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 / 0240 ---------------------------------------------- #Start. 노인의 나이 92세.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수명은 다 누려보았다고 여겨질 법한 연령이었다. 노인은 정령술사였다. 세간에 알려지기를 자연의 4속성을 전부 다스리는 위대한 ‘대현자 이그레트’. 어디서 태어났는지, 또 어디서 사는지도 알려지지 않고 바람같이 살아온 삶이었다. 노인이 된 이그레트는 여전히 방랑자였다. 범인과 다른 특별한 힘은 그에게 자유를 주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욕구는 채워주지 못하였다. 그는 날 때부터 천애고아였고, 나이를 먹어서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홀로 늙었다. 한평생 자연의 정령을 벗 삼고 가족 삼으며 그렇게 살아왔다. 인생의 초기부터 혼자였기에 후회는 없었다. 정령은 티 없이 맑고 순수한 존재들이었으며, 그들과의 소통만으로도 충분히 적적함을 달랠 수 있었다. 만사가 편안하고 매사에 능통했다. 그저 물 흐르듯 세월에 몸을 맡긴 채 한들한들 한량으로 지낼 뿐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이 되자,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온 것인가?’ 이그레트의 마지막을 직감한 정령들이 반투명체로 몰려들어 그의 곁을 지켰다. 파도처럼 주변을 가득 메운 정령들은 인간의 언어와는 다른 소리로 위로와 인사를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그레트. -너는 최고로 깨끗한 인간이었어. 우리가 본 중에서 최고였다구! -100년 가까이 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순 없어. 이그레트는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아. 쭈글쭈글 늙은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매달렸다. “허허. 아이들아. 나도 곧 눈을 감는단다.” 이그레트는 작은 형태를 띤 정령들을 ‘아이’라고 불렀다. 실제로는 감히 인간의 수명으로 따라잡지도 못할 세월을 존재해 온 자연체들이지만, 이그레트는 마냥 그들을 귀엽고 다정하게 여겼다. 외형이 엄지손가락만 한 어린아이 같기도 했지만, 정령들의 사고방식이나 말투가 꼭 그런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한평생을 같은 모습으로 이그레트의 곁을 지켜준 정령들에게 표현하는 그 나름의 애칭이기도 하였다. -이그레트, 슬픈 거야? -울어? 이그레트.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정령들은 그의 감정을 재빠르게 눈치채고 걱정하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힘이 없어 자꾸만 축축 쳐지는 손가락을 들어 눈앞에 파닥거리는 정령을 쓸어주었다. 그마저도 잘되지 않아 덜덜 떨렸지만, 정령의 머리에 제대로 닿은 검지가 천천히 이를 어루만졌다. “글쎄다…… 허허. 쿨럭쿨럭.” 슬픈 것인지 모를 눈먼 감정이 그의 가슴을 답답하게 메웠다.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고 아쉬웠다. 이그레트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현자’로서의 삶을 살았고, 그만큼의 업적을 쌓았으며, 남들이 꿈꾸지 못할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아왔다. 그에게 부족했던 것이라면 아주 단순한 것뿐이었다. ‘가족, 친구.’ 어떻게 보면 그는 같은 종족 사이에서 어울리지 못한 외톨이였다. 타고난 힘이 강력했지만,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 그의 힘을 탐내 미끼를 놓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정작 그와 진심으로 친우가 되고자 하는 자는 없었다. 있었더라도, 결국 그를 이용하는 쪽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가 만나온 인간이란 그런 존재였다. 너무 뛰어난 능력이라는 건, 마치 인간관계를 좀먹는 족쇄와도 같았다. 그래도 이그레트는 포기하지 않고 인간답게 살기를 염원해 왔다. 배신당하고, 일어서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여 찔린 상처가 너덜너덜해지고 눈물자국이 딱딱하게 마를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탐내선 안 될 것을 탐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생이란 공평해서 얻는 게 있으면 얻지 못하는 게 있는 법이라는걸. 반평생을 넘게 배신의 굴레에서 얼룩진 그는 그렇게 자신의 운명을 자책하며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찾아오고 나서야 다시금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다. “내가…… 어리석었구나.” -무슨 소리야, 이그레트. -당신만큼 현명한 인간은 없어. -현명한 이그레트. 사랑스러운 이그레트. 정령은 대체로 인간을 따르지 않는다. 그래서 정령과 계약하고 정령술을 익히는 술사들은 몹시 보기 드물었다. 그중에서도 정령으로부터 ‘사랑’받는 정령술사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대현자 이그레트. 정령의 사랑을 받는 4속성의 정령술사 이그레트. 본가도, 이을 성도 없이 이름 넉 자뿐인 평민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강대하고 고귀한 자리에 있던 사내. 정령들은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고 아꼈다. 그 진심을 느낀 이그레트는 고마움에 울컥 치솟은 눈물을 마른 웃음으로 대신 내보냈다. “포기하지 말아볼 걸 그랬다.” -무엇을? “쿨럭쿨럭!” 기침과 함께 몸이 들썩였다. 온몸이 나무토막같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이그레트는 흐릿한 시야를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가쁜 숨이 실낱처럼 가늘게 흘러나왔다. ‘사람들과 사는 것.’ 귓가가 물속에 들어간 것처럼 웅웅거렸다. 그래도 정신과 이어진 정령들이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그레트! -우릴 잊지 마, 이그레트. -편안히 잠들어야 해. -그리고 일어나면……. ‘인간을 믿어보는 것.’ 왜 후회는 늘 늦는 것일까. 어째서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부질없는 용기와 미련이 남는 것일까. 이그레트는 몸서리치게 갑갑함을 느꼈다. 몸은 늙어 죽어갔지만, 젊은 시절 불태우던 패기와 열정이 아직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다시 살게 된다면, 다신 그리 겁쟁이처럼 달아나지 않으리.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소중한 이들의 속삭임이 마지막으로 울려 퍼졌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 작품 후기 ============================ #Start. 반갑습니다. 공든탑입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2 / 0240 ---------------------------------------------- 1장. 백로황자 째깍째깍. 고요한 방 안. 고급 원목으로 다듬어진 괘종시계만이 일정한 속도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금과 백색으로 꾸며진 휘장 속에 누워 있는 한 소년이 있었다. 이제 갓 12살이 된 소년의 이름은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루바르잔 황조의 세 황자 중 1황자였다. 황조 적통의 핏줄임을 알리는 귀한 은발과 금안은 3황자 중 유일하게 물려받은 색깔이다. 나이를 떠나 지닌 능력과 상징성을 중시 여기는 루바르잔이었기에 우수하게 타고난 외향으로 인해 날 때부터 주목받던 아이였다. 그러나 주어진 것과 다르게 평소 몸이 허약하고 성미가 얌전하여 뭇사람들의 걱정을 사곤 했다. 특히 타고나길 약하게 타고난 탓에 어느 순간부터 체구가 크질 않아 비정상적으로 작고 피부가 창백하리만치 희었다. 게다가 백치마냥 입을 거의 열지 않고 움직임이 없으니 이는 마치 잘 만들어진 인형과도 같았다. 그리하여 1황자는 적정 나이가 지나도록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식은땀에 젖어 늘어진 긴 머리와 앙상하게 마른 팔다리가 더욱 황자를 여리고 병약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겉보기엔 본래 나이 12살이 아니라 7살 수준으로 보일 정도로 작았으며, 성격마저 유약하니 자연히 황자를 안 좋게 보는 무리가 늘었다. 이를 염려한 현 황이 고심하여 선택한 결과가 바로 ‘학원 루바흐’였다. 이는 성년식 이전의 귀족부터 황족까지의 모든 아이가 시험을 치르고 공부하는 재능 개발 학원이었다. 루바르잔(Ruvarsan) 제국이 최초로 만든 국제기관답게 그 이름 역시 학원 루바흐(Ruvar-H). 정치, 경제, 병법, 지리, 심지어 약학이나 마법까지 다루어 익히고 겨룰 수 있다. 이어 누구나 성실하게 교육에 임하면, 그에 준하는 재능을 개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을 걸러내어 빛나게 해주고, 부족한 부분을 교육을 통해 학습한다. 이것이 황제가 장자를 위해 결정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러나. “……또 아프신 걸까요?” “워낙 병약하신 분이라.” “상황이 상황이니, 견디기 힘드셨을 수도 있겠어요.” 1황자 쥬다스는 그 안에서도 영 평판이 좋지 않았다. 또래보다 작고 볼품없는 몸과 백치를 의심케 하는 조용한 태도는 잘난 핏줄의 아이들 사이에 어울리기 어려웠다. 직접적인 괴롭힘이 없었을 뿐이지, 그는 이미 학원 내에서 외톨이었다. 자기 파벌조차 만들지 못한 1황자에게는 형편없는 평판만 주어졌다. 이미 황태자 자리는 그와 상관없다시피 생각하는 자들도 파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도 그러고 있었지만 쥬다스는 걸핏하면 쓰러져 며칠이고 수업에 참석하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잘 자라지 않는 신체는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1황자라는 신분에 관심을 갖는 아이도 많았지만 입학한 지 2년이 지나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며 관심에 대한 반응을 보이지 않은 탓에 점점 그 입지는 좁아져 갔다. 심지어 생모가 이미 죽어 외척세력도 없었다. 병약하고 무능하며 누가 뭐라 해도 그저 웅크리고만 있는 황자에게 돌아오는 건 무시와 차디찬 냉대뿐이었다. 학교 안에는 어느덧 그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자이며 벙어리처럼 입 한 번 뻥끗하지 못하는 장애아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주인이 쓰러져 있더라도 청결은 중요했기에, 청소를 깔끔하게 끝마친 메이드들은 그런 그에게 동정의 눈길을 보냈다. “그렇지만 쓰러지신 지 벌써 이틀째인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군요.” “과연 ‘백로황자’님…….” “쉿. 누가 들을라.” 백로(白鷺)황자. 황제의 정통임을 상징하는 그 고귀한 은발을 의미하는 별칭이기도 했으나, 따로 무리와 어울리지 못하고 동 떨어지는 모습을 백로로 빗대어 놀리는 뜻도 섞여 있었다. 감히 대놓고 제국의 1황자를 핍박하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조롱 섞인 별명. 메이드들은 이에 대해 수군거리며 방을 나섰다. 적막을 찾은 휘장 안에서 쥬다스의 손끝이 움찔 움직인 건 그때였다. 죽은 듯 감겨 있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천천히 그 안에 숨겨진 금안을 드러냈다. 여전히 잠이 덜 깨어 초점을 잃은 금색의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 그는 멍하니 작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목을 매만졌다. 주름이 하나 없는 매끈한 목에선 죽을 것처럼 튀어나오던 기침이 깨끗이 멎어 있었다. 몸에 힘이 없긴 했지만, 그가 기억하고 있는 최근은 이보다 더 힘없고 괴로운 상태였으니 오히려 상쾌하기까지 했다. 쥬다스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휘장을 걷고 두 발을 카펫에 디딘다. 그러고 나서 뭔가 한층 더 이상함을 깨달았다. 쥬다스는 양손을 들어 내려다보곤, 이내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훑어보았다. “이곳은 대체……?” 의아함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쥬다스는 흠칫 어깨를 좁히며 자신의 입술을 매만졌다. 기억 속 거칠고 갈라진 감촉 대신, 보들보들하고 말랑한 어린 소년의 입술이 손끝에 닿았다. 쥬다스는 혼이 나간 사람처럼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움직임에 따라 긴 은발이 사락 어깨를 타고 흘렀다. “허-” 이내 어린 소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탄식 소리가 흘러나왔다. 쥬다스의 시선 끝에는 그 자신을 비추는 탁상 거울이 놓여 있었다. 가까이 가볼 필요도 없이 선명하게 비친 모습에, 그는 연이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이 늙은이가 드디어 꿈을 꾸는 게로구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귀한 긴 은발에 금색 눈동자, 희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피부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의 육체까지. 루바르잔 황조의 직계 혈통을 이은 제 1황자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아니, 지금은 그 이름이 아니었다. 분명 겉모습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모습을 입은 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 죽음을 맞이한 대현자 ‘이그레트’였다. *** 이그레트, 이제는 쥬다스의 육신으로 살아가게 된 그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한동안 거울만 들여다보았다. 한평생 대현자로서의 삶을 살아왔던 그였으나, 도무지 이번과 같은 일은 겪은 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사람의 생은 단 한 번뿐이다. 늙지 않는 정령과 달리 나이를 먹으면 늙고, 병들어 죽는다. 그것은 단순하리만큼 당연한 자연의 섭리였다. 4대 원소 정령을 모두 다루며 가공할 힘과 지혜, 그 모든 것을 갖추고 있던 이그레트 역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겨우 100년도 채우지 못한 92세의 삶을 마지막으로 그는 눈을 감았었다. 분명 그렇게 끝났던 일이었다. “영 어렵구만. 혹 이 어린 것의 몸에 빙의라도 한 것인고……?” 고민할 때면 늘 보이던 버릇대로, 그는 턱을 짚은 채 손가락으로 하관을 툭툭 두들겼다. 거울에 비친 금안은 선명히 빛나며 그 자신을 마주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기분에 그는 난처하게 웃었다. “이것 참. 꼭 유령이라도 앞에 둔 기분일세. 허허.” 턱을 괸 쪽과 반대 손을 들어 가뿐히 주먹을 쥐었다 펴자 그 안에서 청량한 바람이 훅 불어왔다. 후우웅. 갑작스레 일어난 돌풍에 그의 긴 은발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돌풍 끝에 손바닥 위로 나타난 것은 작은 날개를 단 소녀 모습의 정령이었다. 「……이그레트!」 연두빛 머리를 길게 두 갈래로 땋아 내린 정령은 환하게 웃으며 날아올라 그의 뺨에 답삭 달라붙었다. 눈물마저 글썽이며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정령의 태도에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아봐 주는구나, 유니.” 「당연하지, 내 ‘이그레트’인걸.」 유니의 주변으로 수많은 바람이 모여들었다. 삽시간에 방 안에 청량감이 가득 찼다. 바람이 따르는 정령, 바람의 정령왕 유니의 기쁨은 곧 그녀의 의지를 따라 기분 좋은 바람을 일으켰다. 「반드시 곁에 있겠다고 약속했잖아. 다시 불러줘서 기뻐.」 “…….” 「이그레트.」 유니는 그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녀의 모습이지만, 그녀가 가진 힘은 무려 자연의 4대 속성 중 하나. 자연현상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령왕이란 결코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겉모습이 바뀌었어도 거리낌 없이 자신을 따르는 정령왕 유니에게 깊은 감사를 느꼈다. 자신이 대현자라 했던들, 자연계의 정령들에겐 아무런 상관없었을 터였다. 오직 젊은 날 나누었던 맹세를 기억하고 그 부름에 응답한다. 정령들에게 있어 ‘이그레트’는 그저 ‘이그레트’였을 뿐. 꼭 온전히 그 자신을 인정받은 기분이었다. 따뜻한 환대에 그는 허허롭게 웃으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너희와 친우가 된 것은 내겐 평생의 자랑거리였다.” 「끝난 것처럼 말하지 말라구. 바보 이그레트. 앞으로도 죽 친구란 말이야.」 “……고맙구나, 유니. 한데 말이지. 나는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거늘.” 쥬다스는 자그마한 손을 들어 꼼지락거렸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생판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만 그 특이한 머리색과 눈 색을 비추어 보았을 때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그는 길게 나풀거리는 은발을 한 줌 손에 쥐고 훑어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3 / 0240 ---------------------------------------------- 1장. 백로황자 “이건 분명 루바르한 제국 황조에서만 타고난다는 적통의 색일 터.” 「그 말대로야. 지금의 넌 이곳 황조의 직계 혈통을 이은 제1황자.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역시 알고 있었구만그래.” 「후후. 바람은 모든 걸 알고 있거든.」 유니는 키득 웃으며 그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그런 그녀를 향한 쥬다스의 금안이 살짝 가라앉았다. “한데 왜 내가 이곳에.”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봐.」 죽은 인간이 다른 육체에서 눈을 뜨는 것을 결단코 본 적 없다. 유니의 단호한 주장에 쥬다스는 점점 더 난감해졌다. 정령왕조차 모르는 일이라면, 이는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혹시 신이라도 개입된 건 아닐까. 쥬다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자 유니가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이마를 콕 찍었다. 「찡그리지 마, 이그레트.」 “흠, 이 나이부터 주름살이 늘면 곤란하겠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넌 찡그리는 게 안 어울린단 말이야.」 유니는 입을 삐죽 내밀고 툴툴거렸다. 「애초에 그 몸은 12살밖에 안 됐고.」 겉보기엔 7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작은 체구였지만, 어쨌든 실제 육신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 사실에 놀란 쥬다스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탁상 거울을 돌아보았다. 작았다. 너무나도 작았다. 안쓰러울 정도로 마르고 조그만 모습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어찌 아해를 이리 굶겼을꼬. 황손이라 하더니, 구박이라도 받는 겐가.” 「구박이라면 받는 걸로 알고 있어. 여기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받는단 말이냐?” 「응, 아마도?」 멈칫. 어떤 것도 비슷한 점이 없었던 두 개의 삶에서, 비슷한 접점이 생겨났다. 하필이면 좋지 않은 쪽으로 뻗어 나간 동질감에 쥬다스는 혀를 찼다. 대현자 ‘이그레트’의 삶에서 지긋지긋하게 겪어온 것이 바로 ‘따돌림’이었다. 동족으로부터의 배척, 배신. 이는 그에게 있어 너무나도 익숙했다. 그러한 것을 이 작은 소년이 똑같이 겪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엾은 마음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쥬다스는 느릿하게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에 폭 얹었다. 「이그레트?」 “힘들었겠구나.” 쓰담쓰담. 스스로 자기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독이는 쥬다스의 행동에 유니는 눈을 깜빡이며 가만히 지켜보았다. 영 해괴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그레트의 젊은 시절이 그 위로 투영되어 보였다. ‘너희도, 쓸쓸했겠구나.’ ‘그래도 다행이야.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이제 나와 함께 지내지 않을래?’ 상냥한 이그레트, 유니는 과거의 잔상을 묻어두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아무리 겉모습이 변해도, 이그레트는 이그레트였다. 「……이그레트.」 “음?” 「우린, 나는, 네 곁에 계속 있을 거야.」 자신의 머리에서 손을 내린 쥬다스가 빙긋 웃어보였다. “……그거 고맙구나.” 「그러니까 이제 다른 생각 말고.」 포로록. 사뿐히 쥬다스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유니가 그의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살아. 네가 원하는 대로.」 “으음, 그렇게 되면 이 아해는…….” 「어차피 이렇게 된 원인도 모르고, 돌릴 방법도 모르잖아? 어쩌면 다시 몸을 돌려줘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동안은 이그레트 네가 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는 거고.」 유니의 단호한 상황 정리에 쥬다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사실이 그랬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일단 그 육신을 사용하게 된 이상 다시 본래 주인에게 넘겨줄 방도가 없었다. 대현자와 정령왕이 머리를 맞대어도 당장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사는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렇다고 이 늙은이 멋대로 살기도 미안하잖나.” 「이그레트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건 그 애가 아니라 너인걸.」 ‘살아 있다’라- 이그레트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어린아이의 얼굴 위로 떠오른 연륜 가득한 표정에 유니는 빛나는 은발 한 가닥을 붙잡아 돌리며 구시렁거렸다. 「하여튼 이그레트 넌 예전부터 늘 남만 생각하던 버릇이 있어. 이런 상황일수록 너를 위해 살아보는 것도 좋을 텐데. 응?」 “……유니.” 「알겠지, 난 무조건 이그레트 편이야.」 머리부터 발끝까지 연두색으로 빛나는 정령을 머리 위에 얹은 채 쥬다스는 한숨처럼 웃었다. “알고 있단다.” *** 쥬다스가 ‘깨어난’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그 사흘간 쥬다스는 수업에는 전혀 출석하지 않았다. 오로지 제 방에서 머물며 유니로부터 이것저것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집중했다. 유니가 부리는 바람의 정령들은 간만에 할 일이 생긴 것에 신이 나 온갖 정보를 긁어모아 전달해 주었다. 대충 1황자로서의 삶이 어땠는지를 이해한 쥬다스는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학교였단 말이지. 허허, 마침 재미있는 장소구만.” 그가 괜히 대현자라 불린 것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배우고, 학습하는 것에 열의가 있으며 그 동기를 뛰어넘을 만큼 배움에 대한 어마어마한 재능이 있었다. 단순한 두뇌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치 까마득히 펼쳐진 책장에 서적들을 정리하듯 머릿속에 모조리 입력하고 이해한다. 그건 일종의 재능, 천재(天才)였다. 그리고 그 열의와 학습은 영혼까지 각인되어 현재까지 이어져 왔다. 쥬다스는 옷장에서 루바흐 학원 교복을 꺼내 입었다. 작은 체구를 덮다시피 한 교복은 지혜를 상징하는 남색이다. 고풍스러운 조끼와 재킷을 함께 걸치고, 금장 단추를 채워 입자 마치 유치원생이 중학교 교복을 입은 듯 어설픈 모양새가 완성되었다. 길이야 맞춤 제작을 한 듯 딱 맞았지만, 워낙 마르고 작은 체구였기에 품이 널널했다. 흘러내리려는 재킷을 힘 있게 고정시킨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거울을 응시했다. “이런, 키가 좀 커야겠구나.” 「응, 또래에 비해선 많이 작아. 물론 지금의 작은 네 모습도 귀여워.」 “으응? 귀여운 건 너란다. 유니.” 여전히 자신을 어린애 대하듯 웃는 쥬다스에게 유니는 볼을 뚱하니 부풀려보였다. 「……귀여워해 주는 건 좋지만, 살아온 세월을 따지면 내가 훠어어얼씬 연장자야!」 “그랬지, 참.” 「그러면서 또 웃고 있지. 하여간 넌 진짜.」 유니는 졌다는 듯 쥬다스의 머리 위에 풀썩 드러누웠다. 연두빛으로 빛나는 그녀의 몸은 일반인들은 발견할 수 없는 정령체였다. 정령술사가 아닌 이상에야 정령을 직접 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정령술사란 흔한 존재가 아니었다. ‘딱히 뭐, 모습을 보인다 해도 상관없긴 하지.’ 바람의 정령왕이 인간과 계약한 것은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먼 옛날의 이야기였다. 바람뿐 아니라 4대 속성 정령왕 전부가 그랬다. 마치 조부로부터 잠들기 전 전해 듣는 전설처럼 정령왕의 존재는 그야말로 신비였다. 평범한 인간이 알아보려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그레트는 특별했다. 무려 4속 정령왕의 사랑을 한 번에 독차지한 정령술사라니! 유니는 애정을 담은 손길로 쥬다스의 머리칼을 쓸었다. ‘나머지 녀석들에겐 당분간 비밀로 할까.’ 그가 스스로 원치 않는 이상에야 정령이 먼저 그를 찾아올 방도는 없다. 그의 온화한 성품상 나머지 정령들도 곧 부르게 되겠지만, 유니는 당분간 가장 먼저 계약자에게 불린 메리트를 누리기로 마음먹었다. 이는 정령왕인 그녀가 가진 유일한 독점욕이었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모르고 있는 쥬다스는 그저 평온한 얼굴로 숙소를 빠져나왔다. 몸이 원체 약하기도 했고, 본인 성격상 느긋하기도 했기 때문에 걷는 속도는 보는 이가 답답할 정도로 느렸다. 오전이라곤 하나 한창 수업 중일 시간이라 주변에 메이드 외에 다른 학우는 보이지 않았다. 쥬다스는 천천히 거닐며 경관을 구경했다. 산속에 틀어박혀 혼자 지내왔던 게 벌써 수십 년이었다. 메이드들이 고개를 숙이며 지나갈 때마다 잔잔히 웃으며 끄덕여 주었다. 이조차 생소하고 반가웠다. 숙소 밖에 펼쳐진 것은 고급스럽게 지어진 교사(校舍)와 각종 시설이었다. 고귀한 신분의 인재를 양성해 내는 학원 루바흐는 그 규모를 일반적 건물과 달리했다. 이는 마치 하나의 도시와도 같았다. 각 관마다 가르치는 학문이 달랐고, 운동장만 해도 종류가 7가지나 되었다. 일반 체육계와 검술을 연마하는 연무장, 행사를 뛸 수 있는 장과 승마장 등 장소마다 용도가 달랐다.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걷고 있던 쥬다스의 시야에 드디어 처음으로 같은 교복을 입은 소년이 하나 보였다. “…….” 손에 책자를 하나 들고 들여다보며 고뇌하는 소년은 쥬다스보다 한참이나 체격이 컸다. 한창 성장기인 듯 훌쩍 큰 키와 잘 단련된 몸은 자기관리에 철저한 인상을 풍겼다. 평소 무예에 뜻이 있는 듯 허리춤엔 검이 하나 매어져 있었다. 단정한 검은 머리, 마찬가지로 검은 눈동자는 잘 관리받은 블랙 래브라도를 연상시켰다. 언뜻 칙칙할 수 있는 흑색은 입고 있는 남색 교복과 어우러져 고고함을 뽐냈다. 책자를 빤히 들여다보며 고심하던 소년은 어느 틈에 그 앞에 서 있는 쥬다스를 알아차리고 움찔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 기척을 읽지 못한 것에 놀라 검을 뽑을 뻔했으나, 눈앞에 있는 자는 너무도 작고 허약해 보였다. 그뿐 아니라 자신과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루바흐 학생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4 / 0240 ---------------------------------------------- 1장. 백로황자 ‘그런데 어째서 기척을 느낄 수가 없는 거지.’ 소년은 속으로 몹시 당황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가문으로부터 전수받은 무예는 현재 상당한 수준이었다. 눈앞의 꼬마 하나 기척을 읽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야 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도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눈으로 확인한 지금 역시도, 그 기척을 제대로 짚어낼 수가 없었다. 이대로 눈을 감는다면 앞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당황한 소년에게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반가우이.” “……?” 아이답지 않은 말투에 소년은 두 배로 당황했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냈다. “……실례하였습니다. 이곳은 처음인지라.” “아니, 괜찮다. 이 늙은이도 처음이나 다름없으니 말이야.” 쥬다스의 자애로운 대답에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훑어보았다. “늙은이?” 아무리 봐도 7살 수준, 좋게 봐줘도 10살을 넘지 못하는 외향이었다. 툭 치면 쓰러질 듯 허약해 보이면서도 가진 금안만큼은 생기 있게 반짝였다. 기분 좋은 듯 머금고 있는 미소가 그를 더욱 아이답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어디 모자란 건가.’ 소년이 아무 말 없이 쳐다만 보고 있자, 쥬다스는 ‘아’ 하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엇차……? 말이 헛나왔구만. 허허허.” 나이를 먹으니 종종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더욱 영문 모를 소릴 해대는 쥬다스를 쳐다본 소년은 금방 그의 정체를 유추해 냈다. 노인의 센 머리와는 다르게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것 같은 긴 은발, 그리고 아까부터 생기 있게 반짝이는 금색 눈동자. 마치 하나의 보석을 보는 듯한 색의 조합은 제국 내에 유일한 혈통뿐이다. ‘제1황자.’ 황제가 총애하는 적통의 후계자. 그러나 너무나도 유약하여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잘 빚어진 인형 같은 존재. 그 소문 무성한 백로황자다. 소년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유약? 아닌 것 같은데.’ 기척을 읽을 수 없는 것은 고사하고, 분위기부터가 남달랐다. 어딘가 나른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는 게으름이 아니라 지니고 있는 여유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육신이 허약한 것은 맞으나, 그 눈빛에서만큼은 결코 유약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보게 된 것도 인연이겠지. 반가우이. 이름이 뭔가?” “……에단.” “에단, ‘영원의 아이’. 네게 잘 어울리는구나.” 태연스러운 대꾸에 에단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쥬다스가 말한 의미는 고대어였다. 일반적으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에단 스스로조차 가문으로부터 유일하게 전달받은 이름. 고대어를 전부 아는 자는 대현자 이그레트뿐이다. 그렇지만 황조 적통의 피를 이은 자라면 고대어에 대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눈앞의 유약해 보이는 아이에겐 소문과는 다르게 비상한 면모가 있었다. “그렇지, 내 소개를 안 했구나. 내 이름은…… 쥬다스. 쥬다스라 한단다.” “…….” “어디 찾는 곳이라도 있는 게야?” 쥬다스는 그가 들고 있는 책자를 눈짓했다. 에단은 저가 들고 있던 책자를 쥬다스가 보기 쉽게 밑으로 내려 보여주었다. 학원 지도였다. “교무처를 찾고 있었습니다.” 쥬다스는 지도를 쳐다보곤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학원 루바흐는 몹시 넓고 시설이 여러 종류라 길을 찾는 게 어려울 수는 있으나, 이처럼 명확한 지도를 가지고 헤맬 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이번에 입학하는 신입생이래. 나이는 올해로 15살.」 유니가 알려주는 정보를 들으며 쥬다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한 방향을 가리켰다. “네가 찾는 장소는 아마도 이쪽인 것 같구나.” 후웅- 쥬다스의 손끝을 타고 초봄의 찬바람이 불었다. 아이의 주변을 휘감는 바람을 따라 에단은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했다. 교무처로 추정되는 하얀 건물이 하나 보였다. 에단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더 헤매지 않아도 되겠군요.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다행이구나. 그럼 또 보자, 에단.” 부드럽게 웃어 보인 쥬다스는 그를 지나쳐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바람을 타고 살랑이는 은발을 물끄러미 쳐다본 에단 역시 교무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특이한 꼬마…….’ 처음 걷는 길이어도 바람이 알려주는 대로 가면 되었기에 쥬다스에게 길 찾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체는 호흡부터 제동이 걸렸다. 목선을 타고 흐른 땀을 손등으로 닦아낸 쥬다스는 자리에 멈춰 호흡을 가다듬었다. “체력이 원 늙은이보다 약한 것 같누…….” 이그레트로서 죽기 몇 달 전 상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나이 90 먹은 노인보다 허약한 체력은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인가. 쥬다스는 안타까운 눈으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단순히 운동 부족은 아니다. 타고나기를 약하게 태어난 몸이었다. 뛰기는커녕 장시간 걷는 것도 무리인 모양이었다. 「무리하지 마, 이그레트.」 유니는 걱정 어린 말과 함께 그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땀을 식혀주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쥬다스는 허허로이 웃어 보였다. “괜찮단다. 이제 다 왔으이.” 그 말대로였다. 이미 수업이 시작된 지 한창인 건물은 돌아다니는 이 없이 조용했다. 쥬다스는 아주 천천히 층계를 올랐다. 몸 이곳저곳이 삐걱삐걱 쑤셔왔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의 움직임에는 한계가 있음을 정리해 두었다. [경제학 Class A : 301호.] 교실 앞에 선 쥬다스는 고급스러운 글씨체로 쓰인 팻말을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드르륵. 목재끼리 마찰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났다. 수업을 진행하던 교사와 듣고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나이 지긋한 50대 경제학 교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그의 신상을 확인했다. “……쥬다스 님. 몸은 좀 괜찮나?” 그의 신분이 황자라고는 하나, 학원 내에서는 일개 학생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듯 거침없이 하대를 행하는 교사의 발언에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교사가 더 뭐라 하기도 전에 수업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성당에서나 울릴 법한 대종 소리에 교사는 펼쳐 든 책을 접었다. 교실을 나가기 전, 그는 쥬다스를 향해 당부의 말을 남기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리 고귀한 혈통이라 하더라도, 결석이 잦으면 낙제를 줄 수밖에 없네.” 교사가 자리를 비웠으나 학생들은 여전히 책상을 떠나지 않았다. 경제학 특성상 필기량이 많을 수밖에 없는데, 칠판에 빼곡히 적힌 필기를 옮겨 적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칠판으로 다가가 적힌 내용을 훑었다. “이거, 황자 전하 아니십니까?” “……?” 그의 주변으로 한 무리의 학생이 다가왔다. 쥬다스가 돌아보자 먼저 말을 건 학생이 입꼬리를 올려 조소했다. “아~ 아니지, 학원 내에서는 정통 예법 대신 학우 간 전부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룰이니까, 쥬다스 님.” 언뜻 옳은 말이었으나, 굳이 한 번 더 그 상식을 확인시켜 가며 호명한 것은 명백한 조롱이었다.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체구가 작은 쥬다스에 비해 소년은 14세 나이에 걸맞은 성장 속도를 보였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와 다부진 체격이 제법 사나운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도 이어지는 쥬다스의 태연한 대꾸에 왈칵 일그러지고 말았다. “……허어. 이름으로 불러도 되는 겐가? 이런 친절할 데가. 그래,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련?” 실제로 이그레트가 아니더라도 쥬다스와 바이칼이 따로 통성명을 한 적은 없었다. 말을 걸어봤자 대답다운 대답이 돌아오는 일도 보지 못했다. 자주 아프고, 수업에 빠지다 결국 무리에서 소외당하면서 쥬다스는 아무하고도 얘기하지 않게 되었다. 분명 그랬었는데. “……하긴, 그동안 출석도 변변히 하지 못하셨으니 기억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바이칼입니다.” “어감이 좋구만.” 뭔가 이상했다. 바이칼과 다른 학생들은 서로 의문스러운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제1황자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통칭 백로황자. 표정이 없고, 늘 창백하게 질려 말 한마디 하지 않았기에 마치 인형 같았다. 매사에 소극적이며 조롱이나 비웃음을 받아도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더욱 만만히 여겨져 황자로서의 근엄함이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잘 부탁한단다. 바이칼.” 창백한 안색으로도 부드럽게 웃을 줄 안다. 묘하게 말투가 거슬리는 걸 빼고는 흠 잡을 구석이 보이지 않았다. 힘 있는 금안과 마주한 바이칼의 표정이 움찔 흔들렸다. ‘이게 정말 그 백로황자가 맞는 건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5 / 0240 ---------------------------------------------- 1장. 백로황자 쥬다스를 바라보는 학생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정작 혼란을 끼얹은 장본인은 다시금 칠판을 눈으로 훑고는 몸을 돌렸다. 수업에 제대로 참석하지 못한 점은 아쉬웠으나 어쩔 수 없었다. 학원 루바흐는 이동 수업제였다. 과목마다 배정된 관과 교실이 달랐다. 필기를 마친 학생들은 이동을 위해 저마다 가방을 챙겨 들었다. 한발 먼저 휑하니 나가는 쥬다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또 다른 무리가 있었다. 바이칼이 중심인 무리와는 다르게 이들은 여학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놓고 나서진 않았으나 그녀들 역시 그간 쥬다스를 좋지 않게 보던 편이었다. “봤니? 그 뻔뻔한 표정.” “꼴에 황족이라는 걸까? 여전히 기분 나쁜 어린애야.” “어머, 어린애라니. 실제로는 12살이라며?” “그게 더 기분 나빠!” 12살은 어린 나이긴 해도 귀족 사이에서 어린애 취급받을 나이까진 아니다. 실제 학원 루바흐에 입학할 수 있는 최저 나이 제한이 10살인 걸 감안하면, 아직 10대인 그녀들과 큰 차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최악으로 떨어진 평판은 쥬다스를 위치에 걸맞지 않는 유약하고 기분 나쁜 어린애로 몰고 갔다. 조잘거리던 여학생들은 조용히 책을 챙겨 품에 안는 한 소녀를 향해 동의를 구하듯 시선을 보냈다. “차라리 수업에 나오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렇죠, 크리스티나?” “내 앞에서 천박하게 떠들지 마.” 여학생들의 가볍던 입이 순식간에 닫혔다. 차갑게 그녀들의 입을 다물린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바다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크, 크리스…….” “관심 없어. 그딴 품격 떨어지는 이야기.” 크리스티나 델피아. 그녀는 델피아 공작가의 장녀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기품을 잃는 법이 없고, 얼굴 또한 조각같이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이제 갓 14살이 된 소녀였지만 웬만한 레이디들로는 엄두도 내지 못할 품격과 절도를 갖춘 탓에 그 누구도 그녀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 수 없었다. 집안과 외모, 재능까지 고루 갖춘 그야말로 지체 높은 소공녀였다. “아, 그리고 그 애.” 크리스티나는 교실 밖으로 나와서는 멈칫 앞을 응시했다. 걸음이 느린 쥬다스는 먼저 나갔음에도 멀리 가지 못한 채였다. 그 뒷모습에 시선을 힐끗 준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돌리며 작게 덧붙였다. “마냥 어린애는 아니야.” “에……?” 그 말에 소녀들은 그저 영문 모를 얼굴을 할 뿐이었다. 자신이 선택한 수업 시간표에 따라 학생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쥬다스 역시 부지런히 걸어 체육관에 도착했다. 허약한 몸을 단련시키고 싶기라도 했는지 쥬다스의 본래 시간표에는 ‘봉술’이 들어가 있었다. 길고 가벼운 봉을 주로 다루는 봉술은 일단 배우기 쉬운 무예에 속했다. 검술과는 다르게 반대 손의 대칭성을 고려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동선이 크고 선명하기에 따라 하기 쉽다. 체육관에 미리 도착한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거나 미리 봉술 대련을 해보는 등 제각기 할 일을 하고 있었다. “봉이라…….” 쥬다스는 쌓여 있는 훈련용 봉들 중 하나를 양손으로 들어 올렸다. 다른 무구류에 비해 가볍다지만 체력이 약한 쥬다스가 들기엔 이마저도 무거웠다. 대현자였던 이그레트는 봉술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건 아니어도 취미 삼아 익혔던 전투 기술들은 몸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뇌리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무겁군.” 쥬다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봉술의 꽃은 쌍봉이다. 한 손에 하나씩 봉을 들고 총 두 개의 봉을 휘두르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 7살 남짓으로 보이는 작은 체구에 허약하기 그지없는 팔다리는 훈련용 봉 하나의 무게조차 제대로 견뎌내지 못했다. 봉을 양손으로 잠깐 들고 있는 걸로도 벅차 벌써 어깨가 아려오고 있었다. 쥬다스는 들고 있던 봉을 땅에 꽂다시피 세워둔 채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 몸으로 잘도 봉술을 신청했구나. 쯧쯧, 하고 싶었던 건 많은 아이였던가 본데.’ 안타깝게도 전혀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 쥬다스는 무리해서라도 본래 몸 주인이 하고 싶어 했던 봉술을 계속 지속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지금에라도 다른 수업으로 변경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봉술 교사가 체육관에 들어섰다. “오?” 들어오자마자 단연 교사의 눈에 띈 건 쥬다스였다. 교사는 놀란 얼굴로 쥬다스 앞으로 다가왔다. “이게 웬일이야? 이번 학기 통 얼굴 비추지 않던 학우님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기까지 하다니.” 쫙 붙는 트레이닝 복장에 긴 고동색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교사가 씩 웃으며 허리에 한 손을 얹었다. 무예과 봉술 교사 메이란, 그녀는 무예과에서 보기 드문 여성 교사였다. “드디어 할 마음이 생긴 건가? 쥬다스 님.” “…….” 쥬다스는 꽤나 놀란 상태였다. 여자 스승이라니, 남녀차별을 하려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의외였다. 문과도 아니고 무예학에서는 더욱 그랬다. 아직까지 제국 내에서 여성은 무예 쪽에 많이 진출한 편이 아니었다.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가 여식들도 보통 문과나 마법계에서 특성을 드러내곤 하지, 몸 쓰는 험한 일에는 잘 참여하지 않았다. 일단 그녀의 여기저기 자리 잡은 잔근육과 탄탄한 몸매를 보아서는 운동을 게을리한 것 같진 않았다. 아마도 상당한 실력자이리라. 메이란은 메이란대로 대답하지 않는 쥬다스를 내려다보며 씁쓸하게 입꼬리를 내렸다. ‘조금 변화가 있는가 싶었더니, 여전한 모양이군. 하아, 이래서야 폐하께서도 걱정이 크시겠…….’ 거기까지 생각하던 메이란은 쥬다스가 공손히 머리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눈을 홉떴다. “심려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스승님. 가르쳐 주시는 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어……? 어, 그래.” 빙긋. 늘 소극적이고 그늘져 있던 쥬다스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메이란은 놀란 표정을 순식간에 지웠다. 대신 훈련용 봉을 하나 꺼내들고 학생들을 집합시켰다. “봉술의 훈련은 회전에 대한 감각을 키우기에 매우 적합하지. 이 회전에 대한 감각은 다른 무술에도 적용된다. 다른 무술을 배운 학생이라면 느꼈겠지만, 이 감각을 잘 다져 둔다면 모든 무예에 써먹을 수 있을 거야.” 휘릭, 탁! 마치 동전 굴리듯이 가볍게 봉을 휘둘러 잡은 메이란은 먼저 간단한 시범을 보였다. 봉술이라 하나 초급 과정인 만큼 그다지 복잡성을 요구하진 않는다. 봉을 다루는 감각과 기초적인 휘두르기 정도가 현재 가르치는 내용의 전부였다. 쥬다스가 수업을 오래 빠지긴 했어도, 아직 학기 초였던 만큼 다른 학생들도 봉술에는 서투른 모습을 보였다. “자, 이제 둘씩 짝을 지어서 타격을 주고받는 연습을 실시한다.” 메이란의 신호에 따라 학생들은 우르르 흩어졌다. 저마다 친한 친구나 아는 얼굴을 찾아 이동하는 모습을 보며 쥬다스는 잠시 자리에 서 있었다. 이럴 때는 가만히 있으면 남는 인원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자신처럼 멀거니 자리에 서 있던 학생과 마주보게 되었다. “음?” “……당신은.”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낯이 익은지 얼마 되지 않은 사이였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반갑게 그를 향해 다가섰다. “또 보는구나, 에단.” 에단은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사람의 덩치 차이는 상당히 차이 났기에 마치 형이 어린 동생과 놀아주는 모양새처럼 보였다. “찾던 곳은 어찌, 잘 찾았느냐?” “덕분에. 곤란하던 참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주변 학생들이 그들을 힐끗거리기 시작했다. 에단은 이번이 첫 수업이었다. 정식 입학 날짜가 아닌 중도 편입으로 들어온 학생이었기에 아는 얼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신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원칙이긴 하나, 학생들은 저마다 서로의 신분을 추측하여 파벌을 형성하곤 했다. 새로운 얼굴의 등장에 에단의 가문을 추측하려는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다. “한데 봉술이라, 첫날부터 특이한 수업을 신청했구만.”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부분이었습니다만.” 교사의 지시대로 준비 자세를 취하면서도 둘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봉술이 무예 중 가장 쉬운 편이라 수강 학생이 꽤 많은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가 이미 검술을 익힌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첫 만남에서부터 보란 듯 검을 소지하고 있었고, 어린아이치곤 풍기는 기세가 꽤나 절제되어 있었다. 더구나 입학 첫날부터 다른 흥미로운 과목을 뒤로하고 봉술을 시간표에 넣는 경우는 드물었다. 학원 루바흐에는 이보다 젊은 학생들의 흥미를 끌 만한 무수한 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반면, 에단은 쥬다스의 의문과는 그 계기가 조금 달랐다. 그로서도 백로황자에 관한 소문은 그간 질리도록 들어왔다. 타고나길 몸이 허약하게 태어나고, 심신이 전부 유약하여 나이에 비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약체 중의 약체. 그런 그가 아무리 봉술이라 한들 무예과를 신청해 들어왔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아까도 그랬지만, 이분은. 생각했던 것보다 강단이 있는 편인 건가.’ 에단은 자신이 들어왔던 1황자에 대한 소문을 점차 수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적어도 지금 눈앞의 황자는, 아주 못써먹을 인물은 아니었다. 그 생각에 약간 흠집이 난 것은 잠시 뒤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이그레트'에 로맨스는 없습니다. 주인공을 사랑하는 인물들은 늘어나겠지만요. ㅎㅎ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또 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6 / 0240 ---------------------------------------------- 1장. 백로황자 터엉! 요란한 소리와 함께 훈련용 봉이 바닥을 굴렀다. 그다지 세게 맞부딪친 것도 아니었는데, 시늉만 한 타격에도 쥬다스는 버티지 못했다. 봉을 놓친 것은 고사하고, 들고 있던 손바닥이 까져 빨갛게 부어올랐다. “이런! 괜찮나?” 담당 교사 메이란이 부리나케 달려와 쥬다스의 안위를 살폈다. 아무리 형편없다 하더라도, 쥬다스는 제국의 1황자였다. 약간의 상처에도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호들갑을 떠는 것은 교사뿐이 아니었다. 「이그레트, 많이 아파? 응? 저 인간 놈이 감히 이그레트를.」 “……하하.” 쥬다스는 손바닥을 감싸 쥐고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에단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잔뜩 분이 찬 유니가 씩씩거리며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그의 손바닥으로 포르륵 날아가 울상을 지었다. 「이그레트…….」 “이거야 원,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그래도 연습은 중지해야 해. 얼음주머니를 줄 테니 쥐고 앉아 있도록.” 정령에게 중얼거린 말을 용케도 캐치해 낸 메이란이 쥬다스의 어깨를 살짝 떠밀었다. 하는 수 없이 쥬다스는 부어오른 손바닥 위에 얼음주머니를 댄 채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비어버린 에단의 연습 상대는 교사인 메이란이 직접 맡았다. “에단 학생, 신입생이라 했지? 보아하니 무술을 익힌 몸인데, 왜 하필 봉술을 선택했나?” “……무구를 다루는 감각을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검술 반에서 더는 익힐 게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자만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사의 도발에도 에단은 크게 감정적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저 이성적인 어투로 자신의 견해를 그녀에게 밝혔다. “제 검에 완벽을 더하고 싶을 뿐입니다.” 휘리릭, 탁! 배운 자세를 완벽하게 구사해 내며 봉을 돌려 잡는 에단을 본 메이란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확실히 무장 가문답군. 그사이 벌써 원리를 몸이 익혔나.’ 루바흐의 교사는 모든 학생의 가문과 출신 정보를 전달받는다. 난 배경을 알아야 싹을 기르는 법. 대다수의 학생은 자신의 출신지에 맞추어 자질을 드러낸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그럴 경우 어느 것에 더 재능이 있는가를 판별해 양분을 더해 주는 건 각 교사의 몫이었다. 에단의 경우엔, 철저한 전자였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는 학생으로서 합격이야. 그런데 말이지.” 메이란은 찔러오는 에단의 봉을 가볍게 쳐 냈다. 그리고 일반적인 연습과는 다르게 훅 치고 들어가 그의 복부를 노렸다. 놀란 에단이 황급히 봉을 들어 이를 막아냈으나, 봉은 스프링처럼 튕겨 올라 반대로 그의 등을 가격했다. 퍽! 꽤 큰 타격음이 울리고 에단이 휘청거렸다. 그러나 끝까지 제 봉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이를 눈여겨본 메이란이 생긋 웃었다. “봤지? 앞으론 주의하는 게 좋아. 봉이란 무기는 검과 그 성질부터가 다르거든.” 수업이 끝나고 에단의 주위로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사가 호명하는 ‘에단’이란 이름과 짧지만 그가 보여준 무(武)에 대한 익숙한 태도, 그리고 그의 흑발, 흑안을 보고도 그 정체를 유추해 내지 못할 루바흐 학생들이 아니었다. “안녕, 신입생.” “메이란 선생의 일격 기습을 한번이라도 막아낸 학우는 처음 봤어. 선배들도 반응하기 어려웠을걸!” “과연 헤이가 가문인걸.” 에단 헤이가. 델피아 가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양대 산맥. 즉, 공작가 도련님이란 소리였다. 가문에서 전수하는 검술은 그야말로 제국의 자랑으로 알려져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다수의 학생이 그에게 선망을 가진 채 다가왔다. “흠.” 그들에 비해 유독 키가 작은 쥬다스는 아예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인사라도 건넬까 하던 쥬다스는 턱을 긁적이곤 돌아섰다. 와글와글 몰려든 아이들을 헤치고 지나갈 힘도 없을뿐더러,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다르게 입학 첫날부터 모두에게 환영받는 에단을 뒤로한 채 쥬다스는 느릿느릿 걸었다. 몸이 약해 그 이상의 시간표를 짜지 못한 쥬다스의 오늘 일과는 이것이 끝이었다. 체육관을 빠져나온 쥬다스는 고개를 들어 아직 저녁노을도 채 지지 않은 늦은 오후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달라진 게 없구나. 난.” 「응? 왜 그래, 이그레트? 손이 아파서 그래?」 “이런, 유니. 아직 신경 쓰고 있었어? 손은 괜찮단다.” 쥬다스가 손바닥을 펴 보이자, 붓기가 많이 가라앉은 모습이 보였다. 유니는 그 위로 살포시 내려앉아 쥬다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표정이 안 좋아.」 “……내가? 그랬던가. 허허……. 이거 주책이군, 나도.” 「뭐야. 대체 왜 그러는데?」 “이래서야 전혀 달라진 게 없지 않나 해서.” 유니를 손바닥에 얹은 채로 쥬다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오후 수업이 종료되어 저녁 수업을 들으러 이동하는 학생들, 쉬는 시간을 즐기는 학생들, 혹은 자신처럼 숙소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비슷한 또래였지만, 그 누구도 쥬다스를 향해 아는 체하지 않았다. 「그건, 몰라서가 아닐까?」 유니가 손가락으로 녹색 머리칼을 살살 꼬며 말했다. 그 말에 쥬다스는 어? 하고 눈을 깜빡였다. “몰라서?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존재를 경계하곤 했으니.” 「물론이지. 네가 어떤 인간이라는 걸 알고 나면, 누구라도 분명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우리가 그랬듯이.」 어느샌가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음 날, 바이칼은 어김없이 쥬다스와 마주쳤다. 이번엔 경제학이 아닌 역사학 시간이었는데 우연찮게 그들의 수업 경로가 겹쳤던 탓이었다. 이는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라 딱히 놀라울 사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이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하나 있었다. “좋은 아침. 너희는 늘 같이 다니는 것 같구나.” 특이하게도 이번엔 쥬다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지금껏 한 번도 그로부터 인사를 받을 거란 생각해 본 적 없는 바이칼은 주변 무리와 똑같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침 겹치는 수업이 종종 있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단다.” “뭔…….” 하마터면 황자를 향해 쌍소리를 해버릴 뻔한 바이칼은 가까스로 이성을 챙기고 입을 닫았다. 쥬다스의 여유로운 표정이 그를 더 열 받게 만들었다. 바이칼은 조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하! 쥬다스 님은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군요. 같은 수업을 듣는다고 해서 그 수준까지 같으리란 발상은 거두시지요.” “으응? 내 그리 말하진 않았다만.” “분명히 말해둘까요? 역사학을 너무 만만히 보시는 거 아닙니까? 출석보다 결석이 잦은 당신은 이 수업을 제대로 따라올 수 없을 겁니다. 당장에라도 돌아가서 철회 신청하시길 권해드리고 싶네요.” 킥킥. 지켜보던 학생들이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명백히 깔보는 말이었다. 황자라 하더라도, 학원 루바흐에서는 일개 학생. 그 고귀한 혈통을 인정해 존대를 해주더라도 형편없는 자질까진 억지로 인정할 필요가 없었다. 툭하면 쓰러져 결석을 일삼는 황자를 그 누가 인정할 것인가. 그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내 본 적 없는 이름뿐인 황자였다. 그 타고난 외향이야 인형처럼 고고했지만 그게 백로황자의 크나큰 허물을 덮어주진 못했다. “…….” 쥬다스는 그저 멀거니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원망도 분함도 담겨 있지 않은 금안을 직시한 바이칼은 쳇 혀를 차며 이를 외면했다. 마침 들어온 교사가 출석을 호명했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그걸로 끝날 것 같던 쥬다스의 이상 행동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마치 수모를 당한 적 없는 사람처럼 끊임없이 인사하고, 말을 걸어왔다. 비단 바이칼에게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쥬다스는 마주치는 모든 학생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탐탁지 않은 반응에도 그 미소를 잃는 법이 없었다. 실로 끈질기다 싶을 정도의 작태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쥬다스를 몰라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동안 부진한 존재감으로 유명했다면 지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다니는 쥬다스의 행실에 학생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적당히 받아주며 그를 재관찰하거나, 여전히 껄끄러워하며 무시하거나. 전자보다는 후자가 대다수였다. 그중 소수자의 한 축에 속해 있는 에단은 어김없이 봉술 수업에 참석한 쥬다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법 봉을 잡는 자세에 자신감이 붙은 쥬다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올려보았다. “내 그간 팔 힘 단련에 힘썼네. 오늘은 좀 다를 것이야.” 라고 큰소리를 친 것이 무색하게, 쥬다스는 요란하게 넘어지며 봉을 놓쳤다. 손뿐 아니라 무릎에까지 얼음주머니를 올려놓게 된 그는 미안한 듯 에단을 향해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에단은 신경 쓰지 말라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이곤, 이내 교사 메이란과 함께 연습을 빙자한 대련을 이어나갔다. 이런 패턴을 지속한 지도 벌써 일주일째였다. 다른 수업과 달리 실기 중심인 봉술은 매일 오후 시간에 일정이 잡혀 있었다. 확실히 가만히 숨쉬기 운동만 하는 것보다야 체력 향상에 도움이 되겠지만, 봉술 실력은 딱히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봉을 휘두르기는커녕 예정된 타격을 제대로 막아내지도 못하는데 연습이 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쥬다스는 차곡차곡 스승의 가르침을 머리에 집어넣었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있기 때문에 써먹지 못할 뿐, 그가 원래 알고 있던 무예의 지식과 결합하여 이론적으로는 완벽히 봉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실제로 사용할 만한 체력이 뒷받침된다면, 가르친 메이란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굉장한 성과를 보일지도 몰랐다. “……호리병 속 음식이나 다름없구만.” 쥬다스는 까진 주먹을 쥐락펴락하며 피식 웃었다. 동화 속 여우가 기다란 호리병 속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식이 있어도 써먹지를 못하다니, 꽤나 아쉬운 일이었다. 어쨌든 쥬다스는 머리로나마 이를 배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대현자라 불리던 삶을 살았으나 아직 그가 모르는 지식은 무궁무진했다. 기껏해야 92년간의 삶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누릴 만큼 누린 세월이었지만 세상 모든 지식과 이치를 깨우치기엔 짧디짧은 시간이었다. 대현자라 불리긴 했어도, 쥬다스는 한 번도 그 호칭에 동의한 적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적월zero 님, BlindSpot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연휴에도 재밌게 글을 쓸 수 있었네요 ㅎㅎ 함께하는 독자님들이 계시다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입니다. 행복한 오후보내세요!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7 / 0240 ---------------------------------------------- 1장. 백로황자 “앗.” 와장창!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사고가 터졌다. 실험용 비커를 트레이에 잔뜩 쌓아 위태롭게 끌고 가던 학생과 부딪혀 물건이 쏟아진 것이다. 깨진 유리 조각과 기묘한 연기를 뿜으며 흐른 액체가 여기저기 뒤섞였다. “이런, 괜찮으냐?” “아…… 저, 저기.” “다친 곳은 어디 없고?” “네, 네에.” 트레이를 끌던 건 쥬다스와 체구가 비슷한 작은 여학생이었다. 암갈색 생머리가 허리께에서 찰랑였다. 쥬다스보다야 키가 컸지만, 이제 겨우 10살이 된 입학자였다. 어린 여학생은 쥬다스와 깨진 비커를 번갈아 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하게 되었구나. 내 다른 생각을 하며 걷다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이.” 쥬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소녀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따지고 보면 그의 실수는 아니었다. 트레이는 여타 물건으로 가득 차서 여학생의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 있었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뛰다시피 트레이를 끌던 그녀와 부딪히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쥬다스가 피하려고 해도 피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린 소녀에게 상처를 준 기분이었다. 그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일단 치워야겠단 생각에 쪼그려 앉아 손을 뻗자, 여학생이 그 손을 꼭 붙들었다. “아, 안 돼요. 이거……. 그, 그냥 만지면 위험해서…….” 그 말에 다시 내려다보니, 유리 조각들은 정체 모를 연기를 뿜는 액체에 뒤덮여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녹아내린 부분도 있었다. 그들이 멈칫한 사이 지나가던 메이드들이 이를 발견하고 다가와 대신 치워주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솜씨로 말끔히 쓸고 닦아지는 돌바닥을 응시하던 쥬다스는 미안함을 담아 여학생에게 고개를 숙였다. “정말 미안하다.” “아니, 아니에요. 다시…… 만들면 되니까.” “만드라와 케티웁스 증류수가 섞여 있던데, 혹 맹독성 의약품을 연구하던 중이었나?” 비커에 담겨 있던 것은 대부분 산이나 독성분을 띠고 있는 액체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의약품에 들어가는 성분이었기에 이를 알아본 쥬다스가 묻자, 여학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약에 대해 아세요? 그치만, 이건 힐링 푸드 재료였는데.” 힐링 푸드(Healing food), 말 그대로 치료를 돕는 음식이다. 급격히 저하된 체력을 증강시킬 때, 혹은 상처를 입는다든지, 중독되거나 탈이 났을 때 섭취하면 빠른 회복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환부에 바르는 약과는 다르게 자체적인 회복력을 촉진시키는 데에 그 의의가 있었다. 여학생의 말에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흠, 힐링 푸드 재료치곤 좀 위험해 보였는데.” “아직 연구 중이라서…….” “아, 거기에 시톤 성분을 잘 섞으면 중화 작용이 일어나서 독을 와해하는 용도로는 쓸 수 있을 게다. 비율이 좀 까다롭긴 하다만.” “에?” 여학생은 고개를 반짝 들었다. 해독에 효과를 보이는 힐링 푸드는 그 가짓수가 상당히 적었다. 특히 맹독 계열에는 같은 맹독이 필요하여 연구가 까다로웠다. 자연히 그에 대해 정보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의 말이 사실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나 성분 조합에 대한 힌트 정도는 될지도 몰랐다. 여학생은 실험 욕구에 휩싸여 눈을 빛냈다. “시톤 성분이요? 해, 해볼게요!” 의욕이 과해 트레이를 놓고 달릴 뻔한 학생은 황급히 돌아와 트레이를 끌며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저, 고마워요!” “…….” 급하게 달려가는 뒷모습에 대고 쥬다스는 멀거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뭔가 소심한 듯하면서도 정신없는 소녀였다. 재료를 쏟게 된 것보다도 힌트를 얻는 게 훨씬 중요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처음 보는 쥬다스의 말을 덥석 믿고 달려가는 게 상당히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10살 소녀다운 모습에 쥬다스는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도 쥬다스는 어김없이 밝은 인사와 함께 바이칼의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바이칼, 오늘은 바람이 참 좋더구나. 아마 봄비가 올 모양이야.” “……대체.” 질렸다는 얼굴로 바이칼은 제 옆자리에 앉은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바람이 분 건지 최근 열흘 사이 단 한 차례의 지각, 결석이 없었다. 꾸준히 수업에 참석하는 걸로도 모자라 어미 쫓는 새끼오리마냥 졸졸 따라와 이렇게 나란히 앉기도 했다. 앉는 자리까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굳이 자신이 다른 자리로 옮겨가기엔 더욱 불쾌했다. 같이 다니는 무리가 있긴 했으나 굳이 몰려 앉고 싶지 않아 대충 자리를 잡았던 게 실수였다. 결국 쥬다스의 막무가내식 접근에 바이칼은 반포기 상태로 대응하게 되었다. “비는 무슨, 구름 한 점 없었는데요.” “허허, 구름은 없다가도 금방 또 생기는 것이란다.” 게다가 말을 섞게 된 이래로 알게 된 특유의 할배 말투. 바이칼은 눈을 가늘게 뜨며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요즘 왜 그러시는 겁니까?” “으응?” “저한테, 아니, 그냥 전부 들쑤시고 다니는 것 말입니다. 그래 봤자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데요. 왜, 이제 와서 후회라도 드십니까?” 비꼬는 말에도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곤 이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구나, 후회.” “…….” 당당하게 과오를 인정하는 모습에 바이칼은 또다시 할 말을 잃어버렸다. 변한 백로황자는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예전 같았더라면 무시하거나 비꼬는 말 한마디면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져 꿈쩍도 못했을 터였다.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면 덜 우스웠을 텐데, 그에겐 그마저도 버거운 행동이었던 듯 망부석처럼 한참이나 그 자리에 못 박혀 있곤 했다. 그러고 나면 한동안 크게 앓거나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오더라도 바이칼이나 다른 학생들과 눈도 못 마주치고 홀로 떨어져 구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조용히 존재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어떤가. “포기하지 말아볼 걸 그랬다고 느꼈지. 하니 이번엔 그리 살아볼 생각이야.” 부드러운 힘이 깃든 금색 눈동자를 보며 바이칼은 생각했다. ‘달라. 예전의 백로황자가 아니다.’ 변화 커브는 급격했다. 마치 당장에라도 죽음을 앞둔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를 움직이는 게 간절함인지, 아니면 단순한 변덕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대화 이후로 바이칼의 날선 태도는 한층 누그러졌다. 그렇다고 쥬다스를 좋게 보는 건 아니었다. 이전처럼 무시를 하지 않았다 뿐이지, 살갑게 대해 주거나 제국의 1황자로서 인정하진 않았다. 그래도 쥬다스는 이 작은 변화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한평생 대현자로서 살아왔던 그에게 단 한 가지 어설프고 미숙한 점이 있다면 ‘대인 관계’였다. 사람과 어울려 사는 것을 포기하고 정령들과 함께 자연으로 도망치듯 등 돌렸을 때만 해도 분명 지치고 힘들었다. 아무리 해봐도 ‘가족’이나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다. 이는 인간관계에 미숙한 ‘이그레트’로서 나름 불안 불안한 도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을 실패했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는 없었다. 「이그레트!」 촤아악.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가 고개를 들었다. 미술과 수업이 끝난 교실 창문틀에 미술에 사용한 붓 세척용 물통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의도적으로 쥬다스에게 겨냥하여 쏟은 게 분명해 보이는 물통은 말끔히 비워진 채 방울만 떨구고 있었다. 위생적으로 더러운 물은 아니었지만, 물감이 뒤섞여 흡사 흙탕물과 같은 세척수를 뒤집어쓰게 된 쥬다스의 교복이 온통 얼룩덜룩해졌다. 난데없이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다. 누가 봐도 고의였지만, 쏟은 가해자가 보이지 않으니 뭐라 따지기도 어려웠다. 이를 목격한 학생들은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이내 등을 돌려 쥬다스를 지나쳐 갔다. “…….” 들릴 듯 말 듯 흘리고 지나간 비웃음에 쥬다스의 눈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작게 한숨을 뱉은 그는 홀딱 젖은 재킷을 벗어 팔에 걸쳤다. 다른 학생들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쥬다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숙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왜 막아달라고 하지 않았어?」 “…….” 「이그레트!」 “진정하려무나.” 잔뜩 고양된 유니의 부름에도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정령은 계약자가 원하지 않으면 그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설령 계약자가 큰 위기에 처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자연이란 그 의지를 가지고 개입해선 안 되는 법. 계약자의 바람 없이 독단으로 움직일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만일 이를 어긴다면 그에 따른 큰 징벌을 받는다. 정령왕이라 할지라도 그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랬기에 유니는 분이 머리끝까지 차올라도 그저 바라보고만 있어야 했다. 그녀의 기분을 감지한 바람이 거칠게 날뛰었다. 펄럭이는 옷자락을 살짝 쥔 쥬다스의 손에도 물감이 묻어 얼룩져 있었다. “……무서워하게 만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는 거란다.” 「그게 뭐야! 저딴 인간들, 뭐가 그렇게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나한텐 네가 다치는 게 훨씬 무서워.」 “이런, 이런. 유니.” 「네 바람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어. 하지만 이그레트.」 똑- 이미 젖은 이마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하나 더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자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먹구름으로 가득해 있었다. 아침에 그가 말한 대로였다. 그 한 방울을 기점으로 하늘에서 점차 많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네가 괴로운 건 싫어…….」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마치 정령의 눈물과도 같은 녹색 봄비였다. 물감 세례로도 모자라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나기까지 쫄딱 맞고 숙소로 들어온 쥬다스는 그날 밤새도록 열감기에 시달려야 했다. 약해빠질 대로 약한 육체는 잠깐의 한기에도 금방 균형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아침이 되자, 쥬다스는 여벌의 교복을 차려입고 교사(校舍)로 향했다. 가는 도중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하는 그를 보며 유니가 초조하게 주변을 날아다녔다. 「정말! 오늘은 그냥 쉬라니까, 이그레트.」 “괜찮단다. 단순한 감기야. 이전에 앓았던 거에 비하면 말짱허이.” 「그땐 죽어갔던 거고-」 유니는 걱정스러운 한숨과 함께 그의 곁을 지켰다. 이미 수십 년간 그의 고집을 겪어온 정령은 소용없음을 알았기에 더 이상 만류하길 포기했다. 경제학 교실이 있는 건물은 평소에도 숨이 찬 거리였지만 오늘은 현기증이 다 일어날 지경이었다. 어찌어찌 교실에 무사히 도달은 했으나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털썩. 기대다시피 옆자리에 앉는 쥬다스를 발견한 바이칼이 읽고 있던 서적을 탁 덮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사족을 덧붙이자면, 사실 쥬다스(이그레트)는 정령왕의 조력만으로도 충분히 사기급이긴 한데 마음은 상당히 여린 타입입니다. 그러니 한때 사회에 제대로 못섞이고 낙오(?)됐겠죠. 당시 이용하려던 사람들도 문제였지만 이그레트 자체도 문제가 많습니다. ㅎㅎ 아, 지금은 심지어 체력도 약해졌으니까... ...외유내유?(...)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8 / 0240 ---------------------------------------------- 1장. 백로황자 “말씀대로 어제 소나기가 내리더군요. 혹 기상을 읽을 줄 아십…… 음?”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부드럽게 웃으며 건넨 인사에도 바이칼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은 채 그를 훑어보았다. 열이 올라 벌게진 얼굴이며 식은땀에 젖은 앞머리 따위가 쥬다스를 충분히 병자로 보이게 만들었다. 바이칼은 이를 지적해야 할지 아니면 못 본 체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저 입을 다물었다. 백로황자가 체질이 허약하단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안색은 원래 항상 창백했고, 잔병치레가 잦아 결석을 밥 먹듯이 해왔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딱 봐도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인 상태로 수업에 나타난 적이 없었기에 생소하게 느껴졌다. ‘정말 여러모로 예측하기 힘든 자로군.’ 바이칼이 혀를 차는 사이 쥬다스는 그가 덮어놓은 책 표지를 알아보고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일종의 루바르잔 제국 위인전이었다. 위인 범주는 대다수가 루바르잔의 황족과 귀족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아주 가끔씩 일반 평민 중에도 위인으로 칭송받는 경우가 있다. 큰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무예가나 제국 문물 발전에 이바지한 상인, 혹은 대마법사처럼 이능으로 이름을 떨친 자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에 무게가 실렸다. “그중에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인고?” 쥬다스의 시선이 책에 가 있음을 알고 있던 바이칼은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이그레트.” “응……?” 정령이 아닌 다른 상대로부터 이름을 불린 게 얼마만인지 몰랐다. 물론 바이칼은 그를 알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대현자 이그레트입니다. 그가 가진 지성, 현식(賢息), 4대 속성 정령을 모두 부렸다는 그 능력까지 전부.” 겹치는 수업들만 놓고 봐도 짐작할 수 있듯이 바이칼은 무(武)보단 문(文), 즉 학구파였다. 그는 학문적으로 뛰어난 이들을 주로 인정했고, 그중 대현자라 일컬어지는 이그레트는 단연 최고였다. “강한 자는 존경받아 마땅하니까요.” 마치 ‘너 따위는 그렇지 못하니 무시 받는 거다’란 어투였다. 일면은 존경받으면서 동시에 현재의 일면은 무시당한 셈이 되어버린 쥬다스는 그저 허허롭게 웃을 뿐이었다. 경제학 시간이 끝나고 이어서 그는 바로 봉술 수업을 위해 움직였다. 열이 전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어차피 평소에도 힘이 없던 몸이 좀 더 맥아리가 없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한 쥬다스는 체육관 세트에서 차가운 훈련용 봉을 집어 들고 자리로 향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단도 그의 안색을 보더니 상태를 곧장 알아차렸다.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거 참, 그동안 매번 쉬었거늘 또 쉬라는 게야?” 올 때마다 쓸리고 까져 구경만 하곤 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뜻하는 농담 겸 사실에 에단의 표정이 살짝 난감함에 물들었다. 가뜩이나 유약했던 황자가 열이 올라 골골거리며 나타나기까지 하니 더욱 병약해 보였다. 툭 건드리면 쓰러질, 아니, 저대로 봉을 든 채 가만히 내버려 두기만 해도 제풀에 지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요 며칠 봉술 수업의 파트너로 임하면서 쥬다스를 관찰해 온 에단은 이 백로황자가 사실은 제법 강단 있고 심지가 굳은 편임을 알고 있었다. 또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며 매사에 긍정적이다. 그런 쥬다스의 모습은 에단이 보기에 좋은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썩 호의적일 건 없어도 어울릴 만한 상대라 생각하게 되었다. 때문에 에단은 그가 무리하는 모습이 조금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안색이.” “괜찮단다. 고마우이.” 고개를 저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의 고집에 에단도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봉을 잡았다. 당연한 수순대로 오늘도 연습 결과는 처참했다. 봉을 들고 휘두르거나 막는 자세까진 훌륭하게 시연했으나, 가볍게 맞부딪치는 타이밍에 그 전해져 오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봉을 놓치고 구르다시피 넘어지고 말았다. 에단이 놀라 다가가자 쥬다스는 비틀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떨어뜨린 봉을 주워들었다. “미안하구나. 다시 해봐도 괜찮…….” “세상에, 쥬다스 님!” 교사 메이란이 달려와 다시 연습에 임하려는 쥬다스를 붙잡아 세웠다. 그러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열을 재곤 심각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열이 상당한데? 치료사한테는 가본 거야?” “…….” 말로 하진 않았어도 쥬다스의 태연한 표정에서 답을 읽어낸 그녀는 푸욱 한숨을 내쉬며 그 손에서 봉을 뺏어들었다. “서둘러 가보도록 해. 에단 학생, 미안하지만 쥬다스 님과 함께 가주겠나?” “예.” 사양할 틈도 주지 않고 메이란은 쥬다스를 떠밀어 에단과 함께 체육관에서 내보냈다. 루바흐 학원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시설 곳곳에 양호실을 설비해 두었다. 특히 다치기 쉬운 체육관 바로 옆에도 고급 치료사가 상주하는 양호실이 존재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 에?” 양호실에 들어서자마자 보조 업무를 맡은 여학생이 쥬다스를 알아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쥬다스 역시 그녀를 알아보았다. “으음? 이렇게 또 보는구나. 반갑구만.” “가, 감사했어요! 그때, 비율을 몰라 고생하긴 했지만…….” 일전에 쥬다스와 부딪히는 바람에 비커를 깨뜨렸던 그 소녀였다. 당시에 힐링 푸드를 만들고자 하는 그녀에게 팁을 알려줬었고, 이는 아마도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성공…… 했거든요. 헤헤.” “리이나? 환자가 온 게 아니었니?” 안쪽에서 들려온 치료사의 목소리에 소녀는 화들짝 놀라며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 그, 그으…… 어디가 아프신, 누가.” 방황하던 시선은 이내 자연히 쥬다스에게 고정되었다. 병색이 완연한 그의 모습에 소녀가 다시금 허둥대자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허허, 그저 감기 때문에 왔단다.” 다독여지는 손길에 소녀는 진정하고 그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치료사는 푸근한 인상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차트에 쥬다스의 이름을 받아 적은 치료사가 열을 재더니 곁에 선 소녀를 향해 고갯짓했다. “리이나, 해열제C1과 종합 감기약, 그리고 강장제 3일 치.” “네!” 약을 가지러 간 사이 치료사는 한 차례 더 쥬다스의 상태를 살폈다. “쥬다스 님에 대해서는 전달받은 사항이 많아 익히 알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놀라울 정도로 신체가 약하시군요. 어디, 요즘 생활하기엔 어떠신지요?” “……으음, 괜찮습니다. 힘이 좀 없긴 하지만 점차 나아지고 있고.” “나아졌다고 해봤자 몸의 기능 대부분 정지하다시피 한 상태예요. 절대 무리하지 마셔야 합니다.” 애초에 한참 성장해야 할 나이인 12세의 몸이 아니었다. 유아나 다름없는 쥬다스의 외형에 치료사는 주의에 주의를 덧붙였다. 그러던 사이 약을 봉투에 담아온 소녀가 쥬다스에게 이를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저어, 손을.” “……?” 악수하자는 의미인가 싶어 내밀어 잡자, 소녀가 이를 양손으로 감싸듯 쥐고 눈을 감았다. 우웅! 그 손길 아래 따스한 분홍빛 기류가 모여들었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맑은 분홍색이었다.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흡수되자 몸이 한층 개운한 느낌이 들었다. 쥬다스가 눈을 끔뻑이며 소녀를 쳐다보았다. “이건 치유력?” “리이나, 이 아이를 여기 보조로 둔 큰 이유죠. 후후, 감기 정도는 금방 나으실 겁니다.” 치유력은 정령술만큼은 아니었으나, 꽤나 보기 드문 이능(異能) 중 하나였다. 일반 의학 지식만을 가지고 치료에 임하는 자들을 치료사라 부른다면, 타고난 치유력 순식간에 상태를 회복시켜 주는 이들은 치유술사라 부른다. 대현자라 불렸던 시절에도 자주 접해본 적 없는 생소한 능력이었던 탓에 쥬다스는 흥미로운 눈으로 리이나를 응시했다. 치유력으로 쥬다르의 치료를 마치고 눈을 뜬 리이나는 그 시선에 화악 얼굴을 붉히며 손을 놓았다. “도,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벌써 개운하구나. 고맙단다. 리이나.” 기특하다는 듯 빙그레 웃는 얼굴에 리이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꼭 아빠 같아…….’ 그렇게 생각하던 리이나는 제 생각에 놀라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실제 쥬다스가 그녀보다 2살이 많긴 했지만, 나이를 떠나서 저보다 작은 아이를 보고 아빠 같다니. 누가 들으면 대소할 이야기였다. 양호실을 나온 쥬다스는 에단에게도 감사의 뜻을 전했다. “……페어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내 얼른 힘을 길러 제대로 합을 맞추도록 함세.”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무리가 아니야. 이는 노력이라 하는 거란다.” 조곤조곤한 어투에 에단은 힐끗 그를 내려다보았다. 약하다곤 알고 있었지만 조금 전 치료사의 말은 꽤나 충격적이었다. ‘몸의 기능이 정지했다…… 라.’ 순혈일수록 그 건강이 약하다는 말은 들어본 적 있었다. 하물며 짐승들도 잡종이 더 튼튼하고, 초대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한 채 태어나는 순혈들은 대개 허약한 편이었다. 1황자는 그야말로 루바르잔 황조의 현신과도 다름없는 외형이었다. 티 없는 은발과 보석 같은 금안은 잡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원색 그 자체였다. 색뿐이 아니라 생김새마저 초상에 그려진 조상을 그대로 빼닮았다. 그리하여 처음 황자가 태어났을 때 현 황은 크게 기뻐하며 그를 품에 안았다. 완벽한 외형에 가려 크나큰 결함이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에단이 이를 신경 쓰는 사이 체육관 앞에 도달했다. 약 3시간에 걸친 수업인 만큼 아직 반도 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파서 양호실까지 다녀온 판에 쥬다스를 연습 과정에 참여시킬 순 없었다. 이번에도 구경꾼 신세가 되어버린 쥬다스는 메이란이 학생들을 집합시킬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학생들을 열 맞춰 세운 메이란은 양피지를 한 장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고급 가죽으로 제작된 양피지의 상단엔 커다랗게 성전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선작 100넘은 기념으로 한 편 더 들고 왔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꾸벅) 또 사족을 달자면 주인공은 노인답게(?) 한고집합니다. 이그레트 시절엔 그 황소고집에 정령들이 제일 고통받았다고.... 그럼 오늘 밤이나 내일 중으로 다시 오겠습니다. ㅎㅎ BlindSpot 님, kjs1885 님, 소라아카리 님, DSN 님, 오남사여 님, 이스센 님, 버츄얼 님 댓글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09 / 0240 ---------------------------------------------- 1장. 백로황자 “자, 지금 나눠준 건 교황 성하의 전달 사항이야. 매년 이맘때쯤 있는 행사니까 다들 짐작은 하고 있었지?” 메이란은 허리에 한 손을 얹고는 씨익 웃었다. “교황청 현장 학습이다.” 양피지에 적힌 내용은 학원 루바흐의 15세 이하 재학생이라면 매년 권고받는 사항이었다. 제국 제일의 인재 양성 학교인 루바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비단 황실이나 귀족 사회뿐이 아니었다. 황권보다는 뒤쳐져 있으나 충분히 그 영향력을 펼치고 있고 불가침 영역을 지정할 권한마저 가지고 있는 성전(聖殿) ‘엘리시움(Elysium)’. [돌아오는 순행절에 진명을 받으러 오라.] 진명은 교황청에서 직접 내려 받는 이름을 뜻한다. 이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권고 사항일 뿐 강제는 아니었으나, 웬만해서는 이를 받으러 교황청 방문을 택했다. 이렇게 해서 내려 받은 진명은 앞날에 축복을 내려주며, 본래 가지고 있던 이름 사이에 알파벳 초성 형태로 자리 잡아 기록된다. 따로 발설하지 않는 이상 본인 이외에는 공개되지 않는 이름이 바로 교황청의 진명이다. 그러나 문제는 교황청의 위치에 있었다. “아, 귀찮은데.” “이거 15살까지 하면 된대. 내년에 가자.” “미리 다녀오는 게 마음 편하지 않아?” 학생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제국의 서쪽에 자리 잡은 학원 루바흐와 달리, 교황청은 수도에 위치해 있었다. 한 번 다녀오려면 열흘은 족히 걸리는 일정이었다. 진명을 받으러 간다고 하면 학원 측에선 수업 출석 일수로 인정해 주긴 하였으나 그보다 시간이 아까운 게 문제였다. 시끄러운 학생들 틈에서 쥬다스는 조용히 양피지를 정독했다. 양피지의 하단에는 루바흐 학원의 인장과 함께 주의 사항이 함께 붙어 있었다. 출석 일수 인정 요건 및 학원을 벗어나는 데에 필요한 여러 확인증에 관련해서였다. [단, 신청자에 한해 배정되는 3인 1조로 움직일 것.] “……3인 1조?” 보호자가 따라붙는 대신 조 편성을 하는 모양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학원 측에서 알아서 조 편성을 해준다는 점이었다. 쥬다스는 턱을 매만지며 양피지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숙소로 돌아온 쥬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유니.” 「응, 이그레트.」 그의 부름에 정령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포로록 날아와 앉았다. 기분 좋은 듯 그 손끝에 뺨을 부비는 유니를 보며 쥬다스도 함께 미소 지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아해의 몸으로 살아가게 될까.” 「글쎄? 우린 네가 계속 있어주길 바라긴 하지만.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으음. 어느 수준까지 내 멋대로 행동해도 좋을까 하여…….”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는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본 유니가 넌지시 찔러 물었다. 「……받고 싶은 거지? 이름.」 눈치 빠른 유니의 정곡에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청에서 준다는 진명. 이는 10세에서 15세까지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세례명이었다. 일반적인 세례명과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이름을 받는 이가 어느 정도 자기 의지를 가지되 아직 그 순수함이 남아 있을 시기만을 허가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성전에 기록되어 본인이 스스로 밝히지 않는 한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않는 귀하고도 성스러운 이름으로 취급된다. 황권과 신권이 균형을 맞추고 있는 시점에서 교황청이 내리는 또 하나의 이름인 진명은 모든 귀족가 아이들에게 있어 필수 코스나 다름없는 선택지였다. 현황인 레위스 G.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역시 그 나이 때 교황으로부터 진명을 받았다. 이름 가운데 들어간 G는 진명의 초성에 해당하는 알파벳이었다. 그 G가 정확히 어떤 단어를 뜻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이정표를 하나 세워 두었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구나. 허허, 다 늙어서 부리는 주책일꼬.” 「그 얼굴로 그런 말하면 되게 안 어울리는 거 알아?」 유니는 바람을 일으켜 그의 얼굴 옆선을 타고 흐른 땀방울을 식혀주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이그레트. 혹시 알아? 그대로 네가 평생을 살게 될지.」 “그건 좀 슬픈 일이지 않누. 이 아해는 하고 싶은 게 많았던 것 같던데…….” 「그-러-니-까! 넌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 없대도? 네가 사용하고 있는 이상, 지금 그 몸의 주인은 너야.」 정령들의 사랑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오로지 단 한 명을 향했다. 그 맹목적인 애정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뒤로 누웠다. 새의 깃털로 채워진 푹신한 베개의 촉감이 머리를 감쌌다. 고단했던 몸은 얼마 안 가 깊게 잠에 빠져들었다. ‘쥬다스’로 생활한 이래 처음으로 꿈을 꾸었다. 짧았지만 분명 쥬다스의 육신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일부였다. 지금보다 훨씬 어린 쥬다스가 누군가와 함께 서 있었다. 아니, 단순히 가까이 있다고 해서 함께라고 칭하기는 어려웠다. 짝! 고개가 돌아갔다. 그럼에도 아이는 울지 않는다. 고통에 반응한 눈시울이 자연스레 붉어지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갑작스러운 손찌검에 놀라 작은 손을 들어 올려 뺨을 매만지자 꿈인데도 후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쓸모없는 것.” “…….” 죄송해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사죄가 아이의 혀끝에서 맴돌았다. 뺨을 맞으면서 손톱에 긁혔는지 피가 새어 나왔다. 작은 손가락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상대는 휙 몸을 돌려세웠다. “분하구나.” 쨍그랑! 평소 아끼던 화분이 맥없이 깨어져 사방으로 튀었다. 화분을 깨뜨린 여인이 붉은 입매를 고고히 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 안심하려던 찰나, 이번엔 깨진 조각을 집어 들었다. 휙 허공으로 들리는 조각의 반사경에 하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이 비쳤다. “……!” 안 돼, 막아야……. 어린 쥬다스의 마음과 동화된 이그레트의 염원이 누군가를 강하게 불렀다. 그리고 동시에 꿈에서 깨어났다. 잠이 든 쥬다스의 머리맡에 앉아 무언가 상념에 빠져 있던 유니는 심상치 않은 낌새에 놀라 반짝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이그레트!」 드드득- 허공에 날아오른 유니의 시야에 가볍게 진동하고 있는 대지의 흐름이 보였다. 위태롭게 흔들거리던 책장에서 책이 우수수 쏟아졌고 선반 위에 올려 둔 찻잔이 몇 개 떨어져 깨어졌다. 때아닌 지진에 유니는 표정을 굳히고 쥬다스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이그레트.」 그 이마를 조심스레 쓰다듬는 순간, 거짓말처럼 진동이 멈췄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쥬다스를 보며 유니는 걱정스레 다시금 그를 불렀다. 「이그레트, 괜찮아?」 “……으응?” 잠에 취한 눈으로 멍하니 유니를 올려다보던 쥬다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물끄러미 덮고 있던 이불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유니의 고개도 돌아갔다. 유니는 걱정하던 것도 잊고 꺄욱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이불을 향해 삿대질했다. 「너, 너어!」 「……히끅…….」 거기엔 유니와 똑같은 날개를 단 작은 정령이 하나 주저앉아 있었다. 황토빛깔 머리카락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어 눈까지 가려진 소년 형태의 정령은 어깨를 바들바들 떨며 이불에 파묻혀 울먹거렸다. 이를 본 쥬다스가 그를 향해 다정하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련, 토니.” 「우우…… 이그, 레트으으. 후아앙!」 흙색으로 빛나는 정령은 쪼르륵 내민 손에 달라붙어 서럽게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유니는 올 게 왔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땅의 정령왕 ‘토니’, 이그레트의 부름에 응답한 두 번째 정령이었다. *** 토니는 뭐가 그리 서러운지 한참을 울었다. 자다 깨어 난데없이 우는 정령을 직면한 상황에 놓인 쥬다스는 난처한 웃음을 지은 채 기다려주었다. 제풀에 지쳐 울음을 그친 토니는 쥬다스의 손에 껌딱지처럼 매달려 칭얼거렸다. 「보고 싶었다요, 이그레트.」 “나도 마찬가지란다. 허허.” 「죽 기다렸는데, 부르지 않아서. 이제 우릴 잊어버린 건가 했다요…….」 생김새부터 말투까지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아이 같은 토니는 어리광도 잘 부렸다. 시무룩한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토니에게 쥬다스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 내게 너희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친우들이었거늘. 한데 그 말인즉, 너희는 모두 내가 여태 세상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는 게야?” 「웅?」 「당연하지, 이그레트. 넌 우리의 계약자잖아. 부르지 않는다면 먼저 찾아올 수야 없지만 너의 존재만큼은 느낄 수 있어.」 고개를 갸웃하는 토니 대신 유니가 도중에 끼어들어 답변했다. 그런 그녀를 이제야 발견한 토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유니?!」 「어, 응.」 「요즘 갑자기 안 보여서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괜찮아. 내가 너보다 먼저 와 있었으니까.」 심드렁한 대꾸에 토니가 움찔 날개를 떨었다. 앞머리에 가려져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불편함을 드러낸 굳은 입매가 씰룩였다. 「……유니가 먼저?」 「어머, 왜? 이그레트가 제일 먼저 부른 정령이 나라는 데에 불만이라도 있어?」 「거짓말! 나보다 유니가 더 보고 싶었던 거다요?」 토니가 빼액 반발하자 유니는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남매간 유치한 말다툼을 하듯 투닥거리는 두 정령을 바라보던 쥬다스가 부드럽게 그들을 달랬다. “둘 다 그만하련. 보고 싶지 않아서 늦게 부른 게 아니란다, 토니.” 「훌쩍, 그럼 왜……?」 “…….” 그의 금안이 따뜻하게 정령들을 담았다. “내가 부르면 너희는 결코 내 곁을 떠나려 하지 않을 테니까.” 그에게 있어 정령은 무엇보다 소중한 친우들이었다. 동족조차 외면하여 배신의 칼에 피 흘렸던 자신에게 친구이자 가족이 되어준 이들. 그런 이들에게 잠시라도 자유를 주고 싶었다. 언젠가 부르더라도 최대한 늦게. 그런 면에서 눈을 뜬 뒤 제일 처음 곁으로 불러낸 유니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쥬다스의 마음을 알아차린 유니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당연하잖아. 그건.」 “……허허.” 쥬다스는 정령들을 손에 보듬은 채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노곤한 육신에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기 힘들었다. 신뢰하는 이가 곁에 둘이나 있다는 것은 상당히 안심되는 일이었다. 예기치 못하게 토니를 불러낸 것은 미안했지만 이미 불러낸 이상 그 곁에서 다시 사라지는 일은 없을 터였다. 그는 수마에 저항하지 않고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악몽을 꾸지 않길 바라면서.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선작 200찍은 걸 발견하고 부랴부랴 들고 왔습니다. ㅎㅎ 응원 감사드리고, 선추코 모두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ㅠㅠ 신입글쟁이에겐 정말 가뭄의 단비와도 같네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BlindSpot 님, 김햇살 님, 오남사여 님, 애플앗쿠림 님, 초코라양 님, 에리나 님, 시르에리안 님, 우비짱구 님, 오르비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0 / 0240 ---------------------------------------------- 2장. 진명식 학원 루바흐에서는 진명식에 참가신청을 낸 학생 명단을 취합하여 교황청으로 향하는 날짜를 지정해 준다. 학생 개개인의 능력을 고려하여 3인 1조로 배정해 주기 때문에 딱히 따로 인원을 모을 필요는 없었다. 무작위로 결성되는 팀에는 불만을 가질 수 없다. 이 기회에 뭉치는 사람끼리만 뭉칠 게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세우라는 학교 측의 뜻도 섞여 있었다. 친한 사람과 떨어지게 된 학생들은 그 사실에 아쉬워했지만 쥬다스로서는 이 편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친하다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었거니와, 오히려 피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출발 당일 교무처에서 만난 이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쥬다스 님?” “허어, 이거 참 반가운 우연이로구나. 에단.” 시간보다 한참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던 쥬다스가 반갑게 손을 들어보였다. 에단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이곤 다가왔다. “진명식을 이번 절기에 신청하셨을 줄은.” 12살인 쥬다스에겐 아직 3년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진명은 15세가 지나기 전에만 받으면 된다. 실제 많은 이가 충분히 뒤로 미룬 뒤에 교황청을 방문하곤 했다. 특히나 몸이 약한 그라면 당연히 미룰 것이라 예측했던 것이다. 쥬다스는 에단의 말뜻을 이해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기회란 주어졌을 때 잡지 않으면 곤란하니 말이야. 왜 그러누? 혹, 주책 같아 보이느냐?” “……그런 뜻은 아닙니다.” “하면?” 알면서도 물어오는 짓궂은 금안을 마주보며 에단은 하는 수 없이 마주 미소 지었다. “강인해 보이십니다.” “원 녀석도.” 그를 괴롭히는 체력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진명식에 참가하는 모습이 강인하게 느껴진 건 에단의 진심이었다. 에단은 눈앞의 백로황자가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하길 고대했다.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무시받기는커녕 제국의 1황자로서 전혀 무리 없는 위용을 떨칠 수 있으리라. 아직 같은 조원 한 명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교무처 로비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구성이 모두 모인 팀들이 속속들이 출발하는 모습이 보였다. 오늘 출발하는 팀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이대로 마지막 조원이 오지 않는다면 자동으로 일정은 취소였다. 학원 측에서 교황청 방문을 허가하기 위하여 요구하는 조건이 반드시 3인 1조를 유지하도록 함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출발 대기 시간이 거의 끝나가자 에단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진득하니 기다려 보거라. 여직 시간이 남았으이.” “곧 끝납니다.” 에단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엄격한 무예가에서 자란 그는 매사에 칼 같은 면모가 있었다. 절대 꾀부리지 않고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며, 시간 관리에 철저했다. 대기 시간이 끝났을 때 와봤자 허가증을 받지도 못할뿐더러, 그런 불성실은 염두에 두고 싶지도 않다. 그리 생각한 에단은 1황자를 흘끗 돌아보았다. 저보다 오래 기다렸을 쥬다스의 표정은 오히려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아직 좀 더 남았지 않느냐.” “……올 것이라면 진작 왔어야 합니다. 이 이상 기다리는 건 무의미하다 봅니다.” 그때였다. 그들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멋대로 떠들다니, 교양 없긴.” 그들의 마지막 조원인 크리스티나 델피아였다. 크리스티나는 말하자면 루바흐 학원의 여왕이었다. 14살 소녀라곤 생각하기 어려운 차갑고 도도한 태도와 루바르잔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델피아 공작가 출신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학생들 사이 거대한 팬층을 보유했다. 길게 늘어뜨려 끝으로 갈수록 연해지는 특이한 바닷빛 머리카락과 더불어 청순형 미인이라는 사실도 그에 한몫했다. 같은 수업을 들어도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학생이 수두룩했다. 평소 그녀를 따르던 추종자 없이 홀로 나타난 것 자체가 이례적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에단은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원래 주로 무표정이라 티가 나진 않았으나 적어도 여기 모인 두 사람은 알아볼 수 있는 변화였다. 그의 입에서 크리스티나 못지않은 서늘한 음색이 흘러나왔다. “……팀 전체에 민폐를 끼치는 자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이 내가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가치가 있을까.” 금방이라도 쩌적 갈라질 듯한 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는 건 쥬다스뿐이었다.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얘야. 에단 이 아이가 네가 오길 많이 기다렸단다.” “……당신.” 또래로부터 들어본 적 없는 말투에 크리스티나의 도도하던 표정이 잠시 허물어졌다. “그럴 땐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되지 않겠누.” 잠시 그를 내려다보던 크리스티나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후……, 그래. 틀리지 않은 말이네. 늦은 건 미안하게 되었어.” 그녀의 깔끔한 사과에 에단 역시 덤덤히 답했다. “괜찮습니다.” 공작가 자제 둘과 황자의 조합이란 무작위 배정치고는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쥬다스는 이 3인의 조합이 우연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에단을 보자마자 의도된 구성임을 눈치챘다. 황제의 총애대로 1황자가 황태자위에 오른다면, 이 세 사람은 반드시 친밀한 유대감을 가져야 마땅하다. 설령 황자로서 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쥬다스는 황실에 꼭 필요한 말 중 하나였다. 그는 학원 역시 인간 사회의 일부임을 실감하며 쓰게 웃었다. ‘겉으로는 파벌을 만들지 말라 하며 결국은 이리 짜임새를 틀어놓다니, 모순이구나.’ 3인이 모인 것이 확인되자 확인증이 발부되었다. 그들은 안전한 이동을 위해 학원 내 포탈로 안내되었다. 포탈은 제국의 넓은 땅덩어리 곳곳에 설치된 원소형 이동 장치였다.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만들어 낸 최고의 발명품으로, 이 포탈이 없었더라면 거대한 영토를 소유한 루바르잔 제국이 지금처럼 단결력을 보이지 못했을 터였다. 영토 전쟁 당시에도 유용하게 쓰였으며 지금처럼 귀한 가문의 자제들이 학원을 벗어나 이동할 상황에 필요한 시설이기도 했다. 물론 포탈만으로 단번에 루바흐 학원에서 수도의 교황청까지 이동하지는 못한다. 포탈이 인체에 무해한 한에서 닿을 수 있는 최대 비거리는 약 2천㎞. 잘 훈련된 병사라면 2만 킬로도 버틸 수 있다고 하나,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학생들은 안전 수치인 2천에 제한되었다. 때문에 교황청까지 가려면 하루에 한 번씩 특정 지방 포탈을 거쳐 이동해야 했다. 이 포탈의 원리를 확장시켜 보다 장거리 이동이 가능하게 만든 데에 이바지한 최고 공로자는 역시 이그레트였다. 단순 마법학만을 적용시키던 포탈에 그가 연구한 자연 4대 속성을 더해 최대한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주지 않도록 안전 설계를 더했다. 그래서 제국의 포탈은 그 후유증이 없기로 유명했다. 포탈 앞에 선 쥬다스는 예전에 비해 또 많이 발전한 장치를 눈으로 훑었다. “외출 확인증을 제출해 주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에단이 확인증을 내밀자 이를 확인한 포탈 관리자가 그들에게 주의 사항을 다시금 언급했다. “외출 기간은 열흘입니다. 무단으로 어길 시 해당 기간 수업의 학점에 반영됩니다.” 관리자는 사무적인 태도로 포탈을 작동시켰다. 마치 커다란 전신 거울처럼 생긴 포탈은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먹물에 물들 듯 새까맣게 변질되어 갔다. 마법력에 의한 공간의 분리였다. “미성년자의 포탈 이용 가능 횟수는 하루 1회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교황청 엘리시움이며 총 3일에 걸쳐 제1, 제2, 최종 목적지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지금 향하실 제1목적지는 샤를로 영지입니다.” 쿠오오. 포탈에서 마치 괴수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학생들은 물론 성인들마저 꺼려하는 굉음이었다. 그러나 세 사람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깔아보는 듯한 크리스티나의 도도한 눈빛과 무표정한 에단, 거기에 평안하기 그지없는 쥬다스의 표정까지 확인한 포탈 관리자는 내심 감탄하며 포탈을 향해 손짓했다. 출발 신호였다. 세 사람이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먹물 같은 에너지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학우 여러분의 안전한 외출을 기원합니다.” ***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을 때는, 출발할 때와 마찬 가지로 포탈 앞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샤를로 영지의 포탈 관리자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신분에 따른 공식 방문이 아닌 루바흐 학원 학생의 견학이나 다름없는 방문이었기에 그 외에 따로 예를 갖추는 이들은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샤를로 영주성입니다. 포탈 재이용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부터이니 이전까지 성에 머무시면서 자유 시간을 가지시다 복귀해 주시면 됩니다. 그럼 샤를로에서 편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관리자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그들을 안내하여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포탈 관리실 바깥쪽은 계단과 이어진 영주성 외곽이었다. 포탈 발전에 이바지했으나 정작 스스로는 장거리 포탈 이동 경험이 별로 없었던 쥬다스는 신기한 마음에 외곽 복도를 빙글 둘러보았다. 뻥 뚫린 난간에 손을 짚어 내려다보자 샤를로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샤를로 영지라.” 훅 불어온 봄바람에 가볍게 그의 은발이 휘날렸다. 그 뒤로 크리스티나가 휙 몸을 돌려 지나쳐 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정령들 이름은 계약할 당시 이그레트가 지었습니다. 본래는 따로 이름이 없다는 설정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술사가 부리는 정령의 이름을 모릅니다. 그리고 선추코, 감사드립니다! 저도 얼마전까지 독자입장이었던지라(물론 지금도)... 추천이나 코멘트 남기는 게 얼마나 번거로운 작업인지 익히 알고 있습니다. ㅠㅠ 이 감사는 진심입니다. 완결까지 죽 함께 달려주실 수 있다면 좋겠네요. ㅎㅎ BlindSpot 님, 나쯔히보시 님, 오르비 님, 차은하수 님, abcdxyz 님, 저겨꾼 님, 초코라양 님, 시르에리안 님, 불적절포지션 님, 쩡쩡쩡 님, 오남사여 님, windeuria 님, 마을청년1 님, Ylvis 님, 검은위습 님, 내가개뽕 님 코멘트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1 / 0240 ---------------------------------------------- 2장. 진명식 “자유 시간마저 같이 지낼 필요는 없겠지.” “어딜 가는 겁니까.” 에단의 찌르는 듯한 질문에 그녀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싸늘하게 돌아본 그녀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어투로 답했다. “내게 상관하지 마, 그대. 학원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 해줄 의무는 없으니.” “……내일 출발 시간, 늦지 마십시오.” “흥, 사서 걱정이로군. 학원 수칙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아.”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이 홱 돌아서서 계단을 내려가 버리는 크리스티나의 뒷모습에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꽤나 날이 선 아이로세.” “…….” 영 불쾌한 눈으로 그녀가 사라진 쪽을 보던 에단은 가볍게 한숨을 뱉었다. 여럿이서 한 조로 움직여 본 적 없는 건 에단도 마찬가지였다. 시작부터 삐꺽거리는 팀워크에 완벽을 추구하는 에단의 심기는 상당히 불편해졌다. 그런 에단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쥬다스가 손을 뻗어 난간 너머를 가리켰다. “가본 적 있느냐?” “……예? 아뇨, 샤를로 영지를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보통은 그랬다. 포탈을 이용하는 것은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그 절차가 까다로워 매우 급한 일이 아니면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루바르잔 제국은 쥐고 있는 강력한 국력만큼이나 그 보유 면적이 어마어마했다. 같은 루바르잔 사람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보지 못하는 영지가 수두룩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간 제국 동부 영토에서 머물러 온 에단이 서부 지역에 속하는 샤를로에 와보지 못한 건 비단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샤를로 영지를 처음 밟아보는 건 쥬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옛 생각이 나는구나.” “예?” “아니. 그보다 이거 참, 산보하기 좋은 날씨야.” 92년간 살아온 ‘이그레트’는 평민이었다. 제국 어딘가, 기억도 나지 않는 이름의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어쩌면 샤를로 근방을 지났을 수도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할 필요도 없이 그는 이리저리 흐르듯 살았다. 종래에,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의 칼날이 꽂히기 전까지는. 쥬다스는 곁에 있던 에단을 향해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은 제안을 했다. “어찌, 같이 가보련?” 무슨 생각으로 그 제안에 응했는지는 몰라도, 에단은 순순히 쥬다스를 따라 영주성 밖으로 나왔다. 따로 신분을 증명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루바흐 학원 교복이 그들의 신분증이나 다름없었다. 학원 루바흐에 다니는 학생은 주로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시험을 보고 일정 범위 이상에서 뛰어난 두각을 드러낼 경우와 가문이 지닌 재력과 권력이 막강할 경우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는다. 입학 기준이 까다로운 만큼, 학원의 이름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막말로 뛰어난 재능 없이 가문명과 돈으로만 입학하려 한다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 값은 지불해야 한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두 사람이 밖으로 나오자 자연히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러나 시선은 그리 오래 붙지 않았다. 샤를로 영지는 매년 진명식에 참가하는 루바흐 학생들이 포탈을 타고 들리는 거점 중 하나였다. 그랬기에 영지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안을 강화했고, 곳곳에 경비들이 파견되어 있었다. 또한 포탈 거점으로 지정된 이래로 루바흐 학원생뿐 아니라 주요 인사가 제법 많이 지나다녔고, 이에 익숙해진 주민들은 자연히 학생들에게 크게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그들보다 미리 도착하여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여럿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편안한 분위기로구나.” “……예.” 반박자 뒤늦게 돌아오는 응답에 쥬다스는 힐끗 에단을 올려다보았다. “어째 그러는고?” “……예?” “긴장한 것 같으이.” 평소와 다름없는 무표정이었는데 그 안에서 긴장감을 읽어낸 쥬다스를 놀란 시선으로 마주한 에단이 이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것이, 별 이유는 아니나.” “이런 거리에는 처음인가?” “……정말 쥬다스 님께는 숨길 수가 없군요.”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다. 감탄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에 쥬다스는 늘 짓곤 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대현자라서가 아니라 누구라도 92년쯤 살다 보면 십 대 어린아이들이 하는 생각쯤 추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된다. 상대가 설령 귀한 귀족가 도련님이든 아가씨든 아이는 결국 다 같은 아이였다. 그렇게 사실대로 대답할 수 없으므로 쥬다스는 미소를 지은 채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실은…… 호위 없이 무질서한 장소에 나와 본 일 자체가 처음입니다.” 재능이 분명하고 의지도 있으며 출신 가문까지 완벽한 공작가 도련님. 그의 인생은 태어나서부터 지금에 이른 15살까지 탄탄대로였다. 쥬다스는 왜 그런 에단이 굳이 학원 루바흐를 택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자꾸만 기척을 읽게 되는지라.” 에단 헤이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경험이었다. 그가 가문으로부터 피나는 노력을 통해 전수받은 검술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헤이가가(家)에서 사용하는 검은 칼등과 날이 구분된, 엄밀히 따지면 검(劍)이라기보다 도(刀)였다. 일반적으로 검이라 하면 양날로 구성된 곧게 뻗은 무구이다. 반면 도는 외날이며 살짝 휘어 있어 보다 베기 기술에 적합하다. 여기서 적합이란 베었을 때 그 파괴력이 강한 쪽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날붙이, 도를 사용한다는 것은 확실히 적의 숨통을 끊어 제압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잔기교 없이 묵직하게 베어 넘기는 도의 특성상 이를 다루는 무인에게 허점이 있다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잠깐의 방심이나 틈이 곧장 치명타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더욱 신중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15살 소년인 에단이 가문 내에서 실전과 흡사한 위협을 겪어봤을 리 없었다. 이건 에단에게 있어 상당한 단점으로 작용했다. “그래, 불안할 만하지. 보호자가 없이 다닐 땐 어느 정도 경계를 하는 것도 필요하긴 하니 그 불안도 나쁘지 않다고 본단다. 하나 오늘은 걱정 말려무나.” “……?” “혼자 나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더 불안한데.’ 허허 웃는 쥬다스를 향해 차마 속내를 밝히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그러고 보면 쥬다스는 작은 체구는 물론이고 실제 나이조차 에단 자신보다 어렸다. 황자씩이나 되면 아마 이런 경험이 더 없으면 없었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에단은 그의 여유로운 표정이 마냥 어린아이라서 나올 법한 종류가 아님을 알았다. ‘단순 성품이 그러한 건지. 아니면 무언가 믿고 있는 것이라도?’ 어느 쪽이 되었든 평범한 황자는 아니었다. 에단의 관찰하는 시선에 두 정령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참 희한해. 인간은 왜 모든 걸 겉모습으로 판단할까.」 「모르겠다요. 아마 다른 게 안 보여서?」 바로 코앞에서 알짱거려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놀리듯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유니 때문에 살랑살랑 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 우뚝. 때마침 에단이 걸음을 멈춰선 탓에 유니는 자동으로 찔끔했다. 술사가 아닌 인간이 정령을 볼 수는 없다지만 하필 시선이 향하는 방향과 타이밍이 절묘했다. 유니는 슬금슬금 옆으로 물러섰다. 당연하게도 그가 반응한 것은 정령들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 님!” “크리스티나 님 조원은 어떤 분들인가요?” “누군지 몰라도 정말 복 받은 분들이군요.” 거리 한쪽에서 와글와글 몰린 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단연 크리스티나 델피아가 존재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루바흐에서 그녀를 추종하는 학생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도도하다 못해 쌀쌀맞기까지 한 그녀였지만 그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지금도 대꾸 한 번 하지 않고 천천히 거니는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든 학생들이 저들끼리 말을 걸기 바빴다. 맞은편에서 움직이던 크리스티나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 “흠. 저길 보거라, 에단.”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크리스티나의 오만한 태도가 거슬렸는지 빤히 쳐다보고 있던 에 단의 팔을 쥬다스가 툭 다독였다. 마치 뿔난 아이를 어르는 듯한 손길에 일어났던 짜증이 사라지고 다소 민망함이 찾아들었다. 에단은 크리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쥬다스가 가리킨 방향을 쳐다보았다. “……강이군요.” 잘 다듬어진 강변을 따라 잔잔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샤를로의 자랑인 풀문강이었다. 가까이서 내려다본 강물은 그 색이 오묘했다. 단순한 빛의 반사 작용이 아니라 짙은 남색에서부터 청록색을 지나쳐 연두, 노랑까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색을 차분히 지켜본 에단이 작게 감탄했다. “놀랍군요. 색이 변하는 강물은 처음 보았습니다.” “우리가 타고 온 포탈에 사용되는 물이란다. 여기엔 정령이 살고 있지.” “정령……?” 그 말에 다시 내려다본 강물은 보석처럼 빛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 그, 저 놀라도 됩니까?;; 어제 이후로 생각지도 못하게 많은 사랑을 받아서 정말 이 심정을 어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네요. 드림워커 시절 이후로는 처음 잡아본 판타지소설인데,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독자님들의 기대에 다 부응할 수 있을까 걱정부터 드네요. ㅠㅠ; 닉네임이 '공든탑'인 이유는, 절대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심과도 같습니다. 보여주신 관심과 애정에는 완결로 보답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질문을 많이 주셨던 '쥬다스(이그레트)의 할배말투'는, 현재 작중 인물들은 워낙 특이한 황자니까 그러려니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느껴도 '어린 황자가 황실어른들 말투를 따라하는 건가'정도...? 늙어가면서 한 평생 입에 익은 말투를 한순간에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그레트 본인도 딱히 아무도 지적을 하지 않으니 바꿀 필요를 못느끼고 있고... 스토리라인이 진행되면서 말투가 어느 중간쯤으로 조정될 예정은 있으나, 싹 소년의 말투로는 바뀌지 않을 것 같습니다. ㅎ 사족이 길어졌네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추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2 / 0240 ---------------------------------------------- 2장. 진명식 “허허, 그 아이들은 술사가 아니면 보이지 않는단다. 하나 정령이 머무는 장소는 이렇듯 신비로운 경관을 만들어낸다. 순수하고 아름답지 않느냐.” 때마침 노랑에서 붉은색으로 물드는 강물이 보였다. 일반 자연물에선 쉽사리 볼 수 없는 신비로운 현상을 목격한 이상 보지 않고도 정령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에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고 혼잡한 영지에 나와 필요 이상으로 긴장되었던 머리가 본래 자신의 페이스를 찾기 시작했다. 쥬다스가 의도한 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에단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호오? 이거 우연이구나. 나는 홀로 나올 산보를 적적하지 않게 따라와 준 네게 감사하고 있었거늘.” 씩 웃는 금안을 보고서야 그 의도를 확신했다. 몸은 작을지 모르나 그 안에 품고 있는 그릇은 과연 황가의 핏줄답게 큰 인물이었다. 이는 일종의 현인이었다. ‘이런 자가 어찌 백로황자라 불리며 조롱을 받는단 말인가.’ 에단이 1황자의 정보를 수정하며 의문을 품던 찰나, 근처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도둑이야!” “저놈 잡아라!” 와 하고 일어난 소동에 마찬가지로 강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죄 돌아보았다. 소란이 일어난 곳은 한 빵가게였다. 도둑이라 몰린 이는 순식간에 붙들렸다. 샤를로가 치안 유지에 힘을 쏟는 영지답게 소란을 감지한 경비병이 바로 달려온 덕이었다. 웅성거리며 몰려든 인파가 둥글게 주변을 에워쌌다. 쥬다스와 에단도 그 맨 앞줄에 서서 상황을 살폈다. 경비에게 덜미를 잡혀 바닥에 엎어진 청년은 코피를 줄줄 흘리며 사지를 버둥대고 있었다. “아, 아니에요. 훔치려던 게 아니라.” “이 자식! 네가 크리스티나 님의 브로치를 훔쳤잖아?” “떨어진 걸 주웠을 뿐인데……. 바로 돌려드리려고 했어요!” 한 학생의 분노대로 도둑의 손에는 고급 브로치가 들려 있었다. 금을 녹여 방패의 모양을 만들어낸 브로치에는 자잘한 보석이 박혀 있어 그 값어치가 상당해 보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도둑은 정말로 억울한지 코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달달 떨고 있었다. 경비병이 도둑의 손에서 브로치를 빼앗고 그를 포박했다. “똑바로 일어서!” “흐, 크흑.” 손목을 묶은 수갑 탓에 억울함이 몰려왔는지 급기야 도둑은 눈물까지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경비병의 질타에 간신히 일어서긴 했으나 똑바로 서지 못하고 절뚝거렸다. 그는 절름발이였다. “떨어진 걸 주웠다는 저치의 말은 아마 맞을 게야.” 쥬다스가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곁에 있던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크리스티나 그 아이의 곁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느냐. 발을 저는 낯선 이가 다가와 브로치를 뜯을 때까지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을 리가 없지. 분명 브로치를 떼어내고 그걸 바닥에 흘린 일까지는 다른 이가 했을 것이야.” “그렇다면 그자는 왜 가져가지 않고 굳이 바닥에 흘려두었단 말씀이십니까?” “흐음. 혹 목적이 브로치가 아닌, 사람을 곤란하게 하고자 함이었다면 어떨 것 같으냐.” 쥬다스의 금안이 담담하게 울고 있는 도둑을 향했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다. 마찰이 생겨서 싫어하는 경우는 나름의 이유라도 있으니 차라리 양반이었다. 너무 잘난 재능을 질투하거나, 너무 못난 인간을 꼴 보기 싫어 무시하기도 했다. 단순히 재미로 비수를 꽂는 이도 있었다. 상당수의 인간은, 무리가 생기면 누군가 하나를 따돌리게 된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글쎄, 브로치같이 몸에 직접 지니고 있는 귀중품을 훔치는 건 충동만으론 어렵단다. 한낱 도둑질이긴 하나 기술과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재미있네. 그럼 진짜 범인은 누구란 소리지요?” 불쑥 끼어들어 쥬다스에게 말을 건넨 건 다름 아닌 크리스티나였다. 언제부터 그 곁에 다가와 있었는지 오만한 눈으로 쥬다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쥬다스는 놀라지 않고 턱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허허, 듣고 있었는가. 그저 짧은 소견이었다만, 이 이상 함부로 끼어들 일은 아닌 것 같으이.” “……그래요? 그럼 다른 걸 묻지요. 당신이 말씀하신 ‘누군가가 곤란하게 하고자 한 사람’은 나 크리스티나와 저 도둑 중 누굴 뜻한 거죠?” “…….” 포박당한 도둑 청년의 눈길도 그들 쪽을 향했다. 갑작스러운 크리스티나의 관심으로 인해 본의 아니게 시선이 집중된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억울함보단, 곤란함을 느낀 사람이지 않겠느냐.” *** 도둑이라 몰린 청년은 그대로 경비병에게 잡혀갔다. 별 반전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자 구경꾼들은 싱거워하며 자리를 떴다. 타인의 불행을 단순한 구경거리로 취급하는 사람이란 어디에나 많았다. 그 사실을 실감하며 쥬다스는 씁쓸하게 강변을 따라 걸었다. 문득 에단이 물었다. “왜 억울한 자를 끝내 도와주시진 않으셨는지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결국 그치는 도둑이 맞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 “예?” 의외의 답변에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쥬다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떨어진 걸 주웠다’……. 거기까진 진실일지 모르되, 제 코가 깨져 피가 흐르면서까지 손에서 물건을 놓지 않았다는 건 그만한 탐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주운 물건이라도 돌려줄 생각이 없다면 이가 도둑이 아니고 무엇일꼬.” 그 말에 에단은 쥬다스가 마냥 부드럽기만 한 인간이 아님을 깨달았다. 죄는 죄,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은 받도록 한다. 처벌에 있어서는 제법 단호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황자로서 나쁘지 않은 가치관이었다. 다음 날, 세 사람은 다시 포탈 앞으로 모였다. 이번엔 전날과 달리 크리스티나가 늦지 않고 시간 맞춰 나타났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에단을 향해 코웃음 친 크리스티나는 그들의 곁에서 함께 대기 시간을 기다렸다. 오만하고 도도한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기에 지나가다 이를 목격한 다른 루바흐 학생들은 놀라 저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했다. 포탈을 타고 이동한 두 번째 거점은 비교적 수도와 가까운 편에 속하는 산트리안이었다. 산트리안은 타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온갖 정보와 물자가 오가는 무역 도시이다. 거대한 상단이 본진을 설치하고 주둔하는 것만 수십 군데였다. 뿐만 아니라 정보 길드나 암적인 거래처 역시 이곳 산트리안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밤에만 열리는 야시장이라든지, 여타 불법적인 거래 현장도 이곳에선 암묵적으로 허용되었다. 하나하나 통제하기에는 그 규모가 굉장했으며, 때로는 위험한 거래가 필요할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트리안은 샤를로보다 방문자 수가 훨씬 많았고 제국민뿐 아니라 타국 사람의 비율도 눈에 띄게 높았다. “그럼, 오늘도.” 어차피 다음 포탈은 또 하루가 지나야만 이용이 가능했다. 크리스티나는 귀찮다는 듯 고개만 까딱하곤 돌아섰다. 오늘은 에단 역시도 들를 곳이 있다며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비웠다. 홀로 남게 된 쥬다스는 머리 위에서 뒹굴거리는 정령들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자, 이제 어쩌면 좋을까.” 「좀 쉬어두는 게 어때? 어제 많이 걸어서 피곤하지 않아?」 유니의 호들갑스러운 걱정에 그는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야 체력이 늘었다. 축축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착실히 수업에 참석했으며, 그중 봉술을 단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쓸리고 까지면서도 열심히 연습했던 시간들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다. 금방 피로해지고 제 나이에 비해 나약한 건 여전했지만, 어느 정도 견딜 만한 수준까진 되었다. 체력이 붙는다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그럼 이그레트! 놀러 가자요!」 토니가 해맑은 어조로 외치며 붕 얼굴 옆으로 날아왔다. 땅 속성 정령은 다른 속성에 비해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바람 속성인 유니가 감성이 풍부하고 수다쟁이인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바깥 구경을 갈 생각에 벌써부터 신이나 함빡 웃고 있던 토니의 뒷덜미를 유니가 홱 채어 잡았다. 「너란 애는 진짜, 그만큼 놀았으면 됐지! 왜 이그레트까지 꼬드겨서 놀려고 하니?」 「히잉, 그치만 궁금한데.」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 궁금할 게 뭐있어? 뭐, 정 가고 싶으면 혼자서 놀러가든가. 이그레트는 지금 무리하면 안 된다구.」 「싫어어어! 이그레트가 함께가 아니면 안 갈 거다요!」 유니의 조곤조곤한 설명에도 토니는 빼액 떼를 썼다. 소환된 정령이라 해도 술사와 어느 정도 일정 거리까지는 멀어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두 정령이 쥬다스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는 건, 그만큼 그를 아끼고 있다는 마음의 증빙이기도 했다. 뒷덜미를 잡힌 채 훌쩍거리는 토니를 보는 유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얘가 진짜, 너 자꾸 고집 부릴래?」 “그만하련, 유니. 가만히 방 안에 누워만 있는 것도 좀이 쑤셔서 힘들단다. 모처럼 셋이서 나들이를 가보는 것도 좋겠지.” 「나…… 들이?」 「웅, 웅! 나들이 완전 재밌겠다요!」 4속 정령을 모두 다루던 이그레트 시절에는 그의 주변에 늘 정령이 바글바글했다. 직접 계약을 맺은 정령왕은 물론이고 일반 자연계 정령들조차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토니가 끼어 있는 건 거슬리긴 했어도, 유니의 기억상 지금처럼 오붓하게 그와 나들이를 갈 수 있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 매력적인 제안에 유니의 ‘안 돼’가 허물어지고 말았다. 신이 난 두 정령을 양 어깨에 각각 얹고서 쥬다스는 밖으로 나섰다. 무역 활동이 집중되어 있는 산트리안에는 예전에도 한 번 와본 적이 있었다. 당시 이그레트가 여기서 구하고자 한 것은 물건보다는 정보였다. 정보상은 보통 훤히 드러난 거리보다는 골목 안쪽 작은 펍에 주로 위치해 있었다. 아직 그때 그 펍이 운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번 방문은 딱히 목적을 가진 게 아니었기에 상관은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3 / 0240 ---------------------------------------------- 2장. 진명식 쥬다스는 펍이 많은 골목 대신 상단이 늘어선 대로 쪽을 택했다. 그러나 대로는 아예 도떼기시장이나 다름없었다. 상행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대로는 확실히 유동 인구가 많았다. 도저히 붐비는 사람 틈을 비집고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허어, 이거 참. 예전보다 사람이 훨씬 많아졌구만.” 「그러게? 진짜 무슨 꽉 찬 콩나물시루 같아.」 “……표현이 많이 늘었구나, 유니.” 그와 함께 지내면서 정령들의 입담은 날로 구수해졌다. 이게 좋은 영향인지 그 반대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던 탓에 쥬다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어쨌든 허약하기 그지없는 몸 상태로 인파가 바글거리는 시장을 구경하다가는 좋은 꼴 못 볼 게 분명했기에 그들은 노선을 바꿔 대로 옆 변두리길로 들어섰다. 대로를 중심으로 하여 총 5갈래로 갈라진 변두리길은 변두리라곤 해도 제법 많은 행상이 자리해 있었다. 쥬다스가 들어온 길목은 주로 골동품과 주술적 의미가 담긴 액세서리 를 판매했는데, 그래서 비교적 다른 길보다는 한산한 모습이었다. 사람들과 부딪힐 일 없으니 조금 숨통이 트여 느긋하게 걷던 쥬다스에게 익숙한 옆모습이 보였다. “……바이칼?” 분명 바이칼이었다. 그러나 그가 입고 있던 복장은 루바흐 학원 교복이 아니라 검은 비둘기가 새겨진 학자복, 즉 로브였다. 그는 쥬다스를 발견하지 못한 듯 급한 발걸음으로 골목 너머로 사라져 갔다. 쥬다스는 뛰듯이 사라지는 뒤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아이도 진명을 받으러 온 겐가. 한데 분위기가 영…….” 잔뜩 굳어 있던 표정하며 입고 있던 생소한 로브까지 낌새가 좋지 않았다. 따라갈 체력도 되지 않고, 그럴 생각도 없는지라 그저 의문만 품었을 뿐이었다. 수염 대신 말끔한 입가를 쓸며 걸어가던 그에게 한 노파가 말을 걸어왔다. “아가, 점 한번 보고 가렴.” 무심코 지나치려던 쥬다스는 저 ‘아가’란 호칭이 자신을 향하는 말임을 두 번째 부를 때서야 깨닫고 멈칫 돌아보았다. 때 탄 로브를 뒤집어쓴 노파가 쭈글쭈글 늙은 입매를 올리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죽기 전의 이그레트와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해봐, 이그레트! 저런 거 신기해.」 「점이 뭐다요?」 「미래를 읽는다나 봐.」 「미래를 읽어? 어떻게? 어떻게?」 정령들의 추임새가 적절한 타이밍에 들어왔다. 쥬다스는 못 말린다는 듯 한숨처럼 웃으며 그들의 뜻에 응했다. 그냥 지나칠 줄 알았던 그가 발길을 돌려 다가오자 노파가 낮게 웃으며 손짓했다. “내가 봐주는 점은 매우 신통하단다. 이 바닥에서 정확하기로 유명하지. 끌끌, 후회하지 않을 게야.” “……인생의 큰 흐름이 있음엔 동의하나, 정해진 미래를 읽는 점술은 별로 내키지 않는구려.” 아이답지 않은 말투는 고사하고 그 말뜻마저 연륜이 가득하여 노파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그저 손님을 끌기 위해 쥬다스를 불렀던 노파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아래위로 훑었다. “허! 자네, 이제 보니 평범한 인상이 아니시구만?” “아니, 점이 아니라 관상도 볼 줄 아시오?” 아가에서 자네로 바뀐 호칭에 쥬다스는 빙긋 웃으며 받아쳤다. 심상치 않는 눈으로 그를 살핀 노파가 소맷자락에서 그림 카드 더미를 꺼내 탁상에 엎었다. 후두둑 볼품없이 쏟아진 카드 더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쥬다스에게 이내 주름진 손가락을 쑥 내밀어 보였다. “3장. 내키는 걸로 고르시게.” “조금 전 내키지 않는다 하였거늘.” “내가 궁금하여 그러우. 복채는 필요 없으니 어서 뽑아나 보아.” 쥬다스는 볼을 긁적이곤 망설임 없이 맨 위에 쌓여 있던 카드 3장을 골라 건넸다. 무성의해 보이는 손길이었지만 결국 가장 마음에 든 카드를 고른 셈이 되었으니 노파는 조용히 그 3장의 카드를 뒤집어놓았다. “[태양], [사슴], [3개의 칼].” “…….” “자네, 태양처럼 빛나는 자리에 있구만. 한데 빛이란 건 강할수록 그 밑에 생기는 그림자가 짙게 마련이니, 그 목을 노리는 이가 많을 게야.” 마치 1황자의 상황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쥬다스가 루바흐 학원 교복을 입고 있었고, 황조 적통의 머리색을 가리지도 않았으니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물론 그와 비슷한 은발이나 백발은 평범한 사람 중에서도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그의 정체를 유추했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기에 쥬다스는 덤덤히 노파의 다음 말을 경청했다. “사슴이란 영혼을 상징하지. 어린아이의 순수한 영혼 말이야. 끌끌, 그것도 4마리나 있군그래. 기쁨과 감사를 선사하는 영혼이라, 좋은 연을 맺고 있어. 그림자로부터 해를 입고 싶지 않거든 가급적 이들을 곁에 두시게.” 점이란 원래 애매모호한 구절을 이야기함으로서 보편적인 상황에 해석이 가능하도록 한다. 어찌 들으면 이 얘기 같고, 또 달리 들으면 저 얘기 같도록 모호한 여지를 남겨두는 화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말 신통한 기분이 들었다. 쥬다스는 버릇처럼 턱을 쓰다듬으며 마지막 카드를 응시했다. 3개의 검이 가슴을 관통한 그림이라. “쯧쯧, 안타까운지고.” 노파가 혀를 차며 카드를 모았다. “자네에게 3명의 인재가 모여들 것이네. 앞으로 자네가 쓰고자 함에 따라 훌륭한 수족이 되어줄 수도 있을 테지만…….” “…….” “결국 그들이 자네의 심장을 찌를 것이야.” *** 손님이 떠난 후에도 노파는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떠난 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점은 정말로 신통하여 잘 맞아들었지만, 신성을 우선시하는 교황청에서 금지하는 부덕한 행위였기에 이렇듯 숨어서 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그나마 산트리안이기에 가능한 영업장이었다. 노파는 조금 전 손님의 얼굴을 떠올렸다. ‘……태양의 자리.’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첫 카드를 뒤집었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보석 같은 은발이며 금안이 모두 고귀한 황조의 색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백발이려니 생각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였다. 겨우 7살 남짓한 어린아이가 태양을 품고 있었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하나 그 미래를 뜻하는 점괘가 나빠도 너무 나빴다. ‘안타깝다, 안타까워.’ 그녀는 연신 혀를 찼다. 돈을 안 받겠다고 한사코 손을 내젓던 노파에게 어린 손님은 이내 고맙다며 무언가를 쥐어주고 떠났다. 손을 펴보니 박하사탕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원, 노인네 같은 아가로구나.” 노파는 그만 실없이 웃고 말았다. *** 「뭐야, 저 인간 기분 나빠.」 돌아가는 길에 유니가 볼을 뚱하니 부풀렸다. 노파가 말해준 점괘에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저 단순한 점일 뿐이고, 설명해 주었으나 유니는 쉽사리 분을 가라앉히지 않았다. 「그치만 심장을 찌르네 마네! 감히 누굴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우리가, 내가 절대 그렇게 안 둬!」 “이런, 이런. 너무 흥분했구나, 유니.” 「끄으으, 짜증 나!」 그런 유니를 보며 토니가 우물쭈물 덧붙였다. 「진정하라요, 유니. 점을 보자고 한 건 유니였잖…….」 「넌 진정을 하라는 거야, 더 약을 올리는 거야?!」 괜한 말을 했다가 유니에게 볼을 잡혀 버린 토니가 바동거렸다. 「후에에. 자, 자못해떠어.」 “자, 자. 둘 다 그만하고 이리 오련.” 쥬다스가 내민 손바닥에 두 정령은 사이좋게 내려앉았다. 어떤 상황이 되었든 그의 말을 거스를 정령은 없었다. 얌전한 아이들처럼 옹기종기 앉은 정령들을 향해 칭찬의 시선을 건넨 그가 곧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하늘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하늘이었지만 그 자신만큼은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정해진 흐름은 있을지 모르나, 사람의 앞날은 한 치 앞도 모르는 법이야. 점이라 한들 믿지 않으면 그거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단다.” 「이그레트…….」 “그저 지금, 여기에 살아갈 뿐. 그런 게 인간이지 않느냐.” 쥬다스는 오랜 벗들을 향해 허허롭게 웃었다. *** 출발한 지 3일째 되는 날, 세 사람은 마침내 교황청으로 이어지는 최종 포탈에 탑승했다. 검은 에너지 기류에 휩싸여 눈 깜짝할 사이 이동된 그들은 어느 틈엔가 잘 닦인 대리석을 밟고 서 있었다. “방랑자에게 축복을.” 교황청의 포탈 관리자도 역시 사제였다. 긴 사제복을 입고 축복의 인사를 건넨 관리자가 그들을 작은 예배당으로 안내했다. 교황청 건물은 무척이나 컸기 때문에 예배당도 여러 군데 지어져 있었다. 그중 그들이 안내받은 곳은 미사용 소예배당으로 다른 성도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관리자는 자리를 떠났다. 셋만 남게 된 예배당은 정적이 감돌았다. 에단은 원래 말이 없는 편이었고, 크리스티나는 그들과 말을 섞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마련된 긴 의자에 앉아 있던 쥬다스는 일어나 강대상 앞으로 나아갔다. 유리로 지어진 강대상에는 교황청의 상징인 십자 표식과 함께 기도하는 두 손이 새겨져 있었다. 강대상 뒤로는 거대한 창이 자리해 있었는데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었다. 들어오는 빛줄기는 각각 푸르고 붉은색을 입어 은은하게 비추었다. 천사와 비둘기, 포도나무 등이 기록된 창문을 구경하는 사이 철컥 예배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별생각 없이 돌아본 셋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한 분 한 분 '이그레트'에 관심과 애정이 있으니 남겨주시는 코멘트라 생각하고 모든 의견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보답으로 정말 연참이라도 하고 싶은데 평일엔 시간이 부족하네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연참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ㅎ 오늘은 이 시간부터 무척 졸리네요.; 비몽사몽한 채로 업로드인지라....이상한 구석 있으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오타 및 비문 지적은 참고해서 조금씩 수정중입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4 / 0240 ---------------------------------------------- 2장. 진명식 크르륵- 낮게 목을 울리며 들어온 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김새는 개를 닮았으나 크기가 황소만 했다. 머리에는 유니콘의 뿔이 달려 있으며 매끄러운 몸체를 뒤덮은 긴 털은 눈부시게 하얀색이었다. 갑작스러운 짐승의 출현에 에단의 손이 검집으로 향했다. 크리스티나는 팔짱을 낀 채 힐끗 내려다볼 뿐이었다. 개를 닮은 거대한 짐승은 점차 그들 가까이로 다가왔다. 경계하듯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채 콧김을 뿜어내던 짐승은, 앞선 두 사람을 지나쳐 스테인드글라스 앞에 서 있는 쥬다스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었다. 철컥. 에단이 검을 뽑아 들던 찰나였다. “헤브, 이리 와.” 청량한 목소리가 예배당을 감돌았다. 셋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를 향했다. 거기엔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흑발을 세 갈래로 묶어 내린 여인이 서 있었다. 이제 갓 20대가 되었을까 싶은 젊은 여성이었다. 태어나 한 번도 자르지 않은 것처럼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에단의 것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빛을 발하는 듯 생기 있게 반짝였다. 그에 반해 그녀의 눈은 어쩐지 초점을 잃은 하늘색이었다. “크릉.” 헤브라고 불린 짐승이 순한 양처럼 돌아섰다. 척 앉은 짐승의 콧등을 쓸어주며 검은 머리 여성이 살며시 덧붙였다. “놀라지 말아요. 헤브는 나의 수호견이니까.” “……당신은?” “아참, 내 소개를 안 했군요.” 에단이 검을 갈무리하며 묻자 여인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위그드라실.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이은 자녀 중 하나입니다, 형제여.” “……성녀께 인사드립니다. 에단 헤이가입니다.” 성녀 위그드라실. 성녀라 불리고는 있었으나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정확히 어떤 종족이라곤 지목할 수 없었지만, 일단 위그드라실로 태어난 이상 교황청 엘리시움에 머물며 단 한 발짝도 그 안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는 성녀 위그드라실이 성서에 기록된 역사간 줄곧 지켜온 약속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줬다 일컬어지는 수호견 ‘헤브니시우스’를 데리고 엘리시움을 지키는 성스러운 존재. 300년이 넘도록 처녀의 모습을 유지하는 위그드라실은 총수명인 500년을 채우고 나면 다음 대 위그드라실에게 수호견을 양도하고 소멸한다. 오랜 옛날부터 반복되어 온 성녀의 사명은 그 존재만으로도 넘쳐흐르는 신성력을 전달해 주고, 인간의 기도를 대신 들어주며, 신성을 위협하는 자들을 처단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마치 교황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크리스티나 델피아입니다.” 그 도도하던 크리스티나도 위그드라실 앞에선 고개를 숙였다. “형제자매님들께 축복이 함께하길. 그런데 세 분이 오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위그드라실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의문을 접한 두 사람은 자연히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 시선을 따라가지 못한 것은 위그드라실뿐이었다. 에단이 미세하게 인상을 굳혔다. ‘소문대로 눈이 보이지 않는 모양이군. ……그런데 그녀도 역시 느낄 수 없는 건가.’ 성녀 위그드라실은 인간이 가질 수 없는 수명과 신성력을 몸에 품고 있다. 그런 만큼 패널티라 불릴 법한 유전도 타고나는데, 그것이 바로 상실된 시력이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사람의 기척을 읽어 판별해 내야만 했다. 어차피 몸을 가득 메운 신성력을 통해 사람과 사물을 판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지금 쥬다스의 기척만큼은 읽어지지가 않았다. “쥬다스, 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라 합니다.” 위그드라실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쥬다스가 그녀의 앞까지 다가가 빙긋 웃었다. 학생으로서 교황청에 방문한 이상, 그 역시 황자가 아닌 일개 학생일 뿐이었다. 공손한 말투에 위그드라실이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점이 맞지 않는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가 그를 담았다. “……아, 당신이…….” 위그드라실이 하얀 손을 뻗어 쥬다스의 볼을 매만졌다. 과연 인간의 손이 아닌지라 체온 없이 차갑기만 했다. 차갑긴 했어도 신성력이 가득한 손길이라 닿는 즉시 온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푹 자고 일어난 듯한 개운함에 축축 처지던 몸에 혈색이 돌았다. 잠시 그의 볼을 매만지던 위그드라실이 손을 떼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강인한 당신에게 빛의 인도가 있기를.” 그녀가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축언이었다. 곧이어 위그드라실은 그들에게 교황청의 상황을 설명했다. 봄은 한 해가 순환하는 계절이며 지금 교황청에선 이를 ‘순행절’이라 하여 각 곡식의 씨앗과 가축의 첫 새끼를 잡아다 예배를 올리는 절기다. 예배는 약 2주간 진행된다. 이때를 맞춰 진명식을 진행하고는 있으나 아무래도 예식이 길어지다 보니 대기 시간도 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며 위그드라실은 인내를 당부했다. “오늘 안에 형제자매님들께 호명이 갈 것입니다. 편안히 머무시며 차례를 기다려 주세요.” “…….” 결국 기다리란 뜻이었다. 할 말을 마친 위그드라실이 예배당을 떠나자 크리스티나는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 여기 앉아서 예배나 보기엔 시간 낭비가 크군.” “진명식에 허가되는 외출 기간은 총 열흘입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넉넉히 내어준 시간일 테죠.” “그래서? 말해 두지만 그대, 멍청하게 앉아 시간만 죽이는 건 사양이야.” “어쩌시겠다는 겁니까.” 에단과의 짧은 공방 끝에 크리스티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운 바다빛 머릿결이 허리께에서 찰랑였다. “리포트에 담을 내용은 있어야 하니. 근처를 둘러보고 오겠어.” 그간 크리스티나가 계속 돌아다닌 이유였다. 그녀는 성과 없이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는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무엇을 하든 그 결과물이 따라야 한다. 다른 학생들이 단순히 놀러갔다 오는 시간처럼 생각하는 외출 역시 마찬가지였다. 학원에서 요구하는 리포트라고 해봤자 외출 기간 동안의 일을 간추린 일지나 다름없었으나 그마저도 형편없는 결과물을 제출하고 싶지 않았다. 거침없이 홱 돌아서는 그녀를 에단이 붙잡았다. “……그러다 호명하는 시간을 놓치면.” “설마 내가 그리 생각이 없어 보이나?” 붙들린 팔을 탁 빼낸 크리스티나가 불쾌한 듯 손으로 쓸어내렸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다정한 부름이 들려왔다. “크리스티나.” “……?” “에단의 말대로 자리를 떠나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느냐. 기회란 언제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것이니. 그래도 가봐야겠다면 우리도 함께 가자꾸나. 여기에 온 것도 공동의 과제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 말대로 진명식은 일종의 조별과제였다. 교황청을 방문했다는 확인서에는 조원 3인의 인증이 모두 있어야 했고, 앞선 그녀의 말처럼 다녀와서 이에 대한 출석 리포트도 적어 제출해야 했다. 어쩌면 팀워크를 평가하는 학원의 노림수일지도 몰랐다. 크리스티나는 걸음을 멈춰 세우고 쥬다스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는 태연함을 확인한 그녀의 입에서 작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요, 그런 거라면 차라리 그냥 여기서 함께 있는 편이 낫겠군요. 하면…….” 크리스티나는 빙글 방향을 돌려 쥬다스의 앞에 섰다. 똑바로 내려다보는 청록색 눈동자에 그의 모습이 비쳤다. “어떻게 해야 ‘그냥 기다리는’ 대신 이 시간을 유의미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쥬다스 님.” “의미라…….” 어떻게 보면 건방지게도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았다. “허허, 아무래도 내게 따로 바라는 게 있는 모양이로구나.” 크리스티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쥬다스를 주시한 건 아니었다. 갓 입학할 때 즈음, 소문의 1황자를 두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에 대한 모든 기대를 버려두었다. 황자에게선 그 무엇도 그녀를 매료시킬 만한 건더기가 없었다. 황자는 작고, 나약했으며, 심지어 강단조차 없었다. 그저 숨만 쉬며 살아갈 뿐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이는 나라의 주인이 될 자가 결단코 아니다. 크리스티나는 확신했다. 그릇이 작아도 너무 작았다. 매사에 성과를 추구하고 유능을 덕으로 보는 가치관의 크리스티나가 이를 눈여겨볼 리가 없었다. 관심 밖에 난 황자를 다시 마주쳤을 때 그의 건강은 상당히 악화된 상태였다. 안 그래도 희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렸으며 자라난 또래에 비해 성장하지 않는 몸은 점점 눈에 띄었다. 그때부터 백로황자라는 별칭과 함께 스멀스멀 돌기 시작한 조롱은 당연한 수순처럼 그를 괴롭혔다. 알게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그는 학원 루바흐에서 침몰해 갔다. 분명 그렇게 끝났을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학원의 그 누구도 저 ‘백로황자’가 기적처럼 회생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회생? 아니, 그보다 더하지. 마치…….’ 다시 태어난 듯한. 그 외에는 다른 표현을 찾을 길이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다 죽어가던 금색 눈동자에 따뜻한 생기가 스며든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나. 최근 그와 눈을 마주칠 때마다 울컥 솟아오르는 이질감과 압박감에 당혹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분명 부드러우면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어찌 된 바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자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저도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여러분.ㅎ 사족으로 한 독자님께서 이그레트가 92년간 모태솔로였냐는 질문에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독자님들도 92년간 솔로시면 대정령술사가 되실 수 있..;;쿨럭;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5 / 0240 ---------------------------------------------- 2장. 진명식 ‘설마, 이 내가 잘못 판단했다고?’ 순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의 그라면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 또한 엄습해 왔다. 그가 제대로 마음먹고 숨기고자 했다면, 크리스티나의 시선에서쯤은 도망갈 수 있으리라. 크리스티나가 제아무리 또래보다 우수하고 예민한 아이라 할지라도, 이제 겨우 14살 난 소녀였다. 그녀의 청록색 눈동자가 옅은 수치감을 담고 파르르 흔들렸다. “알려주실 수 있다면.” “…….” “……당신이 숨기고 있는 진실은 무엇이죠?” 찌르는 듯한 질문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매만졌다. 눈치는 채고 있었으나 감이 좋아도 보통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아마 이대로 죽 자란다면 귀족 세력을 휘어잡는 제국의 큰 축이 될 법도 했다. “흠, 물론 숨기고 있는 게 없지는 않단다.” 지금도 그들 눈에 보이지 않는 두 정령이 쥬다스의 양어깨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사실대로 말할 생각이 없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를 알았다. 자연의 4대 속성을 전부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정령술사란, 재능을 넘어 마치 재앙과도 같았다. 그가 바라기만 한다면 모든 걸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다. 자연 법칙을 깨뜨려 생명을 앗아가고, 이윽고 생지옥을 만들어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거대한 힘은 늘 화를 부른다. 큰 희생을 대가로 뼈저리게 깨달은 진리였다. 그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쥬다스는 시든 잎사귀처럼 웃었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만, 뽐낼 필요가 없는 재주라 생각했다.” 그가 살짝 들어 올린 손바닥 위로 산들바람이 모여들었다. 겨우 머리카락 정도나 흩날릴 수 있을 법한 세기의 약한 바람은 작은 원을 그리며 그의 손바닥 위로 뭉치기 시작했다. 사방이 막힌 예배당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에 크리스티나와 에단의 표정이 흠칫 굳었다. “이건.” “설마……?” 후우웅. 쥬다스의 손바닥에 모여들던 바람이 짤막한 파공음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에 따라 그들의 머리카락도 이리저리 휘날리다 천천히 가라앉았다. 수식 계산도, 시동어도 없었으니 마법은 아니었다. 여전히 주위를 감돌고 있는 바람을 가늠하며 에단이 입을 열었다. “정령술…… 입니까?” 쥬다스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의 바람에 따라 쇼에 동참하게 된 유니가 팔짱을 끼며 비웃음을 날렸다. 「이깟 게 무얼 대단하다고. 하여간 이그레트 빼고 인간들은 다 바보야.」 “……허허.” 유니, 유니. 차마 정령의 존재를 볼 수 없는 둘 앞에서 대화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부름을 속으로 삼켰다. 그러자 크리스티나가 살짝 고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정령술사의 자질은 찾아보기 힘든 것일 텐데……!” 어찌나 놀랐는지 크리스티나는 그녀답지 않게 속으로 할 생각을 내뱉어 버렸다. 실제 정령술사의 비율은 전체 인구에 비해 매우 적었다. 약 천만 명 중 하나.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이론상으로는 그랬다. 정령술사의 자질이란 마법처럼 머리로 익히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게 결코 아니었다.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이 필요했다. 심지어 정령술사의 재능이 있다고 한다면 학원 루바흐에서 먼저 입학권고할 정도였다. 「에에! 치사하게 유니만 논다요.」 「어머, 이그레트가 지목한 게 나인 걸 어쩌니? 번거로운 땅 속성과 다르게 나는 자유롭거든? 이거 봐.」 아직 쥬다스가 힘의 사용을 거두지 않은 상태였기에 유니가 장난스럽게 바람을 일으켰다. 휘이이잉 “……!” 겨우 산들바람에 해당하는 풍속이었지만 예배당을 가득 메울 정도의 양이 몰아치자 더 이상 가볍게 볼 수만은 없었다. 쉴 새 없이 펄럭이는 교복 치마를 부여잡은 크리스티나가 당황한 눈으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만.” 담담한 한마디에 뚝 바람이 멎었다. 방금 전까지 바람결에 덜컹거리던 창이 고요해졌다. 거짓말 같은 변화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허 하는 한숨을 뱉었다. ‘이것이 자연의 힘 중 하나, 바람.’ 굉장했다. 술사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자연현상이란 보통의 인간에겐 경외감마저 실어주었다. 에단이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째서 숨기고 계셨습니까.” 이 또한 사실대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본래의 1황자에겐 정령술사로서의 재능이 없던 게 사실이다. 쥬다스는 그저 자신이 답할 수 있는 진실만 언급하기로 했다. “힘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란 말을 이해하느냐. 나는 그 책임을 질 자신이 없구나.” “……회피하는 건가요?” 크리스티나의 탐색적인 질문에도 그는 여유롭게 답해 주었다. “그럼. 회피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지.” “피한다고 될 상황이 아니시잖습니까.” 이번엔 에단의 질문이었다. 본래의 황자가 어땠는지 직접 보지 못한 에단으로서는 더욱 답답함이 강했다. 그가 본 쥬다스는 자애롭고, 현명했으며, 또 심성이 올곧으면서도 한편으론 단호한 면까지 있었다. 거기에 뛰어난 재능까지 갖추고 있다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이제 허약한 육신만 제대로 관리하여 평범한 또래 수준까지만 끌어 올려준다면, 그 이상으로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자질은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정도까진 아니어도 크리스티나 역시 엇비슷한 생각이었다. 이대로 묻히기엔 아까운 재능과 성품이다.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뭐라고 생각하든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나는 높은 자리가 필요 없는 사람이야. 그럴 그릇도 되지 않으이. 지금도 이 사실을 가급적이면 다른 이들이 모르길 바란단다.” “…….” 두 아이가 침묵했으나 그 표정만큼은 생생히 자신들의 감정을 담아내고 있었다. 눈빛만으로도 ‘어째서’냐 물어오는 이들을 마주보며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주었다. “그럼 크리스티나야.” 정겨운 부름에 크리스티나가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그럭저럭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는고?” “……하아. 예, 정말 여러모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크리스티나가 예배당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빠르게 생각을 가다듬었다. 황자가 정령술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아직 부족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나약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두 황자에 비해 의지와 카리스마 등 부족한 면이 많았다. 더군다나 실제 그의 진가가 어떻든 간에, 세간에 알려진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만큼은 바닥을 칠 정도로 형편없었다. 자신의 뒤를 지지할 세력 기반 없이는 군주가 될 수 없다. 물론 엉뚱하게도 정작 본인이 군주에 뜻이 없는 게 제일 심각한 문제라면 문제였다. ‘조금 더 지켜봐야…….’ 섣불리 판단하기에는 그녀가 쥬다스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반면 에단은 진심으로 그가 지닌 자질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두 관찰자의 시선이 뚫어져라 자신을 향하자 쥬다스는 모르는 척 턱을 짚었다. ‘어차피 감이 좋은 아이들이니 한번 의심한 이상 늦든 빠르든 결국엔 눈치챘을 일이긴 하나.’ 아무래도 입맛이 썼다. 그를 둘러싼 흐름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흘러가진 않을 모양이었다. 온전히 그의 인생이었다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본래 다른 이의 삶이었다. ‘이그레트’로서 쌓아온 지식과 가치관들이 ‘쥬다스’의 몸으로는 써먹기 어려운 부분이 상당했다. 한평생을 살고 죽었어도 인간이란 또 모를 존재였다. 서로 다른 삶이란 이렇게나 큰 차이를 느끼게 했다. 그에게 현자라 불릴 정도의 특별함이 없었더라면 아마 진즉에 내면에서 붕괴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 가지 상념이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사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크륵.” 저녁 무렵, 성녀가 데리고 다니던 수호견 헤브가 그들을 찾아왔다. 이마에 뿔이 달린 집채만 한 개의 형상은 다시 봐도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살짝 벌린 주둥이 사이로 촘촘하게 돋은 이빨들이 번뜩였다. 다가와 문을 향해 고갯짓을 하는 폼이 영락없는 따라 나오라는 제스처였기에 세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에단이 지나갈 때엔 얌전히 앉아 있던 헤브가 나머지 두 사람이 나가려 하자 몸을 쭉 펴서 입구를 막아섰다. “차례를 지키란 뜻인가 보구나.” “……그런 것 같군요.” 두 사람이 멈춰 서자 헤브는 얌전히 몸을 말고 예배당 문 앞에 누웠다. 쥬다스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헤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헤브는 그의 자그마한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받아들였다. “꼭 뉘와 닮았구나.” 가만 올려다보는 금안에 크리스티나는 싸늘한 눈길로 헤브를 훑었다. “지금 설마 이 크리스티나 델피아를 저런 개 따위와 비교하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그래, 그 얼이 꼭 닮았다. 쉽사리 관심주지 않고 오만하면서도 살근히 말 붙일 틈을 주는 고 표정이 말이야.” “……무, 무슨…….” 나긋한 어조로 적나라한 묘사를 하는 쥬다스 때문에 크리스티나는 뭐라 할 말을 잃고 떠듬거렸다. 쥬다스의 표현 방식은 종종 이렇게 지나치게 솔직하곤 했다. 한 번도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누어본 적 없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민망함으로 살짝 달아올랐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여기서 이그레트가 보여준 힘은 매우 일부입니다. 무언가 감추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에게 어줍잖은 거짓은 소용없으니 진실을 보여주되 가려서 보여줬을 뿐.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남겨주신 정성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6 / 0240 ---------------------------------------------- 2장. 진명식 그녀는 티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헤브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말을 다 알아듣고 있는 헤브 역시도 불쾌한 눈으로 그녀를 슥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쪽 바다를 닮은 청록색 눈동자와 짐승의 고동색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 “…….” 그런 다음 짓는 떨떠름한 표정까지, 부정할 수 없는 동류였다. 잠깐 그렇게 눈씨름을 하다 헤브가 자리에서 스륵 일어났다. 그러더니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갯짓했다. 아직 에단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나가라는 걸 보아 진명을 받고 나면 또 다른 장소로 보내는 모양이다. 크리스티나가 예배당을 떠나자, 쥬다스는 헤브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때 묻지 않은 새하얀 털을 살살 쓸어주자 헤브는 기분 좋게 골골 소리를 냈다. “착한 아이로세.” 오직 성녀만을 따른다는 수호견 헤브니시우스가 꼬리를 흔들며 애교를 다 부렸다. 그 모습을 본 유니가 떨떠름한 얼굴로 딴죽을 걸었다. 「그 녀석도 너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이그레트.」 “너희보다?” 「……아니.」 애초에 정령을 아이 다루듯 하는 그였다. 유니는 딴죽 걸기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근데 헤브니시우스도 여전하다요. 죽 이곳에 있었던 거야요?」 크르릉. 정령들과 헤브는 원래 서로 알던 사이였으므로 친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토니가 헤브의 커다란 앞발에 내려앉았지만 슬쩍 쳐다보기만 할 뿐 내치지는 않았다. 신성한 동물인 헤브니시우스와 자연체인 정령들은 타고난 기질이 같았다. 헤브는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그 대상을 좋아했다. 먼지 한 톨 묻히고 다니지 않는 그 새하얀 털처럼, 헤브가 고집하는 순수는 일종의 강박증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령들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존재는, 이 까다로운 짐승의 마음도 순식간에 매료시켰다. 「한 장소에만 계속 있으면 지루하지 않아?」 그릉. 「아, 하긴. 여기에 위그드라실이 있구나.」 ‘이그레트’의 삶에선 성녀나 헤브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던 그는 이들의 관계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무언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은 듯 유니와 토니가 서로를 마주보며 키득댔다. 그리곤 쥬다스에게 포로록 날아와 그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응, 있어. 우리에게도.」 「이그레트라면 계속 함께 있어도 괜찮다요.」 헤브에게 성녀 위그드라실이 소중한 존재이듯, 정령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음을 피력하는 모양이었다. 대충 짐작으로 대화의 맥락을 이해한 쥬다스가 두 정령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때, 귀를 쫑긋한 헤브가 슥 일어섰다. 황소만 한 몸집이 일어서자 쥬다스의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졌다. 헤브는 코를 한 번 푸릉거린 후 먼저 주둥이로 문을 밀고 나갔다. 밖으로 따라 나가자마자 예배당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녀 위그드라실과 마주쳤다.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소리와 기척에 민감한 그녀는 쥬다스를 향해 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당신의 기척을 읽을 수 없으니, 잡고 따라와 주세요.” 그 말에 쥬다스는 망설이지 않고 위그드라실의 차가운 손바닥 위에 작은 손을 얹었다. “고마워요. 느껴지지 않으면…… 불안하거든요.” “허어, 불안을 느낄 정도라. 하면 지금 그 ‘느껴지지 않음’은 익숙한 일이 아닌가 봅니다.” “네, 정말로 특별한 일이죠.” 성녀는 특별함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쥬다스로서는 딱히 의도한 바가 아니었다. 일부러 기척을 죽이려들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다. 다만 짐작 가는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정령왕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 강해서 자신의 존재감마저 파묻혔을 수가 있다. 또는 본래 육신의 주인이 아닌 자가 그 몸을 사용하게 되어 일어나는 부작용 같은 것도 일리가 있었다. 짐작한 부분을 굳이 꺼내어 놓지 않고 그 이유를 묻자 성녀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내가 느끼지 못하는 건 상대가 보통 사람과 달리 아주 특별할 때뿐이지요.” “…….” “분명한 건.” 그녀는 활짝 웃으며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헤브가 좋아하는 걸 보니, 당신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일 거예요.” 해맑은 칭찬에 쥬다스는 그저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 걷지 않아 넓게 탁 트인 대강당에 도달했다. 하나의 돔처럼 펼쳐진 공간에 사제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그 제일 깊숙한 안쪽에 홀로 붉은색 의복을 갖춘 교황이 보였다. “자아, 다 왔어요. 성하께서 직접 진명을 내려주실 겁니다.” 쥬다스의 방문을 알아차린 교황이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올해 66세로 알려진 교황은 나이에 비해 정정하여 겉보기엔 아직도 중년으로 보였다. 교황이 팔을 들어 올리자 붉은 옷자락이 한 차례 펄럭였다. 그 손끝은 정확히 쥬다스를 향해 있었다. 모여 있던 모든 사제의 눈도 따라서 그를 향했다. “이리로 오라.” 크게 소리친 것도 아닌데 귓가에 선명히 와 닿는 음색이었다. 쩌렁쩌렁하진 않아도 강한 힘이 담긴 목소리였다. 쥬다스는 교황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신성이 황권보단 약하다 하지만 루바르잔 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는 성당 위에 집권하는 자였다. 그러니 엄중하기로 따지면 황제를 만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자리였다. 쥬다스가 그 앞에 서자, 교황은 물이 담긴 대접을 들어 한 손을 그 안에 담갔다. 그리고 물이 묻은 손으로 쥬다스의 양어깨와 머리를 차례로 눌러 축복했다. “보라, 형제여. 너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함께할 진명을 내리노니.” 교황은 들고 있던 대접을 내려 쥬다스가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대접 안에는 맑은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여기에 오른손을 담가 새 이름을 확인할지라.” 찰랑. 차가운 물이 팔목까지 닿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대접 안의 물이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하얗게 빛나던 물은 이내 먹물처럼 새까맣게 훅 물들었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눈을 깜빡이자, 마치 빛으로 글씨를 쓰듯 한 글자씩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물 위의 글자를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쥬다스와 교황뿐이었다. 결과를 확인한 교황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E…….’ 첫 글자를 본 순간 쥬다스는 직감했다. 이건 본래 황자를 위한 이름이 아니다. 이 이름은 그의 것이었다. [Egret.] 결국 여기 내려진 진명이란 온전히, 처음부터 그를 가리키는 단어였다. 진명은 신이 내린, 오로지 자신만의 새 이름이었다. 스스로 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 이름을 강제로 알 권한이 없었다. 진명을 받은 자가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그중 맨 앞 글자뿐이었다. 그래서 교황의 인장이 찍힌 확인서에는 E라는 글자가 큼직하니 적혀 있었다. 쥬다스는 확인서를 받아 든 채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진명식이 끝난 대강당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교황은 자리를 떠난 지 오래고, 뒷정리를 하던 사제들도 모두 할 일을 마치고 나갔다. 촛불이 타오르는 강당 안에서 쥬다스는 홀로 자리했다. 「이그레트.」 “……그래, 그것이 내 이름이지. 이 아해의 이름이 아니라.” 「기뻐? 아님, 슬픈 거야? 지금 네 감정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유니가 걱정스레 그의 뺨을 쓸었다. 정령의 말대로 쥬다스 역시 자신의 감정을 한 가지로 정의 내리기 어려웠다. 우선 기쁜 것도 있었다. ‘이그레트’는 분명 죽었다. 92년의 수명을 채우고 정령들에게 둘러싸여 편안하게 눈을 감았었다. 그리고 영문 모를 일이나, 제국의 1황자 몸에서 다시 깨어났다. 그러니 그는 스스로를 다시 ‘이그레트’라 부를 일이 없다 여겼다. 한 번 그 이름으로 맹약한 정령들이야 결코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켰지만, 이미 그 자신은 이그레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1황자 본인도 역시 아니었다. 쥬다스의 육신을 사용하면서 이미 죽어버린 이그레트의 자아를 유지하기란 상당히 아슬아슬한 일이었다. 죽었는데 죽지 않은 인간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그에게 다시금 ‘이그레트’라는 이름이 주어졌다. 잃어버린 소중한 이름을 되찾았으니 당연히 기쁘고 충족감이 들었다. “내가 자리를 잡을수록, 어쩐지 점점 이 아이는 돌아올 곳이 없어지는 기분이 드는구나.” 「어차피 너만을 위한 이름을 받고 싶었던 거잖아.」 “그렇긴 하다만.” 그러나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쥬다스는 제 이율배반적인 사고와 감정을 인식하고 쓰게 웃었다. 이대로 계속 감상에 빠져 있을 순 없었다. 그는 길게 숨을 한 번 들이마시고 몸을 돌렸다. 강당 입구에는 줄곧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성녀 위그드라실과 헤브가 나란히 서 있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머무실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미안합니다. 원 실없이 생각이 길어진지라.” “아뇨. 더 계셔도 괜찮았어요. 나도 종종 그러는 걸요.” 위그드라실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웃음에 배어 있는 감정의 조각을 눈치챈 쥬다스가 넌지시 말했다. “……성녀님도 고민이 있을 때가 있나 보구려.” “그럼요. 가끔은 궁금할 때가 있어요. 바깥세상은 과연 어떤 곳일까, 나는 왜 남들과 다른 존재일까 하는 그런 것들이요.” 소리를 들어 쥬다스가 가까이 온 것을 확인한 성녀는 먼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주말에 연참 기대하셨던 독자님, 죄송합니다.ㅠㅠ 이번주는 여러모로 상황이 안되어서... 일일참(?)으로 너그러이 봐주세요 ㅎ 주시는 의견들 감사히 받고, 또 참고하고 있습니다.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이 보실 때 이상하다면 그 시선을 참고하는 것도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지적해주신 어색한 부분이나 표현 등은 원본에서 먼저 수정후, 이후 연재란 수정을 거칠 예정입니다. 늘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즐겁게 쓰고 있습니다. 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7 / 0240 ---------------------------------------------- 2장. 진명식 타고나기를 인간이 아닌 ‘성녀 위그드라실’로 태어난 존재에게도 자아가 있는 이상 혼란과 호기심은 존재했다. 특히나 성녀란 인간과 닮았지만 넘치는 신성력과 500년이라는 긴 수명을 가진 특이한 개체로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 담담히 자신이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고 있으나, 그녀의 가슴속에도 인간과 같은 감정이 때때로 꿈틀거리곤 했다. “특히나 정을 준 대상이 먼저 세상을 떠날 때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곤 했었답니다. 그럴 땐 계속 기도했어요. ……더 이상 떠난 사람 생각이 안날 때까지, 아주 오랫동안.” “…….” “이제 내게 남은 수명은 200년가량, 앞으로도 얼마나 더 그런 경험을 겪어야 할지.” 거기까지 얘기한 위그드라실은 아차 싶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할까요? 헤브가 좋아하는 분을 만난 건 오랜만이라 그런 걸까……. 아?” 꼬옥. 텅 비어 있던 차가운 손 위로 자그마한 손이 맞닿았다. 부드럽게 잡아오는 따뜻한 온기에 그녀의 목이 턱 막혀 왔다. 그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을 힘껏 잡아준 쥬다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누구나 겁나는 일이요. 홀로 남겨진다는 건 말입니다.” 성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보이지 않는 눈이어도 그 기능을 전부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떨리던 눈망울에 점차 물기가 어렸다. ‘겁이라고? 나, 겁이 났었나?’ 그녀가 침묵하자 한 박자 쉰 쥬다스는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울고 싶을 만큼 무서울 땐 그저 울면 나아진다 하더이다. 어차피 인간은 다 다른 존재요. 보통보다 조금 더 특별함을 가졌을 뿐, 내 눈엔 성녀님도 오롯한 인간입니다.” “내가, 인간?” “이백 년을 더 사실 수 있다 하였으니 그중 절반은 얼굴 맞댈 날이 있겠지요. 허허, 그동안 말벗이라도 되어보렵니까?” ‘벗…….’ 입안으로 중얼거려 본 위그드라실의 얼굴에 점차 미소가 지어졌다. 위그드라실은 제 차가운 손을 붙들고 있는 작은 손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300년이 다 되어가도록 인간을 위해 살아온 성녀는, 자신을 같은 인간이라 칭해 주는 존재로 인해 조금 다르게 살아보기로 했다. “네, 형제님을 위해서라면 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허어……. 고맙지만 기왕지사 울 일보다야 웃을 날이 많은 게 좋겠습니다.” 결국 성녀 위그드라실은 소리 내어 쿡쿡 웃고야 말았다. *** 진명을 받은 사람은 즉시 쉴 수 있는 방으로 안내되었다. 사제들이 머무는 기숙사 같은 곳이었는데 귀족 자제들이 사용하기에 시설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생필품은 마련되어 있었지만 고급스럽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았다. 세면 시설은 공용으로 사용해야 했고 보급형 침대는 좁고 딱딱했다. 그래도 본래 그마저도 없던 자연 속에서 잘만 생활해 왔던 기억이 있는 쥬다스로서는 걸릴 것 없이 푹 쉴 수 있었다. 거기서 별 탈 없이 하루를 묵은 쥬다스는 포탈 이용 시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뭔가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포탈 관리실에 도달하자 평소와는 달리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중엔 출발하지 못한 루바흐 학생이 대다수였고, 다른 교황청 방문객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쥬다스를 발견한 에단이 크리스티나와 함께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이로구나. 에단, 크리스티나. 그래, 진명들은 잘 받았고?” “예.”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는 두 사람을 향해 크리스티나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아침이라기엔 문제가 좀 있네요.” “흐음……?” 확실히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다. 쥬다스는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포탈 관리자를 향해 거칠게 항의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망연히 포탈 앞에 선 채 고민에 빠진 사람이나 일행끼리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작 포탈 관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그를 보니 쥬다스도 대충 상황이 짐작이 갔다. “포탈이 고장 났다고 합니다.” 에단이 현 상황을 일축했다. 짐작은 했지만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에 쥬다스가 턱을 짚었다. 그가 알기로 포탈은 마법력을 기반으로 작동되는 단순한 원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포탈의 설계와 좌표값을 입력, 출력하는 기능 및 안전성을 위한 장치 등은 복잡하게 얽혀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마법이었다. 마법은 소모되는 에너지만 충분히 제공된다면 절대 녹슬지 않는다. 한번 입력한 수식에는 오차가 생기지 않으며 물리 작용이 아니니 내구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그야말로 누군가 의도적으로 망가뜨리지 않는 이상, 자연적으로 ‘고장’ 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포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던 쥬다스로서는 오히려 현 상황이 더욱 난해한 문제로 다가왔다. 그가 직접 설계에 관여한 만큼 구멍이 있다면 알아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그에겐 정보가 좀 더 필요했다. “……유니.” 「응, 이그레트.」 술사와 정령은 많은 부분이 이어져 있다. 정령술사가 강하게 바라는 것은 굳이 말로 전달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령에게 전해졌다. 그랬기에 유니는 더 물을 것도 없이 쥬다스가 바라는 ‘정보’를 알아오기 위해 즉시 바람을 사방에 퍼뜨렸다. 순간적으로 귓불을 훅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을 감지해 낸 에단이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람의 정령인가.’ 태어나기를 무가 집안에서 태어나 그 자질을 훈련시켜 온 자답게 에단은 이런 면에서도 유독 감이 좋았다. 그는 쥬다스가 정령을 부렸음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그가 주시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쥬다스는 빙긋 웃어보였다. “쥬다스 님, 방금.” “여직 시간이 충분히 남았으이. 차분히 기다려 보게나.” “…….” 쥬다스가 의도적으로 대답을 피했음을 눈치챈 에단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또 다른 정령은 쥬다스의 머리 위에 엎드린 채 투덜거리고 있었다. 「이그레트, 또 유니만 부른다요.」 「훗. 그게 나랑 너의 차이 아니겠어?」 「! 너무해-!」 이런, 또 아웅다웅하는 두 정령을 보며 쥬다스는 볼을 긁적였다. 예전부터 4명의 정령왕 중 제일 잘 티격태격하는 사이는 저 둘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리광이 많고 응석받이인 토니와 장난치길 좋아하며 짓궂은 성격의 유니는 사사건건 잘 부딪쳤다. 주로 유니가 토니를 자극하는 쪽이었는데, 매번 같은 패턴의 놀림에도 토니는 아주 열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니 유니가 참지 못하고 자꾸 건드리게 되는 것이다. 유니가 자애로워지는 범주는 오로지 이그레트 한정이었다. 「힝, 이럴 땐 루니가 보고 싶다요.」 「어쭈, 루니가 네 보모야? 응? 어차피 루니한테 제일 많이 혼나는 것도 너면서 뭘 그래?」 유니의 정곡에 토니는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 앞에서는 유니도 조금은 얌전히 굴었다. 그를 화나게 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졌기 때문이다. 화나게 한 정령이 아닌, 이그레트가. 일전에 한 번 제대로 루니의 화를 돋워 이그레트를 곤란하게 만든 적 있는 유니는 그 뒤로 가급적이면 그 앞에서는 조심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제일 그로부터 혼나는 장본인은 토니였다. 「아, 이그레트! 포탈이 고장 난 원인을 알아냈어.」 유니는 구박하던 것을 멈추고 쥬다스의 손바닥 위로 뽀르르 날아갔다. 「밤중에 마법사가 하나 이곳에 다녀갔대. 일부러 포탈에 균열을 냈다나 봐.」 “……흠.” 여기까진 예상대로였다.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포탈을 망가뜨렸다. 하지만 대체 누가, 왜인지는 명확하지가 않았다. ‘이곳에 발을 묶어 둬야 할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교황청은 오직 포탈로만 입장할 수 있는 성역이다. 사방이 강물에 둘러싸여 있고 건너편과 이어진 다리는 모두 분리된 채였다. 물을 건너오려고 해도 강력히 통제되고 있으며 높은 벽을 쌓아 입구를 봉해 버렸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거대한 밀실과도 같았다. ‘그 말은 포탈을 건드린 마법사도 이곳에 아직 남아 있다는 뜻.’ 쥬다스의 금안이 동력이 꺼져 버린 포탈을 지그시 향했다. “이거 어떡할 겁니까? 우린 오늘 출발하지 않으면 교칙 위반이라고!” “형제님, 일단 진정하시고…….” “당신 같으면 진정이 되겠습니까?!” 포탈을 이용하지 못한 방문객들의 항의가 점차 거세졌다. 포탈 관리자는 관리자대로 난색을 표하고 있었으나 대다수의 사람은 남의 사정 봐줄 의향은 없었다. 이윽고 상황이 위로 전달된 모양인지 성녀 위그드라실이 헤브를 대동하고 포탈로 달려왔다. 성녀가 등장하자 혼란이 조금 가라앉았다. “나는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자녀 중 하나입니다. 우선 형제자매님들께 불편을 겪게 해드린 점 사죄드립니다. 즉시 포탈 수리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니, 나가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머무시는 동안의 편의는 정성껏 제공하겠습니다.” 성녀씩이나 되는 자가 머리를 숙였으니 거기에 대고 함부로 삿대질을 할 수 있는 위인은 아무도 없었다. 불만 어린 표정들은 여전했으나 더 이상의 항의는 이어지지 않았다. 위그드라실의 사과를 들은 방문객들은 투덜거리며 관리실 밖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직 포탈에 미련이 남은 몇몇 사람과 쥬다스 일행만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교황청의 포탈관리가 허술한 건 아닙니다. 침입자의 실력이 월등히 좋은 것일 뿐(...)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8 / 0240 ---------------------------------------------- 2장. 진명식 그러자 헤브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 “히익.” 남아서 기웃거리던 이들은 헤브를 보고 기겁을 하고 쫓겨나듯 밖으로 뛰쳐나갔다. 살기등등한 헤브를 곁눈질로 확인한 에단이 조심스럽게 쥬다스를 불렀다. “……쥬다스 님.” “그래, 내 한 가지만 묻고 가도 괜찮겠습니까?”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위그드라실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포탈 관리실의 통제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까?” “관리실 안팎으로 보초를 서고 있어요. 허가 없이는 출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신성 결계도 설치되어 있고요. 결계가 깨지면 자동으로 경보가 울리도록 알람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3중 보안 체계였다. 보초들이 직접 관리실을 지키고 선 데다, 결계도 쳐두었으며, 그 결계가 깨어질 경우 알람이 울려 즉시 대응할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한데 범인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다?” “……단순한 고장이 아님을 이미 알고 계셨군요. 맞아요, 포탈은 침입자에 의해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어요. 하지만 어젯밤엔 아무도 그 침입자를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해요. 알람 마법 역시 발동되기 전에 그 수식을 파괴해 버린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침입자의 실력이 몹시 뛰어났다. 교황청에서 엄중히 관리하고 있던 시설을 단순히 침투한 정도가 아니라 소리 소문 없이 훼손할 정도가 되려면 제국 내에서도 알아주는 능력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교황청의 안보가 뚫린 문제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린 에단과 크리스티나의 표정도 단단히 굳었다. 상황은 꽤나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침입자를 찾고자 새벽부터 사제님들이 사방으로 알아보고는 있지만,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어렵게 되었다고 해요. 이는 흡사…….” 위그드라실은 세 사람을 향해 진지한 어조로 말을 맺었다. “대현자 이그레트를 의심해 볼 만한 실력입니다.” *** 포탈 관리실에서 나온 셋은 그대로 갈 길을 잃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직 외출을 허가받은 날짜가 좀 여유 있는 편이라 크게 불안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포탈 문제로 복귀일자가 늦춰진다면 그 점은 학원 측에서도 감안할 터였다. 평소와 다르게 가만히 턱을 짚은 채 상념에 빠져 있는 쥬다스를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현자의 이름이 거론될 상황이라. 그 정도의 실력자가 굳이 이 시점에 이곳의 포탈을 훼손했다는 건 명확한 이유에서겠지.” 에단도 작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이게 끝이 아닐 겁니다. 아마 노리는 이가 있어 포탈을 먼저 닫아놓은 것일 테고, 그렇다면 대상은…….” 둘의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모아졌다. 정작 다른 생각을 하느라 흐름을 놓치고 있던 쥬다스는 뒤늦게 쏠린 시선을 느끼고 둘을 의아하게 올려다보았다. “음?” “높은 확률로 당신이겠죠, 쥬다스 님.”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사뭇 진지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둘을 번갈아 쳐다본 쥬다스는 이내 분위기를 파악하고 빙그레 웃었다. “호오, 그럴 수도 있겠구만. 걱정해 주어서 고맙구나.” “딱히 걱정이라기보단 경고를 드린 것일 뿐.” 크리스티나는 눈을 내리깔며 차갑게 정정했다. 그래도 그녀를 향한 기특하다는 눈빛은 바뀌지 않았다. 쥬다스는 웃음기를 매단 채 턱을 매만졌다. “이것 참, 차라리 목표가 나라면 일이 수월할 터인데.” “예?” “가만두어도 제 몫조차 해내지 못하는 치를 노려 얻을 게 무어 있겠느냐. 방문객 중 하나를 노린 것인 만큼 지위가 높은 이를 노릴 법하긴 하다만. 아무래도 나보단 너희가 더욱 조심해야 할 것이야.” 그의 말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허를 찔린 듯한 눈을 했다. 과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이긴 했다. 1황자는 아직 황태자 자리조차 올라앉지 못한 반푼이 황자였다. 정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건 물론, 그를 총애하던 황제조차도 더 이상 손쓰기 힘들 정도로 침몰한 존재. 7살의 외형에서 더 이상 자라나지 않는 나약한 신체는 그가 곧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란 소문마저 떠돌게 했다. 실제 몸의 기능이 정지하다시피 하였기에 아주 틀린 소문도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의 쥬다스가 꾸준히 몸을 단련시키며 회복의 의지를 다졌기에 상태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건 그 내용보다는 쥬다스가 스스로를 평가한 부분에 있었다. ‘스스로의 부족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거리낌이 없어.’ ‘……목표가 자신이라면 수월했을 것이라니.’ 그들이 느낀 쥬다스는, 매사에 온화함을 품고 있었으나 자신에 대해서는 소름 끼치도록 이성적이었다. 게다가 위협을 별로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해 보이는 무사태평한 태도가 더욱 위화감을 들게 했다. 두 사람은 또다시 같은 결론을 내렸다. ‘역시 그동안의 백로황자는 단순히 그가 만들어 낸 이미지였나.’ 몸이 허약한 것은 사실이었겠지만, 아마도 그가 살아남기 위해 발톱을 숨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언젠가 분명 그 발톱을 드러낼 날이 올 테였다. 그동안의 황자를 떠올린 크리스티나는 분함을 넘어 허탈하기까지 했다. 이 결론대로라면 학원 루바흐의 전교생이 그의 손에 놀아난 셈이다. 아니, 학원뿐 아니라 황권을 둘러싼 전부가! 물론 이는 실제 쥬다스와 아무 관계없는 상당히 엉뚱한 결론이었다. “그래서 말이다. 누군가 침입자에게 피해를 보기 전에 미끼를 놓아볼 생각인데. 너희가 도와주지 않으련?” “……예?” “……미끼?” 의아한 눈빛들을 마주한 쥬다스가 말 대신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에 따라 은은한 바람이 몰려들어 주변을 빙빙 돌았다. “정령이란 자연의 힘 그 자체. 사람의 흔적을 좇아 침입자를 찾아내는 정도는 쉬이 할 수 있단다. 단 무작정 찾아가서 그를 제압하기란 어려울 터.” 여기서 어렵다란 단순히 실력 차이를 뜻하는 게 아니었다. 범인을 찾는다 해도 도통 그를 증명할 거리가 없다면 말짱 도루묵인 셈이다. 물론 다른 이들이 보는 앞에서 제 힘을 온전히 드러낼 생각도 없었기에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점도 있었다. “내 그와 직접 대화를 해볼까 싶으이.” “그렇지만 쥬다스 님. 정령술은 굉장한 이능이나, 지금 상황에선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독이 되지 않겠느냔 뜻으로 에단은 난색을 표했다. “혹 정말 대현자 이그레트라도 나타난 거라면…….” “…….” 이쯤에서 쥬다스는 매우 난처해졌다. 생각해 보니 정작 ‘이그레트’가 죽었음을 세상은 모르고 있었다. 그가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를 포기하고 정령들과 함께 자연 속을 떠돈 세월만 해도 수십 년이었다. 그러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상은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보여준 강대한 힘이 평범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기에 막연히 죽는다는 가정을 염두에 두지 않을 뿐이었다. 살아 있다고 해도 늙을 대로 늙어버린 노인. 하지만 세상은 끝까지 그를 인간답게 취급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쥬다스는 굳이 ‘이그레트가 늙어죽었을 가능성’을 끄집어내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글쎄……. 정령을 다루는 술사였다면 애초에 추적할 수 없게끔 손을 써놨을 게다. 그러나 그치는 정령술사가 아니야.” 그 답에 안도를 하면서도 에단은 여전히 굳은 얼굴을 피지 않았다. “굳이 쥬다스 님께서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나설 가치가 있는 일입니까?” 그 말대로 이건 교황청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포탈을 고장 낸 침입자가 아직 별다른 위해를 가하지 않았으므로, 쥬다스가 먼저 움직일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쥬다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포탈의 설계에 직접 관여했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의무감은 둘째 문제였다. 자만은 아니나 그가 언급될 정도의 실력을 가진 이가 누군가를 목표로 한다면 쉬이 막아내기란 어려울 테였다.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고, 충분한 힘이 있으며, 무슨 짓을 할지 예측이 가는 데에도 그를 막지 않는다면 그건 방관자일 뿐이다. ‘또 전과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실수를 반복한다면 이는 더 이상 실수라 부를 수 없다. 쥬다스는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것뿐이란다.” 하는 김에 ‘이그레트’로서의 오명도 좀 벗기고. 그리 여기며 멋쩍게 웃는 그를 두고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럼.” “저희도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군요.” 크리스티나가 손을 털며 가뿐히 결론을 내렸다. 세 사람은 일단 날이 조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 석양이 질 무렵, 모든 예배가 끝난 교황청은 마침내 한산해졌다. 포탈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간혹 돌아다니며 기웃거리긴 했지만 신경 쓰일 만한 숫자는 아니었다. 순행절 예식과 더불어 본격적인 예배가 진행되는 낮 시간에는 복잡하기도 복잡할뿐더러 통제되는 구역이 많아 움직이기 불편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적기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여러모로 오해받는 이그레트. (...)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19 / 0240 ---------------------------------------------- 2장. 진명식 쥬다스는 감시를 위해 띄워놓았던 바람을 불러들였다. 후웅 그의 손바닥에 몰려든 작은 정령들이 까르륵 웃었다. “자, 아이들아. 안내를 부탁한다.” 손을 떠난 바람이 훅 하고 한 방향으로 향했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세기였기에 그들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허공을 훑었다. 정령은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이 뚜렷했다. “…정말 편리하군요.” 이 한 가지 쓰임새만으로도 제국에서 정령술사를 귀히 취급하는 이유를 알만했다. 찾고자 하는 이를 간단히 추적할 수 있다니, 간편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었다. “너무 멀리 떨어지거나 오래된 정보는 찾기 힘들단다.” 쥬다스는 느긋하게 걸으며 덧붙였다. 일반적으론 그랬다. 하지만 그는 정령왕의 술사. 시간은 좀 걸릴지 몰라도 그가 찾고자 하는 이는 어지간해선 전부 찾아낼 수 있었다. 상대가 흔적을 지우는 데에 특출난 비법을 갖고 있지 않는 한에서긴 했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었다. 정령왕의 눈을 속이려면 인간 이상의 힘을 가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단순히 그를 정령술에 자질이 있는 12세 소년으로만 알고 있는 두 사람은 그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교황청은 작은 도시와도 같은 구조였다. 각 목적별로 지어진 예배당만 열 군데가 넘었고 숙소나 식당을 비롯한 편의시설들과 각종 업무를 처리하는 기관까지 합치면 그 규모가 상당했다. 학원 루바흐에 비하자면 작은 편이긴 했으나 일일이 뒤져보기엔 무리가 있는 넓이였다. 바람의 정령이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렸다. 물론 이는 쥬다스의 느린 걸음 탓이기도 했다. 그들이 대략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석양이 완전히 하늘을 붉히고 있었다. 그들은 노을의 적광을 받으며 조그마한 성전의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모양인지 불은 꺼져있었고, 약간의 먼지가 공기 중에 날아다녔다. 막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이었다. 쉬익 “……!” 누군가의 접근을 가장 먼저 눈치 챈 에단이 번개같이 검을 뽑아들고 상대의 목에 겨누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는 목에 닿은 칼날을 인지하고 우뚝 자리에 멈췄다. “웬 놈이냐.” 에단의 낮은 목소리가 헛헛한 예배당을 울렸다. 검은 비둘기가 새겨진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상대가 움찔 몸을 떨었다. 쥬다스가 로브에 새겨진 검은 비둘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사이 크리스티나 역시 차갑게 입을 열었다. “범인은 너인가.” “……크리스티나?” 놀란 목소리가 로브 속에서 흘러나왔다. 제 이름을 알고 있는 상대방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상대는 서둘러 뒤집어쓰고 있던 후드를 휙 벗어 제꼈다. “게다가 쥬다스님까지? 당신이 여기에 왜, 아니, 겁도 없으십니까?!” “겁이 없는 건 네놈의 혓바닥인 것 같군.” 에단이 검을 든 손에 힘을 주며 사나운 기세를 뿜었다. 학원 신입생인 그는 잘 모르는 얼굴이었지만 나머지 둘은 안면관계가 있는 상대였다. 쥬다스가 난감한 미소를 매달고 고개를 저었다. “진정 하려무나, 에단. 우리가 찾던 이는 그가 아니야. 그는 바이칼, 나와 같은 수업을 듣는 학우란다.” “…….” 여전히 경계어린 시선이었지만 에단은 순순히 검을 거두었다. 간소한 차이를 두고 목에 직접 닿지 않았던 탓에 상처는 없었다. 바이칼은 찝찝한 표정으로 멀쩡한 제 목을 매만지며 물었다. “…이런 곳엔 어쩐 일입니까?” “교황청엔 진명을 받으러 왔을 뿐이야. 그러는 너야말로 여기서 수상쩍게 무얼 하고 있던 거지? 낌새를 보니 진명을 받으러 온 것 같진 않은데.” 쥬다스 대신 답한 크리스티나가 팔짱을 낀 채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그를 추궁했다. 바이칼은 황당하단 표정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보았다. “……진명? 그렇게 셋이 말입니까?” “팀이다.” 에단의 짤막한 대꾸에 바이칼은 납득한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저는, 만나기로한 사람이 있어서.” “만나기로한 사람?” “가문이 속해있는 학파 수장이 이곳에 계신다하여 왔습니다. 가문의 일이니 다른 건 따로 밝히지 않겠습니다.” 목적은 달라도 묘하게 동선이 겹쳤다. 에단과 크리스티나의 시선도 로브에 새겨진 검은 비둘기로 향했다. ‘학파라…….’ 학원 루바흐에서 공동의 교육을 받은 자라 할지라도 각 가문마다 추구하는 학파는 다양했다. 전통에 따라 그저 의무적으로 학파에 가입하거나 자신의 세대에서 다른 학파로 옮겨 가치관을 정립할 수도 있었다. 보통은 같은 이념을 좇는 이들끼리 모이게 되기 때문에, 학파란 정치적 색을 띄는 경우가 허다했다. 벌써 1황자가 아닌 다른 황자를 지지하는 세력의 경우 몇몇 가문이 동질의 학파에 모여 있었다. 아직 학파를 정하지 않은 에단과 크리스티나에게도 많은 제의가 들어오고 있었다. 자라는 새싹이긴 하나 차후 귀족체계에서 큰 기둥이 될 두 인물에게 흑심을 품는 세력은 많았다. 또래의 바이칼이 벌써부터 학파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은 몰랐던 사실이기에 그들은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하필 왜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그런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포탈이 의도적으로 파괴된 지금, 바이칼의 행동은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어쨌든 세 분은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이 성전은 최근 잘 쓰이지 않아 예배도 드리지 않는다고…….” “아니. 예배를 드리러 온 건 아니지만 우리도 찾을 게 있다. 안을 확인해야겠군.” “그, 그건.” “왜 당황하지? 그 수장이란 자가 우리가 봐선 안 될 사람인가?” 크리스티나가 싸늘한 눈으로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또래 여학생 중에서도 늘씬하게 키가 자란 크리스티나는 바이칼과 눈높이가 같았다. 깔아보진 못하더라도 충분히 냉기를 품은 오만한 눈빛이 그를 마주했다. 바이칼은 쉽사리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그럼.” “……위험할 수도……!” 바이칼이 자신을 제치고 들어가려는 크리스티나를 다시 막으려던 찰나였다. “이거, 이거. 꽤나 시끄럽군. 날 찾아온 손님이 하나가 아닌 모양이지?” 성전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고 모두 예배당으로 들어서자, 성전 깊숙한 곳에 앉아있던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촛불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성전 내부에는 작은 창으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가 조명의 전부였다. 바이칼과 마찬가지로 로브를 걸치고 있던 사내는 큭큭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내가 초대한 건 한 명뿐인데.” “당신은……?” 사내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왔다. 워낙 어두워 후드를 뒤집어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그레트, 저 사람이야.」 심증뿐이던 사내의 정체에 유니가 확증을 얹어주었다. 쥬다스는 유심히 사내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체격에 분위기도 꽤 유했다. 그럼에도 뭔가 자꾸 걸리는 구석이 있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분명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사내가 가진 분위기가 묘하게 익숙했다. “오호라, 이거 전부 귀하신 루바흐 학원생들 아닌가? 무슨 일이지. 그렇게 무서운 얼굴들을 하고서.” 능청맞은 어조로 하나하나 눈을 맞추던 사내는 이내 쥬다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예상 밖의 인물도 하나 끼어 계시는군. 바이칼, 네놈이 다 모셔온 게냐?” “아, 아니요! 저도 몰랐습니다.” 바이칼은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기가 눌린 표정이었다. 언제나 빳빳하게 콧대를 치켜들고 다닐 것 같던 바이칼의 태도가 아니었다. 꼬리만 짐승처럼 주눅이 든 그를 힐끗 쳐다본 쥬다스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갑작스레 찾아와서 미안하이. 나는 쥬다스라 한다네. 실례가 되는 줄은 아네만, 몇 가지 물어도 괜찮겠는가.” “흐음?” 사내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살짝 꺾었다. 관찰하듯 내려다보는 시선과 똑바로 마주한 쥬다스는 그의 눈이 피처럼 붉은 색임을 알아차렸다. “…….” 섬찟한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쥬다스는 할 말을 놓치고 멍하니 그 눈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저 눈은.’ 왜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싶을 정도로 선명했다. 저 핏빛의 눈동자는 그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쥬다스가 침묵하자 사내는 흥미가 담긴 어투로 말했다. “‘쥬다스’라, 아주 마음에 드는 이름이야. 신분도 알만 하지만, 뭐. 내가 예를 차리는 존재는 몇 안 돼서. 별로 바라는 것 같진 않지만 미리 양해를 구하지. 하고 싶은 말은?” “…….” “뭐, 자기소개부터 해야 하려나? 큭큭. 좋아. 나는 프리드. 성은 옛날 옛적에 버렸으니 프리드가 전부다. 그럼 이제 만족하시는지, 꼬마황자전하.” 사내, 프리드가 킬킬거리며 후드를 벗었다. 어둠 속이었지만 확연히 드러난 윤곽을 마주한 쥬다스의 금안이 작게 일렁였다. 프리드 길리아노. 쥬다스의 기억 속에 있는 사내의 풀네임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그 얼굴까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진정한 회춘이 여기에... 벌써 20편까지 왔네요. 얼른 이 파트 끝내고 학원생활 좀 진행시키고 싶습니다. ㅎㅎ 전 편에서 성녀가 말한 '이그레트 의심설'은 진짜 의심한단 뜻이라기보단... 그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굉장한 실력자란 뜻이었습니다. 물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었지만요. 오탈자 지적해주신 덕에 매번 부끄러워하며(...) 고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그럼 내일 또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0 / 0240 ---------------------------------------------- 2장. 진명식 “프리드……?” 그럴 리가 없다. 쥬다스는 혼란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자신이 알고 있는 프리드라면 이미 이그레트와 마찬가지로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어야 정상이었다. 그런 그가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젊은 시절 그대로의 얼굴을 유지한다는 것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었다. “…….” 쥬다스가 침묵하자 자연히 나머지 둘도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대화를 하고자 한 건 쥬다스였으니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쥬다스의 반응이 영 깔끔하게 진행되질 않았다. 표정은 차분했으나 황금색 눈동자 너머로는 혼란이 일렁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프리드는 더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따로 더 할 말이 없다면 나는 이만 가보도록 하지.” “예? 수장님, 그럼 저는……?” 부름을 받고 찾아온 바이칼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지만 프리드는 귀찮음을 가득 담아 파리 쫓듯 손을 휘저었다. “아~ 됐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찾는 손님이 많으면 짜증난단 말이지.” 그대로 몸을 돌려 스쳐지나가려던 프리드를 향해 쥬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얼 위해 이곳 사람들의 발길을 묶었는가.” 멈칫 발길을 세운 프리드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호오, 이것 봐라. 알고서 찾아왔단 말이냐?” “…….” “큭큭큭. 제법 영리한 꼬마로구나. 네 말이 맞다. 목적이 있어서 포탈을 건드렸지.” 프리드는 깔끔하게 제 소행임을 시인했다. 포탈은 국가재산 중 엄중히 관리되어지고 있는 국보급 시설이다. 특히 신성의 중심인 교황청 포탈은 그 무게가 여타의 것들보다 막중했다. 그러한 포탈을 허가 없이 침입한 것도 모자라 훼손까지 한 일은 중범죄에 해당하는 크나큰 죄질이었다. 만약 제대로 처벌을 받는다면 끔찍한 중형을 받거나 심할 경우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런 죄를 저토록 순순히 시인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뜻했다. 첫째는 흥미였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누구의 방해도 없었던 일을 눈치 챈 자가 고작 저런 코찔찔이 어린아이. 불쾌함과 더불어 그에 대한 흥미도 스멀스멀 스며왔다. 그것도 하필이면 제국 내에서 가장 빛을 받지 못한 불운의 제 1황자였다. 여러모로 재밌어질 예감에 프리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른 하나는, 그만큼 자신이 있단 뜻이었다. 저가 범인임을 알려도 잡히지 않고 유유히 이곳을 떠날 수 있다는 자신이 충만했다. 자기 실력에 어지간한 신뢰가 있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행위였다. “이제 되었나? 그럼, 또 보지.” 프리드는 배부른 사자처럼 낮은 웃음을 흘리며 어슬렁어슬렁 성전을 빠져나갔다. 너무도 당당한 작태에 누구도 그를 붙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포탈? 수장님이?” 바이칼이 침묵을 깨고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크리스티나가 사납게 그를 홱 돌아보았다. “학파의 수장이 저자라고? 그렇다는 건 너 또한 공범인가?”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공범이요?” “저자와 손을 잡고 포탈을 건드린 게 같은 루바흐 학생이라면…….” 뒷말은 생략되었으나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그 이상 냉랭할 것도 없이 싸늘하게 굳어있었다. 혐오마저 깃든 바다색 눈동자를 마주한 바이칼이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결코 아닙니다. 포탈이라뇨. 수장님을 만난 건 방금이 처음입니다. 그 전엔 서신으로만 연락을 드렸기에.” “그렇다면 왜 하필 여기서, 그자를 만나기로 한 거지?” “……가문의 일이라 자세히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아니, 대략 이야기하자면 그분의 연구에 관심이 있어서요. 수장님은 천재십니다. 저분이라면 정말 대현자 이그레트와도 견줄 수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굉장한 분이시라고요.” 거의 살의마저 느껴지는 눈빛화살에 바이칼은 은근슬쩍 말을 늘렸다. 찬사에 가까운 설명을 들을수록 크리스티나와 에단의 표정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에단이 불쾌감이 깃든 어조로 찔러물었다. “그 굉장하다는 분이 왜 저렇게 당당히 포탈을 망가뜨렸는지 이유를 말할 수 있겠나.” “……그건 저도 모르던 일입니다. 다만 수장님이라면 교황청의 포탈을 손쉽게 망가뜨릴 수는 있겠지요.” 단순히 발뺌하는 것인지, 진실을 말하는지를 알고자 둘의 시선이 날카롭게 바이칼을 훑었다. 결론을 내릴 수 없어 어설픈 침묵만이 잠시 그들 사이를 감돌았다. 잠시 후 크리스티나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그 침묵을 깼다. “흥, 적어도 이 내게 범죄자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수치는 느끼고 싶지 않으니 잘 처신해. 아무튼 범인은 알아냈으니 이제……?” 쥬다스를 돌아보며 의향을 물으려던 크리스티나였으나 그대로 굳어버렸다. 혹시나 싶어 시선을 이리저리 옮겨보았지만 찾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사실을 동시에 알아차린 에단 역시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쥬다스님?” 분명 그들과 함께 서있던 쥬다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있었다. 남은 셋은 망연히 그가 있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성전에서 빠져나와 어두운 길목을 걷던 프리드는 돌연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후드를 쓰고 있느라 근질거리는 뒷머리를 벅벅 긁어내린 그는 정면을 응시하며 킬킬거렸다. “허, 이건 또 뭐지. 아까 그걸론 썩 만족이 안 되었나 본데. 꼬마황자.” “…….” 후웅 붉은 눈동자에 눈앞에 있는 작은 소년이 비쳤다. 쥬다스가 어느 샌가 먼저 와서 그 길목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의 주변을 감도는 산들바람을 느낀 프리드가 흥미와 불쾌가 섞인 시선으로 그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목적이 있어 포탈을 건드렸다고 하였지. 그래, 누구의 발길을 묶고자 한 겐가. 프리드.” “그건 정령이냐? 기분 나쁜 재능을 가지고 있구나. 글쎄, 하나 알려주자면 단순히 발길을 묶으려고 한 짓은 아니야.” 프리드는 여유로운 태도로 로브 후드를 도로 눌러썼다. 그럼에도 붉게 빛나는 안광만은 가려지지 않고 남아 어둠 속에서 넘실거렸다. “단지 내게 필요한 걸 구했을 뿐이지. 큭큭.” 그가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흔들었다. 작은 구슬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구슬의 정체를 단박에 알아본 쥬다스가 표정을 굳혔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단순히 반짝이는 구슬처럼 보이지만, 실은 포탈에 박혀있던 정령석이었다. 정령석이란 자연의 정령으로부터 그 힘을 끌어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아티팩트다. 제국의 포탈이 안전하게 운영되고 것도 다 이 정령석이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정령 하나를 그 안에 가둔다는 개념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정령의 힘을 빌려 원소를 다루기 때문에 부작용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정령석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도 역시 이그레트가 유일했다. 포탈이 손상될 경우를 대비해 여분을 만들어두긴 했지만 그 하나하나가 굉장히 귀중한 국가재산이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네가 어째서.’ 쥬다스는 작게 탄식했다. 프리드는 그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였었다. 그런 만큼 가장 뜻이 맞았으며 포탈개발에도 함께 이바지했던 뛰어난 인재 중 한 사람이었다. 쥬다스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프리드가 재밌다는 듯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아, 그렇지만 여기에도 목적은 있지. 연구에 쓸 만한 재료가 아직 남았거든.” “정령석을 훔친 걸로도 모자라, 재료라니. 설마 처음부터 네 목적은……인간이 아니었던 게야.” “이야, 정말 눈치가 빠른데―? 이런 녀석이 어째서 쓰레기취급을 받고 있는지 영문을 모르겠군그래. 뭐, 내숭이라도 떨었나?” 프리드는 진심으로 그를 재미있게 여겼다. 예전부터 그런 성미였다. 그는 ‘보통’이 아닌 존재를 가치롭게 여겼다. 뒤집어 말하자면, 보통에 속한 범주는 전부 자갈밭에 깔린 돌멩이 취급을 했다. 뛰어나지 않은 것은 쓸모없다. 그의 지론이 그러하였으므로, 신이 내린 재능을 타고난 이그레트를 광적으로 따른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끝이 파국에 이르렀을 지언정, 젊은 시절 이그레트는 프리드의 우상이었다. “네게 흥미는 있지만, 오늘 수다는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 “비켜.”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는 금안을 확인한 프리드가 쯧 혀를 찼다. “거 귀찮게 구네. ‘소돔’.” 단조로운 부름이었으나 쿵 하고 땅이 울렸다. 흡사 지진이 이는 것도 같았으나 움직이는 부분은 그들이 서있는 좁은 면적뿐이었다. 땅이 갈라지며 그 속에서 돌과 뼈로 이루어진 괴생물체가 튀어나왔다. 마치 무덤을 열고 걸어 나온 시체처럼 음산했으며 뻥 뚫린 눈구멍에서는 끊임없이 죽은 흙이 흘렀다. 그 흉물스런 형태의 소환수를 확인한 쥬다스가 작게 침음했다. “……사령술.” 살아 있는 것을 죽여 그 영혼과 생기를 흡수해 힘으로서 이용한다. 이는 정령술사가 자연에 퍼져 있는 생명에너지를 다루며 살아 있는 것들에게 힘을 부여해 주는 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흑마법사 혹은 네크로맨서라고도 불렸다. 샘물처럼 솟아 흐르는 검은 흙은 컴컴한 눈구멍을 통해 도로 흘러나오길 반복했다. 뼈와 흙으로 이루어진 소환수는 인간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몰골이 기괴하여 흡사 유령과도 같았다. 그 소환수의 양손에는 각각 검은 연기가 넘실거리는 검과 방패가 쥐어져 있었다. 무덤에서 기어 나온 기사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쥬다스가 가여운 눈을 했다. “허어……. 사령술은 모든 나라에서 금기한 악마의 술법일 터.” 그 말에 프리드는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그에게 있어 금기란 마치 에덴의 선악과처럼 매혹적인 대상일 뿐이었다. “금기? 그딴 걸 따라야할 이유가 있나.” “그 ‘소돔’을 불러내기 위해 당최 얼마만큼의 생명을 꺼뜨린 겐가?” “거기까진 세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군. 아마도 백? 이백? 흐음~ 듣고 보니 궁금하긴 하군, 과연 얼마나 될까.” “……그렇게까지 해서 그 힘을 가져야만 했나.” 거기까지 들은 프리드의 안색이 묘하게 굳어졌다. 입매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눈이 진득한 살기를 담았다. 형형히 안광을 번뜩인 그가 쥬다스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큭큭……. 그래, 아까부터 왜 이렇게 짜증이 나나 했더니만. 과연 그렇구나.” 콰가가각- 그 손짓에 따라 소환수 ‘소돔’이 검은 연기를 흩뿌리며 달려들었다. 속도는 조금 느렸지만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네놈은 그 이그레트를 닮았어.”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프리드는 일단은 명백한 '적'입니다. 이 파트 뿐 아니라 앞으로도 종종 등장할 녀석이니 잘 기억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그레트'가 사망한지 얼마나 지났느냐...하는 부분은 곧 본편으로 확인해주세요. ㅎ 별 건 아니지만 어째 스포같은 기분이 들어서....?ㅎㅎ 아, 내일은 제가 1박2일로 여행을 갈 것... 같습니다. 되도록 써서 올려보려고 노력은 하겠습니다만, 아마도 내일 하루는 연재를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ㅠㅠ 늘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혹은 모레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1 / 0240 ---------------------------------------------- 2장. 진명식 씹어뱉듯 중얼거린 목소리에 쥬다스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제게 달려드는 소돔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믿음대로 쥬다스의 주변을 바람이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콰직! 술사의 의지에 따라 정령들이 순식간에 견고한 방패막이를 형성했다. 손가락 하나 차이로 소돔의 칼끝이 쥬다스에게 닿지 못하고 강제로 멈추어졌다. “기분 나쁘게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말이야…. 생각이 바뀌었다. ‘고모라’.” 프리드의 부름에 이번엔 그림자 속에 웅크리고 있던 무언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빠르게 형체를 갖추어간 소환수는 이내 거대한 늑대를 연상시키는 몸을 구성해냈다. 그림자로 이루어져있었지만 놈이 발을 구르자 발톱에 긁힌 자국이 바닥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르르릉.” 사령술은 정령술과 매우 닮아있는 술법이었다. 정령술이 자연의 4대원소를 부리는 이능이라면, 사령술은 죽음과 혼돈을 권속으로 삼는다. 단, 정령술과 달리 사령술에는 제물이 필요했다. 죽음을 거스르기 위해선 그 무게의 수십 배에 해당하는 피를 흘려야지만 사령이 움직였다. 그러니 제물이 없다면 술법을 부릴 수 없다. 모든 나라에서 금기로 지정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령술사는 힘을 얻는 대신 산 생명을 앗아간다. 그들이 행하는 무분별한 살육은 마치 악마의 현신이나 다름없었다. “재능은 아깝지만 여기서 죽어줘야겠구나, 황자전하.” 프리드는 놀이에 질린 아이처럼 손을 털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고모라가 입을 쩍 벌리고 쥬다스를 향해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웃기시네. 죽긴 누가 죽어?」 유니가 입을 삐죽이며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지금까지의 산들바람과는 차원이 다른 돌풍이 쥬다스를 중심으로 훙 퍼져나갔다. 그 바람에 검을 들이대고 있던 소돔은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이그레트, 나 저 인간 싫다요!」 「난들 좋다니? 제대로 막기나 해.」 토니 역시 기분이 상해 툴툴거렸다.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식물의 줄기들이 달려들던 고모라를 휘감았다. 그림자라 한들, 일반 물질이 아닌 정령의 힘이 담긴 속박에는 속수무책으로 붙들렸다. 꽁꽁 몸을 옭아맨 식물줄기에 잔뜩 화가 난 고모라가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키아악!” 드드드득 어찌나 힘이 센지 그 몸부림을 이기지 못하고 땅에 균열이 갔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프리드의 눈이 살짝 커졌다. “……2속성? 게다가 사령을 제압할 힘이라고?” 쥬다스를 조금 특이한 장난감처럼 바라보던 시선이 완전히 뒤틀렸다. 황자는 고작 12살 난 소년이었다. 그마저도 또래에 비해 작고 병약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몸뚱아리였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지금 무려 정령을 2속성이나 다루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부리는 사령을 단숨에 제압할 만큼 강력한! 이 사실만으로도 프리드는 그를 보석으로 평가했다. 소돔과 고모라는 제물을 먹은 지가 상당히 오래된 굶주린 상태였다. 지금은 본래 발휘할 수 있는 힘의 고작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그 점을 감안한다손 치더라도 저 꼬마황자의 재능은 탐날만한 수준의 것이었다. 자신이 부리는 사령이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는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크게 광소했다. “크, 핫하하! 대단하구나! 아이야, 내 너를 평범하지 않다곤 생각했으나.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인데?” 닮은 것은 말뿐이 아닌 모양이지, 작게 중얼거린 프리드의 적안이 뱀처럼 휘었다. 그 순간, 때마침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순백의 짐승이 고모라의 목을 콰득 물고 흔들었다. 그르르륵 구멍 뚫린 목에서 피 대신 까맣게 죽은 흙이 쏟아져 내렸다. 고모라는 한번 크게 몸을 꿈틀거리더니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손상으로 인한 강제 역소환이었다. 고모라를 해치운 헤브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쥬다스의 앞을 막아섰다. “…성전 안에서 폭력행위는 금지되어있습니다. 악마의 힘을 이용하는 사령술 역시 금기. 포탈을 훼손한 죄 역시 물어야할 것.” 화악 순식간에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성녀 위그드라실을 중심으로 사방에 사제들이 포진해있었다. 신성력이 담긴 구체가 반딧불이처럼 둥실둥실 허공을 떠다니며 빛을 내었다. 성녀가 단호하게 말을 맺었다.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으로 명합니다. 회개하고 투항하세요.” “큭큭, 조용히 떠나긴 글렀나.” 전혀 투항의사가 없는 대답을 들은 위그드라실이 살며시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손끝에 순백의 신성이 일렁였다. 반면 프리드는 자리에 선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열세에 놓인 상황치곤 묘하게 여유로웠다. “미련하긴. 회개 같은 걸 백날 해봐야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이 세상에 구원 따윈 없거늘.” “감히 신성을 모독하다니!” 사제들이 분개하여 달려들려던 찰나였다. 쿠궁 소돔을 소환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로 땅이 울렸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진동에 대다수의 사제들이 휘청거렸다. 정령들의 도움으로 멀쩡히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쥬다스가 땅을 가르고 올라온 형체를 확인하고 탄식했다. “…프리드. 어찌 이렇게까지.” 꼭 신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습이었다. 찢어진 가죽 사이로 훤히 뼈가 들여다보였다. 음산하게 드리워진 두 날개와 긴 꼬리, 군데군데 찢어지긴 했으나 파충류를 닮은 비늘이 번들거렸다. 마치 지옥에서 뚫고 올라온 듯했다. ‘드래곤’의 형상을 충실히 재현해낸 소환수는 프리드를 태운 채 날개를 퍼덕였다. 날개에서 일어나는 바람만으로도 일반 사제들은 저항이 어려웠다. 상급의 네크로맨서가 부리는 본 드래곤(bone-dragon). 저 괴물에 비하면 먼저 소환했던 소돔과 고모라는 장난 수준이었다. 몸체가 충분히 허공에 떠오르자 본 드래곤은 지상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고오오오 본 드래곤의 주둥이를 기준으로 새카만 기류가 응집되기 시작했다. 하나의 구 형태로 모인 기류를 확인한 사제들이 비명처럼 고함을 내질렀다. “―브레스다!” 미처 피할 시간도 없었다. 순식간에 구체를 완성시킨 본 드래곤이 곧장 브레스를 내뿜었다. 응집된 사령 에너지가 굉음과 함께 지상으로 쏟아져 내렸다. 성녀가 다급히 신성을 사용했으나 워낙 급박하게 이루어진 일이었기에 준비가 모자랐다. ‘안 돼. 이대로라면 형제님들을 전부 지킬 수 없어……!’ 성녀의 몸 안엔 무한에 가까운 신성이 잠들어있었기에 공격을 받더라도 그녀 자신만큼은 안전했다. 그러나 그 신성을 밖으로 끄집어낼 시간이 조금 모자랐다. 상대가 실력자임은 인지하고 있었으나, 설마하니 신성의 상징인 교황청에서 금기시된 사령술사가 나타날 줄이야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방심의 결과는 참상으로 이어질 뿐이다. 과오를 깨달은 위그드라실이 입술을 꾹 깨물던 순간이었다. 후웅 무언가 그녀의 검은 머리칼을 사라락 스치고 지나갔다. 눈은 보이지 않지만 찰나의 순간 강대한 존재감이 또렷이 느껴졌다. 「정말~ 이그레트는 너무 정이 많다니까.」 술사의 바람에 따라 정령왕인 유니가 직접 브레스를 막아서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벌기 위해 막을 뿐 상쇄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쥬다스가 원한 유니의 역할은 딱 시간벌이까지 만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성녀가 최대한 빠르게 신성력을 끌어올려 대응했다. 유니의 존재감을 알아차린 건 성녀뿐이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브레스를 막아선 상식 밖의 힘을 감지해낸 프리드가 흥미롭게 쥬다스를 슥 쳐다보았다. “역시 이건……. 조만간 또 보지. 꼬마황자.” 콰아앙! 성녀의 신성력과 사령의 힘이 허공에서 맞부딪히며 큰 폭발이 일어났다. 그 여파로 교황청을 뒤덮고 있던 결계에 균열이 생겼다. 프리드는 그 균열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가 사라져버렸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는 쥬다스의 곁으로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달려왔다. “쥬다스님! 괜찮으십니까?” 쥬다스는 응답하지 않았다. 어딘가 멍한 시선으로 하염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그를 크리스티나가 재차 불렀다. “쥬다스님……?” “…….” 부름을 들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사령술사를 정면에서 마주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멀쩡한 상태였다. 상처는커녕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채, 그들을 돌아본 쥬다스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많이 놀랐겠구나. 다치진 않았느냐.” “아뇨.” 분명 평소와 같은데, 어쩐지 더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머뭇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변을 감싼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다. 내내 꾹 쥐고 있느라 피가 통하지 않아 창백해진 주먹을 펴냈다. ‘이그레트님.’ ‘어째서 막으시는 겁니까……! 당신은 분하지도 않습니까?!’ ‘제기랄! 당신이 가진 그 힘이라면 못할 것도 없잖습니까!!’ 과거, 젊은 시절의 프리드가 제게 따졌었다. 그는 탐욕이 큰 사내였다. 크게 바라는 것 없이 떠돌며 사는 이그레트와 달리 프리드는 끊임없이 열정과 패기를 불태웠다. 그리고 그 열정은 간혹 위험한 방향으로 불똥을 튀기기도 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그레트와는 정 반대되는 성미였다. 프리드는 점차 권력과 명예에 대해 지독한 정복욕을 내보였고 이그레트는 단호하게 이를 저지했다.누구보다 이그레트를 따랐던 만큼 한번 어긋난 관점은 삽시간에 그 차이를 벌렸다. 종래에 등을 돌리면서 프리드는 분노가 들끓는 붉은 눈동자를 들어 그를 저주했다. ‘하! 이해할 수가 없군. 당신이 싫다면 내가 하겠습니다. 이그레트님, 당신은 겁쟁이일 뿐이야.’ ―그러니 평생 그렇게 살아. 마치 귓가에 고스란히 들려오는 듯한 옛 기억의 편린을 떠올리며 쥬다스는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과거와 다른 두 얼굴이 그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자신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태도에서 충분히 배려심이 느껴졌다. 때로는 호들갑떠는 것보다 이렇게 조용히 기다리는 게 더 도움이 되기도 했다. “성녀님의 신성에 경애를.” 그 사이 사제들이 성녀를 중앙에 두고 무릎을 꿇었다. 사제들은 성녀의 신성력이 그들을 지켰다고만 생각했다. 중간에 개입한 정령의 힘은 오직 성녀 본인만 알아차렸다. 성녀는 프리드가 사라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달빛 한 조각조차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밤하늘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예기치 않게 하루를 더 소요했습니다. ㅠㅠ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사족으로 이그레트(쥬다스)는 현재 최대한 자신의 힘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합니다. 과거 프리드처럼 자신의 힘을 노려 문제가 커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물론 그를 제대로 공격하지 않은 건 '사령술사'라는 점에 놀란 것+옛 정 때문이 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내주신 응원 전부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2 / 0240 ---------------------------------------------- 3장. 통과의례 그로부터 하루가 더 지나서야 포탈수리가 완료되었다. 다시 왔던 것과 같은 길로 학원 루바흐에 돌아온 세 사람은 진명식에 참가했다는 교황청의 인증과 레포트를 제출하여 무사히 일정을 끝마칠 수 있었다. 프리드와 비밀리에 접선을 약속했던 바이칼은 며칠간 더 교황청에 남겨졌다. 제대로 접선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프리드의 행적을 도왔다는 증거도 없었기에 별다른 처분은 내려지지 않았지만 필수적인 검문과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에 복귀한 쥬다스에게는 한 가지 시선을 끌만한 변화가 생겼다. 그 자체만으론 여전히 작고 볼품없었으며 두드러지게 대단한 부분도 없었다. 하지만 자연스레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는 한 존재가 있었다. “…쥬다스님.” “허허. 부지런하구나. 좋은 아침이야, 에단.” “식사는 하셨습니까.” “오냐.” 많은 학생들이 눈독들이고 있던 신입생, 에단 헤이가가 그 곁에 붙어 다니기 시작한 것이다. 에단은 진명식을 다녀오자마자 즉각 본래 신청했던 과목 중 일부를 철회하고 쥬다스와 같은 과목을 신청해 들어왔다. 보란 듯이 곁에 붙어 1황자를 챙기고 다니는 모습에 주변의 시선도 날카롭게 그들을 향했다. “설마 1황자를 선택한 건가……?” “그럴 리가. 하필이면 저 유약하고 보잘 것 없는 ‘백로황자’를.” “혹, 저자도 뭔가 모자란 게 아닐까?” 그들을 중심으로 둔 수군거림은 부정적인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에단은 학원 루바흐에 입학하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그 진가를 입장해낸 공작가 장남이었다. 무가의 핏줄답게 선천적으로 감각이 뛰어났으며 도(刀)에 대한 능력이 출중했다. 뿐만 아니라 무에 치우치지 않고 학문을 익히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으니 훗날이 기대되는 유망주였다. 성격이 과묵하긴 했으나 큰 짐을 질 이로서는 오히려 득이 되는 무거움이었다. 그에게 부족함이 있다면 단 하나, 사교였다. 물론 뭇 어른들이나 손위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고 있었다. 그가 먼저 전전긍긍해하지 않아도 몰려드는 사람이야 많았다. 하지만 또래 귀족자제들과는 이렇다할만한 교류가 없었다. 그랬기에 잘난 공작가 도련님에 대한 호감은 그가 쓸모없는 황자에게 관심을 갖는 순간 함께 추락했다. 그를 목격한 루바흐 학생들은 자신들이 버린 백로황자를 선택한 에단의 안목을 폄하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자를 배척하고 침몰하도록 내버려둔 그들 자신이 틀렸다는 반증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륵 교실 문이 열리자 수군거리던 학생들은 일제히 입을 닫았다. 이르지도 늦지도 않게, 늘 제 시간에 맞춰 수업에 참석하는 크리스티나였다. 늘 그렇듯이 싸늘한 표정으로 자기자리를 찾아가던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와 에단을 힐끗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쥬다스가 빙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로구나, 크리스티나.” “……네, 뭐.” 작게 고개를 까딱이는 크리스티나를 본 다른 학생들이 눈을 둥글게 떴다. 못 볼꼴이라도 본 듯 입을 헤 벌리기까지 했다. 크리스티나 델피아가 어떤 인물이던가! 그녀는 결코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에겐 관심을 내어주는 일이 없었다. 황자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처음 그를 마주한 순간 크리스티나는 이미 그를 자신의 위에 설 군주로 인정하지 않았다. 괴롭히거나 싫은 티를 낸 것은 아니었지만 철저히 무시했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저 관심 한 톨 주지 않고 지나쳤었다. 그랬던 그녀가 쥬다스의 인사에 대충이라도 반응했다는 사실은 학생들 사이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하필이면 에단과 크리스티나, 둘 모두 권력의 큰 축에 해당하는 가문이었기에 그 여파는 서로 잘 맞물려 상승효과를 일구어냈다. “…….” “…….” 학생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죄 입을 다물어버렸다. 등장만으로 어수선하던 분위기를 제압해버린 크리스티나는 그들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자리로 가 앉았다. 곧 수업이 시작되고, 마무리할 때 쯤 교사는 안 그래도 심난한 학생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 만한 공고를 칠판에 적어두고 사라졌다. <290th, 1학기 중간고사 일정.> 큼지막한 글자 밑으로 세부사항이 주르륵 나열되어있었다. 수업이 끝났어도 학생들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머리를 싸맸다.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중간고사라니!” 여기저기서 탄식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말마따나 시험을 치르기엔 아직 일렀다. 그러니 교사가 적어둔 시험예정일은 약 2주 가량 뒤였다. 시험공고에도 태연히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건 쥬다스 뿐이었다. 아무런 긴장도 느끼지 않은 채 필요한 정보만 적어 교실을 나서는 그를 에단이 따라 나왔다. ‘그저 성적에는 관심이 없으신 건지, 아니면 아직 때가 아닌 건지.’ 들리는 소문보다야 눈에 보이는 걸 우선시하는 에단이었으나, 단순 소문이 아니라 그간의 행적을 증명하는 명백히 드러난 결과도 존재했다. 알아본 바 쥬다스의 지난 학기 성적은 처참했다. 몇 과목 듣지도 않는데 그마저도 출석점수에서 다 깎아먹은 데다, 시험 성적도 좋지 않아 겨우 낙제만 면한 수준이었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백로황자. 하지만 에단은 그 결과가 전부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일부러 낙제하지 않는 선에서 최하급의 평가를 받았다. 그건 모두의 눈을 속이기 위한 작위적인 결과였나. 하지만 지금은.’ 단 한 번의 지각결석 없는 출석률부터가 차이 났다. 그간 미비하던 존재감이 점차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에단은 그를 좋은 징조로 여겼다. 황자가 발톱을 숨긴 목적은 아직 미지수였다. 역으로 쓸 만한 인재를 골라내고자 루바흐 학생들을 평하고 있었을 수도 있고, 혹은 1황자를 위협하던 모종의 무리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한 보호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 이상, 그가 수면 위로 떠오를 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으리란 사실만큼은 명확했다. 침몰했던 황자가 비로소 재기를 원한다면, 에단은 기꺼이 그를 돕고자했다. 아직은 그를 ‘군주’로 신뢰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충분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봉술은 배우기에 어떻더냐?” “…예?” 상념에 빠져있던 에단에게 쥬다스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뒤늦게 질문의 의미를 알아챈 에단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활용이 조금 어렵습니다. 검과 달리 찌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휘두르거나 퉁겨내기도 하니, 매순간 움직임이 예측되지 않아 적응이 힘듭니다.” 힘든 소리를 했어도 그간 그의 수련을 지켜봐온 쥬다스로서는 그 말이 겸손임을 알았다. 단기간 기초만 배운 학생치고는 상당한 수준까지 따라잡은 상태였다. 비록 흉내일 뿐이라 해도 교사 메이란이 보여준 모든 동작을 오차 없이 재현해냈으며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도 알았다. 과연 무예에 능통한 명가의 핏줄답다 여겨지는 솜씨였다. 세상엔 천재라 불리는 인물이 종종 태어난다. 이그레트도 정령술과 학문에 능통한 천재였다. 같은 맥락으로, 에단은 무의 감을 타고난 천재라 볼 수 있었다. 쥬다스는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은 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체육관에 도달해있었다. “배움에는 늘 어려움이 따르는 거란다. 어려움을 느낀다는 말인즉 제대로 산을 오르는 중이라는 뜻이지. 그 산의 크기는 사람마다 다르기도 하니 참으로 재미있지 않느냐.” “산을 오른다……?” “네게 비할 바는 아니긴 해도, 나 역시 나름대로 산을 오르고 있지. 보려무나, 이젠 제법 균형도 잡게 되었어.” 제대로 들기도 힘들어했던 봉을 양손으로 잘 붙든 채 기본자세를 취하는 쥬다스를 보며 에단도 역시 봉을 꺼내들었다. 쥬다스가 처음에 비해 체력이 조금 붙긴 했으나 말 그대로 정말 조금일 뿐이었다. 그걸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건 오로지 그의 정신력에 달려있었다. 탓! 처음으로 둘의 무기가 맞부딪히고도 낙오되는 이가 없었다. 에단의 힘을 이기지 못할 게 뻔한 쥬다스가 뒤로 봉을 넘기며 흘려냈기 때문이다. 기지는 좋았으나 그마저도 무리였던 듯 이마선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으음?” “신체의 어려움을 알면서도 왜 무예과 수업을 선택하셨습니까.” 연이어 두 번째 봉격도 큰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쥬다스는 저릿거리는 팔에 가까스로 힘을 주며 대답해주었다. “글쎄다. 하고 싶었기 때문이려나.” 하고 싶은 게 많았을 아이. 본래의 쥬다스가 무슨 생각으로 봉술수업을 신청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아이가 하고 싶었던 일이라면 힘들다고 해서 철회하고 싶지 않았다. “…하면,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 터엉 세 번째까지는 쥬다스의 가느다란 팔뚝이 채 견디지 못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간 봉을 내버려둔 채 그는 비어버린 손을 가만 바라보았다. 무리한 결과답게 손바닥이 잔뜩 까져 벌겋게 부어올라있었다. “당신의 몸은, 왜 자라지 않는 것입니까.” 7살의 몸에서 전혀 성장하지 못한 12살 소년의 모습은 부자연스럽다 못해 기이할 정도였다. 처음엔 그 자신도 그 원인으로 단순한 영양부족이나 선천적인 성장지연을 예측했었다. 하지만 루바흐 학원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절대 부족하다볼 수 없었다. 가짓수도 다양할 뿐더러 양 또한 먹고 싶은 만큼 무한정 제공된다. 또래 학생들이 그를 꺼려한다 해도 식사를 못하게 훼방을 놓거나 대놓고 폭력을 가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병’인가. 거기에 대해서도 아직 의문점은 남았다. 병이 있다고 하기에 딱히 아프거나 문제를 보이는 부위는 없었다. 선조 중에 같은 병을 앓았던 이도 없었으며 움직이고 사고하는 데에 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보에 의하면 몸이 허약하긴 했어도 7살까지는 정상적으로 성장을 했던 아이였다. 이는 마치, 몸이 스스로 성장을 거부하는 것만 같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그레트는 현자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지식과 능력을 가져 제국발전에 기여를 했던 인물이지만, 정작 인간으로서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ㅎㅎ 인연을 과할 정도로 소중히 여겼고, 배신자들을 쳐내지 못할 정도로 잔정이 많았기 때문에 그 판단이 독이 되어 돌아온 경우가 수도 없었죠. 상처받는 것에 익숙하지 못하여 결국엔 도망치기까지 했던 인물입니다. 단, 다른 삶을 살게 되었으므로 예전과 마냥 같은 행보를 걷진 않겠죠. ㅎ 똑같이 당하기만 하면.....의미가 없으니(...) 아참, 그리고 질문주셨던 것 중 하나 답해드리자면... 제 세계관에서 정령술사는 '마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자연의 힘을 이용하는 것이라 부작용도 거의 없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차후 스토리상 나오겠지만 정령을 다루는 건 술사의 '정신력'입니다. 정신력이 한계에 달해도 힘을 계속 사용한다면 기절하거나,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미쳐버릴 수 있습니다. ...어쩐지 설명하다가 미묘하게 스포하게 될까봐 자제중입니다. ㅠㅠ 일일히 적합한 답을 드리지 못한 점 죄송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3 / 0240 ---------------------------------------------- 3장. 통과의례 “…거기까진 나도 여직 모르겠구나.” 에단은 고개를 내저으며 굴러간 봉을 주우러 가는 쥬다스의 뒷모습에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다른 건 몰라도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면 아무리 자질이 좋아도 높은 위치에 설 수 없다. 지금 쥬다스가 해결해야할 급선무는 시험이나 평판 따위가 아니었다. 에단은 그리 여겼다. *** 2주란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시험을 앞두고 있다는 조급함 때문인지 루바흐 학생들은 하나같이 이번 2주를 폭포로 향해가는 유수처럼 빠르게 체감했다. 과목을 많이 신청하면 그만큼 졸업할 때 이수증명이 다수 따라붙게 되어 유능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성적이 좋다면 조기졸업을 신청할 수도 있으며 거액의 장학금까지 걸려있어 학기 초엔 수강과목을 무리하게 늘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 중간고사 시기가 지나가면 기력을 다한 파리떼처럼 우수수 나가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매 학기마다 반복하는 루바흐 학원에선 이번에도 어김없이 상당수의 학생들이 초췌해진 몰골로 시험대비에 찌들어있었다. 루바흐의 시험은 글로 쓰는 종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예과나 예술과는 실기시험을 통해 성적을 평가했고 약학의 경우 창의적인 포션을 개발하여 제출하라는 식의 과제를 내어주기도 했다. 그 중 쥬다스가 신청한 과목은 주로 문과영역이었고 예외로 무예과 봉술이 하나 포함되어있었다. 시험을 치를 무렵에는 바이칼도 교황청에서 풀려나 무사히 학교로 복귀했다. 남들보다 수업도 많이 빠지고 공부할 시간도 적었던 만큼 바이칼은 훨씬 지쳐있었다. 퀭한 눈으로 시험지를 받아든 그는 여전히 인자한 얼굴로 손을 흔들어주는 쥬다스를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뭐가 저렇게 여유로운 거야? 경제학은 절대 만만한 과목이 아니라고.’ 바이칼은 찌푸린 얼굴을 펴고 시험지에 집중했다. 남 얘기할 처지가 아니었다. 당장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처럼 급하게 암기해온 교과내용을 떠올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 자신이 말한대로, 경제학은 만만한 과목이 아니었다. <제국력 841년, 역사적인 가뭄이 든 해였다. 우기가 적어 작물이 자라지 못했으며 동시에 ‘COS’라 불리는 전염병마저 돌아 전국민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결국 이 시기에 시장구조가 한차례 크게 붕괴되었다. …(중략)…. ※시장순환에 영향을 미친 원인을 상세히 적고, 이에 따라 효율적으로 민생을 구휼할 방법이 있다면 이를 풀어 쓰시오.(단, 교과과정에 들어있는 이론을 2개 이상 포함할 것.)> 경제학교사는 배운 이론만을 문제로 출제하지 않았다. 아예 예시를 주고 이론을 응용하여 풀어내길 요구하는 지시문에 학생들의 표정이 점차 어두워졌다. 아예 펜을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시험을 치르는 교실 안은 사각사각 글씨 쓰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 일정한 소음 사이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드륵 가장 먼저 일어선 건 쥬다스였다. 시험이 시작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긴 했으나 벌써 답지를 제출할 만한 때는 아니었다. 그 바람에 몇몇 학생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시험에 집중했다. 바이칼 역시 그 중 한명이었다. ‘무슨! 백지라도 낼 셈인가?’ 아니 실은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여유롭게 교실을 나서는 은색 뒤통수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이를 부득 물며 시험지를 응시했다. ‘…조금 달라졌다 생각했더니. 쳇, 역시 그 백로황자로군.’ 그의 녹색 두 눈에 다시금 혐오감이 어렸다. 물론 쥬다스는 그의 오해와는 다르게 지나칠 정도로 착실히 답지를 작성하고 시험장을 빠져나온 상태였다. 어깨에 걸터앉아 발을 까딱이던 유니가 헤~ 하고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그레트, 대충 평범한 점수를 받을 생각 아니었어?」 “으음…. 그랬었지.” 「아까 그건 정령인 내가 봐도 절대 평범하지 않았는걸. 저대로라면 되게 주목받을 텐데? 이그레트는 그런 거 싫어하잖아.」 유니의 말대로였다. 처음 시험장에 발을 들일 때만 해도 쥬다스는 제대로 시험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눈에 띄지 않도록 이상하지 않을 만큼만 성적을 받을 정도로 답안을 작성하고 나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시험지를 받아둔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도망치고 싶지 않더구나.”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 따라 긴 은발이 휘휘 허공에서 나풀거렸다. “이 아이, 한 번도 제 목소리를 내본 적 없이 살았다 하였지.” 「으응. 워낙 유약해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겠지만 뭘 해도 무시 받았다고 해.」 “그래, 유니.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이곳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가려했던 아이라 생각이 들었다.” 이그레트와는 달랐다. 누구에게나 환영받고 누구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지만 인간으로서의 삶에서 도망가 버렸던 자신과는 다른 아이였다. 그가 죽어가면서 가장 후회했던 면도 여기에 있었다. 본래의 황자가 언제 되돌아올지는 몰라도, 사는 동안만큼은 그 결심이 부끄럽지 않게끔 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이그레트답지 않게’ 처음으로 무리수를 두었다. 쥬다스는 그 뒤로도 모범적인 답안을 작성함으로써 대부분 과목의 시험을 끝마쳤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실기로 평가하는 봉술수업이었다. “자, 학우님들 들어. 채점기준은 그동안 가르친 기초자세와 피격법, 방어법을 함께 볼 거야. 방식은 늘 그랬던 것처럼 페어와 대련으로 진행한다. 다들 배운 대로만 열심히 해주도록!” 교사 메이란이 허리에 한 손을 얹고 씨익 웃었다. 다른 엄한 교사와 다르게 털털하게 시험공고를 끝마친 그녀는 두 사람씩 나와 실기를 치르도록 진행시켰다. 넓은 체육관에 학생들이 둥글게 원을 그려 둘러앉았다. 그리고 교사가 호명한 두 학생이 가운데로 나와 대련을 펼치는 형식이었다. 그동안 학생들은 꽤 봉술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실전이 아니라 배운 자세를 활용하는 대련이었기에 대부분 차분한 태도로 시험에 임했다. 슬슬 자신들의 차례가 가까워지자 쥬다스와 에단은 봉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미리 일어섰다. 교사의 지시에 따라 중앙에선 이제 막 앞 순서 대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차례군요.” “그렇구나. 잘 부탁한단다, 에단.” “저야말로……?” 에단은 고개를 꾸벅하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쥬다스를 살폈다. 평소에도 건강해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늘따라 안색이 영 좋지 않았다. 그간 열심히 붙어 다닌 덕에 알아볼 수 있게 된 미세한 차이였다. “괜찮으십니까?” “허허, 가벼운 고뿔이야. 신경 쓸 것 없으이.” 본인은 가볍다했지만 핏기가 창백하게 가신 것이 썩 미덥지 못했다. ‘이상하군. 타고나길 유약하게 나신지라 자주 아프다하더니, 고통에 둔감해졌나.’ 에단의 짐작과는 조금 방향이 달랐지만, 괜찮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노인이었던 시절엔 이보다 더 격하게 몸이 아팠던 적이 잦았다. 죽는 순간은 비교적 편안하게 갔지만, 눈을 감기까지 그는 오랜 시간을 홀로 앓아왔었다. 그에게 있어 손이 떨리거나 열에 들뜬 상태 정도야 가볍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자, 다음.”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호명에 따라 둘은 나란히 봉을 들고 마주했다. 기초자세는 둘 다 흠잡을 것 없이 완벽했다. 시작을 알림과 함께 에단이 먼저 가볍게 획을 그었다. 퉁! 묵직한 효과음이 관내를 울렸다. 힘에서 밀리는 것이 확실한 쥬다스가 효과적으로 방어에 성공하자 메이란의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지어졌다. ‘호오, 생각보다 1황자전하는 영리한 타입인 모양이군.’ 그리고 꽤나 노력파였다. 쓸모없다 여겨지던 황자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해낸 메이란은 흡족하게 기록지를 적어나갔다. 몇 번 합을 주고받지 않았지만 쥬다스는 지친 숨을 고르느라 바빴다. 그는 지금 연습 때 했던 것보다 수배는 집중하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이미 놓쳤어야할 봉도 아슬아슬하게나마 손에 쥐고 놓지 않았다. 그의 지친 기색을 느낀 에단이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그레트’로 살 시절에도 그는 육체파가 아니었다. 취미삼아 무예기술을 익히곤 했다지만 실질적으로 써먹지는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그레트는 4속성의 정령을 전부 수족처럼 부리는 정령술사였다. 그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바라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는 새삼 자신이 자만했음을 깨달았다. 쥬다스의 금안에 씁쓸함이 깃드는 순간 에단이 봉을 휘둘렀다. 서둘러 막는다고 막았지만 열이 오른 몸은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탓에 오른쪽 어깨죽지를 내어주고 봉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털썩 “…?!” 연습용 봉이었던 데다, 에단이 크게 힘을 싣지 않았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약해질 대로 약해진 쥬다스의 몸은 작은 충격에도 쉽게 허물어졌다. 에단이 놀라 다가가자 쥬다스는 어깨를 붙든 채 비틀비틀 일어섰다. “쥬다스님.” “괜찮단다. 이거 참, 미안하구나. 네 상대를 하려면 앞으로 좀 더 단련해야겠어.” “……그보다 손이.” 에단의 안타까운 음색에 쥬다스는 어깨를 짚고 있던 손바닥을 펴보았다. 언제 그렇게 된 것인지 온통 시뻘건 핏기가 가득했다. 까진 게 아니라 아예 터졌다고 표현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 탓인지 어깨에도 핏물이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쩐지 자꾸 데드플래그(?) 꽂는 것 같아서 난감해지지만...; <이그레트>는 해피엔딩 지향입니다.ㅎ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요. 현재 주인공에게 부족한 면이 제법 많은 만큼 착실히 성장할 예정입니다. 이제 몸도 마음도 전부 성장해야겠죠. ㅎㅎ 아, 그리고 이 글은 설정상 아직 초입부입니다. 긴 호흡으로 갈 예정이니 느긋하게 따라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여주신 사랑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4 / 0240 ---------------------------------------------- 3장. 통과의례 어쨌든 시험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쥬다스는 페어인 에단과 함께 양호실로 보내졌다. 짓무른 손 뿐 아니라 가격당한 어깨도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동안 치료사는 내내 혀를 찼다. “쯧. 이런 식으로 무리하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쥬다스님. 이거 여전히 몸의 기능이 정지해있다시피 한데 여기다 상처까지 늘리시다니요. 차라리 무예과 수업을 철회하십시오.” “…….” 쥬다스는 그저 묵묵히 치료사의 말을 경청했다. 표정은 온화했으나 그 금안에 깃든 고집에 치료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치료사이기 이전에 루바르잔 제국민으로서 충언드리는 겁니다. 이대로라면 생명에도 위협이 올 수가…….” “그건 무슨 뜻입니까.” “아이고, 이것 보세요. 따로 뜻이 뭐가 있겠습니까? 말 그대롭지요.” 거기까지 말한 치료사는 날선 에단의 표정을 보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리이나.” “네, 네! 선생님.” “네가 마무리를 해드리렴. 난 처방전을 내드려야겠으니.” “네에.” 치료사가 비켜주자 리이나가 쥬다스의 손을 붙잡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 일전에 봤던 것과 같은 분홍색 기류가 그녀의 손을 타고 쥬다스에게로 흘러들어왔다. “지금 쥬다스님의 상태는 아시다시피 정상이 아닙니다. 이해하기 쉽게 저 화분을 예로 들어볼까요.” 치료사는 볼펜을 들어 양호실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가리켰다. 작은 꽃나무를 심어둔 화분은 손질을 잘 받았는지 생기가 가득했다. 이파리는 무성했지만 아직 꽃은 피지 않은 나무를 보며 치료사가 설명을 시작했다. “저게 보통 사람들의 상태라고 칩시다. 물을 주면 싹이 나고 잎이 자라 꽃열매를 맺는 게 저 화분의 순리입니다. 하지만 쥬다스님은 지금 사계절 내내 싹만 틔우고 있는 셈입니다. 몸이 순리를 거스르고 있죠. 그러니 자주 아프실 수밖에요. 이걸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금보다 큰 상처라도 입으시는 날에는…….” 쥬다스의 맑은 금안을 바라보며 치료사가 약을 가득 담은 봉투를 내밀었다. “최악의 경우, 유지되고 있던 생명활동까지 정지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치료사가 잔뜩 겁을 주어 내보낸 이후로 에단의 표정은 굳어 풀릴 줄을 몰랐다. 정작 당사자는 태연스레 붕대를 감은 손으로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걱정해주어서 고맙다. 에단.” “……당신은, 스스로가 걱정되지 않으시는 겁니까.” 에단은 심적으로 매우 복잡한 상태였다. 그는 1황자를 군주에 어울리는 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나칠 정도로 유한 성격이 조금 걸리긴 했으나 아직 나이도 어렸고 본래 성정을 숨기고 있느라 그런 거라면 좀 더 지켜보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래서 최근 쥬다스의 일과에 맞추어 가급적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과연 생각대로 황자는 충분히 총명했으며 일부러 힘을 감추고 지내는 상태였다. 에단은 아마 자신이 보지 못한 부분이 더 있을 거라 판단했다. 지금껏 보아온 쥬다스의 성격 상, 지난 번 드러냈던 ‘바람의 정령술사 자질’은 그저 맛보기용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컸다. 에단은 어쩌면, 황자가 정령을 다루는 힘이 이미 수준급이거나, 듀얼 속성을 다루는 굉장한 자질이 숨어있을 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다. 만일 그렇다면 그건 정말 기대되는 힘이었다. 더구나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연령대 소년들은 과시욕이 강하다. 하다못해 남들보다 뒤쳐져 무시 받는다는 일 자체를 극도로 꺼려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늘 일관된 태도를 취했다. 자기를 무시하는 자들을 원망하거나 우습게 여기지 않고, 그저 허허롭게 용인했다. 에단은 그 태도를 정말 모자라서가 아니라 또래보다 월등히 타고난 자애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겼다. 거기다 12살에게서 보기 힘든 현명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난 번 크리스티나의 브로치 절도사건을 비롯해 차분하게 프리드를 쫓거나, 일부러 힘을 감추고 있다든지 하는 점만 봐도 보통 영민한 것이 아니었다. 이 모든 걸 통틀었을 때 신체적 능력치가 또래보다 확연히 떨어진다는 약점만 제외하고는 군주로서 모든 게 완벽했다. 그랬는데, 하필이면 그 약점이란 게 생명이 위험할 정도였을 줄이야. 이 정도면 세간에서 떠드는 것처럼 도저히 제왕으로 세울 수 없는 인물인 셈이었다. 어쩐지 잠시나마 기대를 걸었던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지면서 분하기도 하고, 또 정작 태연해 보이는 쥬다스가 답답하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여전히 이 백로황자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지 못하는 자신이 더욱 답답했다. 에단이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않고 드물게 표정으로 드러내자, 쥬다스도 그 일렁이는 검은 눈동자에 똑바로 시선을 맞추었다. “이런, 이런. 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느냐. 생각을 좀 하고 있었다. 특별함에는 마땅히 그리 된 원인이 있을 게야. 나는 그 원인을 찾을 생각이란다. 아마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게야. 못미더워보여도 숨겨진 답을 찾는 일에는 능통하니까 말이다. 당연히….” 그리고 말을 맺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살아야지.” “…….” 에단은 그제야 깨달았다. 걱정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쥬다스는 충분히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자신과 그에 걸맞은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그를 티내지 않는 게 익숙할 뿐이었다. 아마도 홀로 싸워온 시간이 길었을 탓이리라. 그리 생각이 미친 에단은 눈앞의 황자에게 가만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 뜻을 믿겠습니다. 지켜주십시오, 반드시.” 이것은, 완벽주의에 길들여져 자란 ‘에단 헤이가’가 처음으로 내보인 타인에 대한 신뢰였다. 시험이 끝난 한 주간은 휴일이 주어졌다. 과목별로 시험 일자가 달랐으니 학교 측에서 아예 시험 주간을 정해놓고 통째로 수업을 비워버린 것이다.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루바흐 학원 시험에 시달렸을 학생들을 배려한 일종의 포상개념이기도 했다. 모처럼 푹 쉴 수 있게 된 쥬다스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 방안에서 지친 몸을 뉘였다. 확실히 이대로는 곤란했다. 쥬다스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펼쳤다. 두 정령이 포르륵 그 위로 내려앉았다. “흐음. 신체가 허약한 건 이 아이가 타고난 부분인 것 같은데……. 이것 참, 아예 성장을 멈춘 이유는 무엇일꼬?” 「바람이 가져오는 정보에는 이렇다 할 내용은 없어. 미안해, 이그레트.」 「후에에, 미안하다요. 이그레트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요…….」 쥬다스는 풀죽은 두 정령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쓰다듬어주었다. “너희는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큰 도움이자 기쁨이란다. 아이들아.” 「정말? 헤헤, 나도 기뻐!」 「이그레트으으.」 단순한 말 한마디에도 정령들은 순수하게 즐거워했다. 금세 화색을 띄는 유니와 토니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보낸 쥬다스는 이내 턱을 짚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닌 인위적인 현상이야. 헌데 만일 마법의 힘이 작용했다면 너희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으니…….” 「그럼 뭐다요? 약이라도 먹은 거야요?」 “그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는 있겠구나. 아니라면 혹 정신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지.” 「정신?」 “내가 아닌 이 아이의 정신 말이다.” 쥬다스는 손가락으로 제 머리를 톡톡 두들겨보였다. 본래 황자가 가지고 있던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육신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차린 유니가 고개를 갸웃해보였다. 「그럼 이그레트. 만일 원인이 정신에 있다면 루니를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으음…….” 쥬다스는 선뜻 그러마 답하지 못하고 침음했다. 확실히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정신계’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은 인체와 가장 적합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물의 정령은 사람의 심리를 읽거나 파고들어 조절할 수 있는 특이한 힘을 발휘했다. “…….” 그는 제 손위에서 반짝반짝 눈을 빛내고 있는 두 정령을 가만 응시했다. 영락없이 고목나무에 들러붙은 매미 꼴이었다. 실제 쥬다스가 정령을 불러낸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 두 정령은 그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이그레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엇이 자유롭기로 소문난 정령들을 매료시켰는지는 몰라도 마치 둥지안의 새끼 새처럼 그에게 머물렀다. 특별히 이그레트가 바라지 않는 이상 정말 한날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쥬다스로서는 다른 정령을 또 불러내기를 주저했다. 정령은 본디 자유를 누리는 존재. 자연을 다스리며 그 안에서 노닐기를 즐기는 이들이다. ‘이그레트’는 그런 그들에게 있어 처음으로 집착할 대상이 되었다. 4속의 정령왕들은 자연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그레트가 죽는 순간까지 소중히 그 곁을 지켰다. 그랬기에 기왕 죽음으로 떨어진 지금, 가능하다면 오래 부르지 않을 생각이었다. 쥬다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껏 짐작한 유니가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코끝을 매만졌다. 「뭐어~ 나는 지금이 좋지만. 루니랑 카니, 지금쯤 무진장 서운해 하고 있을걸.」 “허허, 그런가.” 「당연하잖아. 나랑 토니가 뻔~히 정령계에서 사라졌는걸. 아무리 그 둘이 둔탱이라지만 지금 정도면 알아차렸을 테고?」 한쪽은 둔하다고 하기보단 아예 매사에 관심이 없는 축에 속했지만, 어쨌든 유니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찾을 만치 찾아보고도 방법이 없으면 그때 부르자꾸나.”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이그레트, 진짜 황소고집이야.」 「와아! 루니도 오는 거다요? 언제? 언제?」 물과 가장 궁합이 좋은 땅 속성 정령왕 토니가 흥분한 얼굴로 날개를 파닥거렸다. “글쎄다. 아마 머지않아 다들 한 자리에 모이게 되겠지.”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장에라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 그 말은 두 정령이 듣기에 흡사 예언과도 같았다. 유니는 귀찮다는 듯 턱을 괴었고, 토니만 신이나 주변을 날아다녔다. 그렇게 평화로운 휴일이 지나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잠깐씩이지만 이그레트가 계약 당시 지은 정령의 이름이 모두 언급되었네요. 정리하자면... 바람의 정령왕 : 유니. 불의 정령왕 : 카니. 물의 정령왕 : 루니. 땅의 정령왕 : 토니. ...인데, 초성모티브는 이름순서대로 야-쿠-르-트입니다. 얘들 이름 지을 때 야쿠르트를 먹고 있었던지라. 초코파이라도 먹었더라면 초이, 케이, 파이, 유이 정도가 됐으려나... (믿으시는 건 자유) 언제나 글을 즐겁게 쓰고 있긴 합니다만 가끔은 '오늘만 쉴까' 싶다가도, 기다리시는 분들 떠올리며 다시 키보드를 잡습니다. ㅠㅠㅎ 늘 힘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지적해주신 오타/비문도 늘 감사히 고치고 있습니다! 일일연재라 그중 빠뜨린 건 나중에 한꺼번에 다듬으면서 수정하겠습니다 ㄷㄷ)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여주신 사랑에 감사드리며,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5 / 0240 ---------------------------------------------- 3장. 통과의례 시험 주간이 종료되고 주말이 지난 첫 등교일이 밝았다. 어느 정도 휴식을 통해 피로를 풀긴 했어도 루바흐 학생들의 몰골은 여전히 초췌했다. 말라죽은 화초처럼 비실거리는 학생들 사이에서 푹 쉬어 말끔해진 쥬다스만이 여유롭게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휴일 동안 평안하였는고?” 언제나와 같은 인사에 피곤에 쩔어 책상에 늘어져 있던 바이칼은 인상을 팍 구겼다. “하……. 남들이 다 당신 같다고 착각하지 마시지요. 시험에 열과 성을 다한 학생이라면 휴일이 아니라 지옥이었을 테니.” “……?” 으르렁대듯 쏘아붙인 말을 들은 쥬다스는 눈을 한 번 깜빡이더니 이내 푸근하게 웃어주었다. “그런가. 열과 성을 다해 시험을 치른 모양이야. 고생했겠구만.” “제대로 하지도 않을 거면서 대체 루바흐에는 왜 오셨는지 모를 일이군요.” 한 번 찌푸려진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끝까지 당신을 믿고 계신 폐하 생각은 안 하는 겁니까? 왜요, 이것도 잘 안 되니까 포기하시게요? 그럴 거면 다 그만두시죠. 말마따나 어차피 여기가 마지노선이니, 어쩌면 폐하께서도 이제 당신을 더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바이칼은 아차 싶었다. 제 구실 못하는 황자를 위해 황제가 최후의 수단으로 루바흐를 선택했다는 사실이야 제국의 귀족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내기엔 도를 넘은 내용이었다. 공공연히 무례를 범하는 바이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큰 실수였다. 시험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더불어 황자의 태평한 얼굴을 보자 치밀어 오르는 화기를 다스리지 못함이 화근이었다. 자존심에 차마 사과도 못하고 굳어 있는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는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무례하구나.” “……!” 늘 조용히 당하던 이에게서 처음으로 책망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큰소리를 내지도 않았으며 특별히 감정이 실린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였지만 오히려 그 담담함이 더 서늘하게 다가왔다. 웃음기가 사라진 금안이 가만히 바이칼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자 바이칼의 등에서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보다 작은 체구의 소년인데, 체감하기로는 큰 어른에게 꾸짖음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무례를 범하고도 사과하지 않을 셈이더냐.” “죄…… 죄송합니다.” “그래, 잘못을 안다면 응당 사과해야지. 다신 그러지 말거라.” 홀린 듯 사과하고 난 바이칼은 뒤늦게 민망함으로 얼굴을 붉혔다. 잘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저 백로황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모멸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위화감이 찾아왔다. ‘역시 이전과는 뭔가 다르다. 뭐지? 대체 무엇이…….’ 그 위화감의 정체는 경제학 수업이 끝나고 성적 순위표가 칠판에 공개된 후에야 드러났다. 성적 순위를 확인하기 위해 우르르 몰려든 학생들 틈에서 한차례 감탄인지 비명인지 모를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바이칼이 새파랗게 질려 기함했다. “말도 안 돼……!” “…….” 충격을 받은 건 바이칼뿐만이 아니었다. 제일 앞에서 자신의 순위를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황망한 눈으로 책을 끌어안은 손아귀에 꽈악 힘을 주고 있었다. 학원 루바흐에 입학해 지금껏 전 과목에서 단 한 번도 1등에서 밀려나 본 적 없는 그녀였다. 크리스티나는 이번 시험도 역시 어렵긴 했으나 수강생들 중 최고의 점수를 받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상대에게 그 믿음이 박살났다. <1등: 쥬다스(12), 100점> <2등: 크리스티나(14), 92점> <3등: 첼피(15), 87점> . . “-풋!” 이내 크리스티나의 입에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주변에서 그녀의 눈치를 보던 학생들이 흠칫 놀라 일제히 시선을 보내왔다. 이제 크리스티나는 아예 시원스레 청명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늘 얼음장같이 싸늘하던 그녀가 웃는 모습에 대부분 깜짝 놀랐으며 뭇 남학생들은 얼굴을 붉혔다. 가문이나 성적을 떠나 조각 같은 미녀로도 유명한 크리스티나였다. ‘하아, 분하긴 하지만, 차라리 이 편이 훨씬 재밌게 됐잖아?’ 그녀는 힐끗 쥬다스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여타 학생들과 달리 성적 순위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쥬다스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그마저도 그녀의 눈엔 자신감으로 보였다. 크리스티나는 미소를 지우고 그 위에 다시 서늘한 표정을 덮어썼다. “과연, 어떻게 될까.” 오만한 눈으로 성적 순위표를 훑어 내린 크리스티나는 미련 없이 홱 돌아섰다. 바다처럼 빛나는 투톤의 긴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내려앉았다. 수많은 학생에게 경악을 안겨준 쥬다스의 ‘성적 순위표’ 사건은 경제학에서 그치지 않았다. 총 5과목, 그가 신청한 문과 과목이 몇 안 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한들 거기서 전부 100점을 기록하여 1등을 차지했다는 사실은 실로 놀라운 행보였다. 유일하게 무예과 수업인 봉술에 한해서만 평균에 해당하는 점수를 받았다. 사실 그의 신체 조건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굉장한 일이었다. 최하 중의 최하, 겨우 낙제만 면하곤 하던 모질이 황자가 보여준 변화는 수많은 관심을 불러 모았다. 시험 문제가 까다롭기로 유명한 루바흐 학원에서 부정행위란 있을 수 없었다. 아예 교과서를 펼쳐 놓고 시험을 치른다 한들 그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활용도 없이 채점 기준에 부합하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철통같은 감시 체계가 잡혀 있었기에 부정행위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온전히 그의 능력으로 1등을 거머쥔 것이다. 그 사실이 퍼져 나가자 학생들 사이에 파란이 일어났다. 잘 빚어진 인형처럼 아무것도 못하던 ‘백로황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처음부터 숨기고 있었던 건가……?” “아무튼 굉장해. 입학해서 이때까지 100점은 처음 봤어!” 학교에서는 결국 성적이 능력을 말해준다. 단순한 1등이 아니라 100점이라는 점수를 거머쥠으로서 뭇 또래를 상회하는 능력을 보여준 황자는 더 이상 무시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던 학생들의 경우엔 은근한 기대마저 갖곤 했다. 타고나기를 황조의 적통을 타고난 황자가, 실은 그 능력마저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귀족 자제들의 선택은 불판 위의 팬케이크처럼 쉽게 뒤집혔다. 그중 몇몇은 직접적으로 쥬다스에게 다가가기까지 했다. “……저기.” “으음?” “으, 응원할게요. 쥬다스 님!” “그거 고맙구나.” 부드럽게 웃어주는 모습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된 학생도 더러 생겨났다. 백로황자가 무시받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마치 인형처럼 표정이 없던 우울함에 있었던 만큼 그는 여러모로 변화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반면, 초조하게 그의 변화를 인정하지 못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래 봤자 몇 과목 안 듣잖아.” “쳇, 조금 똑똑한 걸로 뭐라도 될 줄 아나.” 자신들이 배척한 존재가 실은 가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들을 묘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그 감정들은 음습한 성질이 강하여 곧 다른 쪽으로 변질되어갔다. 쥬다스를 바라보는 몇몇 학생의 눈에 잔인한 분노가 어렸다. 그들에게 있어 백로황자란 영원히 한심한 종자로 남아야 할 대상이었다. 악의적인 시선을 귀신같이 눈치챈 유니가 팔짱을 끼며 눈을 흘겼다. 「꼭 있지, 저런 녀석들.」 「? 누구? 어딜 말하는 거다요?」 「저 뒤에서 쳐다보는 놈들 말이야. 아으, 거슬려. 눈에 시커멓게 ‘나 꿍꿍이 있소’라고 써 붙여놓고 말이야. 확 날려 버리고 싶다니까!」 “허허. 진정하거라, 유니.” 쥬다스 또한 자신을 향한 적개심 가득한 시선들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이그레트’로 살아오면서 지긋지긋하게 받아 온 시선이었다. 그러니 자연 예민하게 잡아낼 수 있었고 동시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그쪽엔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평소대로 성실히 수업에 출석했다. 교사는 물론이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 대다수가 그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늘 자애롭고 부드러우며, 심지어 완벽한 성적까지 받아 낸 그를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지금껏 무시했던 게 있어 먼저 말을 걸어오거나 아는 척하는 이는 없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시하는 일은 깨끗이 사라졌다. 빈정거리거나 비웃는 일 역시 씻은 듯 종적을 감추었다. 쥬다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고 우중충했던 옛날의 모습 대신 따뜻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늘 주변을 감쌌다. 그러나 이는 그를 배척하고자 하는 소년들의 반감에는 더더욱 불을 지폈다. 황자의 긍정적 변화로 인해 지나치게 과열된 반감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마저 불러일으켰다. “……엉?” 마침 지나가다 수상쩍은 모습을 목격한 바이칼이 슬쩍 문이 열린 빈 교실을 향해 다가갔다. “그건…… 하는 편이…… 겠는데.” “……는 건 어때? ……처리할 필요…….” “차라리 황자를…….” 빈 교실에 둘러앉아 작은 소리로 의견을 교환하는 학생은 총 5명이었다. 그 5명 전부 학원 내에서 발이 넓은 바이칼에겐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집안도 웬만하고 성적도 그럭저럭 좋으면서 놀기도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들이었다. 바이칼도 한참 놀기 좋아할 신입생 시절 저들과 어울리고 다닌 적도 많았다. 그런데 그냥 지나치기엔 미심쩍은 단어가 몇 가지 귀에 들어왔다. ‘처리? 황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쥬다스는 성장이 멈췄을 뿐 아니라 선천적으로 약체 중에 약체입니다. 아마 성장이 정상적으로 진행되더라도 이 부분은 오래 안고 갈 리스크로 남을 겁니다.ㅎ 게임으로 따지자면, 메딕없이 스팀팩을 3연타한 마린이랄까... 노셔극공 빅터라거나 도둑작한 엘프 같은.... (농이니 모르셔도 됩니다.) 사족으로 소제목이 '통과의례'인 만큼, 이번 장에서는 한번쯤 학생들과 겪어야할 마찰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렇게 극단적인 파가 아니더라도 쥬다스를 꺼려하는 학생들은 아직 많습니다. 2황자, 3황자 등 견제하는 대상도 많고요. 어린아이들 뿐 아니라 이미 성년인 귀족들에게도 어필을 해야할 거고... 이그레트 갈 길이 머네요. ㅎㅎ ...아참, 그리고 정령왕들 본체(어른모습) 따로 있는 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이것 말고도 독자님들 중에 코난 분들이 계셔서 종종 움찔하네요. 덜덜;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보여주신 응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6 / 0240 ---------------------------------------------- 3장. 통과의례 바이칼은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설마 아무리 생각이 어리다한들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자제들로서 황자를 건드릴 생각을 할까 싶긴 했다. 하지만 일단 가만 놔두기는 영 꺼림칙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교실 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섰다. “여기 모여서 뭐하냐.” “……!” 심각하게 얘기를 나누던 5인조는 흠칫하고 일제히 그를 돌아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침묵이 감돌았다. 바이칼이 당황하자 그중 한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어보였다. “뭐야, 바이칼 너였냐. 거기 서 있지 말고 이리 와서 앉아.” 그가 다가가자 의자까지 끌어다 준 학생이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요즘 어때?” “어떻긴, 똑같지 뭘. 시험 말아먹은 거 빼곤.” “……똑같다고?” 누군가 코웃음 쳤다. 바이칼을 부른 학생이 킥킥거리며 거기에 덧붙였다. “백로황자와 자주 부딪히는 모양이던데.” “딱히? 부딪히는 정돈 아니고. 조금…….” “왜? 조금 어떤데?” 떠보는 질문에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많이 변하셨으니까, 그분도. 변한건지 원래 본모습을 속이고 있던 건진 몰라도 솔직히 감탄했다. 좀 반성도 되고. 그래도 우리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의 핏줄이신데 그동안 너무 무례하게 군 건 사실이니.” “……그래서, 홀랑 그 줄에 서보시겠다?” 묘하게 날이 선 질문에 바이칼은 허 하고 날숨을 뱉었다. “줄? 그런 거 아직 생각도 안 했는데 무슨 소리야. 우린 아직 학생이다. 줄이니 세력이니 하는 건 성인식을 치른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완전히 ‘백로황자’를 인정하고 있군.” 그를 쳐다보는 5인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더니 동시에 주르륵 자리에서 일어섰다. 졸지에 불러서 왔더니 홀로 앉아 있게 된 바이칼은 어처구니없는 시선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너희가 그렇게 백로황자에게 관심이 많았지?” “거기엔 길이 없어, 바이칼.” “뭐?” “그자는 군주가 될 수 없단 소리다.” 얼마 전이었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동조했을 소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군주가 될 거라 장담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 가능성만큼은 진흙에 파묻힌 채 반짝이는 보석처럼 슬며시 엿보이고 있었다. 바이칼은 최근 쥬다스의 달라진 행적을 떠올리곤 표정을 굳혔다. “이봐, 펠리엇…….” “지금부터 증명해 주지. 똑똑히 지켜보기나 하라고, 허파에 쉬슨 놈 같으니.” 펠리엇과 그 무리들은 비웃음을 흘리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바이칼은 난데없이 벌어진 사태를 이해하려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다 이내 벌떡 일어섰다. “저 자식들, 대체 뭘 하려고.”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분명 쥬다스를 향한 강한 적대감이 그들 사이에 팽배했다. 바이칼은 황당함과 짜증이 뒤섞인 표정으로 거칠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제길, 정말 모르겠네……!” 말과는 달리, 그날 이후 바이칼은 은근슬쩍 쥬다스를 주시하기 시작했다. 말을 건네진 않더라도 그의 옆자리에 앉는다든가, 수업을 마치고 나갈 때 거리를 두고 따라 나간다든가 하는 식으로 묘하게 자기 시야 반경에 쥬다스를 두려고 노력했다. 제 딴에는 티내지 않고 감시한다는 게 쥬다스와 에단의 눈에는 훤히 들어왔다. “……저 정도면 명백히 수상하군요.” “허허, 내버려 두어. 나쁜 뜻으로 저러는 건 아닐 테니.” 쥬다스는 그저 귀여운 아이의 재롱을 보듯 즐겁게 웃었다. 실제 바이칼의 작태는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징 하니 노려보고 있다가 시선이 마주칠까 하면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는 식이었다. 신경 쓰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지켜본다는 느낌이 풀풀 나는 태도였다.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다만……. 기특한지고.”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이자 다른 곳으로 가는 척하며 뒤를 쫓고 있던 바이칼이 움찔 고개를 돌렸다. 바이칼의 어설픈 감시는 그들이 봉술 수업을 듣기 위해 체육관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뼛속까지 문과생인 바이칼은 무예과 수업이랑은 담을 쌓고 살았으니 체육관까지 따라 들어올 일은 없었다. 그러나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체육관 앞에 선 바이칼은 이내 성큼성큼 들어와 쥬다스 앞에 섰다. “그…….” “음?” “조, 심…… 하십시오.” “허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분명 도움을 주고자 하는 경고였다. 예상치 못한 적극적인 친절에 쥬다스뿐 아니라 함께 수업을 준비하던 에단마저 연습용 봉을 든 채 의외라는 듯 눈을 지그시 떴다. 기특한 어린애를 보는 듯한 두 시선에 바이칼은 울컥 항변을 늘어놓았다. “이건 그러니까, 딱히 당신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어쩌다 보니 들은 게 좀 있어서.” “들리는 것보다 스스로가 판단하기로 옳다고 믿는 쪽으로 움직였더냐. 그것 참, 쉽지 않을 텐데 네게 그만한 정의감이 있는 게로구나. 고맙다, 바이칼.” ‘……자신이 노려지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의 경고를 정확히 알아들은 데다 칭찬까지 해주는 쥬다스의 모습에 바이칼은 황망히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눈앞의 이 작은 황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걱정할 필요도 없이 강했다.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체육관을 빠져나갔다. 「……쟤 지금 걱정하면서 아닌 척 하는 거지?」 「우웅. 어렵다요. 이그레트를 싫어하던 거 아니다요?」 「글쎄~ 인간은 겉과 속이 따로 놀기도 한다나봐.」 「겉과 속이 따로? 와! 무슨 놀이하는 것 같다요!」 유니와 토니도 바이칼에게 흥미가 생긴 얼굴로 조잘거렸다. 두 정령은 수업이 진행되는 내내 쉼 없이 그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정령들은 대체로 바이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간 못되게 군 면도 있긴 했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모나게 굴면서도 은근 쥬다스를 챙기는 모습을 재미있게 여기고 있었다. 정령은 인간이 가진 보다 본질적인 마음에 반응한다. 그런 정령들이 호감을 표했다면 바이칼은 악한 인물이 아니란 뜻도 되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지만, 토니를 불러온 건 잘한 것 같구만.’ 즐거워 보이는 둘을 힐끗 보며 쥬다스는 푸근하게 미소 지었다. 만일 유니 혼자만 그의 곁에 두었더라면 지금처럼 쥬다스가 바쁜 상황에선 홀로 그림자처럼 뒤만 졸졸 쫓아다녔을 테였다. 정령도 엄연히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는 존재였고, 그에게 있어선 특히 가족이자 친구로 한 평생을 같이 지낸 특별한 이들이었다. 그런 유니를 쓸쓸하게 두지 않게 되었다는 점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안심이 되었다. 한 편으론 나머지 두 정령에 대해서도 생각이 미쳤다. “기왕지사 다함께 있는 편이 나을란가….” “예?” “아니다. 자, 마저 해보자꾸나.” 쥬다스가 방어자세를 잡자, 에단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로 배운 동작은 공격과 방어의 연계기술이었다. 봉이란 무술의 기초라고도 불리는 만큼 동작의 폭이 넓고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공방이 물 흐르듯 전환되며 빠르게 대응할 수 있다. 심지어 무기가 막히면 이를 버리고 곧장 권법으로 전환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이 봉술의 장점이었다. 성실히 배운 대로 자세를 취하려던 에단은 문득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시선을 천장으로 향했다. 유달리 감이 좋은 그의 귀로 와이어가 끊어지는 미세한 소음이 잡혔다. 끼익― 끼이익. 실내체육관이었기에 천장에는 마법구로 내부를 밝혀주는 조명장치가 매달려있었다. 동그란 구 형태의 장치는 성인 둘이 팔 벌려 껴안으면 맞닿을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평소보다 조명장치가 조금 낮게 내려앉아있었다. 미세하게 흔들거리는 조명을 발견한 에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지, 학우님?” 메이란은 지도하던 학생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응답했다. 에단은 천장을 가리키며 이상을 고했다. “조명장치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응? 뭐?” 다른 학생들의 자세를 체크하며 대충 대꾸하던 메이란은 멈칫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눈에도 확연히 위태롭게 보이는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뒤늦게 이상을 눈치 챈 메이란이 기록지를 던지다시피 바닥에 내려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전원 동작 그만! 물러서!” “예?” “설명할 시간 없으니까 일단 거기서 비켜!” “……?!” 한창 연습을 진행하던 학생들은 의아한 얼굴로 동작을 멈추었다. 그러자 그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조명장치가 천장에서 분리되었다. 동시에 학생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쿠웅! 낙하는 빨랐다. 미처 피하지 못한 두 학생이 그 밑에 남았다. 체육관 내부를 밝혀주는 조명장치는 그 크기가 그리 크진 않았지만 마법이 가동되고 있어 충격을 받으면 폭발의 위험이 있었다.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벌어진 일에 메이란은 사색이 되어 조명장치가 추락한 곳으로 달려갔다. 루바흐의 안전설계는 완벽했다. 매주 같은 시간 관리사가 점검을 나오고 있으며 특별히 큰 손상이 생기지 않으면 지금과 같이 사고가 일어날 일은 없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교사 뿐 아니라 학생들도 겁에 질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뒷편에 이어서 나오겠지만 범행을 저지른 학생들은 이 정도로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긴 했습니다. 원래는 그냥 좀 놀래키고, 겁을 줄 목적이었는데 사태가 좀 꼬였을 뿐... ...초반부 학생들 태도에 대해 지적을 많이 받다보니 괜히 구구절절 설명하게 되네요.ㅠㅠ; 아무튼 이번 사건은 그때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르므로..... 음, 어찌 될 지는 그냥 지켜봐주시면 되겠습니다.... (소심) 아, 그리고 이번주 주말에 또 집을 비우게 되었습니다. 가을이라 날이 좋아서 그런지 주말마다 나갈 일이 생기네요 ㅎ 그런고로 이번 토요일과 일요일은 연재를 쉽니다. (꾸벅)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리며, 이틀 뒤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0027 / 0240 ---------------------------------------------- 3장. 통과의례 다행히 아직까진 폭발이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달려간 메이란이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 아래를 살폈다. “첼피! 로하만! 다들 괜찮나?!” “예, 예.” “괘, 괜찮, 저희는 괜찮은데…….” 뜻밖에 멀쩡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밑에 깔릴 뻔한 건 그 두 명이었다. 놀라 주저앉았을 뿐 다친 구석은 없어 보이는 그들을 보며 메이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들의 말에 피가 싹 마르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그, 저, 저분이.” “……저분?” 두 사람이 가리키는 곳엔 어느 틈엔가 에단이 서있었다. 그가 바닥에 꽂다시피 한 봉이 지렛대처럼 작용하여 조명장치를 살짝 떠받치고 있었다. 떨어지기 직전 밀어 방향을 틀어낸 모양이었다. 물론 여기엔 숨겨진 힘이 하나 더 작용했다. 「저 인간도 참 겁이 없네. 이그레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저랬을까?」 「우웅, 그만큼 믿고 있었던 거 같은데.」 「뭐를?」 보통사람 눈엔 보이지 않지만 바람의 힘이 장치를 감싸 떨어지는 충격을 흡수한 상태였다. 아무리 에단이 빠르게 움직였다 해도 그의 힘만으로는 추락하는 조명장치를 안전하게 받아낼 수 없었다. 정령의 힘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장치가 폭발해 함께 다쳤거나 제대로 구해내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에단은 짧게 한숨을 후 뱉으며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가 절대 이 상황을 가만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 거다요. 저 인간.」 「가만? 그렇다는 건 오히려…….」 당연히 에단이 나서지 않더라도 쥬다스는 분명 학생들이 다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힘을 숨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인명이 걸린 일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몸소 뛰어든 건 그가 정령의 힘을 사용했다는 걸 숨기도록 도와준 셈이기도 했다. “자네! 위험하게 이게 무슨, 다쳤지 않나!” 메이란은 큰소리를 내면서도 학생들을 끌고 사고구역에서 벗어났다. 정작 위험했던 두 학생보다 몸을 던져 상황을 타개한 에단이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봉을 꽂으면서 추락한 장치에 손목을 세게 부딪친 듯 피가 꽤 흐르고 있었다. 에단은 곧장 양호실로 보내졌다. 봉술수업만 들었다하면 문지방이 닳도록 찾아오는 두 사람 덕에 그들의 방문이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치료사는 느긋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오늘은 꽤 일찍 오셨네요. 언제 오시나 시간 재던 중이었는데요. 그런데…….” 치료사의 시선이 멀쩡한 쥬다스로부터 에단에게 옮겨갔다. “이번엔 환자와 보호자가 바뀌었습니다?” “사고가 있었습니다.” “…세상에.” 따뜻하게 소독된 물수건을 가져온 리이나가 에단의 핏물을 닦아내며 안타까운 눈길을 보냈다. “이, 이거 위험했어요……. 자칫 했으면 인대에도 손상이 갔을 텐데.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리이나. 진료를 보고 싶다면 네가 치료사를 하도록 하렴.” “아, 아, 아니요―! 죄송해요!” “얼른 치유술로 회복부터 해드려.” 치료사는 간결하게 지시하고 상처주변에 소독약을 뿌렸다. 아무리 치유력이 대단한 힘이라 한들 근본적으로 상처 자체를 없애주진 못했다. 말끔히 상처를 회복시킬 정도의 치유력은 교황청이나 황궁 정도에 상주하는 고위 치유술사들만이 가능한 이능이었다. 이제 겨우 10살 난 리이나가 완벽히 치유를 해낼 리가 없었기에 상처에 대해 기초적인 치료가 함께 들어갔다. 리이나가 에단을 치유하는 동안 쥬다스는 그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넸다. “많이 아팠느냐.” “…별 것 아닙니다.” 뼈나 인대까진 이상이 없다하더라도 깊게 파여 살점이 떨어져나간 상처였다. 피를 철철 쏟아놓고도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 에단을 보며 쥬다스는 난감한 어조로 말했다. “네겐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구나.” “…….” 에단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빼도 박도 못하게 그 자리에서 정령의 힘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더 고마운 사실은, 에단이 그를 믿어주었다는 점이었다. 쥬다스가 타인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도울 것이란 확신 없이는 불가능한 행동이었다.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은 에단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로서는, 제 확신을 증명해주신 쥬다스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역시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에단의 입가에 조그마한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그는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보다 쥬다스님. 이 사고는 분명 누군가 일부러 한 짓일 겁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단다.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던 시설이 급작스럽게 허물어지려면 그만한 조작이 가해졌을 터. 아마 학원 측에서도 조사를 해볼 요량이긴 하다만.” 이번 사고에서 큰 피해가 없었다한들 범인을 찾는다면 루바흐에서는 이를 간단히 두고 보진 않을 것이다. 자칫 학원의 명예가 떨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쥬다스는 이미 그 범인들을 알고 있었다. 은은한 바람이 그의 손끝을 휘감았다. 「이그레트.」 유니가 걱정스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겉으로 태연해보여도 현재 쥬다스는 약간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이유도 알겠고, 무얼 노리는 건지도 짐작이 갔다. 하지만 방법이 잘못됐다. ‘차라리 정당하게 나만을 노렸더라면 좋았을 것을.’ 이번 사건이 뜻하는 바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타인에게 해가 되는 일쯤은 가볍게 이용할 수 있다는 알림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런 식의 사고방식은 쥬다스가 가장 거북하게 여기는 종류였다. 물론 그는 자신의 기분에 따라 행동을 결정짓지는 않았다. 그가 다루는 것은 자연의 4속성, 자칫 잘못 다루어진다면 천재지변을 일으킬 재앙과도 같은 힘이었다. 직접 경험한 바 어떤 일이든 간에 무력에 의지한 해결은 옳지 못했다. 하지만 필요에 의해서라면 적절히 입장을 취해야할 때도 있었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한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의 손끝에서 한기를 품은 바람이 휙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텅 빈 교실에서 책상을 하나 쾅 걷어찬 펠리엇이 분개하여 소리쳤다. 함께 모여 있던 다른 4명의 학생이 서로 시선을 회피하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분명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봤었는데…….” “맞아, 신호를 주면 그때 조명이 추락하도록 해서.” “그럼 그렇게 됐어야지! 젠장.” 펠리엇은 쓰러진 책상을 발로 짓이기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체육관에서 수업이 끝난 후 교사와 학생이 전부 해산할 때, 백로황자만 따로 붙잡아두고 일을 벌일 셈이었다.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조명 장치를 폭발시켜 적당히 다치게 만든다. 그리고 혼자 남았던 그에게 장치를 훼손한 죄를 뒤집어씌우면 간단히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도, 상황이 너무 일찍 벌어졌다. 아직 십 대인 그들이 정확히 실행에 옮기기엔 애초부터 무리인 일이었다. 자신들의 역량을 넘어서는 엄청난 일을 꾸며놓고도 그들의 표정에는 죄책감이란 없었다. “근데 이거 걸리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큰일? 큰일은 이미 났지. 이제 루바흐에선 범인을 찾으려 할 거야. 정작 그 백로황자에겐 아무런 타격도 못 입혔고.” “그, 그럼 어떻게 해야.” “약한 소린 작작해, 크레비.” 다른 학생의 일침에 크레비의 입이 다물렸다. 여전히 불안한 듯해 보이는 친구의 표정을 비웃어주며 펠리엇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시작되기 전에 증거부터 없애.” “증거를 없애라니?” 모두의 눈이 그를 향했다. 펠리엇은 위험스레 눈을 빛내며 말을 맺었다. “어차피 우리가 저질렀다는 증거는 남기지 않았으니까 대타를 만들면 돼.” 무죄를 입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의 발생지를 아예 옮겨 버리는 것이다. 미리 입을 맞춰 다른 유력한 용의자를 만들어내고, 한번 여론이 그에게 몰리게 되면 진짜 일을 저지른 장본인들은 안심할 수 있게 된다. “백로황자를 싫어하는 놈들은 차고 넘치니까. 분명 밟아주고 싶을…….” “그럴 필요 없으이.”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건지 쥬다스가 문가에 서 있었다.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모의 중에 괴롭히던 대상이 나타나 버린 엉뚱한 상황에 학생들은 당황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그에 대해 좋지 못한 대화도 나누고 있었던 탓에 그 당황은 배로 찾아왔다. 그들에게 있어 정말 예상대로 풀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하루였다. 무겁게 침묵이 깔린 교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선 쥬다스가 그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마침 볼일이 있어 찾아왔거늘, 너희도 이에 관해 할 말이 있던 모양새로구나.” “그건…….” 갑작스러운 상황에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이던 펠리엇은 쥬다스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혼자인가?’ 하긴 펠리엇은 입안으로 중얼거리며 납득했다. 아무리 요즘 평판이 좋아지고 있다 한들 상대는 ‘백로황자’였다. 흥미를 보이는 이들은 생겨났지만, 정작 이런 때에 그를 도와줄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확신한 학생들은 긴장했던 표정을 점차 풀고 쥬다스를 마주 바라보았다. “수업도 없는 교실에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으음? 이런, 헷갈리게 했는가. 내가 찾아온 건 이 교실이 아니란다.” “그럼……?” 쥬다스는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 비슷한 또래라 해도 겉보기엔 마치 유아나 다름없었기에 쥬다스는 고개를 들어 한참 올려다봐야 했다. 작지만 흔들림 없이 그들을 향하는 금안에 학생들은 움찔했다. “두렵더냐.” 적막하던 빈 교실에 쥬다스의 목소리가 힘 있게 울렸다. 그 바람에 잠시 멍해 있던 학생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입을 열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너희가 저지른 행동이 말이다.” ‘일부러, 알고서 찾아왔다고?’ 5인의 안색이 동시에 확 굳어졌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주말에 너무 격하게 놀았는지 아직까지도 몸이 힘드네요. ㅠㅠ; 비몽사몽간에 작성한지라 오타나 비문이 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외 어색한 부분은 내일 중 확인 후 수정하겠습니다. 나쁜일은, 정말 그렇게 저지르려고 마음 먹은 경우는 사실 별로 없습니다. 아직 십대 초반인 아이들이니 성인들과는 다르게 판단능력도 떨어지는 편입니다. 하지만 몇몇분들이 말씀하신 대로, 어리다는 것이나 고의성이 없었다는 건 면죄부가 되지 않죠. ㅎ (그렇다고 저 단순한 이들이 이그레트가 만나게 되는 주요 악인이란 뜻은 아닙니다.; 소제목 그대로 통과의례의 일종이므로, 그냥 지켜봐주시면 되겠습니다(...)) 나이 얘기가 나와서 정리하자면, 쥬다스 : 12세 에단 : 15세 크리스티나 : 14세 바이칼 : 14세 입니다. ...루바흐 입학기준이 10세이상부터니 뭐... 대부분 어립니다. 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 모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28 / 0240 ---------------------------------------------- 3장. 통과의례 그들의 표정을 확인한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사람은 종종 스스로 감당치 못할 행동을 저지르게 되기도 하지. 잘못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 큰 잘못을 하려 하고, 이를 덮으려 더욱더 큰 잘못을 과감히 이행하려 한다. 이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야.” “지금, 무슨 말을.” “너희 같은 어린아이에게는 더군다나 감당키 어려웠을지도 모르지. 모난 자갈처럼 여겨 무시하던 존재가 갑자기 힘이 생긴다는 일은, 그래. 두려울 만도 했겠구나.” “…….” 쥬다스는 그들의 속내를 열어보기라도 하듯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말마따나 무시하던 존재가 이렇게까지 자신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을 줄은, 게다가 직접 찾아와 차분히 담소를 나누려 할 줄은 몰랐기에 더더욱 뭐라 답하기가 어려웠다. 학생들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있자, 쥬다스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나 방식이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누? 자칫 여러 사람이 해를 입을 수도 있는 문제였어. 하면 너희가 이곳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더냐?” “그건.” “잘못에 대한 사과를 하기 위함이더냐. 아니면…….” 쥬다스는 미소를 지우고 슬금슬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학생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들은 굳은 얼굴로 그를 에워싸 도망갈 곳을 막아서고 있었다. “……여기서 더 큰 죄를 저질러 잘못을 덮을 생각인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사실을 전부 알면서 혼자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배짱도 좋군요.” 펠리엇이 다른 학생을 대표해서 대답했다. 혐오와 무시가 뒤섞인 눈빛에 쥬다스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인형처럼 살아왔으면 차라리 계속 인형 놀음이나 하시지 그랬습니까. 당신이 아니어도 훌륭한 인재는 많습니다. 이미 당신이 아닌 다른 황자 전하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다고요. 이제 와서 뭐 좀 있는 척하셔서 될 일이 아니란 겁니다.” 펠리엇이 손을 들어 올리자 다른 학생이 의자를 하나 가져다 앞에 놓았다. 억지로 앉히기라도 할 태세였으나 쥬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 태연한 태도에 오히려 더 짜증이 솟은 것은 학생들이었다. 펠리엇이 막 쥬다스에게 손을 뻗던 찰나였다. “이런 공개된 장소에서 감히 그분께 손을 대려는 너희야말로, 배짱도 좋군.” “……?!” 싸늘한 음색으로 일침을 놓은 것은 다름 아닌 크리스티나였다. 그녀가 이 상황에 개입한 것은 쥬다스로서도 의외인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되었다. 크리스티나는 성큼성큼 교실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크리스티나는 안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조금 전 우연히 쥬다스가 교사 안으로 들어가는 걸 발견했고, 지금 시간에는 이 건물에 수업이 없다는 게 떠올랐을 뿐이었다. 최근 쥬다스에 대해서는 꽤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던 그녀로서는 드물게 에단도 없이 홀로 어딘가로 향하는 그 모습에 의아함을 느껴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의도치 않게 지금 장면을 목격하게 되어 나선 것이었다. 도도하기로 유명한 크리스티나가 직접 불미스러운 사건에 끼어듦이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랬기에 무리 중 가장 당당하던 펠리엇조차 말을 더듬었다. “크, 크리스티나? 당신이 여긴 왜.” “너 따위에게 대답할 의무가 있나. 비켜.” 차가운 명령조를 들은 펠리엇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매끈한 팔목을 붙잡고 돌려 세웠다. “남의 일에 끼어들지 마시고 가던 길이나 가죠. 별로 어떻게 하려는 게 아니라……!” 휘익, 퍽!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혔다. 고꾸라진 펠리엇이 영문을 모른 채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간단히 그를 잡아 땅에 매친 크리스티나가 불쾌한 시선으로 팔을 툭툭 털었다. “함부로 건드리지 마, 저급한 것.” “…….” “…….” 학생들은 멍하니 그녀와 쓰러진 펠리엇을 번갈아 보았다. 뒤늦게 그들의 뇌리에 크리스티나에게 따라붙는 별칭 하나가 떠올랐다. ‘차가운 검의 여기사.’ 늘 품위 있고 절도를 지키는 모습을 유지하는 고고한 그녀였다. 거기에 저런 별칭이 붙은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무예에도 상당히 능통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기사들이 쓸 법한 묵직한 장검을 다루며, 무기 없이 권술만으로도 어지간한 학생 정도는 제압할 실력이 되었다. 같은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들도 함부로 상대하기 어렵다는 그녀였다. 거기에 언제나 냉랭한 분위기까지 품고 있으니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굴지 못했다. 굳어버린 다른 이들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스쳐 지나간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앞까지 뚜벅뚜벅 다가가 손을 척 내밀었다. “나가죠. 여기.” 쥬다스는 그녀가 내민 손을 가만 쳐다보았다. 뻔히 다수에게 둘러싸여 무시 받고 있는 상황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다가와 내민 손이다. 이는 90년가량을 살았던 지난 삶에서도 접해 보지 못한 생소한 경험이었다. 쥬다스가 묘한 눈으로 쳐다보자 크리스티나는 뭐하냐는 의미를 담고 고개를 기울였다. “고맙구나.” “뭐, 어차피 당신이라면 뭔가 생각이 있어 왔겠지만. 세상에는 워낙 저급한 부류가 많으니, 혼자 다니는 건 자제하세요.” 크리스티나는 곁눈질로 주변을 둘러싼 이들을 가리키며 시니컬하게 대꾸했다. 작게 웃은 쥬다스가 무어라 답하려던 찰나, 펠리엇이 벌떡 일어서며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멋대로 끼어들지 마시죠. 그쪽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상관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무슨 짓이라뇨? 뭔가 오해하시나본데 먼저 찾아온 건 쥬다스 님입니다. 우린 그저 대화를 하고 있었다고요.” 쥬다스가 먼저 찾아온 것은 맞았지만, 단순히 ‘대화’ 선에서 끝낼 생각이 없던 것만큼은 분명했다. 분위기로 보아 그 사실을 눈치챈 크리스티나가 짜증스레 어깨를 잡은 펠리엇을 노려보았다. “……이거 놔.” “왜, 아까처럼 패대기라도 칠 생각입니까? 놀라서 당하긴 했는데 두 번은 안 봐줍니다.” “하.” “여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고.” 다른 학생들까지 가세하면서 그들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아무리 크리스티나가 무예에 재능이 있다 한들 건장한 소년 다섯을 한 번에 싸워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어깨를 잡아채고 사방에서 나가라고 밀어대는 통에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그들의 손을 쳐냈다. “그냥 얘기만 한다니까? 예?” 탁! 실랑이 끝에 크리스티나는 그들에게 밀쳐져 휘청거리게 되었다. 거기에 하필이면 쓰러져 있던 책상에 발이 걸려 휙 뒤로 넘어졌다. “어!” “-!” 하필 그녀가 넘어지던 쪽에 창문이 열려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앗 하는 사이 크리스티나는 창문 너머로 몸이 반쯤 넘어갔다. 당황한 학생들 사이로 쥬다스가 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 그러나 지금 그의 육신은 90살 먹은 노인네보다도 힘이 없는 약체 중의 약체였다. 급한 나머지 일단 손을 뻗고 봤지만 또래보다 성숙한 몸을 가진 14세 여자아이를 붙들고 지탱할 힘이 쥬다스에게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바람에 쥬다스도 크리스티나와 함께 사이좋게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그레트!」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쥬다스의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가정이 세워졌다 허물어지길 반복했다. 정령의 힘을 사용했을 때,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지는 여파를 전부 다른 방식으로 해결했을 때, 혹은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바람을 가르며 추락하는 시간은 불과 몇 초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유니가 살짝 힘을 사용하여 떨어지는 속도를 늦춘 상태였다. “…….” 쥬다스는 놀란 나머지 눈을 질끈 감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았다. 그토록 도도하게 굴었어도 그녀는 역시 14살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공포에 떨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손을 꾸욱 잡아준 쥬다스가 미안한 눈으로 작게 말했다. “……괜찮을 거란다, 얘야.”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납게 날뛰려는 바람의 힘을 의도적으로 저지했다. 풍덩! 그들이 떨어진 위치에는 다행히도 루바흐 학원을 따라 흐르는 거대한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두 사람이 물속에 빠지는 것까지 똑똑히 목격한 펠리엇 무리는 창문에서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어, 어떡하지.” “신고!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주, 주, 죽으면 어떡해……!” “닥쳐. 신고하면? 이게 다 누구 잘못이 될 것 같아?” 펠리엇의 날카로운 말에 덜덜 떨며 우왕좌왕하던 나머지 학생들이 일동 침묵했다. 겁에 질린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는 그들을 향해 펠리엇이 다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한 짓 아니지 않냐. 우린 그냥 얘기만 하려고 했던 거고, 발을 헛디뎌 떨어진 건 크리스티나잖아. 그걸 구하겠답시고 제 몸 생각 안 하고 뛰어든 백로황자가 멍청한 거지!” “그, 그런가?” “하지만 저대로 내버려 둘 수는…….” “자기들끼리 멋대로 떨어진 거잖아.” 그들 사이에 묘한 자기 방어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번 뒤틀린 생각은 일제히 한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어른들에게 알려야 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뛰어나가는 이가 없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자.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걸 아무도 알아선 안 돼. 다행히 오늘은 여기서 수업도 없었고, 딱히 찾아올 사람도…….” “미친놈들.” 드르륵! 반쯤 열려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혼비백산한 그들이 문 너머를 쳐다보자, 문을 열어 제친 채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진 바이칼이 버럭 소리쳤다. “네놈들이 그러고도 긍지 높은 귀족이자 루바흐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이라 할 수 있겠냐?! 이 개자식들아!” “……뭐, 무슨. 우리, 나, 내가 안 그랬어. 이건 자기들이 알아서……!”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학생들의 눈에 그들만큼이나 하얗게 질린 에단의 얼굴이 들어왔다. 바이칼은 혼자 있던 게 아니었다. 바이칼의 뒤에 서서 주먹을 콱 말아 쥔 그는, 이내 그대로 휙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그레트'는 큰 시놉시스가 정해진 글입니다. 사랑해주시는 분들의 의견을 최대한 새겨듣고 참고하고자 노력하고는 있지만, 전부 반영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많습니다. 아마추어 글쟁이가 표현하는 세상이 여러분의 눈에 많이 부족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시간들여 읽어주시고, 소중히 남겨주시는 의견 한마디한마디에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족으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쥬다스(이그레트)가 좀 달라질 예정입니다. 지금까지는 이런들어떠하고 저런들어떠하리~ 주의였던 주인공이지만, 착실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등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리며,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꾸벅)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29 / 0240 ---------------------------------------------- 3장. 통과의례 ‘설마, 그 밑에는 호수가 있었다. 튀어나온 암석 따위에 부딪히지만 않았다면……!’ 우르릉! 막 마지막 계단을 딛고 내려가려던 에단이 휘청하며 벽을 짚었다. 갑작스레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듯 땅이 울렸기 때문이다. 크게 들썩이던 땅은 이내 잠잠해졌지만 여전히 작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에단은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호숫가로 뛰쳐나갔다. 휘이이잉. 바깥 상황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마치 태풍이라도 온 듯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바람에 그의 머리며 옷자락 등이 거칠게 펄럭였다. 에단은 즉시 이 현상이 자연적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는 쥬다스를 따르는 정령의 힘이 분명했다. 마치 분노하기라도 하듯 거칠게 몰아치는 바람결에 날아온 나뭇가지가 그의 볼을 핏 스치고 지나갔다. “……제길!” 땅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그에 따라 호수의 물도 들썩이고 있었다. 그 상황에 물속으로 뛰어들기란 미친 짓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에단은 망설임 없이 교복 재킷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그가 철썩이는 물에 뛰어들려던 찰나, 거짓말처럼 자연현상이 뚝 멈췄다. “……?” 정령의 힘이 발현을 멈추었을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정령술사가 직접 그 힘을 멈췄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술사가 숨을 거뒀을 때였다. 에단의 안색이 급격히 굳어졌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세상에, 방금 봤어? 분명 백로황자가 저 창문에서…….” “비켜 주십시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여기 학생 간 폭력 사건이 발생했다고……!” 그의 뒤로 웅성거리며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학원 경비대와 교사들, 그리고 근처를 지나다 뜬금없는 자연 재해에 몸을 숨기고 있던 학생들이었다. 상황은 비로소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끝없이, 끝없이 가라앉는다. 차갑던 물살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을수록 점차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쥬다스는 보글보글 떠오르는 기포 소리가 마치 어린애들 웃음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결국 또 내 손으로…….’ 허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같은 결론뿐이었다. 최대한 피하고자 애쓴 보람도 없이 인간관계란 머리로 계산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에 더욱 그랬다. 달리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언제까지가 될진 몰라도, 이 ‘쥬다스’란 아이의 몸으로 살아가는 이상 다른 삶을 산다면 좋겠거니 여겼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의 삶이나 지금의 삶에서나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 있었다. 그는 이를 가지치기 내지는 ‘타작’에 비유하여 불렀다. 나무를 잘 자라게 하려면 해가 되거나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내 버리는 게 좋다. 또 알곡을 걷는 타작을 할 때 속이 빈 쭉정이는 걸러내어야 한다. 이 과정 없이는 나무도 곡식도 무엇 하나 제대로 관리할 수 없게 된다. 인간관계도 이와 같아서, 모든 사람을 전부 이해하고 포용하며 살아갈 수만은 없었다. 살다 보면 비뚤게 자란 가지나 쭉정이처럼 걸러내야 할 관계도 생기는 법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그 본인이 홀로 원한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때로는 자르고자 한 가지가 날카롭게 살을 후벼 팔 때도 있기 때문이었다. 「…….」 파아앗- 물속에서 가장 공명이 쉬운 존재는 당연히 물의 정령이었다. 그의 부름을 느낀 정령은 단숨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두 정령왕과 달리, 발끝에 지느러미가 달린 푸른 늑대의 형상을 띤 물의 정령왕은 쥬다스의 볼에 제 주둥이를 살며시 비볐다. 「……기다렸다.」 이그레트, 네가 불러주기만을.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더라도 정령의 마음은 똑똑히 전달되어 왔다. 부드럽게 쥬다스와 그가 놓지 않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감싸 안은 정령이 훅 그들을 수면 위로 끌고 올라왔다. 촤악! 봄기운을 머금어 차가운 물줄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구조 작업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따뜻한 바람…….’ 크리스티나는 제 볼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흐린 눈을 깜빡였다. 푹 젖은 교복 자락을 타고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어쩐지 발밑이 서늘했다. 크리스티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 후에야, 자신이 물 위, 그것도 물에는 발조차 닿지 않는 허공에 떠 있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서 단단히 손을 잡아주고 있는 쥬다스의 얼굴을 확인하자 놀람보단 안심이 찾아왔다. 황조의 적통을 상징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저녁 달빛을 받아 환히 빛을 발했다. 쥬다스가 고개를 들자 창백한 볼을 따라 눈물처럼 물방울이 주륵 흘러내렸다. “…….” 스륵 내려다보는 금안을 마주한 자는 그가 다루는 힘과 위압감에 눌려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몰려들었던 앞줄부터 시작해서 점차 호수 주변을 에워싼 모든 이가 그를 향해 무릎을 꿇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가장 앞에서 그를 마주한 에단은 무릎을 꿇은 채 탄성 같은 침음을 흘렸다. ‘……이건, 단순히 자질 정도가 아니다. 자연의 2속성을 동시에 다루며 저리도 완벽한 제왕의 상징이라니.’ 그 자리의 모두가 최악의 상황에서도 멀쩡히 살아남은 황자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황자의 곁에는 흐릿하게 제 형체를 드러낸 푸른 늑대의 형상, 물의 정령이 함께인 채였다. 쥬다스는 차분히 크리스티나를 데리고 지상에 착지했다. 발을 딛자마자 어지럼증이 몰려왔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정황을 묻기 위해 다가온 에단과 경비대를 향해 곧장 입을 열었다. “펠리엇 앨런, 리즈 마르셀, 닐 넥시스, 크레비 아놀드, 랠리 덴. 이 다섯은 나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을 루바르잔의 후예로 인정하지 않음을 밝혔다. 그로써 고의적으로 해하고자 하였으며, 그 과정에 여기 크리스티나 델피아를 휘말려들게 한 바.” 이것은 단순히 루바흐 학생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쥐죽은 듯 학원생활을 하던 쥬다스가 처음으로 제 위치를 드러내놓고 죄인들을 호명하는 순간이었다. 후우웅. 그들의 눈앞에 녹색 기운을 띤 바람이 원을 그리며 일었다. 흡사 회오리를 연상시키는 바람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 어리둥절한 표정의 다섯 학생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의 정령술사만이 사용 가능하다는 ‘바람의 소환’이었다. 멍하니 주저앉아 두리번거리다 쥬다스를 올려다본 펠리엇이 경악했다. “포박하여 재판소로 끌고 가 이에 마땅한 처분을 받게 하라.” “……황자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자, 잠시, 잠시만요!” 바람에 정령에 의해 강제로 소환된 다섯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손을 휘저으며 일어섰다. 사태를 지켜보던 수많은 학생의 눈이 그들에게로 향했다. “그, 그러려고 한 게 아니라.” “우린 그저…….” 어째선지 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다섯 가해자는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는 군중의 눈이 익숙한 감정을 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혐오, 그리고 무시. 그들이 늘 황자를 바라보던 바로 그 눈이었다. 더 이상 어떤 말을 꺼내도 그들은 혐오스러운 눈빛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을 테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펠리엇의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저, 장…… 난으로.” 탁!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경비대들이 다가와 그들의 팔을 붙들어 포박했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펠리엇을 향해 쥬다스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장난이라 하였느냐.” “……!” “하면 그 장난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실려 있었는지를 네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 되겠구나. 이제 더 이상 학교라는 울타리도 너희를 죄로부터 지켜주진 않을 터이니.” 재판소는 학교 안에 있는 시설이 아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이름을, 가문을 걸고 그 죄를 판결받는 엄중한 장소였다. 여기에 학생이라는 신분이 어느 정도 감형을 시켜주긴 할 테지만, 지금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죄가 드러날 경우엔 얘기가 달라졌다. 쥬다스가 굳이 물에 빠진 것도 이를 드러내기 위한 증거 중 하나였다. “바이칼 B.드레이크, 증언하겠습니다.” “……에단 R.헤이가, 증언하겠습니다.” 두 소년이 증인으로 나섰다. 그것만으로도 빼도 박도 못할 지경이었는데, 웅성거리던 군중 틈에서 하나 둘씩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저들이 빈 교사(校舍)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두 분이 창문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습니다.” “저도 목격하였습니다.” 아무리 루바흐에 재학 중이던 미성년 귀족 자제라 한들, 황자의 목숨을 건드린 이상 처벌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단순히 퇴학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판결 여하에 따라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는 사안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다섯 학생들은 사색이 되어 부정하기 시작했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우린 아무 짓도 안 했어요, 진짜예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도 여전히 결백을 주정하는 학생들을 물끄러미 바라봐준 쥬다스는 그저 묵묵히 그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어린 날의 혈기가 가져온 결과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처분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들을 처벌하는 데에 있어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라리 죄질이 얕은 단계에서 진정어린 사과를 표했더라면 무난히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쥬다스는 충분히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그들 스스로 걷어찬 셈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같은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쥬다스는 ‘황자’였다. 끊임없이 시시비비에 휘말릴 것이며, 그를 짓누르려는 자들과 깎아내리려는 자, 혹은 조종하려는 자들 사이에 자의든 타의든 간에 뒤섞이게 될 신분이었다. ‘군주의 길.’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다. 다스리는 자는 반드시 손에 피를 묻히게 되어 있다. 많은 것을 가진다는 건 즉 그만큼 많은 것을 짓밟아야 한다는 말과도 상통했다. 황조의 적통을 품고 태어난 제1황자인 만큼 둘 중 하나는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자신이 짓밟히고 숨을 죽일 것인가, 타인을 짓밟고 살아남을 것인가. 가만히 선 채 땅을 내려다보던 쥬다스의 몸이 순간 허물어졌다. “……쥬다스 님!” “……!” 가장 곁에 있던 크리스티나가 쓰러지는 그를 받아 안았다. 도저히 또래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작디작은 몸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술사가 정신을 잃음과 동시에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 형상의 정령도 함께 이슬로 화해 사라져 버렸다. 은은하게 주변을 감돌던 녹색의 바람 역시 후욱 움직임을 멈추었고, 무서울 정도의 고요가 호숫가를 감돌았다. 물과 바람, 듀얼 속성의 정령을 수족처럼 다루며 처음으로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 죄인을 처벌함에 이어 더 이상 숨지 않고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낸 그날. 죽은 듯 잘 빚어진 인형처럼 당하기만 하던 그가 숨겨 놓았던 발톱을 꺼내든 순간. 이는 바로, 루바흐의 그 누구도 백로황자를 무시하지 못하게 된 시작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4장 소제목은 '유명세'입니다. 이번 장을 통해 쥬다스(이그레트)의 작은 변화가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0 / 0240 ---------------------------------------------- 4장. 유명세 쥬다스는 그로부터 이틀을 꼬박 앓아누웠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그가 물에 빠지기도 했고, 또 날뛰려는 정령들을 제어하느라 상당한 정신 에너지를 소모한 데다, 그가 다루는 세 번째 정령왕인 ‘루니’를 불러내기까지 했기 때문에 그 충격을 전부 견뎌내지 못한 탓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건 푸른 늑대의 날카로운 두 눈이었다. 머리맡에 앉아 그가 깨어나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린 정령은 시선이 마주치자 콧김을 푸륵 뿜어냈다. 그 바람에 이마를 훤히 드러낸 쥬다스는 멍한 눈으로 정령을 응시하다, 이내 부드럽게 빙긋 미소 지었다.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다, 루니.” 감사 인사를 들은 루니가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를 담아 볼에 콧등을 비볐다. 겉보기엔 커다란 맹수가 어린아이에게 애교를 부리는 듯한 모양새가 연출되었다.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가만히 머리를 내맡긴 루니를 본 다른 정령들이 그 주변으로 몰려들어 쫑알거렸다. 「남 말할 처진 아니지만, 루니는 정말 이그레트 앞에선 양순한 개 같다니까? 우리한텐 가차 없으면서. 완전 이중인격이야, 이중인격!」 「무슨 소리다요? 그건 유니가 훨씬 더…… 우에에에!」 유니에게 볼을 잡혀 바동거리는 토니를 보며 쥬다스는 못 말린다는 듯 허허 웃었다. 웃음 끝에 이어지는 작은 기침 소리에 정령들이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치료사가 경고했었던 대로 그의 몸은 상당히 위태로운 상태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벼운 몸살이나 피로감 따위로 끝날 일에도 열이 끓어올라 움직이기도 힘든 통증이 전신에 찾아왔다. 포로록 그의 이마로 날아가 앉은 유니가 땀방울을 식혀주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이그레트, 많이 아파?」 “……괜찮단다. 하나 이대로는 곤란하겠지.” 「응, 그렇다면 역시.」 「루니에게 맡겨보는 거다요?」 두 정령의 시선이 고요히 쥬다스를 내려다보고 있던 푸른 늑대에게로 향했다.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루니는 사뿐히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따라 반짝이는 물거품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치 물속에서 움직이듯 물거품을 일으키며 주변을 한 바퀴 돈 루니를 향해 쥬다스가 작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겠느냐?” 「네가 바라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스르륵- 물의 정령이 힘을 개방하자 방 안이 온통 물에 뒤덮이듯 푸른색 기류에 휩싸였다. 실제 물은 아니었기에 젖거나 숨 쉬는 데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았다. 물은 인간과 가장 친숙한 요소다. 물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에너지 파장이라면 인간의 정신 그 기저에 깔린 부분까지도 들여다보는 게 가능했다. 「……이그레트.」 툭. 내밀었던 손이 폭신한 이불 위로 추락했다. 그는 언제 눈을 떴었냐는 듯 깊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른 식은땀만이 조금 전과 같았다. 정령들마저 자취를 감춘 방 안에는 소년의 가느다란 숨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한편, 루바흐는 온통 1황자에 대한 이야기로 떠들썩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결석을 하였다 해도 그 누구도 무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없는 자리에서는 더더욱 소문이 잘 퍼지게 마련이었다. 소위 ‘황자 살해 미수 사건’으로 불리는 지난 사태는 루바흐 학원을 완전히 뒤흔들었다. 간 크게도 황자를 직접적으로 노렸다는 점에서도 충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그 ‘백로황자’가 보여주었다는 이능에 대해서 가장 격렬히 반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중간고사 성적을 전 과목 100점으로 기록한 백로황자가, 심지어 자연계 물과 바람 듀얼 속성의 정령을 수족처럼 부렸다는 이야기는 단순한 충격 그 이상이었다. 평범한 학생이 이능을 보인 것과는 달랐다. 그는 황자였고, 더군다나 반푼이 황자로 유명했던 한심한 존재였다. 지금까지의 오명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숨에 씻어낼 능력이 밝혀졌다는 사실은, 즉 백로황자가 일부러 이를 숨기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무엇 때문에?’ 학생들은 한 차례 큰 혼란에 빠졌다. 자신들이 그를 홀대하는 사이, 그는 자신들을 평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겨났다. 백로황자는 더 이상 무리에서 동떨어진 모자란 백로가 아니었다. 황조의 적통을 상징하는 은빛 머리카락을 고고히 드러낸 채 숨겨 놓았던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이젠 그가 황태자 자리에 가장 근접한 위치에 섰다는 뜻이었다. 아직 미성년인 루바흐 학생들이었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된 이상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학생들은 황자가 자리로 복귀하기를 고대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잘 보여야 한다.’ ‘한살이라도 어릴 때 줄을 잘 서야 해.’ ‘잘만 이용한다면…… 제국을 발아래 둘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소 깨끗하지만은 않은 바람과 함께. 물의 정령왕인 루니의 힘에 의해 깊은 수면 상태에 빠졌던 쥬다스는 그 상태로 하루가 지나고서야 다시 깨어났다. 눈을 떴을 때는 열도 가라앉고 고통에 삐걱대던 육신도 가볍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한결 나아진 몸 상태를 느끼고 일어나 앉은 쥬다스에게로 정령들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그레트, 괜찮아?」 「안 아프다요? 움직여도 된다요?」 「…….」 자신에게로 몰려든 정령을 고루 어루만져 준 쥬다스가 마지막으로 루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의젓한 성격인 루니는 평소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작은 어린아이 모습을 띠고 있는 유니, 토니와 달리 네 발 달린 짐승의 형태를 취한 것만 봐도 루니의 유별난 성향이 짐작 가능했다. 쥬다스의 시선을 받은 루니는 천천히 필요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몸에 쌓여 있던 기억을 수색하던 중 문제가 하나 발견되었다.」 “흐음, 문제라…….”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루니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정령왕, 그중에서도 특히 물의 정령왕 루니에게 있어 ‘문제’라 부를 만한 상황은 흔치 않았다. 루니는 제게 맡겨진 모든 일을 단순 명료하게 해결하길 즐겼고 그 과정에 오류가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 만큼 루니가 문제가 있다고 말했을 시엔 웬만해선 해결이 어려울 정도의 난관이란 뜻으로 해석이 가능했다. 「이그레트, 인간의 정신은 빙산에 비유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표면이 드러난 의식과 물에 맞닿은 전의식, 그리고 물 아래로 가라앉은 방대한 무의식. 수면 위로 드러난 빙산의 상층은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지 않았다. 전의식도 마찬가지, 다른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 「하지만 정작 깊은 내면의 무의식은 막혀 있다. 다시 말해, 읽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며 들리지 않아.」 푸른 늑대의 눈이 찌르듯 쥬다스를 향했다. 「마치 이그레트, 너처럼.」 의외의 설명에 쥬다스는 눈을 깜빡였다. 본래 ‘이그레트’는 특이 케이스였다. 정령의 힘을 제어하고 활용하는 힘은 정신에 달려 있다. 자연의 4속성 정령왕을 전부 다루기란 평범한 인간이 가진 정신력만을 가지고서는 절대 불가능했다. 그의 정신 체계는 인간이라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복잡하게 구축되어 있었으며 루니가 관여하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런데 ‘쥬다스’도 역시 그러한 정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단 소리였다. 단순히 육신에 깃든 기억만을 조사하는 데에도 차질이 생길 정도였다. 그는 난감한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허어, 이거 참. 여러 모로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아이로구나.” 「……그리고 한 가지 더.」 “음?” 루니가 느릿하게 덧붙였다. 「그 몸의 ‘성장’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예기치 못했던 발언이었다. 하지만 물의 정령왕인 그의 말이라면 그 어떤 치료사보다 정확한 진단일 터였다. 쥬다스는 묘한 눈으로 제 손을 펴보았다. 여전히 어린아이같이 작고 여린 손이었다. “그건 언제부터?” 「네가 그 몸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다.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멀었지만 조금씩 제 기능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그가 1황자의 몸에서 눈을 뜬 것은 단순한 우연이나 운에 의한 결과가 아닐지도 몰랐다. 출신은 다를지언정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상황이며, 유독 흡사한 정신 체계, 그리고 자신이 들어옴과 동시에 제 기능을 찾기 시작한 육신. 지금까지완 전혀 다른 새로운 가설들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낮게 중얼거리는 순간,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쥬다스가 대답하지 않자 아직 깨어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방문객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한 발짝 들어선 이는 일어나 앉아 있는 쥬다스와 눈이 마주치곤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 일어나 계셨습니까? 치료사 ‘웨일’입니다.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으음, 제법 평안합니다.” “그러십니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치료사는 열을 재고, 동공을 살피는 등 간단한 진료를 마친 후 안심하며 물러섰다. “참, 그리고 이것을.” 건네받은 봉투에는 황실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치료사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후 방을 나서자 쥬다스는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은 유니가 다리를 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야, 그거 루바르잔 황실에서 보낸 거네? 하여간 인간들이란 이용할 만한 거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가만 놔두질 않지.」 “이런, 유니. 꼭 그런 의도만은 아닐 거란다. 어찌 되었든 이 아해는 제국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혈족이니. 눈에 보이는 성과가 생긴다면 응당 확인하고자 함이 옳을 터.” 「……하지만 이그레트, 너는.」 말로 표현하진 않았더라도 그동안 쥬다스는 명백히 눈에 띄는 자리에 서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그는 곤란한 듯 한숨을 뱉으며 서신을 도로 봉투에 갈무리했다. “당장 출발하란 얘긴 없었으니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움직이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잠시 감았다 뜬 금색 눈동자가 부드러운 힘을 담고 빛났다. “좋든 싫든 부딪혀야 할 문제라면, 도망치기만 해서야 어느 무엇 하나 해결되는 게 없지 않겠누.” 결석한지 나흘째 되는 날, 드디어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복을 챙겨 입었다. 여전히 품이 넉넉한 셔츠와 자켓 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한 후 밖으로 나오자 완숙한 봄 햇살이 내리쬐었다. 이젠 완전히 봄기운이 무르익어 아침공기마저도 따뜻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에단과 마주칠 수 있었다. 머무는 숙소가 가까운데다 같은 수업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들은 최근 이렇게 자연스럽게 중간에 만나서 함께 이동하곤 했었다. 쥬다스가 수업을 빠진지 3일이나 지났음에도 같은 자리에서 묵묵히 기다리고 있던 에단은 그를 발견하고 작게 목례해보였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주 건강하단다. 고맙구나, 에단.” “…….” 에단은 조심스레 황자의 안색을 살폈다. 워낙 허약한 탓에 혈색이 돌지 않아 창백하긴 했으나 본인이 말한 대로 아주 편안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동안 지켜봐온 바 상태가 나쁜 편이 아님을 알아차린 에단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 곁에 서서 함께 걸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오전 수업을 신청하여 그에 따라 이동하는 학생들은 상당히 많았다. 쥬다스의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시선이 따갑게 몰려들었다. 예전에는 아예 눈길을 주지 않거나, 쳐다본다 해도 무시와 경멸이 담겨있기 일쑤였다. 그러나 지금 쏟아지는 시선은 그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띄고 있었다. 놀라움, 호기심, 그리고 경애와 감탄을 담은 온갖 관심과 호의적인 눈길이 바늘에 꿰인 실처럼 따라붙었다. 쥬다스는 그 시선을 알아도 모른 척 평소처럼 움직였다. 느린 보폭으로 걸었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착실히 교실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 궁금해하시던 불의 정령왕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요.ㅎ 사실 제가 기억하던 '판타지 소설연재'는, 드림워커나 모기 시절입니다. 당시엔 이북이나 유료연재 등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쓰시는 분들은 즐겁게 쓰셨고, 저는 즐겁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글을 읽으면서 독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작가님들이 참 멋지고 부러웠습니다. ㅎㅎ; 그래서 언젠가 저렇게 되고 싶다 란 생각을 늘 했었고... 지금이 그 결과인 듯 싶네요. 당시 작가님들과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정말 즐겁습니다! 독자님들과의 소통이란 게 제 소소한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는데 흔쾌히 응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1 / 0240 ---------------------------------------------- 4장. 유명세 “……!” 그가 교실에 들어서자 길거리에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명백한 관심이 쏠렸다. 미리 와서 담소를 나누다 쥬다스를 본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침묵했고, 그가 자리로 가 앉을 때까지 죽 쳐다보았다. 평소처럼 자신의 옆에 와 앉는 백로황자를 힐끗 쳐다본 바이칼은 말을 걸어야 할지 가만있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 사건’ 이후로 모든 수업을 병결했던 황자이기에 안부가 궁금하긴 했으나, 어쩐지 자연스럽게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지금은 모든 학생의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다. 괜히 줄을 서기 위해 일부러 말을 붙이는 꼴이 되는 기분이라 바이칼은 이도저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의 귀에 여느 때처럼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예?” 저도 모르게 바보 같은 얼굴로 돌아본 바이칼은 쥬다스와 시선을 마주치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간 수업은 잘 들었느냐.” “……어? 아, 네. 뭐, 그야…….” “제법 성실한 성미로구만. 껄껄.” 기분 좋게 웃는 쥬다스를 멍하니 쳐다본 바이칼은 민망함에 고개를 숙여 책상을 쳐다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목 재질의 물결 따위를 세고 있던 바이칼은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어깨를 움찔했다. “네가 이번 일에 도움을 주었다지.” “아뇨, 별로 뭘 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제일 먼저 상황을 눈치채고 경비대에 신고를 하였다 하더구나. 에단에게 상황을 알려준 것도 역시, 게다가 재판소에서 증언을 해주었다고도.” “그건.” 바이칼은 어쩐지 점점 더 민망해져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아, 거기서 더 루바흐의 긍지를 더럽힐 수 없잖습니까. 솔직히 그놈들이 뭔가 일을 치겠거니 생각은 했는데, 제대로 막지 못한 제 잘못도 있죠.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깔끔한 사과였다. 아직 어린 나이인 만큼 진솔하고, 또 자신이 옳다 생각한 대로 행하는 올곧음이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아집이 되어 부적절한 행동을 이끌어내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는 주관이 늘 뚜렷한 자였다. 그간 마주친 바로 바이칼의 성미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던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네가 내게 큰 도움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지 않느냐. 고맙다, 바이칼. 인사가 늦어져 미안하구나.” 바이칼은 순간 뭐라 답할지 할 말을 잃었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도 황자를 무시했던 이들 중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그 진솔한 성미 탓에 대놓고 그를 폄하하거나 비웃은 적도 많았다. 그가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할 때에서야 걸맞은 대우를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자신의 태도를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이칼로서는 쥬다스의 감사 인사를 마냥 달게 받을 수만은 없었다. 이번 사건처럼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자신 역시도 백로황자를 고립시키고 무시했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바이칼이 망설이다 무어라 답하려는 찰나, 누군가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쥬다스 님.” 정확히는 쥬다스에게만 관심이 있는 태도였다. 제국에서 흔한 노란 머리에 시원스레 큰 키, 그리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소년은 쥬다스가 멀거니 쳐다보자 싱긋 웃어보였다. “제 이름은 ‘마르젠’이라 합니다. 어디,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마르젠 하쉬, 16세. 하쉬 백작가의 차남이래. 평소 높은 작위의 가문자제들과 주로 어울려 다닌다나 봐. 선한 인상과는 달리 권력에 대한 야욕이 높은 인간이야.」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브리핑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싱글거리고 있는 마르젠을 물끄러미 쳐다본 쥬다스는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냐, 그리 걱정할 만한 정도는 아니란다.” “아, 실은 저도 당시 쥬다스 님과 크리스티나 님이 함께 호수에 빠지시는 걸 목격해서 경비대에 증언했었습니다. 갑자기 쓰러지셔서 많이 걱정되었었는데 말이지요…….” 마르젠은 정말로 걱정된다는 듯 쥬다스를 다시금 훑어본 후 미소와 함께 말을 맺었다. “이리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 “…….” 쥬다스는 답하지 않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으나 속을 읽을 수 없는 금안이 마르젠을 가만히 향하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한 마르젠은 웃는 표정 너머로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이제껏 완벽하게 발톱을 숨기고 있던 황자답군. 쉽지 않겠는데, 이거?’ 단순히 자연계 정령을 다루는 힘만이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감추고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는 지략 또한 범상치 않음이 틀림없었다. 높은 작위의 인물들을 주로 상대하고 다니던 마르젠의 눈으로 보기에 이 백로황자는 거물 중에서도 상당한 거물이었다. 이대로 자라난다면 분명 황태자 자리는 물론이고 제왕으로 군림할 것이 틀림없었다. 마르젠은 속으로 쯧 혀를 찼다. 너무 큰 그릇은 곤란하다. 적당히 허점이 있어줘야 그를 쥐고 흔들기 편했다. 그나마 파고들 틈이 있다면 바로 황자의 나이였다. 아직 12살, 아무리 성숙하고 뛰어나다 한들 생각이 다 여물기엔 어린 나이였기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들이 각자의 상념에 빠진 사이 교사가 들어왔다. 마르젠은 황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제 위치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되어서도 이목은 쥬다스에게 집중되었다. 학생들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교사의 경우 다른 의미로 그를 주시했다. 본래 루바흐의 모든 교사는 1황자인 그를 암암리에 지켜보고 있었다. 루바흐 학원은 루바르잔 제국에서 설립한 최고의 인재양성 학교, 당연히 지도자의 혈통인 그에게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티내진 않더라도 늘 황자의 지지부진한 행태를 아쉬워하던 교사들은 복합적인 마음으로 현 상황을 주시했다. 황자가 드디어 재능을 드러내고 훌륭히 날개를 펼친 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껏 그가 보여준 모든 것이 거짓일 리는 없다’는 불안에 있었다. 이능과 뛰어난 지력을 감춘 것까지는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황자는 12세가 된 오늘날까지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았고 세력을 키우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불나방처럼 몰려들 인파 속에서 과연 제대로 된 판단으로 세력을 키우고, 또 그들을 포용하여 군림할 수 있을지가 불안 요소였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그간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던 1황자는 인간관계에 유달리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능력 여하를 떠나, 영악한 귀족 아이들에게 구슬려져 꼭두각시처럼 내세워지진 않을지에 대해 루바흐의 교사들은 내심 걱정했다. 그 걱정대로, 수업이 종료되자 학생들은 작정하고 우르르 황자에게로 몰려갔다. “그…….” “안녕하세요, 쥬다스 님!” “다루신다던 정령은 물과 바람 두 종류가 맞나요? 그때 정말 굉장했다던데!” 옆자리에 있던 쥬다스를 돌아보며 아까 하지 못한 말을 건네려던 바이칼은 인파에 가로막혀 그대로 묻혀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싼 학생들에게 밀려 뒤로 물러선 바이칼은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였다. “……하, 빌어먹을. 이젠 사과도 마음대로 못하겠네.”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쥬다스는 여기저기서 걸어오는 말에 한마디도 대응하지 않았다. 표정은 부드럽기 그지없었으나 누구에게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에 학생들은 점점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시하고 조롱의 대상이었던 황자에게, 서로 먼저 관심을 받고자 경쟁하는 모순적인 사태를 보고 끼어들지 않고 남아 흥미로운 눈으로 구경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던 순간 쥬다스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만.” 뚝- 짧은 한마디에 시장 통처럼 시끄럽던 교실이 정적으로 뒤덮였다. 스스로들 입을 닫아놓고도 무서울 정도로 잘 지켜진 침묵에 학생들은 흠칫 놀라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빙그레 웃으며 책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러다 다음 수업에 늦겠구나. 혹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서 찾아오거라. 내 느긋하게 들어줄 터이니.”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둘러싸고 있던 학생 무리가 주르륵 갈라졌다. 분명 부드러운 말투였으나 거역하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다. 자연스레 그들을 스쳐 지나간 쥬다스는 그대로 교실을 나섰다. 에단은 쥬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 속내를 짐작하려 노력했다. ‘아무리 총명한 분이라 한들 저 많은 인원이 갑자기 태도를 뒤바꾸는 모습에 환멸이 드실 테지. ……답답하시겠군.’ 자신이 보기에도 황당하고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인데, 그 당사자는 오죽하겠느냔 생각이었다. 에단은 염려 섞인 눈으로 아무 말 없이 뒤를 쫓았다. 위로하는 법도 잘 모를뿐더러, 경험상 차라리 이럴 때엔 혼자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때 쥬다스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를 돌아보았다. “고민이라도 있는가? 표정이 영 아니구만.” “……제 표정이?” 에단은 얼떨결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쓸어 보았다. 늘 표정 변화가 없어 무뚝뚝하다는 평을 주로 듣곤 하던 그였다. 지금도 그다지 표정에 이렇다 할 티가 난 것은 아니다. 에단은 자신을 여과 없이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금안에 졌다는 듯 한숨을 삼켰다. 오히려 정작 염려되던 황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굳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빙긋 웃는 입매를 확인하고 나서야 에단은 자신이 헛된 염려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지, 이분은.’ 쥬다스가 가진 강함은 특별을 넘어 특이하기까지 했다. 남들의 반응을 보고 흔들릴 이였다면 진즉에 무너지고도 남았다. 에단은 그의 강함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여겼다.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무덤덤하다는 건, 어쩌면 기본적으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았다. 어떤 반응이 돌아와도 신경 쓰지 않는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도 없다. 그 말은, 저 백로황자에게 누구도 기대할 만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가 놓인 자리가 그랬기에 누군가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 해도, 이는 마치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성인을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애초에 학생들이 태도를 뒤바꿀 것이라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태평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이제 겨우 12살 소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흐음?” “이는, 학우가 아닌 황자 전하께 드리고자 하는 질문입니다.” 루바흐의 교복을 입고 있는 두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학생 신분으로 서로를 볼 수 없었다. 에단은 요청함과 동시에 정자세로 멈춰 서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쥬다스 역시 걸음을 멈춘 채 돌아섰다. 맑은 금안을 마주한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전하께오선, 어떤 군주가 되고자 하십니까.” “……군주라.” 애초에 다른 선택지는 염두에 두지도 않는 질문이었다. 그 말을 한번 따라 읊조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에단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쥬다스는 1황자였고 제국의 3황자 중 유일하게 황조를 상징하는 적통을 타고난 존재였다. 단순히 스스로 손을 젓는다 해서 내려놓을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완결까지의 횟수는 정확히 장담드리기가 어렵습니다. ㅠㅠ; 확실한 건 장편연재가 될 계획이란 것 뿐... 아참, 어디선가 우연히 일일연재가 오히려 독자입장에선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혹 '이그레트'의 독자님들은 어떠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이대로 일일연재를 지속하는 편이 좋으신지, 아니면 요일을 정해 주3회 정도로 고정하여 연재하는 편이 좋으신지...ㅎㅎ 사실 저는 한편당 분량이 짧은(...) 편이어서 그리 부담은 아니실 것 같긴 하지만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2 / 0240 ---------------------------------------------- 4장. 유명세 당장 그의 아비인 황제, 레위스 G. 역시 그를 후계로 세우길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능력을 보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서신을 보내오는 것만 봐도 그랬다. 반면 그가 황태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무리는 여전히 많았다. 루바흐 학원 내에서의 수군거림 수준이 아니었다. 귀족 사회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권력 전쟁, 즉 암투가 오가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이미 가망을 잃어 싹이 노랗다고 판단된 1황자를 굳이 황제의 후계로 미는 이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1황자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그 능력을 인정받은 2황자나 3황자를 앞세워 권력을 쥐려는 자가 대다수였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허울뿐인 1황자는 방해였다. 뒤늦게 뛰어난 자질이 있다는 소식이 돌기 시작했지만 당장은 그에게 뱃머리를 돌릴 배짱 좋은 항해사는 없었다. 오히려 뒷받침할 세력이 없는 지금은 더욱 표적이 되기 쉬웠다. 만일 그가 황태자 자리를 포기한다손 쳐도 편안히 여생을 살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쥬다스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군주의 길’ 하나고, 에단은 그 뜻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제국을 떠받치는 두 기둥 중 하나인 헤이가 공작 가문의 장자로서 이를 묻는다는 건 명백히 한 가지 의미를 뜻했다. ‘……검이 되어주겠다는 겐가.’ 그간 에단은 곁에서 끊임없이 그가 자신의 주군이 될 만한 자인가를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뜻을 바로 정했다. 군신서약(君臣誓約). 주군을 모시는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고자 함이었다. 에단은 그를 이미 인정하고 있었다. 남은 건 쥬다스의 선택뿐이었다. 강한 신뢰를 담고 마주 보아오는 검은 눈동자를 향해 쥬다스는 잠시 침묵했다. 도망치지 않겠다 결심했었다. 그러니 이 올곧고 강한 아이에게만큼은 자신의 뜻을 미리 밝혀둘 필요가 있었다. 쥬다스는 힘 있게 입을 열었다. “나는…….” 때를 같이해, 마침 크리스티나도 이에 관해 비슷한 질문을 받고 있었다. 백로황자와 생사의 위협을 함께한 그녀야말로 학생들의 주 관심사였다. 원래부터 루바흐를 주름잡으며 따르는 이들을 거느리던 크리스티나는 며칠째 파도처럼 인파를 몰고 다녔다. 그렇다고 해도 ‘차가운 검의 여기사’라 불릴 정도로 냉랭한 성질의 그녀를 감히 시시껄렁한 이유로 붙들어 세울 만큼 배짱 있는 학생은 없었다. 제게 쏟아지는 시선을 익숙하게 흘리며 다음 수업 장소로 향하던 크리스티나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상대를 알아본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눈으로 말했다. “비켜.”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크리스티나.” 오전 수업 시간에 쥬다스에게 호감을 드러냈던 마르젠이었다. 싱긋 지어 보이는 선량한 웃음에도 크리스티나는 한숨을 쉬었다. “후,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이군.” “하하! 너무하시네요. 이거 미인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면 저라도 상처받습니다?” “받든가. 농담할 기분 아니니까 빨리 비켜.”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말에도 마르젠은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다.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올린 크리스티나가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하자, 슬쩍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신경질적으로 휙 올려다보는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개를 숙인 마르젠이 작게 속삭였다. “……황자 전하에 대해, 배팅하실 생각은?” 크리스티나의 바다색 눈동자가 가늘게 뜨여졌다. 멈칫한 그녀는 서서히 팔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에 진땀을 흘리던 마르젠에게 그녀의 고운 손가락이 다가왔다. “일부러 도발할 생각이라면 번지수가 틀렸군.” “……아, 하하.” 상대의 뺨을 훑듯이 쓸어내린 그녀가 이내 어깨를 툭 밀어내며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따위가 쥐고 흔들 분이 아니다. 더 이상 조무래기끼리의 투쟁이나 탐색전 따윈 무의미해.” 면전에서 조무래기 취급을 받았어도 마르젠은 여전히 유들유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크리스티나가 다음 말을 내뱉는 것과 같은 시각, 에단 역시도 쥬다스로부터 질문에 대한 답을 받았다. “군주가 될 사람은 바로.” “나는 군주가 될 생각이.” 서두는 비슷하였다. 그러나 이내 이어지는 끝은 천지차이로 갈라졌다. “그분이야.” “……없단다.” 마르젠은 씨익 웃었으며, 에단은 제 귀를 의심했다.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이었다. 에단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쓰며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설마하니 황자가 스스로 군주에 뜻이 없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탓이었다.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에단을 향해 빙그레 웃어준 쥬다스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하나 내게 주어진 길을 외면하겠다는 뜻은 아니란다. 단지 이것이 정말 ‘나의 길’인지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 아직은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가 읽어내는 데에 실패한 ‘쥬다스’의 기억도 문제였다. 그는 아직 ‘이그레트’인 자신과 본래 ‘쥬다스’간에 있을 접점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어설픈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의 위에 함부로 설 수는 없었다. 설령 그것이 1황자로서의 하나뿐인 선택지라 할지라도 그랬다. “그러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남았다. 이를 알아내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로구나. 하니 질문에 대한 답은 조금 미루어도 괜찮겠느냐.” 그 말을 들은 에단의 눈이 깊은 상념을 담고 가라앉았다.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에단은 이내 그 앞에 깊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 역시.” 다시 허리를 핀 에단의 얼굴에는 시원한 미소가 걸쳐 있었다. “그때에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에단은 더 이상 뜻을 묻거나 언급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함께 수업을 듣고, 봉술 수업 페어로서 그의 수련을 도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더 이상 그를 관찰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쥬다스의 느린 행보에 발을 맞출 뿐이었다. 달라진 건 에단뿐이 아니었다. 도도하기 그지없던 크리스티나 역시 쥬다스와 마주칠 때면 고개를 숙여 예를 차렸다. 여태껏 한 번도 남 앞에서 고개 숙이는 모습을 보인 적 없는 그녀였던 만큼, 쥬다스는 그녀가 루바흐에서 인정하는 단 하나의 상위 존재였다. 공작가의 두 자제가 보이는 태도로 인해 안 그래도 주목받던 ‘백로황자’는 그 명성이 마른가지에 붙은 불처럼 무섭게 크기를 키워갔다. 그러나 학생들이 그 어떤 관심을 보이든 쥬다스는 초연했다. 다가오는 이들을 상대하긴 하되, 과한 접근은 적당히 물려냈다. 어떻게든 친분을 쌓고자 다가가도 부드러운 표정 너머로 명백한 선이 그어졌다. 정작 소문의 장본인이 태연자약하니 루바흐의 학생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눈치를 살피던 한 소년이 쥬다스에게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기.” 소년은 모기만 한 소리로 웅얼거렸다. 쥬다스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작고 마른 체구였다. 게다가 빛이 바랜 듯해 보이는 회색 머리카락과 흑갈색 피부를 지닌 사막 부족 출신이었다. 지금껏 접근했던 이들과는 다르게 소심할뿐더러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쥬다스는 소년의 작은 목소리에도 그를 돌아봐 주었다. 마침 봉술 수업을 가기 위해 이동하려던 참이라 에단도 함께인 채였다. 둘의 시선을 동시에 받은 소년이 황급히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러자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포로록 날아올라 소년의 주변을 뱅글 돌았다. 「아벨 투르케, 15세. 제국 남서쪽 사막 지대에서 올라온 가난한 남작 아들이래. 본래 투르케는 자유로운 사막 부족이었는데 제국에게 흡수된 거라는데? 어쨌든 계급도 낮고, 이런 귀족 사회에 어울려 본 적 없는 아이라 여기선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나 봐.」 “……전달, 해드릴 게, 있는데…….” 아벨은 말을 하는 중간중간 공백을 두었다. 긴장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습관이었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불안에 휩싸여 있던 아벨의 귓가에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반갑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단다.” 아벨은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쥬다스의 금안과 시선을 마주치곤 홀린 듯 대답했다. “……아벨, 이라고…….” “그래, 아벨. 전달해 줄 게 있다고 하였느냐?” 끄덕끄덕. 소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린 아벨은 쥬다스의 부드러운 반응에 용기를 얻고 재차 입을 열었다. “이사벨 스승님께서, 그, 정령학……. 수업에 꼭, 초청하고 싶다고.” “정령학 수업? 으음, 그렇구나.” 학원 루바흐는 일차적으로 학생의 재능을 발굴하고 키우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여태까지 아무런 재능도 드러내 보인 적 없는 쥬다스가 비로소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이번에 선보인 이능 탓이었다. 백로황자의 명성을 높이게 된 결정적인 요소, 바로 그가 듀얼 속성의 정령을 다룬다는 점이었다.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은 매우 희귀하여 루바흐 내에서도 몇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자질이 있는’ 학생을 모아놓은 것이 정령학 수업이었는데 총원이 고작 8명으로, 이들은 마치 하나의 동아리처럼 뭉친 특수 클래스였다. 그들을 지도하는 교사 이사벨은 땅의 정령과 계약한 꽤나 실력 있는 술사였다. 이미 자연계 4속성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쥬다스가 굳이 수업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 사실을 밝힐 수 없으니 거절하기엔 곤란했다.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남은 수업을 마저 마치고 가마. 하면 어디로 가면 될꼬?” “안내, 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기다렸다가.” “허허. 그래주면 고맙겠구만. 그럼 끝나고 보자꾸나.” “……네.” 상대가 작게나마 대답하는 것을 확인한 쥬다스는 에단과 함께 체육관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수업 준비를 위해 보관함에서 연습용 봉을 하나씩 꺼내 들었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느껴지는 무게감이었다. 쥬다스는 봉을 세우고 스트레칭을 하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에단.” “예?” “네 보기엔 어떠한고. 요사이 체력이 제법 늘은 것 같지 않느냐?” 물으면서도 쥬다스는 내심 뿌듯해하고 있었다. 일단 나무토막처럼 뻣뻣하던 몸이 매일 스트레칭을 해준 탓에 유연하게 펴졌다. 그리고 봉을 제대로 들지도 못했던 첫날과는 달리 이젠 균형 맞춰 봉을 들고 휘두르는 것까지도 가능했다. 손바닥이 부르트긴 하지만 맞대는 대련 형식까지도 어느 정도는 진행할 수 있었다. 미약하게나마 몸이 확실히 제 기능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 사실 에단이 보기엔 여전히 나약하기 그지없는 육신이었다. 차도가 있긴 했어도 워낙 약했기에 다른 또래에 비할 바 못되었다. 하지만 그는 차마 뿌듯해하고 있는 쥬다스에게 사실대로 말해 찬물을 끼얹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에단은 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대꾸했다. “……예, 처음에 비해 분명 느셨습니다.” “허허. 고맙구나.” 거짓은 아니었다, 일단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 여러분이 남겨주신 지난화 댓글들 보고 감동받았습니다. 사실 부담된다 하시면 페이스조절을 해볼까 생각하고 여쭈었던 건데,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네요. 마치 에단이 쥬다스(이그레트)를 12살이라 걱정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나봅니다...;; 독자님들 의견대로 변동없이 앞으로도 일일연재로 달려보겠습니다. ㅎㅎ (아, 저는 지금 일일연재에 큰 부담이 없습니다. 혹 상황이 바뀌게 되면 그때 다시 조절해볼게요.)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지는 장편입니다. 1부가 학원생활을 중점으로 다룬다면, 2부는 성장 후 본격적으로 학원밖으로 나와 일어나는 일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아직 계획뿐이므로 쓰다보면 세부사항이 조금 달라질 수는 있지만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3 / 0240 ---------------------------------------------- 4장. 유명세 그날 쥬다스는 최고의 컨디션으로 봉술 수업을 마쳤다. 머리로 익힌 걸 몸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 아쉽긴 했어도 다치거나 아픈 구석 없이 무사히 시간을 보냈다. 간만에 양호실 신세를 질 필요가 없게 된 셈이었다. 체육관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아까 정령학 교사에게 안내해 준다던 아벨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흑갈색 피부의 소년은 어디에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어딘가 가 있는 모양입니다.” “유니.” 쥬다스가 손을 펴보이자, 그 안에 녹색 기운을 머금은 바람이 후웅 맴돌았다. 에단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바람의 정령왕 유니가 그 손바닥 위에 살포시 날아들었다. 바람의 정령을 다룬다는 사실은 더 이상 숨길 필요 없게 되었기에 당당히 힘을 사용한 것이다. 술사가 바라는 바를 느낀 유니는 곧장 정보를 읽어냈다. 「아벨이란 인간은 바로 근처에 있어. 체육관 뒤, 소각장. 그런데 좀 다쳤어. 많이는 아니고 넘어져서 까진 정도?」 “……근처에 있다는구나. 한데 문제가 좀 있는 모양이야.” 짧은 설명만으로도 상황을 짐작해 낸 쥬다스는 유니를 따라 곧장 체육관 뒤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령이란 정말 편리하군요.” 사람 찾기에도 유용한 바람의 정령술사의 이능을 두 번째로 본 에단이 그 효율성 측면에 다시금 감탄했다. 정령이란 자연계 4속마다 각각 그 활용 능력치가 달랐다. 그중 바람은 편리성에 좀 더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힘이었다. 또 파괴적인 전투 능력만으로는 단연 불이었다. 각각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다르고, 또 자연계의 힘이다 보니 그 효과가 어마어마했기에 정령술사는 무슨 속성이든 간에 각국에서 모두 환영받는 입지였다. 그러니 물과 바람 2속성을 다룬다고 알려진 백로황자가 순식간에 핫이슈로 떠오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에단이 일상에서도 편리하게 정령을 부리는 쥬다스에게 새삼 감탄하는 사이, 그들은 소각장 뒤편에 도달했다. “흠.” 낡은 교과서나 폐지 따위가 쌓여 있었다. 소각장이라 해도 화로에 불이 들어오는 건 새벽 시간대뿐이었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폐지의 산을 둘러본 쥬다스가 이내 천천히 그 사이로 걸음을 떼었다. “아벨.” “……!” 폐지가 쌓인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던 소년이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거하게 넘어졌던 흔적으로 교복이 온통 흙투성이였다. 쥬다스는 아벨의 앞에 다가가 가만히 손을 내밀었다. “아팠겠구나. 자, 일어나련.” 멍하니 그 작은 손을 바라보던 아벨이 조심스레 이를 잡고 일어났다. 쥬다스는 말 잘 듣는 아이에게 하듯 그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리고 정령학 교사가 아닌 양호실로 먼저 그를 데려갔다. 오늘은 황자가 방문하지 않아 안심하고 있던 치료사는 한숨을 쉬며 그들을 맞이했다. “오셨군요.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을.” “으음, 오늘은 제가 아니라 이쪽입니다.” 쥬다스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약을 챙겨왔다. 아벨이 치료를 받는 사이, 리이나는 쥬다스에게 다가와 치유술을 시전했다. 다친 곳이 없더라도 워낙 기력이 약한지라 회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쥬다스의 손을 놓은 리이나가 눈을 깜빡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으음? 왜 그러는고?” “저, 전보다 훨씬 상태가 좋아지셨어요.” 아직 10살인 리이나는 자신이 느낀 것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는 멈춰 있던 몸에 치유력을 불어넣어야 했는데. 그, 그러니까아, 오늘은 아주 약간씩이지만 쥬다스 님의 몸이 이미 제 기능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보다 더 치유력이 잘 듣는 것 같은…….” “……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쥬다스 님.” 아벨의 상처 치료를 마친 치료사가 리이나의 말을 듣고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진찰을 마친 치료사는 꽤 고조된 억양으로 리이나의 말에 동조를 표했다. “정말 그렇군요! 정말 미약한 수준이긴 해도 분명 제대로 기능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금방 키도 크시겠지 말입니다?” 키가 자란다라, 쥬다스는 묘한 시선으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12살 소년답지 않은 작은 손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품이 남아 넉넉한 교복이며 한참 높이가 낮은 시야도 이젠 익숙하던 참이었다. 루니가 말했던 대로, 그의 몸은 천천히 성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것이 타인의 눈에 띄게 될 정도면 얼마나 걸리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제 기능을 되찾고 있었다. 쥬다스는 치료사와 리이나, 에단의 축하를 받으며 고요히 웃었다. 고개를 들자 의자에 앉아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던 아벨과 눈이 마주쳤다. “상처는 좀 괜찮으냐?” “……네.” 아벨은 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소심하다 못해 우울하기까지 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쥬다스는 더 묻지 않고 그저 가만히 기다렸다. 양호실을 나선 그들은 아벨이 안내하는 대로 정령학 교사를 만나러 이동했다. 꽤 고급스럽게 지어진 단층 건물이었는데 주변이 작은 정원으로 꾸며져 있어서 마치 학교 시설이 아닌 개인 주택처럼 보였다. 정령술과 연관이 없는 에단은 정령학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에 그 앞에서 헤어졌다. 쥬다스와 아벨, 두 사람은 울타리를 따라 싱그럽게 피어오른 넝쿨 꽃과 키 작은 나무 따위를 지나 황토색 문 앞에 섰다. 아벨이 쥬다스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문을 가리켜 보였다. “정령술사의 자질이 있다면, 누구나 열 수 있는, 문이라고…….” “허허. 그렇구나. 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수업 과정인 모양이야.” 언뜻 평범해 보이는 이 여닫이문은 정령술사로서 가부를 판별해 주는 역할이었다. 자질이 없는 자가 아무리 손잡이를 밀고 당겨봤자 열리지 않는다. 자연계 힘에 반응하여 잠금이 해제되도록 설계된 이 문은 정령석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과연 제국이 자랑하는 인재 양성 기관답게 건물 하나도 허투루 짓지 않았다. 흥미롭게 이를 관찰한 쥬다스가 천천히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딸랑. 문에 달린 방울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힘을 주지 않아도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밝은 톤의 여성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쥬다스 님.” 두더지처럼 생긴 땅의 정령 하나를 끌어안고 있던 정령학 교사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우아하게 손질된 갈색 단발머리가 어깨선에서 사락 흐트러졌다. 아직 젊은 30대 여성이면서도 유능한 땅의 정령술사로서 이름을 떨친 그녀는 루바흐에서 차기 정령술사들을 길러내는 소임을 맡고 있었다. “정령학 수업을 맡고 있는 이사벨입니다. 어서 오세요.” 쥬다스가 목례하며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추자 이사벨은 맑게 웃어주며 그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뒤로 몰려든 학생들이 신기한 눈으로 빼꼼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정령학 수업을 듣는 학생은 아벨까지 합쳐 총 8명이었다. 과연 정령술사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답게 하나같이 맑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개중엔 루바흐의 나이 제한인 10살보다 어려 보이는 아이도 하나 있었다. 겉모습만으로 보면 쥬다스와 비슷할 정도였다. 쥬다스가 시선을 주자 아이는 화들짝 놀라 이사벨의 치마 뒤로 숨었다. 그 시선을 알아챈 이사벨이 후후 웃음을 흘리며 아이의 어깨를 잡아 앞으로 세웠다. “쁘띠-루바흐에서 후원하고 있는 아이랍니다. 아직 7살이지만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발견되어 3년 뒤면 정식으로 입학할 예정이죠. 자, 리베흐. 선배님께 인사드리렴.” “히잉…….” 리베흐는 낯을 많이 가리는 7살 여자아이였다. 교사의 팔을 꼭 붙든 채 울먹거리기 시작한 그녀에게 쥬다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호오, 이름이 리베흐라면 겨울에 태어난 모양이로구나.” “웅……?” 리베흐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생일은 눈이 몹시 많이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울먹이는 것도 잊고 헤 쳐다보는 리베흐에게 잔잔히 미소 지어준 쥬다스는 아이의 연분홍색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었다. “리베흐는 순백과 겨울을 뜻하는 말이란다. 그래, 아마도 네가 태어난 그날, 지나가던 겨울바람에게 사랑받은 것이겠지.” 다른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리베흐의 어깨에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 형태의 정령이 살포시 앉아 있었다. 정령은 꺄르르 웃으며 날아올랐다. 그러자 반짝이는 얼음 결정을 실은 바람이 쥬다스와 리베흐를 감싸듯 은은하게 맴돌았다. 눈앞에서 살짝 흩날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멍하니 바라본 리베흐가 꼭 붙들고 있던 교사의 손을 놓았다. 지켜보던 아이들의 입에서 우와 하는 감탄이 흘러나왔다. 리베흐는 바람의 정령과 계약은 되어 있으나 아직 술사로서 이를 의지대로 다루지는 못하는 어설픈 상태였다. 현재 그녀에게 붙어 있던 정령이 감응한 것은 이 자리에 쥬다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잘 부탁한단다.” 그들이 모여 있던 건물은 일종의 정령학 전용 연구소였다. 말이 연구소일 뿐 실제로는 정령술사로서 자질이 있는 학생들과 교사가 함께 모여 시간을 보내는, 일종의 동아리실과도 같았다. 정령학 교사 이사벨은 서른이 넘은 나이임에도 여전히 소녀처럼 명랑하고 밝았다. 늘 긍정적인 성품으로 성심껏 학생들을 돌보는 교사였기에 학생들도 스승이라기보단 마치 가족처럼 그녀를 따르곤 했다. 그날은 따로 수업을 하려던 게 아니라 쥬다스와 학생들을 소개시키는 자리였다. 이사벨은 생글생글 웃으며 정령학 수업에 대한 소개를 덧붙였다. “정령학은 아직 개발이 많이 되지 않은 분야예요. 가르친다고 해도 전수가 불가능한 이능이기도 하죠. 이미 정령과 계약을 마치고 다루고 계신다니 알고 계시겠지만, 정령은 자아가 있고 이지도 있는 신비로운 존재잖아요? 같은 속성이라 해도 정령마다 성격도, 특성도 달라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 무궁무진하죠. 게다가 계약한 정령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술사 본인인걸요. 아- 아, 정령과의 계약이란 정말로 멋진 일이에요.” 정령학 교사답게 이사벨은 정령을 아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품에 안은 땅의 정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죠, ‘휴’?” 이사벨이 안고 있던 두더지처럼 생긴 땅의 정령은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며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휴’라는 이름으로 계약된 이 정령은 현재 모든 사람이 그 형태를 볼 수 있도록 실체화된 상태였다.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술사가 허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신력이 필요했고, 이사벨은 무리 없이 정령을 실체화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제가 이 수업에서 가르치는 건 정령에 대한 이해와 계약, 계약의 이행 등과 같은 이론이랍니다. 이론 수업은 매일 1시간 동안만 진행되고, 출석 체크는 하지 않아요. 또 능력고하를 알기 위해 실기 평가는 실시하지만 시험은 따로 없답니다. 그래도 수업은 꼭 빠뜨리지 말아주세요. 후후, 나머지 시간에는 자유롭게 연구소를 방문하셔도 좋아요.” 수업 자체가 매우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애초에 정령술사 자체가 희귀하다 보니 정령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것이 얼마 없었다. 교사가 말한 대로 가르친다고 해서 전수가 되는 분야도 아니고,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분야도 아니었다. 정령은 아직까지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는 신비로운 존재였고 그들과 계약함으로 인해 힘을 빌려 사용할 수 있는 정령술사들은 모든 나라에서 대우받는 인재였다. 그러니 학원 루바흐에서도 술사의 자질이 있는 학생들을 한데 모아 관리하면서도 그 능력을 키워줄 이 연구소를 마련해 놓았다. 다른 수업과는 차별화되어 진행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신캐릭터인 리베흐는 분홍머리에 크림색 눈을 가진 미인으로 자라납니다. 2부때 주인공 나이가 22세니, 그때쯤이면 17세 꽃다운 나이겠군요.(크리스티나는 24세.... 바람직한 연상연하 여성들이네요.) 하지만 분명한 건 앞으로도 주인공과 엮이는 로맨스는 없습니다.ㅎ 이건 절대 제가 솔로라서가 아니라요...! 쿨럭;; 아, 혹시 질문이 있으시면 Q/A를 받고자 합니다. ㅎ 'Q.질문'을 해주시면 다음화 후기때 스포가 아닌 선에서 'A.답'을 드리겠습니다. 있으실런지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여주신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4 / 0240 ---------------------------------------------- 4장. 유명세 설명을 마친 이사벨은 수업 종료를 알렸다. 수업이 끝났어도 학생들은 여전히 연구소에서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바닥에 편히 드러누워 담소를 즐기는가하면 정령을 실체화하는 연습에 몰두해 있는 학생도 있었다. 다른 과목 과제를 펼쳐 놓고 끙끙거리는 이도 있고, 마지막으로 쥬다스에게 흥미를 가지고 쫑쫑 다가온 이도 있었다. 바로 7살 소녀 리베흐였다. “…….”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쥬다스도 함께 시선을 맞춰주었다. “바람.” “으음?” 리베흐는 쥬다스의 어깨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의 어깨에 심드렁하니 앉아 있던 유니가 ‘응?’ 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따뜻해. ‘비비’랑 달라.” 「헤에. 이 아이, 바람에 굉장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어.」 일반적으로는 술사가 의지를 갖고 계약한 정령을 실체화하지 않는 이상 그 존재를 모를 수밖에 없다. 보이지 않으며 느껴지지 않는다. 무예를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감이 뛰어난 무사들도 정령의 존재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종종, 같은 정령술사 중에서는 자연체인 정령을 보고 느끼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다. 바로 해당 속성에 보통 인간을 뛰어넘는 강한 친화력을 가졌을 경우가 그랬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자연 상태의 정령을 볼 수 있다면 가히 최상의 친화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대로 자란다면 머지않아 바람의 최상급정령과의 계약을 노려볼 만도 할 정도였다. 쥬다스의 곁에는 바람의 정령인 유니뿐 아니라 토니와 루니도 함께 있었지만, 리베흐가 발견한 것은 유니뿐이었다. 그러므로 리베흐는 바람속성에만 유독 강력한 친화력을 가진 아이라는 뜻이었다. “허허. 알아보았느냐. 그래, 이름이 ‘유니’라 한단다.” “유니? 초록색으로 반짝반짝. 비비는 하얀데.” 리베흐와 계약한 바람의 정령 비비는 겨울바람 출신이었다. 같은 바람속성이라고 해도 정령들은 저마다 출신과 특성이 달랐다. 비비는 얼음결정이 실린 한파를 일으키며 술사의 정신력이 강해질수록 그 냉기도 한층 강력해지는 특성이 있었다. 지금은 겨우 얼음 알갱이를 흩뿌리며 주변을 감싸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후일이 기대되는 힘이었다. 그에 비해 정령왕인 유니는 모든 바람을 아우르는 상위 존재였기에 딱히 이렇다 할 특징은 없었다. 계약자인 쥬다스가 원한다면야 아예 루바흐를 꽁꽁 얼려 버릴 극한의 추위도 몰고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사의 곁에 붙어 있는 얌전한 정령일 뿐이었다. 정령왕이라 해서 눈에 두드러지는 특징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리베흐는 유니를 그저 작고 귀여운 바람의 정령으로만 인식했다. “진짜 진짜 예뻐.” 「어머~? 역시 바람 속성 아이들은 눈이 보배라니까.」 기분이 좋아진 유니가 쿡쿡 웃자, 무어라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리베흐도 따라 헤헤 웃었다. 리베흐가 쥬다스에게 경계를 풀고 어울리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교사 이사벨은 리베흐의 연분홍 머리를 토닥여 주며 조언했다. “리베흐, 선배님께는 존댓말을 써야지.” “우웅. 그치만, 똑같은 친구인걸.” 리베흐는 볼을 뚱하니 부풀렸다. 사실 겉보기로 따지면 리베흐와 쥬다스의 눈높이는 딱 같았다. 거기다 한참 기능을 멈추고 있던 쥬다스의 육신은 여자아이인 리베흐보다 마르고 가느다랬다. 오히려 성장기에 접어든 리베흐가 더 성숙해 보일 지경이었으니, 친구라고 인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사벨은 후후 웃으며 리베흐의 오해를 바로잡아주었다. “쥬다스 님은 올해로 12세란다. 리베흐보다 5살이나 많지?” “에-?” 리베흐의 크림색 눈동자가 놀라움을 가득 담고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5살이나 많은 오빠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외형이었다. 놀라 어벙한 표정을 짓는 리베흐에게 그저 부드럽게 미소지어준 쥬다스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도 같은 시간에 오면 됩니까?” “그래요, 정령학 수업은 다른 일반과목이 전부 끝난 후에 시작되니까요. 내일 오실 때에도 아벨을 보낼게요. 괜찮죠, 아벨?” “제, 제가…… 요?” 구석에 쥐죽은 듯 조용히 앉아 있던 아벨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손바닥에 감긴 붕대를 만지작거린 아벨은 이내 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네.” “후후. 고마워요, 아벨.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쥬다스는 다정한 인사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리베흐랬나, 정말 마음에 드는 아이였어.」 「유니는 귀가 얇아서 그런 거 아니다요?」 「흥, 귀가 얇긴 누가? 너야말로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질투하지 마셔.」 「에엥, 질투……? 왜 때문에 그런 걸 한다요? 이그레트가 있으니까 다른 인간은 필요 없는데.」 유니의 도발에 토니는 그저 순진하게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그러다가도 이내 헤헤 입꼬리를 올리며 쥬다스의 머리 위에 폭 드러누웠다. 「그래도 기분 좋긴 했다요! 친화력이 높은 인간이 한 군데 몰려 있으니까, 우웅.」 「그치, 그치? 막 나른해지더라. 달콤한 꽃밭에 들어온 벌이 된 느낌이었어!」 “……다들 좋았던 모양이로구나.” 교복을 벗어 옷장에 잘 걸어둔 쥬다스가 말을 거들자, 유니는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들뜬 리액션을 취했다. 「응! 앞으로 매일 가는 거지?」 “허허. 리베흐가 그리 마음에 들었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는 손을 뻗어 날아다니던 유니의 머리를 톡톡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유니는 그의 손가락을 꼭 붙든 채 배시시 웃었다. 「으응, 마음에 들긴 했지만. 오해는 하지 말아줘! 나에겐 네 곁이 제일이야, 이그레트.」 마치 다른 데에 눈 돌렸다 반성하는 남편 같은 말투였기에 쥬다스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그레트’ 시절에도 정령술사를 만나본 적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술사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모두가 우러러보았고 함부로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는 후배 정령술사들을 양성하는 데에는 그다지 관여를 하지 않았었다. 정령은 이미 그 삶의 일부였고, 친구이자 가족이었으니 연구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이그레트’라는 완벽한 정령술사가 존재했음에도 정령학계는 거의 연구가 진척되지 못했다. 쥬다스는 그 점을 딱히 후회하는 건 아니었지만 이 연구소에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정령술에 자질을 가진 이들은 전부, 정령이 직접 선택한 만큼 그 영혼이 순수하고 맑았다. 그러니 비단 유니뿐이 아니라 다른 정령들과 쥬다스조차도 그 자리가 포근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었다. “가서 듣고 싶은 게 많구나. 다른 정령술사들은 너희를 어찌 여기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많았다. 한번 궁금한 게 생기면 깊숙이 파고들어 알고자 했다. 그 호기심이 결국 그를 현자라 칭송받게 할 정도로 방대한 지식을 일구어냈고, 젊은 시절의 이그레트는 그를 가지고 세상에 도움이 될 만한 연구와 업적에 이바지했다. ‘결국엔 건드리지 않는 편이 나았지.’ 자신이 개발한 도구와 연구물들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데에만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엔 너무 늦어 있었다. 유용과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것들은 결국 포식자들에 의해 악용되어갔다.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의 피가 흘렀다. 쥬다스는 침대에 누운 채 제 손을 펴보았다. 이제는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천천히 주먹이 쥐어졌다. 쥬다스는 자신이 가진 힘을 어느 필요 선까진 드러내 보이되, 그 힘을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말아야 함을 알았다. 이것은 일종의 균형이었다. *** 다음 날 봉술 수업이 끝날 때를 맞춰 아벨이 그를 찾아왔다. 전날 넘어진 상처에 더해 얼굴 여기저기에도 자잘한 상처가 늘어 있었다. 상처가 생긴 위치나 모양 등을 보고 쥬다스의 곁에 서 있던 에단은 즉시 아벨이 누군가에게 폭행을 당했음을 눈치챘다. “저런, 또 상처가 났구나.” “……아무것도, 아닌.” 아벨은 웅얼웅얼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러고선 민망했는지 쥬다스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걷기 시작했다. 에단이 그를 힐끗 쳐다보곤 쥬다스에게 허리를 굽혀 낮게 물었다. “……그냥 두시는 겁니까?” 에단은 쥬다스라면 아벨이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음을 당연히 눈치채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쥬다스는 이미 아벨을 처음 본 전날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쥬다스는 에단을 올려다보며 난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에단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작은 황자는 늘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움직였다. 에단은 그가 아무 이유 없이 남이 당하는 것을 방관할 자가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더 언급하지 않았다. 만일 그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분명 쥬다스가 먼저 불러 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대로 쥬다스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타인의 삶이 아무리 불합리해 보이더라도 멋대로 끼어들어서는 안 되었다. 그건 자칫 또 다른 폭력의 형태가 될 수 있다. 대신 쥬다스는 오늘도 아벨을 양호실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벨은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치료가 끝나고 연구소로 함께 향하면서 쥬다스는 지나가듯 말을 건넸다. “학교 생활은 어떤고?” “…….” 아벨은 땅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묵묵부답이었다. 그에 상관없다는 듯 쥬다스는 다시 말을 이었다. “최근 즐거운 일은 무어가 있누?” “……즐거운 건, 아무것도.” 이번에는 답이 돌아왔다. 아벨은 여전히 땅을 보며 걸었다. “정령술 특기로, 뽑혔는데.” “호오, 정령술에 자질이 있어 입학하게 되었구나.” “그런데도, 정령이 전혀, 보이지 않아서.” 자질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정령과 계약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 정령 친화력은 있는데, 계약할 정령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리고 아벨은, 입학한 지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어떤 속성의 정령과도 계약하지 못했다. “수업에는, 꼬박꼬박, 나가고 있지만. ……사실 저 같은 걸, 정령이 좋아해 줄 리도 없고.”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야.” 아벨은 우물쭈물 입을 닫았다. 딱 뭐라고 정의하기 어려운 상념들이 그의 머릿속에 복잡하게 맴돌았다. 아벨은 원래부터 성격이 소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아벨이 나고 자란 사막 부족 ‘투르케’는 타인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권력 다툼을 할 이유도, 그러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었고 부족장의 피를 이은 그에게 대체로 호감을 보였다. 그냥 매일매일 하루를 성실히 살아나가는 것이 그들이 속한 주민의 삶이었다. 그래서 아벨이 처음 학교에 입학할 당시 제국의 도시 귀족 자제들과 비교하였을 때 지나치게 순진한 감이 있었다. 루바흐에 입학한 계기는 그가 말했듯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우연히도 포탈 설치를 위해 들여오던 정령석이 아벨에게 반응했다. 정령석에 저장되어 있던 힘을 본능적으로 끌어낸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능력을 제어할 수 없었기에 당시 현장은 엉망진창이 되었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12세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 후기는 Q/A로 대체합니다. 스크롤이 조금 길 수 있습니다. ^^; [Q n A] Q. 주인공 현재 생각이 뭔가요? A. 작중에 나온대로, 자신이 '쥬다스'로 살아가게 된 이유를 먼저 찾고자 합니다. 군주의 길을 갈 생각은 없지만, 그래야하는 이유가 타당하다면 주어진 길을 거부할 생각은 없습니다. ㅎㅎ Q. 정령들하니깐생각낫는데..4대속성정령들만잇는건가요?특이속성정령은없나요? A. 특이속성 정령은 존재합니다. 자세한 건 스포일러 선이므로 생략하겠습니다! Q. 작가님쓰리사이즈는?(스포가아니니...헿) A. ...예? (당황) 어... 실은 저도 모릅니다. 정말 몰라서 답변드릴 수가 없네요. 하하하.;; Q. 주인공에대한 주변인물들의 인식이요. A. 에단의 경우, 자신이 섬겨야 할 주군의 자리라 느끼고 있습니다. 현명하고 자애로우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남용하지 않는 존재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나도 에단과 비슷합니다. 다만 당장 그를 섬기고자 하는 건 아니고, '인정'을 했을 뿐입니다. 그 밑으로 가겠다는 결정은 아직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바이칼은 쥬다스를 이제서야 '제1황자'로 인식했습니다. 다만 쥬다스가 굉장히 특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성격을 가졌다고 느낍니다. 나머지 학생들의 경우, 쥬다스가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자신들을 평가했다는 쪽으로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이건 배경과 관련있는 건데요... 친화력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아는거에요??? 아벨이 친화력이 있다고 했는데;;;; A. 이번 화에서 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ㅎㅎ 살을 좀 더 붙이자면, 본래 포탈에 적용된 마법원리에 의해 작동했어야할 정령석인데, 아벨이 접촉함으로 인해 정령석에 저장되어있던 힘을 폭주시켰습니다. 정령석의 힘을 도구의 도움 없이 끌어낼 수 있는 건 정령술사 뿐이므로, 아벨은 그 자질을 인정받아 루바흐에 초청되었습니다. Q. 주인공종 키워줘요엉엉 A. 착실히 클 예정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ㅎ Q. 불의정령은 언제 나오나요? 혼자 외롭겠다. A. 머지 않아 등장할 예정입니다. 혼자 있어서 느끼는 외로움보다는, 이그레트가 자신을 마지막까지 불러주지 않음에 대해 조금 쓸쓸해하고 있습니다.ㅎㅎ Q. 다른 왕자, 왕녀이야기는 언제나오나요? A. 황제를 만나러 갈 때 함께 다룰 예정입니다. Q. 작가님이 가장 애정하는 정령은 누구인가용..!? 저는 토니가 제일 귀엽네요 A. 다 제 새끼들이니 예뻐합니다....ㅎㅎㅎㅎ 그래도 아주 조금 더 정이 가는 건 유니입니다. 이그레트 초반 설정부터 함께 있었던 아이라 그런가봅니다(...) Q. 병약하고 남들보다 성장이 느리다는 것은 일종의 혈연계통이 아닐까 하는데요. 왕가의 선조가 엘프였다거나 인간종족이 아니라는 떡밥이었겠죠? A. 스포일러 선일 듯 하므로 답변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합니다.ㅠㅠ Q. 주변에서는 쥬다스에게 남자로서 호감이있지만 쥬다스의 정신나이는 100에가까울정도로많으니 쥬다스는 주변인물이 여자로보이지않을테죠.즉 여자쪽에서의 일방통행적인 사랑이라 사랑이 성립되지않아 작가님께서는 로맨스가없다고하신건가요? A.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할아버지가 십대 소녀와 이어지면, 철컹철컹...?(...) 단, 이성으로부터 호감은 살 수 있습니다. 주요하게 다뤄지진 않겠지만요. ㅎㅎ Q. 1,2 부 통틀어 완결은 언제쯤 될까요? A. 사실 확답을 드릴 수 없는 부분이긴 합니다. 계획만으로는 1부를 200~400회 사이로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니 한참 먼 얘기네요.^^ Q. 작가님 여친 생기면 이그레트도 생기나요?ㅋ A. ㅎ...ㅎㅎ.... 생길 것 같지만, 안 생겨요... 이건 농담이고요 ㅋㅋ 이그레트는 작중에선 솔로로 남을 예정입니다. Q. 이그레트 얼마나 크나요?? 훤칠한 미남이 보고 싶어요ㅠㅠㅠㅠ A. 2부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학생시절을 다루는 1부에서는 미남은 맞지만 훤칠하게까진 안 클 것 같습니다. ㅋ 그래도 크긴 큽니다(..) Q. 진짜로 주인공은 어떠한 로멘스도 없나요?하렘도?그리고 혹시 신체의 성장과 기능이 멈춰있었다는건,혹시 초대황제도 그런 적이 있었나요? A. 예, 주인공과 연결되는 로맨스는 없을 예정입니다. ㅎㅎ 다만 일방통행은 있을 수 있습니다. 초대황제와 관련된 부분은 스포일러선으로 생략하겠습니다! Q. 이그레트, 나중에 자라나게 된다면 키와 얼마나 되고, 미남도 되려나요? 한번 이그레트의 이미지가 보고 싶네요. A. 1부 내에서는 학생시절만 다루기 때문에... 일단 평범한 수준까지는 자랍니다. 아직 어려보여서 그렇지 미남은 지금도 맞습니다 ㅋ Q. 작가님이 솔로라고 우리 어린 할배까지 92+N년을 솔로로 만드는건 너무 가혹한 것 아닙니까?! A. .......죄송합니다. (꾸벅) 92년 모솔로 사신 겸 추가로 몇년 더 사셔도 괜찮지 않을까요....ㅎ Q. 봄바람 출신 정령은 향긋포근하고 가을바람 출신 정령은 낙엽 내음이 나는 건가요? 그리고 물정령은 바다 출신, 강 출신, 계곡 출신, 폭포 출신 이런 식으로 나뉘는 건가요? 또또 땅정령은 어.. 늪지 출신, 사막 출신, 어.. 이런 식이려나요? 불정령은 음.. 음... 촛불 출신, 모닥불 출신, 산불 출신, 용암 출신, 벽난로 출신?ㅋㅋㅋ A. 아, 정말 정확히 이해해주셨습니다!! 100점 만점 드리고 싶네요. 모든 정령은 출신에 따라 특성이 다릅니다. ㅎㅎ Q.다음편 내놔라 A. 드... 드리겠습니다. Q. 1부 끝나신뒤에 잠시 휴재하실건가요? 하신다면 얼마정도 할겁니까! 쥬다스 성장모습 자세히 써주세요~ A. 옙, 1부 종료 후에 휴재기간이 있을 예정입니다. 아직 멀긴 했어도 2부 구상이 안되어있어서...ㅎㅎ 아마 한달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쥬다스가 자란 모습은 향후 본편으로 확인해주시는 걸로....ㅎㅎㅎ Q. 이그레트 말투는 언젠가 할아버지말투를 벗어나나요? A. 크게는 벗어나지 않습니다. 다만 상황에 맞추어 스스로 조금 조정할 예정이긴 합니다. Q.로멘스없는게 좋습니다. 근데 이그레트 언제쯤 다 성장하나요? 말투가 취향저격인데 7살짜리가 너무 어른스런 말투 쓴다고 생각하니까 무서웡ㅋㅋ 지혜로운 미(!)청년 쯤으로 가시죠 자까님(이거슨 욕망인가) A. 말씀해주신 부분은 2부에서 뵙도록 하겠습니다.ㅋㅋ 저도 빨리 2부로 진행하고 싶네요(..) 다만 곧 몸이 자라니까 7살짜리 외향은 벗어납니다. ㅎ Q. 쥬다스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쥬다스를 연모하는 사람은 나오나용?? 무튼 로맨스 없는거 좋아요!! A. 예! 쥬다스를 좋아하는 여자는 생깁니다. 다만 작중에선 이어지지 않을...뿐...(....) Q. 왜 연애루트가 없나요 ㅋㅋㅋ A. 제가 솔로라 그런 건 아니고ㅎ 일단은 주인공이 할아버지의 정신이기에 그렇습니다. ...전 철컹철컹이 무섭습니다(..) Q. 황제는 언제나오나요? 나오긴하죠?? A. 옙! 곧 등장 예정입니다! Q. 여기선 정령이 자연계밖에 안나오나요? 아니면 나중에 연재되면서 다른 종류의 정령들도 밝혀 질 예정? A. 자연계 외 정령도 존재합니다! 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5 / 0240 ---------------------------------------------- 4장. 유명세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정령술 특기로 들어와 놓고, 정작 계약도 못했고. 공부도, 너무 어렵고, 힘듭니다. 다른 학생들은, 무섭기도, 하고요.” 한 번도 자신의 생각 같은 걸 물어봐 준 이가 없었다. 정령학 수업 시간에도 늘 혼자 구석에 박혀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시간을 보내다 사라지곤 하는 그였다. 그나마 맑고 깨끗한 아이들이었기에 그를 괴롭히거나 무시하진 않았지만 아벨이 워낙 분위기도 우중충하고 말수도 없었기에 함께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아벨이 고립된 건 그 자신의 성격 탓도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아벨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쥬다스 님. 당신은, 저와, 비슷했으니까……. 실례, 일까요. 이런 말.”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란다.” 쥬다스는 부드럽게 아벨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아벨의 모습은 본래 쥬다스의 모습과 상당부분 닮아 있었다. 키도 작고 왜소한 체형인 데다 정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이 그랬다. 아무리 자질이 있어도 정작 정령과 계약을 하지 못하면 술사로서 무의미했다. 심지어 황자인 쥬다스와 달리 집안도 별 볼 일 없는 사막 부족 출신이었다. 아벨이야말로 거리낄 것 없이 조롱받았으며 괴롭힘을 당했다. 그간 쥬다스가 당해온 정도는 마치 애교 수준과도 같았다. 아벨은 면전에서 욕설을 듣거나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반항할 수 없었다. 아직 십 대 소년인 아벨이 반항하기엔 적이 너무 많았고, 또 다들 집안의 힘이 쟁쟁하여 도무지 어찌할 바가 없는 상대들이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아벨 자신이 반항할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런데 황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쥬다스 님이, 변할 수 있었던 건, 역시……. 힘이 생겼기 때문, 인가요.” “…….” 아벨은 그간 백로황자가 어떤 대우를 받으며 지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큼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세계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였다. 최상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무능하고 나약하게 살아간다. 그로 인해 동질 그룹에서 소외되고 무시 받으며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랬었는데,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게 뒤바뀌었다. “힘만, 있다면. 저도, 당신처럼.” “허허. 이것 참…….” “하지만, 나 같아도, 싫을 겁니다. 이런 한심한 계약자 따위, 싫겠죠.” “진정하려무나, 아벨. 그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어느덧 연구소를 둘러싼 정원에 도착해 있었다. 쥬다스는 곧장 입구로 향하는 대신 키 작은 꽃나무가 자라고 있는 정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봄기운이 물씬 샘솟기 시작한 정원에는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가 부드러운 타르트처럼 몽글몽글 자라 있었다. 쥬다스는 노란 꽃나무 앞으로 가 피지 않은 꽃봉오리 하나를 가리켰다. “네 보기엔 어떠하냐.” “…….” “이 꽃이 좀 더 커다랬다면 어떨 것 같은고?” 아벨은 멍하니 꽃나무를 응시했다. 꽃봉오리는 딱 자신의 주먹크기만 했다. “색이 좀 더 화려했다면? 혹은 아주 튼튼하여 찢기지 않는 잎을 가졌다면 어땠겠느냐?” “……그건, 모르겠습니다. 아직, 피지 않았으니까.” “장하구나. 그 말대로란다.” “……네……?”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옆을 돌아보던 아벨의 귓가로 따뜻한 음색이 들려왔다. “이 꽃에는 ‘피는 힘’이 필요한 거란다.” 그 말을 들은 아벨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신보다 작고 허약해 보이는 어린 황자의 말에 정곡을 찔린 기분이었다. 뚫어져라 내려다보는 시선을 느낀 쥬다스가 그를 올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피기 전까지는 어떤 모습일지, 무엇이 더 필요할지 모르는 게야. 너는 아직 네 정령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잖누. 차분히 생각해 보거라. 지금 네게 정말 필요한 건 무엇일꼬?” “……제게, 필요한 것…….” 힘을 갖고 싶었다. 막연히 그렇게만 생각해 온 그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정말 필요한 건, 강한 힘 따위가 아니라 아주 작고 간단한 부분이었다. “……인정, 받고 싶어요.” “그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훅 하고 뻗어 나온 녹색 바람을 보며 아벨은 또다시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지글거리는 시기와 열등감을 꾹 내리누르며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인정받아서, 모두가 기대했던 그런 어른이 되어서.” 따뜻한 바람이 아벨의 볼을 토닥이듯 감쌌다. 그는 그 바람이 품고 있는 향을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운 사막의 열풍이었다. 건조하고 뜨거운 데다, 퍽퍽한 모래 알갱이가 실려 있었지만 지금껏 그가 한시도 잊어본 적 없는 바람이었다. 아벨은 뜨거운 눈시울을 들어 제 얘기를 가만 듣고 있는 황자를 마주보았다.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말이야말로, 15세 소년 아벨 투르케가 루바흐에 와 처음으로 남 앞에서 숨기지도 더듬지도 않고 당당히 밝힐 수 있었던 속내였다. 수업 준비를 마치고 땅의 정령을 돌보며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던 정령학 교사 이사벨은 나란히 들어오는 두 학생을 보고 해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어머, 아벨? 무슨 좋은 일 있었나요?” “……아뇨, 그냥…….” 이사벨은 학생들의 표정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사람의 감정을 읽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그녀가 가진 장점 중 하나였다. 이사벨이 보기에 지금 아벨은 굉장히 편안하게 느껴졌다. 늘 스스로를 가둔 사람처럼 우중충하고 우울해 있던 아벨이 아니었다. 어찌 보면 별것 아닌 작은 변화였지만 이사벨은 이를 놓치지 않고 관심 있게 물어왔다. 그런 그녀를 향해 아벨은 멋쩍게 말을 얼버무렸다. “후후, 쥬다스 님과 그사이 친해진 모양이에요. 잘됐네요! 자, 그럼 슬슬 시간이니 수업을 시작해 볼까요?” 정령학 수업에는 딱히 참고로 사용되는 교재가 없었다. 이사벨은 학생들을 둥글게 앉혀놓고 마치 공연하는 사람처럼 그 앞을 거닐며 수업을 진행했다.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신비로운 존재죠. 그리고 더욱 신기하게도, 그중 우리 술사들이 만나 계약할 수 있는 짝은 정해져 있답니다. 우리는 마치 영혼의 동반자처럼 깊이 교류하게 되죠. 혹시 지난 시간에 알려드린 내용을 기억하나요? 정령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자연계 4속성이요!” 한 아이가 눈을 빛내며 크게 외쳤다. 그러자 이사벨은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조그맣게 웃었다. “맞아요.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죠? 4속성 안에서도 다양한 특성화로 나뉜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기억하나요?” “겨울바람!” “단단한 바위의 정령과 백사장 모래의 정령처럼 정령마다 특성 차이가 있었습니다.” “용암 정령이랑 파란 불꽃의 정령이요.” 학생들은 눈치 보지 않고 너도 나도 자유롭게 발언했다. “다들 열심히 들었군요? 여러분에게 정령술에 대한 열정이 있어 기쁘네요. 그래요, 정말 많은 특성이 있었어요. 거기에 더해, 우리 술사들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도 분명 많을 거라 생각해요. 자연계 정령이 있다는 사실은 지금 밝혀진 이외에도 다른 속성의 힘을 다루는 정령들이 존재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니까요.” 그녀의 말대로 정령학계는 아직 밝혀진 게 그다지 많지 않았다. 술사마다 계약한 정령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의 영역이 달라서 더욱 정리가 되지 않았다. 정령은 인간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한 개성을 가진 존재였다. “지금 밝혀진 자연계 4속성만 해도 그 범주가 무척 넓고 특성도 몹시 다양해서 우리가 그들을 전부 만나기란 어려울 거랍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모든 정령을 전부 만나봤을 사람이 있다면.” 여덟 명의 학생들은 옛날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처럼 숨을 죽였다. “4속성을 지배하는 4명의 정령왕, 그들 모두와 동시에 계약한 자는 지금껏 기록된 인류 역사상 단 한 사람.” 이사벨이 알려주지 않아도 학생들은 모두 그 답을 알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전설처럼 남아 명성이 알려진 그였지만, 정령술사라면 그를 향한 존경의 정도가 남달랐다. 어느 날 갑자기 모습을 감춰 그 생사마저 불분명하였지만 따져 볼 것도 없이 역대 최강의 정령술사. ‘……‘이그레트’.’ 정작 그 본인을 사이에 두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는 학생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며 그를 상상했다. “저, 스승님.” 한 남학생이 손을 들어 질문이 있음을 알렸다. 이사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의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그레트 님은 그럼, 지금 몇 세이실까요?” “어머…….”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기에 이사벨은 입술에 손을 얹은 채 생각에 잠겼다. 정확한 날짜까진 모르더라도, 이그레트의 탄생년 정도는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분은 ‘금색 미네르바의 해’에 태어나셨으니까…….” 제국은 모든 해에 색깔과 12개의 고대어를 돌려가며 이름 붙였다. 국교(國敎)는 교황청이 주관하는 신성을 따랐지만, 12년을 주기로 해마다 고대어가 상징하는 의미를 붙여 태어난 아이의 앞날을 축복하는 게 전통이었다. 그래서 황실 사서관에서는 복잡한 이름 대신 따로 숫자로도 해를 기록하고 있었다. 다소 불편한 방식이긴 했어도 오랜 세월 그 방식에 익숙해진 국민들은 자연스럽게 매해를 규칙에 따라 불렀다. “그리고 올해는 ‘청색 크로노스의 해’.” “104살이요!” 리베흐가 손을 반짝 들고 외쳤다. 리베흐는 바람의 정령에게 사랑받을 뿐 아니라 두뇌까지 명석한 아이였다. 그녀의 계산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거기서 쥬다스는 이상함을 느끼고 작게 중얼거렸다. “청색 크로노스라……?” 그가 날짜를 확인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확인했을 때에는 ‘크로노스의 해’라고만 보았다. 그가 죽었던 해가 같은 ‘크로노스의 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앞에 붙는 해의 색깔에 오류가 있었다. 누구도 이그레트의 행방은커녕 생사조차 모르고 있다지만 그 본인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분명 92살에 죽었다. “…….”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날 정령학 수업이 끝난 후 쥬다스는 숙소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천천히 교정을 거닐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그가 크리스티나와 함께 빠졌던 호수까지 도달했다. 호숫가에 멈춰선 그는 가만히 물살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가 져 어둠이 내려앉은 호수에는 근처 가로등에서 은은히 흘러나오는 빛줄기가 반사되어 일렁이고 있었다. ‘한 번 죽은 사람이 다시 깨어나는 일.’ 쥬다스는 검게 잠든 호수를 바라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애당초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는 자체가 불가능한 전제였다. 타인의 몸에 깃든 정신이 온전히 유지되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정신은 곧 육신을 따라가는 법. 인간의 영혼에 저장된 기억이 다른 육신에 저장된 기억과 충돌하지 않는 것부터가 이상했다. 수상하리만치 깔끔했다. 마치 겉보기에 잔잔한 호수표면과도 같았다. 쥬다스는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자갈처럼 제 안에도 보이지 않는 돌멩이가 잔뜩 남아 있으리라 예측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째깍 째깍) 12시입니다, 여러분. 아, 만일 제가 공지 없이 3일을 넘게 연중한다면 그것은.... 사고가 난 것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쿨럭; 아마 정 힘들면 중간에 연재주기를 바꾸는 한이 있어도 완결은 꼭 봅니다. 좀 호기롭나요...ㅎㅎ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과만 계약되어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보통사람을 훌쩍 뛰어넘는 사기캐긴 합니다...만, 자세한 건 향후 진행과정으로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6 / 0240 ---------------------------------------------- 4장. 유명세 “……어렵구나.” 「그건, 이그레트 네게서 오랜만에 듣는 소리로군.」 흥미롭게 대꾸한 루니가 그의 발치에 누워 앞발에 턱을 괴었다. 그러곤 쥬다스를 감싸듯 빙 두른 거대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만사에 무관심하고 과묵한 푸른 늑대는 그의 앞에서만큼은 한없이 애교가 늘었다. 「너는 늘 주어진 문제를 슬기롭게 풀어내었으니.」 “과찬이구나, 루니. 내가 지나온 길에 정답이란 없었거늘.” 「아니, 네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 앞에서 표현해 본 적 말이다.」 그 말에 쥬다스는 호수에서 시선을 떼고 루니를 돌아보았다. 「너는 언제나 스스로 판단하고, 또 스스로 감당해 내었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었다.」 「맞아, 이그레트.」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그 말에 동조하며 쥬다스의 옷깃을 끌어안았다. 유니는 울 듯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늘 고통스러워했다는걸.」 정령은 계약한 술사와 깊이 공명한다. 굳이 루니가 물의 속성을 이용해 내면을 살펴보지 않더라도 그가 느끼는 감정 정도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그레트, 평민으로 태어나 누구보다 강대한 힘을 가졌으며, 범인은 꿈도 못 꿀 부와 명예도 한 손에 거머쥐었던 사내. 어디서든 그를 환영했으며 누구나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하지만 정작 ‘이그레트’를 순수하게 원했던 이는 없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한 것은 그의 힘이었다. 그는 철저히 이용당했고, 종래엔 믿음마저 배반당했다.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그였다. 부모도 형제도 없이 거리를 떠돌며 자랐다. 영민한 두뇌와 정령의 힘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그의 주변에 동료라 부를 만한 존재가 모여들었다. 처음엔 진심으로 동료가 되고자 한 자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그의 곁에 친우로 남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고배처럼 쓴 배신의 끝에, 결국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한 그가 마음이 편했을 리 없었다. 죽어가던 그 순간까지 돌이켜 후회할 정도로 이그레트는 늘 마음 한 구석에서 염원해 왔다. ‘사람들과 사는 것.’ 그리고 그 마음은 그를 둘러싼 4속성 정령들에게 가장 가까이 와 닿았다. 쥬다스의 머리 위에 매달려 있던 토니가 손으로 그 머리를 토닥토닥 다독이며 말을 거들었다. 「응요. 힘들면 언제든지 말하라요!」 “……그러마. 고맙구나, 아이들아.” 「헤헤~」 “솔직히 말하자면 좀 놀랐단다. 눈을 감은 지 12년이나 흘렀을 줄이야. 내겐 하룻밤 꿈과 같은 찰나였거늘.” 쥬다스는 고민이 있을 때면 늘 하던 버릇대로 턱을 짚었다. 수염 한 줄기 없이 매끈한 턱이었지만 자연스레 쓸어내리게 되었다. “한데 이 아해의 나이도 12살이란 말이지. 여러 가지로 맞아떨어지는 게 있어 의심 가는 바가 있긴 하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구나. 만일 내가 처음부터 12년을 ‘쥬다스’로서 있었다면, 어째서 의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지가 의문이로구만.” 단순히 이그레트가 사망한 후 쥬다스의 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여기기엔 미심쩍은 점이 많았다. 그는 모든 가능성을 하나하나 염두에 두었다. 지나칠 정도로 자연스러운 육신에의 적응, 그리고 루니가 읽을 수 없는 정신세계. 쥬다스와 이그레트가 애초부터 동일 인물이라면 아귀가 맞물리는 점도 많았다. 하나 그렇게 따지기엔 또 12년간의 공백이 너무 컸다. 그에겐 ‘쥬다스’로서의 기억과 의식이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게다가 한 가지 더 확신할 수 없는 명제가 남았다. ‘보통 인간의 영혼은 윤회를 하는가.’ 정령과 계약을 하는 술사는 그가 아니더라도 예전부터 존재해 왔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이 계약은 죽어서도 풀리지 않고 술사를 따랐다. 그렇다면 왜 지금껏 지난 생에서의 계약이 현생에도 이어졌다는 보고가 한 번도 없었는가. 더구나 제국의 국교에 따르면, 인간의 영혼은 죽어 윤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명계로 이동해 심판을 받는다. 죽음과 동시에 아예 이 세상을 떠난다는 설이었다. 작은 생선가시가 목에 걸린 듯 도무지 답이 명쾌하게 떨어지지 않는다. “……이는 필시 무언가 내가 모르는 변수가 작용하고 있을 터.” 「으음, 그건 우리도 모르겠어.」 정령은 명계에 관여할 수 없다. 그랬기에 정령왕이라 해도 지금 쥬다스의 상태에 대해 알 만한 게 없었다. 지금 그 곁에 있는 세 정령은 그가 죽은 이후로 죽 부름받기 전까지 정령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감도는 사이, 엎드려 있던 루니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하하! 이런 데서 뵙는군요. 시간도 늦었는데 여기서 홀로 뭐하십니까?” 이미 상대의 접근을 알고 있었기에 쥬다스는 놀라지 않고 덤덤히 돌아섰다. 유들유들 웃고 있는 마르젠 하쉬가 시야에 들어왔다. 선한 감색 눈빛 너머로 갈고 닦여진 귀족으로서의 심성이 엿보였다. 쥬다스는 이를 가만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니 예까지 오게 되었다. 마르젠 너도 생각할 것이 있어 나온 것이더냐?” “밤하늘이 한낮처럼 쾌청하니 생각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합니다.” “하면 내게 따로 할 말이 있어 나온 것이로구나.” ‘역시.’ 마르젠은 입안으로 중얼거렸다. 저 영민한 황자는 자신이 아무리 에둘러 말하려 해도 다 알고 있다는 듯 반응해 왔다. 루바흐에 입학하기 전부터 꾸준히 전장 같은 정계에 기웃거리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마르젠이었다. 귀족의 자제라고는 하나 루바흐 학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을 제 입맛대로 다루기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백로황자에겐 제 입담과 처세가 잘 통하지 않았다. 12살 어린아이가 아니라 장성한 귀족을 상대할 때와 비슷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이런, 원하시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지요.” 마르젠은 황자의 눈치에 맞춰 재빠르게 대처했다. 그가 보기에 황자는 미사여구나 구구절절 돌려 말하기식 대화를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원하는 대로 직접적으로 속내를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 계산을 마친 그는 마치 약한 짐승이 강자에게 하듯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황자 전하. 주군으로 모시게 해주십시오.” “…….” “귀족으로서 뜻을 정하기에 아직 이르다는 건 압니다. 하나 지금이기에 정할 수 있는 뜻도 있는 줄로도 압니다. 저 마르젠 H.하쉬는 전하께 힘이 되어드리고자 합니다.” 쥬다스의 금안이 흔들림 없이 마르젠을 담담히 바라보았다. 마르젠 역시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졸업과 동시에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자입니다. 저를 선택하여주신다면 하쉬 가문이 당신을 적극적으로 지지할 것이며, 그간 이를 위해 친교를 쌓아놓은 모든 귀족가문이 당신을 따르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지지 세력이라.’ 일종의 거래였다. 현재 루바르잔 제국은 황권과 신권에 더해 권력을 손에 쥔 귀족 세력들로 체재가 유지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황권은 모든 권력에 앞섰다. 하지만 이는 대외적인 모습이었다. 황권이 신권보다 우위라고는 하나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교황청에서 거머쥐고 있는 부분은 단순히 권력이라고 하기 애매한 감이 있었다. 신권이란 즉 민중의 믿음이었다. 인간, 특히 황제보다 위에 있는 초월적인 존재를 섬기며 축복과 저주를 다루는 영역인 만큼 아무리 인간의 지도자라 한들 침범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이란 게 존재했다. 하지만 이것도 역시 인간이 관리하는 영역이었으니, 당연히 깨끗하지만은 않았다. 현 교황청은 귀족 세력과 상당 부분 결탁되어 있었다. 황제가 고개 숙이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신이었으니, 귀족 입장에서 이를 파고들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신권은 귀족 세력을 암암리에 등에 업고 서로를 키웠으며 황권이 독주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그 와중에 귀족 세력들의 경우 겉은 모두가 충신이었으나 속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직 황자들의 나이가 모두 어리고, 더구나 본래라면 황태자 위에 올랐어야 하나 제 구실을 못했던 1황자 탓에 상황이 점점 애매하게 흘러갔다. 대다수는 1황자보다는 좀 더 쓸 만한 구색을 갖춘 2황자나 3황자에게 붙어 권력을 거머쥘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같은 맥락으로 마르젠은 1황자에게서 기회를 엿본 셈이었다. “부디 선택을.” 간결하게 말을 맺은 그에게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마르젠이 말하는 충성은 일전 에단이 보여주었던 충성 서약과는 그 질이 달랐다. 에단은 쥬다스를 진정으로 자신이 모셔야 할 주군으로 선택했다. 하지만 마르젠의 경우, 그 속내에 검은 야욕을 드리우고 있었다. 그가 모시고자 하는 대상은 쥬다스가 아니라 차기 황제였다. 비슷한 말 같아도 분명 차이가 있었다. 끌어 올려주는 대신 함께 부상한다. 마치 혈통 좋은 명마를 골라 타듯 그를 품평했다. 이를 꿰뚫어 본 쥬다스는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네가 고른 말이 혹 가고자 한 방향으로 달리지 않는다면 후회하지 않겠느냐.” 에단에게 했던 것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시험에는 시험으로 대응하는 법. 역으로 자신을 시험하는 질문에 마르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목이 혼탁하여 길을 정하는 데에 어지러움이 있다면 바른 길을 걸으시도록 간언함이 충신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 말이 옳다. 그러면 네가 말한 바른 길을 판단하는 자는 뉘인고.” 분명 웃고 있었는데 이를 눈앞에서 마주 본 마르젠의 등골에는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움찔 입을 닫는 그를 향해 쥬다스가 웃는 낯을 지웠다. “네가 주인으로 모시고자 한 자인가. 아니면 그 등에 앉아 눈가리개를 씌워 달리게 하려는 치인가.” “…….” 아뿔싸. 마르젠은 상대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리숙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유를 잃고 흔들리는 갈색 눈동자 너머로 크리스티나로부터 들었던 충고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너 따위가 쥐고 흔들 분이 아니다.’ ‘더 이상 조무래기끼리의 투쟁이나 탐색전 따윈 무의미해.’ ‘황제가 될 사람은…….’ 크리스티나는 쥬다스를 단순히 정령의 힘과 혈통만으로 판별한 게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가 군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를 쥐고 흔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소리였다. 그러기에 그는 어린 나이부터 벌써 많은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후일이 상상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로황자가 이대로 자라 장차 군주의 자리에 앉는다면, 누구도 저 고고한 황금색 눈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리라. 마르젠은 뒤늦게 그녀가 했던 말의 의미를 알아차리고 헛웃음을 삼켰다. 그는 즉시 황자의 앞에 부복했다. “신이 감히 전하를 우롱하려 하였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야심이 있다는 건 다른 말로 처세에 능하며 매 순간 전력을 다해 살아간다는 뜻도 되었다. 이 순간, 마르젠은 일생일대의 도박에 자신을 온전히 걸었다. “이곳은 학교이질 않느냐. 그럴 필요 없단다. 대신 네가 따르고자 하는 이가 어떤 길을 가는지 바로 보아 두는 것이 좋겠지. 결정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럼……. 곁에 두시는 겁니까?” “원한다면 그리 하련. 말리지는 않으마.” “하하…….” 마르젠은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다음 날이 되자 교실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쥬다스가 앉은 자리를 힐끔거리기 바빴다. 쥬다스는 평소처럼 바이칼 옆에 앉았을 뿐이지만, 그 주변을 자연스럽게 차지한 인물들이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같은 수업을 신청하여 듣고 있는 에단은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과 친분이 두텁다던 마르젠까지 싱글거리며 그 곁에 붙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평소보다 배는 싸늘한 표정의 크리스티나가 그 앞에 서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르젠이 곱지 않은 시선의 대상이었으나 앉아 있던 모두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생각해보니 만약 200회를 1부 완결편으로 잡을 경우, 이 추세라면 완결까지 6개월 정도 남았네요. 넉넉잡아 1년 안에는 완결을 보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힘내서 가자! (참, 공지란 옆에 설문조사 만들어뒀습니다. 코멘트로 종종 성별얘기하시는 걸 보고 저도 궁금해져서 ㅎㅎ 한번씩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참, 오탈자 및 비문 지적도 감사드립니다ㅠㅠ 덕분에 매번 잘 수정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7 / 0240 ---------------------------------------------- 4장. 유명세 “……너.” “무슨 일인고, 크리스티나야.” 크리스티나가 막 짜증스레 입을 열려던 찰나 쥬다스가 부드럽게 그녀를 얼렀다. 크리스티나는 다소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그를 쳐다보았다. “쥬다스 님, 이자에 대해 잘 아십니까?” “글쎄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겠구나.” “당신이라면 저 가면에 쉽게 넘어가실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저자는 뼛속까지 제 이익만을 챙기는 족속입니다. 귀족이 아니라 상인이었다면 대성하였을.” “……저기, 크리스티나? 알고 지낸 게 벌써 햇수로 2년째인데 면전에 대고 악담을 하시다니. 하하! 저 진짜로 서러워지려 합니다?” “하, 저급 연기는 집어치워.” 그녀는 원래 마르젠을 좋게 보지 않았다. 공작가 영애인 데다 문무 가릴 것 없이 뛰어난 성적을 보이며 수많은 학생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그녀에게도 당연히 접근했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 만났을 당시만 해도 벌써 2년 전 이야기. 지금보다 미숙했던 마르젠의 접근은 당시에도 까칠하기 그지없던 크리스티나에게 대차게 걷어차였다. 등에 업은 권력을 기준으로 사람에게 접근하는 모습은 애초에 높은 자리를 타고난 그녀에게 있어 깎아놓은 과일에 꼬이는 날파리와도 같았다. 그런 데다 결정적으로, 지난번 쥬다스에 대해 나눴던 대화가 있어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크리스티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마르젠을 내려다보곤 홱 돌아섰다. 찰랑이며 멀어지는 투톤의 바다빛 머리카락을 싱글거리며 바라본 마르젠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이거, 이거. 단단히 여기사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입니다.” “저리 날카로워 보여도 실은 잔걱정이 많은 아이란다. 영 기분 나쁘게 듣진 말거라.” “저 냉미녀를 아이 취급하는 건 이 루바흐에서 쥬다스 님이 유일하실걸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하긴 했어도 마르젠은 별로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델피아는 그가 학원에서 처음으로 공략에 실패한 존재였다. 실패라곤 해도 마르젠은 여전히 크리스티나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 포석을 깔아두는 중이었다. 날을 세우고 도도하게 굴수록, 틈을 보이는 순간 빠르게 무너지는 법이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가 게임셋이었다. 마르젠은 델피아 공작가라는 좋은 말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탁. “……?” 제자리로 돌아간 줄 알았던 크리스티나가 다시 그들 바로 뒷자리로 다가와 교재를 내려놓았다. 의외이다 못해 터프하기까지 한 행동력에 학생들의 시선이 다시금 그녀에게로 몰렸다. 크리스티나는 책을 펼쳐 시선을 고정시키며 차갑게 말했다. “뭘 그렇게 보지? 내 자리 선정에 불만이라도 있나.” “오, 그럴 리가. 도리어 환영입니다.” 마르젠은 싱긋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저 얼음 공녀를 무너뜨릴 키워드는 그가 모시기로 결정한 백로황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럴 듯한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리고 본의 아니게 그들의 공방을 바로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바이칼은 깊은 한숨과 함께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왜 여기서들 이러십니까…….” “음? 나는 본래 앉던 자리에 앉았을 뿐이란다.” “……쥬다스 님을 따랐을 뿐.” “하하, 저도 쥬다스 님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말입니다.” “자리에 이름표라도 써 붙여놨나? 까다롭군.” 쥬다스, 에단, 마르젠, 크리스티나. 각자 당당하게 밝힌 사유에 바이칼은 결국 본전도 못 찾고 다시금 한숨으로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 경제학 수업이 끝나고 각자 짐을 챙길 무렵, 누군가 창문을 가리키며 외쳤다. “공지 떴다!” “어, 프리미어 페이퍼(Premier paper)다!” 우오오! 그 소리에 학생들은 일제히 물소 떼처럼 흥분하여 창가로 달라붙었다. 그들이 있던 교실뿐 아니라 사방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갑작스러운 들뜬 분위기에 쥬다스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글바글 창문에 달라붙은 머리통 너머로 하늘에서부터 눈송이처럼 떨어지고 있는 하얀 종이들이 보였다. 학생들 사이에선 일명 ‘공지’라고도 불리는 이 종이는 루바흐 학원 측에서 대대적인 이벤트 행사를 기획할 때마다 지금처럼 전교에 뿌려졌다. 특수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프리미어 페이퍼’는 일주일간의 공지 의무를 다하고 나면 저절로 연소하여 사라졌다. 이번 프리미어 페이퍼 역시 무언가 큰 이벤트를 공지하고 있음을 예상한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소란에 휩쓸리지 않고 한 박자 늦게 비어 있는 창가로 다가간 쥬다스가 차분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구름이 넓게 깔린 하늘 꼭대기에서부터 팔랑팔랑 하얀 종이가 쉼 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봄에 내리는 눈처럼 느껴질 장관이었다. “드디어 이 시즌이군요.” “흠……?” 그를 따라 남아 있던 마르젠이 함께 창가에 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르젠뿐 아니라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도 함께 적막한 교실에 남아 쥬다스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봄 축제.” 루바흐에서는 중간고사가 끝나면 그 노고를 치하하기라도 하듯 어김없이 봄 축제를 열었다. 학원에서 직접 주최하는 만큼 그 규모가 굉장히 성대하여 외부에서 앞다투어 관광을 올 정도였다. 본래 루바흐에는 본교 학생과 교사가 아니라면 출입할 수 없었지만 봄 축제 시기만큼은 예외였다. 때문에 타향에 나와 학업에 정진하던 루바흐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쥬다스 님은 축제 기간에 참여해 본 적이 없으시지요?” “아-” 백로황자가 몸이 약해 수업조차 병결이 잦았다는 사실은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수업도 힘들었던 그가 축제를 제대로 즐겨봤을 리가 없었다. 물론 지금의 그로서는 모르는 과거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축제 자체가 처음인 건 사실이었다.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후웅. 그 끝에서 퍼져 나간 녹색 바람이 떨어지던 프리미어 페이퍼 한 장을 실어와 손 위에 안착시켰다. 사뿐히 내려앉은 종이를 집어 든 그가 적힌 내용을 훑었다. “이틀 뒤 개막하여 3일간 진행한다. 무예전, 경연 대회, 연구물 발표회, 디너파티장은 미리 신청이 필요하다는구나.” 그러자 각자 끌리는 항목이 있었던 지라 동시에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아무리 어른스럽다 한들 이들은 아직 십 대 초중반의 소년 소녀였다. 그런 그들을 귀여운 손주 보듯 미소 지으며 응시하던 쥬다스는 이내 종이에 적혀 있던 작은 글씨에 잠시 시선을 멈추었다. <외부인 출입 허가 기간 : 학부모 및 보호자 전용 포탈 개방 예정. 확인증은 각 주소로 전송하였음. 확인증 미지참 시 포탈 사용 제재.> ‘보호자라…….’ 아마도 황자인 그에게 찾아올 보호자는 없을 터였다. 애초에 쥬다스처럼 황자라는 신분을 가지고 루바흐에 입학한 전례는 극히 드물었다. “……쥬다스 님.” “으응?” “대회, 신청하실 겁니까?” 경연 대회에는 여러 종목이 있었다. 무예처럼 검이나 권, 봉과 같은 근접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마법사들 간의 실력고하를 겨루는 종목도 있었고, 정령술이나 치유술처럼 이능을 선보여 심사위원과 관중으로부터 점수를 부여받는 종목도 있었다. 전투 형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선보일 수 있었기에 학생들은 큰 부담 없이 대회에 신청서를 넣었다. 대회에서 높은 성적을 거둘 경우, 추가 학점과 더불어 상장이 지급된다. 루바흐의 상장은 졸업 후에도 명성을 빛내 줄 업적으로 남는 귀중한 것이었다. “내가 거기 끼어 무엇하겠누. 너희들 하는 양이나 구경하련다.” 그 대답에 다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런데 디너파티는 참석하시는 게 좋습니다.” “디너파티라.” “파티가 열리는 건 축제의 둘째 날 밤, 한마디로 축제의 꽃입니다. 제국 각지에서 몰려든 귀족과 만나 얼굴을 익히고 친교를 쌓아둘 수 있죠. 하하. 어떤 길을 가시든, 당신께는 꼭 필요한 과정일 거라 생각합니다.” 마르젠이 빙글거리며 정보를 전달했다. 여전히 싸늘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던 크리스티나도 짧게 한숨을 뱉으며 이에 동조했다. “마음에 안 들긴 해도, 저자의 말대로예요. 루바흐의 봄 축제는 지배층 입장에서만큼은 그 효용 가치가 디너파티에 편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니. 참여하시는 편을 권해 드리고 싶군요.” 그리곤 묵묵히 쥬다스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에단에게 힐끗 시선을 맞추었다. “후일 군주를 보필할 생각이라면, 그대도.” “…….” 에단은 그저 묵묵히 쥬다스의 선택을 기다렸다. 모두의 시선을 느낀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면 다 같이 축제를 즐기자꾸나.” 그는 말을 마치고 하늘에서 흩어지는 종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뿌옇게 흐려진 하늘이 제 속처럼 먹먹했다. 축제의 시작. 이 시기가 지나고 나면, 슬슬 황궁의 부름에 응할 때였다. *** 메마른 모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사막. 끊임없이 몰아치는 거친 바람에 썰물처럼 쓸려간 모래 언덕이 쌓이고 무너지길 반복했다. 하늘은 온통 먹구름에 가려 있었고 사막임에도 뚝 떨어진 온도에 냉기가 감돌았다. 검은 하늘과 서리가 앉을 정도로 차가운 날씨, 그리고 사방을 뒤덮는 모래가 이곳의 전부였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얼어붙은 사막 한가운데서, 한 사내가 로브 자락을 펄럭이며 서 있었다. 그가 입은 잿빛 학자복에는 검은 비둘기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결국 여기서도 못 찾았네? 프리드.」 검은 기류를 뿜어내는 여인의 형상을 한 사령이 그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때마침 거칠게 불어오는 사막 바람에 후드가 슬쩍 벗겨졌다. 검푸른 머리칼과 더불어 붉게 빛나는 안광이 드러났다. 프리드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앞머리에 붙은 얼음 알갱이를 툭툭 털었다. “그러게? 어찌나 꼭꼭 숨었는지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는구만.” 「찾아봐야 다 죽어가는 노인일 텐데~?」 “큭큭. 숨만 붙어 있다면 상관없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프리드의 적안이 뱀처럼 휘었다.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꺄아, 정말 최고야. 내가 네 것이란 사실이 자랑스러워. 프리드.」 사령은 그의 목을 감싸며 짧게 키스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프리드는 사령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어디 숨어 있는 거냐.’ 만일 살아 있다면 104세, 보통 인간이 누리는 수명은 길어야 70세였고 이능을 가진 자라면 90세 안팎으로 명을 유지하였으니 이미 적정 수명을 한참 뛰어넘은 나이였다. 그러나 프리드는 그가 죽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4속성 정령왕의 사랑을 한 번에 받는 자이니. 만일 죽었다면 그와 계약이 끊긴 정령이 잠깐이나마 그 힘의 제어를 잃고 폭주했을 터.’ 본래 자연은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래 없이 집착했던 대상이 숨을 다해 사라진다면 정령들은 그 상실감을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첫사랑은 늘 이성을 마비시키는 힘이 있다. 4속성이 동시에 한 존재에게 매료된다는 건 생소한 경험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에게 온 마음을 쏟아붓고 있었다. 정작 ‘그’조차 예견하지 못한 일일 테지만, 그의 사소한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그들에겐 절대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만일 그가 불멸을 바라기라도 한다면 아마 세상을 구성하는 정령들은 이를 들어주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죽음을 맞이한다면, 진즉에 세상을 뒤엎을 천재지변쯤은 일어났어야 이치에 맞았다. 물론 자연 법칙을 거슬러 폭주한 정령들이 더 상위 존재들에게 어떤 처분을 받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프리드는 그가 가진 힘이 필요했기에 아직까지 잠잠한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 문득 프리드의 머릿속에 얼마 전 마주쳤던 황자가 떠올랐다. 특이한 존재였다. 시리도록 빛나는 은발과 보석을 통째로 가져다 박은 듯한 금안은, 루바르잔 황조의 초대를 떠올리게 하는 고귀한 외형이었다. 나이에 비해 비실비실하던 몸은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런 데다 황자가 부리던 힘은 그가 찾던 것과 굉장히 흡사한 구석이 있었다. “흐음…….” 그는 텅 빈 사막을 무심히 훑은 뒤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펄럭. “릴리스.” 「응. 다음은 어디로?」 “루바르잔 황궁. 확인하고 싶은 게 생겼다.” 여인의 형태를 하고 있던 사령은 그림자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잠시 뒤, 거대한 본 드래곤이 사막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들이 사라진 사막은 차가운 냉기에 휩싸여 죽음의 향기만 남긴 채 얼어갔다. 이는 본래 뜨거운 햇살이 작렬하던 대지. 오랜 세월 자연에 뒤섞여 생활하던 부족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막, 투르케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날씨가 부쩍 춥습니다. 감기 걸리시지 않도록 따뜻하게 입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저는 집구조상 방이 너무 추워서 타자칠 때 손이 자꾸 어는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ㅠ.ㅠ크흑. 핫팩이라도 사야하려나...;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8 / 0240 ---------------------------------------------- 5장. 성장통 귀족부터 황족까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인재를 기르는 최고의 인재 양성 학교 루바흐에서 열리는 봄 축제, 그 성대한 막의 첫날이 밝았다. 학생들은 아침부터 저마다 신청한 부문에 순번표를 받으러 이동하거나 대회를 위해 준비하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무예전에 참여하는 에단과 연구실적을 발표회에 제출할 바이칼, 그리고 여기저기 활동 계획이 많은 마르젠도 그 행렬에 포함되어 있었다. 자기 페이스에 충실한 크리스티나만 여유롭게 교정을 걷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지난해 봄 축제에서 연구물 발표회를 통해 입상한 전적이 있었다. 한 번 받은 상을 또 노릴 이유는 없었다. 대신 간만에 생긴 여유를 허투루 사용할 생각도 역시 없었다. 크리스티나는 느지막하게 일어나 쥬다스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내일 있을 디너파티 입장권을 드려야 하니까. 간 김에 물어보고 싶은 부분도 몇 가지…….’ 와장창. 상념에 빠져 있던 크리스티나는 눈앞에서 깨져 나간 비커와 유리 그릇 따위를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와 부딪힌 건 아니었다. 급하게 카트를 끌다 제 발이 꼬여 넘어진 소녀가 시야에 들어왔다. 쑥색 미트볼 같은 간단한 음식이 함께 나뒹구는 걸 보아 성분 실험 중이던 힐링 푸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낸 그녀는 한숨을 쉬며 고꾸라져 있는 소녀를 향해 입을 열었다. “괜찮나?” “우…… 우으…….” 소녀는 창피함과 미안함으로 눈물을 글썽이며 고개를 들었다. 암갈색 긴 머리카락에 힐링 푸드가 묻어 더러워져 있었다. “죄, 죄송해요.” “이걸로 머리부터 닦아.” “에?” 크리스티나는 평소 차갑기로 유명했지만 눈앞에서 곤란을 당한 어린아이까지 나 몰라라 지나칠 인성까진 아니었다. 사실 작고 어린 것에는 은근히 약한 그녀는 넘어진 소녀를 향해 자신의 손수건을 건네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앗! 감사드려요. 저기, 전 리이나예요. 크리스티나 님이시죠?” “나를 알고 있나?” “그럼요. 헤헤, 크리스티나 님은 제 우상이신 걸요.” 리이나는 수줍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았다. 차가운 말투에도 아랑곳 않고 낯간지러운 소릴 해대는 리이나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작게 혀를 찼다. “이 내가 존경받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들리는 소문에만 의지하여 판별하진 말도록.” “직접 보니까 더 멋있으세요! 아니, 아름다우세요……? 암튼 둘 다예요!” “하……?” 크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고 리이나를 내려다보았다. 공작가의 장녀인 데다 조각 같은 미인, 뛰어난 두뇌를 자랑하는 그녀를 존경하고 따르는 무리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오죽하면 비공식적이긴 하나 학생들 사이에서 그녀의 팬클럽이 생겼겠는가. 하지만 그들도 먼발치에서 자신을 바라만 보거나 지켜주겠답시고 꼬이는 남정네들을 쳐내는 역할을 했지, 지금 리이나처럼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10살 어린아이의 순수한 애정 공세에 크리스티나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뭐, 그래. 그럼 난 이만.” “어, 잠깐만요!” 도도도. 리이나는 그나마 카트에서 쏟아지지 않고 멀쩡히 실려 있던 초코바 하나를 크리스티나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스트레스가 많을 때 먹으면 머릿속이 개운해지는 힐링 푸드예요. 일종의 정신력 회복? 맛도 달콤해서 좋아요!” “난.” 먹을 음식에는 까다롭다고 말하려던 크리스티나는 헤헤 웃는 리이나의 표정을 보고 이내 뒷말을 삼켰다. 대신 떨떠름한 표정으로 초코바를 손에 쥐었다. 그러는 사이 학원 메이드들이 다가와 쏟아진 파편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는 초코바를 쥔 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리이나가 작게 손을 흔들었다. “혹시 아픈 곳이 생기면 3호 양호실로 찾아와 주세요. 저, 치유술을 배우고 있으니까……!” 3호라면 실내 체육관에 붙어 있는 공간이었다. 학교 지리를 머릿속에 꿰고 있는 크리스티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능이라면 대부분 그렇듯이, 치유술은 상당히 귀한 재능이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어도 쓸 만한 재능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었다. 작은 사건을 뒤로한 채 크리스티나는 정령학 연구소에 도달했다. 다 함께 가기로 했던 디너파티는 크리스티나가 대표로 신청했다. 입장권 분배 및 여타 용건이 있을 경우를 대비하여 쥬다스는 축제 기간 동안 자신이 주로 머물 장소를 미리 일러두었다. 바로 정령학 연구소였다. “…….” 크리스티나는 정원에 들어서며 주변을 빙 훑어보았다. 형형색색 피어오르기 시작한 키 작은 꽃나무와 짧은 잔디, 탑처럼 쌓여 있는 흙무더기와 작은 연못 등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늘 깔끔하고 고고한 스타일을 추구하던 크리스티나였기에 이러한 정원은 별로 익숙한 형태가 아니었다. 짹짹. 새 두 마리가 나무 위에 앉아 지저귀고 있었다. 멈춰 선 채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티나의 뒤에서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손님이 오신 모양이네요.” 정령학 교사 이사벨이었다. 따뜻하게 미소 짓는 교사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가볍게 자신을 소개했다. “크리스티나입니다. 이곳에 쥬다스 님이 계신다 하여.” “아아, 쥬다스 님을 찾아오셨군요. 그분도 마침 정원에 나와 계실 텐데. 연구소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아니, 직접 둘러보겠습니다.” “그래요. 후후.” 이사벨은 활짝 웃어주곤 꽃나무를 마저 정돈하기 시작했다. 이 정원은 교사인 그녀가 직접 관리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녀의 취향을 듬뿍 담아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하게 되었다. 후두둑. 땅속에서 튀어나온 이사벨의 정령 휴가 나무들마다 고르게 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땅속성 정령이자 나무 특성 정령인 휴는 이사벨이 하는 정원 관리에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었다. 두더지처럼 생긴 정령 휴에게 잠깐 시선을 줬던 크리스티나는 이내 발걸음을 떼어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정원은 별로 크지 않았다. 하지만 나무가 많아 시야가 그리 깨끗한 편은 아니었다. 얼기설기 자라난 나뭇가지를 피해 이동하자 조그만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연못에 발을 담근 채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작은 황자의 모습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다. “……왔느냐.” “아.” 저도 모르게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크리스티나는 어느 틈엔가 눈을 뜨고 자신을 돌아보는 쥬다스의 부름에 그녀답지 않게 멍청한 반응을 보였다. “크리스티나야.” 쥬다스는 그녀의 실수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옆자리를 톡톡 두들겨 보였다. 다소 민망한 기분이 되어버린 크리스티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부름에 옆으로 다가갔다. 같은 학생 신분이라 한들 그녀 스스로가 인정한 황자를 계속 서서 내려다볼 수도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그 곁에 주섬주섬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기 입장권을.” “허허, 가져다주어 고맙구나. 찾아오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누?” 그녀가 건넨 입장권을 교복 주머니에 잘 갈무리한 쥬다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쥬다스 님은 왜 굳이 이런 데에 나와 계셨는지요?” “조금 더워서 말이다.” ‘……덥다고?’ 크리스티나는 재킷 위로 느껴지는 서늘한 아침 공기에 팔을 쓸어보았다. 봄이라곤 해도 아침에는 제법 날이 쌀쌀했다. 쥬다스는 재킷도 없이 흰 셔츠만 입은 채 바지를 걷어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그를 본 크리스티나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몸이 약하다 하지 않으셨나요? 혹 무리하시는 거 아닙니까?” “으음, 걱정해 주는 게냐? 고맙다, 크리스티나야.” 황자의 건강을 걱정한 건 사실이었으나 그걸 다시 말로 들으니 상당히 민망했다. 크리스티나는 그의 시선을 피해 연못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 그들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 정령학 수업을 함께 듣는 아벨이었다. 크리스티나의 고운 바다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아벨은 후닥닥 고개를 숙이며 말을 더듬었다. “바, 방해할 생각은, 없었, 는…….” “좋은 아침이구나, 아벨.” “네, 네. 그,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아벨은 여전히 땅을 내려다보며 우물쭈물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작고 볼품없는 체구에 땅으로 꺼질 듯 처진 어깨, 소심하여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성격, 전체적으로 한심함 그 자체였다. 마치 예전의 쥬다스를 보는 듯했다. ‘하지만 이젠 정말 딴사람 같군.’ 그녀가 기억하던 과거의 쥬다스는 어쩌면 저기 선 아벨보다 더 모자랐던 것도 같았다. 그때의 쥬다스는 누군가와 대화를 한다는 자체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땐 몰랐다. 인형 같기만 하던 윤곽이 지금처럼 부드럽고 생기 있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얼굴이란걸. “허어, 축제날 아침부터 배움에 열정적이로세. 그래, 무얼 알고 싶으냐?” 따뜻한 음성에 아벨은 망설이며 고개를 들었다. 아벨이 정령학 교사 이사벨이 아닌 쥬다스를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둘 다 친절했지만, 쥬다스는 조금 더 느낌이 편안했다. 같은 처지였던 자라 그런지, 또래인 탓인지, 아니면 무언가 다른 요소가 작용했는지는 아벨 자신도 몰랐다. 하지만 그에게라면 부담 없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곁에 크리스티나가 있을 줄은 몰랐지만. 외톨이로 지내온 아벨도 크리스티나에 대해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들을 생각이 없어도 듣게 되어 있었다. 마치 지금 루바흐를 휩쓸고 있는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처럼 크리스티나는 늘 학교의 중심이 되어 반짝이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쥬다스의 곁에 앉아 있으니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여기서 어울린다는 표현은 이성 관계라기보단, 어린 동생을 돌보는 누나 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어떤 느낌이든지 간에 아벨은 그녀와 자연스러운 관계를 형성한 쥬다스가 무척이나 부러웠다. 부러운 감정을 내리누른 아벨은 용기를 내어 질문했다. “처음, 정령과 계약할 때, 에 대해…… 어떠셨는지.” “처음 계약할 당시 말이더냐.” 쥬다스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친구이자 가족 같은 정령왕들을 처음 만났던 날. 그날을 그가 절대 잊을 리 없었다. ‘이그레트’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정령의 존재를 느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정령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로 선명하게 정령을 보고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그랬기에 처음엔 그가 유령을 본다며 돌팔매질한 사람들도 있었다.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보고 듣는 이그레트를 기분 나쁘게 여기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처음엔 ‘계약’이 무언지 몰랐었지. 계약을 했던 순간조차 말이다.” 그리고 정령왕들을 만났던 그날. 그때가 바로 이그레트의 나이 17세가 되던 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음, 사정이 생겨서 이번주 주말은 연재를 쉽니다. ....혹시 간절히 부르시면 소환될지도(?) 나와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어줘! ...는 역시 농이니 무시하셔도 좋습니다.(..) 크리스티나가 이사벨의 정령 휴를 볼 수 있었던 건 실체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사벨은 루바흐의 정식 교사인만큼 정령을 실체화하는 정도는 무리 없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작중에서 로맨스를 다루지 않을 뿐이지, 등장인물들이 평생(..) 솔로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ㅎㅎ 자세한 건 스포의 여지가 있기에 여기까지만... 아참, 모바일 버전으로 설문 참여하는 법은 저도 모르겠습니다. 글을 올릴 땐 늘 피시를 이용하는 터라...ㅠㅠ 관심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럼 이번 토요일, 일요일은 쉬고 월요일(화요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39 / 0240 ---------------------------------------------- 5장. 성장통 늘 주변에 돌아다니는 정령을 바라보기만 했던 그가 처음으로 정령을 불렀다. 그 간절한 부름에 응답한 것이 4속성 정령왕이었다. “정령들도 술사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단다. 아마 만남을 기다리는 것은 아벨 너 혼자만이 아닐 것이야.” “기다린다? ……저를요?” 어린 황자가 해주는 이야기는 꼭 동화 같았다. 아벨은 설렘으로 심장이 뛰어오는 것을 느끼곤 주먹을 콱 쥐었다. “기다리고만 있지 말거라. 네가 간절히 부른다면.” 후웅. 녹색 바람이 쥬다스를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물결에 파문이 일듯 잔디를 훑는 산들바람에 크리스티나와 아벨은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바람은 금방 멎었다. 그리고 그들의 눈앞에 지금껏 보이지 않던 새로운 광경이 펼쳐졌다. “그 소리에 이 아이들은 분명 기꺼이 응할 테니.” 「정말이지, 이그레트 넌 너무 친절한 게 탈이라니까.」 「……동감이다.」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지만 유니와 루니가 한숨처럼 투덜거렸다. 대신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앉아 있는 녹색 정령과 그를 감싸고 발치에 엎드려 있는 푸른 늑대의 형상은 또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술사의 요청에 의한 ‘실체화’였다. “이것이, 물의 정령…….” 그의 곁에 앉아 있던 크리스티나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푸른 늑대를 바로 내려다보았다. 어렴풋이 보았던 기억이 났다. 지난번 쥬다스와 함께 호수에 빠졌을 때, 그들을 건져내었던 정령이 바로 이 푸른 늑대였다.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 제대로 살펴보질 못했었는데 막상 바로 눈앞에 두고 나니 가슴 떨릴 정도로 신비로웠다. 루니가 살짝 살짝 움직일 때마다 허공으로 부유하는 물거품들이 아름답게 빛났다. 「힝, 나도 이그레트 옆에 당당히 있고 싶다요.」 황자가 다룬다고 알려진 정령은 물과 바람뿐이었다. 존재를 드러내지 못한 토니는 시무룩한 얼굴로 쥬다스의 머리카락에 몸을 폭 묻었다. 그리고 그 상태로 누워 꿍얼거렸다. 「맨날 유니만 이그레트를 독점하고.」 「얘가 뭐래? 루니도 같이 실체화하고 있거든?」 「그치만! 그치만! 항상 유니가 먼저 와 있으니까!」 「헤에, 그럼 너도 유~ 능~ 한 바람으로 태어나지 그랬니? 네가 느려터진 땅속성이니까 눈에 안 띄는 거잖아. 그걸 가지고 어린애같이 내 탓하면 쓰겠어?」 「끄앙!」 결국 유니가 떼 부리던 토니를 울림으로써 짧은 공방이 끝났다. 보는 눈이 있어 차마 말리지도 못하고 멈칫한 쥬다스를 두 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 “……쥬다스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란다.” 쥬다스는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아벨을 향해 넌지시 물었다. “한번 불러보겠느냐? 네 정령을.” “어떻게, 부르면.”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단다. 소리를 내어도 좋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염원해도 좋으이. 아벨 네가 왜 그들을 만나고 싶어 하는지, 그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함께 떠올려 보거라. 이는 정령이 너를 알아볼 이정표가 될 것이야. 정령은 인간의 정신에 민감하게 반응하니.” “이루고자 하는…….” “그러고 나면 이름을 붙여주는 게다. 먼저 네 소개를 하는 것도 잊지 말고.” 정령과의 계약에 대해서는 아벨도 수업 시간에 설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보통은 때가 되면 정령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 하였었다. 찾아온 정령에게 이름을 준다면 그것으로 정령은 술사에게 구속된다. 한 번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후로는 술사의 바람을 최우선으로 들어주도록, 정령은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술사를 돕는다. 수업을 통해 익힌 정보와 쥬다스의 말을 적절히 머릿속에 정리한 아벨은 눈을 감고 길게 심호흡했다. ‘……대답해 줘. 내게 정말 정령술의 자질이 있다면.’ 그가 루바흐에 입학한 이후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상상했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가난하지만 부족민들을 위해 늘 애쓰던 부모와 아직 어린 동생들, 또래에 비해 작고 소심한 그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투르케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대단한 힘을 가져서, 내 힘으로 당당히 그들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을 바라.’ 그의 소망은 쥬다스가 곁에 있음으로 증폭되었다. 쥬다스가 가진 인간을 뛰어넘는 강대한 친화력은 다른 술사의 공명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랬기에 아주 멀리 떨어져 있던 존재에게도 그의 내면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었다. 「…….」 오싹.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느낌에 아벨은 눈을 번쩍 떴다. “방금, 뭔가?” 그러나 정작 그의 시야에는 다른 정령이 보이지 않았다. 아벨은 얼빠진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 무언가를 느꼈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반면 유니와 토니는 아벨의 곁에 나타난 형체를 눈치채고 반가움에 날개를 파닥였다. 「어라? 저거, 저 녀석.」 「으웅, 나도 봤다요! 완전 오랜만이다요.」 「그러게! 이게 얼마만인지. 저 녀석도 우릴 알아보려나? 왜 숨어 있는 거야.」 나타난 정령은 술사의 부름에 응하긴 했지만 아직 아벨의 친화력이 낮아 소통할 수가 없게 된 상태였다. 「있지, 이그레트. 우리랑은 좀 다르긴 한데 쟤도 정령이야. 인간으로 치면 먼 친척뻘이랄까?」 포로록 날아올랐던 유니는 문득 이상함을 감지하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파앗! 쥬다스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던 정령들의 실체화가 그대로 풀려 버렸다. 제 것은 아니었어도 그나마 보이던 정령마저 사라져 버리자 아벨은 더욱 당황해 굳어버렸다. 그런 그의 귓가로 크리스티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쥬다스 님!” “이게, 어떻게 된.”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쥬다스가 정신을 잃고 크리스티나에게 기대 있었다. 영문을 모르기로는 크리스티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는 당황보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언지 빠르게 판단했다. 쥬다스를 휙 등에 들쳐 업은 크리스티나가 아벨을 향해 소리쳤다. “너희 스승님을 불러와! 어서.” “네, 넷!”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벨이 허겁지겁 달렸다. 그의 눈엔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를 따라 소환된 정령도 함께 이동했다. “하……. 정말, 방심할 수 없게 만드시는군.” 쥬다스를 업은 채 일어선 크리스티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힐끗 업힌 이를 돌아보자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보였다. 마치 끓어오른 냄비의 뚜껑 단면처럼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건.」 「그래, 조금 늦었지만 드디어.」 푸른 늑대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굴려 크리스티나에게 업혀 있는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멈추었던 ‘성장’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령들은 걱정스레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술사가 정신을 잃었으니 힘을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이는 정령이 개입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눈을 뜬 이후부터 그의 몸은 조금씩 제 기능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몸의 성장이 멈추었던 건 무려 5년 가까이였고, 하필이면 시기적으로 그 5년간은 폭발적인 성장이 이루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다시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몸이 미뤄 두었던 성장을 진행하려면 지금 같은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간의 것들은 마치 전력 달리기를 하기 직전의 준비 운동과도 같았다. 그의 몸은 비로소 본래 나이에 알맞은 체형을 따라잡기 위해 순리대로 조정을 시작했다. 「이그레트가 깨어났으니까. 당연한 일이지.」 「으응. 그렇지만 루니, 우리가 알고 있는 걸 정말 알려주지 않아도 괜찮을까? 나쁜 뜻은 아니라지만 어쩐지 속이는 것 같아서 찜찜해.」 「어차피 곧 스스로 알게 될 거다. 먼저 말해서 혼란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어. 아니면, 그 이상 잘 설명해 낼 자신이 있는 건가? 바람이여.」 「……그렇게 부르지 마, 바보. 지금 난 ‘유니’라고.」 유니는 원피스 자락을 꾹 쥐며 웅얼거렸다. 그리곤 휙 날아올라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아 그 창백한 뺨을 소중히 끌어안았다. 희미한 바람이 일어나 열이 오른 체온을 식혀주려 감돌았다. 「괜찮아. 언제나 곁에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그레트.」 ―조금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다 괜찮을 거야. 놀란 얼굴로 달려오는 이사벨을 향해 쥬다스를 업은 크리스티나가 다가갔다. 교사를 불러온 아벨은 숨을 몰아쉬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눈치채지 못한 자연계 정령들이, 주변을 가득 메운 채 끊임없이 몰려들고 있었다. 쥬다스의 의지가 아니더라도, 정령은 오로지 그를 위해 움직였다. 그는 전무후무, 자연으로부터 사랑받는 유일한 인간이었다. * * * 정신을 잃은 사이 쥬다스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 아니, 이번에는 꿈속에서나마 ‘이그레트’ 본래의 모습이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의 모습으로 그는 처음 보는 방 안에 서 있었다. 방은 천장이 매우 높았으며 면적 또한 넓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 그 안에서 달리기 시합을 펼쳐도 될 정도였다. 그러나 방 크기에 비해 가구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침대 하나, 바닥에 깔린 고급스러운 카펫이 전부였다. 그 흔한 탁자 하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은 꿈도 못 꿀 크고 좋은 방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삭막했다. 그리고 창문과 제일 멀리 떨어진 벽 구석에 작은 아이가 하나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 이그레트는 아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지금 그에게 있어 익숙한 얼굴이었다. ‘쥬다스.’ 그가 알지 못하는 12년간의 쥬다스였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작고 말라 있는 아이는 벽에 등을 대고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그 앞으로 다가가 섰다. “얘야.” “…….” “아가, 바닥이 차단다.” 아이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텅 빈 눈을 한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안타까운 마음에 함께 그 옆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실제로는 말 한마디 나눠 본 적 없는 사이였어도 벌써 한 달 가까이 그 몸으로 살아왔다. ‘쥬다스’가 자신의 환생이든 그저 빙의된 몸이든 상관없이 정을 줄 수밖에 없는 아이였다. 이그레트는 주름진 손을 들어 아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토닥토닥. 그는 느린 박자로 고운 은발을 쓰다듬었다. 그 순간, 아이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으면.” “으응?” “……내가…….” 이그레트는 가만 귀를 기울였다. 아이의 목소리는 자신이 내던 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생기라곤 없었으며 금방이라도 픽 쓰러질 듯 형편없이 갈라졌다. 아이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다시 중얼거렸다. “……내가 사라졌으면.” 멈칫. 이그레트는 쓰다듬던 손을 멈추고 가만히 아이의 눈을 응시했다. 눈물 한 방울 고이지 않은 금안 너머로 아주 작은 감정의 싹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그것은 황자가 아무도 모르게 어린 가슴속에 품고 있던 소망이었다. 최고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던 아이의 입에서 나온 것치곤 소름 끼치도록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바라는 건 오직 단 하나였다. “처음부터 없었던 듯이.”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Lv1스킬 ‘독자의 부름’이 성공하여 야생의 [공든탑]이 소환되었다! [공든탑]과 계약하여 마법소녀(년)가/이 되시겠습니까? (Yes . No) ...는 위험하니까 진짜 계약하진 마시고... 흠흠; 농담이었는데 정말 원하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부랴부랴 들고 왔습니다. 내일은 정말로 쉬고 오겠습니다. ㅎㅎ 점점 추워지는 계절, 건강한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 이그레트 독자님들, 해피 할로윈. ^-^ 그럼 월요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정성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0 / 0240 ---------------------------------------------- 5장. 성장통 툭.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아이의 금색 눈동자에서 흐른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의 뺨을 적신 눈물을 느끼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노인 이그레트가 흘린 눈물이었다. 그는 멍하니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아니. 아니다, 아가. 네가 정말 바랐던 건 그런 게 아니지 않누.” 그는 아이의 심정에 이상할 정도로 깊숙이 공명하고 있었다. 언뜻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의 표정 너머로, 실은 뜨겁게 울고 있는 이면이 있었다. 다른 누구도 몰랐지만 그 자신만큼은 알 수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지. 하나 사실은 말이다. ‘죽고 싶다’는 말은,” “…….”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이란다.” ‘쥬다스’는 생각했다. 분명, 생각했었다. 다른 삶이 주어진다면. 내가 이런 ‘실패작’이 아니라면. ―살고 싶어. * * * 각각 무예전과 연구물 발표회 순번표를 받고 나오던 에단과 바이칼은 교무처 입구에서 서로 우연찮게 마주쳤다. 둘은 잠시 갈등했다. 쥬다스라는 교집합으로 인해 안면도 트고 대화도 몇 번 해본 사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바이칼은 루바흐에서 발이 넓은 편이긴 했으나 이번 학기에 편입으로 들어온 에단과는 딱히 교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늘 중심이 되어주던 쥬다스가 없는 자리에서 둘이 덩그러니 마주쳐 봤자 그다지 나눌 대화도 없었다. 그래도 털털한 편인 바이칼이 먼저 어색하게나마 손을 들어 보였다. “여기서 보는군요. 그쪽은 무예전 신청?” “…….” 에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뚝뚝한 반응을 본 바이칼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어휴, 젠장. 이쪽도 어지간히 사교성 없는 자로군.’ 하여간 그 백로황자와 얽힌 인물치고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정작 그렇게 생각하는 바이칼 역시 다른 학생들 눈에는 충분히 황자와 얽혀 있었지만 본인은 겨 묻은 개 나무라기 바빴다. “그 왜, 대기 시간이 얼마 정도랍니까?” “……저녁.” “오늘 저녁이요? 전 무슨 내일 아침에 오라던데. 일찍 나온다고 온 건데도 사람이 많이 밀렸더라고요. 까딱했으면 참가도 못해볼 뻔했을 정도로.” “그랬군.” 기껏 어색하지 않으려고 말을 늘어놓은 바이칼이 도로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멋쩍게 한숨을 내쉬며 재차 입을 열었다. “뭐, 기왕 이렇게 뵌 거 점심이나 같이하시죠?” “……그러지.” 에단으로서도 딱히 거절할 이유 없는 제안이었기에 둘은 느긋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개인 숙소에서도 따로 메이드를 통해 식사를 주문해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교내를 돌아다닐 때는 보통 학식을 이용했다. 축제 기간이기도 하니 기존 학교 식당 외에도 요리 명인들이 펼쳐 놓은 간이식당이 추가로 들어서 있었다. 귀족 자제들의 입맛에 맞추어 고급 재료와 엄선된 메뉴만을 골라 내어놓는 이 식당들은 루바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돈도 노동도 필요 없다. 학생들은 전부 즐기기만 하면 되는 게 바로 이 축제의 메리트였다. “어어, 점심부터 느끼한 건 별론데. 담백한 쪽 어떠십니까?” “그게 좋겠군.” 두 사람은 의외로 취향이 잘 맞았다. 훈제오리 샐러드와 함께 새우, 전복이 들어간 면 요리를 느긋하게 즐기며 바이칼이 힐끔 에단을 쳐다보았다. 귀족식 식사가 아닌 학식 테이블이었음에도 에단의 식사 예법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같은 귀족이면서도 편안한 자리에서는 딱히 예법을 지키지 않는 바이칼과는 사뭇 차이가 나는 태도였다. 칼같이 절도를 지키는 에단의 모습을 질린 눈으로 쳐다보던 바이칼이 포크를 문 채 탁자에 턱을 괴었다. “흠. 시비는 아니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당신은 당최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충분히 시비같이 들리는데.” “아니라니까. 거 밥상머리에서 깐깐히 굴지 맙시다.” 학원 밖에서야 깍듯이 대해야 할 사이였지만 지금은 둘 다 학생이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 해도 바이칼은 그 정도가 늘 조금씩 과했다. 귀족이면서도 허례허식을 싫어하고 진솔한 성품을 가진 탓에 나오는 결과물이었다. 이로 인해 불이익을 받은 적도 있었으나, 그래도 루바흐에서 사귄 대부분의 친구는 바이칼의 이런 태도를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 그가 깐죽거리거나 툭툭 내뱉는 말들이 전부 신분을 의식하지 않고 편안하게 대해 준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정말 기분 나빠할 상이거나 그런 낌새를 보이면 바이칼도 태도를 고쳤다. 허물없는 말투는 그에게 있어 나름 친밀감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선 에단도 역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재미라. 확실히 무(武)에는 흥미가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향후 짊어질 것들을 위해 다방면적인 능력이 필요해. 여기선 이를 마련할 뿐이다.” “흐으음.” 바이칼은 물고 있던 포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렸다. “짊어질 것들? 알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데. 혹, 거기엔 쥬다스 님도 포함된 겁니까?” “……무례하군. 그분은 짊어져야 할 대상으로 볼 수 없다.” “예이, 뭐 그러시겠죠. 솔직히 그분이 요즘 많이 달라지신 거야 저도 인정합니다. 여러 모로 뛰어나신 듯도 싶고. 그 많은 재능을 전부 숨기고 있었다는 게 소름 돋을 정도…….” “해서, 묻고 싶은 건?” 탁. 에단이 식기를 단정히 내려놓으며 바이칼의 말을 잘랐다. 솜씨 있게 단면이 잘린 오리고기처럼 싹둑 말이 잘린 바이칼은 그를 따라 포크를 상에 내려놓았다. “아직 우린 주인을 선택하기에 어립니다. 또한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고작 열두 살의 작은 태양일 텐데요. ……그런 쥬다스 님께, 당신이 충성하려는 진짜 이유는 뭐지?” “…….” 그간 황자에 대해 별 생각 없어 보였던 바이칼이었으나 지금의 그 녹색 눈동자는 찌르듯 에단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에단에겐 별로 감흥을 주지 못했다. 에단은 아무에게나 자신의 결의를 흘리고 다닐 정도로 녹록한 이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네 응석은 실컷 받아주었으니, 이제 내 차례인 것 같군.” 대귀족 특유의 고압적인 말투에서 위압감이 흘렀다. 에단 헤이가는 무예를 숭상하는 공작 가문에서도 그 자질을 칭송받으며 자라난 소년이었다. 강도 높은 훈련에 익숙해진 육체는 강인했고 몸 곳곳 자리 잡은 근육 탓에 교복으로도 그 탄탄한 체형이 가려지지 않았다. 당연히 키도 또래에 비해 월등히 큰 편이었다. 그런 그가 일어선 탓에 바이칼은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왠지 모를 굴욕감을 느껴야만 했다. “아니, 제가 언제 응석 따윌.” “너는 그분의 적이 될 생각이 있나.” “허?” 바이칼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무심히 내려다보는 검은 눈동자에 짜증이 돋은 바이칼이 상대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누굴 반란 분자로 아나. 무슨, 쥬다스 님께 적? 그럴 힘도 없고, 또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별로 관심 없다고요. 나중에 루바흐를 졸업해서 성인이 된 후라면 모를까 뭘 벌써부터. 제가 물어본 건, 그냥 이 학교란 바닥이 워낙 하이에나 같은 족속이 많다 보니 그게 좀 신경 쓰이기도 하고 해서……!” “……꽤나 솔직한 성정이군. 쥬다스 님을 위해 신경 쓰는 충심은 잘 알아들었다.” “무, 무슨. 제가 언제 또 그렇게 말했다고!” 바이칼이 버럭 부정했지만 에단은 이를 귓등으로 흘린 채 허리에 차고 있던 검에서 손을 내렸다. 특수한 재능을 발굴하여 키워주는 인재 양성 학교인 만큼, 루바흐에서는 학생들에게 무기 소지를 허용했다. 어차피 날붙이가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남을 해할 수 있는 신분과 재능을 지닌 아이들이었다. 대신 서로가 귀한 가문의 후예인 만큼 남에게 상해를 입히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리 어린 학생들이라 할지라도 귀족의 긍지와 생존 법칙을 익혔기에 학생도 대부분 그 룰을 어기지 않으려 노력했다. 공공연히 이를 어기며 낮은 신분의 학생을 괴롭히는 일이야 일어났지만 무기를 사용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진 않았다. “아니라면 됐다.” “그러면서 검은 왜 잡았던 겁니까? 결투라도 신청하게요? 보다시피 전 학구파라서 몸 쓰는 일은 별롭니다. 마법이라면 모를까.” 에단은 사교에는 감이 떨어졌지만, 지금처럼 상대가 가진 역량이나 의지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는 굉장히 눈치가 빨랐다. 그가 보기에 바이칼은 정말 황자에게 적의가 없었으며, 오히려 걱정하기까지 했다. 잠정적 아군에게 날을 세울 필요는 없다. 에단은 나름 친절한 어투로 대답했다. “공부도 체력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양반이 진짜.” 둘이 티격태격거리며 식당을 나서는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나풀나풀 떨어져 내렸다. 바이칼은 자신의 머리 위로 툭 떨어진 종이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이건, 프리미어 페이퍼?” 축제를 예고했던 종이와 같은 재질이었다. 학원 루바흐에서 전교생에게 보내는 또 한 번의 메시지였다. 이렇게 연달아서 공지를 띄운 적은 드물었기에 바이칼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무슨…….” “공지 떴다! 공지! 긴급 경보령이래!” “사령술사가 나타났다는데? 그거 때문에 지금 제국이 온통 난리라나 봐!” 공지를 접한 학생들이 격한 반응을 보이며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에단과 바이칼은 프리미어 페이퍼에 적힌 사항을 동시에 눈으로 훑었다. [긴급] 엑스퍼트~제네럴급 사령술사 출몰 경보령. -사령술사의 행적이 곳곳에서 보고되고 있음. -정확한 등급은 미확인 상태. 최상급 사령 ‘본 드래곤’을 다루며 광역 사령술 등을 사용한 흔적으로 보아 최소 엑스퍼트에서 크게는 제네럴급 사령술사일 가능성이 높음. -2일 전, 투르케 사막 부족민 전멸이 보고됨. -이달 교황청을 습격했던 자와 동일범으로 추정. -현 소재지 파악 중. 미확인 상태. -외출 시 각별히 주의할 것. “……제네럴급 사령술사라고?!” 사령술은 전 세계에서 금지된 악마의 술법이며, 죽음을 매개로 힘을 얻는다. 그 힘이 크면 클수록 바쳐야 할 제물의 양도 늘어난다. 사령술사들이 다루는 사령이란 정령과 마찬가지로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계약을 나누며, 끝내 술사의 영혼을 놔주지 않고 소유하려 든다. 정신력이 약한 술사인 경우 자신이 부리는 사령에게 잡아먹혀 영원히 노예가 되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엑스퍼트에서 제네럴급은 어설픈 술사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엑스퍼트는 정령술사로 따지자면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까지만 되어도 어찌 손볼 만 했다. 그러나 제네럴은, 사령왕을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소유했다.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이 정도면 루바흐뿐 아니라 제국 전체에 경보령이 뿌려지기에 충분한 사안이다. 에단과 바이칼은 동시에 공지에서 시선을 떼고 서로를 마주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은 자연계4속성 + 물질계 + 동물계로 나뉘어집니다. 이 중 아벨의 정령은 물질계(거울)입니다. 제국 내에서 알려진 정령은 주로 자연계4속이고, 그마저도 술사가 희귀합니다. 아주 드물게 물질계나 동물계가 출현하곤 하나 아직 연구가 미진하여 그 정체를 '정령'이라고는 생각 못하고 기현상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와 함께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전부 본편안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물론 그리 골치아프게 진행되지 않습니다. 고구마는 초반에 충분히 드신걸로(...) <이그레트>는 호흡이 느린 장편으로, 함께 느릿하게 걸어주시면 됩니다 ㅎㅎ (1부 완결 전까지 프리미엄이나 노블 전환은 없을 예정입니다.) 11월의 시작입니다. 이번 한 달도 매일 잘 부탁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꾸벅)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1 / 0240 ---------------------------------------------- 5장. 성장통 같은 시각. 이사벨, 크리스티나와 함께 쓰러진 쥬다스를 황급히 양호실로 데려가 진찰을 기다리던 아벨도 공지를 읽고 있었다. “……!” 프리미어 페이퍼를 쥔 손이 덜덜 떨려왔다. 아벨은 공지를 읽고 또 읽었다. 틀리기를 바라며 반복적으로 읽던 그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거짓, 말.” 공지에는 그의 고향인 투르케 사막이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시선을 뗄 수조차 없었다. <투르케 사막 부족민 전멸이 보고됨.> ‘왜 하필? 이 투르케가 우리 투르케인가? 혹 다른 투르케 사막이 있진 않을까? 전멸이라면, 전부 다 죽…….’ 아벨은 그대로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쓰러지다시피 앉으며 대기실 의자 팔걸이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지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아니었다. 부딪힌 머리에서 스멀스멀 피까지 흘러내렸다. “저기, 다치셨어요! 괜찮아요?” 쥬다스의 상태가 좋지 않아 바쁘게 치료사를 도와 약품을 나르던 리이나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따끈하게 적신 물수건으로 피를 닦아내었지만 금방 또 얼굴선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 아벨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과 부족민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저기…… 요. 많이 아픈가요? 일단 제 치유술이라도.” 걱정스럽게 상처를 살핀 리이나가 치유력을 전달하기 위해 아벨의 손을 감싸려던 순간이었다. 팍! “……!” 아벨이 리이나를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놀라 넘어진 리이나를 멍하니 쳐다보던 아벨은 이내 비틀거리며 양호실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여전히 프리미어 페이퍼가 눈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루바흐는 축제 분위기에 더불어 사령술사에 관한 이야기로 완전히 달아올라 있었다. 누군가의 불행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이야깃거리였다. 겉으로는 걱정하는 내용이었지만 새로운 악의 등장에 대한 호기심과 흥미로 가득했다. “대박. 사막을 통째로 얼렸다는데?” “말도 안 돼! 그게 가능해? 사막이면 되게 뜨거운 곳 아니야?” “괜히 제네럴급이란 소리가 튀어나왔겠냐. 사령술사라잖아. 사람의 생기랑 영혼까지 탈탈 털어먹는 괴물이라고.”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걷던 아벨은 천천히 귀를 막았다. “……아니, 야. 그럴, 리가…….” 「…….」 그의 불안한 정신에 반응한 정령이 점차 형체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벨은 그 사실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불안해져 있었다. 그는 귀를 막은 채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거짓말이야. 그럴 리가 없어. 투르케가, 그런 식으로, 모두.” 두서없이 이어지던 중얼거림을 따라 정령의 형체는 점점 그 크기를 키워갔다. 우우- 우우우. 수백 명의 관중이 야유하는 것과 비슷한 소음이 흘러나왔다. 아벨이 불러낸 정령은 뚜렷한 형태는 없었으나 물을 부어놓은 모닥불처럼 매캐한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침 안개처럼 희끄무레하던 연기는 점차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정령이 소환자인 아벨의 감정에 감응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어? 저 자식 저거, 아벨 아니야?”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학생들이 그를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길 한복판에 쭈그리고 앉아서 뭐하는 거지. 어디 아픈가?” “알 게 뭐야. 기분 나빠.” 정령학 특기로 입학했으면서도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무능력자. 성적도 저조했고 성격마저 음울하여 그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그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데도 그냥 지나치고 지나갔다. 친한 사이도 아닌데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얽히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아벨은 흩날리는 종이와 그에 열광하는 군중 사이에 서서히 고립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 공지를 읽고 심각한 얼굴로 쥬다스를 찾아가던 에단과 바이칼도 그를 발견했다. 아벨을 알아본 에단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저자는.” “아는 사람입니까? 상태가 영 안 좋은가 본데.” 바이칼은 머뭇거리며 다가섰다. 귀를 막은 채 덜덜 떨고 있는 아벨의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봐, 괜찮은 거야?” “…….” 희게 질리다 못해 이젠 점점 새파랗게 혈색이 죽어가는 아벨을 훑은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뒤를 돌았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갔네. 거 그러고 구경만 하지 말고 부축하는 것 좀 도와주십쇼.” “……원래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가?” “댁이 스토킹 하는 누구 덕분에 오지랖 평수 좀 넓혔죠.”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래 다른 학생들과 두루두루 어울리고 다니던 바이칼이지만, 별 볼 일 없는 인물이나 흥미롭지 않은 대상에게까지 관대하게 대하진 않았다. 오히려 평균 이하의 성적을 내거나 한심한 작태를 보이면 하찮게 여기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그랬던 그가 생각의 한 축을 뒤집도록 만든 대상이 바로 백로황자였다.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누구에게나 발전할 기회가 있고, 변화할 가능성이 있다. 쥬다스는 바이칼이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길 계기가 되어주었다. ‘아마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였겠지.’ 예전 같았더라면 아벨을 도울 생각 따윈 하지 않았을 게 분명했다. 바이칼 역시 지금 모른 척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처럼, 아니,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비난을 퍼부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 생각하니 자연히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를 향해 혀를 쯧쯧 찬 바이칼이 아벨을 부축하기 위해 가방을 내려놓던 순간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마침내 새까만 연기로 형태를 이루어낸 정령이 섬뜩한 안광을 빛내며 포효했다. 「─────!」 쩌엉. 쨍그랑. 순식간에 주변에 늘어서 있던 교사(校舍)의 창문이 동시 다발적으로 깨어져 나갔다. 창문뿐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북적거리며 주변을 오가던 학생들 사이에서 한차례 비명이 쏟아졌다. “……뭐야?” “그자로부터 물러서!” 깨져 나간 유리 조각을 보며 주춤거리던 바이칼에게 에단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마구잡이로 크기를 불려 나간 정령이 어느 틈엔가 제멋대로 실체화를 하기 시작했다. 바이칼은 의아한 얼굴로 여전히 귀를 틀어막은 채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는 아벨을 부축해 일으켰다. “뭡니까, 갑자기 왜.” “……뒤!” “엥?” 에단이 굳은 얼굴로 검을 빼어 들며 짧게 소리쳤다. 그답지 않은 다급한 태도를 본 바이칼은 불길한 예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후욱. 꿀렁이는 그림자가 그의 머리 위를 덮었다. 현실감을 잃게 만드는 생김새에 바이칼은 영혼 없는 미소를 지었다. “……뭔 개뼉다구 같은.” 「그어어어―」 아벨이 소환해 낸 정령은 원래 무색, 무형에 가까운 존재였다. 자연계 4속성에 속하지 않으며 특수성을 띠고 있어 술사의 정신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도플갱어, 혹은 오토스카피(Autoscopy). 물질계 ‘거울’ 속성인 이 정령은 무엇이든 그대로 복제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갓 만든 밀랍인형처럼 흐물거리던 정령은 점차 뚜렷한 모습으로 굳어갔다. 정령이 카피한 대상은 바로 앞에 있던 바이칼이었다. 밤색 머리카락부터 루바흐의 교복까지 완벽히 재현해 낸 정령은 그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씨익. “……!” 웃는 얼굴마저 쌍둥이처럼 똑같은 모습이었다. 코앞에서 자신의 웃는 얼굴을 마주한 바이칼은 등골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바이칼의 모습을 본 딴 정령이 느릿하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손아귀에 모이는 마력을 눈치챈 바이칼이 바싹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사용하는 마법까지 복제했다고?” 딱히 드러내고 다닌 건 아니었으나 바이칼이 추구하는 학파는 주로 마법 계열이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선 시전 시간이 필요했다. 시전자가 미리 암기한 마법진대로 마력을 모아 재배열해야 하기 때문이다. 배열이 끝나면 시동어를 외치는 걸로 마법 발동이 이루어진다. 자신이 배운 마법이기에 마력이 배열되는 마법진의 형태를 알아본 바이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염 마법 ‘플레임 스트라이크’! 제길, 멈춰!” 시전 도중 마법진이 깨질 만큼의 방해를 받게 되면 마법은 중지된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이칼은 자신의 얼굴을 한 정령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까앙! “……!?” 사람의 피부가 아닌 유리 표면을 쳤을 때와 같은 타격이 되돌아왔다. 그 바람에 바이칼은 벌게진 주먹을 움켜쥐며 고꾸라졌다. 그 순간 정령이 시동어를 읊조렸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꽝 하는 우레 소리와 함께 불기둥이 치솟아올랐다. 바이칼이 서 있던 자리를 새까맣게 태운 화염은 작은 불씨를 남기고 마력을 다해 사라졌다. 에단의 도움으로 후끈한 열기를 간발의 차로 피한 바이칼이 쿨럭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폭발과 함께 아벨도 함께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뭐야, 저 괴물은!” “그는 정령술 특기생이다. 저것 역시 그가 불러낸 정령일 테지만.” 딱히 진짜로 물어보는 건 아니었으나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짐작한 에단이 주저앉은 아벨을 향해 턱짓하며 낮게 자신의 생각을 풀이했다. 바이칼은 황당한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정령? 아니, 그럼 왜 우릴 공격하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에겐 자신의 정령을 컨트롤할 힘조차 없는 모양이군.” 에단의 말대로였다. 지금 저 거울 속성 정령은 아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정령이 감응하는 건 아벨의 정서. 즉 절망과 분노, 비애였다. 이는 술사가 자신의 한계치 이상의 정신력을 소모할 경우 일어날 수 있는 현상이었으며 한마디로 제어를 잃은 정령의 폭주였다. 그리고 이 폭주가 오래 지속될수록 술사인 아벨의 정신은 망가져 함께 미쳐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사실까지는 모르는 에단은 차분히 검을 뽑아 든 채 정령을 응시했다. 아마 소란이 일어났으니 경비가 달려오겠지만, 일단은 이대로 정령의 폭주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에단은 검을 바로 잡으며 한 발짝 다가섰다. 「…….」 바이칼의 모습을 한 정령은 에단의 접근을 인식하고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스르륵 모습을 변형시켰다. “……저놈의 능력은 ‘복제’인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악취미로군.” 이번에는 에단의 모습을 똑같이 본 딴 정령은 검은 기운을 넘실거리며 이를 드러내 웃었다. 정작 정령을 소환해 낸 아벨은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가도 인지하지 못하고 눈과 귀를 틀어막고 있었다. 정령은 에단과 같은 검을 들어 그를 겨누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검을 겨누기라도 하듯, 두 에단은 서로를 향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포즈로 서 있었다. 탓! 그리고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그레트>는 제가 판타지를 좋아하기에 쓰는 글입니다. 뭘 바란다기 보단...ㅎ 제 상상 속의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자급자족이라고나 할까요. 단지 선취지에 비해 생각보다 많은 관심을 받다보니 가끔씩 격한 비난코멘트들이 들어옵니다. 그럴 때면 상당히 기운이 빠지곤 합니다...만, 이도 당근과 채찍의 일부라 생각하고 힘내야겠지요! 지금의 연재경험을 양분으로 차기작에선 좀 더 짜임새있는 글을 쓰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ㅎㅎ 그냥, 제 글을 읽으시는 독자님들이 잠깐이나마 즐거웠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제 유일한 바람입니다. (참! 주인공 이름은 egret(왜가리/백로)와 regret(후회) 두 단어에서 따왔습니다. ...야구르트 아닙니닷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2 / 0240 ---------------------------------------------- 5장. 성장통 쥬다스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이 타는 듯이 뜨거웠다. 목과 코를 드나드는 숨이 한겨울 북풍처럼 차다가도 내쉴 때는 불길처럼 뜨겁게 달궈져서 나갔다. ‘이그레트’로 살았을 적에조차 겪어본 적 없는 고통이었다. 「이그레트, 정신이 들어?」 유니가 그의 이마 위에 주저앉아 걱정스레 말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쥬다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유니는 파다닥 날아올라 그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지금 상태가 많이 나빠. 좀 더 쉬어야 해.」 「웅, 웅. 누워 있으라요.」 그가 덮고 있던 이불 위에서 뒹굴고 있던 토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쥬다스가 정신을 잃은 동안 내내 포근히 감싸주고 있던 루니는 그저 자세를 유지한 채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응시할 뿐이었다. 세 정령이 각자 나름대로 표현하는 걱정에 쥬다스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은은히 미소 지었다. “고맙구나.” 「목도 아플 텐데 그냥 말하지 마. 응?」 “…….” 확실히 소리를 낼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오랜 세월을 지내오고, 심지어 죽음까지 경험한 그였기에 겉으로나마 차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지금 정신을 차리고 앉아 있는 일 자체가 불가능했다. 온몸의 뼈가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뼈대와 살점이 빠르게 그 크기와 구성을 달리하는 중이었다. 평범한 인간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으나, 쥬다스는 담담한 얼굴로 이를 인내했다. 쥬다스는 주변을 살짝 둘러보곤 자신이 실려 온 장소가 익숙한 곳임을 눈치챘다. 최근 봉술 수업을 마친 뒤면 늘 제집처럼 드나들던 양호실이었다. 「좀 더 쉬어. 너 지금 일어나면 힘들단 말이야.」 「그래, 자고 일어나면 한결 나아질 거다.」 「이그레트, 아픈 거 싫다요.」 정령들은 그가 다시 잠들길 바랐다. 아무리 지금 느끼는 고통이 성장을 위함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쥬다스가 고통을 겪는 자체를 막고자 했다. “-유니.” 하지만 정작 쥬다스는 다시 잠들 생각이 없었다. 정령들이 그에게 예민하게 반응하듯, 그 역시 날 때부터 정령을 예민하게 느끼는 존재였다. 그의 귀에는 자신의 세 정령 외에, 또 다른 생소한 정령의 울부짖음이 선명하게 들리고 있었다. ‘……저건, 진정시키지 않으면.’ 정령의 폭주는 곧 술사의 정신 붕괴로 이어진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쥬다스는 도저히 그 울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후웅. 침대에 앉아 있던 그의 몸을 청량한 바람이 휘감기 시작했다. 일단 술사가 바란 이상, 정령인 유니는 그의 소망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쥬다스를 바라보던 유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녹색 바람을 일으켜 그를 감싸 안았다. 팟! 바람의 정령술사가 사용하는 이동술, ‘바람의 인도’였다. 쥬다스는 바람에 휩싸여 순식간에 종적을 감추었다. “열이 이대로 더 오르면 곤란해. 얼음은 너무 차가워서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 미지근한 물주머니를 올려놔. 그리고 일단 리이나 네가 치유력을 최대로 불어넣고……!” 리이나에게 지시를 내리며 다급하게 상태를 보러온 치료사가 우뚝 자리에 멈춰 섰다. 텅 비어 있는 양호실 침대를 멀거니 내려다본 치료사는 한숨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황자 전하, 도대체 그 몸으로 어딜 가신 거랍니까?” 아직 온기가 남은 이불만이 침대 위에 덩그러니 구겨져 있을 뿐이었다. * * * 두 에단은 빠른 속도로 맞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정신없이 펼쳐지는 근접전에 지켜보던 바이칼로서는 이제 누가 진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는 에단이 가문에서 훈련받은 검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 과연 인재라 불릴 만한 자임을 깨달았다. 마법으로 지원을 하고 싶어도 워낙 뒤엉켜 싸우고 있기도 했고, 또 자칫 같은 편을 공격하게 될까 염려되어 바이칼은 두 손을 놓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령과 검을 맞댄 에단은 힐끗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공격을 하면 나도 함께 피해를 입는 건가?’ 몇 번 합을 주고받는 사이, 정령의 팔을 살짝 그었었다. 본래는 잘라내려던 게 그 출중한 검술 실력마저 카피해 낸 정령 탓에 살짝 베는 수준에 그쳤다. 단단한 유리를 긁듯 흰 가루가 흩날렸고, 동시에 에단 자신의 팔에도 따끔하며 검상이 생겨났다. 마음 놓고 공격하기도 애매한 상대였다.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꽉 쥐었다. ‘설마 저 정령은 술사를 처리해야만 사라지나.’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아벨을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의미한 합이라는 건 알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기에 에단은 다시 검을 고쳐 잡고 정령과 맞부딪쳤다. 그를 보며 난감한 표정으로 손을 쥐락펴락하던 바이칼의 시야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는 아벨이 들어왔다. 바이칼은 황급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봐! 정신 차려. 저거 네 정령 맞지?” “…….” “젠장,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 엉?” 호통을 쳐도 소용이 없자, 바이칼은 상대의 어깨를 우악스레 움켜잡고 흔들었다. “이러다 누구 하나 다치기라도 하면 너 인마, 퇴학이야! 정신 좀 차리라고!” ‘퇴학’이란 말에 그제야 아벨의 고개가 천천히 들려졌다. 넋이 나간 얼굴로 바이칼을 올려다본 아벨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안 돼.” “뭐?” “모두 내게, 기대를, 걸고 계셨는데.” 바로 눈앞에 둔 바이칼이 아니라 아주 먼 곳을 바라보듯 아벨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벨은 귀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내리며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다 상관없어졌어. 이제 돌아갈 곳이…… ‘투르케’는, 이 세상에, 없어.” “‘투르케’? 너 설마 고향이.” “흐…….” 사람이 너무 큰 슬픔과 맞닥뜨리면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아벨은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멍하니 자신이 소환한 정령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술사에게 접근한 바이칼을 알아차린 정령이 에단에게 겨누고 있던 검을 회수하며 돌아섰다. “……분해.” 「억울해.」 아벨의 말을 따라 정령이 함께 입을 열었다. “허무해.” 「전부 의미 없어.」 “왜지?” 「다른 녀석들은 오늘도 평범한 하루인데.」 정령은 완벽히 아벨의 감정을 투영해 내고 있었다. 에단의 모습을 한 정령이 읊조리는 말은 바이칼에게도 똑똑히 잘 들렸다. 오갈 곳 없는 분노와 슬픔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아벨이 쉰 소리로 말을 맺었다. “……왜, 하필 나야…….” 쉬익. 급격하게 소용돌이치는 술사의 감정에 공명하느라 움직임을 멈춘 정령을 향해 에단이 날카롭게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어깨를 노린 깔끔한 공격이었다. 정령은 여전히 접근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에단의 검이 정령에게 닿으려는 순간, 그들 사이에 나타난 소년이 맨손으로 그의 검을 쳐 냈다. 텅! 사람의 손과 날붙이가 맞닿은 것치곤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튕겨져 나가는 검을 재빨리 회수한 에단이 소년을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쥬다스 님?” 긴 은발이 녹색 바람결을 머금고 어지럽게 흩날렸다. 자애로운 빛을 담은 금안은 그에게 익숙한 것이었지만, 어딘가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쥬다스는 그의 검을 쳐 낸 손을 천천히 내렸다. 에단은 그 손끝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물인가.’ 푸른 물이 쥬다스의 손을 글러브처럼 감싸고 있었다. 단순한 물은 아니고 정령의 힘이 작용하여 응집력이 견고해진 상태의 물이었다. 아마도 저것이 손을 보호해 주면서 검을 튕겨낼 정도의 장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진정하련, 에단. 이 아이는 거울의 정령이니 섣불리 공격해서는 안 된단다. 품고 있는 성질이 말 그대로 ‘거울’이나 다름없으니, 무슨 충격을 가하든 고스란히 네게로 되돌아갈 것이야.” “……감사합니다. 한데 괜찮으신 겁니까?” 쥬다스가 난입한 이유는 에단이 반사된 공격을 받지 않도록 그를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이를 깨달은 에단이 감사를 표하며 동시에 쥬다스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다. 쥬다스는 양호실에서 지급된 새하얀 환자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더해 온몸에 열이 끓어올라 식은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앞머리를 축축하게 적실 정도로 흐른 땀방울이 턱 끝까지 흘러 방울졌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매우 나빠 보이는 행색이었으니 에단의 걱정은 당연했다. 하지만 때가 영 좋지 않았다. 스스슷. 거울의 정령은 순식간에 제 앞을 막아선 쥬다스의 모습으로 복제해 냈다. 황조 적통을 상징하는 은발과 금안조차 똑같이 재현되었다. 이를 본 쥬다스는 꿈에서 본 과거의 ‘쥬다스’를 기억해 내고 살짝 표정을 굳혔다. “아이야, 네가 그럴수록 아벨은 더욱 힘들어할 게다.” 「이미 나락이야.」 정령은 무감정하게 속삭였다.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완전히 전이당했군.’ 술사의 감정이 정령을 지배한다. 이제 저 거울의 정령은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쥬다스의 모습을 베낀 정령이 손바닥을 펼치자, 그 안에 녹색 바람이 몰려들었다. 그가 다루는 바람의 정령왕 유니의 힘이었다. 겉모습뿐 아니라 가지고 있는 능력까지 완벽하게 복제할 수 있는 정령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쥬다스였으나, 그는 큰 감흥 없이 가만히 턱을 짚었다. “흠…….” “정령이 다른 정령의 힘도 복제할 수 있는 겁니까?” “거울에 편파가 있겠느냐. 상에 비친 것이라면 무엇이든 똑같이 만들어낼 수 있을 터. 또한 가해진 충격도 고스란히 반사해 낼 수 있으니 이것 참. 까다로운 상대로구나.” 말은 그렇게 했어도 쥬다스의 표정에선 긴박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여유를 확인한 에단은 들고 있던 검을 도로 조용히 갈무리했다. 바로 코앞에서 바람의 기운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흔들림 없는 결단이었다. 그만큼 에단이 쥬다스를 신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벨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바이칼이 당황하여 외쳤다. “위험합니다!” “괜찮다, 바이칼. 너는 아벨 그 아이가 다치지 않게 데리고 물러서주겠느냐?” 힘 있는 금안과 마주한 바이칼은 뭐라 더 따지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는 멍하니 넋이 빠진 아벨을 끌어다 뒤로 옮겨 놓았다. 자신의 술사를 건드린 걸 알아차린 거울의 정령이 휙 그쪽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사납게 날뛰며 그쪽으로 몰려들었다. “……!” 찢어발길 기세로 바이칼을 향해 달려드는 바람은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바이칼이 놀라 눈을 부릅뜨는 순간, 달려들던 바람이 우뚝 허공에 정지했다. 파스슥. 바람은 그대로 산산이 허공에 흩어졌다. 공격에 실패한 정령이 분노가 깃든 눈으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 이상은 곤란하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본래 이번 화에 썼던 후기는 너무 우울(..)하여 삭제하였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과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3 / 0240 ---------------------------------------------- 5장. 성장통 「복제품은 진품을 이길 수 없는 법이거든. 오랜만에 만난 건 기뻤지만, 이건 엄연히 하극상이라고. 어디서 함부로 내 힘을 흉내 내려 들어?」 유니는 팔짱을 낀 채 헹 콧방귀를 뀌었다. 정령왕인 그녀와 달리 거울의 정령은 그저 물질계에서 파생된 특수체일 뿐이다. 자연계 정령과는 달리 각 특성마다 개체수가 한 개뿐인 물질계 정령이었지만 그들에게도 분명 계급은 존재했다. 일단 물질계는 자연계 정령왕보다는 계급이 낮았다. 정령왕의 지배하에 있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건 아니었다. 자신보다 높은 등급의 힘을 흉내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자연계 법칙상, 그가 바람을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보다 정령왕의 의지가 앞섰다. 그러므로 이 자리에서 쥬다스의 모습을 취한 건 명백히 거울 정령의 실수였다. 만일 눈앞에 본체가 없다면 그 힘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안타깝게도 쥬다스는 그 앞에 있었고 더 이상 폭주를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토니.” 쥬다스가 팔을 내젓자, 땅에서 휘리릭 솟아오른 나무뿌리가 거울 정령을 칭칭 옭아매었다. 「……!」 거울의 정령이 풀어내려 발버둥 칠수록 뿌리는 더욱 거세게 그를 휘감았다. 움직임이 포박당한 정령에게 쥬다스가 천천히 다가섰다. “미안하구나. ……잠시 잠들어줘야겠다.” 「싫어. 괴로워. 아파.」 「……너 말이야. 그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아줄래?」 유니가 쥬다스의 얼굴로 고통을 호소하는 정령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토니와 루니도 이에 동조했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다요.」 「진짜에겐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투정이로군.」 「아무튼, 좋은 말로 할 때 얌전히 굴어. 지금 이그레트도 상태가 안 좋단 말…….」 「싫어!」 콰아아! 거울의 정령을 중심으로 바람과 물이 뒤섞여 요동쳤다. 심지어 이번엔 토니의 힘마저 복제하여 땅이 지진이라도 난 듯 우릉 울렸다. 흔들리는 대지 위로 바람과 뒤섞인 물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흡사 용트림하는 토네이도를 보는 듯했다. 강력한 돌풍에 의해 유리 조각이 휩쓸려 날아올랐고 갈라진 땅 사이로 뜨거운 증기가 산화하기 시작했다. 마법진도 제물도 필요 없다. 술사의 바람만 있다면 자연의 모든 정령이 그의 의지대로 움직였다. 그 뜻이 살육과 파괴에 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주변의 학생들이 죄 도망가서 없었기에 망정이지 자칫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다루는 힘이 만들어내는 자연재해를 가만히 응시했다. 거울은 비치는 자의 모든 것을 흉내 낸다. 흉내 낸 힘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루는 4속성 정령왕의 힘은 어마어마한 효과를 내보였다. 오용되거나 남용되어서는 안 될 힘이었다. 쥬다스는 그 사실을 다시금 체득하며 정령에게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있어선 날뛰는 자연현상도 전혀 위협이 아니었다. 마치 폭풍의 눈처럼 쥬다스가 향하는 자리에는 한없는 고요가 흘렀다. 거칠게 폭주하는 정령을 물끄러미 바라본 쥬다스가 손을 들어 올려 그 이마를 톡 짚었다. “잠들어라-” 뚝. 모든 자연현상이 멈추었다. 동시에 쥬다스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정령은 흐물흐물 녹아 다시 본래의 뿌연 연기처럼 되돌아가 버렸다. 쥬다스가 강제로 술사와 정령의 공명을 끊어버린 탓이었다. 정령의 실체화가 풀리면서 술사인 아벨도 함께 정신을 잃었다. 쓰러진 아벨을 붙들고 앉은 바이칼이 묘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3속성?” 순간이었지만 분명 지진이 일어나며 땅에서 나무줄기 같은 게 솟아올랐었다. 정령에 대해 잘 모르는 바이칼이었어도 땅을 울리고 나무를 조종하는 힘이 물이나 바람 속성이 아니란 사실 정도는 쉽게 유추해 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 힘을 목격한 에단은, 그보다 다른 의미로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쥬다스 님, 그 모습은.” “왜 그러는고?” 쥬다스가 평소처럼 웃으며 에단을 돌아보았다. 어느 틈엔가 바닥에 질질 끌리던 환자복이 무릎께까지 올라와 있었다. 마냥 아이 같던 얼굴도 턱 선이 날렵해지고 묘하게 윤곽이 뚜렷해져 좀 더 사내다운 인상을 풍겼다. 한참 내려다 봤어야 할 키가, 이젠 제법 또래라고 볼 수 있을 만큼 자라있었다. 15살인 에단에 비하면 아직 작은 편이었지만 분명히 전에 비해 자라난 모양새였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순식간에 이루어진 변화에 에단이 천천히 그 앞에 무릎 꿇었다. “…….” 놀라야 하는 건지, 경위를 물어야 할지, 그도 아니면 걱정해야 할 지 통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에단은 백로황자에게 남겨졌던 단 하나의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음을 알았다. “감축드립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희미하게 마주 미소를 짓던 쥬다스는 이내 다시 정신을 잃었다. 풀썩 쓰러지는 몸을 붙들어준 에단이 황급히 그 안색을 살폈다. 그동안 평온한 표정으로 견딘 것이 무색할 만큼 입술이 파랗게 질렸다. 정신을 놓는 순간까지 꽉 다물고 있던 잇새에선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무리 정신력이 강하다 한들 쉬이 견디기 힘든 끔찍한 고통이 쥬다스의 전신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곧장 경비대가 달려왔다. 거울의 정령을 직접 대면한 건 에단과 바이칼, 쥬다스뿐이었기에 경비대는 갑작스러운 소동의 근원을 정확히 짚어내진 못했다. 다만 정령술의 자질을 가지고 있던 아벨이 폭주했다는 사실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정령술 특기생? 위험했군.” 들것에 실려 가는 아벨을 빤히 쳐다보던 경비 대장이 혀를 찼다. 루바흐의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대는 엄선된 실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무예가는 물론이고 마법사와 치료술사가 적절히 배치된 조합이었다. 이들은 지금처럼 이능을 가진 학생이 폭주하는 상황을 종종 보아 왔다. 그럴 경우 진압하는 과정에서 대원이 심하게 다치거나 폭주한 학생을 다치게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상황을 기록하는 경비 대장의 눈이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 이내 손을 들어 대원들에게 확인했음을 알렸다. 정황을 파악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쓰러진 학생들의 안전이 우선이었다. 사인이 떨어지자 쥬다스는 아벨과 함께 다시 양호실로 옮겨졌다. 그로부터 하루가 꼬박 지난 후에야 쥬다스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끔찍했던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그전보다 훨씬 가벼운 느낌마저 들었다.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뼈마디가 뻐근한 걸 빼면 컨디션이 아주 좋았다. 쥬다스가 몸을 일으키자 마침 그를 간호하고 있던 리이나가 활짝 웃으며 따뜻한 물이 담긴 컵을 건네 왔다. “일어나셨어요? 열은 밤새 내렸지만 언제 또 상태가 악화되실지 몰라서……. 아직 아픈 곳이 있나요?” “으음, 지금은 아주 기운이 넘친단다. 고맙구나.” “아.” 리이나는 순간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쥬다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원래도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였지만, 몸이 자란 지금은 유아적인 인상을 벗어나 확실히 어른스러운 면모가 부각되었다. 선한 기운을 담은 금안이 잘 닦인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아직 12살 소년일 뿐이긴 했으나 10살 리이나에겐 충분히 선배다운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리이나는 어쩐지 다른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가 그리 생각한 것이 민망해져서 배시시 웃었다. “헤헤, 다행이에요. 그, 일단 다른 치유술사 선생님들이 오셨는데…….” “깨어나셨군요. 기분은 좀 어떠십니까?” 기록 차트를 들고 들어온 중년 남성이 치유술사 특유의 붉은 가운을 펄럭이며 쥬다스 앞에 섰다. 가운에는 황실의 문양이 박혀 있어 그가 황궁에 소속된 치유술사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쥬다스가 문양에 시선을 주자 치유술사는 짧게 헛기침을 하고 침대 앞 간이의자에 걸터앉았다. “제 이름은 루카스 오웬, 황궁 소속 최고위급 치유술사입니다. 지난 이틀간 황자 전하의 몸에서 급격한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멈추었던 성장을 단 이틀 밤 만에 재생하는 일은 기록에 없어 대처가 늦었습니다. 면구스럽습니다.” “고맙네. 경과가 어찌 되었든 지금은 이리 건강하지 않은가.” 상대가 그를 ‘황자’로 대우했기에 쥬다스 역시 그에 알맞은 예법을 취했다. 품격 있는 어투와 부드러운 눈빛을 마주한 치유술사 루카스가 의외라는 시선을 보내며 말을 받았다. “……예, 말씀대로 현재는 전에 비할 데 없이 건강하시며.” 잠시 뜸을 들인 치유술사는 쥬다스의 손을 잡아 상태를 가늠했다. 리이나로부터 늘 받아오던 것과 같은 분홍색 기류가 손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루카스는 붙들었던 손을 다시 놓아주며 편안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에 본래 갖추어야 할 체격을 온전히 되찾으신 상태로 보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정상적인 속도로 발달하실 것입니다. 감축 드리옵니다, 전하.” 「다행이야, 이그레트!」 유니가 포르륵 날아 그의 볼을 껴안고 부비작거렸다. 쥬다스는 그런 유니를 부드럽게 감싸 손바닥 위에 올려두었다. 잠시 그 주변으로 청량한 바람이 머무는가 싶더니 유니의 모습이 실체화되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한 유니를 발견한 치유술사가 눈을 크게 떴다. “……맙소사, 정말로 정령이군요! 하면 소문대로 전하께오선.” 파앗. 보글거리는 맑은 물거품 소리와 함께 루니도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황자를 감싸듯이 곁에 붙어 있는 푸른 늑대의 형상까지 똑똑히 확인한 치유술사 루카스의 표정은 경탄과 두려움, 안도가 뒤섞여 복잡한 모양새가 되었다. “루카스 경, 황실 소속의 치유술사인 자네가 파견된 이유 중에는 아마 나에 대한 경위 보고도 있겠지.” “……!” “기왕지사 확실하게 보고 들은 바를 전하게. 그 편이 필요한 바를 적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터이니.” 루카스는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빙그레 웃어 보인 쥬다스가 이내 이불을 걷고 일어나 땅에 발을 디뎠다. “또한, 곧 부름에 응하겠다는 뜻도 함께 전해 주게나.” “명을 받듭니다.” 따라 자리에서 일어선 루카스가 진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자리에서 물러남과 동시에 또 다른 손님들이 쥬다스를 찾아왔다. “쥬다스 님, 상태는 어떠신지……!” 눈을 뜨자마자 세 번째로 듣는 같은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쥬다스는 허허로이 웃으며 대꾸해 주었다. “말짱하이. 너희에게 걱정을 끼친 모양이로구나.” 척 듣기에도 생기 있는 목소리에 에단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그와 함께 찾아온 바이칼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당신이라면 멀쩡히 일어나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딱히 걱정 같은 건.” “허허. 믿어주어 고맙다, 바이칼.” “……아니, 제가 또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요.” 그렇게 툴툴거리기는 했으나 바이칼 역시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는 쥬다스의 곁에서 실체화하고 있는 유니와 루니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이 둘이 정령왕이란 사실까진 모르고 있었지만 언제 보아도 경이로운 감정이 찾아왔다. 바이칼이 병실 안을 힐끔 훑으며 운을 떼었다. “그런데…….” “찾는 것이라도 있느냐?” “어, 음.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말이죠.” 쥬다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에단 역시 말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내심 궁금했던 부분이었기에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 화에 보내주신 응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정말, 정말로 위로가 많이 되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로 심려끼쳐드리지 않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꾸벅) 그리고 담당자선생님과 상의한 결과, '종이책 출판'을 겸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본래 했던 계약을 통째로 뒤집는 이야기였던지라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는데 흔쾌히 OK싸인을 주셔서...ㄷㄷ (담당자님, 혹 보신다면.. 사...사랑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글이 아직 초반부인만큼 일정은 어찌될 지 모르겠습니다. 때가 되면 다시 따로 공지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4 / 0240 ---------------------------------------------- 5장. 성장통 “그게, 하나 더 있지 않았습니까? 정령이요.” “토니를 말하는 게로구나.” “……역시 있었습니까?!” 분명 그 힘을 목격하긴 했어도 한 사람이 듀얼을 넘어 3속성 정령과 계약했다는 일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현자 이그레트가 아닌 이상에야 불가능한 일이……!’ 두 눈으로 봐놓고도 긴가민가하던 바이칼이 경악하여 입을 헤벌렸다. “어, 아니, 그럼 쥬다스 님은 자연계 정령 3속성을. 그러니까 트리플 서머너(Triple-Summoner)라고요?!” “호오, 그렇게 되는구만.” 정확히는 트리플이 아니라 쿼드(Quard)였지만. 쥬다스는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 주지 않았다. 이 두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힘을 보여도 괜찮겠다는 판단하에 토니를 다루긴 했으나 모든 걸 내보일 필요는 없었다. 너무 큰 힘은 도리어 인간관계를 좀먹을 수 있다. 어쨌든 그가 땅, 물, 바람 3속성을 다루는 정령술사인 건 맞으니 거짓은 아니었다. “대체…….” 바이칼이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듯 멍하니 되물으려 했지만 그 전에 쥬다스가 먼저 고개를 저어보였다. “그 얘기는 나중에. 찾아온 손님이 더 있구나.” “예?” 똑똑.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양호실이긴 해도 학원 루바흐의 시설인 만큼 개인 병실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이를 쥬다스가 사용 중이었다. “학생부에서 나왔습니다.” “들어오십시오.” 상대방은 쥬다스의 허가를 듣고 나서야 문을 열었다. 평범한 갈색 머리에 훤칠한 체격을 가진 청년이었다. 나이는 올해로 스물한 살이었으며 시력이 매우 나빴기에 마법으로 도수가 조절된 파란색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 앞으로 다가온 청년은 예의바르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학우 여러분. 저는 학생 부장 ‘사무엘’입니다.” “반갑습니다. 쥬다스입니다.” “……에단입니다.” “바이칼입니다.” 세 사람과 눈을 맞추어 인사를 나눈 학생 부장 사무엘은 본격적인 화두를 꺼내기에 앞서 일단 쥬다스의 안부를 물었다. 짧지만 기분 좋은 대화가 오가고 난 뒤, 그는 뜸 들이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여러 정황상 ‘아벨 투르케’의 정령 폭주가 확실해 보이긴 합니다만 정확한 목격자 진술이 필요하여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루바흐는 사립 기관이 아니라 루바르잔 제국에서 직접 세워 관리하고 있는 공립 시설이었다. 그리고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주로 이 학생부에서 처리했다. 루바흐의 사건이라 함은 귀족 학생들이 대상이다 보니 사안이 커질 경우 학생부에서 개요를 정리해 재판부나 국무부로 넘긴다. 일단 아벨이 폭주한 사건은 재판을 받거나 국무로 처리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기에 아벨은 이미 망한 것과 다름없는 투르케 출신이었고, 또 교정이 파괴된 것 외엔 별다른 인명 피해가 없었다. 물론 학생부라고 해도 학생들이 운영하는 부서는 아니었다. 루바흐를 졸업한 학생들 중 성적 우수자를 선별하여 부서에 채용했다. 대략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졸업생이 학생부에 소속되었다. 학생부 출신의 인재는 그 우수성을 인정받아 새 작위에 봉해지거나 황실 특사에 임명되어 중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학생부란 장래 고위직이 약속된 유능한 인재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이었다. “요는, ‘프리미어 페이퍼를 통해 고향의 전멸 소식을 접한 아벨 투르케가 이를 비관하여 이성을 잃고 자신의 정령을 폭주시킨 것’. 맞습니까?” “과연. 눈에 보인 바를 정확히 압축시킨 명료한 정리입니다.” “……‘보인 바’라 하심은 여기에 부족한 점이 있습니까?” 학생 부장인 사무엘은 대답을 듣자마자 쥬다스가 다른 얘기를 하고자 함을 간파해 냈다. 학원 루바흐를 엘리트로 졸업한 선배답게 작은 단서도 놓치지 않았다. 쥬다스는 제 손바닥에 앉아 있던 유니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술사와 계약한 정령은 전적으로 술사의 뜻에 따릅니다. 고의로 바라든, 무의식중이든 술사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지.” 쥬다스가 살짝 손짓하자 물거품을 실은 녹색 바람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곧 병실 천장에 작은 구름이 안개꽃처럼 피어났다. 그 구름에서부터 물거품이 둥실둥실 비 대신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과 바람의 합동 정령술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경이로운 광경에 사무엘은 물론이고 에단과 바이칼도 신기한 시선으로 흩날리는 물거품을 쳐다보았다. 톡.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물거품을 하나 터뜨렸다. 바다 속이라도 여행 온 기분이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세 정령의 시선은 늘 쥬다스를 향해 있었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지는 계약을 맺은 이상, 정령은 언제든지 술사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마치 본능과도 같은 귀속 관계였다. 이를 몸소 체험한 사무엘은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그러니 이번 사건도 역시, 그가 의도했던 그렇지 않았던 간에 자신에게 고통을 느끼게 하는 세계를 전부 파괴하길 바랐다고 볼 수 있겠군요. 맞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단호히 고개를 젓는 황자를 보며 사무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쥬다스는 그가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에 대해 알려주었다. “아벨 투르케는 자신의 정령을 불러내는 데엔 성공하였으나 계약하지 못했습니다.” “……계약을, 하지 못했다?”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불안정한 상태의 정령은 술사의 감정에 크게 좌우됩니다. 원인은 아벨 투르케가 맞으나, 결코 그가 바라서 저지른 일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짧게 침음한 사무엘은 안경테를 만지작거렸다. ‘무의식중에라도 술사의 의지를 따른 정령’과 ‘술사의 의지가 아닌 정서에 반응해 멋대로 날뛴 미계약 상태의 정령’은 분명 차이가 있었다. 아벨 투르케에게 죄가 있다면 정령을 현계에 불러낸 데에 있었다. “…….” 사각사각. 병실 안에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술서를 작성하는 펜만이 침묵을 흐트러뜨리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기록을 마친 사무엘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같은 정령술사이신 쥬다스 님의 증언이니 참고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능을 가진 학생이 힘의 컨트롤에 실패하여 사건을 일으킨 이런 경우는 우리 루바흐에서 꽤 흔합니다. 의지 여부를 떠나 정령을 움직인 건 그의 힘이므로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떤 것을 말입니까?” 이대로라면 아벨은 죄인이 되지 않더라도 퇴학 조치가 내려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간 성적이 우수했던 편도 아니었던 데다 정령술 특기생으로 입학한지 3년이 넘도록 성과를 보이지 못했던 학생이었다. 게다가 이번 사건으로 결국은 학교 건물 하나를 못 쓰게 만들고 교정을 망가뜨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리고 이를 덮어줄 가문과 재력도 이젠 없었다. 투르케 사막이 멸망한 지금 아벨은 더 이상 귀족 자제라 보기도 어려웠다. ‘이능 중에서도 훈련이 불가능한 정령술사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나 다름없다.’ 이건 루바흐의 학생부뿐 아니라 인재를 원하는 권력층의 지배적인 생각이었다. 희귀한 정령술의 자질이 있어도 써먹을 수 없으면 골칫덩이일 뿐이다. 그런 학생 부장의 고뇌를 단박에 날려주는 대답이 들려왔다. “처분이 난 후, 그 아이의 소재를 제가 맡고자 합니다.” “……말인즉, 황자 전하께오서 아벨 투르케를 거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조심스럽게 되묻는 말에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일개 학생으로서 한 말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오갈 곳 없어질 아벨을 1황자가 직접 거두어 지원하겠다는 뜻이었다. 사무엘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발톱을 드러냈다 하더니 드디어 자기 사람을 만들기 시작하시는 건가. 그렇다 해도 왜 하필 망한 영토 출신에 이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한심한 자를.’ 그렇지 않아도 평판이 밑바닥에 가 있는 황자였다. 만일 거둔 이가 문제를 일으킨다면 그 허물을 전부 쥬다스가 뒤집어쓰게 되는 만큼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어쩌면 저 황자의 눈에는 누구도 보지 못한 아벨 투르케의 잠재력이라도 보인 것일까. 사무엘은 복잡한 생각을 머리 한 구석에 밀어두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뜻대로 하십시오. 아벨 투르케의 처분이 결정 나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학생 부장이 병실을 떠나자 에단과 바이칼은 나름대로의 상념에 빠져 침묵을 지켰다. 우선 쥬다스가 가지고 있다는 3속성 정령의 힘, 그리고 그 힘이 각각 어느 정도일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었다. 거울의 정령이 카피했던 힘만 보더라도 일단 평범한 비기너 수준은 아니었다. ‘뚜렷한 형태를 갖추며 그 정도 파괴력. 그렇다면 물과 바람은 적어도 상급 정령 이상의 힘……. 땅은 제대로 못 봐서 모르겠네.’ 정령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는 바이칼로선 여기까지가 추측의 한계였다. 어쨌든 12살이란 어린 나이에 자연계 정령을 3속성이나 다룬다는 점에서 이미 황자는 보통 재능이 아니었다. 「나도 실체화하고 싶다요!」 바이칼이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아쉬워하는 대상인 땅의 정령왕 토니는 정작 한참 떼를 쓰고 있었다. 「너 또 실체화해서 쓸데없이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보이면 돌부리로 발 걸거나 구덩이 파놓고 그러려고?」 「안 그런다요! 히잉. 나요, 정말 얌전히 있을 수 있다요.」 실체화된 정령은 어느 정도 힘의 통제권을 갖는다. 큰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지만 간단한 영역에서 자유 의지를 가지고 개입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술사가 위험한 상황에 먼저 알아차리고 방어해 줄 수도 있다. 4속성 정령왕 중 가장 어린아이 같은 성격을 가진 토니는 그 개입 정도가 꽤 심한 편이었다. 옛날부터 ‘이그레트’를 과보호하는 건 정령왕 넷이 전부 같았지만, 그 방식에는 각자 차이가 있었다. 바람의 정령왕인 유니는 사사건건 이그레트의 일에 개입하려 들었다. 잔소리를 잘하고 수다를 좋아하며 아줌마 같은 구석이 있었다. 대신 상황 판단에 있어서는 제법 이성적이었기에 나설 타이밍과 지켜볼 타이밍을 잘 구분해 냈다. 보통 그가 위험하다 싶은 일이라면 제일 먼저 나서서 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에 반해 물의 정령왕 루니는 일단 묵묵히 지켜보는 타입이다. 이그레트의 명령이 아니면 결코 움직이지 않으며 그가 바라지 않는 이상에서야 무슨 일이 있든 끝까지 지켜보려 한다. 어지간하면 끼어들지 않지만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을 경우 앞뒤 안 가리고 폭발한다. 늘 냉철해 보이지만 한 번 화나면 4속성 중 제일 진정시키기 어려운 게 바로 루니였다. 그리고 지금 찡얼대는 땅의 정령왕 토니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참을성이 적어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편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을 소환한 이래로 이그레트가 제일 공들여 통제하고 있는 정령이기도 했다. 그냥 놔두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곤란하게 만들었다. ‘……카니는, 힘을 들일 필요가 없었지.’ 쥬다스는 기억 속 불의 정령왕을 떠올리며 작게 웃었다. 아무리 곤란한 일을 일으킨다 해도 그에게 있어 정령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었다. 곁에 있는 걸로도 모자라 자기도 실체화하여 당당히 그를 지키고 싶다는 토니의 떼를 지켜보며 쥬다스는 가만히 턱을 짚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금요일 주말을 맞아 직장에서 한잔 하고 올리는 중이라... 정리가 좀 덜 되어있습니다. 이에 미리 사과드리며...ㅠㅠ글 올리기 전엔 술 먹으면 안됩니다, 글쟁이여러분,... 으아아ㅏ아ㅏ 알코올에 지지않는다아ㅏ아아아!! 여러분 불금 행복하게 보내셨길 바랍니다. 비록 짧지만은.... 내일은 정상적인 용량으로 찾아뵙겠습니다.ㅠ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 메세지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저도 사랑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슬슬 겨울비도 내리고 있는데, 감기 조심 하세요.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5 / 0240 ---------------------------------------------- 5장. 성장통 “역시 그 애도 마찬가지일꼬…….” “예?” “아니, 아니다. 이제 가보자꾸나.” 카니를 불러내는 건 좀 더 미루어도 상관없을 테였다. 당장 불의 힘이 필요하진 않았으니 그녀가 좀 더 자유를 즐기도록 두어도 되리라. 쥬다스는 그리 생각하며 옷장에 가지런히 걸려 있던 교복을 꺼내 살폈다. “으음, 아무래도 이건 지금 못 입겠구나.” 7살 체형에 맞춘 교복이 청소년으로 훌쩍 자라난 몸에 맞을 리가 없었다. 새삼 인형 옷처럼 작게 느껴지는 교복을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는 쥬다스를 향해 두 사람이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그런데 쥬다스 님. 교복은 왜 갑자기 보십니까? 가다니, 설마 밖에 나가시려고요?” “……좀 더 쉬시는 편이.” 만류의 뜻이 담긴 에단과 바이칼의 말을 들은 쥬다스가 그들을 돌아보며 빙긋 웃었다. “디너파티를 모두 함께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느냐. 크리스티나 그 아이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그 말대로, 사건은 있었으나 아직 루바흐의 봄 축제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창밖으로 축제 둘째 날 저녁을 알리는 선홍색 노을이 내려앉고 있었다. * * * 권력층의 시선으로 볼 때, 루바흐 봄 축제의 꽃은 둘째 날 밤 디너파티였다. 루바흐는 귀족부터 황족까지 아울러 10세에서 17세에 해당하는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여 키워주는 국제 인재 양성 학교. 제국 내 귀족뿐 아니라 제국이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변 약소국에서도 귀족 자제나 왕족을 유학 보내오기도 하는 국제기관이었다. 그러니 그들 가족의 견학이 허용된 루바흐 봄 축제에서 디너파티란 지배 계급들이 대거 한자리에 모여든 사교의 장과도 같았다. 가족의 품에서 떨어져 학업에 정진하느라 고생하는 자녀를 보기 위해 찾아온 보호자들로 인해 학교 포탈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방문을 허가하는 초대장은 두당 1매였다. 초대받은 자만이 포탈을 이용할 수 있었으므로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자녀를 보러 찾아왔다. 양친이 모두 바쁠 경우 형제가 대신 방문하기도 했다. 귀족으로서의 모습보다는 학생으로서 부모형제를 맞이한 루바흐 학생들은 저마다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크리스티나 역시 저를 찾아온 오라비와 함께 파티장에 서 있었다. 학교 행사긴 했으나 ‘디너파티’인 만큼 파티장에서는 교복이 아닌 정장이 주 복장이었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교복을 벗고 옷장 안에 걸어 두었던 사복을 꺼내 입는 순간이었다. 아직 십 대 소년소녀인 학생들은 눈에 띄는 화려한 색상이나 개성 있는 디자인을 선호했다. 그에 비해 크리스티나는 단정하고 고아한 디자인의 의상을 골랐다. 투톤으로 물드는 바닷빛 긴 머리카락에는 핀을 꽂아 늘어뜨리고 그에 어울리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었다. 긴 치맛단이 나비 날개처럼 겹겹이 이루어져 걸을 때마다 요정처럼 팔랑거렸다. 단순한 치장이었으나 그녀의 청순한 이미지와 어우러져 보는 이들의 탄사를 자아냈다. 크리스티나의 곁에는 그녀와 머리색부터 얼굴형마저 닮은 오빠 알시오스 C.델피아가 함께 있었다. “크리스틴,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니?” 알시오스는 델피아 가문의 장남이자 다정한 오라비였다. 올해 22세인 그는 동생인 크리스티나와 달리 루바흐를 다니지 않았다. 따로 재능을 개발하지 않더라도 알시오스는 이미 완벽한 델피아 가문의 기둥이었다. 인맥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절로 붙어오는 위치에 있었으며 지력, 판단력, 성품까지 다방면으로 우수했다. 매사 쌀쌀맞게 구는 크리스티나도 오라버니인 알시오스 앞에서만큼은 초봄의 개울물처럼 다소 풀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아마.” 쓰러진 쥬다스를 양호실로 옮겼던 게 바로 크리스티나 본인이었다. 원래 건강하던 황자는 아니었지만 그날은 척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 창백한 안색이 눈에 밟혀 축제가 진행되는 하루간 크리스티나는 어떤 일에도 집중하지 못했다.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을 질색하는 그녀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낭비였다. 하지만 알면서도 쥬다스에 대한 염려를 그만둘 수 없었다. ‘역시 못 오실 테지. 많이 안 좋아 보이셨으니.’ 시선을 내리깐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글빙글 꼬았다. 생각이 많아질 때면 보이는 버릇이었으니 오라비인 알시오스는 쉽게 그녀의 속내를 알아보았다. “정말로 몸이 약하다 하던 1황자 전하, 그분과 친해진 건가? 네가? 그건 또 의외네, 크리스틴.” “……알고 있었군요.” “그럼? 너에 대한 보고라면 매달 말 빠짐없이 챙겨 듣고 있지.” 제 말을 듣고 한숨을 쉬는 여동생을 향해 피식 웃어 보인 알시오스가 이내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 너는 어릴 때부터 그런 게 있었어. 한 번 마음에 들면 웬만해선 그 생각을 바꾸지 않는 맹목성이랄까.” “그 말은.” “당장 생각을 바꾸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건강이 늘 위태로우셔서야…….” 알시오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1황자에게 악감정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지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와는 수년 전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눈에 그 싹을 알아보았다. ‘눈이 죽어 있는 자는 오래 살아남지 못해.’ 텅 비어 있던 금색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가능성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을 목전에 앞둔 사형수처럼 모든 걸 포기한, 일말의 의지조차 찾아볼 수 없는 소년. 그의 안목을 똑 빼닮은 크리스티나가 그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자체가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즘 정령술에 자질을 보인다느니 좀 달라졌다느니 하는 소문이 떠돌긴 했지만 알시오스는 그 소문을 무조건 신뢰할 수만은 없었다. ‘하늘이 뒤집힐 정도의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에야 그가 변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비단 그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현 정계에 어느 정도 발을 들여놓고 있는 후계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약육강식(弱肉强食). 권력층의 사회는 언뜻 점잖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듯 보여도 속사정은 그야말로 치열한 야생이나 다름없었다. 약한 종자는 지도자로서 살아남을 수 없다. 루바르잔 제국이 오랜 세월 강건하게 그 국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키워드도 여기에 있었다. 유능한 자만이 우두머리가 될 자격을 갖추었다. 일개 귀족 가문도 그러할진대 황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군주의 핏줄이라면 누구나 그 뒤를 이어 황좌에 오를 기회를 가졌다. 단순히 일찍 태어나거나 좀 영특한 정도로는 곤란했다. 권력을 노리는 눈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으니 이를 휘어잡을 지도자로서의 특별한 자질이 필요했다. ‘물론 1황자는 유리한 조건을 타고나긴 했었으나.’ 제국에서 하나뿐인 은발과 금안, 그야말로 선대로부터 따다 박은 듯이 훌륭한 상징이었다. 처음 쥬다스가 태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눈부시게 선명한 황조의 상징을 보고 모두 그를 넘을 자질은 없으리라 입을 모아 칭송했다. 하지만 그 유리함은 1황자가 평범하게 자라났을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한 현황에게는 애석하게도, 황자는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으며 죽은 눈으로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잘 빚어진 인형처럼 그에게선 아무런 가치를 느낄 수 없었다. 제 어미를 제외하고는 타인과 전혀 대화를 하지 않으니 그를 따르고자 하는 이가 있을 리 만무했다. 해가 지날수록 수상함을 느끼고 있던 귀족들은 어느 순간부턴가 저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1황자에겐 큰 결함이 있다.’ ‘저 정도로 심신이 유약하다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 특별한 상징을 타고난 아들을 총애했다하지만 황제도 가능성 없는 싹에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 루바흐에서조차 낙오된다면 1황자에겐 이제 일말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정쩡하게 명맥만을 유지한 채 졸업한다손 치더라도 그때는 이미 황태자 자리를 바라보기엔 늦은 시점이다. 벌써 2황자와 3황자의 나이가 각각 11세, 9세였다. 일반적으로 10세를 기점으로 황태자 책봉이 이루어지니 이미 그들도 적정한 나이에 이르렀다 볼 수 있었다. 여러모로 1황자가 군주에 자리에 오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군주는커녕 지금까지 모습대로라면 목숨 줄조차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언제 생명 활동을 정지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약한 육신과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를 눈 뜨고 가만두고 보기만 하는 유약한 심성. 비록 아주 최근에 전에 없이 크게 변화했다는 정보가 들어오긴 했으나 1황자는 이미 기울대로 기운 배였다. 이미 황좌를 둘러싼 보이지 않는 전쟁은 시작됐다. 알시오스는 자신의 충고를 귓등으로도 듣고도 않는 크리스티나를 착잡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결코 쉬이 무너지실 분이 아니에요.” “크리스틴.” “아니, 무너지게 두지 않아요.” “너 진짜…….” 서늘하게 잘라 말하는 여동생을 보며 알시오스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도 그들 남매를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영특한 동생은 그 시선들마저 계산하여 말하고 있었다. 알시오스는 착잡한 마음으로 꺼내기 싫었던 가정을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혹 그분을 연모하기라도 하는 거냐?” “……경애하여 흠모하는 바이긴 하나 추측이 과하시군요, 오라버님. 그것과는 성질이 명명백백 다릅니다.” 한층 단호해진 부정에 알시오스는 오히려 의혹이 짙어졌다. 언제나 똑 부러지고 까칠하게 구는 크리스티나가 누군가 한 대상을 ‘경애’한다고까지 표현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녀가 마음 놓고 따르는 아비와 오라비에게도 감정 표현은 잘하지 않던 아이였다. 그녀의 나이 14살, 이성에게 한 번쯤 열병을 앓듯 마음을 줄 수도 있는 나이였다. 알시오스는 그리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묘연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가만, 1황자라면 신체가 7살 이후 전혀 자라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록 남녀 사이라 한들 유아적인 모습이라면 또래보다 성숙한 크리스티나가 이성적으로 빠져들 외관이 전혀 아니었다. 연정이 아니라면 무엇이 저 분명하고 냉철한 여동생의 마음을 끌었단 말인가. 학생들이 주인공인 축제인 만큼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와인으로 타는 목을 축이던 알시오스의 시야에 크리스티나의 표정 변화가 들어왔다. “……!” 알시오스는, 그러니까 장담컨대 그간 모범적이고 도도하던 여동생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비록 오라비 앞이라 누그러진 채긴 했으나 줄곧 유지해 오던 그 얼음 같은 가면이 깨어져 있었다. 머리카락을 꼬던 하얀 손가락이 그대로 정지했다. 당황, 의심, 경탄 순으로 솔직한 표정이 그대로 그녀의 안면에 드러났다. 그런 반응은 크리스티나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훅. 촛불이 꺼지듯 좌중이 침묵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 하얗게 질린 이도 있었다. 알시오스는 갑작스러운 분위기 변화에 의아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그들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을 발견하고 시선을 고정시켰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따뜻함을 품은 소년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맑게 고요해진 파티장을 울렸다. 크리스티나의 물빛 눈망울이 조용히 일렁였다. “맞는 옷이 없어서 말이다. 바이칼 그 아이가 도움을 주어 다행이었다만 시간이 좀 걸렸지 무어냐.” “……쥬다스 님.” “그래, 오늘 너의 복식은 단아하면서도 봄꽃처럼 화사하다. 네게 꼭 맞아 어여쁘구나.” 그리 말하면서 그들 앞까지 차분히 걸어온 소년이 빙그레 웃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QnA때 말씀드렸다시피 일단 로맨스는 없는데 일방통행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 이상으로 티는 안 날 겁니다. 이야기의 중심은 인물들의 성장에 있으니까요. ㅎㅎ 또 실체화된 정령들은 술사가 바라지 않는 이상 실체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정신력이 약한 술사는 오래 유지하는 게 힘들다곤 하는데... 이그레트는 해당사항이 없지요..ㅎ 그리고 아마 현재 주요인물 프로필들이, 쥬다스 : 12세 / 은발 / 금안 에단 : 15세 / 흑발 / 흑안 / 검술특화. 무예가 출신. 공작가. 도를 사용. 절도를 지키며 칼 같은 성격. 정도를 추구함. 크리스티나 : 14세 / 투톤, 바다빛 머리카락 / 바다색 눈동자 / 문무겸비. 특히 머리가 비상함. 공작가. 성과지향주의. 바이칼 : 14세 / 밤색머리 / 녹안 / 진솔한 성격, 직설적인 말투. 귀족답지 않음. 마법사. 혁명학파에 관심을 보이고 있음. 정도가 아닐까 싶네요. ㅎㅎ 이 외에도 지저분하게 막 붙여놓은 설정들이 있는데 스포우려가 있어 최대한 간추려봤습니다.ㄷㄷ (+키 관련부분은 일단 지우고, 후일 수정하겠습니다.ㅠㅠ 적당한 줄 알았는데 나이에 비해 너무 크다는 의견이 많으셔서...!;;)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6 / 0240 ---------------------------------------------- 5장. 성장통 14살 소녀인 크리스티나와 마주 보아도 눈높이에 차이가 없을 만큼의 키에 마르긴 했어도 호리호리하여 보기 좋은 체형이었다. 별빛처럼 은은하니 광택이 흐르는 긴 은발은 단정하게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으며 시선을 사로잡는 금색 눈동자가 힘 있게 그녀를 마주하고 있었다. 아직 조금 창백한 감이 있긴 했지만 병자의 그것과는 다르게 윤이 나는 흰 피부마저도 호수 위의 한 마리 백조처럼 고고해 보였다. 그나마 키가 비슷한 바이칼에게 빌려 입은 옷은 그에게는 조금 컸다. 품이 넉넉한 흰 와이셔츠 위에 고급스러운 회색 베스트를 걸쳤다. 셔츠는 검은 단추, 베스트는 금장 단추였다. 그 위로 걸친 검은색의 얇고 긴 정장풍 코트가 움직임을 따라 가볍게 펄럭였다. 움츠러들기는커녕 자신감 있는 발걸음과 함께 부드러운 미소로부터 나오는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주변을 아울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년의 어깨에 자리한 녹색 바람의 정령, 또 걸을 때마다 물거품을 흩뿌리는 푸른 늑대가 그가 가진 이능을 증명함과 동시에 존재감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를 본 알시오스는 좌중과 동화되어 돌처럼 굳어버렸다. 단단한 둔기로 뒤통수를 빡 두드려 맞은 것처럼 모든 상념이 백지화 되어버렸다. ‘은발에 금안……. 저토록 뚜렷한 루바르잔 황조의 상징은 제국에 단 하나뿐인.’ 바로 1황자 쥬다스였다. 알시오스는 지금껏 품고 있던 정보와 상식을 망설임 없이 지워 버렸다. 꼿꼿하던 델피아 공작가의 기둥이 기꺼이 허리를 굽혔다.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델피아가의 장남 알시오스 C.델피아입니다.” 그를 시작으로 파티장에 서 있던 모든 귀족이 1황자를 향해 예를 갖췄다. 평탄하게 흘러가던 제국의 하늘이 뒤집히기 시작했다. 언제 침묵했었냐는 듯 모인 이들 사이에 술렁임이 번져 갔다. 이곳은 귀족 사회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학생과 학부형 신분으로 초대받은 자리였다. 그러니 학교 밖과 달리 이 안에서만큼은 크게 신분 차이를 의식하지 않고 상호간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다. 확연히 달라진 모습으로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낸 1황자로 인해 잠시 혼란이 일긴 했지만 학교 내 예법은 약식이 원칙이다. 마치 가면무도회에서 자신의 신분을 가리고 대화하듯, 루바흐의 봄 축제는 상호 예의를 갖추며 학생과 학부형으로서의 만남이었다. 디너파티장은 금방 다시 시끌시끌해졌다. “쥬다스 님, 모습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요?” “이런, 놀라게 하였는가. 자세한 원인은 나도 모른단다. 치유술사의 말로는 급작스럽긴 해도 본래 이루어졌어야 하는 성장인지라 위험보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더구나.” “하.”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훑어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복잡한 빛을 담고 내리까는 바다색 눈을 가만 바라본 쥬다스가 손등을 덮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물었다. “흠, 영 이상해 보이더냐?” “아뇨, 그런 것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하던 크리스티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곤 입을 다물었다. ‘똑같이 부드러운 눈.’ 겉이 몰라보게 변화하긴 했으나 그 금안에 담긴 특유의 유한 기운만큼은 그대로였다. 크리스티나는 더 이상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따라서 작게 미소 지었다. “그럼 아프시던 건.” “이제 말짱하이. 걱정해 주어 고맙구나.” 그간 아팠던 사실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씻은 듯이 고통이 사라져 있었다. 아직 남들보다 체력이 약하고 면역력이 약한 점은 그대로였지만 몸 상태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척 보기에도 혈색이 도는 뺨과 편안해 보이는 움직임에 크리스티나는 깊이 안도했다. 쥬다스는 이번엔 그녀의 보호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동생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하네.” “아닙니다. 크리스티나에게서 서신을 통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 자리는 황자 전하를 꼭 뵙고 싶어 나온 자리기도 합니다.” 이건 알시오스의 진심이었다. 그가 침몰해 가는 조각배이든, 떠오르는 샛별이든 간에 직접 보지 않는 이상에 아무 소용없었다. 알시오스는 관찰하는 시선을 유지하되, 어투에는 공손함을 담아 예의바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쥬다스는 미소를 머금은 채 넌지시 물었다. “호오, 하면 직접 보니 어떠한가?” 질문을 들은 알시오스는 순간 갈등했다. 솔직한 심정을 어디까지 내보여야 하는지, 혹은 그저 무난한 포장으로 넘어가야 할지에 대해 잘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만큼 지금 1황자의 모습은 모조리 예측하지 못한 특이점으로 가득했다. 고민의 순간은 짧았다. 델피아 공작 가문의 첫째 기둥으로서 그간 입지를 다져온 알시오스는 상대방의 눈에 깃든 온화함을 귀신 같이 읽어냈다.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남에게서 전해 듣는 이야기란 그저 연못 위에 뜬 달그림자처럼 허상과도 같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제껏 눈이 어두워 그림자만 좇았음이니 겉보다 속을 보는 안목이 없음에 면구스럽습니다. 부끄럽고, 또 경탄하였습니다.” 대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굉장히 솔직하고 직설적인 내용이었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음을 시인하며 또한 예상이 뒤집힘에 감탄했다. 마치 고해성사와도 같은 진솔한 이야기에 쥬다스는 그저 가만 듣기만 했다. 알시오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말을 맺었다. “여기 크리스티나의 오빠로서, 그리고.” “…….” “가문의 차기 가주로서도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진실로 훌륭하게 성장하셨습니다, 전하.” 오라비의 말에 크리스티나도 작게 고개를 끄덕임으로 동조를 표했다. 남매의 호의적인 반응에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 보였다. ‘역시.’ 이것이 알시오스가 발견한 온화함이었다. 온화하지 않은 사람은 솔직한 말을 듣고 나면 어딘가 공격당한 것처럼 반응을 보인다. 아무리 뜻이 좋더라도 먼저 그를 나쁘게 평했다는 의미가 전달되었으니 이에 분개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자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일언반구하지 않고 담담하게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자였다. 알시오스는 황자가 가진 그 포용력도 눈여겨보았다. 말에 담긴 의미를 전부 이해하면서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보통 그 나이 때 가지기 어려운 온화함이었다. 이는 그가 아랫사람을 품어줄 수 있는 그릇이 크다는 뜻도 되었다. 세 사람이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이 순간에도 그들을 향하는 시선은 많았다. 본래의 쥬다스를 알고 있던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크게 뜨고 그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이미 귀족 사회에서 구를 대로 구른 학부형들은 섣불리 반응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겉으로는 다른 학부형들과 웃으며 속빈 이야기를 하더라도, 머리와 귀는 1황자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델피아 공작가의 두 남매가 모두 1황자에게 호의적이며, 특히 루바흐의 꽃이자 출중한 능력으로 인정받는 크리스티나가 완전히 그의 줄에 선 듯한 표현을 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아마 오늘 밤이 지나고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 즈음엔 황좌를 둘러싼 전쟁의 판국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1황자가 우세할 것이란 보장은 없었다. 겉보기만 번지르르하게 자라난 것인지, 아니면 그 속에 숨은 저력이 더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또한 앞으로 그를 돕는 세력이 얼마나 늘어나는지가 관건이었다. 귀족들은 능숙하게 패를 숨기고 기회를 살폈다. “쥬다스 님.” “마르젠이구나. 축제는 잘 즐기고 있느냐?” 성인들과 달리 아직 어린아이인 학생들의 경우는 좀 더 자유로웠다. 짊어진 무게도 어른에 비해 얼마 없었고, 같이 학업을 정진하는 동료라는 인식도 강했기에 정치적 의미를 따지지 않고 얼마든지 그에게 접근할 수 있었다. 그중 마르젠은 특히 그러한 처세에 능한 자였다. 그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양순한 초식 동물마냥 쥬다스에게 다가왔다. “하하! 예, 과연 루바흐의 봄 축제더군요. 여러모로 좋은 구경을 많이 했죠.” 마르젠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곤 그 곁에 서 있던 알시오스를 향해 반가움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역시 이번에도 오셨군요, 알시오스 님. 남매간 우애가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언제부터 남의 형제애에 그리 관심이 많았지?” 알시오스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크리스티나가 툭 싸늘한 말을 내뱉음으로 인사를 차단했다. 마르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에헤이~ 이 루바흐에서 크리스티나 님께 관심 없는 남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 그렇죠, 쥬다스 님?” “음? 그도 그렇겠구나.” “…….” 생각지도 못한 쥬다스의 증원에 크리스티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물론 루바흐에서 그녀를 흠모하는 남학생은 수도 없이 많았다. 스스로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며 거기에 별 감흥도 없었다. 어릴 적부터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여식으로 자라난 그녀는 부모형제로부터 흘러넘칠 만큼의 애정을 받아왔다. 그리고 입학한 루바흐에서조차 조각 같은 미모에 문무 훌륭한 성적을 보이며 자신감 넘치는 그녀를 향해 학생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크리스티나에게 있어 자신을 향한 애정이란 당연했다. ‘그런데 단 한 명.’ 변화하기 전부터, 몰라보게 변한 지금까지 시종일관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 바로 저 백로황자였다. 바뀌기 전 쥬다스는 누구에게도 반응하지 않았다. 한심하리만큼 소극적이었으며 늘 조용했으니 당연히 크리스티나와 얽힐 일도 없었다. 그러나 변하기 시작하면서 쥬다스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따뜻한 시선을 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귀여운 아기를 대하듯, 혹은 재롱부리는 강아지를 보듯이 마냥 부드럽고 따뜻하기만 했다. 그 시선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었으며 크리스티나도 예외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점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은 오히려 ‘크리스티나야’라고 부르는 음성에 익숙해져 제법 듣기에도 좋다 여기고 있는 참이었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내리깐 크리스티나를 흥미롭게 쳐다본 마르젠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호? 이건 또 의외인데요.” 타인의 심리에 예민하여 관계를 잘 파고드는 처세가 마르젠이 크리스티나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놓칠 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빙글거리는 낯에 의아함을 느낀 크리스티나가 눈썹을 꿈틀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아닙니다~? 재밌는 구경은 묵혀놨다가 터뜨리는 주의라서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알시오스 님?” “…….” 알시오스 역시 오묘한 시선으로 크리스티나와 쥬다스를 번갈아 보았다. 걱정할 만한 수준의 것은 아니라 느껴지지만, 앞날이 불투명한 1황자에게 필요 이상의 감정이 개입되는 건 오라비로서 곤란했다. 그가 미간을 좁히던 찰나 때마침 학생부 임원이 파티장 단상에 올라 증폭기를 사용해 안내 사항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자랑스러운 우리 루바흐 학우 여러분, 그리고 오늘 루바흐를 찾아주신 고마우신 학부형 여러분. 이 영광스러운 밤의 피날레를 장식하기 위한 야외무대를 준비했습니다. 모두 안내를 따라 천천히 밖으로 나와 주십시오.” “드디어군요.” 마르젠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더불어 여기저기서 기대감 어린 환호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루바흐 학생들은 작년 봄 축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디너파티의 진짜 시작은 바로 야외무대가 개방되면서부터였다. 학관 하나를 통째로 꾸며 파티를 열었던 만큼 학관을 둘러싼 넓은 운동장이 두 번째 무대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덜컹. 학관의 문이 힘차게 열렸다. 어둠이 내린 저녁 시간대였는데도 마법의 힘으로 밝혀 둔 조명기에 의해 눈부신 빛이 파티장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파티에 참석한 인원들이 차근차근 밖으로 향했다. 쥬다스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일행도 안내에 따라 야외로 이동하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모처럼 약속도 안잡힌 휴일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 흘러가버렸네요. 우연히 취적소설을 발견해버린 탓에 읽다보니...ㄷㄷ 정말 저한테 판타지는 마약과도 같습니다.ㅠㅠ 결국 오늘 비축 쌓아서 연참해보려던 계획은 물거품으로...(...) 아,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투톤-바다빛 머리색은 위쪽이 연하고 아래로 내려갈 수록 진해집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7 / 0240 ---------------------------------------------- 5장. 성장통 슈우우우. 퍼펑, 펑! 밖으로 나오자마자 장관이 펼쳐졌다. 밤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에 학생과 학부형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원모양뿐 아니라 별이나 책, 루바르잔 제국을 상징하는 드래곤 문양까지 다채롭게 하늘을 수놓았다. 귀족이라 해도 좀처럼 보기 드문 초대형 불꽃놀이였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몇 차례 하늘을 수놓던 불꽃은 이내 잠잠해졌다. 모처럼 눈이 즐거워지는 시간이었기에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그 여운을 만끽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저길 봐!” 누군가 흥분된 목소리로 하늘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인파에 섞여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 쥬다스의 금안에도 이채가 어렸다. “정령이다!” “물의 정령인가?” “하나가 아니야. 계속 늘어나고 있어!” 까르륵.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청명하게 밤공기를 타고 울려 퍼졌다. 불꽃놀이가 마법사들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벤트였다면 이번엔 정령술사들의 작품이었다. 정령학 교사인 이사벨을 중심으로 루바흐에 초청된 정령술사 인력들이 함께 자연계 정령들을 소환해 내어 특별한 광경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작은 소녀의 모습을 한 돌개바람의 정령이 사람들의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장난스레 바람을 일으켰다. 빙글 주변을 휘감는 바람에 의해 모자가 날아가거나 스카프를 떨어뜨리는 등 작은 해프닝이 벌어졌다. 하지만 워낙 신비로운 모습이었기에 사람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깔깔대고 웃으며 이벤트를 즐겼다. 술사의 조절하에 마음껏 장난을 치며 돌아다니던 돌개바람의 정령은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살포시 멈추었다. 허공에 동동 뜬 채 빤히 바라보던 정령은 휘릭 곡예를 하듯 그 앞으로 날아들었다. 「응?」 편히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유니가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이었다. 쪽. 돌개바람의 정령은 수줍게 쥬다스의 뺨에 입 맞추고 그대로 후다닥 날아올랐다. 설마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하극상 아닌 하극상을 벌일 줄이야 꿈에도 몰랐던 유니가 뒤늦게 분통을 터뜨렸다. 「저게―!」 “이런, 유니. 저 아이도 반가워서 한 일 같으니 너그러이 봐주지 않으련.” 「그치만, 내 이그레트인데!」 「아니다요! 내 이그레트다요!」 「……‘우리의’겠지.」 루니 역시 곱지 않은 눈길로 날아오른 돌개바람 정령을 노려보며 코 주름을 잡았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군중과 술사들도 연달아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령의 키스. 자신과 계약한 술사 이외에는 인간에게 친밀함을 표현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정령의 생태였다. 정령이 인간에게 먼저 다가가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세간엔 ‘정령의 키스를 받는 자는 해당 속성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설이 돌았다. 딱히 근거가 있는 설은 아니었지만 따지고 보면 일리가 있기도 했으니 정령술사들은 그 설에 전면 동의했다. 심지어 술사와 영혼의 계약을 나눈 정령조차 입을 맞추거나 꼭 끌어안는 등의 친밀함 표현은 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친화력이 아닌 이상에야 정령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만일 정령이 스스로 다가와 애정을 표현한다면 이는 정말 해당 속성 정령들에게 말 그대로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 볼 수 있었다. 마치 자연계 4속성 정령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이그레트처럼. “그렇다면 1황자 전하는 바람에게 사랑받는 정령술사이신 걸까?” “바람의 사랑을 받으면 모든 바람의 정령을 부릴 수 있다고 하던데.” “혹시 정령왕급의 친화력이 있으신 거 아냐?” “우와, 진짜 그런 거면 엄청날 텐데……!” 가뜩이나 주목받고 있던 쥬다스는 다시금 따가울 정도의 시선을 받았다. 그러던 순간 여기저기서 가벼운 돌풍이 일어났다. “또 온다!” 와 하고 짧은 환호성과 함께 사방에서 튀어나온 바람의 정령들이 사람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이번엔 세 정령왕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는 터라 겁 없이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오는 정령은 없었다. 곱게 반짝이는 백사장의 정령, 장마철의 습기를 머금은 비구름 정령, 화롯불의 정령 등 각 개성을 뽐내는 정령들이 춤을 추듯 하늘을 점령했다. 그런 정령들을 따라 함박눈의 정령이 함께 날아오르며 뽀송뽀송한 눈송이들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봄 축제에 내리는 눈을 맞으며 분위기는 한층 달아올랐다. “이어 야외무대의 개막을 알리는 루바흐 아카펠라단의 공연이 있겠습니다. 큰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아카펠라 합창은 무반주로 음역대를 나누어 곡을 진행한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악기가 바로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게 바로 아카펠라 공연이었다. 음악 적성으로 엄선된 루바흐 학생들이 운동장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합창을 시작했다. 어린 학생들이 선보이는 아름다운 화음을 푸근히 감상하고 있던 쥬다스에게 두 소년이 다가왔다. “……쥬다스 님.” 이때쯤 찾아오리라 예측하고 있었기에 쥬다스는 감고 있던 눈을 뜨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래, 가족들은 잘 만났는고?” “예, 아무래도 조용한 편을 좀 더 선호하시는지라 지금은 실내 파티장에.” “그러십디다. 의외로 어른들 간에는 얘기가 잘 통하시던 모양이더라고요. 난 이 양반이랑 오래 얘기 못하겠던데.” 바이칼이 머리 뒤로 깍지를 끼며 피식 웃었다. 말이 많은 편인 그가 과묵한 에단과 둘이 있을 때는 영 대화할 거리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대놓고 이죽거리면서도 바이칼이나 에단이나 불쾌한 감은 전혀 없었다. 거리낌 없이 장난을 건다는 건 그만큼 친근함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접점이라곤 없던 그 둘에게 바로 쥬다스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신뢰였다. “오래 얘기하지 않아도 편한 친구사이가 있지. 너희는 참 좋은 인연으로 이어진 게다.” 즐거운 어조로 말하는 쥬다스를 보며 바이칼과 에단은 똑같이 떫은 반응을 보였다. “……아니, 쥬다스 님, 소름 돋게 저 양반이랑 친구라뇨.” “모처럼 동감이군.” “너희도 느이 어른들 못지않게 얘기가 잘 통해 보이는구나. 허허.” “…….” “…….” 내용의 측면을 떠나 얘기가 통한 건 사실이었으니 부정할 순 없었다. 두 소년이 떨떠름하게 자신을 응시하자 쥬다스는 투닥거리는 손자들을 보듯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고아한 은발 위로 새하얀 함박눈이 내려와 앉았다. 빛나는 은발이나 하얀 눈송이나 때 묻지 않은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결국 그 특유의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에 밀린 바이칼이 깍지를 풀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뭐. 학우는 맞긴 하죠. 답답한 면이 있긴 한데 그것만 빼면 나름.” “……피차일반이다.” “뭐요? 허, 이분 보시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저처럼 화통한 성격도 찾기 힘들 텐데요.” “한 번 옳다 믿은 건 끝까지 놓지 않으려 하지 않던가.” “지금 누가 누구에게 할 소릴……. 쥬다스 님, 솔직히 말해주시죠. 제가 답답합니까, 에단 님이 답답합니까?”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신 입을 열었다. “둘 다 똑같으니 그만 귀찮게 하지?” “크, 크리스티나 님…….” 바이칼은 억울한 듯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도 크리스티나를 동경하던 남학생 중 하나였던 만큼 그녀의 말에는 꼼짝하지 못하는 추종자적 경향이 있었다. 오히려 그녀에겐 에단이 강세를 드러냈다. “……당신에게 귀찮게 군 적 없습니다. 거슬린다면 굳이 여기 계실 필요 없지 않겠습니까.” “말귀를 못 알아듣는가, 그대. 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싸늘함을 넘어서 오만하기까지 한 말투에 에단의 미간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불만이 있는 건 당신뿐인 듯하여.” “고작 그대의 주관적 판단에 따르란 말인가? 우습군.” “하면 누구의 판단에 따르란 말입니까.” “이거 왜들 이래……. 두 분 다 진정하십쇼. 이러다 싸움 나겠네.” 알시오스는 한 발짝 뒤에서 제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작은 어깨들을 내려 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내 그 바닷빛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따르고자 하는 세력이 제법 거물들이로군. 여기에 우리 델피아가(家)가 가세한다면 확실히 재기가 가능할지도 모른다.’ 정령술이라는 이능에 특별한 자질을 보이며 평정심을 유지하는 느긋한 성격과 타인을 품어줄 수 있는 큰 그릇. ‘덧붙여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 보이는 부덕한 자들을 과감히 쳐 낼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잔인함만 갖추어진다면 완벽할 터.’ 하지만 지금 보이는 모습으로는 장담할 수 없었다. 군주는 버릇없는 신하를 쳐 낼 단호함과 배덕자의 목을 벨 잔인성을 필히 요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란 정도(正道)를 걷는 존재가 결코 아니었다. 무릇 나라를 다스리고 신하를 길들이는 데엔 야망과 이기심도 적절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알시오스는 섣불리 가문을 내거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대신 언제든 패를 돌릴 수 있게끔 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아이들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관망하던 자신과 같은 선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쥬다스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맑은 금안이 모든 고민을 알고 있기라도 하듯 물끄러미 그를 향했다. “…….” 자신의 색깔이 청과 홍, 둘 중 하나로 나뉘는 순간, 도박은 시작된다. * * * 정령계 불의 영역. 흐드러지게 피어난 하얀 꽃밭 사이에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붉은 나비의 모습을 한 불의 하급 정령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꽃을 따다 화관을 만든 여인은 이를 사뿐히 들어 올리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후후, 나중에 이런 걸 선물하면 좋아해 줄까요.」 앞머리 없이 훤히 드러낸 이마에는 붉은 보석이 하나 박혀 있었다. 가지런한 이마선을 따라 길게 웨이브 진 다홍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그리고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엔 사람과 다르게 부드러운 깃털이 자라난 조그맣고 하얀 날개가 달려 있었다. 날개는 또 등에도 붙어 있었다. 등에 있는 건 불꽃처럼 강렬한 새빨간 깃털로 이루어진 커다란 날개 한 쌍이었다. 여인은 화관을 품에 안은 채 꽃밭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하아~ 보고 싶어요, 이그레트.」 여인, 불의 정령왕 카니는 멍하니 정령계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령계 중에서도 불의 영역은 하늘이 그녀의 머리카락처럼 진한 홍시 색깔이었다. 카니는 구름 대신 떠가는 동글동글한 불덩이들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언제쯤 불러 줄래요……? 계속,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카니는 약간의 서운함을 담아 중얼거리다 핫 고개를 내저으며 양 주먹을 꼭 쥔 채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파스스 흰 꽃잎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렇다고 절대 불평하는 건 아니니까요, 으응.」 이그레트가 듣고 있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왠지 그리 변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순한 눈망울에 가득 차오른 염원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카니는 무릎을 끌어모아 안으며 턱을 괴었다. 「빨리 보고 싶다…….」 팔랑팔랑. 빨간 나비 모습을 한 불의 하급 정령이 그녀의 발치에 내려앉았다. 하급 정령을 쓰다듬어주던 카니는 순간 움찔 어깨를 좁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 화르륵. 불길에 휩싸인 소환진이 나타나 있었다. 카니는 일어나 소환진 앞으로 다가갔다. 「정령왕 소환진? 하지만 아직 이그레트와의 계약이.」 부름을 받지 못해 정령계에 남아 있긴 했지만,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계약의 흔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한 번 계약을 맺은 정령은 중복 계약을 맺을 수 없다. 술사가 바라는 건 무엇이든 행하게 되어 있는 정령의 특성상 한 번에 두 명 이상의 술사를 갖는 건 불가능했다. 술사와 정령은 무조건 일대일의 관계였다. 그러니 계약이 유지되고 있는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난 소환진은 사실상 불가능한 접근이었다. 「…….」 다른 3속성 정령왕과 마찬가지로 카니는 이그레트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와의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흐름을 거스르는 소환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 앞을 기웃기웃거리던 카니는 이내 조심스레 소환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급 정령들이 만류하듯 몰려들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잠깐 확인만 하고 올게요.」 이 소환진이 이그레트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카니는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힘을 개방했다. 불의 기운과 소환진이 맞물리며 화륵 거센 불길이 일어났다. 마치 불에 삼켜지듯 소환에 응한 카니는 소환진과 함께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붉은 깃털만 바람에 실려 날아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은 계약여부와 상관없이 다른 술사의 소환에 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소환해냈다고 해서 반드시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관계'측면에 상당히 미숙한 인물입니다. ㅎ 그가 성장해야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심리적, 관계적 측면입니다. 정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자신을 '지켜주는'존재로 인식할 뿐, 자신이 '지켜야 할'존재로는 아직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자세한 건 본편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오타나 비문, 설정상 어색한 부분 등을 짚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8 / 0240 ---------------------------------------------- 6장. 재회 3일간의 봄 축제가 막을 내렸다. 무예전에서 에단은 당당하게 검술부문 우승을 거머쥐었다.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생이 우승을 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따로 개발할 것도 없이 무예에 있어선 하늘이 내린 재능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었다. 과연 무장으로 유명한 헤이가 가문의 후계자란 소리가 돌았다. 연구물 발표회에 참석했던 바이칼은 마법학파로부터 꽤 많은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번 교황청 사건 때 이후로 학파 가입에 대해서는 신중을 기하고 있는 바이칼로서는 전부 거절했다. 그리고 현재 관심이 쏠리기로는 쥬다스를 넘어설 자가 없었다. 몸이 성장하면서 그 진가를 더욱 빛내기 시작한 그는 더 이상 흠잡을 것 하나 없이 완전한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영리하고 뛰어난 이능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몸이 성치 않으면 각광받을 수 없다. 또래에 비해 확연하게 작은 체구에 금방이라도 툭 쓰러져 골골댈 것 같은 허약함은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와도 같았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그 족쇄에 발목 잡힐 일이 없게 된 것이다. 성장, 그것도 도리어 또래 학생들보다 좀 더 우월한 키로 자라난 그는 이제 겉보기에도 무시할 수 없는 외향을 갖추게 되었다. 동시에 어린애 모습으로는 발현이 힘들었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비로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어진 약점을 모두 극복해 낸 1황자는 그야말로 루바흐의 뜨거운 감자였다. “세상에나, 맙소사. 쥬다스 님, 정말 잘됐어!” 지금 막 호들갑스럽게 외친 봉술 교사 메이란 역시 그 변화에 놀라면서도 크게 기뻐한 인물 중 하나였다. 쥬다스가 신청한 과목 중 하나뿐인 무예과 스승으로서 메이란은 진심으로 이를 대견하게 여겼다. ‘그렇다곤 해도 이젠 정말 황자님다워지셨는걸. 아니, 마치 제국의 선황 폐하께서 초상화에서 걸어 나오기라도 한 것만 같은 모습이야.’ 몸이 자랄수록 지니고 태어난 황조의 상징은 더욱 선명해졌다. 건강을 되찾으며 윤기가 돌기 시작한 은발과 따뜻한 금안을 본다면 누구라도 멍하니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백로황자. 본래는 그 고귀한 태생과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모습을 빗대어 조롱하는 별칭이었으나 오히려 지금은 그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말 그대로 까마귀 무리 틈에서 홀로 날개를 펼친 고고한 백로와도 같았다. “흠…….” 봉술 교사의 격한 환영 인사를 받으며 수업에 참여한 쥬다스는 조금 어색한 손길로 훈련용 봉을 들어 올렸다. 몸이 성장한 건 좋았지만 도통 어느 정도 수준까지 체력이 올랐는가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했다. 붕. 그가 잡은 봉이 힘 있게 허공을 가로질렀다. 예전엔 양손으로 잡아도 무거워 비틀거리던 무게였는데 이젠 한 손으로도 제법 생각한 만큼 컨트롤이 가능해졌다. 그 사실만으로도 그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쥬다스는 기다리고 서 있던 페어를 향해 돌아섰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한다. 에단.” “예.” 무예전 검술 부문 우승자가 보기엔 별거 아닌 변화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에단은 정중히 예를 갖춘 후 자세를 잡았다. 간단한 준비 자세마저도 빈틈없이 완벽했다. 쥬다스는 일단 현재의 몸이 어느 정도까지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론을 따라갈지를 가늠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예에 있어 자신보다 훨씬 상위 클래스인 에단이 상대해 주는 게 아주 적합했다. 에단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먼저 나서지 않고 잠자코 쥬다스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그럼.” 탓. 쥬다스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가벼운 몸놀림으로 봉을 휘둘러왔다. “……!”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이었다. 에단은 내심 놀랐으나 능숙하게 배운 대로 찌르기를 막아내며 옆으로 돌아섰다. 봉은 날카로운 검과 다르게 다루는 무인의 몸도 하나의 무기처럼 쓰였다. 애초에 상대를 베거나 크게 상처 입히는 게 목적이 아닌 무구였다. 마치 권술처럼 봉술도 팔다리를 이용하여 자유로운 공방이 가능했다. 그러려면 기다란 봉을 물 흐르듯 다룰 수 있게끔 회전에 대한 감각이 필요했다. 그리고 반동에 대한 이해와 유연한 몸놀림, 빠른 판단력, 그에 더해 순간적인 임기응변도 전부 전투력에 가감을 가져왔다. 이 점에 있어서 에단은 몹시 훌륭한 적응을 보여주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미끄러지듯 빈틈을 파고들었다. 어깨가 먼저 이동하고 봉은 그다음에 그림자처럼 따라 날아들었다. 까앙! 그들이 맞춰왔던 합 중 제일 그럴듯한 충돌이 일어났다. 물론 에단이 적당히 힘 조절을 하고 있긴 했지만 예전 같았으면 어림없을 충돌이었다. 봉을 놓치고 쓰러지는 대신, 쥬다스는 무리 없이 맞부딪히며 충격을 흘려냈다. 손바닥이 저릿하면서 얼얼한 느낌이 났지만 태세를 유지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몸이 머릿속의 그림을 어느 정도 재현해 낼 수 있게 되었음을 느낀 쥬다스는 침착하게 다음 합을 준비했다. 휘릭. 후퇴하듯 물러선 봉이 한 바퀴 반원을 그리며 원위치로 돌아왔다. 이를 가볍게 고쳐 잡은 쥬다스가 긴 보폭으로 단숨에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여기저기서 찔러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낸 에단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속공. 힘 자체는 크지 않으나 계산이 몹시 빠르다.’ 차분하던 평소 모습과 달리 쥬다스의 전투 스타일은 빠른 호흡으로 몰아치는 속공이었다. 다른 학생들의 합을 지도하다 문득 시선을 준 메이란도 꽤나 놀란 눈을 했다. 그간 배웠던 기초적인 자세는 물론이고 웬만큼 봉에 익숙하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기 어려운 기교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다루는 이의 힘은 보잘것없었으나 이것저것 실험이라도 하듯 보여주는 다채로운 움직임에 에단은 끓어오르려 하는 호승심을 제어했다. 지이익. 힘 대결에 밀려 바닥을 긁다시피 뒤로 밀려 나간 쥬다스를 향해 에단이 마무리를 위해 가볍게 봉을 쳐 내려던 순간이었다. 지팡이처럼 자신의 봉을 땅에 세운 쥬다스가 이를 지지대 삼아 빙글 공격을 피하고 훌쩍 뒤로 물러섰다. 서로의 공격이 닿지 않는 거리까지 사이를 벌린 그가 잔잔히 입을 열었다. “완급을 조절하여 상대해 주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에단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사실상 실력은 에단이 훨씬 우위에 있었다. 무예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근력, 그리고 오랜 훈련을 통해 다져온 실질적인 임기응변 등이 봉술에도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밀리는 쥬다스였지만 그가 품고 있는 봉에 대한 지식과 정교한 계산에 의한 재빠른 판단력만큼은 일품이었다. 에단은 다시금 1황자가 문과에서 신청 과목 전부 100점을 기록한 수재임을 상기해 냈다. 백치 연기(?)로 모두의 눈을 속여 온 게 무색할 만큼 그 비상한 두뇌는 무술에서도 여과 없이 가치를 드러냈다. 몸으로 체득해야 하는 봉술도 결국 머리로 먼저 이해하고 습득해 버린 것이다. 무술을 제대로 익힐 만한 체력과 육체적 감각만 주어졌다면 쥬다스는 문무를 겸비한 천재로 거듭났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무술과는 체질이 맞지 않았다. 대련에서는 훌륭하게 선방했지만 주어진 골격과 여전히 남들보다 허약한 체력 탓에 아마도 이 정도까지가 그의 한계일 터였다. 쥬다스 스스로도 그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지금의 결과에 만족했다. 상대를 맡았던 에단도 역시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이능을 가지고 계시니 오히려 예상치 못한 훌륭한 성과다.’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한 사람이 모든 면에서 A+를 기록할 수는 없었다. 누구든 최고의 성적과 최하의 성적을 내는 다양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중 1황자는 평균적으로 고르게 A급 능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중 무력이 B급을 찍는다 한들 이를 치명적인 단점으로 취급할 수 없었다. 지력은 물론이고 정령술이라는 훌륭한 특기가 있으며 성품이나 판단력 등 고루 지니고 있는 장점이 많았다. 그처럼 가지고 있는 능력마다 그 편차가 크지 않고 고르게 상위 수준을 유지하고 있기란 사실상 쉽지 않았다. 이어지는 이론과 응용을 들으며 봉술 수업을 마친 쥬다스는 홀로 정령학 연구소에 들렀다. 매일 1시간씩 짧게 진행되는 수업을 듣기 위해서였다. 원래대로였으면 아벨이 찾아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향했을 길이었으나 지금 그는 학생부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처분이 결정지어지는 즉시 알려주겠다고 하였으니 쥬다스는 그저 기다렸다. 그렇게 다소 허전한 심정으로 도착한 연구소에서도 놀란 시선이 그에게 쏟아졌다. “어서 와요, 쥬다스 님.” 땅의 정령 휴를 끌어안은 채 환하게 웃는 정령학 교사 이사벨만이 평소처럼 그를 반겨주었다. 이사벨은 하루아침에 훌쩍 자라난 몸에 대해 별달리 궁금해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대해 주는 그녀의 태도는 편안함을 가져다주었다. “……누구?” 대신 겨울바람 정령 비비를 분홍머리 위에 얹은 7살 리베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진심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의문스러운 시선에 쥬다스는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어주었다. “이런, 알아보지 못할 정도인고. 쥬다스란다.” “……쥬다스 님? 오빠가?” 순진무구한 리베흐의 반응을 접한 쥬다스는 순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오빠’라는 발음은 실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92년간의 기억이 있는 이그레트로서는 ‘할아버지’라 불리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기껏 순화해 봤자 ‘현자님’이나 ‘선생님’ 정도로 불렸다. 쥬다스의 육신이 이제 겨우 12살이라는 건 머리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정작 7살 여자아이에게 오빠라 불리고 나니 무언가 기분이 미묘했다. “…….” 쥬다스는 잠시간 침묵하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키가 조금 컸지. 이리 알려주어도 영 모르겠느냐? 네 정령은 알아보는데 말이다.” 그의 시선을 받은 겨울바람 정령 비비가 방실 웃음 지었다. 머리에 있던 비비를 손바닥으로 옮겨든 리베흐는 정령의 반응을 보고서야 납득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아, 진짜?!” “음.”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키 클래!” 아이는 늘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리베흐는 자신과 비슷한 체구였던 쥬다스가 순식간에 자랐다는 사실에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골고루 잘 먹고 제 시간에 잘 자면 클 거란다.” “이미 그러구 있는데…….” “대견하구나.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자랄 것이야. 뭐든 갑작스러운 것보단 자연스럽게 차근차근 진행되는 것이 좋다 하니.” “우우, 왜요?” 빨리 자라고 싶은 소녀에겐 어려운 말이었다. 쥬다스는 그 작은 머리통을 다독다독 쓰다듬어주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한꺼번에 많은 음식을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누. 아침, 점심, 저녁 먹을 수 있는 만큼 먹어야 배가 아프거나 고프지 않지. 이를 다른 말로 ‘소화’라 한단다.” “먹으면 위장이 소화하는 그거?” “오호라, 잘 아는구나. 바로 그렇다. 먹을 때만이 아니라 사람은 무엇이든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해.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때론 남들보다 늦게 출발할 수도 있지. 자신이 소화할 수 있을 때, 소화할 수 있을 만큼. 누구나 자기 속도란 게 있는 거란다.” “자기 속도……?” 리베흐가 멍하니 되물었다. “그래, 이 할…….” “……?” “……오빠처럼.” 자연스럽게 ‘할애비’라고 자신을 칭할 뻔했던 그는 어색하게 말꼬리를 돌렸다. 다행히 리베흐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네!” 참으로 영특한 아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 오늘이 11월 11일이군요!; 독자님들 초코막대과자(?) 너무 많이 드시진 마시고....ㅎㅎㅎ 남는 물량은 솔로부대 선봉에 서있는 공든탑 대원에게 기부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제 주소는요... (말을 잇지 못하는) 사족으로 제 입장에서 이그레트를 심리/관계에 미숙하다 표현하는 이유는, 이 할배(...)는 늘 사람들과 자로 잰 듯이 거리를 유지합니다. 심성이 따뜻하지만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상대가 ‘왜 상처를 입는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야 이론상, 혹은 자기가 이해하고 있는 한에선 상대방이 상처받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작중 절친이라 부를 만한 인물들이 꽤 나오는데, 이그레트는 그네들을 전부 동일하게 대합니다. 자기가 중심이면서도 늘 한 발짝 물러서서 관망하려는 태도가 있달까... 이게 초반엔 너무 강해서 호구레트(....)라 불릴 건수를 만들었고 현재는 조금씩 알아가는 중입니다. 어찌 보면 이기적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아무튼 현명하되 미숙한 불균형적인 인물입니다. 하긴 그렇다고 주인공이 특정인이나 감정에 치우치게 되면 그것도 곤란해지니... 이거 참 먼치킨도 살기 피곤하겠습니다.ㅎ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표현(?)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49 / 0240 ---------------------------------------------- 6장. 재회 아벨 투르케의 처분이 결정지어진 건 그로부터 이틀 후였다. 결과는 <특기생 취하>. 특기 장학금이 아니면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는 위치에 놓인 아벨에게 있어 사실 상 퇴학이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루바흐의 모든 수업이 끝난 저녁 무렵, 학생 부장 사무엘은 손수 아벨을 데리고 쥬다스의 숙소로 찾아왔다. 쥬다스가 머무는 숙소는 루바흐에서 마련한 일종의 기숙사였다. 하지만 귀족에서부터 황족이 학생으로 입학하는 루바흐가 평민을 대상으로 하는 인재 양성 학교와 똑같은 수준의 기숙사를 제공할 리는 없었다. 기숙사는 기본 1인 1실이었고 경비와 마법 도구로 치안이 보장되어 있으며 최신 마법 설비로 안락한 환경을 구성했다. 잘 교육받은 고급 메이드들이 청결을 담당하며 건물 1층부터 2층까지 마련된 카페테리아는 오픈된 테이블과 함께 방음이 잘되는 룸도 같이 설계되어 있었다. 루바흐의 기숙사는 각 방위별로 4개, 그중에서도 쥬다스가 머무는 동쪽 기숙사는 가장 규모가 크고 고급스러운 시설이었다. 그들은 숙소 숙박 공간이 아니라 1층에 마련된 카페테리아의 룸 테이블에서 만났다. 일목요연하게 ‘아벨 투르케의 처벌 경위’, 그리고 앞으로 처리될 사항에 대해 설명한 사무엘은 쥬다스가 요청했던 전달사항이 끝나자마자 다시 바삐 자리를 떠났다. 둘만 남겨진 자리에서 쥬다스는 먼저 입을 열지 않고 아벨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아벨은 메마른 잿빛 눈동자를 테이블에 놓인 베이글에 고정시켰다. 그는 현재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 끝났어. 전부.’ 더는 외면할 수조차 없다. 현실을 도피한 결과가 바로 정령 폭주였다. 계약을 하지 못해 직접 본 적도 없는 자신의 정령을 떠올리며 아벨은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제국을 비롯해 모든 국가에서 금기로 지정시킨 사령술사가 나타났다. 그 사령술사가 제물로 자신의 고향을 삼았다. 마치 폭우가 내려 홍수가 일어나듯 모든 것이 휩쓸려 사라졌다. 깔끔하게. 처음엔 놀랐고, 이어 부정했다. 그럴 리 없다며 외면하다 이내 뜨거운 분노가 가슴속을 장악했다. ‘왜 하필 나인 거지?’ 모두가 웃고 즐기는 연회에서 홀로 낙오됐다. 불행은 낙석처럼 그의 눈앞을 덮쳤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주변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불러낸 정령이 범람하는 고통에 감응하여 저지른 짓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순간이지만 돌아갈 곳을 잃었다는 사실보다 정령에 대한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오로지 그 하나만을 위해 공감하고 날뛰어 준 정령에게 아벨은 감사와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결국 계약하는 데엔 실패했지만 누군가 자신의 분노를 알아주고 대신 표출해 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자신의 고향을 멸망시켰다던 사령술사에 대한 복수심도 들지 않았다. 그러기엔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고 무력했다. 복수, 그것도 힘이 있는 자가 품을 수 있는 결의였다. 아벨은 자신의 주제를 깨닫고 차디찬 현실 앞에 고개를 숙였다. ‘나란 놈, 그냥 구제불능이지…….’ 그는 마침내 포기했다. 이제 어찌되든 상관없었다. 루바흐에 계속 다니든 아니든, 어느 쪽이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죄송, 합니다.” 그래서 사과했다. 1황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는 몰랐다. 하지만 그 역시 자신을 비난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아벨은 힐책과 비난에 익숙했다. 여기서 더 욕을 들은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밑바닥의 바닥까지 왔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최악에 이르렀으니 더는 내려갈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내려놓자 마음이 마냥 잔잔해졌다. 늘 초조하고 걱정하며 살아온 여태껏 겪어본 적 없는 담담함이었다. 아벨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떨릴 이유가 사라지자 더듬거리던 말도 좀 더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벨은 무기력하게 한 번 더 이유 모를 사과를 건넸다. “……잘못했습니다.” “그건 어떤 감정으로 하는 말이더냐?” “……?” 들은 적 없는 질문이었다. 아벨은 고개를 숙인 채 멍하니 발끝을 바라보았다. 난리 통에 먼지가 잔뜩 묻어 지저분한 학생화가 보였다. “네 마음에 대해 물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아벨 투르케’가 어떤 기분인지 말할 수 있겠느냐.” 보통은 고개 숙인 그에게 뭐가 미안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그네들 기준에 타당하지 않을 경우 비웃음이나 폭력이 돌아왔다. 한 번도 자신의 기분이나 감정 따윌 물었던 사람은 없었다. “…….” 잠시 룸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쥬다스는 더 이상 질문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저 아벨이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다시 기다려 주었다. 그 따뜻한 배려에 아벨은 잔잔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의 정체를 곱씹었다. 뭐라고 답해야 하지, 편안하다? 아니면 괴롭다? 이도 저도 아닌 극과 극의 표현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아벨은 충동적으로 툭 한 가지를 내뱉었다. “스, 슬픈데.” “‘슬프다’?”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히 그가 한 말을 반복했다. 제 말을 잘 듣고 있다는 신호였다. 그에 용기를 얻은 아벨이 우물쭈물 마저 입을 열었다. “……슬프다고 마, 말하면, 비웃을까 봐.” “…….” “아니, 내가 날, 비웃을까 봐. 울고 싶었는데. 근데 울지도 못하고 그냥, 웃을까 봐. 그, 그래서.” 두서없이 흘러나오는 말이 다시 제 귀로 돌아왔다. 아벨은 무기력하게 늘어뜨렸던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슬프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랬는데 지금은 어째선지 숨길 수가 없게 되고 말았다. ‘그뿐입니다. 사실은 누구보다 약한 내가 무섭고 슬픈데. 그냥 말을 못할 뿐.’ 언어화되지 못한 상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투둑. 대신 꽉 쥔 주먹 위로 눈물자국이 얼룩졌다. ‘……겁쟁이.’ 아벨은 자신을 돌아보며 울었다. 복수도, 희망도 꿈꾸지 못한 자신이 그렇게 한심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열심히 견뎌왔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려 했다. 그는 뒤늦게 저가 자신으로부터 줄곧 도망쳐 왔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걸 인정하는 게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왜 못했을까. 아벨은 주먹을 움켜쥐고 아이처럼 울었다. 폭풍 같던 울음이 그쳐 갈 때 즈음, 가만 지켜보기만 하던 쥬다스가 그를 불렀다. “아벨아.” 흡사 동생을 부르듯 다정한 부름에 아벨이 흠칫 어깨를 털며 고개를 들었다. 울고 나니 쓸데없는 잡념이 사라져 겨우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내게 정령술을 배워볼 생각이 있느냐.” “……네?” 목이 갈라져 쉰 소리가 났으나 쥬다스는 재차 그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아벨 네겐 충분한 재능이 있다. 미계약 상태의 정령이 스스로 너를 돕길 원해 여직 네 주변을 맴돌고 있을 정도야. 하여, 내 너에게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만들어주고자 한다.” “저, 정령이…… 아직 제 곁에.” “그래, 그 힘을 어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오로지 네 선택에 달렸다. 나는 그저 너를 선택한 정령의 믿음을 배반하지 않는 길을 가길 바랄 뿐이란다. 어찌, 아벨 네 정령을 만나보겠느냐?” “……!” 끝났다고 생각한 곳에 길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정령술사가 되어 자신만의 정령을 만나는 건 고향과 별개로 그의 오랜 꿈이기도 했다. 아벨은 당장 눈앞에 내려진 동아줄을 부여잡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치미는 의구심을 거둘 수 없어 물었다. “……당신은, 왜 제게?” 목적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아벨이 바라보는 세상은 그랬다. 흔들리는 잿빛 눈동자를 마주한 쥬다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거 너와 닮은 아이가 있었지.” 어찌 보면 자신이 뿌린 씨였다. 아벨은 그 희생자였으며 방관한 ‘이그레트’에게도 그 책임이 있었다. 비단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쥬다스는 미안한 낯빛으로 말을 이었다. “내 불찰로 상처를 받은 아이였다. 또 그 아이가 다시 너를 비롯한 많은 이에게 상처를 남겼구나. 미안하다. 이는 나의 과거로부터 뿌리가 난 것이니 내가 거둠이 옳겠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던 황자의 금안이 이내 숨을 죽여 경청하는 아벨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구나. 그래, 사사로운 욕심이라 여겨주련.” “…….” 만일 이 제안이 그저 꿀을 발라 달콤해 보이는 쥐덫이라도 그는 거절할 수 없었다. 아벨은 1황자 앞에 털썩 무릎 꿇었다. “거, 거두십시오. 욕심대로 쓰셔도 좋고, 한낱 당신께서 하려는 일의 거름으로 쓰실지언정.” 그는 제 삶에 마지막으로 내려진 동아줄을 붙들었다. “말씀에 따르겠나이다, 전하.” * * * 다음 날 쥬다스는 더 지체하지 않고 황실에서 보내온 소환장을 챙겨 교무처로 찾아갔다. 황실의 도장이 찍힌 소환장은 단번에 그 효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즉시 적법한 확인 절차를 밟은 후 외출증을 교부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벨 역시 함께 교무처로 가 자퇴서를 제출했다. 루바흐에서 자퇴를 처리하기까지엔 시일이 좀 걸렸다. 어차피 학교에 남아 있을 재력, 명예도 모두 사라진 아벨은 미련 없이 자퇴서를 내고 쥬다스의 뒤를 따라 교내 잔디 공원으로 이동했다. 봄기운이 무르익어 짙은 녹색으로 자라난 짧은 잔디는 분수대를 끼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학생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군데군데 벤치나 매끈한 대리석이 깔려 있었다. 쥬다스는 벤치 대신 널찍한 대리석으로 향했다. 아벨이 그 뒤에 우물쭈물 따라붙었고,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일어나 그들을 반겼다. 원래 쥬다스와 붙어 다니던 에단을 선두로, 1황자의 편에 설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 크리스티나, 바이칼, 마르젠이었다. 그들은 쥬다스의 황궁 행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고 모인 상태였다. 그렇게 총 여섯 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황실로 가신다고요?” 바이칼이 먼저 운을 떼었다. “그래, 내일 출발하려 한단다.” “예?! 당장 내일 말입니까?” “하하,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좀 갑작스럽네요.” 마르젠이 유들유들하게 웃으며 교복 재킷을 벗었다.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은 이제 슬슬 겉옷을 걸치고 있기엔 기온이 높았다. 재킷을 접어 팔에 걸쳐 든 마르젠이 쥬다스를 빤히 바라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확실히 지금이 폐하께서 부르실 만한 시점이긴 합니다. 아니, 사실 조금 늦었습니다.” 백로황자에 대한 소문은 루바흐는 물론이고 축제에 참석한 귀족 학부형들의 눈과 귀를 타고 삽시간에 제국 전체에 퍼졌다. 거의 기적에 가까운 변화였기에 평민은 몰라도 귀족이라면 아이부터 노인까지 그 소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황제 폐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하심은, 드디어.’ 그 소문은 결국 황제의 흥미를 끌었다. 마르젠의 감색 눈이 가늘어졌다. ‘비어 있던 황태자 자리에 주인이 생긴다는 뜻.’ 그게 1황자가 될지 다른 유능한 황자가 꿰차고 앉게 될지는 아직 판단하기 일렀다. 하지만 마르젠은 불안 대신 기대를 느꼈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고, 1황자에 대한 감은 몹시 선명했다. 마르젠은 슬슬 자신이 움직여야 할 때임을 알아차렸다. “그럼 다녀오시는 동안, 저희는…….”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 일제히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동행하겠습니다.” 짠 듯이 황자와의 동행 의지를 밝힌 세 사람은 이번엔 나란히 입을 다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댁들이 왜?’라는 눈치를 보내는 그들을 보며 마르젠 역시 속으로 당황했다. ‘……뭐지, 이 사람들. 전부 수업을 빠지고서 따라가겠다고?’ 아무리 허가를 받고 결석을 한다 해도 수업에 빠지면 불이익이 컸다. 평가에 예민한 귀족 사회에서 성적을 저조하게 받았다는 건 흠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껏 성적 관리에 철저했던 크리스티나의 경우 더욱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녀만큼은 아니더라도 박 터지게 공부하여 석차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던 바이칼도 마찬가지였으며 신입으로 입학한 에단 역시 이번이 첫 학기인 만큼 보다 세심한 성적 관리가 필요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가 부드럽게 손을 내저어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시험을 앞둔 수험생 여러분, 편안한 몸과 마음으로 시험장에 다녀오실 수 있길 바랍니다. 결과에 상관없이 웃으며 하루를 마칠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그 길을 지나온 선배로서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습니다. 그동안, 정말로 잘 견뎌오셨습니다. 그리고 수험생이 아닌 독자님들도 오늘 하루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0 / 0240 ---------------------------------------------- 6장. 재회 “음? 그럴 필요까진 없단다. 다녀오려면 열흘이 넘을 텐데 그간 수업을 전부 빠지는 건 너무 아쉽지 않겠누.” “……괜찮습니다.” 에단이 먼저 굳은 의지를 밝혔다. 충성 서약을 결심한 만큼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이미 1황자는 그가 따르기로 마음먹은 주군이었다. 결석으로 인해 받는 불이익과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따르겠습니다.” 따로 말하진 않았지만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역시 같은 뜻이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결연한 눈빛을 한 사람씩 마주한 쥬다스는 더 이상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그로서는 딱히 강제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쥬다스는 아이들의 결정을 수용했다. 더 말리지 않는 쥬다스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뱉은 그들은 그제야 뒤늦게 멀거니 뒤에 서 있는 아벨을 발견하였다. 여전히 표정이 어둡긴 했지만 확실히 빛이 돌아온 눈을 확인한 바이칼이 퉁명스레 툭 말을 건넸다. “이제 정신 좀 드냐.” “…….” “어우 씨, 그때 엄청 놀랐는데. 도와주려고 가까이 갔다가 네 그 성질 더러운 정령한테 썰려서 죽는 줄…….” 툴툴대는 엄살에 아벨은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였다. 사실 정령 폭주를 일으킨 당시 상황에선 그 자신도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에단과 바이칼이 도와주려 난입했던 건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자세한 건 안개라도 낀 듯이 흐릿했다. 딱히 대답을 요한 게 아니었던지라 홀로 구시렁거리던 바이칼이 문득 엇 하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그 정령은 도대체 무슨 정령이었지? 거 왜, 물이나 바람 이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원래 정령 자체가 희귀하긴 하다지만 살면서 그런 정령은 듣도 보도 못했어.” “……그, 그건.” 사실 정령에 대해 궁금하기로 따지면 아벨이 더했다. 자신이 소환한 정령이라 해도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계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쩔쩔매고 대답하지 못하는 그 대신 쥬다스가 부드럽게 답했다. “거울의 정령이란다.” “예?” “……네?” 생소한 명칭이었다. 쥬다스는 제 어깨에서 뒹굴고 있는 유니를 살짝 들어다 손바닥에 놓았다. “너희가 익히 알고 있는 정령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세상을 구성하는 요소인 자연계 4속성일 터. 하나 세상엔 다양한 정령이 존재한다 하더구나.” 그가 지금 하는 말이 ‘~하더라’ 하는 전달식인 이유는 그 역시 자연계 외 정령을 직접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흥미로운 시선으로 아벨의 뒤에 그림자처럼 동동 떠 있는 거울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보통 자연계 정령이 인간이나 동물 등 살아 있는 생물체의 형상을 취하는 것과 달리 물질계에 속하는 거울의 정령은 그저 뭉실뭉실한 안개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눈코입이 없으며 거대한 먼지 덩어리처럼 그저 허공에 둥실둥실 떠있을 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전혀 살아 있는 느낌이 안 들었다. 「그러니까 우리랑은 먼 친척뻘인 셈이야!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이랑 힘이 정말 많이 다르거든. 쟤들은 우리랑 사는 동네도 달라. 정령계가 아니라, 뭐라지.」 「우웅, 이공간? 차공간? 비스므리한 거였다요.」 「아공간(亞空間). 무의 세계, 왜곡되고 비틀린 공간이다.」 다른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세 정령이 그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는 중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에 이를 취합하여 적당히 필요한 부분만을 아이들에게 재전달했다. “아벨이 소환해 낸 정령은 물질계, 그중 거울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 한다. 거울이 가지고 있는 ‘반사’의 특징을 마음대로 다를 수 있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때, 도플갱어처럼 제 모습을 흉내 냈던 거로군요.” 거울의 정령을 정면으로 상대했었던 에단이 당시를 떠올리며 수긍했다. 쌍둥이처럼 똑같았던 모습에 심지어 원판이 가진 능력마저 복제해 낸 그 정령의 속성이 ‘거울’이라면 말이 되었다. 무력에 초점을 맞춘 에단과 달리 마르젠이 눈을 빛내며 턱을 짚었다. “호오, 그거 엄청난데요? 사용하는 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마음만 먹는다면야 손쉽게 아비규환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겁니다.” 꼭 무력만이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었다. 실력 있는 정령술사가 아닌 이상에야 구별이 힘든 ‘가짜’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는 자칫 악용될 경우 큰 혼란과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이었다. 당장 마르젠이 예상할 수 있는 시나리오만 해도 정계의 혼란이나 국제적인 분쟁을 일으킬 만한 건수가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미 그 부분을 생각해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아직 아벨에게 정령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벨은 루바흐의 학생이 아니게 될 것이야.” “그건…….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에단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아벨이 가진 힘은 시야 밖에 놓아두기엔 너무 위험했다. 자신이 맹수임을 모르는 어린 불곰을 길거리에 풀어놓는 격이었다. 아직 새끼에 불과한 곰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무력하게 죽어갈 수도 있지만, 예상외로 잘 견디다 누군가의 목을 물어뜯을 수도 있었다. 한 번 피 맛을 알고 자신이 맹수임을 깨닫게 되면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본래 통제 불능의 위협이 더 위험한 법이었다. 차라리 학교 안에 두고 감시하는 게 나았다. 쥬다스는 에단이 뜻한 바를 두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학생이 아니니 더는 수업을 듣지도 성적에 연연할 필요도 없지. 대신 아벨은 앞으로 ‘연구원’ 자격으로 루바흐의 정령학 연구소에 머물게 될 게다.” “‘연구원’……?” 가만히 듣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그 말을 되풀이하며 팔짱을 끼었다. 이는 쥬다스가 학생 부장 사무엘에게 특별히 부탁한 처리 내용이었다. 아벨은 어제부로 투르케 남작가의 자제가 아니라 1황자 휘하로 소재를 변경했다. 황자의 이름 아래 보호받으며 그 재능을 지원하여 ‘정령학 연구원’으로 자질을 키울 수 있도록 한다. 단 향후 있을 모든 책임은 쥬다스가 짊어지는 조건이었다. 또한 이제 학생이 아닌 연구원인 만큼 루바흐의 시설 중 정령학 연구소만이 그에게 허가될 예정이었다. 사실상 정령술이 아닌 다른 학업에는 재능이 없으며 관심도 보이지 않는 아벨로서는 최적의 선택이기도 했다. 비록 루바흐의 졸업장이 나오진 않을 테지만, 적어도 원하던 정령술을 배워 수련할 수는 있게 된 셈이다. “확실히 그 편이 효율적이군요.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러나 쥬다스를 믿는 것이지 아벨을 믿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서늘한 눈으로 흘끗 아벨을 쳐다보았다. “아벨이라 했나. 네가 속했던 투르케 사막은 완전히 얼어붙었다고 했지. 너는 멸망한 고향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나.” “…….” “어려운가? 네 사사로운 감정과 복수심 따위에 흔들려 쥬다스 님을 곤경에 빠뜨리지 않을 수 있겠냐는 뜻이다.” 듣는 사람의 상처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차가운 어조였다. 하지만 그 물음에는 틀림이 없었다. 쥬다스는 가뜩이나 여기저기서 노리고 있는 적이 많았다. 심지어 그를 도울 외척도 없었다. 그의 모계는 루바르잔 제국 출신이 아니었다. 알려지기로는 먼 타국에서부터 동맹혼을 위해 찾아온 왕녀라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5년 전, 그녀의 의문스러운 죽음과 동시에 국가 간 왕래가 끊기다시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인 아벨을 거두는 걸 그냥 두 손 놓고 바라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리스티나의 차가운 어투에 아벨은 움찔 어깨를 좁혔다. 그러나 소심하게 움츠러든 모습과 달리 금방 입을 열어 답했다. “흐, 흔들리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무엇보다, 전하의 뜻, 을 따르려 합니다.” 탐탁지 않다는 듯 냉기를 풀풀 날리는 크리스티나에게 쥬다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내일 먼저 투르케를 들릴 생각이란다.” “투르케를……?” 모두의 시선이 아벨을 향했다가 다시 고무줄처럼 쥬다스에게로 돌아왔다. “어, 쥬다스 님, 투르케 사막은 수도와 다른 방향으로 알고 있는데요.” 바이칼이 코끝을 문지르며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이들도 그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바흐 학원은 제국 서쪽의 넓은 지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수도는 교황청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중앙에 위치해 있었고, 투르케 사막은 최남단 끝에 펼쳐진 황량한 대지였다. 루바흐에서 투르케 사막을 들렀다가려면 아무리 포탈을 통한다 한들 한참을 돌아서 이동해야 했다. “돌아갈 곳을 잃었다 하여 무작정 잊으라 하는 건 핍박이나 다름없다. 스스로 현실을 보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할 테지. 그러고 나서 황궁으로 가도 늦지 않아.” “하지만, 어떻게.” “보거라.” 쥬다스는 가볍게 유니의 힘을 사용했다. 모두의 의문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간단했다. 솨아아.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 바람이 잔디 위를 한차례 쓸고 지나갔다. 그중 일부는 쥬다스의 손에 몰려들어 작게 회오리를 그리고 있었다. 후웅. “바람이 지나는 길은 하나가 아니란다.” 은빛의 황자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1황자가 ‘바람의 부름’이나 ‘바람의 인도’ 정도의 상급 기술을 다룰 줄 아는 정령술사였음을 상기해 냈다. 물론 일반적으로 상급 정령술사가 활용 가능한 범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이 가진 힘으론 기껏해야 가시거리에 해당하는 영역을 이동할 수 있었는데, 그에 비해 정령왕인 유니의 힘이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투르케로 이동이 가능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자신이 다루는 힘을 온전히 개방할 생각은 없었다. “현재 제국에서 다루는 포탈은 정령석을 장착하여 안전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여기에 정령의 힘을 더해 준다면 효율을 어느 정도 증폭시킬 수 있단다.” 그는 그중 일부의 활용법을 알려주었다. * * * 다음 날 아침 6명의 학생은 루바흐 포탈 앞에서 다시 모였다. 확고히 의지를 드러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은 아예 외출증까지 따로 챙겨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간밤 고민한 흔적이 역력한 마르젠은 푸석해진 얼굴로 나와서 동참 의지를 겨우 밝혔다. ‘이런 때 잘 보이지 않으면…….’ 원래대로라면 황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학원 내에서 그의 추종 세력을 만들 생각이었다. 마르젠은 이미 많은 귀족과 그 자제로부터 정치적인 능력과 처세술을 인정받고 있는 정계형 인재였다. 그의 정보력은 십 대 소년답지 않게 빠르고 정확한 걸로 소문이 자자하였으며 때문에 그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눈독 들이는 지도층이 많았다. 마르젠은 이를 역으로 끌어들여 1황자의 편으로 돌리는 작업을 구상하고 있었다. 자신이 가진 연줄을 중심으로 그를 황좌에 앉혀 놓을 수만 있다면 새 지도층을 좌지우지할 거대한 힘이 생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다 1황자가 자신을 믿고 최측근으로 여기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가능한 일들이었다. 기껏 날개를 달아주려는데 정작 본인이 거부해 버린다면 끈 떨어진 뒤웅박마냥 낙오될 게 뻔했다. 마르젠은 피 같은 물밑 작업을 포기하고 황자의 신임을 얻기 위한 행동을 택했다. “의외로군. 네가 몸을 사리지 않을 때가 다 있다니.” 그런 마르젠을 향해 크리스티나는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하핫~ 최대한 사리고 있는 겁니다? 뭐, 그만큼 쥬다스 님께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알아봐 주시면 좋겠군요.” “쯧, 네가 무슨 기대를 걸든 관심 없어. 쓸데없이 방해하지나 마.” 그녀의 날선 경고에 마르젠은 그저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답했다. 정말이지 예전부터 입맛을 맞춰주기 어려운 아가씨였다. 마르젠은 크리스티나에게서 호언을 듣느니 차라리 목석같이 입을 꾹 다문 에단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편이 훨씬 쉬우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것도 상당히 엇나간 추측이었다. “외출 확인증을 제출해 주십시오.” 포탈 관리자의 요구에 대표로 확인증을 모아 들고 있던 쥬다스가 이를 건넸다. 총 인원수를 확인한 포탈 관리자는 포탈의 동력을 작동시키며 주의 사항을 알렸다. “외출 허용 기간은 최대 14일입니다. 연장 신청은 기간이 끝나기 전에 해당 지역 포탈에서 따로 해주셔야 하며, 무단으로 어길 시 해당 기간 수업의 학점에 반영됩니다.” 커다란 전신 거울처럼 생긴 포탈의 내부가 물결치듯 일렁였다. 마법력에 의한 공간 분리, 즉 굴절이 일어나고 있었다. “미성년자의 포탈 이용 가능 횟수는 하루 1회입니다. 최종 목적지는 루바르잔 황성이며 총 3일에 걸쳐 제1, 제2, 최종 목적지까지 이동하게 됩니다. 지금 향하실 제1목적지는 샤를로 영지입니다.” 황성은 수도에 위치해 있었기에 지난번 진명식 때 다녀왔던 교황청과 같은 경로를 지나도록 포탈 좌표가 잡혀 있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에 대해 수정을 요청했다. “제1목적지를 투르케 사막으로 변경해 주십시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그러고 보니 어느 틈엔가 50화 기점을 찍었네요. 여러분은 완결까지 대략 1/4을 함께 하셨습니다. ㅎㅎ 잘 따라오고 계십니까~?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매일 한 걸음씩 걸어가고 있습니다. 가끔 이렇게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괜시리 뿌듯해지고 그러네요.ㅋ 카니에 대해선... 진짜 입이 엄청 근질거리는데 꾹 참고 있습니다. ㄷㄷ; 음...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평점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1 / 0240 ---------------------------------------------- 6장. 재회 “제1목적지를 투르케 사막으로 변경해 주십시오.” “……투르케 사막 말씀이십니까? 그곳은 거리가 멀어 곧장 이동하실 수는 없습니다. 중간에 포탈을 2회 더 갈아타셔야 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좌표 설정을 투르케 사막으로 잡아주시면 됩니다.” 사륵. 관리자가 의문을 표할 새도 없이 루니가 어슬렁거리며 포탈 옆에 섰다. 그와 함께 실체화한 유니가 포로록 날아올라 포탈을 녹색 바람으로 휘감았다. 은은하게 감싸오는 정령의 힘을 알아차린 포탈 관리자가 서둘러 동력 장치를 확인했다. 평소 표시되던 에너지양의 5배 이상의 수치가 차오르고 있었다. 마법력이 아니라 정령이 다루는 자연의 힘이었기에 안전적인 문제도 전혀 없었다. 실제 제국에서 관리하는 유능한 정령술사들은 포탈을 이용할 때 이런 식으로 포탈의 효율을 높여 이동하곤 했으니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관리자는 최종 점검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라면 충분히 무리 없는 장거리 이동이 가능했다. “제1목적지는 투르케 사막 포탈입니다. 탑승해 주십시오.” 쿠우우우. 포탈 안에서는 공간이 갈라져 우레 같은 굉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쥬다스를 선두로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 마르젠까지 5명의 루바흐 학생이 한 사람씩 포탈에 발을 들였다. 마지막으로 포탈의 경계를 넘은 아벨은 공포에 희게 질렸으면서도 꿋꿋이 멈추지 않고 뒤를 따랐다. 이로써 6인 모두 포탈 탑승을 완료했다. 곧이어 먹물 같은 에너지파가 그들을 집어삼켰다. “학우 여러분의 안전한 외출을 기원합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 포탈 관리자의 사무적인 인사말만이 공허하게 맴돌았다. * * * 학원 루바흐와 투르케 사막은 굉장히 멀었다. 만일 말을 달려 도착하려 한다면 5일 밤낮을 쉬지 않고 이동해도 닿지 못할 거리였다. 그 정도의 거리를 정령의 기운을 더한 포탈은 겨우 몇 초 만에 뛰어넘었다. 먹물 같던 검은 장막이 사라지고 다시 시야가 밝아졌다. 달라진 점이라면 루바흐의 고풍스럽고 고고한 포탈 관리실 디자인과 달리 투르케 사막의 포탈 관리실은 허름하고 휑한 느낌을 주었다. 도착하자마자 싸늘한 한기가 먼저 팔뚝을 감쌌다. 살면서 한 번도 고향에서 느껴본 적 없는 한기에 아벨이 가만히 팔을 쓸어내렸다. 이유 모를 소름이 팔뚝을 타고 등줄기까지 죽 돋았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는 투르케 사막입니다. 사령술사의 침공으로 인하여 영지가 완전히 붕괴되었으므로, 귀한 분들이 머무실 공간은 따로 마련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재건작업 중이니 불편하시더라도 근방에 설치된 간이 숙소에 머무시길 바랍니다. 포탈 재이용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부터입니다. 그럼 편안한 하루 보내십시오.” 현재 투르케는 모든 시설이 파괴된 상태였다. 거기다 원주민이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멸하였으니 재건이라기보단 거의 신축에 가까웠다. 심지어 이 포탈 관리실 자체도 급조된 상황이었다. 새로 배치된 관리자는 애도의 뜻을 담은 검은 로브를 걸친 채 현 상황에 대해 짧게 안내했다. 확인증에 관리자의 도장을 받은 쥬다스가 고개를 돌려 아벨을 바라보았다. “아벨.” “……네.” “이리 가까이 오거라.” 일행의 가장 뒤에 서 있던 아벨은 쥬다스의 부름에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쥬다스는 굳게 닫혀 있는 포탈 관리실의 문을 가리켰다. “네 손으로 열어볼 테냐.” 질문을 들은 아벨의 잿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황자는 지금 선택권을 주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손으로 문을 열고 나가 현실을 마주할 것인지, 혹은. “…….” 망가진 제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저 강인한 황자의 등 뒤에 숨을 것인지. 여전히 상냥한 배려에 아벨은 울컥 치솟아오른 감정을 가까스로 삼켜내고 대답했다. “네. 제,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황자의 손에 맡겼을지언정,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무게까지 떠넘기고 싶진 않았다. 「헤에, 저 인간도 제법이네.」 쥬다스의 어깨에 빨래집게처럼 달라붙은 유니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홀로 실체화를 하지 못해 시무룩해 있던 토니가 그 혼잣말에 반응했다. 「우웅? 뭔 말이다요?」 「보통 사람은 저 정도 불행을 겪으면 무너지잖아. 나쁜 마음먹기도 쉽고 말이야. 인간의 정신은 나약하니까. 거기다가 저 아벨이란 인간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훠얼~ 씬 더 나약한 축이었거든.」 「그래 보이긴 한다요.」 「근데 지금 봐. 불행해하면서도 결코 그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있잖아.」 약하면서도 강하다. 아벨이 가진 그 모순적인 성질에 유니는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신기해. 이것도 이그레트 효과일까?」 본래대로라면 꺾였어야 할 나뭇가지였다. 버드나무처럼 휘기만 했을 뿐 다시 튼튼히 자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슨 정령들 사이에서 공신력 있는 이론명처럼 거론된 자신의 이름에 쥬다스는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아벨은 포탈 관리실의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짧은 심호흡과 함께 이를 앞으로 밀었다. 그러자 문은 소리 없이 스르륵 열렸다. 찬바람이 불어와 그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사박사박. 아벨은 모래를 헤치고 몇 걸음 걸어 나왔다. 본래대로라면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어야 할 사막 하늘엔 새까만 먹구름이 몰려들어 뒤덮고 있었다. 투르케 사막 전역을 뒤덮은 요사스러운 공기는 입김이 얼 정도로 차가웠다. 아벨의 뒤를 따라 쥬다스 일행도 함께 포탈 관리실에서 나왔다. 신발아래 밟히는 모래의 질감이 얼음 알갱이와 뒤섞여 몹시 단단했다. “…….” 아벨은 더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자리에 못 박힌 듯 정지했다. “맙소사.” “……그 사령술사란 놈, 더럽게 질 나쁜 녀석이군.” 마르젠이 탄식했고 바이칼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가만히 쥬다스의 곁에 선 채 굳은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보았다. ‘전멸’, ‘파괴’ 등으로 표현되고 있던 투르케는 무엇 하나 바뀐 것 없이 그대로였다. 때 묻은 천막이나 하얀 돌판 위에 새겨진 안내 문구, 낙타를 보관해 놓은 나무 우리며 작은 오아시스, 관상용으로 꽃을 피운 커다란 선인장까지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아벨이 얼어붙은 모래 위로 주저앉았다. 한 발짝 뒤에서 그와 같은 풍경을 담아낸 쥬다스의 금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프리드.’ 투르케의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었다. 드넓은 사막 영토 전체가, 마치 얼음으로 조각된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았다. 제국 재난 기구에서 파견된 대원들에 의해 사람들의 시신은 공동묘에 안치된 상태였다. 멸망한 지 5일이나 지난 후였지만 여전히 사령술의 잔재는 남아 있었다. 사령이란 죽음을 매개로 하여 힘을 발휘하는 영적 개체였다. 사령술사 프리드가 펼쳐 놓고 간 사령술은 마치 저주처럼 그 땅에 남아 끊임없이 한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태양광을 차단한 시커먼 먹구름에선 음습한 바람이 흘러나왔으며 얼어붙은 대지는 시간이 지나도 녹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자연현상이 아닌 순리를 거슬러 발동된 힘이었기에 오물을 뒤집어쓴 스웨터처럼 쉬이 그 여파가 가시지 않았다. 「이그레트, 이건.」 “……그래, 사령의 힘이다. 일반적인 힘으로는 절대 녹지 않겠지.” 아벨은 가족과 영지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투르케 공동묘로 갔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그와 함께 애도를 표하러 묘지로 향했지만 쥬다스는 조금 있다 합류하겠다는 말을 남기곤 홀로 얼어붙은 사막 마을을 거닐었다. 프리드가 사용한 사령술이 정확히 어떤 힘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쥬다스는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바닥으로 차가운 모래를 짚었다. 「……이미 죽은 자들을 되살릴 수는 없을 테지만. 불의 힘이라면 얼어붙은 사막을 되돌려 놓을 수는 있을 거야.」 쥬다스는 침묵으로 유니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그레트’로 사는 동안 한평생을 자신 옆에 묶어둔 정령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자유를 주고자 했던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그는 다시 눈을 뜬 이후로도 기꺼이 부름에 응해 다시금 곁을 지켜주는 정령들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결국 언제나 내 필요에 의해 너희를 부르게 되는구나.’ 정령왕을 뜻대로 부릴 수 있는 존재는 현재로선 그뿐이었다. 이 얼어붙은 대지를 망가뜨리지 않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자연계 4속성 힘을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는 그가 유일했다. 죽어버린 사막을 도로 생명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선 4속성 정령 동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대지를 다듬고 식물을 자라게 하며 깨끗한 물이 흐르고 따뜻한 온기를 품을 수 있도록, 동시에 자연계의 모든 속성이 개입해야 했다. “……?” 멈칫. 땅을 짚고 있던 손바닥이 천천히 거두어졌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쥬다스에게 세 정령의 의아한 시선이 몰려들었다. 「이그레트? 왜 그래?」 「어디 아픈 거다요?」 「……?」 무릎 꿇은 그에게 다가선 루니가 살짝 엎드려 그 안색을 살피던 순간이었다. 울컥. 갑작스레 터져 나온 붉은 핏물이 손바닥을 가득 적셨다. 이를 본 유니가 황급히 날아올라 그 뺨을 짚었다. 「이그레트!」 톡, 토옥. 턱 선을 따라 흐른 핏방울이 손바닥을 적시고도 넘쳐 차가운 모래 알갱이를 붉게 물들였다. 갑작스럽긴 했으나 쥬다스는 지금 토혈의 이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령 역소환. 어느 특정한 제3자의 강력한 힘이 개입하여 술사와 정령 사이에 이어진 계약을 강제로 가로막거나 정령을 크게 상처 입힐 경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정령은 술사의 부름에 무조건 응하게 되어 있다. 영혼과 영혼이 이어진 계약을 가로막으려면 그만한 힘과 정령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혹은, 정령이 술사의 부름에 응할 수도 없을 만큼 큰 손상을 입고 ‘수면’ 상태에 들어갈 경우에도 역소환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럴 경우, 정령을 소환하려던 술사는 역으로 데미지를 입었다. 소환에 실패함으로 인해 계약에 대한 불이행 책임이 전부 술사에게 쏠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정령의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정도가 강했다. 꽈악. 눈앞이 흐릿해질 정도로 큰 충격이 그를 덮쳤다. 쥬다스는 피에 물든 손으로 주먹을 쥔 채 내장을 통째로 뒤흔드는 고통을 감내했다. 곧바로 정신을 잃지 않은 게 용할 정도의 강렬한 타격이었다. ‘카니.’ 늘 그를 보며 행복하게 웃던 사슴같이 순한 눈망울이 환각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맥없이 모래 위에 무릎 꿇고 있는 그의 근처에서 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죽음의 기운이 뒤덮인 음산한 바람이 그를 감돌고 있었다. “여, 꼬마 황자. 묘한 우연이군 그래.” 터벅터벅. 프리드였다. 후드를 눌러쓴 채 지척까지 걸어와 멈춘 그는 빙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혼자 온 게냐?” “…….” “배짱도 좋구만. 명색이 1황자란 녀석이 호위도 두지 않고 이런 델 혼자 나다니다니. 같이 다녀줄 네 편이 없는 거냐, 아니면 그만큼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거냐?” “…….” 쥬다스는 답하지 않았다. 모래를 적신 핏물에 잠시 시선을 준 프리드는 별 상관없다는 듯 그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흠, 전보다 조금 컸군? 그래 봤자 꼬마는 꼬마지만 말이다.” 프리드는 쥬다스와 시선을 맞추기 위해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후드 아래 드러난 적안이 또렷이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입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피를 닦을 생각도 않고 그를 마주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카니, 돌아와! (몬스터볼) 가라 루니, 너로 정했다! ...이런 느낌이지만 아무튼 순순히 제것을 빼앗길 정도로 약하면 먼치킨 이그레트가 아니죠...ㅎ 주인공에게 최강의 힘을 쥐어준 건 새드물을 쓰지 않겠다는 굳건한 의지의 발로였습니다. 하하; 아무튼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 됩니다. 악역후보1인 프리드가 재등장했으니 슬쩍슬쩍 뿌려두었던 떡밥회수할 날도 머지 않았네요. 오늘 13일의 금요일이었다는데,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 것이 분위기가 참 좋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셨는지요~ ^^ 저야 술자리에서 잠깐 빠져나와 업데이트 누르는 거라 다시 복귀하러 가지만은... 음. 이 추세라면 내일은 하루 쉴 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일 혹은 모래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오늘도 재미있게 봐주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며,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관심과 응원에 언제나 깊이 감사드립니다. 건강한 불금+토 보내세요!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2 / 0240 ---------------------------------------------- 6장. 재회 그 반응을 재미있다는 듯 응시한 프리드가 피가 방울져 매달린 상대의 턱을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정령 역소환에 의한 부작용. 많이 아프겠군.” 캇. 칼날처럼 몰아닥친 바람이 프리드의 손등을 할퀴고 지나갔다. 더 다가온다면 아예 손목을 잘라 버릴 기세였다. 흉흉한 정령의 경고에 프리드는 항복하듯 손을 떼며 피식 웃었다. “이봐, 전하. 내가 지금 어디에서 왔는지 아나?” “…….” “황성을 다녀오는 길이다. 혈통이니 존엄이니 떠들어대며 썩은 내를 풀풀 풍겨대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곳이지. 그런데 소득은 있었다. 마침 너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길 듣고 오는 길이거든.” 제국의 황성을 강아지 개집 드나들 듯 가볍게 다녀왔다는 말에 쥬다스의 표정이 한층 굳어졌다. “말해. 너는 ‘이그레트’ 그자와 무슨 관련이 있지.” 쥬다스가 내내 대답을 하지 않자 프리드는 쭈그렸던 무릎을 폈다. 우뚝 선 채 피로 물든 모래를 짓밟은 그가 살기와 광기가 뒤섞인 눈으로 다시금 물었다. “혹 숨겨둔 제자라도 되는 거냐? 그는 어디에 있지?” “…….” “나 참, 벙어리마냥 입을 안 여니 원. 별수 없군.” 프리드는 품속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돌을 꺼내 들었다. “꼬마 황자, 이게 뭔지 알아?” 우웅. 익숙한 기운을 느낀 쥬다스가 고개를 들어 돌을 응시했다. ‘정령석.’ 하지만 이건 그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정령석과는 조금 달랐다. 일단 이그레트가 만들어낸 정령석은 크기부터가 저렇게 크지 않았다. 주먹은커녕 손톱만 한 크기에 주변의 정령을 불러들여 그 힘을 빌려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일종의 매개체였다. 그랬다. 정령석이란 본디 정령의 힘을 빌리는 돌이었다. 지금 프리드가 들고 있는 것처럼 정령을 속박하는 기능 따위가 아니었다. “그 위선자가 지배하고 있던 힘의 일부지. 아직 완벽하게 다루지는 못하지만, 사령술과 접목하니 그럴듯해지더군.” 화르륵! 잘게 진동하던 정령석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붉은 불꽃 사이사이 검은 기운이 혼탁하게 뒤섞여 있었다. 거칠게 솟구친 불길이 마침내 하나의 형상을 갖추자 프리드는 만족스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불의 왕.” 「…….」 노을빛 머리카락이 사락 자리를 잡았다. 가냘픈 여인의 형상을 완성해 낸 불의 정령이 검은 원피스 자락을 흩날리며 눈을 떴다. 사령의 기운이 침식하여 동공이 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카니?」 그녀를 알아본 유니가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토니와 루니도 동요하는 기색을 보였다. 「틀림없이 카니다요!」 「……저 녀석이 왜 저딴 인간 손에.」 정령은 오로지 술사의 소망에만 반응한다. 그러나 지금 카니는 계약자가 아닌 존재의 부름에 응한 상태였다. 유니가 제일 먼저 이질적인 기운의 정체를 알아채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어서 믿기진 않지만.」 유니의 녹색 눈동자가 걱정을 담고 그를 향했다. 「……아무래도 죽음의 기운에 잠식당한 것 같아. 카니.」 정령과 사령은 각각 빛과 그림자처럼 정반대의 성질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자연계의 생명력을 관할하는 4속성 정령과 달리 사령이란 죽음의 기운을 양분 삼아 움직인다.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면 타버리고 그 불에 물을 끼얹으면 식어버리듯 그 둘은 결코 융합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너덜너덜해진 몸 상태와 별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잔잔하던 눈에 동요가 일었다. “이상도 하지. 내가 불의 왕을 잡아둔 건 꼬마가 아닌 노인을 찾아내려는 목적이었다만.” “……프리드.” “흠?” 말 한마디 꺼내는 데에도 폐부를 쥐어짜는 고통이 찾아왔다. 하지만 쥬다스는 멈추지 않고 다시 입을 열어 또박또박 그를 향해 물었다. “카니에게, 쿨럭. 무슨 짓을 한 게냐.” “뭐?” 프리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황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쥬다스의 말뜻을 알아듣고 손에 들고 있던 정령석을 들어 올렸다. 그 안에 눈이 시리도록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아아, ‘카니’.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뭐 조금 손봐줬을 뿐이다. 계약하지 않고도 정령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돌이라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 “편리를 개발해 놓고도 거기서 더 발전하지 않는 게 멍청한 거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야. 힘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지.” “저 아이를…… 어찌한 것이냐.” “그게 궁금한가? 내가 건드린 건 불의 왕만이 아닐 텐데. 한 번 쭉 둘러보라고.” 프리드는 무감정하게 한 손을 들어 주변을 가리켰다. 검은 비둘기가 새겨진 회색 로브가 찬바람을 머금고 펄럭였다. 그 말대로 프리드의 손에 타격을 받은 건 불의 정령왕뿐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투르케 사막이 규모로 보나 사라진 생명으로 보나 훨씬 피해가 컸다. 그러나 쥬다스의 시선은 검은 불꽃에 잠식된 카니로부터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를 확인한 프리드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역시 네놈은.’ 그가 지금껏 굳이 할 필요도 없는 대화를 질리지도 않고 주절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한때 이그레트의 가장 곁에서 그를 따랐던 프리드였다. 정령왕들이 이그레트로부터 어떤 이름을 부여받았는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이그레트에 관련된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벼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애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마저 전부 꿰뚫고 있었다. 황궁에 다녀오면서 알게 된 정보로 인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었지만 그저 심증일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직접 1황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프리드는 아직 그를 흥미로운 꼬마 정도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달랐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불의 정령왕을 ‘카니’라고 부르는 존재는 이그레트, 단 하나뿐이었다. 프리드는 드디어 목표에 근접했다는 기쁨을 감추지 않고 내색했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짚은 그가 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좋아, 보여드리지. 똑똑한 꼬마라면 알아볼 수 있을 테니.” 화르륵. 변질된 정령석을 든 프리드의 손짓에 따라 카니가 불길을 일으켰다. 속은 붉었지만 겉으로 갈수록 새카맣게 타오르는 이형의 불꽃은 기름 부은 것처럼 그 세기를 더했다. 검은 기운에 사로잡혀 미동 없이 서 있는 카니의 붉은 날개에서 타오르는 깃털이 흩날렸다. 흡사 타락한 천사와 같은 모습이었다. “…….” 쥬다스는 물러서거나 다른 정령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을 넘실거리는 불길을 내버려 둔 채 카니의 검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곤 비틀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니.” “이런, 그만두는 게 좋아. 억지로 부르려고 해봤자 역소환 충격만 더 되받을 뿐이다.” 자책감으로 얼룩진 금안이 잘게 일렁였다. 쥬다스는 검은 불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령에 잠식당한 정령에겐 소용없어야 할 접근이었다. 퍼엉! 불길이 폭발하며 사방에 그을음이 흩날렸다. ‘자, 어서 보여 봐라. 그저 자질만 그럴듯한 애송이 황자인지, 아니면…….’ 프리드의 눈이 흥미진진하게 그들을 향했다. 현재 불의 정령왕을 통제하는 건 그의 손에 들린 정령석이었다. 공격 명령을 따로 입력하진 않았어도 사령의 기운에 잠식당한 정령은 사납게 날뛰게 되어 있다. 이성이 사라지고 파괴적인 본능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그레트.」 유니가 걱정스레 그를 부르며 뒤를 따랐다. 피아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날아드는 불덩이는 전부 세 정령의 힘에 의해 산화되었다. 그가 옮기는 걸음에 따라 물과 바람, 대지의 기운이 불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했다. “미안하다.” 화륵! 그의 사과는 불의 정령에게 닿지 못했다. 오히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불길을 연달아 피워 올렸다. 그를 태워 버리기 위한 검은 불꽃이 지척에서 넘실거렸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마저도 가뿐히 무시하고 정령의 힘에 접촉했다. “……이리 오련.” 떨리는 손끝이 정령의 이마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에 닿았다. 그러자 이변이 일어났다. 우우웅! 영혼과 영혼이 공명하며 검은 불꽃이 삽시간에 정화되기 시작했다. “……!”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강한 ‘술사의 부름’이었다. 이를 본 프리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령석과 융합된 사령의 진득한 기운마저 몰아낼 정도로 강한 힘에 그가 들고 있던 정령석에 쩍 하니 금이 갔다. 쩌― 엉! “……허?” 간단한 해박(解縛)이었다. 슈욱. 정령을 잠식하고 있던 사령이 물위에 기름 뜨듯 분리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역시 불완전한 채로는 무리였나. 하지만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군.’ 프리드는 작게 혀를 차며 깨진 정령석을 미련 없이 버렸다. 어차피 이번 건은 ‘이그레트’의 행방을 찾는 게 목적이었다. 이그레트가 아니라면 깨뜨릴 수 없는 힘이었으니, 카니를 데려온 것은 그를 시험한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시험의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프리드는 검은 기운이 사라져 제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한 불의 정령왕을 보며 가볍게 팔짱을 꼈다. 「…….」 다홍색 눈망울을 되찾은 카니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몽롱한 얼굴이었다. “카니.” 다시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은빛 머리카락,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따스함을 담은 금색 눈동자. 생소한 외형이었으나 그 안의 영혼만큼은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의 것이었다. 여인의 모습으로 현신한 불의 정령은 와락 눈앞의 소년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정말로. 보고 싶었어…….」 쥬다스는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떨리는 등을 다독여 주었다. 노을빛 머리카락과 붉은 깃털이 뒤섞여 하늘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프리드는 돌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큭, 하핫, 하하하하!” ‘찾았다’. 뚝 웃음을 멈춘 그가 스윽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말했다. “정말 믿기지가 않는군. 설마 설마 했는데, 도리나 순리 따위를 지껄이던 당신이? 하하하, 예상 밖의 일이야. 자연의 사랑을 받아 선하고 순수한 영혼이라 칭송받으며 더럽다 여겨지는 일에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이그레트 님 당신이…….” 들떠 있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게 가라앉았다. “사상 최악으로 더러운 그 몸에 깃들어 있을 줄이야.” 프리드는 본래 황족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니 당연히 제국에 충성하지도 않았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과감히 성을 버리고 이름 석 자만 가지고 살아가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황족과 제국의 계급 사회에 신물 나 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그 이유로 하는 말치고는 무언가 어감이 달랐다. 프리드는 그 점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여하튼 그래, 우리는 한때 같은 목표를 향해 손잡았던 동료였지 않은가? 건재하게 살아 계셔서 아주 기쁠 따름이야.” “나를 찾아다닌 게냐. 왜……?” “정확히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힘이지. 어차피 제대로 사용할 생각도 없지 않나. 힘이란 건 쓸 줄 아는 사람이 갖는 편이 어울릴 테니.” 후우웅. 허공에 몰려든 녹색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을 형성해 프리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위협적인 태도에도 프리드는 그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앙!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바람은 프리드를 감싼 검은 장막에 가로막혀 산산이 흩어졌다. “뭐 당장 어쩌겠다는 건 아니니 진정해. 당신이 다 죽어가는 노인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졌겠지만, 아쉽게도.” 프리드는 계획을 조금 수정할 필요를 느꼈다. 어쨌든 지금은 ‘이그레트’의 생존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그건 곤란하구나.” “흐음?” 막 뒤를 돌려던 프리드는 고개를 꺾어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부드럽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약간의 한기를 품고 서늘하게 그를 마주 하고 있었다. 우득, 우드득. 순식간에 얼어붙은 사막 모래가 갈라지기 시작했다. 프리드는 흔들리는 땅을 피해 훌쩍 자리를 이동했다. 균열이 일어난 틈새로 솟구쳐 오른 모래더미가 괴수처럼 그를 덮쳤다. 얼음 알갱이가 사방으로 튀어 흩날렸다. 사령의 기운이 몰려들어 모래를 막아냈으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글부글. 고열로 인해 하얀 증기를 뿜어내는 물줄기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펄펄 끓는 온도의 물은 허공에 뭉쳐 수룡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대로 프리드를 향해 내리꽂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몸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어제 하루는 쉬고 왔습니다.ㅠㅠ 기다리신 독자님들이 계실 줄이야...! 죄송합니다.(꾸벅) 오늘의 팁 : 사령은 죽음을 다루는 정령, 혹은 일종의 유령 같은 개념입니다. 언데드나 네크로맨서를 떠올리셔도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늙은 몸을 생기넘치는 젊은 몸으로 바꾸거나 빈 육신에 옮겨가는 일도 가능합니다. 부작용은 사령술사의 영혼은 영원히 사령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점... 또한 작중 나오겠지만, 이런 사령술사도 사용가능한 힘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무적은 아닙니다.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3 / 0240 ---------------------------------------------- 6장. 재회 갑작스러운 연쇄 공격에 프리드가 부리는 사령은 맥을 못 추고 흐트러졌다. 치익 소리와 함께 녹아내린 방호벽 사이로 이번엔 날카로운 바람의 칼날이 몰아닥쳤다. 서걱! 몸을 돌려 피한다고 피했지만 왼팔이 통째로 날아가 모래에 처박혔다. 팔이 잘린 꼴을 힐끗 내려다본 프리드는 고통에 찬 비명 대신 작게 탄성을 흘렸다. “호오―? 제법 과격한 행동도 할 줄 알게 되셨나 본데.” “여기서 더 무엇을 바라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만. 하나 지금 네 행동은 도를 넘었다 여겨지는구나, 프리드.” 쥬다스는 가벼이 손을 휘저어 정령의 힘을 불러들였다. 꿈틀거리며 용의 표피처럼 진동하는 대지와 허공에서 춤을 추듯 뭉치는 물줄기가 그의 손짓 한 번에 들썩였다. ‘그 몸 상태로도 이 정도 힘을?’ 씨익. 검게 죽은 흙이 피 대신 쏟아져 내리는 팔뚝을 덜렁거리며 프리드가 비뚜름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 “저런, 아직도 망설이는 건가. 당신의 힘을 빼앗겠다고 말한 나를 보고도?” 크르르. 섬뜩하게 목을 울린 루니가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물의 정령왕이 뿜어내는 살기에도 프리드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이래서 당신이 싫다는 거다. 끝까지 제 손은 더럽히지 않으려들지. 충분히 재앙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서도 말이야!” “그건.” “큭큭……. 망할 위선자 노인네 같으니. 진즉에 당신의 말 따위 따르지 말았어야 했어.” 붉은 안광 속에 이글거리는 혐오감과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이를 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의지에 따라 부글부글 끓고 있던 물줄기가 순식간에 허공에 얼어붙었다. “아니, 그건 잘못된 생각이로구나.” “뭐…….” 푹. 거대한 얼음의 창이 프리드의 가슴을 관통했다. 피 대신 검은 모래가 얼음 창을 타고 흘렀다.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 몸을 꿰뚫은 얼음을 손바닥으로 감싼 프리드를 향해 쥬다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가 다루는 사령의 힘이라면 분명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지금 그것 외에도 따로 마련해 둔 육신이 더 있을 터이니.” 사령술사란 죽음의 힘을 다루는 자. 한 번 죽은 이를 소생시키거나 영혼이 떠난 육신을 부리는 일이 가능했다. 같은 맥락으로 세월의 흔적을 거슬러 젊음을 되찾은 프리드에겐 제 영혼을 미리 마련한 빈 육신에 옮겨 담는 일 정도야 그리 어려운 술법이 아니었다. 이를 꿰뚫고 있는 쥬다스의 금안이 차갑게 빛났다. “기다리거라. 다음번엔 내가 찾아가도록 하마.” 경고였다. 확실히 제 손으로 마무리 짓겠다는 옛 동료의 뜻을 알아들은 프리드는 놀라 치켜떴던 눈을 서서히 감았다. 쥬다스, 제국의 1황자. 황조 적통의 외향을 그대로 이어받아 태어난 귀한 혈통의 소년. 하지만 그럴듯한 겉모습과는 달리 그와 얽힌 황실에서는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그 모습, 퍽 잘 어울리는군.” 파스슥. 생명력이 다한 육신이 검은 모래로 변해 쏟아져 내렸다. 자리에 남은 흔적이라곤 그가 뒤집어쓰고 있던 로브뿐이었다. 로브 자락에 새겨진 검은 비둘기 위로 죽은 모래가 쌓였다. 어차피 어딘가에 준비해 둔 다른 육신으로 옮겨 눈을 떴을 테지만, 쥬다스는 씁쓸한 시선으로 그가 있던 자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바닥에 꿇어앉아 손바닥을 대었다. ‘내 손은……. 처음부터 더러웠다.’ 사람들의 칭송과 다르게 그는 한 번도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여긴 적 없었다. 깨끗했다면 부모가 갓난쟁이를 버릴 일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을 찾아와 엎드려 빌던 사람들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자국도 사라졌을 테다. 등을 돌린 동료들로부터 칼날을 받을 일도, 구렁텅이에서 건진 사람들에게서 원망과 저주의 말을 들을 일도. 또한 스스로 제어하지 못해 폭주한 거대한 힘으로 인해 피를 봤었던 젊은 날의 잔상(殘傷)도 없었어야 했다. 우웅. 정령의 힘이 그 손을 통해 얼어붙은 대지에 스며들었다. 4속성 정령 동조술, 자연계 최상의 힘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그 빛깔은 무엇보다 고귀한 황금색으로 나타난다. 싸늘하게 얼어 있던 대지를 황금빛 기운이 서서히 감싸기 시작했다. 차갑던 얼음 알갱이가 녹고, 퍽퍽한 모래 사이로 작고 뾰족한 사막 식물이 피어오른다. 얼어붙은 오아시스가 녹아 반짝였으며 먹구름이 사라진 하늘에 태양광이 작렬했다. ‘어린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된다…….’ ―마찬가지로, 결국 사람은 사람을 배신하는 겁니다. 언젠가 옛 친우로부터 들었던 싸늘한 냉소가 깃발처럼 머릿속에서 흔들거렸다. 바람이 불어왔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을 머금은, 메마른 투르케의 열풍이었다. * * * 「…….」 깜빡깜빡. 다홍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여인이 쥬다스의 곁에 붙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슴 같은 크고 동그란 눈이 자석처럼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흔들렸다. 이마에 박힌 붉은 보석과 살랑거리는 하얀 원피스가 그녀가 한 장식의 전부였다. 소탈해 보이면서도 무시할 수 없는 기품을 뽐내고 있는 이 여인은, 다름 아닌 쥬다스가 부리는 정령왕 중 하나인 카니였다. “……저기.” 흡사 아벨의 표정을 따다놓은 듯한 얼굴로 바이칼이 우물쭈물 눈치를 살폈다. 정작 아벨은 간소한 장례를 치르고 난 후라 슬픔과 피로에 젖어 멍하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바이칼은 애꿎은 머리통만 벅벅 긁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쥬다스 님.” 카니는 현재 실체화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에 다른 이들은 전부 그녀를 발견하지 못했다. 다만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쥬다스의 상태를 보고 기겁했을 뿐이다. 투르케 공동묘에서 애도를 표하고 돌아온 다섯 사람을 기다리던 건 말끔히 녹아 옛 모습을 되찾은 사막의 모습이었다. 거짓말처럼 본래대로 돌아온 마을의 형태에 아벨은 놀라 입을 떡 벌렸다. 그러나 그에 더 놀라워할 겨를도 없이 사막 한구석에 쓰러져 있는 쥬다스의 모습에 일행은 기함하여 그를 임시 병동으로 옮겨왔다. 마침 공습을 받은 지역이라 배치되어 있던 중급 치유술사가 허둥지둥 그를 치료했으나 워낙 피를 많이 쏟은 탓에 혈색은 여전히 창백했다. 그러더니 눈을 뜬 이후로 줄곧 한마디도 하지 않고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쥬다스 님.” “…….” “아오, 대답 좀 해주시라고요! 당최 어떤 놈한테 당하신 건지 알아야 방비를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닙니까?!” “무례하군, 너. 환자 앞에서 큰 소리로 떠들 거면 나가.” 조용히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짜증스레 한 소리 했다. 그녀의 일침에 바이칼은 스스로도 무례를 깨닫고 답답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궁금한 건 크리스티나를 비롯해 일행 전체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힐끗 쥬다스의 숙인 머리 위로 시선을 주었다. ‘저 정도로 흔들리셨던 적은 없었어.’ 언제나 태연자약하던 황자였다. 머리에 물을 끼얹든, 모욕을 주든 크게 흔들림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화를 내거나 불안에 떠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평소와 달리 자신만의 생각에 푹 잠겨 있다는 건 분명 그를 크게 흔든 묘연한 사건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걱정에 잠긴 크리스티나의 옆에서, 마찬가지 심정인 에단은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실책이다. 곁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황자가 3속성 정령을 부리는 이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제국에서 특별히 관리 중인 지역이라 안심한 게 화근이었다. 그가 잠깐 정도는 혼자 있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얄팍한 배려심도 이번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침울해져 있는 에단 옆에 자리한 마르젠은 또 마르젠대로 생각이 복잡했다. ‘걸어서 오기엔 척박한 사막. 굳이 험한 환경을 뚫고 올 가치도 없는 멸망한 영지. 원주민은 전멸. 그렇다면 포탈을 이용해서 들어오는 사람뿐이라는 건데, 그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 미쳤다고 루바흐 교복을 입은 학생을 건드릴까?’ 적어도 귀족이나 교육받은 재력가는 범인이 아니었다. 마르젠은 감색 눈동자를 가늘게 좁혔다. ‘……질 나쁜 녀석이 있었다는 건데. 정령술사이신 쥬다스 님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수준이라면.’ 그가 짐작하기로 어쩌면 투르케 사막을 전멸시켰던 그 사령술사와 대면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쥬다스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더 이상했다. ‘단순히 어중이떠중이에게 급습을 당했든지, 아니면 역시 쥬다스 님이 가진 능력이 상상 이상일 가능성도 있겠지.’ 어떤 결론이든 간에 마르젠은 쥬다스가 가지고 있는 힘 전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있음을 확신했다. 지금껏 그가 밟아온 행적을 되새김질해 본다면 저 영리한 1황자는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자신의 패를 보이지 않고 철저히 숨기는 일에 익숙했다. 아마 아직도 그는 드러내지 않은 패가 몇 가지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패를 이용해서 습격해 온 적을 상대했고 보란 듯이 살아남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마르젠은 특별히 걱정하지 않고 만족했다. 그런 철저한 자기 대비를 할 줄 아는 황자가 쉬이 무너지지 않을 거란 믿음이 생긴 탓이었다. 「끄응.」 무거운 분위기는 정령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유니는 한숨을 폭 내쉬며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 자리 잡은 토니도 답지 않게 침묵했으며 침대 밑에 엎드린 루니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귀만 까딱이고 있었다. 그들의 계약자가 느끼는 감정은 지금도 여과 없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가슴을 꽉 조여 오는 답답함을 전달받은 카니는 원피스 자락을 구겨 잡으며 우울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 “으음, 시간이 늦었구나.” 핫. 움찔 고개를 든 카니는 쥬다스가 자신이 아닌 인간 아이들을 보고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느덧 밤이 깊어 창밖이 어두컴컴했다. “생각할 것이 많아 집중하다 보니 너희에게 폐를 끼치게 되었구나. 자, 다들 일어나련. 이만 휴식을 취해야 하지 않겠누? 내일 아침 다시 움직이려거든 말이다.” “……내일 바로 움직이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에단이 걱정스레 묻자 쥬다스는 창백한 얼굴 위로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다. “허허, 거뜬하이. 한숨 자고 나면 말짱할 게야.” 바로 조금 전까지 넋을 빼고 있던 것에 비해 거짓말처럼 빠른 회복이었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눈빛과 태도에 일행은 마음을 놓으면서도 병실을 나서길 망설였다. 부상을 입어 따로 병실 신세를 지고 있는 쥬다스와 달리 나머지 일행은 병동에 마련된 간이 객실에서 하루를 묵을 예정이었다. 축객령 아닌 부드러운 축객령에 하는 수 없이 간호석에서 일어선 일행은 주춤거리며 병실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나던 크리스티나가 힐끗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빙긋. 어른스러운 미소와 정통으로 마주하고만 크리스티나는 움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추었다. 찰나의 망설임이 바닷빛 눈동자를 흔들었다. 그녀는 충동적으로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너무…….” “으음?”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게 더 불안합니다.” “…….” “……저희에겐 걱정할 틈도 안 주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병실 문이 닫혔다. 침대에 앉아 있던 쥬다스는 이내 고개를 돌려 일행이 있었던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 사람의 온기가 남은 구겨진 의자 방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뺨을 따뜻한 손바닥이 감쌌다. 인간의 온기와는 달랐지만 그와 다른 온도의 따뜻함을 품고 있는 손이었다. 「이그레트.」 확인할 필요도 없이 익숙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그와 정령은 같은 말을 내뱉었다. “미안하구나.” 「미안해요.」 눈을 동그랗게 뜬 카니가 곧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처럼 웃었다. 「설마 나를 붙잡아 이용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상상도 못했어요. 그저, 눈앞에 찾아온 그 망할 놈의 소환진을 보고 누굴까 호기심이 생겨서.」 순수하고 여려 보이는 외형과 달리 불의 정령왕 카니는 은근히 입이 험한 편이었다. 「그랬는데, 내가 이그레트를 공격하다니.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너무 무서워요.」 정령왕인 그녀가 공포를 느낀다. 이는 가히 처음 있는 일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니는 사령에게 잠식당해 이지를 잃었던 그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파르르 떨리는 날개깃을 스스로 감싸 안으며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나, 어쩌면 이그레트의 정령으로 계속 남아 있을 자격이 없을지도 몰라요.」 “카니.” 「근데도요.」 사랑, 우정, 소유욕, 그 모든 것이 뒤섞인 애정이 오로지 단 한 명을 향했다. 자신이 그를 상처 입힐 뻔했다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카니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곁에 있고 싶어. 미안해요, 나. 추잡스럽게 욕심만 부려서…….」 그리고 오랜 세월 그와 함께해 온 정령으로서, 그가 결코 자신들을 버리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한 번 믿음을 준 이에게는 밑도 끝도 없이 신뢰와 애정을 보였다. 만일 그 대상이 배반을 할지라도, 찔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등을 내어준 사내였다. 사랑하는 이가 내어주는 잔이라면 독이 든 잔마저도 달게 마실 수 있을 맹목적인 신뢰였다. 그리고 그의 그런 점은 정령들이 가진 성향과 매우 흡사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 지금은 또 거의 말짱합니다. 치유술사 버금가는 빠른 회복력(...) 독한 감기로 고생하시는 독자님들도 계시던데...ㅠㅠ 얼른 나으시길 바랍니다! 아참, 지지난 화에서 묘사는 짧았지만 쥬다스와 프리드는 1:1상황으로 마주쳤습니다.ㅎ 나머지 일행은 투르케 공동묘로 이동하여 애도를 표하고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선 전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팬아트로 주인공을 그려주신 디스이즈님,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ㅠㅠ 조만간 표지로 사용하겠습니다...!(수줍))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4 / 0240 ---------------------------------------------- 6장. 재회 “고맙구나, 욕심내 주어서.” 「이그레트……?」 “나야말로 미안하다. 지금까지 언제나 너흴 내 곁에 가두어두면서 나의 소망만을 요구해 왔지.” 「그게 우리의 계약인걸.」 “아니.” 쥬다스는 손을 뻗어 카니의 동그란 정수리를 톡톡 두들겼다. “계약은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것. 그동안 나는 너무 당연하게 ‘받는 관계’에 익숙해져 있었던 게야. 하지만 인간으로서의 내가 정령인 너희를 위한 일을 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나도 너희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정령의 계약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카니뿐 아니라 유니와 토니, 루니 모두가 당황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전력을 다할 거란다.” 「…….」 정령들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수명, 경험, 체력, 무력, 그 외 다방면에서 인간은 확연히 정령에 비해 약체였다. 그래서 보통은 정령과 계약할 때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보다 자신을 강력하게 지켜줄, 보다 편안하고 편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강한 힘을. 하지만 떠올려 보면 ‘이그레트’는 처음부터 그런 걸 바라고 계약하지 않았다. 그가 원한 것은. ‘……그래? 그럼 부탁할게. 계속 내 곁에 있어줘.’ 정령들은 똑같은 눈빛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어떡하죠.」 「응, 원래도 세상에서 제일 좋았지만.」 「헤헤.」 키득대는 불과 바람, 땅의 왕을 두고 푸른 늑대가 쥬다스의 앞으로 다가갔다. 익숙한 듯 내미는 손길에 주둥이를 부빈 루니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올곧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늘 그랬듯, 우리의 모든 것은 네 뜻대로.」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계약한 그날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그대로였다. 그가 바라는 일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이루어지리라. 「‘이그레트’.」 * * * 다음 날 아침, 출발 시간이 되자 쥬다스는 미리 말한 것처럼 말끔한 모습으로 병실을 나섰다. 속은 아직 쓰라린 구석이 남아 있었지만 치유술사의 힘 덕에 망가졌던 내장이 회복되어 운신에는 무리가 없었다. 내심 그의 상태를 걱정하며 일찍부터 나와 기다리던 일행은 안심하며 포탈로 향했다. 출발하기 전 아벨은 먹먹한 눈으로 투르케 사막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예전 모습을 되찾은 사막은 뜨거운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일단 땅이 녹고 하늘이 개고 나니 복구 작업은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했다. 낡고 눅눅한 헝겊 대신 깨끗하고 빳빳한 재질로 만들어진 천막이 세워졌다. 사막에서 살기 위해 필요한 생필품이 조달되었으며 전문 관리 인력이 투입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정령의 축복이 내려진 게 틀림없다.’ 사령이 사라지고 본래 모습을 되찾은 땅에 분명 자연계 정령의 힘이 개입했을 것이란 추측이었다. 말마따나 마치 축복이라도 받은 양 사막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조만간 새로운 투르케 사막 주민들이 유입되어 북적거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자 아벨은 눈물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이제 모든 미련은 털었다. 그걸 가능할 수 있도록 해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침 쥬다스 역시 아벨을 쳐다보았던 지라 서로 시선이 맞부딪혔다. 꾸벅. 아벨은 깊이 허리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쥬다스는 조용한 미소로 이에 답했다. 그리고 일행은 묘한 눈으로 그를 좇았다. “…….” 다른 이들은 몰라도 쥬다스를 알고 있는 에단과 바이칼, 크리스티나만큼은 투르케를 되돌린 기묘한 힘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자연계 정령들이 나서서 축복을 내려준 동화 같은 일 따위가 아니었다. ‘당신은 대체.’ 어떤 원리로 얼어붙은 사막을 돌려놓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한 건 황실에서 투입한 전문가들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일을 단숨에 해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힘이 ‘자질’에 그치지 않고 눈에 보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당장 그 힘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본인이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이상에야 소용없었기에 세 사람은 그의 뜻에 따라 알면서도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각자의 상념을 품고 일행은 포탈에 탑승했다. 이번에도 역시 정령의 힘을 더함으로써 그들은 중간 거점을 거치지 않고 곧장 루바르잔 황궁의 포탈로 이동할 수 있었다. 포탈을 빠져나오자마자 드넓게 펼쳐진 분수대와 정원이 보였다. 황궁의 포탈은 일반적인 포탈 관리실과는 그 규모와 장비부터 질을 달리했다. 분명 실내 시설이었지만 낮은 키의 꽃밭이나 화로, 분수대 따위가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면적이 넓었다. 또 금장으로 장식된 포탈은 일반적인 수준에 비해 서너 배가량 크기가 컸으며 포탈 관리실에 놓인 모든 자연물에는 정령이 자리 잡고 있었다. 황정의 정령술사 세 명, 마력을 조절해 주는 마법사 다섯에 별도의 포탈 관리자까지 더해 총 9명의 인력이 관리실 내부에 배치된 상태였다. 그들의 방문을 루바흐로부터 미리 전달받아 알고 있던 황실에선 그 인력에 더해 하인들을 보내 마중 나왔다. “대 루바르잔에 영광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자리에 있던 모든 사용인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엄숙한 분위기였다. 쥬다스보다 한 발짝씩 뒤에 물러서 있던 아이들은 지금 그가 같은 교복을 입고 있는 학생이 아닌 ‘1황자’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한 시종이 다가와 그 앞에 무릎 꿇고 두 손으로 케이프를 내밀었다. 술장식이 달린 아이보리색 케이프였다. 쥬다스는 이를 받아 교복 재킷 위에 둘렀다. 케이프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고급스럽게 수놓아져 있었다. “세족탕과 오찬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1황자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전하.” 황자라 한들 바로 황제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의 방문이 고해지면 다시 황제로부터 알현 시각을 내려 받게 된다. 그때까지 쥬다스는 자신의 궁에서 대기하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시종을 바라보며 간단히 지시했다. “내 학우들과 함께 머물 것이네. 그리 준비해 주게.” “명을 받듭니다.” 시종의 안내에 따라 6명의 학생이 포탈 관리실을 빠져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정령술사들과 마법사들, 포탈 관리인은 그제야 자세를 바로 하며 서로 놀란 눈길을 주고받았다. 황자의 앞이라 절제된 태도를 취하느라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사실 그들은 간이 철렁할 정도로 놀란 상태였다. “……보았는가?” “허, 소문이 사실인 모양일세.” 그들은 1황자 쥬다스의 예전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조그맣고 볼 품 없던 황자였다. 좀처럼 입을 여는 일도 없어 조금 전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하는 일 따위는 본 적도 없었다. 작았고, 조용했으며, 그저 숨만 쉬는 황실의 부속품 따위와도 같았다. 그랬던 그가 완전히 뒤바뀌어 나타났다. 만일 제국 유일의 은발과 금안이라는 확연한 특징만 없었더라도 동일인이라 여기지 못할 뻔했다. 제 나이에 맞게 몸이 성장한 것만으로도 황자는 전에 없이 위엄이 흘렀다. 마른 우물처럼 텅 비어 보이던 금안에는 반짝이는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게다가 자신들의 의지로 따라온 것이 분명한 5명의 ‘학우’는 대부분 큰 권력가 자제거나 특별한 재능으로 소문이 나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와 말 한마디 나눠본 적 없는 그 1황자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어 데려온다니?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을 일이다. 마치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이들은 경탄에 사로잡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하고 고요히 포탈 관리실을 지켰다. 1황자 궁은 황제가 기거하는 본궁과 인접한 위치에 자리해 있었다. 궁의 주인인 쥬다스 본인이 원했기 때문에 일행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응접실로 이동했다. 쥬다스는 응접실에 일행을 앉혀두고 잠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루바흐에 입학한 이래 처음 귀환한 것이건만 방 안은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했다. 쥬다스는 뒤를 졸졸 따라온 시종을 의식하지 않고 천천히 방 한가운데에 가 섰다. ‘꿈속에서 본 것과 정확히 일치하긴 하지만.’ 황족이 아니라 귀족이라 해도 가지고 있을 법한 가구가 하나도 없었다. 도자기나 값비싼 장식품을 올려놓는 장은커녕 수수한 화분이나 원목 테이블조차 보이지 않았다. 보드라운 카펫이 깔린 넓디넓은 방 안에는 가구라곤 고풍스럽게 휘장이 쳐진 침대가 전부였다. 창문가로 걸어간 쥬다스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네 살던 곳은 다시 보아도 황량하구나.” “전하, 혹 하명하셨습니까?” “아니다. 그저 혼잣말을 한 것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손을 내저은 그는 하인들이 세족탕(발을 씻는 용도의 작은 욕조)을 날라 오는 걸 보며 다시금 주변을 훑었다. ‘마치 모종의 이유에서 가구를 전부 치워 버린 느낌이야.’ 주인이 특별히 내린 명이 아닌 이상에야 나올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침대 맡에 걸린 초상화 한 장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텅 비어 있는 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장식이었다. 그는 침대로 다가가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겨우 손바닥 두 개 합쳐 놓은 정도 되는 작은 크기의 흑백 초상화에는 머리를 높게 틀어 올린 젊은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이를 본 순간 그는 ‘쥬다스’의 꿈속에서 뺨에 손찌검하던 여성과 동일인임을 알았다. ‘이 아이의 어머니.’ 그는 내심 자신의 가정이 틀리기를 바랐다. 꿈에서 본 여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실망과 경멸 그 자체였다. 그런 눈으로 아이를 바라보는 이가 어미라면 그건 황자에게 있어 너무나도 불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도 어깨에 매달린 유니가 배꼼 초상화를 내려다보며 정보를 알려주었다. 「아, 맞아. 그게 지금 네 육신을 낳아준 생모의 그림이야.」 “음…….” 안타까움이 실린 침음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한데 어찌 이리도 닮은 구석이 없을꼬.’ 그랬다. 쥬다스와 그의 모친은 서로 전혀 닮지 않은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간혹 부모 양친을 모두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나는 아이도 있다 하니 그나마 부계의 혈통을 빼다 박은 쥬다스는 다행인 편이었다. 하지만 초상화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이 모자관계라는 걸 아무도 연상하지 못할 정도였다. 털끝 하나조차 비슷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이름은 하윤 리. 자식은 1황자 하나 낳았고, 먼 타국에서 동맹혼으로 바쳐지다시피 한 왕녀였다나 봐. 당시엔 망해가는 나라였다는데 종속국이 된 후로 루바르잔 제국의 원조를 받아 지금은 조금씩 일어나는 중.」 유니는 녹색 기운을 품은 바람을 양손으로 이리저리 공 굴리듯 굴리며 설명을 이었다. 「떠밀려 한 결혼치곤 황제와 사이도 좋았대. 오히려 따지자면 황제 쪽에서 황후를 귀히 여겨 자주 찾았다고는 하는데.」 「우웅? 그럼 지금은 사이가 나쁘다요?」 「죽었어, 5년 전에.」 그 말을 들은 쥬다스는 초상화를 본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꽃같이 미소 짓고 있는 어미, 하윤이 보였다. “……그래, 이미 떠났구나.” 그에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그레트’를 낳은 부모도 어쩌면 그를 버린 게 아니라 죽어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버려서 떠났든 죽음으로 떠났든 간에 곁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은 같았다. 그가 내려놓은 초상화 액자를 곁에 있던 시종이 깨끗한 천으로 조심스레 닦아 정돈했다. 그리곤 쥬다스를 향해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전하, 말씀드리기 황송하오나 참으로 많이 성장하셨습니다. 그 힘들다던 루바흐에서 풍파를 이겨내고 훌륭히 자라주시다니, 이를 보신다면 전 황후 마마께서도…….” 그는 쥬다스가 아주 어릴 적부터 말동무로 붙여진 시종이었다. 감개무량한 마음에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던 시종은 스스로 주제넘었다는 생각에 헛 하고 말을 멈추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 화 댓글 읽다가, 이그레트 어원은 아니지만 마가레트도 이미지가 정말 비슷하네요. 뭔가 뽀송뽀송한 게... 마가렛트,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제가 직접 한 번 먹어보겠습...쿨럭. 그리고 오늘 입대하신 독자님도 계시던데, 몸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기, 기다리겠습니다!(?) 또, 2016년 수능세대이신 독자님..... ....아마 수능치실 때 즈음엔 1부완결찍고 이그레트2부나 차기작으로 만나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 그때도 보러 와주실 거죠? 아니, 꼭 와주세요...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기운 얻고 하루를 보냅니다.ㅎ 감사합니다! * 디스이즈님과 으규귱님께서 팬아트를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헉...! 정말 감사드립니다. 두고두고 간직하겠습니다.ㅠㅠ(혼자 보기 아까워서 공지란에 올려두었습니다.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5 / 0240 ---------------------------------------------- 6장. 재회 “죄송합니다. 건방이 지나쳤…….” “네가 그리 보았다면 그런 것이겠지. 잘못하지 않은 일에는 사과하지 말거라.” 기억에는 없어도 쥬다스는 시종이 왜 이리 유독 살갑게 구는지 알고 있었다. 황족을 모시는 시종은 귀족가에서 특별히 엄선되어 그 곁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어린아이 때부터 수발을 들며 그가 처한 상황을 전부 지켜봐 온 저 시종이야말로 그의 변화를 누구보다 기뻐하고 있을 테였다. 쥬다스는 정령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름을 그대로 불러주었다. “로한.” 척박한 황성에서 1황자의 유일한 아군으로 끝까지 자리를 지켜온 시종 로한 갈로티아.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 청년으로 자라난 충성스러운 시종은 결국 눈시울을 붉혔다. 액자로부터 관심을 거둔 쥬다스는 발을 씻고 제대로 복장을 갈아입었다. 이 몸으로 눈을 뜬 이후 죽 신분을 증명하던 루바흐의 교복 대신 새하얀 바탕에 금실을 덧댄 황실 예복을 걸쳤다. 미리 그 체형에 맞춰 준비해 둔 예복은 통이 넓고 살짝 늘어지는 길이였다. 소매가 넓어 팔이 가려지며 걸을 때마다 옷자락이 펄럭였지만 움직임에 큰 불편함은 없었다. 그 위로 포탈 관리실에서 받은 케이프를 두르고 서자 그야말로 제국의 황자다운 고귀한 태가 났다. 복장 정돈을 마친 그가 응접실로 돌아오자 일행은 일어서서 그를 반겼다. 1황자의 신분으로 황궁에 귀환한 이는 쥬다스뿐이다. 나머지 일행은 루바흐 학생 신분으로 방문하였기 때문에 여전히 교복 차림이었다. 귀한 황족이 거하는 궁궐에서는 모든 방문자가 발을 깨끗이 하는 예법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그사이 세족을 마친 상태였다. “잘 어울리십니다, 전하.” 의복이 바뀐 쥬다스를 보고 가장 빠르게 알맞은 태도를 취한 건 마르젠이었다. 학우가 아닌 신하의 자세로 고개를 숙이는 그를 따라 다른 이들도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마르젠. 다들 편히 자리하려무나.” 그들은 원탁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마침 시간이 시간이었으므로 하녀들이 오찬을 준비했다. 은식기에 담긴 송아지 비프와 귀한 버섯을 넣고 끓인 크림스프 등이 차례로 상에 올랐다. 쥬다스는 능숙하게 예법에 따른 식사를 진행했다. 출신은 평민이었으나 전대 황제가 작위를 내려주고자 욕심냈을 정도로 거대한 힘을 가졌던 그에게 정찬을 권하는 이는 많았다. 과거 귀족식 예법을 배워둔 게 이제와 다시 유용하게 쓰인 셈이다. 식사를 마친 후 뜨거운 차를 앞에 두고서도 아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대귀족답게 불필요한 말을 배제하느라 조용히 있었고, 마르젠과 아벨은 눈치를 살피는 쪽이었다. 그리고 바이칼은 황자다운 태가 나는 쥬다스에게 적응하지 못해 뻘쭘하게 앉아 있는 상태였다. 결국 쥬다스가 난감한 미소를 매달고 침묵을 깨뜨렸다. “혹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느냐?” “……솔직히 많긴 합니다만.” 찻잔에는 손도 안 댄 바이칼이 직설적으로 되물었다. “기회를 주셨으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전하께선 왜 힘을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지난번 루바흐에서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그리고 이번 투르케 사막에서 이루어진 사건도 함께 연루되어 있었다. 사실 바이칼뿐 아니라 여기 모인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그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최고의 혈통을 타고 태어나 최고의 힘을 가졌다면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서 모든 걸 손에 쥐고 세상을 호령할 수 있다. 그런데 이 12살 난 소년은 왜 그를 바로 쓰지 않고 모욕과 멸시를 견뎌내기만 했는가. 꼭 대답을 듣고자 하는 의지로 가득 찬 녹안을 마주본 쥬다스가 가감 없이 속내를 이야기했다. “내게 힘이 있다는 걸 밖으로 내보이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그야 당연히, 모두가 존경하겠지요. 위치에 걸맞은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니 마땅히 받아야 할 충성과 경애를 바칠 것입니다. ……아, 이건 그동안 걸맞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황급히 부정해 봤지만 바이칼은 그간 아닌 게 아니라 황자가 제 자리에 걸맞지 않다고 여겼다. 비단 바이칼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제국에는 수많은 인재가 존재했고 루바흐에서 양성하는 귀족 자제뿐 아니라 평민 중에서도 걸출한 재능을 보이는 인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제국에 고개 숙인 속국만 해도 사방에 늘어서 있었으며 이를 제어하기 위해 황실에선 최고의 인재를 고르고 골라 수많은 부서와 관리 집단을 구성해 냈다. 그러므로 제국 정상에 설 군주에게는 정치, 외교, 경제, 이능 그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어중간한 머리와 힘만으로는 도리어 뛰어난 인재들에게 잡혀 장기 말로 이용될 뿐이다. 하물며 변화하기 이전의 백로황자는 그야말로 조롱의 대상일 뿐이었다. 장기 말로도 써먹을 수 없는 최악, 최약의 패. 이를 확실히 뒤집으려면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만으로는 부족했다. 바이칼은 그리 생각했다. 눈앞의 황자에겐 모든 이의 경배를 받을 수 있을 거대한 힘이 숨겨져 있다. 그것만 제대로 내보인다면 그 누구도 그의 앞에서 감히 이빨을 드러낼 수 없을 테였다. 그리고 쥬다스는 그들의 그런 생각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 강한 힘을 두려워하여 존경하고 경애하겠지. 하나 두려움으로 얻어진 자리가 과연 얼마나 갈까.” “그건!” “남들 위에 선다는 건 그만큼 많은 걸 짓밟는다는 뜻이란다.” 그리고 밟힌 사람들은 조용히 칼을 간다. 증오로 벼른 날카로운 칼을 꺼내 결정적인 순간 등을 노린다. 경험으로 얻은 지식은 달리는 말의 속도를 늦추듯 그에게 제동을 걸었다. “하나 숨는 데에 급급해서 더 중요한 걸 놓치고 싶진 않구나. 내 힘이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사용할 게다. 다만.” 파앗! 쥬다스가 테이블 위로 손을 내밀자, 그 위로 황토색의 작은 정령이 실체화되었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허용 범위 내에서 말이다.” 「실체화다요! 우왕!」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된 토니가 잔뜩 들떠 테이블 위를 날아다녔다. 바람, 물과 더불어 대놓고 땅의 정령을 공개해 버린 쥬다스의 과감한 선택에 에단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뭔가 달라지셨다.’ 에단이 알고 있던 1황자는 늘 방관하는 자세였다. 힘이 있어도 이를 사용하려 하지 않았고 오히려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느낌이 강했다. 그 결과 겪지 않아도 될 상황을 몇 번이나 마주했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치 못하게 힘을 드러내긴 하였지만 그뿐이었다. 때문에 에단은 황자가 보여주는 적극성에 여러모로 긍정적이었다. “……이 아이는 땅의 정령인가요?” 반면 크리스티나는 그의 이능에 대해 크게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어차피 그녀가 취할 태도에는 변동이 없기 때문이었다. 크리스티나는 한 번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시원스레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저 찻잔에 내려앉아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토니의 모습에 호기심을 느낄 뿐이었다. 토니는 헤에 고개를 기울이며 감상을 표했다. 「색깔 특이하다요.」 「……여기 너만큼 특이한 애가 또 있을까.」 「에엥, 그치만 인간이 이런 색깔을 타고난 건 처음 본다요. 막 반짝반짝하다요!」 유니가 턱을 괴고 딴죽을 걸었지만 토니는 아랑곳 않고 방실방실 웃었다. 빛나는 걸 좋아하는 땅의 정령은 크리스티나의 머리색을 상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잘 알아봤구나. 토니라 한단다.” “‘토니’…….”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야.” 정확히는 그녀의 바다 빛깔 머리카락이었지만. 쥬다스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크리스티나가 살짝 손바닥을 내밀자 토니는 그 위로 가볍게 안착했다. 실체화를 한 탓에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보들보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크리스티나는 처음으로 만져 보는 정령을 신기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정령이란 건…….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네요.” 정령술의 자질은 매우 희귀하여 보통 사람들은 한평생 살며 정령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귀족이라 해도 가문에서 비싼 돈을 들여 정령술사를 고용하거나 특별히 주변에 술사인 친구가 있는 게 아닌 이상에는 정령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쥬다스처럼 3속성의 정령과 계약하여 모두 실체화할 만한 재능을 가진 술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가뭄에 콩 나듯 듀얼 속성을 다루는 이들이 있었고, 트리플부터는 잘 존재하지도 않을뿐더러 만약 자질을 보인다면 평민이라 해도 당장 귀족 작위를 하사받을 수 있을 정도로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정령이라 하면 친근한 이미지보다는 인간을 초월하는 신령한 힘 정도로 인식했다. 크리스티나를 비롯해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 역시 모두 이와 다를 바 없었다. “다들 이렇게 자아가 있나요?” “물론이란다. 감정도 풍부하고 이성적인 판단도 뛰어나지. 다만 계약한 술사에 따라 그 성질이 조금씩 변한다고는 하더구나. 술사가 이름을 부여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을 무의식중에 투영한다 하니.” “……같은 정령이라도 계약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에단의 질문에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지금 이 아이들이 여기서 취하고 있는 형태도 내 무의식이 염원한 모습일 게야.” 그와 계약한 정령들은 주로 어린아이와 동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나마 제일 커다란 카니도 따지고 보면 십 대 후반 소녀의 외형이었다. 「그치, 쬐끄만 모습도 오래 있다 보니 편안하긴 한데.」 「후후. 귀엽잖아요? 이그레트가 원한다면야 천년만년 이대로 지낼 수 있답니다.」 「……보통 인간은 천년만년 못살거든?」 유니는 행복한 얼굴로 볼을 감싸는 카니를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어느 틈엔가 크리스티나의 어깨 위로 날아가 길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콕콕 찔러보고 있던 토니도 손을 반짝 들며 외쳤다. 「그래도 가끔은 본체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요!」 「토니 넌 어차피 본체로 돌아가서도 울보찡찡이일 거면서.」 「……?!」 결국 유니의 태클에 의해 빼앵 울어 젖히는 토니를 보며 푸른 늑대는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둥이를 괴었다. 바람과 땅의 다툼이란 그저 평범한 일상의 일부였다. “거참, 이제 더 놀랄 것도 없습니다.” 실체화된 정령들을 훑어본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 전하께서 뜬금없이 자연계 정령 4속성을 전부 다룬다고 해도 이젠 안 놀랄 자신 있거든요. 사실은 대현자 이그레트가 이미 죽었고, 전하께서 그 환생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지경입니다.” “…….” “……농담한 건데 표정들이 왜.” “그가 아무리 대현자라 한들 평민이지 않나. 어린애 티를 내지 않으려면 입방정부터 조심하는 게 좋겠군.” 본의 아니게 정곡을 찔린 쥬다스 대신 크리스티나가 일침을 놓았다.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은 둘 다 14살로 같은 나이였으나 그는 거기에 대해서 반박하는 대신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때마침 시종 로한이 쥬다스의 곁에 다가가 전언을 전달했다. “폐하께서 이르기를 내일 만찬을 함께 들고자 권하셨습니다.” 오늘 당장 황제와의 대면은 어렵다는 말이었다. 제국을 통치하는 군주가 황태자로 정해진 것도 아닌 황자와의 면담을 최우선시 할 리는 없음을 알고 있었던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로한을 돌아보았다. “음? 더 전할 말이 있느냐?” “……그것이, 실은.” 로한은 해야 할 말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본래 백치라 보아도 무방할 만큼 말이 없던 1황자였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곁을 지켰던 시종 로한이 그로부터 자신의 이름을 불린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런 만큼 로한은 제 주인의 성향이나 포용 범위에 대해 무지했다. 세상만사 벽을 치고 죽은 듯이 살았던 예전과 달리 타인의 접근을 흔쾌히 허용할지, 또 어디까지 포용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시종은 최대한 공손한 태도로 상황을 전달했다. “3황자께서 대면을 요청하였습니다.” 정령들을 구경하고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현재 황자들 간에는 이렇다 할 접점이 딱히 없었다. 루바르잔 황권을 존속시킬 3명의 황자는 각기 어머니가 달랐다. 1황자인 쥬다스는 5년 전 사망한 전 황후 하윤이 낳은 자식이었고, 2황자 카이제르는 정부 소생이었다. 그리고 형제 중 마지막인 세이지는 태어날 당시 제국의 지체 높은 귀족 출신의 황비였으며 현재는 황후로 책봉된 어미에게서 난 3황자였다. 황제는 두 부인과 정부에게서 난 아들을 전부 자식으로 인정했다. 그 말은 누가 황태자위에 올라 후계로 인정받을지 알 수 없다는 뜻과도 같았다. 태어난 나이와 외향은 1황자가 우세했지만 그의 모계는 타국 출신이었다. 반면 어린 나이부터 명석함과 뛰어난 이능으로 명성을 떨친 2황자 카이제르, 그리고 제국 후작가 출신으로 인심을 얻고 든든한 외척을 지닌 현 황후 밑에서 자란 3황자 세이지. 겉으로 봐서는 영 결과를 알 수 없는 판세였다. 그런 와중에 부름을 받고 잠시 귀가한 1황자를 찾아온 3황자라니, 쥬다스를 따라온 아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이칼 코난설. (물론 농담일 뿐입니다ㅎ) 아참, 그리고 지난 화 후기에서 말씀드린 내년 계획은... 1부완결은 내년 여름 안으로 낼 생각이고, 수능시즌에는 아마 2부(or차기작)를 연재할 것 같다는 뜻이었습니다.ㅎ 그리고 Sharm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ㅠㅠ 헉 저 요즘 이렇게 계속 기뻐도 되나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3번째 팬아트를 받고 나니 저도 독자님들께 뭔가 해드려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약소하지만 이번 주말(토요일이나 일요일 하루) +3연참을 할 생각입니다. 부담되셔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그것뿐이네요.ㅎ 허허허(...) (참, 그림은 이그레트+쥬다스가 같이 있는 장면입니다. 공지에 추가해두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6 / 0240 ---------------------------------------------- 6장. 재회 「3황자 ‘세이지 루바르잔 아르키디온’. 9살. 밝은 성격에 똑똑하기까지 해서 주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꼬마래.」 “……그래, 만나보자꾸나. 독대가 아니라 내 학우들과 함께 있어도 상관없다면야 들이도록 하거라.” 로한은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주인의 뜻을 전하러 사라졌다. 식지 않는 마법이 걸린 찻잔을 들어 태연히 그 풍미를 음미하는 쥬다스를 향해 마르젠이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외람된 질문이오나 전하, 본래 두 분께서 자주 왕래하시던 사이셨습니까?” 사실 마르젠이 알기에도 두 황자 사이에는 우애는커녕 아무런 친분이 없었다. 단순히 친분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1황자 측에서 누구와의 만남도 거부했다 알려졌다.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쓴 찻물을 머금고 웃었다. “왕래라. 어찌 형제가 만남에 있어 그런 표현이 필요할꼬.” “……흐음.” 그 말을 들은 마르젠은 생각에 잠겨 티스푼으로 찻잔을 빙글빙글 휘저었다. 하늘빛으로 찻물을 우려낸 귀한 꽃잎이 스푼을 따라 하늘하늘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3황자가 시종의 안내를 받아 응접실로 들어왔다. 올해 9살이라던 3황자는 어린 만큼 자리에 모인 이들에 비해 훨씬 작았고 아직 빠지지 않은 젖살이 뽀얗게 올라있었다. “형님?” 그렇지만 품은 분위기만큼은 남달랐다.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붉은색 머리카락과 황조를 상징하는 금안이 전체적인 인상을 환하게 돋웠다. 쥬다스와 같은 금색 계열의 눈이었지만 그 빛깔이 좀 더 침전하여 온전한 금색이라 하기보단 짙은 호박색이라 볼 수 있었다. 날 때부터 제국 군주의 혈통답게 받들어 모셔진 3황자는 자신감이 담긴 당당한 미소를 지은 채로 쥬다스를 향해 다가왔다. 그런 와중에도 예법은 똑 부러지게 지키고 있었다.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전원이 일어나 그를 향해 목례했다. 그리고 이중 가장 윗선인 쥬다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이지’더냐. 이리 보니 반갑구나.” 실제론 3황자를 만나본 적이 없으니 아무렇지 않게 말을 붙이긴 어려웠다. 대신 그는 초면이든지 오랜만에 본 구면이든 간에 모두 할 수 있는 애매한 인사를 건넸다. 다행히 그들이 잠깐이나마 스치듯 얼굴을 본 건 5년 전 전 황후 하윤의 장례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별로 어색한 인사말은 아니었다. 세이지는 아이다운 해맑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정말 형님이세요? 와아,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꼭 다른 사람 같네요.” “…….” 아무것도 모르는 양 말하긴 했지만 쥬다스는 아이가 둘러쓴 미소가 거짓임을 곧장 알아차렸다. 순수해 보이는 금안 너머로 꽁꽁 숨겨놓은 감정이 그림자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의 파편은 쥬다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바로 ‘혐오감’이다.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구나. 5년이나 지났으니.” “어? 형님도 기억하고 계셨어요? 헤에…….” 3황자는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제가 아는 형님이라면, 절대로 기억 못하실 줄 알았는데.”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하지만 3황자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환한 웃음으로 이를 덮었다. 9살답지 않은 빠른 태세 변환이었다. “루바흐에서 잘 지내셨다고 들었어요. 저리 멋진 친우들도 사귀시고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변하실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요. 형님이 참 자랑스러워요. 아직 졸업까진 머셨지요?” 친근한 낯으로 물어오고는 있었으나 그 내용을 뜯어보면 은근슬쩍 우위를 점하려 드는 기색이 엿보였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연장자인 상대를 칭찬하듯 표현하거나 굳이 한참 먼 졸업에 대해 언급하여 1황자라는 신분을 입고서 홀로 루바흐에 보내져 있는 현 상황을 짚어내는 등 신경을 긁는 내용이었다. 황자 간의 대화인지라 끼어들지 않고 지켜만 보던 5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대놓고 불편한 티는 내지 않았지만 바닥을 내려다보는 에단의 검은 눈동자에 차가운 분노가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5명 중 유일하게 쥬다스의 예전 모습을 모르고 있던 그였기에 더욱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정도로…….’ 심지어 어린 동생마저도 그를 우습게보고 있다니. 이를 보고 나서야 에단은 1황자를 향한 인식이 어느 수준인가를 체감했다. 분하기로는 크리스티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일단은 참았다. 3황자의 어투가 과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그 나이 또래에 호기심이 있을 법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거칠어진 감정 곡선과는 다르게 쥬다스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래, 졸업 학점을 전부 채우려면 아직 한참 더 남았단다. 하여 다음 학기부터는 수업을 좀 더 많이 들어볼 생각이다.” “수업을 늘리시겠다고요? 너무 무리하시진 마세요, 형님. 루바흐에서 가르치는 공부는 하나같이 몹시 어렵다고 하던데요.” “들어보련. 3학기 간 총 60학점을 빠짐없이 A등급 이상 받는다면 조기 졸업이 가능하다 하더구나.” “조기 졸업……?” 세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그가 말한 네 글자를 따라 중얼거렸다. 한 과목 나오기도 힘들다는 A등급. 수업마다 2학점이나 3학점씩 배분이 되니 골고루 나누어 들어도 한 학기 당 최소 7과목 이상을 신청하여 일명 ‘올 A’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는 교칙상으로만 존재할 뿐, 루바흐가 설립된 이래로 그 누구도 달성한 적 없는 수치였다. 조기 졸업이 아니라면 정석대로 낙제만을 피해 총 140학점을 채워 들어야 한다. 과목 낙제 점수인 F등급은 사실 꽤 흔히 찍혀 나오는 점수였으므로 이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엘리트들이야 4~5년 만에 졸업한다지만 일반적인 학생들은 평균 6년가량 걸렸고 좀 둔한 아이일 경우 무려 8년씩 걸려 졸업하는 경우도 있었다. “앞으로 최대 2년. 졸업까지 남은 시간이 되겠지.” 동색(同色)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걸 보면서 쥬다스는 덤덤히 말을 맺었다. 입학한 지 2년이 지났으니 따지고 보면 루바흐 입학 4년 만에 졸업을 하겠다는 의지였다. “최선을 다해 학업에 임하고 돌아오마.” 감정을 제어하고 필요한 수를 계산하는 일에 있어선 9살 세이지보다는 쥬다스가 월등히 우위였다. 마냥 태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도 쉬이 부러뜨릴 수 없는 강한 의지를 전달한다. 흡사 꺾이지 않는 버드나무를 연상케 하는 눈빛이었다. 세이지는 복잡한 낯빛으로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많이, 달라지셨네요. 형님.” 바람의 정보에 따르면 세이지는 고작 4살에 1황자를 만났다. 기억도 잘 나지 않을 어릴 시절에 만난 형제에 대해 뚜렷이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정도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지만 바람은 오랜 세월이 지난 정보에 대해서는 단편적으로밖에 읽어내지 못했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든, 아직 어린아이답게 흔들리는 표정을 짓던 세이지가 곧 꾸벅 고개를 숙였다. “친우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방해해서 죄송해요, 형님. 오랜만에 오신 형님께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온 것이니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래, 떠나기 전 네게 한 번 들리마.” 간단히 인사를 나눈 세이지는 자리에 동석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1황자궁을 나왔다. ‘돌아오지 않으시는 편이 좋았을 텐데.’ 밖에서 기다리던 호위들을 대동한 채 궁을 등지고 선 3황자 세이지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참고 있던 혐오감을 드러낸 세이지는 힐끔 고개를 돌려 1황자 궁에서 펄럭이는 루바르잔 제국기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형님은 그냥 멍청한 백치로 죽 남아 있어 줬어야 했어요. 왜냐하면.’ 꾹 쥐어진 주먹을 옷자락 사이로 숨긴 3황자는 경멸을 담아 중얼거렸다. “……당신은 가짜잖아.” 휙. 그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 * * 3황자가 다녀간 후 쥬다스를 중심으로 한 일행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소소한 잡담이 오갔다. 황궁에 온 목적인 황제와의 만남이 하루 뒤 저녁으로 잡혔기 때문에 그들은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학업도 정치적인 눈치 싸움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조합이었다. 계산적인 이유로 쥬다스에게 접근한 마르젠을 제외한다면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 아벨은 전심으로 쥬다스를 신뢰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제일 눈칫밥을 먹는 건 마르젠뿐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유들유들한 태도를 보였다. 1황자를 지지하기로 한 동기는 달랐어도 엄연히 한배를 탄 사이였다. 꼭두각시 군주를 만들지 못할 바엔 그의 최측근들 사이에서 신임을 얻어 중직에 서야 했다. 어떤 목적에서든 따르는 선장은 하나였으니 배가 기울 일은 없었다. 여섯 학생은 편안히 하루를 보내고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각자 쉴 수 있는 방으로 갈라졌다. 쥬다스도 낮에 보았던 그의 방으로 들어섰다.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넓은 크기에 비해 황량한 내부 구조가 거북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답답함을 거두기 위해 곧장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창밖에 보이는 광경에 의외라는 듯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흠, 저건…….” 「아, 전 황후 하윤 리가 제국에 들어오면서 가져다 심은 벚나무야.」 제국 내에선 보기 드문 커다란 ‘벚나무’였다. 어둠이 내린 가운데에도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은 온통 분홍빛으로 밤하늘을 물들였다. 일정한 길이로 잘라 관리한 낮은 잔디 정원에서 유일하게 피어오른 꽃나무였다. 한들한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에서부터 꽃잎이 마치 눈송이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벚꽃이라……. 책에서 묘사한 걸 읽어본 적은 있다만 직접 보니 색이 아주 곱구나. 허허.” 단 한 그루였다. 그럼에도 부족함 없이 화려해 보였다. 오히려 단조로운 가운데 홀로 가지를 뻗은 모습이 더욱 고고함을 돋보였다. 쥬다스는 물끄러미 벚꽃을 구경하다 살짝 고개를 틀었다. “한데 거기 자네들은 무슨 볼일인고?” 콱. 자연스레 고개를 꺾는 순간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날카로운 단검이 창틀에 박혔다. 단단한 대리암인데도 두부의 이쑤시개처럼 꽂힌 단검에서 대상을 일격에 살해하고자 하는 의지를 찾아볼 수 있었다. 쥬다스는 단검에는 시선을 주지 않은 채 홀연히 방 안에서 나타난 세 명의 복면인을 바라보았다. 당황하지 않는 황자의 모습에 복면을 뒤집어쓴 사내들이 빠른 손놀림으로 두 번째 암기를 던졌다. “……!” 정확하게 쥬다스의 숨통을 노려 날아오던 날붙이는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히기라도 하듯 그대로 허공에 정지했다. 꽈드득, 까득! 허공에서 시퍼렇게 얼어붙은 단검들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져 뒹굴었다. 쥬다스가 들어 올린 손끝에 단검을 얼린 푸른 기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 목을 노렸구만. 자객인가.” 세 자객은 여유를 유지하는 상대의 기세와 자유자재로 부리는 정령술을 보고 잠시 멈칫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답게 곧장 등에서 검을 꺼내 들었다. 일반적으로 기사들이 쓰는 무게감 있는 양손검이 아닌 오로지 살상을 목표로 하는 날카롭고 얇은 검이었다. “……!”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려던 그들은 움찔 놀라 우뚝 멈춰 섰다. 가만히 서 있던 1황자가 신기루처럼 자리에서 사라져 있었다. 쥐를 쫓던 고양이들이 쥐구멍을 둘러싸고 발톱을 세우듯 의도치 않게 서로를 향해 검을 든 채 멈춰 서게 된 자객들의 뒤통수 너머로 소년의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로구나.” “…….” 바람에 휘감겨 사뿐히 착지하는 쥬다스를 본 세 자객은 두말할 것 없이 임무에 실패했음을 알아차렸다. 1황자가 다루는 정령술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세 자객 역시 어릴 때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아온 베테랑이었지만 그 앞에선 아무 의미도 없었다. 보통 인간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는 이능이다. 동시에 같은 판단을 내린 자객들은 망설임 없이 무기를 내버렸다. 쥬다스가 알기로 이러한 자객들은 순순히 투항하지 않는다. 보통 임무실패의 상황에서 잘 훈련받은 암살자란 자결을 택하는 법이다. 하지만 자결에도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이 하는 말은 실체화를 했더라도 술사 이외엔 들을 수 없습니다. 입으로 내는 소리가 아니라 얘기하고자 하는 대상에게만 정신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이라... 이를테면 정령들끼리의 카톡대화방에 상대를 초대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대사처리가 큰따옴표 대신 특수기호인 「」인 이유기도 합니다.ㅎ 사족으로 이그레트는 로리콘(?!)이 아니라 그냥 어린아이와 동물을 순수한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흠흠 (...) 또, 3황자는 아주 영리한 9살꼬마입니다. 기본적으로 이그레트 상대할 깜냥은 아닌데... 옛날에 뭔가(?) 목격한 게 있어서 1황자에 대한 감정이 안좋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평점,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야광형광등님께서 쥬다스를 그려주셨습니다!ㄷㄷ 큽,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주말연참+1강화를 하고 싶지만 못지킬 약속이 될까봐 그건 다음주 정도로 미루도록...ㅠㅠ 그림은 공지에 추가해두었어요~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7 / 0240 ---------------------------------------------- 6장. 재회 “익스플로션.” 속삭이듯 읊조린 시동어에 따라 그들의 몸에 새겨진 마법진이 작동했다. 몰려든 마력이 진동했고, 곧이어 굉음과 함께 세 자객이 폭사했다. 콰쾅! 자폭이었다. 그러나 폭발의 여파는 쥬다스에게까지 미치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물과 바람의 동조술로 만들어진 차단막이 직육면체의 형태로 폭발을 가두었다. 충격은 차단막에 흡수되었지만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새까맣게 타올랐다. 벌컥! “무슨 일이십니까!” 소리까진 완벽히 차단하지 못한 터라 시종 로한이 예를 차리는 것도 생략하고 곧장 문을 열고 달려들어 왔다. 바닥을 구르는 날붙이, 카펫과 함께 까맣게 불타 재가 되어버린 자객들의 잔해를 발견한 로한이 놀라 숨을 삼켰다. 그를 따라 들어온 호위병과 마법사들이 즉각 쥬다스를 옆방으로 피신시키고 사건을 수색했다. 정작 습격을 당한 본인은 멀쩡히 소파에 앉았는데 시종만 혼비백산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진정하거라, 로한. 별일 아니었으이.” “예?” 황당할 정도로 태연한 말에 로한은 뒤늦게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주인의 안위를 살폈다. “다치신 곳은 없으시옵니까, 전하.” “그래.” 대수롭지 않은 기색이었다. 로한은 멀쩡하다 못해 심지어 자객의 습격을 받고 놀라지도 않은 것처럼 보이는 주인을 당황하여 바라보았다. “머릿수는 셋. 암기를 다루는 실력이 오랜 훈련을 거친 솜씨더구나. 암습에 실패하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과감히 자폭을 택하였다. 미리 몸에 마법진을 새겨놓았던 모양이야.” “……전하.” “음?” 시종은 ‘정녕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라는 물음을 목구멍 아래로 간신히 삼켜냈다. 1황자에 대해 공공연히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곤 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목숨을 위협받은 적은 지금껏 한 차례도 없었다. 상해 여부와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침입한 쪽이 실패 시 자폭을 감행하면서까지 흔적을 지우고 목표물을 사살하려는 지독한 살수들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눈앞에서 사람이 터져 나가는 걸 봤을 황자는 지나치게 태연했다. 이 부분을 지적하자니 주제넘은 것 같았고 묻지 않자니 정녕 괜찮은 것인지 걱정이 되었다. 로한이 할 말을 고르느라 선뜻 입을 열지 못하자 쥬다스가 미안한 어조로 먼저 지시했다. “그래, 많이 놀랐겠구나. 소리가 꽤 컸으니 다른 방에 있던 아이들도 듣고 놀랐을 수도 있겠지. 그 아이들에게 상황을 알려주고 너도 가서 쉬려무나.” “……예, 전하.” 로한이 걱정하는 쪽은 오히려 쥬다스였건만 그는 다른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공포에 사로잡혀 떠느니 차라리 이 편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에 로한은 일단 자리에서 물러났다. 시종이 자리를 떠나자 쥬다스는 옮겨온 방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고급 양모가 깔린 소파와 장인의 손길로 다듬어진 조각상,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는 화분과 티테이블 등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손님용으로 쓰이는 방이 차라리 본래 그의 방보다 더 사람 사는 분위기가 났다. 「이그레트.」 유니가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어깨위로 포로록 날아와 안착했다. “……황실의 일들이 생각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모양이로구나.” 이미 ‘쥬다스’라는 인물이 범상치 않은 배경을 가졌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그 깊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깊은 듯했다. 유니는 그의 뺨에 찰싹 달라붙어 위로하듯 토닥였다. 「걱정하지 마. 내가, 우리가 반드시 지켜줄게.」 “으음……. 고맙다만 유니. 걱정되는 건 그 부분이 아니라.” 「아니, 지금은 너 자신만 생각해. 이그레트.」 「맞다요! 지금도 다른 인간들을 걱정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요.」 모처럼 토니가 유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카니는 조용히 웃었고 가만히 엎드려 있던 루니도 끼어들었다. 「과한 욕심을 부리는 자는 자멸하게 되어 있다. 네가 굳이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정령들의 말을 들은 쥬다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글쎄, 자멸이라. 설령 그렇다 한들 가만 두고 볼 수만은 없겠지.” 보복이나 응징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한 번 건드렸을 때 반응이 없으면 그 뒤로는 점점 건드려지는 강도가 세지는 법이었다. 실제 ‘백로황자’가 루바흐에서 받아온 조롱과 멸시는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커진 부분도 있었다. 아량을 베푸는 것과 입 다물고 당하기만 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휘오오. 그의 손끝에서 맴돌던 녹색 바람이 훅 하고 흩어졌다. 때로는 이빨을 드러낸 적에게 상대가 쉬이 건드릴 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직접 깨우쳐 줄 필요도 있었다. 밤새 일어났던 사건으로 인해 그가 머무는 궁은 완벽히 통제되었다. 심지어 대귀족 출신인 에단이나 크리스티나조차 쥬다스가 머무는 방에는 출입이 허가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찾아가 상태를 확인하지도 못한 채 심각한 분위기로 모여 있던 아이들은 쥬다스가 말끔한 차림으로 나타나자 황급히 다가가 정황을 물었다. “간밤에 습격이 있었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아무 이상 없단다. 많이 놀랐느냐?” “당연히……!” 감정적으로 반응하려던 바이칼이 후 심호흡을 하고, 마저 말을 이었다. “무사하셨을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여.” “걱정해 주었단 뜻이구나. 고맙다, 바이칼.” “아니, 꼭 그런 건…….” 당혹스레 웅얼웅얼 얼버무리는 바이칼 대신 크리스티나가 나서서 재차 물었다. “전원 자폭하여 배후를 찾긴 어렵다 들었습니다. 괜찮으신 건가요?” “흠.” 아예 존재가 사라져 버린 사람에 대해 정보를 읽기란 바람의 정령에게도 어려운 일이었다. 황궁 소속 정령술사가 있으니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자폭을 선택한 모양이었다. 물론 정령왕의 힘이 개입한다면 결과는 달라지지만 이를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쥬다스는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배후를 캐는 건 어려울 듯하구나.” “아뇨.” 크리스티나는 단호하게 그의 대답을 부정했다. “전하께서 지금 괜찮으시냔 뜻입니다.” “으음, 내 그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더냐. 너희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었다.” “왜 자꾸 큰일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까?” 쥬다스의 대답에 크리스티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치켜 올렸다. “물론 전하께서 지닌 이능은 대단합니다. 하지만 무려 제국의 1황자 궁에 잠입한 자들, 어젯밤엔 엄연히 위험에 노출되셨던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1황자 궁은 황궁 안에서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황궁을 지키는 호위 인력이 거저 놀고먹기만 하는 자들이 아니라 고위급 실력을 가진 선별 인원이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세 명이나 황자의 거처를 침입했다는 건 굉장히 큰 문제였다. “그렇구나. 그 말이 옳다. 내가 안일했으이.” 쥬다스가 깔끔히 인정했음에도 일행의 표정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추궁하려던 게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크리스티나는 이마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분명 두려우셨을 텐데도.’ 황자는 아직 12살이었다. 14살에서 16살 사이에 있는 그들조차 목숨이 노려지는 상황이나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본다면 태연하게 견딜 자신이 없었다. 뛰어난 무술을 익히고 마법을 학습했다 한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도저히 써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아직 그들 사이에서도 제일 어린 12살에 불과한 저 황자는 어땠을까.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아이들의 마음이 무거워진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하, 티를 내지 않으시려 노력하는 거겠지.’ 생각해 보면 쥬다스는 언제나 그랬다. 늘 느긋했고 부드럽게 그들을 다독여 주었다. 지금껏 그를 알게 된 이후 단 한 번도 분노하거나 표정을 일그러뜨린 전례가 없었다. 아이들은 새삼 쥬다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군주의 혈통은 그 자리의 무거움을 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들 앞에서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거나 동요해서는 안 됐다. 특히 공포나 슬픔 따위는 더욱 금기와도 같았다. 군주는 강해야 하고 어느 때나 흔들림이 없어야 했으니 지금 쥬다스가 보여주는 태도는 이에 아주 부합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이는 실제 그의 내면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었지만, 아이들의 눈엔 마음껏 두려움을 표현하지 못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쓸쓸한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 정작 쥬다스는 아이들의 복잡한 시선에 대해 의문을 품을 뿐이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그가 가라앉은 분위기를 어려워한다고 느낀 에단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 시장할 시간이긴 하구나. 혹 꽃놀이를 좋아하느냐?” “예?” “네?” 황궁에서 들을 거라곤 생각도 못한 단어에 침울해 있던 아이들이 하나같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빙글 발길을 돌렸다. “내 보아둔 자리가 있으이.” 자리란 다름 아닌 1황자 궁 뒤편에 위치한 벚나무 아래였다. 가지가 크고 높게 뻗어 그늘이 질 정도로 우람한 나무였다. 손톱만 한 꽃잎이 살랑살랑 흩날렸다. 날씨는 아주 맑았고 농익은 봄바람은 따사로운 햇살을 식혀 주었다. 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꽃나무였기에 그 밑에 자리를 잡고 간단한 피크닉 식사를 즐기게 된 아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만개한 벚꽃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크리스티나가 꽃잎을 손바닥에 받으며 말했다. “……‘해동’은, 사방신을 믿는 국가라 했던가요.” 쥬다스의 생모 하윤 리가 왕녀로 자라온 모국이 바로 ‘해동’이었다. 해동은 대륙 동쪽 제일 끄트머리에 위치한 나라였으며 루바르잔 제국과는 그 사상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제국이 교황청을 세우고 국교로 유일신을 섬긴다면, 해동은 나라를 지키는 4명의 수호신인 사방신을 믿었다. 여기서 신이란 개념도 제국과는 달랐는데 전지전능한 존재라기보단 말 그대로 인간 이상의 힘을 가지고 나라를 수호하는 영적 존재를 뜻했다. 「걔들도 정령이야. 자연계가 아닌 동물계라 우리랑은 좀 다르지만.」 진실을 알고 있는 유니는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다른 아이들은 카니를 제외한 세 정령의 모습은 볼 수 있었지만 소리는 듣지 못했다. 정령이 직접 말을 걸지 않는 이상 정령이 하는 말을 엿듣는 건 불가능했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끼리 해동에 대해 아는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놓았다. “왕족 대대로 사방신 중 하나의 가호를 타고난다고.” “하나 최근엔 사방신의 존재가 묘연해졌다고도 하더군요.” 「계약을 맺을 만한 친화력을 가진 적합자가 태어나지 않은 모양이야. 계약자가 없으면 그 해동이란 나라에 묶일 이유도 없겠지. 그래서 그런 걸 거야.」 「근데 왜 그동안 왕가라는 한 핏줄에 묶여 있던 거다요?」 「낸들 아니? 걔네만의 특이한 습성인걸.」 토니의 의문대로 정령은 보통 술사와 일대일 계약 관계를 맺었다. 계약자의 후손은 정령 입장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없는 존재였다. 신체적인 특성이 닮았을 뿐 인간의 영혼은 전승되지 않는다. 카니는 알 것 같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계약자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할까요.」 「……충성심?」 「그를 이 세상에서 다시 만날 수 없다면 그를 닮은 아이라도. 한 번 사랑했던 계약자를 도저히 놓지 못하는 충성심인 게 아닐까요.」 「헤에.」 조곤조곤한 설명에 유니가 솔깃한 반응을 보였다. 카니는 동글동글한 눈망울에 웃음기를 담고 쿡쿡 웃었다. 「난 그 마음, 좀 알 것 같은데.」 「……으음.」 4속성 정령의 시선이 한 존재를 향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카니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 약속드린 3연참은 오늘 중으로 전부 올라갑니다. ^^ 아마 5분안에 다음 편이 올라올 것 같으니 여유되시는 독자님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8 / 0240 ---------------------------------------------- 6장. 재회 정령은 기본적으로 ‘충성심’이란 심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인간을 좋아하고 어여삐 여기기는 했으나 그뿐이었다. 둥지에서 알을 깨고 나온 아기 새를 귀여워하듯 소중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게 그들의 기초 태도였다. 정령의 입장에서야 인간도 자연의 일부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만일 계약 내용을 이해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부르는 친화력 강한 개가 있다면 정령은 그 개와도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계약’을 이해할 만한 이지가 주로 인간에게 있었기에 전례가 많을 뿐, 딱히 인간이란 종족만을 특별히 여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그레트의 경우는 지금까지 있었던 그 모든 계약 사례를 뒤집고도 남을 특별함이 있었다. 그를 만난 정령은 무조건 사랑에 빠졌다. 마치 모성애나 연인에 대한 애정, 아기가 부모에게 느끼는 일차원적인 사랑처럼 그렇게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 만일 그가 다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어쩌면 정령들은 전에 없는 선택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확실히 그렇네…….」 유니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그레트가 지금 ‘쥬다스’로 존재하는 이유도 어찌 보면 이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정령의 힘이 지금 상황에 일조한 건 사실이었다. “사방신이라.” 쥬다스는 아벨의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거울의 정령에게 한 번 시선을 주었다. 물질계 정령조차도 이리 생소한데 동물계 정령은 또 어떨지 작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가 빤히 쳐다보자 아벨은 우물쭈물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하, 하실 말씀이 있으신.” “루바흐로 돌아가면 바로 네 정령과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마.” “……!” 그 말에 아벨의 침침하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눈에 띄게 확 밝아진 표정을 본 에단이 조심스레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그의 정령이라면, 거울의 정령 말씀이십니까.” “그래, 에단. 기억하느냐. 그 정령이 아직도 곁에서 떠나지 않고 있으니 그대로 두고 보기 안타깝구나. 마음에 아무 거리낄 것이 없을 때가 적기 아니겠누.” “……뜻은 좋으신데, 거 두 번 보고 싶진 않은 정령이었죠.” 바이칼이 부들부들 입가를 떨며 중얼거렸다. 확연한 거부감을 느낀 아벨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어, 어떻게, 생겼기에……?” “…….” “…….” 에단과 바이칼은 동시에 미간을 구겼다. “그냥……. 넌 안 보는 편이 좋을지도.” “그, 그 정도라니.” 외형이 흉측하다기보단 능력 측면에서 치를 떠는 두 사람이었지만 아벨은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다. 시간이 되자 쥬다스는 다시 복장을 정돈하고 황제와의 만찬 장소로 향했다. 부자지간이라 한들 평범한 가족이 아닌 만큼 지금까지의 어떤 만남보다 신중해야만 했다. 더구나 현황은 즉위 이래 루바르잔 제국을 실수 한 번 없이 완벽하게 다스리고 있는 군주였다. 지배자답게 마법이란 이능에서도 그 권위를 보였으며 치열한 서열 싸움의 승리자인 만큼 사람을 읽는 눈썰미가 보통 사람과 비할 바 없이 뛰어날 터였다. 귀족 사회라는 야생에서 닳고 닳은 지배층을 전부 그 발아래 충성하도록 만든 노련한 제왕의 눈에 그릇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됐다. ‘얕보여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눈에 띄어서도 곤란하다.’ 쥬다스는 자신이 품고 있는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힘이 있으나 그 힘을 사익에 쓰지 않으려는 절제력. 이는 자리에 걸맞은 오만함을 품고 아랫사람을 다스려야 할 지도자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성품이었다. 적당히 쓸 만한 힘을 가진, 그러나 군주로서 서기엔 부족한 존재. 그 모습을 황제에게 적절하게 내보여야 했다. 황제를 만난다는 사실은 별달리 긴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지만 그의 눈을 속여 완급을 조절해야 하는 부분에선 살짝 부담이 되었다. 쥬다스는 신중한 태도로 황제 궁에 들어섰다. 좋은 향을 내는 초가 입구에서부터 은은히 타오르고 있었고 이어지는 바닥은 걷는 모습이 비칠 정도로 매끈했다. 그는 천천히 걸어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회장으로 들어갔다. 부드러운 술 장식을 제치니 길게 이어진 저녁 식탁이 보였다. ‘만찬’에 초대됐을 때 이미 눈치챈 쥬다스의 예상대로 이번 만남은 황제와의 독대가 아니었다. 미리 도착해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1황자의 등장에 눈을 모았다. “루바르잔에 영광을. 전하를 뵙습니다.” 아직 황제석은 비어 있었다. 귀족들이 일어나 인사하는 걸 예법에 맞게 받아준 쥬다스는 자연스레 제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를 보고 일어섰던 귀족들이 전원 착석했다. 모인 귀족은 총 7명이었으며 각자 다른 분야에서 중임을 맡은 이들이었다. 루바흐의 어리숙한 아이들과 다르게 표정과 태도가 철갑처럼 단단히 관리되어 상호 간 쉽사리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집단이었다. 그들의 모든 언행은 식전 빵으로 바구니에 담겨 식탁에 올라온 고급 페스츄리처럼 겹겹이 둘러싼 체계적인 계산하에 이루어졌다. 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1황자를 대우함 역시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았다. 함부로 접근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시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저 소년이 바로 소문의 1황자 전하.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 슬슬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는 나이대의 케이베른 후작이 두 손을 깍지 껴 무릎에 얹은 채 곁눈으로 쥬다스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관심을 끊은 게 전 황후 하윤 리가 사망한 5년 전이었다. 당시에만 해도 도무지 써먹지 못할 최약체였던 황자가 척 보기에도 반짝이는 보석이 되어 돌아왔다. 후작뿐 아니라 만찬 자리에 모인 7명의 귀족은 한눈에 달라진 싹을 알아보았다. ‘폐기(廢器)인 줄로만 알았더니. 출발이 남다른 대기만성이었단 말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대귀족 사이에서 1황자는 만장일치로 버린 수였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알쏭달쏭한 심정이 되었다. 한둘도 아니고 모든 이가 포기했던 싹이 실은 저토록 장성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니? 마치 누렇게 말라죽은 묘목을 뽑아 던져 버리고 신경을 껐더니 이듬해 봄 푸르게 자라나 하늘로 우뚝 솟은 거목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이 자리에 나와 떨지 않고 그들을 가만 바라보는 또렷한 금안을 마주하자니 저절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복잡한 상념을 가다듬고 있던 귀족들은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에 다시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함께 일어서서 예를 갖추는 쥬다스의 시야로 드디어 황제의 발끝이 들어왔다. 펄럭. 회장에 들어선 황제는 어깨를 감싸던 붉은 망토를 벗어 종에게 넘겼다. 레위스 G.루바르잔 아르키디온. 그는 아직 불혹도 채 지나지 않은 젊은 황제였다. 저벅저벅. 잘 닦인 백색 부츠가 반질반질한 바닥을 딛는 소리만이 회장을 울렸다. “…….” 허무에 잠긴 금색 눈동자가 무심히 쥬다스를 향하다 이내 지나쳤다. 황제가 착석하며 앉으라 손짓하자 다른 이도 함께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황제는 쥬다스와 같은 금안이었지만 머리색은 미묘하게 달랐다. 쥬다스처럼 빛나는 은발이 아니라 물탄 듯 진한 회은발이었다. 초대 황제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유전에는 쥬다스가 가진 보석 같은 은발이 더 적합했다. 황제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포크를 움직이다 종종 와인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런 그가 불쑥 질문을 던진 건 식사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에서였다. “루바흐에서.” 디저트로 나온 꿀과 견과류가 섞인 셔벗을 반 스푼 정도 퍼낸 황제가 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재차 말했다. “네 배움은 어디에 있더냐.” “……존귀하신 황제 폐하, 소자 미욱하여 보고 듣는 모든 것이 배움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망설임 없이 되돌아온 대답에 황제는 무미건조하게 셔벗을 삼켰다. “그중 가장 큰 배움은.” “후회입니다.” 딸각. 황제가 툭 디저트 스푼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황제의 눈이 1황자에게로 향했다. 동색의 금안이었으나 태산같이 무거운 빛으로 상대를 담고 있었다. 상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매와 같은 고요한 기다림이 있었다. 모인 귀족들은 참관하듯 숨 죽여 둘의 대화를 경청했다. “이능이 있다고.” “예.” “언제부터.” “……봄의 시작과 함께 눈을 떴습니다.” 이는 거짓이 아니었다. 실제 1황자가 정령술을 부리기 시작한 건 ‘이그레트’가 눈을 뜬 이래였다. 다소 중의적인 표현이었으나 충분히 의미는 전달받은 황제가 가만히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두 금안은 같은 색이었으나 그 안에 짊어진 무게가 달랐다. 황제는 분명 1황자에게 관심은 있었지만 그의 성장에 대해 크게 기뻐하거나 자질을 속단하지 않았다. ‘네게 기대는 많으나.’ 갓 태어난 아이를 처음 안은 순간부터 죽 가슴에 품고 있던 기대였다. 아이가 자라며, 또 아이를 낳은 전 황후 하윤이 죽으면서 그 기대는 점차 홧홧하게 가슴을 태우며 사그라졌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불씨로 남아 1황자를 포기할 수 없게끔 깜빡여 온 그 기대감은 여전히 희미하게 속내를 덥히고 있었다. 하지만 무턱대고 후계 자리를 넘겨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다른 황자에 비해 군주와 어울리는 재목인지 판별이 필요했다. “군주가 갖추어야 할 두 가지 덕목이 있다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쥬다스는 저 질문이 황제가 대놓고 자신에게 내리는 시험지임을 알고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부드러운 표정으로 답을 내어놓았다. “포용과 질서입니다.” 그가 택한 내용은 황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식하거나 생각이 짧은 답이란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혜롭고 넓은 시각으로 위를 바라보는 대답이었다. ‘군주란 위에서 아래를 바라봐야 하는 자리.’ 애초부터 쥬다스는 군주에 뜻이 없다는 답과도 같았다. 황제는 서늘하게 눈매를 굳히며 물었다. “하면 그 질서를 어긴 충직한 병사를 어찌 벌하겠느냐.” “질서를 어긴 순간부터 그 병사는 충직하지 않습니다. 충의 여부를 떠나 마땅히 질서를 어지럽힌 대가를 치르도록 함이 옳다 생각합니다.” “하면 네 포용을 벗어날 만큼 도리를 저버린 수하는 어쩌면 좋겠느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내침이 옳다 여깁니다.” 공허하던 황제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돌았다. 그는 손등에 턱을 괴며 테이블에 몸을 기댔다. “재미있구나. 너는 군주의 정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도 어째서 종전엔 다른 대답을 내놓았지?” “이해하는 것과 제가 직접 행함에 있어 그 간극이 크기 때문입니다.” 군주의 정의를 머리로는 알아도 그대로 따를 생각이 없다. 명백한 거부였다. 그리고 황제 역시 그 당돌한 판단에 동의했다. ‘피를 볼 냉혹함이 없다면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나…….’ 그건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1황자는 아직 어렸다. 그럼에도 황제와 대등한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있었다. 다른 황자들은 물론이고 황후나 공작들조차 그 앞에서 이런 분위기를 보이진 못했다. 여유롭고, 또 부드럽다. 황제는 저 여유가 그저 단순한 어린아이 특유의 패기가 아니라 진짜배기임을 꿰뚫어 보았다. 1황자는 진실로 스스로가 가진 능력을 신뢰하고 있었다. ‘지성, 판단력, 자신감과 정신력. 그리고 뛰어난 이능까지 갖추었으니.’ 그렇다면 자신의 위치에 알맞은 냉철만 깨우면 될 일이 아니던가. 황제는 웃음기를 지운 채 훌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 너를 좀 더 지켜보고 싶구나. 앞으로 사흘간 더 떠나지 말고 궁에 남아 있도록 하라.” 포식자는 장을 떠났다. 수년 만에 아들을 재회한 아버지는 공허한 눈을 하고 있었으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마치 씨종자를 평가하듯 그렇게 흥미를 가지고 떡잎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어디에도 정은 없었다. 쥬다스는, ‘쥬다스’가 자신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 이제 새벽에는 저도 밀린 수면을 좀 취하고(...) 아마 이따 점심시간 정도에 남은 한 편이 마저 올라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오늘 낮에 이어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메시지와 애정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59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황제와의 만찬에서 돌아온 쥬다스를 반긴 건 시종 로한이었다. 이미 시간이 상당히 늦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일행들은 모두 취침을 위해 각자 방에 돌아간 상태였다. “내일 오전 황후께 찾아뵙겠다 전해다오.” “예, 명을 받들겠습니다.” 로한에게 지시를 내리고 방으로 들어간 쥬다스는 소파에 털썩 기댔다. 초콜릿색 양모로 제작된 소파 겉면이 지친 몸을 푹신하게 감싸주었다. 「이그레트, 그런 데서 잠들면 감기 걸려!」 포록 코앞으로 날아와 쫑알대는 유니의 잔소리에 그는 감았던 눈을 흐릿하게 떴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수마가 몰려들고 있었다. 쥬다스는 부드러운 양모에 머리를 기댄 채 작게 한숨을 뱉었다. “……잠시만, 유니.” 육신이 성장했다곤 해도 아직 썩 튼튼하다고는 볼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루바흐를 나온 뒤 줄곧 무리해 왔다. 프리드의 간계에 의해 받았던 정령 역소환 충격도 아직 남아 있었다. 한평생을 평민으로 살아왔던 그가 1황자라는 위치에 맞추어 움직이는 것 역시 상당히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애초에 권력을 탐하지 않아 작위를 거절하고 종래엔 사회를 떠나 은둔했던 이그레트가 권력의 최정상에 가까이 서 있다는 자체가 모순적이었다. 쥬다스는 손등으로 눈가를 터억 덮었다. “내가 지금 잘하고 있는 건가…….” 현자라 칭송받은 자조차 스스로가 걷는 길에 객관적이긴 어려웠다. 곁을 지키는 정령들이 대신 활발히 답을 내려주었다. 「잘하고 못하고 할 게 뭐 있다요?」 「응, 응.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되잖아.」 ‘하고 싶은 대로.’ 사실 그는 지금껏 충분히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죽는 순간 후회한 바가 있기는 했으나 썩 불행하다 느낀 건 아니었다. 충분히 많이 가졌고 충분히 많은 힘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부족한 게 있다면. “‘인간다운 삶’이던가.” 「으음, 네가 생각하는 인간다운 게 뭔데?」 “…….” 쥬다스는 소파에 기댄 채 침묵했다. 파앗. 술사의 의식이 점멸함과 동시에 정령들의 실체화가 풀렸다. 「아, 정말! 이대로 잠들면 안 된다니까.」 유니가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실체화가 풀린 이상 자연체의 정령들은 힘을 사용할 수 없다. 뚱하니 볼을 부풀린 유니를 지나쳐 잠든 쥬다스에게 다가간 카니가 그 앞에 꿇어앉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폭 안아주었다. 「인간답지 않아도 돼요.」 “…….” 「좀 더 욕심을 부려도 괜찮으니까.」 다홍색 눈망울에 어린 따뜻한 애정을 힐끔 엿본 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여튼 다들 이그레트한테 너무 약해.」 「그렇다면 네가 좀 더 세게 나가보지 그런가.」 「……는 나도 포함이거든.」 푸른 늑대를 향해 헹 코웃음 친 유니가 소파 등받이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현계에 거의 영향을 줄 수 없을 정도로 느릿느릿 일어난 따뜻한 녹색 바람이 가볍게 주변을 감싸 안았다. 「좋은 꿈 꾸길, 이그레트.」 * * * 아침이 밝자 쥬다스는 미리 언질했던 대로 황후의 궁에 찾아갔다. 흔쾌히 그의 방문을 허가한 황후는 3황자 세이지와 함께 튤립 정원에서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사적인 자리인 만큼 편안한 차림으로 실외에 나와 있던 그들은 쥬다스를 발견하고 상반된 표정을 지었다. 3황자 세이지는 순간 찌푸린 얼굴로 불쾌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가 가까스로 이를 수습했다. 반면 황후는 품위 있게 미소 지으며 자리를 권했다. “어서 와요. 낯빛이 맑고 밝으니 전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는군요, 1황자.” “염려해 주신 덕입니다.” “호호. 이리 보니 마음이 놓이는 군요. 그간 이 사람이 황자에 관해 걱정이 많았습니다.” 겉보기론 평온하게 주고받은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녀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녹색 바람을 멀거니 응시했다. 「와, 진짜 뻔뻔해. 죽이려고 할 땐 언제고 걱정은 무슨?」 「히에에, 막 두 얼굴의 사나이 그런 거 아니다요?」 「……황후가 사나이면 그게 제일 반전…….」 정령들의 숙덕거림이 들리지 않는 황후는 고운 갈색 눈동자 가득 호기심을 담고 실체화된 유니와 토니, 루니를 향해 차례로 시선을 주었다. “이들이 황자의 정령입니까?” “예.” “정말 편리하겠군요. 부럽습니다. 세이지는 정령술에는 자질이 없으니 말이요.” “황후마마, 이중 바람은 기류를 읽어 길을 안내하는 역할도 합니다.” “……?” 차로 붉은 입술을 적시던 황후는 쥬다스가 갑작스레 꺼낸 말에 멈칫 손을 정지했다. 의도를 읽으려는 차분한 눈길에 쥬다스는 망설임 없이 말을 이었다. “소자는 오늘 그 안내를 따라왔을 뿐입니다.” “…….” 황후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아직 어린 세이지는 무슨 말인지 눈치채지 못하였으나 황후는 저 말이 내포하는 경고를 알아들었다. 1황자가 다루는 정령술은 그녀의 짐작보다 훨씬 수준급이었다. 특히 바람의 경우 보기 드문 최상의 힘. 자폭하여 흔적을 없애 버린 자객들의 정보를 대충이나마 캐낼 수 있었으며 이미 배후로 확신한 상태에서 그녀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쥬다스의 확신대로 황후는 직접 수하를 움직여 암살자를 보냈다.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으며, 보통 12살 꼬마였다면 이능을 사용해 보기도 전에 숨을 거둬갔을 엄선된 실력자들이었다. “……그래요? 유감이로군요. 이 사람은 1황자가 찾아온다는 소식에 기뻐 좋은 차를 준비해 두고 새벽부터 기다렸는데 말이어요.” 쪼로록. 황후는 시녀를 시키지 않고 손수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따랐다.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찻물은 검은색이었다. 황후는 따라놓은 찻잔을 쥬다스를 향해 살짝 밀어주었다. “들어요, 황자. 입이 짧은 황자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차가 아닙니까?” 쥬다스는 그녀가 건네는 차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를 보니 이상할 정도로 몸이 굳었다. 검은 빛깔로 우려낸 차에선 멀리서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달달한 향이 났다. 독은 들어 있지 않았다. 인체에 해롭다면 물의 정령왕인 루니가 지금처럼 얌전히 엎드려 있을 리가 없었다. 어렴풋이 뇌리에 잠들어 있던 기억이 깜빡이며 되살아났다. ‘마셔요.’ ‘편안해질 거랍니다.’ ‘어머니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나요, 황자?’ 과거의 잔상에서도 황후는 지금처럼 고고하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그 미소보다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한 꼬임에 혹해 어린 쥬다스가 잔을 받았었다. 차를 마시고 쓰러졌던 1황자의 기억을 떠올리며 쥬다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때도, 죽이려고 했다.’ 어린 쥬다스에게 건넸던 건 지금과 다르게 독이 든 차였고, 아이는 이를 남김없이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아마도, ‘죽었다’. “왜…….” “으응?” 모르는 척 웃는 입술이 옛날과 같았다. 쥬다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식히려 살짝 눈을 감았다. 이제야 퍼즐이 조금씩 맞춰졌다. 한 번 죽었던 아이가 살아남은 건 순전히 그 안에 잠들어 있던 이그레트의 힘 덕분이었다. 이그레트가 실제 죽었던 날짜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어쩌면 그전부터 줄곧 그의 영혼은 쥬다스와 함께였을 것이다. 다만 그는 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고요히 1황자의 몸에서 잠든 채 지닌 지성과 능력 모두를 잊고 있었다. 그러니 정령도 현계에 소환되지 못했고 황자는 홀로 자신의 숨통을 노리는 세력에게 함락당했다.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 기적처럼 그를 가호하던 정령의 힘이 풀려 나와 되살렸다. 아직 의문으로 남은 건 전 황후 하윤 리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와 이상할 정도로 꽁꽁 닫혀 있는 본래 1황자의 정신 세계였다. 죽어버린 아이의 기억을 단편적이나마 떠올린 그의 금안이 분노를 담고 일렁였다. 내내 유해 보이던 쥬다스의 분위기가 돌변하자 황후는 속으로 조소했다. ‘자랐다 한들 여전히 멍청한 꼬마로구나. 작은 도발에 저리도 솔직히 반응하다니.’ 그녀는 우아한 손길로 찻잔을 들어다 쥬다스에게 손수 건네며 달래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안색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자, 따뜻한 차라도 한 모금 마셔 보도록 해요.” 하지만 이 행동이 실수였음을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쩡! “……!” 찻잔이 깨어지며 흰 장갑 위로 검은 찻물이 쏟아졌다. 온도를 유지해 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이는 매우 뜨거웠다. 황후는 재빨리 장갑을 벗어 던졌다. 시녀들이 아연실색하여 달려와 찬 물수건으로 그녀의 손을 감쌌다. “나는.” 황후는 놀람을 감춘 채 여전히 꼿꼿한 황실 어른의 표정을 유지하며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도를 넘는 걸 싫어합니다.” “……황자?” “사람은 누구나 컵을 깨뜨리는 것과 같은 실수를 하지만.” 존대를 사용하되 존중과는 다른 강한 어조였다. 제 아비를 닮아 깊게 가라앉은 금안을 마주한 황후는 손을 감싼 물수건을 힘주어 꽉 잡았다. 1황자는 고작 작은 도발에 넘어가 감정을 숨기지 못한 애송이가 아니었다. 단지 숨길 필요가 없다 여겼을 뿐이다. “실수가 아닌 행동에는 응당 대가가 따를 것입니다.” * * * 갑작스레 잔이 깨져 뜨거운 물에 손을 데인 황후로 인해 티타임자리는 그대로 파했다.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난 쥬다스의 뒤로 3황자 세이지가 쫓아 나왔다. “형님!” 분기가 실린 부름에 쥬다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표정은 변함없이 온화했으나 전날 세이지가 마주했던 분위기랑은 조금 달랐다. 움찔한 세이지가 조금 수그러든 기세로 물어왔다. “어머니께 드린 말씀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란다.” “설마 어머니가 형님한테 해를 끼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디서 들으셨는지는 몰라도 전부 헛소문입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그럴 분이 아니시니까요. 오히려……!” 우르릉. 하늘이 작게 울었다. 어느 틈엔가 하늘을 뒤덮은 구름에서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이지는 힐끗 하늘을 올려다보곤 단호히 말을 맺었다. “오히려 그런 짓을 잘하는 건 형님의 어머니셨죠.” “…….” “전 봤어요. 형님의 어머니가, 형님을 죽였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 솨아아아. 예고도 없이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비를 맞는 두 소년을 향해 달려온 시종들이 우산을 펼쳐 들었다. 세이지는 보필을 받았으나 쥬다스는 손을 내저어 그들을 물렸다. 우산 아래 귀히 모셔짐을 당연히 누리는 3황자와 황조를 상징하는 은발이 푹 젖도록 비를 맞고 있는 1황자의 대립은 기이한 구도를 만들어냈다. 그르르. 사납게 이를 드러낸 푸른 늑대를 저지시킨 쥬다스가 조용히 대꾸했다. “하나 나는 죽지 않고 이리 살아 있지. 지금은 그래,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고자 함이 아니다.” “그러면!” “나를 향해 달려오는 말을 피하지 않을 뿐이란다.” 오늘은 경고를 위해 찾아갔을 뿐이다. 본래 평화로운 해결을 좋아하는 이그레트의 성정이 아니라 할지라도 제국의 황후 정도 되는 이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쥬다스는 제 어미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배다른 동생을 가만 내려다본 후, 발걸음을 돌렸다. 자리를 파하기 직전 황후의 눈은 심상치 않게 쥬다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쥬다스는 황후가 절대로 그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포기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충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3) 3연참 완료...! 오늘의 팁 : 이그레트의 경우 모든 미계약 상태의 정령을 ‘본체’로 볼 수 있습니다. 단 그와 계약한 정령들은 술사의 소망에 따라 모습을 변화한 상태입니다. 사족으로 쥬다스는 아직 액션은 취하지 않았지만 암살자들의 배후에 대해서 알아둔 상태입니다.ㅎㅎ 이제 움직일 일만 남았네요. 챕터의 소제목은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입니다. ...치킨하면 바삭한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데 그 치킨은 아니고요...ㅎ *Chicken Game : 두 대의 차가 마주 보고 돌진하다가 먼저 피하는 쪽이 패배하는 게임. 대략 이런 뜻입니다. 자세한 설명이 궁금하시다면 네이버에 치킨게임을 검색하시면 됩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원래대로 12시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0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죽일 생각으로 덤벼드는 적으로부터 피하지 않고 전력을 다해 맞선다. 둘 중 하나가 피하지 않는 이상 부딪침은 일어나게 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파멸할 게 뻔했다. 달리는 말이 서로를 교차하지 않고 그대로 충돌하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 충돌에서 피할 생각이 없었다. 찰박찰박. 비에 젖은 풀밭이 밟고 지나갈 때마다 물기를 튀겼다. 어찌나 비가 많이 내리는지 앞도 잘 안 보일 지경이었다. 빗물을 한껏 머금고 늘어진 케이프가 그의 느린 걸음걸이에 따라 흔들렸다. 단편적이나마 떠오른 본래 ‘쥬다스’의 기억이 더해져 머릿속이 갑갑해져 왔다. 쥬다스는 비를 맞으며 이를 하나하나 정리했다. “전 황후…… ‘하윤 리’는 어찌 숨을 거두었지.” 「……자살했어. 스스로.」 유니가 조심스레 답했다. 「그녀는 이미 반쯤 미쳐 있었거든. 죽기 직전, 아들인 1황자와 함께 죽으려고 했었대. 알려지기로는 동반 자살을 시도했지만 혼자 죽은 셈이라고…….」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별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어미의 자살, 이때 함께 죽을 위기에 처했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난 1황자. “…….” 하지만 그렇게만 정리하기엔 무언가 찜찜했다. 단순히 자살이라고만 생각하기엔 오늘 본 황후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여기에도 단서가 너무 부족했다. 생각하며 걸어오다 보니 어느샌가 1황자 궁의 벚나무 앞에 다다랐다. 쥬다스는 커다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았다. 「계속 이대로 비 맞고 있을 거야?」 유니가 걱정스레 그 뺨을 쓸었다. 지금 이 갑작스러운 호우의 원인이 바로 쥬다스였다. 그의 바람에 따라 물의 정령은 황궁을 뒤덮고도 남을 비구름을 불러왔다. 때아닌 소나기에 여기저기 웅덩이가 고였다. “……이상하구나.” 「뭐가?」 “처음엔 나와 전혀 무관하다 느꼈던 것들이 이제와 신경 쓰이다니 말이다.” 「그게 왜?」 “누군가의 어미를, 누군가의 아내를, 그리고 어쩌면 이와 관련된 수많은 이의 인생을 짓밟을 수도 있는 일.”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이다.” 「이그레트.」 “어쩌면 프리드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나는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인 것을.” 그의 자조적인 중얼거림에 정령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기적인 게 뭐 어때서.」 「맞다요.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요.」 「……네가 말하는 게 ‘이기’라면 우리 정령도 마찬가지.」 「우린 이그레트를 위해서만 움직일 테니까요.」 유니, 토니, 루니, 카니 순으로 이어진 말이었다. 그 바람에 쥬다스는 조금 우울했던 것도 잊고 쿡쿡 웃고 말았다. “루니.” 스윽. 그의 부름에 정갈히 앉아 있던 푸른 늑대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 다시 한 번 이 아이의 정신세계에 접촉해 주련. 꿈의 형태를 통해 숨겨진 기억을 볼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힘을 사용해서 말이야.” 「……억지로 닫힌 무의식에 접촉하면 네게 무리가 갈지도 모른다.」 “부탁한다.” 「…….」 「하지만 이그레트…… 어?」 토독, 톡. 하염없이 퍼붓던 빗줄기가 사라졌다. 정확히는 그의 머리 위에서만 사라졌고, 여전히 굵은 장대비가 사방에 퍼부어지고 있었다. 우산을 때리는 소리만이 파도처럼 머리 위에서 울려댔다. 쥬다스는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바닷빛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찰랑였다. “……쥬다스 님.” 크리스티나가 그의 앞에 서서 우산을 씌워주고 있었다. 그녀는 황궁에 오고 나서부터 죽 ‘전하’라 불렀던 호칭 대신, 학교에서처럼 이름을 불렀다. 아침부터 그가 황후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모두 그를 기다렸다. 한참 기다리다 비가 오는 소릴 듣고 밖으로 나온 크리스티나가 벚나무 아래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할 말은 많았지만 쥬다스의 표정을 보니 도저히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크리스티나는 하려던 질문 대신 살짝 무릎을 굽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다녀왔단다.” 쥬다스는 비에 젖은 손으로 그녀의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차가운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전달되었다. 줄곧 냉혹하기만 하던 궁 안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전해 주는 손이었다. 비에 젖은 몸을 씻고 따뜻한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쥬다스를 중심으로 일행이 다시 방 안에 모였다. “그래, 오늘 내가 황후마마를 찾아 뵌 건 말이다.” 쥬다스는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를 모아놓고 옛날이야기를 하듯 허허 웃으며 말을 꺼냈다. “그분께서 내 목을 노렸기 때문이란다.” “……?” 순간 정적이 흘렀다. “―예에에?!” 평이하게 흘러나온 폭탄 발언이었기에 인식이 늦어졌다. 모두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마르젠이 손을 떨다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화, 화, 황후께서……?” “그래, 이번 자객의 배후란 뜻이지.” “그런!” ‘말도 안 된다’고 외치려던 마르젠이 멈칫했다. 현 황후는 1황자의 친모가 아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황태자 자리의 주인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분히 인과관계가 있을 법한 내용이었다. 더구나 그가 아는 한 저 백로황자는 결코 허언을 할 위인이 아니었다. 석상처럼 굳어버린 마르젠을 제치고 바이칼이 끼어들었다. “맙소사! 전하, 그걸 알고 계셨다면 왜 당장 폐하께 알리지 않으시는 겁니까?” “알린다면 어찌 될 것 같으냐?” “그야…….” 늘 이런 식으로 되물어오는 쥬다스의 패턴에 익숙해진 바이칼은 이번에는 섣불리 열을 내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쥬다스가 이번 암살 미수 사건을 황후의 소행이라 확언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뛰어난 정령술에 기인했을 테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았다 한들 물증이 없었다. 자객들은 이미 폭사하여 흔적도 남지 않았고, 상대는 제국의 지고한 황후였다. 1황자라 한들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정령의 힘을 내세워 불미스러운 사건의 배후로 황후를 지목했다간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바이칼은 그 사실을 깨닫고 낮게 침음을 흘렸다. 같은 생각을 한 에단도 굳은 얼굴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하면 이제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찌할 것이란 없다.” 쥬다스는 이미 결단을 내렸다. 흔들림 없이 모두를 담은 금안은 마치 고요한 수심과도 같았다. “다시 기어코 칼을 들겠다면 이에 대응할 뿐이야.” “그 말씀은.” 본디 군주가 될 생각은 없었다. 하나 선택지는 그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것은 일종의 게임이다. 만일 황후가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를 피해서 지나간다면 양쪽 모두 안전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뛰어난 1황자의 그림자에 가려 3황자가 빛을 받지 못할지도 몰랐다. 반대로 빛을 보기 위해 1황자를 꺾으려 든다면 상황은 완전히 뒤집어질 것이다. 한쪽은 쥐고 있던 권력을 잃을 것이며, 반대편에 서 있던 자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겠지.’ 그때엔 추구하던 자유를 잃는다. * * * 그날 밤, 그는 물의 정령왕 루니의 도움을 받아 ‘쥬다스’의 무의식에 접촉을 시도했다. 종종 의도치 않게 이루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꿈을 통한 접근이었다. ‘……역시 닫혀 있군.’ 꿈속에서, 이번에도 역시 그는 본래의 노인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굳게 닫혀 있는 방문 앞에 서 있었다. 어린 쥬다스가 꽁꽁 숨겨 놓은 기억이 이 안에 있을 터였다. 이그레트는 가만히 손을 들어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탁, 끼이익. ‘……?’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다. 조금 의아하게 여겨지긴 했으나 그는 안으로 들어가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방 안에는 한 여인이 포대에 싸인 아기를 안아 들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단아하게 비녀를 꽂아 틀어 올린 검은 머리와 황빛 도는 피부가 제국민과는 다르게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이그레트는 저 여인이 초상화 속에 그려져 있던 쥬다스의 생모, ‘하윤 리’임을 곧바로 눈치챘다. 그렇다면 그녀가 안고 있는 저 아기는. “일어났니?” “아― 우.” “우리 귀여운 아가, 쥬디.” 아주 어린 아기일 적의 쥬다스와 그 어미였다. 가까이서 직접 본 하윤은 이제 갓 스물을 넘었을까 싶은 외향으로 한 아이의 어머니치고는 어려 보였다. 부드러운 손길로 아기의 등을 천천히 어루만진 하윤은 이내 조용히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사랑해, 아가야.” 쥬다스의 어머니가 저런 식으로 아이를 향해 행복하게 웃어주던 여인이었을 거라곤 상상도 못해 봤던 일이었다. 발에 끈끈한 풀이라도 붙은 듯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이그레트가 뚫어져라 두 모자를 바라보는 사이, 방의 건너편에 문이 하나 더 생겨났다. 스르르. 또 다른 무의식과 연결해 주는 문이었다. 마치 따라오라는 듯 꿀렁이는 문으로 다가간 이그레트는, 문을 열기 전 다시 한 번 하윤과 아기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마법이라도 건 듯 둘의 모습은 정지해 있었다. 여기까지가 쥬다스의 무의식이 기억하고 있는 장면인 모양이었다. 이그레트는 문을 열고 다음 방으로 들어섰다. “……해선 안 되지요.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알아요. 황후마마.” 두 여인이 마주 보고 있었다. 조금 전보다 커서 아장아장 걸어 다니게 된 어린 쥬다스가 어미의 옷자락을 잡고 말간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윤의 앞에는 현 황후, 즉 당시의 황비가 서 있었다. 이제 갓 걷기 시작하는 1황자를 힐끗 내려다본 황비가 고혹적으로 입매를 휘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자란 동쪽 나라에선 연금술을 사용한다지요.” “……!” “감히 고귀한 황손을 상대로 더러운 술수를 부리다니.” 황비는 고압적인 눈으로 다시 하윤을 쳐다보았다. 하얗게 질린 하윤이 아이를 안아 올리며 등을 돌렸다. “그런 게 아니요, 황비. 이만 돌아가 줘요.” “내가 모를 줄 아나요? 그 아인 완벽한 황족의 유전을 뽑아내기 위해 당신이 만들어냈을 뿐이잖아요?” “그만해요! 아이가 들어요. 차라리 밖에 나가서 따로 얘기합시다.” “흥. 어차피 실패작이잖아, 그 아인.” 실패작. 그 말에 하윤이 홱 돌아섰다. 분노로 하얗게 굳어진 면전에 대고 황비가 조소를 흘렸다. “부작용으로 말을 하지 못한다죠? 기껏 황조의 상징을 타고난 아이가 연금술로 만들어진 백치라니. 이 사실을 폐하께서 아시면 어찌 될까.” “……입 조심하세요, 황비.” 하윤이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며 답했다. “사실과 다릅니다. 난 연금술을 배운 자랑스러운 해동성국의 왕녀였고, 이를 인간에게 사용해선 안 된다는 사실도 배웠어요. 그러니 하늘에 맹세코 그 술법을 내 아이에게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 발뺌할 셈이죠?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팔락. 황비가 품에서 연금술의 진이 적힌 종이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사방에 흩뿌려지며 추락하는 종이에는 복잡한 연금진과 술법들이 해동의 언어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연금술이란 물질을 변환시키는 힘이다. 술사의 지식과 힘, 그리고 술법에 들어가는 재료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종의 유전을 변환시켜 순종에서 키메라를 만들거나, 반대로 혼혈에서 순종의 피를 만들어내는 것도 가능했다. 자신이 고국에서부터 가져온 자료가 그녀의 품에서 나온 걸 확인한 하윤이 안색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걸, 언제.” “내가 눈감아주길 바란다면.” 하윤은 떨리는 눈으로 상대가 내미는 약병을 바라보았다. “마셔요.” “…….” 설령 연금술을 아이에게 사용하지 않았더라도 이와 관련된 연구물이 존재하는 이상 의심을 피해갈 수 없을 터였다. 하윤은 야생 생태계보다 치열한 권력 경쟁에서 살아남기엔 아직 어렸고, 너무 순진하게 자라난 왕녀였다. 황실에서 순진은 곧 독이다. 그녀는 황비가 내민 덫에 걸려 정체 모를 약을 마셨다. 목적을 달성한 황비가 방을 떠났고, 하윤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정령왕 급이 아닌 자연계 4속 정령들(주로 하급)은 계약자 없이도 현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본체를 유지하고 있고, 간혹 필요에 따라 모습을 바꾸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 7장에선 주인공이 정체성을 찾으면서 조금씩 변한 모습을 보여드릴 것 같습니다. 여기엔 본래 '쥬다스'의 기억과 감정이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힘을 얻고 갑니다!ㅎ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1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우, 아.” “……아니야, 아가. 듣지 마. 듣지 말렴…….” 이미 황비는 떠났지만 하윤은 울먹이며 아이를 품에서 놓지 않았다. 스르륵. 이 장면을 빠짐없이 관찰한 이그레트의 앞에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흐느끼는 하윤과 멍하니 그녀에게 안겨 있는 어린 쥬다스를 바라보다 문을 열었다. 이번엔 그에게도 익숙한 장면이었다. 짝! 아이의 고개가 돌아갔다. 창백한 뺨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는다. 그걸로도 모자라 하윤은 손에 잡히는 대로 가구며 잡기를 쓰러뜨리고 집어던졌다. 고국에서부터 가지고 온 석조화병과 색을 입힌 자기 인형들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간 자주 있었던 일이었기에 어린 황자의 안위를 위하여 위험한 것들은 미리 치워놓았는데도 소용없었다. 아기 천사가 새겨진 시계가 바닥으로 추락했고, 유아용 받침대며 고급스럽게 깎아 만든 장식장이 엎어졌다. 아수라장이 된 방 안에서 아이는 폭력에 방치됐다. ‘……아니, 본인 의지가 아니야. 조종당하고 있다.’ 이그레트는 즉시 그녀의 이상을 알아챘다. 하윤은 마법에 걸려 있었다. 원인은 조금 전 지나온 방에서 마셨던 물약이었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인과에 따라 하윤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이를 폭행했다. 부서지고 깨진 방 안에서 그녀가 잠깐이나마 정신을 차린 건, 자기 아이의 목을 조르고 있는 스스로의 손을 봤을 때였다. “……!” 하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황급히 손을 거두었다. 목이 졸리던 아이는 반항 한 번 하지 않은 채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손자국이 난 아이의 볼에 떨리는 손끝을 가져다대던 하윤은 이내 왈칵 눈물을 쏟았다. “아…… 가.” 황비가 준 물약을 마신 이후로 그녀는 종종 정신을 놓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몽롱하게 흐려진 정신이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폭언이 이루어진 다음이었다. 뒤늦게 함정에 빠졌음을 알았지만 물릴 수도 없었다. ‘울어요? 왜?’ 어린 쥬다스가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이그레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가 나쁜 아이라서?’ ‘잘못했어요.’ ‘울지 마요.’ ‘엄마…….’ 그리고 아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충격을 견디다 못해 기절한 것이다.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일 뻔했음을 알게 된 하윤은 끔찍한 공포에 휩싸였다. ‘이대로는 안 돼, 이대로 가다간 내가…….’ 그녀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깨진 유리 조각을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결단은 빨랐다. 푹. 붉은 피가 흘렀다. 눈앞에서 펼쳐진 비극에 이그레트는 주먹을 콱 쥐었다. 그녀의 마지막은 소문대로 자결이 맞았다. 하지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모든 것이 뒤틀려 있었다. 그다음은 뻔한 수순이었다. 황비는 당시 7살이던 1황자에게 독이 든 차를 먹였다. 하지만 독의 효과는 즉시 나타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1황자는 눈에 띄지 않게 아주 천천히 건강을 잃어갔다. 본래부터 타고나길 유약하게 태어난 아이였으니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자주 열이 올랐고,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늘어났다. 서서히 몸에 퍼져 나간 독기는 몸의 성장을 완전히 멈추어버렸다. 10살이 되자 황자는 황명에 따라 루바흐에 보내졌고, 그사이 결국 독은 1황자의 육신을 모조리 장악했다. 조롱과 멸시 속에서 황자는 남은 생명력을 모두 소진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안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이그레트의 힘과 기억이 깨어났다. 쥬다스의 과거가 파도처럼 그의 머릿속에 범람했다. 그는 못 박힌 듯 선 채 휑한 방 안에 남아 있었다. 어미의 시신도 깨어져 나간 잡기와 가구들도 모조리 사라졌다. 어째서 1황자의 방이 황량하게 비어 있었는지 이젠 알 수 있었다. 남은 건 그와 방 한가운데 웅크리고 있는 어린 쥬다스뿐이었다. “그랬구나.” “…….” “그랬으이.” 이그레트는 서서히 아이에게 다가가 꿇어앉았다. “지금까지 혼자서 버티느라 얼마나 속상했누. 잘 견뎌왔다.” 죽어 있던 금안이 눈앞의 노인을 담았다. 아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손바닥이 그의 머리에 폭 얹어졌다. 빙긋. 그가 늘 짓던 것과 같은 미소가 아이의 입가에 지어졌다. 생기를 찾은 쥬다스의 금안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리고 아이는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래, 너는 즉.’ 이그레트는 꿈에서 깨어나며 비로소 깨달았다. “……나였구나.” 아이의 무의식은 곧 자신의 기억이었다. 서로 다른 자아였으나 같은 혼을 공유한 삶이다. 본래대로라면 ‘이그레트’의 자아는 깨어나지 못했어야 옳았다. 하지만 황실이 낳은 비극이 아이를 죽였으니 웅크리고 있던 전생의 자아가 대신 빈자리를 차지했다. 후웅. 그에게 감응한 정령의 힘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불안하게 일렁거리는 녹색 바람이 커튼을 펄럭였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응축된 자연에너지였지만 이도 잠시였다. 그는 가볍게 손을 저어 모든 힘을 흩어버렸다. 1황자의 몸에서 깨어난 지 약 두 달. 지금의 삶이 그의 영혼을 토대로 이루어진 두 번째 삶이었음을 온전히 인식하기까지의 기간이었다. * * * 그날 1황자는 좀 이상했다. 딱히 무언가 특별한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히려 지나치게 잠잠했다. 깊은 상념에 잠겨 멍하니 있거나 누가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 등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언제나 총명하고 매사에 태연자약했던 그였기에 그 태도 변화는 주변인들의 불안을 샀다. 루바흐를 나와 있는 상태지만 공부를 게을리할 수는 없어 챙겨온 교재를 함께 읽기 위해 모인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거…….” 바이칼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쥬다스가 들고 있는 책을 가리켰다. “아까부터 거꾸로 들고 계십니다만.” “……아.” 이를 본 전원 웃지도 울지도 못할 괴상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아’ 따위의 무감동한 대답으로 바이칼의 지적을 받아들인 쥬다스는 아예 책을 덮어 옆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죽 그를 주시하고 있던 에단도 덩달아 책을 덮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글쎄다. 있다 하면 있고 없다하면 없지.” “……?” 해괴한 대답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서로 아리송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또 한 가지의 이상 행동은 여기에 있었다. 오늘 그는 단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렇다고 찡그린 것도 아니었지만 넋 나간 사람처럼 구는 그 태도는 보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책을 놓은 김에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보자, 벌써 오늘이 마지막 날이로구나.” 황제가 명한 사흘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 날이 밝으면 그들은 다시 루바흐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에 모두가 안도했다. 황궁은 분명 호화롭고 편리한 생활이 가능했다. 귀족으로 살아온 아이들조차 진귀하다 여길 정도로 모든 것이 최상품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음식과 건물 구조, 하다못해 벽마다 걸려 있는 황실의 문장조차 황금과 백금을 섞어 조각한 장인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손님 자격으로 황궁에 머물러 있는 며칠간 아이들은 그 하루하루가 통 좌불안석이었다. 어릴 때부터 귀족으로 훈련받아 자라왔으며 루바흐라는 작은 귀족 사회에서 적응을 마친 그들은 눈치가 빨랐다. 애초에 황실의 부름을 받은 순간 알았다. 자신들이 따르고자 하는 어린 황자가 황실의 알력과 분쟁의 중심이 될 것이란 사실을. 그랬기에 곁을 지키고자 따라온 것이고 최대한 그가 피해를 입지 않도록 조력할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당초 결심했던 것과 달리 지배층의 자녀로 태어나긴 했으나 아직 그 권력을 손에 쥐지 못한 아이들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무력감과 박탈감으로 인해 입안이 썼다. 이는 달콤한 과자만 먹다가 처음 매운 맛을 접해 본 어린아이처럼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 매운 맛은 그들로 하여금 제 위치를 깨닫고 좀 더 성장하고자 하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나가시는 겁니까?” “여 앞에 산보를 가려던 참이란다.” “따르겠습니다.” 에단이 당연하다는 듯 황자를 따라 일어섰다. 한 박자 늦게나마 바이칼도 한숨을 쉬며 그 뒤를 쫓았고, 크리스티나와 아벨, 마르젠은 자리에 남았다. 황자가 자리를 떠나자 크리스티나는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으며 마르젠을 바라보았다. “……이거이거. 그렇게 강렬한 눈빛으로 보시면 부끄럽습니다?” “거두절미하고 확실히 하지, 그대.” “흐음.” 한기가 실린 시선을 받으면서도 마르젠의 표정에는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제게 할 말이 있음을 알았기에 일부러 황자를 따라나서지 않았다.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라도 이 대귀족 출신 아가씨의 관심을 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떤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오고 갈지 기대하는 그에게 크리스티나는 곧장 본론을 꺼내들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안 들어.” “……유감이군요.” “정확히는 네놈의 그 분수를 넘어선 야망이 짜증나.” “하하.” 독설을 듣고도 상처받기는커녕 유들유들 웃는 얼굴에 대고 크리스티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인맥을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겠지. 싫든 좋든 네 그 재능은 인정해. 단, 분수에 맞는 한에서.” 그간 관심이 없는 듯했지만 그녀 역시 대귀족의 일원이었다. 학원 내에서 움직이는 흐름 정도는 눈에 전부 담고 있었다. 그런 크리스티나에게 있어 마르젠의 노림수를 읽는 일쯤은 쉬웠다. 그녀는 마르젠이 1황자에게 접근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분을 이용해서 높은 자리에 오를 생각은 버리도록. 네가 함부로 오를 나무가 아니니까.” “크리스티…….” “이름으로 부르지 마.” 도도한 게 아주 털 세운 고양이가 따로 없다. 그리 생각한 마르젠은 난감함에 코끝을 찡그렸다. 학교 내에서는 가문명 대신 이름으로 부르는 게 교칙이고 그들은 학생인데 이름을 부르지 말라니. 그렇다고 가문명으로 부르는 것도 역시 달가워할 리 없었다. 한숨을 폭 내쉰 마르젠이 어깨를 들썩였다.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 “저는 전하를 이용할 생각 따윈 진즉에 버렸습니다. 솔직히 직접 뵙기 전까진 크리스…… 당신 말씀이 맞는데. 뵙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죠. 아니 뭐,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분을 이용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할지 자체가 의문이라고요. 전.” “…….” 크리스티나는 상대가 하는 말이 진심인가 싶어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럼 왜.” “왜 전하를 선택했냐고요? 하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르젠은 펜을 한 자루 집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간단히 손장난을 치자 펜은 빙그르르 제자리에서 돌았다. “보신 대로 저는 사람을 고를 때 머리를 쓰는 인간입니다. 소위 말해 약았죠. 그런 제가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조차 저버리게 만드는 분입니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면 쳐다도 보지 말아라? 에헤이, 아니죠.” 탁. 손가락으로 눌러 멈춰 세우자, 펜촉이 정확히 황자가 앉아 있던 빈자리를 가리켰다. “그 정도로 대단한 나무엔 매달려라도 봐야죠. 안 그렇습니까? 필요하다면 양분도 날라드리고, 잡초도 뽑아드리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이 나무를 키운 사람 중엔 내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되겠죠. 그거면 됩니다.” 그 말에 크리스티나의 차갑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더라도, 일단 의도를 알았으니 더 나무랄 건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마르젠이 한 말 중 한 가지를 정정했다. “선택은 우리가 하는 게 아니야.” “……?” 멈칫. 크리스티나가 고운 손을 뻗어 펜을 돌려세웠다. 촉과 대가 정반대로 돌려졌다. “너와 나는 전하께서 하시는 선택을 따른다. 그게 신하 아니던가?” 저 오만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복종을 말한다. 마르젠은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킥킥 웃었다. “…….” 그리고 그들 사이에 존재감 없이 끼어 있던 아벨만이 겁먹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정령이 있으면 길게 돌아갈 일도 이렇게 금방 해결되는군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92년만 모쏠로 사시면...! 쿨럭;; 아참, 그리고... 이그레트 1부가 생각보다 짧아질 계획입니다. 연재초반에 구상했던 폼에 조금(?) 변동이...ㅎ 1부가 <학원생활+정체성 찾기>가 주내용이었다면, 2부에서는 <졸업후+모험>이 주류가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잠깐씩 떡밥이 나온 해동이나 사방신이라든지, 물질계 정령 등 다양한 이야기가 포함됩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과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2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황궁은 넓었다. 갖가지 명목으로 지어진 궁만 해도 크고 작은 것을 합치자면 열 손가락에 또 열 손가락을 더해도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마차가 다니는 차로와 사람이 다니는 인도가 따로 구분지어 놓여 있었다. 인도에는 하얀 자갈을 깔아두었고 양옆으로 제국 국화(國花)인 황색 장미가 가득 피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치는 화원은 금으로 채워놓은 호수 같았다. 봄 햇살에 바삭하게 달궈진 장미향이 달았다. “생각해 보면 말이다.” 느린 걸음으로 앞장서던 쥬다스가 꽃밭 앞에 멈춰 섰다. “나는 스스로 좋은 것을 쫓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을 피해 덜 싫은 것을 택하며 살아왔지 무어냐.” 흰나비가 팔랑팔랑 날아와 근처의 장미에 내려앉았다. 쥬다스는 그에 시선을 주었다. 하물며 저 나비조차 수없이 늘어선 꽃 중에 마음에 드는 꽃을 찾아 꿀을 얻는다. “쟁반 위에 사탕이 종류 별로 있었다. 아무나 골라먹을 수 있는 사탕이었지. 나는 고르지 않았고 결국 마지막 남은 하나가 내 몫이 되었단다.” 욕심이 없다는 말은 즉 수동적이란 말과도 같았다. 스스로 골라본 적 없는 삶이었다. 주면 받고, 찌르면 찔렸으며, 썩 싫은 게 아니라면 모조리 수용했다. 그가 가진 힘은 구원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었으니, 남들보다 더 많은 걸 수용하는 게 옳다 여겼다. 섣불리 분노를 표출하여 모든 걸 잃느니 불합리를 수용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랬던 그가 유일하게 선택한 행동이 있다면 그건 바로 ‘포기’였다. 더 상처를 입느니 바라던 삶을 포기하는 편이 옳았다. 과거에 그는 그리 여겼다. 바이칼이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 그럼 전하께서 좋아하는 맛은 그중 어떤 것이었습니까?” “…….” 꼭 무언가를 좋아해야 하는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고 그 자신조차 관심 없던 욕심이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욕심이란 긍정과 부정의 속성을 모두 띠고 있는 인간 행동의 원동력이다. 쥬다스는 지금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결여되어 있던 일부가 살아나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그래도 지금 바이칼이 보기에 사탕 이야기를 하는 쥬다스는 제법 또래 아이 같았다. “그중엔 없었지만 박하사탕이란다. 향이 정말 좋더구나.” ‘……아니, 의외로 어르신 취향…….’ 바이칼은 어색하게 뒷목을 매만지며 조금 전의 감상을 취소했다. 쥬다스는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마찬가지로 이제 선택함에 있어 ‘덜 싫은 것’이 아닌 ‘좋은 것’을 고르고자 한단다. 빼앗긴 게 있다면 되찾아오고, 내 하고자 하는 일에 욕심을 낼 것이며.” 에단과 바이칼은 조용히 그 말을 경청했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피를 볼지도 모른다. 괜찮겠느냐.” 전에 없이 단호한 눈이었다. 황자는 각오를 정했다. 그리고 그 각오를 두 사람에게 솔직히 열어두고 마지막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그들은 단호한 일면 너머로 자신들을 소중히 여기는 따뜻함을 엿보았다. “예, 신(臣)은 전하께서 쓰실 검이 되고자 합니다.” 에단이 먼저 답했다. 그리고 뒤를 이어 명확히 뜻을 정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바이칼은 의외로 선뜻 동의를 표했다. “예, 뭐. 전 사실 정계에 크게 관심이 없긴 했습니다. 보통은 힘이 있어도 써야 할 데에 쓰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저도 귀족이지만 지배하는 자들은 추구하는 바가 좀 성질에 안 맞더라고요.” 아직 십 대 소년답게 개방된 사상이었다. 그는 연구를 할 때에도 혁명학파를 주로 추구하는 편이었다. 한때 프리드가 만든 학파에 가입하고자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사령술을 쓴다는 점만 가려놓고 본다면 그의 이론과 사상은 바이칼의 성향과 딱 일치했다. 그래서 학파의 수장이 사령술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바이칼은 크게 실망했다. “힘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앞으로 흘릴 피에 신경 쓰는 분은 처음 봤습니다. 전에 보여드린 과오를 용서해 주신다면 저 역시 전하를 따르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지금의 1황자는 일종의 정의였다. 힘을 가졌으나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으려 하며, 그렇다고 뻔히 목을 노리는 적을 봐주지만은 않는 단호함이 있었다. 또한 격 높은 자리에 걸맞은 품위가 있었으며 현명했다. 그로 인해 배운 점도 많았다. 바이칼은 한때 멸시하고 조롱했던 그 앞에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구나.” 쥬다스는 그들의 충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때 황제 직속 기사가 그들보다 조금 뒤에서 쥬다스의 뒤를 따르던 시종 로한에게 무언가를 전달했다. 로한이 살짝 표정을 굳히며 이를 제 주인에게로 다가가 전했다. “전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황제는 쥬다스를 황실 미술관으로 불렀다. 이번에는 독대를 하고자 함이었다. 입구까지 따라온 에단과 바이칼은 밖에서 자리를 지켰다. 그들을 뒤로하고 미술관으로 들어가자 푸른 수정을 섞어 마치 얼음 조각처럼 빛나는 복도가 보였다. 쥬다스는 천천히 이 복도 위로 걸어갔다. 건물 내부는 가히 장관이었다. 자연물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인공미가 흘렀다. 마법 전구로 밝힌 등불이며 색깔을 입힌 유리, 아름답게 깎아놓은 수정 기둥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신비롭게 돋웠다. 벽부터 천장까지 미술관 전체가 유리와 수정으로 조화롭게 지어져 있었으며 유리마다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형형색색의 빛깔이 들어 있었다. 또한 특수 제작된 이 유리는 관내에서는 밖이 투명하게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일방경이었다. 이곳에 전시된 모든 작품은 황족만 관람할 수 있었다. 쥬다스는 천천히 벽에 걸린 그림을 훑어보았다. ‘천사…… 인간…… 전쟁.’ 주로 신성과 인간을 접목시켜 그린 그림이 많았다. 전쟁이나 죽음처럼 어두운 측면에 천사와 빛줄기를 그려 넣어 희망을 새기고 신성을 부각시켰다. 수도에 교황청을 세우고 그 신성을 국교로 삼아 국력을 드높인 루바르잔 제국다운 작품들이었다. 모든 그림은 화가에 대한 단서 없이 제목과 그린 날짜만 적어 익명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주로 타락보다는 구원이, 전쟁은 승리로 이끌어내는 게 작품의 주제였다. 벌거벗은 인간이 어둠 속에서 빛이 가득한 하늘을 향해 간절히 손을 뻗고 있는 그림을 지나친 다음, 쥬다스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소재가 뱀이었다. 천사도 빛줄기도 없었다. 새빨간 혀를 날름이며 무덤을 에워싼 거대한 뱀이 죽은 자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하늘은 온통 새카만 먹물로 뒤덮였으며 무덤 뒤로는 일어난 시체들이 휑하게 빈 눈구멍을 드러내놓고 몰려드는 장면이었다. ‘사령술.’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알아본 쥬다스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독 이 그림만 이질적이었다.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화가명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앞에 멈춰 뚫어져라 그림을 응시하던 그의 귓가로 낮은 음성이 들려왔다. “동류로 가득한 무리에서 홀로 이질적인 것은 눈에 띄게 마련이지.” “……존귀하신 폐하를 뵙습니다.” 둘뿐인 자리였으니 ‘아버지’라 칭해도 좋았지만 쥬다스는 군신 간의 예를 갖추었다. 황제 역시 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마치 제국을 지배하는 믿음이 하늘에 닿아 있고, 생명이 죽음을 배척하듯. 무릇 살아 있는 자는 죽음의 권속을 두려워할지니.” “…….” “이 아름다운 작품들 중 제일 추악한 모습을 담은 화폭인데도 결국 이 앞에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는 황제의 말에 동의했다. 평화와 경외를 가져다주는 그림 사이에서 유독 홀로 죽음과 저주를 그린 저 그림은 홀로 거북했으며 그 거북함을 느끼는 한,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었다. 하나는 이를 무시하려 애쓰며 억지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떠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쥬다스 자신처럼 그 앞에 머물러 관찰하게 된다. 황제는 그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까마귀 떼에 섞인 백로든, 백로 떼에 섞여든 까마귀든 이형은 주목을 받게 되어 있다. 좋은 관심이든 나쁜 관심이든 만인의 시선이 그 뒤를 따르지.” 언뜻 감상과도 같았으나 그림 얘기가 아니었다. “너는 그중 어느 쪽이었겠느냐. 혹 둘 다였던가.” 달그락. 대답을 원하는 질문이 아니었으므로 황제는 곧장 그림 옆의 벽장으로 손을 뻗었다. 황실 미술관은 황족만이 관람하는 특별한 시설이었으므로 칸마다 벽장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귀한 와인과 잔이 들어 있었다. 원할 때면 언제든 꺼내 마실 수 있도록 시원한 온도로 보관되고 있는 와인은 흔히 볼 수 없는 고가의 품목이었다. 그는 잔도 두 개를 꺼내 들었다. “열두 살. 그래, 아쉽게도 술을 마실 나이는 아니군.” 두 잔의 와인을 따라놓고 쥬다스를 슥 내려다본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알면서도 두 잔을 따른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쥬다스를 향해 보란 듯 잔을 내려보였다. 우웅. 황제가 들고 있는 잔 하나가 갑작스럽게 빛에 휩싸였다. “……!” 쥬다스의 금안에 드물게 놀람이 깃들었다. ‘연금술?’ 물체가 가진 속성을 치환하고 추구하는 바를 이룬다. 연금술, 생모인 ‘하윤 리’의 나라에서 유일하게 사용하는 특이한 이능이었다. 요즘에야 제국의 속국으로 도움을 받고 있는 입장인지라 여러모로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해동 자체는 그리 개방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연금술의 경우 술법에 필요한 수식과 이론이 몹시 복잡하고 어려워 타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 활용 범위가 넓지 않다고 알려져 연구도 미진한 분야였다. 그런 이능을 하윤 리 본인도 아니고 황제가 익혔으리라곤 쥬다스도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잔을 받으라.” “……예.” 쥬다스는 놀라움을 속으로 감추며 황제가 건넨 잔을 받아 들었다. 들여다본 잔에는 와인 대신 따끈한 코코아가 들어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제는 와인을 머금고 한참 향을 음미했다. 그리고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하윤’은,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이었다.” 그 말이 내포하는 의미는 컸다. 쥬다스는 황제가 굳이 자신의 앞에서 보란 듯이 연금술을 시연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곤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음료는 따뜻했다. “그녀의 고국에선 인체에 술법을 사용하는 걸 금지시켰다. 그리고 하윤은 눈을 감는다 해도 그 가르침을 어기지 않을 만큼 순수한 여인이었지.” 그걸 그녀 몰래 멋대로 어긴 건 황제 본인이었다. 그리고 그 의지에 따라 1황자가 태어났다. 고결한 황조의 상징을 타고난 완벽한 황자였다. “이 황실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황제는 작정하고 아들을 부른 셈이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무리 죄를 지었고, 그 죗값을 이어받은 아들 앞이라 한들 제국을 다스리는 군주가 고개를 숙이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었다. “황실의 정식 치유술사도 그녀의 병을 짚어내지 못했다. 그 이유를 왜라 생각하느냐.” “…….” 쥬다스는 하윤이 먹은 물약을 떠올렸다. 황정 치유술사가 짚어내지 못한다면 그 약은 마법이나 지독한 독약이 아니었다는 뜻이 되었다. 그는 빠르게 모든 가능성을 떠올렸다 잠재웠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은 단 한 가지 가능성만이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황성을 다녀오는 길이다.’ ‘혈통이니 존엄이니 떠들어대며 썩은 내를 풀풀 풍겨 대는 쓰레기들이 가득한 곳이지.’ ‘마침 너에 대해서 재미있는 얘길 듣고 오는 길이거든.’ 일전에 만났던 프리드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는 분명 투르케 사막으로 오기 전 황궁에 들렀다고 했다. 그렇다면 프리드가 이곳에서 접촉한 인물이 바로. ‘황후.’ 쥬다스의 눈이 눈앞의 그림으로 향했다. 붉은 혀를 내밀고 있는 뱀이 시야 가득 보였다. “사령술…….” 아이가 중얼거리는 걸 본 황제는 와인잔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알아내라. 너를 지키고자 피를 흘린 네 어미의 한은 너만이 풀 수 있을 터.” 하윤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버려 둔 잔혹한 자리. 전부 알고 있었다. 황제는 알면서도 서열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다소 과정이 잔혹하더라도 그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우성 인자를 가려내고자 함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더 있는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진실이었다. “……그러면 제게.” 쥬다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후계의 인을 주십시오.” 황태자 자리를 달라는 말이었다. 동색의 눈이 서로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했다. 당돌하기까지 한 어린 황자의 요구에 포식자의 승인이 떨어졌다. “스스로 미끼가 될 셈이더냐. 좋다. 어디 한번 네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증명해 보라.” 1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이를 황후가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그 목을 베려함에 있어 서두르게 될 것이고, 뛰어난 이능을 가지고 있는 쥬다스를 확실히 빠르게 제거하기 위해선 황후 역시 숨겨둔 패를 꺼낼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포석도 없는 지금,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자 한다는 건 제 목숨을 담보로 적을 도발하겠다는 의지였다. 하고자 하는 대화를 마친 황제가 자리를 떠났지만 쥬다스는 여전히 뱀이 그려진 그림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결론 : 자아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영혼을 공유했으니 빙의보다는 환생이 맞습니다. 이 부분은 이그레트가 사기캐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전생+현생을 전부 자각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 굳건한 할아버님ㅎ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참, 노란손 님과 애쉬 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ㅠㅠ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아라 서버가 폭주해서 글이 안올라가네요ㅠㅠ; 이건 내일 올리라는 계시인가...!)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3 / 0240 ---------------------------------------------- 7장. Chicken Game(겁쟁이 게임) 내내 어깨 위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니가 그 대신 표정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와, 저 인간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게 분명해.」 「에에엥, 피가 없는 인간도 있다요?」 「그러니까 인간도 아니란 소리야.」 「……!?」 유니와 토니의 호들갑에 쥬다스는 쓰게 웃고 들고 있던 코코아를 홀짝 목으로 넘겼다. “……달구나.” 황제의 생각처럼 보통 열두 살 어린아이일 수 없는 그에게는, 지독하게 달았다. 단맛이 지나치면 오히려 쓰게 느껴지는 것처럼. * * * 그날 저녁, 루바르잔 황궁은 발칵 뒤집혔다. 황제가 황태자위에 올릴 후계자로 1황자를 언급한 탓이었다. 공식 발표는 아니었고 사석에서 이루어진 선언이었으나 그 파급력은 상당했다. 지배계층은 단순히 서로 견제하던 수준에서 급격히 그 흐름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순풍을 타고 항해하던 배가 급류를 만나 그 방향이 전혀 엉뚱한 쪽으로 꺾였다. 중립에 서 있던 귀족들이야 크게 반발하지 않고 황제의 뜻에 순종했다. 하지만 황후의 손에 매여 있는 귀족들은 바위처럼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이도저도 반응하지 않고 서로 음습한 시선을 교류했다. 1황자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란 소문은 다음 날 아침이 될 때 즈음에는 수도를 비롯해 그 인접 지역까지 퍼져 나갔다. 이를 접한 사람들은 크게 술렁였다. ‘1황자? 3황자 전하가 아니라?’ ‘1황자는 힘없는 도자기 인형 같은 존재가 아니었던가?’ 그간 침몰한 수준이 깊었던 만큼 당연히 소문에 더해 의문이 일었고, 한발 늦게 최근 1황자의 동향에 대한 소문이 추가적으로 따라붙었다. ‘사실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더라.’ 루바흐에서 보여준 뛰어난 성적과 그를 따르는 인재들에 대한 소문도 함께 돌고 있었다. 특히 그가 가진 이능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엄청난 것이었다. 자연계 3속성을 한꺼번에 다루는 정령술사. 마치 제국에서 별처럼 떠올라 지금은 종적을 감춘 대현자 이그레트가 아직도 위인으로 칭송받듯, 정령의 힘이란 늘 제국민들에게 경외를 안겨주었다. 그에 따라 무수한 시선이 1황자에게로 향했다. 거기엔 긍정과 부정이 뒤섞여 있었으나 수면 위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소식을 접하고 놀란 건 그를 따라온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에단과 바이칼은 그가 미리 각오를 언질한 바가 있어 비교적 침착했지만 나머지 셋은 상당히 놀라워했다. 그중 크리스티나는 쥬다스의 결단을 듣고 걱정스럽게 그 뒷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역시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게 틀림없어.’ 그녀가 알기로 본디 쥬다스는 먼저 나서는 편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도 아직 3황자와 맞붙기에는 일렀다. 3황자의 외척 세력인 캐슬롯 후작가를 중심으로 하여 지배 계층의 큰 축이 그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에 반해 1황자는 정식으로 따르는 세력이 아예 없다시피 했다. 에단이나 크리스티나가 아무리 공작가 자제라 한들 그들은 아직 아이였으므로 실질적인 권력층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황제의 이능을 물려받아 마법에 조예가 깊은 2황자가 기대를 받을 지경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좀 더 힘을 기르고 세력을 모을 때였다. 물론 예상보다 결단이 빨랐을 뿐이지 크리스티나는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는 자체는 당연하다 여겼다. 걱정되는 건 그 결단을 시기보다 앞당겨 이행하도록 쥬다스를 재촉한 정체 모를 사건들이었다. “하.” 크리스티나는 답답함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뱉었다. 그러다 돌아본 쥬다스와 허공에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한숨을 쉬던 입을 닫고 바라보자 황자는 평소처럼 빙그레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 역시 저 영민한 황자는 자신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뚫고 있다. 오히려 걱정에 빠져 있는 그들을 다독여 주는 부드러운 음성에 크리스티나는 조금 울컥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낼 만큼 어수룩한 소녀가 아니었다. 고양된 감정을 티내지 않으며 겉으로나마 냉철을 유지했다. 공식적인 태자 책봉식은 루바흐의 한 학기가 끝나는 7월로 잡혔다. 그때까지 이들은 루바흐로 돌아가 학업에 정진하게 된다. 1황자에게 짧게나마 내려진 준비 기간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교복을 차려입은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포탈로 향했다. 아들이 떠나는 날이었지만 황제는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만큼 바쁘기도 했지만 일일이 오고 가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면모이기도 했다. 장엄한 포탈 관리실에 도착한 일행은 그 앞에서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쥬다스가 대표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다른 아이들은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3황자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난 황후는 우아하게 눈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벌써 떠나는 겝니까, 황자? 좀 더 머문다면 좋았을 것을요.” 황제의 부인이 되기 전 이름은 ‘사야 캐슬롯’. 위명이 드높은 캐슬롯 후작가에서 외동딸로 태어나 극진한 관리를 받고 자란 황후는 제국에서 추구하는 전형적인 미인상이었다. 고고하고 선명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거니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그녀의 피부는 주름 하나 없이 매끈했으며 체형 역시 처녀처럼 늘씬했다. “우리 황자가 모처럼 학우들을 데려온 참인데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보내다니. 이 사람은 정말 아쉽습니다.” 그녀는 매우 안타까운 낯을 했다. 그리고 그 아쉬움은 진심이었다. 1황자가 황궁에 머무는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를 처리하는 시간이 단축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는 쥬다스가 황태자 자리에 오르기 전에 그를 제거하고자 했으므로 그 과정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루바흐처럼 관리가 철저하며 눈이 닿지 않는 장소에선 아무래도 손을 쓰기가 좀 더 복잡해진다. 그렇다 한들 황후가 가만히 손 놓고 있을 리는 없었다. 속내야 어찌 되었든 겉으로 만큼은 정녕 어린 황자의 출궁을 안타까워하는 황후의 낯빛이었으니 지켜보는 이들은 아무도 그 내막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루바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여섯 아이만 그 진실을 꿰뚫어 볼 뿐이었다. “하면, 책봉식 때 뵙겠습니다.” “그러지요, 황자.” 책봉식이란 말에 황후의 눈이 차게 굳었다. 하지만 웃는 입매만큼은 변하지 않고 부드럽게 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서 있던 3황자 세이지도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잘 다녀오세요.” 지난번의 그 표정 관리 실력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시선을 바닥에 떨군 채 건네는 형식적인 인사였다. 두 사람의 배웅 아닌 배웅을 뒤로하고 일행은 포탈에 올랐다. 굳이 쥬다스가 힘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황실 정식 정령술사가 포탈의 동력을 증폭시켜 주었다. 곧장 좌표를 루바흐 학원으로 잡은 그들은 검게 진동하는 포탈로 천천히 진입했다. 진입하기 직전 살짝 돌아본 쥬다스의 시야에 고혹적으로 웃고 있는 황후의 붉은 입술이 보였다. ‘……수 있으면.’ 그녀의 입 모양을 읽어낸 쥬다스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미련 없이 고개를 돌리고 포탈에 들어섰다. 콰우우우. 검은 마력이 그들을 삼키는 걸 보며 황후는 미소 짓고 있던 입꼬리를 서서히 내렸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면야 환영해 드리지요. 황자.’ “……그런데 어머니.” 황후는 자애로운 얼굴로 자신의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겨우 9살 난 아들은 또래보다 영특했으며 어미의 말을 잘 따르는 착실한 성향이었다. 세이지는 조금 우물쭈물하다 그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형님은…… 정말 ‘가짜’가 맞는 거지요?” “……세이지.” 황후는 사랑스러운 손길로 아이의 옷깃을 정돈해 주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한 겝니까. 내 늘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가요.” 자상한 어투와는 다르게 날이 선 눈빛을 마주본 세이지는 입을 핫 다물었다. 그의 어머니는 1황자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면서 결코 바깥에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당부했었다. 금기를 어긴 느낌에 죄책감이 밀려왔지만 세이지는 도저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금술로 만들어진 가짜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영혼이 없는 인형 주제에 화를 내기도 하는 거야?’ 혼란스러웠다. 빗속에서 우산도 쓰지 않고 가만 자신을 바라보던 1황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무덤덤해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화를 내는 듯하여 더 따질 수가 없었다. ‘하나 나는 죽지 않고 이리 살아 있지’. 그리 말하던 쥬다스는 영혼이 없는 인형 따위와는 분명 달랐다. 그걸 본 세이지는 처음으로 어미의 말에 의심을 품었다. “혹시 아니면 어떡하죠, 어머니?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요?” “…….” 아들의 의구심 어린 금안에 황후는 조용히 그 볼을 쓰다듬었다. “세이지……. 이 어미가 거짓을 고했다는 말인가요.” “그, 그 뜻이 아니라.” “혹 그가 가엾나요?” 가여웠다. 세이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애로운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자라온 세이지는 밝고 활달했으며 당연한 순리대로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강하게 가진 아이였다. 그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 1황자는 어미의 말대로 혐오스러운 황실의 수치기도 했지만 그 반대급부로 동정을 줄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욕심에 의해 태어나 제 생모의 손에 학대당하다 죽을 뻔했다. 자식을 죽이려던 모친은 자결해 버렸으며 이 세상에 그의 편이라곤 아무도 없다. 세이지는 자신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그를 동정했다. “게다가 그날 형님이…….” 울 것 같은 얼굴이었어요, 라고 말을 잇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여린 어깨에 금장식으로 손톱을 꾸민 황후의 손이 얹어졌다. 작은 어깨만큼이나 마음도 약하다. 이제 겨우 9살인 3황자는 아직 큰일을 이루기에 어렸다. ‘조금 더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잠깐의 침묵 후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이에 응답했다. “그날은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리 무턱대고 화부터 내는 상대를 가엾게 여길 수 있다니, 세이지는 마음이 참 넓군요. 과연 군주의 아들답습니다.” 어미의 칭찬에 세이지는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다독여 준 황후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음에 만나면 그의 허물과 무례를 전부 용서하기로 합시다. 그럼 마음이 편하겠어요?” “네! 어머니.” 3황자는 당차게 대답했고 황후는 물에 기름 뜨듯 가벼운 미소를 둥실둥실 걸쳤다. 이 황실에서 아이의 생각처럼 아름다운 결말이란 없다. 용서, 화합. 그게 가능한 건 어느 한 쪽이 죽어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때리라. * * * 한편 루바흐에는 1황자 일행이 자리를 비운 며칠 사이 특별한 손님이 하나 찾아와 있었다. 중년 특유의 중후함을 풍기는 인상의 사내였는데, 겉보기와 달리 이미 60대 후반의 고령이었다. 이능을 가진 자라면 본래 나이보다 젊어 보이거나 일반적인 수명에 비해 오래 살기도 했으니 아주 이상할 정도의 동안은 아니었다. 그는 루바흐로부터 교사 자격으로 초청받아 정식 임명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겨울바람의 정령 비비를 머리에 얹은 채 그에게 다가간 리베흐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누구?” “음?” 정령학 연구소의 입구에 선 채 멀거니 이를 구경하고 서 있던 남자가 천천히 무릎을 굽혀 리베흐 앞에 쭈그려 앉았다. “안녕, 꼬마야.” 낯을 가리는 7살 아이답게 리베흐는 움찔 한 걸음 물러섰다. “아, 내 이름은 코르토반 옌이라 한단다. 그냥 ‘콜’이라고도 하고.” “……콜?” “그래, 곧 여기 선생님이 될 게야.” 연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희끗한 흰머리가 엿보였다. 길고 가는 눈매와 한쪽 눈에 끼운 모노클이 지적인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차분한 코르토반의 분위기를 마주한 리베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닮았어.” “음?” “선배 오빠랑.” 희한한 호칭이었으나 남자는 리베흐가 뜻하는 게 루바흐 학원생임을 눈치채고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닮은 친구가 있나 보구나. 젊은 학생들과 비슷해 보인다니 이거 영광…….” “얼굴 말고.” “……으응?” 7살 소녀는 제법 신랄한 구석이 있었다. “느낌, 기운? 그런 거.” “호오.” 코르토반은 무릎을 두들기며 짧게 기른 수염을 매만졌다. 그가 보기에 이 어린 소녀에겐 정령술에 대해 굉장한 재능이 있었다. 그녀와 계약한 겨울바람의 정령만 해도 최상급의 존재였다. 주변을 맴도는 찬 기운을 느끼며 그는 작게 감탄했다. “그렇다면 그 친구도 정령술사인가 보구만.” 코르토반 옌, 자연계 최상급 정령 2속성과 계약한 듀얼 서머너. 그는 어릴 적 이그레트를 스승으로 따르길 자청했던 제자이며, 스승이 종적을 감추자 혼자서나마 열심히 그 재능을 발굴하여 나라 발전에 이바지한 유능한 인재 중 하나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지난 편에서 떡밥이 다 회수된 건 아닙니다. '쥬다스'의 과거가 드러났을 뿐 프리드나 정령들이 보인 수상함(..)은 좀 더 지나서 해소됩니다. (+본래 환생개념이 없는 세계관이 맞습니다. 대부분의 "보통" 인간은 환생을 하지 않습니다. 전부 과거에 관련된 일이라 전개상 그다지 중요한 장치는 아니지만 궁금해하시는 독자님께서 계셔서 덧붙여봅니다.ㅎㅎ) 황궁 에피소드는 이번 챕터 안에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무거운 부분 끝내고 얼른 애들끼리 뛰노는(...) 루바흐로 돌려보내고 싶네요.ㅠㅠ ...실은 제가 새드울렁증이 있어서...(?) 매번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한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4 / 0240 ---------------------------------------------- 8장. 허물벗기 무사히 루바흐로 돌아온 쥬다스 일행은 각자 여독을 풀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열흘 만에 다시 찾은 숙소는 주인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도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아침에 세탁하여 갈아놓은 하얀 이불 위에 앉자, 황궁에서보다 훨씬 안락한 느낌이 찾아왔다. 루바흐도 역시 하나의 작은 사회인 만큼 마냥 평화롭지는 않았다. 하지만 슬픈 추억으로 가득하던 황궁에 비하면 온실에 들어온 것처럼 주변 공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애초에 홀로 지내는 걸 더 선호했던 이그레트였으므로, 적어도 자신의 숙소에서 혼자 쉬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마음이 한결 편안했다. “이젠 제법 여기도 익숙해지는 모양이야.” 「……너한테 편하다면 우리도 좋아.」 어깨에서 내려온 유니가 하얀 이불 위에 포록 내려앉았다. 유니처럼 크기를 줄여 따라다니던 카니 역시 그 곁에 함께 내려앉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까 보니 아이들이 많던데, 여긴 무얼 하는 곳인가요?」 「학교다요!」 「……학교?」 카니는 사슴 같은 다홍색 눈망울을 깜빡이다 아, 하고 손바닥을 마주쳤다. 「‘집단 단일체제 교육소’ 말이죠?」 「……뜻은 얼추 맞는데 어감이 좀.」 「흐흥~ 아무렴 어때요. 아, 그럼 옛날처럼 선생님 역인가요?」 “허허, 학생이란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쥬다스를 보며 카니가 신기한 눈을 했다. 「이그레트에게 지식을 가르칠 수 있는 인간이 있단 말이에요?」 “으음, 카니. 이 세상에는 내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알지 않느냐. 또한 꼭 지식이 아니더라도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이 많단다.” 그가 ‘이그레트’였던 시절, 사람들 틈에서 떠난 게 약 60세를 전후해서였다. 변해가는 주변인들과 쓰디쓴 배신, 그리고 그의 이능을 이용하고자 하는 검은 손길에 지쳐 모든 걸 포기했던 때. 그즈음 제자가 되겠다며 쫄랑쫄랑 쫓아다니던 한 아이가 있긴 했다. 딱 지금의 쥬다스와 주변 아이들 정도 또래였던 그 소년은 정령술에도 꽤 큰 재능을 보였고 열의도 강한 편이었다. 이미 사람들 틈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이그레트는 제자를 거두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였다. 그것도 제법 영향력 큰 귀족 가문 출신이었던 아이였건만 계속되는 내침에도 굴하지 않고 그를 따르며 ‘스승님’이라고 불렀다. 종래엔 한 고집하던 이그레트도 묵인할 지경까지 따라다녔으니 참 굉장한 집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동료였던 자들로부터 배신의 칼날이 꽂혔을 때 이 모든 걸 지켜본 것도 그 아이였다. 아이는 하늘이 무너진 듯 울었고 펑펑 우는 낯을 달래줄 체력과 마음이 전부 남아 있지 않았던 이그레트는 피가 흐르는 상처를 품은 채 그대로 종적을 감추었다. ‘돌이켜 생각하니 나는 진실로 부족한 인간이었구나.’ 한 번 죽고 나서야 자신이 보지 못했던 관계가 보였다. 제 상처 돌보기 급급하여 다른 이 가슴에 난 상처를 미처 살피지 못했다. 본래 남의 베인 상처보다 자기 새끼손가락에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지만, 그는 그간 유독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고작해야 우물 안 개구리였던 셈이야.” 이제와 좀 더 넓은 세상이 보였다. 모든 기억을 통틀어 10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온 그였으나 결국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쥬다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너무도 부끄러웠다. 문득 유니가 제 무릎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난 네가 계속 우물 안에 있는 것도 좋은데.」 “…….” 「아, 아니, 그냥. 지금은 왠지 우리만의 이그레트란 기분이 들어서. 근데 네가 이 우물에서 나가고 나면…….」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은 약간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으음, 그러면 뭔가 허무하달까? 아, 허전! 허전할 것 같아. 왜냐면 우린 너라는 맹목적인 우물에서 나가지 않을 테니까.」 유니의 말에 다른 정령들도 모두 동조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연을 아우르며 계약자의 소망을 듣는 정령이란 그 섭리가 인간의 생과는 달랐다. 타인을 이해할 필요도 없고 타인의 잣대에 신경 쓸 이유도 없다. 그저, 지금까지의 이그레트가 그래 왔듯 흘러야 할 때 흐르고 멈춰야 할 때 멈출 뿐이었다. 아마도 정령들이 그라는 한 존재에 머물렀던 건 강렬한 동질감에 의한 이끌림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만일 그가 그 동질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나간다 해도 이를 막거나 거부할 필요는 없었다. 그들은 이미 반해 있었으니 그가 어떻게 변하든 그 변화에 맞추어 움직이면 되었다. 다만 아주 조금. 「유니, 서운한 거다요?」 「……어……? 그런가? 조금은 그런 걸지도.」 아무리 평소에 투닥거렸던 사이라지만 같은 정령끼리라 그런지 토니는 유니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냈다. 시무룩한 바람의 정령왕을 빤히 쳐다보던 토니는 짧은 팔로 팔짱을 끼며 엣헴 헛기침을 했다. 「그거 ‘빈 둥지 증후군’이다요. 다 키운 새끼가 둥지를 떠나면 남은 어미 새가 느끼는 허전함을 그렇게 부른다고 했다요!」 「빈 둥지…….」 멍하니 토니의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유니는 부드러운 눈으로 자신들이 하는 얘기를 가만 듣고 있는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따뜻함이 깃든 금안은 변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유니는 풋 웃음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리곤 샐쭉하니 토니를 향해 눈을 흘겼다. 「……나도 알거든? 것보다 토니 주제에 뭘 그렇게 똑똑하게 떠들고 있어?」 「에엥, 땅 무시하지 마라요! 바람만큼은 아니어도 알 건 다 안다요!」 「웃겨 정말. 지 나이도 못 세는 게.」 「……!」 인간들의 기준으로는 나이를 못 세는 것이 사실이었기에 말문이 막힌 토니가 어벙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쥬다스는 이내 빼앵 터진 토니와 깔깔거리는 유니, 말똥말똥 지켜보던 카니를 양손에 받쳐 안아들었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엎드려 있던 루니 앞에 꿇어앉았다. 푸른 늑대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 유리알 같은 눈동자에 가까이 이마를 가져다댄 그는 천천히 눈을 감고 미소 지었다. “고맙다. 늘 곁에 있어준 너희에게 말도 못하게 고마워. 그리고 이런 나를 필요로 해주어서, 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보듬어 주어서. 지금 내게 소원이 있다면.” 「…….」 상처투성이였던 새끼 백로에게 어느덧 하늘을 날 수 있는 깨끗한 깃이 돋았다. 그리고 커다랗고 깨끗한 날개를 펼쳐 자신을 돌보아준 작은 정령들을 다시금 덮어준다. 자연계를 다스리는 4원소 정령왕들은 이날 동시에 생각했다. “언제까지나 너희와 친구로 남을 수 있기를.” 「우린-」 결코 이 아름다운 영혼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라고. * * * 쥬다스는 황궁에서 돌아온 다음 날부터 정상적으로 수업에 출석했다. 그가 황태자 자리에 오를 것이란 소문은 이미 루바흐에도 퍼져 있었기에 대부분의 학생은 이제 그를 어려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잘 보이려 애를 쓰긴 했지만 이제 함부로 잘못 보였다가는 오히려 아무 짓도 안 하느니만 못할 거라 여기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게다가 학생들은 모두 과거 그를 조롱하거나 혹은 이를 방관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더욱 안면몰수하고 꼬리를 흔들기 어려웠다. 그 바람에 똥마려운 개처럼 주변을 서성일 뿐 더 이상 막무가내로 몰려들지 못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쥬다스는 편안하게 수업을 들었다. 몸이 건강해지니 봉술 수업에서도 그간 열심히 머릿속에 익혀둔 성과를 톡톡히 보였다. 그간 속으로만 수도 없이 시뮬레이션해본 동작이 실제로 재현이 가능해지니 완벽한 자세로 수업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타고난 무인으로서 밥 먹는 것보다 무술 훈련을 더 근접한 일상으로 여겨온 에단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를 상대로 그럴듯한 합을 맞출 수 있다는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문과 과목뿐 아니라 무예과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1황자는 이제 더 이상 못난 백로가 아니었다. “음…….” 그런 그가 난처하게 턱을 짚도록 만든 곳이 있었다. “왜? 요?” 리베흐가 연분홍 곱슬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이 정령학 연구소가 루바흐에서의 모든 일과를 훌륭하게 수행해 낸 쥬다스에게 복병을 안겨준 유일한 장소였다. 쥬다스는 난처한 눈으로 정령술의 자질을 가진 아이들 틈에서 허허로이 웃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콜.” “어? 오빠도 알아요?” 물론 그가 기억하는 코르토반은 저렇게 흰머리가 나고 모노클을 낀 중후한 중년의 생김새가 아니었다. 당시 코르토반은 흰머리는커녕 주름살 하나 없던 십 대 소년이었다. 싹싹한 성격에 제자를 받지 않는 자신을 따라다니며 ‘스승님’이라 부르던 당돌한 아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며 쥬다스는 기묘한 감회에 젖었다. 반갑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으며 또한 대견스럽기도 했다. 그 옛날에 콜에게서 느꼈던 정령의 기운은 무척 강한 것이었으니 당연히 최상급 정령까지는 계약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다른 도움 없이 불과 바람을 동시에 최상의 힘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열정과 노력이 뒷받침되었다는 뜻이었다. 정령술은 자질에 따라 그 능력치가 크게 달라지지만 이를 끌어 올리는 건 술사의 바람과 노력에 있었다. 어릴 적부터 끈질긴 구석이 있던 코르토반이 결국 불과 바람을 다루는 정상급 술사로 우뚝 자리매김한 걸 두 눈으로 보게 된 쥬다스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저 아이도 내게 버림받았다고 느꼈을까.’ 그가 등을 찔려 쏟은 피와 어찌할 바 모르고 펑펑 울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 자리에서 등을 돌렸던 자신을 떠올리며 속으로나마 사죄했다. 그리고 똘망똘망 올려다보는 리베흐에게 마주 시선을 주었다. 과거 연이 있다 한들 지금은 아는 척하기도 뭐한 입장인지라 감회를 뒤로하고 이를 얼버무렸다. “……예전에 이름을 들어본 적 있단다.” “응, 네. 유명한 사람. 이사벨 선생님이 그랬어요.” 그 정도 능력이면 당연히 이름이 알려졌을 것이란 짐작대로 콜은 제국 내에서 이름난 정령술사였다. 본래 황실 정식 정령술사로 소임을 다하던 그는 이제 나이가 들어 험한 일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루바흐의 교사로 업무를 바꾸었다. 마침 실체화하지 않고 자연 상태로 있던 정령들은 일제히 앗 하는 반응을 했다. 「익숙한데, 저 기운.」 「……예전에 봤던 꼬마로군.」 루니가 콧등을 찡긋거리며 콜의 기운을 읽었다. 당시 콜의 끈질김은 이그레트 외의 인간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주지 않는 정령들이 알아볼 정도였다. 정령들이 묘한 눈길로 주시하는 사이 콜도 쥬다스를 발견했다. ‘……저 아이는?’ 마력을 몸에 쌓거나 훈련된 움직임에서부터 알아볼 수 있는 여타 이능과 다르게 정령술은 술사 본인이 숨기고자 하면 얼마든지 그 경지를 숨길 수 있었다. 다만 자질만큼은 감추기가 어려웠는데 최상급 정령을 2속성이나 계약한 콜은 특히 이에 대한 눈썰미가 좋았다. 한눈에 쥬다스가 가진 강대한 정령친화력을 알아본 콜이 조금 감탄하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쥬다스가 황태자자리를 택함으로써 황후에게 선빵을 날렸습니다.(?) 이쯤에서 중간점검, 지금까지 나온 악역으로만 치면 최대 악역은 누굴까요?ㅎ 1. 프리드 2. 황후 3. 점쟁이할머니(?) ....저는 3...농담입니다. 쿨럭(...) 참, 이그레트1부는 카카오 기다리면무료에 등록된다고 합니다.ㅎ 저도 출판사 선생님께 전달받는 내용인지라 나머지 일정은 잘 모르겠고... 어... 따로 확정되는 부분이 있으면 종종 추가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뜻하고도 차가운 역설적인(?)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5 / 0240 ---------------------------------------------- 8장. 허물벗기 “반갑습니다. 오늘부로 ‘정령 실습’수업을 맡아 학생 여러분과 함께할 교사 코르토반 옌입니다.” “콜 선생님.” 리베흐가 그를 가리키며 짤막하게 덧붙였다. 7살 소녀를 향해 호탕하게 웃어준 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기억해 주었구나, 꼬마 아가씨. 그 말대로, 간단히 콜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직 10살이 되지 않은 리베흐는 정식으로 입학한 학생이 아니었으므로 학생 대 교사 신분이 성립되지 않았다. 다만 희귀한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뛰어났기에 학교 측에서 일찍부터 지원해 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학생들 중 가장 꼬마인 게 사실이었기에 리베흐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꼬마 취급을 받아들였다. 자리를 비운 사이 약간이나마 친해져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본 쥬다스는 살짝 목례하며 답했다. “예, 스승님. 쥬다스입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을 대하는 것과 한때 잘 알았던 사람을 모르는 척 대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살면서 처음 겪는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쥬다스는 일단 현 상황에 맞는 태도로 태연하게 상대했다. 사실상 스승이 제자를 스승이라 부르는 황당한 광경이 벌어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건 한 사람과 정령 넷뿐이었다. “예, 예에.” 루바흐에서 본래 신분 고하를 떠나 학생이 교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쥬다스의 목례를 받은 콜은 저도 모르게 당황하며 함께 고개를 숙였다. ‘……뭐지? 이거 뭔가 굉장히 불편한데. 황자 전하이셔서 그런가?’ 거의 본능처럼 불편을 느낀 콜의 속내에 혼란이 일었다. 황실 정식 정령술사로 일했던 그였기에 황족을 만남에 있어 크게 부담을 가질 리 없었다. 그러니 굳이 황자라는 존재를 앞에 두고 떨리거나 두려워할 이유도 전무했다. 아리송한 시선으로 황자를 내려다보았으나 딱히 짚이는 점은 없었다. 오히려 따뜻함을 담고 부드럽게 빛나는 금안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하게 해줄 뿐이었다. 그들은 마주본 채 허허롭게 웃었다. 곁에서 비비를 머리에 얹은 채 둘을 번갈아본 리베흐는 강한 정령의 기운뿐 아니라 그들이 닮아 있는 점을 한 가지 더 찾아냈다. 하지만 그 공통점을 단어로 정의하기는 무척 애매했다. “……분위기? 뭘까?” 갸우뚱. 겨울바람의 정령 역시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쥬다스를 마지막으로 모든 학생과 인사를 나눈 콜은 이사벨이 가르치는 이론 수업과 별개로 실습에 관련된 수업을 간단히 진행했다. 수업이라고 칭해지긴 했으나 P/N(Pass or Non pass)으로 학점이 인정되는 출석형 과목이었다. 이미 학기의 반이 지나간 상황에서 추가된 수업이니만큼 정식 교과목과는 차이가 있었다. 어찌 보면 정령술이란 이능을 지닌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추가 학점이자 배움의 기회를 늘려주는 특혜이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특수 과목 중에 P/N수업이 추가되는 경우는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학생들은 놀라기보단 기쁘게 추가 수업을 받아들였다. 더구나 실습 과목은 무예과로 따지자면 훈련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상위의 술사가 안전성을 책임지고 힘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기 때문에 어린 학생들이 실력을 늘리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본래 이론 수업 교사였던 이사벨이 보조로 참여했고 연구원 자격으로 함께 머물고 있는 아벨 역시 실습 과정에 참여했다. “자, 학생 여러분. 정령을 다루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술사의 정신력입니다. 이 정신력을 요구하는 활동이 또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까?” “배고플 때 음식을 앞에 두고 참는 것?” 한 학생의 발언을 시작으로 너도 나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정신력이 높으면 졸릴 때 참고 버틸 수 있습니다!” “세계 역사서를 3시간 이상 읽는 거요.” “복잡한 행동을 한 번에 해야 할 때?” 아직 십 대 아이들다운 순진한 발상이었다. 콜은 부드럽게 웃으며 모노클을 한 번 문질러 닦았다. “여러분은 지금 정신력에 대한 개념이 너무 광범위합니다. 물론 일상에서 필요한 정신력도 있겠지만 우리가 정령술을 익힐 때 사용하는 정신력이란 좀 더 전문적이고, 때론 파괴적일 수도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부드러운 어투였지만 내용만큼은 단호했다. 아직 정령이 품고 있는 무궁무진한 힘에 대해 체감하지 못했을 어린 학생들을 위해 콜은 다소 과격한 수업 방식을 택했다. “이제부터 ‘세미-던전(Semi-Dungeon)’을 오픈할 겁니다. 세미 던전 안은 전부 마법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 던전은 각자 한 사람씩 활동구역이 주어지는 1인용입니다. 이 던전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던전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 상자를 찾아 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콜이 품 안에서 작은 박스를 꺼내들었다. 사면이 검게 물든 손바닥만 한 박스였다. “죽어서 나오는 방법이 있지요. 마법으로 꾸며진 환상이라지만 죽는 과정은 꽤 사실적이니 일부러 죽어서 나올 생각은 마시길 바랍니다.” “…….” 처음 겪어보는 수업 방식에 학생들은 불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안심하라는 뜻에서 빙긋 웃어준 콜은 들고 있던 박스를 허공에 붕 띄웠다. 휘이잉. 최상급 바람의 힘이 주변을 감돌았다. 박스는 세미 던전을 저장해 둔 마법 도구였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시동어에 따라 컨트롤할 수 있으므로 간단히 활용 가능했다. “스위치 온.” 콜이 시동어를 읊자 박스에서 하얀 빛이 확 솟구쳐 나오더니, 이내 커다란 문을 하나 형성해 냈다. 그는 그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 문고리를 잡아 열었다. 마치 포탈 내부처럼 마력이 요동치고 있었다. 포탈과 다른 점이라면 마력의 색깔이 흰색이라는 점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위험하다거나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으면 제가 개입하겠습니다. 실제 정신력 향상 훈련에 쓰이는 던전이니 불안해하실 필요는 없지만 진지하게 임해 주십시오.” 쥬다스는 예전에 이미 저 세미 던전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무서울 법한 구조였지만 어차피 실제가 아닌 환상. 그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강제 정령 실체화.’ 던전에 입장하는 순간 술사와 계약한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실체화한 채 따라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쥬다스는 자연체로 그 곁에 머물고 있던 네 정령을 슬쩍 돌아보았다. 멀뚱멀뚱. “…….” 「왜애?」 가뜩이나 최근 프리드와의 일을 겪었던 그로서는 이들을 정령계로 돌려보내는 자체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고 있는 4속 정령을 한 차례 빤히 응시한 그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어쩔 수 없나.’ 어차피 다른 학생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아니라 각자 다른 공간에서 움직이는 1인용 던전이었다. 교사가 직접 던전에 개입하지 않는 이상에야 굳이 걸릴 일도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빠른 시간 내에 보물 상자를 찾아 빠져나오기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의 고민을 모르는 콜은 다들 겁에 질려 표정이 굳었다고만 여기고 따뜻한 음성으로 그들을 격려했다. “자자, 막상 해보면 그리 무서운 체험은 아닐 겁니다. 한 사람씩 세미 던전에 입장해 주십시오.” 아이들은 주춤거리며 하얀색 던전입구로 다가갔다. 그러나 누구도 먼저 그 안에 발을 디딜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가장 용감하게 먼저 입장을 원하는 소녀가 있었다. “으음, 꼬마 아가씨는 다음 기회에.” “…….” 리베흐였다. 하지만 아무리 안전하게 설계된 마법 도구라고 해도 이제 겨우 7살 된 소녀를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콜의 제지에 불만스럽게 그를 올려다본 리베흐는 그 곁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순순히 뜻을 따라주는 소녀의 연분홍색 머리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어준 콜이 다시 학생들을 쳐다보았다. 자신들보다 어린 소녀가 먼저 나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아이들은 하나둘 용기 내어 던전 입구에 들어섰다. 하얀 문 너머로 발을 디디자 신기루처럼 학생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대신 허공에 떠있는 박스 위로 숫자가 생겨났다. <8> 던전에 입장한 총원을 표기하는 숫자였다. 아직 어린 리베흐를 제외하고 전원이 세미 던전에 입장했음을 확인한 콜은 팔짱을 낀 채 흥미롭게 박스를 응시했다. “……자, 그럼 제국 최고라는 루바흐 학생들의 정신력을 기대해 보십시다.” “어머, 부임 첫날부터 세미 던전이라니. 짓궂으시네요.” 본래 정령술 수업을 홀로 맡고 있던 이사벨이 호호 웃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아이들 걱정은 하지 않는 겝니까?” “콜 선생님이 위험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그랬지만. 정신력이 낮은 친구들은 다소 충격적일 수도…….” 이사벨은 땅의 정령 휴를 품에 안은 채 생글생글 웃었다. “실례예요, 콜 선생님. 우리 아이들은 그 정도로 나약하지 않답니다.” 오랜 시간 정령술에 자질을 품은 학생들을 돌보아 온 그녀답게 확실한 믿음이었다. * * * 하얀 마력에 휩싸여 세미 던전에 입장한 쥬다스는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제국 마법 연구팀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도구 중 하나인 만큼 박스 안의 던전은 상당히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하얀색 타일을 이어붙인 벽이 한 방향으로 쭉 이어졌다. 등잔이 필요 없을 정도로 벽의 타일이 자체 발광하고 있었으므로 앞길은 환했다. 「어우,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마법 공간은 너무 불편해.」 「빨리 나가고 싶다요.」 「으응. 전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니까요.」 투덜거리는 정령들의 말처럼 이 던전 안에서 자연물이라곤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다. 바닥은 벽과 같이 그저 매끈하고 단단한 타일로 구성되어 있었고 하늘을 볼 수 없도록 천장도 막혀 있었다. 자연물이 존재하지 않는 만큼 자연계 정령들이 사용할 수 있는 힘은 평소 수준보다 떨어졌다. 물론 그가 다루는 4속 정령은 전부 정령왕이라는 특수 개체였기에 힘 사용에 크게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지만 전원 불쾌를 느끼고 있었다. 쥬다스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앞으로 나아갔다. 세미 던전이란, 즉 일반적인 던전과 달리 구조가 단순하여 트랩이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강력한 몬스터가 등장하지 않는다. 콜이 설명했던 대로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보물 상자를 찾기만 하면 빠져나올 수 있는 쉬운 던전이었다. 쉬이익. 건조한 공기를 가르고 날아오는 창살을 발견한 유니가 가볍게 돌풍을 일으켜 궤도를 꺾었다. 창살은 바닥에 수직으로 콰직 꽂혔다. 쥬다스는 꽂힌 창살과 앞을 가로막은 상대의 외형을 확인하고는 그 정체를 바로 맞췄다. ‘만티코어.’ 날아와 박힌 것은 창살이 아니라 놈의 꼬리뼈였다. 목 주변으로 풍성하게 자란 흰 갈기며 사자를 닮은 몸통에 툭 튀어나온 주둥이는 영락없는 짐승이었지만 평범한 동물들과는 분명 달랐다. 이 만티코어는 일반적인 짐승이 아닌 높은 공격성과 흉포한 성질을 가진 몬스터 중 하나였다. 길게 늘어뜨린 꼬리 끝에는 가시처럼 돋아난 꼬리뼈가 줄기줄기 자라났다. 마치 투창을 하듯 꼬리뼈를 뽑아 순식간에 날리는 원거리 공격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정신력 훈련을 위한 박스에 들어 있을 만한 내용이 아닐 터인데.” 쥬다스는 긴장 대신 의아함을 느끼고 만티코어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들어온 세미 던전은 전투 능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었다. 정신력 향상을 목표로 만들어진 박스 안에 만티코어 정도로 공격성이 높은 몬스터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은 무언가 이상했다. ‘일반적으로는 기껏해야 쟈칼이나 블랙베어 정도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꼬꼬마였던 제자가 늙어서 돌아왔고, 늙은 스승님이 꼬마가 되어서 돌아왔...응?(..) 아, 그보다 지난 화 악역투표는 제가 1등했습니다.ㅎ ...감사합니다... 그럼 앞으로 더욱 충실한 흑막이 되어보겠습니다! (결심) 오늘 날씨가 무척 추웠지요. 내일은 더 춥다고 하네요ㄷㄷ 독자님들 모두 건강 잘 챙기시고,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ㅎ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6 / 0240 ---------------------------------------------- 8장. 허물벗기 그러나 만티코어는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놈의 공격은 꼬리뼈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만이 다가 아니었다. 2중으로 자라나 주둥이 밖으로 튀어나온 이빨이며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가 전부 갖춰진 몬스터가 만티코어다. “흠.” 이를 본 쥬다스는 가뿐히 손을 들어 올렸다. 화륵. “케에엑!” 몬스터를 중심으로 화염이 치솟아 흡사 감옥처럼 불벽이 형성되었다. 불벽에 부딪혀 후끈한 화상과 함께 바닥에 나뒹군 만티코어는 벌떡 일어나 다시 돌격했다. 쿵! 쿠웅! 사자만한 몸집이 불벽을 뚫기 위해 돌격을 하니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냥 불길도 아니고 정령왕의 힘이 작용한 불벽이 단순 박치기만으로 뚫릴 리는 없었다. 나방처럼 불을 뚫으려 달려들던 만티코어는 결국 온몸이 시뻘겋게 그을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만티코어를 내버려 둔 채 쥬다스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상일 뿐이라지만 굳이 그 안에서 몸부림을 치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면 해를 입지 않아도 될 ‘불의 감옥’이었다. 결국 제 목숨을 제 스스로 갉아먹은 격이다. 만티코어를 지나고 나자 오르막길이 나왔다. 빙글빙글 이어지는 원형계단을 밟고 오르자 파닥거리는 날갯소리와 함께 하나둘씩 깃털이 떨어져 내렸다. 파삭. 깃털이 내려앉은 부분은 마치 덜 익은 달걀노른자처럼 녹아 흐물흐물 흘렀다. 맹독으로 이루어진 독 깃털이었다. 바람의 보호를 받는 쥬다스에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자칫 끔찍한 상황으로 이어질 법한 장치였다. 「아무리 봐도 여기, 단순히 훈련용은 아닌 것 같아.」 「응, 내가 보기에도 영 아니네요.」 유니와 카니가 중얼거리기 무섭게 다음 상황이 일어났다. 삐이익― 경보음이 울리며 트랩이 발동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당황했을 일이지만 쥬다스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물의 힘을 사용했다. 무섭게 파도치며 차오르던 워터트랩이 잠잠히 그 기세를 가라앉혔다. 층계 밑까지 차올라 찰랑이는 물결을 힐끗 내려다본 그는 이어 계단을 오르며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아무래도 던전 난이도가 ‘자동’에 맞춰져 있는 모양이구나.” 「‘자동’?」 “던전에 입장한 자의 능력에 따라 박스가 자동으로 난이도를 조절하는 게지. 하나 이 자동 모드는 측정 오류에 따른 밸런스 붕괴가 일어나기 쉬워. 이를테면…….” 일반적으로 박스를 사용할 때에는 지정한 난이도가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도록 미리 맞춰 놓는 편이었다. 하지만 콜이 맡은 수업에는 어린 학생들이 대상이라 일괄 ‘자동’에 맡긴 것이다. 박스는 쥬다스가 가지고 있는 힘을 대략적으로 측정해 냈고, 그 수치가 완벽하진 않더라도 던전 난이도를 최고 수준으로 잡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그 결과. 「우와앙! 엄청 바글바글하다요. 저게 다 뭐다요?」 「……응, 새 떼네.」 계단을 다 오르기가 무섭게 아까부터 깃털을 떨어뜨리던 조류들이 그를 발견하고 퍼더덕 날아들었다. 문제는 한두 마리 수준이 아니라 머리 위에 그림자가 질 정도로 거대한 무리를 짓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온 조류들의 생김새는 단순히 새의 형상이 아니었다. 마법 연구팀에서 정식 기재한 이름은 ‘하르피아’. 날개와 하반신은 독수리의 것을 닮았지만 상반신은 인간 여성으로, 얼핏 보기에 천사와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그들의 날개 깃털에는 닿으면 곧장 녹아버리는 맹독이 스며있었고 손에 든 날카로운 창을 휘둘러 침입자를 공격했다. 쥬다스는 개미 떼처럼 몰려든 조류형 몬스터들을 향해 이번엔 땅의 기운을 발동시켰다. 쿠웅. 허공을 점령했던 새들이 아무것도 못해 보고 바닥에 콰득 추락해 버린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추락했다. 순식간에 수십 마리의 하르피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옴짝달싹 못하게 되어버렸다. 눈에 보이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지금 그들의 몸통 위로는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제아무리 날개가 있어봤자 철가루가 자석에 붙듯 땅이 끌어당기는 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쥬다스는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우수수 추락해 ‘끼익’거리는 하르피아 떼를 가뿐히 지나쳤다. 이어지는 길은 상당히 길었다. 그 앞으로도 특이한 몬스터나 트랩이 튀어나와 그를 공격했으며 대부분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날 수 있었지만 던전을 나가기 위한 열쇠인 보물 상자가 도통 보이질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시간이 꽤 흘렀음을 감지한 쥬다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이대로라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데.’ 여기서 더 시간을 끌면 곤란했다. 그의 짐작대로 이미 다른 7명의 학생은 미션을 클리어하고 전원 밖으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만약 너무 오래 나오지 않는 황자를 염려한 콜이 박스 안으로 들어와 4속성 정령들이 실체화한 모습을 발견한다면 그건 그거대로 큰일이었다. 코르토반 옌은 제자를 받지 않으려던 이그레트에게 막무가내로 찾아와 받아줄 때까지 따라다닌 소년이었다. 당시에도 정령들은 지금처럼 그의 곁을 딱 붙어 지키고 있었고 콜은 그 모습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그러니 4속 정령의 생김새를 아주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었고, 다시 마주한다면 분명히 기억해 낼 수 있을 터였다. ‘환생’이라는 특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은 둘째 치고, 제자를 내버려 두고 말없이 떠났던 지난날의 과오가 남아 있어 그가 알아본다면 어찌 해야 할지가 제일 관건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주변 관계를 다루는 법에 미숙했다. 특히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상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드르륵. 2속성 이상 정령 동조술을 사용해야지만 열리는 문이 거칠게 진동하며 입을 벌렸다. 「어머나.」 「직접 본 건 짱짱 오랜만이다요!」 「……끙, 인간 마법사가 만든 홀로그램일 뿐이니까 직접 본다고 하긴 좀 뭐하긴 해도…….」 「…….」 그곳에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얀색 공간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공간의 상단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그들을 맞이하고 있는 존재는 실제 인간 역사상 기록된 지 수백 년이 넘게 지나가는 전설적인 생물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으음, 아까 얘기한 ‘자동’ 난이도의 장점이자 단점이지. 측정 결과에 따라 저런 상대도 나올 수도 있는 거란다.” 마치 왕좌에 앉아 있듯 던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평안히 웅크리고 있던 존재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루비처럼 붉은색으로 빛나는 비늘이 번뜩였다. 긴 목을 들어 올려 침입자를 확인한 상대가 훅 숨결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철 같은 단단한 비늘로 뒤덮인 네 개의 날개가 구김살 없이 동시에 쫙 펼쳐졌다. 수백 년 전 인간 역사서에서조차 그 기록이 끊긴 전설의 종족, 레드 드래곤이었다. ‘어차피 훈련용 박스에 저장된 환상 중 하나. 겉보기는 그럴듯하지만 그리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지는 못했을 터.’ 쥬다스는 침착하게 상대의 역량을 가늠했다. 진짜 드래곤이라면 눈이 마주친 순간 졸도하거나 무릎이라도 꿇었어야 정상이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은 그 정도 사실감까지는 재현하지 못했다. 드래곤은 물리력, 마법력, 지능 및 모든 것을 통틀어 지상 최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더불어 드래곤만이 가진 특별한 이능이 있어 절대로 인간이 이길 수 없는 존재기도 했다. 쿠아아. 산만한 몸을 일으킨 레드 드래곤이 순식간에 마력을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떠다니던 마력이 모여 거대한 운석을 십여 개 형성해 냈다. 시전부터 발동까지 가장 오래 걸리며 소모되는 마력도 어마어마하여 대규모 전쟁이 아니라면 구경하기도 힘들다는 광범위 살상 마법, ‘메테오 스트라이크’였다. 이글거리며 나타난 운석들은 그대로 괘씸한 침입자를 처단하듯 일제히 내리꽂혔다. 콰가가각. 텅 빈 공간에 쏟아져 내린 운석이 바닥과 충돌하며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하지만 폭발하지 않고 그대로 바닥에 꽂혔을 뿐이었다. 잠깐 사이 냉기를 담은 바람과 물의 힘이 작용한 탓이었다. 마법이 다루는 힘과 자연 원소는 그 성질이 조금 달랐다. 겉보기엔 똑같이 불이나 물을 사용한다 해도 마법의 발원지는 자연이 아니라 마력이다. 그래서 마법이 만들어낸 현상을 정령술로 파할 수는 없었다. 대신 그 효과를 절감시키거나 여파를 차단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전부 엇나가게 내려앉은 운석 사이에 가만 서 있던 쥬다스가 반격을 시작했다. 드래곤의 방어력을 어느 정도 흉내라도 냈다면 단순한 공격 가지고는 레드 드래곤의 비늘에 흠집도 낼 수 없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였기에 수준에 맞추어 4속 정령의 힘을 전부 끌어냈다. 마법이 일으키는 파괴력과 정령의 힘이 맞부딪혀 허공에서 몇 차례 큰 폭발을 일으켰다. 아무리 큰 마법이 발동되어도 전부 속수무책으로 가로막혔다. 침입자가 쉬이 쓰러지지 않자 마침내 드래곤은 크게 포효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고오오오. 허공으로 날아오른 레드 드래곤의 주둥이 앞으로 마법과는 다른 뜨거운 열기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체내에 내장되어 있는 열에너지, 즉 ‘용의 숨결’. 브레스였다. “……확실히 던전 자체는 훈련용이구나.” 브레스를 눈치챈 쥬다스는 조금 다른 의미로 황당함을 느끼고 퍼뜨려놓은 정령의 힘을 불러들였다. 저 브레스는 분명 드래곤만이 사용할 수 있는 강력한 이능이며 직격할 경우 작은 나라 하나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4속 정령왕의 힘을 다루는 강한 상대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체내에서 끌어 올린 브레스를 쓰는 순간만큼은 드래곤의 모든 방어력이 감소된다. 콰아아아! 그리고 브레스를 뿜은 지금, 역습을 가하기 가장 좋은 타이밍이 갖추어졌다. 녹색 바람에 휩싸여 훌쩍 드래곤의 뒤편으로 이동한 쥬다스는 얼음과 금속이 뒤섞인 거대한 창을 허공에 형성해 냈다. 콰직! 두 정령왕의 힘이 실린 창은 붉은 비늘을 관통하여 드래곤의 심장을 터뜨렸다. 실제로는 이 정도로 쓰러지지 않겠지만 훈련용으로 만들어진 홀로그램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쓰러진 레드 드래곤의 사체 위로 반짝이는 보물 상자가 둥실 떠올랐다. 쥬다스는 사뿐히 드래곤의 등 위에 내려서서 그 보물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애초에 드래곤은 이거처럼 던전에나 등장하는 저급한 몬스터가 아니라구. 세상에서 처음 마법이란 걸 발견해 낸 게 쟤들인데 오죽 똑똑하고 강했겠어. 지금은 전부 용계로 이사 갔지만.」 유니가 레드 드래곤의 주변을 빙글 날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게다가 용언을 못 쓴다는 게 제일 빵꾸지, 뭐. 드래곤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용언 때문이거든. 그게 없는 이상 쟨 그냥 독 없는 전갈이자 이빨 빠진 사자랄까.」 「으응, 바퀴 빠진 마차일까요?」 「변기 없는 화장실!」 「……그만해, 니들.」 저들끼리 신나 조잘거리고 있는 정령들을 보며 작게 미소 지은 쥬다스가 보물 상자를 막 열려던 찰나였다. “……박스에서 ‘드래곤’이 매칭되었다니?” 경악에 물든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게다가…… 그 정령들은.” “…….” 콜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늘 그렇듯 오늘은 불금입니다...ㅎ 오탈자나 비문, 막장전개가 보이신다면 살포시 알려주시면 됩니다.(...) 뭔가 후기에 쓸 말이 되게 많았던 것 같은데.. 한참 달렸더니 싹 잊어버렸네요. 하하... 늘 과분한 사랑 주시는 독자님들 정말 감사합니다. 연참이라도 해드리고 싶은데 요즘 유독 시간이 없네요 ㅠㅠ 끄어어ㅓ 아참, 지난 편에서 '검은 마력'이라 서술된 부분은 원래 포탈 내부 에너지가 검게 요동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ㅎ 어... 혹시 다른 질문 있으신 독자님이 계시다면 @표시를 붙이고 질문해주시면 기억해두었다가 답변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에너지(?)와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매번 힘을 얻고 있습니다.ㅎ 당근과 채찍은 늘 좋은 원동력이 됩니다...흐흐.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7 / 0240 ---------------------------------------------- 8장. 허물벗기 루바흐 학생 중에서 자연계 3속 정령을 다루며 정령술사로서의 자질이 제일 뛰어나다고 알려진 1황자에 대해서는 콜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데다 묘하게 기시감을 불러일으키는 바람에 좀 더 주시하기로 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훈련용 박스의 난이도 조절을 ‘자동’에 맞추어 두었다. 마법을 통해 스캔되는 능력은 그 자질까지 완벽히 간파해 낼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파악에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하에 이루어진 실습이었다. 다른 7명의 학생은 모두 제 수준에 맞게끔 하급이나 중급 난이도의 던전을 클리어했다. 하지만 최단 시간에 던전을 빠져나올 거라 기대했던 쥬다스의 경우 이상할 정도로 그 시간이 늦어졌다. 결국 의아함을 느낀 콜이 관리자 권한을 통해 박스 안으로 진입했고, 그 안에 펼쳐진 것은 상상도 못한 장관이었다. 설령 최상급 정령 2속성과 계약한 콜이 직접 이 박스 안에서 훈련을 받는다 할지라도 보스몬스터로 ‘드래곤’이 매칭될 일은 없었다. 기껏해야 웨어울프거나 높게 잡혀도 발로그 정도일 것이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훈련용 박스에서 드래곤과 매칭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드래곤은 그저 최고 단계를 암시하기 위해 마법사들이 입력하기는 했지만 능력치를 완성시키지 못한 미시공 홀로그램이었다. 그 레드 드래곤의 사체를 딛고 서 있는 1황자를 발견한 콜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자연계 4원소 정령왕……. 그들은 분명. 저, 전부 만나 뵌 적 있습니다.” 「어머, 꼬마도 우릴 알아보나 봐.」 유니가 까르르 웃으며 콜의 곁으로 날아갔다.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을 눈앞에서 마주한 콜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금안과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그렇다면, 당신은……?” “으음. 하는 수 없구나.” 후웅. 부드러운 바람에 휘감겨 지상으로 탁 착지한 쥬다스가 미안한 얼굴로 다시금 자신을 소개했다. “믿기진 않겠지만 네게 이야기를 해주어야 옳겠지.” “예, 예?” “나는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이 나라의 황자임과 동시에 전생의 기억과 힘을 이어받은 내 또 다른 진명은.” “……?” “이그레트(Egret)란다.” 콜은 전직 황실 정식 정령술사이자 루바흐의 영예로운 교사로서의 품위도 잊고 그만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훈련용 박스에서 나타난 레드 드래곤, 심지어 그를 처치한 1황자.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 그리고 그들의 익숙한 외형. 굳이 쥬다스의 친절한 소개가 아니더라도 이미 모든 정황이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스, 스…… 스…….” 콜은 입술을 달싹이다 주책없이 바닥에 털썩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스승님―?!” “원 녀석, 목청도 크구나.” 기억 속 스승의 얼굴과는 달랐지만, 그 부드러운 빛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수십 년도 전에 잃어버린 스승과 꼭 같은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쥬다스를 향해 콜은 멍한 시선을 줄 뿐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밖에서 나누기로 한 두 사람은 일단 박스 밖으로 빠져나왔다. 콜은 완전히 넋이 나간 얼굴로 수업 종료를 알려 학생들을 해산시켰다. 아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겠다며 허허롭게 웃던 콜 본인이 더욱 창백하게 질려 있자 같은 정령학 교사인 이사벨이 의아하게 물어왔다. “왜 그러세요, 콜 선생님?” “……예?” “낯빛이 좋지 않으셔요. 어디 아프신가요?” 아픈 건 아니었지만 무어라 설명하기 힘든 쇼크 상태였다. 콜이 할 말을 고르지 못해 눈꺼풀만 바르르 떨자 나갈 채비를 하던 쥬다스도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프십니까? 스승님.” “……!” 이번엔 아예 안색이 새파래졌다. 콜은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켜곤 손을 내저었다. “스, 스…… 아니…… 예? 아니, 아프긴 무얼요. 저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콜은 척 보기에도 좋지 않아 보이는 몰골로 허둥지둥 연구소를 떠났다. 실습 수업에 상당히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하늘에는 깜깜한 어둠이 내려 있었다. 대신 루바흐 교정을 밝히는 마법 가로등이 은은하게 길을 밝혀주었다. 수십 년 전 스승과 제자였던 두 사람이 다시 사제지간으로 만나 교정을 걸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둘의 역할이 거꾸로 뒤바뀌었다는 부분이다. 시간이 늦어 돌아다니는 학생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된 루바흐에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 대신 낙낙한 고요가 자리했다. 초여름에 접어든 푸근한 밤공기 사이로 풀벌레 소리가 찌륵찌륵 퍼졌다. “험…….” 콜은 작게 헛기침하여 고요를 깨뜨렸다. “저, 정말.” “…….” “정녕 스승님이 맞으십니까?” 떨리는 물음에 가만 쳐다보는 얼굴은 12살 소년이었다. 하지만 몰라서 물은 게 아닌 만큼 콜은 그 느긋한 표정에서 옛 스승의 잔재를 읽어내고 알아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보고, 듣고, 이리 눈앞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미안하다.” “……!” 콜은 가느다란 눈을 최대한 번쩍 뜨고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알던 스승이라면 결코 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사과였다. 이그레트는 언제나 자애롭고 현명했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나 공평했으며 자신이 세운 기준에 있어 완고한 면모가 있었다. 좋게 말하면 원칙적이었고 나쁘게 보자면 융통성이 없었다. 자애와 공평은 모순적일 정도로 극과 극의 성향을 품는다.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 있어 공평이란 곧 잔인함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당시의 스승을 떠올린 콜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많이 원망했더냐.” 그 말에 콜은 우뚝 자리에 멈추어 섰다. 앞서지도 뒤서지도 않은 채 곁을 따라 걷던 쥬다스가 그가 멈춘 것을 보고 똑같이 걸음을 세웠다. 마주한 맑은 금안은 기억했던 것보다, 한층 인간의 온기가 느껴지는 눈이었다. “나는 그때 너희로부터 도망쳤다.” 도망쳤던 과거의 연을 앞에 두고 쥬다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어떤 이유를 가져다 놓아도 이것만큼은 사실이야. 나는 너희를 버렸다.” 상처받아 울던 어린아이는 이제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늘며 서서히 늙어가고 있었다. 노년기에 들어선 콜은 울지도 웃지도 않은 채 쥬다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 번 도망가고 나니 다시 너희를 볼 용기가 나질 않더구나. 그대로 끝인 줄로만 믿었다. 숨이 다한 끝 날까지 내 옳다 여긴 신념대로 떠나 살았지. 그게 잘못이었다는 걸 새로운 생에서야 깨달았으니. 얼마든지 질타하여도 좋단다.” “아닙니다, 스승님.” 그 순간 콜이 고개를 저었다. “스승님의 삶에 막무가내로 끼어든 건 저 자신이었습니다. 어찌 감히 질타를 한단 말입니까? 따지고 보면 스승님을 도망가게 만든 원흉이 바로 저희였던 게지요.” 콜은 오른쪽 눈에 끼고 있던 모노클을 접어 품에 갈무리했다. 그러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눈으로 은은하게 웃었다. “……평생 다시 뵙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단 한 번도 떠난 스승을 욕한 적 없었다. 오히려 남겨진 제자로 인해 욕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제자라는 명칭으로는 이그레트가 짊어지고 있던 무게 중 반의반만큼도 등에 이지 못했지만 그마저도 버겁고 힘이 들어 한탄이 흘러나왔다. 왜 자신은 그토록 어렸는가. 왜 스승이 완벽하다고 믿었는가. 살아보니 스승도 인간이었다. 찌르면 피가 나고, 아프면 울 수도 있는. “제가 죄송합니다. 스승님, 죄…….” 살랑. 뺨을 스치고 지나간 온풍에 콜의 입이 다물어졌다. 어린 시절, 스승을 경외하고 반드시 따르고자 마음먹게 했던 장면이 다시금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바람과 불의 최상급 자질을 가진 그의 눈에 무수히 많은 정령이 들어왔다. 평소에는 계약한 정령이 아니라면 보이지 않았던 자연체 정령들까지 전부 쥬다스를 중심으로 포로록 날아다니고 있는 게 보였다. 어린 소년 소녀의 모습으로, 혹은 작은 나비의 모습으로, 온순한 동물의 모습을 한 정령들까지 다양했다. 자연체의 정령은 아무리 정령술사라 해도 눈으로 볼 수 없다. 하지만 4속 정령왕과 계약한 이그레트의 경우 원한다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마치 정령과 술사를 이어주는 친화력이 증폭이라도 되듯이. 콜은 나이 먹어 거칠어진 손을 허공에 내밀었다. 붉은 나비가 그 손끝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고맙구나.” “스…… 승님.” 키 차이가 나서 차마 머리를 쓰다듬을 수 없게 된 쥬다스가 콜의 팔뚝을 힘 있게 두드려 주었다. 나이를 먹었어도 제자는 제자일 뿐이었다. 어린 황자의 토닥거림에 그는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손끝에 앉아 있던 나비 모습의 정령이 훌쩍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자리에서 콜은 간단히 쥬다스가 놓인 상황을 전해 듣고 돌아갔다.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다 나누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콜의 입장에서 궁금한 점이야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딱히 급할 건 없으니 자세한 건 조금씩 천천히 듣기로 했다. 나이가 들면서 느긋해진 성격이 이러한 여유에 도움이 되었다. 한편 정령학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된 아벨은 드디어 자신의 정령을 정식으로 소환하여 계약해 내는 일에 성공했다. 술사의 바람에 따라 모습을 맞추어 나타나는 정령의 특성상 거울정령은 아벨의 생김새를 상당 부분 복제해서 나타났다. 다만 아벨과 아주 쌍둥이처럼 똑같은 건 아니었다. “어씨……! 뭐야, 그거!” 점심 식사를 함께 하러 나왔다가 예기치 않게 거울정령을 마주한 바이칼이 기겁하여 소리쳤다. 하마터면 욕설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쥬다스가 함께 있어 가까스로 조절해 낸 필사의 외침이었다. “왜, 왜 그러시는.” “왜긴 왜야?! 너 인마 그…….” 바이칼이 꺼림칙하게 말끝을 흐리자 아벨이 기쁜 어조로 답했다. “제, 제 정령인 투르키…… 입니다.” 「―니다.」 정령의 이름은 고향 투르케 사막에서 따온 ‘투르키’였다. 쑥스럽게 제 정령을 소개하는 아벨을 따라 정령이 웅얼거렸다. 다른 정령들과 다르게 인체를 구성해 낸 투르키가 하는 말은 술사가 아닌 사람들도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누가 이름을 물어봤냐. 그 눈에 띄는 생김새는 대체 뭔데.” 바이칼이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질색하며 물었다. 투르키는 아벨의 잿빛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복제해 낸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색깔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는 닮았지만 성별이 다른 만큼 얼굴형이나 체형 등은 차이가 분명했다. 둘은 꼭 친남매처럼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굳이 나누자면 정령인 투르키 쪽이 여동생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닮은 건 외형뿐이 아니었다. 투르키는 서툴게나마 아벨이 하는 말을 따라하려 했고 감정 표현도 고스란히 복사해 냈다. 아벨이 웃으면 따라 웃었고 시무룩해지면 함께 풀이 죽었다. 속성이 물질계 ‘거울’이라 그런지 다른 정령들을 뛰어넘는 굉장한 동화율이었다. “그, 그렇게 눈에 띄나요……?” 「―나요?」 마치 사람처럼 고개마저 갸우뚱하며 말끝을 따라하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보며 바이칼은 소름이 돋은 팔뚝을 벅벅 문질렀다. “어. 매우, 무척, 과하게.” “……멀쩡한 이능에 핀잔주기보단 격려를 해볼 생각은 없나.” 달그락. 학식을 받아와 한 테이블에 착석한 에단이 바이칼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다함께 황궁을 다녀온 이후로 종종 시간이 맞는 멤버끼리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어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박스'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아공간입니다. 환상을 보여주는 정신적인 공간으로, 클리어조건을 만족하는 외에 죽거나 큰 충격을 받으면 환상이 깨지며 밖으로 퉁겨나오는 구조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ㅎ 음... 저는 사실 오늘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아서 연재펑크낼 뻔(...)했는데 다행히 어찌어찌 시간 내로 맞춰서 왔네요. ㅠㅠ 계속 이 상태라면 내일은 쉬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ㅠㅠ.. 점점 추워지는 계절, 독자님들께서도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럼 내일이나 모레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메세지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ㅎ (+ Yunlynn 님께서 서평을 작성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ㅠㅠ)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68 / 0240 ---------------------------------------------- 8장. 허물벗기 오늘 점심을 함께 먹는 인원은 쥬다스와 아벨, 바이칼, 그리고 에단까지 넷이었다. 에단 역시 다시 만나게 된 거울정령이 껄끄럽기는 매한가지였으나 어디까지나 기분상의 문제였다. 효율과 관계 측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쥬다스가 직접 거두어 재능을 키워주고 있는 아벨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에단은 호의적인 편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을 뒤로 미루고 주군의 뜻에 관점을 맞추는 철저한 모습에 바이칼은 질렸다는 듯 포크를 입에 물었다. “예에~ 뭐, 격려 좋죠.” “……실천은.” “그럼 에단 님이 격려하는 시범을 좀 보여주시죠. 저는 그날 이후로 거울 알레르기가 생겨서.” 잿빛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내린 투르키가 바이칼과 에단을 멍하니 번갈아보다 아벨을 향해 물었다. 「격려?」 “투, 투르키. 그건 그러니까……. 힘을 내란 뜻에서 하는 으, 응원 같은 건데…….” 「응원?」 “기운을 북돋는…….” 「북돋는?」 어버버 말을 더듬던 아벨이 도와달란 눈빛으로 에단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에단은 강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격려했다. “……꾸준히 훈련하다 보면 사람다워질 거다.” 이를 본 바이칼은 생각했다. 아, 이 양반도 진짜 더럽게 요령 없네. 점심 식사를 마친 학생들은 저마다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각자 신청한 과목이 다르기도 하고, 아벨은 이제 학생이 아니었기에 연구소로 돌아갈 차례였다. 쥬다스는 에단과 함께 체육관으로 향했다. 오늘 봉술 수업은 늘 하던 페어 대련이 아니었다. 지금껏 일대일로 대련을 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짝과 같은 팀을 이루어 교사팀을 상대로 2:2전에 돌입했다. 본래 봉술 교사를 맡고 있던 메이란과 보조 교사로 불려온 그녀의 여동생 수란이 교사팀이 되었다. 학생들은 콜로세움처럼 둥글게 자체 관람석을 만들고 앉아 흥미롭게 제 차례를 기다렸다. 2:2 팀전이라는 새 형식을 구성한 메이란은 경쟁 유도를 위해 실기 가산점을 상품으로 걸어두었다. 교사팀을 상대로 승리한다면야 물론이고 채점 기준으로 보았을 때 가장 훌륭한 성과를 낸 상위 세 팀을 꼽아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조건이었다. 물론 이제 기본기와 방어를 익힌 학생들이 봉술 전문 무예가로 이름을 날린 두 자매를 그냥 이길 수 있을 리는 없었다. 그래서 교사팀에게는 ‘자리에서 한 발짝 넘게 이동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이 붙었다. 단 한 발자국, 교사 둘이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이었다. 움직임이 고정된다면 아직 배움이 짧은 학생들이라도 도전해 볼 만했다. 학생들은 에단과 페어인 쥬다스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입학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모든 무예과 수업에서 최고점을 찍고 있는 에단이라면 수월히 가산점을 받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의 불만을 잠재울 조항이 하나 더 덧붙었다. <2:2는 팀워크를 중심으로 채점함. 같은 팀원이 봉을 놓치거나 쓰러질 경우 그 팀은 자동으로 대련 종료.> 어느 하나가 압도적으로 뛰어나봤자 팀플레이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생각보다 까다로워지는 가산점 쟁탈전에 학생들은 안도함과 동시에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에단뿐 아니라 모든 학생이 팀전에 익숙하지 않았다. 짝이 제대로 못할 걱정보다는 스스로가 걸림돌이 될까 걱정하는 아이도 많았다. 팀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자기 자신의 능력과 한계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했으며 또한 평소 짝과 얼마만큼 정확히 합을 맞춰 보았느냐가 이번 2:2전의 관건 중 하나였다. 가산점이 걸려 있는 만큼 대련에 임하는 학생들, 지켜보는 학생들 할 것 없이 모두 정규 시험과 맞먹을 정도로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자, 시작.” 메이란이 씨익 웃으며 봉을 세워 바닥을 텅 찍었다. 체육관에 울려 퍼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첫 도전자들이 교사팀을 향해 달려들었다. 메이란과 수란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들을 향해 첫 팀은 각자 찢어져 맞붙었다. 각자 한 명씩 상대할 셈이었으나 확연한 실력 차 탓에 효과를 보지 못했다. 두 학생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사팀과의 대련에서 패배했다. “여러분. 오늘 보려는 건 팀워크라니까, 팀워크.” 명심하라며 찡긋 웃는 교사를 보고 학생들은 잠시 술렁였다. 그리고 두 번째 팀이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찢어져서 싸우는 게 아니라 동시에 한 명을 노렸다. 표적은 수란이었다.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카리스마를 보여 온 메이란보다는 보조로 불려온 동생 쪽이 그나마 수월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이루어진 판단이다. 의논을 마친 두 학생은 신중하게 수란의 틈을 노리며 정자세를 취했다. 어차피 한 발짝밖에 움직이지 못하는 교사팀은 선공을 할 수 없다. 공격 타이밍을 먼저 잡을 수 있다는 건 학생들에게 굉장한 이득이었다. 게다가 이번 팀은 에단만큼은 아니어도 두 학생 다 무예과에서 인정받고 있는 실력파들이었다. 수업 중 배운 동작을 충실히 재현해 낸 그들은 교사팀을 상대로도 안정된 합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들이 둘이다시피 교사팀 역시도 두 사람이었다. 수란을 2:1로 집중 공격하려던 작전은 금방 수포로 돌아갔다. 등을 맞대고 섰던 메이란이 틈틈이 지원을 해왔던 것이다. 한 발짝이라도 축이 되는 발을 놓고 빙글 돌리면 정반대로 설 수 있게 된다. 교사 자매는 필요한 순간마다 서로 위치를 바꾸어 학생들을 상대했고 기가 막히게 동작을 연계했다. 마치 한 사람을 상대하듯 자연스러운 팀워크였다. 지켜보던 학생들은 일제히 감탄했다. 지금껏 일대일 구도에서만 다루던 ‘봉술’이란 무예가 색다르게 보인 것이다. 검보다 훨씬 길고 무거운 봉을 가지고도 오히려 더욱 빠르고 유연한 연계가 가능했다. 봉은 하나의 지형물로도 이용 가능한 무구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팀도 역시 쉽게 패배했다. 속수무책으로 밀린 두 팀을 보고 나니 이제 누구도 섣불리 도전하려하지 않았다. 메이란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주변을 빙글 둘러보았다. “뭐야, 여러분. 더 없어? 설마 여기서 끝은 아니겠지?” 침묵이 내려앉은 학생들 사이로 누군가 당당히 손을 들고 일어섰다. “도전하겠습니다.” 세 번째 도전 팀을 발견한 메이란이 손을 까딱여 들어오란 신호를 보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에단과 쥬다스 페어였다. 스승을 향해 가볍게 목례를 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봉을 쥐었다. 사실 이 둘도 팀전에는 생소했다. 검술을 연마하며 개인 실력만 갈고 닦은 에단도 에단이었지만 워낙 강한 힘을 손에 쥐고 있어 딱히 협력이란 개념이 필요하지 않았던 전생을 살아온 쥬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교사팀에게 예를 차린 둘은 시작하기 전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잘 부탁한단다.” 이 2:2 팀전에서는 혼자 잘나서야 의미가 없었다. 대신 각자 잘난 부분을 활용할 필요는 있었다. 쇄액. 선공은 에단의 몫이었다. 찌르기 형식으로 파고든 에단의 공격을 가볍게 탁 밀어낸 메이란이 빙글 몸을 돌려 수란과 자리를 교대했다. 기다렸다는 듯 빈자리를 메워 봉을 휘둘러오는 수란의 공격에도 에단은 꿈쩍 않고 봉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 그 사이에 끼어든 건 쥬다스였다. 무기를 다루는 힘 자체는 약했지만 빠른 판단력과 봉에 대한 이해력이 예상치 못한 속공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었다. 탁. 에단이 바닥에 꽂다시피 한 봉을 지지대 삼아 붙들고 빠르게 방향을 전환한 쥬다스가 수란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깡 하며 쇠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체육관을 울렸다. 수란은 루바흐의 정식 교사는 아니었지만 오히려 언니인 메이란에 비해 방어 측면에서 솜씨가 더욱 탁월했다. 빠른 속공에도 당황하지 않고 봉을 한 바퀴 돌려 막아낸 수란의 악력은 쥬다스가 버틸 만한 강도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뒤로 퉁겨난 봉을 그대로 손에서 놓았다. 대신 떨어지기 전 에단이 탁 이를 잡아챘다. 동시에 망설임 없이 각자 들고 있던 자기 봉을 놓음으로 인해 두 사람의 무기가 바뀌었다. 봉을 떨어뜨리면 패배로 간주하는 규칙이었지만 지금처럼 서로의 무기를 교환해 든다면야 상관없었다. 이를 본 메이란은 속으로 감탄했다. ‘오, 제법.’ 방금 전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임기응변이었다. 무인이 자기 무기를 손에서 놓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검술보다 자유도가 높은 봉술이라지만 무기에는 자존심과 숨통이 걸려 있었다. 무인은 손이 비는 순간 무인이 아니게 된다. 그 틀을 깨고 자유롭게 무기를 바꿔들 수 있다는 건 저 두 사람이 그간 그만한 신뢰를 쌓아왔다는 증거가 되었다. 메이란은 교사로서도, 1황자를 염려하던 제국민으로서도 흡족한 마음이 들어 웃었다. “하지만 그건 곧…….”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휘릭 봉을 돌려 잡고 빠르게 쥬다스를 향해 겨눴다. “자네의 치명적인 약점도 될 수 있다는 거겠지? 평범한 동료가 아니라 모시기로 한 주군이라면 아무리 팀전이라 해도 위험에 처하게 두진 못할 테니까.” “……!” 그 말대로였다. 상대를 신뢰하는 것과 별개로 충성하는 대상에게 들어오는 공격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에단은 선봉의 공격 포지션에서 벗어나 그를 돕고자 방향을 틀었다. 때를 노려 수란이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빠악. “충성도 과하면 팀에 붕괴를 일으키는 거야, 에단 님.” “…….” 에단은 표정 변화 없이 내렸던 봉을 들어 올렸다. 수란이 가격한 것은 옆구리가 아니라 쇳덩어리였다. 어느 틈엔가 봉을 돌려 수란의 공격을 막아낸 것이었다. 알고 막았다기보단 동물적인 감각으로 일어난 방어 행동이었다. 그는 더 생각하지 않고 곧장 몸을 움직였다. 강한 힘으로 휘둘러온 일격에 수란이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이는 수란을 지나쳐 그 뒤에 있던 메이란에게로 향했다. 훙. 봉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흡사 커다란 관악기에서 나는 음파와도 같았다. 검술 천재가 휘두르는 봉격은 교사인 메이란이라 해도 위협을 느낄 수준이었다. 그녀는 수란을 지나쳐 자신에게로 향한 봉을 막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 찰나 차분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쥬다스가 개입하여 합공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공격만으로는 메이란을 꺾을 수 없었다. 꽤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하며 차례로 봉을 막아낸 메이란이 쥬다스가 들고 있던 봉을 강하게 쳐 냈다. 악력에서 밀리는 쥬다스는 봉을 놓치고 비틀거렸다. 그가 놓친 봉은 메이란의 힘에 의해 허공에 붕 떠올랐다. 너무 손쉽게 거리를 내준 쥬다스에게 의아함을 느낀 그녀의 시야에 에단의 움직임이 재차 들어왔다. ‘아차!’ 메이란은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공격이 집중되었다고 느낀 건 일종의 함정이었다. 덜그럭! 땅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봉은 총 2개였다. 방어면에선 최고라고 생각했던 수란의 봉이 맥없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수란은 봉을 놓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 작게 숨을 내뱉으며 돌아선 에단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에단 헤이가, 헤이가 가문의 신체 능력과 정통 무술을 물려받아 그 위명을 떨친 소년. 직접 상대해 보니 정말이지 괴물 같은 힘과 움직임이었다. “……와.” 지켜보던 학생들 중 누군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를 시작으로 멍하니 대련을 바라보던 아이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 나갔다. 쥬다스가 봉을 놓치긴 했지만 동시에 교사팀의 수란 역시 봉을 손에서 놓쳤기 때문에 비긴 것과 다름이 없었다. 에단은 쥬다스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니, 충분히 잘해주었단다. 팀전이었지 않느냐.” 팀이란 서로에게 짐이 될 수도 있는 관계지만, 결국 힘이 되어주는 게 그 근골이다. “훌륭했다.” 바로 지금처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 안녕하세요, 어제는 컨디션이 매우 악화되었던 바람에 오지 못했습니다. ㅠㅠ 시간 여유가 있으신 독자님들께서는 약 5분 가량만 기다려주세요. 바로 연참으로 이어집니다.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 헉헉 수정작업이 꽤 힘드네요. 큽.) 0069 / 0240 ---------------------------------------------- 9장. 시험 본격적으로 여름이 시작되었다. 루바흐의 여름은 찜통 같은 습한 무더위와 일주일씩 이어지는 장마가 반복된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자 학생들의 복장도 시원한 하복으로 바뀌었다. 여학생들은 무릎 위로 살짝 올라오는 하늘색 스커트와 품이 넓은 반팔 블라우스를 입었고, 남학생들은 긴 바지와 반바지 중 자율적으로 선택해서 입을 수 있었다. 둘 다 여름용 재질이었기에 어지간하면 비교적 품격 있는 긴 바지를 선호했다. 반바지를 챙겨 입는 학생들은 대부분 품위에는 신경 쓰지 않는 호탕한 성격이거나 나이가 어린 경우였다. 쥬다스를 중심으로 뭉친 일행 중에서는 품격과 거리가 먼 바이칼이 유일하게 반바지를 선택했다. “아~ 으, 벌써 시험이냐. 뭔 놈의 시험은 허구한 날…….” 바이칼은 손부채를 부치며 칠판에 적힌 시험 일정표를 바라보았다. 여름이 시작되었다는 건 곧 기말고사가 가까워졌다는 의미도 되었다. 다들 절망했지만 바이칼은 절망을 넘어 체념에 가까운 심정이었다. 그에게 있어 이번 학기는 시작부터 평범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제일 큰 이변은 백로황자. 바이칼은 제 옆자리에서 태연하게 시험 일정을 확인하는 쥬다스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가 평소 가장 경멸하는 부류는 가진 힘에 맞지 않게 구는 지배층이었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그런 귀족을 지배하는 황족이라면 더욱 황족다운 행실을 보이길 원했다. 큰 힘을 가졌으면 그 힘으로 해야 할 의무를 다하고 아랫것들을 휘어잡는 게 옳다고 여겼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던 과거의 바이칼이 볼 때에 이 백로황자는 그야말로 쓰레기였다. 어딘가에 재활용도 불가능한, 그저 숨만 쉬고 살아갈 뿐인 제 위치에 걸맞지 않는 쓰레기. 하지만 자신의 사상과 편견이야말로 비틀어져 있음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그는 혼란을 겪었다. ‘……어, 잠깐. 설마 내가 생각한 게 틀렸을 수도 있나?’ 그렇게 생각이 든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오류라고 느낀 부분을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이칼 B.드레이크는 귀족치곤 개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14살 소년이었고, 상황에 따라선 자신이 틀렸다는 걸 깔끔하게 인정할 수 있는 용기도 함께 갖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들 사고 전환이 단숨에 확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누군가를 쓰레기 취급하던 가치관에서 그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지하고 타인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데엔 굉장한 노력이 필요했다. 혼란과 의구심으로 복잡해진 머릿속은 도무지 학업에 집중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게다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학파를 찾아 수장을 만나러갔더니 그 수장이란 작자가 금지된 사령술을 다루는 술사였다. 덕분에 교황청에 잡혀서 꼼꼼히 조사받느라 출석 일수와 시험 대비 기간을 홀라당 날려 먹었다. 원래 마법이나 이능에 관련된 역사에 관심이 많은 학구파긴 했어도 수재들 사이에서 그는 그리 지능이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결국 바이칼의 중간고사 점수는 화려하게 박살 나고 말았다. ‘그 뒤로는.’ 1황자를 위험에 빠뜨리려 했던 몰지각한 학생들로 인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런 식으로 점차 바이칼은 사건 사고에 말려들곤 했다. 그러는 사이 바이칼이 가지고 있던 비틀어진 가치관은 확실히 변했고, 백로황자를 따르고자 하는 결심까지 가지게 되었다. 급기야는 황궁까지 따라 다녀오고 나니 수업은 수업대로 빠지고 머리는 머리대로 복잡하여 공부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은 게 없었던 것이다. “젠장, 말이 안 되잖아. 인간인 이상 어떻게 이런 상황에 시험을 잘 볼 수가…….” 거기까지 중얼거린 바이칼은 옆자리를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눈부신 성적을 거둔 공부 괴물들이. “자, 점심을 먹으러 가자꾸나.” “뭘 멍하니 있지? 일일이 챙겨줄 시간 없으니 넋 놓고 있으려면 여기 남도록.” 따뜻한 금안과 그 곁에 선 도도한 바닷빛 눈동자를 번갈아 올려다본 바이칼은 의자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일으켜 세웠다. “……하아.” 괴물이 아닌 평범한 루바흐 학생의 입에서는 한숨밖에 나오질 않는다. 바이칼은 생각했다. 이건, 절대 내가 수준 떨어지는 게 아냐. ‘이분들이 너무 턱이 높은 거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바이칼은 목덜미를 타고 흐른 땀을 팔뚝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거, 날씨 한번 오지게 덥네.” 여름과 동시에 기말고사 시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모든 시험이 종료되고 난 후에, 바로 황제가 공표한 황태자 즉위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작렬하는 태양광 아래 평화롭게만 흘러가던 공기가 바짝 타오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제국을 발아래 둘 권력을 위해, 다른 누군가는 지키고자 하는 삶을 위해.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말이 충돌을 준비한다. 비록 한쪽은 기마(騎馬)가 아니라 뒤에 폭탄을 잔뜩 실은 포마(砲馬)였을지라 해도, 두 말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 * * * “그거 아십니까?” 마르젠이 싱글싱글 웃으며 서두를 꺼냈다. “사실 우리 루바흐에는 슬픈 전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관심 없어.” “……워후, 칼답에 베이겠는데요.” 크리스티나의 싸늘한 거절에 마르젠은 손날로 목을 베이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은 그저 무시였다. 진심으로 관심 없다는 그녀의 태도에 마르젠은 멋쩍은 얼굴로 삐죽 튀어나온 옆머리를 정리했다. 그들은 현재 카페테리아의 룸 테이블에 모여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 복습하라며 일찍 수업을 마친 탓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쥬다스를 찾아 모였고, 모인 김에 함께 공부나 하자며 룸에 자리를 잡고 앉은 것이다. “무슨 전설이더냐?” 뻘쭘함에서 마르젠을 건져 올린 건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부드럽게 답을 기다리는 금안을 마주한 마르젠이 씩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장마철이지 않습니까? 앞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 폭우가 쏟아지는 밤이 되면 말입니다…….” 차츰 말소리를 죽인 마르젠이 장난스레 눈을 찡긋했다. “나온답니다.” “뭐, 뭐가?” 책에 눈을 고정시키고 있던 바이칼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그 곁에서 다른 수업의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에단도 고개를 들었다. 모두의 관심이 모이자 마르젠은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유령이요.” 그 말에 크리스티나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에단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으며, 바이칼과 아벨만이 유독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유령이 나온다고?!” “지, 진짜……?” 무슨 일이든 용감하게 끼어들던 바이칼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대상이 바로 ‘유령’이었다. 그는 주제 불문하고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 불가능한 미스터리나 공포물 따위를 몹시 싫어했다. 14살이긴 했으나 유독 어린아이처럼 두려움을 드러내는 바이칼을 흘낏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코웃음을 쳤다. “그걸 믿나.” “어, 아니, 딱히 믿는다고는 안 했…….” “이거 되게 유명한 전설입니다만? 진짜 다들 그동안 한 번도 못 들어보셨습니까?” 마르젠이 책상에 두 손바닥을 탁 짚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쥬다스가 흥미롭게 턱을 짚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다. 나는 처음 듣는구나.” “…….” 사실 그동안 이렇다 할 친우가 없던 쥬다스로서는 당연히 들을 소식통도 없었을 터였다. 그 점을 뒤늦게 떠올린 아이들의 눈에 동시에 낭패감이 스쳤다. 괜히 주군의 약점을 들쑤신 기분이 들어 굉장히 죄책감이 들었다. 짜증스레 책을 탁 덮고 무릎에 올려놓은 크리스티나가 결국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들어는 봤어. 저급한 내용이라 별 관심은 없었지만.” 그녀의 동조에 마르젠이 거 보라는 듯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진짜 있다니까 말입니다~?” “들어봤다고 했지 직접 봤단 말은 안 했는데.” “그래서 그 내용이란 뭡니까?” 애써 태연한 척 물어오는 바이칼이었지만 녹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들유들한 마르젠의 얼굴과 경직된 바이칼에게 차례로 시선을 준 크리스티나는 마지막으로 흥미롭게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장마가 퍼붓는 날, 새벽 2시부터 4시 사이, 호숫가에 혼자. 이 조건을 충족하면 얼굴이 없는 유령과 마주치게 된다. 하지만 만난다 해도 목숨에 위해를 가하지 않으며, 다만.” “다만……?” “살아 있는 자의 육신, 즉 빙의를 노린다고 합니다.” “……?!”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론이었다. 특히 그간 자신의 상태를 ‘빙의’에 가깝게 여기고 있던 전적이 있는 쥬다스로서는 더욱 움찔하고 말았다. 지금이야 이 역시 전생과 이어진 현생임을 인지하고 받아들인 상태지만 어찌 되었든 그에게는 꽤나 와 닿는 유령이야기인 셈이었다. 묘하게 허를 찔린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르젠이 묘한 눈길로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이거, 이거. 크리스티나 님, 관심 없으시다더니 엄청 자세히 알고 계시는데요?”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큭큭, 예이.” 겉으로는 으르렁대면서도 크리스티나의 속내는 민망함으로 차올랐다. 대신 그녀는 민망함을 꾹 눌러 숨기며 쥬다스를 향해 계속 말을 이었다. “……그야말로 어린애들이나 믿을 법한 유치하기 짝이 없는 내용입니다만. 매년 이 시기쯤 되면 꼭 한 번씩 도는 괴담입니다.” “되게 궁금하지 않습니까? 비 오는 날 새벽에 호수로 나가면 유령을 볼 수 있을지?” “확인도 안 되는 괴담 따위에 휘둘릴 필요가 있나. 애초에 그런 얘기를 지금 왜 꺼내는 건지 모르겠군.” “단합이죠, 단합. 공동의 관심사가 있으면 좀 더 쉽게 친해지게 마련이거든요.” 웃으면서 하는 이야기였지만 마르젠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시험 기간이라고 공부에만 찌들어 있는 것보다는 한 번씩 이렇게 뜬금없는 주제에 귀를 기울이는 여유도 필요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재들이라 해도 결국 십 대 소년소녀들이었다. 그들은 지루한 공부보다는 괴담 이야기에 은근슬쩍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정령이라든지 사령 같은 것들도 전부 유령과 비슷한 개념 같은데.” 에단이 제 의견을 털어놓았다. 다른 학생들이 듣고 보니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누가 시킨 사람도 없는데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쥬다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래, 어쩌면 소문의 정체가 정령이나 사령일 수도 있겠지. 단지 해를 끼치는 자들인가 아닌가에 따라 사령일 가능성이 좌우될 뿐이야.” “계약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들을 볼 수 있는 겁니까?” 정령이나 사령은 자질을 가진 술사만이 소환하여 계약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예외가 존재했다. 쥬다스는 설명을 위해 유니를 손바닥에 얹고 실체화했다. 녹색 미풍이 주변을 감싸며 손가락만 한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도 알다시피 미계약 상태의 정령은 볼 수 없단다.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건 오로지 지금처럼 술사가 원했을 때뿐.” “그렇다면……?” “아주 드문 일이지만 ‘가계약 상태’라면 스스로의 의지로 실체화가 가능하다고 하는구나.” “혹시 아벨의 거울정령처럼 말씀이십니까?” 바이칼이 아벨의 곁에 붙어 있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가리켰다. 괜히 움찔한 아벨이 투르키를 쳐다보았지만 정작 투르키에게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그때는 일종의 정령 폭주였지. 가계약이란 예를 들면 이런 거란다.” 살짝 고개를 저은 쥬다스가 천천히 손가락을 접으며 예시를 들었다. “천 년 묵은 나무의 정령, 오래된 마을에 붙어 수호하는 정령. 오랫동안 사람 손을 타며 잘 관리되고 사랑받은 인형에 깃든 정령.” “어, 그거…….” 한 번쯤은 전래 동화나 민담으로 들었던 이야기였다. 그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실제였다는 말에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들의 공통점이 무언 것 같으냐?” “……일단 한곳에 오래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단이 먼저 답을 한 가지 말했다. 간소한 차이를 두고 크리스티나가 이어 답했다. “구체적인 대상을 지키려는 목적이 보입니다.” “둘 다 잘 말해주었다. 살아 있지 않은 미생물이거나 의지를 표할 수 없는 상태의 대상에 친화력을 느껴 오래 머물다 보면 ‘가계약’ 상태로 전환되어 이를 지키고자 힘을 표출할 수 있게 된단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많은 전설이 실제 있었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니.” 감탄하던 마르젠이 손을 딱 소리 나도록 퉁기며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 12월입니다! 드디어 올해의 마지막달로 접어들었네요. 별 일정은 없지만 겨울을 좋아하는지라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독자님들도 모두 행복한 12월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사족으로 박스에 입장하기 전 콜이 쥬다스의 정령들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단순히 실체화를 하지 않고 있었던 탓입니다(...) 말 그대로 안보여서 못알아봤다는... 하하.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 딸기맛쿠키 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 ㅠㅠ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0 / 0240 ---------------------------------------------- 9장. 시험 “오오, 그렇다는 건 학교에 떠도는 괴담도 실제로는 정령이 정체였을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도 크지.” 크리스티나가 지체 없이 찬물을 부었다. “밝혀지지 않은 존재라 해서 꼭 두려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보단 지금 당장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 문제나 두려워하는 게 좋겠군.” “……시험 문제보다는 나중에 날아올 성적표가 더 두렵습니다, 전.” 이미 기말고사에 대해선 해탈한 바이칼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펼쳐 둔 교재는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결과를 알면서도 이 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런 바이칼을 멀뚱히 쳐다보던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혹 공부에 어려움이 있느냐?” “예? 아, 뭐 그런 셈…….” 대충 얼버무리려던 바이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정도가 아니라 완전 텅 비었습니다, 텅. 수업 때 듣지 못한 내용은 아예 이해도 안 되고요.” “……이해가 안 되다니, 어느 정도로?” 에단 역시 학업에 힘들어 하는 바이칼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정도를 물어 오는 에단을 무서운 기세로 홱 돌아본 바이칼이 되물었다. “알고 싶습니까?” “……?” “에단 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 대어보십쇼.” “……?” “뭐가 보이십니까?” “……아무것도 안 보인다.” “그게 바로 제 이번 학기 앞날입니다.” 하란다고 순순히 따라하던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주먹을 내렸다.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바이칼이 현재 얼마나 막막한 처지에 놓였는지 확연히 이해한 학생들이 그를 향해 안타까운 시선을 던졌다. 설마하니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줄은 미처 염려하지 못했던 쥬다스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흠, 그랬구나. 괜찮다면 내가 네 시험공부를 좀 도와도 되겠느냐, 바이칼.” “……쥬다스 님께서 직접 도와주신다면야 저로서는 감사하지만. 모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좀 힘드실걸요. 게다가 그러면 제가 시험공부에 방해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걱정 말거라.”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바이칼이 한 말은 그야말로 괜한 걱정이었다. 사실을 알고 있는 정령들만이 킥킥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날로 즉시 1황자의 주관하에 혹독한 스터디가 시작되었다. 본래는 바이칼을 대상으로만 진행되려던 스터디였지만 그의 가르침은 아이들이 생각한 수준 이상으로 진국이었다. 쥬다스는 루바흐의 정식 교사보다 정밀한 설명이 가능했고 교과 내용 중 어떤 부분이 포인트로 출제될지에 대해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공부할 양은 줄어들면서 내용 정리는 완벽하게 되다 보니 본래 지적 능력이 우수한 편인 바이칼은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 지식을 습득했다. 중간고사 때 수강 과목 100점 기록 신화를 보여준 황자였기에 지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강의를 듣는 모든 교과 과정을 막힘없이 설명, 요약 정리까지 가능할 줄은 몰랐던 아이들은 그대로 스터디에 눌어붙어 계속 함께 공부를 진행했다. 덕분에 그들 모임은 루바흐에서도 꽤 알려져 본격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두 공작가 자제를 비롯해 황자를 따르는 인재들에 대한 자세한 소문이었다. “마르젠한테 들은 정보인데, 시험 기간이 끝나면 당장 황태자 즉위식이 이루어진다고 했어.” “정말? 그럼…… 역시 1황자 전하께서.” “그뿐만이 아니야. 나도 들은 건데 이미 많은 가문이 1황자 전하의 세력으로 붙고 있대.” “이미 루바흐에서도 두 공작가에 백작가 자제들이 따르고 있잖아. 듣자 하니 모두 충성 서약을 마쳤다는대.” “심지어 이능도 뛰어나셔서 자연계 정령을 3속성이나 계약하셨다고.” 그냥 도는 소문도 있었지만 대부분 마르젠이 깔아둔 밑밥들이었다. 그는 1황자의 위세를 높이고 이목을 끌 만한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여기저기 흘리고 다녔다. 그 결과 이미 루바흐에서는 쥬다스를 황태자나 다름없이 보고 있었고 누구나 그리 수군거렸다. 그러다 보니 이를 당연히 여기게 되어 1황자가 제위를 이어 군림하게 된다는 사실에 큰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십 대 아이들이라 소문에 민감하고 쉽게 선동당한다는 특징이 있었고 마르젠은 이를 귀신같이 잘 이용한 셈이었다. 결과적으로 귀족 세계에 뿌리를 둔 루바흐 학생들은 전원 1황자를 따를 잠정적 아군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이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대로 지배층 중에 실제 죽은 듯 보이던 1황자파가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황제가 그를 황태자 자리에 올리겠다고 직접적으로 밝힌 이상 중립에 서 있던 모든 귀족 가문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태세는 변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남은 건 1황자가 어찌 움직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과연 황태자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귀족 세력을 휘어잡을 것인지, 아니면 반발하는 세력이 던지는 암투에 의해 심장이 꿰뚫리고 말 것인지. 모두의 시선이 그를 주시했다. 누구도 의도치 않았지만 자연적으로 목을 걸고 임하게 된 시험인 셈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이어 학원 루바흐에서도 드디어 기말고사 첫날이 시작되었다. 드르륵. “좋은 아침이구나, 바이칼.” “…….” 그리 혹독하게 스터디를 진행해 놓고도 태연스레 아침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를 향해 바이칼이 다크서클 진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예……. 좋은 아침이네요, 정말. ……좋아서 미쳐 버릴 것만 같은…….” 어찌나 피로에 찌들어 있던지 목이 다 걸걸하게 잠겨 있었다. 루바흐에서 시험이 진행되는 기간은 총 1주간이었다. 한 주만 버티면 공부 지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 바이칼은 그 생각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어깨를 힘 있게 두들겨준 쥬다스가 응원의 메시지를 남겼다. “잘하리라 생각한다만 너무 무리하진 말거라. 성적이 전부가 아니지 않누.” “……저기, 쥬다스 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요.” 시험 당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한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시험 따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100점이라는 엄청난 점수를 거머쥔 상대였다. 천재가 하는 위로는 좁쌀만큼도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스터디는 어제부로 끝났다는 사실이다. 이제 하루하루 시험을 치르고 지푸라기 인형처럼 풀썩 엎어지기만 하면 될 일이다. 우르릉. 시험을 위해 띄엄띄엄 배치된 책상에 앉자마자 하늘에서 심상찮은 소리가 울렸다. 바이칼과 쥬다스는 동시에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 「우왕, 비 오는 거 좋다요! 근데 이 기세라면 좀 시끄러울지도 모르겠다요.」 「……거슬린다면 멈추게 해줄 수도 있다.」 엄숙한 시험장인 만큼 정령들은 모두 실체화하지 않고 자연체인 상태로 쥬다스의 주변을 머물고 있었다. 오로지 그의 의지만을 생각하는 정령들의 호들갑에 쥬다스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툭, 투툭. 조용한 시험장 안에 굵은 빗줄기가 창을 때리는 소리가 조금씩 들려왔다. 여름비의 시작이었다. 솨아아아- 제일 먼저 시험지를 제출하고 1층 현관으로 내려온 쥬다스는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쏟아붓는 장대비에 걸음을 멈추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요란스럽게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 정도 비라면 우산을 쓰나 안 쓰나 홀딱 젖게 되리란 사실은 변함이 없을 정도였다. 쥬다스는 우산을 꺼내는 대신에 그냥 빗속으로 발길을 내딛었다. 화악. 물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정령술사라면 굳이 비를 가릴 우산이 필요하지 않는다. 그의 의지에 따라 빗물이 몸에 닿기 전 알아서 옆으로 피해 흘러내렸다. 그는 빗속을 느리게 걸었다. 비가 쏟아지는 데다가 시험 기간에 돌입한 루바흐의 교정에는 낮인데도 지나다니는 학생이 없었다. 하늘엔 태양 대신 먹구름이 잔뜩 끼어 사위가 온통 어두웠다. 저녁 시간처럼 어둠이 내린 중에 요란한 건 빗소리와 천둥소리뿐이었다. 스산하게 느껴질 법도 한 풍경이었지만 쥬다스는 오히려 간만에 홀로 맞은 여유를 기껍게 즐기고 있었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가 세상을 푹 적셨다. 돌로 지어진 건물도 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마법의 힘이 깃든 가로등이나 시원스레 뻗은 가로수도 전부 빗물을 촉촉이 머금었다. 그 사이로 짙은 풀잎사귀 향이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 나갔다. 「그러고 보니 그 유령 이야기 말이야.」 「우웅?」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슬쩍 괴담을 꺼냈다. 「진짜 유령일 수도 있잖아?」 「에!」 「……유니는 만난 적 있어요? 유령.」 정령이라 해도 괴담에 등장하는 귀신이나 유령을 직접 만나 본 적은 보통 없었다. 정령이란 영적인 존재였으나 그렇다고 미지의 대상은 아니었다. 세상의 사물과 자연을 조정하는 위치에 있는 개체로 ‘계약’이란 틀을 따라 온전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계약자의 의지 없이 무단으로 힘을 사용해서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이건 마치 심장이 뛰거나, 갓 태어난 아기가 생존을 위해 빨기 반사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켜지고 있는 본능적 불문율이었다. 이를 어긴다면 더 상위의 심판자에게 처벌을 받게 된다. 정령왕이라 해도 그 법칙을 어길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내 해를 끼치기도 하고 겁을 주기도 하는 유령이란 존재는 정령과는 전혀 무관했다. 카니가 붉은 날개를 파르르 떨며 두 팔을 문지르자 다른 세 정령을 번갈아 본 유니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니들 설마 유령 따위에 겁먹은 거니?」 「유령은 한 번도 본 적 없다요. 그치만 모르는 건 역시 무섭다요.」 「으응, 맞아요. 싫은 건 싫은 거잖아요. 싫은 것도 취향이니까 존중해 주세요.」 「…….」 올망졸망한 눈망울의 토니와 카니를 비웃는 유니, 그리고 그들을 모조리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루니였다. 쥬다스는 그런 4속성 정령들의 투닥거림에 미소 지으며 계속 빗속을 걸었다. 「유령 그거 별거 없다? 걔들은 그냥 원념 같은 거라서. 실제로 살아 있는 영혼도 아니고 말이야. 그냥 겁만 줄 뿐이라구.」 “음? 그렇다면 죽은 자의 영혼은 아닌 모양이구나.” 「응, 영혼이란 건 우리도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사라지곤 하니까.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 세상을 떠도는 일은 없어. 죽는 순간 그대로 소멸해 버리는 건지 아니면 다른 세상으로 이동하는 건지, 신께 심판을 받으러 하늘로 올라가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정령에게조차 ‘죽음’은 알 수 없는 개념이었다. 단지 현재 이어진 모든 연결 고리가 끊어진다. 그래서 보통 계약자가 죽고 나면 자연히 정령들과의 계약도 함께 끊겼다. 이그레트의 경우 여러 요소가 개입되어 만들어진 이례적인 환생자이긴 했지만, 보통은 그랬다. 정령이 소멸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사후 어찌 되는지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가장 죽음과 밀접해 있는 사령조차도 그 뒷날은 알 수 없다. 그저 죽음의 기운을 양분으로 살아가며 죽었어야 할 영혼을 빼돌려 잠시 손아귀에 넣고 장난감처럼 굴리는 힘을 가졌을 뿐이다. “안타까운 일이구나. 원념만 남아 세상을 떠돌다니.” 「뭐어, 말이 그렇지 실제로는 별 힘도 없어. 걱정 마, 이그레트! 혹시라도 유령을 만나면 내가 눈물 쏙 빠지게 괴롭혀 줄게!」 “아니, 굳이 그럴 것까지는…….” 난처한 얼굴로 손을 내젓는 쥬다스였으나 정령들은 그를 안심시키고자 하는 의욕을 불태웠다. 「근데 유령이란 건 그럼 어떻게 생겼다요?」 「제각각이지 뭐. 유령이란 게 원래 원한이나 강한 잡념 같은 게 한데 모인 존재라서 좀 엽기적인 게 많아. 듣자 하니 여기 학교에 사는 유령은 얼굴이 없는 사람이라던데.」 “으음, 저렇게 말이냐?” 쥬다스의 손가락이 전방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다른 학생이 하나 더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남색의 동복이었으며 치렁치렁한 붉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얼핏 보기엔 여름에 동복을 입고 있는 좀 특이한 여학생으로 보였지만, 문제는 얼굴이었다. 정말로 눈코입이 있어야 할 얼굴에는 창백하게 질린 피부만 존재할 뿐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얼굴이 없는 적발의 소녀가 손을 들어 제 발밑을 가리켰다. 「……어.」 「저게 유령? 진짜 유령이다요?」 토니가 빼꼼 고개를 내밀며 상대를 확인했다. 예고도 없이 어느 순간부터 멀찍이 모습을 드러낸 인영을 보고 다른 정령들도 신기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덧 70화가 넘었네요.ㅎ 이번 챕터와 이 다음 챕터가 끝나고 나면 평화로운 일상 대신 슬슬 1부 마지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음... 사실 제가 요즘 컨디션이 계속 좋지 않은데... 쉬지 않고 매일 달려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번 출판계약이 오고 가면서 카카오페이지와 연계되면 이그레트1부는 조아라에서도 유료전환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고 전달을 받았습니다.ㅠㅠ 그래서 그 전까지 1부를 완결내려고 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뒤로 미루려고 계속 상의를 드렸는데, 출판사 뿐 아니라 카카오나 타사이트들과도 연동이 되어 힘들다는 답변이... 담당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상황이 또 그렇습니다.ㅠㅠ 계약을 처음 해보는 지라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할 수 없고, 여러 입장과 상황이 얽혀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차기작을 연재할 때는 이런 꼬이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신경을 써야함을 깨달았습니다. 어쨌든 지금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을 위해 반드시 조아라 무료연재란에서 1부완결을 내고 나서 타사이트와 연계하고자 합니다.(연계 일정은 1월 중순 정도라고 답변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12월 한달간은 좀 무리해서라도 완결을 위해 달릴 것 같습니다.ㅎ 혹 현재 연재분을 쌓아두었다 몰아보시는 독자님이 계신다면 2015년이 끝나기 전까지 꼭!! 달려주시길 바랍니다...! 그럼 늘 즐겁게 읽어주시는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과 애정에도 항상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1 / 0240 ---------------------------------------------- 9장. 시험 「아니, 잘 봐. 저건 유령이 아니라…….」 그중 유니가 찜찜한 눈으로 포로록 날아올라 팔짱을 꼈다. 녹색 바람이 위협적으로 훙 몰려들자 유령은 슬쩍 뒤로 걸음을 물렸다. 「어딜 도망가려고!」 캇. 바람의 힘이 굵은 빗줄기를 담고 뒤를 쫓았다. 하지만 유령은 흔적도 없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 버렸고 목표를 잃은 바람만이 빈 허공에서 날뛰었다. “잠깐.” 유니를 제지한 쥬다스가 천천히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찰박. 쏟아지는 빗물이 끊임없이 수면에 파문을 일으켰다. 물에 비친 은발이 아른아른 빛났다. 그가 딛고 있는 곳은 땅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쥬다스는 호수 한가운데까지 이동한 상태였다. 그는 물의 정령왕 루니의 힘에 의해 물을 밟고 서 있었지만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호수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야 할 위치였다. “…….” 마치 괴담에나 등장할 법한 상황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호수 정중앙에 서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천천히 뒤돌아 호수에서 걸어 나왔다. 「이그레트, 방금 그거.」 “그래, 흔적을 쫓기 어려울 게야.”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쥬다스는 슬쩍 뒤를 돌아보곤 바람의 힘을 거두어들였다. “유령도 정령도 아닌 애매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잠깐의 관찰만으로도 그가 상대의 정체를 유추해 내기엔 충분했다. 한 차례 호수를 바라본 쥬다스는 그대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금안에 무거운 빛이 감돌다 서서히 가라앉았다. * * * “예? 마, 만나셨다고요?” 기말고사가 시작된 지 3일째 되는 날, 그들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각자 시험에 대해 중간 점검을 하고 미처 신경 쓰지 못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와중에 쥬다스로부터 뜬금없이 유령 목격담을 전해 들은 아이들은 하나같이 화들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소 틀린 말을 하지 않으며, 매사 반듯한 쥬다스가 한 말이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유령에 대한 공포심이 있는 바이칼은 물론이고, 그냥 반쯤 농담 삼아 화두를 던졌었던 마르젠마저 어색하게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아이들의 질린 표정 앞에서도 쥬다스는 의연하게 제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래, 얼굴 없는 여자아이의 모습이라면 확실히 본 것 같구나.” “……!” 번쩍. 때마침 검게 변한 하늘에서 번개가 빛났다. 뒤이어 하늘을 찢을 듯한 천둥이 우르릉 울리자 분위기는 완전히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하, 하, 하.” 바이칼은 현실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딱딱한 웃음을 흘렸다. 정작 유령을 목격한 쥬다스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데 평범한 유령은 아니었어. 정령의 느낌이 옅게나마 감돌고 있었으니, 아마 그 아이는 본래 정령이었을 가능성이 높겠지 싶구나.” “저기, 쥬다스 님.” 바이칼이 발표하듯 한 손을 들었다. “애초에 걔가 유령인 상황부터 평범하지가 않은데요…….” 그 말에 모처럼 모여 있던 전원이 동감을 표했다. 이번엔 마르젠이 손을 번쩍 들며 물었다. “그런데 그 유령이 혹 뭐라고 말은 안 걸었습니까?” “입이 없으니 말을 걸 리가 없지 않느냐.” “……입이 없……. 상상 가니까 제발 그 이상 설명을 부추기지 말아주십쇼, 예?” 바이칼이 애원하는 눈빛으로 만류했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공포보다는 호기심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무관심한 척 입을 다물고 있던 크리스티나마저 긴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넘기며 물었다. “이 말씀을 저희 앞에서 꺼낸 이유가 있으시리라 압니다.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녀의 말대로 쥬다스는 아이들에게 흥미 본위로 유령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이 아니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느긋한 어조로 대꾸했다. “다시 만나러 갈까 한단다.” “누, 누, 누구를요?” 이젠 학생이 아니라 연구원일 뿐이라 시험 스트레스와는 연관이 없는 아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3일 밤낮을 새운 학생처럼 얼굴에 핏기가 싹 가셔 있었다. 바이칼 못지않은 저질 담력을 소유하고 있는 아벨이었다. 공포에 잠긴 잿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는 산들바람 같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 자리에 모인 아이들이 뜻을 이해하기엔 그걸로 충분했지만 에단이 부러 그 답을 재차 확인했다. “……지금 다시 호수로 나가보실 생각이십니까?” “오냐.” 한 치의 거리낌도 없는 긍정이었다. 그러자 모두의 반응이 각양각색으로 나뉘었다. 에단은 결연한 얼굴로 검을 챙겨 일어섰고, 아벨은 딸꾹질을 하면서도 투르키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을 본 크리스티나가 낮은 한숨과 함께 책을 덮었고 마르젠은 빙글빙글 웃었다. 가뿐히 자리를 털고 일어선 쥬다스가 석상처럼 굳어버린 바이칼에게 시선을 주었다. “으음, 바이칼. 무서운 일을 억지로 강요하는 건 아니란다. 가 보고자 하면 가고 아니라면 마는 단순한 선택이지. 어찌할 테냐?” “……하, 그야 당연히.” 바이칼은 밤색 머리칼을 벅벅 긁적이며 굳었던 고개를 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두려움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손바닥을 말아 쥐며 씩 웃는 입꼬리에 쥬다스도 마주 미소 지었다. 그들은 고급 방수 재질로 제작된 야광 녹색 우비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3일째 계속되고 있는 장마 탓에 공기는 몹시 습했다. 더위와 습기가 어우러진 답답한 날씨 속에서 시험의 절반이 막을 내리고 그 끝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시험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쥬다스를 따라 유령을 확인하러 나온 것은 단순한 호기심에서만은 아니었다. 첫째는 유령의 정체를 직접 확인하고자 함에 있었고, 둘째는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주군인 1황자를 방치할 수 없다는 이유가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 무언가 보여주고자 하는 쥬다스의 의도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늘 염두에 두었다. ‘살수.’ 아이들은 이미 황궁에 갔을 때 쥬다스를 노리는 검은 손길을 직접 목도한 바 있었다. 쥬다스와 대적하는 세력은 생각보다 규모가 크고 꼼꼼했다. 그저 몇몇 귀족가문의 권력만을 등에 업고 눈치 싸움만 즐기며 1황자를 견제하는 귀여운 수준이 아니었다. 쥬다스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암흑가 살수뿐 아니라 온갖 이능과 더러운 술수가 관여되어 있었다. 3황자를 제위에 옹립하려하며 황후의 손아귀에 사로잡힌 세력은 전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밖으로 드러난 곁가지만 잘라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치 온몸에 퍼진 작은 두드러기처럼 3황자, 아니, 그 모친인 황후의 권속은 이미 십 년도 넘게 정계에 뿌리를 박아두었다. 황후 측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황자를 제거하려 들 것이다. 쥬다스를 따르는 아이들은 그 사실을 이미 알아차린 상태였다. 필요하다면 마구간에 쌓인 오물더미에서 기생충이라도 잡아다 사용할 치들이었다. ‘혹 단순한 괴담을 가장하여 쥬다스 님을 노리는 살수가 섞였다면.’ 과한 걱정일 수도 있지만 안이하게 움직이다 주군의 숨통을 내어놓는 것보다는 나은 판단이었다. 그들은 기꺼이 천둥 치는 빗속을 함께 걸었다. 쏴아아아. 굉장한 호우였다. 오죽하면 우비를 입어놓고도 얼굴과 목덜미 사이로 물이 새어 들어가 교복 자락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였다. 긴 바지나 스커트는 물기를 흠뻑 머금어 무겁게 늘어진 지 오래였다. 가뜩이나 사위가 어두운데 비안개까지 자욱하게 껴 시야 확보가 잘 되지 않았다. 코끝을 때리는 빗방울을 손등으로 훔쳐 낸 마르젠이 눈을 가늘게 좁혀 앞길을 분간하려 애썼다. “보아하니 요 앞이 호수인 것 같습니다?” 루바흐의 호수는 한 군데에만 고여 있지 않았다. 학교 중앙에 자리한 대호를 중심으로 자잘한 다리로 이어져 5갈래 작은 호수로 순환하는 형식이었다. 규모로만 보면 언뜻 강이라고도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중 지난번 쥬다스가 유령을 만난 호수는 동쪽 기숙사 옆에 자리한 잔잔한 장소였다. 그리고 오늘 이들이 함께 당도한 호수는 제일 면적이 넓은 중앙 호수였다. 물가에 다가가자 빗소리는 한층 거세게 들려왔다. 크리스티나가 제일 먼저 호수로 다가갔다. 끊임없이 파문을 일으키는 물살을 들여다보다 다시금 빙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특별한 징조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오늘은 나오지 않을 셈인가 보군요.” 그리 말하는 크리스티나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역력했다.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본 에단이 무덤덤한 어조로 응수했다. “만나러 온다고 해서 무조건 나타나면 그것이 어찌 유령이겠습니까.” “이 내가 유령의 사정까지 봐주어야 하나.” “글쎄……. 당신이 아니라 누구라도.” 유령이란 게 나오란다고 순순히 나올 리 없다는 에단의 논리에 반쯤 동의하면서도 크리스티나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우습군. 이곳에 서식하는 게 확실하다면 분명히 모습을 드러내게 될 터.” “그리 산짐승 찾듯 생각하여 될 일이 아닙니다.” ‘에헤이, 이 양반들 언제는 흥미 없다더니…….’ 마르젠은 누가 먼저 유령을 찾나 내기라도 할 기세인 두 사람을 구경하며 픽 웃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떨어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이칼이 목청을 높였다. “그런데 유령이라는 놈, 원래는 혼자 있어야 마주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럴 필요 없단다.” “예?” “사람에게 해를 끼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건 이미 ‘사령’에 가까워졌으니.” 우우우. 세찬 빗소리를 뚫고 성인 남성이 낮게 오열하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섞여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 같기도 하고 파이프 관을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지만 결국은 사람의 울음소리였다. 등골의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돋는 소리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우우, 우흐으으. 숨 쉬는 것도 잊고 소리를 듣고 있던 바이칼은 기절할 것 같은 표정으로 다급히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이 소리가 사령이 내는 소리라고요?!” “으음. 아니, 이건 사령이 아니란다. 사령은 아직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어. 이 소리는 그냥.” “그냥……?” 에단이 검집에 손을 얹었고 크리스티나는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경계했다. 소리는 점차 가까워졌다. “네 뒤에 있는 그자가 내는 곡소리란다, 바이칼.” “아, 그냥 평범한 곡소리였군요……. 음?” 바이칼은 녹색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였다. 그리곤 기름칠을 잊은 경첩처럼 삐걱거리며 허리를 틀어 뒤를 확인했다. 우흐흐흑. “끄아악―!” 바이칼은 혼비백산하여 후다닥 쥬다스의 뒤로 숨어들었다. 수하가 주군의 뒤에 숨은 꼴이 되었지만 아무도 그 탓을 할 사람은 없었다. 에단이 단번에 검을 뽑아 갑작스레 나타난 대상을 향해 겨누었다. “웬 놈이냐!” 흐어어어. 시퍼런 칼날을 눈앞에 두자 곡소리를 내던 상대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아예 주저앉아 통곡을 해대기 시작하는 남자를 보고 크리스티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유령?”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나타난 남자는 과연 유령이라 불릴 만했다. 우선 몸의 윤곽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본래 머리색이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파란빛뿐이었다. 또 몸체는 반투명하여 뒤에 사물이 고스란히 비쳐 보였다. 마치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존재처럼 빗방울마저 그를 뚫고 떨어졌다. 무릎 이하부터는 흐릿하게 흩어져 허공에 둥둥 떠 있었으며 차림새는 평민 남성이 입는 평상복이었다. 「뭐야, 저거 그거잖아.」 「그거다요!」 「응, 그거네요.」 「……그거군.」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네 정령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심드렁하니 주고받는 정령들의 대화 소리를 듣지 못한 아이들은 그저 긴장한 눈으로 유령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습을 드러내 놓고도 울음을 기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남자를 보고 크리스티나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 그대.” 흐……. 울음이 뚝 그쳤다. 유령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눈을 들어 크리스티나를 마주보았다. 동공이 따로 없고 눈알 전체가 그저 푸른색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기괴한 형상이었는데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를 한층 더 괴이쩍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옛날의 이그레트였다면 '팀전'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많이 컸구나, 내새끼... ...근데 생각해보니 굳이 팀이 필요가 없는 사기캐긴 했네요...ㅎ 참, 그리고 2부에 대해 질문을 많이 주셨는데, 계속 상의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합니다.ㅠㅠ 결과 나오는 즉시 공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응원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독자님들이 최고에요. 엉엉...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리며 저 역시 여러분을 응원합니다.ㅎ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2 / 0240 ---------------------------------------------- 9장. 시험 유령이 스르르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다리 없는 유령이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크리스티나는 미동 없이 서늘한 기세를 유지했다. “할 말이 있어 여길 찾아온 것이냐 물었다.” 유령은 설레설레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을 알아듣고 있다는 명백한 표시에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흔들림 없이 유령을 문책했다. “하면, 너는 누구지? 이름을 대라.” 「나는 이름이 없구마.」 “……!” 심지어 입을 열어 대답까지 한 유령의 작태에 이번에는 질문한 크리스티나마저 살짝 움찔했다. 유령의 목소리는 산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곧고 청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령은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기세가 마치 며칠째 지속되는 장마와도 같았다. 그때까지 유령을 겨누고 있던 에단이 도로 검을 갈무리했다. 유령이 그들에게 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이었다. 그 판단대로 유령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미묘한 존재였다. 「나는 여기 호수에서 태어났구마. 찾아온 건 내가 아니라 너희구마.」 유령은 스르르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시무룩해 보이는 기색에 떨고 있던 바이칼도 슬쩍 고개를 내밀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럼 왜 울고 있었던 건데?” 「…….」 유령은 입을 다물었다. “뭐 원통한 일이 있었나?” “기, 기분 나쁜 일이라도?” “근데 그걸 왜 하필 내 뒤에서.” 차례로 물어오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쳐다본 유령은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저 대신 울어줄 뿐이구마.」 “뭐?” 「누구나 울고 싶은 마음이 있구마. 내 할 일은 그거구마.」 크응, 훌쩍. 유령은 쉬지 않고 눈물 콧물을 뽑아냈다. 그런 그를 향해 쥬다스가 태연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자는 사람들의 소망과 원념 속에서 태어난 존재로 보이는구나. 정령이라 하기엔 그 힘이 미비하고 계약자 없이도 하고자 하는 목적이 뚜렷하니. 그저 유령이라 보아도 틀림은 없으렷다.” “그냥 유령 말고 정령이라고 해주시면 안 될까요…….” 바이칼의 우울한 항변에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이를 수긍했다. “그래, 눈물의 정령쯤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 “눈물의 정령?” “사람들의 애환과 간절한 마음을 대신 담아 울어주는 게 저 아이의 역할이라 하니. 슬픔과 눈물, 그 자체가 계약자인 셈이다.” 그 설명에 아이들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눈물의 정령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계약자가 있는 정령만 보다 자연체이면서도 사명을 품고 태어나 흡사 유령처럼 살아가는 존재를 보게 되니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정령이 쥬다스를 향해 스르르 다가갔다. 「당신은 아주 맑구마. 울고 싶은 마음도 느껴지지 않고? 전체적으로 투명에 가깝구마.」 인간의 슬픈 감정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존재에게 있어 생소한 일이었다. 차갑고 도도해 보이는 크리스티나조차 그 안에 깃든 슬픔과 눈물이 보였다. 하지만 쥬다스의 안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다만 여기에.」 정령의 푸르스름한 손길이 쥬다스의 이마를 짚었다. 「새로운 색깔이 물들고 있구마. 영체인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별로 좋아보이진 않지만.」 후웅. 성난 녹색 바람이 그의 손을 탁 쳐 냈다. 정령왕들의 명백한 거부의사에 눈물의 정령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 무섭구마. 훌쩍.」 “이런, 무섭게 해서 미안하구나.” 눈물의 정령은 훌쩍이며 곧장 호수로 걸어 들어갔다. 강아지 제 집 들어가듯 편안해 보이는 행동에 모두 멍하니 그를 지켜보았다. “그렇지. 내 너에게 이름을 하나 지어주어도 괜찮겠는가?” 「이름?」 “너는 계약자가 따로 필요 없으니 이름을 받을 일도 없겠지. 그러나 다시 너를 찾을 때 이름을 모르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 정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리마’. 사람의 닫힌 마음을 대신하여 눈물을 흘려주는 고마운 정령이니, 라그리마라 함이 어떠할까.” 「그거 좋구마. ……당신의 이름은?」 “쥬다스라 한단다.” 「쥬다스…….」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는 스르륵 물안개 속으로 사라지며 울음소리와 함께 한 가지 당부를 남겼다. 「조심해야 하겠구마, ‘쥬다스’. 요 근래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몰려들고 있으니.」 푸르스름하게 빛나던 정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날은 라그리마를 만났던 탓인지 사령을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도 쥬다스를 제외한 전원은 진이 빠진 채 터덜터덜 돌아갔다. 남은 3일간 시험은 무탈하게 진행되었고, 드디어 한 주간의 시험이 마침표를 찍었다.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하늘에 구멍 뚫린 듯 퍼붓던 빗줄기도 그쳤다. 여기저기 고인 물웅덩이와 습한 공기는 여전했지만 그동안 하늘을 뒤덮었던 구름이 걷혀 햇볕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사이 괴담과 관련된 사건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그리마의 경고와 더불어 지난번 마주쳤던 얼굴 없는 사령을 떠올리면 아무 일이 없는 게 더욱 수상했다. 쥬다스는 의아함을 품고 마지막 시험일과를 정리했다. 이제 남은 것은 한 학기를 종강하며 방학을 알리는 선언식뿐이었다. 그러고 나면 조만간 다시 황궁으로 가서 황태자 즉위식을 치르게 된다. ‘즉위인가.’ 쥬다스는 숙소로 돌아가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날씨는 맑아졌지만 그간 쏟아진 폭우로 인해 가로등이며 벤치 할 것 없이 전부 빗물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이를 개의치 않고 축축한 벤치에 털썩 앉았다. “유니.” 「응?」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상대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직접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쥬다스는 바람의 힘을 끌어내 소망을 읊었다. “‘프리드’의 위치를 찾아주련.” 화악. 강한 기운을 담은 바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교정의 나무를 흔들고 사라진 녹색 바람을 멀뚱멀뚱 쳐다본 카니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물었다. 「이그레트, 왜 황후가 아닌 프리드 그자를 찾아요?」 “왜 그런 것 같으냐?” 카니는 되려 물어오는 부드러운 금안을 마주 바라보았다. 「모르겠지만…… 난 그 망할 자식이 정말 싫은걸요.」 한 번 정령석에 조종당한 경험이 있는 카니는 혐오스런 눈빛을 드러냈다. 마른 가지에 붙은 불처럼 화륵 기세를 내뿜은 카니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준 쥬다스가 달래듯 대답했다. “그 둘이 같은 속성이기에 찾는 거란다.” 「에엥, 인간도 속성이 있다요?」 토니가 불쑥 끼어들었다. “있지. 성질은 다르나 같은 목적, 같은 사령술, 그리고 같은…….” 쥬다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과거에 만났던 동료들, 자신을 죽이려했던 사람들, 그리고 최근 다시 만나게 된 프리드. 무엇 하나 달라진 것 없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리고 아마도 황후 역시 그 끝에 맞닿아 있을 것이다. 쥬다스는 얌전히 적의 흉계를 기다리는 대신 그 매듭을 직접 밝혀내기로 했다. ‘달라진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은 금색의 눈동자가 천천히 뜨여졌다. 오래 지나지 않아 떠났던 바람이 돌아왔다. 바람이 싣고 온 정보를 취합한 유니가 결론부터 입에 담았다. 「찾았어, 이그레트.」 그 말에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따뜻한 미풍에 반팔 와이셔츠 자락이 사락거렸다. 「그치만 그 ‘프리드’란 자, 자기 위치를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 일부러 보란 듯이 기운을 흘리고 있었어.」 “……그래.”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직접 찾아가겠다고 엄포를 놓았으니 무언가 대비를 하리란 예측은 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리어 정령들이 의구심을 드러냈다. 「찾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찾게 될 줄은 몰랐어. 어딘가 꽁꽁 숨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일부러 기운을 흘렸다면 언제든 찾아와도 좋다는 뜻일까요?」 「그럼 함정 아니다요?」 떠들썩한 다른 정령들 틈에서 루니만이 묵묵히 침묵을 지킨 채 쥬다스의 곁에 섰다. 계약자의 의지를 제일 충실히 따르고자 하는 물의 왕다운 태도였다. 충성스런 푸른 늑대의 머리를 톡톡 다독여 준 쥬다스의 주변으로 한층 거센 바람이 몰려들었다. 「지금 당장 가보려고?」 “부탁한다.” 그가 단호히 뜻을 밝히자 주변을 맴돌던 바람이 돌풍을 일으키며 회오리쳤다. 가고자하는 목적지까지 단숨에 술사를 옮겨주는 ‘바람의 인도’가 발동된 것이다. 바람에 실린 물기가 원을 그리며 파장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 서 있던 쥬다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시험이 끝나 한산한 교정에선 아무도 그가 사라진 걸 본 사람이 없었다. 그저 그가 앉았던 벤치만이 빳빳하게 말라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바람의 인도에 따라 쥬다스가 모습을 드러낸 장소는 어느 산꼭대기였다. 높이는 구름에 닿을 정도로 높았으며 나무는 없고 울퉁불퉁한 바위들로만 그 웅장한 자태를 구성한 바위산이었다. 바위산 주변은 겹겹이 또 다른 바위산이 둘러싼 형태였다. 나무는 없었지만 자잘한 풀이나 작은 꽃 등이 드문드문 산허리를 장식했다. 산의 꼭대기에는 마르고 볼품없는 가시나무 하나만 구불구불 자라고 있었다. 그 한 발짝 앞에는 깎아지르는 듯한 절벽과 부서질 듯 버스럭대는 바윗돌뿐이었다. 쥬다스는 주변을 둘러보곤 가시나무 아래로 다가갔다. 그 밑에 새파란 하늘을 이불 삼아 드러누워 있던 한 사내가 느긋하게 손을 들어 인사했다. “여, 이제 오시나. 이그레트 님.” “…….” 마치 오랜 친우를 기다린 한량처럼 여유로운 인사말이었다. 쥬다스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 황실에 손을 댄 적이 있느냐.” “‘황실’……?” 쥬다스의 말을 따라 읊조린 프리드가 실소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큭, 하하하하! 무슨 소리지, 이그레트 님. 이거 서운해지려고 하는데.” 분명 얼음창에 꿰뚫려 바스러진 육체였으나 지금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했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이에 대비되는 붉은 안광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손을 댄 게 아니야. 그쪽에서 내 바짓가랑이를 붙든 게지.” 먼저 접촉하지 않았을 뿐 결국 연관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프리드는 소원을 이루어준 램프의 요정처럼 만족스레 턱을 괴었다.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인간은 넘치고 또 넘쳐서. 내가 굳이 찾으려 하지 않아도 말이야.” “…….” “결국 제 스스로 불러내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령이란 것을.” 스르륵. 그의 그림자에서부터 검은 기류를 뿜어내는 사령이 기어 나왔다. 매혹적인 여인의 생김새를 한 ‘릴리스’였다. 릴리스는 자신의 계약자에게 매달리다시피 안겨 킥킥거렸다. 쥬다스는 그 사령에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곧장 프리드의 말을 확인했다. “하면 루바르잔의 황후가 직접 사령술에 손을 대었단 말이냐.” “질문은 하나씩만 하자고. 페어플레이, 질서. 그런 거 좋아하시잖아?” 그 말과 함께 프리드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를 신호 삼아 바위산이 순간적으로 흔들거렸다. 투두둑. 단순한 바윗덩어리로 보였던 것들이 기지개를 켜듯 서서히 몸을 세웠다. 가시나무 아래 느긋하게 앉아 있는 프리드의 뒤로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사령들이 병사들처럼 몰려들었다. 갑작스런 위협에도 쥬다스는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후웅. 「하여간 저것들은 볼 때마다 기분 나쁘다니까.」 「웅웅, 맞다요.」 이미 쥬다스의 사방은 정령들의 가호로 가득한 상태였다. 프리드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묻지. 이그레트 님, 왜 이제 와서 인간의 삶에 욕심내는 거지.” “이 역시 내 삶이기 때문이야.” “더러운 권력의 정점에서 피를 보는 것이? 이거야 원, 완전히 난센스로군.” 금안과 적안이 서로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이내 한쪽이 비소를 띠고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좀 더 욕심내보는 게 어때. 기왕 후회했다면, 그래서 변할 거라면. 구역질나는 세상을 전부 뒤집는 게 어떠하냔 말이야. 당신이라면 힘들이지 않고 가능한 일 아니던가? 그저 바라기만 한다면.” 이미 쥬다스의 답을 알고 있는 프리드였다. 그래서 그는 권유가 아니라 잔뜩 비꼰 어조로 말문을 맺었다. “군주가 아니라 신이 될 수도 있는 재목이 아닌가. 자연의 사랑을 받는 위선자여.”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고로 콜은 마냥 순하고 주책없는 이미지는 아닙니다. 다만 과거의 자신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었던 스승이었기에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을 뿐입니다.ㅎ 힘든 시기를 보냈던 인물인 만큼 적을 만나면 제법 사납습니다. 으음. 동물에 비유하자면 새끼 때 키워준 주인을 잊지 않는 백구랄까...(?) 개, 개같은 캐릭터네요. 쿨럭. 독자님들께서 주시는 코멘트는 하나하나 정독하고 있습니다. 답변을 드리고 싶은 메세지도 많았는데, 괜히 여러 의미로 폐가 될까봐서... ...대신 문득 뜬금없이 쪽지를 받으신다면 이를 애교(?)라 생각해주시고 읽어주시면 됩니다.ㅎ 사족으로 저는... 2번까진 지켜봅니다. 쌍욕이든 악플이든 2번까지는 참습니다. 물론 이것도 도를 지나칠 경우 바로 블랙(댓글차단)하기도 하는데, 어지간하면 일단 두고 보려는 편입니다. 그리고 3번째로 악플을 등록하실 경우엔 참지 않고 블랙을 드립니다. ...음, 바른말 고운말을 씁시다...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이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 '이그레트'는 종이책도 함께 나옵니다. 다만 그 시기가 좀 늦을 수 있다고 하네요.ㄷㄷ 이것도 언제 나올지 확실한 일정을 듣지 못했습니다.ㅠㅠ 책관련 답변을 드리려고 보니 어째 저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3 / 0240 ---------------------------------------------- 9장. 시험 「저게 근데!」 휘오오. 산 정상에서 몰아치는 바람은 그 기세가 굉장했다. 바위마저 들썩이는 바람의 분노에 프리드의 앞을 막아선 사령들이 검은 기운을 흩뿌리며 대응했다. 두 기운이 막 충돌하려는 찰나 쥬다스가 손을 들어 바람을 저지했다. “아니. 내가 하려는 일은 그런 게 아니야, 프리드.” “흐음?” “군주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목표를 위해 군주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지.” 비슷한 말 같지만 그 끝이 전혀 달랐다. 답을 들은 프리드는 잠시 침묵했다. ‘이그레트’의 힘은 언제 보아도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지금 당장만 하더라도 그가 다루는 자연계 4속성 힘은 이 바위산을 단숨에 허물고 다시 세울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자연을 통솔한다. 그 힘을 가지고도 늘 초탈하며 매사에 욕심이 없던 강자에게 비로소 욕심이란 게 생겼다. 그가 가진 강대한 힘을 노리고 있던 프리드였으니 이 사실은 그에게 큰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욕심이 생겼다는 건 즉 이해관계가 생긴다는 것, 바라는 것을 위해 싸우고 고개를 숙이기도 하며 결국 취하고자 하는 욕망은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원동력이며 동시에. ‘조종하거나 파멸시킬 수도 있지.’ 당근을 쫓는 나귀나 불을 향해 뛰어드는 나방, 혹은 먹이를 얻기 위해 주인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처럼 욕심이란 인간을 움직인다. 이는 사령술에 손을 댄 황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 그렇다면 오늘 나를 찾아온 이유는.’ 프리드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나를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기특하군. 당신답지 않은데.” “…….” 쥬다스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쿠르릉. 돌연 지진이 일어나며 바위산이 쩌적 갈라지기 시작했다. 땅의 정령왕이 다루는 대지의 기운에 의해 바위들이 과자 부스러기처럼 바스러져 절벽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이 참, 또 괴롭힐 셈이야?」 프리드가 부리는 사령 릴리스의 입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등가죽을 뚫고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두 날개가 우득거리며 솟아올랐다. 「이번엔 안 돼. ‘왕’의 힘을 가진 건 너희뿐이 아니라구?」 검은 기운이 부서지는 바위들을 감쌌다. 그러자 바위에서도 그녀와 같은 뼈 날개가 솟구쳐 오르더니 눈이 세 개 달린 까마귀들로 화해 날아올랐다. 릴리스는 프리드를 꼬옥 끌어안은 채 사령을 끊임없이 불러냈다. 바위와 가시나무, 심지어 구름의 그림자를 타고 꾸역꾸역 사령들이 몰려들었다. 마치 하급 정령을 생성하고 다루는 정령왕의 힘과도 흡사했다. 이를 유심히 본 유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저건, 설마?」 퍼엉! 잠깐 혼란스러운 눈으로 릴리스를 쳐다보던 유니는 근처에서 터진 폭발음에 황급히 쥬다스의 앞을 막아섰다. 녹색 바람이 방어막을 형성해 오염된 기운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아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프리드는 즐거이 웃으며 쥬다스를 향해 마주 손을 들어 올렸다. “자, 그럼 제대로 회포를 풀어보실까. 이그레트 님.” 무너지기 시작한 바위산 정상에서 정령과 사령의 힘이 뒤엉킨 전투가 시작되었다. 팟. 죽음의 기운이 응축된 검은 화살이 쥬다스의 지척을 스치고 지나가 폭발했다. 부서진 돌가루며 마른 낙엽 등이 매섭게 휘몰아쳤다. 굳은 땅이 갈라지고 화염이 치솟으며 다시 그 안에서 죽은 자들이 기어 나왔다. 뼈와 살 대신 마른 나무와 그림자로 구성된 몸뚱이에서는 피로 반죽된 죽은 흙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개미굴에 들끓는 개미 떼처럼 사령은 미친 듯이 날뛰었고 그들을 제압하는 자연의 힘 역시 냉혹하게 사방을 뒤덮었다. 흡사 지옥의 재림과도 같은 장면이었지만 이를 일으키는 두 사람은 재해의 한가운데에 서서 태연히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콰르르 무너지는 바위들에 힐끗 시선을 준 쥬다스가 땅의 힘을 부려 그것들을 한곳에 몰아 쌓았다. 그대로 떨어졌더라면 시야에는 보이지 않더라도 산 밑에 존재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 산사태에 깔렸을 것이다. 적을 상대하면서도 무관한 이들이 상해를 입지 않도록 배려하는 여유에 프리드가 낮게 웃었다. “여유로워 보이는군.” 자연을 거스르는 사령의 힘은 서로에게 천적이었다. 부서지고 토막 나는 사체와 더불어 생기를 빼앗긴 하급 정령들은 비실거리며 역소환되기 일쑤였다. “하긴, 이 정도로 당신을 당황하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쥬다스는 당황하지는 않았어도 어느 정도 절망감은 느끼고 있었다. 젊은 날 만났던 친우의 모습 그대로 프리드는 무수한 사령을 부리고 있었다. 지금 모습을 드러낸 사령의 수만 헤아려 보아도 저들을 부리기 위해 필요한 목숨값이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사람을 죽여 얻은 힘으로 대관절 무엇을 하고 싶은 게냐.” “글쎄……. 어떨 것 같나? 당신처럼 큰 힘을 손에 쥐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반드시 거창한 목표가 있어야만 사는 건 아니라고.” 가라앉은 금안을 즐겁게 바라보며 프리드가 제 속내를 이야기했다. “나는 그저 매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뿐이야.” 단순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어린아이와 같은 답을 내놓은 프리드는 이어서 손을 뻗어 검은 파장을 내뿜었다. 콰앙. 다시금 폭발이 일었다.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으며 사령의 기운을 삼켰다. 검은 연기와 함께 녹아내린 기운에 프리드가 쯧 혀를 차는 순간이었다. 우르릉. 천둥이 울었다. 청명하던 하늘에 어느 틈엔가 시꺼먼 먹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물의 정령왕이 불러온 우기였다. 번쩍 사위가 새하얗게 물들며 벼락이 꽂혔다. 물과 바람이 합쳐져 위력을 뿜어낸 동조술, ‘낙뢰’였다. ‘……과연, 당신도 진심이란 뜻이로군.’ 무릎까지 찢어진 로브 자락이 지직거리는 스파크와 함께 펄럭였다. 릴리스가 곁에서 비호하고 있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낭패를 볼 뻔했다. 프리드는 찢어진 로브를 벗어 던지고 제대로 전투에 임했다.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바람에 날려 사라지자 로브 속에 감추어져 있던 흑색 제복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루바르잔 장교복과 흡사한 디자인이었는데, 정작 루바르잔의 군복은 아니었다. 그 어떤 나라도 정식 제복을 검은색으로 짓지는 않았다. 은장이 달린 검은 옷은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일반적으로 검은색은 죽음을 상징했다. 장례식에 입고 가는 상복이 주로 검은색인 이유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격식과 위엄을 나타내는 색은 주로 하얀색이나 군청색 등 각 나라에서 중요시 여기는 색깔이었으므로 제복의 색으로 검은색을 쓰지 않았다. 사령술이 걸린 은장식과 붉은 술이 검은 제복에 달려 있었다. 마치 지옥에서 출전한 장교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었다. “릴리스-” 쿠우우. 곁을 지키던 사령 릴리스가 날개를 펼쳐 날아올랐다. 그녀는 곧 젤리처럼 흐물흐물 녹아 거대한 형상을 이루어냈다. 릴리스의 본체는 다름 아닌 찢어진 가죽과 뼈로 이루어진 본 드래곤이었다. 죽은 드래곤의 시체에서 다시 태어난 사령이라 할지라도 지닌 힘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거대한 뼈 날개를 펄럭인 릴리스가 육중한 꼬리를 들어 쥬다스를 향해 휘둘렀다. 콰앙! 음산한 사령의 기운이 맴돌고 있는 본체였기에 쥬다스는 막기 보단 피하는 쪽을 택했다. 돌무더기가 우수수 떨어지는 꼬리를 들어 올린 릴리스가 이번엔 주둥이를 열어 브레스를 준비했다. 몰려드는 검은 기운을 보며 유니가 설마 하던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역시 저 애는…….」 콰과과과― 바위산을 통째로 얼리는 냉기가 몰아닥쳤다. 물의 왕인 루니가 다루는 힘과는 그 성질이 달랐다. 그저 차갑기만 한 냉기가 아니었다. 투르케 사막의 생명력과 모든 기운을 앗아가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던 바로 그 얼음이었다. 순식간에 주변이 얼음 조각으로 뒤덮였다. 폐허 위를 감싼 얼음은 깔끔하게 모든 것을 그 안에 파묻었다. 그 안에서도 얼어붙지 않고 멀쩡히 서 있는 건 쥬다스가 유일했다. 냉기로 가득한 바위산에서 유일하게 생기로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을 보며 프리드가 허탈한 한숨을 흘렸다. “좀 힘든 척이라도 해보시지 그래. 나름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기운 빠지는군.” 그러면서 그는 본 드래곤의 형체를 갖춘 릴리스를 어루만졌다. 그때, 유니가 쥬다스의 옷깃을 죽죽 잡아당겼다. 「이그레트, 저거.」 “……유니?” 의아함을 담은 금안을 향해 휙 고개를 들어 올리며 유니가 슬픈 눈으로 웅얼거렸다. 「정령이야, 원래.」 “…….” 「있지, 저 릴리스란 사령 말이야. 전부터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지금 보니 알 것 같아.」 쥬다스는 내렸던 시선을 도로 들어 프리드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뒤에 포효하는 거대한 본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정령이었어. 우리들과 같은, 아니, 좀 더 오래된 과거를 살아온. 그건 아마도.」 유니가 날개를 바르르 떨며 쥬다스의 소매에 매달렸다. 「……자연계의 정령왕 중 하나.」 유니의 말에 다른 정령들도 동조했다. 「익숙한 느낌이 든다요.」 「나도 본 적은 없지만 알 것 같아요.」 「…….」 크르렁. 푸른 늑대가 위협적으로 목을 울렸다. 정령들이 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도 변한 분위기는 알아차린 프리드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릴리스의 등에 올라탔다. “뭔가 알아차린 모양인데.” “……사령이란 건, 정령이 타락해서 태어나는 존재인가.” “자아가 있는 건 전부 변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어찌 타락이라 단정 짓는 것인지 모르겠군.” 쿵!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날개를 펼친 릴리스를 향해 펄펄 끓어오른 물줄기가 내리꽂혔다. 냉기를 품은 사령인 릴리스는 화기에 취약했다. 검은 기운을 뿜어 물의 힘에 대응했지만 해일처럼 덮쳐 오는 불의 파도에 날개를 접고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의 공격은 봐줬다는 듯이 몰아닥치는 자연계 정령들의 힘에 프리드는 진땀을 흘리며 사령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정령들의 합공은 그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기다란 뱀처럼 주변을 휘감은 녹색 바람이 그를 옭아맸다. 물러서고자 했지만 사령의 기운과 함께 통째로 발을 묶는 강한 힘이 하나 더 있었다. 땅의 중력이었다. 땅에서 작용하는 중력과 주변을 감싼 바람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프리드를 향해 타오르는 불로 만들어진 검이 작살처럼 꽂혔다. 콰득. 왼쪽 어깨를 뚫고 지나간 후끈한 일격에 팔이 뚝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구르는 팔을 놀란 눈으로 내려다보던 프리드가 큭큭 실소를 터뜨렸다. 고통은 있었으나 어차피 제 것이 아닌 육신이었다. 재료만 충분하다면 팔 하나 떨어진 것쯤이야 사령술로 금방 복구가 가능했다. “이젠 내가 질문할 차례지. 이그레트 님, 당신이 보았을 때 나는 악인인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물어오는 프리드를 보며 쥬다스는 차분히 대꾸했다.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글쎄. 민간 거리에 성행하는 살인, 강도, 죄인임을 알면서도 눈감아주는 법관, 뒷배를 두고 자신보다 약자를 마음껏 희롱하고 폭행, 강간하는 지배층……. 그리고 그들을 죽여 힘을 얻는 ‘나’.” “…….” “어느 쪽이 더 악한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을 비웃은 프리드는 그대로 손을 뻗어 사령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저주하라.” 쿠우우. 사령이 가진 힘은 물리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인간이 가진 영혼 깊숙이 숨겨진 부정적인 원념을 끄집어내 폭주하게 만드는 저주 또한 사령의 힘이다. 미리 그려놓았던 흑주술의 진이 그들이 밟고 있던 땅에 번쩍 빛나면서 나타났다. 찰나였지만 쥬다스의 정신에 접촉한 사령이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끌어냈다. ‘이그레트 님.’ ‘당신을 친우로 섬기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누가 손가락질 한다 해도 절대 등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친우로 여겼던 세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가까이 두고, 누구보다 믿었었던 셋이었기에 이는 마냥 고통스러운 기억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부드럽게 웃던 입가에 핏물이 튄 건 머지않아서였다. ‘……죽어주셔야겠습니다.’ 기억 속 옛 동료들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웅웅 귓가를 맴돌았다. 그러나 정령왕을 다루는 이그레트의 정신력이 그 정도 저주에 쉬이 넘어갈 리가 없었다. 사령은 더 깊게 침투하지 못하고 곧장 내면세계에서 쫓겨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쿨럭. 지금 졸려서 완전 비몽사몽입니다. 혹 오탈자나 비문 발견하시면 살포시 옆구리를 쿡 찔러주시면 됩니...다.ㄷㄷ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특히 지난 화 코멘트에서는 유독 기운을 많이 얻었습니다.ㅠㅠ 꾸벅!)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4 / 0240 ---------------------------------------------- 9장. 시험 고오오오. 본 드래곤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프리드가 정령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엔 충분했다. 쥬다스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어버린 적을 뒤쫓지 않았다. 어차피 프리드의 본거지를 찾아내어 다른 그릇으로 영혼을 옮기지 못하게 완벽히 ‘본체’를 제거하지 않는 이상에야 지금 그를 죽이는 건 어느 정도 타격은 입힐 수 있겠지만 큰 소용이 없었다. 죽여도 죽지 않는 상대에게 굳이 힘들여 찾아온 목적이라면 이미 달성했다. 쥬다스는 얼어붙은 바위 위에 무릎 꿇고 앉아 음습한 냉기를 몰아내었다. 갈라졌던 바위가 다시 붙고 죽었던 초목이 재생되었으며 냉기가 가득했던 땅에 여름의 온기가 다시금 감돌았다. 완벽히 되살아난 자연 풍경을 두고 그는 남은 한 가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바닥에 떨어진 프리드의 팔을 중심으로 검은 핏자국이 흘러나와 짙게 번져 있었다. * * * 폭풍 같던 시험이 끝난 루바흐에는 평화가 감돌고 있었다. 시험 성적으로 인해 눈물짓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그것도 며칠뿐, 이제 곧 학기를 마치고 ‘하계-자율학습기’, 즉 여름방학에 돌입한다. 루바흐의 방학은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자유 시간이다. 하지만 자유라고 해서 그들이 집에 돌아가 원하는 만큼 놀 수 있는 건 아니다. 학생들이 전원 귀족 이상의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방학 중에는 향후 그들이 맡아야 할 귀족으로서의 소임이나 가훈, 밀린 사교나 예절 등을 교육받는다. 또한 가문을 이어받을 후계가 아니라면 목표로 하는 직업이 무엇인가에 따라 교육 내용은 천차만별로 차이가 난다. 집에 돌아가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거나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엔 아예 학교에 남아 있기도 했다. 학교에선 방학 중에도 계절 학기와 각종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배움에 정진할 수 있도록 터를 마련해 주었다. 어디에서 어떤 교육을 받을지에 대한 모든 선택은 학생 스스로의 몫이었다. 어둠이 내린 시각. 검푸른 밤하늘엔 그간 퍼붓던 장맛비가 방랑자가 꾸고 간 꿈결이라도 되는 양 구름 한 점 떠 있질 않았다. 밤이었지만 유독 청명한 하늘에는 별무리와 둥글게 차오른 은빛 달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 밤하늘을 고스란히 비춘 루바흐의 호수는 그날따라 유달리 잔잔했다. 호수에서 태어난 정령 라그리마 역시 오늘만큼은 눈물을 멈추고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평화로이 휴식을 취하던 라그리마를 깨운 것은 호수를 뒤흔드는 갑작스런 파문이었다. 놀란 라그리마가 빼꼼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자 녹색 바람에 휘감겨 호수를 딛고 서 있는 한 소년이 보였다. 라그리마는 소년의 이름을 기억했다. 「쥬다스구마?」 “……아.” 쥬다스는 홀린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파란 정령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깨운 모양이구나. 미안하다.” 「괜찮구마.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구마.」 라그리마는 흔쾌히 그를 반기며 곁에 다가갔다. 물 밖에 머리만 빼꼼 내밀고 있는 사내의 형상이었지만 쥬다스는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라그리마 역시 정령이었기에 다른 정령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호감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구마?」 “허허. 예민한 아이로구나.” 「아이는 내가 아니라 자네인 듯한데.」 진심으로 의아해하고 있는 라그리마를 향해 그저 부드럽게 웃어준 쥬다스는 천천히 호수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 걸음을 따라 라그리마도 느릿느릿 이동했다. “오늘은 평화로웠던 모양이야. 울지 않는구나.” 「이곳이야, 그럴 때니까. 슬픔보다는 설렘이 가득하구마.」 시험이 끝난 학생이란 대부분 결과야 어쨌든 이전과 같은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지는 않는다. 꿀 같은 단잠을 즐기고 휴식을 즐기며 다가오는 방학을 기다린다. 때로는 울적해지기도 하고 앞날이 걱정되기도 하겠지만 하루쯤은 다 같이 마음 편히 쉬기도 하는 날이 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하지만.」 라그리마가 물 밖으로 손을 뻗어 쥬다스를 가리켰다. 「여기 자네가 슬퍼하고 있구마.」 “……으응? 딱히 슬프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만.” 「그럼 왜 나는.」 훌쩍. 「눈물이 흐르, 흐, 흐어엉―」 “으음…….” 급기야 엉엉 울기 시작한 라그리마를 앞에 두고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쓸었다. 이거야 원, 작게 중얼거린 그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구나, 라그리마. 내 대신 울어줘서.” 「아니구마. 훌쩍. 그거 아니구마. 아무리 인간이란 알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지만 자네는 좀 심하구마.」 라그리마는 도리질치며 보그르르 물에 잠겨 들었다. 「슬플 때는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아무튼 그리 웃지 말라는 거구마…….」 흐어어어. 정령의 울음소리가 어둠이 내린 호수를 맴돌았다. 쥬다스는 라그리마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을 호숫가에 서 있다 이내 천천히 자리를 떠났다. 날이 밝자 드디어 봄 학기 종강을 알리는 선언식이 열렸다. 선언식은 축제 때와는 다르게 짧고 간결하게 진행되었다. 학생회장이 하는 선언문 낭독과 학원장의 훈화 등이 행사의 주된 내용이었다. 그 뒤를 이어 방학 기간에 지켜야 할 규율과 다음 학기가 시작되는 시점, 유의 사항 등이 전달되었다. 마지막 순서로 한 학기 동안 여타 부문에서 최고의 성적을 보여준 학생들에게 상장이 수여되었다. 여기엔 쥬다스와 에단이 나란히 선정되었다. 문과와 무과를 각각 대표하는 뛰어난 성적이 수상 이유였다. 그리고 양호실에서 늘 치료 업무를 돕던 리이나도 역시 상을 받았다. 이능 계열 재능상이었는데 어린 나이에도 틈틈이 개발한 힐링 푸드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치유술사로서의 자질 등으로 크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소수 인원에 대한 수상을 끝으로 선언식은 마무리되었다. 나머지 자잘한 상장과 성적표는 개별로 주어졌다. 성적표를 확인한 학생들 사이에서 탄성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음이 연달아 일어났다. 바이칼 역시 성적표를 받고는 괴성을 내질렀다. “크아! 진짜 이대로 낙제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제기랄!” ‘저놈도 망했나.’ 동류를 보는 슬픔의 눈초리가 그를 스쳐 지나갔다. 성적표를 꾸겨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바이칼의 등을 에단이 툭 치며 말했다. “……축하한다.” “총 평점 B+! 완전 선방했습니다. 젠장!” 총평이 B+라는 건 중상위권 성적을 기록했다는 의미였다. 완전히 말아먹을 것을 예상했던 바이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고득점인 셈이다. 쥬다스가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긴 했으나 지도를 따르며 밤새 학업에 매진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의 열의가 불러일으킨 진실로 눈물겨운 스터디의 결실이었다. 「성적이 잘 나왔다는 얘기 아니다요? 왜 화를 낸다요?」 「너무 좋을 때에도 욕이 나오기도 한답니다, 토니.」 카니의 설명에도 토니는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짧은 팔을 휘적거리며 재차 의문을 제기했다. 「좋은 걸 좋다고 하지 않고서 어떻게 좋음을 표현할 수가 있다요? 그걸 듣는 사람은 다 구분한다요?」 「그럼요. 좀 더 강조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니까요.」 「우에에, 복잡하다요……. 」 「후후. 과장하거나 이중언어를 쓸 필요 없는 우리와는 다르니까요.」 정령들 중에서 유일하게 욕설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카니였다. 그랬기에 인간들이 표현하는 언어를 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녀를 제외한 나머지 정령들은 과격한 언어는 잘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복합적인 의미가 담긴 언어를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이는 정령이 계약자가 가진 감정과 바람을 민감하게 읽어낼 수 있어 굳이 다채로운 표현을 익힐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기우뚱 기울인 토니의 등을 힘내란 뜻에서 토닥여 준 카니는 살짝 고개를 돌려 쥬다스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있는 유니를 쳐다보았다. 「…….」 평소와 다르게 유니는 깊은 상념에 잠긴 상태였다. 풀죽어 있는 녹색 정령의 목선을 따라 양 갈래로 묶어 내린 머리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유니…….」 카니가 작게 불러보았지만 그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카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토니가 파닥파닥 유니의 곁으로 내려앉았다. 「유니!」 「까, 깜짝이야.」 갑작스런 땅의 부름에 녹색 바람이 화들짝 놀라 흔들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유니의 옆에 선 토니가 뚫어져라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빠안. 「……뭐야, 뭔데. 왜 그렇게 봐?」 「어제 그 릴리스란 사령 때문이다요?」 「그, 그런 거…….」 투닥거리긴 했어도 오랜 세월 형제처럼 함께 지내온 자연계 정령들이었다.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 무엇에 신경 쓰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황토색 앞머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또랑또랑 빛나고 있을 토니의 눈을 마주보며 유니는 끙 하고 날개를 늘어뜨렸다. 「……맞아. 걔 때문에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 그 녀석이 본래 정령이었던 게 사실이라면.」 학생들 사이에 섞여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던 쥬다스도 유니의 말에 시선을 내려 정령들을 훑었다. 「‘사령’이란 건 대체.」 자연계를 유지하는 축으로서 존재하는 정령이라지만 그들도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다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정령의 계약이란 무엇인가’, ‘사령은 어디서 태어나는가’. 요컨대 저런 질문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답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원리까지 설명할 수준은 못되었다. 「있지, 이그레트. 만일 사령의 모태가 정령이었다면, 우리 정령은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변하게 된 걸까.」 “…….” 올곧게 내려다보는 금색 눈동자를 견디지 못하고 유니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냥……. 그 애가 우리와 동족이었다면 왜 그렇게 된 걸까 싶어져서.」 잠자리의 것처럼 얇은 날개를 축 늘어뜨린 채 웅얼거리는 유니를 가만 바라보던 쥬다스는 양손을 모아 그녀를 담았다. 어깨 위에서 손바닥으로 옮겨지게 된 유니는 올망졸망한 눈으로 연둣빛 원피스 자락을 꾸욱 쥐었다. 「나, 너무너무 궁금한데, 이해하고 싶진 않아.」 “유니.” 「그 애가 가여워. 그치만 그뿐이야.」 후웅. 바람이 울었다. 강하지 않은 세기로 그의 주변을 휘감은 바람은 그저 조용히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 앤, 아주 소중한 걸 잃었다고 생각해. ‘릴리스’가 되기 전 지키고 있던 자연의 힘을 놓을 정도로. 어쩌면 자연 따위 아무 의미 없었던 게 아닐까. 모든 걸 부수고 깨뜨려 버리고 싶을 정도로 슬펐던 거야.」 쥬다스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돌보듯 유니를 천천히 품에 끌어안았다. 따뜻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유니는 처음으로 계약자를 향해 자신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이그레트, 언제까지고 우리가 너의 정령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켜줘.」 쥬다스는 긍정하지 않았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지금은 어떤 복잡한 인과에 의해 두 번째 삶을 전승했지만, 이 역시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정령들과 약속할 수 없었다. 「……제발.」 언제나 활기찼던 바람의 정령답지 않은 애잔함이었다. “쥬다스 님?” 쥬다스가 실체화된 유니를 품에 안은 채 돌아보자 그를 부른 크리스티나가 바로 곁에 서 있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크리스티나는 짐승의 여린 새끼처럼 안겨 있는 유니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혹여 지난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가 걸음을 멈춤과 동시에 다른 아이들도 전부 멈춰서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역시 달라진 분위기를 눈치챈 상태였다. 선언식이 끝난 직후 크리스티나와 에단, 바이칼 세 사람은 제일 먼저 쥬다스의 곁으로 모였다. 발이 넓은 마르젠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여러 학생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기 바빴고, 얼마 전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아벨은 선언식과 상관없이 연구소에서 잔일을 돕는 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렇습니까.” 서로 잠깐의 공백을 두고 내놓은 대답이었다. 쥬다스가 말을 아낀 이상 그를 따르는 세 사람도 더 이상 억지로 캐물을 수 없었다. 대신 크리스티나는 흘러내린 긴 바닷빛 머리카락을 모아 하나로 묶으며 단호히 말했다. “혹, 무언가 말씀하실 일이 생기시거든.” 투톤의 머리색처럼 깊이 있게 빛나는 눈동자가 모처럼 서늘함을 죽이고 상냥함을 담았다. “언제든지 알려주십시오. 듣겠습니다.” 그녀 스스로도 어색했을 용기를 알아본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공교롭게도 지금 연재시기가 딱 학생분들 시험기간인 모양이네요. 화..화이팅! (..) 오늘 좋아하던 작품 중 하나가 완결이 난 걸 보니 뭔가 제가 다 뿌듯하기도 하고(?) 아쉽기도 하고....(장르가 코믹로판이었는데, 아마 대부분 좋아하시던 작품일 겁니다.ㅎ) 저도 존경하는 작가님처럼 멋지게 완결을 맺을 수 있도록 힘내야겠습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격려에 늘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5 / 0240 ---------------------------------------------- 9장. 시험 찌륵, 찌륵, 찌르르륵― 여름 벌레가 울었다. 습한 장맛비가 그리워질 만큼 푹푹 찌는 햇살이었다. 이제 막 방학을 맞이한 루바흐에서는 학교를 떠나는 이보다는 아직 시기를 두고 보는 학생이 더 많았다. 루바흐는 재능 개발 학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또래 아이들과 정을 쌓을 수 있는 사교의 장이기도 했다. 수업이 종강하여 여가 시간이 주어진 지금 학생들은 다른 가문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때문에 계획적으로 친분을 만들든 이미 친해진 무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든 학교는 방학을 맞은 후에도 제법 북적였다. 쥬다스는 세 아이와 함께 중앙 호수를 다시 찾았다. 라그리마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맑은 수면 너머로 큼직한 자갈돌과 관상용 물고기들이 자리할 뿐이었다. 점심시간이 막 지난 시점이라 호숫가에는 다른 학생들도 여럿 자리를 차지하고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예 돗자리를 펴고 앉은 무리도 있었다. 같은 교복을 입고 재잘거리는 학생들은 십 대 소년소녀답게 쾌활하고 명랑한 분위기였다. 돗자리에 둘러앉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는 무리를 향해 잠시 시선을 준 쥬다스는 다시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세 아이를 가만 쳐다보았다. “……해서, 그때까진 남아 있으려고 합니다.” “하긴. 어차피 즉위식에는 황족이 아닌 이상에야 참관할 수 없을 테니.” “아니, 그럼 쥬다스 님 혼자 황궁에 다녀오셔야 하는 겁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그거?”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 순으로 이어진 대화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중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현재 조만간 있을 황태자 즉위식에 관련된 일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위식은 앞으로 열흘 후, 포탈을 이용해 이동할 예정이므로 왕복에 걸리는 시간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었다. 그렇다 한들 즉위식에는 미리 익혀두어야 할 식순이나 예법 등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 필요했다. 게다가 의복 치수도 다시 맞춰야 했고 즉위식 이전 교황청을 먼저 들러 몸과 영혼을 정갈히 하는 예식을 치르는 게 순서였다. 그러니 넉넉잡아 3일 후에는 먼저 교황청으로 이동해야 시간 분배상 알맞았다. 그가 즉위식을 무사히 치르고 오는 동안 아이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각각 무언지를 정해두고 있었다. “일단 우린 황족이 아니니 쥬다스 님을 따라 입궁할 수 없지. 차라리 이번 시기를 기회 삼아 집안에 스스로 정한 뜻을 정확히 밝힐 필요는 있겠군.” “……동의합니다.” 여전히 진지한 회의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을 보며 쥬다스가 넌지시 끼어들었다. “집에 돌아가는 건 오랜만이겠구나. 혹 형제들이 있느냐?” “……독자(獨子)입니다.” 에단이 먼저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지난 축제 때 얼굴을 비추고 간 오라비 알시오스 C.델피아를 언급했고,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세 손가락을 펴보였다. “어, 저는 형님과 남동생, 여동생이 있습니다.” 바이칼은 드레이크 백작가의 차남이었다. 장남인 레이칼 드레이크는 열 살 때 루바흐에 들어와서 우수한 문과 성적을 기록하고 열다섯에 졸업한 엘리트였다. 학생부에서 곧장 입부 제의가 올 정도의 인재였지만 이를 거절하고 드레이크가의 장남으로서 가문을 이어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바이칼은 허심탄회하게 속사정을 밝혔다. “어차피 가문은 형님이 이을 거고, 원래 저는 학파에 가입해서 이능 연구 활동이나 좀 해보려고 했었죠. 정치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고 집안엔 동생들도 있으니 뭐 저 하나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견문 좀 넓혀도 되겠구나 싶었는데.” 그의 녹안이 쥬다스를 향했다. “저도 이런 제가 루바흐에서 주군을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움 좀 될 수 있게 정치 수업도 미리 들어둘 걸 싶고…….” 멋쩍게 말꼬리를 흐리는 그에게 에단이 툭 끼어들었다. “딱히 네게서 정치적 견해를 듣고자 하는 이는 없어 보이는데.” “뭐요?” “그래도 교양으로 정치 수업 정도는 들어두면 좋긴 하겠군.” “아니, 이 양반이. 뭐, 솔직히 말해 우리 나이에 다들 정치에 대해 별로……!” 거기까지 말한 바이칼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곧 황태자로 즉위할 쥬다스는 그렇다 치고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모두 공작가 출신이었다. 이제 겨우 15살, 14살 아이들이라 해도 루바흐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정치, 경제, 예법, 문학 등 모든 분야를 일정 수준 이상 익혀 왔을 이들이다. 이 자리에는 없지만 같은 백작가 출신인 마르젠도 바이칼과는 다르게 처세에 능하며 일찍부터 정계에 드나들어 왔던 정치적 인재였다. 바이칼은 뻘쭘하게 입을 닫고 코끝을 찡그렸다. “말해주기 전에 스스로 깨달았나. 장하군.” “……예이, 장하게 봐주시다니 거참 고맙네요.” 투덜투덜거리는 바이칼과 농을 건 에단을 보고 나니 쥬다스는 이제야 눈앞의 이들이 아이들다워진 기분이었다. 정작 무리 중에 제일 아이답지 않은 푸근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였지만, 본인은 몰랐다. 뜨거운 여름 햇살만큼이나 따끈하게 무르익어 가던 분위기가 깨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풀벌레 소리가 사라져 있음을 느낀 에단이 곧장 검을 빼 들었다. 챙! 칼날에 맞고 튕겨 나간 날붙이가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굴렀다. 길이는 겨우 손바닥만 한 단도였으나 분명 살의가 담겨 있는 무기였다. 암살을 시도한 건 한 여학생이었다. 초콜릿색 단발을 단정히 늘어뜨린 소녀가 마치 가면을 쓴 것처럼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쥬다스를 노렸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이번에는 등에 차고 있던 장병기를 꺼내 들었다. 길이는 어린 여성 체구에 맞춰 제작되어 다소 짧은 편이었지만 창날이 양쪽 끝에 달려 큰 살상 효과를 낼 수 있는 쌍두창(雙頭槍)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명백한 공격 의사를 확인한 크리스티나도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학원 루바흐에서 대련 상황이 아닌 전투는 금지되어 있었지만 상대가 먼저 무기를 빼 든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박찼다. 슈욱. 넓적한 창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섬뜩하게 귀 끝을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쥬다스에게 닿기 전 에단에게 막혔다. 쩡 하는 마찰음과 함께 창과 도가 허공에서 맞닿았다. 호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웅성거리며 멀찍이서 그들을 관망하고 있었다. 에단이 공격을 막는 사이 크리스티나는 유심히 소녀를 살폈다. ‘뭔가 눈빛이 이상해.’ 크리스티나는 예리하게 문제점을 찾아내었다. 단순 원한이나 사사로운 감정으로 달려든 것 같지는 않았다. 중간에 공격이 가로막혔음에도 소녀의 시선은 끝까지 쥬다스를 향했고 그 고동색 눈동자는 살심으로 가득했다. 부자연스러운 살의였다. ‘마치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티나에게 바이칼이 작게 말했다. “일단 제압해야겠습니다.” 이대로라면 누군가 다칠 수도 있었다. 공격을 해왔으니 정당방위로 상대하고는 있었지만 상대는 그들과 같은 학생이었다. 황자를 노렸으니 처벌은 받겠지만 이는 그들이 판단할 내용이 아니었다. 크리스티나는 빠르게 둘 사이에 끼어들어 검 손잡이로 소녀의 무릎을 가격했다. “……!” 휘청이는 소녀의 손을 내려쳐 창을 빼앗은 에단이 그녀를 바닥에 꿇렸다. 제압당한 상태에서도 소녀는 쥬다스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너만 없으면. 어차피 그 누구도 널 원하지 않았을 텐데.” “…….” “죽어버려.” 현생의 기억 속 생모가 내질렀던 저주와 같은 말이었다. 혐오하는 눈빛마저도 같았다. 쥬다스는 대응하지 않고 차분히 소녀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후웅. 얼어붙은 사막을 정화했던 때와 같이 황금색 기운이 주변을 감돌았다. 자연계 4속성 정령 동조술이었다. 그러자 소녀는 괴로운 듯 몸을 뒤틀며 컥 기침을 내뱉었다. “……!” 소녀의 입을 통해 스르륵 검은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이를 본 에단이 무겁게 표정을 굳혔다. “사령…… 입니까?” 털썩. 그림자를 토해낸 소녀가 정신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동그랗게 덩어리진 검은 그림자는 그대로 붕 떠서 어디론가 날아가려했다. 그 순간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날아와 사령을 퍽 꿰뚫었다. “하, 유령은 무서워도 남의 몸에 숨어서 입을 놀리는 비열한 그림자 따위를 그냥 보낼 순 없지.” 어느 틈에 품에서 마도서를 꺼내 펼쳐 든 바이칼의 일격이었다. 마력에 감싸인 마도서에서 웅 하며 화살이 몇 개 더 형성되었다. 파팍. 화살에 벌집처럼 꿰뚫린 검은 덩어리는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스르륵 기화해 버렸다. 남은 건 정신을 잃은 이름 모를 소녀와 주변에 몰려든 다른 학생들의 시선뿐이었다. 소녀는 즉시 학생부에서 압송해 갔다. 조사를 한다고 데려가긴 했으나 쥬다스 일행은 아마 그녀로부터 크게 건질 내용은 없을 것이라 짐작했다. 대신 지켜보던 증인이 많았기에 이를 ‘사령’의 소행이라 확증할 수는 있었다. 사령을 부린 술사가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루바흐에 금지된 사령술이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겁니까?” 바이칼이 불편한 얼굴로 운을 떼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짓을.”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닙니까…….” 실제로 쥬다스는 현재 천하태평 했다. 그는 오히려 이번 습격을 기회로 여기고 있기까지 했다. 무엇이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다. 이 일은 현생의 생모인 하윤 리를 죽음까지 몰고 갔던 술법과 매우 흡사했다. 황후는 중대한 실수를 두 가지나 범했다. 첫째는 자신을 너무 믿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자리와 3황자를 지지하는 권속이 지닌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이를 믿고 사령술에 손을 대었다. 제국의 황후가 금지된 술법을 익혔으리라곤 아무도 의심하지 못했다. 그리고 들키지 않을 자신 역시 충만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1황자를 그저 ‘쥬다스’로만 본 것이 그녀의 실수였다. 그는 더 이상 어리고 순진한 12살 소년이 아니었다. 현생의 자아는 이미 5년 전 그날 죽었다. ‘이그레트’라는 전생의 자아가 눈을 뜬 순간 1황자는 사령술 따위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실수들을 토대로 황후가 보낸 메시지는 간단했다. ‘경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어미와 같은 꼴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황태자 즉위를 물리라는 경고였다. 물론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상관없이 황후는 1황자라는 싹을 뿌리째 뽑아버리려 할 것이다. 쥬다스는 그 경고에 겁을 집어먹거나 충격을 받는 대신 그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이대로라면 다른 아이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구나.’ 그는 일정을 좀 앞당겨 황궁으로 이동할 필요를 느꼈다. 권력의 중심에 선 영악한 여인이었으나 아직 불혹도 넘지 않은 젊은 황후가 부리는 간교 따위는 그에게 있어 어린애 장난과도 같았다. 속으로 간단히 상황을 정리한 쥬다스가 아이들을 다독여 주었다. “사령은 인간의 약한 마음에 파고들어 좀먹는 벌레와 같단다. 이는 정령의 힘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내겐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해. 그러니 내 걱정일랑 말고 이에 먹히지 않도록 마음을 굳건히 하려무나.” “……그렇지만.” 그들은 아직 설마하니 황후가 사령술과 관련되어 있으리란 생각까진 하지 못하고 있었다. 흉계를 꾸민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데다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사령을 다룬다 하니 주변이 온통 적으로 보일 지경이었다. 바이칼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바이칼, 크리스티나, 그리고 에단.” 문득 쥬다스가 그들을 하나하나 부드럽게 호명하며 눈을 맞추었다. “너희를 믿는다.” “……!” 별거 아닌 듯 흘러나온 한마디였지만 듣는 이들의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웃고 있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굳어 있지도 않은 편안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희도 나를 믿어주지 않겠느냐.” “……믿고 있습니다.” 에단이 철컥 검집을 심장에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하십니까.” “……다녀오십시오.” 바이칼이 씩 웃으며 답했고 크리스티나 역시 눈을 살짝 감으며 목례했다. 나름의 신뢰가 담긴 표현을 들으며 쥬다스는 그제야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녀오마.”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주말 건강히 잘 보내셨는지요? 이제 월요일이 다시 돌아왔네요. 독자님들 모두 힘차게 한 주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시험보시는 분들 좋은 컨디션으로 잘 치르고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화에 언급했던 로판은 많은 분들 예상대로 구들이 맞습니다.ㅎ ...이것은 팬밍아웃?(...) 사실 저는 판타지, 무협 뿐 아니라 로판 장르도 무척 좋아합니다. 영지, 성장, 조직물도 좋아하고... 단, 현대나 과학에 기반을 둔 장르는 조금 읽기 힘들어하는 편입니다.ㅎ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참, 지난 편 '미생물'(...) 및 여러가지 비문 지적 감사드립니다. 부, 부끄럽네요, 아하하;; 덕분에 잘 수정했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6 / 0240 ---------------------------------------------- 9장. 시험 아직 즉위식까지는 여유가 며칠 있었지만 그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정을 조금 앞당겼다. 대신 루바흐를 떠날 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으음,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스승님.” “아니요! 반드시 이래야겠습니다. 어찌 그 피도 눈물도 없…… 크흠흠, 드넓은 황궁에 홀로 보낸단 말입니까. 여하튼 마다하지 말아주시지요, 전하.” 방학을 맞아 덩달아 교사의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콜이 용케 소식을 듣고 제 발로 찾아온 것이다. 콜은 황실 소속 정령술사였던 만큼 황궁이 얼마만큼 더럽고 치열한 암투가 오가는 장소인지를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제 스승인 ‘이그레트’가 암투 따위에 맥없이 당하리란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콜은 과거 눈앞에서 피 흘리던 스승의 표정을 기억했다. 그때 바닥을 적신 핏물보다 더 콜을 떨게 했던 건 바로 그 표정이었다. ‘같은 상처를 드릴 순 없는 노릇이니.’ 콜이 걱정하는 건 정신적인 부분이었다. 세간에 현자라 알려진 이그레트였으나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닌 인간관계와 심리 측면에선 놀라울 만큼 미숙했다. 누구보다 강한 사내라 한들 심적으로 입는 상처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상황은 달라졌지만 이번에야말로 콜은 자신의 스승을 지켜 내리라 결심했다. 그는 황실 소속 정령술사였던 신분을 들어 황자의 호위 격으로 입궁이 가능했다. 강력한 의지를 피력하는 콜의 생떼 아닌 생떼에 쥬다스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헛헛헛. 믿어주십시오. 꼭 스…… 아니, 전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 일흔을 바라보는 제자의 호언장담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진 그는 그저 작게 한숨을 뱉을 뿐이었다. 즉위식을 위해 가는 길인 만큼 쥬다스의 복장은 교복이 아니었다. 그는 황자의 신분에 걸맞은 흰색 예복을 걸쳤다. 황실의 문장이 금실로 수놓인 의상은 품이 넓고 가벼워 작은 움직임에도 새의 깃털처럼 팔락였다. “그럼.” 포탈의 검은 문이 열렸다. 쥬다스는 콜과 함께 포탈을 타고 우선 교황청으로 이동했다. 즉위식에 임하기 전 몸과 영혼을 정갈히 씻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미리 연락한 것도 아닌데 교황청 포탈 입구에는 성녀 위그드라실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수호견 헤브니시우스가 엎드려 있었다. 헤브니시우스는 푸른 늑대의 모습으로 실체화한 루니가 고작 젖먹이 강아지로 보일 정도로 몸집이 컸다. 수호견이 몸을 일으키자 성녀가 부드럽게 인사를 건넸다. “오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초점을 잃은 하늘색 눈이 정확히 쥬다스에게로 방향을 돌렸다. 보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쥬다스는 목례하며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네, 나의 벗께서 언제 오실까 기다리느라 조금 고되긴 하였지만요.” 쿡쿡 웃으며 답하는 위그드라실을 보며 쥬다스의 곁에 있던 콜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인간과 다른 수명, 다른 능력을 타고나 다른 삶을 살아가는 성녀 위그드라실이 누군가에게 ‘벗’이라 칭하는 경우는 그가 알기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위그드라실은 포탈 관리실에서 나와 그들을 중앙 성전으로 데려갔다. 교황청 중앙에 위치한 이 성전은 고위 사제가 아니면 출입이 금지되어 있을 정도로 엄숙한 장소였다. 성서의 장면들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높은 천장, 벽을 따라 죽 늘어선 작은 촛불들이 성전을 장식하고 있었다. 고난과 박해를 상징하는 가시덤불이 붉은빛 크로스를 감싸듯 자랐다. 그 바로 밑에 교황이 예물을 올리는 원형 제단이 위치해 있었다. 위그드라실은 그 제단 앞으로 가 텅 비어 있던 성화에 손을 올렸다. 화륵. 그 손길로 인해 신성한 하얀 불꽃이 타올랐다. 성화를 지핀 위그드라실이 돌아서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시력이 없는 텅 빈 하늘색 눈이 허공 어딘가를 훑었다. “이곳 성전 밖을 나가시면 안 됩니다. 성화의 기운을 받으며 세상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셔야 해요. 그래야 내일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시각, 세례 의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신성이 루바르잔 제국의 국교인 이상 황제의 후계라 임명받는 황태자 즉위식에는 정화 세례가 필수 의식이었다. 제국의 차기 태양을 위한 세례였으니 교황청에서도 이를 위해 정성을 다해야 했다. 신성력으로만 힘을 얻어 타오르는 성화는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쌓인 부정을 씻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대신 하룻밤을 꼬박 성화의 열을 쬐며 몸을 단정히 해야 했다. 아침이 되면 신성력이 충만해진 몸으로 정화 세례를 받음으로써 영혼을 씻을 수 있다. 위그드라실의 설명은 거기서 끝났다. “그럼 이만 기도를 올리러 가보겠습니다. 강인한 당신께 축복이 함께하기를.” “고맙습니다, 위그드라실.” 여전히 부드러운 사람, 따뜻한 감사 인사를 들은 성녀가 소리 없이 웃었다. 충실히 곁을 지키는 헤브의 등을 짚고 성전을 나서기 위해 문으로 이동한 그녀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음?” “당신을 찾아온 손님이 한 분 계십니다.” “…….”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그가 오늘 교황청을 방문하게 된 건 즉흥적인 결심이었다. 즉위식 전 한 번은 들러야 하는 장소긴 했지만 당장 오늘일지 일주일 뒷일이 되었을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다. 성녀쯤 되는 신성력을 지녀 어느 정도 혜안이 있다거나 한 게 아니라면 그자는 정말 대책 없이 미리 교황청에 찾아와 막무가내로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때문에 쥬다스는 그 손님이란 게 누구를 뜻하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위그드라실이 성전의 문을 열자 그를 찾아왔다는 작은 손님이 머뭇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성녀는 이에 살짝 고개를 숙이고 성전을 떠났다. “그간 평안히 지냈느냐? 세이지.” “……형님.” 다름 아닌 3황자 세이지였다. 두 황자 간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콜은 쥬다스의 뒤에 선 채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세이지는 경계하는 눈으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늘 아이를 따라다니던 호위는 보이지 않았고 의상도 황궁에서 입던 그대로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정황을 어느 정도 짐작한 쥬다스는 모른 척 물었다. “혼자 온 게냐?” “……어머니께서 아시면…… 허락하지 않으실 게 분명하니까.” 짐작대로였다. 세이지는 황후로부터 허락도 구하지 않고 몰래 포탈을 타고 교황청에 찾아왔다. 대답을 들은 쥬다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을 봤음에도 추궁하지도 외면하지도 않는 배다른 형제의 맑은 금안에 용기를 얻은 세이지가 쭈뼛쭈뼛 그 앞까지 다가왔다. 아직 9살인 세이지는 쥬다스에 비해 확연히 키와 몸집이 작으므로 그를 올려다보아야만 했다. 꿀을 바른 듯 윤기 나는 피부와 잘 관리 받은 붉은 머리카락이 고귀한 신분으로 자라온 아이의 삶을 잘 드러내 주었다. “저, 형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요.” 무턱대고 어미 몰래 홀로 교황청까지 온 아이답게 세이지는 단도직입적으로 화두를 꺼내 들었다. 그러다 쥬다스의 뒤에 서 있는 콜을 힐끗 곁눈질하며 입을 다물었다. 경계하는 시선을 읽어낸 쥬다스가 즉시 콜에 대해 소개했다. “학교 스승이자 호위란다. 내 등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자니 안심하고 이야기해도 괜찮다.” 신뢰가 담긴 어조였다. 그 말을 들은 세이지는 경계하는 눈으로 콜을 몇 번 더 힐끔거렸다. 백발이 성성한 정도는 아니더라도 중후함을 느낄 수 있는 흰머리 가닥과 더불어 가느다란 눈에 모노클을 끼고 있는 콜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인자했다. 평온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콜이었지만 속으로는 감동하여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있었다. ‘등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자!’ 일전 이그레트가 얼마나 쓰라린 배신을 연달아 당해왔었는지 알고 있는 콜로서는 그보다 더 감격스러운 칭찬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울컥 눈물이라도 흘릴 것 같았지만 그간 다져온 연륜으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때문에 겉으로 볼 때엔 그저 입이 무겁고 온화해 보이는 호위일 뿐이었다. 세이지는 경계의 눈길을 거두고 다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형님이 가짜라고 했어요. 만들어진 가짜일 뿐이고 그 안에 사람의 영혼 따위는 없다고요.” 심상치 않은 내용을 접한 콜이 티 내지 않고 속으로 탄식했다. 설령 쥬다스가 진짜로 영혼 없는 인형일 뿐이었다 하더라도 자식에게 그런 식으로 가르쳐서는 안 되었다. 황후는 3황자가 아무 죄책감 없이 자신의 형을 짓밟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건 마치 어린아이에게 칼을 쥐어주고 술래잡기를 시키는 격이었다. “그러니 이번 정화 세례를 받고 나면 숨을 거둘 거라고 했어요. 모든 부정한 것들은 신성한 힘을 견디지 못하고 불타 버릴 테니까.” “내 존재가 부정하니, 불타 사라질 것이라…….” 그 말은 사실이었다. 신의 창조를 벗어난 부정한 존재는 교황의 세례를 받게 되면 그대로 순백의 화염에 휩싸여 한 줌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소멸한다. 그러나 이는 쥬다스가 실제 영혼이 없는 ‘가짜 생명’일 경우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그는 신의 기준에서 부당한 존재가 아니었다. 방법은 조금 비틀어졌으나 온전히 인간의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었다. “사실 전 이미 예전에 형님의 어머니……. 그 일이 있었을 때, 틀림없이 형님이 죽었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형님은, 그때 죽었어야만 했으니까. 그런데…….” 극진한 보살핌에 감싸여, 어머니를 세상의 신처럼 믿고 따르던 순진한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상하잖아. 만들어진 가짜일 뿐이면서, 이미 한번 죽었으면서,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어요? 그건 꼭, 꼭 살아 있는 사람처럼……!” “자, 그래. 세이지, 진정하고 이리 오련. 우리 앉아서 이야기하자꾸나.” 혼란에 휩싸여 소리를 높이던 3황자에게 쥬다스가 한들한들 손짓했다. 그는 성전 안에 마련된 나무의자를 가리켰다. 폭이 넓고 높이가 낮아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편히 몸을 묻을 수 있는 의자였다. 먼저 의자에 앉은 그를 따라 세이지가 네 뼘 정도 거리를 벌려 앉았다. “…….” 나란히 의자에 앉은 두 형제 사이로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흥분이 가라앉으며 세이지는 생전 처음으로 저지른 충동적 행동에 대해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모친에게 돌아가야 하는 게 아닐까 갈등하는 세이지의 귓가로 힘 있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살아 있단다.” 의심과 혼란으로 흔들리는 동색의 눈을 바라보며 쥬다스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지레 놀라 움찔 눈을 감은 세이지는 곧 머리 위로 내려앉은 따뜻한 온기를 느끼고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는 형이 보였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나는, 확실히 살아 있는 사람이야.” “……아…….” 저도 모르게 입을 헤 벌리고 있던 세이지는 움찔 표정을 갈무리했다. “어차피 이리 말해도 직접 믿음을 가지지 않는 이상 소용없겠지. 그게 궁금해서 예까지 온 게냐. 이런, 다들 걱정하겠어.”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이번 ‘정화 세례’때 비참하게 죽을지도 모른다고요. 형님은……!” “…….” 쥬다스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죽을 거다’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 시점에서 이미 세이지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똑똑히 볼 거예요. 내일 정화 세례가 끝나는 시각까지 여기 남을 겁니다. 남아서, 형님의 비보를 직접 황궁에!” “앞으로 아홉 날.” 황태자 즉위식까지 남은 시일이었다. 쥬다스는 단호한 표정으로 아이의 말을 끊었다. 세이지도 그 뜻을 알아들었다. “곧 네가 알고자 하는 진실을 알게 될 게다, 세이지.” 의미심장한 이야기였다. 쥬다스는 잔잔해 보이나 실은 깊고 거대한 파도가 숨어 있는 바다처럼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네가 직접 선택하거라.” “‘선택’……?” 세이지는 멍하니 선택이란 단어를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극진히 떠받들어져 자라온 어린 3황자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기회보다는 그저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걷는 일이 더 익숙했다. 남들, 특히 어머니가 깔아준 붉은 카펫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었다. “다른 누구의 판단이 아니라 바로 너 자신의 판단으로. 혹 어렵겠느냐?” “아뇨. 그런 거쯤,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하면 약속할 수 있겠느냐?” 괜히 욱해서 당차게 대답하던 붉은 머리의 아이가 약속이란 말에 눈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끄덕거렸다. “……할게요, 약속.” 순순히 대답하나 싶던 아이는 다시 빠르게 경계심을 내보이며 덧붙였다. “하, 하지만 형님을 믿는 건 아니에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판단할 겁니다. 혹시라도 질 나쁜 수법이나 꿍꿍이를 보인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허허. 꿍꿍이를 판다면 그거야말로 ‘가짜’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것일 테니 그 또한 증명의 한 방법이 되겠구나.” “형님!” “농이다. 형으로서 비겁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들 말아라.” 두 주먹을 불끈 쥐었던 세이지는 허탈한 얼굴로 자신의 형님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느껴지는 것이라곤 그가 만들어진 인형 따위가 아니라 온전히 살아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강렬한 의심뿐이었다. ‘아니야. 어머니께서 내게 거짓말을 하실 리가 없어.’ 세이지는 우울하게 신발코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미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쥬다스를 만나러 온 자체가 어머니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지만 세이지는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두고 봐. 당신이 가짜라는 증거, 내가 반드시 보고 말겠어!’ 모든 게 아름답게 끝나려면 쥬다스가 거짓말을 하고 있어야만 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있을 정도로 세이지는 영민한 아이였다. 황후는 자애롭고 진실한 어머니이며, 세이지 자신이 그동안 경멸해 온 게 ‘형님’이 아니라 그저 빈껍데기뿐인 호문클루스(Homonculous)고, 그리하여 즉위는커녕 곧 정화 세례를 받고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는 어머니의 말이 들어맞아야만 했다. 그래야지 지금의 그가 누리고 있는 평화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아이는 균형이 유지되길 바랐다. 설령 방금 느낀 따뜻함이 거짓이라도 괜찮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게 가장 이상적인 길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유령의 법칙 : 꼭 제일 겁 많은 사람한테 나타난다. ....는 농담입니다. 지난 화에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달걀귀신(?) 묘사에 놀라신 독자님들이 계셨더군요.ㅠㅠ 죄, 죄송합니다.(꾸벅) 본격 퇴마물 이그레트...(?) ...같지만 이번 챕터도 이리 진행되는 이유가 있습니다.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7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그 대화가 있고 나서 세이지는 장담한 대로 교황청에 남았다. 마치 죄수를 감시하는 간수처럼 아이는 하루 종일 형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황후가 사람을 보낸다면 떼를 써서라도 교황청에 남을 작정을 하고 있던 세이지의 염려와는 다르게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들의 부재를 진즉에 눈치챘을 텐데도 황후는 어둠이 내려 취침할 때가 지나도록 내내 잠잠했다. 그 바람에 세이지는 오히려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어쩌지. 어머니께서 화가 많이 나신 걸까…….’ 하지만 정화 세례의 결과만큼은 꼭 직접 보고 싶었다. 자기 의지로 행한 최초의 일탈은 아이에게 불안과 동시에 심장이 뛰는 긴장감을 함께 가져다주었다. 우리 밖으로 나왔다가 길을 잃은 새끼 양처럼 웅크리고 있던 세이지는 힐끔 쥬다스가 있는 자리를 쳐다보았다. “…….” 신성한 힘으로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앞에 두고, 쥬다스는 제단에 무릎 꿇고 앉아 그 열을 쬐고 있었다.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과 그가 걸친 순백의 의복이 성화의 불길과 어우러져 마치 한 마리 고결한 백로를 보는 듯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 뭐더라, 거룩한?’ 세이지는 순간 그리 생각했다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영혼도 없는 가짜를 보고 거룩하다니, 말도 안 돼! 졸려서 그런 거겠지.’ 이른 아침부터 정화 세례가 예정되어 있는 쥬다스는 밤새 성전 안에서 성화의 기운을 받아야 했다. 그런 그를 감시하겠다고 나선 세이지 역시 성전 안에서 밤을 꼬빡 새울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몰래 황궁을 나온 사실이 걱정되어 두근 반 세근 반 뛰던 심장은 갈수록 상황에 무뎌졌다. 아직 9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답게 세이지는 금방 지쳤다. 궁 안에서처럼 수발을 들어주는 사용인이 없으니 너무나도 불편했다.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의자도 처음에나 견딜 만했지 지금은 웬 야산의 바윗돌마냥 딱딱하고 시렸다. 그런 와중에 몰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이지는 결국 불편한 자세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콜.” “예.” 콜은 작은 부름에도 즉시 응답했다. 몇 시간 동안 성화 앞에 무릎 꿇은 채 미동도 않고 눈을 감고 있던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도 피곤하겠구나.” 쥬다스는 잠든 3황자를 긴 의자에 바로 눕혀주었다. 성전의 의자는 어린아이가 발 뻗고 누워도 자리가 남을 만큼 길었다. 그 위에 자신이 걸치고 있던 숄을 담요처럼 덮어준 그가 미안한 어조로 말했다. “성전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하는 건 나 혼자뿐이야. 그러니 이만 나가서 쉬거라.” “무슨 말씀을 그리 매정하게 하십니까, 스…… 전하. 고작 제 편의를 챙기려 전하를 따라온 게 아님을 아시지 않습니까.” 서운함이 실린 호소를 들은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내 이 아이에게 무슨 화라도 입을 성 보이느냐?” “그래서가 아니오라…….” 콜은 잔주름이 패인 입가에 난처한 웃음을 매달았다. 이는 쥬다스가 루바흐에서 활기차게 퍼덕거리던 아이들을 보며 종종 짓곤 하던 표정과 흡사했다. “후우, 뭔가를 의심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늙으니 없던 겁도 늘어 이러는 편이 편할 뿐입지요.” “원 녀석도.” 두 차례나 사제지간으로 만나 그 연을 이어가게 된 노인과 소년은 동시에 같은 표정으로 픽 웃었다. 아이가 깰까 봐 소리 죽여 웃은 두 사람은 도로 성화 근처로 돌아와 맨바닥에 편하게 앉았다. 그들은 타오르는 하얀 불꽃을 말없이 한참 응시했다. 성화에는 불이 연소하기 위한 땔감도, 무언가를 태울 때 나오는 연기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은쟁반 위에서 마치 그린 듯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성스러운 힘이 담긴 불꽃은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서 뻗어 나온 따뜻한 기운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성화를 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히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가 있었다. 두 사람은 광합성 하는 식물처럼 차분히 성화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콜이 문득 작은 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저대로 두실 생각이십니까?” 쥬다스는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성화에 눈을 고정시켰다. “전하께서 하고자 하는 일에 가장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아이입니다.” “…….” “아무리 어려도, 그곳에선 ‘적’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스승에게선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콜은 대답을 듣길 포기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스승은 겉모습은 어려졌어도 속은 옛날 그대로였다. 여전함을 반가이 여겨야 할지 아니면 안타까워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 오래 서 있느라 무리했던 다리 근육을 주먹으로 툭툭 풀어주던 그에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콜.” 고집스레 성화에 꽂혀 있던 시선이 방향을 돌려 콜을 똑바로 향했다. “저 아이는 적이 아니라 내 아우란다.” “……전하.” “영특한 아이이니 곧 스스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알아차릴 게다. 그 선택에 따라 어쩌면 네 말대로 적이 될 수도 있겠으나.” 무작정 현생의 핏줄이라 감싸려는 건 아니다. 그에겐 어차피 정을 느낄 가족이 없었다.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그는 가족의 사랑이란 걸 배우지 못했다. 그랬기에 쥬다스는 본 적 없는 사랑을 동경하기보다는, 아이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믿고자 했다. “아직은 구르는 주사위며 파종하지 않은 밭이니, 깊은 생각일랑 잠시 내려놓고서 지켜보자꾸나.” 여전히 걱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었으나 콜은 그 말에 공손히 알겠노라고 답했다. 쥬다스의 말대로 세이지는 아직 아무것도 스스로 결정한 게 없는 아이였다. 전 황후를 죽이고 지금도 호시탐탐 쥬다스의 목을 노리고 있는 건 현 황후였지 그녀의 아들인 세이지가 아니다. 지금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해 제대로 알고자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 뿐 다른 목적은 없었다. 지금 성전 안 불편한 의자에 누워 잠든 3황자 세이지는 그저 평범한 9살 소년이었다. 단순히 나쁜 짓을 저지를 수 있을 법한 위치에 있다 해서 당장 적이라 단정 짓는 건 어른의 횡포이자 일종의 낙인 찍기였다. 그 뜻은 알았지만 콜은 못내 찜찜한 마음으로 3황자가 누워 있는 의자를 돌아보았다. ‘과연 저 아이의 마음에 야욕이 없을까. 제 어미와 어미가 가르친 모든 진리가 카드로 쌓은 성처럼 무너질 텐데. ……진정 저 아이가 과거를 끊어내고 진실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콜은 그간 황실 소속 정령술사로 살아오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겪었다. 그가 쌓아온 연륜에는 사람의 본성에 대한 시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가 알기로 나이를 먹고 인간의 더러운 측면을 수없이 마주하는 데도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건 오직 단 한 명뿐이었다. ‘……그간 제가 세상 때에 너무 물든 탓일는지요. 스승님, 저는 그리 공평하게 생각하질 못하겠습니다.’ 모든 사람은 똑같지 않다. 사람은 타고난 본성이 다르며 그를 양육한 환경에 따라서도 성질이 달라진다. 아이를 수태하여 낳은 모체나 자라난 환경을 보았을 때 3황자는 그리 긍정적인 가능성을 품은 인물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은…… 스승님 같지 않습니다.’ 차마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못한 푸념이 뜨거운 스프처럼 목구멍을 홧홧하게 데웠다. 콜은 이를 토해내는 대신 그저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스승이 직접 경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대신 경계하면 되었다. 다시금 자신의 할 일을 되새긴 콜이 눈을 떠 성화를 바라보았다. 하얗게 타오르는 불꽃 너머로 곤히 잠든 3황자 세이지가 보였다. 각자의 생각과 목적을 품은 채 교황청에서의 밤이 아주 천천히 지났다. 다음 날 이른 새벽녘, 여름이라 일찍 동이 트기 시작하는 탓에 정화 세례가 바쁘게 준비되었다. 막 떠오른 태양의 순결한 햇살과 밤사이 내린 이슬을 모아 만든 성수가 의식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화 세례는 성하께서 직접 주관하실 것이며,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세례자를 제외한 그 누구도 성전 안에 걸음해선 안 됩니다.” 성녀와 그녀의 수호견 헤브니시우스가 성전 문 앞을 지켰다. 이때엔 밤사이 쥬다스와 함께 성전에 남았던 콜과 세이지도 밖으로 나와 기다려야만 했다. 곧 교황이 도착해 성전 안으로 들어갔고, 문은 다시금 굳건히 닫혔다. 세이지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몰랐지만 긴장감에 손바닥 안으로 땀이 슬었다. 정화를 마치고 다시 저 문이 열릴 때에 자신이 믿어야 할 세계가 정해진다. 세이지는 지금이라도 불쑥 뛰어 들어가 세례를 중단시키고픈 충동과 그 끝을 보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바람 앞 등불처럼 흔들렸다. 그러다 문득 편안한 얼굴로 1황자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콜에게 시선이 미쳤다. 세이지는 그를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루바흐의 교사이자 황자의 호위를 자처한 자. 나이는 중년과 노년 사이로 보였으며 검, 마도서를 모두 지니고 있지 않으니 특별한 이능력자임이 분명했다. 세이지가 쳐다보든 말든 콜은 주인을 기다리는 충견마냥 우뚝 서서 성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형님의 호위라 하였지?” “그렇습니다.” 콜은 갑작스레 말을 걸어온 어린 3황자에게 충실히 대답했다. “이름이?” “코르토반 옌이라 합니다.” “‘옌’? 옌의 가주라면 들어본 적 있는데. 아! 그럼 설마 네가 그 유명한 황실 정령술사란 말이야?” “소인, 3황자 전하께오서 알고 계신 바와 같은지는 모르겠사오나, 옌가의 가주이자 정령술사가 맞습니다.” 콜의 차분한 대답에 세이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코르토반 옌은 단순히 자질이 뛰어난 정령술사가 아니었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그레트’의 유일한 제자이자 불과 바람 듀얼 속성 최상급 정령을 수족처럼 부리는 강자! 지금은 나이가 들어 은퇴했다고는 하지만 황실 소속 정령술사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긴 위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황자라 한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런 자가 한낱 호위 임무를 자처하여 저리 서 있다니 세이지로서는 도통 그 내막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너…… 음, 자네는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어물쩍 호칭을 바꿔 묻는 세이지를 보며 콜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1황자 전하를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 “그걸 물은 게 아니야. 그러니까 왜.” “…….” “아냐, 질문을 바꿔야겠다. 형님을 지키고 싶다면 왜 이번 정화 세례를 막지 않았지?” 세이지는 답답한 투로 다시 물었다. 여기엔 미미한 원망도 함께 스며 있었다. “막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네는 두렵지도 않아?” “……3황자 전하, 외람되오나 소인이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여전히 굳게 닫혀 있는 성전 문을 한 번 쳐다본 콜이 3황자를 향해 돌아섰다. 세이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질문이 이어졌다. “이곳 교황청에 무엇을 보시기 위해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히…….” 당당히 답하려던 세이지는 그만 할 말을 잊고 주춤거렸다. 처음 황성을 몰래 떠날 때만 해도 가짜의 죽음을 확인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만난 형은 세이지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인간다웠고, 화를 냈던 이전과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로 그를 환영해 주었다. 심지어 느긋하고 차분한 눈빛에 어울리지 않게 농담도 할 줄 알았다. 그런 존재가 죽기를 바란다는 말은 9살 세이지에게 너무 끔찍하게 다가왔다. 차마 소기의 목적을 답으로 내놓지 못한 3황자는 이를 조금 수정하여 내뱉었다. “저 문이 열리는 걸 보기 위해서다.” 성전 문을 가리키고 있는 작은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었다.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한 3황자의 내적 갈등을 눈치챈 콜은 그저 표면적인 미소를 띠울 뿐이었다. ‘그렇군요’라는 중얼거림이 작게 흘러나왔다. “1황자께서 정화 세례를 무사히 받고 나오신다면 그 뒤는 어쩌실 것인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다!” “가능성이 없다면 왜 여기에 직접 나와 계신 겁니까?” “그, 그건.” “소인은 3황자 전하께서 ‘그럴 수도 있다’라고 여겼기 때문에 나오셨다 생각했습니다만.” “…….” 태연한 얼굴로 냉철한 현실을 일깨워 주는 콜을 보며 세이지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문이 열리면 좋든 싫든 마주칠 수밖에 없겠지요. 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여 주지 않으며, 듣고 싶은 것만 들려주지 않습니다.” 그의 말은 가시처럼 세이지의 가슴을 찔렀다. 그가 한 마디 한 마디 이어갈 때마다 따끔하고 알 수 없는 통증이 느껴졌다. “정녕 진실을 알고자 각오하셨다면 그 각오에 알맞은 용기도 함께 품으셔야 합니다.” “용기…… 라고?” “예.” 그제야 세이지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통증과 떨림의 정체를 직면했다. 이는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바로 대루바르잔의 황자 전하께오서 하실 선택의 무게입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은 조금 늦어졌네요.ㅎㅎ; 설마 기다리신 분은 없...으시겠지...(...)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정주행선언(??) 등 보내주시는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내일 이 시간....아니, 오늘은 좀 늦었고 12시 정각에(..) 다시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8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덜컹. 때마침 성전의 거대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문으로 향했다. 빨리 확인하고픈 마음에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세이지의 앞을 성녀 위그드라실이 막아섰다. “이 이상 함부로 가까이 가실 수 없습니다.” “크르릉.” 세이지는 수호견 헤브의 커다란 송곳니를 보고 멈추었다. 대신 자리에서 까치발을 들어가며 성전 안을 들여다보려 애썼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붉은 예복을 갖춰 입은 교황이 천천히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교황은 정화 세례가 끝날 때까지 문을 지키던 성녀에게 무언가 작게 지시했다. 지시를 받은 성녀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고개를 끄덕이자 교황은 다른 고위 사제들에게 둘러싸여 곧장 자리를 떠났다. “형님은요?” 그때까지도 쥬다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이지가 성녀를 다그쳐 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기다리란 말뿐이었다. “기다리라니요. 대체 뭘 기다리란 말입니까! 의식이 끝났는데 형님은 왜 나오질 않죠?” “이 또한 하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 역시.” 털썩. 지레짐작한 세이지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무릎 꿇고 말았다. 최악이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어머니가 말한 대로 되었다는 기쁨보다는 무언가 잘못된 것 같다는 좌절감이 더욱 강하게 들었다. 한 칸씩 밀린 단추를 발견한 양 심기가 불편했다. ‘……나,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지.’ 바랐던 결과를 손에 쥐었는데도 만족할 수 없다. 자신이 품은 모순적인 심리에 세이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냐, 이런 걸 바란 건 아니었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탁한 금안 앞으로 물기가 방울방울 모여들었다. 그러던 찰나, 아이의 곁을 지나간 콜이 일상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오냐, 밖에 서서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허허, 간만에 그간 잊고 있던 기도를 드렸지요. 그 후엔 3황자 전하와 약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세이지와?” 잠깐 새벽 기도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멀쩡히 나누는 대화 소리에 세이지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황자로서의 품위도 잊고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있던 세이지를 가만 바라보던 맑은 금안이 곧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찌 그러고 있는 게냐, 세이지.” “……형님?” 고였던 눈물 한 방울이 스륵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세이지는 황급히 팔뚝으로 볼을 닦았다. 슬퍼서가 아니라 놀란 마음에 눈물이 났다. 말을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쥬다스였다. 정화 세례를 받은 직후였기에 그의 몸에서는 은은한 광채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몸속을 작은 전구들이 밝히고 있기라도 하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고고한 황금빛이 반짝였다. “사람은 누구나 영혼의 색을 가지고 있답니다. 정화 세례를 받고 난 직후엔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깨끗한 상태가 되기 때문에, 잠시 동안 이를 보통 사람의 눈으로도 식별할 수 있게 된다고 해요.” “위그드라실.” 쥬다스의 부름에 위그드라실은 작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색은 어떤가요?” 성녀는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었으므로 쥬다스가 가진 영혼의 색을 몹시 궁금해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쥔 채로 대답을 기다리던 위그드라실의 귓가에 아이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금색…….” “금색, 인가요?” 세이지가 멍한 얼굴로 일어서 있었다. 아이는 바닥에 쓸려 더러워진 무릎을 털어낼 생각도 않고 되물었다. “맞아요, 루바르잔 황가의 상징인 금빛. 저게 형님이 지닌 영혼의 색깔이라고요?” “황금은 순수와 고귀, 또 지혜와 자애를 상징하는 색. 다른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하고도 무결한 빛일지니.” 성녀 위그드라실의 축복이 노래하듯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귓가로 내려앉았다. “고난이 수초에 몸을 숨긴 물뱀처럼 그대를 찾아올지라 하더라도 이에 결코 굴복하지 않으리라.” 멍하니 이를 듣고 있던 세이지는 쥬다스에게 다가가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아이의 작은 손이 옷깃을 꾹 붙들었다. “……살아 있잖아.” “그래.” “정화 세례를 받고도 살았어요, 형님은.” “그랬지.” 쥬다스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교황이 직접 주관한 정화 세례였다. 이를 의심한다는 건 교황을 의심한다는 뜻이며 곧 신성에 대한 모독으로 이어졌다. 그랬기에 세례 과정에 관해서는 추호도 의심할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쥬다스의 몸을 가득 채운 황금색 광채가 그 자체로 증명이 되었다. 극상으로 순도 높은 신성력이 그를 정화했다. 부정한 것은 씻기고 신성만이 몸과 영혼에 흐르고 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엄숙함이 그에게 있었다. ‘진실이란 그런 것입니다.’ 조금 전 콜이 했던 이야기가 세이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형님이 옳았어요. 형님은 정말 살아 있는 사람이고, 가짜 따위가 아니었어.” 세이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머니는 왜. 왜 내게 거짓을…….” ‘살아서 다행이다’라고 느낀 순간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막혀왔다. 생각만으로도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세이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을 다물었다. “오늘 네가 알고자 한 진실을 하나 알게 되었구나.” “…….” “네 잘못이 아니다.” 세이지의 눈이 왈칵 일그러졌다. ‘이런 때엔 어떻게 해야.’ 그는 루바르잔 제국의 황자로 태어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서랍 깊은 곳에 보관해 둔 옥합처럼 귀히 여겨졌고 황궁 안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선 교육받은 적 없었다. “모르겠어요. 나, 내가 형님께 심한 말을 한 거네요. 그렇죠?” “그럴지도 모르지.” “형님은 내가 밉지도 않아요?” “이런, 미워해야 하는 게냐.” 웃음기 실린 대답을 들은 세이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같으면 미울 겁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화날 거예요.” “네게 억울하지도 분하지도 화가 나지도 않는단다.” “왜죠?” 이유를 묻는 아이에게 쥬다스는 담담한 어조로 답했다. “마른 사람에게 뚱뚱함을 탓하고 부자에게 가난을 탓한들 화가 나겠느냐? 마찬가지로 진실이 아닌 일에 굳이 화를 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란다.” 세이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입을 다문 아이를 따라 쥬다스도 억지로 말을 요구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정화 세례를 받고 은은히 빛을 발하던 육체는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본래대로 돌아왔다. 의식을 치렀음을 증명하는 교황청의 인이 황궁으로 발송되어졌고, 쥬다스는 하루 동안 편히 쉴 수 있도록 방을 안내 받았다. 콜은 호위를 위해 쥬다스와 같은 방에 머물렀다. 내내 혼란스러운 얼굴로 상념에 빠져 있던 세이지는 말없이 옆방으로 가 틀어박혔다. 취침하기엔 이른 시각이었지만 밤새 성화의 기운을 쬐느라 찬 바닥에 무릎 꿇고 있기도 했고 아침에 받은 정화 세례 탓에 온몸이 노곤했던 쥬다스는 저녁도 먹지 않고 단잠을 청했다. 스승이 푹 쉴 수 있도록 불을 꺼준 콜도 조용히 간이침대에 몸을 뉘였다. 그러나 콜은 잠에 빠져들지 않았다. 최상급 정령을 2속성이나 다루는 술사답게 그는 정신력을 집중하여 수마에 저항하고 혹시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콜은 황실의 권력 투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한평생 실감해 온 사람이었다. 황태자 즉위식을 코앞에 둔 이상 교황청이라 해서 안심할 수 없다. 그리고 그의 예민한 경계망에 음습한 그림자가 하나 걸려들었다. 「코르토반, ‘살의’를 품은 자가 근처에.」 최상의 힘을 지닌 바람의 정령이 그에게 위험을 알렸다. 자리에 누워 있던 콜이 스륵 가느다란 실눈을 떴다. 주인을 지키는 호위가 이미 침입을 알아챈 줄도 모르고 암살자는 때맞춰 습격을 시도했다. 검은 복면으로 얼굴을 가려 눈만 드러낸 암살자가 품에서 마력이 집결된 알약을 꺼내 잇새에 물고 으득 깨물었다. 슈우욱! 순식간에 암살자의 몸이 손바닥만 한 나방으로 탈바꿈되었다. 트랜스포메이션(Transformation), 즉 일종의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한 ‘변신술’이었다. 알약마다 지정된 모습으로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지속 시간은 약 5분에서 최대 10분 사이로 짧다. 고위 마법사나 특출한 감을 가진 존재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인 마법이었지만 지금처럼 어딘가에 몰래 숨어들어가기엔 안성맞춤인 아티팩트였다. 팔랑팔랑. 현란한 노란빛에 흑색 점이 두드러진 독나방으로 변신한 암살자는 미리 틈을 만들어 둔 창문을 통해 1황자의 방으로 숨어들어 갔다. 나방의 날갯짓 소리는 밤하늘을 떠가는 먹구름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팔랑거리며 방 안을 가로지른 나방이 마침내 곤히 잠든 쥬다스를 발견해 냈다. 소리 없이 주변을 한 바퀴 맴돈 나방이 쥬다스의 이마로 내려앉으려던 순간이었다. 화륵. 느닷없이 허공에 생성된 불덩어리가 나방을 집어삼켰다. 뜨거운 불길이 몸을 태우자 나방으로 변신했던 암살자는 마법이 풀려 본체로 돌아오고 말았다. “크아악!” 본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어도 몸 여기저기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화기에 몸부림치는 암살자의 뒤로 손을 뻗은 콜이 서 있었다. “지금 감히, 누굴 해하려 한 겝니까.” “……!” 날카로운 황색 바람이 그의 손끝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말투는 점잖았지만 그 안에 실린 노기가 매서웠다. ‘호위가 있다고 했지. 젠장! 하필이면 정령술사였나.’ 암살자는 고통을 참으며 콜을 노려보다 품에서 독침을 여러 개 꺼내 손가락 사이에 쥐었다. 비록 첫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긴 했으나 그는 손속이 빠르고 정확한 전문 살수였다. 목숨을 내놓고서라도 임무를 성공시켜야만 했다. 벌컥. “형님? 방금 여기서 비명 소리가……!” 때마침 옆방에서 소란을 들은 3황자가 뛰어 들어왔다. 몸을 태우는 고통 속에서도 눈에 핏줄이 서도록 정신을 집중한 살수가 휙 독침을 세 방향으로 엇갈리게 날렸다. 하나는 콜을 향한 방향이었고 다른 하나는 3황자 세이지에게로 날아갔다. 그리고 마지막 독침은 본래 목표인 1황자를 노렸다. 우뚝. 그러나 그중 어느 하나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전부 허공에 멈추었다. 콜이 다루는 황색이 아닌 아름다운 녹색의 바람이 독침들을 감싸고 있었다. “전하, 깨어 계셨습니까.” “…….” 어느 틈엔가 눈을 뜬 1황자가 독침을 가만 바라보다 암살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맑은 금안과 마주한 즉시 암살자는 자신의 생이 여기서 끝났음을 직감했다. 우웅. 고작 최상급 따위의 힘이 아니다. 들끓는 용암처럼 분노한 불의 기운이 삽시간에 한 장소로 모여들었다. 바람이 가득 찬 풍선처럼 팽팽해진 기운을 느낀 암살자가 마지막 순간 3황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눈앞에 날아든 독침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세이지는 문득 암살자의 눈이 낯이 익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라…….” 세이지는 합 입을 다물었다. ‘라한 경?’ 분명 아는 인물이었다. 진짜 이름은 뭔지 몰랐지만 황후가 ‘라한’이라 부르는 걸 들은 적 있었다. 세이지가 아주 어릴 때부터 황후인 어머니와 함께 있으면 종종 나타나 짧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사라지곤 했던 그림자 같은 자였다. 직접 말을 나누어본 적은 없었고, 다른 사람들도 그의 존재를 모르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사람이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지난화 지각때 기다려주신 독자님들이 많이 계셨더군요 ㄷㄷ 헙. 감사하고 또 죄송합니다. 지각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주행 달리시는 독자님들도 종종 계시던데 반갑습니다.ㅎ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79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그런 그가 3황자에게까지 독침을 날린 이유는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 살짝 비껴서 날리기도 했지만 어차피 최상급 정령술사가 곁에 있는 이상 독침 따위에 순순히 당하지 않으리란 생각도 한몫했다. 결과적으로는 쥬다스의 개입이 있었지만 어쨌든 라한은 자신이 모시는 주인에게 의심의 화살이 돌아가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 셈이었다. 화악. 순간 눈앞이 번쩍했다. 단순히 ‘불’이라는 속성으로 칭하기 어려울 정도의 어마어마한 화기가 침입자를 한순간에 태워 버렸다. 마치 전쟁용으로 압축된 고성능 마력포에 의해 존재 자체가 지워진 느낌이었다. “…….” 암살자의 흔적이라곤 바닥에 떨어진 독침 3개뿐이었다. 같은 정령술사로서 왕이 다루는 불의 기운에 전율하면서도 스승에 대한 걱정이 앞선 콜은 황급히 쥬다스에게로 다가갔다.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래, 도와주어 고맙구나.” “험, 당연한 것을요.” 손을 내저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에 기쁨을 드러내는 콜이었다. 나이가 들었어도 스승의 칭찬에 반색하는 것은 예전과 같았다. 그런 제자의 등을 두들겨 준 쥬다스가 여전히 방문 앞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세이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대충 아이의 생각이 짐작이 갔지만 그는 모르는 척 말을 붙였다. “세이지, 괜찮은 게냐?” “……아. 네, 괜찮아요. 형님, 무사하신 듯하니 전 그럼 다시 가볼게요. 쉬세요.” 세이지는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머릿속이 터질 것같이 복잡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충격보다는, 그자가 자신이 알던 이였다는 게 훨씬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세이지를 괴롭게 만든 사실은. ‘어머니의 사람이 형님을 죽이려고 했어!’ 라한은 말하자면 황후의 그림자 무사였다. 그리고 축축한 이끼를 닮은 암녹색 눈동자는 틀림없이 그 라한의 것이었다. “……우윽.” 세이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밤새도록 떨림이 멎지 않았다. 동이 트자마자, 세이지는 먼저 첫 포탈을 타고 교황청에서 떠났다. 왔던 것과 마찬가지로 막무가내로 혼자 떠나 버린 세이지에 대해 콜이 보고하자 쥬다스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그들도 더 이상 교황청에 머물 이유는 없었기에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포탈 관리실에 도착하자 성녀 위그드라실이 헤브와 함께 그들을 배웅하러 나와 있었다. “이제 황궁으로 가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간 편의를 보아주어 고맙습니다, 위그드라실.” “후후, 다시 만나 반가웠어요.” 성녀는 쥬다스의 앞에서만큼은 완전히 평범한 소녀처럼 보였다. 방긋이 웃는 위그드라실에게 쥬다스도 역시 따뜻하게 미소 지어주었다. 두 사람이 훈훈하게 인사를 나누던 사이, 정령들은 나름대로 그를 수호하며 움직이고 있었다. 「우앙? 이게 뭐다요?」 문득 토니가 쥬다스의 머리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포탈기기에 박혀 있는 정령석 앞으로 날아간 토니가 의문스레 고개를 기울이자 그 곁으로 유니가 포로록 날아들었다. 「왜 그러는데?」 「돌에 막 금이 가 있는 거다요! 여기 여기.」 「응? 진짜네?」 정령석에는 평범한 인간이 육안으로 알아채기 어려운 미세한 흠집이 나 있었다. 그 흠집은 사실 포탈의 목적지를 강제로 바꾸어버리는 정교한 마법 주문이었다. 누군가 쥬다스가 황궁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출발 직전 교묘하게 손을 써놓은 함정이었으나 정령석도 돌의 일종. 땅 속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관장하는 정령왕 토니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고쳐 놔야겠다요!」 쥬다스의 허가가 내려지기가 무섭게 정령석은 토니의 힘에 의해 말끔하게 복구되었다.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한 작은 해프닝이었지만 본래대로라면 포탈을 타는 즉시 오지로 떨어져 즉사하거나 즉위식 날짜가 지나도록 방황하게 되었을 흉악한 함정이었다. 말끔히 고쳐진 포탈을 타고 쥬다스와 콜은 황궁으로 이동했다. 황태자 즉위식까지 앞으로 7일. 1황자 쥬다스가 황궁의 땅을 다시금 밟았다. 목숨을 건 게임은 이미 시작되었다. * * * 루바르잔 제국의 황후, 사야 D.캐슬롯은 현재 몹시 애가 달아 있었다. 작금의 사태를 제외하고선 여태껏 그녀가 직접 손을 쓰는 일 중 성사되지 않은 일이란 없었다. 그녀는 간교했지만 그만큼 영리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으며 눈치가 빨라 남들보다 두셋은 수를 앞서 두었다. 지금 1황자 건만 해도 그랬다. 사야 황후는 쥬다스가 정령술에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실도 알았고 몇 년 전 보았을 때와 달리 힘없는 어린아이가 아니란 사실도 눈치챘다. 그는 지난 귀환 때에 황후에게 숨겨 두었던 발톱을 드러냈다. 생쥐인 줄 알았던 꼬마가 알고 보니 웅크리고 있던 어린 사자였다. 꼴에 위대한 통치자의 피를 이었다는 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쥬다스는 비범한 이능과 지력을 차례차례 선보였다. 독에 잠식되어 가던 생명은 도로 활기를 되찾았고 도리어 그전보다 훨씬 튼튼하고 건장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심지어 그도 모자라 황태자 자리를 놓고서 황후를 도발하기까지 했다. 참으로 발칙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황후는 섣불리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아니, 응하지 않는 척하면서 때를 살폈다. 그간 다리 부러진 병아리처럼 비실비실하여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해 보이던 것과 달리 아직 새끼더라도 맹수의 피를 제대로 이은 작태였다. 그래서 황후는 더욱 신중을 기해 1황자를 압박했다. 경고 차원으로 보낸 사령에 그가 당하지 않으리란 건 이미 알고 있던 일이었으니 당황할 것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1황자가 사령에게 괴이쩍은 방식으로 공격당하고 나면, 적어도 겁을 먹고 주춤거리거나 제 어미의 마지막을 되새기며 분노해 날뛸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1황자는 지나치리만큼 태연했다. 그 뒤로도 그는 비웃기라도 하듯 황후가 놓은 덫을 유유히 밟아 부숴버리고 지나갔다. ‘……어째서?’ 사야 황후는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녀가 알기로 1황자는 연금술이 개입된 부정한 존재가 맞았다. 아들인 세이지에게 했던 ‘가짜’라는 말이 근원 없는 생거짓말은 아니었다. 전 황후인 하윤이 살아 있을 적에 그녀를 겁박한 연금술 자료들은 조작이 아니라 실제로 황비였던 사야가 직접 손에 넣었던 진짜배기였다. 단, 그 출처는 전 황후 하윤 리가 아닌 황제 레위스였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연금술을 사용했든 간에 1황자의 존재 자체는 부정한 것이 틀림없었다. 부정한 방법으로 태어난 육신에 영혼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 아인 정화 세례를 받고 죽었어야 해.’ 하지만 어쩐 일인지 1황자는 아주 멀쩡했다. 게다가 혹시나 하여 붙여 놓은 그림자는 암살에 실패하고 죽어버렸다. 겨우 사람을 매수해 바꿔치기한 포탈 정령석은 발동조차 하지 않았다. 뭐가 이리도 행운유수(行云流水)인지 도무지 그 행보를 막을 방도가 없었다. “마마, 안으로 드시옵소서.” 그래서 일단 황후는 3황자 휘하 귀족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다. 그녀는 검은 베일이 달린 울 모자를 마지막으로 한 번 눌러 가볍게 고정시켰다. 얼굴을 덮은 검은 베일이 그녀의 흔들리던 표정을 가려 주었다. 황후는 우아하게 접선 장소로 들어섰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저택이었지만 회의장에 모인 자들은 전부 3황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며 황후의 손과 발이 되어주던 패들이었다. “그래, 모두 모였는가.” “그것이…….” 빈자리가 꽤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여 있는 귀족들도 썩 표정이 좋지 않았다. 이를 확인한 황후의 표정이 굳었다. “상관없네. 앞으로 나눌 이야기에는 그만한 각오가 된 자들만 있으면 될 일이지.” 황후는 분을 삼키며 담담한 척 이를 넘겼다. 본격적으로 회의가 시작되었으나 모인 이들은 이날따라 말을 아꼈다. 이렇다 할 방안은 내어놓기는커녕 이 귀족들이 정말 3황자를 차기 황제로 지지하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지부진한 태도를 내보였다. 흘러가는 분위기를 귀신같이 눈치챈 황후가 찻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군. 내 분명히 말해두지. 명심하시게, 이대로 1황자를 황태자로 올려선 아니 될 일이야.” “외람되오나…….” 내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한 귀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미 델피아와 헤이가, 두 공작가문에서 1황자에게 후계의 칼을 바치겠노라고 공표했사옵니다. 마마.” “……!” 칼을 바치다. 이는 귀족들이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할 때 사용하는 오래된 표현이었다. 제국의 양대 산맥이 1황자를 차기 군주로 인정하고 후세대의 충성을 맹세했다. 1황자와 어울리는 무리 중에 공작가의 자제들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고작해야 아이들 놀음 정도라 보고 있었다. 하나 무려 가문과 황실이 얽히는 충성이었다. 아직 황태자 즉위식을 마친 것도 아닌 1황자에게 자제들 개인의 선택이 아닌 가문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다니. 어지간한 신의 없이는 이리도 빨리 결정 날 리 없는 사안이었다. “또한 하쉬 백작가를 선두로 중립에 서 있던 자들이 전부 이에 동요하여 황태자 전하를 모시고자 서로 앞다투어 나선다 하니…….” 바로 마르젠의 물밑 작업의 성과였다. 이어지는 보고를 들으며 황후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베일로 가렸게 마련이지 지금 그녀의 표정을 본다면 다들 비웃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후는 자신이 1황자를 너무 얕보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게다가 이능마저도 워낙 뛰어난지라, 마마께서도 손을 못 쓰고 계신 듯 하온데…….” “…….” “이 이상 견제하는 것은 소용이 없질 않나 싶습니다.” “허흠, 흠.”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만 들려왔다. 누구 하나 반대하거나 목청을 높이는 자가 없었다. 암묵적인 동의였다. 황후가 침묵을 지키자 모였던 귀족들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소인은 다른 회의가 잡혀 있어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아, 저도 역시 이후 일정이 있어.” “……그럼 소인도 이만.” 썰물 빠지듯 빠져나가는 귀족들을 바라보는 황후의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녀의 명이라면 구둣발이라도 핥을 것처럼 굴던 치들이 전부 강 건너 불 보듯 태도를 바꾸었다. 그녀는 차기 황제의 모후라는 신분에서 한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했다. 얻을 꿀이 없는 꽃에 머무르는 벌은 없다. 텅 빈 회의실에 홀로 남은 황후의 어깨를 누군가 두들겨 주었다. “다음 기회를 도모하십시오.” “……아버지.” 캐슬롯 후작이었다. 후작은 황후에게 일단 한발 물러설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서두르면 일을 그르치는 법입니다, 마마. 일단 일 보 후퇴하여 후일을 위해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후일이라니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마마.” “아버지!” 황후는 소리 높여 후작의 청을 잘라냈다. “아버지도 보고 들으셨지요. 1황자의 기세가 날로 높아져만 가고 이능마저 강력하니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건해질 뿐입니다. 그 애는 지금 숨겨 두었던 발톱을 하나둘 꺼내 사냥을 하려 들고 있어요. 제 어미와 자신을 궁지로 몰았던 그날을 잊지 않고서……!” “……마마, 소리를 낮추셔야 합니다.” “소리를 낮춘다고 숨겨질 일이겠습니까. 그 아이가 황태자가 된다면 곧바로 제 목을 조이려 들 겁니다. 황위에 오른다면 세이지의 목을 베려하겠지요.” “으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1황자는 전 황후 하윤 리의 죽음과 관련되어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로 둔다면 자칫 현 황후인 사야가 금지된 사령술을 익혔음은 물론 전 황후를 시해한 장본인임이 밝혀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 마마,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판세가 기울었으니 이만 여기서 접고 다시 천천히 판을 벌이도록 해야.” “아뇨, 이 판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놓지 않을 겁니다.” 사야 황후는 독하게 눈을 빛냈다. “내 이 목숨과 설령 더한 것을 걸어서라도.” 후작은 더는 그녀를 만류하지 못했다. 황후는 차갑게 돌아 회의장을 나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프리드가 사기캐인 이유 -> 재료만 준비되어있다면 신체재생가능 및 몇번이든 부활이 가능하다. 말그대로 언데드. (단 재료가 부족하거나 이를 찾아내어 손상시킬 시엔 주술이 실패하여 그냥 죽습니다.) 사족으로, 많은 분들이 예상하신 대로 이그레트를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이 세계관에 없습니다. 어...4:1이라서가 아니라요.... (...) 어쨌든 각자 목적을 달성한 셈입니다. '? 대체 뭐를 달성함?'이라고 물으신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이지만 스포니까 넘어가겠습니다.ㄷㄷ(..코난은 자유..)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참, 어워드투표... 저거 뭔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투표해주신 800분 감사드립니다! 순위목록에서 이그레트보고 놀랐네요 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0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황궁으로 돌아온 황후는 자신의 처소에 들어가 쓰고 있던 검은색 모자며 하얀 장갑 등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철퍽! 고정 핀을 빼어 바닥에 던지자 매혹적인 붉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등 뒤로 흘러내렸다. 황후는 이를 아무렇게나 쓸어 올리며 화장대 앞에 섰다. 서른이 한참 지난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이 거울에 비추어졌다. ‘……이게 나라고? 이렇게 초라한 표정을 한 게?’ 아름답지만 사랑스러운 얼굴은 아니었다. 황후의 표정은 무섭도록 굳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표정으로부터 비참함을 느꼈다. 황후는 충동적으로 손에 잡힌 보석함을 거울에 집어던졌다. 와장창 보석이 쏟아졌다. 그리고 쩍 소리와 함께 거울에 금이 갔다. 깨지진 않았지만 거미줄처럼 금이 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욱 초라했다. “어, 어머니…….” 황후가 천천히 돌아섰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것인지 세이지가 문가에 선 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아아, 세이지. 이리 오세요.” 그녀는 자애롭게 양팔을 벌렸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떨던 세이지는 그제야 안심하고 황후에게로 다가와 안겼다. “교황청엘 다녀왔다지요.” “죄송해요, 어머니. 꼭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생겨서 그만.” 순한 양처럼 안긴 아들을 다독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이 어미는 세이지가 스스로 판단하고 세상을 알아가는 일도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답니다.” 황후는 아들의 일탈 행위를 학습에 필요한 일환이라 재정의했다. 혼이 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따뜻하게 등을 두드려 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세이지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크게 안심했다. ‘그래, 이렇게 자상하신 어머니께서 일부러 내게 거짓을 말하셨을 리는 없어.’ 세이지는 내내 자신을 괴롭히던 상념으로부터 그렇게 회피했다. 그리고 밝은 얼굴로 황후를 향해 말했다. “참! 우리가 형님을 오해하고 있었어요, 어머니.” 움찔. 황후는 아들을 품에서 떼어놓았다. 두 모자는 지척에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머니가 자신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있다 여긴 세이지는 용기를 얻고 계속 말을 이었다. “형님은 정화 세례를 받고도 멀쩡했어요. 아, 영혼의 색도 볼 수 있었는데 맑고 깨끗한 황금색이었어요. 가짜라면 그런 색깔이 나올 리가 없잖아요?” “…….” “그러고 보니 저, 형님께 제대로 사과도 못하고 와 버렸어요. 이제라도 사과하면 받아주실까요?” 아들의 어깨에서 손을 뗀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리워진 그림자에 세이지가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올려다본 순간이었다. “……어머니?” 짜악! 생전 처음 겪어보는 후끈한 통증이 뺨을 달구었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세이지가 멍하니 볼에 손을 올렸다. 손찌검을 당한 자국이 따끔따끔하고 뜨거웠다. “‘오해’? ‘용서’를 구해?” “……!”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요. 세이지, 설마 이 어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인가요?”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황후는 더 이상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대의 어미는 나예요. 지금껏 황자가 안전하게 자라도록 보호해 주고 길을 만들어준 게 이 어미란 말입니다!” 처음으로 듣는 호통이었다. 세이지는 사자 앞에 선 토끼처럼 그 자리에 오도카니 굳어버렸다. “기껏 밖으로 나가 보고 들은 결과가, 고작 그 가짜의 눈속임에 속아 어미를 의심하는 우둔함일 줄이야…….” 황후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좁힌 세이지는 부어오른 뺨을 쓰다듬는 손길에 바들바들 떨었다. “실망입니다.” “어, 어머니. 그런 게 아니에요. 소자는.” 그간 세상의 신이나 다름없던 어머니로부터 실망했단 소릴 들은 세이지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어댔다. “이 어미의 말을 의심하고, 그 가짜를 형으로 인정한다면. 그래, 세이지는 군주의 자리를 넘겨주어도 좋단 뜻인가요?” “잘못했어요. 어머니, 소자가 잘못했습니다.” “착한 아이가 되어야지요, 세이지.” 울음을 터뜨린 아이의 등을 토닥여 준 황후는 곧장 사람을 불렀다. “이 어미가 다시 찾을 때까지 자숙하고 있으세요. 떼를 쓰거나 고집을 부린다면 그땐 정말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네…….” 세이지는 울먹이며 쫓겨나듯 방을 나갔다. 아이가 나간 문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황후는 걸쇠를 걸어 이를 잠가 버렸다. 방의 불을 모조리 꺼버리고 창문에는 커튼을 쳤다. 그렇게 하고 나니 방 안이 캄캄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밖은 아직 노을이 지는 저녁이었지만 그녀는 홀로 미리 어둠 속에 파묻혔다. 커튼 새로 스며들어오는 노을빛에 의지하여 이동한 황후는 화장대 서랍에서 호신용 단도를 찾아 꺼내 들었다. 날카롭게 벼린 날 위로 그녀의 붉은 머리가 비쳐 마치 루비로 만든 칼처럼 보였다. 쿠욱. 황후는 독한 눈빛으로 손잡이가 아닌 칼날을 손아귀에 꽉 쥐었다. 스치기만 해도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날이었으니 단숨에 손바닥이 찢어져 피를 흘렸다. 피 냄새를 맡은 사령들이 스멀스멀 그녀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피 냄새.」 「계약을…….」 「어서 제물을…….」 그워어어. 방 안을 뒤덮은 어둠이 뒤척이며 태풍 오는 날의 바람소리와 비슷한 소음을 일으켰다. 괴이한 소음이 점점 황후에게로 가까워져 왔다. 사령은 정령과 흡사한 존재였지만, 계약자를 아끼고 지키고자 하는 정령과 달리 호시탐탐 그들의 피와 영혼을 노렸다. 사령을 부리는 술사가 잠시라도 정신력이 흐트러지거나 얕보인다면 사령은 망설임 없이 술사를 파고들어 영혼을 뜯어먹는다. 그러나 그녀는 두려움에 떠는 대신 자리에 꼿꼿이 선 채 손바닥을 앞으로 뻗어 피를 바닥에 뚝뚝 떨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먹게 해줘……!」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주변을 빙빙 돌던 사령 하나가 참지 못하고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퍼억! 어디선가 날아온 강한 사기(邪氣)에 사령이 달려들던 자세 그대로 토마토처럼 터져 버렸다. “흐응, 일부러 피를 흘려 나를 불렀나. 어지간히 급했나 보군.” 분명 황후 홀로 있던 방 안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어느 틈에 붉은 눈동자의 사내가 커튼을 쳐놓은 창문에 기대어 서 있었다. “아니면, 잡아먹히는 걸 좋아하는 악취미라도 있었나?” 분명 창문을 전부 닫아두었는데 커튼이 펄럭거렸다. 그 사이로 검은 제복을 입은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의 등 뒤로 검푸른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현존하는 사령술사 중 최강, 최악의 힘을 지닌 제네럴급 술사 프리드였다. “농담 따먹기나 하자고 그댈 부른 게 아닙니다.” “상당히 초조한 모양이야, 황후마마. 엄밀히 따지자면 이거 반칙이라고. 우리 ‘거래’는 지난번에 완전히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지.” 프리드는 큭큭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붉은 안광에 황후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그를 부른 용건을 밝혔다. “사람 하나를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저주를 알려주십시오.” “호오?” “단 한 명이면 됩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가 가진 이능으로도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내게 주세요.” “당돌하군.” 황후의 코앞까지 다가선 프리드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당신에겐.” “말해두지만 지난번처럼 ‘미래의’ 공약 따위는 하등 소용없어.” “……!” “사야 황후, 그건 네게 그럴 만한 가능성이 있을 때나 가능했던 거래지. 지금은 아니잖나?” 황후는 으득 이를 갈았다. 분하지만 사실이었다. 지금 황태자가 될 존재는 3황자가 아닌 1황자였다. 그녀는 더 이상 어떤 부귀영화도 약속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애초에 프리드가 원한 건 그 정도 선이 아니기도 했지만 지금의 황후로선 휘하의 귀족 세력을 붙들 힘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프리드가 현재 황후의 입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구미가 당기는 상품을 내놓아 보라고. 응? 이를테면 영혼이라도 바친다든가.” 재미있다는 듯 내려다보는 뱀 같은 눈동자에 황후는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래요.” “흠?” “제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그걸로 1황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만 있다면.” 생각 외로 즉답하는 황후의 강단에 프리드는 허 하고 숨을 뱉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채 웃음소리로 완성되지 못한 애매한 호흡이 흘러나왔다. ‘루바르잔 황후의 영혼이라.’ “……걸작이로군.” “혹 이로 부족하다면.” “아니, 그걸로 하지.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꽤 재미있게 됐어.” 프리드의 변덕스러운 결단에 황후는 눈을 빛냈다. “그럼 어서 방법을.” “아, 그러지. 그 전에 분명히 해둘까.” 프리드는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기 중에 먹구름 같은 검은 덩어리가 뭉글뭉글 피어났다. 그 덩어리는 이내 하나의 검은 두루마리 형상으로 변했다. 이를 본 황후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저주가 적힌 두루마리를 장난감처럼 만지작거린 프리드가 슥 그녀를 향해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이능의 방해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강력한 저주는 딱 한 가지. 대신 제약이 있다. 대상을 죽이고자 하는 강한 염원과 시전자의 생명력을 담보로 해야만 한다는 것.” “?” 이해하지 못한 황후가 눈을 치뜨자 프리드가 두루마리를 흔들어보였다. “나 참. 뭘 그리 새삼스레 순진한 흉내를 내지? 저주에 실패하면 그 반동을 네가 대신 입는다는 말이야. 즉 그가 죽으면 당신은 사는 거고, 만에 하나 그가 저주를 이겨낸다면 죽는 건 당신이 되는 거지.” “나는 1황자를 죽일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을 달라고 했을 텐데요.” “백퍼센트 성공하는 저주란 없어, 사야 황후. 그런 걸 할 수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 신이겠지.” 프리드의 말은 옳았다. 황후는 더 따지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알기로 사령술 중에 이 이상 효과를 낼 수 있는 저주는 없다. 또한 이 저주에 걸려 살아남은 인간 역시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지.” 황후의 눈앞에 검은색 두루마리가 내밀어졌다. “자, 어쩔 텐가. 왕급 사령의 저주가 기록된 물건이다.” “…….” 영혼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하는 셈이었다. 황후는 프리드를 잠시 노려보다 천천히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황후의 손끝이 두루마리에 닿기 직전, 프리드가 무심한 투로 경고했다. “뭐 나라면 ‘그’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거는 바보짓은 하지 않을 테지만.” “무슨…?” “사야 황후, 너는 결코 그를 이길 수 없을 거다.” 단정하여 얕보는 말에 황후의 손아귀에 콱 힘이 들어갔다. ‘이길 수 없어?’ 숨이 막힐 듯한 분노와 모멸감에 사로잡혀 손을 떠는 황후를 내려다보며 프리드는 즐겁게 웃었다. 꼭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 이그레트를 어느 누가 정면승부로 이긴단 말인가. ‘하지만 유흥정도는 되겠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누구든지 소망이 지나치면 악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났다기 보단 '결국 그렇게 되었다'. ...물론 주관적 이유가 있다한들 그게 옳다는 준거는 되지 못합니다. 악은 악일 뿐. (그런 측면에서 프리드는 명백히 수많은 인명을 자기 필요에 따라 살해한 악인이죠 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 마셜최고 님과 피어나래 님께서 소중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꾸벅) 공지에 추가해두었으니 함께 감상하십시다.ㅎ) (++ 참, 어워드 투표(?)로 보내주신 1654표에도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1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운이 좋다면 죽이진 못하더라도 반쯤 망가뜨리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그 정도 존재가 망가진다면 과연 어찌 될까. 재앙…아니, 세상에 종말이라도 불러올 텐가?’ 상상만 해도 실소가 터져 나왔다. 어떤 결말이 나든 프리드로서는 잃을 것 하나 없는 싸움이었다. 악마같이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깃든 즐거움을 읽어낸 황후가 이를 악물고 두루마리를 낚아챘다. 탁! 검은 두루마리가 그녀의 손에 넘어감에 따라 계약이 성립됐다. 프리드의 그림자에서 사령 릴리스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매끈한 검은 부츠와 딱 달라붙어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가죽옷을 입은 릴리스는 고혹적으로 웃었다. 그녀의 엉덩이 끝에는 끝이 세모꼴로 솟은 검은 꼬리가 길게 늘어져 흔들거렸다. 릴리스는 두 팔을 뻗어 아기처럼 사야 황후에게 안겨들었다. 그리곤 매혹적인 검은 입술로 황후의 이마에 키스했다. 「도장 꽝. 후후훗, 이제 무르기 없기~?」 장난스러운 말과 달리 릴리스가 키스한 이마에는 선명한 표식이 새겨져있었다. 사령과의 계약을 나타내는 8개의 각으로 이루어진 별이었다. 우우웅 별은 물에 녹아드는 독약처럼 황후의 이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눈에 띄지 않아도 독을 부운 물이 독성을 띄게 되듯, 황후 역시 그 영혼에 사령의 표식을 각인하게 되었다. “모처럼 자비를 베풀어 경고해주었는데 들어먹질 않는군.” “기회를 준 것도 당신이죠.” “그도 그렇지. 뭐, 잘해보라고.” 프리드는 영혼을 걸어 얻어낸 검은 두루마리를 펼쳐 저주를 시전하는 황후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 픽 웃고 돌아섰다. ‘그럼… 이그레트님. 당신이 믿음을 준 아이가 얼마나 멋진 선택을 해줄지, 기대해보도록 할까.’ 그는 방문 너머 이 모든 것을 엿듣고 있던 한 존재를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세이지는 스스로 자기 입을 틀어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가기 전, 교황청에서 1황자를 습격했던 암살자에 대해 생각이 미친 세이지는 이를 확인하고자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라한. 어머니의 사람인 라한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교황청에서 1황자암살을 시도하다가 불타 끔찍하게 죽어버린 악인이 정말 그 라한이 맞았을까. 반대쪽 뺨을 맞더라도 어머니로부터 아니라는 대답을 들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진짜 진실이 어찌되었든 간에 어머니의 답이 중요했다. 세이지는 어미로부터 미움 받고 싶지 않았고, 혹 실망한 그녀에게 버려질까 그게 가장 두려웠다. 이제 겨우 ‘진짜’라고 느껴진 배다른 형보단 아직까지 세이지의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건 어머니인 사야 황후였다. 그 단순한 욕심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 덜덜덜 세이지는 비틀거리며 떨리는 발을 천천히 내딛었다. 정신없이 가던 도중 몇 번이고 힘이 풀려 넘어졌다.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황후의 궁에서 멀어지려 발악했다. 지나가던 다른 시녀의 도움으로 자신의 처소까지 무사히 귀환한 세이지는 그대로 침대로 기어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냐.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어머니가, 어머니께서 그럴 리가…….’ 겨우 9살 난 세이지가 받아들이고 견디기엔 너무나도 크고 가혹한 진실이었다. 후끈거리던 볼이 이번엔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갔다. 세이지는 가물어 노랗게 마른 잎사귀처럼 소리 없이 오열했다. 거짓으로 쌓아올린 한 아이의 세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 * * 딸그락! 손에서 미끄러진 포크가 접시 사이를 구르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소스가 튀어 하얀 옷을 붉게 적셨다. 「이그레트? 왜 그래?」 유니가 제일 먼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잠시 멍하니 손을 놓고 있던 쥬다스가 천천히 가슴께를 짚었다. ‘방금 뭔가.’ 순간적이지만 묘한 울렁거림이 가슴을 파고들었었다. 실제적인 타격은 없었으나 어지럼증을 동반한 이상한 심장박동이었다. 다시 정상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느끼며 생각에 잠기려는 그를 콜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전하? 혹 어디 편찮은 곳이라도?” “…아니. 잠시 어지러웠을 뿐이야.” 소스가 튀어 더럽혀진 옷을 닦아주기 위해 다가온 시종 로한을 물린 쥬다스가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지금은 황궁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갖는 저녁식사시간이었다. 다른 객은 없었고 호위로 따라온 콜만이 유일한 손님이었다. 포탈을 이용해 이동한데다 달리 신경 써야할 문제도 없었던 평온한 하루였던지라 마음 편히 식사를 함께 즐기던 콜은 화들짝 놀라 그를 따라 일어섰다. 음식들엔 문제가 없었다. 식사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모든 음식은 은식기에 담아 나왔다. 또한 독을 감별하기 위해 미리 기미를 보는 시녀도 있었으니 독에 의한 증상은 아니었다. 잠깐 멍했던 걸 빼고는 쥬다스의 상태가 딱히 이상해보이지도 않았다. ‘혹 어제 있었던 습격 탓에 놀라셨나.’ 콜은 이것저것 염려하여 불안한 심정으로 쥬다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제자에게 쥬다스는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저어보였다. “내가 아무래도 영 피곤한 모양이다. 좀 쉬고 싶으니 따라올 필요는 없어. 콜 너는 마저 식사를 하고 나서 편히 쉬거라.” “…예, 전하. 쉬십시오.” 피곤하다는데 굳이 들러붙어 귀찮게 할 이유는 없었다. 황궁에 온 이상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수준 높은 능력자들이 사방에 포진해 있어 보안은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렇다 해도 콜은 1황자의 방과 가장 가까운 객실을 주장했다. 혹시 몰라 바람의 정령을 붙여놓기까지 했다. 과보호에 가까운 콜의 대처를 알고 있을 쥬다스는 거기에 대해서는 별 말 않고 넘어갔다. 다만 콜이 무리하지 않고 쉴 때만큼은 푹 쉴 수 있도록 눈치껏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스승의 따스한 배려에 대해 감사히 여기면서도 콜은 걱정스런 낯으로 그를 배웅했다. 방으로 들어간 쥬다스를 걱정하는 건 정령들도 마찬가지였다. 네 정령은 그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상태를 확인하려들었다. 「정말 괜찮아? 응?」 「좀 전에 표정이 진짜 안 좋았다요!」 「으응. 아픈 게 아니라면, 혹시 나쁜 생각이라도 들었어요?」 계약자와 감응하여 고통이나 감정에 민감한 정령들이었기에 큰 이상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호들갑을 떠는 걸 멈추지 않았다. 쥬다스는 그들을 부드럽게 다독여 진정시켰다. “괜찮단다. 잠을 설쳐서 그런 모양이야.” 「…끄응, 보통 사람들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네가 그런 이유를 대면 인정할 수가 없는걸.」 「그야 이그레트니까요.」 쥬다스는 볼을 부풀리고 웅얼거리는 유니와 이에 동조하는 카니를 향해 멋쩍게 웃었다. 그리곤 침대로 가 누우며 말했다. “어제 정화세례를 받아서 예민해졌을 수도 있겠지. 물론 그리 걱정할 만한 상태는 아니다만.” 「그런가? 아무튼 이참에 앞으론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쉬어버릇 해.」 「맞다요.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자주 쉬어야한다 했다요! 에, 뭐더라. ‘기력이 딸린다’?」 「……그건 육신이 늙었을 때 이야기고. 바보야.」 「에엥?」 「지금의 이그레트는 아직 청춘 맞거든. 아니 청춘이라곤 시작도 안했거든! 완~전 솜털이 뽀송뽀송한 아가거든!」 「에에에!」 ‘아니, 아니. 그 정도까진 아닌데…….’ 쥬다스는 말려야하나 고민하다 그저 내버려두는 쪽을 택했다. 유니에게 타박을 들은 토니는 다시금 반박을 시도했지만 언제나와 같이 그녀의 현란한 말빨에 밀리고야 말았다. 쥬다스는 정령들의 조잘거림을 들으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으니 옛날 그들과 함께 세상을 떠돌았던 시절이 불현 듯 떠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희들은 늘 한결같구나.’ 만일 이들이 없었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눈밭에 버려진 갓난쟁이가 얼어 죽지 않고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일도, 무수한 위협과 위기 속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던 일도, 숨이 멎던 그날까지 홀로 외롭게 늙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고마워.’ 추억은 그를 그리는 붓끝을 따라 이어지고, 오래지않아 이내 깊은 잠으로 이어졌다. 고른 숨소리를 뱉는 쥬다스의 곁에 옹기종기 모여든 정령들은 머리를 맞대고 잠든 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우리도 고마워.」 「필요로 해주었다요.」 「다시 불러주었구요.」 「…네가 살아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서로를 향한 감사가 계약의 흔을 타고 맞닿았다. 같은 감정, 같은 추억을 느끼며 네 정령은 동시에 웃었다. 까르르 어린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잠든 쥬다스의 주변을 감돌았다. 그리고 그 행복의 틈새로, 한을 품은 저주가 스멀스멀 스며들기 시작했다. * * * 휘오오오― 눈발이 뒤섞인 찬 겨울바람이 매섭게 울었다. 소복소복 쌓이는 눈송이가 하늘이 내리는 수줍은 인사처럼 그의 손가락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눈?’ 이그레트는 순간 의아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대지를 후끈 달구는 여름의 태양광이 쨍하니 내리쬐고 있었다. 한여름에 눈이라니, 몹시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는 멍하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제일 먼저 새하얗게 세상을 뒤덮은 눈밭이 보였다. 흐릿한 하늘에선 여전히 함박눈이 펑펑 내려오고 있었다. 이그레트는 냉기가 파고들어 벌개진 손으로 눈 쌓인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그레트!」 화악 그가 깨어남에 따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녹색 정령이 와락 그에게 안겨들었다. 익숙한 존재였으나 최근 늘 보던 손가락만한 작은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그레트는 한 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유니?’ 「걱정했어.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억지로 힘을 사용해서라도 네게 도움을 주려던 참이었다구.」 술사가 잠이 든 상태에서는 계약한 정령이라 할지라도 힘을 마음껏 사용할 수 없다. 정령왕이라 해도 기껏해야 잔잔한 바람을 일으키는 정도로 미미한 영역 안에서 움직여야했다. 만일 이를 어길 시에는 더 상위의 존재로부터 크게 처벌을 받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니였지만 계약자의 목숨이 위험에 처할 경우에는 어떤 벌을 받더라도 힘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울먹거리며 그를 꼭 끌어안는 녹색 정령을 내려다보며 이그레트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유니.” 「응?」 울망울망한 눈을 들어 응답하는 정령은 분명 유니였다. 그러나 실제 인간과 같은 크기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의 외향은 아주 먼 과거에서나 유니가 나타내던 형태였다. 이그레트는 설마하는 생각이 들어 자신의 차림새를 훑어보았다. 손가락은 내놓고 손등만 감싸주는 핸드워머와 낡아빠진 하늘색 후드로브가 보였다. 길게 내려오던 은빛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목덜미까지 단정히 잘라낸 금발이 자리하고 있었다. 금발이라곤 해도 화사한 색깔이 아니라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 진한 노랑에 가까웠다. 그제야 그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했다. ‘여긴 나의 과거구나.’ 금발에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열여덟 살 소년. 지금 그는 자신이 가진 힘을 제대로 자각하기 이전의 ‘이그레트’, 즉 전생의 존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지난 화 코멘트들이 쥬다스 죽으면 세계멸망설(...) (+프리드개이득설(?)) 일단은 제 기준에선 해피엔딩입니다.ㅎ 즐거운 토요일 보내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정주행인증(?)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2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꿈? 아니면……환각인가.’ 그는 차분히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갑작스레 전생으로 되돌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이것이 현실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그레트가 침묵하자 그의 주변을 둘러싼 네 존재가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왔다. 「추운 데서 잠들어서 몸이 아픈 걸까요?」 「…아픈 것 같진 않은데. 평소와 조금 달라 보이긴 하군.」 그보다 좀 더 키가 큰 소녀의 모습을 취한 불의 정령 카니가 걱정스레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 말에 푸른 늑대의 모습이 아닌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 서있던 루니도 툭 던지듯 대꾸했다. 그런 그들의 틈에서 황토색 머리 꼬마가 양 팔을 휘적거리며 끼어들었다. 「헤헤. 그래도 다행이다요! 조금만 늦었어도 유니가 활화산처럼 뻐엉 폭발했을 거……우에에!」 「그럼! 넌 이그레트가 얼어 죽어도 좋다는 거야 뭐야?!」 「아으에! 으에 아이아여!(아닌데! 그게 아니다요!)」 유니에게 볼을 꼬집혀 바둥거리는 모습은 최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전부 인간의 크기에 맞춰 실체화되어있었다. 네 정령들이 손가락만한 요정처럼 크기를 줄이기 시작한 건 더 나중의 일이었다. 때문에 이때의 넷은 이마에 박힌 보석과 날개를 제외하고 본다면 영락없이 사람과 같았다. 기억 속 정령들의 과거를 마주하게 된 이그레트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주변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배경은 겨울, 장소는 어느 변방의 산기슭인 듯 했다. 이맘때의 이그레트는 방랑자였다. 자신이 가진 힘의 크기를 모르고, 날 때부터 그래왔듯이 그저 아무 목표 없이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아가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그러다 분명, 한 가지 사건과 조우함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크게 변화했다. ‘그게 아마 이 무렵이었을 터인데.’ 그는 천천히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열여덟 살, 눈 쌓인 언덕길, 길에서 잠에 들었다 얼어 죽을 뻔 했던 몹시도 추운 겨울날. 「어?」 그때 마침 유니가 귀를 쫑긋하며 토니를 놓아주었다. 「근처에 사람이 있어.」 “사람?” 「응. 근데 좀 다쳤나봐. 상처가 깊진 않은데 피를 많이 흘렸어. 날씨도 춥고, 그냥 놔두면 오늘 안에 숨이 질 것 같은데?」 눈 내리는 겨울 숲이란 인적이 드문 법이었다. 그런데 부상을 입은 채 눈밭을 헤매는 사람이라니, 수상쩍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어린 날의 이그레트는 별 다른 의심 없이 그를 도왔다. 분명 이번의 선행이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시발점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결단도 내리기 전에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유니, 그에게 인도를 부탁한다.” 홀린 듯이 말하고 나서야 한번 지나간 과거는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마치 연극 속 배우가 된 것처럼 그는 과거의 행동을 재연하고 있었다. 지금 말하고 움직이는 이그레트는 자신이되, 실제 자신이 아니었다. 영상이 재생되듯, 혹은 실이 달린 인형처럼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있는 과거의 자신일 뿐이었다. 어린 날의 이그레트는 녹색 바람이 이끄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을 달려 도착한 장소에는 유니가 알려준 대로 어깨에 검상을 입은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다. “!” 이그레트는 쓰러진 남자를 부축해 일으켜 앉혔다. 고통을 느낀 남자가 잘게 기침하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살…려…….” “도와드리겠습니다. 근처에 민가가 없으니 일단 여기서 몸부터 녹이도록 하십시오.” 급격히 체온을 잃어 시퍼래진 손끝이 덜덜 떨며 도움을 갈구했다. 이그레트는 두말 않고 불의 힘을 사용해 온기를 전달했다. 후웅 따뜻함을 품은 녹색 바람이 눈을 녹이고 포근하게 주변을 감쌌다. 아프도록 살갗을 때리던 겨울바람이 아니라 늦봄에나 만날 수 있을 법한 그런 살가운 바람이었다. 한겨울에 기적 같이 불어온 온풍이 얼었던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가자 남자는 가물가물하던 눈을 간신히 뜨고 중얼거렸다. “처, 천국…?” “아뇨. 죽지 않았으니 안심하고 쉬십시오.” 실제 죽어 천국에 왔든 도움을 받아 살았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지라 부상 입은 사내는 결국 그대로 정신을 놓고 기절했다. 기절한 사람을 그냥 둘 수는 없었기에 이그레트는 일단 그의 상처를 살폈다. 상처를 감쌀 깨끗한 천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를 대신할 것들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땅에서 슈루룩 솟아오른 나무줄기에서 특이한 향을 뿜어내는 열매가 열렸다. 뿐만 아니라 상처에 좋은 약효를 지닌 풀들이 기적처럼 겨울의 척박한 땅에서 파릇파릇 자라났다. 자라난 식물 중 어떤 것은 질긴 잎사귀로 변했다. 이그레트는 부상에 좋은 열매와 약초를 따다 각각 분류했다. 그 중 일부는 즙을 낸 뒤 깨끗한 물을 섞어 남자의 상처에 뿌렸다. 환자에게 고통을 느낄 정신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나머지는 잘게 가루로 만들어 사용했다. 그 뒤 질긴 잎사귀로 환부를 아프지 않게 묶어두었다. 의술에 대해 몰라도 땅의 정령왕 토니의 힘이라면 날붙이에 베인 상처 정도는 지금처럼 간단히 처치할 수 있었다. 「이그레트, 이 사람 귀족이야.」 유니가 남자의 머리맡을 기웃거리며 알려주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은 청년이었다. 다치고 고생을 하는 바람에 잔뜩 더러워져있었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옷도 본래는 값비싼 고급 의상이었다. 「귀족? 그거 인간 중에서도 높은 위치 아니다요? 왜 이런 곳에 혼자 있다요?」 “으음, 그럴 만한 사연이 있겠지.” 「그게에~ 일단 귀족이긴 한데 말이야.」 유니는 바람이 가져온 정보를 이그레트에게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이 산 밑에 있는 작은 영지를 돌보는 영주의 아들이라나봐. 대단히 높은 위치에 있는 귀족은 아니고, 오히려 귀족치곤 별로…땅도 조그맣고 재물욕심이 없어 부를 쌓지도 못한.」 「그럼 돈이 없어서 저 꼴이 된 걸까요?」 「아! 들어봤다요.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니는 쿵짝을 맞추는 카니와 토니를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나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손가락을 입술에 얹고 한숨을 폭 쉬었다. 「토니 네가 웬일로 유식한 말을 다 알아? 뭐 꼭 그런 의미에서 칼침을 맞은 건 아니지만. 돈도 없고 권력도 없는 이름뿐인 귀족이라 표적이 된 건 맞아.」 「?」 어리둥절해하는 토니와 함께 아직 십대소년에 불과한 이그레트도 함께 의아한 시선을 주었다. 유니는 날개를 움직여 사뿐히 허공에 떠올라 손짓발짓을 동원하여 이야기를 풀어냈다. 「어느 산골 작고 척박한 영지에~ 욕심 없이 자기 위치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영주님이 있었답니다. 그 영주님에게는 똑똑한 아들과 몹시 아름다운 딸이 하나씩 있었지요!」 「헤에.」 「가난하지만 자애롭게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님 덕분에 사람들은 큰 불만 없이 지냈습니다. 두 자녀도 무럭무럭 자라 집안일을 도왔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은 화목한 가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 바람에 밀려 유니의 손이 풀썩 쓰러지는 흉내를 냈다. 「우연히 영주님의 아름다운 딸을 발견해 첩으로 삼고자 수작을 부리던 높으신 고위귀족 나으리께 그 딸래미가 반항하다 실수로 피를 보게 만들었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고위귀족이 걔한테 확 누명을 씌워버렸고! 이걸 해명하려고 괜히 나섰다가 돈빨과 권력빨에 밀려 실패한 영주님은 졸지에 억울하게 반역을 꾀한 죄인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일이 꼬이고 꼬이고 또~ 꼬여! 화목했던 집안은 그야말로 풍비박산이 나고 말았습니다.」 「?!」 「그 와중에 간신히 도망쳐 나온 불쌍한 아들래미가 바로 저기 저 남자!」 유니가 휙 손가락을 들어 기절한 청년을 가리켰다. 그리곤 심드렁하니 말을 맺었다. 「―라는 진부한 얘기.」 “진부하다니. 유니, 이런 일이 귀족사회에서는 잦은 거야?” 평민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려져 떠돌이로 살아가던 당시의 이그레트가 귀족체계에 대해 알고 있을 리 없었다. 「응, 뭐. 아주 흔한 건 아니더라도 종종 있을 법한 이야기야. 오죽하면 이런 주제로 동화도 많이 나왔겠어? 물론 동화책이야 해피엔딩으로 끝난다지만 현실은 다르지.」 “…몰랐어. 그들도 나름의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구나.” 안타까운 눈으로 쓰러져있는 이름 모를 청년을 바라보는 이그레트를 보며 유니는 어쩐지 동심을 파괴한 기분이 들었다. 열여덟이면 그리 어린 나이도 아니건만 그들의 계약자는 지나치게 순진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이를 유지할 수 있도록 지켜줘야 할지, 아니면 험한 세상에서 더 상처받기 전에 미리 와장창 깨놓아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유니를 놔둔 채 이그레트는 눈이 녹은 바닥에 모닥불을 하나 지폈다. 화륵 바람이 전해주는 온기와는 또 다르게 후끈한 열기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보지 못했다면 모를까, 뻔히 사연도 알게 된데다 상처입고 쓰러진 사람을 추운 눈밭에 그냥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는 떠돌이였다. 목적 없는 여행길을 늦춘 들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그레트는 모닥불 앞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쓰러진 남자가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렸다. 낯선 이가 눈을 뜬 건 그 다음날 동틀 무렵에서였다. 새벽의 어둠이 전부 가시기 전 푸르게 물든 세상 속에서 남자는 악몽으로 인해 헐떡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화들짝 잠에서 깨어났다. 붕대 대신 넓적한 잎사귀로 싸매어진 상처자리를 발견한 그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버지? …한나?” 부친과 여동생의 이름을 부르고 나서야 남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꿈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고 절망했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을 가졌다. “난……. 결국 죽은 건가.” 사방이 눈으로 덮인 산인데 그가 누워있던 자리만 따뜻한 풀밭이었다. 그 앞에는 장작 없이 홀로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도 보였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멍하니 굳어있던 남자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신이 드셨네요. 하지만 무리하진 마십시오. 상처가 꽤 큽니다.” “…누구요!” “아.” 이윽고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의 모습에 남자는 경계하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노랑이나 갈색 계열 머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색이었다.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려보이고 위협적인 차림새도 아니다. 그러나 곧 숨을 흡 들이마시고 말았다. “설마 저것들은.” 소년의 곁에는 이마에 각각 다른 색상의 보석을 박아 넣은 네 존재가 함께 하고 있었다. 외형은 인간과 닮았지만 등에 달린 날개며 움직일 때마다 살짝살짝 흩뿌려지는 은은한 빛줄기가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고 있었다. ‘정령? 그것도 각기 다른 4속성인가?!’ 남자의 눈이 번쩍 뜨여졌다. 믿을 수 없었다. 책으로만 접했던 정령이라는 존재를 넷이나 부리다니! 시골 작은 영지를 다스리던 귀족 청년의 짧은 식견으로도 이는 ‘보통’의 범주를 벗어난 어마어마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메세지와 애정에 감사드립니다! (다른 멋진 작품들도 많은데 어워드투표에서 이그레트를 선택해주신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꾸벅))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3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그가 무어라 할 말을 잃고 눈만 부릅뜨고 있자 소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인사가 늦었네요. 제 이름은 ‘이그레트’입니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참에 쓰러져계시던 것을 발견하여.” “…나, 나, 난 ‘윌리엄 고트’라고 한다.” 귀족의 체면이고 뭐고 본래도 잘 챙기지 않던 것이지만, 저 존재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보는 심정으로 이그레트를 바라보았다. “그, 그것들은. 자넨, 아니 당신은 혹 정령술사인가?” “네. 제 친구들입니다.” 이그레트는 그동안 사람이 별로 없는 장소를 위주로 떠돌아다녔다. 그게 아니더라도 정령에 대해 알아보는 사람은 희박했다. 마을에 들릴 일이 생기면 정령들이 알아서 날개를 감추는 등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한 탓도 있었다. 그는 정령의 힘을 남용하지도 않았고 그럴 만한 일도 없었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이 시점에선 이그레트가 정령술사로 이름을 떨치기 전의 상황이었고, 또 그 자신도 그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 무게인지 전혀 모르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다. 여상히 대답하는 이그레트를 보며 윌리엄은 다급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도, 도와줘! 아니,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윌리엄은 심지어 평민인 이그레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계급 따윈 이미 상관없었다. 그는 도망자의 신분이었다. 평민보다 못한 게 죄인이다. 비록 실제 죄를 짓지는 않았으나 법적으로 윌리엄은 당장 목이 베여도 할 말이 없는 처지인 것이다. “내 부모와 누이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끌려갔습니다. 제, 제발 도와주십시오. 예? 정령사님.” 정령술사란 이능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강력하다 알려진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였다. 한겨울에 풀이 자라게 하며 마른하늘에 비구름을 불러올 수 있는 힘이란 인간의 경외를 샀다. 그런 존재라면, 더구나 4속성을 전부 부릴 수 있는 술사라면 모든 불행을 손쉽게 해결할 수 있으리란 사실을 윌리엄은 알았다. “내, 내 가족들을 살려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한 번 살리신 목숨, 염치 불구하고 한 번만 더…. 예? 크흑.” 윌리엄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이에 당황한 이그레트는 유니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유니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죄송합니다. 그들은 이미.” “뭐…? 이미라뇨, 이미 어떠하다는…….” 뒤늦게 시간에 생각이 미친 윌리엄은 동이 터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새벽하늘위로 피고름 같은 햇살이 번지고 있었다.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윌리엄은 그대로 비명처럼 오열했다. 삶속에 있던 모든 걸 잃은 남자는 한참을 울었다. 기껏 목숨을 살려준 이그레트의 노력도 부질없이 그는 반나절 사이 미라처럼 수척해졌다. 금방이라도 숨을 놓을 듯이 생기가 꺼진 눈으로 윌리엄은 햇빛에 녹는 고드름처럼 눈물만 흘려댔다. 그가 우는 내내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섣불리 위로하지도 못한 이그레트는 쭈그리고 앉아 지켜보기만 하다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전 이만 다시 길을 떠나보겠습니다.” “…….” “여기 상처를 치료할 약초와 며칠 간 먹을 수 있는 얼린 과일입니다.” “…….” 윌리엄은 넋이 완전히 나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계속 남자를 돌봐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의 인생은 그의 것이므로, 이그레트가 대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리 여긴 그가 작게 한숨을 쉬고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십시오.” “?” “도와주십시오. 정령술사님.” 윌리엄이 시체 같던 팔을 들어 옷깃을 붙들고 있었다. “내 가족을 해친 그 악독한 자에게 천벌을. 복수를 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니, 저는.” “그자는 악마입니다. 아무 죄 없는 내 누이를 겁간하고…누명을 씌워 모두를 죽인. 사람의 탈을 쓴 악마란 말입니다!” 윌리엄은 악에 받친 얼굴로 정령들을 가리켜보였다. “당신이 거느린 저 힘이라면 가능하잖습니까? 예?” “…저들은 나의 친구입니다.” “정령술사는 바라기만 하면 정령들이 수족처럼 움직인다 들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그 힘을 제게. 적어도 편히 눈감을 수 있도록. 더러운 오명이라도 씻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후두둑 다시 쏟아졌다. 설마 복수를 해달란 부탁을 해올 줄은 몰랐던 이그레트가 아연하게 바라보자 윌리엄은 털썩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 이러지 마십시오.” “이렇게 빕니다. 평생 종으로 정령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아니, 죽어서도 그 은혜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이그레트는 자신의 발치에 엎드린 윌리엄을 향해 천천히 마주 무릎 꿇었다. “복수를 한들 죽은 이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윌리엄.”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하려는 일은 또 다른 악마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악마가 되어서라도 그자의 심장을 뽑아낼 수 있다면야…!” 윌리엄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소리 질렀다. “무언들 못 되겠어.” “…….” 절망이 낳은 지독한 원한을 마주본 이그레트는 한동안 침묵하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윌리엄이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엎드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습니다.” “왜, 왜…….” “당신의 사정은 알겠지만, 내겐 누군가를 심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럴 힘이 있잖습니까!” “또한 내 친구들마저 악마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곁에서 멀거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네 정령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그레트에게 있어 정령들은 가족이자 친구였다. 그런 소중한 존재에게 차마 그런 부탁을 할 수 없었다. 뜻을 분명히 밝혔는데도 윌리엄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엎드려 빌었다. “당신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예? 정령사님이 내 생명을 살리지 않았습니까!” 이그레트는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거부에 윌리엄은 이를 악물고 벨트에 차고 나온 단검을 빼들었다. “그냥 가시겠다면 차라리 주, 죽을 겁니다. 복수하지도 못할 거 차라리 이대로 죽는 편이 낫다고.” 그 말에 잠시 멈칫하긴 했지만 협박에 넘어갈 이그레트가 아니었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떼었다. “……이럴 거면 살리지나 말던가!” 우뚝 원망과 분노가 뒤섞여 말이 아니라 뾰족한 가시가 날아와 박히는 듯 했다. 이그레트는 걸음을 멈춘 채 가만 그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죽게 놔뒀어야지. 이 고통 속에 나를 던져두고 모른 척 외면할 거면, 왜 내 가족과 함께 눈감지 못하도록! 나만 이 지옥에 살려둔 것이냐! 왜!? 왜―!!” “…….” “너야말로 악마다. 힘을 가지고도 기생하는 악을 못 본 채 등 돌리는, 너 같은 위선자야말로 악마란 말이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선의로 목숨을 구했던 이가 피눈물을 흘리며 그를 저주하고 있었다. “반드시 나와 같은 고통을 겪길 바란다. 내 널 저주하리라. 네놈도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고! 언젠가 나처럼 피눈물을 흘리며 무력하게 죽어가란 말이다!!” 푹 얼어붙은 하늘로 붉은 피가 솟구쳤다. 저주를 남긴 윌리엄은 스스로 제 목을 찔러 자결했다. 하얀 눈밭에 쓰러지는 시체와 붉은 핏물이 스멀스멀 시야를 장식했다. 그와 동시에 이그레트는 꿈에서 번쩍 깨어났다. 「이그레트?」 손가락만한 녹색 바람의 정령이 눈앞에서 그를 불렀다. 땀에 눌어붙은 은빛 머리카락이 스르륵 미끄러져 푹신한 베개 위로 흩어졌다. 황궁의 화려한 천장이 보였고 꿈에서보다 작아진 손발이 느껴졌다. 「왜 그래? 자면서 계속 식은땀을 흘리고. 뭔가 나쁜 꿈이라도 꾼 거야?」 “…유니.” 「으응?」 걱정스런 눈으로 손바닥에 내려앉는 유니를 보고 나니 비로소 이것이 현실이란 자각이 들었다. 이그레트, 현생의 ‘쥬다스’는 길게 숨을 내뱉었다. ―지독한 악몽이었다. * * * 황태자 즉위식까지 남은 기간은 5일.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은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발길이 늘었다. 즉위식 당일은 황족의 피를 이은자와 황제가 직접 허가를 내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황궁에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러니 식이 시작되기 전 미리 들러 눈도장을 찍고자 하는 이들이 황궁을 찾아와 1황자를 만나고 가곤 했다. 상황이 이러하여 부쩍 손님이 늘은 황궁은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게 꽤 들떠있었다. 모두가 들뜬 분위기 속에서 세이지는 방안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고뇌에 빠져있었다. ‘형님이 말씀하셨던 선택이란 게……바로 이거였구나.’ 구석에 웅크린 세이지는 멍하니 쥬다스가 교황청에서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한숨을 뱉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고 두려움과 배신감에 떨기도 했다. 그 떨림은 시간이 지나니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작 머릿속은 터질 것처럼 복잡해졌다. ‘나는…도대체 어찌하면 좋을까.’ 어머니의 잔인한 측면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미워하게 되거나 싫어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세이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존재는 어머니인 황후였다. 그 아무리 더러운 짓을 했더라도, 그 실체가 사령과 계약하여 남을 해치고 1황자를 죽이기 위해 영혼까지 내걸며 저주를 행하는 악인이라 할지라도, 세이지에게 있어서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나 뿐인 ‘엄마’였다. 충격적이긴 했어도 아주 받아들이지 못할 현실은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데에 있었다. ‘형님을 죽이지 못하면 어머니가 죽는다…….’ 다른 걸 떠나 그 사실이 세이지를 제일 괴롭게 했다. 세이지가 보기에 쥬다스는 오롯이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군주의 자리에 어울리는 강한 형이었다. 오히려 피해자라면 피해자였지 그가 죽어야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이유 불문하고 쥬다스와 황후,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게임이 시작되어버린 이상 세이지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이건 잘못된 일이다.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다면 나 역시 형님을 죽인 살인자가 되는 거야.’ 세이지는 바르게 자란 아이였다. 황후가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었을 뿐, 아이 자체는 부정과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영특하기까지 했으니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사실을 형님에게 알려 목숨을 구한다면…….’ 죽는 것은 어머니인 사야황후가 되리라. 어느 쪽이든 세이지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세이지는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구석에 틀어박혔다. 뽀송뽀송하던 얼굴이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가는 모습에 아랫사람들은 심히 걱정하였다. 맛있는 음식을 올려도 먹질 않고 시동을 놀이상대로 들여보내도 곧장 물려버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주변에선 사소한 것이라도 3황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 생기면 이것저것 권해왔다. “전하, 오늘 1황자궁에서 야외정찬이 있다고 하옵니다.” “…형님이 야외정찬을?” 그리고 세이지가 반응한 것은 1황자 쥬다스가 찾아온 귀족들을 위해 한꺼번에 대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점심식사자리였다. 야외정찬이란 실내에서의 식사와는 다르게 좀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여기엔 초대받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편안히 찾아와 식사에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나, 거기 참석해야겠어.” 세이지는 일단 형의 얼굴을 보고자 했다. 당장 선택을 할 수 없다면 다시 만나 얼굴을 보는 것이 결심에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서였다. 쥬다스는 현명한 형이었으니 이 막막한 상황에서 숨통을 트일 수 있는 조언을 해줄 지도 몰랐다. ‘아니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편하게 한 번만 더 얘기해보고 싶어.’ 어쩌면 형과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식사자리였다. 세이지는 제 나이에 맞지 않는 눈으로 쓰게 웃은 뒤, 곧장 방을 나섰다. 1황자궁으로 향하면서 세이지는 익숙한 얼굴을 몇 번이고 마주쳤다. 쥬다스가 황제로부터 황태자로 지목되기 이전, 전부 세이지를 향해 찾아와 친절을 베풀며 간이라도 빼줄 듯한 태도를 보였던 귀족들이었다. 그들을 발견한 세이지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려던 찰나였다. 꾸벅 “……어?”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한 귀족들이 그대로 방향을 돌려 가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제 정말 1부완결이 다가오는군요. 뭔가 두근두근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4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예전 같았으면 그가 아는 척 하기도 전에 먼저 득달같이 곁에 달라붙어 그에 대해 이런저런 칭송과 함께 농을 건네며 함께 길을 걸었을 자들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수척해진 세이지의 모습을 본다면 호들갑을 떨며 안부를 물었어야 했다. 처음엔 급한 일이 있는 건가 싶어 넘어갔던 상황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세이지는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고립감을 느끼며 1황자궁 정원으로 들어섰다. 하하하하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넓은 잔디 위로 하얀 식탁보가 길게 펼쳐져있었다. 파라솔로 만든 그늘 아래에서 정찬이 벌어졌다. 식사하는 테이블 앞에서는 요리사들이 즉석에서 음식을 만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쪽으로 쭈뼛거리며 다가가던 세이지는 문득 낯이 익은 귀족들을 다시금 발견하고 멈칫했다. “역시 1황자전하십니다. 총명하시기로 이미 루바흐 안에 그 위명이 자자하시다지요!” “암요, 그뿐입니까? 우리 전하께오서는 사람 뿐 아니라 정령도 부리시지 않겠습니까?” “소신 감복할 따름이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곁에서 저리 떠들던 이들이었다. 세이지는 자리에 돌처럼 굳어져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서있는 쥬다스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고 그저 부드럽게 모두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흡사 인자한 군주를 보는 듯 잘 어울렸다. 자신보다 더욱 자리에 걸맞아 보이는 형에게서 세이지는 더더욱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늘 황제가 되는 건 나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제 것인 줄 알았던 자리였다. 저기서 쥬다스가 듣고 있는 건 본래 자신을 위한 칭송과 떠받듦이었다. ‘분명 내가, 이 루바르잔의 위대한 군주가 될 거라고…….’ 사흘 째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도 목구멍에서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순식간에 차오른 생소한 감정들로 인해 가뜩이나 어지럽던 머리가 더더욱 미칠 것처럼 변해버렸다.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태엽을 잔뜩 감아둔 오르골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예서 홀로 뭐하십니까?” “……너, 자네는…….” “코르토반 옌입니다. 3황자전하.” 쥬다스의 호위로 따라왔다던 최상급 정령술사였다. 교황청에서의 만남을 기억해낸 세이지가 울렁이는 목을 쓸어내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냥, 속이 안 좋아서. 돌아가려던 참이었어.” “그러십니까. 확실히 낯빛이 많이 안 좋아 보이는군요. 흠, 진찰은 받아 보셨습니까?” 살갑진 않은데 달라진 것도 없었다. 콜을 보고 있자면 그저 충실히 주인 곁을 지키고 서 있다가 세이지를 보곤 ‘아, 너 또 왔냐?’라며 꼬리를 한 번 흔들어 보이는 개가 절로 연상되었다. 그 별 것 아닌 담담한 아는 척에 우습게도 세이지는 위안을 받아버렸다. “코르토반, 자네는 무슨 일이 있어도 형님을 지킬 테지.” “…….” 마른 웃음과 함께 건넨 한 마디에 콜은 침묵으로 답했다. 굳이 말로 표현해봐야 무엇하겠냐는 당연한 긍정이었다. “그 신의, 꼭 지켜.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세이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쥬다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든 콜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날 용서하지 마세요, 형님.’ 혀에서만 맴돌다 끝내 밖으로 내뱉지 못한 당부가 컴컴한 목구멍 아래로 추락했다. 세이지는 그대로 다시 등을 돌려 1황자궁을 떠났다. * * * 쥬다스는 최근 부쩍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틀 전을 기점으로 악몽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찾아와 괴롭혔다. 악몽 탓인지 그는 곧잘 피로를 느꼈다. 깨어있어야 할 상황에는 잘 버티고는 있었지만 그러다 긴장의 끈을 놓쳐 졸음에 빠지기라도 한다면 어김없이 악몽으로 이어졌다. 악몽은 주로 과거 그를 욕하고 저주했던 사람들에 대한 것들이었다. 좀 괜찮다싶다가도 그 끝은 언제나 절망스러웠다. 꿈속에서 그는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며 과거 했던 행동을 그대로 재연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전생의 그가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던 현실 앞에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고 마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사는 걸 포기하고 세상을 등져 은거하는 삶을 택했던 ‘이그레트’였다. 지금은 용기를 내어 다시 도전해본 참이지만 여전히 그에게 있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란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극복하지 못한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그런데 한번 겪었던 과거를 다시 돌이켜 겪다보니 조금 다르게 느껴진 부분도 있었다. ‘내가 선의로 행했던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악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그는 늘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기준에서 움직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 선의란 어디까지나 모두에게 공평한 기준에서 적용되었으므로. 과거에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면서 이그레트는 조금씩 그때엔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함께 깨달아갔다. 악몽을 꾸기 시작한지 삼일 째 되는 날, 그는 또 다시 과거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젠 성인이 된 그가 어느 폐허가 된 마을 입구에 서있었다. 타닥 딱 집이 있었던 자리는 온통 시커멓게 타들어가 밑동만 남아 연기를 뿜고 있었다. 일반적인 무구가 아닌 기습에 주로 쓰이는 석궁 촉과 투척용 창, 그리고 오로지 빠른 살상만을 목표로 개조된 짧고 날카로운 글라디우스가 여기저기 꽂혀있었다. 그 장면만 봐도 충분히 어떤 상황인지 유추가 가능했다. ‘게릴라의 습격.’ 그곳은 제국 국경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루바르잔 제국은 먼 선조 때부터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으로 영토를 넓혀왔다. 지배한 영역은 늘어나고 권력 또한 팽창했지만 제국이 거느린 넓은 영토란 결국 남의 땅을 짓밟고 빼앗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몇몇 국경지역은 이에 반발하여 테러를 하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게릴라들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침략과 전쟁을 명한 것은 상부였지만 게릴라로부터 피해를 입고 신음하는 건 국경에 위치한 영토에서 살아가는 무고한 주민들이었다. 지금 이그레트가 서있는 이 마을도 마찬가지로 영토전쟁의 희생양이 된 곳이었다. 이번엔 그동안 보였던 자잘한 테러나 치고 빠지는 수준의 습격이 아니었다. 게릴라 집단은 이 영역을 아예 작정하고 쓸어버렸다. 불타고 무너져 내린 건물 사이에서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나 가슴에 석궁볼트가 박혀 숨을 거둔 시신 등이 보였다. 이그레트는 그 참혹한 폐허를 빠짐없이 눈에 담고는 그 속으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툭, 투둑 쏴아아 예고에 없던 빗줄기가 급작스럽게 쏟아졌다. 그의 염원에 따라 정령의 힘이 기후에 작용한 탓이다. 루니가 불러온 비구름이 끊임없이 폭우를 내리부었다. 폐허를 태우던 불길이 사라지고 사람들의 시체로부터 피와 눈물을 씻어 내린 빗방울이 웅덩이를 이루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무너진 판자 사이를 반짝이며 지나갔다. 이그레트는 벽돌과 뒤섞여 쌓여있던 부러진 나무판자를 들어 옆으로 치웠다. “…….” 이제 겨우 다섯 살 먹은 어린아이가 그 안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검푸른 머리카락이 누군가의 핏물에 절어 얽힌 채였다. 얼굴에도 피가 잔뜩 튀어있었지만 자신의 피는 아니었다. 정작 상처 하나 없이 기적처럼 살아남은 아이는 무릎을 끌어안고 떨다가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보고 움찔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 “혼자서 많이 무서웠겠구나.” “…우…윽….” 다정한 빛을 담은 보라색 눈동자가 마치 폭우를 내리는 하늘같았다. 빗물이 샛노란 금발을 타고 흘러 아이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제야 막혔던 울음을 터뜨리는 걸 허락받은 듯이 아이는 엉엉 울기 시작했다. 이그레트는 자신이 내민 손을 자그마한 양손으로 꽉 붙들고 울음을 터뜨린 아이를 안아 올렸다. 검푸른 머리카락과 얼굴은 빗물에 씻겨 제 색깔을 드러냈지만 눈동자만큼은 피처럼 짙은 적안이었다. “으아아앙!” 잔혹한 테러로부터 살아남은 생존자는 이제 겨우 다섯 살 난 어린아이가 유일했다. 비록 국경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아이는 제법 귀한 혈통을 타고난 귀족가 도련님이었다. 그는 그를 지키고자 희생한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쓰고 살아남았다. 본래 이번 습격은 아주 예측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빈번히 침략해오는 게릴라들의 공격을 막아내며 사람들은 곧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일 습격이 이어질 것이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규모 침략이 일어나기 전에 적군을 저지해야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병력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수도에 지원을 요청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내용이었다. ‘지금은 황제폐하의 탄신을 기념하기 위한 축제기간이다. 앞으로 7일간은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되며 또한 수도를 방비할 인력을 변방에 낭비할 수 없다. 적의 도발에 대응하지 말고 축제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 고작 축제 따위를 이유로 지원을 거절당한 국경지역의 지도자는 크게 상심하고 분노하였지만 영토를 버리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그들은 자국과 주민을 위해 항쟁했고, 결국 그 땅에 싸늘한 주검으로 쓰러졌다.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지도자의 아들이었던 아이는 이 사실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리고 유일한 생존자로 남아 똑똑히 기억했다. “나는 이그레트라 한단다. 네 이름은?” “…‘프리드 길리아노’….” 그날, 아이였던 프리드에게 이그레트는 하늘이 되었다. 새로운 어버이이자 친우가 되었고, 구원이었으며, 아이가 믿고 따르는 유일한 ‘선’이자 ‘질서’가 되었다. 그 모든 게 일그러지기 시작한 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다. 어린 시절 프리드는 그야말로 순수하게 이그레트를 따랐다. 그동안 이그레트가 만난 사람들은 그의 힘을 보고 엎드려 빌거나 이용하려들 뿐 누구도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사람들이 필요로 한 건 강대한 힘뿐이었다. 그러한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있던 이그레트에겐 맑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어린아이에게 생소함과 감동을 함께 느꼈다. 아이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자신은 인간 이상의 큰 힘을 가진 도구나 괴물 따위가 아니었다. 어린 프리드는 그를 부모형제처럼 따랐다. 처음으로 정령들 이외의 존재를 곁에 둘 수 있게 된 이그레트는 매우 기뻐했다.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게 5년을 함께 지내면서, 피를 나눈 가족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그 이상으로 서로를 신뢰했다. 오년이나 함께 지내면서 정령들의 심기를 대충 분간할 수 있게 된 10살의 프리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의를 표했다. ‘이그레트님이 바라기만 하신다면 당장에 끝장날 녀석들이.’ 이그레트와 함께 떠돌아다니면서 프리드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상처받은 이그레트 본인만큼이나 함께 상처를 입었다. 그는 특히 지배계층의 실체를 알아가면서 부패한 귀족에 대해 염증을 느꼈다. ‘지배하는 자는 저런 게 아니야.’ 이젠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로부터, 프리드는 귀족이 품어야할 의무와 권리에 대해 배웠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책임지는 영지 주민들과 조국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다. 그를 보며 프리드는 대의를 위해 버려야하는 게 있음을 알았다. 또한 세상에는 분명한 ‘악’이 존재함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아이는 차츰 세상의 단면을 알아가며 자라고 있었다. 똑 똑 점잖은 노크소리가 있고나서 그들이 대기하고 있던 응접실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한 명은 그들을 저택까지 데리고 온 기사였고, 다른 한명은 그가 모시는 ‘주인’이었다. 이그레트를 저택에 데려오도록 한 귀족은 중년의 남성이었지만 키는 보통 여성들보다 작았다. 음식을 먹는 족족 크라는 키는 크지 않고 뱃살만 접히게 된 사내는 마법효과가 부여된 얇은 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그는 푸근하게 웃으며 이그레트를 향해 악수를 청했다. “하하. 반갑네. 자네가 그 유명한 쿼드-서머너(Quard-Summoner)란 말인가?” 역시 그의 힘이 목적인 부류였다. 이능이 주목받는 시대인 만큼 특출나게 강한 힘을 가진 평민은 귀족이라 해도 그만한 대우를 하게끔 만들었다. 어차피 이 정도 힘과 명성이라면 곧 황제의 눈에 들어 작위를 하사받을 가능성이 컸다. 이그레트는 담담히 고개를 숙여 답을 대신했다. “보자, 그렇다면 자네 곁에 있는 그들이 바로?” “저와 계약한 정령들입니다.” “오오!” 「으, 저 인간 진짜 거슬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정령들은 그 안에 담긴 탐욕을 예민하게 감지해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음, 저는 이미 틀렸으니 독자여러분 모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ㅠㅠ 쿨럭..(깨꼬닥) 참, 피어나래 님께서 쥬다스와 프리드를 각각 멋지게 그려주셨습니다.ㅠㅠ! 차마 악역을 표지로 걸 수는 없었기에 표지에는 쥬다스가..(?) 작품공지에 프리드도 따로 올려두었으니 현재 표지와 함께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ㅎㅎ 귀한 선물 보내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애정과 응원메세지 모두 늘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5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정령이 하는 말을 듣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표정에 담긴 부정적인 감정은 충분히 알아보았으면서도 귀족은 그저 껄껄 웃었다. 그리곤 자리에 앉으며 만족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렌디미르 백작일세. 나는 연구물 개발과 인재발굴에 관심이 참 많아. 지금 쓰고 있는 이 안경도 이번에 개발한 신품이라네. 시력을 상승시켜주며 동시에 보호효과가 있는 아주 기특한 녀석이지.” “그렇군요.” 기껏 자랑을 풀어놓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이 영 미적지근했다. 여기서 백작은 이그레트의 욕심 없고 순한 성품을 간파해냈다. 그러자 그는 단숨에 서론을 싹둑 잘라내고 물었다. “내가 자네를 왜 불렀는지 짐작하겠나?” “…말씀하십시오. 듣겠습니다.” “하핫, 이거 재능 뿐 아니라 머리도 되는 친구로군. 그래서인가… 건방지기도 하고 말이야.” 아무리 뛰어난 이능력자라고 해도 대귀족 앞에 선 평민이 이렇게 태연할 수는 없었다. 웃으면서 그 점을 꼬집는 백작에게 딴죽을 거는 대신 이그레트는 그저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귀족이 원하는 바는 단순했다. 그의 평민다운 태도를 본 백작은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있다네.” “저는…….” “큰일을 하라는 게 아닐세. 조금 전 말했질 않나, 난 인재발굴에 관심이 아주 많다고. 자질은 있으나 가난하여 기회를 얻지 못하는 불쌍한 평민들에게 특별히 기회를 줄까 해서 말이야. 흥미가 생겨 데려다놓긴 했는데 그것들이 자질만 있지 제대로 능력을 사용할 줄 모르다보니 생각보다 영 쓸모가 없더군.” “…….” 이그레트는 순간 멈칫했다. “전부 부모에게 버림받거나 오갈 곳 없는 불쌍한 녀석들이지. 이번에 다시 내쳐지면 어찌될지 예상이 가는가?” 그 자신부터가 같은 처지였기에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대답하진 않았으나 그가 흔들리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는 백작은 은근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 점도 생각해보시게. 내가 하는 일은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들이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을 도와주는 이 안경처럼 말일세. 거기에 자네의 재능을 빌리겠단 소리야. 물론 합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 “곁에 그 아인 동생인가?” 백작의 시선이 프리드에게로 머물렀다. 아이는 주눅 들기는커녕 오히려 기세 좋게 그와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거리를 떠도는 것보다야, 그 아이에게도 좋은 환경이 될 걸세. 책도 볼 수 있고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도 있지. 전부 내가 후원하는 녀석들이야. 이곳에선 뛰어난 재능의 아이들이 양질의 교육을 기다리고 있다.” 렌디미르 백작이 손깍지를 껴 무릎에 얹었다. “바로 자네 같은 선생을 말이야.” “제가 무엇을 하길 바라십니까.” 드디어 바라던 대답이 돌아왔다. 백작은 만족스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령술에 자질이 있는 아이들을 보낼 테니 가르쳐보게. 숙식과 급여를 제공하고, 금지구역을 제외한 저택 내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쓸모 있는 말을 손에 쥐는 것에 성공했다. 저 말이 가진 가치가 얼마나 될지는 두고 보면 알 일이다. 그리 여긴 백작은 몇 걸음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참, 이름이 어떻게 되나?” “……이그레트입니다.” “이그레트? 이그레트라. 좋은 어감이군.” 렌디미르 백작은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잘 부탁하네. 선생.” 그날 이후 이그레트는 떠도는 생활을 그만두고 렌디미르 백작가에 머물렀다. 백작이 추려 보낸 자질이 있는 아이들의 속성과 그릇 등에 대해 하나하나 파악하고 그 싹을 틔우도록 돕는 일은 그에게 있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그 어떤 정령술사도 이그레트처럼 순식간에 타인의 계약을 성공시키진 못했다. 정령과의 계약은 본래 술사와 정령 간의 1:1관계였다. 그러나 이그레트는 마치 그들 사이의 촉매제처럼 작용하여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로 인해 손쉽게 정령과 계약하고 이를 다룰 수 있도록 가르쳤다. 단기간에 성과를 본 렌디미르 백작은 크게 기뻐하며 포상을 내렸다. 여가시간엔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 아직 어린 프리드가 제대로 관리 받고 자랄 수 있는 좋은 환경이 주어졌다. 정착한지 2년 째 되던 해, 그가 백작가에 감추어진 판도라의 상자만 열지 않았어도 좀 더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평화였다. 이그레트가 계약한 바람의 정령왕 유니는 그가 바라기만 한다면 모든 정보를 알아올 수 있을 정도로 강대한 힘을 가진 정령이었다. 하지만 이는 바꾸어 말해, 계약자가 원한 적 없는 정보를 굳이 물어오지는 않는다는 뜻도 되었다. 정령의 힘은 그들을 다루는 계약자의 성질에 따라 천차만별로 차이가 났다. 같은 하급 정령을 다룬다 해도 이것이 일상생활을 풍요롭게 해주며 평화로운 호신용이 될지, 아니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파괴적인 힘을 발휘할지는 술사마다 달라졌다. 그래서 유니는 모든 정보를 알 수 있지만 이그레트가 알려하지 않으니 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로 그가 소망했다. “유니, 저들을 어디로 데려가는 건지 알 수 있을까?” 「저 노예들? 으음.」 귀족이 노예를 사는 일은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돈으로 사람 몸값을 계산하여 사고파는 행위는 신성이 국교인 루바르잔에서 금지되어있는 행위긴 하였으나 암적 루트로 공공연히 거래가 이루어졌다. 그간 눈에 띄지 않도록 노예를 사들인 렌디미르 백작이었지만 그날따라 여러 가지 착오가 겹쳐 낮에 배달이 온 것이다. 이번에 산 노예는 총 3명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어린 소녀였다. 열 살이라곤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해 겉보기로는 또래보다 한참 어려 보였다. 아예 눈에 안보였다면 모를까 노예를 끌고 가는 백작의 하수인들을 발견한 이그레트는 그에 의문을 가졌고 바람이 정보를 가져다주었다. 「저택에 지상공간만큼이나 넓은 지하실이 있대. 거기서 무슨 실험을 한다나봐.」 “…실험이라니?” 「생체실험.」 끔찍한 진실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이야기에 유니의 설명을 들을수록 이그레트의 표정이 차츰 굳어졌다. 「밀폐된 지하공간이라 바람이 알 수 있는 정보가 한정적이어서 그게 정확히 뭔지는 가봐야 알겠지만.」 그 말을 듣고 곧장 찾아간 지하실에서 이그레트는 참상을 보았다. 인체에 대한 무해함을 검증하기 위해 온갖 성분들이 사람에게 투여되고 있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개발한다던 연구물들이 음지에선 인간을 고통에 물들고 죽어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에선 살상능력에 대한 점검이 함께 이루어졌다. 마법이나 정령술 같은 이능을 가진 자들이 이 훈련이 참가되었다. 그들은 실제 사람을 대상으로 마법을 발사하고 정령의 힘을 사용해 숨을 끊어놓았다. 그곳에선 사람이 사람을 죽여 전투병기로서의 위력을 평가받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마치 돼지고기에 등급을 매기듯 그런 식으로 가치를 매겨 전력에 배치했다. 꼬옥 오늘 막 팔려온 노예소녀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채 그의 옷깃을 붙잡았다.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소녀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도와주세요.’ “침입자다!” “이곳이 외부에 유출되면 모두 끝이야. 죽여!” 우두커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를 발견한 관리자들이 망설임 없이 사살을 명령했다. 쿠웅 경비들이 그를 향해 활을 겨누는 순간 땅이 통째로 진동했다. “…왜 이런 짓을….” 누리고 있던 평화와 평안 밑에 깔린 희생, 그보다 더 역겨운 것은. 자신이 직접 정령과 이어주고 다루는 방법을 가르친 아이들이 병기화되고 있다는 사실. 더불어 자신의 안일하고도 멍청한 판단으로 인해 무고한 이들이 죽어나가야 했다는 사실도. 「……! 이그레트, 안 돼!」 비명 같은 정령의 외침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모든 것이 고요로 물들었다. 폭발음도 비명소리도 없이, 그저 그가 한순간 염원했을 뿐이었다. ‘―전부 사라져버렸으면.’ 그날, 렌디미르 백작가의 지하실은 그대로 세상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 * * 백작가를 나온 이그레트는 다시 떠돌이생활로 돌아갔다. 조금 지친 눈을 하게 된 그는, 전에 비해 소극적으로 변한 태도로 세상을 대했다. 일단 무엇이든 함부로 개입하지 않으려했다. 자신이 무심코 한 일이 누군가의 불행을 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로는 일차원적인 동정심이나 감성에 넘어가 행동하지 않고 차근차근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따르는 두 아이가 있었다. 하나는 이제 열다섯이 된 프리드였고, 다른 하나는 이그레트가 ‘레이야’라 이름 붙여준 열세 살 소녀였다. 소녀는 렌디미르 백작가에 실험용으로 팔려온 노예였다. 지하실이 사라질 때, 레이야도 그 안에 있었다. 그러나 운 좋게도 그의 옷깃을 잡고 있었던 탓에 정령의 공격범위에서 살아남았다. 이그레트는 피투성이가 된 채 정신을 잃은 소녀를 데리고 프리드와 함께 그곳을 떠났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떠돌면서 이그레트는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그가 ‘4속성 정령왕의 계약자’라는 어마어마한 사실이 알려져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는 가히 하나의 신드롬을 형성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전설, 기적 따위의 수식어는 감히 그에게 가져다붙이기도 하찮게 느껴질 정도였다. 소식지와 책, 연극문화 등 모든 것이 정령술사 이그레트에 대한 것으로 도배되었다. 무려 루바르잔 제국의 황제가 그를 찾았고, 이어 작위를 내리고자 하였으나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가 지닌 힘은 자연 그 자체였으니 아무리 제국의 태양이라는 황제라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대신 황제는 이그레트라는 보석을 붙잡기 위해 현자의 칭호를 내렸다. 바람의 왕은 물론 자연계 4속성 정령왕들이 전부 그의 휘하에 있으니 이 세상에서 그가 알고자 하는 진실은 모두 꿰뚫는다. 또한 그 스스로도 총명하고 배움에 관심이 많아 세상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지식과 지혜를 깨쳤으니 그것만으로도 그를 넘을 자가 없었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도 남용하지 않고 남을 함부로 해하지 않는 어진 성품을 지녔으니 이는 성인(聖人)이라 보아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칭호와 함께 거처를 마련해준 황제의 호의에 이그레트는 더는 거절하지 못하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에게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죄다 그를 찾아와 엎드려 빌었고, 눈물로 애원했다.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천차만별이었다. 가뭄이나 천재지변을 해결해달라는 요청도 있었으며 사익이나 권력다툼을 해결하기 위해 그를 찾는 이도 많았다. 평민 귀족 할 것 없이 힘을 원하는 모든 자들이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사사롭게는 길찾기를 물으러 오는 자도 있었고 전쟁이 얽힌 대의를 논하러 오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절실함이란 사람마다 그 기준이 다른 주관적인 것이었으므로 경중을 나누기 어려웠다. 그래서 이그레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전부 공평하게 대했다. 우선 직접적으로 타인을 해치거나 벌하는 일에는 절대 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타인을 대신 벌하거나 심판할 권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건 신의 영역이었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걸 자신의 감정과 잣대로 판단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억울한 사연이나 피눈물 섞인 애원을 들어도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그래. 그게 내가 생각한 선이었지.’ 자신이 가진 힘으로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것. 엎드려 빌던 사람들은 끝까지 울면서 다른 이들에게 끌려 나가거나 도중에 돌변하여 그를 원망하며 떠났다. 어린 날 만났던 억울한 죄인 윌리엄처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족으로 감기에 걸리면 무엇보다 제일 괴로운 게 '잠'입니다. 약에 들어있는 수면성분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더군요.ㅠㅠ;; 이거 약을 안먹을수도 없고... 저, 정신력! 지난화 코멘트에서도 감기로 고생하시는 독자님들이 종종 보이시던데 모두 빨리 나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요즘 날씨가 작년에 비해선 많이 따뜻한 편이라고 하더라고요.ㅎ (...왜 체감이 안 되지...) 선호작, 코멘트, 추천, 후원쿠폰, 정주행인증(?) 등 보내주시는 응원메세지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6 / 0240 ---------------------------------------------- 10장. Chicken Game : Ending 다시금 절망하고 좌절하는 사람들을 반복적으로 지켜보게 된 이그레트는 당시와는 다른 기분으로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허나 선이라 하기엔 차갑구나. 누굴 위한 선의란 말인가?’ 문득 그런 의문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게 능사는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겐 희망을 짓밟고 등을 돌린 악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는 태도였다. 만일 저들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처음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양한 시각으로 판단하기 시작한 그는 고뇌에 잠긴 채 과거의 흐름을 따라갔다. “오늘도 좋은 아침이네요, 현자님.” “…그리 부르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현자가 아닙니다.” “폐하께서도 인정하셨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리 부르는데요, 무얼. 하지만 현자님이 싫으시다면 현자님이라고 부르지 않을게요.” 그러면서 생긋 웃는 금발의 여인은 당시 자주 자리를 비우고 돌아다니는 이그레트를 위해 집 청소며 가사일을 돕는 메이드였다. 이그레트가 따로 고용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녀는 메이드를 자청하여 일을 도맡아했다. 언젠가 한 번 산사태에 깔려 생매장당할 뻔한 마을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목숨을 건진 여인이 은혜를 갚겠다며 따라와 일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다시 은인님이라고 부를까요? 아니면 주인님?” “…그냥 이그레트로 충분합니다.” “네에~, 이그레트님.” 이렇듯 붙임성이 좋고 사글사글한 성격의 메이드다보니 아이들도 그녀를 좋아했다. 그녀의 이름은 미카라고 했다. 미카는 활달하고 뭐든 열심히 해내려고 노력하는 여성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무엇보다 생명의 은인인 이그레트에게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가끔 자신이 그를 위해 한 일을 알아준다거나 감사인사를 건네올 때면 눈물을 글썽이며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행복해했다. 작은 것에 기뻐할 줄 알고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충직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작은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그레트님!” 할 일을 마치고 이틀 만에 돌아온 그에게 프리드가 창백한 얼굴로 뛰어왔다. 이제 많이 자라 더 이상 아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듬직한 체구였지만 여전히 그 앞에서는 어린아이였다. 프리드의 옆에 붙어 훌쩍이던 레이야가 참지 못하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미카…미카가…….”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프리드가 입을 열었다. “죽었어요.” “…….” 달리던 말에 치여 죽었다는 비보였다. “귀족이 타고 있던 말이었대요. 사람이 지나가고 있는 길임에도 그자가 전혀 주의하지 않았답니다. 목격자 말로는 속도도 너무 빨랐고 꼭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을 몰았다고…….” 즉사였다. 어찌 손 써볼 틈도 없이 미카는 세상을 떠났다. 사고원인은 그 귀족의 음주였다. 만취한 상태로 말을 빠르게 몬 탓에 사고를 일으킨 것이다. 「근데 단순사고로 이 사건을 덮었나봐.」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만취상태를 증명해줄 자료를 따로 수집해두지 않아 처벌받을 이유조차 사라졌다. 사망자가 불시에 달리는 말 앞에 뛰어들어 일어난 단순사고로 처리되고 귀족가에선 위로금으로 후하게 금액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녹색 바람이 전해준 정보에도 이그레트는 반응하지 않았다. 어찌해야 좋을지 도무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 자식들 나쁜 놈들이에요. 자기들 명예가 떨어지는 게 싫으니까 사고경위를 조작한 거라고요. …사람이 죽었는데…그깟 명예가 뭐라고, 펜 한 자루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었어요.” 프리드는 귀족이 저지른 범법행위를 민감하게 알아차렸다. “벌 받아야 돼요, 그 새끼들.” “프리드.” “험한 말 써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전요, 이렇게라도 해야.” 프리드는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겨우 한 방울이었을 뿐인데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가 추락했다. “나쁜 놈들이잖아요. 근데 저한텐 그 자식들 어떻게 할 힘이 없으니까, 할 수 있는 건 죽은 미카를 대신해서 욕해주는 거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흐, 씨.”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가는 아이는 레이야처럼 소리 내어 울진 못하고 그저 욕설을 집어삼켰다. 이그레트는 천천히 숙여 아이들을 양팔에 감싸 안았다. 따뜻한 품안에서 두 아이는 둥지 안의 아기새들 마냥 소리 내어 울었다. 울다 지쳐 잠들 때까지 아이들을 다독여준 그는 그들의 울음이 멎어갈 때쯤 입을 열었다. “미카는 어디에 잠들었니.” “…훌쩍, 소원나무 밑에요.” 소원나무란 그들이 이 집에 살게 되면서 뒷산에 함께 심어둔 묘목이었다. 아직 사람 키만 하여 여린 잎을 틔운 그 작은 나무에게는 다른 종자명이 있었지만 그들은 이를 소원나무라 불렀다. 나무를 심으면서 앞으로 소원이 생기면 떼쓰지 말고 작은 방울에 적어다 가지에 걸어놓기로 하고 붙여준 그 나무만의 이름이었다. 소원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게 해두면 나무 누군가 속마음을 들어주고 방울소리로 위로해주는 셈이니 좋지 않겠느냐는 미카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소원나무 밑에 묻힌 미카에게 찾아간 이그레트는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길게 내려앉은 옷이 흙바닥에 쓸려 더러워졌다. “미안합니다.” 「…이그레트.」 워낙 담담한 표정과 어투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그의 심리상태를 알 수 없었지만 정령들만큼은 그의 감정을 공유하고 슬픈 표정을 지었다. “조금만 더 신경을 썼다면 당신이 그리 아프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모든 게 그랬다. 그가 신경 쓰지 못하는 사이 망가지고, 깨지고, 뒤틀려버렸다. 젊은 날의 이그레트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어찌 사용해야 좋을지 몰랐다. 지키려고 마음먹는다면 지킬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모든 이들의 삶을 책임져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일단 그가 한 번 도움을 주면 많은 사람들은 그 이상을 바라왔다. 숨 가쁘게 달리던 사람을 걷도록 해주니 그때부턴 멈추고 싶어 하고, 멈추게 해주니 또 앉고 싶어 하고, 앉게 해주면 누워있게 해주길 바라는 게 일반적인 심리였다. 그리고 누울 곳을 마련해주면, 푹신한 침대, 나아가 더 좋은 장소를 제공받길 원했다. 그래서 그는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재앙이 아닌 이상 함부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단에는 이렇게 희생이 따랐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이때 가장 후회한 것이 진작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 이상 감사인사를 들어줄 메이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안…합니다.” 그는 울지 않았다. 함부로 감정을 폭발시키는 건 위험했다. 그래서 속으로 삼켰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여겼는데 이번만큼은 조금 힘들었다. 「네 탓이 아니야.」 후웅 유니가 그의 손을 감싸고 천천히 주먹을 펴냈다. 다른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탓하고 원망한 이그레트의 손에선 찢겨진 상처 위로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손 위로 작게 입 맞춘 유니가 슬프게 중얼거렸다. 「있지, 이그레트.」 「…….」 탓 어쩔 줄 모르고 허공에 동동 떠있던 토니도 그의 앞에 내려와 섰다. 오른편엔 푸른빛의 정령이 묵묵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우리, 어떻게 해야 네가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너는 시간이 갈수록 슬픔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그저 참는 법을 배우고, 표정을 지우는 법을 배워서.」 꼬옥 다홍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카니가 그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따스함이 담긴 열기가 소녀의 품을 통해 전달되어왔다. 「이러다가 아픈 줄도 모르게 될까봐 두려워요.」 「스스로 모르면 우리도 알 수 없게 된다요.」 「원하는 걸 말해라. 너를 괴롭게 만드는 이들을 죽이길 바라나? 차라리 아무도 대들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설 수 있게끔 해주는 건 어떻지?」 “…….” 늘 과묵하던 루니마저도 다소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이 모든 게 계약자인 이그레트의 감정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이그레트는 그저 씁쓸한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그레트.」 유니가 그의 손을 기도하듯 양손으로 쥔 채 속삭였다. 「알려줘. 우린 너를 위해 무엇을 하면 돼?」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소원나무에 걸린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딸랑딸랑 울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아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까.’ 누군가에게 따로 묻지 않아도 이미 스스로 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그레트는 침묵을 택했다. * * * “네? 안…가신다고요?” 다음날, 당연히 미카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물으러 갈 거라 생각했던 프리드는 멍하니 되물었다. 이그레트는 평소처럼 레이야의 코코아색 단발을 곱게 빗어 묶어주며 답했다. “그래.” “이그레트님…?” 프리드가 납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서있자 이그레트는 짧게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내가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는다는 건 선전포고나 다름없단다.” “그게 무슨.” “문제를 삼는다면 곧 책임을 지란 뜻이 된다. 허나 그리 명예를 중요시여긴 귀족이라면 쉽게 이를 수긍하려 들지 않을 터.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들에게 사죄를 얻어내기 위해선.” “…….” “대화가 아닌 힘으로 겁박하는 수밖에 없어. 그리되면 싸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죗값을 묻기 위해서라지만 죄 없는 누군가가, 혹은 수많은 목숨이 한꺼번에 희생될 수도 있어. 그리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죗값을 물으려한다면 가능이야 할 테지. 하지만 프리드,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정령들에게 그런 짓을 부탁하고 싶지 않구나.” 전부 옳은 말이었다. 자연계 정령왕을 넷이나 부리는 위대한 존재였으나, 제국 안에서 그의 위치는 그저 평민이었다. 만일 귀족이었다 한들 함부로 다른 가문에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는 상당히 무례한 일이며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문제였다. 하물며 사건의 피해자가 평민 여성인 상황에서 귀족에게 진상규명을 요구할 길은 없다. 애초에 목숨의 무게가 달랐다. 평민의 죽음을 이유로 귀족이 사과를 해야 할 의무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걸 가능하게 하려면 신분을 뛰어넘는 무력으로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더 큰 피해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귀족가문에 대한 시비는 한 두 사람 간의 분쟁과는 다르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컸다. 그들은 그냥 이름만 ‘귀족’인 게 아니다. 제국을 대표하는 자들이자 각자 소유한 영토에 따라 지배권을 쥐고 있는 계층에 속해있는 것이다. 물론 프리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게…….” 하지만 소년의 붉은 눈은 혼란과 슬픔을 담고 일그러졌다.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수많은 목숨이 희생될 수도 있다고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레이야가 불안한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보았다. “이그레트님…에게는 전부, 똑같아 보이는 겁니까? 그 개자식들의 목숨 값과 미카가. 어쩌면 저나 레이야도. 얼굴도 모르는 그 귀족집안의 경비병과 같은 수준의…….” “프리드.” “…네.” 프리드는 이를 콱 다물었다. 뾰족하고 쓰라린 통증이 머리를 압박해왔다.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그 통증의 또 다른 이름은 ‘배신감’이었다. “같아서가 아니다.” “…….” “값어치를 따지려는 게 아니야. 내게 너희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란다.” “그런데 왜…….” 왜 화를 내지 않으세요? 프리드는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상실에 대한 분노를 묻기엔 그가 마주한 보라색 눈동자는 너무나도 잔잔했다. 그날, 소년의 하늘에 실금 같은 균열이 생겼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주가 크리스마스라는 소릴 듣고 놀랐습니다. ㄷㄷ 으아닛, 시간의 상태가...?!;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매번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조아라 서버가 폭주해서 터졌다고 글이 안올라가네요 ㅠㅠ 좀만 더 시도해보고 안올라가지면 내일 아침에....;;)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7 / 0240 ---------------------------------------------- 11장. 출사표 마침내 즉위식 당일 아침이 밝았다. 일주일째 악몽에 시달린 쥬다스는 그전과 비교하여 매우 쇠약해져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는 그를 보며 아랫사람들은 필수적인 준비 과정만 준비하고 나머지는 전부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보좌했다. 그러나 저주로 인해 눈만 감았다 하면 끔찍한 악몽과 조우하게 되는 바람에 쉬는 게 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건강상에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수시로 넋을 놓았다. 급기야 전날부터는 눈을 뜬 채로 자신을 저주하는 환청을 듣기까지 했다. 진단을 위해 찾아온 치료사들은 그 원인을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있을 것이라 조심스레 추측했다. 그 외엔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말에 콜을 비롯하여 1황자를 모시는 시종, 시녀들은 근심에 잠겼다. 곧 즉위식이 시작되면 황제로부터 그의 후계임을 증명해 주는 인장을 수여받게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선 3개의 단을 쌓아 층층이 이어놓은 높은 계단을 올라야 했다. 하지만 지금 쥬다스의 상태로는 3단 층계는 고사하고 평지에서 걷는 것조차 언제 쓰러질지 몰라 조마조마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쥬다스는 즉위식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힘겹게나마 마쳤다. 일반 황족의 복장과 다르게 제국의 차기 군주인 고귀한 황태자를 상징하는 예복 정장의 색상은 차콜 그레이였다. 어깨에는 황실을 상징하는 금색 견장을 달았고 단추와 브로치도 마찬가지로 전부 고결한 금장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천연 스타루비가 별 모양의 광채를 흩뿌리며 또렷이 빛났다. 마지막으로 적색 바탕에 금실로 황가의 문양을 수놓은 얇은 케이프가 그의 어깨를 다시 한 번 감싸 덮었다. “전하.” 오랫동안 충심을 다해 주인을 모셔온 시종 로한이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평소 같았다면 총명함으로 빛나는 자애로운 금안이 곧장 시종을 돌아보았을 테지만, 지금의 1황자에겐 무리였다. 예복을 차려입은 채로 어지러운 속내를 진정시키기 위해 양손으로 탁자를 짚고 서 있던 쥬다스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 턱 선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툭 하고 떨어져 탁자에 얼룩졌다. 로한이 조심스레 재촉했다. “전하, 시간이 되었사옵니다.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황태자 즉위식은 제왕의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태양이 가장 높은 위치에 떠오르는 정오에 진행된다. 황족 혹은 황제의 허가를 받은 자들만 참관이 가능할 정도로 엄중한 예식인 만큼 시간에 늦는 불상사는 없어야만 했다. “전하…….” “괜찮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로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심신의 쇠약, 그리고 급기야 환청에까지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쥬다스의 눈은 본래의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속에 깃든 굳건한 의지를 알아본 로한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곤 그를 밖으로 안내했다. 「아, 정말 답답해 죽겠어!」 계약자의 상태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정령들도 몹시 예민해져 있었다.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왈칵 분을 터뜨린 유니가 그의 머리카락을 꾹꾹 잡아당기며 외쳤다. 「이그레트, 이건 분명히 사령의 짓이라구!」 “으음,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모르겠는 게 아니라 틀림없다니까? 아, 진짜! 뻔히! 아는데!」 「훌쩍. 찾을 수가 없다요오.」 울먹거리는 토니의 말마따나 네 정령들은 원흉을 짐작했지만 정작 사령이 침투한 루트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쥬다스가 힘에 겨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어느 것 하나 도울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깊이 관여할 수 있는 물의 왕 루니마저도 문제를 찾지 못해 손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쥬다스가 고통을 느끼는 부분은 새롭게 상처가 생긴 게 아니라 본래 가지고 있던 흉터에 의한 것이다. 차라리 공격을 받고 있다거나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의 정신을 갉아먹기라도 한다면 곧장 처치해 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따로 공격을 받는 것도 아니고 달라붙은 사령도 없으니 그를 철통같이 가호하고 있던 정령들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하다 못해 답답함으로 인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어쩌면 내가 스스로 놓아둔 덫일지도 모르지.” 「넌 진짜 너무 자학하는 버릇이 있어, 끄응. 생각해 봐,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았던 게 왜 이제 와서 힘들게 느껴지겠어?」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게 마련이니까, 유니.” 쥬다스는 어쩔 수 없다는 의미를 담아 웃었다. 「정말, 그런 게 아니라니깐!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어딘가에서 사령의 기운이 느껴지긴 해.」 「그 망할 사령 놈이 어디 붙어 있는지 찾질 못해서 그렇죠.」 다소곳한 자세로 있던 카니도 참지 못하고 험악하게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내내 침묵하고 있던 푸른 늑대가 콧등을 찡그리며 자기 의견을 내어놓았다. 「……한 가지, 직접적으로 네게 접촉하는 방식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기억을 강제로 끌어 올리도록 만드는 원격 주술일 가능성이 있다.」 「원격?」 「확실하지는 않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사령의 공격이라기보단 이그레트가 스스로 묻어두었던 기억을 강제로 마주하게 할 뿐이니까.」 「우웅, 그럼 별일 아닌 거다요?」 토니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답은 루니가 아닌 카니로부터 나왔다. 「아뇨, 정말 그런 거라면 이건 훨씬 더 복잡한 문제예요.」 「……?」 「피하고자 의식 깊은 곳에 묻어 둔 기억을 강제로 매순간 맞닥뜨리게 하는 거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벌써 미치고도 남았겠지.」 「정말 끔찍한 수법이에요.」 정령들의 이야기 소리에도 쥬다스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끼리 있을 때면 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중심이 되어주던 그였기에 지금 모습은 상당히 생소했다. 「더 끔찍한 건…….」 유니가 우울하게 덧붙였다. 「우리가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거야.」 자연을 지배하는 정령왕이 넷이나 한자리에 모여 있는데도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이는 오직 이그레트가 스스로 이겨 내야 하는 문제였다. 괴로워하는 계약자를 앞에 두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정령들은 몹시 슬퍼했다. 침울한 분위기인 정령들과 함께 쥬다스는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즉위식이 열리는 장소는 높은 원형 탑이었다. 돌과 단단한 금속을 섞어 쌓아 올린 벽은 루바르잔 황성에서 가장 높았다. 창문도 없이 솟아 있는 견고한 벽의 끝에는 별도의 천장 없이 뻥 뚫려 맑은 하늘이 맞닿아 있다. 태양이 하늘의 중앙에 위치할 때, 원형 탑 안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 아래서 후계의 인장이 수여된다. 그러기 위해선 탑 내부에 설치된 3개의 단을 올라야 하는데 이때 참관하는 신하들은 단과 멀리 떨어진 지정 구역에 서 있어야 했다. 쥬다스가 건물 안으로 들어오자 이목이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황족과 일부 귀족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황제는 단 꼭대기에 있는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둥― 즉위식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미리 숙지해 두었던 순서에 따라 쥬다스는 천천히 단을 올랐다. 그늘진 바닥을 벗어나 태양이 내리쬐는 계단을 밟고 오르자 그가 걸친 옷도 맑은 금빛으로 물들었다. 첫 번째 단을 오른 순간이었다. -전부 외면한 주제에. 귓가에서 소름 끼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쥬다스는 환청임을 알면서도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그림자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와 발목을 붙잡는 검은 손이 보였다. 그 손은 하나가 아니었다. -우리가 죽는 걸. -책임지는 게 싫어서 도망갔을 뿐. -그래 놓고 이제 와서 그 힘을 이용해 권력의 중심에 서겠다고? 계단을 오르는 발걸음이 힘겨웠다. 발목을 잡아당기는 검은 손에 의해 제대로 발을 떼기도 어려웠다. 환상이 보이지 않는 참관인들은 의아한 눈으로 휘청거리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편찮으시다는 소문이 있던데.” “원래도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이었으니. 혹 다시 병이 도지시기라도 한 건……?” 수군거림 속에는 염려와 의혹이 뒤섞여 있었다. ‘스승님.’ 콜은 불안한 시선으로 1황자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옛날의 그 지친 뒷모습을 다시 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스승을 만났을 때 그는 놀랐고 감동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계속 걱정했다. 혹시라도 그가 다시 상처받을까, 그리하여 다시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나가 버릴까 봐. 이젠 그리되지 않도록 지켜드리겠다고 결심하긴 했지만 콜도 알고 있었다. 모든 건 스승인 이그레트가 직접 이겨 내야 할 문제였다. 거미를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대신 곁에서 거미를 잡아주어 봤자 소용없다. 거미를 볼 때마다 아이는 울 것이고, 두려움에 떨며 도망가려 할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거미를 멸종시킬 것이 아니라면, 아이가 직접 거미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 극복해 내야 했다. “……!” 세 개의 단 중 두 번째 단에 올랐을 때, 쥬다스는 별안간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갑작스런 사태에 장내가 수선해졌다. -은인님 때문이에요. 다른 이는 볼 수 없었지만 쥬다스의 눈앞에는 죽은 미카가 나타나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말발굽에 찍혀 머리의 반이 날아가고 팔이 뒤틀린 기괴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그가 지키지 못했던 수많은 과거의 인연이 나타나 주변을 에워쌌다. -너 같은 놈은 차라리 그 힘을 가지지 말았어야지. -위선자. 환상은 그의 옷깃에 매달려 끊임없이 속삭였다. 원망했고, 또 저주했다. 이대로라면 즉위식 진행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의견마저 제기되는 가운데 단 꼭대기에 선 황제는 홀로 의연했다. 바로 그때, 환상에 의해 무릎 꿇린 채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듣고 있던 쥬다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코 용서하지 않을……! “……그래, 용서하지 말거라.” 쥬다스는 작게 중얼거렸다. 놀라 입을 다문 환영들을 내버려 둔 채 그는 천천히 계단을 마저 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의 무수한 지식과 모두가 우러러보는 힘을 가졌으면서도.” -너는 죄인이다! “사람의 작은 마음 하나를 알지 못해서.” 발악하듯 소리 지르는 환영을 지나치며 그는 생각했다. 전부 상처 주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 방법을 몰랐다. 힘은 힘으로 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은 억지로 눌러 담고 이겨 내야만 모두가 다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일주일 내내 저주에 시달리면서 그는 마침내 선이란 주관적인 개념이며, 무조건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게 ‘선’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쥬다스는 맑은 금안을 들고 자신을 에워싼 환상을 향해 읊조렸다. “나는 정말 몰랐다. 지키기 위해 화를 내는 게 그들을 위한 ‘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을.” 그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그러니 너희 말대로 나는 죄인이 맞아. 어리석고 이기적인 나로 인해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으니. 늦었지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 지난 화 때 '황후가 손에 넣은 연금술자료의 출처가 황제였다'는 게 황제가 직접 현황후에게 준건지 아니면 황후가 몰래 훔친건지 명시하지 않아 혼란을 드린 부분 죄송합니다!ㅠㅠ 전 회차에 수정을 해두긴 했지만, 답을 드리자면 후자입니다! 당시 황비였던 현황후가 우연한 기회긴 했어도 몰래 황제의 물건에 손을 댄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공론화시킬 수 없었던 것이기도 한.... (오타 및 비문 지적도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90화가 다 되어가는데 여전히 매회마다 고칠 것들이 가득... 감사하고도 또 부끄럽네요 ㅠㅠ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따뜻한 사랑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8 / 0240 ---------------------------------------------- 11장. 출사표 -무슨……. “……미안하다.” 우우우우. 사령술로 걸어둔 저주가 깨어지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사야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황후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놀라 숨을 들이켰다. “아니, 저것은?!” 저주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를 에워싼 환영들이 전부 검은 그림자로 변해 울부짖었다. 일반인의 눈으로도 충분히 식별 가능한 사령의 형태였다. 황후가 사용한 주술은 정신적인 공격에 실패할 경우 저주에 사용된 원념과 사령들이 직접적으로 저주 대상자를 공격하도록 명령이 입력되어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호위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사령과 맞서기 시작했다. 동시에 모습을 숨기고 있던 정령들도 실체화하여 쥬다스의 사방을 가로막았다. 파아앗.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구나, 이 녀석들!」 「아주 박살을 내주겠어요.」 바람과 불의 왕이 서늘하게 눈을 빛내며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냈다. 이빨을 드러낸 푸른 늑대가 접근해 온 사령의 목을 물고 흔들자, 그것은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깨어져 기화했다. 장난기 많던 땅의 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자세로 계약자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좀 무식한 게 사실이다요. ……그래서 지금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진 모르겠지만.」 드드드득. 토니의 기운에 의해 땅이 거칠게 진동했다. 자연계 4속성 중 비교적 파괴적인 공격 형태를 띠고 있는 건 불과 땅이었다. 갈라지고 치솟는 땅의 공격에 사령들은 속수무책으로 삼켜졌다. 「이그레트가 마음껏 싸워도 좋다고 했다요.」 지금 정령들은 자유로운 힘의 사용이 허용된 상태였다. 쥬다스는 더 이상 그들을 억제하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을 존중했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성질을 믿었다. 싸움은 거의 일방적으로 진행되어갔다. 자연계 정령왕들의 힘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황제와 1황자의 안전을 위해 뛰어들었던 호위들도 무기를 든 채 멍하니 구경하게 될 정도의 장관이 펼쳐졌다. 소란이 일어난 가운데에도 쥬다스와 황제는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지막 단에 오른 아들을 향해 기다리고 있던 황제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두렵지 않느냐?” “두렵습니다.” 솔직하게 답하는 쥬다스를 보며 황제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물었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오른들 너를 핍박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싸울 생각입니다.” “그 결심에 망설임은 없는가.” “그러기 위해 오른 계단입니다.” 쥬다스는 창백한 낯으로도 힘 있게 대답했다. “더 이상은 도망가지 않습니다.” 싸워서 지켜낼 것이며 그 싸움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힘으로 누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의 결심을 들은 황제가 들고 있던 물건을 앞으로 내어놓았다. “황자는 예를 갖추어 후계의 인장을 받도록 하라.” 쥬다스가 무릎을 꿇자 황제는 그에게 인장을 하사했다. 인장은 세 뼘 정도 길이로, 눈처럼 하얀 옥으로 만든 묵직한 로드(Rod)였다. 로드의 옆면에는 붉은 버튼이 하나 달려 있었다. 이를 눌러 보자 겨우 세 뼘만 하던 짤막한 로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세 배 가까이 길이를 늘려 자라났다. 하얀 몸체 위로 황룡이 그려져 있는 곤봉으로 변화한 인장을 천천히 눈으로 훑는 쥬다스에게 황제가 짤막하게 설명을 곁들였다. “황룡쇄(黃龍碎)라 한다.” 루바르잔에서 황룡은 군주를 상징한다. 후계의 인장에 황룡을 파괴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이 붙다니, 모순을 넘어 불경하기까지 한 물건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 안에 담긴 무거움을 알아차리고 다시 버튼을 눌러 작은 크기로 되돌렸다. “……명심하겠습니다.” 제국의 지배자는 떨어지지 않는 태양이어야 하며 깨지지 않는 태산과 같아야 한다. 만일 군주를 깨뜨리고 부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그 자신이어야만 한다. 언제나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는 군주란 없다. 잘못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망설임 없이 자신을 깨뜨릴 수 있는 결단력과 날카로운 판단력이 필요했다. 황룡쇄는 이를 기르기 위한 후계의 인장이었다. “이로써.” 황제가 아직 선상에 있었으므로 사령과의 전투가 일어난 상황에서도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지켜보던 신하들이 고개를 들었다. “1황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대 루바르잔의 통치자 후계가 되었음을 선포하노라.” 둥― 둥― 둥― 선포를 알리는 북소리가 3회 장내에 울려 퍼졌다. 황족과 귀족들은 경건히 허리를 굽혀 황제의 지엄한 명을 받들었다. 이제 사령들도 거의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이었다. 정령들의 힘에 의해 땅이 갈라지고 불길이 치솟았지만 사람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주지 않았다. 혹 불똥이 튄다 하더라도 콜을 비롯한 다른 실력가 호위들이 참관인들을 철통같이 지켜냈으므로 전혀 문제될 일이 없었다. 모두가 그의 힘에 경탄했으며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연계 4속성이라니.” “이는 마치.” “자연의 사랑을 받는 것 같지 않은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동시에 이젠 전설로 남은 위인을 떠올렸다. 어쩌면 새로운 전설이 될지도 모르는 시작점을 눈앞에 둔 그들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단 한 명, 파랗게 질려 고개를 치켜든 여인이 있었다. “안 됩니다…….” “마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늘이 노하실 것입니다, 폐하!” 사야 황후였다. 그녀는 부서진 단 앞으로 뛰쳐나가 비명처럼 재고를 외쳤다. “방금 그 아이, 그 아이의 주변에서 나타난 사령들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부정한 존재에서 비롯되어 나타난 더러운 증거임이 틀림없습니다. 다시 생각해 주세요, 폐하.” “마마, 황태자 전하이십니다. 그런 말씀은.” “어찌 부정한 존재에게 나라의 미래를 맡기시려는 것인가요? 폐하께서도 아시지요? 저 아이가 연금술로 만들어진 가짜라는걸.”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목숨과 영혼을 걸고 일을 도모했던 황후의 눈에는 더 이상 가릴 것이 없었다. 정리되지 않고 두서없이 튀어나오는 악담에 그녀를 말리려던 신하들도 할 말을 잊고 헛숨을 들이켰다. “분명 저 사령들도 저 아이가 불렀을 것입니다. 감히 황제 폐하와 이 자리에 모인 모두의 눈을 속이고 벌인 간악한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 황후의 말을 들은 쥬다스는 천천히 단에서 내려왔다. 계단을 걸어 내려올 때 아직 남은 사령들이 그를 죽이려 덤벼들었지만 정령왕의 가호를 받고 있는지라 무용지물이었다. 산산조각 깨져 사라지는 사령들 사이로 쥬다스가 천천히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그가 한 걸음씩 계단을 밟을 때마다 녹색 바람과 푸른 물방울이 주변으로 아름답게 산개했다. 쥬다스가 내려올수록 황후의 낯빛은 곧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파래졌다. 황후는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그를 가리켰다. “저것 보세요. 인간이 저럴 수는 없습니다. 저렇게 인형 같은 표정으로…….” 첫 번째 단까지 내려온 쥬다스가 더 내려오지 않고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단 위에서 황후와 마주 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첫 번째 단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표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 “……!” 황후는 그를 가리키고 있던 손가락을 스르르 내려놓았다. 자신을 향한 금안이 미안함과 원망이 뒤섞인 채 일렁이고 있었다. 감정이 없지도, 마냥 온순한 한 가지 감정만을 유지하지도 않았다. 그 안에는 분명 생모를 죽이고 비극을 만들어낸 황후를 향한 원망과 미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해했다. 그녀가 타락하도록 내버려 두고, 좀 더 일찍 비극에 개입하지 못해 많은 희생을 따르게 한 것. 그리고 이제, 참지 않고 행해질 단죄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빛을 마주한 황후는 아연실색하여 입을 다물고 말았다. ‘원망해? ……네가 나를?’ 1황자로부터 그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생생한 감정에 머릿속이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인간이었어. 하윤 리 그녀는, 살아 있는 인간을 낳은 거였어.’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황후는 허탈하게 두 주먹을 허벅지에 붙였다. 진실을 알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가 살아 있는 인간이든 인형이든 간에, 황후는 어차피 같은 짓을 반복했을 테였다. 자신의 아들을 황위에 올리기 위해 하윤 리를 죽였다. 그리고 그 아들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숨이 오래 붙어 있었다. 어차피 가짜 인간이라 생각하여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게 지금의 결과를 불러왔다. 황후는 자신의 뼈아픈 실책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그레트! 아직 남아 있어!」 유니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듣고도 쥬다스는 정령의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지키기 위해 날아든 녹색 바람을 훅 허공에 흩어버렸다. -……죽어주셔야겠습니다. 잊을 수 없는 한마디였다. 익숙한 목소리와 얼굴을 재현해 낸 환상이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촤악! 핏물이 튀었다. 참관인 사이에서 꺄아악 하고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쥬다스가 사령에 의해 공격당한 걸로 보였지만 정작 그의 눈에는 환영이 덧대어져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과거에 그를 배신하여 등 뒤에 칼을 꽂았던 이들이었다. ‘프리드, 레이야, 할더.’ 쥬다스는 어깨에 칼이 꽂힌 채 뒤를 돌아보았다. 이젠 알 것 같았다. 저 셋이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을, 칼을 꽂으면서 버려야 했던 소중한 것들을. 스스로 악마가 되길 선택한 아이들이 얼마나 아팠을는지 이제야 조금 느껴졌다. 후끈 불에 지져지는 것처럼 뜨거운 고통이 왼쪽 어깨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었다. 그 쇳덩이가 뚫은 상처는 타는 듯이 아팠고, 또 눈물 나도록 서글펐다. 하지만 가장 아픈 것은 등도, 어깨도 아닌 가슴이었다. 「이그레트!」 그는 손을 들어 정령들의 개입을 다시 한 번 막았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과거의 환영들을 찬찬히 훑었다. “너희에게도 나는 못난 모습만 보였구나.” -당신이 못하겠다면 내가 하면 돼. -세상은 충분히 더러우니까. -그리고 그런 세상을 눈감아 주고 있는 당신 역시. 당시에는 배신이라고 느꼈던 말들이 지금은 오히려 상처 받은 아이들의 설움으로 들려왔다. 쥬다스는 눈을 감고 마지막까지 그의 마음속을 괴롭히고 있던 과거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줄곧 막고 있던 정령의 힘을 개방했다. “그래, 이 고통을 잊지 않으마. 그리고 이젠…….” 쿠웅.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땐, 분노한 정령에 의해 사령들이 눈 녹듯 녹아 사라진 후였다. 사령들이 사라지자 황후가 이해할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도 일부러 칼에 찔린 데다, 어깨에 칼을 꽂고도 의연히 마주 보는 시선에 공포심이 들 정도였다. “다시는 그리 만들지 않겠다는 도장을 찍었을 뿐입니다.” “도장이라니.” “또한 마마께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의 팁 : 부적을 통한 <저주>는 직접적으로 사령을 이용하는 '공격'이 아닌 일종의 정신력 디버프기능이기 때문에 정령들도 눈치챌 수 없습니다. 네이버닉네임 "돌"님과 따로 이름을 공개하지 않으신 익명의 독자님(?)께서 팬아트를 보내주셨습니다! 캐릭터는 크리스티나와 쥬다스입니다. 공지에 새글로 올려두었으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ㅎㅎ (참, 폰으로 안보이신다는 댓글을 보았었는데, 폰으로도 공지사항을 열람하실 수 있습니다! 연재목록 들어가셔서 표지 근처에 보시면 공지사항이라는 글씨가 딱..! 혹은 받은 팬아트들은 전부 개인블로그에 업로드해두기 때문에 블로그로 구경오셔도 됩니다.ㅎ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ekfquf27 입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따끈따끈 호빵같은(?) 응원메세지에 깊이 감사드립니다.ㅎㅎ 겨울엔 역시 호빵이 진리...!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89 / 0240 ---------------------------------------------- 11장. 출사표 쥬다스는 칼이 꽂힌 왼쪽 어깨를 손바닥으로 훔쳤다. 잠깐 훑고 지나갔는데도 손이 푹 젖을 정도의 혈흔이 남았다. 그는 피에 젖은 손을 황후를 향해 내밀었다. “무릇 사람의 피는 이리 붉을진대.” 주륵. 뜨끈한 액체가 황후의 이마에서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주가 실패함에 따라 사령의 표식이 살갗 위로 드러난 탓이었다. 그녀는 콧대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을 떨리는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아…… 아아…….” “무엇을 위해 그 색을 검게 물들이신 겁니까.” 털썩. 황후는 망연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쥬다스가 일전에 프리드와의 싸움에서 얻은 한 가지 정보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었다. 사령과 계약한 자는 피가 검게 물든다. 이마에 팔각형 별 모양의 표식을 새기고, 검은 피를 흘리고 있는 황후를 향해 경악스런 시선이 쏟아졌다. “맙소사, 검은 피가……!” “이마에 저 흉측스런 표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팔각의 별은 악마를 뜻할 터.” “그렇다면 황후 마마께오서 사령술을?!” 웅성거림은 점차 커졌다. 사야 황후는 모든 것을 잃은 패잔병처럼 주저앉은 채 멍하니 검은 핏물을 바라보았다. 목숨과 영혼을 걸었던 계약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머니.” 참관인들 틈에서 함께 지켜보고 있던 세이지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로 향했다. 어린 아들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한 황후가 큰소리로 이를 저지했다. “오지 마세요, 세이지.” “어머니.” “이 어미가 오라고 할 때까지 오지 않기로 한 걸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안…… 안 돼요. 어머니, 제발.” 여느 때처럼 단호히 명하는 어미를 보고 세이지는 결국 울기 시작했다. 황후는 울컥 검은 피를 토해냈다. 동시에 그녀는 점차 생기를 빨린 미라처럼 말라가기 시작했다. 급속도로 일어나는 노화와도 같았다. 매혹적이던 붉은 머리카락은 순식간에 하얗게 세어버렸고 매끈하게 관리해 온 피부도 툭 튀어나온 핏줄만 남기고 자글자글 말라붙었다. 차라리 주저앉아 있던 게 다행이었다. 황후에게는 서 있을 힘은커녕 비명을 내지를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급기야 말라비틀어진 황후의 몸으로 검은 덩어리들이 곰팡이처럼 뭉게뭉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머니!” 세이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폐하, 저리 고통스러워하시지 않습니까, 예? 누구라도 좋으니 어머니를 제발 살려주세요.” “…….” 황제는 단상 꼭대기에 선 채 그저 침묵했다. 사야 황후가 하윤을 죽인 것을 알고도 묵인했듯, 그저 그 높은 자리에서 탁한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아비의 차가운 시선을 알아챈 세이지가 다른 신하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오히려 두려워하여 뒷걸음질 치거나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댔다. 절망하여 황후에게로 달려가려던 세이지의 귓가로 부드러운 음성이 하나 들려왔다. “세이지.” “……형님!” 쥬다스였다. 세이지는 그 발치에 무릎 꿇었다. “도와주세요, 형님. 제발.” 황후가 하려던 짓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지만, 세이지는 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을 살려 달라고, 그렇게 빌면서 울었다. 동생의 눈물을 보며 쥬다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령과의 계약은 정령과 마찬가지로 그들 간에 이루어지는 절대적인 맹약이란다. 다른 사람이 파기시키거나 계약의 대가를 대신 치러줄 수는 없어.” 「저 인간, 죽는 거다요?」 「한 번 한 계약은 무를 수 없는걸. 사령과의 계약에선 특히 제물로 바치기로 한 걸 반드시 내놓아야 해.」 적을 전멸시킨 정령들이 쥬다스의 곁에 내려앉았다. 유니의 말처럼 계약이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절대적인 맹세였다. 다른 누가 대신 선택해 주는 것이 아닌, 그녀 스스로 목숨과 영혼을 내어놓고 사령의 꼬임에 넘어갔다. 사령은 정령과 달라서 계약자를 이롭게 하려는 목적이 없다. 그저 계약자를 이용해 취하고자 하는 생명력과 영혼을 뜯어먹으려 주변을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사령이 요구하는 제물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귀하고 무거웠다. 그걸 알면서도 계약에 응해 타인의 생명을 꺼뜨리고자 한 건 황후 자신이었다. 살해에 실패한 지금조차 사령과의 계약은 완료되었다. 그러므로 황후는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했지만, 약속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강해지세요, 세이지.” 황후의 목소리는 더 이상 전처럼 청명하지 않았다. 시든 장미꽃잎처럼 쭈그러들어서 눈알이 온통 검게 물든 채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넘어 속이 울렁거리는 혐오스러움마저 들게끔 만들었다. “부디 이 어미처럼 되지 말고. 강해져서.” 노파처럼 걸걸해진 목소리에는 바람 새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언젠가 이 사람이 하려던 일이 무언지 알게 되겠지요. 세이지는 현명하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겁니다. ……부디 청컨대, 그때엔 이 어미의 마지막 모습은 기억하지 말아요.” ‘아뇨, 어머니. 저는 다 알고 있었어요. 어머니가 무슨 짓을 하신 건지, 무엇을 바라셨는지도. 전부 알면서도 모른 척했어요.’ 세이지는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울음과 함께 꾹 눌러 삼킬 뿐이었다. “끝까지 곁에 있지 못해…… 미안하…….” 파사삭.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잿가루처럼 황후는 산산이 부서져 까맣게 반짝였다. 시체조차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날아갔기에 그녀가 입고 있던 무거운 예복이 풀썩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인 없는 물건이 되어버린 옷가지를 보며 세이지가 그 앞으로 다가섰다. “……어머니?” 가만히 불러 보았지만 더 이상 답을 해줄 어미는 없었다. 세이지는 울음도 멈추고 옷가지를 품에 안아 올렸다. “…….”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너무 슬프니 눈물도 나지 않았다. 세이지는 완전히 넋이 나가 어미의 유품을 끌어안았다. 혼돈과 충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들이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황제가 나서서 상황을 정리했다. “이번 사태에 대하여 상세히 조사하라. 억울한 자가 있다면 그 원한을 풀어야 할 것이며 헛되이 희생당한 자가 있다면 그 역시 샅샅이 드러내야 할 것이다. 다른 동조자의 유무도 반드시 확인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이번에 사용된 주술이 무엇이었는지도 전부 알아내도록 하라.” 명을 내린 황제는 쥬다스에게 한 번 시선을 주고, 이어 넋이 나간 세이지에게도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3황자는 ‘침묵의 궁’으로 끌고 가라.” 침묵의 궁은 황족이 죄를 저질렀을 때 감옥 대신 가두어지며 자유를 속박하고 감시하도록 하는 유폐 공간이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이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혼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3황자 세이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무기력하게 끌려갔으며 황제가 이동하자 꼼짝없이 끔찍한 상황에 함께 갇혀 있던 귀족들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탑 안에 남아 있던 쥬다스는 사야 황후가 죽은 자리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사령에게 붙잡힌 영혼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 비록 현생의 생모를 해친 원수였으나 영혼까지 악마에게 붙들려 삼켜지는 것은 너무 비참한 말로였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사령으로 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에 힘을 빌려준 건 프리드일 터. 그 아이를 멈추게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는 셈인가…….’ 뒤늦게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어깨를 찌른 칼은 여전히 붉은 피에 물든 채 꽂혀 있었다. 상처 자체는 큰 부상이 아니었지만 출혈량이 상당했다. 치료사들이 급하게 달려왔지만 이미 그는 점차 의식을 놓아가고 있었다. 탁. 쓰러지던 그의 몸을 누군가 단단히 붙들어 받쳤다. “진실로 훌륭하게 장성하셨사옵니다, 전하.”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아른거리는 시야 사이로 언뜻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단이라고 하기엔 피부색이 너무 짙었다. 황도를 연상케 하는 특이한 색상이었다. ‘황인…… 어디선가 본 듯한.’ “전하!” 콜의 비명 같은 외침을 뒤로 하고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의식을 유지하고 있기 어려웠다. 울렁거리는 머릿속이 점차 가라앉고 대신 폭신한 담요 같은 수마가 찾아왔다. 그는 그대로 의식의 끈을 놓았다. * * * 1황자가 또 다른 전설을 일으키며 황태자 자리에 올랐다는 소문은 빠르게 제국 내를 뒤덮었다. 또한 사야 황후의 사망 소식과 함께 그녀가 사령술사였다는 사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질러 온 극악무도한 죄상이 샅샅이 밝혀져 충격을 안겨 주었다. 특히 자결하였다고 알려진 전 황후 하윤 리의 죽음이 사령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대두되면서 충격을 더해 주고 있었다. 여기에 가담한 자들도 속속들이 색출되었으며 사야 황후의 친가인 캐슬롯 후작가는 멸문에 처해졌다.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아직 어린 나이기도 했고 직접적으로 얽힌 것이 없다 판단되어 침묵의 궁에 유폐되는 한에서 처벌이 내려졌다. 상황이 이쯤 되자 귀족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괜히 꼬투리 잡혀 피바람에 휩쓸릴 필요는 없었다. 3황자파는 물론이고 2황자를 따르던 무리들도 자연스럽게 기세를 죽이고 뿔뿔이 흩어졌다. 정계는 여름을 적시는 보슬비처럼 잠잠해졌으며 축축한 눈물과 수군거림으로 얼룩졌다. 그런 와중에 황태자가 된 쥬다스를 찾는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늘어 있었다. 중립에 서 있던 귀족들은 물론이고 확실히 그에게 붙어 눈도장을 찍으려는 자들, 그리고 즉위를 축하하고자 찾아온 대귀족들까지 모두 그에게 대면을 청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일단 부상을 핑계로 모든 만남을 거절했다. 실제로 치료를 받긴 했으나 그간 끔찍한 저주에 시달리기도 했고 상처 부위가 완전히 치유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저주가 풀려 간만에 푹 휴식을 취한 그는 한결 나아진 낯빛으로 눈을 떴다. 「일어났어?」 “유니.” 따뜻한 녹색 바람이 그의 주변을 한 차례 휘감았다. 쥬다스가 몸을 일으켜 앉자 유니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이미 이불 위를 뒹굴거리고 있던 토니도 엉금엉금 기어 그의 무르팍에 매달렸다. 「헤헤, 잘 잤다요?」 「아픈 곳은 없고요?」 불의 정령왕 카니도 그에게 달라붙어 안위를 확인했다. 여전히 호들갑스러운 정령들의 아침 인사에 쥬다스는 그만 실없이 웃고 말았다. “하하…… 괜찮단다.” 「응, 죽 지켜봤는데 푹 잘 자고 있길래 안심했어. 이제 악몽 같은 거 꾸지 마, 이그레트.」 그는 대답 대신 걱정으로 가득한 얼굴의 정령들을 아이 어르듯 다독여 주었다. “언제나 좋은 꿈만 꾸고 살 수는 없어. 오히려 악몽을 꿨기 때문에 얻은 것도 있지.” 「그치만, 그래도 난 네가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어.」 「그게 우리의 바람인걸요.」 정령이란 언제나 그래 왔듯 계약자를 맹목적으로 생각했다. 갓 새끼를 낳은 어미개가 새끼를 품듯, 혹은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오리가 제일 처음 본 사람을 머릿속에 각인하여 따르듯.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셨나요?ㅎㅎ 올해는 케빈이 아니라 해리와 함께였다는...(?) 농이고, 간만에 집에서 하루종일 푹 자서 좋았습니다. ...솔로라서 일부러 잔 게 아니라요...진짜로 쉬려고.....ㅠㅠ 자느라 사X퍼X 쇼타임도 참여를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이상하네요. 왜 눈에 땀이;)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90 / 0240 ---------------------------------------------- 11장. 출사표 그렇게 그들은 오로지 계약자 한 사람만을 위해 소망했다. 그 절대적이고도 부드러운 바람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마찬가지로 정령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왔다. 그들이 악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의 사익을 위해 도구처럼 이용되지 않도록 늘 주의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그는 조금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무조건 배려만 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었어.’ 그건 마치 관상용 꽃을 창가에 올려두고 때 묻지 않게 지켜주는 행동과도 같았다. 정령은 꽃이나 잘 닦인 보석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선 그 자신이 좀 더 능동적이 될 필요가 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 생각한 쥬다스가 미안함을 담아 정령들을 어루만지고 있을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전하, 로한입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들어 오거라.” 시종 로한이 조심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인사한 후 그에게 말을 전했다. “존안을 뵙고자 청해 온 손들이 있습니다.” 그간 손님들을 전부 거절해 온 쥬다스였다. 굳이 그 말을 또 전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 그가 로한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시종은 한마디 덧붙였다. “루바흐의 친우분들입니다.” “……그 아이들이?” 의외였다. 방학을 맞아 각자의 자택에서 편히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말에 쥬다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는 즉시 친우들을 방 안에 데려오도록 지시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침의 위에 얇은 겉옷을 하나 걸쳤다. 아직 대외적으로는 사령의 공격을 받고 병상에 누운 황태자였기에 제대로 예복을 갖춰 입을 필요는 없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루바흐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도착했다. “쥬다스 님!” 제일 먼저 바이칼이 그 앞으로 달려왔다. “황궁 안이다. 체통머리 없이 굴지 말고 전하께 예를 지키도록.” 그 뒤를 따라 크리스티나가 도도한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들어왔다. 그녀의 일침에 찔끔한 바이칼이 한 발 늦게 품행을 바로 했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으로 들어온 에단이 쥬다스의 안부를 물었다.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별일 아니…….”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으려던 쥬다스는 문득 멈칫 말을 멈추었다. 자신을 찾아온 세 아이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걱정이 물들어 있었다. 예전에 투르케 사막에서 프리드와의 전투가 있었을 당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저 걱정하지 말라 고개를 저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 크리스티나가 처음으로 그에게 서운한 속내를 드러냈었다. ‘너무 완벽해 보이는 게 더 불안합니다.’ ‘…….’ ‘……저희에겐 걱정할 틈도 안 주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때엔 크리스티나의 말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제대로 공감하지 못했다. 그저 어린아이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투정 정도로만 생각했지 그들이 얼마만큼 걱정하고 또 불안해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씩 그들의 마음이 잔잔하게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마치 빳빳한 흰 도화지 끝에 물감이 번지듯 그렇게 천천히 이해했다. 그래서 쥬다스는 하려던 말에서 방향을 바꿔 말했다. “……아니, 약간 다치긴 했으나 잘 치료받고 쉬어서 지금은 거의 다 나았단다. 다들 걱정해 주어서 고맙구나.” “전하.” 세 아이는 모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작은 변화였지만 그를 따르고자 마음먹은 아이들에게 있어선 무엇보다 기쁘고 감사한 일이었다. 척 보기에도 크게 다친 곳 없이 건강해 보이는 쥬다스였기에 그들은 크게 안도하여 그제야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즉위식 전과 다름없이 훈훈한 분위기로 떠들썩해진 아이들을 가만 바라보던 쥬다스는 이내 빙그레 웃으며 장소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온 김에 지난번처럼 꽃구경이라도 가지 않겠느냐?” “좋습니다! 어어, 그런데 전하께선 지금 쉬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활기차게 대답부터 한 바이칼이 뒷목을 긁적이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크리스티나와 에단도 동조하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저희 때문에 편히 쉬지 못하시는 건 아닌지.” “오히려 이럴 때야말로 바깥공기를 쐬어야 기운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하더구나. 그렇잖아도 혼자 나가기 적적하던 참에 너희가 찾아와 아주 잘되었지 무어냐. 하니 그런 걱정일랑 말거라.” “……예.”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만류할 수는 없어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외로 나오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살갗에 와 닿았다. 봄과 달리 여름햇살은 포근하지 않았다. 뜨겁다 못해 따가울 정도로 강렬한 열기가 지상을 달구었다. 궁 뒤뜰에는 생생히 자라난 짙푸른 잔디가 가지런히 손질되어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커다란 벚나무가 홀로 자리했다. 원래는 봄 한 철 아름답게 피고 지는 벚꽃이었지만 나무에 깃들어 있는 정령의 힘으로 사시사철 아름답게 만개한 분홍색 꽃잎을 볼 수 있었다. 궁의 사용인들이 야외용 파라솔과 다과상을 솜씨 좋게 차려 주었다.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지만 나무그늘 아래에서 얼음을 띄운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자니 제법 운치가 있었다. 다시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먼저 쥬다스가 겪은 이번 사건에 대해 상세히 설명을 들은 후 그간 각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즐겼다. “그 쥐방울만 한 동생 녀석이 어찌나 떼를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오, 남동생은 안 그러는데 진짜 여동생은 오라비 알기를 무슨 제 시종으로 안다니까요? 여자 형제들은 원래 이런 겁니까?” “그럴 리가 있나. 여자든 남자든 대우할 만한 사람을 대우하겠지.” “예? 그 말씀은 크리스티나 님이 보기에 제가 대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흠, 확실히.” “……뭐요?” 모처럼 뜻이 통한 크리스티나와 에단은 같은 눈빛으로 바이칼을 심드렁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욱한 바이칼이 열성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변호를 늘어놓았다. “아, 솔직히 제가 뭐 동생들한테 잘해주는 편까지는 아니긴 한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딱히 못해 주고 그런 건 아닙니다. 뭐, 어릴 때야 자주 싸우면서 자랐으니까 골탕도 좀 먹이고 놀리고 그런 건 했지만. 그래도 때린 적은 없다고요! 생일 때면 꼬박꼬박 선물도 챙겨주고. 괴롭히는 녀석 있으면 대신 가서 혼내주기도 하고.” “그래서, 어떤 부분을 오라비로서 존경하길 바라는 거지?” “……예?” “존경할 부분.” 바이칼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딱히 존경받을 구석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대로 말을 못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기에 그는 어거지로 아무거나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어, 그래도 제가 걔보단 나이가 많으니까…….” 웅얼거리던 바이칼은 에단과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닫았다. 따지고 보면 14살인 바이칼에 비해 15살인 에단이 나이 면에서는 더 우세했다. 그 논리대로라면 그도 에단을 존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뇌리를 스치자 바이칼은 어물어물 말을 바꾸었다. “어음, 동생보단 그래도 똑똑한 편…….” 문예과 수석과 차석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는 한 차례 더 말을 돌렸다. “……마법도 쓸 수 있고.” 쥬다스의 주변을 둘러싼 정령들이 말똥말똥 그를 쳐다보았다. 바이칼은 끝내 자신을 변호하길 포기한 채 두 손을 들어 항복을 선언했다. “에라이, 됐습니다! 이 틈바구니에서 내 자랑을 한들 뭔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제 깨달았나.” “자아성찰은 빠르군.” “……이 양반들이 진짜.” 말은 저리해도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바이칼을 마음에 들어 하기에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이 드는구나. 하지만 꼭 대단하지 않더라도 네 동생에겐 충분히 멋진 오라비일 게다.” “하아. 딱히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을걸요.” 바이칼은 자포자기하여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존경은 됐고 그냥 개뼈다귀 취급만 안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멋지다는 건 내 생각이란다.” “……예?”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는 어깨를 두드려 주며 웃었다.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는 그 아이의 삶 속에서 지금껏 오라비로, 형제로 자리한 것이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다고 생각한단다.” ‘나면서부터 원수가 되어 결국 형제의 가슴을 찢어놓은 나와는 달리.’ 쥬다스는 세이지를 떠올리며 뒷말을 속으로 삼켰다. 겉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셋은 생략된 부분을 미루어 짐작하곤 조용히 입을 닫았다. 잠깐 잔잔한 침묵이 감도는 사이 시종 로한이 다가와 쥬다스에게 또 다른 방문객이 찾아왔음을 알렸다. “해동에서 전하의 즉위식을 참관하기 위해 찾아온 사신입니다. 전하를 꼭 뵙고 돌아가야 되니 상처가 회복되기까지 기다리겠다 하여.” 해동이라면 죽은 생모의 모국이었다. 나라 정세가 기울어가던 때에 왕녀를 보내 루바르잔 황제와의 동맹혼을 맺음으로 인해 가까스로 일어선 국가이기도 했다. 쥬다스는 먼저 찾아온 세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잠시 일어섰다. 공식적으로 찾아온 손님인 만큼 그를 궁내부의 응접실로 모시도록 했다. 그가 응접실로 들어서자 미리 와 기다리고 있던 해동의 사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차렸다.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저는 해동 임금의 명을 받들어 이 자리에 나온 ‘수호 연’이라 합니다. 해동 문관 귀족 연가(延家)의 가주로서 즉위를 축하드림과 동시에 제17대 임금이신 성왕의 전언을 전달드리고자 왔습니다.” 타국의 사신은 보통 그 나라에서도 중직을 맡은 귀족이 찾아오게 마련이었다. 쥬다스 역시 그를 향해 예의를 갖추어 답했다. 수호 연은 이방인답게 얇은 짐승 가죽으로 만든 경갑 옷 위로 하늘색 도포를 걸친 특이한 차림이었다. 또한 외형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황색 피부로 확실히 다른 나라 사람다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이는 30대 초반이었고 눈이 둥글고 코가 살짝 낮아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쥬다스는 얼굴을 보자마자 상대를 금방 기억해 냈다. “지난번엔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즉위식이 있던 날, 피를 많이 흘리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쓰러지던 순간 그를 붙들어준 이였다. 모친의 모국에서 온 사신이다 보니 수호는 퍽 자상한 태도로 그를 대하고 있었다. 잠시 안부를 물은 해동의 사신은 쥬다스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차근차근 본론을 이야기했다. “하윤 공주마마의 혈육이신 성왕께선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면목 없는 이야기지만 그간 해동국이 무너지지 않도록 힘쓰는 것만으로도 피가 마르는 각고의 상황이 있었기에……. 이리 늦게 찾아뵙게 된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또한 마마의 억울함을 풀어주시어 감사드립니다, 전하.” 수호 연은 그대로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갑작스런 큰절에 쥬다스도 일어나 엎드린 그를 일으켜 세웠다. “이러지 마십시오. 미안해하실 필요도, 고마워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니요, 전하. 우리 해동은 전하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성왕께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마마의 변고를 애통해하시어 노하셨으나……. 하윤 공주마마의 무고를 강경히 주장하지 못함에 있어 가장 크게 비탄하셨습니다.” 해동의 제17대 임금인 성왕(成王) ‘서윤 리’. 그는 하윤 리의 하나뿐인 오라비이자 그녀의 동맹혼을 끝까지 반대했을 정도로 동생을 아낀 인물이었다. 하지만 해동은 무너져 가는 왕국이었고, 그들이 재기할 방법은 루바르잔 제국의 강대한 힘을 빌어 새롭게 기반을 다지는 수밖에 없었다. 하윤 공주는 이를 위한 공물이었다. 직접 하윤 공주를 대면한 루바르잔의 황제도 마침 그녀를 한눈에 마음에 들어 했고, 다양한 정치적인 거래를 통해 동맹혼이 성립되었다. 해동은 망해 가는 나라이긴 했으나 다른 적국에 빼앗기기엔 무수한 가치를 지닌 곳이기도 했다. 결국 동맹혼이 결정되고, 하윤 공주가 해동을 떠나는 그 전날까지 당시 세자였던 서윤은 끝까지 이를 반대하며 왕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런 서윤을 토닥이고 격려한 게 바로 하윤이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웃는 얼굴로 모국을 떠났다. “하여, 전하를 꼭 해동에 초대하고 싶다 하셨습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미세먼지가 굉장히 많다고 합니다.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먼지는 됐고 12월 끝나기 전에 눈이나 펑펑 내렸으면 좋겠네요.ㅠㅠ 눈오는 날을 참 좋아하는데 영 눈올 기미가 안보입니다. 끙.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따끈따끈한 응원메세지에 오늘도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ㅎ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91 / 0240 ---------------------------------------------- 11장. 출사표 이제 겨우 왕좌에 앉아 나라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 데에 성공한 서윤은 제 누이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조카를 보고 싶어 했다. “알겠습니다. 당장은 어려우니 기다려 주신다면 잊지 않고 꼭 방문하러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감읍할 따름입니다, 전하.” 수호 연은 다시금 깊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후 그는 사신으로서 소임을 다했으니 그길로 루바르잔을 떠났다. 쥬다스는 방학 기간 동안 황궁에 머물며 군주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약식으로 익혔다. 본래 좀 더 어렸을 때 후계의 인을 받고 루바흐가 아닌 황실 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어야 하는 그였다. 뒤늦은 시작인 데다 그가 학원 생활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된 후계 수업은 졸업 이후로 미루어졌다. 대신 앞으로 익혀야 할 것들에 대해 미리 안내받았기 때문에 혼자서라도 독학할 수 있는 것들이 꽤 생겼다.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 세 사람은 방학이 끝날 때까지 종종 그를 찾아왔다. 그들은 다음 학기 어떤 수업을 신청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도 함께 나누었으며 서로에게 부담 없이 연락을 주고받는 등 부쩍 친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한여름 밤 꿈처럼 방학이 지나가 버리고, 이제 루바흐로 돌아갈 시기가 되었다. 쥬다스는 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세이지를 찾아갔다. 죽은 사야 황후의 간계가 밝혀짐으로 인해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침묵의 궁’에 갇혀 있었다. 황족 전용 감옥이라 불릴 정도로 황량하고 감시자들의 눈길이 가득한 장소였다. 하지만 정작 아이에게는 그곳이 어딘들 상관없었다. 별도로 가두지 않았더라도 세이지는 방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터였다. 늘 생기 있게 반짝이던 9살 소년의 눈동자는 죽은 물고기처럼 탁했다. 멍하니 창가에 기대 하늘만 바라보고 있던 아이는 형의 방문 소식에 고개를 돌렸다. “……형님.” “오랜만이구나, 세이지.” 쥬다스가 두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찾아온 이유는 아이에게도 슬퍼할 시간이 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쥬다스가 황후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위험천만한 도박 게임에 뛰어들어 제 목을 조른 건 황후 자신이었다. 그녀는 게임에서 졌고, 그래서 죽었다. 사실이 그랬지만 그렇다 한들 쥬다스를 보는 세이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지난 두 달간 세이지는 홀로 마음껏 울었다. 울다 지쳐 기절하듯 잠들고 꿈속에서도 울었으며 깨어나서도 서러워 울었다. 쥬다스가 피해자에 불과하단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원망하기도 했다. ‘……형님만 아니었으면.’ 이기적인 생각이었으나 막 어미를 비참하게 잃은 어린 세이지로서는 자연스럽게 가슴을 메운 원망이었다. 하지만 그 원망은 오래 가지 않았다. 슬픔이 지나쳐 양은 냄비 끓듯 파르륵 끓어올랐던 분노였다. 원망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일 뿐, 진정으로 쥬다스가 악인이라고 생각한 게 아니었기에 과열되었던 머릿속이 식는 속도도 빨랐다. 대신 세이지는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은 걸인처럼 무너졌다.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하게 엉켰으며 옷은 오래 갈아입지 않아 더러웠다. 눈물자국이 마르지 않아 얼굴에 두드러기처럼 피부염이 일어났으며 제대로 먹지 못해 전체적으로 몸이 비실비실했다. 얼굴 가득 드리운 그림자를 발견한 쥬다스는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창가에 기대 선 세이지는 멍하니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게도 알려주겠느냐?” “…….” 쥬다스는 세이지 곁에 서서 함께 창가에 기댔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 커튼이 펄럭였고 열린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와 보석처럼 반짝였다. “……저는.” 한참 만에 세이지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를 선택했어요.” “그래.” “전부 알고 있었는데. 그랬으면서 말리지 못했어요. 남들에게 알리지도 못했고요.” “그랬구나.” 부드럽게 말을 받아주는 쥬다스를 보며 세이지는 울컥 소리쳤다. “그런데 왜!” 너무 오랜만에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졌다. 쉰 소리가 나는 목을 가다듬을 생각도 않고 아이는 재차 말을 이었다. “왜 형님은 아직도 그런 표정이세요? 전 다 알고 있었다구요. 형님의 어머니를 죽인 게 누군지, 형님을 죽이기 위해 사령과 계약한 게 누군지, 이번에 형님이 이겨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전부 알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도…….” 빨갛게 일어난 볼 위로 주륵 눈물이 흘렀다. 세이지는 더 이상 표정을 관리하지 않았다. “내가, 나쁜 거잖아요. 전부 나 때문인데 내가 모른 척 도망가서.” “세이지.” “차라리 욕해 주세요. 형님을 배신하고 폐하를 배신하고, 나쁜 건 줄 알면서도 죄를 지은 저를, 미워하셔야 하잖아요.” “세이지.” “그래야 제가, 그래야 저도.” 나를 미워하는 형님을 미워할 수 있을 테니까. 고요히 내려다보는 맑은 금안을 마주한 세이지는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창틀에 얼굴을 묻었다. 일그러진 얼굴 대신 작은 어깨가 들썩였다. “미안하다.” “…….” “내겐 너를 미워해야 할 이유가 없구나. 그것이 네게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었음을 알고 있단다.” 뚝 울음이 그쳤다. 세이지는 훌쩍이며 고개를 들었다. “너는 누구도 배신한 적 없어, 세이지. 지키기 위한 선택을 했을 뿐.” “…….” “그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느냐?” “……어.” 세이지는 히끅 딸꾹질을 했다. 우물쭈물 망설이다 형의 따뜻한 시선을 확인하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요.” 아이는 그날 목이 쉬도록 울었다. 홀로 울었던 날들과 다르게, 형의 옷자락을 붙들고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처럼 하염없이 울었다. 이는 3황자 세이지가 어머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제 스스로 걸음마를 시작한 첫날이었다. * * * 드디어 루바흐의 개학일이 밝았다. 더위가 한풀 꺾인 늦여름의 햇볕이 내리쬐었다. 방학 중엔 한산하던 교정에는 다시 교복을 차려 입은 학생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지나다녔다. 다시 루바흐로 돌아온 아이들은 새 학기의 시작에 대한 설렘과 학업에 대한 걱정 등으로 들떠있었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이슈는 다름 아닌 황태자 자리에 오른 쥬다스에 관한 소식이었다. 불과 반 년 전만 해도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볼 품 없는 ‘백로황자’가, 이젠 황제의 후계가 되어 돌아왔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침없는 행보였다. 그뿐 아니라 역사상 단 한 명뿐이었던 자연계 4속성 정령의 계약자라는 사실도 함께 드러나 그에 대한 경탄이 그치지 않았다. 학생들은 마치 새로운 시대의 전설을 눈앞에서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오셨대!” “어디, 어디?” 그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루바흐 학생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차마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하고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시민들처럼 좌악 늘어선 학생 무리를 지나는 한 소년이 있었다. 잡스럽지 않고 깨끗한 은발에 부드러운 빛을 담은 금안, 몰려든 인파를 보고도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제 갈 길을 가는 쥬다스였다. “쥬다스 님!” 그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 아이들이 있었다. 방학 중에도 종종 얼굴을 봤지만 학교에서 다시 만난 그들은 새삼스럽게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간 황실 예복이나 고급 의상을 차려입고 만났던 것과 달리 다들 같은 교복을 입고 루바흐에 도착한 그들은 자연스레 쥬다스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바이칼, 크리스티나, 에단. 좋은 아침이구나.” “옙, 슬슬 날씨도 풀리려나 본데요.” “아침저녁으로는 이제 꽤 쌀쌀합니다. 겉옷을 하나 걸치심이.” 슬슬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환절기 특유의 급격한 온도 변화에 몸이라도 상할까 염려하는 아이들을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괜찮단다. 날이 풀려서 시원한 것이 딱 좋아. 오히려 크리스티나 너는 여자아이니 몸을 따뜻이 하는 편이 좋겠구나.” “……저 루바흐의 여기사님을 ‘여자아이’ 취급하시는 건 쥬다스 님이 유일하실걸요?”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중얼거렸고, 자신이 한 걱정을 돌려받은 크리스티나는 그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중 그들에게 노란 머리의 소년이 한 명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쥬다스 님.” “마르젠, 여기서 보니 반갑구나.” “하하. 저도 반갑습니다.” 여전히 유들유들한 분위기의 마르젠이었다. 그는 방학 기간 중 다 같이 모이는 자리에 끼진 않았지만 따로 쥬다스를 찾아와 축하 겸 병문안을 다녀가곤 했다. “이야, 모두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안부는 딱히 묻지 않아도 그래 보이니 생략하지, 그대.” “아하하. 여전히 매정하시긴~” 크리스티나의 푸대접에도 마르젠은 익숙한 듯 웃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 일행 틈에 끼어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숙소는 반대 방향이신 걸로 압니다만.” “들러야 할 곳이 한 군데 있어서 말이다.” “아.” 그제야 쥬다스의 이능에 생각이 미친 마르젠은 알겠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세 아이는 이미 그가 향할 곳을 알고 있었기에 딱히 의문을 품지 않았다. 그들은 얼마 걷지 않아 목적지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훨씬 꽃의 가짓수가 늘어나 화사해진 정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은은한 꽃향기와 팔랑거리는 나비가 정원의 분위기를 한층 따뜻하게 꾸며 주었다. 정령학 연구소의 정원이었다. “어? 오빠다!” 연분홍색 머리카락에 파란 리본 핀을 꽂은 리베흐가 쥬다스를 발견하고 도도도 뛰어왔다. 그녀의 들뜬 기분에 따라 겨울바람정령 비비가 살랑살랑 눈송이가 섞인 바람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얼음 결정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손을 뻗는 마르젠과 나머지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본 리베흐는 경계하듯 쥬다스에게 폭 달라붙었다. “……누구?” “내 친구들이란다.” “오빠 친구?”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오빠’ 호칭에 쥬다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 래.” “웅, 네! 오빠는 리베흐 친구니까. 친구의 친구님들, 안녕하세요.” 7살 소녀의 배꼽 인사에 네 사람은 웃으며 함께 인사해 주었다. “반가워, 이름이 리베흐? 오빠는 마르젠이라고 해, 마르젠.” “마르젠 오빠?” “그렇지! 리베흐는 똑똑하구나, 하하.” 제일 사교성이 뛰어난 마르젠이 빠르게 리베흐와 친해졌다. 그러는 사이 멀리서 아벨이 그들을 발견하고 헐레벌떡 뛰어왔다. 곁에는 남매처럼 닮은 투르키가 함께였다. “전하! 어, 언제 오신. 아니, 괜찮으신. 아니, 추, 축하드립니다.” 아벨은 정신없이 말을 더듬으며 그에게 하려던 말을 늘어놓았다. 표현은 미숙했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알아본 쥬다스는 아벨을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고맙구나, 아벨.” “어머나, 쥬다스 님? 손님들도 함께 오셨군요. 어서 오세요.” “허허. 오셨습니까?” 이사벨, 그리고 콜도 그에게로 다가왔다. 정원을 가꾸다 말고 온 그들은 물뿌리개와 화분 등을 들고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다른 정령학 수업을 듣는 아이들도 다가와 그들을 반겨 주었다. “……그래, 돌아왔구나.” 그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정령들이 까르르 웃으며 반응했다. 「편안해 보여, 이그레트.」 「재밌는 사람이 많다요!」 「다들 진심으로 반겨 주는 게 보여요.」 「그리고 너 역시. 저들을 만나 기뻐하고 있군.」 처음으로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것이 즐거웠다. 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 미안해할 필요도 없었고 도망칠 이유도 없었다. 그 시선 속에 자신을 이용하려는 생각이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결국 관계란 그런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도 하고 위해 주기도 하면서, 혹은 상대를 위해 헌신하기도 하고 반대로 무언가 해주길 바라기도 하는, 그런 복잡한 것들이 전부 인간관계였다. 정작 그 자신도 지금 눈앞의 이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언제까지고, 지금과 같은 친우로 남아주길.’ 변하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늘 지금 같을 순 없음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 바람은 그가 부릴 수 있는 최고의 욕심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되지 않더라도 더는 실망하거나 도망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아프지 않고 날갯짓하는 새는 없다. 겉보기에 잔잔해 보일지라도 바다에는 파도란 굴곡이 존재하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원하는 대로만 살 수는 없지만, 알 수 없는 미래가 있다는 건 설레는 일이라고. 그래서 그는 두 번째 삶에서만큼은 인간답게 살아보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이제부터 느리지만 똑바로 걸어갈 세상에 대한 출사표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큽, 드디어 1부완결을 찍었습니다! 1부완결 기념으로 Q/A를 받아보려합니다. (...계실까) 혹 질문사항이 있으시다면 'Q.질문'을 해주시면 다음 화에 'A.답'을 달아드리겠습니다. 이제 2015년의 마지막 날이 되었네요. 올 한 해 마무리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바라며,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저는 내일 바닷가로 떠나 새해 첫 일출을 보러갑니다. 흐흐.. 다녀와서 독자님들께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야겠네요.ㅎㅎ 그럼 이틀 뒤, 내년에(?) 에필로그와 집필후기로 다시 뵙겠습니다.^^ 선호작,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메세지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 돌님께서 팬아트로 유니를 그려주셨습니다. 곧 공지에 추가해두겠습니다.ㅎ 귀한 선물 감사합니다!) (이 글은 2016.01.10 수정되었습니다. 내용수정과 용량조절을 함께 적용하였으므로 코멘트 및 작가후기가 본 내용과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0092 / 0240 ---------------------------------------------- 2부 프롤로그 / 12장. 서막 1황자 쥬다스가 황태자로 즉위한 지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는 자신이 미리 예고한 대로 2년 안에 모든 학업을 끝마치고 루바흐 조기 졸업을 달성했다. 그리고 졸업 후 군주의 후계로서 해야 할 과정을 착실하게 밟아나갔다. 17살이 된 지금, 쥬다스는 황태자로서 받는 마지막 수업의 일종인 ‘순례의 길’을 떠날 채비를 시작했다. 순례의 길이란 대제국 루바르잔을 다스리는 군주의 후계가 꼭 거쳐야 하는 관례였다. 다스리는 자는 통치를 받는 영지와 속국을 시찰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예행하여 군주로서의 책임감을 다지는 것이 이 순례의 목적이었다. 보통은 황태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수많은 황실호위대와 기사단이 따라붙으며 그의 방문을 각 영지에 미리 알린다. 그리하여 시찰보다는 유람 겸 귀족들과의 친목도모를 위한 성대한 행차 삼아 다녀오곤 했지만 쥬다스는 그리하길 거부했다. 그는 직접 나서서 황제에게 청을 넣었다. “이 기회를 헛되이 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폐하, 부디 청컨대 사람들의 참된 삶을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지 알고자 합니다.” 전생에서는 그저 피하기에만 급급했던 것들에 대해 지금은 몹시 궁금해졌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알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행차를 할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고서 어디에도 알리지 않은 채 잠행을 나갈 것을 요청했다. 황태자의 당돌하기까지 한 청을 받은 황제는 긴 침묵 끝에 무거운 허락을 내렸다. 대신 조건으로 황태자친위기사단과 황실소속 그림자호위 둘을 동행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황제는 쥬다스를 향해 날카로운 경고를 남겼다. “네 어깨에 걸린 것들은 더 이상 5년 전과 같은 무게가 아니다. 너는 루바르잔의 차기 태양이다. 혹 너의 목에 위협이 가해진다면 너를 따르는 모든 이의 목이 달아날 것이며, 경솔히 행동하여 작은 상처라도 입는다면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이를 명심하라.” 만일 이번 순례의 길에서 쥬다스가 잘못된다면 후계자리는 자연히 2황자에게 넘어간다. 2황자 카이제르는 쥬다스보다 고작 두 살 어린 15살 소년이었다. 유순한 성격에 신체적인 이능이 뛰어났던 그는 세이지처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외척 세력이 없어 크게 눈에 띄진 않았지만 그래도 황제의 후계로서 모난 구석은 없는 훌륭한 황자였다. 쥬다스가 날개를 펴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따르고 차기 군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제법 있었지만 5년 전 죽은 사야 황후가 일으킨 사건으로 인해 흐지부지 흩어지고 말았다. 지금으로선 4속성 정령술이라는 강력한 이능과 수많은 귀족이 지지하고 있는 1황자를 밀어낼 세력도 이유도 없었다. 쥬다스는 루바르잔의 황태자로서 완벽했다. 더 이상 반발은 없었으며 유순한 성격의 2황자 역시 큰 야욕 없이 무예를 연마하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쥬다스가 순례의 길을 잠행으로 떠나겠다고 한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른 분란을 조장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그를 막지 않았다. ‘뜻이 있다면 어디 스스로 이루어 보거라. 여기서 쓰러질 나무라면 어차피 더 큰 싸움에선 살아남지도 못할 터.’ 황태자가 처음으로 올린 청에 대한 허락이자 시험이었고, 또한 신뢰의 표현이기도 했다. 황제의 허가하에 황궁에선 조용히 그에 대한 준비가 이루어졌다. 황태자친위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은 에단 R.헤이가였다. 쥬다스보다 1년 반 늦게 루바흐를 졸업한 에단은 공작가인 집안의 원조와 그간 갈고닦은 우수한 무예 성과를 기반으로 거리낄 것 없이 곧장 기사가 되었고, 작년 초 친위기사단장에 임명되었다. 19살의 나이로 이미 검으로는 제국 내에서 당해낼 자가 없으니 황태자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기엔 적격이었다. 친위대는 일반 기사뿐 아니라 마법기사와 치유술사를 포함하고 있었다. 그중 마법기사로 입단한 바이칼은 쥬다스의 곁에서 실질적인 사회 정보나 진솔한 충언 등을 도맡아 참모 격으로 일했다. 그들과 비슷한 시기에 졸업한 마르젠은 가문을 이을 백작 후계로서 정계에서 물 만난 고기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크리스티나의 경우 공작영애로 돌아가 개인 교습을 받으며 간간히 사교 활동에 참석하는 것으로 소식을 알렸다. 그리하여 곧 출발할 ‘순례의 길’에는 에단이 이끄는 친위기사단 열둘과 황실소속 그림자호위 두 사람이 더 붙어 총 열다섯의 인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리되었던 것이, 출발 전날이 되자 조금 변동이 일어났다. “저만 빼고 가시려 하시다니 서운합니다, 스승님.” “……이런, 어찌 알았느냐?” “허허. 저도 바람의 정령술사라는 걸 잊으신 겝니까? 여튼 저도 반드시 동행할 겝니다. 말리지 마십시오.” 굳은 의지를 다지며 나타난 것은 콜이었다. 이제 일흔이 넘은 나이의 콜은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었지만 정령을 다루는 술사였기에 나이에 비해 건장한 몸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무리하게 움직이기엔 어려울 수 있는 연령이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참, 매일같이 장거리를 움직여야 하는 데다 그리 편안한 일정은 아닐 터인데.” “상관없습니다. 스승님은 제 나이 때 벌써 거동이 불편하셨던지요? 자연의 정령과 계약한 술사는 보통 사람들보다 노화도 느리고 늘 생기가 넘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하, 원 녀석도.” 70대 노인이 17세 소년에게 부릴 투정은 아니었지만 쥬다스는 콜의 말뜻을 곧장 이해하고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아흔이 넘는 나이까지 정정히 살다 간 전생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서 일흔은 한창나이였다. 본인이 저렇게 원하는데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쥬다스는 나이 든 제자의 투정에 져주는 수밖에 없었다. 「쟤도 참 언제 철이 들까 몰라.」 「후후~ 너무 그러지 말아요. 유니. 나름 귀여운데요, 뭘.」 유니의 심드렁한 감상에 카니가 쿡쿡 웃었다. 바람과 불에 최상급 친화력을 가지고 있는 콜이었으니 그들 눈에는 제법 귀여워 보이긴 했다. 대신 토니와 루니는 침묵했다. 「그런데 이그레트.」 “음?” 함께 가겠다며 확답을 받아낸 콜이 자리를 떠나자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한 방향을 가리켰다. 후웅- 녹색빛으로 반짝이는 미풍이 유니가 가리킨 쪽으로 산들산들 흘렀다. 「저 애는 왜 데려가겠다고 한 거야?」 벚나무 아래 앉아 휴식을 즐기던 쥬다스는 천천히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긴 은발이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든 햇살을 받아 아침호수처럼 반짝였다. “글쎄, 변덕이려나. 그 아이에게도 세상을 볼 기회를 나눠주고 싶더구나.” 그의 시선은 침묵의 궁이 자리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어제 3황자 세이지, 이제 열넷이 된 배다른 동생을 위해 기꺼이 손을 내밀었다. 어미를 잃고 홀로 침묵의 궁에 갇혀 지내던 세이지를 위한 황태자의 또 다른 청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번 순례의 길에 3황자를 동행할 것. 중신들은 크게 반대했으나 황제는 기어코 그의 청에 허가를 내렸다. 그리하여 다음 날 출발할 황태자의 순례행렬에는 총 열일곱의 인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것이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역사서에 기록될 첫 번째 발자취였다. * * * 황태자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황궁을 떠났다. 중직을 맡은 일부 귀족들은 그가 순례의 길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정확히 언제 출발해서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해서는 몰랐다. 잠행을 결정한 쥬다스는 심지어 떠나는 당일, 황제조차 만나지 않고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함께 움직이는 일행도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첫 번째 행선지를 알지 못했다. 그는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포탈을 이용할 생각이 없었고 마차를 타지도 않았다. 이동수단은 황실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던 말이었다. 웜브레드로 특수 배양된 경종마들이었는데 새끼 때부터 기초훈련은 물론이고 전투훈련까지 받아 체력이 강하고 영리했다. 또한 각각 금속재질의 단단한 보호대를 차고 있었는데 거기에 안전과 편리를 위한 특수마법이 걸려 있어 장시간 승마하더라도 탄 사람의 몸에 큰 부담을 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었다. 에단과 열둘의 기사단은 물론이고 어린 세이지조차 승마를 할 줄 알았다. 나이가 많은 콜도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편안히 말 위에 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아무것도 거칠 것 없이 곧장 출발했다.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어둑한 새벽녘, 열다섯 기의 말발굽 소리가 찬 공기를 뚫고 울려 퍼졌다. 그들과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황제가 붙여준 그림자호위 둘도 은밀히 그 뒤를 따랐다. 이른 새벽에 출발하여 수도를 빠져나간 쥬다스는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오후 무렵에서야 한 개울 앞에서 멈춰 섰다. 봄기운에 얼음이 녹아 맑고 깨끗한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고 있었다. 일행은 그곳에서 말들의 목을 축이고 휴식할 겸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직접 자신이 타고 온 말에게 물을 먹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법 수도와 멀리 떨어진 위치였는데 노랗게 죽은 풀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전방에는 낮은 경사를 따라 빼곡하게 키 작은 과일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겨우 어른 허벅지 정도에 닿을 정도로 조그마한 나무들은 초봄의 포근한 햇살을 받으면서도 기운 없이 축 가지를 늘어뜨렸다. 볼품없이 말라 있는 죽은 잎사귀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의 머리 위를 차지하고 매달려 있던 토니가 툭 바닥에 내려앉았다. 「이그레트! 여기 이상하다요.」 「이상한 줄은 보면 알아, 얘.」 타박을 놓으면서도 유니는 포로록 날아올랐다. 부드러운 녹색 바람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산들산들 불어왔다. 「그치만 여기 나무들이 다 죽었다요. 우웅, 땅은 멀쩡한데. 누가 일부러 죽인 거 다요!」 토니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땅강아지처럼 흙에서 통통 튀어 다녔다. 척 보기에도 지나치게 황량한 땅이다. 개울에 물이 흐르지 않는 것도 아니고 봄이 시작되어 날씨가 추운 것도 아닌데 전체적으로 식물들이 시들시들 말라죽어 있었다. 쥬다스는 개울에 말을 두고 천천히 언덕을 올랐다. 실체화하여 모습을 드러낸 4속성 정령이 함께였기 때문에 그가 지나는 자리마다 반짝이는 물거품과 녹색 바람이 흩어졌다. 본래대로였다면 이 시기쯤 푸르게 잎사귀가 돋았을 나무들은 까맣게 죽은 잎을 매단 채 전부 시들어 있었다. 비탈진 경사를 따라 넓게 심어둔 나무 전체가 그랬다. 가까이 다가간 그가 죽은 나뭇잎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이었다. “전하.” 어느샌가 에단이 그의 뒤를 따라와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2부의 시작입니다!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ㅎ 소제목에 표기해놓긴 했지만 이번 편은 앞부분에 미리 공개해두었던 프롤로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2부는 따로 1장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12장'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서 붙입니다! 오늘 이어서 다음화까지 업로드해놓겠습니다. 그럼 2부에서도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0093 / 0240 ---------------------------------------------- 12장. 서막 올해 19살이 된 에단은 제국법상으로 이미 작년에 성인식을 마친 어른이었다. 같이 루바흐를 다녔던 당시보다 키가 훌쩍 커 있었고 철저한 자기관리로 인해 검을 휘두르기 적합한 위치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을 만들어두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목선을 따라 깔끔하게 잘라 단정함을 유지했고 매일같이 수염을 깎아 매끈한 턱은 한층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본래 책임감 강하고 매사에 철저한 성격이긴 했지만 황태자친위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라는 중직을 맡으면서 좀 더 신중해졌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곳에는 오래 머물지 않으시는 편이.” “에단.” “……예.” 부드러운 부름에 에단은 고개를 숙였다. “이곳은 궁 밖이질 않느냐. 계속 그리 부르다간 잠행이 아니라 행차를 하게 될 것 같구만.”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하면, 어찌 시정할 생각인고?” “…….” 에단은 짓궂게 물어오는 쥬다스를 보며 말문이 막혔다. 엘리트 코스를 밟아 친위기사단장이 된 그로서는 주군의 잠행을 보좌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황태자를 황태자라 부르지 못하고 친위대를 친위대라 하지 못하는 상황을 뒤늦게 실감한 그가 일자로 입을 다물자 쥬다스가 작게 웃어 보였다. “예전처럼 이름으로 충분하다. 그리해 주겠느냐.” “……!” 어찌 감히, 라고 답하려던 에단은 혀를 깨무는 심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5년이라는 세월을 주군의 곁에서 보필하며 지내온 그로서는 저 유순해 보이는 황태자의 고집이 쇠심줄보다 질기다는 사실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시찰 임무를 제대로 해내기 위해 쥬다스는 눈에 띄는 은발마저 평범한 갈색으로 바꾼 상태였다. 색을 바꾸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황실마법사들이 연구해 낸 특수 모자를 쓰기만 하면 되었다. 챙이 좁은 검은색 중절모는 머리에 착용하는 순간 본래 색이 무엇이었든 간에 마법의 효과로 갈색으로 바꿔 버렸다. 반대로 다시 색을 되돌리는 것 역시 모자를 벗기만 하면 되므로 매우 간단한 방식이었다. 황태자의 이름이야 유명하긴 했지만 어차피 제국에서 그 혼자 쓰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상관이 없었다. 원래 당대의 유명한 위인이나 귀인의 이름은 아이들 이름으로 많이 사용된다. 같은 맥락으로 ‘이그레트’라는 이름도 이 시대 많은 아이가 가지고 있었다. “어, 식사 준비 끝났는데요. 두 분 거기서 무얼 하십니까?” 학자용 푸른 로브를 걸친 바이칼이 그들에게 다가와 기웃거렸다. 쥬다스와 에단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보거라.” “예?” 바이칼은 쥬다스가 내민 손바닥을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그 안엔 까맣게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잎사귀가 놓여 있었다. “근처엔 개울이 흐르고 땅은 건강함에도 식물이 이리 죽을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흠, 그러게 말입니다. 이건 꼭 무슨 병에 걸려 죽은…….” 쥬다스의 손바닥에 놓인 죽은 잎사귀를 자세히 살핀 바이칼은 고개를 돌려 언덕을 따라 전부 시들어버린 나무를 확인하고 쯧 혀를 찼다. “여기서 뭐 전염병이라도 도는 걸까요?” 「에에엥.」 「뭐가 또 ‘에에엥’이야?」 토니가 그 말에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건 병 아니다요. 병이라면 이런 식으로 까맣게 말라죽지 않는다요!」 실체화되어 있는 채로 열렬히 고개를 내젓는 토니에게 세 사람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쥬다스 뿐이었지만 에단과 바이칼도 멈칫 생각이 미치는 바가 있었다. “설마.” “……사령?” 두 사람이 동시에 중얼거렸다. 5년 전 사야 황후의 사령술 사건 이후로 ‘사령’이란 더 이상 그들에게 있어 생소한 존재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금기로 막아둔 사령술은 그날을 기점으로 여기저기서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사령술을 익힌 자는 엄벌로 다스린다 하였지만 누군가 일부러 술법을 전파하고 다니기라도 하듯 사령술사에 대한 신고가 점차 늘었다. 더 크고 강력한 힘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사령이란 배고픈 고양이 앞의 생선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 탓에 하루가 멀다 하고 사령술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터졌다. “내 생각도 너희와 같구나. 허나…….” 쥬다스는 손안에 든 죽은 잎사귀를 털어버렸다. 바뀐 머리색과 달리 여전히 맑게 빛나는 금안이 부드럽게 그들을 향했다. “우선 무슨 목적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겠지.” “예에?” “왜 하필 이 땅의 나무들을 다 말려 죽인 것인가.” 바이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덤덤한 답이 돌아왔다. “사령의 힘이라면 사람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저 덤덤하게 듣기엔 그 내용이 제법 시렸다. 사령술에 대해 차가운 분노를 살짝 드러낸 쥬다스는 나무들을 정화하지 않고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세 사람이 언덕에서 내려오자 친위기사들이 준비해 둔 스프와 빵을 가져다주었다. 에단이 기사단장이 되면서 다른 친위기사들과도 자주 안면을 익혀둔 쥬다스는 익숙하게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갔다. 냄비를 끓이느라 피워둔 모닥불 앞에 붉은 머리 소년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쥬다스는 접시를 든 채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직 날씨가 제법 쌀쌀하구나.” “……형님.” “모닥불 앞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지?” 빵을 든 채 먹지도 않고 멍하니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고만 있던 세이지가 쥬다스를 보곤 미소 지었다. “네, 전 모닥불을 이렇게 피우는 건 줄 몰랐어요.” “처음 본 게로구나.” “따뜻해요. 궁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이제 열네 살이 된 세이지는 생기발랄하고 치기가 넘치던 어릴 때와 달리 매우 침착해졌다. 침묵의 궁에 오래 갇혀 있던 탓에 사람을 많이 만나지 못해 소극적이 된 면도 있었다. 그래도 꾸준히 자신을 만나러 와주고, 지금은 아예 궁 밖으로 데리고 나와 준 형이 있기에 아이는 비뚤어지지 않고 바르게 자라날 수 있었다. 두 형제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함께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었다. 대충 식사를 마무리하고 일어날 때쯤 쥬다스는 본래 더 달리려던 말고삐를 돌려 근처에 위치한 도시로 향했다. 일행의 행선지를 정하는 건 오로지 쥬다스에게 달려 있었으므로 모두들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그의 뜻에 따랐다. ‘레이븐 시티.’ 팻말에 적힌 도시명에 눈길을 준 쥬다스가 벗어놓고 있던 마법모자를 가볍게 머리에 얹었다. 신비롭게 반짝이던 은발이 순식간에 평범한 갈색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그의 의지에 따라 실체화되어 있던 정령들도 모두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말의 속도를 줄여 도시 입구까지 천천히 이동했다. 레이븐은 도시명이기도 했지만 주변 자잘한 마을을 포함한 영지명이기도 했다. 레이븐 영지는 농업과 산림업 등을 통해 경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동네였다. “정지! 신분을 검사하고 있으니 협조 부탁드립니다.” 영주가 사는 모든 도시에선 입구에서부터 신분을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특히나 요즘처럼 뒤숭숭한 시점에선 철저한 보안이 필수였다. 쥬다스 일행은 미리 챙겨둔 위장용 신분증을 사용하여 검문을 통과했다. 그들이 이번 잠행에서 임시로 사용하는 신분은 여행 중인 귀족 도련님과 호위기사들이었다. 딱 봐도 호위를 명목으로 우르르 붙어 있는 친위대를 두고 평민 노릇을 할 수는 없었기에 제일 무난한 귀족가 영식을 택한 것이다. 십 대의 귀족 도령이 호위들을 끌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는 일이야 워낙 흔했다. 대개는 마차를 이용하거나 포탈을 타는 편이지만 쥬다스처럼 몸소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 나이 또래의 불타는 모험심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 탓이었다. 어찌 보면 쥬다스도 그 명목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제법 어울리는 역이었다. “이곳 특산품은 뭔가?” 쥬다스는 새로운 도시를 구경할 기대에 가득 찬 귀족 자제처럼 경비를 향해 물었다. 일단 그의 신분이 귀족이라 확인되었기에 경비는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블루베리를 넣고 담근 와인입니다. 다른 곳에서 나는 베리류보다 훨씬 달고 향이 좋아 많이들 찾으시죠.” “오, 그런가? 그런데 오면서 블루베리 나무 같은 건 못 본 것 같은데.” 일부러 어수룩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경비들이 미안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지난해부터 흉작이 들더니 나무들이 전부 말라죽었습니다. 묘목들만 간신히 살려놓은 상태인데 아직 열매를 맺기엔 무리라서……. 그래도 재작년까지 담가둔 상품이 많으니 구하기 어려우시진 않을 겁니다.” 그 바람에 가격은 원가보다 다섯 배가 넘게 뛰었지만 경비는 부러 거기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그 속내를 뻔히 꿰뚫고 있는 쥬다스였으나 그는 그저 허허롭게 웃으며 지나쳤다. “참고하도록 하지. 그럼 수고하시게.” “레이븐 시티에서 즐거운 방문되십시오.” 도시 안으로 들어간 이들은 말에서 내려 말들을 보호소에 맡겨두었다. 떠들썩한 장터로 들어선 쥬다스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이것저것 행상을 구경했다. 정말 관람이라도 온 듯한 여유로운 태도였다. 따르는 이들은 평소답지 않은 그의 행동에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조용히 뒤를 따랐다. “골라, 골라! 3개에 1실버!” “레이븐 시티에서만 나오는 시지 않고 달콤한 베리 주스 팝니다!” “블루베리 빵 5개에 단돈 2실버, 다 떨어지기 전에 얼른 사가십쇼!” 왁자지껄한 장터에는 주로 먹거리가 가득했다. 쥬다스는 그중 주스와 빵을 구매해 일행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전하…… 아니, 쥬다스 님. 이런 데서 파는 음식은.” “괜찮다. 사람 사는 곳에서 못 먹을 걸 팔겠느냐.” “하나.” “먹어 보거라. 달콤하니 맛이 아주 좋아. 혹 단 걸 먹기 싫어 투정 부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황족은 아무 음식이나 입에 대서는 안 된다. 특히 황제의 후계로 자리매김한 쥬다스의 경우 각별한 관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잠행 나온 자리에서까지 귀한 것들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히려 궁 안에서 입이 짧기로 소문난 황태자는 서민들의 음식을 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씹어 삼켰다. 그 모습에 에단을 비롯한 기사들이며 세이지나 콜 역시 자신 몫으로 주어진 간식을 맛보아야 했다. 달콤새콤한 블루베리를 넣어 만든 빵과 주스는 그 안에 설탕을 뿌려 자극적인 단맛을 만들어냈다. 단 음식을 질색하는 에단으로서는 거의 고문에 가까운 음식이었으나 그는 표정 하나 찌푸리지 않고 빵을 씹었다. 후우웅 녹색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흩날렸다. 도시를 한 바퀴 돌고 온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으며 입을 열었다. 「알아왔어. 여기 영주가 문제인 것 같아.」 쥬다스를 제외한 그 누구도 정령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는 주스를 마시면서 덤덤히 행상을 구경하는 척하며 유니의 설명을 들었다. 「주민들을 아주 착취한다나 봐. 남의 건 자기 거, 지 거도 당연히 자기 거. 나눌 줄 모르고 오히려 뭐든 과하게 징수를 하고 빼앗아간대. 이번에 블루베리 농사가 망한 것도 영주란 인간이 욕심 부리다 그렇게 된 거라는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챕터의 소제목은 "서막"입니다. 가벼운(?) 사건과 마주하면서 2부에서 보여드리고자 하는 큰 뼈대를 조금씩 드러낼 예정입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ㅎ 0094 / 0240 ---------------------------------------------- 12장. 서막 「무슨 욕심이요?」 카니가 다홍빛 눈망울 가득 호기심을 담고 물었다. 그러자 유니는 표정을 살짝 구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영지에서 가장 비옥한 땅으로 유명한 농가가 하나 있었대. 유달리 맛있는 열매가 나고 그 양도 다른 땅에 비해 무지막지하게 많이 나왔다고. 부부와 딸래미가 같이 운영하는 블루베리 농장이었는데, 점점 유명해지니까 소문을 들은 손님들이 그 집 과실만 찾으러오고! 그래서 욕심 많은 영주가 그 꼴을 보고 아주 배 아파 죽으려 했지.」 레이븐의 영주는 결국 농장을 빼앗기에 이르렀다. 일부러 농장에서 사고를 일으켜 죄를 뒤집어씌운 후 농장을 비롯한 모든 재산을 몰수하고 심지어 농부의 아름다운 부인마저 빼앗아 첩으로 삼았다. 그들 사이에 있던 열세 살짜리 어린 딸은 하녀로 삼아 끌고 갔다. 딸은 아직 어려 첩으로 삼을 순 없었으니 하녀 일이라도 시키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농부의 부인은 첩살이를 요구하자 그대로 목을 매 자결해 버렸다. 하루아침에 그동안 열심히 일군 땅과 재산, 부인마저 잃어버린 농부는 눈이 뒤집혀 영주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감히 귀족을 시해하려 했다는 이유로 죽도록 두들겨 맞고 쓰러졌다. 제압하는 과정에 머리를 잘못 맞고 사망하게 된 농부는 마지막으로 영주를 저주하며 죽어갔다. ‘네놈……. 네 사악한 짓거리를 하늘이 보고 땅이 보았으니. 네 영지에서 나는 모든 나무는 꽃을 맺지 못할 것이며 과실을 얻을 수 없으리라. 네가 얻고자 하는 건 무엇이든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기이한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마치 그 저주를 정말 땅이 듣기라도 하듯, 그날부터 정말로 모든 나무에서 열매가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한 해가 지났을 뿐이므로, 영주는 이를 가볍게 여겼다. 이미 거둬들인 과실로 담근 주류나 말린 블루베리 등 여분이 잔뜩 쌓여 있었고 굳이 블루베리가 아니더라도 그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은 많았다. 결국 이 시점에서 농부의 저주는 영주보다는 다른 농가의 주민들을 피 말려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그 저주란 게 참 이상하지? 아무리 원한이 있어도 이능을 가진 자도 아닌데 전부 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는 게 말이 안 돼.」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 위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사령의 기운이 느껴져. 분명 이번 일, 사령이 개입되어 있어.」 “흐음.” 우뚝, 그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그에 따라 일행이 전부 정지했다. 쥬다스는 가장 곁에 있던 에단과 바이칼, 세이지와 찬찬히 눈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부터.” “예.” “바보가 될 생각인데 말이다.” “……?” 하도 황당하니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굳어버린 일행을 대표하여 에단이 가까스로 반문했다. “……예?” “같이 바보놀음에 좀 어울려 주겠느냐?” “……예?” 쥬다스는 이미 바보가 되어버린 듯한 일행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 * * “허허허. 그래,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이 얼마나 많았나?” “하하. 아닙니다, 백작님. 경관이 아름답고 구경거리가 밤하늘의 별처럼 많으니 고생을 느낄 틈도 없었습니다.” “거 감수성이 요즘 젊은이들 같지 않구만 그래. 응? 드로셀라 후작의 조카라 그런가?” 호방한 웃음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쥬다스는 레이븐 영지의 영주, 즉 레이븐 백작과 대면하는 중이었다. 그가 임시로 사용하는 신분은 멀리 떨어진 영지에서부터 출발해 여행 중인 자작가의 영식이자 후작의 조카인 ‘디노 캘런’이었다. 귀족들이 여행 도중 다른 지역의 귀족을 찾아가 대접을 받는 일은 매우 흔했다. 그들은 이를 통해 친목을 다지고 정치적인 줄을 대기도 했다. 화기애애한 만남 속에서 로비가 오간다. 겉보기엔 그저 여행 중 잠시 인사차 들른 것 같아도 귀족들 사이에선 이런 만남이야말로 서로 챙길 것을 챙기는 접대였다. 호위들은 전부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으며, 실제 그렇듯이 동생으로 소개된 세이지는 그 자리에 함께 앉아 음료만 기울이고 있었다. “아, 그래. 이 레이븐에 왔으니 특산 와인은 벌써 먹어봤겠지 싶은데. 어땠는가?” 제국의 귀족이라 하면 12살부터 교양상식으로 와인 문화에 대해 배운다. 미성년이라는 이유로 금지되는 것은 전문적인 술집이나 공개적인 술자리였다. 대개 사적인 만남이나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식사자리에선 와인 한 병쯤이야 관례적으로 허락되는 부분이었다. 쥬다스는 몹시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깍지 꼈다. “안 그래도 그 특산품이란 게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아니! 설마 아직 맛도 못 본 것인가? 내 당장 그 맛을 알려줌세.” 레이븐 백작은 가볍게 손짓했다. 그 사인을 알아들은 집사가 유리장에서 빳빳한 천 조각에 밑동을 감싸둔 와인병을 꺼내 가져왔다. 그리고 크리스털로 만든 잔에다 와인을 기울여 따르기 시작했다. 잔에 와인이 차오르는 걸 힐끔 쳐다본 쥬다스가 백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블루베리와인. 이게 참 일반 와인과 다르게 쓴맛이 없이 달고 향긋하다더군요.” “이런, 그 맛이란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지. 먹어봐야 아는 게야. 자네는 나 아니었음 어디 가서 레이븐에 방문했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뻔 했겠군그래.” “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유쾌하게 답하는 쥬다스와 달리 그 곁에 앉은 세이지는 불안한 표정으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백작은 대화에 끼지 못하고 눈치만 살피는 세이지에게도 잔을 건네주었다. “자네 동생은 숫기가 없는 편이로군. 왜 그리 긴장했나?” “…….” 세이지는 고급 와인이 담긴 잔을 바라만 볼 뿐 입을 굳게 다문 채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넷이 된 아이의 시선에도 백작의 사치가 보였다. 필요 이상으로 큰 저택과 최고급 목재와 보석을 사용한 인테리어. 농업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영지에서 맛보기 힘든 온갖 산해진미가 담긴 고급 사기그릇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메이드들이 가져다주었다. 게다가 유리장을 따라 칸칸이 쌓여 있는 와인병은 지금은 말라죽어 찾아볼 수 없는 블루베리로 담가놓은 최고급 품질이었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세이지를 잠시 쳐다보던 백작은 금방 흥미를 잃고 시선을 거두었다. “지금 따라놓은 게 지독한 가뭄이 들었던 해에 담근 12년산일세.” 레이븐 백작이 먼저 잔을 들었다. 그를 따라 쥬다스가 고고한 손짓으로 와인잔을 마주 들었다. 세이지는 무릎에 손을 올려놓은 채 묵묵히 자기 몫으로 주어진 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세이는 아직 주도를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시고 말씀하시지요.” “크흠.” 못마땅한 눈으로 헛기침을 뱉은 백작은 쥬다스의 말대로 다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본래 과실이란 게 말일세, 가뭄이 들수록 그 맛이 진하게 우러나오는 법이야. 물렁거리지 않고 햇빛을 그대로 흡수하지. 지금도 비록 나무들이 가물긴 했지만 올해도 이 12년산처럼 귀한 열매를 맺으리라 기대하고 있네.” “과연, 귀한 것일수록 진가가 빛나는 법이지요. 쉽사리 얻지 못해야 손에 넣는 재미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호라! 벌써 그 재미를 안단 말인가? 자네와는 역시 말이 잘 통하는군.” 백작은 껄껄 웃으며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와인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백작이 눈짓하자 쥬다스 역시 들고 있던 잔을 기울였다. 블루베리 특유의 달큰한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어떤가? 레이븐 최고의 술이라네. 천것들은 평생 밭일을 해도 감히 입에 대보지도 못할 귀주야. 심지어 황제폐하께도 진상하지 않았지. 오직 나를 위해 바치는 이 땅의 수확물이란 말일세. 오늘은 내 특별히 자네와의 만남을 빛내기 위해 꺼내왔네만.” “…….” “이 정도면 내 저택의 손님들이 즐거이 여길 만한가?” 아주 잠깐이지만 쥬다스의 금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쥬다스는 이를 와인과 함께 깊은 내면으로 넘겨 버렸다. 맛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뜬 그는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즐겁다마다. 이 땅을 찾는 모든 객이 백작님의 은혜를 찬미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호탕한 웃음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울렸다. 어둠이 내린 창밖으로 그들의 웃음소리가 불빛과 함께 새어 나갔다. 세이지는 웃고 떠드는 분위기 속에서 자리가 파할 때까지 끼지 못했다. 일행들에게 미리 예고하고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도무지 쥬다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그야말로 바보가 아닌가.’ 현명한 형님은 이미 이 저택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바보놀음’을 제안하면서, 쥬다스는 일행에게 영주의 악행으로 인해 고통받는 레이븐 주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었다. 감히 군주의 눈을 피해 권력을 악용하여 민생을 착취하고 있다는 괘씸한 내용에 세이지는 분개하여 당장 레이븐 백작을 끌어낼 생각을 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흥분한 동생을 말리며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당장 눈에 보이는 독충만 제거한들 독에 중독된 사람들까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란다.’ 쏘인 자국을 찾고 알맞은 치료약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리 말한 쥬다스는 백작의 저택을 찾아와 사치와 향락에 눈이 먼 멍청한 귀족 자제를 흉내 내고 있었다. 세이지는 그런 형의 연기에 장단을 맞추기 어려워 조개처럼 입만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기분이 좋아진 백작은 그들에게 크고 좋은 방을 내어주고 여자까지 붙여주겠노라며 눈앞에 얇은 슬립만 한 장 입혀놓은 메이드들을 세워놓고 직접 고르도록 했다. 그 바람에 세이지는 질겁하여 형을 쳐다보았지만 쥬다스는 이를 거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부사항까지 지정하여 요구하기까지 했다. “가급적 저보다 어린 편이 좋습니다. 대담한 쪽보다는 내성적인 쪽으로. 여자에게 휘어 잡히는 건 별로 원하지 않는지라.” “크크, 자네도 아직 어리군. 계집은 자고로 적극적일수록 풍미가 깊은 법이거늘 말일세.” 백작은 음흉한 눈으로 메이드들을 훑어보며 와인 품평하듯 대꾸했다. “뭐 취향대로 골라 데려가도록 하게.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 걱정 말고, 난 이만 빠져주도록 하지.”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이 은공을 어찌 다 갚을지…….” “돌아가서 후작께 잘 말씀드려주기만 하면 갚을 일이지 않나. 하면 편히 쉬시게.” 백작이 응접실에서 나가자마자 석상처럼 굳어 있던 세이지는 자신은 필요 없다며 여성접대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연기가 끝난 줄 알았던 쥬다스는 신중히 메이드들 앞을 서성이다 이내 한 소녀를 지목했다. “이 아이로 하지.” ‘형님?!’ 그가 가리킨 건 미색은 빼어났으나 고생을 심하게 하여 피골이 상접한 어린 소녀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결정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 저택에서 귀족의 선택은 절대적이었다. 소녀의 실제 나이는 벌써 열넷, 마냥 아이로만 볼 수 없는 시기였다. 다 자라지 않은 아이라고 해서 명을 거부할 수는 없다. 하는 수 없이 소녀는 겁에 질린 채 방까지 따라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그렇게 다음 스토리는 노블레스로 이동되고....(?) 는 농담입니다. 쿨럭. 12시에 다시 이그레트로 뵙게 되니 기분이 묘하네요.ㅎ 그동안 연재는 안해도 혼자 열심히 쓰고는 있었는데..하하... 기다려주신 독자님들, 감사드립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0095 / 0240 ---------------------------------------------- 12장. 서막 안내해 준 다른 메이드가 문을 닫고 나가자, 소녀는 손마저 덜덜 떨기 시작했다. “…….” 세이지가 안쓰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마저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볼품없이 짧게 자른 단발이긴 했지만 싱그러운 풀을 따다가 물들인 듯한 어여쁜 연두색이었다. 그 색깔만큼은 쥬다스가 다루는 바람의 정령 유니와도 닮아 있었다. 소녀의 커다랗고 맑은 갈색 눈동자 위로 투명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음에도 잔뜩 겁에 질린 그녀를 돌아본 쥬다스가 짧게 한숨을 쉬며 겉옷을 벗었다. 펄럭! “……!” 흠칫 놀라 떠는 소녀의 어깨 위로 따뜻한 온기가 감도는 코트가 내려앉았다. 번쩍 고개를 든 소녀의 시야에 미안한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는 쥬다스가 들어왔다. “미안하구나. 겁먹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얇은 슬립만 한 장 입고 있는 소녀에게 자신의 코트를 둘러준 그는 상대가 안심할 수 있게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였다. 백작과 대화할 때 들었던 허영 가득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다정하게 변한 어투에 소녀의 눈망울이 흔들렸다. “나는 많은 사람의 삶을 보고 듣고자 시찰을 나온 황실의 일원이란다. 이 땅에 고통받는 자들이 있다 하여 이리 들렀거늘, 영주의 말만 듣고는 이보다 평화롭고 풍요로울 수가 없으니 당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기가 어렵구나.” “화, 황실의…….” 연두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말을 따라했다. 쥬다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갈등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을 믿어야 좋을지, 아니면 이로 인해 괜히 엉뚱하게 꼬투리를 잡혀 매질을 당하게 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던 참에 그들의 방으로 작게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들어오거라.” 깜짝 놀라 어깨를 덮은 코트를 꽉 부여잡은 소녀와 달리 쥬다스는 태연하게 입장을 허가했다. 문이 열리고 공손한 태도로 들어온 건 에단과 바이칼이었다. 그들은 쥬다스의 앞에 무릎 꿇고 상황을 보고했다. “백작이 소유하고 있는 병력은 주로 창병과 궁병으로, 마법을 포함한 이능력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 “현재 저택에 기거하는 병사 규모는 대략 오십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어후, 저자도 참……. 나름 영지 치안에는 신경을 쓴 모양이더라구요? 사방에 병력을 배치하여 지키고 있더군요. 그래 봤자 자기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제 발 저려 감시하기 바쁜 거겠지만.”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하며 보고를 마쳤다. 친위기사단원이 되고 나서도 바이칼은 쥬다스에게 그리 어렵게 굴지 않았다. 도를 넘진 않았지만 에단처럼 절도를 지켜 예의범절을 따지지는 않았다. 진솔한 성격을 가진 바이칼이 보이는 친밀함의 표현이었다. 그것이 그만의 장점이기도 했기에 쥬다스는 기꺼이 그 어필을 받아들였다. “형님…….” 이제야 그가 하려는 일에 대해 갈피를 잡은 세이지가 안심하여 확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을 지우자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소녀는 방 안에 오도카니 선 채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이름은 쥬다스라 한단다. 너는?” “……카, 칼라.” “칼라, 내가 좋아하는 꽃 이름과 같구나. 그래. 우릴 도와줄 수 있겠느냐?” 따뜻함을 담은 금안이 자신을 향하자, 칼라는 코트 자락을 붙든 손아귀에 꾸욱 힘을 주었다. 어깨를 덮은 코트에서 좋은 향이 났다. 곧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어찌하면……!” “이야기를 해주렴.” “네?” “칼라, 네가 본 것들, 네가 들은 것들. 이곳에서 일어난 것들에 대해서.” 에단과 바이칼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했다. 방에 모인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사실에 칼라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아빠는, 정령술사셨어요…….” 볼품없이 빼빼 마른 소녀의 갈라진 목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빠의 정령님은 땅의 정령이랬어요. 엄마랑 전 직접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정령님이 도와주셔서 과일나무가 잘 자라는 건 알 수 있었어요.” 그 뒤로 이어진 건 유니가 가져온 정보와 같은 내용이었다. 가만히 듣고만 있는 쥬다스와 달리 세이지는 충격받은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어떻게 제국의 귀족이란 자가 그런 짓을!” “……이런 게 저희 삶인걸요. 나리들께선 평민의 삶 따위에 신경 쓰고 싶지 않으실 테지만…….” 칼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감정에 북받쳐 눈물만 흘렸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우리 아빠, 엄마. 복수까지는 못하더라도 원한만큼은 풀어드릴 수 있다면.” “원한?” “아빠는 가시는 날까지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셨거든요. 끊임없이 저주하고, 또 저주하시다가 그만…….” 그리고 근처를 맴돌던 땅의 정령이 그의 소망을 들었다. 큰 힘이 없고 나무를 돌보기 좋아하며 크고 달콤한 과실을 맺도록 도와주던 정령은 어쩔 줄 모르고 계약자의 주변만 빙글빙글 돌았다. 억울하게 피를 흘리고 죽어간 계약자의 마지막 소원을 들은 정령은 이를 똑똑히 기억했다. 마침내 계약자의 숨이 끊기는 순간, 아름다웠던 땅의 정령은 순식간에 검게 타락했다. “분명 정령님이 아빠의 저주를 기억하고 있는 걸 거예요. 하지만 그래선 안 돼요. 우리 가족처럼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어날 뿐이니까. 그러니까.” 칼라는 조그맣게 애원했다. “……도와주세요.” 본래 같았더라면 평민이 감히 귀족에게 부탁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무례였다. 어깨 위를 덮은 따뜻한 온기 때문이었을까, 칼라는 자신이 염치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온기를 두 손으로 꾹 붙들었다. 어차피 이제 더 이상 떨어질 나락도 없었다. 이대로 어른이 되어 백작의 장난감으로 비참하게 살다 가느니 목이 날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앞의 손님들을 믿기보다 당장 자신의 앞에 펼쳐진 미래를 믿었다. 그래서 애원했다. “제발요. 황실 나리들. 할 수 있는 건 다 할게요. 원하신다면 몸이든 마음이든 전부 드릴 테니까.” 쥬다스는 덤덤한 표정으로 소녀의 애원을 들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깨끗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본 칼라는 지레 겁먹어 입을 다물었다. ‘감성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야. 이 사람도 역시 귀족……. 그럼 난 이제 어떡해야.’ 가진 것 없이 메이드로 노역하는 칼라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사실 그녀는 그간 시찰 나온 관리들을 아예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이 영지주민들에게 저지른 일 정도로는 그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더군다나 백작은 교활하게 자신의 죄를 감출 줄을 알았다. 모든 것은 철저히 평민의 죄로 돌아갔고, 그가 탐낸 제물과 여인들은 전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겉보기엔 멀쩡히 굴러가는 영지였고 오히려 가난한 민생을 거두느라 세금 낼 돈도 없다며 우는 소릴 하는 백작에게 처벌을 할 명분도, 그러고자 하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감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잠시 쥬다스가 보인 따뜻함에 흔들렸던 칼라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때, 훌쩍이는 칼라를 본 바이칼이 목덜미를 벅벅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거참, 뭐 볼 게 있다고. 가뜩이나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미녀들을 들이밀어도 눈길조차 안 주시는 분한테.” 그러자 에단이 곧장 서늘하게 눈치를 주었다. “……바이칼.” “예이, 다물고 있겠습니다.” 이제 에단의 구박에도 익숙해진 바이칼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장난처럼 내뱉긴 했지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차기 군주자리에 앉은 쥬다스에게 접근하는 여인은 많았다. 수많은 귀족가문에서 황태자비의 영예를 노리고 아리따운 여식들을 보내왔다. 대놓고 접근하든 우연을 가장하여 마주치든 어딜 가나 그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미녀들이 찾아들었다. 하지만 열일곱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쥬다스는 황태자비감을 고르지 않는 건 물론이고 하룻밤 열애로 타오르는 스캔들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아직 성년이 되지 않았으니 비를 맞이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여인을 만나지 않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본래 아흔이 넘는 수명을 누려온 전생을 기억하는 쥬다스로서는 도저히 손녀딸 같은 아이들을 여자로 볼 수 없었을 뿐이지만, 그를 보필하는 수하들은 은근히 걱정의 눈길을 주고받곤 했다. 그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칼라는 투덜거리는 바이칼과 한숨을 쉬는 에단을 번갈아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작 난감해진 장본인 쥬다스는 턱을 짚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너와 네 부모님의 복수를 해줄 생각은 없단다.” “…….” 이미 체념한 상태인 칼라는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에 달린 눈물방울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이어지는 말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하나 죄인을 모른 척 눈 감을 생각도 없으니.” “……!” “적법한 절차에 따라 그를 치죄하도록 할 생각이다. 그러려면 네 도움이 필요하다, 칼라.” 칼라는 여전히 흔들림 없이 빛나는 금안을 보며 생각했다. ‘……감성에 흔들리지 않는 게 아니야. 이분은…….’ “도와주겠느냐.” “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처음부터 어떤 것에도 흔들린 적 없었던 거야.’ 뒤늦게 알아본 의지와 함께 포기했던 희망이 다시금 소녀의 가슴속에 부풀었다. ‘오직 우리 얘길 듣기 위해서.’ 쥬다스의 정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간 이 레이븐 영지를 지나쳐 간 시찰단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저택에 들려 상황을 살피고 접대를 위한 자리에서 일부러 그녀를 지목한 것도 전부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그의 금안에 깃든 부드럽고 강한 빛이 어디까지 비출 수 있을 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백작의 사악한 술수 아래 저 빛마저 무너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칼라는 그 앞에 온 마음을 다해 무릎 꿇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나리.” 연신 절을 하는 소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쥬다스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멈추었다. “좀 더 일찍 알아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흡, 흐어어엉.” 부모를 잃고 고초를 겪으면서도 홀로 버텨야 했던 열네 살 소녀는 이제야 막혔던 울음을 터뜨렸다. 사계절을 참았다 터뜨린 울음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쥬다스는 날이 밝자마자 백작을 다시 만났다. 늘 하던 대로 손님을 대접한 백작은 그에 대한 감탄을 늘어놓는 쥬다스를 보며 만족스레 껄껄 웃었다. 아침부터 진귀한 과일들과 갖가지 빵이며 케이크, 노릇노릇하게 구운 베이컨, 요거트와 신선한 과일주스 등으로 상을 채운 백작은 제대로 영지 구경을 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혀를 차며 외투를 껴입었다. “따라오게. 내 자네들에게 이곳 레이븐의 참 가치를 맛보게 해주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말씀하시는 대로 댓글은 줄었지만 소중히 남겨주시는 코멘트 하나하나가 정말 많은 힘이 됩니다!^^ 반갑기도 하고요 ㅎ 뭐랄까.... 메마른 황무지에서 사람을 만난 그런 느낌적인 느낌...운명의 데스티니(?) Q. 에스티오와 이그레트는 1일1연재인가요? A. 에스티오는 2월달까진 1일1연재로, 이그레트는 다음주부터 "월/화/수/목/금"연재로 진행됩니다.ㅎ (질문을 늦게 확인해서 죄송합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 0096 / 0240 ---------------------------------------------- 12장. 서막 백작이 두른 흑담비 모피 코트는 척 보기에도 값비싼 태가 났다. 마치 살아 있는 담비를 보는 것처럼 번들번들 윤기마저 흐르고 있었다. 봄기운이 돌기 시작한 날씨에는 과한 모피 코트였지만 백작은 보란 듯이 단추까지 여미고 밖으로 나섰다. 그 으스대는 꼴에 세이지는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동생의 머리를 살짝 두드려 준 쥬다스가 백작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의 외투도 발목까지 덮는 맥시 코트였지만 모피가 들어가지 않은 얇은 재질이었다. 환절기에 가볍게 걸치는 용도로 제작된 코트였기에 전혀 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금 허전해 보이는 밋밋한 디자인이었다. 확연히 차이 나는 차림새 때문에 백작과 쥬다스는 겉보기에 마치 다른 계절에 사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백작도 그 사실을 느끼고 넌지시 그를 향해 물었다. “겨울이 끝나간다지만 아직 한기가 가시질 않았네. 그 차림으로는 춥지 않겠는가?” “음, 백작님처럼 멋진 겉옷을 챙겨왔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짐 가방에는 물론 본가의 옷장에도 그리 귀한 모피는 들여놓은 적이 없는 지라……. 그보다 정말 결이 좋은 코트로군요. 참으로 세련되십니다.” “그야 그렇지. 제법 보는 안목이 있구만? 쉽게 구할 수 없는 한정 상품이라 들었네. 아마 자네가 평생 가도 만져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굉장하군요. 백작님 덕분에 제 눈이 호강합니다.” 백작은 띄워주는 말에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나중에 구입처를 하나 알려줌세. 귀한 정보니 자네만 알고 있으라고.” “정말이십니까? 하면 저는 벌써 백작님께 두 번째 은혜를 입는 셈이로군요.” 큰 선심이라도 쓰듯 거들먹거리는 백작을 향해 쥬다스가 잔잔히 웃으며 답했다. 저택을 나서기 직전 2층 계단에 앉아 걸레질하던 칼라와 눈이 마주쳤다. 칼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쥬다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문을 나섰다. 탁-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칼라는 걸레질하던 걸 멈추고 동료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저…… 언니.” “칼라?” 칼라보다 2년가량 앞서 저택 메이드로 들어온 수잔이 안타까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메이드는 전부 억울한 사연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사연을 말하지 않았지만 눈치껏 처지를 짐작하고 서로를 챙겼다. 그러한 맥락에서 수잔이 동병상련의 정으로 챙겨주고 있는 막내 메이드가 바로 칼라였다. 처음 저택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어여쁜 소녀였던 칼라는 시간이 갈수록 병든 나무처럼 비실비실 말라갔다. 백작이 내리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으려 하고,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해 매질을 당하곤 했다. 이러한 와중에 아직 어린 칼라가 한 가지 지킬 수 있었던 건 정절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젠 백작의 손님으로 온 귀족이 취해간 걸로 보였으니 수잔의 입장에선 여린 꽃잎 같은 칼라가 삶을 비관하여 극단적인 선택을 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수잔은 어린 강아지처럼 떨며 다가온 칼라의 양손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괜찮……. 음, 아니야. 힘들면 좀 쉬고 있으렴. 오늘은 내가 네 몫까지 해놓을게!” 험한 꼴을 당했다고 여겨지는 아이에게 ‘괜찮아?’라는 질문은 독설보다 무서운 것이었다. 수잔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말을 바꾸어 그녀를 다독였다. 그러자 칼라는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언니. 저 사실은…….” “응?” 칼라는 흔들리는 갈색 눈망울로 수잔을 바라보았다. 지난 밤 울음을 터뜨린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준 후, 쥬다스가 부탁했던 이야기가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랐다. ‘내일 레이븐 백작과 함께 이 저택을 비울 것이다. 저택 내에 그가 저지른 악행을 증명할 증거가 있다면 찾아서 내일 밤 내게 전해주면 좋겠구나. 혹은 증거가 될 만한 소문을 모아 알려주어도 괜찮단다.’ ‘이 일은 오늘 밤이 지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하지만 위험한 상황이 된다면 주저 말고 내 이름을 대거라. 지금 이 일은 너를 위험에 빠뜨리고자 함이 아니니.’ ‘할 수 있겠느냐.’ 칼라는 그 말을 들었을 때처럼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땀이 솟은 손으로 꾸욱 주먹 쥐었다. “……저택 헛간에 가보고 싶어요.” 헛간이라는 단어에 수잔은 사색이 되어 칼라의 어깨를 붙들었다. “미쳤니―?!” 저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만 수잔은 핫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행히도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수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칼라를 끌고 구석진 복도로 데려갔다. “언니.” “칼라.” 수잔과 칼라는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칼라의 단호한 갈색 눈동자를 마주한 수잔은 이마를 짚으며 속닥거렸다. “얘가 진짜 무슨 생각인 거야. 헛간 근처에만 가도 경비들한테 혼쭐이 난다고. 또 매질당하고 싶어?” “그러니까 언니한테 부탁한 거예요. 저 좀 몰래 헛간에 들여보내줄 수 없을까요?” “하……. 칼라, 너 정말 죽으려고 그래? 왜, 어제 그 꼴을 당하고 나니 죽고 싶어졌어? 그런 거야?” 칼라는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밤새도록 생각해 봤지만 저택 내에서 수상한 곳이라면 역시 뒤뜰에 지어져 있는 헛간밖에 없었다. 나머지 장소는 메이드들이 청소를 비롯한 잔업을 맡으며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1년간 저택 생활을 해본 결과 백작은 치밀한 성격으로 눈에 보이는 곳에 자신의 비리를 쌓아두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저택에 가려진 헛간 은밀한 곳에 무언가를 감춰두고 경비를 세웠다. 심지어 자신의 처자식마저 헛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금역. 백작 스스로를 제외하곤 아무도 걸음 할 수 없는 철저한 비공개구역이었다. 수잔은 칼라의 굳건한 의지를 확인하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 “그깟 정조가 뭐라고 그래. 너도 알잖아. 우리 같은 천것들에게 그딴 자존심이 있어서 어쩌게? 일단 살아야지, 칼라. 살아남아야 태어난 의미가 있는 거야.” “…….” “알겠어? 우리가 지켜야 할 건 자존심이 아니라 목숨 하나뿐이라고.” “죽으러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언니. 그럼 언니도 헛간에는 들어가 본 적 없어요?” “거기 얘긴 이제 하지 마!” 칼라의 집요한 질문에 수잔은 몸서리를 쳤다. 칼라는 그런 수잔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애원하듯 답을 촉구했다. “들리는 소문 같은 거라도 없을까요? 제발요.” “…….” 하아, 수잔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허리를 짚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잘 몰라. 비 오는 날엔 거기서 처녀귀신 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도 있고……. 무서운 괴물을 키운다는 말도 있어.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귀신이나 괴물 따위보다 백작님이야. 그 근처에 얼씬거리다가 걸리면…… 정말 죽을 거야.” 메이드로 들어온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칼라는 수잔이 무슨 얘길 하는지 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은 백작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 순진무구한 표정을 확인한 수잔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너는 백작님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아직 몰라, 칼라.” “네……?” “물론 너도 험한 꼴을 당하고 끌려온 신세라지만 그 정도는 흔한 일이야. 솔직히 여기서 허드렛일하는 메이드들은 전부 죄인 신분이거든. 알잖아, 죄인은 평민보다 못한 천것이라는 거.” 지금껏 칼라는 자신이 겪은 불행을 감당하기만도 벅찼다. 부모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었으며 가슴엔 뜨거운 쇳덩어리로 죄인의 낙인이 찍혔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나락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절망했고, 백작이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매질당하고 죽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일했다. 그나마 친동생처럼 챙겨주는 수잔과 다른 메이드들이 없었다면 1년은 고사하고 한 달도 못 버티고 죽었을지도 몰랐다. “너도 사실은 죄인이 아니란 걸 알아. 여기선 다 그래. 우리 집도 골동품을 수집해서 파는 상점이었거든. 근데 어느 날 가짜를 팔았다는 둥 귀족을 능멸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누명을 쓰고 쫄딱 망했어. 화가 나서 항의하던 오빠는 그 자리에서 죽었고, 오빠가 죽는 걸 본 부모님은 홧병에 앓다 돌아가시고…….” “……우리 집도 그랬어요. 독이 든 와인을 진상했다고.” “알아, 나 그때 그 자리에 있었어. 그때 독이 들었다던 와인병을 치운 게 나야. 그래서 난 너희 부모님이 죄가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아.” 수잔의 말에 칼라는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직접 곁에서 아이의 불행을 지켜본 수잔이었기에 더욱 칼라를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이었다. 칼라의 갈색 눈망울에 눈물이 방울방울 맺히자 수잔은 그녀를 안아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있지. 나도 여기 들어오면서 알게 된 얘기인데, 심지어 몇 년 전에 우리 영지에 귀족 영애가 한 분 방문한 적이 있었대. 귀족 신분으로 왔던 건 아니고, 여행자로 신분을 숨기고 들어왔었다고 해. 그런데 그 영애가 아침이슬 같이 곱고 여신이 현신한 듯 아름다웠대. 그 영애를 본 백작님이 한눈에 반해 첩실로 들이고자 했는데, 가문이 조금 기울긴 했어도 귀족은 귀족이잖아. 백작님의 무례에 화를 벌컥 내고 떠나버렸는데…….” “……그런데요?” “그 뒤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실종된 영애를 찾기 위해 가문에서 수색을 나왔지만 결국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수잔은 그녀를 백작이 죽였다고 생각했다. “귀족도 해치는데 우린 더 말할 것도 없잖아? 눈에 거슬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어.” “…….” “……우린 찾아줄 사람도 없잖니.” 수잔은 씁쓸하게 말을 맺었다. * * * 한편, 레이븐 영지를 구경시켜 준다며 쥬다스 일행을 데리고 나온 백작은 천천히 말을 몰아 도시 밖으로 향했다. 그들이 지나는 길마다 평민들이 두려움에 떨며 몸을 사리거나 고개를 숙였다. 영주라고는 하나 과한 반응이었다. 왕이 행차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조용해졌다. 쥬다스는 비정상적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태도를 확인하며 백작의 곁에서 말을 몰았다. “어떤가.” “…….” 갑작스레 물어온 백작의 말에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모든 이가 백작님을 두려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잘 보았군. 이 땅이 전부 내 것이니 내게 경배를 돌리는 게 당연하지.” 레이븐 백작은 과시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도시 밖으로 나오자 끝없이 펼쳐진 농원이 보였다. 비탈진 땅과 맑은 개울, 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과실나무들만 까맣게 말라죽어 있었다. “쯧.” 백작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요즘 천것들이 나태해져서 말일세.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놀고먹기만 하니 나무들이 죄 저 꼴이군.” 말라죽은 나무에서 소출이 나지 않자 당장 굶게 생긴 건 농사꾼들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오히려 그들을 비난했다. “내 저들을 어찌 벌하면 좋겠나?” “…….” 심지어 쥬다스에게 농민들을 벌 줄 방법까지 묻는 레이븐 백작의 행태에 세이지는 치미는 욕지기를 참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쥬다스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만일 그들이 나태하여 과실나무를 전부 죽게 만들었다면 벌해 마땅하지요.”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만에 하나.” 고개를 주억거리던 백작은 여상히 이어지는 쥬다스의 말에 멈칫 했다. “그들에게 원인이 없다면 진짜 원인을 찾아 썩은 뿌리를 뽑아버려야 할 겁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5년사이 아부킹으로 진화한 주인공...(?) Q. 얼마 차이 안나겠지만 부디 14k이상은 유지해주셨으면 ㅠㅡㅠ A. 헙 ㅠㅠ 글자수 5천자 기준으로 끊고 있었는데 용량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지신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OTL 현재 99화까지는 이미 교정작업이 끝났기 때문에 용량조절이 불가능하다 하니, 100화 이후로는 최대한 늘려서 가져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Q. 이그레트가 후회를 뜻한다고 했는데 쥬다스는 어떤 뜻인가요? A. '쥬다스'는 성서에 나오는 '유다'가 어원이 맞습니다.ㅎ 왜 유다를 모티브로 잡았는가에 대해선 2부완결 후기로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쿨럭...(...)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시고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감사드립니다! ...칭찬해달라 하셨는데 독자님들께 제가 감히 칭찬은 해드릴 수 없고... 그저 사랑합니다!!ㅠㅠ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0097 / 0240 ---------------------------------------------- 12장. 서막 “……썩은 뿌리라?” 맑은 금안과 백작의 시퍼런 눈이 마주했다. “모든 나무에는 뿌리가 여러 갈래 있게 마련이니까요. 어느 뿌리가 썩고 있는지는 직접 땅을 파내봐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백작은 굳은 표정을 풀고 씩 입꼬리를 올렸다. “호오. 제법 귀족다운 말을 하고 있구먼?” 분명 웃고 있는데도 그 표정이 초봄의 빗줄기처럼 차가웠다. “참 마음에 드는 친군데 말이야. 한 가지, 처음부터 자네에 대해 거슬리는 게 있더군.” 쥬다스는 태연히 그를 마주 보았다. 정작 주변을 호위하던 에단과 바이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날 선 공기 속에서 백작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내게서 뭘 원하나?” “…….” 레이븐 백작은 욕심이 많은 인간이었지만 그 욕심을 전부 충족시킬 만한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세한 이유까진 알지 못하더라도 쥬다스 일행이 그에게 일부러 접근했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백작이 데리고 나온 기사들과 쥬다스의 호위들 사이에 긴장감이 부풀기 시작했다. “그냥 여행자치곤 자네 동생 태도도 그렇고, 영 석연치가 않단 말이지. 솔직하게 말해보게. 누구의 명을 받고 온 건가?” 백작은 배후가 있나 떠보기까지 했다.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조에 세이지는 움찔 어깨를 떨었지만 쥬다스의 얼굴엔 긴장감이라곤 없었다. 백작을 가만 마주 보던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말에서 내려섰다. “오해이십니다. 이런, 본의는 아니었으나 제가 무례를 저지른 모양입니다.” “본의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실은 오늘 영지를 둘러본 뒤 천천히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습니다만…….” 다음 그가 취한 행동에 백작의 시퍼런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아, 전하, 제발!’ 뭘 그렇게까지 하신 답니까! 지켜보던 바이칼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쥬다스는 백작이 탄 말 앞에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귀족은 귀족들만의 프라이드가 있다. 작위가 낮은 귀족이라고 해서 높은 직분의 귀족에게 쉽사리 머리를 깊이 조아리지는 않는다. 귀족으로 교육받아 자라온 자가 황제의 앞이 아닌 곳에서 허리 숙여 사죄한다는 건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걸 넘어 수치를 느낄 수 있을 정도의 불명예였다. “무례를 보임에 사과드립니다.” “흠흠. 뭐 됐네. 겁을 주려던 건 아니었으니.” 쥬다스가 고개를 들자 백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게서 얻고 싶은 것이 당최 무엇이길래 그리 뜸을 들이나?” “뭔가를 얻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넓은 세상을 보고 배우러 온 것이지요. 레이븐에 와서도 백작님 덕에 식견을 많이 넓혔지 않았습니까.” 백작은 말에 올라탄 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쥬다스를 내려다보았다. “보시다시피 저나 제 동생은 아직 귀족으로서 경험이 많이 부족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다른 이의 삶을 지척에서 보게 되면 질투도 나고 거부감이 들기도 하는 법이지 않겠습니까.” “나를 질투했다?” 듣기에 나쁜 소린 아니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를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다. 뱀처럼 훑어보는 눈길이 그들 형제를 번갈아 보았다. 이내 레이븐 백작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일단 다시 말에 오르게. 아직 볼 것이 한참 남았으니 말이야.” “넓으신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다시 넓은 영토를 돌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저택으로 돌아온 백작은 거한 만찬을 열었다. 쥬다스가 허영심 가득한 귀족자제 흉내를 내며 곁에서 신명나게 비위를 맞춰준 탓에 기분이 몹시 좋아진 백작은 귀한 와인으로 술상을 벌였다. “크흐~ 간만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구만!” 와인은 금방 동이 났다. 벌써 4병째 새 와인을 개봉한 백작은 취기가 도는 얼굴로 호탕하게 웃었다. 그에 반해 함께 잔을 들고 있는 쥬다스는 이제 막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멀쩡했다. 물의 정령왕 루니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가 알코올 성분에 취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적당히 취한 척 어울렸다. 술기운에 코끝이 벌게진 레이븐 백작은 끌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도 오늘 봤다시피 이 레이븐에선 내가 왕이야.” “‘왕’…… 입니까?” “그래, 왕! 비옥한 땅도 맛좋은 과실도, 여자들도 전부! 내가 손짓하기만 하면 발밑에 우르르 엎어지질 않겠나.” “멋지군요. 하지만 백작님, 그러다 혹 황제폐하의 법에 걸리시는 거 아닙니까? 저는 그 점이 조금 겁나서 영 찜찜한 것이…….” “황제폐하? 하하하.” 넌지시 던진 질문에 백작은 피식 비웃었다. “여기선 황제폐하의 법 같은 건 아무 소용없어. 내가 법이지.” 명백히 황권을 모독하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곳에서 그는 정말로 왕이나 다름없었다. 백작은 그 뒤로도 한참을 술을 퍼마시고 자리를 파했다. 그 탓에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일행은 다시 한 방에 모일 수 있었다. 쥬다스와 세이지가 머무는 방에 에단, 바이칼이 찾아왔다. 다른 친위대원들은 명에 따라 대기 중이었으며, 칼라는 콜이 바람의 정령을 이용해 직접 불러오기로 했다. “아까는 놀랐습니다.” 칼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1인용소파에 툭 걸터앉은 바이칼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유니를 손바닥에 얹고 무언가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던 쥬다스가 그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바이칼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하아, 주군께서 그런 백돼지 같은 자에게 고개를 숙이시다니요. 그럴 필요까진 없었잖습니까?” “아.” “‘아’가 아니라고요! 차라리 그럴 바엔 그냥 쓸어버리는 편이 낫습니다. 대체 제국의 황……!” “바이칼.” 그들뿐인 방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정체를 언급하는 건 곤란했다. 에단이 가볍게 제지하자 바이칼은 답답함에 몸부림치며 밤색머리칼을 벅벅 긁어내렸다. “……아오! 어쨌든, 그런 분께서 그리 쉽게 고개를 숙이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꼭 로한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쥬다스는 쿡쿡 웃었다. 황궁에서 머무는 동안 그의 수발을 들던 시종 로한은 황실예법이나 황족으로서의 품위 등에 대해 언제나 강조했다. 그 덕분에 황궁 안에서만큼은 누구보다 품격 있고 완벽한 황태자로서 활동했던 쥬다스였다. 하지만 이번 잠행에선 그동안의 수업이 모조리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굴었다. 특히 이번 바이칼이 열 내는 사건은 더욱 그랬다. 에단도 이번만큼은 바이칼을 제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직접 수모를 겪으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에단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예, 차라리 명을 내리십시오.” 에단은 창가에 기대서 있던 쥬다스 앞에 무릎 꿇고 검집을 들어올렸다. 에단 R.헤이가는 황태자의 친위기사단장, 즉 쥬다스의 오른팔이었다. 주군의 한마디면 에단은 검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단의 밤하늘을 닮은 눈동자가 까맣게 빛났다. 그의 결의를 알아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가진 힘을 휘둘러 대우를 받고자했다면 굳이 이렇게 힘들여 나오지도 않았을 게야.” “하지만.” “‘직접 보겠다’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들어 있단다. 에단, 바이칼.” 바이칼은 여전히 찝찝한 표정이었다. 그도 올해 벌써 열아홉이 되었지만 여전히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쥬다스는 심통 난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나는 충분히 본 뒤 그에 걸맞은 답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착취받는 자뿐 아니라 착취하는 자의 입장을 전부 들어보아야 하겠지.” “……저 정도면 더 볼 것도 없겠던데요, 뭐.” 툴툴거리긴 했어도 바이칼도 현재 레이븐 백작을 대놓고 치기엔 확실히 이렇다 할 증거와 명분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높은 신분을 거머쥔 자일수록, 명명백백 문서화되지 않은 악행은 처벌받기 어렵다. “혹 답할 수 있겠느냐? 어디까지가 욕심이고, 또 어디까지가 그저 사람 사는 삶인 것인지.” 쥬다스는 두 사람을 향해 한숨처럼 웃었다. “……나는 아직 그 기준을 모르겠구나.” 청년으로 자라난 두 기사는 무겁게 고개를 숙였다. 침대에 앉아 죽 그들의 대화를 지켜본 세이지도 복잡한 얼굴로 상념에 빠졌다. ‘형님은 내게도 보여주고 싶으신 거야.’ 내내 차분했던 쥬다스와 달리 세이지는 오늘 하루 종일 손톱에 가시 박힌 사람처럼 불편한 티를 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황궁 안에서 배운 세상은 이런 게 아니었다. 비록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많은 것을 깨닫고 후회하며 자랐지만, 세이지는 어릴 적부터 올바른 길만 보고 자랐다. 그에게 있어 대놓고 사람을 핍박하며 부정을 저지르는 인물은 레이븐 백작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욱 견디지 못했다. ‘왜 그냥 처벌하지 않으시는 거지?’ 백작에게 장단을 맞춰주며 치욕마저 감내하는 형을 보며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렇지만 세이지는 자신의 형이 현명한 사람임을 믿었다. 형의 존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었지만, 다시 세상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도와준 것도 형이었다. 유일하게 신뢰하는 자가 보여주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세이지는 참을성 있게 기다리려 노력했다. ‘형님이라면.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야.’ 톡, 톡- 그때, 조심조심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칼라를 데리고 온 콜이었다.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고 들어온 칼라가 쭈뼛거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저…….” “늦은 밤중에 불러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귀족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저런 사소한 이유로 사과를 받다니, 칼라는 분에 넘치는 값비싼 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하루는 어땠는고?” 자신이 맡은 임무를 보고할 생각에 결연히 이 방을 찾아왔던 칼라로서는 무척이나 당혹스런 질문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갈색 눈망울을 굴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나, 나쁘지는…….” 말끝이 불분명하게 흐려지며 입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나쁘진 않았다? 나도 마침 그리 여기던 참인데, 우린 같은 하루를 보낸 셈이로구나.” 칼라는 멍하니 중절모를 쓴 귀족소년을 올려다보았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적인 대화였는데도 어느덧 떨리던 손끝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핏기가 돌기 시작한 볼에 붉은 혈색이 돌았다. 그녀는 길게 심호흡을 하곤 입을 열었다. “……저택 뒤뜰에 헛간이 하나 있어요.” 칼라는 낮에 동료 메이드인 수잔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빠짐없이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쥬다스는 잠시 침묵했다. 대신 바이칼이 팔짱을 끼며 의문을 제기했다. “너무 대놓고 수상한데. 그동안 감찰에는 왜 안 걸렸답니까?” “……저도 잘 모르지만, 관례랬어요.” “뭐요? 관례?” 바이칼은 황당함에 두 눈을 끔뻑거리다가 다시 그녀의 말을 정리해 주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받을 거 다 받아 처먹고 놀 거 잘 놀고. 그냥 돌아갔다? 그치들이 그걸 관례라고 합디까?” “네, 네에. 저는 그래서 처음엔 나리들도 그러실 줄 알고…….” 으르렁거리듯 화난 기색에 칼라는 어쩔 줄 몰라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표지가 바뀐 걸 알아보신 독자님들이 계시네요!ㅎ 출판사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은 신규표지입니다. 예쁘쥬? (...남주인데 예쁜 게 함정) 크리스티나는 조만간 등장할 예정입니다. 2부에서도 주요인물이니 너무 늦어지지 않도록 보여드리겠습니다.ㅎㅎ (타 연재처와 연재속도를 맞춰야하므로 연속해서 다음 화가 올라갑니다!) 0098 / 0240 ---------------------------------------------- 12장. 서막 “게다가 평소엔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해서, 거기에 뭐가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어요. 저기, 사실은 별거 아닐지도 몰라요.” “이야기해 주어서 고맙다, 칼라. 흠, 그럼 가서 직접 보고 와야겠구나.” “네?!” 칼라는 저도 모르게 큰소리로 반문했다가 양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쥬다스는 기분 나빠하지 않고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울 뿐이었다. 내내 침묵을 지키던 세이지도 조용히 침대에서 일어섰다. 놀란 건 칼라 혼자였고, 에단과 바이칼은 익숙한 태도로 그들의 뒤에 따라붙었다. 콜이 문을 열어주자 쥬다스는 자리에 얼어붙어 있는 칼라를 멈칫 돌아보았다. “같이 가보련?” “……제가? 저도요?” “강요하는 건 아니야.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면 가는 거고, 크게 관심이 없다면 여기 남아 쉬고 있으면 돼. 부탁했던 일은 아주 잘해내주었다.”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니 이건 너의 선택이란다.” 칼라는 입을 막고 있던 손을 스르륵 내렸다. 그리곤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라죽어가던 소녀가 조금씩 스스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그녀의 비상을 응원하며 그 나뭇가지 같은 마른 손을 잡아주었다. * * * 쥬다스는 즉시 헛간으로 향했다. 에단, 바이칼은 물론 열두 명의 친위기사도 함께였다. 여기에 콜과 세이지, 칼라까지 붙으니 제법 대인원이 되었다. 그들이 헛간 입구에 나타나자 지키고 있던 경비들이 험악하게 창을 겨누었다. “웬 놈들이냐!” 횃불아래 드러난 쥬다스의 얼굴을 알아본 경비들은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물었다. “손님분들 아니십니까?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로.” “안을 좀 살펴도 되겠나.” “불가합니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백작님의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돌아가십시오.” 경비들은 일행을 흉흉한 기세로 경계했다. ‘과연. 헛간을 지키는 경비치고는 과한 감이 있군.’ 그들이 몸에 품은 기운을 단숨에 알아본 에단이 조용히 검손잡이를 말아 쥐었다. 무인은 무인을 알아보는 법이다. 특히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은 신체에 영기(靈氣)를 쌓는 이능을 가지게 된다. 쌓인 기운은 몸의 내구력을 높이고 일시적으로 외부로 분출해 무기를 감싸 괴력을 발휘할 수 있게끔 한다. 저들이 품은 영기는 일개 경비로 쓰기에는 아까운 능력치였다. 하지만 돌려 말한다면. ‘그만한 실력자들이 지켜야만 하는 중한 장소.’ 칼라가 제대로 짚었다는 뜻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낸 에단은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으음, 하는 수 없지.” “……?” 쥬다스가 미안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온 녹색바람이 경비들을 훅 덮쳤다. 꽃향기 가득한 기분 좋은 바람이 얼굴을 감싼다 싶더니 어느 순간 그들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풀썩! 유니가 사용하는 ‘수면의 바람’이었다. 정령왕이 일으킨 강력한 수면 효과에 의해 경비들은 일제히 창을 놓치고 주르륵 쓰러져 잠에 빠져들었다. 덕분에 쥬다스 일행은 수월히 헛간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끼이익 하는 오래된 문소리와 함께 캄캄한 내부가 펼쳐졌다. 바이칼이 마법구를 띄워 주변을 밝히자 지푸라기로 뒤덮인 바닥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드러났다. “굉장히 많은…… 와인들이로군요.” 이 헛간은 그야말로 와인 창고였다. 벽을 따라 가득 늘어선 와인 상자, 그리고 말린 블루베리 열매가 가득 들어 있는 부댓자루 등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너무 오래 두어 하얗게 곰팡이가 슬은 것들도 있었다. 먼지가 앉은 와인병을 손가락을 살짝 문질러본 에단이 미간을 좁히며 주변을 빙 둘러보았다. “……분명, 개인이 쥐고 있기에 지나치게 많은 물량이긴 합니다만.” “그래. 굳이 이 정도 물건을 그리도 철저하게 지키고 있었다는 건 영 앞뒤가 맞지 않는구나.” 쥬다스가 그의 곁에 다가와 동감을 표했다. 친위기사들이 사방으로 퍼져 헛간내부를 샅샅이 수색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친위기사단을 보며 칼라가 잔뜩 긴장한 채 쥬다스의 곁에 아기캥거루처럼 착 붙었다. 그러던 중 바이칼이 달려와 보고했다. “그 백돼지 놈, 보기보다 꼼꼼한데요? 벽에 마법진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푸대자루를 치워낸 헛간 벽에는 아무런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다. 스태프를 꺼내 바닥을 콱 찍은 바이칼이 마력을 재배열하자, 먼지뿐이던 바닥에서 희미하게 빛줄기가 번지기 시작했다. 파앗! 제일 먼저 벽선을 따라 거대한 원이 드러나고, 그 안에 수많은 마법문자가 빙글빙글 돌았다. 마법진의 파훼는 빠르고 정확한 계산력을 필요로 했다. 만일 시간 내에 배열을 완료하지 못한다면 알람이 울릴 것이고, 빨리 계산해 낸다 한들 틀린 부분이 한 군데라도 있다면 역시 파훼에 실패하고 알람마법이 발동하게 된다. “디스펠 필드(Dispel Field).” 마법 특기로 루바흐를 졸업한 바이칼은 실수 없이 마법진을 제거해 냈다. 마법진이 사라지자 그냥 평범한 벽이었던 곳에 밀어서 열 수 있는 문이 하나 생겼다. 기사 하나가 나서서 손잡이를 잡고 힘껏 밀자 드르륵 돌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새로운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박스’군요.” 마력에 의해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검은 상자가 보였다. 익숙한 형태를 곧장 알아본 콜이 품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박스를 꺼내 비교해 보았다. 크기며 색깔, 생김새까지 동일했다. 루바흐에서 훈련용으로 종종 사용하던 박스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보게 된 일행이 황당한 눈으로 이를 쳐다보았다. “왜 이런 곳에 ‘박스’가?” 바이칼이 중얼거리며 박스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탁! 콜이 황급히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눈짓했다. “발동 중인 박스이외다.” “허?” “지금 건드리면 박스에 입장하게 될 거요. 무슨 프로그램이 입력된 박스인지 모르니 일단 조심합시다.” “엇,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은 바이칼이 머쓱하게 손을 거두며 감사를 표했다. 콜은 인자하게 미소를 짓고는 박스로 가까이 다가가 이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 발짝 뒤에서 이를 지켜본 쥬다스는 박스 위에 떠 있는 입장 인원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6> 저 정체모를 박스에 6명이나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일반적인 훈련용 박스는 아닌 것 같고. 좀 개조한 것 같소이다.” “개조라니, 무엇으로요?” “자세한 건 박스연구소로 가져가거나 직접 입장해 봐야 알 수 있소. 문제는 이대로 발동을 해지하면 입장한 사람들이 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건데…….” “……무사하지 못하다는 건 즉 어떻게 된다는 뜻입니까?” 침묵을 지키던 에단이 물었다. 그러자 콜은 제법 길게 기른 수염을 쓸어내리며 질문에 답했다. “아시다시피 박스는 마력을 이용해 환상의 공간을 보여주는 도구라오. 하지만 박스 내부의 세계가 전부 환상은 아니지요. 지금 저 박스에 입장한 사람들의 육신은 박스 안에 프로그래밍된 아공간에 갇혀 있을 겝니다.” “그 말은.” “사람을 먼저 꺼내지 않고 강제로 박스를 해지하게 되면, 그들의 정신에 큰 타격이 올 수 있소이다. 어쩌면 아공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영원히 갇힐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설명을 듣던 칼라가 하얗게 질려서 손으로 입을 가렸다. 허공에 둥둥 뜬 채 까맣게 빛나고 있는 박스가 지옥에서 올라온 물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겁에 질린 칼라를 누군가 지나쳐 앞으로 나섰다. “허면 직접 데리고 나오는 수밖에 없겠구나.” “……!” “쥬다스 님?!” 깜짝 놀란 콜 대신 바이칼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어우 좀. 무슨 큰일 날 소릴 하십니까? 방금 설명 들으셨잖습니까. 저거 개조된 박스라 클리어 조건도 명확하지가 않다고요. 그사이에 누가 와서 박스를 해지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는……!” “부탁한다.”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금안에 바이칼은 억이 막혀 입을 닫고 말았다. 그 안에 깃든 깊은 신뢰에 도저히 다른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황망한 눈으로 주군을 바라보는 바이칼을 제치고 에단이 나섰다.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에단.” “믿어주십시오.” 충직한 기사단장의 요청에 쥬다스는 조용히 웃었다. “너희를 믿기에 이리 하려는 것이다.” “하나…….” “마력에 구애받지 않는 정령의 힘이라면 박스 클리어에 그리 애먹지 않을 게다. 지금은 한시 빨리 저 안의 사람들을 내보내고 일을 마무리해야 할 때가 아니더냐.” “그럴 수 없습니다.” 에단은 단호하게 거부의사를 표했다. 황태자를 지키는 친위기사단장으로서 당연한 반대였다. 정체 모를 여섯 사람의 목숨보다 쥬다스의 안전이 훨씬 중요했다. 이대로는 날이 밝을 때까지 반대할 기세였기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턱을 매만졌다. 사실상 이 인원에서 가장 빠르게, 그리고 무사히 박스를 클리어해 낼 사람은 마력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계 4속성 정령을 자유롭게 다룰 수 있는 쥬다스뿐이었다. “흐음. 이거야 원, 내 너희에게 그리도 믿음을 주지 못했던가.” “……그래서가 아닙니다.” “그럼 이리하지.” 휘오오- 녹색 바람이 그의 손바닥에 몰려들었다. 그는 하나의 구체를 이룬 바람덩어리를 지니고 있던 작은 정령석에 흘려 넣었다. 투박한 돌처럼 보이던 정령석이 녹색 기운에 물들어 반짝이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이를 콜에게 건네주었다. “‘바람의 인도’를 기록해 둔 정령석입니다. 혹 입장한 지 30분이 지나도록 박스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스승님이 이를 깨뜨리십시오. 그리하면 정령의 부름을 받아 강제로 박스에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제 스승의 고집을 익히 알고 있던 콜은 빠르게 체념하여 정령석을 받아들었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친 쥬다스가 고개를 돌려 에단을 돌아보았다. “이제 괜찮겠느냐?” “……어찌 주군께서 제게 허락을 구하십니까. 다만 소신도 동행하도록 하여주십시오.” “그러자꾸나.” “아니, 그럼 저도!” 득달같이 끼어든 바이칼이었지만 에단이 칼같이 잘라내었다. “너는 남아라.” ‘젠장…… 치사한 양반…….’ 바이칼은 속으로 툴툴거리긴 했어도 에단의 뜻을 알아들었기에 얌전히 꼬리를 내렸다. 전부 자리를 비우면 위험부담은 커질 수밖에 없다. 박스 밖에 남아 지킬 인원도 필요했다. 하는 수 없이 바이칼은 세이지와 콜, 그리고 나머지 기사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쥬다스와 함께 박스로 들어가는 사람은 에단, 그리고 저택상황을 잘 아는 칼라 둘뿐이었다. 인원정리를 마친 쥬다스는 허공에서 반짝이는 박스를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자 박스에서 뿜어져 나온 하얀 빛으로 그 앞에 마력의 문이 생성되었다. “그럼, 다녀오마.” 동네 마실 가는 사람처럼 가볍게 인사한 쥬다스가 하얀 문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에단과 칼라도 박스에 입장했다. <9> 박스 위에 표기된 인원수가 틱 소리와 함께 변경되었다. 그리고 세 사람을 집어삼킨 하얀 문은 스르륵 공중분해 되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건 여전히 둥실둥실 떠 있는 검은색 박스뿐이었다. “……형님.” 세이지가 걱정스런 눈으로 박스를 쳐다보았다. 반면 바이칼은 편한 자세로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뭐, 우린 30분 동안 노가리나 까고 있읍시다.” 0099 / 0240 ---------------------------------------------- 12장. 서막 “허허, 간단히 육포를 좀 챙겨 왔는데 드시겠소이까?” “크! 역시 영감님. 센스 좋으시구만.” 그간 쥬다스를 주축으로 왕래가 잦았던 콜과 친위기사단이었다.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세이지가 눈을 끔뻑거렸다. 마치 소풍이라도 온 마냥 화기애애했다. “저…….” “세이지 님도 육포 같은 거 드십니까?” “……안 먹어봤는데.” “흠, 입맛에 맞으실 진 모르겠는데. 이게 시간 죽일 때 씹기 딱입니다. 한번 드셔보십쇼.” 세이지는 얼결에 육포를 건네받았다. 한입 작게 물자 딱딱한 질감과 함께 고소한 참기름 맛이 베어 나왔다. “……음.” “먹을 만하죠? 사실 여기에 술이 한 잔 있으면 딱인데.” “허허허.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 잔 같이 나눕시다.” “거 좋지요!”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세이지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들의 태연함은 결국 형님을 향한 강한 신뢰로구나.’ 이제는 이들의 엉뚱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소년은 조금씩 관계에 대해 배워가고 있었다. 살짝 감았다 뜬 탁한 금안에 제 형과 같은 부드러운 빛이 감돌았다. “두 사람은 언제 처음 만났어요?” “으엑, 존대하지 마십시오, 세이지 님.” “맞습니다. 세이지 님까지 그러시면 이 늙은이 제명에 못 갈 것 같단…….” 어쩐지 숨은 사연이 있는 것처럼 콜의 주름진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세이지는 아하하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돌아오세요, 형님.’ 힐끗 올려다본 검은 박스는 한밤의 호수처럼 고요할 뿐이었다. * * * 마력에 휩싸여 박스 안으로 들어온 쥬다스와 에단, 칼라는 검은색 타일로 촘촘하게 이어진 복도에서 눈을 떴다. 박스에 흐르는 마력 탓에 정령들도 모조리 강제적으로 실체화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내부가 워낙 어둡기도 했고,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칼라는 뒤에 나타난 정령들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으으. 여긴 올 때마다 기분 나빠. 도무지가 적응을 못하겠다니까?」 「빨리 나가고 싶다요.」 「으응. 그래도 지난번처럼 던전 형태는 아닌 모양이에요.」 카니가 고개를 기울이며 앞을 손짓했다. 등 뒤는 벽으로 막혀 있었고 일직선으로 복도가 이어졌다. 까맣고 매끈거리는 타일들을 따라 이동하니 얼마 가지 않아 철창이 달린 감옥이 나타났다. “……!” 어둑어둑한 감옥에는 6명의 여자가 갇혀 있었다. 모두 젊고 빼어난 미모를 가진 아리따운 여인들이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텅 빈 눈으로 주저앉아 있던 그녀들은 갑자기 나타난 이들을 보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묶여 있군요.” 에단이 먼저 철창 너머로 그녀들의 상태를 대략적으로 확인했다. 여자들은 밧줄도 아니고 아주 얇은 명주실 같은 것에 칭칭 묶여 있었다. 그중 유일하게 일행을 향해 눈길을 돌린 금발의 여성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환상이라 여겨 눈을 한 차례 깜빡였다. 진짜로 낯선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금발 여성의 눈에 차츰 생기가 돌았다. “누구…… 세요?” “미리엘 언니?” “칼라!” 칼라가 아는 사람이었다. 미리엘이라 불린 여인은 아는 사람을 발견하자 급기야 눈물까지 글썽이기 시작했다. “도우러 왔습니다. 일단 여기서 나간 다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쥬다스의 차분한 안내에 미리엘은 눈물을 꾹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여성들은 여전히 넋이 나가 가느다란 실에 묶인 채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감옥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건 딱히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걱! 에단이 검을 뽑아 감옥 문을 단숨에 내리긋자 철창이 잘려 나가며 수수깡처럼 전부 반 토막 나버렸다. 그 무시무시한 괴력에 놀란 여인이 움찔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난리가 났는데도 미동조차 없었다. 영혼이 없는 인형처럼 축 늘어진 그녀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살핀 칼라가 그나마 정신이 온전한 미리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 사람들은 다 왜 이렇게…… 그리고 언니는 여기 왜…….” 칼라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 그녀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칼라. 일단 그들과 함께 벽에 붙어주려무나.” “네?” “지금부턴 조금 위험할 수도 있으니.” 양 어깨와 오른손에 각각 정령들을 얹은 쥬다스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의 곁에는 푸른 늑대가 함께였다. 칼라는 이제야 겨우 정령들의 존재를 눈치챘다. ‘정령술사셨어?!’ 평생 한 번 보기도 어렵다는 정령을, 그것도 넷이나 데리고 있는 모습에 칼라의 눈이 동그래졌다. 부친이 땅의 정령과 계약했다고는 하나 실체화 능력이 없어 그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황실에서 파견된 감찰. 4속성의 정령술사.’ 불현듯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칼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답이 떠올랐다. 최근 들어 제국을 폭풍처럼 휘몰고 지나간 소문의 주인공. 황태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칼라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태자님은……. 알려지기론 은발에 금안이라 들었는데.’ 금안은 맞았지만 머리색은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었다. 하지만 더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쿵 하고 대지가 흔들렸다. 《경고합니다. ‘마스터 레이븐’의 승인을 받지 않은 침입자는 더 이상 이 박스에 머무실 수 없습니다.》 위잉 위이잉- 요란한 사이렌과 함께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를 듣고 무언가 행동을 취할 겨를도 없이 천장에서부터 핏 하고 무언가 날아들었다. 에단이 황급히 검을 들어 막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고 그대로 녹아내린 사탕처럼 검에 눌어붙었다. 철퍽! 자세히 보니 여인들을 묶어둔 하얀 실과 같았다. 에단은 미간을 좁히며 실뭉치가 날아온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거미?’ 천장에 매달린 건 보통 거미가 아니었다. 여덟 개의 긴 다리로 감옥 천장을 온통 감싸 안을 정도의 거대한 크기며 검정, 노랑, 연두 삼색으로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특징인 몬스터. 학자들 사이에서 정식 기재된 명칭은 ‘아라크네(Arachne)’였다. “키이익.” 아라크네는 네 갈래로 갈라진 입을 꿈틀거리며 바람 새는 소리를 냈다. 동물이 우는 것과 다르게 쉭쉭거리는 소리를 들은 칼라와 미리엘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거미줄에 독이 묻어 있어요! 잘은 몰라도 뭔가 마취제 같은 게……!” 미리엘이 다급히 쥬다스를 향해 소리쳤다. 주변의 다른 여성들이 넋을 잃고 주저앉아 있는 이유가 바로 그들을 칭칭 감은 거미줄 탓이었다. 박스 안에 갇힌 그녀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갉아먹은 건 바로 저 아라크네였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에는 최면 성분이 든 독이 묻어 있었다. 이 독은 시간이 갈수록 감염자의 정신을 마비시켰다. 처음에는 잠시 어지러운 정도에서 그치다가 조금 지나면 환상을 보고, 나중에는 아예 정신을 잃고 인형처럼 변해버린다. 그리되면 죽지도 못하니 박스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사라지는 셈이다. 훈련용 박스를 개조하여 만든 악질적인 감금시설이었다. 그런 패턴 속에 갇힌 여성들은 강제적으로 백작의 노리개가 되었다. 그나마 미리엘은 이 안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독에 취해 있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던 것이다. 철퍽! 철퍽! 마치 우박처럼 천장에서부터 거미줄 뭉치가 떨어져 내렸다. 처음에는 그저 검으로 내려치던 에단은 자꾸만 검날에 달라붙는 거미줄을 보고 체내에 쌓아둔 영기를 일으켰다. 그가 쥔 검이 우웅 진동하며 붉은색 오러를 일으켰다. 달라붙었던 거미줄이 단숨에 녹아내릴 정도로 검에 홧홧한 열기가 이글거렸다. 아라크네는 몬스터긴 했어도 기본바탕이 거미였기에 온도 변화에 민감했다. 밑에서 급작스럽게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자 천장에 매달려 거미줄을 뱉어내던 아라크네는 다리를 마구 꿈틀대며 밑으로 쿵 떨어졌다. 에단의 오러에 위협을 느끼거나 데미지를 입은 건 아니었다. “키에에엑!” 바닥에 내려선 아라크네는 찢어지는 소리를 내지르며 포효했다. 사람이 바퀴벌레나 쥐 같은 혐오스러운 동물을 봤을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아라크네의 첫 번째 다리가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갈고리처럼 에단을 향해 내리 찍혔다. 쩡! 거미 다리는 제법 단단했다. 그 위로 부숭부숭 돋은 검고 노란 털이 징그럽게 바르륵 떨렸다. 가볍게 공격을 막아낸 에단이 섬광처럼 검을 휘둘렀다. 지켜보던 칼라와 미리엘은 그의 검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였는지조차 눈으로 쫓지 못할 정도였다. 퍽 하고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아라크네의 첫 번째 다리가 부러졌다. 다리가 토막 나자 아라크네는 광분하여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단은 거대 몬스터의 폭주에도 침착하게 검의 궤도를 정돈했다. 웅웅거리는 붉은 오러가 허공에 흩어졌다. 황태자친위기사단 단장이자 제국 제일의 무예가문 헤이가의 피를 제대로 이어받은 에단에게 있어 아라크네 정도는 그리 까다로운 상대가 아니었다. 딱히 쥬다스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이어지는 에단의 일격에 아라크네는 남은 다리 중 3개에 뜨거운 열상을 입고 미친 듯이 펄떡거렸다. “키익! 키에! 키이익!” 아라크네는 마치 누군가를 부르듯 짤막한 소리를 여러 번 내질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빠득거리는 수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새끼 벌레가 알을 뚫고 나오는 소리였다. 끼이이- 끼르르르- 사방에서 손바닥만 한 새끼 거미들이 기어 나왔다. 먹이를 먹는 족족 사방에 알을 까는 아라크네의 습성을 정확하게 구현해 놓은 박스였다. 새끼라고는 하지만 이빨에 독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덩치가 큰 아라크네라면 상대하는 데에 문제가 없었지만 작고 떼로 몰려오는 새끼 거미들은 에단이 전부 커버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일시적으로 오러를 대량으로 뽑아내어 주변을 태워 버리는 광역 기술을 사용해야 하는 건지 모체인 아라크네 먼저 처리할지 잠시 판단을 망설이던 에단의 뒤에서 화륵 불길이 뿜어져 나왔다. “……쥬다스 님.” 그의 뒤에 선 쥬다스가 가볍게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끝에 불의 정령왕 카니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작지만 어여쁜 소녀의 모습을 한 카니가 후후 웃었다. 「으응……. 귀여운 꼬마가 모처럼 활약하는 것도 보고 싶긴 했지만. 시간제한이 있는데 너무 오래 걸리면 곤란하니까요.」 번쩍!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불이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짧은 사이 불길이 거미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주변의 적을 한순간에 불태워 남김없이 재로 만들어버리는 ‘화염의 파도’였다. 새끼 거미는 전부 불에 타 사라져 버렸고 모체인 아라크네는 워낙 크고 튼튼한 몬스터였던지라 불이 붙은 채 버둥거리고 있었다. ‘화염의 파도’는 순간적으로 적을 훑고 지나가는 불길이지만 마치 바이러스처럼 불씨를 심어놓는 특징이 있었다. 한 번 휩쓸린 적은 설령 물에 들어간다 해도 그 불이 꺼지지 않고 끝까지 몸을 불태운다. 아라크네는 바람 새는 소리를 내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키에에……!” 콰득! 박스 안에 프로그래밍되었을 뿐인 존재지만 숨통이 끊길 때까지는 발악을 멈추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에단은 불붙은 아라크네를 반으로 갈라 확실히 숨을 끊어버렸다. 그러자 거미는 파사삭 가루가 되어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반짝이는 보물 상자가 툭 떨어졌다. 0100 / 0240 ---------------------------------------------- 12장. 서막 카니가 일으킨 불길로 인해 다른 여인들을 칭칭 묶고 있던 거미줄도 함께 녹아 있었다. 아라크네의 프로그램이 해지되자 독기에 취해 있던 여인들은 작게 신음하며 하나둘씩 정신을 차렸다. “여긴……?” “허억! 거미, 거미는?” “꿈이었나?” 너무 오래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아직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아직 거미에 대한 공포에 질려 있는 이도 있었다. 보물 상자를 집어 든 쥬다스가 그들에게 다가가 상태를 물었다. “자아, 집중. 다들 제 말이 잘 들립니까?” “……?” 일제히 시선이 집중되었다. 쥬다스는 한 명 한 명 눈을 맞춰 초점을 확인했다.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으나 다행히도 전부 큰 이상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는 쥬다스라고 합니다. 갑작스런 상황에 많이 놀라셨겠지만 여러분을 도우러 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천천히 하겠습니다. 우선 이 박스 안에서 나갑시다.” “나간다구요?” “진짜?” “우리…… 여기서 탈출하는 거야?” 여자들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한결 생기가 돌아온 눈빛으로 웅성거리는 그들을 앞에 두고 쥬다스는 보물 상자를 열었다. 지잉- 상자가 열리면서 허공에 박스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하얀 문이 생성되었다. 쥬다스와 에단은 일단 갇혀 있던 여자들부터 문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고 나서 맨 마지막으로 나가려던 찰나였다. 「이그레트! 아까 콜이란 아이에게 맡겨두었던 ‘바람의 인도’야. 아무래도 바깥에서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야.」 유니의 외침과 동시에 쥬다스의 발밑에 녹색 바람이 원을 그리며 몰려들었다. 쥬다스는 당황하지 않고 곧장 에단을 돌아보았다. “서두른다고 서둘렀는데 우리가 조금 늦은 모양이다.” “그 말씀은.” 에단도 바깥 상황을 짐작하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서 보자꾸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쥬다스는 정령의 힘에 의해 박스 밖으로 즉시 인도되었다. 밖에는 먼저 박스에서 빠져나온 여자들이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짧게는 한 달에서 일 년, 가장 오래 갇혀 있었던 자는 삼 년도 넘게 바깥공기를 마셔보지 못했다. 마력으로 분리된 특수공간이라 먹고 마시지 않아도 생명 활동에 큰 지장은 없었지만 온몸에 힘이 없어 비실거렸다. 대부분은 장기간 박스를 이용한 부작용으로 어지럼증을 호소했으며 이를 견디지 못하고 헛구역질을 하는 여자도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들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칼라는 어지럼증으로 쓰러진 미리엘을 부축하며 바들바들 떨었다. 탓! 바람에 감싸여 자리에 나타난 쥬다스를 향해 콜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바로 나오시는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기다릴 것을요. 아무래도 더 지체했다간 위험할 것 같아…….” “예, 그래 보이는군요. 좋은 판단입니다, 스승님.” 쥬다스는 주위를 둘러보곤 빙긋 웃었다. 그의 칭찬에 콜이 멋쩍게 허헛 하고 같이 웃었다. 콰쾅! 그때 밖에서 무언가 크게 폭발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일순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싸하게 가라앉았다. 쥬다스는 고개를 돌려 폭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흘낏 쳐다보았다. 콜이 여전히 깜빡이며 발동 중이던 박스를 해제하여 품 안에 갈무리했다. 쥬다스는 콜과 에단을 대동한 채 헛간 입구로 걸어 나갔다. “형님!” 세이지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작 30분 만에 다시 만난 사이 같지 않게 제법 애틋했다. 바이칼을 비롯한 열둘의 친위기사들은 헛간 밖에서 창칼을 든 병사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스태프를 꺼내든 채 마법으로 아군을 보호하는 진을 유지하던 바이칼이 훅 안도의 한숨을 뱉으며 돌아섰다. “늦으셨습니다, 주군.” “음, 미안하구나.” 부하의 질책에 순순히 사과하는 상관을 보며 에단이 이마를 짚었다. 대체 저 주종관계의 어딜 먼저 짚어야 좋을지 도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들이 태연스레 행동하자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네놈이었군. 내 이럴 줄 알았지.” 레이븐 백작이 창을 든 병사들 뒤에 떡하니 서 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깊은 새벽하늘이 보였다. 하지만 어두운 하늘과 별개로 헛간 주변은 환하게 불이 켜진 상태였다. 사방에서 치켜든 횃불이 뱀의 혀처럼 넘실거렸다. 레이븐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쥬다스를 응시했다. “그래, 처음부터 뭔가 뒤가 구리다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박스에 침입자 감시 시스템을 걸어놓길 잘했어.” “허 참. 구린 건 그쪽이지. 앞이나 뒤나 똑같이 구려서 앞뒤 분간할 필요도 없어서 좋겠네.” 바이칼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답했다. 그 말에 백작은 인상을 굳혔으며 실체화하지 않고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정령들 사이에서 환호성처럼 동조가 터져 나왔다. 「맞아! 앞도 엄청 구려.」 「헤헤~ 너무 대놓고 구리다요.」 「이건 이거대로 보기 드문 인간이에요. 저렇게까지 구리기 힘든데.」 「……근처에 있기만 해도 기분 나쁘군.」 정령의 기준에서도 레이븐 백작의 영혼은 무척 구렸다. 그들의 아우성을 들었더라면 수치스러워했을 테지만 백작에겐 다행히도 정령들의 소리는 쥬다스만 들을 수 있었다. 때문에 쥬다스는 깔깔거리는 유니를 진정시키느라 어색하게 어깨 위를 매만졌다. “그 부하마저도 건방지군. 일이 이리 되었으니 더 이상 숨길 것 없이 바른 대로 고하게. 누구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지?” 레이븐 백작은 섣불리 도발에 넘어가지 않고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쥬다스는 그저 물끄러미 그를 마주 볼 뿐 답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일의 총책임자는 쥬다스였다. 따로 명령을 받은 게 아니니 답할 말이 없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레이븐 백작은 굳게 입을 다문 쥬다스를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흐, 쓸데없이 끈질기게 구는구먼.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네.” 백작이 척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를 신호로 우르르 몰려온 궁병들이 헛간을 둥글게 포위했다. 그리고 일제히 활에 시위를 겨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 말이야.” 원하는 대로 계속 다물게 해주지, 백작이 낮게 웃었다. 사방에서 활을 겨누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쥬다스는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는 에단으로부터 벗어두었던 코트를 건네받아 걸치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법으로 지정된 적정량보다 과하게 징수한 세금, 없는 사실을 날조하여 영지민들로부터 빼앗은 토지와 기물들, 그래 놓고도 상부에 보고할 때에는 가난한 민생을 위해 힘쓰느라 자금이 부족하다 청원을 제출하여 구휼금을 타냈다…….” “뭐?” “죄인이 아닌 자를 죄인이라 하며 잔혹하게 살해, 그 식솔은 매질해 옥에 가두거나 죄인의 낙인을 찍어 하녀로 삼아 노예처럼 부렸으며.” “지금 네놈이 무슨 소릴!” “마음에 드는 여인은 납치 감금하였다. 그중엔 귀족 출신의 여성도 섞여 있었고.” “뭐, 뭐라. 그걸 어찌―” 샅샅이 드러나는 죄목에 당황하여 입술마저 바르르 떨던 백작은 헛간에서 부축을 받아 나오는 6인의 여인들과 칼라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저년이……!” 서슬 퍼런 기세에 칼라는 불에 데인 듯 놀라 치맛자락을 꾹 붙들었다. “횡령. 귀족 납치 및 상해. 또한 평민 대상으로라도 날조된 죄인의 낙인과 과한 처벌 행위는 국법에 어긋난다. 이 중 틀린 것이 있는가.” “뭐라? 이 발칙한 녀석! 네놈이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나보구나.” 백작은 코웃음 치며 들고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눈짓했다. “국법에 어긋남을 알면 무얼 하나! 보라, 이 땅에선 내가 왕이나 다름없다.” “…….” “그리 귀하게 대접해 주었더니 돌아오는 꼬락서니하곤. 어디, 네 아비가 그리 가르쳤더냐? 쯧쯧, 본데없긴. 배은망덕한 놈 같으니.” 이죽거리며 혀를 차는 모습에 에단이 검손잡이를 꾹 쥐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쥬다스는 흔들림 없이 백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레이븐 백작은 그 멍청한 모습을 비웃으며 오른손을 내려 신호했다. 피잉! 미리 장전하고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던 수십 개의 화살이 사방에서 동시에 날아들었다. 이제 저 배은망덕한 소년 일행이 벌집이 되어 쓰러질 것이라 여기고 돌아선 백작은 세 걸음도 채 떼지 못하고 우뚝 멈춰서야 했다. ‘응? 왜 아무 소리도 안 들리지?’ 활에 맞아 비명을 지르거나 하다못해 빗나간 화살이 헛간에 꽂히는 둔탁한 소리라도 들려야 했다. 하지만 활이 시위를 떠난 것치곤 지나치게 조용했다. 백작의 머릿속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는 휙 뒤를 돌았다. 값비싼 흑담비 모피 코트가 그의 거친 움직임에 따라 출렁였다. “뭐야…….” 활을 쏜 궁병들도 제 눈이 잘못된 건가 싶어 눈을 비비고 있었다. 마법진도 시동어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렇게 수십 개의 화살이 허공에 뜬 채 날아가던 중 정지해 있었다. 백작은 등골을 타고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솨아아아- 자세히 보니 녹색 바람이 화살을 전부 감싸 안고 있었다.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연둣빛으로 반짝이고 있는 유니의 힘이었다. “정령?!” 누군가의 놀란 외침에 따라 사병들이 술렁였다. 그냥 정령이 아니었다. 날아오는 화살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은 꽤 정교한 컨트롤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이건 사방에서 동시에 날린 화살을 한꺼번에 정지시켰다. ‘적어도 최상급 바람의 힘…….’ 백작은 차게 식은 손끝을 움찔거렸다. 더 생각하기도 전에 쥬다스의 곁에서 하나둘씩 실체화하기 시작한 정령들이 눈에 들어왔다. 녹빛으로 빛나는 작은 소녀와 붉은 보석을 이마에 단 소녀, 그리고 황토색으로 은은하게 반짝이는 소년과 물거품이 산개하는 푸른 늑대가 차례차례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황토색 소년이 활기차게 고개를 끄덕! 하는 순간이었다. 쿠웅! 헛간을 포위하고 있던 모든 병사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뭐냐!” “크아악.” “무, 무거워……!” 비명 소리를 듣자니 자의에 의한 행동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작의 생각처럼 병사들은 모두 토니의 힘에 의해 무거운 중력에 눌리고 있었다. 창과 칼, 활 등 무기를 놓치고 바닥에 엎드린 병사들 사이에서 백작만 홀로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자신의 명령에 반응할 병사가 전부 땅에 무릎 꿇고 있는 상황에서 혼자 서 있는 것도 중력 못지않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백작은 희게 질려 자신을 가만 바라보고 있는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안타까운 자로구나.” 쥬다스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섰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소리가 쿵쿵 귓가에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백작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너, 너, 너는 도대체 무엇하는 자냐!” “……아직도 그런 게 궁금한 건가.” 백작으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를 남기고 멈춰 선 쥬다스는 모자를 벗어 한쪽 팔에 걸쳤다. 스륵- 흔하디흔한 갈색 머리카락이 고결한 은빛으로 뒤덮였다. 그 아래 은은하게 빛나는 금안을 들어 백작을 마주 본 쥬다스가 품에서 옥으로 만든 로드를 꺼내 들었다. 백작은 이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무슨 막대 같긴 한데 크기가 작아서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 순간 조그맣던 로드가 순식간에 길어져 곤봉의 형태로 변화하였다. 곤봉을 한 손에 쥔 쥬다스가 이를 백작을 향해 척 겨누었다. “이 정도면 네 죄를 벌하기 충분한가.” 턱 끝에 닿은 차가운 봉의 감촉에 백작은 덜덜 떨리는 눈으로 이를 훑었다. 새하얀 옥으로 조각한 봉의 몸통과 그 위에 뚜렷하게 새겨진 황룡을 알아본 레이븐 백작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루바르잔 제국 귀족이라면 모르려야 몰라볼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황룡쇄……!’ 군주를 상징하는 황룡과 이를 파괴한다는 뜻이 담긴 이름, ‘황룡쇄’. 군주를 파괴할 수 있는 건 군주 자신뿐이다. 그 의미를 담아 황제가 후계에게 대대로 내리는 인장이 바로 저 황룡쇄였다. 토니의 힘이 백작에겐 적용되지 않았는데도 그 무릎이 흙바닥에 꿇려졌다. 레이븐 백작은 황망히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황…… 태자 전하.”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황룡쇄의 주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화부턴 '13장. 환향'이 시작됩니다. 즐겁게 읽어주시고, 추천과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0101 / 0240 ---------------------------------------------- 13장. 환향 레이븐 백작은 그 자리에서 즉각 체포당했다. 연락을 받자마자 포탈을 타고 날아온 황실 수사관과 군사들이 뒤처리를 인계받았다. 백작 대신 영지관리를 임시로 맡아줄 대리인이 봉해졌고, 억울한 사연으로 죄인의 낙인을 받은 노역자들은 전부 수사관에게 재검토를 받았으며, 빼앗긴 토지와 재산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박스에 납치되었던 여인들은 일단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치료사들을 붙여주었고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연락을 취했다. 그중 작위는 낮지만 엄연한 귀족의 여식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사람들은 다시 한 번 경악했고 그로써 백작의 죄질은 훨씬 무거워졌다. 남은 건 까맣게 말라죽은 나무들에 대한 처리뿐이었다. 영지민들은 사악한 영주를 끌어낸 것만으로도 환호했으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땅과 나무로 인해 여전히 고통받고 있었다. 이대로 올해 과실을 수확하지 못한다면 농민들의 삶은 또 얼마나 비참하게 바뀔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처우를 마친 뒤, 칼라를 데리고 그녀의 농장으로 향했다. 친위기사단을 비롯한 모든 일행이 그 뒤를 따랐다. 사계절이 지난 뒤에야 겨우 부모님과 함께 일궜던 농장으로 돌아온 칼라는 갈색 눈망울 한가득 눈물을 글썽이며 까맣게 말라죽은 나뭇가지를 붙들었다. “엄마…… 아빠…….” 경사진 토지를 따라 빼곡하게 심어놓은 나무들은 온통 검게 시들어 있었다. 그녀가 어루만지자 나뭇잎이 파삭 부서지며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손안에서 퍼지는 메마른 감촉에 칼라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다신 못 볼 줄 알았던 땅이었다. 더 이상 원수의 밑에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죄인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도 되찾았다. 백작은 저지른 죄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되었고, 부모의 억울한 누명도 벗겨냈다. 하지만 칼라는 가슴을 가득 메운 설움에 어깨를 떨었다. ‘전부 꿈같은데. 꿈에서 깨어 다시 눈을 떠보면 예전으로 돌아갈 것만 같은데.’ 꿈보다 더 꿈같은 게 그녀의 현실이었다. 슬슬 봄기운을 실은 바람이 살랑살랑 나뭇가지 사이로 불어왔다. 말라비틀어진 블루베리나무에는 원래 이맘때쯤이면 푸르른 잎사귀와 꽃 몽우리가 매달릴 시기였다. ‘……허무해.’ 텅 빈 가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 칼라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저 허무하기만 했다. 모든 게 해결되었는데도 아무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칼라.” 멍하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쥬다스였다. 칼라는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맙습니다! 나리, 아니, 태자님. 도와주셔서요.” 평민으로 자라 나무 가꾸는 재주만 키운 칼라가 궁중예법에 대해 알 리가 없었다. 빼빼 마른 열네 살 소녀는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허리를 숙여 쥬다스에게 감사를 표했다. 연두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정말, 감사드리…….” “아직.” 쥬다스가 살며시 고개를 저었다. “네게 부탁할 일이 하나 남았단다.” “……네?” 칼라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숙였던 허리를 우물쭈물 폈다. 쥬다스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에 작은 황톳빛 정령이 통통 튀는 몸짓으로 내려앉았다. 「그 녀석을 찾아서 여기로 데려오면 된다요?」 “부탁한다, 토니.” 「응요!」 토니는 땅의 힘을 주관하는 정령왕이었으니 본래 땅의 정령이었던 사령을 추적하는 데에 가장 적임이었다. 다만 이미 타락해 버려 사령화가 진행된 정령이었기에 시간이 조금 걸렸다. 토니가 땅의 기운을 탐색하는 동안 쥬다스의 어깨에 걸터앉아 있던 유니가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그치만 이그레트, 그게 통할까?」 “…….” 「원래 땅의 정령이었다던 녀석 말이야. 그 녀석의 계약자는 저 칼라라는 애 아빠였다며.」 「하긴 그래요. 정령의 계약은 술사와의 일대일 관계니까요. 계약자의 딸이라고 해도 그 정령이 과연 좋게 반응해 올지 모르겠어요.」 유니의 의견에 카니도 동조했다. 쥬다스가 지금 하려는 일은 타락한 땅의 정령과 칼라를 만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로인해 정령이 하는 일을 멈추고 본래대로 돌아올 수 있도록 재계약을 시킨다면, 이 영토에 내려진 저주는 사라진다. 하지만 계약자가 아닌 타인에게는 결코 반응하지 않는 정령의 습성상 그리 현실성 있는 계획은 아니었다. 유니는 다리를 까딱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하아, 물론 네가 있으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랑은 다를 테지만.」 쥬다스에게는 전생에서부터 정령들을 매료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마치 향기가 몹시 달콤한 꽃에 홀리는 벌, 나비처럼 정령이 한 번 그를 만나면 쉽사리 떨어지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술사의 자질이 증폭되기 때문에 정령과의 계약, 힘의 발동 등에 있어서 어마어마한 효과를 발휘했다. 지금은 그러한 그의 고유특성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었다. 「뭣하면 싸워서 물리쳐야지.」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유니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말이 좋아서 ‘물리친다’였지 재계약에 실패한다면 그대로 소멸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토니는 타락한 땅의 정령을 찾아내어 그들의 앞에 강제로 불러왔다. 콰드득 땅이 갈라지며 어른 손바닥만 한 갈색너구리가 퐁 하고 튀어나왔다. 눈코입을 기준으로 정확히 반을 나누어 색깔이 까맣게 물든 상태였다. 반은 까맣고 반은 본래의 갈색 털을 유지하고 있는 너구리는 발발 떨며 토니의 눈치를 살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너구리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형님, 저것도 정령인가요?” 세이지가 너구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일반적인 너구리라고 하기엔 크기가 너무 작았다. 게다가 자세히 보면 온몸에서 반짝이는 흙이 부슬부슬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래, 본래 계약자를 도와 이 땅을 풍요롭게 돌봐주는 일을 하던 정령이란다.” 쥬다스의 설명을 들은 칼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너구리를 바라보았다. “……아빠의 정령님?” 따로 실체화를 시켜준 계약자가 없어도 모든 사람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몸의 절반을 물들인 검은 기운 탓이었다. 너구리 외형을 취한 땅의 정령은 죽은 계약자의 마지막 소망을 이루어주기 위해 스스로 타락했다. 정령은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달콤한 과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돌봐왔던 땅을 저주했다. 한순간에 돌변한 땅의 힘은 그 어떤 나무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모조리 말라 죽였다. 하지만 아직 이 땅의 정령은 완벽히 사령이 된 건 아니었다. “힘들어 보여요.” 「…….」 칼라는 쥬다스가 시키기도 전에 먼저 움직였다. 너구리의 앞에 쪼그려 앉은 칼라는 검게 물든 반쪽 털에 살며시 손을 올렸다. ‘차가워.’ 꽁꽁 얼어붙은 얼음을 만지는 기분이었다. 소름 끼치도록 찬 털을 쓸어주며 칼라가 울먹였다. “이제 그만해 주세요, 정령님. 아빠가 원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르릉.” 너구리 모습을 한 땅의 정령이 불만스럽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스멀거리는 검은 기운이 정령의 몸을 점차 감싸기 시작했다. 「역시 자기 계약자가 아니라 소용이 없나 봐. 저대로 두면 여자애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라.」 유니의 경고에도 쥬다스는 그저 그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정령님, 우리 아빠는요.” 칼라가 정령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이 농장을 정말 사랑하셨어요. 엄마랑, 나랑 함께 묘목을 심고 물을 주고. 나무 하나하나 물을 주느라 무지무지 고생하기도 했지만. 꽃이 피고 열매를 따는 날이면 얼마나 행복했는지 몰라요.” 「……그날은 이제…… 다신 돌아오지 않아.」 땅의 정령이 처음으로 대답했다. 정령은 분노와 절망에 물들어 붉어진 눈으로 칼라를 올려다보았다. 「전부 끝났어.」 “아뇨. 정령님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요. 나, 알고 있었어요.” 칼라는 검게 물든 정령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았다. “……여긴 우리가 다함께 만든 농장이라는 걸요. 그렇죠?” 뚝, 정령의 코 위로 소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가슴속이 갈래갈래 찢어지는 슬픔을 느끼면서도 정령을 위로했다. ‘모든 걸 잃어버린 건 우리 둘 다 같으니까.’ 그들이 느끼고 있는 좌절과 슬픔은 동질의 감정이었다. 세상 누구보다 서로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녀는 정령을 토닥였다. 마치 자기 자신을 달래듯이. 「……너의 이름은?」 정령이 본래 계약했던 아버지와는 다르지만, 분명 그를 닮아 있는 맑은 영혼이었다. 정령의 반쪽을 물들이고 있던 검은 사기가 안개 걷히듯 사라졌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소녀와 정령을 지켜보며 쥬다스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칼라. 칼라라고 해요.” 「칼라. 내 ‘이름’을 지어다오.」 정령과 술사 사이에서 이름이란 서로를 구속하는 단어였다. 계약을 맺은 정령은 술사가 지어준 이름에 무조건 반응하게 되어 있었다. 너구리처럼 생긴 땅의 정령은 이미 죽어 계약이 끊겨 버린 이전 계약자 대신 칼라를 새 계약자로 지정했다. 그를 안아 들고 일어선 칼라가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게브’.” 땅을 다스리는 동화 속 요정의 이름이었다. 새 이름을 받아 칼라와 계약하게 된 땅의 정령은 그대로 너구리 외형을 유지했다. 새로운 계약자인 칼라가 그 형태를 마음에 들어 했기 때문이었다. 스스슷- 계약이 이루어지면서 칼라의 소망대로 땅에 뿌리박힌 저주가 거두어졌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아지랑이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장하구나, 칼라.” “게브가 제 얘기를 들어주었을 뿐인걸요…….” 그리 말하면서 칼라는 품안에 있는 게브를 꼭 껴안았다. “혼자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게브가 있어줘서 다행이에요.” “다시 보거라.” “……?” 칼라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이자 쥬다스는 그녀의 뒤쪽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 손짓을 따라 천천히 돌아선 칼라는 숨을 흡 들이켰다. “보렴. 너는 결코 혼자가 아니란다.” 흰 꽃망울 하나가 칼라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까맣게 말라죽었던 나무들이 옛 모습을 되찾아 무럭무럭 가지를 뻗고 있었다. 푸르른 잎사귀를 따라 은방울 같은 동글동글한 하얀 꽃망울이 셀 수 없을 만큼 피어올랐다. 하얀색 꽃의 파도가 바람결을 따라 눈부시게 너울졌다. “아아…….” 완전히 되살아나 꽃을 한가득 피운 나무들을 한 바퀴 빙 둘러본 칼라의 볼 위로 멈췄던 눈물이 다시 뜨겁게 흐르기 시작했다. “고맙습니다.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그제야 텅 비어 있던 가슴속에 희망이란 꽃이 활짝 피었다. * * * 세이지는 말을 몰다 말고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비탈진 언덕을 따라 끊임없이 이어진 하얀 물결이 바람에 따라 이쪽저쪽 잔물결을 일으켰다. 마치 백사장에서 반짝이는 모래알처럼 수없이 많은 꽃들이 빛나고 있었다. 봄이 지나 저 꽃이 전부 지면, 그 자리에 달콤한 열매가 열리게 될 것이다. 그 장면을 상상한 세이지가 멍하니 뒤를 돌아본 채로 말을 몰자, 그 곁으로 가까이 다가온 쥬다스가 세이지를 불렀다. “세이지, 앞을 보면서 가거라. 그러다 혹 다칠까 걱정되는구나.” “아. 네, 네! 형님.” 부드러운 충고에 세이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말을 타면서 딴 생각을 하는 건 확실히 위험한 행동이었다. 초보적인 실수를 범한 세이지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물들었다. 동생의 민망해하는 기색을 읽은 쥬다스가 곁에서 말을 몰며 넌지시 물었다. “이번 일이 네게 있어 제법 놀랄 일이었던 모양이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화부터는 '13장. 환향'이 진행됩니다.ㅎ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0102 / 0240 ---------------------------------------------- 13장. 환향 “정말 여러 가지로요. 저런 이름뿐인 귀족이 있었을 줄이야.” “흠.” 쥬다스가 알기로는 귀족 중엔 레이븐 백작과 비슷한 부류가 많았다. 타인을 손쉽게 절망에 빠뜨리고 그 절망을 비웃는 자들은 전생에 수도 없이 마주쳤다. 분명 그 이상으로 악독한 자도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세이지를 황태자로 옹립하려다 실패하고 싹 돌아서서 그의 몰락을 외면한 귀족들도 그들과 비슷한 부류였다. 5년간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쥬다스를 제외하곤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었던 세이지로서는 그들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실상이 그랬다. 하지만 이미 많은 충격을 받은 세이지 앞에서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까진 없었다. 귀족이라 해서 전부 그런 것도 아니었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귀족으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노력하는 이도 세상엔 많았다. 그의 배려하에 딱히 말이 이어지지 않자 세이지는 금방 다른 쪽에 관심을 갖고 화두를 던졌다. “그러고 보면 사령이란 것들도 본래는 정령이었군요…….” 쥬다스는 실체화하지 않은 채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네 정령을 가만히 눈으로 훑었다. 그의 시선을 받자 정령들은 엄마 품에 안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래.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실제로 눈앞에서 사령화되어가는 정령을 만난 건 나도 처음이란다.” “정령이란 마냥 순수하고 초월적인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문득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는 세이지를 보며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하하, 그랬더냐. 하면 이제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야?” “……그런 존재들이 고작 인간의 소망 하나 때문에 타락하다니요. 이해가 잘 가지 않아요.” “고작 인간의 소망 하나라.” 쥬다스는 동생이 한 말을 나직하게 따라 읊조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정령과 술사는 영혼으로 이어진 계약 관계란다. 정령은 세상의 그 어떤 법칙보다 계약자의 소망을 우선시하려 하지. 사령이 된다는 건 어쩌면 그들이 너무나도 순수하게 계약자를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요?” “으음, 꼭 열정적으로 타오르는 사랑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알을 품는 새나 어미를 따르는 어린 고양이처럼. 정령술사란 계약한 정령에게 있어 세상의 중심이 되어주는 거란다.” 세이지는 신기한 눈으로 헤에 입을 벌렸다. 지금 눈에 보이진 않아도 분명 형님의 주변에는 4속성의 정령이 함께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정말로 알을 품는 새처럼 그를 감싸고 있는 정령들을 상상한 세이지가 문득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형님에게 있어서 정령들은 어떤 존재예요?” “으응? 글쎄…….” 딱히 구분해서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다. 정령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곁에 있었다. 심지어 전생의 ‘이그레트’가 계약을 맺기 이전, 태어나자마자 차가운 눈밭에 버려졌던 그 순간에조차 정령들은 주변을 맴돌았다. 말하는 법을 배우기 전부터 이미 정령을 알고 있었다. 「이그레트.」 대화를 듣고 있던 정령들은 그를 이해한다는 뜻에서 방실방실 웃었다. 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단순명료한 답을 내놓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이란다.” 까르르- 정령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그를 감쌌다. 일행은 그 뒤로도 나흘 밤낮을 줄곧 이동했다. 드넓은 농장지대를 벗어나 한참을 달리자 울퉁불퉁한 산맥이 나타났다. 눈과 겨울 낙엽이 쌓인 퍼석퍼석한 산길을 올라 제법 높은 산줄기를 몇 개 넘다 보니 어느덧 눈앞에 광활한 평야가 펼쳐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였다. 쥬다스 일행은 풀밭에 말을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여기부터가 델피아 공작령입니다.” 에단이 분지 밑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산길 아래는 자그마한 마을이 하나 보였다. “이 길을 따라 죽 내려가면 델피아 성이 있는 시엘해안과 만나게 됩니다.” 나흘간 이어진 강행군에 기사가 아닌 일반인 그룹은 제법 지쳐 있었다. 같은 기사단원에 속했지만 마법기사인 바이칼도 마찬가지였다. 늦겨울과 초봄 사이에 있는 애매한 날씨 속에서 학자용 로브를 두른 바이칼은 후드 단추를 푸르며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으, 말을 탈 땐 후드를 쓰니까 더워죽겠습니다. 겨울 날씨에 맞춰 보온력 짱짱한 로브를 고른 건데 생각보다 날이 빨리 풀리네요.” “벗고 타라.” “……아직 그랬다간 얼어 죽지 말입니다, 단장.” 에단의 심플한 충고에 바이칼이 표정을 팍 구겼다. “아무튼 시엘해안 쪽으로 내려가면 성에서 요즘 날씨에 입을 만한 로브 한 벌 구해야겠습니다. 이러다 땀띠로 사망할 것 같네요.” “땀띠로는 죽지 않으니 걱정 마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옷이 입으면 덥고 벗으면 춥고! 완전 환장할 노릇이라.” “나약하군. 그 정도도 버티기 어렵나. 마법기사라지만 체력 훈련을 게을리하진 말도록.” “……하, 지금 저 복창 터져서 죽으라고 일부러 그러시는 거 맞죠?” “눈치가 빠른 점은 합격.”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 앉아 두 사람의 공방을 구경하던 쥬다스는 피식 웃으며 턱을 괴었다. 그때 유니가 포록 날아올라 모닥불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사람이 없는 분지라 모습을 드러낸 채 반짝이는 바람의 정령을 향해 모두가 눈을 모았다. 「근처에 사람들이 오고 있어.」 유니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기 아랫마을 주민들이래. 근데, 어음, 다들 상태가 좀 안 좋은 것 같아.」 “…….” 녹색 빛의 정령을 손바닥에 얹은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함께 휴식하던 전원이 우르르 일어서며 모닥불과 늘어놓은 짐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 유니를 곁눈질한 바이칼이 슬쩍 물어왔다. “크흠, 무슨 일이십니까? 혹 주변에 누가 온답니까?” “음? 정말로 눈치가 빠르구나, 바이칼. 과연 에단에게서 합격점을 받을 만하다.” “……주군까지 이러시깁니까.” 차마 쥬다스에겐 툴툴대지 못하고 시무룩해진 바이칼이었다. 농을 건 쥬다스는 작게 웃고는 말에 올랐다. “근처에 아랫마을 사람들이 올라온 모양이다. 그런데 그들 상태가 영 좋지 않다 하니, 한번 살필 필요가 있겠어.”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빠릿하게 대답한 바이칼도 자신의 말을 찾아 뛰어갔다. 대열이 갖춰지자 일행은 분지를 떠나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유니의 정보대로 얼마 가지 않아 힘들게 언덕을 올라오던 마을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특별히 상처를 입었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들의 몰골은 한눈에 보기에도 위태로워 보였다. 하나같이 눈이 퀭하게 패였으며 피부가 푸석푸석하게 말라 있었다. 손을 덜덜 떨거나 두통을 호소하는 신음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렸다. 쥬다스 일행과 마주친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정신없이 다가와 한 가지를 갈구했다. “물……! 물 좀 주시오……!” 마을 사람들은 전부 탈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가뭄의 논밭처럼 쩍쩍 갈라졌다. “제발, 여행자 나리들, 물 좀 나누어 주시오.” “부탁드려요. 아이에게만이라도.” 아직 어린 아기를 품에 안은 여인도 앞으로 나서서 빌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리며 루니를 실체화시켰다. 포옹! 물거품을 일으키며 모습을 드러낸 푸른 늑대는 마을 사람들 앞으로 어슬렁어슬렁 다가갔다. 갑자기 나타난 늑대의 형상에 놀란 사람들이 숨을 집어삼키며 돌덩이처럼 제자리에 굳었다. “맙소사. 허공에서 늑대가?!” 쥬다스는 더 소란이 일기 전에 그들을 진정시켰다. “이 아이는 제가 다루는 물의 정령이니 안심하십시오. 여러분이 가져온 양동이를 주시면 그곳에 물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마침 물을 기르러 가던 참인 듯 그나마 힘 좋은 장정들이 커다란 양동이를 이고 지고 있었다. 정령이란 말에 우물쭈물 눈치를 보던 사람들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양동이를 앞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늑대에 물려죽는 것보다 목이 말라 죽는 게 더욱 두려웠다. “루니.” 「알았다.」 계약자의 소망을 읽어낸 푸른 늑대가 가볍게 대꾸했다. 늑대의 이마에 달린 푸른 보석이 은은하게 일렁이더니, 곧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 “물이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절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텅 비어 있던 양동이들이 깨끗한 물로 가득 채워진 것이다. 물을 먹지 못해 죽어가던 사람들은 양동이에 달라붙어 허겁지겁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갓 생성해 낸 물은 맑고 청량했다. 아무리 마셔도 양동이의 물은 줄어들지 않았다. 지하수를 끌어오는 샘물처럼 마셔도 줄지 않고 퐁퐁 솟아오르는 물 덕에 죽어가던 사람들은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가, 물이야. 한 모금만 마셔 보렴. 응? 아가야.” 쥬다스는 살았다는 기쁨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사람들 틈에서 여전히 절박한 목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한 여인이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음마를 시작할 즈음 되어 보이는 어린 아기를 안고 주저앉아 있었다. 아기들은 탈수나 영양실조 등 어른이라면 며칠 거뜬히 견뎌낼 만한 증상에도 급속도로 상태가 악화되곤 했다. 여인이 안고 있는 아기도 마찬가지로 지독한 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는 상태였다. 여인은 손으로 물을 떠 아이 입술이라도 적셔 주며 정신을 들게 하고자 노력했지만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 포기하지 않고 아이를 부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쥬다스는 천천히 그 앞에 꿇어앉았다. “시엘, 내 아가야. 제발.” “잠시 아이를 봐도 괜찮겠습니까.” 아기를 안고 어쩔 줄 모르던 여인은 그제야 쥬다스가 가까이 온 사실을 알고 멍하니 그를 돌아보았다. 시야 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마저 바닥에 꿇은 쥬다스의 맑은 금안을 마주한 여인은 안고 있던 아기를 천천히 보여주었다. 수분 부족으로 정신을 잃은 아기는 물을 목으로 넘기지 못하고 입가에 질질 흘리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억지로 먹인 물이 기도로 넘어가지 않고 도로 흘러나온 게 다행이었다. 쥬다스는 아기의 이마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릉. 곁에 앉아 꼬리를 한 번 살랑거린 루니가 기꺼이 그에게 힘을 빌려주었다. 쥬다스의 손을 타고 흘러들어간 정령의 힘이 수분 부족으로 망가져 있던 아기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푸석하던 아기의 피부가 제 나이에 맞게끔 뽀송뽀송 보드라워졌다. 늘어졌던 팔다리에 힘이 돌아왔고, 낯빛도 밝아졌다.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하기 시작하자 아기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던 아기는 쥬다스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꺄아.” “세상에, 시엘!” “아우!” 건강을 되찾은 아기의 모습에 여인은 쥬다스에게 하염없이 고개를 숙였다. “아이를 살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정령술사님.” “……형님.” 세이지가 다가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콜도 함께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명하신 대로 전원 물을 마시고 휴식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 잘했다. 저들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자꾸나.” “옙!” 뜻하지 않게 오늘의 두 번째 휴식을 취하게 된 바이칼은 기분 좋게 답했다. 그런 그를 보며 에단이 못 말린다는 뜻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기 엄마를 자리가 깔린 휴식터에 앉히고 나서 그들도 그 반대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쉬었다. 이젠 제법 익숙하게 바닥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은 세이지가 마을 사람들을 눈짓하며 말했다. “근데 형님. 저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상한 이야기?” “저 사람들이요. 이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 분지 너머에 커다란 호수가 하나 있대요. 마을에 분명 식수대가 설치되어 있고 큰 호수까지 있는데 왜 물을 마시지 못하냐고 물어보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연재속도를 맞추기 위해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ㅎ 0103 / 0240 ---------------------------------------------- 13장. 환향 일행 모두의 시선이 궁금증을 담고 세이지를 향했다. 쏟아지는 시선에 살짝 민망함을 느낀 세이지가 볼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 분지호수에 신룡님이 산대요.” “……신룡?” 듣도 보도 못한 괴상한 명칭에 다들 곁에 있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먼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그러니까 신의 대리자 같은? 생긴 건 드래곤을 닮았다는데 진짜 드래곤일지는 모르겠고요.” 「그럴 리는 없어. 드래곤들은 모두 옛날 옛적에 용계로 떠났거든. 만일 남아 있다고 해도 드래곤이 호수 따위에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걸.」 유니가 단호하게 세이지가 전달하는 내용을 부정하며 추가 정보를 붙였다. 정령에게 태클이 걸린 줄도 모르고 세이지는 계속해서 마을 사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아무튼 그 신룡님이 호수에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에 좋은 일도 많았나 봐요. 마을을 습격하는 산짐승이나 몬스터들도 싹 사라지고. 사람들은 신룡님이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었대요. 근데 이 신룡님이란 존재가 백 일마다 산 제물을 바쳐야 해서.” 처음엔 염소 한 마리로도 충분했던 제물은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그 양을 늘려야만 했다. 마을 조상이 하던 풍습대로 백 일마다 가축을 잡아다 바치긴 했지만 어느 선부터는 그게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물을 바쳐야 하는 주기도 한 달에 한 번으로 짧아졌다. 최근엔 염소 다섯 마리를 바쳐도 만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한 달마다 제물을 바치는 건 작은 산골 마을 사람들에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양이 채워지지 않자 화가 난 신룡은 호수는 물론이고 산에 흐르는 물길을 모조리 막아버렸다. 거기까지 들은 바이칼이 의아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예? 세이지 님, 물길을 막았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세이지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대신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다시 추가 정보를 붙였다. 「그 신룡이란 녀석 제법 힘이 대단한가 봐. 화가 나면 불을 뿜어 그 큰 호수를 냄비 끓이듯 팔팔 끓여버린대.」 말로는 대단하다 하면서도 유니는 쭈욱 기지개를 켜며 날개를 팔랑거렸다. 「끄응차. 이 산맥 수원지가 거의 그놈이 살고 있는 호수인가 본데. 물이 끓어 증발해버리거나 아예 물길이 뚝 끊기곤 해서 사람 살 환경이 못되나 봐.」 「으잉? 불 속성 몬스터다요? 근데 왜 호수에 산다요?」 「낸들 아니? 취향인가 보지. 존중해 줘.」 정령들이 떠드는 이야기를 듣는 쥬다스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대신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긴 채 침묵을 지켰다. “……저기, 여행자님들.” 그때, 그들의 주변으로 다가온 여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신룡님에 대해서는 더 궁금해 하지 않으시는 게 좋답니다.” 조금 전 쥬다스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던 아기엄마였다.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축 늘어졌던 때와는 다르게 까불까불 손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를 본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아이는 좀 괜찮습니까?” “아! 덕분에 아주 건강해졌어요. 술사님께 인사해야지, 시엘.” “우?” 여인이 아기를 고쳐 안으며 쥬다스를 볼 수 있도록 엉덩이를 받쳐 안아주자, 아기는 파란 눈동자를 휘며 말갛게 웃었다. 산 아래 드넓은 해안의 지명을 따서 지은 시엘이란 이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아기였다. “꺄아.” 시엘은 짧은 팔을 뻗어 바둥거렸다. 쥬다스에게 가고 싶어 하는 몸짓에 시엘의 엄마가 당황하여 얼러보았지만 아기의 고집은 제법 셌다. 결국 울먹울먹 눈시울이 촉촉해지는 아기를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양해를 구했다.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아, 얘가 정말 왜 이러지……. 죄송하지만 그래주시겠어요?” 여인은 미안한 얼굴로 아기를 쥬다스에게 넘겼다. 익숙한 손길로 안아다가 느릿느릿 등을 토닥여 주자 시엘은 금방 또 꺄르르 웃었다. “오냐, 아가. 이름이 시엘이라 하였지. 너는 웃는 얼굴이 아주 어여쁘구나.” “우아?” “옳지. 이제 기분이 풀어졌는고?” “아부부!” 전혀 말이 통할 상대가 아닌데도 시선을 맞추고 따뜻하게 기분을 물어주는 쥬다스의 모습에 그의 일행들은 하나같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가만, 이거 뭔가…….’ ‘……기시감이…….’ 바이칼과 에단이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마치 할아버지가 손주 다루듯 어여삐 여겨주는 태도에, 금방 울음을 거두고 방긋방긋 거리는 아기의 모습까지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이었다. 두 사람은 또 다시 동시에 생각했다. 어쩐지. ‘그동안 쥬다스 님 앞에선 다들 저 아기나 다름없었던 게 아닌가?’ 그러다 무심코 눈이 마주친 둘은 피식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걸 확신한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맞죠?” “그럴지도.” 에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 사이 기분 좋게 방실거리는 아기를 도로 여인에게 넘겨준 쥬다스는 다시 본래 이야기하던 주제로 돌아와 물었다. “헌데 그 ‘신룡’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건.” 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신룡님께서 노하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어요. 물이 용암처럼 끓고 땅이 갈라지며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질 것이라 전해 내려오니……. 실제로 마을에 더 이상 마실 물이 없어 다 같이 먼 길을 떠나던 참입니다.” “마을을 떠나는 중이었다는 말입니까.” “네. 신벌을 받아 더 이상 제물로 바칠 가축도, 마실 물도 없는 땅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니 얼른 이 산을 벗어나세요. 저희도 여행자님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어려운 선택을 하셨군요.” 그들은 피난민들이었다. 쥬다스는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곤 턱을 짚었다. ‘신룡, 신벌.’ 대충 어떤 상황인지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마을 사람들이 예부터 신의 대리자라 철썩 같이 믿는 신룡은 아마 가짜일 것이다. 충분히 경고를 전했음에도 쥬다스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여인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부디 오래 머물지 마세요. 저희도 한시 바삐 떠나려 합니다.” 여인이 그들에게 말을 건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신룡의 분노를 피해 마을을 버리고 떠나던 사람들은 기운을 차릴 틈도 없이 빨리 이곳을 떠나려 했다. 그때 쥬다스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신룡을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후두둑. 여기저기서 물건 떨어뜨리는 소리가 났다. 그들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던 피난민들이 일제히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에 반해 쥬다스를 따르는 일행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여상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호수에 있다고 했으니 그리 멀지 않겠군요. 충분한 식수와 식량을 두고 갈 테니 이곳에서 좀 더 피로를 풀고 계십시오.” “아, 아니…….” 말문이 막혀 아무 소리도 못하는 여인과 그녀가 안고 있는 아기에게 한 번씩 눈을 맞춰준 쥬다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당부했다. “안위를 지켜줄 자들을 두고 가겠습니다. 혹 우리가 저녁이 되기 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지체 말고 출발하십시오.” “가지 마세요. 신룡님이 분노하면 여행자님들께 어떤 일이 생길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쥬다스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가듯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쓰고 있던 모자를 매만져 정돈한 그는 에단과 바이칼을 제외한 나머지 친위기사들을 전부 피난민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콜은 자연스레 뒤를 따랐고 세이지에게는 남아서 기다릴 것인지 함께 신룡을 만나러 갈 것인지에 대해 선택권을 주었다. 그러자 세이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형님을 따라가겠어요.” “그러겠느냐? 신벌을 내린다는 용을 만날지도 모르는데도, 아주 용감하구나.” 이미 씩씩하게 말에 오르고 있는 열네 살짜리 동생을 향해 쥬다스가 다독거렸다. 그 말을 들은 세이지는 말고삐를 잡으며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했다. “형님이시잖아요.” “음?” “형님은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니까. 분명 무슨 방법이 있으실 테죠.” 세이지의 용기는 다름 아닌 쥬다스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땅을 가르고 물을 펄펄 끓이는 신룡에 대한 두려움보다 쥬다스의 선택을 믿었다. 신뢰가 가득 담긴 대답을 들은 쥬다스는 잠깐 멈칫 했다가 이내 웃음을 풋 터뜨렸다. “……형님?” “하하하.” 그가 이렇게 소리 내어 웃는 건 평소에 좀처럼 보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세이지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일행 전원 놀라움에 물든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형의 생소한 모습에 놀라 졸린 코알라처럼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쥬다스는 훌쩍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그렇지. 이제 나는 늘…….’ 믿어주고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구나. 그는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린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웃음기가 남아 있는 부드러운 눈을 들어 동생을 돌아보았다. “믿어주어 고맙다, 세이지.” 그야말로 17세 소년다운 얼굴로, 쥬다스가 씩 미소 지었다. *** 쥬다스는 에단과 바이칼, 콜, 그리고 세이지와 함께 말을 달려 분지호수에 도착했다. 호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목적지까지 착실히 안내해 준 유니가 포로록 날아 호수 면을 확인했다. 「우와, 이거 진짜 부글부글 끓고 있어!」 「진짜다요. 꼭 용암같다요?」 그들이 발견한 건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호수였다. 아직 늦겨울이었는데도 훅 열기가 밀려 왔다. 재밌는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호수 위를 날아다니는 유니, 토니와 달리 카니는 쥬다스의 어깨에 꼬옥 붙어 있었다. 열기에 익숙한 불의 정령은 다홍빛 눈망울로 호수를 바라보며 제 의견을 보탰다. 「으응, 그러게요. 되게 귀여운 용암 같아요.」 「……별로 귀염성 있게는 느껴지지 않는다만.」 루니가 귀를 까딱이며 중얼거렸다. 본래 차가워야 할 겨울 호수가 부글부글 끓으면서 활화산처럼 하얀 증기를 내뿜어대어 주변이 온통 안개로 가득했다. 바이칼은 시야는 물론이고 숨쉬기마저 버거워지는 수증기를 스태프로 휘휘 저으며 말했다. “무슨 온천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이거 때문에 기온이 올라갔었나봅니다? 전 또 제 로브가 보온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셀프 고문을 받는 건가 싶었더니만…….” “바이칼, 시야 확보.” “예이. 예이.” 그는 단칼에 감상을 싹둑 잘라내는 에단을 향해 마치 엄마 잔소리를 들은 사춘기 아들처럼 대꾸했다. 그리곤 안개를 헤치는 용도로 흐느적거리던 스태프를 한 바퀴 휘릭 돌려 잡았다. 탁. 제대로 손아귀에 잡힌 스태프로 반짝이는 작은 마력입자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이트 램프(Sight Lamp).” 시동어와 함께 배열이 완료된 마력이 마법으로 발현되었다. 스태프 끝에서 나타난 건 투명한 호박 모양 램프였다. 두둥실 떠오른 램프가 허공에 자리 잡았다. 마법사가 아군으로 지정한 인원에게 어둠은 물론이고 안개나 장벽 등으로 가려 불분명한 시야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특수한 시각 능력을 부여해 주는 버프 마법이었다. 작은 마력입자가 민들레씨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러자 짙은 안개 속에서도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호수를 발견한 일행은 정령들과 다르게 움찔 놀랐다. “허. 이 온천 완전 죽이는데요?” 바이칼이 마른침을 삼키며 농담을 던졌다. 호수는 자칫 발을 헛디뎌 빠지기라도 한다면 삶은 칠면조처럼 익어버릴 무시무시한 기세로 끓고 있었다. 흡사 지옥에 온 기분이었다. 농담을 들은 유니가 심드렁하니 이를 받아쳤다. 「그러게. 뜨끈뜨끈한 게 레드드래곤 목욕물로 딱이겠다.」 어차피 바이칼에겐 들리지 않을 농담이었지만 들었더라도 웃을 리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제가 직접 업로드하는 건 조아라뿐이라 다른 곳과 업로드시각이 조금 다를 수 있습니다. ㅠㅠ; 그 점 죄송합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ㅎ 늘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0104 / 0240 ---------------------------------------------- 13장. 환향 겨울호수가 용암처럼 끓고 있는 섬뜩한 광경을 보고 굳어진 일행 사이에서 유일하게 태연함을 유지하고 있던 쥬다스가 예고도 없이 성큼성큼 호수로 다가갔다. “……쥬다스 님!” 놀란 에단이 그를 막으려 움직이던 순간이었다. 파앗- 허공에서 물거품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나타난 푸른 늑대가 끓는 호수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우아하게 뻗은 다리가 수면을 딛자 이를 기준으로 둥글게 파장이 일어나며 푸른 기운이 호수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러자 맹렬히 끓던 호수 물이 삽시간에 잔잔해졌다. 지켜보던 이들로부터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답고도 신비스런 모습이었다. 에단은 뛰쳐나가려던 자세를 바로 하고 쥬다스가 다루는 정령을 차분히 응시했다. 고요해진 호수를 딛고 선 물의 왕은 고개를 내려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그 안을 확인했다. 「블루와이번(Blue Wyvern)이로군.」 루니는 단숨에 호수 깊숙이 웅크리고 있는 거대한 존재를 꿰뚫어 보았다. 와이번이란 드래곤과 생김새가 닮았지만 그 능력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몬스터였다. 우선 현존하는 모든 생물체보다 고등한 지능을 지녔다는 드래곤에 비해 와이번은 심지어 인간보다도 지능이 훨씬 떨어졌다. 언어를 익힐 줄 모르고 이성보다는 본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니 용언은 당연히 사용할 수 없었고 복잡한 수식이 필요한 마법도 할 줄 몰랐다. 그렇지만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하급 몬스터는 아니었다. 드래곤과 비교했을 때 뒤떨어질 뿐, 와이번 한 마리의 전투력은 웬만큼 훈련받은 이능력자라 해도 이겨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며 그 무리는 여러 가지 속성으로 나뉘었다. 와이번은 폭탄도 뚫지 못하는 튼튼한 비늘과 땅을 가르는 괴력, 이에 더해 브레스를 포함한 속성별 고유능력을 가졌다. 블루와이번은 수(水) 속성이다. 물이 있는 곳에서만 살고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어 철새처럼 서식지를 옮겨 다닌다. 정령처럼 물을 생성해 내거나 자유자재로 다루지는 못하지만 지금처럼 물길을 막아버리는 정도는 가능했다. 물론 정령들의 입장에선 수공예 전문가가 이제 막 종이접기를 배운 어린아이를 구경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루니가 끓고 있던 물을 조절하여 차가운 겨울호수로 되돌려 버리자, 성난 블루와이번이 물속에서 솟구쳐 올랐다. 촤아악! 콰르릉 대지가 울리며 지진이라도 나듯 산 전체가 흔들렸다. 호수에서 튀어나온 블루와이번은 몸집이 플라타너스 나무보다도 컸다.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비늘 위로 뾰족한 뿔과 아가미 등이 꿈틀거렸다. 꼬리는 몸통보다 두 배는 길었는데 길게 늘어진 꼬리를 죽 잇는다면 호수를 한 바퀴 감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놈이 거대한 두 날개를 활짝 펼치자 물기를 담은 바람이 주변으로 후욱 일어났다. “진짜 드래곤……!” 세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함께 지켜보던 콜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허허, 닮았지만 아닙니다. 크기나 생김새를 보아 아마도.” “아마도 뭐랍니까?” 말끝을 흐리자 바이칼이 불쑥 끼어들어 재촉했다. “와이번이 아닐까 싶소이다.” “와이번?” “거참, 신룡이라더니 결국 주는 밥 먹고 오동하게 잘 커가는 몬스터였군요.” 바이칼은 스태프로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대꾸했다. 드래곤만큼은 아니더라도 같은 용 계열 몬스터였기에 무시할 수준은 아니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들은 각자 무기를 고쳐 잡으며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캬르르르.” 와이번이 입을 벌려 톱날같이 촘촘한 이빨을 내보였다. 놈은 가뜩이나 심기가 불편한 중에 찾아온 불청객들에게 무척 화가 난 상태였다. 긴 꼬리를 휘저어 물보라를 일으킨 와이번은 구토라도 하듯이 그륵거리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알아본 콜이 불의 정령을 불러내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때를 같이하여 와이번이 주둥이를 쩍 벌리고 브레스를 뿜었다. 불길이 회오리치며 일직선으로 토해졌다. 와이번의 브레스는 몸속에 품고 있는 화기를 배출하는 형태였다. 동화 속에 나오는 ‘불 뿜는 용’, ‘기사가 물리치는 악룡’ 등으로 표현되는 건 대부분 와이번이 모델이었다. 와이번이 뿜어낸 불길은 콜의 정령에게 가로막혀 허공으로 분수처럼 솟구쳤다. 막아내긴 했지만 그 열기가 주변을 후끈하게 달구었다. 마치 가까이서 폭죽놀이를 구경하듯이 일행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졌다. “캬아아아!” 침입자를 불태우는 데에 실패한 와이번은 더욱 분노하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호수물이 파도처럼 뭍으로 넘쳐흐르고 긴 꼬리에 맞아 부러진 나무들이 우르르 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을 한 바퀴 휩쓴 와이번의 꼬리가 이번엔 쥬다스 일행 쪽으로 날아들었다. 에단이 검을 뽑아 들고 놈의 꼬리를 쳐 냈다. 꽝 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검과 꼬리가 맞부딪혔다. “……!” 오로지 힘으로 받아치긴 했으나 검신이 견디지 못하고 부르르 떨렸다. 에단이 들고 있던 게 집안에서 물려받은 명검이 아니었다면 아마 산산조각 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에단은 이를 힐끗 내려다보곤 붉은 오러를 일으켰다. “바이칼, 지원.” “그 정도는 시키지 않아도 한다고요!” 투덜거리면서도 바이칼의 스태프 끝에는 별빛 같은 마력입자가 모여들고 있었다. 시동어와 함께 허공에 빛나는 화살이 일곱 개 생겨났다. 다시 매섭게 날아오는 와이번의 꼬리를 향해 에단이 단숨에 달려들었다. 조금 전과 달리 오러에 휩싸인 검은 충격을 흡수하는 건 물론이고 단단한 비늘에 길게 흠집을 내는 데에 성공했다. 놀란 와이번이 꼬리를 물리는 순간 바이칼의 지원사격이 이어졌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살들이 일제히 와이번에게로 내리꽂혔다. 워낙 비늘이 단단하여 큰 타격은 입히지 못했지만 마구잡이로 휘두르던 꼬리가 주춤했다. 놈은 그나마 물 밖으로는 나오려 하지 않았다. 거리가 멀어지면 브레스를 뿜었고 가까이 다가올 때만 꼬리를 휘저어 공격을 가할 뿐 계속 호수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와이번의 공격패턴을 파악한 에단이 다시 검을 회수하여 제대로 일격을 가하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려 보거라, 에단.” “……예.” 부드럽게 그를 제지한 쥬다스가 루니를 불렀다. “아무래도 우리가 제 보금자리를 찾아와 화가 난 모양이야. 일단 진정시키자꾸나.” 「알겠다.」 여전히 호수 위에 고고히 서 있던 푸른 늑대는 가볍게 톡 발을 굴렀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까득, 꽈드득! 수분이 응고하여 얼어붙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 깜짝할 새 호수 전체가 꽁꽁 얼어붙어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바뀌어 버렸다. 그 한가운데에는 조각상처럼 끼어버린 와이번이 있었다. 다리 아래부터는 완전히 얼음 속에 파묻혀 옴짝달싹 못하게 된 와이번은 몸부림치다 쿵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와이번은 몸이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자 당황하여 낑낑 강아지 울 듯 울었다. 와이번의 움직임이 봉쇄되자 쥬다스가 단단하게 얼어붙은 호수 위로 천천히 걸어갔다. 끙끙대던 와이번은 주홍빛 눈알을 번뜩이며 그를 노려보았다. “캬르르!” 사납게 이빨을 드러낸 순간, 루니가 와이번의 머리를 앞발로 텁 내리눌렀다. 푸른 늑대의 콧잔등에 험악스레 주름이 잡혔다. 「감히 누구한테 건방을.」 “……끼잉.” 와이번은 물의 정령왕의 기세에 눌려 힘없이 코로 울었다.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들은 쥬다스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 무리지어 산다는 와이번이 어찌 이런 호수에 홀로 남아 울고 있는 것이냐?” “푸흥.” 와이번은 하얀 콧김을 뿜으며 루니의 눈치를 살폈다.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생물의 내면적인 세계를 엿보는 것도 가능했기에 와이번의 기억을 대략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단체이동 중에 낙오되었다는군.」 「이그레트, 얘 아직 어린애야.」 유니가 와이번의 주변을 빙글 돌았다. 와이번도 용 계열인 만큼 특별한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평균수명이 400년 정도로 무척 길었다. 그리고 그중 100년가량을 성장기로 소모했다. 지금 이 호수에 살고 있는 블루와이번은 이제 겨우 성장기를 마치고 성체가 될 준비를 하고 있는 어린 와이번이었다. 「막 알을 깨고 나왔을 때쯤 철이 바뀌어 서식지 이동이 시작되었다는군. 이 호수를 지나던 중 어미와이번이 실수로 놓친 모양이고. 너무 어린 시기에 무리와 떨어져 날갯짓도 배우지 못해 호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얼라료? 그동안 왜 떨어뜨린 어미가 찾아오지 않았다요?」 토니의 물음에 대답한 건 카니였다. 「무리 생활을 하는 종족은 낙오자를 챙기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설령 자기 새끼라고 해도 예외는 없죠.」 「우와앙, 유니보다 더 매정하다요!」 「……이게 진짜. 가만있는 나는 왜 걸고 넘어져?」 찌릿 노려보는 눈길에 토니는 찔끔하여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정령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쥬다스는 와이번의 주둥이를 살며시 쓸어주었다. “배가 고팠던 게로구나.” “…….” 블루와이번의 구슬 같은 주홍색 눈동자가 스르륵 쥬다스를 향했다. 놈은 더 이상 반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넘어진 채로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사람들이 보기엔 크고 무서운 괴수였지만 사실 성장기가 끝난 와이번치고는 크기가 작은 편이었다. 블루와이번은 본래 에너지원으로 물을 흡수한다. 충분한 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때부터 성질이 포악해지며 육식을 시작한다. 그런데 이 와이번은 갓 태어난 새끼 때 호수로 떨어져 근처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룡이라 떠받들어졌다. 처음엔 산맥을 타고 흐르는 물을 흡수했지만 이로 인해 물길이 마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신룡이 노했다며 제물을 바쳤다. 그들이 제물로 가져오는 고기로 배를 채워 버릇한 와이번은 완전히 입맛이 길들여져 물을 흡수하는 대신 고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사자처럼 사람들에게 길들여져 버린 것이다. 하지만 와이번이 먹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고, 놈은 그동안 성장기를 거쳐 점점 덩치가 커졌다. 「그니까 결국 땡깡을 부리고 있었단 소리지?」 「……아마도.」 이 블루와이번은 늘 배가 고팠다. 딴에는 사람들이 먹이를 가져다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며 참아왔지만 몸집이 커진 지금은 도저히 배고픔을 참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대로 물을 흡수하여 배고픔을 달래다 보니 산맥에 물이 마르기 시작했고 그도 모자라 먹이를 달라며 떼를 쓰고 있던 셈이다. 쥬다스로부터 사정을 전해 들은 일행은 축 늘어진 와이번을 둘러싸고 회의를 열었다. “여기 길 따라 쭉 내려가면 해안이 나온다면서요. 차라리 바다로 보내주는 게 어떻습니까?” “……길 따라 내려간다는 게 얼마나 가야 하는지 알고 하는 소린가. 말을 타고도 사흘이 넘게 걸리는 거리다.” “으음, 날지도 못한다니 이동하는 방법도 문제예요. 와이번이 걸어서 해안까지 갈 수 있을까요?” 바이칼, 에단, 세이지 순으로 말을 주고받았지만 영 뾰족한 수가 없었다. 여기에 콜이 한마디 더했다. “바다로 간다한들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고 보오. 백 년 넘게 인간이 주는 먹이를 먹고 호수에서만 자라온 녀석인데 홀로 바다에서 적응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요.” “……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다고 이대로 두면 와이번에게나 산골 주민들에게 서로 악영향을 끼칠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요즘 날씨가 무척 춥던데 독자님들 모두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람으로부터 파워싸다구를...;; 순간 이그레트가 무진장 부러웠습니다. 유니를 데리고 있으면 바람한테 싸다구 맞을 일은 없겠지...(...)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늘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0105 / 0240 ---------------------------------------------- 13장. 환향 “어, 근데 저 블루와이번은 물에서 나오면 죽습니까?” 바이칼이 와이번을 가리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상한데요? 원래 날아다니기도 한다는 걸 보면 아예 물 밖에 못 나오는 종은 아닌 것 같은데. 저놈은 왜 호수에서 안 나오고 버틴 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와이번은 여전히 얼음에 끼인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채 가만히 놈을 바라보고 있는 쥬다스 대신 콜이 대답했다. “블루와이번은 개인 의지로 물길을 멈추고 펄펄 끓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물과 밀접한 속성을 가지고 있소이다.” “……그 정도는 딱 봐도 아는 사실이지 말입니다, 영감님.” 너무 당연한 사실을 읊는 콜을 향해 바이칼이 울컥하여 구시렁거렸다. 콜은 허헛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중요한 설명을 덧붙였다. “짐작하신 대로 물 밖으로 나온다고 해서 죽지는 않소이다. 다만 핸디캡을 적용받지요.” “핸디캡?” 그때, 생각을 마치고 그들을 돌아본 쥬다스가 와이번의 머리를 톡톡 두들겨 주며 입을 열었다. “이는 간단한 원리야. 블루와이번의 몸체는 마치 스펀지와 같아서 끊임없이 물을 흡수할 수 있단다. 흡수하면 흡수할수록 힘이 세지고 몸이 자라나지. 그럼 반대로 물을 뱉어낸다면 어찌 되겠느냐?” “물을 뱉어내기도 하나요?” 세이지도 궁금한 눈으로 끼어들어 물었다. “보거라.”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와이번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계약자의 소망에 따라 루니가 힘을 발현했다. 파스슷!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에 끼인 채 눈알만 데록데록 굴리고 있던 어린 블루와이번은 갑작스레 몸에서 빠져나가는 수분에 놀라 끼에엑 비명을 질렀다. 와이번의 몸통에서 연기처럼 물안개가 일어나 사방을 뒤덮었다. 그 바람에 기껏 호수를 얼려 맑아졌던 시야가 도로 뿌옇게 흐려졌다. 일행은 훅 온몸을 적시는 습기에 움찔했지만 별도로 쥬다스의 명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습기는 오래 지나지 않아 천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주홍빛 눈망울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찜통 속에 들어간 미꾸라지마냥 펄떡거리던 와이번의 머리를 따뜻한 손바닥이 토닥거려 주었다. “괜찮다. 널 해치려는 게 아니야.” “……삐이이?” “자, 자. 이제 다 끝났단다. 진정하렴.” 넘어진 채 고개만 빠끔 들어 올린 와이번이 서럽게 코에서 삐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 모습에 쥬다스의 오른쪽 어깨를 늘 차지하고 있던 카니가 볼을 감싸며 감탄을 흘렸다. 「어머나.」 「헤에~ 이렇게 보니 제법.」 유니도 포로록 날아 와이번의 주둥이에 내려앉았다. 신이 난 정령들을 보며 쥬다스가 와이번의 통통한 앞발 사이에 손을 넣어 놈을 들어 올렸다. 갑작스레 붕 떠오른 시야에 놀라 흠칫하던 와이번은 같은 높이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맑은 금안을 발견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옳지, 착한 아이구나.” “…….” 블루와이번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때 안개가 완전히 걷혀 시야를 확보한 바이칼이 쥬다스에게 들려 있는 와이번을 발견하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쥬다스 님, 그 땅콩만 한 게 뭐랍니까? 겁내 쬐끄만…….” 인형인가. 바이칼이 현실 부정을 하는 사이 세이지가 놀라움이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형님! 맙소사! 설마하니 아까 그 와이번이 그렇게 작아진 건가요?” “그래, 몸에서 물이 빠져나가면 이렇게 작아진단다. 충분한 물만 주어지면 다시 본래 크기로 돌아갈 수도 있지.” “그게 진짜 와이번이라고요!” 바이칼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쥬다스와 그의 손에 들린 와이번을 번갈아 보았다. 거대했을 적의 공포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남은 건 성인 남성 기준으로 무릎까지밖에 닿지 않을 작은 키의 오동통한 미니 와이번뿐이다. 환상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이래서 용이 환상의 종족이라고 했던 건가……!’ 진지하게 고찰에 빠진 바이칼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에단이 쥬다스에게 앞으로의 의견을 물었다. “바다까지 손수 데려가실 생각이십니까.” “으음, 일단 내게 물의 정령이 함께하고 있으니 물이 없어 말라죽진 않겠지.” “……그 점을 걱정하는 게 아니오라.” 에단이 진지한 눈으로 입을 다물자 쥬다스는 들고 있던 블루와이번을 아기 안듯 어깨에 걸쳐 안았다. 그리고 다시 제대로 답했다. “이 아이는 사람 손에 먹이를 받아먹고 자랐다질 않느냐. 배가 고파 흉포해지긴 했어도 진정 사람을 해칠 생각까진 없었을 게다. 아마 자신이 물길을 막아 먹이를 주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겠지.” “하면…….” “그래도 바다에 방생하기 전까진 사람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훈련을 시킬 필요는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그 일은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그 물음에 쥬다스가 힐끔 누군가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와이번은 그에게 안긴 채 꼬리만 살랑거렸다. “아마도. 적임이라 생각이 드는 참인데.” “흠흠, 나쁘진 않겠군요.” “……불안하긴 합니다만, 쥬다스 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쥬다스의 말에 콜과 에단이 동의를 표했다. 주어 없는 대화였지만 눈치 빠른 세 사람 사이에 훈훈한 기류가 감돌았다. 본의 아니게 그 기류에서 제외된 바이칼과 세이지는 멀거니 서로를 돌아보았다. “보셨죠? 매번 이렇게 됩니다, 세이지 님. 이거 보통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습니까.” “……아하하.” 서럽다는 말과 달리 몇 년간 저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밥 먹듯 겪어온 바이칼의 표정에는 허허로움이 감돌았다. 아예 그 부분에 대해선 득도한 사람과도 같았다. “바이칼.” “옙?” 그가 밤색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다가오자 쥬다스는 안고 있던 와이번을 넘겨주었다. 얼떨결에 매우 어색한 포즈로 조그만 와이번을 받아 들게 된 바이칼이 ‘응?’ 하는 표정을 지었다. “……?” “……?” 한 와이번과 한 사람의 얼굴에 같은 감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내 둘은 또다시 동시에 몸부림쳤다. “삐애액!” “으아아아니, 뱀 비늘! 뱀 눈! 저 이런 거 딱 질색이라고요!” “원 녀석들, 짝이 참 잘 맞는구나.” “저으은하아아! 저한테 왜 이러십니까아!” 바이칼은 거의 울기 직전의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 없이 통곡했다. 심지어 바깥에서는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한 전하 소리까지 튀어나온 지경이니 싫기는 정말 싫었다. 불쾌하긴 그에게 어설프게 날갯죽지와 꼬리를 붙잡힌 와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와이번은 갓 잡은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바이칼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면서도 막상 쥬다스가 직접 건네 준 와이번을 집어 던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바이칼은 와이번을 붙들려 애썼다. ‘아오, 이 빌어먹을 뱀대가리.’ 차마 밖으로 표현하지 못한 욕설을 목구멍 아래로 삼킨 바이칼은 스태프를 꺼낼 생각도 못하고 맨손으로 마법을 시전했다. “섀클(Shackle).” 우뚝! 와이번의 몸 위로 마력이 배열되면서 속박 마법이 발현되었다.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스태프가 있다면 사슬 모양으로 나타난 마법진으로 온몸을 칭칭 감아둘 수도 있지만 아쉬운 대로 발버둥치는 날개와 몸통 힘부터 속박했다. 거대한 몸뚱아리였다면 이 정도 마법에 꿈쩍도 안 했을 테지만 지금은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 작아질 대로 작아진 미니사이즈였다. 와이번은 속수무책으로 마력에 휘감겨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그러자 와이번은 마법에 속박당하지 않은 주둥이 사이로 톱니 같은 촘촘한 이빨을 뽐내며 크르릉 목을 울렸다. 바이칼은 와이번의 목덜미를 홱 잡아 대롱대롱 들어 올렸다. “음, 생각보다 더 잘 다루는구나. 부탁하마. 바이칼.” “……그리 말씀하시면 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하라고 맡기시는 거다. 실수 없이 잘 훈련시키도록.” “아니, 그러니까 왜 하필 제가.” “주군의 명에 토를 달셈인가.” “…….” 에단에게 핀잔까지 듣고만 바이칼은 억울한 심정으로 손에 대롱대롱 잡혀 있는 블루와이번을 슥 쳐다보았다. 와이번 역시 잔뜩 불편한 심기를 품고선 주홍색 눈알을 굴려 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삐이이…….” “하아아.” 닮기는 참 닮은 둘이었다. 바이칼에게 와이번을 맡긴 쥬다스는 정령들에게 부탁해 막힌 물길과 망가진 호수 등을 원래대로 복구시켰다. 산맥을 따라 물줄기가 다시 흐르기 시작했고, 말라붙었던 계곡에 청명한 폭포 소리가 타악기 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거기에 더해 루니와 유니의 동조술로 불러온 구름에서 큼직한 함박눈이 송이송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기사들과 함께 길목에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마을 사람들은 하얀 눈송이를 향해 너도 나도 손을 뻗었다. “눈……?” “세상에, 이게 몇 년 만의 눈이야?”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블루와이번의 특성상 온도가 올라간 산에선 수년째 눈이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비가 내린 것도 아니었다. 빗물을 비롯한 모든 물줄기는 호수에만 집중되어 왔다. 와이번이 고픈 배를 채우고 힘을 얻기 위해선 그만큼 많은 양의 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보고 놀란 사람들은 어린아이 엄지만 한 눈송이를 입으로 받아먹기도 하고 손바닥 위에 쌓기도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로 떠났던 쥬다스 일행이 말을 타고 무사히 복귀했다. 제법 쌓이기 시작한 눈밭을 박차고 달려온 말들이 힘차게 울었다. 히히힝! “이제 신룡은 없습니다.” 놀라 다가온 사람들에게 쥬다스가 불쑥 선언했다. “네? 신룡님이?” “여러분이 터전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호수에 신룡은 없으며, 이 산맥에 물길이 돌아올 것입니다.” “……!” 마을 사람들은 쉽사리 그 말을 믿지 못했다. 수년 만에 처음으로 눈이 내리고는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당장 타는 듯한 갈증으로 고통받았던 터전에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치만 살피고 머뭇거리는 사람들을 한 차례 훑어본 쥬다스가 모자를 눌러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흠…… 어쩔 수 없나.” 어차피 해야 할 일을 했고, 전할 사실을 전했으니 나머지는 사람들이 알아서 판단할 일이었다. “여행자님들! 무사하셨군요.” 아기를 안은 여인이 뒤늦게 그들의 무사를 확인하고 달려와 크게 기뻐했다. 여인에게 안겨 있던 아기, 시엘도 방긋방긋 웃으며 쥬다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신룡님이 사라졌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주, 죽으셨나요? 아니면 노하셔서 산맥을 떠나신 건가요?” “죽은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신룡이라 떠받들었던 블루와이번은 지금 바이칼의 로브 속에 꽁꽁 숨겨져 있었다. 쥬다스보다 좀 더 뒤쪽에서 그를 따르며 말을 몰고 있던 바이칼은 답답함에 바둥거리는 와이번의 머리를 꾹 눌러 더 안으로 집어넣었다. “……얌전히 좀 있어라. 너는 눈 맞으면 몸이 불어나서 무겁다고.” “뿌엑.” 조그맣게 옥신각신하는 그들을 힐끗 보곤 조용히 미소를 지은 쥬다스의 곁으로 친위기사들이 전부 집결했다. 재난 아닌 재난을 해결했으니 더 이상 피난민 행렬과 함께 있을 필요는 없다. 쥬다스는 그들을 향해 살짝 목례했다. “그럼, 조심히 귀향하시길.” “예, 예…….” 멍하니 서 있는 마을 사람들을 남겨두고 쥬다스 일행은 힘찬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멀어졌다. 언덕 내리막을 따라 달리는 특이한 여행객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기 어머니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중얼거렸다. “응? 귀향……?” 피난 가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마을로 돌아갈 것을 확신하는 인사말이었다. 멀어지는 여행객들의 뒷모습과 이를 찬찬히 가려주는 눈송이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서둘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신룡이 떠났다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 이 판국엔 그저 빨리 이동하는 게 답이었다. 그렇게 다시 짐을 챙겨 이동하기 시작할 즈음, 선두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냇물! 냇물이 흐른다!” 누군가 격양된 목소리로 외쳤다. 소리를 듣고 너도 나도 몰려가 물줄기를 확인했다. 그러자 그들의 눈앞에 힘차게 굽이치며 내려오는 맑은 냇물이 보였다. 우아아아! 사람들 사이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아기를 안은 여인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시엘. 아가야, 집에 가자.” “우아?” “다시 집으로 가는 거야.” 헤헤 웃는 아이를 향해 마주 웃음 지은 여인은 이미 실루엣조차 남지 않은 여행객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더 이상 피난민이 아니었다. 겨울바람은 차가웠고 이고 진 짐들은 무거웠지만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흐르는 시내 위로 큼직한 눈 결정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그들의 환향(還鄕)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렇게 이그레트는 포켓X마스터가 되기 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쿨럭.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0106 / 0240 ---------------------------------------------- 13장. 환향 델피아 공작령. 시엘 해안의 절벽을 따라 지어진 요새 형태의 성이 바위산처럼 우뚝 솟아 있었다. 철갑을 두른 듯 두텁고 빽빽한 하얀 바윗돌을 쌓아 굳건한 성벽을 이루었다. 성벽은 두꺼울 뿐 아니라 높기까지 하여 바다를 통해서는 절대로 진입할 수 없는 구조였다. 험준한 산맥과 깊은 바다 사이에 위치한 델피아 성은 멀리서 보면 하늘 위를 떠가는 부유섬으로도 보였다. 사실은 깊은 해저에서부터 뻗어 나간 거대한 절벽바위 위에 지어진 성지만 구름과 맞닿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었기에 신비스런 분위기를 자아냈다. 까마득한 절벽 아래는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와 철썩대며 부서져 내렸다. 거대한 성벽에 감싸인 성내엔 많은 사람이 살아가고 있었다.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다듬어진 색색의 돌로 길을 만들고 집집마다 화사한 단색으로 칠했다. 파란 집, 노란 집, 빨간 집 등 그림동화책 속의 한 장면처럼 알록달록한 집들이 늘어섰다. 그리고 그중 제일 높은 중앙에는 공작이 살고 있는 대저택이 위치해 있었다. 쾅! 저택 안에서 흉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책상을 내려친 공작 후계, 알시오스 C.델피아가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안 돼.” “오라버니.” “크리스틴.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분노에 겨워 활활 타는 듯한 시선 끝엔 올해로 19살이 된 크리스티나가 서 있었다. 허리께까지 길게 굽이치는 머리카락은 보는 각도에 따라 연한 하늘색에서부터 청록색까지 색을 달리 하는 바닷빛이었다. 정수리는 하늘색을 연상시키는 푸름이었지만 밑으로 내려갈수록 짙은 청록색을 띠었다. 어릴 적에도 조각품처럼 예뻤던 그녀였지만 성인식을 마친 지금은 갓 피어난 꽃잎처럼 곱고 청초했다. 보통 여자들에 비해 늘씬하게 큰 키와 몸 여기저기 자리 잡은 잔근육은 탄력적인 몸매를 완성시켰다. 거기에다 루바흐를 다닐 적부터 돋보이던 미모에 물이 올라 지금 사교계에서도 아름답다는 명성이 자자했다. “네가 영리하고 강하다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벌써 많은 인명피해가 나왔다. 이능을 가진 기사들도 놈을 잡지 못했어. 그런 위험천만한 곳에 너를 보낼 수 없다. 아니…….” 알시오스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러고 나서 마저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너도 내 말을 이해하리라 믿었다만. 왜 그리 고집인 거니? 크리스틴.” 오라비의 강경한 태도에도 크리스티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제가 가겠다는 겁니다.” “네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하면.” 그녀는 흔들림 없는 물빛 눈동자로 올곧게 알시오스를 바라보았다. “오라버니의 말씀은 제가 델피아 가문의 일원이 아니란 뜻인가요?” “하아, 크리스틴. 내가 널 두고 어찌 그런 뜻으로 말했겠니.” “작금의 사태는 델피아 영토 자체에 크나큰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자치대나 기사단만으로는 쉬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적합한 인력이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모두가 겁먹고 항해를 멈춘 때에 이 땅의 주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대관절 누가 나선단 말입니까.” “…….” 냉정히 상황을 판단하여 지적하는 크리스티나의 말에 알시오스는 이마를 짚었다. 그는 더 이상 저 영특하고 고집 센 여동생을 말리지 못할 것을 직감했다. 그의 예상대로 크리스티나는 형형히 빛나는 눈을 들어 자기주장에 쐐기를 박았다. “저 크리스티나 R.델피아, 가문의 일원으로서 더 이상 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날이 밝는 대로 깃발을 들고 출항하겠습니다.” * * * 쥬다스 일행은 피난민들을 만났던 때로부터 사흘 밤낮을 더 달려 산을 내려왔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지형이 점차 험준해졌다. 울퉁불퉁한 바위와 중간에 길이 뚝 끊긴 절벽 등 말이 달리기 어려운 구간도 있었다. 그런 지형을 만나면 콜이 바람의 정령을 부려 안전하게 지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흘째 되는 날 아침, 그들은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시엘 해안에 도달했다. 드디어 델피아 영지에 진입한 것이다. 시엘 해안은 바위섬과 깎아 지르는 절벽을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드넓은 바다를 끼고 펼쳐져 있었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굵은 알갱이와 조개껍데기가 섞여 거친 모래가 해변에 가득했다. 바다 수심이 금방 쑥 깊어지는데다 바람이 강하니 파도 역시 대체적으로 크고 사나웠다.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때때로 파도에 밀려 온 해초들이 구불구불 띠를 그리며 바윗돌에 걸려 있기도 했다. 마침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말을 세운 일행은 이곳에서 와이번을 방생하기로 결정하였다. “얌마, 나와라.” “삐이.” 그사이 바이칼의 따뜻한 로브 안에 있던 와이번은 꾸벅꾸벅 졸던 눈을 반짝 떴다. 그러나 시키는 대로 밖에 나오지는 않았다. 놈은 둥지 튼 새마냥 콕 틀어박혀 바이칼의 무릎 위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편히 누웠다. 로브를 들춰 그 모습을 본 바이칼은 허 하고 한숨을 뱉으며 와이번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뭐해, 겨울잠이라도 자냐? 이거 아주 와이번이 아니라 뱀이네, 뱀. 먹는 것보다 잠이 더 좋냐?” “삐애액!” 자는데 자꾸 건드리자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짜증을 부렸다. “어쭈? 이놈 이거 안 되겠는데요? 아직 사회성 훈련이 덜된 듯해 보이는 게……. 그냥 아싸리 며칠 더 빡세게 굴려볼까요?” “아무래도 물 밖에 오래 나와 있다 보니 많이 피곤한 모양이야.” 루니를 통해 생명 활동에 필요한 만큼의 수분은 꾸준히 전달해 주었지만 아무래도 블루와이번이 본래 물속에서 서식하는 종족이다 보니 쉽게 피로를 느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려 바이칼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곤 따뜻한 로브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캬르르거리는 와이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이리 나와 보련.” “삐이이?” 빼꼼, 와이번이 고개를 내밀었다. 자기가 깨울 땐 꿈쩍도 안 하더니 쥬다스의 한마디에 냉큼 일어난 와이번을 내려다보며 바이칼은 배신감에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하다하다 뱀대가리한테까지 차별을…….” 파다닥! 제대로 멀리 날진 못했지만 바이칼의 로브 속에서 튀어나와 쥬다스의 품에 안길 정도의 단거리는 비행이 가능했다. 흡사 한 마리의 닭이 퍼덕이는 모양새였다. 와이번은 쥬다스에게 아기처럼 안겨 볼을 부비며 애교까지 부려댔다. “삐익, 삐익!” “오냐. 잘 잤나 보구나.” “삐이익.” 가볍게 머리를 토닥여 준 쥬다스가 와이번을 안은 채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로 천천히 걸어갔다. 나머지 일행도 그를 따라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향기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와이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이 바로 바다란다. 네 고향과 닮아 있지 않느냐.” “……삐잉.” 와이번은 바다를 보며 아주 어린 새끼 때를 떠올렸다.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과 내리쬐는 태양, 반짝이는 물결 전부 분명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와이번은 본능에 이끌려 밀려온 파도를 향해 훌쩍 뛰어올랐다. 퐁당! 와이번은 멀리 날지는 못하고 가까운 바닷물에 입수했다. 그리고 물을 흡수하여 점차 몸을 본래대로 불려나가기 시작했다. “와.” 쥬다스 곁에 선 세이지가 작게 감탄을 흘렸다. 조그맣게 줄어 있을 때와 달리 본래 크기를 되찾은 와이번은 확실히 신룡이라고도 불릴 만한 모습이었다. 머리끝부터 등줄기를 따라 뾰족하게 돋아난 뿔이며 거대한 두 날개, 몸통보다 두 배 이상 기다란 꼬리까지, 온몸을 뒤덮은 푸른 비늘이 번쩍거렸다. 와이번은 신나게 바다를 헤엄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았다. 녀석이 겨우 몸만 담그고 살던 호수와는 다르게 바다는 그 거대한 몸집이 들어가도 끄떡도 없었다. 오히려 멀리서 길게 물결치는 파도만도 못해 보였다. 넓고 낯익은 바다에 몸을 맡긴 와이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를 헤엄쳐 갔다. 크워어어어! 거대한 포효가 파도 소리와 함께 바다를 뒤흔들었다. 고래처럼 물을 뿜기도 하고 깊이 잠수했다 뛰어오르기도 하는 등 와이번은 무척 신이 난 모습이었다. 잠깐 사이 점처럼 멀어진 와이번을 바라보던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혀를 찼다. “쳇, 이래서 파충류한테는 잘해줘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이런, 인사도 없이 떠나서 많이 서운한 게로구나.” “누, 누가 서운하다고……! 그런 거 아닙니다.” 바이칼은 손사래를 치며 홱 돌아섰다.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와이번을 무사히 바다에 방생하는 데에 성공했으니 더는 바닷가에 미련 둘 이유가 없었다. 말의 허리를 박차기 전, 바이칼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반짝이는 바다를 돌아보았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하지 그랬냐. 이 배신자 와이번 같으니.’ 멀리서 별처럼 빛나는 푸른 반짝임을 보며 바이칼은 피식 웃고 말을 출발시켰다. “잘 지내라, 꼬맹아.” 아주 속이 시원하구만 뭘. 바이칼은 말과는 다르게 씁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바이칼을 흘낏 쳐다본 쥬다스가 가만히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 위로 몰려든 녹색 바람은 이내 작은 소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네가 바란 대로 잘 적응하는지 보고 왔어! 그 녀석 되게 기분 좋아 보이더라. 신나서 지금 우리와 헤어졌단 사실도 눈치 못 챈 것 같아. 나중에 혼자 있단 걸 깨달으면 조금 쓸쓸해할지도 모르겠어. 아, 근데 마침 바다 멀리에 와이번 무리가 서식하는 지역이 있더라구?」 “와이번 서식지?” 「응응. 저 꼬마 와이번이 잃어버린 무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비늘이 푸른색인 걸 보니 동족인 블루와이번들이야. 아마 저대로 돌아다니다 보면 그 무리랑 마주치게 될걸?」 “……음.” 쥬다스는 조금 난처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정보를 전달하던 유니가 휙 날아올라 그의 왼쪽 어깨에 자리 잡았다. 「왜 그래? 이그레트.」 “동족이라. 그 아이가 괜찮을지 모르겠구나.” 「으응?」 「나도 같은 생각이에요. 낙오자를 버리고 갈 정도로 무리 질서가 강한 종족인데. 이제 와서 동족이 나타났다고 해서 쉽사리 반길 것 같진 않아요. 오히려.」 「오히려 어떻게 된다는 거다요?」 카니의 의견을 듣자 토니도 뒷말을 궁금해했다. 바람의 정령과 땅의 정령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받으며 카니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경계하고 쫓아낼 가능성이 높아요. 보자마자 공격하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헤에, 동족이라고 봐주는 게 없구나.」 「우우웅.」 쥬다스는 정령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묵묵히 이동에 집중했다. 얼마 가지 않아 크고 작은 배들을 묶어놓은 항구가 나왔다. 나무판자를 깔아놓아 넓게 이어진 항구 근처로는 제법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배낚시를 떠나는 사람부터 다른 항구로 떠나기 위해 바쁘게 준비하는 화물선 선원들, 그리고 델피아 공작가의 문장이 찍힌 군함에서도 병사들이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 “……군함이 출항 준비를 하는군요.” 에단이 넌지시 이점을 짚었다. 델피아 공작가에서 맡고 있는 역할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이 해상 전력이다. 루바르잔 제국의 왼쪽 날개라 불리는 델피아 가문은 바다로부터 적의 침략을 막고 역으로 바다로 침투해 들어가는 작전을 수행하는 데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단장. 지금은 딱히 전시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꼭 전시가 아니라도 바다에서는 많은 일이 일어난다. 델피아가는 영토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력을 아끼지 않지.” 바이칼의 질문에 에단은 막힘없이 답했다. “과연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명예로운 대귀족답질 않나.” 그들은 동시에 바다를 닮은 도도한 소녀를 떠올렸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루바흐를 졸업한 이후로는 서로 바빠 만날 기회가 없던 그녀와 3년만의 재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물에 넣으면 불어나는 공룡! (...) 거기서 영감을 얻은 건 아니었는데 뭔가 비슷한 느낌이라 말씀듣고 저도 웃었습니다.ㅋㅋ 드디어 크리스티나가 등장하네요.ㅎ 개인적으로 예뻐라하는 캐릭인데.. 등장이 좀 늦었습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 0107 / 0240 ---------------------------------------------- 13장. 환향 루바흐에서 쥬다스를 중심으로 한뜻으로 모인 그들은 만날 때마다 틱틱거리며 가시를 세우던 관계였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진심으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혈육만큼이나 서로를 마음 깊이 신뢰했기에 마음 놓고 투닥거릴 수 있었다. 학원 시절부터 황태자의 수족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이 바로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 마르젠까지 네 사람이었다. 이 중 마르젠은 일찍이 정계에 진출하여 각종 로비와 회의를 통해 귀족세력 간 이해관계를 다듬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여성인 크리스티나는 졸업 후 가문으로 돌아가 귀족영애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물론 여성이긴 해도 문무 출중한 실력을 가졌기 때문에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다양했다. 조만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델피아 공작령을 다스리게 될 알시오스의 곁에서 업무를 나눠 맡을지, 혹은 뛰어난 지략과 무력을 바탕으로 여성 장교로 지원할지, 이도 아니면 혼인을 통해 평범한 여인의 길을 걸을 것인지. 크리스티나는 수많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신중하게 시기를 살폈다. 그렇게 그녀는 지난 3년간 델피아 영지에서 공작가의 후손으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배우며 선택의 순간을 기다렸다. “또 당했다지?” “말도 말라더군. 이번엔 배가 완전 걸레짝이 되어서 돌아왔다지 뭐야. 오죽하면 공녀님께서 직접 깃발을 드셨겠어!” 쥬다스 일행은 말에서 내려 항구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항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에단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어수선하군.’ 델피아 성의 인구가 많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이른 아침의 항구가 시장통처럼 바글거리는 모습은 그리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조금만 귀를 기울여도 알아낼 수 있었다. “벌써 이게 몇 번째인지.” “살아남은 사람은 없고 자꾸 찌그러진 유령선만 항구로 돌아오니. 도대체 저 바다 너머에 어떤 끔찍한 괴물이 살고 있기에 이런 일이 자꾸 생기는 걸까?” “이번에 공녀님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델피아 정예군함이 출항한다지 않나. 믿고 기다려 보자고.” 최근 들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간 어선이나 무역선들이 종종 유령선이 되어 돌아온다는 소문이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은 머리카락 한 올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배만 덜렁 항구로 돌아왔다.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당하는지 정확한 기준조차 없다. 알려진 사실이라곤 특정 해역이라는 장소뿐. 그저 어느 순간 항구를 떠났던 배중 하나가 텅 빈 채로 돌아오게 될 뿐이다. 그런데다 돌아온 배를 살펴보면 괴이쩍게도 전투의 흔적이 없었다. 그 대신 암초에 받아 구멍 나고 깨어진 흔적은 제법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반파되거나 가라앉지 않고 항구까지 돌아오긴 하였으니 사람들이 통째로 사라질 이유는 없었다. 그야말로 정황을 파악할 수 없는 괴기사건이었다. 델피아 공작가에선 이를 흉악한 마력을 사용하는 몬스터의 습격이라 추측했다. “사람을 현혹시키는 세이렌이 있다던데.” “날개 달린 몬스터 떼의 습격일지도 모른다더군. 하늘에서부터 사람만 낚아채서 사라진 게 아닐까 하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명확하지 않은 적에 대한 공포심은 델피아 성의 주민들에게 전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그들은 더 이상 항해하길 두려워하여 항구에 발길을 끊기 시작했다. 바로 이 시점에 나선 이가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여식, 크리스티나였다. 그녀는 해양몬스터 토벌을 목적으로 하여 군함 세 척을 이끌고 일선에 나섰다. 시끌시끌한 사람들 틈에서 이야기를 주워듣던 바이칼이 문득 볼을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어, 근데 공녀님이라면…….” “오셨다―!” 그가 더 말을 잇기도 전에 와 하고 소란이 일어났다.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인파에 치이지 않게 한쪽 구석에 뭉쳐 있던 쥬다스 일행은 한 호흡 늦게 그 뒤를 따라 발길을 움직였다. “어디야? 어디?” “저길 봐, 지금 막 도착했다고!” 우글우글 몰려든 틈바구니에서 누군가 크게 환호했다. “크리스티나 공녀님!” 척척! 군용부츠가 일정하게 딛는 발자국 소리가 장엄히 울려 퍼졌다. 길게 굽이치는 투톤의 바닷빛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여성 장교를 선두로 델피아 정예해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백색의 갑옷이 햇살을 받은 파도거품처럼 번쩍였다. 수십의 군사가 4명씩 대열을 맞춰 항구로 걸어오는 모습은 장엄한 걸 넘어서 고결해 보이기까지 했다. 주민들의 응원과 환호를 받으며 군함 앞까지 걸어간 크리스티나가 우뚝 자리에 멈췄다. 시엘 해안 특유의 거칠고 강한 바닷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휘저었지만 이에 신경 쓰지 않고 굳건한 표정으로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지금부터 델피아 영지민들의 안위를 위협하는 원흉을 탐색, 척결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에 나 크리스티나 R.델피아가 사령관으로서 진두지휘할 것이며 총 삼 척의 군함을 사용한다.” 진남색 장교복 위에 하얀 갑주를 걸친 크리스티나가 특유의 차가운 표정과 어투로 출정을 선언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근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미확인된 원흉을 찾아 정체를 밝히고 척결하는 것이다. 작전 도중 꼬리를 말 겁쟁이들은 쓸모없으니 내게 목숨을 맡길 전사들만 뒤를 따르라.” 이미 사태를 충분히 지켜봐 왔으며 명을 받자마자 두말 않고 갑주를 챙겨 나온 군사들의 눈에선 흔들림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대열을 훑어 이탈자가 없음을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출항을 명하려던 순간이었다. “저희도 지원하겠습니다!” 활과 조립식 발리스타를 챙겨 든 사내들이 앞으로 나섰다. 델피아 공작령은 영지민의 성품이 대체로 호전적이고 용감하여 영토를 지키기 위한 전투를 명예롭게 여겼다. 크리스티나가 직접 해군부대를 이끌고 나서기 전까지도 많은 민간 자치대들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용감하게 바다로 떠났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러면서도 델피아의 영지민들은 뱃길을 지키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이는 그들의 긍지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는 굳이 이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 “지원을 수락하지. 단 작전에 참여하는 때에 한에 자네들도 휘하의 군인으로 취급하겠다. 명령불복종으로 인해 향후 발생하는 모든 책임은 각자 짊어지도록.” “예!” 사내들은 일제히 씩씩하게 대답했다. 크리스티나는 홱 돌아 배에 올랐고, 그녀를 따르는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각 위치로 향했다. 민간 지원자들도 지정된 칸에 올라탔다. 그리고 세 개의 군함이 모두 출발 준비를 마쳤다. “출항!” 뿌우우우-! 승리와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고동소리가 묵직하게 항구를 울렸다. 출발과 동시에 급격히 차이 나는 파고로 인해 배가 위아래로 출렁였다. 해상 활동에 익숙해진 해군들과 뱃사람들은 익숙하게 균형을 잡았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무리도 있었다. “토, 토할 것 같.” “참아라.” “저 배 처음 타보…… 웁.” 지원자들의 틈에 섞여 배에 오른 쥬다스 일행이었다. 정령의 가호를 받는 쥬다스와 콜은 힘든 기색이 전혀 없었고 극상의 신체 능력을 지닌 에단도 역시 너울 치는 시야에 별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반면 다른 친위기사들과 세이지는 뱃멀미로 인해 안색이 질려가고 있었는데 그중 유독 멀미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바이칼이었다. “아으 씨……. 배는 타지 말걸.” 한바탕 속을 게워낸 후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구석에 널브러진 바이칼을 보며 에단이 작게 혀를 찼다. “허약하군. 역시 체력 단련이 필요해.” “체력……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또한 훈련으로 해결될 일이다.” “아 거 쫌! 제가 지금 농담할 기분이 아닙…… 우웨엑!” “…….” 이제 더 나올 것도 없는데도 웩웩거린 바이칼은 결국 비쩍 골은 고라니마냥 비틀거리다 벽을 짚고 주르륵 드러누워 버렸다. 군함은 제법 넓고 튼튼하게 설계되어 있었는데도 제국 서해의 거친 파도에는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지원자들은 호출이 있기 전까진 돌아다녀서는 안 되기 때문에 다 같이 한 칸에 머무르고 있었다. 가장 크고 설비가 좋은 D3027함, 바로 크리스티나가 오른 함선이었다. 그들 일행은 지원자들 틈에 섞여 들어왔기 때문에 아직 크리스티나와 만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아는 척하지 않은 것은 쥬다스가 그리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크리스티나가 자신의 안위에 신경 쓰느라 맡은 임무에 충실하지 못할까 염려했다. 더불어 한편으로는 과연 만나지 못했던 3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조용히 지켜보고자 하는 바람도 있었다. 쥬다스는 벽에 달린 커다란 창문 앞으로 다가가 솟구치는 하얀 물살을 바라보았다. 일반 어선은 노를 저었지만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무역선이나 함선의 경우 앞에서 배를 끄는 해마(海馬)를 사용했다. 육상의 마차를 끌고 가는 말들처럼 바다에도 배를 끄는 해마가 있다. 해마는 육지의 말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네 개의 다리 대신 지느러미와 꼬리로 헤엄친다. 창문 너머로 옆 함선을 끌고 있는 해마들이 보였다. 함선은 크기가 크고 무거운 편이기 때문에 힘이 좋고 건장한 해마 다섯이 배를 끌었다. 이들이 지칠 때를 대비하여 함선 안에는 잘 훈련된 예비용 해마들이 대기 중이었다. 해마는 길고 흰 메기수염에 두터운 눈썹, 붓으로 찍은 듯한 까만 점눈이 특징이었다. 몸통색은 흰색에서부터 갈색, 검은색점박이 등 다양했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는 쥬다스를 따라 유니가 창틀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이그레트, 이렇게 큰 배에 타서 수심 깊은 바다까지 나와 본 적은 처음이지?」 「헤헤, 내 기억에도 그런 것 같다요.」 바람의 왕 곁에 톡 내려앉은 토니도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그레트는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 갈 생각은 없었으니까요.」 카니의 말대로 쥬다스는 이전의 삶에서 아흔이 넘는 나이 동안 자신이 나고 자란 제국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나라가 그에게 어떤 일을 했는가와 관계없이 그는 기본적으로 고국에 대한 정을 가지고 살았다. 넓디넓은 제국을 방랑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겐 늘 새로웠고 도전으로 다가왔다. 굳이 언어부터 시작해서 문화, 생활환경마저 다른 타국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늘 수동적이었던 그는 아예 새로운 환경에서 처음부터 다시 적응하는 자체를 꺼려했다. 그래서 강을 건너거나 짧게 조각배를 이용해 본 경험은 있었어도, 지금처럼 장거리 이동을 배를 타고 해본 적은 없었다. “…….” 쥬다스는 창문에 손바닥을 얹고 조금 멍한 시선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세상이라.’ 배신과 저주 속에 홀로 늙어가며 딱딱하게 굳었던 심장이 너른 바다를 보고 나서야 조금씩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알지 못하는 걸 두려워했었지.’ 그는 무엇이든 머리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알아야만 마음이 편했고 어떻게 대처할지 판단이 가능했다. 세상에서 그를 힘으로 떨게 할 자는 없었지만 정작 그 자신이 두려워했던 건 명확히 알아낼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이거야 원. 크리스티나 그 아이가 싫어하던 겁쟁이가 바로 나였구나.” “……예?” 몇 걸음 뒤에서 그를 주시하던 에단이 의아한 눈을 했다. 쥬다스는 바다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힘차게 달리는 해마와 높은 파도에 흔들리는 뱃머리. 그들이 보고 지나는 모든 것엔 굴곡이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가 되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어음, 그건 그렇지.」 「나요 무서운 거 많다요. 완전 무서운 거 투성이다요!」 「……어머, 토니. 그건 정말 겁쟁이인 게 아닐까요?」 자연계 4속성을 지배하는 정령왕들조차 겁쟁이가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었다. 그건 강인한 성정의 에단, 언뜻 차가워 보이는 크리스티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쥬다스는 겁쟁이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그저 인정하기로 했다. 그가 하는 말을 전부 이해하진 못했으나 편안해 보이는 주군의 어깨를 보며 에단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음, 크리스티나에 대해선...ㅎㅎㅎ 어디까지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냥 노코멘트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이칼은 묘하게 '까임신의 부름'같은 디버프가 걸려있어서... 저도 모르게 손이 가네요. ㄷㄷ 정말 지나가다 새똥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까임캐가 된 느낌이지만 그래도 똥까진 맞지 않을 겁니다. 그보다 심한 거라면 모를까....(??)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오늘도 즐겁게 읽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0108 / 0240 ---------------------------------------------- 13장. 환향 거칠게 꿀렁이는 파도와 달리 날씨는 계속 맑았다. 풍랑을 맞는다 해도 크게 위협으로 느끼지 못할 만큼 튼튼한 함선이긴 했지만 기왕이면 날이 맑은 편이 바다를 수색하기 편했다. 구름만 조금 낀 허여멀건 하늘 밑에서 거칠 것 없이 망망대해를 가로지른 세 척의 배는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출항한 지 이틀째 되는 날, 그들은 문제의 해역에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맑았고 바다에는 딱히 문제 될 만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직접 갑판에 서서 상황을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명령을 내렸다. “정지! 여기부터 더 이상 들어가지 않는다. 각 함선은 삼각대열을 유지하고 전원 전투배치. 정찰조는 해마를 이용해 탐색하되, 중앙함선 시야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이상 징후가 발견되면 그때 다 같이 움직인다. 마법조, 시야 추가 확보 지속해.” 그녀의 지휘에 따라 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마법사들이 허공에 램프를 띄우자 바다 속까지 투명하게 밝혀지며 시야가 확보되었다. 마치 깨끗한 연못을 들여다보듯 훤히 드러난 물 아래에는 갖가지 바다생물이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배를 끄는 해마와 다르게 정찰조 대원들을 위해 따로 준비된 해마들은 몸집이 작고 날렵했다. 비교적 힘은 약한 편이었지만 속도는 훨씬 빨랐다. 정찰조들은 해마에 올라 지상에서 말을 타듯 고삐를 잡았다. 위치를 표기한 노란 부표가 수면 위에 둥실 떠올랐고 정찰조들은 해마를 탄 채 부표를 기준선 삼아 근처 해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배에 남은 병력은 각자 위치에서 망을 보거나 포를 준비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평화로워 보이는 이 해역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긍지를 가지고 출발하긴 했으나 언제 어디서 어떤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이니 맑은 날씨마저도 되레 공포로 다가왔다. 바다에서 한결같은 날씨란 없다. 이렇게 맑다가도 갑자기 폭풍우가 몰아칠 수 있는 게 변덕스런 바다의 성질이었다. 전투 배치에 들어가면서 민간지원군도 갑판에 나와 발리스타를 설치하고 무기를 점검하는 등 싸울 준비를 했다. 쥬다스 일행도 자연스럽게 그 틈에 섞여 전력을 가다듬었다. 이틀간 멀미에 시달려 해쓱해진 바이칼이 비틀거리며 스태프를 꺼내 균형을 잡았다. 그리곤 지팡이에 기댄 노인마냥 스태프를 짚고 푸념했다. “와, 죽겠다…….” “엄살떨지 말고 제대로 서라. 언제 적이 덮쳐올지 모르지 않나.” “……적이요? 지금으로선 파도가 덮쳐오는 게 더 끔찍합니다.” 에단의 핀잔에 바이칼은 희게 질린 낯빛으로 중얼거렸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는 맑은 날씨와는 별개로 근방 해역은 본래 유속이 빠르고 거칠게 일어나는 파도로 유명했다. 실제 그들이 타고 있는 배는 2m도 넘는 파고로 인해 널뛰듯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늘로 쑥 치솟았다가 이내 다시 밑으로 쑥 가라앉기를 무한정 반복하고 있는 배 위에서 내륙에서만 살다 온 평범한 사람이 적응하지 못하는 건 당연했다. 세이지 역시 널뛰는 파도에 괴로운 얼굴로 한숨을 푹 쉬었다. “바다란 정말 힘든 곳이군요. 이런 걸 보면 참 대단해요.” 쥬다스가 돌아보자 세이지는 뱃머리 쪽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형님의 학우였던 저 공녀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몸으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군사를 지휘하다니.” 세이지의 시선을 따라 쥬다스도 거센 바닷바람에도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았다. 예전과 비슷한 느낌도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성숙해져 있었다. 여전히 길게 늘어뜨린 바닷빛 머리카락과 좀 더 자란 키, 남색 장교복과 백색 갑주를 걸친 크리스티나는 파도 사이 굳건히 솟은 바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주변을 아우르는 포스와 서늘하지만 강한 어조, 오만함이 깃든 푸른 눈동자는 군사들을 지휘할 사령관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부하들에게 다시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는 모습을 확인한 쥬다스가 대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아주 멋지게 자랐어.” ‘……맞는 말씀인데 뭔가 어감이 좀.’ 실제 연령은 쥬다스가 크리스티나보다 2살 어렸다. 이미 성년식을 치른 19살의 크리스티나를 17살의 쥬다스가 잘 자란 아이 취급하자 세이지는 어벙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스태프에 의지해 서 있던 바이칼이 피식 어깨를 들썩였다. “가끔 말이죠. 쥬다스 님은 주변인들을 너무 어린아이 취급하십니다.” “음? 그리 느꼈단 말이더냐. 이거 미안하구나. 이제 너희도 다 컸는데 그래선 안 되지.” “아니, 그러니까, 그 말씀부터가 이미…….” 바이칼이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지만 쥬다스는 진지하게 자신의 태도를 되짚어보며 반성했다. 사실 노인으로 살아온 기억이 있는 쥬다스에게는 에단이며 바이칼, 크리스티나 등 루바흐에서 만난 학우들이 전부 여전히 아이들로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났고, 이젠 어엿한 어른이 되어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을 마냥 어리게만 보는 자신의 주책에 미안함을 느꼈다. ‘이제부턴 조금 달리 대해주어야 하나.’ 쥬다스가 이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자 그의 감정을 공유하는 정령들은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그를 말렸다. 「킥킥, 뭐 어때. 넌 우리들도 애로 보면서.」 「맞다요! 나이로 따지면 우리가 훨씬 고연령층이다요!」 「뭐래. 토니 넌 애 맞잖아.」 「……?!」 실제 탄생한 나이로 따지자면 자연계 4속성 중 가장 연장자는 바람속성 유니였다. 그다음이 물속성 루니, 땅속성 토니, 불속성 카니 순이었다. 순서는 그랬지만 세상에 태어나 존재한 시간은 누구 하나만 꼽을 수 없을 정도로 전부 인간이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길었다. 다만 정령이란 계약한 술사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 순간 외형과 성격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본체 모습과 성격과 별개로 술사가 바라거나 무의식적으로 그려둔 이미지로 현계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쥬다스가 그들에게서 투영하고 있는 이미지는 순수하고 귀여운 아이나 동물이었다. 그중 가장 아이 같은 성격을 지닌 토니는 또다시 유니의 작은 도발에 넘어가 빼앵 반격했다. 「그렇게 치면 유니도 카니도 전부 애다요!」 「응, 어리게 봐줘서 감사.」 「딱히 애로 보아도 상관은 없지만 토니가 말하니까 조금 부정하고 싶어지기도 하네요.」 「…….」 씨알도 먹히지 않는 반격이었다. 루니는 그들의 투닥거림에 끼지 않고 한심하다는 눈으로 앞발에 턱을 괴었다. 그때였다. 막 함선으로 복귀한 정찰조가 상황을 전달했다. “앞으로 좀 더 들어가면 바다협곡이 있습니다.” 정찰조장이 대표로 크리스티나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사실에 지켜보던 모든 군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협곡에서 서식 중인 블루와이번 무리를 발견하였습니다.” “……!” 함선 위로 소리 없는 술렁임이 퍼져 나갔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가 고요했다. 어수선한 고요 속에서 정찰조장이 보고를 마쳤다. “개체숫자는 파악된 것으로만 약 여섯에서 일곱 마리, 물속에 깊이 잠수하여 서식하는 특성상 그 두 배 이상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필 상대가 블루와이번이라니!’ 해양몬스터 토벌을 위해 참전한 모든 병사의 머릿속에 같은 탄식이 떠올랐다. 블루와이번은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는 종족이다. 오랜 옛날 드래곤이 세상에서 모습을 감춰 버린 이후로 그나마 용족의 명맥을 대신 이어온 게 바로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용족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생긴 것만 용이었지 드래곤에 감히 비할 바 못 되는 몬스터의 일종이었다. 다만, 각 속성 별로 최적화된 환경에서만큼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자랑했다. 물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고 수족처럼 사용할 수 있는 블루와이번은 바다에서만큼은 가히 최강이라 불릴 만 했다. 풍랑을 일으키고 물을 끓게 만들며 빠르게 날아다니거나 물속 깊이 잠수하는 등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게다가 무리 지어 움직이는 특성이 있어 한 번에 다수의 와이번을 요격해야 했으니 이능력자를 포함한 해군이라 해도 상대하기가 아주 까다로웠다. 보고를 들은 크리스티나는 서늘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 와이번이라. 한 번 고기를 맛 본 동물은 먹이로 고기만 찾는다더니 바로 그 짝이로군.” 그녀는 겁을 집어먹는 대신 곧장 지시를 내렸다. “정찰조가 발견한 협곡으로 배를 돌려라.” “예!” 스릉- 크리스티나는 바닥에 내려두었던 검을 빼 들었다. 하얀 자태를 드러낸 대검이 번쩍 햇살을 받아 빛났다. 그녀가 주력으로 다루는 검술은 대검류였다. 가늘고 늘씬한 팔뚝으로 대검을 거뜬히 지탱한 그녀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전방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델피아 영지민들을 슬픔과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원흉을 찾았다는 생각에 푸른 눈동자가 더욱 서늘해졌다. 정찰조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거대한 바위산과 그 사이로 이어지는 협곡이 나타났다. 악마의 입처럼 삐죽삐죽 튀어나온 바윗돌을 바라보며 크리스티나가 정지 명령을 내렸다. “께르르륵.” “크워엉.” 아직 자신들을 해치러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와이번들은 바위에 앉아 햇볕을 쬐거나 몸에 물을 끼얹는 등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비늘을 온몸에 두른 와이번들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떼로 몰려 있는 모습은 신비로우면서 심지어 마냥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엇, 뱀대가리 꼬마.” 바이칼이 문득 낯익은 블루와이번을 발견하고 난간을 붙들었다. 워낙 멀어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리처럼 물에 동동 뜬 채 무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어린 와이번이 보였다. 쥬다스도 이를 알아보고 함께 난간에 손을 올렸다. “그때 그 아이로구나.” “예! 다행히 자기 무리를 잘 찾아갔나 봅니다. ……근데 저놈 왜 저렇게 비실비실하지?” 분지호수에서부터 억지로나마 어린 와이번을 맡아 돌봐왔던 바이칼은 금방 놈의 상태에 대해 눈치챘다. 기껏 바다에 방생해 준 어린 와이번은 무리에 끼어들지 못하고 조금 떨어진 바위에 올라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친 것 같은데요?” “흠.” 바이칼의 말대로 무리에 끼지 못한 어린 와이번은 아름답던 비늘 사이로 여기저기 상처가 나고 벌어져 붉게 속살이 드러나 있었다. 축 늘어뜨린 날개는 찢어진 부분이 있었으며 무척 의기소침한 분위기였다. 홀로 무리를 바라보며 끙끙대던 어린 와이번은 이내 쓸쓸히 바위 위에 몸을 말고 누웠다. “동족인데도 끼워주지 않나 보군요.” “어어, 저놈들 괴롭히기까지 하나 봅니다!” 바위에 웅크린 어린 와이번의 곁으로 다가온 다른 와이번이 놈을 향해 크고 촘촘한 이빨을 쩍 드러냈다. 크워어엉! 흡사 사자의 포효와도 같았다. 화들짝 놀란 어린 와이번이 더 멀리 피신하자 그제야 와이번 무리는 놈에게서 신경을 끄고 일상을 즐기기 시작했다. “제군들.” 쥬다스 일행이 와이번에 집중해 있는 사이 델피아 군은 블루 와이번 무리를 적으로 판단했다. 현재로서는 문제가 일어나는 해역에 서식하는 와이번 무리가 가장 사태의 원흉에 근접해 있었다. 만일 아니라 하더라도 저렇게 위험한 몬스터 떼를 그냥 내버려 두고 갈 순 없었다. 부관들과 간략히 회의를 마친 크리스티나가 대검을 번쩍 하늘로 치켜 올렸다. “건투를 빌지. 전원 전투태세!” “전투태세!” 군사들은 마치 한 몸처럼 전투태세를 따라 외쳤다. 그들의 눈에서 타오르는 결의를 확인한 크리스티나가 전투명령을 내렸다. “마력포을 발사하라!” 출항하던 때와 같이 군더더기 없고 빠른 명령이었다. 슈우우, 콰앙-! 대포 소리가 천둥처럼 협곡을 뒤흔들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사실 2부들어오면서 쥬다스 말투에 묘하게 변화가 있습니다.ㅎ 허허거리지 않는다든지 조금 아이같이 말한다든지 하는 식인데, 문제는 아직 애들은 애들로만 보고 있다는 점이죠.ㅎㅎ 사족으로 저도 직업상 가끔 십대 친구들과 슬쩍 섞여 놀곤 하는데 어이쿠.... 그냥 다 예쁘더라고요. 늙은이(?)앞이라고 다들 예쁜짓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ㅠ.ㅠ 적어도 20대 초반까지는 해맑고 에너지넘치고 아이같고 그리 느껴집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주말 쉬고 다음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무지무지 춥다는데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 잘 챙기셔요! 0109 / 0240 ---------------------------------------------- 13장. 환향 함선은 마력을 전투 에너지로 사용한다. 따라서 배에 설치된 포구는 전부 다양한 마법진이 기록된 마동(魔動)장치였다. 단순한 파괴력만을 뿜어내는 마력포가 있는가 하면, 필요에 따라서 바닷물을 얼리는 냉각포나 적을 속박시키기 위한 그물포도 있었다. 그중 선제공격은 늘 파괴적인 마력포를 발사해 전장을 울렸다. 갑자기 날아든 마력포에 바위가 퍽 깨어지며 바닷물이 화산 분출하듯 치솟아올랐다. 와이번 두 마리가 직격탄을 맞아 크게 비틀거리며 울음소리를 내질렀다. “캬아아아!” “께루룩!” 공격을 받자 와이번 무리도 협곡으로 다가오는 함선을 발견했다. 잔뜩 흥분하여 끼룩거리던 와이번들을 보며 전투태세에 돌입한 군사들이 긴장의 끈을 조이는 찰나였다. 퍼드득! 블루 와이번 무리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도주를?!’ 예기치 못한 모습에 크리스티나는 당황하여 멈칫했다. 비둘기 떼가 놀라 달아나듯 와이번들은 깜짝 놀라 날개를 퍼덕여 대고 있었다. 흉악해 보이는 생김새와 달리 블루와이번은 본디 유순한 성질이었다. 물이 충분히 제공되는 환경이라면 배를 채울 필요가 없기 때문에 따로 사냥을 하거나 포악하게 굴지 않는다. 마치 초식동물처럼 겁이 많고 순하여 궁지에 몰리거나 알을 품고 있을 때가 아니면 일단 도망가고 보는 게 블루와이번의 특징이다.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그들을 순순히 도망가게 놔두지 않았다. “그물포 전환, 포획하라!” 그녀의 명령에 따라 포병이 포구에 깔려 있던 마법진을 변경했다. 화력이 강한 마력포 대신 그물처럼 촘촘하게 짜인 마력덩어리가 펑 소리를 내며 날아갔다. 그리고 번개처럼 빠르게 와이번들을 뒤덮었다. “캬아앙.” 그물에 걸린 와이번이 눈을 번뜩이며 송곳니를 드러냈다. 옴짝달싹못하게 거대한 몸통을 옭아맨 마력그물이 제대로 놈의 심기를 거슬렀다. 후욱 숨을 들이켠 와이번이 아가리를 쩍 벌리는 순간이었다. “실드 개방!” 예민하게 낌새를 알아차린 크리스티나가 재빠르게 지시했다. 그러자 각 전함에 설치된 실드파일런(Shield Pylon)에서 푸른 장막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블루와이번의 뜨거운 브레스가 전함을 향해 내리꽂혔다. 콰과과과― 쿠웅! 푸른빛 실드에 막혀 브레스가 직접적으로 함선에 닿진 못했지만 선체가 지진 나듯 뒤흔들렸다. 몇몇 병사는 무기를 놓치고 넘어지기까지 한 충격이었다. 브레스를 뿜어 마력그물을 찢어버린 와이번은 그대로 홱 방향을 틀어 하늘로 도주했다. 싸우다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도주할 생각뿐인 날개 달린 적을 함선이 따라가 붙잡긴 어려웠다. 더구나 바다의 제왕이라 불리는 블루와이번 무리가 마음먹고 발악해 대자 파도가 마구 요동쳐 타깃을 잡을 수 없었다. 군사들은 허탈한 눈으로 멀어지는 와이번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보고했다. “아직 한 놈 남아 있습니다!” 무리에 섞이지 못한 와이번이었다. 날갯짓을 배우지 못한 어린 와이번은 갑작스런 전투 상황에 놀라 두리번거리고만 있다가 갑작스레 폭격이 날아들자 깜짝 놀라 물속으로 뽀그르르 잠수했다. “……놓칠 수야 없지.” 기습한 보람도 없이 허무하게 와이번 무리를 날려 보낸 크리스티나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대기하던 부관이 새의 깃털 모양으로 조각한 거대한 활을 건네주었다. 공작가 대대로 내려오는 신물, ‘페어리 보우’. 이는 주인을 정하는 신물로, 델피아가의 혈족만이 발동시킬 수 있다. 활만 가지고 있어도 마력만 주어진다면 무한한 화살을 발사할 수 있는 편리한 기능이 탑재되어 있었다. 일반 활과 달리 거의 사람 키 정도로 커다란 활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하프를 연상케 했다. 백금으로 조각된 깃털이 활대에서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시위를 잡자 허공에 팟 하고 진청색 마력화살이 생성되었다. 마법사들이 띄운 램프로 인해 바닷물은 투명하게 그 안이 비쳐 보였다. 바들바들 떨며 물밑으로 가라앉은 와이번의 꼬리를 발견한 그녀가 정확히 활을 조준했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에 놈의 그림자가 비쳤다. 물속에서 빠르게 움직이곤 있었지만 크리스티나의 조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조준을 마치자마자 망설임 없이 시위를 놓았다. 슈우욱! 강력한 힘을 실은 푸른 마력화살이 물살을 뚫고 날아갔다. “……!” 날카로운 화살촉이 어린 와이번의 비늘을 막 뚫고 박히려던 순간이었다. 화살은 간발의 차를 남기고 시간이 멈춘 듯 물속에서 우뚝 멈춰 버렸다. 화살이 제 스스로 의지를 갖고 멈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를 본 군사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어났으며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들고 있던 활을 내렸다. ‘이런 일이 가능한 건.’ 크리스티나가 다루는 페어리 보우는 일반적인 마법으로는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담긴 화살을 쏘아낸다. 제아무리 단단한 와이번의 비늘이라 해도 뚫어버릴 수 있는 그 화살을 막아내려면 그와 맞먹는 힘이 필요했다. 그런 힘을 가진 자가 적이라면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리 여긴 크리스티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방해꾼을 찾으려 주변을 훑는 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아무 상관이 없단다.” 그럴 리 없다 여기면서도 그녀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델피아 영지로 돌아온 순간부터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차가운 바람 사이로 하얀 입김이 흩어졌다. “그릉.” 허공에서 물거품을 일으키며 나타난 푸른 늑대가 제 계약자의 손에 살짝 머리를 비볐다. “네가 찾는 적은 그 아이가 아니다. 훼방을 놓아 미안하지만 잠시 기다려 주지 않겠느냐.” “…….” 척! 차갑고 오만하던 자태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크리스티나는 그 자리에 무릎 꿇고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델피아의 딸 크리스티나가 황태자전하를 뵙습니다.” 사령관이 무릎을 꿇자 그녀를 따르는 수하들은 당황했지만 이내 우르르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는 사이 어린 와이번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오랜만이구나.” 마법으로 머리색이 바뀌었을 뿐 진작 알아보지 못한 게 한스러울 정도로 예전 그대로인 금안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천천히 일어서며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어찌 이런 곳에…….” “그 이야기는 나중에. 우선 여기 온 목적부터 해결하자꾸나.” 크리스티나는 힐끗 시선을 돌려 협곡을 훑었다. 와이번이 사라진 협곡에선 거친 파도만 남았을 뿐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신뢰 어린 눈으로 쥬다스를 다시 응시했다. “블루와이번은 본래 온순한 종이란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공격하고 배를 파손시키지 않아.” “하면.” “아예 헛짚은 건 아니야. 마침 진짜 범인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니.” “……예?”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거라.”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크리스티나는 파도 소리에 묻혀 작게 들려오던 노랫소리를 감지했다. 라라라― 라라라라― 「……달도 별도 잠든 까만 새벽에 너만은 깨어 있었지…….」 어린 소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는 동굴 안처럼 웅웅 울려 어디서 들리는지 위치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처음엔 웅얼웅얼거리던 게 조금씩 커지고 선명해지는 탓에 곧 함선에 오른 모든 사람이 노래를 듣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약속해, 너는 나의 바다가 되고 나는 너의 파도가 되기를.」 노랫소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크리스티나는 시원한 물로 귀를 적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잠시 몽환적인 분위기에 신경을 빼앗기던 찰나 갑자기 여기저기서 털썩털썩 쓰러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혹시 바다를 찾아 헤매는 파도를 본다면 말해주겠니. 그 아이가 어디로 가버렸는지를.」 크리스티나는 쓰러진 수하들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깊은 수면 상태에 빠져 미동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큭.” 상황은 쥬다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온몸의 통제권을 빼앗긴 느낌에 친위대를 비롯한 그의 일행이 전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잇새에서 피가 흐르도록 버티려 노력하던 에단마저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 결과 자리에 멀쩡히 서 있는 건 크리스티나와 쥬다스뿐이었다. 삽시간에 침묵으로 물든 함선 세 척은 그대로 갑자기 방향을 틀어 협곡 안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저절로 돌아가는 키, 제멋대로 펄럭이기 시작한 돛을 보며 크리스티나가 차분히 쥬다스의 곁으로 다가섰다. “이것이 말씀하신 진짜 적이군요.” “그래. 이런 식으로 뱃사람들을 홀려 잡아먹은 모양이다. 곧 만나게 되겠지.”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요사스런 노랫소리와 함께 악마의 이빨처럼 뾰족하게 솟은 바위 사이로 배가 서서히 진입했다. 아무리 강심장인 크리스티나라도 갑자기 사람들이 모두 잠들고 으스스한 협곡 안으로 들어서게 되자 등골이 오싹해져 왔다. 그녀는 태평한 얼굴로 갑판 난간을 잡고 선 쥬다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럼 함선의 모든 인력이 저 노랫소리에 홀렸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지. 지금은 그저 단순히 잠든 것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런데 저는 왜.” 쥬다스는 자연계 4속성 정령의 가호를 받고 있으니 그러려니 생각할 수 있어도 크리스티나 자신은 무슨 이유로 노래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가 더 묻지 않고 거기서 입을 다물자 쥬다스는 난간에서 손을 놓으며 여유로운 어조로 대답해 주었다. “글쎄다. 그건 노래를 부른 자의 마음에 달렸으니 직접 가서 물어보아야 알 수 있지 않겠느냐.” “……혹 이곳에 이런 괴물이 산다는 걸 알고 계셨습니까?” 갑작스레 기이한 현상에 휘말린 사람치곤 마치 산책 나온 노인네마냥 느긋했다. 크리스티나의 당혹 섞인 물음에 쥬다스는 작게 웃어 보였다. 녹색 바람이 그들의 주변을 산들산들 맴돌았다.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알았다.” “제가 아는 전하께오선 꼭 스스로의 안위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수많은 사람이 위험에 처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실 분이 아니십니다.” “미리 위험을 알렸어야 했다는 말이더냐. 듣고 보니 그 말도 옳구나.” “하나 일부러 언급하지 않으셨다는 건 즉 이번 사안이 그리 위험하지 않다 판단하셨기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흠.” “마지막으로 추측컨대, 미리 위험을 알리셨더라면 제가 맡은 임무를 뒤로하고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느라 뱃머리를 돌렸을 거라 여기셨기에 일부러 모른 척하신 거라 보여집니다.” “그도 맞는 이야기다. 영특하구나, 크리스티나야.” 크리스티나는 불안에 떠는 대신 체념한 얼굴로 작게 한숨을 뱉었다. “하. 정말……. 전하께선 참으로 여전하십니다.” “우연이구나. 나도 널 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배가 멈추었다. 동시에 줄곧 이어지던 노랫소리도 뚝 끊겼다. 바위로 둘러싸여 여기저기서 작은 폭포가 콸콸 쏟아져 내리는 협곡 한가운데였다. 닻을 내린 것도 아닌데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못 박힌 듯 멈춰 선 함선을 둘러본 크리스티나가 활 대신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때 깎아 지르는 듯한 절벽 위에서 노래 부르던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 크리스티나가 움찔 놀라 고개를 들자 바위에 걸터앉은 작은 소녀가 보였다. 밤하늘을 닮은 새까만 원피스에 제 키보다 더 기다란 하늘색 머리카락, 그리고 검게 물들어 흰자를 찾아볼 수 없는 섬뜩한 눈알이 돋보였다. 크리스티나는 대검을 쥔 손아귀에 힘을 꾹 주며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그대가 그동안 이 바다에서 무고한 생명을 해친 자인가.” 「라일러스……?」 “……?” 묻는 말엔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이름을 꺼내 부르는 소녀로 인해 크리스티나는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소녀는 절벽에서 휙 뛰어내려 함선에 탁 착지했다. 아직 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작은 키의 소녀는 늘씬하게 쭉 뻗은 크리스티나를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했다. 「라일러스! 정말이야. 내 라일러스가 맞잖아! 어째서 이제야 온 거야?」 올려다보는 소녀의 검게 물든 눈에서 먹물 같은 눈물이 주륵 볼을 타고 흘렀다. 「기다렸어. 줄곧 기다렸어. 라일러스. 너를 만나기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수도관 동파, 욕조에서 찬물이 나오지 않고 뜨거운 물만 나오기도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는 강추위입니다. ㅠ.ㅠ;;; 덜덜덜... 독자님들 모두 건강 잘 챙기시고, 힘세고 강한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0110 / 0240 ---------------------------------------------- 13장. 환향 ‘라일러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크리스티나는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소녀를 향해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하늘색 머리카락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소녀는 울먹이며 애원하듯 말했다. 「나, 매일매일 기다렸는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네가 찾아오지 않아서.」 “뭔가 착각하고 있군. 내 이름은 라일러스가 아니다.” 「응?」 크리스티나의 단호한 부정에 소녀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 그 얼굴. 틀림없이 라일러스잖아?」 소녀가 크리스티나를 라일러스라 확신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머리색이었다. 투톤의 바닷빛 머리카락이라는 특징이 제일 결정적이었고 심지어 얼굴 생김새마저 흡사했다. 「설마……. 날 잊은 거야?」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본 적이 없으니 잊을 리도 없질 않나. 다시 묻겠다. 그대가 바다에서 사람들을 해쳤나? 제대로 정체를 밝혀라.” 「…….」 소녀는 뚫어져라 크리스티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답답해진 크리스티나가 재차 물었다. “이름은?” 그러자 소녀가 살짝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볼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난 이름이 없어. 라일러스가 지어주기로 약속했잖아.」 검게 물든 눈이 애정을 담고 휘어졌다. 「약속, 기억하고 있지?」 그러나 크리스티나는 이미 활을 손에 쥐고 있었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력화살이 생성되며 소녀의 심장을 겨누었다. “내 이름은 라일러스가 아닌 크리스티나 R.델피아다. 마지막으로 묻지. 사람들을 해친 게 너인가?” 「라일러스가…… 아니야?」 멍하니 크리스티나를 바라보던 소녀가 뒤로 훌쩍 물러섰다. 그리곤 묘기를 부리듯 배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라섰다. 혼란과 슬픔, 분노 등으로 표정이 일그러진 소녀의 주변으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거짓말! 꼭 다시 찾아와준다고 해놓고서!」 우르르릉! 맑은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크리스티나가 뒤를 돌아보자 요동치던 물결 너머로 거대한 파도가 꿀렁꿀렁 형성되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태산처럼 어마어마한 높이로 일어난 파도 탓에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해일이었다. ‘이런 방식이었나.’ 잠잠하던 바다를 조종해 삽시간에 거대한 해일을 일으키는 힘을 본 크리스티나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대로 해일이 배를 덮치면 쓰러진 사람은 물론이고 전원 물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 노랫소리에 홀려 수면상태에 빠진 군사들은 그대로 익사할 수밖에 없다. 크리스티나는 지금껏 바다로 떠났다가 유령선으로 돌아온 배들의 연유를 알아차렸다. 하지만 당황하여 허둥거리는 대신 도로 홱 돌아서서 화난 표정의 소녀를 쳐다보았다. 「거짓말쟁이들. 인간 따위 전부 죽어버려!」 검게 물든 눈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소녀가 원하는 대로 거대한 파도가 함선들을 막 덮치려던 순간이었다. 「……?!」 파스슥 과자 부스러지듯 파도가 전부 공중분해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유리 조각처럼 반짝이는 물방울 사이로 희미한 무지개마저 엿보였다. “믿음을 배신당했다는 생각은 이 겨울바람보다 차갑지.” 크리스티나가 차분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놀라 눈을 크게 뜬 소녀를 향해 손을 들어올렸다. 후웅- 녹색바람이 몰려들어 소녀의 팔다리를 구속했다. 옴짝달싹 못하게 된 소녀가 뒤늦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강대한 기운을 느끼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당신은…….」 “나도 그리 느꼈던 적이 있었다. 추워서 몸이 떨리지만 가슴만은 뜨겁게 타는 기분이더구나.” 소녀는 형형히 독기를 품은 눈으로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뭘 알아! 그들에게 이름을 주고, 신뢰를 주고받은 당신은.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그 모든 걸 다 가진 당신이 그 심정을 어떻게 안다는 거야!」 자연계 4속성 정령왕과 한 번에 계약한 인간에 대한 소문은 정령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 본래 정령이었던 소녀도 역시 ‘이그레트’란 이름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소녀는 천천히 그의 곁을 가호하는 유니와 토니, 루니, 카니를 훑어보았다. 평안한 표정의 그들을 보며 소녀는 더욱 비참함을 느꼈다. 「나에겐 없어. 약속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아.」 ‘네게 최고로 멋진 이름을 줄게. 조금만 기다려!’ 소녀의 기억 속에서 바닷빛 머리카락이 아른아른 흩날렸다. 본래 영혼의 색으로 알아보아야 했지만 타락할 대로 타락해 버린 검은 눈으로는 영적인 시야가 일그러져 구별이 어려웠다. 그래서 소녀는 같은 머리색을 지닌 크리스티나를 보고 라일러스로 착각했다. 타락한 정령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나를 버린 널 증오해.」 “우습군. 왜 그 라일러스란 자에게 그리도 집착하는 거지. 이름을 받지 못했다면 계약을 맺은 것도 아닐 텐데?” 크리스티나는 서늘한 얼굴로 정곡을 찔렀다. 소녀는 분노에 잠식된 눈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꼭 계약을 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뭐?” 「계약을 하지 않더라도 그냥 네가 좋았어. 내 노래를 들어주고 나를 만나러 와주는 라일러스 네가.」 바람의 속박에 팔다리를 묶인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말했다. 왕의 힘이 그녀를 속박하는 이상 벗어나거나 반항할 방법은 없었다. 「나도 몰라. 언젠가부터 소중해졌어. 그래서 매일매일 기다렸어. 나는 파도의 정령이고 이 바다에 가계약상태로 머물고 있었으니 여길 벗어날 수 없었어. 그래서 라일러스와 계약을 하기로 한 거야. 인간과 계약하면 바다에서 벗어나 늘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너는 나만을 위한 이름을 구해오겠다고 약속했어. 그래서 또 기다렸어.」 인간을 사랑한 정령은 기다리는 시간마저 사랑했다. 「태양이 뜨고 지는 걸 수천, 수만 번……. 얼마나 더 기다려야 네가 올까. 슬퍼져서, 오지 않는 네가 너무 미워서 노래했어.」 너무도 긴 기다림에 지친 정령은 슬픔과 분노를 축적하면서 점차 검게 타락해 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령이 되어 주변을 지나는 배를 모조리 홀리기 시작했다. 라일러스를 부르는 파도의 노래는 남성들에게만 효력이 있었고, 일반적으로 뱃일을 하는 선원은 대부분 남자였다. 근처 해역을 지나는 배는 꼼짝없이 이 협곡으로 끌려 들어와 배에 타고 있던 전원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사람을 모두 살해한 사령은 텅 빈 배만 항구로 돌려보냈다. 그 배가 다음번엔 라일러스를 데려올 수 있도록. “오랜 시간 고통스러웠겠구나.” 「…….」 “하나 아이야. 그 ‘라일러스’란 이가 너를 배신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느냐.” 「그가 약속을 어겼으니까!」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약속을 어겼으나 만일 지키려고 온 힘을 다해 노력했다면, 그래도 배신이라 여기느냐?” 「……?」 “인간은 정령과 달라서 마음먹은 대로 하지 못하는 일이 많단다.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하지.” “아.” 쥬다스의 말에 무엇인가 떠올린 크리스티나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크리스티나는 사령이 되어버린 소녀를 향해 읊조렸다. “라일러스 델피아. 델피아 계보에 적혀 있던 이름 중 하나로군. 그분은 나의 조상이시다.” 「조상이라고?」 “14세의 어린 나이로 요절하셨다고 들었다. 계보상으로 이미 백 년도 훌쩍 넘은 이야기인지라 바로 떠올리지 못했군.” 비운의 공자, 라일러스. 가문에서 촉망받던 인재였으나 가파른 바위를 오르다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인해 뛰어난 지성과 훌륭한 인품을 뽐내보지도 못하고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했다. 뛰어난 마력과 더불어 남들보다 강한 신체를 타고 나는 델피아 가문의 특성상 그렇게 일찍 허무하게 죽어버린 후계는 처음이었기에 아직도 종종 회자되고 있었다. 「요절……? 죽었다고? 라일러스가?」 “인간은 백 년 넘게 살기도 어려울뿐더러, 그분은 열 넷에 돌아가셨다.” 「그럴 리가…….」 파도의 정령이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을 때가 바로 그의 나이 14살이었다. 가장 멋진 이름을 지어주겠다며 떠났던 그가 그길로 비명횡사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소녀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이기 시작했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올 수 없었을 뿐이었다. 빨리 이름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 안전한 길을 놔두고 급하게 험한 바윗길을 오른 게 화근이었다. 미끈거리는 바위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진 소년은 며칠 시름시름 앓다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바다 너머에서 그를 기다리던 정령에겐 닿지 않을 소식이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날 이미 죽었다고? 라일러스가?」 차라리 배신당했다고 느꼈을 때가 나았다. 타락한 파도의 정령은 주체할 수 없는 설움과 경악에 휩싸여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화도 화낼 대상이 있을 때에나 낼 수 있는 것이다. 아예 그 대상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엔 갈 곳 잃은 분노와 상실감이 폭풍우처럼 덮쳐왔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왜 자꾸 나한테 거짓말만 하는 거야. 라일러스…….」 소녀는 어린애처럼 검은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이게 뭐야. 전부 의미 없잖아. 너를 기다린 시간도, 내가 불러온 노래도. 아무 소용없잖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고 기다려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령은 허무함에 몸서리쳤다. 검은 기운이 한층 짙어졌다. “룬.” 그때 크리스티나가 한 단어를 툭 내뱉었다. 소녀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자 크리스티나는 무심한 어조로 다시 말했다. “조상께서 눈을 감기 전 남기신 말이라고 들었다. ‘달’을 의미하는 단어로 어두운 새벽 자신의 달이 되어준 이에게 전해주고자 했다고.” 깃털이 조각된 새하얀 활이 소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하얀색 몸체 위로 선명하게 새겨져있는 글자가 보였다. “이 페어리 보우에 기록되어 있군.” 깔끔하게 말문을 맺은 크리스티나와 그녀가 내민 활을 번갈아 쳐다보던 소녀의 몸에서 점차 검은 기운이 옅어졌다. 「‘룬’…….」 잊힌 게 아니었다. 라일러스는 정령을 생각하며 소중히 이름을 지었다. 그리고 그걸 알려주기 위해 급히 달려가다 바위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백 년도 넘은 세월이 지나 자신의 이름을 전달받은 사령은 눈물 섞인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라일러스.」 포옹- 소녀의 몸에서 투명한 물거품이 솟아올랐다. 곧 사령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물거품으로 변해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봐……!” “크리스티나.” 당황하여 달려가려던 크리스티나의 손을 쥬다스가 부드럽게 잡아 세웠다. “저 아이 스스로 소멸을 택한 것이다.” “전하.” “더 이상 분노할 이유도 증오할 대상도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쥬다스는 쓸쓸히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있는 사령, ‘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아주겠느냐. 모든 눈물이 무의미하고 절망스러운 건 아니란다.” 「…….」 “눈물도 햇살에 닿으면 빛나는 것임을.” 그의 말을 들은 룬은 작게 입을 달싹여 노래하기 시작했다. 「달도 별도 잠든 까만 새벽에 너만은 깨어있었지. 약속해, 너는 나의 바다가 되고 나는 너의 파도가 되기를.」 본래 파도의 정령이었던 소녀는 부서지는 파도처럼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은은한 노랫소리만이 마지막으로 협곡을 감돌았다. 「혹시 바다를 찾아 헤매는 파도를 본다면 말해주겠니.」 너의 바다는 언제나 네 곁에 있다고.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룬의 모티브는 인어공주입니다....만 저는 어릴 적에 인어공주이야기를 정말 마음에 안들어 했습니다. 인어공주에겐 슬픈 짝사랑으로 새드엔딩, 왕자에겐 이웃나라공주님과 해피엔딩. ...(부들부들) 아마 제가 새드엔딩을 싫어하게 된 계기가 유치원시절 읽었던 인어공주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봅니다....(...)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 0111 / 0240 ---------------------------------------------- 14장. 맹세 델피아의 공녀 크리스티나가 이끌고 간 함선은 나흘 만에 맡은 임무를 완수하고 전원 무사히 항구로 귀환했다. 안심하고 바다로 나갈 수 있게 된 사람들은 환호성으로 그들의 귀환을 반겼다. 여동생을 출전시킨 후 한숨도 자지 못했던 알시오스는 바쁜 부모를 대신하여 소소한 축하연을 열었다. 그리고 그 축하연엔 알시오스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들이 참석했다. “아, 순례의 길을 다니고 계신 중이었군요.” 갑주를 두른 제복을 벗고 화려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크리스티나는 사령관이 아닌 귀족 영애로서 자리에 임했다. 파도의 정령을 만난 협곡에서부터 이틀간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오면서 크리스티나와 쥬다스 일행은 함께 대략적으로 각자의 정황에 대해 들었다. 그리고 항구에 도착하자 크리스티나는 그들을 델피아 공작성에 초대했고 한 식탁에 둘러앉아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순례의 길이라 함은 제국의 많은 영지를 비롯하여 머나먼 종속국까지 방문하셔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험준한 여정을 잠행이라니요? 이번처럼 위험천만한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시니, 그러다 자칫 해라도 입으실까 염려됩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하나 내 이래 봬도 꽤 도움이 된단다. 그렇지 않누, 크리스티나야?” “…….” 황망해진 크리스티나는 곧장 대답하지 못하고 입안으로 말을 골랐다. “전하…… 께선.” “으응?” 여전히 아이 대하듯 부드럽게 응수해 주는 그를 보며 크리스티나는 한숨처럼 말했다. “예, 전하께오서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전멸했을 것이라 감히 확신합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여자인 크리스티나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노래에 홀려 수면상태에 빠졌고 사령은 이들을 해일로 덮쳐 죽이려 했다. 만일 그 시점에서 쥬다스가 적절하게 끊어주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전부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였다. “하오나.” 크리스티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흘끗 그의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전하를 말리지 못한 그대들에겐 실망이군.” “……면목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노래에 홀렸던 날 이후 자신의 불찰을 뼈저리게 에단이 변명 없이 즉각 고개를 숙였다. 같은 심정이던 바이칼도 사과에 동참했다. “저희가 자만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전하.” 쥬다스는 호위들이 침울해져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시에 노랫소리를 들은 인간이 사령의 힘에 저항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너희 탓이 아니란다. 다만 세상에는 우리가 예상치 못할 만큼 신비한 힘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며, 타인의 불행을 간절히 염원하는 자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려무나.” 쥬다스는 혹시라도 그들이 방심하다 함정에 빠지거나 겉으로 드러난 그럴 듯한 가면에 속아 등 뒤에 칼을 맞을까에 대해 걱정했다. 자신들이 해야 할 걱정을 주군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에단과 바이칼, 콜은 나란히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말을 할수록 더 침울해지는 그들을 보며 쥬다스는 난처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다시 봐도 색깔 진짜 신기하다요.」 그사이 토니는 통통 튀어 크리스티나의 찻잔에 쏙 매달렸다. 처음 그녀를 봤을 때부터 바닷빛 머리카락에 호기심을 느낀 토니는 이번에도 구경에 푹 빠져 있었다. 찻잔에 매달려 빼꼼 고개만 내민 땅의 정령을 발견한 크리스티나는 차를 마시지도 못하고 토니와 어색하게 마주 보았다. 「얘가 진짜. 부담스럽게 앞에서 그러고 있으면 어떡해?」 핀잔을 던진 유니가 토니 곁으로 날아와 착지했다. 싫은 소리를 듣고도 토니는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씩씩하게 대꾸했다. 「하나도 안 부담스럽다요!」 「너 말고 저 여자애가 부담스러워한다는 뜻이야. 하여튼, 너는 명색이 땅의 정령왕이란 애가 왜 신기한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니?」 「에엥. 그치만 가만있는데? 나요! 반짝반짝하고 특이한 건 다 좋다요. 완전 예쁘다요!」 「어휴, 얘도 보면 은근 외모지상주의라니까…….」 반짝거리고 예쁜 거 최고를 외치는 토니를 앞에 두고 유니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실체화하여 돌아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금 테이블 위에서 알짱대는 바람과 땅의 정령이 가장 활발한 편이었고 만사 귀찮아하는 푸른 늑대는 그저 테이블 아래에 길게 누웠다. 마지막으로 불의 정령왕 카니는 유독 쥬다스와 떨어지는 걸 싫어하여 한순간도 그의 주변을 벗어나는 일이 없었다. 지금도 그의 무릎에 눌러앉아 옷자락을 부여잡고 아기캥거루마냥 달라붙어 있었다. 정령들이 그러는 사이에도 대화는 훈훈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하다못해 포탈이라도 이용하여 다니심이.” “필요하다면 포탈을 탈 생각이 있긴 하다만. 그래도 아직까진 필요치 않을 듯싶구나.” 알시오스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여 이것저것 제안을 해왔지만 전부 부드럽게 거절당했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지 않도록 따뜻한 태도로 거절하긴 했지만 이를 본 알시오스는 황태자가 마냥 유하기만 한 인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자신이 한 번 하고자 정한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위험하고 고난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뜻을 굽히지 않는 강한 의지가 있었다. 알시오스는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험난한 길을 고집하는 쥬다스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는 더 이상 쥬다스를 설득하는 걸 포기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알시오스는 서로 원수가 되었으리란 편견을 깨고 쥬다스가 3황자 세이지를 일행에 포함하여 함께 다닌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간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있었다던 3황자는 숫기가 없고 내내 차분한 분위기긴 했으나 선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쥬다스를 형으로 따르며 신뢰하고 있으니 따로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그들은 밤이 깊도록 기분 좋게 담소를 나누다 자리를 파했다. 델피아 공작은 바쁜 용무로 인해 출타 중이었으므로 현재 공작성의 총책임자는 후계자인 알시오스였다. 알시오스는 쥬다스 일행이 최대한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준비를 지시했다. 방에 들어가기 전 쥬다스는 호위를 위해 따라 들어오려던 에단에게 따로 휴식을 권했다. 공작성에 도착한 후로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던 에단은 잠시 망설이다 평소답지 않게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다른 친위기사를 붙여두고 자리를 떠났다. 「에궁. 저 꼬마도 어지간히 심난한갑다.」 유니가 멀어지는 검은 뒤통수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그럴 만도 하죠. 이그레트를 지켜주는 게 저들의 역할이잖아요. 떡하니 위험한 상황이 됐는데 정작 자신들이 술수에 당해서 보호를 받았으니 오죽 자괴감이 들겠어요.」 「우웅. 그땐 어쩔 수 없다아니다요? 사령의 힘은 정신적인 저주를 거는 데에 특화돼 있으니까.」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저들 스스로 용서가 안 되겠지.」 정령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방 안에 들어온 쥬다스는 모자와 겉옷을 벗고 침의로 갈아입었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제국 유일의 맑은 은발로 돌아왔다. 취침 준비를 완벽히 마친 그는 침대에 눕는 대신 창가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머무는 방은 3층이었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장소는 너른 잔디밭이었다.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아 잔디는 녹색이 아니라 누런 황갈색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버석거리는 마른 잔디를 밟고 선 인영이 있었다. “…….” 모처럼 편히 쉬라고 보내놓은 에단이었다. 밖으로 나와 한참 동안 찬바람을 맞고 서있기만 하던 에단은 자신이 차고 있는 도 형태의 검을 꺼내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나는 강해지고자 했다.’ 손잡이를 잡은 아귀에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힘이 들어갔다. ‘강해진다면, 누구보다 강한 검을 완성시킨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하지만.’ 그는 검술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기도 했지만 집중력과 지구력이 좋아 무식할 정도로 훈련에만 집중했다. 노력형 천재를 따라잡을 자는 없다는 옛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에단은 괴물 같은 성장을 보였다. 신체형 이능력자라는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이를 키우는 훈련에만 성실하게 매진한 끝에 검술에 한해서만큼은 이른 나이부터 정상급에 이르러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검으로 무엇을 지킬 수 있지?’ 철컥! 에단은 거칠게 검을 도로 갈무리했다. 정령들이 얘기한 대로 그는 지금 극심한 자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아오며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패배감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어낸 패배감에 에단은 향이 지독한 약초를 입안에 잔뜩 머금은 듯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쓴 물이 목구멍을 넘어가면서 머릿속마저 띵해졌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좀 더 강해져야 하나. 강하다면 얼마나? 일단 정신력을 먼저 길러야 하나?’ 모든 게 다 혼란스러웠다. 천재라 칭송받고 명예로운 승리를 거머쥐는 일 따위는 아무 소용없었다. 조무래기들을 상대로 강함을 뽐내보았자 정작 위험한 상황에서 손을 쓰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그는 냉철하게 자기 자신을 평가했다.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허헛, 역시 감이 무척 좋군요.” 에단의 뜬금없는 말에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뜬금없이 대꾸하였다. 바람과 불의 정령술사 콜이었다. 바람으로 기척을 감추고 있던 콜은 에단의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희끗해진 머리와 살짝 주름 잡힌 얼굴이 그가 슬슬 노년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실제 나이는 일흔이 넘었지만 정령의 도움으로 비교적 젊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침 잠이 오지 않아 달이나 구경할까 하여 나왔건만. 에단 님 정도 되는 분이 이 늙은이에게 부탁할 것이 대체 무엇이랍니까?” 여유로운 어조로 말하긴 했으나 콜도 역시 에단과 마찬가지로 자책감에 시달리다 찬바람이라도 쐬러 나온 참이었다. 에단은 다른 인사치레나 미사여구는 집어치우고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이 바라는 걸 불쑥 입 밖으로 꺼냈다.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술, 판단력은 물론 정신력까지 키울 수 있는 극한훈련 말입니다.” “허어, 박스를 사용하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부탁드립니다.” 콜은 단번에 에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리곤 곤란한 표정으로 제법 길게 자라고 있는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훈련용으로는 박스가 최고라 하지만 단점도 있지요.” 콜은 품에서 울룩불룩 각진 주머니를 하나 꺼내 들었다. 짙은 겨자 색깔의 주머니에는 여러 종류의 박스들을 미발동 상태로 넣어 놨다. “박스는 분리된 차원을 만들어내 지정된 난이도와 맵에 입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이외다. 그러니 신체적으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지만…….” 콜은 주머니에서 박스 하나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두었다. 빛이 꺼진 박스는 그저 평범한 장난감상자처럼 보였다. “정신적으로는 매우 피로를 느낄 수 있지요. 박스훈련을 겸한다면 평소 가볍게 임했던 활동에도 무척 피곤해질 수 있다는 뜻이올시다.” 그러나 에단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정도를 버틸 정신력도 없다면 기사단의 수치겠지.” “아 나 진짜 타이밍. 어후, 뭡니까? 왜 저를 보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건데요? 표정이 영 좋지 않으신데 지금.” 어둑어둑한 그늘 사이로 바이칼이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나타났다. 그들 셋은 쥬다스의 호위로서 스스로를 자책하느라 잠에 이루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달이 차오른 밤, 하나도 아니고 셋씩이나 같은 심정으로 바깥에 나왔다는 사실에 그들은 함께 피식 웃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4장. 맹세'의 시작입니다! 어느덧 14장까지 오다니 ㄷㄷ 2부 시작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주인공이 먼치킨이라 자괴감에 빠지는 주변인들...(..) 억울하면 강해져야하느니... 하지만 각자 어떤 방식의 '강함'이 필요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겠죠.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기를 바라며, 늘 보내주시는 응원말씀에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 0112 / 0240 ---------------------------------------------- 14장. 맹세 이른 새벽, 한 폭의 수채화처럼 흐릿하게 빛이 번져 오는 어둔 하늘 아래 일행은 조용히 출발 준비를 마쳤다. 델피아 공작령은 청렴하고 깔끔하게 관리하기로 유명했으며 그 명성대로 영지민들에게 신임을 얻고 있었기에 오래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민심이 믿고 따를 때에는 그만큼 관리계층이 책임과 의무를 다해 노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쥬다스는 모두가 잠들어 있는 이른 새벽 시간을 택해 조용히 성을 빠져나갔다. “흐아~ 암. 그런데 크리스티나 님과는 따로 인사를 나누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말없이 몰래 떠나버리면 엄청 서운해하실 텐데요.” 유독 피곤에 찌든 얼굴로 늘어지게 하품한 바이칼이 눈을 비비며 물었다. 새벽의 성읍은 찬 서리가 내려 공기가 안개처럼 촉촉했다. 어제 낮의 환호와 축제 분위기가 전부 거짓이었다는 양 조용한 가운데 느린 말발굽 소리만이 다각다각 부지런히 울려 퍼졌다. 쥬다스는 바이칼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 답했다. “그 아이가 그럴 것 같진 않구나.” “에이, 그러지 않긴요. 서운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 서러워하실지도.”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형님.” 이젠 제법 일행의 편안한 분위기에 익숙해진 세이지도 바이칼의 의견에 동조했다. “델피아 공녀도 형님과 동문이시라면서요. 형님을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 보였어요. 그 싸늘하던 얼굴에 미소를 지었을 땐 어찌나 놀랐던지.” “어, 세이지 님. 그거 저도 봤습니다. 꼭 조각품에 표정이 생긴 느낌이었다니까요. 그때 솔직히 좀 소름…….” “바이칼. 험담은 자제해라.” “……소름 돋게 아름다우셨다는 뜻인데요.” 에단에게 무 자르듯 말이 잘린 바이칼은 뚱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아무튼 크리스티나 님도 이제 성인이고 하니 애 취급하시면 정말 삐지실지도 모릅니다?” “흐음. 크리스티나를 애 취급하는 건 내가 아니라 바이칼 너인 듯싶은데.” “옙?” 예상치 못한 쥬다스의 반격에 바이칼이 놀란 개구리처럼 눈을 껌뻑거렸다. 바이칼에게 동조하던 세이지와 지켜보던 에단도 의아한 얼굴로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쥬다스는 넌지시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자, 보련.”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들은 성읍을 빠져나가는 성벽 문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어어……!” 평소 잘 관리하여 매끄럽게 흩날리는 재색 갈기와 풍성한 꼬리털, 다른 말들에 비해 길쭉한 다리와 늘씬한 체형을 뽐내는 우아한 백마가 푸릉 콧김을 뿜었다. 놀라 할 말을 잊은 일행을 돌아보며 쥬다스가 빙긋 미소 지었다. “마냥 제자리에서 기다리며 서러워할 아이가 아니지 않느냐.” 긴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모아 하나로 묶고 이동에 편한 여행복 차림으로 백마에 올라탄 크리스티나가 미리 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크리스티나 님?!” 일행이 가까워지자 크리스티나는 가벼이 목례하고는 말을 몰아 합류했다.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행태에 바이칼이 헛웃음을 흘렸다. “허. 명색이 델피아 공녀님이신데 이렇게 마음대로 성을 빠져나와도 되는 겁니까?” “안 될 이유라도 있나?”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니지, 이유가 있긴 하지 않습니까? 허락은 받고 나오신 거세요?” “오라버니 앞으로 서신을 남겨두었다. 곧 확인하시겠지.” 당당히 대꾸하는 크리스티나를 보며 바이칼은 할 말을 잃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침부터 뒷목 잡으실 알시오스 공자님께 심심한 위로를.’ 성문을 빠져나온 그들은 바다를 끼고 해안선을 따라 곧장 이동했다. 아직 어둑한 해안은 낮에 봤을 때와 달리 잔잔한 분위기였다. 바닷가라고는 해도 고운 모래사장이 아니라 바위가 많은 울퉁불퉁한 길이었기 때문에 일행은 속도를 조절하여 천천히 이동했다. 「어?」 겨울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흥얼거리고 있던 유니가 문득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런다요?」 「가만 있어봐.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으응? 소리라뇨?」 토니와 카니도 함께 바다를 바라보았지만 유니와 달리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쥬다스가 탄 말 옆으로 어슬렁어슬렁 함께 이동하고 있던 루니만이 귀를 쫑긋 세우며 이상을 감지했다. 「그때 그 꼬마 와이번이로군.」 「울고 있나 본데?」 히히힝! 갑작스레 말을 멈춰 세운 쥬다스로 인해 일행이 전부 우뚝 이동을 멈추었다. “형님?” “으음. 지난번에 이곳에서 풀어준 블루와이번을 기억하느냐?” “그 파란색 뱀대가리, 아니, 꼬마 와이번 말씀이십니까?” 바이칼이 제일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내놓고도 내심 신경이 쓰였던 그는 쥬다스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자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 자식.’ 마침 바닷가에서 말을 세웠으니 한 번쯤 더 볼 수 있을까 기대감을 품던 찰나였다.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바이칼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많이 다친 모양이다.” “……예? 다쳤다고요?” 허공에서 파앗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녹색 궤도를 일으키며 먼저 앞으로 포로록 날아가기 시작했다. 일행은 그 뒤를 따라 파도치는 해변 가까이로 말을 달렸다. 십여 기의 말발굽이 젖은 자갈과 웅덩이를 밟으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멀리 가지 않아 거친 자갈모래밭에 쓰러져 있는 와이번이 보였다. 몰려드는 차가운 파도를 맞으며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와이번은 긴 꼬리로 제 몸을 감싸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야이 멍청한!” 그 처량한 모습에 기가 탁 막힌 바이칼이 제일 먼저 말에서 뛰어내리며 욕지기를 집어삼켰다. 바들바들 떨던 와이번은 일행이 다가오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놀라 도망가려던 포즈를 취했으나 기세 좋게 달려간 바이칼의 외침을 듣고 바로 돌아앉았다. “좋다고 갈 땐 언제고!” “푸릉.” 어린 와이번은 콧김을 뿜으며 바이칼을 내려다보았다. 어리다곤 해도 몸집은 집채만큼 거대했다. 가까이서 본 와이번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좋지 않았다. 아름답던 푸른 비늘이 군데군데 뜯어져 나가고 날카로운 발톱에 쓸려 흉터가 잔뜩 생겨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자라난 뿔은 몇 개 부러지는 바람에 볼품없었고 날개도 물어뜯긴 자국이 선연했다. 놈은 끝내 동족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바닷가까지 쫓겨났다. 상황이 그리되자 하는 수 없이 얕은 바닷가에서 노닥거리다 사람들을 발견하고 멋모르고 다가갔다. 와이번 입장에서야 사람에게 길들여진 기억이 있어 반가운 마음에 다가간 거지만 갑자기 나타난 블루와이번에 놀란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뿐만 아니라 경비대를 불러 공격하기까지 했다. 호의적인 사람들만 보다 갑자기 공격을 받게 된 와이번은 기겁하여 달아났다. 하지만 와이번이 머물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깊은 바다로 들어가면 동족에게 공격받았고, 얕은 해안으로 올라오면 사람들에게 활과 포를 얻어맞았다. 결국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와이번은 맥없이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 누워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끼에에엥.” 바이칼이 화를 내자 와이번은 아기 울 듯 길게 소리 내었다. 그들 사이로 쥬다스가 다가와 부드럽게 와이번의 긴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미안하다. 이 바다가 너를 더 힘들게 만들었구나.” “크워엉.” 어린 와이번의 주홍빛 눈망울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와이번은 쥬다스의 따뜻한 손길에 이마를 맞대었다. 다행히 이마 사이에 솟은 뿔은 부러지지 않고 멀쩡했다. 쥬다스는 놈의 이마부터 뿔까지 쓸어 토닥거려 주며 물었다. “너는 어찌하고 싶은지 이야기해 주렴. 이곳에 남아 너만의 터전을 찾겠느냐, 아니면 우리와 함께 가겠느냐?” 영리한 블루와이번은 언어를 직접 사용하진 못하더라도 뜻을 알아들었다. 선택지를 얻은 와이번은 생기 있게 꼬리를 살랑거렸다. 어느새 떨림이 멎어 있었다. 할짝. 와이번은 뱀처럼 끝이 갈라진 혓바닥으로 곁에 서 있던 바이칼의 얼굴을 훑어 올렸다. 불시에 봉변을 당한 바이칼이 질겁하며 팔뚝으로 얼굴을 벅벅 닦아냈지만 진득한 와이번침이 한가득 머리털까지 묻어 있었다. “크흐흡. 배, 뱀 혀…….” 더러운 건 둘째 치고 파충류를 질색하는 바이칼 입장에선 악몽 같던 한순간이었다. 울상이 된 바이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준 쥬다스가 루니를 불렀다. “부탁한다, 루니.” 「네 바람대로.」 푸른 늑대는 순식간에 블루와이번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수분을 빼내었다. 잠시 안개가 몽실몽실 피어오르나 싶더니 와이번은 수분이 쫙 빠져 지난번처럼 미니사이즈로 줄어들어 버렸다. “삐이이.” 오랜만에 작아진 와이번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안정을 찾았다. 쥬다스의 품에 안겨 삑삑 울어대는 와이번을 보며 에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와이번을 데리고 가시는 겁니까?” “음? 그래. 이 아이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하마. 하지만 훈련 적임은 따로 있었지.” 모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로 향했다. 눈빛세례를 받은 바이칼이 수통으로 물을 끼얹어가며 얼굴을 닦다 말고 뭔가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진 와이번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삐익?” 바이칼은 미니사이즈 와이번의 오동통한 몸통을 반사적으로 건네받았다. 그리고 놈과 동시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 왜 또 접니까!” “삐애애액!” 똑 닮은 표정으로 목청 높여 소리친 바이칼과 와이번을 물끄러미 바라본 쥬다스가 푸근하게 웃었다. “둘이 사이가 아주 좋아 보이는구나.” ‘어딜 봐서……?!’ 더 이상 따졌다간 에단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기에 바이칼은 깊은 한숨과 함께 와이번을 내려다보았다. 똘망똘망한 주홍빛 눈을 마주본 그는 이내 쯧 혀를 차고 말에 올라 로브 속에 놈을 넣어주었다. 그 안에 쏙 들어가 그의 무릎 위로 익숙하게 자리 잡고 누운 와이번은 옷자락 사이로 고개만 내밀었다. “삐잉.” “그러다 떨어진다, 너. 날지도 못하는 게.” 바이칼의 구박에도 빤히 그를 올려다본 와이번은 주둥이를 쩍 벌려 하품했다. 그리고 도로 로브 안으로 들어가 편안하게 누웠다. 어린 와이번은 그동안 바다에서 여기저기 다치고 쫓겨 다니며 피로가 쌓인 탓에 금방 잠들었다. 흔들리는 말 위에서도 새근새근 잘도 자는 와이번을 슬쩍 들여다본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해안선을 따라 다시 죽 달리자 점심 무렵쯤 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침 식사 시간이기도 하고 크리스티나와 와이번의 합류로 인해 간단하게나마 재정비가 필요했기에 그들은 마을에 들러 차분히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델피아 공작성이 있는 중심부에 비하면 인구가 적었지만 아름다운 바다 경관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들이 제법 있어 마을은 한산하지 않고 적당히 활기를 띠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식당 테라스에 자리 잡고 앉아 해산물요리를 주문한 일행은 음식을 기다리며 데리고 다니게 된 와이번을 꺼내놓았다. 수탉 한 마리 크기만 한 푸른 비늘의 와이번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인형처럼 얌전히 앉아 있었다. 세이지가 신기한 눈으로 와이번을 살피며 물었다. “상처는 따로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친위기사단 중엔 치유술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점을 염두에 둔 질문이었지만 쥬다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 속성인 블루 와이번은 자체치유력이 무척 빠른 편이야. 잘린 뿔 같은 건 조금 늦게 돋겠지만 상처는 이미 거의 다 회복했을 게다.” 그의 설명대로 와이번은 비늘이 좀 뜯기긴 했어도 상처는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발견했을 당시 상처투성이였던 건 지속적으로 공격을 받아 회복할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식당 근처에 관광객을 노리고 호객행위를 하는 잡상인이 나타났다. “시엘 해안 기념품 있습니다! 델피아 성에선 구하지 못할 명화가가 그린 미술작품들 있습니다! 각종 목걸이, 반지 있습니다!” 대부분은 흘낏 보고 관심 없이 지나쳤지만 돌연 바이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쥬다스 님. 저 얼른 저기 좀 다녀와도 됩니까? 정말 잽싸게 다녀오겠습니다!” “다녀오거라.” 흔쾌히 수락이 떨어졌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어서 죄송합니다! ㅠㅠ 여러 일이 겹치다보니...;; 방생했던 와이번을 다시 주웠습니다. 가랏, 몬스터보ㄹ...쿨럭. 늦었지만 남은 하루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ㅎ 보내주시는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리며,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0113 / 0240 ---------------------------------------------- 14장. 맹세 바이칼은 정말 날다람쥐처럼 잽싸게 잡상인에게 들렀다가 돌아왔다. 돌아온 그의 손엔 델피아령을 상징하는 푸른 유리구슬이 달린 목걸이가 들려 있었다. “……그건 왜.” 에단이 황당함을 감추지 않고 묻자 바이칼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저놈 저거 그냥 두기 너무 허전해서 말입니다.” 바이칼은 와이번에게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그러자 확실히 떠돌이강아지 같던 모습에서 보호자가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는 맹수나 몬스터 따위를 길들여 애완용으로 키우는 사람도 많았으니 나쁠 것 없는 액세서리였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바이칼은 스태프를 꺼내 목걸이에다 마법진을 겹겹이 복잡하게 깔았다. 마법 효과를 부여하는 인챈트(Enchant)였다. 싸구려 관광기념품이 순식간에 마법 아티팩트로 바뀌었다. “나중에 크기가 커져도 몸집에 맞게 늘어날 수 있도록 ‘맞춤’ 기능을 입력해 뒀습니다. 또 웬만한 충격에는 끊어지지 않도록 ‘강화’도 같이 걸었고요. 마지막으로 혹시 잃어버려도 위치를 알 수 있는 ‘추적’도.” “인챈트는 하나만 거는 것도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어. 이렇게 쉽게 여러 개를 한꺼번에 걸다니 굉장하네!” 세이지도 어느 정도 마법을 다룰 줄 알았지만 침묵의 궁에 갇힌 후로는 이전과 같은 교육을 받지 못해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 같은 마법사로서 진심으로 감탄하는 세이지를 향해 바이칼은 민망해하며 답했다. “어, 아뇨. 영구적인 인챈트도 아니고 소모성이라 몇 번 쓰다 보면 효과가 날아갑니다. 한 번에 여러 개 입력한 건 천재라서가 아니라 제 특기가 공격 쪽보단 빠른 계산력이라서요.” “‘정확한’이란 수식어가 빠졌군.” 웬일로 에단이 칭찬에 가담했다. 그 바람에 괜히 찝찝해진 바이칼이 손사래를 쳤다. “왜들 이러십니까? 아니 뭐……. 아무튼 전 마력 최대 보유량이 적어 고급 마법은 자주 사용하기 어렵습니다.” 기껏 칭찬해 줬더니 도로 자기 입으로 깎아먹는 그를 보며 에단이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허영이나 허세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다. “목걸이가 참 잘 어울리는구나. 허면 이 아이의 이름은 생각해 보았느냐?” “이름…… 말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바이칼이 멍하니 굳어버리자 세이지가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계속 이 와이번, 저 와이번 하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허허. 정령에게만 이름이 필요한 건 아니지요. 모든 살아 있는 것이란 서로 이름을 부를 때에야 비로소 특별해지는 법이니 말입니다.” 정령술사인 콜도 동의했다. 그저 내키는 대로 뱀대가리, 이놈저놈 등으로 부르던 바이칼은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어, 그럼. 그냥 퍼렁이나 용돌이 정도로 부르면 안 될까요?” “…….” 순식간에 싸한 시선이 그에게로 쏟아졌다. 괴악한 작명센스를 뽐낸 바이칼을 야만인 보듯 흘겨 본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에게 품위까진 바라지 않아. 부디 그 유아적인 범주에서만 벗어나도록.” “유, 유아적…….” 오랜만에 듣게 된 크리스티나표 독설에 바이칼은 얌전히 찌그러졌다. 시무룩해진 그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바이칼. 저 아이를 보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느냐?” ‘떠오르는 것.’ 힐끗, 시선을 주자마자 바이칼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와이번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곤 대뜸 생각나는 단어를 뱉었다. “비요.” “비?” “겨울에 내리는 찬 비 말입니다. 마침 저놈을 만난 계절도 겨울이고요.” 왜 눈이 아니라 비가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저 녀석을 보고 있자면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미의 실수로 낯선 호수에 떨어지고 홀로 자라나 동족으로부터도 배척받게 된 블루 와이번. 놈을 보면 따뜻한 봄비나 너른 바다와는 다르게 차가운 겨울비가 떠올랐다. “호오, 겨울에 내리는 비라. 좋은 심상이다. 바이칼 네게는 상대방의 특징을 잘 잡아내는 능력이 있구나.” “옙? 제가요?” “그래, 겨울비를 뜻하는 말로 ‘플루비’라는 단어가 있단다.” 주군으로부터 뜻하지 않게 칭찬을 듣게 된 바이칼이 어색하게 뒷목을 매만졌다. 일행은 만장일치로 와이번의 이름을 ‘플루비’라 짓는 것에 동의했다. 이름을 얻게 된 와이번 역시도 기분 좋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따뜻한 분위기로 식사를 마치고 마을을 떠났다. 이제 해안을 따라 가지 않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다가 멀어지면서 짭조름한 바다 내음 대신 마른 풀 향이 났다. 한참 동안 오르막과 내리막이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타났다. 저녁이 될 무렵까지 언덕을 오르내리다 제법 높은 정상에 올랐을 때쯤 그들은 정지하여 임시캠프를 꾸렸다.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지친 말들을 쉬게 하고 어둠을 밝히기 위해 불을 지폈다. 슬슬 봄이 찾아오고 있는 계절이지만 아직 밤에는 제법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마법으로 보온을 유지하고 모닥불에 뜨끈한 스프를 데워 몸을 녹였다. “전하.” 쥬다스는 그들 사이에 끼지 않고 홀로 빠져나와 언덕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를 찾아온 크리스티나가 컵에 담은 스프를 전해주며 말을 붙였다. “바람이 찹니다.” “고맙다.” 부드럽게 웃어주는 그를 보고 나서야 크리스티나는 자신이 헛된 걱정을 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반짝이는 녹색 기류가 쥬다스를 감싸고 있었다. 자연계 정령들이 그를 가호하고 있는 한 세상의 어떤 바람도 해를 끼칠 수 없으리라. 크리스티나는 민망함을 속으로 감추기 위해 시선을 내리깔았다. “여기서도 아직 바다가 보이는구나.” 문득 그가 한 손을 들어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그 손가락 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구불구불 자라난 마른 나무와 수풀 사이로 검은 바다가 보였다. 일렁이는 물결 위에 등대불빛이 별빛처럼 깜빡였다. 델피아 성에서 공녀로 태어나 자란 크리스티나에겐 익숙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루바흐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공부했던 이들과 함께 바라보는 밤바다는 조금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다. 언제나 여유로운 분위기인 저 황태자와 있을 때면 꼭 무언가를 열심히 해야 할 필요가 없다 느껴졌다. 쓸모없는 시간은 한 순간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말없이 서서 잘 보이지도 않는 먼 바다의 파도를 지켜보는 순간조차도 값지게 느껴졌다. “……형님? 거기서 뭐 하세요?” 편안한 침묵이 감돌던 중 세이지가 그들을 찾아왔다.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따끈한 스프가 담긴 컵을 양손으로 모아 쥐고 있는 모습은 황자라기보다 영락없는 여행자였다. “아, 공녀도 함께 있었군요.” 세이지는 어쩐지 방해한 기분이 들어 다가오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밤바다를 구경하던 중이었단다. 세이지 너도 궁에 있을 땐 보지 못했던 풍경이 아니더냐. 이리 와서 같이 바람이나 쐬자꾸나.” 눈치껏 돌아가려던 세이지였지만 형이 직접 손짓하며 부르는 탓에 쭈뼛거리며 곁으로 다가섰다. 보라는 바다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고아한 분위기로 말없이 서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시선이 먼저 갔다. 그 시선을 눈치챈 크리스티나가 살짝 목례하며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앞으로는 크리스티나라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크리스티나. 저도 그냥 세이지로 충분합니다.” “예, 세이지 님.” 이름을 부르는 순간까지 정이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어조였다. 세이지는 새삼스럽게 저런 냉랭한 성격의 여성과 친밀한 학연을 맺은 쥬다스가 대단해 보였다. ‘나 혼자라면 말 걸기도 어려웠을 거야.’ 황자라는 신분과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어머니를 잃고 유폐되면서 세이지는 그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은 그저 꿀을 바르고 벌과 나비를 유혹하여 그럴듯하게 포장한 허황된 길이었음을. ‘진심으로 나를 따르고자 한 이는 아무도 없었어.’ 그 많던 3황자 추종세력이 그야말로 연기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모래로 쌓은 성이나 다름없었다. 1황자를 따르는 파도가 밀려오자 부질없이 무너져 가라앉아 버리는 거짓된 복종이었다. 어미가 발라놓은 꿀이 마르자 더 이상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꽃길을 걸어온 세이지는 그 속에서 사람의 진심을 얻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신기하지 않느냐?” “……네?” 우울하게 발끝을 내려다보던 세이지의 고개가 퍼뜩 올라갔다. 쥬다스는 여전히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이지는 그 시선을 따라 함께 멀리 아른거리는 검은 바다를 응시했다. “저리 늘 한결같아 보이는 파도가 가까이서 보면 매번 높이와 밀려오는 길이가 달라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꺼낸 쥬다스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같은 건 그들이 전부 파도라는 점뿐이지.” “……전부 파도라는 점뿐.” 세이지는 멍하니 그가 한 말을 따라 읊조렸다. 무슨 말인지 다 이해한 건 아니었지만 어쩐지 위로받는 느낌이었다. 쥬다스는 동생의 머리를 토닥여 주곤 말을 이었다. “나는 말이다. 사람의 속을 아는 게 제일 어렵더구나. 처음엔 모르니까 피했다. 아예 도망쳐 버린다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지.” “아…….” 세이지와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그가 ‘백로황자’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렸다. 쥬다스가 뜻한 바는 전생의 경험이었지만 묘하게 들어맞는 상황인지라 두 사람은 알아서 이를 곡해했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겁에 질려 등 돌리고 도망가는 모습도 누군가에겐 배신이고 상처였던 게야.” “형님이 겁에 질릴 때도 있으셨어요?” “그럼.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란다.” 쥬다스는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해주는 할아버지처럼 허허로이 웃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지. 사람이 사람을 알게 되는 데에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니 말이다. 서로 이야기를 해서 잘 풀린다면 상처받을 일도 싸울 일도 없지 않겠느냐.” “그렇겠네요. 표현하지 않으면 서로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세이지는 이어지는 쥬다스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네?” “피해도 상처받고, 표현해도 풀리지 않을 때. 아무리 잘해보려 노력해도 결국 상처만 남는 관계. 그건 말이다.” 쥬다스는 두 아이들의 진지한 얼굴에 대고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냥 서로 맞지 않는 거야.” “……?” “네에?” 전혀 엉뚱한 결론이었다. 무엇이든 해결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형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에 세이지는 벙쪄서 입을 작게 벌렸다. 반면 잠깐 놀란 눈을 했던 크리스티나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미소 지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지. 각기 취향과 사상이 다르니 어찌 한 사람이 모두를 만족시키겠느냐. 그러니 부딪칠 만큼 부딪쳐 본 후, 그래도 영 나와 맞지 않는다면.” 쥬다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따뜻함을 담은 녹색 온풍이 주변을 휘감았다. 사락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그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상처를 주는 걸 두려워하지 말 거라.” ‘프리드.’ 그건 이번 순례의 길에서 꼭 제 손으로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쥬다스는 그에 관련해서까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엘 해안 근방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어 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ㅎ 벌써 새해의 1월이 지나가버리고 2월이 찾아왔네요. 시간이 정말 빠릅니다...OTL 독자님들 모두 행복한 2월 시작하실 수 있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ㅎ 0114 / 0240 ---------------------------------------------- 14장. 맹세 해안에서 벗어나 구릉을 타고 이동하는 사이 본격적으로 봄이 찾아왔다. 갈색과 회색뿐이던 시야에 푸르른 녹음이 지고, 마른 대지에 여린 새싹이 돋고 송이송이 터뜨릴 준비를 하는 꽃망울이 가지마다 맺혔다. 따뜻한 봄바람을 따라 말을 달리던 일행은 드디어 거대한 포탈관리소에 도착했다. 이후부터는 워낙 산맥이 높고 험준하여 안전관리차원에서 일반인들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었다. 대신 포탈을 설치하여 근방 도시에 바로 입장할 수 있도록 연결해 놓았다. 초장거리까지 지원이 가능한 다른 포탈과 다르게 근거리 이동만 가능한 시설이었기에 평민들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비용이 저렴했다. 그래서 일행이 포탈에 도착했을 때에는 북적이는 사람들을 따라 줄을 서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군말 없이 대기 줄에 합류했다. “‘엘리아 비행장’이나 ‘베르젯 지하동굴’. 둘 중의 하나로 이어지는 포탈입니다.” 에단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도와 포탈 대기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가이드맵을 함께 펼쳐 보였다. 그들이 타려는 포탈은 단거리 전용 포탈인지라 행선지가 딱 에단이 말한 두 군데뿐이었다. “저, 비행장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어요! 엘리아가 페가수스를 길들일 수 있는 유일한 부족이라고 해서 관심이 많았거든요.” 늘 차분하게 굴던 세이지가 모처럼 고조된 기색으로 엘리아 비행장에 흥미를 보였다. 엘리아는 그만큼 유명한 도시였다. 하늘도시 엘리아. 신의 축복을 받아 구름보다 높은 위치에서도 흔들림 없이 떠 있는 거대한 섬이다. 그리고 이 엘리아에서만 서식하는 날개 달린 천마 ‘페가수스’는 개체수가 적고 성질이 까다로워 사람이 길들이기 어려운 종이었다. 그들은 교황청 엘리시움에 있는 성녀의 수호견 헤브니시우스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오랜 세월 같은 서식지에서 공존하며 살아온 엘리아 사람들과는 어느 정도 교류하며 그 냄새를 기억하여 따르긴 했지만 모든 이를 다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중 페가수스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그 등에 오를 수 있었다. 높은 고도를 좋아하며 태어난 고향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 페가수스의 습성상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또한 엘리아 사람들도 귀한 페가수스를 함부로 다른 곳에 분양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페가수스란 하늘도시 엘리아에서만 볼 수 있는 명물이자 신비로운 환수였다. “오? 마침 엘리아 쪽으로 죽 직진하면 투르케 사막에도 들를 수 있겠는데요.” 지도를 빤히 들여다보던 바이칼이 손가락으로 엘리아와 투르케를 이어보이며 말했다. 쥬다스가 루바흐를 졸업할 시기에 정령을 안정적으로 다룰 수 있게 된 아벨도 연구소에서 나와 투르케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투르케의 이름을 걸고 멸망한 대지를 처음부터 다시 일으켜 세우기 시작했다. 그때로부터 벌써 3년이 지났으니 황량하던 사막이 어찌 변했을지 모두가 궁금히 여겼다. 차마 떼는 부리지 못하고 엘리아가 표시된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세이지와 은근히 동조하는 나머지 일행을 번갈아본 쥬다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엘리아로 가자꾸나.” “예, 형님.” 차분한 척 대답하긴 했지만 세이지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구름보다 높이 떠 있는 섬이라 하는데 무섭진 않고?” “아…….” “어억.” 탄성과 탄식이 엇갈렸다. “사실 그 점을 제일 기대하던 참이에요. 어릴 때 제일 많이 읽었던 동화책이 페가수스 전설이었거든요. 그래서 뭔가 책 속 세상에 가는 느낌이라. 게다가 구름 위라고 하니 꼭 천국 같기도 하고요.” 세이지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점점 줄어드는 대기 줄을 바라보았다. 이제 포탈이 코앞이었다. 반면 바이칼은 다른 의미로 두근대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천국이라뇨? 전 가급적이면 오래오래 이 땅에서 살아 있고 싶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요. 뭐 바닥이 투명한 유리로 깔려 있고 이런 것만 아니라면 버틸 만은 하겠지만.” “의지로 극복해라.” “……왜 거 아예 무좀도 의지로 극복하라고 하시죠?” 에단의 칼 같은 조언에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구시렁거렸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포탈에 입장했다. “신분이 확인되었습니다. ‘엘리아 비행장’, ‘베르젯 지하동굴’ 중 목적지를 선택해 주십시오.” “엘리아 비행장으로 가겠습니다.” “목적지를 엘리아 비행장으로 설정합니다. 엘리아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관리인의 사무적인 안내와 함께 포탈이 열렸다. 단거리 이동이라고 해도 포탈의 작동 원리는 같았다. 천둥 치듯 번쩍이는 마력의 물결 속으로 발을 딛자 곧장 반대편 포탈의 좌표로 이동되었다. 고오오오- 도착하자마자 거센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휘날렸다. 마치 거대한 고래가 낮게 우는 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이 도착한 포탈관리실은 다른 지역처럼 실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엘리아에서 제일 높은 바위꼭대기에 위치했다. 그 덕분에 도착하자마자 한눈에 엘리아의 경관을 내다볼 수 있었다. “허.” 한숨처럼 경탄이 흘러나왔다. 호화로운 황궁이나 잘 꾸며놓은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웅장함이 이곳에 있었다. 우선 깎아 지르는 절벽 사이사이에 새둥지처럼 집을 지어놓았다. 또한 하늘 위에 떠 있는 섬이지만 근처에 부유하고 있는 자잘한 폭포가 모여 만들어진 거대한 강물이 섬 테두리를 돌고 있었다. 포탈관리실이 위치한 장소는 하늘도시의 중앙탑이었는데 페가수스를 관리하는 역할과 더불어 비행허가증 발급 및 분쟁조정 등 관리를 맡았다. 뿐만 아니라 탑에도 층마다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어 많은 사람이 거주하기도 했다. ‘이곳이 신의 축복을 받은 하늘도시 엘리아.’ 감탄하기로는 쥬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그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던 중 이렇게 관광지로 유명한 장소는 일부러라도 걸음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그에게 두려움만 안겨줄 뿐이었다. 당시 그에겐 사람을 품을 용기와 여유가 없었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힘에 대한 불안이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처럼 많은 일행과 함께 편안히 유명 관광지를 방문한다는 건 당시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호사였다. 새삼 자신의 변화를 실감하게 된 쥬다스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쥬다스 님?” “……아.” 다른 일행이 경관에 감탄하는 사이 엘리아를 찾은 다른 관광객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에게 크리스티나가 말을 걸어왔다. “혹 무슨 일이라도.” 그녀뿐 아니라 에단과 바이칼, 세이지, 그리고 콜과 나머지 친위대까지 전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 어린 따스한 시선을 느낀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란다. 그저 너희와 함께 이런 멋진 장소에 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던 참이야. 정말 기쁘구나.” “…….” 이번에 말문이 막힌 건 크리스티나 쪽이었다. 그들의 주군은 늘상 어른스럽게 굴다가도 가끔 순진한 아이마냥 지나칠 정도로 꾸밈없이 표현할 때가 있다. “고맙다.” 바로 지금처럼. 웃음기를 담고 맑게 빛나는 금안을 정면에서 마주한 크리스티나는 고개를 숙임으로 겨우 허물어지려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포탈관리실 앞은 마침 비행장이었다. 마치 바다의 항구처럼 길게 뻗은 활주로가 탑을 중심으로 꽃잎처럼 뻗어 있었다. 총 8개의 게이트로 이루어진 활주로는 푸드득거리는 날갯짓소리로 가득했다. 주변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페가수스를 보며 문득 바이칼이 안아 들고 있던 블루와이번 플루비를 내려다보았다. “뱀대갈…… 아니, 플루비. 저기 봐봐. 말도 날개 달면 날아다닌다. 넌 인마 명색이 용족이란 놈이 왜 날지를 못하냐.” “삐이이?” 플루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릴 때부터 부모와 떨어져 비행을 배우지 못한 와이번은 자신이 날 수 있단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바이칼은 답답함에 혀를 쯧 하고 찼다. “으이그, 아주 날개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삐익! 삐이익!” “어쭈? 이거 눈깔 보소. 너 지금 반항하냐?” “삐이―!” 비꼬는 말을 알아들은 플루비가 거칠게 날개를 파닥이며 불만을 토로했다. 에단은 잠깐 사이 또 투닥거리는 둘을 보곤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들었다. “……차라리 잘됐군. 온 김에 여기서 비행 훈련이나 시켜봐라.” “예엣?” 그의 한숨 섞인 제안에 버둥거리던 플루비의 목덜미를 잡아 빨랫감처럼 대롱대롱 들고 있던 바이칼이 당황한 눈으로 돌아보았다. “훈련이요? 이 겁쟁이를 데리고 무슨. 아마 훈련하라고 갖다놓으면 허공에 뜨기는커녕 고대로 추락사할 겁니다.” “삐애애앵!” 저 욕하는 말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빼액 울어대는 플루비였다. 그 순간 바이칼이 잡고 있던 놈의 뒷덜미를 허공에서 휙 놓아버렸다. “……!” 플루비는 날개를 파닥거릴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땅으로 추락했다. 툭 떨어져 버린 플루비를 가리킨 바이칼이 에단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거 보십쇼. 겁만 무지하게 많다니까요. 이런 녀석을 데리고 훈련을 하라고요?” “바이칼.” 그러나 대답은 엉뚱한 데서 돌아왔다. 찔끔한 바이칼이 고개를 돌리자 플루비를 향해 쭈그린 쥬다스가 보였다. 플루비는 바닥에 나동그라지기 직전 녹색 바람에 휘감겨 동실 허공에 멈춘 상태였다. 커다란 주홍빛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플루비를 아이처럼 안아 든 쥬다스가 등을 토닥여 주며 일어섰다. “겁이 많다는 건 ‘할 수 없다’의 지표가 될 수 없단다.” “그건.” “너는 지금 이 아이가 날아본 적 없다 하여 앞으로도 날 수 없을 거라고 낙인을 찍은 셈이야. 그 판단을 왜 네가 하느냐.” “……죄송합니다.” “사과는 이 아이한테 하려무나.” 쥬다스는 안고 있던 플루비를 다시 바이칼에게 넘겨주었다. 녀석은 두 날개를 추욱 늘어뜨린 채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그 바람에 바이칼은 명령이고 뭐고 정말로 미안해지고 말았다. “플루비.” “…….”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정말 미안.” 바이칼의 사과에도 플루비는 기운 없이 눈물만 글썽거렸다. 그러자 바이칼도 덩달아 시무룩해져 속으로 자책했다. ‘어우 씨. 그러게 왜 애를 울리냐 울리길.’ 답답함에 스스로 머리를 헝클어 엎은 바이칼은 플루비를 바로 눈앞까지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쳤다. “좋아. 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는 거지?” “삐이?” 그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모르면서 축 늘어져 있던 긴 꼬리가 한차례 살랑였다. 쥬다스는 어차피 여러 영토를 돌아다니며 그 생활을 이해하고 감찰하는 게 목표였던지라 흔쾌히 그들의 비행 훈련을 수락했다. 중앙탑에는 넓은 실내 정원도 있었다. 정원을 거닐며 바이칼은 즉각 첫 번째 훈련에 돌입했다. 크리스티나가 귀찮음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셈이지?” “흠. 혼자 자라서 나는 법을 모른다고 했잖습니까. 일단 다른 날짐승들은 어떻게 나는지 보고 배우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관광객이 뿌리는 먹이에 퍼덕거리며 달려드는 비둘기 떼가 보였다. 바이칼은 그사이에 플루비를 풀어주었다. “삐…….” “구구구구!” “구국 구구구구!” 통통하게 살찐 비둘기 떼는 날지는 않고 신명나게 뛰어다녔다. 플루비는 먹을 것을 찾아 열심히 바닥을 콕콕 쪼고 다니는 비둘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따라서 바닥에 주둥이를 대고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거지냐―! 그딴 걸 배우라고 풀어둔 게 아니야!’ 한 번 플루비를 울린 전적이 있는 바이칼은 머리를 싸매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과연 바이칼은 플루비를 비행포켓몬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사족이지만 포켓몬게임할 때 날지 못하는 리자몽 때문에 고통받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날개가 있는데 왜 날지를 못하니!ㅠㅠ)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ㅎ 0115 / 0240 ---------------------------------------------- 14장. 맹세 바이칼은 당장 비둘기 떼 사이에서 플루비를 달랑 집어 짐짝처럼 옆구리에 끼고 돌아왔다.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군.”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에단의 말에 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냥 페가수스 훈련소를 찾아가 봐야겠습니다. 아무래도 그쪽은 전문가니까 뭔가 도움 될 만한 정보를 알고 있겠죠.” “처음부터 그렇게 하지 그랬나.” “번거롭게 시간만 낭비했군.” ‘이 양반들이 진짜 아까부터…….’ 바이칼은 한 쌍으로 잔소리를 해대는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보며 조용히 인내를 키웠다. “그럼 다녀오거라. 우린 탑에서 나가 근방을 둘러보고 있으마.” “옙, 다녀오겠습니다.” 어린 페가수스와 그들이 선택한 파일럿을 함께 교육하는 훈련소는 탑 중간층에 위치해 있었다. 탑에는 별도의 계단이 없고 층간이동마법진이 존재했다. 마법진에 올라간 뒤 자판에서 원하는 층수를 선택하면 포탈의 원리를 응용하여 간단히 이동할 수 있는 장치였다. 층별 안내판을 통해 훈련소 위치를 확인한 바이칼은 홀로 마법진을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훈련소는 마치 놀이방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밖에서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고 안에서는 바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일방경으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관광객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은 이 일방경 바깥쪽뿐이다. 어린 페가수스 망아지들은 고삐와 안장을 찬 채로 자유롭게 뛰어다녔고 훈련생들은 그런 망아지를 쫓아 올라타는 연습을 하거나 그 위에서 균형을 잡고, 또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트는 등 호흡을 맞추려 노력했다. “이곳은 페가수스 훈련소입니다! 아직 어린 페가수스가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안전사고방지를 위해 관계자 외 출입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관광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바깥에서 구경해 주세요.” 여성 안내원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워낙 관광 인파가 많은 장소다 보니 불미스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설마다 안내원과 경비요원이 붙어 있었다. “훈련에 대해 질문드릴 게 있습니다!” “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안내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씩씩하게 질문을 요청한 바이칼에게로 다가왔다. 훈련소 내부에 돌아다니는 어린 페가수스들은 평범한 망아지보다 몸체가 훨씬 크고 길며 때 묻지 않은 새하얀 털에선 윤기가 번들거렸다. 옆구리에 달린 날개는 몸을 가릴 정도로 컸으며 새의 깃털처럼 폭신한 깃이 자라 있었다. “혹시 페가수스가 아닌 녀석도 비행 훈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네에?” 바이칼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안내원을 향해 품에 안고 있던 플루비를 들어 보였다. “삐이익.” 주홍빛 눈을 깜빡이는 자그마한 블루 와이번을 마주한 안내원의 얼굴에 당황이 번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용……! 이 맞나요? 근데 왜 이렇게 작은…… 어, 키메라?” “블루 와이번입니다. 근데 이놈이 나는 법을 몰라서요.” “와, 와이번이요? 나는 법을 모른다구요?” 하늘도시 엘리아의 베테랑 안내원조차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의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당황하여 말을 버벅거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우리 훈련소는 오로지 페가수스를 대상으로만 훈련에 임하고 있습니다. 다른 종족의 비행법과 습성에 대해서는 무지하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네요. 죄송합니다.” 너무 단칼에 거절해 버린 탓에 더 부탁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바이칼은 훈련소에서도 아무런 결실도 얻지 못하고 허무하게 플루비를 데리고 탑에서 나와야 했다. “하아아, 생각보다 쉽지 않네, 이거.” 그는 긴 한숨과 함께 볼을 긁적였다. 옆구리에 끼워든 플루비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놈과 눈이 마주친 바이칼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주군께 돌아가 봤자 드릴 말씀도 없고. 플루비, 일단 너 몸 크기부터 원래대로 키워서 뭐라도 시도해 보자. 이 섬 테두리를 따라 죽 강이 흘렀지? 아마.” 하늘도시 엘리아에선 페가수스가 날아다니는 풍경이 일상이었다. 심지어 그중엔 택시라고 하여 비용을 받고 원하는 목적지까지 태워다주는 페가수스도 있었다. 보통 페가수스는 주인 외에는 태우려하지 않지만 특별히 택시용으로 훈련받은 녀석들은 주인 외 1인을 추가로 태우고 다녔다. ‘제길, 걸어서 가려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비행장 중앙탑에 말들을 맡기고 나왔기 때문에 이동수단이 딱히 없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바이칼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눈을 딱 감고 택시를 잡아탔다. 그가 푸릉거리는 페가수스의 손님용 안장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고 떨리는 목소리로 부탁하던 순간이었다. “저기, 좀 낮게 비행해 주시면 안 될…… 히이이익!” 푸드득! 파일럿과 바이칼을 태운 새하얀 페가수스는 눈 깜짝할 새 허공으로 치솟았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바이칼은 하얗게 질린 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안장에 달린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밑을 보지 말자. 밑을 보지 말자. 밑…….’ “삐이!” 앞에서 페가수스를 조종하는 파일럿의 뒤통수를 보며 정신통일을 하고 있던 바이칼의 귓가로 겁에 질린 플루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품안에 넣어둔 플루비에게 시선을 내리자 놈은 바들바들 떨며 울먹거렸다. “쁘에에.” “너 인마, 와이번 주제에 고소공포증이란 건 아니겠지 설마.”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지는 법이다. 플루비는 석상처럼 굳어서 발발 떨었다. 그리고 졸지에 공포에 떠는 와이번을 달래주게 된 바이칼은 발밑에서 휙휙 스쳐 가는 지상을 내려다보고 강에 도착할 때까지 현기증에 시달려야 했다. 그를 강가에 안전하게 내려준 페가수스 택시는 다시 푸득 날아 깃털을 흩뿌리며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흐, 진짜 꼬맹이 너 때문에 이게 무슨 생고생이냐.” 바이칼은 플루비를 물에 퐁당 넣어주며 투덜거렸다. 축 처져 있던 블루 와이번은 차가운 강물을 흡수하여 불린 미역처럼 몸을 키워 나갔다. 놈이 몸체를 본래 크기로 되돌리자 바이칼은 기운 없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까 페가수스도 타봤겠다. 너도 한번 그렇게 날아봐.” “쿠워어!” 플루비는 힘차게 날개를 펼쳤다. 그로 인해 수면 위를 훙 하고 강한 바람이 쓸고 지나갔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었다. 일광욕하는 도마뱀처럼 날개를 펼친 채 가만히 앉아 있는 플루비를 보며 바이칼의 이마에 혈관이 삐죽 튀어나왔다. “짜식이. 장난하냐? 날갯짓을 해야 날지.” “끄우우워어엉.” 플루비는 거대한 몸을 비틀며 강아지처럼 낑낑거렸다. 되도 않는 애교에 바이칼의 짜증만 증폭되었다. “너 다 컸다며. 별로 어리지도 않은 게 뭔 겁이 그렇게 많아? 지금 그 덩치에 그 어마어마한 날개를 달고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게 말이나 돼?” “쿠에에엥!” “아, 귀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말고 좀!” 그는 땡깡 부리는 와이번의 콧잔등을 주먹으로 통 가격했다. 그러자 플루비가 바닥에 풀썩 엎드려 왱알거렸다. “꾸웡. 꾸엥. 쿠오옹.” “뭐. 왜.” 플루비는 푸흥 콧김을 뿜으며 제 등을 고갯짓했다. 아까 페가수스의 파일럿이 부러운 눈치였다. 그 뜻을 알아들은 바이칼은 인상을 팍 썼다. “뭔…….” “…….” 함께가 아니면 날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에 직면한 바이칼이 허 한숨을 뱉었다. ‘에라이, 하는 수 없나. 어차피 제대로 날갯짓도 할 줄 모르는 놈이니까. 기껏해야 조금 떠오르다 마는 정도겠지.’ 승마를 처음 배우는 아이도 옆에서 어른이 고삐를 쥐고 말을 끌어준다. 플루비에겐 고삐가 없을뿐더러 날갯짓을 이끌어줄 어른도 없었다. 일단은 쥬다스가 플루비의 교육을 일임한 상황에서 현재 놈의 보호자는 바이칼이었다. 탓! 그는 원래 한번 결단을 내리면 행동이 빠른 편이었다. 플루비의 목과 등뼈 사이로 걸터앉은 후 길게 자라난 뿔을 안전대 삼아 꽉 붙잡았다. “됐냐? 너 날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붙어 있을 테니까. 어디 한번 날갯짓 해보든지.” 그러자 플루비는 해맑은 기색으로 몸을 일으켰다. 집채만 한 몸뚱이가 일어서자 그것만으로도 제법 시야가 높아졌다. 바이칼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발로 놈의 가죽을 툭툭 찼다. “좋았어. 아까 그 말대가리들처럼 날아보라고.” “푸르릉!” 말처럼 투레를 한 번 지른 플루비는 활짝 핀 날개를 한 번 느릿하게 퍼덕였다. 그럴 듯한 바람이 휘몰아치긴 했지만 몸체만 살짝 기우뚱했을 뿐 전혀 떠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바이칼은 혀를 차며 재차 발을 굴렀다. “폼은 괜찮네. 날개를 좀 더 빠르게 휘저어야지. 멈추지 말고 계속 해 봐!” 그의 응원에 용기를 얻은 플루비는 눈을 빛내며 기운차게 날개를 퍼덕였다. 놈은 이미 다 자란 성체였고 과하게 힘을 준 날개에선 퍼덕인 스스로조차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콰아아아! 흡사 회오리처럼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블루 와이번의 육중한 몸체가 붕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들이 타고 온 페가수스 택시보다 훨씬 가볍고 빠른 이륙이었다. “……응?” 바이칼은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기껏해야 비틀거리며 조금 떠오르다 말 거라 생각했던 플루비가 바람에 흩날린 민들레홀씨처럼 가뿐히 날아오른 것이다. 순식간에 높은 창공으로 떠오른 플루비는 플루비대로 몹시 당황하여 계속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그러자 비행에 속력이 붙으며 더 높이, 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 자, 자자자잠깐!?” “크워어어엉!” 둘은 동시에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나 한번 질주하기 시작한 와이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갔다. “어? 저게 뭐지?” “저건 페가수스가 아닌데.” “드, 드래곤?” 엘리아의 사람들도 허공을 질주하는 거대한 그림자를 발견하고 웅성거렸다. 페가수스의 속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스피드였다. 긴 꼬리를 늘어뜨리고 거대한 두 날개를 퍼덕이는 플루비의 실루엣을 본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드래곤으로 착각했다. “그러고 보니 산맥에 신룡이 산다고 들었어!” 누군가의 외침을 기점으로 와 하고 환호성이 일어났다. “신룡님이다!” “신룡이 나타났다!” 환호와 웅성거림은 엘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마침 한갓지게 광장을 돌아다니던 쥬다스 일행도 그 소리를 듣고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신룡?” 귀에 익은 단어였다. 에단이 미간을 좁히고 한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바라본 순간 그의 눈에도 멀리서 빠르게 비행하는 무언가가 보였다. 주변에 퍼덕거리는 페가수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굉장한 속도였다. 이를 멀뚱히 올려다본 유니가 쥬다스의 볼에 머리를 툭 기대며 말했다. 「이그레트, 쟤 울어.」 “…….” 쥬다스는 웃지도 찡그리지도 못한 애매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끄아아아’ 하는 비명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느낌이었다. 그는 난처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이거야 원……. 저리 무리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뭐 제대로 날 수 있게 되긴 했네.」 「으응. 착륙을 못하는 게 문제죠.」 카니가 방싯 웃으며 덧붙였다. “저어, 형님. 방금 플루비가 맞죠?” “그래, 바이칼과 플루비구나.” “예? 바이칼이요?!” 너무 멀어 그 위에 사람이 타고 있는 것까진 확인하지 못했던 세이지가 경악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지만 플루비는 이미 그들의 머리 위를 쏜살같이 지나가고 없었다. 일행은 멍하니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륙할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착륙할 땐 아니란다. (?) Q. 작가님! 종이책 출판은 언제쯤으로 계획이 되어 있나요??8ㅁ8)/ A. 종이책은 2부완결후에 제작하는 걸로 들었습니다! 2부완결은 200화 즈음, 시기적으로는 5월정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보내주시는 응원과 사랑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 0116 / 0240 ---------------------------------------------- 14장. 맹세 신룡 소동은 유니의 바람이 플루비를 멈춰 세우고 나서야 간신히 마무리되었다. 그 와중에도 살겠다는 집념으로 플루비의 뿔을 붙들고 놓지 않았던 바이칼은 지상에 내려오자마자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초췌한 몰골로 픽 엎어졌다. 루니의 도움을 받아 다시 미니 와이번의 형태로 돌아간 플루비도 그 옆에 나란히 엎어졌다. 크리스티나가 한심한 눈길로 그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결국 제대로 비행을 익힌 건 아니군요.” “……그래도 날갯짓은 할 줄 알게 된 것 같습니다만.” “착륙이 불가능한 날갯짓은 결국 독이 될 뿐이라 생각하지 않나, 그대.”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같은 기사단원인 바이칼을 감싸주려던 에단은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러자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대신 답했다. “크리스티나야, 처음부터 달릴 줄 아는 사람은 없단다. 플루비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와 같으니 큰일을 해낸 셈이야.”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에단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태도로 시원하게 과오를 인정하는 크리스티나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세이지는 적응이 되지 않아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크리스티나 델피아. 남에게 쉽게 굽힐 여인이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본인은 숨기려고 무던히 애쓰고야 있지만 때때로 드러나곤 하는, 단순히 충의로만은 보이지 않는 눈빛까지. 여러 의미로 자신의 형님은 대단했다. “세이지 님은 어떠셨습니까?” “어…?” “허허. 동화책에서만 보던 엘리아를 직접 방문해보신 소감 말입니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지켜보던 세이지의 곁에 언제부턴가 콜이 서있었다. 세이지는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묻는 콜을 보고 흠칫 놀랐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엘리아는 상상한 그대로야. 날개 달린 말도 하늘에 떠있는 폭포와 바윗돌도 전부 멋있었어.” “오, 그렇습니까? 다행이로군요.”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세이지는 나란히 엎어져있는 바이칼과 플루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누군가의 작은 지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게 제일 신기해. 그러니까, 음. 이 세상엔 아직 환상이 남아있구나?” 까맣게 물든 세상에 형이라는 믿고 따를 빛줄기가 하나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빛을 따라 나온 낯선 세상에선 지금껏 본 적 없고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벌어졌다. “곧 사라질 환상 말고 사람들이 꿈꾸는 환상 말이야. 내가 어릴 때 읽었던 동화책 같은 거. 그걸 지켜주는 게 우리들 역할이 아닌가 하고.” “허허, 좋은 생각이로군요.” 콜은 그저 웃었다. 그가 자신을 챙기는 게 형을 위해서임을 알고 있었지만 세이지는 이마저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나?” “소인이 어찌 감히 고귀한 분들께서 하실 일을 판가름하겠습니까.” “아니. 코르토반, 지금 내가 말한 ‘우리’에는 여기 있는 모두를 포함시켜서 들어줘.” 세이지의 올곧은 금안을 바라본 콜이 소리 없이 감탄했다. ‘영혼과 상관없이 결국 피는 피를 닮는 겐가.’ 소년은 정말 놀랍도록 제 형을 닮아가고 있었다. 마치 날개가 있어도 자신이 날 수 없다고 착각하고 살아온 플루비가 비행에 대해 깨치듯 쥬다스를 만남으로 인해 그간 가라앉아 있던 총기와 따뜻함이 서툴지만 확연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내심 비뚤어지지 않을까 걱정했던 시간이 전부 무의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콜은 이를 공경하는 뜻을 담아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외람되오나 소인은…… 오히려 환상을 지키는 건 꿈꾸는 자들의 몫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그러니 세이지 님, ‘우리’는.” 잠깐의 텀을 두고 인자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직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할 나이의 어린 황자는 그 뜻을 이해하고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살짝 돌아보고 있던 쥬다스도 역시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가 특별히 도움 주지 않아도 동생은 충분히 잘 자라고 있었다. 일행은 엘리아에서 사흘간 더 머문 후 발을 떼었다. 섬에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단거리 포탈을 타자 구름보다 높이 떠 있는 섬에서 순식간에 반대편 산맥이 시작되는 낮은 초입의 포탈관리실에 도착했다. 창공이 아닌 평범한 지상에선 쉴 새 없이 푸드덕거리던 페가수스도 하늘에서 떨어지던 작은 폭포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잎이 큰 활엽수가 파란 하늘로 가지를 뻗었을 뿐이다. 엘리아에서 머무는 동안 비행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플루비와 함께 생사의 위기를 몇 번이나 넘나든 바이칼은 진절머리 난다는 표정으로 말에 훌쩍 올랐다. “크으! 살았다…….” “왜 그러나, ‘신룡의 기사님’.” 다각다각 그 옆으로 말을 몰고 다가온 에단이 툭 던지듯 말을 건네며 정지했다. 동시에 바이칼의 표정이 곰팡이 핀 빵조각처럼 썩어 들어갔다. “그거 하지 말아주십시오.” “뭘 말이지?” “신룡의 어쩌고 하는 말똥 같은 호칭이요. 저 지금 진짜 소름 돋았습니다.” “신룡의 기사님 말인가.” 천연덕스럽게 한 번 더 언급한 칭호를 들은 친위대 사이에서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늘도시 엘리아에서 머문 3일간, 바이칼과 플루비는 제법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고소공포증에 시달리며 제대로 비행할 줄 모르는 와이번과 그 파일럿이란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굉장한 속력으로 하늘을 가르는 플루비와 그 위에 올라탄 바이칼의 실루엣을 보고 모두들 이를 가리켜 ‘신룡의 기사’라 입을 모았다. 장본인인 바이칼과 그를 아는 일행들이 듣기엔 황당무계한 칭호였지만 굳이 나서서 해명하는 것도 우스꽝스러웠기에 소문은 그대로 굳혀졌다. 진상이야 어찌 되었든 플루비의 비행 속도만큼은 엘리아의 어떤 페가수스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또한 균형을 잡고 날갯짓하는 법도 본능적으로 깨우쳐 몹시 안정적으로 날았다. 하지만 아주 어린 새끼 때 어미가 하늘에서 놓치는 바람에 호수로 뚝 떨어진 경험이 있는 플루비는 높이 올라갈수록 두려움을 느끼고 제어력을 잃어버리는 단점이 있었다. 놈은 일단 날아오르는 데엔 수월히 성공했지만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혀 미친 듯이 질주했다. 그러다 보니 의지대로 방향을 꺾거나 착륙하는 법은 끝내 익히지 못한 채 엘리아에서 내려오게 되고 말았다. 그러니 현재로선 플루비의 비행은 불완전하다 못해 가히 엉망이라고까지 할 수 있었다. 유니가 강력한 바람 길을 만들어내 거의 반강제로 착륙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체력이 다할 때가지 허공을 떠돌다 추락하고 말 수준이다. 그런 상황에서 붙여진 ‘신룡의 기사’란 칭호는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에단은 일부러 그 칭호를 사용해 부르곤 했다. “기사단 내에 위명이 붙는다면 잘된 일이지. 입 막을 생각을 하지 말고 칭호에 걸맞은 존재로 거듭나도록 노력을 함이 어떤가?” “그럼 단장이 훈련시키십쇼. 직접 거듭나시면 되잖습니까?” 바이칼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했지만 에단은 단호히 이를 묵살했다. “플루비는 주군께서 직접 네게 훈련을 일임하셨다. 따라서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명예로운 일이지.” “……예, 뭐. 명예 좋죠. 고공낙하하거나 심장마비로 죽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의 투덜거림을 끝으로 십여 기의 말이 동시에 흙을 박찼다. 산맥의 끝자락인 만큼 숲은 그리 깊지 않았다. 엘리아를 구경하기 위한 사람들의 통행이 잦았기 때문에 길도 헷갈리지 않게 잘 나 있는 편이었다. 그대로 길을 따라 죽 달리기만 하면 숲을 벗어나 큰 도시가 하나 나올 것이고, 그 도시가 바로 투르케 사막과 맞닿아 있는 델피아 영토의 끝자락이다. 그 수순대로만 말을 달리면 될 여정이었으나 쥬다스 일행은 중간에 발걸음을 묶는 사건과 하나 조우하고 말았다. 「전방에 도적단. 별로 대단한 애들은 아닌데 피해자가 있어.」 숲의 정취를 느끼며 오래된 동요를 흥얼거리던 유니가 문득 몰려든 봄바람을 감지하곤 브리핑했다. 「돈 받고 움직이는 여객마차인가 본데 호위도 없이 마부랑 손님 딸랑 둘? 뭐야, 얘네 이상해. 보통은 용병을 쓰는데 손님이 돈이 모자랐나? 아무튼 마부는 죽었고 손님은 도적이랑 실랑이 중.」 “고맙다, 유니.” 「이 정도로 뭐얼.」 말은 그러면서도 유니는 기쁘게 웃었다. 마주 미소 지어준 쥬다스는 천천히 달리던 말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에단.” “예.” “이 앞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야. 조금 서두르자꾸나.” 쥬다스가 상황을 간단히 전달하자 에단은 그의 뜻에 따라 손짓으로 나머지 일행에게 속도를 높일 것을 지시했다. 얼마 가지 않아 유니의 말대로 반파된 마차와 칼에 베여 즉사한 마부, 그리고 살아남은 여행객을 끌고 가려는 도적단이 발견되었다. “살려주세요!”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여행객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갑작스런 다수의 등장에 도적단은 똥 밟은 표정으로 무기를 들었다. 흉흉한 기세로 번뜩이는 날붙이를 발견한 크리스티나가 제일 먼저 활을 꺼내 말을 탄 채 겨누었다. 하얀 손가락 끝에 맺힌 마력화살이 자비 없이 시위를 떠났다. 피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화살이 여행객과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도적의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도적을 선두로 빠르게 날아온 다음 화살에 앞쪽에 있던 도적들이 차례로 허벅지를 맞고 나뒹굴었다. “후, 후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도적단은 과감히 전투를 포기하고 달아나려 하였다. 하지만 에단이 이끄는 기사단은 단 하나의 도망자도 허용하지 않고 모조리 그들을 쓰러뜨렸다. 치명상을 피해 팔이나 다리를 공격하여 무력화시킨 후 속박마법진을 설치해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런 다음 즉사한 마부의 시신을 수습하고 겁에 질린 여행객을 안정시키는 등 모든 상황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눈물콧물 흘려가며 공포에 떨었던 여행객은 위기상황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결해 버린 그들을 보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특히 가장 먼저 활을 쏘며 난입한 크리스티나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평소엔 풀고 다니던 머리카락이었지만 편의를 위해 틀어 올려 머리띠로 고정시킨 그녀는 품격 있는 기사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네. 구해주셔서 감사…… 합니다.” 다른 기사의 질문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한 여행객은 뒤늦게 몰려오는 안도감에 다리를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았다. 차림새는 남성복이었고 맨 얼굴에 긴 머리를 질끈 묶긴 했으나 누가 봐도 여자가 남장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는 외관과 목소리였다. 말을 탄 채 그 앞에 다가온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어조로 물었다.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가.” “……!”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조각해 낸 인형 같은 외모의 그녀를 가까이서 보게 된 여행객이 흠칫 숨을 들이켰다. 그 모습을 두려움에 떠는 거라 판단한 크리스티나는 일단 자신부터 소개했다. “우리는 캘런가의 두 도련님을 모시는 가신들이다. 큰도련님의 명으로 상황에 끼긴 했으나 정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 설명해 보도록.” “아! 역시 기사님들이셨군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유리엘이라고 해요.” 유리엘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인사부터 했다. 어설픈 남장부터 티가 났지만 화장을 하지 않았어도 잡티 하나 없이 고운 얼굴에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는 하얗고 보드라운 손이 그녀가 귀족가 영애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사정상 남장을 하긴 했지만……. 시즈 가문의 장녀예요.”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자기소개였지만 유리엘은 배시시 웃으며 민망함에 볼을 붉혔다. 상황을 설명해 보라 했더니 묻지도 않은 신상정보를 제 스스로 홀랑 털어버린 유리엘을 보며 크리스티나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철없는 가출 소녀로군.’ 그러나 상황조사는 해야 했기에 모른 척 다시 질문하려던 순간 유리엘의 수줍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경의 이름은요?” “……크리스.” 본명을 밝히기엔 여러모로 귀찮았던 크리스티나는 대충 둘러 대답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해는 오해를 낳고.... (?) 오늘 커피를 머그컵으로 7잔쯤 마셨는데 도저히 잠이 안깨네요. ㄷㄷ 후, 이제 카페인도 소용없는 것인가... 크큭... 나의 이 왼손에 깃든 흑염룡을 깨워야할 때가 온 모양이로군.... ...는 제가 졸리긴 많이 졸린 모양입니다. 쿨럭; 벌써 한 주의 반을 지나왔네요!ㅎ 오늘 하루도 즐거우셨으면 좋겠습니다.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리며,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 0117 / 0240 ---------------------------------------------- 14장. 맹세 델피아가 특유의 투톤으로 빛나는 바다색 머리색은 자세히 관찰했을 때 특이한 편이긴 했으나 지금처럼 돌돌 말아 틀어 올린 상황에선 티가 나지 않았다. 딱히 남장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간편한 여행자 차림에 가뿐히 틀어 띠를 두른 머리, 여자치고는 훤칠하게 큰 키 등으로 인해 중성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말달리며 활을 쏘던 모습까지 목격한 유리엘은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멋대로 크리스티나의 성별을 오해했다. ‘크리스 경? 으으, 이름까지 완전 멋있어. 꼭 소설 속에 나오는 백마 탄 기사님 같아……!’ 유리엘은 크리스티나를 완전히 미소년 기사쯤으로 단정지어 버렸다.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크리스티나는 갑자기 볼을 붉히는 그녀를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상황 설명은 단순했다. 일단 크리스티나가 추측한 대로 유리엘은 가출 소녀가 맞았다. 이유는 집안에서 추진한 정략혼을 거부하기 위해서였다. “전 아직 열여덟 살이라고요!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남자의 재취 자리로 들어가라니, 죽기보다 싫어요.” 유리엘의 가문은 약소한 남작가로 지닌 재산이 빈약하고 지위도 낮았다. 그런 와중에 들어온 혼담은 나이 서른 중후반의 고위귀족 재취 자리였다. 그나마도 상대측에서 웨이브진 금발에 장밋빛 눈동자를 가진 유리엘의 반반한 얼굴에 반해 겨우 들어온 혼담이다. 전처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지만 유리엘이 꿈꾸던 결혼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할 거야!’ 장녀라는 이유로 집안을 위해 팔려가는 결혼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유리엘도 이런 자신이 철이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인생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가족인 걸요. 내 결혼 상대만큼은 스스로 정하고 싶어요.” ‘이런 일을 당하고서도 돌아갈 생각이 없는 건가.’ 정략혼을 피해 급히 도망치듯 나온 탓에 여행 자금조차 준비하지 못한 걸로 보였다. 호위도 없이 달랑 혼자 집을 나선 그녀는 출발한 지 하루 만에 도적단을 만나 무력하게 당하고 만 듯 했다. 눈앞에서 마부가 죽었고 예쁘장한 생김새의 유리엘은 납치당해 끔찍한 일을 겪을 수도 있던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도대체가 멍청한 건지 용감한 건지 판단이 어려운 상대였다. 그리 여긴 크리스티나는 더 신경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휙 돌아섰다. “생존자는 다친 곳 없이 상태가 양호합니다.” “다행이구나. 근처 도시에 신고를 넣어두었으니 곧 처리하러 올 게야. 흠, 굳이 우리가 자리를 지킬 필요까진 없어 보이니 먼저 출발하자꾸나.” “예.” 도적들은 손발을 꽁꽁 묶었고 통신마법을 통해 신고해 두었기에 그냥 두면 알아서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시신과 피해자에 대한 뒤처리도 지역관리인의 몫이었다. 쥬다스 일행이 떠날 기미를 보이자 유리엘은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가, 가시려고요?” “곧 도시에서 사람을 보내올 것입니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혼자 이 무서운 도적 떼 사이에 남으라는 말씀이세요?” “저들은 당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합니다.” “그래도 혼자선 무서워요! 차라리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네? 다른 도적들이 또 나타날지도 모르잖아요…….” 자신을 홀로 두고 갈까 불안해진 유리엘은 급기야 일행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쥬다스의 옷깃을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부탁드려요. 근처 도시까지 만이라도 좋으니 여기서 데리고 가주시면 안 될까요? 네?” 탁! 그 무례한 손길을 뿌리친 건 쥬다스가 아니었다. 유리엘의 손목을 잡아채 그로부터 떼어낸 크리스티나가 차가운 눈으로 입을 열었다. “타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다니 무례하군요. 아무리 가문이 약소하다 한들 레이디로서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지 못했습니까?” “앗. 크리스 경! 이건…….” 너무 불안했던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지른 행동인지라 유리엘도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어깨를 움츠렸다. 귀족 가문 사이에선 여자가 타인, 특히 남성의 몸에 함부로 먼저 접촉하는 것을 천박한 행위로 여긴다. 이를 크리스티나가 직설적으로 표현하긴 했지만 모시는 주군에게 결례를 범한 상황에서 기사가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유리엘은 훌쩍이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쥬다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듣고 보니 홀로 이곳에 남는 것도 무서운 일일 수 있겠습니다.” 쥬다스는 힘없는 어린 소녀 입장에선 아무리 포박되어 있다고 한들 사람을 죽인 도적단 사이에 혼자 남아 도움을 기다리는 일은 정서적으로 가혹한 처치임을 인정했다. 예전 같았으면 모르고 지나쳤겠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여전히 굳은 표정의 크리스티나를 불렀다. “크리스.” “예.” 급조된 가명 아닌 가명을 용케 눈치채고 즉각 써먹는 쥬다스를 향해 그녀의 고개가 공손이 숙여졌다. 싸늘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노곤노곤 녹아내리자 유리엘은 일전 세이지가 그랬던 것처럼 멍하니 그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도시에 도착할 때까지 네가 맡아줄 수 있겠느냐.” 마차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말을 타고 이동하던 일행이 유리엘을 데려가기 위해선 누군가 함께 말을 타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일행은 크리스티나를 제외하면 전부 남성이었기 때문에 귀족영애의 입장을 생각하면 그녀가 적격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잠시 불편한 기색을 띠었지만 이를 금방 지워내고 명에 복종했다. “그리하겠습니다.” “고맙다, 크리스.” 얼결에 댄 가명이긴 했지만 어쩐지 들을 때마다 애칭을 불리는 착각이 일어 그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멋진 기사로 착각하고 있는 유리엘도 함께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어머! 어떡해. 저 기사님과 같이 말 타고 가는 거야? 왜 하필 저분에게 날? 이쯤 되면 정말 운명 아닐까!’ 유리엘은 한껏 소녀스러운 망상에 부풀었다. 그리고 잠시 뒤 정말로 크리스티나의 말에 함께 올라탔다. 말도 제 주인을 닮아 다른 말보다 늘씬하고 아름다운 흰털을 뽐내고 있었다. 신기한 눈으로 보들보들한 갈기를 쓸어보던 유리엘은 말이 달리기 시작하자 떨어지지 않기 위해 크리스티나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저기, 크리스 경.” 크리스티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묵묵히 앞을 보며 말을 몰 뿐이었다. 그래도 유리엘은 실망하지 않고 해맑게 질문했다. “여긴 무슨 일로 지나가던 중이었나요?” “…….” “여행? 지령? 아니면 만나러 갈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요?” 계속되는 질문에 크리스티나는 짧게 한숨을 뱉었다. “주군의 뜻을 따를 뿐. 당신에게 밝힐 의무는 없는 것 같군요.” “그건, 으음. 그렇죠.” 북풍한설처럼 차가운 대꾸에 유리엘은 팍 풀이 죽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들며 크리스티나의 등을 향해 반짝이는 시선을 보냈다. “경은 정인이 있나요?” 정인(情人). 이제 막 성년이 된 크리스티나로선 제법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든 단어였다. 델피아의 하나뿐인 공녀인 그녀에게도 제법 많은 혼담이 들어왔다. 정략혼을 강요당한 유리엘과 달리 선택권이 주어졌고 크리스티나는 이를 전부 단칼에 거절했다. ‘바라지 않는다하면 거짓이겠지만.’ 순전히 혼자만의 욕심이었다. 드러내 그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철저히 제 감정을 숨기고 대답했다. “없습니다.” “어! 정말요?!” 들뜬 어조로 기뻐하는 유리엘의 반응을 접하자 이상하게 속이 울컥했다. 유리엘이 그녀의 비밀스런 감정에 대해 알 리는 없었지만 괜히 놀림받는 기분이 들었다. 크리스티나는 한층 싸늘해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지금은 감정놀음 따위에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헤에, 크리스 경은 지금 시간이 소중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거네요?” 철이 없다는 건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만큼 순진하단 뜻이기도 했다. 정곡을 찔린 크리스티나가 입을 다물자 유리엘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부러워요. 전 지금 마냥 제 시간에서 도망치고 싶을 뿐인데.” 장미꽃잎을 닮은 눈동자엔 마냥 웃음만이 담겨 있지 않았다. “도망간 지 하루 만에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한심하죠? 정말 무서운 일투성이네요.” 크리스티나는 답하지 않았다. 슬슬 그녀의 냉대에도 익숙해진 유리엘은 씁쓸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줄곧 침묵이 이어졌다. 말달리는 소리만 사방에서 다가닥다가닥 울렸다. “정말 무서운 건 그런 게 아니라.” 한창 달리다말고 크리스티나가 문득 입을 열었다. “경……?”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야만 할 때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걸 위해서 도망치는 건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으니까.” 유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를 천천히 휘었다. “고마워요. 친절하신 분.” 다시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유리엘은 시원스레 웃었다. 출발할 때는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더니 지금은 조금 풀어진 두 여인을 보며 바이칼과 에단이 서로 시선을 교류했다. “워. 크리스…… 님도 많이 변하셨네요.” “원래 그녀는 자신보다 어린아이들에게 약했지.” 떠올려 보면 동갑인 바이칼과 한 살 연상인 에단에게는 늘 강하게 굴던 그녀가 자신보다 어린 쥬다스나 리이나 등에게만큼은 그리 모질게 굴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다. 에단의 의견을 듣고 바이칼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라. 취향이신 건가…….” “바이칼.” “예, 뭐. 존중해 드리죠.”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에단도 더는 제지하지 못하고 작게 한숨을 뱉었다. 도시까지는 금방이었다. 투르케 사막으로 진입하기 직전에 위치한 큰 도시였기에 이곳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아무래도 사막을 앞둔 지점이다 보니 사막 여행을 할 때 필요한 물품이나 비상식량, 의상 등을 판매하는 장이 열려 있었다. 사막 동물이나 선인장 등 사막에서 볼 수 있는 특산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일행은 다른 걸 살피기 이전에 우선 도시 관리를 담당하는 귀족가 저택으로 유리엘을 데려다주려 했다. 하지만 막상 도시에 들어오니 그녀가 이를 한사코 거부했다. “도와주신 건 감사드려요. 하지만 전 저택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예요.” “집으로 안전히 돌아가려면 저택에서 보호를 받는 편이 좋습니다.” “바로 그게 문제죠! 저는 아직 집에 들어가선 안 되거든요.” 유리엘은 말에서 내려 옷자락을 탁탁 털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저. 이대로 돌아가면 정략결혼이라고. 제 운명의 상대를 찾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아요.” “으음…….” 쥬다스마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굳건한 의지 표출이었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매우 불안하기 짝이 없는 순진한 의지였다. 「쟤가 아직 세상 무서운 줄을 모르네.」 「사기 잘 당할 것 같다요!」 「응, 사기보단…… 사고를 몰고 다닐 것 같은 인간이네요.」 정령들마저 짠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유리엘은 그런 줄도 모르고 힘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여기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정말 잊지 않을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하려는 일에 행운이 함께하길.” 쥬다스는 더 이상 그녀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가 깔끔히 돌아서자 유리엘은 아쉬운 얼굴로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특히 크리스티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그녀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신이 진정 바라는 걸 위해서 도망친다면…….” ‘크리스 경, 당신도 있나요? 정말 바라는 것.’ 유리엘은 멍하니 크리스티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곤 그들이 북적북적한 사람들 사이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기 전에 자기도 모르게 따라서 후다닥 발걸음을 옮겼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본격 삼각관계 로맨스판타지 이그레트... (?) ....가 아니라 별로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오해를 받게 된 크리스티나입니다. ..힘쇼.. 이제 내일만 지나면 연휴의 시작이네요! 행복합니다.ㅠㅠ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리며,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 0118 / 0240 ---------------------------------------------- 14장. 맹세 쥬다스 일행은 투르케에 대한 소식도 듣고 끼니도 챙길 겸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 식당에 들어가 자리 잡았다. 음식을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쥬다스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뒤돌아 기대며 그를 불렀다. 「이그레트.」 “알고 있단다.” “예? 뭐가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바이칼이 그의 말에 냉큼 반응했다. “그 아이가 우리를 따라오는 모양이야.” “그 아이라 하심은…… 설마 그 가출 소녀 말씀이십니까? 아니, 아까 각자 갈길 간다고 잘 갈라져놓고 왜 또 따라온답니까?” 쥬다스는 유유자적하게 테이블 위에 손깍지를 끼곤 턱을 괴었다. 웃음기를 담은 금안이 맞은편에 앉은 크리스티나에게로 향했다. “글쎄다. 아마도 ‘크리스 경’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만.” 짓궂은 농에 크리스티나의 표정에 옅은 낭패감이 드리워졌다. “하면 제가 직접 만나 돌려보내겠습니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기세인 크리스티나를 부드럽게 제지시킨 쥬다스가 재차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할 말이 있다면 직접 와서 전하겠지.” 그의 말대로 유리엘은 계속 일행의 주위를 맴돌며 어찌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뭐라 말해야 좋을지도 모를뿐더러 통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식사를 끝내고 나와 장에 들러 사막에서 필요한 용품을 구비할 때까지도 우물쭈물하며 어설프게 뒤를 밟았다. 그 때문에 투르케 사막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을 즈음에는 딱히 정령의 감시가 아니더라도 모든 일행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리 망설이는 걸까요? 이러다가 사막까지 쫓아 들어오면 위험할 것 같은데.” 세이지가 신경 쓰인다는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내버려 두십쇼. 아무리 그래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사막까지 따라 들어오겠습니까? 아벨 그 녀석이 관리를 시작했다곤 해도 애초에 투르케가 얼마나 넓고 위험한 사막인데요.” 쥬다스 대신 바이칼이 손을 휘휘 저으며 대꾸했다. 그 와중에도 유리엘은 일행을 줄곧 뒤따라오다가 세이지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짐수레 뒤로 몸을 숨겼다. 상자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굽이치는 금발을 보며 세이지는 찜찜한 어조로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래도 따라오면?” “그건 둘 중 하나입니다. 진짜 무식을 넘어 뇌가 순수하거나, 아니면 정말 목숨 걸고서라도 따라오고 싶은 이유가 있거나.” 그리 말한 바이칼은 사막으로 출발하기 전 말들이 차고 있는 보호대와 발굽에 새겨진 마법진을 사막전용으로 수정했다. 그걸로 사막에 진입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정지. 혹시 투르케 사막으로 가십니까?” 도시를 벗어나기 전 출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일행의 목적지를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병사는 그들의 신분을 조사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근 사막에서 실종 사건이 눈에 띄게 잦아져서 사막 방문객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종 사건?” “일단 멀쩡한 모래언덕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늪처럼 쑥 가라앉는 지형이 많이 늘어나서 모래에 빠져죽는 사망 사고가 하루에도 열 건이 넘게 보고되고 있습니다. 거기다 여자와 아이를 노리는 인신매매꾼들이 기승이라고 하니 이 점도 각별히 주의해 주십시오.” 이야기를 듣고 보니 투르케 쪽 문으로 도시를 빠져나가는 인파는 생각보다 적었다. 일행은 사막으로 이어진 모래밭길을 천천히 내달리며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허. 사막의 유사는 자연현상이니 그렇다 치지만 인신매매라니.” “한 번 멸망했던 땅인데다 일단 환경이 열악하니까. 혼란을 틈타 범행을 저지르는 모양이로군.” “게다가 모래늪 역시 마찬가지. 자연현상일지라도 평소보다 눈에 띄게 잦아졌다면 그다지 자연스러운 상황은 아닐 수 있다.” 바이칼과 에단, 크리스티나가 하는 대화를 들은 세이지가 제 형을 쳐다보았다. “형님은 어찌 생각하세요? 갑자기 늘어난 모래늪이 인신매매와 연관이 있을까요?”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대화에 끼지 않고 조용히 있던 그는 평소 쓰던 모자 대신 후드를 눌러쓰며 여상히 대답했다. “글쎄, 어떨지. 직접 가보고 나서 판단하는 게 어떠하냐.” “예? 하지만.” 당연히 위험 지형과 인신매매꾼들을 맞닥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하는 어조였다. “그러기 위해 다니는 순례길이니 말이다.” 그의 확신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모습을 드러낸 유니가 까르륵 웃으며 주변을 맴돌았다. 토니도 모습을 드러내며 한마디 보탰다. 「여기 좀 이상하긴 하다요.」 「뭐가?」 「사막이 사막 같지 않은 느낌? 그러니까, 우웅. 모래가 모래가 아니다요!」 「……얘가 뭐래니.」 유니는 토니의 저질 표현력에 감탄하여 눈을 가늘게 떴다. 「아으우! 나요도 이런 건 처음 봐서 설명하기 어렵다요. 모래긴 모래인데 막 강처럼 흘러다닌다요. 분명 평범한 모래가 아니라!」 「아냐, 됐어. 그냥 직접 가서 볼게. 역시 이그레트 말은 언제나 정답이야.」 심드렁한 반응에 토니는 힝 하고 손가락을 물었다. 출발할 땐 자잘한 풀과 돌멩이들이 중간중간 보이던 길이 이동할수록 점차 거친 모래밭으로 가득해졌다. 나중에는 정말 끝없이 펼쳐진 모래언덕만이 시야에 남았다. 울퉁불퉁 솟았다 내려앉은 모래언덕은 태양광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낙조가 질 때까지 모래언덕을 넘어 이동했지만 의문의 모래늪과 인신매매꾼은 찾으려 하니 오히려 나타나지 않았다. 시뻘건 화로처럼 변해 지평선 가득 노을을 흘린 태양은 모래언덕에 삼켜지듯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둠이 내리기 직전, 그들은 여행객을 위해 지어진 사막휴게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얕은 오아시스를 하나 끼고 넓게 천막을 쳐서 지어놓은 휴게소에선 숙박 외에도 야외에 마련된 공터에 둘러앉아 바비큐를 해먹거나 음유시인의 노래를 감상하는 등 즐길 거리가 많았다. 물론 이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단장, 저기 좀 보십쇼.” “……?” 공터에 나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던 중 바이칼이 턱짓을 하며 질렸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허 참, 저 정도면 근성 하나는 끝내주지 않습니까? 근성만으로 따지면 기사단 입단도 가능하겠는데요. 설마하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모른 척해라.” 에단은 힐끗거리던 바이칼의 고개를 텁 붙잡아 억지로 돌려주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시선을 보내던 곳에는 초췌한 몰골이 되어 낙타 한 마리를 끌고 나타난 유리엘이 털썩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 보리빵 하나요.” 심지어 사막을 건너기 위해 낙타를 구매하느라 모아 들고 온 용돈마저 대부분 소진한 그녀는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제일 싸구려 메뉴를 하나 주문했다. 그마저도 쫄쫄 굶다 먹게 된 소중한 식량이었다. 유리엘은 빵이 나오자마자 허겁지겁 입안에 우겨넣었다. 하지만 보리빵은 귀족으로 자라난 그녀가 먹었던 하얀 밀빵과 다르게 무척이나 딱딱했고 질겼다. 물도 없이 단단하게 굳은 보리빵만 한가득 베어 물고 우물거리던 유리엘은 어느 순간 컥 소리와 함께 목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큽. 쿨럭! 켁켁.” 목구멍이 찢어질 듯 아팠다. 기침을 통해 제대로 씹지 않고 삼켰던 빵조각이 튀어나오긴 했지만 사레가 들려 기침이 멈추질 않았다. 가슴을 탕탕 치며 병 걸린 사람마냥 기침을 해대는 그녀의 눈앞에 수통이 하나 내밀어졌다. “……!” 마치 활활 타오르는 지옥에서 발견한 생명수를 들이켜듯 유리엘은 정신없이 수통을 입에 대고 꿀꺽꿀꺽 들이켰다.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휴우. 감사합…….”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수통을 건네준 이에게 감사인사를 건네려던 유리엘은 싸악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대가 왜 이곳에 있지?” 그녀 앞에 선 크리스티나가 짜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하니 따라온 장본인에게 들켰으리라 생각도 못했던 유리엘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직접 전해야할 이야기잖아.’ 마침 기회였다. 유리엘은 화악 붉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저, 사실 크리스 경을 따라왔어요.” “왜.” 어찌나 짜증이 났는지 영애고 뭐고 말이 짧아져 있었는데도 유리엘은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경이 했던 말대로 기왕 정략혼에서 도망친 거, 제가 정말 원하는 남자를 잡고 싶어졌거든요.” “……?” “그러니까 나, 크리스 경을…….” 이런 이유로 자신을 쫓아다닌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크리스티나였다. 처음엔 영문을 모르고 미간을 좁히다 이내 숨쉬기를 멈추었다. 곧 조각같이 단아하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지금 무슨.” “좋아해요!” 툭. 누군가 들고 있던 포크가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일행은 접시를 든 채, 숟가락을 문 채, 모닥불에 불쏘시개를 넣는 자세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전부 굳어버렸다. 주변의 다른 여행객들이 떠들고 노래하는 와중에 그들 일행 사이에서만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쥬다스와 눈이 마주친 그녀는 도로 홱 고개를 되돌렸다. 무언가 크나큰 오해가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간신히 억누른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 도대체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의 무엇을 알고 좋다고 말하는 거지?” “꼭 많은 걸 알아야만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막무가내로군.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나 알고 있는 건가.” “그럼요! 진심인걸요.” “진심?” 크리스티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군. 그리고 불쾌해.” “……크리스 경?” 웃음기가 거짓말인 양 싹 사라졌다. 그 어느 때보다 차가운 기세였다. 말한 대로 불쾌가 담긴 바닷빛 눈동자를 마주한 유리엘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진심이라고 했나. 그렇다면 너는 그 진심을 위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지?” “책임이라뇨?” “자기감정에 책임조차 질 줄 모르는 건가. 한심하군.” 크리스티나는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 “답해 보도록. 무엇으로 그 진심을 증명할 텐가.” “그건!” “그대가 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냐는 뜻이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을 품는 것까진 강제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를 드러내고 상대방에게 동등한 사랑을 요구하기 위해선 자신이 그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고 무언가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유리엘은 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허름하게 때 탄 옷과 더러운 손이 보였다. 수중에 돈은 떨어져가 제대로 된 밥 한 끼 사먹지 못하고 보리빵에 목이 막히는 처지였다. ‘내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 머릿속이 텅 빈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다 한들 그녀는 그저 약소한 가문의 장녀일 뿐이다. 특별한 재주나 이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평범한 귀족 영애들이 그렇듯이, 유리엘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답할 수 없다면.” “…….” “유감이군.”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돌아서는 크리스티나의 등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어놓고 사라져 버린 유리엘 탓에 일행은 슬슬 크리스티나의 눈치를 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좋다고 따라온 여자애한테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조금 부드럽게 대해 주시지.” “…….” “뭐 그쪽도 나쁜 뜻은 아니었잖습니까. 그나저나 크리스티나 님도 참 대단하시네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들어오는 애정공세가……!” 피잉! 눈치 없이 평소처럼 크리스티나에게 말을 걸던 바이칼은 볼을 스치고 지나간 푸른 빛줄기에 멈칫 입을 다물었다. 슬쩍 돌아보자 쇠 냄비에 반쯤 박힌 마력화살이 보였다. “흐업.”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는 동시에 오들오들 떨었다. 신경질적으로 활을 내리고 휙 돌아선 크리스티나는 저녁도 먹지 않고 그대로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것 참.” 가만히 앉아 엉뚱하게 꼬여 버린 상황을 지켜보던 쥬다스는 곤란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바로 이어서 119화가 올라옵니다. ㅎ 0119 / 0240 ---------------------------------------------- 14장. 맹세 「우와, 크리스티나란 애, 되게 기분 나빠 보인다.」 「누가 자길 좋아한다고 하는 게 나쁜 일이다요?」 「그러게. 마음에 안 드는 인간이 고백해서 짜증났나?」 「어머, 그런 게 아니에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두 정령 사이로 끼어든 카니가 손을 나긋나긋 고개를 내저었다. 「제 생각엔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카니는 동그란 다홍빛 눈망울을 깜빡이며 손가락으로 입술을 짚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아주 복잡해서, 딱 정의 내릴 수는 없답니다. 물론 상대가 마음에 안 들기도 했겠지만 너무 뜬금없이 들이대서 당황한 마음도 있었을 테고.」 「당황하면 당황한 거지 왜 화가 나는데?」 「그 크리스티나란 아이가 마지막에 화낸 건 아마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해요. 평소에 좋아하는 상대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느껴왔다면 그게 투사되어서 더욱 화가 치밀어오를 수 있죠.」 「웅? 투사가 뭐다요?」 「알게 모르게 남에게 자신의 모습을 덧씌워 본단 뜻이야. 은밀한 속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보는 기분일걸.」 유니의 보충 설명에도 토니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결국 스스로한테 화가 났단 뜻이 된다요?」 「후후, 비슷한 의미겠네요. 하지만 조금 달라요.」 카니는 붉은 날개를 파닥여 날아가 쥬다스의 손가락을 꼬옥 붙잡았다. 「만약 우리가 하급정령이라고 쳐요. 이그레트와 계약을 하고 싶어도 주변에 다른 강하고 멋진 정령들이 많으니까 차마 말을 걸 수 없는 상황인 거죠. 그가 나 따위와 계약해 줄까, 라는 생각 때문에.」 「에에에! 나요는 하급정령 아닌데!」 「만약에요, 만약에. 그냥 상상해 봐요. 만일 이그레트가 우리와 계약하지 않아서 우린 그 주위만 맴돌고 있다면. 그런 와중에 다른 인간이 계약을 요청한다면 기분이 어떨 것 같아요? 계약, 할 수 있어요?」 「……?!」 예시를 들은 토니는 금방 울먹울먹한 표정이 되었다. 상상만으로 충격 받은 땅의 정령은 휘익 날아 계약자의 품에 달라붙어 빼앵 울음을 터뜨렸다. 「싫어어! 안 할 거다요! 절대절대 안 할 거다요!」 “이런, 토니. 진정하렴.” 쥬다스는 패닉 상태에 빠진 토니를 양손으로 감싸주었다. 그 안에서 토니는 훌쩍거리며 꿍얼거렸다. 「그치만 이그레트. 네가 아니면 다른 계약자는 싫다요.」 “그래, 알고 있어. 나도 마찬가지란다.” ‘너희가 아니면 지금의 나도 없는 것을.’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따뜻한 애정에 토니는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땅처럼 울진 않았지만 기분이 저조해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유니도 그의 어깨 위로 날아가 앉으며 말했다. 「흐응, 카니 덕분에 대충 이해는 했어. 결국 스스로의 문제네.」 쥬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한 가지 더, 성별을 오인받은 것도 기분 나빴던 모양이지만.’ 본질적으로 성별이 나누어지지 않은 정령들에게는 굳이 언급하여 혼란을 초래할 필요는 없었다. 그는 크리스티나의 상처 난 자존심을 모른 척해 주기로 했다. 정작 그 역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놓친 상태였지만 그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 * * 사막의 밤은 제법 추웠다. 이미 계절상으로는 봄이었지만 다시 겨울이 찾아온 듯 서늘함이 감돌았다. 담소를 즐기던 여행자들은 밤이 되자 모두 휴게소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음유시인의 노랫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삐이익. 삐익.” “흐아암……. 알았어. 알았다고, 플루비.” 한밤의 적막을 깨고 미니 와이번을 포대 자루처럼 품에 안아 든 바이칼이 어기적어기적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자다 깨어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얼굴로 연신 하품을 해댔다. “아오, 이 밤잠도 없는 뱀대가리 자식.” “삐이!” 사막의 건조한 날씨는 가뜩이나 몸에서 수분을 빼내 조그맣게 변한 플루비에게 버티기 힘든 갈증을 안겨주었다. 본래 물이 많은 곳에서 살아가는 블루 와이번이었으니 사막은 놈에게 있어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이칼은 한밤중에 삑삑 울어대는 플루비를 데리고 휴게소 옆의 오아시스로 향했다. “진짜 귀찮게 구네.” “삐…….” “알았어, 시끄러우니까 울지 마. 뭔 놈의 와이번이 마음은 약해빠져서.” 바이칼의 질타에 플루비는 금방 시무룩해져서 울먹였다. 그 바람에 당황한 그가 서둘러 오아시스로 걸음을 옮겼다. “다 왔네. 이제 너 알아서 놀든가.” “삐이!” 플루비는 잔뜩 신난 기색으로 날개를 파닥였다. 그래 봤자 날아오르진 못하고 짧은 다리로 물을 향해 종종 뛰어가는 놈을 쳐다보며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얌마, 그렇다고 너무 커지면 사람들 놀라니까 물은 조금만 마시고.” 그의 당부를 알아들은 플루비는 물에 들어가지 않고 근처 촉촉한 땅바닥에 일단 몸을 비볐다. 그리고 고개만 쑥 뻗어 물을 할짝할짝 핥아먹기 시작했다. 바이칼은 그 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 문득 이상한 느낌에 주변을 훑어보았다. 플루비가 물을 할짝거리는 소리 외에 거슬리는 소리가 하나 더 있었다. “흑…… 흑흑…….” “아아아 쫌! 진짜!” 하필 괴담을 몹시 두려워하는 바이칼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루바흐에서 만났던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를 떠올리곤 밀려오는 신경질에 이를 갈았다. “왜, 왜 자꾸 나한테만.” “으흡, 흑흑, 흑흑흑.” “…….” 어둠에 잠긴 오아시스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그의 등골이 쭈뼛 서도록 만들었다. 바이칼은 견디지 못하고 어색하게 플루비를 불렀다. “플루비, 얌마.” “삐잉?” 그사이 물을 신나게 켜고 대형견 수준으로 몸이 불어난 플루비가 뒤뚱뒤뚱 달려왔다. 바이칼은 플루비를 덥석 끌어안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너도 이 소리 들려?” “삐?” “막 사람 우는 소리 같은 거.” “삐이이!” 플루비는 꼬리를 한 번 살랑이고는 그의 품에서 홱 벗어났다. 놀란 바이칼이 놈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미 앞으로 우다다 달려 나간 상태였다. 그는 공포에 떨면서도 플루비를 쫓아 다리를 움직였다. “어, 어, 어디 갔어……?” “삐익.” 어둠 속에서 답이 돌아왔다. 바이칼은 부들부들 떨리는 걸음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향해 다가갔다. “플루비?” “훌쩍. 누구세요?” “으히이익!” 갑자기 물가에서 일어선 사람과 마주친 바이칼은 그대로 숨이 넘어갈 뻔했다. 놀라 엉덩방아를 찧은 그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상대방은 눈물을 닦으며 인사했다. “아, 크리스 경과 같은 기사님……훌쩍.” “……유리엘 양?” 다행히도 서로 아는 사이였다. 바이칼은 그제야 귀신이 아니라 실제 사람이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쓱하게 엉덩이를 털며 일어선 그를 향해 유리엘이 콧물을 훌쩍거리며 물었다.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산책이죠, 산책. 으하하.” “삐이!” 그에게 달려와 다시 안긴 플루비가 긴 꼬리를 휘저으며 기분 좋게 울었다. “늦은 밤에도 펫을 산책시켜 주다니. 대단해요.” “아니 뭐. 그러는 유리엘 양은 여기서 왜.” 차마 왜 울고 있었냐고 묻지는 못하고 어설프게 말이 끊겼다. 유리엘은 헤헤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차였으니까요. 태어나서 처음 고백한 건데.” “크흠. 그거 안타깝군요. 힘내십쇼!” 이번에도 상처받을까 차마 크리스티나가 실은 여자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못하고 어설픈 위로만 흘러나왔다. “아뇨, 전혀 안타깝지 않아요.” 유리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크리스 경 말이 맞았어요. 내가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그렇습니까?” “네, 심지어 지금 돈도 똑 떨어져서 밥도 못 사먹는 신세예요. 낙타를 팔아야 며칠 빵이라도 사먹을 텐데.” “어이고, 그런 상황에서 잘도 따라왔습니다?”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무모하군요.” “그러게요. 정말 무모하고, 바보 같고, 하등 쓸모도 없는…… 그런 게 나였네요.” ‘아니,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바이칼이 당황하여 입을 다문 사이 그녀의 볼에 다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지저분해진 소매로 볼을 슥슥 닦아낸 유리엘은 오아시스를 바라보며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살며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말 할 줄 아는 게 없더라고요. 나 스스로 뭘 해야겠단 생각도 안 해봤어요. 그냥 결혼하면 다 해피엔딩일 줄 알았죠.” 바이칼은 조용히 그녀의 옆에 앉았다. 어두운 밤중에도 오아시스 위엔 달과 별이 둥실둥실 빛났다. “돈이 없어 서럽다는 게 뭔지 몰랐어요. 시즈 가문의 영애가 아닌 ‘그냥 유리엘’은 어디서도 내세울 게 없다는 것도. 제일 짜증나는 건 지금 이 와중에도 배가 고파 죽겠다는 거예요.” “그야 당연히 그렇겠죠. 몸은 거짓말을 못하니까.” “흐어엉! 너무 한심해서 창피해 죽을 것 같아요. 크리스 경이 얼마나 우스워했을지.” ‘아니, 그보단 좀 다른 의미로 우스웠을 것 같은데.’ 의도치 않게 남자로 오인받은 크리스티나의 입장은 그야말로 난센스였다. 바이칼은 싸하게 굳었던 그녀의 표정을 떠올리곤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뇨.” “잘 생각하셨…… 뭐요?” 당연히 집에 간다는 결론이 나올 줄 알았던 그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적어도 나 스스로 무언가 할 줄 알게 되고, 그걸로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을 책임질 수 있게 되고 나서.” 유리엘이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때 돌아갈래요.” 모래먼지를 뒤집어써 구질구질한 얼굴이었지만 유리엘은 환하게 웃었다. 마지막으로 속눈썹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톡 바닥으로 추락했다. “에이, 더는 쫓아다니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보지 마요. 이젠 정말 혼자서 다녀봐야죠.” “허, 정말입니까?” “네! 그래도 털어놓으니까 속이 엄청 시원하네요. 고마워요. ……참, 경은 이름이 뭐예요?” 그녀는 여태 상대방 이름도 모르고 떠들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미안한 표정을 짓는 유리엘을 향해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바이칼입니다.” “고마웠어요, 바이칼 경.” 바이칼은 그 순간 문득 이상하단 생각을 했다. ‘뭐지.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어두컴컴했는데 유리엘 양 근처는 좀 밝은 느낌이.’ 주변과 비교해 봐도 확연히 그랬다. 처음엔 어둠 속에서 눈이 익어 그런가보다 싶었던 것이 시야마법이라도 발동한 것처럼 세세한 움직임까지 잘 보이고 있었다. 바이칼은 그녀의 몸이 어둠 속에서도 스스로 미약하게나마 빛을 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가 멀어지는 유리엘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뻗으며 일어선 순간이었다. “잠시만…….” “으읍!?” 어둠 속에서 나타난 정체 모를 사내가 유리엘의 입을 손수건으로 틀어막았다. 불시에 입을 틀어 막혀 그 안에 묻은 마취가루를 들이켠 유리엘은 이내 시체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목격한 바이칼이 로브 속에서 황급히 스태프를 꺼내 들려 했다. “무슨 짓을!” 퍼억! 뒤통수가 후끈해지며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바이칼은 스태프를 놓치며 흐릿한 시야를 깜빡였다. “……어?” 주르륵, 목선을 타고 뜨끈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났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는 그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그 앞으로 유리엘을 둘러업은 사내가 다가왔다. “목격자는 어쩔까?” “치워야지. 일단 데리고 가.” 바이칼을 뒤에서 습격한 다른 패거리가 나타나 그를 똑같이 둘러업었다. 그러자 곁을 지키고 있던 플루비가 발작적으로 파닥거리며 이빨을 드러내고 달려들었다. “삐익! 삐애액!” “뭐야, 이 미친 새는.” 크기가 너무 작아 미처 와이번이라고까진 생각하지 못한 그들은 달려드는 플루비를 발로 뻥 걷어찼다. “끼엑.” 작아진 만큼 힘도 줄어든 플루비는 맥없이 발길질에 차여 데굴데굴 굴러갔다. 플루비가 오아시스 안으로 퐁당 빠지는 것까지 지켜본 사내들은 각각 유리엘과 바이칼을 짐짝처럼 짊어진 채 훌쩍 뛰어 자리를 벗어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간만에 쉬는 날이라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새해 짱..! 연휴 짱짱...!! Q. 그러고보니 옆동네마음읽는청년은 언제쯤오나요? A. 그...그 청년(?)은 지금 작업 중에 있습니다.ㅠㅠ;! 더 늦지 않게 들고 오겠습니다! 함께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0120 / 0240 ---------------------------------------------- 14장. 맹세 잠시 뒤, 고요하던 오아시스의 수면 위로 부글부글 거품이 올라왔다. 촤아아악- 거대한 두 날개가 먼저 물 밖으로 튀어나왔다. 차가운 물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사방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건 푸른 비늘로 뒤덮인 블루 와이번이었다. 본래의 몸 크기를 회복한 플루비가 번들거리는 주홍빛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예민한 와이번의 후각에 바이칼이 흘린 피 냄새가 잡혔다. “그르륵.” 혈흔만 남아 있을 뿐 어디에도 바이칼은 보이지 않았다. 플루비는 몹시 당황하여 목을 울렸다. 그리곤 있는 힘껏 울부짖었다. “뭐야! 무슨 소리지?” “습격인가?” 단잠에 빠져 있던 투숙객들이 혼비백산하여 깨어났다. 사방에 불이 밝혀지고 천막 밖으로 하나둘 달려 나오던 중 누군가 비명을 내질렀다. “드, 드래곤이다!” 용족의 구분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인들은 플루비를 드래곤이라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루비는 갑작스런 사태에 대한 불안과 놀람을 이기지 못하고 푸드덕 날아오른 상태였다. 놈은 비틀거리며 정신없이 질주하다가 이내 모래언덕 위로 브레스를 토해냈다. 길게 열선이 그어지며 확 치솟은 불길로 인해 후끈한 열기가 사막의 밤을 밝혔다. “플루비.” 그때, 플루비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태롭게 비행하던 플루비의 머리 위에 녹색 바람이 원을 그리며 흩어졌다. 놈의 거대한 머리 위에 내려선 쥬다스는 간단히 균형을 잡으며 날뛰는 플루비를 달랬다. “쉬이. 진정하련.” “…….” 후웅- 녹색 기류가 와이번의 두 날개와 몸통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바람의 인도를 따라 천천히 모래언덕에 내려앉은 플루비를 향해 나머지 일행이 말을 달려왔다. 휴게소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크워엉.” “그래, 착하구나. 플루비,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래?” 쥬다스는 플루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나직하게 물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무엇이든 그 내면을 읽어낼 수 있는 물의 정령왕 루니가 그의 곁에서 플루비의 기억을 읽어냈다. 「산책을 나왔다가 습격을 받았군. 유리엘이라는 인간과 함께.」 “……유니.” 「응, 피 냄새가 강해서 대충 위치는 찾은 것 같아. 그치만 문제가 하나 있어.」 유니는 곤란한 표정으로 포로록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어느 지점에서 딱 흔적이 끊겼어. 아마 땅속으로 들어간 것 같아.」 「땅속?」 「응, 거기서부턴 토니 네가 찾아봐.」 「헤헤~ 맡겨 달라요!」 두 정령은 깔끔하게 역할을 분담했다. 쥬다스는 플루비의 머리에서 내려와 한 손에 들고 있던 스태프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오아시스 앞에서 주워 온 바이칼의 물건이었다. 최고급 번개나무 가지를 깎아 만든 스태프에는 마법용어와 함께 소유주의 진명을 상징하는 ‘B’가 새겨 있었다. 투르케 사막에 진입하기 전 경비병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여자와 아이를 노리는 인신매매꾼이 있으니 각별히 주의해 달라, 였나.’ 설마하니 제국 최고의 인재양성기관인 루바흐를 졸업하여 황태자친위기사단에 입단한 마법기사가 인신매매꾼 따위에 당할 거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것도 비교적 어린 세이지나 여성인 크리스티나를 노린 게 아니라 하필 생뚱맞게 바이칼이 휘말린 탓에 동료들의 황당함은 더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휘말린 것일 테지만.’ 쥬다스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들의 본래 목표는 유리엘이고 우연히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바이칼도 화를 입은 셈이다. 가만히 스태프를 쥔 그의 곁으로 말을 끌고 온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하.” “바이칼 그 아이가 많이 다친 게 아니어야 할 텐데 말이다. 흠, 그러고 보니 이거 어쩐지 역할이 바뀐 것도 같구나.” “송구합니다.” 지킴을 받는 자가 역으로 수하를 구하러 가게 생긴 상황에 쥬다스는 살며시 농을 건넸다. 어찌할 바 몰라 하는 에단을 보며 그는 엷게 미소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탓하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찾아가려 했던 곳에 바이칼이 먼저 도착했을 뿐.”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플루비의 목덜미를 툭 두들겼다. 그 손길의 뜻을 알아들은 플루비가 한 차례 울부짖고는 훌쩍 날아올랐다. 모래회오리를 일으키며 밤하늘을 가른 플루비를 응시한 쥬다스가 이를 따라 말에 올라 고삐를 당겼다. “우리도 늦지 않게 도착해야지.” 반짝임을 실은 녹색 바람이 밤하늘의 별을 잇듯이 길게 뻗어나갔다. 유니가 안내한 장소는 오아시스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위치였다. 폭풍 같은 스피드로 먼저 바람을 타고 온 플루비는 텅 빈 사막언덕 위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착륙하는 법도 모르고 착륙할 만한 위치도 눈에 띄지 않았다. “끄워엉.” 플루비는 쓸쓸히 찬 공기를 가르며 울었다. 아무리 울어도 바이칼은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컹?” 커다란 주홍빛 눈망울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사막 위를 배회하던 플루비의 코로 익숙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모래더미에 반쯤 묻힌 채 널브러진 로브자락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바이칼의 로브였다. 플루비는 급한 마음에 속도를 늦추며 착륙자세를 취했다. 아직 속도가 완전히 늦춰지지 않은 채 내려앉느라 불안정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제 스스로 속도를 늦춰 착륙에 성공하던 찰나였다. “……?!” 그냥 모래언덕인 줄 알았던 지형이 늪처럼 쑥 꺼졌다. 플루비가 당황하여 날개를 퍼덕였으나 모래늪이 빨아들이는 힘은 성체가 된 블루 와이번조차 이겨내기 힘들 정도로 강했다. 일반적인 모래가 아니라 검은 사기가 작용하는 기괴한 지형이었다. 때문에 플루비는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더욱 빠르게 밑으로 가라앉았다. 이윽고 거대한 와이번을 통째로 삼켜 버린 모래늪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고요해졌다. * * * “……봐요. 저기요. 바이칼 경?” 시끄럽게 귓가를 울리는 여자 목소리에 바이칼은 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동굴 안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가 웅웅 울렸다. 그가 멍하니 누운 채로 눈을 끔뻑이자 누군가 눈앞에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흐어엉.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그는 산발하여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금색 머리카락을 보고 식겁하여 흐리멍덩하던 눈을 번쩍 떴다. 다행히 금방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기에 망정이지 도로 기절할 뻔했다. 엉망진창으로 울고 있는 유리엘이었다. “저 알아보겠어요? 네에?” “예이, 유리엘 양. 아주 잘 알아보겠으니까 좀 비켜주시죠.” 그는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턱턱 갈라져서 나왔다. 뒤통수에서 축축한 느낌도 들었다. 유리엘이 콧물을 킁 들이켜며 옆으로 물러나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앉을 수 있었다. 바이칼은 손으로 뒤통수를 슬쩍 훑어보았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가루와 함께 젖어 있던 핏물이 함께 묻어나왔다. “피를 많이 흘리셨어요. 저는 바이칼 경이 죽은 줄 알고! 흡.” “아니, 안 죽었는데요. 죽긴 왜 죽는 답니까? 거 불길한 소리는 됐고. 일단 여기가 어딘지 알겠습니까?” “훌쩍. 저도 사실 깬 지 얼마 안 되어서.” “……뭐 그래 보이긴 하네요.” 머리를 어떻게 맞은 건지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자꾸만 흐려지려는 시야를 다잡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우아앙!” “엄마…….” 유리엘만 울고 있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서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동굴 안에 그들을 포함하여 총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함께 갇혀 있는 게 보였다. 반은 울고 있고 반은 자포자기한 얼굴로 동굴 벽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입구는 두텁고 억센 그물 같은 것으로 막힌 상태였다. “아, 요즘 사막에서 자주 나타난다는 인신매매꾼들에게 끌려온 건가?” 바이칼은 멍하니 중얼거리며 그물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철사가 섞인 특수밧줄을 꼬아 만든 그물은 몹시 단단하게 얽혀 있어 칼로도 끊기 어려워 보였다. 지키는 자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인신매매 따위가 아니야.” 근처에 앉아 있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누군가가 단호히 부정했다. 바이칼이 돌아보자 메마른 시선을 바닥에 고정시키고 있는 젊은 여성이 보였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있으면 전부 다 죽어.” “허?” “놈들에게 먹혀서. 전부 다. 먹힐 거야.” 가뜩이나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러운데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해대는 통에 바이칼은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졌다. “놈들이라니. 뭡니까, 그게?” “…….” 여인은 더 이상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어깨를 떨 뿐이었다. 완전히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여인을 보며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일단 여길 나가야겠군. 로브와 스태프가 전부 없으니 마력이 많이 드는 마법은 무리겠는데.’ 바이칼은 천천히 주변의 마력을 제어하기 시작했다. 맨손으로 시전하는 마법진은 무척 속도가 더디고 미약했지만 계속 그 안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파직, 파지직- 그가 서 있는 바닥을 중심으로 파랗게 스파크가 피어났다. 전격계 마법사용을 위한 마력 배열이 완료되자 그는 힘겹게 시동어를 읊었다. “라이트닝 스피어(Lightning Sphere).” 눈앞이 번쩍하더니 동그란 구슬처럼 뭉친 전기에너지가 폭발하며 그물을 화끈하게 지져 버렸다. 충분히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큼 크게 구멍 뚫린 그물망 사이에선 여전히 빠직거리는 스파크가 튀었다. “후와, 마법기사셨어요?” 유리엘이 곁에 다가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히 빛나는 실루엣을 다시금 확인한 바이칼이 호흡을 고르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유리엘 양은 사제입니까?” “네?” “몸에서 나는 빛 말입니다. 신성력을 가진 자들만 그렇다고 들었는데요.” “빛이요? 저한테 그런 게 있어요?” 스스로 몸을 더듬어보는 모양새가 정작 본인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바이칼은 허탈하게 한숨을 푹 쉬었다. 신성력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사제라면 축복을 걸어주거나 정화를 사용하여 몸 상태를 조금 회복시킬 수 있다. 상처를 치료하는 데에선 치유술사만큼 탁월한 효과를 보진 못하지만 적어도 일시적으로 몸에 활력을 돌게 하며 체력을 높이고 정신력을 극대화시키는 등의 여러 가지 축복이 존재했다. 그는 아쉬운 눈으로 유리엘을 쳐다보다 일단 그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 밖은 무척 넓은 또 다른 굴로 이루어져 있었다. 굴이라기보단 마치 대강당처럼 넓게 펼쳐진 공간이었다. 높은 천장 어딘가에서 부슬부슬 모래가 가랑비처럼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여기 지하 같은데요. 어휴,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사막 밑에 뭔 땅굴을 파놓고 장사하나.” “가, 같이 가요.” 유리엘이 후다닥 구멍을 통해 따라 나왔다. 다른 사람들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자신들을 가둔 그물이 사라졌는데도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바이칼은 새롭게 마력배열을 준비했다. 치직 타오르며 바닥에 생겨나는 마법진을 발견한 유리엘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저 사람들 문이 열렸는데도 나오지 않는 거 보이죠?” “어? 그러네요. 왜 그럴까요?” “감시자가 있나 보죠. 무서울 정도로 못생긴.” 대충 완성되어가는 마법진에게서 시선을 뗀 바이칼이 옆을 향해 턱짓했다. 「……인간의 영혼.」 “힉.” 유리엘은 그가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고 손으로 입가를 틀어막았다. 그곳엔 발이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등 뒤에는 제 몸보다 크고 징그러운 뼈로 된 날개가 달려 있었다. 코와 입은 없었고 푹 파인 눈두덩이에서 죽은 흙이 흘러내리는 기괴한 몰골이었다. 녀석은 입이 없는데도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어 말했다. 「먹게 해줘.」 “으, 으으.” ‘사령인가.’ 겁에 질린 유리엘과 달리 대충 놈의 정체를 알아본 바이칼이 셔츠자락을 쥐고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씨익 웃었다. “하! 인신매매가 아니라 영혼매매였냐.” 「배고파…… 배고파…… 배고파.」 “망할.” 카갓! 턱이 찢어지며 입을 쩍 벌린 사령이 들개처럼 달려들었다. 유리엘이 새된 비명을 질렀고, 동시에 바이칼의 발밑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웅 하고 밝게 진동했다. 콰아앙! 불기둥이 일어나며 한 차례 폭발이 일어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일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사령에 관한 스토리가 진행됩니다.ㅎ 그리고 유리엘.... 중요인물은 아닙니다.;;ㅠㅠ 너, 너무 걱정하진 않으셔도...쿨럭... Q. 10쪽에 켜고=>들이키고 아닌가요 그리고 내 질문은 무시당했어... 다음부터는 골뱅이를 붙여야겠군 A. 앗, 질문하셨다고 생각을 미처 못했습니다! 그냥 의견을 이야기해주신 줄로만 알았어요 ㅎㅎㅎ 으아, 속상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꾸벅) 늦게나마 답을 드리자면, 크리스티나의 차림새는 여행자의상(긴바지)에 후드로브를 두르고, 홍건적(..)처럼 머리띠를 두른 상태입니다. 배경설정상 제국 남성/여성 모두 머리길이에 대해선 자유로운 편이라 남자가 장발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게다가 크리스티나는 파도의 정령이 등장한 파트에서 언급된 조상님(?)과 무척 닮았습니다. 어여쁜 중성느낌이 있습니다....는 물론 유리엘 자체가 순진해서 너무 단편적으로 판단하긴 했죠(...) 참, 그리고 '물을 켜다'는 평소 '물을 많이 마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표현이긴 한데... 아무래도 방언을 사용해버린 모양입니다.ㅠㅠ;; 여러모로 혼란을 드려 죄송합니다! 남은 연휴동안 즐거이 보내시길 바라며, 응원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ㅎ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0121 / 0240 ---------------------------------------------- 14장. 맹세 매캐한 연기가 가득 피어올랐다. 연신 기침을 내뱉는 유리엘의 팔목을 누군가 탁 붙잡았다. “엄마야!” “엄마고 아빠고 간에 일단 달립시다!” 바이칼이었다. 부상을 입은 데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고 심지어 전투 특화도 아닌 그가 사령을 상대로 싸운다는 자체가 무리수였다. 무슨 경위로 사령이 이 지하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도망이 최선이다. 놈이 화염계 마법에 타격을 입고 멈칫거리는 사이 그들은 제단처럼 생긴 넓은 공간을 가로질러 달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허무하게 멈춰야만 했다. 스르륵, 스륵- 바닥에서 솟아오른 흐릿한 형체가 점차 일정한 모습을 만들어냈다. 크고 징그러운 뼈 날개, 흘러내리는 검은 흙. 완전히 사령들 천지였다. 바이칼은 울먹이기 시작한 유리엘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에헤이, 괜히 달렸네요.” “흐엉.” 차라리 그물이 쳐져 있던 동굴 안이 안전할 지경이었다. 깨질 듯이 욱신거리는 머리는 더 이상 수식계산을 하기 적합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포기하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젠장! 졸업장이 아까워서라도 이딴 곳에서 죽을 수는 없어.’ 그가 루바흐에서 공부한 기간이 자그마치 6년이었다. 고생고생해서 마법을 익히고 졸업장을 따내 기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다시 고된 훈련의 나날이 이어졌다. 그 시간을 전부 합치면 자그마치 8년이었다. ‘게다가 이건 전하를 위해서도 아니고 완전히 개죽음이잖아?’ 본래 홀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학문을 연구하겠단 꿈도 접고 황태자를 지키고자 친위기사단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엉뚱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고 만 그로서는 억울함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생명에는 죽음을.」 「순수에는 타락을.」 「인간의 영혼…… 먹고 싶어.」 “으아아아, 시끄럽네 정말! 사람 피 말리지 말고 덤비려면 덤비든가!” 두 사람을 둥글게 포위한 채 점차 다가오는 사령들을 보며 바이칼이 버럭 소리 질렀다. 그러자 사령들은 움찔 조용해졌다. 「계약하자.」 「네 영혼을 걸고.」 「그래, 산 육체를 먹는 것보다 그쪽이 더.」 “닥쳐! 영혼을 먹겠다는 놈들이랑 계약 따윌 하겠냐!” 바이칼은 눈에 핏발이 서도록 마력을 움직여 마법진을 생성해 냈다. 화염계 마법이었다. 하지만 이를 터뜨릴 새도 없이 갑자기 천장에서 우르릉 천둥소리가 울렸다. 텅― 쿠쿵― 콰콰콱― 가만 듣고 있자니 거대한 무언가가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또 뭔데?” 불안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한 바이칼의 얼굴 위로 사르륵 모래가 떨어졌다. 그 순간 위험을 감지한 사령들이 스르르 사방으로 흩어졌다. “미친, 엎드려요!” “네? 엄마야아아!” 콰앙!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그러자 어마어마한 양의 모래가 지하공간을 덮쳤다. 바이칼이 유리엘을 감싸며 서둘러 엎드린 탓에 크게 타격을 받진 않았지만 코와 입으로 들어간 모래 때문에 정신없이 기침이 터져 나왔다. 바이칼과 유리엘은 쿨럭이며 모래를 헤치고 일어섰다. “으으으. 괜찮아요, 바이칼 경?” “이게 지금 괜찮아 보입니까?” “어, 아뇨.” 본래 밤색이었던 머리는 모래먼지와 피가 뒤섞여 잔뜩 떡이 져 있었다. 갑자기 쏟아진 모래에 맞아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진 피부는 척 보기에도 아파 보였고 장비도 없이 연이어 마법을 사용하느라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했던 유리엘이 그를 부축했다. “휴우, 놀래라. 이대로 모래에 파묻혀 죽는 건가 했어요.” “크르르르.” 지척에서 들리는 섬뜩한 소리에 유리엘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번뜩이고 있는 하얀 송곳니가 보였다. “차라리 모래에 파묻히는 게 나았을지도…….” 맹수의 뜨거운 콧김이 후욱 그들을 덮쳤다. 유리엘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지만 정신을 다잡고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의도와 달리 부축하고 있던 바이칼이 불쑥 앞으로 몸을 이끌었다. 그 바람에 함께 딸려간 유리엘이 비명을 지르려던 순간이었다. “와씨! 야 플루비―! 너 이 빌어먹게 기특한 자식. 여길 어떻게!” “끼우우웅.” 바이칼이 덥석 주둥이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아는 사이세요?” “플루빕니다, 플루비. 그러고 보니 유리엘 양도 봤었잖아요?” “제가요? 언제?” 거대한 푸른 와이번이 비둘기처럼 꾸구국 목을 울렸다. “여기 오기 직전에, 오아시스 앞에서.” 그 말에 유리엘은 오아시스 앞에서 쫑쫑 뛰어다니던 미니 와이번을 떠올렸다. 기껏해야 대형견 크기였던 플루비였지만 확실히 푸른 비늘이며 날개, 짧은 다리와 긴 꼬리 등 생김새는 전부 일치했다. 그녀가 설마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사이 바이칼은 플루비의 콧등을 쓸어주며 물었다. “플루비, 너 여기 어떻게 들어온 거야? 다시 나갈 수 있냐?” “꾸앙?” 거대한 블루 와이번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갸우뚱했다. 놈의 큰 몸통 위로 꾸물꾸물 저절로 다시 막혀 버리는 천장이 보였다. “그건 불가능해, 친구. 보다시피 여긴 사령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공간이니까.” 갑작스레 그들의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한 번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수 없는 곳이지.” 플루비가 사납게 크르륵거렸다. 검은색 후드 망토를 두르고 나타난 건 한 무리의 사령술사였다. 대충 세기에도 머릿수가 열이 넘었다. 그 주변으로 사령이 스르르 몰려들었다. 이를 본 바이칼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각보다 더 개 같은 곳이네.” “제법 수준 높은 마법사였던 모양이지? 별 기대 없이 데려온 게 하필 이능력자라. 좋은 제물이 되겠어.” 사령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영혼을 먹이로서 가장 좋아한다. 마찬가지로 순결한 처녀가 가진 생명력도 선호하며 또한 이능을 가진 존재를 제물로 바칠 경우 그 힘을 흡수하여 강력한 죽음의 에너지로 변환시킬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바이칼은 기분이 더 개 같아지고 말았다. 꼭 A급 판정을 받은 돼지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그때 사납게 으르렁거리던 플루비가 입안에 후욱 뜨거운 열기를 머금었다. 날카로운 잇새 사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붉은 불꽃으로 변해 토해졌다. 지하공간이 지진이라도 나듯 흔들렸고 땅에서 불길이 치솟아 사령 몇 마리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후끈하게 덮쳐오는 열기에 닿은 사령들은 솜사탕 물에 녹듯 녹아 사라져 버렸다. “이 멍청한! 사령의 힘이 부족해지면 이 지하공간도 무너져 내린다고!” 사령술사들이 분개하여 소리쳤지만 바이칼은 코웃음을 치며 플루비의 등에 올라탔다. 유리엘도 얼떨결에 손을 잡혀 함께 와이번 위로 끌려 올라가 덜덜 떨었다. “내 알 바냐. 깔려 죽나 먹혀서 죽나 어차피 죽는 건 똑같은데.” “뭐?” “그럴 바엔 발악이라도 해보려고.” 그야말로 단순무식한 발언이었다. 황당함으로 가득 찬 사령술사들의 시선을 받으며 바이칼은 플루비의 뿔을 단단히 붙들었다. “마음껏 날뛰어라, 플루비.” “……!” 곧이어 블루 와이번의 포효 소리가 지하공간을 가득 메웠다. 포효만으로 지진이라도 나듯 땅이 흔들렸다. 플루비는 퍼드득 날아올라 천장을 향해 마구잡이로 브레스를 뿜었다. 쾅! 콰앙! 한번 불길이 치솟을 때마다 사령술로 유지되고 있던 천장에서 우수수 모래가 떨어졌다. 거대한 와이번이 날뛰는 통에 브레스에 맞아 타죽거나 부상을 입는 사령술사들도 속출했다. 당황한 사령술사 무리는 급히 사령을 부려 와이번을 제압하려 들었다. “캬아앙!” 그러나 명색이 용족에 해당하는 와이번이 몸부림치자 아직 힘이 약한 하급 사령들은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천장이 쩌적 갈라지며 모래가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와이번의 등에 매달려 있던 유리엘이 울먹거리며 물었다. “지, 진짜 깔려 죽으려고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바이칼은 씩 웃으며 그동안 배열하고 있던 마력을 한 번에 움직였다. “타임 포즈(Time Pause)!” 우웅- 천장에 마법진이 나타나며 쏟아지던 모래가 그대로 정지했다. “맙소사, 모래폭포가 멈췄네요!” “하아……. 일시적이긴 하지만 플루비가 뚫고 나갈 정도는 가능하겠죠.” 마력을 한계치까지 사용한 바이칼이 창백한 얼굴로 호흡을 골랐다. 그사이 바이칼의 의도를 알아차린 플루비가 쏜살같이 구멍이 뚫린 천장으로 방향을 틀어 날았다. 그리고 곧장 모래폭포를 뚫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던 순간이었다. 촤르르륵- 검은 사슬이 날아와 플루비의 뒷다리를 포박했다. 그 바람에 위로 솟구치던 플루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휘청거렸다. 연이어 날아온 다른 사슬들이 플루비의 두 날개도 마저 포박하자, 그들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어 크게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쿵 하고 굉장한 소리가 났다. “블루 와이번, 성가신 펫이로군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다리와 날개가 쇠사슬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게 된 플루비를 향해 후드를 뒤집어쓴 작은 소년이 걸어왔다. “그냥 죽이기엔 아까울 정도로.” 그는 그리 말하며 후드를 벗었다. 흑갈색 피부에 짧게 자른 머리도 까맸다. 온통 어두운 가운데서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홀로 빛났다. “오셨습니까, 할더 님.” ‘할더?’ 기껏해야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을 향해 사령술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갑자기 추락하는 바람에 플루비의 등에서 굴러 떨어졌던 바이칼은 쓰러진 채 흐려지는 시야를 회복하려 애썼다. ‘단순한 어린애는 아닌 것 같은데. 이놈들 우두머리인가? 망할! 이젠 정말 더 이상 쓰고 죽으래도 사용할 마력이 없다고.’ 부상당한 몸으로 무리에 무리를 더해 한계에 치달았다. 정말 죽을 각오로 마력을 끌어모아도 제대로 된 마법을 구사하는 건 무리였다. 그는 간신히 손바닥으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피가 섞인 모래를 퉤 뱉어내며 갑자기 난입한 소년 할더를 바라보았다. “남의 걸 빼앗는 건 내 전공이 아닌데…….” 할더는 잠시 고민하듯 턱을 짚었다. “흠, 하는 수 없네요. 프리드를 조금 흉내 내볼까.”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한 손을 플루비를 향해 들어 올렸다. 우웅- 할더의 손바닥에서 검은 사령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 기운은 바람처럼 날아가 포박당한 플루비를 감싸기 시작했다. “플루비! 젠장, 플루비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괴로워하는 플루비를 돌아본 바이칼이 맨손으로 할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심히 그를 쳐다본 할더가 반대 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장막이 생겨났다. 퍽 하고 장막에 부딪힌 바이칼이 쓰러지자 할더는 천천히 그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생의 와이번이라면 사령의 힘을 사용한다 해도 길들일 수 없는 게 당연하겠지만. 신기하네요, 인간을 따르는 용족이라.” “……이 자식.” “그 마음을 약간만 오염시킨다면 아름답고도 비천한 악룡을 탄생시킬 수 있겠죠.” 어린아이의 외형이면서도 표정만큼은 지독하게 무감정했다. 바이칼은 쓰러진 채 주먹을 콱 말아 쥐었다. “도망쳐, 플루비!” “소용없어요. 이제 곧 내 것이 될 테니. 아, 마침 당신이 제물이 되어준다면 좋겠군요.” 소년 특유의 미성이 그의 귓가에 노랫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사랑스러운 자의 영혼을 먹고 타락하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뭐죠, 왜 연휴가 끝나있는걸까요...! 시간여행이라도 한 기분입니다. 으헐. 벌써 또 일하는 날이 돌아오다니ㅠㅠ 예전에 스치듯 지나간 이름이긴 하지만 '할더'는 과거 이그레트를 배신했던 3인조(?)중 한명입니다. 프리드, 할더, 그리고 레이야라는 노예소녀가 있었습니다. 코멘트, 추천, 후원쿠폰 등 보내주신 응원에 감사드리며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0122 / 0240 ---------------------------------------------- 14장. 맹세 사령의 저주는 순식간에 플루비의 정신에 침투했다. ‘신룡이여, 제물을 바칠 테니 부디 자비를.’ ‘꺄아악!’ ‘신룡님이 노하셨다―!’ 처음부터 자신을 두려워하고 멀리서 먹이만 가져다 놓던 인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블루 와이번은 천성적으로 양순하고 싸움을 싫어하는 종족이다. 또한 외로움을 잘 타 무리 지어 생활하는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루비의 외향을 보고 지레 겁을 먹은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숭배하여 신룡으로 떠받들 뿐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홀로 호수에 갇히다시피 하여 백 년이란 세월을 외롭게 보내야 했던 플루비는 그 쓸쓸함이 뼛속 깊이 사무쳐 있었다. 사령은 바로 그 고독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주홍빛 동공을 제외한 눈알이 온통 검게 물들었다. ‘맙소사, 해변에 몬스터가 나타났어!’ ‘죽여!’ ‘대포를 쏴!’ 태어나 처음 바다에 갔을 때도 플루비는 혼자였다. 동족에게 핍박받아 해변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나마 백 년간 보아온 인간이란 존재에 반가움을 느끼고 다가갔지만 그들은 자신을 보고 포탄과 마법을 갈기며 쫓아냈을 뿐이었다. “크르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며 쥬다스 일행과의 만남은 밑바닥으로 가라앉아 잊혀졌다. 플루비는 검게 물든 눈으로 스륵 고개를 들었다. “이봐, 플루비?” “크워어엉!” 사령에게 반쯤 잠식당한 플루비는 괴성을 내지르며 입안에 불길을 머금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후욱 내뿜었다. 타오르는 화염은 송이버섯처럼 둥글게 부풀어 오르다 다시 한 번 천장에 맞닿아 폭발했다. 그 바람에 간신히 유지되고 있던 정지 마법이 풀려 모래폭포가 다시 쏟아져 내렸다. 쿠쿵, 날뛰는 플루비에 의해 지하공간은 속절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할더를 제외한 사령술사들은 우왕좌왕거리다 무너지는 모래더미를 피해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유리엘도 어디론가 사라져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모래세례를 받으면서도 자리에 남아 있는 건 할더와 바이칼 둘뿐이었다. “펫을 쓸쓸하게 만드는 주인이라니. 떠올리기 싫을 만도 하군요.” “…….” “그래서 잘 돌보지 못할 거면 함부로 펫을 기르는 게 아니라고 하죠.” 대답이 없는 바이칼을 빤히 쳐다보던 할더는 무표정한 채로 손가락을 들어 올려 까딱였다. 그러자 플루비가 마치 잘 훈련된 돌고래처럼 즉각 그에게로 날아들었다. “더 이상 쓸쓸해하지 않을 겁니다. 무능한 주인 대신 제가 잘 길러드릴 테니까요.” “……마.” 양순하게 고개를 숙인 블루 와이번의 뿔을 매만지던 찰나였다. 할더는 무심한 눈으로 다시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가지 마, 플루비.” 도발에는 일절 반응하지 않고 오직 플루비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인 채로도 자신의 동료를 걱정하는 바이칼을 보며 할더가 처음으로 표정을 바꾸었다. 잔혹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조소였다. “그렇게 걱정되면 함께 가면 되겠네요.” 슈욱- 할더의 손아귀에 검은 기운이 뭉쳐 무구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어린 소년이 들기엔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다란 창이었다. 할더는 가뿐히 이를 들고 바이칼을 겨누었다. “영원히.” 다트를 던지듯 한 손으로 던진 창은 휙 날아가 바이칼의 어깨에 꽂혔다. 피한다고 피한 건데도 워낙 빠르게 날아와 심장 대신 어깨를 관통해 버린 것이다. 창대를 잡고 이를 악문 바이칼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어먹게…… 신경 쓰이는 뱀대가리 같으니…….” 후두둑- 모래뿐 아니라 짙은 핏물이 함께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혈향을 맡은 플루비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꾸구국?” “그 비둘기 소리는 또 언제 배워왔냐.” 말은 진짜 더럽게 안 듣지, 바이칼이 투덜거리며 플루비의 앞까지 다가왔다. 뼈째 집어삼키라는 사령의 지배를 듣지 않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고만 있는 플루비를 보며 할더가 한숨과 함께 허리에 손을 얹었다. ‘프리드가 했다면 완벽했겠지만 역시 내 정신지배는 이 정도까지인가. 흠, 공포심을 건드려 본다면 어떨까?’ 그는 사령을 슬쩍 플루비의 가장 깊은 곳에 내재된 공포에 침투시켰다. 보통 가장 두려웠던 순간을 떠올리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에 쉽사리 지배당하는 법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플루비에게만큼은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됐냐? 너 날 수 있을 때까지 여기 붙어 있을 테니까. 어디 한번 날갯짓 해보든지.’ ‘멈추지 말고 계속해 봐!’ ‘자, 자, 자자자잠깐!?’ 플루비가 가장 큰 공포 상황이라 느끼는 순간은 고공비행을 할 때였다. 하지만 첫 비행부터 죽 플루비와 함께 공포에 떨었던 존재가 있었다. 사령의 침식에 시달리던 와이번은 밑으로 가라앉았던 기억 속에서 그를 발견해 냈다. 플루비의 검게 물든 눈이 점차 본래 색을 되찾아갔다. “크르륵.” 그렇지만 사령으로부터 완벽히 제정신을 찾은 건 아니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바이칼을 쳐다보던 플루비는 마지막 저항이라도 하듯 거칠게 포효했다. 놈의 잇새 사이로 몰려드는 뜨거운 브레스를 발견한 바이칼이 자리에 푹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돌겠네.” “안 돼!” 할더는 멈칫 고개를 돌려 그들 사이에 끼어든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바이칼도 그녀를 발견하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리엘 양?!” 양팔을 벌려 바이칼의 앞을 막아선 유리엘은 공포에 희게 질렸으면서도 꿋꿋한 눈으로 플루비를 올려다보았다. “허, 도망친 게 아니었습니까?” “도망치고 싶었죠. 지금도 도망가고 싶은데 어차피 여길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잠시 떨리는 호흡을 고른 유리엘이 다시 말했다. “사령인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자기가 주인으로 따르고 사랑했던 사람이 누군지조차 잊어버린 채 죽이려 하다니! 그런 건 너무 비참해요.” 그녀 스스로는 그저 순수하게 애통함을 느껴 무턱대고 앞을 막아섰을 뿐이지만 바이칼과 할더는 동시에 유리엘이 가진 힘을 눈치챘다. 신성력. 마치 사령과 정령이 상극의 힘이듯, 죽음의 기운을 양분 삼아 움직이는 사령과 신의 축복이 가득한 신성력도 역시 상극이다. 신성과 정령은 둘 다 생명을 사랑하고 축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었다. 다만 정령의 힘은 각 속성과 계약자에게 한해서만 발동된다는 전제조건이 있을 뿐이다. 타인을 축복하거나 그 뜻이 공평하지 않다. 반면 신성력은 조건 없이 발동되며 누구나 기꺼이 공평한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제대로 발현된 건 아니지만 은은하게 감돌고 있는 신성력에 의해 사령이 조금씩 플루비의 정신세계에서 밀려나고 있는 중이었다. 신성력에 의한 ‘정화’였다. 이를 확인한 할더는 덤덤히 입을 열었다. “아, 귀찮게 됐네요.” 우우우우- 검은 사령들이 사방에서 땅을 뚫고 치솟아올랐다. 그 모습이 흡사 무덤을 열고 나오는 좀비와도 같았다. 단 하나의 사령술사가 바라는 의지에 따라 수십의 사령이 군대처럼 움직였다. 보아하니 다른 사령술사들은 기껏해야 각기 서너 마리를 다루고 있었고, 지하공간을 유지하는 사령들은 할더의 계약하에 움직이는 게 태반이었다. 할더는 프리드가 다루는 릴리스처럼 사령왕급의 거대한 힘은 아니더라도 한꺼번에 많은 사령을 부릴 수 있었다. “정리하죠. 모아둔 제물은 지금 즉시 흡수하도록 하세요. 이 시간 이후 여긴 폐쇄합니다.” “예! 할더 님.”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사령술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가둬두었던 사람들을 끄집어냈다. 죽음을 직감한 사람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너 이 자식, 이게 다 뭐 하는 짓이야.” “내가 가질 수 없는 건 차라리 없애야죠. 남도 가질 수 없도록.” 할더는 엉망진창으로 다친 채 그를 노려보는 바이칼과 제정신을 차린 플루비, 그리고 유리엘을 한 차례씩 훑어보았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입은 게 아니잖아요?” “미친놈.” 쌈박한 평가를 듣고도 할더의 표정에는 털끝만큼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답했다. “미친놈이 세상 살기엔 편하더군요.”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기어 나온 사령들이 손톱을 길게 빼고 달려들었다. 천장에선 끊임없이 모래가 흘러내렸고 땅에선 죽은 자들의 군단이 솟아나와 몰려든다. 사면초가의 상황에 몰린 바이칼과 유리엘을 플루비가 확 온몸으로 막아섰다. “플루비!?” 제아무리 단단한 와이번의 비늘이라 해도 사령의 공격에 멀쩡할 리가 없었다. 바이칼이 놈을 밀쳐내려 했지만 단단한 성벽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등을 돌려 거대한 날개를 휘장처럼 펼친 채 두 사람을 감싸 대신 공격을 대신 받아낸 플루비는 바이칼을 내려다보며 작게 울었다. “끼이이―” “이 멍청아. 울긴 왜 울어.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거든?” 비틀거리며 가까이 다가선 바이칼이 방울방울 눈물을 떨구며 울고 있는 플루비의 주둥이를 끌어안았다. 꽈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감싼 날개가 꿰뚫렸다. 푸른 비늘이 조각나 깨어지고 구멍 난 날개 사이사이로 붉은 안광이 빛났다. 먹이를 쫓는 박쥐 떼처럼 몰려든 사령들이 어둠보다 더 검게 물든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통에 울부짖은 플루비를 끌어안은 채 바이칼이 속삭였다. “찾아와 줘서 고마웠다, 친구.” 마지막 인사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유리엘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는 머리 위에서 파스스 흩날리는 푸른 비늘 가루와 피 냄새, 울부짖는 소리를 견디다 결국 공포에 사로잡혀 풀썩 기절하고 말았다. 동시에 플루비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거목이 쓰러지듯 쿠웅 쓰러져 버렸다. 바이칼은 쓰러진 유리엘 쪽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플루비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플…… 루비…….” 에너지원으로 물을 사용하는 블루 와이번은 모든 에너지를 소모하자 다시 미니사이즈로 돌아갔다. 닭 한 마리 크기로 줄어든 플루비를 품에 안아 든 바이칼의 뒤에서 사령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그런데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우뚝! 시간이 정지하기라도 하듯 쏟아지던 모래와 모든 사령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거슬리는 존재들을 치우고 갈 셈으로 끝까지 지켜보던 할더의 무감정하던 눈에 흥미가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이건.” 드드드득- 모래로 된 천장이 종이가 찢기듯 간단히 갈라졌다. 제법 깊은 지하공간이었는데도 단번에 밤하늘이 올려다 보일 정도로 갈라진 땅 사이로 녹색 돌풍이 휘몰아쳤다.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뜨거운 화염을 실은 바람이 벼락처럼 대지에 내리꽂혔다. 화륵! 플루비를 안아 든 바이칼과 유리엘을 중심으로 화염이 파문처럼 타올랐다. 불길에 닿은 사령들은 눈송이처럼 녹아내렸다. 순식간에 깔끔하게 주변을 태워 버린 불길 속에서 바이칼이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곤 볼에 남은 눈물자국도 잊고 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또 늦으셨잖습니까, 주군.” “그 꼴을 하고 할 말인가? 창피한 줄을 알아라.” 녹색 바람을 타고 그들 앞으로 훌쩍 뛰어내린 크리스티나가 핀잔을 주었다. 그 뒤를 따라 다른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뛰어내려 자리를 잡았다. 순식간에 사막의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르르 전투배치가 완성되었다. “……그래, 내가 너무 늦은 모양이야. 미안하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걸어 나온 쥬다스가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어 바닥에 툭 버렸다. 어둠 속에서도 제국 유일의 은발은 달처럼 빛났다. “많이 다쳤구나.” “아, 아뇨. 괜찮습니다. 저보다는 플루비가.” 쥬다스는 어버버거리며 고개를 내젓는 바이칼의 머리를 툭 두들겨 주고 그를 지나쳤다. “치료하라.” “예!” 명을 받은 치유술사들이 달려와 바이칼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기 전 바이칼은 플루비의 상태를 먼저 봐줄 것을 요구했다. “함께 봐드리겠습니다. 와이번은 이쪽으로.” 다행히 플루비는 상태가 심각하긴 해도 죽을 정도까진 아니었다. 플루비와 함께 치료를 받으며 바이칼은 멍한 표정으로 쥬다스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쩐지 평소와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농을 농으로 받지 않으며 늘 부드럽게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화가 난 것도 같아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드디어 과거-현재 대립구도의 시작입니다. 근데 아직 초반부라는 게 함정.... (...) 어찌어찌 한주의 마지막이 왔네요. 행복한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ㅎ 늘 응원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0123 / 0240 ---------------------------------------------- 14장. 맹세 그 바람에 넋을 놓고 있던 바이칼에게 세이지가 다가와 물었다. “저, 괜찮은 거야?” “넵? 뭐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합니다.” “지금 거의 산송장으로 보이오만.” “……그 정돕니까?” 콜까지 한마디 거들자 바이칼은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려다 훅 엄습하는 고통에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오, 더럽게 아프네.” 그리 중얼거리는 바이칼의 곁으로 에단이 툭 한마디 던지며 지나갔다. “할 말은 많지만.” “예?” “치료가 끝난 뒤에 몰아서 하도록 하지.” 그리곤 휙 지나쳐 쥬다스의 뒤에 가 섰다. 바이칼은 치료가 끝난 후엔 다른 의미의 죽음을 맛보게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추리해 내고 끙 자리에 드러누웠다. 바싹 마른 육포처럼 온몸에 마력이라곤 하나도 없고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리고 창에 꿰뚫린 어깨에선 불에 지지는 고통이 꾸역꾸역 숨을 달구고 있었다. 그로선 여태껏 정신을 놓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전하께선 왜 그런 표정을.’ 그간 좀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주군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 바이칼이 목격한 표정에는 약간이나마 뭐라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드러나 있었다. 빙산의 일각인 양 보이는 그 감정의 일부분은 분노와 가장 닮아 있었다. 얼떨떨함을 넘어서 불안까지 느끼기 시작한 바이칼의 염려대로 쥬다스는 현재 그리 평안한 심리 상태가 아니었다. “흐음. 일행인가요? 고기를 낚다 운 좋게 얻어걸린 송사리 한 마리라고 생각했는데.” “…….” “생각보다 거물을 끌어들인 모양이네요.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 할더는 상대의 은발과 금안으로 곧장 그의 정체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마찬가지로 쥬다스 역시 그를 알아보았고, 그랬기에 침묵을 택했다. “꼭 한번 만나보곤 싶었죠. 그 프리드가 관심을 가지는 것도 특이한 일이었지만. 전하껜 개인적으로도 흥미가 있었거든요.” 흥미가 있다는 사람치곤 지독하게 무감정한 어조였다. 프리드는 쥬다스를 만난 이후 누구에게도 ‘이그레트’의 환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더나 다른 그의 동료들은 쥬다스가 이그레트 본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할더는 지루해하는 아이처럼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자연계 4속성 정령과 전부 계약한 인간이 또 있다니. 과연 어떤 자기에 자연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분과 똑같은 찬사를 듣고 있는 걸까 해서…….” 고개를 살짝 기울인 할더가 손을 저어 남은 사령을 전부 물렸다. “그런데 정말 짜증나네요.” “무엇이 그리도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게냐.” “당연한 걸 물으시네요. 빛나도록 영특해 보이면서 정작 당연한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점마저 닮았군요.” 그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옅은 경멸을 담고 쥬다스를 향했다. “세상에서 위대한 자는 한 명으로 족해요. 그 칭송은 오직 이그레트 님을 위한 것이죠. 어리석은 당신이 아니라.” “너는 그를 싫어한 것 아니었느냐.” “싫어해요? 내가 그분을?” 할더는 고양이가 생선을 마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럴 리가요. 그분은 내 어버이, 내 하늘이신데.” 진심으로 존경하며 따랐다. 그는 차가운 세상에 버려진 자신을 거두어준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자의 심장을 찌르려 했던 이유는 단순했다. 진심으로 죽여 없애고자 한 건 아니었다. “단지 그분의 사상이 방해가 되었을 뿐이죠. 다신 눈을 뜨지 못하게 되든지, 타락하여 사령의 지배를 받든지. 어떤 모습이라도 곁에 살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까지 하고 있는 거지?’ 문득 자신이 평소답지 않게 입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할더가 잠시 멈칫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늘 만사에 무심하며 무엇이든 크게 흥미를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타인과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는 상황 따위는 경험하기 힘들었다. 특히 지금처럼 극히 개인적인 일에 대해서는 더더욱. ‘게다가 이상하네. 방금 그 말은 마치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할더가 의문을 품고 입을 다문 시점까지 가만 듣고만 있던 쥬다스의 금안에 잔잔한 분노가 일렁였다. 그 분노에 감응한 정령들이 일제히 파앗 실체화하여 그 곁에 나타났다. “어째서 저들이.” 할더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뒤로 훌쩍 물러섰다. 한때 이그레트의 가장 곁에 있던 이들 중 하나였던 만큼 정령왕들을 알아보는 일도 쉬웠다. “뭐죠.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지조 없네요, 당신들.” 「저게 진짜? 누굴 바람난 여편네 취급이야!」 「유니, 그 표현은 좀 상처예요. 저건 그냥 저 자식이 우릴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거라구요.」 「끄앙. 둘 다 상처다요!」 씩씩거리는 유니와 말리는 척하며 험악하게 동조하는 카니를 향해 토니가 도리질했다. 묵묵히 쥬다스의 곁에 선 푸른 늑대가 사나운 기세로 그르르 목을 울렸다. “하면 지하공간을 만든 건 일부러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나.” “……잡담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일행을 건드린 건 미안하게 됐습니다.” 애초에 당신 일행인 줄 알았으면 건드리지도 않았죠, 할더는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러자 쥬다스는 허공에 타오르는 불새를 하나 만들어냈다. 어둠을 밝히는 불새의 날갯짓에 할더가 후드를 뒤집어쓰며 중얼거렸다. “아, 이런. 곱게 보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 보죠.” 대답 대신 타오르는 불새가 그가 서 있던 자리로 돌진했다. 콰앙! 자비 없이 폭발하는 불기둥을 간발의 차로 피해낸 할더의 얼굴에 붉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큭.” 물러설 새도 주지 않고 사방에서 불기둥이 치솟았다. 빠져나가려 할수록 몸이 불타 사라지게 되는 ‘불의 감옥’이었다. 꼼짝없이 그 안에 갇혀 버린 할더를 향해 쥬다스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래. 너 역시 다른 사람과 타협할 생각은 없나 보구나.” 허공에서 눈 결정을 흩뿌리며 생성된 얼음검이 철컥 그의 손에 잡혔다. “할더.” “…….” 할더는 제 목에 맞닿아 피를 머금고 있는 날카로운 얼음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검신에 새겨진 빛나는 결정 문양과 날카로운 칼날, 잠깐 사이 물의 힘을 빌려 만들어낸 검치곤 정교한 구성이었다. ‘이것이 루바르잔의 황태자. 이상하다, 분명 만난 적이 없는데.’ 할더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사령술을 사용함에 있어서 프리드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지 못한 그로서는 지금의 육체가 죽으면 그대로 끝이었다. 생기를 흡수하는 사령술사의 특징상 늙지는 않았어도 죽음만큼은 피할 수 없다. 죽은 그의 시신을 프리드가 사령술로 되살리는 일이야 가능하겠지만 그건 그거대로 페널티가 너무 컸다. 따라서 지금 검에 베인다면 끝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할더는 덤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곤란하네. 이건 완전히 자충수네요.” 생전 처음 보는 깨끗한 금안이 얼음검처럼 시리게 그를 비추었다. “한 수만 봐주시면 안 됩니까? 저 지금 죽으면 정말 곤란한데요.” 쥬다스는 답하지 않고 검을 휙 들어 올렸다. 덤덤하게 그를 올려다보던 할더가 한숨과 함께 미리 포기하고 눈을 감던 순간이었다. 쩌엉! 곁을 경호하던 에단이 나서서 날아온 단검을 쳐 냈다. 단검은 가느다란 실에 연결되어 있어 다시 본래 주인에게로 돌아갔다. 그사이 탁, 유연한 몸놀림으로 할더의 곁에 내려선 습격자는 사납게 쥬다스를 노려보았다. 짧은 스커트에 검은 구두, 전체적으로 매혹적인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인상이었다. 어깨선에서 단정하게 정돈한 코코아색 단발머리가 부드럽게 찰랑였다. ‘레이야.’ 오랜 추억 속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소녀를 알아본 쥬다스가 작게 탄식했다. 전부 한때 가장 소중한 동료이자 가족 같던 아이들이었다. 예측하지 못한 인물의 등장에 놀라긴 했지만 이대로 그들을 놓칠 수는 없다. 그리 여긴 쥬다스가 정령의 힘을 움직이려던 찰나, 별안간 뒤쪽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끄아아!” “사, 살려줘!” 비명의 주체는 제물로 모아두었던 사람들이었다. 근처에 숨어 있던 사령들이 일제히 제물에 달려들어 그들을 뜯어먹기 시작한 것이다. “……!” 쥬다스는 황급히 그들을 향해 돌아섰다. 눈앞의 적도 중요했지만 잔혹하게 사령의 제물로 먹혀 가는 사람들을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다른 기사단원들도 즉시 투입하여 사령들을 상대하기 시작했지만 놈들을 해치우는 것과 달리 인간에게 달라붙은 사령을 안전하게 떼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생명과 그 원흉을 제거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이 우선인가를 따졌을 때, 쥬다스는 전자를 택했다. 그가 다루는 4속성 정령왕의 힘은 곧장 방향을 돌려 사람들을 보호했다. 그 짧은 사이에 레이야는 할더를 품에 안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자 등가죽과 옷자락을 찢고 까만 뼈와 피막으로 구성된 날개가 우드득 자라났다. 펄럭! 그녀의 등을 따라 돋아난 검은 박쥐 날개가 음산하게 바람을 갈랐다. 날개에서 흘러나온 피가 섞인 끈적한 액체가 투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끈거리는 검은 날개를 사용해 살짝 허공에 떠오른 그녀는 붙잡을 새도 없이 그대로 낙하하여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져 버렸다. 사령들이 사용하는 그림자 공간이동술이었다. 사령이 전부 사라진 지하공간에선 피 냄새와 고통에 울부짖는 소리만 가득했다. “전하.” “……우리도 일단 이곳에서 나가자꾸나. 치료가 필요한 이도 많아 보이니 말이다.” 잠시 할더와 레이야가 사라진 그림자를 응시하던 쥬다스는 곧장 발길을 돌렸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부상자들의 치료가 시급했다. 치료를 받던 중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린 바이칼은 차라리 양반이었다. 팔다리를 뜯어 먹히거나 산 채로 가슴이 꿰뚫린 자들도 있었다. 부상자와 구조자들을 데리고 지상으로 올라온 일행은 다시 오아시스 옆 휴게소로 돌아갔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의 신상을 조사해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는 건 조금 나중 문제였다. 일단 공포에 질린 그들을 진정시키고 상처를 돌보아주는 게 급선무다. 그리 명한 쥬다스는 홀로 자리를 빠져나와 거친 모래언덕을 올랐다. 휴게소가 내려다보이는 가까운 거리였지만 이렇게라도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자 함이었다. 슬슬 어둡던 하늘에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제 막 태어난 모래바람이 그를 한 차례 휘감고 지나쳐 갔다. 「이그레트.」 유니가 불안한 얼굴로 그의 볼을 쓸었다. 감정을 공유하는 그들에게 있어 괜찮냐는 질문은 무의미했다. 그래서 정령들은 그저 언제나처럼 조용히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남긴 후회들이 ‘이그레트’가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세상에 남아 있어.” 「…….」 “이제와 다시 죽는다 할지라도.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쥬다스는 깨달았다. 그가 남긴 후회는 하나가 아니었다. 작은 불씨인 줄 알았던 것이 마른 나무에 옮겨 붙고, 또 옮겨 붙어 이내 큰 산을 모조리 삼키려 하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분노? 슬픔? 아니, 그런 것보다는.’ 그저 두려웠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초콜렛 데이 잘 보내셨나요? ㅎ 저는 백화점에서 40% 세일을 하길래 두통이나!!!.....사서 먹었습니다. 아직 남았어요. 헤헤. 맛있습니다, 초코... ....맛있는데 왜 눈물이 흐르지.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ㅠ... 즐겁게 읽어주시고, 추천과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0124 / 0240 ---------------------------------------------- 14장. 맹세 자신이 만들어낸 불씨가 결국 주변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까 불안했다. 쥬다스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그는 과거의 잔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절벽 위에 핀 꽃처럼 흔들리는 감정을 감추려 눈을 감아 보았지만 불안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눈을 감고 서 있던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찌 쉬지 않고 여기까지 나온 게냐.” “……쥬다스 님.” 쥬다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엔 어느 틈엔가 와서 올곧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크리스티나가 서 있었다. “이런, 아무래도 내가 오늘 너희에게 퍽 미덥지 못하게 굴었나 보구나. 미안하다.”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크리스티나는 오히려.” 그녀는 쥬다스의 말을 단호히 부정했다. “미욱한 자신보다 전하를 더 깊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염려하는 뜻이야 주군을 섬기는 신하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는 것이니 사과를 거두어주시길 청합니다.” “그건.” “감히 말씀을 끊는 불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나 저 역시 그녀와 같은 생각입니다.” 에단이었다. 갑작스레 등장한 그를 향해 크리스티나가 놀란 시선을 던졌다. 에단은 천천히 그의 앞에 걸어가 허리를 숙였다. “원컨대 혹여 책하는 마음이 드시거든 전하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는 저희를 꾸중하시어 바로잡으소서.” “맞습니다, 형님. 아무것도 못한 건 저인걸요.” 에단과 반대편에서 나타난 세이지가 동의를 표했다. 어쩌다 보니 작정하고 모인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그 사실을 깨달은 그들은 하나같이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동시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원 녀석들. 죄 잠 못 들고 이리 산책을 나온 게냐? 하하, 다들 젊어서 그런지 새벽부터 기운도 좋구나.” 「아니, 그건 너도…….」 눈을 가늘게 뜨고 뚱하니 쳐다보는 유니를 손안에 감싸든 쥬다스가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올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고맙다.” “…….” 세이지는 살짝 고개를 숙였으며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조용히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이번 사건으로 마음이 들썩인 건 비단 쥬다스뿐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자책을 했고, 더러는 그를 더욱 우러러보게 되었으며, 또한 어떻게 해야 떳떳이 그의 곁을 지킬 수 있을지 막막해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한자리에 모인 셋은 같은 소망을 품었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이는 중상을 입어 병동 신세를 지고 있는 바이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나 지금 같아서는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각자 어떤 방향으로 강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위협하는 적이 어떤 존재이든 간에 전하께서 등을 맡기실 수 있도록.’ 친위기사단장이자 무에 대한 감각이 남달리 뛰어난 에단은 물리적인 강함을 원했으며, ‘한 발짝 뒤. 언제든 돌아보실 때마다 막힘없이 응답할 수 있는 거리만 된다면. 거기까지가 나의 역할이다.’ 크리스티나는 그가 기댈 수 있는 강한 신뢰관계를 원했고, ‘전하께서 구해주지 않았으면 그대로 죽을 셈이었냐.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지켜드리는 건 고사하고 민폐나 되지 말아야……. 그리고 플루비도 제대로 훈련을 해야겠어.’ 이번 사태에서 엉망으로 당하고 돌아온 바이칼이야말로 실질적인 힘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와이번에 대한 책임감을 덩달아 실감하였다. ‘나는 형님과 달라.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이지는. ‘하지만 할 수 없다고 해서 정말로 손 놓고 있을 순 없잖아? 형님의 뒤에 숨어 있을 뿐인 지금의 내가 가출 소녀와 다를 게 뭐야. 그녀는 차라리 용감하기라도 했지! 나도 무언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있어야 해.’ 본격적으로 다시 마법을 공부하고자 마음먹었다. 날 때부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어느 정도 기초 지식과 마법의 발현은 가능한 상태였으니 마법서적만 바이칼에게서 빌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정체되어 있던 소년소녀들의 성장이 더디게나마 흐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맹세를 품고 거친 모래언덕에서 내려왔다. * * * 동이 트자마자 쥬다스는 부상자들을 모아둔 임시 병동을 찾아가 한 명씩 상태를 살폈다. 빠르게 대처한다고 했지만 21명의 구조자 중 사망자가 셋이나 나왔다. 치명상을 입고 상태 회복에 애를 먹는 이들도 반은 되었으며 팔이나 다리를 영영 못 쓰게 된 피해자도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산지옥에서 자신들을 구해준 쥬다스에게 감사를 표했지만,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하는 이들도 존재했다. “흑흑, 차라리 아이가 죽을 때 나도 같이 죽게 놔두지 그랬어요…….” “이 다리를 가지고 어떻게 살라고!” “엄마는요? 우리 엄마도 찾아주세요. 네?” 쥬다스는 절망하여 오열하는 자들 앞에서 쩔쩔매는 대신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삶이며 그들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래였다. 그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젠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절망 속에 머물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사람들이 감정을 추스르고 집으로 돌아가거나 재기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 일행이 이곳을 떠난 후에도 연락을 받은 재난 관리팀에서 그들이 모두 있어야 할 장소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기로 하였다. 그렇게 깔끔하게 상황 정리를 하고 돌아선 쥬다스 대신 버럭 화를 내는 이가 있었다. “거, 입 좀 다물지. 지하에 하도 갇혀 있었더니 머리까지 돌았답니까? 도와준 사람보고 보따리 내놔라 짖어 대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 국법이요?” “네놈은 또 뭐야!” 어깨에 붕대를 감은 채 비딱한 자세로 벽에 기대 앉아 있던 바이칼이었다. 무릎에는 작게 변한 플루비가 둥글게 꼬리를 말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는 멀쩡한 왼손으로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말했다. “뭐긴 뭐야. 댁들처럼 모래늪에 끌려들어가서 숨질 뻔한 인간이지.” “너, 너는 잃은 게 없지? 우리처럼 가족을 잃고 팔다리를 잃은 게 아니니까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잖아! 우린 얼마나……!” 콰아앙! 잘려 나간 다리를 가리키며 시끄럽게 소리쳐 대던 피해자는 조개처럼 합 입을 다물었다. 소규모긴 하지만 화염 마법에 의해 누군가의 짐가방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 잿더미가 되어 있었다. 왼손만으로 마법을 시전한 바이칼이 성난 짐승마냥 위험스레 웃으며 말했다. “주둥아리 안 닥칩니까?” “이…….” “닥치라고요. 누가 그랬지?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아까 죽고 싶다던 사람만 계속 떠드세요.” “…….” 단체 환자를 수용 중이던 임시 병동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확 침묵이 감돌았다. 마지막으로 유리엘의 상태를 보러온 쥬다스만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미소 지었다. “저어.” “음?” 그를 향해 유리엘이 우울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바이칼과 플루비와 달리 유리엘은 큰 상처 없이 자잘한 찰과상만 입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처음 생기발랄하던 모습과 달리 잔뜩 기가 죽은 상태였다. 병동이라곤 해도 임시로 꾸려진 천막이었기에 침대는커녕 제대로 된 이불도 없었다. 보급용으로 주어진 두터운 갈색 담요를 두르고 앉은 유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쥬다스를 향해 감사인사를 전했다. “고맙습니다. 구해주셨다고 들었어요. 정신을 잃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네요.” “큰일을 겪어 많이 놀랐겠습니다.” “네, 정말 놀랐어요. 정말로요. ……하지만 저 중간에 한 번 깼었는데. 그때 분명 본 것 같아요. 아니, 봤어요.” 유리엘은 잔뜩 긴장한 채로 안절부절못해했다. 그 반응을 보고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쥬다스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게, 저. 본래는 은발이시죠?” “음.” “그, 그럼! 정말로 황……!” 저도 모르게 ‘황태자 전하’라고 소리칠 뻔했던 유리엘은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한 쥬다스를 보고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쥬다스는 난감한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발언을 막고는 고개를 저었다. “숨기고 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유리엘은 무형의 벽에 가로막힌 사람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답을 받으니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라웠다. ‘그럼 크리스 경은 누구지? 황태자 전하의 호위씩이나 된다면 평범한 기사는 아닐 텐데!’ 황태자의 호위는 처음부터 높은 품격을 지니고 엘리트 과정을 밟아 훈련받은 귀족만이 맡을 수 있다. 아무리 세상 이치에 맹한 유리엘이라 할지라도 그 정도 귀족적 상식은 알고 있었다. 잠시 크리스티나에 대해 의구심을 품었던 유리엘은 이내 그 상념이 쓸데없는 것임을 깨닫고 후우 한숨을 뱉었다. “죄송해요. 계속 폐만 끼치고. 저 때문에 바이칼 경까지.” “그건 너의 탓이라고만 볼 수 없다. 방심하고 있던 우리 모두의 실책이지.” “그치만, 전 정말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부모님 말씀대로 얌전히 결혼이나 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유리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담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돌아갈게요. 더 이상 고집 부려봤자 상황만 나빠질 뿐이니까요.” “그런가. 원치 않는 결혼으로 힘들지 않겠느냐.” “네! 괜찮아요. 해볼 만큼 해봤으니까요. 이젠 다 괜찮을 거예요.” 유리엘은 붕대로 감아둔 손바닥을 반대쪽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래, 정말 이걸로 된 거야. 내가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응석받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대로 돌아가서……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 거기까지 생각한 유리엘은 참고 있던 눈물을 소리 없이 삼켰다. 그때 고개 숙인 그녀의 귓가로 가버렸으리라 여긴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말이다.” “네……?” “다들 그렇단다. 알고 보면 정말 힘든데도, 아주아주 힘들어서 미칠 것 같다고 느끼고 있어도.” 그 말을 듣자 어쩐지 더욱 고개를 들기 힘들어졌다. 그런 유리엘을 다독거리기라도 하듯 쥬다스는 느리게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이 힘들다 보니 지금 힘들단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게다. ……그래, 누구나 겪는, 아니, 겪어야만 하는, 그래야만 하는 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니까. 잊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을 테지. 하지만 그걸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야.” 마치 그녀의 부모처럼 따뜻하게 어르는 어조였다. 유리엘은 뿌옇게 번진 시야를 들어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어렸지만 훨씬 강하며 어른스러웠다. 그러나 그만큼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얘야. 사는 게 늘 괜찮은 사람이란 한 사람도 없단다. 그러니 괜찮은 척하지 않아도 된다.” 쥬다스가 내민 손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크로스목걸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교황청 엘리시움에서 신성력을 판별하기 위해 제작한 특수 목걸이었다. 신성력을 가진 자가 이 목걸이를 걸면 은 목걸이가 신성력에 반응하여 붉게 물든다. 강한 신성력을 가질수록 그 붉은색이 강해지며 가장 강력한 신성력을 지닌 성녀 위그드라실이 착용할 경우 주변을 빨갛게 비추는 빛이 일어난다고 전해진다. 유리엘은 떨리는 손으로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처음엔 연한 분홍색으로 바뀌다가 이내 피처럼 붉게 변해버렸다. 색깔로만 보면 그 잠재능력이 굉장한 수준이었다. “교황청에 내 벗이 하나 있다. 네 이야기를 해주면 반갑게 맞이해 줄 테지. 자, 이제 선택지가 한 가지 더 생긴 셈이로구나. 어찌하겠느냐?” 유리엘은 크로스를 손바닥에 감싼 채 고개를 들었다. 아직 눈물방울이 남아 있는 얼굴 위로 해사한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발렌타인 때 애인이 있는데도 여친분께 초콜릿 못받으신 독자님...ㅠㅠ 세상이 그런 겁니다.(?) ...아, 아니 속상하셨겠습니다!ㅠㅠ;; 비록 저는 그 기분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요! (주르륵) Q. 작가님은... 남자분이셨나요?... A. ...아하하. 성별에 따른 고정관념이 생길까 일부러 밝히지는 않는 편입니다만, 아마도 독자님들이 생각하시는 그 성별이 맞을 겁니다.ㅎ Q. 작가님... 제 초코라도... (남자입니다...)ㄸㄹㄹ... A. .....크흡 친절하신 분....ㅠㅠ!! 사랑합니다. 그럼 화이트데이땐 제가 사탕을...(?) 늘 감사드리며, 행복한 월요일 보내셨길 바랍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0125 / 0240 ---------------------------------------------- 15장. 신기루 치유술사의 활약으로 바이칼은 빠르게 부상을 회복해 나갔다. 그 결과 사흘째 되는 날 상처는 전부 사라져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겉은 멀쩡해졌더라도 내상이 남아 아직 여행길을 떠나기엔 무리였기에 그들은 며칠 더 휴게소에 머물렀다. 회복이 더딘 건 오히려 플루비 쪽이었다. 바이칼을 감싸느라 날개가 찢어지고 비늘이 뜯기다 못해 쩍쩍 갈라질 정도로 공격을 받은 플루비는 상처가 나은 후에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비실거렸다. 작아진 채로 품에 안겨 하루 중 대부분을 수면 상태에 빠져 있는 플루비를 돌보는 건 역시 바이칼의 몫이었다. 이번엔 딱히 그러라고 시킨 사람은 없었는데도 대신 봐주겠다는 동료들의 제안마저 거절하고 그가 스스로 나섰다. 그 모습을 본 기사단원들은 뱀을 그리도 질색하더니 이젠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거냐며 놀려 댔다. ‘뱀이 좋아진 게 아니라 와이번이 아주 조금 편해졌을 뿐이라고! 무엇보다 이놈에게 목숨 빚을 졌으니까.’ 파충류는 아직도 질색이었다. 뱀 비늘과 뱀눈을 보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플루비에 한해서만큼은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바이칼은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정성껏 플루비의 비늘을 닦아주고 때마다 물을 먹이는 등 소중히 대했다. 그러는 사이 유리엘은 교황청에서 데리러 온 사제들을 따라 먼저 사막을 떠나게 되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다시 한 번 일행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동안 정말 여러모로 감사했어요. 특히 바이칼 경, 저 때문에 말려들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알고 그런 건 아니잖습니까? 나쁜 짓한 놈들이 나쁜 거지, 같은 피해자끼리 죄책감 느끼지 맙시다.” “아.” 바이칼은 손톱만큼도 유리엘을 원망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곧 에단으로부터 받게 될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한 지옥훈련을 걱정하느라 연신 눈치를 볼 뿐이었다. 그의 품에 안긴 플루비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유리엘을 향해 삑삑 울었다. “그리고…….” 유리엘은 망설이다 크리스티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꾸벅 인사했다. “크리스 경, 불편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 “다, 다음에! 제가 정말로 자신의 감정에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된 후에. 그때 다시 찾아뵈어도 괜찮을까요?!” 딴엔 큰 결심을 하고 떨리는 주먹마저 뒤로 감춘 채 묻는 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찾든 말든 그건 그대의 자유겠지. 개인의 행동마저 제한하진 않아.” “저어, 그럼 혹시 경의 본가를 알려주신다면.” “델피아.” “……에?” 수려한 입술 사이로 막힘없이 흘러나온 가문 명에 유리엘의 표정이 띵 하니 굳었다. 크리스티나는 짜증스레 한숨을 뱉으며 머리띠를 풀었다. 그러자 틀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며 찬란하게 반짝였다. 흡사 바다를 보는 듯 두 가지 푸른빛으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한 번 쓸어 넘긴 크리스티나가 재차 입을 열었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조용하지만 강한 목소리였다. 크리스티나는 오만한 눈으로 유리엘의 착각을 단방에 깨뜨렸다. “정확히는 기사가 아니라 여기 계신 전하께 검을 바친 델피아의 딸이다.” “……!” 그 말을 듣고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붉게 물들어 있던 유리엘의 얼굴이 다른 의미에서 화르륵 타올랐다. ‘크리스 경이 아니라 델피아 가문의 크리스티나 공녀님? 그러니까 결국.’ 사모하던 대상이 처음부터 같은 여자였다는 충격적인 진실을 깨달은 유리엘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입을 뻐끔거리다 그만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푹 숙였다. “어, 어으. 그럼 어떡, 으아아.” 창피함과 실망, 실연의 상처 등으로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그녀의 귓가로 또다시 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피해할 일인가.” 유리엘은 잘 익은 토마토처럼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차갑지만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바닷빛 눈동자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비록 그대의 행동이 내게 불쾌를 안겨주긴 했으나.” “윽.” “자신만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는 건 대단한 용기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허황된 거짓으로 이 나를 기만했다는 뜻일 터.” “아뇨! 그건 절대 아니에요!” 고백을 민망하리만치 딱 잘라 거절했었지만 그 진심마저 외면한 건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리엘은 복잡하던 머릿속을 전부 날려 버리고 생긋 웃었다. “정말, 정말로 좋아했어요. 거짓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요.” “하, 그래. 모자란 것보단 단순한 게 차라리 낫군.” “헤헤.” 칭찬이 아닌 소리에도 그저 웃음만 나왔다. 마냥 웃던 유리엘을 잠시 내려다보던 크리스티나는 다시 머리를 정리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단순한 용기만큼은 봐줄 만 해.” ‘……역시 ‘크리스 경’은 상냥해요.’ 유리엘은 살짝 고이려던 눈물방울을 얼른 소매로 훔치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언젠가 꼭 다시 만나러 오겠다는 꿋꿋한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교황청 사제들과 함께 투르케 사막을 떠났다.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집에 돌려보내지 않아도 정말 괜찮을까요? 저렇게 되면 어째 우리가 가출을 더 부추긴 느낌이.” “허허. 가출이 아니라 출가가 된 셈이 아니겠소이까?” 콜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의견을 덧붙였다. 그 말에 에단도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그녀 스스로 버틸 수 있으니 버티고 있을 뿐.” 집을 나와 겪게 된 갖은 설욕과 공포 등에 버티지 못했다면 이미 포기하고 돌아갔었을 테였다. 하지만 유리엘은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녀의 선택이었다. 마치 쥬다스를 중심으로 뭉쳐 각자의 맹세를 이루려 각자의 자리에서 버티고 있는 그들처럼. 그로부터 이틀이 더 지난 후에야 일행은 푹 쉬어 빤질빤질 윤기가 나는 말에 올라 휴게소를 떠났다. 푹푹 꺼지는 모래에도 크게 방해를 받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인챈트 효과 덕분에 말들은 신나게 사막을 가로질렀다. 중간에 들릴 목적지는 투르케 사막영토를 관리하는 중앙마을 알투르케였다. 정식명칭은 ‘투르케 리제너레이션 존(Trukei Regeneration Zone)’. 본래는 사막부족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던 곳이었지만 수년 전 사령술사 프리드의 습격으로 전멸한 이후 복원에 애를 먹은 지역이기도 했다. 특히 당시에 부족민 전원 몰살이라는 끔찍한 대참사가 일어난 탓에 텅 빈 고향으로 돌아온 아벨 투르케는 새로운 부족민들을 모아 중앙마을을 재건해 냈다. 그 위치가 바로 그들이 달려가고 있는 알트루케다. “그러고 보니 아벨 그 녀석 말입니다. 영 소심해서 재건이니 부흥이니 제대로 못할 줄 알았는데. 용케 해낸 모양이네요.” 거의 알투르케에 근접한 지점에서 바이칼이 문득 입을 열었다. 거기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동조했다. “확실히. 그건 예상외였지.” “과거 투르케 부족마을 그 이상으로 재건설해 냈다더군. 델피아까지 그에 대한 호평이 들려올 정도니.” 부족민부터 규율, 건축양식까지 완전히 새롭게 구성되었다고 전해진다. 투르케 사막 전역을 관리하기란 아직 역부족이었지만 아벨 투르케는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착실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부터 완벽하게 착공하고 있었다. 그 첫 시도인 알투르케의 재건은 가히 놀라우리만치 성공적이었다. 이에 대해 잠시 사담을 나누던 그들은 문득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그는 지난 모래늪 사건 이후로 줄곧 말을 아꼈다. 평소보다 좀 더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고 무언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쥬다스 님.” 지금처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작게 한숨을 쉬는 크리스티나를 힐끔 쳐다본 유니가 그의 볼을 쿡쿡 찌르며 정신을 일깨웠다. 「이그레트.」 “……응?” 「애들이 너 불러.」 정령의 부름을 듣고서야 그는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두의 시선이 제게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구나. 내게 할 말이 있었다면 다시 말해주겠느냐?” “아닙니다. 특별히 뜻을 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에단이 고개를 저었고 세이지가 대신 말을 이었다. “형님, 아벨 투르케가 그 물질계 거울정령과 계약했다는 사람이죠?” 아벨이 루바흐의 정령학 연구시설에 머무는 동안 세이지는 내내 침묵의 궁에 유폐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에 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직접적인 접점은 한 차례도 없었다. “그래. 지금쯤 둘 다 많이 자랐겠어.” “둘 다요?” 세이지뿐 아니라 그 대화에 참여하고 있던 전원이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쥬다스는 이에 대해 부드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아벨의 정령 투르키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을 게야. 계약 초반의 정령은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아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단다. 술사의 성향과 정신력에 비례해서 정령도 함께 성장하니 지금쯤 너희가 기억하는 모습과는 차이가 클지도 모르겠구나.” “그러고 보니 그 거울정령 녀석, 제대로 말도 못했었죠.” 바이칼이 턱을 짚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의지조차 표현하지 못하고 겨우 아벨의 말끝만 ‘~니다!’, ‘~했다아!’거리면서 따라했던 투르키였으니 과연 갓 태어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와도 같았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이칼은 문득 한 가지 더 의문점이 들어 슬쩍 손을 들었다. “어, 그 말씀은 혹시.” “음?” “정령등급과 관계없이 새로운 술사와 계약을 할 때마다 정령의 능력치가 초기화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 질문에 답해준 건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인 콜이었다. “어허, 반은 맞고 반은 틀리외다. 계약 시 능력치가 초기화되는 건 사실이지만 등급에는 분명히 영향을 받지요.” “등급에는 영향을 받는다고요?” “출발선에 차이가 있다는 뜻이요. 하급 봄바람의 정령이 따뜻한 미풍을 부르는 정도에서 시작한다면 최상급 봄바람의 정령은 크기가 작고 지속력이 낮은 토네이도를 만들어낼 수 있소이다.” “와. 역시 타고나길 잘 타고나야…….” 콜의 예시를 통해 극명한 차이를 깨달은 바이칼이 감탄하는 사이 에단이 점잖게 추가 질문을 던졌다. “하면, 정령왕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크흠. 정령왕이라면.” 콜은 묘한 시선으로 일행의 주변을 감싸 내내 가호하고 있는 녹색 바람결을 훑었다. “……술사가 원한다면야 한여름에라도 제국 전역을 뒤덮는 눈보라를 불러올 수 있겠지요.” “눈은 물 계열 아닌가요?” “정령왕급 정도가 되면 더 이상 속성은 큰 의미가 없지요. 바람의 정령왕이 허리케인을 몰고 오거나, 물의 정령왕이 뜨겁게 끓는 용암을 만들어낼 수도 있으니 이를 어느 한 속성이라 정의하기 힘들지 않겠소이까?” “크. 완전 사기네요, 사기. 그런 존재가 하나도 아니고 넷씩이나 단 한 사람에게 묶여 있을 수가 있다니.” 바이칼은 할아버지에게 옛 이야기를 듣는 손자처럼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제일 존경하던 이가 다름 아닌 ‘이그레트’였으니 거침없이 찬사가 튀어나왔다. “역시 그는 인간이 아닌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제 생각엔 아마도 드래곤이나 신이 아닐까!” 물론 그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옆에서 보고 있는 장본인으로서는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니, 아니. 그건 좀 비약인 듯싶구나.” “예? 쥬다스 님도 자연계 4속과 전부 계약하셨으니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경지인지 더 잘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플루비 이놈을 보니 용족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 말이죠. 아마도 용보다는 인간 세상에 현신한 천족 같은 게 아닐까요?” “…….” 들뜬 얼굴에 대고 더 이상 뭐라 부정하기도 힘들어진 쥬다스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사정을 알고 있는 콜만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채 어깨를 떨고 있을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5장 : 신기루' 챕터의 시작입니다.ㅎ 헉, 셋째 품으신 독자님 축하드립니다!! +_+ 올해 말 즈음엔 좋은 소식 들을 수 있는 건가요? (두근두근) Q. 보답으로 크리스티나가 쥬다스한테 츤츤거리며 사탕주는거라도... 주륵... A. 상상했다가 잘 어울려서 혼자 큭큭웃었네요. ㅋㅋㅋ 화이트데이즈음에 짤막하게 들고 오겠습니다 ㅎ 오늘도 즐겁게 읽어주셨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0126 / 0240 ---------------------------------------------- 15장. 신기루 일행은 소소한 잡담을 뒤로한 채 다시 이동에 집중했다. 구름 한 점 끼지 않은 하늘에서는 뜨거운 태양광이 내리쬐었다. 잠시 뒤 그들은 달리던 속도를 줄이며 위치를 점검했다. “뭔가 빙빙 도는 느낌인데요. 단장, 우리가 지금 어디쯤 온 겁니까?” “지도상으론 이미 도착하고도 남았을 위치다.” 출발할 때 예측했던 도착 예정 시간을 한참 넘겼는데도 그들은 알투르케에 도착하지 못했다. 마을은 고사하고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너른 모래사막을 바라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누군가 장난을 쳐둔 모양입니다.” 챙! 그러곤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허공을 그었다. 그 여파에 대기가 물결치듯 울렁거리더니 스르르 잠잠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쥬다스도 느긋하게 웃으며 에단의 견해에 동조했다. “이런. 다 같이 꼼짝없이 걸려들었구나.” “예? 설마 앞에 결계라도 있는 겁니까?” 바이칼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묻자 크리스티나가 차갑게 답했다. “명색이 마법기사란 자가 그런 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그대가 눈치 채지 못했다면 마법이 아니라 다른 요소겠지.” “아니, 뭐 그건 그렇긴 한데. 결계 효과를 낼 수 있는 능력이 마법 외에 또 있습니까?” “암, 있고말고. 세상엔 마법 이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이 무수히 많단다.” 쥬다스는 냉기를 풀풀 날리는 크리스티나와 달리 친절히 풀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보거라. 이건 아주 낯설지만은 않질 않느냐?” 말에서 내린 쥬다스가 벽을 짚듯 허공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오른 녹색 기류가 화악 뻗어 나가 땅과 하늘을 뒤덮었다. 마치 거대한 경계선을 표시하기라도 하듯 녹빛으로 차오른 대지를 보자 바이칼도 아차 싶은 얼굴을 했다. “물질계 거울의 정령……!” 아벨의 정령, ‘투르키’의 힘이었다. 수년간 계약자를 따라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투르키는 비치는 모든 것을 반사해 내는 고유 성질을 이용하여 사막지형마저 복제해 냈다. 이러한 물질계 정령의 특성은 자연계 정령들이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 번 눈치챈 이상, 보다 상위 존재인 정령왕의 힘으로 이를 깨뜨릴 순 있었다. 녹색으로 뒤덮인 단면에서 벼락이라도 내리치듯 쩌저적 금이 갔다. 「헤~ 에, 제법이네. 깜빡 속아 넘어갔잖아?」 유니가 까르륵 웃으며 손뼉을 치자 사막을 통째로 반사시키던 거울이 산산조각이 나 깨져 버렸다. “와, 이게 전부 거울이었단 말이에요?” 거울이 깨어지며 드러난 광경을 보며 세이지가 나직하게 감탄을 흘렸다. 일행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거울조각이 태양광을 받아 반딧불처럼 빛났다. 조각난 파편은 사람에게는 해를 끼치지 않고 그대로 증발하여 사라졌다. “그래, 도착했구나.” 쥬다스도 바람의 힘을 거두며 눈앞에 펼쳐진 목적지를 응시했다. “사막도시 ‘알투르케’에.” 그들이 지나온 거친 모래와는 다르게 순백의 고운 모래로 지어진 성벽이 보였다. 마치 아이들이 백사장에서 바닷물에 반죽하여 지은 모래성처럼 마을 전체가 하얀 모래로 이루어져 있었다. 감탄도 잠시 거울이 깨어진 자리에 스르륵 잿빛 머리의 소녀가 나타났다. 「오랜만이야, 거울.」 「지금은 투르키라고 했다요!」 「아참! 그랬지? 헤헤, 미안.」 “…….” 정령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에 투르키는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떴다.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그들을 멍한 기색으로 훑었다. 그러더니 이내 쥬다스를 발견하곤 활짝 미소 지었다. “다시 만났다.” 목소리마저 곱고 청아했다. 외형은 예전 그대로였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때에 비해 확연히 인간적인 면모를 풍기는 거울정령 투르키를 향해 모두가 놀란 시선을 던졌다. 오직 쥬다스만이 놀라지 않고 잔잔하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네가 이곳을 지켜주고 있었구나. 투르키.” “응! 투르키, 아벨 돕는다.” 기운차게 주먹을 말아 쥐고 고개를 끄덕인 투르키는 매우 반가운 기색을 풍겼다. 그녀는 마치 매우 어린 새끼 때 다른 집으로 분양된 강아지가 성견이 된 후 본래 주인댁을 다시 만난 것마냥 가슴 깊이 솟구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이는 정령이라면 누구나 그에게 끌리고 마는 본능 같은 애착이었다. 쥬다스에게 어린아이처럼 와락 안겨 들려는 투르키의 뒷덜미를 누군가 확 잡아챘다. “……!” 「어머, 실례. 내 계약자거든요?」 새빨간 깃털이 이리저리 모래바람에 섞여 흩날렸다. 급한 나머지 손가락 만하던 크기에서 보통 십 대 후반의 소녀 체구로 외형을 되돌린 카니가 눈을 가늘게 뜬 채 투르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작스런 불의 정령왕의 개입에 투르키는 덜미를 대롱대롱 잡힌 채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깜빡였다. “……안 돼?”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그치만 카니 너, 또 틀렸어.」 뒤에서 덜미를 잡아챈 카니와 함께 투르키의 앞에 나타나 가로막은 유니가 단호히 콧방귀를 뀌었다. 「자꾸 헷갈리나 본데, 이그레트는 ‘우리’의 계약자거든?」 「쳇.」 「뭐가 ‘쳇’이야!?」 덜미를 붙들린 채 멍하니 두 정령을 번갈아보던 투르키는 밑에서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물어 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내렸다. 건조한 사막에서도 촉촉한 물거품을 유지하고 있는 우아한 푸른 늑대가 물고 있던 옷자락을 놔주며 이야기했다. 「……내용이 딴 길로 샜다만 계약자에 대한 선은 지켜 달란 뜻이다.」 “선?” 「아마도, 정령사회에서의 도의적 책임 문제?」 그저 정령의 본능처럼 내재되어 있는 계약자에 대한 독점욕일 뿐이었지만 같은 정령인 투르키는 그 모호하기 짝이 없는 설명에도 곧잘 이해하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알겠다. 계약, 도의적 책임! 투르키 꼭 지킨다.” 많이 성장하긴 했으나 투르키는 아직 어린아이 같은 면모가 대부분이었다. 카니는 여전히 경계하는 눈으로 그녀를 놓아주었다. 예기치 못한 정령들 간의 알력다툼에 일행은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몰라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쥬다스의 머리 위에 엎드려 말똥말똥 이 광경을 지켜보던 토니가 배시시 웃으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헤헤. 그래도 다시 보니까 좋다요.」 “응. 투르키, 안내한다.” 사박거리며 모래 위에 내려선 투르키는 알투르케의 새하얀 성벽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척박한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요새이기 때문 에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투르키는 굳건히 닫힌 문 앞에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예의 바르게 노크했다. 똑똑! 딱히 신분 확인도 하지 않았는데 육중한 문이 쿵 소리와 함께 활짝 열렸다. 투르키를 따라 그 안에 발을 디딘 바이칼이 뒷목을 문지르며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보안이 철저하다고 해야 할지, 허술하다고 해야 할지.” “아마 알투르케 전체를 투르키가 직접 가호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 작은 중얼거림마저 듣고 친절히 답해준 쥬다스를 향해 이번엔 세이지가 입을 열었다. “그럼 형님. 정령의 시험에 통과한 자만 이곳에 들어올 수 있다, 뭐 그런 건가요?” “에헤이, 저 거울 녀석이요? 그런 중직을 맡기엔 좀 띨해 보이는데.” 그때 앞서가던 투르키가 홱 돌아섰다. ‘드, 들었나?’ 괜히 찔끔한 바이칼이 지레 움츠러든 사이 투르키는 앞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벨, 저 안에 있다.” 직접 들어와서 본 알투르케는 그들이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발전된 도시였다. 하얗고 고운 모래로 정교하게 지어진 건물들은 기본이 2층이었고 높게는 5층에서 최고 7층까지도 지어져 있었다. 마치 하얀 성벽이 미로처럼 겹겹이 지어진 듯한 모양새였다. 건물들 사이사이엔 선인장이 가로수처럼 줄지어 자라고 있었는데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 하얗기만 한 건물을 깔끔하게 돋보여 주었다. 사막이라고 해서 삭막하기만 한 게 아니라 제법 디자인까지 살려 도시를 재구성해 낸 아벨의 감각에 모두가 감탄했다. 그 건물들 중 투르키가 가리킨 건 3층짜리 중간 규모 건물이었다. 일반 주택이 아님을 알아볼 수 있도록 노란 간판을 달고 그 안에 스마일 표식을 그려놓았다. “호오, 학교로군요.” 루바흐에서 교사로 부임한 적 있던 콜이 가장 먼저 표식을 알아보았다. 루바흐의 교기(校旗)는 따로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지도나 서적 등에서 학교를 상징하는 표식은 바로 저 노란 스마일이었다. 제국 내에서 ‘학교’란 평민과 귀족을 통틀어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다. 귀족계 학교는 오직 루바흐뿐이며 평민을 대상으로 한 시설은 학교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비공식, 비전문적인 교육 시설이 몇 군데 있을 뿐이다. 그나마도 루바흐처럼 국가에서 따로 인계를 내주고 지원하는 국공립시설이 아니라 일부 재력가들에 의해 설립된 사립 시설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평민 학교는 이익 창출이 쉽지 않아 오래 유지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평민들은 귀족처럼 우아하고 경쟁적인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그들의 학교는 몹시 자율적이며 제한이 없고 배움의 폭 또한 정해진 바가 없어 무작위로 공부하는 형식이었다. 학교를 나와 졸업장을 받아보았자 딱히 쓸 곳도 없다. 그중 특출나게 뛰어난 성적을 보이거나 이능을 가졌다 보고되는 아이들의 경우만 제국 인재관리팀에서 따로 스카우트하여 데려가 키웠다. 여기서 운이 아주 좋다면 이름뿐이라곤 하나 낮은 귀족 작위까지도 얻을 수 있다. 그런 판국에 이제 막 재건하여 일어서고 있는 투르케 사막에 존재하는 학교란 시설은 일행의 시선을 모조리 사로잡았다. “비록 함께 졸업하진 못하였으나 루바흐의 가르침을 받은 자답군.” 고향을 멋지게 재건하겠다는 아벨의 노력은 크리스티나마저 인정하게 만들었다. 수익이 나오지 않는 평민 학교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시설 유치였다. “그런데 아벨 그놈은 저 안에서 뭐 하는 걸까요? 그래도 명색이 사막의 지도자라는 녀석이 직접 교사일이라도 뛴답니까?” “……그렇진 않을 거다. 그도 귀족의 배움과 평민의 배움은 다르다는 사실을 알 테니.” 그래도 루바흐를 떠나기 전까진 아벨을 종종 만났었던 그들이었다. 투르케가 사령술사에게 공습받아 한 번 멸망하고 나서 정령폭주까지 일으킨 아벨은 더 이상 떳떳한 귀족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존재였다. 가뜩이나 루바흐 안에서 학교 폭력을 당하며 겉돌고 있던 아벨은 정령폭주 이후 아예 학적에서 제명당하기까지 했다. 당시 비에 젖은 낙엽 신세가 되어 갈 곳 없는 그를 받아준 게 쥬다스였고 아벨은 정령학연구소에서 정령술을 배우며 조교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도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고귀한 품격을 키우는 귀족들 사회였다. 평민과 귀족은 사는 사회가 달랐다. 그들은 귀족의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 아벨이 사막 부족을 위해 지어둔 학교 안에서 무얼 하는지에 대해 일행이 의구심을 품는 순간 학교 문이 열렸다. “엇! 마침 나오는……?” 와아아! 문을 열고 환호와 함께 우르르 몰려나오는 건 아직 조그만 아이들이었다. 반가운 얼굴로 그쪽을 쳐다보던 바이칼이 헛 하고 숨을 들이켜며 경악한 얼굴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시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비롯한 일행 대부분이 표정을 굳혔다. “저, 저거!” “흐음.” 쥬다스도 턱을 짚으며 흥미로운 눈으로 아이들을 응시했다. 수업이 끝나 저들끼리 신나 조잘거리며 밖으로 뛰어나온 아이들은 제각각 나이가 달라 키와 체구가 들쭉날쭉했다. 나이대가 일정하지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보통 아이처럼 신난 표정에 대화 내용조차 평범했다. 그런 와중에 그들에게선 눈에 확 띌 만한 특이점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커다란 크림색 여우귀가 살짝살짝 팔랑거렸다. 심지어 복슬복슬한 꼬리마저 바지나 치마 사이로 빠져나와 있었다. 이를 확인한 쥬다스가 태평한 어조로 그 정체를 규명했다. “수인족이로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이고 ㅠㅠ 어젯밤에 그만 깜빡 잠들어버렸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라며, 다음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 0127 / 0240 ---------------------------------------------- 15장. 신기루 “수인족이라고요?!” 세상에는 다양한 종족이 공존한다. 그중 지능이 높고 개체수가 많은 인간이 드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지배하다시피 하고 있지만, 미개척 영역이나 인간이 살기 어려운 야생 등에서는 이종족들이 존재했다. 이종족이라 함인즉, 드래곤이나 와이번 같은 용족뿐 아니라 위그드라실이나 페가수스 같은 신성족, 일반 몬스터와 짐승뿐 아니라 수인족 또한 상당수 보고가 되는 편이었다. 다만 수인족의 경우 인간과 섞여 살지 않고 거친 야생에서 조용히 숨어 사는 편이기 때문에 그들을 목격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그중 황량한 사막에서만 살아간다는 사막 여우 수인족을 이렇게 대놓고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인 바이칼의 표정이 튀김옷에 갇힌 새우마냥 찌그러들었다. “어! 처음 보는 사람들이다!” “바보야, 선생님이 낯선 사람 보면 먼저 숨으라고 했잖아?” “아냐, 알투르케에선 안 그래도 된다구 하지 않았어?” 신나서 문 밖으로 달려 나온 아이들은 쥬다스 일행을 발견하고 주춤 멈춰 섰다. 그리곤 저들끼리 모여 수군수군 의견을 나누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엉덩이에 달린 꼬리가 바람 앞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속닥거리던 사막 여우 아이들은 문득 투르키를 발견하고 왁 소리쳤다. “투르키!” “에이, 뭐야. 투르키가 데려온 거면 괜찮아.” 어린 강아지들처럼 주변을 뽈뽈거리고 맴도는 아이들을 향해 투르키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그리 살가운 반응이 아니었는데도 아이들은 와! 하고 거울정령을 둘러쌌다. “근데요.” 투르키에게 몰려든 아이들 틈에서 한 수인 여자아이가 꼬리를 살랑이며 다가왔다. 키가 겨우 쥬다스의 허리에 닿을락 말락한 작은 소녀였다. 아이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쥬다스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발에는 신발 대신 보드라운 크림색 털이 뒤덮고 있었고 짐승처럼 손톱발톱이 갈고리 형태였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얼굴에 코 양쪽으로 긴 여우 수염도 세 가닥씩 자라 있었다. “누구세요? 어디서 왔어요? 여기 왜 왔어요? 그리구…….” “이런, 질문이 너무 빠르구나.” 스륵- 쥬다스는 옷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것도 아랑곳 않고 자리에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따뜻한 금안과 시선을 마주한 여우족 소녀는 움찔 커다란 여우 귀를 까딱였다. “천천히 하나씩 물어주지 않으련? 아가.” “……아가 아닌데, 제 이름은 류히인데요.” “그래, 류히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단다. 여기엔 아벨을 만나러 왔어,” 류히는 아벨이란 이름에 반응하여 귀를 쫑긋 세웠다. “아벨 님을 만나러? 그럼 아벨 님 친구예요?” 그 순진한 물음에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답했다. “아벨의 학교 친구란다.” “화, 황공할 따름입니다.” 류히의 뒤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가장 마지막으로 학교 밖으로 나온 아벨이 그의 앞에 엎드리다시피 무릎 꿇었다. “전……!” “학우가 아니더냐.” ‘전하’로 이어져야 할 인사말이 뚝 끊어졌다. 쥬다스는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느라 꿇어 안고 있던 무릎을 펴며 엎드린 아벨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다. 아벨.” “아.” “그동안 잘 지냈느냐?” 아벨은 내밀어진 손을 덜덜 떨며 맞잡고 일어섰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아벨 투르케는 건장한 청년으로 자라 있었다. 예전의 비실비실하던 체형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몸이었다. 구릿빛으로 탄 피부에 잘 단련한 근육이 구석구석 자리 잡았다. 거기다가 키도 훌쩍 자라 쥬다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했다. 심지어 같은 나이 대에서 키가 큰 편에 속하는 에단보다도 더 컸다. 아벨은 과거 루바흐 학창 시절 소심하게 어깨를 움츠리고 폭력에 당하기만 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용맹한 사막 부족 투르케를 이끄는 수장이었던 아비를 닮아 훤칠하게 잘 자라 있었다. 사자 갈기처럼 어깨선까지 투박하게 자라난 잿빛 머리카락이 건조한 사막바람을 타고 살짝 흩날렸다. “예! 투르케의 친우이자 스승이 되어주신.” 아벨의 잿빛 눈동자에 일렁이는 물기가 맺혔다. 그는 맑게 빛나는 눈으로 쥬다스를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주군을 뵙습니다.” 「얘가 그때 걔 맞아? 엄~ 청 씩씩하게 자랐네.」 「말 더듬는 버릇도 사라졌다요!」 「맞아요, 그거 은근 신경 쓰였었는데.」 정작 쥬다스는 편안하게 인사를 받고 있었지만 정령들 사이에선 워어 하는 감탄성이 튀어나왔다. 실체화가 되어 있지 않아 정령들의 반응은 눈치채지 못한 아벨을 향해 투르키가 달려가 와락 목에 매달렸다. 그러고 있으니 나이 차이가 꽤 나는 남매처럼 보였다. “그, 우, 우선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말 더듬는 건 아직 못 고친 것 같은데?」 「지금은 긴장해서 그런 것도 같아요. 원래 소심한 성격이었으니까요.」 카니의 짐작대로 아벨은 예기치 못한 만남에 당황하여 무척 긴장한 채였다. 수인족 아이들은 오히려 긴장한 아벨의 모습에 신기해하며 주위에서 쫑알거려 댔다. “친구인데 어떻게 스승님도 될 수 있어요?” “친구인데 왜 존댓말해요?” “…….” 아벨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런 게 있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 일단 어서 집에 가세요.” “네에.” 다행히도 수인족 아이들은 아벨을 무척 잘 따르는 편이었다. 꼬리를 살랑이며 와르르 뛰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푹 한숨을 쉬었다. “……보셨다시피 지금은 사막 여우 수인족이 투르케의 주민입니다.” 아벨은 앞장서서 알투르케의 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설명대로 거리에 돌아다니는 주민 대부분은 여우 귀와 꼬리가 달린 수인족이었다. 신체적인 특성이 다를 뿐 감성과 인지가 보통 사람들과 같은 여우 수인족들은 평화롭게 투르케를 지켰다.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도 있고 학교나 의원 같은 복지 시설도 존재했다. “특이하군. 저들과는 어떻게 연이 맺어진 거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훑은 에단의 물음에 아벨은 머쓱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연히 만났습니다, 투르케가 얼어붙은 동안 사막 여우족도 큰 피해를 입은 모양인지라, 제가 여기에 돌아왔을 때엔 다들 배를 곯아 무척 흉포해져 있었습니다.” “……그 흉포해진 이들을 주민으로 받아들였다?” “예, 먼저 칼을 버리고 대화를 청했습니다. 다행히도 도울 수 있는 문제인 것 같아 어찌어찌 잘 해결을 하여.” “아벨, 거짓말한다. 그때 여우한테 물려 죽을 뻔했다.” 대충 둘러 설명하던 걸 투르키가 순진한 얼굴로 홀랑 끄집어냈다. 그 바람에 아벨이 난감한 목소리로 투르키를 불렀지만 이미 쥬다스의 흥미를 산 후였다. “흐음. 이빨을 드러낸 여우들 앞에서 무방비 상태로 대화를 청한 게냐?” “아, 예에. 그게 그땐 벌써 2년 전이기도 하고……. 지, 지금도 그렇지만 더욱 미숙했던 때였는지라.” “투르키가 아니었다면 큰일을 볼 뻔했구나. 무모한지고.” 나무라는 말을 하면서도 쥬다스는 쿡쿡 작게 웃었다. 투르키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그 말에 동조했다. “맞다, 무모! 아벨은 바보다. 무식하다. 점점 더 멍청해진다.” “투르키이이…….” 거울정령의 당돌한 반란에 아벨은 이마를 짚고 끙 하는 소릴 냈다. “그만큼 자신의 정령인 투르키 널 믿었다는 뜻도 되겠지. 상대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바보가 되어버리니 말이다.” “믿음이, 강해?” “그래, 아벨이 너를 진실로 신뢰하고 있는 모양이야.” 투르키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아벨을 휙 돌아보았다. 자기 정령과 눈이 마주친 아벨은 쑥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제, 제가 잘못했던 일입니다. 그날 투르키를 많이 놀라게 했죠.” “그래도 그 결과 이리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게 된 거로구나. 수인족과의 공생이라. 마을이 아주 생기가 넘치고 보기 좋아졌어. 축하한다, 아벨.” “감사…… 합니다.” 뜻밖의 칭찬을 듣게 된 아벨은 완전히 예전의 소심했던 모습으로 돌아가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옛날 왜소했던 소년이 아니라 떡 벌어진 덩치로 짓는 수줍어하는 표정을 본 일행은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사이 세이지가 주변 건축물을 손으로 살짝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저기 건물들은 전부 모래로 지은 겁니까? 희한하게 감촉이 부드러운데도 엄청 단단하네요.” “아, 그건 그냥 모래가 아닙니다.” 아벨의 답변을 들은 세이지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응? 그냥 모래가 아니면 무슨 모래죠?” “사막 여우족으로부터 알게 된 기술입니다만, 건축에 적합한 모래를 만드는 법이 따로 있습니다. 저쪽을 봐주시겠습니까?” 아벨은 농작지로 보이는 한 울타리를 가리켰다. 그의 소개를 따라 울타리로 가까이 다가간 일행은 순간 전투태세를 취할 뻔했다. “샌드웜……!” “퀘에엑. 웨엑.” 거대한 그림자가 모래밭을 점령하고 있었다. 황소 한 마리 굵기에 마디마디마다 꿀렁이는 주름, 길게 늘어진 몸통은 꼬리를 제외하고 땅에 파묻혀 있어 전신을 다 볼 수가 없었다. 흡사 거대한 지렁이를 연상케 하는 몬스터, ‘샌드웜’이었다. 놈들은 전체적으로 붉은 팥색이었는데 한두 마리가 아니라 척 보기에도 열 마리는 넘는 숫자가 그 모래밭에 서식했다. 연신 몸통 주름을 꿀럭꿀럭거리는 커다란 샌드웜을 보며 검집에 손을 올린 에단을 향해 아벨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 아뇨. 샌드웜은 육식성 몬스터가 아닙니다. 돌이나 모래를 먹고 살아요. 뿐만 아니라 건축용 모래를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하?” 놈들의 머리 부분에는 눈도 코도 없이 오로지 타원형으로 길게 찢어진 입이 자리해 있었다. 입안에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다닥다닥 엿보였는데 그 사이로 여러 갈래 갈라진 혓바닥이 쉼 없이 날름거렸다. 샌드웜들은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도 반응하지 않고 열심히 모래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땅 밖으로 빼꼼 내민 꼬리를 통해 하얀 배설물을 쏟아냈다. “웨에에엑.” “…….” 배설물을 뱉는 소리가 마치 사람이 구토하는 소리와 비슷했다. 각자 틀어쥐었던 무기에서 손을 뗀 기사단원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어졌다. 웩웩거리는 샌드웜들에게 가까이 다가간 아벨이 그들이 뱉어놓은 하얀 배설물을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이게 바로 건축용이나 도구 제작용으로 사용되는 모래입니다. 티끌조차 없이 새하얀 색이라 저희끼린 ‘화이트샌드’라 부르고 있습니다만 학계에는 발표되지 않은 재료인지라.” 일반적인 상식으론 사막에서 출몰하는 거대 몬스터 ‘샌드웜’은 위험한 존재였다. 몸통의 대부분이 모래 속에 파묻혀 있어 실제 모습과 길이를 추측하기 어려우며, 외피가 끈끈한 액체로 뒤덮여 있어 미끈거리는데다 두껍기까지 해 어지간한 날붙이는 꿰뚫지 못했다. 그리고 모래 속 이동속도가 독수리보다 빨라 사막에선 그 누구도 따라잡을 수 없는 상대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 징그러운 외형과 쉽게 잡을 수 없는 특징들을 보고 사막의 괴수라 부르며 샌드웜을 만날 경우 사냥하여 죽이려 들 거나 도망쳤다. 그러니 이 샌드웜이란 존재가 사막의 모래를 귀한 재료로 변환시켜 주는 순기능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화이트샌드는 굳으면 시간이 지나 상태에 따라 종종 보석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이 또한 정식 명칭은 없지만 색과 형태가 아름다워 알투르케에선 장신구로 가공하고 있습니다.” 아벨은 품에서 손바닥만 한 각진 보석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이것이 바로 그 화이트루비입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는 똥. 으아아, 요즘 왜 11시만 되면 잠드는지 무슨 잠자는 숲속의 뭐시기라도 된 기분입니다. ㅠㅠ...죄송합니다.... (꾸벅) 그래서 자꾸 상쾌한 아침에 뵙게 되네요! 아하하.;; 한주의 마지막인 불금이네요. 독자님들 모두 오늘 하루도 파이팅하시고, 행복한 주말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ㅎ 감사합니다! 0128 / 0240 ---------------------------------------------- 15장. 신기루 ‘분명 신기하긴 한데.’ 그리 썩 유쾌하게 느껴지진 않는 가공 과정이었다. 여전히 큰 몸통을 꿈틀거리고 있는 샌드웜들을 힐끗 쳐다본 세이지는 목선을 따라 돋은 소름을 문질거리며 조용히 입을 닫았다. 일행의 불편해하는 기색을 한 박자 늦게 눈치챈 아벨이 허둥지둥 자리를 떠나려던 찰나였다. “멋지구나.” “옛?” 어느 틈엔가 쥬다스가 샌드웜 한 마리의 곁에 다가가 있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하는 표정으로 잠든 플루비를 어깨에 둘러업은 바이칼이 그 뒤로 슬금슬금 따라붙었다. “……쥬다스 님?” “이런 발전이 가능하다니.” 전생의 이그레트가 그저 모든 자연을 다루는 탓에 현자라는 호칭을 받은 건 아니었다. 그는 본래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데에 흥미가 많았고 생태계에 일어나는 자연과학적 원리에 대해서도 무척 관심이 높았다. 늘 차분하고 어른스럽게 굴던 그가 유일하게 아이처럼 설레는 순간이 바로 지금처럼 새로운 발견을 찾아냈을 때였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순환이야…….” 그는 서커스를 구경하듯 샌드웜의 움직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꺼칠한 모래가 샌드웜의 둥근 입으로 들어가 꿀렁거리는 주름을 지나 결국 화이트샌드가 되어 우수수 쏟아지는 과정까지 빠짐없이 관찰한 그는 그 모래로 지어진 알투르케의 성벽과 건물들을 다시금 확인했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장소였다. 생명도, 기술도 없던 척박한 땅. 그런데도 서로가 서로에게 편견을 갖지 않고 공존하여.’ 쥬다스는 진정으로 아벨의 능력에 경탄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땅을 만들었구나.’ 아벨은 누가 뭐래도 사막부족 투르케의 후예였다. 소심하고 남들보다 느릴지언정 그만큼 만사 꼼꼼하게 살폈으며 자신이 배척받은 경험을 통해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인간뿐 아니라 귀나 꼬리가 달린 수인족도, 크고 징그러운 샌드웜도 전부 알투르케의 주민으로 살아간다. 그건 어느 지도자도 아닌 아벨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었다. “퀘엑. 우웨웨엑.” 그리고 그가 감탄하는 사이, 나머지 수하들도 본의 아니게 함께 샌드웜 농장을 진득하니 관람했다. “전하께서 환형동물에 관심이 많으셨을 줄은.” “……바이칼, 조용히.” 수하의 경박한 입놀림을 제지하긴 했지만 에단도 조금은 당혹스런 눈길로 자신들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늘 생각이 깊고 인자한 성인같이 보이다가도 가끔 이렇듯 엉뚱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에단은 이해가 가지 않더라도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모든 걸 한 번에 다 이해하기보단 일단 지켜보며 따른 후 천천히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다. 쥬다스는 곧 샌드웜 농장에서 발길을 돌렸다. 멀지 않은 곳에 아벨의 처소가 있었다. 귀족 저택처럼 화려하진 않았지만 제법 크고 깔끔했으며 손님들이 머물 만한 여유 공간도 충분했다. 짐을 풀고 호위들을 쉬게 한 후, 편한 차림으로 다시 한자리에 모인 그들은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나누고자 원탁에 둘러앉았다. “본디 네 고향이라고는 하나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리느라 많이 힘들었겠구나. 지금 크게 어려움을 겪는 부분은 없느냐?” “아, 아닙니다. 알투르케는 이제 막 작은 싹을 틔운 셈이니 할 일이 많긴 해도 관리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곧 사람들이 더 유입되면 불협화음이 생기기 시작하니 그때부터가 난관이리라 미리 마음먹고 있습니다.” 소심함에 책임감이 더해지자 치밀함과 신중함이란 결과를 낳았다. 5년 전 루바흐에서 투르케의 전멸소식을 들은 당시, 정령 폭주를 일으키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락으로 떨어졌더라면 결단코 이룰 수 없을 발전이었다. 그런 아벨을 장한 시선으로 바라본 쥬다스가 턱을 괴며 넌지시 물었다. “우리가 이곳까지 찾아온 연유는 묻질 않는 게냐.” “어찌 전하께서 하시는 일에 의문을 가, 갖겠습니까.” 뜬금없이 여행객 차림으로 나타난 쥬다스 일행에게 아벨은 일말의 의문도 갖지 않고 그들을 대접했다. 아벨에게 있어서 쥬다스는 여전히 제 목숨과 삶을 바친 유일한 구원자였다. 그에 대한 신뢰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지금 당장 갑자기 자결하라 명령해도 아벨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기꺼이 검을 들어 제 목을 그을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무릎 꿇었다. “명하소서. 따르겠나이다.” 학원 루바흐에서부터 이어져 온 충성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이런. 네게 무언가를 부탁하고자 온 게 아니란다, 아벨. 그저 보러왔을 뿐이야.” “……예?” 공손히 무릎 꿇었던 아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찬가지로 전혀 변하지 않은 금빛의 눈동자가 따스함을 담고 그를 향하고 있었다. “말했지 않느냐. 나는 지금 너의 학교 친구라고.” “그, 그런.” “음? 혹시 친구라 생각한 건 나만의 착각이었던 게냐? 이거 민망한 일이로세.” “아, 아,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아벨은 쥬다스의 농에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맸다. 오히려 그의 정령인 투르키가 순진한 얼굴로 대신 답했다. “아벨, 친구 없다. 친구는 같이 있을 때 편한 거랬다. 친구끼린 솔직해야 하고 의리란 걸 지켜야 한댔다! 근데 아벨 지금 편하지 않다. 왕왕 부담 느끼는데 아닌 척한다. 그러니까 여기엔 친구 없다아.” “투르키, 제발.” 진솔하다 못해 눈치 없기까지 한 정령의 주책에 아벨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가 우울하게 고개를 푹 숙이는 걸 본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누가 그럽디까? 친구는 뭐 편하고 솔직하고 의리 있고.” “그, 그게.” “거, 친구를 글로 배우셨습니까요, 투르케 영주님?” 실제로 친구란 개념을 책에서 배운 아벨은 아무 말 못 하고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리고 말았다. 가까이 다가가 그 축 처진 어깨를 툭툭 두들긴 바이칼이 연이어 말을 건넸다. “어이구, 무슨 버프 마법이냐? 같이 있으면 편해지게. 편하기만 한 친구란 건 없어. 솔직히 친구끼리도 감추는 거 많지. 무슨 영혼의 동반자도 아니고 살면서 친구끼리 모든 걸 오픈하고 다닐 리가.” “그런…… 겁니까?” “그런 거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칼의 뒤에서 이마를 짚은 에단이 한숨과 함께 동조했다. “……틀린 말은 아니긴 하다만.” “놀 때 편한 친구가 있으면, 좀 불편해도 더 신뢰가 가는 친구가 있는 거고. 진지한 얘기하기엔 좋은데 취미가 맞지 않아서 잘 안 만나는 놈, 혹은 엄청 편한데 속 얘기 터놓기엔 영 좋지 않은 친구도 있고.” “그 말씀은 친구에도 종류가 있다는 뜻입니까?” “뭐 비슷해.” “그, 그럼!” “엉?” 아벨은 마치 첫사랑을 고백하는 소년처럼 긴장된 얼굴로 바이칼을 바라보았다. 몹시 부담스러워진 바이칼이 슬쩍 뒤로 물러서는 순간 소심한 질문이 들려왔다. “저…… 저…… 저도 정녕 여러분의 학우…… 였습니까?” “뭐래, 이제 와서 무슨 뚱딴지같이 학우 소릴.” 다시 시무룩해지려는 아벨을 향해 바이칼이 툭 던지듯 내뱉었다. “낯간지러우니까 한 번만 말한다. 햇수로 따지면 5년.” “……?” “그때부터 아벨 너랑 친했던 것 같다고. 오 년 지기, 이해됐냐?” “아.” 그의 당당한 태도에 아벨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말을 꺼낸 바이칼은 밀려오는 낯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괜히 새근새근 잠든 플루비를 흔들어 깨웠다. “이 뱀대가리는 겨울도 끝나 가는데 동면이냐. 일어나, 짜샤.” “삐이이…….” 플루비는 눈도 뜨지 않고 힘없이 울먹인 뒤 다시 날개에 코를 묻고 잠에 빠져들었다. 그 기운 없는 모습을 본 아벨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건?” “아, 이 녀석? 플루비다. 종족은 블루 와이번.” “와, 와이번입니까? 그런데 어디 아픈 것 같은…….” “삐액.” 자꾸 건드리는 손길이 귀찮아진 플루비가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치유술사들의 힘으로 다 나았지만 사령들에게 입은 손상은 쉽사리 낫지 않았다. 그 바람에 아무리 물을 먹여도 커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푹 젖은 스펀지마냥 물을 도로 줄줄 토해냈다. 하루 중 대부분은 잠에 빠져들었고 깨어 있는 시간도 잠시 칭얼거리다 축 처질 뿐이었다. 내심 걱정하던 바이칼은 찡찡 우는 플루비를 익숙한 손길로 다독이며 말했다. “그게, 사령들한테 당했어. 좀 지독하게 당한 거라 그런지 잘 낫질 않네.” 유심히 플루비의 상태를 살핀 아벨이 작게 중얼거렸다. “자칫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 “뭐가? 왜?” “아, 아뇨. 수인족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대충 동물의 건강 상태를 알아보게 되어서. 용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 “위험하다는 건 무슨 소린데.” 아벨은 난감한 얼굴로 플루비의 콧등을 살짝 매만졌다. “한 번씩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눈빛이 너무 흐립니다. 특히 지금처럼 꼬리가 펴지지 않고 계속 휘어진 채로 있다면 상태가 정말 나쁘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건 용족에게도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동물은 냄새로 정보를 판별해야 하는데 코끝이 이렇게 메말라 있다는 건 위험신호라고 들었습니다.” 설명을 들은 바이칼은 끙 소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상태가 나쁘다는 건 알겠어. 그런데 치유술로도 처치가 안 되는 걸 당최 어떻게 해야 좋아질지.” “그게, 도움이 될진 모르겠습니다만…….” 플루비를 향한 걱정 가득한 시선을 눈치챈 아벨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이 투르케 사막에는 ‘아큐미나타’라 불리는 천년목이 있습니다.” “아큐미나타?” “예, 천 년 이상 묵어 영물이 된 선인장입니다. 아큐미나타는 선인장이 피우는 꽃 이름이기도 한데……. 본래는 용신목에 해당하는 선인장이라 하더군요. 이 아큐미나타 꽃을 달여 마시거나 목욕을 하면 그 어떤 상처나 병도 씻은 듯이 낫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 그 천 년 묵었다는 선인장 꽃이 만병통치약이라고?” 바이칼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아벨은 꿋꿋이 고개를 끄덕였다. “효능을 본 사람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슨 문제?” “아큐미나타는 호기심이 많은 동시에 겁이 많은 선인장이라……. 한 자리에 있질 않고 이리저리 사막 전역을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그러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신기루처럼 나타나 꽃을 선물하고 사라진다고…….” 나름 진지하게 듣고 있던 바이칼의 표정이 순식간에 썩은 사과처럼 찌그러졌다. “와씨, 소름. 그게 뭐야. 괴담이냐?” “저, 전설입니다만.” 그러자 조용히 듣고 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한마디씩 보탰다. “전설치곤 꽤나 세세하군.” “놈의 꽃이 그 정도로 효과가 좋은 영약이라면 어째서 사냥하려는 자는 없는가.” “그것이, 천년목 아큐미나타에 관한 이야기는 터무니없는 전설까진 아닙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실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을 직접 봤었을 정도입니다! 다만 천 년이 넘게 살아오며 숨는 데에는 도가 튼 선인장이라. 일부러 잡으려는 사람 눈에는 절대로 띄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나 참, 겁나게 도도한 선인장이네.” 바이칼은 투덜거리며 플루비를 코앞까지 들어 올렸다. 기운 없이 눈을 깜빡인 플루비가 삐잉 울었다. “얌마, 들었냐. 천 년이나 묵었다는 할배 선인장, 찾으러 가볼까?” “삐이?” “그래. 내일 날이 밝거든 같이 찾으러 가보자꾸나.” 조용히 듣고만 있던 쥬다스가 대신 대답했다. 뒷동산에 산책 가자는 제안처럼 가볍게 건넨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황토빛으로 반짝이는 땅의 정령을 손에 얹은 쥬다스가 빙긋 웃어 보였다. “땅에 관해선 숨은그림찾기에 자신이 있는 친구가 하나 있으니 말이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크흠. 선인장에게서 뭔가 낯익은 느낌을 받으셨다면..... 그 느낌이 아주 틀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쿨럭. 평화로운 주말이네요! 저는 어제 불금을 홀로 불태우려고 신나게 편의점을 털어(?)왔는데 결국 또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ㅠㅠ 뜯어놓고 한모금 마신 아까운 드라이피니시만 날아갔습니다. 흑.. 그럼 월요일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0129 / 0240 ---------------------------------------------- 15장. 신기루 메마른 화분처럼 바싹 말라 시름시름 앓고 있는 플루비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순 없는 노릇이었다. 바이칼이 적극적으로 나선 탓에 아큐미나타 꽃 탐색에 대한 일정이 곧장 잡혔다. 날이 밝으면 다 함께 천년목을 찾으러 가자는 결론을 끝으로 그들은 자리를 파했다. 아벨은 일행을 편히 쉴 수 있는 개인 객실로 안내했다. 각자 휴식을 위해 뿔뿔이 흩어지자 쥬다스도 모처럼 독방에 머무르게 되었다. 창 너머로 보이는 사막도시는 어둔 밤중에도 하얗게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무리가 지평선에 맞닿아 고운 가루를 흩뿌려놓은 듯하였다. 쥬다스는 여독에 지친 몸을 쉬는 대신 창틀에 기대 하염없이 그 경관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소매를 누군가 살짝 잡아당겼다. 「이그레트.」 투르키를 만난 이후 손가락만 한 크기가 아니라 실제 소녀의 외향을 유지하고 있던 카니였다. 쥬다스는 그녀의 순한 다홍빛 눈망울에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내게 할 말이 있나 보구나.” 「응. 하나만 대답해 줘요. 이그레트, 지우고 싶나요?」 계약자가 느끼는 감정과 사고를 어느 정도 공유하고 있는 정령들은 이미 그의 고뇌를 알고 있었다. 붉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하얀 옷자락과 나부끼는 머리카락도, 그녀를 감싸고 있는 불의 기운도 사막의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일렁였다. 흡사 불의 여신마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너의 후회. 너를 괴롭게 만드는 그 아이들. 죽이고 싶어요?」 “카니.” 순진해 보이는 소녀의 얼굴로 잔혹한 말을 입에 담는다. 맑고 깨끗한 정령이라고는 하나 그들은 세상만물을 사랑으로 감싸는 신과는 달랐다. 자연이란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지만 때론 무섭도록 냉정했으며 아무에게나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녀가 순진한 아이같이 구는 건 오로지 계약자에 한할 뿐이었다. 카니는 자신의 계약자를 빤히 올려다보며 재차 질문했다. 「아니면, 그 애들이 죽고 나서가 두려운 거예요?」 타는 듯이 붉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꼈다. 사람의 심리에 해박한 불의 정령왕은 이런 식으로 허를 찌르곤 했다. 쥬다스가 답하지 않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팔짱을 낀 채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끄응, 과거의 인연 때문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는 건 알겠지만. 너 지금 좀 위태로워 보인다구.」 “……내가?” 「응. 꼭 쓴 약을 두고 마실까 말까 고민하는 아이 같아.」 「헤에, 뭐 하러 고민한다요? 그냥 한입에 꿀꺽 삼키면 되는 거다요.」 토니의 간단명료한 해답에 유니가 손을 내저었다. 「약을 마셔야 병이 낫는 걸 아는데도, 마신 후에 그 쓴맛을 견딜 자신이 없는 것처럼 보여.」 사실이 그랬다. 그가 가진 힘이라면 할더와 레이야가 마침 한 장소에 나타났을 때 한순간에 그 숨통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이라도 그가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자연이 그들을 숨 멎게 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렇지. 나는 자신이 없어. 사실은 지우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르지. 과거가 사라져야 모든 게 해결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지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그를 등진 아이들은 그렇게 되길 바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견뎌야만 했다. 그리 생각한 쥬다스는 깊은 심호흡과 함께 폭풍처럼 가슴속을 헤집던 불안을 잠재웠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그에게 있어 오랜 시간 몸에 익힌 봉술처럼 익숙한 것이었다. 그의 침묵을 지켜보던 카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자그마한 크기로 모습을 되돌렸다. 「으응, 알겠어요. 기다릴게요. 마음이 편할 때까지 고민해 봐요. 그러고 나서.」 새빨간 불씨 같은 깃털 하나가 쥬다스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그레트가 정말 바라는 게 뭔지 우리에게 알려줘요.」 ―너는 그저 바라기만 하면 돼. 언제나 그래 왔듯 정령들은 오직 그의 결단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무게에 대해 누구보다 크게 실감하고 있는 쥬다스는 섣불리 입을 열지 않았다.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사막의 냉혹한 밤바람과 함께 그날 하루가 저물었다. 날이 밝자, 일행은 전날 이야기했던 대로 천년목 아큐미나타 수색에 나섰다. 수색조엔 아벨도 함께였다. “생김새는 일반 용신목에 해당하며 크기는 성인 남성 평균 키의 다섯 배 정도, 꽃은 황백색입니다. 식물이지만 말할 줄 알고 자의로 움직일 줄도 안다고 들었습니다.” 아벨이 알려주는 정보를 토대로 토니가 투르케 사막 전역의 식물에 대해 탐색을 시작했다. 땅을 지배하는 정령왕의 수색망에선 제아무리 천 년을 넘게 산 영물이라 할지라도 벗어날 수 없다. 탐색 결과, 다행히도 아큐미나타는 알투르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더운 바람이 부는 눈부신 모래언덕 사이로 선인장들이 하이에나 떼마냥 한꺼번에 우그르르 자라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제 키만 한 선인장을 기웃거리던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놈들은 다 키가 고만고만한데요.” “그러게? 특별히 꽃이 피었다거나 눈에 띄게 커다란 개체는 보이지 않는데.” 세이지도 동의를 표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일행 중 누구도 아벨의 정보에 들어맞는 선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누군가 일부러 밭을 만들어놓기라도 하듯 선인장들이 몰려 자라고 있는 특이한 구역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천년목 아큐미나타는 보이지 않았다. “헛헛. 그야말로 숨은그림찾기로군요?” 콜이 여유로이 너털웃음을 짓자 쥬다스도 마찬가지로 느긋하게 답했다. “한번 재미 삼아 찾아보시렵니까, 스승님?” “아니요. 저도 이제 나이가 드니 눈이 침침해져서 말이지요.” “흠, 그렇습니까. 아직 정정하실 나이인데요.” “……자꾸 놀리지 마십시오. 소신은 이렇게 나이 먹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서럽습니다.” 나이 칠십 먹은 노제자의 면구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고도 쥬다스는 농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태평한 어조로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안에는 블루베리가 특효라 하더군요. 으음, 식이요법이 확실히 효능이 있었던 것도 같고…….” “정말 이러시깁니까?” “옳거니. 마침 잘되었군요. 내년 봄에는 레이븐 시티에서 열매를 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쥬다스 님.” 콜이 거의 울 것 같이 눈꺼풀을 부르르 떤 후에야 그의 어린 스승은 농담을 멈추었다. “토니.” 「저거다요!」 똑같이 생긴 선인장이 잔뜩 자라난 모래밭에서 토니는 정확하게 한 그루를 가리켰다. 크기로 보나 외형으로 보나 몹시 평범하게 생긴 선인장이었다. 하늘을 향해 곧게 자라 두 팔을 활짝 펼친 선인장에는 세로결을 따라 스티치 자국처럼 뾰족한 가시가 자라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선인장 앞에 파닥거리며 내려앉은 토니가 손가락으로 가시가 없는 매끈한 부분을 콕콕 찌르며 말했다. 「얘한테서 특이한 냄새가 난다요. 천 년 이상 오래도록 생기를 품어온 식물 냄새?」 「으, 천 년을 품어온 냄새라고 하니까 뭔가 이미지가 구리구리해지잖아.」 실제로 체향이 나는 건 아니었다. 땅의 정령인 토니가 영물이 지닌 기운을 알아보고 있을 뿐이지만 질 낮은 표현을 접한 유니는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이겁니까? 들은 것보다 훨씬 작은데요. 꽃도 달려 있지 않고.” “……꽃이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닌가.” 바이칼과 에단도 영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천년목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던 아벨도 당혹스러운 얼굴로 이를 살폈다. “그, 제가 들은 건 사막에 도는 전설 같은 거라 어느 정도 왜곡된 부분도 있긴 할 겁니다.” “야야. 암만 그래도 꽃은 달려 있어야지. 그래야 뽕도 따고 임도 볼 거 아냐.” 바이칼이 스태프로 선인장을 툭툭 건드리며 투덜거렸다. “아예 뿌리째 뽑아서 화분에 심어놓고 꽃이 자랄 때까지 지켜봐야 하나?” 움찔, 평범한 식물인 양 고요하던 선인장이 미동했다. 바이칼은 그 사실을 모르고 아벨을 돌아보며 턱짓했다. “어쩔래? 네가 가져가서 그 전설이 사실인지 실험해 보든가.” “제, 제가요?” “엉. 우리야 이거 꽃 피울 때까지 계속 여기서 기다릴 순 없으니까.” 그는 우물쭈물거리는 아벨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근데 이거 어떻게 뽑……?” 다시 선인장 쪽을 쳐다본 바이칼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태양을 가리고 우뚝 치솟은 선인장이 보였다. “……저기 혹시 선인장이란 것들도 와이번처럼 물 뿌리면 쑥쑥 자랍니까?” 우드득! 앙증맞게 하늘을 향해 벌리고 있던 가지에서 사람 손가락보다 더 굵은 가시가 돋아났다. 이젠 가시가 아니라 칼날 수준으로 번뜩이고 있는 모양새를 발견한 에단이 제일 먼저 검을 빼 들었다. “물러서라.” “옙.” 더 이상 평범한 선인장이 아니었다. 어느 틈엔가 거대하게 몸을 부풀린 선인장이 날카롭게 자라난 가시를 뽐내며 서 있었다. 마치 잔뜩 성난 고양이가 털을 부풀린 자세와도 비슷했다.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선인장이 사람처럼 두 발로 일어섰다. 그때,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긴장의 끈을 놓게 만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 무섭.」 “……?” 「흡. 잔인해. 어떻게 뿌리째 뽑는다는 이야길 할 수가!」 정령들과 비슷하게 사념파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특정 대상에게만 들리는 정령 언어와 다르게 선인장의 말은 장내에 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분위기로 울먹거리던 거대 선인장은 이내 폭발적으로 소리쳤다. 「으아아아, 손 내려놓고 칼 들어!」 “바, 반대 아냐?” 「닥쳐!」 선인장은 가시를 바들바들 떨며 위협적으로 팔을 붕붕 휘둘렀다. 묘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본 일행이 무기를 손에서 놓지 않자 선인장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네 이 간악무도한 놈들! 뿌리째 뽑겠다는 말을 취소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정작 본인이 겁에 질려 뒷걸음질하는 주제에 입만 당당했다. 나설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심드렁하게 쳐다보는 정령들 대신 쥬다스가 넌지시 말을 건넸다. “무서운 말을 듣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나 우린 너와 싸우러 온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믿지!」 “뿌리째 뽑지도, 칼을 휘두르지도 않으마.” 그 말에 따라 에단을 선두로 모든 기사단원이 무기를 집어넣었다. 상대가 먼저 날붙이를 갈무리하자 선인장도 기세를 누그러뜨렸으나 여전히 미심쩍은 어조로 다시 물었다. 「뭐야, 뭐야. 네가 보스임? 여긴 그럼 뭐하러 왔음? 만에 하나 수상한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면!」 「어머? 태우지 않겠단 말은 안 했는데.」 화륵! 마른 허공에서 불길이 피어올라 선인장의 팔 한쪽을 훑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팔위에 위협적으로 돋아났던 가시들이 홀라당 타서 사라져 버리자 선인장은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었다. 「그러니까 입조심하세요. 알겠죠?」 「넹.」 해맑게 방긋 웃는 카니를 앞에 둔 선인장은 오들오들 떨며 냉큼 수긍했다. 쥬다스는 살짝 한숨을 쉬곤 카니를 손바닥에 감싸 안았다. “아픈 친구가 하나 있어. 상태가 계속 좋지 않던 참에 네 꽃에 대한 소문을 듣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온 거란다.” 「아프다고?」 그 말에 선인장이 관심을 보였다. 놈은 겁이 많고 경계를 잘 하는 성격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해칠 심성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죽어가는 자나 병마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자를 보면 슬쩍 꽃을 선물해 주고 갈 정도로 생명을 아끼는 편이었다. 「누가?」 “이 녀석.” 물러서 있던 바이칼이 품에서 잠든 와이번을 꺼내놓았다. 이 난리가 났는데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플루비를 향해 스르르 가지를 뻗은 선인장이 곧 알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그러게, 아파 보이네. 그냥 두면 올 해 안에 죽을 듯.」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한성깔하는 카니.... 오늘 보름달 기대하고 있었는데 결국 못봤습니다.ㅠㅠ 내일은 보름 비스므리한 거라도 볼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ㅎ 아쉽습니다. (사족으로 조만간 다른 글들도 연재재개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그럼 이번 한 주도 즐겁게 시작하시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립니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 0130 / 0240 ---------------------------------------------- 15장. 신기루 “죽긴 누가 죽는다고. 어때, 그 꽃인가 뭔가로 살릴 수 있겠냐?” 「안 알려줌.」 무척이나 당당한 거절 의사였다. 황당함이 실린 침묵이 한 차례 선인장 밭을 감돌았다.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코끝을 슥 훔치며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렇다는데요. 말할 때까지 불 고문이라도 해볼까요?” 「끼야악! 인간이 어쩜 그렇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 “……그러는 너야말로 인간도 아닐뿐더러 피도 눈물도 없지 않냐?” 선인장은 분노에 가시를 부르르 떨다가 이내 퉁명스러운 말투로 설명했다. 「솔직히 진짜 몰라. 모르는 걸 어떻게 장담함? 난 양심이 반듯한 식물이라 그렇게는 못함.」 “만병통치약이라던데.” 「만병통치약이 될 수도 있고, 그냥 어깨 뭉친 게 풀어지는 정도일 수도 있고. 사람에 따라 아예 효과가 없을 수도 있음.」 “허어?” 「대박 아니면 쪽박. 것도 아니면 꽝이 뜨기도 하는 선인장꽃도박! 어때? 끌림? 끌리면 한번 시도나 해보시든가. 근데 좀 신중해야 할걸. 꽃을 피우는 과정이 좀 아프거든.」 도박장 직원처럼 쫑알쫑알 설명을 늘어놓던 선인장은 다들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슬쩍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정 도박하고 싶다면.」 선인장이 바이칼을 향해 손을 내밀 듯 스르르 가지를 뻗었다. 「나한테 피를 먹여줘.」 “잠깐. 뭘 달라고?” 「피. 갓 짜낸 따끈따끈한 피 말이야. 아, 너무 적으면 꽃이 안 피니까 양은 적당히. 많을수록 좋고? 그리고 저 와이번이랑 가장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효과가 좋…….」 “이 돌팔이 선인장이 어디서 약을 팔아!” 얼토당토 안 되는 조건이라 여긴 바이칼이 버럭 소리치며 스태프를 말아 쥐었다. 주변에 몰려든 마력이 이글이글 금방이라도 화염 마법을 시전할 기세로 변모하자 선인장은 화들짝 놀라 사람 키보다 작게 쭈그러들었다. 「왜 이래 이 사람아. 싫음 말고! 애 떨어질 뻔했네.」 순식간에 기가 팍 죽은 선인장을 물끄러미 응시한 쥬다스가 바이칼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이 아이의 말이 틀린 건 아닌 것 같구나, 바이칼.” “하오나 피를 탐하는 식물의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무턱대고 찾아와 도움을 구하는 쪽은 우리이질 않느냐. 꽃을 피우는 데에 피가 필요한 것이라면 그도 역시 우리의 선택이지.” 「고럼고럼, 내 말이 고거시다! 역시 보스, 멋졍!」 바이칼은 옆에서 방정맞게 구는 선인장에게 찜찜한 시선을 주었다. “이봐. 피는 뭐, 얼마나 필요한데?” 「니 꼴리는 대로 주세요.」 선인장의 건방지기 짝이 없는 언행에 인상을 팍 찡그리던 그는 문득 이상한 느낌에 일행을 돌아보았다. “……제가 합니까?” “그럼 누구보고 하라는 거지?” 에단이 간결하게 덧붙였다. “신룡의 기사님.” “으아아아! 제가 할 테니까 제발 그 호칭 좀 넣어두십쇼.” 사색이 되어 치를 떤 바이칼은 터덜터덜 선인장 앞에 섰다. “근데 피는 어떻게 뿌려야. 어어, 손바닥이라도 찢어야 하나?” 「아, 그거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해.」 선인장은 푸근한 어조로 말하며 양팔을 활짝 벌렸다. 「짜잔. 프리허그!」 “선인장 주제에 뭔.” 「아니, 농담 아니고 진짜 피는 많이 흘릴수록 효과가 짱짱함. 기왕 하는 김에 제대로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난 죽으라고?” 바이칼이 황당하게 되묻는 순간이었다. “치유술사들이 대기 중이니 죽진 않을 거다.” 다시 한 번 끼어든 에단이 무심한 손짓으로 뒤에 대기 중인 기사단원들을 가리켰다. 그 안엔 칼에 찔리고 뼈가 부러지는 치명상조차 즉각 치료가 가능한 실력파 치유술사가 둘이나 섞여 있었다. 바이칼은 허탈하게 웃으며 양팔을 쭉 뻗은 선인장을 바라보았다. 반짝! 햇살을 받아 번뜩이는 가시는 흡사 상어 이빨처럼 날카로워 보였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바이칼이 품에 안고 있던 플루비를 한 번 내려다보았다. ‘플루비.’ 지하에서 사령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그를 찾아온 플루비가 온몸으로 그 공격을 막아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날개가 찢어지고 비늘이 계란 깨지듯 쩍쩍 갈라질 정도였으니 무척이나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꿈쩍 않고 그를 지켰다. 귓가에 놈의 울부짖던 소리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바이칼은 한숨을 쉬며 로브를 벗었다. ‘겨우 이 정도로 약한 소리해서는 너한테 너무 미안하지.’ 그러곤 플루비를 아기처럼 로브에 잘 싸매 에단에게 넘겨주었다. 뜨거운 사막을 지나가느라 로브 속에는 얇은 티 한 장만 자리했다. 소매를 걷어붙이자 그의 살갗 위로 건조한 모래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이를 꽉 깨문 바이칼이 눈을 질끈 감으며 팔을 뻗었다. “거, 거짓말이면 진짜 태워 버릴 거다.” 「아이 부끄러웡.」 수줍어하는 선인장을 살짝 끌어안자, 따끔하고 가시가 살을 파고들었다. 어찌나 뾰족하고 날카롭던지 맨살은 고사하고 옷자락마저 뚫고 온몸을 붉게 물들였다. 생살을 파고드는 선인장 가시에 시큰해지는 코를 훌쩍이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됐냐?” 「뭐래. 이래 가지곤 택도 없음. 젊은 애가 넘나 비실비실한 것…….」 청천벽력 같은 답이었다. 가시가 잔뜩 돋아난 선인장을 계속 안고 있어야 한다니, 그야말로 고문도 이런 고문이 따로 없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던 바이칼은 속으로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그래. 남자는 한 방이지. 계속 얇고 길게 고통받느니, 한 방에 굵고 짧게 가자!’ 그리고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박력 있게 선인장을 콱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선인장이 가시를 팍 줄이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영영 눈을 감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의도한 대로 한 방에 다량의 피가 가시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자 피를 머금은 선인장의 팔 끝에서 푹 익힌 고구마 속살같이 샛노란 꽃이 사라락 피어올랐다. 「와, 패기 보소? 진심 반하겠당. 야! 너 나랑 살자!」 필요 이상의 피를 흡수한 선인장은 신이 나서 호들갑을 떨어댔다. 정작 쇼크사할 뻔했던 바이칼은 치유술사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상처를 치유했다. 수하의 돌발행동에 할 말을 잊고 이마를 짚은 에단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질타했다. “……대체, 무모함도 정도가 있지. 그리도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나.” “어으윽.” 바이칼은 가까스로 충격적인 고통으로 놓아버렸던 정신을 되찾았다. 치유술로 상처는 즉시 회복되었지만 옷이 가시에 찔려 여기저기 찢어진데다 핏자국으로 더럽혀져 걸레짝마냥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완전히 넝마가 된 꼴로 모래밭에 대자로 널브러진 그는 킬킬 웃으며 답했다. “단장보다 십 년은 더 살고 갈 생각이니 걱정 붙들어 매쇼.” “그 꼴로 입만 살았군.” “추하면 어떻습니까? 결과가 중요하죠. 제 한 몸 희생해서 저렇게 꽃을 피워냈지 말입니다?” 바이칼은 자신 있게 선인장을 턱짓했다. 노랗게 활짝 피어난 꽃은 주먹 하나 크기였다. 그다지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수수한 꽃 한 송이가 앙증맞게 선인장 팔에 달려 있었다. 작은 황색 꽃과 칭찬을 바라는 의기양양한 태도를 번갈아 본 쥬다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플루비를 생각하는 네 마음이 아주 잘 담겨 있는 꽃이로구나.” “아니, 그렇다고 저걸 제 마음이라고 칭하시면 뭔가 좀.” 꽃이라곤 달랑 한 송이 핀 데다, 크기도 작고 영 볼품없는 모양새였다. 큰맘 먹고 선인장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대가치곤 뭔가 좀 시원찮았다. 「옛다! 가루로 빻아서 맥이든 목욕물로 달여서 흡수시키든 편할 대로 해. 효과가 어떨진 모르겠고. 알아서 하셔들.」 “협조해 줘서 고맙다.” 「알면 됐음.」 선인장의 꽃을 구했으나 플루비는 여전히 수면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거의 기절 수준으로 깨워도 미동 없는 플루비에게 직접 먹이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꽃물을 달여 플루비를 그 안에 집어넣고 몸으로 흡수할 수 있게끔 돕는 방법을 택했다. 장소를 옮길 것도 없이 곧장 사막 한복판에 널찍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정령들의 힘으로 땅이 파이고 그 안에 곧장 뜨겁게 부글부글 끓는 온수가 들어차 찰랑거렸다. 그야말로 즉석에서 만들어진 온천이었다. 본래 온기를 좋아하여 호수를 거의 용암에 가까운 열기로 끓여놓고 그 안에서 생활하던 플루비였으니 이 정도는 단순히 시원한 목욕물에 불과했다. 쥬다스는 정령들이 만든 임시 욕탕 안에 선인장으로부터 얻어낸 꽃을 넣고 찻물 우리듯 달였다. 그리고 충분히 꽃이 달여졌다 싶을 무렵엔 플루비도 조심스레 그 안에 입수시켰다. 아픈 동안엔 아무리 물을 부어줘도 흡수시키지 못하고 도로 토해내던 녀석이었으니 다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그 상태를 살폈다. 팔팔 끓는 물웅덩이 안으로 뽀그르르 가라앉은 플루비는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몸이 커지는 일도 없었다. 그저 정말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를 보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선인장을 끌어안기까지 했던 바이칼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많이 걱정되느냐.” “예? 예에.” 멍하니 웅덩이 가에 앉아 물에 잠긴 플루비를 바라보던 그의 곁에 쥬다스가 함께 와 앉았다. 처음엔 어정쩡하게 답했던 바이칼은 곧 솔직하게 걱정을 털어놓았다. “저 녀석, 저러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더 신경이 쓰입니다.” 「올. 아닌 척하더니 내 말 믿어주는 거임?」 선인장이 몸을 비비 꼬며 기뻐했지만 바이칼은 그쪽으론 눈길도 주지 않고 못들은 척 말을 이었다. “죽지 않겠죠? 쥬다스 님. 다시 건강해져서 시끄럽게 빽빽 울겠죠?” 쥬다스는 확신을 바라는 상대에게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잔잔하게 등을 다독여 주었다. “이대로 죽으면 불쌍해서 어떡합니까. 동족에게 버림받고 제대로 날지도 못한 놈인데. 뱀대가리 자식, 그러게 왜 괜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인간 따위나 감싸다가…… 에이 씨.” 선인장 가시에 몸에 구멍이 났을 때보다 오히려 지금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 사실을 창피해할 겨를도 없이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마찬가지 아니겠느냐.” “……예?” “플루비 말이다. 가시에 찔릴 걸 알면서도 그 아일 살리고자 선인장을 껴안은 너와 같은 심정이었지 않을까.” 차분하게 이어지는 말을 들으며 바이칼은 보글보글 기포가 올라오는 웅덩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네가 위험에 처한 걸 알았을 때 망설이지 않고 날개를 폈다.” “날았…… 습니까?” “그래. 꼭 하늘 높이 떠오르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게 있다는 듯이.” “…….” “그리 날더구나.” 말을 마친 쥬다스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살짝 손을 내젓자 뜨겁게 끓어오르던 물이 순식간에 식어 잠잠해졌다. “그러니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란다. 용기의 다른 표현일 뿐.”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다. 그 말을 되뇌는 사이 이변을 눈치챈 일행 사이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벌떡, 바이칼이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웅덩이 밑바닥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촤아악! 사방으로 미적지근하게 식은 물이 튀었다. 본래 몸 크기는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덩치를 키운 블루 와이번이 주홍빛 눈을 빛내며 생기 있는 목소리로 울었다. “삐이이!” “하.” 바이칼은 웃는 것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숨을 뱉으며 웃었다. 작은 송아지만 한 체구로 그에게 달려간 플루비가 와락 품에 안겨들었다. “잘 잤냐?” “삐이! 삐이이!” “하여간 누가 뱀대가리 아니랄까 봐. 이젠 하다하다 겨울잠까지 자냐.” 「워어, 꽃도박에 성공하신 걸 축하합니다.」 그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멀뚱멀뚱 지켜보던 선인장이 별 감흥 없는 어조로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SYSTEM : "플루비(lv.7)" 강화에 성공하였습니다! 계속 하시겠습니까? 실패 시 강화재료는 사라지고 펫 등급은 한 단계 강등됩니다. ...는 무슨 드립인지 모르겠네요. 게임하고 싶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네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31 / 0240 ---------------------------------------------- 15장. 신기루 이후 플루비는 완전히 기운을 차렸다. 물기를 투다다 털어낸 어린 와이번은 언제 기운 없이 비실거렸냐는 듯 삑삑거리며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말로는 투덜거린 바이칼도 놈을 향한 시선엔 흐뭇한 기색이 가득했다. 확연히 건강해진 모습을 확인한 나머지 일행들도 긴장을 풀며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주고받았다. “사실 보면서 잘못될까 조마조마했었는데. 이제야 좀 안심이네요.” 세이지가 안도의 한숨을 폭 내쉬며 중얼거렸다. “걱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구나.” “네, 제가 돌봐준 적은 별로 없지만요. 그러니까 어, 그동안 같이 지내다 보니 정이 들었나 봐요.” 플루비를 주로 돌본 건 바이칼이었지만 그간 함께 다니면서 모두에게 예쁨을 받았다. 사람에게 거부감이 없는 와이번은 여기저기 잘도 애교를 부려 댔다. 넉살좋게 먹을 것도 얻어먹고 이 품 저 품 옮겨 다니며 안겨 있기까지 했다. 플루비는 일행에 합류한 이래로 빠르게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갔다. 이제는 약방의 감초처럼 없어서는 안 될 기사단의 마스코트가 되어버렸으니 다들 알게 모르게 녀석의 부상을 걱정하던 참이었다. 다시 건강한 모습을 되찾은 와이번은 예전처럼 이리저리 우다다 뛰어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 이제 가도 됨?」 순간 모두의 시선이 선인장에게로 향했다. 마치 소임을 다했으니 떠나겠다는 홀가분한 말투였다. “어디로 가게?” 「아, 몰랑. 혼자 있고 싶음. 다 비켜주세요.」 “그러고 보니 넌 천년목이었지. 일반 선인장과는 좀 삶의 방식이 다르겠네. 무슨 목적으로 돌아다니는 거야?” 「식물이 목적 가지고 사는 거 봤음? 그냥 사는 거임.」 선인장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단순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에 질문한 바이칼만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뭐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도와줘서 고마웠다.” 「오냐.」 그럼 이만, 하고 모래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한 선인장을 향해 누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큐미나타!” 「……?」 아벨이었다. 멀뚱히 멈춰 선 선인장에게 가까이 다가선 그가 재차 입을 열었다. “혹시 갈 곳이 정해진 게 아니라면.” 짧은 심호흡을 사이에 두고 정중한 요청이 이어졌다.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함께’……?」 선인장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양 머뭇거렸다. 실제 그 오랜 세월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부터 처음 들어본 제안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아픈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드넓은 오지랖, 비록 식물이지만 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물이기도 하였으므로 외로움도 잘 탔다. 또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잡아가거나 악용하려는 무리를 자주 마주치다 보니 사람을 겁냈다. 친사회적 성격과 공포심이라는 완전히 상반되는 두 가지 특성이 마음속에 공존한 채 오랜 세월 살아가게 되자 선인장은 쉽게 지쳤다. 이젠 마른 모래언덕에서 멍하니 햇볕을 즐기는 시간이 차라리 편할 지경이었다. “알투르케에는 새 주민이 필요합니다.” 「알투르케? 아항. 새로 지은 투르케의 지도자가 너구나.」 “도박이라 칭하셨지만 당신의 꽃은 낫기 힘든 병도 치유할 수 있는 기능을 하니 사막주민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겁니다.” 선인장은 희망이란 낯선 단어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조용해졌다. 한 번도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 단어 조합이었다. 거기에 아벨은 쐐기를 박았다. “투르케의 수호목이 되어주십시오.” 「허억. 낯간지러워서 심장이 멈출 것 같당.」 “……식물 주제에 심장도 있냐?” 바이칼이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선인장은 사춘기 소녀마냥 새침하게 답했다. 「수호목까진 오바임. 나란 나무, 연약한 나무.」 “우리도 당신을 위험으로부터 지켜드리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사막부족의 마지막 후손과 하는 약속이면 좀 끌리긴 하네. 함정은 아니겠지? 이거 믿어도 되는 각?」 선인장이 미심쩍다는 태도를 보이자 아벨의 정령 투르키가 대신 씩씩하게 답했다. “아벨 약속 잘 지킨다! 바보라서 함정 같은 거 못 판다.” “……투르키, 그건 자랑이 아니야.” 실제로 함정을 파서 누군가를 계략에 빠뜨릴 심성은 못 되는 아벨이었지만 자기 정령으로부터 바보 소리를 듣게 된 그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근데 ‘아큐미나타’는 내 이름 아님.」 “예?” 「원래 이름은 그거보다 훨씬 김. 인간들이 기억 못할 만큼.」 선인장은 식물마다 타고나는 이름이 있다며 쫑알댔다. 식물의 이름이란 누가 지어주는 것도 아니고 물려받는 것도 아니다. 그 생명을 품은 씨앗에서부터 이미 자신만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손가락에 각기 다른 지문을 달고 태어나는 것과 비슷한 원리였다. 그리고 그 타고난 이름은 한 호흡에 미처 다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길었다. 선인장은 자신의 이름을 책으로 쓰면 두꺼운 사전 한 권을 꽉 채우고도 남을 거라며 선심 쓰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너희들에겐 짧은 이름이 편하지? 그럼 그냥 아큐미나타라고 치지 뭐.」 “그렇다는 건.” 「너 진짜 바보 맞구나?」 신중하게 선인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벨은 쿨럭 헛기침을 뱉었다. 「호칭을 정한다는 건 스카우트 제의를 승낙한단 뜻임. 알간?」 “아.” 「캬, 나 정말 겁나게 친절한 듯! 그래서 네 이름은?」 그는 선인장의 페이스에 말려 입만 뻐끔거리고만 있다가 그제야 환히 웃으며 답했다. “아벨 투르케입니다.” * * * 단순히 꽃을 얻으러 출발했던 수색조는 아큐미나타와 함께 알투르케로 귀환했다. 움직이며 말하는 선인장을 본 주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왕 선인장이다!” “가시 안 따가워요? 만져 봐도 돼요?” “입이 없는데 어떻게 말해요? 우우, 샌드웜처럼 똥꼬로 말하나?” 「똥꼬 없거든? 식물이거든? 난 똥도 안 싸거든?」 특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여우 귀에 꼬리까지 달고 있는 수인족 아이들의 눈에도 아큐미나타는 충분히 독특하고 신기한 존재였다. 와 하고 몰려든 아이들의 관심을 어색해하면서도 선인장은 그 관심에 일일이 상대하느라 바빴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여기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되게 의심하더니.” 선인장은 여기저기 매달리는 아이들이 다치지 않도록 가시를 일부러 뭉툭하게 바꾸기까지 했다. 오랜 세월 영물로서 살아온 천년목이었지만 지금처럼 한 번에 많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친 사람을 도울 때에도 슬쩍 와서 그들이 흘린 피를 흡수하여 꽃만 피워다 주고 신기루처럼 홀랑 떠나곤 했던 아큐미나타였다. 사람들 틈에 아무 걱정 없이 섞여 있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선인장은 무척 기뻐했다. 「의심이 안 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님? 너그들도 나만큼 오래 도망 다녀보던가. 딱 이렇게 백 년만 살아봐. 의심병 오짐.」 “근데 용케 믿고 따라왔네? 말마따나 천 년도 넘게 인간을 피해 도망 다녔으면 별로 믿음도 안 갔을 거 아냐.” 「솔직히 너넨 다 안 믿었음. 자연에게 사랑받는 인간을 믿은 거.」 아큐미나타는 쥬다스의 곁을 가호하고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진작 알아보고 있었다. 처음 그들이 찾아왔을 때 금방 경계를 푼 것은 그 탓이었다. 나무가 거센 폭풍우 앞에서 저항하려하지 않듯 아큐미나타도 마찬가지로 자연의 뜻에 순응했다. 「자연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니까.」 많은 의미를 함축한 말이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아큐미나타는 더 이상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다지 드러내고 싶지 않아 하는 정령왕의 계약자에 대한 배려였다. 플루비가 건강을 다 회복할 때까지 며칠 더 알투르케에서 머물며 조화롭게 뒤섞여 살아가는 주민들의 삶을 지켜본 쥬다스는 떠날 무렵 아벨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게 진정 감탄했다. 여기서 정말 많은 걸 배웠어.” “예, 예? 아뇨, 그런. 어찌 제게.” 그동안 늠름한 사막부족장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아벨은 쥬다스 앞에 서자마자 다시 예전의 소심한 아이로 돌아가 허둥거렸다. “나중에 또 들리마.” 마치 친구 집에 놀러왔다 떠나는 듯 잔잔한 인사였다. 그 말에 멈칫한 아벨은 이내 경직된 자세를 풀고 편안하게 고개를 숙였다. “언제든 편히 찾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정말 감사하고 있는 건 아벨 자신이었다. 잿빛 눈동자 위로 물감처럼 번져온 따스함이 일렁였다. “……쥬다스 님.” 친우로서의 인사였다. 검을 바친 군신관계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기에 세이지는 이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사람 사이란 한 가지 관계로만 정립되는 게 아니구나.’ 부모와 자녀, 주인과 신하, 그리고 친구관계는 전부 그 선이 나뉘어져있다고만 생각해 온 세이지에게는 상당히 새로운 개념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형님인 쥬다스와 마냥 형제간의 대화만 나누는 건 아니었다. 때에 따라 부모처럼 따르기도 했고 선생님이나 상관을 대하듯 깍듯할 때가 있었다. 세이지가 두 사람을 보며 인간관계에 대해 보다 유연하게 생각하게 된 사이, 아벨은 투르키에게 부탁하여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여럿 들고 오게 했다. “참, 여러분께 드리고자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상자들을 품에 한 가득 안아 들고 온 투르키가 사람마다 하나씩 건네주었다. 제 몫으로 주는 상자를 받아 든 바이칼이 피식 웃으며 이를 열었다. “짜식. 뭘 이런 걸 다 주고 그러냐.” 내심 기대하고 상자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바이칼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이거 설마 샌드웜에서 나온.” “화이트루비를 가공하여 만든 장신구들입니다. 순도 높은 보석인지라 마법 인챈트를 부여하면 효과가 아주 좋을 겁니다.” 목걸이나 반지, 팔찌 등으로 우아하게 가공된 화이트루비는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색과 형태는 무척 오묘하고 아름다웠으나 채득 과정을 알고 있는 일행의 표정은 어색하게 굳어졌다.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 쥬다스가 자신 몫의 상자에 곱게 포장되어있던 장신구를 꺼내 들었다. 하얀 깃털을 부드러운 결까지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핀 브로치였다. ‘백로인가.’ 루바흐를 다닐 당시 붙여진 별칭을 떠올린 쥬다스는 브로치를 손에 말아 쥔 채 작게 웃었다. 처음엔 조롱의 의미로 사용되던 ‘백로황자’란 별칭은 그가 졸업할 무렵에는 뜻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은빛으로 빛나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새.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오른 백로처럼 그는 순식간에 비상했다. 이젠 그 누구도 백로황자를 조롱의 의미로 여기지 않았다. 감히 그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봐 온 아벨이었으니 하얀 깃털이 상징하는 바는 고귀한 백로에 대한 경애였다. 쥬다스는 기꺼이 그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쓰고 다니던 모자 대신 브로치에다 새로 변장 인챈트를 걸도록 명했다. 그리고 제일 먼저 옷에 달았다. 상관이 모범을 보이자 나머지 일행도 그를 따라 선물 받은 장신구를 착용했다. “앞으로 유용하게 사용하겠구나. 고맙다, 아벨.”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 어떤 보석보다 깔끔하고 영롱하게 빛났다. 에단이 받은 것은 검집에 달아둘 수 있는 장식이었고 크리스티나의 경우 팔찌였다. 알이 굵은 반지를 받은 바이칼은 차마 손에 끼진 못하고 고민하다 플루비의 목걸이에 달아주었다. 진심 어린 감사를 마지막으로 그들은 알투르케를 떠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5장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 '16장. 불가항력'챕터가 이어집니다.ㅎ 아쉽게도(?) 선인장씨와는 이렇게 투르케사막에서 헤어졌습니다. (에스티오 곁에서 다시 만나요...쿨럭)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0132 / 0240 ---------------------------------------------- 16장. 불가항력 쥬다스 일행이 알투르케를 벗어난 지 며칠 후, 드디어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드넓은 사막이 그 마지막을 드러냈다.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모래언덕이 사라지고 드문드문 비쭉 솟은 나무가 보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사막을 벗어났다는 신호처럼 가랑비도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빗물에 촉촉하게 젖은 풀잎 사이로 사막에선 보기 어려웠던 들꽃들이 봉우리를 터뜨렸다. 갓 피어난 꽃잎은 선인장에서 피는 억센 것과 달리 아기 피부처럼 얇고 부드러웠다. 낮은 키의 풀밭 위를 달린 그들은 오래지 않아 수풀이 우거진 오솔길에 진입했다. 두 갈래 길이 나오자 꼼꼼히 지도를 살펴두었던 에단이 즉각 설명에 나섰다. “계속 직진하면 디올레 숲에 진입합니다. 숲 길이는 반나절 안에 벗어날 수 있을 정도로 짧다고 하며 곧장 국경지대와 이어집니다. 이 우측으로 난 샛길을 타고 가면 남부지방과 이어지는 산을 오르게 됩니다.” 「응, 꼬마가 설명 잘해주네.」 늘 새로운 지역에 대한 브리핑을 맡아왔던 유니는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도 떼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마치 베테랑 가이드가 착실히 맡은 역할을 잘해내는 신입사원을 바라보듯 만족스러운 시선이었다. 선택지를 받은 쥬다스는 국경을 지나 해동국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직진을 택했다. 디올레 숲에 진입하면서 점차 커다란 나무가 주변에 가득해졌다. 바로 얼마 전까지 사막을 지나왔다곤 생각하기 힘든 울창한 숲이었다. 「근데 한 가지 더 있어. 숲 속에 쪼끄만 마을이 하나 있대.」 에단의 설명에는 포함되지 않은 정보였다. 유니는 녹색바람을 가지고 실타래 엮듯 손장난 치며 말을 이었다. 「아마 지도엔 없을걸. 국가에 신고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모양이야. 뭔가 죄를 짓고 도망간 사람들이 아닐까?」 “흐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잠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생각하던 그는 이내 말머리를 돌렸다. “쥬다스 님?” “근처에 부락이 하나 있다는구나. 위치가 위치이니 한 번 들려 볼까 한다.” “이런 숲 속에요?” 세이지가 의문스런 눈으로 물었다. 확실히 마을이 자리 잡기엔 조건이 너무 열악했다. 근처에 교류할 만한 도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 살기 좋게 관리되는 숲도 아니었다. 길이라곤 숲을 통과하기 위해 내어놓은 호젓한 오솔길이 전부였다.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걸 보니 그림자 마을인 모양이군요.” 유니가 알려준 것처럼 나라에 신고하지 않고 몰래 부락을 이루는 곳을 은어로 ‘그림자 마을’이라 칭했다. 세상에 떳떳하게 드러나 있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숨어사는 이들을 뜻하는 표현이었는데 실제 수배 중인 범죄자나 빚을 갚지 못해 도주하는 등 사연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주로 이러한 형태를 이루었다. 그들은 바람의 안내를 따라 직진으로 뻗은 길에서 벗어나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정말 사람 사는 마을이 있다고는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숲은 자연 그대로였다. 따로 길을 내거나 나무를 베는 등 훼손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었다. 아리송한 기분으로 정령의 뒤를 따라 이동하던 일행의 시야에 나뭇가지 틈으로 허름한 굴뚝이 하나 보였다. 막 불을 지핀 듯 뽀얀 연기가 몽실몽실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쪽인가 봅니다.” 안내를 마친 바람이 스르륵 흩어졌다. 잔가지를 헤치며 가까이 다가가자 제법 커다란 통나무집이 나타났다. 그 집을 중심으로 다른 자그마한 오두막들도 드문드문 보였다. 다른 집에선 불을 때지 않아 냉기만 가득했다. 유독 크기가 크고 사람 사는 느낌이 드는 통나무집에선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잠시 마을 전체를 둘러본 일행은 그 제일 큰 오두막에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활기차게 도란거리던 대화 소리가 뚝 멈추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집 분위기에 일행 사이에도 덩달아 긴장감이 감돌았다. 답이 돌아오지 않자 에단은 재차 노크하며 조금 더 큰 소리로 물었다. “계십니까?” 몇 초가량 더 침묵이 감돌았다. 문을 열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통나무집을 앞에 두고 일행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무래도 낯선 이들을 경계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겠지. 조금 더 기다려 보자꾸나.” 쥬다스는 느긋하게 답했다. 그들이 순순히 떠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통나무집 문이 끼익 열렸다. “뉘슈?” 그 안에서 걸어 나온 건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된 노인은 언뜻 보기에도 나이가 무척 많아 보였다. 지팡이를 짚은 손조차 힘이 들어가지 않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잔기침을 쿨럭이는 노인을 향해 쥬다스가 대표로 말을 건넸다. “저흰 국경지대로 향하는 여행객들입니다.” “여행객?” “그간 사막을 건너오느라 일행이 모두 지쳐 있습니다. 더구나 챙겨 온 물과 음식이 전부 떨어져 숲을 헤매던 참이었습니다. 실례지만 잠시 신세를 질 수 있을는지요?” 노인은 지팡이를 짚은 채 일행을 주르륵 훑어보았다. 사막을 건너오느라 고생했던 건 사실이었기에 모두 모래먼지를 뒤집어쓰고 살이 발갛게 타기까지 하여 피로한 행색이었다. 노인에게서 고민하는 기색을 엿본 쥬다스가 그 고민을 잠재울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례는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쿨럭, 쿨럭. 여긴 객들이 묵을 만한 곳은 따로 없수.” 기침과 함께 문을 열어 제친 노인이 먼저 돌아서며 안을 턱짓했다. “그나마 이곳이 제일 큰 집이라오. 좁으시겠지만 방이 없으니 참으시구랴.” 작은 마을에는 마구간이 따로 없었기에 그들은 근처 굵다란 나무기둥에 말들을 매어두고 노인을 따라 오두막집에 들어갔다. 노인의 말대로 집 안에는 따로 방이 없었다. 화로를 중심으로 널찍한 거실이 이어졌다. 그곳엔 십여 명의 주민이 둥글게 모여앉아 말린 야채나 견과류 따위를 늘어놓고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뭐시여. 영감 아는 애들이우?” “웬 젊은이들인감?” 하나같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었다. 그들 입장에선 오히려 마을을 방문한 젊은 사람들이 더욱 신기했다. 조금 전 침묵은 내숭이라도 되는 듯 주민들은 다시 껄껄거리며 왁자지껄하게 떠들기 시작했다. “쿨럭, 나도 몰러. 물어보니깐 여행자라대? 어린 친구들이 피곤하다잖어 글쎄.” 대표로 나왔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그들 사이에 끼어 앉았다. “암, 그렇담 응당 집에 들여 줘야지. 잘했네, 잘했어.” “뉘집 애들인지 훤칠하게도 생겼다.” “아니, 곱다 해야 하질 않누? 요즘 애들은 다 예쁘게 자라서 사내앤지 기집인지 구분이 안 간단 말이여.” “아, 거기 서있지 말고 일로 좀 가까이 와보아.” “여기 앉으이.” 거침없이 쏟아지는 입담에 어색하게 서있던 일행은 천천히 노인들 근처로 다가가 앉았다. 자리에 앉으며 바이칼이 찜찜한 표정으로 에단을 향해 속닥거렸다. “여기 그냥 노장마을인 것 같은데요.” “…….” “나이 든 사람들끼리 모여 여가를 즐기는 모임 같은 거 아닐까요? 딱히 수상해 보이는 건 없는, 윽!” 거기까지 말하던 바이칼은 머리를 꽁 내려치는 타격감에 혀를 깨물고 말았다. “떼끼! 어른들 앞에서 누가 그리 버릇없이 속닥거리누?” 지팡이를 쥔 노인으로부터 호통을 듣게 된 그들은 더 딴짓하지 못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혹시 이 마을엔 어르신들뿐입니까?” “으응? 아녀아녀. 볕 좋다고 버섯 따러간 할망구들도 있지. 커허허.” “그 소리가 아니잖여! 젊은 애들 없냐고 묻는 말이지.” “잉? 그런 건가?” 노인들은 대체로 수다스러웠다. “그려. 이 마을엔 늙은이들뿐이지.” “젊은 것들은 진즉에 다 죽었지. 이젠 애들 얼굴이 기억도 안나.” “에에이! 썩을 나라 같으니. 애들 살아갈 세상이 아니었던 게지. 죽은 애들만 불쌍하이.” 한 노인이 말라비틀어진 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한탄했다. 젊은 사람들이 전부 죽었다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세이지가 그를 향해 물었다. “다 죽었다니? 관리의 잘못이……있었습니까?” 아직 평민을 대하는 태도에 익숙하지 않은 세이지의 어설픈 말투에도 노인들은 아기 재롱 보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잘못 정도인감? 사람 피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것들을 두고 귀족이라 봉하니. 평민 목숨은 파리 목숨도 아니라 이거지.” “그니까 나라가 이 꼴인 거여.” “썩을 대로 썩었지.” 주민들은 전부 권력층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귀족 출신인 일행 입장에선 껄끄러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었다. 버릇없다며 한 대 얻어맞은 바이칼은 물론이고 에단과 크리스티나, 친위기사단 전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노인들 틈에서 제일 자연스럽게 적응한 두 사람이 있었다. “허허,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허나 또 나이가 들면 세상일에 신경 쓰고 살기 피곤하지요.” “그래서 우리도 세상일 안 보고 안 들으려 여기 모여 있는 거요. 근디 그쪽은 아직 젊어 보이는데 몇 살이우?” “동안이란 소리 많이 듣소이다. 벌써 일흔도 넘었다 하면 안 놀라는 사람이 없지.” “일흔? 으허헛, 정말로 동안이구만!” 잔잔한 웃음이 한차례 터져 나왔다. 본래 노년기에 접어들었지만 아직 십 년도 더 젊어 보이는 콜이 첫 번째로 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다. “원망하며 살기엔 인생이 너무 짧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말이 맞네. 내 장장 삼십 년을 원망했으이. 원망하고 또 원망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구먼. 얼마 남지 않은 생에서 그네들을 원망해서 무에 좋겠느냐고.” “용서는 못해도 물 흐르듯 흘려보낼 수는 있더군요. 처음엔 몰랐지요. 용서하는 것과 흐려지는 건 다른 문제인 것을.” “어떻게 그놈들을 용서할 수 있겠어. 다만 가슴에 묻을 뿐이지. 그래, 자네 말이 맞으이. 흐려질 뿐이야.”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아직 십 대에 불과한 그는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더니 심지어 노인들을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바이칼이 차마 겉으로 표현하진 못하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예전부터 어른스러우신 줄은 알았는데, 그 점이 노인들한테도 먹힐 줄이야.’ 의외의 활약을 통해 마을 주민들로부터 얻어낸 정보는 단순했다. 그들은 본래 삼십 년 전쯤, 근처 영지에서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마치 레이븐 영지에서 비리를 일삼던 영주처럼, 그들을 지배하던 자 또한 노동력을 착취하고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취하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오히려 목숨을 빼앗는 일에는 누명을 씌우는 등 치밀하게 굴었던 레이븐 백작과는 다르게 이번 영주는 거리낄 것 없이 반항하는 자들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로 인해 부모자식이 사별하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죄를 짓거나 누군가에게 쫓겨 숲 속으로 도망 온 게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억울하게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권력이 휘두르는 폭력으로부터 달아난 이들이라 했다. “이런 일이 이토록 흔하다니.” 잠시 마을 우물에서 물을 길어온다는 핑계로 쥬다스, 에단과 함께 통나무집에서 나온 세이지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눈먼 힘에는 희생자가 따르게 마련이야.” “도저히 저들을 볼 낯이 서질 않아요.” “세이지.” 힘 있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세이지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저들은 분명 희생자가 맞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란다.”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말씀이세요?” 이젠 제법 눈치 빠르게 의도를 읽어오는 동생을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늙은 동생(?)들과 어울려주는 이그레트 할아부지(전생+현생 도합 109세)....ㄷㄷ 크으으으 내일만 버티면 주말이네요. 다들 하루만 더 힘냅시다.ㅠㅠ 추천, 코멘트,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과 격려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ㅎ 0133 / 0240 ---------------------------------------------- 16장. 불가항력 “아직까진 그저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한평생 죽도록 원망했던 자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원망에서 미련으로, 미련에서 후회로. 아마 눈 감는 그날까지 놓지 못하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느냐.” “하지만 아까는 분명.” “한두 명도 아니고 여기 모인 주민들 전체가 자기 자식을 죽인 악독한 원수를 그저 가슴에 묻고 평화로이 지낼 수 있다는 게 이상하더구나.” “보통은 그렇게 하지 못하나요?” “글쎄다. 아마도 원망할 대상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면 가능할지도 모르지.” “……!” 그 말에 세이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삼십 년이나 지난 이야기인데. 자연사했을 수도 있겠네요.” “하나 그랬다면 굳이 그 점을 숨길 필요까진 없었을 겁니다.” 에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세이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죽였다……?” 멀리 허름한 우물이 보였다. 쥬다스는 우물을 향해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며 그 말을 받았다. “숲 속에 생긴 그림자 마을, 그에 더해 마을 주민 전원이 노인으로 구성된 것도 단순히 우연의 일치는 아닐 거란 이야기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지 않더냐.” 그는 우물 덮개를 열었다. 물에 비친 노을이 피처럼 붉었다. “가려진 진실은 거짓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쥬다스는 물을 동이에 퍼 담는 대신 루니를 실체화시켰다. 푸르륵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타난 푸른 늑대는 살갑게 그의 손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우아한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애교 어린 몸짓에 세이지가 신기한 시선을 주었다. “루니.” 「말해라. 무엇을 하길 바라지?」 쥬다스가 정령들에게 특정 소망을 요구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그나마 바람의 정령인 유니는 유용한 정보를 알아오는 역할이라도 맡았지만 나머지 정령들에게는 딱히 할 일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의 계약자는 남과 함부로 싸우는 호전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세상을 뒤엎어 지배하고자 할 정도로 야망이 높은 인물도 아니었다. 전생의 ‘이그레트’ 시절, 방방곡곡 떠돌아다니면서 그가 정령들에게 부탁한 일이라곤 주로 소소한 것들뿐이었다. 허허벌판에서 물을 끓여 달라거나 맨 땅에서 신선한 허브 잎사귀를 자라게 해달라는 정도였다. 정령들은 그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고자 하였지만 정작 본인이 힘을 사용할 생각이 그다지 없으니 특별히 나설 기회가 없었다. 때문에 루니를 비롯한 자연계 정령왕들은 지금처럼 그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오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기합이 들어갔다. 루니는 평소의 근엄함조차 집어던지고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로 자신의 계약자를 올려다보았다. 심지어 늘 고고하게 늘어뜨리고 있던 풍성한 꼬리마저 살랑거리고 있었다. 늑대라기보단 애완견을 연상시키는 태도에 쥬다스는 살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오늘 밤 이 마을에 비를 내려주련.” 「밤 내내 이 마을에만 비를?」 “그래, 천둥번개가 칠 정도로 강한 비라면 좋겠어.” 「……네 뜻대로. 이그레트.」 푸른 늑대는 왜냐고 묻지도 않고 곧장 수락했다. 그 대신 지켜보던 세이지가 물었다. “형님, 비는 갑자기 왜요?”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기 때문에.” “예?” “때론 계기만 준다면 작은 변화에도 크게 흔들릴 수 있지.” 그가 손수 가져온 동이에 물을 채워 넣자 에단이 이를 서둘러 받아 들었다. 그 성의를 고맙게 받아들인 쥬다스는 붉은 노을을 흘끗 올려다보곤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거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통나무집으로 돌아갔다. 우물에서 길어온 물로 다 함께 스프를 끓여 먹고 식수를 마련하였다. 수십 년 동안 단체 생활에 익숙해진 노인들은 굳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돌볼 자식도 손자도 없는 마을에선 집이란 딱히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늘 큰 집에 모여 공동식사를 하였고 피곤하면 아무 데나 널브러져 잠들었다. 이 통나무집은 마치 노인들을 위한 일종의 요양시설과도 같았다. 저녁이 되자 낮 동안 가볍게 가랑비만 뿌리고 지나갔던 비구름이 도로 몰려들어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으르렁댔다. “아이구, 허리야. 비가 오려는감?” 한 노인이 허리를 두들기며 창가로 다가갔다. 조악하게 깎아 만든 나무창 너머로는 벌써 한두 방울씩 빗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혀를 끌끌 찬 노인이 창문을 닫았다. 곧이어 우지끈 나무기둥 부러지는 소리처럼 천둥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는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빗소리가 거세지자 담소를 나누며 평화롭던 노인들의 분위기가 싸악 굳어졌다.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잔기침만 쿨럭이던 중 한 노인이 중얼거렸다. “……이상한 일이구만.” “무엇이 그리 이상하십니까?” 쥬다스가 슬쩍 물었다. “여긴 원래 비가 잘 내리지 않아. 비가 와두 해 뜰 때 내린 부슬비 정도지. 이 정도로 쏟아붓는 비는 본 적이 없으이.” “옛날 생각나는구만.” “그러게 말이여.” 노인들은 짤막하게 맞장구치고는 다시 조용해졌다. “옛날 사시던 동네에선 이런 비가 자주 왔나 봅니다.” “에잉, 거기서도 자주까진 아니었지.” “그려. 영감은 그 시절에도 천둥만 쳤다 하면 하늘이 노했다고 벌벌 떨었잖여.” “떨긴 누가 떨었다그려? 그러는 영감탱이야말로 그날 오줌보가 터져서는 아주 꼴이 우스웠지그래.” 옥신각신하며 서로를 흉보던 노인들은 조금씩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막말로 하늘이 노한 게 맞지. 안 그려? 그놈들 죄다 천벌 받았잖여.” “이 양반이 노망이 났나. 그게 왜 천벌이여 천벌이길? 그 시부럴 놈 때문에 같이 죽은 애들은 무슨 죄여!” “어차피 그냥 뒀으면 다 같이 죽은 목숨이었어. 사실 걔들도 그놈 밑에서 일했으니 벌을 받은 거잖수.” “아니, 그래도 이 영감탱이가?”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닫아놓은 창틈으로 번쩍 새어 들어온 번갯빛이 노인들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었다.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만큼이나 시끄럽게 소란이 일어났다. “나 원 우스워서. 그놈 목을 베어달라고 손이 발이 되게 빌 때는 언제고? 그렇게 그놈들 벌 받는 게 싫었으면 복수를 바라지도 말았어야지.” “그래서 지만 깨끗하다는 거여?” “지? 지금 지라고 했냐, 이 자식아. 내가 네놈보다 못해도 십 년은 더 살았다!” “같이 늙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처지에 십 년 더 산 게 대수여!” 감정이 격해지자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튀어나왔다. 멍하니 보고 있던 세이지는 오싹 소름이 돋아 뒤로 물러섰다. ‘정말 저들이 복수를 위해 영주를 죽인 건가? ……평민이 귀족의 목을 벴다고?’ 선량하게만 보였던 노인들의 얼굴이 더 이상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이지는 흔들리는 시선을 돌려 자신의 형을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소란이 일어난 와중에도 느긋하게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맑은 금안을 보자 세이지도 차츰 불안하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사이 언쟁을 벌이던 노인들은 씩씩거리며 마무리를 짓고 있었다. “그만들 혀. 다 지난 일 아니우?” “아, 근데 저 영감탱이가 천벌이라고 자꾸 우기잖어.” “천벌이지! 천벌이 아니고서야 그날 일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시우?” “그 ‘천벌’은 누가 내렸습니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한 군데로 몰렸다. 쥬다스는 벽에 기대앉은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노인을 마주보았다. “하늘입니까? 아니면.” “…….” “하늘이라 믿고 싶은 무법자인가.” 누구도 답하지 못했다. 쥐 죽은 듯 조용해진 집 안에는 요란한 빗소리만 가득했다. 심지어 엉성하게 지어놓은 천장에선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노인들은 움찔 한 발짝씩 물러섰다. 아직 성인도 되지 못한 소년을 상대로 기가 눌렸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 그들 사이에 헛기침이 유행처럼 번졌다. 그중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나선 노인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크흠. 살 만큼 살고 나면 말이여. 젊은 애들 딴엔 숨긴다고 숨기는 게 어찌 이리 선명하게 보이는지.” “…….” “자네들, 귀족 도련님들이지?” 쥬다스는 이를 침묵으로 긍정했다. 이미 다들 짐작하고 있었기에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앞에 나서서 말을 꺼낸 노인은 클클 웃기까지 했다. “보믄 알겄지만 우린 귀족이 싫어. 귀족이란 것들에게 부인과 딸자식을 빼앗기고 젊음과 아들은 한평생 노역에 바쳐졌지.” 옛 생각에 다시 여기저기서 한숨소리가 이어졌다. “들어보시오, 귀족 나리들. 칼과 채찍으로 다스려지는 우리가 개돼지와 다를 게 뭐요. 나라가 정한 법은 대체 누굴 위한 법이란 말이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 두려울 게 없어진 노인들은 귀족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다. 욕하거나 날붙이를 겨누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하늘인지 무법자인지 난 모르겠고. 그 끔찍한 현실 속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었지. 바로 그분이 하늘도 법도 외면한 파리 목숨들을 구원해줬단 말이요.” “누군가 대신 복수해 줬단 말입니까?” 세이지의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가던 나그네였지. 딱 자네들처럼 귀하게 생긴 상에 지옥에서 올라온 해골들을 부리던, 그야말로 죽음을 초월한 사내였어. 악신도 신이라면 그분은 진정 신이었을지도 모르지.” “그래! 우리가 그에게 복수해 달라고 빌기야 했소. 믿기 어렵겠지만 뼈로 만들어진 용이 나타나 폭풍을 불러왔지. 아직도 기억한다오. 오늘처럼 굉장한 폭우가 쏟아졌거든.” 노인들은 맞장구치며 구원자를 찬양했다. 단번에 그들이 말하는 영웅이 누구인지 눈치챈 쥬다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복수라…….” “나리들께서 이 늙은이들을 벌하신다 해도 미련은 없소. 우린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이니!” “정당하다 여겼으면 왜 모든 것이 해결되었는데도 살던 곳에서 떠나온 것입니까.” “그건, 커흠. 문제가 조금 있었지비.” 노인들은 시선을 피했다.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이 이어졌다. “그놈, 영주의 병사는……. 강제로 징병된 젊은이들이었지. 거 왜, 복수하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그들도 함께 희생되었으니 어찌들 낯이 있겠수. 복수를 빌었던 우리가 그 땅을 떠나는 수밖에.” 자기 가족의 복수를 위해 다른 희생자를 낳았다. 사령술사에게 복수를 사주한 장본인들은 새로운 희생자 가족들로부터 추방당하다시피 땅에서 쫓겨났다. 이를 두고 후회하는 노인도 있었고, 어쩔 수 없었다 말하는 노인도 있었다. 그 차이가 갑작스런 폭우를 시발점으로 조금 전 언쟁을 불러일으켰던 셈이다. “하나 그대로 있었으면 모두가 억울하게 죽었을게요. 그놈은 천벌을……!” “에단.” 무어라 더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노인을 내버려 둔 채 쥬다스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기사들이 따라붙었다. “이만 가자.” “예.”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채비를 챙겨 집밖으로 우르르 나가는 일행을 보며 노인들이 당황하여 눈을 끔뻑거리던 찰나였다. 벌컥 문을 열어젖히자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부었다. “우리는 오늘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곳엔 벌할 사람이 없구나.” “……뭐?” 평민이 귀족을 죽여 달라 사주했다는 소릴 듣고도 그냥 지나가겠다는 말에 노인들은 의아하게 서로를 쳐다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덧 2월의 마지막날이네요. ㅎㅎ 독자님들 모두 한주의 시작과 더불어 달의 마지막날인 오늘 하루, 평안히 잘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오늘 밤 12시경에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P.s. 참, 요즘 시간이 없어 연참이 어렵습니다 ㅠㅠㅠ 조만간 여유가 생기면 화끈하게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꾸벅) 0134 / 0240 ---------------------------------------------- 16장. 불가항력 “이보슈. 귀족나리들. 쿨럭쿨럭, 정말 이대로 떠나는 거여?”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문지방까지 따라 나와 물었다. 처음 마을에 방문한 낯선 객들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순간부터 주민들은 사실 벌을 받게 되리라 각오했다. “설마하니 우릴 이해한다는 건 아니겠고.” “…….” 쥬다스는 폭우가 쏟아지는 문간에 서서 잔잔히 노인을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실린 서늘함을 느낀 노인이 자조적으로 쓰게 웃었다. “그려. 귀한 분들 눈에 우리는 감히 귀족을 해한 범죄자일 뿐이잖우. 굳이 여길 찾아온 건 죄상을 밝혀 벌하려던 게 아니었소?” 살기 위해 사령술사 앞에 엎드렸고, 그 옷자락을 붙들고 애원했다. 그리고 잔혹하게 살해당한 가족들의 복수를 이루었다. 노인들은 이를 두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여겼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의는 나라가 정한 법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이었다. “이곳에 분명 죄인은 있으나.” 콰르릉! 새하얀 번개가 천지를 감쌌다. 잠깐이지만 본래의 은발처럼 물든 머리카락이 달처럼 빛났다. 쥬다스는 그대로 돌아 빗속으로 걸어 나갔다. “루바르잔의 국민은 없으니. 우리에겐 이들을 벌할 이유가 없다.” 그 말을 들은 노인은 자리에 못 박힌 듯 굳었다. 문이 열려 있었기에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노인들도 묘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다. 자신들이 늘 부정해 온 나라에서 역으로 그들을 부정하는 것. 모인 이들 전부 살 만큼 살았다고 여긴 나이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벌하지 않는다 하니 기뻐야 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도리어 평생을 따라다닌 갑갑함만이 목을 옥죄어 왔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상하리만치 기분 나쁜 침묵만이 주민들 사이에 감돌았다. 한편, 마을을 떠나 말을 타고 빗길을 달리기 시작한 일행도 그리 좋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빗물에 푹 젖어 얼굴에 자꾸 달라붙는 붉은 머리카락을 털어낸 세이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형님. 그래도 귀족을 해한 자들입니다. 저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일까요?” “하면 너는 어찌 하였으면 좋겠느냐?” 쥬다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동생에게 도로 의견을 물었다. “아무리 악하게 굴었다 한들 황제폐하께서 임명하신 귀족을 벌할 수 있는 건 황실, 그리고 오직 국법에 의한 재판뿐입니다.” “과연 그 말이 옳구나. 하여?” “하여, 이와 같이 지엄한 국법을 어긴 죄인들이니 무릇 정해진 절차에 따라 엄중히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부 옳다. 네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정도(正道)라 할 수 있겠구나.” “그리 말씀하시면서 어찌 형님께선 그들을 벌하지 않으십니까?” 쥬다스는 잠시 눈을 들어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법사들이 시야 마법을 발동하여 말을 달리는 데엔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주변이 밝았지만 폭우를 쏟아내 하늘만큼은 별빛 하나 없이 캄캄했다. ‘―위선자.’ 기억 저편에서 한때 자신에게 복수를 요구했던 자들의 원망이 떠올랐다. 이루어지지 못한 간절함은 곧 절망과 분노로 바뀌었다. ‘그 힘을 가지고도 기생하는 악을 못 본 채 등 돌리는, 너 같은 위선자야말로 악마가 아닌가!’ 그는 갈 곳 잃은 분노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만난 노인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찢기고 덧나길 반복해 피고름이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고서라도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해했다고 해서 그들을 사면한 건 아니었다. “불가항력이라, 그들이 하는 말도 역시 틀리지 않았단다.” 이도저도 틀리지 않았다는 대답만 돌아오자 세이지는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들었다. 황자라곤 하나 아직 열네 살에 불과한 세이지가 상반되는 두 의견의 합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고민하는 얼굴을 힐끗 쳐다본 쥬다스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 지배층의 행실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어. 약자를 사지로 몰아넣고 모른 척 방관하는 것이 권력은 아닐 터.” “그 말씀은……. 지배층에게 죄가 있기에 하층민들도 죄를 짓게 되었단 뜻인가요?” “예컨대 만일 논밭을 관리하는 농부가 물길이 닿지 못해 말라가는 농작물을 발견하지 못해 시들어 죽게 만들었다면 관리하지 못한 책임이 있질 않겠느냐. 방치도 결국 학대다. 그리 따지자면 제국의 모든 권력자에게는 제 책임과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죄가 있는 것이야.” “그럴 수가.” “그것이 권력이란 힘의 무게다. 비뚤어진 계층구조부터 바로잡지 않으면 이와 같은 일은 끊임없이 반복될 테지.” 마을에서 벗어나 다시 반듯하게 정돈된 오솔길로 진입하자 거짓말처럼 비가 뚝 그쳤다. 세이지는 괜히 빗물에 푹 젖은 후드를 털어 내리며 시무룩하게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곱씹었다. 하지만 쥬다스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세이지,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죗값을 받고 있단다.” “네? 아무도 그들을 벌하지 않았잖습니까?” “한평생을 자신의 죄에 쫓겨 죄인으로 숨어사는 이들이야. 네 보기엔 그들이 우리가 귀족임을 알고 두려워하더냐?” “아뇨! 너무도 당당했습니다. 오히려 반기는 듯도 하였고요.” “그랬지. 꼭 누군가 자신들을 벌해주기만을 기다려온 사람들처럼.”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바이칼도 씁쓸한 눈길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두컴컴한 숲 속이 흡사 수풀로 꽁꽁 싸맨 감옥 같기도 해보였다. 우중충한 분위기를 느낀 플루비가 고개를 치켜들고 삐익삐익 울었다. “지금 그들을 처벌한다면 도리어 죄책감을 덜어낼 빌미를 제공해 줄 뿐이지. 저들에겐 이미 삶 자체가 형벌일 게야. 저 숲에 스스로 발을 묶은 채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사후엔 더 끔찍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터.’ 굳이 뒷내용까진 언급하지 않았다. 영특한 동생은 지금 이야기해 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납득하였고 또 충격 받은 상태였다. 쥬다스는 뼈로 만들어진 드래곤을 부렸다는 증언에서 노인들이 영웅이라 생각하는 자가 프리드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 있었다. 현존하는 최강, 최악의 제네럴급 사령술사 프리드 길리아노. 사령은 무조건적으로 계약자를 위해 움직이는 정령과는 다르다. 사령의 힘을 빌렸다면 그들의 영혼에는 이미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한 표식이 새겨졌을 것이다. 사령의 제물로 바쳐진 영혼은 죽어도 편히 눈감지 못한다. 사야 황후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는 쥬다스는 굳이 이 사실을 밝히지 않고 속으로 삼켰다. 일행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이 그렇게 숲을 빠져나왔다. 오솔길이 끝나갈 무렵 어슴푸레 연한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던 새벽하늘은 점차 남색이 섞인 오묘한 다홍색으로 바뀌었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오기라도 하듯 숲을 벗어나자마자 구름 낀 지평선 사이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봄꽃이 달린 키 작은 나무가 늘어선 널찍한 평야가 펼쳐졌다. 갑갑했던 마음이 뻥 뚫리는 광활한 풍경이었다. “어후! 이제야 좀 살겠네요.” “디올레 숲이 어지간히도 불편했나보군.” “말이라고요. 불편해서 발바닥에 땀띠 날 뻔했습니다. 저럴 바엔 차라리 괴물이 튀어나오는 게 낫죠.” “경솔한 언행은 삼가라. 전하께서 위험에 노출되는 편이 좋다는 건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괜히 호들갑 떨다가 일침을 맞은 바이칼은 고삐를 한 손으로 쥔 채 머리를 긁적였다. “당연히 지켜드릴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그보다 주군을 위험에 빠뜨릴 괴물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모르겠다며 투덜거리는 바이칼에게로 크리스티나가 끼어들어 말을 건넸다. “본인 뒤통수나 잘 지키지 그래.” “옙? 크리스티나 님, 그때 일은 제가 방심해서.” “그 와이번 꼬마도.”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는 일행 중 유일하게 사고를 일으킨 한 세트였다. 투르케 사막에서 납치를 당했던 일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지라 바이칼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밤새 숲을 빠져나와 날이 밝도록 이동하느라 일행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그러나 평야가 끝나면 곧장 국경도시 ‘베르디’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노숙 없이 곧장 달렸다. 그 예상대로 점심시간이 좀 지났을 무렵엔 평야를 벗어나 국경도시의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국경도시 베르디는 제국 동쪽 제일 끄트머리에 위치한 구역입니다. 이 뒤로는 국경선을 지키는 병사들 뿐, 사실상 제국을 벗어나기 전 마지막으로 제국민이 자유롭게 오가는 자국 영토라 보시면 됩니다.” 위치가 위치인 만큼 베르디는 다른 도시들보다 훨씬 보안이 철저했다. 황실 소속 공방에서 세밀하게 만들어둔 합법적 위장 신분으로 수월히 발을 들이긴 했으나 그마저도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인원을 꼼꼼히 확인하느라 관문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했다. 빈틈없이 쌓아올린 성벽과 마력포를 발사할 수 있는 포문, 그리고 높게 솟은 망루까지 도시라기보단 하나의 요새였다. 내부에 들어가서도 다른 도시들과는 상이한 광경이 이어졌다. 길목을 돌아다니는 대부분이 군복을 입은 병사였다. 어리면 열아홉에서부터 오십 대 중후한 나이까지, 심지어 여성 병사도 종종 보였다. 국경도시 베르디에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나라를 지키는 일에 임하였으며 무기상점이나 마법정비소, 의료원 등이 눈에 띄게 많았다. 도시 내 모든 시설이 거주나 관광보다는 전투에 최적화된 상태였다. 심지어 음식도 주문하면 3분 안에 받아볼 수 있는 패스트푸드를 파는 식당이 주를 이루었다. 「꼭 전쟁을 앞둔 모습 같아요.」 「전쟁? 전쟁하는 거다요?」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고 쥬다스의 머리위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던 토니가 카니의 감상에 제일 먼저 반응했다. 「전쟁이라고 하긴 좀 그렇고. 게릴라들이 자주 습격하나 봐.」 「우앙? 루바르잔이 제일 강하다고 하지 않았다요?」 「바보야. 인간이 강자에게 무조건 굴복하는 종족이라면 복잡한 세계사가 왜 있니? 독립운동은 왜 있어?」 「에에…….」 포로록 날아올라 손가락을 들이밀며 이어지는 타박에 토니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크고 강한 나라라는 건 결국 남의 걸 빼앗아서 이루어진 거거든. 동물의 세계로 치면 약육강식. 다른 점은 인간은 거기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거?」 루바르잔은 영토 전쟁을 통해 땅을 취한 강대국이었다. 역사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드넓은 땅을 지배하고 있는 제국이었지만 모든 약소국이 그 발밑에 엎드린 건 아니었다. 「간절히 되찾고 싶은 거지. 안될 걸 알면서도.」 게릴라단체는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들며 공격했다. 「이해가 안 간다요. 이런 도시를 공격해 봤자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요?」 「침략에 성공하면 물자 정도는 얻겠지. 자신들이 아직 굴복하지 않았다, 뭐 이런 의미도 전달할 수 있고.」 「의미 전달! 그걸 하면 뭐가 달라진다요?」 「낸들 아니?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봐.」 「힝.」 귀찮음에 손을 훠이훠이 내젓는 유니의 태도에 토니는 시무룩하게 질문 공세를 멈추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 역시 이에 관해 의견을 주고받고 있었다. “게릴라인가.” “베르디를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자국영토가 아니니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에단의 걱정스런 말에 바이칼이 휘유 휘파람을 불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분위기가 다르겠네요.” “제국어를 공용어로 배급 중이긴 하나 아직 다 익히지 않은 자들도 많다 들었습니다.” 타국에선 언어의 장벽이 존재할 수도 있었다. 좋은 가문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해외를 경험해 보지 않았기에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코르토반, 자네도 국외로 나가본 적이 없어?” 문득 세이지가 제일 나이가 많은 콜을 돌아보며 물었다. “허허, 소인은…….” 어쩐지 다음에 이어질 말을 알 것도 같아 쥬다스는 미리 작게 한숨을 뱉었다. “스승님의 뒤를 쫓느라 그럴 경황이 없었지요. 워낙에 나라 밖으로는 한 발짝도 걸음하지 않던 분이신지라.” “당신 스승이라면 그 대현자 이그레트를 말하는 겁니까? 하긴, 위인전에도 그가 제국 밖에서 활동했다는 기록은 없었으니. 그렇다는 건…… 애국자였나?” “…….” 단순히 낯선 땅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던 것뿐이지만 쥬다스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3월의 시작이자 삼일절이네요. ^^ (삼일절... 하필 본편 내용이 좀 공교롭게도 전쟁이니 독립운동이니 하는 이야기가 ㄷㄷ;; 의도한 건 아닙니다.ㅠ) 뿐만 아니라 한달의 시작이자 봄의 시작, 학생분들은 새학기를 여는 등 여러 모로 뜻깊은 날이네요. 평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뵙겠습니다! 0135 / 0240 ---------------------------------------------- 16장. 불가항력 그들은 밤새도록 쉼 없이 말을 달려오느라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먼저 숙소를 잡았다. 비에 젖었던 옷을 갈아입고 깔끔하게 씻은 후 휴식을 취하기 위함이었다. 국경을 넘어 타국으로 이동하기 전 이것저것 꼼꼼히 재정비할 시간도 필요했다. 그들이 택한 장소는 국경도시 베르디에서 가장 큰 숙박 시설이었다. 스무 명 가까이 되는 대인원도 거뜬히 수용한 커다란 건물에선 식당과 카페, 숙박을 겸했다. 짐을 풀고 모처럼 제대로 된 휴식시간을 갖게 된 일행은 각자 역할을 나누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비를 관리하는 이들은 마법 인챈트를 점검하고 내구도가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하여 새 것으로 갈았다. 그리고 향후 필요한 품목이 있으면 넉넉히 구비하여 채워 놓았다. 그렇게 제 할 일을 마친 사람 순서대로 자유롭게 식당에 내려와 식사를 시작했다. 직접 그 과정을 지도한 후에야 1층에 내려온 쥬다스는 잠시 멈칫했다.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대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고새 바글바글해졌네.」 만석이었다. 그들 일행뿐 아니라 점심시간을 맞아 우르르 몰려나온 병사들과 여행객들이 어우러져 식당은 무척 붐비는 상황이었다. ‘……차라리 그냥 들어가서 쉬는 편이 나으려나.’ 12살 이래로 건강을 되찾았다곤 하여도, 그는 기본적으로 에단이나 다른 기사들만큼 체력파가 아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어도 비까지 맞아가며 밤새 말을 달린 일정에 상당히 지쳐 있었다. 그가 굳이 저 복잡한 사이에 끼어 식사를 하느니 도로 올라가서 쉬는 게 낫다고 판단한 순간이었다. “쥬다스 님?” “왜 그러고 서 계십니까?” 곧장 뒤따라 내려온 에단과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바이칼은 북적이는 식당 내부를 쓱 훑어보곤 알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어휴, 식당 한번 복잡하네요.” 그러곤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훗,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이럴 줄 알고 미리 자리를 예약해 두었습니다. 가시죠.” “…….” 쥬다스는 차마 호의를 거절하진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들의 예약석은 커다란 파라솔로 햇볕을 가린 테라스에 위치한 큰 테이블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종업원을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붙어 다니던 호위들이 각기 흩어진 데다 세이지도 지칠 대로 지쳐 먼저 쉬러 간 탓에 간만에 루바흐 시절 조합인 넷이서 마주 앉게 되었다. 그래서 음식이 준비되는 동안 그들은 모처럼 편안한 분위기로 담소를 나눴다. “여긴 점심시간에 늘 이렇게 붐비는 모양입니다.” “흠, 대부분 군복을 입은 자들이군요. 국경이라 그런가?” 제국의 위대성을 교육받고 자란 귀족 자제들은 대부분 실상 동쪽 국경지대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고 있었다. 나라에선 전쟁의 승패가 기록된 역사와 영토를 표기해 놓은 지리, 땅을 지배하는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만 가르칠 뿐이었다. 영토전쟁을 종료한 지 백 년도 넘게 지났지만 분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는 역사서는커녕 이를 관리해야 할 수뇌부에게 제대로 전달조차 되지 못했다. “단순히 그렇다 치기엔 분위기가 영 아닌데요.” 바이칼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들기며 거리를 내다보았다. 뻥 뚫린 1층 테라스자리에선 베르디 도시 거리가 코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전운이 가득했다. 식당 고객은 물론 거리를 돌아다니는 이도 대부분 병사들이었다. 심지어 어떤 건물들은 폭격을 맞고 무너진 기둥, 깨진 벽돌 더미를 채 치우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에 더해 도시 상공에는 동그란 구체 형태를 띤 마력구가 이리저리 끊임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하늘에서 전방을 감시하고 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용 마법 아티팩트였다. “뭐든 철저하면 좋다지만, 이건 마치 전쟁 시절 그대로인 듯한…….” “그건 호족 놈들 때문에 그래.” 갑작스레 끼어든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혹시 자리 비었으면 합석 괜찮아? 베르디에 대해 궁금한 게 있으면 내가 좀 더 얘기해 줄 수 있는데.” 옆과 뒤는 깔끔하게 밀어 윗선만 짧게 남겨둔 살구색 머리에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청년이 서글서글하니 웃으며 빈자리를 가리켜 보였다. 소매를 접어 올려 팔뚝을 훤히 드러낸 군복차림에 가슴께에서 반짝이는 목걸이형 동 계급패가 베르디의 병사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들이 자리 잡은 테이블은 6인석이었고 넷이 앉았으니 두 자리가 빈 상태였다. 대단한 격식을 차릴 공간도 아닐뿐더러 지금처럼 복잡하고 자리가 없는 상황에선 충분히 합석을 청할 만했다. 의심이 한 꺼풀 거둬지자 에단이 테이블 아래로 쥐고 있던 검에서 손을 놓았다. “빈자리이니 앉으셔도 좋습니다.” 쥬다스가 친절히 답해주자 청년은 꾸벅 목례를 하고 비어 있던 자리에 합석했다. “고마워. 어휴, 교대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 시간에 나왔더니만. 꼼짝없이 굶는 줄 알았네.” “베르디 병사로 근무하시나 봅니다.” “뭐 아직은 근무고 뭐고 그냥 신참이지. 미성년자 딱지 뗀 지 얼마 안 됐거든!” 병사 지원은 제국법상으로 19세가 지난 성인부터 가능하다. 청년은 뿌듯한 얼굴로 누런 동패를 만지작거렸다. “참, 나는 마빈. 그쪽은 친구들끼리 외국 여행? 세계 일주라도 가?” 「나쁜 앤 아닌 것 같아. 뭔가 복잡한 의도를 가질 만큼 똑똑해 보이지도 않고.」 마빈은 오히려 좀 둔한 성격이었다. 경계심이 별로 없어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지금처럼 편히 대했다. 병사가 되기엔 잔정이 많고 어수룩한 청년이었다. 식당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 중엔 주인의 안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친위기사단원이 상당수 섞여 있었지만 마빈은 그마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무뚝뚝한 에단과 눈길조차 주지 않는 크리스티나를 대신하여 바이칼이 상대의 질문에 자연스럽게 응수했다. “뭐 비슷한 거지. 일단 국경을 넘어가려고 하는데. 분위기가 별로인 것 같아서 걱정되던 참이었어. 요즘 여기에 뭔 일 있어?” “요즘? 그럴 리가. 정확히 백 하나.” 마빈은 검지를 흔들어 보였다. 멍하니 쳐다보는 시선들을 향해 씩 웃은 그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백 년 하고도 일 년을 더 싸우는 중이라고. 우리야 어릴 때부터 전쟁교육받고 자란다지만 멀리서 놀러오는 여행객들은 죄다 놀라더라?” “그 백 년하고도 일 년도 전에 전쟁은 끝난 걸로 알고 있는데.” “응, 딱 그렇게들 알지. 하긴 전쟁까진 아니고 좀 잦은 분쟁 정도야. 백 년 전에 영토전쟁에서 지고 쫓겨난 ‘호족’놈들이 계속 반기를 드는 거라서. 자기들 땅을 되찾겠다나?” 거기까지 설명할 즈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기름에 바싹 튀긴 닭다리를 뜯으며 마빈은 자릿세를 지불하듯 설명을 계속했다. “솔직히 지들도 게임이 안 되는 걸 알아서 정면승부는 못 걸고. 게릴라전만 주구장창! 불시에 숨어들어 테러 뻑! 터뜨리고 하는데 당하는 입장에선 솔직히 미쳐 버리지 아주.” “……위험하군.” 짐작한 것보다 심각한 상황이었음을 깨달은 에단이 작게 탄식했다. 바이칼은 탄식 선에서 그치지 않고 따져 물었다. “이봐, 왜 그냥 지원군 요청해서 확 쓸어버리지 않고서? 설마하니 백 년 동안이나 놈들 위치를 모르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모르긴 왜 몰라. 아주 호족 놈들 주둔지부터 본거지까지 빠삭하게 꿰고 있지. 문젠 그게 아니라.” “아니라?” “상부 허가가 안 떨어져서 선공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거야.” “하? 그건 또 무슨 소리…….” “영토전쟁이 쫑 났으니까. 기껏 잠잠해진 마당에 군대를 움직여 국경 밖을 쓸러 나가면 뭔 규율에 위반된다나 뭐라나. 수비는 되는데 진군은 불가능하대. 겁나게 얻어터지는데 나라에서 싸우지 말라고만 하니 별수 있나. 그쪽은 신나게 쳐들어오고, 우린 열심히 막고.” 황당한 이야기였다. 공격을 받는데 반격을 가할 수 없다는 기막힌 사정을 듣게 되자 크리스티나마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정벌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루바르잔의 권위가 떨어질 텐데. 제대로 상부에 보고가 올라간 게 맞나?” “저기, 나 신병이거든요. 여기서 나고 자라면서 들은 얘기는 있어도 그런 자세한 내막까진 몰라.” 마빈이 들려주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로부터 얻을 게 없다 판단한 크리스티나는 곧장 시선을 거두어 버렸다. 그러자 마빈은 닭고기를 우물거리며 투덜거렸다. “인형처럼 예쁜 여자애가 차갑기는 얼음장이 따로 없네. 이럴 게 아니라 ‘오빠앙, 소녀 궁금하와용’ 하고 애교 한 방이면 장군님도 녹으실 텐…….” “와하하! 애교 없는 여자도 있을 수 있지 왜 이러시나. 사람마다 각자의 매력이 있는 법이지.” 살벌하게 얼어붙는 분위기를 눈치 챈 바이칼이 필사적으로 눈치 없는 젊은 병사의 입방정을 말렸다. 하지만 마빈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씨익 웃으며 말했다. “거 친구, 남자 사귀어본 적 없지?” “…….” 직설적이면서도 무례한 질문에 정곡을 찔린 크리스티나는 그만 분노할 타이밍을 놓쳐 버렸다.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고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마빈은 곧장 바닷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도하게 눈을 내리깔고 무관심하게 있을 때와 정면으로 마주할 때는 완전히 분위기가 천지 차이였다. 늘씬하고 키가 큰 그녀였으나 가녀리다고 하기보단 강인하단 표현이 더 잘 어울렸다. 드레스가 아닌 여행자 차림이라 약간 중성적인 느낌도 들었다. 화장기 없이 꾸미지 않은 얼굴은 제 본연의 색만으로도 충분히 또렷했으며 조각상같이 단정하고 완벽해 보였다.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특유의 오만한 빛으로 상대를 내려다본다. 순순히 아무에게나 함락당하지 않을 고압적이면서도 매혹적인 눈이었다. 그 뛰어난 미색에 내심 감탄한 마빈이 잠시 넋을 놓았다가 황급히 말을 이었다. “아니, 이건 나쁜 뜻이 아니라 그냥 그럴 것 같아서. 내 여동생이 딱 너 같거든.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남자는 싫어하지? 또 그렇다고 먼저 살갑게 애교를 부리는 것도 아니고.” “…….” “이 오빠가 딱 보니까 넌 전형적인 마음고생 심하게 할 타입이네.” 두 사람 다 열아홉 살로 동년배였지만 마빈은 동네오빠의 마음으로 그녀에게 조언했다. “들어봐. 예쁘면 땡이라는 말이 진리긴 한데 이거 간혹 안 먹힐 때도 있어. 남자란 기본적으로 살랑살랑, 따끈따끈에 매력을 느끼는 동물이라. 그렇게 벽치고 차갑게 굴면 아무리 예뻐도 여자로 못 느낄 수가 있다?” ‘감히…… 여자로 보이고 싶다고 바라는 건…….’ 저도 모르게 멍하니 속으로 생각하던 크리스티나는 냉정하게 휙 시선을 거두었다. “쓸데없는 소리.” “아하하, 너무 끼어들었나. 기분 나빴다면 미안. 동생 녀석이 생각나서 그만.” 마빈은 머쓱해져서 뒷목만 만지작거렸다. 가만 지켜보기만 하다 불편해하는 기색을 읽은 쥬다스가 넌지시 끼어들어 화두를 틀었다. “동생에 대해 걱정이 많으신가 봅니다.” “그 징글징글한 녀석들? 말도 마.” “형제가 여럿입니까?” “8남매 중 내가 넷째야. 난 딱 중간인데 내 밑으로 동생이 넷이나 줄줄이, 으휴. 여자 하나에 남자 셋. 전부 내 손으로 키우다시피 했지 뭐.” 8남매라는 말에 에단, 바이칼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이를 필요한 만큼만 낳아 번듯하게 교육시키는 제국 귀족사회에선 자녀수가 보통 하나에서 둘, 많아야 서넛이었다. 모든 역사를 통틀어 혁명이라 불린 ‘포탈’이며 ‘박스’ 등을 개발했을 정도로 마법개발강국인 루바르잔에선 아티팩트에 대한 개발 및 실험을 황실 차원에서 지원하고 있었다. 부부생활 중 임신을 원치 않는 경우 사용할 수 있는 아티팩트도 여럿 출시되어 있었다. 때문에 귀족을 비롯한 부유층은 자녀수를 조절하는 게 가능했고 가난한 평민의 경우 그저 생기는 대로 전부 낳아 길렀다. 그러다보니 마빈처럼 중간 형제가 동생들을 도맡아 키우는 부모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잦았다.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던 네 사람은 그제야 그의 사교적이고 수다스러운 성격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이 중에선 막내로 보이는데. 차분하고 어른스러워서 형누나들 속 썩일 것 같진 않네.” “흠, 글쎄요. 형누나들 속이 안 썩을 것 같진 않은데.” 쥬다스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해 버린 탓에 ‘형누나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묘해졌다. 사정을 모르는 마빈만 홀로 호탕하게 웃으며 이유를 물었다. “왜? 형들이 과보호라도 하나?” “그런 듯도 싶군요. 다들 잔걱정이 많은 편이라.” “그…… 아니…….” 바이칼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손을 내저었지만 결국 무어라 말은 꺼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정신연령 109살짜리 막내(?)에게 듣는 형누나....쿨럭. 참, 원하시는 내용에 관련된 외전은 잘 기억해두었다가 여유가 되거나 완결난 즈음에 써볼까 합니다.ㅎㅎㅎ 말씀해주시는 소재(?) 열심히 메모해두는 중입니다! 출판본에 합류되지 못할 정도로 짧거나 가볍게 다루는 내용인 경우엔 블로그 공개로...허헛. 보내주시는 응원과 애정에 늘 감사드립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 0136 / 0240 ---------------------------------------------- 16장. 불가항력 “엇차차! 늦겠다. 그럼 나 먼저 일어날게. 끼워줘서 고마웠어, 친구들!” 마빈은 병사였기에 정해진 시간 안에 부대로 복귀해야 했다. 오지랖 넓고 유쾌한 성격의 병사는 즐거웠다는 인사와 함께 국경을 지날 때는 꼭 조심하라는 당부를 남기고 후다닥 먼저 자리를 떠났다. 본래 일행끼리만 남은 테이블엔 한층 편안한 기류가 감돌았다. 그러자 그동안 로브 속에 꾸욱 눌려 있던 플루비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처량하게 울었다. “삐이이.” “안 돼. 기다려.” 바이칼이 바둥거리며 사람 음식을 탐내는 와이번을 매몰차게 훈육했다. 그간 투닥거림을 통해 고집을 부려 봐야 옴짝달싹못하도록 구속마법에 걸릴 뿐이라는 사실을 학습해 온 플루비는 전략을 바꾸었다. 녀석은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떼쓰는 대신 시무룩하게 날개를 접고 몸을 웅크렸다. 그러곤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긴 꼬리를 살랑이기 시작했다. 주홍빛 눈망울이 막 깨뜨린 달걀노른자처럼 촉촉하게 반짝였다.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먹고 싶냐.” 바이칼은 질린 눈으로 와이번의 애교를 바라보았다. 남은 감자튀김 따위를 집어다주자 플루비는 날카로운 이빨로 주는 족족 씹어 삼켰다. 주식이 물이라곤 하나 신룡으로 떠받들어지며 인간이 주는 제물로 배를 채우던 플루비였기에 가리는 것 없이 다양한 맛을 즐길 줄 알았다. 행복한 얼굴로 남은 음식을 와작와작 해치우고 있는 플루비를 떨떠름하게 내려다본 바이칼이 문득 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그 호족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일까요? 게릴라니 테러니 하던 것들 말입니다.” “병사가 거짓을 알려줄 이유는 없지. 다만.” 에단은 자신이 말하고도 찜찜함을 느끼곤 미간을 살짝 좁혔다. “상황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군.” “그럼 뭐 역시 직접 알아보는 게 빠르겠네요.” 쥬다스 역시 그 의견에 동의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것보다 베르디 거주자들의 안전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분위기를 보아선 군 시설뿐 아니라 일반 민가에도 테러를 가하는 모양이니 말이야.” 「잠깐, 이그레트. 당장 가보려고?」 어깨에 앉아 있던 유니가 휙 날아올라 그의 코앞을 가로막았다. 「그건 곤란해. 너 지금 상태가 별로란 말이야. 그러다 또 예전처럼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잔소리하는 부모마냥 타박을 놓는 정령을 향해 쥬다스는 난감한 미소와 함께 손을 내밀었다. “유니.” 「……그러니까 곤란하다구!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내가 알아올게. 응?」 뾰로통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부름에 거역하진 못했다. 계약자를 사랑하는 바람의 정령은 순순히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와 동시에 작은 미풍이 주위를 감돌며 불만을 표시했다. 실체화하진 않았지만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녹색 기류를 알아본 세 명의 수하가 멈칫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부리는 자연의 정령들은 어지간해서는 지금처럼 먼저 의지를 드러내지 않았다. 주변에 특별한 이변이 있을 때 나타나 살며시 일러주는 정도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이 아이가 내게 전하려는 이야기가 있어 말이다. 시간을 지체하여 미안하구나.” “아뇨.” 크리스티나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도도하고 냉정하지만 쥬다스에게만큼은 그 모든 경계가 풀어지던 그녀가 아니었다. 그 순간 크리스티나는 올곧은 눈으로 그를 마주 보며 자신의 사견을 밝혔다. “쥬다스 님께 정령이 어떤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분명 상황에 알맞은 이야기를 전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정령들은 어떤 상황이 와도 늘 계약자를 행동의 중심에 두고 움직였다. 계약자란 정령들이 움직이는 목적 그 자체이자 원동력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주인에게 충의를 바친 종보다 훨씬 맹목적이고 절대적인 관계다. 루바흐에서 수년간 그의 학우로서 붙어 다닌 셋은 그런 정령들의 습성을 어느 정도 파악해 냈다. 정령이 계약자에게 제동을 걸었을 때엔 그만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그리 생각하고 보니 평소보다 안색이 조금 창백해 보이기도 했다. 몇 가지 힌트를 토대로 쥬다스의 상태를 알아차린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해졌다. “오늘은 이만 휴식을 취하시길 청합니다. 국경 문제에 대해서는 따로 적합한 인원을 보내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으응? 아니, 크리스티나야. 내 그리할 정도까진 아니다만.” 피곤한 건 사실이었지만 버티지 못할 만큼 힘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그의 항변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제 소견도 같습니다.” 에단마저 우직하게 뜻을 보탰다. “이는 저희들에겐 주군의 안전이 최우선 사항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뜻이 맞지 않을 땐 서로에게 가차 없으면서 이럴 때는 참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플루비를 안아 든 바이칼이 한 축 보탰다. “우리 애들 일 잘하지 않습니까? 그 녀석들 평소에 하는 일도 없는데 이럴 때 좀 시키죠.” 딴에는 친위기사단이란 표현을 자중하여 돌려 말한다고 한 건데 어쩐지 시정잡배라도 된 양 껄렁한 게 어감이 영 좋질 않았다.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바이칼은 도리어 자기 말이 틀렸냐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들을 응시하던 쥬다스는 한숨과 함께 살짝 고개를 저었다. ‘……이러니 과보호라 할 수 밖에.’ 결국 쥬다스는 고집을 꺾고 잔걱정 많은 친우들의 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들이 머무는 숙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편의시설이었다. 보안이 철저한 성이나 저택은 아니었기에 호위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보안에 힘썼다. 정령은 술사가 잠들거나 정신을 잃었을 때엔 실체화할 수 없다. 때문에 휴식을 취한다고 해도 쥬다스는 방 안에 혼자 남겨지지 않았다. 여성인 크리스티나는 제하고 에단과 바이칼이 그와 같은 객실에 들어섰다. 가장 곁에서 혹시 모를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편성이었다. 둘은 쉬는 자리에서까지 무기를 품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실체화되지 않은 채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유니가 베갯머리에 내려앉으며 중얼거렸다. 「잘 자네.」 「우웅. 심심하다요.」 쥬다스는 방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태연함을 유지했지만 쉴 수 있는 공간에 들어오자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동안 무리해서 줄곧 이동을 한데다가 특히 지난밤 찬 기온에 비를 맞고 밤새도록 달려온 터라 그가 느끼고 있던 피로감은 과중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그가 궁을 떠나 순례의 길에 임하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피로하다거나 힘들다는 내색을 한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어린 세이지나 나이가 있는 콜에 대해선 편의를 봐주고 짬짬이 쉴 수 있도록 신경을 썼으면서 정작 본인은 쉬지도 않고 줄곧 움직였다. 사건이 터지면 직접 나서서 일을 수습했고 자신을 따라나선 일행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모든 일정을 총괄했다. 자기관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과는 달랐다. 오히려 쥬다스는 자기관리를 제법 잘하는 편이었다. 한 번 호되게 아팠던 전적이 있었던 탓에 식사와 운동을 규칙적으로 챙겼고 일정 한계치 이상 무리했다거나 아프다는 생각이 들면 알아서 쉬고 치료를 받았다. 문제는 그가 나름대로 정해둔 ‘한계치’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에 있었다. 그의 입에서 힘들다는 소리가 나오려면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이미 쓰러지고도 남았을 시점이 되어야만 했다. 늘 자애롭고 부드럽다 싶다가도 엉뚱한 부분에서 고집을 부린다. 자존심이나 오기가 아니라 정말로 괜찮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가 적용하는 허들은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자애롭지 못했다. 에단과 바이칼은 이미 루바흐 시절에서부터 알고 있던 황태자의 기묘한 고집에 대해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번에 크리스티나가 나섰던 것처럼 그의 상태를 빠르게 파악하여 휴식 시간을 마련하는 정도였다. 두 사람은 혹여 떠드는 소리에 기껏 잠재운 쥬다스가 깨기라도 할까 줄곧 침묵했다. 바이칼의 품에서 벗어난 플루비만이 순진한 눈망울로 방 안을 뽈뽈거리고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너를 생각해 주는 인간 친구들이 생겨서.」 유니는 베개 위에 풀썩 엎드려 손등에 턱을 괴었다. 편안히 잠든 계약자를 빤히 쳐다보던 그녀의 곁에 불의 정령이 함께 풀썩 내려앉았다. 「으응. 다행이긴 하지만, 역시 조금 질투 나네요.」 「뭐가?」 「이제 우리보다 그들을 의지하게 될까 봐.」 카니는 호의와 적의 그 어느 쪽도 아닌 시선으로 에단 쪽을 바라보았다. 자연체인 정령들을 눈으로 볼 수 없는 에단과 바이칼은 그저 호위임무에만 충실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마법사인 바이칼과 달리 타고난 무예가의 핏줄인 에단은 타고난 짐승 같은 감각으로 예민하게 정령의 존재를 느꼈다. 수년간 쥬다스의 곁을 지키다 보니 정령의 기척에 익숙해져 간접적 훈련 효과도 있었다. 그가 감지하는 건 기껏해야 단순히 ‘방 안에 정령이 존재하고 있다’정도였지만 실체화하지 않은 자연체 정령을 알아차린다는 건 굉장한 일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 있던 에단이 고개를 들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응시하자 카니는 쿡쿡 웃었다. 「정말 예민한 꼬마라니까요. 귀엽기도 해라.」 「좀 전엔 쟤한테 질투 난다며?」 「어머? 그건 별개의 문제죠. 귀여운 건 귀여운 거잖아요. 질투의 대상을 귀여워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카니를 향해 유니가 표정을 구겼다. 「난 가끔 카니 네 감정선이 정말로 평범하지 않다고 느껴.」 「후후. 물론이에요. 난 특별하니까.」 「…….」 뻔뻔한 불의 응대에 바람의 정령은 더 할 말이 없어 그저 입을 다물어버렸다. 바닥에서 제 꼬리를 물며 장난을 치던 플루비가 데굴데굴 굴러 침대기둥에 머리를 콩 박았다. 자기가 와서 부딪혀 놓고 삑삑 울어대는 와이번을 심드렁한 눈으로 쳐다보던 유니가 문득 토니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보니 둘이 되게 비슷하네.」 「앙?」 마침 침대보 위를 굴러다니며 온몸으로 심심함을 표출하고 있던 토니가 빼꼼 고개를 들었다. 「하는 짓이 되게 닮지 않았어? 토니랑 저 와이번.」 「?」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아마 와이번이 말할 줄 안다면 말투도 닮았을 것 같지 않아요?」 「?」 영문을 모른 채 두 정령을 번갈아보던 토니는 이내 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뭐다요. 지금 앞담 하는 거다요? 아무리 봐도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의심도 할 줄 알아? 많이 컸네. 칭찬이야, 칭찬.」 「끄앙, 아닌 거 다 안다요!」 와이번과 쌍으로 빽빽거리는 토니를 내버려 둔 채 유니는 쭈욱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카니. 아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응?」 「우리보다 인간들을 더 의지하게 될 것 같다고 했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걸.」 순진하게 깜빡이는 동그란 다홍빛 눈동자를 보며 유니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아는 이그레트는 결코 어느 쪽도 의지하지 않을 테니까.」 「…….」 「그렇지?」 처음부터 그가 우리에게 바란 건 그저 함께 있어달란 소망뿐이었는걸. 뒷말을 삼킨 유니는 포로록 날아올라 쥬다스의 이마에 살포시 자그마한 손을 얹었다. 「아주 조금쯤은 어리광 부려줘도 좋을 텐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17살의 쥬다스는 옛날처럼 병약(..)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또 체력이 강인한 편은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좀 약한 편이긴 하겠네요. 체력의 한계는 주인공이 가지고 있는 나름 약점입니다. 정신력으로 우적우적 씹어버려서 큰 의미가 없을 뿐(...)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라며, 함께 해주시는 독자님들께 언제나 감사드립니다.ㅎ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0137 / 0240 ---------------------------------------------- 16장. 불가항력 그때 대화에 끼지 않고 가만히 엎드려 있던 루니가 귀를 쫑긋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르릉 사납게 목을 울리는 소리에 다른 정령들도 움찔 고개를 들었다. 「이건…….」 “습격이다!” 누군가의 외침 소리와 함께 도시 곳곳에서 요란하게 비상벨이 울었다. 며칠간 잠잠했던 호족의 기습 공격이었다. 정령들이 반응하기가 무섭게 창밖 어딘가에서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인지 큰 혼란은 없었다. 마력포와 병사들이 곧장 투입되었고 베르디 시민 또한 군대 못지않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느껴지자 에단도 창문을 벌컥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끼이이! 뀨루루룩! 아닌 밤중에 새소리가 한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뒤따라 창가에 선 바이칼이 스태프를 빙글빙글 돌리며 하늘을 턱짓했다. “그리폰을 길들였군요.” “……작정하고 육성한 공습부대로군.” 에단의 날카로운 눈길이 도시 상공을 훑었다. 그리폰 열세 마리가 하늘을 휘젓고 다녔다. 그 위에 능숙하게 올라앉은 침입자들은 활과 마력탄을 이용해 지상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사자의 동체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가 달린 그리폰은 초원이나 숲속 등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비행형 몬스터였다. 단순한 맹수를 넘어 몬스터라고 칭해지는 만큼 전투능력이 우수하다. 또한 성질이 몹시 포악하여 쉽사리 사람 손을 타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호족은 먼 옛날부터 부족에 전승되는 비법을 통해 그리폰을 길들여 그 힘을 전쟁에 활용해 왔다. 육상에서만 빠르게 달릴 수 있는 기마부대와 달리 하늘을 날며 적들을 폭격할 수 있는 공습부대는 어마어마한 기동성과 전투력을 자랑했다. 그야말로 기마 따위와는 격이 달랐다. 많은 나라에서 공중전이 가능한 비행군단을 만들고자 노력했으나 결과는 대부분 실패였다. 사람이 탑승할 만한 조건을 만족하는 비행개체의 부족, 온순한 말과 다르게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난폭한 기질, 그리고 사육과 훈련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측면에서 난관을 겪었다. 이 모든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비행부대가 창설된다 하더라도 극소수로만 운영이 되었다. 강대한 영향력을 쥔 루바르잔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건 비행도시 엘리아의 천마 페가수스 훈련소가 유일했다. 날개 달린 몬스터를 길들이는 건 조련 대상에도 문제가 많았지만 파일럿을 훈련시키고 양성하는 과정도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번에 나타난 그리폰 공습조는 비록 숫자는 많지 않았지만 실수 없이 작전을 이행하는 걸 보아 대단히 우수한 실력임은 확실했다. “아무래도 저것들. 영 허접스러운 놈들은 아닌가 봅니다?” “한눈팔지 말고 역할에 집중해라.” “예이, 합니다. 해요.” 바이칼은 툴툴거리면서도 받은 명령대로 착실히 제 할 일에 임했다. 그가 대충 손으로 빙글빙글 굴리고 있던 스태프는 숙소에 깔아둔 보호마법진을 발동하기 위한 마력을 끌어모은 상태였다. 마력배열이 끝나기가 무섭게 탁 고쳐 잡은 스태프에서 은은히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마법진이 발동하며 건물 전체가 흐릿한 청색 배리어로 뒤덮였다. 물리적인 타격이 가해질 경우 대신 그 충격을 흡수하는 실드마법이었다. 총책임자이자 호위의 대상인 쥬다스가 지시하지 않는 이상 친위대는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방어태세만 갖춘 채 무차별 폭격을 가하는 침입자들의 행태를 지켜보았다. 다행히 오랜 분쟁 끝에 이러한 기습 공격에 익숙해진 베르디의 병사들은 당황하지 않고 신속히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마력포를 발사하여 그리폰을 격추시키는 등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어! 저놈들 도망가는데요?” 갑자기 나타나 베르디를 공격하던 호족의 공중부대는 제국군이 제대로 대열을 갖춰 응전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꽁무니를 빼버렸다. 유유히 하늘을 날아 도주하는 적들과 말을 타고 그 뒤를 쫓는 마법기사들 사이로 몇 번 더 폭발음이 터졌다. 에단은 창가에 선 채 성벽 쪽으로 달아나는 그리폰 떼를 주시했다. 마침 성벽 쪽에서도 굉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적들이 공중과 지상, 양동작전으로 침입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차별폭격 후 퇴각이라.” 완벽한 게릴라성 습격이었다. 불이 붙은 건물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놀란 아이 의 울음 소리가 뒤섞여 주변이 난장판이 되었다. 상황이 그쯤 되자 죽은 듯이 잠들어 있던 이도 도저히 깨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잠에서 깬 쥬다스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에단.” “……예.”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돕도록 하여라.” 지시는 간결했다. “나는 성벽 쪽으로 가보마.” “뒤를 따르겠습니다.” 에단은 곧장 동행 의사를 밝혔다. 모시는 주군이 아무리 강한 정령술사라 한들 위험한 상황에 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쥬다스는 그의 뜻을 말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은 닫혀 있었지만 어디선가 바람이 몰려들어 옷자락을 스쳤다. “아니, 그럼 저도.” “피해자들을 돕는 일은 자네가 맡도록.” 함께 따라나서려던 바이칼은 할 일을 떠넘기는 에단의 단호한 명령에 움찔 굳었다. 곧 소용돌이처럼 몰려든 녹색바람에 휩싸여 두 사람이 자리에서 사라졌다. 홀로 남아 어정쩡하게 서 있던 바이칼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한탄했다. “아오, 진짜! 맨날 나만 이런 역할이야!” 불만가득한 말과는 달리 몸은 이미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폭격에 노출된 주민들의 안전이 시급했다. * * * 쥬다스와 에단이 바람의 인도에 따라 성벽 밖으로 이동했을 때쯤엔 게릴라들과 베르디 병사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치고 빠지는 데에 익숙한 게릴라단체는 바로 퇴각하지 않고 살짝살짝 간을 보다가 싸움이 커질라손 치면 얄미울 정도로 쏙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베르디 군사 역시 이런 간지러운 싸움에 익숙해져 있었다. 눈먼 마법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사방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베르디가 적군을 쫓는 걸 멈출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포로를 잡았기 때문이다. 게릴라는 득 없는 싸움을 하러 도시에 침범한 게 아니었다. 폭격을 가하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다 끌고 갔다. 그런 식으로 끌고 간 포로들은 본보기로 참수당하거나 물자를 요구하는 거래대상으로 쓰였다. 이 성 밖 전투는 최대한 포로를 많이 데려가려는 게릴라들과 그 포로를 탈환하려는 병사들 간의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전장의 한복판에 무방비상태로 나타난 두 사람 역시 침략자들이 보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스릉- “뭐지, 샌님들 같은데. 이런 데서 한가롭게 관광인가?” “…….” 쥬다스는 제 목에 맞대어진 검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미 누군가를 베고 온 듯 뜨끈한 핏물이 배어 있었다. 그는 순순히 양손을 포박당했다. 충분히 벗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밧줄에 손을 묶인 쥬다스를 본 에단도 움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원래대로라면 지금 당장에라도 일격에 상대의 머리를 날려 안전하게 구해낼 수 있었지만 그러기에 쥬다스의 행동이 너무나도 덤덤했다. 심지어 정령들조차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선 그를 보고 동료가 당해서 당황했다고 여긴 호족 전사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무기 버려!” 끄덕, 쥬다스의 신호를 받은 에단은 망설임 없이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버렸다. 곧 둘은 나란히 손이 묶여 다른 포로들을 실어둔 수레에 함께 실렸다. 철창에 자물쇠까지 걸어둔 튼튼한 수레였다. 그 안에는 폭발의 여파로 잿더미를 뒤집어쓴 채 떨고 있는 이십여 명의 포로가 있었다. 겁먹은 눈길이 새로 들어온 포로들에게로 향했다. 덜컹!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 포로를 수용한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레를 끄는 건 소나 말이 아니라 길들여진 그리폰이었다. 말들이 끄는 마차와 다르게 그리폰 수레는 힘차게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르자 사람들 사이에서 새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엄마야!” “히익. 나, 날고 있어!” 충격과 공포로 소란스러워진 틈을 타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혹 생각을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철창에 기댄 채 멀어지는 지상을 내려다보던 쥬다스는 사과로 대신 답했다. “내 독단적인 판단으로 이런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을 듣고자 여쭌 것이 아닙니다.” “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방식이 아니라 홀로 잠시 다녀올까 했었지.” “저……!” 황당함이 지나쳐 ‘전하’라고 소리칠 뻔한 에단은 가까스로 자신을 진정시켰다. 강철같이 단단한 성미에 늘 무뚝뚝한 그가 평소에 동요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상관이 지금처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언행을 보일 때를 제외하곤. 쥬다스는 철창 밖으로 멀어지는 지상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지금 내가 하려는 일은 너희 보기에 위험해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이미 충분히 위험하십니다…….’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이 다시 목구멍 언저리에서 가로막혔다. 에단은 그저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폰 수레는 얼마 가지 않아 지상으로 착륙했다. 수레바퀴가 부서질 듯 덜컹거리며 바닥에 내려앉는 바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은 적응할 새도 없이 다시 비명을 내질러야 했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자 수레를 몰던 호족이 고삐를 놓고 바닥에 내려섰다. 쿵! 투박한 양날도끼, 비펜니스 형식의 무기를 휘둘러 땅에 찍은 호족 전사가 거칠게 일갈했다. “입 다물어! 더러운 제국 놈들.” 순식간에 비명 소리가 뚝 끊겼다. 질긴 가죽을 엮어 만든 경갑을 걸친 사내는 숨도 쉬지 않고 철창에 딱 달라붙은 포로들을 향해 도끼날보다 날선 눈빛을 부라렸다. “지금부터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수틀리면 다 모가지를 콱 날려 버리는 수가 있어.” 포로들은 일제히 시선을 땅으로 내렸다. 호족은 성미가 급하고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어차피 이 중 몇은 죽여 잔혹함을 증명하고 몇은 자원과 교환할 셈으로 데려왔으니 당장 머리 몇 개 날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포에 숨을 죽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직까진 어린아이부터 젊은 여성들까지 전부 혼절하거나 덜덜 떨지 않고 잘 버티는 편이었다. 그들에게 이런 분쟁은 일상이니 두렵긴 해도 아예 새삼스러운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색을 읽어낸 쥬다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위기에 대한 공포가 이미 만연해 있구나. 어린아이들마저 이런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고 순응하고 있다니.’ 예전 같았으면 관심 없이 지나갔을 일이었다. ‘이그레트’는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에야 타인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지 않고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부모를 잃고 죽어가는 전쟁고아를 거두긴 했어도 아이의 복수를 해주거나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고려는 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힘으로 누군가를 편들기 시작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재앙이라 생각했다. 선의로 내민 손길에 달려드는 불행은 끝도 없이 꼬리를 물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개입을 꺼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누군가를 구해 다른 누군가가 불행해진다. 어찌 보면 당연한 삶의 이치인 것을.’ 선의는 방관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때로는 두루뭉술하게 방관하기보다 분명한 선을 긋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현재 루바르잔을 다스리는 통치자의 피를 이은 그가 지켜야 할 대상은 명명백백 정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슬슬 입장에 따른 차이를 인식하며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기 시작한 쥬다스입니다. 적으로 분류된 이들에게 애도를...(..)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 한주의 마지막이 또 돌아왔군요! 즐거운 불금 보내시길 바랍니다~ ^^ 0138 / 0240 ---------------------------------------------- 16장. 불가항력 “망할 제국 놈들. 나와!” 잠시 포로를 수레에 실은 채 상황을 살피던 호족들은 쫓아오는 제국군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철창을 열어주었다. 자유를 준 건 아니다. 그저 더 넓고 확실히 감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포로들을 이동시켰을 뿐이었다. 쥬다스와 에단은 포로들 틈에 섞여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 수레에 끌려온 자들 외에도 다른 경로로 잡혀온 사람들도 함께 한자리에 합류시켰다. 장정 다섯이 팔 벌려 안아도 남을 만큼 커다란 느티나무가 하나 보였다.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의 손을 묶은 밧줄을 전부 연결시켜 나무에 둘둘 감아 묶어놓았다. 언뜻 허술해 보이기까지 한 조치를 끝으로 그들을 나무 아래 데려다놓은 호족 사내는 휙 자리를 떠나버렸다. 그건 믿는 구석이 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뀨루룩.” 포로 감시자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폰이었다. 머리는 독수리처럼 생겼지만 목 아래로는 거대한 사자 몸통이 이어졌다. 그 몸집을 지탱하는 만큼 두터운 네 개의 다리엔 흰털이 북슬북슬 자랐고 날카로운 발톱이 삐져나와 있었다. 풀밭에 배를 깔고 느긋하게 엎드려 있던 그리폰은 낯선 사람들의 냄새를 맡자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그러자 오히려 거대한 양날도끼를 한 손에 휘두르던 사내가 지킬 때보다 훨씬 더 고요한 침묵이 감돌았다.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려는 듯 가까이 다가온 그리폰은 경고하듯 끼룩거렸다. 괴수를 앞에 둔 사람들은 나무에 손이 묶여 달아나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전부 사자 앞의 토끼 꼴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사납게 사람들을 압박해 가던 그리폰이 문득 한 사람 앞에서 정지해 버린 것이다. “……?” 「흐응. 제법 감이 좋은 아이네.」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이 팔짱을 낀 채 방앗간 참새 보듯 가소로운 눈빛으로 그리폰을 보았다. 그리폰은 쥬다스의 앞에 당황한 기색으로 굳은 상태였다. 따로 실체화를 한 건 아니었지만 동물적인 본능이 그를 가호하는 자연의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알아봤으면 숙여야지. 안 그래?」 말이 들리는 건 아니라도 그리폰은 알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꼬리를 말았다. 그리곤 슬금슬금 자리에 엎드렸다. 그 꼴을 본 유니가 만족스레 그리폰을 향해 손짓했다. 「봐, 카니. 귀엽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라구.」 「으응,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그리폰은 정령들의 눈치를 보며 시무룩하게 눈만 데록데록 굴렸다. 그런 녀석의 코앞으로 천천히 밧줄에 묶인 손이 내밀어졌다. “괜찮아. 괴롭히려던 건 아니란다.” “꾸룩.” 완벽히 힘의 차이에 굴복한 그리폰이 양순한 태도로 손바닥에 머리를 비볐다. 뽀송뽀송한 새의 머리털이 손바닥을 폭 감쌌다. 쥬다스는 덩치는 사자만 한 주제에 아기 새마냥 구는 그리폰을 차분히 다독여 주었다. “그래, 착한 아이로구나.” “어……? 낮에 합석했던!” 그 순간 얼어붙은 채 쥬다스와 그리폰을 바라보기만 하던 포로들 틈에서 누군가 불쑥 큰 목소리를 냈다. “우왓차차, 묶여 있었지 참.” 반가운 기세로 달려오려던 청년은 나무기둥에 단단히 묶여 있는 밧줄 때문에 고꾸라질 뻔하고 자세를 바로 했다. 밧줄은 숙이거나 약간 움직일 수는 있어도 제자리로부터 몇 걸음 이상 떼기 어려운 길이로 고정되어 있었다. 쥬다스와 에단 역시 그를 알아보고 돌아섰다. “아. 다시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빈.” 태연스레 인사를 건네는 쥬다스와 그 곁에서 묵묵히 목례하는 에단을 번갈아본 마빈이 어색하게 밧줄에 묶인 양손을 들어 보였다.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이라 반갑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아무튼 놀랐어,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저도 놀랐습니다.” 놀란 사람치고는 표정이며 어투까지 느긋하기 짝이 없었지만 마빈은 꼬투리를 잡는 대신 멋쩍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우, 베르디의 군인으로서 면목이 없다. 하필 내 쪽에 폭격이 떨어져서.” 직격탄을 맞은 건 아니지만 그 여파에 휩쓸려 거하게 구른 모양인지 복장이 아주 너덜너덜했다. 병사가 포로로 잡혀오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쥬다스는 거기엔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상태를 눈으로 한번 살폈다.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이군요.” “뭐 그렇긴 하지. 그런데 지금 여기엔 두 사람뿐? 다른 친구들과는 떨어진 거야?” “예, 말하고 나왔으니 크게 걱정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마빈은 곁에 있는 에단을 향해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 넷이나 되는 동생을 업어 키우다시피 한 보호자로서의 고충을 떠올린 탓이었다. 가만 보니 연장자이면서 체격이 큰 에단조차 저 순둥이처럼 보이는 소년에게 이기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막내라고 너무 오냐오냐 해주나 보네. 보기보다 상당히 마이페이스인 꼬마인 모양인데.’ 오해 아닌 오해를 사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쥬다스는 그리폰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여긴 호족 주둔지인가 봅니다.” “아, 그래. 놈들 본거지는 좀 더 깊숙이 들어가야 있을 거야. 포로로 협박이든 협상이든 간에 하려면 가까이 있는 편이 좋을 테니까.”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 사이로 잊고 있던 공포심이 파도처럼 너울졌다. 결국 잘 참고 있던 어린애 하나가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당황한 마빈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혹시 조련사야?” 쥬다스가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올려다보자 마빈은 눈짓으로 바닥에 발라당 엎드려 그르렁거리고 있는 그리폰을 가리켰다. “호족이 아닌 자가 그리폰을 그렇게 잘 다루는 건 처음 봤어. 전설의 조련사라도 돼? 그 사나운 놈을 어떻게 한순간에 따르게 만든 거야?” “조련사는 아닙니다. 이 아이는 나를 따른다기보다 자연을 따르고 있을 뿐.” “엥?” 「이그레트, 혹시 건방지게 굴면 말해요.」 그의 옷자락을 꼭 끌어안고 있던 불의 정령왕이 해맑게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조져 줄게요.」 “……!” 해사한 웃음 뒤로 화끈한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폰은 급기야 바닥에 엎드린 채 와들와들 떨어댔다. 정령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영문을 모르는 마빈은 갑자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그리폰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엄청난 비법이 있나 보네. 그렇다 해도 계속 그러면 눈에 띌 텐데.” “여기선 눈에 띄면 안 좋은 겁니까?” “내가 알기론 말이지. 감시자가 없어도 이 주둔지 내부는 온통 호족의 감시망에 속해 있을 거야. 지상은 물론 상공까지 싹 다! 아예 땅굴을 파서 달아나지 않는 이상에야 걸리지 않고 탈출하는 방법은 없을 거라 본다, 난.” 형편없는 솜씨로 대충 묶어둔 밧줄, 그리고 전의를 상실한 그리폰이라는 최적의 조건 두고도 탈출의 단꿈에 젖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어쨌든 네가 그리폰을 길들일 줄 안다는 사실이 놈들 눈에 뜨이면 아주 곤란해질 거야. 호족은 특별한 재주를 가진 포로는 풀어주지 않는다고 들었어. 오히려 본거지로 데려가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킬지도.” “흐음.” 애초에 본거지를 찾아가려던 쥬다스로서는 잘 된 일이었다. 그는 아예 자리에 풀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곤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는 그리폰의 부리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잠시 조련사가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쥬다스 님.” 풀밭에 편하게 앉은 그의 곁에 에단이 따라서 턱 한쪽 무릎을 꿇어앉았다. 무언의 뜻이 담긴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쥬다스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빠르고 쉬운 길만이 능사는 아니야.” “주군께서 더 이상 수모를 당하도록 묵인할 수 없습니다.” “받을 수모를 생각하면서 움직이려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 없단다. 나는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게다.” “그들에겐 그러실 가치가 없습니다.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여 제국의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침략자들입니다.” “듣거라.” 단호함이 깃든 반발에도 쥬다스의 음성은 담담히 이어졌다. “신이 인간을 심히 사랑하여 영원토록 버리지 않는다 하거늘. 어찌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그들의 가치를 함부로 결정짓는단 말이더냐.” 먼저 에단의 입장을 곤궁하게 만든 건 신권을 높이 세워 유일신 사상을 국교로 삼은 루바르잔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반박할 수 없는 종교적 사상이었다. “손뼉도 합이 맞아야 소리가 나는 법이다. 땅을 빼앗긴 입장에선 제국이야말로 무뢰배나 다름없을 터. 저들이 바라는 목적이 정확히 무엇이고, 이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안이 있는가를 알아보는 게 우선이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자비였고, 이를 다시 풀어 말하자면 힘 있는 자의 관용이었다. 힘이 없고 그릇이 작은 자는 자비를 베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자비를 베푼다는 건 상대보다 철저하게 우위에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처음부터 힘으로 겁박한다면 대화가 되겠느냐.” 그래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자비란 없다는 소리였다. 에단은 더 이상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주인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무릎을 꿇은 채 공손이 고개를 숙였다. 위험을 감수하고 적장을 만나려는 주군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려던 신하. 그 묘한 군신관계에서 벌어진 짤막한 대치가 종료되자 지켜보던 마빈이 눈을 끔뻑이며 슬쩍 운을 떼었다. “얼라료. 형님 아우 하는 친구들이 아니었나?” “친구는 맞지만 형님 아우 사이는 아닙니다. 아, 그리고 제가 막내도 아닙니다. 동생이 베르디에 같이 와있으니까요.” “동생도 있었다고?” 마빈이 아무리 눈치 없는 말단병사라 할지라도 방금 대화를 지켜보며 이미 쥬다스가 평범한 소년은 아니란 사실은 알아차렸다. 그래도 첫인상이란 게 제법 강했던 모양인지 일행 중 막내라 여겼던 그 밑으로 동생이 있다 하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친동생?” “그렇습니다.” 머리색이 다른 배다른 동생이긴 했지만 같은 아버지의 피를 이은 건 확실했다. “형제가 위아래로 몇 명씩 있는데?” “아래로만 둘…… 이군요.” 말하다 보니 2황자 카이제르의 얼굴이 떠올랐다. 둘째 황자는 드물게 마법과 신체적 이능을 동시에 타고난 천재였다. 야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수를 읽을 줄 알아 3황자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린 쥬다스를 보고 곧장 고개를 숙였다. 카이제르는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였지만 그조차도 쥬다스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그가 조금만 더 야망이 높은 자였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불운을 통탄하며 좌절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어 황태자 자리에 앉은 쥬다스는 하필 천재여도 그냥 천재가 아니었다. 자연계 4속성 정령의 계약자! 대현자 이그레트 이후 전무후무한 정령술사의 탄생이었다. 심지어 그 수준조차 상급에서 최상급이라 알려졌으니, 정령왕급이 아니더라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황제는 오래전부터 1황자를 총애 한다 소문이 나 있었고 실제 별다른 이견 없이 쥬다스를 황태자위에 올렸다. 게다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전부 지배층의 큰 축을 맡고 있는 고위귀족들이다. 쥬다스는 사야 황후를 처단한 직후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는 완벽한 차기 군주가 되었다. 그야말로 철옹성이나 다름없었다. 이길 수 없는 상대임을 깨닫자마자 유순한 성격의 카이제르는 순순히 야망을 버리고 칩거생활에 들어갔다. 평소 좋아하던 학문과 재능이 있는 무예를 골라 익히며 얌전히 지낸다고 들었다. 하지만 형제를 찾아오지도, 찾아오는 걸 반기지도 않는 그런 서먹한 사이였다. 그는 3황자 세이지가 침묵의 궁에 유폐된 이후 내내 단 한 번도 동생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살아 있음을 알고 지내는 정도의 사이였다. ‘황실의 핏줄이라. 그마저도 다행인지도 모르지.’ 피로 물든 왕관을 쓰기 위해 형제의 가슴에 칼을 박는 역사보다야 지금이 훨씬 깔끔했다. 애초에 그는 가족이란 개념에 무지했다. 전생과 현생 모두 가족애를 느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비단 그뿐 아니라 황실의 특성상 부모형제와 평범한 가정처럼 친밀하게 지내기는 어려웠다. 생각해 보면 세이지와의 인연이 어마어마하게 특별한 것이었다. 사실 그들도 본래대로라면 원수가 될 사이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쥬다스는 조용히 쓴웃음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어어 또다시 월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상하게 월요일은 자도자도 졸리네요.... 정말 이상해요...그러니까, 제가 게으른 게 아니라 월요일이 이상한 겁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ㅎ 감사합니다! 0139 / 0240 ---------------------------------------------- 16장. 불가항력 한편, 호족 전사들은 포로들을 나무 아래 묶어두고 짤막한 회의를 나누는 중이었다. “전사 5인, 그리폰 2기 손실. 포획한 포로는 스물다섯. 이상 작전을 성공적으로 종료하였음을 보고합니다.” “수고했다.” “포획한 포로 수가 지난 작전 때에 비해 두 배나 많습니다. 그중 제국군인의 수가 다섯입니다. 놈들이 일부러 심어놓은 것일 수도…….” “상관없어. 늘 하던 대로 분류해.” 덤덤한 대화가 이어졌다. 그들에게 있어 이번 습격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의 일부였다. 고향을 잃은 백여 년 전 그날부터 호족은 오로지 싸우기 위해 살았다. 붉은 깃으로 장식한 가면을 쓴 사내가 전사들을 향해 낮게 명령했다. “오늘 이후 이 거점은 버린다.” “예!” 본거지에서 몸을 숨기고 있을 거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호족의 우두머리는 습격에 직접 가담하여 전두지휘하고 있었다. 왕은 가장 뛰어난 전사이자 책략가로 군림하며 거의 모든 전투에서 빠짐없이 선봉을 맡았다. 지금 쓰고 있는 붉은 가면과 더불어 그리폰의 발톱을 갈아다 촉으로 심어 넣어 제작한 쌍두창이 바로 왕의 상징이었다. 그리폰을 몰고 지상에선 창을, 상공에선 활을 사용하여 무수히 많은 적의 숨통을 거두어 왔다. 그가 지닌 무력은 부족 최고였다. 몸을 사리지 않고 용감하게 나서는 수장을 보자 호족의 전사들의 사기가 더불어 치솟았다. 뛰어난 무력과 기개, 책략을 동시에 갖춘 지도자는 집권과 동시에 제국에게 패배한 이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던 호족역사를 뒤집기 시작했다. “해산.” 호족의 왕은 깔끔하게 회의를 종료했다. 전사들이 제 위치를 찾아 우르르 흩어지자 그는 곁에 남은 부관을 향해 물었다. “포로들은 어디에 두었지?” “그리폰들의 쉼나무에 묶어두고 페리에게 감시를 맡겼습니다.” 그리폰은 본래 울창한 숲이나 높은 산속에서 살아가는 종족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나무에 이끌렸다. 새처럼 둥지를 틀진 않지만 등을 붙이고 잠들 수 있는 나무를 하나 정하고 서식하는 편이었다. 그리폰이 택한 나무를 ‘쉼나무’라 불렀다. 그리고 이들이 포로들을 묶어둔 커다란 느티나무가 바로 이 거점에 머무는 동안 그리폰들이 휴식을 취하는 마구간 역할을 했다. 보고를 받은 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페리에게 맡겼나? 녀석이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을지 의문이로군.” 페리는 그중에서도 덩치가 크고 힘이 좋아 제법 높은 서열을 차지한 그리폰이었다. 사실상 최고 서열은 왕의 그리폰 ‘알파’였지만 주인의 명령만 듣는 까탈스러운 성격 탓에 늘상 곁에 붙이고 다녔다. 알파는 지금도 왕의 그림자처럼 어슬렁어슬렁 뒤를 따르고 있었다. “모처럼 머릿수를 많이 포획했다더니. 써먹지도 못하고 전부 고깃덩이가 되어버리는 건 곤란한데.” 최고 서열이 아닌 페리가 쉼나무를 찾은 다른 그리폰들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왕이 염려하는 건 포로들의 탈주가 아니라 안전이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페리는 자기가 맡은 임무를 목숨 바쳐 수행할 충성스런 그리폰이니까요.” 부관은 흔들림 없이 답했다. 신뢰가 담긴 어조를 귓등으로 흘리며 왕은 몸소 포로들을 모아둔 쉼나무로 향했다. 꼭 그리폰이 기껏 잡아온 포로들을 한 끼 식사로 대체했을 거란 의심 탓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우스갯소리로 던진 말일 뿐이다. 왕은 뭐든 제 눈으로 확인하려는 버릇이 있었다. 작전수립, 진행, 결과 보고까지 일일이 직접 참여했다. 특히 포로를 잡으면 면대면으로 인상을 살펴 신분과 재능 여하를 판별해 냈다. 그의 눈썰미는 정확했고, 거액의 몸값을 요구할 만한 출신 신분이거나 요긴하게 활용 가능한 능력자는 그에게 곧바로 걸러졌다. “지금 살펴봐서 써먹을 만한 재주가 있는 놈이 있으면 곧장 본부로 데려가겠다. 남은 놈들은 명단작성해서 3일 후 베르디에…….” 임시로 세워둔 천막을 돌며 늘 하던 대로 부관에게 지시하던 왕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왕이 갑자기 침묵하자 의아한 얼굴로 앞을 내다본 부관 역시 눈을 부릅떴다. 붕어처럼 몇 번 입만 뻐끔거리던 부관이 혼비백산하여 간신히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이, 이게 무슨!” 눈앞에 장관이 펼쳐져 있었다. 게릴라 습격 작전을 수행하고 와서 지친 그리폰들은 그들의 예상대로 쉼나무에 몰려들었다. 페리는 결국 아홉 마리나 되는 동족들을 전부 통제하지 못했다. “…….” 가면 속에 가려진 왕의 흑청색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창대를 쥔 손아귀에 콱 힘이 들어갔다. ‘복종.’ 현재 상황을 표현하는 정확한 단어였다. 총 열 마리의 그리폰이 전부 한 소년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 그중 감시 역을 맡은 페리는 아예 발라당 배를 뒤집고 갖은 애교를 다 떨어대는 중이었다. 왕은 보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타고난 성질이 흉포하여 길들인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을 절대 따르지 않는 게 그리폰이다. 그마저도 오랜 역사를 그리폰과 함께해 온 호족이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호족과 그리폰과의 관계는 동료에 가까웠다. 저 까탈스럽고 자존심 강한 그리폰들이 누군가에게 엎드리거나 배를 까뒤집어 복종을 표하는 일은 지금껏 전무했다. 심지어 갓 태어난 새끼 그리폰조차 제 부모에게 뱃가죽을 내보이지 않는다. 배는 급소다. 놈들은 주인의 명령을 듣고 친밀함을 느끼긴 해도 생명을 내맡길 정도로 절대적인 복종을 하진 않는다. ‘저런 자가 포로 따위로 잡혀 왔다고?’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호족의 왕은 천천히 눈앞의 상황을 한 번 더 훑었다.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십 대 중반의 소년이다. 갈색 머리카락에 금안,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외형에 그리 강해 보이지도 않았다. 도리어 조금 유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발치에 그리폰들이 전부 엎드려 복종과 경외를 표하고 있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장면이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도통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왕이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 않자 소년이 먼저 그의 기척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맑은 금색 눈동자가 고요히 그를 바라보았다. 특별할 것 없다 여겼던 눈과 마주치자 경직되었던 어깨가 스르르 풀어졌다. 어른이 어린아이를 볼 때처럼 온화한 빛의 금안에는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왕은 한 차례 숨을 고르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누구냐.” “…….” “누구냐고 물었다.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왔는가?” 대답이 없었다. 상대가 묻는 말에 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자 무시당했다고 느낀 가면 속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불쾌를 숨기지 않고 덕지덕지 묻혀서 다시 말했다. “마법사인가? 그리폰들을 전부 제압할 실력이라니, 제법 강력한 이능을 지니고 있나 보군. 제국 황실에서 보냈나?” “황실에서 온 것은 맞습니다. 하나 이 경우 ‘보냈다’는 표현보다는 ‘찾아왔다’는 말이 더 적합하군요.”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왕은 순순히 대답하는 소년을 보며 지독한 모멸감에 휩싸였다. ‘그래, 너희들은 우릴 언제든 지워버릴 수 있는 땟자국 정도로 여기고 있겠지!’ 지금의 호족은 사실상 부족이나 나라라고 칭하기 어려웠다. 그저 근본 없이 떠도는 패잔병들이었다. 선대의 시대 때 영토전쟁에 의해 나라는 삼켜졌고 왕조는 처참히 짓밟혔다. 남은 것은 포기하는 것을 포기한 전사들뿐이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한 왕의 후손과 전사들은 지박령처럼 빼앗긴 땅 주변을 맴돌았다. “드디어 백여 년 전 당신들이 남긴 불씨를 진압이라도 하고 싶어졌나 보지?” ‘왜 이제 와서.’ 호족은 민족성이 강했다. 그들은 차라리 짓밟혀 죽는 한이 있어도 결단코 지배당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계란으로 바위 치기임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분쟁을 지속했다. 그러는 사이 욕심이 커졌다. 루바르잔 제국은 넓어진 땅덩어리를 온전히 보살피지 못했다. 이미 그 안에서 부패한 것도 많았다. 국경 밖에서 항쟁하는 나약한 게릴라 따위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제국 내에선 안정되지 않은 황권과 신권, 귀족세력 사이에선 보이지 않는 냉전이 유지되며 끊임없는 교체가 일어났다. 제국이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하는 사이 호족은 그럴듯한 본거지를 갖추게 되었고 열심히 훈련시킨 전사들은 제국군과 맞부딪혀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들의 웃음을 바라보며 그들은 희망이란 여신의 옷자락을 엿보였다. “당신이 지도자입니까?” “그래. 내가 호족 전사들의 왕 ‘호세 타이겔’이다. 원하는 게 무엇인지 말해라.” 왕, 호세는 놀랍도록 침착하게 대응했다. 타오르는 분노와 반대로 눈은 차갑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어찌하면 제국민들을 해치는 일을 멈출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왜 멈춰야 하지?” “멈추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담담한 말투가 오히려 더 신경에 거슬렸다. 소년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여겼던 전쟁을 애들 다툼 말리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희 제국은 우리의 땅을 빼앗은 적이다. 적이 적을 섬멸하는 것에 이유가 더 필요한가?” “영토전쟁은 이미 백 년도 더 전에 끝났습니다.” 그러니 적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 말뜻을 이해한 호세가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창을 날렸다. “그 오만한 눈엔 민족의 결의가 그리도 우스워 보이는가!” 쇄액! 호세의 창은 빨랐다. 태어나자마자 분쟁에 노출되어 강한 힘을 목표로 훈련에 몰두하며 자라온 그였다. 호세 타이겔은 열다섯 어린 나이에 전쟁으로 부친을 잃고 왕이 되었다. 그로부터 벌써 십이 년째, 그는 그리폰에 올라 창을 들고 국경지대를 넘나들며 노련한 장수로 성장했다. 설움과 살육으로 다져진 창끝이 매섭게 날아들어 적의 목을 단숨에 꿰뚫으려던 찰나였다. 번개같이 그 사이에 끼어든 날붙이가 창을 가로막았다. 쩌엉! 그릇이 깨지는 소리와 흡사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년은 코앞에서 방향이 비틀려 목옆으로 지나친 창대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빙그레 미소 지었다. “참, 녀석도. 보통이 아니로세그려.” “……보통이 아닌 건 네놈 쪽이지.” 왕은 허무하게 중얼거리면서 창을 거두었다.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동료가 있는지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달려들다니. 성급했다. 저 소년과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자꾸 본래 페이스를 잃는 기분이었다. 호세의 시선이 자신의 창을 막아낸 검은 머리 청년에게로 힐끗 옮겨갔다. 어느 틈엔가 양손을 속박했던 밧줄을 풀고 소년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호세의 창을 쳐 내는 데에 사용한 건 대단한 무기가 아니라 겨우 소매 안에 숨겨 두었던 작은 단검이었다. “이건 경고인가? 아니면…….”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그걸 들은 호세는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뭐라?” “누구의 명도 받지 않았으며 아직 어떤 결단도 내리지 않았으니.” 부드럽지만 그는 결코 유약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처음부터 공포나 불안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쥬다스는 이 가운데 철저히 우위에 선 강자였다. “나는 당신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습니다.” 호세는 이제야 자존심 강한 그리폰들이 그의 발치에 엎드린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옙, 쥬다스는 조련사가 맞습니다. 정령+동물+인간 종합조련사..쿨럭....농담입니다;;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코멘트, 추천, 후원쿠폰 등 보내주시는 응원에 늘 감사드립니다! 0140 / 0240 ---------------------------------------------- 16장. 불가항력 “루바르잔…… 제국의 황태자라고?” 왕의 음성이 어린애 손가락 사이에 낀 잠자리날개처럼 볼품없이 떨렸다. 왕 자신조차 그 떨림의 의미를 자세히 알지 못했다. 터무니없는 소개에 황당함을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제국의 차기 군주에 대한 두려움일지도, 그런 엄청난 존재가 국경지대의 사소한 분쟁을 해소하기 위해 몸소 행차했다는 사실이 못내 우스워서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저 단순히 적장의 피를 이은 후계의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에 심장이 뛰는 걸지도. 호세는 복잡한 머릿속을 긁어내기라도 하듯이 머리를 몇 번이고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국은 우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있던 게 아니었나? 아니, 신경이 쓰였다면 아예 군대을 보냈겠지. 어째서 황제의 후계가 이런 곳에? 정말로 명을 받고 온 게 아니란 말인가?’ 따로 증명할 필요도 없었다. 호세는 본능적으로 상대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알아차렸다. 눈앞에 있는 저 소년의 여유는 허세가 아닌 진짜배기였다. 오히려 믿지 못하고 있는 건 함께 묶여 있던 제국군 마빈이었다. ‘조련사 아니었어?!’ 마빈은 차마 소리 내어 지적하진 못하고 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황태자 전하의 외향은 은발에 금안으로 유명하시다고. 아무리 지금 상황이 암울하다지만 간도 크게 황족 사칭이라니……!’ 중범죄 중에서도 엄벌로 다스리는 범죄였다. 황족을 사칭하는 자는 단순 징계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그 대상이 황제의 후계정도 된다면 본인의 목은 물론이고 그와 연관된 자들의 목까지 모조리 날아갈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마빈은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장은 이미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하고 싶다는 거지?” “지도자에겐 피지배층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습니다.” 중의적인 표현이었다. 쥬다스는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와 호세가 그에 응대해야 할 이유를 동시에 짚었다. 그리고 그 한마디는 호세의 흥미를 끄는 데에 성공했다. 왕은 흉흉한 살기를 누그러뜨리고 답했다. “민족의 자유를 위해 싸울 의무도 있지.” “안전과 자유, 당신에겐 둘 중 어떤 것의 가치가 더 큽니까?” “물론 자유다.” 호세의 답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나라는 멸망했지만 기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설령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자유를 위해 항쟁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물려받은 호족의 정신이며 앞으로도 후세에 이어질 피의 맹세였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 자유란 무엇입니까?” “……?”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호세가 멈칫하자 쥬다스는 한 번 더 풀어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되면 ‘자유를 찾았다’라고 느낄 수 있겠습니까?” 호족의 지도자는 이제 겨우 스물일곱이었다. 피 끓는 투쟁심과 복수심은 가슴 깊이 품고 있었지만 그 염원이 이루어졌을 때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본 적은 없었다. “네놈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면…….” “땅을 되찾는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그건.” 호세는 이게 뭐지 싶은 생각에 입을 다물었다. 요구한다고 다 들어줄 것도 아니면서 굳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 도무지 저의를 알 수가 없었다. 정작 경계 어린 눈초리를 받는 쥬다스는 뻔뻔스러울 정도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호세가 다시 천천히 대답했다. “우리가 살아갈 땅을 되찾는 것. 그래, 지금 네놈들이 국경이라 칭하며 깎아 길을 내고 갈아 밭을 만든 그 땅 말이다. 우리에게 이 싸움은 너희 침략자들 생각대로 단순한 영토전쟁이 아니야. 지금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적어도 먹고 사는 것에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본래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갖춰 다시 호족의 이름을 되찾는 걸 뜻한다.” 말하고 나니 잡을 수 없을 만큼 멀어 보이는 희망에 대한 갈증이 목구멍을 까끌까끌하게 뒤덮었다. 그 순간 멀리서 와 하는 소란이 일었다. 다른 전사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은 부관이 다급하게 이를 전달했다. “제국군입니다! 현재 거점을 포위! 섣불리 선제공격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기세가 지금까지와 사뭇 다릅니다. 고위마법사에 기사, 드래곤까지 한 패로 나타났다 합니다.” 드래곤이란 말에 에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마도 그건 진짜 드래곤이 아니라 플루비일 것이다. 그 사실은 쥬다스와 에단, 두 사람밖에 짐작하지 못하는 부분이었기에 다른 이들의 표정은 적아 구분 없이 하얗게 질렸다. ‘제법 대처가 빨라졌군.’ 에단이 속으로 수하의 신속함을 칭찬하는 사이 정예전사들이 왕에게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이대로 계시면 위험합니다! 저희가 시간을 끌 테니 어서 피신하십시오.” 호세의 입가가 비릿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수하들에게 손을 뻗어 저지한 후,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제 어쩔 텐가? 이렇게 몰래 숨어들어와 본거지를 알아내 일망타진이라도 할 계획이었나? 명심하라, 오만한 제국이여.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이다. 너희가 빼앗아간 터전을 돌려받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으리란 이 말이다.” “흠. 정리하자면 살아갈 땅, 사용할 자원, 그리고 안전이 보장된다면 싸울 이유가 사라진다고 이해했습니다. 맞습니까?” 기껏 비장하게 선언했는데 돌아오는 건 자신의 말을 간단하게 요약한 문장이었다. 상대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지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렇다면?” “협상을 제안합니다. 옛 명예를 버리고 대신 제국 휘하의 자치권을 택하십시오.” 그 말에 포로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번졌다.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제국의 밑에 속하기만 한다면 일정 영토를 내어주고 자치권을 내어준다. 법적으로는 지배하되 호족의 민족성을 인정하겠다는 뜻이었다. 도리어 제국의 강대한 힘으로 보호를 받는다. 멸망한 나라를 위해 선뜻 내거는 협상 조건치고는 지나치게 후했다. 제안을 받은 호세도 놀라 눈을 찡그렸다. “지금 우리를 제국의 자치령으로 인정하겠다는 말인가?” “자세한 사항은 조절이 필요하겠으나, 그렇습니다. 새 이름을 받아 새 땅에서 당신의 민족을 돌보십시오.” 침묵이 감돌았다. 기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잡혀온 자가 잡은 자에게 선심을 베푼다. 도리어 호세 자신이 밧줄에 묶인 듯 꼼짝할 수 없었다. 잡혀온 포로들은 물론이고 무릎 꿇은 호족의 정예전사까지 자리에 얼어붙었다. 쥬다스는 그가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렸다. 잠깐의 침묵을 지나 무겁게 닫혀 있던 말문이 열렸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뭐지?” “제국민의 안전입니다.” “거절한다면?”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비로워 보이지만 적진의 깊은 곳까지 직접 찾아왔을 정도로 행동력이 있는 자였다. 만약 거절한다면 두 번의 자비는 없으리라. 호세의 예상대로 쥬다스는 그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대우하나 그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백 년 전 내 선조를 찾아온 이가 당신이었더라면.” 호세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모든 게 이렇게까지 망가지진 않았을 텐데.” “…….” “어쩌면 우린.” 콱, 날선 창끝이 쥬다스를 겨누었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금안을 보며 호세는 허무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동료가 되었을지도 모르지.” 분노와 혐오감 대신 포기를 담은 창날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당신이 이해할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나만큼은 절대 원수의 발밑에 무릎 꿇을 수 없소. 선대가 흘린 피를 기억하는 이 창을 쥐고 있는 한!” 얼핏 협상 결렬처럼 보였으나 거절은 표면적일 뿐이었다. 그는 호족의 마지막 왕으로서 모든 명예와 책임을 짊어지기로 했다. 죽는 것은 왕 하나다. 왕이 죽으면 명분을 잃은 호족들은 자연스레 제국의 밑으로 모일 수 있을 것이다. 남은 자들은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전한 땅과 자치권을 받고서 살 수 있게 된다. 솟구쳐 올랐던 창은 방향을 틀어 다루는 자의 가슴으로 내리꽂혔다. 파앙! 그 순간 옷을 찢고 살에 맞닿았던 창날을 멈춰 세운 건 갑작스레 주변을 휘감은 녹색 바람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막에 부딪힌 창끝에서 파생된 바람이 잔물결처럼 퍼지며 공기를 찢는 소리가 났다. “성급하군. 옛 명예를 버리란 주군의 말씀을 듣지 못했나.” 에단이 강한 힘으로 창대를 쳐올렸다. 고작 단검 따위에 부딪혔을 뿐인데 창은 호세의 손을 떠나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뒤로 날아갔다. 그리곤 한참 뒤에 풀밭에 푹 꽂혔다. 텅 빈 손아귀를 멍하니 내려다보는 호세를 향해 에단이 툭 내뱉었다. “창을 놓쳤군.” “이……!” “선대가 흘린 피란 그 정도 무게였던 모양이지.” “나를 농락하는 것이냐!” “정녕 민족을 생각한다면 지도자로서 끝까지 책임을 져라.” “……!” “살아서.” 수치심에 주먹을 떨던 호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전사들을 돌아보았다. 모두 자신의 무기를 빼 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은 적을 향해야 할 날이 모조리 무기를 든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음까지 따를 작정이었단 말이냐.’ 실망이 가득할 줄 알았던 호족전사들의 눈에는 지도자에 대한 신뢰가 굳은살처럼 박혀 있었다. 목숨을 걸고 전사들을 이끈 왕이었다. 그가 죽음으로 책임을 다한다면 그를 따르는 전사들 역시 망설이지 않고 죽음을 택할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호세는 가까워지는 제국군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쟁의 끝.’ 불가항력이다. 선대가 민족을 위해 항쟁을 선택했듯 지금 그의 선택 역시 다른 길 따위는 없었다. 한숨과 함께 다시 고개를 들자 경배하듯 엎드린 그리폰들 사이로 형형색색의 나비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아니, 나비가 아니라.’ 자세히 보니 나비로 보일 만큼 작은 정령들이었다.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이미 노을도 가라앉은 저녁이었다. 어둠이 내린 시각에도 주변이 낮처럼 환했다. 호세는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는 작은 파란색 돌고래를 보았다. “허…….” 한숨인지 경탄인지 모를 긴 숨결이 코끝으로 흘러나왔다. 호세는 생각했다. 수백, 수천의 전사 따위는 무용지물이다. 이 전쟁은 이미 한 사람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그가 바란다면 전쟁이 아니라 설령 하늘의 분노라도 멈출 수 있을 것이다. 쥬다스의 곁에는 어느 틈엔가 자연계 4속성의 정령들이 실체화해서 모습을 드러낸 채였다. 그리고 정령왕의 기운을 감지한 자연의 하급정령들도 주변에 몰려들어 반딧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호세는 쥬다스가 그저 값싼 싸구려 동정이나 허황된 자비가 아닌 진실로 협상을 원했음을 깨달았다. 겉보기는 어리고 유약하였으나, 실로 현명하고 자비로운 강자였다. 털썩! 호족의 왕은 제국의 차기 군주를 향해 진심으로 무릎을 꿇었다. 비로소 길었던 국경 분쟁이 종료되는 날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걸로 16장 에피소드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 '17장. 마녀사냥'이 시작됩니다.ㅎ 3월도 1/3이 지나갔네요. 날씨도 완전히 봄이 되었습니다. 미세먼지는 많다지만요..ㅠ.ㅠ 다들 건강 잘 챙기시고, 오늘 하루도 힘내세요! ㅎㅎ 그럼 내일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41 / 0240 ---------------------------------------------- 17장. 마녀사냥 에단 R.헤이가가 단장으로 이끄는 황태자친위기사단은 명령의 우선권이 그들이 모시는 주인에게 있다. 평소에는 단장의 지휘 아래 쥬다스를 철통같이 지키는 호위 임무가 주된 역할이지만 별도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에는 즉각 그를 따르게 되어 있었다. 명을 받은 기사단이 습격당한 베르디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왔을 때까지 쥬다스와 에단은 자리로 복귀하지 않았다. 모시는 주군에 더해 단장마저 함께 부재중인 경우 기사단의 통솔권은 부단장인 바이칼에게 넘어간다. 바이칼은 일정 시간이 지나도록 두 사람이 돌아오지 않자 더 기다리지 않고 수색에 나섰다. 최상급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콜에게 위치 정보를 얻어 막 출발하려던 찰나 마침 그들과 같은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린 군대와 마주쳤다. 목적지는 같았다. 얘기를 들어보니 쥬다스가 호족 주둔지에서 마주친 마빈 등 군인 출신 포로들은 적진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일부러 침투시킨 병력이라 하였다. 백 년간 분쟁을 이어오며 제국군도 당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때론 스파이를 심기도 하고 이번처럼 포로를 가장해 위치를 알아오는 등, 적의 동선을 파악하였으며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바이칼의 대처는 베르디의 군사작전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한뜻을 품은 그들은 함께 적진을 찾아가 동서남북 포위망을 짜고는 불시에 습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온통 전의를 상실한 호족전사들 사이에서 무릎 꿇은 적장을 발견했다. “그땐 진짜 놀랐다니까요. 거 이번엔 또 무슨 새로운 함정인가 싶었습니다.” 다각다각 말을 몰며 바이칼이 투덜거렸다. 정상끼리 협상이 끝나자 싸울 이유가 사라졌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린 전투를 맞닥뜨리고 놀란 건 제국군뿐이 아니었다. 포로로 붙잡혔던 사람들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정령들을 둘러보며 ‘자연계 4속성 정령을 다루는 루바르잔 황태자’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특히 쥬다스에게 친한 동네 형처럼 굴던 마빈의 경우 충격과 공포에 빠진 눈으로 끝까지 그의 정체를 의심했다. ‘너, 네가, 아니. 이봐! 대체 진짜 정체가 뭐야…… 요?’ 덜덜 떨리는 손가락 끝을 바라본 쥬다스는 그저 웃으며 작게 목례했다. ‘합석, 즐거웠습니다.’ 벙찐 마빈을 두고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그때를 회상한 바이칼이 여전히 구겨진 표정을 펴지 않자 그보다 조금 앞서가던 에단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무슨 득볼 게 있다고 자네 앞에 함정을 파겠나.” “아, 씨…….” “씨?” 바이칼은 지금껏 살며 단 한 글자에서 섬뜩한 한기를 느끼게 될 줄은 몰랐다. 생활 속 예의범절을 중요시 여기는 단장은 어느 틈엔가 그를 돌아보고 있었다. 한기를 넘어 살기까지 넘실거리는 검은 눈동자를 피해 필사적으로 눈을 굴린 바이칼이 말을 고쳤다. “씨…… 앗 같은 신입기사도 아니고 단장씩이나 되시는 분이 그러셔도 되느냐고요.” “새싹도 아니고 씨앗인가.” 진지하게 다른 포인트를 짚는 에단의 대답에 바이칼은 빠직 표정을 구겼다. “단장이라도 말리셨어야죠. 거기서 홀랑 같이 포로로 잡혀가십니까?” “전하의 명이셨다. 그래서 자네에게 일을 맡기지 않았나.” “뭐요? 그럴 거면 애초에 뒷일까지 싹 말씀을 해놓고 가십시오!” 결국 답답함이 폭발했다. 불만 어린 외침에 에단은 다시 절도 있는 태도로 ‘그런 건 눈치껏 해라’라고 말하여 바이칼의 속을 박박 긁어놓았다. 뒤에서 권태기부부마냥 아옹다옹하는 소리를 들으며 태연스레 제 갈 길을 가는 쥬다스에게로 콜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희에게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시는 거지요?” “하하. 예, 스승님.” “……지금 웃고 계십니다, 쥬다스 님.” “이런. 들켰습니까?” 보란 듯 웃어놓고 시침 떼는 어린 스승을 보며 콜이 난처하게 입가를 씰룩였다. “상의 없이 움직인 점은 아주 미안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시진 않으시는군요.” “돌이킬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호족은 자신들의 영토를 고스란히 돌려받지는 못했다. 국경 땅의 일부에서 그리폰들과 함께 새로운 영역과 제도에 익숙해지도록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당장은 제국에서 제공하는 교육이 우선이었다. 제국 휘하의 자치령으로 인정하는 대가는 황실에 대한 충성이다. 당분간은 중앙관리처에서 파견된 자들이 호세와 그의 부족을 관리할 것이다. 쥬다스는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어느 정도 지켜보다 조용히 국경지대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일행은 국경을 넘어 동쪽나라 해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에 들어서 있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예?” 해동은 산맥이 많은 나라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국경을 넘자마자 산이 나타났다. 이 산맥만 넘어가면 드디어 해동의 초입이다. 쥬다스는 주변에 울창하게 자라난 나무와 풀들을 가리키며 어린아이같이 감탄했다. “겨우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나무 생김새부터 다릅니다.” 제국의 따뜻한 기후에서 볼 수 있는 나무들은 주로 잎이 넓고 커다랗다. 나뭇가지도 큼직큼직하여 곧게 뻗었으며 대체로 키가 시원스레 컸다. 하지만 동방의 나무들은 이와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일단 나무들이 전체적으로 키가 작아 아담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쉬이 부러지거나 찢겨지지 않는 견고함도 가지고 있었다. 이파리는 길고 뾰족한 것이 많았으며 화려한 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원래 식물이든 동물이든, 사는 환경에 따라 생긴 게 조금씩 달라. 그 본질은 다르지 않지만.」 유니가 바람을 일으켜 나뭇잎을 우수수 흔들었다. 장난스런 바람을 타고 막 피어오른 새 이파리와 함께 연보라색 꽃 한 송이가 춤추듯 산들산들 하늘로 날아올랐다. 산길을 따라 죽 이동한 그들은 저녁 무렵 산등성이에 있는 한 사냥꾼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이라곤 하나 규모는 작았다. 건물도 몇 채 없었고 그나마도 주점이나 식당 등이 전부였다. 사실상 해동으로 넘어가는 여행객들이나 사냥꾼들이 간단한 숙식을 해결하며 정보를 교류하는 일종의 휴게소였다. 이 마을에 가족들을 데려와 거주하는 자는 드물었다. 마을이라기보다는 사냥꾼들이 연합을 이루어 생계활동을 하는 중심지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했다. 그래도 일단은 팻말에 ‘사냥꾼마을’이라 적혀 있긴 하였다. 쥬다스는 말을 쉬게 할 겸 마을 밖에 세워두고 주점으로 향했다. “어서 옵~ 셔허! 6인 이하 손님만 실내로 입장 가능하셔라. 대인원은 바깥에서 드쇼잉!” 주점은 실내와 실외 모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선선한 봄 날씨에 사람들은 대인원이 아니더라도 주로 실외에 불을 지피고 늘어앉았다. 실외공간은 바처럼 길게 이어진 테이블을 따라 주르륵 앉는 형식이었다. 길고 투박한 나무 테이블은 음식 얼룩이 져 지저분했지만 갓 잡은 짐승 고기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냥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크, 시원하구만! 한 동이 더!” “누님! 여기 장작 떨어졌소.” 가게주인만 바빴다. 꺼져가는 불씨를 다시 지피고 빈 그릇을 치우면서 한편으로는 또 술동이를 나르는 손길이 마치 마법 같았다. 쥬다스 일행은 자연스레 실외에 늘어선 기다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시 식사를 해결할 겸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자 들린 셈이었다. 여행객과 사냥꾼이 뒤섞인 주점에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주변에서 나도는 소문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해동은 다행히 제국어를 배운 사람들이 많다는 것 같군요. 의사소통에 큰 어려움은 없을 듯싶습니다.” “혹시 몰라 주변국 언어를 전부 익혀놓긴 했습니다만.” “……아니, 그걸 다 익힐 틈이 있었다고요?” 바이칼의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담긴 질문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미리 독학했다.” “외국어 몇 가지쯤 익히는 건 이 내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외국어이라 하나도 채 익히지 못한 바이칼은 똥 씹은 표정으로 두 천재를 바라보았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익히는 일은 어려운 일이지. 타국의 언어를 모른다고 해서 기 죽을 필요는 없단다.” 지켜보던 쥬다스가 시무룩해진 바이칼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저 아이들이 있어 아마 말이 통하지 않아 곤란을 겪을 일은 없겠구나. 그렇지?” “예, 뭐…….” 범접할 수 없는 천재는 오히려 이쪽이었다. 아마도 그들의 주군에게 언어의 장벽을 느끼게 할 국가는 없을 것이다. 쥬다스라면 외국어는 물론이고 외종어(外種語)에 외계어까지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아마 모르는 언어가 있어도 즉석에서 언어규칙을 찾아내어 암기하시지 않을까.’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이었다. 바이칼은 복잡한 얼굴로 주스만 홀짝였다. 마음 같아서는 술이라도 벌컥벌컥 들이붓고 싶었지만 호위임무 중에는 절제가 필요했다. 더구나 곧 다시 말을 타야 하기 때문에라도 음주는 곤란하다. 무릎 위에 얌전히 앉아 있던 플루비가 긴 목을 꺾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삐이?” “왜, 배고프냐. 같이 먹을래?” 바이칼은 플루비에게 자기 몫의 닭고기 수프를 넘겨주었다. 행복한 얼굴로 꼬리까지 살랑이며 수프를 핥는 플루비를 빤히 쳐다본 그는 피식 웃었다. “짜식, 그래. 많이 먹어라. 나한텐 너뿐인가 보다.” 바이칼이 와이번에게 수프를 넘기고 주스와 짭짤한 치즈로 입맛을 달래는 사이 쥬다스는 어느 틈에 또 넉살좋게 주변 대화에 끼어들고 있었다. “해동으로 간다고? 꼬마야, 충고 하나 해주지. 캄캄한 밤엔 산을 타지 마라.” “어둔 시각이면 산행에 특별한 문제라도 있습니까?” 팔 근육이 울퉁불퉁 튀어나온 덩치 큰 사냥꾼의 말에 근처에 앉은 다른 사내가 킬킬대며 동조했다. “정말 못 들어봤소? 큭큭, 이곳 피리네오스 산맥에서 ‘밤의 마녀’이야기는 유명한데.” “뭘 또 그렇게 재수대가리 없이 쪼개나. 외지인들은 모를 수도 있지.” “아, 성님. 내가 언제 재수대가리 없이 웃었다 그러시오?” 억울한 듯 항변하는 사내를 향해 에단이 슬쩍 끼어들어 물었다. “……밤의 마녀 이야기가 뭡니까?” “마녀 말이요, 마녀. 댁들같이 순진한 여행객들이 밤중에 돌아다니면 무서운 마녀한테 잡혀간다 이 말이지.”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일행은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일부러 외지인을 놀리는 건지 알기 위해 분위기를 살폈다. “무조건 마녀가 나타난다는 건 아니고. 밤중엔 길눈이 어두우니까 잘 헤매게 되잖소? 길을 잃고 떠돌다보면 멀리서 불빛이 하나 번뜩번뜩.” “그게 바로 마녀의 성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지.” “아, 지금 밤의 마녀 얘기요? 엄청난 미인이라던데!” “그 미모가 매혹적이라 거부할 수가 없다더군. 들려오기론 인간이 아니라 하지 아마. 눈이 멀 미색으로 홀려 사람을 잡아먹고 성에 그 해골을 장식하는 게 취미라고.” 공통의 주제가 나오자 사람들은 너도 나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느덧 마녀에 대한 소문은 이것저것 살이 붙어 제법 구체적인 수준까지 나돌고 있었다. “게릭 씨도 최근에 당했다 하지 않았소?” “말도 마! 그때 생각만 하면 내 숨통이 붙어 있는 것에 기도를 드리게 된다니까.” “응? 실제로 잡혀갔다 살아 돌아오셨단 말씀이십니까?” 한창 이런 이야기에 약할 나이인 세이지가 불안함이 가득 일렁이는 눈으로 물었다. 그 순진한 표정을 본 사냥꾼들은 껄껄 웃으며 짐짓 겁을 주기 시작했다. “그 밤의 마녀가 얼마나 괴팍한지 몰라. 천사 같이 눈부신 외모로 사람을 홀린다지. 하지만 그 외모가 사실은…… 천사의 껍데기를 뒤집어썼다는 거야.” “네? 껍…… 데기?” “본래는 엄청난 추녀인데. 사람을 홀리려고 위장을 하고 있지 뭔가. 밤에 사람들을 잡아다 배불리 먹이고 재운 후, 날이 밝으면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먹는다더군. 살점은 쭉쭉 빨아먹고 뼈는 남겨 장신구로 쓴다지. 밤중에 먹인 음식도 알고 보면 거미에 지렁이, 각종 악충들이 득시글!” 이야기해 주던 사내가 손아귀를 펼쳐 벌레다리처럼 조물거리는 탓에 세이지는 헛숨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중간에 담당하시는 선생님과 착오가 생겨서 업로드가 하루 늦어졌습니다.ㅠ 죄송합니다!(꾸벅) '17장. 마녀사냥'은 해동에 도착하기 전 쉬어가는(?) 에피소드입니다. 이후엔 스토리가 좀 진지하게 진행이 될 예정이라... 핫핫. 어찌어찌 또다시 불금이 돌아왔네요. 크, 벌써부터 설렙니다. 오늘 저녁은 치킨이 좋을까요 고기가 좋을까요...! 두근두근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42 / 0240 ---------------------------------------------- 17장. 마녀사냥 비록 지난 몇 년간 유폐되어 살았다지만 고귀한 황자의 신분으로 자라온 세이지에게는 면역이 없는 더럽고 역겨운 이야기였다. “거기서 꾀를 내어 간신히 목숨 부지하여 도망쳐 나온 사람이 몇 명 있지. 그중 하나가 바로 나요.” “지, 진짭니까?” “진짜고말고! 내가 똑똑히 보았소. 그 마녀의 진짜 모습을 말이야. 키는 난장이처럼 작고 눈은 옴팡눈에 코만 홀로 우뚝 선 매부리코였지. 피부는 축 늘어진 게 노인 같은데다가 입술은 실밥이 터진 인형처럼 징그러웠어. 아, 그래.” 아름다운 보라색 머리카락만큼은 똑같더군. 주절주절 실컷 마녀의 추한 외모에 대해 늘어놓던 사내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아무튼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소? 괜히 돌아다니다가 잡아먹히기 싫으면 오늘 밤은 여기서 묵고 가쇼. 사람 잡아먹는 밤의 마녀도 마을에는 들어오지 않으니까.”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일제히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향후 움직임에 대한 결정권은 오직 그에게 달려 있었다. “고맙습니다. 충고대로 날이 밝거든 떠나겠습니다.” “좋은 선택이요. 산을 오를 동안은 일행들과 가급적 꼭 붙어 다니시오. 밤의 마녀는 혼자 동떨어진 인간을 노리거든. 아무튼 뭐 너무 겁먹진 마시고.” 마녀에 대한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그들은 그 뒤로도 해동에 대한 몇 가지 소소한 소문을 수집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작은 사냥꾼 마을에는 객을 위한 숙소가 한 군데 밖에 없었다. 이 숙소는 산맥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여행객으로 인해 늘 만원이다. 그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사냥꾼들은 빈 방을 찾지 않았다. 대신 텐트나 침낭을 이용해 알아서 눈을 붙일 수 있도록 풀을 깎아 모닥불을 지펴놓은 공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냥꾼들은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이불 삼고 모닥불 타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침낭에 몸을 묻고 휴식을 취했다. 그동안 여행을 다니며 노숙에 익숙해진 쥬다스 일행도 자연스레 그 틈에 끼어 자리 잡았다. “형님.” 평소 같았으면 군말 없이 잠들었을 세이지가 불편한 표정으로 제 형을 찾았다. “잠이 오질 않는 게냐?” “네, 형님은요?” “흠. 나도 어째 그렇구나.”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답하였다. 그는 턱을 괸 채 새로 지핀 모닥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안에서 춤을 추는 작은 불의 정령들이 보였다. “그…… 형님. 아까 그 흉흉한 소문 말이에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진짜일까요?” 결국 세이지는 주섬주섬 자리에 일어나 앉았다. 침낭을 끌어안다시피 한 동생에게 쥬다스가 태연한 어조로 되물었다. “밤의 마녀 말이더냐?” 세이지는 차마 그렇다고 답하지 못했다. 아이는 올해로 열 넷이 되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마녀이야기가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티낼 수 없는 어중간한 나이였다. 오히려 다 자라지 않은 소년은 속마음을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우물쭈물 시선을 돌리며 민망해하는 세이지를 쥬다스가 힐끗 쳐다보았다. “글쎄, 모르겠다.” “예에?” 마녀의 정체까진 알 수 없더라도 이에 대한 현명한 해결책을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허물어졌다. 세이지가 눈만 끔뻑거리자 쥬다스는 다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소문이란 마치 그림자와 같단다. 혹 그림자공연을 본 적 있느냐?” “아아, 네. 그림자공연이라면, 예전에 한 번…….” 그림자공연은 서커스나 축제 등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연이었다. 그림자를 이용하여 연극을 하기도 하고 커다란 괴물을 만들어 보이기도 하는 등 눈으로 즐길 거리를 잔뜩 만들어낸다. 간단한 도구만 있어도 공연을 시연할 수 있기 때문에 평민 사이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귀족 상대로는 마법을 섞어 만든 고급스러운 그림자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쥬다스는 모닥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양손을 겹쳐 세우자 날개를 펼친 새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그림자가 땅에 그려졌다. “그림자는 분명 본체의 형상을 본 따 이루어지지. 하지만 세이지, 그림자만 봐서 본래 모습을 정확히 알아낼 수 있을까?” 날아가는 새 같던 그림자는 손을 약간만 틀어놓자 포악한 늑대처럼도 보였다. 세이지는 고개를 저었다. “마찬가지로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지 않고선 소문의 본질을 알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소문을 전혀 뜬소리로 치부할 수도 없어. 소문이 난 데에는 무엇이든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산에 마녀가 살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얻었다. 하나 그뿐이다. 정말 그 마녀가 괴팍한지, 혹은 사람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잡아먹는 잔인한 성미인지는 모르겠구나.” 쥬다스는 손장난을 거두고 살짝 주먹을 그러쥐었다. 사르르 몰려든 녹색 바람이 틈을 비집고 흘러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그러니 한번 만나러 가볼까 한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세이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누구를요?” “누구기는, 소문의 주인공이지.” “설마 마녀를 만나러 가시겠다는 말씀이세요?” “날이 밝거든 말이야. 이제 그만 푹 자두거라.” 이미 바람의 정령이 길을 알아온 게 틀림없었다. 세이지는 결국 무섭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잠자코 형제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던 나머지 일행은 그러려니 싶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민생을 샅샅이 살피기 위해 포탈조차 타지 않고 말을 달려온 그들이었다. 흉흉한 소문이나 사람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일부러라도 가서 들여다볼 판이다. 남들은 피해가는 것을 굳이 사서 하는 고생이었지만 이에 대해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았다. 더구나 다들 마녀에 대해서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심지어 성인이 되도록 귀신을 무서워하는 바이칼조차도 마녀나 징그러운 괴물에 대해서는 코웃음을 쳤다. 시무룩해진 세이지만 홀로 침낭에 기어들어가 온갖 상상에 사로잡혔다. 아이는 그날 결국 독충수프를 먹고 토실토실 살이 쪄서 마녀에게 쫓기는 악몽을 꾸고 잠을 설치고야 말았다. 긴 밤이 지나 푸르른 새벽 동이 터오자마자 일행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맥의 하늘은 옅은 물안개가 낀 감청색이었다. 해가 완전히 뜬 게 아니라 구름은 도리어 검게 보였다. 그들이 사냥꾼 마을을 떠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징검다리처럼 둥실둥실 떠 있는 구름 사이로 슬며시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아담한 키의 나무와 포근한 기온, 오묘한 빛깔로 밝아오는 새벽하늘의 조화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한편으론 제국의 풍경과 달라 이색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말은 이쯤에서 두고 가야겠습니다.” 유니의 인도를 따라 이동하다가 어느 한 구간에서 말들이 일제히 멈춰 섰다. 처음에는 산길로 산들산들 이어지던 녹색 바람은 제법 높이 올라왔다 싶을 무렵 아예 길이 없는 비탈진 숲 속으로 휙 꺾어져 들어갔다. 비탈이야 그렇다 쳐도 갈수록 무성해지는 식물들과 울퉁불퉁 꺼진 험준한 지형은 말이 달릴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일행은 그쯤에서 머릿수를 나누었다. 말들을 그냥 매어놓을 수는 없었기에 안전하게 돌볼 사람이 필요했다. 그 역할에는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콜이 선정되어 기사단 다수와 함께 남기로 했다. 쥬다스의 뒤로는 세이지, 그리고 늘 한 팀처럼 움직이는 세 사람에 더해 치유술사 하나와 검사 둘이 따라붙었다. 「저쪽이야, 저쪽!」 모처럼 제대로 된 안내역을 맡은 유니는 활기차게 방향을 일러주었다. 에단이 앞장서서 앞을 가로막은 수풀과 잔가지를 베어냈다. 그렇게 해도 나뭇잎이며 온갖 풀잎사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달라붙었다. 그렇게 한참을 가다 보니 우거진 수풀 대신 다른 난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녹색 기류가 반짝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든 바이칼이 볼을 긁적였다. “이능력자가 아니면 노크도 못하겠는데요.” 보랏빛 마녀의 성이 하늘 위에 떠있었다. 정확히는 나무 다섯 그루가 얼기설기 얽혀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었다. 모래성처럼 아기자기한 형상의 성이 나뭇가지 위에 새 둥지처럼 자리했다. 워낙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밑에서 볼 때는 언뜻 웅장해보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소꿉놀이용 장난감처럼 크기가 아담했다. 그저 정말 한 사람 살기에 딱 적당했다. 심지어 나무 다섯 그루를 엮어 그 위에 집을 지었으면서 계단도 사다리도 없이 그저 그렇게 허공 위에 지어놓은 폼이 영 아슬아슬해 보였다. 그들은 일단 그 묘한 건축물 밑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마녀의 성’이라 불리는 장소는 저기가 맞아. 아, 근데 마녀라는 애는 지금 저기 없어.」 「우으엥? 마녀 만나러 온 거 아니다요? 마녀 없는 마녀의 성이 무슨 소용이다요?」 계약자의 머리위에 갈대처럼 늘어져있던 토니가 파닥파닥 날아올라 마녀의 성 주변을 빙글 돌았다. 유니는 허리에 손을 얹고는 의기양양하게 대꾸했다. 「이그레트가 찾아달라고 한 건 마녀가 아니라 마녀의 성이라구. 물론 마녀도 지금 여기서 가까운 곳에 있으니까 별 차이 없긴 하지만.」 “주인이 부재중인 빈집이라면 손님으로서 응당 예의를 지켜 기다려야 옳겠지.” 쥬다스는 당장에라도 마녀에게 다시 안내를 시작할 기세인 유니를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외딴 위치였다. 마녀의 성은 사람 사는 마을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과도 무척이나 동떨어져 있었다. 주변 정리조차 해두지 않았다. 일부러 숨어 지낸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볼수록 수상하네요. 몰래 사람을 잡아먹으려고 이런 으슥한 곳에 집을 지어놓은 걸까요?” 세이지가 나무 위에 지어진 마녀의 성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높아서 잘 보이지는 않아도 건물을 빠짐없이 뒤덮은 보라색 칠을 보고 있자면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보라색은 광기의 색이라고도 하던데…….” “색깔에 편견을 갖고 보는 건 좋지 않은 버릇이란다, 세이지.” 쥬다스는 동생의 불합리한 시각을 가볍게 지적하곤 건물을 떠받든 나무들로 가까이 다가섰다. 일반적인 나무와 달리 밑동에서부터 소용돌이치듯 배배 꼬여 자랐다. 무거운 건축물을 지탱하기 좋은 형태였다. ‘원래 이런 종은 아닌 듯한데. 일부러 이렇게 자라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정령의 힘은 아니야.’ 정령의 기운이 섞였다면 그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쥬다스는 스크류 형태로 빙글빙글 꼬여 자라난 나무기둥을 손끝으로 훑어보았다. 그 순간 토니가 빙글 나무 주변을 돌며 신이 나 외쳤다. 「이건 그거다요!」 “응……?” 「그거다요, 그거.」 「이 답답아. 그래서 그게 뭔데? 똑바로 좀 말해봐. 이그레트가 당황하잖아.」 「우으으웅? 뭐라더라요. 우리랑 되게 비슷한데에. 막 나무 열매에서 태어난다요!」 토니는 답답한 얼굴로 팔을 버둥거렸다. 그러자 유니도 덩달아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뭔지는 아는데 종족명을 좀처럼 떠올리지 못하는 바람에 빚어진 비극적인 사태였다. 두 정령은 서로 종류가 다른 답답함으로 함께 끙끙거렸다. 쥬다스의 어깨에 매달려 멀뚱히 상황을 지켜보던 카니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혹시 ‘픽시’를 말하는 건가요?」 「맞다요! 픽시다요!」 「뭐야, 난 또. 요정족 픽시(Pixie) 말하는 거였어? 하도 오래되어서 잊고 있었네. 맞아, 걔들이라면 가능해. 애초에 나무에서 태어나는 애들이니까.」 유니도 손바닥을 통 하고 내려치며 동조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기울였다. 「어? 가만. 근데 픽시는 아주 오래전에 멸종한 게 아니었어? 난 그렇게 알고 있는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바로 143화로 이어집니다~ 0143 / 0240 ---------------------------------------------- 17장. 마녀사냥 요정족 픽시. 지금은 전설로 남은 드래곤들이 용계로 떠난 시점에 이미 멸종되었다 알려진 고대종족이다. 성향은 자연계 정령과 비슷하지만 정신체인 정령과 달리 육체를 타고난다는 점에서 달랐다. 픽시는 평화와 고요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그들은 생태계 법칙상 일어나는 약육강식조차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살생 자체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피와 살생에 민감하여 작은 다툼만 있어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피이 몸에 닿으면 불이 붙은 나무처럼 온몸이 붉게 물들어 열이 나다 쇼크로 사망하기도 했다. 그래서 픽시는 누구도 피 흘리지 않고 수백 년간 순결하게 보존된 땅에서 자란 나무에서만 태어난다. 나무의 주변은 조용하고 위협이 없어야 하며 맑은 물이 흘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탄생 조건이 까다로워 픽시가 열리는 나무는 몹시 드물었다. 바스락. 그때 맞은편에서 수풀을 헤치고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콧노래를 흥얼대며 나타난 건 새카만 검은 로브를 칭칭 두른 작은 여성이었다. 「저 아인가 봐요.」 「흐응, 확실히 남다르긴 하다. 패션 센스가 어마어마하게 난해하네.」 아직 성장기인 세이지보다도 한 뼘은 더 키가 작았다. 몸은 그렇게나 작은데 두르고 있는 로브는 지나칠 정도로 품이 넓고 커서 움직일 때마다 깃발처럼 펄럭였다. 거기에 액세서리랍시고 목에 건 해골목걸이가 덜렁거렸다. 거기에 또 머리엔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고깔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사람이 옷을 입은 게 아니라 옷이 사람을 삼킨 모양새였다. 본연의 모습은 어느 것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어깨선을 따라 하나로 길게 땋아 내린 머리카락은 팬지꽃처럼 선명한 보라색이다. 바로 사람들이 찾아왔으리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돌아온 집주인이었다. 품안 가득 밀가루며 초콜릿 등이 담긴 자루를 끌어안고 나타난 그녀는 땀 흘려 일한 농부처럼 뿌듯한 얼굴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란 정말 아름다워!” “…….”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자신만의 감상에 젖어 있는 그녀를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잔뜩 긴장해 있던 세이지가 얼떨떨한 얼굴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혹시 밤의 마녀……?” “흐억!” 평온한 자태로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나온 햇살을 만끽하고 있던 마녀는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그 바람에 안고 있던 자루를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것저것 가득 집어넣어 입구를 여미지도 못한 자루는 온갖 식재료를 흩뿌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밀가루며 치즈덩어리, 초콜릿, 그리고 사탕알갱이 따위가 풀밭 위로 데굴데굴 굴렀다. “왜, 왜 여기에.” 마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며 팟 물러섰다. ‘집 앞에 웬 사람들이 저렇게나 많이? 지금까지 한 번도 누가 찾아온 적 없었는데!’ 살면서 처음 겪는 상황인 탓에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쥬다스 일행을 보자마자 뻣뻣하게 굳어버린 마녀가 이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겁먹고 주춤거리는 마녀를 향해 에단이 먼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잠시만…….” “엇? 저 녀석 도망치는데요!” 마녀는 그들이 무어라 말을 걸기도 전에 홱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수풀더미가 잔뜩 우거진 산에서도 그녀는 한 마리 족제비처럼 날렵하게 뛰어다녔다. ‘무서워.’ 인간은 그녀를 싫어한다. 누구든 그녀의 지금 얼굴을 보면 소리 지르며 도망갔다.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아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녀라 부르며 적대시했다. 심지어 죽이려던 자도 있었다. ‘하다못해 지금이 밤이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처럼 무작정 달아나지 않았어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에겐 두 가지 얼굴이 있었다. 해가 뜬 동안의 얼굴과 달이 뜬 동안의 얼굴. 그 둘은 판이하게 달라서 그녀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도 함께 달라졌다. 환한 대낮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아야만 했다. 슈르륵 슈륵. 마녀는 나무를 조종해 가지와 잎사귀를 자라나게 한 후 그 사이에 몸을 숨겼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씨앗 형태부터 시작하여 아름드리 거목까지 모든 식물은 요정족인 그녀의 명령을 잘 따랐다. 카멜레온처럼 식물 틈에 몸을 숨겨버린 그녀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마녀는 뒤따라오는 사람이 없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게 무슨 꼴이람.” 너무 놀라 심장이 펄쩍펄쩍 뛰었다. 사람이 그녀의 집을 찾아온 건 처음이라 일단 줄행랑치고 보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후회가 들긴 했다. ‘나쁜 사람들 같진 않던데.’ 무기를 소지하고 있긴 했지만 그녀를 향해 꺼내 들지 않았다. 마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은 채 중얼거렸다. “이야기라도 들어볼 걸 그랬나…….” “많이 놀랐나 보구나.” “놀란 정도가 아니라, 아?” 언제부터였는지 그녀의 곁에 누군가 함께 있었다. “끄아악!” 마녀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는 물론이고 균형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리던 손이 바닥을 짚으면서 흙투성이가 되었다. 알싸한 통증이 손바닥을 얼얼하게 뒤덮었다. “진정하련. 우린 널 해치러 온 게 아니란다.” 그녀의 눈앞에 천천히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위로 올리자 따뜻하게 빛나는 금안과 눈이 마주쳤다. ‘꼭 보석 같다.’ 멍하니 생각하던 마녀는 잠시 망설이다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일어섰다. 흙투성이 손을 힘 있게 잡아당겨 일으켜 세워준 쥬다스는 아이 다루듯 그녀의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주기까지 했다. 픽시의 본능은 위협적인 인물과 그렇지 않은 자를 구분해 내는 데에 탁월하다. 그녀가 보기에 쥬다스는 전혀 위협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히려 보고 있자면 공포가 가라앉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도망갈 생각을 버린 마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는 누구?” “쥬다스라 한다. 루바르잔 제국에서 해동을 향해 가던 중이었다만.” “그럼, 여긴 왜 왔어? 어떻게 왔어? 혹시 길을 잃은 거야?” 쥬다스는 차분히 마녀를 응시했다. 그리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너를 만나러 왔어.” “나, 나를……?” 모든 게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집에 누군가 찾아오는 것, 낮의 자신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거나 공격하지 않는 것, 그리고 지금 어린아이를 달래듯 토닥여주는 따뜻한 손길도 전부. 마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아가,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는 먼저 이름을 소개하는 거란다.” “…….” “네 이름은?” “……란.” 자신을 란이라 소개한 소녀는 힐끔 쥬다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싫어하는 기색은 전혀 아니었다. “그래, 란아.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게 한 모양이다. 미안하구나.” 놀란 건 사실이었지만 란은 딱히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등 돌려 달아난 것 역시 미안한 일이라 생각했다. 「거 보라요! 픽시가 맞다요!」 「응, 맞네.」 그사이 토니는 란에게 날아가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맴돌았다. 유니도 일단 수긍하긴 했지만 미심쩍은 눈으로 토니를 따라 날아들었다. 「근데 어딘가 좀 이상한데…… 뭐지?」 란은 문득 근처를 감도는 맑고 깨끗한 기운을 느끼고 아 하고 깨달음의 탄성을 질렀다. “굉장해.” “응?” “정령왕의 술사였잖아?” 인간과 다르게 식물에서 태어난 픽시는 자연계 정령들과 친숙했다. 실체화하지 않으면 모습을 볼 수 없는 건 일반인들과 같았지만 적어도 정령들이 품고 있는 기운이나 힘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읽어냈다. 란은 무척 신기해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실 나도 살면서 정령왕은 처음 봤어. 뭔가 익숙하면서도 강대한 기운이 느껴지길래 뭔가 싶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술사가 직접 드러내지 않는 이상에야 실제 정령등급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란은 황실의 수준급 정령술사들도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단박에 맞춰 버렸다. 쥬다스는 적잖이 놀라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요정족 픽시. 자연에 한없이 가까운 종족이라고는 들었지만. 과연 정령의 기운을 읽는 능력이 탁월하구나.’ 그가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자 어색하게 머리에 손을 올리던 란은 그제야 모자가 벗겨졌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녀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질렸다. “으아아.” 낮 동안의 란은 사람들에게 마녀라 불리게 된 결정적인 모습이었다. 옴팡진 두 눈은 서로 가까이 몰려있으며 피부는 악어가죽처럼 거칠거칠했다.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며 기다란 귀는 볼품없이 축 쳐졌다. 손톱발톱이 짐승처럼 길었고 이빨은 누랬다. 그런 와중에 키는 열 살 소녀만큼 작았다. 란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색 고깔모자를 냉큼 주워 들었다. 그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모자는 머리에 쓰는 게 아니라 덮어서 추한 얼굴을 가리는 용도였다. “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아?” “음. 확실히 놀랍긴 하구나.” 쥬다스는 고깔모자를 푹 눌러쓴 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실체화하지 않은 정령의 기운을 그리도 쉽게 읽어낼 수 있을 줄이야. 대단해.”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 그거 외에 또 놀랄 것이 있냐고 묻는 듯한 태연한 표정을 마주한 란은 고개를 푹 숙이고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징그럽다거나 무섭다거나 뭐 그런.” “…….” “아. 정령왕의 술사니까 무서울 리는 없겠네.” 쥬다스는 시무룩하게 혼자 결론을 내리는 란을 보며 난처하게 웃었다. “이런,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냐.”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로?” “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란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으응.” “너는 무서운 아이가 아니란다.” 신기한 말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마녀’나 ‘괴물’ 따위로 불렀다. 거리낌 없이 먼저 다가와 이름을 부르고 평범한 아이 대하듯 해준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길을 잃고 산속을 헤매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사람을 구해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란은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침묵했다. 스르륵 스륵- 그녀를 숨겨주고 있던 나무와 풀들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란 스스로 숨는 걸 그만둔 탓이었다. 란은 폴짝 뛰어 수풀 밖으로 나왔다. “근데 나 아가 아니야.” 쥬다스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사뿐사뿐 흥에 겨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되돌아가며 란이 쫑알쫑알 떠들기 시작했다. “올해로 딱 오십 년. 내가 나무에서 태어난 이후로 흐른 시간이야.” 고대종족 픽시의 수명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인간과는 다른 세월을 살아가리란 것만큼은 확실했다. “오십 년이라. 그랬구나.” 란의 항변에도 쥬다스는 그저 느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당최 놀라지도 않고 어려워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를 접한 란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상한 사람.’ 어쨌든 전생에서 아흔이 넘도록 살아온 그가 보기엔 쉰 살도 아가는 아가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부 들어오면서 말투는 조금 변했지만 속은 여전히 할아버지...(..)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어김없이 월요일이 돌아왔네요. 우어어... 이번 한 주도 힘차고 강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ㅎ 감사합니다! 0144 / 0240 ---------------------------------------------- 17장. 마녀사냥 그다지 멀리 도망쳤던 건 아니었기에 금방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앞서가던 란은 여전히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나머지 사람들을 발견하고 점점 걸음이 느려졌다. 자연계 정령왕의 계약자인 쥬다스에게는 마음을 놓을 수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아직 무서웠다. 란의 겁먹은 표정을 읽어낸 쥬다스가 함께 걸음을 늦추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안심하련. 아무도 널 해치지 않는단다.” 그는 발밑에 떨어져 있던 물건을 주워 내밀었다.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나 보구나.” 허겁지겁 달아나느라 떨어뜨린 초콜릿이었다. 멍하니 그걸 받는 사이 에단이 나머지 식재료를 깔끔하게 정돈해 둔 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터진 밀가루는 최대한 흐르지 않게 담아 봉해 두었습니다.” ‘생긴 것과 다르게 알뜰하네…….’ 란은 저 귀티가 흐르는 기사가 밀가루를 주섬주섬 주워 담는 장면을 상상하다 풋 하고 웃었다. 그리고 제 웃음소리에 놀라 합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에단은 그녀의 웃음에는 일말의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자, 서로 인사들 나누거라.” “란이야.” 조금 전 처음 사람을 만날 때엔 이름을 밝히는 게 순서라던 쥬다스의 조언을 떠올린 란이 냉큼 자기 이름부터 밝혔다. 그제야 에단은 짧게 목례하며 화답했다. “에단.” “여, 네가 그 소문의 마녀냐?” 불쑥 끼어든 바이칼의 직설적인 질문에 에단이 검집으로 그의 머리를 빡 내려쳤다. “아! 아프잖습니까!” “무례다. 인사를 나누랬지 언제 막말을 하라하셨나.” “막말하려던 건 아닌데요. 마녀를 마녀라고 하지 그럼…… 윽!” 바이칼은 머리에 혹 두 개를 달고 나서야 나불거리던 입을 멈췄다. 다른 일행들이 한 명씩 인사를 마친 후에야 그는 화끈거리는 정수리를 부여잡고 사과했다. “이봐, 기분 나빴으면 미안. 난 바이칼이다.” 멀뚱히 그가 악수를 청한 손을 쳐다보던 란이 고개를 돌렸다. “흥.” “어어……?” 란은 어리둥절한 표정의 바이칼을 세워둔 채 곁에 있던 쥬다스의 손을 탁 붙잡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이, 이봐?” “이봐가 아니라 ‘란’이거든?” 벌처럼 쏘아붙인 란의 목소리에 바이칼이 찔끔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홱 돌아본 란이 싸늘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똥멍청아.” “……?!”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 뒤따라가던 쥬다스는 아이들 다툼을 지켜보는 어른처럼 소리 죽여 웃었다. 집이 지어진 나무 밑까지 다가간 란이 한 손을 들어 올리자 그녀의 의지에 따라 나무줄기가 콰드득 자라났다.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자라나던 줄기는 나무 꼭대기에서부터 땅까지 연결되고 나서야 멈추었다. 란이 만들어낸 건 사람이 충분히 타고 올라갈 수 있을 법한 그물사다리였다. “이것도 정령의 힘인가요? 식물이 특정 형태로 자라나다니.” 세이지의 감탄에 란은 그물사다리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난 요정족 픽시야. 식물이라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픽시?” 이미 오래 전 멸종한 고대종족 픽시를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쥬다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픽시라는 종족명 자체를 생소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니까 식물을 다루는 건 내 본연의 힘이야. 열매를 맺게 하거나 본래 씨앗 속에 저장된 정보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자라게 하거나.” “놀라운 능력이네요.” “아니면 말려죽일 수도 있어.” 생명은 물론 죽음까지도 관장한다. 그 말을 들은 세이지는 섬뜩하여 입을 다물었다. 요정 픽시란, 식물에 한해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마치 숲의 여왕과도 같다. “……나는 마녀가 맞아.” 란은 눈을 내리깔며 덧붙였다. “키워준 사람을 잡아먹고 태어났거든.” 좌중이 기묘한 침묵에 휩싸였다. 란은 그런 반응에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먼저 사다리를 탔다. “어쨌든 기왕 여기까지 찾아온 거 차라도 한잔 대접할게. 마시고 가.” “란.” 쥬다스가 그녀의 곁에 함께 그물을 잡고 올라왔다.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죽은 건 네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을 얘기하는 것이겠구나.” “아? 으응. 그 사람은 내가 아직 열매일 적에 죽었어.” 열매 속에서 자라고 있던 란이 양분으로 흡수한 건 시체였다.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나무를 돌봐주던 사람이 죽었고 란은 그 시체를 먹었다. “그렇다면 그건 네가 원해서 한 일이 아니야. 그렇지?” 란은 작고 볼품없는 눈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실 그 사람을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이름도 몰라. 그때 난 아무 힘도 없는 작은 열매였으니까. 하지만 내가 자란 나무를 키워주고 돌봐줬으니까 그 사람은 내 아버지나 다름없어.” “너는 마녀가 아니라 그저 아버지를 사랑했던 예쁜 딸이었구나, 란.” ‘이 사람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신기했다. 오십 년간 자신이 마녀란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듣고 보니 마음이 들썩였다. 별것 아닌 한마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쥬다스는 란의 추한 얼굴도, 괴물 같은 속내도 그 어느 하나 외면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다. 오히려 똑바로 보았으면서도, 전부 괜찮다고 말해준다. 그 사실이 고맙고도 놀라워서 란은 그만 웃어버렸다. “고마워.” 그물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자 기다렸다는 듯 문이 덜컹 열렸다. 그 덕에 일행은 곧장 란의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는 제법 넓었다. 세 명의 호위는 바깥에 남아 망을 보기로 하고 란을 포함해 6명의 인원이 들어갔는데도 비좁음을 느낄 수 없을 정도였다. 바닥엔 폭신한 검은 카펫이 깔려있고 2층으로 연결되는 계단도 있었다. “여기 앉아서 기다려. 금방 차 끓여올게.” 의자나 소파가 없었기에 란은 그들을 카펫에 앉게 하고 차를 끓이러 사라졌다. 둥글게 원을 그려 앉은 쥬다스 일행은 집 내부를 둘러보며 저마다의 감상을 표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식품이 많군요.” “분위기 한번 작살나네요.” “……좀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할 수는 없는 건가.” 벽을 따라 높고 낮은 선반을 주르륵 연결해 놓았다. 선반 위에는 박쥐나 쥐 등을 박제한 것인지 인형인지 모를 장식품들이 자리했다. 크고 작은 투명한 항아리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라색, 검은색 액체들이 꿀렁꿀렁 기포를 만들며 담겨 있었고 그 근처에는 사람의 심장이나 뇌 등을 재현해 둔 것도 있었다. 세이지가 쥬다스의 소매를 잡으며 속닥거렸다. “형님.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아직 란이 무서운 게냐?” “무, 무서운 게 아니라. 저기 해골이 걸려 있어요.” 액자 대신 해골이 걸려 있었다. 어찌나 실감나게 생겼던지 문드러진 콧등까지 자세하게 보였다. 쥬다스는 동생의 등을 토닥여주며 웃었다. “가짜란다.” “정말요……?” “그럼. 내가 언제 거짓을 말한 적이 있더냐?” 세이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형이 있어 조금 안심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으스스한 분위기까진 어찌할 순 없었다. 겁먹은 세이지와 반대로 바이칼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해골 하나를 주워들어 이리저리 살피며 말했다. “근데 란 녀석 말입니다. 저 아무래도 미운털 박힌 것 같지 않습니까?” “다짜고짜 마녀라 부르며 무례를 범했으니 나 같아도 싫겠군.” “아니 단장……. 이럴 땐 빈말이라도 위로 좀 해주십쇼.” 내가 왜? 라는 뜻을 얼굴 근육만으로 충실히 표현해 내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이 끙 한숨을 쉬었다. “진짜 놀리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고요. 작은 여자애한테 미움받긴 싫은데.” 실제 란의 나이는 50살이 넘었지만 쥬다스는 굳이 그 사실을 짚어주지 않았다. 대신 다시 잘못을 사과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그 아이가 주는 차를 맛있게 마시면서 다시 한 번 사과해 보려무나. 아마 란도 그리 깊이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을 게다.” “옙!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나 바이칼의 굳은 결심도 란이 가져온 다과상 앞에 카드로 지은 집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 따뜻한 차랑 내가 직접 구운 쿠키야.” 란이 한상 가득 차와 쿠키를 가져와 내밀었다. 컵에서 찰랑이는 정체모를 붉은색 액체를 내려다보며 세이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호, 혹시 피…… 는 아니죠?” “에이, 세이지 님. 설마 피겠습니까? 이런 건 보통 빨간 꽃잎 같은 걸 달여서 만드는 걸 겁니다.” “응? 피 맞아.” “푸웁―!” 이미 마시고 있던 바이칼이 분수처럼 피를 뿜어냈다. “드라키 꽃이라고 집 근처에 흡혈식물이 자라거든. 그 꽃에서 채취한 피는 향긋해서 맛도 좋고 먹으면 어마어마한 스태미나 증가 효과도 있어. 쓰러져 가는 소도 한 잔만 마시면 벌떡 일어난다는 귀한 약재야.” “욱…….” 한 번도 피를 끓여 만든 차를 마신다는 발상을 해본 적 없는 세이지가 찻잔을 든 채 어쩔 줄 모르고 안색만 노래졌다. 금방이라도 목구멍으로 시큼한 위액이 넘어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까다로운 식성을 가진 크리스티나는 진즉 설명을 듣기 전부터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고 있었다. 쥬다스와 에단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차를 들었다. 란이 두 손을 꼬옥 모으고 감상을 물었다. “어때? 맛있어?” “꼭 화차 같구나. 향기롭고 독특한 맛이야.” “정말?” “맛있어. 잘 먹을게, 란.” “……!” 행여나 마음에 들지 않아할까 전전긍긍하던 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드라키 차와 함께 가져온 쿠키쟁반을 들고 얌전히 덮어두었던 덮개를 열었다. “여기!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쿠키들이야.” 피로 만든 차까지도 그러려니 넘기던 에단의 표정이 비로소 굳어졌다. ‘산 넘어 산이 바로 이거로군.’ 에단마저 탄식케 한 쿠키는 일행 모두를 경악으로 몰아넣었다. 만일 ‘쿠키’라고 따로 명명해 주지 않았다면 그것들을 먹을 것으로 보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세이지가 혼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버, 벌레…….” 란의 쿠키는 정말 충실하게 벌레를 재현해 냈다. 초콜릿을 넣어서 까만 점박이를 넣기도 하고 치즈와 설탕을 교묘히 굳혀 알 무더기나 가느다란 다리 하나하나까지 사실적으로 만들었다. 거미부터 시작해서 다리가 많은 지네, 날개달린 바퀴벌레나 나방, 곱등이까지 없는 게 없었다. 크기도 새끼인 것과 성체, 거대버전 등등 여러 종류였다. 쿠키와 함께 유리병에 담아 내온 젤리는 심지어 눈알모양이었다. 유리병에 가득 담긴 하얀 눈알에는 세밀하게 눈동자색깔을 각각 다르게 새겨 넣기까지 했다. 벌레쿠키와 눈알젤리는 귀족인 그들이 보기엔 견딜 수 없이 흉물스러웠다. 살아 숨 쉬는 듯 생동감 있는 꿈틀거림이 보는 이들의 식욕을 감퇴시켰다. “히히, 이것도 있어!” 란은 신나서 다른 쟁반도 들고 왔다. 설탕을 녹여 가느다란 머리카락 뭉텅이처럼 해골에 얹어 만든 사탕이나 내장모양으로 빚은 분홍빛 빵 등이 들어 있었다. 벌레쿠키보다 더 혐오스러우면 혐오스러웠지 절대 덜하지 않은 생김새였다. 이제 세이지는 그녀가 완전히 정말 동화 속에 나오는 음험한 마녀 같다고 생각했다. 「히이. 무슨 요정이가 저런 걸 좋아한다요?」 「속지 마, 이그레트! 얘 아무리 봐도 요정족 아니야.」 정령들마저도 란의 특이취향에 혀를 내둘렀다. 「으응, 쿠키나 빵은 그렇다 쳐도 픽시는 피를 마시면 열이 들끓어 죽을 텐데. 아무리 식물에서 채취한 피라지만 픽시가 피를 마실 수 있을 리가 없어요.」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는 란의 정체를 의심했다. 잠자코 있던 푸른 늑대도 고개를 들어 카니의 의견에 동조했다. 「픽시는 오로지 여성체로만 태어나는 식물의 여왕.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종족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특별한 향기와 미형을 가진다. 그러니 저것은 생김새부터 일반적인 요정족이 아니다.」 「일반적이지 않다요? 그럼 뭐다요?」 「아마도 돌연변이겠지. 본래대로라면 픽시는 이미 멸종하여 태어나지 못한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인간이 키우던 나무에서 픽시열매가 맺혔고, 키워준 인간의 시체를 양분으로 먹고 태어났다.」 루니의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쿠키를 집어 든 란에게로 향했다. 「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픽시이자, 순수한 픽시가 아닌 새로운 개체인 셈이다. 어쩌면 저것을 모체 삼아 새로운 요정족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군.」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몰랐는데 화이트데이가 지나갔군요 (!) 외...외전도 못써보고 ㄷㄷㄷ;; 요즘 정말 날짜 가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ㅠㅠ 사탕들 맛있게 드셨나요?ㅎ 기념으로 박하사탕이라도 먹었어야 하는건데...(?) 지났으니 별 수 없군요.ㅋ 그럼 다음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0145 / 0240 ---------------------------------------------- 17장. 마녀사냥 정령들이 수상한 눈길로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란은 오동통한 거미 모양의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정말 예쁘지 않아? 자, 얼른 먹어봐. 맛을 보면 감동할지도 몰라!” ‘다른 의미로 감동하겠지……!’ 소리 없는 이구동성이 모두의 입속에 맴돌았다. 그러나 유일하게 한 사람만은 쿠키의 흉물스러운 외형에 타격받지 않고 란이 내민 것을 얌전히 받아먹었다. 다름 아닌 쥬다스였다. “표현하고자 한 것을 무척 사실적으로 재현해 냈구나. 마치 정말 살아 있는 거미를 씹는 듯한.” “형님. 거미 드셔 보셨……? 아, 아니, 괜찮으세요?” “음, 그래. 맛은 아주 훌륭해. 적당히 달고 고소한지라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겠어.” 세이지는 거기에 대고 ‘아뇨, 맛을 품평하실 게 아니라 형님의 비위가……’라고 차마 토를 달지 못했다. 대신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결의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주인이 먼저 맛을 보았는데 신하 된 도리로 다과상을 마다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가장 품격과 청결에 예민하게 구는 크리스티나가 도리어 제일 먼저 쿠키를 집어 먹었다. 그나마 개중 크기가 제일 작아 보이는 풍뎅이 쿠키였다. 공녀씩이나 되면서 벌레 쿠키를 터프하게 한입에 털어 넣은 그녀를 보고 에단도 질세라 거미모양 쿠키를 입에 넣었다. 두 사람이 스타트라인을 끊자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라야만 했다. 결국 마지막까지 망설이던 세이지도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뻗었다. “…….” 잠시 동안 일행 사이에 흡사 절규와도 같은 침묵이 감돌았다. 입안에서 버석버석 부서지는 질감마저 진짜 벌레를 연상케 했다. 물론 쥬다스의 말대로 맛은 훌륭했다. 하지만 두 번 먹고 싶진 않은 쿠키였다. “이거 의외로 맛있는데요?” 그 묘한 침묵을 깬 건 바이칼이었다. 처음엔 그도 꺼렸지만 막상 먹어보니 제법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고로 물건은 제 기능만 잘하면 장땡이고 음식은 맛만 좋으면 장땡이란 모토를 가지고 사는 그에게 있어 벌레쿠키는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었다. 그는 포크로 눈알 젤리를 쿡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요거도 괜찮네. 플루비, 너도 먹어봐.” “삐이!” 란이 감동한 눈으로 바이칼을 쳐다보았다. 산속에서 죽어가던 사람들을 구해 집으로 데려오면 기껏 만들어준 빵과 쿠키를 그릇째로 내던지며 비명을 질러대곤 했다. 저렇게 적극적으로 맛을 보고 좋아해 주는 사람은 그동안 아무도 없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바이칼에게 꽁해 있었던 란의 마음이 사르륵 풀렸다. “간 특제파이. 먹을래?” “어, 먹을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레이디.” “아하하! 그게 뭐야.” 바이칼의 장난스런 대꾸에 란은 어린아이처럼 히히 웃었다. 그사이 포크를 내려놓은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픽시 그대에게 세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첫 번째, 혹 사람을 해친 적이 있나?”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질문을 들은 란도 덩달아 가뿐히 답변했다. “아니. 사람은 맛없는걸.” “큽! 쿨럭쿨럭!”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이었기에 맛있게 파이를 우물거리던 바이칼이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해댔다. “둘째, 이 식재료들의 출처는 어디지?” “거래처가 있어.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나. 그쪽에서 필요로 하는 식물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마녀라 불리며 산중 깊은 곳에 홀로 지내고 있는 란이었지만 나름대로 착실히 생존방식을 익혀 살아가고 있었다. “마지막.”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티나는 차가운 눈으로 세 번째 질문을 던졌다. “왜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지 않는 거지?” “왜냐니…….” 겁이 좀 많긴 하지만 일단 익숙해지면 사람들과 곧장 어울리는 모습을 보였다. 거래를 할 줄 아니 생계에도 지장이 없다. 크리스티나는 그녀가 마녀란 오명을 쓰면서까지 산속 깊은 곳에 홀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를 짚어 물었다. 란은 대답 대신 파묻히다시피 몸에 두르고 있는 새카만 로브자락을 쿡 움켜쥐었다. 그리곤 더듬더듬 되물었다. “꼭, 남들과 함께 살아야만 하는 거야?” “그대는 지금 사람을 잡아먹는 마녀라 오해를 사고 있어. 혼자 괴물이라 손가락질을 받으며 사는 게 억울하거나 고독하지 않나?” “나는 이대로가 편해. 사람들이랑 친해지고 싶지 않아. 어차피 그들도 날 무서워해.”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쥬다스의 손이 멈칫했다. “있잖아, ‘고독’이란 건 어떨 때 느끼는 거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지금이 좋아. 남들이 나를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달콤한 게 잔뜩 있는 이 세상을 정말정말 좋아하니까.”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넓은 벽면 중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은 단 한 개뿐이었다. 창을 활짝 열자 푹 익은 노을과 함께 신선한 저녁바람이 흘러들어왔다. “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으면 힘들어. 사람들은 겉모습에 따라 태도가 달라져. 다른 사람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끼워 맞추게 돼. 그럼 난 점점 나의 어떤 부분들을 미워하게 되는 거야.” 바람결에 란의 땋은 보라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말을 마치며 란은 로브를 벗었다. 투둑. 무거운 담요 같던 검은 로브가 사라지자 나비날개처럼 얇고 부드러운 미니드레스가 찬란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어느덧 훌쩍 자란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없이 순진한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고혹적인 미소가 붉은 입술에 초승달처럼 매달렸다. “가르쳐 줄 수 있어? 어떤 게 진짜 고독인지?” 픽시는 모든 종족으로부터 호감을 사는 향기와 외형을 가진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하지만 란은 픽시로서의 특징을 반만 가지고 태어났다. 낮에는 모두가 기피할 추녀로, 밤에는 사람의 정신을 홀려 꿰어낼 미녀로. 태양이 지고 달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순간 그녀는 아찔한 미모를 가진 숲의 요정으로 탈바꿈했다. 그래서 그녀는 ‘밤의 마녀’라고 불리었다. “와 씨. 놀래라. 뭐냐 너? 낮이랑 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잖아?” “그렇지만 낮이랑 밤의 모습 둘 다 나야. 히히, 웃기지?” “허. 솔직히 변화폭이 그 정도로 크면 사람들 태도가 다른 것도 어쩔 수 없겠는데.” 바이칼이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로는 투덜거리면서도 변하지 않은 태도에 란도 안심하고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곤 사뿐사뿐 다가오며 함께 쫑알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입장에선 갑자기 태도가 싹 바뀌면 적응 안 된단 말이야.” “적응이 안 되기로 치면 널 보는 사람 쪽이 더 심하지 않을까…….” 외모의 괴리감이 극심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나니 처음 밤의 모습을 보고 홀린 사람들이 날이 밝아 추하게 변해버린 란을 보고 경악하는 심정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도 바이칼의 말에 동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가지 외형을 가지고 살아가는 건가. 그렇다면 이를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어려웠겠군.” “보통은 그래. 너희처럼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게 이상한 거지.” 대수롭지 않게 답한 란이 본래 자리로 돌아와 앉자 짧은 스커트가 딸려 올라가 허벅지가 드러났다. 맡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달콤한 과일사탕 같은 향기가 주변으로 은은하게 퍼졌다. 그 바람에 가까이 있던 바이칼은 귀 끝을 빨갛게 물들이며 휙 몸을 뒤로 물렸다. “그, 거 좀 떨어져 앉지?” “왜애? 낮의 모습일 땐 별 말 안하더니.” “옷이라도 얌전한 걸로 갈아입던가!” 쥬다스는 버럭 소리치는 바이칼과 깔깔 웃어대는 란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지금 생각지도 못한 부분에서 놀라고 있었다. 그녀의 외형이 변해서가 아니다. 쥬다스의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동질감.’ 일순간 그가 란에게서 느꼈던 감정이었다. 한때 그도 역시 란과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대로가 편해. 사람들과 엮이고 싶지 않아. 어차피…….’ 자연계 4속 정령왕의 계약자, 대현자 이그레트. 인간 이상의 힘을 지닌 그를 모두가 두려워했다. 그리고 그 자신조차 두려움에 빠져 스스로를 억압했다.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고 공평한 선의를 품을 수 있도록,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도록. 그 지키고자 하는 범주에는 그에게 힘을 빌려주는 정령들조차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늘 사람들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했고 필요 이상의 정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의 그가 란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실은 지독히도 외로웠던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인간의 삶에서 도망치면서 그는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그렇게 한평생을 살고 죽어가면서도 후회했을 정도였다. “란, 너는…….” “응?” ‘나완 달리 강한 아이구나.’ 란은 인간이 아니라 픽시다. 그녀는 온순하고 평화로운 성미를 가졌지만 사회적인 동물은 아니었다. 결코 인간적인 삶에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다. 미적 취향이 남달라 해골이나 내장, 벌레 등을 좋아하듯 행복의 기준이 달랐다. 그 사실을 꿰뚫어 본 쥬다스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여러모로 안심이 되는구나. 우리가 확인하고자 한 건 방금 크리스티나 저 아이가 질문한 내용들이 전부였으니 말이야.” “벌써 가려구?” “근처에서 다른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어. 걱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란 사실을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야지.” 란의 집은 말을 타고선 들어오지 못하는 험한 산중에 있었다. 그 바람에 콜을 비롯한 많은 인원을 길목에 두고 온 참이었다. 아쉬운 눈으로 따라 일어선 란이 쫄래쫄래 그들을 집 앞까지 배웅했다. “힝. 너희들이라면 좀 더 오래 같이 있어도 괜찮은데.” “삐이이?” 그녀의 발치에 남은 플루비가 대형견처럼 꼬리를 흔들며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란은 블루 와이번의 자그마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우리, 조금은 친해진 걸까?” “플루비. 거기서 뭐 해? 이리 와.” “삐.” 플루비는 바이칼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갔다. 껑충 뛰어오른 와이번을 비틀거리며 품안에 받아낸 바이칼이 란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이봐.” “으응?” “바보같이 괜히 오해받고 살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해. 네가 만든 건 진짜 벌레가 아니라 좀 특이한 디자인의 초코쿠키일 뿐이라고 말하라고. 입 뒀다가 뭐하냐.” 그 말을 들은 란은 킥킥 웃었다. 혼자 지내는 걸 불편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지만 누군가와 헤어지는 건 조금 싫은 기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낮에 느꼈던 것과 같은 손길이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그럼 다음에 또 만나자꾸나. 란.” “다음에, 또?” 생소한 인사였다.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응! 또 만나. 다들.” * * * 쥬다스는 헤어진 지점에서 말을 지키고 있던 팀과 다시 합류했다. 상황을 궁금해하는 콜에게 마녀의 정체에 대해 알려주자 매우 뜨거운 반응이 돌아왔다. “맙소사! 고대종족 픽시 말씀이십니까?” 학구파인 콜은 픽시를 지척에 두고도 보지 못한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했다. “다음엔 저도 꼭 데려가 주시는 겁니다, 스…… 쥬다스 님.” “그리도 아쉬우십니까? 돌아오는 길에 함께 방문하시면 되지요.” “무려 요정족이지 않습니까! 부끄럽사오나 고대종족을 만나보는 건 이 늙은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흐음, 그랬군요. 진작 말씀하시지.” “쥬다스 니이임.” 울상을 짓는 노제자를 보며 쥬다스는 모르는 척 웃었다. 「어?」 문득 유니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훙 몰려드는 녹색 바람에 쥬다스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그는 정령이 감지한 이변을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이그레트, 강한 피 냄새가 나.」 “…….” 쥬다스가 말을 멈춰 세우자 침울하게 있던 콜도 의아한 얼굴로 그 곁에 멈추었다. 모든 일행이 한꺼번에 정지하자 유니가 주변을 빙빙 돌며 자세한 정보를 읽어왔다. 「사람이 무척 많이 몰려 있어. 기분 나쁜 기운도 몇 섞여 있고.」 “장소는?” 「아까 그 픽시의 집이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개한테 손을 물렸습니다. 커헉. 왼손이라 다행이긴 한데 타자치는 게 좀 불편하네요 ㅠ.ㅠ 봄이 되었으니 다들 개조심합시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만나요! 감사합니다! 0146 / 0240 ---------------------------------------------- 17장. 마녀사냥 바람이 전해주는 피 냄새는 몹시 짙었다. 쥬다스는 말에서 내리며 에단에게 상황을 알렸다. “아무래도 란에게 뭔가 일이 생긴 것 같구나. 되돌아가 봐야겠다.” “예, 알겠습니다.” 눈치가 빠른 에단은 그 말뜻을 금방 이해했다. 그가 간단한 수신호를 보내자 주시하고 있던 기사단 전원이 말에서 내렸다. 준비가 완료되자 유니가 바람을 일으켜 일행을 중심으로 마법진처럼 원을 그렸다. 한 번 기억해 둔 장소로 곧장 이동시켜 주는 고급정령술을 사용하려는 것이다. 곧 대단위 ‘바람의 인도’가 발동하자 일행은 말까지 포함하여 전원 녹색 바람에 감싸였다. 팟! 강한 기류가 주변을 감싼다 싶더니 순식간에 장면이 바뀌었다. 도착하자마자 눈앞에 시뻘건 불길이 치솟았다. 홧홧하게 타오르는 불이 저녁하늘을 한낮처럼 밝혔다. 열기가 훅 밀려와 팔로 얼굴을 가린 세이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란의 집이……!” 보랏빛 성이 불타고 있었다. 불길을 보고 놀란 말들이 거칠게 투레질했다. “젠장. 란! 어디야!” 바이칼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청껏 불렀지만 어디에도 픽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쥬다스는 매섭게 타오르는 불길에도 아랑곳 않고 수그려 풀밭을 손으로 훑었다. 진득한 핏물이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핏자국.’ 상황이 벌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핏물이 채 굳지도 않았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의 피가 바닥에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집 뒤쪽이야. 근데 지금 상황이, 끄응.」 유니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그때였다. “아악!” 누군가의 비명이 들렸다. 쥬다스는 곧장 소리가 들려온 집 뒤편으로 달려갔다. 불타는 나무기둥 사이로 불길보다 더 새빨간 핏자국이 낭자했다. 사람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그를 돌아보는 보랏빛 요정과 눈이 마주쳤다. “이게 대체…….” 뒤따라온 일행들 사이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앞에 산지옥이 펼쳐져 있었다. 카니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말했다. 「픽시는 분명 살생을 싫어하지만, 그 이유는 약해서가 아니죠.」 끄어억! 근처에 있던 한 남자가 피 칠갑이 된 손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자세히 보니 손이 통째로 잘려 날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부상자는 차라리 다행인 수준이었다. 주변엔 나무줄기에 감겨 목이 졸리거나 가슴이 꿰뚫려 죽은 시신이 수두룩했다. 시체 한가운데 서 있는 란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멍하니 풀린 눈동자와 칼에 찢겨 흘러내린 옷자락, 곱게 땋았던 머리카락은 산발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시선을 홀리는 미형이 춤추는 불빛 아래 드러나 요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밤의 여신처럼 아름다운 얼굴 아래 풀어헤친 보라색 머리카락과 함께 반짝이는 드레스 자락만 더운 바람을 타고 흔들거렸다. 「어머나, 제대로 저질렀네요. 보통의 픽시라면 위험을 느꼈을 때 거주지를 버리고 도망가는 편을 택했을 텐데.」 「애초에 저 픽시를 보통의 범주에 넣어서 보는 건 무리라 생각한다만.」 「그렇긴 해요.」 이미 란은 벌레쿠키를 즐기던 특이한 취향부터 부정할 수 없는 괴짜 픽시였다. 「그치만 이건 이거대로 이상하지. 돌연변이긴 해도 살인을 즐기는 애는 아니었잖아? 혼자 조용히 집 안에 틀어박혀 살던 픽시를 저 정도로 잔뜩 화나게 할 수 있다니.」 「것도 인간들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네요.」 「우웅, 집이 불타버려서 화난 거 아니다요?」 “이, 악마!” 정령들은 떠들다 말고 소리가 들린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란이 무차별학살을 벌인 듯 보이지만 쥬다스는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반인이 구하기 힘든 전문방어구에 대인살상무기. 상대가 식물계란 사실을 알고 불을 먼저 질렀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픽시를 노린 자들이로구나.’ 그들은 마녀를 퇴치하라는 지령을 받고 온 용병이었다. 란이 정기적으로 거래하던 식재료 상단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를 넘겼다. 오늘이 거래 날이고 거래 장소와 함께 주로 출몰하는 장소에 대한 모든 정보가 용병단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저 불길하단 이유만으로도 마녀가 사라지길 바라는 사람은 많았다. 만일 란이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피 흘리고 있는 건 인간이 아니라 그녀였을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시체의 목을 계속 조르던 나무줄기가 스르륵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죽은 동료의 파랗게 질린 얼굴을 쳐다본 용병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순진한 처녀인 척 유혹하더니. 역시 사람을 매혹해 잡아먹는 마녀였군!” “유혹한 적 없어. 너희가 먼저 내 집을 불태웠잖아.” “닥쳐라, 이 악독한 마녀!” “…….” 란은 입을 다물고 남은 용병들을 응시했다. 신비한 보라색 머리카락과 다르게 눈동자만큼은 밤하늘을 베어다 펴 바른 듯 짙은 검은색이었다. 쥬다스가 중간에 곧장 끼어들지 않은 이유가 바로 그녀의 그 눈 때문이었다. 잔에 가득 차오른 물결처럼 파르르 흔들린 검은 눈동자는 끝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쥬다스는 그 안에 숨은 상처를 알아보았다. ‘너는 지금 견딜 수 없이 아프구나.’ 익숙해졌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인간과 요정이 느끼는 고통은 다르지 않다. 그저 참는 것에 익숙해질 뿐이었다. 살아 있는 이상, 상처는 누구나 똑같이 아프다. “……왜 ‘아빠’가 만들어준 내 집을 불태우고, 날 죽이려 했어?” 란은 찢어진 스커트 자락을 움켜쥐었다. “왜 너흰 나를 악마라고 부르는 거야?” 그녀는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란은 살면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 오히려 깊은 산중 길을 잃고 헤매던 이들을 구해주고 돌려보내는 선의를 베풀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 그녀의 기괴한 취향에 놀라 까무러치거나 달아나곤 했지만 상관없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게 보기 싫었을 뿐이고, 그래서 도와줬다. 마녀라 오해를 사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거기까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문제는 존재 자체에 대한 살의였다. 그냥 두려워하고 꺼려하는 것과 생명을 밟아 꺼뜨리고 싶어 하는 것은 받아들이는 무게가 달랐다. 란은 자신이 왜 죽임을 당해야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제거하러 온 용병들은 그 의문을 풀어줄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죽어!” 란의 심장을 노리고 날카로운 칼날이 날아들었다. 무기력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란은 그대로 천천히 주저앉았다.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대로 찔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땅에서부터 거대한 바위가 솟아올라 공격을 가로막았다. 콰가각! 단단한 바윗덩어리였지만 찌르기가 아니라 옆 날을 세워 휘두른 칼은 튕겨 나가지 않고 시끄러운 마찰음을 내며 박혀 버렸다. 손목에 저릿한 충격을 받은 용병은 인상을 팍 찡그리며 갑작스레 솟아오른 바위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헤헤, 토니다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실체화한 작은 정령이 검끝에 톡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토니가 모습을 드러내자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잠시만 이러고 있자요! 이그레트가 너요들을 붙잡아두길 바라니까.」 토니는 방긋 웃으며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후죽순처럼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후두둑! 투둑! 갑자기 용병들의 발목을 덮친 흙은 그대로 굳어 바위로 변해버렸다. 졸지에 바윗돌 속에 두 다리가 끼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황당함과 공포가 뒤섞인 비명 소리가 잇달아 터졌다. “……!” 그리고 멍하니 주저앉아 있던 란은 눈높이를 맞춰주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따뜻한 금색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괜찮으냐?” “아…….” 주르륵. 까만 눈동자 한가득 넘실거리기만 하던 눈물이 허락이라도 받은 듯이 비로소 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쥬다스는 다리가 끼인 채 옴짝달싹 못하는 용병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아…… 빠…….” 란은 쥬다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선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아버지를 찾았다. 나무에서 태어나는 요정족이기에 당연히 친부는 아니었지만 본래대로라면 태어날 수 없었던 픽시의 마지막 열매가 세상 빛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 인간이었다. 란은 그를 향해 남몰래 속으로만 불러왔던 호칭을 울먹거리며 읊조렸다. “아빠. 아빠가 남기고 간 집. 불타버렸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아빠가 키워준 나무도.” “란, 네 탓이 아니야.” “전부 사라졌어.” 쥬다스의 옷깃을 동아줄처럼 부여잡은 두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란이 지금 쥬다스에게 투영하고 있는 대상은 그녀가 아버지로 믿고 있는 인간이었다. 그녀는 꼭 비에 젖은 작은 새와 같이 그렇게 떨기만 했다. ‘정말로 혼자가 됐어.’ 픽시는 본래 숲에서 살아가는 요정족이다. 그러니 꼭 사회적인 삶을 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란에게는 마음 붙이고 살아가던 아늑한 공간이 있었다. 자신이 태어난 나무, 그 나무를 돌봐주던 사람이 죽기 전까지 살았을 낡은 집. 그거면 충분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홀로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는 나무처럼 란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녀의 뿌리가 모조리 불타 사라졌다. “뭐하는 놈들이냐? 밤의 마녀는 혼자 다닌다고 들었는데.” “…….” 용병들은 갑자기 우르르 나타난 기사단을 보고 흠칫 어깨를 떨었다. 발이 묶였으니 뒤로 물러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적에게 항복할 생각도 없으니 속수무책이었다. 가만히 란의 등을 다독거려 주던 쥬다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녀에게 홀린 멍청이들인가? 정신 차려! 그 마녀가 어떤 년인지……!” 적반하장으로 쥬다스 일행을 훈계하던 용병은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딱히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진 것도 아닌데 저절로 입이 다물렸다. 고요히 가라앉은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한 탓이었다. 같은 인간일진대 감히 눈을 마주보고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무언가 크게 거스른 기분이었다. 용병들은 오래 걸리지 않아 같은 생각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니, 결코 같지 않다.’ 마치 보아뱀 앞의 생쥐라도 된 듯이, 명백하게 상대측이 상위의 존재였다. 그 사실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깨달았을 뿐이다. “이 아이는 마녀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린 의뢰를.”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으로 의뢰를 수락한 당신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만 물러나십시오.” 표현은 완곡했지만 쥬다스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토니가 파닥파닥 날아와 손바닥 위로 답싹 내려앉았다. 동시에 용병들의 다리를 봉하고 있던 흙무더기가 무너지며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해박되었다. “…….” 맥없이 부서져 내리는 흙을 털고 주춤주춤 물러서던 용병들은 서로 눈치를 보았다. 마녀를 퇴치하기 위해 파견된 12명의 용병 중 현재까지 살아남은 수는 겨우 넷이었다. 여덟 명이 죽고 한 명이 손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으며 그나마 상태가 양호한 인원이 나머지 셋이다. 마녀 혼자라면 모를까 이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쥬다스 일행까지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수한 의뢰 현장을 거치는 용병답게 판단은 빨랐다. 지금은 의뢰 따위보다 목숨이 우선이었다. 끄덕. 통솔자의 지시에 따라 살아남은 용병들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란도 덤비지 않는 적을 굳이 쫓아가 죽일 생각까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지쳐 있었다. “란.” 란은 쥬다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 틈엔가 루니와 카니가 힘을 사용해 불길을 말끔히 제압한 상태였다. 하지만 란의 집과 나무들은 이미 까맣게 타버려 본래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있지, 사람을 죽였어. 잔뜩.” “그래.”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쥬다스에게 시선을 준 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를 죽이려 했어. 너무 놀라서 나무들을 불러 막으려고 했더니 거기에 사람들이 그냥 죽어버렸어.” “그랬구나.” “인간은 의외로 쉽게 죽더라.” 란은 울듯이 웃었다. “나, 정말로 마녀인가 봐.”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드디어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이 돌아왔네요.ㅎ 3월의 중반쯤 오니까 날씨도 무척 따뜻해졌습니다. 그럼 기운찬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47 / 0240 ---------------------------------------------- 17장. 마녀사냥 그 말을 마치자마자 란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른 봄,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아롱져 있던 꽃봉오리가 마침내 툭 터져 여린 꽃잎을 드러내듯 그렇게 살며시 울음이 터졌다. 쥬다스는 우는 그녀를 보고도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소맷자락을 내어준 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 차분한 배려가 더 고마워서 란은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쥬다스 님.” 그사이 상황을 정리한 에단이 이에 대해 짤막하게 보고했다. “시신은 전부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또한 죽은 자들의 소지품 중 명패가 있어 각 무덤 위에 알아볼 수 있도록 세워놓았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채비를 명하시겠습니까?” “으음, 그건 아무래도.” 쥬다스는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힐끗 아직까지도 단단히 잡혀 있는 소매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이곳에서 떠날 수 없겠어.” 란은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잠이 든 채로도 간절히 붙든 소맷자락만큼은 놓지 않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홀로 폐허 속에 버리고 갈 수 없어 쥬다스 일행은 근처에 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어찌나 깊이 잠들었는지 누가 업어 가도 모르던 란은 어둠이 완연한 한밤중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산속의 밤은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추웠다. 찬 기온을 녹이는 모닥불 타는 소리가 따닥따닥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눈을 뜨니 컴컴한 밤하늘을 가린 나뭇가지이 시야에 보였다. 란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 몸을 덮고 있던 부드러운 담요가 흘러내렸다. “아직 밤이 깊단다.” 몽롱한 정신으로 담요를 쳐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던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자려무나, 아가.” “아…….” 조금 떨어진 곳에 쥬다스가 앉아 있었다. 란은 그만 멍하니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쥬다스의 주변에는 모습을 드러낸 정령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마치 그라는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릉! 쥬다스의 무릎에 턱을 괴고 있던 푸른 늑대가 작게 목을 울리며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물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란도 느낄 수 있었다. ‘사실은 당신이 저들의 별이구나.’ 그는 자연계 정령들로부터 세상 무엇보다 소중히 지켜지고 있었다. 배시시 미소 지은 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있지, 나 꿈을 꿨어.” 아직도 꿈속의 장면이 눈앞에 선했다. 란은 허전한 품안에 담요를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아빠가 나를 부르는 꿈.” “으엑. 그거 무서운 꿈 아니냐?” 고개를 들어보니 모닥불 주변에는 쥬다스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칼뿐 아니라 에단과 크리스티나까지 함께 둘러앉아 있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서운 게 아니라……. 그리운 꿈이었어. 내가 태어나기 전의 아빠 목소리를 들었거든.” 픽시는 인간과 달리 나무에서 열매로 맺힌다. 하지만 그렇게 맺힌 열매가 무조건 픽시로 태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깨끗한 햇살과 기름진 토양, 충분한 수분, 거기에 더해 선대 픽시의 축복이라는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후에야 비로소 열매는 픽시로 진화해 태어난다. 그 조건이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을 시에는 열매인 채로 약 백 년 가까이 버티다 자연적으로 소멸한다. 그렇게 태어나는 픽시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 열매의 기억을 갖고 있다. 란은 선대 픽시 대신 자신을 따뜻하게 축복해 준 인간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둥근 구체 속에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다니, 너는 마치 란(卵) 같구나.’ 남자는 해동 출신이었다. 그는 픽시의 열매를 두고 알이라는 뜻의 ‘란’이라 칭했다. 그가 하는 말을 다 알아듣진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을 향해 ‘란’이라고 부르는 음성만큼은 또렷하게 뇌리에 입력되었다. 어쩌면 그는 그녀에게 이름을 붙여준 게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란은 그의 목소리를 좋아했다. 매일 찾아와 나무가 시들지 않도록 돌봐주며 사랑스럽다는 듯 불러주는 그가 좋았다. 한 인간의 정성 어린 보살핌은 본디 식물에서 태어나 혈연의 정이 없는 요정족에게 부모에 대한 애정을 싹 틔웠다. 담요를 꼼지락거리는 란을 향해 크리스티나가 물었다. “아버지를 기억하나?” “음,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빠는 해동 출신이었어. 그 나라 언어를 사용했거든.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아마도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이었겠지? 참, 그리고 연금술사였던 것 같아.” “뭐?” 단순히 아버지에 대해 툭 던져봤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대답이 돌아오자 크리스티나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연금술이란 해동에서만 나타나는 특수한 이능이다. 제국 내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분야이자 마법 기술로는 이해할 수 없는 변환과 창조가 가능했다. 그랬기에 연금술에 대해 무수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정작 해동 내에서도 이를 다룰 수 있는 이능력자는 귀했다. 특히 고위 연금술을 사용하기 위해선 정교하고 복잡한 술법이 적힌 술법궤가 필요했는데 이는 고위귀족가문이나 왕족들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다. 루바르잔 황제와 해동의 왕녀가 동맹혼으로 이어지면서 연금술에 대한 비밀이 어느 정도 풀리는가 싶었지만 혼인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해동 왕녀 하윤 리가 충격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그로 인해 두 국가 간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연금술에 대한 연구마저도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아직 연금술이란 주제에 대한 심각성을 모르는 란은 그저 추억에 잠겨 이야기를 지속했다. “처음 태어났을 때 아빠가 지은 집에서 연금술이 적힌 서적과 술법궤를 발견했어. 어디에 쓰는 건지 몰라 그냥 그대로 집안에 뒀지만. 지금은 다 타버렸겠네.” “……타버렸다니.” 연금술이 적힌 서적과 술법궤는 무척 희귀한 물건이었다. 특히 술법궤는 고위가문의 가보로 전해 내려오는 만큼 그 가치가 엄청났다. 그 어마어마한 보물이 고작 화재 따위에 잿가루가 되어버렸다는 말을 들은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그런 에단을 힐끗 쳐다본 란은 그를 향해 반가운 어조로 말을 걸었다. “해동 사람처럼 생기진 않았지만, 너도 검은색이네.” “……?” “머리랑 눈이.” 에단의 흑발과 흑안은 제국 내에서도 아주 특이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흔한 편도 아니었지만 누군가 색깔에 대해 특별한 감상을 표현 적은 없었기에 에단은 잠시 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묵묵히 자신을 마주보아오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란은 히히 웃었다. “나도 눈은 검은색인데! 아마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물려받다니.” 요정족이 인간과 다른 태생을 타고난다는 사실은 쥬다스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들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에단은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추측에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인간의 시신을 먹고 태어났다고 했다. 설마 그때 유전된 건가?’ 란은 동족의 축복이 아닌 인간을 양분으로 삼아 태어났다. 그래서 온전한 요정이 아닌 낮과 밤의 모습이 다른 기이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요정의 모습이었지만 곧 해가 뜰 무렵엔 다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추한 외모로 변할 것이다. 그 이유가 바로 그녀의 반을 차지한 인간의 피 때문이라면 모든 이상현상에 대한 설명이 되었다. “그치만 이젠 전부 의미 없게 되어버렸어.” “무슨 말이지?” “태어난 의미 말이야. 아빠가 날 세상에 만들어준 의미. 난 완벽한 픽시로 태어나지 못한 반쪽짜리고, 그렇다고 사람들과 섞이는 것도 싫어해. 결국 이렇게나 미움 받아버리고.” 란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모닥불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사람들이 날 죽이고 싶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워할 줄은 몰랐어.” “이봐, 그건 그 녀석들이 잘못한 거야.” 바이칼이 울컥하여 끼어들었다. 하지만 란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처음엔 살아 있다는 게 마냥 좋았는데. 이젠 정말 모르겠어. 아무도 원하는 사람이 없고, 차라리 죽길 바라기까지 한다면.” “…….” “나는 왜 태어난 걸까.” “란아.” 그때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그녀를 불렀다. 란이 풀 죽은 고양이처럼 슬쩍 고개를 들자 그는 옆자리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와서 앉으라는 손짓에 란은 순순히 담요를 들고 총총 그 곁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자 쥬다스는 그녀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건?” “전부 타버리진 않았더구나.” 불길에 휩싸인 나무 사이에서 유일하게 타지 않은 나뭇잎이었다. 이제 막 자라나 연한 녹색으로 가득한 부드러운 잎사귀가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반짝이는 보석을 하나씩 품고 태어난다는구나.” “보석…….” 란은 손안에 든 나뭇잎을 조심스레 말아 쥐었다. “왜 사람들은 함께 살아갈까? 나도 그것이 궁금했던 적이 있단다.” “지금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지.” 대답은 웃음기를 담고 부드럽게 이어졌다. “자신이 가진 보석은 스스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우린 서로 만나 그 보석을 발견해 주고, 다시 알려주는 거야.” “……?”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빛나고 있음을.” 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던 란은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이상해. 분명히 나보다 어린데도.” 그녀는 너무 웃어 눈가에 눈물까지 매단 채 덧붙였다. “꼭 아빠 같아.” “크흠.” 쥬다스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은 해봤던 생각이었기에 듣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헛기침이 튀어나왔다. “있지, 있지! 아빠라고 불러보면 안 돼?” “컥! 쿨럭쿨럭쿨럭!” 아니, 이건 결단코 생각해 본 적조차 없었다. 헛기침이 아니라 마구 터져 나오는 기침으로 인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쥬다스를 제외한 세 사람의 얼굴이 일제히 하얗게 질렸다. ‘무슨 큰일 날 소리를……!’ 그가 이제 겨우 17세라는 사실은 그렇다 쳐도, 일국의 황태자를 향해 그런 오해사기 딱 좋은 호칭을 부르도록 허락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이칼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미쳤냐! 차라리 오빠라고 하든가!” “응? 태어난 지 오십 년도 넘었는데 너희한테 오빠는 좀.” “……아빠는 되고?” “양아빠라면 나이 차이 상관없지 않을까?” 순진한 얼굴로 되물어오는 통에 바이칼과 에단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살면서 어처구니가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는 적은 처음이었다. 할 말을 잃은 바이칼이 슬쩍 크리스티나의 안색을 살펴보니 아예 돌처럼 굳어 있었다. “잠깐. 몇 살이라고?” “정확히는 쉰여섯.” 종족이 다른 줄은 알았어도 그렇게 나이가 많을 줄은 몰랐던 바이칼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기각. 절대 안 돼.” “엑? 왜!” “왜는 쥐뿔이 왜야. 그 나이 먹고서 누구보고 아빠 소릴 하냐? 아니, 그 나이가 아니어도 안 돼. 어후, 아직 성인도 아니신 분한테 무슨 막말을 못해서.” 그 투덜거림을 들으며 란은 도로 시무룩해졌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지켜보던 쥬다스에게 마지막으로 의중을 물었다. “정말 안 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월요일입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주말은 정말 짧군요 -_ㅠ 주르륵... 그래도 어제 저녁을 족발로 마무리해서 행복합니다. 고기는 어떤 형태든 사랑입니다(?) 그럼 즐거운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48 / 0240 ---------------------------------------------- 17장. 마녀사냥 “그랬다간 여러모로 곤란해질 일이 잔뜩 생길게다. 또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거나 다칠 수도 있지. 어떨 것 같으냐?” “으음. 나 때문에 쥬다스 님도 같이 미움받는다는 거지? 그건 싫어.” 란은 냉큼 수긍했다. 자신보다 상대의 피해를 먼저 생각하는 순진한 픽시의 마음에 쥬다스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개인적으로는 상관없다만.” “진짜?” “글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금하겠다고 약속해 준다면야 사적인 자리에서는 편히 대해도 좋아. 아빠든, 친구든, 혹은 할아버지든.” ‘할아버지…….’ 예시 끄트머리에 끼어 있는 괴이쩍은 호칭을 듣고 모닥불에 둘러앉아있던 나머지 세 사람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보다 란, 네가 일어나면 한 가지 묻고자 한 게 있단다.” “뭔데?” “우리는 날이 밝거든 이곳을 떠나 해동으로 향할 것이야. 원한다면 네가 정착할 만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 함께 다녀도 좋다. 아니면 이곳에 남아 다시 활로를 개척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쥬다스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었다. “어찌하겠느냐?” 집은 불타버렸고 마녀로 몰려 목숨을 노려지고 있다. 오늘은 그냥 돌아갔지만 언제 또다시 마녀를 죽이려는 자들이 나타날지 모를 일이었다. 이젠 더 이상 거래처를 믿을 수도 없게 되었으니 좋아하던 쿠키나 빵을 굽지도 못할 터였다. 란은 그제야 자신의 처지가 현실적으로 와 닿았다. ‘정말 어쩌지.’ 이렇다 할 대답이 곧장 나오지가 않았다. 그녀는 깊은 산속에 틀어박혀 살아온 픽시지만 세상물정을 아예 모르진 않았다. 그렇기에 지금 쥬다스가 자신에게 베푸는 친절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고 있었다. 란은 고개를 돌려 까맣게 탄 나무들과 집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태어나 50년이 넘도록 살아온 고향을 떠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이곳에 머물긴 싫었다. “……생각해 봤는데.” 란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주먹을 꾹 쥐었다. “나, 오십 년이나 살았지만 배운 기술도 없고, 집이 불타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 “…….” “그러니까 쥬다스 님을 따라갈 수 없어. 새 집을 찾는 건 스스로 어떻게든 해볼게. 구해줘서 고마워.” 그녀가 알고 있는 인간관계란 그런 것이었다. 하다못해 밀가루를 한 자루 얻으려 해도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닌 식물을 가져와 교환해야 했다.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건 아이들이 시소를 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양쪽의 균형이 맞지 않으면 같이 어울릴 수 없다. “본래 생활에서 벗어나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새 집을 찾는 일이 두렵진 않느냐?” “그건 문제없어! 이번 일을 겪었으니까, 다시 또 누가 날 죽이려고 들면 그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막 죽이는 건 싫으니까…… 으음, 이번엔 살살 때리지 뭐.” 조금 풀이 죽어있긴 했으나 씩씩하게 웃는 란을 보며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되었다. 자아, 시간이 늦었으니 이만 다들 눈을 붙이자꾸나.” 아닌 게 아니라 잘 시간이 한참 지나있었다. 이대로라면 밤을 꼬박 새울 기세였다. 다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취침을 준비했다. 제 몫의 침낭을 펴던 바이칼이 문득 여전히 모닥불 앞에 쪼그려 앉아 있는 란을 발견하고 물음을 던졌다. “이봐, 안 자? 거기서 뭐 해?” “난……. 오늘이 지나면 다들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냥 깨어 있을래.” “흠. 동이 트자마자 함께 움직이려면 피곤하지 않겠느냐?” “어?” 당연히 함께 움직이리라 여기는 말이었다. 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쥬다스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며 설명을 덧붙였다. “란아, 함께 가자는 건 무언가를 바라서 꺼낸 말이 아니야.” “아?” “너는 아무것도 해줄 필요 없단다. 세상에는 꼭 무언가를 해줘야 하는 이해관계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 네가 길을 잃고 쓰러져 가는 사람들을 호의로 구해주었듯이 말이다.” “그치만.” “굳이 따지자면 너를 데려가고자 하는 건 내 욕심이겠구나.” 그는 사람을 믿고 사람에게 상처받은 란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스스로 딛고 이겨내고자 하는 씩씩한 요정족에게 그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싶은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아가. 아빠라 불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누.” “……!” 시무룩했던 란의 얼굴이 사탕을 선물 받은 아이처럼 확 밝아졌다. 그래도 부끄러운지 정작 ‘아빠’라고는 부르지 못하고 손가락을 배배 꼬았다. “고마워, 쥬다스 님. 데려가준다면 나 정말 열심히 따라다닐게. 귀찮아지면 중간에 버려도 좋아. 아, 피곤하면 안마라도 해줄게. 길 잃은 사람들 피로 풀어줄 때 배웠거든. 나 안마 잘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지켜보던 바이칼이 침낭에 묻은 잔디를 대충 툭툭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근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왜 우리한텐 너, 너 거리면서 쥬다스 님께는 쥬다스 님이라고 하는 거야? 아니,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떤 분인지 모르지 않냐?” “그야 당연히 알지. 나도 요정족인 걸.” “엉? 그게 무슨 상관…….” “요정은 인간보다는 정령에 가깝거든.” 인간의 신분계급을 따를 필요도 없고 어떤 신분인지조차 듣지 못한 란이 굳이 쥬다스에게 특별대우를 할 이유는 없었다. ‘아빠’라고 부르고 싶다는 정도야 워낙 그의 성정이 어른스럽고 따뜻하기에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지만 ‘님’을 붙이는 건 그것과 별개로 의문스러운 호칭이었다. 란은 해맑게 웃으며 그 의문을 종식시킬 파격적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정령왕의 계약자에게 함부로 너, 너 거릴 순 없잖아.” 일행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보초를 서던 기사단원은 물론이고 이미 누워서 잘 준비를 하던 사람들까지 싸하게 굳어졌다. 자는 척 누워 있던 콜도 화들짝 놀라 혀를 깨물었다. ‘과, 과연 요정족 픽시구나! 스승님의 정령을 알아보다니.’ 자신이 한 말이 어떤 폭풍을 몰고 왔는지 까맣게 모르는 란만이 헤헤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그럼 내일부터 같이 여행가는 거네. 친구들이랑 떠나는 여행은 어떤 기분일까?” “…….” “아, 기대된다.” “…….” 차마 본인에게 물어볼 정신도 없이 다들 멍하니 굳어버렸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정지 마법이라도 걸린 양 움직임이 멈춰 버린 일행 사이에서 정작 당사자는 멀쩡히 자리를 펴고 누웠다. 그의 곁에 몰려든 정령들이 까르륵 웃는 모습이 보였다. ‘후우. 전하께서 평범하지 않다는 건 알았지만.’ 주군의 비범함을 늘 곁에서 지켜봐온 에단은 그나마 비교적 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시는군.’ 잠시 침묵을 지키던 크리스티나와 바이칼도 조금씩 혼란을 진정시켰다. ‘저 픽시가 굳이 거짓을 얘기할 이유는 없으니 분명 사실이겠지.’ ‘정령왕은 이제 전설에만 남은 존재가 아니었나?’ 무수한 업적을 남긴 채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사라진 대현자 이그레트 외에, 그 어느 누구도 정령왕과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정령왕은커녕 최상급 정령의 계약자조차 만나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그 말도 안 되는 한마디에 모두가 진짜라 생각하고 반응한 건 쥬다스라면 그럴 만하다는 독특한 신뢰를 품은 탓이었다. 일전 바이칼이 우스갯소리로 ‘이그레트 환생설’을 떠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주인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경의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 그라면 설령 정령왕이나 드래곤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이 연관되었다 한들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저 4속성 중에 누가 정령왕이라고?’ 바이칼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리는 눈동자로 쥬다스의 곁을 에워싼 4속성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가장 눈에 익은 건 아무래도 녹색으로 빛나는 바람의 정령이었다. 하지만 자주 본 만큼 오히려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정령왕이 그렇게 자주 나타날 리가 없지. 아마 바람은 아니겠군.’ 붉은 날개를 달고 있는 조그마한 소녀의 외향인 카니와 아기처럼 뒹굴거리고 있는 토니도 차례로 보았지만 정령왕의 위엄은 손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선을 받게 된 루니는 그릉 목을 울리며 그들을 마주 노려보았다. 그 서슬 퍼런 눈빛에 움찔한 바이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물이려나?” 「우우, 뭐람! 이그레트, 쟤들 지금 되게 웃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포로롱 날아오른 유니가 불만스레 칭얼거렸다. 그러자 카니도 손가락을 입가에 올린 채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웃긴 것보단 되게 무례한 생각 같은데요.」 「왜 무례하다요? 모르는 편이 낫지 않다요?」 「흐흥~ 토니 네가 웬일로 거기까지 생각을 했대? 맞아, 물론 모르는 게 편하긴 하겠지만. 근데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우리 중에 하나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라 그게 은근 열 받네.」 유니는 팔짱을 끼며 왈칵 소리쳤다. 「저것들 분명 나를 제일 먼저 후보에서 제쳤다고!」 「우잉?」 「그다음은 너고!」 「에에에엥.」 쥬다스의 이마 위에서 뒹굴거리던 토니는 그대로 양손에 턱을 받쳤다. 「뭐다요, 실제로 약하지 않으면 된 거 아니다요? 못 알아보는 인간 쪽이 약한 거다요.」 유니는 손가락으로 푸른 늑대를 처억 가리키며 항변했다. 「바보야, 그래서가 아니야! 우린 전부 동급인데! 저 과묵한 멍뭉이보다 얕잡아 보였다는 게 화나는 거지!」 「……가만히 있는 나는 왜.」 조용히 엎드려 있다가 졸지에 과묵한 멍뭉이가 되어버린 루니가 억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쿡쿡. 진정해요, 유니. 존재가 드러나지 않길 바라는 건 이그레트의 뜻이기도 했잖아요. 오히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쪽이 더 그의 바람엔 걸맞은 모습인걸요?」 「그…… 건 그렇지만. 우으으.」 떠들썩해진 정령들의 대화를 들으며 쥬다스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그 자신이 정령왕의 계약자란 사실을 최대한 밝히고 싶지 않은 건 맞지만 지금처럼 드러난 사실을 굳이 아닌 척 숨길 생각은 없었다. ‘구해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쥬다스 님도 같이 미움 받는다는 거지? 그건 싫어.’ ‘새 집을 찾는 건 스스로 어떻게든 해볼게.’ 조금 전 란이 했던 이야기가 아른아른 머릿속을 스쳤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도움을 주면 더 큰 도움을 바라거나 당연히 남은 책임을 지길 바랐다.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저 보랏빛 요정은 정말로 특이한 존재였다. 그에게 고맙다고 하고 그 이상의 도움을 바라지 않는다. 란은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고자 씩씩하게 마음먹는 강한 아이였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긴장으로 꽉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이 이제야 스르르 풀렸다. 쥬다스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준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아, 잔다.」 저들끼리 이렇다 저렇다 우기며 찡얼거리던 정령들은 일제히 잠든 계약자에게로 눈길을 모았다. 잠깐 일어섰던 푸른 늑대는 도로 자리에 길게 누워 쥬다스를 동그랗게 감쌌다. 그의 머리며 이불 위로 날아든 나머지 정령들은 방금 전의 불만을 싹 날려버리고 키득키득 웃었다. 「너는 늘 다른 사람을 아가라고 부르지만…….」 「헤헤. 자장자장이다요.」 백 년이 지나도 처음 그를 발견했던 모습이 잊을 수 없었다. 눈밭에 버려져 울지도 않고 새근새근 자던 하얗고 작은 아기. 계약을 맺은 건 그 후로 제법 시간이 지난 후였지만, 그 아기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정령들은 전부 그에게 반해 있었다. 살짝 날아든 유니가 잠든 계약자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잘 자, 이그레트.」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조금 크고 아름다운 파란 멍뭉이 (...) 한주의 시작은 잘 여셨나요?ㅎㅎ 봄바람이 따뜻해서 놀러가기 딱 좋은 날씨더라구요. 놀러가진 못하지만...쿨럭. 내일은 기분삼아 엄청나게 단 카라멜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겠습니다.ㅋ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늘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0149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제국 동쪽과 해동을 잇는 피리네오스 산맥. 제국에서는 별 제약 없이 건널 수 있지만 정작 동방국가에선 ‘서요산(西妖山)’, 즉 요괴가 가득한 산이라 부르며 출입을 꺼리는 금역이다. 예부터 폐쇄적인 성향이 강한 해동에선 타지로부터 건너오는 문물에 대해 보다 부정적이었다. 루바르잔 제국과 동맹을 맺고 교류를 시작한 지도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났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여전히 타국인과 타국 문물을 좋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았다. 쥬다스 일행은 바로 그 산을 내려와 해동의 첫 마을에 도착했다. 사실 그들도 산을 통째로 넘은 건 아니었다. 산맥 중턱에 해동으로 이어지는 포탈이 있었다. 쥬다스는 무리해서 산봉우리를 넘는 대신 포탈을 타는 편을 선택했다. 산맥이 어찌나 규모가 크고 산세가 험하던지 중턱에 위치한 포탈관리실까지 이동하는 데만도 수일이 걸렸다. 그 거대하고도 험준한 산맥을 온전히 걸어서 넘으려면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사람이 지쳐 도저히 건널 수가 없었다. 길도 제대로 닦이지 않아 말이 달리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보통 일정 높이 이상의 산마다 간편하게 이동할 수 있는 포탈이 설치되어 있었다. 포탈은 순식간에 일행을 해동의 초입으로 이동시켰다. 처음 밟은 해동의 땅은 ‘하늬’라는 이름을 가진 마을이었다. 하늬마을 역시 해동의 폐쇄적 성향을 그대로 드러냈다. 마을에 산을 건너온 제국민이 제법 섞여 그나마 익숙할 텐데도 마을사람들은 타국인을 은근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장터에 늘어선 장꾼들만이 활발한 호객행위로 그들을 반길 뿐이었다. 어차피 주목받을 생각 따윈 없었던 쥬다스 일행은 물 흐르듯 조용히 마을에 들어와 분위기를 살폈다. “어으, 드디어 도착했네요.” 며칠간 험한 산길을 지나오느라 체력의 한계를 시험해야만 했던 바이칼이 숙소에 들어서자마자 풀썩 엎어졌다. 쿡쿡 쑤시는 뼈마디며 온몸을 강타하는 근육통에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신체적 이능력자로 구성된 기사단원들은 멀쩡했지만 그게 아닌 마법사나 치유술사, 정령술사들에겐 휴식이 절실했다. 무가에서 태어나 신체적 이능을 누구보다 강하게 타고난 에단은 죽는 시늉을 하는 바이칼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볍게 혀를 찼다. “그렇게나 힘든가?” “진짜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이 이상 더 말을 탔다간 영 좋지 못한 곳에 근육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힘든 건 둔부뿐인 모양이군.” 바이칼은 고통을 토로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는 철벽 앞에서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남이사 뭐라든 그는 지금 며칠 만에 취하는 꿀 같은 휴식에 감동하고 있었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온기에 뭉친 근육이 노글노글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국경을 넘자마자 생활양식부터 바뀌었다. 해동의 숙소에선 특이하게도 침대 대신 바닥에 요를 깔아 각자 알아서 누울 수 있도록 했다. 맨 바닥이라고는 해도 바닥 전체가 따끈따끈해서 침대보다 금방 몸을 덥힐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바로 부뚜막에서 불을 지펴 그 열기로 방 전체를 달구는 온돌난방을 사용하는 까닭이었다. 온돌은 제국에서 주로 사용하는 벽난로 난방법과 다르게 연기가 나지 않도록 구조화한 독특한 보온설계였다. 거기다가 건물은 전부 1층으로 되어 있었다. 인간이란 자고로 하늘 아래 살아가는 미물이며, 하늘에 가까워질수록 오만하고 무례하다 여기는 사상 탓이다. 여기엔 해동의 귀족가도 빠짐없이 해당되어 아무리 높은 신분이라 해도 2층이 한계였다. 「딱히 특별한 건 안 보여. 치안도 나쁘지 않고.」 가볍게 주변을 훑은 유니가 청량한 바람을 흩뿌리며 날아들었다. 「참! 축제라고 하기엔 뭐하고, 봄마다 키우는 짐승의 첫 새끼를 바치는 풍습이 있대. 얘네가 믿는 수호신에게 잘 봐달라는 의미라나 뭐라나.」 「수호신이라면 그 녀석들 말하는 거다요?」 「응. 신이라기보단 우리와 같은 정령들이지. 자연계가 아니라 동물계이긴 하지만. 뭐어, 최근엔 계약자를 만나지 못했다고 들었으니까 암만 이렇게 제물을 바쳐보았자 소용없을걸.」 교황청을 세우고 국교로 유일신을 섬기는 루바르잔 제국과 다르게 해동은 토속신앙을 간직해 왔다. 세상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으며, 특히 해동의 왕가와 대대로 계약하여 그들을 보살피는 사방신수. 해동은 상경, 동경, 남경, 서경으로 나누어 4군부 체재를 사용하고 있으며 방위에 따라 수호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지금 쥬다스 일행이 산을 넘어 도달한 서쪽 방위에선 ‘백호’를 수호신으로 섬기며 매해 봄마다 제물을 바쳤다. 그리고 지금이 마침 봄이 무르익어 제물을 바치는 제사 기간이었다. “수도 호성은 북쪽 상경에 있습니다. 지금 같은 속도로 움직이면 일주일 안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니의 브리핑과 별개로 에단은 현재 일행의 위치와 목적지에 대한 간단한 보고를 마쳤다. 쥬다스는 들은 정보를 종합하여 머릿속에 대략적인 그림을 그려 넣었다. 순례의 길을 겸하여 찾아온 해동은 사실 그에게 있어 여러모로 뜻깊은 나라였다. 생모 하윤 리의 모국이자 그에게 이번 생을 살게끔 만든 연금술의 근원지. 드디어 5년 전 전달받았던 서윤 리의 초대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일주일이라.” 데에엥- 바깥에서부터 묵직한 쇳덩어리를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겉옷을 접어놓던 세이지가 의아한 얼굴로 창가로 다가갔다. 얇은 창호지를 바른 투박한 나무창문을 열자, 온갖 타악기 소리와 함께 음역대가 낮은 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아, 밖에 사람이 많아요. 가면 같은 것도 잔뜩 쓰고 있고요. 행사일까요?” 쥬다스는 세이지의 곁에 다가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하얀 털의 호랑이를 상징하는 동물가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면을 쓴 마을 사람들은 제각기 짐승의 첫 새끼를 끌고 줄 지어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악기 소리를 들으며 쥬다스는 창틀에 기대 턱을 괴었다. “흠, 이곳은 백호의 영역이라 하더구나.” “백호…… 요?” “그래. 해동의 사방신수에 대해서는 들어보았느냐?” 그 물음에 세이지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책에서 종종 읽었어요.” 해동의 사방신수에 대한 이야기는 연금술보다도 훨씬 유명했다. 그들이 제국의 힘 앞에 쉽사리 무릎 꿇지 않을 수 있었던 저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왕가 대대로 계약을 유지해 온 사방신의 힘은 아무리 마법강국 루바르잔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없었다. 그 맥이 끊겨가면서 나라가 흔들리긴 했지만 제국과의 동맹혼, 그리고 현왕의 피나는 노력으로 이제 겨우 안정화되어가던 참이다. “아, 그럼 저 행렬은 백호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글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드리러 가는 모양이다.” “제물을…….” 세이지는 누군가의 손에 목줄을 잡혀 아장아장 따라가는 잿빛 아기염소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던 그의 귓가에 웃음기 섞인 제안이 들려왔다. “가보겠느냐?” “네? 아. 그, 그래도 될까요?” 열넷, 한창 호기심 많을 나이였다. 황궁은 아이가 자라기엔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고 세이지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법을 배웠다. 어미가 저지른 죗값은 고스란히 자식에게 이어졌다. 사람들은 그를 손가락질했고 비참하게 죽은 어미는 죽어서까지 죄인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차가운 아버지는 그를 미워하거나 내치진 않았으나 따로 정 붙일 구석 따위 내어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 해동의 왕실에서조차 아마도 그는 죄인으로 고개 숙여야 할 것이다. 세이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형을 따라왔다. 자신이 죄라는 굴레를 입고 있다면 피하는 건 오히려 그 굴레를 키울 뿐이다. 싫든 좋든 맞부딪혀야만 했다. 세이지는 그리 생각했다. 그 자신을 위해서도, 죄를 저지른 채 세상을 떠나버린 어미를 위해서도,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얽혀 있는 형을 위해서라도. 그 죗값에 대한 강박적인 생각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아이의 어깨를 토닥여 주며 직접 아이다운 발상을 제안해 주었다. “모처럼 다른 나라에 왔으니 기회가 있을 때 보아두는 편이 좋겠지. 피곤한 사람들은 쉬도록 두고 제사를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끼리만 다녀오자꾸나.” 세이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형과 달리 약간 탁한 금안에 설렘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차마 떼를 부리진 못할 테지만, 쥬다스가 먼저 제안한다면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형제의 대화를 듣고 말린 오징어처럼 축 바닥에 늘어져 있던 바이칼이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쉬고 있거라. 금방 다녀오마.” “아뇨, 저도 그 제사란 게 궁금해서 잠이 다 안 옵니다.” 바이칼은 퀭한 눈으로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백호라느니 제사라느니 하는 타지의 문화가 궁금한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그냥 푹 쓰러져 잠들고 싶을 뿐이다. 그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차린 쥬다스가 부드럽게 만류했다. “해동의 수호신은 넷이나 되니,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게다.” “사실 제가 동물 중에 호랑이를 제일 좋아해서…….” “이거야 원.” 쥬다스는 14살 아이보다 더 아이 같이 떼 부리는 19살 친우를 보며 쿡쿡 웃었다. 그리곤 되도 않는 소릴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바이칼을 향해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다. “명령이다, 바이칼.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지친 동료들을 지켜다오.” “……예, 전하.” 막 스태프를 챙겨 들던 바이칼은 허탈하게 이를 도로 내려놓았다. 힐끗 쳐다본 단장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을 본 그는 완전히 따라나서는 걸 포기했다. 쥬다스는 세이지, 에단과 함께 방을 나섰다. 남자방과 여자방을 따로 잡았기 때문에 크리스티나와 란이 따라갈지 어떨지에 대해서는 바이칼이 알 수 없었다. 그는 벽에 기대 주르륵 미끄러져 누웠다. ‘그래도 살았다.’ 마법기사로 입단한 그는 인챈트를 걸거나 마력을 소모하는 일은 기가 막히게 수행해 냈지만 체력이 필요한 활동에서만큼은 극악한 효율을 보였다. 다 죽어가는 노인네마냥 삭신이 다 쑤셨다. 그러다 문득 한쪽 구석에 이미 자리를 펴고 편안히 누워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고 멈칫 눈을 깜빡였다. “어, 콜 영감님은 안 따라가셔도 됩니까?” 남들이 볼 때 유별날 정도로 제자사랑이 지극한 황실 정령술사 코르토반 옌은 쥬다스가 무슨 일을 하는 족족 따르는 편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마치 어미닭이 물가에 내놓은 병아리를 총총 따라다니며 챙기는 느낌마저 들곤 했다. ‘아니, 반대로 병아리가 어미닭을 쫓아다니는 건가?’ 묘한 딜레마에 빠진 그를 두고 향나무베개에 머리를 벤 콜이 여유롭게 대꾸했다. “피곤한 사람은 쉬라고 하셨으니 따를 뿐이라오.” “뭐, 제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걱정은 안 되십니까?” “제 걱정을 받으실 분은 아니시지 않소이까? 허허.” 바이칼은 한 박자 늦게 그들의 주군이 정령왕의 계약자란 사실을 떠올렸다. 확실히 웬만해선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나기 힘들 테였다. 사실이 그렇긴 하지만 수하된 입장에선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바이칼이 뻘쭘하게 머리를 긁적이는 걸 본 콜이 다시 말을 이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지 않으면 몸이 축난다오. 이 나이에 몸살이라도 들면 앞으로 더 폐가 될 것 같아 말입지요.” 콜은 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덮었다. “게다가 좋은 친우들을 호위로 두고 계시니 이 늙은이는 오늘만 파업 좀 하렵니다.” “예, 뭐…….” 그 말을 끝으로 콜은 정말로 편안하게 쿨쿨 잠에 빠져들었다. ‘천하 태평한 영감님이로구만.’ 스승과 제자는 닮는 법이라더니, 쥬다스와 닮은 구석도 좀 있는 것 같았다. 바이칼은 벽에 기댄 채 늘어져라 하품을 갈겼다. 몸은 천근만근 피로에 잠겨있었지만 정작 잠이 올 것 같진 않았다. “삐이?” 활기 넘치는 어린 와이번만이 쫑쫑거리며 그의 발치를 기웃거렸다. “플루비.” “삐!” 피식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손을 뻗자 대형견마냥 손바닥에 머리를 가져다대었다. 그는 파란색으로 빛나는 미니 와이번을 들어다 가슴 위에 올렸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징그럽게 느껴졌던 푸른 비늘과 주홍빛 눈동자가 이제는 제법 귀엽기까지 했다. 바이칼은 제 가슴 위에 얹어놓은 플루비의 오동통한 볼을 집게손으로 꼬집듯 늘어뜨렸다. “뭔 일 있으면 깨워라. 알람 마법을 걸어두긴 했는데, 너무 푹 잠들면 내가 못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삐애액…….” 불만스럽게 대답하는 울음소리마저 익숙했다. ============================ 작품 후기 ============================ *By. 공든탑 '18장 : 사신수-백호'의 시작입니다. 사방신수긴 한데 동물계 정령이라 좀...크흠... 아무튼 그렇습니다 (?)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뿅! 0150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쥬다스는 세이지와 에단을 데리고 곧장 밖으로 향했다. 거리로 나온 세 사람은 일단 장터에 들러 비둘기를 한 마리씩 샀다. 제사에 참여하려면 제물이 필요한데 그들은 가축을 기르는 현지인이 아니니 방문객의 예로써 상인에게 비둘기를 사서 대신 바쳐야 했다. 그렇게 합류한 제사 행렬에는 특이한 탈을 쓴 자들이 춤을 추며 주변을 뛰어다녔다. 대부분 수염이며 눈썹 등을 괴이쩍게 묘사해 놓은 호랑이탈이었는데 간혹 청룡이나 주작 같은 다른 사방신도 섞여 있었다. 거기다 제사를 알리는 음악 소리도 요란하여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 빨간 천에 감싸인 비둘기를 품에 안은 채 넋을 빼고 있던 세이지는 퍼뜩 정신을 되찾고 불안한 눈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무수한 인파 속에서도 자신을 챙겨주고 있는 형과 시선이 마주쳤다. 세이지는 크게 안도함과 동시에 어쩐지 창피해졌다. 순간적으로 미아가 될까 걱정한 사실이 너무 어린애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알기로 쥬다스는 자신의 나이 때 이미 루바흐를 졸업해 황태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척 봐도 말 붙이기 어려울 법한 사람들을 친우로 사귀고 독사같이 속살거리는 귀족들까지 전부 발아래 무릎 꿇렸다. 심지어 원수의 아들인 세이지에게마저 손을 내밀어 품어주었다. 그가 손을 내밀지 않았다면 세이지는 지금쯤 폐인이 되었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을지도 몰랐다. 당시엔 어른이라고 생각한 나이가 지금 와선 고작 열네 살 소년일 뿐이다. ‘그리고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겠지.’ 늘 따뜻하게 주변을 보살펴주고 있지만 쥬다스는 세이지보다 겨우 세 살 많은 열일곱이었다. 세이지는 문득 깨달은 그 사실이 신기해서 하염없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3년 뒤엔, 나도 형님처럼 할 수 있을까?’ 늘 그랬듯 세이지에게 있어 모범적인 이상은 형이었다. 마치 황폐한 땅에서 유일하게 놓인 표지판을 보고 따라가듯 그렇게 따랐다. 아이는 착실히 자라고 있었다. 둥, 두웅! 그때 행렬이 끝나며 둔탁한 북소리가 울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너머로 백호탈을 쓴 누군가가 새끼 염소를 끌고 나섰다. 그 앞에 정갈하게 쌓아올린 거대한 석탑이 하나 보였다. 높이 짓지 않는 집과 달리 제사를 위한 탑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다. 무려 자그마치 8층이나 되는 석탑이었다. 새끼염소를 짚단 위에 올린 자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여기 성신의 민족이 백호제를 드리고자 한자리에 모였으니!” 와! 하고 군중이 따라 소리쳤다. “첫 제물을 받으소서!” “받으소서!” 탈을 쓴 마을 대표가 제일 먼저 자신이 끌고 온 새끼 염소의 목을 찔러 피를 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짚단에 화륵 불길이 타올랐다. 짚은 타지 않고 짐승만 남김없이 태운 불길은 먹이를 더 바라는 맹수처럼 꺼지지 않고 계속 넘실거렸다. 「헤에, 저것도 연금술인가 봐.」 「막 피가 불이 된다요! 신기하다요!」 「응. 확실히 평범한 불은 아니에요.」 불의 정령인 카니가 제단의 불을 보고 자연적인 현상이 아님을 단언했다. 「피를 불로 변환시키는 연금술……. 어머? 교묘하게 맞아떨어지네요. 이건 백호를 부르는 제사가 맞아요.」 「어쩌면 진짜로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에 앉은 채 다리를 꼬며 중얼거렸다. 「사신수, ‘백호’.」 이제 정령들은 조금 전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불의 제단을 응시했다. 동물계 정령은 본래 동물에서 파생된 신수인 만큼 자연계보다 훨씬 기초 욕망에 충실한 존재다. 예컨대 육식성 동물은 육식을 하기 때문에 살육에 대한 거부감이 전혀 없다. 거기에 불 속성이기까지 한 백호를 짐승의 피로 부르는 건 몹시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를 거듭하며 백호를 섬겨온 조상들이 찾아낸 실질적인 맞춤형 제사방법인 셈이다. 그사이 사람들은 짚단에 차례로 가져온 제물을 바쳤다. 본토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른 짐승의 첫 새끼를 바쳤으며 이방인들은 장터에서 사온 비둘기를 죽여 불길에 던졌다. 대기 열은 빠르게 줄어 세이지 차례가 되었다. 빨간 보자기에 싸인 비둘기가 구구 울며 고개를 기울였다. 잠시 망설이던 세이지가 비둘기를 향해 단도를 내리찍으려던 순간이었다. 크르르르! “어……?” 불길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세이지가 멈칫하는 사이 불은 하나의 형상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뱀 같은 꼬리와 튼실한 다리, 비죽비죽 솟은 털까지 재현해 낸 불길은 훅 열기를 가라앉히며 검은 빛깔의 매끈한 짐승으로 탈바꿈하였다. “오오, 백호님이다!” “백호님이 강림하셨다!” “모두 엎드려 절하시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우르르 자리에 엎드렸다. 놀란 세이지가 덩달아 고개를 숙이려다 그만 실수하여 안고 있던 비둘기를 놓쳤다. 푸드덕! 비둘기는 잽싸게 하늘로 날아오르려 날갯짓했다. 하지만 그보다 불속에서 튀어나온 맹수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콰득, 비둘기를 낚아 챈 맹수가 굳어 있는 세이지를 돌아보았다. 하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리는 와중에 붉게 빛나는 안광이 섬뜩했다. 백호라 불린 검은 맹수는 입에 물고 있던 비둘기 사체를 툭 뱉었다. 피에 젖은 사체가 구멍이 뚫린 채 바닥에 뒹굴었다. ‘먹잇감으로 삼으려 죽인 게 아니야.’ 달아나려 하니 죽였을 뿐이다. 무심코 떠올린 생각에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저것이 백호…… 하지만 검은색인데?’ 동시에 놈이 바닥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카각! 맹수의 발톱과 날렵한 도가 맞부딪히며 마찰음을 생성했다. 어느 틈엔가 에단이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저건 백호가 아니야!」 유니가 날뛰기 시작한 맹수를 확인하고 소리쳤다. 생김새는 호랑이가 맞았지만 털이 먹물처럼 까맸다. 백호가 아닌 흑호였다. 붉은 눈알을 번뜩인 흑호는 사냥을 방해한 에단을 보며 분개하듯 으르렁거렸다. 마찬가지로 대치 상황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벌떡 일어섰다. “백호님께 그 무슨 불경한 짓이냐, 이방인!” “어서 검을 거둬라!” 사람들에겐 호랑이의 털색이 하얗든 검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백호제를 올리던 중 불길 속에서 나타난 호랑이를 무조건 백호라고 믿었다. 오히려 에단이 제를 방해한다고 여겨 당장에라도 끌어낼 기세였다. 하지만 에단은 묵묵히 명을 따를 뿐이었다. 그가 칼을 거두지 않자 흑호는 사납게 송곳니를 드러내고 크르륵 울었다. 놈은 피에 굶주려 있는 상태였다. 강한 적을 상대해 봤자 원하던 꿀을 얻을 수 없으리라 여긴 호랑이의 관심은 저절로 다른 쪽으로 향했다. 휘익! 발톱을 세운 흑호가 방향을 틀어 웅성거리는 인파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에단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끼어들어 놈의 진로를 막아섰다. 쩡! 발톱과 칼이 만난 것치곤 지나치게 큰 소리가 났다. “에에잇, 그만두래도!” “……!” 맹수를 상대할 때는 당황하지 않았던 에단의 표정에 살짝 금이 갔다. 지켜주려 했던 사람들이 역으로 그의 팔을 붙들고 늘어진 것이다. 기회를 노려 빈틈을 파고든 호랑이가 아가리를 쩍 벌렸다. “흐헉!” 에단을 말렸던 사람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촷! 하지만 맹수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다. 견고하게 생성된 물의 장막이 둥글게 그들을 보호한 까닭이었다. 찰랑이는 물만 한 입 가득 베어 문 흑호는 당황하여 뒤로 성큼 물러섰다. 콱 다문 잇새로 맑은 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물의 장막을 형성해낸 푸른 늑대가 그 앞에 우아하게 탁 내려섰다. ‘백호는 아니지만 그 외향과 능력이 아주 흡사하구나.’ 쥬다스는 루니의 곁에 다가가 차분히 상대의 정체를 파악했다. 백호를 본떠 만들기라도 하듯 비슷한 모양새였으니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는 해동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저 검은 동물은 백호가 아닙니다.” 그의 말을 듣고 사람들이 술렁였다. “백호님이 아니라니, 무슨 소리냐!” “진짜 백호라면 백호를 섬기는 민족인 당신들을 죽이려 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 그건 이방인인 너희들이 칼을 뽑았으니 신수께서 노하셔서 그런 것이지!” 너를 벌하려 했을 뿐이다! 쥬다스는 분개하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사이 흑호는 입을 벌려 불길을 훅 내뿜었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그들을 감싸고 있던 물의 장막이 기화되기 시작했다. 쥬다스는 여전히 살의를 불태우며 울부짖는 흑호를 손으로 가리켜 보였다. “신수라 불리는 백호라면.” 피이잉! 그때, 어디선가 날아온 빛나는 화살이 놈의 머리를 꿰뚫었다. 흑호는 그 일발에 맞고 맥없이 쿵 쓰러졌다. “고작 활에 맞았다고 해서 죽을 리가 없지요.” “이게 무슨!” 사람들은 경악한 눈으로 쓰러진 흑호를 쳐다보았다. 놈은 머리에 화살이 박힌 채 죽어 있었다. 죽은 호랑이를 확인한 유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건 신수도 뭣도 아니라 그냥 사령에 잠식된 평범한 호랑이야.」 “…….” “쥬다스 님.” 활을 쏜 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의 곁에는 큼직한 로브로 모습을 가린 란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에겐 딱히 외출을 알리지 않았으나 어느 틈엔가 뒤따라 나온 상태였다. 크리스티나는 하얗게 빛나는 활을 쥔 채 다가와 주군의 안위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고맙다. 딱 맞추어 와주었구나.” 잔잔히 웃어준 그는 당황과 경악으로 굳어진 마을사람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보셨다시피 저것은 백호가 아닙니다.” “그럴 리가…….” “가짜였다고?” “그러면 백호님은? 진짜 백호님은 어떻게 된 건가?” 백호를 부르는 제에서 백호가 아닌 엉뚱한 호랑이가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이 황망히 물었다. “진짜 백호는 아마도 이 근처에 있을 겁니다.” 그가 다루는 바람은 미약하게나마 근처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기운을 읽어냈다. 호랑이의 사체는 검은 가루가 되어 우수수 바람에 흩날렸다. 사령에 잠식당한 존재의 비참한 말로였다. 한번 사령에 사로잡힌 자는 그 육신과 영혼조차 모조리 검게 물들어 사라진다. 동물이라 해도 예외란 없었다. 호랑이가 검은 가루로 흔적도 없이 흩어져 버리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푸라기에서 넘실거리던 불길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헌데 자네는 대체……?” 누군가 쥬다스를 향해 우물쭈물 물었다. 우아한 자태의 푸른 늑대가 양순하게 그의 곁에 서 있었다. 정령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눈엔 루니도 역시 신수 중 하나로 보였다. “루바르잔에서 온 객일 뿐입니다.” 쥬다스는 단순명료한 답을 내어놓고는 무리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불이 꺼진 짚단 앞에 서서 멍하니 서로를 쳐다볼 뿐이었다. * * * 「하지만 이상해, 이그레트.」 유니가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걔들은 동물계 정령 중에서도 신수라 불릴 정도로 강한 녀석들이야.」 「그렇다요! 자연계로 치면 우리와 비슷한 수준이다요.」 「저런 허접한 사령 따위에 놀라 도망갈 만큼 약해빠진 애들이 아니라고.」 그들은 지금 바람의 안내를 따라 백호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녹색 바람은 사방으로 퍼져 목표를 찾아다녔다. 작정하고 숨어 있는 백호를 찾아내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었으나 그것이 유니의 힘이라면 상황은 달라졌다. 조금 시간이 거리긴 해도 바람은 끈질기게 백호의 기운을 추적해 흔적을 잡아냈다. 「그럼 유니, 문제는 그 망할 놈의 사령술사가 사방신수 자체를 노렸을 경우겠네요.」 사령이 무서워서 피한 게 아니라면 그 근원을 피해 달아났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유니는 카니의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노린다고 노려질 애들이야? 계약자도 아닌 인간이 신수라 불리는 정령을 손쉽게 사령화시킬 수 있을 리가 없어.」 「으응, 그치만. 저도 당했었잖아요?」 순진한 눈으로 대꾸하는 카니를 보며 유니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아우우, 그땐 네가 방심해서 그랬던 거고! 그러게 모르는 소환진은 함부로 따라가는 거 아니랬잖아?」 「에헤헤, 미안해요오…….」 카니는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0151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반짝이는 녹색 바람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그들이 건너온 산맥, 즉 서요산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뜬 한낮이라 어둡진 않았지만 산 전체에 스산한 찬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구불구불 자라난 침엽수림이 하늘을 가려 바늘 같은 뾰족한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여기 봐봐!” 란이 수풀을 헤치고 먼저 총총 뛰어갔다. 픽시인 그녀는 산을 타는 발걸음이 한 마리 사슴처럼 가벼웠다. “누군가 싸웠나 봐. 엄청 큰 나무가 통째로 부러졌어.”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호랑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낮게 자란 나뭇가지를 허리 숙여 간신히 통과해 낸 에단이 그 흔적을 확인하고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난장판이로군.” 마치 땅을 쟁기로 갈아엎기라도 한 듯 풀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뿌리째 뽑힌 풀과 나무들이 뒤엉켜 흙바닥을 뒹굴었으며 여기저기 발톱자국과 선명한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날카로운 것에 잘려 나가거나 큰 힘에 의해 부러진 거목들도 보였다.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현장 보존이 잘되어 있는 걸 보니 그리 오래되지 않은 것 같군요.” 크리스티나가 바닥을 뒹구는 나무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녀의 세밀한 관찰대로 부러진 나무들은 이끼가 앉거나 색이 바라지 않고 싱싱한 나뭇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이지도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대체 누구랑 싸운 걸까요?” “…….” 쥬다스는 섣불리 답하는 대신 차분히 망가진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동물계 정령 중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백호가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상대라.’ 경우의 수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가 턱을 짚은 채 누군가를 떠올리는 찰나 근처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응?” 쪼그려 앉아 파헤쳐진 흙더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란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든 순간이었다. 쇄애액! 수풀 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온 무언가가 쥬다스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근처에 닿기도 전에 역으로 목을 물려 쿠당탕 엎어지고 말았다. 콧등에 험악하게 주름을 잡은 푸른 늑대가 습격자의 목을 물고 바닥에 내리꽂았다. “깨갱깽!” 곧장 항복의 뜻이 담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루니는 봐주는 것 없이 상대의 목을 문 채 이리저리 흔들었다. “루니.” 계약자의 부름이 있고 나서야 루니의 포악한 응징이 멈추었다. 목을 놓아주긴 했지만 푸른 늑대는 우아한 앞발로 상대의 머리를 턱 누르고 섰다. 물거품이 뽀로록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자비하게 짓밟힌 채 엎어져 있는 작은 습격자에게서 낑낑 우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이거?」 유니가 헛웃음을 지으며 그 앞에 톡 내려앉았다. 루니의 발밑에 깔린 습격자는 옴짝달싹 못하고 코만 훌쩍였다. 「내가 알던 모습이랑 좀 달라졌는데?」 「그러게요. 작네요.」 상대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작았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우람한 체격의 호랑이가 아니라, 이제 갓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 다닐 법한 새끼 호랑이의 외형을 취하고 있었다. 작지만 형형하게 빛나는 새파란 눈동자 가득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너…….」 「너?」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 새끼 호랑이가 웅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끄흑 하고 설움을 터뜨렸다. 「너무하다냥! 흡, 흐읍.」 백호는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었다. 겁에 잔뜩 질려 닭똥 같은 눈물만 뚝뚝 떨어뜨리기 시작한 백호를 둘러싼 일행의 표정이 얼떨떨하게 변했다. “이게, 아니, 이 애가? 아니, 어. 그러니까 이분이 백호…… 예요?” 세이지가 적절한 호칭을 찾지 못하고 말을 더듬거렸다. 「먼저 덤벼놓고 뭐가 너무해?」 「느아아, 헷갈렸다냥! 요즘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변태가 있단 말이다냥. 벌써 몇날 며칠을 쫓겨 다녔는지 모른다냥. 니들이 내 맘을 어떻게 알겠느냐앙!」 호랑이 주제에 고양이처럼 냥냥거리는 백호를 한심하게 내려다보던 유니의 눈초리가 북풍한설처럼 매서워졌다. 「오호라. 그래서 그 변태랑 이그레트를 헷갈렸단 말이지? 그게 더 나빠!」 끼잉. 백호는 납작 엎드린 채 꼬리를 말고 달달 떨었다. 「잘못했어, 안 했어?」 「자, 잘못…… 했…….」 비록 작은 모습이었지만 백호는 자존심이 강한 동물이었다. 기세에 눌려 수긍할 뻔했지만 도무지 인간에게 사과만큼은 할 수가 없었다. 백호는 루니에게 머리를 밟힌 채 네 발을 수영하듯 버둥거리며 낑낑 울어댔다. 「……지 않다냥! 캬악!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냥! 억울하다냥! 집에 가고 싶다냐릉.」 「얘 좀 봐. 지금 뭘 잘했다고 땡깡질이야? 확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까 보다.」 냐아악! 백호는 안간힘을 다해 버둥거리며 서럽게 울었다. 조금 떨어져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힘을 많이 소진한 듯싶구나. 백호의 본체를 유지할 수 없을 만큼.” “므앙?” 아직 루니에게 머리를 눌린 채였기에 백호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얼굴을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목소리만으로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버둥거림을 멈추고 축 늘어진 백호가 귀를 쫑긋거렸다. 「…….」 그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청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백호가 아리송한 기분에 빠져 있는 사이 그 앞에 쪼그려 앉은 쥬다스가 손을 내밀었다. “그 상태로 사령에게 쫓기느라 힘들었을 테지. 지금껏 잘 버텨왔다.” ‘아. 익숙한 냄새.’ 백호는 코를 킁킁거렸다. 낯설지만 동시에 그리운 향이 났다. 머리를 짓누르던 푸른 늑대의 앞발이 사라지고 대신 따뜻한 손바닥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들어 올린 백호는 또로록 소심하게 눈알을 굴려 상대를 확인했다. ‘금색 눈동자라 해동의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틀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쥬다스로부터 익숙한 기운을 감지해 낼 수 있었다. 그에게 머리색을 바꾸는 마법 인챈트도 걸려 있는 걸 알아차린 백호가 기억 속에서 나직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끄집어냈다. 「하윤 공주…….」 생김새는 전혀 달랐지만 분명 그녀의 피가 흘렀다. 백호의 겨울 하늘빛 눈이 그리움을 담고 일렁였다. 「응?」 「‘이하윤’.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사랑스러운 어린 공주. 어느 날인가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한참 찾아다녔는데.」 유니의 질문에 백호는 사뭇 진지해진 어조로 답했다. 그리곤 살갑게 그의 손에 턱을 얹었다. 「왜 이제야 돌아온 거야, 공주…….」 물기 어린 환대였다. 쥬다스는 이 작은 백호가 기억 속 어린 하윤공주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를 느끼고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그녀가 아니란다.” 「므아앙? 하지만 공주의 냄새가 난다냥. 공주가 아니라면 너는 누구다냥?」 “쥬다스.” 뒤의 제국식 성을 붙여봤자 백호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대신 쥬다스는 다른 설명을 덧붙이기로 했다. “네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내…….” 전생에서부터 현생까지 죽, 그에게는 제대로 사용해 볼 기회가 없던 생소한 단어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가 망설이자 유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줬다. 「하윤은 그를 낳아준 어머니야.」 「저 애가 하윤 공주의 자식이라고? 벌써 그렇게나 시간이 흐른 거다냥?」 백호는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댕그랗게 떴다. 「이럴 수가! 하윤공주가 아니라 그녀의 피를 이은 새 공주였다니!」 「아니, 공주가 아니라 황자.」 「냥?」 「여자 아니고 남자. 아까부터 웬 헛소리야? 눈도 좋은 애가 왜 제대로 보질 못하니, 응?」 백호는 유니와 쥬다스를 천천히 번갈아보곤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크헝 울부짖었다. 「안 돼애애! 나, 난 사내아이보단 나긋나긋하고 사랑스러운 공주가 좋다냥!」 「……뭐 이런 변태 호랑이가 다 있어. 솔직히 말해봐. 니들 그동안 계약 안 한 거 마음에 드는 공주가 없어서 그랬지? 앙?」 「알 게 뭐다냥! 이제 다 틀렸다냥! 크허엉.」 “갑자기 백호가 왜 저러는 겁니까?” 정령의 말이 들리지 않는 에단이 앞발에 얼굴을 묻고 통곡하는 백호를 쳐다보며 곁에 서 있던 란에게 물었다. 그러자 란은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자기에겐 이제 꿈도 희망도 없대.” “……?” “공주가 많이 그립나 봐.” “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서로 어리둥절한 시선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백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쥬다스가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혹 너를 쫓고 있다는 자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겠느냐?” 「여자였어.」 「이 밝힘증…….」 「캬악! 그게 아니다냥!」 백호는 슬금슬금 멀어지는 유니를 향해 억울한 듯 소리쳤다. 「여자긴 여잔데,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었단 말이다냥.」 「뭐래. 죽은 여자가 널 따라다닌다고?」 「말이 그렇게 되냥? 비슷하지만, 그 여자는 사령이었다냥. 처음엔 그 사령을 부리는 술사한테 당하긴 했는데 그때 힘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바람에……. 크으으, 그 자식들 이제는 아주 날 사냥하고 있다냥!」 그 내용만으로도 쥬다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레이야.’ 사령이 된 소녀와는 사막에서 바이칼을 구하러 갔을 때 잠깐 마주친 적이 있었다. 사령술사가 되어 인간의 육신을 유지하고 있는 프리드와 할더, 두 사람과 다르게 레이야는 완전히 사령화가 진행되어 사령 그 자체로 변모한 상태였다. 그녀에겐 인간으로서 느껴온 감정, 기억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사령이 되어버린 자는 그 전과는 아예 별개의 존재나 다름없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본능적으로 죽음을 탐하며 생명을 앗아가려 든다. 그저 한 마리의 악마로 재탄생했다고 볼 수 있었다. 이제 그 소녀는 ‘레이야’가 아니었다. 백호를 쫓는다는 사령이 그녀란 보장은 없었지만 쥬다스는 그럴 가능성을 높게 잡았다. 사방신수라 불리는 존재를 기진맥진하게 만들 힘과 전략, 도구가 있는 존재라면 아마도 프리드가 유일할 것이다. 그리고 그 프리드가 백호를 취하기 위해 보내온 사령이라면 평범한 하급 사령보다는 살아 있는 인간을 타락시켜 만들어낸 ‘레이야’를 보냈을 확률이 높다. 쥬다스는 그에 대한 생각을 머리 한 구석에 남겨둔 채 일단 상황을 정리했다. “여튼, 지금은 너도 힘을 많이 소진한 상태겠지. 여기 계속 홀로 있으면 위험할 게다. 회복할 때까지 당분간 우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겠느냐?” 「억! 진짜 그래도 되냥?」 백호는 냉큼 대답해 놓고 다시 핫 하고 말을 바꿨다. 「내가 무서워서 이러는 게 아니다냥. 날 쫓아다니는 변태가 진짜 질기고 독한 놈이라 진절머리 나서.」 「누가 누구더러 변태라는지 원.」 작고 하얀 호랑이는 유니의 중얼거림을 듣고도 못 들은 척 몸을 일으켰다. 「착각하지 마라냥. 하윤 공주의 핏줄인 네가 같이 가자고 부탁해서 가는 거 뿐이다냥!」 “그래, 아가.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다.” 인자하게 얼러주는 말을 듣고서야 백호는 자존심을 세웠다는 생각에 만족스럽게 그릉거렸다. 이제 그에게 안아달라는 뜻으로 앞발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였다. 텁! “음?” 「믕?」 푸른 늑대가 백호의 뒷덜미를 물고 들어 올렸다. 루니는 새끼를 물고 이동하는 어미개 마냥 그렇게 녀석을 입에 물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넌 나랑 간다.」 「히엑?」 「……이그레트에게 귀찮게 굴지 마.」 정령들의 유별난 계약자사랑을 느낀 백호가 뒷덜미를 물린 채 주둥이를 삐죽거렸다. 「아리따운 공주도 아니고, 뭘 그리 싸고도는 거다냥?」 답이 돌아오지 않자 꽁알거림은 줄곧 이어졌다. 「자고로 계약자라고 해서 뭐든 오냐오냐 해선 안 된다냥. 계약자가 정령님들을 모셔야지, 우리 정령이 계약자를 모실 수는 없는 거다냥. 정령도 정령 나름의 자존심을 지켜야……!」 「으응, 저기.」 「냥?」 쥬다스의 어깨에 달라붙어있던 카니가 다소곳하게 백호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박해 보이는 다홍빛 눈동자를 깜빡인 카니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 「안 궁금하니까 닥쳐요.」 「냐…….」 그렇게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한주 중 가장 바쁜 금요일입니다 @_@!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ㄷㄷㄷ 그럼 즐거운 불금+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52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행사를 구경한다고 나갔다가 웬 새끼 호랑이 한 마리를 데리고 돌아온 쥬다스를 본 바이칼의 첫마디는 이랬다. “전 플루비로 충분합니다, 전하.” “…….” “정말입니다.” 쥬다스가 멀거니 그를 쳐다보기만 하자 자기 얘기 하는 줄 알아차린 푸른 와이번이 쫑쫑 달려와 긴 꼬리를 살랑거렸다. “삐이!” 그러자 루니는 플루비의 앞에다가 물고 있던 백호를 툭 떨어뜨렸다. 배짱도 좋게 늑대에게 뒷덜미를 물린 채 고롱고롱 잠들어 있던 호랑이는 부스스 눈을 떴다. 그러다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플루비의 주홍빛 두 눈과 시선이 마주치곤 기겁하여 하악 털을 세웠다. 「갸아악! 용! 용이다냥!」 「……용족이긴 한데 걘 그냥 와이번이야.」 유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백호를 진정시켰다. 플루비를 향해 청룡 일족이냐며 난리 블루스를 추던 백호는 끝내 콜이 펴놓은 이부자리 밑에 기어들어가 오들오들 떨었다. 이불 밖으로 하얀 꼬리만 남겨 놓은 채로. 플루비는 그 앞에 앉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를 따라 고개를 좌우로 움직였다. “근데 뭘 데려오신 겁니까?” 「헹, 인간 녀석. 용족을 길들였다고 우쭐해하지 마라냥. 이 몸은 그 이름도 위대한……!」 “엄청 겁이 많은 고양이네요.” 「누가 고양이다냐―!」 백호에겐 안타깝게도 쥬다스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정령의 언어를 듣지 못했다. 픽시인 란조차도 정령들이 실체화하지 않으면 보고 듣는 게 힘들 정도였다. 동물계 정령인 백호의 경우 자연계 정령과 다르게 늘 실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정도 정령사도 아닌 바이칼의 눈에는 힘을 잃고 작아진 백호가 그저 하얀 고양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작게 혀를 찬 에단이 짤막하게 백호의 정체를 일러주었다. “신수다.” “하아?” 이불 밑에 기어들어가 궁둥이를 씰룩거리는 새끼 호랑이의 모습은 전혀 신령처럼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숙소까지 백호를 물어다 나른 루니가 훨씬 신성해 보일 지경이었다. 푸른 늑대는 고고한 자태로 계약자의 곁에 되돌아갔다. “해동을 수호하는 사방신수 중 하나인 백호란다.” 쥬다스는 루니의 목덜미를 가볍게 쓸어주며 백호에 대해 소개했다. “소문대로 누구와도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이름은 없을 터.” 정령은 술사와 계약하면서 이름을 부여받는다. 백호가 ‘백호’라 불리는 건 단순히 그를 상징하는 종족명일 뿐 이름은 아니다. 술사로부터 이름을 받지 못한 정령은 사용할 수 있는 힘의 크기가 극히 제한된다. 계약을 맺고 나면 그 뒤로부터 외형, 성격 등을 비롯한 세부적인 능력치가 조정되며 계약자의 의지와 정신을 통해 힘을 외부로 끌어내 사용할 수 있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도구라 할지라도 의지를 가지고 사용할 주인이 없으면 무용지물이 되는 법이다. 정령에게 있어 술사란 마치 그들을 다스리는 사령탑, 즉 두뇌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니 현재 계약자가 없는 백호는 아주 기초적인 능력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힘을 발현시키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불 속에 숨은 백호가 시무룩하게 꿍얼거렸다. 「계약자만 있었어도 이런 꼴은 안 당했을 거다냥…….」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왜 안 한 건데? 너흰 그동안 해동의 왕가와 대대로 계약을 유지해 왔잖아?」 유니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이불 위에 톡 내려앉았다. 카니와 토니는 쥬다스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질문을 더했다. 「당신들의 그 천 년도 넘게 이어져온 뚝심은 정령계에서도 유명하죠. 하지만 슬슬 생각이 바뀌었나 봐요?」 「오앙? 그럼 이제 계약하기 싫어진 거다요? 해동을 떠나는 거다요? 떠나면 어디로 간다요?」 「떠나긴 누가 떠난다고? 그런 게 아니다냥. 싫어질 리가 없잖냥!」 단호한 부정이었다. 쥬다스가 느끼기에도 백호는 여전히 이 나라를 사랑했고, 해동의 왕가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결론은 단순했다. ‘계약을 안 한 게 아니라.’ 못했을 뿐이다. 쥬다스는 사방신수가 현재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계약을 맺지 못하고 있는 상태임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백호가 다른 정령들의 질문 공세에도 굴하지 않고 고집스레 입을 꾹 다물어버렸기 때문이다. 「갸릉. 어차피 너희들은 말해도 모를 거다냥. 한 번도 배고파 본 적 없는 너희한테 이 허전함을 설명해봤자……?」 덥석! 이불 밖에 빠져나와 흔들거리던 꼬리 위로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꼬리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던 플루비가 묘한 사냥 본능을 자극당해 콱 물어버린 탓이었다. 난데없이 꼬리사냥을 당한 백호가 캭 털을 세우며 버둥거렸다. 「아아아아, 이거 놔라! 놔라, 용족!」 “삐?” 「싸, 싸우자는 거냥! 치사하게 꼬리로 이러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붙어라!」 “삐이이!” 플루비는 순순히 꼬리를 놔주었다. 어린 와이번은 백호를 아주 흥미롭게 여기고 있었다. 꼬리의 자유를 찾자마자 이불 밖으로 튀어나와 후다닥 물러선 백호를 향해 플루비가 삑삑 울며 달려들었다. 사람들 입장에선 플루비도 작은 사이즈였지만 힘을 잃고 새끼 호랑이만큼 작아진 백호에게는 괴수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쿵쿵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백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느아아아앙!」 와이번과 백호 사이에 엉뚱한 술래잡기가 시작되었다. 한쪽은 놀이라 생각해서 달려들고 한쪽은 기겁하여 도망가는 꼴이었다. 정신 사납게 방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는 두 녀석을 바라보며 바이칼이 표정을 구겼다. “맙소사, 골칫덩이가 두 배…….” 쥬다스가 그런 바이칼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무래도 서로 좋은 친구가 될 것 같구나.” “뭐, 그렇긴 합니다. 놀이상대로는 딱이겠네요.” 생각해 보니 평소 와이번의 넘치는 체력을 감당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었다. 이제 한밤중에 와이번 소리에 깨어나 비몽사몽으로 산책을 나다닐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바이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표정으로 뻔히 속내가 드러나는 그에게 쥬다스는 웃음을 삼키며 한 마디를 추가했다. “백호는 내가 관리할 테니 너무 걱정 말거라.” “예? 아닙니다. 그러실 것까지야.” “저 아이도 정령이니 그러는 편이 좋아. 참, 바이칼 너는 플루비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였지?” “그…… 건.” “놀랍구나. 어찌 그리도 귀애하게 되었느냐?” “그, 그런 뜻이 아니라.” 바이칼은 손사래를 치며 쩔쩔매었다. 귓등까지 붉어져 어버버거리는 그를 향해 잔잔히 웃어준 쥬다스의 시선이 다시 백호에게로 향했다. 녀석은 뛰어난 점프력을 이용하여 높은 장롱 위까지 달아났다가, 곧 날개 달린 와이번에게는 높이 따위 소용없다는 진리를 깨닫고 야옹 울어댔다. 쥬다스의 금안에 감돌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또한 그래야만 내가 널.’ 곧 추적자가 백호를 쫓아올 것이다. 백호의 설명대로라면 이 일에는 틀림없이 프리드가 연관되어 있다. 쥬다스가 일행에게 설명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였다. 해동의 수호신 백호를 보호함과 동시에 덫을 놓는다. 그의 곁에 있는 이상 백호에겐 견고한 방패막이와 웅크린 사냥꾼, 두 가지가 갖춰진 셈이었다. 「이그레트.」 정령들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우린 언제나 네 편이지만.」 유니가 나비처럼 날아와 쥬다스의 손바닥에 내려앉았다. 따스한 미풍이 실내를 은은하게 감쌌다. 「가끔은 조금 걱정되기도 해.」 그들의 계약자는 고지식하게 느껴질 정도로 곧았다. 이전 삶에서 그는 심지어 세상에 섞이기를 거부하고 홀로 늙어 죽는 것을 택했다. 그랬던 그가 차츰 변화하고 있었다. 선의나 정의 따위보다 좀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생겨났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수평을 유지했던 저울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 수도 있게 된 셈이다. 어쩌면 이러한 변화야말로 과거 그의 등에 칼을 꽂았던 배신자들이 원했던 바일지도 몰랐다. 「네 선택이 또다시 널 아프게 만들까 봐.」 정령들이 걱정하는 건 그가 욕심을 가짐으로써 일어나는 불균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바란다면 무엇이든 어렵지 않았고 무슨 일이든 기꺼웠다. 단 한 사람을 위해 세상을 전부 불바다로 만들어 상위 초월자로부터 벌을 받게 된다 한들 상관없었다. 정령의 걱정이란 마치 엄마들이 처음 가위를 잡아본 아이가 가윗날에 손이라도 베일까 염려하는 것과 같았다. 쥬다스는 괜찮다는 말 대신 조용히 불안에 잠긴 그들을 토닥여 주었다. 「……아무리 봐도 과보호다냥.」 결국 플루비에게 잡혀 하얗고 보드랍던 털이 온통 침 범벅이 되고만 백호가 그 모습을 보곤 뚱하니 투덜거렸다. 다음 날, 일행은 흑호 사건으로 인해 어수선하게 변한 분위기의 마을을 벗어나 발길을 재촉했다.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추가되었지만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비록 외형은 작아졌어도 백호는 신수다. 고작 말이 달리는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오히려 달라진 건 플루비 쪽이었다. “삐! 삐약, 삐이익!” “아 거참 시끄럽네. 이게 와이번이야, 병아리야.” “쁘익.” 바이칼은 바르작대는 플루비를 품에 가둔 채 목줄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새 친구를 만나 신이 난 플루비는 끊임없이 백호에게 치근덕거렸다. 이동하는 도중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플루비를 힐끗 쳐다본 백호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기껏 변태 추적자를 떨쳐냈더니 이번엔 왜 또 용족이 달라붙는다냥.」 「왜? 귀엽잖아.」 유니가 키득키득 웃자 백호는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세상에서 용이 제일 싫다냥! 그것도 청룡!」 「에이, 쟤는 청룡이 아니라 와이번인걸.」 「비슷하게 생겼쟈냥!」 해동에서 사방신수는 같은 수호신으로 추앙받고 있긴 하나, 서로 사이는 별로 좋지 않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실제로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나빴다. 백호는 특히 청룡을 아주 싫어했다. 「용이란 것들은 다 재수가 없다냥. 그나마 주작과 현무는 솔직하기라도 하지! 청룡은 완전 이중인격이다냥!」 「으음, 하긴. 걔가 그렇긴 하지.」 마찬가지로, 청룡은 자연계 정령들을 만날작시면 종종 백호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곤 했다. ‘응? 아하, 그 시끄러운 고양이? 안 싫어해, 안 싫어해. 귀찮을 뿐이지. 그 녀석 쓸데없는 말이 좀 많으니까. 근데 아깽이가 깽알깽알 떠든다고 해서 일일이 신경 쓰는 사람은 없잖아?’ 유니는 오래 전에 만났던 청룡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표정은 밝았지만 어투에는 확실히 혐오와 짜증이 담겨있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목을 잘라서 다시는 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게 낫지. 아하하~ 농담이야.’ 가장 웃음이 많고 친절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방신수 중 가장 다혈질이 청룡이다. 청룡은 사람 목을 자를 때에도 한결같이 웃었다. 그자의 속내를 정확히 파악해 내는 건 오랜 세월 함께 한 사방신수라도 무리였다. 백호는 바로 청룡의 그 안개 낀 듯 불투명한 심리를 치 떨리게 싫어했다. 「아직도 그러려나?」 「자기 성깔이 쉽게 변하는 거 봤냥? 청룡 그 자식은 소멸하는 순간까지 절대절대 변하지 않을걸!」 으름장을 놓는 백호를 보며 토니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치만 나요는 청룡 좋아한다요. 전에 청룡이가 반짝이는 보석도 줬다요!」 「으이익. 그런 거에 속아 넘어가지 말고 본질을 보란 말이다냥. 솔직히 성격만으로 따져 봐라냥. 그 음험한 자식과 늠름한 이 몸 중에 누가 더 좋으냥?」 「청~ 룡!」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1초의 고민도 없이 해맑게 답하는 토니를 보고 백호의 입이 댓 발은 더 튀어나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0153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해동은 얕은 산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언덕길이 잦았다. 노랗고 하얀 봄꽃들이 활짝 만개하여 가는 길목을 장식했다.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언덕길을 따라가길 사흘째 되는 날, 그들은 마치 용이 드러누운 듯한 커다란 강과 조우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폈지만 강을 건너는 것 외엔 더 앞으로 나아갈 방도가 없어보였다. 자갈이 깔린 강가에는 크고 작은 돛단배들이 오밀조밀 늘어선 나루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정령의 힘을 사용한다면 굳이 배를 타지 않고도 강을 건널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수도에 도달할 때까지 굉장한 이목이 집중될 터였다. 쥬다스는 그런 상황이 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은 일단 배편을 구하기 위해 나루터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왁자지껄한 소리가 커졌다. 나루터에는 배를 관리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 세이지가 당황한 눈으로 주변을 둘레둘레 살펴보았다. 황궁에서 자란 세이지는 강가 풍경이 생소한 게 당연했지만 지금 느껴지는 어색함은 꼭 그래서만은 아니었다. “해동은 항구 문화가 굉장히 독특하네요.” 특이하게도 나루터를 중심으로 여기저기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아예 화장실부터 취침 시설까지 조립식 건물을 넓게 지어놓고 처소로 활용하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상단 단위로 우르르 몰려와 천막을 치고 대기하는 모습도 보였다. “설마하니 이게 다 강을 건너려는 대기자들일까요?” “글쎄다, 세이지. 내 보기엔 아무래도 해동의 문화라서가 아니라.” 동생의 순진한 물음에 쥬다스는 말뚝에 매어 있는 배들을 눈짓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을 성싶구나.” 강을 건너려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운행하는 배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빈 배는 많았다. 특별히 날씨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구름이 살짝 끼긴 했으나 하늘은 청명했으며 바람도 선선했다. 세이지는 조금 전보다 훨씬 깊은 의문에 빠졌다. “특별한 이유요?” “무엇인진 몰라도 그 이유가 사람들로 하여금 제법 오랫동안 이 강을 함부로 건너지 못하도록 만든 모양이다.” 어차피 이방인인 그들끼리 대화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다. 마침 근처에서 그물을 깁던 뱃사람 하나를 붙들고 물었다. “어이쿠, 타향서 온 객들인 모양이구려. 그렇담 모를 만도 하지. 이곳 다온강은 청일과 홍일이 정해져 있다오.” 삿갓을 눌러쓴 중년의 사공이 친절히 답해주었다. 배를 운행할 수 있는 날을 청일, 운행이 금지된 날을 홍일이라고 한다. 이는 색깔에 따른 의미부여로 해동에서 푸른색은 ‘희망’과 ‘통과’를 뜻했으며 반대로 붉은색은 주로 ‘금지’, 혹은 ‘불통’을 상징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은 배를 운행할 수 없는 홍일이었다. “그럼 얼마나 지나야 청일이 돌아옵니까?” 사공은 며칠이라 답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강을 가리켰다. “뱃길이 열리는 때는 다온 님께 달려 있지.” 에단은 상대가 말하는 ‘다온’이 강 이름을 뜻하는 건지 아니면 또 다른 다온이란 존재가 강에 살고 있다는 뜻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아 침묵했다. 그 침묵에 대고 깊이 한숨을 내쉰 사공이 마지막으로 충고를 덧붙이고 그물을 마저 손질하기 시작했다. “명심하게. 다온 님이 허락하지 않는 날에는 절대로 강을 건너려 들어선 안 돼. 하기사, 목숨 귀한 줄 안다면 억만금을 주어도 배를 띄우겠다는 사공은 없을 테지. 쯧.” 혀를 끌끌 차는 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이 답답해서인지 멋모르고 찾아온 객들이 가여워서인지 통 모를 일이었다. 다른 배를 찾아가 물어도 사정은 같았다. 누구도 배를 띄우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그 홍일이란 게 언제까지 지속되는지조차 몰랐다. 강을 건너려면 그야말로 무식하게 죽치고 앉아 청일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방법뿐이었다. 때를 놓치면 다시 하염없이 기다려야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에단이 그 비효율적인 상황에 대해 보고하자 일행은 난처한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엉뚱한 이유로 발이 묶이게 생겼다. 정령의 힘을 사용해서 건너갈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처럼 막연히 청일이 되기를 기다릴지 결정하는 것은 쥬다스의 몫이었다. 그는 행로를 정하기 전 찰랑이는 강물에 다가가 수면을 바라보았다. 강물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푸르렀다. 그러나 강의 중턱쯤에만 기름이라도 부은 듯 색이 거무죽죽하게 변질되어 있었다. 게다가 특정 부분에서 유독 기포가 부글부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바로 저 검은색 강물과 솟구치는 기포를 보고 청일과 홍일을 구분해 냈다. 사람들의 설명에 따르면 강을 건너도록 허락되는 날은 물색이 깨끗하고 기포가 생기지 않는 청일이었다. 쥬다스는 물에 살짝 손을 담가 보았다. 수온은 별 이상 없이 차가운 편이었다. 「자, 멍뭉아. 강에 뭐가 있어? 딱히 다른 정령이 장난치는 것 같진 않은데. 그지?」 유니가 루니의 콧잔등에 내려앉으며 물었다. 같은 자연계 정령이긴 해도 바람속성은 물속 사정에 상대적으로 둔감했다. 푸른 늑대는 제 콧등에 자리 잡은 유니를 향해 눈을 모았다. 「정령은 아니다. 그리고 멍뭉이도…….」 「그럼 뭐다요? 설마하니 또 블루 와이번이라도 들어 있는 거다요?」 갑작스럽게 토니가 대화에 끼어드는 바람에 무언가 더 부정하려던 루니의 말이 싹둑 잘렸다. 어쩐지 억울해진 푸른 늑대의 눈시울이 살짝 촉촉해졌다. 「……비슷해. 뱀이다.」 「배앰?」 세 정령이 일제히 플루비를 돌아보았다. “삐이이.” 바이칼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던 플루비가 꼬리를 살랑였다. 닭 한 마리 크기로 줄긴 했지만 명색이 용족인 플루비는 정령왕들의 시선을 예민하게 읽어냈다. 사실 따지자면 와이번도 뱀과 흡사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와이번은 명백히 용족에 해당된다. 용족과 뱀의 차이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바로 날개의 유무에서부터 갈린다. 「이무기. 용으로 자라나지 못한 동방계 해츨링이다.」 「헤에. 동방계 해츨링은 한 번도 본 적 없다요!」 「사실 동방계 용족은 예전에 용계로 떠나버린 드래곤 일족하곤 또 다른 애들이니까. 해츨링이 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은 아니긴 해. 그렇다고 흔한 것도 아니지만.」 동방계 용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권능을 가진 채로 부모 용의 극진한 보호 아래 안전하게 성룡으로 자라나는 서방계 드래곤과 유년시절이 달랐다. 동방의 용족은 알을 낳으면 품지도 않고 그 자리를 떠나버린다. 알에서 깨어나기 전부터 홀로 태어나 알아서 생존법을 익혀야만 하는 것이다. 서방의 드래곤처럼 유년시절부터 모든 권능을 품고 태어난다면 그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하필 용으로 성장하기 전의 ‘이무기’들은 종족 권능, 즉 용언을 사용할 수 없는 약체였다. 일반적인 뱀보다야 체구가 크고 어느 정도 자잘한 마법을 부릴 수야 있지만 고작 그 정도 가지고 살아남기에 생태계는 너무 혹독했다. 그렇기에 모든 이무기가 다 용으로 성장하는 건 아니다. 착실히 살아남아 천 년의 긴 수명을 채우고 나면 그때서야 비로소 각성이 일어나 용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과정을 거치기 전까지는 그저 하나의 크고 독특한 뱀의 일종일 뿐이었다. 물론 이무기 정도라면 배를 뒤집거나 폭풍우를 불러와 사람을 위협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어째서 이무기가 사람의 뱃길을 막고 있는 거람?」 조용히 지내며 천 년간 살아남는 게 목표인 이무기들에게 지금 상황은 득 볼 것이 하나 없는 장난질 수준이었다. 「남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을 텐…… 윽.」 루니의 콧등에 앉은 채 중얼거리던 유니가 움찔 입을 다물었다. 계약자와 감정을 공유하는 정령들에게 있어 술사의 갑작스런 감정변화는 전기충격과도 같이 찌르르 전달되어 왔다. 계약자가 강하게 한 감정을 느끼게 되면 정령도 역시 강압적으로 해당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유니는 살짝 몸을 움츠린 채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이그레트…….」 “아.” 그는 스멀스멀 머리를 옭죄던 감정을 순식간에 가라앉혔다. “미안하구나.” 「훌쩍,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그보다 대체 왜?」 「우아앙!」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의 감정에 노출되었던 정령들이 저마다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장 어린아이 같은 토니는 아예 대성통곡을 했다. 단순히 한 가지로 정의할 법한 감정은 아니었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이런 실수를.’ 평소에는 감정에 대한 통제를 잘 하는 그였으나 순간적으로 통제가 되지 않았다. ‘쥬다스’로서의 삶에 적응하는 과정인 탓일 수도, 아니면 새삼스럽게 빗장을 걸어두었던 인간적인 감정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는 걸지도 몰랐다. 쥬다스는 입가를 짚으며 작게 한숨을 뱉었다. “쥬다스 님?” 그를 주시하고 있는 건 정령들만이 아니었다. 곁에 선 수하들은 강물을 쳐다보다 표정이 굳어지는 그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어 걱정스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혹 이 문제를 일으키는 원흉이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상대입니까?” “으음, 그래서가 아니란다. 오히려 너무나도 연약하고 안쓰러운 아이기에.” “예?” 차라리 강한 자의 횡포라면 콧대를 확 눌러 벌을 내리면 될 일이다. 포악한 괴수라면 물리치면 되고 나쁜 저주가 걸려 있다면 해제할 방도를 찾기라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새싹처럼 여리고 찢기기 쉬운 어린 생명이었다. 채 자라지 못해 약하고 순수한 생물이 질척질척한 어둠에 물들어 버렸다면, 이는 돌이킬 방도가 없다. 「사령화가 되었구냥?」 휙! 높은 나뭇가지에 올라가 돌아가는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던 백호가 그의 곁으로 날렵하게 뛰어내렸다.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아냈던 루니가 망설임을 담고 긍정했다. 「……그 말대로다.」 「그럴 줄 알았다냥. 요즘 이 나라에 사령이 판을 치고 있으니까.」 백호는 앞발을 핥아 털을 고르며 도도하게 말을 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계약자가 없는 지금 우리 사방신들도 위험하다냥. 수호특화인 내가 겨우 견뎌냈을 정도면 진격특화인 청룡과 주작은 이미 당했을지도 모르고냥!」 「너 수호특화였어?」 「크르릉. 호랑이는 수호특화면 안 되냥? 왜 그런 눈으로 본다냥?」 「어, 안 될 건 없지만 뭔가 좀…….」 유니의 떨떠름한 시선에 수염을 꿈틀거린 백호가 툴툴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한 번 사령화가 완료되었으면 끝이다냥. 저 이무기는 그래도 용의 후손이라고, 폭주하는 자아를 한 번씩 되찾긴 하나 보다냥. 하지만 그럴 수 있는 날도 얼마 안 남았다는 거다냥.」 「잠깐, 그렇다는 건.」 「죽여라냥.」 쥬다스는 물끄러미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백호가 말한 대로였다. 사령화가 된 존재는 본능적으로 죽음을 탐한다. 지금까지야 이무기가 스스로 어떻게든 억눌러 왔다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사람을 죽이려들 것이다. 이젠 죽여서 멈추는 수밖에 없다. 「사령화가 완료되기 전에 일찍 정화를 시켜주었다면 살았겠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다냥.」 쥬다스는 마주보던 백호의 푸른 눈동자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강 밑에는 채 다 자라지도 못한 어린용의 희생이 존재했다. 이무기는 강물위로 끓어오르는 기포만큼이나 바글바글 끓어대는 검은 욕망을 참아내느라 괴로워하고 있었다. “사령에게 잠식당한 어린 이무기가 이 안에 있다는구나.” “……!” 술렁임은 짧았다. 놀란 것과 별개로 수하들은 이어질 주인의 선택을 기다렸다. “하여 우린 바람을 타고 이동할까 한다.” 가급적 편리보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을 접하려는 의도에는 맞지 않는 선택이었다. 왜냐고 묻는 것만 같은 시선들에 대고 쥬다스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내게는 이 강을 건널 용기가 없기 때문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니가 불러온 녹색 바람이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았다. 갑작스레 불어 닥친 회오리에 천막이 펄럭이고 강물이 파도쳤다. 큰 소란으로 번지기 전에 유니의 바람은 쥬다스 일행을 감싸고 신기루처럼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시야가 바뀌기 직전, 에단은 흘낏 기포가 끓던 강 중턱을 바라보았다. ‘말씀인즉 무엇에 대한 용기셨습니까.’ 더 이상 검은 기포는 솟구치지 않았다. 대신 젖은 나무를 태우고 남은 연기처럼 새카만 핏물이 켜켜이 번져갈 뿐이었다. 깊고 어두운 물속에서,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한 이무기는 얼어붙은 창날에 심장을 꿰뚫려 즉사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0154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일행 전체를 깔끔하게 강 건너편으로 이동시킨 후 바람은 봄날 꽃가루처럼 반짝이며 흩어졌다. 펄럭이는 옷자락이 가라앉으며 발이 땅에 가벼이 톡 닿았다. 갑작스런 시야 변화에 놀란 말들이 연달아 투레질했다. 놀란 말들을 진정시키는 사이 세이지는 개운하지 못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멀리 흐릿하게 나루터가 보였다. 사람들은 아마 곧 청일이 되었다며 기쁘게 배를 탈 것이다. 뱃길을 막은 존재가 사실은 이무기였고, 그 이무기가 사령에 물들어 타락해 있었으며, 조금 전 죽어 사라졌다는 사실 따위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외로운 죽음을 기억하는 건 타국에서 찾아온 손님들이 전부라는 사실에 세이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형님.” 푸릉거리는 말의 목덜미를 토닥여 진정시켜 주던 쥬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정작 그를 부른 세이지는 강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생명이 이 시대를 떠났어도 강물은 여전히 같은 속도로 흘렀다. “자의와 상관없이 사령에게 잠식되는 것과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직접 사령과 계약하는 건요…….” 아이는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는 이의 파멸을 빠짐없이 지켜봤다. 사령에 의한 타락은 소름 끼치도록 잔혹하고 또 비참했다. 아름다웠던 어머니의 피부가 주글주글 일그러져 조각나던 장면이 눈에 선했다. “결국 마지막은 같나요?” 당시 어미의 소망은 세이지 자신이었다. 비록 그 방법이 부적절했다 한들 아들에 대한 사랑만큼은 진짜였다. “만약 같다면, 다시 돌이킬 방법은 전혀 없는 건가요?” “돌이킬 수 있다면 좋겠지. 하나 사령에 의한 타락은 영혼의 죽음과 같단다. 칼에 찔려 죽는 자와 스스로 목을 매는 자. 결국 마지막은 같지 않겠느냐?” 쥬다스는 세이지의 말을 긍정함과 동시에 현실을 직언했다. “사령은 늘 호시탐탐 살아 있는 자들의 영혼을 노리고 있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유혹하지. 지금 처한 현실이 삶의 바닥이라고 생각하도록.” 가지지 못한 것들만 부각시키고 상처를 마구잡이로 들춰낸다. 부정적 감정이란 쏘시개로 잔뜩 헤집은 가슴에 자그마한 불똥이 튀는 순간 상처 입은 자는 절망한다. “가령 인생의 점수가 0점부터 10점까지 있다면 나는 지금 0점일 거야…… 라고 말이다.” 분노나 증오가 아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어’라는 생각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다. “당연하게 지켜오던 법이나 도의마저 상관없다고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죄책감을 잃는다. 사령이 바라는 건 바로 그런 단순한 마음 변화겠지.” 인간의 정신은 아주 사소한 절망만으로도 쉽사리 무너뜨릴 수 있다. 세이지도 그 사실을 절감했다. “그럼, 사령술사들은 그 누구보다 악독한 죄인이네요.” “그리 생각하느냐.” “예, 형님. 왜 모든 나라에서 사령술을 금지했는지 이제 알겠어요. 사령술사들은…….” 아이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전부 사라져야 하는 존재군요.” 세상엔 존재해선 안 될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쥬다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대신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들도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대화를 끝으로 그들은 미련 없이 강을 떠났다. 다온강을 지난 지점부터 이미 해동의 수도권 영역이었다. 수도는 야트막한 돌담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는데 담의 높이는 낮았지만 특별한 방어주술이 걸려있어 허가 없이 함부로 넘을 수 없었다. 날이 저문 이후로는 출입과 외출을 모두 금했다. 해동에서 밤중에는 객으로 찾아가는 게 대단한 무례였다. 수도로 향하기 전 근처 마을에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그들은 아쉬운 대로 거기에 머물며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산지가 많고 흙이 거친 해동에선 주로 밭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낮은 풀이 자라난 언덕 사이사이로는 말이나 나귀를 풀어놓고 길렀다. 수도권으로 오면서 쥬다스 일행의 눈에 들어온 가장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말을 돌보거나 마을 내 치안을 담당하는 경비 등의 보안 역할을 사람이 아닌 존재가 맡고 있다는 점이다. 스륵! “어우 씨! 깜짝이야.” 놀란 바이칼이 담벼락에 달라붙다시피 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주먹만 한 검은 눈동자로 스륵 그를 훑은 짐승이 다시 구름 흘러가듯 스르르 지나쳐 갔다. 해태들은 힘을 대부분 소진하여 고양이처럼 변해버린 백호라도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쥬다스의 곁에 있는 백호 쪽에는 얼씬도 하지 않고 주로 바이칼이나 다른 일행들에게 다가와 기웃거리다 사라지곤 했다. “……어딜 가든 해태가 감시하고 있으니 범죄가 일어날 확률은 적겠군.” “기척 좀 내고 다녔으면 훨씬 안전할 텐데요. 오히려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범죄자한테 뒤통수 깨질 확률보다 놀라서 자빠졌다가 머리 깨질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요.” 다름 아닌 해동의 토종동물, 해태였다. 해태는 지능이 인간 어린아이 정도로 높고 정해진 규칙을 잘 따르는 습성이 있었다. 때문에 해동의 수도와 그 주변 마을에서는 잘 훈련된 해태를 풀어놓아 경비를 맡기곤 했다. “시끄러운 짐승보다는 조용한 편이 낫지 않나?” “삐!” 에단의 반문에 바이칼은 삑삑 울어대는 게 하루일과인 와이번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아니, 조용한 것도 정도가 있죠. 당최 발자국 소리도 안 내고 다니는 게 말이 됩니까?” 해태는 매우 조용한 동물이다. 울음소리가 없는 대신 사슴을 닮은 뿔 두 개로 파장을 주고받으며 동족들과 교신할 수 있었다. 머리부터 몸통 절반까진 파란색, 나머지 절반은 빨간 양털이 복슬복슬 자라며 전체적인 생김새는 양과 사자를 합쳐놓은 듯이 생겼다. 바이칼은 근처 담벼락에 앉아 하품하는 해태 하나를 또 발견하고 표정을 구겼다. 지긋지긋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에단이 단호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훈련을 하면 가능해진다.” 이 부분에서 바이칼은 따지려다 말았다. 에단이라면 기척을 숨기고 이동하는 기술 따윈 진작에 익혔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는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가 수련이 필요하다며 쓸데없는 훈련 종목만 늘어날라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렇지만 오래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이 방정을 떨었다. “단장은 정말 안 놀라는 겁니까? 실은 놀랐는데 안 놀란 척하는 거죠?” “아니.” “평소에도 그렇게나 기척에 예민하신 분이 아니는 무슨. 아니, 그럼 단장, 해태가 소리 없이 사방팔방 돌아다니는 게 거슬리지 않다는 말씀이십니까?” “소리만으로 모든 움직임을 단정 짓지 않는다.” 에단은 막힘없이 답했다. 신체형 이능력자들이 가진 뛰어난 감은 일반인이 느끼는 오감과는 차원이 다르다. 특히 제국 내에서 제일이라 여겨지는 무가 헤이가의 핏줄은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욱 우수했다. 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뿐 아니라 시각적인 정보, 또 생물이 기본적으로 품고 있는 기 등을 읽고 끊임없이 파악해 냈다. “이곳 사람들이 자네보다 심신이 튼튼하다는 점만큼은 잘 알겠군.” “…….” 더 딴죽 거는 걸 포기한 바이칼이 ‘예이, 어련하시겠습니까’라며 고개를 돌리자 에단도 도로 침묵했다. 그러자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을 주지 않고 거리를 살펴보던 크리스티나가 작게 한숨을 뱉었다. “하.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군.” “이런 건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요.” “그대 얘기가 아니야.” “옙?” 뚱하게 대답했다가 톡 쏘는 답변을 받고 머쓱해진 바이칼이 고개를 틀었다. “잘 봐, 이 마을 전체적인 분위기. 수도를 코앞에 둔 구역치곤 지나치게 무기력하지 않나?” 별 생각 없이 지날 때와 달리 듣고 보니 확연히 그런 특징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거리가 너무 한산했다. 본래 수도를 앞둔 마을이기 때문에 유동인구가 많고 거주민들은 부유한 편이며 해태를 풀어놓아 치안에도 걱정이 없다. 그러니 활기가 넘치고 평화로워야할 거리인데도, 지금은 오히려 스산할 정도로 찬 고요가 감돌고 있었다. 특히나 제일 사람이 많아야 할 장터에선 노을이 지는 시각이 되자 전부 가게 문을 닫고 자리를 정리해 버리는 등 먼지만 날렸다. 일반 민가에서도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문 앞을 밝힐 호롱불만 놓았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은 소수였고 그마저도 전부 표정이 어두침침했다. “물론 해동은 밤 문화가 없는 나라이긴 하지만.” “대문 앞에 호롱을 걸어두는 건 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군. 다른 마을에선 지금껏 보지 못한 풍습이니.” 밤에는 각자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그것이 해동국민들의 예의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상적인 예절을 지키는 사람들치곤 어딘지 몹시 불안하고 동시에 피로해 보였다. 심지어 숙소 주인도 피로에 찌든 얼굴로 충고를 한 마디 했다. “외지 분들이니 모르시겠지만 이곳에선 어둠이 내린 시기를 조심하십쇼.” “무슨 일이 있습니까?” “딱히 큰일이 생기거나 하는 건 아니오만. 정신적으로 피곤한 일이지. 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죽겠소.” 그는 일행을 각자 방으로 안내했다. 남녀가 유별하니 성별에 따라 한 번 나누고, 인원이 방에 비해 너무 많으니 숫자대로 또다시 나누었다. 두 여성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은 각 5인씩 방을 나누어 쓰도록 했다. “혹 가위라고 아시오?” “가위?” “그쪽 동네에선 가위도 안 눌리는 모양이군. 모르시면 오늘 알게 될 거요. 요즘 마을에 귀기가 돌아 뉘가 되었든 가위 눌리기가 일상이거든.” 숙소 주인은 졸린 눈을 꾹꾹 누르며 손을 내저었다. “여하튼 오늘 밤엔 불을 꼭 밝히고 주무시오. 절대로 방 안의 불을 전부 꺼뜨려선 아니 된다오.” “……?” 주인은 학과 소나무 수가 놓인 자줏빛 요를 깔아준 후 다른 질문은 듣지도 않고 훌쩍 방에서 나가 버렸다. 방 안에는 등불 외에도 여기저기 놓인 초가 은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숙소 주인의 의미심장한 경고 탓에 분위기가 어색하게 굳었다. 자리에 앉을 생각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던 세이지가 촛불을 힐끗거리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 ‘가위’라는 게 뭘 의미하는 걸까요?” “저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바이칼이 뒷목을 매만지며 고개를 흔들었다. 해동의 문화와 그들이 즐겨 쓰는 특정 단어에 대해 무지한 건 학자인 콜도 마찬가지였다. “잠을 자다 주로 나타나는 증상으로 악몽을 꾸는 것과 비슷한 상태라 하더구나.” 그나마 정령들로부터 정보를 전해 들을 수 있는 쥬다스가 넌지시 그 뜻을 읊었다. “악몽과 비슷한 상태요?” “의식은 깨었는데 몸은 움직이지 않고. 환청을 듣거나 환상을 보거나 한다지 무어냐.” 제국에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괴상한 현상이었다. 세이지는 상상도 잘 가질 않아 멍하니 눈만 끔뻑였고, 에단과 콜은 그러려니 이해하고 넘어갔으며 바이칼은 홀로 안색이 창백해졌다. “가위라는 건 무슨 저주입니까? 아니면 속박마법처럼 마력을 이용한다든지…….” “글쎄, 듣기론 특정한 누군가의 저주나 마법에 의한 현상이 아닌 모양이다. 그냥 자다 악몽을 꾸듯이 자연스러운 게지.” “하온데 쥬다스 님. 그 현상이 동시에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계속 적용되면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라 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콜이 제법 자라난 수염을 매만지며 현상과 그 정의 사이의 오류를 짚어내었다. 학자다운 논리적인 지적에 쥬다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승님. 말씀하신 대로 의도해서든 아니든 분명 가위 눌림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어딘가 존재할 겁니다.” “허허, 이쪽 관리들도 힘들겠군요. 본디 정신적인 현상은 요인을 찾기 어려운 법일 터. 해결에 애를 먹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태연자약한 분석을 들으며 바이칼의 어깨가 그늘에 둔 화분처럼 칙칙하게 늘어졌다. 그는 플루비를 무릎에 앉힌 채 그 작은 머리통에 턱을 얹고 중얼거렸다. “와이번은 단순하니까 상관없으려나.” “삐?” 놀리는 것치곤 진지하게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보며 플루비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좋은 월요일 보내셨나요? 이제 슬슬 3월도 끝나가네요~^^ 완연한 봄날씨라 요즘 기분이 참 좋습니다. 슬슬 개나리도 피고 있더군요. ㅎ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0155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어차피 오래 머물 곳도 아닌지라 쥬다스는 가위라는 괴현상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 그들은 숙소 주인장의 조언대로 등불만 끄고 촛불만 켜둔 채 잠을 청했다. 해동에서 사용하는 초는 특수한 기능이 있어 오래 켜두어도 전부 녹아내리는 일은 없다. 사용자가 불을 끄고자 할 때엔 덮개를 덮어두면 되어 사용이 간편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잠을 청하는 시점에 정령들은 깨어 활발히 떠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 느낌이 좀 별론데.」 「네에, 좀 구린 감이 있네요.」 사령을 직접 발견한 건 아니지만 어딘가 마음 한 구석 찜찜함이 떠나지 않았다. 정령이 불쾌를 느낀다는 건 그만한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마치 방 안 어딘가에서 썩고 있는 상한 우유 냄새를 맡듯이 정령들은 사령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야아. 백호, 안 자는 거 다 알아. 일어나 봐.」 이불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하얀 호랑이는 여전히 눈은 감은 채 꼬리만 살랑거렸다. 「뭐다냥.」 「물어볼 게 있어.」 「크흥. 귀찮게 굴지 말라냥.」 백호는 졸음이 덕지덕지 묻은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자연계인 너희들은 모르겠지만 동물계는 반쯤은 동물이라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한다냥. 지금은 잘 시간이다냥. 나는 잘 거다냐아.」 「카니, 저 녀석 수염 다 태워 버려.」 「그러고 보니 수염이 너무 길게 자랐네요. 으응, 면도해 드릴까요?」 「냐아악!」 화륵 코끝을 스치는 열기에 백호가 눈을 번쩍 떴다.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친 불의 정령이 방싯 웃었다. 백호는 털을 세우며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거, 거, 건드리지 마라냥!」 「어머. 누가 보면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요.」 「호랑이는 맛 없다냐…….」 백호는 주위를 둘러싼 네 정령을 쳐다보며 귀를 접었다. 승냥이 떼에 둘러싸인 새끼 고양이처럼 달달 떨던 백호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하다냥?」 「사령한테 공격받기 시작한 지는 얼마나 됐어?」 「그렇게 오래 되진 않았다냥. 한 1년?」 길다하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다. 정령들은 심각하게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머지 사방신수가 어디에서 뭘 하는지는 모르고?」 「그렇다냥.」 「곤란하네. 걔들이 사령에게 당했다면 문제가 커지는데.」 「뭐가 문제다냥? 힘의 우위로 따지면 우리 동물계는 어차피 자연계인 너희를 이길 수 없다냥.」 그 자존심 강한 백호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모든 정령 체계에서 가장 우위를 점하고 있는 존재는 자연계 정령왕들이다. 동물계나 물질계가 존재하기 위해선 자연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자 환경 그 자체인 자연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만일 그 녀석들이 사령에게 잠식되었다면.」 백호는 강에서 사령화된 이무기를 보았을 때처럼 간단히 말문을 맺었다. 「죽여라냥.」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안 괜찮을 게 뭐 있다냥? 사령에게 조종당하는 채로 내버려 두는 게 더 기분 나쁘다냥.」 백호가 투덜거리며 꼬리로 바닥을 탁탁 내려치는 순간이었다. 훅! 아무도 초를 건드린 사람이 없었는데 방 안의 불이 전부 꺼져 버렸다. 정령은 어둠에 영향을 받지 않지만 불이 꺼짐과 동시에 전부 흠칫 굳었다. 제 스스로 꺼질 리 없는 촛불이 꺼졌다는 건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작용했다는 뜻이었다. 그 낌새를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정령들의 감각이 둔해져 있었다. 「뭐야?」 「힝, 모르겠다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요.」 토니가 울상을 지었다. 마찬가지 상태인 유니도 표정을 굳히며 파다닥 날아올랐다. 어두워진 방 안에는 음산한 고요가 가득했다. 밖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 창문이 덜컥거렸다. 제국의 창문과 다르게 해동에선 얇은 종이를 창에 발라놨기에 닫아놓은 상태에선 바깥 풍경을 볼 수 없었다. 잠시 동태를 살핀 유니는 백호를 홱 돌아보며 말했다. 「상황이 이상해. 다들 깨우는 게 좋겠어.」 백호는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실체를 가지고 있는 동물계 정령이다. 자연계 정령들은 계약자가 의식이 없는 동안에는 실체화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백호는 그런 면에선 한결 편했다. 폴짝 이불 위로 뛰어간 백호가 잠든 사람들을 앞발로 톡톡 건드리며 울었다. 냐아아― 그러나 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새끼 호랑이의 말랑말랑한 발바닥에 볼을 맞은 세이지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으…….” 「틀렸다냥. 전부 행동 불능 상태다냥.」 방 안을 한 바퀴 돌아본 백호가 사람들을 깨우는 걸 포기하고 털퍼덕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는 사이 바람 소리는 점차 조용해지더니 흔들리던 창문이 잠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유니는 더욱 불안한 표정으로 조용해진 방 안을 날아다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급하게 쥬다스의 머리맡으로 휙 내려앉았다. 「적이야, 이그레트!」 그 외침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검은 형체가 나타나 비호같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막 칼을 내리 꽂으려던 순간 붉게 번뜩이는 긴 검이 가로질러 나타났다. 채앵! 습격자를 막아선 건 에단이었다. 신체형 이능력자 중에서도 최고라 불리는 헤이가의 핏줄은 검술 천재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상태 이상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는 백호가 잠든 사람들을 깨워 보겠답시고 어기적거리는 동안 이미 깨어 있었다. 그리고 적이 제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회심의 습격이 허무하게 가로막힌 적은 당황하지 않고 반대 손을 휘둘러왔다. 악단의 연주처럼 검이 다시 한 번 쩌엉 울렸다. 검은 로브로 모습을 가린 적이 양손에 각각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단검을 쥐고 속공을 해왔다. 에단은 침착하게 상대가 공격을 전부 막히고 물러날 때쯤 역으로 치고 들어갔다. “……!” 빠른 속도로 아래에서 위로 그어오는 도를 발견한 적이 흠칫 자리에 멈춰 섰다. 서걱! 한 발짝만 더 물러섰어도 배에 꼬치구이처럼 칼이 꽂혔을 터였다. 본능에 가까운 현명한 판단 덕에 죽음을 면했다. 대신 습격자의 정체를 가려주고 있던 로브가 찢어져 나풀거렸다. 흐트러진 옷자락 사이로 코코아색 단발과 눈동자가 보였다. “너는.” 에단도 최근에 한 번 본 적 있는 얼굴이었다. 그는 투르케 사막에서 바이칼을 납치했던 사령술사들 중 ‘할더’라는 어린아이와 그 아이를 구해 그림자 너머로 사라졌던 소녀를 기억했다. ‘사령의 날개를 달고 있었지.’ 사령에게 잠식당한 소녀, 레이야였다. 목표를 놓친 레이야는 찢어져 흐느적거리는 옷 따위엔 신경 쓰지 않고 에단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지금은 날개를 감추어 평범한 소녀처럼 보이고 있었다. “악연이군. 우리에게 원하는 게 있나?” 레이야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딘가로 향했다. 그 끝을 따라간 곳엔 잠든 쥬다스와 털을 바짝 세운 백호가 있었다. “백호…….” 레이야는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리고 초승달 모양의 단검을 들어 백호를 가리켰다. “살리든…… 죽이든……. ‘홈’에 데려가야…….” 앞서 쥬다스가 예상한 대로 백호를 쫓는 건 프리드였다. 백호뿐 아니라 사신수를 전부 손에 넣으려 하는지도 몰랐다. 프리드에게 필요한 건 힘이다. 그는 오로지 강한 힘만 있으면 세상이 정의로워질 수 있다고 늘 주장해 왔다. 우득! 우드득! 레이야의 등에서 흉물스런 날개가 피부를 찢고 튀어나왔다. 뼈로 이루어진 날개에선 피와 살점이 뒤섞인 끈끈한 액체도 줄줄 흘렀다. 흰자 없이 검은 색으로만 가득한 눈이 스산하게 백호를 쳐다보았다. 「크르릉, 대체 언제까지 따라다닐 생각이다냥! 엄청난 집착이다냥.」 백호는 잔뜩 긴장해서는 입만 살아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지긋지긋하리만치 끈질긴 추격이었다. 에단은 백호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검을 휘둘렀다. ‘백호만을 노리는 게 아니다.’ 처음 레이야가 찌르려 했던 건 바들바들 떨고 있던 백호가 아니라 그 곁에 잠들어 있는 쥬다스였다. 제대로 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단은 사령술사가 꿈꾸는 목표에 그가 방해가 되는 모양이라 추측했다. 대충 적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냈으니 더 이상은 쓸데없는 말을 걸 이유가 없다. 그리 여긴 에단의 공격이 매서워졌다. 레이야가 홀로 상대할 만한 적이 아니었다. 근접전에서의 패배를 직감한 레이야는 단검을 버리고 곡예단처럼 유연하게 몸을 뒤로 날렸다. 탁, 창가에 내려선 그녀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은 에단이 코앞에서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핏! 황급히 피했지만 옆구리를 깊게 베여 울컥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검은 피가 후두둑 바닥을 적셨다. 레이야는 비명도 지르지 않고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확인했다. “방해…….” 살기등등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레이야는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무턱대고 덤비느니 더 이상 싸우지 않고 퇴각하는 편을 택했다. 콰앙! 창문이 벽째로 산산조각 났다. 에단의 검이 날아들자 그녀는 그 공격을 비웃기라도 하듯 뼈로 이루어진 날개를 퍼덕여 유유히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에단은 검을 갈무리하고 돌아섰다. 적을 놓친 건 아쉽지만 지금 중요한 건 호위 임무였다. 그리 생각하고 쥬다스의 안전을 확인하려던 에단은 황급히 도로 부서진 창가로 달려갔다. ‘낭패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녹색 기류가 살랑거리며 남아 있었다. 도대체 어느 틈에 깨어 움직인 것인지 쥬다스가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에단은 녹색 바람결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상처…….’ 레이야는 여전히 꾸역꾸역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한 손으로 감싼 채 굵은 대나무에 등을 기댔다. 그녀가 도망친 곳은 마을밖에 자리한 작은 대나무 숲이었다. 화끈한 통증과 함께 손이 온통 검은색으로 젖어들었다. 사령이 되면서 자가 치유력도 높아졌지만 지금처럼 깊이 상처 입었을 시엔 회복에 시간이 제법 걸렸다. “아파.” 고통이란 감각도 오랜만이었다. 아득한 옛날엔 넘어져서 무릎만 까져도 엉엉 울었던 것도 같다. 레이야는 아플 때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흐릿한 기억 속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런, 많이 아팠겠구나.’ 아파서 울 때면 머리를 토닥여 주던 손길이 있었다. 그 다정한 말투와 손길이 좋아서, 일부러 더 서럽게 운 적도 있었다. “레이야.” “핫……!” 멍하니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 누군가 다가온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레이야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많이 아팠겠구나.” 눈앞에 한 소년이 있었다. 쥬다스였다. 생소한 얼굴이지만 레이야는 그 맑은 금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소년이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느릿하게 토닥여주었다. “미안하다.” 마치 기억 속에서 튀어나온 듯, 다정한 말투와 손길에 레이야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단검을 꺼내 공격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어.’ 사령이 되면서 예전 기억은 거의 의식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녀에게 남은 건 ‘홈’이라 부르는 보금자리와 소중한 오빠 둘. 그게 전부였다. 두 사람을 위해 움직였고 그 명령에만 따랐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죽어도 상관없었다. ‘내 가족.’ 프리드와 할더는 레이야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래서 레이야는 두 사람을 위해 무엇이든 했다. “누…… 구……?” 레이야는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고통 속에 내버려 두어 정말 미안하다. 너를, 너희를 그렇게 두고 도망가 버려서.” 그녀를 다독거려 주던 손길이 떨어졌다. 작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레이야를 향해 쥬다스는 전과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고 이제야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서.” 스릉- 허공에 모여든 얼음알갱이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어 검의 형상을 취했다. 봄에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레이야는 그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아, 당신이구나.’ 가뭄이 든 땅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던 레이야의 얼굴 위로 그와 같은 미소가 번졌다.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면서도 레이야는 만개한 꽃처럼 웃었다. “이그…… 레트 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좋은 아침입니다! (...) 어느 틈엔가 3월의 마지막날이 왔습니다. 시간이 참 빠르네요.ㄷㄷ 참, 요즘 미세먼지가 어마어마하다고 들었습니다. 미세먼지를 많이 마시게 되면 혈관기능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하니 외출 시에 조심합시다.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 달려주시는 독자님들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ㅎ 0156 / 0240 ---------------------------------------------- 18장. 사신수-백호 많은 것이 변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로부터 벌써 수십 년이 지났다. 노인은 소년이 되었고, 소녀는 악마가 되었다. 변하지 않은 건 그의 눈에 담긴 따스한 빛뿐. 외형도 색깔도 전부 달라졌지만 그 빛만큼은 알아볼 수 있었다. 레이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결국 그에게 닿지 않는다. 아니, 부족한 건 거리가 아니다. 도무지 떨리는 손끝을 진전시킬 수가 없었다. ‘피.’ 옆구리에서 새어 나온 검은 피가 잔뜩 묻어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흘렀다. 그에게 닿기엔 너무나도 더러워진 손이다. “보, 보지 마세요.” 레이야는 황급히 손을 등 뒤로 숨겼다. 흉측한 날개도 몸 안으로 집어넣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지고 타락해 버린 추한 모습을 그에게 보이는 건 싫었다.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정작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되는 대로 아무 말이나 끄집어내었다. “저, 이그레트 님께는 착한 아이이고 싶었는데…….” 쥬다스는 그녀가 진정할 수 있도록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이런 괴물이 되어버려서…….” 그녀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까마득한 기억 너머에서도, 그는 한 번도 레이야를 혼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미움받고 혼날 거란 생각은 레이야를 떨게 만들었다. “잘못…… 했어요.” “괜찮단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로.” “괜찮아.” 괜찮다는 대답을 들을 때마다 레이야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온통 검게 물든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사령이 된 영혼은 울지 못한다.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건 살아 있는 자뿐이기 때문이다. “미워하지 마세요…….” “미워하지 않아.” 즉답을 듣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는 여전히 레이야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레이야는 비로소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늘…… 함께 있고 싶었는데.” 그리곤 뒤로 숨겼던 손을 천천히 내밀었다. “프리드 오빠와 할더. 그리고…….” 소녀는 자신의 피가 잔뜩 묻어 더러워진 손으로 살며시 자신을 겨누고 있는 얼음검을 붙잡았다.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져 순수한 얼음 그 자체인 검에서 피어오른 하얀 냉기가 손바닥에 가득 달라붙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 흩날리는 눈송이가 레이야의 코코아색 머리카락에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검을 붙들어 자신의 심장을 향해 똑바로 그 끝을 맞추었다. “이그레트 님, 알아요? 사령은 심장을 찌르지 않으면 죽지 않아요.” “…….” “계속 살아서. 몇 번이고 상처를 재생해 내니까. 한 번에 심장을 파괴하지 않으면.” 지금은 일시적이지만 사령의 본능보다 레이야로서의 자아가 앞선 상태였다. 거기까지 말한 레이야는 문득 쥬다스의 표정을 확인하고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그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다시 찾아줘서 고마워요.” 그녀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다쳐서 울고 있을 때에도 어김없이 이그레트는 그녀를 찾아주었다. 찾아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그 따스한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게 좋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당신은 나를 버리고 도망쳤다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 이렇게 찾아주었으니까. 레이야는 속으로만 중얼거리고 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저, 먼저 잘게요. 더 깨어 있으면 다시 전부 잊을 것 같으니까…….” 푹! 뜨거우리만치 지독한 냉기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령의 힘으로 이루어진 얼음검은 소녀의 까맣게 물든 심장을 파괴했다. 검에 심장을 꿰뚫림과 동시에 레이야는 아기처럼 쥬다스의 품에 안겨 들었다. 가슴은 차가웠지만 그의 품안은 따뜻했다. 하얀 눈송이와 함께 바스러지기 시작한 몸이 점차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코코아빛깔의 찰랑이는 단발을 꾸욱 힘 있게 쓰다듬어준 쥬다스가 눈을 감은 그녀를 향해 나직하게 인사했다. “잘 자렴. 레이야.” 파사삭- 레이야는 반짝이는 검은 가루로 화해 공중으로 산산이 흩어졌다. 껴안을 것이 없는 두 팔은 허공을 휘젓고 스스로를 안다시피 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남기고 떠난 속삭임이 그의 귓가를 흰나비처럼 맴돌았다. ‘―사랑해요.’ 귀족가에서 태어난 프리드와 할더의 경우와는 다르게, 날 때부터 빈민가에서 태어나 버려져 홀로 자란 레이야는 부모에 대한 정을 모른다는 점이 이그레트와 같았다. 그래서 레이야는 유독 ‘가족’이라는 단어를 동경했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고 그 집에서 함께 사는 세 사람을 가족이라 부르며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다. 모르는 사람 열이 죽는 것보다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다치는 걸 견디지 못했다. 수백, 수천이 죽어도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레이야는 망설임 없이 그렇게 했다. 그런 그녀가 그들 셋 중 가장 소중히 여겼던 건 당연하게도 이그레트였다. 그를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레이야는 절벽 아래로 추락한 인형처럼 볼품없이 망가졌다. 그 후 상실과 공포의 틈을 파고든 사령에게 완전히 잠식당했다. 냐아아- 쥬다스의 발치에 다가온 백호가 조그맣게 울었다. 쥬다스는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걱정스런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본 백호가 다시 힘없이 갸르릉거렸다. 그리고 백호의 뒤를 따라 나타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전하?”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온 힘을 다해 뛰어온 에단이었다. 홀로 대나무 숲 한가운데에 서 있는 쥬다스를 발견한 에단이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가 서 있는 자리에는 검은 핏물이 잔뜩 튀어 있었다. 어마어마한 출혈량이었다. ‘아까 그 사령의 피겠군. 죽은 건가.’ 정작 쥬다스에겐 상처가 없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에단이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뱉던 찰나였다. “잠시만.” “……?” 꾸욱! 가느다랗게 떨리는 손이 에단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그제야 에단은 제 주인의 턱선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흠칫 굳었다. “잠시만 기대도 되겠느냐.” “……예.” 억누를 수 없다. 몰랐을 때라면 모른 척해 보겠지만, 이미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아버렸다. 쥬다스는 더 이상 그 모든 것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폭발시키듯 터뜨려서는 안 된다. 그가 바라는 소망은 곧 거대한 힘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범람하는 감정은 혈관을 타고 흘러 온몸을 적시고도 모자라 밖으로 흘러넘쳤다. 휘몰아치는 폭풍을 잔잔한 냇물로 화해 가라앉히는 일은 그에게 있어서 생소한 일이었다. 하늘에 뜬 초승달은 소리 없는 눈물을 미처 비추지 못했다. 가녀린 달빛 아래 검은 가루만 별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의 슬픔을 감지한 정령들이 몰려들어 함께 울음을 터뜨렸다. 빛은 많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숨 막히게 캄캄한 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슬픔’이란 감정을 오롯이 인정했다. * * * 쨍그랑! 모래시계 하나가 떨어져 박살 났다. 코코아색 모래가 유리 조각 사이로 흩어지는 걸 발견한 할더가 그 앞에 서서 물끄러미 이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깨져 버렸군?” “……그렇네요.” 의자에 앉아 다른 모래시계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돌리던 프리드가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빠른데. 정말로 그 위선자의 손에 피를 묻힐 줄이야. 제법이야, 꼬맹이.” 할더는 허리를 숙여 흩어진 모래를 주먹에 쥐었다. 함께 뒤섞인 유리조각에 찔려 손바닥 사이로 검은 핏방울이 맺혔다. ‘이보십시오, 레이야. 엄밀히 따져보면 내가 너보다 한 살 많습니다?’ ‘응. 그게 뭐?’ ‘뭐긴 뭡니까. 앞으론 나한테도 오빠라고 불러요.’ ‘싫어, 할더 멍청이.’ 이제는 멀게만 느껴지는 추억 속에서 두 사람은 꽤나 앙숙이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 사이에서 큰형인 프리드가 늘 중재를 해주곤 했다. ‘멍청이는 욕이잖아, 꼬맹아. 조금 모자라지만 착한 할더라고 불러주자.’ ‘아, 프리드. 정말 이러깁니까!’ 깔깔 웃던 소녀의 맑은 얼굴이 아른거렸다. 마치 평행세계에 살고 있는 세 사람을 보듯 이젠 멀게만 느껴지는 추억이었다. 할더는 주먹을 콱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암갈색 모래가 맥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프리드.” “……?” “당신은 처음 그분을 만났던 날을 기억합니까?” 사람들의 혐오스런 시선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광장에 내동댕이쳐졌던 날이었다. 있지도 않은 반역죄를 뒤집어쓴 가문은 몰락했고 식솔의 목이 차례로 잘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문의 핏줄인 할더는 광장에 묶여 썩은 달걀과 짐승의 피를 뒤집어썼다. 목이 잘리기 전 뒤늦게 모든 게 누명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그에게서 죄수의 낙인을 지우지 않았다. 한 번 죄인으로 인식된 자는 사회에서 다시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다시 사람답게 살게 해준다 하더라도 그 틈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더러워진 그의 머리 위로 시커먼 하늘이 우릉 울었다. 텅 빈 눈을 하고 쓰레기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비를 맞았다. “나는 그때 두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죽음만을 기다리던 할더에게 가을비는 차라리 따뜻했다. 비는 모두에게 공평했다. 편견도 낙인도 없이 세상을 적실 뿐이다. “하나는, 세상의 정의란 결국 힘 있는 자가 정하게 된다는 것.” 귀족의 지위도 쌓아온 신의와 명예도 모조리 종이쪼가리처럼 갈기갈기 찢겼다. 더 큰 권력 앞에서 상대적 약자는 철저하게 짓밟히고 말았다. 선하고 악하고의 개념 따윈 상관없이 말 한 마디에 죄인이 되고 손짓 한 번에 목이 떨어졌다. 할더의 덤덤한 어투에 프리드는 그저 손에 든 붉은 모래시계만 빙글빙글 돌렸다. 그 안에 담긴 모래가 이리저리 휩쓸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할더는 주먹을 쥔 손을 털어냈다. 손에 박힌 유리조각만 남기고 모래가 우수수 추락했다. “힘이 있는 자가 꼭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그의 하늘은 공평하고 따스한 자였다. 하지만 그가 바라본 이그레트는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따뜻하지만 어딘가 결여된 눈으로, 그렇게 할더를 지옥에서 건졌다. 마치 이 더러운 세상 위에서 가을비를 흩뿌리는 하늘처럼. 그리고 멍하니 내밀어진 손을 잡은 그에게 조그만 여자아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알려주었다. ‘가족이 되는 거야. 우리.’ 할더가 입을 다물고 바닥만 내려다보자 프리드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을 받았다. “세상을 바꿀 힘이 있는 자가 겁쟁이처럼 웅크리고만 있어서야 행복할 리가 있나.” “프리드. 당신의 방식에는 동의하는 바이나 그분을 욕되게 부르진 마십시오.” “아아, 그러지. 너나 레이야가 그 위선자의 열렬한 신봉자라는 사실을 깜빡했군그래.” 비꼬는 말에도 할더는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얼굴로 레이야에 관한 사실을 물었다. “레이야는 지금 죽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내가 아는 그분이라면 레이야를 죽일 리도 없고요. 정말로 그분의 행방을 찾은 게 맞습니까?” “물론. 노인네가 아주 팔팔하더군. 까딱했더라면 자칫 못 알아볼 뻔했어.” 프리드는 붉은 모래시계를 손안에 굴리며 큭큭 웃었다. “잊지 마십시오. 나는 그분을, 레이야를 죽이려는 게 아닙니다.” “그래. 되찾으려는 거지. 나도 마찬가지야. 그저 힘을 가지고도 사용할 줄 모르는 짜증 나는 성격이 싫을 뿐이지. 그자는 내 오랜 친우가 아닌가.” “정말입니까?” “이런, 이런. 의심하는 거냐? 이거 참, 꼬맹이의 죽음이 그렇게나 충격적이었나. 어차피 사령은 죽어서도 자유롭지 못해. 재료만 모이면 다시 되살리는 건 시간문제다. 할더.” 할더의 곁으로 다가온 프리드는 실수인 척 손에서 모래시계를 놓았다. 쨍 소리와 함께 모래시계가 깨져 붉은 가루가 쏟아졌다. 코코아색 모래와 붉은색 모래가 뒤섞여 반질반질한 대리석이 지저분하게 물들었다. “모든 걸 바꾸고 사랑하는 자를 되찾는다.” 프리드는 선반으로 다가가 새 모래시계를 꺼내들었다. “그 결의를 잊을 리가 있나.” 벽면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무수히 많은 모래시계가 세워져 있었다. 대신할 말은 아직 많다. 한 소녀를 잃고서 얻은 대가는 예상외로 값졌다. ‘도망치지 않았어.’ 그 이그레트가, 진심으로 레이야를 죽였다. 그렇다는 건 답답할 정도로 굳건히 지켜오던 그자의 룰이 깨어졌단 뜻이다. 공평한 하늘에 가까웠던 현자가, 감정을 알고 사사로운 일에 전능한 힘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진심으로 사령을 상대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등줄기를 타고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마치 잠들어 있던 신이 깨어나 지상에 강림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제 세상의 추는 단 한 사람에게 기울기 시작할 것이다. 만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이 세상의 정의가 바뀐다. 프리드는 그 사실이 기대되어 비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기대하지, 이그레트 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 이걸로 18장이 끝났습니다. 다음 화부터 '19장 :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내일부터는 봄꽃이 한창이라고 하네요. 아니, 이미 한창이었던가? (..)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57 / 0240 ---------------------------------------------- 19장. 소망 쥬다스는 낯선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잠시 구름에 가렸던 초승달이 다시 빠끔 고개를 내밀었을 즈음 그는 작게 한숨을 뱉으며 에단에게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처음 보는 주군의 눈물에 적잖이 놀라 있던 에단은 그렇게밖에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도통 무엇이 미안하다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단발머리 소녀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하지만 에단은 쥬다스가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저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알아야 할 일이면 말을 꺼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캐물을 필요는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단 특유의 충직하고 간단명료한 사고방식은 의도치 않게 쥬다스를 한결 편하게 해주었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가자.” “예.” 슬슬 자리를 떠나려던 쥬다스는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시선을 내렸다. “이건…….” 레이야의 심장을 찔렀던 얼음검이 아직 손에 쥐어져 있었다. 본래는 하얗게 냉기를 폴폴 뿌리던 얼음조각이었는데 지금은 까맣게 변색되어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 모습은 이젠 단순히 얼음덩어리라고 볼 수 없었다. 백호가 코를 킁킁거리며 중얼거렸다. 「희한하고냥. 정령이 만든 검에 사령의 힘이 깃들 수가 있다냥?」 “사령의 기운을 흡수한 모양입니다.” 곁에서 그 검을 살펴본 에단도 비슷한 결론을 내렸다. 그 추측대로 레이야가 죽으면서 그녀의 기운이 얼음 결정 안에 흡수된 상태였다. 사령의 기운이 얼음을 통해 응집되면서 더욱 견고하게 달라붙었다. 루니가 검을 유지하고 있는 얼음을 흩어버리면 남아 있던 사령의 기운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냥 바닥에 버리고 갈 수도 없다. ‘정령의 기운과 사령의 기운이 함께 공존하는 검이라.’ 이론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레이야의 마지막 염원이 깃든 탓일지도 몰랐다. 사람의 마음이란 때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쥬다스는 잠시 고민하다 그 검을 에단에게 건넸다. “사령의 힘이 깃들어 있다곤 하나 정령의 힘이 대부분이라 해롭진 않을 게다. 에단 네가 누구보다 검에 조예가 깊으니 잠시 맡아줄 수 있겠느냐?” “명을 받듭니다.” 에단은 군말 없이 검을 넘겨받았다. 본래 속성이 얼음인 검이라 날은 물론이고 손잡이조차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에단처럼 전문적으로 검을 다루는 기사들은 충격을 줄이기 위해 손바닥을 감싸는 특수 글러브를 착용했기에 냉기 정도는 다루는 데에 무리를 주지 않았다. 팔뚝 하나 길이로 그다지 길이가 긴 편은 아닌데다가 따로 검집이 없었기에 에단은 이를 헝겊에 둘둘 싸서 다른 검과 함께 고정시켜 두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백호가 쉼 없이 쫑알거렸다. 「그냥 네가 가지고 있는 편이 낫지 않냥? 왜 저 인간에게 준 거냥?」 쥬다스가 딱히 답을 해주지 않아도 백호의 일방적인 이야기는 주구장창 이어졌다. 「정령과 사령의 기운이 뒤섞인 검이라면 분명 사령에게도 치명적인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은데냥!」 “흠.” 「이 세상에 너만큼 정령을 잘 다루는 술사는 없을 거다냐…… 냥?」 갑자기 몸이 붕 들리는 느낌에 백호가 놀라 귀를 접었다. 쥬다스는 백호를 품에 안아 들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팔에 단단히 안긴 채 벙찐 백호의 콧등 위로 유니가 폴싹 내려앉았다. 「이그레트는 꼬마들을 엄청 아끼거든.」 「꼬마들?」 「저 에단이란 꼬마를 비롯해서 주변 아이들 모두. 평소엔 꼬마들도 제법 강해서 괜찮은데 이번처럼 사령이 나타나면 아무래도 상황이 어려워진단 말이야.」 「아하! 그렇구냐릉.」 백호는 고개를 위로 꺾어 물끄러미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까 넌 아이들이 네가 없을 때에도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길 원한 거구냥?」 쥬다스는 말없이 백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손길을 마음에 들어 한 백호는 흡사 사람이 웃듯이 고로롱고로롱 목을 울렸다. 「그런데 네 이름이 그 유명한 ‘이그레트’가 맞다냥?」 하나를 해소해 주니 이번엔 백호의 호기심이 엉뚱한 쪽으로 튀었다. 「꼬마들한텐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 같던데. 이름이 두 개나 된다냥?」 ‘이그레트’는 정령들 사이에선 이미 유명해질 대로 유명해진 이름이었다. 굳이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처음 그를 보는 순간 알았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 신수도 정령이었으니 본능적으로 그에게 이끌렸다. 물론 그에게 해동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곁을 맴돌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어떤 이유든 간에 백호는 그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그간 백호가 지켜본 바, 그는 정령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름보다는 ‘쥬다스’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었다. 삶은 한 번뿐이란 진실하에 백호는 당연한 의문을 품었다. 「이름 두 개 맞아. 그렇지만 이그레트는 이그레트니까.」 「크흥. 뭔가 사정이 있나 보구냥. 뭐 둘 다 상관없다면 편한 쪽으로 부르겠다냥.」 「아냐. 부르지 마.」 「므앙?」 당사자가 아니라 정령의 단호한 거절 탓에 백호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해버렸다. 유니는 퉁명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아기 호랑이의 이마를 쿡 찔렀다. 「애초에 안겨 있질 마. 떨어져.」 「맞아요. 우리 멍뭉이도 제 발로 걸어가는데!」 「그렇다요! 멍뭉이 자리를 빼앗지 말라요!」 푸른 늑대와 백호의 시선이 어색하게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아니, 난 이게 더 편해서…….」 어차피 크기도 커서 안기는 건 무리고. 거기까지 말하다 보니 왠지 조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계 정령인 그는 일부러 계약자가 선호하는 우아한 늑대의 모습을 유지한 건데, 막상 저 동물계 정령은 귀여운 아기 호랑이의 외형으로 계약자의 관심을 훔쳐갔다. 루니는 눈을 가늘게 뜨며 뚱하니 코주름을 잡았다. 「……역시 좀 거슬린다.」 「우이 씨. 내가 일부러 작아졌다냥? 사령술사에게 힘을 다 뺏겨서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않냥! 험악한 표정 짓지 말라냥.」 자연계 정령들과 백호 사이의 미묘한 대치 상태는 숙소에 돌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이어졌다. 간밤에 어떤 난리가 벌어졌는지 전혀 모른 채 잠에서 하나둘 깨어난 일행은 무척 피로한 얼굴로 멍하니 박살 난 창문이며 바닥 등을 훑어보았다. “이게 무슨……?” “삐이이.” 바이칼과 플루비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누가 봐도 습격받은 현장이었다. 이 난리가 날 때까지 전원 일어나지 못한 건 문제가 컸다. 심지어 숙소 주인이나 다른 투숙객들도 아침이 될 때까지 전혀 상황을 몰랐다. 비슷한 시기에 잠에서 깨어난 란과 크리스티나도 옆방에서 옮겨와 그들과 합류했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 있는 방 안을 보고 기함을 금치 못했다. “좋은 아침이구나.” 유일하게 쥬다스만이 이런 와중에도 변함없이 태연했다. 그는 이미 출발할 채비를 마치고 여유롭게 너저분한 방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숙소 주인에게 전투로 인한 피해배상은 했고, 깨지고 조각난 쓰레기들은 한 곳에 쓸어모아두고 이불도 손수 개어 장롱에 넣었다. 완전히 박살 나버린 창문 너머로는 상쾌한 봄바람이 햇살과 함께 살며시 흘러들어왔다. “형님,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음, 있기야 했지.” 쥬다스는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밤중에 사령이 습격했었고 에단이 막아냈으며 그 과정 중에 검상을 입은 사령이 대나무 숲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령은 소멸했다. “맙소사. 사령이라니.” 이야기를 들은 후 세이지가 인상을 굳히며 중얼거렸다. 나머지 일행의 표정도 가히 좋지 않았다. 자칫 큰일로 번졌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자책과 의문, 안도를 차례로 떠올리는 이들 사이에서 콜만이 유일하게 다른 이유로 표정이 굳었다. “쥬다스 님. 그 사령이 죽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괜찮…… 으십니까?” 사령이 죽었다는데 뜬금없는 걱정이 이어지자 모두의 의아한 시선이 콜에게로 쏟아졌다. 콜이 기억하는 레이야는 소녀가 아니라 성숙한 여인이었다. 당시 콜은 그녀보다 어렸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배신의 징후를 눈치채기엔 너무 순진했다. 그래서 레이야가 다른 두 동료와 함께 어떤 마음으로 스승을 배반하였는가 따위는 모르기도 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그들이 미웠다. ‘그자들은 도대체 왜 자꾸 스승님을.’ 어렸던 그날 울면서 떠올렸던 원망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속을 끓였다. 그치들이 죽든 살든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거기에 다시 스승을 끌어들이는 건 치 떨리게 화가 났다. 한 번 찢어놓은 가슴을 억지로 다시 벌려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콜은 진심으로 분노했고 또 걱정했다. 굳은 표정으로도 감추어지지 않는 노제자의 감정을 읽어낸 쥬다스는 부러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보단 다들 안색이 좋지 않은데.” “아, 그건.” 긴 밤 내내 사정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던 사람들은 서로 퀭한 눈으로 멋쩍은 시선을 교환했다. 심지어 와이번마저 끼에에 하품을 터뜨렸다. 바이칼이 플루비를 안은 채 대표로 보고했다. “그게, 귀기가 감돈다 하더니 실제 수면상태에 관여하는 모양입니다. 어젯밤 한 명도 빠뜨림 없이 전부 가위 눌림을 경험했습니다.” “가위 눌림?” “이상하게 계속 악몽을 꾸고요. 중간 중간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깨긴 했는데 물속에 있는 것처럼 울리기만 하고 제대로 들리진 않았어요. 거기다가 몸이 전혀 움직여지질 않아서.” 세이지가 덧붙여 설명했다. 가위를 눌리던 당시엔 마취약에 취하기라도 하듯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일부 기사단원 사이에선 귀신을 봤다는 목격담마저 나오고 있었다. “분명 남자만 있는 방인데 기분이 쌔해서 눈을 떠보니 웬 머리 긴 여자가 옆에 누워 있더라나? 처음엔 누가 침입한 줄 알고 놀라서 얼굴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더니 똑같이 스르르 고개를 돌리더라고…….” “으아아아! 왜애애! 얼굴은 또 왜 확인하는데!” 괴담에 유독 취약한 바이칼이 얼굴을 싸매고 절망했다. 아무 생각 없이 어느 기사의 경험담을 읊던 세이지가 멋쩍게 볼을 긁적였다. “근데 사실 저도 무슨 여자 목소리 같은 걸 들은 것도 같…….” “아, 제발!” 몸부림치는 바이칼을 한심스럽게 쳐다본 에단이 작게 한숨을 뱉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확인한 결과 현재 나라 전체에 이와 같은 괴현상이 유행 중이라 합니다. 원흉이 밝혀지지 않아 상부에서도 골머리를 앓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단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니 수도로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겠구나.” 해동이 제국의 동맹국이라곤 해도 당장 쥬다스 일행이 논할 개재는 아니었다. 부정적 영향을 받긴 하지만 실제로 생명이 직결된 문제는 아니었고 원흉이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들은 일단 해동의 왕을 먼저 만나보기로 했다. 아침이 되어 수도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예전엔 식목일에 놀았던(?) 것 같은데 이젠 그저 평범한 화요일이네요.ㅎ 나무.. 나무를 심고 싶다...! 직접 심지는 못해도 만개한 꽃들을 보면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입니다. 근처 릉(?)에 소풍가고 싶군요! (릉이 의외로 칙칙하지가 않고 꽃도 많고 넓습니다. 아이들 소풍명소가 하나 있는데 몇년전에 가보니 경관이 엄청 좋더라고요.ㅠㅠ)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58 / 0240 ---------------------------------------------- 19장. 소망 수도 호성을 오가는 인파가 굉장히 많았기에 성문을 따라 긴 줄이 만들어졌다. 그중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는 내부의 출입을 금했다. 이를 위해 뿔이 3개 달린 특별한 해태가 관문에 서서 방문객의 몸수색을 맡았다. 수상한 주술이 걸려 있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요괴는 삼각해태의 감시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주술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태에게 발목을 붙들린 건 쥬다스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관문에선 주술 도구를 해제해 주십시오.” 엄밀히 따지자면 그 원리가 주술과는 달랐지만 제국에서 사용하는 마법 인챈트도 삼각해태의 감시망을 피해갈 수 없었다. 문을 지키던 군졸의 사무적인 안내가 다시 이어졌다. “또한 말이나 고양이 같은 일반적인 가축이 아닌 정체를 알 수 없는 요괴의 출입은 불허합니다.” 그나마 크기가 작은 백호는 고양이 정도로 봐준 모양이었지만 플루비가 문제였다. 아무리 크기가 작아도 와이번을 평범한 짐승으로 보긴 어려웠다. 거기에 더해 군졸은 후드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린 란에게까지 요괴라는 의심의 시선을 던졌다. 사실 란은 인간이 아닌 요정족 픽시였기에 삼각해태도 아리송한 표정으로 그녀의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어쩌지? 인간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나 봐.” 란이 울상을 지었다. 사실 제국에서 몬스터나 이종족의 출현이 새삼스럽지 않듯이 동방에서도 요괴란 꽤나 사람들에게 익숙한 존재였다. 명칭만 ‘요괴’일 뿐 인간과 평범한 동식물이 아닌 이종족은 전부 그 범주에 들어갔다. 해동은 인간과 요괴가 공존하는 나라로, 그들이 사방신수로 섬기는 동물계 정령들도 그 일례였다. 다만 요괴란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강한 힘을 갖고 있거나 요술을 부리는 등 대응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명확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우엔 마음놓고 대하지 못한다. 특히 임금이 거하는 수도에선 그 경계의 정도가 심했다. “나 여기서 플루비랑 함께 기다리고 있을까?” 쥬다스의 소매를 붙잡고 속닥거리는 란에게 군졸이 험한 목소리로 다그쳤다. “그쪽도 요괴인가? 수상하군. 가리개를 벗으시오.” 그 말에 란은 화들짝 놀라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더욱 푹 잡아 내렸다. 누가 억지로 벗길 새라 불안한 모습이었다. 마찬가지로 군졸들의 차가운 시선을 느낀 플루비는 삐액삐액 울며 바이칼의 품을 파고들었다. “쥬다스 님.” “그래. 이곳은 해동의 심장이니 예의를 갖추자꾸나. 마법진을 전부 해제하여라.” 쥬다스는 착용하고 있던 브로치를 옷에서 탈착하며 부드럽게 명했다. 군졸의 압박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일행은 그제야 발동 중이던 마법도구를 전부 해제했다. 혹시 모를 습격을 대비한 이동식결계, 언제라도 시전 가능하도록 대기시켜둔 공격마법진, 그리고 심지어 말들이 잘 달릴 수 있도록 걸어두었던 특성인챈트까지 모두 사용이 중지되었다. 그러자 뒤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술렁임이 일어났다. “은발……?” 소란의 원인은 브로치를 떼어내 색상 변조 인챈트가 해제된 쥬다스였다. 해동민족은 머리도 눈도 전부 검은색이다. 루바르잔 제국이야 영토전쟁을 통해 드넓은 땅을 흡수하면서 다양한 민족이 섞여 색깔도 다양하게 타고난다지만, 해동은 그렇지 않았다. 나라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이 강해 타국인과 혼인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어렵게 혼인한다 하더라도 그 사이에선 후손을 볼 수 없었다. 해동의 피는 무척 강했고 동질이 아닌 피와는 섞이지 않는 특징이 있어 절대로 혼혈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만일 해동 사람이 타국인과 혼인을 하게 되면 둘 사이에선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해동의 왕녀가 루바르잔 황제와 혼인하였을 때, 사람들은 이름뿐인 동맹혼에서 결코 그 결실을 볼 수 없을 거라 예측했다. “허어, 저토록 깨끗한 은색이라니.” “물감으로 내려 하여도 어렵겠어.” “저 색상을 왜 ‘은’이라 부르겠는가? 인간이 아닌 귀한 광석에서나 볼 수 있기에 그렇다지.” 당시 모든 이의 예측을 산산조각 내버린 존재가 바로 제국의 1황자 쥬다스였다. 해동의 왕녀와 제국 황제 사이에서 버젓이 탄생한 그는 해동 민족의 특징인 검은색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제국의 황손이었다. 그리고 이젠 황위를 계승하게 될 황태자로 자라났다. 그가 가진 유일무이한 은발금안에 대한 소문은 해동에서도 유명했다. “설마, 당신은…….” 군졸들이 들고 있던 창을 내리며 심각한 표정으로 침음하던 순간이었다. 도성 내에서부터 요란스레 말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탐문을 중지하라!” 군졸들은 말이 매달고 온 깃발을 확인하고 곧장 물러섰다. “옛!” 물러선 병사 사이로 군마 세 기가 멈춰 섰다. 어찌나 급히 달려왔던지 먼지구름이 멀리서부터 뿌옇게 이어져 온 것이 보였다. 그들이 달고 온 깃발에는 파란색과 붉은색, 두 색상이 조화롭게 얽힌 해동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마중이 조금 늦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서둘러 말에서 내린 사내가 쥬다스를 향해 공손히 머리를 숙여보였다. “성왕을 모시는 신하 수호 연, 귀한 객들께 인사드립니다.” 5년 전 황태자 즉위식에 참관하여 해동으로 초대하는 메시지를 전달했던 ‘연수호’였다.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떨림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입니다. 반겨 주어 고맙습니다, 수호.” 쥬다스는 비록 잠깐의 만남이었어도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해 냈다. 당시 수호를 만났던 건 쥬다스뿐이므로 나머지 일행들은 조용히 목례로 인사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반짝 손을 들어 올린 란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저기, 나도 들어가도 돼?” “물론입니다.” “이거 안 벗어도?”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쥬다스가 데려온 일행이라면 픽시가 아니라 설령 마계괴수 발로그(Balrog)라도 막을 이유가 없다. 홀로 성 밖에 남겨질까 전전긍긍하던 란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성왕께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호는 관문에서부터 그들을 인계받아 직접 안내하기에 나섰다. 도성 내부는 무척 넓었으며 제국에선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냥 건물과 평지로 이루어진 도시가 아니라 돌담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마치 미로처럼 빙글빙글 돌도록 쌓아놓았다. 그 돌담은 얕은 담으로 시작해 마치 계단처럼 켜켜이 점차 높이가 올라갔다. 담에는 저마다 견고한 주술이 새겨져 있어 월담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았다. 정확히는, 담을 넘을 수는 있지만 이상하게 담 위를 지나는 순간 다시 처음의 가장 낮은 자리로 돌아와지는 특수한 주술이었다. 아무리 급하게 달려가고 싶어도 복잡한 길을 따라 돌아다녀야만 하는 구조다. 안내를 따라 이동하면서 쥬다스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가 오늘 도착하는 줄을 어찌 아셨습니까?” “하하! 제국에는 마법사가 있지요? 그처럼 이곳에는 용한 주술사와 연금술사가 있습니다.” 수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의 호기심을 달래주었다. “허면 주술…… 입니까?” “예, 미래를 점치는 무녀가.” 이어지는 말에 쥬다스가 멈칫 했지만 상대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호는 마냥 기쁜 얼굴로 무녀의 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귀한 손께서 드디어 이 땅을 향할 것이라고.” “…….” “실은 오늘 아침에 일어날 때만 해도 그게 오늘일 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만. 때마침 신내림을 받아 이리 나와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용한 무녀였다. 보통 점이라 함은 애매한 정보를 뭉뚱그려 짚어주는 난해한 결과가 주를 이룬다. 대부분 해석하기 나름인 내용이 많으며 명확하게 몇 날 몇 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예지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쥬다스는 점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처음 ‘쥬다스’로서 눈을 떴을 무렵 길거리에서 받았던 점을 떠올렸다. ‘[태양], [사슴], [3개의 칼]…….’ 점을 봐준 건 주름이 자글자글하던 노파였다. 단순히 흥미로 보고 지나갔던 점이라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놓고 잊고 있었다. 점 자체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지만 해동에서 이 정도로 신통하게 들어맞는 주술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생각해 보면 그가 태양처럼 빛나는 위치에 올라가게 된 건 이미 이루어진 사실이나 다름없다. 제국에서 황제, 그리고 그 제위를 물려받게 될 황태자는 전부 태양이라 묘사되었다. “점술도 해동에서 사용하는 주술의 일종인 줄은 몰랐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든 미신이나 점쟁이는 존재하지요. 다만 우리 해동의 무녀의 점은 절대 헛된 정보를 읽어내지 않는 고급 기술로 명맥을 이어왔습니다.” “점을 보면 무조건 들어맞는다는 말입니까?” “으음, 예. 썩 석연찮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수호는 자부심을 가지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일행의 놀란 시선에 민망한 듯 손을 내저었다. “물론 모든 운명을 다 읽어낼 수 있다는 게 아닙니다. 특정 대상의 점은 단 한 번만 볼 수 있으며 그것이 미래일지 과거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운명을 읽어낼 수 있었다면 그 또한 끔찍했을 터였다.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특정 사건에 대한 미래는 보려고 해서 봐지는 게 아닙니다. 불시에 ‘신내림’이라 불리는 현상이 일어나 단편적인 한 장면을 보여준다 합니다.” “그렇군요. 대단한 능력입니다.” 말로는 대단하다 하면서도 쥬다스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게 있어 운명을 읽는 신통한 점술은 그다지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았다. 그는 운명론보다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요시 생각하는 자유론파였다. ‘자네에게 3명의 인재가 모여들 것이네. 앞으로 자네가 쓰고자 함에 따라 훌륭한 수족이 되어줄 수도 있을 테지만…….’ 만일 예전 그 노파가 그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돌팔이 점쟁이였다면 별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자네의 심장을 찌를 것이야.’ 하필 끝이 별로 좋지 않았다. 심지어 점의 내용이 과거를 뜻하는 건지 미래를 뜻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해석하기에 따라 전생의 일로도 여겨질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쥬다스는 잠시 진지하게 점술에 대해 생각하다 머릿속에서 전부 흩어버렸다. 어차피 이루어질 일은 이루어지고 아닐 일은 아닐 것이다. 괜히 고민에 휩싸여 있어봤자 아무것도 나아지는 게 없다면 그냥 다시 잊는 게 나았다. 그렇게 돌담길을 따라 빙글빙글 가다보니 마법처럼 궁궐이 눈앞에 나타났다. 수호는 굳건히 닫힌 문 앞에 말을 세우고 명했다. “문을 열라.” 끼이익! 무거운 빗장이 들리며 거대한 문이 좌우로 벌어졌다. 해동의 궁은 루바르잔과 다르게 전부 그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대신 단아하게 처마를 늘어뜨린 건축양식이나 기둥 마디마디에 새겨진 사방신수의 벽화 등을 보면 절로 장엄함과 고급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제국의 궁이 호선과 원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둥글고 높게 솟아 있다면 이곳의 전각들은 질서정연하게 각을 지켰고 크기며 길이 비율마다 균형을 맞추어 척 보기에 흐트러짐 없이 반듯한 인상을 주었다. 건물이 낮고 작아도 결코 초라하지 않았다. 마치 개별적으로 예쁘게 포장한 선물상자처럼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그만큼 정갈하며 아름다웠다. 「여기도 오랜만이다냥.」 익숙한 공간에 들어서자 쥬다스의 품에 안겨 있던 백호가 홀짝 뛰어내렸다. 「얼마 만에 와보는 궁인지냥!」 「대체 얼마나 오래됐기에 그래?」 향수에 젖은 눈으로 어느 전각기둥에 몸을 비비적거리는 백호에게 유니가 다가와 물었다. 「모른다냥. 갸르릉. 한 삼십 년쯤 됐으려냥?」 「……별로 오래도 아니잖아.」 「그러게요. 삼백 년도 아니고.」 백호는 다른 정령들의 떨떠름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궁의 건물들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빛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도착! 그리고 또다시 대놓고 뿌려지는 떡밥....(?) 쿨럭.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159 / 0240 ---------------------------------------------- 19장. 소망 「앗! 바로 저기서 하윤 공주와 자주 놀았다냥.」 좀 더 걸음을 옮기다 보니 한 구석에 밧줄을 꼬아 만든 그네가 하나 보였다. 백호는 한달음에 그네로 달려갔다. 아기 호랑이는 그네안장에 앞발을 얹은 채 시무룩하게 꼬리를 늘어뜨렸다. 「공주는 그네를 굉장히 무서워했지냥.」 「헤에. 겁이 많았나 보네?」 「아주 겁쟁이 울보 아가씨였다냥. 요 그네도 무섭다며 절대 서서 타지 않았다냥.」 그랬던 꼬마 아가씨가 어느 틈에 시집을 가버리더니, 이젠 그녀의 아들이 대신 이곳에 찾아왔다. 슬픈 건지 반가운 건지 모를 이상한 기분이었다. “……백호님이십니까?” 냐앙~ 백호는 자신을 부른 연수호를 흘낏 쳐다보았다. 하윤 공주의 곁에서 노닥거리고 있을 때 그도 같이 종종 얼굴을 본 적 있었다. 백호가 기억하는 공주는 어린 소녀였고 그땐 수호도 마찬가지로 어려 아직 귀족으로서의 임무를 맡지 않을 시절이었다. 크기가 대폭 줄어 영락없는 고양이 꼴을 하고 있는 백호를 보고도 그 정체를 알아차린 수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다시 찾아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한 쌍의 푸른 눈동자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겉은 줄었어도 눈만큼은 확실히 맹수의 기개를 품었다. 백호는 해동 왕족이 아닌 이상 결코 살갑게 굴지 않았다. 왕가를 모시는 하수인이라 해도 예외는 없다. 차갑기까지 한 눈빛을 마주하면서도 수호는 거리낌 없이 웃었다. 「하윤 공주의 아이가 아니었다면 다시 오지 않았을 거다냥.」 평범한 사람에겐 들릴 리 없는 대꾸였다. 하지만 백호는 하소연이라도 하듯 투덜거렸다. 「공주를 잃어버린 너희들 따위가 날 믿는다고 해도 하나도 안 반갑다냥.」 「사실은 엄청 반갑지?」 「캬앙, 반갑긴 누가!」 신경질적으로 캬르르 목을 울리던 백호는 그네에서 발을 내리며 쥬다스의 곁으로 되돌아왔다. 연수호의 시선이 그를 따라왔지만 모른 척 새침하게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금색 눈동자는 하윤 공주의 검은 눈과는 전혀 달랐지만, 그래도 같은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따뜻해.’ 순수하고 따스한 영혼. 정령이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빛깔이다. 하윤 공주도 저렇듯 맑고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향해 웃곤 했다. 백호가 발치에서 야옹거리자 쥬다스가 손을 뻗어 그를 안아 올렸다. 얌전한 고양이처럼 고롱거리는 백호를 바라보던 수호가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해동의 색을 품고 태어난 후손은 아니나, 쥬다스는 제국의 황태자임과 동시에 해동 왕가의 피를 이었다. 그를 따르는 백호의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터였다. “객들께선 이곳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수호는 그들을 우선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먼 길을 찾아왔으니 우선 씻고 여독을 풀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여겼기 때문이다. 왕은 타국에서 찾아온 조카를 당장 만나고 싶어 했지만 혹여 불편하기라도 할까 저어하여 일부러 하루 간 휴식을 취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쥬다스 일행은 왕에게 인사를 가는 대신 편안한 마음으로 주어진 휴식을 즐기게 되었다. 안내를 마친 수호가 물러나자 그들끼리만 남게 된 일행은 각자 방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그리고 주어진 의복으로 갈아입은 후 쉴 사람은 그대로 쉬고, 몇 사람만 그 앞 작은 화원에서 얼굴을 맞대었다. 나와서 보니 약속이라도 한 듯 모처럼 루바흐 동창생인 쥬다스와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만이 나란히 모여 있었다. 화사하게 피어난 자줏빛 봄꽃 사이로 흰나비가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어우, 여기 옷은 원래 이런 겁니까? 굉장히 불편한데요.” 해동의 의복은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모조리 길이가 길었으며 겹겹이 덧입는 방식이었다. 루바르잔에선 여러 겹을 입는다고 해봤자 블라우스에 베스트, 자켓 정도로 구성되지만 해동은 그 정도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일고여덟 번을 더 걸쳐 입었다. 아예 속옷부터가 의복 디자인의 일부였다. 꼭 이곳의 옷이 아니라 챙겨온 의상을 입어도 예법에 어긋나지 않지만 쥬다스가 온전한 순례의 길을 택했기에 정식 예복은 따로 준비해 오지 않았다. 그러니 왕이 기거하는 궐에서 예의를 차리기 위해선 이곳의 복식을 따라는 수밖에 없었다. 바이칼은 마치 여성의 치마처럼 치렁치렁한 바짓단과 이를 고정시켜 주는 오비를 점검하며 어색하게 구시렁거렸다. “입는 것도 복잡하고 활동하기도 어렵고. 이래서야 뛸 수도 없겠네요.” “서적에서 본 바로는 이곳 사람들은 뛰는 걸 방정맞다고 하더군.” “그럼 급한 용무가 생길 시에는 어찌합니까? 갑자기 적이 나타나면요?” 그는 에단의 설명에도 납득하지 못하고 질문을 더했다. 나름 친절하게 일러주었던 에단은 같은 의문에 봉착하여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바이칼은 품이 넓은 소매를 이리저리 깃발처럼 흔들었다. “이건 뭐 자기 옷에 걸려 자기가 넘어지게 생겼다니까요. 확실히 보기에 멋은 있는 것 같은데. 그 외엔 효율이 완전 꽝이지 않습니까? 뭐하러 이렇게 펄럭펄럭…….” “복장에는 사람의 인상과 예의가 녹아 있어.” 바이칼의 불만을 뚝 끊고 들어온 건 크리스티나였다. 그녀가 착용한 건 단아한 저고리와 긴 치마로 구성된 풍성한 스타일의 의상이었다. 굳이 헤어스타일까지 맞출 필요는 없어 길게 늘어뜨린 바닷빛 투톤 머리카락이 허리선에서 찰랑였다. 이국적인 외모와 색상이 해동 전통예복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조화를 만들어냈다. 그렇지 않아도 아름다운 외모의 크리스티나였는데 독특한 의상으로 인해 분위기가 달라져 별거 아닌 한마디에도 바이칼이 움찔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활동성과 효율만을 중시하는 건 그러한 활동이 필요한 상황에서의 이야기지. 예의와 품격을 우선으로 치는 장소에서는 이를 극대화할 필요도 분명히 있지 않나.” “그렇지만 크리스티나 님, 이건 좀 과하지 않습…….” “그대의 기준으로 생각하지 마.” 또다시 말이 잘렸다. “다수의 가치동의하에 만들어지는 것이 그 나라의 문화다.” “옙.” 결국 바이칼은 더 이상 복장의 비효율성을 제기하지 못하고 순순히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쥬다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꼭 의좋은 오누이를 보는 것 같구나.” 크리스티나는 소리 내어 반응하는 대신 표정으로 의중을 드러냈다. “아니…… 그렇다고 그런 표정까지 지으실 필요는.” “만일 저한테 동생이 있었다면 저렇게 키우진 않았을 겁니다.” “제가 동생입니까?!”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은 둘 다 19세로 동갑이다. 더 세세하게 생일로 따지자면 크리스티나가 누나인 게 사실이긴 했으나 바이칼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에이, 지위를 떠나 포지션으로만 보자면 제가 좀 더 오빠 느낌이죠. 크리스티나 님은 집안에서 막내잖습니까? 저는 동생들을 여럿 돌보아온 경험이 있다고요.” “희한하군. 동생들이 그대를 돌본 게 아니라?” “대체 제가 평소 뭘 했다고 그런 이미지가.” “뭘 하지 않아서겠지.” “……단장마저.” 젠장! 바이칼은 탄식했다. 애초에 루바흐에 다닐 때부터 느끼곤 있었지만 도무지 이 모임에서 제 편은 아무도 없다. 그리 투덜거린 바이칼을 쥬다스가 부드럽게 달래주었다. “어리다는 건 장점이 될 수 있단다, 바이칼.” “장점이요?” 전부 아직 ‘어리다’는 수식을 싫어할 나이이긴 했다. 사람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을 늘 품고 있기에 아이는 어른이 되고 싶어 하고, 어른은 반대로 아이가 되고 싶어 하곤 했다. 어른 정도가 아니라 노년기까지 겪어본 쥬다스는 빙긋이 웃으며 바이칼의 머리를 토닥였다. “암, 장점이고말고. 어리다는 건 무언가 하나를 실패해도 다시 다른 걸 시도해 볼 기회가 많다는 뜻이니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본인은 바이칼보다 2살이나 어렸다. 그러나 그의 세상 다 산 노인 같은 언행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세 사람은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넷은 우두커니 서서, 잠시 동안 말없이 단아한 화원과 소담한 돌길, 낮은 전각 등을 바라보았다. 아직 밝은 대낮이라 멀리 지어진 건물까지 훤히 보였다. “참 좋은 나라입니다.” 문득 크리스티나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한 소녀가 자라기에 어둡지 않고, 너무 밝지도 않은.” 하윤 공주 이야기였다. 궐은 조용했지만 적막한 것과는 달랐다. 종종 그녀를 찾아오던 백호와 어릴 적부터 친우로 자라온 연수호, 그리고 오라버니인 이서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던 그네와 아름다운 화원은 주인이 떠난 뒤에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켜왔다. 마치 언제고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듯이. ‘어머니…… 라.’ 전생의 자아가 깨어나기 전 백치에 가까웠던 쥬다스의 어린 자아는 어머니인 하윤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하지만 이전 생에서의 기억을 되찾은 그에게 있어선 어색한 느낌이었다. 본디 ‘이그레트’는 제 부모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버려진 평민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윤과 황제 레위스는 그가 두 번의 삶을 통틀어 기억하는 유일한 부모인 셈이다. 하지만 황제는 자식을 그릇으로만 판단하는 무정한 아버지였고 하윤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 크리스티나 네 말대로 참 좋은 곳이로구나.” 쥬다스는 은은한 미소와 함께 동의했다. 끝은 비참했을지언정 하윤의 삶은 대부분 행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사실은 슬픈 말로를 기억하고 있던 쥬다스에게 안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던 백호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화원 속으로 들어갔다. 만개한 봄꽃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백호의 곁에 유니가 따라가며 물었다. 「어디 가?」 「여긴 내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라서 말이다냥. 난 좀 둘러보고 오겠다냥.」 「마음의 고향이면 진즉에 좀 자주 들르지.」 「예쁜이도 없는 빈 궐에서 뭐한다냥. 더 이상 내 얘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아기호랑이는 유연하게 꽃가지 아래로 걸어 화원을 횡단했다. 계약자로부터 일정 거리 이상 멀어지자 유니는 더 이상 그를 따라가지 않고 멈추었다. 그리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백호의 등에 대고 소리 높여 그를 불렀다. 「그런데 백호!」 「왜 부르냥. 귀찮게 굴지 말고 계약자에게나 돌아가라냥. 그러고 보니 그 이그레트라는 인간, 소문은 들었지만 과연 굉장한 친화력…….」 「넌 왜 그렇게나 예뻐한 하윤 공주와 계약하지 않은 거야?」 백호는 지독한 덫에 걸리기라도 하듯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할 수 없었다냥.」 「왜?」 「바보 같은 질문 좀 하지 말라냥. 정령이 계약을 원해도 하지 못할 경우는 얼마 안 되지 않냐릉.」 「하윤 공주가 계약을 거절했어?」 정령이 계약을 원했음에도 성사되지 않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정령 자체가 자유를 추구하여 특정인에게 잘 끌리지 않으며 일반적으로 계약을 부탁하는 쪽은 정령이 아니라 술사다. 간신히 정령이 소환에 응한다 해도 계약을 거절하고 되돌아 가버리는 일도 태반이었다. 마찬가지로 무려 정령이 호감을 느낀 상대가 직접 계약을 거절한다면 계약은 성사되지 않는다. 유니의 추측을 들은 백호가 울컥 성난 표정으로 여린 풀밭을 발톱으로 헤집어놓았다. 「거절한 게 아니다냥.」 「그럼?」 「술사로서의 자질이.」 정령의 호감과 술사로서의 자질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 하윤은 사방신수의 마음을 얻었으나 그들과 계약할 만한 자질이 없었다.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친화력이 빵점이었다냥.」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ㅎ 0160 / 0240 ---------------------------------------------- 19장. 소망 백호의 하소연을 들은 유니는 입을 헤에 벌렸다. 황당한 이야기였다. 술사는 정령을 다룰 때 정신력을 사용한다. 그러나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제로에 수반한다면 그들과 공명하고 통제할 정신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었다. 장작이 없으면 화로에 불을 붙일 수 없듯이 어린 하윤과 백호 간의 계약은 허무하게 무산되었다. 「그래서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보려고 했는데.」 어릴 적에 아무리 친화력이 없어도 신수가 오랫동안 곁에 머물다 보면 성년이 될 때쯤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백호는 그녀가 성인이 되기를 기다렸지만 해동 왕실에선 그 사실을 몰랐다. 결국 급격하게 무너져 가기 시작한 나라를 위해 왕녀는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졌다. 「인간은 정말 멍청하다냥.」 인내심도 없고 통찰력도 부족하다. 백호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포로록 날아 계약자에게로 되돌아가는 유니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중한 자와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계약으로 이어진 그들이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자유.’ 정령술사들은 이 개념을 종종 오해하곤 했다. 정령에게 있어 자유란 술사를 만났을 때 비로소 주어진다.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욕심도 가질 수 없는 게 정령이다. 정령을 움직이게 하고 행복감을 느끼게 해주는 건 오로지 계약자뿐이다. 「에휴.」 깊은 한숨과 함께 막 꽃밭을 벗어나던 작은 호랑이의 시야에 낯익은 소녀가 들어왔다. 때마침 상대방도 백호를 발견하고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었다. “안녕, 호랑이님. 여기서 혼자 뭐해?” 「자기도 혼자면서 뭘.」 백호는 작게 중얼거리며 그녀가 내민 손끝에 코를 비볐다. 인간이 아닌 픽시에게선 숲의 청량한 향기가 났다. 「끄응. 이 꼬마는 이름이 뭐였더라.」 “란이야. 란.” 「아, 맞다냥.」 무심코 꼬리를 살랑거리던 백호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깃들었다. ‘뭐지, 방금.’ 백호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낮의 란은 갈라진 피부에 매부리코를 가진 추한 모습이었기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란은 말똥말똥한 눈의 백호를 마주 쳐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신기하다냥.」 “헤헤. 내가 좀 신기하게 생겼다는 말을 자주 들어. 그래도 보통은 깜짝 놀라거나 인상을 팍 쓰던데. 호랑이님이라 사람 얼굴에 관심 없나?” 「예쁜데? 보기 좋다냥.」 백호의 기준에서 란은 추녀가 아니었다. 정령은 외모보다는 영혼의 본질을 보기 때문에 오히려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기분 좋게 꼬리를 살랑거리던 백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화들짝 놀랐다. 어찌나 놀랐던지 털이 쭈뼛 일어났다. 「갸아악! 뭐, 뭐, 뭐다냥!」 “응? 왜 그래?” 「진짜 뭐냥? 너, 정령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거냐릉?」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당연하다냥! 정령의 언어는 계약자만이 들을 수 있다냥.」 “쥬다스 님과는 잘만 대화했으면서.” 「그거야…….」 백호는 잠시 그에 대해 떠올려보곤 코를 찡긋거렸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우리 사방신수는 다른 정령과 좀 다르다냥.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존재라면 꼭 계약을 맺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다냥.」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그 아이는 특별하지만.’ 만일 쥬다스가 해동 왕가의 핏줄이 아니었더라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백호와 대화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는 전생의 초기, 즉 갓난아기 때부터 이미 모든 정령과 대화할 수 있었다. 정령계에서 ‘이그레트’란 이름은 아주 특별했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그가 중심에 있다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자연계 정령왕을 모조리 매료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상식 밖의 일이었다. “그렇구나. 그럼 난 정말 어떻게 알아듣는 거지?” 란은 잠시 고민하다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보였다. “아마 내가 요정족이라서 그런가봐.” 「먀아아, 모르겠다냥.」 백호가 알기로 요정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정령의 언어를 알아듣는 건 아니었다. 숲을 관장하는 특별한 힘을 갖고 있으며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강할 뿐이다. 지금 백호와 대화하는 것과 다르게 란은 자연계 정령들이 하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충 정령의 분위기를 읽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정도만 가늠해 낼 수 있었다. 의문에 빠진 란과 백호는 서로를 향해 나란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나 좀 전에 호랑이님 말고 다른 사람도 한 명 만났어.” 「그러냥?」 “응, 조카를 만나러 왔대서 방향을 알려줬어. 이거 봐봐. 고맙다고 과자도 받았다?” 해맑게 약과를 꺼내 보여주는 란을 향해 백호가 돌연 눈을 반짝 빛냈다. “으앗!” 크기가 작긴 했지만 백호가 갑작스레 메뚜기처럼 폴짝 뛰어오른 탓에 쪼그려 앉아 있던 란은 뒤로 풀썩 넘어지고 말았다. 백호는 란이 들고 있던 약과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는…….」 “아야야. 호랑이님, 과자가 먹고 싶었으면 말을 하지. 근데 이거 되게 달콤하고 고소하고 느끼하고? 아무튼 맛있더라.” 온 김에 약과 만드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쫑알거리는 란을 두고 백호는 자신이 횡단해서 지나온 화원을 돌아보았다. 「어른이 돼서 달라졌나 했더니. 막무가내인 건 여전하구냥.」 백호는 밤톨마냥 쪼끄만 주제에 커다란 호랑이 앞에서 고집스레 여동생을 지키겠다고 나섰던 소년을 회상했다. 한 나라의 왕세자치곤 소탈하여 평복을 하고 자주 궁 밖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하수인들만 늘 발에 땀나게 아이를 잡으러 다녔다. 자존심이나 허례허식보단 실리를 추구하는, 제법 똘똘한 아이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윤과 마찬가지로 친화력이 없었던 데다 결정적으로 백호의 취향이 아니었기에 둘은 별로 친해지지 못했지만. ‘아! 그래도 청룡 녀석과는 제법 친했던 걸로 아는데.’ 꼭 계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사방신수는 해동 왕가에게 늘 호의적이었다. 백호가 이 궐을 마음의 고향이라 칭한 건 진심이다. 그들은 제 집 드나들 듯 아무 때나 해동의 왕궁에 찾아왔다. 내킬 때 와서 놀다가 또 어느 틈엔가 홀연히 사라지는 게 바로 사방신수였다. 백호는 반가움을 담아 갸르릉 목을 울렸다. 「‘서윤’.」 * * * 백호가 짐작했듯이, 마침 쥬다스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가 친우들과 함께 화원의 꽃을 구경하며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도중이었다. 우람한 체격을 가진 한 사내가 흡사 투우장 소처럼 맹렬한 기세로 달려왔다. 달리기에 거추장스러운 긴 바짓단은 걷어 올리고 두루마기는 아예 벗어서 망토처럼 묶어 펄럭거렸다. 그 기세가 어찌나 불같던지 기에 민감한 에단이 하마터면 무의식적으로 검을 뽑을 뻔했을 정도였다. 바이칼도 덩달아 품을 더듬어 스태프를 말아 쥔 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광인인가?’ 해동 특유의 검은 머리와 검은 눈, 짧게 기른 수염과 운동으로 잘 단련한 어깨 근육 등 멀끔하게 생긴 거구의 40대 남성이었다. 옷차림만 봐서는 미치광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잡스러웠다. 타국에서 온 객들조차 깔끔하고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눈썹이 휘날리게 달려와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고 있는 저 남자는 아무런 무늬도 넣지 않은 소복을 입고 있었다. 마치 평민이나 입는 단출한 복장에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등장에 모두 할 말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헉. 허억……. 누가, 누가…….” “……?” “누가 하윤 그 아이의.” 채 질문을 끝맺기도 전에 남자는 멀뚱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와 눈이 마주치고 입을 다물었다.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사내는 엄청난 거구였다. 키로 치자면 일행 중에서 가장 큰 에단보다도 한 뼘은 더 컸다. 거기다 체격도 커서 마치 한 마리 곰이 우뚝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 그가 쥬다스의 앞에 서자 태양이 가려져 그림자가 훅 드리웠다. 열일곱 살이라곤 해도 아직 성장기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다. 게다가 평소 입이 짧아 마른 쥬다스와 거구의 사내가 마주 보게 되니, 주위 사람들은 꼭 어른과 꼬마아이를 함께 보는 기분이 들었다. “…….” 잠시 말없이 쥬다스를 내려다보던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한참을 허공에서 머뭇대던 손은 이내 쥬다스의 머리에 조심스럽게 얹어졌다. 크고 두꺼운 손바닥이 깨지기 쉬운 도자기인형을 만지듯 잘게 떨렸다. “그래, 네가.” “…….” “어서…….” 톡, 토독. 강철같이 단단해 보이던 얼굴에서 눈물이 줄기를 이루어 줄줄 흘렀다. 처음으로 만난 조카의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사내는 품위를 챙기는 대신 많은 의미를 담은 눈물방울을 떨구었다. “어서 오너라.” 목이 아닌 가슴 안에서 끄집어낸 환영인사였다. 쥬다스는 그때까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사내는 조카의 냉담한 반응에도 개의치 않고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네 어머니의 오라비인 ‘이서윤’이다.” 설마하니 저 광인이 일국의 임금일 줄은 몰랐던 에단과 바이칼이 흠칫 놀라 손에서 무기를 놓았다. 아직 주군인 쥬다스가 인사를 마치기 전이었으므로 다른 세 사람은 그저 한 발짝 뒤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왕에 대한 예를 차렸다. “찾아뵙는 건 내일이 아니었습니까?” 혈육을 향한 첫 질문치고는 차가워 보이는 질문이었으나 서윤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차리고 따뜻하게 답해주었다. “으흠, 해동의 왕을 대면하는 날은 내일이 맞지.” “그럼 오늘 저를 찾아오신 분은, 단순히 ‘어머니의 오라비’이신 겁니까?” “바로 그렇다. 쿨쩍. 하윤이와는 다르게 아주 영특하구나.” 내 동생이지만 하윤이는 맹한 구석이 있었지. 서윤은 그리 말하며 히죽 웃었다. 눈물 섞인 웃음을 본 쥬다스는 그제야 서윤을 향해 제대로 된 인사를 올렸다. “……!” “외숙부께 늦은 첫 인사를 드립니다. 쥬다스입니다.” 그가 취한 행동은 다름 아닌 큰절이었다. 쥬다스는 먼저 상대가 어떤 입장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서윤이 임금으로서가 아닌 가족으로서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자신도 그에 맞추어 입장을 정했다. 대제국의 황태자가 타국의 왕에게 엎드리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러나 처음 만난 외숙에게 드리는 조카의 인사로서는 어긋남이 없었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이서윤은 물론이고, 한발 뒤에서 지켜보던 수하들은 아연실색하여 그대로 주군을 따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지위를 떠나 모시는 주인이 자세를 낮춘 이상 뻣뻣하게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예상치 못한 쥬다스의 태도 변화에 서윤은 놀란 것도 잠시, 곧 호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타국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어려운 동안 저를 한 번도 찾지 않은 염치없는 나라에 와, 그래도 외가랍시고 해동의 법도를 따를 줄이야.’ 웃어른에게 올리는 큰절은 제국에 없는 문화였다. 루바르잔 사람이 무릎을 꿇거나 허리를 숙이는 건 충성을 표하거나 자신보다 높은 지위의 사람을 만났을 때뿐이다. 어른을 공경하기 위해선 다른 세부적인 예법을 따른다. 특히 귀족사회에선 어른이라 해도 지위에 따라 도리어 아이에게 공손히 응대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지금 서윤의 눈앞에서 쥬다스가 택한 행동은 놀랍고도 고마우면서도 기특한 정성이었다. 주책없이 볼을 흐르던 눈물 대신 희미한 미소가 감돌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계속해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 0161 / 0240 ---------------------------------------------- 19장. 소망 “고맙다.”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난 조카를 향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했다. 왕답지 않게 투박하고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이 큰절을 올리느라 흐트러진 쥬다스의 옷매무새를 대신 정돈해 주었다. “실은 너를 만나기까지 무척 많이 망설였었다.” 지금까지도 걱정과 불안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서윤은 동생의 사망에 얽힌 비화, 그로 인해 아이가 겪어야만 했던 어두운 루바르잔 황궁의 암투를 전부 알고 있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네가 나를, 이 나라를 원망하고 있진 않을지.” 서윤의 눈이 진하게 우려낸 찻물처럼 쓰디쓴 감정으로 물들었다.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걱정되고 두려웠어.”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듯이 눈에도 한껏 짓무르고 피고름을 짜내 단단히 굳어버리는 살들이 있다. 그건 쥬다스도 가지고 있는 내면의 굳은살이었다. 서윤은 딱딱하게 굳고 지쳐 버린 눈으로, 그러나 자상하게 웃음 지었다. 그리고선 잠자코 듣기만 하는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외삼촌이 생긴 것과 어울리지 않게 겁쟁이라 혹시 실망했느냐?” “그럴 리가요.” 쥬다스는 상대가 안심할 수 있도록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은 누구나 겁쟁이입니다. 외숙께서 겁내지 않으셨다면 이 자리에서 저만 홀로 겁쟁이가 되었을 테지요. 오히려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어머니와 많이 닮았구나.” “……그렇습니까?” 해동에서만큼은 절대 들을 리 없을 거라 여겼던 말이었다. 그것도 하윤의 친오빠인 서윤의 입에서는 더더욱. ‘이거 참,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기억 속 생모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지만 무엇 하나 자신과 닮은 점이 없었다. 쥬다스는 혼혈이 아니라 그야말로 루바르잔 황조의 순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외형적 특징을 전부 부계로부터 물려받았다. 놀랄 만치 모계의 흔적이 없었다. 어색하게 되묻는 그에게 서윤이 강한 어조로 긍정했다. “아주 많이, 더 이를 데 없이 꼭 닮았어.” “어떤 점이 그리도 닮았는지요?” 다 자라고 나서야 겨우 이렇게 만나게 되긴 했지만 어머니에 대해 묻는 조카는 여전히 아이 같았다. 서윤은 안타까움과 함께 짙은 감동을 느꼈다. 여동생의 아들은 막연히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무척이나 귀여웠다. 열일곱이 이렇게나 작고 사랑스러운 나이였던가. 서윤은 제 덩치 생각은 못하고 속으로 그리 되뇌었다. “이 나라에서 얼굴은 얼을 담는 굴곡이라 하며,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하지. 네 나이 때는 아직 모를 이야기다만.” “참으로 좋은 표현입니다.” 육신의 나이가 아니라 그가 실제적으로 살아온 세월만으로 치자면 모르는 게 이상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서윤은 맞장구를 쳐오는 쥬다스를 기특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네 얼굴, 특히 눈이 하윤일 똑 빼닮았어. 마치 그 아이와 대화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자신은 모르는 모친과의 공통점을 타인이 발견해 주자 기이하게 느껴졌다. 쥬다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피부색부터 머리카락이며 눈 색 등이 전부 달랐지만 듣고 보니 얼굴형은 조금 비슷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그렇지. 단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만.” 서윤은 망토처럼 두르고 온 두루마기를 풀어 탈탈 털었다. 그러자 마치 마법처럼 한지에 곱게 포장된 약과며 유과, 양갱 등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그러곤 그가 하는 양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쥬다스에게 그걸 다 한 아름 안겨주었다. “이것은.” “무엇을 좋아할지 몰라 달고 맛좋은 과자는 전부 챙겨왔다. 친구들과 함께 맛보려무나.” 서윤은 뒤에 시립한 에단과 크리스티나, 바이칼을 눈짓하며 덧붙였다. 눈치가 빠른 외숙은 짧은 사이 그들이 단순한 군신관계가 아니라 막역지우로 자라왔단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린아이도 아닌 그들이 달콤한 과자에 들뜰 리는 없었지만 처음 만나는 조카를 생각하며 심도 있게 과자를 고르던 서윤의 모습이 상상되어 다들 작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순간, 어디선가 한을 품은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저어어언하아아아!” “아이쿠. 이런.” 서윤은 낭패한 얼굴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힐끔거렸다. 그리곤 엉망으로 구겨진 두루마기를 홀홀 털어 어깨에 척 걸쳤다. “내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는지라 이만 가봐야겠다.” “살펴 가십시오.” 수하들이 저렇게 한을 품고 찾아다니는 걸 보니 평소에도 꽤나 제멋대로인 왕인 모양이었다. 쥬다스는 그가 안겨준 과자를 잔뜩 품에 든 채 쿡쿡 웃었다. 자리를 떠나려다 그 모습을 본 서윤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하윤아.’ 소리 죽여 웃는 모양새도 어쩌면 저리 죽은 누이와 닮았는지 눈을 뗄 수가 없다. 서윤은 울컥 치솟아 올라오는 그리움에 못 이겨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어찌 그러십니까?” “네게 너무 미안하다.” “외숙께서 원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쥬다스의 말처럼 서윤은 끝까지 여동생을 타국에 공물로 바치는 것을 반대했다. 거세게 반발하며 왕세자로서의 체면과 책임도 마다않고 무릎 꿇은 서윤에게 노한 선왕은 그를 골방에 가두라 명했다. 그리곤 더 손쓸 틈도 없이 하윤을 보내 버렸다. 한 번 황제의 손에 넘어간 공물을 되찾을 방법은 없다. 그로 인해 나라는 멸망을 면했으며 이제 와서야 간신히 안정기에 돌입했다. 누이의 죽음과 관련해 서윤이 원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더욱 죄책감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내 대신 지켜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태양의 곁에 있다면, 적어도 그 여린 한 목숨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어쩌면 항의 정도가 아니라 필사적으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막았더라면 하윤을 그리 보내지 않아도 되었을지도 모른다. 서윤은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그 역시 선왕이었던 아비와 다를 바 없이, 현실과 타협해 책임을 떠넘긴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 아무리 황제께 보냈다 한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무수한 것들을 발아래 두고서도. “선왕께서도, 또한 루바르잔의 황제께서도. 각기 나라를 지켰을지 모르지만 고작 가까이 곁을 주었던 한 사람을 지키지 못해서.” 쥬다스는 서윤의 후회를 들으며 깨달았다. 외숙은 지금 자신을 등진 사람들이 했던 말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도 아프게 다가와서 쥬다스는 꽉 쥐었던 주먹을 맥없이 풀고 말았다. 바로 힘 있는 자가 해야 할 일. ‘결국은 내가 했어야 한 일.’ 그것은 자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뜨거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머리로 이해한 것과 가슴으로 절절히 이해한 것은 완전히 무게가 달랐다. “여기 계셨사옵니까, 전하!” 그때 누군가 전각 지붕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그는 하얀 의상을 입은 서윤과 대조적으로 짙은 남색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에서 감나무 감 떨어지듯 툭 떨어졌다. “후. 아무리 궐 안이라지만 혼자 다니시면 위험하다고 제가 귀에 못이 박히게……!” 이를 갈며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왕의 직속호위였다. 겉보기에 따로 무기를 장비하고 있진 않았지만 그로 인해 지금껏 한 번도 왕의 신변을 위협할 자가 없었던 만큼 확실한 강자였다. 문제는 적의 암습보단 지금과 같은 개인 행동이었다. 국왕 이서윤의 충동적 일탈을 하루 이틀 보아온 게 아닌지라 호위의 표정은 그다지 공손하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던 호위는 서윤의 곁에 선 쥬다스를 발견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분이 하윤 공주님의?’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소문은 빨랐다. 따로 공표하거나 기별을 하고 찾아온 건 아니었지만 이미 수도 전역에 루바르잔 황태자의 방문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궁 안에선 말할 것도 없었다. 호위는 이번만큼은 국왕의 경솔한 행동을 타박하는 대신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며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성왕을 모시는 검 ‘정다울’이라 합니다.” 이름을 소개할 때 루바르잔식으로는 ‘다울 정’이라 하겠지만 해동에선 해동의 언어 규칙을 따랐다. 쥬다스는 이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쥬다스입니다.” 일단은 사석이었으며 왕과 황태자가 아닌 외삼촌과 조카의 만남이었다. 대제국 군주의 후예가 건네는 예의바른 인사를 통해 상황을 이해한 다울의 눈에 감탄의 빛이 깃들었다. ‘큰 그릇이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라 해도 아직은 혈기와 감정에 치우칠 나이건만 그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느긋한 성품을 가지고 상황에 기꺼이 자신을 맞춰주는 여유가 보였다. 결코 삿된 자존심이나 허영에 내면을 맡기지 않는 자다. 왕의 호위로 오래 지내오면서 만나는 사람에 대한 경계와 분석이 몸에 밴 다울은 한눈에 쥬다스가 지닌 군주로서의 상을 알아보았다. “큼. 흠.” 서윤은 부드러운 위압감에 눌려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버린 호위를 향해 헛기침을 뱉었다. 덕분에 상념에서 빠져나온 다울이 서윤을 향해 지긋이 눈길을 보냈다. 뜻밖의 손님을 만나 기껏 가라앉았던 잔소리가 다시 목 끝까지 차올랐다. “이만 돌아가려던 참이었네.” “…….” “음. 정말일세.” “…….”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수하를 보며 서윤은 홀로 와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호위 정다울은 차마 귀한 손님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라 모래 씹은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리고 그 둘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낀 루바르잔 측 호위 세 사람도 불안한 생각에 빠졌다. ‘닮으셨어.’ ‘……하필 닮으셨군.’ ‘어후. 이거 완전히 빼닮으셨는데.’ 평소에는 온화하나 한 번 무언가에 꽂히면 지독한 쇠고집에 마이페이스. 그 점 하나 만큼은 영락없이 닮은 삼촌조카사이였다. 크리스티나와 에단, 바이칼은 어쩐지 자신들의 미래를 보는 기분에 다울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내 눈치가 없어 좋을 대로 찾아와 친구들과 노는 시간을 방해했구나.” “아닙니다. 이렇게 먼저 뵙게 되어 좋았습니다.” “그래그래. 내일은 다시 인사를 나눠야겠지. 그때 보자, 쥬다스.” 정식으로 두 사람은 아직 만나지 않은 사이다. 대중 앞에서 정치란 마치 하나의 연극처럼 이루어진다. 이미 알아도 모르는 척, 처음 본 사람들처럼 새롭게 인사를 나누어 두 나라 간의 관계 증진을 도모한다. 이때엔 언행을 조심하여 각 나라에서 책잡힐 일이 없도록 해야만 한다. 서윤은 처음 광인처럼 달려왔을 때보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되돌아갔다. 멀어지는 해동 국왕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쥬다스는 이내 참고 있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의 외숙께선.” “예, 전하.” “좋은 분이시구나.” 분명 하윤에게도 좋은 오라버니였으리라. 여동생에 대한 애정은 내리사랑으로 이어져 조카에게까지 번졌다. 맛난 과자 하나라도 챙겨 먹이고 싶어 하고, 혹 외가를 원망하지 않을까 불안에 떨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 무조건적인 애정이 도리어 가슴 아팠다. 그는 어미를 지키지 못한 어린 자아의 슬픔을 기억했다. ‘잘못했어요.’ 아이는 끊임없이 용서를 빌었다. 자신의 존재가 어머니를 위협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자신이 사라지기를, 그리하여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숨이 멎는 순간까지 간절히 바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극적으로 전생의 기억이 돌아오면서 ‘이그레트’라는 보다 성숙한 자아가 다시 모든 것을 총괄하게 되었고, 그는 아이로서 느끼던 죄책감으로부터 일정 부분 해방되었다. 하지만 ‘이그레트’와 ‘쥬다스’는 처음부터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어미에 대한 죄책감을 전부 떨쳐낼 수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밀린 분량 업로드 완료! (...) 참, 모처럼 봄비가 주륵주륵 내리길 기대했는데 금방 하늘이 맑아졌네요.ㅎ 아쉬워라.. 그래도 봄꽃들은 아직 살아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꽃구경 못하신 분들은 그냥 동네 공원에라도 구경나가보셔요.ㅎㅎ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162 / 0240 ---------------------------------------------- 19장. 소망 “전하.” “음?” 크리스티나가 그를 부르곤 잠시 머뭇거렸다.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십니까.’ 사실은 그리 묻고 싶었다. 쥬다스는 여전히 자상한 미소로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오래 그를 보아온 친우들은 전부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차마 이유를 묻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해동에선 얼마나 머무실 생각이십니까?” “흠, 글쎄다. 우리 여행의 본래 목적은 제국와 동맹국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고 돕는 일이지. 어쩌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딱 언제까지라곤 잘라 말하기 어렵겠구나.” 수도로 오는 동안 지나쳐 온 해동의 마을들에선 전부 수상한 움직임이 발견되었다. 그게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라면 좋겠지만 쥬다스는 지난번 레이야와 만나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나라에 귀기가 드리운 원흉은 바로 사령술사다. “이곳 궐에는 국왕께 직접 초대받아 온 것이니, 만나야 할 사람들을 다 만나고 나면.” 그가 만나야 할 사람들 중에는 악연도 필히 섞여 있을 테였다. 쥬다스는 크리스티나의 걱정스런 눈빛을 마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당연한 한마디였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크리스티나는 홀린 듯이 빛나는 금안을 바라보다 천천히 그를 따라 입 꼬리를 올렸다. 웃음과 눈물은 전염성이 있어 금방 따라하게 된다. 그리고 쥬다스가 짓는 잔잔한 미소는 주변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옮아가고 있었다.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그 무뚝뚝하던 에단도,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멸시하던 자기중심적 사고의 바이칼도 이제는 남을 향해 먼저 웃어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달을 비롯한 행성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을 비추는 태양빛을 반사시켜 어둠 속에서 빛난다. “예, 따르겠나이다.” 파랗기만 하던 하늘에 살며시 금빛 노을이 번져가듯, 그는 그렇게 모두를 물들였다. * * * 다음 날 정오, 쥬다스는 대전에서 정식으로 왕을 만났다. 이서윤은 전날 소복만 입고 나타났던 허름한 몰골과 다르게 엄중히 의관을 갖추고 자리에 나왔다. 임금만이 입을 수 있는 곤룡포는 검은색과 붉은색, 노란색이 섞여 있었다. 바지는 루바르잔의 정장을 연상케 하는 검은색이었으며 요대로 묶은 허리선부터는 노란색 실을 땋아 파도처럼 엮어놓았다. 윗옷은 얇은 비단을 여러 겹 덧댄 후 마지막으로 바닥까지 끌리는 긴 붉은 두루마기를 걸쳤다. 거대한 체구에 화려한 의복이 갖추어지니 그야말로 위엄 있는 국왕의 모습 그 자체였다. 어제 그를 보았던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의 시선으론 마치 이서윤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온 것만 같았다. 오늘 대전에는 쥬다스의 곁에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뿐 아니라 세이지와 콜, 란 등을 비롯한 모든 일행이 집결했다. 호위를 위해 따라온 친위기사단도 전부 작위가 있는 귀족이었기에 함께하기에 무리가 없었다. 유니는 쥬다스의 어깨에 앉은 채 고개만 이쪽저쪽 돌려 구경했다. 「사람이 무지 많네.」 왕을 대면하는 자리에는 해동의 문관, 무관 귀족들이 함께 출석했다. 쥬다스 일행과 일면식이 있는 연수호도 그 틈에 섞여 있었다. 무수한 눈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쥬다스는 왕과 형식적인 인사를 주고받았다. 「심심하다냥.」 백호는 사람들의 시선이고 뭐고 바닥에 길게 누워 끙차 기지개를 켰다. 가죽이 호피무니긴 해도 생긴 건 영락없는 하얀 고양이였던지라 누구도 백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대신 다른 정령들이 관심을 주었다. 「저기 백호. 너 이젠 아예 고양이가 되기로 한 거야?」 「그럴 리가냥! 힘은 차근차근 회복하고 있다냥. 쓸데없이 낭비하기 싫은 것뿐이지.」 백호는 누운 채로 고개만 들어 대답했다. 그러자 카니가 동그란 눈망울을 깜빡이며 동조했다. 「으응, 하긴. 당신 지금 그 모습이 편해 보여요.」 「편하긴 한데 좀 괘씸하다냥.」 「뭐가?」 백호는 제겐 시선 한 줌 주지 않는 해동 귀족들을 흉흉한 눈길로 노려보았다. 「어떻게 크기가 좀 작아졌다고 나한테 이럴 수 있다냥? 내가 여기서 산 게 얼만데!」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니까 서러워?」 「으이익, 서러운 게 아니다냥! 화내는 거다냥! 이게 바로 배은망덕이다냥!」 「아니아니. 딱히 일부러 널 무시하는 건 아니라고 봐. 못 알아볼 만 하게 생겼구만, 뭘.」 유니의 의견을 들은 백호는 빠직 미간을 꾸기며 반박했다. 「잘생긴 이 몸을 못 알아보는 게 말이 되냥?」 「얼씨구. 솔직히 너 지금 아무리 봐도 고양이거든?」 「어딜 봐서냥!」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백호의 외침에 정령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일단 그 야옹거리는 소리부터 문제가 아닐까.」 「우웅? 야옹이니까 야옹야옹 하는 거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원래 호랑이는 냥~ 이 아니라 어흥! 이잖아요.」 「이, 이건 그냥 버릇이다냥…….」 백호는 소심하게 항변한 후 앞발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얄미운 자연계 정령들은 저들끼리 똘똘 뭉쳐 백호를 놀리기에 여념 없었다. 그 생각에 이가 갈린 백호는 시무룩해져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씨. 평소엔 도움 안 되는 녀석들이라도 이럴 때 있으면 좋았을 텐데.’ 미우나 고우나 가재는 게 편이라고 결국 같은 계열 정령끼리 뭉치게 되어 있다. 백호는 다른 신수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다 마지막으로 청룡을 떠올리곤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청룡!」 「응?」 백호는 용수철처럼 폴짝 뛰어올라 긴 탁자 위로 안착했다. 사람들이 고양이를 보고 당황해 입을 다문 사이 백호는 서윤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청룡 녀석, 서윤 너랑 함께 있지 않았다냥?」 “…….” 사방신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범주엔 해동의 왕인 서윤도 해당되었다. 그가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자 백호는 답답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청룡은 수도를 지키는 신수였으니까냥. 엉덩이가 무거워서 잘 돌아다니지도 않고냥. 게다가 서윤 너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냥?」 “……그렇지 않아도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던 참입니다.” “전하?” 갑작스런 임금의 말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모두 들으시오. 우리 해동은 뿌리부터 지금 이 시점까지 언제나 사방신수의 수호를 받아왔소.” 서윤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단호히 말을 꺼냈다. “해동의 민족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것이오. 사방신이 흔들리면 나라가 함께 흔들렸으며, 사방신이 평안하면 나라도 함께 평안했다는 것을.” 귀족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서윤은 그들을 훑어본 후 다시 백호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 「냐앙?」 “신수들의 힘이 위협받고 있소. 청룡께선 크게 기력을 쇠해 회복기에 들어가셨으며, 현무와 주작의 행방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뭐라고? 청룡 그 녀석 다쳤다냥? 지금 이곳에 있다냥?」 백호는 궁에 다시 온 후 지금까지도 청룡의 기운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백호 자신이 힘을 잃어 약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 정도로 아예 모르고 있던 건 아주 심각한 상황이란 뜻이었다. 망연히 넋을 놓은 백호를 잠시 내려다본 서윤은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공손히 가리켜보였다. “그리고 여기 계신 신수 백호께서도 마찬가지.” “설마……!” “백호님?!” “호랑이가 아니라 고양이셨다니!” 「느아아아, 저것들이 진짜.」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백호는 해동 사람들의 격한 반응을 보고 괘씸함에 수염을 꿈틀거렸다. 이미 사실을 알고 있던 쥬다스 일행만이 평정을 유지한 채 성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하여 신수의 수호를 잃은 온 나라가 어두운 그림자에 뒤덮이고 있으니.” “……!” “이 시간 이후 금기 ‘사령술’을 몸에 익힌 자들을 나라의 주적으로 간주할 것이오.” 사령술사들에 대한 전쟁선포였다. 해동의 임금은 더 상황이 심각해지기 전에 나라를 지키기 위한 수를 아낌없이 두었다. “이는 명백히 나라의 위기에 해당하니. 동맹국 루바르잔에 사실을 가감 없이 알리는 바.” 하윤의 희생으로 간신히 바로 세운 나라가 생각지도 못한 적에게 다시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적을 감추어버린 주작과 현무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서윤은 마지막으로 쥬다스를 돌아보며 강한 어조로 말을 끝맺었다. “빠른 시일 안에 루바르잔에서도 이에 대한 대처가 필요할 것이오.” 제국의 황태자와 해동의 임금 간 이루어진 첫 인사 자리는 무거운 분위기에서 파했다. 공식석상에선 분명 그러했으나, 막상 자리를 파한 후 서윤은 쥬다스를 따로 불렀다. “아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서 놀랐지? 미안하다.” 쥬다스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아가 취급하고 있는 서윤의 말에 당황하여 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란다. 루바르잔 황제께서도 알아야 할 내용이야. 오늘 들은 이야기를 아버지께 잘 전해드릴 수 있겠느냐?” “……그건.” “으흠! 역시 네게 짐이 되겠지. 그래, 차라리 사람을 함께 보내마.” “아뇨. 그러실 필욘.” 이미 서윤은 붓을 쥐고 서신을 작성하고 있었다. 쥬다스는 작게 한숨을 쉬며 차분히 그를 말렸다. “그저 현재 상황을 폐하께 알리는 정도라면 마법을 이용해 즉시 전달할 수 있습니다.” “마법! 그렇지, 루바르잔이 마법강대국이란 사실을 순간 망각하였어.” 해동에선 마법을 다루는 이능력자가 없다. 마법뿐 아니라 정령술이나 치유술 등 대다수의 서방계 이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로 무예를 익힌 신체형 이능력자와 점성술을 익힌 무녀들, 마지막으로 연금술을 전승받는 극소수 고위계층이 존재할 뿐이다. 서윤은 그 자리에서 전달할 내용을 마법활자로 저장하여 마법진을 통해 전송하는 바이칼을 보며 몹시 신기해했다. 그러다 능숙하게 수하들을 총괄하는 쥬다스를 힐끗 보며 잠시 딴 생각에 빠졌다. ‘……한데 저 아이. 제 아비를 아버지가 아니라 폐하라 부르는 건가.’ 사적인 자리에서만큼은 서윤조차 ‘외숙’이란 호칭으로 부르는 쥬다스였다. 그런 아이가 유독 자기 아버지인 황제에게는 거리를 두고 표현했다. 루바르잔 황실이 유독 혈육 간에 정이 없고 냉혹하며 대제국 군주의 자리는 피로 물든 권좌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들어 알고 있긴 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서윤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정이 많은 아이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염치없는 외삼촌을 찾아와 웃어줄 정도로. 저 따뜻한 아이가 거리를 두고 대할 정도라면 아마도…….’ 어쩌면 루바르잔 황실은 하윤이 일찍이 눈을 감은 후 홀로 남은 조카에게 상상했던 이상으로 잔혹한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또한 군주이기 전에 아버지가 아닌가.’ 서윤도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고 있어 아비로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저 여리고 착한 조카가 지금껏 잘 자라나 제자리를 유지한 것이 황제의 보호가 있었기 때문이라 추측했다. 그래야만 했다. 만일 그마저도 없었다면, 도대체 누가 저 아이의 편에 서서 살아갈 길을 열어주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혼자 가시밭길을 걸어왔으리란 가능성은 상상조차하기 힘들었다. “……그렇지?” 서윤은 부디 그러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중얼거렸다. 때마침 마법문서 전송 작업을 마치고 돌아선 쥬다스와 눈이 마주쳤다. 쥬다스는 마치 서윤의 불안한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어어어 어제부터 목감기에 제대로 걸렸습니다. 아픈 건 목인데 이상하게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_@ 저를 액땜삼아 독자님들께선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ㅠㅠ...!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별 -> 행성 : 수정하였습니다. 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0163 / 0240 ---------------------------------------------- 19장. 소망 “형님, 더 전달하실 내용이 없다면 진을 해제할까요?” “오냐. 그러고 보니 이젠 마법진도 사용할 줄 알고 대견하구나, 세이지. 그간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야.” 전송 마법을 발동시키는 인원 중엔 세이지도 껴 있었다. 진을 그리는 건 상당히 복잡하고도 어려워 제대로 익히지 않고서는 마력배열 실패로 인한 캔슬이 일어난다. 단 한 차례의 실패도 없이 곧장 전송 마법을 발동시켰다는 건 완벽하게 마법진에 대해 숙지했다는 뜻이다. 존경하는 이에게 칭찬을 듣게 된 세이지는 얼굴빛을 환하게 물들였다. 기쁨이 역력한 표정을 억지로 감추느라 아이의 뺨이 상기되었다. 그러나 세이지는 자만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진을 그리는 건 바이칼 경이 전부 도맡아했습니다. 그, 저는 그려진 진을 따라 마력을 배열하고 발동시키는 일에 힘을 조금 보탰을 뿐이에요.” “조금이라뇨. 그려진 진을 따라 오차 없이 마력을 배열하는 일도 절대 쉬운 일 아닙니다? 덕분에 훨씬 빨리 전송할 수 있었습니다.” “흠. 그렇다는데.” 바이칼의 첨언을 듣고선 쥬다스가 능청스럽게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그의 어린 동생은 어쩔 줄 모르고 어색하게 웃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형님, 저 사실 바이칼 경에게 마법을 다시 배우고 있어요.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많이 미숙하지만.” 본래 황족을 가르치는 스승은 그만한 지위와 학식을 지닌 자가 따로 임명받는다. 제대로 된 스승도 아니고 황태자의 친위기사에게 가르침을 받는다는 사실은 황족의 존엄을 해치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세이지는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히 제 형에게 밝혔다. 전보다 훨씬 진솔하고 당당해진 아이를 보며 쥬다스는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그래. 응원하마.” 서윤은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형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이지와는 공식석상에서 인사를 나누긴 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서윤은 사야 황후가 저지른 죗값을 당시 9살이던 어린아이에게 물을 정도로 감정에 휘둘리는 사내가 아니다. 도리어 배경은 다르나 그도 권력의 중심에 선 국왕이기에 하윤의 죽음이 세이지의 탓이 아니란 걸 이해하고 있었다. 잘못한 일이 아니니 잘못을 묻지 않았고, 용서할 일이 아니니 용서하지 않았다. 대신 세이지를 쥬다스의 동생으로 대하지도 않았다. 서윤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조카는 쥬다스 한 사람뿐이다. 세이지는 루바르잔의 3황자이자 원수의 자식일 뿐, 굳이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쥬다스는 그러한 서윤의 심정을 눈치채고 필요 이상으로 세이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동생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 속죄를 하라거나 해동의 임금과 친해지라는 뜻이 아니었다. 직접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식으로 이서윤과 냉랭한 관계가 유지됨으로 인해 세이지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서윤에게 세이지가 원수의 자식이듯, 세이지에게도 사실 그는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어미는 악인이었으나 아이에게만큼은 세상의 전부였다. 한 번 세상을 잃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다시 억지로 용서를 구하거나 아무렇지도 않게 친밀해질 자신이 없었다. 「서윤, 서윤. 청룡은 지금 어디 있냥?」 잠시 넋을 놓고 있던 사이 백호가 서윤의 바지자락을 물고 늘어졌다. 서윤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백호를 내려다보았다. “백호께서 조카아이와 함께 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서요산에서 사령에게 쫓기고 있을 때 만나 도움을 받았다냥.」 “무사하셔서 다행이군요.” 서윤은 차분하게 안도를 표했다. “청룡을 만나보겠습니까?” 백호가 그러겠다고 답하자 왕은 청룡이 있는 곳에 몸소 안내해 주겠다며 돌아섰다. 펄럭이며 바닥에 가라앉은 곤룡포를 빤히 응시한 백호가 작게 투덜거렸다. 「크흥. 인간은 너무 빨리 변한다냥.」 백호의 기억 속에는 장난꾸러기 꼬마였던 서윤이 아직 남아 있었다. 이서윤은 울기도 잘 울고 시끄럽게 왁왁거리며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녔던 활기 넘치는 어린애였다. 매사 얌전하고 순한 하윤과 정반대인 성격이라 백호의 취향과는 맞지 않아 자주 찾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랬던 꼬맹이가 이젠 일국을 책임지는 왕이 되어 저토록 믿음직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 간극이 너무 크게 느껴져 발걸음이 무거웠다. 딱히 서윤을 하윤만큼 좋아했던 것도 아니면서 괜히 그랬다.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있어준다면. 부질없는 소망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서윤의 뒤를 따라가는 백호의 머리위로 녹색 정령이 톡 내려앉았다. 「그들의 수명을 생각하면 빠른 편은 아니지. 종족 차이를 생각해, 백호.」 「차이는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거랬다요!」 미간 사이에 나타나 방실거리는 토니 때문에 백호의 시퍼런 두 눈이 사팔뜨기처럼 가운데로 쏠렸다. 「맞아, 완전히 달라. 우린 사는 동안 내내 한 가지 속성을 유지하잖아. 하지만 인간은 작은 계기로도 내면이 바뀌어버리는걸.」 「그걸 성장이라고도 부르지요.」 성장은 좋은 면과 나쁜 면을 모두 품고 있다.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란다. 지금 당장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이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고, 희대의 살인자로 악명을 떨칠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은 변화하게 마련이다. 「성장…….」 백호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그냥 아이인 채로도 상관없는데.」 「동감이에요.」 카니가 입을 가리고 후후 웃었다. 「내 계약자는 작고 약한 모습도 사랑스러우니까요.」 「뜻은 참 좋은데, 카니. ‘우리 계약자’라고 정정해 줄래?」 「쳇.」 정령들이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이 서윤은 손님들을 데리고 궁궐 한복판에 마련된 동굴로 향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돌계단을 발견한 바이칼이 당황하여 멈칫거렸다. “궁궐에 웬 동굴입니까?” “그건 편견이야, 그대. 동굴이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크리스티나의 반문에 바이칼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예에. 뭐, 안 될 건 없죠.” “일부러 판 굴이 아니라 자연동굴이다. 아마도 궐 안에 동굴을 만든 게 아니라 동굴이 있기에 이곳에 궐을 지었을 가능성이 높겠군.” 에단이 동굴 벽을 눈으로 훑으며 의견을 내놓았다. 자세한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하필 궁 중심부에 동굴이 자리한 것만 봐도 중요성을 엿볼 수 있었다. 무언가 특별한 기능을 하고 있으리란 에단의 추측대로 이 동굴은 해동왕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국보였다.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던 서윤이 그들의 추측에 살을 붙여주었다. “루바르잔에서 혹 풍수설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만.” ‘풍수?’ 누구도 안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풍수란 터를 잡거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필요한 학문이었다. 그러나 신성을 따르는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학설이다. “풍수학에 따르면 천지만물에 늘 기가 흐르고 있지.” “기……. 마력 같은 겁니까?” “비슷하다 여기곤 있으나 과인이 마법에 대해 모르니 확언할 수는 없겠군.” 서윤이 낮게 웃었다. 조카를 예뻐하다 보니 그 친구들까지 덩달아 귀엽게 느껴졌다. “자연, 공간, 인간 등 모든 존재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근원이라. 시간과 공간에는 음과 양의 질서가 있으니 이 질서를 이해하고 유익한 기운을 찾아 활용하는 것이 바로 풍수학이다.” 그는 대략적으로 기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후 양손을 들어 동굴을 빙 둘러 가리켰다. “보통은 늘 조화롭게 흐르고 있으나, 종종 상서로운 기운이 특정한 곳에 양 떼처럼 몰려드는 경우가 있지.” “한 곳에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쥬다스가 물었다. 전생에 현자라 칭송받았던 그라 해도 아예 가본 적 없는 나라의 학문까지는 알지 못했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마주 본 서윤이 잠시 답하길 망설이다 시선을 내리깔았다. 「무슨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냥. 여긴 그냥 좋은 기운이 밀집된 맑고 깨끗한 공간이다냥. 아래로 내려갈수록 순도가 높아지고 불순물이 씻겨 사라진다냥.」 「그러니까 이그레트. 이 동굴은 제국으로 치자면 교황청 같은 느낌이야.」 백호에 이어 유니가 대신 동굴에 대해 설명했다. 그에 질세라 토니도 한마디 거들었다. 「응요. 인간은 아마 그거랑 비슷한 느낌일 거다요!」 「그거?」 「그거 말이다요. 그거. 으에에, 전에 이그레트도 교황청에서 받았던.」 안타깝게도 중요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바람에 정작 의미는 통하지 않았다. 다른 정령들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토니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울상을 지었다. 쥬다스는 작게 웃으며 토니가 말하고자 하는 단어를 짚어주었다. “정화세례.” 「맞다요! 정화세례! 여기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다요!」 답답함이 해소되어 신이 난 토니와 반대로 이번엔 정령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다른 일행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 “으음. 정령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동굴이 교황청에서 정화세례를 받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낸다고 하는구나.” “신기하네요. 신이 내리는 축복과 같은 효과를 자연동굴에서 볼 수 있다니.” 신성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루바르잔인들에겐 해동에서 지금까지 보고 겪은 일 중 가장 기이한 현상이었다. 신이 개입하지 않는데도 자연의 기운만으로 몸과 영혼이 정화가 될 수 있다니! 감탄하는 일행 사이에서 성왕 이서윤만이 홀로 표정이 어두웠다. 「서윤.」 백호의 푸른 눈동자 한 쌍이 예리하게 그를 쫓았다. 「역시 청룡 녀석, 많이 다친 거냥? 그래서 쉬면서 기운을 회복하고 있는 거지냥?」 무거운 추 같은 답이 입술 끝에서 맴돌다 툭 떨어졌다.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백호여.” 동굴은 제법 깊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갈수록 어두워지면서 한기가 들어찼다. 그나마 벽면마다 붙어 있는 횃불에 불이 들어와 앞을 분간할 수 있었다. 연금술로 특별 제작한 이 횃불들은 사람이 근처에 다가오면 인식하여 자동으로 화륵 타올랐다. 그리고 사람들이 지나가면 다시 저절로 꺼졌다. 화재가 날 리 없이 안전하면서도 간편한 장치였다. 원리는 다르나 마치 제국에서 사용하는 마법전등과 비슷한 기능이다. 마법에 익숙한 쥬다스 일행에게는 그리 신기한 광경은 아니긴 했지만 해동의 문물이 제국 못지않게 발전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벽에 걸린 횃불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널따란 공터가 나왔다. 말을 타고 경주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천장에서 뾰족하게 돋아난 크고 작은 종유석들이 보였다. “와.” 세이지가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자세히 보니 단순 종유석이 아니라 전부 보라색으로 빛나는 자수정이었다. 보라색 물결이 천장과 벽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바이칼이 휘유 휘파람을 불었고, 에단도 찬찬히 주변을 살피며 감탄했다. “동굴 바닥에 이러한 공간이 존재할 줄은.” 타오르는 횃불에서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자수정들은 거울처럼 주변 모습을 비추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반투명하게 그 속이 비쳐보였다. 냐앙! 그때, 백호가 쏜살같이 앞으로 홱 튀어나갔다. “호랑이님……?” 그 모습을 본 란이 얼굴을 가린 후드를 살짝 들어 올리며 걱정스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0164 / 0240 ---------------------------------------------- 19장. 소망 눈 깜짝할 새 공터의 중앙으로 달려간 백호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우뚝 멈춰 섰다. 망연히 고개를 들자 푸른 눈동자에 보라색 자수정이 가득 비쳤다. 「어째서.」 백호의 뒤를 따라 달려온 일행이 굳은 눈으로 눈앞의 장관을 바라보았다. “……!”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이게 대체?” 동굴 중앙에 있는 건 그들이 지금껏 본 자수정 중 가장 거대한 자수정이었다. 역동적으로 천장까지 치솟아 오른 자수정은 길고 구불구불 이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는 마치 얼음에 갇힌 단풍잎처럼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거대한 용이 비쳤다. 「‘동면’이야.」 바람의 정령이 슬픈 어조로 계약자에게 속삭였다. 「흔하진 않지만 알 수 있어.」 금방이라도 자수정을 깨뜨리고 포효할 듯 역동적인 모습이었다. 청룡을 가둔 건 본래부터 보랏빛 자수정이 아니라 정령의 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명한 정기(精氣)다. 정령의 실체를 구성하는 생명에너지인 이 정기는 밖으로 뿜어져 나온 순간 얼음보다 차갑고 촛농보다 빨리 굳는다. 유니는 눈을 질끈 감으며 쥬다스의 옷자락을 끌어안았다. 「‘동면’은…… 정령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자결수단인걸.」 본래는 시리도록 파랬을 비늘을 붉게 물들인 채, 청룡은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다. ‘사령에 잠식당하고 있었구나.’ 비늘색이 변했다는 건 폭주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붉음을 지나 검게 물드는 순간 청룡은 완벽히 사령으로 변질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존심 강한 사방신수의 일원인 청룡이다. 그는 사령에게 억지로 잠식당해 타락하느니 제 손으로 눈을 감는 걸 택했다. 한 번 체내의 정기를 폭발시켜 동면에 들어간 정령은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 다시는 깨어날 수 없다. 정말 그대로 보석처럼 굳어져 소멸도 하지 못하고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것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종유석처럼 매달린 자수정은 전부 지옥 같은 폭주의 흔적이었다. 사람으로 치자면 미치기 직전까지 토혈하고 몸부림치다 스스로 목을 매단 것과 같았다. 핏자국처럼 번진 자수정들이 사방에서 위험스레 반짝였다. 백호는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에 아연히 자리에 서 있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이런 뜻이었다냥?」 “백호.” 서윤이 주저앉은 작은 호랑이 곁으로 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백호의 머리통 위로 두터운 손바닥이 내려앉았다. 따뜻한 체온을 느낀 백호가 코를 씰룩거렸다. 「회복이라는 게…….」 “예, 아니었습니다.” 「저건 동면이잖냥.」 “미안합니다.” 「서윤!」 백호가 앞발로 서윤의 손바닥을 탁 밀어냈다. 그 아래 드러난 푸른 눈동자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라있었다. “미리 말하지 않아서. 그리고 지켜드리지 못해서.” 당신들은 늘 우리를 지켜줬는데. 서윤은 백호의 앞에 무릎 꿇은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정말 미안합니다.” 고개 숙인 왕 곁으로 작은 그림자가 함께 무릎을 땅에 대었다. 그리곤 울고 있는 새끼 호랑이를 살며시 들어 올려 품에 안았다. 냐아아 냐앙! 토닥이는 손길에 백호는 더욱 구슬프게 울었다. 동료들이 사령에게 잠식되었다면 단칼에 죽이라던 그였다. 그래도 괜찮겠냐는 물음에 억지로 조종당하는 것보단 훨씬 나을 거라 대답했다. 그것도 백호와 가장 사이가 나쁜 청룡이다. 그런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이렇게 비참하게 눈을 감을 줄은 몰랐다냥. 뻔뻔한 청룡 자식이 이 따위로 엉망진창 당해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냥.」 “그래.” 「당연히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냥. 다른 녀석도 아니고 무려 청룡이잖냥!」 “그랬구나.” 쥬다스는 조금 진정된 백호를 바닥에 내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거대한 자수정에 갇혀 있는 청룡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동면에 들어간 정령을 되돌릴 방법은 없어.” 「알고 있다냥…….」 “하지만.” 단단한 자수정 위에 살짝 손바닥을 가져다 대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쥬다스는 냉기에도 아랑곳 않고 살짝 눈을 감았다. “정령의 소망은 곧 계약자의 소망을 따른다.” 정령은 계약할 때마다 옛 이름을 버리고 새 이름을 받는다. 심지어 그 외형조차 술사가 원하는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듯 변화한다. 특히 친화력이 강한 정령술사일수록 그 소망은 절대적이다. 지금 자연계 정령왕들에게 오로지 이그레트의 의지만이 절대적이듯. 뒤늦게 쥬다스가 하려는 일을 눈치챈 서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가, 설마 네가……!” “제가 사방신수와 계약할 자질이 있는지는 사실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만일 가능하다면 허하시겠습니까, 외숙?” 쥬다스는 자수정에 손바닥을 맞댄 채 서윤에게 마지막 결정권을 넘겼다. 모른다곤 했지만 사실상 모든 정령은 그와의 계약을 염원했다. 다른 정령들은 청룡이라고 비단 다를 바 없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신분이다. 쥬다스가 아무리 하윤 공주의 아들이라 한들, 그는 현재 루바르잔 제국의 황태자였다. 만일 그가 청룡과의 계약에 성공한다면 대대손손 해동왕가의 핏줄과 계약하며 해동을 수호하던 사방신수 중 하나를 루바르잔에 보내버리는 격이 된다. 해동의 임금으로서는 할 수 없는 위험한 결정이었다. 서윤은 흔들리는 눈으로 쥬다스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도 고고히 빛을 발하는 은빛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어깨와 백호를 다독이던 다정한 손. 그 손은 이제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청룡에게 닿아 있었다. “…….” 잠시 침묵하던 서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매달렸다. “하…….” 그는 작게 어깨를 들썩이다 이내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하다니, 과한 욕심이로다.” 모두의 시선이 서윤에게로 향했다. 그는 뚝 웃음을 그치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이미 한 번 신수 청룡을 잃었지. 그러므로 더 이상 그는 해동의 수호신이 아니다.” 외숙의 단호한 목소리를 들으며 쥬다스는 천천히 눈을 떴다. “부디 할 수만 있다면, 그를 구해다오.” 해동의 임금은 진정으로 청룡을 위한 선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청룡을 구할 수 있는 자가 하윤의 아이라면. “나는 널 믿는단다. 쥬다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그간 주지 못했던 신뢰를 주리라. 서윤은 굳은 결심을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 진심을 받아들인 쥬다스는 고개를 들어 청룡을 바라보았다. 「이그레트.」 녹색 바람이 그를 부드럽게 감쌌다. 「다른 정령에게 너를 내어주는 건.」 「솔직히 마음에 안 들지만요.」 파앗! 토네이도처럼 몰아닥친 바람에 의해 그와 청룡의 모습이 다른 이들의 시야에서 차단되었다. 성왕과 루바르잔 측 수하들은 바람에 휩쓸리지 않게 뒤로 물러나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백호마저도 내부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바람의 장막 안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오로지 쥬다스 뿐이다. 모습과 소리가 모두 완벽히 차단되며, 설령 안에서 폭탄이 터져도 밖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다. “이런, 다들 다른 정령을 원치 않는 모양이구나.” 「무지무지 싫다요!」 「으응. 그래도 당신이 간절히 바란다면 막지 않을게요.」 자연계 정령들은 꽤나 날이 서 있었다. 같은 계열의 동급 정령왕들끼리는 큰 경쟁심 없이 사이좋게 계약을 공유했다지만 이번만큼은 사정이 달랐다. 계약자의 바람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양보를 해야 했지만 싫은 건 싫은 거였다. 그들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쥬다스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그들을 달랬다. “그리 오래 지속할 계약은 아니니 진정하렴.” 「힝. 그치마안.」 “무엇보다 이 계약의 목적은 청룡을 되살리는 데에 있으니 말이다.” 이미 자연의 사랑을 받고 있는 그에게 청룡의 힘까지는 필요치 않다. 힘은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가지고 있다. 그래서 쥬다스는 청룡이 기력을 회복하고 사령의 위협이 사라져 안전하다 판단이 될 때쯤 자연스레 계약을 파기할 생각이었다. 우웅! 그의 손바닥과 맞닿아 있는 자수정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너는 이 나라를 정말로 사랑했기에 이런 선택을 한 거겠지.’ 쥬다스는 그 상태로 잠든 정령을 향해 가만히 말을 걸었다. “이제 괜찮아.” 「…….」 깊은 수면에 빠져들었던 청룡의 의식이 꿈틀거렸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겠구나. 잘 버텨왔어. 이제 혼자서 애쓸 필요 없단다.” 그 순간, 자수정 안에 갇혀 있던 청룡이 눈을 번쩍 떴다. 몸은 여전히 갇힌 채로 길게 찢어진 눈알만 하얗게 빛났다. 「나를…… 찾은 이……. 누구인가.」 “이그레트.” 쥬다스는 정령과의 계약에서만큼은 옛 이름을 사용했다. 전생이라고 해서 잊어야 한다거나 지워 버려야 할 기억은 아니다. 오히려 전생의 자아를 유지하고 있는 쥬다스는 정령들로부터 그 이름으로 불리는 편이 더 편했다. 마찬가지로 정령 간 소통의 통일화를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의 이름을 들은 청룡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의…… 이름은?」 이는 계약 수락이나 다름없는 질문이다.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정령은 술사에게로 귀속된다. 쥬다스는 하얗게 빛나는 청룡의 눈을 응시한 후 입을 열었다. “가야.” 「계약자 ‘이그레트’, 계약명은 ‘가야’. 계약은 성립되었다.」 쩌엉! 계약을 알리는 선언이 끝나자마자 자수정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나 부서졌다. 길고도 거대한 동양계 용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잔해물만 남았다. 주변을 감싸던 정령의 기운이 흩어지면서 그들을 가려주던 녹색 바람도 사르르 흩어져 버렸다. 밖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반색하여 그에게 달려왔다. 「청룡은? 그 자식 어디로 갔다냥?」 백호가 조각난 자수정 사이를 헤집으며 물었다. 「기운은 아직 느껴지는데. 왜 보이질 않는다냥?」 “시끄러워.” 「냥?」 자수정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던 백호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말이 많은 건 여전하구나, 빌어먹을 야옹아.” 「……청룡?」 “뭐. 왜.” 청룡은 백호처럼 동물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형을 취하고 있었다. 해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양계 남성으로 건장한 체격에 파란 도포를 둘렀으며 머리는 검고 눈만 백호와 똑같이 푸르게 빛났다. 정령은 계약과 동시에 계약자가 바라는 소망을 실체에 반영한다. 따라서 동물계 정령인 청룡도 예전 모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백호는 띠꺼운 표정을 짓고 있는 청룡을 향해 우물쭈물 물었다. 「너……. 성격이 좀 변한 것 같다냥?」 “아아. 계약했으니까.” 백호의 시선이 귀찮다는 투로 짤막하게 대꾸하는 청룡에게서 스르르 그 옆으로 옮겨갔다. 청룡과 막 계약을 마친 쥬다스가 넓적한 자수정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맹렬한 의문을 알아차린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속을 알 수 없으면 대하기 어려우니 차라리 솔직했으면 해서.” 「하긴. 넌 언제나 솔직한 성향을 좋아했지.」 유니가 묘한 표정으로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면 자연계 정령들도 모두 단순한 성격을 취하고 있었다. 계약을 맺고 나면 굳이 말로 소통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지만, 그는 명확하고 분명한 소통이 이뤄지길 원했다. 그간 해동 왕족들은 대대로 사방신수와 계약을 이어오면서 그들이 가진 본래 성격과 이미지를 고착화했다. 선대부터 보고 들어온 전례가 있으니 자연히 큰 변화 없이 성격이 유지되어 온 것이다. 그렇지만 쥬다스는 이전의 청룡을 본 적도 없고, 따로 전해 들은 적도 없으니 자유롭게 청룡의 새 이미지를 구현해 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청룡을 죽이지 않은 건 결코 제가 용덕후라서가 아닙니다....ㅎ.. 음, 사실 원래 청룡의 이름후보엔 '이오'도 있었습니다. 아쉽네요. 야쿠르트 Vs 이오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는 반쯤 농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보내세요! ㅎ 0165 / 0240 ---------------------------------------------- 19장. 소망 「그렇다는 건 지금의 청룡은 성격이 개망나……!」 덥석! 청룡은 기겁하는 백호의 덜미를 한손으로 잡아 올렸다. “청룡이라고 부르지 마. 지금은 ‘가야’다.” 「냐악?!」 “흐흥. 뭐야. 넌 아직 이름도 없는 거냐? 쥐방울만 한 여자애 꽁무니를 그렇게 쫓아다니더니 결국 계약도 하지 못한 거냐? 야옹아?” 「시, 시, 시끄럽다냥! 청룡 주제에!」 “가야라니까.” 청룡 가야는 그 말과 함께 백호를 손에서 놓았다. 날렵하게 바닥에 착지한 백호가 부르르 치를 떨었다. 「솔직한 청룡이라니! 므으으, 이건 이거대로 재수없다냥.」 “…….” 밑에서 뭐라고 냥냥거리든 간에 이미 가야의 관심 밖이었다. 가야는 팔짱을 낀 채 힐끗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긴 건 영락없이 해동 사람이지만 유일하게 눈만 백호와 같은 푸른색이었다. 긴장감 어린 분위기로 자신을 주시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한 그는 마지막으로 서윤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청룡.’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던 아이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뿐이다. 가야는 해동의 왕을 향해 반가움을 표하거나 아는 척하지 않고 홱 돌아섰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다. “상태는?” “음, 그래. 잠시 적응이 되지 않았을 뿐이야.” 별거 아니란 듯 고개를 젓는 쥬다스였지만 청룡 가야는 그가 갑작스런 정신력 소모를 감내하느라 자수정에 기대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령왕 넷에 신수 하나라.’ 정령과의 계약은 서로의 정신과 정신을 잇는 술법이다. 흔히 말하는 ‘친화력’이란 바로 정령의 정신을 감당할 자질이 있는가를 뜻한다. 정령이 가진 힘을 제어하기 위해선 그들이 가진 정서와 감정, 욕망 등에 져서는 안 된다. 또한 그들의 정신에 감응할 수 있을 만큼 순수한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만 계약이 가능했다. ‘조금 무리하긴 했나.’ 보통 사람이라면 정령왕 하나도 감당하지 못한다. 이미 정령왕 넷이나 감당하고 있던 정신회로에 신수가 추가됨으로 연결고리가 5개로 증가하자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찾아왔다. 그나마 그였기에 버티는 일이지 다른 이였다면 이미 정령폭주가 일어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정말로 청룡과……, 신수와의 계약을 해내었구나.” 가까이 다가온 서윤이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예전처럼 친절히 웃어주지는 않지만, 분명 최후까지 해동을 지키기 위해 제 몸을 내던진 그 청룡이 맞았다. 해동의 성왕 이서윤은 청룡이 되살아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격했으며 안도했다. “다행이다. 진정 이리되어 다행이야.” “제가 해동의 신수와 계약한 것으로 곤란을 겪으시진 않겠습니까?” “어차피 백 년도 넘게 적합한 계약자를 찾지 못하여 큰 곤란을 겪던 참이다. 루바르잔의 황태자라 불리고 있으나 너는 우리 해동의 아들이기도 해. 하니 이를 어찌 곤란이라 여기겠느냐.” 서윤은 그와 닮은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표했다. “청룡을 구해주어 고맙다. 쥬다스. 나는, 이 나라는 네게 늘 감사할 일 뿐이로구나.” “해동의 아들로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따로 고마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외숙.”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탓에 서윤의 표정이 멍해졌다. ‘이 아이에겐 정말 당해낼 수가 없구나.’ 여린 몸으로도 조곤조곤 할 말은 다 하던 하윤이 생각나 도저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카의 언행은 보면 볼수록 더할 나위 없이 흡족했다. “일단 어찌 급한 상황은 해결이 된 것 같습니다만.” 쥬다스는 대강 어지럼을 삭히고 몸을 일으켰다. “이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야겠군요.” “……그렇지.” 모두의 시선이 청룡 가야에게로 향했다. 가야는 무신경한 얼굴로 계약자를 따라 무릎을 폈다. “가야야. 네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 이야기해 줄 수 있겠느냐?” “주인이 원한다면.” 동물계 정령은 자연계와 다르게 계약자를 아예 ‘주인’으로 인식했다. 본래 동물로 시작한 신수인지라 계약자를 상위서열로 판단하고 따르기 때문이다. 자연계 정령들이 술사를 사랑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복종이었다. “저 못생긴 고양이를 보면 알겠지만, 우리 사방신수는 오랜 세월 계약을 맺지 못해 나라를 수호하는 힘이 약해져 있는 상태야.” 「누가 못생겼다냐!」 「……고양이인 건 괜찮고?」 발끈한 백호를 바라보며 유니가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야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해동의 국토는 신수의 힘으로 생명력이 유지되는 풍요로운 땅. 그러나 본래는 죽은 모래와 귀기에 뒤덮인 척박한 영토였어. 해동을 건국한 초대 국왕 ‘이강’의 뜻 아래 우리는 각각 동서남북 사방위의 수호신수로서 존재해 왔으나.” 여기까진 현재 해동을 다스리는 성왕 이서윤도 알고 있는 역사였다. 그리고 뒤에 이어질 내용도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서윤은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만일 넷 중 하나라도 잘못된다면 그 땅에는 귀신들이 들끓게 될 거야.” 말인즉, 해동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쥬다스 일행이 해동의 수도로 오는 도중에도 귀기에 덮인 마을들을 종종 만났었다. “그리고 얼마 전, 우리는 아마도 동시에 이강을 만났다.” “……?” ‘이강’이라면 조금 전 가야가 언급했다시피 해동의 건국왕 이름이었다. 그는 사방신수와 최초로 계약한 인간이기도 했다. 천 년도 전에 죽은 자의 이름이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백호가 벌떡 일어섰다. 「뭐냥! 전부 같은 함정에 빠진 거였다냥?」 “네가 지금 나랑 같은 걸 떠올린 걸 보면 그렇지 않겠냐?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 단순한 야옹아.” 「너, 너는 어떻게 알았다냥? 혹시 주작이나 현무를 만났다냥?」 어찌나 놀랐는지 백호는 청룡이 걸어오는 시비에 응할 생각도 못했다. 다급해 보이는 백호를 향해 청룡 가야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 만났어. 만나자마자 좋지 않은 모습으로 헤어졌다는 게 문제지만.” “좋지 않은 모습……?” 쥬다스가 작게 가야가 한 말을 따라 입안으로 굴렸다. 그러자 가야는 곧장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강은 우리의 소중한 첫 계약자이지만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당연히 천 년도 더 전에 죽었어.” “그렇다면.” “결론만 말하자면 사령술사들은 사방신수 전원에게 이강의 환상을 보여주고 함정에 빠뜨린 거지.” 사령은 신수들이 약해진 틈을 타 그들의 사랑하는 자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용했다. 그리고 마음속 허를 찌르는 방법은 몹시 성공적이었다. “주작과 현무는 완벽히 사령에게 먹혔어. 부끄럽지만 저 역시 둘 곁에서 반쯤 잠식당하다 가까스로 빠져나왔지. 그러나 결국 점차 몸을 갉아먹는 잠식을 이겨내지 못했고, 종래엔 사령이 될 위기에 처해 어쩔 수 없이 동면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할 잠이라고 생각했는데.’ 개인적인 감상은 속으로만 덧붙였다. 가야는 차분히 제 얘기를 들어주고 있는 쥬다스를 희한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혼자서 애쓸 필요 없다고 했던가.’ 정말이지 특이한 인간이었다. 이강과 계약한 이래로 해동 왕가를 지키며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었지만 이번 같은 경우는 없었다. 사람들은 신수에게 무언가를 늘 요구해왔다. 누구나 자신을 지켜주길 바라고 강한 힘이 되어주길 원한다. 하지만 쥬다스는 이미 강했다. 또한 그렇게 강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면 어느 것도 욕심내지 않았다. 그가 계약을 원한 이유는 오로지 청룡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상대에게 지켜 달라고 비는 게 아니라, 상대를 지키기 위해. 냐오오 고양이 우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가야는 찜찜한 표정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우리 넷 중 가장 무식하고 단순한 야옹이가 어째서 가장 멀쩡했지?” 「뭐라는 거냥.」 계속되는 청룡의 결례에 백호가 가느다랗게 가자미눈을 떴다. 「도대체 그 따위 함정에 왜 속는 거냥? 난 보자마자 한눈에 알았다냥. 이강의 냄새가 전혀 아니었다냥.」 “오호라. 너 이제 보니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냐?” 「고양이도 개도 아니다냥!」 바락 소리쳐 봤자 아무도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백호는 힘없이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주작과 현무는 이미 틀린 거구냥…….」 “그 녀석들을 편하게 해주는 방법은 이제 소멸뿐이지.” 가야는 사령의 잠식을 막기 위해 동면을 택했지만 나머지 둘은 그조차 불가능했다. 청룡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주작과 현무는 이미 완전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신수들께선 방위마다 영토를 지키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득 에단이 질문을 해왔다. 가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렇다면 사령에게 먹힌 두 신수의 영토는…….” “끝장이지.” 엄청난 이야기를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바람에 다들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질문을 꺼낸 에단이 무거운 눈으로 고개를 숙이자 가야는 다시 말했다. “이대로 두면 해동은 망국의 길을 걷는다. 사령이 된 신수는 주작과 현무. 즉 해동의 남과 북이다. 사령이 된 신수를 소멸시켜도 다시 그 땅을 관리할 새로운 신수를 찾기 전까진 회복이 불가능해.” “그런.” “다만, 적어도 지금 살아 있는 동쪽과 서쪽 영토는 지킬 수 있겠지.” 가야의 푸른 눈동자가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결정은 주인에게 맡길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가야는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일단 가야를 데리고 동굴에서 나왔다. 더 이상 동굴에 남아 사기를 정화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청룡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동굴계단을 내려갔던 일행은 무거운 발걸음이 되어 지상으로 올라왔다. “내 너를 초대한 이유는 그저 얼굴을 보기 위함이었거늘.” 서윤이 쥬다스를 향해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하필 시기가 이렇게 어둡구나.” 시기가 어두워진 이유는 임금의 부덕 탓이 아니었지만 서윤은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껏 되살렸다고 생각한 나라가 아예 망국의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은 그의 숨통을 올가미처럼 조였다. 하지만 서윤은 쥬다스에게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고 스스로 그 압박과 부담을 감내했다. “하지만 큰 걱정 말거라, 아가. 이 나라는 그리 약하지 않단다.” 괴롬을 겉으로 티내지 않는 고집스런 심성마저도 닮아 있는 삼촌조카지간을 보며 쥬다스의 수하들은 속으로 안타까운 한숨을 삼켰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달린 큰일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가 먼저 티를 내지 않으면 아는 척하기도 어려웠다. “가야는.” “음?” 쥬다스는 제 외삼촌보다 더 의연한 얼굴로 간결한 답을 내놓았다. “해동의 신수입니다.” 계약은 했으나 청룡의 힘은 본래 해동을 수호하는 데에 돌려주겠다는 뜻이었다. “이제부터 해동을 돕고자 하는 건 루바르잔의 황태자가 아닌 해동의 신수 청룡의 뜻이니 외숙께서도 걱정 마십시오.” 그러니 국제관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쥬다스는 해동이 제국에게 숙일 명분을 제하고 그들을 돕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잠시 흔들리는 눈으로 조카아이를 바라보던 서윤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그렇구나.” 마치 지금 무르익은 봄 햇살만큼이나 따뜻한 배려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 다음 편부터는 '20장. 그림자밟기'로 이어집니다. 그림자밟기란 얼음땡, 멀리뛰기와 비슷한 어린아이들 놀이 중 하나인데 요즘 아이들도 하려나 모르겠네요 ㅎ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0166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사령술사들을 적으로 선포한 후, 며칠간 해동 왕실에서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나라를 수호하던 신수가 무려 둘이나 사령에 씌어 타락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수호신이 아니라 말살해야 하는 적이다. 그러나 성왕 이서윤은 일부러 그 사실을 민중에 알리지 않았다. 만일 사람들에게 상황을 사실대로 알리고 주작과 현무를 소멸시켜야 한다고 말한다면 도리어 왕실이 반감을 살 수 있다. 그만큼 해동이란 나라에서 사방신수의 위치는 절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신수를 수호신으로 모셨고 무조건적으로 맹신했다. 루바르잔 제국이 왕권과 신권을 동일선상에 놓고 민심을 다룬다면 해동은 수호신에 대한 민속신앙이 왕권에 대한 충성도보다 높았다. 왕조차 신수에게 고개를 조아리고 말을 높였으니 백성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삐이이?” “……뭐야, 이 새는.” 그리고 백성들의 경외와 사랑을 받는 사방신수 중 가장 으뜸이라 여겨지는 청룡은 지금 진지하게 한 존재를 마주 보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영롱한 푸른 비늘, 잘 익은 홍시처럼 주홍빛으로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닭 한 마리 정도 크기의 미니사이즈. 동방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묘한 생김새의 이 괴수는 다름 아닌 블루 와이번이었다. 와이번은 드래곤과 닮았지만 엄연히 하위개체였고, 용족에 해당하긴 했어도 진짜 배기 용과는 차이가 컸다. 청룡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애완견 이나 다름없었다. 청룡 가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발로 플루비를 툭 밀었다. “비켜.” 종의 동질감과 강한 용에 대한 동경으로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플루비가 가야의 버선코에 밀려 털퍼덕 엎어졌다. “쁘엑.” “거, 새는 아니고 꼴에 용족이긴 합니다만.” 가야는 무심하게 지나치려다 말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바이칼이 넘어진 플루비를 일으켜 세워주고 있었다. 토실한 궁둥이에 묻은 먼지까지 툭툭 털어준 그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제법 영리한 와이번입니다. 브레스도 쏠 줄 알죠.” “…….” “아, 고소공포증은 있지만 요샌 나름 잘 납디다.” “…….” 가야는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무시하고 있지도 않았기에 바이칼은 씨익 웃으며 플루비를 놓아주었다. 파다닥, 플루비가 요란하게 날갯짓하여 가야의 앞에 내려앉았다. “이 녀석 이름은 플루비. 주군께서 직접 지어주셨죠.” “흐응, 고어군. ‘겨울비’냐.” 가야는 제게로 겁도 없이 다가와 꼬리를 살랑거리는 와이번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발에 채여 놓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꾸구귝 비둘기소리까지 냈다. 가야는 주인이 직접 이름을 지어줬다는 말을 듣자 플루비에게 조금 관심이 생겼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새롭게 계약을 맺긴 했으나 실로 오랜만에 가져보는 충족감이었다. 동물계 정령들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가 크기 때문에 주인이 없으면 지독한 결핍을 느낀다. 장기간 계약자를 만나지 못한 신수는 나약해질 뿐 아니라 극도로 예민해지고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딱히 계약자가 없어도 정령계에서 평화롭게 노닐며 안정을 취하는 자연계 정령과는 달랐다. 신수는 늘 애착을 형성할 주인을 필요로 하고, 주인의 명을 듣는 것에서 기쁨과 안정을 얻는다. 그들이 유독 해동 왕가라는 핏줄에 집착하는 이유도 한 번 애착을 형성한 주인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청룡은 수백 년 동안이나 적합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다. 사방신수라고 해서 무조건 해동 왕가와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술사로서의 자질을 가진 자라 하더라도 네 마리 신수와 한꺼번에 계약하는 일은 드물었다. 이는 루바르잔에서 자연계 4속성과 동시에 계약한 계약자가 몹시 희귀한 취급을 받는 것과 비슷했다. 보통은 왕 한 명당 하나의 신수와 계약을 맺었다. 그렇게 계약을 맺은 정권에는 신수의 명칭이 따라붙는다. 가장 최근 계약을 맺은 백여 년 전 현무 예종왕 집권 당시에는 ‘현무의 시대’라 불렸다. 그 전은 백호의 시대였다. 수백 년이 흐르는 동안 청룡의 적합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청룡 가야에게 이번 계약은 여러 의미로 특별했다. “그 녀석한테 잘 어울리네. 이름.” 무의미했던 것들도 쥬다스가 연관되는 순간 귀해졌다. 청룡은 길가를 따라 죽 자라난 갈대를 하나 꺾어 들고선 발밑에서 알짱거리는 플루비를 향해 내밀었다. “삐…….”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갈댓잎을 쳐다보던 플루비가 짧은 앞발을 뻗어 이를 잡으려 했다. 하지만 잡힐 동 말 동 갈대는 눈앞에서 홀랑홀랑 사라지곤 했다. 플루비는 완전히 놀이에 몰입하여 날개마저 파닥거렸다. 예상외로 플루비와 잘 놀아주는 가야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본 바이칼이 뒤통수에 깍지를 끼며 물었다. “그런데 청룡께선 여기서 뭐 하십니까?” “가야.” “예이, 가야 님. 가야 님은 여기 계실 이유가 없잖습니까?” 해동 왕실에선 국가적 비상사태를 목전에 두고 긴 회의가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쥬다스 일행은 궐에 머물며 힘을 보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더인 쥬다스가 해동을 전력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탓이었다. 하지만 이는 쥬다스의 개인적인 선택이기 때문에 대놓고 루바르잔에서 원조를 보낸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된다. 그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나 청룡을 표면에 내걸고 이루어질 예정이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사령술사들을 징벌할 계획이 수립되기 전까진 단독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해동의 무사들과 함께 루바르잔의 기사들도 합동 훈련에 임했다. 그리고 청룡 가야는 쥬다스의 명에 따라 본래 자신이 맡았던 수호임무에 임했다. 천(天)과 우(雨) 속성인 청룡은 귀기에 휩싸인 하늘을 가장 먼저 정화시켰다. 단번에 모든 하늘을 되찾을 순 없었지만 차근차근 시간을 들여 영역을 점차 넓히는 중이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다 했어.” “벌써요?” 아직 해가 중천이었다. “와, 백호 님도 아까 처마 위에서 낮잠 주무시던데. 사방신수들 진짜 하는 거 없…….” “바이칼.” 진지하게 신수들의 무용(無用)에 감탄하고 있던 바이칼의 뒤로 에단이 나타났다. 농땡이 피우다 걸린 기분이 든 바이칼은 찔끔하여 지레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지금 노는 게 아닙니다. 청룡, 아니 그 가야 님이 갑자기 찾아오셔서!” “난 가만히 있었어. 말은 네가 걸었잖아.” 쥬다스와 계약한 청룡은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성격이었다. 에단이 지그시 쳐다보자 바이칼은 결국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실토했다. “예, 뭐. 제가 말 걸긴 했죠. 어휴.” “대련 시간이다. 중요한 대화 중이 아니었다면 그쯤하고 따라오도록.” 체력단련까지는 마법기사인 바이칼이 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대련은 달랐다. 루바르잔과 해동이 각각 팀을 나누어 서로의 전력을 견주고 합을 맞춰보는 시간이므로 에단은 모든 기사단원을 빠짐없이 소집했다. ‘대련’이란 소리에 바이칼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그거 저도 합니까?” “자네가 루바르잔의 기사가 맞다면 당연히 해야 할 훈련이다.” “기사는 맞는데 마법기사죠. 해동에는 마법사가 없잖습니까?” “마법사는 아니지만 그와 흡사한 술을 다루긴 하더군. 자네에겐 특히 좋은 배움터가 될 거다.” 해동에서 무인은 검사와 권사로 나누어진다. 그중 권사는 격투하는 마법사라고 볼 수 있는 특이한 포지션을 취했다. 권사가 사용하는 술법은 인체가 즉 마법진 그 자체다. 몸 안에 저장한 기운을 ‘혈’이라 불리는 길을 통해 순간순간 뿜어내는 것으로 기술을 사용했다. 마법사들이 사용하는 대단위 마법이나 초장거리 포를 쏘아내는 건 불가능했지만 대신 중장거리 범위 내에서만큼은 물이나 불을 포함한 온갖 속성의 술법을 다루며 자유자재로 공격이 가능하다. 왕의 호위무사인 다울이 바로 이 권사에 속했다. “애초에 포지션이 다르잖아요, 포지션이. 마법기사는 육탄전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역할이 아니란 말입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적이 지척으로 치고 들어오면 당하기만 할 텐가? 해동의 무사들은 그런 다각도전투에 해박해. 어느 정도 근접전에서 상대하는 법은 알아둬야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지 않으려고 검기사들이 있는 거잖습니까!” 바이칼의 항변은 에단의 귀에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싸늘한 일침만이 되돌아왔을 뿐이다. “전투상황은 늘 준비된 상황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보통은 자비롭게 납치로 끝나지 않지.” “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얘기는 제발 그만.” 투르케 사막에서 가출 소녀와 함께 납치된 전적이 있는 바이칼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맥없이 에단의 뒤를 따라갔다. 그때까지도 갈대를 든 채 플루비와 놀아주고 있던 청룡 가야의 시선이 잠시 그들을 쫓다 스르르 되돌아왔다. 때마침 갈댓잎을 잡는 데에 성공한 플루비가 잔뜩 신이 나서 삐삣 울었다. “플루비.” “삐!” 청룡이 어떤 용인지도 모르고 해맑게 답하는 어린 와이번을 보며 가야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리곤 좋다고 갈대를 입에 문 플루비를 번쩍 들어 올렸다. “헤에. 분명 못생겼는데.” “삐잉?” “하는 짓이 귀엽네.” 플루비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애교가 몸에 밴 와이번이었다. 녀석은 그간 애교인 줄도 모르고 한 행동에 먹을 것이나 칭찬이 돌아오는 걸 보며 꾸준히 학습했다. 여기선 사냥기술이나 남보다 강해 보이는 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예쁜 짓해봐.” “끼으웅.” 작은 와이번은 그가 시키는 대로 품에 파고들며 애교를 부렸다. 그러자 가야의 푸른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렸다. 「저거 또 뭐한다냥…….」 처마 위에서 낮잠을 즐기다 그 광경을 목격한 백호만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또 귀신같이 들은 가야가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했다. “어허. 계속 빈둥빈둥 잠만 자면 뱃살 나온다?” 「남이사.」 “힘도 약하고 볼품없는데 뱃살까지 붙으면 큰일 아니냐. 귀염성 없는 야옹아.” 「청룡 따위에게 귀여움 받을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으니 걱정 마라냥.」 백호는 길게 하품하곤 꼬리만 내려 흔들거렸다. 「네 주인은?」 “바로 옆 건물. 서고에 있어.” 「아니. 어딨는진 나도 안다냥. 안가 봐도 되냥?」 “오늘의 정화 할당량을 마쳤으니 슬슬 찾으러 가볼 생각이긴 했지.” 과연 사방신수의 으뜸이라 여겨지는 청룡답게 하늘 정화를 시작한 지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수도를 중심으로 맑은 기운이 감돌았다. 백호도 그 변화를 느끼고 처마에서 내려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뭐 아무튼 솔직해지니까 말이 잘 통해서 좋긴 하다냐.」 “흐으음.” 「왜 그러냥?」 청룡은 플루비를 안은 채 서고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와이번은 날개가 있어서 귀여움이 배가되는 것 같아. 주작도 그래서 제법 귀여웠잖냐. 백호, 우리도 외형에 날개를 추가할까?” 쭐래쭐래 그를 따라가던 백호의 표정이 말린 감처럼 쭈글쭈글해졌다. 「서방의 드래곤 계열이나 날개가 어울리지. 넌 동방 용이다냥. 날개가 달린다고 별달리 멋있어질 것 같지 않다냥.」 “멋있을 필요 없는데? 난 플루비처럼 예뻐지고 싶은 건데?” 「변태 자식.」 백호는 다정한 어조로 오랜 친구를 호칭했다.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분위기의 두 신수를 번갈아 본 플루비는 그저 고개만 갸우뚱 기울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으어어 늦었습니다.;; 바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0167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그렇게 백호와 청룡이 티격태격 주고받으며 서고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둘을 제치고 먼저 서고로 불쑥 들어섰다. 「므앙? 저 아인…….」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해동 왕가의 피를 이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오, 이서윤의 아들인가.” 「서윤과 많이도 닮았다냥. 끄응, 친화력 없는 점까지 판박이일 필요는 없는데냥.」 이제 겨우 열두 살 난 아이는 다름 아닌 넓은 궁궐에서 사랑받고 자란 하나뿐인 왕세자였다. 근래 태어나는 왕족의 친화력 미달은 이젠 별로 신기할 일도 아니라 백호는 절망하는 대신 가볍게 투덜거렸다. 「근데 넌 또 뭐가 그렇게 즐거운 표정이다냥?」 문득 올려다본 가야의 표정은 꼭 심심하던 차에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긴 한량 같았다. “글쎄. 저 꼬마 왕자님이 무슨 사고를 칠지에 대한 기대감?” 「걱정이 아니라 기대인 거냥? 하여튼 너 이 자식.」 “시끄러. 우린 얌전히 구경…… 아니, 감시나 하자고.” 가야는 백호와 플루비를 각각 한 팔씩 안은 채 이지오의 뒤를 몰래 따라갔다. 그의 주인이 저런 어린애에게 밀릴 리는 없지만 만일 해를 끼친다고 여겨지면 곧장 끼어들어 차단할 생각이었다. 세 쌍의 지켜보는 눈길이 있는 줄도 모르는 어린 왕세자는 나름대로 잔뜩 긴장하여 서고에 들어섰다. 목표는 금방 눈에 띄었다. ‘은색…….’ 왕세자는 잠시 멍하니 그 머리카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신과 사촌지간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신비한 색상이었다. 해동의 어린 왕세자는 쥬다스를 보고 이질감과 동시에 질투를 느꼈다. ‘이럴 수가! 완전히 이방인이잖아.’ 사방신수들이 사령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사실은 기밀에 부쳐졌지만, 청룡의 계약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왕세자는 아비인 이서윤으로부터 직접 쥬다스가 청룡과 계약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서고로 달려왔다. 조용하고 어둑한 책장 사이에서 유독 이질적인 외모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한 소년을 발견한 왕세자의 주먹에 꽉 힘이 들어갔다. ‘아니지. 싸우려고 온 게 아니잖아? 예의를 지켜 인사하자. 우리나라 왕족으로서 근엄함도 보여야지.’ “그…….” 막 떨리는 결심을 다잡고 말을 걸려던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형님, 이건 어떻게 읽는 건가요?” 왕세자로선 안타깝게도 상대는 혼자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서윤의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비는 시간 동안 서책을 통해 해동의 전반적인 역사와 문화에 대해 알아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배다른 동생인 세이지가 함께 있었다. ‘동생?’ 머리색은 달랐지만 두 사람이 형제관계라는 사실은 열두 살 아이의 시선으로도 알아보기 쉬웠다.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그건 역사서라 어려울걸? 게다가 세로로 읽는 책이야.” “란.” 세이지와 란은 그동안 제법 친해져 있었다. 해동의 언어를 잘 모르는 세이지는 의사소통까진 통역 인챈트가 걸린 아티팩트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글자를 읽지 못해 쩔쩔맸다. 그런 세이지를 챙겨준 건 형 쥬다스보다는 상냥한 픽시 란이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 정도쯤이야. 쥬다스 님은 지금 따로 할 일이 있어서 바쁘잖아. 또 궁금한 게 생기면 나한테 물어봐.” 그녀의 친절에 감동한 세이지는 낮의 추한 모습조차 개의치 않았다. 쥬다스가 워낙 그녀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었다. 세이지나 란이나 제대로 된 친구 하나 없이 자란 이들이었다. 나이는 란이 훨씬 많긴 했지만 픽시 특유의 순수함이 있어 또래처럼 어울릴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고에서 활자를 가르치고 배우며 어느덧 절친한 친구로 발전했다. 그런 아이들을 곁에 두고 쥬다스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주들의 재롱을 보는 노인처럼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아, 그럼.” 그는 탁, 가볍게 책을 덮어 본래자리에 꽂았다. “이제 슬슬 가볼까 하는데.” 세이지와 란이 쥬다스를 따라 어지럽게 꺼내놓았던 서책을 전부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기 계신 귀인께선 책을 보러 오셨습니까?” “……아, 아니요!” 왕세자는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것인지, 황금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 안엔 놀람이나 의아함 따윈 전혀 없었다. 왕세자는 상대가 자신에 대해 전부 눈치챘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 않…… 습니다.” “나눌 말씀이 있다면 밖을 거닐며 나누지 않겠습니까. 날씨가 참 좋습니다.” “예, 예.” 이미 왕족의 근엄함을 보이려는 의지는 훨훨 날아간 지 오래였다. 왕세자는 가까스로 울상을 짓고 싶은 걸 참았다. 서고를 나오자마자 따가운 햇볕이 쏟아졌다. 쥬다스의 말대로 날씨는 정말 좋았다. 왕세자는 한발 늦게나마 격식을 차려 자신을 소개했다. “해동 이씨 왕가의 후손 ‘이지오’입니다. 마침 궐에 걸음 하셨단 소식을 들어 인사를 나누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혹 실례가 되었다면.” “아닙니다. 반갑습니다. 루바르잔의 두 번째 이름을 이은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입니다.” 제국 루바르잔의 첫 번째 이름은 황제를 뜻한다. 그리고 두 번째 이름을 잇는다는 수식은 황태자의 것이었다. 해동의 왕세자 이지오가 예를 지켜 인사한 이상 쥬다스도 역시 법도에 따라 그를 대했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삼촌 조카로 허물없이 대하는 이서윤과는 달랐다. 이에 쥬다스는 이지오가 처음엔 호감을 가지고 다가왔으나 정작 자신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해동은 제국과 달리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나라이니. 어려울 만도 하겠구나.’ 지금 이지오가 보이는 낯설어하는 태도는 해동 사람으로서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그가 쥬다스를 보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 쥬다스는 동방 특유의 황색 피부도 아니었으며 머리와 눈 모두 인간 같지 않은 색상을 띠고 있었다. 이름도 제국식이었으며 신분마저 그냥 황자가 아니라 제위를 물려받을 후계로 몹시 비범했다. 사촌지간이라 한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이에선 모든 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도리어 여동생의 아이란 이유만으로 아낌없이 애정을 보이는 성왕 이서윤이 특이한 편이었다. 쥬다스는 이지오의 입장을 이해하고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화의 주도권을 자신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지오가 의외라는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태자께서 이 나라엔 어인 일로 오신 건지요?” “5년 전 성왕 전하께 초청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초청을…….” 몰랐던 사실이긴 하나 죽은 하윤 공주에 대해 늘 애틋해하던 아비 이서윤을 떠올리면 그럴 만하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 아바마마께선 이자를 우리나라에 초대하신 거지? 괜히 제국에 청룡만 빼앗기질 않았나.’ 이지오는 청룡을 뺏긴 거라 생각했다. 한번 안 좋게 보다 보니 무엇 하나 곱게 보이질 않았다. “형님.” 마침 란과 함께 책을 모두 정리하고 서고를 나온 세이지는 멋대로 경쟁의식을 불태우고 있는 이지오를 보며 당황했다. ‘경쟁?’ 겉으로 볼 때에는 각각 일국의 황태자와 왕세자로서 일국의 후계자로 비슷한 입장이긴 했다. 하지만 실제론 전혀 비슷하지 않았다. 세이지가 보기엔 둘을 비교하는 자체가 이미 쥬다스에게 무례였다. 이는 마치 하룻강아지와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범을 놓고 비교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이쪽은 제 아우 세이지, 그리고 요정족 란입니다.” 쥬다스가 책을 정리하고 돌아온 두 사람을 지오에게 소개했다. 세이지는 황당한 심정을 속으로 감추고 인사를 건넸다. “루바르잔 3황자 세이지입니다.” “란이야.”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란을 보며 지오가 흠칫 표정을 굳혔다. 그녀가 반말을 사용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요정은 분명 선녀처럼 아름다운 존재라 들었는데.” “란이는 참으로 어여쁜 아이입니다. 물론 해동에서는 익숙한 종족이 아니긴 하겠지요.” 쥬다스는 지오가 찡그리든 말든 태연히 대꾸했다. 지오가 볼 때에 낮의 란은 그야말로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생김새였다. 차라리 대놓고 특이하게 생긴 괴수나 짐승들이라면 그러려니 싶겠는데 사람 모습에서 피부나 특정 부위들이 징그럽게 자리 잡아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꼭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는 걸 볼 때나 기괴한 방향으로 꺾인 뼈 등을 볼 때 느끼는 징그러움이 그녀의 외모에 녹아 있다. 마치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귀신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지오는 소름이 오른 팔뚝을 긴 소매 안에 감추며 가까스로 시선을 돌려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게다가 루바르잔 제국의 3황자까지. 특이한 구성원이군요.” “그렇습니까?” 쥬다스는 먼 나라 얘기하듯 멀거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태연함에 어쩐지 울컥한 지오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어린 지오로써는 요괴같이 생긴 소녀에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아들과 함께 다니는 쥬다스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예의에 어긋난 질문을 던지고 말았다. “하면 묻지요. 당신들은 서로를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예.” 즉답이었다. 지금까지 여유롭게 허허거리던 것과 다르게 몹시 단호했다. “어째서?” “저도 묻겠습니다. 신뢰란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이지오는 갑작스런 질문에 대해 답하지 못했다. 간단한 내용이었는데도 통 이렇다 할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오가 멍하니 입을 다물자 쥬다스는 다시 물었다. “그럼 주로 어떤 자에게 신뢰를 주십니까?” “믿음을 갖기 위해선 상대를 완벽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나는 아무에게나 신뢰를 주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답할 수 있었다. 이지오는 당당히 제 의견을 밝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마음속은 모른다 하니, 꾸준히 오랫동안 지켜봐서 판별할 일입니다.” “오랫동안이란 정확히 얼만큼입니까?” “적어도 사계는 지켜봐야 하겠지요.” 쥬다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세자 전하는 신뢰를 얻는 법은 모르고, 사람을 평가하는 방법만 배우셨군요.” 그 말에 이지오의 얼굴이 대뜸 굳어졌다. “나는 이 나라의 왕족입니다. 그 누가 감히 나를, 해동의 왕세자를 의심한단 말입니까.” “높은 자리에 있는 자일수록 의심을 사기 쉽지요. 다른 사람들이 전하께 보이는 모습은 신뢰가 아니라 충의입니다.” “그게 무슨.” “한평생을 알아도.” “……?” “알 만큼 알아 이젠 표정만 봐도 속마음을 알 수 있고, 거짓말할 때 보이는 사소한 버릇마저 알고 있는 이라 한들.” 그조차도 몰랐다. 가족처럼 아꼈던 아이들이 사실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가 지킨 건 사람이 아니라 혼자만의 규칙이었다. 그는 타인의 삶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규칙은 지켰지만 소중한 이들을 상처 속에 방치했다. “신뢰는 보통 쌍방향이라 여기기 쉬우나, 실제로는 일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결코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고로 완벽히 타인을 안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린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듯, 사람은 사람을 배신한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프리드가 말한 적 있었다. 쥬다스는 그 말에 뼈저리게 동감했다. “그럼 누구도 믿지 말라는 뜻입니까?” “아니.” 하지만 그건 불신과는 다른 문제였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상대에 대해 완벽히 알 거라는 오만을 버리시란 얘기입니다. 그건 신뢰가 아닌 무지이니.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신뢰코자 하거든.” 늘 평안하고 사랑으로 가득한 관계란 없다. 삶이라는 건 언제나 굴곡이 있게 마련이다. “누구나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임을 먼저 신뢰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이임을. 쥬다스는 사랑하는 친우들로부터 등에 칼을 맞았을 때를 떠올렸다. 만일 그 사실을 먼저 알았더라면 모든 것이 그렇게까지 일그러지지 않았으리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월요일의 시작입니다.ㅎㅎㅎ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드립니다.ㅎ 0168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어른인 척 노력하고는 있으나 아직 열두 살에 불과한 어린 왕세자는 그가 하는 말에 대해 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반면 조용히 경청하던 세이지가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그렇구나. 우린 분명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나는 지금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 형님을 믿어.’ 신기했다. 당장 쥬다스가 그에게 손해를 입힌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세이지에겐 ‘형님이 하는 일이라면 이유가 있을 테니까’라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있기 때문이다. 세이지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이지오는 어려운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화두를 돌렸다. “하면 청룡과의 계약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습니까?” “흠, 그렇지요. 예정한다고 될 일은 아닌 걸로 압니다.” “대체 왜 청룡은 당신을.” 이 나라 왕손이 버젓이 존재하는데 어째서 타국의 황족을 선택했는가. 이지오는 차마 그리 말을 잇진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분했다.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조차 해내지 못한 계약을 그저 참새가 벼 알곡을 빼먹듯 홀랑 맺어버렸다. 다른 것보다 타국에 청룡을 빼앗겼단 생각에 억울함마저 들었다. 그때, 불쑥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건 내 맘.” “……?” 그들이 뒤를 돌아보자 백호와 플루비를 각각 한 팔씩 안아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몰래 숨어서 지켜보다가 기대했던 것과 달리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아 심심해하던 가야였다. “누굴 선택하든 내 마음이지.” 지오는 아직 가야가 청룡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야는 성큼성큼 다가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왜냐고? 우리 사방신수는 언제나 스스로 주인을 선택했다. 인간들의 기준에서는 국적이라느니 인종이라느니 복잡하게 나눠질지도 모르지만, 실제 그딴 건 무의미해.” 스스로를 신수라 칭했다. 그에 더해 자유로운 복장과 건방진 태도,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등을 훑어보며 왕세자는 ‘설마?’ 하고 중얼거렸다. “그에게는 명백히 해동 왕가의 피가 흐른다. 그러니 일단 사방신수의 계약자가 될 조건은 충분하다.” “겨우 그 정도로……!” “또한 자연계 사대정령을 매료시켰을 정도로 충분하다 못해 흘러넘치는 자질.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깨끗하고 맑은 영혼.” 가야가 쥬다스의 정령들을 ‘사대 정령왕’이라고 표현하지 않은 건 나름의 배려였다. “이렇듯 모든 게 완벽한 자가 내 주인이 되었다. 뭔가 문제라도?” 영락없이 불량배가 시비 거는 모양새였다. 이지오는 물론이고 세이지와 란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가야.” 삐딱한 시선으로 이지오를 내려다보던 가야는 주인의 부름에 순순히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런 청룡의 등장으로 불편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쥬다스만이 홀로 편안한 얼굴이었다. 쥬다스는 손을 들어 가야의 옆구리를 넌지시 가리켜 보였다. “플루비가 마음에 든 모양이로구나.” “쁘에엑.” 거기엔 플루비가 붙들려 밀가루 반죽처럼 찌부러져 있었다. 플루비가 쥬다스에게 가려 바둥거리자 가야는 순순히 손에서 놓아주었다. 쥬다스는 비둘기처럼 푸드득 날아온 플루비를 부드럽게 받아 들었다. “플루비. 바이칼은 어디에 두고 가야랑 왔누?” ‘바이칼’이란 말에 반응한 플루비가 삐삣 울며 날개를 까딱였다. 그 장면을 유심히 쳐다본 가야가 백호를 어깨에 척 얹으며 물었다. “오. 이 녀석 주인이 바이칼이야?” 「캬악. 이거 놔라냥!」 백호가 질색하여 발톱을 세웠지만 청룡에겐 일말의 위협도 되지 못했다. “아까 에단이랑 무슨 훈련한다고 가던데.” “흐음, 훈련이라.” “어. 안내해 줄까? 주인.” 이지오는 돌연 시끌시끌해진 그들을 바라보며 굳었다. 나름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했는데 청룡의 등장과 함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반전되어 버렸다. 아니, 쥬다스는 그대로였지만 청룡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명랑했다. 그는 자신의 계약자뿐 아니라 이미 일행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외웠을 정도로 완벽히 적응한 상태였다. “당신이…… 청룡이라고?” 지오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굳이 답을 듣지 않아도 가야가 청룡임은 알 수 있었다. 지오의 검은 눈동자에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솥단지 위의 뜨거운 김처럼 짙게 서렸다. “나는 왜 안 되는 겁니까?” 가야는 백호에게 머리를 물어뜯긴 채로 힐끗 지오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제국의 황태자와 그와 계약한 청룡 둘 모두에게 화가 나 있었다. “선택은 당신께서 하시는 게 맞습니다. 맞지만, 어째서 저는 안 되는 겁니까? 이 나라가 큰 위기에 처했음을 아시잖습니까. 그런데도 왜 우리나라 왕족이 아닌 타국의 황족을, 혹 이제 해동을 버리시려는 겁니까!” “헛소리.” 비웃음 섞인 답이 돌아왔다. “꼬마야. 뭔가 착각하나 본데.” “……!” “해동은 우리 사방신수 것이 아니라 너희들 것이야. 나는 이 나라를 사랑하지만 결국 그뿐이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정령은 나라와 인종에 귀속되지 않는다. 그들을 유일하게 속박할 수 있는 건 계약자 한 사람뿐이다. 오랜 세월 해동과 함께해 온 신수기에 수호신으로서의 책임감은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해동만을 위한 병기가 된 것은 아니었다. 지오는 청룡의 냉정한 말을 듣고 나서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사방신수에게 애국심 따윈 없다. 그들에겐 계약자에 대한 애정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라를 지키는 건 너희 스스로 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사방신수는 그간 계약자가 원하는 대로 수호임무를 맡아 수행해왔다. ‘아버지와 내가 그들의 사랑을 얻지 못했을 뿐이구나.’ 이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그저 아쉬워해야 할 일이란 걸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해동의 왕세자는 감정적으로는 아직 미숙하긴 하나 현명한 아이였다. 의무가 아닌 그들의 선택이었음을 알고 나자 더 이상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오가 시무룩하게 입을 닫자, 가야는 코웃음 치며 관심을 거두었다. 「너무 심하게 말한 거 아니다냥? 꼬마가 상처받잖냥.」 가야의 머리에 매달려 머리카락을 잘근잘근 씹고 있던 백호가 타박을 주었다. “뭐. 틀린 말도 아닌데.” 「좀 좋게 좋게 말할 수도 있잖냐릉. 여봐, 꼬마. 이 자식 원래 서윤과 계약하고 싶어 했다냥.」 “에?” 해동 왕족인 이지오의 귀에도 백호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팔뚝만 한 고양이가 쫑알거리는 걸 발견한 지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근데 이 계약이란 게 영혼과 영혼을 잇는 술이라 무쟈게 복잡하다냥. 단순히 좋아하고 안 하고로 선택하는 게 아니다냥. 자질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정령의 사랑을 받아도 계약할 수 없다냥.」 “아…….” 그간 신수들이 해동 왕가와의 계약을 거부한 게 아니다. 계약을 하고 싶어도 못하는 상황이란 게 분명 존재했다. 청룡은 여전히 삐딱한 표정이긴 했지만 백호의 설명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렇다냥! 바로 네가 생각하는 그거…….」 “백호님이 고양이셨다니!” 「므앙?」 아직 어린 왕세자가 받을 충격을 걱정하여 신나게 설명해 주던 백호가 입을 세모 모양으로 오므렸다. “놀랐습니다. 궐 안에 현재 청룡만 계시다고 들었는데.” 「뭐? 뭐냥? 내 얘기는 소문이 안 돌고 있다냥?」 “백호라고 해서 당연히 호랑이신 줄 알았습니다. 한데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셨을 줄은.” 지오의 감탄을 듣는 동안 백호의 푸른 눈동자 안에 물음표만 가득 차올랐다. 그러다 이내 꽤액 소리쳤다. 「냐아아악! 고양이 아니다냥! 호랑이가 맞다냥!」 “얌마, 우리 야옹이 삐졌잖아. 사과해.” 「청룡 네가 제일 문제다냥! 이게 다 너 때문이다냥! 으냐앙.」 “엉? 내가 뭘 했다고.” 또다시 티격태격 거리기 시작한 두 신수를 뒤로 하고 쥬다스가 이지오에게 태평한 어조로 물었다. “이제 궁금하신 건 해소가 되셨습니까?” “예? 예에. 저.” “그럼 가십시다.” “예?” 대뜸 가자는 말에 지오는 자신의 무례함을 사과할 타이밍을 놓치고 벙해졌다. 그러는 사이 쥬다스는 이미 가야에게 다가가 안내를 부탁하고 있었다. “훈련장? 알았어, 주인.” 쥬다스가 이지오와 함께 가려는 곳은 다름 아닌 수하들의 훈련장이었다. 그간 궐 안에서 지내면서 에단에게는 합동훈련을 맡겨두었다. 왕이 기거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청룡이 붙어 다니기 시작했으니 굳이 호위들이 우르르 붙어 있을 필요는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제국과 동맹국이지만 해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연금술은 물론이고 주술, 무예, 세부적인 문화풍토까지 전부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다. 해동 자체가 폐쇄적인 성향을 띄고 있기도 했지만 제국에서 그리 문화공유를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맹을 맺으며 제국이 공식적으로 요구한 건 영토 공유와 연금술 하나였다. 그 연금술마저도 황제가 소수 친위관들과 함께 직접 전달 받았고, 확인 후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공론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감추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해동은 자연스럽게 제국인들의 관심사에서 멀어졌다. 제국은 해동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넓었고 마법이나 정령술 등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학술이 많았다. 제국 최고의 검술명가에서 태어난 에단도 집안의 검을 익히는 것에 집중했기에 타국의 무술까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 해동의 왕실에서 무사들을 만났다. 그러나 처음 합동훈련을 제안한 건 에단이 아니라 성왕의 호위무사인 정다울이었다. ‘……곧 큰 전쟁이 일어날 듯하니. 필요하지 않겠소?’ 폐쇄적인 해동 측에서 먼저 협력을 제안해 올 거라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만큼 해동은 큰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훈련장엔 어쩐 일로.” “음. 무사들과 함께 훈련해 보신 적 있습니까?” 지오는 고개를 저었다. 왕족이 무사와 함께 훈련하는 일은 없다. 이는 해동뿐 아니라 모든 나라의 지배계층이 그랬다. 지배자의 권위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말을 꺼낸 쥬다스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오늘 한번 해볼까 합니다.” “예에엣?” 절로 큰 반응이 튀어나왔다.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무사들 틈에 끼어 칼을 휘두르겠다니,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쥬다스의 곁에 있던 세이지와 란은 아무렇지도 않게 동조했다. “형님, 저도 함께해도 될까요?” “그러려무나.” “헤헤. 다치지 않게 조심해. 쥬다스 님, 세이지.” “고맙다, 란아.”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지켜보며 지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말리지는 않는 거야?!’ 친하지 않아서 그렇다 치기엔 분위기가 너무 화기애애했다. 결국 그는 넓게 펼쳐진 야외훈련장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다물고 일행을 관찰했다. 결론은 간단했다. ‘이상한 사람들…….’ 해동의 하나뿐인 귀한 왕손이자 왕세자인 이지오에게 저들처럼 편안히 대할 존재는 없었다. 모두가 그를 받들어 왕족으로서 갖추어야 할 덕과 품성, 행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만 가르쳐 주었다. 아이는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줄 알게 되었으나, 쥬다스가 말했듯 그저 평가하는 법만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니, 이상한 건 나일지도 몰라.’ 지오의 시선이 훈련장으로 먼저 들어서는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참, 조아라에서는 말씀을 미처 드리지 못했네요. 최근 작가그룹 '팀 타우린'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ㅎ 작가그룹 팀타우린은 '달이 뜨지 않는 밤'을 쓰시는 담덕님과 '마왕의 게임'을 쓰시는 니콜로님, '무한리셋'의 다울님, '핑크레이디' 그림작가셨던 서나님 등이 속한 창작그룹입니다. 공식 카페 주소는 http://cafe.naver.com/teamtaurine 입니다. 저도 오늘 가입했....쿨럭.... 한번씩 놀러오셔요!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169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그리고 그를 발견하자마자 즉시 훈련을 정지하고 우르르 달려오는 기사들도 보았다. “오셨습니까, 전하.” “어흐. 전하, 살려주십쇼! 단장이 절 죽이려는 게 틀림없습니다.” 바이칼이 시퍼렇게 멍 든 팔뚝을 내보이며 엄살을 떨었다. 이를 본 쥬다스가 잠자코 웃으며 루니를 불렀다. 파아앗! 허공에서 생성된 푸른 물결이 흐물거리며 붕대처럼 팔뚝을 감쌌다. 열이 쏠려 후끈거리던 자리가 시원해지면서 통증이 완화되었다. “글쎄다, 바이칼. 에단이 너를 정말 죽이려 했거든 그처럼 멍이 질 일은 없었을 것 같다만.” “전하의 말씀대로다. 죽이려면 번거롭게 굴리겠나? 일격이면 충분하다.” “단장. 거 무슨 심정인진 알겠는데 파리 잡듯 말씀하지 마시지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 곁으로 해동의 무사들도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 무예에 뜻이 없는 이지오로서는 전부 잘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과 자신들 사이엔 무언가 극명한 차이가 있었다. 지오는 그것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졌다. 해동의 왕세자가 아까와는 사뭇 달라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당사자는 느긋하게 에단에게 훈련 소감을 묻고 있었다. “이곳에서 서로 합을 맞추어 보니 어떠하더냐?” “그간 알지 못했던 것을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합동훈련을 허하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하.” 에단은 진심으로 제 주군께 감사했다. 시작은 정다울의 제안이었지만 에단은 사실 많이 망설였다. 명색이 황태자친위기사단의 단장인 그는 다른 무엇보다 황태자의 호위를 우선시한다. 별도의 명령이 있기 전까진 호위임무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아무리 해동의 무술에 관심이 있더라도 단독으로 결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또한 에단 스스로도 쥬다스를 위험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의 주군은 상당히 안전에 둔감했다. 지난번 호족 사태 때 몸소 인질이 되어 잡혀간 것만 보아도 그랬다. 만일 그때 에단이 곁에 없었더라면 혼자서 그 호족 소굴에 끌려들어갔을 것이다. 에단은 그리 확신했다. 레이야가 나타난 대나무 숲 마을에서도 그는 레이야를 쫓겠답시고 혼자 숙소를 이탈했다. 쥬다스는 자애로워 보이면서도 막상 자기 안전에 관련해서만큼은 말도 못하게 독단적인 주군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에단은 어떤 상황에서든 쥬다스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해동 왕궁에 들어와서도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주인을 철벽 호위했다. 그런 상황이니 합동 훈련이고 뭐고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랬던 것을 쥬다스가 먼저 눈치채고 일부러 명령을 내렸다. 마침 동물계 정령의 왕이라 불리는 신수 청룡과도 계약했겠다, 조금은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단은 명에 따라 합동 훈련에 임했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결과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해동의 무술은 마법과 검을 섞어놓은 것 같은 독특한 체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별도의 무기 없이도 자신의 신체를 무기화하여 전투하는 이능력자도 존재합니다. 이들의 경우, 제가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으음? 에단 네게 그 정도 평을 들은 적은 처음이구나.” “면구스럽습니다만, 그렇습니다. 해동 무술은 매우 우수하며 무인으로서 배울 점이 많습니다.” 해동과 제국은 각기 다른 양식의 무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에단이 했던 칭찬은 해동 측에서 역으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해동의 무사들을 눈앞에 두고 단점을 말하기는 어려워 일단 장점만 보고하였지만, 그렇다 해도 에단을 비롯한 제국 기사단은 해동의 무사들에게 진정 감탄했다. ‘정다울이라 했나. 그와도 한번 검을 맞대고 싶군.’ 왕의 호위무사인 정다울은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합동 훈련을 제안하긴 했으나 그는 왕을 지키는 자였다. 신수와 계약하지 못한 이서윤이야말로 제대로 된 호위가 늘 필요했다. ‘아마도 그가 이곳에서 가장 강한 무사겠지.’ 그 추측대로 정다울은 이름난 권사 중에서도 제일고수라 일컬어지는 무인이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해동의 무술에 놀란 에단은 그와 언젠가 진검승부로 대련해 보고 싶다는 호승심을 느꼈다. “자, 그러면.” “……?” 휘릭- 다루는 자의 키보다 더 길이가 긴 봉이 공기를 가르며 가볍게 바람을 일으켰다. 에단은 잠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훈련을 마저 해보자꾸나.” “전하께서도 참여하십니까?” 서두에 ‘설마’가 생략된 질문이었다. 표정 자체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사정없이 흔들리는 검은 눈동자를 보며 지오는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었다.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탁 걸친 채 웃었다. “그래. 세이지도.” “아하하. 잘 부탁할게.” “…….” 에단은 한숨을 삼키며 생각했다. 정말이지 그의 주군은, 안전의식이 없어도 너무 없다. 그야 다칠 일이 없을 만큼 강한 정령사라는 사실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이그레트, 쟤가 지금 너 걱정하나 봐.」 「헤헤헤. 기특한 꼬마다요!」 「기특하긴 한데 걱정할 방향이 반대라고 봐요.」 정령들은 걱정에 잠긴 에단을 쳐다보며 동네 아낙들처럼 수군거렸다. 여기 모인 무인들은 전부 제국과 해동에서 손꼽히는 상위 실력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도 쥬다스가 전력을 다한다면 옷깃도 스치지 못하고 단숨에 전멸시킬 수 있다. 숨을 끊고자 하면 끊어질 것이며 건물을 무너뜨리고자 하면 흔적도 없이 흙으로 되돌리거나 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 사실을 아는 건 그가 전생에 거둔 제자인 콜 한 사람이었다.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훈련에 참여하고 있던 콜은 제 스승이 훈련에 참여한단 말을 듣고 에단과 다른 의미로 당황했다. “스…… 전하. 진심이십니까?” “하하. 제가 언제 진심이 아닌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런 뜻이 아니오라. 흠흠.” 콜은 자꾸만 칼칼해지는 목을 헛기침으로 가다듬었다. 노제자의 표정에서 당황을 읽어낸 쥬다스가 빙긋이 웃으며 덧붙였다. “단, 정령의 힘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예?” 「에에에엑!」 이번엔 정령들 사이에서 괴성이 튀어나왔다. 심지어 늘 과묵하게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마저 눈이 동그래져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지?」 「굳이 그럴 건 없지 않아? 우리의 힘은 곧 너의 힘인걸.」 「끄앙. 이제 우리가 필요없다요? 그런 거다요?」 꼭 이별 통보를 받은 여인처럼 훌쩍이는 토니를 손가락으로 쓸어준 쥬다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훈련에 참여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는 각자 위치로 돌아가 자리를 잡는 무사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훈련이기 때문이지요.” ‘적을 섬멸해야만 하는 전쟁이 아니라.’ 이미 극상에 다다른 정령의 힘은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다. 한평생을 살며 모든 일상을 정령과 함께해 온 그가 정령의 힘을 다루는 응용력 역시 완벽했다. 훈련용으로 팀을 짜고 진행하는 전투시뮬레이션에서 그가 진심으로 상대측을 전멸시키고자 정령의 힘을 사용하는 순간 이는 더 이상 훈련이 아닌 학살이 된다. “크흠. 전하, 그건 그거대로 우려가.” “이번 훈련은 안전을 위해 박스를 이용합니다.” “아.” 콜은 그제야 알겠다는 의미로 만류의 손길을 거두었다. 박스는 현실의 육체 대신 정신체로 활동하는 제3의 공간이다. 이 시대의 마법 기술을 집대성한 최고의 아티팩트로, 현실의 육체를 박스에 저장하고 가상공간에서 프로그래밍된 배경과 정신체를 사용한다. 박스 안에서는 아무리 다쳐도 실제 육신에는 영향을 주지 않으므로 훈련 및 시범, 학습용으로는 제격이다. 제국에서는 이미 국가인증기관에서 부분상용화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해동 사람들은 박스에 대해 잘 몰랐기에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였다. “훈련용 박스를 개방시키겠습니다. 맵은 어떤 것으로 할까요?” “가급적 해동의 지형과 비슷하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런 건 아직 없을 것 같은데.” 그가 알기론 루바르잔에서 개발한 박스 중에 제국을 제외한 특정국가의 지형을 프로그래밍한 제품은 없었다. 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한 나라의 지형을 세부적으로 재현한 박스는 없습니다. 대신 비슷한 산이나 평지 등을 재현한 것들은 있습니다.” “음. 그럼 무난하게 산으로 하지요.” 맵이 정해지자 콜의 손에서 자그마한 박스 하나가 빙그르르 돌아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사이 에단은 해동 측 무사들에게도 박스를 이용한 훈련 동의를 얻고 돌아왔다. 해동에서 볼 수 없는 도구지만 박스는 워낙 획기적인 발명품이었기에 대부분 포탈과 더불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전하께선 어찌하겠습니까? 박스 훈련은 실제 전투가 아니라 정신체를 이용한 가상현실이기 때문에 절대 직접적인 피해는 입지 않습니다.” 친절히 의중을 물어오는 쥬다스를 앞에 두고 이지오는 잠시 머뭇거렸다. 솔직하게는 박스에 입장하기가 좀 두려웠다. 그러나 명색이 왕세자인데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오기로라도 박스에 입장하기로 결정했다. “그 훈련. 저도 참가하겠습니다.” 그러자 무사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졌다. 제국의 황태자와 해동의 왕세자. 두 나라의 합동 훈련만으로도 이례적인데 여기에다 각 나라의 정상이 직접 참여하기까지 하다니,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쥬다스라면 몰라도 이지오의 경우 왕족 기본 소양으로 익힌 승마와 궁술을 제외하고는 무예를 배워본 적이 없었다. “잠깐만, 주인. 정령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건 나도 낄 수 없는 거야?” “그래, 부탁한다. 훈련 중엔 얌전히 있어주렴.” “…….” 가야는 매우 반항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계약자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사가 바라는 소망은 아무리 부탁이라 말해도 결국 절대적인 명령이나 다름없다. 심기가 불편한 티를 팍팍 내며 서 있던 그는 결국 쳇 하고 작게 혀를 차며 뒤로 물러섰다. 「거 보라냥.」 “뭐.” 그의 어깨에 행낭처럼 매달린 백호가 갸르릉 웃으며 깐족거렸다. 「주인이 생기면 뭘 한다냥? 어차피 청룡 넌…….」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들어보고 헛소리면 꼬리로 리본을 만들어버릴 거야.” 「느아아! 이 폭력적인데다 야만적이기까지 한!」 백호는 화들짝 놀라 꼬리를 뒤로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룡은 백호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비폭력주의에 고상하기까지 한 우리 야옹아.” 「네놈 진짜 싫다냥.」 “너는 주인을 누구로 정할 거냐?” 놀리는 듯한 말 속에 진지함이 한 조각 깃들어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백호는 툴툴거리던 표정을 풀고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누구로는 무슨 누구로냥? 상대가 있었으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냥?」 “있잖아. 둘씩이나.” 멈칫, 백호의 시선이 박스훈련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네 주인 말이냥?」 “하긴 주인은 아무리 네가 바라더라도 힘들겠지. 포기해라, 야옹아.” 「헹. 네가 포기하라니까 더 포기하기 싫구냥.」 “선택은 그가 하는 것이니까. 뭐 야옹이 네게 딱 어울리는 주인은 따로 있는 것 같다만.” 「있긴 개뿔이…….」 “어허. 야옹이가 개뿔 얘기하는 거 아니야.” 「냐…….」 청룡은 기가 막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바라보는 백호를 다시 한 번 툭툭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주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던 참이었다. “정렬!” 때마침 훈련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170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스위치 온.” 짧은 시동어와 함께 박스가 개방되었다. 육면이 전부 매끈한 검은 벽으로 이루어진 박스는 홀로 부유하여 허공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그 아래로 새하얀 문이 하나 생겨났다. 콜의 지도에 따라 기사단부터 시작해서 무사들까지 무사히 박스 안으로 진입했다. 제일 마지막으로 들어온 이지오는 망막을 찌르는 환한 빛에 화들짝 놀라 두 팔로 얼굴을 가렸다. “……!” “전원 무사히 입장한 것 같군요.” 그보다 한발 앞서 박스에 들어온 쥬다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오는 그 소리를 듣고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리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휘이이이- 낮은 담과 멋들어진 기와로 가득했던 궐에서 거친 바람이 부는 황야로 바뀌었다. 잘 살펴보니 황야가 아니라 곳곳에 마른 풀과 나무, 크고 작은 돌이 쌓여있는 거대한 산 정상이었다. “이게 다…… 가짜?” 지오는 바람에 쉴 새 없이 펄럭이는 옷자락을 쓸어보며 중얼거렸다. 도저히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감촉이 생생했다. “이 훈련에서 팀은 국가를 기준으로 가릅니다. 여러분이 보고 있는 모든 배경과 감각은 마법으로 이루어진 환상이므로 실제로 다치거나 죽지 않습니다. 죽음 상태에 이른 구성원은 자동으로 박스 밖으로 퇴장되며, 재입장할 수 없습니다.” 박스에 대한 설명은 간결했다. 어차피 원리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아봐야 마법이론에 무지한 이들이 이해하기엔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이었다. “팀원이 전멸할 경우나 깃발을 들어 항복 선언을 할 경우, 마지막으로 팀의 리더가 사망할 경우 이 훈련은 종료됩니다.” 쥬다스는 청팀의 리더를 상징하는 푸른 견장을 어깨에 차며 붉은 견장을 지오에게 건넸다. 얼결에 견장을 받아든 지오가 그를 올려다보자 쥬다스는 마지막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이곳에서 다친다고 해서 실제 부상을 입지는 않지만 고통은 그대로이니 유의해 주십시오.” “……이해했습니다.” 검과 마법이 난무할 전장이다. 부상을 입는다면 가벼운 찰과상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재수가 없다면 신체 일부가 날아가 퇴장하지 못하고 고통에 몸부림칠 수도 있다. 어린애 장난이 아닌 진지한 훈련이며, 가짜라고 마냥 마음 놓을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지오는 그 사실에 겁을 먹으면서도 견장을 쥔 손아귀에 콱 힘을 주었다. ‘모르겠어. 이런 훈련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지?’ 모의전투라곤 하나 국적을 기준으로 나눈 팀이다. 이 훈련에선 심지어 직접적으로 적장의 목을 칠 수도 있다. 자칫 가뜩이나 어색한 나라간 감정의 골만 깊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훈련이었다. ‘설마 나를 시험하는 건가?’ 예리한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상대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이었다. ‘젠장! 웃기지 마. 아무리 제국이 강하다고 해도 그건 전체 국력을 따져보았을 때 이야기다. 개개인 실력은 절대로 뒤지지 않아.’ 지오는 붉은 견장을 당당히 어깨에 찼다. 그가 비록 어린 나이긴 했지만 날 때부터 제왕학을 배우며 자란 준비된 군주였다. 첫 실전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나라에 대한 책임감과 애정이 훨씬 강했다. 그는 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한 제국 황태자의 콧대를 단단히 눌러 주리라 결심했다. 지오 본인은 무력이 별로 강하지 않으니 전략을 잘 활용해야했다. “준비가 완료된다면 깃발을 흔들어주십시오. 전투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를 울리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각자 위치로.” 이지오는 자기 무리를 이끌고 홍색 깃발이 꽂힌 홍팀 진영으로 향했다. 해동 무사들로 구성된 홍팀은 견고한 바위로 둘러싸인 위치에 깃발을 꽂고 자리 잡았다. “홍군은 들어라. 적은 우리가 마법공격에 약할 거라 생각하겠지.” 지오는 움츠러들지 않고 곧장 지휘를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해동은 타국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뿐, 무지한 게 아니었다. 루바르잔 제국이 다른 소국들을 발밑에 두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동안 해동은 흔들리는 기반을 다잡으며 타국 전력의 맹점에 대해서 숨 가쁘게 연구해 왔다. 고로 그들은 제국이 손에 쥔 이능에 대해 제법 세세히 알고 있었다. 지오는 이번 훈련이 직접적으로 제국에 반기를 들 수 없는 해동이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역습기회라 여겼다. 그의 입가에 자신감 어린 미소가 감돌았다. “그 오만함이란 허를 찔러 들어갈 것이다. 검기사들을 선제공격하여 시선을 끈 뒤 원거리 이능력자들을 덮쳐 부지불식간에 제거한다. 마법이 봉쇄되면 그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될 테지.” 한편, 루바르잔 제국 기사들로 구성된 청팀은 풀과 나무가 우거진 부근에 진영을 세웠다. “적은 마법 공격에 가장 강할 거야.” “예?” 쥬다스의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봉을 어깨에 걸친 채 수하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을 이어갔다. “도리어 우리가 해동의 권술이나 주술 등에 생소하여 놀라게 될 수도 있어. 처음엔 당황스럽겠지만 몇 번 수를 주고 받다 보면 익숙해질 게다.” 부드러운 어조로 이어지는 설명에 의문을 갖는 이는 이제 없었다. “그러니 우린 적의 수에 익숙해질 때까지 마법 기사를 포함한 서포터들을 지키면 된다. 말인즉.” 각 팀의 리더는 동시에 최종 지시를 내렸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방어는 최선의 공격이 될 것이다.” 펄럭! 홍기와 청기가 하늘 높이 펼쳐졌다. 드디어 전투 훈련의 시작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묵직하게 산을 뒤덮었다. * * * 「프리드.」 길고 하얀 손가락이 검푸른 머리카락을 훑었다. 스르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보며 릴리스가 고혹적으로 웃었다. 「정말 꼬맹이만 보내도 되겠어?」 “왜? 그사이에 정이라도 들었나?” 프리드는 킥킥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들었다. 핏물이 고인 샘처럼 진한 붉은 눈동자가 즐거움을 담고 빛났다. 이를 마주 본 릴리스가 그의 뺨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아니. 귀여운 꼬마긴 했지만. 릴리는 어린애한텐 흥미 없는걸.」 “그럼 뭘 걱정해. 녀석 정도면 충분하다.” 「상대는 그 이그레트인데?」 의아함을 느낀 릴리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매끈한 목선을 따라 밤처럼 까만 머릿결이 흘러내렸다. 머리카락은 나른한 자세로 의자에 몸을 반쯤 묻고 있던 프리드의 가슴팍까지 내려와 아무렇게나 흩어졌다. 「할더는 네가 아끼는 꼬맹이잖아. 게다가 이그레트란 자, 이젠 진심으로 상대할 거라며. 혼자 보내면 정말 죽을 지도…….」 “아, 그런 얘기였나.” 프리드는 피식 조소를 흘렸다. “그거라면 더욱 걱정할 이유가 없어. 어차피 할더는 그를 만나지 않는다.” 「응? 그러라고 보낸 거 아니야?」 “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패를 그렇게 허무하게 버릴 순 없지.” 「헤에.」 프리드의 손길이 가볍게 그녀의 턱을 붙들었다. 입술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이듯 대화가 이어졌다. “할더가 만나게 되는 건 그가 아니라 그의 주변 사람들이야.” 어리석게도, 다시 사람을 믿는 걸 택한 그에게 보내주는 깜짝 선물이지. 머릿속으로만 덧붙인 프리드가 즐거이 웃으며 릴리스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리곤 다시 깍지를 끼고 의자에 풀썩 몸을 기댔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쪽에서 맞이할 거야.” 「흐으응. 직접 상대하려구?」 “상대한다고 표현하긴 부끄럽군. 뭐, ‘도발’ 정도로 해둘까.” 프리드는 이그레트가 어떤 존재인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다는 말은 그저 단순히 자연계 정령의 계약자라는 뜻이 아니다. 어찌어찌 꼼수를 부려 정령왕의 힘을 봉쇄한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정령은 전부 그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어찌 보면 이그레트야말로 자연의 왕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런 자를 상대로 진검승부에서 이길 생각을 하는 자체가 미련한 짓이었다. ‘미련한 걸 넘어서 미친 짓이지.’ 농담처럼 중얼거리긴 했지만 과거 실제 그 미친 짓을 하다 영혼마저 잃어버린 여자가 있었다. 프리드는 사야 황후의 말로를 떠올리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건드렸다. “슬슬 파티를 열 준비를 해야겠군.” 「파티? 좋아! 모처럼 드레스를 꺼내 입어야겠네.」 릴리스는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가죽옷을 내려다보며 기대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귀빈을 모셔야 하니 화려하게들 꾸미라고.” 붉은 눈동자가 한쪽 구석으로 향했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릴리스가 스르륵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곳엔 쥐 죽은 듯 조용히 숨도 쉬지 않고 서 있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맞아. 너는 특별히 이 언니가 꾸며줄게.」 릴리스가 키득키득 웃으며 손을 뻗었다. 「흑주작.」 사령 릴리스의 차가운 손이 주작의 복숭아 빛깔 손등을 감쌌다. 멍하니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음산한 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하얀색 바탕에 붉은 꽃 자수가 놓인 한복이 무릎 선까지 풍성하게 내려와 살랑였다. 주작은 정작 눈앞에 있는 릴리스에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가만히 자신을 향하는 푸른 눈동자를 발견한 프리드가 낮게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릴리스를 따라가. ‘이브’.” “…….” 주작도 해동 왕가 외엔 누구와도 계약하지 않던 사방신수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이브’라는 계약명으로 불리고 있었다. 화륵! 주작 이브의 등 뒤로 불꽃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타올랐다. 불꽃은 이미 본연의 화사한 색상을 잃어 먹물을 풀어놓은 듯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불꽃의 날개를 단 주작의 모습은 더 이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신수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릴리스에게 손을 잡힌 채로 살짝 날개를 팔랑여 허공에 동실 떠올랐다. “앞으로 내가 다시 부를 때까지 릴리스를 따라다녀.” 그러자 이브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주인께서 원하시는 대로.” 릴리스의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두 여인은 그림자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자리에 남은 프리드는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모래시계를 꺼내 빙글 돌려세웠다. 유리 너머로 파스슷 떨어지는 연두색 모래알갱이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너울너울 빛났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내리는 모래는 마치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삶과도 같아 보였다. 프리드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모래시계를 응시했다. “……또다시 당신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된다면.” 간신히 용기 내어 느릿느릿 뛰기 시작한 심장 위로 다시금 차가운 칼날이 내리꽂힌다면. 자신이 믿고 있던 주변이 전부 모순투성이였음을 알게 된다면. “그땐 어쩌실 겁니까? 이그레트 님.” 그래도 당신은 이 더러운 세상을 용서할 수 있을 텐가. 프리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모래시계를 휙 손에서 놓았다. 쨍! 유리가 퍼석하고 깨지며 연두색 고운 모래가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처참히 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쏟아진 모래를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다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연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서... ㅠㅠ 앞으로 분발하겠습니다. (꾸벅) 즐거운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 0171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박스 안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참여자들이 시작 전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치열했다. 인원은 리더를 포함하여 13대 13. 그리고 리더가 퇴장당하면 그대로 훈련이 종료된다. 때문에 실질적인 전투인원은 12명씩이었다. 초반에 서로 진짜 공격해도 되는 건지 걱정이 되어 눈치만 살피던 훈련이 본격적인 전투양상을 띠기 시작한 건 시작한 지 10분이 지나서부터였다. 선제공격은 홍팀에서 먼저 치고 들어왔다. 파앙! 사람의 손에서 나는 소리라곤 믿기 힘들 정도로 거센 파공음이 터져 나왔다. 해동국군은 검사와 권사가 섞인 특이한 조합이었다. 위력으로 치자면 맨손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상대하는 권사들이 훨씬 강력했다. “……!” 전투 시작과 동시에 돌아가는 양상을 줄곧 살피고 있던 이지오는 자못 놀란 기색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도발에 넘어오지 않다니?’ 청색 물결은 홍색의 도발에도 꿈쩍하지 않고 제 진영을 지켰다. 마법기사와 치유술사 곁에는 각 사이사이마다 검기사들이 포진하여 지키고 있어 당초 계획했던 작전대로 파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상황이 자신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자 초조함을 느꼈다. ‘쳇, 질 수 없지.’ 이지오는 호신용으로 들고 있던 검을 힘주어 쥐었다. 그는 무술실력이 부족한 자신이 직접 나서 봤자 될 일도 그르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팀의 머리가 되어 전략적으로 명령을 내리면 된다. “진을 펼쳐라!” 상대가 방어에 신중을 기한다면 힘으로 깨뜨려 버리면 될 일이다. 지오는 그러기 위해 주술을 활용하기로 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전투에 임하고 있던 무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위이잉- 모기 날갯짓 소리와도 흡사한 소리가 급작스럽게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들은 루바르잔 측 기사들이 일순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건.” 가장 선봉에서 검을 휘두르던 에단이 신중하게 적군을 살폈다. 해동군은 루바르잔 기사단과 다르게 근접전과 원거리 전투가 분리되지 않는다. 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권사들이 수인(手印)을 맺어 직접 주술을 사용하기도 했다. 맞붙은 상태에서 펼쳐지는 주술진은 치명적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에단이 서둘러 수하들로 하여금 뒤로 물러서도록 했다. “적은 주술을 사용한다. 거리를 벌려라!” 쥬다스는 큰 줄기는 자신이 맡더라도 세부적인 지휘는 에단에게 맡겨놓은 상태였다. 전투에 능한 에단의 즉각적인 판단이 현재 정령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자신보다 훨씬 유용하리라 여겼기 때문이다. 확실히 에단은 상대가 어떤 주술을 사용하는 줄 모르면서도 예리하게 판도를 짚어냈다. 청팀이 한발 물러서자 홍팀은 기세등등하게 주르륵 진영에 밀고 들어왔다. 해동의 주술은 마법처럼 대단위로 펼쳐지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거나 폭발을 일으키는 등 큰 손상을 입혔다. 최대한 빨리 일선을 물렸지만 그 사이 주술에 당해 쓰러지는 기사들이 둘이나 발생했다. 대등하게 맞붙던 전투 중 처음으로 탈락자가 생겼다. 파앗! 죽음 상태에 이른 두 기사는 그대로 하얀 빛에 휩싸여 박스 밖으로 퇴장되었다. ‘12명 중 2명 탈락. 남은 인원은 열.’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걸친 채 차분히 이를 지켜보았다. “흐음.” 「쟤들 정말 이기려고 마음 제대로 먹었나 봐. 굉장히 저돌적이네.」 「두 명 아웃이다요!」 이번 전투에서 힘을 사용하지 않지만 일단 박스 안에 들어온 이상 정령들은 모두 강제적으로 실체화한 상태였다. 그들은 청팀 깃발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렇구나. 슬슬 시간인가.” 「응? 뭐가?」 유니가 펄럭이는 깃발 위에 살포시 매달려 그를 내려다보았다. 쥬다스는 정령들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곤 봉을 제대로 손에 쥐었다.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가벼운 무게감이 손아귀에 감돌았다. 루바흐에서 처음 봉술을 배울 때만 해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신체가 무기를 감당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넘어지고 까지고, 다치는 게 일상이었던 시절이 바로 오 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간단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주술을 다루는 건 권사뿐. 검사들은 기를 운용하지 못한다. 주술의 종류는 폭발, 속박, 둔화. 주문을 외우거나 마력을 배열하는 시간 없이 즉시 시전이 가능. 공격은 매우 위력적이나 이는 근접 전투 시에만 해당하는 이야기.’ 맑은 금안이 치열한 전투의 현장을 담았다. 쥬다스는 에단에게 지휘를 맡기고 잠시 안전한 위치에 서서 홍팀이 사용하는 주술의 종류나 전투방식을 전부 파악해냈다. 그는 팀의 승패를 쥐고 있는 리더로서 자신이 끼어들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슬슬 때가 되었다. “자, 그럼. 알겠지? 이 안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은 끼지 않는 게야.” 「……노력은 해볼게.」 유니는 탐탁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유니뿐 아니라 다른 정령들도 전부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쥬다스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답했다. “고맙구나.” 그의 바람대로 정령들은 그가 자리를 벗어났어도 여전히 깃발이 꽂힌 땅에 머물렀다. “부단장님, 마법진 전환 완료하였습니다.” “좋아.” 마침 바이칼은 칼같이 타이밍을 맞추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시작 전 미리 마법기사의 역할에 대해 언질을 해놓은 상태였다. ‘바이칼, 전투 시작 15분 후에 보호마법진을 해제하고 공격 마법으로 전환하도록 하여라.’ 청팀의 마법기사는 바이칼을 포함한 세 명뿐이다. 그들이 다루는 마법진은 한 번에 하나의 성질만을 띠게 되어 있다. 방어에 주력하느라 실드와 보호마법을 발동하고 있던 마법기사들은 명령에 따라 시간이 되자 진을 수정하여 공격 형태로 전환하였다. “첫 번째 목표는 우측 검사진영.” 고오오오- 마력이 요동치면서 기사단의 발밑에 깔려 있던 마법진이 번쩍 빛을 발했다.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홍팀에서도 이를 저지하려 방향을 틀었다. “마법사들을 공격해라!” “어딜!” 검과 손이 부딪히며 다시금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기를 손에 두른 권사 하나가 자신을 막아선 검을 밟고 도약했다. 하늘을 날 듯 기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은 권사가 빠르게 주술을 사용해 마법기사를 노렸다. “폭(爆).” 콰앙! 폭발한 자리가 시꺼먼 연기에 휩싸였다. 무리하게 뛰어든 권사 탓에 마력 배열이 흐트러지며 마법시전이 멈추었다. 그리고 그 권사는 긴 검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하얀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의 희생으로 인해 마른가지에 불붙듯 양 팀의 기세가 급격하게 타올랐다. “지금이다! 마법기사를 먼저 제거하라.” 와! 하고 홍색 물결이 중심부로 달려들었다. “……아오, 빌어먹을. 다 됐었는데.” 바이칼은 욕지기를 내뱉으며 얼굴에 묻은 재를 털었다. 다행히 마법사들의 피해는 적었다. 대단위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마법진을 재생성해 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느 틈엔가 대열이 바뀌어 검사는 검사가 상대하고 권사는 마법사들을 노려 치고 들어온 형국이 되었다. 해동의 권사들은 몹시 행동이 재빨랐다. 권사 셋이 갑작스럽게 마법을 해제하는 바람에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은 마법기사들에게 쏜살같이 파고들었다. “실드.” 바이칼은 뛰어 들어온 적들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급한 대로 실드를 시전했다. 빠악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기를 두른 주먹이 실드를 강타하였다. 그 일격에 실드가 촘촘한 거미줄처럼 좌르륵 금이 갔다. ‘으아아, 그러니까 단장! 마법기사에게 근접전은 힘들다니까요!’ 마법진 없이 시전하는 마법들은 소규모에 준하며 대체로 그 위력이 약하다. 신체형 이능력자가 전력을 다해 부딪혀오는 공격에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너덜너덜해진 실드를 본 바이칼이 아연실색하여 뒤로 물러서던 찰나였다. “큭!” 맹수처럼 흉흉한 기세로 달려든 권사가 주먹에 불길을 휘감고 내지르고 있었다. 권사들이 운용하는 기란 바람이나 불, 물의 형태로 주먹을 감싸곤 했는데 그중 불이 파괴력이 가장 강했다. 걸레짝이 된 실드가 버텨낼 수 없으리란 생각에 바이칼이 황급히 동료기사를 뒤로 밀쳤다. 마법기사는 하나하나가 소중한 전력이다. 하나가 당해도 다른 둘이 생존해 있어야 팀의 승률이 높아진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라 본능적으로 전우를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으나 이는 곧 무의미한 행동이 되어버렸다. 카앙! 화륵, 불길이 긴 막대를 타고 번갯불처럼 번쩍였다. 바이칼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이를 바라보았다. “전하……?!” 순백색으로 빛나는 황룡쇄가 권사의 맹렬한 공격을 올려쳤다. 쥬다스는 위협적으로 타오르는 불길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선 바이칼을 향해 명령했다. “바이칼, 마법진을.” “옙!” 바이칼은 도대체 쥬다스가 이 상황을 어떻게 알고 끼어든 건진 몰라도 자신이 맡은 임무를 상기해 냈다. “거기 쓰러진 친구는 괜찮나?” “소, 송구합니다. 넘어졌습니다.” 바닥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던 다른 마법기사도 비칠거리며 일어섰다. 마른 풀이 잔뜩 묻은 얼굴에 코피까지 흐르고 있었다. 언뜻 처참한 몰골이었으나 바이칼은 동료를 지켜주겠답시고 자신이 밀어 그 꼴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미안. 웨일 경.’ 그래도 마음만은 널 위한 거였어. 바이칼은 속으로나마 동료에게 사과를 건넨 후 새 공격마법진을 생성해 냈다. 마법기사들이 힘을 합하자 흐트러졌던 마법진이 다시 천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 앞을 쥬다스가 막아섰다. 그가 어깨에 착용하고 있는 파란 견장을 확인한 권사가 소리쳤다. “적장이 여기에 있다!” 청팀 리더만 퇴장시키면 이 전투는 홍팀의 승리로 끝난다. 그건 홍팀 리더인 이지오도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가장 후선에서 몸을 숨긴 채 안전하게 호위를 받고 있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위치에 떡하니 모습을 드러낸 쥬다스는 당연히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기사들과 뒤섞여 있던 홍팀 무사들이 방향을 틀어 그를 제거하고자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피잉! 파랗게 빛나는 마력화살이 날아와 적의 접근을 막았다. 적들이 주춤하는 사이 화살은 핑핑 속사로 날아들었다. 마법 외에 원거리 공격이 존재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권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뒤로 물러섰다. 근거리 전투에는 루바르잔 기사들도 고전할 만큼 강력한 무예를 선보인 권사들이지만 원거리 공격에는 쥐약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크리스티나.” 쥬다스의 곁에 활을 든 여인이 나타났다. 바다를 연상케 하는 투톤의 푸른 머리카락이 길게 산바람을 타고 나풀거렸다. 바로 크리스티나의 엄호사격이었다. ‘여자?’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오는 당황하여 다른 지시를 내릴 생각을 못했다. 해동에서는 여자를 왕실무사로 뽑지 않는다. 여성은 신체형 이능력자라 해도 남성보다 위력이 약하며 여러모로 생리적 제약이 많았다. 같은 이유로 루바르잔 제국에서도 여기사는 흔치 않았다. 다만 제국에선 여기사를 드물게나마 선출했고, 해동에선 여자를 절대로 병력으로 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크리스티나는 이 전투에서 유일한 여성 전사였다. 해동왕족으로 자라면서 여성을 귀히 아껴야 한다는 가치관을 굳힌 이지오로서는 몹시 당혹스러운 구성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0172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엄호하겠습니다.” 활을 등에 갈무리한 크리스티나는 이번엔 검을 빼 들었다. 여성의 몸으로 문무 모두를 겸비한 그녀는 검술 실력도 다른 기사에 비해 뒤처지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달려드는 권사의 공격을 막아섰다. 주먹을 받아친 날카로운 검신 너머로 살랑이는 푸른 머릿결을 바라본 권사가 소리쳤다. “여자의 몸으로 검을 들다니!” 경탄이라기 보단 경악에 가까웠다. 하지만 크리스티나는 해동 무사의 외침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훙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적의 옷자락이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까딱했으면 옷이 아니라 생선 토막 나듯 배가 갈라졌을 매서운 일격이었다. 그제야 그녀를 얕보던 적들은 진지하게 대전에 임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 전투가 각국의 자존심을 건 훈련인 만큼 무사들도 여자라고 봐줄 생각이 없었다. 옆구리로 파고드는 주먹을 이번엔 백색 곤봉이 막아냈다. “멋진 무술이로군. 화려하진 않아도 수려하다 칭할 수 있겠어.” “……!” ‘루바르잔 황태자?!’ 설마하니 수하의 등을 적장이 직접 지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던 권사가 당황하여 곧장 방향을 틀었다. 드드득- 땅을 긁고 올라온 봉의 하단부가 이번엔 역으로 권사의 옆구리를 노렸다. 퉁 소리와 함께 몇 수 더 합이 오고 갔다. 생각보다 봉을 다루는 움직임이 유연했다. “내 그리 뽐낼 실력은 아니네만. 썩 녹록치는 않을 걸세.”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건네며 봉을 회전시켰다. 그 사이 공격 마법진을 완성해낸 바이칼이 시동어를 외쳤다. “라이트닝 로더(Lightning Loader)!” 꽈릉! 마력과 마력이 정해진 배열을 따라 충돌을 일으키며 스파크를 뿜어냈다. 그가 시전한 건 자연이 불러오는 재해와 다르게 다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섬멸하도록 설계된 대단위마법이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벼락의 춤 아래 처음 목표로 잡은 검사들이 직격 당해 생명 에너지를 소진했다. ‘이건 마치.’ 후방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지오는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도 채 의식하지 못하고 생각했다. ‘모든 흐름이 그를 중심으로 흐른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그러나 그 각본에는 리더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투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거대한 축이 되어 쥐고 흔든다. 아군 적군 구분할 것 없이 누구나 그에게 이목을 집중하도록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판세는 쥬다스가 이끄는 청팀에 기울어갔다. “킹…….” 꼭 체스판의 킹을 보는 것 같다. 지오는 그리 생각했다. 쥬다스란 존재는 체스를 두는 승부사가 아니라 하나의 말로서 존재하는 킹이다. 그 킹을 잡기만 하면 게임은 끝나지만, 다가가는 순간 대기하고 있던 나이트와 룩이 나타나 승기가 만연하던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그리고 이제 곧 킹에게 직접 보호를 받은 비숍이 대규모 마법을 펼치는 것이다. 이지오의 기세등등하던 눈빛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전투 능력은 없어도 판세를 읽는 지휘관의 눈만큼은 가지고 있었다. ‘달라. 애초에 가지고 있는 역량이 다르잖아! 정말로 저자가 나보다 겨우 다섯 살 많은 소년이라고?’ 팀원들 개개인 간 무술 실력은 분명 서로 우위를 가리기 힘들었다. 제국의 검술 천재로 칭송받는 에단만이 유일하게 홀로 검사 서넛을 거뜬히 상대할 정도로 격차를 보여줬고 나머지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가 어느 한쪽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 건 고작 한순간에 결정된 일이었다. 지오는 여기서 지휘관의 차이가 팀의 승패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 게임의 퀸은. 「우으으. 정말 걱정된다니까.」 「어쩌죠? 환상이라지만 공격을 받는데 가만히 지켜보기도 좀 불안해요.」 「그치만 이그레트가 나서지 말아달라고 했다요.」 「……조금만 더 참아보도록 하지.」 이지오의 시선이 멀찍이 떨어진 청팀 깃발로 향했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어렴풋이 아른거리는 색색의 빛줄기가 위험스레 번뜩이고 있었다. 그 사이에 홀로 팔짱을 낀 채 불만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가야가 보였다. ‘어느 수준인지는 알 수 없으나 만일 여기다가 정령의 힘까지 적용했더라면.’ 실은 저들 중 신수 청룡만 끼어들어도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일찍 종료되었을 것이다. 봄날 꽃가지처럼 흐드러지게 하늘을 수놓는 번개와 그 아래 비치는 온갖 그림자를 보며 지오는 홍팀 깃발에 손을 뻗었다. 검사진영이 정리되자 에단은 쏜살같이 합류하여 쥬다스의 곁을 지켰다. 공격마법진이 포화처럼 연속적으로 불을 뿜었다. 그리고 직접 수하를 지키는 벽이 되어 기꺼이 적과 맞서면서도 전군 지휘를 완벽하게 해내는 쥬다스는 누구보다 굳건해 보였다. 펄럭! 뒤집어진 홍기가 하늘높이 솟아 휘날렸다. 이지오는 남은 무사들이 더 괴로워하기 전에 깔끔히 결과에 승복했다. 홍군의 패배였다. * * * 박스에서 나온 훈련참여자들은 하나같이 피로감을 감추지 못했다. 겨우 사십 분 남짓한 짧은 전투였지만 생생한 감각을 느껴가며 몰입하다보니 실제 몸을 쓴 것 이상으로 피곤해진 탓이었다. “앗.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쥬다스 님, 어땠어?” 밖에서 백호를 끌어안고 콜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란이 밝은 표정으로 총총 다가왔다. 쥬다스는 그녀의 머리를 토닥여 주며 답했다. “잘 마쳤단다. 란이 너는 기다리느라 지루했겠구나.” “어? 아니, 콜 아저씨한테 옛날 얘기 듣고 있었어.” 란은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백호도 쩍 하니 하품을 뱉으며 동조했다. 「후아암. 그냥저냥 들을 만했다냥.」 “무슨 얘길 들었는데?” 가야가 관심을 보이자 백호가 귀찮다는 투로 대답해주었다. 「어릴 적에 사부님을 만나서 설움을 많이 겪었다는 이야기?」 “뭐야 그게. 스승이 무척 무서운 사람이었나?” “하하.” 설움을 겪게 만든 장본인은 그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리곤 박스에서 나와 우두커니 서 있는 이지오에게로 다가갔다. “좋은 훈련이었습니다.”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 지오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깐 채 그를 불렀다. “당신과 당신의 국가는 강합니다. 제가 건방졌음을 인정하고 사과하겠습니다.” “그렇습니까.” 여전히 잔잔한 호수같이 태연스런 어투였다. 승자의 만용이 아닌 그저 그 본연의 여유임을 알기에 더욱 패배감이 짙어졌다. “해동의 무사들은 움직임이 빠르고 다룰 수 있는 기술이 많더군요. 원거리 공격에 대한 취약점만 보완한다면 이를 활용한 여러 전술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예.” 그가 짚은 건 이지오도 느낀 부분이었다. 분명 홍군을 지휘한 게 이지오가 아니라 전투에 익숙한 장수라면 훨씬 더 적절한 판단을 내렸을 것이고 이처럼 빠르게 패배하진 않았을 테였다. 처음부터 아예 마법사들을 확실하게 끝내버리거나 대단위 마법공격을 무위로 만들 교란 작전을 사용할 수도 있었다. ‘조금만 더 신중을 기해 상대했더라면.’ 이지오는 자신이 적을 만만히 보고 경솔히 훈련에 임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는 팀의 패배가 결국 리더인 자신의 실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는.” 열두 살 아이의 어깨는 이 모든 걸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가기에 너무 작았다. “저는 당신처럼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했어도 결국 상대에게 패했을 것이다. 그렇게 자괴감에 빠지려던 찰나 쥬다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내 동료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택했습니다. 당신은 어땠습니까?” 이지오가 택한 건 이기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겨서, 적어도 저 제국의 소군주 앞에서만큼은 해동이 무시받지 않길 바랐다. 아이는 입을 다물었으나 쥬다스는 잔잔히 말을 이었다. “나름대로의 지키고자 하는 바가 있으셨겠지요. 이번 훈련을 통해 우리는 서로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서로의…… 방식이?” “예. 패배에서 얻을 것은 많지만 이는 당신의 선택을 후회하란 뜻이 아닙니다. 선택함에 있어 꼭 다른 누구처럼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려 한 게 아니었던가. 이지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온화한 빛을 품고 있는 금안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쥬다스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우리의 생각이 각기 찌르는 창과 견고한 방패와도 같다고 느꼈습니다. 둘을 합한다면 최고의 전사가 되겠군요.” 문득 그 미소가 아버지인 이서윤을 닮았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손을 맞잡았다. “‘지오’라고 불러주십시오.” 이름을 허용한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신뢰하게 되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지오는 자존심이 강하고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이 많은 성격이지만 아직 어린아이인 만큼 생각의 전환이 빨랐다. “쥬다스입니다.”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간결해진 이름을 다시 주고받았다. 지오가 돌아간 후 모두 휴식 시간을 가졌다. 박스는 몸을 다치지 않고도 실감나는 훈련을 경험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후유증이 없는 건 아니었다. 모시는 주군을 끼고 이번처럼 초집중 상태로 진행한 전투훈련은 모든 기사단원에게 극심한 피로감을 가져다주었다. 특히 사망 상태에 이르러 박스에서 강제 퇴장당한 기사들은 후유증이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심했다. 뜨끈한 방바닥에 털퍼덕 엎어진 바이칼이 골골대며 앓는 소리를 했다. “와 나, 진짜. 이거 두 번 하라면 못할 것 같습니다.” 훈련이 평소보다 일찍 마무리되긴 했지만 힘들기로 따지면 갑절은 더 힘들었다. 몸이 쑤시는 대신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누운 볏단처럼 널브러진 바이칼의 얼굴 옆으로 플루비가 다가와 기웃거렸다. “삐?” 마침 환복하고 깔끔하게 땀을 씻어내고 나온 에단이 그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살짝 덜 마른 머리카락을 도톰한 천으로 두들기며 조언했다. “녀석도 훈련시키는 걸 게을리하지 마라.” “저요?” “자네와 자네 파트너.” 에단은 당연하다는 듯 그를 플루비와 한 세트로 묶어버렸다. 바이칼은 바닥에 턱을 괸 채 웅얼웅얼 말했다. “플루비 말씀이십니까? 매일 비행연습은 하고 있습니다요.” “비행은 이제 마스터할 때도 되지 않았나. 내가 말하는 건 공중전이다.” “아, 공중전…….” 에단이 한 말을 무심코 되뇌던 바이칼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뭐요?” “공중전 말이다. 녀석이 지닌 빠른 기동력과 고공비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을 살려야지. 명색이 신룡의 기사님이니까.” “정정. 와이번이지 신룡이 아닌데요. 그보다 지금 저더러 공중에서 마법영창을 하란 말씀이십니까?” “기왕이면 마법진을 그려 공중폭격이 가능하다면 좋겠군.” “아니, 이 양반이 진짜!” 검술 천재는 마법의 복잡성을 무시한 채 누구도 해내지 못한 희망사항을 밀어붙였다. 그간 제국 내에선 와이번을 길들이겠다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생각을 하는 자가 없었던 뿐더러 공중에서 마법으로 폭격을 가하겠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지도 못했다. 애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공중을 나는 몬스터는 잘 길들여지지 않았으며 어렵사리 길들인다 해도 그 위에서 마력을 정확히 배열해 마법을 시전한다는 건 창기사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싸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바이칼은 이 모든 생각을 속으로만 꾹꾹 눌러 담고 이를 악다문 채 한 마디로 대꾸했다. “즐대 못합느드(절대 못합니다).” 어차피 설명해 줘봤자 에단은 개미눈물만큼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 뻔했다. “해본 적 없는 걸 못한다고 포장하지 마라. 해보고 나서 얘기하도록.” ‘지금처럼 말이지.’ 바이칼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은 채 푸념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오, 드디어 4월의 마지막 한주가 시작되는군요. ㅎ 저는 오늘부터 29일까지 통영!!!으로 팀합숙(?)을 떠납니다...! 헉 생전 처음 통영을 ㄷㄷㄷ 언뜻 놀러가는 것 같지만 실은 단체로 글쓰러 갑니다. 쿨럭. 농구만화로 치면 단체로 농구수련을 위해 떠나는 뭐 그런...(말을 잇지 못하는) 그런 이유로 가서 편수가 늘면 늘었지 휴재란 없습니다.ㅋ 핫핫.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연재속도는 가급적 맞추도록 노력하겠습니다.ㅠㅠ 죄송합니다! (꾸벅) 0173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플루비는 이제 곧잘 날았다. 날면서 원하는 대로 방향을 꺾는 법도 순탄히 몸에 익혔고 안정적으로 착륙할 줄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겁에 질려 빼액 비명을 지르던 예전의 어리숙한 와이번이 아니었다. 다만 플루비가 가진 한 가지 문제라면. “이리 와, 플루비.” “삐익! 삑!” 바이칼의 부름을 들은 플루비는 날개를 파닥이며 쫑쫑 걸어왔다. “좀 날아오면 안 되냐……?” “삐이이?” 플루비의 고질적인 문제, 바로 혼자서는 절대 날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미니 사이즈인 상태에선 종종 파다닥 뛰어올라 사람의 품에 안긴다든가, 저공비행을 했다. 하지만 물을 잔뜩 머금어 본체를 되돌린 후에는 어림도 없었다. 놈은 바이칼 없이는 절대 날려 하지 않았다. 다른 파일럿은 허용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바이칼과 함께 비행할 때만 기꺼이 응했다. “뭐 덕분에 나도 덩달아 비행에 익숙해지곤 있지만.” 바이칼은 플루비를 들어 가슴팍에 올려놓은 채 중얼거렸다. 고소공포증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소년과 와이번은 서로에 대한 신뢰로 공포를 견뎠다. 여전히 높은 절벽 위나 건물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오금이 저리고 손발에 땀이 잡히면서 현기증마저 일었다. 둘이 함께가 아니면 날지 못한다. “얌마, 넌 어때? 한번 해볼까?” “삐!” 그도 에단의 제안이 마냥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플루비처럼 양순하고 사람을 올곧이 믿는 와이번이 그간 없었을 뿐이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시작으로 바이칼은 슬쩍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 보았다. 마력 배열에 관해선 마법기사 시험을 통과하면서 규칙을 전부 외웠으니 삐끗하지 않고 잘만 설정한다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바이칼이 진지하게 공중 전투를 상상하는 사이 정작 화두를 던진 에단은 정자세로 앉아 다른 관심사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르륵- 투명한 크리스탈을 깎아 만든 조각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신비롭게 반짝이는 검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사령이 깃든 검.’ 바로 얼마 전 쥬다스가 맡긴 검이었다. 딱히 크기에 맞는 검집이 없어 임시방편으로 헐렁한 가죽커버에 보관해 두던 참이다. 신기하게도 본질은 얼음일 테지만 냉기를 띠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녹아내린다거나 부서지지 않았다. 맑고 투명한 검신은 얼음 결정을 이리저리 흩뿌리며 빛날 뿐이다. 전혀 사령이 깃든 무시무시한 검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 검으로 사람을 찌르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냥 평범하게 죽음을 맞이할지, 아니면 혹여 다른 결과를 불러올지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웠다. 단, 에단은 쥬다스가 자신에게 이 사령검을 맡긴 이유가 단순히 관리만 하란 뜻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단장.” 검이 가진 특징에 대해 이것저것 실험해 볼 필요가 있겠거니 여기던 찰나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에단이 고개를 들자 플루비를 옆에 세운 바이칼이 문 쪽으로 손짓했다. “저 좀 나갔다 옵니다.” “어딜?” “산책이요.” 그 말을 듣자마자 플루비는 신나서 날개를 파닥파닥 저었다. 날지도 않을 거면서 소리만 요란한 쪼끄만 와이번을 힐끗 쳐다본 에단이 간결하게 답했다. “다녀와라.” “예압.” “타국이니 특히 움직임에 주의하도록.” “예예.” “사고치지 말고.” 자꾸 말미에 따라붙는 염려에 바이칼이 나가다 말고 울컥한 표정으로 홱 돌아섰다. “거……. 제가 무슨 다섯 살 꼬맹인 줄 아십니까?” “자넨 다섯 살이 아니라 쉰이 되어도 불안할 거라 보는데.” “으에엑. 설마하니 쉰까지 감시하시려고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바이칼은 아주 잠깐이나마 꼬부랑 노인이 되어서까지 에단에게 잔소리 듣는 장면을 상상했다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전 은퇴하면 물 맑고 공기 좋은 산속에 근사한 오두막이나 짓고 살 겁니다!” “퍽이나.” 갖잖다는 비웃음을 마지막으로 바이칼은 플루비를 데리고 밖으로 털레털레 나왔다. “젠장. 당한 게 있어서 반박도 못하겠고.” “삐잉?” 투르케 사막에서 꼴사납게 뒤통수를 맞고 끌려갔던 사건은 두고두고 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흑역사로 남았다. 에단이 아무리 면박을 줘도 한 마디 반박하지 못하는 건 바이칼 스스로가 그때 일을 용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칫 목숨을 잃거나 쥬다스마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의 바이칼은 정말로 짐 수준밖에는 되지 못했다. 그 이후로 그는 강해지기 위해 플루비와 함께 고공비행을 익혔고 평소에도 방심하지 않고 매사 안전에 신중을 기했다. 그는 일단 수(水) 속성 마법을 사용해 플루비를 본체로 되돌렸다. 그리고 녀석에게 연습하는 동안 사용해 온 특수 안장과 목줄을 채웠다. 이제 제법 익숙해진 자세로 안장에 올라탄 바이칼은 플루비의 목덜미를 툭툭 두들겼다. “자, 이제 날아볼까?” 크우우우! 자그마한 모습일 때와는 차원이 다른 포효가 우람한 목울대를 타고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을 가르고 날아올랐다. ‘일단 실드.’ 그동안 바이칼은 비행을 연습하며 추락을 대비한 충격감소실드를 제일 먼저 깔아둘 필요를 느꼈다. 사막에서 연습할 때에는 푹신한 모래가 있었기에 별 장치 없이도 큰 무리가 없었지만 그 외 지형에서는 아니었다. 공중전이고 자시고 잘못 착륙하다가 플루비와 나란히 터진 만두처럼 바닥에 찌그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일단 해동 왕궁 사람들이 와이번을 보고 놀라지 않도록 계속해서 높이 올라갔다. “플루비, 고도를 더 높여.” 블루와이번은 인간보다 청력이 훨씬 좋아서 작은 지시에도 칼같이 반응했다. 곧장 붕 뜬다 싶더니 껑충 하늘 높이 뛰었다. 순식간에 찬 기운과 함께 매서운 칼바람이 실드에 맞부딪혔다. 바이칼이 사용하는 고출력 실드는 착륙을 대비한 충격감소 뿐 아니라 공기저항과 기압 조절, 체온유지기능도 돕고 있었다. ‘하. 여기까진 좋은데 이후가 문제란 말이지.’ 하나의 방어마법진을 유지하며 와이번을 조종하는 일은 어느 정도 몸에 익었다. 다만 방어마법진과 공격마법진은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여기서 신체가 타격을 입지 않을 정도까지 고도를 낮추면서 순간적으로 실드를 해제하고 공격마법진으로 전환하여 마법을 발동시키는 일은 굉장한 집중력을 요했다. 정지해 있는 지상과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허공이란 환경차이가 심한데다 위치 변동이 커 마력이 잘 모여들지도 않았다. 게다가 어찌어찌 마법진을 형성하고 발동하는 데에 성공시킨다 한들 정확히 특정 대상을 명중시킨다는 게 가능할지가 의문이었다. ‘해보자!’ 망설임은 짧았다. 에단에겐 산책이라고 말해놓긴 했지만 애초에 피곤한 와중에도 플루비를 데리고 나온 건 이걸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플루비, 강하!” “꾸웍!” 짧은 대답과 함께 순식간에 고도가 내려갔다. 갑자기 낮아지는 시야에 피가 손끝으로 쏠려 싹 빠져나가는 듯한 공포가 찾아왔다. 고소공포증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 제일 두려워하는 순간이 바로 이 급격한 추락이다. 이때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와 함께 온몸이 돌처럼 굳는다. 하지만 거기에 질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가 스태프를 쥔 손을 움직였다. 슈우우! 와이번의 머리 앞에 마법진이 그려지며 마치 브레스를 쏠 때처럼 마력 입자가 모여들었다. “……?!” 갑작스런 마력의 파동을 느낀 플루비가 움찔했지만 바이칼의 냄새를 맡고 빠르게 진정했다. 마력 배열이 몹시 복잡한 고급 마법까진 무리였지만 만들고자 한 공격마법진이 무사히 생성되자 바이칼은 비명처럼 시동어를 외쳤다. “흐이이, 프, 플레임 스트라이크으으―!” 결단만큼은 최강의 공성마법 메테오라도 시전할 기세였지만 기껏 시전된 건 간단한 화염마법이었다. 포앙! 마법은 왕궁 담벼락 바깥에 위치한 버려진 공터 한복판에서 정확하게 터졌다. 발동 수준을 최하로 조절했기에 한 사람 서있을 만한 자리에 작은 불기둥이 치솟았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위력은 별거 아니었지만 그에겐 어쨌든 성공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됐다! 으핫하, 플루비 요 기특한 녀석!” 바이칼은 비행에 대한 공포도 잊고 플루비의 목덜미를 끌어안고는 활짝 웃음꽃을 피웠다. 플루비도 기분 좋게 포효했다. “크워어어엉!” 슈우우! 눈앞으로 하늘색 마력입자가 스쳐가는 걸 본 바이칼이 어라 싶은 얼굴로 이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자신이 타고 있는 와이번의 주둥이 앞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자, 자, 잠깐만. 플루비?” 쿠꽝! 플루비가 기분이 좋은 나머지 파일럿을 따라 브레스를 뿜은 것이었다. 블루와이번답게 파란색 불길을 쏘아낸 플루비는 바이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합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날아간 브레스는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레이저처럼 바닥을 긁고 치솟은 불길은 공터에 세워져있던 한 거대한 팔층석탑을 폭파시켰다. “…….” “…….” 한 소년과 한 용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슬며시 그 앞으로 내려앉았다. 매캐한 연기와 함께 활활 타오르고 있는 탑은 그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목재도 아닌 석재 구조물인데도 어찌나 잘 타오르는지 가까이 가기만 해도 달궈진 열기로 인해 살갗이 후끈후끈했다. “이런. 큰 소리가 들리기에 와봤더니만.” “저, 전하…….” 녹색 바람을 타고 가볍게 그들의 곁에 탁 내려선 쥬다스가 난처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 다 다친 곳은 없느냐?” “예에. 저…… 그게.” “무슨 일이오!” 바이칼은 그만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어졌다. 플루비가 브레스를 뿜은 위치는 왕궁 뒤편 사람이 살지 않는 낡은 공터였다. 그곳은 너무 오래 되어 허물어버린 집터와 고목들, 그리고 허물어질 듯 기운 석탑들만이 존재하던 폐허나 다름없는 위치다. 아직 어떤 용도로 재개발을 해야 좋을지 상부로부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잠시 버려둔 공간이었다. 그런 낡은 공터라고는 하나 엄연히 왕궁 근처인 만큼 창칼을 든 군졸들이 늘 관리하고 있었다. 습격인 줄 알고 놀라 헐레벌떡 달려온 군졸들이 자리에서 제국에서 온 손님들을 발견하고 황당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 이게 대체.” 불타 무너진 석탑, 거대한 블루와이번, 제국의 황태자와 그 친위기사까지 번갈아 쳐다본 군졸들이 일단 미심쩍은 투로 물어왔다. “습격을 받으신 겁니까?” “……아닙니다.” 습격을 받기는커녕 석탑을 습격한 범인이 바로 바이칼이었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병사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죄송합니다. 소란을 일으킨 건 접니다.” “예?”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병사 하나가 다시 물었다. “객들께서 이곳에선 무슨 일로?” “그게…….” 쥬다스는 일선에 나서지 않고 수하가 직접 설명하고 사과하는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바이칼은 허리를 피지 않은 채 거듭 사과를 했고 뒤늦게 자초지정을 알게 된 군졸들은 여전히 당혹을 감추지 못한 채 눈만 꿈뻑거렸다. 그런 이들 틈으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황태자 전하?” 해동 왕궁까지 찾아오는 동안 안내를 맡았던 수호 연이었다. 그때서야 지켜보기만 하던 쥬다스가 한발 나서 정중하게 사과를 건넸다. “제 불찰로 인해 해동의 건축물을 훼손시킨 점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아, 아닙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되는 자가 사죄의 뜻을 밝히자 군졸들은 오히려 아연해지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우워어어 이곳은 생애 처음 와본 통영입니다! 바다가 참 잔잔하네요. ㅎㅎ 멍게비빔밥은...제가 멍게를 못먹어서..OTL... 대신 물회를 먹었는데 맛있더군요 +_+ 그럼 다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0174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대신 연수호가 손을 내저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어차피 이 석탑도 수명을 다해 자연히 허물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수명을……?” “예, 건물에도 수명이 있어 한 번씩 허무는 과정이 필요한데, 차마 조상님들이 공들여 세우신 석탑을 함부로 허물 수 없어 지켜보던 중입니다.” 연수호는 점잖게 설명한 후 바이칼에게로 고개를 돌려 당부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우리 해동인이 보기에 낡고 오래된 것들은 몹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으니, 앞으로는 주의 부탁드립니다. 기사님.” “예, 죄송합니다.” 연수호는 바이칼의 사과에 은은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의 현명하면서도 자비로운 일처리에 진심으로 고맙게 여긴 쥬다스가 그와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 토니가 타다닷 날아 불타고 있는 돌무더기를 기웃거렸다. 「왜? 거기 뭐라도 있어?」 유니가 득달같이 토니를 따라 날아왔다. 여전히 돌덩이들에 시선을 고정한 토니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응요! 뭐가 있다요.」 「아니…… 뭐가 있는지를 말해줘야지.」 유니의 재촉에도 답은 명쾌하게 나오질 않았다. 「모른다요.」 「엥?」 「느낌이 꼭 정령석 같다요. 근데 정령석이가 아니다요.」 「어머, 그러게요. 저 안에 불에 타지 않는 물건이 들어 있나 본데요?」 불쑥 끼어든 카니마저 토니의 이상한 묘사에 동조했다. 토니는 허공에서 팔짱을 낀 채 고개만 끄덕거렸다. 결국 답답해진 유니가 한숨을 쉬며 쥬다스에게로 되돌아갔다. 「이그레트. 저 무너진 구조물 안에 뭔가 특이한 게 들어 있다나 봐.」 “……?” 마침 연수호와 대화하며 자리를 떠나려던 참이었기에 쥬다스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그가 돌아서려다 말고 멈칫하자 수호가 그를 불렀다. “전하?” “저 탑은 본래 어떤 기능을 하던 구조물이었습니까?” “탑이라면…….” 수호연은 잠시 불에 타고 있는 석탑의 잔해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해동에는 탑이나 불상이 굉장히 많습니다. 보통 탑이란 소원을 빌며, 수호신수께 공물을 바치는 제단 역할을 합니다. 이 탑도 그 일종이었을 뿐입니다.” “흠. 그렇습니까.” “하온데 어찌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될는지요?” 제국의 황태자가 관심을 가지기에 무너진 석탑은 그리 대단한 구조물이 아니었다. 특별히 의미 있게 관리하던 곳도 아닌 버려진 폐허일뿐더러 이제와선 아무도 기도를 드리러 찾아오지 않는 그저 이름 없는 팔 층짜리 석탑이었을 뿐이다. 쥬다스는 수호의 의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무너진 석탑에 다가갔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길을 빤히 바라보던 그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불쑥 손을 뻗었다. “전……!” 수호는 제국의 황태자가 다칠까 염려되어 큰 소리를 낼 뻔했으나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자연체 정령에 익숙하지 못한 해동 사람들이 보기엔 이처럼 불구덩이에 손을 집어넣는 건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손이 흉측하게 타버리거나 고통에 비명을 내지를 거란 예상과 달리 쥬다스는 지극히 멀쩡한 얼굴로 불길을 헤집던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에는 화상자국은커녕 시뻘겋게 달구어진 흔적마저 없었다. 연수호를 비롯한 해동 군졸들은 순간 환각에 빠지기라도 했나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오직 바이칼만큼은 그가 무사할 거란 사실을 알았다. 쥬다스는 불구덩이에서 꺼내온 물건을 손바닥에 얹은 채 사람들 앞에 내밀어 보였다. 그의 손을 감싸듯 끌어안은 불의 정령이 온화하게 웃으며 팔랑 날아올랐다. 붉은 깃털이 불씨처럼 휘날리며 손안에 든 물건이 정체를 드러냈다. “이, 이건?” “의도적으로 탑 내부에 보관한 게 아니라면 아무래도 숨겨져 있던 게 아닐까 싶군요.” 연수호는 홀린 듯 쥬다스에게로 다가가 그 손바닥에 놓인 물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해동 여성들의 머리장식으로 사용되는 길고 가느다란 장신구가 맑은 옥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정교하게 주작이 새겨진 옥비녀였다. ‘주작의 증표.’ 연수호는 물건을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보고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방신수는 해동 왕가와 계약할 때마다 각각 그에 알맞은 증표를 선사하곤 했다. 이를 보통 ‘신물’이라 부르는데, 신물마다 신수의 힘이 깃들어 계약자가 원할 경우 그 힘을 나눠서 사용할 수 있도록 공유하는 매개체로 활용되었다. “저건 신물입니다. 사방신수 중 주작의 힘이 깃든 증표로 계약자가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주작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에에엥. 어차피 정령이 계약자에게서 떨어져 있을 일은 없지 않다요?」 「쟤넨 동물계잖아. 동물계는 원래 잘 돌아다녀.」 「보세요, 토니. 가야도 지금 없잖아요.」 「진짜다요! 가야는 어디 갔다요?」 카니의 말대로 청룡 가야는 현재 쥬다스의 곁에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계약자의 곁에 붙어 있으려고 하는 자연계 정령들과 달리 동물계는 자유의지가 강해 자기가 원할 때만 나타났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심지어 친화력이 낮은 경우엔 술사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농땡이를 피우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렇다면 계약이 끝나면서 도로 신수가 회수해가는 게 아닙니까?” “아니요. 사방신수께선 신물을 따로 회수하지 않으십니다.” 사대신수의 신물들은 궁에서 따로 보관하고 있다가 새로운 신수의 시대가 열릴 때 물려주는 식의 형식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수백 년간 새 계약자가 생기지 않자 신물은 주인 없이 오랜 세월 방치되었다. 왕궁에서 관리하던 신물들은 너무 시간이 흐른 탓에 이제 각 보고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수가! 두 분이 아니었더라면 자칫 귀중한 신물을 영영 잃어버릴 뻔했군요.” ‘다른 신물들도 무사히 보존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겠어.’ 연수호는 불타버린 헌 석탑에서 뜬금없이 튀어나온 주작의 신물을 보고 당혹스런 심경에 더해 어찌 되었든 신물을 찾았다는 안도감 등, 여러 가지 복합적인 기분이 동시에 들어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청룡의 신물은 루바르잔 황태자 전하께 가야 할 물건이니. 곧 찾아서 드리겠습니다.” 그간 사방신수의 신물 네 개 모두가 해동 왕가의 국보로 전해져 내려오긴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이 계약자일 때 이야기다. 신물은 본래 해동의 것이 아니라 엄연히 신수의 것이니 새 계약자가 생겼다면 응당 그에게 돌려주는 게 맞았다. 쥬다스는 주작의 신물을 수호에게 건네주고 바이칼과 함께 처소로 돌아왔다. 폭발 소리를 듣긴 했으나 자리를 지키란 명에 의해 자리에서 꼼짝 않고 기다리던 에단이 눈을 형형히 빛내고 있었다. 바이칼은 지레 찔끔하여 마주쳤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변호할 기회를 주지.” “잘못했습니다…….” “알긴 알아서 다행이군.” “삐이이!”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플루비도 함께 날개를 축 늘어뜨렸다. 곧 정신교육이란 명목으로 기사단 전원이 소집되었고 그날 하루는 그들에게 있어 해동에 온 이후 가장 잊고 싶은 날로 손꼽히는 최악의 날로 기록되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성왕 이서윤 앞으로 급보가 날아왔다. ‘그래. 우려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구나.’ 서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묵묵히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예측하지 못한 바가 아니라 결단은 빨랐다. 그는 최종적으로 명을 내리기 전에 소식이 적힌 서신을 들고 청룡을 찾아갔다. 「서윤이다냥.」 다행히 가야는 멀리 가지 않고 쥬다스의 곁에 돌아와 있었다. 쥬다스는 모여 있던 수하들과 함께 일어서서 외숙을 반겼으며 서윤도 웃으며 그들에게 인사했다. 구석에서 실뭉치를 입에 물고 뒹굴거리던 백호가 반가운 기색으로 이서윤의 주변을 슬슬 맴돌았다. “청룡께 전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 서윤.” 마침 귤을 하나 까고 있던 가야가 힐끗 그를 쳐다보았다. 휙! 반쯤 까다만 귤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왔다. 서윤은 반사적으로 귤을 받아 들었다. 매우 싱싱하고 상큼한 향이 나는 귤이었다. “밥은 먹고 다니냐?” “아……. 예? 아니, 그건 아직. 일단 사안이 급박하여.” “그럼 밥부터 먹자. 점심시간이야.” 태연하게 식사를 챙기자는 가야의 제안을 서윤은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서신을 들고 중한 얘기를 전하러 온 자리인데 엉뚱하게 수저를 들게 됐다. 이서윤은 나무토막이라도 씹는 듯 밥알을 입안에 넣고 한참을 우물거렸다. “…….” “왜. 맛없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절인 연근 좋아했잖아. 하긴 어렸을 때니까 입맛이 바뀔 순 있지. 그럼 이젠 싫어졌나?” “아뇨. 아직 좋아합니다.” 가야가 대뜸 반찬을 집어주는 바람에 서윤은 얼떨떨하게 대답하고 난 뒤에야 그가 아직 자신에 대해 기억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청룡은 쥬다스와 계약하면서 성격이 변해도 너무 변해버려 도저히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친절함은 사라지고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태도와 퉁명스러움만 남았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아예 자신이 알고 있던 청룡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를 대했다. 그랬는데 청룡의 본질은 그대로란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서윤은 새삼스럽게 감동한 얼굴로 가야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를 마주 본 가야가 대뜸 다시 물었다. “그래서 현무냐? 주작이냐? 아니면 둘 다?” “예?” “하려던 말. 녀석들 얘기 아냐?” “아. 그렇지요.” 제 조카 앞에서는 늘 어른스럽게 굴던 이서윤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보아온 청룡에게만큼은 아직 애나 다름없었다. 쥬다스는 그 모습을 보며 조용히 웃었다. 서윤이 멋쩍게 헛기침을 흘린 후 설명을 시작했다. “현무와 주작 두 분 모두입니다. 각 남쪽령과 수도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수도면 여기? 기운을 읽기 어려운 걸 보니 확실히 둘 다 사령화가 진행된 모양이고. 그래서 이쪽엔 누가 왔는데?” “여기 호성에는 주작께서 현신하셨습니다.” ‘주작이라.’ 가야는 닭다리를 하나 입에 문 채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주인.” “음?” “주작은 내가 맡을게.” 마치 오늘 저녁에 먹을 반찬 고르듯 간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컸다. 쥬다스는 잠시 침묵을 택했다. ‘괜찮겠냐’거나 ‘안 된다’는 말 대신 가만히 응시하는 계약자를 향해 가야는 말을 덧붙였다. “난 현무와는 상성이 별로야. 상대하기엔 주작이 편해. 같은 하늘 계열이기도 하고.” 「날개는 주작만 달렸지만냥.」 “그러게. 역시 나도 날개를 좀 달아볼까?” 「시끄럽다냥. 하늘을 지배하는 청룡이 굳이 날개를 달 필요가 뭐가 있다냥!」 “아니, 그렇게 치면 자연계 바람정령은 대체 왜 날개를 다는데?” 「응?」 쥬다스의 어깨에 잠자코 앉아 있던 유니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포로록 날아 백호의 이마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예쁘잖아. 자고로 날개는 패션의 완성이라구.」 “거봐. 예뻐서라잖아.” 「……내가 졌다냥. 날개를 달든 머리를 길러서 묶든 알아서 하라냐.」 백호는 긴 한숨과 함께 항복을 선언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패완날이죠! (...) 모 게임에서 흰천사날개가 그렇게 갖고 싶었는데...크흑.... /결국 구하지 못했다는 슬픈 전설이..... 그럼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0175 / 0240 ---------------------------------------------- 20장. 그림자밟기 「어쨌든 네가 주작을 맡겠다면 현무 쪽은 내가 가겠다냥.」 “아서라, 야옹아. 현무한테 넌 무리야.” 「뭐라냥? 청룡 네가 현무랑 상성이 나쁜 거지 난 상관없다냐.」 “그런 이유가 아니라.” 「시끄럽다냥.」 백호는 더 듣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온몸으로 표명했다. 쥬다스의 무릎 위에 뛰어올라 새침하게 홱 고개를 돌린 백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본 가야는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쉬며 이유를 알려주었다. “지금의 너는 힘을 사용하지 못하잖아.” 「……므앙.」 하얀 꼬리가 맥없이 바닥을 쓸었다. “계약자가 없는 백호는 그저 조금 튼튼한 야옹이일 뿐이지. 해동을 돕겠다는 생각이 아직 유요하다면 남쪽은 주인이 맡아주는 게 가장 이상적이야.” 가야의 말에 모든 시선이 쥬다스에게로 모여들었다. 그와 란, 서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백호가 하는 말까진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쥬다스는 백호의 등을 쓸어주며 답했다. “백호도 여기 남아 가야를 도와주련.” 「싫다냥. 차라리 현무를 보러 갈 거다냥. 청룡이랑 둘이 두지 말라냥!」 그러자 가야가 심드렁하니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너랑 붙어 있을 건 아닌데…….” 「도와줘야 한다잖냥.」 “도와줄 필요도 없는데.” 「하여튼 예쁜 구석이라곤 없다냐.」 백호가 투덜거리는 걸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서윤이 다시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 지금 아가 네가 남쪽으로 내려가 현무를 막겠다는 뜻이냐?” “예. 현재 수도에 있는 병력이라면 이번 습격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겁니다. 남쪽 현무는 제가 막아볼 터이니 이대로 수도의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만 일단 집중해 주십시오.” 남쪽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맡겨달라는 의미였다. 이서윤은 조카를 향해 처음으로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럴 수 없다.” 단호한 거부였다. “신수 청룡께서 도와주시도록 힘써준 것만으로도 네게는 충분히 감사하고 있단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아.” “…….” “후우, 어린 네 앞에서 객기를 부리지는 않으마. 지금은 해동의 위기가 맞아. 그러나.” 이서윤은 한숨과 함께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겉으로나마 평정을 유지하곤 있었지만 사실 속내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본격적인 여름을 맞이하기 위해 들이치는 폭우와도 같은 심경이었다. “어려움이 있다 하여 핏줄을 대신 전장에 내보내고 근심을 덜어낸다면 그게 무에 소용일까. 우리 해동이 이조차도 해결하지 못하는 엉망진창인 국가였다면 천 년도 넘게 명맥을 이어오지 못했을 거다. 어려움은 직접 해결할 터이니 이 외숙부를 믿고 크게 염려하지 말거라.” “외숙.” “안 된다 하지 않았느냐!” “그게 아닙니다.” “응?” 다시 한 번 단단히 엄포를 놓을 셈이던 이서윤이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올곧게 자신을 향하는 금빛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보자 희한할 정도로 격해졌던 감정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서윤이 진정하는 기색을 보이자 쥬다스는 잔잔한 어조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외숙의 말씀대로 해동을 위해서 하는 일은 가야를 수도에 남겨두는 것뿐. 제가 지금 현무가 나타난 남쪽지역으로 가려는 이유는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이 나라에 도움을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이구나.” 성왕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조카가 하려는 말의 갈피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고개를 끄덕여 그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그 애정 어린 신뢰를 알아본 쥬다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서서히 지웠다. “프리드 길리아노.” “……?” 해동이 아닌 제국식 이름이다. 분명 누군가의 이름 같긴 한데 통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이 자리에 모인 제국인과 해동인 그 누구도 들어본 적 없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길리아노……?’ 제국을 지탱하는 큰 기둥 중 하나인 공작가문 헤이가의 일원으로 자라난 에단은 제국의 귀족들에 대한 정보가 전부 샅샅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프리드’가 누군지는 몰라도 이름 끝에 붙은 가문명은 알아볼 법했다. 그러나. ‘아니. 루바르잔 제국에 길리아노라는 가문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작가 자제인데다 암기로는 더욱 뛰어난 성과를 보이는 크리스티나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전혀 짚이는 구석이 없다. 두 사람은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의문스러운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는 사이 쥬다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신수 주작과 현무를 어둠에 물들인 사령술사의 이름입니다.” “뭐?” 프리드가 태어난 가문 길리아노는 이미 수십 년 전 멸문하여 역사의 책장 너머로 사라졌다. 당연히 세상에 태어난 지 이제 겨우 스무 해가 되어가는 청년들이 알 리 없는 내용이다. 제국에 현존하는 귀족 가문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 와중에 이미 멸문하여 사라지고 없는 귀족을 알고 있을 리가 없다. “저는 그를 만나고자 합니다.” “‘프리드 길리아노’라고? 그에 대해 어찌 알고 있는 것이야? 그리고 아가. 지금 그 사령술사가 남쪽에 현무와 함께 나타났을 거란 추측은 어떤 근거로 인한 게냐?” 쥬다스는 프리드가 이번 일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비극을 만들어 내리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 일에 개입했다는 사실을 마찬가지로 프리드도 알고 있으리란 계산도 이미 끝난 후였다. 만일 사령에 잠식당한 주작과 현무에게 동시에 수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어도 쥬다스가 버티고 있는 한 역부족이다. 그런 마당에 각 신수를 북쪽에 있는 수도와,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남쪽 지역에 따로 떨어뜨려 보내왔다는 건 특정 의미를 품고 있는 짓이었다. ‘내게 보내는 초대장이겠구나.’ 프리드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이그레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존재였다. 그는 상대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면승부로 도전해 올 무모한 자가 아니다. 대신 자신이 직접 나서기보단 타인을 전면에 내세워 공격하도록 만들었다. 지난번 사야 황후 사건 때에도 그랬고 신수를 타락시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쥬다스는 이 모든 추측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자세한 건 지금 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자는 제국에서도 수많은 인명을 살해한 중한 범죄자이며 국가와 종족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인 행위를 저지릅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그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하면 그런 자를 너 혼자 가서 막겠다는 것이냐?” “이 정도면 혼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쥬다스는 눈으로 빙글 주변을 훑으며 되물었다. 그의 곁에는 호위를 위해 따라온 친위기사단을 비롯해 크리스티나와 콜, 세이지 등 제법 많은 인원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서윤은 기껏 이마에서 떼어냈던 손바닥으로 이번엔 얼굴 전체를 덮어버렸다. “그 말이 아니잖니…….” “정 우려되시거든 수도 쪽 상황을 먼저 정리하신 후 지원을 보내주십시오. 그럼 먼저 내려가 있겠습니다.” 사실 주작과 현무가 적으로 나타난 이상 한시가 급한 상황이긴 했다. 지금 이 순간도 누군가 목숨을 잃어가는 중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지금 쥬다스는 해동을 돕는다는 명목이 아닌 개인적인 목적으로 따로 움직이겠다는 의지를 밝힌 상태였다. 서윤은 더 이상 조카를 말리지 못하고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을 안내해 줄 장수를 보내주도록 하마.” “아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르륵- 비단결처럼 반짝이는 녹색 바람결이 주변을 휘감았다. 허공에서 까르륵 웃으며 모습을 드러낸 유니를 발견한 이서윤이 놀라 선 채로 굳은 사이 쥬다스가 그녀에게 부탁했다. “유니. 현무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이동할 수 있을까.” 「물론이지!」 본래 바람의 인도는 술사가 방문한 적 있는 장소에만 사용이 가능한 정령술이다. 하지만 정령왕인 유니는 거기에 더해 자신이 알고 있는 특정인물을 목적지로 삼아 이동술을 펼칠 수도 있었다. 지난번 바위산에 있던 프리드를 찾아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 원리로 바람을 다뤘다. 정령의 바람이 몰려들자 반딧불이가 가득 든 호롱처럼 주변이 온통 연둣빛으로 물들었다. 후웅- 눈 깜짝할 사이 바람은 사람들을 감싸고 팟 하고 흩어졌다. 마치 구름이 흩어지듯 루바르잔에서 온 객들이 홀연히 자리에서 사라져버린 자리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이제 방 안에 남은 건 성왕 이서윤과 그의 호위 정다울, 청룡 가야와 백호뿐이었다. 멍하니 서 있던 서윤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다녀오겠단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게냐. 이거 원, 누구 아들이라고 어쩌면 내게 이리도 똑같이 매몰찬 것이야.” 이서윤의 뇌리에는 아직도 누이의 마지막 웃는 얼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누이는 ‘안녕’이란 인사를 하지 않았다. 잘 다녀오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웃어주곤 다음 날 홀연히 제국에서 온 사절단을 따라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진심으로 제국의 황제를 사랑했던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이제 하윤이 그날 국가를 위해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건 아니란 사실만큼은 확실할 수 있었다. ‘너는 스스로 떠나는 걸 선택한 거야. 네 웃음은 거짓이 아니었어.’ 누이를 똑 빼닮은 조카가 알려주었다. 아이는 결코 거짓된 웃음은 짓지 않았다. “……다녀오려무나.” 서윤은 힘주어 쥐고 있던 주먹을 풀며 홱 돌아섰다. 이미 떠난 자리를 보며 미련을 갖는 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미련일 뿐임을 지금은 알고 있질 않나. 이서윤은 그리 생각하며 성큼성큼 건물 밖으로 나섰다. 왕의 뒤를 호위와 두 신수가 조용히 따랐다. * * * 갑자기 땅이 녹아내리며 검은 늪이 생겼다. 끈적거리고 차가운 액체가 땅을 삼키고 나무를 삼키며 논밭을 삼켰다. 집은 불타는 대신 늪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부모와 아이가 늪에 빠져 생이별을 해야만 했고 보이지 않는 적에 의해 지상이 침몰했다. 창칼도 주술도 소용없다. 군졸은 인명을 구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함께 무너져 갔다. 마치 땅을 감염시키는 전염병처럼 그렇게 검은 늪이 증식했으며 땅을 딛고 선 모든 것이 그 아래로 가라앉았다. 재난, 재해. 생전 본 적 없는 끔찍한 사태를 두고 사람들은 입을 모아 ‘천벌’이라고 말했다. “하늘님께서 노하신 게 틀림없어.” “하늘이여! 벌을 거두어주십시오!” 아무리 기도를 올려봤자 하늘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검게 물든 건 하늘이 아닌 땅이었고, 땅을 물들인 건 흙과 돌이 아닌 새카만 물이다. “으아앙!” 부모를 잃은 아이가 나무기둥을 끌어안고 울었다. 그 나무도 점점 검은 늪에 가라앉는 중이었다. 공포에 질린 아이 앞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찰박! 웃옷을 입지 않아 맨살을 드러낸 사내가 검은 늪을 밟고 서 있었다. 맨발이었는데도 늪에 빠지지 않고 굳은 땅을 밟은 듯 유유히 선 사내를 발견한 아이가 울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현무님……?” 해동의 아이라면 사방신수에 대해 동네친구보다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해동에서 신수들은 동화나 전설, 민담 등으로 끊임없이 묘사되고 있고 실제적으로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었다. 아이가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존재를 보고 청룡이나 현무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의 눈앞에 무료한 표정으로 서있는 존재는 사방신수 중 현무가 맞았다. 그는 희망이 담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 정말 현무님이에요? 우리 마을을 지켜주러 오신 거예요?” “…….” 마치 구원이라도 해줄 듯 내밀어진 손을 향해 아이가 나무기둥을 놓고 그를 향해 마주 두 손을 뻗었다. 닿을 듯 가까워진 거리에서 현무는 살짝 손을 뒤로 물렸다. 어? 하는 사이에 아이는 늪에 풍덩 빠져버렸다. 꿀렁이는 검은 액체가 굶은 하이에나 떼처럼 아이를 덮쳤다. “현무님! 도와주세요, 현무님!” 그러나 기다리는 구원은 찾아오지 않는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하고 기대가 포기로 바뀌는 건 순간이었다. 지켜야 할 대상으로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그저 차갑게 죽은 눈으로 늪에 잠겨가는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다른 생명을 꺼뜨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찰박 찰박. 그가 옮기는 걸음마다 검은 늪이 번져나가 지상을 물들였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을 위한 신수가 아니었다. 흑현무 ‘헤로드’. 사령에게 잠식당한 새로운 마수의 이름이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허억 통영에서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ㅎ 뭔가 아쉽기도 하고... 그래도 모처럼 즐겁게 놀다 돌아가네요. 아하하.(케이블카도 타봤습니다! 비가 와서 경치가 흐리긴 했지만 공기는 좋더군요 ㅎㅎ 짠 바다공기...!)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176 / 0240 ---------------------------------------------- 21장. 약속 해동의 남쪽령을 침략한 흑현무 헤로드와 반대로 흑주작 이브는 북쪽에 있는 수도 호성의 상공에 나타났다. 공습의 시작은 하늘을 뒤덮는 새 떼였다. 까마귀, 까치, 비둘기, 참새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새부터 시작해서 무리 생활을 하지 않는 희귀한 새까지 골고루 섞여 있었다. 새들은 마치 잘 훈련된 군대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평소에는 그냥 손짓만으로도 쫓아낼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떼 지어 날아다니며 기와를 부수고 불붙은 나뭇가지를 물어와 던졌다. 검은 하늘에서 불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듯한 장관이 펼쳐졌다. 펄럭! 불붙은 성벽 위로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사뿐히 내려섰다. 무릎을 덮은 풍성한 치맛단이 뜨거운 바람에 팔락거렸다. ‘수도를 불태우고 왕의 목을 베어라.’ 주작에게 내려진 계약자의 명이었다. “……그리하여 해동은.” 주작은 아주 조그맣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훅 하고 불길이 회오리처럼 몰려들었다. 가벼운 손짓 한 번에 불이 사방으로 폭사하여 근처의 나무며 목재건물에 옮겨 붙었다. 열기가 폭발하는 굉음과 새 울음소리가 뒤섞여 혼란스러운 가운데 정작 주작의 목소리는 파묻혔다. 하지만 딱히 누군가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이 아니기에 주작은 불길 사이로 걸어가며 말문을 맺었다. “천 년의 역사를 딛고 새롭게 태어나리라.” 나라의 수호신이 직접 이 나라를 불태운다.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장면이기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불타고 있는 집을 지키기 위해 물동이를 길어와 뿌리려던 한 소녀가 머리 위에서 사납게 날아든 까마귀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얏.” 소녀는 넘어진 채로 볼을 손으로 감쌌다. 날카로운 부리가 스치고 간 자리에서 길게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눈에 띄는 자는 전부 죽여.’ 계약자의 명령을 떠올린 주작이 손안 가득 불길을 머금었다. 마침 소녀도 주작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작님……?” 비단결 같은 검은 머리가 장신구도 없이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주작이 지닌 화염 날개를 확인한 소녀가 흐엉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 “왜 우릴 버리셨어요?” 멈칫! 주작의 손끝에서 당장 소녀를 삼킬 듯 이글거리던 화염구가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주작은 멍한 눈동자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버…… 려?” “저랑 엄마는 신수님들을 믿었어요. 오늘은 아니라도 내일, 올해가 아니라면 내년. 이번 시대가 아니라면 다음 시대라도 언젠가.” 소녀는 주저앉은 채 눈물과 핏물이 뒤섞인 더러운 얼굴로 주작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 다시 우릴 지켜주러 오실 거라고.” “지켜?” “신수님들은, 훌쩍. 우리의 수호신이시잖아요.” 사실은 줄곧 지켜왔다. 계약은 하지 못했더라도 해동을 떠나지 않았으며 적은 힘이라도 최대한 활용하여 나라를 수호하고자 했다. 해동은 사방신수의 고향이자 소중한 둥지였다. ‘그래, 맞아.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의.’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쑤셔 왔다. 내내 무표정하던 주작의 얼굴이 일순 찌푸려졌지만 소녀는 우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주작님. 혹시 사람들이 나쁜 짓을 너무 많이 해서 화가 나신 건가요? 안 그럴게요. 착한 일 많이 하고 살 테니까. 다른 사람들한테도 착하게 살자고 얘기할 테니까. 네?” “……없어.” “주작님?” 화륵! 불길이 용암 분출하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소녀의 놀란 얼굴 위로 불 그림자가 환하게 비추었다. “착해질 필요 없어. 난 너희에게 화난 게 아니니까.” “……!” 주작의 답과 함께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불길을 보며 소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생각했던 열기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냐아앙! ‘고양이 소리?’ 의아함을 느끼고 눈을 뜬 소녀의 시야에 하얀색 새끼 호랑이가 들어왔다. 날렵한 몸동작으로 주작이 쏘아낸 불덩어리를 막아선 백호는 앞발로 이를 짓밟아 모닥불 끄듯이 콱 꺼뜨렸다. 「불장난이 좀 과하지 않다냥?」 주작은 백호를 보고도 아랑곳 않고 허공에 불새를 한 마리 만들어냈다. 불씨가 또 다른 불씨를 낳는 건 순식간이었다. 위협적으로 파닥이는 소리가 둘에서 넷으로, 넷에서 여덟로 부지불식간에 증식하더니 경고도 없이 동시에 백호와 소녀에게로 쏘아져 갔다. 파앙! 그러나 이 역시도 꿀렁거리는 푸른 장막에 막혀 전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공중에서 산화하고 말았다. 주작은 두 번째로 나타난 방해꾼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힘없는 야옹이 괴롭히면 동물학대다, 너.” “……청, 룡.” 그리고 아주 잠깐 백호에게 머물렀던 눈길이 다시 가야에게로 되돌아갔다. 「왜 난 못 알아보는 거다냐?!」 백호가 울컥하여 소리쳤지만 주작은 꿋꿋하게 그를 무시했다. 긴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허공에 불쑥 나타난 가야는 주작이 서 있는 성벽 위로 가볍게 내려섰다. 두 신수는 서로를 마주 보며 잠시 침묵했다. 침묵을 먼저 깨뜨린 건 청룡 가야였다. “그때 한 약속.” “…….” “지키러 왔어.” 주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가만히 가야를 바라보기만 했다. 타락한 흑주작이 되었어도 예전의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옛 동료를 본다고 해서 반갑다거나 동요가 일어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도는 기억했다. ‘있잖아, 청룡.’ ‘응.’ ‘만일 우리 중에 누군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때 그녀는 흰색 저고리에 파란 치마, 머리엔 옥비녀를 꽂고 그네에 앉아 있었다. 두 손을 치마 위에 포개놓고 맑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주작은 작은 새처럼 웃었다. ‘우리 손으로 반드시 해방시켜 주자.’ ‘해방?’ ‘우리는 수호신수니까. 소중한 걸 지키지 못하게 된다면 아무 의미 없어.’ 사령에게 잠식당한다면 눈을 가리고 손발을 묶여 채찍질 받는 노예나 다름없다. 사명에 대해 자부심이 강한 신수들은 자유의지를 잃고 폭주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다. 여기서 주작이 말했던 ‘해방’이란 죽음. 결국 서로의 손으로 끝을 내달라는 뜻이었다. ‘약속이야.’ 씩씩하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던 주작은 이제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청룡 앞에 서 있었다. 불타는 성벽 위로 후끈한 열기가 아지랑이가 되어 울렁거렸다. 하늘을 까맣게 덮은 새들은 여전히 그 수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더 늘어나기까지 했다. “나는…… ‘이브’.” “그래. 이브 네가 현재 지키고 있는 건 뭔데?” “아무것도.” 이브는 공허한 눈으로 가야를 마주보았다. 텅 빈 눈 안에 살의가 감돌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화아앗!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 그녀는 불길에 휩싸여 거대한 주작 본체의 형상으로 돌아갔다. 불로 이루어져 타오르는 꼬리 깃이 길게 물결치듯 돌벽을 따라 흘러내렸다. 머리에서부터 몸통까지는 하얀 깃털이 뽀송뽀송 자라난 새였지만 그 외 날개라거나 꼬리 등은 전부 불길로 이루어져 있었다. 갑작스레 거대한 타오르는 새를 올려다보게 된 백호는 소녀의 앞을 막아선 채 입을 쩍 벌렸다. 「우씨, 반칙이다냥.」 「내 임무는 섬멸. 해동의 수도를 파괴하겠다.」 본체로 돌아간 주작은 인간의 언어 대신 정령의 언어를 사용했다. 사나운 선포를 듣고서도 청룡은 별달리 겁내지 않았다.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뜻으로 한숨을 푹 내쉰 뒤 허리에 손을 얹었다. “나 이거 참. 무대를 마련하려면 일단 불부터 꺼야겠네.” 가야는 일단 기후를 조종해 강한 비구름을 불러왔다. 개미 떼처럼 우글거리는 새 무리 위로 진짜 먹구름이 순식간에 도래했다. 우릉! 하늘이 울며 비가 쏟아졌다. 날개가 젖은 새들이 더욱 시끄럽게 울음소리를 질러댔다. 「한갓지게 불이나 끄고 있을 때가 아니다냥!」 “엉? 하지만 주변에 막 불타고 있으면 신경 쓰이잖냐. 뜨거운 건 딱 질색이라.” 「지금 그런 게 문제냥?!」 속성이 정해져 있기는 하지만 동물계 정령이 실제 싸우는 방식은 주로 육탄전이었다. 한쪽이 본체로 돌아간 이상 나머지 한쪽도 본체로 돌아가지 않으면 힘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백호가 한 차례 더 재촉하려던 순간 주작은 청룡의 변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곧장 날아들었다. 쿠쾅! 거대한 새의 공격을 받은 성벽이 그 타격을 이기지 못하고 처음으로 깨어지며 돌조각이 이리저리 튀었다. “하아. 정말 성질 급하기는.” 훌쩍 뒤로 물러서 피하긴 했으나 찰나의 시간차를 두고 화염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왔다. 간발의 차로 방어막을 형성해내 막은 후 청룡도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육신을 본체로 되돌렸다. 우드득, 우득! 「백호. 넌 가서 다친 사람들을 구해.」 「……그러려고 했다냥. 딱히 네가 시켜서 가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라냥.」 「그래, 그래.」 파란 비늘로 뒤덮인 거대한 몸통이 꿈틀거렸다. 쥬다스 일행 중 블루와이번인 플루비가 본체로 돌아간다 해도 청룡만큼 커다랗게 자라지 않는다. 가야는 동방의 용중에서도 매우 거대하고 아름다운 육신을 가진 청룡이었다. 해동 사람들이 동방 용중 가장 최고봉이라 칭해지는 전설 속 황룡을 만난다 해도 청룡만큼 아름답다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 입을 모을 정도였다. 「자, 그럼. 우리끼리 오붓하게 파티를 즐겨볼까?」 백호가 등을 돌려 후다닥 뛰기 시작하자 가야는 막기만 하던 태세를 전환하여 몸을 일으켜 세웠다. 마침내 거대한 두 신수가 충돌했다. 번쩍이는 번개 아래 굵은 빗줄기가 하염없이 쏟아졌다. 검은 연기와 그보다 더 짙은 먹구름, 순간순간 번뜩이는 번개와 천둥소리, 그 아래 불타다 만 마을과 다쳐 신음하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간절한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았다. 번개가 칠 때마다 거대한 용과 새의 형상이 그림자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한쪽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수호신에 대한 믿음을 결코 손에서 놓지 않았다. 긴 전투의 시작이었다. * * * 한편, 현무의 기운을 읽어 남쪽령에 도착한 쥬다스 일행은 도달하자마자 소용돌이치는 검은 늪을 발견하고 잠시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것도……. 신수 현무의 힘입니까?” “그런 모양이구나.”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했다. 땅을 뒤덮은 검은 늪은 점점 그 면적을 늘려 마치 강처럼 지상을 꿀렁꿀렁 흐르고 있었다. 생명이 있는 존재든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물건이든 관계없이 늪은 수면에 닿는 족족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분명 하나의 거대한 도시였을 공간이 지금은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삭막한 늪지대로 변모해 버렸다. “어후. 나라를 수호하는 신수라더니 정말 무시무시하네요.” “삐잉.” 바이칼과 플루비가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늪을 향해 중얼거렸다. 무언가 돕고 싶어도 깔끔하게 검은 늪 아래로 잠겨 버린 마을을 다시 끄집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행은 잠시 할 말을 잃고 그대로 보이는 광경에 압도당한 채 서 있었다. ‘잠깐. 란이랑 코르토반은?’ 문득 자주 같이 다니던 두 사람이 보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세이지가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그들을 찾을 수 없었다. “…….” 세이지는 형에게 그 사실을 물으려다 도로 입을 다물었다. 쥬다스가 실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언가 이유가 있어 따로 그들을 해동 왕궁에 놓고 왔으리라 짐작한 세이지는 걱정스런 눈으로 북쪽 하늘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남쪽령에서 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기만 할 뿐이다. 워낙 거리가 멀어 수도의 상황이 어떤지는 짐작조차 어려웠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ㅎㅎ 벌써 5월의 시작이네요! 요즘 시간이 엄청 빨리가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ㄷㄷ 5월이라니... 2016년이 절반이나 지났다니! 이게 무슨 소리요 ㅠㅠ;; 5월이라는 건.. 슬슬 2부완결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네요 ㅎㅎㅎ 출판사와의 사정 상 3부연재가 이어질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0177 / 0240 ---------------------------------------------- 21장. 약속 「현무는 이 근처에 있어.」 유니가 주변을 뱅글뱅글 선회하며 정보를 읽어왔다. 바람의 인도를 사용한다고 해서 너무 적의 코앞에 불쑥 나타나는 건 위험하다 판단했기에 현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에단.” “예.” 충성스런 기사단장은 주인의 부름에 즉각 응답했다. “이곳에 있는 적은 사령에 잠식당한 현무뿐만이 아니다. 그를 부리는 사령술사도 같이 있을 게야.” “사령술사라면, 말씀하셨던 ‘프리드 길리아노’입니까?” “그래. ……잘 기억하는구나.” 에단은 순간이지만 사령술사의 이름을 언급할 때 쥬다스의 금안에 씁쓸한 빛이 스쳐 지나가는 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자와 무언가 얽힌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어.’ 단순히 정령에 의해 정보를 알아냈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분명 그 프리드란 자를 사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까진 어렵지 않게 이루어진 짐작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그 짐작을 또다시 의문스럽게 느꼈다. ‘……이상하군. 전하께서 사상 최악이자 최강이라 불리는 제네럴급 사령술사와 얽힐 만한 일이 도대체 언제 있었던 거지?’ 에단이 쥬다스를 알게 된 건 학원 루바흐에 갓 입학해서부터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15세였고, 쥬다스는 막 12세가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후 쥬다스를 주군으로 섬기게 된 에단은 빠짐없이 그의 곁을 지켜왔다. 그 와중에 사령술사라는 위험한 존재를 만났다면 에단이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보안이 철저하고 다수의 학생이 공동생활을 하는 루바흐에 들어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령술사와 접점이 있었을 것 같진 않았다. 입학 전이라 추측하기엔 쥬다스의 신분이 황자였단 게 문제였다. 금기인 사령술을 몸에 익힌 자가 감히 황궁까지 들어와 당시 백치로 소문나 황위도 계승받지 못할 거라 소문이 파다한 쓸모없는 황자를 해치려 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그때인가.’ 에단은 골몰히 머릿속을 뒤진 끝에 가까스로 어느 한 시점을 짚어냈다. 5년 전 투르케 사막이 사령술로 인해 얼어붙어 멸망했을 때. 그때 쥬다스는 홀로 일행과 떨어져 있다가 장기를 크게 상해 피를 토하고 쓰러지는 변을 당했다. 본인은 별일 아니라며 입을 다물어버렸지만 그 모습을 본 주변인들은 그가 아마도 사령술사를 만났던 게 아닐까 의심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를 주군으로 모시는 세 명의 최측근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프리드란 사령술사와 어떤 일이 있었기에.’ 쥬다스가 실은 대현자의 환생이며 프리드 길리아노와는 전생의 악연으로 맺어진 사이라는 엄청난 사실까진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현무와 만날 수 있어. 하지만 조심해야 해. 네가 말했듯이 현무는 지금 혼자가 아니거든.」 유니는 녹색 기류가 은하수처럼 안내하고 있는 방향을 향해 기분 나쁘단 표정을 지었다. 「그 사령술사 녀석, 영 거슬린단 말이지…….」 「당장 가서 박살 내버리자요!」 토니의 단순한 대답에 유니는 양손을 교차시켜 휘휘 내저었다. 「가만 있어봐. 프리드란 녀석은 여벌의 목숨이 있을 거라구. 당장 박살 내는 게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몰라.」 「저기 그럼, 아예 부활하지 못하게 막아버린다면요?」 슬쩍 끼어든 카니의 제안에 정령들은 일제히 ‘무슨 수로?’라는 눈빛을 보냈다.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깜빡이며 말을 덧붙였다. 「사령술사가 죽은 목숨을 부활시키려면 미리 재료를 준비해 놓는다잖아요? 거기엔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은 생명력도 필요할 테고.」 「그렇지. 문제는 그 재료를 어디에 어떤 식으로 봉인해 두었는지를 모른다는 거잖아.」 가뜩이나 어둠 속성인 사령술사가 작정하고 밀폐된 공간에 무언가를 봉인해 둔다면 아무리 수색에 능한 자연계 정령왕들이라 해도 완벽히 찾아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육체 재구성에 필요한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황에선 더욱 곤란하다. 이러한 유니의 지적에도 카니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으응, 그치만 모아둔 생명력을 전부 소진하게 만들어버리는 건 가능하잖아요.」 「생명력을?」 「사령술의 근원도 결국엔 생명력이니까요. 잘 자극해서 생명력을 전부 소진하게 만들 수만 있다면.」 사령들이 사람을 공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술사의 정신력을 통해 본연의 힘을 끌어내는 정령과 다르게 한 번 사령이 된 영체들은 살아 있는 것들이 가진 생명력을 흡수해야 힘이 생긴다. 사령술사에게 있어 생명력이 바닥난다는 건 극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예컨대 맹수 조련사는 맹수가 좋아하는 먹이를 상으로 주며 조건반사를 통해 놈들을 훈련시킨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을 잘 시켜놓아도 조련사의 손에 먹이가 없다면 사나운 맹수는 그의 말에 복종하지 않는다. 「인정하기 싫긴 하지만, 솔직히 프리드란 녀석도 제법 똑똑해. 그 영악한 녀석이 함부로 생명력을 막 소모할 리가 없다구. 분명 최후의 최후까지 여유분을 남겨놓고 행동할 거야.」 「아마도 그렇겠죠.」 카니는 순순히 그 사실을 인정했다. 처음부터 쉬운 방법이라 생각하고 의견을 제시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 할래요? 이그레트.」 누가 뭐래도 결정권은 그에게 있다. 최근 정령들은 전생과 판이하게 달라지기 시작한 계약자의 감정을 느끼며 불안 반 기대 반으로 그를 지켜봐 왔다. 쥬다스는 과거와는 다르게 무언가를 욕심내기도 하고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힘을 행사하기도 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을 억압하기보다 조금씩 작은 것부터 꺼내놓고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근래에는 슬픔이나 분노 같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까지 오롯하게 인정했다. 예전의 그를 알던 이가 본다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느낄 정도였다.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처럼 어설프지만 조심스럽게, 그는 자신과 타인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웠다. ‘그래. 중심. 결국 ‘나’와 ‘남’ 양쪽을 모두 알아야 잡을 수 있는 게 중심이지.’ 그리고 오늘, 오래전에 배신의 상처를 안고 도망치기를 선택했던 대상을 다시 만나러 왔다. “루니.” 그르릉- 바람을 따라가는 동안 잠자코 곁을 지키던 푸른 늑대가 낮게 목을 울렸다. “더 이상 늪이 생기지 않도록 막아줘. 부탁한다.” 자연계 물의 정령왕과 동물계 신수 현무가 서로 물을 지배하기 위한 싸움을 할 경우 결과적으로는 압도적으로 자연계가 승리한다. 그러나 문제는 그 과정에 발생하는 거대한 파장이었다. 이미 사령으로 타락해 버린 흑현무는 일반적인 물이 아닌 검게 오염된 물을 생성해 내고 있다. 지금 남쪽령을 빠른 속도로 뒤덮고 있는 검은 늪이 바로 흑현무가 다루는 힘이다. 검은 늪은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 찬 망자의 물이기 때문에 맞닿는 모든 생명을 삼키고 끌어들여 파멸시켰다. 이를 정화시키지 않고 억지로 개입해 물의 지배권을 빼앗아가게 되면 역으로 물에 깃든 죽음의 기운이 루니에게 스며들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사대정령을 전부 통솔해야 하는 쥬다스에게도 영향이 미치게 되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틀어지게 된다. 이를 어렵지 않게 예상한 쥬다스는 무리한 제압을 하는 대신 그 힘의 증식을 막는 선에서 정령을 움직였다. 오염된 물을 본래 성질로 되돌리는 건 사대정령 동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어마어마한 정신력을 소모한다. 그러고 나면 어쩌면 일시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놓일 수도 있다. 그러니 물의 정화는 일단 큰 싸움이 끝난 뒤 할 일이었다. 우우우! 계약자의 소망을 전해 받은 루니는 곧장 목을 빼고 늑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물의 힘이 개방되면서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고 있던 검은 늪 위로 매끈한 코팅이 깔리기 시작했다. 물의 기운을 느낀 흑현무가 무기력하게 질질 끌면서 가던 걸음을 멈춰 세웠다. 포옹! 그의 얼굴 옆으로 동그라미 하나가 날아올라 뽁 하고 터졌다. “……물거품.” 흑현무의 뒤편에서부터 해일처럼 밀려오는 맑은 기운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질척한 검은 늪 위로 투명한 물거품이 뒤덮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점점 앞으로 번져가던 늪은 물거품에 갇혀 더 이상 영역을 넓히지 못하게 됐다. 순식간에 풀어놓은 힘이 봉해진 흑현무 헤로드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늪을 돌아보고 있던 현무의 앞쪽에서 예기치 못한 음성이 들려왔다. 「뭔가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모양이군.」 “……!” 현무는 천천히 고개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그러자 우아한 자태로 앞길을 가로막은 푸른 늑대가 떡하니 시야에 들어왔다. ‘물의 왕.’ 사방신수와 사대정령왕은 오래전 서로 안면식이 있었다. 물론 그걸 꼭 기억해서가 아니더라도 정령끼리는 본능적으로 서로의 기운과 계급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그게 너의 뜻은 아니겠지만. 현무.」 “나는…….” 현무는 무언가 적절히 표현할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아 잠시 입을 닫고 침묵했다. 그러다 다시 느릿느릿 말했다. “주인의 뜻을 따르는 ‘헤로드’. 주인의 뜻은 곧 나의 뜻이니.” 물거품에 감싸인 늪은 멈춰 있었지만 그가 아예 힘을 다루지 못하게 된 건 아니었다. 현무의 발이 딛고 있는 땅이 돌연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검은 물이 온천수처럼 뿜어져 나오며 그를 감쌌다. “이 뜻에 당신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 물의 왕.” 「……이 나라의 수호신수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루니가 비킬 생각이 없어보이자 현무는 곧장 육신을 인간형에서 본체로 되돌렸다. 용이나 새 같은 명확한 동물의 형태를 취한 다른 신수와 달리 현무의 본체는 특정 동물로 판단하기 애매했다. 해동 사람들은 그를 거북이라 일컫는다. 그 이유는 현무가 등에 두른 단단한 등껍데기 탓이었다. 하지만 마치 말이나 사슴처럼 길고 무릎이 있는 네 개의 다리를 가졌고, 목은 흡사 뱀처럼 길었다. 꼬리도 마찬가지로 길었는데 꼬리 끝에 또 하나의 머리가 달려 있어 총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수였다. 「나 헤로드는.」 본체로 돌아간 현무는 마치 두 사람이 동시에 말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울렸다. 그보다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은 루니가 고개를 꺾어 올려다보자 현무는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인간을 수호하지 않는다!」 콰앙! 거대한 발굽이 루니가 서 있던 바닥을 찍어 눌렀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피해 루니가 가볍게 착지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루니는 날랜 몸놀림으로 공격을 피하며 물의 기운을 움직였다. 곧 검은 파도와 푸른 파도가 짐승의 아귀처럼 서로를 덮쳤다. 그렇게 루니가 현무의 발목을 묶어두는 사이 쥬다스는 그 근처 땅에서 주작과 현무의 새 주인과 조우하고 있었다. “이런, 이런. 간만의 만남을 반가워하기엔 손님이 너무 많구만?” 생존자 하나 없이 온통 죽음의 기운에 휩쓸려 버린 마을에서 프리드는 어느 부잣집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있었다. 불타거나 부서진 것도 아닌데 사람의 흔적이라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기와집이었다. “설마 당신답지 않게 이런 일에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 줄이야.” 여기서 짐이란 쥬다스가 함께 데려온 친위대를 칭하는 표현이었다. 뒤이어 조롱의 의미가 담긴 휘파람이 그들 사이를 할퀴고 지나갔다. “다치지 않게 지켜줄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면.” “…….” “그들이 어찌 되든 당신한테는 아무 상관없으려나.” 쥬다스가 대꾸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자 프리드는 즐거운 눈으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마루에 앉아 기다렸다는 듯 느긋하게 말을 건네는 그를 보며 쥬다스를 제외한 일행은 전부 긴장의 끈을 팽팽하게 조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로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0178 / 0240 ---------------------------------------------- 21장. 약속 “틀렸다. 전자도 후자도 아니야.” “허어?” 애초에 그가 데려온 동료들은 짐이 아니었다. 쥬다스는 자신의 기사들을 안전하게 지켜줄 자신이 있어서 데려온 것도, 다치든 말든 상관이 없어서 이 싸움에 관여케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적이자 옛 동료를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첫째 이유는 이들에게 너를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며.” 프리드는 대기 중의 떨림을 느끼고 비소를 지었다. 자연을 구성하는 모든 기운이 서서히 그를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하물며 그냥 피부에 맞닿는 공기조차도 서늘하게 날이 서 따갑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두 번째는 너에게 이들을 숨길 필요가 없기 때문이고.” 사령술사를 비호하는 검은 장막이 숨을 압박해 오는 자연의 기운에 항거하여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흠?” “등을 맡기기 위함이다.” 신뢰. 그건 전생의 자색 눈동자에서는 단 한 번도 발견한 적 없는 생소한 빛깔이었다. 프리드는 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옛 동료의 맑은 금안에 담긴 신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곤 턱을 괸 채 차갑게 중얼거렸다. “이거이거, 굉장한 믿음이군그래. 질투 날 정도야.” 스릉!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는 적을 둥글게 포위하듯 둘러싼 기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날카로운 검이 당장에라도 목을 날리기 위해 번뜩였으며 마법사들의 발밑엔 마법진이 발동을 기다리며 웅웅거렸다. 흉흉한 분위기에도 프리드는 여유를 잃지 않고 낮게 큭큭 웃었다. “날 죽이러 왔지?” 마치 ‘맥주나 한잔할래?’라고 물어보듯 간결한 어조였다. “그럼 확실히 죽여.” 후웅! 주변으로 몰려든 녹색 바람에 당장에라도 그를 찢어발길 듯 거세게 요동쳤다. 쥬다스는 칼날 같은 바람을 손에 머금은 채 탄식했다. “……너는 왜 항상.”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시험하려 하느냐.’ 그는 프리드가 오랫동안 자신을 시험해 왔음을 모르지 않았다. 채 어른이 되기 전부터 아이는 미묘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시작은 아주 소소한 반항이었다. 어미 새을 따르는 아기 새처럼 이그레트의 뒤만 따라다니던 아이가 처음으로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사춘기를 맞은 소년의 반항은 고작 식사를 거르거나 늦은 시간까지 밖을 돌아다녀 집에 들어오지 않는 정도에 그쳤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반항을 해보아도 그 대상에게선 원하는 답을 듣지 못했다. 당시 이그레트는 아이들의 엇나감이나 비뚤어진 일탈행위를 벌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엔 자비였으나 프리드가 느끼기엔 벽을 치고 방치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느낀 배신감을 복수하기라도 하듯 일부러 나쁜 짓을 과감히 저질렀는데도 절대 혼내지 않았다. 잘못을 해도 화내지 않는다. 그 사실은 아이들에게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어떤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프리드가 사람을 죽일 뻔한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 터진 날 이그레트는 현장에 나타나 사고를 무마시키고 손수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여전히 화는 내지 않았지만 그 뒤로도 인명이 걸린 일에는 나서서 그를 막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고.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건 싫으신 거야?’ 그러자 프리드는 점점 오기가 들어 많은 일을 저질렀다. 어찌 보면 그가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인내심을 시험한 것 같기도 했다. “망설일 틈이 있나? 이러는 동안에도 이 나라는 망국의 길로 향해 가고 있다고.” 여전히 무방비한 자세로 앉아 자신의 죽음을 종용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작태를 보면서 말없이 검을 겨누고 있던 에단이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뭔가 이상하다.’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불리한 상황에 저리도 태연할 수 없다. 주변엔 그가 부리는 사령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특별한 주술이나 수작질을 부린 흔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만 지켜보기도 영 찜찜했다. “서두르는 게 좋을 텐데. 하나 알려줄까?” 에단이 상황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는 사이 프리드는 옷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지금 해동 왕궁에 찾아간 손님은 주작만이 아니야.” “……?” “할더도 함께 보냈지. 아마 지금쯤 아수라장이 되었겠군. 과연 어느 쪽의 목이 떨어졌을지 기대되는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화르륵 마룻바닥을 뚫고 시뻘건 화염이 치솟았다. 뜨거운 불길은 프리드의 주변을 감싼 검은 장막을 순식간에 태워 버렸다. 콰직! 살이 꿰뚫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양 어깨와 허벅다리를 뚫고 뾰족한 창이 박혔다. 땅의 정령이 만들어낸 단단한 금속 창이었다. 프리드는 마치 엄벌을 받는 죄수처럼 사지를 결박당했다. “지금 네 숨을 끊어봤자 다른 육신으로 옮겨갈 뿐이겠지.” 쥬다스는 진심으로 그를 죽이러 왔다. 단순히 벌을 준다거나 막으러 온 게 아니었다. 사지를 결박하고 여분의 생명력을 전부 소진시킬 것이다. 다시 부활하지 못할 정도로 힘을 쓰게 만든 후 마지막 순간 확실히 그 숨통을 날린다면 그 질긴 생명도 거기서 끝이었다. 산 채로 말려 죽이는 고문이나 다름없는 처우였다. 채집된 곤충마냥 어깨와 다리를 꿰뚫린 채 축 늘어져 있던 프리드는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설마하니 당신을 상대로 아무 준비도 없이 왔다고 생각했나?” 그우우우우- 여기저기서 사람이 통곡하는 것 같은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쥬다스는 힐끗 자신이 밟고 있던 땅을 내려다보았다. 살짝 발을 옆으로 치우자 짓밟혀 있던 검은색 선이 보였다. 그 선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로 이어져 거대한 그림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육망성.’ 악마의 별이라 불리는 육망성이 음울한 빛으로 존재를 드러냈다. 흙 아래 숨겨져 있던 선이 점차 허공으로 떠오르며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 현무와 대치 중이던 루니가 흠칫 놀라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늘 차분한 모습을 보여 온 푸른 늑대답지 않은 급박함이었다. 루니가 곧장 몸을 돌려 계약자에게로 돌아가려던 순간 그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부웅! 「어딜.」 거대한 꼬리가 루니를 덮쳤다. 당황한 나머지 공격을 허용한 루니가 이를 피하지 못하고 제대로 직격당했다. 꼬리에 맞아 주르륵 뒤로 밀려난 푸른 늑대의 앞을 흑현무 헤로드가 가로막았다. 검게 물든 두 쌍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시비를 걸어놓고 먼저 빼는 건 예의가 아니지.」 「……이 망할. 파충류가.」 크르르릉! 흙투성이가 된 채 일어선 루니가 살벌하게 목을 울렸다. “어? 단장, 육망성이 마력을 흡수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하늘로 솟아오른 육망성은 어디로 보나 사령술의 일종이었다. 마법진도 아니면서 마력을 흡수해대는 통에 바이칼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육망성의 크기는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을 전부 뒤덮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정체를 알 수 있나?” “아뇨,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마력을 흡수한다는 건 무언가 발동을 준비한다는 뜻인데요.” 바이칼은 스태프를 쥔 반대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규모가 워낙 커서 막을 수도 없고 원리를 모르니 파훼하기도 어려웠다. 하늘에 떠올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악마의 별은 음산하게 빛났다. “자, 그럼 마지막 피날레를 즐겨주실까.” 프리드는 여전히 사지를 결박당한 채로 웃었다. 불길한 빛으로 돌고 있던 육망성이 그의 말에 응답하듯 우뚝 멈춰 섰다. 그걸 본 바이칼의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맙소사.” “왜 그러지?” “단장, 이거…….” 발동 직전이 된 육망성의 마력 배열을 읽어낸 바이칼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끊긴 문맥 뒤로 ‘미친’이라거나 ‘망할’ 따위의 감탄사가 몇 번 이어지다 이내 버럭 큰 소리가 튀어 나갔다. “이 배열은 박스입니다!” “뭐?” 바이칼이 스태프로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가리켰다. 대지에 그려진 육망성은 검은 빛을 흩뿌리며 오로라처럼 하늘로 치솟아 땅과 하늘에 모두 그 표식을 새겨놓고 있었다. “그러니까 정체불명의 프로그램으로 이어진 박스라고요! 저 빌어먹을 별표식이!” 이해할 수 없는 주장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박스’란 보통 손바닥만 한 크기의 네모난 마법 상자를 칭한다. 저런 말도 안 되는 크기에 음습한 검은 기운, 육각의 별 모양으로 생긴 박스는 개발된 적 없다. 그러나 모두가 이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프리드의 입이 먼저 열렸다. “스위치 온.” ‘박스’가 발동했다. 먼저 검은 파도가 시야를 뒤덮었고,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의 모습이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뒤엉켜 싸우던 현무와 루니도, 사지를 결박당했던 프리드도, 을씨년스러운 기와집 하나를 남겨두고 모두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 * * 짹, 째짹! 명랑한 새 지저귀는 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약간 찬 기운을 머금은 물안개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따스함을 색칠하는 봄 햇살. 새로 자라난 여린 풀잎과 노란 꽃잎 사이로 미풍이 살랑살랑 불었다. ‘……새소리?’ 쓰러져 있던 인원 중 에단이 가장 먼저 눈을 떴다. 그러자 뜬금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풍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녹색 정원과 노란 꽃밭, 아름다운 석조건물과 함께 그 사이를 뛰노는 어린 새들. 에단은 순간 판단력을 잃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으, 머리야.” “바이칼.” 다행히도 전원 깨어나는 시기가 비슷했다. 이슬을 머금어 촉촉한 잔디위에 쓰러져 있던 기사단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검게 물든 하늘과 대지는 사라지고 마치 낙원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가장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린 크리스티나가 익숙함을 알아차리고 입을 열었다. “여긴……. 루바르잔 황궁인가.” “과연. 그런 것 같군요.” 에단도 그 의견에 동의했다. “으음. 일단 우리가 지금 박스 안에 들어온 것 같긴 한데요. 황궁을 모델로 만든 공간인가?” 박스라고 치기엔 지나칠 정도로 세부적이었다. 드넓은 황궁의 건물이며 날씨, 작은 동식물까지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건 꼭 현실 같군.’ 방금 전까지 함께 전투 상황에 있었던 동료들이 아니었다면 그저 꿈을 꾸고 일어난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생생했다. 함께 눈을 뜬 인원은 열둘의 기사단과 크리스티나까지 합쳐 총 열 세 명이었다. “전하께선?”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건 배경이 아니었다. 쥬다스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프리드 길리아노도 보이질 않는군.” 그 자리에 있던 전원이 박스로 강제입장한 상황이라면 프리드도 함께 들어왔어야 정황상 맞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상황이 점점 좋지 않게 다가왔다. 박스 어딘가에 쥬다스와 프리드가 같이 있는 거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단장. 문제가 하나 더 있습니다.” “……?” “그게, 박스를 나가는 조건을 전혀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박스를 나가려면 보스몬스터를 처치하거나 적을 섬멸하여 열쇠를 얻으면 된다. 하지만 이 박스는 황궁을 기반으로 만든 공간이기 때문에 몬스터 처치가 조건일 것 같진 않았다. “거기다가 여기선 ‘죽음’이 탈출조건이 되는 건지도 확실치가 않습니다.” 박스 내부에서 죽으면 강제적으로 이탈하도록 조건을 추가해 놓은 건 제국의 마법연구팀이 마련한 안전장치였다. 박스란 인간의 정신을 연결하는 일인 만큼 안전성에 대한 대비책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사령술사가 만들어낸 박스가 과연 그 장치를 충실히 재현했을 지에 대해서는 아직 미지수였다. “솔직히 그 악독한 사령술사라면 ‘죽음’이 곧 ‘사령화’가 되도록 입력해놓았다 하더라도 이상할 게 전혀 없죠.” 바이칼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 말대로 그들은 이 박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극단적인 예시였으나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사령술로 이루어진 박스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전부터 나오는 개념이긴 하지만 '박스'는 게임판타지에서 종종 등장하는 컴퓨터 가상현실게임 정도로 이해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ㅎㅎ 다만 맵은 옛날 닌텐도게임처럼(?) 팩마다 다르다는... 참, 다음 편도 잠시 후 바로 이어집니다! 0179 / 0240 ---------------------------------------------- 21장. 약속 “일단은…….” 에단이 침묵하자 크리스티나가 서늘한 눈으로 주변을 훑으며 입을 열었다. “전하를 찾아보도록 하지. 그게 급선무다.” 그녀는 착용하고 있던 팔찌으 머리를 높게 올려 묶었다. 맑게 찰랑이는 바닷빛 머리카락을 한 차례 응시한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섰다. “동의합니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놀릴 순 없는 노릇이니.” 에단은 일단 인원을 정확히 체크했다. 제일 급한 건 쥬다스를 찾는 일이었지만 사라진 건 흑현무나 3황자 세이지도 마찬가지였다. 적이 어디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대열을 분산시키진 않기로 했다. “지금부터 주군을 찾는 데에 주력한다. 마법사들은 가급적 박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면서 이동하도록.” 그들은 일단 잔디를 따라 걸었다. 근처에 있는 건물부터 살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건물까지 다가가기도 전에 한 무리의 경비대와 맞닥뜨렸다. “……!”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에단의 표정에 당황이 어렸다. ‘박스에 사람들이?’ 아무리 훌륭하게 현실을 재현해 낸다 해도 박스 안에는 훈련을 위한 몬스터 정도만이 설계 가능했다. 지능을 가진 사람을 재현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에단은 눈앞에 나타난 경비병 무리가 박스 안에 사로잡힌 진짜 인간들인지 아니면 그저 환상일 뿐인지 판단하기 어려워 자리에 멈춰 섰다. “에이, 황궁 배경인데 설마 공격하진 않겠죠?” 그를 따라 멈춰 선 바이칼이 속닥거리던 찰나였다. 저벅저벅. 경비병 무리가 그들을 무시하고 스쳐 지나갔다. 바이칼은 걱정했던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멀어지는 경비병들의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실제 사람은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둔 모양인데요.” “다행이군. 귀찮아질 뻔했어.” 에단은 검 손잡이에 올렸던 손을 내리며 성큼성큼 앞서갔다. “와, 단장. 아무리 그래도 황실 경비대를 베려고 하셨습니까?” “어차피 가짜들이다.” 칼 같은 대답에 바이칼은 물론이고 다른 기사단원들마저 의외라는 시선으로 자신들의 단장을 쳐다보았다. 고지식한 면모가 강한 에단이라면 아무리 가짜라도 황궁에서 난동을 부린다거나 상해를 입히기 꺼려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예상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며 루바르잔 황가에 충의를 바친 헤이가 공작가문의 후예다. 다만 에단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시 여기는 가치가 있을 뿐이었다. ‘전하께 검을 바쳤으니까.’ 단 한 사람에게 검을 바치고 목숨을 맡겼다. 개가 한 번 정한 주인을 평생 따르듯 결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설령 가짜가 아닌 진짜 황궁에서라도 주인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검을 뽑을 수 있다. 그러한 속내에 대해 굳이 부연설명을 붙일 필요를 느끼지 못한 에단은 묵묵히 앞서 수색에 임했다. 근처에 있던 궁은 빈 건물이었다. 루바르잔 황궁은 워낙 넓었기 때문에 실제 황족이 기거하는 건물보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많았다. 그렇지만 주인 없는 궁도 관리만큼은 철저했다. 깔끔히 쓸고 닦은 바닥과 매일 세탁해 갈아놓는 시트, 옷가지들을 나르는 하녀들이 종종 보였다. 경비대와 마찬가지로 하녀들 역시 박스 안에 들어온 인원을 인식하지 못하고 투명인간처럼 지나쳐 버렸다. “얘기 들었어? 오늘도래.” “아아, 어쩌면 좋아. 오늘도?” “응. 이러다 정말 큰일 터지는 거 아닌가 몰라.” “에구머니! 그런 소리 함부로 하다 우리가 먼저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얘.” 본인들은 작게 소곤거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근처를 지나는 누구나 엿들을 수 있는 이야기였다. 지나쳐 간 하녀들을 슬쩍 돌아본 바이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늘도’……?”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알기로 최근 루바르잔 황궁에선 딱히 이렇다 할 사건이 없었다. 에단과 바이칼은 서로 의문스런 시선을 주고받았다. “아무래도 그냥 평범한 황궁 배경이 아닌 것 같습니다. 뭐 에피소드 같은 게 있는 박스인가? 그럼 에피소드 감상을 완료하면 자동으로 나가진다거나?”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전하를 찾는 일에 집중하도록.” “예이. 예이.” 단호하게 말을 자른 에단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바이칼은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바이칼도 쥬다스의 행방이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빈 궁을 나와 장미정원과 분수대를 지나 낮은 잔디며 색색의 벽돌로 꾸며놓은 길을 따라 한참을 수색했다. 큰 성과는 없었지만 아직까지 폭발음이라든지 전투의 흔적이 보이지 않음에 다들 안심했다. 만일 쥬다스와 프리드가 한 공간에 있다면 이 정도로 조용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수색 속도에 박차를 가하던 와중, 마침내 그들에게도 익숙한 건물에 다다랐다. 1황자궁이었다. “어랍쇼? 이거 옛날 건물 아닙니까?” 익숙하긴 했지만 동시에 1황자궁은 쥬다스가 황태자로 즉위하면서 외부디자인을 새롭게 수정했다. 본래는 다른 건물로 옮겨가야했지만 쥬다스가 이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가 떠나고 싶지 않아하니 어쩔 수 없이 궁 자체를 황태자를 위한 건물로 바꿔 버렸다. 그런데 지금 이들의 눈앞에 떡하니 보이는 1황자궁은 변화를 주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크리스티나는 건물 벽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이 박스의 배경은 과거라는 뜻이 되겠군.” ‘어쩌면 여기에…….’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망설임이 깃들었다. 경비병이나 하녀들처럼 세밀하게 재현해 낸 이 박스라면 과거 1황자궁의 주인도 이 안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과거 그의 곁엔 그들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크리스티나는 문득 문에 기대선 소년을 발견하고 멈칫 입을 열었다. “3황자 전하?” 크리스티나의 손이 벽에서 떨어졌다. 상대도 그녀를 발견하고 놀란 눈으로 마주보았다. 바이칼이 반갑게 소리쳤다. “세이지 님! 여기 계셨군요. 무사하셨습니까?” 세이지였다. 혼자 있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여긴 들어가지 마. 다들.” “그게 무슨.” 무사해서 다행이란 말을 건네려던 바이칼이 도로 입을 닫았다. 3황자의 주먹이 겁먹은 사람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세이지는 무척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었는데도.” “예?” “내 눈으로 봐놓고선 잊고 있었어. 나, 그때 형님이 죽었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세이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다른 일행이 알아듣기 힘든 이야기를 횡설수설했다. 일단 그를 진정시킨 바이칼이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입 모양으로만 전달한 질문에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답을 내놓았다. “가자.” 세이지가 뭘 보고 충격받았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과거 따위에 연연해서 흔들릴 시점이 아니었다. “우린 한시라도 빨리 주군을 찾아 이곳을 나가야 한다.” “하지만.” “외람되오나 3황자 전하께서도 혼자 계시면 위험하니 함께 이동해 주십시오.” 알겠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에단은 다시 앞장서서 1황자궁으로 들어섰다. 궁 안은 몹시 조용했다. 그들의 발자국 소리를 제외하곤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돌아다니는 하녀조차 없었고 심지어 장식물도 없어 벽면이 온통 썰렁했다. 지금껏 돌아다닌 건물들 중 가장 허전한 공간이었다. 벽면을 따라 양쪽으로 이어진 둥근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복도가 나타났다. 그 복도 한가운데에 위치한 방이 바로 이곳 주인의 방이었다. 가장 앞에 선 에단이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달칵! 문이 먼저 열렸다. 내심 당황한 에단이 한 걸음 물러서자 안에서 문을 연 이가 천천히 그 안에서 걸어 나왔다. “……!” 제국 유일무이한 맑은 은발 금안.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라 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설마설마 했던 과거의 주인이 그 앞에 있었다. “전……!” 그러나 어린 쥬다스 역시 마찬가지로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걸음은 무척 느렸고 비틀거리는 기색이 있어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위태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래, 본래 전하께선 몸이 몹시 약하셨지.’ 그들은 루바흐에서 처음 만났던 쥬다스를 떠올렸다. 같이 봉술 수업을 받았던 에단은 그가 당시에 얼마나 체력이 없고 나약했었는지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심지어 치료사로부터 언제 신체기능이 정지해 숨을 거둘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충격받았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에단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라. 다른 곳에 신경 쓸 시간이 없다.” 그들은 지금 가짜로 만들어진 어린 그가 아니라, 진짜 쥬다스를 찾아야만 했다. 애써 아이를 무시하고 돌아서 지나치려던 에단의 귓가에 작은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콜록.” 돌아보자 아이는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벽을 짚고 잔기침을 내뱉고 있었다. 그마저도 원활히 되지 않아 몇 번이고 콜록거리다 털썩 주저앉았다. “……?!”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그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다, 다치신 것 같은데요.” 바이칼이 조심스럽게 말한 것처럼 어린 쥬다스는 타고난 건강뿐 아니라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목에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뺨에도 긁힌 자국이나 쓸린 상처 등이 조금씩 남아 있었고 누군가 조른 듯 목이 잔뜩 부어 있었다. 가까이서 그의 참혹한 상태를 살펴본 에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분개했다. “대체 누가 이런!” “형님의 어머니.” 답은 세이지로부터 나왔다. 그러자 모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사실 쥬다스의 생모가 그를 학대했다는 사실은 귀족가 사이로 공공연하게 퍼진 유명한 소문이었다. 세이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분을 그렇게 만든 게 나의 어머니, 사야 캐슬롯.” 그 진상이 밝혀진 게 불과 5년 전이다. 사야 캐슬롯은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고 그녀의 아들인 3황자 세이지는 침묵의 궁에 유폐당했다. 이른바 ‘해피엔딩’, 사람들은 모든 게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며 황제를 칭송했다. ‘형님, 어째서 날 용서했습니까?’ 세이지는 지독한 모멸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그동안 해온 행동과 생각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것이었는가를 이제야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야 황후는 형에게 있어 악마나 다름없었다. 어미에게 자식을 죽이도록 했다. 제 목을 조르는 어머니를 보며 형은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 놓고 쥬다스를 원망하고 어머니를 보고 싶어 한 자신이 너무나도 추악하게 느껴졌다. ‘나는 형님의 뒤를 따를 자격이 없어.’ 세이지가 고개를 숙이고 절망하는 사이, 에단은 분개하던 그대로 굳어져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소문을 들을 때야 그러려니 싶었던 일을 눈앞에 직접 확인하고 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으.” 그때 아이가 주저앉은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원스레 울음을 터뜨리진 못하고 입을 꾹 다문 채 눈물만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에단은 문득 생각했다. 차가운 궁이다. 일곱 살 어린아이가 엉망진창으로 다쳐 울어도 아무도 그 눈물을 찾지 못할 만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하루 보내셨나요? ㅎㅎ 오늘은 하루종일 비바람이 몰아쳐서 좀 무섭기까지 하던데.... 그래도 나갈 일 없이 집안에만 있어서 좋았습니다.ㅋ 역시 비오는 날은 집에서 라면이죠! 흐흐.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 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 0180 / 0240 ---------------------------------------------- 21장. 약속 오래 지나지 않아 아이는 다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안절부절못하고 그를 지켜보던 일행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쯤 되니 에단도 더 이상 매몰차게 돌아설 수 없었다. 그들의 주군이 한 번도 드러낸 적 없는 약한 모습이었다. “어딜 가시는 걸까요?” “그건…….” 크리스티나는 짚이는 곳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 고운 이맛살을 찌푸렸다. 당시 1황자가 정계에서 무시받았던 이유 중 큰 줄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기댈 곳이 없으니까.’ 먼 타국에서 건너와 정신이상을 일으킨 모친, 그리고 궁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방관하는 부친, 작고 병약한 황자보다는 다른 튼튼하고 총명한 말에 패를 거는 귀족들. 넓고 아름다워 마치 낙원 같다 일컬어지는 루바르잔 황궁 안에서 아이가 기댈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음? 이거 안녕하십니까. 1황자 전하.” 느린 걸음으로 겨우 궁에서 빠져나온 어린 쥬다스는 마침 근처를 지나던 한 귀족 무리와 맞닥뜨렸다. “…….” 속내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표정만큼은 다들 친절하고 깍듯해 보였다. 그러나 그도 잠시, 황자가 답하지 않고 침묵하자 그저 목례와 함께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그 지나가는 행렬 사이에 끼어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한 크리스티나의 눈이 잘게 떨렸다. ‘저건, 과거의 나야.’ 델피아 공작가의 하나뿐인 딸 크리스티나는 어릴 적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따라 황궁을 방문하곤 했다. 어린 나이지만 대귀족 자제답게 그녀는 아이보리 셔츠와 겹겹이 덧대어 만든 붉은 스커트를 입고, 체리처럼 동그란 방울로 머리를 묶어 장식했다. 그리고 그때 어렸던 그녀는 쥬다스를 보고 한눈에 평가했다. ‘아니야. 제발.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쓸모없고 무능한 존재에 대한 경멸. 그 모든 걸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드러낸 물빛 눈동자를 보며 크리스티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손끝으로 피가 죄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본래 그녀는 능력주의에 결과중심 성향이 강했다. 루바흐에서 쥬다스를 다시 만나 충의를 바치면서부터는 그 가치관이 많이 희석되어 융통성이란 걸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는 결과만으로 판단할 수 없는 가치도 있다. 당장 쓸모없다고 느꼈던 것들이 어느 순간이 되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로운 존재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이 바로 쥬다스다. 하지만 이때의 크리스티나는 그런 사실 따윈 모르던 콧대 높고 도도한 꼬마 아가씨였다. ‘나는 도대체 당신에게, 어떤 터무니없는 상처를…….’ 10년 전 그녀는 약해 빠지고 볼품없는 어린 쥬다스를 향해 경멸 섞인 싸늘한 시선을 던지곤 휙 돌아서서 어른들 틈에 섞여 버렸다. 크리스티나는 이때 자신이 보낸 시선이 흉악범에게 던지는 돌팔매질보다 그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음을 알았다. “잘 생각해 보라고. 약한 놈은 왜 그 무리에서 약할까?” 문득 지나간 행렬 중 한 남자가 완전히 좌절해 버린 그녀를 힐끗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밟으면 죽으니까.” 붉은 눈동자가 뱀처럼 빛났다. 마치 박스 내에 제작된 환상 중 일부처럼 움직였던 그였지만 사실은 그저 연기였을 뿐이다. 박스에 들어온 기사들과 충분히 멀어졌다 판단한 지점에서 그는 푹 눌러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 손가락에 걸었다. “누가 잘했든 잘못했든 상관없어. 약한 놈은 한 번 밟히면 그냥 알아서 죽거든. 무리 생활을 하는 녀석들은 그걸 아는 거지.” 스스로의 과실을 깨닫고 절망하기 시작한 쥬다스의 수하들을 보며 프리드는 목에 맨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너희 자신이고 말이야.” ‘너희들이야말로 그를 밟아 죽이고 싶어 했잖아?’ 궁에서, 학교에서, 귀족사회에서. 지금 황태자를 따르는 이들 중 대다수는 한 번씩 그를 짓밟았다. 꼭 물리적인 타격을 입혀야지만 짓밟는 게 아니다. 사람은 단순한 표정이나 한 마디 말만으로도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 “과연 어디까지 스스로의 죄의식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을지. 기대하지.” 피식 웃음을 흘린 프리드는 유유자적 돌아서서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쥬다스의 수하들은 하나둘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에단이 주변을 확인했다. “여긴.” 어린 쥬다스가 향한 곳은 하윤이 혼인을 맺으며 고국에서부터 가져왔다는 벚나무 아래였다. 1황자궁 뒤편에 심어둔 이 벚나무는 사시사철 분홍색 꽃이 피며 눈처럼 흩날린 후 솜사탕처럼 자연히 녹아 사라진다는 신비로운 나무다. 그들이 알고 있는 모습 그대로인 생기 넘치는 벚나무를 보자 답답했던 가슴속이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았다. 크리스티나는 나무 밑에서 멍하니 서 있는 쥬다스의 곁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전하께선 어릴 적부터 이 나무를 좋아하셨군요.” “…….” “그래서 저희에게도 보여주신 건가요.” 떠올려 보면 쥬다스는 늘 궁을 찾아온 친우들에게 틈만 나면 함께 꽃놀이를 하자거나 나무 아래서 차를 마시자는 식의 제안을 해왔다. 그들은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름다운 꽃나무구나 생각하며 따랐던 일들이 사실은 꽤나 무거운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았다. “그땐 꼭 비밀기지에 우릴 초대하는 심정이셨으려나요?” 바이칼도 풀썩 그 곁에 꿇어앉으며 농담조로 말했다. 무릎을 꿇어야 겨우 아이의 눈높이와 비슷해졌다. 사실상 12살이 되기까지 쥬다스는 전혀 성장하지 못하고 7살의 외형을 유지했었다. 그랬기에 지금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에단은 과거의 그를 보면서도 생소함 대신 익숙함을 느끼고 있었다. 다만 원래 알던 그와 눈빛이 조금 달랐다. 맑고 부드럽던 금빛이 아니라 뿌옇게 일어난 흙탕물처럼 눈동자가 흐릿했다. 초점도 제대로 맞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흡사 몽유병에 걸린 사람을 연상케 했다. “잠깐. 꿈……?” 벚나무까지 와서도 혹시 주변에 진짜 쥬다스의 흔적이 있진 않을까 두리번거리던 에단이 문득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쳐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처럼 그 곁에 무릎을 꿇어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전히 아이는 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환상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에단은 단순히 과거의 그라서 그들이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 거란 예감이 들었다. “바이칼.” “예.” “‘박스’는 사람의 정신에 접촉하여 환상을 보게 한다. 맞나?” “네? 아, 넵. 이론상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박스에 진입한 자가 본래 모습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덮어쓸 가능성은?” “아니 이 양반이. 갑자기 그게 웬 뚱딴지같은 말씀…….” 똥 씹은 표정으로 되물으려던 바이칼이 퍼뜩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전히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어린 쥬다스를 조심조심 살폈다. 곧 그의 입에서 탄성과 탄식이 섞인 애매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허! 단장은 정말 천재시지 말입니다?” “쓸데없는 감상은 넣어둬라. 결론부터 말해.” “가능합니다. 그거 가능해요.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그러니까 지금 눈앞에 계신 꼬마 전하께서 실제로는 진짜 주군이실 수도 있다는 거죠.” 바이칼은 자신의 밤색 머리칼을 벅벅 헤집으며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예상인데, 어쩌면 말입니다. 애초에 여긴.” “……?” “전하의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그럴싸한 추리였다. 일반적으로는 박스에서 사용할 맵을 고르고 입장한다. 만일 맵을 고르지 않고 입장한다면 사용자의 정신세계에서 맵을 대체할 기억을 끌어오게 된다. 이 경우 정신세계를 침범당한 사용자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박스 사용 시 맵을 반드시 지정하도록 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사령술사가 만든 박스가 그렇게 친절할 리는 없었기에 기사단원은 모두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자와 환상을 판별해 낼 수 있는 방법은?” “그건 모르겠는데요.” 바이칼은 박스개발자가 아니라 일개 마법기사일 뿐이다. 당연히 세부적인 사항까진 알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전하를 이 기억 속에서 깨울 수 있지?” “보통은 죽여서 박스 밖으로 끄집어내죠.”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시간을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정체를 확인하고자 어린 쥬다스를 죽여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단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정돈하지도 못하고 허겁지겁 아이를 찾아온 여인이 슬픈 얼굴로 서 있었다. 루바르잔 황실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이국적인 외모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감빛 도는 피부와 선한 눈, 루바르잔 여성 평균키보다 작아 체격이 아담했으며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전 황후 하윤 리였다. 특이한 외향 덕에 에단을 비롯한 일행은 그녀를 처음 봤어도 그 정체를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또 여기 혼자…….” 하윤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녀는 아이를 찾았지만, 이렇듯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오열했다. 하윤은 자신이 사령에게 조종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면서도 곁을 떠날 수가 없었다. ‘나마저 떠나면 이 아이 곁에는 누가 있어줄까.’ 자신의 존재가 아이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떠나지 못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엄마?” 어린 쥬다스는 자신을 학대한 어미를 보고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이의 부은 목과 멍든 손목을 어루만지며 하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내가 또 널. 아아, 어찌, 어찌해야.” 아이는 엄마를 올려다보고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울어…… 요?” 하윤은 너무 울어 초췌하기까지 했다. 그녀가 눈물을 삼키느라 답하지 못하자 어린 쥬다스는 담담하게 자신의 잘못을 빌었다. “잘못했어요.” “아니야, 아가.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크리스티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세간에선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황궁에서 벌어진 비극이 눈앞에 있었다. ‘결국 얼마 후 하윤 리는 자결한다.’ 제 손으로 아이를 죽이지 않기 위해서. 이는 자식을 목숨보다 사랑한 하윤에게 있어 심장을 도려내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죽 걱정했던 대로 아이는 혼자 남았고 모두에게 경멸받았다. 마지막 기회로 그를 루바흐 학원에 입학시켰지만 그 안에서도 철저히 혼자였다. 그가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기까지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는 같은 루바흐 동기인 세 사람이 잘 알고 있었다. “맞습니다. 형님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세이지는 차마 쥬다스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발끝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건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그는 사야 황후가 사령과 계약해 끔찍한 죄를 저지른 원인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형을 죽이려고 한 순간조차 세이지의 선택은 그를 위한 게 아니었다. 세이지는 어머니인 사야 황후를 택했고 형을 버렸다. “죄송해요.” 세이지는 그 말과 함께 홱 돌아섰다. 갑자기 대열을 이탈하는 3황자를 보고 당황한 바이칼이 그를 불렀다. “세이지 님! 어딜 가십니까? 아직 혼자 다니시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 신경 쓸 새도 없이 바로 곁에 꿇어앉아 있던 크리스티나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세이지가 사라진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그녀를 보고 바이칼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크리스티나 님은 또 왜? 이분들이 단체로 사춘기가 오셨나.” “두 분을 데려오도록 하지. 바이칼. 대열을 지키고 있어라.” “예? 제가요? 잠깐만.” 에단은 우선 세이지가 사라진 방향으로 달렸다. 멀어지는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바이칼이 이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어씨 젠장! 다들 나한테 왜 이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그건.. 네가 동네북이라서 그래.... ....가 아니라 잠시 후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0181 / 0240 ---------------------------------------------- 21장. 약속 “저, 부단장님.” 바이칼은 머리를 뜯던 자세 그대로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차로 절망했다. 다른 기사들의 상태도 영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다들 의기소침해져서 우물쭈물하는 꼴이 당장에라도 전원 대열을 이탈할 낌새였다. 바이칼의 손에 들린 스태프가 웅웅거리며 마력을 머금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니들도 헛소리 지껄이면 진짜 기사단복 벗을 각오하고 그 정신상태를 개조해 줄 거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먼저 말을 건 기사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전하께서, 아니, 그러니까, 과거의 전하께서 이동하고 계십니다.” 그 말대로 어린 쥬다스는 하윤의 손을 꼭 붙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전하를 따라가야 하나? 단장은 대열을 지키라고 했지 제자리에서 기다리란 말씀은 하지 않으셨잖아.’ 이대로 어린 쥬다스를 놓쳐서는 안 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멋대로 대열을 이끌고 움직여도 되는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았다. 끙끙대던 바이칼은 결국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아이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 * * 해동의 수도는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밝았다. 화염이 살아 있는 새처럼 날아다녔고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무지개처럼 불의 다리가 놓였다. 신수는 자연계 정령과 다르게 여러 속성을 동시에 품고 있다. 그중 불 속성을 가진 신수는 백호와 주작으로, 현재 백호가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작이 다루는 화염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대신 하늘 속성만큼은 주작과 청룡이 같았는데 두 신수는 천기를 다루며 엎치락뒤치락 격렬하게 싸워 댔다. 그러나 거대한 신수들의 싸움 아래에서도 사람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호성의 주민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대피시켜라!” “수(水)기를 더해 주술진이 깨어지지 않도록 보충하라.” “집과 성벽은 불타도 괜찮으니 민간인 보호에 주력하라!” 왕은 가장 먼저 지하대피소에 사람들을 피신시켰다. 큰 전쟁이나 재난을 대비해 만들어둔 장소였는데 수도의 모든 거주자를 수용하고도 공간이 남아 여행객이나 장사꾼들도 모조리 들어오도록 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은 불타는 와중에도 지하대피소는 제법 안전하게 유지되었다. 왕실주술사들이 나서서 있는 힘을 다해 결계를 쳤기 때문이다. 집을 태우고 산간을 집어삼켜 무섭게 넘실거리는 불길도 그 결계에 막혀 대피소 내부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다. 성왕 이서윤이 사람들을 지키는 데에 모든 병력을 주력한 탓에 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윤은 아름다운 궁궐이 불타는 것엔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선봉에 나서 상황을 지도했다. “전하! 근방에 사령술사가 나타났습니다!” 지금껏 나름 큰 위기 없이 척척 대응해 나가던 해동군이 술렁이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사령군단이 나타났단 속보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으며 병사들의 얼굴에도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정작 이를 보고받은 서윤의 표정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잠시 혀를 찼을 뿐이다. ‘사령술사라……. 적의 수뇌부 놈들은 어디서 뭘 하나 했더니 이제야 한 놈 나타났나? 생각보다 게으른 녀석들이군.’ “중앙군은 전투를 준비하라.” 그는 차분히 창을 챙기며 명을 내렸다. 중앙군은 왕의 칙명에만 움직이는 군대였다. 중앙군을 움직이겠다는 건 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겠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아바마마, 저도 돕겠습니다!” “세자.” 그의 아들 이지오가 맹랑한 기세로 뛰쳐나왔으나 서윤은 단호히 기각했다. “너는 여기 남아 사람들을 지키도록 하여라. 절대 이 안에서 한 발짝도 나와서는 안 된다.” “하오나!” “듣거라!” 큰 소리에 찔끔한 지오가 입을 다물자 서윤은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지오 너는 이 나라 해동의 왕족이다. 왕족은 왕족으로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걸 배웠지 않느냐.” “배웠습니다. 그러니 저도 나라를 위해…….” “네가 정녕 나라를 위한다면!” 왕은 열두 살 왕세자의 작은 두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네 사람을 지킴과 같이 너 자신도 지켜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왕족에겐 백성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할 의무도 있는 것이야.” 늘 인자하던 성왕이 아닌 아비로서의 호통이었다. “그럼 왜 아버진.” “나는 왕이기 때문이다.” 그 말과 함께 이서윤은 아들의 어깨를 놓았다. 그리고 호위가 끌고 온 말에 훌쩍 올라탔다. “수호!” “예, 전하. 하명하시옵소서.” 왕의 부름을 받은 연수호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중앙군이 돌아올 때까지 세자를 도와 이곳을 지키도록 하게.” “명을 받듭니다.” 간결한 명을 마지막으로 왕은 중앙군을 이끌고 결계를 나섰다. 먹잇감을 발견한 검은 불꽃이 왕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으나 그를 지키는 호위의 활약으로 인해 전부 무위로 돌아갔다. “아버지.” 이지오는 아비의 말을 따라 결계 안에 남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반드시 승리하여 돌아오소서.” 아들의 바람을 뒤로한 채 이서윤은 갈라진 땅을 박차고 말을 달렸다. 딱딱하게 말라 굳은 흙덩이가 말발굽에 채여 이리저리 튀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눈에도 멀리서부터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는 검은 먹구름 같은 게 보였다. “정지.” 정지신호에 따라 말들이 일제히 투레질했다. 당당히 싸우고자 자리에 나오긴 했지만 막상 검은 물결을 마주하고 나니 고삐를 쥔 주먹이 떨렸다. 서윤은 불타는 성벽 아래에 자리 잡고선 쓰게 웃었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전쟁이군.’ 모든 전쟁이 그렇긴 했지만 이 전투는 서윤에게 있어 특히 벼랑 끝에 몰린 느낌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서 그가 무너진다면 다음 순서는 그의 아들 이지오의 차례였다. 절그럭! 그는 문득 창칼에서 나는 쇳소리가 꼭 맹수나 요괴처럼 무기가 우는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후.” 짧게 심호흡한 후 서윤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적은 사령술사와 놈이 부리는 대량의 사령군단이다! 사령이란 평범한 물리 공격에 소멸하지 않으니 기를 두르거나 주술을 사용해서 공격하라.” 검은 해일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낄낄대는 사령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해동군도 말을 박차고 적과 맞부딪혔다. 와아아아! 「느아아, 진짜 미치겠다냥.」 “어어, 호랑이님. 괜찮아?” 주작과 싸우는 청룡 측에도 도움을 주지 못하고 주변만 어슬렁거리던 백호는 이번엔 사령군단과 맞서 싸우는 해동군을 발견하고 이를 갈았다. 「하나도 안 괜찮다냥! 나라가 불타고 있는데 신수 체면에 이게 무슨 꼴이다냐!」 울상을 짓는 백호를 따라 란도 시무룩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꽈르르릉! 우르릉! 검은 하늘을 수놓은 화염과 뿌연 연기가 보였다. 그 사이로 거대한 두 신수가 뒤엉켜 싸우면서 끊임없이 천둥이 일어났다. “란 님, 이제 여기서 피해야 할 것 같소.” “응. 근데 정령사 아저씨.” 올해 쉰이 넘은 란보다 스무 해는 더 산 코르토반 옌은 아저씨란 호칭에 어색하게 콧수염을 매만졌다. “쥬다스 님은 언제 돌아올까?” 두 사람도 쥬다스가 남쪽의 땅을 지키러 떠났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란과 콜은 그 출정에 굳이 자신들을 부르지 않았다는 건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허허. 그쪽 일을 잘 해결하시고 나면 돌아오시겠지요.” “그치만 나, 쥬다스 님이 없으니까 계속 불안해.” “두려우시오?” “응. 맞아, 무서워.” 그 와중에도 악착같이 달려드는 불새들을 콜이 부리는 바람의 정령이 반으로 갈라 소멸시켰다. 란은 숲의 힘을 가진 요정이기에 불을 상대로는 힘을 쓰기 어려웠다. 지금 그녀가 하는 일은 불타버린 나무를 재생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그것만으로도 수도의 정경을 지키는 데엔 상당히 도움이 되긴 했으나 숲의 요정족이 불을 보고 무서워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란이 정말 무섭다고 느낀 건 타오르는 불새들이 아니었다. “쥬다스 님, 거기서 다치면 어떡하지?” 「어이고, 걱정도 팔자다냥. 다쳐? 누가냥? 자연계 정령 녀석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키고 있을 텐데!」 백호가 기가 차다는 눈으로 쨍알거렸지만 란은 여전히 시무룩한 기색을 지우지 못했다. “그치만 거기 나타난 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령술사라며!” 「……꼬맹이, 방금 네가 무슨 말을 한지나 아는 거냥?」 “걱정되는 게 당연하잖아! 여기도 이렇게 무서운데 거긴 얼마나 더 굉장할지 상상도 가지 않아.” 「나 참. 대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령술사가 뭔 소용이다냥.」 백호는 여유롭게 앞발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사령술사고 나발이고, 그 이그레트 앞에선 다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을걸.」 “응……?” 「계약한 정령왕만 넷. 그걸 두고 인간들이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라고 했던가냥? 솔직히 그 표현도 웃기다냥.」 란이 멍청히 눈을 깜빡임과 동시에 콜이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백호는 털 고르기에 열중하여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쯤 되면 그냥 살아 움직이는 신이라고 봐도 무방하다냥.」 “저기.” 「냥?」 “근데 ‘이그레트’는 누구야?” 「…….」 백호는 아차 싶어 입을 냉큼 다물었다. 그러나 이미 란은 눈을 말똥말똥 빛내고 있었다. “그 사람이 왜? 쥬다스 님과 아는 사이래?” 「…….」 “응? 호랑이님. 누구냐니까?” 「므, 므앙. 그건, 그러니까.」 아무리 눈치 없는 백호라고 해도 그 사실이 쥬다스에게 있어 감추어야 할 비밀이라는 정도는 알아차렸다. 다행히 숲 속에서 혼자 살아온 란은 루바르잔에서 대현자로 이름을 떨친 ‘이그레트’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마땅히 수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쩔쩔매던 백호는 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익숙한 검은 눈동자였다. ‘있잖아. 둘씩이나.’ 왜 하필 이 순간에 청룡의 한 마디가 떠올랐을까. 백호는 꼬리를 천천히 살랑거리며 란의 냄새를 다시 확인했다. 그 검은 눈만큼이나 익숙한 냄새가 났다. 「란. 너를 돌봐준 ‘아버지’가 해동사람이었다고 했었냥?」 “응. 아빠는 해동 사람이었어.” 「이름이나 다른 특징은 모르는 거냥?」 “으음. 이름은 몰라. 직접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내가 아는 거라곤, 아빠는 해동 사람이었고 연금술로 나를 만들었고…….” 「만들었다고냥?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을 사용했다는 거다냥?」 생명을 다루는 연금술은 해동 왕가에만 전해지는 금지된 술법이었다. 연금술로 만들어내는 생명에는 전부 영혼이 없다. 영혼이 깃들지 않은 실패작들은 전부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연금술로 생명을 만드는 건 살인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넌 멀쩡히 요정족으로 태어났다는 거고.」 “멀쩡하진 않아. 난 반쪽짜리거든.” 란은 배시시 웃으며 스스로를 가리켰다. 밤이 되어 아름다워진 얼굴은 숲의 여왕이라 불리는 픽시다웠다. “원래대로라면 나도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지도 몰라. 난 아빠의 시체를 먹고 태어났어.” 「시체를…….」 백호가 그녀의 말을 따라 중얼거렸다. ‘만일 그 아버지란 자가 해동 왕가의 피를 이었고. 란이 그를 흡수해 태어난 존재라면?’ 보통은 결혼을 통해 후사를 남기지만,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특이한 경로로 유전된 핏줄인 셈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란에게 사방신수와의 친화력을 증폭시킨 물건이 있었다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열매 상태의 픽시가 인간의 시체를 자력으로 흡수했을 리는 없어. 그 자리에 최후의 연금술을 완성시킨 매개체가 있었을 거야.’ 무기력하게 쪼그려 있던 백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백호의 신물!」 “어?” 「설마 그걸 네가 흡수한 거다냥?」 “어어어?” 그렇다면 청룡이 그녀에게서 그다지 친화력을 느끼지 못한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란은 사방신수 중 백호와 계약할 조건을 충족한 해동 왕가의 핏줄이었다. 「이럴 수가. 네가 신물 그 자체였을 줄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진정해. 호랑이님.” 란은 여전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울먹이는 백호를 다독여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옙, 란의 정체는 그러하였습니다.(...) 애당초 신물 그 자체이기 때문에 친화력이 만땅일 수밖에 없죠. ㅎ (콜의 경우는 그냥 불의 자질이 뛰어난 정령술사입니다. 그러나 해동왕가의 피를 잇지 않았으니 사방신수의 마음을 얻는 데엔 실패하였다는...쿨럭. 콜 의문의 1패...)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ㅎㅎ 늘 감사합니다! 0182 / 0240 ---------------------------------------------- 21장. 약속 “서둘러 주시겠소? 지금 뭔가 굉장히 중요한 말씀들을 나누고 계신 것 같긴 하오만.” 코르토반이 둘을 슬슬 재촉했다. 그는 최상급 듀얼 술사답게 불과 바람의 정령을 동시에 다루며 능숙하게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거세지는 주작의 불길에 그도 란을 지키는 게 버거워지고 있었다. 「쿨쩍. 설마해서 묻는 건데 이 정령술사도 내 얘기를 들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냥.」 “실례야, 호랑이님. 정령사 아저씨는 쥬다스 님의 스승님이랬어. 엄~ 청 대단한 분인걸.” 「아니, 내 말은, 지금은 이 꼬락서니여도 원래 신수의 목소리는 개나 소나 알아들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나도 나름 격 있는 신수인데냥…….」 청룡의 표현에 따르면 ‘그냥 조금 튼튼한 야옹이’ 꼴을 면치 못한 백호의 목소리가 자신감을 잃고 작아졌다. 쿠꽈앙! 그때, 사방이 번쩍 흑백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제 빛깔을 찾았다. 한 박자 늦게 터진 폭발음이 뒤이어 지축을 흔들었다. “흐익! 놀래라. 바, 방금 뭐야?” 「청룡.」 백호가 그르륵 목을 울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무언가 제대로 맞은 듯 거대한 청룡의 몸체가 비틀비틀 기울며 추락하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는 게 분명했다. 백호는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고 란에게 본론부터 꺼내 들었다. 「지금 당장 계약해 줘.」 “에엑?” 모처럼 진지하게 한 요청이었지만 란은 질겁하며 눈을 깜빡였다. “저기, 난 요정족이야. 정령술사도 아닌데?” 「술사의 자질에 종족은 상관없다냐. 인간이든 요정이든, 누구나 계약을 하면 그때부터 술사가 되는 거다냥.」 “하지만 난.” 「제발.」 자신은 해동 왕가의 후손이 아니지 않냐고 물으려던 란이 움찔 입을 닫았다. 작고 하얀 새끼호랑이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냐. 청룡이 많이 다친 것 같다냥. 이제 남은 신수는 녀석밖에 없는데, 이대로 청룡 자식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신수의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지금 백호에겐 절박함만이 남아 그물처럼 심장을 조였다. 「부탁한다냥. 지금 이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냐.」 “호랑이님.” 「……도와줘.」 또옥! 어느 틈엔가 고개 숙인 백호의 콧등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약자를 갖지 못한 정령이란 이렇게나 무력했다. 유일하게 악에 물들지 않은 동료도, 오랜 옛날 지켜주겠노라 약속했던 나라도,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지켜봐 온 귀여운 남매도. 소녀는 이미 죽었고 그녀의 오라비는 지금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전쟁터에 나갔다. ‘분명 눈앞에 있는데.’ 어느 것 하나 지킬 수가 없다. 간절히 손을 뻗어 보았자 닿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할게.” 고개 숙여 울기만 하던 작은 호랑이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나랑 계약해.” 「……!」 “그리고 지키고 싶었던 것들, 같이 지키자.” 보랏빛 머리의 아름다운 요정이 잿더미 한가운데 쪼그려 앉아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손바닥이 백호의 앞발을 꼬옥 쥐고 있었다. 그날, 엉망진창으로 불타버린 잿더미 속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백호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저길 봐!”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축포는 바로 화염이었다. 청룡이 아무리 하늘에서 비를 뿌려도 꺼지지 않고 뜨겁게 대지를 불태우던 검은 불길 위로 파란 불길이 나타나 이를 집어삼켰다. 파란색 불은 해동의 건물과 사람들에겐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오로지 검은 불길만을 집요하게 공격해 꺼뜨렸다. 그사이 시커멓게 타버린 터전에선 다시 녹색 풀과 나무가 기적처럼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 살았다.” “검은 불이 꺼지고 있어!” “갑자기 어떻게 된 거지?” 아직 하늘에선 청룡과 주작의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히려 불리하다면 부상을 당한 청룡 쪽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해동 사람들의 시야로 또 다른 신수가 훌쩍 나타났다. 무너진 성벽을 차례차례 밟고 뛰어올라 날쌔게 가장 높은 망루까지 다다른 신수는 다름 아닌 눈처럼 새하얀 털을 가진 백호였다. “백호님이다! 저건 백호님의 불이야!” 두려움에 떨던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함성을 질렀다. 「―?!」 함성 소리를 듣고 움찔 시선을 내린 주작에게로 파란 불꽃이 뿜어졌다. 맑은 기운이 담긴 파란색 불에 대응하여 검게 타락한 흑주작의 불이 허공에서 이글거렸다. 두 불길이 부딪혀 마치 폭죽처럼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청룡!」 「오, 벌써 계약했어? 십 년은 지나야 눈치챌 줄 알았더니.」 「이 자식. 알고 있었으면 진작 알려주지 그랬냥?」 커헝! 위협적으로 포효하는 백호를 사이에 두고 주작과 청룡이 잠시 전투를 멈추었다. 「그래, 그래. 우리 야옹이 기특하네.」 「캬아악! 지금 그 꼴로 농담이 나오냥?!」 「내 꼴이 뭐 어때서.」 「꼬부랑 수염이 완전 너덜너덜해졌자냐!」 타락한 흑주작은 본래 신수가 다루는 힘보다 훨씬 파괴적인 성향의 힘을 사용했다. 가호하고 생명을 살리는 힘은 사라지고 모조리 살육과 파괴에 능한 힘만이 강화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사방신수 중 최고서열에 자리한 청룡이라 할지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청룡은 조금 전 크게 한 방 먹어 비늘 일부가 깨어진 상태였다. 후끈한 열기에 당하면서 긴 메기 수염도 까맣게 탔다. 그걸 본 백호가 수염 운운하자 청룡 가야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아. 수염은 그냥 자를까 봐.」 「왜 또!」 「수염 있으면 늙어 보이잖아. 못생겼어.」 「이 망할 외모지상주의 용 같으니…….」 그러는 사이 뜬금없이 나타나 두런두런 떠들고 있는 백호를 가만히 쳐다보던 주작이 검게 물든 눈을 번뜩였다. 콰아아! 백호와 청룡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주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척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파괴력이 실린 회오리가 형성되고 있었다. 회오리 속에는 검은 불꽃이 함께 타오르고 있어 꼭 독사를 품은 비단이 하늘에서 펄럭이는 것만 같았다. 그리 여긴 백호가 긴장의 끈을 조이는 순간 청룡이 별거 아니란 투로 말했다. 「아무튼 이쪽은 걱정할 필요 없어.」 「지금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냥?」 「내 말 들어.」 청룡은 주작과는 반대로 물길이 요동치는 회오리를 만들어내 충돌을 준비했다. 동시에 백호에게는 사령과 싸우고 있는 해동군 쪽을 살짝 고갯짓했다. 「여긴 신경 끄고 저쪽을 지켜.」 「하지만 청룡 너 다쳤잖……!」 「고작 수염 좀 탄 거다. 어차피 자를 건데 뭐 어때.」 「그게 아니라!」 「어서 가.」 워낙 차분하게 떠미는 바람에 백호는 머뭇거리며 주작과 청룡을 번갈아보았다. 「타락한 주작을 막는 건 내 주인이 나한테 맡긴 일이다. 걱정하지 않아도 완벽하게 처리할 테니.」 쿠우우우- 웬만한 집 한 채 정도는 거뜬히 삼킬 수 있는 회오리 두 개가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검은 불꽃은 물에 젖어서도 꺼지지 않고 끊임없이 넘실거렸다. 청룡은 그 불꽃을 온몸으로 뚫고 달려들어 주작의 날개를 옭아맸다. 「야옹이 넌. 지금 네가 지켜야 할 게 뭔지만 생각해.」 「…….」 백호는 망루에서 휙 뛰어내렸다. 올라왔을 때보다 내려가는 건 훨씬 속도가 빨랐다. ‘하여튼 재수 없는 청룡 자식.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이 나라만이 아니라고.’ 울컥한 마음에 괜히 발톱에 힘이 들어갔다. 날카로운 발톱에 긁힌 돌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먼저 추락했다. 그러나 백호도 역시 해동의 수호신수였다. 「므아아, 내 도움 없이 이기지 못했단 봐라. 수염이 아니라 온몸의 털을 다 잘라버릴 테다냥!」 “진정해, 호랑이님. 청룡님이 좀 다치긴 했어도 그렇게 심하게 밀리고 있는 것 같진 않던걸?” 백호의 등에 잠자코 매달려 있던 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며 그를 달랬다. 「그건 그렇지만냥……. 참, 근데 란. 너는 나한테 바라는 게 없었다냥? 왜 계약하면서 성격을 재구성시키지 않았다냥?」 정령은 술사와 계약하면서 강하게 바라는 술사의 의지에 따라 성격이나 외형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란은 계약할 때 백호가 가진 그 어느 것도 수정하지 않았다. “나는 호랑이님이 내가 알던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그게 편해.” 「기껏 지어놨으면 이름을 불러라냥.」 “응. ‘실라’.” 맑은 웃음기가 섞인 대답에 백호는 짜증스럽게 세웠던 발톱을 감추고 사뿐사뿐 가볍게 달렸다. 먼저 해동군을 도우러 간 콜의 모습이 저만치서 보였다. 서로 상극인 정령과 사령은 부딪히는 족족 서로 함께 역소환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아무리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라 해도 코르토반은 무척 힘에 겨워했다. 「란. 지금 내게 원하는 건?」 “으음. 사령군단이라더니 진짜 어마무지하게 많네.” 란은 눈앞을 가득 메운 사령들을 둘레둘레 훑어본 후 진지한 어조로 답했다. “역시 이럴 땐 보스를 해치우자.” 「통도 큰 주인이네.」 백호 실라는 푸르륵 콧김을 뿜어대며 웃었다. 인간의 피를 뒤집어 쓴 사령 사이에 그 잔혹성과 어울리지 않는 한 소년이 서있었다. 작고 연약해 보이지만 바로 그 소년이 무수한 사령에게 둘러싸여 가호를 받고 있는 사령술사였다. 「근데 그 명령, 아주 마음에 든다냥.」 화륵! 백호의 입가에 푸른 불꽃이 넘실거렸다. 심상찮은 열기를 느낀 소년 ‘할더’가 그들을 힐끗 돌아보았다. 「내 주인의 바람대로.」 이글거리는 푸른 화염이 눈 깜짝할 새 대지를 뒤덮었다. * * * 바이칼은 에단이 남긴 명대로 기사단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상태로 열심히 어린 쥬다스를 쫓아갔다. 하윤이 아이를 데리고 간 곳은 텅 빈 방 안이었다. 그녀는 간헐적으로 기침을 흘리는 아이를 침상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이런, 열이 있잖아.” 가뜩이나 몸이 약한 아이가 상처까지 입고 돌아다녔으니 성할 리가 없긴 했다. 열에 들떠 제대로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어린 쥬다스를 보며 하윤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야. 많이…… 아프지.”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으로 아이의 창백한 볼을 쓸었다. 그러나 오래 머물지 못하고 금방 떨어져나갔다. “얼른 치유술사를 불러올게.” 하윤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하게 일어났다. 아이를 간호하거나 잠들 때까지 곁에 있어주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자식으로부터 멀어져야만 했다. “로한.” “부르셨사옵니까.” “황자를 보아주게. 내 나가서 사람을 불러…….” 꼬옥!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하윤은 자신의 소맷자락을 붙든 작디작은 손가락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아가?” “……콜록.” 억지로 참은 기침이 마른 입술 새로 비집고 튀어나왔다. 일곱 살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곁을 빨리 벗어나려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차마 함께 있어 달라 떼를 부리진 못했다. 대신 병아리 날개 같이 작고 연약한 손을 내밀어 어미의 옷자락만을 간신히 붙잡았다. “미…….” 하윤은 행여 바스러질까 아이의 손을 살며시 감싸 쥐었다. “미안해. 미안해, 아가야. 엄마가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너를 그렇게 아프게 만들어서. 엄마가 엄마일 자격도 없는 나라서. 그녀는 하염없이 사과하다 손을 놓았다. 간신히 용기 냈을 아들의 손을 그렇게 떨어뜨리고 나서, 그대로 돌아서 방을 빠져나갔다. 어린 쥬다스는 이불 위에 손을 내려놓은 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나 참. 울지도 않으셨습니까?” 아이에겐 들리지 않을 목소리였다. 바이칼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과거의 주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청룡 계약명 : 가야 백호 계약명 : 실라 만일 주작과 현무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저런 형식의 이름을...(..) 음, 그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후기에만 살짝 남기자면 3부연재의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확정되면 다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ㅎ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0183 / 0240 ---------------------------------------------- 21장. 약속 “아프시잖아요. 제 동생 녀석들은 아플 때 빽빽 잘만 울던데.” 멍이 든 손목이 보였다. 나머지는 옷에 가려 보이진 않았지만 그리 멀쩡한 상태일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목도 부어올라 숨은 제대로 쉴 수 있나 싶을 지경이었다. 그 상태로 열이 올랐으니 보통 아이들 같았으면 진즉에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상황이었다. “전하께선 왜.” 남들 다 겪는 어린 시절조차 제 어미에게 떼 한 번 써보지 못하고, 그렇게. “하.” 바이칼은 답답함에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뱉었다. 쥬다스에 대한 답답함은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아이가 떼를 써봤자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사령에게 좀 먹히고 있던 하윤의 곁에 있다간 또다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하윤의 선택은 옳았고 아이는 이를 이해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걸 왜 이해하냐고요!’ 그냥 상황이 전부 다 엿 같았다. 그리고 이 엿 같은 상황을 계속 보여주는 박스도 정말이지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대로 계속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바이칼은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일 눈앞에 있는 이 작은 황자가 실제 쥬다스와 동일인이라면 지금쯤 그가 받고 있을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클 게 분명했다. 해동이 위기인 것과 별개로 한시 빨리 이 박스에서 쥬다스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 “끄응. 열쇠를 가진 보스 몬스터가 분명 이 박스 어딘가에 있을 텐데.” “부단장님. 그럼 흩어져서 찾아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를 주시하고 있던 다른 기사단원이 칼같이 물어왔다. “확실히 그 편이 빠르겠지. 근데 아오, 단장의 명령을 거스를 수도 없고.” 하필이면 에단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사라진 명령이 ‘대열을 유지하라’인 게 문제였다. 바이칼이 아무리 평소 막 나간다지만 그는 나름 명령 체계만큼은 확실하게 지켰다. 그가 고민에 빠진 사이 치유술사들이 들어와 어린 쥬다스에게 치유력을 불어넣고 건강을 진단한 후 약을 지어주었다. 할 일을 마친 의료진은 그 외 다른 교류 없이 훌쩍 방을 떠났다. 다행히도 치료를 받은 후 아이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양질의 치유력을 전해 받은 아이는 몸에 난 멍이나 상처가 전부 사라지고 기침도 멈추었다. ‘실력은 있나 보네. 전 황후 마마를 조종한 사령술을 끝끝내 짚어내지 못했다기에 맨 돌팔이들인 줄 알았더니만.’ 바이칼은 대놓고 혀를 쯧쯧 찼다. 사실 황실 정식 치유술사쯤 되면 최고의 교육을 받고 최고의 성적을 낸 엘리트들이다. 치유술이란 사령과 관계없는 이능이기에 하윤 리에 얽힌 비극을 두고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응?” 어느 틈엔가 얌전히 누워 있을 줄 알았던 아이가 꾸물꾸물 일어나 침상에서 내려와 있었다. 이제 막 치료받아 안정되어가던 몸으로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 낌새가 보이자 바이칼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가시면 안 됩니다!” 움찔!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지금껏 박스 안에 있는 환상들은 외부에서 들어온 실제 인간들을 인지하지 못했다. 단순히 인지를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치 연극 속 배우들처럼 정해진 시나리오를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바이칼의 외침에 아이가 반응했다. “…….”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초점 없이 흐릿한 눈동자 위로 당황한 바이칼의 얼굴이 비쳤다. 지금까지완 다르게 제대로 그를 인식하고 있었다. ‘역시 진짜 전하이신 건가?’ 바이칼은 꼭 진행되던 연극에 난입해서 연극배우를 붙잡은 기분이 들었다. “누, 구?” 바이칼은 다른 환상과는 다르게 반응을 보이는 어린 쥬다스에게 무어라 자신을 소개할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니까, 저는.” “……?”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금색 눈동자에 대고 차마 ‘미래에 만나시게 될 전하의 친위기사입니다’이라고 소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돌이켜보면 그 만남 과정도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어휴, 좋긴 개뿔. 따돌림에 막말에, 할 수 있는 패악질은 다 부렸지.’ 쥬다스의 세 수족 중 과거 가장 질 나쁘게 굴었던 바이칼이었다. 그는 멋쩍게 뒤통수를 매만지며 답했다. “바이칼 B.드레이크입니다.” “…….” “여기서 B는 브레이브(Brave)의 이니셜입니다. 제 진명이죠.” 어린 쥬다스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바이칼은 자신의 진명까지 숨김없이 알려주었다. “음, 전하를 주군으로 모시는 마법기사고요.” “…….” “그리고.”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허약하여 온갖 추문이 떠돌던 ‘백로황자’. 그 앞에서 한 번도 제대로 말해준 적 없는 단어가 떠올랐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온힘을 다해 펄떡이듯이 바이칼은 용기를 짜내 입을 열었다. 그리고 막 말을 꺼내기 직전, 잠깐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과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건 아니야.’ 한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백로황자를 경멸했고 혐오했던 소년은 이제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이칼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숙했던 과거에 죄책감을 느꼈다. ‘그 시절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이불을 걷어차도록 부끄럽고 죄스럽지만, 그래도 지금은.’ 바이칼은 어린 쥬다스에게 손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함께 루바흐를 졸업한 친우…… 입니다.” 옛 잘못과 상처를 딛고 그들은 변했다. 지금의 쥬다스가 눈앞에 있는 상처투성이 어린 쥬다스가 아니듯, 그의 주변도 전부 달라졌다. 바이칼은 자신의 주군이 제게 변화할 수 있도록 내밀어주었던 손을 기억했다. 그로부터 받은 신뢰를 다시 돌려줄 차례였다. 그때,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말대로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바이칼은 반색하여 고개를 돌렸다. “단장!”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날뛰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아하하, 말은 저래도 칭찬일 거야. 바이칼 경.” 에단의 뒤를 따라 크리스티나와 세이지가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크리스티나 님?! 세이지 님도 돌아오셨군요.” “하. 그대가 뭘 걱정했는지는 알 만해. 하지만 틀렸어.” 크리스티나는 자신을 영락없이 사춘기 가출소녀 취급하는 바이칼을 향해 코웃음 치며 말했다. “지금까지 맵을 수색해 보았다.” “예? 그럼 박스 내부를 정찰 다녀오셨단 말씀이십니까?” “그럼 뭔 줄 알았지?” ‘……사춘기 감성 폭발이요.’ 솔직하게 말했다간 감성이 아니라 마력이 폭발할 예감이 들었기에 바이칼의 입이 고요히 다물렸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박스 밖으로 나가는 열쇠는 보이지 않더군.” “그거 큰일이네요.” “한 가지 더. 쥬다스 님이 계신 장소가 아닌 곳은 전부 시간이 정지한 듯 움직임이 멈추어 있었다. 그러므로 박스를 구성하는 배경이 쥬다스 님의 기억이란 사실도 확실해졌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 그렇단 사실에 바이칼은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 ‘그렇다면 역시 박스의 심장이 전하이신 건가.’ “하여, 우리는.” 그러나 크리스티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떻게 나가야 하나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바이칼은 이어지는 결론을 듣고 기함하고 말았다. “박스를 구성하는 심장을 파괴하여 이곳을 나간다.” 끼기긱! 푸른 활촉이 정확히 어린 쥬다스를 향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분개하여 그 앞을 막아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여길 나가기 위해서 이분을 해하겠다고요?” “잘 알아들었군.” “……단장도 같은 생각이십니까?” 스릉! 에단은 검을 뽑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박스를 구성하는 게 쥬다스의 기억이기 때문에 그 본인이 사라지면 모두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게 된다. 바이칼의 입가에 헛웃음이 감돌았다. “자네도 알다시피 박스란 실제가 아닌 환상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그래서 이 안에선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잘 보도록. 그가 진정 우리의 주군인가.” 바이칼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어린 쥬다스는 그가 알고 있던 본래 쥬다스와 다르긴 했다. 본래의 맑은 금안이 아니라, 무언가 탁하고 불투명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자세히 보다보면 음습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비켜라. 이건 명령이다, 바이칼.” 바이칼은 여전히 쥬다스의 앞을 막아선 채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황태자의 친위기사가 되어 지금껏 한 뜻으로 검을 들었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이칼은 처음으로 단장의 명을 어기기로 결심했다. “싫습니다.” 마력이 깃든 바람이 후욱 그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바닥에 서서히 그려지는 마법진에서 주군을 지키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알아본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수 없군.” 바이칼은 문득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에단의 모습에서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다. ‘날 공격할 생각은 없다?’ 그들로부터 딱히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바이칼에게는 이해한다는 눈빛마저 보내고 있었다. 이상함을 느낌과 동시에 소맷자락에서 작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 옷깃을 잡아온 아이가 두려움에 떨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바이칼이 머뭇거리는 사이 크리스티나가 과감히 활을 발사했다. 피잉! 푸른빛으로 빛나는 마력화살이 아이의 손과 발을 꿰뚫었다. 비명 소리는 없었다. 그저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바이칼의 옷자락을 놓고 축 늘어질 뿐이다. 그 모습을 본 바이칼은 이어지는 공격을 막지 않았다. 그저 떨고 있는 어린아이를 잠자코 품에 안아주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 그러곤 발밑에 그려진 마법진을 촛불 끄듯 훅 꺼뜨려 버렸다. 방어의사가 사라진 그의 어깨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에단이었다. “용케도 알아차렸나 보군.” “거 좀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면 어디가 덧난답니까?” “그런 재주는 없다만.” “하긴 만약 단장이 친절하게 나오셨다면 전 단장부터 의심했을 겁니다.” 바이칼은 씁쓸한 눈으로 농을 중얼거렸다. 그가 뒤로 물러서자 에단이 대신 아이의 앞에 섰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검을 들었다. 콰득! 냉기를 품은 얼음검이 어린 쥬다스의 심장을 찔렀다. 뼈와 살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뜨끈한 핏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이는 쓰러지는 대신 천천히 입꼬리를 휘었다. 「킥킥. 결국 인간들이란 이렇다니까.」 반짝이던 은발이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뼈로 만들어진 날개가 등가죽을 찢고 튀어나오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사령…….” 이를 본 세이지가 앓듯이 중얼거렸다. 어린 쥬다스의 흉내를 내고 있던 건 다름 아닌 프리드와 계약한 사령 ‘릴리스’였다. 그녀는 왈칵 검은 피를 쏟아내면서도 즐겁다는 듯 웃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선 가엾은 어린아이의 심장이라도 터뜨리려 하잖아.」 릴리스는 여전히 쥬다스의 모습을 뒤집어 쓴 채 그들을 비웃었다. 「겉으론 깨끗한 척 고상한 척하지만 결국 극한의 상황에 처해지면 전부 똑같아지지.」 “그걸 시험해 보고 싶었던 건가.” 「왜? 억울해?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아무리 환상이라 해도 여기서 빠져나가기 위해 친우라 부른 자를 찌른 주제에.」 더 이상 금색이 아닌 검게 물든 눈알에서 눈동자만 구름처럼 희었다. 「아니, 너흰 결국 필요하다면 진짜라도 찌르게 될걸.」 “…….” 「그게 바로 너희들 본질이야.」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본 에단은 얼음검에 묻은 핏자국을 툭툭 털어내며 답했다. “깨닫게 해줘서 고맙군. 보답으로 네게도 그 ‘본질’이란 걸 알려주고 싶은데.” 「무슨…… 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챈 릴리스가 시선을 밑으로 떨어뜨렸다. 조금 전 칼에 찔린 가슴께가 하얗게 얼어붙고 있었다. 「뭐야, 이게.」 기분 나쁜 냉기였다. 사령이 가진 음습한 기운과도 닮았으면서 더욱 차갑고 처절했다. 사령이 되면서 잊고 있던 간절함이 되살아나며 눈물이 흘러나왔다. 릴리스는 점점 하얗게 얼어붙는 제 몸을 내려다보다 황급히 자신을 찌른 검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령이 깃든 검? 어째서 계약하지 않은 자가 사령을 무기로 다룰 수 있는 거지?」 “전하께서 맡기신 검이다.” 「그가…….」 “본래 이름은 ‘레이야’라고 하더군.” 릴리스는 그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얼음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말도 안 돼. 사령의 힘으로 사령을 봉인시킬 수 있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0184 / 0240 ---------------------------------------------- 21장. 약속 거기까지 중얼거린 릴리스는 그걸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자가 세상에 한 사람뿐이란 걸 기억해 내고 망연히 고개를 흔들었다. “네가 연기한 게 진짜 주군이셨다면 결코 과거 따위에 지지 않으셨을 테지.” 에단은 릴리스가 연기한 쥬다스가 환상이 아니란 걸 안 순간부터 그가 진짜가 아니란 사실을 눈치챘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과거는 이미 한 번 이겼기 때문에 과거가 되었다.” 누구든지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라도 현재의 자신이 그 상황에 다시 놓인다면 결코 같은 행동, 같은 감정을 취하진 않으리라. “……그러니 적어도 그때만큼 힘들진 않을 거다.” 까득 까드득! 섬뜩한 소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고 있었다. 릴리스가 얼음 속에 갇혀 갈수록 박스로 이루어진 세상도 서서히 함께 얼어갔다. 그녀가 바로 이 박스의 보스였던 것이다. 「안 돼. 싫어! 나는, 난 아직 이대로……!」 릴리스는 발악하듯 소리 질렀지만 이를 멈추진 못했다. 결국 그녀와 박스 안 세상은 전부 하얗게 얼어붙어버렸다. 얼음에 갇히지 않은 건 오로지 박스 안에 들어온 에단 일행과 보스를 처치한 대가로 새롭게 생성된 출구뿐이었다. 에단은 눈앞에 나타난 문을 턱짓해보였다. “여기로 나가면 되겠군.” “……가끔 생각하는 겁니다만, 단장.” 바이칼이 질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으시죠? 환상일지도 모르니 한 번만 찔러보면 안 됩니까?” “헛소리는 나가서 질리도록 들어주도록 하지.” 단호한 대답을 끝으로 그들은 박스 안에서 전부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천금 같은 고요가 사방을 뒤덮었다. 얼어붙은 세상에는 사령 릴리스만이 남았다. 언제 다시 깨어날 수 있을지 모를 기약 없는 봉인이었다. 화앗! 문을 통해 탈출한 기사들은 갑자기 눈을 찌르는 빛에 적응하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박스를 벗어나며 생성되는 이 마력광은 언제 겪어도 도통 적응되지 않았다. 그중 가장 빨리 시력을 회복한 에단의 귓가에 따뜻한 음성이 들려왔다. “잘 다녀왔느냐?” 녹색 바람결이 풀린 실타래처럼 팔랑거리며 눈가를 훅 스쳤다. 에단은 저도 모르게 답하는 대신 짧게 숨을 들이켰다. 놀라 크게 뜬 검은 눈동자 위로 일렁이는 은색이 비쳤다. “으음? 표정이 영 아니구나. 어디 다친 곳이라도 있는 게야?” “……전하.” 어째서인지 목이 메여왔다. 에단은 시큰해지는 코끝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곧장 무릎을 꿇었다. 쿵 소리가 났다. 단단한 맨바닥에다가 주먹을 박살 낼 기세로 내리꽂은 그가 기사의 예를 갖추어 주군을 맞았다. “3황자 전하와 델피아 공녀, 친위기사단 전원 무사귀환 하였습니다. 전하.” 단장의 보고가 있고서야 뒤늦게 박스 밖으로 나왔음을 깨달은 구성원들이 와르르 바닥에 꿇어 고개를 숙였다. “그래. 다들 무사하여 다행이야.” 쥬다스는 과하게 걱정하거나 기뻐하는 대신 그저 잔잔히 웃어 보였다. ‘어찌 헷갈릴 수가 있겠는가. 이리도 선명한 빛임을.’ 에단을 비롯한 크리스티나와 바이칼, 세이지는 전부 잠깐이나마 혼란을 겪었던 스스로를 향해 탄식했다. 그들 입장에선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과거의 장면이라 더욱 흔들리긴 했지만 역시 본래의 쥬다스는 환상 따위와 차원이 달랐다. 그에게선 정말로 금색이니 은색과도 같은 은은한 빛이 깃들어 있었다. 이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색상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마치 한겨울에 지핀 화롯불만큼 따스했다. “전하. 설마 밖에 홀로 남아계셨던 겁니까? 그 프리드 길리아노라는 사령술사와 타락한 현무는…….” 크리스티나가 걱정스런 시선으로 물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령술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단다.” 처음부터 쥬다스는 박스 안에 끌려들어가지 않았다. 아무리 강력한 사령의 힘이 개입된 박스라 해도 정령왕의 가호를 받고 있는 그를 강제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 폭주하는 현무를 데리고 마을 밖으로 이동하여 주민들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잠재웠다. 「이그레트. 전부 되돌렸다.」 때마침 푸른 늑대가 허공에서 퐁 물방울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물의 정령이 나타난 걸 보고 나서야 무릎 꿇었던 수하들은 주변의 검은 늪이 전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해동을 침식하던 검은 늪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 더럽혀진 땅을 씻을 맑은 보슬비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늪을 피해 숨어 있던 해동 사람들이 비를 맞으며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된 거지?” “현무님은?” “검은 늪이 사라졌어.” 쥬다스는 루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타락한 흑현무 ‘헤로드’는.” 차분히 이어지는 목소리에 사람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그에게 시선을 모았다. “소멸하였습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였는데도 해동 사람들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똑똑히 그 말을 뇌리에 새겼다. ‘현무님이 소멸?’ 사방신수를 수호신으로 섬겨온 해동국민들에게 있어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그 수호신이 타락하여 자신들을 해쳤다는 사실부터 충격이었기 때문에 사실 어디서부터 놀라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쥬다스는 유니를 불러들였다. 「프리드란 녀석, 사령 릴리스를 잃은 게 엄청 타격이 큰가 봐. 기척을 숨기지도 않고 곧장 수도로 갔어.」 “고, 고맙습니다.” 그때 누군가 울먹이며 인사했다. 쥬다스 일행에 대해 정확한 신원까진 몰랐지만 적어도 무수한 사람들이 검은 늪에 빠져 죽어갈 때 폭주한 현무에 맞서 싸워준 고마운 이들이란 사실만큼은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 인사를 시작으로 들불 옮겨 붙듯 여기저기서 감사가 터져 나왔다.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현무님을 막아주셔서 감사드려요.” 심지어 엎드려 절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들은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됨에 순수하게 기뻐하였고 한편으론 수호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상실을 느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이 섞여 눈물이 되어 흘러나왔다. 쥬다스는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 해동 사람들을 뒤로하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이제 다시 수도로 가자.” “예!” 수하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며 일어섰다. 환상이라고는 해도 과거 상처투성이 어린 주군을 보고 온 그들이었다. 다시 만난 지금의 쥬다스를 보고 있자면 그저 한없이 감개무량해질 따름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기합이 들어간 일행을 보며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쥬다스는 곧 바람의 힘을 사용해 이동을 준비했다. “에단.” “하명하시옵소서.” “수도에 도달하면 먼저 사람들을 돕거라.” 그 말인즉 쥬다스 본인은 그들과 따로 움직이겠다는 뜻이었다. 뜻을 알아들은 에단이 의문을 표하고자 움찔 고개를 들었으나 그와 눈이 마주치곤 목구멍까지 치솟은 말들을 도로 삼켰다. “……명을 따릅니다.” 충직한 기사는 잠자코 복종을 표했다. 미리 양해를 구한 쥬다스는 바람을 일으켜 일행과 함께 순식간에 남쪽령을 떠났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의 시야에 보인 것은 청룡과 주작의 싸움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두 신수는 모두 전력을 다해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선 개미 떼처럼 지상을 점령한 사령들과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사람들의 사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늘과 대지 모두 전장이 되어 불타는 장관에 기사들은 순간 압도되어 무기를 꺼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쿠오오오! 멀리서 괴수가 울부짖는 소리가 났다. 눈처럼 새하얀 모색을 자랑하는 거대한 체구, 우람한 골격에 걸맞은 거대한 발톱과 긴 꼬리, 그리고 빛나는 파란 눈동자. 바로 계약을 맺고 본체를 되찾은 백호였다. 작은 새끼 호랑이 모습일 때와는 그 기백이 천지 차이였다. 백호는 철갑을 두른 군함처럼 사령들의 한가운데에 뛰어 들어가 날뛰고 있었다. 그 덕에 사령들의 공격이 백호에게 집중되어 있어 병사들의 피해는 적었다. 그야말로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전쟁터. 현무 하나에게 고요히 침식당했던 남쪽령과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이었다. “전원 전투 준비!” 그런 와중에도 에단의 명령이 칼같이 떨어졌다. 넋 놓고 있던 기사들의 손에 저마다 무기가 들렸다. “우리 목적은 적의 섬멸이 아닌 아군원조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고 주변의 피해를 먼저 도와라!” 미리 얘기해 둔 대로 착실하게 움직이는 기사단을 뒤로 한 채 쥬다스는 소리 없이 대열을 이탈했다.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와 사령의 웃음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함성이 점차 멀어지면서 스산한 바람만이 주변을 감돌았다.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흉이 서 있었다. “선물은 마음에 드셨나?” 쥬다스가 언덕 위에 내려서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돌아보며 물어왔다. 피처럼 붉은 눈동자엔 절망이나 분노 따위는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도리어 이번 전쟁에 일절 관여하지 않은 방관자처럼 느긋하기까지 했다. “조금 아쉽긴 해. 당신의 새 장난감들은 내가 준비한 연극의 끝까지 배신할 생각이 없더군.” “그게 네가 보고 싶었던 진실이 아니었느냐.” 쥬다스는 프리드가 던진 장난감이란 도발에도 흔들림 없이 직언을 던졌다. “……진실이라.” 프리드는 피식 웃었다. “그들이 과연 언제까지 당신의 등을 지켜줄까?” “프리드, 난 그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해도 상관없단다.” 충성을 맹세하고 우정을 약속했다지만 그는 그것이 영원불변할 진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쥬다스가 그들에게 가진 신뢰는 깨어지지 않을 절대적인 믿음이 아니다. 사람은 완벽하지 않으니 ‘절대로 그럴 리 없다’는 믿음은 오히려 독이다. 그가 믿고 있는 건 아이들의 선택이었다. 과거 자신들에겐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굳건한 신뢰를 엿본 프리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지독한 위선자 같으니. 어디 한번 자신이 만들어낸 불행을 보라고.” 프리드는 엄지손가락으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가엾은 레이야. 그 아일 당신 손으로 죽였지. 하지만 비참하게도 소멸하지 못하고 검이 되어버렸더군.” “…….” “할더는 어떻지? 당신을 어버이처럼 따르던 꼬마 말이야. 이제 곧 당신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이 그의 목을 베어버리겠지.” 쥬다스는 잠시 불타는 수도를 내려다보았다. 언덕 위에서 바라다본 전장은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나 역시.” 프리드가 천천히 그를 향해 다가왔다. 수족처럼 다루던 사령 릴리스를 봉인당한 프리드에겐 이제 이렇다 할 방어 능력이 없었다. “그 손으로 직접 숨통을 꺼뜨리러 온 것이 아니던가.” 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불행히도 프리드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그가 말한 셋은 모두 전생에서 이그레트가 직접 삶을 구원한 아이들이었다.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치자면 지금 인연들보다 훨씬 애틋했다. “그 말이 맞다.” 후웅! 계약자의 소망에 따라 몰려든 바람이 폭풍처럼 언덕을 휩쓸었다. 천천히 뻗은 손바닥 앞으로 자연계 4속성 정령의 힘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미안하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현무 소멸! 다음 타겟은....읍읍. 크흠, 이그레트를 제어하는 장치는 사실 인간답지 않은 '균형'에 있었습니다. 지금 그가 처벌을 내리고 악을 제거하기 시작했다는 건 좋게 말하면 인간다워진 것이지만... 그 철벽같던 자기제어가 깨어지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ㅎ 그럼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함께 달려주셔서 언제나 감사합니다! ^^ 0185 / 0240 ---------------------------------------------- 21장. 약속 백날 마음속으로만 사랑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상대가 사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 그게 사랑을 주는 법이라는 걸 그땐 몰랐다. “나는 이기적인 위선자가 맞아.” 처음엔 거창한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눈앞에서 누군가 죽지 않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렇게 살려놓고 보니 병아리들처럼 그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어느 틈엔가 소중한 가족이 되어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배신을 당했어도, 자신을 향한 칼끝에 분노와 원망이 깃들어 있었더라도. 도저히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다시 새 삶을 살게 된 후에도 그 마음은 여전했다. “아무 연고 없는 사람 백이 죽는 것보다 너희가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잘못되었다는 줄 알면서도 전심전력으로 그들을 막지 않았다. 그 결과가 이렇듯 커져 무수한 불행을 낳고야 만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되어서도 나는…….” 쥬다스는 정령의 힘을 손에 쥔 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머리가 내려앉아 축축하게 젖은 눈가에 달라붙었다. 뜨거운 날붙이로 생가슴을 찢는 것만 같다. 실은 이건 레이야를 죽였을 때부터 남모르게 간직해 온 고통이었다. 아이들이 그를 부모처럼 따랐듯이 그 역시 아이 셋을 친자식처럼 아꼈다. 그걸 서로 몰랐을 뿐이다. “흠, 아쉽군.” 프리드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입매는 웃고 있었지만 피처럼 붉은 눈동자만큼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이그레트 님!’ ‘꼬맹이가 또 사고 쳤어요.’ ‘우아앙! 그치만그치만! 제대로 보여 드리고 싶었단 말이야.’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날, 막내인 레이야가 코끝이 발개져 엉엉 울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아이들은 각각 정령술, 마법,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여자아이면서도 가장 신체적 능력이 뛰어난 레이야가 검술을 익혔는데 그날 드디어 검기를 발산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나 이그레트에게 보여주겠다며 방방 뛰던 레이야는 결국 컨트롤미숙으로 인해 그들이 머물던 집의 일부를 홀라당 날려먹고야 말았다. ‘훌쩍. 왜…… 혼내지 않으세요?’ 울다가 제풀에 지쳐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 이그레트를 향해 레이야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상하게 웃어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망가진 물건은 다시 고치면 된단다, 레이야.’ 그는 정말로 집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던 것이다. 잠깐 그 당시를 회상한 프리드는 위협적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정령의 힘을 넌지시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직접 내 눈으로 보길 바랐는데. 당신이 만들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전생의 이그레트는 세상을 뒤집을 힘을 가졌으면서도 결단코 심판자의 위치에 올라서지 않았다. 누구도 벌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화내지 않는다. 그랬던 그가 지금 처음으로 자신들 앞에서 표정을 일그러뜨렸단 사실이 무엇보다 가장 프리드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걸로 됐어.” 공평을 추구하여 방관하는 신과도 같았던 자가 드디어 선악을 구분하고 처벌을 내리기 시작했다. 프리드는 바로 그 포문을 여는 시작점이 자신이란 사실에 만족했다. ‘……그래도 말이야. 사실 아주 조금쯤은.’ 다 같이 하얀 눈을 모아 주먹만 한 눈 토끼를 만들었던 그때가 자꾸만 떠올랐다. 까르르 웃던 레이야와 투닥거리면서도 나뭇잎을 구해와 토끼귀를 만들어주던 할더. 그리고 이그레트는 그 곁에 앉아 토끼를 만드는 데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하염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이그레트 님, 우리도 평범한 가족이 될 수 있었을까.’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콰아아아! 자연계 4대 속성을 압축시킨 힘이 눈부신 빛을 발산하면서 폭발했다. 뜨거운 열기와 냉기가 뒤섞인 돌풍이 벼락처럼 수직으로 내리꽂히며 지축을 뒤흔들었다. 자연의 힘이 융합한 색상은 지독하게 깨끗한 황금빛이었다. 그 순결한 금색에 맞닿은 사령들은 모조리 신기루처럼 흩어져 소멸해 버렸다. 사령과 대치 중이던 사람들과 신수 역시 망막을 찌르는 강한 빛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큭.” 시력과 청력 모든 걸 차단해 버린 정령에너지의 폭발이었지만 사람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생명에너지를 가득 담은 빛에 쬐이자 상처나 흉터 따위가 물에 녹듯 사라져 버렸다. 이는 에단 일행에겐 익숙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쥬다스의 힘임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크리스티나는 놀라지 않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그 폭발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돌풍에 휩쓸려 긴 바닷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려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모든 게 훅 정지했다. 눈을 뜬 병사들은 얼떨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 강한 빛과 함께 돌풍이 휩쓸고 지나간 후로 적이 깔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사령군단이 뼛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린 탓에 맞서 싸우던 사람들의 얼굴에 당황이 깃들었다. 펄럭! 정적을 뚫고 해동을 상징하는 깃발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용맹하게 선봉에 서 전투를 지휘해 온 성왕 이서윤이 깃대를 부여잡고 힘차게 외쳤다. 승전기였다. “전투 종료!” “……!” “우리는 사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우오오! 왕이 전쟁의 끝을 알리자 그제야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해도 사령과의 전투가 끝났으며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그들을 환호케 했다. 무너진 성벽과 불타 버린 건물들, 그리고 미처 지키지 못해 희생된 목숨 앞에서 터지는 함성은 마냥 기쁨만을 담고 있진 않았다. “눈이다!” 누군가 소리쳤다. “하늘에서 황금색 눈이……?” 이미 해동은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한여름에 내리는 눈은 반딧불처럼 반짝이며 하늘에서 송이송이 떨어졌다. 황금색으로 빛나는 기이한 눈송이였다. 쥬다스는 언덕 위에 서서 수도를 가득 메워 파도처럼 울렁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다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 깨진 모래시계가 떨어져 있었다. 쥬다스는 유리조각이 손에 박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모래시계 잔해를 양 손바닥으로 쓸어 담았다. 「이그레트.」 유니가 그 근처를 빙그르르 돌다 코앞에 멈춰 섰다. 「사령의 기운은 전부 사라졌어요.」 「깨끗해졌다요!」 카니와 토니도 그의 어깨며 머리에 폴짝 내려앉았다. 카니는 쥬다스의 옷자락을 꼬옥 끌어안으며 한숨을 폭 내쉬었다. 「후아아. 정말 지긋지긋한 개자식이었어요.」 「개였다요?」 충격받은 토니를 내버려 두고 카니가 마저 말을 이었다. 「끝까지 상처만 주고 가버리다니, 참 주옥같네요.」 「그래도 끝났으니까.」 「그렇다요! 이제 다신 볼 일 없을 거다요.」 토니는 신나서 쥬다스의 머리 위에 드러누운 채 날개를 팔락거렸다. 그 말에 깨진 모래시계를 들고 있던 쥬다스가 손에 힘을 꾹 쥐었다. 검은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사라락 흘러내렸다. 그릉! 소리 없이 다가온 루니도 계약자의 곁에 서서 작게 목을 울렸다. 「……다쳤잖아, 이그레트.」 「에?」 「정말!」 유니가 그의 손에 조심스레 내려앉아 유리조각이 박힌 부위를 살폈다. 핏방울이 맺혀 똑똑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이거 프리드가 남긴 물건이야.」 「녀석의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다요.」 그의 피와 섞인 검은 모래는 이제 밀가루 반죽처럼 굳어져 동그란 구슬처럼 뭉쳤다. 어떻게 보면 검붉은 보석 같기도 했다. 「아프지도 않아? 왜 그러고 있어. 얼른 가서 치료받지 않고.」 “그러게.” 멍하니 깨진 조각들을 내려다보던 쥬다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어조였기에 다그치던 유니가 움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의 표정을 다시 살폈다. “아파. 분명 아픈 것 같은데.” 누군가의 죽음에 수많은 사람이 환호한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고 그들을 죽이려던 사람이 죽었다. 그 판단을 한 건 쥬다스 자신이었다. “모르겠구나.”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할 수가 없다. 유리에 찔린 손바닥이 아픈 건지 붉게 물든 눈앞이 답답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어.” 무수한 군중이 환호하는 가운데, 오로지 승리를 거머쥔 한 소년만이 피눈물을 흘렸다. 해동 역사에 승전으로 기록될 흑사전쟁이 막을 내렸다. 이날, 해동은 사방신수 중 현무와 주작을 잃었다. 대신 새로운 왕가의 핏줄이 나타나 백호와 계약을 맺었다. 그로써 성왕 이서윤은 새로운 백호의 시대가 열렸노라고 선포하였다. ―‘이유란(幼卵)’, 종전과 함께 나타난 해동성국 새 왕녀의 이름이다. * * * 루바르잔에서 온 손님들에 대한 이야기는 퍼지지 않았다. 그들의 원조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승리였으나 쥬다스가 자신들의 도움을 공식화하길 원치 않았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국가 간 손익계산이 불필요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바르잔 황태자의 원조는 아는 사람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로 남았다. 싸움이 끝난 후에도 쥬다스는 바로 떠나지 않고 해동 궁궐에 남아 며칠 간 휴식하며 상황 정리를 도왔다. “주인.” 청룡 가야는 긴 접전 끝에 결국 주작을 쓰러뜨렸으나 당분간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타격을 입었다. 그는 며칠 동안 종적을 감췄다가 오늘 드디어 피곤한 얼굴로 쥬다스의 앞에 나타났다. “이거.” 불쑥! 가야가 내민 손아귀에 작은 새 한 마리가 웅크려 있었다. 겨우 참새 정도로 보이는 크기에 깃털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로 이루어졌다.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눈도 뜨지 못한 아기 새는 날개에 부리를 묻은 채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새로 태어난 주작이로구나.” “예에?!” 주작과 현무가 소멸했다는 이야기에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던 일행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정령은 소멸해도 다시 태어나고 그러는 겁니까?”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전의 정령과 같은 아이는 아니야. 이 주작은 전 세대 주작과는 별개의 존재란다.” 이전 해동을 수호하던 주작과 다르게 그럴 의무도 이유도 없는 새로운 주작인 것이다. 새로 태어난 주작과 현무는 더 이상 해동의 사방신수가 아니다. 쥬다스는 수하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모든 정령은 저마다의 자리가 있다고 들었다. 아주 작은 하급 정령이라 해도 그 아이의 자리가 비면 새 정령이 태어나 그 자리를 맡는다고 하더구나.” “오, 그거 편리한 시스템이네요.” “정령은 인간처럼 후손을 남기는 존재들이 아니니 말이요. 그런 식으로 세상의 균형을 유지해 온 것이지 않겠소?” 쥬다스만큼은 아니나 최상급 정령을 다루는 콜도 정령에 대해선 제법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부연설명에 바이칼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알겠다는 리액션을 취했다. “정령은 죽어야만 자신과 같은 능력치, 같은 등급을 가진 후대가 태어난다는 뜻이군요!” “그렇지요. 허허헛.” 콜은 루바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기분이 들어 흐뭇하게 웃었다. “하온데 전하. 이 작은 새가 새로 태어난 주작이라면…….” 모두 가야의 손바닥 위에 잠들어 있는 주작에 시선을 모으던 찰나, 이번엔 크리스티나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혹 현무도 새로 태어났다는 뜻이 됩니까?” “…….” “…….”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을 꼬집는 바람에 다들 멍청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말았다. 그런 일행 사이에서 쥬다스는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물계 정령은 자연 조건이 마련되어야 한단다. 주작이 날개의 불을 계속 타오르도록 유지해야 하듯이, 현무는 깨끗한 물이 있어야만 살 수 있어.” “설마 현무는 태어나지 못한 겁니까?” 사령이 점령했던 땅은 아직 상당 부분 회복이 필요했다. 수질의 상태도 그다지 좋지 않아 갓 태어난 현무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루니.” 잠시 후 계약자의 부름에 응하여 물거품을 흩뿌리며 푸른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루니의 입에는 등딱지가 없는 새끼거북이 대롱대롱 물려있었다. 「네 바람대로 새로 태어난 현무가 생존할 수 있도록 보호했다. 현재 건강 상태는 양호하다.」 “큐웅.” 어린 현무가 낯선 공기를 느끼고 킹킹 울어댔다. 그 모습을 보며 도로 할 말을 잊은 사람들 틈에서 세이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신수도 어릴 때는 귀엽네요.” “아닌데? 다 커도 귀여울 수 있는데?” 가야가 진지하게 반박했지만 아무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0186 / 0240 ---------------------------------------------- 22장. 개미의 꿈 한동안 해동의 임금 이서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번 사령의 대규모 습격은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난이었다. 해동 백성들이 믿고 있는 수호신들이 둘이나 타락하여 민가를 습격했다. 이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입은 피해를 제하고 나서라도 국가의 뿌리부터 불안정해질 여지가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히도 사람들의 믿음을 다시 붙잡아둘 수 있는 ‘백호의 시대’가 새롭게 열렸다. 사람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백호와 성왕을 칭송했고 더불어 새로이 백호의 계약자로 나타난 왕녀 이유란에게 관심을 집중했다. 「……그래서 난 왜 또 이 모습이다냐!」 하얗고 작은 새끼 호랑이의 외형으로 되돌아온 백호 실라는 버럭 짜증을 부렸다. 청룡과 마찬가지로 백호 역시도 사령들과의 싸움에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태였다. 전투의 마지막 순간, 갑자기 터져 나온 밝은 빛줄기에 시력을 차단당하고 아차 하는 사이 사령술사 할더는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범위 내에 있던 모든 사령을 소멸시켰던 엄청난 정령에너지 폭발이었으니 죽은 것인지 아니면 살아서 도망친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쩝. 거의 다 잡았었는데.’ 그 당시를 떠올린 실라는 목표물을 놓쳤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할더는 프리드처럼 아주 강력한 사령을 다루지는 못했지만 대신 무수한 하급 사령군단을 불러올 수 있는 지원형 사령술사였다. 그 숨통을 꺾기 위해선 벌 떼처럼 달려드는 사령들을 전부 해치워야만 했다. 때문에 야심차게 술사부터 처리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어버려 상당히 장시간 전투를 지속했다. 결국 사령술사 할더는 놓쳤지만 엄청난 양의 사령군단을 제압해 낸 실라는 남은 기운을 절약하기 위해 본체를 숨기고 둔갑해야만 했다. 하지만 계약자의 뜻에 따라 백호는 인간형으로 둔갑하지 못했다. 바로 그 백호의 새 계약자, 성왕으로부터 ‘이유란’이라는 이름을 받은 보랏빛 머리의 소녀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헤헤. 편한 모습을 상상하라고 하니까 그 모습밖에 안 떠오르지 뭐야.” 「차라리 청룡처럼 인간형으로 해달라냥! 왜 나만!」 “어? 그치만 백호님…… 아니, 실라님이 사람이 된다는 건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걸.” 냐아아아! 실라는 앞발에 얼굴을 묻고 구슬프게 울었다. 그런 백호의 자그마한 어깨를 누군가 툭툭 두들겼다. “낙심하지 마, 야옹아.” 「청룡…….」 그래도 같은 신수랍시고 위로해 주는 건가 싶어 고개를 든 실라에게 가야는 훈훈하게 웃으며 엄지를 척 내밀었다. “다 큰 것보단 새끼인 편이 귀엽대. 넌 거기에 날개만 달면 완벽하겠네. 이야, 부러워라.” 「역시 청룡 따위 세상에서 제일 싫다냐악!」 한자리에 모여 있던 루바르잔 사람들은 바닥에 드러누워 바둥거리는 호랑이와 그 곁에 쭈그려 앉아 해맑게 놀려대는 청년을 그러려니 내버려 두었다. 그간 두 신수가 티격태격거리는 광경을 하도 봤더니 이젠 정말 고양이가 냥냥거리는 수준으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루 기둥에 기대 잠자코 그 투닥거림을 주시하던 에단이 쥬다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전하.” 쥬다스는 미소로 그 부름에 답했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부드러운 표정이었으나 조금 기운 없어 보이기도 했다. “……해동에 도달한 지 한 달이 지났습니다.” “벌써 그렇게 되었구나.” 그가 현재 임하고 있는 ‘순례의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물론 황제의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특별히 시간에 제약은 없다. 그렇다고 한들 특정한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고 장시간 머무르는 건 책잡힐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도 황제가 붙여놓은 그림자들이 그의 행보를 은밀히 따르며 기록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쥬다스의 직속친위대처럼 가까이 붙어 이동하진 않았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상시 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림자’란 호칭대로 정말 목숨이 위태로울 때만 개입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간 특별히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해동 수도에 장기간 머물러 있다간 이를 불필요하다 판단한 황제로부터 귀환명령이 떨어질지도 몰랐다. 익히 알려지기로 루바르잔 황제는 어떤 경우에서도 정에 호소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래.” 쥬다스는 마루에 걸터앉아 태양광이 내리쬐는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에 눈이 시려왔다. 그는 무릎에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슬슬 돌아갈까.” 작은 소리까지도 귀 기울여 들은 에단이 깊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이제 그만 어미의 고향에서 떠날 시간이 되었다. 쥬다스는 문득 멀리 반쯤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보이는 낡은 그네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윤이 좋아했다는 그네였다. 어쩐지 이를 타고 놀던 작은 소녀의 모습을 상상하게 되어 그네를 향해 목례했다. 일단 결심이 서자 쥬다스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채비를 차려 이서윤을 찾아갔다. “오, 아가. 왔느냐.” 왕은 여전히 바빠 보였다. 며칠간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해 초췌해진 안색으로도 서윤은 자신을 찾아온 조카를 마다하지 않았다. “예. 바쁘신 줄 알지만 언제 다시 뵐 수 있을지 몰라 따로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는가.” 이서윤은 미안함과 고마움, 아쉬움 등이 뒤섞인 복잡한 심정이 뒤섞여 눈살만 찌푸렸다. 언뜻 화난 것처럼도 보이는 험악한 얼굴을 앞에 두고도 쥬다스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해동은 몹시 따뜻한 나라입니다.” 계절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해동 사람들이 건네던 진심 어린 감사인사를 잊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들 입장에서 볼 때 쥬다스 일행은 머리색부터 피부색까지 전부 다른 이방인들이었다. 그런데다 아무리 타락했다곤 해도 건국일 이래로 줄곧 나라를 지켜온 수호신수를 둘이나 소멸시켰다. 좋은 뜻에서 사람들을 구해줬지만 사실 원망하고 두려워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해동인들은 순수하게 감사를 표했다. 입은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따스함이 민족성에 깃들어 있었다. “제 어머니는 분명 이곳을 사랑하셨을 겁니다.” “…….” “그리고 이 나라와 외숙을 믿으셨겠지요.” 이서윤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자신의 조카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눈빛이 꼭 죽은 누이가 살아 돌아온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하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우리 해동엔 오라버니가 계실 테니까.’ 하윤 역시 해동을 떠나기 전, 같은 말을 하며 잔잔히 웃었다. “저는 이제 돌아가,” ‘그러니까 저는,’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러 갈게요.’ 누이동생의 마지막 인사를 생생히 기억해 낸 서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그저 인사치레라고만 생각했던 말들의 무게가 이제야 제대로 느껴졌다. 서윤은 누이의 웃음이 설움을 덮는 가면 따위가 아니라 진실로 원한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을 이제야 절절히 실감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눈두덩이가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랐다. 꼭 끓기 시작한 찻주전자처럼 목구멍에서 팔팔 김이 날 것만 같았다. 서윤은 눈앞의 조카를 놓칠 새라 허둥지둥 말문을 열었다. “쥬다스, 아가, 부디 들어주겠느냐. 네 어미는. 하윤이는 말이다.” “……?” 두서없이 터져 나온 울음 섞인 이야기에 쥬다스는 의아한 표정으로 서윤을 바라보았다. “정략혼을 강요당한 게 아니야. 루바르잔 황제폐하, 네 아버지를.” 쥬다스는 이내 이어지는 말을 듣고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노라고 내게 말해주었단다. 네 어머니는 이 땅을 떠나 제국에 가서도 결코 불행하지 않았어.” “…….” “지키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말로 목숨 걸고 지켜낸 거야. 자신이 사랑한 사람과 너라는 행복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존재를 ‘행복’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그리고 그게 바로 먼 타국에서 건너와 황실 암투에 휘말려 비참하게 죽은 생모였을 줄은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었다. 이하윤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그의 존재를 원하고 축복한 유일한 부모였다. 쥬다스는 그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그 자신보다 성왕 이서윤이 더욱 격하게 반응했다. 잘나가다 뜬금없이 체통을 잃고 우는 왕을 보며 곁에 서 있던 호위 정다울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저, 전하. 제 손수건이라도 쓰시옵소서.” “쿨쩍. 고맙네.” 남들에겐 상남자 소리를 듣는 정다울이었지만, 사실 그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아내가 붉은 매화와 까치를 수놓아준 손수건을 늘 가지고 다니는 제법 다정한 면모가 있었다. 그가 알을 품는 어미새처럼 애지중지 품에 넣어가지고 온 손수건을 건네자 서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기다가 코를 팽 풀었다. “……전하. 옥루를 닦으시란 뜻이었사옵니다만.” “휴우우! 시원하군. 유용하게 잘 썼다네.” 다울은 더럽혀진 손수건을 우울하게 받아 들었다. 좋은 뜻에서 나섰다가 심적 타격을 입고 조용히 찌그러진 호위를 뒤로한 채 서윤이 쥬다스의 어깨를 다독였다. “누이에겐 해주지 못한 말을 이제 와서야 네게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서윤은 그대로 어깨에 손을 얹은 채 힘 있게 붙들고 말했다. “널 믿는다. 쥬다스.” 그것으로 왕과의 짧은 작별인사는 끝났다. 나라가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할 일이 태산인 이서윤은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곧장 궁을 나섰다. 수도 입구까지 실라를 데리고 따라 나온 란이 시무룩하게 물었다. “쥬다스 님. 가는 거야?” 란은 이제 ‘이유란’이라는 이름으로 해동의 왕녀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백호는 해동의 신수이고 란은 그의 계약자이니 당연한 절차였다. “헤어지기 싫은데.” 그녀는 솔직한 마음으로 칭얼거렸다. “나도 따라가고 싶어.”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 게로구나. 하지만 란아, 나는 네게 집이 생겨서 안심했다.” “집…….” 란은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꽤 익숙해지긴 했지만 아직은 어색한 해동의 궁궐이 보였다. 그곳에 혼자 남는다는 생각에 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아빠가 이 나라 왕족이었대. 그래서 나는 요정족이지만 이곳 일원이라고 사람들이 그랬어. 이름도 이제 란이 아니라 ‘이유란’이래.” “혹 그리 불리는 게 싫으니?” “으음, 아니.” 란은 기운 없이 고개를 저었다. “싫지 않아.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해준 적은 처음인걸.” 마녀라 불리며 홀로 숲 속에서 수십 년을 살아온 그녀였다. 자신의 태생을 알고 그로 인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뛸 듯이 기뻤다. 이곳에선 누구도 그녀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이제부턴 영혼의 계약으로 묶여 늘 곁을 지켜줄 백호도 있었다. “근데 쥬다스 님과 떨어지는 건 싫어.” 「이제 보니 완전 욕심쟁이다냥.」 “욕심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실라. 쥬다스 님은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진짜 아빠는 아니지만 아빠 같은 사람이니까.” 사실은 새 이름, 새 집보다 그가 불러주는 ‘란’이란 이름이 더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명석하게 판단해 냈다. 해동 수호신수의 계약자가 해동을 떠난다면 많은 사람에게 절망을 안겨주게 된다. 상냥한 요정족 란은 그런 선택은 차마 내릴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안녕하세요! 컴퓨터가 랜섬웨어 바이러스에 걸려 부랴부랴 조치하고 오는 길입니다.ㅠㅠ 지금껏 살면서 컴퓨터가 모니터나 마우스, 내부부품이 고장나는 경우는 있었어도, 바이러스는 단 한 번도 안걸려봤는데 이번에 어마어마한 독종에게 걸렸네요 ㄷㄷㄷ 이럴수가...OTL 다행히 이그레트 원고는... 메일함과 네이버클라우드에 백업하는 버릇이 있어서 살았습니다. 큰 피해는 없다지만 랜섬 바이러스는 따로 치료방법이 없기 때문에 포맷하여 깔끔해진 피시 화면을 보고 있자니... 크... 문제는 더리더(에스티오)와 두살배기~ 등 차기작 원고가 싸그리 날아갔다는 건데..ㄷㄷㄷ 차기작들은 그냥 쉬엄쉬엄 쓰는거라 백업을 안했거든요.ㅠㅠ 조아라 연재분량 외에 진행된 분량이 그다지 많은 양은 아니지만 제법 마음이 아픕니다. 여러분 바이러스 조심하시고 늘 백업을 생활화합시다!! 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ㅠ (이번 화부터 '22장 : 개미의 꿈' 파트가 시작됩니다.^^) 0187 / 0240 ---------------------------------------------- 22장. 개미의 꿈 「청룡. 너도 가는 거냥?」 “엉?” 지나가듯 툭 던진 실라의 질문에 가야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대충 대꾸했다. “왜? 서운하냐?” 「서운하긴 누가!」 털을 바짝 세우며 질색하는 실라를 보며 가야는 피식 웃었다. “보고 싶으면 하늘에 대고 빌어. 이 몸이 또 위대하신 하늘의 청룡이잖냐.” 「……자꾸 그딴 식으로 굴 거다냥?」 “진짠데? 야옹이 소원 정도는 들어줄 수 있어.” 「므아아, 말을 말아야지.」 청룡도 해동의 수호신수로 오랜 세월 해동을 지켜온 존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수호신수가 아니라 쥬다스의 정령 ‘가야’다. 그는 계약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함께 나라를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의외다냥. 귀찮다고 계약 파기해 버릴 줄 알았는데.」 일련의 사건이 끝난 뒤 쥬다스는 가야에게 계약 파기를 제안했다. 애초에 청룡을 살리기 위한 계약이었으므로 이제 해동을 떠나 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가 계약을 지속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지만 가야는 해동에 남길 원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을 뒤집고 가뿐히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나는 지금이 좋아. 그동안 너무 갈증 났었거든.’ 사방신수 중에서도 특히 청룡은 수백 년간 적합한 계약자를 만나지 못했다. 계약을 맺지 못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청룡의 기운은 이제야 막 물 만난 고기처럼 되살아나던 참이었다. ‘주인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정령에게 계약자란 영혼의 동반자잖아. 이제 와서 계약을 파기한다면 배우자에게 이혼당한 사람보다 더 비참할 것 같아.’ 그러면서도 가야는 그의 의지를 가장 중시했다. ‘하지만 주인이 바란다면 그렇게 해.’ 시무룩해진 청룡의 의견을 듣고 쥬다스는 계약 파기를 철회했다. 마침 백호의 시대가 열린 참이고, 요정족인 란의 수명을 생각한다면 아주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인간인 쥬다스가 이번 생을 명대로 누리고 죽은 후에도 란과 백호는 변함없이 해동의 수호자로 남는다. 쥬다스는 청룡 본인이 계약을 유지하고 싶다고 하는 그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아, 물론 내가 게으른 건 사실이지만.” ‘스스로 인정했어?!’ 지켜보는 이들의 당황에도 가야는 아랑곳 않고 죽 말을 이었다. “주인과 계약을 깨면서까지 이 나라에 남아 있고 싶은 건 아니라서. 참, 야옹아. 새로 태어난 현무와 주작은 아직 각성하기 전이니까 잘 돌봐줘야 할 거다.” 「헹.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냥.」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현무와 주작은 힘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아직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이 제대로 힘을 다룰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가호는커녕 제 몸 하나 지키기 힘들 정도로 나약하다. 백호 실라는 투덜거리면서도 기꺼이 다른 신수들을 돌보는 일을 도맡았다. “기다릴게.” 그런 백호를 품에 끌어안은 란이 살포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보러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니까. 쥬다스 님이 꼭 다시 만나러 와줘야 해?” 사실상 이번 순례의 길을 마치고 나면 제국 군주의 후계자인 쥬다스도 나라 밖으로 나올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그가 앞으로 짊어질 무게는 거대한 제국 전역에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이다. 그러니 한 보 한 보가 무거워질 것이며 설령 밖으로 걸음 한다 할지라도 지금처럼 편안히 방문할 수 없을 것이다. 쥬다스는 굳이 그 부분을 짚지 않고 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따뜻한 온기가 머리를 토닥거리자 란은 물기 어린 눈으로 그를 마주보았다. “약속하마.” “……!” 순간 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다시 만나러 올게. 그때까지 건강하려 무나. 란아.” “응!” 란은 팔을 뻗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이번 헤어짐이 끝이 아니란 사실에 안도감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눈물방울이 턱선을 타고 아롱아롱 떨어졌다. “다녀오세요.” 「잘 가라냥.」 보랏빛 요정과 하얀 호랑이의 배웅을 마지막으로 루바르잔에서 온 손님들은 해동을 떠났다. * * * “그런데 전하. 이 방향은 왔던 길이 아니지 않습니까?” 며칠간 말을 달려 해동을 벗어난 쥬다스 일행은 어느덧 생소한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군말 없이 따르던 바이칼이 의문을 제기한 건 길가로 늘어선 온갖 표지판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였다. “로울리스 존(Lawless zone).” 커다란 표지판 위에 빨간 물감으로 덕지덕지 칠해진 글자는 대륙공용으로 사용되는 루바르잔 제국어였다. 그 외에도 도박장이나 유흥거리를 안내해 주는 표시들이 가득했다. 대충 꺾어 만든 나무판 위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못에 잠시 시선을 준 에단이 이를 간단히 정리했다. “국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영역이군.” 때맞춰 그들의 머리 위로 까마귀 떼가 까악 울며 지나갔다. 해동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물씬 드는 삭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거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요?” 「뭐어? 얘가, 얘가. 도대체 날 뭐로 보고!」 은은한 녹색 바람 길을 만들어 길안내를 맡고 있던 유니가 뾰로통하니 볼을 부풀렸다. 하지만 그녀의 불만 어린 목소리는 바이칼에게 닿지 못했다. “아니. 제대로 온 게 맞다.” 대신 에단이 단호하게 답해주었다. “현재 위치는 대륙 북부에 있는 무법지대다. 여기부턴 ‘미드가르드’의 영토에 해당하지.” 그 답을 들은 바이칼의 안색이 한층 허옇게 떴다. “예? 미드가르드요?” “그래. 올 때는 남쪽 사막지대를 거쳐 왔지만 이번엔 북쪽으로 살짝 돌아서 갈 생각이란다.” “저, 정말 북쪽을 지납니까?” “이미 북쪽이다.” 쥬다스와 에단의 호흡이 척척 맞는 답변을 들은 바이칼은 푹 고개를 숙였다. “삐?” 멋모르는 어린 와이번만이 그의 품에서 날개를 바르작거렸다. 바이칼은 답답해하는 플루비를 로브 밖으로 꺼내 어깨 위에 올려놓았다. 긴 꼬리로 그의 반대쪽 어깨를 휘감아 균형을 잡은 플루비가 기분 좋게 날개를 스치는 바람을 만끽했다. “전하, 이미 늦은 건 알지만 그래도 말씀드리자면.” “응?” “대륙 북부는 전하께서 걸음 하실 만한 동네가 아닙니다.” 평소에 까불대던 바이칼답지 않게 진지한 어조였다. 쥬다스가 멀거니 이야기를 듣고만 있자 바이칼은 끙 소리를 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여기 문화는 상상이상으로 더럽…… 지저분…… 아오.” 딱히 황태자씩이나 되는 존재에게 이를 표현할 만한 고급스런 단어를 뇌리에서 찾아내지 못한 그는 제대로 말미를 장식하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러자 에단이 작게 혀를 차며 원조에 나섰다. “대륙 북부를 장악한 미드가르드는 제국 기준에선 납득하기 힘들 정도로 자유로운 나라입니다.” “에헤이, 그냥 자유로운 정도가 아니죠. 아마 정말로 법이 없다시피 할 겁니다.” 북의 국가 미드가르드. 이 국가를 수식하는 다른 표현으로 ‘무법국가’와 ‘기계국’이라는 명칭이 있다. 두 명칭 모두 다른 국가에서는 보기 힘든 특이점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중 ‘무법국가’라는 표현대로 미드가르드에선 딱히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르고 지켜야 할 법 같은 건 없다. 그야말로 약육강식! 미드가르드에선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이들을 지배한다. 심지어 왕이라는 개념도 없었다. 혈통에 따른 권력구조가 아니라, 보다 강한 힘을 가진 이들이 상위계층에 올라서는 무한 경쟁체재다. 가장 강한 힘을 가진 자를 운영자, 즉 ‘시솝’이라 부르며 추앙하고 섬길 뿐이다. “그렇다는 건 알고 있단다.”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에 대해 알고서 일부러 북쪽을 경유하는 길을 택했다. 결국 한 대륙 안에 존재하는 이상 제국과 아예 연관이 없을 수는 없는 나라였다. 동맹을 맺고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해동과 달리 미드가르드는 제국과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미드가르드는 힘을 숭상하는 나라답게 수도 없이 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 역사에는 정복욕 강하기로 치면 손꼽히는 루바르잔 제국도 빠지지 않고 끼었다. 그러다 전쟁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륙 전역에 평화가 지속되는 근래에는 그저 소 닭 보듯 멀리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너무 다른 문화와 체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류하고 친해지기엔 그들 사이에 너무나도 큰 장벽이 존재했다. ‘책에서 보신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실지도 모른다고요.’ 바이칼은 그 걱정을 속으로 삼켰다. 정작 그 자신도 대륙 북부에 가본 적은 없었기 때문에 자세히는 몰랐다. 하지만 그나마 어릴 때부터 이리저리 나돌아 다니며 여러 계층의 문화를 접해본 바이칼이었기에 대략적으로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아마 무법국가라는 미드가르드의 문화는 온실 속에서 자라난 루바르잔 지배층들이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저열한 형태로 이루어져있을 것이다. 그런 바이칼의 걱정도 모르고 세이지가 순진한 눈으로 형에게 물었다. “형님. 법이 없으면 나라가 어떻게 유지되나요?” “어떨 것 같으냐?” “……사실 잘 상상이 가질 않아요. 범죄자를 치죄할 수도 없고, 피해 입은 자에게 선처할 수도 없고. 또 기준이 없으니 작은 것 하나조차 어디에 맞춰 움직여야 할지도 모르고. 완전히 혼돈 그 자체잖아요.” 루바르잔 제국 황자로서 당연히 드는 생각이었다. 세이지는 어미의 그늘에 가려 자라 세상물정에 어둡긴 해도 지배층으로 익혀야할 지식들은 착실히 공부해 왔다. 정확히 통치자의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세이지를 향해 쥬다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 생각하는구나.” “네. 저런 체제로도 붕괴되지 않고 오랜 역사를 유지하고 있다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아요.” 비록 쉴 새 없이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교체가 일어나긴 했지만 미드가르드의 역사는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 중에 가장 길었다. “아마 그들 사이에 암묵적인 룰이 있을 게다.” “그렇지만 그걸로 될까요? 결국 분쟁과 혼란은 생기게 마련일 텐데요.” “어쩌면 그 분쟁과 혼란 자체가 그들에겐 법일지도 모르지.”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세이지가 멈칫했다. ‘싸워서 이기고, 혼란에서 살아남고. 그런 식으로 승자가 모든 걸 취하는.’ 여전히 납득할 만한 구조는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았다. 세이지가 곰곰이 상념에 잠긴 사이 녹색 정령이 쥬다스에게로 포로록 날아들었다. 「있지, 앞에 큰 장터가 있어.」 「장터? 재밌겠다요!」 쥬다스의 머리 위에 나른하게 드러누워 있던 토니가 반짝 일어나며 제일 먼저 반응했다. 「끝까지 들어, 멍충아. 이 장터가 네가 생각하는 그 장터가 아니란 말이야.」 「으에엥? 이 장터가 그 장터가 아니면 무슨 장터다요?」 「사람을 파는 장터.」 “……노예시장.” 정령들의 대화를 듣던 쥬다스가 어렵지 않게 그 정체를 짚어냈다. 그의 갑작스런 발언에 놀란 눈길이 모였다. “예?” “이 앞에 노예시장이 열렸다는 구나.” 맑은 녹색으로 반짝이는 바람의 정령을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진중하게 대꾸했다. “강자가 약자를 취하는 나라이니 노예를 부림에 거리낄 이유가 없을 겁니다.” 무법국가인 미드가르드에서는 당연하게도 노예를 사고파는 게 불법이 아니었다. 심지어 노예의 아들이라 해도 주인보다 강한 힘을 가졌다면 더 높은 지위로 껑충 뛰어올라갈 수 있는 파격적인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미드가르드는 종교마저도 자율화되어 있었다. 신성을 국교로 삼아 인간의 고유인격을 존중하고 최소한의 법적장치를 마련해 놓은 루바르잔과는 달랐다.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아무리 하위계층이라 해도 지배층이 함부로 착취하고 목숨을 앗아서는 안 된다. 바로 여기서 오는 차이가 일행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타국의 손님들인 그들은 미드가르드의 노예시장에 관여할 권한도 그럴 이유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Q. 프리드는 완전히 소멸한 건가요? A. 옙! 현재 '프리드'는 죽은 게 맞습니다. 다만 '할더'의 존재여부는 아직 정확히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 외 사령술사 집단과 봉인된 릴리스 등 미언급된 인물들은 남아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본편에서 밝혀드리도록 하겠습니다.ㅎ 새로운 한 주의 시작입니다! 어젯밤까진 내내 비가 들이치더니 아침하늘은 맑고 깨끗하네요. 듣자하니 대학교는 슬슬 축제기간이라던데... 흐, 부럽습니다. ㅋ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0188 / 0240 ---------------------------------------------- 22장. 개미의 꿈 그러나 노예시장에 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던 일행의 발목을 붙든 건 다름 아닌 호객꾼들이었다. “이야! 우리 도련님들, 타이밍도 잘 맞춰오셨네. 오늘이 마침 딱 장날이요, 장날.” “말만 해봐 그려. 어떤 물건이 필요하쇼?” 호객 행위는 시장거리를 지나가는 모든 방문자에게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사실 이곳을 찾는 이들은 쥬다스 일행처럼 별 뜻 없이 지나치려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노예를 보러온 손님들이었다. 그중에는 미드가르드인뿐 아니라 타국에서 놀러 나온 귀족이나 부호들도 있었다. 루바르잔 출신으로 보이는 자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이를 본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찌 신성을 섬기며 지엄한 국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저런……!” “타국에서 노예를 사들여오는 건 꽤 흔한 일이죠.” 바이칼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제국법으로 노예제도가 금지되긴 했지만 사실 루바르잔 내부에도 몰래 노예를 사들여오는 자가 많았다. “그럴 수가. 처벌을 좀 더 강화해야 하는 건가?” “아뇨.”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지 말란다고 곧이곧대로 지키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뭅니다. 아무리 엄한 벌을 내려도 결국 어떻게든 뒷거래를 만들걸요.” “법은 지키라고 있는 건데.” “하지만 그 법에는 늘 구멍이 있으니까요.” 청렴결백이란 관리들의 이상향이지만 현실로 이루어지긴 힘들다. 비단 법을 어긴 자만을 치죄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를 잡고자 하면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처럼 그럴듯한 이유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만다. “때론 필요에 의해 일부러 피할 구멍을 만들어두는 경우도 있지.” 쥬다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건 지배층의 융통성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잘 알고 있구나. 무조건 강제하고 억압한다고 해서 범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에 차라리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어둠을 만드는 게다.” “통제할 수 있는 어둠…….” 호객꾼들을 초파리 떼처럼 달고 시장에 진입하자 말을 타고 달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파가 보였다. 일행은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하나 그렇다고 그걸 지배층이 전부 묵인해 버리면.” 쥬다스는 천천히 자기가 타고 온 말의 고삐를 끌며 앞장섰다. “우리가 일전 레이븐 영지에서 봤던 것처럼 관례라 불리는 악습이 생겨나는 것이겠지.” 그 말에 세이지도 농사꾼들을 착취하던 레이븐 영주를 떠올렸다. 남의 물건을 탐내고 여인들을 납치하며 사고로 위장하여 사람을 죽였던 파렴치한 악질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악행을 저지를 동안 감찰 나온 황실의 관리들은 단 한 번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럼 형님. 형님께선 이를 어찌 해결하고자 하십니까?” 몰래 타국의 노예시장을 통해 여타 용도로 노예를 들여오는 자들. 그에 대한 처분을 묻자 쥬다스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잔잔히 답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게 마련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지.” “당사자라면…… 설마 노예들의?” 이젠 황태자의 돌발 행동에 익숙해질 때도 되었건만 일동 놀란 다람쥐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노예를 산 자들도. 양측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남들이야 놀라든 말든 태연히 대꾸한 쥬다스가 브로치에 걸린 인챈트 마법을 발동시키며 겉옷을 벗었다. 그러자 곧장 인챈트가 발동하여 순식간에 머리색이 변하였다. 보석과도 같던 은빛에서 평범한 갈색으로 변한 머리카락을 본 나머지 일행도 차분히 겉옷을 벗어 정리했다. 대륙의 북향이라 하지만 여름에 접어든 날씨는 제법 후덥지근했기에 더 이상 긴 재킷이나 로브를 두르고 있는 건 고문이 따로 없었다. 다른 여행객들의 차림새도 반팔이나 민소매, 속이 비치는 망사 등 무척이나 간소했다. 땡볕에서 바쁘게 일해야 하는 장사치들은 아예 웃통을 까기도 했으며 심지어 여성들의 경우엔 천으로 가슴만 겨우 가리거나 엉덩이 끝에서 살랑거리는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무법지대인 만큼 의상양식이 제국이나 해동보다 훨씬 파격적이었다. 보이는 족족 노출이 많아 눈 둘 곳을 잃은 바이칼은 힐끗 크리스티나의 낯을 확인했다. ‘음? 생각보다 멀쩡하신데?’ 일행 중 유일한 여성이기도 한데다가 품격을 중시하는 공작가에서 자란 그녀였기에 저급한 문화에 가장 취약하리라 여겼다. 물론 안절부절못하거나 얼굴이 빨개지는 그녀를 상상하긴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힘든 내색은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걱정되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바이칼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도리어 칼같이 알아차리고 물어왔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아뇨. 그냥 새삼.” “새삼?” 크리스티나는 수상쩍은 상황에서 절대로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납득할 만한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말꼬리를 붙들 것이 분명했다. 그 강경한 성향을 알고 있는 바이칼은 솔직하게 답해주었다. “뭐, 거친 여행길에도 잘 적응하신다 싶어서요.” “말마따나 새삼스럽군.” 그녀가 무력 면에서나 정신적인 면에서나 강한 여자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고위 가문 여성이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험한 일에 노출되는 건 평민 여성들뿐이다. 루바르잔 귀족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귀애받는 역할이며 신분고하를 떠나 절대로 궂은일을 하지 않는다. 귀족들은 남녀가 동시에 난관에 처했을 때 여성을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걸 예의라고 여겼다. 당연히 귀족 아가씨가 여행을 떠날 때에도 우아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준비된 행렬을 꾸린다. 지금처럼 장시간 말을 타고 이동하는 강행군에 여성을 포함시키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이 또한 그녀가 자발적으로 자택을 나와 합류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평할 각오였다면 내 발로 걸어 나오지도 않았어.” 크리스티나는 머리끈을 입에 물고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정돈했다. 잘 교육받은 시녀가 여럿 달라붙어 치장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머리를 묶는 그녀의 모습은 제법 터프해보이기까지 했다. 가느다란 손목을 타고 긴 바닷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흔들렸다. 머리를 하나로 높이 올려 묶은 그녀가 가벼이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왜, 그대도 마찬가지 아닌가?” 늘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가 보여주는 아침햇살 같은 웃음에 바이칼은 그만 벙하니 넋을 놓고 말았다. “허 참. 크리스티나 님.” “또 뭐지?” 슬슬 귀찮다는 눈으로 대꾸하는 크리스티나에게 바이칼은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부턴 좀 자주 웃으십쇼.”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거, 남자는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단순합니다.” “뭐?” “특히 시각적 자극에 약하다고요. 제가 볼 땐 크리스티나 님이 방금처럼 웃어주시면 안 넘어갈 남자는 없을 것 같은데요. 천하의 목석이라도 사람인 이상 심장은 뛸 거 아닙니까?” 그때까지 당당하던 크리스티나가 처음으로 얼굴색을 붉혔다. 동시에 웃음기가 싸악 날아가 버린 굳은 표정을 보고 바이칼은 씩 웃었다. “고민하실 거 없지 말입니다. 장담하죠! 이거 진짜 효과 직방으로 얻으실 수 있…… 끄악!” 뻐억!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후두부를 가격당한 바이칼이 꺾인 들풀처럼 맥없이 휘청거렸다. 가차 없는 손속을 자랑한 건 가만히 지켜보다 상황에 불쑥 난입한 에단이었다. 그는 입 가벼운 수하를 향해 체벌의 이유를 읊었다. “무례다. 그리고 시끄러워.” “……그렇다고 부관을 죽이실 셈입니까?” “그 정도로 죽을 체력이라면 그게 낫겠군.” “으익, 낫긴 뭐가 낫습니까! 누구나 단장 같은 맷집을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고요!” 바이칼이 억울한 어조로 항변했지만 에단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인파에 자연스레 섞여 들어가 시장의 중앙거리로 진입했다. 노예시장은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장터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북적이는 사람들과 개 짖는 소리, 갓 조리한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다만 전시된 ‘상품’들이 살아 있는 인간이란 점만이 달랐다. “도련님들. 밤노예 필요하지 않슈?” “대량구매 원하시는 분! 세트당 10두씩 묶어서 팝니다. 애들 상태 좋아요. 기초 체력단련은 물론 검술까지 훈련되어 있습니다!”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 일로 와 봐요. 싸게 드릴게.” “평범한 노예들은 이제 식상하시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한정판 토끼 수인족 있습니다!” 초입보다 훨씬 노골적으로 공세해대는 호객 행위에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세이지는 벌거벗기고 짐승처럼 사슬에 달아놓은 상품들을 보며 문화충격에 놀라 혀까지 깨물었다. “토, 토끼…….” 속이 다 비치는 그물망을 옷이랍시고 입혀 놓았지만 결국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벗겨놓았고 전부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에다 개목걸이처럼 사슬을 감았다. 인격에 대한 존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행태였다. 이능을 사용할 줄 아는 특수노예들은 취급이 더욱 심했다. 행여나 이능을 사용해 주인을 해치거나 난동을 부릴 새라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입에 재갈을 물려놓았다. 대부분 채찍에 찍혀 구멍 난 등짝이나 터져 짓무른 살갗 등 구타의 흔적이 역력했고 그에 굴복하여 더 반항하지 않고 체념한 상태였다. 상인들은 흉이 질 법한 상처는 내버려 두고 정말 목숨이 걸린 경우에만 최소한의 치료를 해주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찾는 조건에 따라 노예를 끌고 와 보여주며 물건 다루듯 거래했다. 주인이 정해진 노예는 그 자리에서 불에 지진 송곳으로 몸에다 주인의 문장을 새겼다. 이를 ‘낙인’이라 불렀다. 끔찍한 거래 방식이었으나 ‘낙인’은 노예시장에서 일종의 거래증서처럼 쓰였다. 바로 이 낙인을 통해 노예의 소유주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장부에 기록하기 때문이었다. 「으으, 여기 기분 나빠.」 유니가 추운 사람처럼 팔뚝을 쓸며 중얼거렸다. 생명을 다루는 정령에게 있어서 부정적 감정과 폭력이 가득한 이 노예시장은 몹시 불쾌한 장소였다. 쥬다스의 정령들은 전부 실체화를 풀어둔 상태였기에 자연의 흐름에 보이지 않도록 녹아들어 있었다. 「정말이에요. 이럴 바엔 차라리 전쟁터가 낫겠어요.」 「맞아. 거긴 역동적이기라도 하지. 여긴 애들이 너무 무기력하잖아.」 「……둘 다 별로.」 푸른 늑대만이 고고하게 콧등을 찡그렸다. 카니는 문득 답지 않게 조용한 땅의 정령왕을 돌아보며 물었다. 「토니는 어때요?」 「에에, 나요는 나름 재밌다요.」 「얘가 뭐라니. 재밌어? 이게?」 치를 떠는 동료 정령들을 보며 토니는 고개를 끄덕끄덕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리곤 열심히 팔을 휘저으며 설명하려 노력했다. 「땅속에서만 놀다가 우연히 밖으로 뽁! 튀어나왔는데 완전 어지러운 폭풍우를 빡! 하고 만난 느낌?」 「뽁? 빡? 뭔 느낌이야, 그건…….」 바람의 정령이 이해할 리 없는 예시였다. 토니는 헤헤 웃으며 쥬다스의 머리 위에 누워 뒹굴거렸다. 「아무튼 신기하다요! 다른 종족들에게선 볼 수 없는 현상 아니다요?」 「어, 그런가?」 「동족을 잡아다 복종을 가르치고 또 다른 동족에게 팔아 넘긴다요.」 유니는 허공에 둥둥 떠서 팔짱을 낀 채 다시 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렇네.」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리는 거다요.」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로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0189 / 0240 ---------------------------------------------- 22장. 개미의 꿈 정령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쥬다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우르르 따라 멈춘 일행이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 님?” 그는 답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어느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던 크리스티나가 그가 바라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런 사기꾼들 같으니! 당장 내 돈 뱉어내지 못해?” 시끌벅적한 틈새로 한 사내가 수하들을 이끌고 와 어느 천막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모습이 보였다. 큰 소리에 놀란 상인들이 허둥지둥 천막 아래서 뛰어나왔다. “어이쿠!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손님.” “곤란? 곤란은 내가 할 말이지. 보라고!” 철그럭! 화난 손님은 자신이 끌고 온 노예를 사슬째 바닥에 내던졌다. 그러자 목에 걸린 사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노예가 바닥에 맥없이 널브러졌다. “이따위 하자 있는 물건을 팔아놓고 반품을 못해주겠다니!” “자, 자. 일단 진정하시고.” “이능이 있다며? 이능이고 뭐고 전혀 사용할 줄 모르잖아.” 분노가 가득 담긴 외침에 상인들이 서둘러 노예의 옷을 걷어 등에 찍힌 낙인을 확인했다. “손님, 이 녀석은 치유력을 가진 상품이군요. 목소리에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습니다.” 치유술사는 다친 상처를 낫게 하는 힘을 가진 만큼 진귀한 이능력자였다. 그 등급이 높으면 높을수록 치유가 가능한 범주가 넓어진다. 아주 높은 등급의 치유력을 구사하는 술사들은 절단된 신체 부위를 깔끔하게 붙인다거나 불치병을 씻은 듯이 낫게 하는 등 기적에 가까운 이능을 선보였다. 쥬다스를 호위하는 기사단 중 둘이 이 치유술사에 해당했는데 그들은 칼에 찔린 상처를 아물게 하는 정도가 가능한 중급 치유술사들이었다. 일단 치유력 자체가 드물게 발현되는 이능이다 보니 중급 정도만 되어도 훌륭한 기사단원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니 치유력을 가진 노예는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상품으로 팔려나갔을 터였다. 하지만 결국 그 노예는 도로 반품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고!” 노예를 반품하려는 손님은 몹시 분노한 투로 외쳤다. “노예를 길들이는 건 손님의 책임이십니다.” “뭐야?”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분명 상품을 구매하실 때 알려드렸습니다. 단순 변심은 반품이 어렵습니다.” “이 사기꾼 자식들이 지금 누굴 놀려? 내가 이걸 얼마를 주고 샀는데!” 결국 분노한 손님이 먼저 주먹을 날렸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벌어졌다. 먼저 구경하고 있던 쥬다스 일행을 따라 다른 구경꾼들이 붙더니 금세 호떡집에 불나듯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주변에선 관중석처럼 우우 야유가 터져 나왔다. “흠.” 쥬다스는 턱을 짚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다 이내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노예를 산 자의 관점부터 알 수 있을 모양이구나.” “……그러게요.”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형의 곁에 붙어 있던 세이지가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손님이 반품하러 데려온 노예는 바들바들 떨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에 그대로 엎드려 있었다. 마른 체구에 아담한 키를 가진 여성이었다. 모발은 연한 레몬색으로 숱이 많은 곱슬머리였다. 굽이치는 머리카락 사이로 둥글게 말린 양뿔이 달렸으며 그와 함께 뽀송뽀송 여린 털이 자란 양귀가 잠자리 날개처럼 파르르 떨렸다. ‘양 수인족!’ 척 봐도 알아보기 쉬울 정도로 극명한 특이점이었다. 루바르잔 제국에서는 수인족을 보기 드물었기 때문에 세이지는 더욱 그 노예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신기하다. 인정하긴 싫지만 수인족 노예는 정말 잘 팔리겠어.’ 그의 짐작대로였다. 일반 노예보다 수인족 노예는 공급은 적고 수요가 많은 초고가 상품이다. 수인은 동물의 특징을 타고난 소수인종이다. 사람들은 희귀한 것에 열광하며 특별한 외형을 가진 수인들에게 매력을 느꼈다. 각 종족별 희소성과 외모, 능력치에 따라 또 값이 올라갔다. 그런 이유로 이 시장에서 구매층이 귀족과 부호라 하더라도 웬만한 자본 가지고선 수인족 노예를 구하지 못한다. 지금 반품을 요구하는 사내 역시 그 노예를 사기 위해 집안의 기둥뿌리가 흔들릴 정도로 막대한 지출을 한 타국의 귀족이었다. “형님, 이대로 두실 건가요?” “글쎄다.” 세이지가 보기에 이상하게도 쥬다스는 저 상황에 끼어들 생각이 없어보였다. 여유롭게 구경만 하는 형을 곁에 두고 세이지는 다시 바닥에 엎드린 노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엾네…….’ 분명 살아 있는 인간인데도 상품가치로 판별한다. 값을 매겨져서, 그 값어치만큼의 효율을 보이지 못하면 이렇게 찬 바닥에 패대기쳐지고야 마는 것이다. 결국 난동을 부리던 손님은 기존 금액의 80%를 돌려받고 나서야 씩씩거리며 돌아갔다. 딱히 치안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법지대니 판결을 내릴 존재도 없다. 그러니 이런 문제가 일어날 경우 그들은 지금처럼 자율적인 해결 방식으로 끝맺곤 하였다. “어느 한 쪽이 피 볼 줄 알았더니만.” “에이, 아쉽네. 너무 빨리 끝났어.” 싸움이 끝나자 구경꾼들은 아쉬워하며 굴뚝에서 연기 흐르듯 순식간에 흩어졌다. 더러는 반품한 손님을 비웃었고 더러는 끝까지 판매수칙을 지키지 못하고 반품을 받은 상인을 욕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버린 수인족 노예를 향해선 손가락질만 이어질 뿐이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인지.” 반품을 받은 상인은 짜증스레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봐. 양 공주님, 아픈 것도 아니면서 왜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거야?” “…….” “네 가치는 목소리에 달려 있다고. 이래서야 비싸게 파는 내 양심이 아프잖아. 응?” 아무리 어르고 달래보아도 수인족 노예는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상인은 당장 말을 시키는 걸 포기하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더러운 짚단을 깔아둔 철창 안에 그녀를 밀어 넣고 문을 잠가버렸다. “배고프면 알아서 울겠지. 하여간 요즘 노예들은 대접이 너무 좋아서 하나같이 건방지다니까.” 단순한 철창같이 보여도 복잡한 보안장치가 되어 있는 노예전문 구속장이었다. 상인은 자리에 남아 감시를 하지 않고 철창을 천막 앞에 전시해 놓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행인들이 양뿔이 달린 수인족 노예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지나쳤다. 끊임없이 품평하듯 온몸을 스쳐 가는 눈길에 노예는 쭈그려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풍성하고 구불거리는 레몬 빛깔 머리카락만이 그녀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오래 굶은 게 확실해 보이는 파리한 안색이었지만 상인의 말처럼 울거나 배고픔을 호소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물쇠가 걸린 철창처럼 굳게 입을 다물고 무릎에 뺨을 기댔다. ‘울지 마. 그냥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림자처럼 살아. 절대 소리 내선 안 돼.’ 수인족 노예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특별한 목소리란 지독한 저주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에게 내 목소린 들리지 않아.’ 그녀가 소리 내어 보았자 태엽이 돌아가는 오르골처럼 신기하게 바라볼 뿐이다. 들어주지 않을 사람들에게 고통을 호소하기 보단 그냥 입을 막는 편을 택했다. 포옹! “……?” 웅크리고 있던 노예는 뺨에 닿아 톡 터지는 물방울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치 눈물방울처럼 맑고 투명한 물기가 볼을 타고 주륵 흘렀다. 그녀는 멍하니 손을 들어 제 뺨을 쓸었다. 눈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꼭 누군가 대신 울어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철창 밖에 누군가 서 있었다. 다른 구경꾼들이 모두 흩어질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던 쥬다스였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빙긋이 웃으며 안녕 하고 작게 인사를 건네 왔다. “따사로운 오후구나. 햇볕이 참으로 좋아.” 마치 평범한 사람을 대하듯 다정한 어조였다. 한평생 물건 취급을 받고 살아온 노예는 그 차이를 민감하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철창 가까이 무릎으로 기어갔다. “그렇지 않누?” 다크 초콜릿을 연상케 하는 한 쌍의 눈동자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대답을 듣지 못했는데도 손님은 화를 내지 않고 자리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하자 낮은 철창에 갇힌 노예와 눈높이가 딱 일치했다. ‘예쁜 황금색…….’ 정면에서 바라본 금안은 그녀가 본 중 가장 아름다운 색으로 빛났다. 그간 귀한 태생이라는 무수한 귀족을 보아왔지만 진정 고귀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이지만 동물의 특성을 타고난 그녀의 눈에는 그를 가호하고 있는 투명한 물방울들과 녹색 바람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마치 시장이 아닌 숲 속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탁 트이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수인족 노예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말을 하기 어려운 모양이로구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랫동안 자신을 억압해 온 탓에 말하는 법마저 잊어버린 것이다. 당황하여 자신의 목을 감싼 노예를 향해 쥬다스가 철창 사이로 손을 뻗었다. “괜찮아.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입을 뻐끔거리는 그녀의 눈앞에 따스함을 품은 손이 내밀어졌다. 함부로 와 닿지도,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는다. 노예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손에서 흐르는 기운을 조심스레 맡았다. “정말 네가 말하고자 하는 건 들을 수 있단다.” 적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기운이었다. 수인족 노예는 동물적인 본능으로 그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존재란 사실을 알아차렸다. “저…….” 그 순간, 노예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입을 열었다. “저를 구매하실 건가요……?” 순간 쥬다스의 곁에 서 있던 다른 일행들은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살짝 미간을 좁힌 에단이 속으로 단언했다. ‘맙소사. 이건 단순히 치유력 따위가 아니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그걸 듣는 순간 ‘슬픔’이란 감정에 저절로 사로잡혔었다. 가슴이 울렁거리는 답답함과 울컥 치솟아 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훌쩍이기 시작한 기사단원도 있었다. 아마 상처를 치유하는 힘도 함께 실려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다른 기능이었다. 쥬다스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로 듣는 이들의 감정을 동화시키는 이능인가.’ 간혹 이처럼 두 가지 이상의 이능을 동시에 타고 나는 이들이 있다. 마법사, 치유술사, 정령술사처럼 잘 알려진 능력이 아니라 어느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는 특이한 능력을 가진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노예를 살 생각은 없단다.” 그 말에 수인족 노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쉬웠다. 어차피 한평생을 속박당해 살아가는 노예에게 있어 소원이 있다면 좋은 주인에게 팔리는 것이었다. “다만.” 쥬다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곳 미드가르드가 힘으로 모든 걸 뒤집을 수 있는 나라라면, 그는 기꺼이 사로잡힌 노예들을 위해 싸워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에는 명확한 이유가 필요했다. 섣부른 동정심으로 노예시장을 뒤엎어 버리면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너희가 가진 꿈에 대해 듣고 싶구나.” 그래서 그는 노예의 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저 노예는 다른 연재글 주인공인 에스티오와 비슷한 감정계 능력자입니다.ㅎ (물론 남의 감정을 읽거나 지배하여 원하는대로 조종할 수는 없으니 능력의 등급이 훨씬 낮은 편입니다.) 요즘은 매일매일 날씨가 좋네요.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0190 / 0240 ---------------------------------------------- 22장. 개미의 꿈 “꿈…….” 철창에 갇힌 양 수인족은 평생 동안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한 단어를 어색하게 발음해 보았다. 태어나 처음 느끼는 울림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쥬다스는 차가운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그런 그녀를 기다려 주었다. 한참을 ‘꿈’에 대해 생각하던 수인족 노예가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런 건……. 없어요…….” “갑자기 생각해 보려니까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야.” 쥬다스는 ‘없다’라는 표현을 ‘떠오르지 않는다’로 고쳐주었다. 언뜻 작은 차이 같지만 그 한 마디만으로도 수인족 노예는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꿈을 품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녀는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정도로 더러운 지푸라기가 깔린 바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침묵으로 긍정을 표했다. “음.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꾸나.” 쥬다스가 문득 질문을 바꿨다. “지금 이 낮이 지나면 캄캄한 밤이 찾아오겠지. 어쩌면 그때까지도 너는 이곳에서 힘들어할지도 모르지만.” 노예시장은 낮보다는 밤에 손님이 많았다. 어둠이 내린 미드가르드는 낮보다 환히 불을 밝히고 훨씬 더 자극적이고 대담한 방식으로 이목을 끌기 시작한다. 쥬다스는 이를 짐작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구경꾼은 사라지고 개 짖는 소리마저 잦아드는 시간에 너 역시도 잠이 들겠지. 바로 그렇게 편안히 잠든 사이에 네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이……?” “그래. 하지만 너는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밤사이 기적이 일어난 줄을 모를 거란다.” “아.” “그리고 마침내 눈을 뜨고 일어났을 때. 그때 너는 가장 먼저 무엇을 보면 ‘기적이 일어났다’라고 느낄 수 있겠느냐?” 수인족 노예는 멍하니 그의 말을 곱씹었다. ‘기적? 나에게 기적은.’ “1년…….” 소녀와 여인의 경계에 선 그녀는 몽롱한 눈빛으로 답을 찾았다. “하루가 아니라. 1년 정도만 죽 잠들어 있었다면…….” 아플 정도로 주린 배를 채우고 싶다는 것도, 자유를 얻어 철창을 나가고 싶다는 것도 그녀의 소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욱 간절했다. “지금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구나.” ‘맞아. 지금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쥬다스의 말에 그녀는 속으로나마 강하게 인정했다. 당장 이 모든 현실을 버티기엔 너무나도 지쳤다. 하지만 죽는 건 무서웠다. 그러니까 1년 정도 오래오래 잠들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좋은 주인님을 만난다면.” 당장 굶주림을 해결해 봤자 노예의 삶은 다시 허기진다. 철창 밖을 나가 자유의 몸이 된다고 해서 몸에 찍힌 낙인이 지워지는 건 아니다. 상품으로 판매되는 노예는 전부 오랜 시간 철저히 노예로 훈련받거나 태어나면서부터 노예였던 이들이다. 스스로 일어선 적 없는 나팔꽃에게서 타고 오를 담벼락을 뺏는다면 꺾여 쓰러질 뿐이다. 마찬가지로 노예들은 노예가 아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쥬다스는 노예 의식에서 분리되지 못하는 수인족을 보며 그 점을 간파해 냈다. ‘이들을 당장 풀어주는 건 곧 물고기를 물 밖으로 꺼내는 짝이나 다름없구나.’ 책임질 수 없는 구원은 결국 독이다. 그의 금안이 잠시 짙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다시 갇힌 노예에게로 향했다.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 수인족 노예는 빙긋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뽀송뽀송한 양의 귀가 시무룩하게 축 늘어졌다. 그대로 자리를 떠날 것처럼 보였던 쥬다스는 멈칫 돌아서려던 걸 멈추고 그녀를 다시 불렀다. “참, 아이야.” 누가 봐도 그녀는 ‘아이’라 불릴 나이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쥬다스가 부르는 호칭에는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목소리가 아주 어여쁘구나. 참으로 듣기 좋다.” “…….” “그렇지, 노래를 한다면 퍽 잘 어울릴 것 같아.”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칭찬이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저주라 여기고 숨겨왔던 수인족 노예는 낯간지러운 느낌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가슴께에 모아 꼭 쥐었다. ‘노래?’ 가사까진 몰라도 알고 있는 멜로디는 몇 가지 있었다. 노래는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하찮은 노예는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 그리 생각하고 동경해 왔다. ‘내가 노래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쥬다스는 이 짧은 만남 동안 그녀에게 지금껏 접해본 적 없는 새로운 감각과 소망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수인족 노예가 벼락 맞은 나무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사이 돌아선 쥬다스에게 가야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주인.” ‘……저 사람도 노예인가?’ 양 수인족은 아리송한 눈으로 쥬다스와 가야를 번갈아보았다. 가야는 노예치곤 차림새가 멀쩡한데다 태도도 몹시 건방졌다. 겉보기에는 젊은 청년처럼 보이는데 대충 풀어헤친 옷자락에 손을 넣고 옆구리를 벅벅 긁는다거나 하는 행동은 배나온 아저씨를 연상케 했다. “배고프다. 밥 먹자.” 심지어 반말까지 했다. 뻔뻔스러우리만치 당당하게 식사 시간을 챙기는 가야를 보며 수인족 노예는 그가 결코 노예일 리 없다고 확신했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초콜릿 튀김 팔더라. 그거 어때?” “무진장 느끼할 것 같은데요.” “그럼 초코바나나 튀김.” “초코에 바나나가 붙었을 뿐이잖아요?!” 바이칼의 열띤 반박에 가야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하품했다. “하아아. 거 까다롭네. 자꾸 편식하면 키 안 큰다, 너.” “……가야 님이 그런 말씀하시면 진짜 같으니까 하지 말아주십쇼.” 하늘이 내리는 성장 중단선고 같은 걸 받은 기분이 든 바이칼이 우울하게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키가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 멋지게 큰 편도 아니었다. 에단과 비교하자면 한참 모자랐고 동년배들 사이에선 평균 수준에 해당했다. 말하자면 2살 어린 쥬다스와 같은 수준이었으니 더 신경이 쓰이는 정도였다. 그래도 아직은 성장기였으니 충분히 더 자랄 가능성이 있었다. 한 발짝 앞에서 혀를 차는 에단을 억울함과 부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응시한 바이칼이 푹 한숨을 쉬었다. “넌 좋겠다, 플루비. 물만 먹으면 자랄 수 있어서…….” “삐잉?” 얌전히 그의 어깨 위에 자리 잡고 앉아 졸고 있던 플루비가 제 이름을 듣고 깨 주황색 눈을 끔뻑거렸다. “흐음. 플루비는 정말 물만 먹고 살아?” “블루 와이번이니까요. 뭐 간식 정도야 종종 챙겨주는 편입니다만.” 완전히 잠이 깬 플루비는 간식 얘기에 지레 신이나 긴 꼬리를 살랑였다. “튀김류도 먹나?” “이놈 식성 자체는 잡식성입니다. 어릴 때 습관 탓인지 유독 고기를 좋아하긴 하더라고요. 튀김도 기름기가 많으니 좋아할 것 같긴 한데.” “그럼 역시 튀김으로 정하자.” “아니, 그러니까 왜 우리 점심 메뉴가 플루비 입맛으로 정해지는 거냐고요!” 수인족 노예는 시장의 소음과는 다른 분위기로 왁자지껄 떠들며 사라지는 쥬다스 일행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가슴속에 죽어 있던 꿈이 희미하게 등불을 밝히다 금방 다시 사그라졌다. 그녀는 끌어 모은 무릎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노예는 정해진 삶을 살 뿐이다. 꿈을 이야기해 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녀 자신과 달리 아름답게 빛나는 존재를 보고 조금 설렜을 뿐이다. ‘기적…….’ 그의 맑은 금안은 놓치기 싫어 꽁꽁 숨겨온 목소리를 냈을 정도로 보기 좋았다. 평범한 갈색 머리카락이었지만 그마저도 햇빛을 받아 찰랑이는 수면처럼 반짝였다. ‘사실은 그분을 만난 오늘이야말로 기적일 거야.’ 그동안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던 목소리가 그에게만큼은 닿았다. 평생에 찾아올 리 없을 그런 만남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편안한 표정을 짓던 수인족 노예는 문득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미풍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긋. 쥬다스를 가호하던 바람의 정령이 그녀의 곁에 남아 미소 짓고 있었다. ―기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 * 노예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일단 노예로 교육받는 자는 감히 주인에게 반항할 수 없도록 끊임없이 마음을 죽이는 과정을 겪는다. 그 과정은 무척 정교하고 오랫동안 지속되며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유의지를 완전히 말살한다. 종을 울리면 침을 흘리게 되는 개처럼 주인에 대한 복종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게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노예가 보통 사람들은 꿈도 못 꿀 비싼 값에 거래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단순히 사람을 납치한다고 해서 아무나 노예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사람은 늘 자유 의지를 추구한다. 편해지고자 하는 욕망,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야망이 무조건적인 복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흠. 역시 어렵겠지.” 단호하게 반대를 표명하는 에단을 보며 쥬다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웃었다. 차마 주군의 뜻을 따르지 못한 에단은 침울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부디 소신의 불복을 벌하소서.” “아니, 언제나 내게 진솔하게 의견을 표해 주어서 고맙게 생각한단다. 에단.” “하오나.” “앞으로도 그리해 주려무나.” 이어지는 격려에도 에단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늘 현명하고 자애로워 수하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주군은 가끔 폭탄발언을 해서 그들을 발칵 뒤집어놓곤 했다. 다름 아닌 지금처럼, ‘아무래도 양측 입장이 난해하구나. 이럴 땐 아예 하룻밤 정도 직접 노예의 입장이 되어보는 게 확실히 알 수 있을 터인데.’ 따위의 제안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내뱉곤 하는 것이다. 발언이 아니라 망언에 가까웠지만 에단은 단호하게 이를 잘라냈다. 그가 아무리 쥬다스를 주군으로 모시고 그의 명을 따르는 기사라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제국의 황태자가 평민도 아니고 한낱 노예 노릇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주인을 물심양면으로 섬기는 에단으로선 극단적으로 택하자면 차라리 이를 막다가 목이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다행히 쥬다스도 그냥 던져본 말인 듯 수하들의 정색하는 면면을 보고 농담처럼 웃으며 지나갔다. “해서, 우리는 노예시장의 밤를 파고 들어간다.” ‘그래도 조금쯤은 더 신중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쥬다스는 속으로 난처한 한숨을 삼켰다. 그로서도 수하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이제 전생의 평민 이그레트가 아니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란 사실은 알았지만 시도라도 해보고 싶었다. 사실 그가 지금 신중하고자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실패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사람은 결코 완벽할 수 없으니.’ 그는 자신의 선택이 틀릴 수도 있음을 걱정하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하겠다는 마음 자체가 독선이 될까 두려웠다. 쥬다스는 마치 발밑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밟아죽일 수 있는 어린아이와도 같았다. 재미로 죽일 수도 있고 개미가 집에 들어와 해칠까 우려되어 짓밟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판단은 늘 자기 시야에서만 이루어진다. 어쩌면 ‘구하고 싶다’, ‘고치고 싶다’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걸지도 몰랐다. 노예시장이 불합리하고 불행한 구조라는 건 그 자신만의 가치관일 수도 있다. 그가 세상에 관여하는 순간 모든 것은 손쉽게 이루어질 테지만 그건 결국. ‘한 사람의 생각이 세상의 질서가 된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선택을 기뻐했던 프리드가 한 이야기와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눈에 문제가 좀 생겨서... 원고작업 중에도 이상이 생긴 상황입니다..ㅠ.ㅠ; 어느덧 한주의 마지막인 금요일이 되었네요. 저는 금요일 저녁 시간이 제일 행복하더라구요.ㅎ 다들 평안한 밤 보내시고, 즐거운 주말 맞으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 0191 / 0240 ---------------------------------------------- 22장. 개미의 꿈 쥬다스는 일단 노예시장을 빠져나가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낮은 언덕에 말을 풀어 쉬게 했다. 그리고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노예시장에 대한 정보를 세세하게 수집하였다. 「이런 건 유니가 전문인데 아쉽네요.」 「나요도 잘할 수 있다요!」 「으응, 물론 땅도 사방에 펼쳐져 있으니 웬만한 정보는 다 모아올 수 있긴 하지만.」 흰 치맛자락을 다소곳하게 모아 쥔 카니가 곁에서 의욕을 불태우는 토니를 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필요한 정보를 판별하고 정리해 주는 역할은 유니가 야물게 잘하는 편이니까요.」 「우으으. 그건 그렇다요…….」 토니는 순순히 그 차이를 인정했다. 계약자가 원하는 정보를 중요도별로 정리해서 전달하는 역할은 주로 바람의 정령인 유니가 도맡아 해왔다. 그러나 유니는 현재 쥬다스의 곁에 없었다. 그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은 다른 임무를 맡고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이 정도면 충분해. 고맙다.” 쥬다스는 유니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정령들을 다독여 주었다. 저녁을 지나 밤에 가까워지는 시각, 하늘이 갓 짜낸 물감처럼 검푸른 색상으로 어둑어둑 물들어갔다.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시장은 길목마다 밝혀둔 불빛으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조명도 한 가지 종류가 아니라 붉은색, 녹색, 파란색 등 형형색색의 불빛이 번쩍거려 마치 축제라도 하는 듯 화려했다. “참 모순적이네요.” “세이지.” “인간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장소가, 가장 큰돈이 오가는 상류세계라는 것이.” 지금까지 세이지는 형을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왜 루바르잔 역사에서 황제의 후계자가 순례의 길을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단순히 신하들에게 대접을 받고 권력을 즐기며 편안히 여행을 다니라는 취지가 아니었다. 세이지는 포탈을 이용하지 않고 험준한 여행길에 몸소 부딪히고자 한 쥬다스의 선택을 이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몬스터도 사령도 없는데.” 지금 세이지의 눈에도 보였다. “왜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서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걸까요?” 힘을 가진 자가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사람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사회.’ 지도자란 결국 삶을 지키는 자다. 사람이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고 정치하며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주를 진정으로 따르며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다. 그저 당연히 올라야 할 권좌에 올라, 힘을 휘두르고 억압하여 봤자 지금 노예를 부리는 무도한 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된다. “루바르잔을 그리 만드는 게 우리 역할이지 않겠느냐.” 쥬다스는 우울해 보이는 동생을 향해 빙긋이 웃어주었다. “물론 여긴 루바르잔이 아니니 우리가 황족으로서 의무감을 느낄 필요는 없지.” “예? 그렇지만 형님은…….” 세이지는 의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밤까지 기다린 쥬다스에게 의문을 느꼈다. 그 의아한 눈빛에 쥬다스는 작게 미소를 흘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미드가르드에 왔으니 미드가르드의 법을 따라볼까, 하고 말이다.” “미드가르드의?” ‘무법국가’라 불릴 정도로, 미드가르드에선 확고하게 지켜야만 하는 법이 몇 가지 없었다. 세이지가 무슨 말인지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사이 쥬다스는 미리 챙겨둔 가면을 착용했다. 시장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모양이었는데 색상은 검은색으로 눈과 코까지 가려주며 턱선은 내보이는 반가면이었다. 사실 노예를 사는 것이 몇몇 나라에서는 불법이기도 했고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닌지라 야시장에 찾아와 거액의 돈을 주고 노예를 구하는 귀족들은 주로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곤 했다. 그 풍토를 따라 자연스럽게 얼굴을 가린 쥬다스는 이번엔 챙겨온 고급 망토를 꺼내 두르고, 거기에 검은색 천으로 문양을 감싼 황룡쇄를 지팡이처럼 한 손에 드니 영락없이 부유한 집안의 귀족 도련님으로 보였다. 멍하니 변장인지 변신인지 모를 형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 세이지에게 불쑥 코앞으로 가면이 내밀어졌다. “자아, 자. 세이지 님도 얼른 이거 쓰시죠.” “어? 나도?” “‘나도?’라뇨, 무슨 말씀이십니까? 연극의 꽃은 손발이 잘 맞는 조연들이라고요.” “하아?” 어느 틈엔가 바이칼도 윤기 나는 검은색 고급 로브를 걸치고 마법기사다운 태를 다듬어둔 상태였다. 그뿐 아니라 여행객 차림으로 있던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환복을 마친 상태였다. 에단은 호위기사의 차림이었고, 크리스티나는 모처럼 외출용 드레스를 차려입어 레이디로 치장했다. “자, 잘 어울리……! 아니, 다들 어느 틈에.” “코르토반 님과 나머지 기사들은 일반인으로 위장하여 근처에서 호위하기로 하였습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가면과 재킷을 받아 착용하는 세이지에게 바이칼이 덧붙였다. 쥬다스로부터 대충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세세하게 준비할 줄은 몰랐던 세이지는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동생을 보며 쥬다스는 황룡쇄를 어깨에 걸친 채 느긋하게 일러주었다. “지금부터 우린 노예를 사러 온 귀족들이다. 노예에 대해 호기심이 많으며 필요하다면 방탕하게 소비할 생각도 있지.” “……그런 역할을 연기하란 뜻인 거죠?” “영 어렵다면 그냥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자신이 없긴 했다. 세이지는 처음 여행을 시작할 무렵 들렀던 레이븐 영지에서 쥬다스가 보여준 ‘바보놀음’을 떠올렸다. ‘그땐 정말 형님이 이상해지신 줄로만 알았지.’ 그만 깜빡 속을 정도로 기가 막힌 연기였다. 혹시 루바흐 학원에서 연기 수업도 가르치나 싶을 정도로 그럴듯했다. “네, 한번 해볼게요.” “좋아. 그럼 출발하자. 각자 위치에서 조심해서 움직이도록 하여라.” “예!” 먼저 일반 여행객 차림의 기사들이 노예시장 내부로 투입되었다. 그리고 바람과 불의 정령을 동시에 운용할 수 있는 콜이 그들을 따라가 신호를 주고받는 임무를 맡았다. 마지막으로 잠시 간격을 두고 쥬다스와 세이지,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 한 일행으로 뭉쳐 시장으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을 환영합니다!” 대낮처럼 환히 불을 밝혀놓은 시장에 발을 들이자마자 입구를 지키는 덩치들이 우렁차게 인사했다. 말로는 환영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들은 야시장 입장 요금을 받는 관리인들이었다. 요금을 지불하고 시장에 들어서면서 일행의 표정은 굳어졌다. 세이지는 그 표정이 가면에 가린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우와. 같은 노예시장인데도 분위기가 낮과는 완전 딴판이구나!’ 낮에는 말마따나 물건을 파는 시장처럼 각자 노예를 진열해 놓고 판매했다면, 밤의 노예시장은 하나의 거대한 경매장이었다. 자잘한 천막을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서커스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무대를 마련했다. 무대에는 쉼 없이 다양한 노예가 올라왔고 낮 시장에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가격에 팔려 나갔다. 시장에 몰려든 인파는 많은데 딱히 좌석이 지정되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건 일찍부터 앞줄에 자리 잡은 자들이나 힘으로 밀고 들어간 강자들 위주였다. “안녕하십니까요? 꼬마 도련님들.” “후후. 처음 와보시나 봐요? 귀여워라.” 이제 막 시장에 들어와 초보 티가 흐르는 쥬다스 일행에게 두 남녀가 접근했다. 대머리가 홀랑 까진 남자와 노출이 심한 옷을 걸친 금발미녀였다. 그들은 다 안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속살거리기 시작했다. “여기 참 복잡하죠? 이런 데에선 가이드 없이 돌아다니면 아주 큰일 납니다. 아닌 밤중에 뒤통수 맞으실 수도 있다구요.” “가이드?” “하하! 저희야 뭐 야시장 안내도 해드리고. 경매장 참여도 도와드리고. 그 외 밤중에 필요한 이런~ 저런~ 일을 도와드립죠.” “노예사용법은 아시나요? 처음이시면 우리가 잘 알려드릴 수 있는데에. 응?” 상대가 가이드도 모르는 초짜라는 사실을 알자 접근해 온 남녀는 은밀한 시선을 교환했다. 아직 어리고 순해 보이는 세이지에게는 남성 가이드가 붙어 유려한 말발로 가이드 고용을 종용했고 쥬다스에게는 여성 가이드가 붙어 애교를 피워댔다. “아이 참, 오빠들. 놀러온 김에 화끈하게 놀고 가요.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구경만 하고 갈 건 아니잖아?” 쉽사리 고용한다는 답이 돌아오지 않자 여성 가이드는 속으로 코웃음 쳤다. ‘흐응, 이제 겨우 십 대 중후반? 이 나이 때 귀한 집 애들이야 뭐, 적당히 자극만 해줘도 쉽게 넘어가지.’ 그녀는 상대를 유혹해 보고자 좀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렇게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속삭이던 순간이었다. “어때요. 내가 자세히 알려줄……꺅!” 화륵! 갑자기 허공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화들짝 놀라 볼품없이 엉덩방아를 찧은 여성 가이드의 턱에 검은 지팡이가 와 닿았다. “싸구려 수법. 과연 시장 바닥답긴 하구나.” “……아.” “지저분한 건 그럭저럭 봐줄 만하지만.” 지팡이 끝에 붉게 빛나는 정령이 파앗 실체화하여 내려앉았다. “나는 천한 것들이 건방지게 구는 걸 싫어해.”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소년의 입에서 싸늘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두 가이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십여 년 이 바닥에서 구른 가이드로서의 촉이 경보를 울려댔다. 그 경보를 종식시키는 명령이 떨어졌다. “똑바로 꿇어.” ‘망했다.’ 두 가이드는 부리나케 자리에 무릎 꿇었다. 가면 사이로 언뜻 엿보이는 금안이 사자의 눈동자처럼 냉혹했다. 그들은 상대가 어설픈 초짜가 아니라 지배하는 일에 익숙한 맹수의 새끼였음을 깨달았다. 가이드를 무릎 꿇린 쥬다스는 에단에게 눈짓하여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케 했다. “마침 정보가 필요했던 건 사실이었으니 너희들을 고용하겠다.”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의 액수는 평소 그들이 받던 비용의 스무 배가 넘었다. 가뜩이나 귀족들 상대로 비싼 값에 후려치던 가이드 비용이었으니 그 스무 배가 넘는 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엄청난 고위귀족!’ 이대로 잘 만하면 망한 게 아니라 제대로 크게 한 방 물었다는 생각에 풀죽어 있던 가이드들의 눈빛이 살아났다. “마, 말씀만 하십쇼. 무엇이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1열.” “예?” 남성가이드는 간신히 미소 짓던 입매 그대로 굳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하는 사이 쥬다스가 단호하게 재차 언급했다. “이 경매장에서 최고로 좋은 자리.” 그는 오만하게 사람들이 바글바글 들어찬 무대 주변을 턱짓했다. “뒷자리엔 흥미 없거든.” “그, 그게. 하지만 1열은 이미 자리가.” “무엇이든 안내해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 뜻이 아니잖아! 적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걸 맡기라고오오!’ 방금 했던 말이라 무를 수도 없었다. 가이드들은 이제 표정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다. 울상이 된 두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입모양으로 방법을 강구했다. 하지만 중간열도 아니고 1열에 자리를 마련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건 현재 1열을 차지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것과도 같았다. “흠. 가이드가 꼭 둘일 필요는 없겠지.” 쥬다스가 지팡이를 짚으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그들에겐 꼭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불금 보내고 계신가요? ㅎ 핫핫. 모처럼 12시 연재를 하러 왔습니다 (?) 참, 본래 학원 루바흐에서 만나 친해졌던 아이들(치료술사 리이나, 정령술사 리베흐, 그 외 마르젠 등)은 3부에 등장 계획이었습니다.ㅎ 다만 3부가 이어서 진행이 될지 안될지는 아직 결정이 나질 않아서.....(...)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더리더-에스티오'의 연재도 재개하였습니다. ^^) 0192 / 0240 ---------------------------------------------- 22장. 개미의 꿈 에단의 손이 소리 없이 검 손잡이에 올라가는 걸 본 가이드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대로 못하겠다고 드러누웠다간 정말로 차가운 시신이 되어 눕게 생겼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결국 선택은 하나였다. “지금 바로 1열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생각으로 돌아섰다. 사람이 가득 들어찬 경매장을 뚫고 들어가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진상 손님들을 제재하기 위해 가이드 연합이 있지만 반항했다간 도움을 받기도 전에 이미 저세상으로 떠날 게 분명했다. 강자에겐 복종하는 수밖에 없다. 미드가르드의 철칙이 여기서도 빠짐없이 적용되었다. 그들은 억울함을 느끼기보단 당연한 심정으로 쥬다스의 명에 따랐다. 그가 보여준 무력은 불의 정령 하나뿐이었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눈만 마주쳐도 짓눌리는 기분이었다. 단순히 귀족이라서가 아니라 확실한 강자였다. 그래서 그들은 군소리 없이 일단 1열로 안내해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문제가 있었다. “잠시 지나가겠습니다요.” “뭐? 지나가긴 어딜 지나가?” 아직 1열에는 도달하지도 못했는데 중간 지점을 지나면서부터 벌써 다른 손님들과 부딪혔다. 중간 열부터는 힘 좀 깨나 쓴다는 권력층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돈이 오가는 시장이니 몰려드는 손님들은 하나같이 고위계층일 수밖에 없었다. 자리싸움 끝에 힘들게 얻은 위치를 양보하려는 멍텅구리는 이곳에 없었다. “지나갑니다요. 죄송합니다만 손님. 잠시만…….” “죄송한 줄 알면 저리 꺼져.” “왜? 왕이라도 행차하셨냐?” 킬킬, 한차례 비웃음 세례가 쏟아졌다. 쥬다스를 안내해 온 두 가이드의 표정이 눅눅하게 짓무르자 다른 손님들에게 고용된 가이드들이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어허! 이거 알 만한 가이드들이 왜 이래? 겁도 없이 어딜 끼어들려고.” “법은 없지만 상도는 지켜야지. 어떤 자리를 원해서 그러나? 형님들이 구해다 줘?” “1열까지 가야 합니다요.” “……?” 안내를 맡은 이상 이렇게 되리란 건 예측하고 온 쥬다스의 가이드가 단호하게 답했다. “1열 말이요. 그러니까 비켜주십쇼.” 당당하게 1열을 가야겠다는 대꾸에 왁자지껄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워낙 어처구니가 없다 보니 미처 할 말을 찾지 못한 까닭이다. “이보게, 초짜 도련님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가이드들 대신 가면을 쓴 다른 손님이 비아냥거리며 조언하기 시작했다. “다른 나라에서 누리던 귀족 지위는 여기서 아무 쓸모없수다.” “맞소. 귀족이든 왕족이든 알 게 뭐야? 여긴 미드가르드인데.” 다른 몇몇 손님도 수군거리며 동조했다. “설령 그대들이 다른 나라의 왕이라고 해도 우리가 비킬 이유는 하등 없다는 거요. 좋은 자리를 맡고 싶으면 지나가는 자리마다 돈을 내시오. 그게 싫으면 시솝 정도의 무력을 갖추고 죄 짓밟아버리든가.” 미드가르드는 같은 대륙 내에서 제국이 유일하게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땅이다. 그만큼 국력이 강했고 그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머리 숙이는 대상은 미드가르드의 운영자, 즉 시솝뿐이다. “흠. 시솝?” 알겠다는 듯 짧게 읊조린 쥬다스는 곧 가볍게 웃었다. 늘 짓던 편안한 웃음이 아니라 상대를 깔아보는 오만한 미소였다. “이거야 원, 노예를 사러 왔더니.” 그는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는 이들을 힐끗 눈으로 훑었다. “과연 어딜 봐도 노예가 되길 자청하는 이들뿐이로구나.” “뭐요?” “시솝의 힘 아래 복종하는 너희가 저 무대의 노예나 다를 바 무어냐.” 야시장을 즐기러 온 인원 대부분이 자존심 높은 고위계층이었던지라 도발에 넘어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건방진!” 챙! 누군가 검을 빼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쥬다스를 노린 날붙이는 그에게 닿기도 전에 에단에 의해 가로막히고 말았다. ‘빠르다.’ 덤빈 사내는 물론이고 지켜보던 사람들도 놀라 흠칫했다. 아무도 그가 움직이는 걸 본 적 없는데 이미 공격을 막아서고 상대의 검을 동강 내버렸다. 단 일격만으로 완패. 정말이지 귀신같은 몸놀림이었다. “계속 안내해.” “예? 예, 예!” 벙 쪄있던 가이드가 각 잡힌 자세로 앞장섰다. 그러나 어렵사리 자리를 차지한 다른 손님들은 그 정도 무력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놈들을 제압해!” “저 자식들 호위는 제아무리 날뛰어봐야 검사다. 근접전이 아니라면 쪽을 못 쓰겠지!” 경매장에 모인 사람들이 전부 큰돈을 굴리는 고위계층이다 보니 각자 실력 있는 호위를 데리고 다녔다. 검사들이 에단과 상대하는 사이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하자 바이칼이 스태프를 꺼내 들며 투덜거렸다. “거 성급들 하시긴. 누가 우리 팀에 검사만 있답니까?” 이미 완성시켜 둔 마법진이 발밑에서 번쩍 빛났다. 마력끼리 충돌하며 내뿜는 빛으로 그의 검은 로브가 파랗게 물든 채 펄럭였다. “잠시 일시정지 해주시죠. 타임포즈(Time-pause).” 허를 찌른 기습에 공격을 준비하던 마법사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춰 버렸다. 잠깐이지만 동작이 제한되면서 정교하게 모아놓은 마력 배열이 흐트러져 마법이 우르르 캔슬되었다. 에단이 상대한 검사들은 전부 자로 대고 자른 듯 똑같은 길이로 잘려나간 검을 보곤 전의를 잃은 상태였다. 그 사이를 유유히 지나가는 쥬다스 일행을 보며 중간열 손님들의 표정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물론 제압을 시도했던 사람 수가 몇 안 되긴 했다. 경매장은 지금 노예 구매를 위해 후끈 달아오른 상태였다. 시끄러운 소음 속에 묻혀 이런 사사로운 다툼 따위에 신경을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쳐도 머릿수로만 따지면 공격을 가한 쪽이 훨씬 많았는데도 졌다는 건 그들 간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증명했다. ‘말뿐인 허세가 아니란 말인가?’ 제압에 실패한 사람들은 쥬다스가 지나가자 주춤주춤 물러섰다. 자연스레 길이 열리자 무대에 집중하고 있던 1열 손님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응? 시장 가이드로군. 뭐지?” “크흠흠. 혹시 자리 파실 분 안 계십니까요?” 가이드의 물음에 가면을 쓴 1열 손님들이 일제히 쥬다스 일행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부채로 입을 가린 여성이 옆에 앉은 남성에게 작게 웃으며 수군거렸다. “어머나. 새로운 이벤트인가 봅니다.” “잘됐군. 무대가 좀 따분해지려던 참이긴 했어.” “이제 이런 식으로 노예를 경매하는 건가?” 1열에 자리 잡은 건 로얄 중에서도 로얄 계층의 손님들이었다. 특별대우에 익숙한 그들은 갑작스런 상황에서도 고압적인 태도를 잃지 않고 이를 즐겼다. 자리를 구하려한 쥬다스의 가이드만이 난처함에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그러고 서 있지 말고 소개를 좀 해주지그래?” “호오, 저 여아의 머리 색깔은 탐나는군.” “…….” 누군가 크리스티나의 머리카락을 가리키며 품평했다. 그러자 가면에 가려진 크리스티나의 눈매가 차갑게 굳어졌다. “그, 이분들은 상품이 아닙…….” “아니라면 상품으로 만들면 그만이지.” 가면에 얼굴을 가린 이들은 본연의 모습이 가려졌다는 생각에 취해 저열한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평소라면 귀족의 품위와 체면을 생각하여 짓지 않았을 음흉한 미소도 가면 아래 마음껏 취했다. “귀족 출신의 노예도 길들이는 맛이 있을 것 같지 않나?” “어머. 확실히 들어본 적 없어요.” “최고의 상품이 되겠군!” ‘아이고, 하필이면.’ 상황이 이쯤 되니 바이칼은 크리스티나가 얌전히 참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걱정을 넘어 불안감마저 느꼈다. 바이칼이 알고 있는 크리스티나 R.델피아란 여인은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며 자존심이 상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하는 꼿꼿한 인물이었다. 그런 여자가 상관의 계획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고스란히 수모를 당하고 있다. 새삼 그녀가 쥬다스에 한해서만큼은 얼마나 자신을 내어놓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안 그래도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인데, 다들 동의한다니 잘되었구나.” “응?” 설마하니 조롱하던 상대가 저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1열 손님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쥬다스는 지팡이를 들어 가장 먼저 크리스티나를 탐냈던 사내를 척 가리켰다. “‘귀족 출신의 노예’.” 자신들의 입으로 한 얘기인데 이상하게 모욕감이 느껴졌다. 사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쥬다스는 그를 올려다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나도 그 최고의 상품을 가지고 싶어졌거든.” 천근같은 침묵이 장내를 감돌았다. 가면에 가려지지 않은 나머지 부위를 시뻘겋게 물들인 상대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빼 들었다. 타앙! 고막이 먹먹해지는 총성이 울렸다. 이를 기점으로 더 이상 무대에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무대에서 노예를 소개하고 있던 사회자조차 진행을 중단하고 그들의 상황에 집중했다. 쥬다스는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 궤적에 힐끗 시선을 주었다. “보아하니 부하가 제법 실력 있는 검사인 모양이오. 하지만 이 나라에선 칼 같은 구린 무기는 안 통해, 형씨.” ‘총.’ 미드가르드를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기계국’인 이유. 그들이 마법 대신 기계와 과학 등으로 이루어진 색다른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었다. 기계를 움직이는 동력은 마법과 똑같이 마력을 사용했지만 발동 원리는 아예 달랐다. 나라 초입에 위치한 노예 시장에선 온갖 문화가 뒤섞여 기계가 잘 눈에 띄진 않았지만 미드가르드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기본적인 문물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마력 탄환을 채워 발사하는 ‘마력총’이었다. 철컥! 철컥! 여기저기서 총을 꺼내 겨누는 소리가 들렸다. “수하 중에 마법사도 있군? 루바르잔 제국에서 온 건가.” “…….” “하지만 마법 발동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마법사로는 총을 막을 수 없지. 시험해 보고 싶다면 덤벼도 좋지만. 기왕이면 살아 있는 노예로 부리고 싶으니 무기를 버려라.” 총을 든 남자가 말이 없는 쥬다스를 보며 친절하게 충고해 주었다. 물론 겁을 먹었으리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쥬다스는 흥미롭게 그들이 쥔 총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으음, 서적에서 본 미드가르드 기계식 무기가 저건가. 실물로 보니 제법 구조가 복잡해 보이는데. 마법과 과학이 결합된 제품인가?’ 그는 한때 현자로서 연구에 기여했던 인물이었다. 그건 비단 타인의 요구에 맞춰주었던 것만은 아니라 스스로도 연구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남자는 쥬다스가 총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줄도 모른 채 우월함에 도취되어 주절거렸다. “루바르잔도 이젠 퇴물이야. 뭐가 마법강국이란 말이냐. 다시 한 번 시솝께서 전쟁의 시대를 일으키신다면 분명 발밑에 무릎 꿇릴 수 있겠지.” “…….” “뭐, 걱정 마라.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우리의 노예로 들어오면 죽을 위험은 없질 않나. 특히 거기 푸른 머리 아가씨는 얼굴도 반반할 것 같은데.” 처음부터 크리스티나를 점찍었던 사내는 아예 가면 속에 숨겨진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가면부터 벗어보지 그래…… 응?” 삐삐삑! 갑자기 그가 들고 있던 총에서 경고음과 함께 과열을 뜻하는 붉은빛이 빠르게 깜빡였다. 어떤 대처도 하기 전에 화륵 열기에 휩싸인 총은 그대로 손안에서 폭발해 버렸다. “끄아악!” 폭발과 함께 손이 날아간 사내가 자리에 털썩 쓰러졌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귀부인들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고 총을 겨누고 있던 다른 이들이 일단 방아쇠를 당겼다. 두두두두! 요란한 총성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뭐, 뭐야, 저게!” 알 수 없는 푸른 장막에 가로막힌 마력 탄환들이 치이익 김을 내뿜으며 산화되어가고 있었다. 본래 마력이 응집된 강력한 탄환들은 마법사들이 설치한 정교한 실드조차 뚫어버린다. 이처럼 아예 장막에 가로막혀 녹아버린다는 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기계는 열에 약하군.’ 정령의 힘을 운용해 총을 터뜨리고 동시에 탄환을 막아낸 쥬다스는 별 감흥 없는 얼굴로 그들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가 다가서는 만큼 공격을 가했던 1열 손님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해괴한 광경이 벌어졌다. “그래.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게 당연한 법도라면.” 그의 지팡이 끝에 몰려든 붉은 기운이 괴물의 눈처럼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제부턴 내가 너희들의 시솝이 되면 되겠구나.”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역시 먼치킨다운 간단한 해결안... 참 쉽죠? (?) 쿨럭. 좋은 주말 보내고 계신가요? ㅎㅎ 벌써 일요일이라니.ㅠㅠ 주말만 되면 시간여행자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냥 눈 몇 번 깜빡이고 숨 좀 쉬었을 뿐인데 지나가버렸다... 그럼 남은 주말 평안히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ㅎ 0193 / 0240 ---------------------------------------------- 22장. 개미의 꿈 장내에 무섭도록 깊은 고요가 감돌았다. 경매장에 입장한 인원은 무려 천 명이 넘었는데 전원 미동도 없이 침묵을 지켰다. ‘아으으. 형님, 어쩌시려고 일을 이렇게까지……!’ 세이지는 쥬다스의 곁에서 가까스로 태연함을 가장하였으나 속으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시솝이란 결국 미드가르드의 왕이나 다름없는 존재다. 연기라곤 하나 시솝이 언급될 정도면 이 나라의 제도를 정통으로 건드리겠다는 뜻이다. 즉, 미드가르드인들에겐 그보다 더한 도발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세이지가 보기엔 제법 위험한 선택이었다. 쥬다스는 제국 군주의 후계자다. 아직까진 그 정체를 들키지 않았지만 이번 사안은 자칫 잘못했다간 대륙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중차대한 문제였다. 다만 현재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이를 도발로 받아들이기보단 쥬다스가 보여주는 기백에 압도당해 있었다. ‘뭐지?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심지어 그들은 조금 전 쥬다스가 사용한 이능이 정령술이란 사실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보통 세간에 알려진 정령술사가 사용하는 정령의 힘은 특별하긴 해도 이렇게까지 압도적이지 않았다. 힘을 쓰기 위해선 정령이 늘 술사의 근처에 있어야 하며 그 능력치도 주로 일상생활을 편리하게 하거나 하는 등 주로 서포트 형식이다. 아무리 실력 좋은 정령술사라 해도 마력이 응집된 총격을 산화시켜 버린다거나 불길을 일으키지 않고도 정확히 총만 노려 폭발시키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겼다. 하지만 관중들이 간과한 사실은 쥬다스와 계약한 정령이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 정령왕은 실체화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계약자와의 교감을 통해 간단한 정령술을 발동시킬 수 있다. 정령왕이 사용하는 힘은 아무리 간단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받아들이기엔 강력하고 정확했다. 방금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특정 부분에만 온도를 높여 총을 폭발시키는 작업은 불의 왕에게 있어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우, 웃기지 마!” 누군가 발작적으로 소리쳐 적막을 깨뜨렸다. “네놈에게 무슨 재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감히 우리의 시솝이 되겠다니. 어느 누가 너를 시솝으로 인정한단 말이냐!” 쥬다스는 불의 기운을 머금고 있는 황룡쇄를 바닥에 끌듯이 짚은 채 멈춰 섰다. 그때를 기회로 포착한 상대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곧장 방아쇠를 당겼다. “죽어!” 타앙! 탄환이 발사되고 다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잠시 뒤 펼쳐진 건 많은 이가 예상했던 결말이 아니었다. “어리석구나. 내가 정한 일에 누가 감히 인정을 한단 말이냐.”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깔끔하게 지팡이를 회수했다. 그를 노린 사내는 지팡이에서 발사된 불화살을 맞고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채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즉사였다. 그에 반해 피 한 방울 튀지 않은 새하얀 반가면이 그를 지켜본 좌중을 더욱 소름 끼치도록 만들었다. 이젠 더 이상 경매를 진행할 수도, 그를 대적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 야시장의 꽃이라 불린 경매장은 그렇게 전대미문의 파국을 선언하고야 말았다. * * * 한편, 경매장 외곽의 시장거리에서도 특별한 손님들이 머물고 있었다. 다름 아닌 청룡 가야를 중심으로 나타난 쥬다스의 수하들이었다. 소란이 일어난 경매장 쪽을 힐끔 쳐다본 가야는 지루한 표정으로 목덜미를 벅벅 긁었다. “뭐야. 저쪽은 재밌어 보이네.” 깔고 앉아 있던 노예상인의 머리를 맨발로 툭툭 건드려 본 그는 턱을 괴며 중얼거렸다. “니들도 좀 발악이란 걸 해봐. 죄 물독에 빠진 쥐새끼도 아니고.” “네 이 무도한 놈들! 대체 무슨 목적이냐!” 누군가 악에 받쳐 소리쳤다. 가야는 휙 그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가 방석으로 깔고 앉은 자 이외에도 그 주변에는 시장을 점유하고 있던 수많은 노예상인들이 죄다 벼이삭처럼 맥없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공통점이라면 모두 찬물에 푹 젖어 물기를 뚝뚝 흘리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질식할 뻔하였다가 힘겹게 입에서 물을 뱉어내는 상인도 있었다. “왜, 뭘 위해서 노예들을 풀어주려는 거지?” 청룡 가야는 계약자의 바람에 따라 경매장 주변 노예상을 습격했다. 습격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지불식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는 무기 하나 없이 카드로 쌓은 성을 무너뜨리듯 단숨에 진열을 무너뜨렸다. 그저 길을 따라 걸으며 눈에 띄는 상인마다 한 명 한 명 손수 멱살을 잡아다 패대기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하게 폭포수처럼 물을 끼얹었다. 쓰러진 노예상인들의 손발을 묶어 제압하는 건 나머지 기사들의 몫이었다. 위협을 느낀 몇몇 상인이 총을 쏴 댔지만 본신이 청룡인 그에겐 간지러운 수준이었다. 마력탄을 온몸으로 맞으며 뚜벅뚜벅 걸어와 사람들을 패대기치는 가야의 모습은 가히 동방의 야차나 다름없었다. 가야는 공포에 질린 상인들을 상대로 파리 쫓듯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아, 그거? 안 풀어줘도 돼. 귀찮으니까 그냥 풀어주지 마.” “……?” 기껏 노예상을 습격해서 먼지까지 탈탈 털어놓고 나서 한다는 말이 ‘풀어주지 마’라니? 말과 행동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 가야를 보며 상인들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들이 황당해하거나 말거나 가야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섰다. ‘내가 받은 명령은 단 한 가지.’ 쥬다스는 노예들을 어떻게 해달란 부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노예가 목적이 아니란 말인가?” “관심 없는데.” “그럼 왜 이런 짓을…….” “내 주인이 너희들에게 전해 달라더군.” 정령의 바람은 즉 계약자의 바람. 가야는 충실히 그의 뜻을 이행했다. 뱀눈을 연상케 하는 가느다란 푸른 동공이 바닥에 널브러진 상인들을 주르륵 훑었다. “오늘부로 이 시장은 철폐한다.” 파격적인 선언에도 청룡의 힘 앞에 굴복한 사람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충격을 받았을지언정 그가 가진 힘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패자가 승자의 말을 듣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노예든 아니든 차이는 없다. 즉, 너희는 미드가르드의 법도에 따라 모두 한 주인에게 귀속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릴 전부 노예와 같은 취급하겠다는 소리……!” “불만 있는 놈은 덤벼.” 그 말에 술렁이던 좌중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자 가야는 만족스레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이상, 임무 끝.” 때마침 경매장 상황도 종료되어 그들을 향해 처억 길이 열렸다. 썰물 빠지듯 물러서는 사람들 사이로 하얀 반가면을 쓴 소년이 걸어 나왔다. 물에 쫄딱 젖어 쓰러진 사람들을 발견하고도 거침없는 보폭이었다. “주인.” 가야가 그를 향해 무릎 꿇고 예를 갖추는 걸 본 상인들의 안색이 거무튀튀하게 물들었다. ‘저자가 주인이라고?’ ‘아직 어려 보이는데?’ ‘어쩌면 잘 구슬릴 수 있을지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뻔히 들여다본 쥬다스가 검은 지팡이를 어깨에 툭 걸친 채 서늘하게 웃었다. “과연. 여기 엎드린 게 전부 사람을 사고팔던 자들인가.” “아,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런 일을 벌인 거요? 호인이시구려.” 한 상인이 손발이 묶인 채로 회유를 시도했다. 쥬다스가 그에게 고개를 돌리자 흥미를 끄는 데 성공했다고 느낀 상인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한데 사정 좀 봐주시오. 이 나라에선 노예를 사고파는 게 결코 불법이 아니요.” “흠. 불법이 아니다?” “그렇소! 신을 믿는 나라에선 이를 불쾌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알고 있소. 하지만 각 영토에는 그 나라만의 법이 있질 않겠소?” 쥬다스는 계속 해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이 나라에선 능력이 곧 지위고 돈이요. 무능력한 인간은 결국 무쓸모!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여 그나마 쓸 만하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 상인들이란 말이오.” “그, 그래! 인간이라고 해서 모두가 유능하진 않아. 쓸모없는 녀석들은 그렇게라도 해주지 않는다면 죄다 굶어죽을지도 모른다고!” 여기저기서 동조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은 압도적인 무력 앞에 무릎 꿇긴 했으나 여전히 이를 납득하진 못한 상태였다. 노예를 판 상인들은 한 목소리로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때 쥬다스가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건.” 차가운 금안이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너희들도 다른 누군가에게 평가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도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들이 했던 말대로라면 유능한 자가 그보다 못한 자를 노예로 삼는 건 당연한 논리였다. “그래. 그러고 보니 노예에겐 낙인을 찍어 그 소유주를 표시했던가.” “이, 이럴 수는 없소. 시솝께서도 우리를 노예로는 대하진 않았거늘!” 누군가 공포에 질려 발악하듯 외쳤다. 쥬다스는 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무시해 버리고 황룡쇄로 바닥을 툭 찍었다. 치지직!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상인들의 등에 손바닥만 한 동그란 해문양이 그려졌다. 불의 정령이 만들어낸 화염의 낙인이었다. 태양 안에 새겨진 E라는 글자는 그들 자신이 노예들에게 새겼던 그대로 정교하고 선명했다. “끄아악!”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눈앞에서 상인들이 노예로 전락하는 꼴을 지켜본 다른 여행객들이 경악한 눈으로 덜덜 떨었다. 낙인이 찍힌 대상은 상인들뿐으로, 여러 나라에서 노예를 사러 방문한 손님들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 같은 꼴이 될지 모른다는 짙은 공포가 그들 사이를 점령했다. “요, 용서를.” “저는 오늘 구경 온 것뿐입니다. 노예를 살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이 뭐라 하든 간에 정작 쥬다스는 일말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는 새처럼 날아든 붉은 정령을 손끝에 얹고 그녀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미안.’ 이런 일을 부탁해서. 말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영혼이 이어진 계약자의 뜻을 생생히 전달받은 카니는 생긋이 웃었다. 「도움이 되어서 기쁜걸요.」 「응요. 이제야 좀 계약한 보람이 느껴진다요!」 뜻밖의 대답이었다. 그가 멈칫하는 기색을 느낀 카니가 다홍빛 눈망울을 빛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미안하다고 생각할 필요 전혀 없어요. 이그레트가 우리를 친구처럼 여겨주는 마음은 잘 알지만, 으응. 그래도 우린 정령이니까요.」 「인간은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좋아한다요.」 「후후, 우린 그 반대죠.」 정령은 오히려 계약자가 자신을 속박하면 속박할수록 만족을 느낀다. 술사가 자신을 찾고, 이름을 불러주고, 소망을 간절히 바라기만을 기다린다. 곁에 있기만 한다면 기다리는 순간조차 정령에겐 구속이 아니라 행복이었다. 「나는 자유롭지 않은 이곳이 너무 좋은걸요.」 「어쩌면 인간들의 ‘노예’라는 개념이 우리에게서 파생된 걸지도 모르지.」 푸른 늑대가 조용히 의견을 덧붙였다. 그만큼이나 정령은 무조건적으로 술사의 소망에 따른다는 뜻이었다. 「단지 우린 자의로 움직이는 것이고, 노예는 강제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이 다를 뿐.」 루니는 둘 다 하는 역할은 닮아있다고 느꼈다. 그는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연 속에 숨긴 채로 그르렁거렸다. 「알겠지, 우린 따르기 싫은 명령을 억지로 따르는 게 아니란 소리다.」 「그러니 부디 원하는 만큼 명령해 줘요.」 카니는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볼을 물들인 채 맑게 웃었다. 쥬다스가 굳게 입을 다물고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사이 바람결을 타고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노래가 아니라 가사 없이 흥얼거리는 허밍(Humming)이었다. “뭐지……?” “갑자기 눈물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등에 낙인을 새기고 절망하던 상인들과 두려움에 질려있던 방문객들, 그리고 쥬다스의 명을 받아 이들을 제압하던 기사들까지 전부 같은 감정에 휩싸여 눈시울을 붉혔다. 그 원인이 소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살랑이며 불어온 바람 탓에 점점 노랫소리가 크고 선명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오, 이거 재밌는 능력이네.” 육체가 있긴 해도 정령에 해당하는 가야는 그 노래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는 흥미로운 얼굴로 노래를 감상했다. ‘이 목소리는.’ ‘낮에 만났던 그 양 수인족 노예로군.’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본인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눈물방울을 내버려 둔 채 침착하게 그 정체를 유추해 냈다. ‘크응. 그건 그렇고.’ 그런 그들보다 조금 뒤에 서있던 바이칼은 코를 훌쩍이며 회색 먹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선율이다…….’ 비단 슬픈 감정을 전이시키는 능력이 아니었어도 빠져들 법한 목소리다. 낮에 그녀를 봤을 땐 워낙 자신감 없고 작은 목소리라 몰랐는데, 노래를 한다면 퍽 잘 어울릴 거라던 쥬다스의 말이 백번 공감이 갔다. 후웅! 그때 낯익은 녹색 바람이 쥬다스의 주변을 감쌌다. 그가 손바닥을 내밀자 허공에서 몰려든 바람이 파앗 하고 형체를 이루어냈다. 「이그레트!」 이내 손바닥 위로 톡 내려앉은 유니가 자리에서 빙글 돌며 발랄하게 날개를 파닥였다. 「에헤헤, 다녀왔어!」 “어서 오렴. 유니.” 다정한 환영에 유니는 까르르 웃었다. 활기찬 바람의 목소리에 푸른 늑대도 살며시 꼬리를 흔들었다. “당신은…….” 가까이에 있던 한 사내가 가면을 벗으며 진중한 태도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쥬다스에게 질문한 건 미드가르드의 귀족이었다. 노예시장을 찾은 귀족이 가면을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다는 건 그만큼 상대를 존중한다는 뜻이다. “그대들의 시솝에게 전하여라.” 쥬다스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고압적인 태도로 명했다. “곧 그가 가진 권위에 저항하는 도전자를 만나게 될지니.” 누구든지 출신지 및 신분을 막론하고 현재 시솝에게 도전하여 이기는 자는 시솝의 권위를 얻을 수 있다. 군주가 아닌 무력에 의한 서열제로 운영되는 미드가르드의 특별한 권력구조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시솝에게 도전하는 행위를 두고 ‘게임’이라 불렀다. “새 게임을 준비하도록 하라.” 수많은 무법자에게 혼란을 안겨줄, 미드가르드의 새 게임을 여는 선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커헉 분량조절의 실패.... (...) 이걸로 22장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23장 : 융합' 챕터가 이어집니다. ㅎ 어제까지 더워서 허덕였는데 오늘은 비가 내려서 조금 추운 감이 있네요. 감기 조심하시고, 시원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 감사합니다! 0194 / 0240 ---------------------------------------------- 23장. 융합 그날 밤, 기존의 노예들은 모두 철창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역으로 새롭게 노예 낙인이 찍힌 상인들이 대신 그곳에 갇혀 버렸다. 더러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분개하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댔고, 더러는 묵묵히 좌절했다. 풀려난 노예들은 철창에서 나왔을 뿐 달아나거나 특별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장소가 차가운 철창 안에서 이젠 폐쇄된 시장 바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들은 마치 상단이 망해 처분을 기다리는 상품처럼 옹기종기 모여 눈치를 살폈다. 세이지는 기사들을 도와 천막을 걷다 말고 그런 노예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린아이부터 건장한 성인까지, 족쇄에서 풀려났음에도 주체적인 행동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노예로서의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은 세이지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소위 ‘연극’을 시작한 이후로 쥬다스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루바르잔에서 왔을 거라는 심증은 있어도 정확한 물증을 주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보안 장치였다. “정말 시솝을 만나러 가실 생각이세요?” “음, 아니.” 설마설마하던 질문에 대해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아이가 안심하려던 찰나 차분한 음성으로 덧붙였다. “정확히는 그쪽에서 만나러 오도록 만들어야지.” “예에?”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바람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단다. 지금으로선 그의 위치를 알 수 없어.” 괜히 미드가르드의 운영자, 시솝이 아니란 뜻이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정보에 능한 바람의 정령왕조차 시솝이 머무는 장소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니 직접 찾아오도록 도발할 생각이야.” “도, 도발이요?” “기왕이면 합리적인 방식으로.” 궁금증이 충분히 해소되진 않았지만 세이지는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일일이 방법을 묻는 것보단 직접 눈으로 보는 게 더 나으리란 판단 때문이었다. 동생과의 대화가 끝나자 쥬다스는 홀로 텅 빈 경매장으로 이동했다. 사람이 가득 차 활발하게 노예를 사고팔던 경매장이었지만 지금은 폐쇄되어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부서진 의자와 불이 꺼진 조명기구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가 텅 빈 무대에 발을 딛자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미풍이 주변을 은은하게 밝혔다. 「통칭 ‘시솝 : 오딘’. 정확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어.」 자세한 정보를 얻는 데에 실패한 유니가 쥬다스의 어깨에 내려앉아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수상해. 정식 명칭, 나이, 성별, 거주지 모두 불명! 한 나라의 대표치고는 너무 비밀이 많아. 집권 기간이 무려 300년이 넘는데 그 비밀들이 다 지켜진 것도 이상하고.」 「으엑? 인간이 300년 이상 살았다요?」 「응. 그러니까 수상하단 거야. 너도 알지? 인간의 수명은 아무리 길어봤자 100년도 채우기 힘들어.」 「맞다요. 그때 이그레트가 90살 넘게 산 것도 엄청 오래 산거라고 했는데!」 ‘정확히는 92년. 장수하긴 했지.’ 전생의 나이를 떠올린 쥬다스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새삼스럽게 열일곱이라는 현생의 나이가 무척 어리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지금 그가 하려는 행동이나 생각하는 모든 게 그 나이 때 할 법한 종류가 아니었다. 속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을 텐데도 군말 없이 자신을 따르는 친우들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은 이런 일정이 힘들 수 있겠구나.’ 그가 무리의 중심에 있는 이상 아무래도 아이들이 그에게 맞추려 노력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다. 쥬다스가 진지하게 일행들의 고충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사이 정령들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 이 미드가르드란 나라는 정령이 살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라서 돌아다니기 불편하단 말이야.」 「……확실히 거북하다.」 푸른 늑대도 콧등을 찡그리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사실 이들의 생명 활동이 이루어지는 근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군. 이곳엔 강이 흐르지 않으니.」 「맞아. 자연환경이 너무 열악해. 강은 물론이고 풀과 나무, 흙으로 이루어진 토양 자체가 없어.」 노예시장이 있는 위치까지는 여러 문화가 뒤섞인 지방이었기에 그러한 특성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곧장 그 변화를 느낄 수 있게 된다. 땅에 깔린 폭신한 바닥재부터 시작해서 높은 건물, 길을 따라 늘어선 조화며 가짜 가로수들까지 전부 인공적인 구조물뿐이었다. 심지어 어떤 지역은 하늘을 뒤덮은 특수 배리어로 햇빛과 구름 대신 그때그때 필요한 날씨를 조작하여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아우우, 암튼 완전 최악이야!」 유니가 볼을 부풀린 채 투정을 부렸다.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이 나라는 자연계 정령술사로선 최악의 상성이었다. 불편해하는 정령들을 진정시키며 달래는 사이 같은 이유로 정령 활용에 곤란을 겪던 콜이 그를 찾아왔다. “쥬다스 님. 이런 곳에 혼자 계셨습니까?” 콜이 다루는 바람의 상급 정령이 까륵 웃음소리를 흘리며 쥬다스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콜은 무대 아래까지 걸어와 단을 오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공손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보는 눈이 없으니 쥬다스도 편하게 대꾸했다. “아. 그래, 콜.” “흠흠, 아무래도 이 나라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으시는 편이…….” “요즘 젊은 아이들은 뭘 하며 노는지 아느냐?” “예?” 뜬금없는 질문에 다른 걸 물으러 왔던 콜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젊은…… 아이들이라면, 에단 경이나 바이칼 경 같은 친우들 말씀이십니까?” 콜은 콧등까지 미끄러져 내려온 외알 안경을 다시 제대로 착용하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애썼다. 어린 스승은 황룡쇄에 기댄 채 제법 진지하게 고뇌하고 있었다. “귀환하고 나면 이것저것 놀 기회를 마련해 줄까 하고 말이야.” “놀 기회를?” “으음. 지금은 내 곁에 있으니 매사 너무 심각하기만 하단 생각이 들어서.” ‘확실히.’ 콜도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좋게 말하면 자상한 것이겠지만, 쥬다스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과하게 타인을 배려하곤 했다. 여기저기 신경 쓰는 곳이 많고 매사 진지하게 임하는 일면이 강하니 그의 행동에는 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사람은 각 연령대에 알맞은 과업이 있다고 하였다. 젊어서 노는 것도 성장 과업의 일종이지.” “허허. 듣고 보니 그렇긴 합니다.” “나 어릴 때야 그저 눈 오면 눈밭에서 뛰고 단풍지면 색이 고운 낙엽 줍는 게 놀이였지. 요즘엔 시대가 변해서 그런 건 영 지루할 것 같아 말이다.” “……스승님.” 모처럼 ‘쥬다스 님’이 아닌 ‘스승님’이라는 옛 호칭으로 그를 부른 콜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은 스승님도 어리십니다.” “응? 그야 물론.” “아뇨.” 쥬다스도 자신이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콜이 말하려는 건 이와 조금 다른 문제였다. “곁에 있는 자들을 위해 기회를 마련하는 것보단 그들과 함께 어울리십시오.” “…….” “스승님, 저는, 이 코르토반 옌이란 못난 제자가 감히 청컨대.” 이젠 색 바랜 종이처럼 오래된 기억 속에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쫓아다닐 적 이후로 처음 청하는 바람이었다. “부디 당신께서 사는 지금 삶을 온전히 소유하시길.”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콜은 쥬다스가 진정으로 그 삶에 정착하길 원했다. 현재 쥬다스는 전생의 자아를 유지한 채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덕에 많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그러다 보니 정작 스스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마치 지금 가면을 쓰고 폭군을 연극하듯 ‘열일곱의 소년’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콜이 짚은 부분은 바로 그 점이었다. 두 사제지간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냥 어리다 여겼던 아이가 언제 이렇게 어른이 되었나.’ 어린 강아지처럼 순수한 눈으로 제자가 되겠다며 졸졸 쫓아다니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젠 칠십 넘은 노인이 되었다. 콜의 눈은 여전히 맑고 순박한 빛을 띠었지만 일생의 말년에 도달하여 가지게 된 현명함도 함께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황룡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콜.” “예.” “늘 지금처럼 있어다오.” 무대에서 툭 뛰어내린 그가 경매장 밖으로 걸어 나가며 덧붙였다. “한 50년만 더.” “허어. 50년 뒤까지 제가 살아 있으면 인간 수명 신기록을 갱신하겠군요.” “평생 살면서 신기록 정도는 한번 이룩해 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그거야 하늘이 정할 일이지요. 그런 식으로 떼쓰시면 곤란합니다.” 두 사람은 실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나를 찾았느냐?” “헛, 참. 그렇지요. 제가 정신이 이렇게 없습니다.” 콜은 쥬다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아차 싶은 표정으로 하려던 말을 꺼냈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위험한 자입니다. 깊이 관여하지 않으시는 게…….” 이어지는 내용은 유니가 알아온 정보와 거의 동일했다. 거기에 더해 콜은 좀 더 세부적으로 현 시솝에 대해 묘사했다. “‘오딘’이 현 시솝이 된 이유는 그가 가진 천재적인 재능 덕이라 들었습니다.” “천재적인 재능이라.” “기계를 만들고 개발하는 재능 말입니다. 기계국이라 불리는 미드가르드에서 그야말로 최고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게죠. 300년도 넘게 집권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못 쓰게 된 장기나 신체기관을 새 기계부품으로 교체하여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우엑. 징그러워.」 유니가 학을 떼며 진저리를 쳤지만 콜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말을 맺었다. “그러니 아마도 이 나라의 시솝은 더 이상 인간이라 보기 어려울 겁니다.” 두 사람은 어느덧 기사들이 열심히 천막을 걷고 있는 위치까지 도달했다. 그 많던 천막을 거의 다 걷어내어 노예 시장은 이제 완전히 황무지처럼 변해버렸다. 사슬에 묶여 철창에 갇힌 상인들만이 그 여진을 느끼게 했다. “그다지 깊이 관여할 생각은 아닙니다.” 보는 눈이 생기자 쥬다스는 다시 콜에게 존대로 답했다. “하나…….”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일을 보고도 내 할 일이 아니라 외면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 그 대답을 듣고 나서 콜은 조금 전 자신이 했던 생각 중 한 가지는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쥬다스는 착실히 새 삶에 적응해 나가는 중이었다. 이전의 그라면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책임의식이 지금은 존재했다. “알겠습니다. 무리하진 마십시오.” 콜은 더 만류하지 않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두 사람은 상인들이 갇힌 철장을 지나쳐 바이칼과 크리스티나가 서 있는 곳에 도달했다. “어, 주군! 오셨습니까?” 바이칼이 먼저 그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세세히 살펴보았느냐?” “옙. 그동안 취급이 심했던 모양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생기는 건 기본이고 상처가 정말 많습니다. 증세가 심해 저희 치유술사들로 해결이 안 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불도 들어오지 않는 낡은 천막 아래 옹기종기 모여앉아 멍하니 시간을 때우고 있던 노예들이 다가오는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노예들은 풀려났음에도 지금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껏해야 ‘주인이 바뀌었다’ 정도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마저도 상처를 치료해주고 돌봐주는 낯선 상황에 놀라 하나같이 공포와 의문이 뒤섞여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들이었다. “게다가 몸보다 문제는 정신입니다. 상인 놈들이 무슨 짓을 해놓은 건지 완전히 세뇌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들, 전부 자신을 물건이라고 생각하더군요.” 물건이 먼저 주인에게 말을 거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 그 절대적인 규칙에 따라 노예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앞에서도 전부 입을 꾹 다문 채 눈치만 살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새 챕터 '23장 : 융합'의 시작입니다. 뭐가 뭐랑 융합될지는 비밀입니..쿨럭. 사실 별 건 아닙니다.ㅎ 새로 등장한 기계국 미드가르드는 어찌 보면 현대와 닮았지만 사실 좀 더 무서운(?) 곳입니다. 소제목 뜻과 함께 여기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 그럼 오늘도 함께 해주셔서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195 / 0240 ---------------------------------------------- 23장. 융합 “그래, 당장은 적응하기 힘들겠지만.” 쥬다스는 그들을 빙글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정하자꾸나. 나는 시장을 철폐하였을 뿐, 너희들을 구매하지 않았다.” 단호한 어조였다. 그 말을 들은 노예들은 일순간 주인에게 버림받은 폐기물이 된 기분에 휩싸였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대신 너희들의 시간을 구매할까 한다.” “……?” “너희는 이제부터 내 소속이 되는 걸 선택할 수 있다. 노예가 아닌 고용인으로서 말이야. 그리하겠느냐?” 노예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주인이 묻는 말에는 대답해야 한다는 강박증이 입을 열게 했다. “예.” 주인의 성향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노예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의사표현은 ‘예’, ‘아니오’라는 딱 떨어지는 단답형에 불과했다. “주인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명령이 아니라 권유였지만 그들에겐 이러한 복종이 숨 쉬는 것보다 더 익숙했다. 그들이 새 지위에 적응하지 못하리란 사실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쥬다스는 기꺼이 다시 한 번 더 이해를 도와주었다. “지금부터 너희들의 소속은 미드가르드가 아니라 루바르잔으로 전환된다.” ‘루바르잔 제국.’ 사실 노예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이상 국적은 아무 상관없었다. 제국이 아니라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약소국으로 간다 해도 노예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갈 뿐이다. 힘으로 시장을 폐장시키고 상인들을 모조리 무릎 꿇린 강자가 고작 일개미에 불과한 노예들에겐 어떤 삶을 부여할지 그들로선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내 수하들이 너희를 포탈로 안내해줄 것이다. 그들을 따라 먼저 이동하여라. 나는 할 일을 마저 한 후에 돌아갈 테니.” 미리 명을 받고 대기 중이던 기사 다섯이 앞으로 나섰다. 붙잡힌 상인들도 그들이 관리해서 데려가기로 한 상태였다. 이를 보자 노예였던 사람들은 서로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쥬다스의 말대로라면 기사들을 따라가는 게 맞았다. 우물쭈물 이동하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쥬다스가 빙긋 웃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사람들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이는 따뜻한 미소는 상인들에게 낙인을 찍으며 차갑게 군림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꼭.’ 노예를 위해 대신 싸워준 것 같다. 억측이라고 느끼면서도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호의는 따뜻함을 넘어서 뜨겁기까지 했다. 한겨울에 줄곧 찬바람을 맞아 꽁꽁 얼었던 손이 미지근한 물에만 닿아도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하게 달아오르듯이. 두려움 대신 좀 더 특별한 감정이 상품으로 살아온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들은 전부 처음과는 다른 표정으로 안내자들을 따라 우르르 이동했다. 그런데 다른 구성원과 함께 이동하지 않고 홀로 자리에 남은 이가 있었다. “저는…….” “아, 네겐 따로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이다.” 가녀린 두 귀가 흰 나비의 날갯짓처럼 두어 차례 파닥거렸다. 남아 있으란 명을 전달받고 착실히 제 위치를 지키고 선 양 수인족 노예였다. 그녀는 다크초콜릿 색깔의 순박한 눈망울로 쥬다스를 올곧게 바라보았다. “네, 주인님. 명령을.” “우선 통성명이 필요하겠구나. 나는 쥬다스라 한다. 혹 이름이 있느냐?” “아뇨.” 양 수인족은 담백한 어투로 답했다. 그러자 사람에게 이름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세이지가 의문을 표했다. “어? 이름이 없으면 다른 사람들이 부를 때 뭐라고 호칭하지?” “이전 주인님들께 불렸던 호칭……이라면.” 그녀는 조금 머뭇거렸다. 창피해서가 아니라 순진해 보이는 세이지에게 무례가 될까 염려된 까닭이었다. 그러나 노예의 습성대로 오래 망설이지 않고 질문에 대한 답을 내어놓았다. “그럼…… ‘이년’이라고…….” “뭐?” “‘이년’, ‘양년’, ‘양새끼’…….” “아니! 아니야. 물어봐서 미안해.” 세이지가 낭패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녀가 지나온 삶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법한 호칭이었다. 괜히 그 아픔을 부추긴 꼴이 되었다 생각한 세이지는 굉장히 낯이 뜨거워졌다. 정작 양 수인족은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하고 멀뚱히 눈만 깜빡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쥬다스가 무언가를 언급했다. “키리에 엘레이손.” 제국이 믿는 신성을 향한 기도문의 일종이었다. 짤막하지만 그 안에 강한 울림이 깃들어있었다. “앞으로 네가 해주었으면 하는 일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이 드는구나.” “제가 하길 바라시는 일이라면…….” “감정을 노래하는 가수.” 그날 식사 메뉴를 고르듯 단조로운 명령이었다. 거기에 담긴 무게도 채 실감하지 못한 양 수인족 여성은 속으로 다시금 그가 한 말을 중얼거렸다. ‘키리에…… 엘레이손.’ 볼을 타고 흘러내린 레몬빛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짝 흩날렸다. ‘그게 이제부터 내 이름?’ 늘 남에게 소유당하는 삶을 살아온 그녀다. 노예의 삶에선 설사 이름이라 해도 주체적으로 소유하는 걸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지금 보니 이렇게 간단히 움켜쥘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상한 떨림.’ 그녀는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혈관을 타고 흐르는 새 리듬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에 빠르게 뛰던 심장과는 달랐다. 오히려 조바심 날 정도로 설레기까지 했다. “이봐. 왜 그래? 설마 주군께서 지어주신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거나.” “아니에요.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바이칼의 딴죽에 양 수인족은 필사적으로 붕붕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심장이 떨려서…….” “그걸 ‘희망’이라고 부르지.” 수하가 더 경박한 말을 나불거리기 전에 에단이 먼저 그녀의 이상 상태를 한 단어로 일축했다.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 그 말을 들은 그녀는 조금 전 루바르잔으로 떠난 사람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들의 얼굴에도 같은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나, 이런 걸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야 하는 거구나.’ 그녀는 비로소 쥬다스가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해보겠느냐?” 그는 할 수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해볼 것인가, 하지 않을 것인가라는 선택지를 내주었을 뿐이다. 노예였던 레몬빛 양 수인족은 처음으로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키리에 엘레이손. 이로써 장차 제국 민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출신 미정의 수인족 ‘아이돌’이 탄생하게 된다. * * * 다음 날, 쥬다스는 노예 시장을 떠나 본격적으로 미드가르드 중심지로 향했다. 그다지 오래 이동하지도 않았는데 황량한 사막 같던 길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변화했다. “혹시 지금 제 눈이 이상합니까? 길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바이칼이 눈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안타깝게도 자네의 시력은 정상이군. 하늘로 올라가는 게 맞다.” “저기 단장? 정상인 걸 알려주셔서 감사한데, 왜 안타까우신지……?” “내리도록. 더 이상 말을 타고 가는 건 무리다.” 에단은 수하의 강렬한 눈빛을 무시하고서 말에서 내렸다. 상관의 횡포를 하루 이틀 당하는 게 아닌지라 바이칼도 역시 구시렁대면서도 그를 따라 훌쩍 바닥에 착지했다. 길은 부드러운 탄력이 느껴지는 바닥재로 덮인 포장도로였다. 이 도로는 급경사를 이루며 하늘로 높이 향해 있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태양빛이 눈부셔 잘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말들을 지킬 사람이 필요할까요?” 황실에서 잘 관리해 키운 혈통 좋은 명마를 아무렇게나 방생할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미드가르드에서 볼일을 마치고 제국으로 귀환하려면 다시 말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인원이 줄어드는 건 그거대로 곤란했다. “여기서 더 머릿수를 줄이는 건 안 된다.” 에단이 강경하게 노예들을 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벌써 기사단 중 5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아무리 쥬다스가 강한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최소한의 호위 병력은 갖추고 있어야만 했다. 안전을 생각해서도, 또 황태자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그에 대한 예법 측면에서도 일정 수준은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하는 수 없네요. 일단 방생하고 나중에 다시…….” “허허. 그럴 필요 없소이다.” “코르토반 님?” 아쉽게 입맛을 다시는 바이칼을 느긋하게 만류한 건 콜이었다. “정령술사는 좋은 서포터지요.” 콜은 그리 말하며 바람의 정령을 불러 말들의 머리에 앉혀두었다. 정령왕인 유니만큼은 아니어도 콜이 계약한 정령도 최상급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황색 바람의 인도를 따라 말들은 마주 없이도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중에 다시 필요할 때 부르면 곧장 달려올 거요.” “허. 정령술로 그런 일도 가능합니까?” “자연계정령은 자연 그 자체이니 말이외다. 동물과 소통하는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소? 다만 저 말들이 우리에게 신뢰가 없다면 정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았을 테지요.” 주인에게 신뢰가 있고 잘 훈련된 말들이기에 가능한 기능이었다. 콜의 정령이 풀과 물이 있는 곳에 말들을 데려다놓고 돌볼 테니 이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다. 그들은 경사 급한 도로를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아오. 이 동네 사람들은 길을 왜 땅에 만들지 않고 이따구로 높이 지었답니까?”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마법기사 입장에선 욕이 저절로 나오는 도로구조였다. 헉헉거리면서도 열심히 불만을 토로하는 바이칼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삑삑 울었다. 쌍으로 시끄럽게 구는 둘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쳐다본 에단이 절도 있게 걸으며 대답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다른 이능은 묻히고 마력을 양분 삼은 과학기술만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나라니까. 혹시 아나?” “……뭐를요?” “하늘을 나는 기계라도 발명했을지.” “풉.” 하도 황당한 나머지 바람 빠지는 비웃음 소리가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바이칼은 서슬 퍼런 검은 눈동자에 찔끔하여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에이이. 하늘을 나는 기계요? 상상력이 너무 뛰어나시네요, 단장. 차라리 작은 나라 하나쯤은 날려 버리는 대규모 폭탄을 개발했다고 하십쇼.” “그도 일리가 있군. 지난 대륙전쟁 역사를 살펴보면 수백 년 전 이미 도시 하나는 충분히 날렸다.” “예? 마법도 아니고 겨우 화학 폭탄으로 도시를 날렸다고요?” 걸어서 이동하는지라 말을 타는 것보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서 둘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던 크리스티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몰랐다는 건 아니겠지? 그대와는 분명 같은 역사 수업을 들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와하핫! 그랬죠. 도시를 날렸었죠.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도시가 날아갔는지는 아나?” 애써 아는 척하려던 바이칼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 글쎄요. 어디더라? 해동……아니, 마흐바……?” 쯧, 에단이 혀를 차며 답을 알려주었다. “레비아탄 왕국.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섬나라다.” “예, 뭐. 흠.” 바이칼은 헛기침으로 어물쩍 민망함을 넘겼다. “그런데 그 정도 힘을 가졌다면서 왜 대륙을 재패하지 못했답니까? 오히려 다른 나라들한테 미움받고 있죠?” “하, 기가 차는군. 강하다고 해도 제국 아래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이들은 절대로 야욕을 드러낼 수 없어.” “그건 그렇지만.” “과학은 신성에 반하는 힘. 그들은 결국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만을 위한 전당을 만들었지.” 크리스티나의 냉소적인 답에 이어 에단이 말했다. 슬슬 경사진 길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리고 있는 허공의 도로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오직 인간을 위한 전당 ‘아스가르드’. 그게 바로 미드가르드의 수도다.” 보행자가 추락하지 않도록 터널식으로 지어진 도로가 사방에 쫙 펼쳐져 있었다. 여기저기서 별처럼 반짝이는 표지판과 하늘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교차로를 보며 누군가 경탄을 터뜨렸다. 지상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공중 도로였다. 이는 마치 하늘을 뒤덮은 투명한 거미줄과도 같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196 / 0240 ---------------------------------------------- 23장. 융합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힌 공중도로를 잠시 바라보며 어떤 길이 좋을지 고민하는 일행 사이에서 가야는 홀로 다른 의미로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것들은. 하늘이 다 가려지잖아.” “어차피 투명해서 아래에서 봤을 땐 아무것도 안 보이던데요.” 바이칼의 대수롭지 않은 한마디에 가야가 불만스럽게 대꾸했다. “투명한 것과 맑은 건 다른 문제야. 난 하늘 속성을 가진 정령이라 예민하다고. 저렇게 하늘이 가려져있으면 멀미가 난단 말이다.” “멀미까지요? 하늘 조금 가려진 게 대체 뭐라고.” 여전히 인간 입장에선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야는 공중도로 따위 전부 부숴 버리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음산하게 말했다. “너네 같으면 스프 위에 투명한 기름덩어리가 두껍게 끼어 있으면 먹고 싶겠냐?” “……이해했습니다. 어후, 비유가 참 찰지시네요.” “헹. 아무튼 거슬려. 이렇게 파괴 본능이 끓어오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야.” ‘나처럼 순한 용을 자극하다니 제법이군’ 따위의 중얼거림과 함께 가야 공중도로를 향해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그뿐 아니라 쥬다스가 데리고 있는 정령들은 전부 미드가르드의 내부로 깊이 들어갈수록 불편해하고 있었다. 평소 떠들썩하던 분위기와 상쾌한 웃음소리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침묵하는 시간이 더욱 잦아졌다. 쥬다스는 그런 정령들을 한번 조용히 응시하곤 흠 하고 턱을 짚었다. “도로를 파괴해 버리면 이곳 주민들에게 너무 큰 피해가 갈 것 같구나.” 도로 아래로는 척박한 땅이 이어졌다. 도시와 도시 사이는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가득하여 말이 달릴 공간도 없고 위험하기까지 했다. 그에 반해 이 공중도로는 모든 도시와 이어져 있는데다 땅에서 이동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다. 그런 수단을 부숴 버린다면 거주자들의 삶에 막대한 불편을 안겨주는 꼴이다. 쥬다스는 시솝을 만나고자 하는 생각을 가졌을 뿐 미드가르드를 공격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시솝의 관심은 확실히 끌겠지만.” 그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조용히 웃었다. “오래 머물 것은 아니니 조금만 참아주련.” “응. 그러지 뭐. 얼른 끝내고 여길 뜨자.” 청룡을 떼쓰는 아이 달래듯 다독여준 쥬다스가 눈앞의 갈림길을 슥 둘러보았다. 무려 지금 선택할 수 있는 길만 해도 8갈래였다. 어느 길이 어느 도시로 이어진다는 표지판이야 적혀 있었지만 그들은 지금 특정 장소로 향하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시솝을 만나기 위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시솝은 미드가르드를 관리하는 ‘운영자’일 뿐 왕이 아니었으니 따로 궁전이나 처소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때문에 수도로 간다 한들 시솝을 만난다는 보장은 없다. 쥬다스는 잠시 갈림길을 살피다 이내 손에서 들고 있던 황룡쇄를 놓았다. 텅! 데구르르. 검은 지팡이로 탈바꿈한 황룡쇄는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빙글빙글 돌다 멈추었다. 쥬다스는 이를 집어 들고 지팡이 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형님? 설마 이쪽 길로 정하신 이유가…….” 그는 아니겠지 싶은 얼굴로 묻는 동생을 향해 태연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차피 우린 시솝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질 않느냐.” “……형님께서 그런 방법도 쓰시는군요.” 쥬다스라면 늘 현명하고 깊은 생각을 통해 움직인다 여겨왔기에 이번 선택은 더욱 의외였다. 세이지뿐 아니라 다른 수하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하나같이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쥬다스는 지팡이를 손바닥 안에서 빙글 굴려 보였다. “막대 굴리기나 동전 뒤집기. 꼭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더라도 종종 사용하는 방법이지. 살면서 영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 문제가 생긴다면, 때론 단순하게 생각하는 게 답일 때가 있단다.” “아.” 바이칼이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내며 동조를 표했다. “생각해 보면 저도 그런 적 많습니다. 가령 학교에서 다지선다형 시험을 볼 때 답을 모르겠으면 펜을 굴려서 찍는다거나.” “……그럴 때 사용하라고 만든 펜이 아닐 텐데?” 학원 루바흐에서 입학 기념으로 나누어주는 펜을 가져다 엉뚱한 용도로 사용했다는 소리에 에단이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그런 게 다 편견입니다, 편견. 펜으로 글씨만 쓰라는 법이 어디 적혀 있기라도 하답니까?” “꼭 법으로 알려줘야만 따를 셈인가.” “명장의 검을 장식용으로 벽에 걸어둘 수도 있고! 사전으로 파리를 때려잡을 수도 있고! 코를 파서 끈끈이풀 대신 사용해도 되고!” “바이칼 경, 그건 좀 더럽…….” 별 생각 없이 듣고 있던 세이지가 슬금슬금 그 곁에서 멀어졌다. 그와 더불어 크리스티나의 경멸 어린 눈초리가 화살처럼 날아가 박혔다. “아니. 바이칼이 한 얘기처럼 사실 시험 볼 때에도 ‘찍기’는 좋은 전략이야.” “예?” 자기가 말해놓고도 내심 민망했던 바이칼이 수그렸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전부 풀기 위해선 답을 모르는 문제는 빨리 찍고 넘어가는 게 효율적이지.” “그, 그렇죠. 모르는 문제에 막혀 끙끙대느니 훨씬 효율적이죠!” “물론 정답을 알고 넘어가는 게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만.” “…….” 바이칼은 화색이 돌던 낯빛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으음, 이상은 이상일 뿐이니 말이다.” 소위 전 과목 올백, 문과 수석으로 조기 졸업하여 학교 신화를 이룩한 천재의 위로는 결국 바이칼을 두 번 죽이고야 말았다. 일행은 그렇게 한참 떠들썩하게 분위기를 유지하며 걸었다. 길을 따라 가다가 다시 또 네 갈래, 다섯 갈래 국수면발처럼 쫙쫙 찢어지는 갈림길을 만나면 한 사람씩 알고 있는 찍기 방법을 사용해서 길을 골랐다. 그렇게 가다 보니 슬슬 투명한 터널 너머로 거대한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내리막길이군요.” “우와. 이렇게 보니까 꼭 도시로 이어진 미끄럼틀 같아요.” 아이의 표현은 별것 아닌 사물에도 촉촉한 환상을 부여했다. 모두 그 말에 공감하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내리막길에 첫발을 딛는 순간이었다. “삐!” 별안간 바이칼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폴짝 뛰어내렸다. 그간 놀아달라고 땡깡도 안 피우고 얌전히 잘 버티고 있던 꼬마 와이번이 보여준 갑작스런 단독 행동에 바이칼이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그의 손아귀에 긴 꼬리를 탁 붙들리자 플루비가 주홍빛 눈을 불만스럽게 치켜떴다. “삐액!” “어쭈? 반항이냐. 오늘은 간식 먹기 싫은가 보네.” “……!” 도리도리! 꼬리를 잡혀 거꾸로 매달린 플루비는 그 와중에 착실하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송곳니 집어넣습니다, 실시.” “삐이이…….” 와이번의 짧은 반항은 그렇게 끝났다. 바이칼은 플루비의 꼬리를 놔주었다. 바닥에 톡 착지한 플루비가 미어캣처럼 목을 쭉 빼고 뒤를 돌아보았다. “왜? 뒤에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다들 따라서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사람의 시력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같은 용이랍시고 가야가 대신 플루비의 심리를 대략적으로나마 읽어주었다. “플루비가 많이 불안한 모양인데.” “갑자기 웬 불안이요?” “시끄럽잖아.” “하루 이틀 떠드는 것도 아닌데.” “그거 말고.”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얼굴이자 가야가 의아한 얼굴로 귀를 가리켰다. “뭐야, 지금 이 소리 안 들려? 인간이라 인식하기까지 좀 걸리나.” “소리라면.” 부아아앙! 더 말을 잇기도 전에 멀리서부터 벌떼가 한꺼번에 날갯짓하는 소리 같은 요란한 소음이 그의 귓가에도 잡혔다. 놀라 귀를 까딱인 플루비가 두 발로 일어서서 바이칼의 다리를 꾹 붙들었다. “어, 들립니다.” “저도요.” “들리는군.” 바이칼, 세이지, 에단 순으로 거의 동시에 중얼거렸다. 살짝 불어오기 시작한 미풍에 크리스티나의 긴 머리카락이 살짝 휘날렸다. 자신의 머리카락 가닥을 손으로 훑어본 크리스티나가 진지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어째 점점 가까워지는 듯한……?” 바이칼이 중얼거리는 순간, 먼 교차로에서부터 은빛으로 빛나는 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더니 빠르게 그들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저게 뭐죠?” “일단 동물은 아닌데.” “기계인가.” 잘 관리받고 자란 말 한 마리를 연상시키는 매끈한 몸체에 바퀴는 없었다. 살짝 공중에 부유한 채로 질주하고 있었는데 표면이 윤택한 게 마치 단단한 철갑을 두른 듯 했다. 멀리서 봐서는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체였다. 바이칼은 슬쩍 스태프를 꺼내 들며 마법진을 그릴 준비를 시작했다. “뭐가 됐든 속도가 너무 빠른데요? 이대로라면.” 공중도로는 지상의 길과 달리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 터널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투명한 막을 깨뜨리지 않고서야 오로지 직진과 후진밖에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대로라면 충돌할 수밖에 없다. ‘실드를 발동할 시간까진 없을 것 같은데.’ 폭발 마법을 사용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달려오던 물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켜, 비켜비켜비켜! 비키라고!》 “사방이 막힌 터널에서 어디로 비키냐! 댁이 멈추쇼!” 울컥한 바이칼이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 지르자 안에서도 용케 그걸 들었는지 꽥 하는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난 이거 못 멈춘단 말이야!》 ‘그럼 그걸 왜 타고 있는 건데―?!’ 그러는 사이에도 물체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멀리서 볼 땐 말 한 마리 정도라고 느꼈는데 가까워져서 보니 면적도 제법 넓었다. 그 안에 사람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바이칼은 마법을 사용하기 두 배로 찝찝해졌다. “공격 마법을 사용할 필요는 없단다.” “옙. 알겠습니다.” 다행히 쥬다스에게 다른 방법이 있었다. 바이칼은 자세히 묻지도 않고 곧장 배열하던 마력을 회수했다. 아무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플루비만이 바이칼의 다리 뒤에 숨어 삑삑 울어댔다. 쥬다스는 가볍게 손을 저어 자신의 정령에게 소망을 전달했다. “루니.” 타앗!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낸 푸른 늑대가 달려오던 물체의 앞을 가로막았다. 《뜨허어억! 부딪힌드아아아! 아빠!》 부딪친다고 느낀 탑승자가 부친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푸른 늑대와 충돌한 순간 거짓말처럼 부드럽게 기계가 자리에 멈춰 섰다. “커다란 비눗방울 같네요.” 세이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를 묘사했다. 미끄럼틀에 이어 아이다운 적절한 묘사였다. 정체 모를 물체는 커다랗고 두터운 물방울 안에 달려오던 그대로 갇혀있었다. 공기를 담은 비눗방울이 아니라 물이 가득 들어찬 원형의 방울이었다. 퐁! 방울이 터지며 터널 바닥에 물이 촤르륵 쏟아졌다. 에단과 바이칼은 푹 젖은 물체를 앞에 두고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관으로부터 눈짓을 받은 바이칼이 푹 젖은 물체에 다가가 똑똑 노크했다. “이보십쇼? 저기요? 안에 잘 살아계십니까?” 《…….》 멀리서 소리 지를 땐 잘만 주거니 받거니 해놓고 이제 와서 묵묵부답이었다. 바이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어랍쇼? 설마 죽었나?” “……너무 놀라서 기절했을 순 있겠지.” 에단이 한숨을 길게 뱉고는 검을 빼들었다. “단장, 뭐 하시려고요?” “자네 말대로 심장마비가 와서 죽었으면 곤란하지 않겠나.” “그렇다고 저걸 벱니까?! 잘못 잘라서 속에 든 사람까지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약간만 도려내면 돼.” “잘못 충격을 주면 폭발하는 기계일지도 모르는데요.” “그러면 자네는 또 뭐가 나타날지 모르는 도로 한가운데에 이걸 버려두고 가자는 의견인가.”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온 쥬다스가 물체의 표면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찬물을 사용했음에도 금방 온수로 변해버릴 만큼 표면이 뜨끈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틈이 있어.’ 그는 미드가르드에서 사용하는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개발품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경우 대부분 손잡이를 당기거나 버튼을 누르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있다. 그의 예상대로 바람이 파고들어 틈을 벌리자 물체의 윗부분이 주전자 뚜껑처럼 덜컥 열렸다. 치이익! 과열된 내부에서 김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크고 둥그런 헬멧을 눌러쓴 소년이 그 안에 죽은 듯이 널브러져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0197 / 0240 ---------------------------------------------- 23장. 융합 아이의 이름은 리키. 올해로 열셋이 된 리키는 미드가르드의 하나뿐인 계절 ‘봄’에 태어났다. 봄이라곤 해도 실제 자연환경이 만들어내는 기후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온도, 같은 날씨, 같은 하늘 아래에서 아이는 태어나 13년간 자랐다. ‘리키.’ 기억이란 걸 갖게 된 첫 순간부터 리키의 가족은 아버지 한 사람뿐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를 사랑으로 돌봤기 때문에 전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었다. 무척 유능한 발명가였던 리키의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 기계로 친구를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리키는 행복했다. ‘있잖아. 아빠가 없으면 난 어떡하지?’ 어느 날 리키가 그렇게 물었을 때 아버지는 웃으며 답했다. ‘없긴 왜 없어. 리키도 알잖니? 아빠는 강해.’ ‘응. 하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누구나 죽는대. 만약 내가 엄청 오래오래 살아서 100살이 되면, 그때 아빤 없을 거잖아.’ ‘이런, 리키.’ 우울해하는 아이를 품안에 힘주어 꼭 안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었다. ‘그럼 아빠가 120살까지 살아줄게.’ ‘어……?’ ‘리키가 100살에 죽으면 아빠는 120살에 죽고, 리키가 200살에 죽으면 아빠는 220살에 죽을 거야.’ 서로 똑 닮은 밀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시선을 맞부딪혔다. ‘약속할게. 절대 먼저 안 죽어. 그럼 안심이지?’ ‘정말?’ ‘아빠가 이제까지 거짓말한 적 있니?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네 편이야. 리키. 널 혼자 두지 않을게.’ 그러나 그 약속은 이미 2년 전에 깨어졌다. 리키는 꿈에서 깨어나는 몽롱한 와중에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 거짓말 안 한다는 이야기도 거짓말. 절대로 먼저 죽지 않겠다는 말도 거짓말.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까지도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잠에서 깼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싫었다. 2년 전 사고 이후로 새벽마다 찾아오는 무기력증이 오늘도 어김없이 온몸을 번데기고치처럼 휘감았다. 도로록. 정신은 깼지만 여전히 눈은 감고 있던 리키의 귓가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 집에서 듣던 익숙한 문소리도 아니었을 뿐더러, 이제 더 이상 아이에게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발소리를 대놓고 나타나는 침입자라니? 당황하던 리키는 곧 잠결에 반쯤 잠겨 있던 정신을 똑바로 차렸다. ‘아니지. 침입자가 아니라 내가 낯선 장소에 있는 거야. 여긴 내 방 침대가 아니야.’ 이불은 너무 얇아서 거슬리고 베개도 너무 높아서 불편했다. 꾸고 싶지 않았던 꿈을 꿔서 그런지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울렁거리는 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리키는 일단 실눈을 뜨고 낯선 상대의 행동을 살폈다. 마침 상대방은 침대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뭐야. 뭘 하려는 거지?’ 다행히도 상대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좀 더 체격이 크긴 했어도 리키 자신과 그다지 나이 차이가 많아보이지도 않는 소년이었다. 그가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일단 제압하는 데에 무리가 없으리라 판단이 섰다. 리키는 이런 때를 대비하여 방범용으로 발목에 걸고 다니던 투명 발찌가 제 위치에 잘 걸려 있는지 확인했다. 리키는 상대가 이불보에 손을 뻗는 틈을 타 날렵하게 몸을 일으켜 굴렀다. 그러면서 훈련한 동작대로 투명 발찌에 마력을 불어넣어 이를 발동시켰다. 철컥! “움직이지 마.” 어느 틈엔가 발찌가 총으로 변해 있었다. 리키는 낯선 이의 머리에 총을 겨눈 채 최대한 성질 더럽게 보이는 말투로 그를 협박했다. “허튼 수작 부리면 쏠 거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 “누구야, 너.”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이른 새벽이라 상대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총에 머리를 맡긴 상태에서도 평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전자란다.” “도전이라니, 나한테 뭘 도전하게?” “네가 아니라 시솝을 만나서 하려는 일이지.” “시솝?!” 갑자기 스케일이 달라지는 대화에 리키가 히익 숨을 삼켰다. 자신을 시솝의 도전자라 소개한 낯선 상대는 뒤통수에 총구를 맞댄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다루지 못하는 기계를 타고 도로를 질주하는 바람에 치일 뻔했던 이이기도 한단다.” “뭐?” “이 아이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지.” 크르르! 섬뜩한 소리가 밑에서 들려왔다. 분명 처음엔 있는 줄도 몰랐던 푸른 늑대가 소년의 곁에 선 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물어뜯을 것만 같은 험악한 태세에 리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도로 질주…… 치일 뻔……. 아!’ 생각났다. 리키는 사색이 되어 맥없이 총구를 바닥으로 내렸다. “맞아. 2호가 폭주해 버려서, 도저히 멈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정말 죽는구나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앞에 사람들이 잔뜩 나타나서.” “기억나느냐?” “근데 그 뒤로는 대체 어떻게 된……!” 리키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물어보려는 찰나 초승달 같은 불빛이 번쩍 어둠을 가르고 빛났다. 퍼억! 알싸한 통증이 리키의 오른손을 가격했다. 동시에 손에서 놓친 총이 바닥에 떨어져 빙글빙글 돌며 벽까지 가 부딪혔다. 리키가 무엇으로부터 공격받았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긴 도가 형형히 빛나는 날을 완전히 드러냈다. 그게 곧장 리키의 목으로 향하던 순간이었다. “거기까지, 에단.” “……예.” 에단은 주인의 명에 깔끔히 승복했다. 그러나 검을 거두었을 뿐, 여전히 리키를 향해서는 서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 휘두른 검에 그대로 목이 날아갈 뻔한 리키는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바닥에 흐물흐물 주저앉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구나. 하나 다짜고짜 총부터 겨눈 네 잘못도 있으니 앞으로는 조심하려무나.” 슬슬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둑어둑하던 방 안에 창문을 타고 물안개처럼 촉촉하고 묽은 햇살이 번졌다. 희미한 태양빛 아래 드러난 소년의 금안이 부드럽게 리키를 마주보았다. “미, 미안.” 리키는 고개를 푹 숙이고 사과했다. “으으, 정말 미안. 난 내가 자는 사이 납치라도 당한 건 줄 알고…….” “괜찮다. 아가. 우리도 더는 괘념치 않으마.” 소년, 쥬다스는 빙긋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본 리키가 사과하던 중이란 사실도 잊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전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데도, 이상하게 아버지가 떠오르는 미소였다. 잠시 후 완전히 동이 터 아침이 되었을 무렵, 숙소에 머물고 있던 일행이 전부 한자리에 모였다. 엉뚱한 만남으로 쥬다스 일행 사이에 끼어들게 된 리키가 따뜻한 우유를 홀짝이며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하룻밤을 묵은 장소는 근처 도시에 있는 커다란 숙박시설이었다. 무려 방 하나가 열 명이 넘는 대인원이 머물기에도 불편이 없을 정도로 넓었다. 쥬다스가 폭주한 기계 장치 안에서 기절한 리키를 데리고 와 아무 경계도 하지 않고 돌보아주었단 얘기를 들은 리키는 대단히 민망해졌다. 은인도 몰라보고 총부터 들이댔으니 그의 수하에게 칼침을 맞아도 할 말이 없을 뻔했다. ‘그나저나 시솝의 도전자라더니 엄청 여유롭네.’ 한자리에 모여서 작전회의라도 하려는 줄 알았더니 다들 한갓지게 빵에 잼이나 바르고 있었다. 가끔 에단이 등골이 오싹해질 만큼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것만 빼면 불편한 구석이라곤 없었다. 그냥 여행 온 사람들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리키는 우유에 입술을 담근 채 힐끗 쥬다스를 훔쳐보았다. “주인, 플루비한테 빵 먹여도 돼?” “너무 많이 주면 탈이 나니 적당히만 주렴.” 그 곁에는 가야가 빵을 조각조각 찢어 손바닥 위로 모으고 있었다. 루바르잔 출신으로 구성된 일행 가운데 유독 이질적인 생김새였다. 리키는 그의 검은 머리와 복숭아색 피부, 품이 넓은 의상 등을 보고 해동 출신이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쥬다스를 향해 주인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노예인가 싶었는데 하는 태도는 건방지기 짝이 없었다. 주인을 존중하고 있긴 하지만 노예가 가져야 할 공손함과 명령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움직임이 전혀 아니었다. ‘반말하는 거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둘이 친구 사이 같기도 한데. 컨셉인가?’ 졸지에 가야는 리키의 머릿속에서 특이한 컨셉을 좋아하는 매니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플루비. 아침 먹자.” “꾸구구구.” 빵을 찢고 있을 때부터 이미 가야의 곁에 붙어있던 플루비가 애교랍시고 비둘기 소리를 따라하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리키는 그 광경에서 도통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괴상한 생물체…….’ 생긴 건 영락없이 전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이지만 크기가 닭 한 마리만큼 작았다. 짐승의 새끼가 끼잉끼잉 우는 것과 흡사하게 삑삑 소리를 내며 울지만 지금처럼 비둘기 소리를 따라 하기도 한다. 가뜩이나 기계와 사람이 지배한 미드가르드에서 한 번도 야생동물을 만난 적 없는 리키는 특이한 외향을 가진 플루비가 마냥 신기했다. “플루비의 종족명은 와이번이란다.” “콜록!” 리키는 우유에 입술을 담근 채 마시지는 않고 멍하니 있다가 흠칫 놀라 사래에 들리고 말았다. 입을 틀어막고 우유를 뿜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리키를 보며 쥬다스가 미안함을 담아 웃었다. “이런, 괜찮으냐?” “어, 으, 네.” 리키는 존대도 아니고 하대도 아닌 애매한 화법을 사용했다. 처음엔 나쁜 뜻으로 침입한 사람인 줄 알고 험악하게 굴었지만 자신을 구해줬다는 은인에게 계속 함부로 대할 이유는 없었다. 나이도 조금이나마 쥬다스가 더 많았고 일행 중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걸로 보아 지위도 높아 보였다. 그러다 보니 평생 쓰지도 않던 존대가 입안에서 저절로 맴돌았다. 뿐만 아니라, 나이나 지위 등을 떠나서 그에겐 그래야만 할 것 같은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저기요, 분명 시솝을 만나러 갈 거라고 했지?” 리키는 입가를 타고 흐른 우유를 소매로 슥슥 닦으며 말했다. 어중간한 화법이긴 했으나 뜻은 통했기에 쥬다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야.” “음?” “나도 시솝을 찾아다니던 중이었어. 2년 동안.” 그 말이 끝나자마자 바이칼이 빵에 버터를 바르다 말고 불쑥 끼어들었다. “미드가르드인 사이에서도 시솝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나 봐?” “당연하지. 시솝은 미드가르드에서 모든 자유를 손에 쥔 일인자야. 굳이 자기 위치를 구구절절 알릴 이유가 없잖아.” “하긴. 위치를 공개하면 사람들이 엄청 귀찮게 굴겠지.” 쥬다스도 시솝의 그러한 행동이 이해가 갔다. 그 또한 전생의 삶에서 사람에게 지쳐 도망치듯 자신의 위치를 알리지 않고 은거해 버렸었기 때문이다. ‘이그레트’가 사망한 지 17년도 넘었지만 아직도 세상 사람들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지금 시솝을 찾아다니는 미드가르드인들처럼 루바르잔 제국에서도 ‘이그레트’를 찾는 걸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분명 존재했다.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떠올린 쥬다스가 쓴웃음을 삼키는 사이 바이칼이 다시 리키를 향해 물었다. “근데 너 같은 꼬마가 무슨 목적으로 시솝을 찾는 건데?” “시솝은 영생을 손에 넣은 유일한 사람이니까.” 리키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찾아서 꼭 알아낼 거야.” 그의 밀빛 눈동자가 강한 열망을 품고 이글거렸다. “영생을 사는 방법.”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업로드가 늦어서 죄송합니다! (꾸벅) 5월의 마지막 월요일이네요.ㅎ 날씨도 이젠 완전히 여름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다 충동구매한 선풍기가 빨리 배송오기만을 바라며....(...)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 0198 / 0240 ---------------------------------------------- 23장. 융합 영생. 이제 막 13살 꼬마가 바랄 법한 소망이 아니다. 그리 여기면서도 쥬다스는 그 말이 어떤 생각에서 나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확실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면 거짓이겠지.’ 심지어 한 번 눈을 감았다가 다시 태어났어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의 끝에서 머리가 하얗게 세고 온몸이 병들어 기력을 잃어가던 순간 그는 다가오는 죽음과 적나라하게 마주했다. 죽음은 아무리 강한 힘로 막아보려 해도 벗어날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이 한 번도 손에 넣어보지 못한 영원이란 개념을 죽음으로서 깨닫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한 번 죽은 인간은 결코 다시 살아날 수 없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이 소중했는지도 아무 상관없이 영원토록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죽음을 두고 영원한 상실이라 부르기도 했다. ‘저 아이는 주변에서 그러한 큰 상실을 느낀 적이 있구나.’ 쥬다스는 리키의 소중한 존재가 죽었음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 냈다. 사람은 자신의 죽음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소중히 여기던 자가 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은 대부분 크나큰 공포로 남게 마련이다. 그가 시선을 내리고 침묵하자 바이칼이 휘파람을 휙 불어 정적을 깨뜨렸다. “어이쿠. 포부가 대단하네. 시솝이 영생을 산다는 건 어떻게 확신해?” “시솝은 이미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 지 오래야.” 리키는 단호하게 답했다. “영생이 아니라도 좋아. 그는 수명을 늘리는 법을 알고 있을 거야. 그거면 돼. 백 년이고 이백 년이고 계속 살아 있기만 하면.” “왜 그렇게까지 오래 살고 싶어 하는데?” “그건…….” 사실 이유는 명확했다. 리키는 무릎위에 둔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살아 있기만 하면 아빠를 되살릴 수 있어.’ 과학과 마법, 그게 아니라면 모든 나라에서 금기로 지정한 사령술을 이용해서라도 어떻게든 돌이킬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리키는 영생에 가까운 시간만 주어진다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그걸 오늘 막 처음 본 타인들에게 설명하긴 힘들었다. “그, 그건 너희 목적과 관계없잖아? 내가 하려던 말은, 아으, 어차피 시솝을 찾을 거면 같이 찾자고!” “흐음.” 쥬다스는 수락하는 말 대신 식탁에 턱을 괸 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금안과 시선이 마주친 리키가 움찔 어깨를 좁혔다. “왜…… 왜?” “꼭 우리가 무슨 목적으로 시솝을 찾는 건지 알고 있다는 투로구나.” “아.” 리키는 긴장했던 숨을 내뱉으며 왼손에 끼고 있던 손등장갑을 벗었다. “그야 당연하지. 미드가르드에서 지금 너희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드물걸?” 그 말과 함께 손등이 불쑥 내밀어졌다. 소년의 손등에는 둥근 전구처럼 생긴 연분홍색 구체가 박혀 있었다. 꼭 살아 있는 심장을 손등에 박은 것처럼 구체가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이걸 봐.” 위이잉- 리키가 손등에 박힌 연분홍색 구체에 마력을 주입하자 묘한 진동음과 함께 구체에 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반짝이는 분홍빛 정령이 불쑥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언제나 주인님의 편안한 하루를 위해 일하는 내비게이션, Navi.J0527입니다. 현재 기온 23도, 날씨도 쾌적하네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나비날개처럼 팔랑이는 4장의 연분홍색 날개, 길게 늘어뜨려 흩날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손가락만 한 크기로 주인의 곁을 맴도는 모습까지. 영락없이 정령의 모습이었다. 「어머. 저 애도 정령인가요?」 「맞는 것 같은데.」 「이상하다요. 저런 정령은 본 적 없다요.」 「수상하군.」 다른 정령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생김새와 품고 있는 기운까지는 다른 정령과 비슷했지만 무언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좀 더 봐야 알겠지만 쟤, 일단 확실히 정령이야.」 자연계 정령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리키의 분홍빛 정령은 방글방글 웃기만 했다. 리키는 그녀에게 일상적인 태도로 명령했다. “제이. 오늘의 핫이슈를 검색해 줘.” 「네, 주인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상냥하게 대답한 분홍빛 정령은 잠시 후 스프레이를 뿌리듯 스르륵 허공에다가 빛줄기를 이어 한 장면을 그려냈다. [노예 시장 철폐 사건.]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둥실둥실 떠올랐다. 제목 밑에는 폐허가 된 노예시장과 쥬다스 일행의 모습, 그리고 그가 말했던 ‘시솝에게 도전한다’는 이야기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입체 영상으로 자신들의 행적을 확인한 세이지가 신기한 눈으로 분홍빛 정령을 올려다보았다. “와. 이건 통신구 같은 역할인가요?” “내비게이션이야. 기계형 정령이라고 들었어.” 「뭐야. 기계형 정령도 있었어?」 유니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세상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던 바람의 정령조차 몰랐던 사실이었다. 미드가르드에서 ‘내비게이션’이라는 정령이 출시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기도 했고, 또 자연환경을 말살시킴으로 인해 바람이 접근하기 어려워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충격받은 바람의 정령의 곁에 날아든 카니가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아마도 저 내비게이션, 인간이 만들어낸 정령이 아닐까 해요.」 「인간이 정령을 만들어 낸다고?」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니죠. 따지자면 물질계 정령에 속하겠네요.」 물질계 정령 역시 주로 인간의 소망에 의해 태어난다. 강하게 바라는 마음을 빌어, 소중히 아껴주었던 마음을 모체 삼아 그렇게 물질에 깃들어 실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성향이 조금 다르긴 했으나 기계형 정령도 아마 마찬가지일 거라고 자연계 정령들은 짐작했다. 「으응, 그렇지만 생명력이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 조금 무섭긴 해요.」 「꼭 인형을 보는 느낌이다요.」 토니가 날개를 바르르 떨며 쥬다스의 옷깃에 매달렸다. 정령들이 충격 받은 만큼 쥬다스 역시 이 기이한 현상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바라보고만 있자 리키가 손으로 휙 영상을 가리켜보였다. “봐. 이런 식으로 미드가르드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 사고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너희에 대해서 모를 리가.” “그 아이. 기계형 정령이라면 네가 직접 만든 게냐?” “어? 제이(J) 말이야?” 영상을 종료시킨 제이가 파다닥 날아 리키의 손등에 내려앉았다. 리키는 자신의 정령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었다. “제이는 우리 아빠가 만들었어. 그래서 좀…… 구식이긴 한데. 업그레이드만 제때 해주면 불편하진 않아! 아빠가 생일 선물로 준 내비게이션이라 정도 많이 들었고.” 「현재 밀린 업그레이드가 총 5건 남았습니다.」 “……기다려. 좀 이따 해줄게.” 리키가 들어가 있으라고 명령하자 분홍빛 정령은 마치 개가 제집을 찾아 들어가듯 팟 손등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사라진 정령의 자취를 쫓아 손등을 내려다보던 리키는 다시 고개를 들고 쥬다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에휴, 업그레이드 적용이 점점 버거워지긴 하지만. 최신 내비게이션은 엄청나게 비싸서 살 엄두도 안 나.” “…….” “미드가르드를 여행할 거라면 하나쯤 구매해 두는 걸 추천해. 뭐 나랑 동행할 거라면 굳이 살 필요 없고. 헤헤.” ‘정령을 구매하고 판매한다라.’ 자연계 정령들과 계약한 정령술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었다. 기계형 정령은 스스로 계약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돈을 주고 구매한 사람에게 강제로 귀속된다는 뜻이다. 노예 시장을 봤을 때만큼이나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정령들의 세계는 인간인 그가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게 기계형 정령들이 살아가는 형태일지도 모른다. ‘어디까지가 존중이고 어디까지가 방관인지 점점 판단하기 어렵구나.’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의 문화를 접하면 접할수록 골치가 아파지는 걸 느끼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때? 어차피 너희들은 강하니까 나 같은 꼬마 하나쯤 낀다고 겁먹진 않을 거 아냐?” “허 참. 거 당돌한 녀석이네.” 자기 입으로 자신을 꼬마라고 칭할 정도면 상당히 영악하단 뜻이었다. 혀를 찬 바이칼이 슬쩍 에단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 때와 변함없이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5년 지기 친구의 눈으로 그 안에 묻어둔 짜증을 솎아낼 수 있었다. ‘역시 엄청 싫어하시는군.’ 예전부터 제멋대로 구는 꼬마는 에단의 성미와는 아예 맞지 않았다. 평소 야생마처럼 날뛰곤 하는 바이칼이 그 앞에서만큼은 방정맞은 행동을 자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에단은 예의범절을 중시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는 행위를 극도로 싫어했다. 어찌 보면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남들과 자신 간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일 뿐이었다. 그는 특히 주군에게 피해를 끼친다거나 함부로 대하는 자가 생기면 칼같이 대응했다. 루바흐 학원을 다닐 적에 쥬다스가 초기 입지를 다지는 데에 큰 공헌을 한 게 바로 이러한 에단의 숨은 노력들이었다. 그런 그가 지금 주군의 목을 노린데다가 제멋대로 굴고 있는 리키를 참아주고 있는 건 순전히 명령 때문이었다. 쥬다스가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벌써 리키의 목을 날려도 스무 번은 더 날렸을지도 몰랐다. 제 목의 안녕이 몇 번이나 위협받았는지 모르는 리키는 서슬 퍼런 눈길을 받으면서도 쥬다스에게 동행제의를 거듭했다. “내가 지금까지 돌아다니면서 알아낸 정보 중에, 시솝이 관심가질 만한 주제가 몇 가지 있어. 나한텐 힘이 없어서 저지르지 못했던 일들이지만 노예 시장을 철폐해 버린 당신들이라면 가능하잖아?” 다시 손등장갑을 착용하여 내비게이션을 가린 리키는 고개까지 숙여가며 간절히 부탁했다. “모아둔 정보를 전부 그쪽한테 제공할게. 숙식 비용도 꼬박꼬박 낼게. 그냥 시솝의 초대장이 오면 같이 데려가주기만 하면 돼. 응?” 쥬다스 일행으로서도 미드가르드에 대해 안내를 해줄 사람이 들어온다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리키의 말마따나 고작 열세 살 꼬마 하나를 두려워해서 결정을 고민하는 건 아니었다. 쥬다스는 아이가 시솝을 만나 하려는 일에 조금 신경이 쓰였다. ‘영생. 그리고 죽은 자를 되살리는 일. 그건 인간이 바라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소중한 자의 죽음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를 되살리길 바라게 된다. 쥬다스는 아이가 바라는 게 비단 영생뿐 아니라 누군가를 되살리는 것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잠시 리키를 바라보던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래. 같이 가보자꾸나.” “정말?! 열심히 협력할게요!”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느냐?” “응. 뭔데?” 대수롭지 않게 되물었던 리키는 돌아온 답변에 멈칫 밝게 웃고 있던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곧장 대답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쥬다스는 머뭇거리는 아이를 향해 한 번 더 질문했다. “내게 약속할 수 있겠느냐?” “……물론이지.” 리키는 눈을 피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아. 약속할게.” ‘어차피 약속 따윈 전부 거짓말이니까.’ 불편한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리키는 장갑을 낀 손을 당당히 앞으로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손에 상대 역시 부드럽게 응해왔다. “이제부터 우린 같은 편이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6월의 첫 시작이네요. ㅎㅎ 봄이 왔다, 따뜻하다 얘기하던 게 엇그제같은데 벌써 여름에 속하는 6월달이라니...ㄷㄷㄷ 과연 그마만큼 더워지기도 했고요.ㅠ 강해지는 더위 조심하시고, 이번 달도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ㅎ 늘 감사합니다! 0199 / 0240 ---------------------------------------------- 23장. 융합 그렇게 시솝을 만나겠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리키가 임시로 일행에 합류했다. 자신만만해했던 대로 리키는 시솝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시솝이 직접 모습을 나타나는 일은 절대 없어. 그자는 정치엔 모래 한 톨만큼도 관심이 없으니까.” “나라가 망해도?” “그 정도로 큰일이 벌어지면 나타날지도 모르지만. 아직까진 그래.” 의자를 거꾸로 돌려 앉아 등받이에 턱받침을 한 바이칼이 질린 눈으로 물었다. “아직까지라면……. 설마 300년이라는 집권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응.”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그쯤 틀어박혀 있었으면 존재 자체도 잊힐 만한데.” “시솝이 괜히 서열 1위가 아니야. 그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미드가르드 전역을 늘 지배하고 있어. 아마 지금 우리 이야기도 듣고 있을 걸?” “지금? 어떻게?” “모든 기계 시스템은 시솝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어. 시솝이 왕이라면 기계는 전부 그의 기사야.”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이지는 오싹 소름이 돋아 팔뚝을 쓸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을 거란 이야기에 목줄을 매놓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 세이지만큼은 아니더라도 불쾌함을 느낀 에단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신이나 다름없군.’ 미드가르드가 어째서 교황청과 대립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솝의 권한은 제국 황권이 지닌 권력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재물, 자유, 심지어 건강과 수명까지도 모조리 그의 손아귀에 있었다. “아무튼 그동안 시솝이 관심을 보인 주제는 ‘질서의 붕괴’, 그리고 ‘화제성’이야.” 리키는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너흰 벌써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냈어. 노예 시장을 닫아버리고 핫이슈 검색어에 올랐잖아! 이미 시솝은 너흴 주시하고 있을 거야.” “300살 넘은 아저씨가 어디선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니 기분이 좀 나쁜데…….” 그러자 가야가 단호하게 손날을 세워 바이칼의 머리통을 통 내려쳤다. “단정 짓지 마, 멍충아. 아직 아저씨인지 아줌마인지도 모르잖냐?” “윽. 아줌마라고 해도 기분이 나아질 것 같진 않은데요.” “그리고 300살이 넘었으면 너희 기준이면 아저씨가 아니라 할아버…….” 거기까지 말하던 가야는 문득 자신이 신수로서 존재해 온 세월이 천 년도 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말꼬리를 돌렸다. “―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야지.” “에이, 가야 님. 무리수 두지 마십시다. 세상에 30살도 아니고 300살 차이 나는 형이 어디 있답니까?” “남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형이고 오빠다. 아저씨나 할아버지 따윈 되지 않아.” “오? 그거 왠지 멋진 말씀이네요.” “난 원래 멋져.” 비장한 어조로 말하는 가야를 보며 바이칼이 경탄을 터뜨렸다. 은근히 죽이 잘 맞는 신수와 수하를 바라본 쥬다스가 뭐라 끼어들 말을 찾지 못하고 어색하게 볼을 긁적였다. “흠……. 그럼 리키 네가 볼 때엔 이제 우리가 무엇을 더 하면 되겠느냐?” 저 바보들은 뭔가 싶은 표정으로 바이칼과 가야를 쳐다보고 있던 리키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 강하다며? 기왕 시솝에게 도전을 할 거면 화끈하게 미드가르드를 뒤흔들어 봐. 어디 보자, 나한테 마침 미드가르드 서열 순위권자의 정보가 있으니까.” 리키는 손등에 장착한 연분홍 빛 기계, 내비게이션 홈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겨 보이며 개구쟁이처럼 헤헷 웃었다. “서열 깨기. 어때?” * * * 메이벨 시티. 규모는 다른 도시에 비해 작은 편이지만 집 밖으로 멀리 나가기 귀찮아하는 이들을 위해 편의시설도 오밀조밀 잘 구성해 놓았고 큰 사건 없이 늘 조용하여 제법 사랑받는 장소였다. 특히 아름다운 자연의 강물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마력 홀로그램 운하가 흐르고 있어 삭막한 도시 풍경보다는 쾌적하다는 평을 듣곤 했다. 지난주 콜로세움을 기점으로 드디어 미드가르드의 공식서열 100위권 안에 들어오게 되어 골드 등급으로 승급한 신예 ‘카자하’가 바로 이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한적한 호프에 들어가 골드 진입을 홀로 자축하며 술잔을 들이키고 있었다. “소문 들었나?” 덜컹. 비어 있던 맞은 자리에 덩치 큰 사내가 앉았다. 카자하는 놀란 척도 하지 않은 채 주전자만 한 잔에 담긴 맥주를 한입에 깨끗이 비우곤 대꾸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노예 시장 얘기를 또 하려는 거면 콧구멍에 후추통을 처박아주마.” 소식을 전하러온 동료가 어정쩡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 얘기의 연장선이긴 한데……. 흠흠, 그 도전자들이 지금 이 도시에 와 있다고 하더군.” “뭐?” 시솝의 도전자들! 미드가르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있던 화젯거리였다. 지겹다고는 했어도 카자하 역시 미드가르드의 상위 서열을 차지한 골드 등급자. 바로 지척에 당사자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건방진 도전자 놈들이 근처에 있었다니.’ 시솝은 미드가르드의 자존심이다. 그에게 도전한다는 건 미드가르드를 전부 자신의 발밑으로 두겠다는 뜻이나 매한가지다. 그래서 정말 그만한 실력이 있다고 인정받기 전까지는 상위 서열일수록 그 도전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쾅! 테이블이 부러질 듯 거세게 짚고 일어선 카자하가 동료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그 자식들 위치는?” “진정하고 마저 얘기를 좀 들어봐.” “어차피 나보고 처리해 달라고 물어온 정보 아닌가? 자세한 위치 당장 넘겨.” 동료는 한숨을 쉬고 위치좌표를 알려주었다. 워낙 작은 도시라 그런지 건물 위치가 다 거기서 거기였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숙소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한 카자하가 착용 중인 내비게이션을 작동시켰다. 그러자 띠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보라빛 정령이 카자하의 손등에서 튀어나왔다. 「꺄하항, 주인님을 위해 불철주야 일하는 Navi.M40이에용! 감지된 위협 0건~ 음주로 인한 약한 상태이상 1건이 발견되었어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발랄한 정령의 목소리가 호프에 울려 퍼졌다. 내비게이션의 발랄한 목소리를 들은 다른 사람들이 움찔 놀라 그들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연계 정령과 달리 기계형 정령들은 누구나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주인이 원한다면 파장을 보내 귓속말 하듯 몰래 대화를 주고받기도 한다. 카자하는 쓸데없이 답답하기만 한 귓속말 기능을 해제하고 줄곧 이렇게 큰 소리로 대화하곤 했다. “입력한 좌표를 토대로 시솝의 도전자들이 있는 현재 위치를 찾아. 그리고 전투를 준비해.” 「경고, 주인님 음주 상태예요! 경고, 전투는 늘 맑은 정신으로!」 “경고는 무시한다. 전투 모드.” 주인의 안위를 위해 쫑알대던 정령은 재차 이어진 명령을 받고 곧장 경고를 멈추었다. 그러더니 몸에서 화앗 빛을 뿜으며 무기로 변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들기는커녕 밑에 깔리거나 반동으로 팔이 부러질 법한 거대한 마력총이었다. “놈들의 위치 탐색은?” 「좌표 확인. 생체 반응 확인. 위치정보 갱신.」 큰맘 먹고 새로 장만한 카자하의 내비게이션은 확실히 비싼 값을 했다. 정령은 물 흐르듯 빠르게 주변을 탐색하더니 결과를 알려주었다. 「목표 대상은 1m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응?” 막 호프를 나가려 문고리를 잡았던 카자하가 잠시 멍하니 자리에 못 박혀 섰다. ‘1미터? 방금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순간 내비게이션이 고장이라도 난 게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황당한 수치였다. ‘고장이 아니라면 이 문 밖에 바로 놈들이 있다는 뜻.’ 카자하는 그 생각이 들자마자 발로 문짝을 뻥 걷어찼다. 싸구려 철판으로 대충 못 박아 기워놓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감히 시솝께 대항하는 오만방자한 도전자가 누구냐!” 총을 든 채 버럭 소리부터 지르고 본 카자하의 시야에 반가면을 쓴 소년이 들어왔다. 검은 지팡이를 짚고 검은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렸으면서 얼굴의 반을 가린 가면만 새하얗다. “호오, 열렬한 환대 고맙군.” 이런 건 예기치 못했는데, 라며 소년이 가벼이 웃었다. 웃는 입매와 달리 가면 사이로 엿보이는 금색 눈동자는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사냥.’ 카자하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기세를 느꼈다. ‘놈은 나를 사냥하러 왔다.’ 그러고 보니 문을 그렇게 세게 걷어찼는데도 소년은 멀쩡해 보였다. 카자하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오히려 강철로 된 문짝이 걸레짝마냥 갈기갈기 찢어져 흩뿌려지고 있었다. 후웅! 정체를 알 수 없는 녹색 바람이 이를 드러낸 맹수처럼 위협적으로 주변을 맴돌았다. “제법 오만하게 굴 자격은 갖춘 모양이지? 제대로 된 훈련만 받으면 골드 등급에 입성할 수 있을지도.” “저런, 그새 잊어버린 것이냐? 어리석구나. 분명 조금 전 네 입으로 말했을진대.” “……?” 소년은 검은 지팡이를 들어 그를 가리키며 혀를 찼다. 당당을 넘어 대범하기까지 한 태도에 카자하가 영문을 모르고 서있자 소년은 같잖다는 듯 지팡이를 어깨에 걸쳤다. “나는 시솝의 도전자다.” 그리곤 홱 뒤돌아섰다. 사납게 피부를 스치던 바람결도 그를 따라 훅 누그러졌다. “골드 등급은 100위 안에 들어가는 실력자들이라고 들었는데. 헛걸음이었군.” “무슨!” “……학살에는 흥미 없어.” 완벽한 무시였다. 소년은 조롱하려는 의도 따윈 손톱만큼도 없이 진심으로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자하가 뿌득 이를 갈고는 거대한 마력총을 들어 올렸다. “자만하지 마라! 학살이 될지 피살을 당할지 어찌 그리 확신하고 등을 보이는가!” 그는 경고를 듣고도 멈추지 않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일반 마력총에 비해 훨씬 많은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총에선 응축된 강력한 총탄이 두두두둑 연발로 발사되었다. 그리고 곧 카자하는 깨닫고 말았다. 「시스템 작동 정지.」 날아간 총탄은 전부 푸른 장막에 가로막혀 각설탕이 커피에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놀랄 틈도 없이 들고 있던 마력총이 느닷없이 작동을 정지하며 본래 정령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게 대체.’ 정령이 가진 능력을 활용한다면 총 말고도 다른 공격도 가능했지만 하필 그의 내비게이션은 무엇 때문인지 공포에 질려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자만은 약한 자들이 부리는 주책이지.” 그리 말하는 소년은 혼자가 아니었다. 처음엔 짓눌러 버려야겠다는 생각에 가려 보이지 않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하는 것이다.” 가면을 쓴 소년은 그를 따르는 수하들에게 둘러싸여 유유히 사라졌다. 몇 잔 마시지도 않은 술기운이 뒤늦게 참패에 대한 부끄러움처럼 카자하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시야가 훌렁 뒤집히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우르릉! 천둥이 울었다. 사계절 내내 언제나 맑은 날씨를 유지하던 하늘이 그 평상을 깨뜨렸다. “별일도 다 있군…….” 카자하는 한 방울, 두 방울 천천히 얼굴 위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을 감상하며 중얼거렸다. “미드가르드에서 소나기라니.” 날씨마저 시솝의 지배하에 통제되는 영토에서 조금씩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메이벨 시티의 골드 등급 카자하를 기점으로 소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시솝의 도전자가 상위 서열자들을 무릎 꿇리기 시작했다’라고.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0200 / 0240 ---------------------------------------------- 23장. 융합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하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겨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사흘째 되는 밤, 골드 등급의 최상위권 서열권자가 쓰러졌다. “하…… 하하.”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버린 서열자와 그 추종자들을 지켜보던 리키가 헛웃음을 지었다. 강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건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쥬다스가 다루는 힘은 상대를 전부 무력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높은 서열권자라고 해도 그 앞에서는 갓 태어난 아기나 다름없었다. “대단해.” 리키는 쥬다스의 뒤를 따라가며 쓰러진 사람들을 힐끔힐끔 살펴보았다. 죽지는 않았어도 의식을 잃을 정도의 큰 타격을 받았다. 이들이 전부 명성 드높은 서열권자란 사실이 소년을 오싹 소름 돋게 만들었다. “……나도 당신처럼 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도저히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강함이다. 리키는 그저 그를 부러워했다. “저기. 왜 굳이 더 강해지려고 하는 거야?” 곁에서 그런 리키를 의아하게 여긴 세이지가 질문을 던졌다. “여긴 능력주의 사회잖아. 2년간이나 시솝을 찾아다닐 여력이 있는 걸 보니 너도 이쪽 사회에서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것 같은데. 그냥 네 능력만큼 누리고 살면 되지 않아?” “속 편한 소리를 잘도 하네.” 헹, 콧방귀를 뀌며 투덜거린 리키는 자신의 내비게이션 제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대답했다. “왜냐고? 여기선 남들보다 뛰어나야 그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니까. 다들 더 잘난 삶을 살려고, 더 좋은 평가를 받으려고 노력하는 거야.” 분홍빛 정령이 막 잠에서 깨어난 반딧불처럼 빙그르르 반짝였다. 그걸 보며 세이지도 마냥 신기하게만 보았던 무법국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수정했다. ‘신분제가 아닌 능력주의 사회라고 해서 모두에게 평등한 건 결코 아니로군.’ 미드가르드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일국의 지배층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감이 잡혀갔다. 충분히 답을 얻은 세이지가 고개를 끄덕이자 앞서 걸어가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남들보다 더 잘난 삶이라 함은 어느 정도 선을 말하는 것인고?” “정해진 선 같은 건 없어. 그냥 계속 경쟁할 뿐.” “너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는 셈이로구나.” 리키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누군가를 목표로 하고 달려가는 삶은 아니었다. 무법국가 미드가르드에선 타인과 경쟁하지 않으면 뒤쳐진다. 기계학을 배워서 획기적인 발명품을 개발하든지, 아니면 타고난 이능을 전투에 접목시켜서 강한 힘을 갖든지, 혹은 뛰어난 머리로 명성을 떨치든 뭐라도 하나는 남들보다 잘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매일 바쁘게 움직여야겠구나.” “맞아. 사는 게 바쁘고. 계속 바쁜 와중에…….” “그래.” “마음 어딘가에 아주아주 작은 구멍 하나가 뚫려서.” 그 구멍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약을 바를 수도, 아프다고 호소할 곳도 없다. “작고 대단하지도 않은 그 구멍 하나가 가끔씩 너무 시리고 아플 때가 있어.” 왜 아픈지 이유조차 모르고 그렇게 고통스럽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떠난 아버지 때문인지, 아니면 숨 가쁘게 살아가야만 하는 일상이 힘들어서인지는 리키 자신도 몰랐다. “그래서 이유 없이 슬퍼질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어. 괜찮아졌다 싶으면 또 아무렇지 않게 살다가.” 어느 날 의미 없이 툭 터지고 하는 그런 눈물방울. 그건 눈물 흘려본 자만이 아는 공허한 슬픔이었다. “무섭잖아. 내 마음조차 어떤 게 진실인지 모르니까. 그래서 강해지려는 거야.” 상류층에 입성하게 되면 적어도 무시 받는 삶은 살지 않게 된다. 소위 성공한 사람이 되어 힘과 명예, 부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리키는 만일 자신이 쥬다스만큼 강했더라면 2년간 고생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시솝을 만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는 당신은 그렇게나 강하면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겠네?” “그리 보이느냐.” “당연하지! 누구나 당신 앞에 무릎 꿇었을 테고.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질 수 있었겠지? 위협당할 일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잃은 적 없을 것 같아.” “…….” 쥬다스는 그저 침묵했다. 리키의 짐작은 전부 다 틀렸다. 사람들은 그가 가진 거대한 힘을 탐내 어떻게든 자신들의 발밑에 꿇리려 했다. 그리고 남들에겐 없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해주길 바랐다. 가족처럼 소중히 여겼던 아이들은 그의 등에 칼을 꽂았고, 차가운 배신만이 되돌아왔다. 제국의 황자로 다시 태어난 삶에서조차 그는 세상에 존재한단 이유만으로 목숨을 위협당했고 비참하게 어미를 잃었다. 살아갈 자리를 지키고 지금 그의 곁에 함께하는 친우들을 얻기까지 무던히 노력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그저 보이는 대로 그의 삶을 부러워했다. “좋겠다. 원하는 대로만 살아왔겠네.” ‘나는…… 그렇게.’ 원하는 대로 살아오지 못했어. 그가 평범한 열일곱 살이었다면 했을지도 모르는 항변이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답하지 않고 그저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랬으려나.” “……쥬다스 님.” 작은 부름에 돌아보자 내내 조용히 그를 따르던 크리스티나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정작 그가 웃어버리니 말문이 막혀 버린 표정이었다. 그녀의 바닷빛 눈동자 속에 담긴 걱정을 읽어낸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결국 크리스티나는 입을 다문 채 째릿 리키를 노려보았다. 그 서늘한 눈빛을 느낀 리키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쥬다스에게 속닥거렸다. “이상해. 당신 부하들은 왜 저렇게 다 날 싫어하는 걸까?” “흠. 글쎄다.” 에단에 이어 크리스티나에게까지 미움을 산 리키는 억울해 보이기까지 했다. 「전방 갈림길에서 우측 골목입니다. 이어서 목적지 부근입니다.」 내비게이션 제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방향을 알렸다. 그러자 늘 맡아오던 역할을 잃은 유니가 쀼루퉁하니 볼을 부풀렸다. 「체엣.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세부 정보를 찾기엔 어렵다고 하지 않았다요?」 「이 나라는 너무 막힌 부분이 많단 말이야. 날씨 조절이다 뭐다 하면서 배리어를 쳐놓고 자연의 바람은 들어가지 못하게 하질 않나, 창문을 죄다 유리로 막아버리질 않나!」 「그래서 제이의 도움을 받는 거 아니다요?」 유니는 순진하게 대꾸한 토니의 볼따구를 양손으로 감쌌다. 「토니.」 「……?」 그리고 꾸욱 꼬집어 찰떡을 늘리듯 쭉 늘렸다. 「몰라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이 멍청아!」 「우에에에!」 「‘제이’라고 친근하게 쟬 부르지도 마!」 「끄앙. 아라떠여.」 유니는 답을 듣고 나서야 울먹이기 시작한 토니를 놓아주었다. 「그치만 제이를 제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른다요?」 「어차피 불러봤자 별 반응도 없잖아.」 기계형 정령인 제이는 다른 정령들과 소통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정령이란 본디 계약자에게 제일 민감하게 구는 성향이 있긴 했지만 저렇게까지 일방적으로 한 사람에게만 반응하진 않는다. 정령에게도 감정이 있고 사고능력이 있다. 개체마다 차이야 있었지만 오히려 인간보다 더욱 풍부한 감성체계와 독특한 사고방식을 가진 정령도 많았다. 「솔직히 쟤네, 마음에 안 들어. 사람들이 겉껍데기만 흉내 내서 만든 장난감 같단 말이야.」 기계형 정령은 감정도 없고 이성도 없다. 그저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 주인을 도울 뿐이다. 이미 상품으로 거래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정령과는 차이가 컸다. 「그건 그렇다요.」 토니는 물끄러미 제이를 쳐다보다 추욱 날개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친해지면 재밌을 텐데.」 「응, 좀 더 알아볼 필요는 있을 것 같긴 해요. 나중에 이그레트가 여기서 하려는 일이 끝나고 나면.」 시무룩해진 땅의 정령을 향해 카니가 부드럽게 제안했다. 「같이 남아서 기계형 정령들에 대해 조사해 볼래요, 토니?」 「응요!」 「……네가 웬일이래?」 평소 아기 캥거루처럼 쥬다스에게 붙어 있길 좋아하는 카니답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그레트와 떨어져 있기 싫어했잖아.」 「많이는 말고 조금만 보고 오려고요. 몰랐던 정령들을 보고 나니 관심이 생겨서.」 「끙, 하긴. 카니 넌 옛날부터 호기심이 많은 편이긴 했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의 유니를 보며 카니는 후후 웃었다. 「당연히 우리는 이그레트와 언제까지고 함께할 테지만.」 노을처럼 말간 다홍빛 눈망울이 느릿느릿 깜빡였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잠시의 틈도 없이 손에 쥐려 하고 있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고.」 정령은 계약자의 내면을 닮아간다. 그가 성장할수록 그의 정령들 역시 어린아이 같은 집착에서 벗어나 보다 성숙한 애정을 품게 되었다. 계약자와의 분리에 대한 불안을 품고 있던 카니가 먼저 이를 시도하겠다고 나선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카니는 방긋 웃으며 말을 맺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이그레트가 나의 계약자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가만. 너 또 은근슬쩍 소유권 주장을…….」 「목적지에 도달하였습니다.」 제이의 안내 음성에 따라 정령들의 대화가 멈추었다. 서열깨기, 즉 상위권 서열권자들을 무릎 꿇려 정복하는 도중인 그들 일행이 이번 목표로 삼은 건 드디어 골드 등급을 넘어 시솝의 바로 아래 권력자라는 ‘스탭’들이었다. 스탭은 미드가르드 내에 총 10명이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 시솝 대신 각자 나라 관리의 중요한 부분을 맡아 하였다. 그중 하나인 등급관리 스탭이 바로 이번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콜로세움’…….” 제이가 안내를 해온 곳은 끝이 보이지 않도록 높이 솟은 원형 건물 앞이었다. 이른바 콜로세움, 즉 결투를 통해 국가공식 서열등급증을 발행받는 곳이다. 제국의 건축물들은 일반적으로 2층에서 3층이었고 높아봐야 5층 정도였다. 그리고 미드가르드에서 본 건물들은 대부분이 5층 이상으로 높긴 했다. 그런데 이 콜로세움은 미드가르드의 다른 건물보다도 월등하게 높았다. 층수만 따져 보아도 장장 33층! 해를 가리고 하늘과 맞닿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찌나 넓던지 콜로세움 건물 하나로도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열~ 장난 없네요. 이렇게 높은 건물을 어떻게 지었을까요?” “꾸꾹.” “그렇지? 플루비. 너도 저기까진 못 날겠지?” “까깍!” 바이칼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앉아 있던 플루비도 덩달아 날개를 까딱이며 괴성을 내질렀다. “등급을 올리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크게 지을 수밖에. 여긴 골드 등급전만 취급하는데도 이 정도야. 실버나 브론즈 전당은 이거보다 훨씬 더 커.” “이보다 더 크면 그게 건물이냐. 산이지.” “산이 그렇게나 커?” 리키는 오히려 방대한 자연을 본 적이 없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냇물, 무수한 식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산이란 미드가르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다른 대상에 신기함을 느끼며 콜로세움 출입구로 들어갔다. 밤중에도 건물 내부는 대낮같이 환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들어차 있었기 때문에 누가 들어오고 나가는지 눈여겨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어느 틈엔가 또 금요일이 돌아왔군요. ^^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금요일! 으하하. 독자님들도 행복한 금요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참, 이그레트 완결이 이제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이번 6월에서 7월 사이에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라 예정 중입니다. 마지막 최종장을 찍는 그 순간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ㅎㅎ 0201 / 0240 ---------------------------------------------- 23장. 융합 콜로세움 1층에 위치한 데스크 앞에는 무법국가라는 별칭이 무색하리만치 사람들이 착실하게 차례를 지켜 줄을 서 있었다. 콜로세움에 온 자들이 전부 골드 등급증을 얻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 만큼 여기서만큼은 함부로 큰소리를 치기가 애매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키는 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쥬다스도 차분히 그 줄에 합류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앞으로 약 1시간 47분입니다.」 딱히 시키지 않아도 제이가 알아서 시간을 계산해 주었다. 지루한 표정으로 앞줄을 내다본 가야가 등을 긁으며 투덜거렸다. “여긴 다 야행성인가? 밤에도 잘 돌아다니네.” “보니까 낮에도 사람 많던데요. 그냥 밤낮 구분이 없는 게 아닐까요?” 그들이 며칠간 미드가르드를 돌아다녀본 결과, 대체 잠은 언제 자나 싶을 정도로 늘 거리에 사람이 많았다. “응. 각자 활동 시간이 다 달라. 낮이 편한 사람들은 낮에, 밤이 편한 사람들은 밤에 움직이는 거지.” 리키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알려주자 그와 대조적으로 루바르잔 출신 일행들은 찜찜한 기색을 표했다. ‘정말 모든 면에서 제국과는 다르군. 친해질 수 없는 이유를 알겠어.’ 루바르잔에선 저녁노을이 지는 순간 모든 업무가 종료된다. 여행객들을 위한 여관이나 특수직종만이 영업을 지속할 뿐 대부분 하던 일을 중단하고 가정으로 돌아간다. 그런 루바르잔에서 온 일행들은 생활 패턴만 따져 보아도 대륙 아래위로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들끼리 전혀 친해지지 못하고 앙숙처럼 싸워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두 나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생활양식부터 시작해서 제도, 종교 및 가치관까지 전부. “음?” 그렇게 담소를 나누며 대기 시간의 지루함을 달래고 있는 일행 뒤에 새로 줄을 선 사람이 눈가를 찡그렸다. “가만. 이게 누구야.” “……?” “그 대단하신 사기꾼의 아들 아닌가?” 리키를 향해 씹어뱉듯 말하는 자는 거구의 중년 사내였다. 아이가 돌아보자 잘 익은 밀밭처럼 연한 황색의 눈동자를 들여다본 사내는 차가운 분노가 서린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키 파르바우티. 시솝 오딘의 보물을 빼돌리고 도망친 사기꾼 말이네.” “뭐? 아빠는 사기꾼이 아니야!” 리키가 버럭 소리 질렀지만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이를 듣고 웅성웅성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로키 파르바우티’? 전 정보관리 스탭 이름 아니야?” “맞아.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죽었지 아마.” “시솝의 보물을 뒤로 빼돌렸다가 스탭진에서 파문당했다던데.” “아냐, 그건 다 거짓말이야! 아빠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억울한 외침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았다. “멍청한 꼬마야. 내가 왜 널 알아볼 수 있었던 것 같나?” 먼저 리키를 알아본 사내가 손가락을 들어 분홍빛 정령을 가리켰다. “저 내비게이션 덕분이지.” “제이?” “그래, 그건 사기꾼 로키 놈이 빼돌린 내비게이션이다. 원래는 시솝에게 갔어야 할 모델이지.” 리키라고 몰랐던 사실은 아니었다.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죽는 그 순간까지 곁에 있었다. 무엇 때문에 죽었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가 가진 발명품이 탐이 났을 뿐이면서.’ 리키는 입을 꾹 다물고 이를 갈았다. “그리고 나는 그때 로키를 도와 신제품 개발에 참여했던 개발자 동료다.” “동료라면서 왜 끝까지 아버지를 믿지 않았어? 제이는 아빠가 빼돌린 물건이 아니야. 그게 사실이라면 왜 시솝이 지금 제이를 가지고 있는 날 찾지 않겠냐고!” 말마따나 감히 시솝을 상대로 사기를 친 범죄자의 아이를 아직까지 살려둘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지난 2년간 시솝을 만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날 수가 없었다. “봐. 제이는 구식 모델이야. 로딩도 오래 걸리고 가끔 렉도 먹어. 업데이트도 아직 안 받아서 기능도 몇 개 없고.” 이런 상황에서도 제이는 차분히 그의 손등에 앉아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키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제이를 눈앞에 들어 올렸다. “2년 전, 아빠가 마지막 생일선물로 나한테 준…….” “그야 내용물을 뜯어봐야 알 일이지.” 아버지의 동료였다던 남자는 코웃음을 치며 리키의 말을 잘랐다. “그때 우리가 개발하던 기능이 뭔 줄 아나?” “무슨.” “바이러스다.” “……!” 「바이러스. 기계 프로그램에 침투하여 시스템을 감염시키고, 결과적으로 파괴하는 악성 프로그램을 뜻합니다.」 제이가 놀란 리키의 반응을 감지하고 단어 뜻을 알려주었다. 물론 리키는 뜻을 몰라서 놀란 건 아니었다. “그 빌어먹을 연구가 실패로 끝난 직후 나는 개발자를 때려치우고 지금처럼 승급전에나 참전하게 되었지. 하, 바이러스에서 손을 떼고 나니 어찌나 마음이 편안하던지.” “실패했다며? 왜 아빠를 사기꾼이라고 부르는 거야?” “실패? 실패한 건 공식적인 발표였을 뿐이지. 로키 그 사기꾼은 빌어먹게도 천재였어. 놈은 바이러스 개발에 성공했다. 그게 바로 네가 들고 있는 그 내비게이션 ‘J’다.” 리키는 멍하니 제이를 내려다보았다. 분홍빛의 정령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마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시솝이 널 내버려 두는 이유는 글쎄. 아마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상하잖아. 그럼 왜 시솝은 아빠한테 바이러스를 개발하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시솝은 즉 미드가르드의 1인자. 이미 전 영토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바이러스라는 무기를 만들어낼 이유가 도무지 짐작가지 않았다. 리키가 충격에 빠진 사이 남자는 계속 떠들어댔다. “알 게 뭐냐, 꼬맹아. 보아하니 그 내비게이션을 무기로 승급전에 참전할 생각이었나 본데. 아서라. 당장 그걸 파괴해야 해.” “제이를…… 파괴하라고?” “그래. 콜로세움에 참전하기 전에 내가 널 알아봐서 천만다행이로군. 자칫 잘못했다간 바이러스가 유포될 뻔했잖아.” 아버지의 동료였다던 중년 남자는 리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어서 내게 넘겨. 대신 파괴해 주마.” “싫어.” “응?” “싫다고! 제이는 아빠가 내 생일 선물로 준 정령이야. 멋대로 사기꾼이니 바이러스니 떠들어대지 마.” 제이를 감싼 채 으르렁거리는 리키를 본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고집부릴 일인 줄 알아? 당장 그걸 내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바이러스든 뭐든 알 게 뭐야. 애초에 시솝의 물건이었으면 댁같이 배 나온 아저씨 말고 시솝이 직접 나서라고 해!” “이 망할 꼬맹이가!” 철컥! 말로 해서 들을 것 같지가 않자 사내는 총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이를 제대로 겨누기도 전 그의 목에 차가운 금속이 와 닿았다.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이 아이는 우리 일행이라서.” ‘검?’ 기계 문화로 점철된 미드가르드에선 익숙하지 않은 무기였다. “이 이상의 무례는 봐주기 어렵구나.” 잠시 목에 닿은 검날을 신경 쓰고 있던 사내는 그 사이 리키의 어깨를 잡아 뒤로 물러서게 한 쥬다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너는 누구냐.” “흠.” 쥬다스는 답하는 대신 무언가 고민하듯 턱을 짚었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짜증이 치솟은 사내는 자신의 내비게이션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순식간에 전신에 튼튼한 갑주가 생겨났다. 시커먼 전신갑주에 둘러싸인 사내의 모습은 흡사 거대한 몬스터를 보는 듯했다. 우람한 강철 손으로 에단의 검날을 장난감 던지듯 잡아 쳐 낸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방해하려 거든 먼저 나를 무릎 꿇려 봐라! 골드 등급 중에서도 20위권 경기를 하러 온 나를 이깟 칼 쪼가리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 쿠웅! 순간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동시에 숨을 헉 들이켰다. 제 눈을 의심해서 비비적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그건 정말로 큰 오산이었다. “그래. 일단 싸울 수 있어야 이길 수도 있는 거지.” 어차피 칼이든 총이든 쥬다스에게는 전혀 필요 없었다. 이미 사내는 그 앞에 쓰러져 강제로 엎드려 있었다. 땅의 정령이 내리누르는 강한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갑주에서 우득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면 그 말인즉 나와 싸우고자 한 것인가.” “끄윽. 수, 숨이…….” 어찌 된 영문인지 몸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고 숨조차 막혀왔다. 죽음을 목전에 둔 공포 탓에 눈물과 함께 침이 질질 흘렀다. “건방지구나.” 기계보다 무감정한 어조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위압감에 눌려 하나 둘씩 뒷걸음을 치기 시작하던 순간, 누군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만!” 꼭 폭탄을 맞은 사람처럼 머리가 덥수룩한 남자가 구경꾼들을 헤집고 불쑥 튀어나왔다. 마른 체형에 안경을 끼고 있었다. 헥헥거리며 숨을 한 차례 고르던 그는 쥬다스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해보였다.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저는 미드가르드 등급관리 스탭, ‘헨리’입니다.” ‘STAFF.’ 그의 목에 걸린 스탭 목걸이를 본 쥬다스가 정령의 힘을 훅 거두어들였다. 바닥에 짓눌린 채 숨이 막혀 있던 사내는 이미 기절한 상태였다. 그 모습을 힐끗 본 헨리가 쥬다스를 향해 정중하게 제안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저와 함께 따로 대화를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왜, 왜 이런 일에 스탭이 직접 나서는 거지?” 누군가 물었다. 서열싸움을 비롯해 미드가르드 내에 벌어지는 전투는 늘 자율적으로 일어났으며 상부에서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그야 응당 스탭으로서 해야 할 일이니까요.” 헨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시솝의 도전자 여러분.” 쥬다스 일행을 돌아보며 묻는 말에 구경꾼들 사이에서 더 이상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헨리는 일행을 데리고 빈방으로 안내했다. “엥? 이렇게 좁은 방에서 대화합니까?” 바이칼이 불만 섞인 의문을 터뜨렸다. 그럴 만도 한 게 방 안에는 테이블도 의자도, 아무것도 없었다. 게다가 일행이 들어가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방이라기보단 그냥 어디 물건 쌓아두는 용도로 쓸 법한 창고 같았다. “아뇨. 이건 승강기입니다.” 헨리는 이를 몇 초간 대기하면 원하는 층수로 이동할 수 있는 기계라고 설명했다. 그 설명대로 잠시 후 그들은 콜로세움의 꼭대기인 33층으로 올라갔다. 승강기에서 내리자 널따란 공간을 따라 이어진 창문 너머로 비를 흩뿌리는 하늘이 보였다. 헨리는 흐린 하늘을 배경 삼아 그들을 소파에 앉혔다.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죠. 제가 여러분을 마중 나온 이유는 간단합니다.” ‘마중.’ 쥬다스는 그의 표현에 무게를 두었다. 그냥 스탭으로서 등장한 게 아니라 무언가 임무를 받고 나왔다는 뜻이다. “시솝께서 여러분을 ‘라그나로크’에 초대하셨습니다.” 품에서 초대장을 꺼낸 헨리가 그걸 곧장 쥬다스에게 내밀었다. “라그나로크라면?” “시솝께서 머무시는 공간입니다. 미드가르드의 심장이라 할 수 있죠.” “나라의 심장은 수도 아스가르드가 아닙니까?” “으음.” 헨리는 곤란한 듯 콧등을 찡그렸다. “아스가르드는 나라의 수도로서 중요 역할을 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심장은 아닙니다.” “그렇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시솝의 초대에 응할 경우 초대장을 열어보시면 됩니다.” “거절할 수도 있습니까?” “에, 그건 의외네요. 도전자인 여러분이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데요.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미드가르드는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는 나라니까요.” 쥬다스의 질문에 헨리는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02 / 0240 ---------------------------------------------- 23장. 융합 하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어도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자를 노예로 만들어 사고파는 ‘자유’만큼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는 존중받아야 할 자유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억압이 필요한 자유도 분명 있었다. “망설일 필요 없잖아? 얼른 초대를 수락하자!” 리키는 잔뜩 흥분한 어조로 재촉하며 쥬다스의 손에 들린 초대장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시솝의 초대장이 눈앞에 있다. ‘드디어, 드디어 시솝을 만날 수 있어!’ 꼭 전설 속에 나오는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램프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리키는 기대감에 취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리키를 바라보던 쥬다스는 초대장을 열어보지 않고 그대로 반으로 접어버렸다. “뭐, 뭐 하는 거야? 시솝에게 도전하러 가겠다며?” 크게 당황한 리키가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따지자 쥬다스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한 번 더 네 의견을 확인하마.” “확인? 그딴 게 왜 필요해. 지금 당장…….” “리키.” 소리를 높이지도, 표정을 굳히지도 않았는데 이름 한 번 불린 걸로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어릴 적 사고를 치고 아버지한테 혼나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쥬다스는 담담히 아이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만에 하나 아까 그자의 말대로 네 정령 제이가 정말 시솝이 원하던 ‘바이러스’라면.” 순간 시솝을 만날 수 있다는 흥분으로 과열됐던 머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냉기가 흘러들어왔다. “너는 원하는 걸 얻는 대신에 시솝에게 그 바이러스를 넘길 생각이 있느냐?” “그…… 건.” 리키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망설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줄 수 없어.” 그는 저장된 마력을 아끼기 위해 손등 위 기계로 돌아간 제이를 반대 손으로 감쌌다. “바이러스라서가 아니야. 제이는 이제 하나뿐인 내 가족이란 말이야. 달란다고 어떻게 덜컥 주겠어?” “영생을 살게 해주는 조건이라고 해도?” “다, 당연하지.”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대답만큼은 단호했다. 그걸 본 세이지는 이해가 가지 않아 살짝 미간을 좁혔다. ‘뭐지? 분명 굉장히 간절해 보였었는데.’ 그리도 간절히 바란 소망을 이루어주는 대가라고 친다면 저렇게 한 치 고민도 없이 걷어찰 수 있을 리가 없다. 세이지는 리키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무언가 숨기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러다 문득 이 대화를 조용히 지켜보고 있는 헨리에게로 시선이 갔다. ‘이 사람은 스탭이랬지. 바이러스니 뭐니 하는 대화를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사실 둘의 대화를 듣고 조금 어리둥절해하거나 놀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래 보이질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눈으로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군주제가 아닌 서열제 사회다 보니 타인의 일에 딱히 관심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미 시솝으로부터 무언가 언질을 받은 상태인건지 알 길이 없었다. 세이지가 의아하게 쳐다보자 헨리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싱긋.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상대가 갑자기 웃는 바람에 당황한 세이지는 움찔 시선을 피해버렸다. 형을 따라 넓은 세상을 돌아다니며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이런 처세에는 약했다. 저런 능구렁이 같은 자들을 상대로도 아무렇지 않게 연기하고 결국 제압해버리는 쥬다스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스탭 헨리.” “결정하셨습니까?”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오우!” 헨리는 과장되게 놀란 제스처를 취해보였다. “빠른 결정이네요! 따로 점검하실 시간은 더 필요 없으신 겁니까?” “어차피 시솝을 만나고자 함이었으니 준비는 이미 되어 있습니다.” “아하. 그럼 제가 드린 초대장을 펼쳐주시면 됩니다. 자동으로 라그나로크에 입장하실 수 있을 겁니다.” 빙글빙글 웃는 헨리에게서 시선을 거둔 쥬다스가 반으로 접어둔 초대장을 느릿느릿 펼쳤다. 빳빳한 흰 종이가 접힌 선을 따라 한 겹 한 겹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마침내 미드가르드의 인장이 찍힌 용지가 드러나면서 그 안에서 강렬한 마력파동이 일어났다. 파아앗! 마치 박스에 입장할 때처럼 눈부신 하얀 빛이 그들을 삼켰다.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쥬다스는 빛이 사그러들 때쯤 다시 천천히 자세를 바로 했다. 스탭의 말처럼 어느 틈엔가 자동으로 장소가 바뀌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하하, 놀라셨습니까? 라그나로크에는 무수히 많은 방이 존재합니다. 도전자님의 일행분들은 다른 방에 들어가 계시지요.” 지금 쥬다스의 눈앞에는 오직 스탭 헨리뿐이었다. 그들이 서 있는 장소는 현실세계 같지 않은 기이한 장소였다. 훅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신전 같군.’ 하얀 돌기둥과 길게 펼쳐진 대리석이 경건한 신전을 연상케 했다. 뻥 뚫린 기둥 사이사이 엿보이는 연두색 하늘을 배경으로 파란 노을이 지고 있었다. 내려다보이는 밀밭은 은빛 물결로 살랑살랑 흔들렸다. 꿈결처럼 몽환적인 풍광이다. “왜 우리를 굳이 다른 방에 나눈 겁니까?” “음, 글쎄요.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일까요? 하핫. 시솝의 도전자는 당신 하나뿐이잖습니까? 나머지는 그저 당신을 따르는 자들이거나 다른 볼일이 있는 어린 친구거나.” “…….” 그 어린 친구는 도전자님과 목적이 다르니 따로 보는 게 당연히 효율적이죠, 헨리는 대리석 길을 앞서 걸으며 떠들어댔다. “그런데.” “……?” “듣던 것과 태도가 많이 다르시군요.” “그렇습니까?” “정보에 의하면 시솝의 도전자는 강하고 오만하며 무서울 정도로 고압적인 이미지라고 하던데요.”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이지요.” 쥬다스는 미드가르드에서 보인 태도가 그저 만들어낸 이미지였음을 인정했다.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스탭이 미소 지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역시 그런 겁니까? 한데 왜 끝까지 그 이미지를 고수하지 않으시는 거죠? 저도 시솝 아래 스탭일 뿐이니 꺾어야 할 대상이 아닙니까?” “나는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또한.” 쥬다스의 태연한 대답을 들으며 앞서 가던 스탭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스탭이라 불리고 싶은 것 같기에 그리하였을 뿐입니다.” “아아. 그래서 도전자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은.” 뒤를 돌아보던 헨리가 다시 고개를 바로 했다. 그의 덥수룩한 뒤통수에 삐죽 튀어나온 꽁지머리가 보였다. 그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내게 장단을 맞춰주셨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서늘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쥬다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이유까지 설명해 주었다.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분께서 직접 스탭 노릇을 하고 계실 줄은 미처 짐작하지 못했으니까요.” “푸흐흐.” 헨리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곤 자리에 멈춰 섰다. 어느덧 그들은 하얀 신전의 중심부까지 도달해 있었다. 천장 없이 뻥 뚫린 연두색 하늘에선 노란깃털을 가진 새 몇 마리가 지저귀며 날아갔다. “아이고, 이런. 제가 도전자님을 너무 얕본 모양이네요. 이거 한 방 먹었습니다?” 흘러내린 안경을 제대로 고쳐 쓴 헨리가 쥬다스를 향해 돌아서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죠.” “…….” “미드가르드의 시솝. 오딘 헨리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도전자님…… 아니.” 헨리가 손가락을 모아 딱 소리를 내자, 쥬다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반가면이 후두둑 바스러져 버렸다. 바람에 실려 맨얼굴 위로 흘러내린 은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이곳은 라그나로크, 시솝이 기거하는 미드가르드의 심장이다. 가면을 벗어 던진 시솝 앞에서는 그 역시 본연의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전하.” 드디어 쥬다스의 금안을 오롯하게 마주볼 수 있게 된 오딘 헨리가 시원스레 싱긋 웃었다. “……혹은 대현자 이그레트 님. 어느 쪽이 편하신지?” * * * 한편, 쥬다스를 제외한 일행은 모두 한 곳에 뭉쳐 있었다. 쥬다스가 초대장을 펼친 순간 갑작스레 장소가 바뀐 데다 정작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일행이 받은 충격은 제법 컸다. 그들은 잠시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돈에 빠졌다. “일단 흩어져서 움직입시다!” 바이칼은 흩어져 주군을 찾자고 주장했고, “기각한다. 상대가 어떤 자인 줄 알고 경솔하게 움직이자는 거지? 지금 함부로 흩어지면 끝장이다.” 에단은 수하의 주장을 기각한 채 뭉쳐야 한다고 판단했으며, “제이.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위치정보 다운로드가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다운로드 권한이 없습니다.」 “그럼 근처에 뭐가 있는 지도 몰라?” 「경로 탐색이 불가능한 장소입니다. 탐색 권한이 없습니다.」 “아, 그놈의 권한, 권한! 뭔 놈의 권한이 자꾸 없대!” 리키는 제이를 붙들고 씨름하고 있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깐 채 주먹을 움켜쥐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그녀의 주먹을 걱정스레 쳐다본 세이지가 조심조심 말을 걸었다. “형님께선 괜찮으실 겁니다. 오히려 우릴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그걸 어떻게 확신합니까.” “어…… 음, 확신이라기보단 그냥 믿는 거죠. 형님이시니까.” 세이지의 눈에서 단순하지만 강한 신뢰를 엿본 크리스티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나도 그분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야. 당연히 믿고 있어. 하지만.’ 한때는 그녀도 세이지처럼 맹목적으로 쥬다스를 믿었다. 그분이라면 괜찮아, 그분이 잘못될 리 없어, 그분은 늘 올바른 선택을 해왔으니까 이번에도 역시. 그런 단순한 신뢰였다. 하지만 학원 루바흐 시절 검을 바친 후로부터 해가 지나고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그 믿음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 ‘그도 사람이야. 다칠 수 있고, 다치면 아파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는 그가 이번 여행에서 어떤 역할이든 완벽한 연기를 해낼 때마다 더욱 그 사실을 절절히 깨달았다. “……싫어.” “네?” 늘 철벽처럼 냉철하던 그녀의 표정이 열아홉 소녀처럼 여문 감정을 내보였다. 크리스티나는 홱 고개를 내저었다. “싫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크리스티나.” “그분께서 괜찮은 척 연기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바닷빛 눈망울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던 세이지는 이내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의 금안이 제 형이 짓곤 하던 부드러운 빛을 띠자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더 이상 무력하게 걱정하고만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3황자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그들을 둘러보며 단호히 제안했다. “그러니까 다 같이 형님을 찾으러 가요.” 거기에 토를 다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순식간에 흐트러졌던 대열이 정돈되는 걸 본 리키가 제이를 손등에 얹고 중얼거렸다. “헤에. 그 사람, 저들의 신뢰를 몽땅 받고 있는 건가. 대단하네.” 혼란을 진정시킨 건 세이지였지만 어린 리키의 눈에도 그들이 누굴 의지하고 있는지 정도는 보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ㅎㅎ 저는 모처럼 낮잠을 잤다가 장편 스릴러 판타지(?) 같은 걸 꿈으로 꾸는 바람에.... 고통받고 일어났습니다. ㅠㅠ 어흑. 아직도 뭔가 그 꿈이 잊혀지지가 않네요. 가끔가다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 꿈들이 있는데 이건 소재로 쓰라는 계시인가..@_@ 쿨럭. 그럼 이번 주도 즐거운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늘 감사합니다.ㅎ 0203 / 0240 ---------------------------------------------- 23장. 융합 내심 감탄하던 리키는 힐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하늘…….” 날씨를 조종하던 미드가르드에서조차 본 적 없는 기이한 색상의 하늘이었다. 게다가 그 위로 파스텔처럼 번지는 파란 노을이 더욱 꿈결 같은 신비감을 조성했다. 갈대들도 평범한 갈색이 아니라 은빛으로 반짝였다. 상황은 상황이었지만 풍경만큼은 마치 천상에라도 온 양 아름다웠다. “이쪽에 길이 있습니다! 좀 수상쩍긴 해도 갈대밭으로 들어갈 순 없으니 일단 길을 따라 가볼까요?” 바이칼이 갈대밭 사이에 놓인 오솔길을 하나 발견해 냈다. 지푸라기와 함께 큼직한 자갈이 깔린 아기자기한 오솔길이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그들은 오솔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은 아무리 가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 키만큼 자라난 갈대밭은 줄곧 시야를 방해했고, 때문에 그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작은 오솔길이 어디로 이어졌는지는 미리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하자 길목 한가운데를 가득 메우고 있는 노란 비둘기 떼가 보였다. 그 사이에 쭈그려 앉아 모이를 뿌리고 있던 사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 “어라,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푸드덕!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비둘기들이 살짝 날갯짓을 하다 다시 내려앉았다. 그 모습을 본 플루비가 바이칼의 어깨에서 폴짝 뛰어내려 비둘기 떼 사이에 끼어들었다. “구구구구.” “꾸구구?” “구구구구구구.” 자연스럽게 비둘기 언어를 따라하기 시작한 플루비를 보고 바이칼이 이마를 짚었다. ‘오 쉣. 쟨 진짜 자기가 비둘긴 줄 아나 봐.’ 블루 와이번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었을까 심히 걱정이 되었지만 그 마음도 모르고 플루비는 꼬리를 살랑이며 모이를 쪼아댔다. 기꺼이 모이를 더 뿌려준 사내가 싱글싱글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렇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오순도순 손에 손잡고 나타나시다니. 사이가 정말 좋나 봅니다.” 그들이 정말 손을 잡고 나타난 건 아니었지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함께 이동한 건 사실이었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자 사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기껏 초대를 받아서 왔으면 좀 반응을 보여주시지. 혼자 떠드니까 심심하잖아요.” “……당신이 시솝입니까?” 에단이 대표로 그의 정체를 물었다. 굳이 숨길 생각도 없었던 사내는 손가락으로 O 모양을 만들며 씩 웃었다. “딩동댕~! 미드가르드의 시솝, 오딘 슬레이프입니다.” 방정맞기까지 한 어조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도 가볍지 않았다. 모두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가장 시솝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리키가 다급히 그 사실을 재확인했다. “시솝이라고? 정말?” “정말이죠. 여러분을 이곳 라그나로크까지 데려다놓고 거짓말 치겠어요?” 그에게선 시솝의 위엄이라곤 손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300년을 넘게 집권했다던 정보대로 늙어보이지도 않았다. 오딘 슬레이프는 기껏해야 30살이나 막 되었을까 싶은 젊은 청년의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잔디밭처럼 짧게 친 머리도 평범한 금발이었다. 에단이 그를 향해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주군은 어디 계신 겁니까?” “아, 당신들 주인은 지금 따로 만나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따로 만나다니, 누굴?” “음? 그야 당연히.” 그다음 이어지는 말은 모인 이들 중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었다. “시솝이죠.” “당신이 시솝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만나고 있는 건 ‘오딘 헨리’. 내가 사용하는 메인 모델입니다. 따지자면 지금 당신들을 만나고 있는 ‘오딘 슬레이프’는 서브 모델이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음, 그러니까 간단히 말하자면.” 슬레이프는 잠시 말을 끊고 들고 있던 모이봉투를 뒤적거렸다. “나 ‘오딘’은 사용하는 육체가 여러 개라는 뜻이죠.” 그는 비둘기들에게 모이를 한 줌 가득 뿌려주며 히죽 웃었다. 퍼득거리는 날갯짓 소리와 함께 비둘기의 노란 깃털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육체가 여러 개라니?” “에, 호기심이 많은 손님들이네요. 여러분이 이해하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입니다. 나는 하나의 정신으로 여러 개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죠.” “……!” 그 대답에 따라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영생을 목적으로 온 리키는 안색을 환하게 밝혔으며 나머지 일행은 경악과 불신이 뒤섞인 눈으로 굳어버렸다. ‘그건 마치.’ 설명대로라면 시솝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신에 가까웠다. 인간이 하나의 정신으로 여러 개의 몸을 움직이는 일은 불가능했다. 사령에게 영혼을 판 사령술사들도 새 몸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은 어렵게나마 가능했지만 동시에 여러 육체를 제 것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육신에 구애받지 않는 삶, 그걸 손에 넣은 순간부터 시솝은 인외 존재가 되었다. “참, 어때요? 이곳 라그나로크는 마음에 드셨습니까?” “여긴……. 꼭 ‘박스’ 같군요. 혹 가상공간입니까?” “오우, 눈치가 빠르네요! 라그나로크를 만들 때 루바르잔 제국에서 사용하는 박스기술을 조금 응용해 봤어요. 프로그램을 입력하기에 정말 편리하더라고요. 이 원리를 개발한 루바르잔 마법사들은 정말 천재에요.” 시솝은 진심으로 루바르잔의 마법사들을 칭찬했다. “하지만 땡! 이곳은 가상공간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박스는 정신체로 움직이는 가짜공간이지만, 라그나로크는 엄연히 육체를 가지고 움직이는 ‘진짜’다. 시솝은 그 사실을 강조했다. “여기선 죽으면 진짜 죽어요.” 태평하게 죽음을 언급하는 시솝의 어투에 세이지는 살짝 소름이 끼쳤다. ‘300년. 그 긴 세월 동안 여러 개의 육체를 가지고 끝없이 생명을 연장시켜 온 저자는 지금 무엇을 바라는 걸까.’ 도전자가 나타났단 소문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웃었나? 아니면 지금처럼 태평했을까? 세이지는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떤 답을 떠올려도 등골을 타고 흐른 소름이 가라앉지 않았다. “형님을 어쩔 셈입니까?” “응?” “데려다가 뭘 하려는 거죠? 설마 해칠 셈이라면!” “어허이. 걱정도 팔자시군요. 자자, 진정하세요.” 세이지가 불신하는 기색을 보이자 시솝은 모이 봉투에서 손을 빼고 툭툭 털었다. “확실히 말하죠. 저는 그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여기 있는 누구도 죽이지 않아요.” “그럼 왜 우릴 이곳에 초대한 겁니까?” “어, 뭐 이것도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사실 당신들은 그냥 그를 데려오기 위한 곁다리였어요. 오징어 몸통을 먹고 싶어서 샀더니 딸려온 다리들이랄까? 내가 관심이 생긴 건 당신들의 주인뿐입니다.” 묘하게 현실적인 비유에 듣는 이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져갔다. “그래서 방해받기 싫어서 그를 따로 만나고 있는 중인 거고요.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마세요. 스트레스는 심장에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에단과 바이칼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적어도 두 사람의 의견은 일치했다. 그들이 보기에 시솝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럼 그분께 왜 관심이 생긴 거죠?” “그거야말로 간단합니다.” 오딘 슬레이프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그들 앞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모이를 주워 먹던 비둘기들은 날지 않고 푸득푸득 그를 피해 뛰어다녔다. “그가 있어야 세상은 좀 더 완벽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 듣는 이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연의 사랑을 받는 자.’ 라그나로크를 창조해 내며 자신이 기계 그 자체가 되어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정보를 모조리 흡수해 낸 시솝은 결국 치열한 계산 끝에 쥬다스의 정체를 도출해 냈다. 계약한 정령이 아니라면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영혼의 이름을 기계가 읽어낸 것이다. 도전자의 정체를 알아내자마자 시솝은 결단했다. ‘그를 라그나로크에 초대하자.’ 처음부터 자연의 힘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기계만으로 완벽해질 수가 없었다. 그 한계에 부딪혀 가고 있던 미드가르드엔 쥬다스가 가진 거대한 힘이 꼭 필요했다. “시솝.” 일행에게 다가온 오딘의 앞에 리키가 나섰다. “내 아버지 로키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로키…….” 시솝의 표정에 처음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리키가 그것이 분노인지 슬픔인지 가늠하기도 전에 오딘 슬레이프는 다시금 히죽 웃었다. “물론 기억합니다. 로키 파르바우티, 정보관리 스탭. 당신이 그의 아들이군요?” “네! 저는 리키. 리키 파르바우티입니다.” “그렇습니까, 리키. 당신 아버지에겐 신형 내비게이션 개발을 맡겨두었었죠. 하하. 로키는 정말 보기 드물게 훌륭한 개발자였어요.” 아버지에 대한 칭찬이 나오자 아이의 얼굴에 기쁜 빛이 감돌았다. 오딘은 웃는 얼굴 그대로 차갑게 말문을 맺었다. “금방 죽어버렸지만.” 파리 목숨 거론하듯 무감정한 어투였다. 리키는 울컥하여 소리쳤다. “아버진 시솝이 맡긴 일을 하다 살해당하셨어요!” “그러게 말이에요. 골드 등급도 아니고 스탭씩이나 되는 사람이 꼴사납게 살해당할 줄이야. 실망이 꽤 컸습니다만.” “그런!” “어차피 죽은 사람을 살리는 법은 없으니까요. 아쉽게 됐죠.” 여러모로 충격적인 말의 연속이었다. 시솝조차 죽은 자를 살리는 방법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리자 리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이었지만 리키는 가까스로 정신을 다잡았다. ‘알고 있어. 방법이 없으니까 내가 만들려는 거잖아.’ 심지어 사령에 관해서도 조사해 봤지만 영혼을 잡아먹는 그 악독한 사령술조차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을 대상으로는 사용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포기해 버렸다. 일단 다른 방법도 찾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면 영생이 필요했다. “시솝처럼 영생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응? 영생 말입니까?” 시솝은 푸핫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긴, 그런 건 없어요.” “네에? 하지만 시솝께선!” “내가 영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나요?” 오딘 슬레이프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천만에! 나는.’ 속을 긁는 절규와 달리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건 그저 무덤덤한 음성뿐이었다. “살아가는 게 아닌 기계가 됐을 뿐인데.” “그럼 저도 기계로 만들어주세요!” 그 의미의 무게를 알지 못한 아이의 소원은 징그러울 정도로 순수했다. 시솝은 순간 경멸 어린 눈빛을 보냈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어렵진 않습니다만.” “정말……!” “대신 당신이 가진 내비게이션을 내게 넘겨주세요.” 시솝이 내민 손바닥을 눈앞에 둔 리키가 입을 합 다물었다. “모델 J0527. 로키가 만든 나의 신형 내비게이션 말입니다.” “그건 왜……?” “본래 나를 위해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그 내비게이션은 대단히 위험한 기능을 탑재하고 있어요.” 모든 걸 꿰뚫어보는 눈이 리키를 내려다보았다. “‘바이러스’라는.” 시솝은 정확히 제이를 원하고 있었다. 그 순간 리키는 라그나로크에 들어오기 전 쥬다스가 했던 질문을 기억해 냈다. ‘너는 원하는 걸 얻는 대신에 시솝에게 그 바이러스를 넘길 생각이 있느냐?’ 그 질문에 리키는 단호히 줄 수 없다고 답했다. ‘바이러스라서가 아니야. 제이는 이제 하나뿐인 내 가족이란 말이야.’ ‘영생을 살게 해주는 조건이라고 해도?’ 그 질문에도 아이는 제이를 넘겨주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어서 처음 리키가 일행에 합류했을 때 쥬다스와 나누었던 약속도 떠올랐다. ‘단, 한 가지만 약속해 주겠느냐?’ ‘응. 뭔데?’ ‘어떤 경우에서라도 거짓말은 하지 않기로.’ 부드럽게 자신을 바라보던 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리키는 입을 꾹 다물고 제이를 손등에서 꺼냈다. “제이.” 「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연분홍색 빛무리를 뿌리며 자그마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게 약속할 수 있겠니?’ 리키는 그 질문에 뭐라고 답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설정 모드. 트랜스퍼(Tranfer:이적).” 그의 선택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04 / 0240 ---------------------------------------------- 23장. 융합 트랜스퍼, 즉 기계형 정령이 소속을 옮기는 시스템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기계형 정령들은 정령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람의 필요에 따라 주인을 바꿀 수 있다. 그 기능을 선택하는 건 이전 주인뿐이다. 주인이 트랜스퍼를 사용하지 않고 사망하거나 사라져 버린다면 그 정령은 영원히 주인을 잃고 버려지는 셈이다. 그렇게 버려진 정령은 대개 폐기처분된다. 「트랜스퍼 기능이 실행되었습니다. 이 기능은 주인님의 권한을 타인에게 양도하는 중대한 시스템입니다.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 “계속 진행.” 사무적으로 트랜스퍼 시스템을 작동시킨 제이는 잠시 렉이 걸린 기계처럼 멈칫 리키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연분홍빛 눈동자를 깜빡임과 동시에 다시 진행 절차를 밟아갔다. 「트랜스퍼할 대상을 지정해 주십시오.」 “대상은…….” 리키의 눈길이 앞에 서 있는 오딘 슬레이프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은 별다른 재촉 없이 리키를 기다렸다. 그는 사실 당장 바이러스를 손에 넣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원래는 몇 년 더 뒤에 천천히 찾을 생각이었다. 아예 리키가 제 아비처럼 살해를 당하든 아니면 수명을 다하든 간에 사망한 다음에 버려진 내비게이션을 취하는 방법도 나쁘진 않았다. 기왕 눈앞까지 찾아온 데다 영생을 살고 싶다고 소망하니 충동적으로 내건 거래였을 뿐이다. 그러나 리키가 오딘을 가리켜 지정하려던 순간 누군가 불쑥 중간에 끼어들었다. “잠깐!” 다름 아닌 바이칼이었다. 바이칼을 비롯한 쥬다스의 측근들은 시솝과 리키 사이에 벌어지는 거래 장면을 찜찜한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남의 일인데 끼어서 말려야 하나 그냥 알아서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섣불리 판단이 서질 않던 참에 결국 참다 참다 바이칼이 나선 것이다. 「타인의 개입으로 트랜스퍼 시스템이 잠금 상태가 되었습니다. 5분 뒤 다시 시도해 주세요.」 “아니, 아으! 이게 무슨 짓이야?” 주인이 바뀌는 트랜스퍼 시스템은 기계형 정령에게 있어 매우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보안이 철저했다. 잠금 상태가 되어 5분간 정령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리키가 갑자기 끼어든 바이칼을 향해 짜증스런 시선을 던졌다. “잠금이란 기능도 있었어? 그건 몰랐네. 미안.” “지금 사람 놀려? 댁 때문에 시솝께서 기다리시게 됐잖아!” “아, 그렇지.” 바이칼은 시솝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 그만 결례를.” “괜찮아요. 뭐 5분 정도야.” 급할 게 전혀 없는 오딘 슬레이프의 표정은 변함없이 태평했다. 오히려 이들의 대립을 흥미롭게 관찰 중이었다. “이봐. 그때 주군께 드렸던 약속은 거짓말이었나?” “생각이 바뀌었어. 어차피 바이러스를 넘기든 말든 너희들이랑 상관없잖아.” “어. 바이러스고 나발이고 그런 건 난 모르겠고.” 바이칼은 리키의 덜미를 잡아 채 낮은 목소리로 질타했다. “내가 열 받는 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이야. 아니,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건가.” “……그래서?” 리키는 그의 사나운 태도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덩달아 눈을 치켜뜨며 대꾸했다. “약속 같은 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사람은 다 변해. 약속도 결국 사람이 한 말인데 영원히 지켜진다고 믿는 쪽이 바보 아냐? 너희들도 지금은 그렇지만 좀 더 지나고 보면 분명히!” “똥 싸고 있네.” 결국 바이칼의 입에선 귀족답지 않은 험한 언사가 튀어나오고야 말았다. “네 똥을 치우는 게 왜 믿었던 사람 몫인데?” “뭐?” “그딴 식으로 말 같지도 않은 자기합리화하지 마.” 그는 끌어당겼던 리키의 덜미를 거칠게 팍 놔주었다. “네가 병신이 됐다고 해서 남도 병신이리라 멋대로 생각하지 말라고.” “……!” 쿠당탕! 아무리 기사단 내에서 체력적으로 허약하다 놀림받는 마법기사라지만 열아홉 살의 손아귀 힘은 고작 열세 살 소년에게 비하면 꽃가지를 꺾는 태풍처럼 강했다. 밀쳐 넘어진 리키는 이를 악 물었다. ‘왜 나만.’ 세상엔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더 많은데 어째서 자신만 비난받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곧 억울함으로 이어졌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제이가 그의 코앞으로 팔랑 날아들었다. 리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정령과 눈을 마주했다. 잠금이 풀린 제이는 주인의 안위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였다. “제이.” 「네.」 키리는 연한 분홍색으로 빛나는 제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트랜스퍼 진행해. 대상은 시솝 오딘.” 차가운 명령어가 떨어졌다. 슬레이프라느니 헨리라는 모델명은 붙일 필요도 없었다. 제이는 전방 탐색에서 간단히 ‘시솝’을 발견해 냈고 트랜스퍼 기능을 작동시켰다. 기껏 한 소리 해주었더니 무시하고 트랜스퍼를 진행해 버린 리키를 보며 바이칼이 입을 떡 벌렸다. ‘아오, 저 징하게 제멋대로인 자식!’ 주군이 없는 상황에서 바이러스를 건네는 걸 말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딱히 막으라는 명령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떡하니 눈앞에서 약속을 어기는 장면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답답했다.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말렸어야 했나 살짝 후회도 들었다. 하지만 이미 프로그램을 실행시킨 제이는 연분홍색 빛무리를 흩뿌리며 시솝에게로 날아가 버렸다. 「리키 파르바우티 님께서 트랜스퍼를 신청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합니다.” 시솝은 기꺼이 리키의 성의를 받아들였다. 그걸로 절차는 끝났다. 원주인은 이적을 신청했고 새 주인은 수락했으니 더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곧 리키의 손등에 박혀 있던 내비게이션 구슬이 물에 설탕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시솝의 손등 위로 그 구슬이 옮겨갔다. 「트랜스퍼가 완료되었습니다.」 제이의 사무적인 음성이 적막을 뚫고 울려 퍼졌다. 시솝은 손등에 제이를 얹고 흥미로운 눈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당신 차례예요, 시솝.” 오딘 슬레이프는 다시 리키에게로 슥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실험을 좀 해볼까 하는데요.” “실험이라니?” “성능 실험 말입니다. 당신 아버지가 제대로 바이러스를 제작하긴 한 건지 궁금하잖아요.” “그……!” 웃음기 실린 의심에 리키로서는 이도저도 반응하기 애매했다. 아버지가 악성 바이러스를 만들어냈다고 당당하게 주장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제작에 실패하였을지도 모른다는 건 그의 능력을 의심받는 것 같아 기분 나빴다. 똥 씹은 표정으로 입술만 달싹이는 아이를 보며 시솝은 키득키득 웃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에단이 나직하게 물었다. “만일 제대로 만들어진 바이러스를 실행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어이쿠. 그런 것도 모르고 이 어린 친구를 도와줬습니까? 여러모로 재미있는 조합이네요.” 시솝은 제이를 손등에 얹은 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어주었다. “바이러스는 병균이에요.” 그는 바이러스에 대해서 동화책을 읽듯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아주 지독한 병균이죠. 생물화학무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작고도 악랄한 병균은 호흡기를 통해 간단히 사람의 몸을 감염시킨답니다.” ‘기계가 아니라 사람을?’ 질문한 에단뿐 아니라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시솝이 노리는 목적이 점점 명확해질수록 불길한 마음이 커져갔다. “사람의 몸은 원래 병균에 저항하는 체계를 가지고 있죠? 면역력이라고 부르는 정밀하고도 안정적인 체계 말입니다. 하지만 바이러스가 들어간 순간 몸은 점차 착오를 일으킬 거예요.” “착오를 일으킨다?” “네에. 기계가 오류를 일으키듯이, 몸속의 모든 세포가 자기 자신을 ‘적’으로 인식해 버리는 겁니다.” 말문이 막힌 에단이 입을 다물자 시솝이 싱긋 눈을 접으며 물었다. “그럼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몸이 스스로를 적으로 인식하다니, 쉬이 상상할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일행을 뒤로 한 채 가장 선두에 서 있던 에단은 서서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그 대신 세이지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그 말은 몸이……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살이라도 한다는 뜻인가요?” “딩동댕!” 짝짝! 시솝은 장난스럽게 손뼉을 쳤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은 곧 몸속에서 소리 없는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스스로 공격하는 거예요. 위장을, 혈관을, 심장을.”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모두 바이러스의 정체를 깨달았다. 이를 넘겨준 리키의 표정이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감염자는 자신이 왜 아픈지 이유도 모른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겠죠.” 슈욱! 그 순간 시솝의 손에서 제이가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모습을 감춰 버린 제이를 찾아 두리번거린 리키가 이내 하얗게 질린 채로 시솝에게 달려갔다. “잠깐, 잠깐만요, 시솝! 제이를 어디로 보낸 겁니까?” “오딘 헨리에게로 전송했습니다.” “어? 헨리? 그건 지금 쥬다스 님과 만나고 있는…….” 바이칼이 무심코 중얼거리다 흠칫 멈추었다. 스멀스멀 올라오던 불길함이 확신으로 변화하던 순간 검 손잡이를 잡고 있던 에단이 벼락같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깡! 웃고 있던 시솝의 목에 에단의 검이 반쯤 꽂히다 말았다. 사람의 피부가 아닌 철덩어리에 검을 쑤셔 박은 듯 손아귀가 아려왔다. 만일 신체형 이능력자인 에단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휘두른 검이었다면 이미 칼이 부러지고 손목이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런, 벌써 잊으셨습니까? 저는 지금부터 바이러스의 성능을 실험해 볼 겁니다.” 칼이 꽂혀 갈라진 목 틈새에서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솝은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꽂힌 검을 천천히 뽑아냈다. 파직- 파지직! 반쯤 잘린 목에선 붉은 피 대신 시퍼런 스파크가 쉴 새 없이 일어났다. 여러 부품으로 만들어진 모델일 뿐인 ‘오딘 슬레이프’는 목이 조금 잘렸다고 해서 작동을 멈추진 않았다. “감히 그분께 무슨 짓을!” “분명 아무도 해치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요!” 분개한 루바르잔 기사들과 리키의 다그침에도 시솝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목이 덜렁거려 자꾸만 꺾어지려는 머리를 손으로 붙들어 고정시킨 그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라? 이건 실험이지, 해치려는 목적이 아닌데요. 나는 그가 바이러스 따위에 당할 거란 생각은 절대 안 하거든요.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바이러스는 리키 당신이 제공했다고요.” “그런…….” “그가 버텨낸다면 바이러스의 백신을 얻는 셈이고. 혹시라도 버텨내지 못한다면 인간을 확실히 말살시킬 수 있는 좋은 무기를 손에 얻은 셈이 되겠네요.” 인류 최강의 존재. 모든 데이터를 통틀어 지금껏 ‘이그레트’보다 강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보다 더 좋은 표본은 세상에 없다. ‘그는 나와 비슷해.’ 사실 시솝은 두 번의 삶을 살고 있는 ‘이그레트’에게 동질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한 번뿐이다. 그 절대적인 규칙을 깨부순 것도 모자라 자연에게 사랑받는 유일한 존재. 300년 이상을 시솝으로 군림해 온 오딘은 이미 인간을 뛰어넘는 특별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이그레트’는 특별했다. “앞으로는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위한 세상이 펼쳐질 겁니다.” 미드가르드의 시솝이 바라는 건. “평화를 위해서.” 금속처럼 차가운 이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헉 이번 챕터가 생각보다 길어지고 있네요. 중간에 한 번 챕터를 잘라야하나...@ㅅ@.... 오늘 하루도 즐거우셨나요? 날씨가 더워져서 그런가 낮잠이 늘어서 죽겠습니다. 커피가지곤 잠이 깨지 않아요. ㅠㅠ 어디 잠깨는 특효약 없을까요? (...)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함께해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 0205 / 0240 ---------------------------------------------- 23장. 융합 한편, 쥬다스는 자신의 전생까지 꿰뚫어 본 오딘 헨리와 대치하고 있었다. 사실 쥬다스는 그의 말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정령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그레트’라 불려 보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자신의 전생을 알고 있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다. ‘다만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시솝의 기계 시스템이 그의 예상보다 훨씬 정밀한 것이리라 추측했다. 시솝이 가진 정보가 어느 정도인진 몰라도 평범한 인간들의 상식은 뛰어넘은 모양이었다. 그리 생각하며 힐끗 돌아보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실체화한 정령들이 흉흉한 기세로 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자연계 정령뿐 아니라 최근 계약한 동물계 정령 가야도 함께였다. 라그나로크, 시솝이 직접 만들어낸 인공 공간인 만큼 이 안에서 정령들의 힘은 상당히 제약을 받고 있었다. 녹아들 자연이 없으며 살아 있는 생명이라곤 외부인들이 전부다. 자연계를 지배하는 정령왕이라 해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호칭은 ‘쥬다스’로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쥬다스 님. 그럼 이제.” 헨리는 낮은 돌기둥에 기대다시피 앉았다. 천장 없이 뻥 뚫린 하늘에서 녹색 햇살이 은은하게 내려와 그들을 비추었다. 그 빛은 신비로워 마치 신들이 사는 세상에 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싸우러 온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이유로 절 찾으셨는지?” 목적을 묻는 질문에 쥬다스는 차분히 대답했다. “당신은 왕이 아닙니다.” “그렇죠. 나는 ‘시솝’일 뿐이에요.” 시솝이란 운영자, 즉 미드가르드 내 최고 권한을 가진 1인자를 의미한다. 그는 군주가 아니니 나라를 다스릴 의무가 없고 대의가 없으며 물을 책임이 없다. 단지 운영자로서 원하는 대로 관리 체재를 운영할 뿐이다.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편리를 제공하는 게 나의 역할이죠.” “당신이 추구하는 자유는 정확히 무엇입니까?” 그러나 시솝은 절대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나라에서 ‘추방’해 버리면 된다. 원하는 대로 사람들에게 등급을 매기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또 다른 독재였다. 그 사실을 집어 묻는 쥬다스의 질문에 오딘 헨리는 싱긋 웃었다. “그거야 사람마다 다르겠죠.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주는 것이 자유 아니겠습니까?” “누군가 자유를 누리려면 다른 누군가는 억압당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물건으로 만들어버린 결과물, ‘노예’처럼.” “아! 그 얘기 들었습니다. 시장을 아예 철폐해 버리셨다고요.” “예.” 쥬다스는 물끄러미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웃고 있으나 그 안에 깃든 차가움은 분노보다 매서웠다. “탓하지 않으십니까?” “응? 제가 쥬다스 님을 탓해야 합니까? 왜요?” “나는 당신이 추구한 자유를 부숴 버렸습니다.” “아하.” 헨리는 입가를 짚으며 키득거렸다. “쥬다스 님은 그럴 자격이 있어요. 설령 이 자리에서 저를 부순다고 해도 탓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요.” “왜입니까?” “강하니까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즉답이 튀어나왔다. 오딘 헨리는 솔직한 성격이었다. 애초에 그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야망을 숨길 이유가 없었다. 말마따나 그는 1인자였고, 강했기 때문이었다. 시솝은 그 가치관을 그대로 쥬다스에게도 적용시켰다. “시솝.” 쥬다스는 명료하게 이를 정리했다. “당신이 추구하는 자유란 결국 강자를 위한 자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가볍게 인정한 헨리가 이어서 덧붙였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유를 나눠 갖죠. 자원도, 영토도, 사랑도. 인구가 많을수록 자유를 더 많이 나눌 수밖에 없어요.” 온전히 자유롭게 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누구나 자유를 꿈꾼다. 누군가는 죽은 부모를 다시 만나는 게 꿈일 수 있고, 누군가는 배를 곯지 않고 따뜻한 집에서 사는 게 꿈일 수도 있다. 혹은 일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술을 마시며 노는 걸 자유라 칭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당신의 나라.” 헨리는 손가락으로 쥬다스를 찌르듯 가리켰다. “루바르잔 제국, 거기서도 마찬가집니다. 귀족층이 많은 걸 누리는 바람에 빈민이 생기잖아요. 어떤 형태로든 강자가 하나를 가지면 약자가 하나를 빼앗겨야 하는 구조인 겁니다. 내가 말하는 자유는 당신들이 말하는 자유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아니, 전혀 다릅니다.” 그 논리에 쥬다스는 전면으로 부정했다. 헨리가 흥미롭게 바라보자 그는 덤덤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루바르잔에는 분명 귀족과 평민의 격차가 존재하나 이는 신분에 따른 차이입니다. 여기에는 지켜야 할 질서와 인간에 대한 존중이 분명히 들어가 있습니다. 제국의 지배층은 타인의 것을 빼앗거나 짓밟는 것이 아닌, 모든 제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오, 바로 그겁니다. 제가 거슬리는 부분이요.” “……?” “우리가 왜 나눠야 하죠?” 갑자기 끼어든 말에 그가 멈칫 입을 다물자 시솝 오딘은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쓸데없이 모든 사람을 존중하느라 자원을 낭비할 필요는 없잖아요. 요는, 효율적인 삶을 위해선 인구를 줄이면 된다.” 지금 시솝은 쥬다스가 그간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결과지를 말하고 있었다. 쥬다스는 작게 탄식을 삼켰다. “간단하지 않습니까? 머릿수를 줄이면 당연히 나눌 필요도 없어지겠죠.” “소수를 위해 다수를 죽이겠다는 겁니까?” “물론이죠. 인간은 강하고 우수한 인자만 남기면 됩니다.” 오딘 헨리는 그리 말하며 자연에게 가호 받는 유일한 인간에게 눈짓했다. “당신처럼요.” “……아무래도.” 후웅! 날선 녹색 바람이 쥬다스의 손끝에 모여들었다. 숨기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정령왕의 힘을 사용하는 데엔 자연물 따위는 필요 없었다. 순결하고 맑은 바람이 순식간에 새의 날개깃처럼 그 주변을 감싸 안았다. “시솝과 나는 결코 합일될 수 없는 이념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래요? 저는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닮아 있다는 걸 더 확신하게 되었는데요.” 적대감을 드러낸 정령왕의 계약자를 보면서도 시솝은 태연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 약자를 죽이려는 저와.” 그는 기대고 있던 돌기둥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쥬다스의 힘에 대응하기라도 하듯 분홍색 기류가 그의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자신의 이념을 위해 저를 막으려는 쥬다스 님.” 자석의 N극과 N극이 만나면 서로 격렬하게 밀어내듯, 동류끼리 융합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헨리는 자신이 쥬다스와 그런 관계라 생각했다. 「트랜스퍼가 완료되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주인님?」 그의 손등 위에 나타난 연분홍빛 정령이 파라락 날아올랐다. 익숙한 정령임을 알아본 토니가 앗 하고 소리쳤다. 「제이다요!」 「……정말이네?」 제이라고 이름을 부르지 말라며 토니를 구박했던 유니마저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눈을 깜빡였다. 리키의 정령이라고 알고 있던 제이가 느닷없이 시솝의 손에서 나타나자 정령들 사이에 당혹감이 번져갔다. 「우잉. 근데 제이가 왜 저기 있다요?」 「계약자가 바뀐 모양이에요.」 「뭐야. 언제 그럴 틈이 있었어?」 정령에게 있어 계약자란 영혼과 영혼이 묶이는 매우 특별한 존재다. 심지어 계약자가 스스로 파기를 원해 계약관계가 끊기는 경우라도 정령은 전 계약자에 대해 특별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돌곤 한다. 정령은 기계나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종족이었다. 그들에겐 감정이 있으며 계약자에 대해 품는 감정은 인간이 연인에게 느끼는 사랑보다 훨씬 깊고도 진했다. 연인과 헤어진 사람이 당장 새로운 이성과 인연을 맺기란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한번 계약자를 잃은 정령이 새 계약자를 만나게 되는 건 이별에 대한 슬픔이 어느 정도 희석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잘은 모르겠지만.」 카니는 다홍빛 눈망울을 살짝 내리깔았다. 「슬퍼 보이네요. 저 아이.」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같은 정령들끼리는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제이는 자신의 전 계약자와 헤어진 걸 비통해하고 있었다. 다만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지 못할 뿐이다. 그녀는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 정령이었으니까. ‘리키.’ 쥬다스도 역시 제이를 알아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어린아이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수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악수를 두고 만 것이다. 이건 어리다고 해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 따위가 아니었다. ‘네 선택을 믿고자 하였거늘.’ 세상에 처음부터 악인인 자는 없다. 누구나 자신의 선택으로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고 선행을 이루기도 한다. 쥬다스는 리키가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곧장 이를 파괴하거나 빼앗는 대신 아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기다렸다. 마치 사야 황후와의 대립에서 세이지의 선택을 지켜봤을 때처럼 지켜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리키는 바이러스를 시솝에게 넘겼다. 어떤 선택이 옳고 그르다곤 함부로 판단할 순 없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리키가 선택한 건 자신의 소원을 위해 타인의 목숨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악행이었다. “저는 이제 이 바이러스를 실행시킬 겁니다.” 제이를 손바닥에 얹은 채 시솝이 말했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제 바람대로 수많은 인간이 죽어 나가겠죠.” “그건 불가합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시선. 이건 연기가 아니었다. 쥬다스는 시솝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분노를 느낀 헨리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핫,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냥 바로 밖에 가지고 나가서 실행시켜도 되지만 제가 굳이 여기서 이러는 이유는.” 오딘 헨리는 공손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 성능을 실험해 보고 싶어서입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 인류 최강이라는 당신이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인지.” “나로 실험을 해보겠다?” “예. 바이러스의 성능이 너무 강하면 다운드레이드가 필요할 테니까요. 인간을 전부 몰살시킬 순 없잖아요.” 시솝은 지극히 기계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인간을 그저 닭 우리에서 배양하는 달걀처럼 말하는 그를 보며 쥬다스가 주먹을 살짝 말아 쥐었다. “어때요? 물론 강요하겠다는 건 아닙니다. 실험에 참가하는 게 싫으시다면 차라리 당신과 일행분들을 포함한 우수한 인간 그룹을 이 라그나로크 안에 안전하게 모셔 놓고 바이러스를 살포해 버려도 돼요. 실험 따위 꼭 하지 않아도…….” “오딘 헨리.” 헨리는 움찔 입을 다물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어투였다. “내게 실험을 하는 데에 동의하마.” “…….” “단, 그 실험이 끝나기 전 너는.” 우우우! 푸른 늑대가 길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반짝이는 얼음알갱이들이 녹색 기류에 섞여 몰려들었다. 그 알갱이들은 유한 물줄기가 아닌 날카로운 얼음 창살로 결합하여 일제히 시솝을 뾰족한 끝을 겨누었다. “내 손으로 파괴하겠다.” ‘이거이거, 무서운 기세로군. 싸우러 온 게 아니라더니.’ 오딘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씩 웃었다. 거래 성립이다. “J0527. 바이러스 시스템, ‘궁니르’ 발동.” 「계약자의 명령에 의해 히든 시스템 ‘궁니르’를 발동합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제이의 몸에서 동글동글한 방울들이 훅 뿜어져 나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06 / 0240 ---------------------------------------------- 23장. 융합 바이러스는 마치 피처럼 붉은 방울이었다. 그것은 거품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다량으로 증식해서 허공에 붕 떠올랐다. 쥬다스는 그것들의 움직임을 잠시 관찰했다. ‘……저게 바이러스인가.’ 겉보기로는 단단한 쇠구슬 같기도 하고 핏방울 같기도 하였다.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떠다니는 걸 보니 어느 정도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초파리 떼와 비슷하단 생각도 들었다. 그게 한낱 벌레 따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 활동을 막아버리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란 사실을 알고 있는 이상 쥬다스는 가만히 구경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는 일단 미리 생성해 둔 얼음조각들을 시솝을 향해 내리꽂았다. 그러나 오딘 헨리는 웃는 낯과는 달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특히 장소가 라그나로크, 오딘의 지배하에 있는 특수공간이었기 때문에 그의 간단한 의지만으로도 온갖 기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오딘은 순식간에 자신을 보호할 마력 배리어를 생성해 냈다. 창처럼 날카로운 얼음조각이 일제히 날아가 반투명한 배리어에 박혔다. 단 일격에 달걀 깨지듯 쩌저적 깨져 버린 배리어를 힐끗 쳐다본 오딘이 여유롭게 손을 들어올렸다. “오, 놀랍네요. 다중속성 정령술사는 동시에 여러 가지 힘을 다룰 수 있습니까?” 파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타오르는 불덩이가 그의 손 안에 잡혔다. 불이 아니라 대포알을 붙잡은 것처럼 손이 터져 버렸다. 하지만 시솝의 몸은 살아 있는 인체가 아니었다. 손이 산산조각 났지만 피가 흐르는 대신 시퍼런 스파크가 이리저리 튀었다. 그는 귀찮다는 듯 반대쪽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곤 고장 난 팔을 통째로 뽑아버렸다. 그러자 곧장 새로운 팔이 생성되어 빈자리에 착 붙었다. 시솝에게 있어 새 팔을 연결하는 건 실밥이 터진 인형을 꿰매는 일보다 간단한 과정이었다. 그러는 사이 물과 불, 두 정령을 시솝에게 붙여둔 쥬다스는 바람을 이용해 바이러스 쪽에 접근한 상태였다. 오딘은 정령들의 공격을 설렁설렁 막으며 그 모습을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원리는 호흡기.’ 즉 공기를 차단하면 된다. 쥬다스가 바이러스를 막는 데에 바람의 정령인 유니를 선택한 이유였다. 바람은 바이러스들이 퍼지지 않도록 휘감아 한 군데로 뭉치게 했다. 그나마 방금 뽑아낸 바이러스들은 눈에 보이는 붉은 결정이라 처리가 수월한 편이었다. 문제는 끊임없이 바이러스를 살포하는 내비게이션 제이였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는데?」 「우앙. 꼭 식물계 정령 라플레시아를 보는 것 같다요!」 붉은 바이러스 덩어리들을 포자처럼 허공에 뿜어내는 제이를 보며 토니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라플레시아란 말 그대로 꽃들의 여왕 격인 신수를 지칭하는 명칭이었다. 동물계 정령 가야처럼 식물계에도 정령이 존재했다. 그중 가장 거대한 꽃을 피우는 라플레시아는 그 씨앗도 꽃잎만큼이나 붉다. 민들레 씨처럼 바람에 의해 날아가는 라플레시아 씨앗은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난다. 그리고 날아간 씨앗은 각 환경에 맞게 변화하여 식물이 더 이상 필요 없는 땅에선 말라죽고 필요한 땅에 도달하면 갖가지 식물로 자라나 숲을 이루고 망가진 자연을 회복시킨다. 「토니치곤 제법 괜찮은 비유네. 문제는 저 애가 그렇게 아름답기만 한 생물이 아니란 거지만.」 유니는 팔짱을 낀 채 어찌 해야 하나 싶은 얼굴로 제이를 노려보았다. 「저 앨 파괴해야 끝나려나…….」 하지만 저 가엾은 기계형 정령은 죄가 없질 않나. 나쁜 건 그녀를 병기로 만들어버린 인간이었다. 유니가 알기로 ‘이그레트’는 절대 그런 존재를 해치지 않았다. 자신이 손해를 입더라도 고스란히 당하거나 다른 방법을 찾곤 했다. 유니는 이번에도 그가 그런 선택을 내릴까 염려되어 최대한 빨리 적합한 해결책을 찾고자 머리를 싸맸다. 그러나 그건 지금의 그에겐 불필요한 걱정이었다. “유니.” 「……어? 으응?」 고민에 빠져 응답이 반 박자 늦은 유니에게 쥬다스가 마음속으로 자신의 소망을 전달했다. ‘제이를 파괴하자.’ 고민한 게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결단이었다. 조금 의외긴 했지만 그를 걱정하던 정령으로선 환영인 선택지다. 바람의 정령은 계약자의 마음이 돌아서기 전에 잽싸게 움직였다. 후웅! 곧 주변으로 몰려든 녹색 바람이 거대한 토네이도를 일으켰다. 불과 물의 합동공세에 벌써 몇 번이고 몸의 부품을 갈아치운 오딘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끼고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어라, 이번엔 토네이도입니까? 역시 자연의 왕쯤 되면 아무리 계산해도 소용없군요. 애초에 정령왕은 데이터가 너무 없어서 예측하기도 힘들고요.” “정령왕만?” “―?!” 갑자기 시야에 불쑥 끼어든 검은 머리의 사내를 보고 시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해동에서 건너온 신수 가야였다. 오딘보다 키가 훨씬 큰 가야는 몹시 귀찮다는 눈으로 상대를 내려다본 후 깔끔하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청룡인 가야의 주먹은 거의 대포알에 맞은 듯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고작 300년 살아놓고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마. 애송아.” 슈우우! 맞은 부위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천 년 묵은 용의 진심 어린 충고에 시솝은 찌그러진 배를 멍하니 쳐다보다 잔기침을 내뱉으며 웃었다. “아…… 켁켁. 동물계 정령님? 동물이라 그런가, 진짜 인정사정없네요.” “웃기지 마.” “농담 아닌데. 봐요, 저 지금 진짜 눈물까지 나요.” 오딘의 엄살에 가야가 눈살을 팍 찌푸렸다. “그 정돈 너한테 별거 아닌 거 다 알아. 이 요망한 기계 괴물 같으니.” “콜록! 좀 전엔 애송이라고 하셨으면서 이번엔 괴물이라뇨? 별명은 어울리는 걸로 한 가지만 정해주시죠.” “싫어. 콱 무지개빛깔로 일곱 가지도 넘게 중구난방으로 지어버릴 테다.” “우와, 정말 너무하네.” 그러는 사이에 거대한 토네이도는 신전의 돌기둥, 금간 벽, 하늘의 파란 구름 등 모든 걸 집어삼키며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가야의 근접공격으로 움직임을 멈춘 오딘 헨리를 뜨거운 불기둥이 화악 덮쳤다. ‘확실히 굉장하군.’ 오딘은 슬슬 오작동을 일으키는 육체를 감지하며 속으로 경탄했다. 아무리 시솝의 공간이라 해도 더 이상 버티기는 무리였다. 게다가 이번 열기는 꽤나 지독했다. 지옥의 겁화처럼 살갗을 활활 태우는 불길 속에서 그는 잠시 고민했다. ‘새 모델을 꺼내야 하나. 새 계정 파기 귀찮은데……. 하지만 예측한 수치보다 쥬다스 님의 능력치가 너무 높아. 이대로는 바이러스 실험까지 견디지 못할지도…… 응?’ 태연하게 상대의 무력을 재평가하고 있던 시솝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는 제이의 동력구슬이 달린 손등을 홱 들어 올렸다. “……뭐야, 이건.” 처음으로 오딘의 입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곧 그에게서 가야조차도 움찔할 정도의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처음엔 분명 연한 분홍색이었던 제이의 구슬이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색깔로 물들어있었다. 그리고 이내 버그를 알리는 이상한 글자가 주르륵 구슬 위로 떠올랐다. 오딘은 마치 몸속에 생쥐가 한 마리 기어들어와 휘젓고 다니는 것만 같은 기이한 역겨움을 느끼고 머리를 감쌌다. 「사용자의 문서파일이 외부로 노출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의 제어기능이 마비됩니다. 사용자의 운영체재에 침입한 프로그램이 발견되었습니다.」 오딘의 눈앞으로 제이가 아닌 시솝의 직속 내비게이션이 나타나 끊임없이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는 현재 상황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이를 으득 갈았다. ‘해킹(Hacking)!’ 설마하니 로키가 바이러스 안에 해킹 프로그램을 함께 설치해 뒀을 거란 짐작은 하지 못한 시솝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니, 예측하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수작이었다. 기계가 가장 취약한 허점이 바로 보안 시스템이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제이를 리키로부터 트랜스퍼받기 전에 정밀 검사를 돌려봤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는 당장 이그레트라는 변수에 홀릴 대로 홀려 있던 상태였다. “이 내가, 해킹을 당했다고?”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시솝은 미드가르드의 1인자이자 기계와 한 몸이 된 절대자였다. 기계가 있는 곳에선 그는 어디든지 신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아무나 그의 시스템을 뚫고 휘저을 만한 해킹 프로그램을 개발하진 못했다. 오딘이 머리를 감싸 쥐고 씹어 뱉듯이 그 빌어먹을 해킹 프로그램 개발자의 이름을 읊조렸다. “‘로키’……!” 오딘에겐 불행히도 로키는 천재였다. 바이러스를 만들란 지시를 받은 로키는 감히 시솝의 명에 거역하지 못하고 임무에 착수했으나, 그의 뜻에 온전히 따른 건 아니었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당신이 원하는 차가운 지옥으로 만들어버릴 순 없어, 오딘.’ 꼭 로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 오딘은 헛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버틸 힘을 잃은 다리는 결국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말았다. 「쟤 갑자기 왜 저런다요?」 「몰라. 아무튼 기회인 것 같네. 토니!」 「엣, 알았다요!」 일단 할 일이 정해지자 두 정령은 언제 싸웠냐는 듯 호흡이 척척 맞았다. 유니는 토니가 만들어낸 알록달록한 조약돌을 바람으로 만두피처럼 휘감았다. 그러곤 정확히 시솝이 손등에 장착한 제이의 구슬을 노렸다. 쩌엉! 구슬이 깨지자 파랗게 변했던 색깔이 지지직 노이즈를 일으키며 빛을 잃어갔다. 「본체에 큰 손상을 입었습니다. 작동을 정지합…… 니…….」 본체를 잃은 제이는 말도 다 끝마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바람으로 한 곳에 뭉쳐둔 바이러스들은 카니의 뜨거운 불길이 집어삼켰다. 타오르다 못해 용암처럼 이글이글 끓다시피 하는 시뻘건 불길 속에서 바이러스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녹아 없어졌다. 매섭게 휘몰아쳐 신전을 무너뜨린 토네이도가 잦아들고, 그 사이로 쥬다스가 무릎 꿇은 시솝을 향해 걸어왔다. “실험은 실패했다.” “…….” “중간에 갑자기 행동을 멈췄더구나. 충분히 다른 방도를 찾을 시간이 있었을 텐데도.” 오딘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깨어진 구슬과 검게 그을려 너덜너덜해진 피부를 가만히 바라본 쥬다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우웅! 손바닥 안으로 몰려든 열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꿈틀거렸다. 고개 숙이고 있던 오딘의 입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 건 바로 그때였다. “……하하.” “무엇이 그리도 우습더냐.” “아니. 쥬다스 님, 당신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습니다. 지금 우스운 건…….” 오딘 헨리는 망연자실하여 중얼거렸다. “이제 곧 그 망할 꼬맹이에게 지배당할 제 자신이죠.” “……?” 순간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쥬다스가 화염을 손안에 감싸 쥔 채 멈칫했다. “해킹입니다. 기계 운영체재를 파고들어 지배하는 방식이죠. 바보같이 그 꼬마의 아비 놈이 만들어낸 함정에 빠지고 말았네요.” 시솝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불에 반쯤 타 갈라진 얼굴 사이로 녹아내린 금속 부품이 보였다. “내비게이션 J0527이 가짜 트랜스퍼를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제 권한을 가지고 리키라는 꼬마에게로 돌아갔겠네요.”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무리 시솝이라도 블루스크린이 뜨면 화가 나죠(...)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07 / 0240 ---------------------------------------------- 23장. 융합 “리키가…….” “모쪼록 방심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본래 어린아이일수록 앞뒤 가리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법이니까요.” 꺼져가는 눈빛으로 그가 덧붙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실험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무슨.” “눈에 보이는 것만 바이러스라고 생각하시면…… 곤란…….” 자세히 물어보려던 찰나 시솝의 몸이 허물어졌다. 찬 바닥에 쓰러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오딘 헨리를 보며 쥬다스는 손 안에 쥐었던 화염을 훅 흩었다. 파라락 날아든 유니가 그 앞을 빙글빙글 서성였다. 「얘 뭐야. 죽은 거야?」 「죽은 건 아닐 거다. 본체가 따로 있으니.」 「죽진 않았어도 더 이상 움직이진 못하는 것 같다요.」 「으응, 글쎄요. 리키라는 꼬마애가 시솝의 권한을 훔쳐갔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카니의 대답에 유니가 끙 팔짱을 끼며 쥬다스를 올려다보았다. 「어떡할래? 만일 시솝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면 그 애가 이제……. 이그레트?」 잠깐 사이 그의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았다. 쥬다스는 떨리는 손으로 근처 무너진 벽을 짚었다. ‘숨이, 꼭, 죽어갔을 때처럼.’ 전생의 죽음이 떠오를 만큼 강렬한 고통이 벼락처럼 찌르르 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갑작스런 통증에 숨마저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 정령들도 그가 느낀 고통을 대략적으로 감지하고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랐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그레트, 어디 아파?」 「히잉. 아프다요?」 어지간한 고통으로는 내색조차 하지 않던 그였다. 그런 그가 이번엔 숨 쉬는 것도 잊고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거품을 물고 기절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쿨럭!” 한차례 피를 토해낸 후에야 그는 간신히 가빠진 호흡을 정돈했다. 피는 손바닥을 타고 흘러넘쳐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쥬다스는 자신의 상태가 무엇 때문인지 그 원인을 쉽사리 짐작해 낼 수 있었다. ‘바이러스. 대체 어느 틈에?’ 제이가 뿜어내는 바이러스를 보자마자 바람으로 경로를 완벽히 차단했고 불로 전부 태워 버렸다. 그 과정에 틈은 없었다. 하지만 문득 시솝이 조금 전 한 말이 떠올랐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었다는 건가.’ 방울 형태의 바이러스를 직격으로 맞는다면 더욱 끔찍한 효과가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아주 미세한 양만 침투하였다. 그는 소매로 대충 피를 닦아내곤 길게 숨을 내뱉었다.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나니 당장은 견딜 만했다. 「괜찮아? 바이러스인가 뭔가 하는 그거 때문인 거야?」 “……괜찮아, 유니.” “하지만 주인 지금 안색이.” 기대고 있던 벽에서 손을 떼며 다시 바로 선 쥬다스를 보며 가야가 머뭇머뭇 걱정의 말을 건넸다. “나는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그보다 만일 리키가 시솝의 힘을 강제로 빼낸 거라면 문제가 조금 커지겠구나.” 「그건 차라리 잘된 거 아냐? 꼬마가 약속을 어긴 건 괘씸하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솝의 힘을 빼앗아온 거니까. 이제 더 싸울 이유가 없잖아.」 “그렇게 평화롭게 흘러가주면 좋겠다만.” 쥬다스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는 통로를 찾기 위해 바람을 사용했다. 초록색으로 반짝이는 바람들이 훅 하고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시솝의 말대로라면 이 라그나로크는 여러 개의 방으로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중 리키와 다른 일행들이 모여 있는 장소를 서둘러 찾아가야만 했다. “굶주린 이에게 너무 많은 음식을 주면 배를 앓는 법이지.” 그릇이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거대한 힘은 오히려 독이다.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큰 힘을 손에 넣은 사람은 쉽게 그 힘에 취한단다.” 「과한 욕심을 부린다는 소리다요?」 「아, 나 알 것 같아. 예전에 이그레트가 만난 사람들도 그랬었잖아.」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그레트’의 힘을 탐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유한 성격과 미천한 신분을 약점으로 삼아 발아래 꿇리려 했다. 그가 가진 힘을 자신들이 휘두를 수 있게 되길 바랐다. 「나야 뭐 이그레트를 자기 발밑에 두려고 한 게 제일 짜증 났지만.」 그는 과거사를 떠올리며 꿍얼거리는 유니를 가만 바라보았다.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에 와선 그때 만난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각양각색의 사정과 이유로 그들은 간절했다. 타인의 불행보다 자신의 소망이 더욱 중요했을 뿐이다. 꼭 지금 리키가 하는 행동처럼. 「웅?」 안색이 창백해진 계약자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던 토니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러다 무언가 알아차리곤 파다닥 쥬다스의 머리 위에서 내려와 짧은 팔다리를 붕붕 휘저었다. 「으에에. 큰일요! 큰일났다요! 이그레트!」 「뭐야. 왜 또 갑자기 오두방정이야?」 「유니이! 유니는 이게 안 느껴진다요?」 「그니까 뭐가?」 라그나로크는 시솝이 만들어낸 인공공간이었다. 정령들의 감은 외부에 있을 때보다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바람의 정령조차 감지하지 못한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해 낸 땅의 정령을 말똥말똥 쳐다보던 카니가 움찔 눈을 깜빡였다. 「어머나. 이건 좀 큰일이 맞긴 하네요.」 「흐엥. 어떡한다요.」 「……니들 자꾸 못 알아듣게 말할래?」 큰일이고 자시고 당장 유니의 손에 뺨을 꼬집히게 생긴 토니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빽 소리쳤다. 「여기, 무너지고 있다요!」 「뭐?」 「이 공간 자체가 사라지고 있는 거다요!」 그 말을 듣자마자 유니도 흔들리는 기류를 느끼고 흠칫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갓 자라난 새싹처럼 고운 연두색 하늘이 깨진 빙판처럼 이리저리 금이 가 있었다. 때맞춰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덩이들이 작게 진동하며 기름에 콩 볶듯 드드득 튀기 시작했다. 「시솝이 쓰러져서 라그나로크도 닫히려나 봐. 지금 애들을 찾는 게 문제가 아니야, 이그레트.」 정령들의 경고를 들으면서도 쥬다스는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았다. 유니는 그의 주변을 빙글 돌며 한 차례 더 경고했다. 「여기서 빨리 벗어나지 않으면 이 라그나로크와 함께 소멸할지도 몰라.」 무수한 방 중 일행이 있는 방을 찾는 게 어려울 뿐, 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가 다루는 정령의 힘이라면 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인공 공간을 찢고 밖으로 탈출할 수 있다.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찢어버리면 되겠구나.” 그가 손을 뻗자 응축된 4속성 정령에너지가 콰앙 폭발을 일으켰다. 그러자 허공에 꼭 신문지를 여러 겹으로 접어 구멍을 낸 것처럼 괴상한 통로가 생성되었다. 통로를 넘어 다른 방으로 이동하자 굽이치는 은빛갈대밭이 보였다. 이곳도 마찬가지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올려다본 하늘이 퍼즐조각처럼 부서져 흩날렸다. 「아으으, 정말! 이런 때에도 고집 부릴 셈이야? 너 지금 상태도 별로 좋지 않잖아.」 쥬다스는 갈대를 헤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니 말대로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간이 가면서 라그나로크도 무너지고 있었다. 혼자 밖으로 나가서 상태를 돌볼 여유 따윈 없었다. ‘모두를 찾아서 나가야 해.’ 그는 욱신거리는 가슴께를 짚으며 잔기침을 뱉었다. 소량이라고 해도 바이러스는 인체에 몹시 치명적이었다. 이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일단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시솝이 원하는 대로 실험을 하긴 하는 셈이군.’ 그리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다. 그러던 순간 먼저 퍼져 나갔던 유니의 바람이 빠르게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어? 찾았어. 다행히 전부 근처에 있었나 봐.」 그는 바람의 인도를 따라 곧장 일행에게로 향했다. 그들도 마침 라그나로크의 붕괴를 알아차리고 곤혹스러워하던 중이었다. 봄눈처럼 사뿐사뿐 흩날리는 연두색 하늘 조각을 하나 집어든 에단이 굳은 표정으로 서있다 쥬다스를 발견하곤 눈을 크게 떴다. “……주군?” “쥬다스 님!” 동시에 그를 발견한 바이칼과 크리스티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앞으로 달려왔다. 쥬다스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는 일행 수를 확인하고 잔잔히 웃었다. “다들 무사했구나. 사이좋게 모여 있어서 다행이야.” “어찌 또 아이 취급을 하십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무사히 그를 만나게 된 크리스티나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쥬다스는 자신에게 몰려든 일행의 뒤편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리키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솝의 권한을 해킹해 온 제이가 멀쩡히 그의 손등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키는 그런 제이를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쥬다스의 시선을 따라 리키를 힐끗 쳐다본 바이칼이 콧등을 찡그리곤 상황을 설명했다. “저 자식, 제이를 시솝에게 넘겼었습니다. 주군과의 약속을 어긴 게 괘씸해서 한마디 하려고 했습니다만, 알고 보니 제이에게 무슨 함정을 파둔 모양이더라고요. 갑자기 시솝이 눈사람처럼 녹아서 사라져 버렸는데 어씨, 소름이 쫙.” 바이칼은 소름이 오른 팔을 벅벅 긁으며 제이를 만지작거리는 리키를 눈짓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하늘이 깨지는 게 아니겠습니까? 꼬마는 시솝이 사라진 후부터 넋이 나가서 죽 저 상태…… 엇?” 말하다 말고 쥬다스의 옷자락에 시선을 준 바이칼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쥬다스 님. 소매에 왜 핏자국이…….” 후웅! 그 순간 보이지 않았던 바람에 의해 그 손이 튕겨져 나갔다. 쥬다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주군, 왜 그러십니까?” “음……. 옮을 수 있어서.” “예?” 그가 감염된 바이러스는 호흡기로 전염될 수 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쥬다스는 바이러스가 다른 이에게 옮지 않도록 미리 자신의 주변을 바람의 장벽으로 막아둔 상태였다. “설마.” “당장은 괜찮다. 일단 이곳을 나가서 얘기하자꾸나.” 에단이 바이러스에 대한 사실을 짐작하고 침음성을 흘렸지만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오래 붙들고 사정을 설명할 시간은 없었기 때문에 곧장 정령의 힘을 사용해 탈출구를 만들어낸 순간이었다. 쥬다스는 일행을 먼저 내보내고 출구 앞에 멈춰 서 여전히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는 리키를 불렀다. “리키.” “난 안 가.” 아이는 단호히 그의 부름을 거절했다. “나가야 해. 시솝이 힘을 잃었으니 라그나로크는 곧 무너질게다.” “……아직 다 빼앗아오지 못했단 말이야.” 리키는 해킹 프로그램을 실행 중인 제이를 손에 얹은 채로 중얼거렸다. “시솝이 가진 히든 데이터. 그게 필요해.” 영생을 사는 법, 그리고 죽은 아버지를 되살릴 방법. 두 가지를 얻기 위해선 시솝이 모아둔 데이터를 완벽히 빼앗아올 필요가 있었다. 리키는 떨리는 손으로 제이를 감싸 쥔 채 천천히 무너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려. 난 아직 나갈 수 없어.” “바보냐? 라그나로크가 사라지면 영생이고 뭐고 너도 죽는 거야, 이 멍청아!” 탈출구 밖에 먼저 나가 있던 바이칼이 답답한 심정으로 소리쳤지만 리키는 통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소리로 대꾸했다. “라그나로크는 원래 시솝의 공간이라며! 여길 유지시키는 권한도 뺏어오면 돼. 찾기만 하면 되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바이러스로 인한 주인공 데드플래그...(?)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 슬슬 이번 에피소드도 끝이 보이고 있네요.ㅎ 생각보다 길어지곤 있지만(..) 굵은 에피소드 하나 끝날 때마다 뭔가 시원섭섭합니다. 헛헛.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0208 / 0240 ---------------------------------------------- 23장. 융합 쿠릉! 하늘이 불온하게 울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여전히 라그나로크에서 탈출할 생각이 없는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휙 몸을 날렸다. 그 돌발 행동에 놀란 세이지가 숨을 훅 들이켜며 탈출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형님!” 그런데 그 손 너머로 세 개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군이 뛰어들자 앞뒤 가릴 것 없이 함께 뛰어든 에단, 크리스티나, 바이칼이었다. 세 사람을 마지막으로 정령의 힘으로 열려 있던 탈출구가 팟 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사태에 세이지와 콜,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사들이 일제히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다 함께 무사히 빠져나왔다 싶었는데 정작 제일 중요한 사람들이 도로 라그나로크에 남아버린 채 공간이 닫혔으니,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이게 대체…….” 처음 오딘 헨리를 따라 올라왔던 건물의 최상층이었다. 이미 주군과 세 심복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세이지는 망연자실하게 텅 빈 소파를 눈으로 훑었다. ‘아니지. 탈출구를 만드신 건 형님이니까, 분명 조금 더 기다리면 평소처럼 태연하게 나타나실 거야.’ 그럼 다들 긴장하고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겠지. 기사들이 진이 빠진 걸 보고 에단 경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엄하게 혼낼 게 분명했다. 그런 상상을 하며 세이지는 고개를 들었다. 라그나로크의 몽환적인 하늘과 다르게 그들의 눈앞에는 투명한 유리창 너머 파란 하늘이 보였다. 33층이라는 고층에서 내려다본 세상은 기계가 가득한 인공도시. 세이지는 유리벽에 손바닥을 맞대며 중얼거렸다. “형님. 얼른 나오세요.” 마치 손바닥에 맞닿은 것처럼 보이는 미드가르드의 풍경이 너무나도 차가웠다. “이제 우리 그만 돌아가요. ……루바르잔으로.” 세이지는 간절히 바랐다. 순례의 길에서 깨달은 게 무척 많았고, 그로 인해 다들 많은 부분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그들의 중심에 쥬다스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고, 또 의미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이는 소망했다. 형님이 돌아오길, 그리하여 고국으로 함께 돌아갈 수 있길. 쥬다스는 더 이상 백로황자가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황태자이며 더 이상 그 누구도 그의 나약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누구라도 그를 직접 만난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탄복하고 만다. 게다가 이젠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 너무나도 많았다. 이미 수많은 사람이 그가 돌아오길 기다렸고, 반드시 그들 위에 군림하길 바라는 군주였다. * * * 리키는 하늘이 무너지든 땅이 갈라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조금만 더 기다리면 손안에 들어올 시솝의 권능, 그 하나만이 간절할 뿐이었다. ‘어차피 마지막 기회야. 이번에 실패하면 살아 있어도 의미가 없어.’ 리키의 목적은 단순하리만치 직선적이었다.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 보고 달려왔다. 만일 이대로 라그나로크가 무너져 시솝이 가진 모든 데이터를 찾을 길이 없게 되어버린다면 목표를 이룰 방법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러니 리키는 목숨 걸고 라그나로크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기계가 되어 영생을 사는 법을 알 때까지, 그리고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방법에 관련된 정보를 티끌만큼이라도 찾을 때까지. 그러나 제이를 손에 얹고 시솝의 데이터를 해킹하던 리키의 어깨를 누군가 확 끌어당겼다. “뭐야! 방해하지…….” 따악! 버럭 소리 지르려던 리키는 장렬하게 내려찍히는 꿀밤에 머리를 감싸 안고 주저앉았다. 절로 끄윽 하는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정수리에서 후끈후끈 열이 나는 게 머리에 불이라도 지른 기분이었다. “아으으, 진짜 뭔데. 왜 때리는데!” “네 아버지가 진정 이런 걸 원하리라 생각하느냐.” “……!” 리키는 머리를 감싸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목소리는 낯이 익었지만 가면이 사라진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었기에 멍하니 그를 쳐다보게 되었다. 보석을 캐다가 그대로 깎아 만든 듯한 금안과 스스로 빛을 내기라도 하듯 반짝이는 은발이 하염없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멍청해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리키는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은발이었나?’ 얼굴이야 가면을 쓰고 있어서 몰랐다곤 하지만 머리카락 색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라그나로크에 들어오기 전 쥬다스의 머리색은 분명 은발이 아니라 흔하디흔한 갈색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당신, 시솝의 도전자 맞지?” 묻는 순간 쥬다스를 뒤따라온 세 사람이 다가와 호위 진영을 만들어냈다. “쥬다스 님.” 철컥! 쥬다스에게 다가선 에단이 검을 뽑아 리키를 겨누었다. “어찌 이리 무모하십니까.” “이런, 다들 왔구나. 좋지 않은 상황이라 말려들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생각이 더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작정하고 말려들게 해주십쇼.”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를 이어 크리스티나가 공손히 덧붙였다. “따르겠습니다. 명령을.” 연두색 하늘은 이미 반 이상 무너져 있었다. 게다가 붕괴되는 속도가 점점 빨라져 꼭 눈이 내리듯 사방이 하늘 조각으로 뒤덮여 반짝였다. 부서지는 세계 속에서 쥬다스는 고집불통인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얘야.” 또다. 리키는 여전히 따뜻한 음성을 들으며 해킹을 진행 중인 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을 마주치면서 목소리를 듣다보니 왠지 모르게 자꾸만 아버지가 떠올라 마음이 약해지는 탓이었다. “네가 영생을 살고자 하는 까닭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런 게지?” “쳇. 알면서 왜 물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진실이란 게 있다. 쥬다스는 아직 열세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영생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며 그 내면에 숨겨둔 진짜 소망을 읽어냈다. 그리고 동시에 아이 자신조차 몰랐던 다른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해 냈다. 그는 씁쓸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네겐 괴로울 수 있는 질문이겠다만. 혹 아버지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느냐?” “……몰라. 그런 거.” 리키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관심 없어.”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짜는? 그 당시 사인은 뭐였지?” “나도 몰라. 자꾸 그런 이상한 거 묻지 마!” 묻는 족족 가시가 잔뜩 돋친 대꾸만 돌아왔다. 그걸 지켜보던 바이칼이 황당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툭 끼어들었다. “이봐. 이상한 건 너 아니야?” “뭐?” “넌 지금 죽은 사람을 되살리고 싶어서 이렇게까지 하고 있다며? 보통 그렇게 소중한 가족이 끔찍하게 살해당했으면 적어도 기일이나 사인 정도는 기억할 법하잖아.” 소중한 존재의 죽음을 겪고서 2년이나 지났는데 그에 대해 모른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심지어 복수하겠단 의지마저도 없었다. “여태껏 왜 죽었는지 관심조차 없었다는 게 말이나 돼?” ‘어? 그러고 보니 나, 왜…….’ 듣다보니 리키도 이상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한 번도 궁금하게 여겨본 적 없는 문제였다. 리키가 기억하고 있는 건 ‘아버지가 살해당했다’는 정보뿐이었다. 아니, 정말로 살해당한 거였나? 리키는 고개를 저었다. ‘사고로 죽었다’가 더 적합한지도 몰랐다. ‘왜 몰랐지?’ 멍하니 넋을 놓은 리키를 향해 제이가 알람을 울렸다. 「해킹 과정 중 심각한 손상을 입은 데이터가 있습니다. 건너뛰고 진행하시겠습니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진 리키는 제이의 알람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부서지는 하늘 조각 사이에 주저앉은 아이를 바라보며 쥬다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네게 있어 되살리고 싶은 사람은 아버지뿐이더냐?” “그야 다른 가족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다른 가족은 없었다. 리키가 기억이란 걸 가질 무렵부터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었다. ‘되살린다’라는 건 죽은 사람에게 바라는 소망이다. 처음부터 없던 존재를 되살리고 싶을 리가 없다. 그 사실을 인지한 리키는 계속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연분홍빛 정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류로 인해 해킹 프로그램이 중단되었습니다. 계속 진행을 원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제이.” 「네, 주인님.」 “아빠는……. 로키 파르바우티는 왜 죽었는지 알고 있어?” 「로키 파르바우티. 그는 본 내비게이션에 탑재된 바이러스 제거를 시도하다 중도 감염되어 사망하였습니다.」 제이의 차분한 기계음이 소름 끼치게 들린 적은 처음이었다. 리키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살해당한 게 아니라?” 「로키 파르바우티의 사망원인은 바이러스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살인도구가 바로 제이였단 사실을 알게 되자 허탈감이 몰려왔다. 리키의 아버지 로키는 바이러스를 만들어낸 걸 후회했고 다시 없애려고 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없애는 건 만드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로키는 자신이 만들어낸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일에 실패했고, 도중에 감염되어 사망에 이르렀다. ‘말도 안 돼. 그럼 나는.’ 로키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아이가 그 사실을 기억하지 말길 바랐다. 그래서 눈을 감기 전, 리키의 기억을 수정했다. 아버지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도록, 아버지의 죽음에 집착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가 제거에 실패한 그 바이러스에 손대지 않도록. 모든 정보를 리키의 머릿속에서 삭제했다. 이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나…….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구나.” 뒤늦게 그 사실을 떠올린 리키가 헛웃음을 입가에 매달았다.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생이 이미 손에 넣은 것이었을 줄이야. 허무하고 또 허탈했다. 봉인이 풀리듯 잠겨 있던 데이터가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기계였어. 그것도 13년 동안 죽 이 얼굴 이 모습으로 살아온.” 안드로이드(Android), 즉 인간의 모습을 한 로봇을 뜻하는 명칭이었다. 실제적으로는 리키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안드로이드는 아무리 기계국 미드가르드라 한들 다른 이들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대신 종종 노동이나 소일거리를 맡기기 위해 제작되는 안드로이드들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감정과 이성이 없으며 입력된 프로그램대로만 움직인다. 자의를 가지고 움직이는데다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감정마저 느끼고 있는 리키는 단순한 기계라고만은 볼 수 없었다. 인간에서 기계로 바뀌어버린 시솝 오딘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로키는 그 사실을 아이에게 숨겼다. ‘리키.’ 아빠는 왜 날 그렇게 다정하게 불렀을까, 어차피 진짜 사람도 아니었는데. 리키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도무지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영생을 사는 법은 필요가 없게 되었고, 아버지라 생각했던 사람은 자신을 만든 제작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소망 따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렇게 생각한 리키의 코앞으로 손이 하나 내밀어졌다. “리키.” “…….” “함께 이곳에서 나가자.” 쥬다스였다. 포기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그에게 리키는 따지듯 물었다. “왜?” 붕괴가 막바지에 다다른 라그나로크는 이제 바닥마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파사삭 바스러진 갈대꽃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잘해줘요?” “이리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느냐?” 태연한 되물음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리키는 자폭하는 심정으로 대답했다. “난 약속도 어기고, 당신한테 거짓말도 했어. 내가 당신이라면 화가 나서 나 같은 건 굳이 살려주고 싶지 않을 거야.” ‘아빠도, 당신도. 어차피 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로봇일 뿐인데.’ 이어지지 못한 한마디가 가슴속에 남아 스스로를 할퀴었다. 영생을 살 수 있게만 된다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영생을 사는 기계란 걸 안 지금, 리키는 다시금 깨달았다. 수명과 관계없이,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력한 꼬마일 뿐이었다. “음, 그리 생각하는구나.” 그러나 리키가 뭐라 하든 쥬다스는 그저 빙긋 웃어 보이기만 했다. 꼭 어른 앞에서 떼쓰는 아이가 된 기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누구나 그런 때가 있지. 내 발이 잘못 꼬여 길에서 꽝 넘어졌는데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니까, 들키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서 척척 걸어가는 그런 순간 말이다.” 리키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따스한 빛을 담은 금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사실은 넘어져서 까진 부분이 눈물 나게 아픈데.” 눈물로 엉망진창이 된 얼굴이 드러났다. 어느 틈에 그렇게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었을 정도였다. “그렇지?” “우, 흑. 으아아아앙.”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우는 아이를 품에 안아 다독여주는 쥬다스를 보며 세 수하도 공격태세를 풀고 한숨을 쉬었다. 혹여 시솝의 권한을 빼앗은 리키와 싸우게 될까 조마조마했는데 다행이었다. “유니.” 「알았어!」 기다리던 바람의 정령이 막 탈출구를 만들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던 찰나였다. 훅 촛불 꺼지듯 흩어져 버린 바람을 느끼고 유니가 계약자를 돌아보았다. 「……이그레트?」 정령은 계약자의 상태에 따라 힘의 사용을 제약받는다. 계약자가 정신을 잃으면 정령왕이라 해도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할 수 없다. 그 정령계 법칙에 따라 유니도 현재 힘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털썩! 멀쩡하진 않았어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다 싶던 쥬다스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라그나로크라는 특수한 환경이었기에 정령들의 실체화가 풀리진 않았지만 이대로라면 탈출구를 만들 수 없었다. 놀란 크리스티나가 가장 먼저 그를 붙들었다. “쥬다스 님! 괜찮으십……!” 상태를 물으려던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쥬다스를 부축하고 있던 손이 피에 푹 젖어 있었다. 의식을 잃으면서 토해낸 피가 그의 흰옷을 잔뜩 적시고 있었다. ‘……안 돼.’ 그녀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어져가던 하늘이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전부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그레트!」 공간의 일그러짐을 느낀 정령들이 일제히 계약자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날, 미드가르드의 시솝과 함께 그의 거처인 라그나로크가 영원히 붕괴되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뒤통수! 통수를 치자! ....가 아니라 이런저런(?) 사건사고가 가득한 이번 화였네요.ㅎ 이걸로 이번 챕터가 마무리되었습니다. 다음 편부터는 '24장 : 운명'이 진행됩니다. 그럼 오늘 하루도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 0209 / 0240 ---------------------------------------------- 24장. 운명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대자로 쓰러져 있던 리키는 그 흐느낌을 들으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하늘에 물고기들이 거꾸로 날아다녔다. “……꿈?” 포옹! 마치 호수처럼 하늘에 파문이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난 로봇 주제에 무슨 꿈까지 꾸지?’ 그렇게 자조하던 순간, 갑자기 바로 옆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 아니구마. 여긴 정령계구마.」 “히익!” 리키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몸의 윤곽이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한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일어났구마. 다른 친구들은 아직이구마.」 “친구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주변에 쓰러져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바닥은 발목까지 차오른 얕은 물이 찰랑이고 있었는데 크리스털처럼 파랗게 빛나고 있어 눈이 부셨다. 그리고 그 물에 살짝 잠기다시피 누워 있는 세 사람은 리키도 익히 알고 있던 이들이었다. “시솝의 도전자들.”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였다. 리키는 기억을 더듬어 마지막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우린……. 그러니까, 라그나로크가 무너져서.” 「공간이 붕괴됐더구마? 쯧쯧, 왕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다들 그대로 영원히 소멸해 버렸을 거구마.」 “왕이라니?” 「자연계 정령왕 네 분 말이구마.」 몸체가 반투명한 남자가 이상한 말투로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정령왕의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죽지 않고 여기 있는 거라고? 여기가 어딘데?” 「정령계구마.」 “정령계? 당신도 그럼 정령이야?” 「그렇구마. 내 이름은 라그리마라고 하구마.」 ‘유령인 줄 알았는데.’ 라그리마라는 정령은 무릎 아래로는 흐릿하게 형체도 없는데다가 동공 없이 눈알 전체가 통째로 파랗게 채워진 눈에서는 끊임없이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몸은 비쳐 그 너머가 보이고 발이 없으니 이동할 땐 허공을 둥둥 떠다닌다. 그야말로 기괴하게 생겨 유령이라고 오해받기 딱 좋은 생김새였다. 다행히 유령에 대한 공포심이 없는 리키는 충격을 받지 않았다. “저기, 라그리마.” 「왜 부르구마?」 “혹시 그. 한 명 더 있지 않았어? 은색 머리카락에…….” 말을 하려고 보니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느끼기엔 어른이라고 느꼈는데 외형을 떠올려보니 그와 별로 나이 차이가 나지 않은 소년이었다. “이름이 ‘쥬다스’ 님이라고 불렸던 것 같아.” 「쥬다스? 그를 찾는 거구마. 그야 물론 당연히 같이 정령계에 도착했구마.」 “정말? 어디? 지금 어디에 있어?” 「…….」 라그리마는 답하지 않고 몇 번 코를 훌쩍였다. “으으. 젠장, 머리야.” 리키가 다급한 심정으로 대답을 재촉하려던 찰나, 바닥에 엎어져 있던 바이칼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그를 기점으로 에단과 크리스티나도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함께 공간을 옮겨온 만큼 정신이 드는 기점도 비슷한 모양이었다. 리키는 어물어물 그들의 곁에 다가갔다. “다들 괜찮아?” “어 씨, 뭐야. 꿈에서도 왜 네놈 면상이 나오냐.” “삐이이.” 리키를 발견하고 왈칵 표정을 구긴 바이칼의 품에서 어린 와이번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얼씨구, 플루비도 있네. 겁나 웃기는 꿈…….” “꿈이 아니야.” “땅과 하늘이 온통 물바다인데 꿈이 아니긴. 하여튼 저 자식은 꿈에서도 재수대가리가 없어.” 적대감 가득한 눈빛을 받은 리키가 담담히 이를 받아들이며 대꾸했다. “재수대가리 없어서 미안한데, 진짜야. 라그나로크가 무너져서 같이 정령계로 넘어온 거래.” “누가 그러는데?” “라그리마란 정령이.” “라그리마?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충대충 건성으로 대답하던 바이칼의 시선이 문득 자신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푸른빛의 정령과 마주쳤다. “으아아악!” 「너무하구마. 그렇게 놀랄 건 없구마…….」 그들이 반가워해 줄 줄 알았던 라그리마는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늘어뜨렸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선 바이칼 대신 에단이 라그리마를 날카롭게 훑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리키의 말이 사실인 것 같군. 여긴 꿈이 아니다.”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 그대가 있는 걸 보니 여긴 정말 정령계인가?” 크리스티나도 놀라지 않고 상황을 물었다. 혼자 놀라 깨갱했던 바이칼이 플루비를 방패처럼 얼굴 앞에 들어 올리며 덜덜 떨었다. “여, 여어. 오랜만.” 「오랜만이구마. 여긴 정령계가 맞구마. 정확히는.」 라그리마는 호수처럼 파문을 일으키는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물의 영역이구마.」 물로 이루어진 하늘은 지상의 모습이 그대로 비치고 있었다. 지상이라고 해봐야 끝없이 펼쳐진 물뿐이었고 지금 서 있는 그들의 머리통만 비쳐질 뿐이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중요치 않아.” 크리스티나가 다급히 라그리마에게 다가섰다. “쥬다스 님은 어디에 계신 거지?” 울고 있는 정령은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바닥에서 찰랑이는 물 위로 토독 서너 방울 떨어졌을 무렵, 그는 살짝 소리를 죽여 속삭이듯이 답했다. 「그는 자연계 정령왕들의 곁에 있구마. 지금은 가까이 갈 수 없구마.」 “가까이 갈 수 없다니?” 「왕들께선 지금 몹시 예민하시구마. 다가가면 같은 정령끼리라도 큰일 나구마.」 ‘왜 정령왕들이?’ 그들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직면한 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투성이였다. 이곳이 정령계란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고 왜 쥬다스를 정령왕들이 손수 데려갔는지도 도무지 그 이유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사…… 하신 건가?” 에단은 지금 상황을 머리로 이해하기 전 주군의 안위부터 물었다. 분명 라그나로크가 무너지기 직전, 그들은 쥬다스가 쓰러지는 걸 똑똑히 보았다. 손을 적시던 핏물을 떠올린 크리스티나가 흠칫 몸을 떨며 손을 펼쳐보았다. 지금은 물에 씻겨내려 간 건지 손은 피 한 방울 없이 깨끗했다. 「모르겠구마.」 라그리마는 그리 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만, 그가 무사하다면 왕들께서 저리 불안해하실 이유가 없겠구마.」 “그게 무슨 뜻이지?” 「절대 좋은 상태일 리가 없다는 거구마.」 팍! 크리스티나가 라그리마의 어깨를 붙들었다. 반투명한 형체라도 그녀의 손에 잡혔다. “그분을 직접 만나야겠어. 어디로 데려간 건지 말해.” 「내가 데려간 게 아니구마. 왕들께서…….」 “빌어먹을, 왕인지 뭔지 알 게 뭐냔 말이다!” 늘 냉철하고 차분하던 그녀의 욕설에 오히려 바이칼이 놀라 눈을 끔뻑였다. 크리스티나는 라그리마의 어깨를 붙든 채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해.” 「…….」 “어디 계신지만 알려줘. 나머지는 알아서 할 테니까.” 고개 숙인 그녀를 보면서도 라그리마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걱정돼서 오긴 했지만. 이것 참 난감하구마.’ 눈물의 정령은 루바흐 학원에서 만난 쥬다스를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그의 영혼은 맑고 아름다웠으며, 바라보기만 해도 저절로 끌리는 마약 같은 빛이 있었다. 비단 라그리마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령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홀렸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그러니 정령왕들이 그를 독점하고 애지중지하는 심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상황이 정말 좋지 않구마.’ 처음 쥬다스가 정령계에 도착했을 때 라그리마는 늘 흘리던 눈물도 뚝 그칠 정도로 놀랐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정령인 라그리마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인간의 생명 활동은 심장에서 비롯된다. 왕들이 데려온 쥬다스는 그 심장이 차갑게 정지해 있었다. ‘심장이 멈춘 인간은, 즉 죽은 자. 그걸 자연이 용납하지 않고 억지로 붙들고 있을 뿐이니.’ 자연의 왕들은 인간을 정령계로 데려올 만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영혼이 몸에서 떠나지 않았으니 완전히 죽은 건 아니었지만, 심장이 정지한 시점에서 생명 활동도 함께 정지했다고 보아야 했다. 그리고 그 정도로 심각한 상태에 빠진 계약자를 두고 정령왕들은 죽은 새끼를 품에 데려다 핥는 어미 짐승처럼 예민해져 있었다. 누가 근처에 다가오기라도 한다면 계약자를 해칠까 두려워 그 즉시 산산이 찢어 죽일 게 분명했다. 그랬다. 지금 정령왕들이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안내해 주긴 하겠구마. 하지만 잘 듣구마.」 눈물의 정령인 라그리마는 지금 세 사람이 느끼는 참담함을 누구보다 잘 공감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안색이 굳은 그들 대신 펑펑 울고 있는 라그리마는 결국 크리스티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정령왕이 분노하면 인간 따윈 단숨에 죽일 수 있구마. 왕들께서 너희들을 정령계에 데려온 이유는 그가 의식을 잃기 직전까지 소망했기 때문이구마.」 쥬다스는 심장이 멎는 고통에서도 끝까지 친우들을 생각했다. 자신을 따라 무너지는 라그나로크에 다시 들어온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쥬다스를 가호하던 정령들은 그 소망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과 리키를 정령계로 함께 데려오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정령왕들이 그들의 남은 안위까지 챙겨줄 이유는 없었다. 「알겠구마? 절대 왕들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되구마. 너희가 괜히 고집부리다 여기서 헛되이 죽으면 그가 얼마나 슬프겠구마.」 “…….” 세 사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었다. 쥬다스가 걱정된다고 해서 무턱대고 정령왕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 「그럼 따라오구마.」 “나, 나도 같이 가.” 리키가 따라붙자 바이칼이 흡사 악귀처럼 눈을 부라렸다. “네가 왜? 가서 뭐 하려고?” “어차피 여긴 정령계라잖아. 혼자 남아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리고 나도.” “너도 뭐?”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애초에 돌아보지도 않고 라그리마를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나마 싸늘한 시선이라도 말을 들어주는 바이칼에게 리키는 속으로 감사하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한테 제대로 사과하고 싶어.” “사과는 개뿔이. 누가 그런 사과 받고 싶다고 했냐? 네 마음 편해지려고 하는 사과면 집어치워.” 바이칼은 진솔한 성격인 만큼 비난할 때도 신랄했다.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뭐가 아니야. 보나마나 네 녀석은 또 애처럼 징징징…….” “끝까지!”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외치는 리키를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 사람은 끝까지 손을 내밀어줬어. 내가 로봇인 걸 알고도, 내가 잘못한 걸 알면서도.” 버리지 않았다. 홀로 두고 떠나지 않았다. 그 사실이 눈물겹게 고마워서 꼭 무사를 확인하고 인사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진심으로 사과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허어.” “만일 그가 원한다면 평생 종노릇을 해서라도 진 빚은 갚을 거야.” 일종의 보답이었다. 리키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가 종으로 받아주기나 한대? 하여튼 자식 뻔뻔하긴.” 툴툴거리면서도 바이칼의 눈은 더 이상 혐오를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런 건 직접 주군께 여쭤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바이칼도 입을 다물고 부지런히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리키는 그들의 뒤꽁무니에 따라붙어 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게. 직접 만나서 물어보면 당신은 뭐라고 답할까?’ 차라리 호되게 혼이라도 났으면 좋겠다. 그가 처음 아버지 로키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보통 아이들처럼 몽둥이로 볼기짝을 두드려 맞았던 게 떠올랐다. 그때만큼 눈물 쏙 빠지게 혼나도 좋으니까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세 사람과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한 정령은 다 함께 하늘과 땅이 전부 물로 뒤덮인 세계를 걸어갔다. 소중한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하여.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두번째 통수...! (?) 이렇게 저는 주인공을 두 번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주인공은 자고로 굴려야 제맛이죠. ...쿨럭.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ㅎ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210 / 0240 ---------------------------------------------- 24장. 운명 정령들이 사는 세상은 육신을 가진 자들의 세상과 차원적으로 다르다. 일단 먹고 먹히는 생태계와 다르게 정령계에선 먹이 개념이 없다. 먹을 필요가 없으니 동식물은 자라지 않으며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곰팡이조차 슬지 않는다. 그렇다고 또 마냥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살아 있는 생물 대신 온갖 종류의 정령들이 돌아다니며 자연의 생기를 만끽하고 있었다. 정령계에서는 공간과 거리에 대한 개념도 인간의 기준과 달랐다. 물의 기운이 가득한 물의 영역과 불의 기운으로 매워진 불의 영역은 국경선 긋듯 나누어진 게 아니라 그저 자연물 그대로 존재할 뿐이다. 끝없이 흐르는 강물인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야트막한 둔덕이 나타나 땅의 축복을 머금은 꽃을 피운다. 그 사이로 날아다니는 불의 나비와 바람의 새들은 춤추듯 어우러져 하나의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바로 정령계, 모든 자연이 조화롭게 뒤섞인 세상이다. 「이제 어떡하지…….」 유니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물방울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우울하게 얼굴을 묻었다. 물방울에선 차갑고 푹신한 감촉이 느껴졌다. 시원한 녹색 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끊임없이 흩날렸다. 정령계로 돌아온 그들은 계약자의 곁에 소환되었던 때와 다르게 평범한 사람의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이그레트’와의 계약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니는 크기만 커졌을 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인간 소녀의 외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너무 놀라서 정령계로 데려오고 말았어.」 살아 있는 자를 정령계로 데려와선 안 된다. 그건 각 차원을 살아가는 존재들 사이에서 정해진 규칙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긴다고 해서 정령들이 벌을 받게 되는 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차원으로 끌려 들어온 자들에게 발생한다. ‘정령화.’ 정령계는 즉 정령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세계. 살아 있는 인간이 정령계로 들어와 일정 기한을 넘긴 채 오래 머물고 있으면 그는 정령과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건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음을 의미한다. 정령과 동화된 인간은 다시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육신을 잃어버리고 영혼만 남아 영원히 정령들과 함께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규칙을 어기고 정령계에 살게 된 자가 몇 존재했다. 「하지만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건 안 돼요.」 내내 조용하던 카니가 유니의 말을 막았다. 아름다운 붉은 머리카락을 굽이굽이 늘어뜨린 카니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다소 식어 있었지만 여전히 따뜻한 계약자의 체온이 손바닥에 맞닿았다. 은발의 소년은 꼭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자리에 누워 있었다. 카니는 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추며 나직하게 말했다. 「절대로.」 맑은 다홍빛 눈동자에 슬픔이 내려앉았다가 이슬처럼 사라졌다. 「절대 보내지 않아.」 그 차가운 세상으로. 어차피 그의 몸에 침투한 바이러스는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를 죽게 만들 게 분명했다. 치료를 하고 싶어도 한번 감염된 이상 그 자신이 자신을 공격하는 상황이라 방법이 없었다. 정령들 입장에선 그냥 죽게 놔둘 바엔 차라리 이대로 영원히 정령계에 묶어두는 편이 나았다. 「응.」 유니도 물방울을 내려놓고 카니의 옆으로 가볍게 날아왔다. 「나도 마찬가지야. 적어도 이곳에선 괴롭지 않겠지.」 육신의 아픔도 배신의 괴로움도 없는 곳. 어쩌면 진작 이렇게 됐어야했는지도 모른다. 유니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거기 둘, 정신 좀 똑바로 차려봐. 왜 그렇게 넋이 나가 있어?」 원래 과묵한 루니는 그렇다 쳐도 매사 정신 사납게 조잘거리고 통통 튀던 토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으니 더욱 분위기가 어두웠다. 정령계로 돌아오면서 늑대의 모습에서 푸른 머리를 가진 성인 남성의 모습으로 변화한 루니는 유니의 타박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그저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자리에 서있을 뿐이다. 대답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루니를 보며 유니가 푸욱 한숨을 쉬던 순간이었다. 「……있지.」 멍하니 그 곁에 주저앉아 계약자가 깨어나길 기다리고 있던 토니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만일 싫어하면 어떡한다요?」 「으음, 이그레트라면 싫어할지도.」 곧장 무슨 말인지 알아듣고 대꾸하는 유니를 보며 토니가 훌쩍거렸다. 「나요는 무섭다요.」 「뭐가 그렇게 무서워?」 「이대로 일어나지 못하는 것도,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이그레트를 보는 것도.」 “욕심쟁이네, 너.” 가만히 듣고 있던 가야가 손을 뻗어 토니의 머리를 우악스럽게 헤집었다. “본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죽거나, 아님 영원히 여기에 남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후자잖냐?” 「그치만그치만! 이제 막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인간 친구들이 생겼는데!」 토니는 버둥거리며 가야의 손바닥 아래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청룡은 집요하게 토니의 황토색 머리카락을 내리눌렀다. 「이런 건 이그레트가 바라던 게 아니다요.」 결국 토니는 포기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도 헤집어서 까치집이 되어버린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가야가 손을 떼었다. “알아. 그래도 주인은 너희들의 결정에 화를 내진 않을 거다.” 엄밀히 따지자면 자연계 정령이 아닌 신수에 해당하는 가야도 정령계에 초대된 입장이었다. 그는 울고 있는 토니를 향해 한숨처럼 덧붙였다. “니들도 그가 언제까지나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닐 거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데려오려던 것도 아니었어.」 “데려올 생각은 있었단 거네?” 「응. 그가 원하는 삶을 살고 난 후에.」 초록빛의 정령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때 데려오려고 했어. 아직은 아니야.」 “바보냐. 니들.” 「……?」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없어.” 자연계 정령들에 비해 훨씬 인간과 가까운 삶을 살아온 가야는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의 계약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삶은 그냥 삶일 뿐이지. 힘들든 어렵든,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도 그냥 사는 것. 그게 인간이라고.” 탁! 부드럽게 잠든 계약자의 머리를 쓸어주려던 가야의 손이 누군가에게 꽉 붙들렸다. 조각상처럼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루니였다. 늑대의 모습이었을 때보다 훨씬 난폭하고 위험해 보이는 눈빛에 가야가 움찔 손을 뺐다. 「……그래서 네놈이 하고 싶은 말은.」 물의 정령에게서 맹수가 으르렁대듯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를 이대로 죽게 놔뒀어야했다는 건가. ‘청룡’.」 “엉? 우리 멍뭉이 삐졌냐.” 분노하여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 상대를 보며 가야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너넬 탓하는 건 아냐. 이번 상황은 공간이 무너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으니까. 다만 너무 욕심 부리지 말란 소릴 하고 싶은 거지.” 「신수 따위가.」 “뭐?” 명백히 깔아보는 말에 이번엔 가야의 표정도 굳었다. 「자연의 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다.」 “거참, 좋은 뜻에서 조언을 해줘도…….” 「필요 없어.」 “아, 그러셔?” 둘 사이에 날 선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같은 계약자를 두고도 적의를 불태우는 루니와 가야를 유니가 당황한 얼굴로 번갈아보았다. 「야, 야. 너희 왜 싸워.」 「애초에 계약자의 핏줄이기만 하면 꼬리를 흔드는 신수와는 계약의 무게부터 다르다는 걸 잊고 있었군.」 “뭐래. 너희도 계약자를 바꾸는 건 똑같잖아? 계약하지 않고선 이 꿈동산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주제에.” 가뜩이나 예민해진 상태에서 일어난 말다툼은 점점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말로만 끝나지 않고 제대로 한 판 붙을 요량인 듯 루니와 가야의 주변으로 물의 기운이 몰려들었다. 유니는 여전히 훌쩍거리고 있는 토니와 쥬다스에게 달라붙어 다른 데엔 신경도 쓰지 않고 있는 카니를 돌아보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필 한번 핀트가 나가면 이그레트가 아니고서야 아무도 말리지 못한다는 루니가 폭풍의 중심이었다. 유니는 말리는 건 빠르게 포기하고 소리쳤다.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바보들아!」 자연계 정령이 힘을 온전히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었으므로 이 싸움은 무조건 가야가 불리했다. 그러나 가야도 오랜 세월 살아오며 하늘을 지배해 온 청룡이었다. 승패 여부를 떠나 루니를 곤욕에 치르게 할 정도는 되었다. 둘 사이로 몰려든 어마어마한 기운에 땅과 하늘이 동시에 진동했다. 고여 있던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고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올랐다. 우르릉 울린 천둥번개 사이로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우으으, 정말! 몰라, 물 한 방울이라도 이쪽으로 튀어봐. 나도 가만히 안 있을…….」 가시눈을 뜨고 쥬다스를 지킬 바람을 불러 모으던 유니가 핫 고개를 돌렸다. 놀란 그녀의 손바닥에서 모여들었던 바람이 새의 깃털처럼 이리저리 흩어졌다. 유니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졌다. “루니. 가야.” 멈칫! 잔뜩 적개심에 달아 있던 두 정령이 동시에 소리가 들린 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죽은 듯 누워 있던 소년이 어느 틈엔가 눈을 뜨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만들 하려무나. 그러다 둘 다 다치겠어.” 「이그레트으으!」 울먹이던 토니가 가장 먼저 그에게 안겨들었다. 난처한 미소와 함께 토니를 토닥거려 준 쥬다스를 향해 카니가 한발 늦게 팔을 뻗었다. 「……괜찮아요?」 “괜찮아.”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한 번 멈췄던 심장은 정령계로 와 자연의 기운을 얻어 가까스로 제 기능을 되찾긴 했지만 고통은 여전히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바이러스가 퍼져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 의식을 되찾고 움직이기 시작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 들을 것도 없이 파앗 늑대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꾼 루니가 곧장 계약자를 향해 뛰어갔다. “참 나, 누가 누구한테 꼬리를 흔든다는 건지…….” 그 모습을 본 가야가 투덜거리며 그 뒤를 쫓아갔다. “루니.” 그의 앞까지 뛰어간 루니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멈춰 섰다. 척 보기에도 쥬다스의 상태는 매우 나빴다. 차라리 토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안겨들 수 있다면 좋으련만, 유리알처럼 투명한 하늘빛 눈동자는 이미 걱정에 잔뜩 잠겨 있었다. “많이 화가 나 보이더구나.” 루니는 그 앞에 시무룩하게 귀를 접고 앉았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그런 푸른 늑대의 콧등을 쓰다듬었다. “착하지. 화내지 마.” 「……알았다.」 유순한 대답에 쥬다스는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여긴.” 「정령계야.」 가볍게 날개를 팔락여 그의 곁에 다가온 유니가 슬픈 눈으로 알려주었다. 손가락만 한 작은 크기였을 때완 다르게 보통 소녀만큼 커다래진 지금은 어깨에 앉는 대신 허공에 동실동실 떠다녔다. 「라그나로크는 파괴됐어.」 “그랬구나.” 「그리고 너, 심장이 멈췄었어.」 그 사실까진 몰랐던 쥬다스가 손으로 제 가슴을 짚어 보았다. 미약하게 뛰는 심장에선 여전히 찌르는 듯한 고통이 함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건 정령계에 들어왔기 때문인가.’ 쥬다스는 어렵지 않게 그 사실을 유추해냈다. ‘그렇다는 건.’ 그는 멍한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이대로 이곳을 나가면 죽겠구나.” 「그러니까 가선 안 돼.」 고개를 저은 유니가 그의 소맷자락을 꼬옥 붙들었다. 「여기에 있어.」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1 / 0240 ---------------------------------------------- 24장. 운명 그 목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들렸다. 오로지 정신력으로 눈을 떴기 때문인지 아픈 가슴보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졸음이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이봐, 멍뭉아. 손님들이 주인을 만나겠다고 온 모양인데?” ‘손님?’ 몽롱해진 머릿속으로 그 단어만 화살처럼 와 박혔다. 쥬다스는 그제야 라그나로크에 함께 있었던 친우들을 떠올렸다. 그와 동시에 푸른 늑대가 서늘하게 눈을 빛냈다. 「돌려보내겠다.」 “잠…….” 잠깐 기다리라고 하려 했는데 하필 숨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사이 루니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작은 기침과 함께 목을 막고 있던 핏물을 뱉어낸 쥬다스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어그러지는 시야를 견디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려야만 했다. 「아직 움직이면 안 돼.」 유니가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팔을 부축해 주었다. 「넌 지금 나은 게 아니라 감염진행이 멈췄을 뿐이야. 무리하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유니.” 흔들림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 본 유니는 말려도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말을 멈추었다. 평소 온화한 분위기에 송아지처럼 순한 성격을 가진 그였지만 한 번 정한 건 결코 바꾸지 않는 쇠심줄 같은 고집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정령들은 알고 있었다. ‘내 상태가 불안정한 만큼 지금은 루니도 자기제어가 힘들 터.’ 물의 정령왕인 루니는 본래 자비롭지 않은 정령이다. 처음 이그레트가 루니를 보고 고고한 한 마리의 늑대를 떠올린 건 그런 성정 탓이었다. 그와 계약하며 성격이 몹시 물러지긴 했지만 루니에겐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자비나 사랑 따위가 없었다. 다른 속성 정령과 다르게 과거 그는 심지어 아무리 자기 계약자라고 해도 절대 애정을 주지 않았다. 인간보다 고귀하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 알려진 고대종족 드래곤을 만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세상 만물에 차갑고 변덕스럽게 구는 바다와도 같았다. 애초에 물의 정령왕이 누군가를 가호하고 소중히 여긴다는 자체가 특례 중의 특례. 한번 신경에 거슬리면 성난 파도와 같이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의 숨통을 끊어놓는다. 그게 바로 이그레트와 계약하기 전 잔혹하고도 무자비한 물의 왕이 가진 본성이었다. “……네게 부탁이 있어.” 그런 정령들을 한눈에 사로잡은 존재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바람에게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초록빛으로 반짝이는 바람이 팟 하늘을 가르며 정령계 밖으로 사라졌다. * * * 한참 동안 에단을 비롯한 네 사람을 안내하던 라그리마는 붉은 나비와 흰 새가 날아다니는 어느 눈 덮인 언덕에서 이동을 멈췄다. 하늘은 여전히 호수처럼 물로 뒤덮여 찰랑거렸으며 언덕 아래로는 얼어붙은 냇물이 보였다. 굽이치는 물살이며 폭포가 전부 투명하게 얼어 반짝였다. 그런데도 주변을 날아다니는 나비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불과 얼어붙은 냇물, 그리고 찰랑이는 맑은 하늘. 하얀 눈이 덮인 언덕에선 색색의 꽃과 녹색 풀들이 자랐다. 일행은 정령계란 온도와 상식의 경계를 벗어난 공간임을 다시금 깨달았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구마.」 언덕 위에서 라그리마가 손을 뻗어 아래를 가리켰다. 「그는 저 냇물 너머에 있구마.」 냇물 너머에는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머물만한 집은 물론이고 지나간 흔적조차 없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가시덩굴 밭만이 보일 뿐이었다. “……저 가시덩굴 속으로 들어가라고?” 「흐흑. 나는 더 이상 갈 수 없구마. 무섭구마.」 라그리마는 겁에 질린 생쥐처럼 오들오들 떨었다. 바이칼은 허리에 손을 짚은 채 끙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냇물 너머로 펼쳐진 가시덩굴은 무서울 정도로 울창했으며 뾰족뾰족한 가시가 가득해 지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흡사 이빨을 드러낸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을 연상시켰다. 하지만 라그리마가 두려워하는 건 고작 가시 따위가 아니었다. 「왕께서 분노했구마. 그에게 가까이 가는 걸 허락하지 않을 게 분명하구마.」 “시솝을 처리했다 싶었더니 이젠 또 정령왕의 분노라니. 젠장, 뭐가 이렇게 꼬였지.” 살면서 정령왕이라곤 책에서 읽은 단편적인 정보를 접한 게 전부인 바이칼이 머리를 헤집으며 한탄했다. 「지금이라도 좋구마. 정령계에서 나가게 해줄 수 있구마.」 “안 나가.” 「단호하구마…….」 바이칼의 거절에 훌쩍이며 주변을 맴도는 라그리마를 힐끗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와서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뭐구마?」 “쥬다스 님께선 왜 정령왕들과 얽히신 거지?” 「훌쩍, 왜냐니?」 라그리마는 황당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소매를 들어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닦아봤자 금방 또 주르륵 눈물이 흘러 소매만 적시는 꼴이 되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눈가를 훔쳤다. “정령왕은 일반 정령들과 달라. 계약자가 관련된 일이 아닌 이상 그들이 직접 나서는 일은 없다고 들었다.” 「잘 알고 있구마?」 “그런데 왜 하필 지금.” 크리스티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대면할 수 있을 거라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존재들을 향해 의구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마음을 품었다. 라그나로크가 무너지며 정령계로 이동한 자체는 그가 다루던 4속성 정령들을 떠올리면 아예 연관이 없는 상황까진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뜬금없이 쥬다스를 데려가 버린 정령왕들의 행동에 대해선 손톱만큼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혹시 이번 일에 그들의 계약자가 정말로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계약자라면.” “속세에서 모습을 감추어버린 이그레트 말입니다. 그가 사실 정령계에 와 있었다고 치면 갑자기 사라진 것도 이해가 가네요.” 평소 이그레트에 관련된 일화며 기록 등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바이칼이 그럴듯한 추측을 해냈다. “그럼 그는 왜 쥬다스 님을 데려간 거지?” “글쎄요. 뭐 나쁜 뜻은 아닐 것 같습니다. 치료해 주려는 걸지도 모르고요.” 일행은 아예 ‘이그레트가 쥬다스를 데려간 것이다’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듣던 라그리마는 묘한 표정으로 그들을 응시하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본인이 말하지 않은 걸 굳이 내가 밝힐 필요는 없겠구마.’ 「어쨌든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구마.」 “아, 라그리마. 당신은 여기에 남아 있으려고?” 「나도 물의 정령이구마. 정령이라면 절대 왕에게 거역할 수 없구마.」 눈물의 정령은 촉촉한 눈알을 빛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정령계에서 나가는 일은 도와주고 싶구마.」 “헤에. 처음엔 무섭게 생겨서 놀랐었는데. 당신 착한 정령이구나.” 리키의 칭찬에 라그리마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다시 필요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인간이 오래 정령계에 머물면 안 되구마.」 “그야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좋진 않겠지만. 오래 머물면 어떻게 되는데?” 「정령에게 동화되는 거구마. 육신을 잃고 영혼만 남는 거구마. 정령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다구마.」 “크으. 거 무섭구만.” 바이칼이 피식 웃었다. 그를 비롯한 일행은 지금이 충분히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누구도 도망치겠다거나 포기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마워, 라그리마.” 진심 어린 감사와 함께 그들은 언덕을 내려갔다. 얼어붙은 빙판을 건너기 위해 발을 내딛는 넷을 바라보며 라그리마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부디, 왕이여.」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스산하게 주변을 적시기 시작한 물의 기운을 감지한 라그리마가 애절하게 중얼거렸다. 정이 많고 사람을 좋아하는 눈물의 정령에겐 간절한 소망이었다. ‘왕께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중하다는 걸 알고 있구마. 그렇지만.’ 그들 역시 그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들임을 알아주소서. 정령의 소망을 뒤로 한 에단 일행은 빙판을 건너가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얼어붙은 냇물 한 가운데서 눈보라가 몰아쳤다. 순식간에 거대한 얼음기둥이 솟구쳐 올라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을 매섭게 때려대는 눈보라를 팔을 들어 막은 에단이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얼음기둥을 힘겹게 올려다보았다. 그 위에 누군가 사뿐히 서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존재.’ 정령에 대한 친화력이 없는 그조차도 알 수 있었다. 정령계에 와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강대한 힘이 그로부터 느껴졌다. 마치 물속에 풍덩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느껴진 물의 기운이다. “물의 왕이십니까?” 담담한 질문에 휘몰아치던 눈보라가 뚝 그쳤다. 얼음기둥 위에 서 있던 푸른 머리의 남자가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를 슥 내려 에단을 응시했다. 바람은 그쳤지만 싸늘한 냉기가 주변을 휘감았다. 「돌아가라.」 정령계라는 특수한 상황 덕에 누구나 정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흠칫 몸을 굳혔다. 대화 의사가 전혀 없는 차가운 분노가 깃들어 있는 음성이었다. 「너희의 세계와 통하는 문을 열어주지.」 “돌아가겠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리 답한 에단에게로 향했다. 에단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즉시 말을 이었다. “쥬다스 님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즉시 이곳을 떠나겠습니다.” 「하. ‘돌려달라’?」 웃는 것 같기도 하고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탄식과 함께 물의 왕이 얼음기둥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보통 사람이라면 즉사할 수도 있는 굉장한 높이에서 떨어졌는데도 마치 새가 바닥에 착지하듯 가벼운 발소리가 났다. “그분을 데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신 건 감사드리오나 저희끼리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습니다.” 에단은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보며 강하게 덧붙였다. “반드시, 함께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주선 루니는 무감정한 눈으로 그들을 훑어보곤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너희 인간들은 항상 그랬지.」 “……?” 「필요로 하고 곁에 두려고 한다.」 그 사탕발린 말에 그가 얼마나 설레 했던가. 또 얼마만큼 기대하고 얼마만큼 실망해야 했던가.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루니는 그를 되찾으러왔다고 말하는 에단 역시 믿지 않았다. 「하지만 너흰 스스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고, 믿고 싶은 대로만 믿지.」 “그게 무슨.” 「그러다 그가 조금만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순간 등을 돌려.」 루니는 생각했다. 아마도 그들 역시, 그가 자신들이 알던 제국 1황자란 존재가 아니라 평민 출신의 정령사, ‘이그레트’였단 사실을 알고 나면 변하고 말 것이라고. 그래서 더욱 정령들과 함께 있는 그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돌려달라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는 죽는다. 그 사실은 알고 있는가?」 “무슨…….” 「그 정도의 상처를 입혀놓고도 잘도 그런 뻔뻔한 말을 입에 담는군.」 에단은 망연히 입을 다물었고, 그의 한 발짝 뒤에 서있던 크리스티나가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의 상태가 그 정도로 심각했을 줄은 누구도 몰랐다. 한순간에 그들을 자괴감으로 몰아넣은 루니는 으르렁거리듯 낮게 읊조렸다. 「그를 ‘돌려줘야 할 건’ 우리가 아니라 너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2 / 0240 ---------------------------------------------- 24장. 운명 쩌저적! 그 순간 굉음과 함께 얼어붙어 있던 빙판이 갈라졌다. 갈라지는 틈으로 차가운 물살이 파도치며 넘실거렸다. 그 위에 서 있던 넷은 황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피하는 것보다 바닥이 갈라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젠장!” ‘화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바이칼은 더 듣지도 않고 다짜고짜 공격을 시작한 물의 정령에게 속으로만 구시렁거렸다. 쥬다스를 바이러스에 감염시킨 원흉에 대해선 그들도 몹시 분개하던 참이었다. 할 수만 있었다면 시솝을 처리하는 건 리키가 아니라 자신들이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제국 내에서 날고 긴다는 능력의 소유자인 세 사람은 결국 이번에 쥬다스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자신들의 무력함에 더욱 화가 났고 실망스러웠다. 그래서 물의 정령이 보이는 차가운 태도에도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 순 없으니, 어?” 스태프를 꺼내 마법을 시전하려던 바이칼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닫고 멈칫했다. ‘이럴 수가! 정령계엔 마력이 없나?’ 마력이 전혀 모이지 않았다. 정령계란 오로지 정령의 의지에만 반응하는 세계였으니 타종족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놀라 스태프를 꾹 말아 쥔 그는 이내 머리 위를 덮는 거대한 그림자에 천천히 팔을 내렸다. 허탈한 나머지 입에선 반쯤 진심인 농담이 흘러나왔다. “이거 게임이 너무 쉽게 끝나지 말입니다.” “포기하지 마. 아직이다.” 그리 말하는 에단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웬만한 동산보다 높은 파도가 그들의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자연의 분노 앞에선 마법이고 뭐고 소용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본능적으로 저항을 포기한 바이칼의 어깨에서 작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플루비?!” 조그마한 와이번은 용감하게 달려가 덮쳐오는 파도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파도가 일행을 덮치기 전, 순식간에 전부 흡수해 버렸다. 스펀지처럼 쭉쭉 물을 빨아들인 플루비는 거대한 용의 모습을 갖추고 루니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캬아아아!” 「…….」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를 쳐다본 루니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주변으로 동그란 물방울들이 퐁퐁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보기엔 제법 아름답기까지 했으나 고작 장식 따위로 방울을 만들어냈을 린 없다고 여긴 에단이 앞으로 둥실둥실 날아온 방울을 검으로 베어 터뜨렸다. 콰앙!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폭탄처럼 터져 나갔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에단이 제대로 막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함께 폭발에 휘말려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파괴력이었다. 그걸 본 바이칼은 질린 얼굴로 서 있다가 플루비를 향해 소리쳤다. “플루비, 피해!” “끼오웅?” 하지만 몸집이 커진 플루비는 솟아오르는 방울 폭탄을 피하기 어려웠다. 펑펑 터지는 방울들에 여기저기 비늘이 깨지고 화상자국이 생겼다. 결국 플루비는 온몸을 공격하는 물방울들을 견디다 못해 브레스를 훅 내뿜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기둥이 루니를 덮쳤다. 막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브레스에 직격당한 그를 보며 혹시나 싶었던 바이칼은 곧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뭐 저런 괴물이 다 있어!’ 절로 경악이 튀어나왔다. 루니는 브레스에 머리털끝 하나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꼭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불붙은 성냥 하나를 떨어뜨린 것처럼 그렇게 멀쩡했다. 오히려 그를 덮친 브레스가 깨끗하게 소멸해 버렸다. 루니는 천천히 손을 뻗어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어냈다. 그 주변을 감싼 물줄기가 마치 용트림을 하듯 꿈틀거렸다. 「장난은 여기까지다. 그를 생각하여 마지막 기회를 주지.」 일행이야 목숨을 위협 당했다지만 루니에겐 장난에 불과한 순간이었다. 물의 왕이 마음만 먹는다면 불필요한 잡음 없이도 순식간에 넷의 숨통을 끊을 수 있었다. 루니가 그리하지 않고 이처럼 경고를 한 이유는 계약자가 그들의 안전을 늘 염원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진동했다. 우르릉, 큰 천둥이 울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앞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방을 적시는 장대비에 플루비가 조금씩 상처를 회복하여 낑낑거렸다. 「돌아가라.」 “싫습니다.” 즉답이었다. 에단은 망설임 없이 답한 후 루니를 마주보았다. “……그분께서 이곳에 남으신다면.” 단호함을 담은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 루니가 인상을 딱딱하게 굳혔다. “우리도 이곳에 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충분히 살아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가지 않겠다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뿐이다. 루니는 자신의 계약자에게 그들을 데려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꿈틀거리던 물줄기가 뱀처럼 입을 쩍 벌렸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살기등등한 물줄기를 보며 에단이 다시 답했다. “쥬다스 님을 돌려주시기 전까진 한발 짝도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유감이로군.」 그 말과 함께 물줄기가 기다렸다는 듯 쏘아져 나갔다. 빗속에서 먹이를 사냥하는 뱀처럼 사납게 달려드는 물 덩어리를 막기 위해 에단이 검을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후웅! 녹색 바람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공격을 무마시켰다. 그의 앞을 막아선 이를 발견한 루니가 황급히 모든 물의 기운을 흩어버렸다. 물줄기며 방울들이 순식간에 형체를 잃고 사라져 버렸다. 오로지 하늘에서 퍼붓는 빗줄기만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이런. 비가 이렇게 오는데도 여직 싸우고 있는 것이야?” 따뜻한 음성이 꼭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기가 크리스티나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들 막무가내로구나.” “…….” 그렇게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단도, 바이칼도 벼락 맞은 듯 자리에 굳어버렸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하듯 정지해 버린 전원을 빙 둘러본 쥬다스가 가만히 턱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으음, 내가 할 말은 아닌가.” “쥬다스…… 님.” “그래, 크리스티나야. 다치지 않아 다행이구나.” 창백한 안색으로도 자신들의 안위를 생각해 주는 그를 향해 에단과 바이칼이 자리에 털썩 무릎 꿇었다. “일어나거라. 바닥이 차단다.” “죄송합니다, 전하.” 에단은 차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고 바이칼이 먼저 고개 숙여 사죄를 표했다. 다른 설명 없이도 아이들의 자괴감을 꿰뚫어 본 쥬다스는 가벼이 고개를 저었다. “너희 잘못이 아니야.” “하오나.” “고맙다.” 사과를 했는데 도리어 감사가 돌아오는 바람에 바이칼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지쳐 보이는 얼굴이 불안했다. “전하.” “놀랐지 무어냐. 너희가 이곳에서 저 아이에게 대항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말에 다들 양순하게 쥬다스를 바라보고 있는 루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당장에라도 죽일 듯 굴던 조금 전과 달리 공격 의사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루니를 보며 쥬다스는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아이처럼 살며시 웃었다. “루니는……. 평소에는 온순한데 화가 나면 아주 무섭거든.” 「……무섭게 하려던 건 아니었다.」 “음. 하지만 조금 진정할 필요는 있겠어, 루니.” 잔뜩 예민해져 계약자의 동의도 없이 손님들을 전부 죽이려고 했던 루니는 풀죽은 얼굴로 그에게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은 동시에 같은 힌트를 얻고 일순 숨을 멈추었다. ‘루니.’ 평소에도 쥬다스가 종종 부르던 정령의 이름이었다. 게다가 같은 물의 정령이었고 그가 나타나자마자 돌변하는 태도까지. ‘하지만 그건 저런 모습이 아니라, 좀 더 동물 같은…….’ 설마 하던 걸 확신으로 바꾼 건 그 순간 훅 하고 모습을 바꾼 루니였다. 외형을 푸른 늑대로 되돌린 루니는 주인을 따르는 개처럼 쥬다스의 발치에 엎드렸다. “……저 지금 뭔가 이상한 가설이 떠오르려고 하는데요.” “넣어둬.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속닥거리는 바이칼에게 칼 같이 자르긴 했지만 에단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물의 정령왕의 계약자였다는 건 가히 충격적인 진실이었으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에단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쥬다스를 향해 물었다.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 들었습니다.” “알고 있었느냐.” “예, 송구하오나 이곳에서 나가기 어려우시다는 말도.” “글쎄다. 지금 정령계를 떠나면 살 수 있으리란 장담은 못하겠구나.” 자기 목숨을 놓고도 태연자약한 그를 보며 크리스티나가 울컥하여 입을 열었다. “어찌 그리 간단히 말씀하십니까. 궁으로 돌아가 치유술사들에게 치료를 받으신다면.” “이건 병이 아니란다.” 시솝이 만들도록 한 바이러스는 일반적인 병과는 달랐다. 한번 감염되면 몸이 스스로를 적으로 인식해 파괴해 버린다. 치료한다는 개념이 아니라 바이러스를 원천 제거해야만 한다. 하지만 그 방법을 아직까지 개발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몸이 스스로 망가지고 있는 것이니 치료를 해봤자 금방 다시 상하게 될 테지.” “나, 나한테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있을 거야!” 쥬다스는 안절부절 못하고 서있다 불쑥 끼어든 리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리키의 손등 위에 앉아있던 분홍빛 정령이 사락 날아올랐다.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던 건 제이니까. 다시 없앨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나비처럼 살랑거리며 쥬다스에게 날아든 제이가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또 허튼수작 부리는 건 아니겠지?” 문득 바이칼이 불신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사실 더 악질적인 바이러스를 숨겨놨다든가 하는.” “그런 거 없어! 바이러스를 만들라고 시킨 건 시솝이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해?” “시솝 같은 소릴 하고 자빠졌네. 애초에 주군께서 곤경에 처하신 건 네놈 때문이잖아? 처음부터 주구장창 거짓말만 늘어놓은 자식을 어떻게 믿으라고.” “그, 그건.” 리키는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술만 달싹였다. “확실히 제이에겐 바이러스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겠지. 제거까진 무리라도 말이다.” 서로 투닥거리던 두 사람은 쥬다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제이를 손바닥에 얹은 채 차분히 말했다. “부탁하마.” 그가 직접 제이를 활용하는 걸 부탁한 이상 바이칼도 더 이상 빈정거릴 수 없었다. 더 방해하는 사람이 없자 리키는 곧장 제이를 불렀다. “제이!” 「네, 주인님.」 “바이러스에 대한 데이터를 검색해. 혹시 제거할 수 있어?” 「해당 바이러스 제거에 대한 권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빌어먹을 권한 같으니.’ 다시 권한 타령을 해대는 제이를 보며 리키가 머리를 짚었다. 지켜보던 이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차는 순간 제이가 다시 분홍빛으로 반짝이며 검색 결과를 알려주었다. 「대신 바이러스 원격조종이 가능합니다.」 “……원격조종?”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리키는 이마에서 손을 내리며 제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쥬다스의 손바닥 위에 다소곳이 서있던 제이는 기계적인 음성으로 주인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주인님께서는 현재 저를 통해 감염자에게 퍼져 있는 바이러스를 조종하여 특정 신체부위를 집중적으로 공격하도록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원격조종기능을 사용하면 감염자의 특정 신체부위를 훨씬 빠르게 괴사시킬 수 있습니다.」 “뭐야, 그게!” 리키는 질색하여 펄쩍 뛰었다. 끔찍한 설명이었다. 원하는 신체부위를 공격하도록 명령해서 그 부위를 괴사시켜 버린다니. 그냥 서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보다 더 잔인했다. 그러나 제이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다. 「원격조종으로 목표를 괴사시킨 후, 바이러스는 자동 소멸합니다. 현재까진 유일한 바이러스 제거 방법입니다.」 “팔이나 다리를 내어주고 목숨을 살리란 소리야?” 「원하신다면 장기도 괜찮습니다.」 제이는 산뜻하게 덧붙였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무거운 침묵이 이를 듣고 있던 일행 사이로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3 / 0240 ---------------------------------------------- 24장. 운명 리키마저 할 말을 잃고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물론 그냥 목숨을 잃는 것보다야 신체 한 부분을 내어주고 바이러스를 제거하는 편이 나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인간의 신체는 기계가 아니므로 한 번 잃고 난 뒤엔 재생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치유술사라 하더라도 괴사한 부위를 되살리진 못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계속 정령계에 머물렀다간 영영 빠져나가지 못하는 몸이 되고 만다. 어떤 방식으로든 결단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아무런 말이 없자 제이는 보충 설명을 덧붙였다. 「바이러스와 동시에 사멸시킬 수 있는 신체 부위는 손, 발, 팔, 다리, 머리 중 선택 가능합니다. 장기일 경우 중요도가 올라가므로 비교적 좁은 범위인 심장, 위장, 폐, 간…….」 “으음, 그만하면 되었다. 결국 생존에 위협이 갈 정도의 피해를 입히는 게 이 바이러스의 목적이로구나.” 「대인살상무기니까요.」 기계형 정령 제이는 감정을 배제하고 따박따박 사실만을 알려주었다. ‘돌겠네.’ 이도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바이칼이 손에 얼굴을 묻고 마른세수를 했다. 그는 판에 찍은 듯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과 크리스티나를 힐끗거리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수하로서 주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선 팔이라도 한 짝 버리라고 충언해야 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죽어도 못해.’ 그들은 정답을 알아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어쩌면 이대로 정령계에 남는 편이 나으실지도.’ 만일 팔을 잃는다면 황제와 귀족 세력들은 순례의 길을 무사히 마치지 못하고 불구가 된 그를 불명예스럽다 여길 것이다. 세 명의 수하는 그에게 태어나면서부터 처절한 환경에 놓여 힘겹게 쌓아온 모든 위업이 파도에 모래성 휩쓸리듯 흩어져 버리는 경험을 하게하고 싶지 않았다. 검을 바쳐 충성을 맹세한 이들이야 그를 떠나지 않겠지만 그 자신에겐 다시금 지독한 악몽과도 같은 굴레일 게 틀림없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눈물의 정령 라그리마로부터 설명을 듣기로, 정령계는 마치 인간이 상상하는 천국과도 같았다. 다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조화로운 자연의 기운으로 가득 차 늘 꽃이 피고 냇물이 흐르며 선선한 바람이 분다. 지금처럼 몸이 아파 고통스러워하거나 배를 곯아 힘겨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바로 이 정령계였다. 그들은 정령계에 인간이 오래 머물 경우 육신을 잃고 정령화가 된다는 사실도 들어 알고 있었다. 셋의 대표로 에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하.” “뭔가 결심한 표정이로구나.” 에단이 입을 떼자마자 쥬다스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본 듯 답했다. 그리고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고뇌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씀인즉.” “나는 이미 답을 정했으니 말이야.” 복잡한 심경을 담고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을 하나하나 마주 보며 쥬다스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제 결정을 말해주었다. “돌아가자.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처음부터 그는 정령계에 남을 생각이 없었다. 당연히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세 명의 수하도 반발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숙여 보였다. “……따르겠습니다.” 더 낫고 자시고를 따질 필요도 없었다. 발치에 엎드려 있던 루니가 콧잔등을 실룩이며 살며시 그의 옷깃을 물었다. 끼잉! 낑! 코로 내는 울음소리에 쥬다스는 미안함을 담아 푸른 늑대의 머리를 다독였다. 그런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리키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장기는 무리지만 팔 정도는 금방 만들 수 있어. 우리 미드가르드에서 만드는 의수는 진짜 팔처럼 움직이거든.” “참 신기한 기술력이로구나. 하지만 아쉽게도 팔을 뗄 생각은 없단다.” “어? 하지만 바이러스를 제거하지 않고 나가면 당신은.” 땅에서 뿌리 뽑은 나무처럼 바이러스에 잠식당해 죽게 된다. 뒷말을 삼키고 눈치를 보는 아이에게 쥬다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래서 일단은 도움을 청하긴 했다만.” “도움? 누구에게?” 뜬금없는 이야기였다. 묵묵히 주인의 결정을 따르고자 한 다른 세 사람도 리키와 마찬가지로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 순간 몰아치던 폭우가 거짓말처럼 뚝 그치고 새의 깃털 같은 실바람이 살며시 불어왔다. 그렇게나 주구장창 비를 맞았는데도 바람이 불자 옷이나 머리는 물기 하나 없이 뽀송하게 말라 산뜻함을 주었다. 크리스티나는 잘 마른 머리카락을 무심코 손가락에 감아보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를 말려준 바람이 애들 웃는 소리를 내며 까르륵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물이 무거운 중압감을 풍기는 신사라면 바람은 장난꾸러기 아이였다. 자연물에서 고유의 성격을 느끼다니, 확실히 정령계는 상식으로 이해할 공간이 아니었다. “마침 저기 오는구나.” “예?” 후우웅! 그가 가리킨 곳에 녹색 바람이 살아있는 새처럼 날아들어 바닥에 복잡한 진을 하나 그렸다. 다른 세계에서 정령계로 이어지는 소환진이었다. 그 소환진 한가운데에서 눈부시게 하얀 털을 가진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몸집은 황소보다 크고 머리엔 유니콘의 뿔이 달렸으며 긴 흰색 털은 잘 관리받은 귀족 여인의 머릿결처럼 매끄럽게 찰랑였다. “……수호견 헤브라시스.” 그 정체를 어렵지 않게 알아본 에단이 탄성처럼 중얼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듣자 흰 짐승은 콧김을 푸륵 뿜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성녀의 수호견이 있다는 건.’ 즉 성녀도 함께 왔다는 뜻이다. 그 추측대로 헤브의 몸집에 가려져 있던 가녀린 여인이 앞으로 천천히 나섰다. 여인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흑발을 세 갈래로 묶어 내리고 월계수가 새겨진 단정한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초점이 없는 하늘색 눈동자를 들어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형제자매님들께 축복이 함께하길.” “맙소사. 성녀께서 어찌 이런 곳까지 걸음하셨습니까?” 바이칼이 경악하여 물었다. 역사상 고결하고 신성한 성녀가 교황청에서 벗어나지 않고 질서를 지킨다는 불문율을 어긴 전례는 없었다. 전례를 따지자면 이번이 최초인 셈이다. “예. 아시다시피 성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이은 자녀가 엘리시움에 머무는 것은 본래대로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원칙이지요.” “그럼 왜…….” “하나 나는 곤궁에 처한 벗을 외면하면서까지 원리원칙을 고집할 정도로 융통성이 없지는 않답니다.” 쥬다스가 유니에게 따로 부탁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의 전언을 담은 바람의 정령이 교황청으로 찾아들자, 성녀 위그드라실은 벗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고 선뜻 그 부름에 응했다. “청을 들어주어 고맙습니다, 위그드라실.” “……나의 벗, 쥬다스. 캄캄한 죽음이 풀숲에 도사린 뱀처럼 그대의 목전까지 드리웠으니.” 성녀는 쥬다스의 감사인사를 듣고서야 그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호견 헤브라시스가 그녀의 지팡이가 되어 가는 걸음걸음을 지켜주었다. 마침내 쥬다스의 앞으로 다가온 위그드라실은 차가운 손길로 그의 뺨을 짚었다. “이런 아프고 고된 시기에 벗으로 떠올려주어 나 역시 고마울 따름이랍니다.” 온기라곤 느낄 수 없는 시린 손끝에서 화롯불처럼 따스한 걱정이 느껴졌다. 정령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왔지만 위그드라실은 직접 벗의 상태를 진단하고자 했다. 그러자 강대한 신성력이 물결치듯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쥬다스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답했다. “정화의 축복을 가진 당신이라면 생명을 해하는 바이러스를 깨끗이 태워 버릴 수 있으리라 멋대로 추측하였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다른 이들도 안개 낀 듯 갑갑했던 머릿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성력은 쉽게 말해 신이 살아있는 자들에게 베푸는 자비, 즉 생명에 대한 신의 사랑을 담은 힘이다. 루바르잔 제국 국교의 대상이자 교황청에서 굳건히 믿고 있는 신은 만물을 사랑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미쁜 자식처럼 여긴다 했다. 그래서 사제들은 치유술사와 달리 상처를 낫게 하진 못하지만 몸에 걸린 상태 이상이나 저주, 해로운 질병을 거두어가는 정화의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그중 성녀 위그드라실이 내리는 축복은 온몸이 썩어문드러지는 불치병도 순식간에 낫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후후, 지혜로우신 분. 맞습니다. 나는 당신을 괴롭게 만드는 원흉을 정화할 수 있어요.” “……!” 지켜보던 네 사람 사이에 소리 없는 탄성이 스쳐 지나갔다. 위그드라실의 말대로라면 쥬다스가 목숨이나 신체 일부를 잃지 않고도 밖으로 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안심하기도 전에 성녀가 신성력을 사용하기 위한 조건을 덧붙였다. “다만 이건 병이 아니라 ‘바이러스’라는 무기에 의한 공격이므로. 그 작은 바이러스 알갱이들이 온몸에 퍼져 있는 상태로는 어렵습니다.” “하면.” “일망타진이라고 하죠. 한 번에 성화로 불태울 수 있도록 그 바이러스들을 몰아주세요. 기왕이면 작으면서도 생명력이 집결되는 중심부.” 뺨을 어루만지던 하얀 손가락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쥬다스의 가슴께를 짚은 채 나직하게 말을 맺었다. “심장으로.”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에단이 소리를 높일 뻔했으나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저었다. 제이를 통해 바이러스를 원격조종하는 일은 그 부위를 괴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니 만에 하나 타이밍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정화하기 전에 심장이 먼저 터져 죽을 수도 있었다. “기사여, 그대의 검에 축복을 걸어드리겠습니다.” 반발하는 에단을 향해 돌아선 성녀가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그가 가지고 있던 검에서 은은한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이를 본 에단은 검을 검집에서 빼 들었다. 스릉! 살벌한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빛나고 있는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이 꼭 금속이 아니라 빛으로 만든 검과도 같았다. “정화의 축복이 걸린 검은 정확히 부정한 것만을 파괴합니다. 그것으로 바이러스가 모인 부위를 찌르면…….” “싫습니다.” 쩡! 성난 손길에 의해 검이 그대로 흙바닥에 푹 꽂혔다. 에단은 검을 땅에 꽂은 채 손잡이에서 손을 떼어버렸다. 단호한 거절이었다. 위그드라실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는 다시 한 번 강하게 제 뜻을 표명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거 아무리 낫게 하려는 목적이라지만 어떻게 주군을 찌릅니까? 완벽히 낫는다는 보장도 없고요. 그랬다가 죽을지도 모르는 거잖아요?” 바이칼도 어깨를 으쓱하며 에단의 의견에 동조했다. “차라리 여기서 지내시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데요. 전하의 곁엔 저 살벌한 늑대 정령도 있으니 위험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가만히 있다가 느닷없이 바이칼에게 살벌하다고 지목당한 루니가 불만스럽게 크르릉 목을 울렸다. “무리해서 제국으로 돌아가실 필요 없습니다. 전하.” 마지막으로 무겁게 입을 연 크리스티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쥬다스는 문득 생각했다. ‘진정 모든 게 달라졌구나.’ 과거 그가 만났던 인연은 전부 그에게 무언가를 원했다. 사람들은 그가 남들보다 더 가졌으니, 남들보다 더 강한 힘이 있으니 당연히 베풀고 희생해야 한다고 입을 모아 강요했다. 가족처럼 아끼고 사랑했던 세 아이들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좋은 사제지간으로 남은 콜마저도 처음엔 그에게서 힘을 얻길 바라 찾아왔다. 그가 바란 건 그저 편안함과 다정함, 언제고 기댈 수 있고 언제고 편안히 연락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상냥함. 하지만 정작 다가오는 자들은 전부 외면과 능력으로 경매하듯 그를 만나려 들었다. 앞에선 엎드리고 돌아서면 그 등에 칼을 박는 게 전생의 그가 만난 인간이었다. 그는 문득 처음 ‘쥬다스’로서 눈을 떴을 때 우연찮게 점쟁이 노파로부터 받았던 점괘를 떠올렸다. ‘결국 내게 모여든 3개의 검이 심장을 찌를 것이라 했던가.’ 흥미본위로 본 점이라 줄곧 잊고 있었던 것이 왜 하필 지금 떠올랐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사실 노파가 예언한 점괘는 제법 잘 맞아떨어졌다. 그는 결국 황태자위에 올라 태양이라 일컬어지는 황제의 후계가 되었고, 4대 정령왕에게 위험한 순간마다 늘 가호를 받았다. 그리고 루바흐 학원에서 그에게 검을 바친 3명의 인재를 만났다. 거기까지 생각한 쥬다스는 피식 웃고야 말았다. ‘한 가지, 당신이 틀렸어.’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땅에 꽂힌 에단의 검을 스스로 손에 쥐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이번 에피소드도 슬슬 막바지를 향해 가는 군요! ㅎㅎ 곧 장마시작이라는데 시원하게 퍼부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밤인데도 너무 덥네요. ㅠ.ㅠ 그럼 다음 화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0214 / 0240 ---------------------------------------------- 24장. 운명 땅에 박혀 있던 검이 뽑히며 하얗게 타오르는 날이 드러났다. 신성한 불꽃, 성화가 검 전체를 새하얗게 뒤덮고 있었다. 쥬다스는 예전에 한 번 이 성화로 정화 세례를 받은 적이 있었기에 제법 익숙했다. 손에 닿아도 전혀 뜨겁지 않은 이 성화는 부정한 존재만을 태우는 따뜻하고도 자비로운 불길이었다. “전하?” 왜냐고 묻는 듯한 눈길에 답하지 않은 채 그는 리키를 향해 입을 열었다. “리키.” “그, 하, 하지만.” “부탁한다.” 정말 그래도 되는 것인지 망설이는 리키를 향해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쥬다스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을 앞두고도 여전히 차분했다. 꼭 심부름 시키는 어른처럼 그저 그렇게 잔잔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신뢰를 느낀 리키는 울컥 목이 메는 걸 느끼며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제이.” 작은 분홍색 정령이 포로록 아이에게로 날아들었다. 리키는 떨리는 손으로 제이를 감쌌다. ‘처음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쥬다스는 리키가 무슨 행동을 해도 원망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배신하고 상처를 줬는데도 여전히 다정했다. 처음엔 특이한 사람도 다 있구나 싶었다. 화가 나도 속으로 참기만 하는 바보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쥬다스는 리키가 지금껏 본 중 가장 이타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는 이타적인 게 아니었다. ‘늘 진심으로 행동한 것뿐이야.’ 본심을 숨기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는다. 쥬다스는 강한 자만이 가지고 있는 여유와 포용 속에서 자신이 만난 이들을 언제나 진심으로 대해주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더라도, 배신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임을 알았더라도 등을 돌리거나 원수를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전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리키가 했던 배신의 저면에 숨겨져 있던 아빠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과 그 간절함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비참한 소망이었다는 사실을. 또한, 그가 만난 이들이 전부 자신이 손만 까딱이면 목숨을 거둘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알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의 앞에 선 사람들은 여러 의미로 전부 어린아이였다. 그러니 진심으로 화가 나지 않았고 아이가 부리는 장난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가 분노하는 순간은 아이들의 장난이 선을 넘었을 때다. 바로 시솝이 그를 협박했을 때처럼. 리키는 성화에 감싸인 검을 든 쥬다스가 마치 신과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러스 원격 조종 실행.” “……!” 명령어가 떨어지자 쥬다스의 세 친우들은 동시에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리키의 입을 막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건 쥬다스가 직접 내린 결단이기 때문이다. 냉철하기로 유명한 에단조차 눈꺼풀을 바르르 떨 정도로 동요했지만 정작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크리스티나도 어찌할 바를 모르긴 매한가지였다. 그녀는 그저 또래의 여린 소녀처럼 입술을 짓씹었다. 「목표물을 지정해 주십시오.」 “쥬다스 님!” 그때 바이칼이 불쑥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쥬다스의 금안과 시선이 마주치자 바이칼은 한 차례 길게 심호흡을 했다. 긴장으로 굳어져 있던 입가가 겨우 풀어져 평소다운 장난스런 미소를 씩 그려냈다. “제국에 돌아가면 저랑 가면 파티 한번 나가시죠.” “…….” “제가 또 한 인맥하지 않습니까? 만나는 여자마다 죄다 친구가 되어버려서 비록 제 연애 사업은 망했지만, 미팅 주선엔 자신 있습니다.” “……바이칼.” “괜찮은 친구들 다 데려올 테니까 지금처럼 신분 감추고 한번 만나나 보시라고요. 아, 세이지 님도 함께 데려가셔도 좋겠네요. 14살이면 이제 다 크셨구먼요.” 혼자 주절주절 떠드는 바이칼을 멀거니 쳐다보던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는 건 바이칼이 가진 큰 장점이었다. 말은 장난스럽게 했지만 그 속까지 장난인 건 아니었다. 그가 웃자 바이칼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본 쥬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약속하신 겁니다?” “그래.” 가면 파티는 말 그대로 신분과 얼굴을 감추고 즐기는 만남의 장이었다. 마치 동화 속 장면처럼 묘하게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가벼운 듯 진솔한 만남을 가능하게 했기에 실제 여기서 이어지는 연인이 상당했다. 평소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그로부터 참여 의사를 따내자 바이칼은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꼭, 같이 가시는 겁니다.” ‘살아서.’ 대답 대신 스릉 땅을 긁은 뾰족한 검 끝이 하늘로 향했다. 쥬다스는 그 끝을 움직여 정확히 자신에게로 맞추었다. 성스러운 불꽃에 둘러싸인 검에선 예기가 번뜩였다. 「주인님, 목표를 지정해 주십시오.」 제이의 재촉이 이어지자 리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을 열었다. “심장으로.” 목표가 정해지자 바이러스가 발동하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온몸을 잠식하고 있던 바이러스가 하나의 장소로 몰려들었다. 생명의 근원이자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심장을 괴사시키기 위해 몰려든 순간, 쥬다스는 세상이 핑 도는 것만 같은 강한 현기증을 느꼈다. ‘안 돼. 진행이 너무 빨라.’ 생각했던 것보다 바이러스의 공격이 몹시 빨랐다. 도저히 검을 내지를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끝까지 파고들지 못한 검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대로라면 성화가 바이러스를 태우기 전에 심장이 먼저 괴사해 버릴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누군가 무너지던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콱 등을 받치고 어깨를 부축한 이들은 한사코 그를 찌르는 걸 반대했던 크리스티나와 바이칼이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걸 눈치채고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일에 가담한 것이다. ‘감히 주군을 찌를 수 없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지금 순간 중요하지 않았다. 아차 하는 순간 심장은 괴사할 것이고 그럼 모든 게 끝이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검 손잡이를 잡은 채 떨리는 손 위로 단단한 손길이 하나 더 느껴졌다. 흐릿한 시야로 밤하늘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에단이었다. 심장이 공격받은 충격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쥬다스의 손을 붙든 에단은 그대로 힘을 가해 검을 내질렀다. 성스러운 불길이 바이러스로 가득 들어찬 심장을 관통한 순간이었다. 화아앗. 도저히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빛이 사위를 집어삼켰다. 나중에는 눈을 뜨고 있는 것인지 감고 있는 건지도 분명치가 않을 지경이었다. 그들은 휘몰아치는 빛 속에서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의식하지 못한 사이 바닥에 쓰러져 있던 크리스티나는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낯익은 울음소리였다. 「으헝헝헝. 돌아왔구마. 으헝헝헝.」 “……라그리마……?” 온몸이 파랗게 빛나는 눈물의 정령이 주저앉아 펑펑 울고 있었다. 「잘했구마. 고생했구마. 다들 너무나도 장하구마.」 크리스티나는 멍하니 일어나 앉았다. 바로 옆에 대 자로 쓰러져 있는 바이칼의 뒤통수가 보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그녀보다 한발 늦게 눈을 뜬 에단과 시선이 마주쳤다. “크리스티나, 전하께선?” “전하……?” 당연하게도 두 사람은 깨자마자 쥬다스를 찾았다. 눈을 뜬 곳이 어딘가에 대한 의문보다 그에 대한 염려가 우선이었다. “으으, 누, 눈부셔.” 바이칼도 잠꼬대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멀 것만 같던 신성한 빛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푹신한 카페트와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도시. 라그나로크로 입장하기 전 들렀던 미드가르드의 콜로세움 최상층이었다. ‘여긴 정령계가 아니다.’ 그들이 살던 세상으로 돌아왔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 사실에 놀라 벌떡 일어섰다. 세상은 온통 어둠이 내린 밤이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홀로 파랗게 빛나며 주저앉아 울고 있는 라그리마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세 사람은 슬슬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사람이 무척 많다는 사실을 발견해 냈다. 라그나로크에서 먼저 탈출해 갈라졌던 일행이 모두 여기에 있었다. “형님…….” 라그리마뿐 아니라 세이지도 울고 있었다. 덜컥 내려앉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크리스티나가 떨리는 입술을 떼었다. “전하…… 쥬다스 님은……?” “음? 벌써 일어났구나.” 그녀는 순간 환청을 들었나 싶었다. 그러나 에단과 바이칼의 표정이 자신과 같은 걸 보니 제대로 들은 게 맞았다.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깊은 밤이니 잠든 김에 좀 더 자고 일어나길 바랐건만.” 급한 마음에 미처 살펴보지 못했던 창가에 그가 서 있었다.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가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 아니야.’ 그를 둘러싼 빛은 각기 다른 속성을 뜻하는 네 정령이었다. 그중엔 살벌하게 굴었던 루니도 있었다. 계약자의 발치에 엎드린 채 유리알 같이 맑은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힐끗 쳐다본 푸른 늑대는 코로 훅 가볍게 한숨을 뱉어냈다. “위그드라실은 헤브라시스와 함께 교황청으로 먼저 돌아갔단다. 마지막으로 폭발한 빛은 해로운 게 아니라 정화 세례를 받은 셈 치면 된다고 하더구나.” 마음을 놓고 보니 라그리마나 세이지가 흘리는 눈물이 슬픔이 아니라 기쁨을 담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크리스티나는 그를 감싸고 있는 녹색 바람을 보자마자 목구멍까지 울컥 치솟아 오른 감정을 참지 못했다. “이런, 어찌 또 우는 게냐? 그렇지 않아도 세이지 저 아이도 영 울음을 그치지 않아 난감하던 차인데.” 늘 도도하고 냉랭한 표정으로 무장하고 있던 크리스티나가 코끝을 발갛게 물들이며 소리 죽여 터뜨린 울음에 쥬다스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녕 전하이십니까?” “그럼, 환영이라도 될까 봐 그러누?” 장난삼아 한 말이었지만 크리스티나는 눈앞에 선 쥬다스가 진짜로 환영이 되어 사라질까 간절히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이제 아프지 않으신 겁니까?” “너희가 도와준 덕분에 이리 멀쩡하지 무어냐.”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하마터면 심장이 괴사해 죽을 뻔했다. 태연히 그 사실을 언급한 쥬다스는 손을 뻗어 울고 있는 크리스티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고맙구나. 다들 용기를 내주어서.” 털썩. 에단이 먼저 자리에 무릎 꿇었다. 그러자 마음 졸이며 지켜보던 기사들이 우르르 한 번에 무릎을 꿇었다. 그중엔 조용히 코를 훌쩍이던 콜도 함께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기다렸습니다. 스…… 아니, 쥬다스 님.” 무릎 꿇은 이들을 가만히 바라본 쥬다스는 곧 은은하게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이제 돌아가자.” 우리의 나라로. 제국 북쪽에 위치한 기계국 미드가르드를 마지막으로 순례의 길이 끝났다. 아직 본체가 남아 있던 시솝 오딘은 라그나로크에서 벌어진 사건을 겪고도 완벽히 죽지는 않았다. 대신 라그나로크를 잃고 데이터를 해킹당한 시솝은 더 이상 예전만큼의 권한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시솝을 해킹한 리키가 ‘GM’이라는 새로운 운영 체제를 만들어 그에게 대항했다. 사회를 게임으로 표현해 이름 붙여진 GM이란, 어지러운 무법지대에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약속과 법규를 지정하고 감독하는 운영진을 통칭한다. 아직 GM이 시솝에게 어느 정도 대항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나머지는 그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몫이었다. 눈 쌓인 겨울에 순례의 길을 떠났던 루바르잔의 황태자 쥬다스.E 아르키디온은 황궁 정원에 색색들이 낙엽이 질 무렵, 무사히 황궁으로 귀환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언젠가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저는 새드 울렁증이 있어서...(?) 엔딩은 해피 예약입니다. ^^ 챕터로 따지면 완결까지 2~3챕터 가량 남았네요. 자, 마지막까지 달려봅시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215 / 0240 ---------------------------------------------- 25장. Kyrie ―황태자가 귀환했다! 소식이 퍼지며 그가 순례의 길에서 행한 온갖 위업이 입에서 입을 타고 이어져 세간을 휩쓸기 시작했다. 천민부터 고위귀족까지 모두가 그를 주시했다. 그가 거쳐 간 모든 지역에 대한 소문이 가을철 무르익은 농작물처럼 번져 나갔다. 그중에는 착취당해 고통받던 영지민들을 구원해 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타락한 사령술사를 벌했다느니 청룡의 가호를 받게 되었다느니 하는 다소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도 섞여 있었다. 혹자는 벌써부터 큰 두각을 드러내는 군주의 후계를 찬양했고 다른 누군가는 너무 부풀린 루머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평은 불호보다는 호가 전반적이었다. 발 없는 말이 먼저 제국을 휩쓴 후, 순례의 길을 떠났던 일행이 궁에 돌아오자마자 황제는 쥬다스를 따로 불렀다. 명목은 무사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였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를 후계자로 양성하기 위한 확인 과정으로, 정이라곤 하나 느낄 수 없는 독대였다. 함께 다녀온 3황자 세이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오로지 황태자인 쥬다스만 불러들인 것만 봐도 그랬다. 포식자는 여전히 메마른 눈을 하고 있었고 시험에 통과한 새끼 사자를 보듯 그렇게 아들을 살펴보았다. “어디, 네가 얻고자 한 걸 얻었더냐.” “그 이상을 얻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숨지 않고 필요한 자를 위해 가진 힘을 사용하리라 마음먹고 나선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끝날 무렵 돌이켜 보니 그는 도리어 많은 걸 얻었다. 쥬다스의 대답을 들은 황제 레위스는 그 내용에 관해서 까진 더 캐묻지 않았다. 황자가 세상에 나가 얻은 것이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황제는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몸을 기대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레이븐의 영주였던 자를 벌하였다지.” “예.” “그 이유는 무엇이냐.” 미리 붙여둔 그림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아 자세한 정황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황제는 직접 후계의 저의를 물었다. 이제 막 돌아와 여행복을 갈아입기도 전에 부름받은 쥬다스는 황제가 묻는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했다. “그에게는 권리만 있을 뿐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이 없는 권리라. 이를 벌할 까닭으로 삼은 이유는?” “첫째, 책임이 없이는 아무런 권리도 따르지 않으니 이는 타인으로부터 빼앗은 권리일 것입니다. 둘째, 그런 자가 영토의 주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인즉 제자리에서 본연의 역할과 의무를 다하는 권위자들에 대한 불명예이며.” 다음으로 이어진 단호한 의견을 들은 황제의 짙은 금안이 미세하게 흥미를 띄었다. “마지막, 나라의 지배층으로서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평소 온화하고 자비로운 성정이나 벌할 때만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차 없이 벌을 내린다. 황제는 쥬다스가 가진 상벌에 대한 명확한 행동수칙을 높이 평가했다. ‘아직 멀었지만.’ 지도자는 좀 더 냉기를 품을 필요가 있다. 레위스는 그리 여겼다. 그의 후계자가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었음을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는 있었지만 아직도 물렀다. 권좌란 따뜻함이나 부드러움 따위로 유지되는 자리가 아니다. 필요하다면 친우의 목이라도 거침없이 벨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살아남는 냉혹한 자리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황제의 귓가에 이번엔 쥬다스의 질문이 들려왔다. “해동에 대해선 묻지 않으십니까?” “…….” 황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무미건조했고 배부른 사자처럼 나른했다. 하지만 쥬다스는 그의 무관심해 보이는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해동. 그 고요한 동쪽의 나라가 네게 특별히 중한 곳이었던가.” “제게만, 입니까?” 두 번째로 말문을 닫게 만드는 물음이었다. 황제는 등받이에서 천천히 등을 떼었다. 그러곤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당돌하게 포식자의 의중을 캐내는 아들을 눈에 담았다. 생긴 건 영락없이 자신을 닮았는데 정작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저 표정만큼은 다른 이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럼 폐하께선 아무것도 즐거운 게 없으신가요?’ 흑단 같은 머릿결에 연둣빛 나비 장식이 잘 어울리던 여자였다. 약소한 동쪽 나라의 왕녀인 주제에 그녀의 아비보다 당당했고 누구보다 가까이 그의 곁에 다가와 시선을 맞추었다. 분명 다른 눈높이였는데도 같다고 느낄 정도로 그녀는 당돌했다. ‘제가 알려드릴게요. 이 세상이, 이 나라가 특별한 이유는요.’ 모두가 피하기 바쁜 차가운 금안을 마주보며 그녀가 아기처럼 까르르 웃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모든 것이 유일하기 때문이에요. 당신도, 나도.’ ‘…….’ ‘세상에서 똑같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마치 어제 들었던 목소리처럼 선명하게 뇌리를 맴돌았다. 레위스는 턱을 괸 채 눈을 감았다. “특별했었지.” 그 목소리가 없는 지금은 너무 조용하다. 그녀 말대로 세상에 똑같은 건 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그녀와 같은 존재를 찾지 못했다. 마치 잠든 사람처럼 눈을 감고 시야를 차단해 버린 황제를 보며 쥬다스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회피하는 모습으로 충분히 답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상처를 직면하는 건 두려운 일이다. 설령 제국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마음의 난 상처 앞에선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너는.” 막 돌아서던 쥬다스의 등 뒤에서 잔뜩 잠긴 목소리가 불쑥 이어졌다. “이미 죽어버린 꽃을 위해 물을 준 적이 있느냐.” 쥬다스는 그 말을 듣고 문득 전생에 함께 살던 메이드 미카가 죽은 후 소원나무 앞에서 울던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때 프리드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에게 물었었다. 왜 미카의 죽음에 화를 내지 않느냐고. “해동은 내게 있어 죽은 꽃을 담고 있던 화분이다. 더 이상 관심을 가질 이유도, 물을 줄 필요도 없어.” “아뇨, 폐하.”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황제는 전생의 자신과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레위스는 젊은 나이부터 피로 물든 황좌에 앉아 감정을 숨기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사로운 감정보다는 대의를 생각해야만 했고 만인이 그의 행보를 주시했다. 그 몸서리쳐지게 아픈 고독과 도망가고 싶은 심정을 쥬다스도 알고 있었다. “그 꽃이 폐하께 특별하였다면 억지로 잊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언제부터 눈을 뜨고 있던 것인지 돌아보자마자 시선이 마주쳤다.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화분은 작지 않습니다.” “작지 않다?” “예. 꽃은 졌어도 뿌리가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물을 주면 지금이라도 새 꽃이 다시 피어오를지도 모르지요.” 쥬다스는 그리 말하며 빙긋이 웃어주었다. “꽃은 당장 피지 않았어도 언제든 피어오를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 레위스의 굳건한 가면에 미세한 금이 갔다. 자신이 하윤 리의 죽음을 외면한 사이 아이가 직접 어미의 누명을 풀고 진실을 밝혀냈다. 물 한 모금 주지 않아도 아이는 죽지 않고 버텨냈고 모두에게 칭송받는 군주의 후계로 자라났다. 황제는 안도함과 동시에 이 순간조차도 ‘황제’일 수밖에 없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느꼈다. 한번 제어를 잃은 감정은 범람하는 강물처럼 그의 마음을 적셨다. 쥬다스가 자리를 떠난 후에도 황제의 무너진 표정은 쉽사리 감추어지지 않았다. ‘너는……. 어째서 내게 그리 웃어주는 것이냐.’ 수년 전, 어린 쥬다스를 후계로 적합하지 않다 판단하였으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 그건 결국 비뚤어진 애정이었을 뿐이다. * * * 황궁에 복귀한 지 한 달 가까이 지났을 무렵, 쥬다스의 앞으로 초대장이 하나 날아왔다. 정식 루트를 통해 전달된 초대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녹색 바람이 물고 날아온 초대장이었다. 「이그레트, 이거!」 유니는 품에 꼬옥 쥐고 온 하얀 편지봉투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양족 꼬마가 네게 전해달래.」 “양이라면 키리에를 말하는 게로구나.” 「응응. 노래 부르는 여자애.」 키리에는 미드가르드 노예시장에서 만나 제국으로 이주해 온 양 수인족이었다. 목소리에 감정을 동화시키는 특별한 능력이 있어 쥬다스의 후원 하에 노래를 배우기 시작한 그녀는 그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돌 키리에.’ 최근 그녀를 수식하는 단어는 우상을 뜻하는 ‘아이돌’. 아름다운 외형과 목소리로 순식간에 마음을 홀리는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열광했다. 아직 그녀의 노래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다고 전해질 정도였다. 그녀는 음유시인처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가는 곳마다 두터운 팬층을 만들어냈다. 이제 키리에의 노래는 루바르잔 제국에서 새로운 유행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쥬다스는 반가운 마음으로 유니가 전해준 초대장을 열어보았다. <경애하는 주인님께.> “원 녀석, 고집도……. 이런 호칭은 사용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편지를 작성하는 양식과 글을 쓰는 방법 등은 분명 그가 후원을 위해 붙여준 스승으로부터 배웠을 테지만 제일 중요한 호칭 문제가 남아 있었다. 쥬다스는 노예시장을 철폐하고 노예들을 제국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그들의 주인이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키리에는 꿋꿋이 그를 주인님이라 불렀다. 어떻게 보면 명령에 따르지 않는 태도가 되는 것임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작부터 그에게 난감함을 선사한 초대장은 단순명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콘서트를 연다는구나.” 「콘서트? 음악회를 말하는 거야?」 제국에선 노래를 부르는 걸 딱히 직업으로 인정하는 풍조가 아니었다. 시와 노래를 읊으며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들조차 돈을 번다는 목적보다는 예술을 추구하고 방랑하며 세상을 여행하는 목적이 강했다. 돈을 주고 감상하는 음악이라 하면 보통 귀족사회에서 우아하게 즐기는 악기 연주회 정도였다. 평민들은 노래를 즐기기보단 생계를 이어나가느라 바빴다. “평민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음악회인 모양이야. 수련생이 아닌 가수로서 여는 첫 콘서트라 내가 꼭 와줬으면 한다는구나.” 「가수! 재밌겠다요!」 살찐 고양이처럼 나태하게 늘어져있던 토니가 확 몸을 일으키며 안색을 밝혔다. 궁에 돌아온 이후로는 딱히 흥미를 끌 만한 요소가 없어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에, 음. 뭐 구경이야 가도 좋겠지만. 이제 여기서 함부로 나갈 수 없는 거 아니야?」 “지난번처럼 여행까진 무리더라도 잠깐 외출하는 정도는 괜찮아.” 어차피 유니가 곁에 있는 이상 어디든 오고 가는 데에 오랜 시간을 잡아먹지 않으니 노래를 감상하고 올 여유는 있을 터였다. “날짜는 다음 주, 보름달이 뜨는 저녁이라 한다. 그 아이가 어떤 노래를 부를지 벌써부터 기대되는구나.” 쭈그려 앉은 채 초대장을 들고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유니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근데 이그레트.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평소 같았으면 차분히 독서를 할 시간이었지만 쥬다스는 지금 나무가 가득한 정원에 나와 있었다. 그리고 바닥을 가득 메운 낙엽들 사이에 쭈그려 앉아 무언가를 골똘히 살피던 참이었다. 유니가 그를 보며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카니가 대신 상냥한 어조로 대답해 주었다. 「책갈피를 찾는 중이래요.」 「책갈피?」 “하하, 단풍이 아주 예쁘게 들었지 무어냐.” 마침 노랗게 물든 은행잎 하나를 주워든 그가 초대장 사이에 이를 끼웠다. 들고 나온 책 사이사이에는 이미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들어차있었다. 명령 한 마디만 하면 금은보화를 녹여 만든 최고급 책갈피를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달라진 듯하면서도 전혀 달라지지 않은 자신들의 계약자를 물끄러미 쳐다본 유니가 킥킥 웃었다. 「응, 예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25장 : Kyrie'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6월 마지막 주의 시작이기도 하네요. 이제 곧 7월... 이젠 정말 한여름이네요. *_*!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ㅎ (오늘 밤에 이어서 남은 분량 다 올리겠습니다.ㅠㅠ) 0216 / 0240 ---------------------------------------------- 25장. Kyrie 그날 저녁, 쥬다스는 초대장을 다른 친우들에게도 공개했다. 키리에가 초대한 건 쥬다스뿐만이 아니라 그때 함께 있었던 사람들 모두가 대상이었다. 일상적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러 왔다가 뜬금없이 콘서트 초대장을 눈앞에 둔 바이칼이 포크를 입에 문 채 중얼거렸다. “공연이요? 적혀 있는 장소가 마침 수도의 강변이라 멀리 나갈 필요는 없겠네요.” 귀족들의 우아한 음악회와 다르게 키리에가 공연장으로 잡은 장소는 홀이 아닌 널따란 강변 한복판이었다. “뭐 저야 멀든 가깝든 상관없습니다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바이칼은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보며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에단은 무척 반대하고 싶어 죽겠는 얼굴을 하고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주군의 결정에 토를 달기 어려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단장을 대신해 바이칼이 한숨을 푹 내쉬며 나섰다. “환궁하신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다시 궁 밖으로 나가시는 건, 어흠,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직 용태가 완벽히 좋아지신 게 아니라 지금은 쉬셔야 할 때입니다.” 보고서 작성과 쥬다스가 해야 할 밀린 업무를 돕는다는 핑계로 아직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은 크리스티나도 진지하게 한마디 거들었다. 그녀의 말대로 쥬다스는 일전 미드가르드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바람에 심하게 상했던 몸 상태를 아직 회복 중에 있었다. 더 이상 아프진 않았고 상처도 말끔히 나았지만 사람의 건강이란 아무리 좋은 약과 술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기계 고치듯 뚝딱 해결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는 귀환 후 한 달간 무리한 일정을 잡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이거 참. 누가 들으면 중한 환자인 줄 알겠구나.” “……중하지 않았다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곡을 찌르다 못해 매섭기까지 한 에단의 낮은 질문에 쥬다스는 난처하게 손을 내저었다. “으음. 그런 게 아니라.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사실 이젠 본래의 건강을 거의 되찾은 상태라 걱정할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친우들의 걱정은 그가 보기에 과한 감이 강했다. 지난 여행을 다녀오면서부터 그의 주변인들은 극히 안전을 염려하기 시작했다. 마치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바라보듯 조마조마한 시선으로 늘 그를 바라보았다. 호들갑도 그런 호들갑이 없었다. 과보호로 치자면 그의 네 정령왕보다 더 막강했다. “아무튼 모처럼 초청까지 받았으니 산책 삼아 다녀올 생각이야. 되짚어보면 우리가 그동안 함께 공연을 감상한 적은 없지 않느냐?” ‘그러고 보니.’ 그들은 군신관계이기도 했지만 믿음을 나눈 친우이기도 했다. 학교를 다닐 적엔 학업에 바빠 음악회나 서커스 같은 공연을 보러 갈 시간이 없었고 졸업 후엔 각기 맡은 업무를 해결하느라 더욱 염두에 두지 못했다. 노는 일도 놀아본 이들이 잘 노는 법. 모범생 축에 끼는 그들은 기껏해야 함께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시고, 학교 축제에 참가해 구경한 정도가 다였다. 묘하게 설득력 있는 한마디로 모두를 굴복시킨 쥬다스는 다음 말로 쐐기를 박았다. “그래서 실은 이번 공연이 무척 기대되는구나. 여유가 된다면 다들 같이 다녀왔으면 좋겠어.” “……따르겠습니다.” 초대장만 봤다면 모를까, 저 기대감 가득한 표정을 보고도 반대를 고집할 수 있는 이는 자리에 없었다. 에단마저 잘 익은 곡식처럼 고개를 숙여 버리자 따라서 크리스티나도 공연을 보러가는 일에 동의했다. 그걸 본 바이칼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양어깨를 으쓱였다. “아! 말이 나와서 말입니다, 전하.” 매실을 설탕에 담가 만든 장아찌를 후식으로 입에 쏙 집어넣은 그가 우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정 잡혔습니다.” “응?” “그 왜, 저번에 약속하셨던 거요.” 그제야 바이칼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감이 잡힌 쥬다스가 나직하게 웃었다. 이럴 때보면 바이칼도 평소엔 에단에게 눌려서 그렇지 한다면 하고야마는 성격이었다. “가면 파티를 말하는 게냐?” “예입. 수요 조사 좀 미리 해봤는데 생각보다 참석자가 많더라고요. 가을이라 다들 쓸쓸해서 그런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일정이 빨리 잡혀 버렸습니다.” “그걸 진짜로 한다고?” 에단이 황당하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약속할 당시 상황이야 너무 급박하기도 했고 정신이 없어서 그러려니 보고 지나쳤는데 진짜로 가면 파티를 기획하고 있을 줄은 직속상관인 그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당연히 에단에게 먼저 경과를 알렸다간 당장에 멱살 잡혀 중단될 게 뻔했기에 바이칼은 소리 소문 없이 주도면밀하게 파티를 준비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수의 귀족이 그가 준비한 가면 파티에 참여 의사를 밝혔다. “진짜로 하지 그럼 가짜로 합니까? 전하께서 친히 약속해 주신 좋은 기회인데요.” “전하. 혹 언짢으시다면 취하해 버리십시오.” 얄짤없이 가면 파티에 대한 약속을 무시해 버리라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이 펄쩍 뛰었다. “안 됩니다! 벌써 참여자 명단도 정해졌고 장소 예약도 다 해놨다고요!” “자네가 가서 직접 즐기면 되겠군.” “제가 즐기려고 여는 파티가 아니잖습니까!” 급기야 울상을 짓기 시작한 그에게 쥬다스가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약속대로 참석할 것이니 너무 걱정 말 거라.” “하오나 전하.” 가면 파티에는 미혼의 젊은 귀족남녀만 초대되며, 주최자 외엔 아무도 참여자 명단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품위를 지키거나 일반적인 파티 예절을 따를 필요도 없었다. 남성과 여성, 고위층과 하류층 등으로 무리를 나누어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접근해야만 하는 황실무도회와 다르게 그곳에선 편안한 마음으로 뒤섞이게 된다. 그러다 보니 육체적인 관계만 노리는 불손한 목적을 가지고 오는 이들도 있었으며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겐 다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드는 장소기도 했다. 에단은 아무리 좋은 뜻이라고 해도 차기 군주인 쥬다스를 그런 곳에 보내기 영 꺼려졌다. 무엇을 하든 일단 반대부터 하고 보는 걱정 많은 수하를 보며 쥬다스는 그저 태연하게 답해주었다. “내가 가진 지위가 상대보다 더 높다고 하여 모른 척 취하한다면 그게 어찌 약속이겠느냐. 이는 약속이 아니라 기만이니, 나는 너희를 기만하고 싶진 않구나.” 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에단은 속으로 천근만근 무거운 한숨을 삼켰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신경 쓰이는 일정이 두 개나 늘었다. 당장 다음 주에 있을 콘서트와 그 뒤로 이어질 가면 파티. 얼핏 평범한 놀이문화와 같이 들리지만 거기에 참여하는 게 쥬다스인 게 문제였다. 모시는 주군과 부하가 동시에 벌려놓는 판에 에단은 젊은 나이에 허리가 굽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건 언제라고?” “어, 단장도 참석하시게요? 두 달 뒤입니다.” 지금이 한창 가을이었으니 두 달 뒤는 계절상 겨울이 왔을 무렵이다. ‘그러고 나면 슬슬 새해인가.’ 쥬다스는 새삼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을 했다. 12살로 깨어났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열여덟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니. 마냥 어린아이 같았던 주변 친우들도 전부 이젠 제법 어른스러운 태가 나고 있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는 경탄이 나올 정도로 빨랐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건 이미 살 만큼 살아봤다고 생각한 그 자신조차도 아이들과 속도를 맞추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전보다 자주 웃었고 슬플 때엔 눈물 흘리는 법도 알게 되었다. 홀로 결론을 내기 어려운 고민이 생기면 터놓고 의논하기도 했으며 지금처럼 무언가를 기대하고 설렐 수도 있었다.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이후 몸이 자라면서 이전 삶에선 자라지 못했던 억압된 내면도 함께 자란다는 사실이 못내 신기했다. “나도 갈래.” 언제부터 들은 건지 청룡 가야가 불쑥 창문을 통해 들어오며 당당히 끼어들었다. 「와, 귀도 밝다. 가야 너 황궁 무사들이 수련하는 수련관까지 갔었다가 이쪽 얘기가 더 재밌어 보이니까 돌아온 거지?」 그쯤 되면 천리안도 아니고 천리이라는 둥 감탄하며 유니가 가야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쫑알거렸다. 실제 청룡의 오감은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게 발달해 있었다. 평소에는 인간보다 조금 더 잘 보고 듣는 정도였지만, 필요하다면 수십 리 떨어진 곳에서 떠드는 소리도 명확하게 도청할 수 있었다. “가야 님, 그리 다니시면 창문 망가집니다. 다음부터는 문으로 들어오십시오.” 식사 시중을 맡고 있던 시종 로한이 차분히 가야의 잘못을 지적했다. 어지간한 무관이나 귀족들도 무서워서 말을 못 붙이는 신수 청룡이었지만 로한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할 말을 다했다. 용이든 신수든, 궁에 온 이상 예법을 지켜야만 했다. “미안. 급한 마음에 실수했어. 다음부턴 문으로 들어올게.” 가야는 순순히 사과했다. 청룡씩이나 되는 위대한 존재가 일개 시종에게 미안해하는 장면을 다들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로한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그가 짓밟고 들어온 창틀을 깨끗이 닦기 시작했다. “으음……. 가야. 어딜 가고 싶다는 뜻이었느냐?” “음악회도 갈 거고 파티도 갈 거야. 여기 너무 심심해.” 본래 이리저리 쏘다니는 걸 좋아하는 동물계 정령이었으니 황궁 생활이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해동에 있을 적에도 청룡을 비롯한 사방신수는 계약자를 두고도 궁궐에 주구장창 머무는 게 아니라 산과 들로 나돌아 다니곤 했다. 가야가 지금 멀리 떠나지 않고 궁 안에서만 설렁설렁 돌아다니는 이유는 그만큼 현재 계약자에 대한 애착이 깊기 때문이지만, 건수만 있다면 흥미로운 사건을 찾아 돌아다닐 준비가 되어 있었다. 동방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가야에게 루바르잔에서 열리는 음악회라든지 가면 파티 같은 건 무척 생소하고 흥미로운 주제였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응. 갈 때 놓고 가지 말고 꼭 불러.” “그나저나 가야. 요즘 통 안 보이던데 식사는 하고 다니는 게야?” “별로? 안 먹어도 돼. 나는 신수니까.” 특별히 몸을 회복시켜야 하거나 맛을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먹지 않는다. 신수는 자연의 정기를 흡수해 살아가기 때문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 음식 좀 느끼해. 아무것도 안 바르고 소금만 친 통구이 같은 거 먹고 싶어.” 고기와 과일에 꿀과 버터를 발라 구운 걸 보고 식겁한 뒤로 가야는 통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심지어 야채 스프에도 치즈가 들어갔다. 가야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아침에 잼 바른 모닝빵 말고 굴비고추장 비빈 밥에 우거지된장국 먹고 싶다…….” “저런. 여러 측면에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해동의 요리법을 찾아보마.” “고마워, 주인.” 가야는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동방국가에서 살아온 신수가 적응하기엔 제국은 음식문화부터 시작해서 건축물, 생활양식까지 너무나도 달랐다. 지금 그가 입고 있는 옷 역시 제국에선 무척 눈에 띄는 하늘색 도포차림이었다. 본체가 청룡인 이상 마음만 먹으면 의상을 바꿀 수 있었지만 가야는 지금이 훨씬 편하다며 바꾸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건 플루비 집사에게 주는 선물.” “예?” 휙! 갑작스레 날아든 보따리를 가까스로 받아 든 바이칼이 황당한 눈으로 이를 내려다보았다. “플루비 옷이야. 이제 날씨도 슬슬 추워지는데 애를 그렇게 홀딱 벗겨 놓냐.” “거, 무슨 와이번이 옷을 입는다고…….” 보따리를 풀어보니 그 안에서 앙증맞은 크기의 빨간색 후드 망토가 한 벌 나왔다. “이거 애들용 아닙니까?” “애잖아.” “사람 애가 아니잖아요.” “지금 종족 차별하냐?” 말이 통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바이칼은 주섬주섬 옷을 꺼내 플루비에게 입혔다. 후드 망토라 팔다리를 넣을 필요도 없이 목에 둘러주고 앞에 단추만 잘 여며주면 되었다. 보기엔 시장 지나가다 대충 아동복을 하나 집어온 것 같은데 어째 사이즈가 맞춘 듯 딱 들어맞았다. 심지어 빨간색이라 푸른 비늘인 플루비에게 잘 어울리기까지 했다. 바이칼은 문득 억울한 심정으로 가야를 향해 따져 물었다. “아니, 근데 제가 왜 플루비 주인이 아니고 집사입니까?”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늦었습니다. ㅠㅠ; 죄송합니다.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7 / 0240 ---------------------------------------------- 25장. Kyrie “엉? 몰랐냐?” 가야는 오히려 뻔뻔스럽게 대꾸했다. “주인이라고 하면 네가 플루비보다 위에 있다는 뜻인데. 전혀 아니잖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플루비는 바이칼을 유독 잘 따르고 좋아하긴 했지만 딱히 명령을 듣는 태도까진 아니었다. 귀찮을 땐 불러도 오지 않았고 짜증 나게 굴면 잇자국이 남도록 손을 콱 깨물기도 했다. 바이칼은 새삼스럽게 충격받은 눈으로 품에 안고 있던 플루비를 내려다보았다. 마침 그를 올려다보던 주홍빛 눈망울과 딱 시선이 마주쳤다. 와이번의 긴 꼬리가 한 차례 살랑거렸다. ‘좋아! 네가 마음에 들었으니까 원하는 걸 들어줄게!’ 반짝반짝 빛나는 큼지막한 눈동자가 꼭 그리 말하는 느낌이라 바이칼이 울컥 소리쳤다. “먹이고 재우고 놀아주고! 전부 제가 해주는데요!” “이열~ 훌륭하게 수발들고 있구만.” “……크흑.” 자기가 생각해도 ‘주인’보단 ‘집사’쪽에 무게가 쏠리자 바이칼은 말을 잇지 못하고 좌절했다. 그러자 그의 어깨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간 플루비가 께륵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암만 그래도 용족은 아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요 꼬마 와이번에게 선택받았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삐잉.” 전혀 자부심이 생기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무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뱀대가리니 뭐니 하며 혐오스럽게 느꼈던 때보다야 녀석과 친해진 지금이 훨씬 좋았다. 바이칼은 제게 익숙하게 볼을 비비는 플루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짜식이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그렇게 엉아가 마음에 들었디?” “걔 여자앤데?” “…….” 바이칼은 더 이상 생각하는 걸 포기하기로 했다. * * * 공연 당일. 쥬다스는 약속했던 인원들만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에단, 바이칼, 크리스티나, 그리고 청룡 가야까지. 눈에 보이는 인원은 그 정도고 그 주변을 자연계 정령들이 철두철미하게 가호하고 있었다. 어차피 멀리 나갈 게 아니라 수도에 잠시 다녀오는 일정이었기에 그들은 몹시 간소한 차림으로 성을 나섰다. 배낭이나 말 따윈 필요 없었다. 성에서 나와 죽 이어진 큰 길을 따라 펼쳐진 크고 화려한 영토가 바로 루바르잔의 수도 엘리. 그리고 수도를 끼고 흐르는 큰 강 건너편에 허락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교황청 엘리시움이 있다. “워, 날씨 끝장나네요.” 바이칼이 손으로 햇살을 가리며 감탄했다. 가을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은 하늘은 무척 새파랬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대로 가득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갔다. 양산을 쓴 여인과 엄마 손을 잡고 나들이 나온 아이들, 파라솔을 펼쳐 야외장사를 개시한 음식점,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선물을 고르러 온 사내 등 각각의 하루가 모여 평화로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마차도 사람이 많은 거리에선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으며 길목마다 배치된 경비대가 도난사건을 접수한다든지 미아를 돌보는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맘마! 아슈쿠림!” “아이스크림? 안 돼. 오늘은 이미 하나 먹었잖니.” “흐에엥.”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이가 아이스크림 마차 앞에서 떼를 부렸다. 아이 엄마는 집에 가면 달콤한 초콜릿을 주겠다, 자꾸 울면 경비아저씨들이 와서 이놈 한다 등 회유에서 협박까지 동원해 봤지만 우는 애한텐 씨알도 안 먹혔다. 결국 그녀는 서럽게 엉엉 우는 아이를 억지로 품에 안고 아이스크림 마차 앞을 떠날 수 있었다. 힘들게 떠나가는 뒷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 쥬다스는 문득 자신도 어렸을 때 저랬을까 싶어 상념에 잠겼다. ‘……기억이 안 나.’ 전생엔 갓난아기일 적부터 부모가 없었으니 떼를 부릴 대상이라곤 계약하기 전부터 그 곁을 지키던 정령들이 전부였다. 차가운 눈밭에서 살아남고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익힌 건 전부 그들의 도움이었다. 그게 계약으로 이어지고 죽 함께 지내면서 다 크고 나서도 늙어죽을 때까지 정령의 손을 탔으니, 그에게 있어 정령이란 피는 이어지지 않았어도 진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자.” “……?” 불쑥 눈앞에 민트색 성이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성이 아니라 콘과자 위에 구불구불 쌓아올린 아이스크림이었다. 가야가 어느 틈에 사온 건지 그에게 내밀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길래. 먹고 싶으면 말을 하지 주인도 참.” 그래서 보고 있던 건 아니지만 쥬다스는 일단 가야가 성의껏 사온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었다. “민트 초코맛이래. 뭔 맛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초코보다 상큼하다는데.” “아.” “역시 그냥 초코가 나았을까?” “아니, 충분해. 고맙다.” 초코가 알알이 박힌 민트색 아이스크림은 확실히 상큼하긴 했다. 계약자에게 감사인사를 받은 청룡은 뒤통수에 깍지를 낀 채 휘파람을 불어댔다. 자신이 도움이 되었단 사실이 굉장히 뿌듯해보였다. 「야야, 이거 불량식품이잖아. 막 사다 주면 어떡해!」 “뭐 어때. 가끔은 불량한 것도 먹어줘야 위장이 튼튼해지는 거야.” 「와앙? 그런 거였다요?」 「아니거든! 토니 넌 또 뭘 넘어가고 있어!」 「으응, 이번엔 좋은 뜻이기도 했고 특별히 몸에 나쁜 건 아니니까 넘어갈게요. 하지만.」 쥬다스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앉아있던 카니가 후후 웃었다. 「한 번만 더 상의 없이 저지르면, 그땐 똥을 입으로 싸게 만들어줄게요.」 「…….」 “…….” 카니 저 무서운 아이. 토니의 볼을 잡아 뜯고 있던 유니가 중얼거렸다. 저들끼리 왁왁거리면서 나름 친해지고 있는 정령들을 부드럽게 응시한 쥬다스의 입가에 웃음기가 맴돌았다. ‘저들의 눈엔 나는 아직 어린아이나 다름없겠지.’ 정령들은 언제부턴가 그를 챙겨주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는 늘 정령들을 아이처럼 대했지만 그건 정령이란 존재 자체가 워낙 순수하고 귀여웠기 때문이다. 제대로 따지자면 저들은 어떤 생명체보다 오래 이 세상을 살며 지켜온 어른이었다. 겨우 아이스크림 하나 가지고 호들갑 떠는 귀여운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잔잔히 웃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려 에단에게 말을 건넸다. “키리에의 공연은 저녁달이 뜰 무렵에 시작한다 하였지. 그동안 시간이 좀 남겠구나.” “예. 햇볕이 뜨거우니 실내에 들어가 쉬시겠습니까?” 가을이긴 해도 한낮의 태양빛은 꽤 강렬했다. 아직 회복기에 있는 그가 강한 열기를 고스란히 받으며 걷기엔 힘들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에단이 휴식을 제안했으나 쥬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몸이 상했던 건 사실이나 여직 환자인 건 아니란다.” “하면.” “모처럼 나들이를 나왔으니 놀아야지. 다들 자유 시간에 해보고 싶었던 일이나 가보고 싶었던 장소는 없느냐?” “저요! 저 있습니다.” 그의 세 친우들 중, 노는 얘기에 가장 빠삭한 건 역시 바이칼이었다. “도박해 보고 싶습니다.” 에단의 표정이 흡사 악귀처럼 변하자 바이칼은 잽싸게 가드를 올리며 말을 이었다. “아뇨! 불법도박 말고요. 혹시 게임 카페라고 아십니까? 최근 유행하는 문화인데요.” “게임 카페?” 최근 제국에선 차와 케이크만 시켜놓고 얌전히 대화하는 카페와 다르게 시끄럽게 떠들며 친구들끼리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카페가 새롭게 유행하고 있었다. 바이칼은 바로 그 최신 유행 시설에 대해 일장 읊어대며 일행을 유혹했다. “비용은 음료 값만 내면 되고요. 입장할 때 인원수대로 똑같은 양의 게임머니를 받습니다. 그 게임머니를 걸고 카드나 보드를 이용해서 노는 겁니다. 게임머니 다 쓰면 탈락! 음료수나 빨면서 손 터는 거죠.” “불건전한 문화는 아닌 것 같군.” “어휴! 건전하다마다요. 이게 지금 얼마나 유행인데요. 단장, 진짜 못 들어보셨습니까?” “모른다.” 오로지 검술과 차후 주군을 보좌해야 할 정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둔 에단은 오락 문화에 대해선 아예 무지했다. 무리 지어 노는 활동에는 일절 관심을 꺼버리는 크리스티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철벽을 눈앞에 둔 바이칼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코를 긁적였다. “뭐 사실 별로 기대는 안 했습니다만. 너무 당당하게 모른다고 하시니까 좀.” “당당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최근 유행하는 놀이시설도 죄 섭렵할 정도인 걸 보아하니 그동안 열심히도 뺀질거리고 논 모양이군.” 그 말에 바이칼이 뜨끔하여 시선을 쥬다스에게로 돌렸다. “어떠십니까? 쥬다스 님도 도박게임은 즐겨보신 적 없으시지요?” “그걸 지금 말이라고…….” “흐음. 도박이라.” 점점 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쥬다스가 흥미를 보였다. “유행을 한다는 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사로잡았기 때문인 게지. 어떤 곳인지 궁금하구나.” 바이칼은 제가 판 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동아줄을 하나 붙잡은 사람처럼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렇죠? 궁금하시죠? 재미는 제가 보장합니다. 짱짱한 게임들로다가 다 알려드릴게요!” 신난 바이칼을 제지하고 싶긴 했지만, 딱히 다른 놀 거리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는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야는 어차피 루바르잔의 문화 자체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를 멀뚱히 지켜보다 하자는 대로 따라갔다. 에단의 말마따나 훈련을 빼먹고 열심히 뺀질거린 덕에 바이칼은 수도에서 가장 크고 인기 많은 게임 카페를 이미 뚫어놓은 상태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카페주인은 바이칼의 얼굴을 알아보고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와 새끼. 이게 얼마만이야? 다른 가게로 단골 옮긴 줄 알고 형 실망할 뻔했다.” “에이, 그럴 리가. 근데 형이 지금 그런 말 하면 나 이따가 맞아죽어.” “왜?” “다음에 설명할게. 아으으. 제발 모른 척 좀 해주라.” 친해도 보통 친한 게 아닌 듯 서로 말까지 놓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얼씨구, 하는 추임새가 절로 입안에 맴돌았다. ‘하. 단골? 돌아가면 훈련 강도를 높여야겠군.’ 그간 마법기사라고 좀 풀어줬더니 어지간히 놀고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놀아도 플루비나 데리고 나가 비행훈련을 시키는 줄 알았더니 훈련은커녕 도박장에서 비행이나 일삼았나 싶어 절로 주먹이 근질거렸다. 에단은 속으로 오늘 일과를 마치면 기사단 전체를 소집하여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겠노라 굳게 다짐했다. 카페 주인은 잡담을 멈추고 일행을 한 테이블로 안내해주었다. “자, 여기 앉아. 근데 친구들은 처음 보는 얼굴들인데. 게임 카페 와본 적 있어?” 다짜고짜 반말로 물어보는 직원을 향해 당황스러운 시선이 쏠렸다. 그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 카페 주인이 넉살좋게 웃었다. “아하하! 표정 보니까 초보구나. 여기선 서로 말 놓는 게 룰이야. 나는 베르너. 나이 상관없이 호칭이 ‘형’이니까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니들도 편안히 대해줘.” 파격적인 컨셉이었다. 규율과 예법에 엄격한 에단과 크리스티나가 적응하기에 이 게임 카페는 너무나 험난한 장소였다. 그러나 가장 적응이 어려워야 할 쥬다스는 오히려 곧장 편안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좋아. 그래서 무슨 게임을 할 건데?” “글쎄? 우리가 저놈 빼고 다 초보라. 형이 가벼운 걸로 하나만 추천해줘.” 바이칼마저 말문이 막혀 버릴 정도로 자연스러운 말투였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8 / 0240 ---------------------------------------------- 25장. Kyrie 게임머니를 전부 배분해 준 베르너가 이내 씩 웃으며 게임 종류를 설명해 주었다. “초보자가 즐기기에 좋은 게임이야 많지. 운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카드게임, 민첩성이 생명인 스피드게임, 상대를 죽고 죽이는 전략게임, 땅따먹기 게임, 힌트를 모아 범인 잡는 추리게임. 어떤 게 제일 마음에 들어?” “난 골치 아픈 건 싫어.” 가야는 단도직입적으로 미리 못을 박아두었다. 평소에도 문제가 생기면 일단 몸으로 부딪치고 보는 청룡이었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일이라면 아무리 게임이라도 딱 질색했다. “운발 게임하자.” “아니 그러면 좀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가야 님은 신…….” 신수니까 하늘의 천기를 읽을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지려던 바이칼은 카페 주인 베르너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어물 말을 바꾸었다. “신께 귀의한 몸이시라면서요.” “엥. 내가?” “조만간 사제가 되러 엘리시움에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뭐?” “아무튼 저는 공평한 추리게임과 땅따먹기게임 추천합니다.” 졸지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비 사제가 되어버린 가야는 황당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바쁜 카페 주인 베르너는 그들이 고른 게임들을 꺼내 놓고 간단한 설명을 한 후 다른 손님들을 맞으러 사라져 버렸다. 대신 단골이 될 정도로 게임 카페에 많이 와본 준전문가 바이칼의 가르침에 따라 그들은 차근차근 게임을 배웠다. 학업과 검술 측면에선 천재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었지만 게임은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적응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었다. 게임 규칙과 승리를 위한 전술 전략 등은 쉽게 익혔지만 문제는 심리전이었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 나이 또래들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할 얍삽한 수법이나 치사하게 함정을 파고 뒤통수를 때리는 전략에는 취약했다. 늘 전나무처럼 올곧게 행동하는 에단, 그리고 얍삽한 수는 품위 없다고 여기는 크리스티나는 융통성 있게 임해야 하는 전략게임에서 매번 뒤통수를 맞았다. “눈에는 눈, 똥에는 똥으로 대응하셔야죠. 그렇게 자꾸 정직하게 구시면 안 된다니까요?” “……이 비열한.” “예, 비열해지셔야합니다. 게임은 이기면 장땡이거든요.” 모처럼 에단을 놀려먹을 수 있게 된 바이칼은 씨익 웃으면서 주사위를 굴렸다. “크아! 이걸 어쩌나, 또 인수해 버렸네요. 랜드마크 건설합니다?” “…….” 그들이 지금 하는 게임은 땅을 구매하여 건물을 짓고 세계 제일의 부호가 되는 게임이었다. 기껏 공들여 건물을 지어둔 도시가 통째로 날아가 버리자 에단은 허무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런 상관을 두고 바이칼이 그 자리에 건물을 새로 올렸다. “이제 이 도시는 제 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와, 봤어? 저 비열함. 쟤한테는 정치 맡기면 안 되겠다.」 「제 생각은 반대예요. 저런 사람한테 맡겨놓으면 나라를 엄청 잘 발전시키지 않을까요? 욕은 좀 먹겠지만요.」 쥬다스의 양어깨를 차지하고 앉은 유니와 카니가 동네 아낙들처럼 수군거렸다. 현재 게임의 선두를 달리고 있는 건 바이칼이었고, 꼴찌는 부관에게 집중 공격을 받고만 에단이 차지했다. 쥬다스는 그냥저냥 평타를 유지하고 있었고 크리스티나는 나름 꾸준히 땅을 정복하여 자산을 모으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의외네. 전하라면 처음 하는 게임도 모조리 재패하실 줄 알았는데.’ 바이칼은 에단을 놀려먹으면서도 쥬다스를 힐끗거리며 생각했다. 적응을 못하는 건 아닌데 생각보다 성적이 특출하진 않았다. 함께 학교를 졸업한 친우들은 그가 1등을 하지 못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물론, 생각지도 못한 목적을 위하여 일부러 뒤처지는 경우는 간혹 있었다. ‘설마 이번에도……?’ 바이칼의 생각과 달리 쥬다스는 나름 게임을 즐기는 중이었다. 승패를 떠나 같은 상황에서 아이들이 각자 어떤 수를 쓰나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래서 지고 있어도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다. 쥬다스 일행과는 대각선에 위치한 테이블이었는데 구성원 나이가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비슷한 수준이고 인원도 똑같이 5명이었다. “……어때?” “완전 샌님들인데?” “게임 좀 할 줄 아는 일반인 하나랑 초보자 넷. 선수는 없음.” 그들은 마치 약하고 어린 짐승을 노리는 하이에나 무리처럼 군침을 삼켰다. 근방에선 질 나쁘기로 꽤나 유명한 불량배 무리였다. 게임 카페의 모든 도박은 가짜 돈을 걸고 하는 건전한 문화였지만 그 틈새를 찔러 실제 도박판도 함께 벌어지고 있었다. 지금 쥬다스 일행을 지켜보고 있는 무리는 게임 초보자들을 꾀어내어 실제 도박판으로 데리고 가 홀딱 벗겨 먹는 악질적인 꾼들이었다. 머리색을 바꾸고 간편한 차림으로 나오는 등 외출에 신경을 쓴 쥬다스 일행이었지만 그들이 걸치고 있는 고급 의상이며 절도 있는 동작에서 풍기는 귀족적인 냄새까진 감출 수 없었다. 한동안 주변 테이블에 앉아 추이를 지켜보던 불량배들은 결국 그들을 오늘의 타깃으로 정했다. 길고 긴 건달 생활을 통해 발달한 촉은 부유하면서도 아직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귀족자제를 물색할 줄 알았다. 문제는 그냥 귀족자제 정도로 여겼지, 설마하니 황태자 일행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헤헤, 여자 예쁘다. 비싼 공방에서 파는 인형 같아.” “미친놈아, 여자는 건드리면 안 돼. 저 초보자들 돈만 뜯자고.” “걱정 마. 저런 도도한 여자들 특징이 뭔 줄 알아? 막 대하는 거 좋아해. 워낙 아무나 예쁘다고 잘 대해주니까 다정함에 질렸을 거거든.” 불량배들은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려 하는 줄도 모른 채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잘 봐. 저렇게 자상하게 대해 봤자 소용없다고.” 크리스티나를 목표로 삼은 남자가 손가락으로 일행을 척 가리키자 다른 불량배들이 기대 어린 시선을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하필 비용이 큰 땅에 걸려 파산 직전에 처한 그녀가 차마 돈을 빌려달란 말은 꺼내지 못하고 눈동자만 떨고 있었다. “파산입니까? 크리스티나 님?” “…….” “파산이죠? 돈 없으시죠? 예? 예?” 큰 땅의 소유자인 바이칼은 쉴 새 없이 깐족거리며 그녀를 약 올렸다. 곁에서 보던 에단마저 표정이 팍 구겨질 정도의 극심한 깐족거림이었다. 크리스티나가 울컥했다가 이내 시무룩해지던 순간이었다. “이걸 쓰려무나.” “……!” “게임에서 돈을 빌리는 건 전혀 창피한 일이 아니란다.” 그리 다독거린 쥬다스가 선뜻 제 몫의 게임머니를 내놓았다. 별로 열심히 한 것 같진 않은데 요리조리 표 나지 않게 띄엄띄엄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놓아 제법 모아둔 게임머니가 많았다. 다른 이가 호의를 베풀었으면 자존심에 걷어찼을 크리스티나였지만 상대가 쥬다스인 이상 반응이 손바닥 뒤집히듯 달라졌다. “감…… 사합니다.” 그녀는 조신하게 게임머니를 받아들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봐야 볼을 발갛게 물들인 홍조는 감출 수 없었다. 이를 본 구경꾼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닌 것 같은디?” “그러게. 누가 봐도 저 자상한 애한테 호감이 있어 보이는뎀?” “그, 그렇지 않아! 호감은 개뿔, 착각이다!” 씩씩거리며 현실을 부정한 남자가 가장 먼저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섰다. 하는 수 없이 나머지 불량배들도 건들거리며 그를 따라 일어나 걸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이 가까이 다가갔지만 쥬다스 일행 중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도도한 여자는 막 대해야 좋아한다’고 주장한 남자가 막 투지를 불태우던 크리스티나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끈 순간이었다. “잠깐……?” 휘익, 쿵!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졌다. 말도 채 꺼내기 전이었다. 등부터 바닥에 꼬라박힌 사내는 숨이 턱 막히는 걸 느끼고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흐려진 시야로 굽이치는 푸른 머리카락이 보였다. 언뜻 바다를 연상시키는 빛깔과도 같았지만 윗부분은 챙이 넓은 나들이용 모자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가라앉는 머릿결 사이로 싸늘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멋대로 손대지 마. 천박하긴.” “크헉.” 뒤늦게 당황 섞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하늘하늘한 레몬빛 원피스에 가려 나약하게만 보였던 소녀의 몸 어디에서 저리도 강한 힘이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가장 나이도 많고 우두머리격인 청년이 재빨리 그들 일행을 재판단했다. ‘귀한 집 아가씨가 호위도 없이 이런 곳에 왔을 땐 역시 그 이유가 있게 마련이지.’ 같이 온 일행이 실력자들이든지, 그녀 자체가 잘 훈련받은 무인이든지. 무엇이든 좋지 않은 결론이었다. 사실 하다못해 일행 중 에단을 건드렸어도 이 정도 반응이 나오지 않았을 테지만 여자라서 만만하게 보고 크리스티나부터 건드린 게 불량배들의 실수였다. 우두머리는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시비를 걸려던 건 아니야. 오해하지 마.” “무슨 용무지?” 에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그의 허리춤에 걸린 두 개의 검을 발견한 불량배들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어쨌든 그들과 싸우려는 게 목적은 아니었기에 우두머리 청년이 최대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넸다. “친구들, 제대로 된 게임을 즐기고 싶지 않아?” “친구?” 에단은 그저 되물었을 뿐이지만 어쩐지 비아냥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심한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본 불량배 다섯이 동시에 움찔했다. 잠깐의 침묵 후 말을 꺼낸 청년이 다시 유들유들한 어조로 대꾸했다. “어. 뭐 황제폐하의 크신 은혜 아래 보살핌을 받고 있는 수도 엘리에선 모두가 친구지. 안 그런가, 친구들?” “암! 그렇고말고.” “근데 여자한테 얻어터진 놈은 친구라고 하기 좀 부끄럽다.” 일행에게 접근한 무리는 괜히 나섰다가 망신을 당한 동료를 저들끼리 거하게 비웃었다. “아무튼 좋은 정보를 나누어주고 싶어서 그래. 이런 애들 놀이터 대신 진짜 어른들의 놀이터를 가보고 싶지 않나?” 그들은 슬슬 본론을 꺼내 들었다. 에단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다시 한 번 되물었다. “어른들의 놀이터?” “그래. 화끈한 놀이터지.” 카페 주인에게 걸리지 않도록 자연스러운 태도로 테이블에 손을 짚은 청년이 은밀하게 제안했다. “진짜 도박게임. 어때?” “…….”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단은 당장 검을 뽑아 저들을 벌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을 거쳤다. 그들이 말하는 건 불법 도박장을 뜻했다. 지금처럼 게임머니를 가지고 순수하게 경기를 즐기는 도박이 아니라 진짜로 큰돈이 오고가는 도박장. 일정 금액 이상 현찰을 걸고 도박을 하는 행위는 불법이었다. “아무나 알려주는 정보는 아니야. 우린 수준 있는 사람들만 초대하거든.” 불량배 하나가 윙크를 날리며 손가락으로 돈을 뜻하는 동그라미를 그려보였다. 한마디로 돈 있는 사람들만 도박장에 초대한다는 뜻이었다. 귀족은, 즉 돈이다. 한번 도박을 맛본 귀족은 쉽게 그 맛에 빠져들었다. 아무리 부유한 평민이라 해도 귀족만큼 돈을 쏟아 붓진 못했다. 수도에서까지 간 크게 사업장을 벌릴 정도니 이미 공공연하게 귀족들 사이에선 불법도박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렇게 빠져들지 않더라도 이미 참여자 명부에 이름이 들어간 이상 함부로 윗선에 찌르지도 못하게 되므로 잡힐 확률이 적었다. 불법도박장은 한 군데를 잡는다고 해서 근절하지 못할 정도로 무척이나 조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진짜 도박은 이런 애들 장난과 다르지. 한번 경험해 보면 반드시 그 맛에 중독될 거야.” 에단은 먼저 행동하지 않고 주군을 돌아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쥬다스는 잠자코 테이블에 한 손을 얹고 턱을 괸 채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게임을 즐길 때나 다름없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어때. 이번 기회 놓치면 다신 못 가볼지도 모른다?” 불량배들의 작태는 영락없이 사탕을 내밀며 순진한 아이들을 꼬드기는 유괴범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쥬다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그거 기대는 되는데, 좀 의심스럽구나.” “응? 우린 수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나는 태어나서 지금껏 한 번도.” 지레 찔려 발뺌하려던 청년의 말허리가 싹둑 잘렸다. 쥬다스는 여전히 턱을 괸 채 심드렁하니 말을 이었다. “무언가에 중독 되어본 적이 없어서 말이야.”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찌르는 듯한 금색 눈동자를 마주하며 일동 침묵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19 / 0240 ---------------------------------------------- 25장. Kyrie 이상할 정도로 강한 위압감이 그들을 휘감았다가 이내 스르륵 풀렸다. 불량배들은 쥬다스를 날 때부터 받들어지다 보니 편안하게만 살아와 나태함과 무료함에 찌든 귀족 자제일 것이라 확신했다. ‘그것도 제법 고위의.’ 봉 잡았단 생각에 그들의 얼굴에 저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닳고 닳은 어른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아직 얼굴에서 솜털도 빠지지 않은 풋내기들이었다. 설령 저들이 영민하고 청렴하여 도박에 빠지지 않고 어른들에게 정보를 흘린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불량배들은 아주 하위 계급의 조직원일 뿐이다. 거대한 검은 조직과 맞물려 운영되고 있는 사업은 도박장뿐 아니라 밀수, 인신매매와 같은 범죄부터 시작해서 정식 무역, 유명 포도주 주조 등 다양했다. 그 음습하고도 거대한 연결 고리는 작은 도박장 하나 걸린다고 해서 간단히 꼬리를 잡힐 정도로 허술하지 않았다. ‘황제폐하의 심기를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면 상관없지!’ 걸려도 금방 풀려나고 어지간해선 잘 걸리지도 않으니 십 년 이상 이 바닥에서 구른 시정잡배들의 간덩이는 점점 커져만 갔다. 그들의 눈에는 쥬다스 일행이 꼭 주렁주렁 열린 돈다발 열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어이쿠, 까탈스러운 도련님이시네. 내 장담하지. 오늘 하루 안에 그 재미에 빠져들 수밖에 없을걸?” “하면 내기를 해보는 것이 어떠하냐?” “내기라니.” “구미를 당겨보란 이야기다. 그 정도 흥밋거리도 없이 시간을 빼앗기긴 영 귀찮구나.” 내기란 말에 조직의 다섯 끄나풀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았다. ‘해?’ ‘응, 해.’ 동료들의 지지에 용기를 얻은 우두머리가 인심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기를 하도록 하지. 일단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게임을 즐겨봐. 만일 그쯤에서 중독되지 않고 자의로 ‘놀이터’를 벗어날 수 있다면 너희 승리다.” 도박장에는 게임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해외에서 들여와 구하기 힘든 술과 미녀도 즐비했다. ‘이용료가 비싼 게 흠일 뿐.’ 돈만 있다면 무엇이든 즐길 수 있는 천상의 놀이터. 도박장을 와본 사람은 누구나 동감하는 별칭이었다. “패배한 쪽은 수중의 돈을 모조리 넘겨줄 것.” “동의하지.” 망해가는 가문이 아닌 이상에야 일반적인 귀족은 아무리 간단한 나들이를 나왔더라도 많은 돈을 들고 다닌다. 그에 반해 조직 말단에서 손님을 끌어오는 역할을 하는 다섯 청년은 주머니 속이 텅 비어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내기에 걸린 보상액 자체가 불공평했다. “좋아. 따라 나오셔. 음료 값은 우리가 계산하지.” 불량배들은 웬 떡인가 싶어 서둘러 일을 진행했다. 처음엔 소극적이고 유순하던 사람도 성난 들소처럼 포악하고 만들어버리는 게 바로 도박장이다. 그들은 새 고객을 끌어왔을 뿐 아니라 용돈까지 벌게 되었다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잘난 귀족도 애들은 애구만!’ 꿀 바른 유혹에 이끌려 도박장에 발을 딛는 것도 모자라 제 주머니까지 탈탈 털어 내기를 걸다니. 무모한 데다 현실 감각마저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차던 청년은 문득 가야와 눈이 마주치고 움찔했다. ‘뭐지?’ 방관자가 되어 내내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구경하고 있던 가야가 어째 자신과 비슷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마치 사자굴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 토끼 다섯 마리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들은 잠시 후 그 이유를 똑똑히 깨닫게 된다. * * * 불법 시설이라면 응당 음지에 있을 거란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도박장은 큰길가에 버젓이 자리했다. 겉으로는 크고 아름다운 저택이었는데 정작 그 안에 거주하는 집주인은 없었다. 대신 매일같이 저택을 찾아오는 손님들로 북적였다. 그리고 오늘, 도박장을 찾은 모든 손님의 시선을 강탈한 새 얼굴이 하나 저택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오늘 실적 좀 올리겠구나 싶어 좋아하던 조직의 말단 직원 5명은 처참하게 인상을 구겼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상황이 완전히 틀어져 있었다. 원래 초짜를 데려오면 처음엔 더 큰 금액을 유도하기 위해 돈을 좀 따게 해준다. 하지만 이건 조금 따게 해주는 정도가 아니었다. 손님을 상대하기 위해 줄줄이 나온 조직 직원들이 연패, 참패를 겪고 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화려하고 큰돈이 오가는 도박장 외관에 주눅이 들 법도 한데 쥬다스는 그러지 않고 처음 자리에 앉자마자 자신이 걸 수 있는 최고 금액을 걸었다. 이제 겨우 열일곱 소년이 보이는 통 큰 행동에 잠시 시선이 모여들었다. 또 허영심 가득한 귀족 자제를 낚아왔냐며 킥킥대던 다른 손님들과 직원들은 시간이 갈수록 그가 보이는 게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덧 모두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홀, 짝?” “짝.” 지금 하는 게임은 심지어 운 게임이었다. 원래 주사위를 던져 홀짝을 맞추는 게임이나 카드 뽑기로 운을 테스트하는 게임은 절반 이상이 짜고 치기다. 언뜻 공평해 보이는 게임들이 사실은 온갖 트릭과 각본대로 흘러가는 연극일 뿐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손님이 짝이라고 말했으면 간단한 트릭을 거쳐 홀이 나올 수밖에 없도록 주사위를 굴린다. 그러나. “또 짝이야!” “굉장하다. 벌써 몇 판째 이긴 거지?” “모든 종류의 게임을 다 해보는 것 같은데.” “전문꾼인가 봐. 일부러 농락하는 거 아냐?” 구름 떼처럼 주위를 빙 둘러싸고 구경하던 사람들 사이에서 와 하고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 도박장을 찾은 손님들은 전부 자신의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가히 전설로 남을 만한 게임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반면 하루 만에 자금이 탈탈 털리게 생긴 직원들은 안색이 하얗게 굳었다. ‘젠장! 저 자식,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야!’ 분명 짜고 치는 게임인데 짠 대로 흘러가질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손님한테 따질 수는 없었기에 울상만 짓고 있을 뿐이다. 「바보들.」 몸을 자연에 숨긴 채 둥실둥실 떠있던 유니가 한심해하는 눈빛으로 투덜거렸다. 「지들이 누굴 속일 수 있으면 지들도 속을 수 있는 줄을 알아야지.」 「맞다요! 이게 바로 ‘뛰는 놈 위에 자는 놈 있다’다요!」 「……자는 놈이 묘하게 편해 보이긴 하는데 그거 아냐.」 「에엑! 이거 동화도 있다요. 거북이가 열심히 뛰는 동안 토끼는 자고 있고 뭐 그런 거 아니다요?」 「응, 아니야. 그건 다른 동화고. 원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거든?」 「히잉.」 토니는 자기가 틀렸다는 사실에 충격받고 쭈그러들었다. 그사이 간단히 승수를 하나 더 챙긴 쥬다스를 상대하던 도박장 직원이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럴 순 없어! 이건 사기다!” “흐음.” 달그락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주사위며 카드 등을 별 감흥 없이 쳐다본 쥬다스가 그에 게 물었다. “사기라는 근거는?” “알 게 뭐야! 이런 젠장! 아무리 도박이라지만 벌써 수십 판도 넘게 연승하는 게 말이나 돼?” “마치 그래선 안 된다는 듯 말하는구나.” 쥬다스는 테이블을 구르던 주사위 하나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도박은 확률 게임이질 않나. 희박하긴 하지만 서른 판을 내리 이기는 것도 내 운이라 할 수 있겠지.” “웃기지마! 그게 운이라면 신의 사랑이라도 받는다는 거냐?” “글쎄.” ‘그 비슷한 거라면 받고 있지.’ 그는 주변을 감싼 자연의 가호를 느끼며 속으로만 답했다. 사실 모든 게임을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정령왕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박장에선 마법을 비롯한 이능을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으나 넷이나 되는 정령왕들의 힘은 사람이 기능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를 상대한 직원들은 이유도 모른 채 패배의 쓴잔을 연거푸 들이켜야 했다. 그 곁에 서 있던 가야가 피식 웃으며 한마디 거들었다. “이봐, 판을 보아하니 내 주인이 적어도 너보단 사랑받는 모양인데?” 구경꾼들 사이에서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사실 도박장에서 돈을 딴 사람보다는 잃은 자가 훨씬 많았다. 그들이 보기에 도박장 직원이 속절없이 당하는 꼴은 꽤나 속 시원한 광경이었다. 노골적인 비웃음에 직원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분명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어. 이 사기꾼 자식!” “명확한 근거도 없이 감정적으로 손가락질부터 하다니. 추하구나.” 해가 지고 있는 어둑해진 창밖을 흘낏 내다본 쥬다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겠다.” “뭐?” 열심히 승패 조작에 대해 항의하던 직원은 뜬금없이 자리를 떠난다는 말에 벼락 맞은 듯 쩌적 굳어버렸다. “아, 그리고 내기.” 이대로 지나갈 줄 알고 지켜보던 다섯 불량배는 내기란 말에 뜨끔하여 시선을 피했다. “시시하기 짝이 없더구나.” “그…….” “벌금은 필요 없어.” 그들은 그나마 주머니를 지켰다는 생각에 반색했다. 쥬다스가 그들을 지나쳐 문을 향해 걸어가는 걸 보고만 있던 직원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손뼉을 쳤다. “어딜 가시려고?” 구경꾼을 비집고 나타난 떡대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도박장 보안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배치된 전투 요원들이었다. 척 보기에도 주먹깨나 쓸 것 같아 보이는 덩치들이 나타나자 웅성거리던 다른 손님들도 조용해졌다. 쥐죽은 듯 고요해진 틈 사이에서 쥬다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연.” “?” “보러가기로 선약한 공연이 있어서.”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직원은 그가 자신이 한 말에 친절히 대답해 주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허 하고 어처구니없는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래서 지금 따고 배짱을 하시겠다? 그건 예의가 아니지.” “이런 곳에서 지킬 예의도 있더냐?”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목소리에 더 약이 오른 직원이 손을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주변을 에워싼 주먹꾼들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와씨, 깜짝이야!” 가까스로 주먹을 피한 바이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마법을 시전 할 새도 없이 달려드는 주먹꾼들 앞에서 마법사는 그야말로 쥐약이었다. 움츠러든 바이칼 대신 가야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주먹을 휘두르는 덩치들을 상대로 거침없이 발길질을 했다. 가벼운 슬리퍼를 신은 가야의 킥에 맞은 상대는 박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발치에 쓰러져 신음하는 부하를 내려다본 직원이 인상을 찡그리곤 엄포를 놓았다. “무슨 꼼수를 부려 사기를 쳤는지는 몰라도 먹은 건 다시 다 토해내야겠어.” 결국 돈이 문제였다. 도박장 입장에선 이렇게 잃고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때려 눕혀서라도 잃은 건 되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정작 쥬다스 일행이 순순히 당하지 않았기에 도박장 내부에선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와장창 소란에 휩쓸려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게임판이며 술병이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러자 흥분한 덩치 하나가 깨진 술병을 들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유리조각이 채 쥬다스에게 닿기도 전에 그는 뜬눈으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커…… 헉.” 뜨거운 피가 미더덕 터지듯 훅 뿜어져 나왔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을 들고 휘둘러 오던 사내를 단칼에 베어버린 에단이 피에 젖은 검을 회수했다. 예기치 못하게 살인사건이 발생하자 다른 손님들 사이에서 비명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피를 본 주먹꾼들이 움찔 자리에 멈춰 섰다. “하, 이 미친놈들. 사람을 죽여?” 이곳은 큰돈이 오가는 고급 도박장이었다. 아무리 불법 시설을 운영하고 있어도 대놓고 사람을 죽이진 않았다. 기껏해야 주먹으로 협박하고 밖으로 쫓아내는 정도였다. 왜냐하면 손님 중에는 주로 귀족이 많았으며, 도박장에 종사하는 직원 중에도 귀족이 다수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상호 간 살인사건이 발생해 봐야 좋을 것 하나 없었다. “시, 시, 신고를.” “신고라면 미리 해두었다.” 단호하게 돌아온 대답에 덜덜 떨던 구경꾼이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쥬다스는 쓰러진 시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법으로 금한 향락과 잃는 것이 당연한 게임, 그리고 당연하게 이어지는 폭력.” 듣는 모두가 흠칫할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였다. “이런 것이 나라의 음지에서 성행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문이 열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이 들어왔다. 일반 경비대가 아닌 황실 기사단이었다. 기사들은 일제히 쥬다스를 향해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이쯤에서 도박장 직원들은 그가 평범한 귀족 자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당신은…….” 신음처럼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뒤로 하고 쥬다스는 방 안에서 떠났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요즘 모기가 정말 기승을 부리는군요 ㅠㅠ 팔다리 발바닥(?)할 것 없이 온통 모기에 물렸는데, 문제는 물린 곳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툭 터져서 푹 파이는 기괴한 증상을 보인다는.....;;; 으아아 징그러워요. ㅠ.ㅠ 내몸이지만 징그럽다...!(바들바들) 다들 모기 조심하셔요.ㅠㅠㅠㅠ 그... 그럼 즐거운 하루 보내셨길 바랍니다.ㅎ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함께 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0220 / 0240 ---------------------------------------------- 25장. Kyrie “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건물을 나온 후 바이칼이 연신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뒷일은 어련히 황실기사단이 잘 처리하겠지만 이번 사안이 단순히 도박장 한 군데만의 문제는 아니리란 생각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라 도박장이 돌아가는 행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전원이 같은 짐작을 해냈다. 그 정도 규모의 놀이터라니, 저건 막대한 운영 자금과 무수한 인력을 굴리는 거대 조직이다. 고위 귀족과 더불어 그 뒷배를 봐주는 세력이 분명 존재했다. “저 녀석들, 뭔가 뒤가 구린내가 나는데요. 살살 구슬리든 고문하든 해서 배후를 잘 캐내 보면…….” “구린내라, 좋은 표현이로구나.” 뜬금없는 부분에서 칭찬을 받게 된 바이칼이 머쓱하게 코끝을 훔쳤다. 쥬다스는 발길을 돌리지 않은 채 계속 걸으며 말했다. “하지만 빛나기만 하는 나라는 없단다. 사람이 모인 곳엔 어딘가 꼭 구린내가 나게 마련이지.” 조금 전까지 냉혹하게 기사단을 투입해 도박장을 진압하라 명한 사람답지 않은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최고의 인재양성기관이라 불리는 루바흐. 그리고 이 제국을 다스리는 자들이 모이는 황궁. 너희가 보기엔 어떠했느냐?” “그건.” 쉽사리 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아니, 답은 알고 있어.’ 바이칼과 에단, 크리스티나는 같은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당장 눈앞에 주군으로 모시고 있는 쥬다스만 보아도 답은 나왔다. 그가 예시로 든 두 장소는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라 칭송받았지만 그다지 아름답기만 한 것도, 위대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에겐 찬란한 햇살처럼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순간이 다른 어떤 이에겐 캄캄한 밤에 숨통을 조르던 끔찍한 악몽으로 기억되기도 했다. 사람이 모인 곳은 똑같다. 천민이든 귀인이든,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결국 빛나기만 할 수는 없다. “그게 옳은 일이라는 뜻은 아니다. 분명 바뀌어야 하고 깔끔하게 고쳐져야 할 부분이지. 그건 이를테면.” “으음.” “변소 같은 거란다.” “예?” 진지하게 듣고 있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변소 타령에 모두 놀란 아기사슴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더러운 오물이 싫다 한들 사람으로 하여금 배변을 금할 수는 없어.” “그…… 렇지요.” “하지만 가는 길마다 아무 데나 오물이 널려 있으면 그건 너무 더럽질 않겠느냐.” “더, 더럽죠.” 가까스로 의식에 흐름에 따라 대답하고 있던 바이칼은 문득 자기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건가 혼란에 빠져 눈동자를 떨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똥을 더럽다 욕할 게 아니라 나라의 변소를 지어주는 게지.” “……!” 그제야 확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와 닿은 바이칼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에단과 크리스티나는 그보다 한발 앞서 탄식하는 중이었다. ‘초점을 맞춰야 할 건 오물 따위가 아니라.’ 오물을 배설할 수밖에 없는 세상이다. 당연히 위에서 군림하며 나라를 더럽히는 치들을 벌하고 구석구석 빛을 나누어주는 것을 정치라 여겼던 이들의 머릿속에 새로운 개념이 세워졌다. 그들이 멍하니 상념에 잠긴 사이 쥬다스가 가벼이 덧붙였다. “조만간 루바르잔이 쌓아 방치해 둔 오물과 마주하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땐 명령만 하십시오.” 바이칼은 장난스레 씩 웃었다. “아주 끝내주는 변소를 짓겠습니다.” 보란 듯 호언장담하는 말에 다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덧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낮과 저녁의 경계에 걸친 시간대에 뜨는 달은 이제 막 봉오리를 피운 꽃처럼 여린 색을 띠었다. 저 멀리 어둠과 불빛이 뒤섞여 반짝이는 강이 보였다. “참, 그러고 보니 쥬다스 님.” “음?” “정말로 무언가에 중독되어 보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까?” 아까 전 그가 불량배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쥬다스는 웃음기를 담아 되물었다. “왜, 재미없어 보이누?” “아뇨. 그래서가 아니라.” “거짓말이야.” “예에?”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주군을 보며 바이칼이 입을 떡 벌렸다. “끊으려야 도저히 끊을 생각이 들지 않는 걸 중독이라고 한다면.” 세상엔 도박이나 음주처럼 부정적인 중독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노래를 좋아하는 것도 중독이 될 수 있다. “지금처럼 너희들을 놀……. 아니, 함께 시간을 보내며 노는 것도 중독이라 할 수 있겠지.” ‘방금 놀린다고 하려시던 것 같은데.’ 아이들이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지만 쥬다스는 모르는 척 다시 말을 이었다. “햇볕 좋은 날 산책하는 것도 좋고. 책을 읽는 시간도 버릴 수가 없고. 박하사탕도 여직 끊을 수가 없고.” 그가 끊지 못하는 것들 중에는 전생에서부터 이어온 취미나 입맛도 있었다. 그는 과거와 현재, 모든 부분이 전부 자신의 것임을 인정했다. “이런. 말하고 나니 완전히 욕심쟁이 같구나.” “……조금 더.” 묵묵히 뒤를 따르던 에단이 문득 제 목소리를 내었다. “좀 더 욕심내셔도 됩니다.” “음?” “차라리 전하께서 많은 걸 욕심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쥬다스가 어린 날 가졌던 공허한 눈을 기억했다. 환상 속에서조차 보고 싶지 않은 눈이었다. 그런 에단을 마주본 쥬다스는 이제 더 이상 그가 어린 소년이 아님을 깨달았다. 열아홉, 이미 성년식을 마친 시기. 쥬다스의 눈에는 한없이 어리게만 보였지만 아이는 착실히 자라 어느 틈엔가 뒤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가 가진 검은 눈동자는 딱딱해 보이지 않았다.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간절히 바랄 수 있는 따뜻함이 그 안에 있었다. 그걸 알아차린 쥬다스는 조금 놀랐다. ‘어느덧 읽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졌구나.’ 가을하늘처럼 청명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고맙다, 에단.” 어둠이 내린 강가 한복판에 환하게 불을 밝힌 무대가 보였다. 미리 예고를 하고 손님을 끌어모은 공연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직 불빛을 보고 모여든 사람은 별로 없었다. 텅 빈 무대에 양 뿔이 달린 청초한 소녀 하나가 서 있었다. 구불구불 등허리를 덮는 레몬빛 머리카락과 하얀 프릴로 장식한 귀여운 미니드레스가 잘 어우러져 꼭 강가에 떨어진 천사를 보는 듯했다. 의상이며 분위기까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많은 부분이 달라졌지만 일행은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키리에.’ 무대에 선 키리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살며시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쥬다스가 무대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마치 마법처럼 그녀의 눈이 떠졌다. 겁에 질려 떨고만 있던 노예소녀는 그를 본 순간 함빡 웃음을 머금었다. 아. 탄성과도 같은 맑은 목소리가 다홍색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걸 시작으로 키리에는 마치 친구에게 하는 다정한 속삭임처럼 반주 없이 노래를 시작했다.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물도 아닌 ―50골드라는 이름표를 단 소녀는, ―인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물건도 아닌 것을 파는 ‘시장’이란 곳에서 자랐어요. 노래는 바로 그녀 자신의 이야기였다. 특별한 반주도 없이 흘러나오는 단조로운 노랫소리를 듣고도 홀린 듯 사람들이 점차 모여들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가 바라야만 했던 소원은 ―구속이란 이름의 행복. ―하지만 정말로 행복했다면 왜 소녀는 단 한번도 ‘싫어’라고 말할 수 없었을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다지 슬픈 가사도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들은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정적을 깬 건 갑자기 무대를 감싸고 피어오른 연기였다. 동시에 귓가가 멍멍해질 정도로 큰 음악이 터져 나왔다. 키리에는 이젠 슬픔이 주체가 아니라 기쁨을 담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가 부르는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모래알이 파도에 휩쓸리듯 같은 감정에 휩쓸려 열광했다. 노래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이 몰려와 무대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타인의 감정을 움직이는 노래라니, 역시 대단하구나.’ 이럴 줄 알고 있었으면서도 쥬다스는 새삼 감탄했다. 그녀의 노래는 상상했던 이상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사람은 타인과 교감할 때 애정을 느낀다. 노래를 통해 기쁨과 슬픔, 모든 감정을 전이시키는 키리에는 그 목소리를 듣는 관객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녀였다. “와줘서 고마워요.” 노래가 끝날 무렵, 그녀가 속삭이듯 말하며 웃었다. 순수한 애정이 가득 담긴 감사인사였다. 관객이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지만 키리에가 바라보고 있던 건 단 한 사람이었다. 그 역시 미소를 지어 그녀의 인사에 화답했다. 머리 위로 떠오른 커다랗고 둥근 달마저 반짝이는 박수갈채를 보내는 듯하였다. 무대는 이제 시작이었다. 아직 음악 소리가 끝나지 않은 강변을 뒤로 한 채 쥬다스 일행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허가받고 나온 외출이라지만 밤을 새워가며 궁 밖에 있을 순 없었다. 돌아가는 길, 여전히 가슴을 쿵쿵 울리는 박자에 따라 휘파람을 불던 바이칼이 먼저 운을 떼었다. “제가 진짜 음악엔 관심 없었거든요?” “도박에 관심이 많았겠지.” “……단장.”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억울해할 수도 없었다. 인상만 종잇장마냥 꾸깃거리던 바이칼은 푹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이건 진짜 순식간에 매료되더군요. 공연을 보는 순간만큼은 사랑에 빠진 기분? 내내 두근거려서 제가 미친 줄 알았다니까요.” 그랬던 게 공연장을 벗어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꼭 한바탕 신나는 꿈을 꾸고 온 기분이었다. 바이칼은 진지하게 팔짱을 낀 채 단언했다. “장담하죠. 키리에 녀석, 대박 날 겁니다.” “이미 대박은 난 것 같은데.” 에단이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완전히 축제 현장처럼 바글거리는 강가를 턱짓했다. 간이로 설치한 공연장엔 남녀노소, 신분귀천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든 상태였다. 그 많은 사람을 한마음으로 열광하게 만드는 소녀를 보며 쥬다스도 농담을 던졌다. “사인이라도 받아둘 걸 그랬구나.” 농담치곤 제법 진지한 어투로 말하는 바람에 에단은 순간 돌아가서 사인을 받아와야 하나 내적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그녀로 인해 새 공연 문화가 유행하겠군요.” 크리스티나도 이번 키리에의 공연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공연이라 함인즉, 오로지 귀족을 대상으로 지은 근사한 홀에 모여 와인을 들며 고상하고 우아한 악기연주를 감상하는 형태뿐이었다. 때문에 남성들은 따분함을 느껴 공연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관람료가 비싸 귀부인들 사이에서나 친목을 다지는 용도로 종종 찾았다. 이번 공연은 그 틀에 박힌 무대에서 벗어나 누구나 자유롭게 노래하고 감상할 수 있는 대중가요의 첫 시작이었다. ‘아직 이 나라에선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구나.’ 비단 문화적인 성장만이 숙제가 아니었다. 낮에 제압한 도박장에 얽힌 검은 세력을 조사하다보면 또 예기치 못한 문제가 발생할지도 모른다. 우스갯소리로 변소 이야길 하긴 했지만 정말로 사회의 더러운 찌꺼기를 모아 합법적으로 관리할 체제가 필요했다. 「이그레트. 네가 무슨 생각하고 있는진 알겠는데.」 귀신같이 그의 생각을 읽어낸 유니가 고개를 저었다. 「수백 년이나 지속해 온 악습을 한순간에 바꾼다는 건 불가능해. 역대 황제들이 전부 몰라서 그냥 놔둔 게 아니야.」 “…….” 「그러니까 너무 다 짊어지려고 하지는 마.」 언뜻 매정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쥬다스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건드리면 부푼 고름을 터뜨리는 격이 되겠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천천히 속도를 맞추어 접근할 생각이었다.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이 거대한 제국의 공연 문화를 흔들기 시작한 키리에의 노래처럼.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1 / 0240 ---------------------------------------------- 26장. 첫눈 가을을 닫는 비가 지상에 남은 온기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후, 젖은 낙엽 위로 찬바람이 불었다. 이제 아침 동이 트면서 창문에 서리가 함께 끼는 그런 계절이었다. 제법 싸늘해진 공기 아래로 전날 못다 내린 비가 진눈깨비가 되어 흩날렸다. “어흐, 추워.” 하루아침 새 변덕스럽게 변해버린 날씨에 바이칼이 팔짱낀 자세로 바들바들 떨며 실내에 뛰어 들어왔다. 그가 착용하고 있는 의상은 기사단 임무수행 중 입는 정복이긴 했지만 춘추 전용으로 통풍이 잘 되는 얇은 재질의 로브 종류였다. 머리에 달라붙은 반쯤 녹은 얼음알갱이를 툭툭 털어내던 그의 어깨에서 플루비가 폴짝 뛰어내렸다. “삐이익.” 따뜻한 기온을 좋아하는 블루 와이번은 점차 추워지는 날씨에 적응하지 못하고 두터운 카펫 아래로 버둥버둥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날개가 걸려 머리만 들어갔을 뿐 몸통은 여전히 밖에 남아 있었다. 보다 못한 바이칼이 플루비를 꺼내 담요를 둘러주려 했다. 하지만 추위에 떨던 플루비는 좀처럼 카펫 아래에서 머리를 꺼낼 생각을 않고 고집을 부렸다. “야이 멍청한.” “삐이!” “날개가 꼈다고! 머리만 따뜻해지면 다냐!” “쁘익! 삐에에엑!” 죽을힘을 다해 버티는 플루비를 카페트 아래에서 끄집어내는 데에 실패한 바이칼이 하는 수 없이 담요를 들고 와 푸른 등짝에 덮어주었다. “오늘도 사이가 좋구나.” “……전하. 와이번은 머리 좋아지는 교육 같은 거 없을까요?” “글쎄, 지금도 충분히 영리해 보이는데 말이다.” 손수 주전자에서 따뜻한 음료를 컵에 따라 가져온 쥬다스가 이를 바이칼에게 건네주었다. 마침 진눈깨비를 잔뜩 맞고 들어온 바이칼은 감사히 컵을 받아 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핫초코였다. 컵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그나마 손바닥을 따스하게 달구어주자 살 것 같았다. 바이칼은 한숨을 푹 쉬며 핫초코를 홀짝였다. 찬바람 부는 바깥이 어찌나 추운지 마음 같아선 플루비처럼 카펫 밑에라도 기어들어가고 싶을 지경이었다. “날이 추워서 더 힘들었던 모양이야.” “어으으, 말도 마십쇼. 어찌 된 게 단장의 괴롭힘이 점점 심해집니다.” 지난번 도박장을 다녀온 뒤로 에단은 곧장 기사단원을 소집했고, 하루도 빠짐없이 극악한 난이도의 훈련을 시행했다. 마법기사라고 종종 제외시켜 주던 고강도 훈련에서도 이젠 예외가 없었다. 바이칼은 쉬는 시간에 여가활동을 즐기고 온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이냐며 억울해했고, 에단은 그 절규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덕분에 최근 두 달간 기사단의 체력은 몰라보게 좋아졌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나도 혹독했다. “대체, 마법기사에게 검기사들이 하는 훈련을 똑같이 시킨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이러다 저 진짜 죽을 지도 몰라요.” “저런.” 입으로는 안타까워했지만 정작 쥬다스의 표정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그래도 일단 받아주자 평소 에단에게 이를 갈고 있던 바이칼의 하소연이 이어졌다. “가끔 단장이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호오, 그럼 무슨 종족 같으냐?” “알고 보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아닐까요?” “……아니다만.” 마지막 대답은 쥬다스가 한 말이 아니었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기묘한 감각에 바이칼은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싸하게 굳어졌다. “아쉽게 됐군.” “다, 단장.” “내가 악마였다면 자네에게 진정한 지옥을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그, 그런 게 아니라.” “아무래도 훈련 강도가 약했던 모양이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에단은 몰래 상관을 흉보고 있다 딱 걸린 부하에게 지옥까진 아니더라도 그 유사한 경험까지는 체험시켜 줄 의사가 충만했다. 기겁하여 고개를 붕붕 내젓는 바이칼을 불쌍히 여긴 쥬다스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최근 교황청에서 진명식을 열었다고 하더구나.” “……진명식을.” 거의 바이칼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던 에단이 멈칫 태도를 누그러뜨리며 반응했다. 진명식이란 신성을 국교로 믿는 루바르잔에서 15세 이하 아이들에게 ‘진명’이라 불리는 세례명을 부여하는 특별한 행사였다. 그들도 루바흐에 다닐 적에 교황으로부터 직접 진명을 받은 바 있었다. 원래는 매년 봄에 치르는 행사였으나 부득이한 경우로 정상적인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이렇듯 해의 마지막 시기에 교황청의 문이 열리기도 하였다. “마침 기도를 위해 엘리시움을 방문하던 참이었는데.” 군주의 후계자라 하여도 결국 신의 피조물. 순례의 길을 마치고 돌아온 후 무사귀환에 대한 감사기도를 올리는 게 예법이었다. 그가 귀환한 지도 꽤 오래 지났으니 더 늦기 전에 교황청을 한번 방문해야 할 시기긴 했다. “이번에 가면 후배 아이들도 만나볼 수 있겠어.” “크흠. 뭔가 묘한 기분이네요.” 바이칼은 어색하게 헛기침을 쿨럭였다. 진명식을 받으러갈 때만 해도 그들은 지금 같은 사이가 아니었다. 당시 쥬다스는 ‘백로황자’라 조롱받을 시기였고 그러다 보니 충성은커녕 껄끄럽기만 한 대상이었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고 심지어 바이칼은 같은 조원도 아니었다. 멋쩍은 표정으로 뒤통수만 긁적이던 바이칼이 문득 쥬다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크리스티나 님도 함께 가시는 겁니까?” “아, 그 아이는.” 크리스티나는 지금 특별한 업무를 처리하는 중이었다. 친위기사단으로 쥬다스를 늘 곁에서 호위하는 임무를 가진 에단, 바이칼과 다르게 그녀는 기사도 아니었고 집안의 작위를 이은 후계자도 아니었다. 가문을 잇는 건 그녀의 오라비인 알시오스 C.델피아의 몫이다. “루바흐 학생부에 지원했더구나.” “허어.” 의외인 소식이면서도 그녀라면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바이칼이 한숨도 경탄도 아닌 애매한 숨을 뱉었다. 학생부는 루바흐를 총괄하는 핵심이자 졸업자 중에서도 최상위 성적을 유지했던 자들만이 지원 가능한 부서였다. 학생부에 들어간다는 뜻은 곧 황실소속의 인재로 발탁된다는 의미. 그녀는 귀족영애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새 지위와 명예를 받아 황실을 위해 일하는 쪽을 택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바쁠 게야. 안정적인 위치를 찾으면 곧장 찾아오겠다고 하였다.” “예에, 뭐. 그분도 참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 할지. 거 애매한 성격이네요.” “그 아이는 언제나 자신이 해야 할 바를 똑 부러지게 정하질 않느냐.” “그렇긴 하지만 말입니다.” ‘정작 중요한 말을 못하시던데요.’ 오죽하면 눈치 없기로 유명한 자신이 다 알아차렸을까 싶다. 바이칼은 뒷말은 꿀꺽 삼키고 물끄러미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모든 면에서 현명한 주군이 어째서 이런 쪽으로는 가능성을 절대 열지 않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끔 보면 모르시는 게 아니라 일부러 철벽을 치시는 건가 싶기도.’ 비단 크리스티나뿐만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여성에 대해 쥬다스가 보이는 거부방식은 정말 상대를 싫어한다거나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는 종류가 아니었다. 모든 친밀한 관계에서 그는 한 가지 태도를 고수했다. 마치 어른이 아기를 예뻐하듯 그런 자상함. 아무리 아기가 예뻐도 성인남성이 아기를 보면서 설레지 않듯, 그리 대했다. 그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던 바이칼이 손바닥에 주먹을 통 내려치며 입을 열었다. “참! 그럼 다녀오시는 길에 파티에 참석하시면 시간이 딱 되겠네요.” “……파티? 설마.” 에단이 먼저 그 뜻을 짐작하고 중얼거렸다. “그때 말이 나왔던 그 가면파티인가.” “맞습니다. 단장도 기억하고 계셨네요. 흐흐, 아닌 척하시더니 역시 관심 있으셨…… 으악!” 괜히 깐족거리다 기어코 매를 벌고 만 바이칼을 보며 쥬다스가 작게 웃었다. “교황청을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티라. 겸사겸사 그러면 되겠구나.” “그럼 일정을 조율해 보겠습니다.” 교황청은 수도 엘리와 바로 붙어있었지만 아무 때나 허가받지 않고 입장할 수는 없는 성역이다. 신께 올리는 기도도 기도였지만 그곳에는 개인적으로도 보고 싶은 벗들이 있었다. ‘그리고 확인하고 싶은 것도 몇 가지.’ 쥬다스는 교황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아무래도 제법 바쁜 일정이 될 것 같았다. * * * 성전 엘리시움. 마침 진명식을 맞은 기간이라 교황청의 포탈관리소는 쉴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한산하던 예배당에도 전부 불을 밝혔으며 혹시 모를 사건사고를 막기 위해 감시하는 성기사들이 빈틈없이 객들의 발걸음을 지켜보았다. 엄숙한 분위기에서 은은한 찬양소리만 울려 퍼지던 교황청에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찾아오자 고요가 깨졌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저들끼리의 외출에 신이 난 상태였고 교황청의 큰 규모와 아름다움에 감탄하느라 바빴다. 그렇지만 사제들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이 소란이 싫지 않은 눈치였다. “역시 아이들이 있으니 활기가 생기는군요.” “귀엽기도 하지.” “후후. 저대로 잘 자라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제들은 푸근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란 어른들의 시선처럼 마냥 귀엽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다. 열 살 어린아이들 사이에서도 그들만의 세계가 있었다. 특히 귀족 출신인 아이들은 힘과 명예에 무척이나 민감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힘이란 결국 ‘인기’였다. 인기 많은 아이 앞에서 제 편이 없는 아이는 소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씨, 지겨워.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거야.” 사제의 지시에 따라 예배당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아이들 중 한 소녀가 불만을 터뜨렸다. 교황청에는 진명을 받으러 온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여러 목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엘리시움을 찾았고 자연히 진명을 받는 순서는 뒤로 미루어졌다. 지루함에 발끝으로 대리석바닥만 차던 아이들에게 다른 조 친구가 다가와 쑥덕거렸다. “페르디온이 지금 대예배당 앞에서 모이자는데?” “가자. 어차피 오늘도 땡이야.” 예배당에서 하는 일도 없이 이틀이나 기다리는 바람에 마침 지루해하던 두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나 한 아이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이거 조별과제인데.” “어쩌라고.” “그렇게 자리에서 이탈하면 벌점이…….” “뭐래. 벌점 조금 받는다고 안 죽거든? 하여간 쫄보 자식.” “냅 둬. 저 자식 아슬란이잖아. 원래 책만 보는 찐따로 유명해.” 괜히 말렸다가 욕만 들어먹게 된 아슬란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올해 11살, 몇 달 뒤엔 곧 12살이 되는 그는 아이들 사이에서 힘이 없는 축에 속했다. 성적은 과목마다 일등 이등을 다툴 정도로 무척 좋은 편이었지만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친구를 거의 사귀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벌점 때문에 같은 조원들을 말리려던 아슬란은 한숨을 삼키며 그냥 입을 닫기로 했다. 더 말해봐야 먹힐 상대들이 아니었다. 조원들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듯 그 역시도 조원들을 탐탁지 않아했다. ‘이번 학기 성적은 잘 받기 틀렸네.’ 친하지 않아도 팀을 위해 협력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조원들처럼처럼 놀기 좋아하고 점수에는 그다지 생각 없는 비협조적인 아이들도 있었다. 아슬란은 이번 진명식이 루바흐에서 수업 일수로 인정해 주는 조별과제인 만큼 이로 인해 깎이는 점수가 제법 클 것이라 예측했다. “재수 없어.” 가장 먼저 일어선 소녀가 코웃음을 치며 친구들을 데리고 예배당을 나가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2 / 0240 ---------------------------------------------- 26장. 첫눈 홀로 적막한 예배당에 남은 아슬란은 씁쓸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다 이내 배낭을 뒤적여 챙겨온 교재를 꺼내 들었다. ‘수업을 빠지니까 예습이라도 해야.’ 그러나 막상 다들 놀러나갔는데 혼자 남아 공부하려니 내키지 않았다. 아슬란은 망설이다 주섬주섬 다른 책을 꺼내 들었다. 필기와는 상관없는 책. 그는 소중히 책을 펼쳐 보았다. 지금껏 혼자서 시간을 보낼 때마다 그려온 그림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는 빈 종이에 상상 속의 인물이나 동물 등을 주로 그려두었다. 그림은 모이고 모여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게 바로 그의 유일한 취미생활이었다. ‘어디까지 그렸더라.’ 며칠 전 그리다 만 그림이 보였다. 그는 그 부분을 찢어버리고 새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에 닿는 소리만 고요한 예배당에 울렸다. 아슬란은 그 소리를 가장 좋아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과 별개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순간이 가장 보람 있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이 무척 빠르게 지나갔다. 그는 정교하고 섬세한 표현을 즐겨했다. 그러다 보니 한 장면을 완성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만 두 시간이 넘었다. “휴우, 됐다…….” “그림 그리는 걸 무척 좋아하나 보구나.” “……!”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아슬란이 그림을 끌어안으며 흠칫 어깨를 좁혔다. 예배당의 긴 의자에 누군가 함께 앉아 있었다. 예배당이니까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는 있지만 하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줄은 몰랐다. 학교에서도 우수한 성적 외엔 아무도 관심 갖는 사람이 없었다. 이 와중에 자신의 그림을 남에게 보여줬다는 사실이 좀 창피하기도 했다. 놀람과 수치심, 걱정 등으로 물든 아이의 표정을 보며 상대가 난처한 얼굴을 했다. “음, 미안하다. 훔쳐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옆에서 몇 번 불렀는데 답이 없어서 기다렸단다.” ‘기다렸다고?’ 원래 아슬란은 한 번 집중하면 옆에서 뭐라 하든 잘 듣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 있곤 했다. 상대의 말이 사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자 그는 조금 경계를 풀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림은 끌어안은 채였고 낯선 이를 앞에 둔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교성이 거의 없다시피 한 그에게 있어 낯선 사람과 둘이 대화하는 상황은 고문에 가까웠다. ‘하지만 어쩐지 낯설기만 한 사람은 아닌 듯한……?’ 상대방은 그보다 조금 더 키가 큰 소년이었다. 아직 어른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교복을 입은 학생도 아니었다. 소년에게는 금방 시선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자상함을 담은 금색 눈동자라든가, 고귀하다 못해 신성하게까지 느껴지는 은빛 머리카락이라든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아슬란은 헉 숨을 들이켜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화, 황……!” 유일무이한 은발금안, 그 소문 무성한 황태자였다. 놀라 일어나긴 했는데 그러는 바람에 그를 내려다보게 되었단 사실을 깨달은 아슬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손에서 그림을 그려둔 공책이 툭 떨어졌다. 허둥지둥 무릎을 꿇고 엎드리면서 종이가 구겨졌지만 이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라몬가의 아슬란 라몬이 전하를 뵙습니다.” “따지고 보면 선후배간이니 그리 어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쥬다스는 떨어진 책을 주워 아슬란에게 다시 내밀어주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책을 받아 들자 부드러운 미소가 되돌아왔다.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서 받아본 적 없는 호의였다. 그렇게 어쩌다 보니 다시 쥬다스와 나란히 예배당 의자에 앉게 된 아슬란은 속으로 오만 가지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서 황태자 전하께서 여기 계신 거지? 수행원들은?’ 힐끗 옆을 쳐다보니, 쥬다스는 정말 기도만 하러 온 사람처럼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그 혼자였는데도 무사태평한 기색이었다. 이쯤 되니 정말 황태자가 맞긴 한 건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키리에.” “예, 예?” “나도 정말 좋아하는 가수란다. 노래가 아주 어여쁘지.” 기도를 마친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슬란은 조금 당황하여 머뭇거리다가 그가 그림을 보고 하는 이야기인 걸 알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키리에 엘라이손의 팬입니다.” 아슬란이 아까 그렸던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아이돌 키리에였다. 며칠 전 우연히 학교에서 누군가 녹음해온 그녀의 노래를 듣고 반해 그 자리에서 팬이 되어버렸다. 마법구에 담긴 노랫소리는 직접 들을 때만큼 감정을 움직이는 힘도 없었고 음질도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듣자마자 푹 빠져버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학교에서 유행한다는 놀이나 인기몰이 등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던 아슬란이었지만 키리에만큼은 특별했다. 그녀의 노래에는 눈물이 녹아 있었다. 상처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아픔과 상냥함이. “이거 반갑구나. 나도 그녀의 팬이란다.”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얼마 전엔 공연도 직접 보러 갔었어.” “우와!” 아슬란은 황태자를 직접 만났다는 사실보다 그가 키리에의 공연에 갔었다는 말이 더욱 놀라웠다. 11살 아이의 천진함에 웃고만 쥬다스는 차근차근 공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경청하던 아슬란은 망설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펼쳐보였다. “진짜 키리에는 제 그림 따위보다 훨씬 예쁘지만…….” 흰 종이 위에 그려진 소녀가 새끼 양 한 마리를 품에 꼬옥 안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따뜻해 보이는구나.” 특이한 감상이었다. 보통은 ‘잘 그렸다’거나 ‘실제랑 다르다’등, 그림에 대한 평가를 내렸지 지금처럼 온기를 느끼진 않았다. 게다가 우는 소녀를 보고 따뜻하다고 할 줄은 몰랐던 아슬란이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자 쥬다스는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키리에는 양 수인족이지. 그런 그녀가 작고 힘없는 새끼 양을 안고 함께 울어준다는 건 마치 자신의 어린 과거를 안고 보듬어주는 느낌이 들어.” “아…….” 정확했다. 아슬란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키리에는 따뜻한 노래를 부르니까요.” 두 사람은 같은 가수를 좋아하는 팬으로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런데 전하께선 교황청에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신께 기도를 올리고.” 예배당이니 당연히 기도를 하러 왔다는 말에 아슬란은 아차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벗을 만나러 왔단다.” “벗…….” 황태자가 ‘벗’이라 부를 정도가 되려면 어떤 사람일까. 아슬란은 무심코 그리 생각했다. “한데 그 친구가 지금 좀 바쁜 모양이야.” “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지 몰라 무얼 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후배를 만나게 된 게지.” “하…… 하…….” 아슬란은 스스럼없이 자신을 후배로 대해주는 쥬다스를 보며 조금 전 했던 생각을 철회했다. 그는 특별한 사람을 특별히 대하는 게 아니었다. 특별하지 않은 상대를 특별하게끔 만든다. “다른 친구들은 어디로 갔느냐?” 그 물음에 아이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그들이 친구가 아니라는 점, 기다리라는 지시를 어기고 놀러 나가버린 점, 혼자 그 틈에 끼지 않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점. 어느 하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아슬란이 좀처럼 답하지 못하자 쥬다스는 빙긋이 웃어보였다. “나도 루바흐를 다닐 적에 친구들과 함께 이곳에 왔었지.” “전하께서도…….”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쥬다스는 루바흐에서도 유명한 졸업생이었다. 최악, 최약의 상태로 입학하여 어느 순간 찬란한 날개를 펼친 백로. 2년간 전과목 수석은 물론 조기졸업까지, 그에 관련된 것들은 가히 전설로 남은 일화뿐이었다. “그때 같은 조였던 아이들이 어땠냐면 말이다.” “네.” “‘자유시간마저 같이 지낼 필요는 없겠지’라며 자리를 이탈하곤 했단다.” “……네?”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아슬란에게 쥬다스는 비밀얘기를 나누는 친구처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신이 자리를 이탈하지 않게 하려면 그만큼 유익한 무언가를 알려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지.” “무슨.” “같은 조원은 아니었지만 수업 때 강의 내용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 비꼬던 아이도 있었고.” “어, 어찌 전하께 그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 아이들과 어찌 되었을 것 같으냐?” “혹, 그들을 크게 벌하셨습니까?” 과거 황태자가 루바흐에서 발톱을 숨길 당시 도를 지나친 학생 몇을 그대로 재판에 회부하여 집안 째로 매장시켰다는 일화를 들은 적 있었다. 그래서 아슬란은 그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상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내게 그 누구보다 절친한 친우들이 되어 있단다.” “……!” 도저히 어떤 과정을 거쳐 그리 되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나라면.’ 아슬란은 무릎 위에 놓았던 주먹을 꾹 쥐었다. 자신을 비웃고 모욕하던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저 역겹기만 했다. ‘나라면 절대 못해. 그 자식들과 친구가 되는 일.’ 딱히 친구가 되지 않아도 학교생활에 큰 지장은 없었다. 아슬란은 교사들 사이에선 이미 우수한 인재로 손꼽히고 있었고, 잘하면 조기졸업까지도 가능할지 몰랐다. 이 역겨운 학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반드시 조기졸업을 해내고 싶었다. 그리 생각하던 아슬란의 귓가에 허탈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창피하게 옛날이야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바이칼.” 밤색 머리카락의 소년이 긁적이며 예배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분부하신 대로 말씀을 전달하고 왔습니다.” “고맙구나, 에단.” ‘에단이라면 그 에단인가.’ 에단 R.헤이가. 헤이가 공작의 외동아들인데다 황태자에게 검을 바쳐 루바흐를 졸업하자마자 최연소 기사단장으로 임명된 검술 천재. 루바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바이칼에 대해선 몰라도 에단의 이름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왔다. 과연 실제로 보니 검에 대해 잘 모르는 아슬란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다. 눈에 띄게 큰 키, 절도 있는 태도 등이 더욱 그를 우러러보게 만들었다. 아슬란은 꼭 교과서에 실린 위인을 보는 기분으로 쥬다스와 에단을 번갈아보았다. “루바흐 학생?” “……?” 그때 바이칼이 툭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런 질문에 아슬란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바이칼이 씩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 후배구만. 반가워. 바이칼이다.” “아슬란 라몬입니다.” 조심스럽게 악수에 응하자 바이칼이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븡금 들은 근 잊으어.” “……네?” 복화술도 아니고 이를 앙 다물고 웅얼거리는 소리에 아슬란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바이칼이 답답하단 표정으로 재차 강요했다. “방금 전하께 들은 건 잊으라고. 창피하니까.” 그러자 에단이 쯧 혀를 차며 강제로 두 사람의 손을 떼어놓았다. “있었던 사실을 잊게 만들 궁리나 하지 말고 반성이나 하도록.” “에이씨.” “씨?” “씨…… 씻은 듯이 반성하겠습니다.” 아슬란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공방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화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3 / 0240 ---------------------------------------------- 26장. 첫눈 쥬다스에 이은 에단과 바이칼의 합류로 적막하던 예배당은 제법 떠들썩해졌다. 바이칼에게 나름 장단을 맞춰주곤 있지만 에단은 본래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니었다. 대신 그 점을 보완할 존재가 하나 더 끼어 있었다. “삐익!” 아슬란은 바이칼의 품속에서 툭 튀어나온 파충류의 머리에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드, 드, 드래곤?” “허어, 이 녀석이 무슨 드래곤이야. 와이번이다, 와이번.” 플루비를 예배당 바닥에 풀어준 바이칼이 어느 틈엔가 벽까지 도망간 아슬란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대체 이 쬐끄만 걸 보고 어떻게 드래곤을 떠올리냐?” “그게, 책에서 본 모습이랑 똑같아서…….” 유리를 깎아 만든 것 같은 푸르고 투명한 비늘, 몸길이에 비해 짤막한 앞발과 앉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통통한 뒷다리, 그리고 박쥐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와 긴 꼬리까지. 모습은 확실히 드래곤과 닮았지만 기껏해야 닭 한 마리 크기였다. 우물우물 변명을 하긴 했지만 아슬란 스스로도 겁을 먹었단 사실이 민망했기에 금방 입을 꾹 다물었다.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플루비가 커다란 주홍빛 눈동자를 깜빡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막 잠에서 깬 꼬마 와이번은 양 날개를 부채 펴듯 쫘악 펼친 채 늘어져라 하품했다. 크기는 앙증맞았지만 주둥이 사이로 엿보이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플루비가 애완용 동물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플루비라고 한단다.” 아슬란이 와이번을 향해 호기심을 드러내자 쥬다스가 넌지시 이름을 알려주었다. 열한 살 소년은 몹시 상기된 얼굴로 양해를 구했다. “이름이 플루비…… 군요. 혹시 그려도 될까요?” “엉? 좋을 대로 해. 워낙 빨빨거리고 잘 돌아다니는 녀석이라 가만히 있진 않겠지만.” 플루비는 이미 신나게 예배당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 플루비의 집사로 인정받은 바이칼이 대신 대꾸해 주자 아슬란은 펜을 입에 물고 연습장을 펼쳤다. “괜찮습니다. 자연스럽게 돌아다니는 편이 그리기 편해요.” “그래? 가만히 있어야 더 편한 거 아니야? 하긴 난 그림은 잘 몰라서.” “저도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판에 박은 듯 똑같이 그리려는 건 아니에요. 그냥…….” 그사이 플루비는 성화가 타오르는 촛대를 신기한 눈으로 톡톡 건드려 보고 있었다. 아슬란은 꼬리를 살랑대는 와이번을 바라보며 흰 종이 위로 펜을 가져갔다. “제가 그리고 싶은 건 ‘느낌’이에요.” “느낌?” “예. 지금 이 그림을 그리는 제가 느낀 느낌이요.” 아이들의 말은 가끔 너무 직관적이어서 어려울 때가 있다. 바이칼은 느낌을 그리고 싶다는 아슬란의 이야기에 난해함을 느끼고 입을 다물었다. 운동감각은 뛰어났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바이칼과 그리 수준 차이가 나지 않는 에단도 역시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슬란은 이미 그림에 열중해 있었다. 끼이익. 와이번 낑낑 우는 소리, 펜 사각거리는 소리만 오묘하게 이어지던 예배당에 누군가 들어섰다. 오래된 경첩이 공기를 긁는 소리에 아슬란을 제외한 모든 이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다. “어…….” 시원하게 드러낸 하얀 목선 위로 분홍색 단발이 찰랑거렸다. 머리 양쪽에 더듬이처럼 쪽머리를 내어 민트색 리본으로 묶어놓은 헤어 스타일이 앙증맞아 보였다. 양손으로 꼬옥 문고리를 잡은 채 멍하니 예배당 안을 쳐다보고 있는 소녀는 자그마한 체구에 유난히 하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대조되는 진한 남색 교복 스커트가 무릎께에서 살랑였다. “어어?” 소녀는 곧장 쥬다스를 알아보았다. 놀람이 깃든 크림색 눈동자는 동그랗고 큼직했다.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겨울바람 정령이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눈알갱이가 섞인 바람을 훅 일으켰다. 서늘하게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에 쥬다스가 잔잔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리베흐.” “우아!” 그러자 놀라 굳어있던 소녀, 리베흐의 안색이 화악 밝아졌다. “오빠다!” “…….” “앗, 아니지. 쥬다스 님…… 아니아니, ‘전하를 뵙습니다’?” 5년 전 루바흐에서 같은 정령학연구소 수업을 듣던 7살 꼬마 리베흐였다. 정령술사로서의 굉장한 자질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여전히 겨울바람의 정령 비비와 함께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이젠 비비가 실체화하여 모습을 드러내고 다녔으며 다루는 힘도 한층 강력해졌다는 것이다. 쥬다스가 자란 만큼 꼬마아이도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12살 소녀가 되어 있었다. 습관처럼 쥬다스의 호칭을 남발하던 리베흐는 입술을 오므리며 어색하게 치맛자락을 잡고선 꾸벅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보자 꼭 다 자란 손녀딸의 재롱을 보는 기분이 된 쥬다스는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 원 녀석도, 갑자기 예의를 차리니까 내가 다 어색하구나. 이제 다 컸다는 게야?” 이제 수줍음을 탈 줄도 알게 된 리베흐는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내려 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땐 아가였으니까. ……요?” “되었다. 개인적인 자리에선 예전처럼 대해주렴.” “진짜?! 그래도 돼? ……요?” “그럼. 내게 있어 리베흐는 여전히 아가란다.” “힝. 인제는 아가 아닌데.” 뚱하니 볼을 부풀린 채 꿍얼거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기억 속 꼬마아이 그대로였다. 「어머. 예전의 그 귀염둥이네? 많이 컸다!」 「그러게요. 아이들이란 정말 빨리 자란다니까요.」 유니와 카니도 그녀를 알아보고 반가운 내색을 했다. 「어떨 땐 좀 아쉽더라. 좀 천천히 자라도 귀여울 텐데.」 「으응. 그렇지만 어리다는 건 약하다는 뜻도 되니까요. 얼른 성장하는 편이 생존엔 도움이 되겠죠.」 「괜찮아! 내가 지켜줄 거니까!」 「맞다요! 나요도 지켜줄 수 있다요!」 「……응? 지금 뭔가 대상이 한정적인 기분이 드는데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래? 처음부터 이그레트 얘기였는데.」 “…….” 본의 아니게 정령들의 대화를 엿듣는 꼴이 된 쥬다스의 표정이 다소 어정쩡해졌다. 그는 못 들은 척 리베흐와 밀린 안부 인사를 나누며 생각했다. ‘원래 정령들이 아이를 좋아하긴 하지.’ 그래서 정령술사가 정령과 계약하는 시기는 대부분이 어린 시절이었다. 정령은 어린아이의 눈앞에 가장 잘 나타나고 어른이 되어갈수록 흥미를 잃는다. 한번 계약을 맺으면 죽는 그날까지 함께하지만 정령과 계약을 맺지 않은 채 어른이 되는 경우엔 아무리 자질이 충만해도 곁을 떠나버리곤 했다. 어른이 되든 노인이 되든, 심지어 다시 태어나서까지 늘 맹목적으로 정령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이그레트’가 유일했다. 정령왕들의 철통같은 수비로 계약을 하지 못했을 뿐 아직도 그의 곁을 맴도는 정령은 많았다. ‘생각해 보면 이들은 언제, 어떻게 나를 찾아왔던 걸까?’ 쥬다스는 새삼스럽게 그 과정이 조금 궁금해졌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정령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당연시 여겼던 그들의 관계에도 당연히 첫 만남이란 게 존재했다. 네 정령왕 중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온 건 누구였을지, 어쩌다가 만나게 된 건지, 한 번 궁금하기 시작하니 그물에 고기가 줄줄 올라오듯 여러 궁금증이 딸려 올라왔다. 그사이 리베흐는 루바흐에서 안면이 있었던 에단과 바이칼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에단 님, 바이칼 님도 안녕!” 에단은 가볍게 고개만 까딱였으나 바이칼은 가까이 다가가 소녀의 머리를 헝클며 반갑게 인사했다. “이야, 꼬맹이! 많이 컸네.” 그런 바이칼을 물끄러미 올려다본 리베흐가 헤에 감탄사를 뱉었다. “바이칼 님도 이제 다 큰 거야?” “엉?” “옛날엔 맨날 볼 때마다 에단 님한테 혼나고 있었는데. 헤헤, 철들었나봐!” “내가 그랬냐…….” 12살 꼬마숙녀에게 듣는 과거지사에 바이칼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그를 더 슬프게 만드는 건, 리베흐가 보지 못했을 뿐이지 방금 전까지도 에단에게 한 소리 듣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발전이 없잖아, 발전이. 크흑.’ 그는 남몰래 눈물을 훔친 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는 리베흐에게 툭 질문했다. “야, 꼬맹아. 너도 그럼 진명을 받으러 왔어?” “응! 오늘 받았어.” “벌써 받았다고?” “유디모닉(Eudemonic).” 거침없이 그들 앞에서 진명을 밝혀버리는 리베흐의 당돌함에 바이칼이 기겁하여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듣고 난 후였다. 그림에 집중하느라 누가 왔는지 신경 쓰지 못하고 있던 아슬란도 마침 종이에서 펜을 떼고 그녀를 당황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오! 미치겠구만.” “왜?” “꼬맹이. 진명받을 때 못 들었어? 이건 신과 교황 성하, 그리고 너 자신만 알고 있는 특별한 세례명이야.” 신권으로 내려진 ‘진명’은 유일하게 황권이 통하지 않는 영역이었다. 심지어 황제조차도 강제로 교황청에서 내린 진명을 들을 권한이 없다. 진명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에서 축복과 저주를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충성을 맹세한 주인, 사랑을 맹세한 부부 간이 아니면 진명을 밝히지 않았다. “응, 들었어.” “근데 그걸 홀랑 아무한테나……!” “아무나가 아니잖아.” 리베흐는 맑은 크림색 눈동자로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도 여전히 그에겐 따뜻한 빛이 있었다. 분홍머리 소녀는 이른 아침 갓 떠오른 태양을 만난 해바라기처럼 함박 웃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전부 쥬다스 님이 믿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허어.” “그러니까 괜찮아.” 열두 살, 귀족 출신 학생들로 구성된 작은 사회, 루바흐에서는 그다지 어리고 순수할 나이가 아니다. 오히려 물들 대로 물들어 충분히 영악해졌을 법한 나이였다. 그녀보다 한 살 어린 아슬란조차 그들 사회에 역겨움을 느끼고 홀로 겉돌고 있었다. 그런데도 리베흐는 여전히 쥬다스를 처음 만났던 7살의 순수한 믿음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를 본 쥬다스는 문득 왜 정령들이 유독 어린아이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령들은 단순히 어리다고 해서 다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그들이 좋아하는 건 저런 올곧은 마음이겠지.’ 어찌 보면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신성력도 마찬가지였다.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직관적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순진함을 가질수록 강한 신성력이 몸에 임했다. 영적인 존재는 육체가 아닌 정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상대방을 믿고 사랑해 주는 그 마음이 좋은 것이다. “리베흐.” “응?” 살짝 비뚤어진 민트색 리본이 보였다. 쥬다스는 소녀의 머리카락에 달린 리본을 단정히 정리해 주며 말을 이었다. “믿어주어서 고맙다. 하지만 앞으로는 진명을 이야기할 때 신중해야한다는 점을 잊지 말거라.” 리본은 깔끔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쥬다스가 리베흐보다 어른이긴 했지만 여자아이의 머리를 리본으로 묶는 일이 익숙할 만한 나이도, 그럴 지위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의 손길이 마치 여러 번 여아의 머리를 만져준 사람처럼 익숙하게 느껴져서 리베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건 네게 단 하나뿐인 소중한 이름이니 말이야.” “으응. 알았어.” “착하구나.” 그는 얌전히 대답하는 소녀의 머리를 가벼이 쓰다듬어주고 손을 내렸다. 분홍색 단발머리에 달린 리본이 무척 잘 어울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비가 하염없이 내리는 밤이네요. ^^ 날씨도 선선하고 빗소리가 자글자글(?)해서 좋습니다. 비오는 날엔 역시 커피가 제 맛이 납니다. 게다가 부침개.. 치킨... 피자.... 짬뽕+탕수육..... 따끈한 음식이 안어울리는 게 없는 날이 또 비오는 날 아니겠습니까!! 크으. 내일도 비가 많이 온다하니 안전 유의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ㅎ 늘 감사합니다! 0224 / 0240 ---------------------------------------------- 26장. 첫눈 리베흐는 문득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아슬란을 발견하고 그에게 총총 다가갔다. “넌 누구야?” “……저요?” “응. 난 리베흐.” 무심코 자기 이름을 소개하던 리베흐는 앗 하고 다시 말을 고쳤다. “리베흐 E. 그리젤!” 보통은 학교에서 가문명까지 소개하진 않지만 진명이 생겼으니 써먹고 싶어진 탓이다. 기분 좋게 풀 네임을 알려준 리베흐를 보며 아슬란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슬란 라몬. 진명은 아직…….” “헤에. 네가 아슬란이구나? 이름 들었어!” “날 알아요?” “응. 문과부 1등.” 조금 쑥스러워진 아슬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1등까진 아니에요.” “스승님들이 그러시던데. 천재라며?” “천재도 아닙니다. 그냥 책을 많이 읽어서 성적이 잘 나왔을 뿐이죠.” 다른 아이들이 친구와 놀러 다니는 동안 아슬란은 책과 하루를 보냈다. 자조적으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리베흐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어깨 아래로 쏟아지는 분홍빛 머리카락이 흡사 솜사탕처럼 달달해 보였다. “신기하당. 난 책 읽는 거 무지 싫어하는데.” “왜요?” “재미없어.” 리베흐는 어릴 적부터 무척 영특한 아이였다. 하지만 머리가 좋다고 해서 공부를 좋아하진 않았다. 리베흐는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것보다 바깥에 나가 뛰어노는 걸 좋아하는 발랄한 소녀였다. “그치? 비비.” 「…….」 그녀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겨울바람 정령 비비가 생긋 미소 지었다. 계약자가 조용히 앉아 책을 읽든 밖으로 나가 뛰어놀든 정령에게는 아무런 상관없었다. 정령이 바라는 소망은 결국 계약자가 바라는 소망. 비비는 리베흐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정령…….” 아슬란은 상기된 표정으로 비비를 쳐다보았다. 지금껏 정령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겨울바람의 정령은 인형처럼 작고 예뻤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비비는 주변에 끊임없이 반짝이는 눈송이를 흩뿌렸다.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리베흐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 이렇게 되자 어쩐지 리베흐에게 예쁘다고 한 기분이 되고 만 아슬란이 어쩔 줄 모르고 얼굴을 붉혔다. 두 꼬마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바이칼이 ‘이것들 봐라?’ 하는 눈으로 서 있다가 에단에게 속닥거렸다. “크으. 귀엽네요. 단장, 우리도 몰랐을 뿐이지 학창시절에 저렇게 풋풋했겠죠?” “내 기억에 자네가 학창시절에 연애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 얘기 말고요, 이 양반아.” 풋풋한 학생 시절을 떠올리려 했더니 급 암흑기로 묘사해 버린 에단 덕에 바이칼의 표정이 왈칵 구겨졌다. 그사이 리베흐는 자신의 정령에게 예쁘다고 해준 아슬란에게 한층 가까워진 태도로 조잘거리고 있었다. “정령은 다 예뻐.” “그런가요?” “응! 있지, 쥬다스 님 정령들도 완전 예쁜데. 봤어?” “아뇨.” ‘그러고 보니 황태자 전하께서 유명하신 이유 중 하나가…….’ 아슬란은 리베흐의 조잘거림을 듣고서야 쥬다스가 4속성 정령의 계약자란 소문을 떠올렸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시선이 쏠리자 예배당 의자에 앉아 턱을 괸 채 구경하고 있던 쥬다스가 작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화앗!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던 투명 커튼이 걷히듯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정령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발치에 길게 누워 있던 푸른 늑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고, 어깨며 머리에 자리한 자그마한 정령들도 보였다. 각자 강렬한 빛을 품고 있어 크기는 작아도 다른 정령들에 비해 존재감이 부각되었다. “정령술사가 보는 세계는……. 이런 겁니까?” 아슬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마치 밤하늘에 박힌 별처럼 무수한 정령이 반짝이는 광경이 보였다. 함께 입을 벌린 리베흐가 바닥에서 열심히 기어 다니던 고슴도치 모양의 정령 하나를 품에 안아 들었다. “달라. 모든 정령술사가 이런 걸 보는 건 아니야.” 바람의 자질이 매우 강한 리베흐는 평상시 바람에 관련된 정령들을 종종 발견하곤 했다. 그것도 늘 보는 건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씩 자연체로 노닥거리는 정령을 발견하는 날이면 축복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좋았다. 정령술사는 보통 자신이 가진 친화력의 종류와 등급에 따라 정령을 본다. 바람과 불을 다루는 최상급 듀얼 정령술사로 알려진 코르토반 옌조차 모든 속성의 정령을 보진 못했다. “굉장해. 이것 봐봐.” “……고슴도치?” “아마 땅의 정령일걸.” “그런 건 어떻게 구분합니까?” “싹이 나 있잖아.” 리베흐의 손짓을 따라 움직인 아슬란의 눈에도 고슴도치 머리에 달린 여린 새싹이 보였다. ‘머리에서 싹이 자라?!’ 뿐만 아니라 날개가 달린 여우라든지, 파란 불꽃으로 짠 드레스를 입은 소녀 등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형태를 하고 있는 정령들이 보였다. 그들의 형상은 실체화를 가능하게 만든 쥬다스의 의지를 따른 것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환상적으로 보이기만 했다. “히히, 귀엽다.” 감탄하는 리베흐의 곁에서 아슬란도 눈만 둥그렇게 뜬 채 굳어 있었다. 지금 잘못 움직였다간 이 모든 게 꿈처럼 깨어질 것만 같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정령이 여기 다 모인 것 같아!” 쥬다스는 손끝에 날아든 녹색 정령을 쓸어주며 태연히 답해주었다. “나도 만나보지 못한 정령이 많단다.” “쥬다스 님이 모르는 정령도 있어요?” “여기에 있는 건 자연계 정령 중 일부일 뿐이야. 정령들도 각자 성격이 달라서 사람을 좋아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아이가 있는 반면, 사람 눈에 띄거나 돌아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이도 있지.” “꼭…… 사람 같네요.” 정령을 무지개나 오로라처럼 초월적인 현상쯤으로 이해하고 있던 아슬란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유니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으며 코웃음 쳤다. 「헹. 우리가 사람 같은 게 아니라 원래 이런 거거든? 저게 우릴 뭐로 보고!」 「어머, 유니. 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우리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에요.」 「뭬야?」 「우리의 계약자는 다른 종족보단 주로 인간이니까. 우린 계약자의 의지와 의식을 따라 형상화되고, 움직이잖아요.」 카니가 조목조목 이유를 짚어주자 유니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건, 그렇지만.」 「이 세상이 만들어진 직후 태어난 아주 초기의 정령들은 감정을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요.」 「오아앙! 정말이다요?」 「네. 후후, 상상이 안 가죠?」 카니는 다른 정령들에 비해 옛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다. 가장 늦게 태어났는데도 어디서 어떻게 알게 된 지식인지 한 번씩 이렇게 꺼내놓곤 했다. 신기한 건 유니도 마찬가지였지만 토니의 반응이 더 빨랐다. 「감정을 모를 수가 있다니. 그거 완전 바보 아니다요?」 「뭐래. 그 바보가 네 조상님이시거든.」 정령이 비록 후손을 남기는 구조가 아니라 해도 선대와 후대 간의 등급은 분명히 나누어져 있었다. 같은 정령왕이라 해도 후대가 앞서 태어나 선대를 살았던 이를 존경하는 건 당연했다. 왁왁거리기 시작한 두 정령을 앞에 두고 카니가 살포시 웃었다. 「웃는 법도, 우는 법도. 그리고 ‘사랑스럽다’는 감정까지. 전부 계약자로부터 배웠는걸요.」 자연은 생명의 어머니라 불리며 인간을 품어주었지만, 역으로 인간 역시 자연을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조금씩 그 온기를 자연에게 전해주었다. ‘바람이 유니. 물이 루니. 땅이 토니. 그리고 불이 카니. 음……. 이러면 된 건가?’ 굳이 계약하지 않고도 늘 같이 있었기 때문에 계약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그들과 계약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기쁜 마음에 일단 계약을 먼저 맺은 다음 이유를 물었더니 어렸던 그는 처음으로 어린아이답게 얼굴이 빨개져서 대답했었다. ‘……부러워서.’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한데.’ ‘그런데도 사실. 다른 사람들이 질투 날 정도로 부러웠어. 나한텐 없으니까.’ 그가 처음으로 욕심내 본 단어. 그들이 계약이란 이름으로 묶인 관계는, 단 하나였다. ‘고마워. 다들. 내 가족이 되어줘서.’ 그 수줍은 고백을 듣고도 어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그들에게 단지 언제나 함께 있어줄 것을 바랐지만 그가 원했다면 어떤 바람이라도 들어줬을 것이다. 설령 세상을 유지해 온 절대적인 질서와 조율을 파괴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잘 보았구나. 정령도 마치 사람 같지. 이들도 서로 맞는 사람과 함께할 뿐이란다.” “그럼 정령도 자기랑 맞지 않는 사람은 차별하는 겁니까?” 어쩐지 울컥한 아슬란이 대뜸 따지듯 물었다. 루바흐에 입학한 지 이제 겨우 일 년째, 그동안 아슬란은 학업에는 뛰어난 성과를 보였으나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데엔 완전히 실패했다. 그는 사교적인 성격이 아닐뿐더러 타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남들의 비위를 맞춰주는 일을 하는 걸 무척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에서 소외되었고 알게 모르게 차별당하는 일도 잦았다. 그런 상황에서 쥬다스의 말은 마치 자신을 비웃는 다른 학생들이 하는 변명처럼 들렸다. 괜히 꼬아 듣고 분개하는 아이를 보며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차별하여 남을 핍박하는 데에 집중하란 소리가 아니다.” “그러면.” “지금 힘들다면 억지로 너를 힘들게 하는 그들과 친해질 필요 없다. 서로 잘 맞는 사람들을 찾으란 뜻이야.” 마치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꿰뚫어본 듯한 이야기에 아슬란은 어깨를 흠칫 좁혔다. 불안에 가득 찬 아이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쥬다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가 누군가를 싫어한다면, 그 역시 너를 싫어하게 마련이다.” “……제가 먼저 싫어한 건 아니었어요.” “그래. 상대가 너를 싫어했기에 네가 그들을 싫어할 수도 있지.” 그는 누군가를 탓하려는 게 아니었다. 일단 자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자 아슬란은 목구멍을 막고 있던 가시 같은 게 스르륵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는 서로 맞춰 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기 힘든 사람들이 있단다. 전부 둥글게 같이 맞출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이상일 뿐이다.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모여 있으면 서로 힘들기만 할 뿐이다.” 그 말과 함께 쥬다스는 주변을 감싸고 있던 힘을 거두어들였다. 훅,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정령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제 시야에는 리베흐의 겨울정령 비비와 4속성 정령왕들만 남아 있었다. 이제 아슬란은 머리를 한 대 맞은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서있었다. ‘나랑 맞는 사람? 맞지 않는 사람? 그런 건 어떻게 구분해야…….’ 그러다 문득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던 리베흐와 눈이 마주쳤다. 소녀는 눈을 접으며 맑게 웃었다. 그는 문득 그 웃는 얼굴만큼은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베흐…… 님은.” “엑! 같은 학생끼리 무슨 님이야, 님은. 너 몇 살인데?” “열한 살입니다.” “난 열두 살. 내가 누나네. 귀찮으면 그냥 이름 불러.” 나이로 따지면 누나였지만 리베흐는 아슬란보다 키가 작았다. 소녀는 뚱하니 쥬다스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억울해.” “뭐가?” “원래 쥬다스 님이랑 나, 키 똑같았는데.” “…….” 분명 그럴 때가 있긴 했었다. 그게 비정상적인 상황이었던 거지만 리베흐는 마냥 억울해했다. “혼자서만 그렇게 크다니 반칙이야!” “리베흐는 아직 어리잖니.” “잘 먹고 잘 자면 큰다구 해서 믿었는데!” 그동안 리베흐는 그의 말에 따라 착실하게 편식도 안하고 끼니도 잘 챙겼으며, 아무리 재밌는 놀이를 하다가도 잘 시간이 되면 침대로 가 누웠다. 하지만 정작 자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또래 소녀들 중에서도 유독 자그마한 체구를 가진 그녀는 그 점이 가장 불만스러웠다. “씨잉. 쥬다스 님 거짓말쟁이.” 그날, 쥬다스는 처음으로 아이를 달래는 데에 실패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5 / 0240 ---------------------------------------------- 26장. 첫눈 한참 칭얼거리던 리베흐는 박하사탕을 하나 입에 물고서야 울먹이는 걸 멈췄다. “그런데 꼬맹아.” 바이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리베흐를 불렀다. 그러자 아이는 사탕을 오물거리며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는 벌써 진명을 받았잖아.” “응.” “그런데 왜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여기 남아 있어?” “비비가 알려줬어. 여기에 쥬다스 님이 왔다고.” 바람의 정령은 여러 정령 중에서도 정보를 전달하는 일을 곧잘 했다. 겨울바람 정령 비비도 가끔 리베흐가 시키지 않아도 도움이 될 법한 정보를 미리 알아다 전해주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조원들은?” “몰라. 어디 놀러간 댔는데.” 복귀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모처럼 나온 외출을 최대한 즐기고 돌아가고 싶어 했다. 평소 같았으면 리베흐도 그 틈에 끼어 함께 놀러 다녔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하여튼 요즘 애들은 겁도 없네. 이 신성한 교황청 내부를 놀이터쯤으로 여기고 돌아다니다니.” “진명식 이후로 정학 처분을 받았던 자네가 할 말인가.” 내내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던 에단의 일침에 바이칼이 찔끔했다. 그들이 진명식을 받던 당시, 바이칼은 교황청에서 사령술사와 접촉한 혐의로 붙잡혀 징계를 받은 적이 있었다. 사령술사인 줄 모르고 학자로서 만났다곤 하지만 일이 잘못됐다면 큰 피해로 번졌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문 바이칼을 올려다보며 리베흐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정학? 왜?” “으하하! 별거 아니야. 그냥 뭘 좀 잘못 알아서 생긴 해프닝이랄까?” “뭘 잘못 알아? 누가 잘못 알았어? 별거 아닌데 왜 정학씩이나 받아?” “……살려주세요, 단장.” 그러나 그의 상관은 매정했다. 차갑게 시선을 회피해 버리는 에단을 보며 바이칼은 실연당한 여인네처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까도 까도 양파처럼 끊임없이 나오는 자기 흑역사에 질린 그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바이칼 님, 울어?” “크흡.” “괜찮아. 살다보면 누구나 실수하는 거랬어. 반성하면 됐지 뭐.” 어깨를 토닥이는 작은 손바닥 때문에 더욱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던 쥬다스는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표정을 굳혔다. ‘그러고 보면 그때.’ 새 삶을 살게 된 후로 옛 친우를 처음 만났던 날. ‘프리드는 왜 교황청에 왔었던 거지?’ 당시에는 그냥 포탈을 건드리러 왔다고 여기고 넘어갔었는데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석연찮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그때 프리드는 분명, ‘이그레트’의 존재를 몰랐다. 오랫동안 찾아다니긴 했으나 정작 그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어디에서 무얼 하는지조차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렇다는 건 ‘이그레트’를 찾는 것과 별개로 따로 꾸미고 있던 음모가 있었다는 뜻이다. ‘왜 하필 교황청 포탈을 노린 걸까.’ 정령석을 모으는 게 목적이었다면 다른 루트를 통해서 보다 안정적으로, 많이 모으는 게 가능했다. 보안이 철통같은 교황청을 노린 까닭은 비단 포탈뿐만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쥬다스는 가만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프리드를 직접 죽였다. 그 결정을 후회하진 않지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남아 있었다. ‘네 얘기를 좀 더 들어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옛 친우들과 허심탄회하게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지금 그의 주변을 둘러싼 친우들과는 사뭇 다른 비틀어진 관계였다. 그는 그 점이 못내 안타까웠다. 과거의 그는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몰랐고 그런 그의 밑에서 자란 아이들도 역시 속내를 숨기는 일에 익숙했다. 그러다 보니 가슴속에 자꾸만 맞추어지지 않은 퍼즐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형제자매님들의 하루에 평안과 축복이 함께하길.”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예배당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고아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모두의 시선이 막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에게로 향했다. 리베흐가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성녀님이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자매님.” “히히. 오랜만에 오빠들을 만났거든요.” 알겠다는 듯 짧게 고개를 끄덕인 검은 머리의 여인이 초점 없는 눈을 들어 그들을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위그드라실.” 쥬다스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성녀 위그드라실의 멍하던 표정에 상냥한 미소가 떠올랐다. “……빛의 인도가 함께하는 분. 건강을 찾으셨군요.” “덕분에.”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가진 활기를 감지해 낸 위그드라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령계까지 찾아와 도움을 주긴 했으나 오래 교황청을 비워둘 수 없어 경과를 지켜보지 못한 채 돌아가야만 했다. 무사할 거라는 믿음과 별개로 걱정되는 마음이 컸던 그녀는 이제야 안심하고 웃을 수 있었다. 그런 성녀를 보며 쥬다스가 미안한 미소를 지었다. “진즉 감사인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늦었지요.” “아뇨. 벗과 이렇게 다시 만나 말을 섞을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위그드라실은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상냥하고 나긋나긋한 어조를 들으며 다른 사람들도 함께 마음이 차분하게 정돈되었다. 그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그간 밀린 안부 인사와 감사 인사를 나누었다. “크릉.” 수호견 헤브라시스도 여전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수호견이 아슬란을 향해 눈길을 주자 성녀도 함께 그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아슬란 형제님이군요.” “네, 네!” 긴장한 채 서있던 아슬란이 더듬거리며 답했다. “진명을 받을 차례가 되어 안내하러 왔습니다. 그런데…….” 위그드라실은 헤브의 등에 손을 얹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느껴지는 기운은 낯익은 것들뿐이었다. “세 분이서 한 조라고 들었는데.” “아.” 다른 조원들은 오늘 진명식이 있을 줄 모르고 놀러나간 상태였다.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린 아슬란이 탄식을 터뜨렸다. “그게.” 그들을 위해 변명을 해줄 이유도 없고 할 말도 없었다. 아슬란은 잠시 고민하다 사실만을 그녀에게 알렸다. “지금은 이 자리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다행히 위그드라실은 더 추궁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형제님.” “저, 저만 가나요?” 당황한 아슬란이 묻자 성녀가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조별활동 권장은 학원 루바흐에서 관리하는 규칙이지요. 제가 할 일은 차례에 따라 진명식을 진행하는 것뿐.” “그럼 다른 조원들은.” “한 번 자기 차례를 놓쳤다면 올해에는 더 이상 진명을 받을 수 없답니다. 다음 해에 다시 부름을 받는 수밖에요.” 교황은 차례를 지키지 않은 아이들의 편의까지 봐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기회를 놓치면 올해는 그걸로 끝. 다음 해 진명식에 다시 신청하는 수밖에 없었다. 위그드라실은 아슬란을 데리고 예배당을 나갔다. 나가기 직전, 그녀는 쥬다스를 돌아보며 살짝 목례했다. “나의 벗이여, 오늘 밤은 이곳에서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 뜬금없는 부탁을 남긴 채 성녀는 아슬란을 데리고 뒤돌아 사라져 버렸다. 자리에 남은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 뭐죠? 하루 묵고 가란 뜻인가?” “……그런 것 같군.” 에단도 이해할 수 없는 성녀의 부탁에 미간을 좁혔다. 원래대로라면 성녀를 만난 후 교황청을 떠날 생각이었다. 굳이 교황청에서 하루를 묵을 이유는 없었다. 이유를 모르기는 쥬다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의문을 표하는 대신 다시 예배당 의자에 걸터앉았다. “이런, 외박 허락까진 받지 않았는데.” 태평하게 중얼거리는 그의 곁에 리베흐가 총총 다가와 함께 앉았다. “쥬다스 님도 무단외박하면 황제폐하께 혼나요?” “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황자로서 살아오면서 한 번도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해본 적 없는 그였다. 당연히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도 없었다. 그저 추측해서 답했을 뿐인데 리베흐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우아! 쥬다스 님이 혼날 수도 있다고 하니까 되게 이상하다.” 엉뚱한 부분에서 놀라는 리베흐였다. 막상 구체적으로 혼나는 상황까진 상상해 본 적 없었던 쥬다스가 쿡쿡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나도 폐하께 혼나게 되면 기분이 이상할 것 같긴 하구나.” “있지, 있지! 폐하께선 한 번도 화내신 적 없어?” “글쎄. 적어도 내 앞에선 없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그들 부자지간은 면담하는 상황 자체가 적었다. 황제가 그를 사적인 자리에 불러내는 경우는 무언가 따로 일을 시키거나 그 일에 대한 경과 보고를 들을 때 정도였다. 삭막하다 못해 가뭄 든 논처럼 건조하기까지 한 관계였으나 거기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저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귀를 축 늘어뜨린 채 발치에 앉아 있던 루니가 그런 그를 토닥거리듯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문득 정령계에서 정령들을 만나 대화했던 때를 떠올린 바이칼이 묘한 눈으로 푸른 늑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저 개…… 같이 생긴 분이 물의 정령왕이라 이거지?’ 뭔가 어감이 좀 이상했지만 정말로 바이칼의 눈에 루니는 커다란 개처럼 보였다. 깊고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털에 유리알 같은 맑은 눈동자, 그리고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물거품이 마치 너울거리는 바다를 온몸으로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평소에는 잘 실체화를 시키지 않아서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저렇게 한 번씩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시선이 사로잡히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정령은 계약자가 죽어야만 자신의 계약자를 바꾼다.’ 아무리 정령에 대해 무지한 바이칼이라도 그 정도 상식은 알고 있었다. 정령의 계약자는 오로지 한 명뿐. 먼저 계약했던 술사가 죽지 않는 이상 멋대로 파기하고 다른 계약자에게로 옮겨가는 일은 불가능했다. 「흐응. 쟤가 또 루니 널 열렬히 바라보는데?」 묘한 시선을 알아차린 유니가 킥킥대며 루니의 콧등에 내려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푸른 늑대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자리에 엎드렸다. 귀찮음을 잔뜩 담은 콧김이 푸릉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본 바이칼이 심각한 표정으로 추리를 이어갔다. ‘그렇다는 건 세간에 알려진 정령왕의 계약자…….’ 4속성 정령왕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대현자 이그레트는 이미 사망했다는 뜻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바이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쥬다스를 휙 돌아보았다. “설마!” “응?”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전하, 저번에 미처 여쭙지 못했던 게 하나 있습니다.” 바이칼은 진지하게 운을 떼었다. “그 개 같은 정령…….” 크르릉. 푸른 늑대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자 그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이 아니라, 루니 님과 쥬다스 님이 계약하셨다는 건 ‘이그레트’가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뜻이 되는 거죠?” “…….” 참 애매했다. 쥬다스로서는 기다 아니다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이그레트’는 분명 죽었지만 그렇다고 이 세상에 없진 않았다. 기묘한 딜레마에 빠진 그가 침묵하자 바이칼이 흥분된 기색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게다가 그의 제자라고 알려진 코르토반 옌과도 유독 친해 보이시고요.” “으음. 친하긴 하다만.” “또한 자연의 사랑을 받았다는 그와 마찬가지로 자연계 4속성 정령을 모두 다루고 계시죠. 그렇다는 건.” 심상치 않게 흘러가는 추리에 그동안 관심 없어하던 푸른 늑대의 눈동자도 스르륵 그를 향해 움직였다. “설마 전하께선…….” 바이칼은 틀림없다는 확신을 담아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대현자 이그레트의 숨겨둔 진짜 제자?!” “…….” 「…….」 홀로 신난 바이칼을 사이에 두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응, 그거 아니야....(..) 헉 방금 눈앞으로 모기 한마리가 슥 지나갔는데 벌레공포증이 있어서 때려잡질 못했네요.ㅠㅠ 에프킬라를 손에 들었을 땐 이미 모습을 감춘... 으아아아 모기 네이놈(들)!! ...라고 치는 사이 또 바로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나길래 놀라서 저도 모르게 바람을 훅 불었더니 그대로 날아서 도망갔네요 ㅠㅠㅠㅠㅠ 아이고 멍청한 ㅁㄴㅇㄹㅇㄴ아이고;; 근데 바로 눈앞에 모기가 있으면 그 사이즈가 되게 커보입니다.ㅠ 징그러워요. 큽... 는 변명이군요. 여러분 모기는 보이면 바로 때려잡읍시다.ㅠ...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ㅠ 0226 / 0240 ---------------------------------------------- 26장. 첫눈 사람이고 정령이고 나눌 것 없이 모조리 황당함으로 물들어 침묵하는 가운데 정작 의혹을 받게 된 쥬다스만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즐거워 보이는 웃음소리에 이번엔 모두 황망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의혹을 제기한 바이칼은 얼떨떨하게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 음. 아닙니까?” “그래, 아니야.” 즉시 단호한 부정이 돌아왔다. 쥬다스는 여전히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채 손을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것 참. 내가 제자라니……. 제법 재미있는 발상이구나.” 「사람은 모름지기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배우는 법이라며. 그런 의미에선 맞지 않을까?」 그의 어깨 위에 앉아 있던 유니가 손가락으로 녹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바이칼의 가설을 지지했다. 「그럼요. 누구나 과거라는 스승 하나쯤은 가지고 있잖아요?」 「오왕. 뭔가 철학적이다요!」 「토니 네가 철학적이라는 말뜻도 알고 있어?」 「무시하지 마라요. 인간들이 사용하는 어려운 말은 잘 모르긴 하지만 어려운 말이 뭔지는 안다요!」 「……뭐라는 거야. 네 말이 제일 어려워.」 진지함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동조가 정령들 사이에서 쏟아졌다. 쥬다스는 그 시끌벅적한 의견에 흔들리지 않고 잔잔히 말을 이었다. “네 추측 중 일부는 맞았다, 바이칼. ‘이그레트’는 죽었지.” “이럴 수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부분이긴 했지만 쥬다스에게서 다시 존경하던 위대한 현자의 죽음을 듣게 된 바이칼은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확인사살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하나 그는 제자를 거두지 않았다. 코르토반 옌이 제자가 되기를 자처하긴 하였으나 실제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어.” “예에? 잠깐만요, 전하.” “그러니 나 역시 그의 제자일 수 없다.” 콜은 진정으로 스승을 존경하고 섬겼으나 힘과 지식, 지위 전부 스스로 노력하여 맺은 열매였다. 이그레트가 어렸던 코르토반 옌에게 준 것이라곤 고작 그 주변을 맴도는 정령들에 대해 알려준 정도였다. 정령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대해야하는 건지 정도는 눈대중으로 보고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 그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스승노릇을 한 적이 없었다. ‘콜이 들으면 서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쥬다스는 쓰게 웃었다. 도대체 뭐가 스승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 어렸던 꼬마를 홀로 남겨둔 채 세상을 등지고 달아났으니, 자신에겐 스승자격이 없다. 그는 그리 여겼다. “다만.” 선명한 빛을 담은 맑은 금안이 바이칼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그레트’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혹 이에 관해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 “…….” “너희들이 묻는다면 가감 없이 사실만을 알려주도록 하마.” 엄청난 이야기를 입에 담으면서도 그의 태도는 변함없이 차분했다. 그는 아이들이 바란다면 기꺼이 이 자리에서 그 자신이 이그레트 본인이란 사실을 밝힐 생각이었다. 이미 ‘쥬다스’와 ‘이그레트’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음을 언급한 상태였다. 딱히 숨기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단지 자세한 사정을 밝혀야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궁금해한다면 알려줄 수야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이렇다 할 상상이 가지 않았다. 믿지 않을 수도 있고 혐오감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게 될지도 몰랐다. 이건 그간 쌓아온 믿음과 별개로 사람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에 따른 반응이었으므로 함부로 확신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쥬다스는 그들이 어떤 반응을 하든지 상관없었다. ‘이그레트’는 자신의 한 부분이 맞았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그를 받아들이지 못해 깨질 관계라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이 지나간 건지 이해하지 못한 리베흐만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세 사람을 둘레둘레 쳐다보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이유로 상념에 잠겼다. 꽤나 긴 침묵이 흐르고 난 후 바이칼이 머리에서 손을 내리며 한숨 쉬듯 입을 열었다. “전하. 저는 말입니다.” 사실 묻고 싶은 건 많았다. 제국 1황자로 태어난 쥬다스가 오래전 행적을 씻은 듯이 감추어버린 위대한 정령술사와 도대체 어떻게, 또 어떤 접점이 있었단 말인가. 바이칼뿐 아니라 묵묵히 서 있던 에단도 그에 대해서는 같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둘 다 그 의문을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그건 쥬다스가 굳이 먼저 자신의 과거를 밝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궁금하긴 한데요.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궁금한데 굳이 알 필요는 없다?” “옙.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한밤중에 허기가 진 느낌 정도일까요?” 바이칼은 본인이 실제로 종종 겪는 현실적인 갈등을 예시로 들었다. “어휴, 끼니때도 아닌데 배가 고프다고 해서 굳이 뭘 챙겨먹을 필요는 없잖습니까? 오히려 밤중에 잘못 먹었다가 소화가 안 돼서 탈날 수도 있는 거고요.” “맞아. 나 밤에 쿠키 먹고 잤다가 얼굴 부은 적 있어.” “역시 그렇지?” 중간에 끼어든 리베흐를 보며 바이칼이 씩 웃었다. “그리고 뭐, 꼭 알아야 하는 거라면 전하께서 진작 말씀하셨겠죠.” “흠. 에단,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에단은 그저 묵묵히 선 채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는 처음부터 쥬다스에게 무언가를 물을 생각이 없었다. “과거에 어땠는가보단.” 시선을 받은 에단이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 전하께서 어떠하신가가 훨씬 중요합니다.” ‘바로 당신이 우리에게 알려준 진실이니까요.’ 언제나 그랬다. 과거에 못살게 군 바이칼도, 낮잡아보고 냉대했던 크리스티나도, 이용하고자 접근한 마르젠도 전부 지금은 그의 신뢰를 받는 동료들이다. 노예였던 수인족 소녀조차 지금은 수많은 사람에게 열광받는 가수로 키워냈다. 그건 잘못을 용서한다는 개념과는 좀 달랐다. 쥬다스는 그들이 자신에게 보인 태도로부터 상처입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저 곁에서 자신을 보여주며 천천히 가치관과 태도를 변화시켜주었다. 진실을 알 기회를 주었는데도 거절하는 두 친우를 보며 쥬다스는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상관없는 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저 태연함은 자신이 주로 보이던 태도였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기에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종소리가 울렸다. 뎅― 데엥― 엘리시움 가장 높은 곳에 달린 거대한 종, ‘알리’가 울고 있었다. 알리는 교황청 전역에 울려 퍼질 정도로 큰 소리를 냈는데 한번 울릴 때마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작은 종들이 함께 연달아 딸랑딸랑 합창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웅장하고 경건하던지 일행은 하던 대화도 잊고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렸다. 아기 천사가 그려진 창문 밖으로 붉은 석양이 지고 있었다. 알리는 총 12번을 울렸다. “‘알리’? 저거 새해가 왔을 때나 울리는 신성한 종 아니었습니까?” 바이칼의 말이 끝나자마자 예배당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저, 저, 전하.”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채 뛰어온 사제 하나가 쥬다스에게 급히 비보를 전달했다. “교황 성하께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에 모두의 얼굴에 같은 낯빛이 떠올랐다. “승하하셨습니다.” * * * 교황 ‘노아 H.에세키엘’이 신의 품으로 돌아갔다. 아직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고 건강에 별다른 이상신호도 없었던지라 세간의 충격은 더욱 컸다. 루바르잔은 신성을 믿는 국가였고, 따라서 황권과 신권이 양립했다. 교황의 죽음은 곧 황제의 죽음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위그드라실이 부탁한 게 이런 거였구나.’ 오늘 밤은 이곳을 떠나지 말아 달라 부탁했던 성녀를 떠올린 쥬다스가 짧게 한숨을 뱉었다. 신성력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강한 신성력을 가진 존재 중에서는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한다고 들었다. 아마도 성녀 위그드라실은 교황의 수명이 다했음을 예지한 모양이었다. 당연히 진명식은 중지됐다. 진명을 받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을 비롯한 모든 손님이 교황청에서 나가야만 했다. 지금 엘리시움에 남은 사람은 성녀와 사제들, 그리고 성녀의 부름을 받은 쥬다스 일행뿐이었다. 그들과 같이 있던 리베흐는 시무룩한 얼굴로 아슬란과 함께 먼저 학교로 돌아갔다. 성녀의 요청에 따라 교황청에 남은 쥬다스는 두 수하를 데리고 대예배당에 들어섰다. “오, 신이시여.” 그곳엔 벌써 많은 사제가 모여들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쥬다스는 그 행렬의 끄트머리에 선 채 침묵을 지켰다. 섣불리 위그드라실에게 다가가 말을 걸 수가 없었다. 그녀는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유리관 앞에 경건히 무릎 꿇은 상태였다. 「하여간 인생사 정말 알 수 없네.」 유니가 팔짱을 낀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신의 사랑을 받는 성스러운 인도자잖아. 그런 교황이.」 그녀의 보석 같은 연두빛 눈동자가 유리관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령의 표식에 당할 줄이야.」 교황청에서 사건이 터진 즉시 모든 외부인을 쫓아냈기 때문에 이는 아직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사인(死因)이었다. 유리관 안에는 숨을 거둔 교황의 시신이 하얀 꽃과 함께 안치되어있었다. 월계수 관으로 덮어놓은 이마에는 성스러운 잎사귀로도 가릴 수 없는 선명한 검은 표식이 남아 있었다. 이를 본 쥬다스의 금안이 짙게 가라앉았다. ‘팔각의 검은 별.’ 유니가 말한 대로 사령을 상징하는 표식이었다. 물론 표식이 떴다고 해서 교황이 사령과 계약한 건 아니다. 사령술사의 말로는 숨을 거둠과 동시에 산산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영혼부터 육신까지, 그 티끌만큼의 흔적도 용납하지 않고 모조리 사령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죽은 뒤 그 시신에 표식이 새겨졌다는 건 그가 침범해 오는 사령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었다. 「교황은 신성력이 가장 강한 인간 아니다요? 근데도 어떻게 당할 수가 있다요?」 “사람의 마음은 약하니까.” 쥬다스는 눈을 감으며 작게 답해주었다. 아무리 강한 존재에게 가호를 받는다 할지라도 인간은 누구나 약한 부분을 함께 가지고 있다. 사령이 어떤 방식으로 교황에게 접근해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교황을 욕할 수는 없었다. 교황도 결국 인간이다. ‘그간 홀로 얼마나 힘드셨습니까.’ 그는 속으로나마 교황을 위로했다. 진명을 받던 날, 교황은 그의 진명인 ‘Egret’를 함께 목도했다. 그 즉시 교황은 그의 정체를 꿰뚫어보았고, 아무도 모르게 입모양으로 속삭였다. <그대에게.> 남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짤막하게 고개를 숙인 것은, 교황이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예우였다. <빛의 영광이 함께할지라.> 그날 교황은 강한 신성을 담아 그를 축복했다. 교황의 축복을 기억한 쥬다스는 그 자리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 뒤를 따라 에단과 바이칼도 함께 무릎을 꿇고 숨을 거둔 교황을 향해 애도를 표했다. “이제 편히 잠드소서.” 기도를 올리던 위그드라실이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관을 매만졌다. 늘 정갈하게 묶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가녀린 어깨가 잠자리날개처럼 떨렸다. “노아…….” 인간과 달리 수백 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성녀 위그드라실에게 어릴 적부터 돌보아온 교황은 마치 자식 과도 같았다. 숨을 거둔 교황을 하염없이 내려다보며 그녀는 끝내 울지 않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7 / 0240 ---------------------------------------------- 26장. 첫눈 교황의 장례는 7일간 이어졌다. 장례를 애도하기 위해 찾아온 신도들이 바친 촛불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장성(長城)을 이룰 정도였다. 애도의 물결에는 루바르잔 황제와 그의 후계자도 섞여 있었으며 타국에서 온 신자도 많았다. 근간 예정되어 있던 모든 행사가 취소되었으며 전 대륙이 숨을 죽이고 루바르잔을 주시했다. 신성을 인도하던 자의 죽음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슬픔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마냥 애도만 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한다 해도 교황의 죽음에 얽힌 충격적인 진실은 감추어지지 않았다. 고개 숙인 사람들의 귀를 타고 불온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교황이 사령술사에게 살해당했다더라.’ ‘사망 직후 저주받은 검은 별의 표식이 남아 있었다지.’ ‘신의 대리자가 사악한 영에게 패하다니!’ ‘인간은 결국 사령에 먹히고 마는 게 아닐까?’ 교황이란 신권의 최상위층에 있는 존재. 그런 이가 사령의 표식을 남기고 죽었다는 건 황제가 적장의 손에 목이 베였다는 것과 비슷한 충격을 일으켰다. 감추지 못하고 새어 나간 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맙소사. 신성력이 그렇게 충만하셨던 분이셨는데도.” “세상이 망해가는 징조가 아닐까 싶군.” 대성전에 모인 귀족들이 제국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곱씹으며 혀를 찼다. 교황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말세의 징조라 떠드는 이들도 있었다. “말세가 다가오니 신께서 인간을 포기하셨는지도 모르지.” 한번 불씨를 지핀 혼돈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짙어지기만 했다. 심지어 신을 의심하는 불경한 언사도 서슴지 않고 튀어나왔다. 추모를 위해 장식 하나 없이 깔끔한 검은색 복식을 갖춘 쥬다스는 고개를 돌려 술렁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검은색과 대조되는 깨끗한 은발로 인해 그의 움직임은 유독 눈에 띠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금안과 시선이 마주친 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고 기도하는 척 두 손을 모았다. “…….” 한차례 성전 내부를 훑어본 그는 그런 술렁임을 읽고 천천히 꿇었던 무릎을 폈다. 길게 늘어진 검은색 후드케이프가 가볍게 펄럭였다. 그가 돌아서자 수군거림이 딱 멈추었다. 무겁고 침울하게 울려 퍼지는 레퀴엠만이 천사의 중얼거림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쥬다스는 무릎 꿇은 사람들 사이로 홀로 역행했다. 오늘만큼은 사제들도 흑색 제의를 입은 채 촛불을 들고 있었다. 그가 다가오자 사제들은 고개를 숙이며 문고리를 잡았다. 그러나 막 문이 열리던 차에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신성이 더 이상 너희를 지키지 못할까 봐.” 작지만 숨 막히는 침묵 속에 엎드린 사람들의 귓가로 파고들기엔 선명한 음성이었다. “두렵더냐.” “……!” 기도하는 척 손을 모았던 귀족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차기 군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고요한 질타에 압도되어 있던 군중 틈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내었다. “외람되오나 전하. 최근 사령에 관한 망측한 입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발언한 자는 쥬다스의 시선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쉬쉬하기 바쁜 귀족들 중에서 그나마 용감한 발언자였다. “블레어 J.루드 백작입니다.” 남자는 약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이제 막 가문을 물려받은 젊은 수장이었다. 주름살 하나 없이 둥근 이마처럼 청년의 가슴속은 패기와 열정으로 팽배했다. 쥬다스가 계속 해보라는 눈으로 응시하자 블레어는 곧장 말을 이었다. “사령술사들이 이제 조직을 갖춰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셨겠지요. 제네럴급 사령술사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파멸할 자들이 아닙니다.” 해동에서 알려온 프리드의 죽음은 많은 이에게 희망을 선사해 주었다. 투르케 주민을 비롯하여 그에게 고향과 가족을 잃고 절망했던 자들, 그리고 제네럴급 사령술사의 출현에 겁먹고 떨던 이들이 소식을 듣자마자 일제히 환호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독사입니다.” 하지만 블레어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단호히 주장했다. “그것도 평범한 독이 아니라 신의 가호를 뚫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맹독을 품고 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 패하실 정도이니 오죽 강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머리 하나가 죽어도 독사굴에 남은 뱀들은 우글거리고 있겠죠.” 몇몇 비위 약한 귀족이 그 묘사를 듣고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반면 쥬다스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한 블레어가 순간 멈칫거렸다. “……현재 우린 그 굴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독니로 사람을 물지 알 수 없으니 두려울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젊은 수장의 눈으로도 쥬다스는 아직 어렸다. 그는 황태자가 아직 어리기 때문에 사령의 무서움에 대해 잘 모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사령술사의 무서움을 실감나게 표현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루드 백작.” 쥬다스는 부드럽게 그를 호칭했다. “그대는 뭔가 착각하고 있군.” “예……?” “만일 굴에서 독사가 전부 사라진다 하여도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건 독사가 아니라 독사가 물어다주는 죽음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첫 번째 착각.” 독사가 사라져 봤자 또 다른 굴에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원천적으로 제거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독이 있으니 독사가 두려운 것이지. 한낱 말장난일 뿐이잖나!’ 블레어는 도무지 그 말만 듣고 납득할 수 없었다. 오히려 농락당한 사람처럼 황태자에 대한 실망감이 차올랐다. 그가 보기에는 당장 만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독사를 제거함이 옳았다. “하오나 전하!” “두 번째 착각은 고(故) 교황께서 사령에게 패했다는 것이다. 인간 ‘노아 에세키엘’은 죽음을 맞았으나.” 무언가 반박하려던 블레어의 서두가 강제로 뚝 잘렸다. 불만스럽게 고개를 치켜든 젊은 백작을 향해 쥬다스가 고압적으로 명했다. “신께서 사령보다 약하기 때문이라고는 착각하지 말거라.” 혹은 신이 인간을 버렸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는 건 스스로의 몫이며 나라를 지키는 건 다스리는 자의 몫이니.” 신은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어여삐 여기나 그렇다고 왕으로 군림하는 건 아니다. 신은 신으로서 사랑을 나누어줄 뿐. 그리하여 인간은 신성을 섬기지만 그와 별개로 위기를 이겨낼 주체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신은 인간과 나라의 존망에 그 어떠한 책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말에는 공포를 갖되, 신을 의심하거나 원망하진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신에게는 그 책임이 없기 때문이다. 언뜻 매정하게까지 들리는 말을 남긴 채 쥬다스는 돌아섰다.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떼어 열린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철컹! 사제들이 열어주고 있던 두터운 철문이 도로 굳게 닫혔다. 황태자가 자리를 떠나자 엎드린 이들이 고개를 들고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사제들도 당황스러운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 와중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게 된 블레어는 참고 있던 숨을 훅 내뱉으며 생각했다. ‘다스리는 자의 몫이라는 건, 전하께서 이 일을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뜻입니까?’ 단순하게 상황을 축소하면서도 그 책임의 소재를 교황청에서 황실로 넘겼다. 블레어는 황태자가 풍기던 위압감을 다시금 떠올리며 소매를 걷었다. ‘마르젠 그 친구가 입이 마르게 칭찬한 재목답군. 뭐, 차기 군주께서 나서신다는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으면 귀족 자격 박탈이지.’ 걱정과 불만이 가득했던 입가에 어느덧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쥬다스는 대성전을 나오자마자 길게 한숨을 뱉었다. 부쩍 추워진 날씨는 내쉰 숨을 따라 하얀 입김을 그려냈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숨결 너머로 잔뜩 구름이 껴 흐려진 하늘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에단.”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두 수하가 가까이 다가왔다. 쥬다스는 대답 대신 그저 빙긋이 웃어 보였다. “추모식이 조금 늦게 끝나긴 했지. 둘 다 오래 기다렸겠구나. 춥진 않았느냐?” “크으, 말도 마십시오. 날씨 완전 미쳤습니다.” “……바이칼, 전하 앞에서 교양 없는 말투는 지양하도록.” 에단이 주의를 주었으나 바이칼은 덜덜 떨리는 팔을 스스로 쓰다듬으며 재차 투덜거렸다. “거 단장은 왜 맨날 표현의 자유를 막습니까? 과언이 아니라 정말로 날씨가 돌았어요. 어씨, 아직 초겨울인데 입김이 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지지리도 말 안 듣는 수하를 보며 에단은 이마를 짚었고 쥬다스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세 사람 중 가장 옷을 두껍게 껴입은 건 추위와 더위에 모두 약한 바이칼이었다. 그는 검은색 롱코트에 목도리까지 칭칭 감다시피 입어놓고도 호들갑을 떨어댔다. “으아아! 저 찌뿌듯한 하늘 좀 보십쇼. 이러다 눈까지 내리겠네요.” ‘눈이라.’ 쥬다스는 흘끗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이칼이 한 묘사대로 하늘이 정말 찌뿌듯해 보였다. 당장 눈이 내려도 이상할 것 없는 날씨에 잔뜩 흐려진 하늘. 그는 예전부터 눈 오는 날을 무척 좋아했다. 햇살도 삼킨 잿빛 구름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잠시 그리운 감성을 떠올렸다.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딱히 눈이 온다고 해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도, 눈만 오면 마냥 기분이 좋았다. 늙어 홀로 살 무렵에는 눈 오는 날 흔들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곤 했다. 아마도 눈이 온 세상을 솜이불처럼 덮은 날. 함박눈이 펑펑 내린 그 날, 보랏빛 눈의 아기는 하얀 눈밭에 버려졌다. 고향이 정확히 어딘지 모르던 그에게 있어 눈 내리는 날은 흡사 고향과도 같은 친근감을 주었다. “첫눈 오는 날은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 옛말이 있단다.” “어? 정말입니까?” 추위에 몸서리치던 바이칼이 그 말을 듣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의 코트 안에 폭 파묻혀 함께 오들오들 떨고 있는 플루비 탓에 그 모습이 꼭 새끼를 품에 안은 어미 곰처럼 보였다. “오호라, 그렇다면 혹시 곧 새 교황 성하라도 정해지는 게 아닐까요?” “그럴 리는 없다.” 에단이 칼같이 바이칼의 추측을 부정했다. “차기 교황은 아직 후보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그 후보를 정하고, 후보 사이에서 다시 또 적합자를 계시 받아야 한다.” 황제와 다르게 교황은 핏줄로 그 자리에 앉는 직위가 아니다. 사람의 눈으로 먼저 신성력을 판단하고, 신의 계시를 통해 최종적으로 가부를 결정한다. 계시를 받는 인원은 교황이 직접 임명한 주교 열한 명으로, 그들은 교황과 성녀 다음으로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졌다.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선 교황은 공석으로 유지된다. 명맥대로라면 제 명을 다하기 전 후임을 미리 선출해 놓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사령에 의해 살해당한 이 경우엔 교황이 지목한 후임이 따로 없었기 때문에 과정이 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너무 일러.” “어이쿠. 성전 일은 뭐가 그리 복잡하답니까?” “첫눈이 올 시기도 아니다.” 에단은 검을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 착용하고 있던 손등장갑을 벗어 맨주먹으로 찬 공기를 가볍게 훑어 쥐었다. “온다면 진눈깨비 정도겠지.”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8 / 0240 ---------------------------------------------- 26장. 첫눈 그 말을 들으며 가만히 하늘을 바라보던 쥬다스는 문득 에단이 차고 있던 검으로 시선을 향했다. ‘검에서 빛이……?’ 두 개의 검 중 하나가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쥬다스가 유의 깊게 검 쪽을 바라보자 에단도 그 눈길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검에 손을 올렸다. 빛을 내고 있는 건 투명한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령검, ‘레이야’였다. 검집에서 뽑아 들자 검신과 함께 눈이 얼얼해질 정도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와 주변까지 푸르게 물들였다. “빛나는 검이라니! 휘두르면 섬광마법처럼 눈뽕 효과를 얻을 수 있겠네요.” “눈뽕?” “그 왜, 강렬한 빛 때문에 순간적으로 시력을 잃는 효과요. 그걸 노리신 겁니까?” “아니다.” 바이칼이 우스갯소리를 던져 보았지만 에단은 그 와중에도 칼 같은 단호함을 유지했다. “그럼 그 눈뽕검은 뭡니까?” “…….” 사령검이 갑자기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건 조금 전부터였다. 평소에는 그냥 얼음장처럼 차갑고 투명할 뿐 이렇게 빛을 번쩍이지는 않았다. 그러니 에단이라고 그 이유를 알 리가 없었다. “근처에 사령의 기운이 도사리고 있는 모양이구나.” 의문을 풀어준 건 그 사령검을 직접 에단에게 맡겼던 쥬다스였다. 그는 푸른빛으로 번뜩이고 있는 사령검을 살며시 손가락으로 짚었다. 우우우. 마치 검이 울기라도 하듯 부르르 떨렸다. “이 아이는 본래 사령이었으니까. 아마도 근처에 동류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모양이야.” “……살아 있는 겁니까?” “글쎄.” 살아 있다고 표현하기엔 좀 애매했다. 에단이 쥐고 있는 사령검은 검의 형태를 취한 소녀의 영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아니라 벌이 달콤한 꽃향기에 끌리듯 사령의 기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쥬다스는 그에 대한 설명을 아꼈다. 의도적으로 레이야에 대한 언급을 피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바이칼이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 쓸어 넘기며 헛기침했다. “크흠, 동류라면 사령이 지금 근처에 있다는 거죠? 설마 또 제네럴급 사령술사가.” “그건 아닐 게다. 지금은 이곳을 지탱하는 힘이 약해졌을 테니 누구든 침입하기 쉽겠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바이칼은 그간 강대한 교황의 힘으로 지켜지던 많은 부분이 무너져 있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습격을 노린다면 지금이 적기였다. 같은 생각을 한 에단이 신중하게 사령검을 응시했다. ‘지난번에 사령술사들과 대치했을 때에는 이런 반응이 없었는데.’ 그의 기억으로는 해동에서 사령에게 잠식된 신수들을 상대로 싸울 때엔 이렇게 빛나지 않았다. 모르는 사이 무언가 계기가 되었거나 특별히 반응하고자 하는 대상이 따로 정해져 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당장 문제는 사령이 습격하고자 하는 대상과 이유 모두 불분명하다는 점이다. 아무리 교황이 사라져 결계가 약해졌다 하더라도 성전 엘리시움에는 아직 성녀가 남아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교황의 장례를 위해 황족과 귀족이 방문한 상태라 평소보다 훨씬 보안이 철저해진 상태였다. 이 타이밍에 정면승부로 덤벼와 봤자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에 뛰어드는 나방 꼴이나 다름없다. 그는 사령에게 그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만큼 중요한 목적이 이 교황청에 남아 있는가를 검토했다. ‘……남아 있는 성녀를 노리는 건가.’ 교황을 죽여 혼란에 빠뜨림에 이어 아예 신권을 무너뜨리려는 목적이라면 놈들의 다음 목표물이 성녀일 가능성이 높았다. “전하. 위험할지도 모르니 궁으로 돌아가시는 편이.” “마침 좋은 기회로구나.” “……?” 잠시 멈칫한 에단이 이내 주인이 하려는 바를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전하……!” “독사를 잡으러 독사굴로 들어가지 않아도 그쪽에서 먼저 기어 나와 주었으니 말이야.” 블레어 J.루드 백작이 했던 비유를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쥬다스를 본 에단이 간곡히 말리기 시작했다. “사태를 성전에 알리고 물러서시는 게 좋겠습니다.” “굳이 따로 알리지 않아도 위그드라실이라면 이미 사령의 기운을 눈치챘을 게다.” “하면 전하께오선 서둘러 피하시는 편이.” “아니, 나는 지금부터.” 쥬다스는 어떻게든 발길을 돌리게 하려는 수하의 노력을 부드럽게 허물어뜨렸다. “이 성소에 침입한 사령술사를 찾아갈 생각이다.” 도망은커녕 제 발로 찾아간다는 포부였으나 그걸 듣고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이미 쥬다스의 돌발행동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두 수하의 얼굴에는 놀람보다는 곤욕스러움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도 알다시피 이건 교황청만의 문제가 아니다. 등 돌려 도망가야 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 “……그리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포기는 빨랐다. 기사로서 주군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거듭 만류하였을 뿐 학생시절부터 그 곁을 지켜온 에단은 쥬다스가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사실을 진즉 알고 있었다. 에단은 그의 뜻을 존중하면서도 끝끝내 한마디를 덧붙였다. “다만 전하께서 무탈하셔야 나라의 우환도 거둘 수 있음을 잊지 마시옵소서.” “원 녀석도. 젊은 나이에 벌써 세상 다산 늙은이마냥 걱정이 많구나.” “전하.” “알겠다, 알겠어.” 순식간에 잔걱정 많은 어르신 취급을 받게 된 에단이 차마 내뱉지 못한 한숨을 속으로 푹 삼켰다. 그들은 더 시간을 소요하지 않고 곧장 사령검이 빛을 발산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목적지는 어느 낡은 예배당이었다. 엘리시움에는 대성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예배당이 많았지만 모든 건물을 사용하는 건 아니었다. 불이 켜진 건 주로 사용하는 건물들 뿐, 나머지 오래되고 자그마한 예배당은 찾는 이가 없어 먼지가 뽀얗게 쌓여있기 일쑤였다. 간혹 수습사제들이 청소를 하러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장소. 쥬다스는 지금 찾아온 건물이 공교롭게도 5년 전 프리드를 만났던 건물과 같은 예배당임을 알아차렸다. “……여긴.” 당시 함께 프리드를 만났었던 에단과 바이칼도 그 사실을 눈치챘다. 오래전 일이긴 했어도 워낙 큰 사건이었던지라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단장,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불 꺼진 창문을 기웃거리며 바이칼이 투덜거렸다. 사령검이 인도하는 빛을 따라온 에단도 말없이 창문 쪽을 훑어보았다. 반면 쥬다스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눈앞의 낡은 건물을 응시했다. ‘제대로 찾아왔구나.’ 비록 어둠에 잠겨 내부가 들여다보이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마치 동굴 벽에 붙은 박쥐 떼처럼 시커먼 사령들이 우글거리고 있음을. “문이 잠겨있습니다.” 겁 없이 먼저 나서서 문고리를 당겨본 바이칼이 쥬다스를 돌아보며 보고했다. 단단히 잠긴 문은 아무리 힘을 줘서 거세게 밀고 당겨 봤자 꿈쩍하지 않았다. “부수고 들어가시겠습니까?” 명령만 떨어진다면 곧장 문을 박살낼 기세로 에단이 검을 들었다. 그가 쥔 건 빛나는 사령검이 아닌 본래 그가 다루는 애검이었다. 사령과 가까워져 이미 밝을 대로 밝아진 사령검 레이야는 검집에 넣어두었어도 흡사 마법구처럼 번쩍거렸다. “흠.” 쥬다스는 턱을 짚은 채 가만히 예배당을 바라보았다. ‘단순히 잠긴 게 아니라 사령의 힘으로 봉해두었어.’ 힘으로 억지로 열려고 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바닥이 문에 닿자 금속 특유의 서늘한 감촉과 함께 녹이 슬어 끈끈함이 함께 느껴졌다. 철컹! 그때,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았는데 쇳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앞서 문고리를 잡고 끙끙거렸던 바이칼의 표정이 얼빠진 사람처럼 변했다. “으아니! 왜 저렇게 칼로 버터 자르듯 쉽게 열린 답니까? 무, 문의 상태가……?” “…….” 에단의 찌르는 듯한 검은 눈동자, 그리고 쥬다스의 손바닥에 의해 가볍게 밀린 예배당 문을 번갈아 쳐다본 바이칼이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소리쳤다. “분명 잠겨 있었는데요. 진짜로요!” 한 뼘 정도 열린 문 틈새를 억울함과 황당함이 뒤섞인 눈빛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쥬다스가 허허로이 웃어 보였다. “아무래도 이 안에 있는 사령술사가 주술을 걸어놓은 모양이다.” “주술을?” “그래. 허가받은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그 말을 듣자 당황은 배가되었다. “그럼 여기 숨어 있는 사령술사 놈이……. 전하께서 들어오는 건 허가하고, 제가 들어가는 건 거부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옳지. 잘 이해했구나.” 주군으로부터 따뜻한 칭찬을 받았으나 바이칼은 여전히 찝찝해했다. 그가 말문이 막힌 채 입을 다물자 쥬다스도 반쯤 열린 문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캄캄한 어둠이 자리한 예배당 내부는 고작 한 발 들여 넣기도 꺼려질 만큼 을씨년스러웠다. ‘처음부터 목적은 나와 만나는 거였나.’ 목적을 알고 나니 대충 상대의 정체도 짐작이 가능해졌다. 그러자 더 고민할 이유도 사라졌으므로, 쥬다스는 가만히 붙들고 서 있던 문을 힘주어 완전히 열어젖혔다. 텅 하는 금속 특유의 묵직한 울림과 함께 예배당 문이 활짝 열렸다. 구름 낀 하늘에선 햇빛이 거의 들지 않았고, 따라서 문이 열린 예배당 내부도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밖에서 보이는 거라곤 긴 의자나 불 꺼진 은촛대의 그림자 정도였다. 크르릉. 쥬다스가 그 안에 막 발을 들여놓으려던 순간 루니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계약자의 앞을 막아섰다. “……역시 감이 좋은 친구들이네요.”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낡은 예배당 안에서 울려 퍼졌다. 꼭 소년소녀성가대가 부르는 찬송처럼 감미로운 음성이었으나 이를 들은 자들의 반응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에단과 바이칼은 각자 무기를 꺼내 들고 겨누고 있었으며 쥬다스는 그저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그 자리에 석고상처럼 굳어 있었다. “아, 그래도 그렇게 노려보면 무서워요. 당신에겐 그들이 친구겠지만 남들 보기엔 공포소설에 등장하는 귀신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이라고요.” 어느 틈엔가 쥬다스의 네 정령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채로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나?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고 자빠졌네요.」 카니가 봄꽃처럼 해사한 미소를 지은 채로 수줍게 볼을 감쌌다. 「사람 영혼에 빨대 꽂아서 쪽 빨아먹는 사령술사 주제에.」 「……옳은 말이긴 한데 표정이랑 행동 좀 일치시켜 줄래?」 유니가 소름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중얼거렸지만 불의 정령왕은 여전히 방긋방긋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어머? 충분히 일치하고 있는데요. 정말 웃겨서 웃고 있는 거예요.」 「정말?」 「그럼요. 타는 쓰레기보다 못한 사령술사 따위에게 화낼 일이 뭐가 있겠어요.」 「으, 응? 그치만 카니 너 점점 입이 험해지고 있는 것 같은…….」 「치워봤자 잊을 만 하면 다시 나타나고. 또 치우면 보란 듯이 또 나타나고. 꼭 겨울철 내리는 함박눈 같아요. 호호호, 생각할수록 짜증 나네.」 「역시 화났잖아―!?」 카니가 평소에는 온화하지만 한 번 화나면 입이 거칠어지며 파괴적으로 날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니의 표정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유니는 팔짱을 낀 채 난감한 어조로 그녀를 말리기 시작했다. 「진정해. 뭐 확실히 사령을 보면 짜증 나긴 하지만 못 참을 만큼은 아니잖아. 그치, 루니?」 「그렇군. 이번엔 카니가 과했다.」 평소 중립적인 루니가 모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유니의 의견에 동조했다. 곧 푸른 늑대의 유리알 같은 투명한 눈동자가 불만스럽게 불의 정령왕에게로 향했다. 「함박눈이 어때서? 도저히 동의할 수 없군. 겨울에 내리는 눈이란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자연현상인데. 당장 취소해라.」 「알았어요. 그럼 가을철 쌓이는 낙엽으로 정정하죠.」 「낙엽이 뭐가 나쁘다요? 가을에 이그레트가 낙엽으로 책갈피 만들면서 기뻐한 것도 모른다요?」 「아, 그런가.」 「저기, 얘들아? 그거 아냐. 그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고!」 멍하니 지켜보던 유니가 울상을 지으며 두 팔을 붕붕 내저었지만 누구도 들어주는 이는 없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29 / 0240 ---------------------------------------------- 26장. 첫눈 정령들이 쫑알쫑알 떠드는 사이 사령술사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계속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요. 이번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왔을 뿐이니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에단이 싸늘한 어조로 반박했다. 날 선 반응에도 상대는 그저 바람 빠지듯 픽 웃었다. “글쎄요, 증명할 방법은 없는데. 어쨌든 진심입니다. 꿍꿍이를 꾸미려면 제가 왜 굳이 이런 시기에 경비가 삼엄한 교황청까지 바득바득 기어들어왔겠어요?” “…….” “들킬 게 뻔한데.” 비꼬는 뜻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입에 담으면서도 별 감흥 없는 어투라 그 점이 더 수상했다. 입을 다물긴 했지만 에단의 검은 눈동자는 더욱 날카롭게 예배당 내부를 훑었다. 그가 쥬다스 대신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려 걸음을 뗀 순간, 어둠 속에서 수십 쌍의 붉은 안광이 촛불처럼 화악 모습을 드러냈다. “단,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거기 계신 황태자 전하.” 번들거리는 사령들의 붉은 눈 사이에서 소년의 목소리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한 분뿐입니다. 나머지 분들은 거기서 기다려 주셔야겠네요.” “헛소리.” 다시금 칼 같은 거부가 돌아왔다. 당연히 에단과 바이칼은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가 사령술사와 대치를 하면 했지, 쥬다스만 들여보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따위 허튼수작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용건이 있다면 지금 말해.” “그건 곤란하군요.” “왜지?” “제가 좀 예민해서요. 낯을 가리거든요.” 상대가 내건 이유는 뻔뻔스럽기까지 했다. 사령술사는 거기에 한술 더 떠 덧붙였다. “보는 눈이 많으면 말수도 적어지죠.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못하면……. 흠, 아쉽잖아요.” 말투는 태평성대가 따로 없었으나 어쩐지 그 안에서 마치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듯 약간의 절박함마저 느껴졌다. 에단과 바이칼이 침묵하는 사이 사령술사는 쥬다스에게로 대화의 화살을 돌렸다. “그러니까 당신과 따로 대화했으면 좋겠네요. 황태자 전하.” “무슨 그런 억지가.” “그러마.” 바이칼이 인상을 찌푸리고 따지려는 순간 산뜻한 답이 떨어졌다. 잘못 들었나 싶어 얼떨떨한 눈으로 돌아보는 수하들에게 쥬다스는 가뿐히 쐐기를 박았다. “마침 나 역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전하!” 경악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으나 쥬다스는 이미 건물 안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이대로 사령술사와 둘이 대면하게 둘 수는 없었기에 황급히 따라 들어가려던 두 사람의 귓가에 단호한 명령이 떨어졌다. “에단, 바이칼. 너희는 잠시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그럴 수 없습니다.” 주군의 명에 의해 급한 대로 멈춰 서긴 했지만 단호하기로는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저희는 전하의 친위기사입니다. 전하의 안위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을 수수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모처럼 바이칼이 진지하게 자신들의 임무에 대해 언급했다. 쥬다스가 정령왕과 계약한 특별한 정령술사인 것과 별개로 기사라면 당연히 주군의 곁을 지켜야 한다. 위험은 예측된 범위 내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강한 의지를 엿본 쥬다스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음, 직무를 외면하라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도 저 아이에게 들을 것이 있어.” “들으실 것이.” “그래. 어차피 위그드라실이 곧 사령의 기운을 눈치채고 이곳으로 올 게다. 시간이 얼마 없어.”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고 있는 사령들은 고위개체는 아니었으나 분명 죽음의 기운을 품고 있는 사악한 존재들이었다. 성녀라면 오래 지나지 않아 이 기운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말에 무쇠 같던 에단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위험인 줄 알면서도 전하의 명에 무엇 하나 불복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나는 너희의 바로 그 점을 신뢰하고 있다. 뜻에 따라주어 고맙구나.” “하아.” 애초에 두 사람은 쥬다스가 완두콩으로 스테이크를 만든다 해도 믿고 따를 이들이었다. 한숨을 쉬면서도 결국 명령에 따르고 마는 에단과 바이칼을 향해 쥬다스가 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자, 그럼 얼른 다녀오마.” “……알겠습니다.” 그들은 고개를 숙여놓고도 안에서 조금이라도 낌새가 이상하면 바로 뛰어 들어올 태세로 건물에 바투 섰다. 그런 두 사람을 문 앞에 세워둔 채 쥬다스는 홀로 낡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이, 탁. 누가 밀지도 않았는데 그가 들어서자마자 문이 저절로 닫혔다. 어둠 속에서 붉은 안광을 번뜩이는 사령들의 숫자는 척 보기에도 수십이 넘었다. 놈들은 오랫동안 굶어 사납게 이를 드러냈지만 그들 앞을 지나는 쥬다스에게 함부로 달려들지는 못했다. 심지어 그가 가까이 다가온 순간 슬금슬금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쥬다스는 사령들로 바글바글 들어찬 긴 의자를 지나 빈 강당에 올라섰다. 커다란 십자가 밑에 죄인처럼 한 소년이 기대서 있었다. “드디어 만났네요.” 기다렸다는 듯 소년이 그를 반겼다. “사실은 별 기대 안 했는데. 진짜 오실 줄은 몰랐거든요.” “‘레이야’가 네 기운에 반응하더구나.” 레이야라는 이름을 듣자 소년은 입을 다물어 버렸고, 불편한 침묵이 강당에 감돌았다. 쥬다스는 쓴웃음을 삼키며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할더.” 마지막 남은 과거의 연이었다. 레이야의 영혼이 검에 묶이고, 프리드가 덧없이 소멸해 버린 이후 할더는 목적을 잃어버렸다. 홀로 남은 세상은 아무 색깔 없는 흑백 그림과도 같았다. 단맛도 짠맛도, 쓴맛조차 없는 수박의 흰 껍질만을 갉아먹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할더는 죽어버린 세상에서 단 하나의 살아 움직이는 빛을 떠올렸다. 늘 차분하고 무감정하게 움직이던 소년은 앞뒤 가리지 않고 그 빛을 찾아 달려왔다. “역시 당신이 맞았군요. 이그레트 님.” “일부러 부른 것 아니었더냐.” “제가 부른다고 무작정 달려오실 분은 아니잖아요.” “왜?” 곧장 따져 묻는 쥬다스를 보며 할더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소년의 바로 앞까지 다가간 쥬다스가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그야 당신은…….” 할더의 기억 속에서 ‘이그레트’는 늘 그랬다. 아이들이 그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하던 일을 제치고 달려오리란 확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는 그 무엇도 우선순위가 될 수 없으니까요.” 할더는 웃었다. 서운할 일도 원망할 일도 아니었다. ‘이그레트’란 그런 존재였다. 어떤 누구도 그에게 우선시될 수 없고 어떤 무엇도 특별해질 수 없다. 사랑을 받되 태양이 고루 빛을 뿌리듯 공평했다. 사람이 하늘에게 왜 더 많은 빛을 주지 않느냐 따질 수 없듯이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이다.” “……?” “네가 나를 부른 적이.” 금색 눈동자가 가만히 상대를 응시했다. 순간 할더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자식에게 처음 젖을 물려본 어미 개처럼 미묘한 감정이 그 안에 일렁이고 있었다. “무슨.” “함께 지낼 적에도 먼저 찾지는 않더구나. 그래서 너희가 날 필요로 하는 줄 몰랐다. 당시 내게 그 정도 눈치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당시에 그는 자신이 거둔 아이들에 대해 아주 단순하게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찾으리라. 그의 힘을 노리고 접근한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소리 내어 표현하지 않았어도 아이들에겐 늘 돌봐줄 어른이 필요했다. 마치 작고 여린 새싹에게도 햇빛이 필요하듯, 그저 그렇게 그가 곁에 있길 바랐다. 서로 간 소통의 부재로 인해 오해는 커져갔고 결국 그들 사이엔 크나큰 균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추억의 조각 가운데 무언가를 떠올린 쥬다스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중에서도 너는 언제나 무엇이든 알아서 잘하는 아이였지. 할더. 레이야처럼 울며 떼쓰지도 않고, 프리드처럼 화를 내고 따지지도 않았어. 그래서 난.” 묻지도 않은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왔지만 할더는 조용히 그를 경청했다. “난 네가,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스스로 잘하고 있었으니까.” 쉽사리 울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는, 언제나 예의 바르고 잘 웃는 아이. 그게 바로 그가 지옥에서 건져 올린 할더란 꼬마였다. 하지만 그렇게 예의 바르고 잘 웃기 위해서 그 아이가 속으로 얼마나 힘들어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미안하구나. 진작 알아주지 못해서.” 뜻하지 않게 사과를 받게 된 할더가 십자가에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정말 어린 소년이었을 적이라면 모를까, 겉모습만 예전 그대로인 지금은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정말 다른 사람이 되셨군요. 쥬다스 전하.” 할더는 그를 옛 이름 대신 현생의 이름으로 칭했다. 그 정체를 알게 된지는 얼마 안 됐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예전의 ‘이그레트’라기엔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다시 태어났으니 황실의 피를 그대로 이은 생김새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위기가 너무 달라졌다. “다시 물으마. 왜 나를 찾았지?” “음, 그냥 찾아왔다고 하면 믿으실래요?” 왜인지 웃음이 났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한없이 탁하고 어두웠다. 마치 실낱처럼 흘러나온 한숨과도 같았다. 쥬다스가 가만히 그 미소를 바라보기만 하자 할더는 쿡쿡 웃었다. “거봐요. 안 믿으실 거면서.” “많이 지쳐 보이는구나.” “네. 지쳤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찾은 거예요.” 할더는 더 지체하지 않고 그를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이 고통뿐인 삶을 당신 손으로 끝내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해.” “허, 맹랑하구나. 죽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이야?” “사령과 계약한 자는 혼자서 자기 숨통을 못 끊거든요. 정령술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정령과 사령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계약자에게 집착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그 이유는 달랐다. 우선 정령은 계약자에게 강한 애착과 유대를 느끼며 정서를 공유한다. 그렇기에 능력이 허락되는 한에서 무조건적으로 계약자를 지키려든다. 반면 사령은 계약자의 영혼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계약이행의 의무에 따라 사령은 계약자를 최대한 죽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호한다. 그리고 계약을 이룬 순간, 혹은 계약자가 계약이행에 실패한 순간 사령은 먹이를 노리던 매처럼 그의 영혼을 강탈해 간다. 어찌 되었든 각각의 이유로 정령과 사령은 계약자가 죽는 걸 결사적으로 막는다. 그러니 술사들은 자살하거나 자해를 저지를 수 없다. “왜 이제 와서 죽으려는 거지? 너희들에게는 꼭 이루고자 한 목적이 있어 사령과 계약한 것이 아니었나. 그래서 레이야마저 사령으로 만들어버리지 않았더냐.” “잘못 알고 계신 게 하나 있네요. 우리가 억지로 그렇게 만든 게 아닙니다. 레이야는 스스로 사령이 되길 택했어요.” 쥬다스의 예상과는 다른 얘기였다. “그 앤 늘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했죠.” 할더는 십자가에서 등을 떼었다. 형벌에서 탈출한 죄인처럼 홀가분한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다. “특히 당신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어요. 아시잖아요? 레이야가 얼마나 ‘가족’에 집착했었는지.” 노예였던 소녀는 유독 가족을 갖길 원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프리드가 비틀어 꼬드겼고 결국 처음으로 일탈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날, 아이는 도리어 하늘을 잃었다. “당신이 사라진 후, 입버릇처럼 얘기하더군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어쩌면 우리 중 가장 필사적이었던 건 레이야 그 녀석이었을지도 몰라요.” “…….” “어땠나요? 당신이 만난 레이야는.” ‘잘못했어요.’ 쥬다스는 레이야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를 똑똑히 기억했다. 소녀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꿈결처럼 귓가에 아른거렸다. 사령이 된 소녀는 그를 알아보자마자 잘못을 빌었다. ‘죄송해요. 정말. 정말로.’ ‘제발 미워하지 마세요.’ ‘……다시 찾아줘서 고마워요.’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졌다. 열이 끓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차게 얼어붙은 것도 같았다. 그 기묘한 감각을 견디기 어려워진 쥬다스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헉 이 시간에 보시는 분들이 계실 줄은 ㄷㄷ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 0230 / 0240 ---------------------------------------------- 26장. 첫눈 우우우우- 짐승 우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렸다. “수호견이군요. 성녀가 눈치챘나 봅니다.” “…….”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그래도 이게 마지막인데.” “…….” 쥬다스가 직접 손을 쓰지 않더라도 성녀가 엘리시움에 침입한 사령술사를 결코 살려둘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할더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쥬다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하, 그나저나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당신이 군주가 되는 건 상상해 본 적없는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좀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나 봅니다.” “무엇을.” “개혁이요.” 언젠가 프리드가 그에게 말했었다. ‘악은 악으로 제압해야 가장 효과적’이라고. 애초에 그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선은 악을 단죄할 생각이 없다. 원수를 사랑하라든가 용서가 진정한 승리라는 둥 물러터진 주장만을 반복할 뿐이다. 반면 악은 타인을 공격하고 망가뜨리며 불행을 가져다주는 일에 망설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악이 되는 길을 택했다. “한때 누군가는 썩어빠진 세상을 뒤집어 흔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손 놓고 타인의 불행을 구경하기만 하는 지배층을 처단하고 직접 심판자가 되어 죄인의 싹을 뿌리 뽑는다. 과정 중에 희생자들도 속출하겠지만 어차피 가만 놔두어도 닥칠 불행. 그 희생을 양분 삼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면 된다. 그들은 이를 개혁이라 불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정작 썩어가고 있었던 건 나 자신이네요.” 할더는 눈높이까지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사령의 그림자가 마치 부화를 위해 태동하는 나방의 유충같이 느껴졌다. “너무 늦었지만 레이야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계속 착한 아이로 남아 당신을 기다렸다면.’ 공허한 녹색 눈동자가 쥬다스에게로 향했다.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꿈이다. 만일 이룰 수 있다면 그건 꿈이 아니라 희망이라 불렸을 것이다. “이제 그만둘래요. 전부.” 할더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악마와 계약했다가 신벌을 받아 십자가형을 당하는 죄수처럼 모든 걸 포기한 눈이었다. 그때 줄곧 침묵하던 쥬다스가 입을 열었다. “……네겐 삶이 고통뿐인 지옥이라 했던가.” “네.” “그렇다면.” 소년은 웃었지만 쥬다스는 지독히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지옥에 남아.” 생각지도 못한 선고가 떨어졌다. 무감정하게 죽어 있던 할더의 눈이 점차 크게 뜨여졌다. “그게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이다.” 그가 하고자 한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쥬다스는 그대로 돌아섰다.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돌아가는 발걸음을 멍하니 쳐다보던 할더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 잠깐만요! 설마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심히 문으로 향하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할더는 이를 꽉 깨물었다. ‘이게 벌이라고? 이런 게?’ 웃는 것도 한숨도 아닌 애매한 숨이 목구멍을 타고 역류하듯 터져 나왔다. 끝끝내 돌아봐 주진 않는 자신의 하늘을 향해 소년이 절규하듯 소리 질렀다. “진짜 바보예요? 난 당신을 배신했어요. 등에 칼을 꽂고 불행으로 몰리도록 채찍질했다고요. 그렇게 당하고도 모르겠어요? 우리가, 내가 당신을……!” “아. 그렇지.” 우뚝 걸음을 멈춘 쥬다스가 그를 돌아보았다. 맑은 금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갑갑하게 만들었다. “사령술사라면 같은 사령술사들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꾸미는지 더 잘 알 테지. 그들의 뒤를 쫓아.” “무슨.” “발견 즉시 제거하든, 정보만 알아오든 상관없어. 한 달에 한번 경과를 보고해라.” 이독공독(以毒攻毒). 사령술사인 할더를 사령을 제거하기 위한 발판으로 쓰겠다는 말이었다. 후웅! 당황으로 일그러진 할더의 얼굴 앞에 녹색 바람의 정령이 나타났다. 바람은 마치 밧줄을 묶듯 그의 목을 꽈악 휘감았다. 목이 졸리진 않았으나 단단히 얽힌 바람의 족쇄가 선명하게 피부 위로 느껴졌다. “‘바람의 구속’이다. 내가 죽거나 해제하지 않는 이상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정령술이지. 따라서 너는 네 원대로 죽을 수도, 끊고 달아날 수도 없다. 두 번 배신당할 일은 없어야 하니까.” “……!” “네 스스로 버린 목숨 줄은 내가 가져가마.” 은은하게 빛나던 바람의 끈은 잠시 깜빡거리다 이내 시야에서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할더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제 목을 감쌌다. 바람은 형체를 감췄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개에게 목줄을 채워놓듯 그는 정령의 힘으로 구속되어 있었다. ‘어째서.’ 이유를 묻기도 전에 쥬다스는 이미 예배당 문을 열어젖히고 있었다. 대신에 문이 열리자마자 밖에서 기다리던 에단과 바이칼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안에서 별일 없으셨습니까?”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단다.” 괜찮다는데도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는 두 사람을 향해 쥬다스가 조용히 웃어 보였다. “보렴. 멀쩡하지?” 에단과 바이칼은 입을 다문 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상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는 확신이 든 바이칼이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혹시 그 음침한 사령술사 놈이 무슨 짓 했습니까?” “응?” “아까 얼핏 들어보니 겁나게 재수 없는 목소리던데요. 짜식이 건방지게 개긴 거 아닙니까?” “아니. 그저 조금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가벼이 손을 저었지만 둘의 표정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바이칼은 한숨을 푹 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휴, 표정이 전혀 괜찮지 않으시잖아요.’ 다른 이들은 속아 넘어갈지 몰라도, 주군을 모신 지 이제 5년도 넘어가는 그들이었다. 미소라는 가면을 덮어썼다 한들 미묘하게 가라앉은 눈빛이라든가 미처 감추지 못한 창백함 정도는 감지해 낼 수 있었다. 실제로 상처도 없고 본인이 괜찮다는데 계속 따져 묻기도 어려워 입을 다물긴 했지만 분명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하는 의심만 한가득 이었다. “그럼 지금 저곳에는…….” “크르르륵.” 바이칼이 낡은 예배당을 힐끗거리며 할더에 관한 질문을 꺼내려하는 찰나 하얀 털의 짐승이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심기 불편한 눈으로 그르렁대는 거대한 개를 발견한 쥬다스가 친근한 어조로 그를 불렀다. “헤브.” 수호견 헤브라시스였다. 쥬다스에게 이름을 불린 수호견은 고개를 숙여 그가 내민 손바닥에 콧등을 비볐다. “헤브가 하늘을 바라보며 울기에 불순한 일이 있을까 저어하였습니다만.” 당연한 수순으로 성녀 위그드라실이 그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연못가에 내려앉은 학처럼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저 제 기우였던 모양이군요.” 교황의 장례 기간이었지만 성녀는 신성을 상징하는 존재였기에 티 없이 하얀 의상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뒤로는 흑색 제의를 입은 사제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의 소중한 벗이여. 내가 이 성전 안을 들여다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위그드라실은 쥬다스가 등지고 서있는 작은 예배당을 손짓했다. “어찌 내게 허락을 구하십니까. 이곳은 신의 영역이니 뜻대로 하십시오.” 그가 기꺼이 비켜주자 성녀를 따라 많은 사제들이 함께 예배당에 들어갔다. 혹시 큰 싸움이 일어날까 조마조마한 얼굴로 지켜보던 바이칼은 도로 우르르 나오는 사제 무리를 보며 살짝 미간을 좁혔다. ‘쳇. 벌써 달아난 건가?’ 고개를 쭉 빼고 예배당 안을 훑어보자 붉은 안광을 빛내던 사령들은 물론이고 그것들을 다루는 사령술사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찬찬히 내부를 둘러보고 나온 성녀가 입을 열었다. “더러운.” 초점 없는 하늘빛 눈동자가 잠시 예배당을 향했다가 다시 쥬다스에게로 돌아왔다. “먼지가 많이 앉았더군요. 성전을 이리도 소홀히 관리하다니 부끄럽습니다.” “청소가 필요하겠군요.” “예. 형제님들께 청소를 부탁해 두었으니 다른 예배당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정말로 예배당 내부에선 몇몇 사제가 청소를 시작하고 있었다. 성녀는 별다른 추궁 없이 남은 사제들과 함께 대예배당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떼었다. “위그드라실.” 나직하게 부르는 목소리에 성녀가 가슴께에 두 손을 모은 채 그를 돌아보았다. “신은 정말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베푸십니까?” 제국의 황족인 그가 모를 리 없는 기본 교리였다. 성녀는 뜬금없이 그걸 묻는 쥬다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깜빡인 위그드라실이 상냥한 온기를 담아 대답했다. “네. 누구에게나.” 괴로움으로 물든 금빛 눈동자 위로 먹구름 진 하늘이 비쳤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날씨 속에서 성녀의 기도가 이어졌다. “사랑스러운 당신께 축복을.” * * * 쥬다스는 일행과 함께 낡은 예배당을 뒤로 하고 엘리시움의 거리를 걸었다. 그와 마주친 귀족들은 깊이 허리를 숙였으며 사제들도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해왔다. 평소라면 하나하나 부드럽게 응대해주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간단한 눈인사 정도로 예의를 차린 그는 거침없이 사람들을 지나쳐 갔다. 도착한 목적지는 포탈이었다. 추모예배도 참석했으니 더 이상 교황청에 머물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어? 눈 오는데요?” 막 포탈관리실로 들어가기 직전, 바이칼이 하늘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허 참. 춥다 춥다 했더니 진짜 눈까지 오네.” “벌써 눈이 올 시기인가.” 에단도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곤 중얼거렸다. 양탄자처럼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 탓에 아직 해가 질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어두컴컴했다. “올해는 겨울이 빠르군.” “아으, 추워지면 아침에 눈 뜨는 게 두 배로 힘들어지는데. 단장, 오전 훈련 좀 줄여주시면 안됩니까?” “안 돼.” “……저기. 단호박이세요?” 두 사람이 떠드는 걸 들은 쥬다스가 걸음을 멈춰 세웠다. 고개를 들자 막 내려온 눈송이 하나가 그의 볼 위로 내려앉았다. ‘첫눈.’ 차갑던 눈송이는 체온에 닿자 몽글몽글 녹아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수줍어하는 여인처럼 예고도 없이 찾아온 눈은 곧 함박눈으로 바뀌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넋을 놓고 서 있는 사이 머리며 어깨 위로 소복이 쌓일 정도였다. “전하. 옷이 얇으십니다. 이대로 계속 눈을 맞으시면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에단의 말대로 그들은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나 입는 재질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쥬다스가 걸친 것 역시 후드케이프 형식의 겉옷이라곤 하나 함박눈이 쏟아지는 추위를 막기엔 턱없이 얇았다. 수하들의 걱정에도 쥬다스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여유롭게 눈 내리는 하늘을 좀 더 구경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만 가자꾸나.” 하얀 눈이 그림자진 세상을 차곡차곡 덮어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취도, 가을 내내 쌓였던 낙엽들도, 먼지 낀 낡은 예배당도 하얗게 파묻혔다. 그리고 곧 새로운 소식이 제국 내에 퍼지기 시작했다. -교황 서거, 장례절차 이후 사인이 사령술사의 소행으로 밝혀지다. -루바르잔의 황태자, 사령술에 관련된 모든 증거를 엄중히 검토할 것을 명하다. -조사 도중, 거대 조직의 뒷심을 마련하던 사령술사 집단이 덜미를 잡히다. -황태자의 명에 의해 발각된 사령술사 전원 공개처형하다. 찬 겨울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이고 뭔가 수정하면서 올리다보니 텀이 좀 길어졌네요 (..) 이것으로 '26장 : 첫눈' 챕터가 끝났습니다. 다음 편부터 '27장 : 성인식'으로 이어집니다.ㅎ 밤인데도 무척 덥네요. ㅠㅠ 슬슬 여름이 끝나가려나 하고 달력을 봤더니 이제 시작이었다는....부들부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셔요! ^^ 0231 / 0240 ---------------------------------------------- 27장. 성년식 새해가 밝았다. 교황이 숨을 거둔 충격으로 움츠러들었던 제국에도 새 햇살이 비추자 슬슬 밝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새해 첫 달에 있는 가장 큰 행사는 다름 아닌 ‘성년식’이었다. 평민부터 귀족, 황족을 가리지 않고 제국 내 모든 18세 소년소녀가 성인으로 인정받는 시기. 생일과 상관없이 태어난 년도로부터 햇수로 18년째를 맞는 아이들은 모두 축하받을 자격이 주어진다. 그들은 새 옷을 입고 새 신을 신으며 어른이 열어준 파티에 참석한다. 매년 새해를 맞아 성년식을 치르는 시기는 특별했지만 이번 해는 유독 나라 전체가 평소의 갑절은 더 들떠있었다. 바로 제국 군주의 후계자, 쥬다스 E.루바르잔 아르키디온이 18세가 되는 해기 때문이다. 황실의 주도하에 전국적으로 성대한 축제가 열렸다. 평소 아들의 일에 무심하게 굴던 황제였으나 이번만큼은 조금 그 태도가 달랐다. 황제 레위스는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황태자의 성년식에 신경을 기울였다. 심지어 쥬다스를 불러 직접 축하선물을 하사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많은 사람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할 만한 명을 내렸다. “……폐하. 그 명은 거두어주십시오.” “불허한다.” 황제와 황태자의 각 측근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두 부자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어지간해서는 황제의 명에 토를 달지 않던 황태자가 거부를 표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황제가 직접 마련한 둘만의 식사 자리였다. 본래대로라면 아버지와 아들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겠거니 싶은 장면에서도 둘 사이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애초에 황제는 식사를 가족과 함께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성년이 된 아이를 불러 축하한다는 명목으로나마 한 상에 앉혀놓은 자체가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색함을 넘어 분위기는 싸하기까지 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황제 앞에서 하필이면 그 유순하고 총명한 황태자 역시 평소라면 하지 않을 반항을 하고 있었다. 또 황제는 황제대로 그런 아들의 반항을 단칼에 쳐 냈다. ‘아니 왜들 이러십니까!’ 덕분에 시종들과 호위들만 진땀을 뻘뻘 흘러내렸다. 주변 사람들은 불안해서 위장이 다 떨릴 지경인데 정작 황제와 그의 후계는 태연한 얼굴로 요리를 맛보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참 닮은 꼴 부자였다. “앞으로, 이달이 끝날 때까지 성년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할 것이다.” 먼저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었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금안을 힐끗 쳐다본 황제 레위스가 시선을 거두며 툭 내뱉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차기 국모가 될 여인을 찾아오라.” “폐하.” “명은 번복하지 않는다.” 대화의 창구를 닫아버리는 황제를 보며 쥬다스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매사 여유로운 그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현생의 부친이었다. 살아온 날로만 따지고 보면 자신보다 어린 사내이긴 하나 동시에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준 ‘아버지’이기도 했다. 지금 그가 이그레트가 아닌 쥬다스로 살아가고 있는 이상 그 앞에서 함부로 굴긴 힘들었다. 거기다가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부모와 부대끼며 살아본 적 없는 그는 이런 관계가 숨이 턱 막히도록 낯설었다. 결국 쥬다스는 강하게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고 소소한 반박만으로 난색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소자에게는 아직 다른 이를 품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핑계가 우습구나. 내 네가 그토록 총명하다 들었거늘.” 말과는 달리 황제의 차가운 얼굴에서는 미소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쾌와 불쾌,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는 탁한 금안이 자신을 빼닮은 아들에게로 향했다. “사내가 여인을 품는 일에 어찌 준비를 논한단 말이냐. 이는 팔을 뻗고자 하는 곳에 뻗고 발을 딛고자 하는 곳에 딛는 것과 마찬가지일진대.” “…….” “너는 팔과 다리를 움직이는 일에 준비가 필요하더냐.” “그런 뜻이 아니오라.” 황제의 말에는 틀림이 없었다. 자신에게 닥친 일만 아니라면 쥬다스도 구구절절 옳은 소리라 여겼을 것이다. 실제 황족들은 황권다툼이 오래 이어지거나 급박한 전시상황이 아니라면 성년식을 치르기도 전에 이미 여인을 거느렸다. 지금 같은 태평성대에, 이미 군주의 자리가 약속된 후계자라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차라리 전생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나았겠지만.’ 문제라면 쥬다스에겐 백 년 가까이를 살아온 전생의 기억이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이걸 곧이곧대로 말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 알맹이를 빼고 얘기해선 도저히 납득시킬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황제는 거침없이 상황을 일축했다. “더 들을 이야기는 없는 것 같군.” 둘 다 입이 짧은 편인지라 이미 식사는 끝난 지 오래였다. 부친이 먼저 일어서자 쥬다스도 따라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지근하게 식은 찻잔을 식탁에 남겨둔 채 황제가 돌아섰다. 멀어지는 등을 복잡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쥬다스가 이마를 짚은 채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곤란한데.” 「헤에. 뭐야뭐야, 지금 너더러 결혼하라는 거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유니가 그의 주변을 빙그르르 돌며 물었다. 본인은 복잡할지 몰라도 주변인들에겐 상당히 즐거운 구경거리였다. 「우웅? 결혼? 언제 그런 얘길 했다요?」 여태 듣고 있었으면서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한 토니만이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바보냐. 아까 차기 국모 어쩌고 했잖아.」 「엑! 그게 그 뜻이다요?」 「이그레트가 이 나라의 차기 왕이니까. 당연히 결혼을 하면 그 여자가 국모가 되겠지.」 「신기하다요. 그럼 진짜루 결혼하는 거다요?」 「그을쎄.」 해맑게 물어오는 땅의 정령을 향해 유니는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가 느끼기에 그들의 계약자는 그다지 결혼을 원하고 있지 않았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돼요.」 어차피 계약자의 바람을 최우선시하는 정령들의 입장에선 그다지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유니와 함께 단순한 답을 내어놓은 카니가 방실방실 웃으며 그의 어깨에 매달렸다. 「모든 것은 당신의 바람대로. 이그레트.」 바라기만 한다면 아예 당장 눈앞에 참한 신붓감을 구해다 줄 기세였다. 정령들의 반짝반짝한 눈길에 더욱 난감해지고 만 쥬다스는 고개를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황제의 궁에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에단과 바이칼이 뒤로 따라붙었다. “크으, 벌써 전하께서 성년이시라니. 감개무량합니다.” 안에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모르는 두 친우는 그저 이번 성년식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무려 모시는 주군이 성인으로 인정받는 날이다. 다른 어떤 날보다 특별한 감격이 느껴졌다. 이미 재작년에 성년식을 마친 바이칼이 모처럼 선배의 기분을 만끽하며 코를 슥 훔쳤다. “언제까지나 어린아이로 계실 줄 알았는데, 이거 참 뿌듯…….” 문득 말하고 나니 위화감이 느껴진 바이칼이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어, 이건 아닌가?”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 봐도 쥬다스가 어린애답게 굴었던 적이란 떠오르지 않았다. 어른스럽다 못해 인자한 노인처럼 항상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다닌 쥬다스는 오래 전부터 어른 취급을 받고 있었다. 어울리는 이미지를 꼽으라면 큰 가지를 드리운 거목이었지 결코 새싹 느낌은 아니다. 성년식을 앞둔 아이를 보며 느낄 법한 보편적인 정서와 쥬다스만의 특별한 감각 사이에서 혼돈을 겪고 있는 바이칼을 보며 에단이 미간을 좁혔다. “바이칼.” “예입.” “말을 할 때는 생각이란 걸 좀 깊이 하고 내뱉도록.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전하를 곤란하게 해드릴 셈인가.” “예? 전하, 제가 곤란하게 해드렸습니까?” 핀잔을 줬더니 그걸 또 고스란히 본인에게 확인하는 수하로 인해 에단의 표정이 미미하게 구겨졌다. 바이칼이 능청스럽게 물어온 게 정말 몰라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쥬다스는 피식 웃으며 답해주었다. “괜찮다. 내가 영 어른스럽지 못했던 건 사실이지.” “억. 아뇨!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받게 된 바이칼의 안색이 순식간에 허옇게 떴다. 그야말로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굴에 들어간 꼴이었다. “흠. 이런, 절대 그렇지 않을 정도라니. 어울리는 동안 내게 아이다운 맛이 없어 고생이 많았겠구나.” “으아아! 아닙니다, 전하! 제발.” 이제 바이칼이야말로 아이처럼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시무룩하니 울상 짓는 그를 내버려 둔 채 쥬다스가 에단을 향해 말꼬리를 돌렸다. “참, 에단.” 에단은 곧장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담을 좋아하고 진지함이라곤 찾기 어려운 바이칼과는 달리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도를 잃지 않았다. 성향으로 따지면 극과 극인 두 사람이 절친한 친우가 되어 같은 주군을 모시는 상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바라보는 이들도 많았다. “너는 가문의 독자라 하였지?” “예, 그렇습니다.” 헤이가 공작가문의 독자로 하나뿐인 후계자인 에단은 올해로 21살이 되었다. 이제 갓 성년식을 맞게 된 쥬다스보다 3년 앞서 성인이 된 그도 아직까지 싱글이었다. 오히려 멋모르는 십 대 초반에는 집안에서 내정해 준 약혼녀가 있었으나 루바흐에 입학하고 나서 파혼을 결정했다. 루바흐에서 충성서약을 맹세하였으니 주군의 위치가 안정될 동안은 당분간 혼약에 집중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고 어릴 적 집안끼리의 결정만 믿고 멀쩡한 아가씨를 오랫동안 홀로 버려둘 수는 없으니 자유롭게 다른 기회를 맞으라는 나름의 배려이기도 했다. ‘아, 맞아. 소문으로는 아직 그 아가씨가 마음을 접지 않았다곤 하던데.’ 소문을 떠올린 바이칼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괜히 소리 내어 말했다가 또 어떤 일침을 맞을지 두려워서였다. ‘근데 이상하네. 집안 짱짱하고 인기도 많다면서? 뭐가 아쉬워서 단장 같은 냉혈한을 기다리겠다는 건지. 으휴, 여자들이란.’ 에단에 대해 볼꼴 못 볼 꼴 다 본 바이칼로서는 도무지 여자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물론 그에게는 기다리겠다는 여자가 없었고 가문끼리 언약을 맺었던 약혼녀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에이, 절대 부러운 건 아니야.’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는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자신을 세뇌시켰다. “…….” 문득 진 것 같다는 슬픈 예감이 가슴속에 휘몰아쳤지만 애써 모른 척 입맛만 다셨다. “삐잉!” “그래, 나한텐 네가 있었지.” 품안에 폭 파고들어 있던 플루비가 그의 심란함을 눈치채곤 고개를 쏙 내밀었다. 선물 받은 빨간 망토가 귀엽게 어울렸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도 여자애라며. 용족이긴 하지만 어쨌든 날 잘 따르잖아?’ “삐?” ‘그러니까 난 여자한테 인기 없는 게 아니야!’ 엉뚱한 논리였지만 마음이 편해지는 데엔 성공했다. 바이칼은 씩 웃으며 플루비의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어이구, 예쁜 것.” “삐액?” “물 마실래?” 수상쩍게 쳐다본 건 언제고 물을 준다니 또 좋다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꼬리까지 살랑이고 있는 단순한 와이번을 보고 흐뭇해진 바이칼이 수통을 꺼내 뚜껑에다가 물을 따라주었다. 그사이 주군으로부터 무슨 말이 나올지 기다리던 에단은 쥬다스가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는 낌새를 눈치 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따로 하문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으음.” 물론 있었지만, 에단과 파혼한 얼굴 모를 영애에게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자 차마 그에 관한 질문을 던질 수가 없었다. 결국 쥬다스는 솔직하게 제 고민을 털어놓기로 결단했다. “실은 내가 조금 전 폐하께 따로 명을 받은 게 있는데 말이다…….” “주인!” 그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최근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분주한 청룡, 가야였다. 루바르잔이라는 새로운 땅에 어느 정도 적응한 가야는 이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수도 근처를 탐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시간만 혼자 내버려 두면 불안해하더니 이젠 쥬다스의 곁에서 제법 오래 떨어져 있곤 했다. 이번에는 무려 한나절씩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던 가야는 어딘지 설레는 표정으로 계약자의 곁에 돌아왔다. “나, 나! 오다가 들었어!” “응? 뭐를.” 신수 특유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을 발했다. 그 눈빛을 보자 쥬다스는 문득 다른 정령왕들이 보내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떠올리고 움찔 뒤로 물러섰다. 아니나 다를까, 청룡은 두 주먹을 움켜쥔 채 들뜬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결혼한다며?” “푸우웁!” 느닷없는 폭탄선언에 플루비와 나란히 물을 마시고 있던 바이칼이 입에서 분수쇼를 선보이고 말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32 / 0240 ---------------------------------------------- 27장. 성년식 해맑게 물어온 가야 덕에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게 무색해지고 만 쥬다스는 그만 실없이 웃어버렸다. “……라는 명을 받긴 했다만.” 가야 덕분에 황제로부터 받았다는 명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깨닫게 된 에단이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수하들의 놀람 섞인 시선을 받으며 쥬다스는 태연히 말을 이었다. “따르겠다고는 안 했어.” “어엉? 결정된 사항이 아니야? 그거 아쉽네.” 청룡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이었지만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주인한테 짝이 생긴다면 어떤 사람일까 엄청 궁금했는데.” “그러는 가야 님은 따로 짝이 없으십니까?” “정령은 후손을 남길 필요가 없으니까.” 그 대답에 바이칼은 가야가 정령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되새겼다. 겉모습은 인간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가야는 엄연히 신수, 즉 동물계 정령이었다. 그들은 선대가 소멸함과 동시에 그 자리를 채울 똑같은 능력치의 후대가 눈을 뜬다. 그러니 정령에게 따로 배우자가 필요할 일은 전혀 없었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이번 달은 좀 바쁠 것 같구나.” 그제야 가야도 장난을 거두고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흐응. 표정을 보니 주인은 별로 안 내키는 것 같네.” “하지만 내 하고 싶은 대로만 고집 부릴 수는 없으니 말이야.” “하긴.” 해동의 건국부터 시작하여 왕실대소사를 전부 지켜봐 온 청룡이다. 성질 같아서는 그냥 다 엎어버리고 원하는 대로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국 황제의 후계란 자리가 그리 편안히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다니까.’ 귀찮기만 한 허례허식조차 목숨 걸고 지키려 든다.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도 신분에 따라 고개를 조아리며 때론 싫은 일도 기꺼이 받아들여야할 때가 있다. 본능보다는 이성이 앞선 사회. 그러한 인간 세상에는 인간들만의 침범할 수 없는 선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가야로서는 그저 떫은 표정으로 뱃가죽만 긁적거릴 뿐이었다. 반면 강제로 배우자감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쥬다스는 정작 여유로운 태도였다. “다들 어째 심각한 분위기로구나. 그리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단다.” “하지만 전하. 폐하께서 직접 관여하시는 일이라면 어영부영 넘어갈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암, 당연히 어영부영 넘어가서는 아니 되지.” “그 말씀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때에는 언제나 명분이란 게 필요한 법.” ‘……황제폐하를 설득시키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칼은 차마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한 경악성을 가까스로 삼켰다. 결혼이라는 중대사를 말 한마디로 강요한 황제도 황제지만 거기에 대항하려는 쥬다스의 고집도 어마어마했다. 현 황제가 누구인가. 혈육의 목이 떨어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으며 군주의 자질을 키우기 위해 자식을 사지로 내몰고 제 알아서 살아 돌아오길 기다린 자다. 그런 자를 말로 온건히 설득하는 일은 도무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럼 그 명분이란 건 어떻게……?” “일단은 폐하께서 준비해 두신 파티엔 꾸준히 참석해야겠지.” 본래 파티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그였다. 시끄러운 장소보다는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분위기를 선호하기 때문이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러한 취향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 한 달.” 나머지는 그 후에 생각할 일이다. “그동안은 너희가 나를 좀 도와주어야겠구나.”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두 친우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그것으로 그날 일과를 마친 쥬다스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평소보다 일찍 방으로 돌아갔다. 쭐래쭐래 따라 들어온 가야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주인.” “응?” “주인은 왜 그렇게까지 혼약을 거부하는 거야? 좀 이른 감은 있지만 황제가 시킨 게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나?” 다른 이들이 있을 때엔 미처 물어보지 못한 속내였다. 그 물음을 듣자 쥬다스가 답하기도 전에 정령들이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요즘 애들이랑은 나이 차이가 너무 커서 그런 게 아니다요?」 「그러게. 이그레트는 이미 한 번 노인으로 살았었잖아. 애들은 눈에 안 찰 수 있지.」 「으응, 상대가 너무 아가 같으면 부담스럽지 않을까요?」 다른 정령들의 추측에도 가야는 흔들리지 않고 팔짱을 척 꼈다. “요 꼬꼬마 정령들아. 니들은 인간을 몰라도 너무 몰라.” 「뭐야?」 “진짜 갓 태어난 응애응애 아기도 아니고 다 큰 처자를 보고서 누가 아가 같다는 생각을 하겠냐?” 「아냐! 인간은 수명이 짧기 때문에 열 살만 어려도 되게 어려 보인다고 그랬단 말이야.」 한심하다는 투에 발끈한 유니가 따져보았지만 가야는 콧방귀만 뀌었다. “헹. 너희가 지금 뭘 착각하고 있는데. 어려 보이는 거랑 매력을 느끼는 건 다른 문제다?” 「……달라?」 “인간 세상에선 나이 칠팔십이면 노인이지? 그런 노인들도 이십 대 젊은이를 좋아할 수 있다고.” 「정말?!」 “응. 실제로 해동에선 늙은 왕이 십 대 여자아이를 부인으로 삼는 경우도 꽤 많았다?” 「우와아, 대단해. 인간이란 여러 의미로 대단하구나!」 자연계 정령왕들을 앞에 두고 뜬금없는 인간사 교육을 시작한 청룡을 보며 쥬다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정령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뒤돌아 침대에 털썩 누웠다. ‘현생의 또래아이들이 어려 보이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의 진짜 속마음은 가야의 주장과는 조금 달랐다. 루바흐에서 거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크리스티나를 보고도 마음이 동하지 않던 이유는 그녀가 정말 어린아이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건 양 수인족 키리에도, 오십 년을 살았다는 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들은 그에게 있어 돌봐 줘야 할 대상이었다. 전생에서 노예 출신인 레이야를 구해주어 한 지붕 아래에서 살면서도 딸처럼 아껴주었던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그에게 접근하는 여성들에게선 지위나 명예를 노리고 있는 어린 생각이 전부 보였다. 이렇듯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그로서는 심리적인 나이도 문제였지만 실상 더 큰 장벽은 따로 있었다. ‘결혼은 즉 가정을 이루는 일.’ 물론 군주가 혼약을 맺는 데엔 더 크고 복잡한 관계가 얽혀 있겠지만 결혼이란 공통적으로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다. 쥬다스는 누운 채로 천장을 향해 손을 뻗어보았다. 처음 12살로 눈을 뜬 이후로 보았던 작은 손바닥은 이제 제법 자라 어른의 손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겉보기만 그럴듯할 뿐 그 손으로 거둔 무엇도 책임지지 못했다. 그는 맥없이 손을 떨구었다. 복잡한 상념을 담은 긴 숨이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가족이 된 아이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직접 그 숨통을 끊고 비참한 말로를 지켜보았다.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이는 사령술사를 쫓는 사냥개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제 새롭게 소중한 존재들로 자리매김한 이들 역시 그런 식으로 잃고 싶지는 않았다. 하물며 여기에 새로운 사람을 ‘반려’라는 틀로 받아들여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지금은 내 마음 하나 다스리기도 벅차.’ 모든 사람이 그를 대단한 현자, 이제는 완벽한 군주의 후계라 치켜세웠지만 그 안에 깃든 마음은 나약하기 그지없었다. 영토를 다스리는 군주에겐 그 핏줄을 이을 의무 또한 있다. 그 의무를 외면할 셈은 아니었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관계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어느샌가 와글와글한 정령들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카니가 그의 뺨에 살며시 손을 올리고 있었다. 선한 다홍빛 눈망울이 따뜻한 온기를 품고 휘어졌다. 「이그레트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좀 더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좋을 텐데.」 그 손길이 무척 포근하게 느껴져서 절로 눈이 감겼다. 피곤하단 말은 거짓 핑계가 아니었다. 잠에 빠져들락 말락 하는 애매한 경계선에서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충분해.” 「뭐가요?」 “걱정할 수 있는 게 많은 지금이…….”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이 홀로 살았던 쓸쓸한 시간보다. ‘훨씬 좋아.’ 시원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실체화가 풀려 버린 자연계 정령왕들 대신 청룡 가야가 이불을 끌어다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주인은 왜 모를까?” 하늘을 담은 듯한 푸른 비늘이 가야의 피부 위로 신기루처럼 퍼져 나갔다. 곧 사람 팔뚝만 한 작은 청룡의 모습으로 바뀐 그가 꾸물꾸물 계약자의 발치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웠다. 「세상에서 단 한 사람만 걱정하면 된다는 게 얼마나 편한데.」 목소리 대신 정령들이 사용하는 파장으로 변한 청룡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슬금슬금 다가온 푸른 늑대가 조용히 그 곁에 자리를 꿰차고 엎드렸다. 그러자 포로록 날아든 유니도 동조를 표했다. 「역시 그렇지?」 「헤헤, 그렇다요. 완전 편하다요.」 이젠 완전히 한 식구가 되어버린 다섯 정령이 동시에 키득거리고 웃었다. * * * 며칠 뒤, 하루도 빠짐없이 열리는 황궁 파티에 발길을 끊지 않는 황태자를 두고 암암리에 소문이 퍼졌다. ‘이번 한 달간 치러지는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은 사실상 황태자비 간택 기간이다!’ 대놓고 공표한 건 아니었지만 누구나 눈치껏 알아차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파티라곤 눈길도 주지 않던 그가 특별한 목적도 없이 나흘간 연달아 파티장에 출현한 것만 봐도 그랬다. 덕분에 본래 파티를 즐겨하던 자들은 물론이고 대충 눈도장만 찍고 관심을 거두려던 모든 귀족이 발등에 불 떨어진 듯 안달하기 시작했다. “자네, 내일 파티 초대장은 구했나?” “당연하지. 한데 가문당 자녀는 1인까지 동반이 가능하다는군. 후우, 딸내미가 셋이나 되는데 어떤 아이를 보내야할지 통 정할 수가 없어.” “나도 마찬가지일세. 조카딸이 둘인데 둘 다 빼어난 미녀라…….” “듣자 하니 황태자 전하께서는 외모보단 지혜를 보신다 하던데.” “에잉. 모르는 소리! 외모는 베이스고 지혜는 옵션일세.” 이런 대화는 이제 일상적이었다. 어지간한 미녀로는 황태자의 시선조차 사로잡을 수 없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차린 귀족들은 이제 재색을 겸비한 여아들을 파티장에 들이밀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뛰어난 재주를 가졌으나 레이디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묻혀 있던 여성들이 속속들이 진가를 드러냈다. 황족의 반려로 간택받는 대상에는 일반적인 혼인과는 다르게 나이 제한이 없었으니 아직 성년식도 치르지 못한 어린 소녀에서부터 과년한 처녀에 이르기까지 나이대도 무척 다양했다. 그로 인해 황태자의 성년을 축하하는 파티장에서는 그동안의 파티와는 사뭇 다른 진풍경이 펼쳐졌고 때를 노려 줄을 대기 위해 파티를 찾는 귀족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모든 현상을 출현만으로 가능하게 만든 쥬다스는 파티가 시작된 지 열흘이 다 되어가도록 누구에게도 이렇다 할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황태자비 후보로 딸과 조카 등을 밀어주는 귀족들의 긴장은 점차 커져만 갔다. “그래서, 너는 왜 가지 않겠다는 것이야?” 그리고 한 영지에서도 같은 이유로 속 끓이는 사내가 있었다. “크리스틴.” 가문을 이어받아 젊은 공작으로 자리매김한 신예 델피아 공작. 알시오스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자신의 여동생을 바라보았다. 파도치듯 아름다운 바닷빛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어깨선을 따라 늘어뜨린 크리스티나 R.델피아가 무표정한 얼굴로 찻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녀는 새해를 맞아 모처럼 학생회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휴식 기간을 갖는 중이었다. 오라비인 알시오스가 어렵게 구한 파티 초대장을 내밀었더니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하께선 그런 생각이 아니실 겁니다.” “그걸 네가 어찌 알고?” “…….” 우아하게 테이블에 찻잔을 내려놓은 크리스티나가 답했다. “그냥 감이에요.” “하.” 어처구니없는 한숨이 끓는 기름처럼 툭 튀어나왔다. 그의 여동생은 감 운운하며 명확한 근거 없는 행동을 할 정도로 어수룩한 소녀가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하기로 치면 공작 위에 오른 알시오스 자신보다 더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예쁘고 똑똑한 여동생에게 부족한 것이라곤 단 하나, 상황을 어우르는 융통성. 철근처럼 딱딱하게만 굴어 혹여 세상 풍파에 부딪혀 부러지기라도 할까 걱정하던 때가 하루 이틀이던가. 알시오스는 억지로 미소 짓느라 경련이 일어나는 입가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곧장 이어집니다! 0233 / 0240 ---------------------------------------------- 27장. 성년식 “크리스틴, 내가 모를 줄 알아?” “뭐를요?” 태연스레 대꾸하는 그녀가 예전의 그 새침데기가 맞나 싶다. “요사이 뜬금없이 학생회 일을 시작하더니 황태자 전하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파티에도 안 가겠다고? 언제는 말도 없이 가출을 하지 않나.” “‘출가’입니다. 가출은 어린아이들이 허락 없이 집을 나갈 때 쓰는 용어지요.” ‘……결국 가출 맞잖아!’ 울컥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반박을 간신히 삼킨 알시오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동생을 어르기 시작했다. “어쨌든 아예 축하조차 드리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서운해하시지 않겠니.” ‘서운…… 하실까?’ 크리스티나의 푸른 눈동자에는 별달리 기대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꽃잎이 지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우아한 손길로 잔을 매만지곤 있었지만 자색 찻물이 흔들리는 것까진 감출 수 없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이내 쓴 미소가 자리했다. ‘상상하지 말자.’ 혼자 멋대로 상상해 봤자 전부 무의미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마음에 둔 이는 정말이지 예측하기 힘든 남자였다. 어떤 면에서라도. 그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 게 무색해질 만큼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여동생을 보곤 알시오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라 애매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크리스틴, 네가 처음 학교에 들어갈 때를 기억해?” “루바흐 말입니까?” “그 명문 루바흐에 입학하지 않겠냐는 추천서를 보자마자 네가 뭐라고 했게?” 루바흐 정식 입학 시기가 열 살이니 그때가 벌써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일이었다. 크리스티나는 어렵지 않게 당시를 떠올려 냈다. ‘싫어요.’ 어릴 적부터 그녀는 호불호가 강했다. 싫은 것은 칼같이 거절했고 좋은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만 했다. 그게 바로 바쁜 부모님과 후계자 교육으로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빠 알시오스 사이에서 어렸던 크리스티나가 택한 생존방법이었다. 무조건 효율적으로, 무조건 뛰어난 모습을 보여야 칭찬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그녀에게 있어 가족들과 멀어지기만 하고 불필요한 학습 과정으로 가득 찬 학교 따윈 방해였다. “학교에 가봤자 시시하기만 할 거다, 차라리 집에서 개인교습을 받는 게 훨씬 빠르고 능률적일 거다, 뭐 그랬었던.” “오라버니! 그땐.” “맞아. 그땐 어려서 몰랐지?” 알시오스는 살그머니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은 절대 우리 생각대로만 돌아가지 않아.” “…….” “기대를 하든, 좌절을 하든. 당시엔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모래밭에 숨은 조개껍데기처럼 무수히 많다는걸.” 고작 몇 해 앞서 태어난 형제였지만 알시오스에게선 한발 먼저 어른이 된 자로서 그녀에게는 없는 여유가 느껴졌다. 오라비의 웃는 낯에 기가 눌리고 만 크리스티나가 불만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심통 난 고양이 꼴로 오도카니 앉아 있는 그녀를 두고 알시오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 파티가 네게 있어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몰라.” “기회?” 제 오라비에게서 나오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였기에 크리스티나의 눈매가 쨍하니 가늘어졌다. ‘무슨 기회? 내가 아는 오라버니는 분명 권력을 탐하는 성향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동안 알시오스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친족을 황태자비로 앉히는 일에 관심이 없으리라 추측하고 있었다. 이미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델피아 공작가에선 굳이 황가와 더 얽힐 이유가 없었다. 과한 욕심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르게 마련이다. 현 황제의 첫 정실이었던 하윤 리가 어떻게 죽었는가. 호수 위에 떠있는 백조가 고고하고 아름답지만 물밑을 들여다보면 쉼 없이 허우적거리듯, 호화로운 겉과는 달리 실상 암투가 난무하는 황실이다. 황가에 충성을 바칠지언정 그 일원이 되어 전전긍긍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그래서 알시오스는 처음부터 여동생인 크리스티나가 황태자와 얽히는 일을 꺼려 했다. 적어도 크리스티나 본인이 느끼기엔 그랬다. ‘설마 눈치챈 걸까?’ 수년 전부터 단 한 사람을 향한 외사랑에 일희일비하는 그녀를 봤다면 누구라도 알아차릴 수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연애초짜인 당사자는 그저 조마조마하기만 했다. 여동생의 경계 어린 눈빛을 받으면서도 알시오스는 꿋꿋하게 품에서 하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여기 초대장이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분께선 제가 가지 않는 편이 더 편하실 겁니다.” 수상쩍긴 했지만 크리스티나는 일단 칼같이 거절하고 봤다. “아니. 그분 말고.” 알시오스의 입에서 뜬금없는 이름이 튀어나왔다. “수신자는 바이칼 B.드레이크. 네 절친한 친구가 보낸 초대장이야.” “하아?” 누가 누구랑 절친하다는 건지. 그녀는 황당함에 저도 모르게 초대장을 손에 건네받고 말았다. 손에서 느껴지는 빳빳한 종이의 촉감에 표정을 굳힌 크리스티나가 초대장을 팔락 펼쳐보았다. <귀하를 가면파티에 초대합니다.> 첫줄부터 기가 막혔다. <크리스티나 님, 오기로 약속한 거 잊지 않았죠?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집에 계신 거 다 알아요. 성인식 기념으로 열리는 새해 첫 가면무도회! 엄청 신경 써서 준비해 놨으니까 꼭 오셔야합니다.> 서체를 읽고 있을 뿐인데 어쩐지 그 촐랑거리는 목소리까지 함께 들리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줄까지 읽고 난 크리스티나는 결국 보호막처럼 얼굴을 장악하고 있던 무표정을 해제하고 푸훗 웃어버리고 말았다. <추신 : 올 때 파도맛 사탕.> 파도맛 사탕은 바다를 끼고 있는 델피아 령 특산품이었다. 맛이 독특하고 강렬해 현지인이 아니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친우들은 군소리 없이 잘 먹었다. 여기엔 여행 다닐 때마다 그 지방의 특산물은 맛보는 게 예의라며 억지로 일행들 손에 쥐어주던 쥬다스의 영향이 컸다. 오랜 친구라곤 하나 건방지기 짝이 없는 바이칼의 요청에 크리스티나는 탁 소리 나게 초대장을 접었다. “갈게요. 가면파티.” * * * 새해를 맞은 수도에는 갖가지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중 황궁에서 열리는 파티 못지않게 많은 청춘남녀를 설레게 만든 파티가 하나 더 열렸다. 바로 드레이크가의 차남이 주최하는 가면파티였다. 참여자 불명. 참여인원 불명. 초대기준 또한 불명! 오로지 주최자 하나만 공개된 비밀의 파티. 이것이 바로 요즘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가면파티였다. 이 가면파티는 엄격한 예절을 따라 신분 기준으로 어울려야 하는 여타 파티와는 다르게 아예 신분 노출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물론 작위가 있는 자들에 한해서 초대를 받는다는 일차적인 규칙은 있었지만 자세한 신상정보만큼은 철저히 비밀로 유지한다. 비밀은 신비감을 조성했고 신비감은 곧 기대감으로 변하여 설레면서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장에 게재된 회원 인장을 검사하겠습니다.” 가면을 쓴 손님이 당도하면 입구에서 경비병들이 초대장을 받아 위조가 아닌 정품인가를 검사한다. 정품 여부는 바로 초대장에 찍혀 있는 초대 회원 인장으로 알 수 있다. 미리 인장을 찍을 때 사용한 잉크와 짝을 맞춰놓은 마법석을 가져다 대었을 때 녹색불이 뜨면 통과, 무반응이면 불통이다. 몰래 가짜 초대장을 만들어 난입하려는 자가 많아 입구에서 하는 검사인데 이 검사가 끝나면 추가 검사 없이 온전히 파티를 즐길 수 있게 된다. 포옹! 마법석에서 통과를 알리는 불이 들어오자 경비병들이 고개 숙여 손님을 맞이했다. “환영합니다, 회원님. 안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마차에서 내린 귀족남성이 땅에 발을 딛자마자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본래 오렌지에 가까운 노란계열이었던 남자의 머리 색깔이 눈 깜짝할 새 흑단같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것이다. 남자는 조금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뒤이어 도착하는 손님들도 전부 같은 과정을 겪었다. “……그런데 왜 하필 흑발이지.” “어허이, 왜긴 왭니까? 그야 흑발이 제일 간지 나니까요!” ‘재수 없긴 하지만.’ 뒷말은 꿀떡 삼킨 바이칼이 간신처럼 헤헤 웃었다. “아니 뭐, 가면파티라지만 결국 파티잖습니까? 파티에선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는 게 중요한데 검은머리가 옷발이 잘 받더라고요.” “그런가.” 의상 디자인이나 색깔 매치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없는 에단은 영 모르겠다는 얼굴로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본래 검은색이나 흰색은 어디에나 잘 어우러지는 기본 색상이니까요.” 따지자면 쥬다스의 은발도 탐나긴 했지만 은발은 황실의 색이니 함부로 놀이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빨간색은 너무 강렬하고 파란색도 너무 화사해 이번 성년식 축하파티 분위기랑은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검은색이 당첨되었다. “근데 이거, 제가 지정하긴 했지만 사람들 머리가 전부 검은색이니까 꼭 해동에 온 것 같네요.” 바이칼은 검게 물든 머리카락을 어색하게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신분을 감추기 위한 장치 중 하나가 바로 이 변색 마법. 파티가 열리는 저택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구성된 최첨단 마법시설로, 저택 입구에 발을 들여놓기만 해도 즉각 머리 색깔이 미리 시전자가 지정해 놓은 검은색으로 변해버린다. 따라서 원래 밤색 머리카락이었던 바이칼은 이곳에서만큼은 흑발이 되었고 속속들이 도착하는 파티 참여자들도 남녀 가릴 것 없이 검은머리에 가면을 쓰고 입장하고 있었다. 머리색이 다 같고 얼굴까지 가면으로 가려 버리니 누가 누군지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란이랑 백호님은 잘 지내시려나?” “응, 잘 지내더라.” 답을 기대하고 중얼거렸던 건 아닌데 예상 외로 즉답이 돌아왔다. 가야였다. 에단과 마찬가지로 원래 검은머리였던 가야는 전혀 위화감 없는 기색으로 파티장에 섞여 있었다. 그는 심지어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아이스와인 잔을 하나 집어 들어 시원스레 들이켜기까지 했다. “며칠 전에 새해인사도 할 겸 안부차원에서 가봤는데.” “그사이 해동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어엉. 근데 야옹이 그 자식, 떠날 때 가지 말라고 찡찡거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 가야의 손아귀에서 우드득 소리와 함께 포도주 잔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꺼지래!” 주먹을 입에 물고 가련하게 부르짖어봤지만 바이칼은 떨떠름하니 그의 주먹 새로 흘러나오는 유리 가루에 시선을 주었다. “예에. 그러셨습니까? 뭐 하긴 거기도 한창 바쁠 때이긴 하겠죠.” 계약자를 따라 천 년도 넘게 살아온 해동에서 떠나온 가야는 루바르잔 제국에 적응하는 동안 내내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러다 드디어 이번에 새해를 맞이하여 큰맘 먹고 계약자의 곁에서 떨어져 해동에 다녀왔다. 그러나 두 팔 벌려 환영해 줘도 모자랄 판에 백호는 할 일이 많다며 란과 함께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사령에 의해 망가진 나라를 복구시키고 안정화하는 데에 앞으로도 한참은 걸릴 거라고 했다. 가야는 그 이야기를 전하며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러면서 도와줄 게 아니면 꺼지라고 했어.” 신수도 정령인지라 계약자와 멀리 떨어진 채로는 힘을 많이 사용할 수 없다.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도 유니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가야로서는 그야말로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시간만 죽이다 털레털레 돌아와야 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즐거운 주말 보내셨나요? ㅎㅎ 드디어 마지막 챕터(아마도), '27장 : 성년식'에 도달하였습니다. 첫 아이(?)가 손을 떠날 날이 얼마 안남았다니! 시원섭섭한 기분이네요. ㅎ 그럼 마침표를 찍는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늘 감사합니다. 0234 / 0240 ---------------------------------------------- 27장. 성년식 가야는 울컥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망할 흰털고양이 자식. 날 찬밥 취급하다니!” 그러는 본인은 호랑이를 고양이 취급하고 있었다. 5살 먹은 어린아이같이 구는 가야를 보며 에단과 바이칼은 그를 귀찮아하던 백호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갔다. 바이칼은 진정하란 의미로 와인 잔을 하나 더 집어 그에게 건넸다. “근데 왜 그 자리에선 화를 안 내셨습니까?” “엉? 에이, 됐어. 뭐 화까지 낼 일인가 그게.” ‘지금 화내고 있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포도주를 홀짝이는 가야를 보며 바이칼이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섰다. “화낼 타이밍에 화를 잘 못 내는 사람들의 특징은 말이다.” 그때 벽에 기대선 채 그들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지독한 겁쟁이란다.” “예?” “어?” 듣는 이는 듣는 이대로,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늘의 청룡을 두고 감히 겁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발상을 거침없이 입에 담은 쥬다스는 가면 너머로 조용히 웃었다. “화를 낸 다음 돌아올 상대방의 반응이 무서워서 화낼 수가 없는 거란다. 겁쟁이들은 미움받는 것도, 자기가 화를 내서 상대방이 상처 입는 것도 견디기 힘들거든.” 길게 흘러내린 흑발이 평소보다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빛이 다정함을 담은 색상이라면 검정빛은 좀 더 무겁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그 사이로 맑은 금안이 부드럽게 세 사람을 담았다. “그러니까 계속 속상한 채로 지내고 싶지 않다면 앞으론 좀 더 용기 내는 편이 좋겠지? 가야.” “……푸흐, 주인이 그렇게 정곡을 찌를 때면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다니까.” 이번에는 부수지 않고 멀쩡히 잔을 비운 가야가 키들거렸다. 쥬다스와 계약하기 전에는 청룡이란 몹시 변덕스럽고 겉과 속을 알 수 없는 의뭉스러운 성격이었다. 좋으면 웃고, 싫으면 찡그린다는 정서 표현의 개념이 그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마주 앉아 웃으며 대화하던 사람의 목도 댕강 베어버리곤 했을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그렇듯 청룡은 기분과 상관없이 늘 미소 지어왔고 때문에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진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백호가 같은 사방신수 중 청룡만큼은 치를 떨며 기피하던 이유였다. 하얀 털의 호랑이는 그를 향해 늘 속을 알 수 없어 친해지기 싫은 녀석이라며 발톱을 세우곤 했다. 그랬던 것이 쥬다스와 계약하면서 직설적으로 성격 구조가 변해버리긴 했지만 청룡이 가지고 있는 내면적인 특징까지 변화한 건 아니었다. 계약은 그의 겉모습을 바꾸었을 뿐, 그가 필사적으로 가리고 있던 약점은 바꾸지 못했다. ‘미움받기 싫어.’ 누군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자체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웃으면서 사람을 베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 그 전에 먼저 상대를 세상에서 제거해 버린다. 잔혹한 결단이면서도 실상으론 겁에 질린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어쩐지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군.’ 누구도 꿰뚫어 본 적 없는 나약한 속내를 다독거림받는 기분이 든 가야가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자 바이칼이 헛기침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그것보다 지금은!” 여유롭게 서 있던 셋의 시선이 단숨에 그에게로 향했다. “파티를 즐길 시간입니다. 언제까지 벽에만 붙어 계실 겁니까?” “응? 아니, 난.” “나중에 가서 이런저런 노력을 했노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입모양으로만 ‘폐하께’라고 덧붙인 그를 보며 쥬다스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많은 참석자들로 채워진 홀에선 청춘남녀들이 합석하여 하하 호호 즐거운 분위기를 이끌어내고 있었다. 가면으로 정체를 가렸다곤 하나 파티장에는 친구들끼리 온 경우도 많아 서너 명씩 짝을 맞춰 대화하곤 했다. 마침 그들처럼 대화에 끼지 못하고 소심하게 벽에 붙어 있는 여성 무리를 발견한 바이칼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자고로 학교에선 공부를 하는 것이 미덕이며, 바다에 가면 물놀이를 해줘야 제맛. 마찬가지로 파티장에선 사교를 즐겨야 인지상정이죠.” “자네는 학교에서도 공부를 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그래서 제가 덕이 없었죠.” 에단의 따가운 지적에도 바이칼은 찰떡같이 반응했다. 실제 그의 학교성적은 처참했다. “자, 출발합시다.” 척척 앞장서는 바이칼을 따라 벽에 기대 있던 쥬다스도 한숨을 뱉으며 걸음을 떼었다. 에단은 그를 곧장 뒤따랐고 가야는 와인잔을 든 채 자리에 남아 잘 다녀오라며 손만 휘적휘적 흔들어주었다. 한편, 시무룩한 얼굴로 검게 물든 머리카락만 손가락에 빙글빙글 꼬고 있던 소녀는 슬슬 아파오는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괜히 왔어. 이런 파티.’ 체칠리아 샬롯트, 그리 부유하지도 내세울 것도 없는 남작가의 무남독녀 외동딸로 올해 열여덟 살이 된 소녀다. 그녀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매년 헌납할 만한 기부금도 없어 교황청에서 진명조차 받지 못했다. 아버지인 샬롯트 남작이 성년식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힘들게 구해온 초대장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수도까지 올라오긴 했지만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체칠리아는 얼굴을 덮은 갑갑한 가면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호화로운 식사를 하고 예쁜 옷을 입으며 멋진 남성과의 만남을 즐거워하는 자리. 나랑 전혀 어울리지 않잖아.’ 그녀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에게 황궁 파티 초대장을 구해다 주지 못한 사실만으로도 몹시 미안해했다. 체칠리아가 아무리 파티에 관심 없다고 이야기해 봤자 아버지의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흔한 인형꾸미기 놀이 한번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가는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시집이라도 제대로 보내주고 싶은 게 아비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체칠리아는 그런 마음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오늘도 일손이 부족할 텐데.’ 최근 들어 소소히 꾸려가던 상단 일이 잘 풀리면서 작업량이 늘었다. 성년식이고 나발이고 얼른 집에 돌아가서 밀린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초조해하던 그녀에게 누군가 다가온 건 그때였다. “어머나, 이게 얼마 만인지요. 체칠리아 맞죠?” “……?” 고개를 들자 수수한 드레스 차림의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갓 피어난 봄꽃처럼 화사한 연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가면을 써서 얼굴을 가리긴 했지만 그 살랑살랑한 목소리만큼은 낯익었다. 체칠리아는 반신반의한 어조로 물었다. “이소타?” “역시! 설마하니 또 누가 그런 구식을 입고 다닐까 싶었는데.” “저거 작년에 이소타 생일파티에서 입었던 드레스 아니에요? 거기서 사이즈는 더 안 변했나 봐요.” “색깔은 좀 변한 것 같지 않나요?” 다가온 소녀들 사이에서 꺄 하고 작은 탄성이 터졌다. 얼굴도 가리고 머리색도 바꾼 마당에 후줄근한 의상만으로 정체를 알아봤다는 놀림에 체칠리아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난한 집 외동딸인 체칠리아와 다르게 지금 다가온 소녀 셋은 각자 한 재력 하는 집안의 영애들이었다. 나이는 전부 동갑으로 열리는 파티 때마다 동년배 무리로 마주쳤기 때문에 친구라 할 수는 없지만 제법 오랫동안 안면을 트고 지내온 사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집안이 좋은 이소타는 그 무리의 공주님처럼 굴며 지금처럼 사사건건 체칠리아를 걸고넘어지곤 했다. 그 유치한 장난질에는 가난해도 늘 자신감 있게 살아가며 얼굴까지 예쁘장한 체칠리아를 향한 약간의 시기심도 섞여 있었다. “왜 혼자 그러고 있죠? 우리랑 같이 다녀요, 체칠리아.” “맞아요. 혼자 있으면 다가오는 남자도 없을걸.” “여기선 무조건 일행이 있는 편이 유리하답니다.” 하나같이 다정한 목소리였지만 소녀들의 속셈을 뻔히 들여다본 체칠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나마 예쁜 얼굴을 가면으로 가려놓았으니 낡은 드레스며 빼빼 마른 몸, 굳은 살 박힌 손가락 등 더 보잘 것이라곤 없었다. 그들은 그녀를 데리고 다니면서 비교 대상으로 삼아 소위 ‘폭탄’으로 만들고자 하는 게 뻔했다. 더 못난 존재를 옆에 둠으로써 자신을 더 부각시키기 위한 폭탄. 그게 바로 체칠리아의 역할이었다. “……그래요.” 하지만 알면서도 제안을 거부하지 못했다. ‘지금처럼 구석에서 시간만 죽이고 서 있느니 얘들을 따라 다니는 편이 낫겠지.’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의 초대장을 구해왔다며 기뻐하던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자면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죄스러웠다. 어차피 평생 단 한 번뿐인 성년식이다. 소녀들의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놀림에는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파티를 즐기고 돌아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 생각한 체칠리아는 이소타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 낡은 드레스를 가지고 놀리면 수치스러워할 줄 알았던 소녀가 끄떡하지 않고 다가오자 이소타의 가면 너머 눈길이 차가워졌다. “실례합니다, 레이디들.” 그 미묘한 신경전을 끊어낸 건 다름 아닌 바이칼이었다. 그녀들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끼어들긴 했지만 실로 적절한 타이밍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은 열여덟 청춘들의 성년식을 축하하는 기쁜 날이지요.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예, 물론. 흑색으로 맞춘 머리색하며 아름다운 실내 장식들이 그간의 식상한 파티들과는 다른 정갈한 느낌을 주는군요.” 당연하다는 듯 이소타가 대표로 나섰다. 고상한 태도의 그녀를 바라본 바이칼이 어깨를 으쓱하며 장난스레 말을 꺼냈다. “그렇긴 한데 벽에만 붙여 있으려니까 벽걸이 액자가 된 기분입니다. 전부 다 얼굴을 가려놓으니 아는 척하기도 힘들고요.” 얼굴을 가려놨지만 체칠리아를 향해 아는 척한 이소타 일행은 애매한 웃음으로 답하고 말았다. 그 미묘한 흐름을 눈치채지 못한 바이칼은 제 일행을 눈짓하며 말을 이었다. “보시다시피 이쪽은 남자들끼리만 와서요. 함께 자리를 빛내주시지 않겠습니까?” “어머.” 소녀들의 시선이 세 남자에게로 향했다. 앞으로 나선 바이칼도 서글서글하니 좋은 인상이었는데 뒤에 선 둘도 느낌이 무척 좋았다. ‘특히 의상과 분위기.’ 가면으로 정체는 가렸다지만 파티에 익숙한 소녀들의 예리한 눈썰미로는 그들이 가진 특징을 금방 잡아낼 수 있었다. 일단 연미복 자체가 고급스러웠다. 재력을 자랑하듯 일부러 화려하게 치장하여 눈길을 끄는 자들과 다르게 보석 장식 따위는 보이지 않았지만 쓰인 소재가 좋고 디자인이 깔끔했다. 비어 보이지 않게 깔끔한 디자인이란 어려운 법이다. 그 점에서 벌써 제법 고위 귀족이란 사실이 태가 났다. 정말 높은 사람들은 과한 치장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앞에 나선 바이칼을 따라 다가오긴 했지만 여자들에게 안달하지 않는 차분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두 가지 특징만으로도 소녀들은 충분히 세 남자의 대시에 만족했다. “좋아요.” 이소타가 생긋 웃으며 수락의 뜻을 표하자 다른 소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 넷에 남자 셋, 딱 맞는 비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어울리지 못할 숫자도 아니었다. 곧 그들은 함께 음식이 진열된 파티장 내부로 이동하여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면파티는 처음이시라고요?” “네. 후후, 부모님이 이런 쪽에선 엄격하셔서.” ‘엄격하시겠지. 오히려 파티에 참가하지 않으면 혼내실지도.’ 가면파티는 물론이고 유명하다 싶은 파티에는 늘 참석해 온 이소타였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하는 이소타를 힐끗 쳐다본 체칠리아가 열심히 그릇에 요리만 담았다. 파티 음식은 뷔페식이었다. 돌아다니면서 먹을 음식을 고르고 파티테이블로 가 앉아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밥은 맛있네. 이럴 때 많이 먹어야지.’ 집에 가면 꿈도 꾸지 못할 식단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평소 먹고 싶었던 초콜릿 케이크와 희귀한 과일 위주로 푹푹 퍼 담았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더웡... 다음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35 / 0240 ---------------------------------------------- 27장. 성년식 고급 레스토랑에 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했다. 어차피 체칠리아는 여기서 운명의 상대를 만날 거란 기대감 따위는 손톱만큼도 하지 않았다. “초콜릿 스테이크?” 대충 다 담았다 싶을 무렵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그 이름도 생소한 초콜릿 스테이크였다. 다크 초콜릿을 고기 위에 얹어 익힌 요리였는데 까무잡잡한 색상하며 특이한 향내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헤에. 수도에서 열리는 파티에는 신기한 요리도 많구나. 도전해 볼까?’ 호기심이 많은 체칠리아는 생전 처음 보는 스테이크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별로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그녀가 막 요리를 담으려던 찰나 공교롭게도 누군가 그녀의 팔을 치고 지나간 것이 화근이었다. 툭! 불길한 효과음과 함께 미끄러진 스테이크가 소스를 튀기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딱히 음식을 흘리거나 그릇을 깬 건 아니라 이목이 집중될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그녀의 옷에 있었다. “아.” 하필 소스가 튄 곳이 그녀의 소중한 드레스 앞섶이었다. 하얗던 옷자락에 거무튀튀한 초콜릿 소스가 묻은 걸 본 체칠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냥 낡은 드레스를 입고 온 것과 음식물을 묻혀 더러워진 옷을 입고 있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소타가 아니라 다른 누가 보더라도 크게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심지어 그녀는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오지 못했다. 체칠리아는 이쯤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파티장을 빠져나가야 하는 건지 일단 자리로 돌아가 일행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건지 판단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망설였다. ‘하아, 난 왜 항상 이 모양일까.’ 절로 자괴감이 들었다. 애써 태연한 척 서 있긴 했으나 머릿속이 다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돌처럼 굳은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체리 님?” “……!” 가면파티에선 신상을 숨기는 규칙이었기 때문에 참석자들은 사이에선 서로의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했다. 그리고 ‘체리’라는 건 체칠리아가 사용하고 있는 가명이었다. 가명을 불린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을 부른 이를 향해 돌아섰다. “……네. 쥬드 님.” “음, 오래 자리를 비우신다 싶었는데 여기 계셨군요.” 파티자리에선 자신을 ‘쥬드’라 소개한 쥬다스였다. 분명 옷에 묻은 소스 자국을 보았을 텐데도 그의 목소리엔 놀람이나 조롱기가 없었다. “저, 죄송합니다.” “……?” “제가 자리를 오래 비워서. 이렇게 찾으러 오실 정도라면 혹……. 분위기가 많이 안 좋나요?” 우울함에 땅을 파고 들어갈 듯이 보이는 체칠리아를 향해 쥬다스가 멀뚱히 시선을 주었다. 이내 곧 의문점을 알아낸 그가 조그맣게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아닙니다. 저도 어쩌다 보니 오늘 하루 종일 속이 비어서.” “에?” “배가 고파 식사를 좀 가지러 온 겁니다. 체리 님처럼.” 빙긋이 웃는 입매에 체칠리아의 얼굴이 뒤늦게 달아올랐다. 당연히 그가 자신을 찾으러 왔다고 여겼는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우울하게 초콜릿이 묻은 자국으로 시선을 떨어뜨리는 체칠리아를 가만 쳐다보던 쥬다스가 쌓여 있던 접시를 하나 집어 올리며 그녀의 귓가에 살짝 속삭였다. “그 자국 때문에 곤란하신 겁니까?” 체칠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상한 목소리에 어쩐지 애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하면 잠시 실례를.” “어, 네. 네?” 파아앗! 그의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 기운이 일렁이나 싶더니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 손끝만 바라보고 있던 체칠리아는 문득 자신의 드레스에서 음식물 자국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쉿, 하고 조용히 해달라는 사인을 보내는 쥬다스를 보며 그녀는 합 입을 다물었다. ‘마법인가? 아님 정령술?’ 아무리 이능에 대해서 무지한 체칠리아라도 알 수 있었다. 순식간에 옷에 스며든 음식자국을 깨끗이 지워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정체가 무엇이 되었든 상대가 밝히고 싶지 않은 능력을 큰 소리로 감탄하며 떠벌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작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솔직하게 감사를 표해오는 소녀에게 쥬다스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응수했다. “별말씀을.” “하마터면 이대로 집에 돌아가야 할 뻔했어요.” 안심이 되자 자연스레 뒷말이 더 흘러나왔다. “여벌의 드레스는 챙겨오지 못했거든요. 파티를 시작하자마자 그냥 집에 돌아갔더라면 부모님께서 크게 실망하셨을 거예요.” “실망이라. 체리 님 스스로는 어떠셨을 것 같습니까?” “저는…….” 늘 가족을 위해 살아온 체칠리아는 이번 파티도 역시 부모님의 뜻에 따라 나왔을 뿐이다. 미처 생각지도 못한 자기 자신의 감정을 처음으로 돌아본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러게요? 저도 속상했을 것 같아요. 이상하네요, 별로 즐겁지 않았는데.” “파티를 싫어하십니까?” “핫. 아니요, 그게 아니라.” 주책없이 오늘 처음 본 남자 앞에서 파티가 즐겁지 않다는 속내를 꺼내 보이고 만 체칠리아의 표정이 꼭 조금 전 음식물을 드레스에 흘렸을 때만큼 굳어버렸다. “할 일이.” “흠?”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집에 가면 또 밀린 일이 잔뜩 있어서…….” “그렇군요. 확실히 일이 많으면 머릿속이 복잡해지죠.” “네, 정말 그래요. 쥬드 님도 할 일이 많으신 편인가요?” 그는 체칠리아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차곡차곡 그릇을 채웠다. 하루 종일 끼니를 챙기지 못한 바람에 배가 고팠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성년식이라고 해서 할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니까.’ 오히려 할 일은 늘었다. 행사는 행사대로, 군주의 후계자로서 해야 할 업무는 업무대로 쌓여 있어 주야장창 바쁘기만 했다. 황제는 쥬다스가 성인이 되자 본격적으로 그를 실무에 가담케 함으로써 교육시키고 있었다. 아예 식사 시간까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워낙 바쁘다 보니 입맛이 돌지 않아 끼니를 거르고 있던 와중이었다. 「팍팍 좀 담아. 팍팍 좀.」 「맞아요. 요즘 바쁘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있잖아요? 걱정되게.」 「맛있는 거 많이 먹으라요.」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주변에선 정령들이 야근하는 아들을 본 엄마처럼 잔소리해 대고 있었다. 그들의 성화에 못 이겨 몇 스푼 더 음식을 담은 쥬다스가 태연한 얼굴로 체칠리아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할 일이야 많지요. 지금도 일차원에서 나와 있는 거기도 하고.” “일이요? 저어, 파티는 놀려고 나오는 거 아니었나요?” “그렇습니까?” “그럼요. 사람도 만나고, 맛있는 것도 잔뜩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 생각 없이…… 어음.” 말을 할수록 자기 자신도 영 즐기고 있지 못하단 생각에 목소리가 우물우물 작아졌다. 그 나잇대 소녀다운 귀여운 어수룩함에 쥬다스는 작게 웃고 말았다. 아주 작은 웃음소리였는데도 무척 듣기가 좋아 체칠리아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파티에 참석한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가면에 가려진 얼굴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두 사람이 테이블로 돌아오자 담소를 나누고 있던 일행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 에단과 바이칼이야 모시는 주군의 거동이니 반사적이다시피 쳐다본 거지만 이소타와 그녀의 친구들은 의도가 있었다. ‘뭐야. 왜 둘이 같이 돌아와?’ 그녀들이 체칠리아를 일행 안에 포함시킨 건 폭탄으로 쓰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의 관심을 받는 건 체칠리아가 아니라 그녀들이어야 했다. 게다가 쥬다스는 이소타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던 대상이었다. ‘하여간 옛날부터 얄미운 계집애.’ 파티 자리에서 굳이 음식을 가지러 떠난 체칠리아를 격식 없다는 뉘앙스로 내리깔려고 했는데, 하필 그가 그녀를 따라 자리를 비웠다. 보란 듯 사이좋게 자리에 앉는 체칠리아를 노려보던 이소타의 귓가에 쥬다스가 묻는 소리가 들렸다. “다른 분들은 식사를 하지 않아도 괜찮으십니까? 이거 참, 저희끼리만 먹으려니 조금 면구스럽습니다.” ‘저희끼리…….’ 별 뜻 없이 한 표현이었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달라졌다. 체칠리아는 어쩐지 부끄러워져 후다닥 고개를 숙였고 이소타는 가면 너머로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생긋이 웃으며 답했다. “레이디들은 원래 저녁을 일찍 먹는 경우가 많지요. 미리 먹고 왔으니 신경 쓰지 마시고 편히 드세요.” “…….” 마치 지금 식사를 하고 있는 체칠리아는 레이디의 교양도 모르는 무식한 여자라는 뜻과도 같았다. 그러한 교묘한 비하 발언을 알아본 쥬다스는 흔들림 없이 대꾸했다. “배려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만찬 시간이 지나면 곧 댄스홀도 개방될 터인데 움직이다 보면 허기가 질 수도 있을 겁니다.” 파티에는 엄연히 순서가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들이 다 입장할 때까지는 가벼이 배를 채우며 담소를 나누는 만찬 시간이 주어진다. 뒤이어 남녀가 어우러져 파티를 즐길 수 있는 메인이벤트, 댄스타임이 시작되면서 파티 분위기는 본격적으로 무르익게 된다. 쥬다스는 이 댄스타임을 언급하며 날선 분위기를 다듬어주었다. “그러니 레이디들께서도 타인의 시선을 불편하게 여기지 마시고 마음이 동하신다면 언제든지 즐기시길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탓하지 않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해주는 그의 언변에 이소타는 물론이고 고개 숙인 체칠리아까지 미소 지었다. “파티란 그런 자리니까요.” 그리 말을 맺고 나니 더없이 안락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가면에 얼굴이 가려지긴 했지만 합석한 여성 넷의 시선이 모조리 쥬다스에게로 향한 걸 깨달은 바이칼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나저나 전하께선 목석처럼 계실 줄 알았더니, 의외로 능숙하시잖아?’ 내내 속으로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 고민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쥬다스는 능숙하게 그녀들을 대하고 있었다. ‘아니지. 어쩌면 능숙한 게 당연하신 걸지도.’ 그랬다. 생각해 보면 쥬다스는 루바흐에 다닐 적에도 절대 인기가 없는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선망하고 경애하는 학생들이야말로 차고 넘쳤다. 백로황자라 조롱받던 시기에서 벗어나 완벽한 황태자의 모습으로 되돌아왔을 때,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어린 학생부터 선생들까지 전부 그에게 매료되었다. 특히 여성들 가운데선 가히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었는데 그게 전부 짝사랑으로 끝났을 뿐 애정공세로 이어지지 않은 까닭은 단 하나였다. ‘‘황태자’니까 가까이 못 가는 게 당연하지.’ 아무리 좋아도 감히 범접할 수가 없다. 먼저 말을 거는 자체만으로도 힘든데 평범한 소녀들이 일방적인 감정을 고백하고 강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루바흐에 다닐 적에는 마치 모두가 지켜줘야 할 보배 같은 느낌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바로 그 장벽이 허물어진 지금은 과감하게 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어쨌든 그가 또래 소녀들과 편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본 바이칼은 한 가지 더 깨달음을 얻었다. ‘역시 전하께서는.’ 저 허허로운 웃음, 긴장 따위 개미눈물만큼도 엿보이지 않는 의연한 식사장면, 자신을 보며 얼굴을 붉히는 소녀들에게도 전부 똑같이 대하는 자상한 태도까지. ‘……전혀 이성으로 대하고 있질 않잖아!’ 딱 어린아이를 대하는 어른의 자세였다. 바이칼은 울고 싶은 얼굴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쉬어가는 코너 같은 챕터입니다.ㅎ 오늘은 광어회랑 맥주를 먹었습니다. 광어회는 사랑입니다.... 어으으 밤인데 너무 덥네요. ㅠ.ㅠ 눈왔으면 좋겠다! 그럼 다음 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0236 / 0240 ---------------------------------------------- 27장. 성년식 “칼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뇨. 그냥 좀.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크흡, 코를 훌쩍인 바이칼이 손바닥에서 얼굴을 떼고 힘없이 대꾸했다. 과연 주군은 강했다. 이 가면파티에 들인 모든 노력이 허사였음을 깨달은 바이칼은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공허해졌다. 그의 좌절감과 상관없이 소녀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까르르 웃었다. “자아! 이 자리에 모여주신 귀한 손님 여러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저는 파티 진행을 맡은 레이칼 H.드레이크랍니다.” 모인 객들의 식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다 싶을 무렵, 갑자기 파티장 단상에서 누군가 마력확성기를 사용해 큰 소리로 인사했다. 청년의 유쾌한 소개를 들은 손님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파도처럼 번졌다. “레이칼?” “드레이크가 수장의 후계자로군.” “하지만 이번 파티 주최자는 차남인 바이칼 경 아니었나?” 그 혼란을 잠시 지켜본 진행자가 박수를 짧게 끊어 쳐서 이목을 모았다. “주최자는 제 아우인 바이칼이 맞습니다. 다만 그 아이 역시 손님들 사이에서 즐기고 싶다고 떼를 써서 제가 대신 진행자로 나왔죠.” “……!” 다들 그러려니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바이칼만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즐기고 싶다고 떼를 썼다 기보단 주인에게 짝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마련해 주고자 하는 중차대한 사명감을 띠고 이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바이칼이 진행자로서 주구장창 옆에 붙어 있다면 쥬다스의 정체를 유추하는 게 몹시 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진행은 형에게 맡기고 일행으로 합류한 것인데 형제끼린 닮는다고 레이칼은 그걸 또 놀려먹고 있었다. “아무튼 이제 파티 분위기엔 많이들 적응하신 것 같은데요. 슬슬 본격적으로 진행을 해볼까 합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좀 더 커졌으나 그런 소극적인 태도는 진행자가 원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레이칼 H.드레이크는 대놓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확성기를 입에 가져다댔다. “저기요? 여러분, 여기가 어디?” “……가면파티?” 잠잠한 반응에 다시 실망하려던 찰나 누군가 소심하게 답을 내어놓았다. 레이칼은 손가락을 딱 퉁기며 곧장 반응했다. “맞습니다. 가면파티장이죠. 여기선 품격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 자신을 무장하고 있던 품위 유지! 소심함! 다 집어던지세요.” 이쯤에서 잠시 멈칫한 레이칼은 은밀한 어조로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아, 물론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주셔야 하겠지만요. 안 그러면 나중에 집안싸움 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공작각하께 불려가도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하하하.” 아직 귀족적인 품위를 시원하게 집어던지진 못했어도 진행자의 너스레를 보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레이칼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 파티를 진행했다. “어휴. 이렇게 미적지근해서야 재미 하나도 없는데요. 박수라도 좀 보내주시죠.” 그러자 절도 있는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귀를 기울이는 동작에 박수 소리는 좀 더 커졌다. 어느 정도 반응이 돌아온다 싶어지자 레이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휘저었다. “그럼 분위기를 좀 더 풀기 위해 퀴즈 몇 개 나갑니다! 정답자에게는 무려 탐나는 상품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답을 맞히실 땐 ‘정답!’ 하고 크게 외쳐주시면 됩니다.” 퀴즈란 말에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흥미롭게 빛났다. 상품이 걸린 퀴즈란 귀천을 가리지 않고 호응을 이끌어내며 즐길 수 있는 좋은 행사 미끼였다. “첫 번째 문제입니다. 읽다가 지치는 책은?” ‘읽다가 지치는 책?’ 사람들은 일제히 골똘해졌다. 누군가 재빠르게 손을 들었다. “정답!” “예, 정답은요?” “세계역사서!” “아쉽지만 틀렸습니다.” 틀리긴 했지만 한번 도전자가 나타나자 눈치만 살피던 손님들이 슬금슬금 뒤를 이어 손을 들기 시작했다. “정답! 경제학개론.” “땡. 틀렸습니다.” “정답! 제국사 바로알기!” “아닙니다.” “마법의 정석?” “땡, 땡, 땡!” 오답이 속출했다. 쥬다스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서도 소녀들이 답답한 얼굴로 조잘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참, 문제가 정말 어렵네요.” “이건 명문 루바흐를 졸업한 분들에게 유리한 문제가 아닐까요? 보통은 읽다 지칠 정도로 책을 읽지 않으니까요.” ‘저 형이 어려운 문제를 낼 리가 없는데.’ 정작 파티의 주최자인 바이칼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 형을 훑어보았다. 레이칼이 엘리트로 루바흐를 졸업한 우등생인 건 맞았지만 대세에 맞지 않게 뜬금없이 아주 어려운 문제를 낼 리는 없다는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레이칼은 평소에도 그다지 진지한 인간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진지하게 퀴즈를 풀기 위해 골몰하던 체칠리아가 문득 고개를 돌려 쥬다스를 쳐다보았다. 가면에 가려져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는 그저 테이블에 손을 얹고 턱을 괸 채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체칠리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쥬드 님은.” “응?” 의아한 음성을 듣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은 입에서 떠난 후였다. 그녀는 기왕 말을 건 것 끝까지 물어보기로 했다. “퀴즈의 답을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게, 어쩐지 여유로워 보이셔서.” 정말 궁금하다는 애절함이 묻어나는 어조였기에 쥬다스는 잠시 침묵하다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직접 답해주는 대신 손을 들어올렸다. “정답.” “말씀하십시오.” “지침서.” 순간 침묵이 흘렀다. 사람들은 멍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다 이윽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잠시 후 진행자가 꼭 바이칼과 닮은 미소를 씨익 지으며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예잇, 정답입니다! 읽다가 지치는 책은 ‘지침서’였습니다. 당연히 지치니까 지침서죠! 크하핫!” “우우.”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소리가 군중을 휩쓸었다. “자자, 진정들 하시고. 첫 정답자께는 상품이 마련되어 있습니다만, 더 도전해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 퀴즈를 푸는 데에 성공하신다면 훨씬 더 좋은 선물을 드리지요. 대신 실패하시면 보상은 없던 걸로.” “흠.” “도전하시겠습니까?” “그러죠.” 이미 군주의 후계자인 그가 백작 가에서 마련한 상품을 탐낼 이유는 없었지만 그는 기어이 도전을 신청했다. 도전을 받게 된 진행자는 주먹을 콱 움켜쥐며 열띤 목소리로 퀴즈를 계속해나갔다. “조개가 웃으면?!” “쪼개.” 정답을 바로 맞혀서인지 정답 자체가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한층 더 살벌해졌다. 그러나 도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들깨를 먹으면?” “술이 들깨.” “부부가 산에 오르면?” “쁏.” 그야말로 거침없는 행보였다. 정답 중 몇 가지는 듣는 이로 하여금 해석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기어코 마지막 퀴즈까지 탈탈 털어버린 쥬다스를 향해 레이칼이 감동의 눈길로 힘차게 박수쳤다. “크윽! 회심의 난센스 퀴즈를 최종단계까지 클리어하시는 분이 나오시다니! 이거 놀랍습니다. 자, 상품은 테이블로 전달드렸고 이번엔 난센스 말고 진짜 퀴즈입니다. 다들 잘 듣고 방금처럼 정답을 외쳐 주십시오.” “오오오!” 쥬다스의 활약으로 완전히 파티에 대한 긴장이 풀려 버린 사람들은 훨씬 더 적극적으로 레이칼의 진행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드레이크가의 하인으로부터 상품을 전달받은 쥬다스를 에단과 바이칼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쥬…… 드 님.” “왜들 그러십니까?” 상품은 드레이크 가문 문양과 이번 파티를 상징하는 가면이 함께 찍혀 있는 고급 찻잔세트였다. 모르는 척 컵 하나를 손에 들고 빙글빙글 돌려보는 그를 향해 바이칼이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무시무시한 개그, 아니, 난센스는 어디서 배우신 겁니까?” “글쎄요, 인생 경험에서?” “…….” 그렇다는데 더 할 말이 없었다. 감히 주군의 인생까지 논할 수는 없었던 바이칼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고 에단이야 늘 그렇듯 그러려니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들은 몰랐지만 쥬다스의 곁을 지키던 정령들은 하나같이 웃음보따리가 빵 터져 있었다. 「키키키키. 쪼개래, 쪼개.」 「이거 재밌다요! 다른 거 또 없다요?」 「으헤헤, 지금은 사람이 많잖아. 있지, 나중에 우리끼리 있을 때 퀴즈 내달라고 하자.」 「그게 좋겠네요! 완전 기대돼요.」 정령들은 말장난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말은 안 했지만 과묵하게 굴던 푸른 늑대도 은근히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계약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살랑거리는 꼬리를 발견한 쥬다스가 웃음을 참으며 나중을 기약하였다. 어느덧 퀴즈도 막바지에 달하고 있었다. 실컷 농익은 분위기를 눈대중으로 재본 레이칼이 다음 순서로 넘어갔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시던 댄스타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어디 보자. 다들 아까보다 분위기가 훨씬 좋아지셨네요. 어떻습니까, 즐길 준비됐습니까?” “이예에에!” 이젠 굳이 유도하지 않아도 척척 호응이 터져 나왔다. 레이칼은 들뜬 손님들을 더 기다리게 하지 않고 곧장 댄스홀 개방을 명했다. “파티는 이제 시작입니다! 저를 따라 밖으로 나와 주세요!” 실내에서 음식과 함께 즐기던 파티와 다르게 댄스홀은 실외 정원에 설치되어 있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하늘 높이 설치된 천막과 풀벌레를 방지하기 위한 거대 마법진, 그리고 마법으로 반짝이는 효과를 부여한 색색의 꽃들이 밤의 정원을 수놓았다. 거기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름 높은 초대악단이 아름다운 연주를 시작했고 빠른 템포의 멜로디를 따라 조명이 파박 하고 터져 나왔다. “와, 이런 파티는 처음이에요.” 바깥 경취를 둘러본 이소타가 아까 파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며 내숭 떨었던 건 깜빡 잊고선 감탄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점에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얕은 잔디 위로 깔린 꽃밭과 알록달록 주변을 물들인 조명만으로도 이미 시선을 빼앗기기엔 충분했다. “이번 가면파티의 칼라코드는 블랙. 마법효과로 인해 전부 머리카락을 검은색으로 물들이셨죠. 따라서 컨셉은.” 특이한 정원 댄스홀을 구경하면서 신기해하는 손님들을 향해 레이칼이 중대한 발표를 하듯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블랙레이디’입니다.” “블랙…… 레이디?” 머리색이 검게 변한 건 남녀가 모두 같았다. 하지만 굳이 레이디의 앞에만 블랙을 붙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레이칼의 얼굴에 짓궂은 장난기가 떠올랐다. “춤 신청은 무조건 레이디 먼저! 남성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허어?” 그동안의 고정관념을 완전히 박살 내는 파티 컨셉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남성이 여성에게 춤 신청을 한다. 신청을 받은 여성은 이를 거절할 수야 있지만 상대의 명예를 생각하여 어지간해서는 응해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 가면파티에서는 얼굴을 가려놓아 서로 신분을 알 수 없으니 떨어질 명예가 없었다. 그렇다는 건 즉 여자들이 자유롭게 상대를 고를 수 있다는 뜻이고, 춤 신청을 받는 남자 측에겐 선택권이 없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당황한 시선을 받으며 레이칼은 목검을 들고 마당을 뛰는 아이처럼 방글방글 웃었다. 실제 바이칼보다 4년이나 앞서 태어난 성인이었지만 그 안에 반짝이는 장난기는 동생과 쌍둥이처럼 똑 닮아 있었다. ‘하이고야, 블랙레이디라니. 형님다운 발상이군.’ 늘 영특하고 재치 있는 사고를 하며 우수한 성적으로 루바흐를 졸업한 레이칼다운 진행이었다. 이 파티장에서만큼은 여성들이 늘 보호받아야 하는 청순한 레이디의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남자를 직접 선택하는 진취적인 모습으로 변화한다. 그야말로 매혹적인 검은 꽃, 블랙레이디가 아닌가! 작게 휘파람을 분 바이칼은 모처럼 제 형의 똘끼를 응원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아이고 늦었습니다;; 완결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새벽 중에 최종화까지 업로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237 / 0240 ---------------------------------------------- 27장. 성년식 남성 참가자들에게선 의외로 반발이 적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기도 했고, 늘 용기 내어 신청 하던 입장에서 받는 입장이 되자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지금 이 가면파티 자체가 평범한 일상을 탈피하는 이벤트였다. “춤을 신청하실 때는 상대가 명찰로 달고 있는 ‘가명’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파티 참여자들은 각기 자신의 가명이 적힌 명찰을 가슴팍에 달고 있었다. 멀리서는 잘 안 보여도 춤을 신청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명찰이었다. “그럼 마음껏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진행자의 깔끔한 인사와 함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빠른 템포의 신나는 음악에서 살짝 느려진 곡조가 정원에 울려 퍼졌다. 겨울 밤하늘은 시리고 추웠지만 댄스홀로 꾸며진 정원에는 따뜻한 불의 마법구가 마련되어 있어 바깥공기의 상쾌함과 아른아른한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머리 잘 썼네.」 「우잉? 뭐다요?」 「봐.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잖아.」 유니가 주변을 빙글 가리켰다. 조금 전까지 퀴즈 정답을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던 열정이 미묘하게 이어져 낯선 사람에게도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용기로 변했다. 음악, 조명, 그리고 실내에서 실외로 옮겨가는 개방적인 장치까지. 블랙레이디라는 특이한 규칙에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로맨틱한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마련된 셈이다. 「한마디로 저 레이칼이란 사람이 완급 조절을 잘하는 진행자라는 거지.」 「분위기를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네요. 이런 면에서는 바이칼 꼬마와는 확실히 다른 게 느껴져요.」 쥬다스의 어깨에 꼭 달라붙어 있던 카니가 배시시 웃었다. 정작 바이칼은 정령들이 자기 얘기를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댄스홀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래도 난 꼬마 쪽이 좀 더 좋아. 자주 봐서 그런가? 순진한 면도 있고.」 「후후, 그런가요? 저는 이그레트 외에 다른 사람들은 다 똑같게 느껴져서 모르겠어요.」 「나요도 이그레트가 제일 좋다요!」 「다른 인간에겐 별로 관심이 없다.」 「……야야, 니들이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가 되니.」 다른 정령들의 야비한 반응에 배신감을 느낀 유니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저기, ‘에드’ 님? 아까부터 지켜봤는데 합석한 영애들 중에 따로 파트너는 없으신 것 같아서. 저랑 춤 한곡 어떠신가요?” 그러는 사이 마침 에단에게도 춤 신청이 들어왔다. 가면 아래로 엿보이는 밝은 미소와 곡선적인 몸매, 손을 내미는 태도까지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한 여성이었다. ‘역시 단장. 그럼 그렇지.’ 바이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참가자들이 전원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황에서 에단의 큰 키와 단련된 몸은 확실히 눈에 띄었다. 그 탓에 연미복으로 입고 온 검은 슈트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거기다 기사 특유의 절도 있는 분위기까지 갖추고 있어 그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여자들은 상당했다. “…….” 평소대로였다면 단칼에 거절하고 호위 임무에 충실했을 테지만 이 가면파티에서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색이야 어찌 되었든 그는 호위를 위해 따라붙었을 뿐이다. 주군의 곁을 비우면 직무태만이고, 반대로 여기서 춤 신청을 거절할 경우 파티의 룰을 어기는 꼴이 된다. 에단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난처한 심정으로 쥬다스를 돌아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쥬다스는 빙긋 웃어주었다. “다녀오십시오. 에드.” 주군의 반응은 쌈박하기 짝이 없었다. “……예.” 한숨처럼 대답한 에단은 하는 수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용기 내어 춤을 신청해 온 이름 모를 여성과 함께 자리를 비우는 그를 보며 미처 나서지 못했던 여성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차례엔 내가!’ ‘여기선 먼저 행동하는 사람이 이기는 거구나.’ 이제 더 이상 소극적으로 머뭇거리는 영애는 없었다. 가면을 쓴 검은 머리의 여성들은 보다 전투적으로 마음에 둔 대상, 혹은 그럴 듯한 상대를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기.” “쥬드 님.” 마찬가지로 도도하게 콧대를 높이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이소타가 곁에 있던 쥬다스에게 춤을 신청하려던 찰나였다. 동시에 입을 연 두 여자는 각기 다른 당혹감을 담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체리를 닮은 자줏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이소타의 눈매가 차갑게 굳었다. ‘뭐야, 얘. 맨날 소심하게 구석에 찌그러져 있었던 주제에.’ 사사건건 무시하면서도 은근히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던 동년배 소녀, 체칠리아였다. 파티에 잘 참여하지도 않을뿐더러 와서도 조용히 밥이나 먹고 금방 자리를 떠나곤 하던 그녀였다. 그나마 반반한 얼굴 덕에 남자들이 춤을 신청해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소타가 접근해 빼앗아 버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체칠리아는 겁먹은 토끼처럼 움츠린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흥, 그래 봤자 체칠리아 샬롯트. 언제나 그랬듯이 너답게 굴어. 건방지게 변하려 하지 말고.’ 그 깔아보는 눈빛을 느낀 체칠리아는 움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이소타는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냉큼 쥬다스의 팔을 붙들었다. “이렇게 알게 된 것도 인연인데. 한 곡…… 어때요?” 은근한 목소리로 섹시함까지 어필하는 그녀를 보며 유니가 어처구니없는 숨을 탁 뱉었다. 「와, 막 달라붙는 거 봐.」 「어머나. 끈끈하네요. 거미줄인 줄.」 카니도 입을 살짝 가린 채 무감동한 반응을 해보였다. 떨떠름한 정령들의 반응을 들으며 쥬다스가 제 팔에 과감하게 팔짱을 낀 이소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 가면 너머에 자리한 금안을 발견한 이소타가 흠칫 몸을 떨었다. 차가운 금색. 그걸 보자 마치 사자나 호랑이를 마주친 사람처럼 등골을 타고 소름이 죽 올라왔다. 금안은 은발과는 달리 제법 흔한 색이었으므로 그것만으로 황족을 유추해 내기는 힘들었다. 다만 이소타는 지금 본능적으로 상위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있었다. 그녀가 겁먹은 표정으로 툭 그의 팔을 놓자 반쯤 포기하고 있던 체칠리아가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쥬다스는 웃음기 없이 입을 열었다. “이 파티에선 ‘이름을 부른 사람’이 파트너가 되는 것이었지요.” 분명 선택받은 입장인데도 마치 심판자처럼 고고하다.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도무지 반발할 수 없는 위압감을 담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규칙대로라면 제 명찰에 적힌 이름을 부른 체리 님에게 우선권이 있겠군요.” “……!” 순간 두 여자 사이에 희비가 엇갈렸다. 이소타가 중간에서 꼬리를 쳐 빼앗지 못한 남자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충격으로 굳어버린 이소타를 두고 쥬다스는 체칠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화들짝 놀라 그 손을 잡긴 했지만 그를 따라 걸음을 떼면서도 체칠리아는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힐끔거렸다. ‘이소타.’ 가면에 가려 표정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이소타가 그리 좋은 심기가 아니란 사실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이소타의 다른 친구들이 어쩔 줄 모르고 발을 구르는 모습까지 본 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정신없이 상황을 빠져나오느라 몰랐는데 맞잡은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체칠리아는 손을 잡은 채 거침없이 정원을 가로지르는 쥬다스의 등에 대고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마치 옷에 묻은 자국을 지워줬을 때처럼 태평한 목소리였다. 체칠리아는 그제야 편안히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전 춤을 신청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그렇군요.” “……알고 계셨어요?” “파티를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 자리에 계속 함께 있어봤자 이소타 무리에게 괴롭힘을 받을 뿐이다. 그 사실을 눈치챈 쥬다스가 그들과 멀리 떨어진 자리로 장소를 옮겨다주었다. “새삼 춤을 신청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는 그리 말하며 부드럽게 손을 놓아주었다. 두 사람은 어느 틈엔가 정원에 심어놓은 어느 커다란 나무 밑까지 와 있었다. 춤을 추는 사람들과 입김이 하얗게 얼 정도로 시린 겨울 공기, 하지만 사방에서 따뜻하게 열기를 뿜어내는 마법구. 그 모든 게 꿈처럼 아름다웠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가장 몽환적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체칠리아가 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갑자기 웃어도 트집 잡지 않고 진정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그의 배려마저도 따뜻했다. 체칠리아는 옷이 더럽혀지는 것도 아랑곳 않고 나무에 등을 기댔다. “쥬드 님은 참 신기해요.” “어떤 점이 그리도 신기합니까?” “으음, 꼭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현자 같아요.” 체칠리아야 별 뜻 없이 감탄 삼아 한 말이지만 전생의 삶에서 한평생 대현자라 불려온 그는 어쩐지 조금 찔렸다. 지레 찔려 말문이 막힌 줄도 모르고 소녀는 즐거운 어조로 말을 계속 했다. “있죠, 쥬드 님.” “예.” “저는요. 늘 바쁘게 살았어요. 귀족이지만 이름뿐인 작위라, 파티에서 즐거움을 찾을 시간 따윈 없었죠. 그럴 시간에 거래처를 하나라도 더 따고, 상단 홍보를 한 군데라도 더 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쥬다스가 가만히 얘기를 들어주자 체칠리아는 볼을 긁적이려다 손가락 끝에 닿는 가면의 차가운 재질을 느끼고 힘없이 손을 내렸다. “집이 가난하거든요. 부모님은 저보다 더 바빠요. 그래서 악착같이 일만 하고 살았던 것 같아요.” “힘들었겠군요.” “어, 조금요.” 그녀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힘들었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무언가 가슴 속에서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그치만 누구나 한 번쯤 있잖아요? 힘들고 지쳤는데 좁은 내 방 안엔 아무도 없는 거예요. 듣는 사람 하나 없이 누가 제발 내 목소리 좀 들어달라고 울어본 적.” “…….” “사실은 내가 아파서 죽겠는데 내 앞에서 힘들다는 사람 토닥여 준 적.” 18살 성년식을 갓 치른, 소녀에서 성인이 되어가는 그녀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 그런 생각해 보기도 했어요. 아이들은 아이라서 사랑해 줘야 한다고들 하잖아요. 그럼 어른은요?” 까만 밤하늘이 보였다. 어릴 적 보았던 것처럼 여전히 하늘은 높았다. “어른이 됐지만.” ‘난 아직도 아이 때랑 달라진 게 없는데.’ “어른이 됐다고 해서 누구나 더 잘 견뎌낼 수 있는 건 아닌데…….” 음악 소리에 묻힐 만큼 조그맣게 웅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도 쥬다스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직 힘들다고 느끼시는군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체칠리아가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보았다. “힘내라곤 하지 않으시네요?” “그래야 하는 겝니까?” “앗, 아뇨! 그게 아니라. 보통은 이런 얘기를 하면 그러잖아요.” 힘내, 잘될 거야라고. 민망함에 볼을 붉히는 그녀를 마주 바라봐 준 쥬다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이미 죽을 만큼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또 ‘힘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소리와 같습니다.” 체리를 닮은 붉은 눈동자가 점차 크게 뜨여졌다. “그건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윽.” “당신은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힘낼 필요 없어요.” 후두둑,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억지로 못 박아두었던 둑이 쾅 터진 느낌이었다. 기껏 파티에 나온다고 가면 속에나마 꾸며놓은 화장이 엉망이 되어버리자 체칠리아는 황급히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창피함과 서러움, 후련함 등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라 당장 눈물을 멈추는 건 무리였다. 쥬다스는 그녀가 마음껏 울 수 있도록 앞에 서서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카운트 다운 3! 0238 / 0240 ---------------------------------------------- 27장. 성년식 시원하게 울고 난 체칠리아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망설였다. 손에는 짠 물기에 젖은 가면이 들려 있었다. 눈물을 닦느라 벗어두었던 탓이었다. 곧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에 쥬다스가 고개를 돌렸다. “체칠리아 샬롯트.” 가면파티에선 정체를 감추는 게 규칙이지만 마음에 드는 상대를 찾으면 그에게만큼은 가면을 벗고 이름을 알려준다. 생면부지의 관계에서 바로 그렇게 인연이 이어진다. 이 파티장에 있는 모든 여성이 혹시 모를 인연을 위해 가면을 쓰더라도 예쁜 옷을 입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장을 받은 채 나왔다. 체칠리아는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로 소탈하게 웃었다. “제 이름이에요. 맨 얼굴은 이미 들켰으니까.” 설마하니 곧장 이름을 밝혀 버릴 줄은 몰랐던 쥬다스가 침묵하자 그녀는 가면을 들어 도로 얼굴을 덮었다. “꼭 알려주시지 않아도 돼요. 오늘 쥬드 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거든요.” “으음. 미안합니다.”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혔는데도 거기에 응하지 않는다는 건 즉 거절을 의미했다. 쥬다스에겐 굳이 정체를 밝힐 생각까진 없었다. 고민하거나 어영부영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한 거절의사에 체칠리아는 키득거렸다. “괜찮아요. 저도 다른 뜻으로 말씀드린 건 아니라.” “그렇습니까?” “네. 그저…….” 오늘 만나 말 몇 마디 나눠보지 못하고,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상대에게 이렇게까지 홀려 버릴 줄은 몰랐다. 체칠리아는 귀족 작위가 있긴 하나 상인의 딸이었고, 본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기 위해선 그만한 시간과 투자가 오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철저한 현실주의적 소녀였다. “그저 친구라도 된다면 좋을 텐데, 하고.” ‘친구?’ 쥬다스는 조금 의외인 시선으로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늘 무언가를 바라 접근해 오거나 자연스럽게 군신관계로 이어진 친우들을 제외한다면 먼저 이렇게 아무 목적 없이 친구가 되고 싶다고 요청해 오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위그드라실이라면 진심 어린 벗이라 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삶에서 처음 벗으로 맺어진 성녀 역시도 생각해 보면 그가 먼저 손을 내밀었었다. 그가 생경한 기분에 휩싸여 말을 않자 그 침묵에 부담을 주었다고 생각한 체칠리아가 서둘러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려던 찰나였다. “파티가 끝나면.” “어?” “제 이름으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그때 뵙지요.” 귀족은 평민과 달리 어지간한 친분이 있지 않고서야 서로를 집에 초대하지 않는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체칠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친구로.” 욕심 내지 않았던 보상을 받게 된 아이는 더 큰 상을 바라게 되기 마련이다. 체칠리아는 순간적으로 들뜬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러면 오늘…….” ‘저랑 춤 춰주시지 않겠어요?’ 그렇게 이어졌어야 할 말이 뚝 끊어졌다. 그녀뿐 아니라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도 할 말을 잊고 멍한 시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머물던 주변만 묘한 정적이 흘렀다. 길게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에 이어 얼굴을 반쯤 가리는 새까만 고양이 가면, 레이스가 달린 코르셋 드레스는 붉은색과 검은색을 배합한 고급스러운 원단이었다. 인어의 꼬리지느러미처럼 길게 늘어진 허리 리본과 손목을 감싼 노란 뱅글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파티장에 나타난 여인은 꼭 공방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빚어낸 인형 같았다. 고양이 가면에 가려진 얼굴 탓에 빨간 리본을 맨 도도한 검은 고양이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그런 그녀의 당당하면서도 우아한 걸음걸이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감탄했다. 분명 육감적인 몸매는 아니었다. 하지만 뭇 여성들보다 큰 키와 탄력 있는 하얀 피부, 소녀와 여인의 사이에 걸친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이 그녀를 한층 빛나게 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 쥬다스와 체칠리아의 앞까지 와 섰을 때, 체칠리아는 꼭 장군을 우러러보는 병사처럼 위축되고야 말았다. ‘다른 세상 사람 같아.’ 똑같은 검은 머리카락에, 가면을 쓰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었지만 이렇게나 격이 다를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여인은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은 채 곧장 쥬다스를 찾아왔다. 그러더니 아는 사이인가 싶어 눈치를 보는 체칠리아에게조차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쥬다스 역시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모르려고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는 명찰에 적힌 이름이 아니었어도 그녀의 가명쯤은 쉽게 맞출 수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오셨습니까, 크리스 님.” 그의 부드러운 응답에 크리스티나의 무표정하던 입매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크리스티나 R.델피아. 블랙레이디라는 파티 컨셉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오만함과 고고함을 갖춘 여인의 등장이었다. * * * 한편, 춤 신청을 거절당한 충격으로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이소타가 홱 몸을 돌려 파티장을 가로질렀다. 머리가 아플 정도의 분노 탓에 즐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감히 날 거부했어?’ 그것도 체칠리아, 그 여자 때문에. 평소 그녀에게 느끼던 감정이 얄미움 정도였다면 지금은 아예 흙탕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더럽고 불쾌했다. ‘하! 그 건방진 눈빛은 뭐냐고.’ 다 알고 있다는 듯 차갑게 내려다보던 금색 눈동자.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치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무서웠다. 이소타는 정계에서 상당히 영향력 있는 가문의 고명딸이었다. 다른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한 떨기 꽃처럼 예쁨받고 자란 그녀에게 냉대한 남자는 없었다. 그래서 얄밉긴 하나 별 볼 일 없는 체칠리아보단, 자신을 거절한 쥬다스에게 못 견디게 화가 났다. 가면 너머로 차게 빛나던 눈이 거슬려서 미칠 것 같았다. 이소타는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누군지 그 잘난 정체를 까발려서.” 아버님에게 울며 매달리기만 하면 된다. 어차피 이 가면파티에 참석한 인원들은 전부 갓 성년을 맞이하였거나 이렇다 할 작위가 없는 젊은 청년들이다. 각 가문의 수장들이라면 모를까 젊다 못해 어리기까지 한 새싹쯤이야 어렵지 않게 짓밟아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분노를 삭이던 그녀의 뒤통수 위로 사람 그림자가 졌다. “그건 곤란한데요.” “……?!” 순간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지를 뻔한 이소타는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웬 키 큰 남성이 그녀를 향해 빙글거리고 있었다. 남자가 쓴 가면은 동물 중에서도 말을 형상화한 동물가면이었는데 그 장난스러운 선택이 이소타로 하여금 더욱 소름 끼치게 했다. “뭐, 뭐야. 당신.” “말가면맨이요. 히힝.” “뭐 이딴.” 뭐 이딴 게 다 있느냐는 소리가 이소타의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황당하다는 투에 자칭 말가면맨은 곁에 있던 친구의 팔짱을 끌어다 척 가리켰다. “이 친구는 낙타가면맨!” “……창피하지도 않습니까, 말 씨.” “뭐 어때요? 원래 이런 곳에서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구요. 알아두세요, 벨 씨.” ‘그냥 처음부터 말, 벨이라고 소개하면 된 거잖아?!’ 말에게 끌려온 친구는 정말 창피해보였다. 이마를 찡그리던 이소타는 부끄러워하는 벨이란 청년의 피부가 특이하게도 까무잡잡하단 사실을 깨닫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막부족에 초콜릿색 피부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본의 아니게 제 출신지를 온몸으로 노출하게 된 꼴이었지만 벨이란 청년은 그것도 모른 채 꿋꿋하게 낙타가면을 유지했다. 그런 벨 곁에 있던 또 다른 일행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우웅. 이미지, 중요하다. 바보 이미지, 오래 간다.” “왜 네 안에서의 나는 하필 그런 이미지가 오래 가고 있는 건데……?” 이번엔 어여쁜 감청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성이었는데 벨과 마찬가지로 피부색이 어두웠다. 두 사막부족인은 옷까지 맞춰 입고 온데다 찰싹 붙어 있기까지 해 이소타가 보기엔 꼭 연인처럼 보였다. “당신들 뭐예요?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이소타가 따져 묻자 말가면을 쓴 청년이 능글맞게 대꾸했다. “예, 있습니다.” “뭔데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요. 당신이 접근하려는 남자.” 슥- 갑자기 얼굴을 코앞에 들이대는 말 때문에 이소타는 기겁하여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진짜 말처럼 주둥이가 툭 튀어나오고 혀를 빼문 말가면을 가까이서 보니 더 무서웠다. “……에게 관심이 있거든요, 제가.” “네?” 이소타는 순간 맹꽁이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하도 가면에만 시선을 집중했더니 헛소리가 들리는 건가 싶었다. 그런 그녀를 위해 말이 친절하게 방금한 말을 되짚어주었다. “쥬드 님께 특별한 관심이 있다고요.” “네에?” “그러니까 정체를 밝혀 복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말아줬으면 좋겠는데요. 순순히 당할 분도 아니시긴 한데, 그래도 좀 신경 쓰여서.” 말 가면이 히죽 웃는 착각이 일어났다. 이소타는 화르륵 붉어진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다, 다, 당신도 나, 남자잖…….” “네. 그게 왜요? 제 몸과 마음은 이미 그분 것이거든요.” “히이익.” 듣지 말아야 할 금단의 이야기를 들어버렸다는 생각에 그녀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가, 가끔 이런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도 있다고 듣긴 했지만!’ 신성을 믿는 제국 내에서 남색, 즉 동성연애는 엄격히 금지된 항목이었다. 특히 귀족들 사이에선 더욱이 입에 담지 않는 주제였으니, 이제 갓 성년식을 치른 이소타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뭐야. 그럼 체칠리아 고 계집애랑도 잘 되가는 게 아니었나? 하긴 내 애교에 넘어가지 않는 남자라니, 이상하긴 했어.’ 혼란 상태가 된 머릿속에서는 엉뚱한 결론이 나왔다. 그사이 말이란 청년은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러니까 관심을 좀 꺼주셨으면.” “끌게요! 그…… 런 쪽에 관심 없어요!” “오?” 말이 반색하며 물어왔다. “정말입니까?” “더 신경 쓰고 싶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네.” “조, 좋은 사랑하세요!” 결국 이소타는 견디지 못하고 그들을 지나쳐 달려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낙타가면의 벨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저기, 완전히 오해한 것 같은데요.” “일부러 그러라고 한 말입니다. 저런 부류는 어쭙잖게 자극해 봤자 더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거든요. 일이 커지면 귀찮잖아요.” “아.” “그리고 주군께는 충성을 맹세했으니까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하죠. 멋대로 오해한 건 그 영애 쪽이라고요. 제가 틀린 말 한 건 아닙니다?” “그래도 전하께서 아시면 좀 기분 안 좋으실 것 같…….” “당신만 입 다물면 됩니다, 벨 씨.” 말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덧붙였다. “물론 당신의 귀여운 정령 아가씨도요.” “웅, 웅. 다문다, 입.” “착하네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말가면 청년의 뒤에서 이번엔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댁들이셨습니까?” 딱히 할 일이 없어 우두커니 자리에 남아 있던 바이칼이었다. 그들이 이소타를 둘러싸고 한 짓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바이칼은 어처구니없는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초대를 하긴 했지만 루머를 퍼뜨리라고 부른 건 아닙니다. 아무리 서로 정체를 모르는 가면파티라지만 주군께 이상한 이미지를 만드는 건 자제해 주시죠.” “이야, 이게 얼마 만입니까? 바…… 아니, 칼 님.” 말가면을 쓴 청년이 무척 반가운 어조로 인사를 건넸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으로 바로 이어집니다! 0239 / 0240 ---------------------------------------------- 27장. 성년식 그는 한때 루바흐에서 쥬다스의 수족이 되기를 자처한 마르젠이었다. 지금은 정계에 진출해 화려한 언변과 인맥으로 귀족들을 휘어잡은 초신성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사람 사이를 누비고 다니며 온갖 위업을 쌓은 그는 황태자를 보필하는 이들 중에서 이젠 없어서는 안 될 인물로 크게 자리 잡았다. 대신 그만큼 할 일도 많아 쥬다스의 친위기사로 들어온 에단이나 바이칼만큼 자주 얼굴을 비추지는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들을 만나기 위해 바쁜 일도 뒤로하고 초대에 응해 찾아온 참이었다. 그런 마르젠의 곁에는 투르케 사막에서 새로운 부족민들을 이끌고 있는 신예 수장, 아벨 투르케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두 사람이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예상외로 호흡이 잘 맞아 친해졌다. 그들은 이제 방금 전처럼 서로 허물없는 농을 건넬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아벨에게 마치 연인처럼 엉겨 붙어 있는 소녀는 거울정령 투르키였다. 가면에 가려지긴 했으나 목소리며 피부색, 분위기 등을 통해 눈치 빠르게 그들의 정체를 알아본 바이칼이 반가움과 황당함이 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셨으면 형님에게 말해서 저를 바로 찾아오시지 그랬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진행자님이 너무 바쁘시던데요. 기왕 온 거 파티도 좀 즐기고, 제 눈썰미를 시험해 볼 참으로. 겸사겸사?” 그 특유의 유들유들한 말투는 여전했다. 바이칼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뭐 아무튼 마침 신경 쓰이던 똥파리를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할 일을 했을 뿐이지요.” ‘방법은 영 아름답지 못했지만.’ 싱글거리는 두 친우 사이에서 아벨은 소심하게 속으로만 토를 달았다. “그나저나 에단 님은?” “끌려갔습니다.” “호오, 역시 천재 검술사. 얼굴을 가려 놔도 인기는 사라지지 않으시나 보네요.” 별다른 설명 없이도 마르젠은 알 만하다는 반응을 했다. “마침 저기 오시네요.” 그는 때를 맞춰 제자리로 돌아오는 에단을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욥, 에드 님.” “주군께선?” “에이. 오자마자 하는 말이 그겁니까? 뭐 댄스 소감 같은 거 없어요?” “까불지 말고.” 지극히 충성심 높은 기사단장다웠다. 장난이라곤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관에게 쳇 혀를 찬 바이칼은 쥬다스가 있는 방향으로 손짓을 해보였다. “체리 양과 함께 반대편으로 가셨습니다.” “가지.” “아뇨, 아뇨. 잠깐 기다려 보십쇼.”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성큼성큼 이동하려는 에단의 옷깃을 바이칼이 붙잡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손님들이 찾아오셨는데 인사는 안 하십니까?” “…….” 그의 검은 눈동자엔 어떠한 감동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심하게 마르젠과 아벨, 투르키를 차례로 훑어본 에단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왔군.” “으하하핫! 뵌 지 2년도 넘었는데 여전하시네요.” 마르젠에 비해 비교적 최근에 순례의 길에서 만난 아벨은 그저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주 짧게 눈인사를 해준 에단이 다시 몸을 돌렸다. 그 단순하리만치 임무에 충실한 태도에 바이칼이 질린 표정으로 다시 그를 붙들었다. “잠깐만요.” “또 왜?” “생각 좀 해보십쇼. 제가 왜 진작 주군을 안 따라가고 여기 남아 있겠습니까, 이 양반아.” 그 말에 멈칫한 에단이 눈매를 살짝 좁혔다. “신경 쓰일 만한 일 있었나?” “조금요. 별거 아닌 신경전이었긴 한데 그 상황에서 같이 있던 영애가 한 방 먹었거든요.” “‘이즈’ 양인가.” 이소타의 가명이었다. 에단이 정확히 그녀를 짚어내자 부관은 긍정의 뜻을 표했다. “옙, 분위기 정말 장난 아니었습니다. 뭐라도 한 방 터뜨릴 눈치였다니까요? 그랬던 걸 여기 이분들이 나서서……!”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임무에나 충실해라.” “아오, 바로 그게 문제라고요.” 바이칼은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우리가 지금 여길 왜 왔습니까? 주군께 혼담까진 무리더라도 연애사업 정도는 도와드리려고 파티를 연 거잖아요?” “그래서?” “자꾸 눈치 없게 끼어드시게요? 예?” “그런 시답지 않은 이유로 곁을 비우고 있었다면 실망이로군. 돌아가면 정신 교육이다.” 고지식한 기사에겐 설득 따위 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신교육을 빙자한 지옥훈련을 선물 받게 된 바이칼은 억울함에 입만 뻥끗거리다 축 늘어진 채 상관을 따랐다. 루바흐에 다닐 적부터 익숙한 모습이었기에 마르젠과 아벨은 그러려니 싶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채 걷지 않아 변수가 생기고 말았다. “안녕하세요?” 활짝 핀 장미꽃처럼 생기 가득한 소녀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성함이…… 에드 님이군요. 한 곡 어떠세요?” “그다음엔 저랑도요!” “아이, 가면 한 번만 벗어보시면 안 될까요? 정말 멋있으실 것 같은데.” 블랙레이디란 파티 컨셉 아래, 이안에서 남성이 여성의 권유를 거절할 권리는 없다. 그 단순한 규칙에 꼼짝없이 발목을 붙잡혀 버린 탓에 에단은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 무리에게 질질 끌려가다시피 붙들린 에단을 보며 일행과 함께 자리에 남은 바이칼이 눈을 끔뻑였다. 한 차례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모래성처럼 그저 어안만 벙벙했다. “…….” 그는 문득 허전한 옆구리를 쓸었다. ‘왜 나한텐 아무도 안 오는 건데!?’ 솔로의 정령이 있다면 이런 것일까. 분명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건 똑같은데 이상하게 자신에게만 춤 요청이 오지 않았다. 바이칼은 누구에게도 토로할 수 없는 억울함에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하인에게 맡기고 온 플루비의 말랑말랑한 온기가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빌어먹을 빈익빈 부익부 같으니. 파티고 뭐고 그냥 다 망해버렸으면.’ 그 심정과는 별개로 그 자신이 주최한 파티였으니 진짜로 망칠 수는 없었다. 바이칼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레이디들에게 둘러싸여 사라진 에단을 기다렸다. 잠시 후 에단이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제법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정신적으로 상당히 지쳐 보이는 그를 향해 마르젠이 농을 건넸다. “검술 천재도 여자 앞에서는 맥을 못 추는가 봅니다?” “……당연히. 검으로 상대하는 게 아니니까.” 돌아오는 대꾸에는 심지어 짜증마저 어려 있었다. 귀족가문에서 철저히 교육받고 자란 영애들은 대부분 이중, 삼중 언어를 사용했다. 바로 그 점이 말수가 적고 직설적인 화법을 주로 사용하는 에단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말속에 뼈가 있거나 의도를 가지고 낚아보려는 계산을 일일이 대응하려면 피곤할 수밖에.” “호오, 그런가요?” “동류끼린 어려움을 못 느끼겠지만.” 따끔한 일침에 마르젠은 말 가면을 고쳐 쓰며 모르는 척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정원이 꽤 넓군요. 그분께서 어디 계신지 찾는 것도 일이겠는데요.” “하긴 어딜 둘러봐도 비슷비슷하네요. 참석자들이 머리색도 전부 같고 가면까지 쓰고 있으니 찾기가 어렵겠…….” 답답한 나머지 목을 꽉 조이던 타이를 풀어내던 바이칼이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동시에 발길을 멈춘 일행들 사이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 침묵이 흘렀다. 투덜거리던 목소리가 어설프게 이어졌다. “……은 아닌 듯?” “찾은 것 같군요.” “그, 그러게요.” 이미 많은 사람의 주목 가운데 일행이 찾던 그가 있었다. 혼자였다면 묻혔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의 옆엔 마침 인형 같은 레이디가 함께 자리했다. 가녀려 보이면서도 강인하게도 느껴지는 모순적이면서 독특한 분위기의 그녀 덕에 사람들이 힐끗힐끗 둘을 훔쳐보는 참이었다. 마침 크리스티나가 손을 내밀었고, 쥬다스는 부드럽게 그 제의에 응했다. 그 접촉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사교댄스로 이어졌다.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바이칼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에단에게 쑥덕거렸다. “제 눈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저분, 크리스티나 님 맞으시죠?” “내 눈에도 그러해 보이는군.” 수년을 같은 학교에서 동고동락한 바이칼이나 에단도 그녀 특유의 분위기를 몰라볼 리 없었다. 대체 언제 파티장에 도착한 건지 그들에겐 인사도 없이 곧장 쥬다스를 찾아간 그녀를 보고 둘은 놀란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자 크리스티나를 알아보지 못한 마르젠이 휙 휘파람을 불었다. “워후~ 분위기 좋은데요?” “보셨죠, 단장? 지금은 절대 끼어들면 안 되는 타이밍입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이럴 필요가.”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레 나무 사이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인남자 셋과 여성체 정령 하나를 가려주기에는 나무가 턱없이 얇았지만 그 외에는 넓은 야외 파티장에서 숨을 곳이 딱히 없었다. 엉겁결에 같이 나무 기둥 뒤에 서게 된 에단이 영 불만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쥬다스와 크리스티나의 주변에서 여전히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있는 체칠리아를 발견한 바이칼이 새로운 사실을 유추해 냈다. “아니, 가만. 설마, 진짜, 혹시, 지금 삼각관계인가?” 밤을 새워가며 추리소설을 읽을 때처럼 절로 손에 땀이 쥐어졌다. 바이칼은 그래도 오래 알고 지냈던 크리스티나에게 한 표를 던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거 완전 흥미진진한데!’ 하지만 그런 바이칼의 기대가 무색하리만치 실상은 완전히 달랐다. 쥬다스는 두 여성 중 어떤 이에게도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아직까진 그에게서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란 ‘친구’였다. 심리적 거리로 따지자면 학생 시절부터 이미 친구로 지내온 크리스티나가 더 가깝긴 했지만 그뿐, 바이칼이나 마르젠이 기대하는 종류의 호감은 아니었다. 숨는다고 숨은 일행이 있는 나무를 등진 채 크리스티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그들은 몇 해가 지나도 여전하군요.” “그렇구나. 변함없이 유쾌한 아이들이야.” 그녀가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지 단박에 알아들은 쥬다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크리스티나는 춤을 청하듯 손을 내밀며 몸을 살짝 틀었다. 가면에 가려진 바다빛깔 눈동자가 흘끗 나무쪽을 향했다. “설마 저런 꼴을 하면서 안 들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아마도?” “하.” 그녀는 작게 한숨을 뱉었다. 분명 함께 성장했는데 나무 뒤에 숨어서 몰래 지켜보는 모양새가 아직도 루바흐를 다니던 시절 활기찬 소년들 같았다. 좋게 말하면 아직 천진했고, 나쁘게 말하면. ‘한심해.’ 그리 생각하는 크리스티나의 손에 따뜻한 온기가 맞닿았다. 그녀의 춤 신청에 쥬다스가 기꺼이 응해준 것이다. “우리가 모르길 바라는 모양이니 모른 척 해주자꾸나.” 장난기가 스민 목소리에 크리스티나는 가면을 써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가면파티가 아니었더라면 지금 표정을 감출 수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나무 뒤에 숨은 바이칼보다 못난 꼴을 그에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늘 도도하고 완벽을 추구했던 공녀는 가면 뒤에 숨어 씁쓸한 마음을 곱씹었다. ‘사실은 내가 제일 한심해.’ 전혀 성장하지 못했다. 몸이 자라고 지식을 얻었을지언정, 가장 인정받고 싶은 한 사람에게만큼은 여전히 어린 소녀였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티나는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주었다. 그 따스한 온기가 자신만의 것이 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을 아이가 아닌 여인으로 봐주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다들 몸이 성인이 된 것과 별개로 아직도 자랄 날이 한참은 남았다고, 그렇게 느꼈다. ============================ 작품 후기 ============================ * By. 공든탑 다음 편은 최종화입니다. 곧 이어질 완결편 후기에서 뵙겠습니다! 0240 / 0240 ---------------------------------------------- 27장. 성년식 평소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파티 음악이 오늘따라 무척 짧았다. 춤곡이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자 크리스티나는 저도 모르게 짧게 숨을 뱉었다. 그 안에 섞여 나온 아쉬움을 눈치챈 쥬다스가 달래듯 입을 열었다.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구나.” “……예?” “그간 파티가 열리면 춤을 추려 하지 않았으니 말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파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착각하였지 무어냐.” 그 이야기에 크리스티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쥬다스가 본 대로, 그녀는 그다지 파티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델피아의 하나뿐인 공녀라 사교활동을 빠뜨릴 수는 없었지만 파티에서 춤을 추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녀의 성인식 때에도 정식 약혼자가 없었기 때문에 에스코트 댄스는 오라비인 알시오스가 맡아 해주었다. 이처럼 뭇 남성들의 춤 신청에도 도도하게 전부 거절하는 그녀는 마치 가시가 잔뜩 돋은 아름다운 꽃과도 같았다. 워낙 여왕 같은 이미지의 크리스티나였기에 거절받은 남자들은 민망해하거나 불명예스럽다 여기지 않고 그저 아쉬워했다. 과연 저 가시투성이 푸른 꽃을 꺾는 자가 누구일지 궁금해할 뿐이었다. “춤추는 걸 좋아하였느냐?” 몰랐다는 듯 가만 내려다보는 눈길에 크리스티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은 좋아하지 않았더라도 지금만큼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좋아해요.” 가시꽃 중에서도 푸른빛의 에렌지움이란 꽃이 있다. 그 에렌지움의 꽃말은 ‘비밀스런 애정’. 춤이라는 핑계에 기대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심이라도 크리스티나는 표현할 수 있음에 기뻤다. 언제나 냉랭하던 얼굴 위로 이제 막 태양빛을 받아 자라난 꽃송이처럼 활짝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런.’ 아무리 쥬다스라고 한들 온몸으로 표현하는 애정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지 이성 간의 감정에 무지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간 무신경하던 부분에 대해 갑작스럽게 직면하게 된 그로서는 답지 않게 당황하고 말았다. ‘나는 확실히. 이들과 어울리고 있구나.’ 참 당연한 사실인데 새삼스럽게 가슴이 뛰었다. 그는 생을 마쳐가는 노인으로서, 보호자로서, 혹은 관망자로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땅의 차기 군주로,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눈 친구로. 혹은 사랑스럽게 바라볼 이성으로. 어디까지나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아이들과 같은 선상에 서있었다. “당신도 즐거우신가요?” “…….” 처음 냉기 가득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따스했던가. 쥬다스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동에 휩싸여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곡이 끝남과 동시에 그녀의 손을 놓으며 답해주었다. “그래. 과분할 만큼.” * * * 짧았던 춤곡이 끝나자 크리스티나는 홱 돌아 바이칼 무리가 숨어 있던 나무를 아무 말 없이 응시했다. 이대로 뒀다간 파티가 끝날 때까지 따라다니면서 몰래 훔쳐볼 기세였다. 그러자 두 사람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전혀 들리지 않았던 나무 뒤 일행들은 찔끔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눈짓과 입모양으로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들킨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제가 나무 하나당 한 명씩 숨자고 했잖아요.’ ‘투르키, 잘 숨었다. 커다란 사람들, 못 숨었다.’ ‘결국 에단 님이 문제네요!’ 건방지게도 상관을 탓하는 부하를 향해 에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망설임 없이 곧장 나무 뒤로 걸어 나갔다. 하도 당당하게 걸어 나간 바람에 붙잡지도 못한 바이칼은 ‘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물쭈물 그 뒤를 따라 나섰다. 꼭 소풍 나온 다람쥐 가족처럼 사이좋게 우르르 나무 뒤에서 튀어나오는 일행을 가만히 지켜보던 크리스티나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나무 뒤에 재미난 구경거리가 있으셨던 모양이지요?” “그건…….” “와하하핫! 아닙니다. 너무 열심히 파티를 즐기다 보니 지쳐서 좀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려는 에단을 황급히 제치고 나선 바이칼이 대신 어색한 웃음과 함께 손을 휘휘 저었다. 변명을 늘어놓는 그를 바라보는 크리스티나의 눈빛이 한층 서늘해졌다. “쉬고 있었다고?” 머리에 잔뜩 달라붙은 나뭇잎, 급히 숨느라 헝클어진 의상, 나무껍질에서 묻은 검은 먼지 등이 그 말이 거짓임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바이칼은 꿋꿋하게 그 주장을 밀고 나갔다. “나무에 기대서 쉬니까 정말 편안하더라고요. 나무 향이란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참 식물의 냄새란 게 어찌나 향긋한지 꼭 끌어안고 맡기만 해도 건강해지는 기분이 듭니다.” 관상용 나무 한 그루를 가지고 자연예찬론이라도 펼칠 기세인 바이칼을 물끄러미 쳐다본 크리스티나가 더 추궁할 의지를 상실하고 한풀 꺾인 어조로 말했다. “머리에.” “예?” “붙은 나뭇잎이나 털어.” “옙.” 변명은 할지언정 시키는 대로는 또 잘했다. 자기도 같이 숨어 있었으면서 끅끅 웃음을 삼키고 있던 마르젠이 작게 헛기침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장소를 좀 옮길까요?” 이렇게 모인 이상 더 시끄러운 파티장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가면파티에선 정체를 감추느라 서로 존대를 써야 하는 데다가 진짜 속에 있는 이야기를 대놓고 떠들기도 어려웠다. 만장일치로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하고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체칠리아도 그만 파티장에서 발걸음을 돌렸다. ‘정말 즐거워 보여.’ 이 파티에 오기 전까진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상대방의 기분을 잘 모르니까 대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가면으로 얼굴을 가려놓으니 목소리나 분위기 등에 더욱 잘 집중할 수 있었다. 표정이란 가면으로 숨길 수 없는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엿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서로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들이 나누는 유대는 꼭 화롯불 같다. 오래 지피고, 오래 그 열기를 이어간다. 뜨겁거나 차지 않게 온화한 빛으로 물들어 서로를 비추는 것이다. 체칠리아는 현재 그 유대 안에 들어가지 못한 이방인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정신없이 일하는 그런 평범한 하루를 살겠지.’ 그렇지만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그녀의 하루는 여전히 힘들고 지치겠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었다. 체칠리아는 어느 순간 낯선 이름으로 문을 두드릴 초대장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벌써 기다림은 시작되었다. 사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초대장을 보내겠다는 약속을 지키리란 보장은 없었다. 그쪽에서 귀찮다고 여기거나 잊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체칠리아의 입장에선 다시는 연락하지 못한다. 하지만 체칠리아는, 그가 진짜로 초대장을 보내리라 믿었다. 그 믿음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이유라면 그저. ‘당신은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힘낼 필요 없어요.’ 그 짧은 위로에 자신이 이만큼이나 많은 힘을 얻었다는 걸 그는 알까. 체칠리아는 손깍지를 낀 채 앞으로 쭉 뻗어 힘차게 기지개를 켰다. 달빛조차 어스러진 늦은 밤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개운했다. “난 지금까지 잘해왔으니까.”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 * * 아직 끝나지 않은 파티를 뒤로한 채 그들은 정원을 빠져나가 저택에 마련된 응접실에 모였다. 보는 사람이 없자 제일 먼저 가면을 벗어 던진 바이칼이 콧등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오. 갑갑해 죽는 줄 알았네!” 그나마 야외 활동이라 다행이었지만 내내 가면을 쓰고 활동하기란 몹시 갑갑했다. 패잔병처럼 소파에 널브러진 그를 따라 모두 시원스레 가면을 벗었다. “그 갑갑한 가면파티를 기획한 게 자네였지.” “과거의 저를 찾아가서 정말 등짝이라도 세게 때리고 싶네요.” 그는 에단의 따가운 일침에 모처럼 동감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파티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형 레이칼의 환상적인 진행, 참가자 대부분이 만족한 파티의 질 등 다른 자잘한 성공요소는 다 제치고서, 당초 목적이었던 쥬다스의 짝을 찾아주려는 시도가 대차게 실패로 돌아간 게 문제였다. “아, 역시 크리스티나 님이셨군요.” 대화 내용을 듣고 중간에 대충 짐작은 했지만 마르젠은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새삼스럽게 놀란 척을 하였다. “여전히 꽃처럼 아름다우십니다.” “그대도 여전히 입 발린 소릴 잘하는군.” “에이, 이걸로 먹고사는데 당연하죠. 좀 더 듣게 좋게 발라드릴까요?” “치워.” “매정하시긴.” 서운하다는 투였지만 눈은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전부 모인 건 오랜만이네요.” 여전히 장난스럽긴 했지만 그리움이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마르젠이 한 말에 전원 공감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과는 달리 학교생활이 신경 써야 할 전부였던 루바흐 시절이 떠오르면서 자연스레 모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자리했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몸이 자라고 지위가 바뀌었다. 더 이상 학생이 아니므로 그들이 각자 어깨에 짊어진 무게는 훨씬 무겁고 컸다. “바뀌지 않은 것도 분명 있지요.” 그 시절 맹세했던 마음 그대로, 같은 인원이 한자리에 모였다. 마르젠은 공손히 주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성년이 되심을 감축드리옵니다. 전하.” “감축드립니다.” 그를 따라 자리에 모인 이들이 전부 무릎 꿇으며 예를 표했다. 가장 가까운 이들로부터 받는 진심 어린 축하에 쥬다스는 평상시대로 웃으며 화답했다. “고맙다.” 짧은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는 보다 길고 복잡한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너희들이 있기에 지금의 내 삶이 있어.’ 삶이란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전생의 그는 그 사실을 몰라 죽을 때까지 한평생을 방황했다. 한 사람을 구성하는 건 그가 만나는 모든 관계부터 시작한다. 마치 작디작은 흙 알갱이며 잡초, 투박한 바위와 구불구불한 냇물, 나무와 그 가지에 쌓아올린 둥지가 전부 모여 거대한 산을 이루듯 그렇게 차곡차곡 쌓이는 게 바로 삶이다. 태어나 버림받고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혼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었다. 전생의 부모가 그를 버렸기에, 누군가에게 미움 받아보았기에, 혹은 어울리지 못했기에 지금이란 순간이 돌아왔다. 약한 부분도, 강한 부분도, 혹은 쓸모없다고 여긴 부분조차 지금의 자신을 만든 원재료였다. 자신의 삶을 후회하며 쓸쓸하게 죽어간 전생의 기억조차도. 그들은 마치 옛날로 돌아간 것처럼 허물없이 떠들고 장난쳤다. 그렇게 밤새도록 회포를 푼 뒤 새벽동이 터올 때쯤에서야 각자의 처소로 돌아갔다. 「정말 신기해.」 그가 홀로 될 때까지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유니가 문득 입을 열었다. 「뭐가요?」 「그때 우리가 했던 얘기 기억해? ‘이그레트는 아무에게도 의지하지 않는다’던 말.」 「아. 그랬었죠.」 카니는 동그란 눈망울을 깜빡이다 살포시 웃었다. 「지금은 아닌 것 같지만요.」 「그치? 그땐 정말 상상도 못 했었는데.」 정령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은 쥬다스가 손바닥을 내밀자 그 위로 유니가 나비처럼 팔랑팔랑 내려앉았다. 「네가 사람을 믿고 그들에게 기댄다는 게.」 “그렇구나. 혹시 전과 달라져서 좀…… 이상한가?” 「응? 아니!」 유니는 무슨 말이냔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있지, 이그레트. 우리는 과거의 네 모습도 한눈에 반할 정도로 너무너무 좋아했지만.」 “…….” 「지금 변한 모습도 좋아. 아니, 오히려 전보다 조금 더.」 맑은 녹색으로 빛나는 정령의 곁에 황토색과 붉은색 정령이 함께 내려앉았다. 「응요! 완전 보기 좋다요!」 「요즘에는 잘 웃으니까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거든요.」 정령의 바람은 즉 계약자의 바람. 새 삶에 적응해 가는 쥬다스의 곁에서 정령들 역시 감정적인 측면에서 함께 성장하고 있었다. 손가락만 한 다른 정령들과 달리 커다란 푸른 늑대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루니는 그의 발치에 앉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걱정할 필요 없다.」 루니는 정령들을 얹고 있는 것과 반대쪽 손에 살며시 머리를 가져다대었다.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곁에 있을 테니까.」 「응. 맞아.」 계약자와 감정이 연결되어 있는 정령들은 그로부터 혹시라도 멀어질까 불안해하는 마음을 읽어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전혀 쓸데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여전히 자신들을 필요로 해준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언제나 네 곁에 있을게.」 쥬다스는 천천히 자리에 꿇어앉으며 푸른 늑대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손바닥에 올려두었던 세 정령들 역시 품안에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고마워.” 이젠 자신이 그들을 품어줄 차례였다. 그들이 언제까지고 알을 품는 어미 새처럼 쥬다스를 품어주었듯, 그 역시 그렇게 그들을 감쌌다. “너희들의 계약자가 이런 부족한 나라서 미안해.” 「어머.」 「무슨 소리야! 너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어.」 「전혀 부족하지 않다요!」 「……인간들을 전부 부족한 존재로 만들 셈인가.」 「하긴 완벽한 사람은 없긴 하지.」 「그래도 미안할 건 없잖아요?」 순식간에 와글와글해졌다. 그는 전생에서는 꺼내지 못했던 속마음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꺼내놓았다. 영혼이 이어져있으니 당연히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했던 표현들을. “사랑해.” ―처음으로 사랑을 알려준 이들에게. <이그레트>, 完. ============================ 작품 후기 ============================ <작가 후기> 안녕하세요! <이그레트> 글쓴이 공든탑입니다. <이그레트>는 작년 9월부터 이곳 조아라에서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엔 워낙 판타지를 좋아해서 단순히 ‘나도 판타지 소설을 쓰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것이, 독자님들을 만나 거의 1년 가까이 함께 한 셈입니다. 우어어. 이쯤 되면 저작물을 넘어 진짜 자식 같네요.(...) 완결이 났다고 생각하고 키보드를 놓자마자 멍합니다. 기쁜가? 슬픈가? 무언가 후회되는 것도 있으려나. 아직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깔끔한 기분이네요. 이상하죠? 저도 이상합니다. 큽. 음, 후기라곤 하지만 무슨 말을 더 써야 할지……. 같은 팀 작가님들이 후기를 짧게 쓰지 않으면 흑역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지 말입니다. ……예, 실은 저도 그렇게 될 것 같긴 하네요. 그래도 원래 첫사랑은 대부분 흑역사인 법입니다. 크리스티나 양이 그랬듯이 말이죠!(아직도 흑역사를 생성 중인 그녀.) <이그레트>에 달아주신 댓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읽었습니다. 그간 표현을 많이 못했지만, 함께 달려주신 독자님들이 계셔서 기뻤고, 여러 가지 힘든 상황 중에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꾸벅) 사족으로, <이그레트>에 나오는 가치관 혹은 주제 등은 주로 제 경험을 토대로 쓴 것들입니다. 저는 세상에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란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그레트도 만인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어요. 물론 과거엔 그렇게 되고 싶어 했지만, 그 바람은 결국 상처만 남겼죠. 무리할 것 없이 그냥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도 충분히 따뜻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님들께선 제게는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에요. 이그레트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그간 보내주신 사랑과 응원은 정말 잊지 못할 겁니다. 사랑해요. 엥? 이렇게 말씀드리고 나니까 뭔가 떠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차기작! 착실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르는 좀 여러 가지를 써보고 싶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중입니다. 쓰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손이 느려서 큰일입니다.(현재 조아라에 연재중인 두 녀석을 포함해서요! 아마도 그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ㅎ) 어떤 장르, 어떤 스토리로 결정될지는 몰라도 준비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데리고 돌아오겠습니다. 더 자세한 소식과 실제적인 후기(?)는 블로그에서 뵙겠습니다. 후기 하단에 이메일과 함께 주소를 첨부해 두었으니 찾아와 주시면 몹시 기쁠 거예요! ^^ (서, 서로이웃도 좋아한다능... 저도 독자분들의 사생활을 염탐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 새로운 이야기에서 다시 만나요! 이메일: ekfquf27@naver.com 블로그: http://blog.naver.com/ekfquf27 팀 타우린 카페: http://cafe.naver.com/teamtau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