린다! 난 술에 좀 강하니까 몇 병은 퍼마셔야겠네?” 가장 먼저 블라디미르가 팔을 걷어붙이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붉은 술병을 집 어들고 코르크를 따기 시작했다. 카이세리온은 주저주저하다가 카류리드가 내민 술잔을 들고는 냄새를 콩콩 맡았 다. 제 아무리 동안이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데, 정말 어린아이 같은 행동이 었다. “세라 누나도, 키옌 형도. 응? 부탁이야.” 카류리드가 양손에 술병을 든 채로 다가갔지만 그들은 다른 두 사람처럼 금방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예민한 성격이라던 세렐리아가 대뜸 말했다. “뭐야. 우리들을 전부 취하게 만든 다음에 죽일 셈?” “바보. 카이 형이 듣잖아. 그리고 정말 막말로, 취하게 만들 필요 뭐 있어? 드래 곤이 아니라면 그 어떤 자라 한들 내 손가락질 한번에 죽고 말던데.” 카류리드는 위로라고 한 말인데 세렐리아는 더욱 공포에 물든 얼굴이다.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카류리드가 머리를 긁적이다가 그냥 눈 딱 감고 그들을 향해 술병을 불쑥 내밀었다. “일부러 구해온 달콤한 술이야! 마구 마셔 줘. 제발 부탁이야. 응? 우리 그냥 취 해버리자! 가끔씩은 취하는 것도 좋아.” 결국 그들도 술잔을 들었다. 세렐리아는 두려움을 잊어버리기 위해, 키예프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인지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키옌! 사내놈짜식이 술 마시는 꼴하곤! 음~침한 것! 아하하하!” 가장 먼저 취한 것은 적극적으로 술을 마시던 블라디미르였다. 술잔은 저쪽에 내 팽개친 채로 땅을 팡팡 치며 별것도 아닌 것에 계속 웃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두번째로 취한 것은 세렐리아. 겨우 6잔을 마시고는 어느덧 풀려버린 눈으로 홀 짝 홀짝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카이세리온에게 비틀대며 다가가 그를 꼭 안고 는 또 눈물을 흘렸다. “웅…….” 카이세리온도 카류리드의 권유로 상당한 양을 마시고 어느 정도 정신이 몽롱한 듯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로 몸을 비틀거렸다. 카류리드의 끈질긴 권유로 어느덧 키예프까지 완전히 취해버렸을 때였다. “형들, 누나들!” 카류리드가 앞으로 나서 형제들의 시선을 모았다. 드디어 내가 나설 차례인가 싶 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카류리드가 말했다. “전부 바보 멍청이 똥싸개.” 일어서다 말고 잠시 비틀했다. 내가 식은땀을 닦는 사이 카류리드의 형제들도 하 나씩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뭐라는 거야! 아하하하!” “크으! 조구만 게 누구더러 바버래. 다시 한번 말해바! 아우, 저걸 주겨 살려.” “훌쩍훌쩍.” “우웅…….” 카류리드가 그제서야 나를 향해 씨익 웃음을 보였다. 확실히 그들의 반응을 보니 완전히 취한 것 같기는 하다. “형들, 누나들! 내가 굉장한 선물을 가져왔어! 전부 보면 놀라 자빠질 거야!”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 차례였다. 자리에서 슥 일어난 후에 걸음 소리를 숨기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하지만 취한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발소리에 별 로 관심을 주고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목을 돋워 루블로프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왔는데, 환영해주지 않는 거냐?” “어?”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울기만 하던 세렐리아였다. 그녀는 몸을 크게 비틀 거리면서 내게로 뛰듯이 걸어왔다. 하지만 바로 직전에서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세라.” 내가 먼저 말했다. 그러자 세렐리아의 눈에서 조금씩 흐르던 눈물이 한꺼번에 터 져 나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대로 내 품에 얼굴을 묻어왔다. 언젠가 내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랬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은발을 쓸어내 려 주었다. 아마도 루블로프의 죽음에 가장 쓸쓸했던 것은 이 아가씨인 모양이 다. 전 왕비인 에렌시아의 아이가 루블로프와 세렐리아, 그들이었지. “응?” 내 품에 안겨있던 세렐리아의 몸이 스르륵 무너지는 것을 느끼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그녀는 마치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그것을 보고 카류리드가 말없이 다가와 그녀를 안아 들었다. 품안에 안고나서는 그녀의 이마에 살짝 키스까지 해 주었다. “하… 하하하… 오빠. 하하하… 루브 오빠다.” “가짜지. 누가 모룰까바. 가짜인 거 다 아라. 가짜자나. 헛쇼리 그만해. 이것드리 감히 누굴 속이려 드러.” 블라디미르에 이어 키예프가 완전히 꼬인 발음으로 바닥을 팡팡 쳤다. 나는 피식 웃으며 키예프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다음에는 고개를 기울 이며 물었다. “내가 왜 네 형이 아니라는 거지? 내가 그리도 보기 싫었어?” “구게 아니라 형은… 형은… 그러니까 루브 형은… 으으…….” “중얼중얼 거리지 말고 확실히 봐라. 응? 키옌.” 키예프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나를 주시했다. 하지만 점점 그 움직임은 멈추었 다. 너무 충격적인 일에 술기운이 다 달아나 버린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되지 만… 뭐, 카류리드가 알아서 처리할 것이라 믿는다. 아니면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란 걸 녀석이 모를 리 없을 테니까. “루…루브형.” “아아. 키옌.” 키예프가 입을 조금씩 열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대뜸 몸을 일으켜 팔을 뻗었다. 그가 무엇을 위해 이런 행동을 하는지는 굳이 당해보지 않고도 충 분히 짐작되는 바이다. 쿵-! 내가 몸을 옆으로 슥 피하자 나를 안으로 달려들었던 키예프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쓰러졌다. 곁에서 그 꼴을 쳐다보던 카류리드가 이마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아우우우. 왜 그래. 왜 그러는데.” 키예프가 머리를 움켜쥐고서 질문했다. 힐긋 그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 다. “남자랑 포옹하고 싶진 않아.” “모야? 항상 껴안고 했던 쥬제에! 구렇게 안았으면서! 나만 변태냐? 나만 미친넘 이야? 너무하자나!” 키예프가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며, 하지만 여전히 비틀거리며 분개한다. 그 모습 에 좀 전부터 웃기만 하던 블라디미르가 더욱 배를 잡고 떼굴떼굴 굴렀다. 그녀 는 내 존재를 보고도 그냥 자연스럽게 본래 있었던 것처럼 말을 걸고 웃어넘겼 다. 바랐던 것처럼, 정말 바보가 된 것 같이. 이번에는 멍하니 앉아있기만 하는 카이세리온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바로 앞에 앉자 녀석은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챈 거 같았다. 멍하기만 한 눈동자에서 한방 울 한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얼굴의 변화는 없는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그저 조 금씩 눈물이 흘려 내릴 뿐이다. 세렐리아와 함께 소파에 앉아있던 카류리드가 다가왔다. 그가 카이세리온을 다독 여 자신의 무릎에 눕게 했다. 고개를 기울여 세렐리아 때처럼 살짝 키스를 해주 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누나랑 형들. 너무 귀엽지?” “…글쎄… 귀엽다고 말하기엔 다들 나이가 있지 않나?” 생각 없이 한마디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형제들이야.” 카류리드가 나의 등 뒤에서 말했다. 문득 그 목소리가 잔뜩 뭉쳐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고개를 돌리자 왠지 울 것만 같았던 카류리드는 그냥 미소하고 있었다. 여기저기에 널린 술병의 가운데로 블라디미르와 키예프가 가끔 코고는 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의 카이세리온은 카류리드의 무릎 위에 누워 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세상의 검은 티라고는 모르는 어린아이의 얼굴이다. “유아퇴행인가. 그녀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소년은 가엾은 병에 걸렸군.” “응.” 조용히 말을 던지자 카류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카 이를 내려다보는 그를 보다가 저도 모르게 문득 한마디를 던졌다. “괴롭겠군.” “아냐.” 의외로 카류리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가만히 미소하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주 좋아. 적당히 잊고 적당히 얼버무린 지금이 제일 좋아. 세상은 정확 히 재어가며 살기엔 너무 제약이 많은 곳이거든. 여기에 치이고 저기에 치이고 하다보면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 영영 일어서지 못할지도 몰라.” 카류리드가 몸을 살짝 움츠려 정말 아픈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딱히 긍 정도 부정도 않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카류리드가 고개를 들어 멍한 눈길로 천장 을 바라보았다. “오래오래 살아야지. 아이들도 키우고 손자도 보고하면서 늙어죽을 때까지 살아 야지. 에뮤도 미치지 말고 빨리 어른 용 돼서 오래오래 살어.” “노인네 같은 소릴.” 고개를 픽 돌리며 시큰둥이 말하자 놈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우리 에뮤는 너무 어리다니까.” “이 새파란 꼬마 놈이! 내 이름 앞에 ‘우리’ 라는 말을 붙이지 마라!” “꺄하하하. 난 몰라~ 우리 에뮤가 삐쳤어요!” 카류리드가 자지러지며 옆으로 미끈 넘어지기에 이 기회에 놈을 한번쯤 흠씬 두 들겨 패주고자 몸을 일으켰다. 조금은 생소한 아르윈의 왕궁에 조용한 바람이 찾아왔다. 미풍에 녹은 웃음소리 가 오랫동안 겨울의 궁을 적셨다. 이르나크의 장 Part 70 먼 훗날의 이야기- 그들의 하루 (1) 왕국력 521년 아르윈 왕국은 300년 만에 나타난 9서클 마법사 카류리드를 왕으 로 옹립한다. 그는 보통의 9서클 마법사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세계에 전파했고, 그 영향 아래 세계는 바야흐로 혁명의 시기를 맞이한다. 어렵 던 마법수식은 한결 쉬운 방법으로 재해석되었고, 선택된 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 을 것이라 믿었던 마나는 더 이상 제한된 힘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의 지식은 비단 마법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인쇄술의 제시하여 새로운 교육법 에 활용할 책을 대량으로 찍어낼 수 있도록 종용하는가 하면, 내전으로 황폐해진 국토에 가장 시급해진 식량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농작법까지 내놓았다. 카류리드는 자신의 획기적인 지식들을 이용하여 혁신적인 국정 개혁을 지속하고 있다. 그가 즉위한지는 아직 10년여의 세월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계 획안은 아직 큰 결과를 보이지 못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를 용의 가호를 받는 마법 왕―이른바 마룡왕이라 찬양하며 이 아르윈을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마룡왕이란 놈이 바로 저 놈이란 말이지.” 전체적으로 백색 톤으로 꾸며진 화려한 응접실의 한쪽에서 턱을 꼬고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나의 시선이 닿는 맞은편 자리에는 양 옆으로 10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 둘과 여자아이 한 명에 둘러싸여 헤벌쭉 웃음을 흘리는 카류리드가 있었다. 그 아이들은 모조리 흑청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는데, 의심할 여지없 는 녀석의 아들딸이었다. 조금 떨어진 자리에 히노양과 옐루니얀, 연?아남이 앉아 있었지만, 누가 봐도 아내들은 뒷전이다. 카류가 갑자기 오른 편에 얌전히 앉아있는 루크레이브를 번쩍 안아들고 나의 앞 으로 걸어왔다. 루크레이브는 카류에게 안기는 것이 어색한 듯 약간 굳은 표정이 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류 놈이 아이를 땅에 내려놓고 머리를 슥슥 쓰 다듬으며 완전히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에르가형! 여기 좀 봐!! 우리 루브가 얼마나 똑똑한지 알어? 이제 막 12살이 됐 는데 벌써부터 4서클 마법 수식을 마스터했대! 아직 어려서 마나 유동 능력이 좀 미숙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디야! 아주 천재야, 천재!” “소문에 폐하께서는 막 10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배우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4서클 수식을 풀어 내셨다던데 그에 비하면 루크레이브는 미천한 수 준이 아니겠습니까.” 옐루니얀이 겸손하게 미소했다. 루크레이브는 왕비인 옐루니얀이 낳은 제1왕자이 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류는 고개를 팩팩 저으며 소리쳤다. “에이! 그건 제가 좀 비정상적인거고, 이 정도는 되어야 정상적인 인간으로서의 천재성이라 볼 수 있지요! 루브야, 아빠~ 해봐, 아빠~.” 카류리드가 그 말대로 참으로 비정상적인 대답을 해대며 루크레이브에게로 초롱 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루크레이브는 무엇을 고민하는지 금방 입을 열지 않았다. 잠시 침묵했던 아이가 단호히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끄~아! 아빠라니깐! 벌써부터 무슨 아버지야, 아버지가~” 뭐가 벌써냐. 루크레이브도 12살인데 아빠라고 부르려니 얼마나 닭살스럽겠어. 게다가 국왕인 주제에 아빠라는 말을 강요하는 네가 이상한 거다. 하지만 매번 땅바닥을 떼굴떼굴 구를 듯 자지러지는 카류리드를 앞두고 여전히 요지부동으로 ‘아버지’ 를 고수하는 루크레이브도 보통의 수준은 넘는다. 그때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르츠민이 소파에서 폴짝 뛰어 내려왔다. “저렇게까지 애원하시는데 좀 해드리지! 이게 뭐 어렵다고 그러는지 몰라. 아 빠~.” “그래그래, 아르. 흑흑……” 카류가 애교 있게 말하는 아르츠민을 보고서는 당장 껴안아 들고 징징거린다. 같 은 12살임에도 아르츠민은 루크레이브에 비해 훨씬 정이가고 귀엽다. 단지 아르 츠민이 히노양의 아들이고, 루크레이브가 옐루니얀의 아들이기에 그런 느낌이 드 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도 할 줄 아는걸. 아빠!” “아이고~ 우리 디트까지!” 아르츠민이 카류에게 안겨있는 것에 새초롬해진 디트민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 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딸내미가 질투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카류리드가 아 니다. 오른손으로 아르츠민을 안은 녀석이 나머지 손을 뻗어 디트민트까지 꼭 껴 안고는 번갈아가며 얼굴을 부비며 자지러진다. 카류가 두 아이들을 싸고도는 사이, 루크레이브는 몸을 돌려 옐루니얀의 옆자리 에 가서 털썩 앉았다. 옐루니얀은 좀 곤란한 표정이다. 루크레이브가 좀 더 귀여 운 행동으로 카류리드의 관심을 끌 필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옐루니얀과의 혼인은 카르틴의 정복 야욕의 밑거름과 같은 것이었다. 하 지만 카류가 9서클의 마법사가 되고 나서는 상황이 역전, 카르틴은 오히려 침략 을 받지 않기 위해 옐루니얀과의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다. 카류는 전 세계를 정 복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자신의 쪽에서 먼저 평화를 원했고, 카르틴의 제안을 받아들여 옐루니얀을 왕비로 삼았다. 히노양을 지지하는 나였지만 카류의 마음을 아는 이상 이것만은 반대의 의견을 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상호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혼인을 완전히 끝냈다고 해서 이야기가 그 렇게 간단하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흘러도 카르틴이 원수였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옐루니얀의 출신이 카르틴인 이상, 왕비와 제1왕자라는 지위로도 그들의 입지는 그리 강력하지 못하다. 도리어 제1후궁인 히노양과, 동 갑내기이지만 약간 늦게 태어난 2왕자 아르츠민 쪽이 더욱 귀족들의 관심을 끌 고 있는 것이다. 수백년을 지속되어 온 국가 간의 감정이 원인이다. 루크레이브는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카류리드만은 반드시 자신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하지만 루크 레이브는 카류리드에게 살갑게 대하려 하지 않는다. 천재라는 말을 부정하기 힘 들 정도로 생각이 깊어 보이는데도 도리어 카류리드만은 어려워하곤 한다. 생리적으로 서로 파장이 맞지 않는 것일까나-.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어딘지 기품이 철철 흐르는 루크레이브와, 일부러 공을 들 여 근엄한 표정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방정맞은데다가 칠칠맞게만 보이는 카류리 드를 비교해 보다가 상당히 그럴 듯 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하지만 실없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보다는 루크레이브가 그 비상한 머리로 어렴풋 무언가를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딱히 귀여운 표정을 지어 애교를 부리지 않아도 카류리드가 자신과 옐루니얀을 저버릴 리는 없다는 것을. “왜 날 보며 그렇게 피식 웃어? 내가 그렇게 좋아?” “윽, 네놈이 그 딴 소릴 하니까 루크레이브가 널 싫어하는 거다! 알겠냐?” 문득 카류리드가 내 시선을 눈치 채고 쓸데없는 소릴 하기에 버럭 소리쳐줬다. 그런데 카류리드 놈 골려주겠다고 그냥 내뱉은 말에 갑자기 옐루니얀이 대답을 해왔다. “에스문드 공작님, 루브는 조금 어색할 뿐, 폐하를 싫어하지는 않는답니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 루브가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되니 부디…….” 루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옐루니얀은 말끝을 살짝 흐려 내게 자중해 달라는 뜻 을 비쳤다. 하긴, 안 그래도 간당간당한 입장에 아르윈의 하늘같으신 마룡왕을 싫어한다는 말이 실언으로라도 퍼져나가면 굉장히 곤란하겠지. “에르가형도 정말… 생각 좀 하고 말하면 안돼? 이제 결혼도 했는데, 히노 선배 를 잊지 못해 옐을 괴롭히는 건 그만둬. 그렇지 않아도 말 꺼내놓고 맨날 후회만 했으면서.” “누, 누가!?” 깜짝 놀라서 히노양과 옐루니얀 쪽을 쳐다보며 더듬거렸다. 솔직히 히노양의 자리를 빼앗은 것이나 다름없는 옐루니얀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초반까지 그녀를 괴롭히는 놈들과 어중간하게나마 한패거리였다는 사실을 부인 하지는 못하겠다. 지금에야 잊고 싶은 과거이거늘 저 썩을 놈이!! “이런 농담은 그만두세요. 혹이나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이야기가 자신에게 좋지 못하게 흘러가자 히노 양이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카류리드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다. “에르가형이야 이미 격렬한 연애 끝에 결혼까지 해버렸고, 뭐 어떻습니까. 게다 가 이렇게 인기가 대단한 여인이 저만을 사랑해주니 이 보다 더 흐뭇한 일도 없 죠!” “아니, 카류리드 너 끝까지! 글쎄 누가 누구를 좋아했다는 거야!?! 왜 이렇게 헛 소리가 심해!!” “에르가형이 흥분했네요. 여러분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으세 요?” 아, 저 능글맞은 카류리드의 면상! 최소한 옐루니얀과 연?아남만 없었어도 단번에 날려버리는 건데!! 그때 연?아남이 입술에 손을 대고 괜히 과장하여 흐느끼는 동작을 보이기 시작했 다. “흑. 전 달리 인기도 없고 첫 번째로 낳은 아이도 딸이어서 사랑이 식으시겠군 요. 이를 어쩌면 좋을까.” “연! 딸이라서 싫다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은 버리세요! 무엇보다 디트가 보는데 서 그런 소릴 하면 쓰나요! 그리고 연에게도 연심을 품는 남자가 아주 없는 것 같지 않던데요?” “어머, 정말인가요?” 연?아남은 조금 놀란 얼굴이다. 그 사실에는 나도 흥미가 동해 아닌 척 하며 귀 를 쫑긋 세웠다. “그럼요. 있고말고요. 옐도 카르틴에 열렬한 팬들을 한 부대 거느리고 있다고 하 니! 훗훗, 이리도 인기 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사랑 받고 있는 전 얼마나 행복한 남자일까요.” 연을 좋아한다는 그 남자의 이름을 분명히 거론하지는 않았다. 카류는 그대로 아 이들의 이마에 키스를 쪽쪽 하며 딴청을 부렸다. 가만히 돌아보니 카류 녀석, 딱히 누구의 편을 들어주는 듯한 분위기를 없애고 그녀들을 똑같이 대우해주기 위해 그런 말을 꺼낸 것 같다는 느낌인데? “루브~ 엄마한테만 있지 말고 아빠한테도 오렴, 응?” 카류가 잠시 그녀들에게 관심을 주나 싶었더니 또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 린다. 녀석이 손을 내밀며 통 사정을 하자 루크레이브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카류에게로 다가갔다.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역시 귀염성 없는 꼬맹이다. 그럼에도 카류는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서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온통 흐트러뜨렸다. “에구에구, 아빠라고 안 불러도 좋으니까 미워하지만 말아주렴, 알았지? 아빠가 우리 루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모르니? 가르쳐 줄까? 에구, 우리 루브! 너 왜 이렇게 귀엽니. 뭐 믿고 이렇게 귀여워!!” “사실 폐하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저희들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인 것 같은 데요? 전 요즘 제 아이인 아르에게 질투를 느낄 지경이예요.” 히노양이 농담하듯 말한다. 그러나 반은 진심일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 생각 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카류리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앗, 역시 히노 양. 평생에 홀로 가슴 속에 간직하려 했던 비밀을 들켜버렸네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니까 너무 질투하진 말아줘요.” “잘도 자랑처럼 말을 늘어놓는군. 이 어린애 취향 변태 녀석아!” 카류리드의 능글맞은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옐루니얀, 연?아남의 시선 전부 제쳐놓고 핀잔을 던졌다. 그랬더니 카류 놈이 도리어 혀를 찼다. “이거 왜 이러실까! 나 같은 취향이 아니더라도,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게 자기 애라고! 에르가 형도 레아딘이 있으면서 내 마음을 모른다는 거야?” “전혀 모른다! 난 레아 녀석 볼 때마다 뒤집어 패주고픈 욕망밖에 안 들어!” “하하, 레아딘이 장난이 좀 심하지. 하지만 그거 100% 부모 유전이잖아. 레아딘 에게 전부 뒤집어씌우면 안 되지.” “그래도 난 최소한 그거보다는 나았다고 본다.” “와하하하하! 히, 히노 선배 방금 그 말 들었어요? 꺄하하하하하!! 이거 정말 하 이 개그네! 아하하하하!” 카류가 히노양까지 끌어들이며 죽어라 폭소를 터뜨렸다. 아주 찔리는 곳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처음에는 좀 참아주려 했는데 카류 놈이 풀쩍 주저앉아 땅바닥까 지 팡팡 치며 끝까지 웃어대기에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좀 닥치지 못해! 이게 정말 죽고 싶어서!!” “와앗, 못된 형이 아빠를 때리러 오네요. 루브, 아르, 디트! 나 좀 도와줘~!”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카류리드가 아이들의 뒤로 냉큼 도망쳤다. 아르츠 민, 디트민트, 그리고 루크레이브가 차례로 하나씩 앞으로 나서며 나를 향해 소 리치기 시작했다. “폭력 반대! 폭력 반대!” “아빠 때리지 말아요!” “어릴 적 친구라고는 하나 너무 무례하신 것이 아닌지요.” 조금 떨어져 이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히노 양 등이 쿡쿡 웃음을 터뜨린다. 괜히 나만 저 또라이 같은 카류리드와 한 떠리로 취급된 기분. 아, 힘 빠져… 그건 그 렇고 루크레이브는 천재라는 말보다 애늙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겠구만. 아이들을 지긋한 시선으로 내려보다가 팔을 뻗어 애들 너머에 고개를 숙이고 있 는 카류리드의 머리를 꾹꾹 눌러주었다. 머리를 살포시 들어올린 녀석이 역겹게 도 눈을 깜빡이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죽고 싶지?” “아니.” “죽고 싶잖아. 응? 그냥 속 시원히 말해봐라. 내 원 없이 널 팰 수 있도록 죽고 싶다고 말해.” “진짜 죽기 싫은데. 난 지금이 최고로 행복하단 말이야. 안 죽을래. 안 죽을래.”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놈의 모습에 속이 느끼해져 옴을 느꼈다. 기어코 그 놈의 머리를 한방 때려주고야 만 내가 뒤로 돌아섰다. 내가 소파를 그대로 지나쳐 걸 어가자 등 뒤에서 카류가 소리쳤다. “벌써 가? 오랜만에 개인적인 시간을 가지는데 오래오래 있지 않고서.” “됐네. 레아 옷 맞춰야 해.” “형이 직접 레아딘의 옷을 골라주려고? 우와~ 에르가 형이 그런데 신경을 쓸 줄 몰랐는데” “그럴 리가 있겠냐! 레아가 매일같이 말썽을 부리며 온 집구석을 뒹굴고 다녀서 대부분의 옷이 뜯어지고 헤진 것이 아니겠냐. 그래서 이 기회에 대량으로 새 옷 을 장만하려 했지. 하지만 십중팔구 레아 녀석. 재단사 앞에 앉아있긴 커녕 어딘 가로 도망쳐서 같잖은 일을 벌이고 있을 거다. 내가 머리끄덩이를 쥐고 감시를 해야 겨우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지, 아니면… 하아~!” 말을 하다보니 한숨을 절로 터져 나왔다. 꾀가 말짱한 레아 녀석의 얼굴이 마치 약이라도 올리듯 시야에서 어른어른한다. “에구, 힘들겠네. 성질난다고 레아딘 너무 패진 말고 적당히 해. 자아~ 루브, 아 르, 디트. 저기 공작 형아 한테 빠이빠이 해야지.” 카류가 키득거리다가 아이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 위로 들어주며 인사를 시켰 다. 빠직 열 받은 내가 이를 갈며 말했다. “헛소리 말고 너나 잘해. 네 아이들 이름만 해도 말이지! 아르츠민은 그렇다 쳐! 루크레이브는 다들 루크라 부르고 말 것을 저 혼자서 루브라고 부르고 말이야, 디트민트도 민트라 부르면 될 일을 여자애 이름이 디트가 뭐냐?” “뭐 어때서! 이렇게 부르면 꼭 그 사람이 다시 태어난 것 같아서 참 좋잖아. 다 음 차례는 세이스미르야. 세미르. 게다가 에르가 형도 레아딘을 레아라고 부르면 서 뭘 그래? 꼭 줄이자면 아딘으로 부르는 것도 가능한데 일부러 여자애 같은 애칭을 뜯어 붙이고 있잖아. 게다가 레아딘은 우리 아이들과는 달리 레아라고 부 를 때마다 길길이 날뛰는데 말이야.” “싫어하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지. 내가 열쳤냐? 그 놈 좋으라고 제대로 된 이름 을 불러주게?” “아하! 복수라 이거지? 웬 어른이 아이를 상대로 저렇게 유~치하지?” “…….” 조용히 주먹을 들었다가 한쪽에서 가만히 이쪽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들과 여자 들의 얼굴을 봐서 참기로 했다. 히노 양과 옐루니얀, 연?아남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완전히 돌아섰다. 카류 놈과 이야기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여서인지 오늘은 아무래도 상당히 일진이 안 좋을 것 같은 예감이다. ================================ 이건 전에 썼던 것을 약간 수정 ^_^; 이르나크의 장 Part 70 먼 훗날의 이야기- 그들의 하루 (2)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돌아오니 왠지 온 집안이 시끌벅적하다. 이미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일단은 마중을 위해 나열해 선 자들 중 가장 가까이 있는 하녀에 게 물었다. “또 무슨 일이야?” “…레, 레아딘님께서 마님의 비단 천으로 깃발을 만드셔서…….” 하녀가 슬며시 저택의 한쪽을 가리켰다. 레아의 방이 있을 창문틀에서 웬 붉은 깃발하나가 펄럭이고 있었다. 왠지 구하기 힘든 이국의 값비싼 비단일 듯한 직감 이 온다. 비단을 보는 눈도 없는 주제에 반드시 사용해서는 안 될 것만을 골라내 어 장난질을 치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녀석인 것이다. “레아 이놈!” 주먹을 콱 쥐고 한 걸음에 달려가 내 손으로 직접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정면으로 보이는 중앙 계단에서 조그마한 것 하나가 무언가에 쫓기 듯 다급히 아래로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레아딘! 9살 치곤 자그마한 몸집에 선이 가늘어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한 꼬마 녀 석. 우리 집안의 그 누구도 저런 야리야리한 의모를 가진 놈은 존재치 않건만, 천지를 모르고 날뛰는 싸가지 없는 성격과 짙은 녹색의 머리카락은 그놈이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든다. “게 서라!” 바로 레아의 뒤로 어떤 여인이 진검을 든 채 마찬가지로 난간을 미끄럼틀 삼아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보랏빛 드레스자락이 뒤집어지는 것도 무시하며 잘도 균형을 잡고 미끄러져 와 1층 홀로 훌쩍 뛰어내렸다. 그러나 레아를 잡기엔 약간 늦은 상태다.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는 레아를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당신! 그 놈 잡아욧!!” “말 하지 않아도 그리 할 셈이었다, 리플리케.” 리플리케에게 쫓기던 레아가 정면에 선 나를 보고는 바로 방향을 꺾어 왼편 부 엌 쪽으로 죽어라 뛰고 있었다. 자세를 낮춰 레아가 향하는 진로 바로 앞으로 가 로질렀다. 그리고 녀석이 가까워졌을 때 바로 허리로 손을 가져가 단번에 검을 뽑아 위로 그어 올렸다. 스컹-! “우아아악!” 바로 코앞에서 진검의 공격을 본 레아가 벌렁 뒤로 나자빠졌다. 미처 피하지 못 한 녹색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하늘하늘 공중을 날았다. “하아하아… 당신 마침 잘 오셨네요!” 리플리케가 이쪽으로 달려오며 생긋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아 곧 살 벌한 시선으로 바뀌었다. 그 시선의 주목 대상은 바로 레아. 복도 바닥에 넘어진 채 있는 레아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표정을 보니 여전히 오 기충전한 상태다. “그래서, 또 무슨 짓을 저질렀냐?” “뭐예요! 뭔 일인지도 모르면서 하나뿐인 아들 얼굴에 검을 휘둘러요!? 우리 친 아버지 맞긴 한거… 끄악!!” 내가 뭐라 말할 것도 없이 리플리케가 시끄럽게 지껄이는 레아의 얼굴 바로 옆 에 검을 팍 꽂았다. 귓불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은 레아가 그제야 새파래진 얼굴 로 입을 다물었다. 리플리케는 아주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말없이 그들의 모 습을 지켜보던 내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리플리케. 그래도 드레스 입은 채 검을 휘두르진 말아 주겠나?” “아아? 지금 날 탓하는 건가요?” “하인들이 다 보잖아! 검을 배우는 것까진 좋지만 집안에서까지 휘두르진 말라 고!” 주위에 웅성거리고 선 하인들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그랬더니 리플리케가 도리어 더욱 크게 화를 낸다. “알지도 못하면서! 제가 오죽했으면 이런 몰골로 온 집안을 달렸겠어요! 이 녀석 이 에베리아 왕국의 왕비님께서 손수 선물로 보내신 비단으로 이상한 깃발을 만 들었다고요! 다음에 사신이 말을 전하면 뭐라 답을 해야 할지!” “일일이 비단 어디다 썼는지 검사 받을 것도 아니고, 물어오면 거짓으로 꾸며대 면 되잖아! 어쨌거나 당신도 좀 자중해!” “아니, 또 그것뿐인 줄 아세요? 서재에 따로 보관해놓은 당신 보검을 몰래 가져 가서는 철 기둥에 검술 연습을 해서 이를 다 빼놨다고요! 그래도 참으라고 할 건 가요?!” “뭐야!?” 목구멍으로 욕설이 와락 차오르는 것을 간신이 참았다. 며칠 전부터 녀석이 검을 빌려달라며 칭얼대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일부러 깊은 곳에 고이 숨겨두었 었는데, 그것을 또 찾아내 장난질을 쳤다는 건가? 우리들이 이야기를 하는 사이 아래에 누워있던 레아가 어느덧 제정신을 차리고 슬그머니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내가 아니다. 당장 레아의 옷자락을 발로 밟아 고정시켜놓고 뒤쪽의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몽둥이로 쓸만한 걸 가져와!” “여기 있습니다.” 말을 꺼내자마자 들려오는 대답에 움찔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지긋한 눈매의 집 사가 고개를 숙인 채 목검을 내밀고 있었다. 내 행동 패턴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듯 초탈한 움직임이었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일단 목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레아를 향해 낮게 목소 리를 깔아 말했다. “레아, 내가 나가기 전에 경고했었지. 오늘 하루 가만히 집구석에 처박혀 새 옷 을 맞춰놓지 않으면 아주 사생결단을 내겠다고!!” “계집애처럼 옷이나 고르고 있으라고요? 웃기지 마요! 모름지기 남자라면 옷 따 위엔 관심 끄고 조금이라도 더 실력을 키우기 위해 검을 휘둘러야지! 왜 자꾸 아 들을 계집애로 만들지 못해 안달입니까!! 또 레아라고 부르고 말이야!!” “하! 쥐방울만한 놈이 입 하나는 잘도 놀리는군! 계집애 같은 놈을 계집애라 부 르겠다는데 무어가 불만이냐!?” “뭐야! 아버지가 날 이렇게 낳아놓고!”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레아 녀석 도리어 자신이 더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 지만 내가 옷깃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바둥거리는 움직임 이상은 불가능했다. 레아는 몹시 분한 얼굴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녀석이 몸을 왼쪽으로 돌리며 빠르게 오른쪽 소매를 벗더니 그대로 한바퀴 돌며 나머지 왼쪽 소매까지 벗어냈 다. 구렁이 허물 벗듯 웃옷을 벗어낸 꼬맹이 놈이 옆으로 두어 바퀴 더 구른 다 음 벌떡 일어나 냉큼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도망가게 할 것 같으냐!!” “으악!” 레아 놈이 아무리 재빨라도 나를 넘을 순 없다. 다섯 발자국도 가지 못해 내가 휘두른 목검에 어깨를 맞은 레아가 몸을 크게 움츠렸다.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도 일지 않는다. 목검을 높게 들어 녀석의 엉덩이를 향해 강하게 휘둘렀다. “끄악! 사람 죽는다!” “시끄러워! 진짜 죽어가는 놈은 그딴 소리는 안 해!” 엉덩이를 맞은 녀석이 땅바닥에 철푸덕 넘어져 꽥꽥 소리를 질렀다. 사정을 봐주 고 있다고는 해도 목검으로 죽도록 두들겨 맞는 중인데 이놈은 울기는커녕 아직 까지도 새파랗게 기가 살아 시끄럽게 입을 나불댄다. 레아는 올해로 겨우 9살, 게다가 저렇게 계집애 같은 얼굴을 한 놈인데도 어디가 아프다거나 혼이 났다고 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아 아, 정말이지 어찌해도 부정할 수가 없는 내 아들인 거다!! “아악!! 아악! 다른 애들은 매질은커녕 공부시간에 대신 맞아주는 시동까지 들인 다던데!! 으악! 제기랄! 그만 좀 패요! 진짜 우리 아버지 맞아?” “내가 바라는 바다! 주워온 놈이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리고 이놈이 어디서 욕 설질이야?! 누가 가서 로프를 가져와라! 이 놈을 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겠다! 오늘 날 잡아서 아주 혼 구멍을 내주겠어!” “빌어먹을! 아주 제 아들을 죽이려고!!” “이놈이 또 욕이야!!” 다시 목검을 들어 땅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레아를 두세 방 더 패주었을 즈음이 었다. 갑자기 주변이 고요해짐과 동시에 어떤 인기척이 들려 잠시 처절한 응징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중앙 계단의 중간쯤에서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어떻게 이 집안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느냐? 이 아비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으면 조용히 쉴 수 있는 자리나마 만들어야지, 허구헌날 이게 무슨 짓이 야!” “제, 제가 오죽하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레아 놈이 또 말썽을 피워서 그러는 거 죠!!” “그래요, 아버님! 레아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면 그런 소리 못하실 거예 요!” 내가 항변하는 것에 리플리케도 한발 나서 거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인 상을 지우지 않고 소리쳤다. “시끄럽다! 너희 둘 다 똑같아! 공작부인이 드레스를 입은 채 온 집안을 뛰어다 니며 칼부림을 하질 않나, 공작이란 놈은 돌아오자마자 현관 문 앞에서 제 아들 을 몽둥이로 두들겨 패? 너희들이 그러고 다니니 레아딘이 보고 배우는 것 아니 냐?” 그렇지 않아도 레아 덕택에 열 받아 있던 차인데 아버지는 제대로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고 우리들을 향해 언성만 높였다. 약간 발끈해서 삐딱한 자세로 말대답 을 했다. “배우다니요? 카류리드가 그리 설쳐도 그 아들인 루크레이브는 잘도 고상하게 컸단 말입니다. 이건 순전히 레아 놈 천성이 막돼먹어 그런 겁니다!” “에르가! 좀 조심하지 못하겠느냐? 폐하와 태자전하의 존함을 함부로 입에 담다 니!”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뭐 어떻습니까? 공석만 아니면 됐지. 그럴 것 같으면 아버지도 에르가가 아니라 에스문드 공작님이라고 부르시죠.” “이 놈, 이 놈이 제 아버지가 설교하는데 말대답에 건들거리는 폼하고는! 오늘 나랑 사생결단 내볼 테냐?” 아버지가 거친 걸음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레아를 혼내려던 것이 어찌하다가 아버지와 나의 일전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거 레아만 좋은 일 하는 거 아닌 가 하는 의구심이 새록 솟아오를 무렵 리플리케가 재빠르게 치기를 발휘하여 냉 큼 레아를 가리켰다. “아버님! 게다가 레아가 아버님께서 아끼시는 체핑-일종의 술-을 가져가서 전부 사냥개한테 먹였답니다. 제가 먹으려고 가져갔다가 쓴 맛에 질려 개한테 줘버렸 다더군요! 먹기 싫음 도로 가져다 둘 것이지 개한테는 왜 먹여!?” “뭐, 뭐라고!? 레, 레아, 진실이냐?” 아버지가 매우 놀란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 체핑은 리샤스 왕국에서 가져온 고 급 술이라 아버지도 하루 한잔만 조심스럽게 마시던 것이었다. 리플리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버지는 다시 한번 체핑을 즐기기 위해 리샤스로 보낸 무역상인이 돌아오기까지의 긴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좀!! 레아라고 부르지 좀 마요! 할아버지가 왜 그렇게 술을 좋아하는지 실험해 보려고 그랬던 것뿐이라고요!” 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은 레아가 아버지를 향해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다. 살풋 일그러진 아버지의 눈매를 보아할 때, 이제는 그분도 레아 의 사정을 봐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주, 주인님. 로프를 가져왔습니다.” 때를 맞추어 하인이 다급히 밧줄을 들고 뛰어왔다. 아버지가 그 하인을 향해 손 을 불숙 내밀었다. “이리 다오. 내가 직접 묶으마.” 아버지의 살벌하게 가라앉은 얼굴에 레아도 드디어 위기감을 느낀 듯 했다. 그러 나 녀석이 도주를 시도하기 직전 손을 뻗어 목덜미를 잡아챘다. “켁! 이거 놔요!” “아직도 기가 살았군. 거꾸로 매달리고도 큰소리가 나오나 보자!” “으윽, 제길! 이거 놔, 놔앗!!” 레아가 온 힘을 다해 발광을 한다. 이 녀석, 보기엔 계집애 같아도 제 엄마를 닮 아 엄청난 괴력을 자랑하기에 나도 나머지 한 손으로 몸통을 붙들어서야 완전히 고정시킬 수 있었다. “좋아! 에르가, 그대로 잡고 있어라!” 아버지가 재빠르게 다가와서 레아의 발목을 붙든다. 로프를 감는 아버지의 손놀 림이 유독 능숙한 것은, 인정하긴 싫지만, 과거의 나를 키우면서 얻은 노하우 때 문일 것이다. “주인님, 저녁식사가 마련되었습니다만.” 한참 꺅꺅대는 레아를 묶어놓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집사가 불쑥 튀어나왔다. 나와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 이야기는 조금 있다가 하면 안 되는가?” “기다렸다가 말씀을 올리면 오늘 저녁 식사도 그냥 넘겨버리게 될 것 같아서 실 례를 무릅쓰고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 무례하게 끼어든 벌은 달게 받겠으니 일단 은 식사부터 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레아를 쫓아다니다가 저녁나절을 꼴딱 넘긴 과거를 떠올랐다. 확실히 집사의 말 에도 일리는 있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대강 발목까지 묶여있던 레아가 상체를 빨딱 일으켜 당돌하게 집사에게 물었다. “오늘 저녁은 뭐지? 설마 양고기는 아니겠지? 내가 지겹다고 그렇게 말해뒀으 니… 윽!!” 레아의 등을 발로 한번 차서 넘어뜨려놓고 하인들에게 명령했다. “이놈을 끌고 가서 키 낮은 나무에 거꾸로 묶어 놔.” “아으… 벌을 줘도 밥부터 먹이고 나서 해요! 아, 제기랄! 맨날 이러니까 내가 키 가 안 크지!!” “닥쳐! 먹어서 클 키였으면 예전에 네 머리가 이 지붕을 뚫었을 거다! 나보다도 더 퍼먹는 주제에 말이 많아! 도대체 먹은 것들이 다 어디로 가는 거야?” 레아를 향해 소리질러주고 있는데 리플리케가 내 팔을 잡으며 뜯어말렸다.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키 크는데 사용될 영양분이나 있겠어요? 당신, 그만 아버 님과 어머님을 모시고 가요. 레아를 상대해주면 끝도 없으니까.” “레아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끝까지 저러네!!!” 레아가 땅바닥을 구르면서도 악다구니를 쓴다. 한쪽 눈썹을 꿈틀한 리플리케가 내 팔을 놓고 목에 핏줄을 올렸다. “보자보자 하니 이 녀석 반말까지 서슴치 않네! 네가 똑바로 행동하면 이렇게 부 르지도 않아!” “리플리케. 그만 가자, 가. 저놈을 상대하면 끝도 없다고 당신이 말했잖아.” 리플리케를 끌어당겨 안쪽으로 향했다. 레아의 욕설과 괴성의 난무를 뒤로 하며 걷자니 어째 저녁식사가 쉽게 목구멍으로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몇 년이 지나야 이 저택에서 조용한 식사를 가질 수 있을까. 마찬가지 생각인지 아버지와 어머니도 함께 한숨을 쉰다. =========================== 벌받는 것이다, 에르가. 이르나크의 장 Part 70 먼 훗날의 이야기- 그들의 하루 (3) 저녁식사의 메인메뉴는 그릴에 구운 양고기다. 최근에 에르가가 자신의 요리사를 통해 소개해준 요리인데, 기름을 발라내 부드러운 육질이 입에 딱 붙어 꽤 만족 스러웠다. 아무래도 요리사의 실력만은 우리 트로이가보다 에스문드 가가 확실히 나은 것 같다. “맛이 어떻소?” “굉장히 부드럽네요. 양고기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고.” 나즈에라가 부드럽게 미소했다. 칠흑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그녀는 올해로 13 년째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내 아내이다. 카류가 즉위하여 옐루니얀과 히노, 연?아남을 비로 맞아들일 때쯤 나 역시 그녀 와 결혼의 언약을 했다. 트로이가는 나를 제한 모든 이들이 국왕파였던 전적으로 처형당하여 그 무엇보다 가문의 다른 일원을 만드는 일이 시급했다. 자칫 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트로이 공작가는 후르부크 가처럼 멸문하고 만다. 당연히 그러한 위태로운 상태를 계속 유지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 때마침 들어온 스나일 후작가의 청혼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마 룡왕의 가까운 친우 중 하나로 급부상한 제르카인의 가문이다. 양가간의 단합은 여러모로 상당한 이득을 가져다줄 것이 틀림없었다. 시선을 나즈에라에게서 돌려 맞은편에 앉은 아이를 바라보았다. “티스, 넌 어떠니.” “예. 저도 아주 마음에 듭니다.” 브리티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이 몇 가닥 더 이마위로 흘러 내린다. 그의 머리색 색을 보다시피 이 아이는 나즈에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 들이다. 올해로 11살이 되는 브리티스는 매사가 성실하며 조용한 성격이다. 특기 할 것이라면 나를 대할 때면 유독 조심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스테이크를 조금 더 잘라먹다가 브리티스에게 다시 말을 걸 었다. “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2서클의 마법까지 거의 다 익힌 상태라면서…….” “에? 예, 예. 최선을 다했지만 이 이상은… 아니, 죄송합니다. 좀 더 노력하겠습 니다.” 말을 미처 끝내지도 못했는데 브리티스가 큰 잘못이라도 들킨 양 깜짝 놀라 고 개를 들었다. 하지만 변명을 하려는 듯 시작했던 말은 금방 멈추고, 고개를 깊이 숙여 사죄했다. 그의 모습을 보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갑자기 사과부터 하는 구나? 난 너의 빠른 진보에 칭찬을 해주려 했던 것을.” “루크레이브 전하께서는 이미 4서클까지 완전히 익히셨고, 저보다 2살 어린 레 아딘만 해도 얼마안가 1서클을 완전히 익힐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에 비하 면 저는… 아버지와 트로이 공작가의 명예에 누를 끼쳐드리는 것이 죄송스럽기 만 합니다.” 브리티스는 보일듯 말듯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를 하늘과 다름없는 존재와 같이 느끼는 아는 아이의 모습에서 과거의 내 모습이 비추어 보였다. 하지만 브리티스 는 내 앞에서 기가 죽어 말을 더듬거나 제 의사 하나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얼 간이는 아니다. 달리 말해 나와는 달리 훨씬 더 제대로 된 인간이 될 가능성을 갖춘 건전한 녀석이라는 거다. “티스. 조금 더 자신을 가지렴. 너도 충분히 잘해나가고 있단다. 그 정도도 다른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인 걸?” “아니오, 저는 마법뿐만이 아니라 검술까지 두 사람에게 이겨내지를 못하고 있습 니다. 최근에는 레아딘과의 대련에서 몇 번인가 패배한 적도 있을 정도로… 부디 제 부족함을 나무라 주십시오.” 브리티스는 아주 심각한 얼굴이다. 하지만 나는 보편적인 아버지들이 그러하듯 브리티스를 다독일 생각은 않고 그 대신으로 나이프를 집어 들었다. 접시에 담긴 스테이크 두 조각을 잘라내어 한 개씩을 옆으로 밀어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부족하다니 당치도 않다. 천재이기에 앞서 완벽한 애늙은이인 루크레이브 전하에게 머리로 앞서려는 것 자체도 우습지 않겠느냐. 게다가 현 국왕 폐하와 같은 황당한 성격의 인물이 아닌 다음에야 군주를 이기려드는 신하는 밉보이기 십상이지. 또한 레아딘의 경우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 주제에 경악스럽게도 머 리가 똘똘한 모양이다만은 마나 유동력에 소질이 부족해 대마법사가 되기는 글 러먹었다. 마법에 관한한은 따라올 자가 없는 폐하께서 몰래 귀뜸해준 일이니 틀 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너는 마나 유동력에 대한 재능이 상당하다고 하더구나. 에스문드 가가 대대로 유명한 무인의 집안이라 검으로 이기는 것은 쉽 지 않겠다만 점차 마법이 주류가 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레아딘 정도야 신경 쓸 가치도 없지. 안 그렇느냐, 티스?” 국왕과 태자, 에스문드 공작가의 외아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씹으며 활짝 웃어보 였다. 당사자들의 얼굴도 안 보이고, 듣는 사람은 나즈에라와 티스 뿐이니 내 생 활신조 상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브리티스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내 눈치를 살피며 나이프만 깔짝거 렸다. 내게 거스르는 일은 절대 못하는 녀석이지만, 남 험담 역시 영 체질이 아 닌 아이이다. 적당한 가식이 필수요소인 이 세계에 브리티스의 저런 성격을 기뻐 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감히 끼어들어 말대답을 하는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하지만 티스를 위로하기 위 해 평소 친하게 지내시던 분의 아드님들을 그리 깎아 내리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리어 티스의 버릇만 나빠질 뿐이라고…….” 나즈에라가 냅킨으로 입을 가리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브리티스에게 나빠 질 버릇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그 외에는 모두가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티스를 위하고자 했던 내 마음이 너무 앞섰던 모양이오. 그럼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볼까? 티스도 그 두 사람에 비해 훨씬 나은 부분이 있지 않니.” “예? 나은 점이라니…….” 브리티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올려다본다. “요 전에 있었던 연회장에서 남 이야기 좋아하는 귀부인들이 수근거리더구나. 벌 써부터 네 미래의 모습이 기대된다고 말이다. 마룡왕 폐하께서도 드래곤이 폴리 모프해서 나타난 것 같다며 감탄을 하셨단다. 제 아들을 두고 이런 말도 우습다 만, 솔직히 그 또래에 너 만한 미남이 또 있을까?” “아, 아닙니다. 미, 미남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브리티스의 단점이라면 또 한 가지. 칭찬에 그리 익숙하지가 못하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의 칭찬 앞에서는 어느 정도 의연히 대처하는 편이지만, 내 입에서 나온 칭찬이라면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 한다. 레아딘의 뻔뻔스러움 을 아주아주 약간이라면 본받아도 좋을 텐데. 진땀을 뻘뻘 흘리는 브리티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이프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미소 대신 조금 진지한 빛을 띄웠다. “호오? 놀랍구나. 넌 다르게 생각한다는 말이냐? 매일 거울을 보면서도 네 스스 로가 잘 생겼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말이렷다? 일말의 가식도 없이 진심으로 그 리 생각한다고?” 살벌하게 음성을 낮추지 않아도 미묘하게 어긋난 분위기에서 내가 다소 불쾌해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을 것이다. 실제로 브리티스는 크게 당황한 상태다. “저, 저기…….” “무엇을 그리 당황하지? 그 대답에 진정 네 진심이 담겨있는지 어떤지 말을 해 보라는 것이다. 겸손한 척 말하면서도 실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 냐?” 일부러 비꼬듯 말끄트머리를 비틀었다. 안절부절 못하던 브리티스였지만 곧 결심 이 선 듯 했다. 이 이상 내게 밉보일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브리티스의 성격상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사실! 사실, 사실…은… 잘…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 을…….” 주먹까지 쥐고 강력하게 자신의 의사를 전하려 던 것이 뒤쪽으로 갈수록 점점 흐려졌다. 브리티스는 조금씩 고개를 숙이더니 결국은 내게서 시선을 피했다. 머 리카락으로 가려져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귓가까지 새빨개져 있었으니 일 부러 다른 것을 보려 할 필요도 없었다. “푸훗!”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만 피식거리고 있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소 리를 내버렸다. 한번 웃음이 터지고 나자 걷잡을 수가 없게 되어 곁에 앉은 나즈 에라의 옷깃까지 잡고 끝까지 부들부들 떨었다. 나즈에라는 함께 웃어야 할지 그 만두라고 말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애매모호한 표정으로 있었다. “아, 아버지!!” 브리티스가 그제야 자신이 놀림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망에 가득 찬 눈초 리를 내게로 보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지만 운 없게도, 너무 급하게 일어서 다가 때마침 가까운 곳에 놓여 있던 그릇을 잘못 건드리고 말았다. 샐러드가 한 가득 담겨있던 그릇은 식탁을 벗어나 바로 브리티스의 다리 위로 엎질러졌다. “앗! 이런!” 그렇지 않아도 당혹해 있던 브리티스가 더욱 당황해서 한걸음 물러섰다. 그 덕에 의자가 뒤로 넘어지고, 무릎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샐러드 그릇이 땅바닥으 로 떨어지면서 큰 소음을 냈다. 나즈에라까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밖 에서 대기하던 하인들이 소리를 듣고서 다급히 안쪽으로 달려왔다. 온통 시끌벅 적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만 싱글벙글 팔짱을 낀 채로, 얼굴에서부터 목덜미 까지 새빨개져 있는 브리티스에게 질문했다. “다친 곳은 없느냐, 티스.” “예. 어, 없습니다만… 자, 잠시 나가서 씻어내고 오겠습니다!” “그러려무나. 너무 많이 더럽혀져서 닦는 것보단 차라리 씻는 게 나을 것 같군.” “그럼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브리티스가 쥐구멍이라도 찾은 것처럼 재빠르게 식당 문을 통과해 밖으로 빠져 나갔다. 하인들이 대간 주변을 정리하여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을 보다가 괜히 고 개를 내저었다. “티스가 아무래도 소심한 감이 없지 않군.” “제 탓입니다. 제가 티스를 너무 싸고 돈 것인지…….” 생각 없이 중얼거린 것인데 나즈에라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그 일을 자신의 탓 으로 돌린다.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것이 어떻게 당신의 탓이겠소. 친구들도 사귀고 하다보면 점차 나아지겠지. 그리고 꼭 따지자면 브리티스의 저런 점은 날 닮았다오. 나도 어릴 땐 꽤나 소심 한 남자였으니까.” “설마!” 나즈에라가 한마디 감탄사만으로 자신의 모든 속마음을 토로했다. 그동안의 내 행적을 돌아볼 때 믿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전부 사실이라오. 5살이 되기 전까진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지? 특히 아버지의 앞에서는 말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지. 브리티스는 그나마 이 수준까지는 아니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겠소?” “예…….” 나즈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답하는 목소리가 다소 작은 것에서 짙은 불신의 흔적을 느낀다. “이런, 믿질 못하는군. 에스문드 공작에게 물어보면 확실할 거요. 그가 남자답지 못하다고 매일 같이 나를 두들겨 팼으니까. 백작가이면서 감히 후작의 아들에게 주먹을 휘두르다니 간도 크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에스문드 공작에게 맞을까 봐 그렇게 벌벌 떨었군. 지금에야 도리어 내 쪽에서 그를 골려주는 수준이 되었 지만. 훗, 이것 참. 몹시 유쾌했던 옛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구려. 후후후.” 웃음소리가 점점 짙어진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즈음에서 당한 것이 참 많았던 듯 하다. 옛 성현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빚을 지고 살아서는 안 된다 고 했다. “삼일 후 에스문드 공작의 방문이 참 기대되는군. 시간을 내서 오붓이 옛 이야기 나 나눠봐야겠소.” “에스문드 공작님이 부러워요. 당신과 그리도 스스럼없이 가깝게 지내고 계시 니.” 나즈에라가 곧이곧대로 내 이야기를 해석하더니 조금 쓸쓸한 미소를 보였다. “어째서 그런 소릴 하시오? 도리어 에스문드 공작보다는 매일 밤 함께 잠자리에 드는 당신이야 말로 더욱 스스럼없는 사이라고 생각하오만.” “사실… 저와는 정략결혼일 뿐이었으니까요. 저는 오래 전부터 제르 오라버니와 함께 어울려 다니시는 당신의 모습을 동경하곤 했지만, 당신은 제 이름조차 잘 모르셨겠지요.” “왜 그리 부정적인 생각만 하지? 제르카인의 하나뿐인 여동생인데 설마하니 그 럴 리가 있겠소? 당신과는 분명 정략결혼을 했지만, 내가 다른 곳에 눈 돌릴 일 은 없을 것이오.” “죄송합니다. 공작님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오라…….” 나즈에라가 당황한다. 놀랍게도 그녀는 처음 수줍은 얼굴로 결혼식을 올렸을 때 와 거의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조금은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고자 시종일관 보이고 있던 웃음기를 거두었다. 그 리고 손으로 그녀의 앞머리를 넘겨 티 없이 검은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말하지. 나는 에스문드 공작이 리플리케 양을 대하듯 그런 격렬한 감정 을 그대에게 느끼고 있지는 않소. 하지만 만에 하나 내 가슴을 뜨겁게 만들 만한 여인이 나타난다 해도 나는 오직 당신의 입술에만 키스할 것이오. 먼저 당신을 아내로 맞이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어찌할 수 없는 일…인가요?” 나즈에라가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가 손으로 턱을 잡아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막았다. 불안한 그녀의 눈동자를 진지하게 마주보다가 빙긋 미소했다. “어찌할 도리가 없을 밖에. 사랑스러운 여인을 위해 이 마음이 준비한 자리는 오 로지 하나인데, 그것을 당신이 차지하고 말았으니.” “그건…….”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다. 잘 들어 보면 처음 말과 그리 다를 것 도 없는데 달콤하게 치장을 좀 하니 금방 긴장을 풀어버린다. 이래서 교묘히 돌 려 말하는 재주는 필요한 법이다. 고개를 조금 기울여 그녀의 가까이로 얼굴을 가져갔다. 나즈에라의 눈꺼풀이 천 천히 덮이는 것을 보며 붉은 입술을 부드럽게 덮었다. “죄송합니다. 늦어서……!!” 브리티스가 되돌아오던 중 우리들의 모습을 본 탓인지 말을 하다 말고 멈추었다. 아쉽게도 키스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그러고 보면 지금은 식사 중이었지. 나즈에라와 떨어져 고개를 돌리니 입구 쪽에서 브리티스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 들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어찌할 줄을 모르고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내 시선을 받자마자 필요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시, 실례합니다. 전 나가있겠습니다!” “됐다. 실례라면 내 쪽에서 한 것이겠지. 들어 오거라. 저녁식사를 마쳐야지.” “에, 네.” 자리에 돌아올 때까지도 브리티스의 붉어진 얼굴은 식을 줄을 모른다. 녀석이 얼 마나 부끄러워하는지 나즈에라까지 새삼 쑥스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키스 정도에 그 녀석 반응 한번 굉장하군. 그 얼굴이면 여자 여럿 후릴 만도 하 거늘 왜 그렇게 순진하느냐?” 후끈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도 역시 나 혼자서만 빙글거리며 브리티스에게 물었다. 나즈에라가 고개를 저으며 대신 답했다. “이제 막 11살인데 여자랄 것이야 있겠습니까.”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조숙한지 부인은 모르시는군. 게다가 티스의 외모라면 나 이 있는 사람들도 한번쯤 생각을 달리해볼만하다고 생각하는데.” “아, 아버지!” “왜? 또 자신은 잘 생긴 게 아니라고 말할 테냐? 뻔히 눈에 보이는 사실을 가지 고 지나치게 겸손을 떠는 건 안하느니만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두거라. 십중팔구 아니꼽다고 한 소리를 들을 테니.” 브리티스가 고개를 푹 떨군다. 이렇게 계속 놀려먹었다간 벌게진 얼굴이 영원히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천운이 하늘에 닿아 미남 아들을 두게 되었는데 한순간 의 재미를 위해 이렇게 망가뜨린다면 아깝겠지. “식사가 끝나면 일찍 들어가 쉬거라. 최근 마법수련이다 검술연습이다 해서 바빴 던 것 같은데 가끔은 숨 돌릴 날도 있어야지.” “아니오. 그냥 평소대로 공부를 하겠습니다.” 화제가 바뀌자 브리티스가 그 즉시 본디 모습으로 돌아온다. 역시나 성실한 아이 다. “최근 계속해서 늦게 잠들지 않았니. 하루쯤은 쉬어도 좋지 않겠니?” 나즈에라까지 말했지만 브리티스는 고개를 젓는다. “루크레이브님도, 레아딘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데 저 혼자서만 아무런 성과도 없 이 하루를 보내는 것은 싫습니다.” “티스가 불타올랐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막지는 않겠다. 게릭을 보낼 테 니 조언을 구하도록 하거라.” “예, 감사합니다.” 전쟁이 끝나고 작위를 박탈당한 아이시스 남작은 그 후로 계속 트로이가에서 일 을 하고 있다. 처형하는 대신 내가 그를 맡아 감시를 하며 보좌관으로 쓰겠다고 하자 카류는 다른 대신들의 반대의견을 물리치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내게 있어 아이시스 남작과 일라트의 존재를 용인하겠다는 것은 좀 더 뿌리가 깊은 곳의 응어리를 풀겠다는 것과 같았다. 아이시스 남작은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아버지이며, 처형당한 나의 아버지는 아들을 버리고 그보다 큰 것을 선택한 아버지였다. 나는 그들을 향한 질투와 원망을 멈추기로 했다. 한번도 말 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카류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티스. 혹시라도 게릭에게 수상한 이야길 듣거든 당장 내게 말하렴. 그가 화려한 배신의 전적을 가졌다는 사실은 익히 들었을 테지. 누누이 말하는 것이지 만 게릭은 유능한 자이긴 하되 신용할만한 놈은 못된단다.” “알고 있습니다. 수업에 필요한 말 이외의 것은 허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 대화를 할수록 루크레이브 정도는 안 되어도 브리티스 역시 매우 명석한 아이라 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하루하루의 일상은 충분히 만족스러워 온 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만찬이 마무리되고 있었다. ====================================== 앞으로 웃다가 뒤로 돌아서 음흉한 살기를 흘리는 이중인격 딜티를 표현하고 싶었건만 조건이 안 따라주는 구려. 아쉽다........... 이르나크의 장 Part 69 먼 훗날의 이야기- 그들의 하루 (4) 디저트로 들어온 과일을 집어 들며 큰 원형 식탁에 둘러앉은 여인들과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여럿이 함께하니 음식 맛도 더욱 좋은 것 같군요. 매일 이렇게 식사를 할 수 있 다면 좋을 것을 말입니다.” “그럼 모두 빛의 궁으로 옮겨서 매일 함께 식사도 하고 생활하면 안돼요? 아빠 가 그렇게 명령하세요. 아빤 왕이잖아요.” 아르츠민이 기대에 잔뜩 들어찬 눈빛을 반짝였다. 히노 선배가 그의 머리를 쓰다 듬었다. “아르. 주변국의 보는 눈이 있지 않니. 그 나라엔 왕궁을 지어줄 돈도 없었나 하 고 수근거릴게다.” “뭐 어때요. 마룡왕께서 지배하는 신성불가침의 나라를 향해 설마 돈이 없다고 수근거릴까요?” 아르가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내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루크레이브 가 나섰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왕가의 일이다. 비와 왕자가 거처하는 수십 개의 호화스러 운 궁은 그 나라의 국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린애 같은 이야기는 그만 두는 것 이 어떠냐.” “끙.” 약간 수선스럽게 몸을 들썩이던 아르는 결국 패배를 선언한다. 루브의 엄격한 말 은 언제나 아르에게 효과 직방의 극약이다. “루브의 말이 맞긴 하지. 하지만 어린애 같은 말투라니. 사실 너희들 둘 다 어린 애잖니.” 하하 웃으며 농담을 건네자 루브가 고개를 숙인다. “그렇군요. 제가 어른 분들의 앞에서 너무 건방진 말을 사용했습니다. 용서하십 시오.” “뭐, 용서랄 것까지야.” 여전히 농담이 안 통한다. 나 혼자 썰렁하게 웃다가 다시 시선을 루브에게 향했 다. 루브가 우아한 동작으로 마지막 남은 사과를 향해 포크를 뻗었다. 사과 하나 찝 는데도 굉장한 품위와 절도가 보인다. 이럴 때면 쟤가 정말 내 아들이 맞나 싶은 것이 괜히 찡하게 감동의 물결까지 밀려온다. 솔직히 국왕의 재목으로 나 같은 성격은 곤란한 감이 없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역시 조금은 귀여운 면모도 보여 주면 좋을 텐데. “그럼 이만 일어나도록 하죠. 가까운 시일 내에 또 한번 이런 자리를 가질 수 있 도록 해보겠습니다.” 내가 대강 자리를 정리할 것을 제안했다. 그때 연?아남이 가볍게 헛기침을 해서 내 시선을 끌었다. 왠지 그녀의 얼굴에 그려진 웃음이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폐하. 오늘은 누구의 침소에 드실 예정이신지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살짝 들어봐도 괜찮을까요?” 세 명의 비가 모두 모여 있는 자리인데 연?아남의 질문은 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나 당황했다. 하지만 히노 선배과 옐루니얀은 불편은 기색은커녕 도리어 연?아 남과 같은 종류의 미소를 띄웠다. “아마 물의 궁에 드시겠지요. 오늘은 연?아남의 차례이니.” 옐루니얀이 눈을 살짝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일의 순번은 저이고요.” 이번에는 히노 선배가 나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모레엔 다시 제 차례일 테고, 다음 날엔 옐루니얀님의 침소에 드시겠지요? 그 다음날은 공휴일인가요?” 다시 되돌아와 연?아남이 마무리를 짓는다. 내게로 집중된 세 여인의 시선에서 강렬한 압박을 느낀다. “아…하하하. 세 부인이 제 마음을 어찌 그리도 잘 아실까. 하하하.” 등 뒤로 땀을 삐질 흘렀지만 일단은 웃어넘기려 했다. 하지만 세 여인은 나를 조 금 더 갈구고 싶은가 보다. “순번을 매기는 것이 너무 부실하셨습니다.” “조금은 어려운 방식으로 바꾸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네 달 동안 똑같은 방법이 지속되어서야 왕궁 내의 시녀들까지 눈치 채고 만답 니다, 폐하.” 옐루니얀, 히노 선배, 연?아남이 차례로 말했다. 입을 헤죽 벌리고 웃던 나는 손 으로 눈가를 가리고 일부러 슬프게 목을 울렸다. “아아! 세 부인께서 합심하여 저를 따돌리려 하시는군요. 이거 가슴이 아파서 어 찌 하면 좋을지.” 흐느끼는 척 하다가 슬쩍 눈을 들었다. 그녀들의 지긋한 시선은 여전히 내게 박 힌 채로 있었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그냥 철판 깔고 모르는 척 웃기만 했다. 그냥 농담으로 넘겨주지 않으려나. 내겐 언제부터인가 밤마다 누구를 찾아갈 것인지를 미리부터 정해두고 움직이는 버릇이 생겼다. 별 생각 없이 히노 선배를 너무 많이 찾아가면 다른 여인들이 쓸 쓸해하는 것은 물론 곧장 사교계에게 찬밥 대접을 비슷한 것을 받게 된다. 몇 번 그런 장면을 몇 번 보다보니 침소에 드는 숫자는 반드시 공평하게 나누어야겠다 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런 배려가 도리어 그녀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나로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안이었다. 물론 그녀들도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고 지금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이번에 이리 직접적으로 나온 것은, 시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정도로 내 가 허술하게 순서를 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조금 더 신경을 쓸 것을 후회막심이 로다. “어머님. 그리고 히노님, 연?아남님. 아버지께서 곤란해 하십니다. 비록 잠시 실수 를 하셨다고는 하나, 아버지께서는 깊은 마음으로 배려하신 일입니다. 세분께서 그리 말씀하셔서는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조용해진 분위기 속에 갑자기 루크레이브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듣자니 부인들의 압박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던 나까지 꿀꺽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루브… 어떻게 이런 일에까지 알거 다 안다는 말투냐… 네 나이는 아직 12살란 말이야. 딜티가 들으면 역시나 애늙은이의 원조라고 십년은 족히 씹을 듯싶다. “죄송합니다. 저희들이 주제넘어서…….” “용서하세요, 폐하.” “저희들이 지나쳤습니다.” 그녀들도 황당한 표정이었지만 곧 하나 둘 용서를 구했다. 나도 미안할 게 뭐있 느냐고 손을 저었다. 잠깐 동안의 해프닝이 끝난 후, 모두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들과 아이들 은 각자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 각자의 궁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보내고 식당 근처에 서 있다가 아르츠민이 가장 늦게 일어나 움직이는 통에 가까운 곳에 홀로 남아있는 히노 선배의 모습을 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걸 리는 것이 있었는데 잘 되었다 싶어 빠르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히노! 잠시 이야기 좀.” 그녀가 눈을 깜빡이다가 호위기사와 아르츠민은 남겨두고 나를 따라왔다. 아직 그릇을 치우러 하인들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식당은 단 둘이 이야기하기 딱 좋 은 장소였다. “무슨 이야기신지요?” “히노 선배가 많이 섭섭해 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요. 그동안 내가 너무 신경을 써 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군요.” “아아, 조금 전 이야기 때문에 이렇게 사과를…….” 내가 왜 자신을 불렀는지 히노 선배는 그제야 이해했다. 하지만 의외로 그녀는 바로 미소하지 않고 시선을 좀 피했다.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녀가 다시 나 를 바라보았다. “모두에게 마찬가지인 이야기인데도 폐하께서는 유독 저만을 불러 사과를 하시 는군요.” “그거야 히노 선배가 너무 좋으니까요. 마음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러신가요? 다른 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를 몹시 사랑하시기에, 이렇 듯 더 신경 써 주시는 것이란 말씀이신가요?”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는데 히노 선배의 지긋한 눈매는 바뀌지 않는다. 이거 아무 래도 오늘 하루 된통 걸린 듯한 느낌. 일단 궁색하게나마 변명이나마 하려는데 히노 선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폐하께서 유독 저만을 불러 사과를 하시는 이유는 세 명의 비(妃) 중에 제 가 가장 질투가 심하기 때문이겠죠.”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요? 그럴 리가 있겠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며 과장된 동작을 보였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곡을 찔린 것에 뜨끔하고 있었다. 이런 대화가 계속 이어지다가는 히노 선배가 완전히 토라져 며 칠동안 바람의 궁-히노 선배와 아르츠민이 거처하고 있는 궁- 근처에도 다가가 지 못할 듯 싶다. “매번 비슷한 일이 반복되면 이런 저라도 눈치를 채고 말지요. 전 괜찮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히노 선배. 가지 말아요!”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 와락 내게로 당겼다. 말발로 안 되면 남은 것은 육 탄 공격뿐이다. 그녀의 몸이 다가왔을 때 자연스럽게 다른 손으로 목을 감싸서 괜찮은 자세를 만들어냈다. 소설에서나 나올 듯한 로맨틱한 포즈는 여자들을 녹이는 충분요소.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과거에 폴리모프했던 카뮤르?카이야가 여러 애인들 을 상대로 사용했던 포즈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토라지지 않았으니까요.” 그윽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키스라도 하려고 하는데 히노 선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고 부드럽게 그녀의 뺨을 감싸 내게로 시선을 주게 했다. “히노…….” “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니까요.” 내 말을 가로채어 대뜸 그녀가 말했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재현하려 했던 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결국 손을 놓고 말았다. 한발자국 떨어진 후 얕게 한숨을 쉬었다. “후우, 직설적이네요. 이번일로 굉장히 마음이 상했나 봐요.” “사실 상하긴 했었지요. 폐하께서 그렇게까지 저희들과의 잠자리에 관심이 없으 셨던가 해서 말입니다.” 히노 선배의 말이 바늘에 되어 내 뺨을 꼭꼭 찌른다. 그녀의 말이 아주 틀린 것 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때가 된 남자인 이상 밤일에 완전히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 만 세 명의 아름다운 아내들은 모두 이성으로 사랑하는 그녀가 아니다. 꼭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여인이 없으니 어차피 누구를 선택하든 마찬가지 이다. 내가 순서를 정하는데 무관심해진 것은 이 때문이다. “괜찮아요. 궁극적으론 폐하께서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뜻했 으니까. 당신의 마음은 누구의 것도 아니니 저 혼자 독차지 하지 못한다 해도 아 직은 참을 수 있습니다.” 히노 선배가 나를 향해 빙긋 웃는다. 반대로 나는 진담이 삐질 흐른다. 그녀의 말은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 다. “히노 선배, 사악해졌어요. 오오오~ 무서워라~.” 저런 말에 진지하게 답하면 이야기가 더 복잡해질 수가 있다. 그래서 일부러 몸 을 배배 꼬며 장난을 쳤다. 선배는 살짝 웃다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앞서 가는 그녀에게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래 묵은 짝사랑 때문인지 점점 더 사악해지고 있네요.” “히노 선배! 난 그런 뜻이 아니라……!” 장난으로 한 말인데 그녀가 너무 심각하게 나오는 것 같아 손을 뻗었다. 히노 선 배가 식당 문 바로 앞에 서서 살짝 뒤로 돌아본다. “아니요. 폐하께서는 사랑하는 그녀를 영영 떠나보내셨지요. 전 항상 그 사실을 위안삼아 살고 있답니다. 사악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지요? 부디 폐하께서 그 어 떤 여인도 사랑하지 못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히노 선배가 씁쓸하게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혼자 있고 싶어함을 분위기 로 느꼈기 때문에 따로 달려 나가 그녀를 붙들지 않았다. 내 주변에는 이렇게도 엇갈리는 사람이 많을까. 서로 깊이 사랑하여 결혼을 한 자는 한 명도 없는 듯 하다. 아, 에르가 형이 하나 있구나. 비슷한 성격들끼리 똘똘 뭉쳐 주먹다짐까지 하다 가 결혼을 하게 되었지. 가만히 생각하고 보니 이렇게 질투 나는 일이 있을 수 가! “휴우. 아냐. 인간이 살아가며 마음을 곱게 먹어야지. 암~ 그렇고 말고.” 그냥 내일 만나 간단히 골려주는 정도로 끝내자고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식당을 나섰다. 깊은 밤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 남은 일거리를 처리하기 위해 집무실 로 향했다. ======================================= 에르가, 너 딱 걸렸어. ^_^* 마지막에 하늘같으신 글쓴이를 물먹인 벌이다. 이르나크의 장 Part 70 먼 훗날의 이야기- 그들의 하루 (5) 집무실에는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어린 소년의 모습이 보였다. “힐레인. 벌써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다니, 이거 잠시도 쉬지 못 하겠는걸?” 힐레인의 곁을 지나며 녀석의 긴 머리카락의 끝을 슬쩍 건드렸다.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새끼 강아지의 꼬리처럼 살랑살랑 움직이는 것이 너무 귀엽다. 내 아이들 도 점차 아이의 모습을 벗어나고 있는데도 엘프의 피를 이은 힐레인만은 아직까 지도 어린 소년의 모습이다. “죄송합니다. 폐하의 조언을 구할만한 문서가 몇 가지 있어서 가다리고 있었습니 다.” “정말 그것 때문이야? ‘그녀’ 를 만날 날이기 때문에 이렇게 와있었던 것이 아니 고?” 빙글빙글 웃으며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얼마안가 힐레인이 약간 뻣뻣이 굳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 고민이 있으면 이 만능박사 마룡왕에게 상담해 보라구.” “…그녀를 만나는 일은… 그만두겠습니다.” “에? 왜 갑자기!?”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깜짝 놀라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소리를 높였다. 힐레인 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가 더 이상은 만나지 말자고 말하더군요. 저 역시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이 런 식으로 계속 만나는 것은… 역시 그만두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을 것이라 판 단했습니다.” “모두를 위해?” 눈살을 찌푸리며 묻는 도중에 문득, 그들이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 를 생각해 냈다. “이런. 내가 연이나 두 여인에게 무관심했던 일 때문이구나.” “아뇨, 폐하께서 그리 무관심해지신 것도 모두 저희들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감히 폐하의 동정을 이용해 밀회를 나누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 도 당연한 일이겠지요.” “아아, 이게 아닌데!” 힐레인의 진지한 이야기를 듣다가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생각 없이 벌인 실수 에 파장이 너무 커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아주 작은 실수라고 말하긴 곤란한 대사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세 명의 비가 왕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 기 때문이다. 연에게도, 히노 선배에게도, 옐루니얀에게도 치명적인 스캔들이 될 수 있는 거다. “에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뒷일도 내가 최대한 좋게 무마시킬 테니 좀 봐주라. 응?”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지금까지만 해도 폐하의 자비에 크게 감사하고 있습니 다. 감히 제가 봐주고 말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확실히 그렇긴 하지. 다름 아닌 바로 내가 연과 너의 밀회를 도와해주고 있으 니.” 카이야의 기억과 독심술을 능가하는 눈치빨을 가지게 된 나는 연?아남과 힐레인 의 사이에 감도는 은근한 기류를 금방 깨달을 수가 있었다. 그 이후에 내가 한 짓은 황당하지만 그 둘의 은밀한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었다. 내가 연?아남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연?아남과 힐레 인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이혼을 해서 힐레인과 연?아남을 맺어주는 일은 어 렵더라도 나만 묵인하면 음성적으로나마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 는가? 하지만 그것도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힐레인과 연?아남이 자주 밀회를 가지다보 면 소문이 새어나갈 수도 있고, 그것이 표면화되는 즉시 두 사람은 파멸이나 다 름이 없다. 나는 그 문제를 내가 가진 몇 가지 마법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만의 하나의 사태가 있어도 바로 연?아남의 남편인 내가 알리바 이를 대어 얼버무리면 원만하게 해결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불타오르기 시작한 나는 한 쌍의 아름다운 연인들을 이어주기 위해 발 벗고 나서 이 획기적인(?) 계획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내 말을 들은 힐레 인이 얼마나 당황해 했던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부정을 하던 그 얼굴이 아직 도 기억에 선하다. 하지만 몇 번이고 계속 이야기를 전하자 힐레인은 마지 못하 는 척, 내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내 진심을 확신하지 못하는 연?아남을 설득하 는 일은 훨씬 더 어려웠다. 그 무엇보다도 나라를 먼저 위하는 그녀가 정략결혼 을 한 상태로 외도를 한다는 것은 감히 꿈에도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런 상태 이다 보니 그녀와 힐레인을 처음 만나게 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2년이나 된 다. 이렇게까지 남 좋은 일을 서슴지 않았다니, 나도 참 어지간히도 무른 녀석이 다. “폐하의 마음 씀에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두겠습 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기에, 첫 단추부터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 던 것입니다.” 잠시 과거에 했던 좋은 일(?)을 떠올리고 흐뭇해하고 있는데 힐레인이 고개를 깊 이 숙여 말했다. 잠시 흐뭇했던 기분이 그대로 하늘 위로 증발해 버린다. 책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소리를 빽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너희들을 만나게 해주려고 몇 년 공을 들였는데 이제 와서 깨지겠다는 거야! 그딴 소린 내가 억울해서 인정 못해! 하늘이 너희 커플을 찢어놓아도 내가 도로 붙여놓고 말테다!” “폐하께서 저희들을 위해 일부러 철없는 어린애인 양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희들도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단입니다. 부디 받아들여 주십 시오.” 음, 삼분지 이 정도는 진심인데 철없는 어린애라니 너무하네. “싫다. 받아들일 생각 없으니 그 결단은 안 보이는 곳에 치워버려.” “페하!” 힐레인이 결심을 단단하게 한 모양이었다. 이래서 모든 일은 미리 신경 써서 처 리할 필요가 잇는 것이다. 에구에구 뒷수습에 허리가 휘어지는 구나. “휴우. 이야기는 그만하자. 힐레인. 애초부터 너희 둘 사이의 관계가 없었다 해도 나는 이런 실수를 저질렀을 거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만 두는 것이 어때? 그럼 너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그렇다면 내가 그대로 연 에게 빠져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녀만을 보며 마음을 졸일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힐레인의 앞에서 일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침묵하던 힐레인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나마 폐하의 마음을 다잡아주는 역할 정도는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합니 다.” “절대 무리. 나는 조금도 그녀에게 흔들리지 않아.” 딱 잘라 말하자 힐레인이 조금 불쾌한 표정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니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 았다. “나는 여전히 카이야를 잊지 않아. 그녀의 오랜 기억이 환영처럼 내 주변을 맴돌 고 있으니까. 히노 선배의 기원대로 내가 다른 여자를 사랑할 날 따윈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르지.” 힐레인을 말리려고 시작한 말이 우울한 이야기까지 끌고 나온다. 그 덕분에 진심 으로 기분이 가라앉아 버리자 힐레인이 그것을 눈치 채고 안타까운 눈빛을 주었 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라. 내가 가엾다고 생각해? 세상엔 여자를 사랑하는 것 말고 도 좋은 일이 얼마든지 있어. 나는 실연을 당한 남자이기 이전에, 귀여운 아이들 의 아버지이고 신의 깊은 친우를 가진 남자이며 드래곤의 지식을 전수받은 9서 클 마법사지. 나보다 더 대단한 행운을 가진 자가 있을까?” “…….” 말없이 서있는 힐레인의 곁으로 다가가 등을 팡팡 두드렸다. “가자! 더 이상 이야기를 늘어놓다간 하루 밤을 넘겨버리겠네! 솔직히 급하게 처 리해야할 문서가 있는 건 아니지?” “그건 그렇습니다만…….” “어서 네 방으로 돌아가! 조금 후에 찾아갈 테니.” “…폐, 폐하.” 반항하는 힐레인을 떠밀어서 방 밖으로 쫓아냈다. 이런 일로 언성을 높여 말이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힐레인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자신의 방 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연?아남이 싫어서 헤어지려 한 것이 아닌 만큼 은근히 한 쪽으로는 내가 이렇게 배려해주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책상 위에 올려진 문서들을 눈대중으로 훑어본 다음 딱히 심각한 문서는 없는 것으로 판단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아무래도 내가 저지른 일의 수습이 더 중요할 듯 하다. 서류는 내일 처리하도록 하자. 빼곰이 문을 열어 밖에 기다리고 있는 호위기사에게 혼자 워프로 가겠노라고 말 을 전했다. 그럴 수는 없다는 아우성을 치는 자들에게 실력의 우위를 설명하여 차근히 누른 다음에 다시 집무실로 들어왔다. 아무도 모르게 힐레인의 방으로 들 어간 후엔, 녀석을 데리고 다시 연?아남이 있는 물의 궁으로 워프할 예정이다. 당 연히 다른 병사가 딸려오는 것은 곤란하다. 눈을 감고 힐레인이 거처하는 방을 한참 잰 다음 캐스팅에 들어갔다. “폐하! 제 말을 먼저 들어주십시오. 저희들은!!” 안전히 워프를 해서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힐레인이 와락 내 앞에 나타나 소리 쳤다. 인상을 확 찌푸리며 힐레인의 얼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이봐. 워프가 8서클 마법이라는 거 알아, 몰라? 그런데 내가 나타나자마자 시끄 럽게 소리를 질러대?” “어차피 심심할 때마다 워프를 시전하시지 않습니까. 8서클 마법 정도야 장난으 로 아시면서.” “아무리 그래도 사용하고 난 직후엔 머리가 왱왱 울린단 말이야. 내가 드래곤이 야? 마법 사용에 제약이 없을 리가 없잖아.” “겨우 머리가 울리는 정도란 말씀이시죠?” 힐레인이 한쪽 눈썹을 꿈틀했다. 마법 진흥 정책에 따라 힐레인도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의외로 힐레인은 마법에 큰 재능이 없었다. 어차피 힐레인은 드래곤 의 현자이지, 드래곤의 용사라던가 마법사는 아니기 때문에 무력은 약해도 상관 이 없지만 가끔은 이런 내 행동에 약이 오르나보다. 하지만 그 모습이 도리어 안심이 된다. 저 모습이야말로 힐레인의 성질 더러운 평시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힐레인은 연?아남의 일 때문에 너무 진지한 감이 없지 않았다. “자자, 쓸데없는 이야기는 관두고, 연이나 보러가자.” “아니,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지금 간다?” 격렬히 거부하는 힐레인의 목덜미를 쥐고 캐스팅에 들어갔다. 힐레인이 팔을 바 둥대며 소리를 시끄럽게 말을 늘어놓아 정신이 산만했지만, 괜히 마룡왕의 칭호 를 단 것이 아닌 만큼 캐스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물빛의 화려한 휘장이 앞을 가린다. 물의 궁으로 워프를 할 때는 항상 연의 침대 앞을 목표로 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오른 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머리카락 을 풀어내린 연?아남이 손을 모으고 서있다. “폐하. 저희들은…….” 힐레인이 함께 온 것을 보고 연?아남이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자 한다. 그 전 에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 그녀의 말을 막았다.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힐레인처럼 은근슬쩍 넘어가주길 바라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많다. 연?아남은 자기 나라를 위해 고향을 버리고 먼 외지로 홀로 건너온 여인, 그녀는 그 마음가짐이나 입장 부터가 크게 달랐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죠. 난 이성으로서 연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헛된 희망일랑 버리고 힐레인과 깊은 사이로 지내는 것이 도리어 내게 잘 보이 는 방법이 된다는 것을 알아두시죠.” “폐하!‘ 조금 전 집무실에서 이야기를 듣고도 힐레인이 또 다시 발끈하여 나선다. 연?아 남은 상처받은 것처럼 눈을 아래로 깔았다. 하지만 내 날카로운 직감이 신호하건 대, 실제로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 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요인이다. “연은 해룡족의 미래를 위해 내 마음을 얻어야 할 필요가 있겠죠. 하지만 만에 하나 그대에게 완전히 빠지는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이 이상의 이득을 해룡족에 게 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연도 알고 계실 텐데요. 내가 전 세계를 한 손에 주무를 힘을 가지고서도 단 한번도 정도를 넘는 일을 벌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 을.” 거만함까지 곁들여 냉정하게 말을 끊고 돌아섰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두 사람은 여전히 ‘폐하폐하’ 이러면서 토를 달려고 한다. 이러다가 폐하라는 단 어가 완전히 닳아버릴 것 같다. “힐레인! 난 이대로 옐루니얀에게 갈 예정이다. 내 마음은 변함이 없으니 정 마 음에 안 들면 그대로 깽판을 내던지, 아니면 내일 새벽녘 내가 다시 되돌아올 때 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지 마음대로 하라고.” 다행히 또 한번 폐하란 단어가 나오기 전에 캐스팅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두 사 람을 향해 손을 흔들려는 찰나였지만 아쉽게도 타이밍을 놓쳐 주위풍경이 완전 히 바뀌고 말았다. 물빛 휘장은 은색의 휘장으로 바뀐다. 전체적으로 금빛과 은 빛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바람의 궁이다. “또 이렇게 깜짝 방문을 하시는군요.” 침대에 앉아있던 옐루니얀이 미소했다. 예고도 없이 나타났음에도 옐루니얀은 조 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다. 그녀가 나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자 장신구 하나 없 이 자연 그대로 풀러진 머리카락이 우아하게 흘러내린다. 내 주변에 많고 많은 사람들 중 가장 ‘귀족적이다’ 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 바로 그녀다. “루브가 옐을 닮은 것이 천만 다행이네요. 장차 한 나라의 국왕이 될 자라면 그 정도 기품은 있어야겠죠?” “폐하는 신기한 분이세요. 저희 아버님처럼 평민이었다가 왕궁에 들어오신 것도 아닌데, 이렇게 소탈하시니 말입니다. 폐하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솔직히 전 깜짝깜짝 놀라곤 한답니다.” “하하. 좀 그렇죠? 전 당장 ‘짐’ 이라는 말도 껄끄러워서 공석이 아니고는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질 않는다니까요.” 옐루니얀의 옆으로 가볍게 걸어가서 몸을 내던지듯 풀썩 앉았다. 내가 완전히 자 리 잡고 나서야 그녀가 다소곳이 앉는다. 단 둘이 되어도 그녀는 절대 예를 잊지 않는다. “오늘 섭섭했죠?” 잠시 침묵하다가 멋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다름 아닌 옐루니얀이 상대라 당연 히 괜찮다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가 조금 고개를 떨구었다. “섭섭하다기보다는 걱정이 됐습니다. 제게 마음을 주시지 않는 것은 괘념치 않으 나 제 아이들에게 그 영향이 미칠 것이 신경이 쓰이기 때문입니다.” “하하. 만에 하나 제가 옐을 아주 미워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해도 아이들에 대한 일만은 걱정하지 말아요. 몇 년간을 봐왔으니 아실 텐데요? 제가 아이들을 굉장 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렇군요. 제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습니다.” 옐루니얀이 부드럽게 미소한다. 손으로는 자신의 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 다. 그녀에게서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행동이 굉장히 의미심장하 게 다가왔다. 그 순간, 조금 전 옐루니얀이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이라고 했던 사실이 번개처럼 스쳐갔다. 현재 옐루니얀이 낳은 아이는 루크레이브, 단 한명뿐 이다. “예, 옐! 혹시?!” 비스듬히 두고 있던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눈을 크게 뜨고 말을 기다리고 있으 니 옐루니얀이 살짝 웃었다. “정말 제 아이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요.” “저, 정말 그런건가요? 아이를 가진 거예요?!” 당장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귓불이 후끈 달아오를 만큼 흥분해 있었 다. “확실한 것은 판명되지 않았지만 아마도…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아니! 그럴 것 없이 지금 당장 알아보죠! 분명 쓸만한 마법이 있었는데!! 음~ 음~ 어떻게 하더라?” 머리를 싸쥐고 카이야의 기억을 더듬었다. 10만년분의 기억은 너무 광대해서 대 부분은 안개에 싸여 어렴풋하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는 나머지만으로도 어마어 마한 지식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 내가 찾는 것도 그 기억 속에 남은 마법 중 의 하나이다. 잊혀지기 직전의 마법 수식을 간신히 끄집어내어 캐스팅에 들어갔다. 노란색의 빛이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와 옐루니얀의 몸 전체를 덮었다. 몸의 곳곳에 특별히 이상은 없는지 확인할 때 사용하는 치료용 마법이다. 잠시간 시간이 지나자 그 빛은 파삭 소리를 내며 유리창 부서지듯 사그라져 내 렸다. 옐루니얀이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본다. “우우우~ 세이스미르!” 입으로 대답을 해주는 대신 잔뜩 부풀어 오른 기분으로 옐루니얀의 허리를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안에는 작은 생명이 자라고 있었다. 내가 의사가 아닌지라 성 별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세이스미르라는 이름은 성별 구분이 꽤 모호한 편이니 까 남자든 여자든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말 임신한 것이 맞나요?” “그럼요! 움후후! 세미르야! 어서어서 나와라, 아빠랑 같이 놀자. 응?” “아핫, 그렇게 좋으세요?” 배에다 얼굴을 대고 마구 부볐더니 옐루니얀이 간지러운 모양이다. 그대로 옐루 니얀의 다리에 누워서 그녀의 배에 가만히 귀를 대었다. 임신한지 얼마 되지 않 았으니 별 기척이 느껴질 리가 없는데도 마냥 좋아서 그렇게 했다. “이번에 태어나는 세미르는 옐처럼 예쁜 벌꿀 색이었으면 좋겠네요.” “어째서지요? 흑청색 머리칼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금발은 너무 흔하지 않나 요?” “솔직히 흑청색 머리칼이 예쁘긴 예쁘죠. 하지만 똑같은 아이들 보다는 다양한 종류의 아이들이 있는 쪽이 더 즐겁……!” 너무 솔직하게 진심을 털어놓은 듯해서 입을 합 다물었다. 옐루니얀이 쿡쿡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아이들을 좋아하시네요. 폐하께서는 어쩌다가 그렇게 아이들을 좋아하게 되셨나요? 달리 계기 같은 것이라도 있으신가요?”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니 멍하니 과거가 떠오른다. 내가 언제부터 아이들을 좋아 했었을까. 아주아주 오랜 전생에서부터였다. 지금에 와서 그 이유를 분석해보니, 혼자 집안에 있는 것이 쓸쓸해서 동생을 가지고 싶어 했던 심리가 그렇게 비껴 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아, 그로부터 참 오래도 지났구나.” “네?” 어울리지 않게 회한에 젖어있자 옐루니얀이 눈을 깜빡인다.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것보다 옐! 저 좀 도와주지 않을래요?” “예? 무엇을 말씀이시죠?” “새삼 에르가 형에게 원한을 품을만한 일이 생각났거든요. 내일 당장 골탕을 먹 여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후후, 그런 일이라면 트로이 공작님과 상의해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아하! 그것이 명안이군요!! 딜티라면 몹시 즐거워하며 물심양면으로 계책을 짜 낼 줄 테니!” 손뼉을 딱 마주치며 와하하 웃어버렸다. 하늘이 검게 젖어든다.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동안 하루는 이미 저물어가고 있었 다. ================================ ===== …그리하여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적당적당히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올 시다. 드뎌드뎌 별 것도 아닌 주제에 길게 끌리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끝났습니다~ (폭죽 터뜨리기) 끝났습니다~ (축하 케이크 자르기) 끝났습니다~ (말티 손잡고 춤추기) 에르가놈, 완결이 눈앞인데 마무리 끄트머리 에 달라붙어서 2주일을 끌게 만들다니! =_=^ 빨리 금안의 마법사랑 흑의 황제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