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장 피는 피를 부른다 (Chapter 8 Blood Breeds Blood) 1. 보고서를 읽는 엘먼의 표정은 침착하기 그지없었다. 일말의 놀라움도 분노도 나타나지 않은, 차가운 껍질 같은 얼굴이었다. 그 문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펠드릭으로서는 그의 침착이 오히려 불안했다. 그것은 에스텔에 일어났던 재앙을 설명하고 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마족들의 침입, 그리고 간신히 그들을 몰아낸 듯 하자, 이번에는 그 두 배나 될 듯한 대군의 침입, 결국 에스텔은 폐허와 다름없는 곳이 되었고, 그곳의 거주민은 마족들이 되었다, 그리고 도망친 사람들은 전체 주민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편지는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읽으면서 엘먼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치 점심 식사 식단을 읽듯이. 그리고 그것을 다 읽고 나서 그가 던진 말 역시, 감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에스텔은 망했다는 말이군. 뻔한 걸 길게도 썼네. 내 말이 틀린가, 총리대신?" "마.... 맞습니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게 하나 있단 말이야." 엘먼은 이렇게 말하며 곁에 있는 식탁에 몸을 기대었다. 그리고는 대답 따위야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식탁에 놓여져 있던 금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포도주를 깨끗이 비웠다. 이곳, 왕자가 에스텔로 돌아가기 전까지만 임시로 묵고 있는, 에스텔에 바로 이웃한 도시 카루아드의 영주가, 이 방과 함께 왕자를 위해 특별히 마련한 것이었다. 왕자는 아마도 모르겠지 만, 아이러니칼하게도 그것은 아트웰 특산의 포도주였다. 그 사실이 펠드릭의 얼굴에서 쓴웃음을 자아냈다. "에스텔로 오려면 적어도 두 도시를 거쳐야 하지, 안 그래? 에스텔의 전선 (戰線)에 접한 도시가 아니니까 말야. 그런데 왜 거기서도 아무 보고가 없었던 거야? 아무런 편지도, 전령도, 봉화도? 그곳들도 다 마족들에게 정복당했나?" "아닙니다..." 펠드릭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가 머뭇거리는 일은 거의 없었고, 특히 엘먼 왕자를 20년 넘게 돌보아 왔지만, 그의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최근 아트웰에서 돌아온 그를 만난 며칠 동안, 그는 왕자와 함께 지내면서 얼마나 자주 머뭇거렸는지 모른다. 전에 없던 무언가가 왕자 에게 생겨, 두려울 것 없는 총리대신으로 하여금 기를 못 펴게 하고 있었다. "전하, 사실은, 그들이 에스텔을 침공한 경로에 두 도시가 있기는 합니다. 아르멘과 카란이지요. 그러나 두 도시는 - 정말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만 - 전(前) 휘넨 왕국의 영토였습니다. 마족들은 아마 그들의 묵인을 받은 채 날아와 에스텔을 공격한 것 같습니다. 거의 모두가 하피나 비룡 등 날 수 있는 마족들이거나, 그 위에 탈 수 있는 작은 리저드맨 정도였던 것을 볼 때..." "그러니까 그 망할 휘넨 놈들이 마족들이 에스텔로 날아가는 걸 보고도 일부러 입 꾹 다물고 있었단 말이지?" ""그렇다는 것이 저의 추측입니다. 아마도... 휘넨 인들은 자신들이 독립하기 위해 에스테이아의 쇠락을 바란 것이 아닐까요." "그 말이 맞는 것 같군." 엘먼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펠드릭은 초조해졌다. 그는 간신히 점잖은 표정을 유지한 채, 망설여 왔던 말을 꺼냈다. "전하, 아무래도 조치를 취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속국(屬國)들은 이제 에스테이아를 얕보고 있습니다. 아트웰의 독립 때문입니다. 아트웰이 독립했 는데, 자기들이라고 못할 것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하지만 나도 별 도리가 없었어. 알고 있지 않나? 그들이 아버지를 처형하 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 아들인 내가 뭘 할 수 있겠느냔 말야. 그래, 너희들 맘대로 해라, 그러고 내버려 두고 올 걸 그랬나?" 엘먼의 말은 한치도 틀림이 없었다. 그것은 펠드릭도 인정해야 했다. 엘먼이 만약 아버지를 포기했었다면, 그는 죽을 때까지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독립의 교환 조건이었던 왕은 누구보다 유명한 아클레어 대왕, 그리고 그 협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깊기로 이름난 엘먼 왕자 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왠지, 펠드릭은 그 일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을 아무리 탓해 보아도 그의 마음속의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가, 이제는 그 그림자가 그의 내부를 꽉 채우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무엇 때문일까, 저 지나치게 평온한 왕자의 표정 때문일까... "이미 ㄱ난 일이야, 총리대신. 주제넘은 참견은 말도록. 내가 왕의 적자(適 者)의 자격으로 아트웰 왕과 다섯 신의 앞에서 맹세했고, 이제 그 계약을 깨뜨릴 수 없어. 그리고 아버지는 오늘 오실 것이고..." "...전하께서는 잘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조치를 취하긴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족은 아클레어 대왕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 서로 물어 뜯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엘먼의 얼굴이 생기를 띄었다. 펠드릭은 그 모습을 보고 주춤했다. 그것은 보는 사람의 기분을 섬뜩하게 만드는 생기였다. 왕자의 눈은 간만에 생명을 얻은 듣 활활 타오르고 있었으나, 그것은 차가운 야심의 불꽃이었다. 펠드릭은 60평생을 궁정에서 생활하면서, 이런 눈빛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러나 엘먼 왕자의 눈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 줄이야... "전하, 디온 총독 마커스 경께서 오셨습니다." 병사가 방문을 두드리며 고했다. 엘먼은 펠드릭을 불안하게 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아,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들어오라고 해." 며칠 사이에 살이 더 포동포동하게 찐, 땅딸막한 마커스가 거드름피우는 듯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가 살이 더 찐 이유는 마음이 편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아서였다. 디온 역시 조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디온의 왕족이 살아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압제자를 벌하러 나타날 것이라는 소문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죽하면 술집에 가면 디온 왕가의 후손들이 한 명씩 버티고 3있다고 할까. 그러나 오늘만큼은, 마커스의 얼굴도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왕자에게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왕자의 변모 역시 온 에스테이아에 알려져 있었고, 그가 왕위를 계승할 확률은 그만큼 더 높아져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엘먼 왕자가, 방금 그에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왕세자 전하." 펠드릭은 눈살을 지푸렸다. '왕세자 전하'라니. 아직 누가 왕이 될지는 짐작도 안 가는 판인데! 그러나 엘먼은 기분이 좋은 듯, 소리내어 웃었다. 이상했다. 분명 무엇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아무리 전쟁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지만, 저렇게까지 변하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펠드릭 경, 마커스 경, 그대들은 언제나 나의 좋은 친구들이었지. 그래서 그대들에게는 숨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안 그런가?" 엘먼은 능글맞은 웃음까지 띄고 두 신하를 돌아보았다. 펠드릭은 간신히 '예'라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했으나, 마커스는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예, 전하. 그렇고 말고요! 저희는 전하께 캐러도스 대공같은 존재입니다." 펠드릭은 그 비유의 의미를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웬바우스 1세의 충복이었던 캐러도스 대공은, 자식이 없는 선왕(先王)의 수많은 조카들 중 그웬바우스가 왕이 되도록 각별히 힘을 썼고, 후에 그 이상의 보상을 받았던 것이다. 엘먼 역시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방금 펠드릭과 조치를 취해야겠다는 말이 나와서 말이야. 속국(屬國)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있어. 이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돼지 않겠나?" "물론이지요, 손을 쓰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대책을 세우기 전에 원인부터 파악해야겠군. 자네들은 도대체 왜 우리가 아트웰에서 패하고 이모양이 되었다고 생각하나?" 순간적으로 펠드릭과 마커스는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왕자가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꺼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펠드릭은 대답을 시도했다. "교활한 두 왕에게 속았기 때문이겠지요. 사일러스와 스트라본 말입니다. 그들은..." "펠드릭! 자네가 나한테 늘상 하던 말이 있지 않나? 결함을 내 안에서 찾아야 고칠 수 있지, 자꾸 남의 탓만 하면 아무 대책도 안 선다는 말 말야! 우리 내부에서 문제점을 찾자고. 내부에서! 우리들이, 에스테이아가 대체 뭘 잘못한걸까?" "...전하께서는 대체 무엇이 이유라고 생각하십니까?" 펠드릭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러자 엘먼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탁자를 주먹으로 꽝 치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내 대답은 이거야. 아버지는 나이가 드셨어. 이제 더 이상 말타고 칼 휘두르실 나이는 아니지.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께 3-40년 전과 똑같은 것을 기대하거든. 3-40년 전, 영웅 아클레어 3세가 하던 것을 말야. 그러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 "전하...?" "그래서 내 해답은 이거야. 아버지는 더 이상 이 나라 백성들이 왕에게 기대하는 일을 하실 수 없어. 그러니 아들인 내가 그 일을 대행해야 할 시기야!" 엘먼은 당당하게 소리치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마커스는 입을 딱 벌리고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펠드릭은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엘먼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들 그래? 나는 왕의 적자고 성년이 된 지도 4년이 지났어. 왕으로서의 자격은 충분해. 또 내가 왕이 안 되면, 누가 된단 말야? 어머니가 창녀인지 괴물인지도 모르는 클레이브? 아니면 아무것도 못 하시는 연로하신 아버지?" "그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펠드릭이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의 마음 속에서 모든 일의 윤곽이 잡혀 가고 있었다. 아트웰에서의 패배, 포로가 된 왕, 그리고... 너무나도 흔한 일, 그가 수십번 읽어 오고 그만큼 보았던 일. 그러나 막상 일이 이렇게 닥치자 그의 마음은 온갖 힘을 동원해 그것을 믿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면서. 그리고 그의 혀를 맴도는 또 하나의 외침... '당신은 엘먼 전하가 아냐. 당신 대체 누구지?' "우선... 왕의 의회의 인정을 받지 않으면 안 되고..." "그래, 그래서 자네들을 부른 거야. 바보같은 클레이브는 쓸 데 하나 없는 놈이지만 이상하게 그 쓰레기를 좋아하는 놈들이 많거든. 그러니 손좀 써 줘. 뭐, 귀족들을 다루는 건 어렵지 않겠지? 어쨌건 나는 결함 없는 혈통이니 말야." 사실 지금 엘먼 왕자가 하는 말은, 오래 전부터 마커스와 펠드릭 자신이 누누히 입에 달고 다니던 말들이었다. 전하, 백성들이 클레이브를 좋아하는 것은 그들이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명망 높은 귀족들이라면 당연히 전하를 지지할 것입니다. 전하는 나무랄 데 없는 왕가의 혈통, 왕가의 성(姓)조차 받지 못한 사생아와 창부(娼婦)의 사이에서 난 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고귀 하신 분이니까요... 그리고 지금, 엘먼은 똑같은 말로써 그들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지금... 흐뭇해야 하겠지? 하지만...' 펠드릭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마커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먼은 그들의 앞에 당당히 선 채, 찌를 듯한 눈빛으로 긍정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한 마디 덧붙이지. 캐러도스 대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그웬바 우스 왕의 친형을 두 명이나 죽이고, 사형 선고까지 받고 옥에 갇혔지만, 그웬바우스가 즉위하자 풀려나 막대한 상을 받았지. 뭐, 두 사람 다 알고 있을테지만..." 2. 아클레어 3세는 조용했다. 아트웰에서의 긴 여정동안 그는 불평 한 마디, 자밤 한 마디 없었다. 마부와 간수 겸 호위 기사들은 그런 그를 불안한 눈으 로 바라보았다. 이상스럽게 조용하고, 거북할 정도로 위엄을 풍기는 노인. 그러나 그들 역시 말 한마디 붙이려 들지 않았다. 그들은 승자들이었고, 승자는 패배가 무슨 심술을 부리든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클레어 3세는, 그는 패자였다. 그 사실이 너무나 뼛속 깊이 파고 들었다. 언제나 영웅인 척,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싸움을 걸던 자신은 패자 였고, 올두스, 어린 시절 눈물 그득한 눈으로 에스텔에 보내어진 볼모, 그 말 한 마디 제대로 못 하던 소년은 승자의 자리에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아스틸라는 두 소년에게 기구한 운명을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자네 아들이 자네를 버렸네.' 올두스도, 그의 교활한 아들 스트라본도, 그리고 그 꼴도 보기 싫은 배신자 사일러스도 그에게 진실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즐겁게 웃으며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날 것인지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엘먼은 왕이 되고 싶어하죠, 폐하.' 그들의 의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다. 분열을 획책하려는 것이겠지. 교활한 아트웰 놈들! 그는 결코 그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속지 않을 것이다. 에스테이아 왕 아클레어 3세는 결코 반란군의 놀음에 속지 않을 것이었다. 아클레어 3세는 더 이상 편할 수 없는 휴가를 누리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인생 중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쉰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간수들도 하인들도 친철했고, 식사와 잠자리는 정말이지 왕의 것 다웠다. 그러나 그 속에서 그는 자신이 시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 그는 노인처럼 보살핌받고 있었다. 아무 일도 못한 채. 그가 없는 동안 에스테이아에서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아트웰은 독립했다. 왕의 몸값인 독립. 그러나 왕은 석방되지 않았다. 명목은 국경 문제 때문이라지만, 이미 아클레어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족들은 떳떳이 인간들의 묵인을 받은 채 에스텔 을 공격했다. 왕자의 윤허 아래 별궁이 있었던 팅갈리온이 새로운 수도가 되었다. 엘먼은 그가 없는 동안 놀랄 만큼 잘하고 있었다. 엘먼은 너무나 잘 하고 있었다. 엘먼은 이제 왕이었다. 아클레어는 아트웰의 경치 좋은 방에 갇힌 채, 최고급 포주를 마시면서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런 난세에 왕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엘먼 왕자님은 어차피 왕위를 물려받으실 분, 지금 에스테이 아가 그 분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면, 당연히 지금이 대가 아니겠습니까?' 펠드릭의 편지는 그에게서 화를 낼 기력조차 빼앗아 버렸다. 며칠 지나지 않는 사이에, 통일 왕조는 붕괴되고, 인간족은 에스테이아와 아트웰, 두 나라로 분열되고, 에스텔은 우클로우에 포함되었으며 수도는 팅갈리온으로 바뀌었고, 그 다음 다음날, 에스테이아의 왕은 엘먼 아클레어 시이그람 1세가 되어 있었다. 아클레어 3세는 그제서야 에스테이아로, 그의 조국이지만 이제는 며칠 사이에 전혀 낯선 나라가 된 그 곳으로 보내어진 9것이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리라. 아들에게는 한 맏의 추궁도 하지 않으리라. 분열을 획책하려는 아트웰의 반역자들의 놀음에 놀아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조용히, 모든 수치를 베일 안에 감추어 두고, 다시 왕위를 요구하여 통일 왕국 에스테이아를 재건하고, 클레이브에게 왕위를 물려주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면 다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머리 뿐, 감정은, 그의 가슴은 그렇지 못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그의 아들처럼 차린, 그의 아들과 꼭 같이 생긴 젊은이가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팔을 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아들이 아니었다. 미사여 구가 가득한 인사말, 얼굴 가득한 미소,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곳에 서 있는 것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서라면 나라까지 팔아먹는 파렴치한일 뿐. 그의 포옹까지도 거짓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포옹. 그가 최초로 아들과 한 포옹은 마치 돌과 하는 포옹 같았다. "이해해 주실 줄로 아옵니다, 전하." 펠드릭이 난감한 얼굴로 그를 '전하'라고 칭했을 때, 아클레어 3세는 할 말을 잃었다. 펠드릭은 언제나처럼 단호하고, 슬픔은 있어도 후회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가늘고 긴 얼굴로 말했다. "엘먼 폐하는 난세에 훌륭한 능력을 발휘하고 계십니다. 전하의 부재시에 그 분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 귀족 평의회는, 그 분께서 주장하시는 대로 왕위를 이어받기에 손색이 없다고 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 그러나 귀족 평의회 중 벌써 세 사람이 갈아치워져 있었다. 한 명은 자객에게 암살되었고, 다른 한 명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지금 살인죄로 감옥에서 교수형 날짜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 다. 그들 셋은 모두 클레이브에게 호의적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버님께서는 이제 쉬십시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이렇게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부덕한 탓에 아버님께서 나이에 맞지 않는 고생을 하셨지요." 부드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하는 아들을 보고, 아클레어 3세는 난생 처음 으로 인간 한 명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람에게 왕위를 내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엘먼, 네 말대로 나는 죽을 때가 다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이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에는, 왕홀은 그의 손에 있는 것이 우리 에스테이아의 전통 아니더냐?" "전통은 바뀌게 마련입니다, 아버님. 그리고 지금 왕홀은 제게 있으니, 제가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까지는 제 것이겠지요. 누구든 그것에 반대하는 자는 반역죄로 응당의 벌을 받을 것입니다."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엘먼 즉위! 짜자자잔! 근데 얘가 완전히 맛이 갔군요. 끝을 향해 치닫는 용의 신전! (이게 도대체 몇 번째 하는 소리?) Radagast... PS. 흐음... 너무나 흔한 제목이 부끄럽네요. 이게 마지막 장이 될까요? 아니면 다음 장이? 흐음... 다음 장 이상으론 안 나갈 것 같은데... 두고 봐야 알겠지요^^; 아무것도 장담 못하는 무능한 래디... 으으... 다음부턴 꼭 분량 정해 두고 써야지... 3. "라우더로군." 클레이브는 언덕에 선 채, 저물어가는 햇빛에 흐릿하게 비치는 성곽과 대지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향수가 감회는 없었다. 슬픔까지도 철저하게 배제된, 공허한 목소리였다. "라우더..." 하고 그가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마치 이곳이 라우더라는 것을 자신에게 납득시키려는 듯이. 어두운 빛으로도 이곳이 얼마나 척박해졌는지 알아보기란 여럽지 않았다. 울창했던 숲읕 처참하게 베어지고, 남아 있는 나무들마저 바짝 말라 죽어가고 있었다. 성의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하얀 벽이 오르크들이 무기를 만드는 연기에 그을려 우중충한 회색과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고, 까마귀들이 성문 앞에 걸어 놓은 시체들을 먹기 위해 성위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저 농경지, 지금은 인간족 노예들이 오르크들의 채찍을 등에 ㅂ으며 신음하고 있는 저 밭에서는, 한때 즐거운 풍요의 노래가 흘러 나왔었다... "클레이브 님..." 데이슨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클레이브는 그제서야 아픈 회상 에서 깨어나 데이슨을 돌아보았다. 그는 얼굴에 억지로 미소를 띄워 보이며 명령을 내렸다. "모두들 오늘은 여기서 야영하도록. 바로 저 앞이 오르크 소굴이니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해!" 데이슨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대로 명령을 이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9칼릭 역시 클레이브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그런 아버지를 따라 주춤 거리며 병사들 틈으로 사라져 갔다. 클레이브가 풀이 죽어 있다면, 결국 사기가 떨어지다 못해 한계 상황에 다다른 병사들을 격려할 사람은 부관인 칼릭 자신이었으니까. 그가 마지막을 고개를 돌려 클레이브를 바라보았을 때, 클레이브는 어느새 곁에 온 켈리를 향해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칼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켈리는 이상할 정도로 클레이브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클레이브는 저번 오르크의 급습 이후, 켈리의 말에 반대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이 무모한 라우더로의 진격만 해도 그랬다... '이래서야 내가 아니라 켈레브리스가 부관 같군...' 칼릭은 쓴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생각하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 무슨 배은망덕한 생각이란 말인가! 켈리는 그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클레이브의 동생 랜스 역시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클레이브가 힐리 온의 주인이라는 사실 역시, 켈리가 말해주지 않았더라면 알 도리가 없는 정보 아니었던가. 처음에는 그 정보 때문에 모두 다 충격을 받고 그녀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오르크들의 급습에 군사의 반 이상을 잃은 이상, 사장은 달라졌다. 클레이브조차 우클로우를 공격할 수 없다면 인간족이 마족 에 대항할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에스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지원군도 보급품도 감감 무소식이니... 단, 힐리온을 찾아 드래크로니안족의 분열을 꾀할 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 지만... '어쨌든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켈레브리스밖에 없다. 그녀는 우리가 모르는 많은 것들을,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지만, 알고 있으니까...' 그는 아버지 데이슨이 한 말을 되뇌었다. 그래, 그의 아버지 역시 켈리를 신임했다. '클레이브 님도 아버지도 그녀를 믿는데, 나 혼자만 못 믿겠다고 이러고 있으니... 역시 내가 이상한 건가? 클레이브 님이 너무 그녀를 신임하셔서 질투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이조넬이시여, 제가 어리석은 감정에 이끌려 우를 범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칼릭은 병사들의 막사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오르크들은 땅을 죽게 하죠. 하지만 라우더는 아직 완전히 어둠의 땅이 되지는 않았을 거에요. 정복된 지 10년이 되었을 뿐이니. 이곳을 수복하면, 신관들과 마법사들의 힘으로 다시 10년 안에 당신의 아름다운 고향이 될 수 있을 거에요." 켈리는 클레이브를 위로하려는 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클레이브는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녀가 가끔, 아주 가끔 그 혈기왕성한 청년 같은 표정을 떨쳐 버리고, 부드럽고 여성다운 표정을 지을 때면, 그녀의 얼굴은 놀랄 만큼 그의 어머니와 닮은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그녀를 믿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째서 저렇게 닮은 얼굴일까? "당신은 정말로, 오르크 족에 대해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아는군요, 켈레브 리스." 클레이브의 말에 켈리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대답은 없었다. 클레이브는 말을 이었다. "혹, 당신도 나처럼 마족 때문에 잃은 것이 있소? 그래서 그들에 대해 연구를 한 거요?" "..." "나는 당신에 대해 아는 것이 없소, 켈레브리스 - 그리고 그 점은 랜스도 마찬가지이리라 생각되는군." "알게 될 거에요. 영원히 모를 수는 없겠죠." 켈리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곧 알게 될 거에요. 하지만 우선 힐리온을 찾을 생각부터 해야죠. 힐리온을 찾고, 숨 돌릴 틈이 생기면 꼭 이야기해 드릴께요. 약속해요!" 클레이브는 놀랐다. 켈리가 이런 약속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킨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었 으니까. 그는 잠시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엉뚱한 물음을 꺼냈다. "힐리온을 찾으면... 그렇게 상황이 변할 수 있을 것 같소?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소. 그냥 칼일 뿐인데...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힐리온은 그냥 칼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소." "왕의 칼이죠. 드래크로니안과 인간의 군주의 칼. 그런 식으로 따지면 왕관도 왕홀도 그냥 금덩이일 뿐이죠. 로데인에서는, 왕관과 함께 힐리온을 전수받아 야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았지요. 내 말을 믿으세요. 힐리온을 찾으면, 당신의 모든 문제는 해결될 거에요." 켈리의 말은 결연했다. 클레이브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어째서 그렇게 한치의 의심도 없을 수 있는지. 그는 아직도, 힐리온을 찾으면 무엇이 어떻게 변할지 구체적으로 잡히는 감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을 찾기는 찾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뭐, 최소한 드래크로니안 족을 분열시킬 수야 있겠지... 켈레브리스의 말 대로 그들의 도움을 얻을 수는 없더라도 말이야.'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면서도, 그는 꺼림칙한 감정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힐리온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것이 라우더로 가까이 갈수록 그의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단숨에 정원을 덮는 악독한 잡초처럼, 그것은 점점 그의 마음을 뒤덮고 그를 지배하려 하고 있었 다. 분명한 이유도 모른 채, 단지 찾아야 한다는 생각, 그 칼은 그에게 속해 있으므로 가져야 한다는 생각 - 그것은 일찍이 이성이 명하는 대로만 행동한 클레이브가 가져 본 일이 없는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불안하게 했다. '운명인가... 힐리온의 주인의...' 로크 페울로니는 주인을 끌어당긴다. 엉뚱한 전설이라고만 생각했던 그 말이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그는 그런 몰락 왕조의 칼 따위에 끌려 다니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칼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었다. '어쨌건... 나아지는 일이 있을 거야. 마법의 검이니...' 4. "두아스 님! 두아스 님!" 어울리지 않는 로브를 입을 땅딸막한 오르크가 헐레벌떡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계단을 내려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내려온 것보다 더 많은 듯한 계단이 줄을 잇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등불이 보였다. 두아스가 켜 놓은 등불이리라. "두아스 님!" 그 오르크는 숨이 턱까지 차오른 채 무거운 발을 놀리며 뛰어내려 왔다. 간신히 그가 계단 끝에 다다르자, 두아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꾸짖었다. "조용히 하지 못하겠나! 여기는 귀중한 서고(書庫)다. 네녀석이 난리쳐서 어지럽힐 곳이 아니란 말이다!" "죄... 죄송합니다." 그 오르크는 얼이 빠져서 등불을 켜 놓고 책들을 뒤적이는 이 몸집 작은 오르크를 바라보았다. 오르크들에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결코 권장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육체를 약화시키는 일이었고, 어리석은 요정들이나 인간들을 흉내내는 일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되었다면 모를까, 존경받는 오르 크가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저 두아스, 아크트의 각별한 신임을 얻는다는 두아스는 읽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책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그것도 발음도 우스꽝스러운 요정들의 고대어 책들 속에... 그런 채로 자신이 가져온 귀중한 정보는 들을 생가도 안 하는 것이다. '저 분이 이 지하 서고에 틀어박히신 지 열흘 정도 되었는데... 그럼 계속 저러고 계셨단 말이야?' 처음에 오르크들은 그가 아크트에게 심한 꾸중을 듣고, 이 변경으로 돌아와 있으란 말을 듣고는 낙심하여, 지하실에 틀어박혀 화풀이라도 하고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아마 아크트의 욕을 퍼붇고 있겠지, 그런 소리는 남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까, 지하실 맨 밑바닥에서... 그러나 이제 보니, 계속 저 먼지 나는 책들을 뒤적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정보란 뭐냐? 냉큼 말하고 꺼지거라!" "아, 예, 저, 힐리온의 주인이 라우더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도 이제 곧 도착..." "이런!" 두아스는 비명을 지르더니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는 기운이 빠졌는지 얌전히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서둘러야겠군... 서둘러야겠어..." "저... 아크트 님께로 가는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니면 기형 용들에게 부탁 을..." "아니... 가 봐라." "...예?" "가 보라고. 난 여기서 해야 할 일이 있어!" 오르크는 아무 말 못하고 두아스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젓고는 얼른 계단 위로 달려가 버렸다. 두아스가 이제 미쳐버린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두아스는 그가 올라가는지 마는지 상관도 않은 채, 여전히 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분명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몇백 년 전의 일, 그 사이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그의 마음을 빼앗았으니... 필리우스처럼 아무 일 없이 얼음 속에서 잠만 자고 있지 않는 한,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 있었다. 카야크. 그 이름을 들은 것은 800년 전... 그렇지, 저 교활한 엠로크, 필리우스의 스승이자 주인인 엠로크가 드래크로 니안과 싸우기 시작할 때 즈음이었으니. 엠로크는 드래크로니안들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했다. 알면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 결국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것은 있었다. 정보들, 오랜 먼지와 망각 속에 파묻힌 정보들과, 그리고 그 자신, 두아스. 연금술사의 실험 대상이 되어 유일하게 영생을 부여받은 오르크. 머리를 잘리거나 몸을 태우지 않는 이상, 다시 살아날 수 있기에,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에서도 네아 아르카스 (오르크의 전쟁)에서도 살아남은 자... '카야크에 대해서 뭐라고 했을 텐데... 기억이 나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었어...' 그렇지, 꺼림칙한 것. 로크 페울로니와 그 주인들을 모아 카야크를 봉인에서 풀 수 있다고 했지.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엠로크는 여러 학자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확인했다. 그런데... 왜 엠로크, 그 강인했던 지옥의 군주는 최후까지 카야크를 해방시킬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왜 그 힘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을까? 분명 엠로크에게는 가능한 일이었다. 레젠디아 대륙 절반 이상을 지배했던 막강한 마왕, 오르크들을 만들어 낸 창조신 아카드 다음으로 전능한 자, 너무나 강해서 지옥의 군주라고 불렸던 인물, 그래, 요정들은 그의 이름을 차마 부르지 못하고 벨라디오스(지옥의 왕)이라 불렀었지. 드래크로니안이 없었다면, 그리고 그 망할 로크 페울로니가 없었다면, 그리고 노상 아옹다옹 하던 요정족과 인간족, 난쟁이족, 그리고 드래크로니안이 그 망할 열쇠로 단결하지 않았더라면, 결국 지금까지 세계는 엠로크의 손 안에 있을텐데... 그는 물론, 원하기만 한다면 네 열쇠의 주인들을 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는 누구라도 설득할 수 있는 어둠의 정령, 필리우스가 있었으니까. 그당시의 필리우스는 엠로크의 은혜를 입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했고, 훨씬 더 유혹적이었고, 남의 마음까지 읽은 수 있었다. 그런데 엠로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카야크를 해방시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은' 것이다. 왜...? 무슨 이유가 있었다. 두아스 자신이 알아야 할 이유가, 그리고 고르탁 프오트 만큼은 미덥지 못하지만, 어쨌건 모든 오르크들의 왕, 쿠푸-헤인 아크트가 알아야 할 이유가... 5. "야아, 벌써 사흘이나 지났어. 날아가는데 왜 이렇게 느린 거야?" 데이미아가 용의 등 위에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용의 머리 하나가 바짝 고개를 쳐들며 따졌다. "그야 다섯이나 탔으니까 그렇지!" "쳇, 그래도 열 명을 태울 수 있을 만큼 크잖아! 게다가 툴위그는 난쟁이고, 로이하고 나는 둘 다 몸무게 합쳐 봐야 랜스 한 사람만큼밖엔 안 나갈 거란 말야." 데이미아가 대꾸하자, 랜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따졌다. "왜 날 들먹이고 그래?" "맞는 말이잖아요!" "그만들 싸워." 툴위그가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이제 다 온 것 같은데... 왜들 싸우고 그래? 조금만 더 참자고. 이봐, 용, 우리 거의 다 온 것 맞나?" "예... 이제 해질 녘이면 라우더가 보일 겁니다." "라우더에 너무 가까이 착륙하지 말아요. 그 근처에는 마족들이이 너무 많을테니까. 아무래도 혼돈의 신 카야크의 현신이라는 자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니까 말입니다. 한 한나절쯤 걸을 생각 하고, 좀 떨어진 곳에 내려서 천천히 가는 게 나을 것 같군요. 모두, 어떻게 생각하세요?" 필리우스가 제안했다. 툴위그는 아무래도 켈리의 일이 불안한지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그의 말이 틀린 데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서두르다가 잡혀서 켈리의 얼굴도 못 보게 되면 곤란하니까. 데이미아는 물론 찬성이었고, 로이 역시 아무 이의가 없었다. 로이는 사흘 전부터, 날아 간다는 사실 자체에 흥분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도 마냥 좋다고 실실 웃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우스가 랜스를 돌아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좋을대로..." 사실 랜스는 이 필리우스라는 작자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가 그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그의 어머니의 정체를 폭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에이레나의 '불길한 예감' 때문이기도 했다. 하긴, 필리우스는 호감을 주는 외양을 가졌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가 가진 아름다움은 빛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고, 이유는 모르지만 불안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 유독 에이레나만은 아니었으리라. 뭐, 데이미아는 그를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이지만... 그가 처음에 필리우스가 의심스럽다고 했을 때, 데이미아는 거의 이성을 잃을 듯 화를 내며 소리쳤던 것이다. '어떻게 랜스는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요? 날 도와준 사람이고, 랜스도 그에게서 은혜를 입었단 말예요! 랜스의 상처를 단번에 고칠 그 약을 갖다 준 게 바로 필리우스니까! 정말 계속 그런 말이나 한다면, 난 딸 가겠어요.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랑 함께 여행할 수는 없으니까!' '뭐... 좀더 일을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중에, 결정적인 증거가 잡힐 때까지만이라도...' 랜스는 이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있었다. "와! 성이에요! 굉장히 크네! 시지리스 영주 성의 두 배는 되겠다!" 로이의 흥분한 외침이 랜스의 마음을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그는 무의식적 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라우더..."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추석입니다^^ 로이 일행과 켈리가 함께 라우더에 도착했으니, 조만간 만나겠지요? 이즐레이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나? 어서 와서 켈리랑 함께 있으라고 하시는 분들이 꽤 많이 계신데...^^; 글쎄요. 이즈야~ 나올래? 말래?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명절이 되시길!! Radagast... PS. 저희 아래층에 사시는 외삼촌 외숙모가... 아이들을 위해 동물을 사셨는데... 강아지와 이구아나 2마리를 단번에 사셨다는군요^^; 경악하는 어머니... 이구아나는 다 자라면 1m나 된다는데... 라우더는 변해 있었다. 풍요만이 가득한, 드래곤 슬레이어 리반 아덴의 영지에서, 이제는 검은 연기만이 감도는 오르크들의 땅으로. 겨울이어서 앙상해진 나무들 때문에 주위는 더욱 음산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형들과 올라가 놀곤 했던 저 탑들, 그리고 아버지를 따라 걸었던 성벽, 가정교사를 따돌리고 도망치곤 했던 밭들의 외형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곳이 다른 어느 곳으로도 착각할 수 없는 그의 고향, 라우더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1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가 지워질 수 없다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고작 열 여섯밖에 안 되었던 아이의 증오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똑같은 깊이와 한층 더한 무게로 남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라우더의 변화에 대한 분노는 곧바로 하르크자엘에게로 이어졌다. 하르크 자엘, 이 모든 일의 원흉. 오직 그의 죽음만이 랜스 자신의 분노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내려놓았던 검을 꼭 쥐었다. "저 뒤에 숲이 있군요. 오늘은 늦었으니 저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출발하도 록 하죠. 오르크들을 비롯한 마족들은 밤이 깊을수록 오감이 날카로워지고, 낮에는 반 장님이 되니까요." 필리우스가 말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용은 힘차게 날개짓을 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라우더를 지나쳐 가 버렸다. 그리고 필리우스가 가리킨 앙상한 숲을 향해 나아갔다. 날이 밝을 때까지 숲에 몸을 숨기고 기다리자는 필리우스의 주장은 물론 합리적인 것이었으나, 솔직히 그 숲이 가까워질수록 일행은 그의 의견에 찬성한 것이 그다지 잘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뼈만 남은 시체와 같은, 가지만 앙상히 남은 검은 나무들이 즐미한 그 숲은 너무나 음산하게 느껴졌다. 생명이 있는 숲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죽은 나무들을 마구 쌓아 놓은 나무들의 묘지처럼 보였다. 저런 숲에서 밤을 보내는니 차라리 오르크들에게 쳐들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모두들 생각하고 있었다. "케에에엑!" 그 숲에 다다라, 이제 내려앉으려 하던 용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일행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용의 비늘을 꼭 잡아야 했다. 용은 몇 번 더 몸을 격렬하게 비틀며 비명을 지르더니, 착륙이라기보다는 불시착 이라고 해야 할 속도로 땅을 향해 돌진했다. 그 상황에서도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 파악한 사람은 툴위그밖에 없었다. "화살이 꽂혔어!" "예?" "용이 화살을 맞았다고. 누군가 숲에서 우릴 공격한거야!" 더 이상은 묻고 싶어도 물을 수 없었다. 얼기설기 얽힌 그물 같은 나뭇가지 들을 꺾으며, 용이 지면에 쿵 쳐박혔고, 그 진동으로 로이, 데이미아, 툴위그, 랜스, 그리고 필리우스는 모두 흙바닥에 뒹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랜스와 툴위그는 몸을 일으키는 즉시, 무기를 잡고 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한 떼의 군대를 보고는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르크가 아닌, 활을 든 다크엘프들과 칼로 무장한 드래크로니안들로 이루어진 그 군대는, 용과 그들을 빽빽히 에워싸고 있었다. 요정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을 다 합쳐, 백 명은 족히 될 듯한 숫자였다. 싸워 봤자 가망이 없을 것이 뻔했다. "아쿠쿠..." 로이와 데이미아는, 랜스와 툴위그보다 한참 후에야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로이는 일어나자마자, 얼른 용에게로 눈을 돌렸지만, 심장에 화살이 꽂힌 용은 이미 죽어 있었다. 두 개의 머리는 똑같은 모습으로 눈이 감긴 채, 힘없이 바닥에 늘어뜰여져 있었다. "포위당했어...!" 데이미아가 중얼거리며, 그래도 무슨 수가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눈으로 필리우스를 바라보았다. 필리우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왠지 그녀를 섬뜩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압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데이미아는 불안함을 이기지 못해, 슬금슬금 뒷걸음질치 다가 용의 시체에 등을 부딪혔다. "환영합니다, 로크 페울로니의 용사들이여." 맑고 조용한 목소리가 다크엘프들과 드래크로니안들로 이루어진 부대 속에서 들려왔다. 일행의 눈은 모두 그리로 향했다. 하얀 로브를 입은, 젊은 청년의 모습을 한 사내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그의 머리칼은 로브보다도 훨씬 더 하얗게 반짝이는 은빛이었고, 그에 못지 않게 피부도 하얘서 차라리 창백하다고 해야 좋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눈, 깊숙히 박힌 눈만은 홀로 색깔을 지닌 듯, 강렬한 붉은 색을 발하고 있었다. "당신은... 설마 드래크로니안 족의 얼음의 신관? 에퀴온의 신관 보레아스...?" 데이미아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보레아스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의 어머니가 이야기해주던가요, 라스헨 에이니드? 그래요, 아름답고 용감한 플리에타와는 한 편이 되어 싸운 적이 있었죠. 그녀의 딸인 당신과는 이런 인연으로 만나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탁을 잘 들어 주신 다면, 해를 끼치지는 않을테니 너무 걱정 마시죠." 그는 데이미아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좀더 낮은 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새로운 라스헨 에이니드여. 그대의 어머니가 나의 동료였듯이, 그대도 내 편이 되어 우리를 도울 수 있겠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 괴물!" 랜스가 소리치며, 보레아스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가 보레아스의 몸에 가까이 가기도 전, 의외의 공격이 그에게 덮쳐왔다. "르오트!" 필리우스가 주문을 읊으며 랜스를 향해, 검게 타오르는 불덩이를 던진 것이다. 랜스는 얼른 칼로 그 불덩이를 막았다. 아덴 가문에 전수되는 명검 이었기에 화상은 면할 수 있었으나, 그 충격으로 랜스는 몇 발짝 날아가 나무에 등을 부딪치고 쓰러졌다. "피... 필리우스?" 데이미아가 경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아무 거리낌이 없는 미소를 지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사랑스러운 라스헨 에이니드, 제가 엘미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드리겠다 고 약속드렸지요? 저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기대에 가득찬 눈으로 보레아스를 바라보았다. 보레아스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쉬더니, 이윽고 그가 원하는 말을 꺼냈다. "그래, 수고했다, 필리우스. 약속대로 이제 너는 자유다. 자유를 누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유감이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자비로운 얼음의 신관이시여.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 그리고 시간의 가치는 그 길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필리우스는 마냥 좋은 듯, 얼굴 가득 미소를 띄고는 보레아스의 발밑에 꿇어앉아 공손히 절했다. 그리고 그는 데이미아에게로 눈을 돌렸다. "여리고 사랑스러운 숲의 마법사님! 마지막 임무가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었다니 행운이였지요. 맹세컨데 당신에 대한 봉사가 연기만은 아니었습니다. 제 능력으로 당신을 억지로 끌고 오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귀여운 당신께 어찌 그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아쉬운 작별의 키스를 그대의 손등에 남겨도 될까요?" 데이미아는 욕설을 내뱉으려는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찌푸렸으나, 다음 순간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필리우스가 그녀의 손 가까이에 입술을 가져가는 순간, 그녀는 그 손을 힘껏 휘둘러 필리우스의 얼굴을 때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그가 비틀거리다 흙바닥에 쓰려졌을 정도였다. 황당한 열굴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입술은 그녀의 손톱에 크게 찢겨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크루다스!" 데이미아가 싸늘하게 비웃으며 고대어로 말했다. 그 말에는 인간 언어로는 번역하기 어려운 경멸이 숨어 있었다. 굳이 번역하자면 사기꾼, 혹은 배신자 라는 뜻이 될 테지만, 그것 가지고는 부족했다. 크루다스는 최초로 동족을 배신하고 오르크의 노예가 되기를 원했지만, 스스로의 주술에 이기지 못하고 해도 달도 보지 못한 채 거대한 지렁이가 되어 흙과 오물만으로 배를 채우며, 인간의 용사가 그를 죽이기 전까지 영원히 땅 속에서 살아야 했던 요정이었 기 때문이다. 필리우스는 물론 보레아스와 로이 일행도, 그녀의 대담성에 놀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필리우스가 억지로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런, 이런, 제가 졌습니다. 그럼, 모두들 안녕히 계시지요. 라스헨 에이니드, 또 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우리 모두 남은 수명이 별로 없는지라 그럴 시간이나 있을는지 모르겠군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그는 공간 이동 주문을 읊으며 사라져 버렸다. 로이는 눈살을 찌푸린 채, 보레아스에게 물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남은 수명이 별로 없다니..." "어리석은 자의 어리석은 소리일 뿐이지요, 이디실의 주인." 보레아스는 이렇게 대답했으나, 그의 미소짓는 얼굴에서 근심의 그림자를 지울 수는 없었다. 로이는 더 물으려 했지만, 그는 대답을 회피하는 태도로 한 발짝 물러서, 로이 일행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여러분은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라우더로 오셨을 줄로 압니다만. 제가 여러분을 라우더로 모실 테니 걱정 마십시오. 아, 물론, 로크 페울로니도 곧 여러분의 손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보레아스는, 증오로 가득 찬 랜스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리반 아덴의 아들 랜스 경, 그대는 그대가 오래도록 만나기를 원했던 분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6. "하르크자엘 님! 귀환하셨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그루크는 라우더의 성벽 위를 헐레벌떡 달려오며 소리쳤다. 거대한 그가 갑옷까지 입을 채로 쿵쾅거리며 달려오자, 성벽은 무너질 듯한 소리를 내며 신음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그런 것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듯,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라우더 외성(外城)의 정문에 세워진 망루, 본성(本城)과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새카만 날개가 반쯤 펴진 채, 지붕 위에 걸터앉은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방금 돌아왔어... 그렇게 호들갑 떨 것 없어." 하르크자엘은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루크는 그의 풀 죽은 듯한 모습이 불안해졌다. 하르크자엘은 아크트처럼 쉽게 흥분 하거나 자주 혈기왕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지만, 맥빠진 모습을 보이는 일도 없었다. 그가 실망을 감추지 못했던 것은, 단 한 번, 라우더를 점령하고도 힐리온을 찾지 못했을 때였다. 지금 그 때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주인님, 제가 주제넘게 괴롭혀 드릴 일이 아닌 줄은 압니다만, 혹 에스텔 이...?" "에스텔 함락은 성공적이었네. 걱정할 것 없어. 노토스도 덩치만 큰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두 번에 걸쳐 공격했고, 인간들은 쉽게 넘어갔어. 그리고, 그래, 아르멘과 카란의 영주도 약속을 지켰지. 에스텔은 이제 우클로우야. 내가 원하던 ㅍ로도 아무 문제 없이 생포했고..." "...그러면...?" "다 잘 되었어, 잘못된 건 하나도 없어. 걱정할 것 없다고. 힐리온의 주인, 그 배신자의 아들은 아무 문제 없이 오는 중이고, 나머지 세 명도 마찬가지지. 아니, 어쩌면 그들은 도착했는지도 모르겠군. 모두 성공이야. 걱정할 것 없어." "...그렇군요. 기쁩니다, 주인님. 이제 봉인을 풀어 카야크 님께서 힘을 되찾게 해 드리는 것만 남았군요." "그렇지? 나도 기쁘네." 그러나 도저히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그루크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하르크자엘의 어두운 표정 뿐이 아니었다. 그의 태도, 그루크 자신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여느 때와는 너무 달랐던 것이다. 분명 지금 그는 호통을 받아도 마땅할 정도로 주제넘은 참견을 하고 있는데, 그의 주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일일이 설명을 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의 저 정중함이라니... "누구보다도 강한 저의 주인이시여, 제가 지금 주제넘은 참견을 하고 있다면 죽여 주십시오. 그러나 저는 주인님의 노예로서 지금 여쭈지 않을 수가..." "그루크." 갑자기 먼 곳만 응시하던 하르크자엘의 눈이 그루크에게 꽂혔다. 그의 자색 눈은 이제까지 그 거인 오르크가 보지 못한 빛을 띄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루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는지 모두 잊은 채, 그의 말을 가만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 그래, 20년 전이었지 - 아크트가 자네가 이끌던 일족을 정복했을 때의 일이 기억나는가?" "예, 그 일을 어찌 잊겠습니까? 아크트는 오르크의 전통에 따라 눈을 뜰 나이가 지난 모든 남자들을 처형하려고 했습니다. 주인님께서 저희를 구해 주시지 않았다면, 저희는 모두 아카드 신의 나라에 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 멍청한 아카드가, 금화 몇 닢과 보석 몇 개에 현혹되어 너희를 포기했었지. 그는 아마 너희가 이렇게 강한 푸이 하르크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야." "모두 주인님의 덕택입니다. 저희는 평생 보상하고, 그 자손들이 보상해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건 아냐." 하르크자엘이 조용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쩐지 쓸쓸한 웃음이었다. 그루크의 부리부리하고 노란 눈이 크게 떠졌다 "예?" "평생 갚지 못할 은혜는 아니라고. 난 내 욕심에서 자네 일족을 구했고, 지금까지 자네들이 해 준 일들은 그 빚은 갚고도 남았지." "그게 무슨...?" "내가 자네들을 해방시킬 때가 되었다는 말이네. 자네들은 자유야." 그루크는 이것이 무슨 뜻일지 한참동안 궁리해 보아야 했다. 이윽고 그는 하르크자엘의 발밑에 커다란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자비로우신 주인님, 만약 저희가 죄를 지었다면 어리석은 저만을 벌하시고 제 명에 따른 부하들은..." "그게 아니라니까. 나는 이제 자네들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을 그만 두겠네. 그동안 나를 위해 무척 많은 일을 해 주었어. 고맙게 생각하네. 그 대가로 이제 자네들은 자유야. 더 이상 푸이 하르크가 아닌, 쿠그루 일족으로 돌아 가게. 내가 오기 전처럼, 그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가 살게. 결투를 하고, 정기적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그래, 자네들 오르크들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이제 내 참견을 없을테니까. 하지만 경고하건데, 라우더에서 먼 곳으로 가게. 가능한한 멀리,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가게. 그래야만 그 자유는 좀더 오래 지속될테니..." 그루크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는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다가, 이윽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언제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제 나에게 묻지 말게. 더 이상 내 명령은 자네들을 움직이지 못하니. 그러나 충고하건데, 가능한한 빨리 이곳을 떠나는 것이 이로울 것이네." 그루크는 어설픈 동작으로 다시 절을 했다. 몸에 배인, 노예가 주인에게 하는 큰절을. 그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하르크자엘은 한숨을 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자유를 주셨군요?" 어느새 보레아스가 하르크자엘의 반대편 곁에 서서 묻고 있었다. 하르크자 엘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가 원하던 바가 아닌가." "예... 저 역시 제피로스 님의 뜻대로 더 이상 필리우스를 휘하에 두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준비는 끝난 겁니까?"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만 온다면." "이미 이디실과 엘미어, 카자룬의 주인이 와 있습니다. 그리고 리반 아덴의 작은 아들도 함께요." "그래..." 하르크자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의 얼굴은 왠지 어두워 보였다. "이제 힐리온의 주인이 그 칼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 거로 군..."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데이미아 성질도 장난이 아니네요... 하지만 필리우스 역시 못지 않은 괴짜^^; 보레아스와 제피로스는 마치 가게 문닫을 직전에 상품 정리하듯이 부하들을 마구 정리하고 있는데... 저래도 되나 몰라? Radagast... PS. 6장 7장 환동 자료실에 올렸습니다^^ 7.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희미한 햇빛 속에 라우더 성의 잿빛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마치 왕성처럼 위풍당당한 모습. 그 성벽 위에는 오르크들과 인간 처럼 보이는 윤곽들 - 아마 다크엘프이리라 - 이 느린 동작으로 오가고 있었다. 켈리는 이제 열 네 필밖에 안 남은 말 중 한 마리에 올라탄 채, 그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허리에 찬 묵직하고 차가운 칼의 감촉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반대쪽에 찬, 비교적 가볍고 부드러운 채찍의 감촉도. 둘 다 그녀의 긴 여행의 친구였다. "준비는 됐습니까, 켈레브리스?" 킬릭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지금 이 언덕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근와 칼릭, 그리고 클레이브, 셋 뿐이었다. 나머지 병사들은, 그래 봤자 300 명이 채 안 되는 숫자이지만, 데이슨을 따라 저 성으로 진격하고 있는 중 이었다. "두발하면 잔소리!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어요." 켈리는 친근하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이며 말했다. 그녀의 발랄한 태도는 칼릭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잘못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저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온단 말인가. 그가 실패가 걱정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깔깔 웃기까지 했다. "실패할 리가 없잖아요. 실패하면 다 죽게 되니까!" 그녀의 들뜬 듯한 즐거운 기분, 거의 흥분 상태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그 기분은 전혀 이해가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의 병적 상태처럼 보였다. 클레이브의, 힐리온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집착과 마찬가지로. '어떻게든 되겠지...' 칼릭은 스스로를 위로하려 애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이 난리를 쳐 가며 힐리온을 찾는다는 것도 우습지만, 안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다면 켈리의 말마따나 빈손으로 에스텔에 돌아가는 길밖에 없으니. 모두들, 클레이 브처럼 그래도 힐리온을 찾으면 뭔가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속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슨이 잘 하는 것 같은데." 클레이브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개미만하게 보이는 데이슨의 병사들이 오르크 부대와 충돌하고 있었다. 성문은 이미 망가진 뒤였고, 뒤늦게 나온 다크엘프들이 화살을 난사하고 있었다. 오르크들은 이미 성문 안쪽까지 들어온 인간들을 몰아내느라 안간 힘을 다하고 있었다. "천천히 내려가 볼까요?" 켈리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고, 칼릭과 클레이브는 각각 고개를 끄덕였다. 켈리는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녀의 말은, 비록 지치고 늙은 말이었지만, 전력을 다해 언덕 아래로 내달렸다. 곧이어 클레이브와 칼릭도 그녀의 뒤를 따랐으나, 몸무게가 자신보다 가벼운 그녀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았다. 데이슨의 병사들이 오르크들의 정신을 빼앗고 있어서, 성문의 바로 앞에 다다를 때까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하앗!" 켈리가 날카로운 고함과 함께 채찍을 휘둘렀다. 외골격의 보기 흉한 오르크 말 위에 타고 있던, 잿빛 갑옷으로 무장한 오르크의 목에 그 채찍이 감겼다. 오르크는 들고 있던 도끼를 그 채찍을 끊으려 했으나 켈리가 더 빨랐다. 그녀가 채찍을 휙 잡아당기자, 오르크는 단번에 목뼈가 어긋나면서 말 아래로 추락했다. 다른 오르크 병사가 메이스를 휘두르며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으나, 제대로 공격 한 번 해보기도 전에, 그녀의 칼이 그의 투구 아래의 얼굴로 파고들었다. 얼굴이 알아볼 수조차 없게 피범벅이 된 채로, 그 오르크는 풀썩 뒤로 나자빠졌다. "하하하하! 올테면 오라고!" 켈리는 큰 소리로 웃어제끼며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오르크와 병사들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말은 발목까지 죽은 오르크와 병사들의 피로 붉게 물들이며, 시체를 밟아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어제 하루동안 휴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몇 달 동안의 강행군으로 말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켈리는 상관하지 않았다. 아니, 그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녀는 앞만을 바라보며, 사정없이 말을 재촉하여 몰아 가며 싸울 뿐이었다. "더러운 오르크들! 다 처치해 주마!" 그녀의 칼이 커다란 반원을 그리면서, 두 마리 오르크 병사의 눈을 한꺼번에 빼앗아 갔다. 고통에 찬 비명과 함께 그들이 들고 있던 도끼와 메이스가 땅에 쳐박혔다. 데이슨의 병사들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와, 그 두 불운한 괴물들의 목을 쳤다. 그리고 켈리는 이미 앞으로 나아가, 성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두 마리의 하피가 양쪽 하늘에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지체 없이 왼손에 든 채찍을 휘날렸다. 채찍은 하피의 날개를 휘감았고, 곧 '으드득'하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를 내며 그 날개를 조여들었다. 다른 한 마리의 하피는 클레이브의 칼에 날개가 잘려 땅바닥에 쳐박혀 퍼덕였다. 클레이브와 켈리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둘은 똑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 적어도 칼릭이 보기에는. 무엇엔가 홀린 듯한 눈. 힐리온에게 끌려 가고 있는 사람들의 눈. 적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눈 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듯 진격하는 둘의 모습은 놀랄 정도로 닮은꼴이었다. 휙! 화살이 클레이브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말머리를 돌려 화살을 피했으나, 대신 말이 목에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그는 갑옷을 입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렸다. "칼릭, 클레이브와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가요! 나도 곧 따라갈테니." 켈리 역시 말에서 뛰어내리며 소리쳤다. 그녀의 말도 이제 너무 지쳐서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칼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완전히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 었다. "어서!" 그녀가 재촉했다. 클레이브와 말에서 내린 칼릭은 성으로 달려들어갔다. 서너 마리의 오르크가 그들의 뒤를 쫓았으나, 켈리가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케에에엑!" 분개한 오르크 한 마리가 자기 몸만큼이나 큰 도끼를 휘두르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켈리는 가볍게 몸을 피했고, 도끼는 그 무게 때문에 허공을 가르며 벽에 날의 반이나 박혔다. 그 사이, 그녀의 칼이 오르크의 투구 아래로 비집고 들어가 목을 땄다. 손가락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작은 상처에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피가 분수처럼 솟아올랐다. 검붉은 피가 그녀의 옷을 적시고 얼굴에까지 튀었으나, 신경 쓸 틈이 없었다. 다른 두 마리의 오르크가 그녀의 등 바로 뒤로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휙! 오르크의 메이스가 정확히 그녀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다. 그러나 그것이 때린 것은 죽은 동료의 시체였고, 켈리는 어느 새 한 발 뒤로 가 있었다. 그녀의 칼이 그의 얼굴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는 간신히 그 칼날을 피했으나, 곧바로 이어진 그녀의 발차기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오르크는 코가 깨진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고, 그 사이 그녀의 채찍은 다른 한 마리의 오르크의 목을 부러뜨렸다. 그리고 간신히 망가진 코를 부여잡고 일어선 오르크의 눈앞으로, 다시금 그녀의 칼이 날아들었다. 날카롭고 가는 칼날이 그 오르크의 두꺼운 손바닥을 뚫고, 얼굴을 뚫었다. 오르크는 쓰러졌다. 켈리는 가볍게 점프하여 쓰러진 오르크의 머리맡에 착지하여, 자신이 던진, 지금은 오르크의 얼굴에 박혀 있는 칼을 빼어들었다. 그녀의 얼굴에 잔인한 기쁨의 표정이나, 혹은 징그럽다는 찌푸린 표정 따위는 없었다. 다만 일을 무사히 완수한 사람의, 만족스러운 미소가 희미하게 스쳤을 뿐이었다. "대단하군." 어디선가 박수 소리와 함께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웃거나 분노에 찬 목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탄복하는 사람의 말투였다. 그 소리는 하늘 위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켈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왼쪽에 십자 모양의 흰 흉터가 있는 검은 날개를 핀, 흑발의 청년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띈 자색이었고, 그의 얼굴은 단정하면서도 어둠이 깃든 듯 했다. 어딘지 이즐레이와 닮은 얼굴이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피의 여전사라... 당신과 같이 훌륭하게 싸우는 여자를, 인간 중에서는 딱 한 명 본 적이 있지. 내 손에 죽어야 한다는 게 유감이군." "왜 내가 당신과 싸워야 하지?" 켈리 역시 침착하게 물었다. 검은 날개의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둘의 태도는 너무나 차분하고, 언성 한 번 높아지지 않아 누가 보면 친구끼리 이야기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힐리온의 주인 곁에 당신과 같은 훌륭한 전사가 있대서야 일이 복잡해질 수 있으니가... 미리 해치우자는 것이지. 오늘 죽거나 내일 모레 죽거나 어차피 마찬가지일테니, 나를 너무 원망하지는 않겠지?" 말을 마치는 순간, 검은 날개의 드래크로니안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켈리가 잠시 후 그의 존재를 파악했을 때, 그는 이미 그녀의 등 뒤에 서 있었고, 어느새 뽑아 든 그의 가는 검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켈리의 피였다. 찢어진 왼팔로부터, 가느다란 선홍색의 액체가 그녀의 팔을 타고 흘러내려 손으로부터 똑똑 떨어졌다. 드래크로니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왜 피하지 않지? 포기한 것인가?" "어떤 의미로는." 켈리가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내가 피하려 했다면 분명 그 칼이 내 심장을 찔렀을거야. 안그래? 드래크 로니안의 공격을 피하려 한다면 죽여 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지. 특히 당신과 같은 훌륭한 전사 드래크로니안의 공격이라면, 글라노우스으 후계자 제피로스!" 제피로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인간, 고작 20년 정도 살았을까 말까한 인간 여자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30년동안 아무도 입밖에 낼 리 없었던 그의 이름을. 보레아스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드래크로니안, 그리고 그가 직접 이름을 가르쳐 준 로이 이외에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그 이름을. "하앗!" 켈리가 갑자기 칼을 휘두르며 그를 공격해 왔다. 두 칼날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인간이라면 그녀의 급습을 피할 리 없었지만, 제피로스이기에 방심하고 있던 찰나에도 공격을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나 켈리 역시 그의 목숨을 노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과 칼을 맞댄 당새에게 요구했다. "제피로스, 드래크로니안의 족보에서 그 이름이 제외된 저주받은 전사여. 내 얼굴을 보시오!" 최면술에 걸린 듯 제피로스의 눈이 커졌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인가? 오르크와 손잡았기 때문에, 어둠의 종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드래크로니안들의 입에 다시는 오르내릴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것을 아는 인간이 살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검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 피에 더러워졌지만, 어깨 위에 엉킨 구불거리는 금실같은 머리칼. 저 코, 저 입술, 저 갸름한 얼굴선은...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은... 한 명밖에 없어. 단 한 명밖에!' 제피로스는 숨을 헐떡이며 뒤로 물러섰다. "넌 대체 누구지!" 그는 날카롭게 외쳤지만 이미 대답이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었다. 시엘레이스 - 다른 얼굴, 물론 다른 얼굴이다. 그녀보다 좀더 광대뼈가 높고, 그녀보다 입술이 작고 도톰하고, 그녀보다 턱선이 직선적이다. 그러나 그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놀랄 만큼 닮은 얼굴, 도저히 남이라고 볼 수 없는 얼굴. 10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그의 앞에 과거가 돌아오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인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 텐데? 길을 비키시오. 나는 그대와 적이 아니니." 제피로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와 그 여성 - 시엘레이스이지만 도저히 그녀일 수 없는 인간족의 여성은 서로 칼을 마주한 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에라도 그녀를 죽일 수 있었다. 그것은 그들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드래크로니안의 검술을 알고 있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여전사라 해도, 리반 아덴조차 벤 하르크자엘의 칼날을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제피로스는 칼을 거두었다. "만약 그대가 내 적이라면, 그것이 확실해진 다음에 죽여도 상관 없겠지." 그는 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 켈리가 미처 대답할 새도 없이,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펴고 날아올랐다. 그가 일으키는 바람에 켈리의 머리칼이 헝클어져 그녀의 눈앞을 가렸다. 그녀가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그가 있던 곳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그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후우... 죽을 뻔 했어..." 켈리는 큰 한숨을 내쉬며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승자의 기쁨이 번져 가고 있었다. "쿠와아악!" 두 마리의 오르크가 성벽으로부터, 그녀를 향해 뛰어내렸다. 그러나 그녀의 채찍이 곡선을 그리며 날아가, 두 마리의 오르크들을 그녀의 머리 위로부터 가볍게 쳐 냈으므로, 결국 둘을 균형을 잡지 못한 채 그녀의 바로 앞의 땅에 철굴을 쳐박고 넘어졌다. 그녀는 한 발로 한 오르크의 목을 쿡 밟아 뼈를 부러뜨리는 동시에, 다른 한 오르크의 목에 칼을 꽂았다. 금세 피가 벌겋게 검은 당을 물들였다. "그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클레이브를 쫓아가야지!" 켈리는 다시 여느 때와 같은 밝은 미소를 띄우며, 성 안으로 들어섰다. 8. "어둠의 창조자, 선택받지 못한 우리 모두의 아버지시여, 나 그대의 이름을 받들어 이제 청하노니, 어둠의 생물들이 저들의 영혼까지도 삼키게 하소서!" 검은 로브로 온몸은 물론 얼굴까지 감싼 마법사의 입에서, 고대어가 아닌 공용어의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와 동시에 성의 돌바닥이 흔들리면서 시커먼 늑대 모양의, 머리가 두 개 달린 생물들 다섯 마리가 튀어나왔다.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런 걸 본 적이 있나, 칼릭?" "없습니다. 그래도 해치워야 하겠죠?" 칼릭은 먼저 그 머리 둘 달린 늑대 중 한마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푹! 하고 살을 가르는 칼의 감촉이 손에 전해져 왔고, 그와 동시에 검붉은 피가 늑대의 등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신음 한 번 없이 칼릭에게 이를 드러내며 접근해 왔다. 클레이브는 들고 있던 검을 휘둘러 한 늑대의 머리를, 아니 두 개의 머리 중 하나를 막 베어 버린 참이었다. 그러나 머리 하나가 더 남아 있기 때문인지, 그 늑대는 움찔하지도 않고 기세 좋게 짖어대며 그를 공격해 왔다. 게다가 잘린 목으로부터 뿜어지던 피가 점점 일정한 모습을 갖추며 굳어져, 이윽고 새로운 머리 하나가 더 생겨나 버렸다. "저놈들... 머리 둘을 동시에 쳐야 하겠는데?" 클레이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칼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차라리 아트웰 전선에 지원할 걸 그랬군요." 그러나 둘 중 아무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망설이지 않았다. 칼릭은 클레 이브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신에 의해 상처입은 늑데에게 다시 한 번 돌진하여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당했기 때문인지, 늑대는 약삭 바르게도 몸을 피했다. "칼릭, 조심해!" 다른 늑대 한 마리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칼릭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칼을 휘둘렀고, 그것이 그 늑대의 코를 스쳤다. 그것이 후각을 잃고 멈칫하는 사이, 칼릭의 칼이 그것의 목 하나를 잘랐다. 등에 상처를 입은 늑대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칼릭은 물러서지 않고 한쪽 팔에 댄 팔 보호대를 늑대의 입에 물렸다. 커다란 이가 쇠를 으그러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 도금까지 한 보호 대에는 이미 금이 가고 있었다. 칼릭은 얼른, 쓰러진 괴물 늑대의 하나 남은 목을 마저 베어내고는, 그의 팔을 물고 있는 늑대의 목을 베기 위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힘이 부족했던지, 칼은 커다란 상처만을 남긴 채 뼈를 베지 못하고 튕겨나갔고, 늑대는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서며 으르렁거렸다. 클레이브는 늑대가 자신에게 달려들자, 방패로 그것을 쳐 내면서 뒤로 밀려 났다. 팔이 얼얼했다. 늑대는 너무 힘이 세고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늑대 자신도 클레이브 못지 않은 충격을 받았는지, 땅에 털썩 떨어져서 얼른 일어 나지 못했다. 클레이브는 얼른 갑옷으로 감싼 발로 그 늑대의 등을 밟아 누르며, 두 개의 머리를 차례 차례 베어냈다. 첫 번째 머리는 그런 대로 잘 잘려 나갔으나, 두 번째 머리는 세 번이나 칼을 내리쳐서야 겨우 떼어낼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의 은빛 갑옷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크와아악!" 다른 늑대가 동료를 구하려는 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클레이브는 얼른 쓰러진 늑대의 목에 마지막 일격을 가하고 방어 자세를 취했으나, 늑대는 그의 가슴으로 정확히 달려들어 앞발로 그를 누르며 목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것의 긴 이빨이 목 보호대를 뚫고 들어와 으스러뜨리려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쓰러지면서 칼을 놓치지 않았기에, 그는 늑대의 몸에 칼일 푹 찔러 넣음으로써 그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늑대는 옆구리에서부터 등 한가운데 까지가 완전히 구멍이 뻥 뚫려 버렸지만, 한 발짝 뒤로 물러섰을 뿐 여전히 살기 띈 건강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헤에... 잔인묘사가 좀 많군요^^; 역시 몸이 아프니까 기분이... 클레이브는 얼른 일어서서 칼을 고쳐 잡았다. 망가진 목 보호대가 귀찮게 가슴에 매달려 덜렁거렸다. 그의 눈이 그를 노려보는 늑대의 생명 없는 붉은 눈과 마주쳤다. 소름끼칠 만큼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그것은 펄쩍 뛰어올라 그의 머리를 향해 덮쳐 왔다. 허깨비라고 느껴질 만큼 소리 없는 동작이었다. 클레이브는 반 반사적으로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의 이마를 향해 어깨 너머로부터 내리그었다. 퍽! 하고 무엇인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차갑고 끈끈한, 악취 나는 액체가 그의 얼굴에 튀었다. 그의 발밑에 풀썩! 소리를 내며 몸이 거의 반으로 갈라진 늑대가 쓰러졌다. "캬아오!" 한숨을 돌릴 새도 없었다. 죽어 가는 늑대가 경련을 멈추기도 전에, 다른 늑대가 괴성을 지르며 그를 향해 뛰어올랐던 것이다. 커다란 이빨을 드러낸 입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허리를 스쳐갔다. 은빛 갑옷에는 선명하게 푹 패인 자국이 남았다. 늑대는 사뿐히 착지하여 그를 노려보았다. 그 늑대의 등 뒤로 서서히 검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동료 늑대들이었 다. 처음에는 분명 다섯 마리밖에 없었지만, 이미 셀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역시 마법사를 쳐야 하는 건가...' "크와아아아!" 늑대가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클레이브는 일부러 보호대가 덮인 왼팔을 늑대에게 물린 후,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로 그것의 두 머리를 쳐 버렸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보호대였건만 이빨 자국이 선명히 박혀 있었다. 새로 생겨난 늑대들은 서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살았을 적의 습성 때문인지, 이것들은 때가 되기 전에는 급하게 행동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클레이브가 늑대들 쪽으로 덤벼들었다. "하앗!" 그의 칼날이 큰 원호를 그으며 늑대들의 털끝은 스쳐갔다. 죽어 괴물이 되었지만 아직도 민첩하고 용의 주도한 이 생물들은 수월히 칼끝을 피해 가며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어차피 상관 없었다. 칼을 휘두른 것은 길을 뚫기 위한 방법이었을 뿐이니까. 클레이브는 늑대들이 비켜선 틈에, 그들의 뒤에 버티고 있던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 달려갔다. 뒤에서 늑대들이 컹컹거리며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는 한 발로 땅을 박차고 펄쩍 뛰어오르며 칼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아일룬 우클라스!" 마법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자그마한 불꽃이 날아왔으나 클레이브의 무릎 보호대 중 하나를 망가뜨린 채 날아갔을 뿐이었다. 소환에만 재주가 있는 자였는지, 근거리 공격 마법은 형편없었다. 촤악! 클레이브의 검이 마법사의 가슴과 배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발이 가벼ㅕ게 땅에 디뎌진 것은 그 직후였다. 마법사는 분수처럼 피가 뿜어나오는 가슴을 움켜잡고 쓰러져 꿈틀거렸다. 클레이브는 그의 마지막 숨을 끊기 위해 칼을 들어올렸으나, 그가 그것을 내리치려는 순간, 늑대 한 마리가 그의 얼굴에 몸으로 부딪쳐 왔다. 9 "윽!" 클레이브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투구가 머리에서 벗겨져 덜커덩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곳으로 굴러가 버렸다. 늑대 역시 쓰러졌으나, 그보다 먼저 몸을 일으키고 달려와 그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입을 벌렸다. 클레이브는 급한 김에 다시 왼손의 팔목을 그 입에 들이댔다. 듣기 싫은 소리와 함께 팔 보호대가 찌그러드는 것이 느껴졌다. 늑대의 앞발은 그의 가슴 위를 단단히 누르고 있어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쓰러진 마법사를 찾아보았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피를 뿜으며 엉금엉금 기어가는 검은 로브를 입은 형체가 보였다. 팔 보호대는 이제 거의 다 망가져서 늑대의 이빨이 그의 살갗을 스칠 정도였다. 클레이브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칼을 힘껏 던졌다. 칼은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 마법사의 등을 꿰뚫었다. 마법사는 경련을 한 번 일으키더니,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동시에 클레이브의 팔목을 물고 있던 늑대도 움직임을 멈추 었다. 그것은 잠시 시간이 멈춘 듯이,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더니, 이윽고 하얀 뼈만 남긴 채 그 살과 가죽이 모두 재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클레이브의 팔목을 물고, 가슴에 앞발을 디딘 그 자세 그대로 뼈만 남더니, 이윽고 뼈도 무너져내려 가루가 되었다. "클레이브 님!" 맞서 싸우던 늑대가 갑자기 사라져 당황해하던 칼릭이, 쓰러져 있는 클레이 브를 보고는 질겁을 해서 소리치며 달려왔다. 클레이브는 웃으며 몸을 일으 켰다. "됐어, 난 다치지 않았어. 어서 힐리온이나 찾으러 가지." 칼릭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말없이 클레이브를 부축해 일으켜 주고, 그가 망가져 쓸모없게 된 왼팔의 보호대와 무릎 보호대를 떼어내는 것을 지켜보 았다. 힐리온. 그 말이 섬뜩한 칼날처럼 칼릭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말의 의미와, 그 말을 하는 클레이브의 태도, 모두가. "뭘 그러고 있어, 칼릭? 시간이 많지 않아. 서두르자고." "클레이브 님..." 칼릭은 간신히 말을 꺼냈다. "그... 힐리온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차마 '이 성에 있다는 것도 확실치 않고 실제로 존재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클레이브의 대답은 확신에 차 있었다.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군... 어리석게 보일테지? 하지만 어디에 있는지 내가 알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정말 이상한 일이군. 이게 바로 힐리 온의 주인의 능력이라는 건가?" 그리고 그는 가벼운 걸음으로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갑옷의 여기 저기를 떼어낸데다 투구까지 벗어버려 훨씬 몸이 가벼웠다. 더 이상 아까의 소환사(召喚士)와 같은 문지기는 없는 것 같았다. 다크엘프 몇 명이 레이피 어를 휘두르며 대항했으나, 에스텔의 클레이브에게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헛되이 피를 뿌리며 돌바닥에 쓰러졌다. 한때는 클레이브 자신의 성이었던 곳, 그리고 이제는 오르크들의 어둠에 싸인 성, 그리고 이제 클레이브가 되찾 으려 하려는 성, 라우더의 바닥으로 그들의 피가 스며들었다. 하피들이 그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칼날이 곧 그들의 날개를 꺾어 버렸다. 클레이브는 자신이 이 성의 주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살던 그 어느 때보다도, 그는 자신이 이 성의 주인이라고 느꼈다. 오르크 두어 마리가 메이스를 들고 그에게 달려왔다. 그의 칼이 한 오르크의 투구 사이로 파고들어 미간을 찌르는 사이, 다른 오르크의 메이스가 그의 옆구리를 스쳤다. 그는 그것의 무기 든 손을 잘라 버렸다. 그것의 목숨은 칼릭의 차지였다. 거의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었으므로 클레이브는 스스로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였다.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랄까. 그의 발은 그의 이성을 초월하고 있었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었지만 왜 자신이 그쪽으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힐리온을 찾으러.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검이었던 그것을 찾으러. 힐리온, 그것이 그에게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줄 것이었다. 고향 라우더, 승리, 그리고 부러진 자긍심 - 그렇다, 아버지를 죽음에서 구하지 못했던 이후, 아니 임종조차 지켜보지 못하고 시체조차 수슴할 수 없었던 이후로 그 상처를 치유할 수 없었던, 그의 자긍심을. 이미 힐리온은 그가 잃어버렸던 모든 것이 되어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클레이브 님? 그 쪽은 막다른 골목..." 칼릭이 당황하여 외치는 소리가 먼데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네, 칼릭." 클레이브의 대답. 칼릭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알던, 리반 아덴의 아들, 에스텔 최고의 기사 클레이브가 아니라, 힐리 온의 주인 클레이브였다. 갑자기 불안이 칼릭을 압도했다. 막아야 했다. 클레이브가 힐리온을 갖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지금 막지 않으면 영원히 돌이킬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을? 무엇을 돌이킬 수 없는데...?' 뒤죽박죽. 칼릭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것이 그를 자신없게 만들었다. 그는 클레이브가 가는 것을 막을 자신이 없었다. 그는 클레이브보다 자신이 현명하다고 믿을 수 없었다. 그는 클레이브를 따라 계속 달렸다. 복도를 돌고, 계단을 내려가, 횃불 몇 개만 앞을 겨우 밝힐 수 있는 빛을 내뿜고 있는, 벽이로 막힌 복도의 끝으로... 햇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지하, 마치 오르크들을 위해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처럼 음산한 장소였다. 클레이브는 그 장소를 기억했다. 그가 어렸을 때, 아직 기사 수업을 제대로 받기도 전, 아버지와 함께 라우더 성에 살면서 간단한 검술만을 익히던 때, 아직 드래크로니안도 모르고 오르크도 이름만 알던 그 때, 이 막다른 복도의 끝에 와 보았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그 때 온몸을 훑고 지나가던 공포 역시 기억했다. 낯선 것, 인간의 지식에 속하지 않은 것, 그가 모르는 종류의 어떤 공포가 거기에 존재했다. 그래, '유령'. 어렸을 적의 그는 그것을 그렇게 이름붙였다. 항상 이름난 성 안에는 유령이 출몰하는 장소가 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공포는 그의 마음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 낯선 존재의 느낌은 더욱 더 크게 느껴졌다. 그는 꽉 막힌 벽의 바로 앞에 섰다. 이것이 벽이라고, 지나갈 수 없다고 그처럼 확신했던 적이 있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는 달려오느라 흐트 러진 숨을 가다듬었다. 침착하게 들어서야 했다. 이곳은 신성한 곳이므로.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형성된 그의 지식이 그에게 명령하고 있었다. "크와아악!" 갑옷을 입은 오르크 한 마리가 메이스를 휘두르며 그에게 돌진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채 클레이브에게 가까이 다다르기도 전, 칼릭의 칼날이 그것의 투구와 갑옷 사이로 난 틈을 파고들었다. 휙! 칼날은 피를 뿌리며 그것의 목을 비집고 나왔다. 그것은 쓰러졌다. 그러나 연이어 달려온 다른 오르크가 쉴 틈도 주지 않고 그를 향해 손도끼를 던졌다. 아슬아슬하게 칼릭의 망토 자락을 ㅉ고 비껴간 도끼는 땅에 떨어졌다. 칼릭은 얼른 그 도끼를 집어들어 그 오르크에게로 던졌다. 그것은 그 오르크가 다른 도끼를 던지기 직전에 그것의 이마를 파헤치며 명중했다. 오르크는 쓰러졌다. 칼릭은 그 두 시체 뒤로, 달려오는 수많은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을 보았다. "클레이브 님...!" 그는 절망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의 목소리 다위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손을 가만히 들어 올렸다. 그의 손이 벽돌 중 하나를 눌렀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오르크가 도끼를 휘둘렀고, 그것은 칼릭의 어깨 보호대 중 하나를 떼어냈다. 칼릭은 그것의 갑옷 입은 배를 힘껏 발로 차 쓰러뜨렸다. 클레이브가 누른 벽돌은 쑥 들어갔다 - 그가 손을 뗀 후에도 한참동안 들어갔다. 칼릭이 쓰러진 오르크의 투구를 걷어차 벗겨내고 목에 칼을 찔러넣었다. 클레이브의 눈앞 에서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벽이...!" 놀란 칼릭은 잠시 눈앞에 적이 있다는 것을 잊은 채,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제는 돌문이 되어 좌우로 열리고 있는 단단한 벽과 그 앞으로 뻥 뚫린 어두컴컴한 길을, 끝도 없어 보이는 그 길을 보았다. 그 순간, 오르크가 휘두른 메이스가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갑옷이 찌그러지면서 그는 벽쪽으 로 튕겨나가 쓰러졌다. "윽...!" 그는 신음하며 칼을 들었으나, 오르크 쪽이 좀더 빨랐다. 오르크의 메이스가 벌써 그의 머리 바로 위로 들어올려져 있었다. 반격의 시간 따위는 없었다. 오르크의 메이스가 그의 얼굴로 덮쳐오고 있었다. 휙! 갑자기 그의 얼굴로 메이스의 둔탁한 고통 대신 뜨겁고 악취나는 피가 뿌려졌다. 그와 함께 가까운 곳에서, 그의 귀청을 찢을 듣한 비명이 들려왔다. "크와아아악!" 고통에 찬, 탁한 비명. 인간이 낼 수 없는, 짐승의 울음과 지성이 있는 생물 의 비명의 중간쯤 되는 소리. 그를 내리치려던 오르크가 지르는 비명이었다. 메이스를 들고 있던 팔은 손목만 남아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모습도 잠시, 비명은 곧 콱 막힌 것처럼 멈추었다. 딱 벌린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다음 순간 오르크의 몸은 기우뚱 하더니 풀썩 쓰러졌다. 갑옷이 돌바닥에 부딪쳐 소름끼칠 만큼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피가 튀었네요. 미안해요, 칼릭!" 켈리가 빙그레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가 흥건한 칼과 채찍을 든 그녀의 뒤로, 다크엘프들과 오르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칼릭은 간신히 한숨을 내쉬고는 칼에 몸을 기대어 일어섰다. "목숨을 빚졌군요. 감사하오, 켈레브리스..." "빚진 게 한두번인가... 그보다 어서 클레이브를 쫓아가야겠군요. 이쪽 길로 갔나? 당신까지 놔두고 가다니, 눈에 정말 뵈는게 없는가보네..." 켈리는 뭐가 좋은지 킥킥거리기까지 하며, 그녀의 앞에 뚫려 있는 검은 길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벽이었던 그 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클레이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칼릭은 멍하니 그 어둠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켈리의 어깨를 붙잡고 호소하듯 소리쳤다. "켈레브리스, 뭔가 잘못되고 있소. 클레이브 님은 그냥 저렇게 가실 분이 아니란 말이오! 힐리온, 그 저주받을 물건에 사악한 마법이 깃든 게 분명해요. 지금이라도 그 분을 막아서..." "어리석은 소리 말아요, 칼릭, 이제 와서!" 켈리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날카로웠다. 칼릭은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고 침착해졌다.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게 무슨 꼴이람! 저토록 침착한 여인 앞에서 그는 두려움에 질려 이성을 잃은 꼴을 보인 것이다. 켈리는 그가 어쩔 줄을 모르고 있는 것을 보고, 격려하듯 등을 툭 치며 미소지었다. "걱정 말아요, 힐리온이 그를 이렇게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30년 동안 주인도 없이, 유폐된 것이나 다름없이 기다려 왔으니. 어서 가요, 서두 르지 않으면 희대의 구경을 놓치게 될테니까." 켈리는 스스럼없이, 가까이에 있는 횃대에서 횃불을 뽑아들고 어두운 비밀 통로로 달려들어갔다. 칼릭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공포가 사라졌다고 해서 걱정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힐리온이 부른다고? 그건 또 무슨 소리죠?" "몰랐나요? 로크 페울로니는 서로를 부르죠. 그리고 또 주인을 불러요. 주인들끼리는 운명이 끌어당기죠. 가까이 갈수록, 그리고 염원이 진실될수록 로크 페울로니까 주인을 끌어당기는 힘은 강해져요. 클레이브가 코앞까지 오니까, 이제 힐리온은 그가 보고싶어서 못견디겠나봐요." "설마 칼이...?" "그냥 칼이 아니죠. 저승에서 온 드래크로니안들이 가져온 칼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기와 똑같겠어요? 하지만 너무 걱정 말아요. 클레이브가 힐리온과 상봉하면, 모든 게 다 잘될 테니까." 켈리의 말은 확신에 차 있었다. 칼릭은 횃불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그녀의 확신, 그것은 그가 흔히 클레이브에게서 보던 확신과 흡사한 것이었다. 그녀의 눈은 횃불 때문인지 이상한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아니, 횃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흥분해 있었다. 그녀 역시 홀려 있었다. 클레이브에 못지 않게... "로크 페울로니에 대해... 많이 아는군요..." 칼릭은 자신이 한 말의 이상한 어조를 깨닫고는 당황했다. 그러나 켈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씩 웃더니 대답했다. "공부를 많이 했으니까요. 걱정 말아요, 다 잘될 거에요. 모든 것이."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아래로 통하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다리가 무거워질 정도였다. 밋밋하던 벽들이 어느새 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길은 넓고 잘 다듬어져 있었다. 주위는 어둠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이 돌바닥에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적들은 추격을 포기한 것일까? 추격자가 없다는 것이 오히려 칼릭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하치고는 이상하게 시원한, 낯선 향이 섞인 듯한 공기도... 그는 달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얼굴들이 그의 곁을 스쳐갔다. 부조(扶助). 웃는 얼굴, 슬픈 얼굴, 분노한 얼굴, 무표정한 얼굴, 고귀한 모습 들과 천한 모습들, 악의에 찬 눈빛과 선한 눈빛을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을 꺼내려는 듯이... 소름이 그의 등을 타고 목까지 올라왔다. 조각된 사람들의 등 뒤에서 날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가죽 날개를 단 사람들... '조각일 뿐이야... 조각일 뿐이라고...' 칼릭은 자신에게 타일렀다. 공포에 휩싸이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저렇게 태연한 켈리의 눈앞에서는. 그러나 그는 지금 드래크로니안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여긴 어디요, 켈리!" 그는 침착하게 물으려 했으나 물음은 비명이 되어 터져나왔다. 켈리는 반은 경멸하는 투로, 반은 꾸짖는 투로 답했다. "큰소리 내지 말아요. 여기는 신성한 곳이니까. 실리사와 에퀴온이 화를 내면 난 책임져 줄수 없어요." "신전이오... 그들의...?" "드래크로니안들의 신전... 아마 가장 최초로 만들어진 곳이겠죠."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무 오랫동안 게으름을 피워서 죄송합니다. --; 이제 끄트막에 다다라서... 좀더 잘쓰고 싶었는데... 욕심이 과했던 것 같군요. 그냥 평소대로 쓰는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역시 욕심은 고통은 원천... 켈리의 혈통에 대해 한 말씀 드립니다. 켈리는 하프 드래크로니안인 이즈와는 물론 다르답니다. 시엘레이스가 하도 많이 나와서 그녀가 켈리의 엄만줄 아는 분도 있으신가본데, 그럼 켈리의 엄마가 100살에 죽었으니 켈리는 몇 살...? ^^; 켈리는 단지 시엘레이스와 네스토르의 자손일 뿐입니다. 그러니 드래크로니안 피가 섞였다 해도 1/16 이하겠지요? 그러니 켈리가 이즈처럼 빨리 날고 기는 건 무리입니다^^; 피가 너무 희석되었어요. 죄송 + 죄송한 래디였습니다...^^; 칼릭은 의심에 찬 눈으로 켈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요? 라우더는 에스테이아의 전략상의 요지였소. 에스텔이 생겨 날 때부터 에스테이아의 영토였단 말이오. 오르크들에게 빼앗기기 전 다른 종족에게 이곳이 함락되었던 적은 없었소. 그런데 어떻게...?" "에스테이아의 역사는 기껏해야 500년 정도지요. 그 전의 생각은 안 하시 나요? 드래크로니안이 이 땅에 온지는 그보다는 100년 정도 전인데." "그럼...?" "이곳에는 그 전에도 성이 있었죠. 라우더 성, 지금 세워져 있는 이 성은 단지 개조한 것일 뿐이에요. 모르셨나요? 그보다 한참 전에 이곳에 신전이 있었죠. 아니, 아직도 있죠... 이 지하에. 드래크로니안들이 최초로 세운 신 전, 바로 카야크가 봉인되어 있는 그 신전이지요. 네 개의 열쇠를 처음 보관 한 것도 여기였고, 맨 밑층에 카야크의 문이 숨겨져 있는 곳도 여기이죠. 오 르크들이 단지 전략상의 이유로 이곳을 본부로 삼았다고 생각했나요? 천만 에요, 전략상의 요지는 이곳이 국경 지방에 있을 대에나 전략상의 요지였죠. 지금 우클로우의 경계는 저 남쪽인데, 뭣하러 이곳에 눌러앉아 있겠어요? 답은 하나, 이곳에 카야크를 봉인한 신전이 있다는 것 아니겠어요?" "맙소사..." 칼릭은 말문이 막혀 고개만 저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다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에스텔 다음 가는 에스테이아의 도시가... 드래크로니안의 신전 위에 세워 진 도시란 말인가..."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달렸다. 다급하게, 그러면서도 흥분 된 듯 눈을 빛내며 그들의 앞에 서서히 밝아져 왔다. 그는 의심이 되어 눈9 을 가늘게 떴다. 분명 내려오기만 했지 지상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지상에 서 적어도 몇 미터는 떨어진 거리일텐데... "헉...!" 칼릭은 신음하듯 숨을 들이마시며 걸음을 멈추었다. 거대한 석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괴물의 석상이었다.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두 명의 젊은 남녀. 여자는 꾸짖는 듯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긴 창을 들고 있었 고, 남자는 슬픈 듯 눈을 내리깔고 해골을 감싸안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하체는 연결되어 있었다 - 뱀, 또아리를 튼 단 한 마리의 뱀이었다. "실리사 렐 에퀴온, 오르 렐 세이 세네드. 라시엔 렐 하리엔, 훼이엔 렐 에 훼이엔, 라이데이엔 렐 다닐리엔, 아일 렐 팔... 베이 오르 사르 ㅋ라 오르 다닐리엔, 엘랄 사루인..." 켈리가 나즈막히 읊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통해 들어와 전신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고대어를 모르는 칼릭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 나, 그녀의 표정과 그 기이한 어조만도 그의 기분을 섬뜩하게 만드는 데에 는 충분했다. 낯선 운율로 낯선 언어를 읊조리는 그녀는 그보다는 저 흉측 한 석상의 세계에 더 속한 존재처럼 보였다. 저 이상한 빛을 내뿜는, 알 수 없는 돌로 만들어진 알 수 없는 신의 석상... "...클레이브 님...?" 석상을 바라보던 칼릭은 기가 막혀서 중얼거렸다. 그 석상의 앞에, 키가 크 고 붉은 금발을 가진, 위엄 있고 건장한 청년이 마치 신전의 일부처럼 가만 히 서 있었던 것이다. 클레이브였다. 아니, 클레이브의 모습을 가진 자, 그러 나 칼릭이 알지 못하는 자였다. 홀린 듯한 몸짓으로, 주위에 누가 있다는 것 따위는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천천히 신전을 향해 나아가는 그는... 칼릭은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로 다가갔다. 클레이브가 신전에게 다가갈수 록 칼릭 또한 그를 따라 신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에 서서히, 낯 선 모습의 덩굴과 꽃, 그리고 해골들이 장식된 석상의 받침대와, 석상 앞에 놓여 있는, 석상에 비해 형편없이 조그마한 제단을 보았다. 그리고 제단 위 에 놓인 칼, 마치 유혹하듯 빛을 발하는 칼집과 손잡이를 가진, 금빛 장검 (長劍)도. 드래크로니안의 눈처럼 붉은 보석이 박힌 폼멜과 덩굴 모양으로 장식된 알 수 없는 글씨가 가득 새겨진 칼집이, 그 칼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힐리온...!' 그 칼의 주인, 클레이브는 가만히, 제단 앞으로 갔다. 그는 잠시 고개를 숙 여 칼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그것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한순간의 망 설임도 없는 행동이었다 - 마치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안돼!" 갑자기 칼릭이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순간 그들을 감싸고 돌던 알 수 없 는 분위기는 정적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클레이브는 한 손에는 칼을, 한 손 에는 칼집을 든 채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칼릭을 바라보고 미소지었다. "왔군, 칼릭. 하지만 그렇게 소리를 지르다니, 무슨 일인가?" "아... 저는..." 칼릭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힐리온, 위험한 마성을 지닌 듯 보이던 그 칼은 지금 단지 하나의 금속 덩이가 되어 클레이브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얼굴만 달아올랐다. 도대체 무슨 어이없는 실수 란 말인가! 차마 '그냥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소리쳤다고 클레이브에게 설 명할 수는 없지 않은가! "푸하하하하..." 조용히 있던 켈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클레이브와 칼릭은 그제서야 그녀를 의식하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좀 창백했으나, 웃음소리는 여전히 발 랄하고 거리낌이 없었다. 그녀는 아예 배를 움켜잡으며 자지러지게 웃더니, 한참 후에야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칼릭도 웃기는 데가 있군요... 도대체 소리는 왜 질렀어요? 무슨 큰일 났 는줄 알았잖아! 영광인 줄 알아요, 날 놀래킬 수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으니 까. 하지만 진짜 깜짝 놀랐네... 푸하하하..." 그녀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클레이브도 아직 자루에서 뽑지 않은 칼을 쥔 채, 따라 웃었다. 칼릭은 점점 더 기가 죽었다. 그 역시 멋적게 뒷통수를 긁 적이며 따라 웃는 도리밖에 없었다. 도대체 왜 이런 바보같은 짓을 했던가... "자아, 칼릭, 이제 클레이브가 칼을 뽑아도 되나요?" 켈리가 농담조로 물었다. 칼릭은 더욱 얼굴을 붉혔다. 클레이브는 아직 웃 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다시 왼손에는 칼집을, 오른손에는 손잡이를 쥐 었다. 칼을 뽑기 직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신상(神像)이 지키는 이상한 신전. 더더욱 이상한 것인 이 칼이 여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사실,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었던... 켈리는 기대에 찬 듯 눈을 빛내며, 어딘지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 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온 얼굴로써 그에게 '어서 칼을 뽑아요'라고 재촉하 는 것 같았다. 칼릭, 언제나 충실한 그의 부관은 벌개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르며 서 있었다. 갑자기 클레이브는 그가 왜 소리쳤는지 알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칼릭의 마음에 끼어들었던 공포와 불안이 한순간 클레이브에게 도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힐리온을 자루에서 빼냈다. 금빛의 가는 칼날이었다. 얇고 가벼운 만큼 단단했다. 아니, 단단함이 그의 눈을 통해, 그의 손끝을 통해 느껴졌다. 그의 칼. 클레이브는 미소를 지으며, 칼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었다. 금빛 칼날이 빛을 발하는 것처럼 느껴졌 다. 아니, 실제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그러나 점점 더 강하게, 이윽고 칼릭과 켈리가 제대로 눈을 뜰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환한 빛 을 내뿜었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청록색 눈으로 그 칼날을 응시한 채, 미동 도 않고 있었다. 마치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된 듯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석상이 입을 열었다. "이드 엘브린 로 휜 켈(왜 약속을 어겼지)?" 두 사람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목소리와 남자의 목소리. 그러나 한치의 어 긋남도 없이 입을 맞추었으므로, 한 사람의 목소리같기도 했다. 칼릭은 간신 히 눈을 가늘게 뜬 채 석상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니, 보았다고 생각했다. 빛은 이미 너무 강했다. 환각이었을 거야, 분명히 빛이 너무 강해 서 환각을 본 거야... 칼릭은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수십번 되뇌었다. 그러나 눈으로 본 것이 환각이라 해도, 귀로 들려오는 것은... "이드 엘브린 로 휜 켈? 이드 엘브린 로 휜 켈? ..." 연기, 칼이 내뿜는 저 빛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도 없이 칼을 들고 있는 클레이브, 그러나 그의 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 었다. 벌써 그의 장갑은 타들어가 재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다. 칼은 이미 그 의 살갗을 태우며 먹어들어가는 중이었다. "클레이브 님!" 칼릭은 있는 힘을 다해 그에게로 달려갔다. 클레이브의 손의 화상은 멀리 서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에는 변화 하나 없 었다. 여전히, 무표정하다고 해도 될 만큼 평온한 얼굴.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마치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 듯이... 그 동안에도 그의 손에는 물 집들이 생겨나고,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칼을 놓으십시오. 칼을 놓으라니까요!" 칼릭의 외침조차 그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방법은 하나밖 에 없었다. 칼릭은 있는 힘을 다해 클레이브를 밀쳐내며, 칼을 빼앗으려 했 다. 클레이브의 손은 물론 칼자루를 단단히 쥔 채 놓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칼릭이 팔꿈치로 그의 입술을 강타하자 어쩔 도리 없이 비틀거렸고, 그 사 이에 칼릭은 그 칼을 빼앗았다. 차가웠다. 분명 손을 저렇게 타들어가게 할 정도라면 몹시 뜨거울 것이라고 생각했는 데, 차가웠다. 고통은 없었다. 아무 느낌이 없었다. 칼의 무게, 손잡이의 촉 감, 칼을 잡았다는 아무 느낌조차 없었다. 이제는 차가움조차 느낄 수 없었 다. 그는 느끼지 않고 다만 '알았다'. 그의 두 손의 생명이 이제 다했다는 것 을... "칼릭!" 낯익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는 칼을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죽음'의 감촉이 팔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어깨로, 가슴으로, 하반신과 머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더욱 아득한 곳에서 들려왔다. 클레이 브가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다 끝났다는 것을. 칼의 원한, 아니, 칼을 만든 자들의 원한이 그의 가슴을 스 쳐갔다. 그는 이제 느낄 수 있었다. 그 낯선 종족의 염원... 그들이 마지막까 지 믿었던 맹세... 그렇게 쉽게 파기해서는 안될 것이었다는 것을... 파란 눈, 차가운 복수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복수자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갑자기 칼릭은 살아야 한다고 느꼈다. 아직 죽을 수는 없었 다. 클레이브, 그의 상관에게 알려야 했다. 이 모든 일을 알고도 입다문 자 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그러나 그럴 시간은 없을 것이다... 칼릭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아니, 칼릭이었던 물체가 풀썩 무너져내렸다. 까맣게 탄, 이제는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체가. 땅에 부딪치는 순간 그것 은 먼지가 되어 흩어져 버렸다. 남은 것은 텅 빈 갑옷과 옷, 그리고 음산하 게 빛나는 금빛 칼 뿐이었다. 신전 안은 이제 조용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이... "...칼릭." 클레이브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제까지 아무도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그는 텅빈 갑옷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8. "인간들은 물러갔습니다, 하르크자엘." 다크엘프 한 명이 공손히 보고했다. 제피로스는 자리에 앉은 채 무성의하 게 고개만 끄덕였다. 다크엘프는 한참동안 그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가 전혀 대답이 없자 조심조심 물러났다. 제피로스는 그 모습을 보며 잠시 그 요정 이 누구일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처음 보는 얼굴 같았다 - 하지만 필 시 보레아스가 부리는 다크엘프들 중 한 명이겠지. '푸이 하르크에게 그토록 의지하고 있었나... 그들 말고는 이 성에 누가 있 는지조차 모르다니.' 제피로스는 이렇게 생각하다 말고 쓴웃음을 지었다. 오르크들에게 의지하 다니. 종족의 계보에서 제외되도 할 말이 없군, 정말... 그는 단지 마음대로 부릴 소모품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소모품, 그래, 말 잘 듣는 개들. 명령만 내리면 죽음으로라도 돌진하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충성스러운 개들. 주 인이 아무리 학대해도 혀를 내밀고 반기는... 그런 종족으로 오르크만큼 적 격인 존재가 어디 있을까? 그들은 강하면 숭배했다. 무조건. 그루크가 아크 트에게 반감을 품은 것도 그가 강하다는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루크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 아크트가 이긴 것은 저 흑마법사이자 사악한 꾀주머 니인 두아스에게 의존했기 때문이라고. 그래, 만약 아크트가 그루크 자신보 다 강했더라면 그는 기꺼이 목숨과 종족을 내어 주었을 것이었다. 그것이 오르크라는 종족이니까. 제피로스, 아니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은 강했다. 그루크보다 강했다. 그 것이 그와 그들 종족이 기꺼이 복종한 이유였다. 하르크자엘은 강했으므로 그들을 죽일 권리도 살릴 권리도 있었다. 약한 자들은 노예였다. 그들은복종 과 존경을 바쳤다. 그래, 존경. 존경, 믿음, 그것이 문제였다. 제피로스는 그 들이 다만 자신을 두려워해서 따르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들은 존경과 신뢰 까지 바쳤다. 하염없이 바치면, 얼마나 적은 비율이든간에, 되돌아오게 되어 있는 그 감정을.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그루크에게 가라는 소리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다 끝난 일이야. 지금 와서 무엇이 소용이 있겠어. 며칠이나 남았다고...' 제피로스는 피식 웃으며 눈앞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노예들을 바라보았 다. 인간족과 난쟁이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벌써 10년동안 여기서 땅을 파고 있었다. 아크트는 요정족 노예들은 전혀 땅 파는 데에는 소질이 없다고 ㅜ 덜거렸다. 노예들이라면 오르크 족 소관이었으니, 결국 아크트는 인간족과 난쟁이 족만 배치시키고 요정족들은 다 어디론가 데려가 버렸다. 소문이 분 분했지만, 아크트와 그 부하들이 그들을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까지 하르크 자엘이 관여할 이유는 없었다. 하르크자엘은 다만 싸우면 되니까. 어쨌든 아크트가 노예들 배치를 잘 시킨 탓인지 아니면 충분한 시간이 흘 러서인지, 이제 차차 '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원형의 거대한 돌문,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아무도 문이라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고 거대한 원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아마 그냥 특이한 모양의 바닥 장식이라고 생각했으리라. 원의 안에는 또 원이 있고, 그 작은 원에 내접하 는, 덩굴 무늬로 장식된 정사각형이 그러져 있었다. 정사각형의 네 꼭지점이 9있는 곳에는, 무엇인가 꽂아넣을 수 있을 듯한 가는 구멍이 뚫려 있었다. 로크 페울로니, 네 개의 열쇠의 자리. 그리고 이것은 재앙을 부르는 문... 재앙은 임박해 있었다. 이미 노예들은 문의 발굴을 끝내고, 그 위의 흙먼지 와 자갈 등을 치우는 중이니까. 카야크의 직속 부하인 검은 로브의 흑마술 사들은 의식을 준비하느라 부산을 떨고 있었다. "우리의 날이 임박했군, 하르크자엘." 기묘한 울림이 있는, 깊고 신비로운 만큼 음산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 왔다. 제피로스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카야크 님..." 로브 안의 얼굴이 웃었다. 창백하고, 영원히 젊은 아름다운 얼굴. 넉넉한 검은 후드 아래의 그의 얼굴을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 은 그 얼굴을 알았다. 하르크자엘이야말로, 카야크가 가장 먼저 만난 부하였 으니까. "일어서라, 하르크자엘. 힐리온의 주인이 나타났다더군. 잘 해 주었다. 네 덕에 이제 우리가 세상을 지배할 날이 머지 않았으니... 세계가 내 것이 된 다면 네게 가장 원하는 영토를 주마." "황송하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힐리온의 주인을 잘못 알고 있었 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무려면 어떠냐? 모든 것이 잘 되었는데. 그 인간을 찾아 잡으라고 지시 를 내렸다. 이제 로크 페울로니가 모이는 것은 시간문제다." "황송하옵니다... 그러면 저는 잠시 물러가 있겠습니다." "그래... 휴식을 취하도록 해라." 후드 아래의 웃고 있는 얼굴. 제피로스는 최하층(最下層)을 벗어나 계단을 올랐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 다. 모든 것이.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제피로스 님...?" 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보레아스가 그의 표정을 보고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기분이 좋지 않으십니까?" "특별히 좋을 일도 없지... 이미 성공을 예상하고 있었으니." 제피로스는 자신도 모르게 보레아스를 외면했다.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선홍빛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마음 속을 뚫어보는 것처럼... "고민이 있어 보이시는군요." "당치 않은 소리." 보레아스는 잠시 머뭇거렸다. "제피로스 님, 만약 후회하신다면 지금이라도..." "후회 따윈 안 해!" 제피로스는 날카롭게 잘라 말했다. 후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후회란 다른 선택이 가능했던 자들의 것이므로...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보 레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빠른 말을 쏟아놓았다. "내가 왜 기분이 나쁜지 알고 싶나? 그렇다면 말해 주지. 자네가 숨겼던 일 때문이야. 힐리온의 주인 때문이라고! 하마트면 일을 전부 그르칠 뻔 했 어. 어째서 그 여자가 주인이라고 진작에 말해 주지 않았나? 난 지금까지 리반 아덴의 아들 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여자라니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보레아스의 표정은 정직했다. 제피로스는 마음이 누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시엘레이스를 닮은 그 여자... 모른단 말이야?" "시엘레이스...?" (계속) 제피로스는 실수했다고 느꼈다. 보레아스의 얼굴이 평상시보다 더욱 창백 해져 있었다. 그의 손끝이 창틀 위에 놓인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정직했다. "시엘레이스라고요?" 그가 되물었다. 제피로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자네가 아무 상관 없다는 걸 알았어. 오해해서 미안해. 나는..." "시엘레이스가 살아 돌아왔다면..." 9 "어리석은 소리 마, 보레아스. 그냥 닮은 여자였을 뿐이야!" 제피로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납득시키려는 듯, 절망 적인 말투였다. 보레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창틀을 꼭 쥔 그의 손은 더욱 떨리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그것을 보고 있더니, 문을 쾅 닫으며 나가 버렸다. 보레아스는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중얼 거림이 흘러나왔다. "헤르미온..." 9. 딸그락... 딸그락... 구부린 브러치 바늘이 공허하게 열쇠 구멍을 맴도는 소 리가, 문에 바짝 가져다 댄 로이의 귀를 통해 들려왔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대체 몇 시간이 지났을까. 허리도 아파 오고 스트레스가 쌓여 이제 소리라 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 되었건만, 아직도 이 바늘은 걸리는 것 하나 없이 허공만 헤집고 있었다. "로이! 아직 멀었어?" 데이미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렇게 쉬워 보이면 네가 해!" 로이도 여느 때와는 달리 짜증을 억누르며 툭 쏘아붙였다. 아무리 대접이 극진하다고 한들, 탑 꼭대기의 이런 방에 아무 할 일도 없이 하루 이상 가 두어 두니,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짐작도 안 가고, 다만 무슨 일이 닥치든 좋은 일은 아닐 거라 는 생각만이 점점 뚜렷해지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 거야, 로이? 너 도둑 맞니?" 3"쳇, 이런 열쇠는 따 본 적 없단 말야! 그리고 난 잡혀서 갇히거나 하는 삼류 도둑은 절대 아니라고." "둘 다, 싸우지 마! 이 상황에서 서로 싸우면 어떡하냐?" 아까부터 말없이 앉아 있던 툴위그가 한 마디 하자, 로이와 데이미아는 동 시에 그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우리 싸우는 거 아녜요!" 툴위그는 할 말을 잃고 한숨만 푹 쉬었다. "후우..." 로이는 잠시 열쇠 따는 일을 잊은 채 쿠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데이미 아도 그런 그의 곁에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둘은 잠시 다리를 뻗고 우두 커니 앉은 채 한숨만 쉬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쪽은 로이였다. "난 정말이지 걱정돼..." "뭐가?" "랜스 말야. 도대체 어디 있을까? 왜 랜스만 따로 가둔 거야?" "그야... 랜스는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이 아니니까..." "불쌍한 랜스. 어떻게 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래도 밥이라도 제때 주고, 잠 자고 싶을 때 잠자고, 힘든 일은 아무것도 안 하잖아. 랜스는..." "랜스는?" "어쩌면 끌려가서 땅파고 있을지도 몰라." "...? 땅을 왜 파?" "몰라. 하지만 얘기에 나오는 것 보면 오르크들은 포로 잡아다가 항상 땅 파는 노예들로 쓰던데..." "..." 데이미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한숨을 쉬었다. "인간들의 상상력은 참 이해할 수 없군. 난 그보다 다른 게 걱정돼." "뭐가?" "아까 들었지... 필리우스랑 드래크로니안 신관이 한 말." "그 하얀 마법사 말야? 기억 안 나는데..." "시간이... 남지 않았다고 했어." 데이미아의 얼굴은 어두웠다. 불안이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고 있었다. 그러 나 그 불안은 로이에게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그 말? 그 하얀 마법사가 우리보고 신경 쓸 거 없다고 했잖아." "로이! 넌 그 말을 믿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지금 벌써 나쁜 일 충분히 많이 일어났잖아. 필리우스는 저쪽 편에 가 붙 고, 우린 포로가 됐지, 랜스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 여기다 카야크가 힘을 얻어서 세계정복하면 끝나는 거지 뭐..." 카야크... 그래, 맞아. 소름이 그녀의 등을 훑고 지나갔다. 카야크. 그것이 그녀를 불안하게 하던 단어였다. 드래크로니안들의 조상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며, 저 저승 아래 봉인한 존재. 혼돈. 그리고 지금은 그들이 해방시키려 하는 존재... 어딘지 맞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 "이엘 카야크 레이시나드 ㅋ라 이엘 에두 레이시나드. 베이 타냐헨 에나 엘레 알론 베일 케멜 이셀 산 모린. 이엘 사르 리아스 일린 ㅋ라 엘레 니드 베일 우클..." "무... 무슨 소리야?" 다시 문을 여는 작업에 몰두해 있던 로이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데이미 아를 바라보았다. 데이미아는 침착하게 그것을 공용어로 해석했다. "카야크가 지배하는 곳은 혼돈의 세계. 오직 백도 흑도 아닌 태초의 마법 만이 그를 잠재울 수 있어라. 그의 숨결이 뻗치는 곳에는 빛도 아니고, 어둠 도 아닌 것들만이 있을지니..." "...무슨 소리야?" "날 불안하게 하던 것이 뭔지 알았어. 오르크는 어둠의 생물이야." "그... 그야 당연..." "카야크는 혼돈이고. 어째서 요정들도, 인간들도 아닌 드래크로니안들이 카 야크와 싸워야 했을까? 어째서 신들이 아닌, 반신반수인 실리사와 에퀴온이 카야크를 봉인해야 했을까? 실리사와 에퀴온은 저승의 여신 페레이타가 용 들의 조상, 게히스헨 메인의 피를 마시고 낳은 쌍둥이야. 왜 그런 존재가 카 야크를 봉인했지? 페레이타 자신이 아니라, 다섯 신들 중 어느 누구도 아니 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답은 하나야. 신들은 빛의 존재지. 카야크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은 빛 도 어둠도 아닌 존재 뿐이야. 이것도 저것도 아닌 혼돈, 그게 카야크지." 데이미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설이 맞다면... 카야크가 봉인에서 풀려난다고 해서, 오르크들에게 좋을 것은 하나도 없어..." 로이와 툴위그는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로이가 더듬거리며 입을 연 것은 한참 후였다. "그... 그럼 왜 오르크들이 걜 봉인에서 풀려고 하지? 바보들인가?" "그건 그들이 속고 있기 때문이죠." 명쾌한 대답이 문가에서 들려왔다. 로이,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는 동시 에 문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치 합창하듯 소리쳤다. "필리우스!" "예, 접니다. 상상 이상으로 반가워해 주시는군요." 어느 새 문은 열려 있었고, 그 자리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생글생 글 웃는 필리우스가 서 있었다. 마치 미소짓는 가면이 씌워진 듯한 그의 얼 굴에서 악의나 죄책감 같은 것을 한 조각이라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배신자. 무슨 염치로 우리 앞에 나타났지!" 데이미아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러자 필리우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조금 옅어지면서, 그런 대로 진지한 표정이 드러났다. "아, 물론, 그 일 때문에 기분이 나쁘셨겠지요. 하지만 저 역시 어쩔 수 없 었습니다. 보레아스 님께 매여 있는 몸이었거든요. 그 분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저를 얼음 감옥으로 되돌려보낼 수 있었죠. 지금은 다르지만..." "뭐라고? 고작 기분이 나쁘셨겠지요, 라고? 내가 정말...!" "하하, 화내지 마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무섭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사과의 표시로 이렇게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필리우스는 들고 있던, 검은 천으로 둘둘 말린 거대한 물체를 내려놓았다. 천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앞으로 좌르륵 펴졌고, 그 안에 있는 물건들 이 드러났다. 데이미아는 물론, 로이와 툴위그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로크 페울로니..." 단아한 금빛 손잡이와 칼집의 이디실, 그리고 녹색 보석이 박혀 있는 초승 달이 장식된 엘미어.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검은 손잡이가 달린 거대한 은빛 날의 도끼였다. 마치 거울처럼 반들반들하고 고른 도끼의 날은 덩굴 무늬와 알 수 없는 글자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의 맨 윗부분에는, 푸 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검고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카자룬..." 툴위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드래크로니안이 그의 조상, 용맹한 자일 게 르 글렌델에게 준 보물. 영광의 상징. 난쟁이족도 다른 어느 종족 못지 않게 태초의 전쟁에서 훌륭히 싸웠다는 증거이자, 글렌델 가의 명예 그 자체인 가보(家寶). 긴 여행의 목표. "자,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이것들을 찾아서 이 곳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어서 손을 뻗어 가지십시오." "누가 네가 하자는 대로 할줄 알아! 우린 카야크를 부활시키는 것 따위엔 협조 안 해. 엘미어 따위는 너나 가져!" 데이미아의 성질은 역시 대단했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이디실을 잡으 려다가 그녀가 소리치는 바람에 주춤해서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툴위그의 시선은 여전히 카자룬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고끼의 자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필리우스가 만족스러운 눈으로 그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랗고 강인한 손이 도끼의 자루를 단단히 잡는 순간, 갑자기 그는 그것 을 휙 들어올리며 크게 휘둘렀다. 도끼의 번쩍거리는 날이 필리우스의 흉부 (胸部)를 향해 돌진했다. "어어...!" 너무 의외의 습격인지라 필리우스는 방어 주문을 욀 새도 없었다. 그는 반 사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도끼의 날은 그의 옷깃만을 가르며 스쳐갔다. 뒤늦 게 필리우스는 주문을 외려 했으나, 이번에는 데이미아가 돌진하여 그를 밀 어 쓰러뜨리며 자신도 그의 위로 쓰러졌다. 마지막으로 로이가 든 이디실의 칼날이 그의 목을 위협했다. "잡았다!" 로이가 즐거운 듯 외쳤다. 데이미아와 툴위그도 각자의 무기를 들고, 쓰러 진 필리우스의 주위를 빙 둘러섰다. 그들은 최초로 필리우스의 얼굴에서 웃 음이 싹 가시고 당황한 표정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아니, 그 표정은 차라리 공포에 가까웠다. "무슨 짓입니까. 이것 좀 치워요!" 그는 이디실의 푸르스름한 칼날을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러나 로이는 만 면에 미소를 띄운 채 고개를 저었다.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카자룬 을 빙빙 휘두르며, 툴위그도 한 마디 했다. "하, 조종(操縱)의 주술을 걸어 놨더군. 하지만 로크 페울로니가 괜히 로크 페울로니인 줄 알아? 어떤 주술도 이들에겐 안 퉁한다고. 단 하나, 실리사와 에퀴온이 맨 처음 걸어 놓았다는 그 주술, 오직 '주인'들만이 이것들을 잡을 수 있다는 그 주술을 제외한다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죽이고 싶지만 나가는 길을 모르니까 봐 준거야. 우 리가 여기서 나갈 때까지 인질 겸 안내자가 돼 줘야겠어!" 데이미아도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필리우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들을 카야크의 부활에 이용하려는 속셈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걸 막으려고 이렇게 찾아온 거고요. 난 당신들을 탈출시키려고 왔단 말입 니다! 아니라면 왜 오르크 경호원 한 명 없이 혼자 왔겠습니까? 제발 이 칼 날 좀 치워 주십시오. 찌르겠어요!" "그걸 누가 믿어?"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안 치워요. 재밌는데, 뭘." "아, 알았다고요. 믿어도 좋고 안 믿어도 좋으니까 조금만 칼날을 멀리 치 워 달라고요. 손가락 한 마디 만큼이라도 좋으니까!" 가장 먼저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툴위그였다. 필리우스는 분명 공 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연기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그는 필리우스가 난리치는 게 재미있어서 칼날을 점점 더 가까이 대 는 로이를 말리며 물었다. "이디실을 왜 그렇게 두려워하지?" "내, 참,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씩이나 되어서 이디실의 저주를 모른단 말 입니까! 그 칼에 자기 피를 묻힌 사람치고 오래 산 사람은 없습니다. 요정이 건 인간이건 난쟁이이건!" "헤에... 정말요?" 로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칼을 거두었다. 필리우스는 일어나 앉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 호소하는 듯한 눈빛으로 데이미아, 로이, 툴위그를 차례 로 바라보았다. "저는 정말 당신들 편입니다.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예, 비열 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었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얼 음 동굴에 500년 동안이나, 추위나 외로움을 나눌 사람도 없이 갇혀 있는다 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니까요! 500년이 지난 후에야 저 얼음의 마법사 보레 아스는 저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명령을 수행해야만 완전한 속 박을 풀어 준다는, 즉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시에는 다시 얼음 감옥으로 되돌아가 갇힐 것이라는 조건을 붙인 주문으로... 500년이나 그곳에 갇혀 있 다 보면 누구라도 무슨 짓이든 할 만큼 비굴해졌을 겁니다. 정말이지 저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자유를 얻었기에, 제가 저 지른 일을 조금이라도 보상할까 해서 온 겁니다. 믿어 주세요!" 세 명은 심란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고, 서로를 쳐다보고, 또 그를 쳐다보 았다. 필리우스의 표정에서 무엇인가를 읽어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 지만. 툴위그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믿어 줄까?" "글쎄요..." 가 로이의 대답이었다. 데이미아만이 아직도 불신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보 고 있었다. "난 믿을 수 없어요. 하지만..." "하지만?" "...어차피 안내하는 사람이랑 인질이 한 명은 있어야 하니까..." 필리우스는 감동한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라스헨..." "저리 가! 그렇게 맞고도 또 손에 키스하려고 들어?" 데이미아가 그를 뒤로 고꾸라질 만큼 세게 밀었내자, 그는 머쓱한 표정이 되어 일어섰다. 그리고는 옷을 털어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안내라면 자신 있지만... 인질은..." "왜?" "그게..." 그러나 필리우스의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왁자지껄한 오르 크 어가 터져나왔기 때문이다. 오르크 어를 아무도 몰랐기에, 로이와 데이미 아, 툴위그는 동시에 필리우스를 올려다 보았다. 그는 버릇대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저 잡으러 온 거에요." (계속) "...거짓말..." 데이미아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필리우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검은 깃털을 단 화살 하나가 그녀의 머리칼을 휙 스쳐지나가, 필리우 스의 소매를 벽에 고정시키며 멎었다. "이르 사이기스! (배신자!)" 활을 든 다크엘프 한 명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가 한 말은 고대어였으므로, 이번에는 데이미아와 툴위그도 어려움 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툴위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정말인가보네..." 그러나 언제까지고 어리둥절해 있을 수는 없었다. 화살 세 개가 더 날아왔 다. 모두 필리우스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는 재빨리 소매를 찢으며 몸을 숙 여, 화살을 피하고는 소리쳤다. "우노신, 이르 바알 이신 딘! (어리석은 것들, 나를 공격하다니!)" 필리우스는 주문도 읊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그 즉시, 그에게 화살을 쏘았 던 다크엘프 중 선두에 서 있던 자의 몸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주위 에서 불을 끌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는 돌바닥에 풀썩 쓰러녀 몸부림치다 가 반쯤 탄 시체가 되어 움직임을 멈추었다. 살이 타는 악취가 온 복도를 채우고 있었다. "구경이나 할 시간 없습니다. 저를 따라 오세요!" 필리우스가 멍하니 있는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를 다그쳤다. 그리고는 그 에게로 몰려 오는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을 향해 몇 발짝 걸어나가며 주문 을 읊기 시작했다. 화살이 그의 몸을 향해 쏟아졌으나, 그의 몸은 마치 딱딱 한 돌인 것처럼 그것들을 튕겨냈다. "오 엠로크 벨라디오스, 자히 엘테이리나드 기알 자히르 하울 라시나드! 테 인 로르 페이헨 에레스 테이 휜 우노신! (오 지옥의 군주 엠로크, 지금은 사라졌으나 그 두려움은 남은 자여! 어리 석은 자들에게 그대의 힘의 잔재를 보이소서!)" 주문을 마치며 필리우스는 오른손을 들어, 허공에 사선을 그으며 휘둘렀다. 그의 손끝을 따라 검붉은 선이 흐릿하게 그어졌다. 그것은 이내 더욱 굵고 커지더니, 꿈틀거리는 뱀이 되었다. 온 몸이 비늘 대신 검붉은 불꽃으로 덮 여 있는, 사람 키의 다섯 배는 될 법한 길이의 거대한 뱀이었다. 그것은 입 을 크게 벌리고, 기묘한 소리로 쉭쉭거리며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을 향해 돌진했다. 화살과 도끼들이 날아들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이글 이글 타오르는 꼬리로 오르크들을 때리고, 거대한 입으로 요정들을 집어삼 혔다. "이 때입니다!" 필리우스가 그 뱀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은 결국 뱀에 맞서 싸우려는 생각을 버리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뱀은 그들의 뒤를 쫓았고, 그 뒤로 필리우스, 데이미아, 로이, 툴위그가 따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짧은 복도를 지나 아래층으로 네려가는 층계를 따라 내려갔다. 그러 나 이 이상한 술래잡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엘테이린, 우클라시엔! 휘일린 이엘 이르 데인 ㅋ라, 디 케닌 이린! (어둠의 생물이여, 물렀거라! 태초의 언어로 명하노니, 네가 있던 곳으로 돌 아가라!)" 9 누군가가 당당하게 큰 소리로 외쳤고, 그 외침이 계단 복도를 울리며 사라 지기가 무섭게 거대한 뱀의 형상도 서서히 사라져 갔다. 필리우스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마법사와 마주보았다. 온통 검은 로브로 차려 입은, 키가 크고 마른, 얼굴은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손이 마치 시3 체처럼 흰 마법사를. 그의 등 뒤에는 여러 명의 오르크들이, 감히 필리우스 의 앞에 뒤어들지 못한 채 무기를 들고 로이 일행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어리석은 자의 부하로군!" 필리우스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싸늘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필리우스, 감히 카야크 님을 배신하다니... 네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쯤은 알고 있겠지?" 마법사가 말했다. 공용어. 싸늘하고, 소름이 끼칠 만큼 감정이 결여되어 있 지만, 혀에 익어 거북함이 없는 공용어였다. 그는 인간이었다. 혹이 전에 인 간이었던 자이거나... "그래서? 네가 나를 벌하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어리석긴! 우클라일룬!" 필리우스의 손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불꽃은 급속도로 자라나며 검은 로브의 마법사에게로 날아갔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마법사는 입을 벌려 그 불꽃을 삼켜 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인간의 얼굴, 그 러나 인간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얼굴. 뼈에다 가죽 만 씌운 듯한, 머리 칼조차 한 올 없는 새하얀 얼굴이었다. 눈이 있어야 할 곳은 뻥 뚫려, 그 안 에서 이상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러나 주문을 외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필리우스는 팔을 벋으며 소리쳤다. "데이미아, 숙여요! 엠로크 넬 플리인 아스!" 검은 로브의 마법사의 입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필리우스가 아까 쏘 아보낸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격렬한 화염이었다. 그것은 맹렬한 기셀 필리우스에게 덮쳐왔으나,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끝에서 생겨난 검은 장막이 그것을 막았다. 아니, 그것을 빨아들였다 - 검은 장막에 닿은 불꽃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필리우스는 지친 것 같지는 않았으나 몹시 분노한 듯 소리쳤다. "감히 잘못 만들어진 시체 주제에 내게 덤비다니! 엠로크 벨라디오스, 디, 자히 로르 위넨, 카이메인 에멘데스, 틸린, 오닌! 웨이닌 딤 로르페이, 웨이 닌 딘 로르 이키드!" 그는 마치 무엇을 잡으려는 듯, 허공을 휘저었다. 다음 순간 그의 손에는, 기묘하게 날이 휜 작은 단검이 쥐어져 있ㄷ다. 그는 그것을 마법사의 뒤에 숨어 있는 오르크 중 하나에게로 던졌다. 오르크는 방배로 그것을 막았으나, 그 단검은 마치 빛이 그림자를 뚫듯 그것의 방패와 갑옷을 뚫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것의 심장에 박혔다. "크아아악!" 오르크의 비명이 복도 안에 메아리쳤다. 그것의 상처에서는 피가 붐어져 나오지 않았다. 그 심장에 꽂힌 칼이 피를 빨아들여 자라나고 있었던 것이 다. 처음에는 기껏해야 한 뼘 정도 될까말하 했던 짧은 칼날이, 순식간에 장 검처럼 길어져 오르크의 등을 뚫고 나왔다. 오르크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 며 쪼그라들자, 길어진 칼은 저절로 날아와 필리우스의 손에 잡혔다. 오르크는 쓰러졌다. 그것의 머리에서 투구가 굴러떨어졌다. 공포의 웅성거 림이 오르크들 사이에서 새어나와 자라났다. 죽은 오르크의 얼굴은 말라 비 틀어져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시체라기보다는 차라리 미이라라고 해야 할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지옥에 왕 엠로크의 수호를 받는 자! 너희는 날 이길 수 없어. 살고 싶다면 도망쳐서 비겁한 두아스나 어리석은 아크트에게 고자질이라도 해라! 안 그러면 모두 이 꼴로 만들어 줄테니까!" 필리우스가 날카로운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 잡힌 칼의 날 은 검붉은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오르크들은 서서히 뒷걸음질쳤다. 로이 와 데이미아조차 몸서리를 치며 뒤로 몇 발짝 물러났다. "아일 제레이드!" 검은 로브의 마법사가 대담하게 주문을 소리높여 외치며 필리우스에게 달 려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화염이 작열하여, 부채꼴로 번지며 필리우스에게 덮쳐왔다. 그러나 그것이 미처 가까이 오기도 전, 필리우스의 붉은 칼이 그 것을 모두 빨아들여 버렸다. 화염은 거짓말처럼 없어졌다. "죽어랏!" 다음 순간 필리우스는 칼을 든 채 마법사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 라도 그것은 마법사의 능력이 아니었다. 필리우스가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 니라, 그가 칼에 의해 조종되고 있는 것이었다. 칼은 그의 팔과 다리를 빌어 마법사의 목으로 날아들었고,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머리는 돌바닥 에 뒹굴었다. 그의 몸은 잠시 후에 털썩 쓰러졌다. "아르그르! 아르그르!" 오르크들 중 두려움을 물리친 몇 명이 무기를 휘두르며 그에게로 돌진했 다. 그의 얼굴엔 차가운 만족의 웃음이 떠올랐다. 붉은 칼은 마치 춤추듯이 날뛰었다. 그리고 필리우스는 그 칼의 움직임에 온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 의 표정은 인형처럼 딱딱해졌고 눈빛도 반쯤 기절한 사람처럼 흐려졌다. 그 대신 칼날만이 그의 모든 의지를 흡수한 듯, 활활 타오르는 듯한 빛을 내뿜 었다. "캬아악!" 오르크 한 마리의 칼날이 그의 옆구리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교 묘하게 몸을 트는 한편, 등을 보인 오르크의 뒷목을 가볍게 칼로 따 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등을 찌르려는 오르크의 도끼 날을 가볍게 뛰어넘은 다음, 그것의 투구로 칼날을 찔러넣었다. 칼을 빼는 동시에 튀어나온 피가 그의 옷을 적셨다. 그러나 이미 그의 칼날은 다른 오르크를 향해 날뛰고 있었다. "...잘 싸우네. 어떻게 저러지? 마법사 아니었던가?" 로이가 신기하다는 듯 묻자, 데이미아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필리우스가 싸우는게 아냐... 저건... 엠로크?" "...엠로크?" "하지만 엠로크는 죽었는데... 어떻게 그가 만들어낸 주술이 아직까지 유효 하지?" 데이미아는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으나 로이가 그것에 대답해 줄 수 있을지 만무했다. 필리우스가 싸우는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고만 있던 툴 위그는 카자룬을 들고 앞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저건 마법사의 실력은 아니군... 하지만 마법사가 앞서 싸우게 놔 두다니, 전사의 도리가 아니지." "툴위그, 그만 둬요!" 데이미아가 날카롭게 소리쳤으나, 툴위그는 듯지 않고 앞으로 도끼를 든 채 앞으로 나섰다. 오르크 한 마리가 메이스를 들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그의 도끼, 마력의 카자룬 앞에서 메이스 따위는 무기가 되지 못했 다. 카자룬의 검은 날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드는 것을 본 오르크가 얼른 메이스를 들어 그것을 막았음에도 불구하고, 카자룬은 그의 목과 메이스를 동시에 베어 버렸다. "햐아, 이 도기 정말 굉장한데!" 툴위그가 탄성을 지르며 로이와 데이미아를 돌아보았다. 로이는 멋모르고 박수를 쳤으나, 데이미아는 오만상을 다 찌푸린 채 소리를 질러댔다. "그러지 말고 어서 돌아와요! 필리우스 혼자서도 잘 하잖아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귀신 씌운 듯 날뛰는 것을 본 오르크 중 절반은 달아나 버렸고, 절반은 돌바닥 위에 죽어 널브려져 있었다. 시체에 비해 피 가 거의 없는 것은 칼날이 피를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툴위 그는 계속 오르크들을 치며 필리우스에게로 다가갔다. 그를 가로막은 칼이 나 메이스는 부러져 버렸고, 도끼는 날이 나간 채 떨어졌으며 오르크들의 몸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러나 카자룬의 칼날은 여전히 번쩍거렸고, 마 치 막 벼려낸 것처럼 흠집 하나 없었다. 이윽고 오르크는 두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필리우스가 한 마리의 허리를 반으로 갈라 버리는 사이, 툴위그는 그의 등을 향해 메이스를 내리치려 했 던 오르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리고는 의기양양하게 필리우스를 올려 다보며 물었다. "마법사 치고는 괜찮게 싸우는군! 다치진 않았나?" 피를 뒤집어 쓴 필리우스는 공허한 눈빛으로 툴위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죽은 사람의 것과 같은 눈빛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 하나 없었고, 그렇 게 오래도록 싸웠는데도 불구하고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아니, 차라리 거의 숨을 안 쉰다고 해야 할 만큼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왠지 소름이 끼쳐서, 툴위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것은 결 과적으로 현명한 행동이었다. 필리우스의 칼날이 지체없이 그가 서 있던 자 리로 내리꽂아졌기 때문이다. 붉은 칼날의 반쯤이 돌바닥을 파고 들면서, 돌 의 파편이 사방으로 날렸다. "자네 미쳤나!" 툴위그가 기가 차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듣고 있는 것 같지 도 않았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칼을 뽑아, 툴위그의 목을 향해 겨냥하며 달 려들었다. 그러나 툴위그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그의 도끼, 카자룬이 필리우스의 붉은 칼날을 막았다. 파란 불꽃을 뿜으며 두 날은 부딪쳤고, 붉 은 칼날은 반으로 부러진 채 빙글빙글 돌아 떨어졌다.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부러진 칼날과 필리우스가 쥔 칼자루, 두 부분 에서 모두 연기가 피어올랐다. 칼은 순식간에 흐물흐물해져 녹아내렸고, 다 음 순간 피가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빈 손으로 멍하니 서 있 다가, 눈을 꼭 감고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정신을 차 린 듯 눈을 번쩍 드고는, 주위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아... 다 죽었군. 다행이다. 오랜만에 써 본 주술인데 잘 듣네..." "뭐? 잘 들어? 날 죽이려고 해 놓고?" 툴위그는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 필리우스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 다가, 이윽고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그 주술을 쓸 때에는 제 정신이 아니게 되니까, 용서해 주시죠." "미, 미안하다면 다야? 그런 주술을 사전 예고도 없이...!" "죄송하다니까요. 일단은 도망치는 게 급선무니까, 나중에 야단치시죠."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므로 툴위그도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는 불만을 품 은 채 필리우스를 따라 계단을 달려내려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로이는 흥분 해서 필리우스의 곁에서 달리며 마구 떠들어대고 있었다. "대단해요! 그 주술을 쓰면 잘 못 싸우던 사람도 잘 싸우게 되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엠로크 님께서 만드신 주술이죠. 이디실을 모방해서요." "이... 이디실을?" 로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러자 필리우스는 의외라는 듯 반문했다. "모르셨습니까? 이디실 역시 쓰는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능력이 있지요. 이 주술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는 사람에게 충분한 살의(殺意)만 있 다면, 그것이 몇 배의 실력이 되어 나타나지요. 이디실처럼 살의까지 만들어 낼 수는 없지만..." 로이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뚜렸해졌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이디실을 내 목에 들이댔을 때, 이젠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이디실을 뽑고도 피를 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당신 은 굉장한 정신력을 가진 분인 것 같군요, 로이. ...아, 친구들이 또 왔네요." 필리우스의 말대로 계단 아래족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툴위그는 카자룬을 양손으로 들고 앞으로 나서며 필리우스를 쏘아보았다. "이젠 제발 그 이상한 주술은 쓰지 말게. 도대체 내가 그 칼을 안 부수었 더라면 어쩔 뻔 했나?" "하하... 죄송합니다. 이제부턴 평범한 주술만 쓰죠." 필리우스는 뒷통수를 긁적이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앞에서 하나 둘 나 타나는 오르크와 다크엘프들을 향해, 양손을 모으며 쾌활하게 소리쳤다. "갈 아카드, 데이 헤이 우클라스, 디 오페인 이린. 이루크 벨라다나스!" 순간 귓청을 찢는 비명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검은 바람이 소용돌이치 며 뿜어져 나갔다. 그 끔찍한 소음 때문에, 로이 일행은 모두,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막아야 했다. 검은 바람은 그들의 눈앞을 가득 메우며, 더욱 더 큰 소리를 내며 성을 무너뜨릴 듯 흔들더니, 갑자기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 렸다. 손가락을 귀에서 떼는 일행의 앞에는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의 시체 가 널브러져 있었다. "...분명히 시끄러워서 죽은 걸거야." 로이가 중얼거렸다. 그들은 시체들을 밟고 뛰어넘어 달려, 이윽고 맨 아래 층에 도달했다. "이리 오십시오, 비밀 통로가 있습니다!" 이제 일행은 필리우스를 다라가는 데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필리우스는 앞서서 달려갔고, 그의 곁에 붙어 선 툴위그가 도끼를 휘두르며 간간히 앞 을 가로막는 적들을 모두 처치했다. 다음번에는 필리우스가 어떤 황당한 마 법을 쓸 지 걱정되어, 차라리 자기가 다 죽이는 것이 났다고 판단했기 때문 이다. "이쪽으로!" 필리우스는 성문의 반대쪽으로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좁은 복도에는 다크 엘프들과 오르크들이 몇 명 있었을 뿐, 불길할 정도로 성은 비어 있었다. 카 자룬이 없다 해도 툴위그에게 이 정도의 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적어도, 로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기 전까지는. "툴위그! 저게 뭐죠?" 멀리서 보았을 때, 그것은 거대한 검은 뱀 같았다. 그러나 급속도로 가까워 짐에 따라, 그것은 불투명하게 넘실대는 연기처럼 보였다. 뱀, 거대한 입을 벌린, 검은 연기의 뱀이었다. 그것의 눈은 떠다니는 두 개의 등불 같았고, 뱃속은 검은 암흑이었다. "으와아아악!" 툴위그는 자신도 모르게 뱀의 미간을 향해 카자룬을 휘둘렀다. 전혀 효과 가 없으리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급소를 맞은 뱀은 당장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하얀 로브를 입고 긴 은발을 늘어뜨린, 붉은 눈의 창백 한 마법사가 서 있었다. 청년의 얼굴과 경험 많은 자의 눈을 가진 마법사가. 그는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역시 카자룬... 우리 종족의 역작(力作)이군요. 그것의 마력이 독(毒)으로 만든 뱀에까지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보레아스 님... 이렇게 직접 오실 필요는 없었는데..." 필리우스는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계속) "필리우스, 정말 여전히 날뛰는군. 네 뒤를 돌봐 줄 검은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지?" 보레아스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필리우스는 대담하게 앞으로 나서며 대꾸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이제 자유가 아닙니까? 노력의 결과로 얻은 자유죠." "그래서 마음대로 날뛰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엠로크는 죽었고 그의 피로 얻은 네 능력은 이제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 지금이라도 얌전히 사라진다면 네 그 소중한 자유를 조금 더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법입니다, 드래크로니안의 신관이시여... 제 가 능력을 잃었다지만, 보레아스 님께서도 예전의 힘을 지니고 계시지는 않 지 않습니까?" 보레아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붉은 눈으로 필리우스를 노려보았다. 분 노가 담긴 눈, 그러나 한편으로는 슬픔이 담긴 듯한 눈이기도 했다. 그는 천 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공평한 셈이군. 다시 한 번 500년 전의 싸움을 벌여 볼까, 엠로 크의 수제자?" "기꺼이..." 필리우스는 가까스로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보레아스가 행동을 취하기 전, 재빨리 한 걸음 물러서며 주문을 외웠다. "아일로카 우클라스! 갈 아카드!" 곧게 뻗은 그의 손끝에서, 긴 끈과 같은 검푸른 불꽃이 휘몰아쳐 나왔다. 아니, 끈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거대한 구렁이와 같이, 섬뜩하게 허공을 감으 며 앞으로 돌진하는 불꽃이었다. 그것은 보레아스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 진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보레아스가 여유있게 비켜서 공격을 피하는 모습을, 필리우스는 두 눈으로 보았다. 쾅! 성 안이 온통 무너질 듯 흔들렸다. 필리우스의 뒤에 서 있던 데이미아, 로이, 그리고 툴위그는 그대로 쓰러져 나뒹굴었다. 보레아스가 있던 자리는 벽이거나 바닥이거나 천정이거나 할 것 없이, 전부 금이 가 흔들거리고 있 었다. 검게 그을은 바닥에는 아직도 불꽃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보레아스는 멀쩡한 모습으로 필리우스의 곁에 서 있었다. "겨우 그 정도의 기술로 나를 이기려고 했나?" "설마 그럴 리가요...!" 필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검지손가락을 귀엽게 쳐들었다. 그의 손끝에는 아 직도 자그마한 불씨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가볍게 튕겨내는 순간, 그것은 사람 키보다도 더 큰 불꽃을 터뜨리며 폭발했다. 필리우스는 마치 날듯이 가볍게 뛰어올라 그 폭발을 피했다. 놀랍게도 옷자락 하나 그 을리지 않았다. 반면 로이 일행은 불꽃을 피해 도망치다가 넘어져 구르기까 지 했으므로,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다. "너 미쳤냐! 우리보고 다 죽으란 얘기야?" "필리우스! 좀 살살 해!" "아야야야..." 툴위그, 데이미아, 로이는 다 함께 아우성을 쳤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그들 의 항의를 깡그리 무시한 채, 예의 미소조차 사라진 굳은 얼굴로 불꽃이 이 글거리는 폭발 현장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의 걱정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불길과 연기로 뒤덮였던 그 곳 에서 얼어붙을 만큼 차갑고 강한 바람이 휘몰아쳐 왔다. 간신히 몸을 일으 킨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는 바람에 날려 복도 끝으로 날려가 벽 에 쿵 부딪쳐 쓰러졌다. 툴위그는 화가 난 나머지 악을 박박 썼다. "이게 뭐냐고! 카자룬을 기것 찾았는데 이상한 마법사들의 싸움에 휘말려 이리저리 날려다니기나 하고! 난 정정당당히 싸우고 싶단 말이야!" "...그건 곤란해 보이는데요, 툴위그..." 로이가 자신없이 중얼거리며, 필리우스가 불꽃을 터뜨린 쪽을 눈짓으로 가 리켰다. 방금 전까지 활활 타오르던 불길은 온데간데 없었고, 성벽과 천정이 온통 하얀 얼음과 서리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보레아스가, 필리우스 못지 않게 멀쩡한 모습으로 당당히 서 있었다. "정말이지 힘을 많이 잃었군, 필리우스. 팔로카 우클라스!" 보레아스의 손끝에서 검푸르게 빛나는 창끝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가볍게 몸을 비트는 필리우스의 옆구리를 스치며, 로이 일행에게 치달았다. 다행히 모두 비명을 지르며 피했으므로, 그 빛줄기는 성벽에 부딪쳤다. 순식간에 벽 은 물론 그 주변의 천정과 바닥까지 하얗게 얼어붙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깨어져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로이 일행은 다시 우왕좌왕하며 천정 에서 떨어지는 돌을 피해 도망쳐 다녀야 했다. "도... 도대체 마법사들은 왜 얌전히 싸우지 못하고 이렇게 주위 사람들에 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거냐고!" 툴위그가 외쳤지만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필리우스와 보레아스는 열심히 성벽을 무너뜨려 가며 싸 우고 있었다. 필리우스가 맞서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보레아스가 얼른 아직 사라지지 않은 주문의 효력을 이용하여 같은 주문을 발동시켰다. 필리우스 는 주문조차 외우지 못한 채 간신히 만들어 낸 마법의 방패로 그것을 막았 다. 순식간에 보이지 않던 방패는 하얗게 얼어붙었고, 필리우스는 뒤로 미끌 어지듯 밀려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의 등에 도망다니다가 넘어진 로이가 부딪쳤으므로, 둘 다 넘어져 나뒹굴고 말았다. 보레아스는 주문을 얼른 거두고는 로이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을 해치고 싶지 않으니 비키시지요, 이디실의 주인." "아, 예? 감사합니다..." 필리우스는 로이가 순진하게 미소지으며 인사하는 틈을 타, 얼른 주문을 외웠다. "아카드, 데이 우클라스, 웨이닌 페이! 웨이닌 딤 페이! 웨이닌 딤 페이 다 닐리에나스!"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로이는 몸을 일으키다 말고 저 멀리로 날려가 버렸다. 그나마 멀리 있던 데이미아와 툴위그 역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넘 어져 데굴데굴 굴러갔다. 성벽이 온통 진동하며 무너져 내렸고, 검은 연기가 필리우스를 감싸 그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검은 연기는 마구 회우 리치며 커다란 입의 모양을 취했다. "웨이닌 딤 페이 다닐리에나스! 페이 우클라스!" 필리우스가 외쳤다. 커다란 입은 그를 떠나 보레아스에게 돌진하여, 그를 머리 위에서부터 덮쳐들었다. 보레아스의 모습은 검은 연기의 소용돌이 속 에 사라졌다. 필리우스는 숨을 헐떡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나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갑자기 보레아스를 사고 돌던 검은 연기의 소 용돌이가 천장을 향해 치솟았다. "갈 페레이타, 휘일린 이엘 이르 ㅋ라 에드리나드!" 보레아스가 소리쳤다. 그는 상처 하나 입지 않은 채, 뒤집어진 원뿔 모양으 로 휘몰아치는 검은 구름 아래에 서 있었다. 오직 그의 하얀 은발이 그 구 름이 일으키는 바람에 흩날릴 뿐이었다. 필리우스는 창백하게 질려 얼른 몸을 피했다. 검은 구름이 긴 끈의 모습으 로 그에게 돌진하여,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쓰러져 굴렀지만 얼른 일어나 두 손을 가슴 위에 X자로 교차시킨 채 주문을 외웠다. "엠로크, 갈 우클, 플리인 딘, 플리인 로르 엘비니스!" 로이 일행의 코앞까지 왔던 검은 바람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다시 필리우 스에게로 향했다. 그것은 다시 큰 입 모양이 되어, 두 손을 가슴 위에 교차 시킨 채 서 있는 필리우스를 삼켜 버렸다. 그리고 검은 구름의 소용돌이가 되어 그 주변의 벽들을 파괴마고 돌의 파편을 날리며 마구 회전하더니, 이 윽고 쾅!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이번에는 데이미아가 미리 마법의 방패를 마련해 주었으므로, 로이도 툴위그도 날려가지는 않았다. 복도 전체가 온통 흔들리고 있었다. 벽과 천정에서 돌이 우수수 떨어졌고, 특히 폭발이 일어났던 그 곳은 아예 천정이 뻥 뚫려서 윗층이 다 들여다 보 이고, 벽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 쉬긴 했지만, 다친 데는 아까 스친 어깨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갈 카야크, 에디오스 에두아스..." 필리우스는 오른손을 들어 올리며 주문을 외웠으나, 그의 손끝은 멀리서 보기에도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주문보다 미리 주문을 외운 보레아스 의 공격이 더 빨랐다. "팔, 팔리루크!" 간단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보레아스의 마력이 워낙 강한 탓인지, 그의 손 끝에서 뻗어 나온 얼음의 폭풍은 우클로우 전체를 얼려 버릴 듯 귀청이 찢 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온 성 안을 뒤흔들었다. 로이와 툴위그는 이제 다 포기하고 데이미아가 엘미어의 힘을 빌어 유지시키고 있는 마법의 보호막 안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천정의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이제는 바닥까 지 흔들거렸다. "저 사람들, 이 성 다 부술 모양이지... 저래도 되나 몰라?" 로이가 한숨을 푹 쉬고 중얼거렸다. 물론 이 성이 무너지거나 말거나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나갈 길도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 이다. "아스틸라, 레야 로세나스! 레야 로세나스! 모린 이루크! 모린!" 필리우스의 주문은 거의 헐떡거림처럼 들렸다. 마법을 전혀 모르는 로이가 보기에도 누가 밀리고 있는지 뻔했다. 그러나 그런 주문도 효력이 있는지, 성을 온통 파괴하던 바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귓속을 울리는 바람 소리가 사라지자, 보레아스의 비웃는 듯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필리우스, 자네 입에서 아스틸라의 이름이 나오다니! 자네는 그 운명의 여 왕을 영원히 저주하지 않았던가?" 필리우스는 이를 악물고 보레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의 지친 얼굴에 다시 여유 있는 미소가 자리잡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하, 역시 대단하시군요, 보레아스 님. 전혀 자비를 보이실 생각을 않으 니 이제부터 저도 사정을 봐 드리지 않겠습니다." "좋을 대로..." "그렇다면... 라시에니 우클라스, 디 케닌 이린 갈 엠로크 벨라디오스! 카르 히르다 에두아스!" 정말 성을 무너뜨리기로 작정을 했는지, 이제 아예 바닥이 지진 나듯 갈라 지며 거무스름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필리우스는 보레아스에게서 물러서며 두 손을 X자로 교차시킨 채 정신을 집중했다. 한편, 보레아스 역 시 눈을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둘 다 맛이 갔군..." 툴위그는 이제 차라리 허허 웃으며 중얼거렸다. "도... 도망가는 게 좋을 거 같지 않니, 데이미아?" 로이가 머뭇거리며 물었으나, 데이미아의 정신은 이미 다른 데 팔려 있었 다. 그녀는 필리우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카르히르다...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 그녀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으므로, 로이는 하는 수 없이 그 자 리에 않은 채 혼자 투덜거렸다. "으이그... 나야 이제 나갈 거라지만, 저 사람들은 여기서 살 거면서 이 성 을 이렇게 부수면 어쩌자는 거야? 두고 봐라, 이제 비라도 오면 지붕이 다 새서 다들 감기에 걸려 버리고 말거야. 하루종일 재채기나 하고 코나 찔끔 거려라..." 로이가 비난을 하건 저주를 하건, 바닥은 계속 갈라져 점점 더 많은 연기 의 덩어리들이 생겨났다. 그것은 커다란 말벌 같기도 하고 파리 같기도 한, 이상한 날벌레의 모습을 형성했다. 각각 한 마리가 사람 키만큼이나 컸는데, 다 합쳐서 열 마리가 넘었다. 흐물흐물한 형체의 그 모습이 너무나 징그러 웠으므로, 로이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 고 소리쳤다. "열 넷... 열 다섯 마리나 돼!" "...그게 그렇게 좋으니? 우웩..." "바보야, 그렇게 좋은 게 아니라, 저러다 지면 십중팔구 사망이란 말야! 이 제 아예 이판사판으로 싸우네..." "아까부터 이판사판으로 싸웠잖아." 툴위그가 간단히 결론을 내렸으므로, 데이미아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 나 그녀는 여전히 걱정에 찬 눈길로 열 다섯 마리의 형체 없는 곤충들을 바 라보고 있었다. 카르히르다에 대해서는 그녀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어 머니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 강력한, 그러나 그만큼 부리는 데에 위험이 따르는 어둠의 생물들에 대해서. "이신!" 필리우스가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소리쳤다. 검은 벌레들은 일제히 윙윙 거리는 날개 소리와 함께 보레아스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보레아스 역시 드 래크로니안이었다. 그의 몸짓은 날개가 달린 벌레들보다도 민첩했다. 그는 마법을 쓴 것처럼 서 있던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고, 미처 그의 위치를 파악 하지 못한 한 벌레를 향해 주문을 외웠다. "팔로카 카하렐리아스!" 새파란 얼음의 빛이 곤충의 날개를 잘랐다. 순간 필리우스는,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분이 잘린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벌레는 땅에 떨어졌으나, 금방 다시 날개가 돋아났다. 그리고 다른 벌레들도 이미 방향을 바꾸어 보레아스 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페레이타 넬... 웃!" 비명이 보레아스의 주문을 삼켰다. 그의 벌레 한 마리가 그의 팔을 물어뜯 은 것이다. 그 팔에서 빨간 피가 흘러내려 하얀 로브를 적셨다. 다른 벌레가 멈칫해 있는 그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 벌레의 입을 허공을 물어뜯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보레아스의 외침과 함께 그 벌레는 나기 몸 만한 불공을 맞고 펑 폭발해 버렸다. "아일룬 우클라스!" 필리우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비틀거렸다. 벌레들의 움직임이 맹렬해졌다. 그러나 번번히 그들은 허공을 공격했을 뿐이었고, 잘해야 팔이나 어깨를 스 치는 등의 자그마한 상처를 내었을 뿐이었다. 반면 보레아스는 마법사라고 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공격 주문으로 그 들을 하나 하나 죽이고 있었다. "...빠르네요, 저 사람..." 로이가 중얼거렸다. 툴위그는 그의 말에 깃든 이상한 어감을 눈치채지 못 한 채,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드래크로니안이니까." "...빠르면 드래크로니안인가요?" "글세... 그렇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하여튼 저 정도의 움직임은 다른 종족에게는 불가능하니까..." "저런 종류의 움직임..." 로이는 점점 불안해져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한편, 데이미아 는 다른 이유로 불안에 떨며 그들의 싸움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제 남은 벌레는 겨우 여덟 마리 뿐. 필리우스는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 다. '바보... 아무리 카르히르다라 해도 드래크로니안과 상대가 될 리 없잖아!' "아일룬 우클라스! 갈 카야크!" 보레아스의 외침과 함께 불꽃이 폭발했다. 벌레는 이제 일곱 마리. 그들은 마치 겁을 내는 것처럼 보레아스의 앞에서 서서히 물러났다. 그러더니 흐물 거리며 아메바처럼 모여들어,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되었다. 이제 그야말로 형 체도 없고, 공중을 둥둥 떠 다니는 거대한 덩어리가. "카야크 에두아스, 게닌 딤 로르 페이... 이루크 우클라스!" 보레아스의 손에서 검푸른 바람이 소용돌이치며 뻗어나갔다. 그 바람은 그 의 눈앞에 떠 있는 검은 덩어리를 관통하고 중앙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 다. 그러나 그 덩어리는 아무 충격이 없는 듯, 금방 구멍을 메꾸며 보레아스 에게 덮쳐왔다. 보레아스가 만약 여느 마법사였다면 꼼작없이 그 검은 덩어 리 속에 빨려들어갔을 것이었지만, 그는 드래크로니안이었다. 어느 새 몸을 피한 그가 다시 주문을 소리쳐 외웠다. "아일룬 우클라스!" 붉은 불덩이는 바람보다는 소용이 있었다. 검은 덩어리 전체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이상한 모양으로 길게 일그러지며 꿈틀거렸다. 보레아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다음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 다. 그러나 갑자기, 불타는 덩어리는 커다란 천 모양으로 펼쳐지면서 보레아 스를 삼켜 버렸다. 너무 불시의 공격이라 피할 새조차 없었다. 검은 덩어리 와 보레아스는 활활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이 되어 버렸다. "하아... 하아... 갈 엠로크 벨라디오스... 아니인 딘... 아니인 딘... 카르히르 다..." 필리우스는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악문 입술에서 피가 흘러나왔 다.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상처를 입지 않았는데도, 마치 극심한 고 통을 겪는 이처럼... 그러면서도 주문을 거두려 하지는 않았다. "바보! 어쩌려고 저러는 거야?" 데이미아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격한 동요에 로이와 툴위그를 보호하고 있던 마법의 보호막이 사라져 버렸다. "데, 데이미아?" 두 사람은 당황하여 그녀를 호소하듯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이미 엘미어를 휘휘 휘두르며 필리우스에게로 달려가고 있었다. 있는 힘을 다해 소리치면 서. "필리우스! 어서 주문을 거둬! 잘못하다 죽겠어!" 그러나 그는 그녀의 말이 들리는지 안 들리즌지, 꼼짝도 않은 채 주문을 유지하고 있었다. 카르히르다, 그 검은 덩어리는 보레아스를 덮은 채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타면 둘 다 재밖에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 불꽃을 떠뜨리며, 불덩이는 모습을 감추었다. 파지직, 하고 하얀 연기만이 허공에 피어올랐다. 필리우스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쓰러졌 다. (계속) "필리우스!" 데이미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외치며 달려가 그를 붙잡아 일으켰다. 그는 한 팔로는 몸을 지탱하며 안간 힘을 쓰면서, 다른 한 팔로는 데이미아를 만 류했다. "괘... 괜찮습니다. 카르히르다 몇 마리 소환했다고 죽지는 않... 큭!"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피를 토해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으나 데이 미아를 겁주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새파래진 얼굴로 맑은 녹색 눈에 눈물까 지 글썽거리며, 기침을 몇 번 하다가 결국 간신히 일어나 앉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필리우스는 숨을 고르며 입가에 묻은 피를 닦다가, 울음을 터뜨 리기 일보 직전인 그녀의 얼굴을 보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 을 지었다. 그리고는 얼른 시선을 돌려 딴 소리를 중얼거렸다. "에... 피 좀 봐. 지저분한 건 딱 질색인데... 보레아스 님을 죽여버렸으니 이제 새 옷 줄 사람도 없고, 큰일 났군." "..." 순간적으로 데이미아는 할 말을 잃었다. 필리우스는 입을 딱 벌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정말이지 좀 창백하긴 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괜찮아' 보였다. 데이미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야, 놀랬잖아. 어서 이곳을 나가자." 그러나 필리우스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새파란 빛줄기가 그를 향해 내리꽂혔다. 데이미아는 영문도 모른 채, 그의 손에 떠밀려 엉덩 방아를 찧었다. 필리우스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했으므로, 머리카락 몇 올이 타버렸을 뿐 부상을 면할 수 있었다. "내가 자네를 얕보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정중히 사과하겠네. 마법사의 생 명력과 밀접하게 이어진 카르히르다를 그렇게 죽였는데도 살아있을 줄은 미 처 몰랐군. 자네를 얼음 감옥에서 꺼내 준 게 잘못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 네." 보레아스의 목소리였다. 그가 무너진 벽 위에 꼿꼿이 선 채, 필리우스를 내 려다보며 말하고 있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빨간 피와, 조금 그을은 옷소매를 제외하고는, 정말 염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필리우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만... 저를 다시 얼음 감옥으로 돌려보내지는 않으시겠지요? 그것이 약속이었으니까요. 드래크로니안들은 약속을 존종한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이야."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보레아스의 손끝에서 새파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작은 소리로 방어를 위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보레 아스는 말을 이었다. "차라리 죽여버리는 게 더 낫겠지!" 새파란 불꽃이 가늘고 긴 직선을 그리며 필리우스에게 내달았다. 그러나 필리우스 역시 때에 맞추어 방패의 주문을 완성했다. 불길은 방패에 막혔다 - 그러나 그것은 사그러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더 크고 굵은 불길로 자라 났다. "웃...!" 필리우스의 발이 뒤로 밀려났다. 거센 불길에 마력으로 형성한 방패에 금 이 가고 있었다. 앞으로 뻗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드디어 방패는 폭발음 을 내며 깨어졌다. "크윽!" 필리우스의 몸은 열 발짝쯤 뒤로 내던져졌다. 보레아스는 여유 있게 스러 진 그를 공격할 주문을 외웠다. "갈 에퀴온, 팔리루크...!" 살갗을 찢을 듯 거센 바람이 나선 모양을 그리며 필리우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그를 덮치기 직전, 희미하게 빛나는 녹색을 띈 막이 그 것을 막았다. "아렌데일, 레이스 드뤼아데스, 넬 플리인 아스!" 데이미아의 목소리였다. 푸르스름한 빛을 띈 거센 바람은 녹색의 막에 부 딪힌 뒤, 마치 벽에 부딪친 고무공처럼 튕겨져 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완전 히 제어를 잃은 자연의 바람마냥, 무너진 복도 전체를 가득 메운 채 아무데 나 휘몰아쳤다. 무너진 벽과 천장과 갈라진 바닥이 순식간에 꽁꽁 얼어붙었 다. 이 이상한 상황에는 보레아스까지 완전히 당황해 버렸다. 데이미아만이 의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아... 역시 엘미어의 제어에 아직 서투르군... 그건 그렇고, 기회야, 어서 도망치자!" 그녀는 아직 일어나 앉지도 못한 필리우스의 팔을 사정없이 잡아 끌었다. 필리우스의 얼굴에 잠시, 그녀가 보지 못했던 표정이 스쳐갔다. 그러나 곧 그는 웃는 얼굴로 자리를 탁탁 털고 일어나, 힘차게 외쳤다. "이쪽으로!" 데이미아, 로이, 툴위그는 군말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사라져 가 는 동안, 보레아스는 자신이 발동시킨 주문을 취소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이윽고 마람이 잠잠해졌을 때,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머리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라스헨 에이니드가... 이거 정말 의외로군." 그 웃음은 결코 비웃음이나 자조 섞인 냉소가 아니었다. 무너진 벽 속에서, 검은 머리의 다크엘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걸어나왔다. "부상을 당하셨군요, 보레아스 님..." "괜찮다, 에이아. 별 것 아니니까. 내가 필리우스 따위의 마력에 당할 성 싶더냐?" "...그들이 도망치게 일부러 놔 두셨군요." "상관 없어. 어디로 갔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보레아스는 미소를 지었다. "네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에이아." 에이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그러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은 둘 다 알고 있었다. 10. "뭐야, 다 잡은 포로들을 놓쳤단 말야?!" 아크트의 성난 고함이 성 안을 온통 울렸다. 그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거인 오르크 병사 두 명이 고개를 그의 발밑에 박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마법에 걸린 채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다가, 필리우스 와 보레아스가 요란법석을 떨며 싸우는 바람에 비로소 잠에서 깬 것이다. 그들이 지키던 탑의 포로,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은 물론 온데간데 없고, 그들을 지키던 오르크들과 다크엘프들은 모두 차가운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들을 죽인 것은 금속의 무기가 아니라 마법이라는 것은, 한 눈에 보기에 도 뻔했다. "죄... 죄송합니다... 쿠푸-헤... 한 번만 용서를..." 두 거인 오르크는 커다란 몸을 가능한한 작게 움츠려들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빌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아크트의 칼날이 그 중 한 명의 목을 쳤다. 피를 뿜으며 그 목은 데구르르 굴러가 아크트의 발 앞에 멈추었다. "너, 고개를 들어!" 아크트가 다른 한 명을 향해 소리쳤다. 그 오로크는 대꾸 한 번 못 한 채, 그의 명령에 따랐다. 휙! 아크트의 칼이 원호를 그리며 그 오르크의 얼굴을 스쳤다. "크와아아악!" 귀청을 찢을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 오르크는 왼쪽 눈을 움켜잡은 채 뒹굴었다. 아크트는 끙끙거리며 신음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꺼져! 그리고 하루 안에 그 세 명을 모조리 잡아 와! 그렇지 않으면 네 눈 이 아니라 네 목을 받아가겠다!" 그 오르크는 벌벌 떨며, 엉금엉금 기어 알현실을 나갔다. 아크트는 칼을 칼집 속에 넣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살을 찌푸린 하르크 자엘과 그의 하얀 마법사, 그리고 두 개의 거대한 얼굴이 모두 무표정한 얼 굴을 담고 있는 노토스를. 아크트는 보레아스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호령했다. 9 "이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를 하고 있겠지? 필리우스는 네놈의 부하 였어. 그 놈의 배신에 대해서는 네놈이 책임을 져야 해!" 그러나 보레아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오르크 족의 지도자시여. 필리우스의 지조 없는 성격을 간과 한 것은 확실히 제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저렇게 많은 오르크 들과 다크엘프들이 그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흥! 잘도 지껄이는군. 너 역시 그를 놓쳐 버린 주제에!"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습니다. 저 혼자서 필리우스를 잡는 것은 가능하지만 필리우스와 라스헨 에이니드, 숲의 마법사를 동시에 대적한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엘미어까지 손에 넣고 있었으니까요." 아크트는 이를 갈며 노란 눈으로 보레아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오르크 말로 빠르게 욕설을 지껄이며, 칼을 뽑았다. 오르크 치고는 매우 빠른 솜씨 였다. 그 칼은 순식간에 보레아스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챙! 맑은 금속성이 울리며, 아카트의 칼을 바닥에 떨어졌다. 제피로스가 어 느 새 칼을 뽑아, 그의 칼날은 맞서 쳐낸 것이다. 그는 입가에 조소를 띄우 며 말했다. "아무리 쿠푸-헤라 하시더라도 내 부하를 마음대로 처벌할 수는 없소. 보 레아스는 내가 알아서 근신하도록 하겠으니, 그대는 가서 그대의 부하인 오 르크들이나 채근하도록 하시오. 다른 포로들마저도 뺏기지 않도록!" "뭐야, 이 애송이가! 내 밑에서 일하던 일을 다 잊었나? 누구 덕에 이 자리 까지 올랐는지 알긴 알아?" 아크트가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질렀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붙을 기세였다. 그러나 그 때 노토스가, 그 목을 길게 빼며 그 우렁차고 깊은 목소리로 그 들을 말렸다. "부하들 앞에서 추태를 보이지 마시오, 오르크 족의 수장과 드래크로니안 의 수장! 포로들을 놓친 것은 두 종족 모두의 잘못이오. 그러나 아직 일이 완전히 틀어진 것은 아니오. 그들은 아직 우리 가까이에 있을 테고, 무엇보 다 그들의 동료 중 하나가 여기 잡혀 있는 이상, 그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올테니까. 그러기를 기다리도록 합시다. 피치못하게 카야크 님의 힘의 부활이 늦추어지기는 했지만, 이해 하실거요." 아크트는 한 발 물러섰으나, 여전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제피로스를 노려 보았다. 제피로스 역시 지지 않고 차가운 자색의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헤어졌다. "정말 필리우스를 잡을 수 없었던 거야, 보레아스?" 탑으로 돌아와, 제피로스는 웃으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한 미소였다. 그러나 보레아스는 태연히 대답했다.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를 죽이려는 찰나, 엘미어의 계승자가 방해를 했 습니다. 그녀와 겨루었다가는 둘 중 하나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말이 되지 않잖아. 엘미어의 계승자, 그 어린 요정 소녀는 필리우 스에게 속아 넘어가 우리에게 잡혔어. 그를 한 대 때리기까지 했다소 했잖 아. 그런데 이제 와서 또 도와주었다고?" "필리우스가 그녀를 다시 탈옥시켜 주었으니까요..." "말도 안 돼. 그 멍청한 요정은 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라고. 그게 다 함정일지 의심 따위는 해 보지도 않나보지?" 제피로스는 혼란스러운 듯 머리를 저었다. 보레아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여운이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한 번 적은 영원한 적... 그녀는 그렇게 생각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요정들은 머리가 비었어." 제피로스는 도리질을 하며 말했다. "한 번 배신한 놈은 또 배신한다고. 믿어서는 안 돼... 하여간 그 어둠의 정 령 녀석 때문에, 리반 아덴의 아들의 처형이 늦어지겠군. 정말이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었다니까..." 11. "저길 봐. 저기 북동쪽에, 라우더가 있어. 어둠의 종족이 빼앗은 도시, 하르 크자엘이 빼앗은 도시... 내 도시지. 내가 충분히 자라고, 또 강해지면, 난 군 사를 이끌고 그리로 가 어둠의 종족들을 몰아낼 거야. 그리고 하르크자엘을 쓰러뜨리고, 정의라는 게 뭔지 보여 줄 거야. 라우더의 이름은 후세에 길이 남을 거고..." "그러실 수 있을 거에요, 클레이브 님...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저도 클레이 브 님을 따라가겠어요. 그리고 아버지가 리반 님을 곁에서 지켜 주셨듯이, 저도 클레이브 님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설사 제 목숨을 잃는다 해도, 클레이브 님께는 아무 일이 없을 거에요." "고마워, 칼릭... 라우더를 되찾게 되면, 에스텔에 있는 성은 네게 줄게. 그 럼 영원토록 우리 두 가문은 우정으로 맺어지게 될거야!" ... 클레이브는 눈을 떴다. 낯익은 막사.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손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시는 쓸 수 없을 듯 까맣게 쪼그라들었던 손은 이제 완전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당장이라도 칼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명 남지 않았던 치유술사들이 온 기술을 다해 그를 회복시켜 주었던 것 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돌이킬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정신이 드셨습니까, 클레이브 님?" 데이슨이 막사의 휘장을 조심스레 젖히고 들어오며 물었다. 클레이브는 자 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냥 누워 계십시오." "이젠 괜찮네." 데이슨은 그 자리에 서서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그의 상관이 이 정도로 해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그는 전에는 본 일이 없었다. 창백한 안색과 아래로 내리깐 시선이 그의 어머니와 흡사해 보였다. 그의 어머니, 리반 아 덴 부인, 그리고 로데인의 왕녀 - 그리고 그녀는 켈레브리스와 닮았었지... "칼릭을 잃었어." 클레이브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데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전쟁터에서는...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하지요." "내가 죽인 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부관이 죽는 일은... 흔한 겁니다, 클레이브 님. 목숨을 걸고라도 주군이 위험할 때 돕는 것이 그가 할 일이니까요..." "내 어리석음이 그를 죽인 거야!" 클레이브의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대항할 수 없는 힘이 깃들여 있었다. 데 이슨은 입을 다물었다. 클레이브는 그를 바라보고는 나직하게 웃음을 터뜨 렸다. 쓰디 쓴 웃음이었다. 마치 리반 아덴이 죽던 그 때, 데이슨이 자신의 가족과 주군의 가족을 이끌고 손끝 하나 안 다친 채 에스텔로 와서,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터뜨린 웃음과도 같은... 그는 한숨을 쉬었다. 깊은 한 숨을. 적어도 그의 어린 주군만큼은, 승자이기를 원했는데. 패배를 아는 일 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살해당하는 일 없이, 우뚝 선 전설의 영웅 같은 존재 이기를 원했는데... 그래, 그리고, 그의 아들, 칼릭도 그의 곁에 선 채 함께 빛이 나기를 바랬었다. 그것이 데이슨이 바란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 그 꿈 은 모두 사라지고, 이 백발의 노장에게 남은 것은 없었다. "...켈레브리스는?" 클레이브가 간신히 자신을 수습하며 물었다. 추태를 부릴 수는 없었다. 데 이슨은 아들을 잃었지 않는가... 사실 그는 데이슨이 차라리 자신을 원망하 고 저주하기를 바랬는지도 몰랐다. 이제까지 데이슨의 얼굴을 본다는 것이 두려웠지만, 이제 막상 이렇게도 침착한 그를 대하고 나니 숨이 막힐 지경 이었다. ...그래, 그렇게 죄책감에 숨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그의 슬픔을, 그 의 죄책감을 나누어 주지 않으므로. 아무도 그 자신을 대신해서, 그를 꾸짖 어 주지 않으므로. 데이슨과 그 외의 부하들은 언제까지나 입을 꾹 다물고, 기껏해야 칼릭이 명예롭게 전사했다는 소리나 할 것이다. 그리고 그의 내부 에서 그 자신을 꾸짖는 목소리는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켈레브리스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가..." 클레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멋지게 속아넘어갔군... 정말이지 나는 너무도 어리석었어." (계속) ------------------------------------------------------------- 클레이브 바~ 보~ ^^; "우리 모두 그녀에게 속아넘어갔지요, 클레이브 님. 그녀는 사악한 만큼 교 활했으니까요. 마치 저 불길 속에 자신과 에스테이아의 군사들을 함께 희생 시켰던, 로데인의 마녀 시엘레이스처럼 말입니다." "그런게 아냐... 그녀는 내 약점을 알고 있었네, 데이슨. 라우더로 오고 싶 다는 것, 라우더를 되찾고 싶다는 것. 그래, 난 라우더로 오고 싶었어. 이 곳 을 떠난 이후, 내 마음은 언제나 라우더에 얽매여 있었어. 랜스는 하르크자 엘을 죽이면 영원히 그 아픈 과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나는 마찬가지로 라우더를 되찾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고 믿었네. ...나를 끌어 당겼던 것이 라우더 그 자체였는지, 아니면 어리석은 추억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짓고는 나직하게 덧붙였다. "...아니면... 힐리온이었는지도..." "클레이브 님!"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나는 힐리온에 지배당하고 있었어. 아무리 싫 어도 내 몸 속에 흐르는 피의 절반은 로데인 왕가의 것이니까... 지금 생각 해 보면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힐리온에 집착했는지 알 수가 없군.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힐리온을 찾지 못하면 세상이 끝날 것 같은 기분이었 어..."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데이슨은 잠시 머뭇거렸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힐리온도... 켈레브리스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역시..." 클레이브는 놀라지 않았다. 대신 분노가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뻔했다. 너 무 뻔한 일이었다.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일인지라 지금까지 그가 깨닫 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욱 어리석어 보였다. 켈레브리스, 그의 어머니와 닮은 여인, 로데인의 왕조... 왜 그것을 생각지 못했을까? 그녀가 그렇게 자 신과 동행하겠다고 우겼을 때, 왜 의심하지 못했던가? 그 별로 독창적이지 도 않은, '사랑에 빠진 여자'의 연기 때문에? 그녀가 랜스를 위해 그를 따라 간다고 암시했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것을 송두리째 믿었단 말인가? "바람을 좀 쐬고 싶군..." "좀더 쉬시지요." "아니, 잠시만 돌아보고 오겠어." 클레이브는 '여기에 더 이러고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라는 말을 간신히 삼 켰다. "병사들을 부탁하네... 얼마나 남았지?" "300명 정도... 희생이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적들은 멀리까지 쫓으려 하지 않더군요." "그나마 다행이군..." 그는 침낭 위에 놓여 있던 칼을 잡으며 막사를 나왔다. 병사 몇 명이 그를 보고 머뭇거리며 길을 비켜섰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에 올라타, 절벽의 끝으로 몰아 갔다. 절벽 아래로 확 트인 전경이 나타났다. 그는 말에서 내렸 다. 라우더 성, 그가 모든 것을 잃었던 곳. 이곳에는 두 번 다시 오지 말았 어야 했었는지도 몰랐다. 하르크자엘을 쫓으러 집까지 나선 랜스를, 그가 얼 마나 어리석다고 나무랐던가. 그러나 그 역시, 똑같이 과거에 붙들려 있었던 것이었을까... 검은 성 위의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라우더의 하늘에는 이제 별조차 없었다. 이곳은 더 이상 라우더가 아니었다. 그가 원하던 라우 더는 처음부터, 그의 기억 속에, 아니 미화되고 과장되어 그의 상상 속에 존 재했을 따름이었다. 그것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그것을 오래 전에 인정했 어야 했다. 칼릭이 아직 그의 곁에 있을 때에... "클레이브 님... 막사로 드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투구를 눌러 쓴 한 병사가 다가와 머뭇거리며 말했다. 몸집이 작고 어린 병사였다. 클레이브는 피식 웃었다. 이제 아주 환자 취급을 하는군 그래... 바람은 그렇게 차지 않았다. 물론 아직 겨울 바람이긴 했으나, 그가 이곳으 로 진격해 올 때보다 훨씬 따뜻해져 있었다. 우클로우라고 봄이 비껴 가지 는 않을 테니까... "괜찮으니 자네나 가서 쉬도록 하게." "그건... 곤란합니다." 그제서야 클레이브는 그의 목소리가 낯익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는 칼자 루에 손을 얹으며 뒤로 돌았다. 그러나 그것을 뽑을 새는 없었다. "꼼짝 마." "켈레브리스..." 금빛으로 빛나는 힐리온의 칼날이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투구 아래의 푸른 눈이 분노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의 것과도 비슷했다... 그녀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으리라. 색 깔은 다르지만, 어두운 의지가 깃든 날카로운 눈빛. 부정하고 싶어도, 그들 은 닮아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했지..." 그는 천천히 물었다. 그의 목에 닿은 칼날은 그에게 아무 두려움도 주지 않았다. 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날카롭고 악의에 찬 웃음을. "그런 걸 묻다니 우습군 그래! 네가 이피아의 아들이라는 걸 알면서, 그 입 에 담기도 더러운 이름을 가진 배반자의 아들이고, 로데인을 멸망시킨 시이 그람 왕조의 핏줄이자 드래크로니안을 학살한 리반 아덴의 아들이라는 걸 알면서... 무엇보다도 너 자신이 그렇게 많은 소위 '반란군'들을 사정 없이 학살했으면서도, 내가 네게 아무 악감정을 품지 않을 거라 생각했나? 넌 내 원수이자 우리 로데인 인의 원수야. 드래크로니안은 말할 것도 없고! 너와 너희 나라, 그리고 네 아비와 네가 섬기는 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행해졌는지 알기나 해? 성주들은 무기를 든 일이 없어도 처형되 었고 백성들은 노예가 되었지.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자손손 숨어 살아야 했어.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바꿔 보려고 했던 사람들은, 반역자로 몰려 끔 찍한 방식으로 처형당했고 그들의 처와 딸들은 무슨 짓을 당하든 동정받지 못했지. 그래, 난 숨어 살았어. 내 가족은 전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숨어 살았지. 하지만 난 영원히 그렇게 살 수는 없었어. 무슨 대가를 치루더라도, 설사 내 목숨을 내주더라도, 바로잡고 말겠다고, 한 어리석은 왕녀 때문에 뒤틀린 역사를 바로잡고 말겠다고 난 맹세했지. 난 그것 때문에 살아왔어!" "...확실히, 너는 나를 증오할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죄없는 칼릭은 어째서...?" "죄없는 칼릭이라고!" 그녀는 분노에 차 소리쳤다. 칼끝이 떨리고 있었다. "죄없는 것 좋아하시네! 그 역시 네 곁에서 우리 로데인 인들을 사정없이 죽였잖아. 부하들이 로데인의 여자들을 범하는 걸 보고 웃었잖아, 그 어린 아이들이 칼날에 찔리는 걸 보고도 막지 않았잖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도, 넌 고작 그 한 명 죽었 다고 죽을 상을 하고 있군. 칼릭이야 죽었다 하더라도, 네녀석들이 치켜올려 주고 영웅 대접을 해 줄 것 아니야. 장렬한 전사 운운하면서. 하지만 네놈들 이 '반란군'이라 불리며 학살한 사람들은? 시체조차 불테우지 못하게 했던 내 사람들은? 정말이지 너 같은 건... 죽여 버리겠어!" 그런 건가... 똑같은 상처, 똑같은 운명, 똑같은 발자국... 켈리의 칼이 들어올려졌다. 힐리온. 로데인의 왕가의 칼. 그 금빛 칼날이 클레이브의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챙! 맑은 금속음이 비로소 그의 정신을 들게 했다. 켈리가 든 힐리온은 그의 목에 닿는 대신, 다른 칼날에 튕겨졌다. 켈리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이즈!" 이즐레이가 칼을 빼어든 채, 그녀와 클레이브의 사이에 끼어들어 있었다. 켈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붉은 눈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띈 채 그녀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죽은 듯한 침묵이 그들의 사이에 흘렀다. 이윽고 켈리가 소리쳤다. "어째서, 이즈, 어째서! 저 자는 로데인의 적이야. 로데인의 적이로, 드래크 로니안의 적이라고! 왜 날 막는거야!" "지난 일이야, 켈리... 지금 이러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 이즐레이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럴수록 흥분한 켈리의 목소리는 더욱 더 커졌다. "지난 일이라고? 아무 의미가 없어?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비켜, 안 그러면 너까지 함께 죽여 버릴 거야!"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 이즐레이는 칼을 칼집에 넣었다. 켈리의 눈이 커졌다. 당혹감이 가득한 표 정. 그러나 이즐레이는 평온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날 죽이고 싶다면 죽여. 어차피 난 널 해칠 수 없어, 켈리... 그건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러나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방관하고 있을 수도 없어. 그러니... 선택은 네게 맡기겠어." "어째서... 어째서!" "켈리... 지난 일은 지난 일이야. 지금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돌이킬 수 없 어. 인정해야 해..." 이즐레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힐리온의 칼날을 밀어냈다. "피는 피를 부를 뿐이야. 계속해서 부르지. ...노인네같은 말처럼 들려도, 그 건 사실이야. 파괴와 살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해. 많은 사람들이 그 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파멸해 가는 것을 지켜보았어. 아니, 그걸 알면서도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을... 하지만, 넌, 켈리, 너만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힐리온의 칼끝이 서서히, 이즐레이의 목에서 멀어져 땅으로 내려왔다. 켈리 는 투구를 벗었다. 이제 너무 어두워 그녀의 표정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나 역시도... 똑같은 바보였다는 것인가... 그렇게 그들을 경멸하면서도..." 막사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켈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파란 눈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아름다웠다. 그녀가 말했다. "군사들이 오는군... 도망가자, 이즈." 이즐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켈리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가벼운 발자국 소리들이 아득해지더니, 떠나 버렸다. 클레이브는 그 자리에 굳은 듯 이 서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클레이브 님!" 데이슨이었다. 데이슨이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급히 절벽으로 올라오 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인가?" "아... 아니, 아무 일 없으셨습니까? 너무 오래 안 오시길래..." 데이슨은 지나치게 아무렇지도 않은 클레이브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눈 치였다. 클레이브는 웃었다. 밝게 웃으려고는 했지만, 그 웃음 소리에는 지 워지지 않는 그림자가 깃들여 있었다. 똑같이 상처받은 영혼들, 똑같은 바보 들. 서로 미워하는 동족들. "걱정을 끼쳐서 미안하네... 이제 마음이 안정되었어. 막사로 돌아가도록 하 지." "예? 예..." 클레이브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절벽 아래 라우더 성에서는 붉은 횃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하얀 연기가 별도 없는 하늘로 치솟았다. 이제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땅. 그는 막사로 돌아왔다. 초라하고 춥고, 그리고 그가 이제 속해 있는 곳. "병사들을 소집해 줘, 데이슨." "예...?" "병사들을 소집해 줘. 우리는 할 만큼 했는데 실패했어... 아무래도 내가 너 무 자만했던 모양이야. 돌아가야겠어. 우리의 땅, 에스테이아로." 11. "결국 그 아이를 데리고 왔군, 아이아스." 하고 화려한 황금빛 날개를 가진 용이 말했다. 마치 거대한 금덩이로 만들 어져, 붉은 루비로 눈을 박아 넣은 것 같은 모습의 용이었다. 긴 목과 꼬리 가 우아하게 흔들거렸다. "네스토르..." 켈리가 말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지만은 않았다. "역시 네스토르가 이즈를 데리고 왔군요." "날 탓하지 마라, 용감하고 아름다운 내 자손아. 그가 고집을 꺾지 않아서 어쩔 수가 없었단다. 내가 모른체 하고, 아이아스가 탈출해서 혼자 우클로우 에 가게 했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네가 더 화를 낼 것 같아서..."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이즐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칠 것 없이 환한 미소를. 켈리는 미소 를 지으려 했으나 그것은 한숨이 되어 나왔다.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난 정말 바보였어요... 제피로스에게 복수하겠다는 랜스를 그렇게도 비웃 었으면서, 맹목적으로 분노만 키우는 제피로스를 그렇게도 어리석다고 생각 했으면서... 결국 나도 똑같은 바보 짓을 하고 있었군요. 드래크로니안들을, 알에서 갓 깬 어린 용들까지 사정없이 학살한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그렇게 도 증오했으면서, 로데인의 싹을 없애려 했던 시이그람 왕조를 타도하겠다 고 큰소리 치면서... 나 역시 죄 없는 사람들을 '처벌'하겠답시고 날뛰었어요. 너무 바보같아요." "네가 자책을 할 때도 있다니, 나이가 헛먹은 건 아닌 모양이다." 네스토르는 긴 금빛 목을 흔들며 웃었다. "그러나 켈레브리스... 잊은 건 아니겠지? 헤이 칼리엔 드리인 사르나우클, 헤이 제미엔 드리인 사르니드 - 모든 승리에는 그림자가 있고, 모든 패배에 는 빛이 있다는 말을. 패자에게 언제나 희망이 있는 것처럼, 티없는 승리를 거두는 승자도 없단다. 승리라는 것은, 남에 대한 승리든 자신에 대한 승리 든, 항상 실수와 패배를 겪으며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지. 오직 많은 실 수와 패배를 거치고, 그것들을 이겨낸 사람만이 진정한 승리를 알 수 있단 다. " "하지만 무엇에 대한 승리죠? 나는 로데인의 원수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강 해졌어요. 헤르미온도 그렇게 말했고..." "그 복수심이 너를 강하게 해 주었지. 덕분에 너는 힐리온을 가질 수 있었 지 않았느냐? 그러니 이제 네 복수심은 할 일을 다 한 거란다. 이제는 좀더 진실한 목표를 위해 네 힘을 쓸 때이지." "어떤 목표요? 그래요, 힐리온을 얻었죠, 네스토르. 그렇지만 난 이제 이 칼을 어디에 써야 할 지도 모르는걸요. 나는 이것으로 배신자의 목을 베려 고 했지만, 이제 다 지난 일이니 잊으라는군요. 그럼 난 이제 이 칼로 뭘 하 죠?" 켈리는 자못 도전적인 눈길로 네스토르를 올려다 보았다. 네스토르는 재미 있다는 듯 웃었다. "네 눈빛이 마음에 든다, 켈레브리스. 정말이지 시엘레이스의 것과 꼭 같구 나. 그러나 그 칼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 힐리온은 레이스 에이나스 렐 테이렐라스, 즉 인간과 용들의 지배자의 칼이 란다." "인간과 용들의 지배자..." 켈리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 허공을 노려보 았다. 이즐레이가 그녀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는 힐리온을 뽑아 들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 칼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 었다. "그것을 제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네가 할 수 없다면, 누가 할 수 있겠느냐? 켈레브리스, 약속의 이행자, 로 데인의 왕녀여..." 켈리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밝은 웃음이었다. 허망함이나 어두움, 자조 따위는 섞일 여지도 없는 그런 웃음이 었다. 그녀는 소리치듯 말했다. "그래요, 제가 하겠어요! 네스토르, 라벤데일로 돌아가 전해 주세요. 힐리온 의 계승자, 로데인의 군주가 나타났다고. 더 이상 드래크로니안들은 인간들 을 미워하는 편과, 인간들과 함께 숨어 사는 편으로 나뉘어 대립하지 않을 거라고. 다시 한 번 한 땅 위에서 인간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이 함께 살 나라 가 건설될 것이고, 그것은 복수의 피를 흘리지 않고도 건설될 것이라고. 다 시 한 번 드뤼안 1세와 글라노우스의 맹약이 빛을 발할 것이라고요! 그래요, 처음부터 제가 할 일이었어요. 하지만 두려워했죠. 그래서 복수니 뭐니 얼토 당토 아닌 것들을 내세웠던 거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요. 나는 힐리온의 주인이고 켈레브리스, 약속의 이행자이니까요. 지금 당장 라벤데일로 날아가 주세요, 네스토르, 제발!" "지금 당장 말이냐? 너를 혼자 놔두고? 나와 함께 가는 것이 더 좋지 않겠 느냐, 로데인의 새 여왕, 시엘레이스의 자손이여?" 네스토르가 놀란 듯이 물었으나, 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여기는 한시가 급해요. 제피로스, 젊은 드래크로니안의 군주는 네 스토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무모하고, 증오로 가득차 있어요. 게다가 제 친구들이 저 안에 있으니 전 갈 수 없어요. 제가 잘 해낼 수 있을 테니 까, 네스토르 아저씨는 라벤데일의 드래크로니안들에게 가 주세요." "걱정 마십시오. 켈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이즐레이도 나서며 말했다. 켈리는 그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네스토르 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수백살 먹은 조상은 퇴장해야 할 시간이 분명한 것 같구나. 뭐, 좋 다. 힐리온의 주인에 흑룡 카시드라의 아들... 이 두 사람이면 나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겠지." "하지만 세 명인데요!" 갑자기 끼어든 인물은 바로 마빈이었다. 그는 졸고 있었는지, 부시시한 얼 굴로 눈을 비비며 달려나왔다. 그 모습에 켈리와 네스토르, 이즐레이는 웃음 을 터뜨렸다. 네스토르는 너무 고개가 흔들흔들해질 정도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그렇군요, 용사 마빈, 그대를 잊은 것을 용서하시오. 정말이지 마 음 놓고 떠날 수 있겠군!" 그는 붉은 루비 같은 눈으로 켈리를 한 번 바라보고, 이즐레이를 한 번 바 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켈리를 보았다 - 너무나도 시엘레이스를 닮은, 그 의 자손. 지나간 행복은 다시 오지 않는 것이라고, 시간이 흐를수록 오직 바 스러져가는 추억만이 남는다고 그는 믿었었다. 그러나 이제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행복은 마치 바퀴가 돌듯이, 그렇게 불행처럼 찾아오고 또 찾아온다 는 것을 이제 그는 알았다. 황금빛 날개가 어두운 하늘을 덮었다. 그 밤, 우클로우의 척박한 언덕에서 황금빛 용이 라벤데일을 향해 날개쳐 가는 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계속) ------------------------------------------------------------- 와아! 드디어 뭔가 해결될 조짐! 9장은 종장(conclusion)입니다! 얼씨구 좋구나! 제 9장 종장(終章) (Chapter 9 Conclusion) 1. 우클로우의 검은 밤하늘이 잿빛으로 희미하게 밝아져 오고 있었다. 클레이 브는 막 떠날 준비를 마친 병사들을 돌아보고 있었다. 칼릭은 죽었다. 그것 은 그가 인정해야 할 일이었다. 그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더 이상 실수할 수는 없었다. 너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자들을 이끌고 후퇴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물론, 데이슨은 기를 쓰고 말렸지만. "지금 돌아가신다면 귀족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은 클레이브 님의 흠을 잡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클로우까지 다 와서 돌아가신다면...! 병사들은 고작 300명이 남았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완패입 니다. 클레이브 님의 경력에 치명적인 결함이 될 것입니다." "내가 어리석었으니, 문책받는 것은 당연하지. 이 기회에 그 얼토당토 않은 장관 자리나 도로 가져갔으면 좋겠군. 내게는 그런 자격이 없으니." "클레이브 님!" "어차피 후퇴가 아니면 죽음이네, 데이슨. 300명을 가지고 라우더 요새를 점령이라도 할 생각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최소한 200명은 살 수 있을 테지..." "말도 안 됩니다. 엘먼을 지지하는 무리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들이 무서워서 200명을 고스란히 희생시키고 싶지는 않네. 문책받아도 할 수 없어. 나는 힐리온 때문에 이성을 잃었었으니. 기사 따위 집어치우고, 영지나 돌보며 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자격이 있는 사람이 군사를 이끄 는 것은 당연하니까. 나는 합당한 처벌을 피해 도망칠 생각은 없네." 처벌, 괜찮겠지. 아니, 차라리 처벌당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남이 처벌을 해 준다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렇지 않을 것이 라고 그는 생각했다. 칼릭에 대한 죄책감은 더하면 더했지 줄어듦이 없는 무게로, 평생 그를 짓누를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치루어야 할 죄값.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좋아... 이제 출발할 수 있겠군." 하고 클레이브는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가는 길은 평탄할 것이다. 거의 모 든 어둠의 무리들을 해치우면서 진군했으니까. 그리고 날은 점점 더 따뜻해 질테고... "클레이브 님!" 갑자기 저쪽에서 허둥지둥 데이슨이 달려왔다. 그는 클레이브의 말 앞에 멈추더니, 다짜고짜 말했다. "후퇴하실 수 없습니다." 클레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데이슨, 그 얘기는 이미 끝난 줄로 아는데..." "후퇴하실 수 없습니다, 클레이브 님... 후퇴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클레 이 폐하께서 원군을 이끌고 도착하셨습니다." 2. 아클레어 아레나스 시이그람 3세는 막사의 의자에 기대어 앉은 채, 눈앞의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그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제 거의 쓰러져 죽을 듯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얼굴은 피골이 상 접하여 두개골의 모양이 드러날 지경이었고, 하얀 머리칼은 듬성듬성했으며, 주름은 배로 늘어난 듯 했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때보나 투지와 살의에 불 타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 살의가 모든 에너지를 갉아먹어 그의 몸 까지 상하게 한 듯이. "고생이 심했군, 클레이브... 군사를 거의 다 잃었다지?" 그의 목소리는 메말랐다. 클레이브는 무릎을 꿇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면목 없습니다, 폐하... 처벌해 주십시오." "아니, 자네 잘못이 아니네. 그 정도의 병력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게 장한 거지." 클레이브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왕은 분명히 분노해 있었다. 그런데도 왕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고, 그의 목소리에 거짓은 없었다. 그러면...? "폐하...?" "자네와 군사를 합하여 라우더를 치기 위해, 이렇게 왔네." "예? 하지만...!" 클레이브는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클레어 3세는 그 병사들을 보지 못 했단 말인가! "불가능합니다. 제 부하들이 더 이상 싸운다는 것은... 그들의 사기가..." "병신만 아니라면 싸울 수 있는 거야. 나는 라우더를 멸할 작정이네." 잘못되어 있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되어 있었다. 아클레어 3세는 이렇 게 무모한 왕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아는 그의 주군은... "폐하...!" "말릴 생각 말게. 그 더러운 족속들을 모두 쓸어내 버릴테니. 그들이 내 아 들을 죽였어!" 클레이브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아클레어는 한숨을 쉬었다. 마치 온 몸의 공기가 다 빠져나가는 듯한 한숨을.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오랫동안 에스텔을 떠나 있었지... 그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고 있나? 나는 한 번 폐위당했다가 다시 왕위에 올랐네." "폐하...?" "사실일세. 엘먼... 그 아이가 아트웰의 반란군과 합작하고, 그들에게 자유 를 주는 대신 자신이 왕위에 올랐지. 상상할 수나 있는가?" 물론 상상할 수 없었다. 왕은 클레이브의 얼굴을 보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 렸다. "그 아이는 변했어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것이라고 하 더군. 나는 그 아이의 몸에 흐르는 시이그람 왕조의 피가 이제서야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했지. 잠깐, 아주 잠깐동안... 그 애는 내가 원하던 그런 아들 이었네. 용맹하고, 거칠 것이 없었지. 성난 사자처럼. 그러다가 갑자기 배신 자가 된 거야... 반란군의 주도자 사일러스와 합작하고, 나를 포로로 넘겨주 었지. 그리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고, 내 목숨의 대가라는 미명하에 그들을 독립시켜 주었네. 상상이 가는가? 엘먼이, 내 아들이, 몇 대에 걸쳐 그렇게 피를 쏟으며 이룩한 통일을 서명 한 번 하고 허물어 버린 걸세. 펠드릭이 나를 찾아온 것은 그 때였지. 펠드릭이 자네를 싫어했다는 것은 알고 있네만... 그는 나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네. 그냥 단지, 지나치게 보 수적이고 융통성이 없었을 뿐이었지. 그 역시 그렇게 말했네. 자신은 단지 왕가의 직계 자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에 엘먼을 지지했 던 것 뿐이었지, 자네에게 특별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그리고 이제는... 이제는, 자신이 아무래도 잘못했다고 느낀다고. 그래, 그렇게 말했 네. 자네는 그가 당황한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나 역시 없네. 그가 그 날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야. 그는 완전히 어쩔 줄을 모르고 방 안을 서성거렸 네. 그리고 한참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대뜸 '폐하 - 사실 그 때 나는 폐하가 아니었지. 엘먼이 왕이었으니 - 엘먼 왕자님은 정신이 나가셨습니 다.'라고 하더군. 그리고는 마치 막았던 둑이 터진 듯 이야기했네. 엘먼은 이 제 다짜고짜, 자신에게 반대하던 귀족들을 숙청해 버리고 있다고. 이유 하나 제대로 대지 않고 말이네. 그리고 위험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자네 들이 보내 온 요청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나는 그를 돌려보냈네. 그리고 내가 곧 엘먼에게 가겠다고 했지. 그리고 그 렇게 했네. 나를 아직 따르는 기사들을 모두 이끌고. 그러나 특별히 걱정을 하지는 않았지. 그 아이는... 그 아이는... 자네도 알잖나. 그 아이는 내 말을 거역한 적이 없지 않았나? 언제나... 언제나 순종적인 아이였지, 그래, 크리 스티나, 그 여자처럼. 자네도 기억하지 않나?" 왕은 호소하듯이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클레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 먼, 그의 기억 속에 있던 엘먼은 항상 아버지의 관심에 굶주리던 소년이었 다. 그는 항상 부러움과 증오가 뒤섞인, 결코 영리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클 레이브를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어쩌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화들짝 놀라 달 아나 버렸지... "그는... 폐하의 명령이라면 무슨 일이든지 했지요." "그랬지. 그런데 내가 그 아이를 찾아가서 만난 것은, 오만방자한 왕이었 어. 폭군이었지. 날 보더니, 그 아이는 대뜸 나를 안내해 준 병사에게 '왜 데 려왔지? 내게 묻지도 않고?' 라고 소리치더군.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말이네. 병사는 더듬거리다가, 내가 그에게 말해 준 대로 - 그러니까 나는 선왕이고 그 아이는 아버지인 내 충고를 들어야 할 의무가 있으니, 들여보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했노라고 대답했네. 그러자 엘먼은 가만히 그 병 사를 노려보더니, 묻더군. '왕의 말이 말같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지?' 그 병 사는 겁에 질려 대답도 하지 못했네. 사실 오래 겁에 질려 있을 새도 없었 네. 엘먼이 단번에 칼을 뽑아 그의 목숨을 거두어 버렸으니... 나는 물론, 그 아이를 꾸짖으려 했네. 그가 들으려고 했다면, 꾸짖었을 거 야.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어. '나가십시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하셔도 이 렇게 약속도 없이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돌아가셔서, 내가 허락을 내릴 때 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게 그 아이가 한 말이었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하 고, 펠드릭이 내게 말한 것을 낱낱이 들어 가며 그 아이에게 따졌지. 그러자 엘먼은 - 허, 참 - 내가 세상에서 본 적도 없는 차가운 미소를 짓더군. '우클로우로 보낸 원정대는 몰살당했어요. 소식이 없습니다. 당연한 것 아 닌가요? 우클로우로 보냈던 군대들 중 무사했던 군대가 있었던가요? 아무리 아버지가 총애하시는 조카라 해도, 별 도리 있겠어요?' '하지만, 펠드릭은 그들이 도움을 요청하는데 네가 무시하고 있다고 했다.' '펠드릭이 노망이 났나보군요. 저는 그런 일 없습니다.' '펠드릭이 거짓말했다는 거냐? 그는 고지식하긴 해도 그럴 사람은 아니다! 그는 지금이라도 페레이타 여신의 앞에서 맹세하고(저승신의 앞에서 맹세하 다; 생명을 걸고 맹세한다는 뜻) 그 말을 되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 런 충신이니.' 그러자 엘먼이 웃더군. 하르크자엘이라 하더라도 그렇게 소름끼치는 소리 로 웃지는 못할 것이네. 그 아이는 그렇게 웃다가... 소리치더군. '아뇨, 그는 맹세 못 할 겁니다. 이봐, 펠드릭을 데려와!' 병사들은 그의 명령에 군소리 없이 따르더군. 그들은 펠드릭을 데려왔네. 아니, 정확히 말해서 펠드릭의 목과 몸을 각각 따로 들고오더군. 나는 물론 이고 내가 이끌고 온 기사들까지 모두 충격을 받았네. 이렇게 갑자기, 펠드 릭은 총리대신이었는데, 이렇게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처형할 수는 없는 것이었네. 대역죄를 지었다 해도... 최소한 처형 사실을 사후에 발표하기라도 했어야지! 그런데 엘먼, 그 아이는, 우리가 놀라는 것을 보고 더욱 크게 웃 더군. 미친 듯이 -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자아, 펠드릭에게 명령해 보세요, 아버지. 페레이타 여신의 앞에서 맹세하 라고 명령해 보시라니까요! 펠드릭, 펠드릭, 한 번 맹세해 봐. 맹세할 수 있 겠나? 하하하!' 엘먼은 피투성이가 된 펠드릭의 머리를 들어올려 마구 흔들며 웃어 댔지. 내가 그만 하라고 하자 그 머리를 내게 던졌네. 나는 그것을 피했고... 머리 는 바닥에 뒹굴었네... 그제서야 나는 그 머리에서 눈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네... 무슨 소리를 소리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네. 단지... 너는 왕될 자격 이 없다, 그런 내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네... 하지만 그 다음, 내가 한참동안을 미친 듯이 소리치고 나자, 그 아이가 빈정거리며 한 말은 뚜렷 이 기억나네. '아버지께서는 그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왕이니까 요. 왕이 하는 일이 마음에 안 드신다면, 그건 반역자라고 부를 수밖에 없지 요. 대역죄를 지으실 생각이십니까?' 자네라면 어떻게 했겠나? 나는 칼을 빼어들었네. 그 아이의 등 뒤에 늘어 서 있는 기사들이, 그 아이를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 나 는 그 아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네. 다만 - 다만 왕관을 넘겨받으려 했을 뿐 이네. 그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너무나도 분명했으니까. 그리고 - 맹세코 - 페레이타 여신의 앞에서 맹세하건대, 그 이후에는 내가 그 아이를 보호해 줄 생각이었네. 그러나 엘먼은 아니었네. 그 아이는 칼을 빼어들었고 - 탁자를 엎으면서 - 맹렬하게 나를 공격했네. 누구라도 그 살의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네. 나는 그 아이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네. 내 아들이었으니까. 그러니 상대가 되 질 않았던 게지... 엘먼은 나를 쓰러뜨렸네. 그리고... 내 목을 향해 칼을 높 이 쳐들더군. 다음에 할 일은 너무도 분명해 보였네. 그는 칼을 내리쳤지. 그러나, 그것이 내 목에 닿기 직전, 아주 잠깐, 그는 머뭇거렸네. 그리고 나 는 - 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 틀림없었네 -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그의 심장을 찔렀네." 왕은 한숨을 쉬었다. 클레이브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새빨간 거짓말처럼 생 각되었다. 그러나 왕이 태도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저 한숨, 저 그늘진 얼굴은 연기일 수 가 없었다. "폐하..." "마치 악마에게 홀린 것 같더군. 칼은 들어가다가...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 쳤네. 마치... 마치 유리가 깨어지는 듯한 느낌이 칼을 타고 전해져 오더군. 그러더니 칼이 놀랄 만큼 차가워졌네. 그건... 얼어붙었네. 엘먼의 심장에서 는 피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네... 칼은 꽁꽁 얼어 있었고... 나는 칼자루가 너무 차가워 놓쳐 버렸네... 그 칼자루가 닿은 바닥의 카페트까지 얼어붙었 지... 엘먼은... 내 아들은... 놀란 듯이 보이더군... 그는 나를 보고... 칼을 보 더니... 웃음을 터뜨렸네... 그리고 소리쳤지... '그럴 줄 알았어, 날 찔렀군. 그 럴 줄 알았어!' 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 네... '내 심장이... 조금만 더 차가웠더라면!' ...그리고... 죽었네." 왕은 텅빈 웃음을 터뜨렸다. "상상이 가나? 그리고 죽었다네. 죽어 버렸어. 엘먼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네. 마법사들이 와서 보고는, 그것이 흑마술의 일종이라고 하더군. 전설 에나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오래되고 잊혀진 흑마술이 그 아이의 심장을 꽁꽁 얼려 버렸다고... 그래서 난 이렇게 온 것이네. 그 아이의 원수를, 우클 로우에서 갚으러." 왕은 결연해 보였다. 비침한 만큼 단호했다. 그를 꺾을 수 있는 것은 없는 듯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 병사들의 사기는 너무도 떨어져 있고, 폐하가 이끌고 오신 군사들의 숫자도 라우더를 함락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라우더는 우클로우의 수도..." "그런 소리 말게나, 클레이브! 이제 에스텔은 자네가 다스릴 나라네. 내가 죽으면 후계자는 자네밖에 없어. 그러니..." "폐하, 저는 왕위를 원하지도 않고, 또 얻을 자격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라우더를 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클레이브, 한 번의 실패가 자네를 겁쟁이로 만든 건가? 이대로 돌아가면 문책을 면하지 못할 것이네!" "문책은 각오하고 있습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왕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노기를 띈 눈으로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클레 이브는 쓴웃음을 삼켰다. 왕의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힐리온을 찾으며 이성을 잃었던 것처럼, 왕도 지금 이성을 잃고 있을 뿐이었다. '우클로우에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나보지...' 한참 후에야 왕은 분노를 누그러뜨렸다. 그는 클레이브를 향해, 희미한 미 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내 자네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군." "예...?" "저 성 안에 자네의 어머니와 아내가 포로로 잡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자네와 내가 수도를 비운 사이 에스텔이 공격받았네. 뒤늦게 도착한 군사들 이 어둠의 종족들을 몰아내긴 했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지. 남아 있는 건물들도 거의 없었고. 그러나 자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본 사람은 적지 않다고 하더군. 어쩔 텐가, 클레이브?" 3. 데이미아는 재채기를 하며 잠에서 깼다. 추웠다. 발 앞의 모닥불이 다 꺼져 불씨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얼른 곁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넣고 불을 살리 려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잘 되지 않고, 연기만 잔뜩 났으므로, 결국 주문 을 외워 불을 붙였다. 그러나 이미 툴위그와 로이는 기침을 하며 깨어나고 있었다. "콜록콜록..." "켁... 데이미아, 너 우리를 모두 질식시킬 셈이냐?" 데이미아는 그들의 항의를 무시하며 하품을 했다. 그들은 지금 필리우스가 '비밀 통로'라고 주장하며 안내한 동굴 속에 있었다. 지하인지 어둡고 습한, 그러면서도 차가운 바람이 흐르는 동굴이었다. 툴위그가 자기 전에 피워 놓 은 모닥불이 그 안을 밝히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런 만큼 이 안에서는, 지금 이 낮인지 밤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데이미아의 활약(?)으로 그들은 무사히 보레아스를 피해 이 비밀 통로로 도망쳐 들어왔다. 그리고 계속 달렸다. 추적당하고 있다는 예감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지칠 때까지 달리고 또 달려서 도망쳤다. 이 통로를 계속 따라가면 우클로우의 한 동굴로 통한다고, 자신이 그 동굴에 말과 약간의 식량을 준비해 두었다고 필리우스는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오르기 전까지 는, 아니 우클로우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멈추고 싶은 마음이 없 었다. 가장 먼저 지친 것은 필리우스였다. "헉, 헉... 자, 잠깐만... 여기까진 못 쫓아올 겁니다..." 그는 휘청거리며 손으로 벽을 짚었다. 숨이 차서 알아듣기도 힘들 정도로 말을 더듬고 있었다. 로이, 데이미아, 툴위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 았다. 필리우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모두 지쳐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 비밀 통로에 발을 들여 놓은 이후 족히 두 시간은 달렸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이 앉아서 쉬기로 합의를 본 것은 아무래도 필리우스 때문이었 다. 로이야 원래 뛰는 데에는 이력이 난 도둑이었고, 데이미아 역시 드라이 어드 족으로 달리는 것이 걷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종족이었으며, 툴위 그는 느리긴 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질주하고도 숨 하나 흐트러지지 않 는 체력을 자랑했으니. 그러나 필리우스는 보레아스의 격전 때문에 지쳤는 지,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해서 일행을 모두 걱정시키고 있었다. 쓰러지듯 동굴 벽을 짚으며 무릎을 꿇은 그는, 고개를 벽 쪽으로 돌린 채 심하게 기침을 했다. 어깨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가 다시 얼굴을 돌렸을 때, 그의 입술과 소매에는 선홍색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는 마치 유령 보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이 일행을 보더니,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띄웠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제 곧 라우더 성을 빠져나갈 수 있는데, 머뭇거 릴 수야 없지요." "그렇지만... 조금 쉬었다 가는 게..." 툴위그가 머뭇거리며 말했으나, 필리우스는 손으로 벽을 잡고 몸을 지탱하 며 일어섰다. (계속) ------------------------------------------------------------- 하아... 엘먼... 결국... 죽었습니다. 흐음... 대청소(?) 시작일까요? ^^; "시간이 없습니다... 곧 카야크의 봉인을 푸는 의식이 시작될 겁니다. 그 안 에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인 당신들은 여길 빠져나가야 합니다... 안 그러 면... 이런...!" 순간 그는 휘청거리며 벽에 몸을 기댔다. 낭패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 는 무엇을 잡으려는 듯, 허공으로 손을 내ㅈ더니 그 자리에 털썩 쓰러져 버 렸다. 데이미아가 창백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그에게로 달려갔다. "필리우스!" 로이와 툴위그도 당황한 얼굴로 다가왔다. 데이미아는 그의 몸을 바로 누 이고는, 목과 소매를 죄고 있던 단추들을 풀렀다. "그냥 기절한 것 뿐이야... 많이 지쳤었나 봐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는 엘미어를 한 손에 잡은 채 치유의 주문을 읊 기 시작했다. "아스틸라 뤼아나스, 레야 로세나스, 힐린 로르 테일. 힐린 휜 테일 한 롬 엘레이시나드, 휜 테일 론 라베나드..." 천천히 필리우스의 얼굴에 핏기가 돌았다. 곧 멈출 듯 하던 호흡도 편안해 졌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다. 그는 편안한 얼굴로,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의식을 잃고 있었다. 로이가 그의 이마를 짚어 보고는 말했다. "차갑네... 많이 힘들었었나 봐." "그렇게 성을 박살을 내며 싸우니 안 힘들 리가 있나!" 툴위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데이미아는 그런 그를 흘끗 보고 말했다. "카르히르다 때문이에요." "뭐?" "아까 그가 소환해 낸 검은 연기로 된 곤충들이요. 그건... 이제 거의 사라 진 주문이에요. 카르히르다는 강하긴 하지만 마법사의 생명력과 너무 밀접 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잘못했다가는 죽는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망토를 풀러 필리우스의 몸을 덮어 주었다. "정말이지 난 필리우스가 죽는 줄 알았어..." 로이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에 그늘을 던지는 긴 갈색 속눈썹, 감정이 풍부한 녹색 눈. 그녀를 만난 지 겨우 몇 달이 흘렀을 뿐인데, 왠지 그녀는 다 자란 것 같고 자신은 아직도 어린 소년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지금의 데이미아와 로센 라스에서의 데이미아는... "하지만... 보레아스인가, 그 사람한테는 상대도 안 되는 것 같던데?" 로이는 엉뚱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이렇게 물었다. 데이미아는 고개 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보레아스가 대단한거지. 하지만 카르히르다를 열 다섯 마리나 만들어 내고, 다 죽여 버리고도 살아 있다니, 필리우스도 참 대단해." "으음... 확실히 안 죽겠지?" "당연하지! 내가 이래뵈도 엘미어의 주인, 라스헨 에이니드라고!" 데이미아가 발칵 화를 내며 소리쳤다. 툴위그가 장작을 모아 왔고, 데이미아가 마법으로 불을 붙였다. 그들은 그 렇게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채, 필리우스가 깨어날 때까지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가 다 같이 잠이 들어 버리고, 이제서야 깬 것이다. 필리우스는 아직 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누가 봐도 기절한 게 아니라 기분 좋 게 자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데이미아가 덮어 준 망토를 목까지 폭 덮 고... '내 참, 사람 걱정 시키고 속 편하게 퍼질러 자는 꼴이라니...' "필리우스, 일어나, 일어나! 그리고 망토 내 놔!" 갑자기 데이미아는 심통이 나서 망토를 끌어당기며 소리를 질렀다. 필리우 스는 눈을 비비며 몽롱한 상태로 일어나 앉았다. "후우... 아침인가... 에? 데이미아?" "도대체 언제가지 잘거야! 시간이 없다고, 빨리 나가야 한다고 우긴 사람이 누군데!" "아, 맞다! 큰일났네! 제가 얼마나 오래 잤죠?" 필리우스는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것 같았다. 그는 당혹한 표정으로 주위 를 둘러보았다. "그건 아무도 몰라. 왜냐하면 다 같이 잤거든." 툴위그의 솔직한 대답에 필리우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이내 잔 기침을 하며,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어... 어쨌든 빨리 이 곳을 벗어나도록 하죠. 이쪽으로..." "잠깐만!" 툴위그가 다급하게 소리쳤으므로, 일행은 모두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우리... 뭔가 잊고 온 것 같지 않아?" "에? 뭘요?" "글쎄... 로이, 너 이디실 흘리고 온 거 아니지?" "설마! 여기 있잖아요. 데이미아, 너야말로 엘미어 잘 가지고 있냐?" "당연하지! 툴위그는요?" "설마 내가 카자룬을 잊어먹고 안 가져오겠냐? 이 놈 때문에 이 고생을 다 했는데?" "참 이상하네... 그럼 뭘 빠뜨리고 왔을까..." "으음..." 일행은 모두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 동안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가, 갑자기 로이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번쩍 들며 말했다. "아! 뭘 잊어먹었는지 생각났어!" "정말?" "뭔데?" "랜스 말이야, 랜스!" 일행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렇네..." "그럼 어떻게 하지?" "데리러 가야죠, 뭐." "그래야겠지?" 로이, 툴위그, 데이미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 하는 순 간, 필리우스가 질겁을 해서 그들을 불러 세웠다. "자, 잠깐! 어딜 가려는 거에요?" "랜스 찾으러..." "미, 미쳤어요? 그를 찾으러 라우더 성으로 되돌아간단 말예요? 지금쯤 우 리를 찾기 위해 오르크들이 쫙 깔렸을텐데!" "그렇지만 랜스만 두고 올 수도 없잖아! 랜스는 드래크로니안들이 특히 미 워하는 리반 아덴의 아들이란 말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런 그를 내버려 두고 올 수는 없어!" 데이미아가 대꾸했다. 여간해서 꺾이지 않을 기세였다. 로이와 툴위그 역시 그녀의 말이 옳다고 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뭐... 뜻이 정 그러시다면 할 수 없지요, 라스헨 에이니드... 그렇지만 로크 페울로니를 다 들고 간다는 건 위험해요. 그건 봉인의 열쇠인데..." "그럼 두고 갈까?" "지금 농담합니까? 잘못하면 세계가 수천년 전의 혼란으로 되돌아갈지도 모르는데!" 로이의 말에 필리우스가 격하게 소리쳤다. 말이 끝나는 순간 실수했다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스쳤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툴위그가 천천히, 낮고 거역하기 어려운 위엄이 깃든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뜻이지? 수천년 전의 혼란이라고...?" 필리우스는 한숨을 쉬었다. "아실 텐데요... 라스헨 에이니드께서 이야기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오르 크들은 카야크가 자기들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혼돈은 어느 누구도 돕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수천년 전의 혼란이라니..." "전설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지요? 수천년 전의 혼란, 말 그대로입니 다. 땅은 바다처럼 출렁이고, 하늘이 무게로 짓눌렀던 시대... 실리사와 에퀴 온, 페레이타의 자손인 반신반룡(半神半龍)이 그 시대를 끝냈다고 드래크로 니안들은 주장하지요. 타냐헨 이피엔, 태초의 노래에서 말해지듯이... 실리사 렐 에퀴온 테이닌 탈레스 델 하르메이닌 데란 데이란 플로멜레인... 실리사와 에퀴온은 신전에 그들의 조상을 봉인했다, 땅과 바다가 하나일 적에... 그래요, 실리사와 에퀴온, 그리고 그들의 종족인 드래크로니안은 혼돈의 생 물이었습니다. 빛과 어둠, 그 어느 것도 없었을 때, 그 시기를 극복하기 위 해 신들이 혼돈으로부터 최대한 선한 생물을 끌어냈다고 합니다. 지금은 다 잊혀진 전설이지만요. 이조넬이 그 생물에게 생명을 주었고, 아스틸라가 각 각의 별, 즉 운명을 주었으며, 페레이타가 그들이 죽었을 때 영혼을 거두어 줄 것을 약속했지요. 그리고 에누인과 훼로크가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것은 그 생물이 혼돈의 시대를 끝내게 해야겠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에 뜻에 따라 만들어진 생물이었으므로 본성 이 악하지는 않았지만, 빛의 생물과 같아질 수는 없었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혼돈, 바로 카야크 그 자체였으니까요. 그들의 집은 빛의 생물들에게는 죽음 의 미로였고, 그들의 지혜는 창조의 지혜가 아닌 파괴의 지혜였습니다. 그리 고 그들의 별, 그들의 운명 - 그것은 오직, 혼돈이 끝나고 빛의 종족이 승리 할 때까지만 정해져 있었습니다. 모든 어둠의 생물들이 우클로우로 추방되 고 빛의 세상이 오자, 드래크로니안들은 길을 잃은 격이 된 것이지요." "그... 그러면 그 카야크라는 것은..." "데이미아, 당신은 타냐헨 네아가 끝난 후에, 아니 네아 아르카스(오르크 전쟁)이 끝난 후에야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 동안 많은 언어가 금지되고 잊 혀졌지요. 카야크는 혼돈(chaos)이란 뜻입니다. '신'이라는 것은 단지 은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야크는 혼돈의 힘 그 자체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힘을 자기의 것으로 하거나, 이용할 수 없는..."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저 오르크들이 숭배하는 마법사는?" "꼭두각시입니다. 제피로스가 데려온..." "제피로스?" 로이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그 외침에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 다. 모두들 필리우스가 폭로하는 의외의 사실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고 있었 던 것이다. 필리우스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짧게 대답하고는 말을 이었다. "제피로스... 하르크자엘,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의 본명입니다. 드래크로니안 의 계보에서 삭제된 이름이므로 그 이름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하여 간 그가 카야크, 아니 카야크의 흉내를 낼 인간을 데려왔습니다. 물론 그는 처음부터 막대한 마법을 가진 마법사였죠. 거기에다 지금 보레아스의 힘까 지 빌어 쓰고 있으니,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할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는 천재라고 부를 수 있는 인 간이었을 뿐, 신성(神性)과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모닥불이 째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꺼져 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데이미아는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럼... 제피로스는 그 힘을 부활시켜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빛과 어 둠이 하나이고, 땅과 바다가 하나인 세계... 그런 세계에서 뭐 하나 살 수 있 을 리가 없잖아!" "잊으셨군요, 라스헨 에이니드. 드래크로니안들은 혼돈의 자식들입니다. 그 들이 비록 오랫동안 이 세계에 적응해 왔어도, 몇몇 명을 제외하고는 다시 혼돈의 세계에 적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피로스는 아마 그것을 노리는 것이겠지요..." "미쳤군!" 하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정말 미친 짓이야. 당장 그만 두게 해야 해!" 그는 성 쪽으로 되돌아 달려가려 했다. 그러나 그의 앞길을 필리우스가 막 았다. 툴위그는 멈칫했다. 어두운 표정을 지은 필리우스에게서, 전에 없었던 위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만 두세요! 어차피 당신들이 없으면 카야크는 봉인에서 풀려날 수 없습 니다. 제피로스의 계획은 자연히 실패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 들을 탈출시킨 것입니다." 필리우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의 주위를 감 사던 위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껏 자유를 얻었는데, 이렇게 빨리 죽는 건 싫으니까요." "그래도, 랜스를 버려두고 갈 수는 없어." 데이미아가 고집했다. 그녀는 잠시 로이와 툴위그에게 시선을 던지더니, 다 시 필리우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렇게 하자. 넌 저들을 데리고 말이 있는 곳으로 가 있어, 필리우스. 난 랜스와 함께 따라갈테니. 그럼 내가 잡히고, 운이 나빠서 힐리온의 주인도 - 누군지는 모르지만 - 잡혀도, 이디실과 카자룬이 없으니까..." "그건 안 됩니다, 데이미아 님!" 필리우스가 소리쳤다. "오르크들이 한 패라고요. 그들은 카야크의 부활이 자기들에게 이롭다고 믿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막으려 하니 당연히 자기네들에게는 좋다는 식이 죠! 그들이 점잖은 방식으로 나올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랜스를 내버려둘 수 없는 거야!" 데이미아는 굽힘이 없었다. 툴위그와 로이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 치 막 피어난 나뭇잎처럼 생명력에 넘치는 눈을 부릅뜨고 필리우스를 똑바 로 쳐다보는 그녀를. 그녀는 더 이상 수다를 떨던 어린 요정 소녀가 아니었 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자책에 시달리던, 아트웰에서의 그녀와도 달랐다. 로이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전에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드래크로니안의 신전, 엘미어가 숨겨진 그 곳에서, 그녀 외에는 플리에타의 마지막 후손이던 제이룬이 먼지로 산화(酸化)하던 그 자리에서... "어쩔 수 없군요." 하고 필리우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와 당신이 가죠... 안내인이 필요할테니까." "나도 가겠어!" 하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그러면 이디실의 주인 혼자서 남게 되는데... 그건 아무래도 불 안해요. 이디실의 주인을 지켜 주십시오. 그와 함께 미리, 말들이 있는 곳으 로 가 주십시오. 이 동굴을 죽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툴위그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미아는 마치 딸을 걱정하는 아버 지와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툴위그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걱정 말아요, 툴위그. 무사히 랜스를 데리고 나올테니까요. 잠시 후에, 비 밀 통로의 끝에서 봐요!" 그리고 그녀는 필리우스와 함께,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4. "인간들의 원군이라... 이제 간들이 부어서 별 짓을 다 하는군." 아크트는 코웃음을 치며 보고를 올린 오르크 병사를 발로 찼다. 그러나 그 의 반응과는 달리, 그의 마음 속은 지금 부글부글 끓고 있다고 해도 모자랄 정도였다.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은 감쪽같이 사라졌지, 가뜩이나 낡은 성 은 그 미친 드래크로니안의 마법사가 반쯤 부수어 놓았지, 하르크자엘이 그 렇게도 큰 소리치던 힐리온은 영영 빼앗겨 찾을 방법이 묘연하지 - 물론 하 르크자엘이 한 방 먹은 것은 고소한 일이지만. 하여튼 제대로 돌아가는 일 이 없는데, 마침 인간들의 왕이 군사를 이끌고 도착했다니. 왕이 몸소 여기 까지 왔다면 이유는 뻔했다. "제길... 노토스에다 하르크자엘까지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우리 오 르크 족의 임무는 도망친 포로들을 찾는 것이다." 아크트는 제법 위엄 있게 임무를 내렸으나, 이것 역시 그의 성에 안 차는 일이었다. 그는 조무래기들을 쫓아 성 안을 이잡듯 뒤지기보다는 인간들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이렇게 사소한 일은 다크엘프 같은 힘 없는 놈들에게 시키면 딱 좋을텐데, 대체 카야크 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계신 건지...' 그러나 이 상황에서 카야크에게 이것저것 건의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막 봉인이 풀리려 하는 순간에 일이 틀어져 버렸으니, 그의 기분이 어떨지는 설명 안해도 뻔했다. 보아하니 언제나 예외로 취급하던 하르크자엘조차 알 현해 주지 않는다는 소문이었다. '하긴, 뭐, 이 기회에 하르크자엘이 점수가 깎였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이제 놈이 푸이 하르크까지 해산시켰으니, 놈을 물리치는 건 시간문제야. 카 야크 님이 힘만 되찾으신다면 언제든지...' "쿠푸-헤! 쿠푸-헤!" 갑자기 흥분된 외침이 그의 생각을 끊고 들려왔다. 한 신참 병사가 환한 낯으로 허둥지둥 달려오고 있었다. 아크트는 생각을 방해받았다는 것이 화 가 났으므로, 일단 식탁에 놓여 있던 쟁반 하나를 들어 냅다 그 병사에게 던졌다. 이래뵈도 오르크 들의 총지휘자의 실력이니 보기 좋게 명중한 것은 당연했다. 신참 오르크는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뻗어 버렸다. "감히 내가 생각하는 데 방해하다니... 물 뿌려서 내게 데려와!" 병사들은 아크트가 명령한 대로 따랐다. 어린 오르크 병사는 눈 위에 혹이 커다랗게 난 채,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아크트 앞에 섰다. 아까와는 달리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모습이었다. "제...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쿠푸-헤...? 만약 그렇다면... 용서 를..." "내가 생각하고 있는 데 방해했잖아! 어쨌든 무슨 일인지나 들어 보지. 만 약 별볼일 없는 일로 그 난리를 떨었으면, 네 놈 목숨은 없는 줄 알아!" 그 말에 병사는 기가 잔뜩 죽어서 우물거리더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비밀 통로를 발견했습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아무래도 로크 페울 로니의 주인들이 그 길로 간 것 같..."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크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 에 희색이 만연했다. 이미 아까 하던 생각이나 불만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 다. 그는 넓은 방 안은 물론 성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병사 들에게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당장 그 못된 포로들을 잡으러 가자!" "크와아아!" "우그르! 우그르!" 어쨌거나 싸우러 간다는 말에, 오르크들은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무 기를 휘두르며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아크트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그를 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안 됩니다!" 아크트는 그를 돌아볼 새도 없이 칼을 날렸다. 그러나 그의 칼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불꽃을 튀기며 땅 위로 떨어졌다. 아크트의 얼굴은 금방 분노로 일그러졌다. "네 놈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두아스!" 드아스는 넓은 알현실 문의 한 가운데에 버티고 서 있었다. 혹시 아크트가 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니 억누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자신을 공격할 경우를 대비하여 마법의 보호막을 걸어 놓은 채로. 가득이나 왜소한 몹집의 그는 며칠 사에에 더욱 조그맣고 더욱 볼품없어진 것 같았다. 얼굴을 덮은 털은 윤기가 없이 엉킨 잿빛이었고, 온몸이 먼지투성이였으며 곰팡이 냄새 를 풍겼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아크트를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쿠푸-헤... 그러나 일단 제 말을 좀 들어 주십시오. 하르크자 엘은 미쳤습니다!" "그건 우리 모두 알아! 겨우 그 일 때문에 날 방해했느냐?" 아크트의 대답은 너무도 간단하게 튀어나왔다. 두아스는 말문이 막힌 듯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아크트는 그런 그에게 침을 뱉으며 소리를 질렀다. "어서 그 문에서 비키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이제야 겨우 로크 페울로 니의 주인들이 도망친 비밀 통로를 찾아, 그들을 잡으러 가려 했는데! 만약 그들을 놓치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거냐, 두아스?" 그러나 '로크 페울로니'라는 말이 두아스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그는 순간 거의 경련을 일으키듯 부르르 떨더니, 놀라울 정도로 큰 소리로 외쳤 다. "안 됩니다. 로크 페울로니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계속) "완전히 정신이 나갔군." 아크트는 피식 웃으며 칼을 들어올렸다. 그의 칼날은 바람을 가르는 소리 를 내며 두아스를 향해 내달았다. 쨍강! 아크트의 칼날이 무엇인가 단단한 것에 부딪쳐 멈추었다. 아크트는 팔이 저릴 정도의 충격에 칼을 떨어뜨리며 물러섰다. 놀랍게다 바닥에 떨어 진 칼은 두동강이 나 있었다. "두아스...!" 그가 신음하듯 외쳤다. 두아스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하얀 빛을 발하는 주먹만한 수정 구슬이었다. 칼날을 맞은 자리에는 가느다란 금이 가, 다른 부분보다도 훨씬 더 밝은 빛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보레아스의 마력입니다." 하고 두아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충성스런 오르크 족 전사 한 명이 목숨을 담보로 가짜 카야크의 방에서 훔쳐 내 온 것입니다. 이 구슬을 매개로 가짜 카야크는 보레아스의 마력을 빌어다 썼던 것입니다. 아크트 님! 그는 신도 무엇도 아닙니다. 아크트 님께 서 지금까지 섬기던 그 자는, 단지 하르크자엘에게 속고 있는 바보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 말을...!" "증거를 보여 드릴까요?" 두아스는 담담하게 말하며, 수정 구슬을 다시 품 안에 넣더니 손뼉을 쳤다. 그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오르크 병사 두 명이 즉시 문 뒤에서 수염이 하얗게 센 인간 한 명을 이끌고 나타났다. 초라한 옷차림과 왜소한 몸집의, 농노처럼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오르크들만 잔뜩 모인 이 방을 둘러보더 니 공포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아이고... 살려만 주십시오, 오르크 님들... 제가 잘못한 거라고는, 제가 잘 못한 거라고는 그저 오래 전에 집을 나간 동생을 보고 싶어한 것밖에 없습 니다..." 공포에 질려 맥을 못 추는, 비굴한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크트 는 그 목소리가 누구와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너무나도 닮아 있는 목소리 였다... "동생... 이라고?" 되묻는 아크트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예, 예, 오르크 나으리... 제발 살려 주십시오..." "동생 얘길 해 봐!" "제... 쌍둥이 동생입죠. 농부의 자식답지 않게 마술에 관심이 많아서, 부모 님이 항상 걱정했습죠. 야단도 많이 맞았지만... 결국에는 마녀들 뒤를 쫓아 다니며 그 망할 기술들을 배우더니... 악마가 데려갔습죠, 예. 그건 악마였습 니다, 나으리. 악마가 아닐 리가 없었죠. 눈은 피처럼 새빨갛고, 어둠 속에서 도 번쩍번쩍 빛나고, 거기다 그렇게 까맣고 큰 날개를 가진... 악마가 그 애 를 꼬여 갔습죠. 그 요술들이 나쁜 거라고, 악마의 기술이라고 그렇게도 아 버지가 말씀하셨는데, 듣지 않더니만 결국 악마에게 잡혀 간 겁니다..." 식은땀이 아크트의 얼굴에 난 검은 털을 적셨다. 두아스는 대답을 기다리 는 듯 그의 얼굴을 똑바고 바라보고 있었다. 믿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 일은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저 목소리는, 저 목소리 는... "새 칼을 다오!" 하고 그가 소리쳤다. 오르크 중 한 명이 얼른 준비해 놓은 칼을 가져다 바 쳤다. 아크트는 그 칼을 단숨에 빼어들더니,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쳤다. "나를 따르라! 당장 지하 신전으로 가자!" 오르크들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함성을 지르며 아크트의 뒤를 따랐다. 두아 스 역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 바삐 걸어갔다. 그의 뒤로는 두 명의 오르크가, 마구 소리를 지르는 오르크들 틈에서 거의 정신을 잃은 노인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아크트의 군사들이 신전으로 쿵쾅거리며 내려오자, 카야크가 문을 지키도 록 세워 놓은 두 명의 흑마술사가 음산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검은 로브 로 온 몸을 가리고, 얼굴까지 검은 후드로 가린, 카야크의 직속 부하들이었 다. 그러나 아크트는 대답을 하려 하지도 않고, 대뜸 그 중 한 명의 목을 베 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습격이었으므로, 그는 피할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그 대로 쓰러져 죽었다. "이... 무슨 짓이냐! 아일룬 우클라스!" 다른 흑마술사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아크트에게 주문을 읊었다. 검 은 불덩이가 그를 향해 날아갔으나, 아크트는 가볍게 피해 버렸다. 불덩이는 천정에 맞고 산산히 부서졌다. 흑마술사는 다른 주문을 읊으려 했으나, 이미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셀 수도 없이 많은 오르크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던 것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가 주문의 첫 마디를 읊기도 전에 오르크들의 메이스가 그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오르크들이 자신의 무기와 몸으로 잠긴 철문을 부수어 넘어뜨렸다. 그들의 함성이 어두운 지하도의 안을 마구 뒤흔들고 있었다. 오르크들이 부서진 철 문을 넘어 그곳을 떠났을 때, 살해당한 두 흑마술사의 시체는 이미 그것이 원래 무슨 모양이었는지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무슨 일이야?" "오르크들...!" 문 안에는 더욱 많은 흑마술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더군다나 오르크들이 조용히 오는 것도 아니라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쿵쾅거리며 들이닥치자, 멀 리 있던 흑마술사들도 무슨 일이 일어났나 해서 당장 달려와 모여들었다. 그러나 오르크들은 상관조차 하지 않고, 무작위로 메이스와 칼들을 휘두르 며 기세 좋게 전진했다. "아일로카 우클라스!" "갈 아카드, 이루크! 이루크!" 흑마술사들의 마법이 지하도 안을 휩쓸었다. 여기저시거 불덩이와 얼음, 바 람, 소화된 괴물들이 동시에 쏟아졌다. 수많은 오르크들의 시체가 널브러지 고 휘날렸다. 그러나 흑마술사들은 숫적으로 너무나 열세였다. 게다가 오르 크들은 지금 단단히 피에 취해 투지를 불태우는 상태였다. "아르그르! 아르그르!" "부르그! 부르그 쿠푸-헤!" "아르그르 투!" 동료가 죽건 말건, 자기 앞에서 불꽃이 터지건 말건, 오르크들은 무기를 휘 두르며 전진했다. 온갖 주문을 다 동원하며 싸우던 흑마술사들이 칼과 메이 스에 갈기갈기 찢기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문을 부수어라!" 신전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아크트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흥분한 오르크들은 철문에 머리를 박고 칼과 메이스를 휘두르며, 문을 부수고 있었다. 다른 문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도 오래 버티지 못했다. 이성을 잃은 오르크들의 앞에서 오래 버틸 수 있 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있을까. "무슨 일이냐, 두아스!" 신전의 한가운데에 있던, 검은 로브를 늘어뜨린 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그 를 꾸짖었다. 그 역시 후드로 얼굴을 가린, 다른 흑마술사와 다름이 없는 모 습이었으나, 그 제왕과도 같은 위엄과 당당한 모습에서 다른 이들과는 구별 되었다. 위엄이 가득 찬, 음산하고 신비로운 목소리. 그러나 방금 아까 들었 던 그 비굴하고 겁먹은 목소리와, 놀랄 만큼 비슷한 목소리였다. 그의 발 밑 에는 이제 모두 드러난 거대한 문, 카야크의 힘을 봉인했다는 문이, 열쇠만 을 기다리며 잠들어 있었다. "카야크 님, 만나보셔야 할 분이 있습니다." 하고 두아스가 아크트 대신 말했다. 누가 듣더라도 불손한, 비아냥거리는 목 소리였다. 카야크는 잠시 머뭇거렸다. 당장 호통을 쳐야 할지, 아니면 일단 이들의 말을 들어 주어야 할지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두아스는 그가 자신의 요구를 들어 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 해 도, 이렇게 많은, 그것도 피를 갈망하는 오르크들을 상대로 전투를 벌인다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그의 짐작은 적중했다. "좋다, 내가 만나야 할 자가 누구냐? 데려와 보거라. 그러나 그 이후에는 네 무례한 행동을 추궁받아야 할 것이니, 각오하고 있거라, 오르크 족의 흑 마술사여!" 두아스는 씩 웃었다. 그리고는 손짓을 하여 그 인간족의 늙은이를 카야크 의 앞에 데려오도록 했다. 늙은이는 겁에 질려 벌벌 떨면서 끌려왔다. 카야 크는 그의 모습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나는 모르는 자다." "그런가요? 아마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겠죠. 30년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도 긴 세월이니... 시간을 되돌린다면, 이 분을 알아보실 겁니다." 두아스는 이렇게 대답하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카드, 아카드, 하루바 야루, 아카드, 아카드, 자그드르 바아..." 하얀 연기가 두아스의 발밑에서 피어올랐다. 그 연기는 서서히, 점점 빠른 속도로 소용돌이치더니, 인간족의 노인에게로 덮쳤다. 그는 비명을 지를 새 도 없이 그 연기에 휩싸였다. 연기는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돌며, 그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오르크들은 모두 경외에 찬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 다. 쭈글쭈글힌 피부 ㅂ에 근육이 생겨나, 피부가 윤기있는 모습으로 펴지는 모습을. 그리고 새하얗던 머리칼에 검은 물이 차 오르고, 거의 벗겨졌던 정 수리에는 금방 까만 머리털이 솟아오르는 모습을. 멍청하고 흐릿했던 눈에 다히 빛이 나는 모습을. 흰 연기가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노인 이 아니라, 검은 머리칼과 남성적인 - 잘 생겼다고도 말할 수 있는 - 외모 를 가진, 건장한 청년이었다. 어디선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오르크들은 모두 카야크를 바라 보았다. 그가 충격을 받은 듯 숨을 몰아 쉬며,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물러서 고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더욱 아까의 노인의 목소리와 닮아 보였다. "아니야... 나는 저 자를 모른다. 어서 끌어내라! 나는 저 자를 몰라! 모두 어디에 있나!" 그러나 벌써 오르크들에게 죽임을 당한 흑마술사들이 그의 외침에 응답할 리 없었다. 거의 비명에 가깝게 자라나는 그의 외침을 끊고, 그의 목소리와 똑같은, 그러나 분명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물었다. "...게브?" 그 노인 - 아니 이제 청년으로 변신한, 그 인간이었다. 그는 아까와는 비교 도 되지 않는 모습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검은 로브로 몸을 감싼 카 야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너 게브구나! 그런 이상한 까만 옷을 입고... 뭐 하는 짓이냐? 당장 고향으 로 돌아가자!" "나... 나는 네놈을 모른다. 누구든 좋으니 이 인간을 끌어내!" "말도 안 되는 소리! 네 쌍둥이 형을 못 알아보겠단 말이냐? 악마의 놀음 을 좋아하더니, 완전히 미쳤구나!" 그 대담한 인간은 카야크의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휙 잡아채 버렸다. 오르크들은 모두 숨을 멈추었다 - 이 사태를 예상하고 있던 두아스마저도. 그 인간이 몰상식할 정도로 대담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행동은 당연 한 것인지도 몰랐다 - 그는 지금 카야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지도 못했 으니. 그들이 놀란 것은 그 후드 아래의 얼굴 때문이었다. 완전히 똑같았다. 청년으로 변한 노인의 얼굴과, 후드 아래의 창백한 얼굴은... 카야크는 그들의 시선을 알아보았다. 그는 자신을 향해 손을 뻗치는, 자신 과 똑같은 얼굴을 가진 인간을 매섭게 뿌리치며, 후드로 다시 얼굴을 가렸 다. 인간은 털썩 쓰러졌다. 그의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이 후례자식 같은 놈! 제 형도 못 알아봐!" 그는 벌떡 일어나 카야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몸에 손을 대기 직 전, 그 인간의 몸은 폭발하듯 불길에 휩싸였다. 인간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카야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재가 되 어 부스러져 내렸다. 카야크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드로 가리워진 그의 얼굴이 두아스를 향했다. 그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아스... 네놈... 죽여버리겠다!" 그가 팔을 휘두르자, 거대한 푸른 불꽃이 두아스를 향해 날아왔다. 그러나 두아스는 당황하지 않고, 품 안에 감추어 두었던 수정 구슬을 꺼냈다. 놀랍 게도 그 작은 구슬은, 두아스의 몸집보다도 더 컸던 푸른 불꽃을 한순간에 빨아들였다. 그리고는 눈을 아프게 할 만큼 강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두아 스는 공중을 향해 그 구슬을 던져올렸다. 마치 불꽃놀이 같은 화려한 빛을 어두운 천정 위에 터뜨리며, 그 구슬을 폭발했다. "욱...!" 카야크가 가슴을 움켜 쥐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임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으나, 가슴을 움켜 쥔 손이 쪼그라드는 것만은 확실히 보였다. 그 손은 마치 30년의 나이를 순식간에 먹는 것처럼, 급속도로 주름 이 지고 검버섯이 피고 있었다. "드래크로니안의 마력으로 그동안 늙지 않았었지... 하지만 그 마력을 끌어 다 쓰던 매개체가 부서졌으니 네 몸이 원래의 나이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 간으로서의 나이를..." 두아스가 카야크의 앞에 나서며, 조용히 말했다. 카야크는 얼굴을 들었다. 너무 급히 드느라 그의 머리에 씌워져 있던 후드가 벗겨져 버렸다. 그의 얼 굴은 두아스가 잡아 왔던 아까 그 노인의 얼굴과 꼭 같았다. 두려움 대신 분노로 흐려진 눈빛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랄까... "아니야!" 그는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는 누구의 마력도 빌어 쓰지 않는다! 나는 카야크, 혼돈의 신이야!" 그는 두아스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서 나온 것은, 아까와 는 달리 한 뼘조차 되지 않는 조그만 불꽃이었다. 그것은 두아스의 몸에 닿 자마지 피시식 하고 하얀 연기를 내며 사라져 버렸다. 두아스는 무표정하게 선 채 그 인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카아그다! 카아그다! (사기꾼! 사기꾼!)" 오르크들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얼거림은 순식간에, 분노에 찬 고함으로 자라났다. "카아그다!" "아르그르, 아르그르!" 카야크, 아니 인간 게브의 얼굴을 두려움의 그림자가 뒤덮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인지, 아니면 오르크들을 향해서인지, 절망적인 절규를 터뜨렸 다. "아니야. 나는 혼돈의 신, 카야크다! 나는 일개 농노의 자식이 아니란 말이 야! 나는 위대한 신이다. 나는 카야크다!" 그의 외침은 오르크들의 칼날과 메이스 아래, 죽음을 앞둔 비명으로 바뀌 어 갔다. 5. "헉...!" 라우더 성의 탑에 있던 보레아스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비틀거렸다. 곁에 있던 제피로스가 얼른 그를 부축했다. "왜그래? 괜찮아?" "괘... 괜찮습니다. 별일 아닙니다." 보레아스는 정말로 별일 아닌 듯, 곧바로 균형을 잡으며 혼자 일어섰다. 걱 정스럽던 제피로스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무슨 일이야? 그 필리우스인가 하는 놈과 싸우느라 기력을 너무 낭비한 건 아니겠지?" "그런 건 아닙니다. 대체 이게..."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젓던 보레아스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 다. 그는 고개를 쳐들더니 절박한 표정으로 제피로스에게 외쳤다. "제피로스 님, 카야크입니다." "뭐?" "카야크... 가자 카야크와 제 마력을 연결하던 매개체가 깨졌습니다!" 제피로스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들통난건가... 짐작했던 일이지만..." "웃을 일이 아닙니다. 오르크들이나 타락한 용족들이 비밀을 밝혀낸 게 틀 림없습니다. 그러니 어서 이 곳을 피해야...!" "알고 있어. 자네는 이곳에 남아 있는 드래크로니안을 이끌고 어서 도망치 게. 몇 명 안 남아 있을거야." "제피로스 님께서는...?" "나도 곧 따라가겠네. 하지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까요? 시지리스입니까?" "글쎄... 시지리스도 좋겠고... 라벤데일로 가던지." "제피로스 님!" 보레아스는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과민반응 할 것 없네. 자네가 라벤데일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는 것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라벤데일에 숨겨진 페레노스들이 살고 있다는 헛소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도..." "제피로스 님, 저는 단지..." "변명할 것 없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어. 나중에, 이곳을 벗어나서 길게 이야기하지. 우리의 계획은 - 아니, 내 계획이라고 해야 할까 - 끝이 난 거 야. 잠시동안만 라우더의드래크로니안 족을 부탁하네." 제피로스는 웃는 낯으로 보레아스의 등을 두드렸다. 보레아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제피로스를 바라보았다. 실패했다는 사실을, 저렇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니... 보레아스 자신은 제피로스의 계획에 반대했었다. 처음 부터. 그가 제피로스의 휘하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계획 때 문이 아니라 제피로스라는 드래크로니안에게 봉사해야 할 자신의 의무 때문 이었다. 그래, 충성심, 혹은 우정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그런 자신도 지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ㅡ 지페로스는 저렇게 태연한 것 이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을 만난 사람처럼... '그러면... 제피로스 님도 사실은, 이 일의 실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인 가. 마음 한편으로는...' "걱정 마십시오. 남아 있는 드래크로니안들을 이끌고 시지리스로 가겠습니 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속히 오십시오." 보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거의 모든 드래크로니안들은 시지리스로 이주시킨 후였고, 지금까지 라우더에 남 아 있는 이들은 고작해야 3,40명 정도였으니까. 제피로스는 씩 웃으며 창문 을 통해 날아갔다. "부탁하네, 보레아스!" 6. "헉헉, 필리우스... 아직 멀었어?" 데이미아는 끝도 안 보이는 계단을 달려올라가며 칭얼거리듯 물었다. 그녀 를 돌아보며, 앞장서서 달리던 필리우스가 피식 웃었다. "그럼 지하에서 탑 위로 올라가는 게 쉬울 줄 아셨어요?" "그, 그렇지만..." "많이 힘드시면, 업어 드릴까요? 라스헨 에이니드!" "치이, 됐어. 몸도 안 좋은 주제에!" 데이미아는 입을 삐죽 내밀고 속력을 더했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적을 만 난 일은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러나 그 사실이 데이미아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아무리 운이 좋다 해도, 지금까지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지나고, 성의 마당을 통해 달리기까지 했는 데, 이렇게 아무도 안 만날 수가 있을까? "피, 필리우스... 적이 너무 없는 것 같지 않아?" "글쎄요... 카야크 앞에 모여서 다같이 기도라도 드리고 있나보죠." "...물어 본 놈이 잘못이지..." "하지만 너무 섭섭해 마세요. 저기, 괴물들이 떼로 몰려오는 것 같은 소리 가 나네요." "...!" 필리우스의 말은 사실이었다. 계단 저편에서 여러 개의 발이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으으렁거리는 소리와 비명 비슷한 울부짖음과 뒤섞여 다 가오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발을 멈추고 숨을 고르며 엘미어를 잡았다. 필리 우스 역시 멈추어 서서 공격에 대비할 준비를 했다. "온다...!" 선두에 서서 달려오는 것은 세 마리의 오르크들이었다. 어디서 싸우다가 왔는지, 갑옷에 피가 흥건했다. 그들이 쳐들고 달리는 메이스에도 피가 흥건 히 묻어 있었다. 그들은 데이미아와 필리우스에게 정면으로 박치기라도 할 생각인지, 속도도 늦추지 않고 엄청나게 빠른 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쟤, 쟤네 어쩌려고 저러지?" "글쎄요, 새로 나온 전술인가..." 필리우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데이미아와 필리우스는 펄ㅉ 뛰어 스 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었다. 주문을 욀 시간도 벌고, 운만 좋다면 등을 공격 할 목적으로.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 오르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쿵쾅거 리며 나선형의 계단을 달려내려가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 "...뭐야...!" 데이미아와 필리우스는 이 황당한 사태에 할 말을 잊고, 입을 딱 벌린 채 그들이 사라진 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우스의 귀가 멀리서 퍼덕 거리는 날개 소리를 듣고, 갑자기 데이미아의 머리를 잡아 누르며 소리쳤다. "엎드려요!" 필리우스가 얼마나 머리를 세게 눌렀는지, 데이미아는 엎드리고 싫어도 엎 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거센 바람과 푸드덕거리는 날개짓소 리와 함께, 기괴한 비명이 지나갔다. "캬아아악!" "하피...!" 그들이 사라지자, 데이미아는 고개를 들며 중얼거렸다. "하피잖아. 하지만... 어째서 하피가 오르크들을 공격하는 거지?" (계속) "하피들이..." 필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피들은 원래 오르크들과 한통속은 아니죠. 단지 컨트롤되고 있을 뿐이 었으니까..." "무슨 소리야?" "하피들은 원래 제멋대로인 짐승에 불과해요. 잘못 만들어진 짐승... 요정이 나 인간들의 대용품으로 만들어진 오르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죠. 그들은 자기 종족까지도 죽이고 그 썩은 시체를 먹을 수 있으면 만족하는 종족이니 까..." "하, 하지만 오르크들과 한편이 되어서 싸우는 걸 봤는데!" "그건 그들의 정신의 통제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일종의 세뇌라고 할까... 카야크의 마력이 그들을 부리는 거죠." "그런데 그 컨트롤이 풀렸다는 건...?" "두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수 있겠죠. 첫번째로 카야크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오르크들을 다 치워 버리기로 했던가, 아니면 두번째로 카야크의 마 력이 갑자기 사라졌거나... 예를 들어 카야크가 죽거나 했다면..." "휴우..."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찌 됐건. 큰일났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군. 카야크가 그런 식으로 컨트롤 하는 괴물들은 하피 말고 또 뭐가 있지?" "그러니까... 로크, 좀비 늑대들, 기형 용들 중 상당수, 그리고..." "그리고?" "...직접 보세요." 데이미아는 필리우스가 가리키는 쪽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거대한 박 쥐들이 한 떼로 몰려 그녀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얼마나 촘촘하게 무리 를 지어 날아오는지, 마치 검은 물결이 그녀를 덮치려고 달려오는 것 같았 다. 그녀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엘미어를 들고 주문을 외웠다. "아스틸라 넬 헤인 딘! 이루크 티리아드!" 그녀의 손에 들린 엘미어의 녹색 보석이, 노란 빛을 발했다. 그녀는 박쥐들 을 향해 엘미어를 힘차게 휘둘렀다. 커다란 황금빛 불길이 엘미어로부터 솟 아나오더니, 거대한 박쥐들을 휩쓸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뼈조차 남지 않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역시... 엘미어..."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들여다 보며, 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순 간, 그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몸은 휘청거렸다. 필리우스가 얼른 그런 그 녀를 부축했다. "데이미아 님, 당신은 아직 엘미어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엘미어를 통해 발 휘하는 힘이더라도 그 힘의 근원은 당신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물론 지팡이를 통해 낭비되는 힘이 적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엘미어가 원래 의 힘보다 더 많은 힘을 증폭시켜 줄 수는 없는 겁니다." "아... 알고 있어!" 데이미아는 얼른 균형을 잡으며 얼굴을 붉혔다. 필리우스에게 아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필리우스는 언제나 공손하 긴 했지만... "그럼, 갈까요?" 데이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다시금 계단을 달려올라갔다. 오르크 들의 비명과 무슨 동물의 울음인지 짐작할 수 없는 괴성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곧이어 계단의 끝에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한 마디로 아수라 장이었다. 한 쪽에서는 오르크들이 늑대에게 뜯어먹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기형 용들이 늑대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거대한 뱀을 마구 메이스와 칼로 태려치는 한 무리의 오르크들도 보였다. 그 뱀은 고통에 몸을 뒤트느라, 성 벽에 몸을 쿵쿵 부딪치고 있었다. 이미 천정과 벽의 상당 부분에 금이 가 돌 부스러기가 떠러져 내리고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의 일부들로 바닥은 제 색깔을 알아볼 수 없었다. "아스틸라...!" 데이미아가 공포에 질린 채 입을 딱 벌리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필리우스 는 그다지 놀라지 않고, 어두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카야크, 카야크... 로 브린 로르 딜, 하르크자엘... (혼돈, 혼돈... 당신은 뜻을 이루었군요, 하르크자엘...)" 늑대 한 마리가, 계단의 발치에 서 있는 그들을 보더니 피가 흘러내리는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데이미아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 반사적으로 엘미어를 휘둘렀다. 엘미어의 보석 부분이 늑대의 몸에 닿자, 그 늑대는 외 마디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어 부서져 내렸다. "데이미아 님! 엘미어를 쓰지 마십시오!" 필리우스가 다급하게 외쳤다. 데이미아가 멈칫하는 사이, 다른 두 마리의 늑대들이 그녀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주문을 읊으려는 찰나, 필리우 스가 얼른 그녀의 늑대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가 가만히 노려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두 마리의 늑대는 갑자기 쓰러지더니 피와 거품을 잔뜩 토해내고 죽었다. 데이미아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내가 할 수 있어, 필리우스!" "그렇다면 엘미어 없이 하십시오, 데이미아 님!" "명령하지 말란 말야. 마치 오빠처럼! 전에는 뭐든 내가 하자는 대로 하더 니!" "크와아악!" 데이미아의 마지막 단어는 괴성에 묻혀져 들리지 않았다. 각각 눈이 하나 씩 있는, 머리 다섯 개를 가진 뱀 모양을 한 괴물이, 데이미아와 필리우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다지 빠른 속력은 아니었다. 데이미아는 엘미어에 기를 모으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갈 카하렐리, 레이스..." 그러나 이번에도 필리우스가 그녀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우클라일룬!" 급하게 주문을 외운 것이 확실했다. 그의 마력은 채 형태가 갖추어지지 않 고, 흐물흐물한 불의 반죽처럼 되어 긴 꼬리를 흘리며 괴물에게 날아갔다. 그나마 괴물의 머리 중 두 개가 떨어진 것은, 그 마법을 쓴 사람이 다름 아 닌 필리우스였기 때문이리라. 데이미아는 맥이 빠진 채 그가 싸우는 모습을 구경만 했다. 필리우스는 그 녀가 나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비로소 안심했는지 제대로 정신을 집중하 여 주문을 읊었다. "갈 아카드, 데인 헤이 우클라스..." 그러나 이미 그 가까이로 다가온 괴물이, 세 개의 입을 한꺼번에 크게 벌 리며 그에게로 덮쳐왔다. 필리우스는 가볍게 뛰어올라 그것의 공격을 피하 면서도, 정신을 흩뜨리지 않고 계속 주문을 외웠다. "엘테이렌!" 순간 괴물의 몸은 펑! 하고 터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그 피를 뒤집어쓰지 않기 위해 얼른 계단 밑으로 몸을 숙였다. 필리우스 역시 자신의 주위에 마 법의 보호막을 쳐 두고 있었는지, 피가 몸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그 피를 뒤집어 쓴 다른 괴물들과 오르크들은, 전부 몸을 뒤틀며 괴로워하기 시작했 다. 그 비명이 한데 어우러지는 소리가 너무 끔찍했으므로, 데이미아는 귀를 막았다. "그럴 새가 없습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지금이 기회입니다. 어서 이쪽으 로!" 필리우스가 그런 그녀를 잡아 끌며, 바로 곁에 이어진 계단으로 달려갔다. 데이미아는 아무 저항 없이 그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에는 불 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불만이 말로 폭발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뭐든 멋대로야, 필리우스. 전엔 안 이랬잖아! 날 추켜세워 준 건 다 연기였어? 보레아스가 그렇게 시켰나?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어 린애라고 생각한 거야?" 그녀는 발을 멈추고,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던 필리우스를 거세가 뿌리치 며 소리쳤다. 필리우스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가더니, 곧이어 노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라스헨 에이니드라고 부르지 말란 말야, 이 다크엘프! 사실은 내가 라스헨 에이니드도 뭣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사실은 그냥 힘도 없고 엘미어도 못 다루는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 난 엘미어를 들고 있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해! 없으나 있으나 똑같다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난 엘미어를 손 에 달랑 들고, 오빠가 죽는 꼴을 대책 없이 구경만 한 어린애일 뿐이야! 그 렇게 말하고 싶은 거지!" "도대체 무슨..." 필리우스는 이제 화를 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 다. 데이미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연신 소리쳤다. "그래, 다들 그렇게 다루지 않아도 다 안다구. 네가 그렇게 취급하지 않아 도 나 혼자서도 다 안다구! 엄마가 죽고, 오빠는 두 번 죽었지. 내 앞에서, 아무것도 못 하는 라스헨 에이니드 앞에서 말야! 내가 다치게 한 랜스롤 고 쳐 준 것도, 너의 힘이었지. 그러니 나 같은 애의 힘은 필요도 없다는 거 지!" "그렇지 않아요!" 필리우스가 소리쳤다. "그럼 뭐야!" 데이미아도 맞받아 소리쳤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성 전체를 뒤흔드는 괴물들과 오르크의 외 침도 그들 사이의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필리우스는 데이미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 갈등은 드러나지 않았다. 마치 가면을 쓴 것처 럼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그가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 다. "데이미아 님... 라스헨 에이니드. 당신은... 당신은 단지 엘미어에 익숙하지 않은 것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는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모르시겠어요? 당신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이 것이 연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걱정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모르시겠어요?" "그러니까 50살도 안 된 어린애는 걱정된다는 거지. 당연히 넌 천 살이나 된 어른이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당신이 잘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걱정하는 거에요. 가능한 한, 가능한 한 제 힘으로 당신이 겪을 어려운 일을 막아 주고 싶으 니까... 당신에게 그것을 헤쳐나갈 힘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이지..." 필리우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엠로크의 심복 필리우스가 이런 소리를 지껄이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당신은 가치 있는 마법사에요. 당신은 저보다 훌륭한 마법사입니다. 그래요, 저는 500년이 넘게 마법을 써 왔습니다. 그러나 그 마법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해 본 일은 한 번도 없 었습니다. 단 번도... 500년이 넘는 시간동안! 당신은 훌륭한 마법사에요, 라 스헨 에이니드. 그래서 당신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거짓말." "아닙니다. 그래요, 전 거짓말에 익숙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진실입니다. 제 가 당신의 어머니를 안다고 한 것, 그것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녀를 만난 적 도 없었지요... 하지만 저는 단 한 명의 라스헨 에이니드를 알고 있고, 그녀 를 만난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녀는 제가 만난 마법사 중 가장 위대한 마법 사니까요." 데이미아는 말없이 필리우스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날카로운 웃 음소리가 그녀의 귀를 괴롭히기 전까지는. "하하하...! 감동적이군, 정말 감동적이야, 필리우스! 이제 별 소리를 다 지 껄이는군. 바보들을 상대하는 데에 지루해졌나? 엠로크가 이걸 보면 대성통 곡을 하겠군. 아니, 오히려 배꼽을 쥐고 웃을지도 모르지!" "두아스..." 필리우스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에 분노의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다 음 순간, 그는 데이미아에게도 두아스에게도 익숙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쎄, 두아스... 그래도 자네가 아크트 그 바보에게 벌벌 기는 것보다는 덜 웃겼을걸." "하! 마음대로 입을 놀리는 것은 여전하군, 필리우스! 나는 오르크 족의 미 래를 위해서라면 어느 누구에게든 복종한다. 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놈과는 틀리단 말이다!" "글쎄... 내 생각에는 너 같은 놈이 있다는 거 자체가 오르크 족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 것 같은데..." 필리우스가 싱글거리며 빈정대자, 두아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노기 띈 음성으로 두 팔을 뻗으며 소리쳤다. "르오트 타이!" 그의 손에서 사람 머리통만한 검은 불꽃이 뻗어나왔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주문도 외치 않은 채, 그 불꽃을 공중에서 터뜨려 버렸다. "자만하는 것 아냐, 두아스? 오르크 주제에! 너희는 몸으로 때우는 종족이 라는 걸 잊었나. 마법같이 머리 쓰는 건 안 어울린다고!" 필리우스는 이렇게 그를 놀리며, 일부러 똑같은 주문으로 그를 공격했다. "르오트 타이!" 두아스의 주문과는 격이 틀렸다. 검은 불꽃을 눈 깜짝할 새에 두아스에게 로 날아갔고, 두아스가 보호막을 만들 새도 없이 그의 몸에 부딪치며 쾅! 하 고 폭발했다. 자욱한 연기가 계단을 감쌌다. 필리우스는 데이미아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자, 기회입니다. 어서!" "왜? 죽은 거 아냐?" "오르크는 그 정도로는 안 죽는다고요." 데이미아와 필리우스는 연기 속에 싸인 두아스를 남겨 둔 채 열심히 계단 을 뛰어올랐다. 필리우스의 말이 옳다는 것은 곧 증명되었다. 계단 밑에서 두아스의 살기등등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것이다. "필리우스! 푸! 사아크! 차 우크 아르그르!" 쿵쾅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두아스는 아니었다. 그보 다 휠씬 크고, 여러 명이 달려오는 소리... "제길!" 필리우스는 등 뒤를 돌아보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길이의 거대한 늑대 세 마리가, 붉은 눈을 번쩍이며 그와 데이미아를 따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검은 털에서는 축축한 썩는 냄새가 풍겼다. "팔로카!" 필리우스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그의 손끝에서 푸른 빛줄기가 뻗어나가, 선두에서 달려오던 늑대의 미간을 관통했다. 가느다란 빛이었지만 보기와는 달리 위력을 발휘해, 그 늑대의 두개골의 절반을 날려 버렸다. "이런 소환수(召喚獸) 따위로 나를 물리칠 수 있을 것 같더냐! 아일룬!" 퍽! 두 번째 늑대의 얼굴에 주먹만한 불덩이가 명중했다. 순식간에 그 늑대 는 불길에 휩싸여 쓰러졌다. "크와아악!" 마지막 늑대가 필리우스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가 주문을 외우려는 순간,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키드 제레이아드!" 휙! 날카로운 기류(氣流)가 늑대의 목을 갈랐다. 목이 없는 늑대와 그 목은 거의 동시에 바닥에 털썩! 하고 떨어졌다. 데이미아는 필리우스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엘미어만 안 쓰면 되는 거지?" "훌륭했어요." 필리우스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크...!" 늑대들을 따라 달려올라오던 두아스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그들을 해치 운 데이미아와 필리우스를 보자, 기가 찬다는 듯 이를 갈았다. 필리우스는 상냥한 미소를 띄우며 그에게 말했다. "이제 나와 너의 간과할 수 없는 실력차를 깨달았겠지? 많이 지친 것 같은 데, 이제 우린 내버려 두고 아크트한테 가서 신발이나 닦아 주지 그래?" "필리우스 네놈...!" 두아스는 흉물스러운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말했다. 그는 한 발짝 물 러서더니, 갑자기 오르크 어로 외쳤다. "이쿠르, 바루그! 아르그르, 아르그르 이르가!" 그러자 계단의 양쪽을 가득 메우며, 오르크들이 들이닥쳐 왔다. 필리우스는 얼굴 가득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 실력이 안 되니까 군사를 부르는군... 너같은 녀석이 마법사라 불리고 있다니! 좋아, 와라, 엠로크 벨라디오스의 제자의 실력을 보여주마! 이루크 아일라스! 갈 엠로크 벨라디오스!" 새빨간 불의 폭풍이 계단 위쪽을 휩쓸었다. 오르크들은 얼른 방패로 그것 을 막으려 했으나, 방패조차 그 불길에서는 녹아 버렸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오르크들은 시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까맣게 타 버렸고, 다른 오르크들도 화상으로 죽거나 살아 있다 해도 고통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며 뒹굴고 있 었다. "크으으..." 계단 아래쪽에서 달려내려오던 오르크들이 놀라서 발을 멈추었다. 필리우스는 데이미아를 향해 속삭였다. "라스헨 에이니드, 어서! 오르크들이 다시 들이닥치기 전에 가십시오. 이 계단을 계속 올라가면, 탑 꼭대기에 랜스 님이 갇혀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처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말도 안 돼, 필리우스! 저 많은 오르크들을 어떻게!" "방금 보셨잖아요. 오르크 따위는 제게 상대도 안 됩니다." 필리우스는 미소를 지었다. 창백한 얼굴에 드러난 밝은 표정이 소름이 끼 칠 만큼 누군가와 닮아 있었다.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함께 싸우면 되잖아. 필리우스는 지금 몸도 안 좋은데! 손이 떨리고 있잖아! 더 이상 무력해지는 건 싫어!" "무력하지 않다면, 증명하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필리우스는 마치 농담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그의 말투에는 거역 할 수 없는 무엇이 들어 있었다. "지금 저는 당신이 필요 없습니다. 가서 랜스 경을 도우세요. 너무 늦지 않 게 쫓아갈테니!" (계속) "그러나...!" 데이미아는 입을 열었으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럴 새가 없었던 것이다. 필리우스의 마력을 보고 잠시 겁을 먹었던 오르크들이, 용기와 살의를 되찾 고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어리석은 것들. 그렇게 보여주었는데도 모르겠다는 거냐? 하디미르, 에디 오스 제레이아드, 테인 로르 페이! 제레이드 모디엘라스!" 다가오던 오르크들을 향해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수십마리의 오르크들 이 날아가 계단으로 굴러떨어졌다. 필리우스는 계단 위로 데이미아를 밀어 보내며, 우왕좌왕하는 그들을 향해 한손을 뻗고는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쳤 다. "이루크 아일라스!" 아까와 같은, 그러나 규모가 좀더 작은 불꽃이 휘몰아쳤다. 오르크들의 털 과 옷에 불이 붙어, 악취를 풍기며 타들어갔다. 필리우스는 그것 보라는 듯, 데이미아를 향해 여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 보세요. 누워서 떡먹기라니까요! 어서 랜스 경에게 가세요. 시간 낭 비하지 말고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순간에도, 필리우스는 아래층에서 달려올라오는 오 르크들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여기는 무엇보다 어둠의 종족의 본거지 였고, 그는 수많은 오르크들을 부릴 수 있는 오르크 족의 제 2인자, 게다가 그 자신과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을 마법사로서 산 두아스를 혼자 상대하는 것이었다. '누워서 떡먹기'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좋아... 그럼 무리하지 말고, 대충 상대하다 와야 해, 필리우스. 난 먼저 가 있을테니!" "걱정 마세요. 곧 갈께요!" "오래 걸리면 떼어 놓고 간다. 빨리 와!" 데이미아는 이렇게 소리치면서 계단을 달려올라갔다. 필리우스는 자신만만 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흥... 만용인가, 아니면 그 계집애를 떼어 버리기 위해 연기한 건가?" 두아스가 쉰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주문으로 이미 오르크들을 뒤덮 던 불길이 다 꺼져 있었다. 필리우스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이성적인 판단이지." "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어리석고, 제멋대로지. 엠로크가 명령을 내 려 주지 않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고 갈팡질팡하는, 풋내기 마법사일 뿐이야!" "그 풋내기 마법사의 수준이 네 수준을 훨씬 웃돌았다는 것을 잊은 모양이 군, 두아스?" "흐음... 하지만 내가 더 자신 있는 재주도 하나 있었지. 아카드, 아카드, 아 그 푸우 이이크르. 아카드, 아카드. 아그 푸우 이이크르, 다 아그 가 바루그 후우르, 아그 가 사그 후우르!" 두아스가 주문을 마치자, 까맣게 타 죽었던 어르크들의 시체가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화상을 입은 흉측한 모습으로, 아니면 아예 뼈가 다 드러난 모습으로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필리우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너 답게 지저분한 술수지. 기껏해야 뽐낼 재주가 시체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니!" 그러나 두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체들을 움직이기 위해 온 정신 을 집중하고 있어서, 말대꾸 한 마디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랬다 가는 금방 주문이 무너져, 시체들은 다시 쓰러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미숙한 녀석!" 필리우스는 비웃으며, 두아스를 향해 자그마한 불덩이를 던졌다. 그것은 화 살 같은 모양을 갖추어 가면서, 허공을 가르고 두아스를 향해 내달았다. "크와아악!" 그러나 그 불꽃에 휩싸여 사라진 것은 두아스가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낸 화상을 입은 좀비 오르크 중 하나였다. 그것이 갑자기 두아스의 앞을 가로 막고, 대신 불화살을 맞았던 것이다. 이미 필리우스의 주위에는 그가 살해했던 오르크들이 전부 다 일어나, 그 를 에워싸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피식 웃었다. "하, 그래... 해 보자 이거지, 두아스! 팔리루크! 갈 카하렐리, 레이스 키냐 스!" 그의 손길에서 새하얀 눈보라가 치솟았다. 그것은 하얀 소용돌이를 그리며, 그의 주위를 감싸고 돌았다. 그것에 닿기만 한 오르크들은 당장,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꽁꽁 얼어붙었다가, 마치 너무 차가운 기온 속에서 물병이 터 지듯 펑! 하고 터져 버렸다. 산산조각이 난 오르크의 일부분이 필리우스의 발밑에 널브러졌다. "두아스! 네 실력은 고작 이거냐!" 필리우스는 주문을 유지하면서도 잘도 떠들어대며 두아스를 약올렸다. 그 의 주위에서는 여전히 그가 불러낸 하얀 바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이미 죽어 영혼이 없는 오르크들은 끊임없이 그에게로 다가가려 했고, 그럴 때마 다 꽁꽁 얼어서 부서져 버렸다. "이...!" 두아스는 마침내 버티지 못하고 주문을 거두었다. 죽었던 오르크들이 다시 풀썩 쓰러졌다. 그러나 그 수보다 필리우스의 바람에 휘말려 부서져 버린 오르크의 수가 훨씬 더 많았다. 필리우스는 자기 앞에 놓은 까맣게 탄 오르 크의 머리의 일부분을 발로 툭툭 치며, 농담조로 물었다. "이거라도 한 번 되살려 내보지 그래? 볼만 할텐데!" "르오트 쿠아!" 두아스는 대꾸 대신 외쳤다. 앞으로 모은 그의 두 손에서, 불길이 부채꼴로 번지며 필리우스를 덮쳐왔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가볍게 뛰어올라 그것을 피하고, 맞받아 주문을 외웠다. "이따위 것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텐데? 이루크 우클라일라스!" 검은 불꽃이 두아스를 향해 휘몰아쳤다. 두아스는 재빨리 마법의 방패를 만들어 그 불꽃을 막았으나, 힘이 부족하여 뒤로 열 발짝쯤 밀려났다. 마법 의 방패가 금이 가 깨어지기 직전이 되었을 때, 필리우스는 주문을 거두고 새 주문을 외쳤다. "아일로카!" "크윽!" 가느다란 불의 줄기가 마법의 방패를 부수고 두아스의 어깨를 꿰뚫었다. 검붉은 피가 그의 로브와 털을 적셨다. 그러나 필리우스는 사정없이 그를 밀어붙였다. "갈 하디미르! 로카 제레이아드!" "크와악!" 두아스는 괴성을 지르며, 마법의 방패로 다시 그 주문을 막으려 했다. 그러 나 다친 어깨가 자꾸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이 상태에서, 필리우스와 겨룰 수 있을만큼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가 불러낸 바람은 평상시 의 그라도 오래 대항하지 못할 만큼 강한 힘으로 그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두아스가 굴복하려는 순간, 그를 도운 것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화살 이었다. "크윽!" 검은 깃털을 단 작달막한 오르크 족의 화살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필리 우스의 왼팔에 꽂혔던 것이다. 필리우스의 주문은 단번에 깨어져 버렸다. "이르가! 이르가!" "아르그르!" 한 무리의 오르크들이 계단을 달려올라오고 있었다. 족히 백 마리는 넘어 보이는 숫자였다. 필리우스는 잠시 두아스와 그 오르크 무리를 번갈아 노려 보더니,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팔에 꽂힌 화살을 잡았다. 그리고 신음조차 하지 않고 그 화살을 쑥 뽑아내었다. 살점의 일부분과 함께 딸려나온 화살 촉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필리우스는 잠시 그것을 보고 있더니, 미소 를 지우지 않은 채 화살에 묻은 자신의 피를 쓱 핥았다. "후후후... 그래, 이번에야말로 끝을 봐야겠지, 두아스... 언제나 오르크 족을 등에 업고 으스데는 네놈이 신경에 거슬렸어. 혼자의 힘은 형편없는 주제 에!" 그의 목소리는 조용한 만큼 남을 소름끼치게 하는 힘이 들어 있었다. 두아 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필리우스는 그와 오르 크들의 무리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어리석은 종족들. 너희들 모두에게 내 힘을 보여주마! 엠로크 벨라디오스! 게닌 딤 로르 페이. 게닌 딤 로르 페이아드 페이! 디 ㅋ라 에티로디나드, 로 르 다닌!" 필리우스의 외침이 성 안을 가득 울렸다. 그가 손을 높이 쳐들자, 갑자기 성의 천정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천정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 어져 내리더니, 이어서 벽이, 그리고 바닥이 흔들렸고, 이윽고 천정과 벽이 마구 부서져내리기 시작했다. 커다란 돌덩이기 오르크들의 머리를 짖이기며 떨어져내렸다. 두아스는 간신히 보호막을 펼친 채 그 공격을 막고 있었으나, 다른 오르크들까지 도울 수는 없었다. "게닌 딤 로르 페이! 엠로크!" 필리우스의 외침이 더욱 높아졌다. 그의 몸 주위에 검은 번개가 맴돌기 시 작했고, 이윽고 그것이 사방으로 펼쳐져 나가며 그의 주위에 접근하던 오르 크들의 몸을 사정없이 꿰뚫었다. 어쩌다 벽이나 천정에 부딪친 번개는, 커다 란 구멍을 남기며 폭발했다. 무너져 내리는 소리와 오르크들의 비명소리로 귀가 멀 지경이었다. '완전히 미쳤군, 필리우스 녀석...!' 두아스는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 다. 그러나 곧, 필리우스가 오르크 병사들을 공격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 머지, 두아스 자신을 잊고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군... 필리우스, 널 없앨 절호의 기회지. 설사 내가 목숨을 잃는다 해 도, 여기 있는 모든 오르크들의 목숨을 잃는다 해도... 너는 오르크 족의 미 래를 위해 죽어야 해!' "아카드, 아카드, 쿠크트 쿠푸... 차그 푸우 타그르, 차그 루우 타그르... 차그 와크트 타그르, 다 타그 후쿠 푸아...! (아카드, 아카드, 위대하신 군주여... 제 영혼을 가져가시고, 제 생명을 가져 가십시오... 제 모든 것을 가져가시고, 그리고 제게 힘을 주십시오...!)" 두아스는 보호막 안에서 가만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서 검 붉은 빛덩이가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얼굴을 덮고 있던 털 의 빛이 하얗게 세어 갔다. "아카드, 타그 후쿠 푸아!" 두아스의 주문이 완성됨과 동시에, 그의 보호막조차 그의 손에 빛나는 검 붉은 빛덩이 속으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가 그 빛덩이를 필리우스에게 쏘아 보낸 것과, 필리우스가 그것을 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엠로크! 헤인 로르 나우클!" 필리우스 역시 큰 소리로 외치며, 자신의 주위를 맴돌던 번개들을을 모두 모아 두아스에게 날려보냈다. 검은 번개들과 붉은 빛덩이가 둘의 사이에서 충돌했다. 주문을 유지하는 두아스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털은 이제 새하얗게 변했고, 이제 는 마치 갑자기 나이를 먹는 것처럼 얼굴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빛의 덩 어리를 유지하기 위해 앞으로 뻗은 손이 점점 가늘어지더니, 완전히 피골이 상접해지자 하얀 털이 마구 빠져 날리기 시작했다. '네... 생명인가, 두아스. 정말 어리석군. 어째서 이렇게까지?' 필리우스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는 흘끗 필리우스를 쳐다 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었다. 두아스 자신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었 다. 그러나 필리우스 역시 그보다 더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이 확실했다. 그 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고 온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입에 서 한 줄기의 선혈이 흘러나와 그의 로브를 적시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필리우스. 오르크 족의 미래를 위해 서다. 우리는 지배자로 태어난 종족 - 내가 죽은 후의 우리 종족의 영광을 위해서다. 그것을 위해 너는 사라져야 해. 엠로크의 제자 중 마지막으로 남 은 자, 그리고 우리를 적대하는 자... 내 생명과 맞바꾸어서라도...' '어리석은 놈...!' '그러는 네놈은 얼마나 영리한가? 어째서 도망칠 수 있었는데 맞붙은 것이 지... 그 어린 드라이어드 족의 계집이 그렇게도 중요했나?' '글쎄... 나는 언제나 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래, 너와는 다르지...' "크... 크으으..." 두아스의 몰골은 이제 완전히 미이라나 다름없었다. 털이 듬성듬성하게 빠 져, 뼈만 남은 흉측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우욱...!" 필리우스도 고개를 숙이며 피를 토해냈다. 그런 그들과는 상관 없이, 둘 사 이에서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검붉은 빛덩이와 검은 번개는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고 있었다. '네가... 죽더라도...냐, 두아스...' '그렇다...' '그래... 나도, 내가 죽더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한다. 하하... 우리는 최초로 의견의 일치를 본 셈이군... 잘 가라, 두아스...' '잘 가라, 필리우스...' 쿠르르르릉! 빛덩이와 검은 번개가 한 데 섞여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 구(求)가 되더니, 이윽고 점점 희고, 눈을 멀게 할 듯한 강한 빛을 발하면서 자라났다. 그것은 필리우스를 삼키고, 거의 동시에 두아스를 삼키고, 오르크 들의 성한 시체와 성하지 못한 시체의 조각들을 삼켰다. 이윽고, 벽과 천정과 바닥을 이루는 돌들도 그 빛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7. 쿠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한 진동음이 계단을 뒤흔들었다. 달려가던 데 이미아는 무릎을 쿵 찧으며 넘어졌다. "뭐, 뭐야...?" 그녀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마치 태양을 바로 보는 듯한 하얀 빛이 밀물처럼 밀려들어와 그녀의 눈을 덮쳤다. "아악!"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계단 아래로부터 강한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계단 위쪽으로 굴려보냈고, 둥글게 몸을 웅크리고 데굴데굴 굴러가 는 그녀의 몸 위로 작은 돌조각과 먼지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쿨룩쿨룩...! 필리우스는 대체 아래에서 뭘 하는거야?" 데이미아는 화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 위에 쌓여 있었던 먼지가 풀썩!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당장 아래로 달려가고 싶었으 나, 잠시 기다려야만 했다. 아까의 빛 때문인지, 일시적으로 시각이 마빕되 었던 것이다. 시력을 되찾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일단 앞이 보이기 시작하자, 그녀는 할 일도 잊고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까 눈이 먼 상태 에서 길을 마구 달려내려가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녀의 몇 발짝 앞에는, 거대한 거공이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계단은 중간에서 끊어져 있었고, 천정의 뻥 뚫린 구멍으로는 어두운 우클로우의 하늘이 보였다. 까마 득한 아래는 뿌연 먼지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피... 필리우스!" 데이미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이 들려올 리 없었다. 그녀는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았다. "역시... 역시 가 버렸어..." 그녀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물도 흘리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렇 게 될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필리우스에게서 제이룬 을 보았으니까. 의지할 수 있는 어른, 무엇이든 들어주고, 필요할 때마다 그 망토 자락에 몸을 숨길 수 있는 '오빠'를.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가라고 말 했을 때, 자신이 곧 뒤따라 가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그의 얼굴에서 필 리우스의 표정을 보았다. 똑같은 이별, 똑같은 슬픔.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흐릿해지는 눈앞으로 서서히 접근하는 오르크들의 모습이 보 였다. 세 마리. "아일로카! 갈 아스틸라!" 그녀는 주저 없이 외쳤다. 황금빛의 불꽃이 세 마리를 동시에 덮쳤다. 오르 크들의 비명이 그녀의 귀를 아프게 했다. 순식간에 불길은 그들의 살을 먹 어 치우고, 뼈를 드러냈다. 그녀는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오르크들의 시신 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포기할 수 없어. 혼자의 목숨이 아니니까..." 그녀는 서서히 속력을 붙여,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계단, 필리우스가 계 단만 계속 올라가면 된다고 했었다. 꼭대기의 방에 랜스가 있다고. "이키드 제레이아드!" 날카로운 바람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오르크들에게 불어닥쳤다. 그들의 목이 싹둑 베어져 계단으로 굴러내려갔다. 데이미아는 그들의 머리 없는 몸 통을 훌쩍 뛰어넘어 계속 달렸다. 그녀의 눈앞을, 작지만 단단해 보이는 철 문이 가로막을 때까지. "아일룬!" 그녀는 그 문을 향해 팔을 뻗으며 외쳤다. 콰광! 불꽃이 잠긴 철문에 작렬 했다. 철문은 벽으로부터 떨어져 나가, 바닥에 철컹!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데이미아는 그 방 안으로 펄쩍 뛰어들며 소리쳤다. "랜스!" "데이미아?" 랜스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소리쳤다. 데이미아는 재빨리 그를 훑어보았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어 보였다. 좀 놀란 것 같긴 했지만. "무사했군요. 다행이에요. 어서 여길 나가요." 데이미아의 말에 랜스는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 번 다시 볼 때마 다 그녀는 달라지는 것 같았다. 지금, 낯선 지팡이를 손에 든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마법사의 모습이었다. 그 표정과 눈빛조차도. "데이미아... 그건, 엘미어?" "필리우스가 도와줬어요.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요. 지금은 얼른 여길 나 가야 해요. 카야크가 죽어서 온통 뒤죽박죽이니까." 그녀는 대담하게 랜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계단을 달려내 려가기 시작했다. 랜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쿵! 계단이 크게 흔들리며 천정에서 돌가루가 떨어졌다. 랜스는 휘청거리다 가 간신히 균형을 잡고, 데이미아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넘어졌으나 아무렇 지도 않은 듯, 몸을 일으키고 다시 달렸다. "데이미아,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카야크가 죽었다는 건...?" "모든 게 하르크자엘의 술수였대요. 필리우스가 가르쳐 줘서 겨우 알았어 요. 어쨌든 지금 여길 빠져나가지 않으면 다 죽을 거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감정을 감추는 듯 딱딱했다. 랜스는 발을 멈추었다. "데이미아, 난 갈 수 없어." "가야 해요." "그럴 수 없어. 여기 어머니가 잡혀 계셔. 난 혼자 도망칠 수는 없어." "정말 답답하군요!" 데이미아가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반응에 랜스는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그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언제나 그런 식이죠. 내가 하는 일은 희생을 불러!" "뭐라고?" "내가 당신을 데리러 오자고 고집했어요, 랜스! 그런데 이제 어머니를 구하 기 전엔 못 간다고! 필리우스는 내 고집 때문에 죽었는데!" "데이미아, 미안해. 하지만 일단 혼자 가도록 해. 나는... 나 혼자서 도망칠 수는 없어. 그리고 어머니도 구해야 하지만..."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하르크자엘을 이렇게 가까이에 두고도 아무것도 못 하고 돌아갈 수는 없 어. 미친 소리 같겠지만... 미안해." "복수인가요?" 데이미아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랜스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동요되지 않고, 침착한 눈빛으로, 놀랄 만큼 침착한 눈빛으로 랜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복수, 복수, 또 복수인가요! 결국 복수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되었군요. 하르크자엘의 복수, 드래크로니안의 복수! 그리고 이제는 랜스, 랜스가 복수 를 하려고 하는군요! 제발 바보같이 굴지 말아요. 내가 부탁해요. 이 일은 여기서 끝나도록 해요. 하르크자엘은 복수를 계획했고, 결국 이런 난장판으 로 끝을 맺었어요. 그 자신과, 그의 적 모두를 상처입히면서! 이대로, 이대로 처벌이 다하도록 해요. 더 이상 일을 크게 벌리지 말아요. 이젠 지긋지긋해. 복수의 다음 순서는 복수일 뿐이에요. 랜스의 복수가 끝나면, 드래크로니안 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라는 걸 모르세요? 그래요, 계속 말하죠, 요정족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개입하지 않았을 뿐이죠. 드래크로니안들이 랜스의 아버지를 해하기 이전, 그는 그들에게 죄 를 지었어요. 학살이었죠. 시지리스의 학살, 그걸로 그와 그의 부하들은 영 웅으로 떠받들어졌지만. 그리고 그 이전에는, 드래크로니안들이 로데인 대 에스테이아의 전투에서 많은 잔인한 일들을 벌였지요. 그들은 인간이 아니 기에, 인간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짓들도 많은 했다고 하더군요. 리반 어덴은 그래서 그들을 벌한 거에요. 그렇지만 그 이전에는 또 무슨 일이 있 었는지 아세요? 드래크로니안들이 쓸모 없다고 생각한 에스테이아 인들이 그들을 몰아내 버렸죠. 아니, 아예 청소해 버리려고 했어요. 태초의 전쟁도, 오르크들의 전쟁도 끝났고, 그들의 힘은 이제 수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것 이 되어 버렸으니까!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요?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끝이 없다고요! 복수에 복수, 피의 역사! 어디선가 끝나야 해요. 이런 식으로 계속될 수는 없어요!" 데이미아의 눈이 그의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요정의 눈이었다. 그는 어느 순가보다도 그것을 강하게 느꼈다. 복수의 복수. 그는 알고 있었다. 모른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그럴 리가 없 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하르크자엘과 그는 동족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하르크 자엘, 그, 그의 아버지, 모두 같은 끈에 묶여진 희생자들이었다. 그러나, 그 의 가슴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앞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었 다... "데이미아... 인간의 힘으로도 요정의 힘으로도 안 되는 게 있어. 신들의 힘 이지... 아스틸라는 복수의 운명을 정해 놓은 게 틀림없어. 그건... 내 힘으로 안 되는 거야." "그런 멍청한 소리가 어디 있어요! 복수의 매듭이 있다면 그건 끊으라고 있는 거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하르크자엘이 나를 죽이든지, 아니면 내가 그를 죽이 겠지. 그리고 모든 것이 전과 같이 이어지겠지... 미안해, 데이미아, 나는 이 럴 수밖에 없어." (계속) ------------------------------------------------------------- 100회 축하 메시지 감사합니다^^ 데이미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숨을 푹 쉬 었다. 그녀의 표정이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그가 아는, 어린 소녀의 표정 이었다. "하는 수 없죠, 뭐... 랜스 없이 갈 수는 없어요. 필리우스에게 미안해서라 도 그렇게는 안 돼요. 그리고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라면 라스헨 에이니드가 도와줄 만한 일이니까..." "데이미아...?" "그 대신! 명심해요, 랜스! 혹시 위험하게 되면 난 혼자 살아 도망가 버릴 거야! 내 목숨은 비싼 목숨이란 말예요. 엄마에 오빠, 게다가 이젠 필리우스 까지 얹혔으니!" 그녀는 농담조로 말했으나, 그 어조에는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랜 스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채, 환하게 미소지었다. "고마워, 데이미아!" "자, 자, 그럼 시간낭비 하지 말고 어서 가요. 로이와 툴위그가 기다릴테니 까! 도대체 랜스 어머니가 어디 계시대요?" 8. "이상하네... 왜 이리 조용하지? 게다가 성벽 위에 있던 오르크들은 다 어 디 갔어?" 앙상한 나무 가지 위에 걸터앉아 라우더 성 안을 살피던 켈리가 고개를 갸 우뚱하며 중얼거렸다. 근처의 나뭇가지에는 이즐레이와 마빈이 앉아, 그녀와 마찬가지로 목을 길게 뺀 채 성 안을 넘보고 있었다. "이즈, 넌 뭐가 보이니?" "아니... 전혀. 오르크는커녕 개미 한 마리 안 보이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뭐가 이해가 안 돼? 공휴일인가보지, 뭐." 마빈의 속편한 대답이었다. 켈리와 이즐레이는 동시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켈리는 마빈의 머리를 한 대 툭 치면서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소리야?" "아야! 너야말로 말로 하지 왜 때려?" "너한테 말로 해서 뭐가 돼냐? 정말 황당하기로는 로이 둘째 가는 놈이라 니까." "으휴! 말하는 것 하고는... 정말이지 조금도 여왕같지 않아, 너!" "뭐? 네가 여왕 본 적 있어?" "...없지만...." "없으면서 까불어!" 이즐레이는 열심히 다투는 둘을 보고 - 특히 켈리의 모습을 보고 - 자신 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녀는 그가 처음 보았던 트레져 헌터의 모 습 그대로였다. 그에게 스스럼없이 함께 가지 않겠냐고 묻던 소녀, 눈을 뗄 수 없는 활달함을 과시하던 그녀로 되돌아온 것이다. 힐리온을 찾기까지의 불길한 변화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었다. 그가 믿었던 대로, 켈리는 그가 기억하는 트레져 헌터 켈리였다. 설사 그녀가 로데인의 여왕 켈레브리스라 해도, 그리고 그녀가 찾는 보물이 단순한 금덩이가 아니라 로데인이라는 왕 국이라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즈! 넌 또 뭘 보고 그렇게 실실거리는거야?" "맞아! 너 내가 맞는게 그렇게 기분이 좋으냐?" "아니, 뭐... 꼭 좋다고 할수만은 없지만서도..." "..." "그나저나 우리 어쩔거야? 오르크들의 공휴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성 은 텅텅 빈 것처럼 보이는데." "글쎄... 눈 딱 감고 쳐들어가 볼까?" "...케... 켈리..." "농담이야, 농... 앗, 저게 뭐지?" 켈리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긴장된 표정으로 성 쪽을 가리켰다. 마빈과 이즐레이도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마치 한 떼의 산양(山羊) 들이 달려가는 듯, 뿌연 먼지가 줄을 이어 라우더 성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마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병사... 같은데? 오르크의 지원군인가?" "아...아냐..." 이즐레이가 긴장된 얼굴로 속삭였다. "인간들의 군사야.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건... 아클레어 3세?" "아클레어 3세!" 켈리가 입을 딱 벌렸다. 이즐레이는 재빨리 덧붙였다. "클레이브도 옆에 보여." "내, 참... 아클레어 3세는 또 왜 여길 왔나... 일이 복잡해지겠는걸..." 켈리는 중얼거리며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나무에 묶어 둔 말에 오 르며 이즐레이와 마빈에게 소리쳤다. "우리도 가보자!" "뭐? 켈리, 제정신이야?" 마빈이 입을 딱 벌리며 소리쳤다. "오르크들과 에스테이아 군의 틈에 끼어들자는 거야? 그렇게 되면 양쪽 모 두에게 '나 좀 죽여 줍쇼'하는 꼴이라고!" "그렇진 않을거야. 오르크들은 에스테이아 군이랑, 에스테이아 군은 오르크 들이랑 싸우느라 정신이 없을테니!" 켈리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게다가 아주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길 것 같은데, 놓치면 아깝지 않아?" "뭐? 어... 이봐!" 켈리는 마빈의 외침도 무시한 채, 성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즐레이는 하하 웃으며 말의 등 위로 뛰어내렸다. "드디어 원래의 켈리로 돌아왔군." "그... 그렇다면 쟤는 원래 저런단 말야? 그게 웃을 일이냐, 이즈?" "어서 따라와, 마빈. 늦으면 네 몫은 남아 있지도 않을 걸." 이즐레이 역시 마빈을 남겨둔 채, 켈리를 따라 말을 몰고 달려갔다. 마빈은 하는 수 없이 나무에서 내려와 말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이즈 녀석은 여자 취향도 이상해, 정말... 결국 불쌍한 건 나라니까!" 세 사람이 탄 말은 에스테이아 군의 뒤를 쫓아 라우더 성으로 향하소 있었 다. 9.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 부하들이 이성을 잃고 날뛰고 있소!" 노토스가 벽에 금이 갈 정도의 괴성을 지르며, 벽을 거의 부수면서 신전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두 머리에 달린, 각각 두 개씩의 눈은 카야크의 시처 를 보고는 휘둥그래졌다 - 그것을 시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산산조각이 난 뼈 부스러기와 살점들은, 그것이 입고 있는 검은 로브와 아직도 그것의 주 위를 맴도는 가냘픈 마력에 의해서만 누구인지 짐작될 뿐이었다. "카야크요, 정확히 말해 가짜 카야크지." 하고 아크트가 으스대며 말했다. 아까의 분노는 다 어디로 가고, 지금의 그 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이 사기꾼의 정체를 간파하여 해치웠다는 자 부심만이 가득했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어서 견 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모두 설명해 드리겠소, 노토스. 사실은..." "가짜 카야크... 그래서 죽인 건가?" 노토스는 아크트의 말을 끊으며 으르렁거렸다. 아크트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쨌든 뻐기는 듯한 미소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 했다. "그렇소."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노토스의 표정은 - 비록 아크트 자신이 용의 표정을 잘 읽을 수는 없었지만 - 적어도 아크트가 기대하던 그것은 아니었다. 우선 노토스의 두 얼굴은 똑같이 노기 띤 표정으로 일그러지더니, 그는 코와 입 에서 뜨거운 김을 뿜으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하늘을 향해 머 리를 휙 들었다. 가뜩이나 몸집이 큰데 고개를 있는 힘껏 하늘로 뻗으니, 머 리통은 천정을 뚫고 돌덩이를 흩날리며 다음 층의 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노토스는 입을 딱 벌린 아크트의 눈앞에서, 그 행동을 서너 번 계속 하더니, 이윽고 분을 참지 못하고 외침이라기보다는 울부짖음이라고 해야 할 소리를 질렀다. "하르크자엘!" 그 소리만으로도, 천정과 벽에 금이 가고 돌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 자리 에 있던 오르크들은 모두, 귀가 멎을 듯한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노 토스는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동안이나 다시 천정에 박치기를 하며 으르렁 거리다가, 아크트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도대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있소, 아크트! 카야크가 - 아니, 가짜 카 야크가 - 컨트롤하고 있던 어둠의 종족이 모두 정신이 나갔소. 기형 용족 중에서 인간성보다 야수성이 더 높은 자는 한 명도 빠짐없이 날뛰고 있고, 하피와 도마뱀 인간들도 마찬가지요." "나 때문이 아니라 하르크자엘 때문이오." "...하르크자엘." 하고 노토스는 다시 으르렁거렸다. "좋소, 아크트, 좋소. 하르크자엘 - 그는 내 손에서 살아 도망치는 일이 없 을 것이오." 노토스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그 굵고 거대한 발로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 며 신전을 나갔다. 또다시 금이 간 천정에서 돌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크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8"쳇... 몸집만 커서 잘난 척하는 기형 용 같으니. 꼴에 하르크자엘을 죽이 겠다고..." 그는 피식 웃으며 칼을 허리에 찬 칼을 빼어들어 호공에 휘둘렀다. "꼴에 하르크자엘을 죽이겠다고, 지금까지 놈에게 휘둘려 온 주제에! 천만 에! 그에게 죄과를 치루게 하는 것은 나, 아크트가 될 것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노토스를 따라 달려나갈 기세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부 하들이 행동을 취하기 직전, 오르크 병사 한 명이 숨이 넘어가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쿠푸-헤! 성문이 부수어졌습니다. 인간들이 몰아닥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라고!" 아크트는 찌푸린 얼굴에 노기를 가득 드러내었다. "인간들이 감히 이곳에! 좋다, 기다리고 있던 바라. 죽여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그러나, 쿠푸-헤, 그들은..." "잔말이 많군! 나를 따르라!" "크와아아악!" 오르크들은 흥분에 찬 함성을 지르며, 동료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 동쪽 문 으로 내달렸다. 아클레어 3세가 이끄는 인간군과 아크트가 이끄는 오르크 군은 성의 홀 한 가운데에서 맞부딪쳤다. 먼저 상대편의 화살이 서로를 쓰러뜨리며 오갔으나, 그것은 그 어느 편도 멈추지 못했다. 두 종족은 곧 칼과 칼을 맞대고 라유 더의 검음 바닥을 피로 물들였다. "돌진하라, 돌진! 후퇴는 허락하지 않는다. 어둠의 종족과의 인류의 오랜 전젱이 그대들의 어깨에 달렸다!" 선두에 선 아클레어 3세는 칼을 높이 휘두르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투 구와 갑옷이 노인의 외모를 가려 주었고,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마지막 에너 지를 폭발시키듯 우렁찼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생각지도 않는 듯, 가장 먼 저 오르크들 사이로 뛰어들어가 닥치는 대로 베고 있었다. 옛 영웅의 솜씨 는 아직 녹슬지 않아, 그의 손에 쓰러진 오르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클레이브는 그런 그의 곁에 선 채, 마치 이성을 잃은 듯 날뛰는 왕을 보호 하기 위해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왕은 미친 맹수처럼 날뛰어 오 르크들을 죽음으로 몰아 가고 있었으나, 그만큼 허점이 많기도 했다. 마치 살 생각이라고는 전혀 하지 않고 싸우는 사람같이 보였다. "폐하! 제발 조심하십시오. 이렇게 앞으로 튀어나와서는 기사들이 폐하를 보호할 수 없습니다!" "나도 나 혼자쯤은 보호할 수 있네!" 왕은 화를 내며 소리치고는, 다시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오르크가 내려 친 도끼를 방패로 받아냈다. 도끼는 흠집 투성이의 방패에 또 하나의 상처 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그 오르크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아클 레어의 칼날은 그의 목을 베었다. "오너라, 오르크들! 이 더러운 어둠의 무리들아!" 아클레어의 기세에 힘입어 오르크들은 서서히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크 트는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댔다. "두아스! 두아스! 두아스 녀석은 어딜 간 거야! 이럴 때 마법이라도 쓰지 않고!" 마치 그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쿠쿠쿵! 하는 굉음과 함께 그가 딛고 선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천정과 벽 역시 돌 조각을 떨어뜨리며 몹시 진 동하고 있었다. 마치 성이 곧 무너지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엎드려!" 누가 먼저 소리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이런 외침이 오르크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인간들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엎드려!" "으악! 피해라!" 잠시동안 오르크들과 인간들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졌다. 그들은 모두 약속 이라도 한 것처럼 칼을 거두고 쏟아져내리는 벽과 천정의 일부분들을 피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미 천정은 반쯤 사라져 있었고, 이제 바닥까지 위 태롭게 흔들거리고 있었다. "으악!" 오르크 병사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발이 딛고 있던 바닥이 푹 꺼지 며, 그의 몸이 아래층으로 추락했던 것이다. 그 구멍으로부터 굵은 금은 자 라나듯 사방으로 퍼져, 곧 바닥의 여기저기가 부서지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오르크들의 비명과 인간들의 비명이 귀청을 찢을 듯 했다. "두아스 녀석,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인거야?" 아크트는 이리저리 피하면서도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함을 쳐 댔다. 한편, 아클레어 3세는 이 상황에서도 멈추지 않고 칼을 휘둘러 오르크들을 베고 있었다. 그가 아크트의 뒷모습을 보고 그를 향해 달려가려는 찰나, 그 의 발이 바닥이 금간 부분을 디뎠다. 그 부분은 순식간에 아래층으로 무너 져 내리며,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으악!" 아클레어 3세는 칼을 놓치며, 간신히 구멍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의 머리 위로 돌가루와 먼지들을 사정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손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폐하!" 클레이브가 외치며, 그의 손목을 덥썩 잡아 끌어올렸다. 그런 그의 등 뒤에 서, 오르크 세 마리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클레이브, 등 뒤를 조심하게!" 하고 왕이 외쳤다. 클레이브는 한 손으로 왕의 손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으 로는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순간,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입 술을 깨물었다. 거인 오르크였다.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와, 그것도 한 손으로는 왕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 가 그들의 등 뒤에는 다른 오르크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듯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크와아악!" 세 마리의 거인 오르크가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클레이브는 힘껏 칼 을 쥐었다. 그러나 그가 칼을 휘두르려는 순간, 오르크들과 그 사이에 세 개 의 그림자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캬아악!" 오르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피를 뿜으며 쓰려졌다. "당신은...!" 클레이브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외쳤다. 켈리는 그를 향해 씩 웃어 보였 다. 악의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장난꾸러기같은 미소였다. "로데인과 에스테이아 간의 전쟁은 잠시 휴전하도록 하죠. 어때요?" 클레이브는 가만히 그녀를, 그 다음에는 그녀의 손에 들린 황금 날의 힐리 온을 노려보았다. 칼릭을 죽인 여자, 칼릭을 죽인 칼. 그러나 지금 싸워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앗!" 이즐레이가 그녀에게 달려드는 오르크들의 앞을 막으며 칼을 휘둘렀다. 손 이 여러 개로 보일 정도로 빠른 손놀림이었다. 단번에 네 마리의 오르크들 이 쓰러져 뒹굴었다. 클레이브는 그들의 주위를 메운 오르크들을 보고, 다시 아클레어 3세를 내 려다보았다. 그리고 소리쳤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로데인의 여왕!" 켈리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겨우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도. "하앗! 와라, 오르크들아!"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밝게 느껴지는 것은, 클레이브만의 착각이었을까. "크와아악!" 오르크들이 한꺼번에 그들을 메워싸며 달려들었다. 마빈이 등에 멘 대검을 마구 휘둘렀다. 그에게 접근하던 오르크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어져 나갔 다. 이즐레이의 칼날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오르크들이 그의 주위에 가면, 보이지 않는 장막에 부딪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다. 켈리 역시, 이에 질세라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인간과 용족의 왕의 검, 힐 리온은 그녀의 손에서 찬란히 빛을 발했다. 그녀는 오르크들이 다가오는 족족 허리를 싹둑싹둑 베고는 흥분하여 소리 쳤다. "와아! 정말 대단해! 역시 이 칼은 마검(魔劍)이야!" 곧 아클레어 3세를 끌어올린 클레이브도 가세했다. 그의 칼은 유연한 곡선 을 그리며, 오르크들의 심장 부위를 정확히 가로질렀다. 아클레어 3세 역시 죽은 기사의 칼 한 자루를 집어들고는 오르크들을 공격했다. "칼릭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해요!" 켈리가 클레이브의 곁으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리쳤다. 이렇게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칼은 오르크들의 칼날과 메이스를 받아 쳐내며, 그들의 갑 옷의 허점을 파고들어 혈관을 베어내고 있었다. "로크 페울로니는 주인될 자의 정신력을 시험해 본다고 하죠. 대개 엘미어 의 주인에게는 강인한 마음을, 카자룬의 주인에게는 허영심 없는 마음을, 그 리고 이디실의 주인에게는 폭력에의 탐닉을 이겨낼 수 있는 의지와 힐리온 의 주인에게는 살의를 이겨낼 수 있는 의지를 시험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걸 알면서도 나는 힐리온에 휘둘려 엉뚱한 일을 잔뜩 저질렀군요. 당신이 내게 원한을 품든다 해도 할 말이 없어요, 클레이브. 불쌍한 칼릭 역시, 그의 죽음은 내 평생 짊어질 죄가 될 겁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었 는데." 클레이브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오르크들에게 돌진하 여, 자신에게 칼을 휘두르는 한 마리의 칼을 쳐 내고, 그것이 비틀거리는 사 이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뒤에서 공격하는 오르크의 메이스를 슬 쩍 피해낸 다음, 몸을 돌리는 동시에 칼을 휘둘러 그것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는 켈리에게 다시 돌아와, 숨을 고르며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힐리온의 시험을 받은 건... 그대 뿐이 아니었소." "알아요." 하고 켈리가 대답했다. "우리 둘 다 힐리온에게 정신을 빼앗겨 반쯤 미쳤었죠." "반쯤이라고? 나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소. 그러나 어쨌든... 지나간 일 이오. 우리는 똑같은 상처를 갖고, 똑같이 원한이라는 줄에 매달려 휘둘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지. 누가 누굴 탓하겠소. 지금은 오르크들이 우리 둘의 공동의 적이오." 켈리는 클레이브를 흘끝 보았다. 그리고는 그의 어깨를 툭 치며 기쁜 듯이 웃었다. "그렇게 말해 주니 기쁘군요, 사촌!" (계속) ------------------------------------------------------------- 에에... 켈리가 변했던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로크 페울로니... 쉽게 넘볼 게 아니죠? ^^; 그나저나 중간고사 기간... 힘들군요. 끝을 눈앞에 남겨 두고... 이런... 켈리가 클레이브에게 '사촌'이라고 한 건... 그냥 'cousin'의 뜻입니다. 둘의 촌수가 '사촌'일 리가 없죠...^^; 아마 이종 16촌 정도...? "크르르..." "크..." 갑자기 맹렬하게 덤벼들던 오르크들이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다. 공포 어린 웅성거림이 그들 사이에 퍼지고, 이윽고 그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고 도망쳐 버렸다. 복도에는 인간들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마빈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이즐레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러나 그 순간, 인간보 다 예민한 그의 귀가 어떤 소리를 잡았다. 무너진 천정과 바닥으로부터 들 려오는 소리였다. "...기형 용들이군..." "뭐?" 마빈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반문했다. 그러나 이미 이즐레이는 켈리에게 달려가고 있었다. "켈리! 기형 용들이 몰려오고 있어!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숫자야! 이 성 에 감추어져 있던 놈들이 모조리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어서 도망쳐야 해!" "이런...!" 켈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르크들의 지원군인가?" "모르겠어. 어쨌든 빨리 도망쳐야 해!" 켈리는 '들으셨죠?'하고 묻듯이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대답한 사 람은 아클레어 3세였다. "우리는 후퇴하지 않소." "그런...!" "우리는 폐하의 명령에 따릅니다, 레이디 켈레브리스. 그러나 도망치고 싶 다면 도망치시오. 그대는 어차피 우리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하고 클레이브가 말했다. 그는 반박하려는 켈리를 가만히 내려다 보며 덧붙 였다. "이제 우리의 인연, 힐리온으로 시작해서 힐리온으로 끝나는 인연은 없었 던 것으로 합시다. 나도 그대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고 그대도 나 때문에 많은 것을 잃었소. 그러니 서로 잊읍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때에는, 그대 와 나는 에스테이아와 로데인의 입장으로 만날 것이오. 아마도... 전쟁밖에는 남는 것이 없겠지만." 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즐레이와 마빈 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가자! 우리만이라도 도망쳐야지!" "로데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도망치는 세 명의 뒷모습을 보며, 아클레어 3세가 물었다.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지을 뿐 대답이 없었다. 그들의 귀에도 서서히, 쿵쾅거리는 발소리 와 무너지는 소리, 그리고 기괴한 으르렁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기형 용들인가..." 클레이브는 칼을 빼어 들며 중얼거렸다. 벽이 쿵쿵 울리며 흔들거리기 시 작했고, 반쯤 무너진 천정에서 다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아클레어 3 세는 웅성거리는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밀집 대형을 갖추도록! 용들에게는 한꺼번에 덤비는 수밖에 없다. 한 번에 한 마리를 공격하고, 흩어지면 그대로 죽음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거대한 세 개의 머리가 벽을 부수고 들어왔다. 한 몸이 이어진 세 개의 목 이었다. 그 머리 하나가 각각 한 장정의 키만큼이나 컸다. 웅성거림이 병사 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에스테이아의 용사들이여, 용기를 잃지 마라!" 아클레어 3세는 대담하게도 스스로 용에게 달려들어 중앙의 목을 깊이 잘 랐다. 용은 세 개의 머리를 높이 쳐들며, 기괴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 팔이 왕의 몸을 향해 내리덮치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질겁을 하여 왕을 밀쳐내고, 내리닥치는 용의 팔목을 칼로 잘 랐다. 급히 휘두른 칼날은 반쯤 베다가 용의 뼈에 부딪쳐 멈추었다. 고통에 놀란 용은 팔을 번쩍 쳐들었고, 클레이브는 칼을 꽉 잡은 채 그 팔에 딸려 올라가다가, 칼을 뽑으며 훌쩍 뛰어내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는 몸을 일으키는 즉시 소리쳐 물었으나, 왕은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기어이 용에게 달려들어 가운데에 있던 목을 베려 하고 것이다. 클레 이브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우클로우로 쳐들어오는 건 바보 짓이다... 그런데 지 금 폐하는 거의 이성을 잃고 계시니... 하긴, 나도 이리로 올 때 제정신이 아 니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어쨌든 한숨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병사들은 그 용과 함께 나타난 하피와 트롤들을 대적하느라 거의 힘을 못 쓰고 있었고, 왕은 이판사판이라 는 듯이 용에게 덤벼들고 있었으니. "하앗!" 드디어 왕이 칼을 휘둘러, 용의 가운데 머리를 잘라 버렸다. 붉은 피가 솟 구치면서 왕의 갑옷을 적셨다. 이미 오르크와의 전투 때부터 원래의 황금빛 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던 갑옷이었지만, 이제는 아예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두집어 쓴 꼴이었다. "캬아아!" 용의 남은 두 머리가 고함을 지르며 왕을 향해 내리덮쳤다. 왕은 침착하게 긴 원호를 그리며 칼을 휘둘러, 왼쪽 머리의 각막 하나를 터뜨렸다. 왼쪽 머 리는 흠칫 물러났으나, 오른쪽 머리는 그를 물어뜯기 직전이었다. 휙! 그 입이 왕을 삼키기 직전, 클레이브의 칼이 그 목의 뒷부분에서 들어 가 그 끝이 앞쪽의 피부를 뚫고 나왔다. 용의 움직임이 일순간 멈추었고, 그 칼은 목을 관통한 채 스르륵 움직여 목의 반을 가른 채 밖으로 나왔다. "크와아아악!" 용은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몸부리쳤다. 왕은 물러섰고, 용의 등 위에 올 라섰던 클레이브는 벽쪽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반쯤 잘린 목은 용의 몸부림에 따라 덜렁거리다가, 결국 피부로만 간신히 이어진 채 잘려버린 꼴 이 되고 말았다. "더러운 어둠의 일족 같으니!" 왕은 노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태도로, 마지막 남은 용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두르며 내달았다. 용의 머리 역시 입을 딱 벌린 채 흉측한 이빨을 내보이며 왕에게 달려들었다. 왕은 그 머리를 향해 뛰어오르며 칼을 휘둘렀 으나, 마음이 앞선 탓인지 너무 빨랐다. 칼날이 닿기 전 용은 재빨리 목을 움츠렸고, 그 칼날은 용의 콧등에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왕은 용 의 바로 코앞에 착지했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용의 송곳니가 가득한 거 대한 입이 머리 위에서부터 직각으로 그를 덮쳐왔다. "하앗!" 클레이브의 고함과 함께, 그의 칼이 용의 이마를 파고들었다. 용의 입은 왕 을 덮쳤으나 그를 삼키지는 못했다. 그 입은 벌어진 채로, 마치 머리 위를 덮은 천막처럼 왕의 머리 위를 덮었을 뿐이었다. 클레이브는 용의 이마로부터 칼을 뽑았다. 피와 함께 하얗고 찐득한 점액 이 함께 흘러나왔다. "클레이브, 자넨가!" 왕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용의 혀를 헤치고 나와 물었다. "폐하, 이대로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후퇴 명령을 내리시지요." 클레이브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 한줄기를 닦아 내며 말했다. 아까 천 정에 부딪친 것 때문에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이 괴물들... 뭔가 잘못되어 있습니다. 지금 라우더 성은 정상이 아닙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폐하와 제가 상대했던 모든 괴물들... 오르 크건 기형 용이건 아니면 다른 것들이건, 그것들은 적어도 인간 비슷한 점 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군대의 규율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이 놈들은 완전히 행동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파괴 본능만 남아있는 것 같 습니다. 보십시오. 이 용도 얼마나 많은 트롤들을 밟아 죽였는지를!" "한마디로 협동이 전혀 안된다는 뜻이로군. 그럼 우리가 유리한 것 아니겠 나?" 왕은 태평스럽게도, 자신이 방금 목숨을 간신히 건졌다는 것조차 잊은 듯 미소까지 띄우며 트롤들 틈으로 달려갔다.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집고, 용의 거대한 머리에 잠시 몸을 기댔다. 벽을 뚫고, 혹은 천정을 무너 뜨리며 더욱 많은 기형 용들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물어뜯고 싸웠고, 인간들과 그들과 싸우는 트롤들을 한 입에 삼켰다. 그리고 마치 성 을 통째로 무너뜨리려는 듯, 무의미하게 성의 벽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완전히... 질서가 결여되어 있어..." 클레이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잡았다. "창세 이전의 혼돈이 이랬을까..." 갑자기 윙윙거리는 그의 머릿속에 무엇인가 희미한 것이 스쳤다. 그러나 곧 그것은 사라지고 말았다. 눈이 한 개 달린, 거대한 지네 모양의 괴물이 9 그에게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0. "비명소리가 계속 들리는데... 저 사람들 괜찮을까 몰라!" 열심히 복도를 달려 도망치는 세 사람 중, 뒤에 남겨진 에스테이아 군을 걱정하는 사람은 마빈밖에 없었다. 켈리는 투덜거리며 그를 질책했다. "지금 남 걱정해 줄 시간이 어딨어! 어서 달리라고! 마빈, 네가 제일 늦잖 아!" "그래, 넌 제일 잘나서 제일 앞에서 도망치는구나, 여왕님!" "칭얼대지 마! 상황 파악을 좀 하라구!" "상황을 알아야 파악하든지 말든지 하지?" "둘 다 그만 좀 해!" 이즐레이가 지쳤다는 듯 소리를 질렀으므로, 마빈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켈리는 혀를 삐죽 내밀며 대들었다. "내가 원래대로 돌아와 좋다고 할 땐 언제고?" "그 말 취소야, 켈리!" "...그러니까 너희는 원래 이러고 다녔단 말이지...?" 마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이즈가 하도 그리워 하길래 좀더 로맨틱한 뭔가가 있을 줄 알았더 니만..." "마빈, 내가 언제...!" 이즐레이는 화를 내며 마빈에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의 눈의 커지면서 비명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나왔다. "왔다!" 하고 그가 외쳤다. 그와 함께, 마빈 쪽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그 위로 거 대한 얼굴이 튀어나왔다. 얼굴 높이가 마빈의 키보다도 더 큰 그것은, 눈이 세 쌍 달린 뱀의 머리였다. "뭐... 뭐야!" 마빈은 비명을 지르며,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그 뱀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칼날은 정확히 그 굵은 목에 부딪쳤으나,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오히려 마 빈 자신이 비틀거릴 만큼 진동을 일으키며 튕겨나와 버렸던 것이다. "어... 어?" 마빈이 휘청거리고 있는 사이, 뱀의 크게 벌린 입이 그를 향해 들이닥쳤다. "마빈! 피해!" 이즐레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마빈의 몸을 힘껏 밀어젖혔다. 그와 마빈은 동시에 땅 위에 쓰러져 굴렀고, 이즐레이의 망토를 찢으며 뱀의 입이 바닥 을 파고들었다. "쉬이이잇!" 헛수고를 했다는 것을 깨달은 뱀은 얼른 그 머리를 들고, 이즐레이와 마빈 을 노려보았다. 마빈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나, 이즐레이는 재빨리 일어나 어느 새 칼까지 잡고 뱀을 마주 노려보고 있었다. "흥, 정말 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역겨운 괴물이군!" 그는 뱀의 시선을 마빈으로부터 돌리기 위해, 일부러 한 발짝 한 발짝 마 빈에게서 멀어지며 말했다. 뱀은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들은 듯, 고개를 잠시 뒤로 젖히더니, 쉬쉭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을 크게 벌리고 덥쳐 왔다. 그 입은 순식간에 벽을 무너뜨리고 이즐레이가 있던 자리의 바닥을 한 움큼 물 어뜯었다. 그러나 이즐레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그는 어느 새 뱀의 머리보다 더 높이 뛰어올라, 사뿐히 뱀의 머리, 세 눈과 콧구멍의 사이에 착지했다. 그리 고 뱀이 꿈틀하기도 전에, 그의 칼날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뱀의 세 눈을 한꺼번에 갈랐다. "쉬이이익!" 뱀의 몸부림에 그렇지 않아도 무너져 가던 성벽과 천정이 온통 흔들렸다. 이즐레이는 뱀이 고개를 마구 휘젓기 전에 얼른 바닥으로 뛰어내렸으나, 다 음 순간 의도 없이 휘두른 뱀의 꼬리를 맞고 튕겨져나가 벽에 쿵 부딪치고 말았다. "윽!"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그의 눈앞에 다시 뱀의 꼬리가 덮쳐 오고 있었 다. 그러나 그것이 이즐레이를 가격하기 직전, 한 검은 그림자가 눈 깜짝할 사이에 덮쳐와 그 꼬리를 움켜잡더니, 하늘로 다시 날아올랐다. 인간족인 켈 리나 마빈은 형체를 파악할 수도 없이 빠른 움직임이었다. "드래크로니안...?" 이즐레이가 낮게 소리쳤다. 뱀의 꼬리를 날카로운 방법으로 꽉 움켜잡은 채, 천정에 날개가 닿도록 높 이 날아올라 커다란 날개를 휘젓고 있는, 조금 작은 금빛 용의 모습을 한 생물. 그 날렵한 사지와 날개, 한편으로는 징그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아 하게 긴 목과 꼬리, 그리고 붉은 색으로 빛나는 눈 - 그것은 분명 드래크로 니안, 용의 모습으로 변한 드래크로니안의 모습이었다. "그... 네스토르라는 사람이 용으로 변한 모습이랑 똑같잖아!" 마빈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켈리와 이 즐레이가 동시에 대답했다. "색깔만 같지, 달라." 드래크로니안을 별로 본 경험이 없는 마빈으로서는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드래크로니안을 본 켈리나 그 자신의 드래크로니안의 혈통인 이즐레이에게는 분명 다르게 보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 드래크로니안은, 날개의 색깔이 균일하지 못한 것으로 보아 네스토르보 다 한참 어린 용이었다. '곤란하다... 저 녀석, 저런 괴물을 이길 수 없어...' 켈리는 힐리온의 손잡이를 꽉 주며 이제는 눈이 먼 괴물 뱀에게 한 발 다 가갔다. 그녀가 본 대로, 꼬리를 움켜잡고 있는 용은 간신히 지탱하고 있을 뿐 허공에서 뱀의 힘에 의해 반쯤은 휘둘려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나서기 전에, 뚫린 벽으로부터 또 한 마리의 드래크로니안 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좀 더 크기가 큰, 온통 녹색의 비늘로 덮인 용이었 다. 그것은 곧장 뱀의 목으로 날아가, 이마에 돋아난 긴 뿔로 그 목을 꿰뚫 었다. 그러나 두 개의 뿔이 모두 목의 반대편을 뚫고 나와, 입에서 피를 철 철 내뿜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뱀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더 격 렬하게 요동쳤다. 사람 키의 스무 배는 될 듯한 거대한 그것의 몸통이, 복도 안을 마구 휘저으며 벽과 천정을 사정없이 부수었다. 그것의 꼬리를 잡고 있던 황금빛 용은 이미 떨어져 나간 후였고, 그의 목을 뿔로 찔렀던 푸른 용은 미친 듯이 휘둘리는 그 뱀의 머리를 피하다가, 결국 이마에 받힌 채 벽에 쳐박히고 말았다. 사람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드래크로니안의 몸이 천 정을 뚫고 나갔고, 그 위로 하얀 먼지와 함께 돌덩이들이 쏟아져내렸다. 켈리가 나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휘릭! 그녀의 채찍이 긴 원호를 그리며 날아가 뱀의 송곳니를 감았다. 이즐 레이나 마빈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한 손에는 채찍을, 한 손에는 힐리온 을 든 채 펄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몸의 반동을 이용하여, 이리저리 휘두 르는 뱀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그 머리는 너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으 므로, 이것저것 생각할 새가 없었다. 켈리는 망설임 없이 힐리온을 정수리에 서부터 꾹 박아 넣었다. "캬아아아아아아!" 뱀의 비명이, 아니 비명이라기보다는 목구멍 저 아래서부터 긁어 대는 듯 한 이상한 소리가 그들의 귀를 괴롭혔다. 켈리는 힐리온도 채찍도 놓친 채, 얼른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녀의 발 바로 앞에, 뱀의 머리는 쿵! 하고 떨 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뱀의 몸통과 꼬리가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멈추었다. 하얀 먼지가 웬만큼 가라앉자 켈리는 침착하게, 그 뱀의 송곳니에 감겼던 채찍을 풀어 내고 정수리에 꽂혔던 힐리온을 뽑아들었다. 힐리온의 금빛 칼 날은 피까지도 금방 떨구어내고는, 먼지 속에서 차가운 빛을 발했다. "힐리온...!" 낮선 탄성이 잠잠해진 복도 안에 울려퍼졌다. 켈리와, 그녀에게 다가가던 이즐레이와 마빈은, 동시에 그 목소리가 난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야를 가린 뿌연 먼지 속에서, 돌무더기를 헤치고 비틀비틀 걸어나오는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20대 초반의, 인간에게는 있을 법하지 않은 청록 색 머리칼을 늘어뜨린 기사 차림의 청년이었다. 머리칼 사이로 빛을 발하는 눈은 머리 색깔과 선명히 대비되는 붉은 색이었다. "그... 푸른 용?" 마빈이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그 청년, 혹은 푸른 드래크로니안 은 그의 목소리는 듣지도 못한 듯, 아직 힐리온을 들고 있는 켈리의 앞에 가서 쓰러지듯 무릎을 꿇었다. "로 ㅋ라 드리스 힐리오나스, 레이스 에이나스 렐 테이렐라스! (당신이 힐리온의 주인, 인간과 용의 군주이시군요!)" 나지막하지만 감격에 찬 목소리였다. "아스 틸린, 휘 퀘냐 인 테이린! (우리들은 전설이 실현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켈리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로서는 예측도 못한 일이었다. 하르크자엘이 다스리는 드래크로니안 족이라면 당연히 인간을 적 대시하고 인간과 용족 공동의 왕조인 로데인에 대해서도 좋은 감정을 가지 고 있지 않다고 들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라우더의 드래크로니안들이 그녀 의 존재를 알고, 그리고 또 기다려 왔다는 것은... "캬아아악!" 갑자기 날카로운 비명이 그들 넷의 귀를 울렸다. 그들은 동시에 비명이 들 린 쪽을 바라보았고, 아까 뱀의 몸부림을 감당하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던 금빛 드래크로니안이 여러 마리의 오르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 았다. "디 인 달 라힐린(나중에 설명할께)!" 켈리는 재빨리 푸른 머리칼의 드래크로니안에게 말하고는, 그 어린 금빛 용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조금 달려가다가 오르크들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 다고 하는 편이 나으리라. "너희들!" 켈리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드래크로니안의 머리 위로 도끼를 쳐 든 오르크의 팔목을 싹둑 베었다. 그리고는 다른 한 마리의 머리를 밟고 착지 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 마리의 목에 채찍을 감아 휙 잡아당겼다. 우두둑! 하며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 오르크는 축 늘어졌다. (계속) "크와아악!" 다른 오르크들이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르며 메이스를 휘둘렀으나, 변변한 공격 한 번 해 보기 전에 풀썩 쓰러졌다. 이즐레이와 푸른 머리칼의 드래크 로니안의 칼날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의 등을 뚫고 들어가 심장을 베었던 것이다. 뒤늦게 달려온 마빈은 금빛 드래크로니안의 날개를 짖누르고 있던 돌을 들 어올렸다. 이 돌 때문에 그는 오르크들을 상대로 제대로 싸울 수 없었던 것 이다. 돌이 치워지자, 그 드래크로니안은 다쳐서 축 늘어뜨린 날개만을 제외 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기사의 복장을 하고 금빛 머리칼을 땋아내 린, 16,7 세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의 모습으로. "아..." 마빈은 순식간에 커다란 용이 귀여운 소녀로 변하자 입을 딱 벌려 버렸다. 네스토르가 용으로 변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이것은 문제가 달랐다. "이거... 너희... 어떻게 사는 거야?" 마빈이 무슨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아듣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알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푸른 머리칼의 드래크로니안은 재빨리 그 소녀에게 달 려가 그녀를 품 안에 안았다. 그리고는 다시 켈리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이헬린... 아시레디오스! 아이헬린 루 디르케렌 라이시엔. (감사합니다... 우리의 주군이여! 제 동생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센 파린? 잔 이신 아르킨 테이렐린? ㅋ라 이르 벨 프레이닌? (뭐가 어떻게 된거야? 왜 오르크가 드래크로니안을 공격하지? 너희는 한 편이 아니었나?)" 켈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두 드래크로니안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완전히 왕이 백성에게 묻는 투로군...' 이즐레이는 가만히 켈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건 분명히 왕의 태도야... 역시 켈리는...' "테이렐린 ㅋ라 벨웨이 프레이닌 아르카스! (드래크로니안 족은 절대로 오르크와 한 패가 아닙니다!)" 푸른 머리칼의 드래크로니안은 고개를 바짝 쳐들고 대들 듯이 소리쳤다. 화가 난 나머지 아까의 공손한 태도도 잊은 듯 했다. 켈리는 그 반응에 놀 라 주춤거렸다. 그러자 드래크로니안은 자신이 좀 무례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조용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테이렐린 드리아 벨웨이 프레이닌 아르카스 ㅋ라. 아스 드리아 루 딜 제 피로사스 에일하 네인... 벨웨이 지엘드 프레이닌! (저희는 오르크와 한패였던 적이 없습니다. 제피로스 님의 뜻에 따라 함께 싸우고는 있었지만... 결코 긴정한 동료는 아니었습니다!)" "디 레이닌. 달, 잔 네인 아스 아센 테스? (알았다. 그건 그렇다 해도 왜 이렇게 갑자기 서로 싸우는 거냐고?)" "아스 틸린 벨... 템 아스 ㅋ라 아시나드... (그것은 저희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공격받고 있기에...)" "이시나드. 헤이 테이렐린? (공격받는다고. 드래크로니안 전체가?)" 켈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푸른 머리칼의 드래크로니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 덕였다. "디 레이닌. 카아닌 아이엘 에일 이이르케렌. 오브리엔 벨, 단 아센 켄에메 인 시엘레이사스, 로데인헨 레이사스 ㅋ라. 카아닌 아이엘 테이딤.(알겠다. 너는 네 동생과 함께 일단 이 곳을 피해라. 걱정할 것 없다. 시엘레이스의 자손, 로데인의 여왕의 명령이니까. 그리고 이 곳은 내게 맡겨라.)" 드래크로니안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데인헨 레이스'라는 말이 그의 눈을 빛나게 했다. "디, 네리온, 아니인 롬, 레이스(저, 네리온, 여왕의 뜻에 복종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추었던 푸른 색 날개를 활짝 폈다. 조금 상처가 나긴 했으 나 나는 데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켈리에게 예를 표하더니, 동생을 안고 뚫린 천정을 통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일이 복잡해진 거 같지, 이즈?" 켈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즈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잠깐! 뭐가 어떻게 돼 가는 거야?" 마빈이 당황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켈리와 이즐레이는 그제서야 마빈이 고 대어를 알지 못하며, 그래서 켈리와 네리온 사이에 있었던 대화도 전혀 알 아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말이지, 대충... 오르크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이 서로 싸우는 것 같아." 켈리의 대답에 마빈은 소리를 빽 질렀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 내 말은 왜 그렇게 됐냐고!" "글쎄... 아까 그 녀석도 잘 모르는 거 같던데..." "그럼 도대체 뭘 들었길래 그렇게 재잘재잘 오래 떠들었어?" "흐음... 그래서 심통이 난 거로군? 화 풀어. 이제 곧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다 알게 될테니까." "뭐? 어떻게?" "아는 사람을 찾아 물어보면 되지." 켈리는 씩 웃으며 힐리온을 바로 쥐었다. "드래크로니안들이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것 같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지. 같이 가 주겠어, 이즈?" 이즐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그러려고 여기까지 온 걸." "그럴 줄 알았어!" 켈리는 밝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어서 가자! 한시가 급해!" "자, 잠깐! 너희들, 내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냐?" 마빈은 앞서 달려가는 두 사람의 뒤를 쫓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11. "갈 페이 타냐스, 헤이스 레이시나드! 아일리아스 게히사스!" 보레아스의 손에서 거대한 불꽃이 뿜어져 나와, 그의 눈앞에서 시뻘건 입 을 한껏 벌리고 있던, 늑대의 머리를 한 도마뱀의 머리를 맞추었다. 그 크기 가 보레아스의 키의 두 배나 되었던 그 괴물의 머리는, 털이 거무칙칙하게 탄 채 한 바퀴 돌아, 벽에 부딪쳤다. 그리고 산산조각이 나 까맣고 하얀 재 로 부서져 내렸다. 목을 잃은 머리는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경련을 일으키 며 쿵 쓰러졌다. 그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벌써 보레아스의 발및에 흥건히 괴어 그의 로브 자락을 적시고 있는 다른 피들과 섞여들었다. "헉... 헉..." 보레아스는 숨을 몰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나 곧 다음 공격을 준비해야 했다. 벽의 뚫린 구멍으로부터 사자의 몸통에 뱀의 머리가 다섯 개 달린, 그러나 그 크기는 사자의 세 배쯤 될 법한 괴물이, 슬금슬금 그에 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 개의 머리는 아예 입맛까지 다시면서. "갈 카하렐리, 키냐헨 레이스! 팔로카!" 하얗고 차가운 빛이 그 괴물의 가슴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그 괴물은 생각보다 재빨리 피했고, 빛은 다섯 개의 머리 중 단 세 개를 잘랐을 뿐이 었다. 그것은 나머지 두 개의 입을 벌린 채 보레아스에게 달려들었다. "아일룬!" 보레아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키며 주문을 외쳤다. 아무리 괴물이 재빠르 다지만 드래크로니안인 보레아스를 따르지는 못했다. 불덩이가 그 괴물의 털을 삼켰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괴물의 허리를 시뻘건 불의 날이 갈랐다. "갈 실리사 아일텔! 이키드 아일라스!" 그러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보레아스는 등 뒤에서 또다른 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물러섰다. 머리 둘 달린 늑대가 그의 어깨를 발톱으로 스치며, 그의 몸을 넘어갔다. 주문을 욀 새도 없이, 그 늑대는 착지한 땅을 박차고 다시 뛰어올라, 보레아스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드래크로니안과 거의 맞먹는 속도였다. "어딜!" 그 늑대가 보레아스의 목을 물어뜯기 직전, 재빠른 칼날이 그것의 허리를 꿰뚫었다. 늑대는 그 자리에서 악취나는 검은 재가 되어 스러졌다. 보레아스 는 한숨을 쉬었다. 그와 같은 은빛 머리칼의 드래크로니안 청년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보레아스 님?" "그래... 고맙다, 에피누스. 신관이 되어서, 자기 몸 하나도 간수를 못 하는 군..."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추스리는 보레아스를 보고, 에피누스라 불린 드래크 로니안 청년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입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그들 모두 보레아스가 시지리스 최후의 날, 인간들의 공격을 받은 이후 현저히 약해졌 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마력 자체에야 변함이 없겠지만, 그 힘의 소모 를 지탱해줄 수 있는 체력이 턱없이 부족해졌던 것이다. "저희가 전투는 맡겠습니다. 좀 쉬시는 것이..." "됐다, 에피누스. 난 아무렇지도 않아." 보레아스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꼿꼿이 섰지만, 자신이 보기에 도 한심할 정도로 숨이 차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마력은, 정신력은 아무 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사지(四肢)가 무거워서야... '필리우스와... 그런 장난을 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군.' 보레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엠로크의 힘을 빌린 필리우스조차 봉인했던 나였는데... 이제는 이런 괴물 들마저 힘겨워하다니. 정말이지... 날개만 온전했더라도...' 그러나 에피누스의 말대로 물러설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싸움에 능한, 그래서 싸움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도 불리는 드래크로니안이라 할지 라도, 채 50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이렇게 하염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 을 상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드래크로니안들은 카야크의 부활의 날이 임박해 오자, 제피로스가 시지리스나 가이니크로 보내 버렸던 것이다. "크와아아아아!" 발밑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보레아스는 무의식중에 몸을 피했다. 바닥을 뚫고, 거대하고 반들반들한 도마뱀의 머리가 치솟아올랐다. "이런... 갈 실리사 아이텔, 헤이 테이렐 레이시나드...!" 보레아스는 재빨리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으나, 도마뱀은 마치 그것을 알아들은 듯,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그러나 에피누스의 칼날이 때를 맞추어 그 도마뱀의 왼쪽 눈을 찔렀다. "크와아악!" 분노에 찬 고함과 함께, 도마뱀의 양 앞발도 바닥을 뚫고 나타났다. 보레아 스는 간신히 마법의 장벽을 만들어 그 공격을 피했으나, 막 날개를 펴고 날 아오르던 에피누스는 그 팔꿈치에 맞고 튕겨져 나가, 벽에 부딪쳐 떨어졌다. 도마뱀은 악의가 가득한, 하나 남은 노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오 른쪽 날개가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진 채, 몸을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크르르..." 도마뱀은 입을 벌리고 그를 삼키려는 듯 몸을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보 레아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그것을 멈추게 했다. "팔리아스 에퀴오나스!" 도마뱀은 무엇인가를 느낀 듯 보레아스를 돌아보려 했으나, 반쯤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 자세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의 거친 비늘이 하얀 서 리와 얼음이 덮인 채로. "엘다닐린! 갈 실리사 렐 에퀴온!" 보레아스의 외침과 함께, 그 도마뱀의 거대한 몸은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얼음 조각이 되어 떨어져 내렸다. 보레아스와 에피누스는 거의 동시 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풀썩 쓰러졌다. "보레아스 님!" "에피누스!" 각기 다른 괴물들과 싸우던 드래크로니안들이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 왔다. 에피누스는 벌써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보레아스는 비틀거리 며 몸을 일으켰다. "난... 괜찮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흐늘흐늘한 줄같은 것이 그의 발목을 감고 휙 끌어당겼다. 기운이 거의 다 빠져 있던 보레아스는 맥없이 쓰러졌 다. 그리고 그가 무슨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다른 줄이 주문을 외우지 못하 도록 그의 턱과 입을 꽉 틀어막았다. '나무덩굴...!' 수많은 나무덩굴들이 순식간에 벽으로부터 뿜어져나와, 그의 팔과 가슴, 발 을 잡고 늘어졌다. 보레아스는 꼼짝도 못 하고 누에고치처럼 나무에 파묻힌 꼴이 되고 말았다. 입이 막혀 있어도 정신력만으로 쓸 수 있는 마법이 있기 는 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레아스 님!" 한 드래크로니안이 재빨리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그의 빠른 칼날은 눈깜짝할 사이에 수십개의 나무 덩굴을 베어가며 돌진해 왔다. 그러나 스무 개의 덩굴을 베면 마흔 개가 나오는 데에야, 아무리 드래크로니안이라도 어 쩔 도리가 없었다. 찰캉! 그의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나무덩굴이 이미 그의 목과 팔목, 그리고 발 목을 죄고 있었다. "크아아아!" 그의 입에서 인간의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의 목이 길게 늘어났고, 팔과 다리는 길고 굵어졌다. 흰 피부로부터 적갈색의 비늘이 솟아나왔다. 이미 나무 덩굴에 얽힌 것은 인간의 모습을 한 청년이 아니라, 구리빛 비늘과 날개를 가진 용이었다. "캬아아아!" 용은 자신의 몸을 묶고 있던 덩굴을 마구 뿌리치며 물어뜯었다. 다른 드래 크로니안들 역시, 용의 모습으로 변하여 이미 바닥을 빽빽히 덮고 꿈틀거리 는 덩굴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푸른 용의 발톱이 보레아스를 덮고 있던 덩굴들을 갈랐고, 보레아스는 숨을 헐떡이며 그 고치 안에서 빠져나왔다. 드 래크로니안들의 발톱이 이미 사정없이 덩굴들을 자르고 찢어, 원래의 형체 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쿠쿠쿵... 드래크로니안들이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지진이 일 어나듯 사방의 벽과 천정과 바닥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돌로 된 벽면 을 뚫고, 사방에서 굵은 넝쿨들이 꿈틀거리며 솟아나와 그들의 몸을 감았다. "카야크 에디오스 에두아스, 게닌 딤 로르페이. 이키드 에두아스!" 보레아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벽과 천정이 뚫리는 굉음을 헤치고 울려퍼졌 다. 그러자 아무도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만큼의 진동과 함께, 벽과 천정 을 이루던 돌들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바닥과 천정에서 건물을 지탱하던 철 근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리고 천정을 뚫고, 검은 빛의 무더기가 덩굴들에게 내리꽂혔다. 꿈틀거리는 덩굴들이 바닥에 떨어져 기어다녔다. "소용 없습니다, 보레아스. 끝도 없이 자라납니다!" 하늘빛 비늘을 가진 드래크로니안이 외쳤다. 보레아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 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 '어차피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여 만들어 낸 생물... 주인이 제어를 잃으니 본능만 남아 끝없이 파괴하고 그 파괴로써 성장하는 것이지. 흑마술로 만들 어낸 모든 것이 그렇지...' 잠시 드래크로니안들이 우위를 차지한 듯 했으나, 덩굴들이 다시 득세하고 있었다. 보레아스는 한숨을 쉬며 주문을 외우기 위해 손을 모았다. "내가 저것을 어떻게든 파괴해 보겠다. 시간을 벌어 줘!" "보레아스 님, 그러나 몸이..." 하늘빛 드래크로니안이 당황하여 반박했으나, 이미 보레아스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는 데에 온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몸통 굵기쯤은 될 법한 덩굴들이 그를 향해 꿈틀거리며 뻗어 오고 있었다. "크와아아!" 하늘빛 드래크로니안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로 그 덩굴들을 짖이겼다. 그러 나 그의 머리 위에서 또 한 무더기의 덩굴이 뻗어 나오고 있었고, 그것이 그의 날개와 목을 묶어 버렸다. 그리고 바닥에서 솟아 나온 덩굴이 거대한 채찍처럼 보레아스의 등을 쳐 튕겨냈다. "윽!"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보레아스는 맥없이 튕겨나가 벽에 부딪쳐 쓰러졌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수많은 굵고 가는 덩굴들이 그물을 이루며 덮쳐 오고 있었다. "하아-!" 그 그물이 그를 덮치기 직전, 번쩍거리는 칼날이 그의 눈앞에서 사선을 그 었다. 생명을 잃은 나무덩쿨이 흐느적거리며 보레아스의 위로 떨어졌다. "ㅋ라 이르 알리드(괜찮은가)?" 유창한 고대어. 보레아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일을 이해할 수 없 었던 것이다. 분명 그의 앞에 서 있는 인간은... "시엘레이스?!" "켈리, 조심해!" 다급한 외침에 시엘레이스의 모습을 한 그 소녀는 뒤를 돌아 보았다. 그러 나 그녀가 손을 쓸 필요도 없이, 그녀의 등 뒤를 덮쳐 오던 한 무더기의 덩 굴들은 싹둑싹둑 잘려 떨어졌다. 볼품없이 잘려나간 덩굴들 뒤로, 흑발을 조 금 헝클어뜨린 단정한 미모의 청년이 칼을 든 채 서 있었다. 그의 눈은 드 래크로니안 중에서도 흔치 않은, 선명한 피빛이었다. '전사(戰士)의... 눈... 인가...' 보레아스는 일어서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 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저 얼굴... 저 모습, 저 금발과 푸른 눈, 붉은 입술... 분명 저 여자는 시엘레이스다. 그리고 저 칼은... 금빛 날의 힐리온...!' (계속) 아아.... 왜이렇게 쓰기가 힘든지 모르겠네요^^; 환상적으로(?!) 안 올려서 죄송합니다. 다 끝내 놓고선 무슨 짓인지... 계속 봐 주시는 분들께 감사하고 죄송할 따름입니다. 못된 래디 올림... 『게시판-SF & FANTASY (go SF)』 21372번 제 목 : 巖용 의 신 전 載--- Part 2 No.105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11/15 10:44 읽음 : 566 관련자료 없음 ----------------------------------------------------------------------------- "미안, 좀 늦었군요!" 켈리는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만면에 띄우며 할 말을 잃고 있는 보레아스에 게 말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사방으로 덩굴을 펼치고 있는 나 무 줄기 모양의 괴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몹쓸 잡초로군... 저런 건 뽑아버리는 게 상책이지!" 그녀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녀의 머리 위로 수십개의 덩굴이 촘촘한 그물을 이루며 뻗어 갔으나, 힐리온의 금빛 칼날 앞에 잘려나가 땅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드래크로니안들은 물론 이즐 레이와 마빈마저도, 잠시 넋을 잃고 그녀의 모습에 정신을 빼앗겼다. 힐리온 의 날이 그렇게도 날카로운 빛으로 빛난다는 것을 이즐레이는 처음으로 깨 달았다. 켈리는 무너진 벽 위에 착지했다. 맞은편으로 그 거대한 식물의 줄기가 꿈 틀대는 것이 보이고 있었다. 여러 겹으로 얽은 줄기는 돌바닥을 뚫고 보이 지 않는 지하의 뿌리로 이어져 있었다. '그렇지... 뿌리에서 잘리면 나무는 죽는 거야.' 한아름은 될 듯 굵은 덩굴이 켈리를 향해 곧바로 뻗어 왔다. 그러나 그녀 는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가볍게 그 덩굴을 밟더니, 나무의 줄기 쪽으로 몸 을 날렸다. "켈리! 저 바보가!" 이즐레이는 당혹감에 가득 찬 고함을 지르며, 그녀가 간 길을 밟아 벽 위 로 뛰어올랐다. 덮쳐오는 덩굴들은 그의 재빠른 칼날 아래 갈갈이 찢겨졌다. 수액이 튀었다. 그런 그를 보며 켈리는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즈! 뒤를 부탁해! 그리고 보레아스! 힘을 빌려줘!" 보레아스는 마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라도 받은 듯 망설이지 않고 일어 섰다. 그녀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린다는 것도,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안다는 것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의 눈은 거대한 나무 줄기의 바로 곁에서 쉴새없이 칼을 휘두르는 켈리와 이즐레이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그 의 입에서는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갈 페이 타냐스, 헤이스 레이시나드... 팔리아스 에퀴오나스!" 그의 주문이 끝남과 동시에, 켈리는 힐리온을 높이 쳐들었다. 주문은 이미 보레아스를 떠나 그녀의 것이 된 후였다. 힐리온의 금빛 날이 점점 차가운 청색의 빛을 발하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눈을 제대로 뜨고는 바라볼 수 없 는 하얀 빛덩이가 되었다. "팔리아스 에퀴오나스!" 켈리가 보레아스의 마지막 말을 받아 외치며, 있는 힘껏 칼을 내리쳤다. 꿈 틀거리는 녹색의 줄기를 향해. 하얗게 빛나는 섬광이 마치 긴 채찍처럼, 줄 기를 세로로 가르며 뿌리 깊숙히 파고들었다. 그 광선은 줄기를 꿰뚫고 지 나가 뿌리에 다다라, 거대한 백색의 폭발을 일으켰다. 콰쾅-! 성 전체가 그 폭발에 흔들렸다. 뿌리는 눈부신 빛을 뿌리며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하얀 죽음은 곧이어 줄기를 타고 덩굴 하나하나 로 이어졌다. 녹색의 줄기는 일순간에 색을 잃고 창백한 빛깔이 되어, 마치 노인의 사지마냥 쪼그라들었다. 가는 덩굴들은 부스러져내렸고 굵은 덩굴들 은 부리지며 먼지를 뿌렸다. 이윽고 줄기 전체가 하얀 먼지를 뿌리며 스러 져 갔다. "힐리온...!" "에디오스. 에디오스 드리아 휘일린! (여왕이야. 여왕이 돌아왔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드래크로니안 사이에 퍼져 갔다. 이즐레이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힐끔 켈리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눈을 크게 뜨 고, 힐리온을 뚫어지게 노려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멋진데... 이게 힐리온이란 말이지!" 그런 그녀에게 비틀거리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기척에 켈리는 비로소 칼에서 눈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보레아스였다. 그의 얼굴은 지쳐서 창백했으나,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쓰러지듯 그녀 앞에 무릎을 꿇 고, 마치 보물을 받아 쥐듯 두 손으로 그녀의 왼손을 받쳐 들었다. "레이스 에이나스 렐 테이렐라스...!" 그는 조용한, 그러나 작지 않은 목소리로 말하며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었 다. 드래크로니안들의 시선이 한순간 켈리에게 집중되었다. 이즐레이 역시, 흘끗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레아스 아일탈로스. 그리고 다른 드래크로니안들... 지금까지 잘 기다려 주었소. 이젠..." 켈리는 미소지으며 금빛 날의 힐리온을 들어올렸다. 그녀의 미소는 아까의 소년 같은 미소와는 또 다른, 왕의 위엄이 서린 미소였다. "기다림은 끝났소." 12. 이피아 왕비는 가만히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성의 흔들림이 점점 심 해지고 있었으나, 그녀는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미동도 없이 앉 아 있었다. 하르크자엘은 그녀를 납치한 후에도 험하게 다루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다크엘프들의 시중을 받았으며 간소하지만 편안한 방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녀는 하르크자엘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처벌을 기다리는 죄인일 뿐, 절도 없는 앙갚음의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리반..." 그녀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녀가 다른 모든 것을 버리면서 사랑한 남자의 이름.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일은 그 한 명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었 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그녀는 생각했다. 그 날 숲으로 산책나가지 않았 더라면, 그렇게 시녀들을 따돌리고 혼자 돌아다니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그 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 때 만난 기사가, 그 때 로데인의 잔당을 토벌하러 보내어졌던 기사가 그런 친절한 젊은이만 아니었더라면. 나이들고 추한, 거칠고 예의라고는 없는, 그런 기사였더라면. 아니, 전부 고사하고, 단 지 리반 아덴 그만 아니었더라면... 그러면 이 모든 일들은 일어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혹은, 그녀가 그녀의 선조들이 적을 사랑했을 때 그러했듯이, 다른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스스로 추방당하는 길을 택했더라면... "내가 당신을 지켜 주겠어. 나와 함께 도망치자고. 시지리스의 드래크로니 안들을 전멸시키고 나면, 내가 누구와 결혼하더라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거야. 그래, 난 어차피 관심에서는 벗어난 왕의 서자(庶子)일 뿐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리반, 당신은 드래크로니안들을 이길 수 없을 거에요!" "그렇지 않아. 나 혼자라면 몰라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제피로스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에요." 그래... 제피로스가 시지리스의 드래크로니안들을 전부 이끌고 싸운다면... 그러면 리반 아덴과 그의 군사들에게는 기회 따위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제피로스가 없다면? 만약 제피로스를 섬에서 끌어내고, 섬의 드래크로니안들을 없앤 다음, 그 다음에 제피로스를 살해한다면... 소름끼치는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리반을 잃는 것보다 더 두렵지는 않았다. "하나만... 하나만 부탁드릴께요. 이번만 내 말대로 해 줘요, 리반. 그러면, 다시는 이런 일로 부탁드리지 않을께요..." 리반 아덴은 시지리스에서 승리했다. 그는 어째서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이 라는, 그 악명 높은 흑룡(黑龍)이 보이지 않는지 의아해 했다. 그러나 어쨌 든 시지리스는 인간들의 섬이 되었고, 리반 아덴은 영웅이 되었다. 드래크로 니안의 수장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오직 단 한명만이 그 실종된 드래크로니안을 두려워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 새웠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침착한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이피아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제피로스." "이제는... 하르크자엘이오. 제피로스는 시지리스에서 죽었지." 붉은 눈의 청년은 냉정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피아 왕녀가 이미 오래 전 죽었듯이 말이오... 레이디 리반 아덴." 그가 칼을 뽑았다. 날카로운 빛이 이피아의 가슴을 섬뜩하게 했다. 배신자에게는 죽음을. 그것은 로데인의 건국 시절부터 이어져 온 법이었다. "당신이 한 말 중 맞는 것도 있더군." 제피로스는 천천히, 이피아에게로 다가서며 말했다. 분노 따위는 제거된 말 투였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하고 냉정했다. 복수가 아니라 심판을 원하는 자 의 목소리. "내가 어리석었소. 증오와 원한만으로 이 모든 일을 꾸몄지. 그 결과 내 자 신과 내 소중한 이들까지도 워험에 빠뜨리고... 세계를 혼돈으로 다시 몰아 넣는다는 계획 따위도..." 낮은 웃음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새어나왔다. "아니, 이 실패를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지. 카야크는 영원히 묻힐 것이오. 내 계획도 영원히 실패겠지. 잘 된 일이오. 인간과 드래크로니안 모 두를 위해..." "제피로스..." 이피아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백성을 버리 고 리반을 선택한 이래, 후회 따위는 한 적이 없었다. 리반 아덴이 죽었을 때조차 후회하지 않았다. 그녀의 첫째 아들이 죽고 막내 아들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며 집을 나갔을 때조차... 그녀는 자신의 선택을 확신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후회하려 하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으시오, 왕녀!" 제피로스는 나지막하게 명령했다. "당신은 선택을 했소. 선택을 했다면 책임이 따르는 법. 배신자의 길을 선 택한 처벌을 받으시오. 다른 모든 로데인의 배신자들이 그러했듯이." 이피아는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고 있었다. 스스로 처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녀 하나쯤 무력으로 죽이 는 것은 제피로스에게는 쉬운 일일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죽음 이 되겠지.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습니까,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이여.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나 자신의 죽음으로, 당신의 복수를 끝마치겠다고. 내 아들들과 그 자손들에게는 더 이상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제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피아는 바닥에 내려앉아 무릎을 꿇었다. 제피로스의 하얀 칼날이 서서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멈춰!" 갑자기 날카로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굳게 잠겨 있던 문이, 펑! 하고 치솟는 불길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버렸다. 제피로스는 반사적으로 칼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부서진 문으로 갈색 머리칼의 요정 소녀와 칼 을 든 금발의 청년이 달려들어왔다. 붉은 금빛의 머리칼, 분노로 이글거리는 청록색 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을 그대로 빼어 박은 모습. "어머님한테서 물러서라, 이 악마!" 랜스는 칼을 겨누며 소리쳤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놀라지도, 화를 내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서서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랜스는 화를 내며, 더욱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칼을 거두고 물러서, 하르크자엘! 내가 널 상대한다!" "이젠 너를 쓰러뜨리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다, 리반 아덴의 아들." 제피로스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눈길로 랜스를 뚫어지 게 쳐다보고 있는 이피아에게, 조용히 말했다. "설명해 주시오, 왕녀. 어차피 내 말은 믿지도 않을테니." 이피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는 보지 못할 아들 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켜 두려는 듯, 한참동안 말없이 그의 모습을 바 라보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가거라, 랜스. 가서 이 일을 잊거라. 이것은... 우리의 세대, 나와 제피로스 의 세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란다. 너희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말도 안 됩니다, 어머니! 제 눈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이번 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모습까지 보라는 겁니까? 이번에는, 이번에는 가 만히 있지 않겠어요, 절대로!" "듣지 않았나. 자네와는 관련이 없는 일이야." "시끄러워, 하르크자엘! 너는 내 아버지를 내 눈앞에서 죽였어. 그리고 이 제 와서 나는 아무 관련 없다고? 너같이 피도 눈물도 없는 악마가 인간의 감정 따위 알 게 뭐냐! 10년동안 나는 너를 쓰러뜨리기 위해 살아왔다. 그러 니, 자, 싸우자. 그리고 네가 죽든지, 아니면 날 죽이라고!" "그만 둬, 랜스!" 이피아가 소리쳤다. "저 아이의 말을 듣지 말아요, 제피로스! 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 고 약속하지 않았던가요! 날 죽여요, 날 처벌해요! 그리고 모든 복수를 끝내 요! 더 이상 되풀이되게 놔두지 말아요! 제발!" 그러나 랜스는 이미 칼을 높이 쳐들고 하르크자엘에게로 덤벼들고 있었다. 그 칼날이 그의 어깨를 강타하려는 순간, 그는 재빨리, 가볍게 뛰어올라 뒤 로 서너 발짝 후퇴했다. 칼날은 허공을 갈랐다. "이러지 마라, 리반 아덴의 아들. 나 역시 너와 싸우고, 너를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피아 왕녀의 말이 옳다. 설사 내가 너희들을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한다 하더라도, 너희, 리반 아덴의 아들들은 이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지. 그래. 인전하기 싫지만 시지리스의 그 일은... 너희들 자신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지..." 제피로스의 목소리는 비통했다. "내 실수를 인정한다. 리반 아덴을 죽인 것은 내게 있어서 정당한 일이었 다. 그러나 그 아들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 것은, 모든 인간들을 적으로 삼고 살해하려 했던 것은, 그리고 네가 그의 죽음을 보게 만든 것은... 내 불 찰이었다. 사과한다." "뭐라고!" 랜스는 분노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으나, 떨리는 입술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제피로스만이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도 보았겠지. 카야크를 눈뜨게 하려는 내 계획은 이렇게 비참한 실패 로 끝났다. 내게 있어서 정당한 처벌이지. 이제 내 어리석은 복수극은 끝이 다. 그러나 드래크로니안 족의, 그리고 로데인 백성의 정당한 복수가 끝나기 위해... 배신자의 피가 필요한 것이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랜스였다. 그의 부자연스러운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래, 하르크자엘... 그러니 네가 어머니를 살해하게 놔두고 가라... 그리고 모두 없었던 일로 하자... 이건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지." "받아들이고 싶고 말고가 문제가 아니다. 네 녀석은... 너라는 놈은! 도대체 어떻게 된 악마냐! 오르크 따위라도 그렇게 태연한 얼굴로 이런 말을 꺼내 지는 못한다. 넌... 부모와 자식이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지?" 갑자기 제피로스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한순간 그의 표정은 드래크로니 안의 냉정한 수장, 제피로스의 것이 아니라, 원한에 사무친 하르크자엘의 것 이었다. "리반 아덴은 시지리스에 와서, 부모와 자식을 생각했던가!" 순식간에 그의 등 뒤를 날개가 덮었다. 그는 훌쩍 뛰어올라, 날개로 천정을 스치더니 랜스의 바로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칼날이 랜스의 목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아슬아슬한 차이로 랜스의 칼날이 그 칼날의 진격을 막아 세웠 다. 랜스는 갑자기 돌변한 적의 태도에 당혹한 채, 코앞에서 이글거리며 자 신을 노려보고 있는, 증오에 찬 자색 눈을 응시했다. "말해 봐라, 리반 아덴의 아들! 말해 보라고! 네 아비는 시지리스에서 부모 와 자식을 생각했던가. 네 어미는 그런 추잡한 계획을 세우며 부모와 자식 을 생각했던가 말야! 왜 대답을 못하나!" 랜스는 힘으로 하르크자엘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는 가볍게 튕겨나가듯 물 러서서, 반대편의 벽을 박차더니 다시 랜스에게로 되돌아왔다. 칼날이 랜스 의 어깨를 스쳐 피가 튀었다. 랜스는 바닥으로 굴러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 러나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하르크자엘의 칼날은 다시 머리 위에서부터 그 를 덮쳐오고 있었다. 그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자신의 칼로 그 공격을 막았다. "그만 둬요, 제피로스!" 이피아가 소리쳤다. "나 하나면 끝난다고 했잖아요. 나 하나의 죽음이면 충분하다고...!"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천정에 닿을 듯 날아올라, 물 고기를 발견하고 하강하는 갈매기처럼 날쌔게 랜스의 등을 덮쳐 왔다. 랜스 가 간신히 몸을 돌려 그 공격을 받아냈을 때, 하르크자엘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있었다. "푸린(죽어버렷)!"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고함치며, 하르크자엘은 랜스의 허리를 향해 긴 원호를 그리며 칼을 휘둘렀다. (계속) "크윽...!" "윽!" 두 사람의 비명과 함께, 피가 벽까지 튀어 흘러내렸다. 한 사람의 피는 아 니었다. 하르크자엘의 얇은 칼날이 랜스의 왼쪽 옆구리를 꿰뚫고 있었으나, 랜스의 넓은 칼날도 하르크자엘의 바른 어깨에 반쯤 꽂혀 있었던 것이다. "랜스!" 이피아 왕녀와 데이미아가 거의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랜스와 하르크자엘은 잠시 멈추어 선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제... 법인데...! 많이 늘었군..." 하르크자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랜스 역시 간신히 미소지으며 대꾸 했다. "내... 친구에게서 알았지... 드래크로니안들의 검술은... 상대가 피하려고 들 거라는 가정에 기초해 있다는 것을... 피하지 않는다면... 네 놈을 벨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과연..." 하르크자엘은 어깨의 상처를 움켜쥐고, 숨을 헐떡이며 벽에 몸을 기댔다. 랜스는 자신의 칼을 지팡이 삼아 몸을 지탱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무릎은 힘없이 꺾여져 바닥에 내려앉았고, 그의 손도 곧 칼자루를 놓쳤다. 왼손으로 움켜 쥔 상처에서 피가 솟아나와 땅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는 이 를 악물고 고개를 쳐들어 하르크자엘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곧 고개를 푹 떨구며 바닥 위에 쓰러졌다. 하르크자엘은 냉엄한 눈으로 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어깨의 상처에 서 흘러나온 피가 칼을 타고 바닥에 떨어져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왼손으로 칼을 바꾸어 쥐었다. 그리고 쓰러진 적을 노려보며 들어올렸다. "쉬린(그만 둬)! 아일룬!"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하르크자엘은 그녀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지라, 놀라 멈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에서 막 어린 아이의 머리 만한 불덩이가 만들어져, 그를 향해 날아오려는 참이었다. 쾅! 불덩이는 벽에 검은 자국을 남기며 사라졌다. 어느 새 한 발짝 뒤로 물 러난 하르크자엘은 데이미아를 노려보았다. "너는... 그 쥐로군." "그래요." 데이미아는 하르크자엘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표정 없는 단아한 얼굴, 갓 소년 티를 넘긴 청년의 얼굴 같으면서도 노인 이상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얼굴, 고귀해 보이는 만큼이나 차갑고 증오심에 차 있는 얼굴. 그리고 저 자색 눈. 분명히 낯이 익었다. 그녀는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아니, 이제서야 기억났다는 것이 이상할 노릇이었다. "제피로스... 당신은 로이를 도왔던 그 기사죠." 하르크자엘은 피식 웃으며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나를 방해하지? 부상을 입은 하르크자엘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던 가?" 데이미아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 자신이 생각해도 놀랄 만큼 침 착한 태도였다. 몇 발짝도 안 되는 거리 앞에서, 하르크자엘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칠 수 있을 자세로 칼을 쥐고 있는데, 그녀는 스스로 이해가 안 될 만큼 태연했다. '내가 이거... 아무래도 지금 제정신이 아니지...' 데이미아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하르크자엘의 자색 눈을 똑바로 올려다 보며 말을 이었다. "실수를 후회한다고 하셨으면서 왜 똑같은 실수를 하나요, 제피로스?" "..." "솔직히 나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드래크로니안이라는 것은 전 부터 알고 있었어요. 그러기에 당신의 증오, 그건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의 원한도, 복수심도. 하지만 당신이, 로이를 도왔던 그 기사였던 당신이, 그 원 한을 그렇게 실행에 옮겼다는 건... 도저히..." "요정족은 입을 다물거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요정족이지만."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두 손으로 쥐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신이 내 친구를 공격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 있지만은 않겠습니 다. 희생을 더 늘리고 싶으신가요!" 하르크자엘은 공격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감히 자신에게 대든 어린 요정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의아했다. 분명 자신이 이제 엘미어를 가졌고, 그리고 하르크자엘은 부상을 입었다고 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게다가 하르크자엘에 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어깨의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내려 팔과 땅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네 말이 맞다, 엘미어의 주인." 하르크자엘이 이윽고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입가에는 미소의 흔 적마저 남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쓸쓸한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 패배다. 더 이상 추한 결말을 만들지 말아야겠지. 저 자... 그대 의 친구는, 지금 손을 쓴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다." "...하르크자엘?" "놀랐는가." 눈이 휘둥그래져서 중얼거리듯 묻는 데이미아를 보고, 하르크자엘은 미소 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부드럽거나 따뜻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방금 전까지 가면처럼 얼굴을 덮고 있던 살기와 증오가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데이미아 는 결코 투구를 벗지 않는 기사의 얼굴을 몰래 훔쳐본 느낌이었다. 투구 아 래의 그 얼굴은, 로이를 도와 싸우던 그 기사의 얼굴이었다. "그가 깨어나면, 알려주거라. 더 이상 하르크자엘을 찾아 헤멘다 해도 소용 없을거라고. 이제... 원한과 복수의 역사는 끝난 것 같으니." 그는 천천히 데이미아의 앞을 지나쳤다. 그리고 이피아의 앞에 서서 나직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왕녀. 그대도 약속을 지키기를 바란다. 단지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나와의 계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대도 잘 알 것이 다. 그대가 살아있는 한 피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이피아는 꼼짝 않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을 뿐이었다. 하르크자엘은 칼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이피아 왕녀의 눈앞에 꽂았다. 한때 그가 충성을 맹세했던 왕녀, 그가 함께 싸울 동료로 인정했던 인간 여 인,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배신하고 불행을 몰고 온 여인. 그토록 오랜 세월 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은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약속을 지켜라. 그대는 더 이상 왕녀가 아니다, 이피아. 그러나 나는 그대 에게 왕녀의 명예를 지키며 자결할 권한을 준다." "안돼...!" 데이미아가 낮게 소리쳤다. 하르크자엘과 이피아의 눈이 동시에 그녀를 바 라보았다. 데이미아는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끼어든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면서도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이런... 이런 방법밖에 없는 건가요! ...뭔가 다른 치유책이 있을 거에요. 살 생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될 수 없어요. 증오는 복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복 수로 키워지는 거라고요! 그걸 모르나요, 제피로스!" "그대는 확실히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의 딸이로군." 하르크자엘은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복수는... 무의미하다. 그러나 이것은 처벌이다. 무의미한 복수가 아니다. 그대의 어머니가 드래크로니안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 않던가, 어린 숲의 마법사여. 실리사와 에퀴온은 한 몸이지. 실리사가 판결한다. 그리고 에퀴온이 자비를 베푼다. 실리사가 끝을 내고, 에퀴온이 새로 시작하지. 처 벌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어떤 자비도 없다.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 다. 그것이 드래크로니안의 법칙. 아무도 처벌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부당하 게 그녀의 생명을 부지시켜 준다 하더라도... 또 다른 드래크로니안이 그녀 의 생명을 받으러 올 것이다. 혹은 또 다른 로데인 인이. 끝을 맺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그런...!" "그의 말이 옳습니다, 어린 마법사여." 이피아 왕비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끝을 맺어야지요. 제가 한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나는 정당한 방 법으로 왕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가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 는 권력을 이용하여 드래크로니안들을 속였고, 그 벌로부터 도망쳤습니다. 그 결과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은... 희생을 늘 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하르크자엘의 칼을 빼어들었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비굴한 두려움의 흔적은 없었다. "이것으로 우리의 원한은 끝입니다, 제피로스. 부디 이 일로 모든 희생의 역사가 끝나고, 새 역사가 시작되기를." "그대의 피 위에서 새로운 로데인이 세워질 것이오, 왕녀. 그리고 거기서는 인간을 적대하지 않는 드래크로니안들과 드래크로니안을 적대하지 않는 인 간들이 살아가게 되겠지. 새로운 여왕이 그곳을 다스릴 것이고, 그곳에서는 이피아도 제피로스도 없을 것이오." 제피로스는 차분하게 대답하고는, 데이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라스헨 에이니드. 그대에게 이 처벌의 증인이 되어 줄 것을 부탁하오." "에에에?" 데이미아는 할 말을 잃고 새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상관 않 고 말을 이었다. "그대는 자격이 있소. 이제 왕녀의 죽음을 목격하고, 전해 주시오. 드래크 로니안의 배신자는 그 처벌을 받았으니 더 이상의 복수는 없다고. 이제 모 든 원한은 풀렸다고 말이오." "부탁합니다, 어린 마법사여." 이피아 왕녀도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 했다. 그리고 데이미아가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어깨 위에 칼을 올리더니, 반 대 쪽 어깨를 향해 잡아당겼다. 경동맥이 끊겨, 선홍색의 피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흘러나왔다. 왕녀는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하르크자엘은 말 없이 칼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왕녀의 피가 묻은 그 칼날 을 카펫에 비벼 닦았다. 깨끗하게 빛나는 칼날을 칼집 속에 감추고, 그는 가 벼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아... 자, 잠깐, 하르크자엘! 당신 역시 그 상처를 방치했다가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린 데이미아가 퍼뜩 문 쪽을 돌아보며 소리쳤을 때, 이 미 하르크자엘의 모습은 허깨비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데이미아는 잠시 어 리둥절해 있다가, 세차게 고개를 몇 번 휘젓고는 랜스에게 달려갔다. 하르크 자엘의 말대로 맥박이 약하기는 했으나,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아... 아스틸라 넬 시아인 딘(아스틸라여,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데이미아는 한숨을 푹 쉬며 쓰러진 랜스와 죽어 있는 그의 어머니를 번갈 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모든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젓고는, 서둘러 주문을 읊었다. "아스틸라 뤼아나스, 레야 로세나스, 힐린 로르 테일. 힐린 휜 테일 한 롬 엘레이시나드, 휜 테일 론 라베나드..."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땅바닥에 내려놓은 채 두 손을 랜스의 상처에 올려놓 았다. 그녀의 양손은 곧 은은하면서도 따뜻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흰색이 었으나 어떻게 보면 녹색이나 금빛같이 보이기도 했다. 빛 속에서 랜스의 상처는 스스로 아물었고, 그의 얼굴에는 다시 혈색이 돌았다. "휴우..."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어쨌든 랜스는 살았으니 불행 중 다행 이긴 하지만... 어머니의 시신을 보고 그가 어떤 반응을 할지도 걱정이었다. 그러나 그녀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않는가. 그렇다. 도저히 말릴 수 없었다. 무책임한 발언 같지만, 이것은 정말 이피아와 제피로스 사 이의 문제, 요정이 간섭할 수 없는 인간과 드래크로니안의 문제... 쾅! 갑자기 방 전체가, 아니 탑 전체가 요란한 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천정 에서 우수수 돌가루가 떨어졌다. 아까부터 계속 크고 작은 진동이 이어져 와서 결코 조용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지금 것은 데이미아를 넘어뜨리기 에 충분할 정도로 강한 진동이었다. "뭐... 뭐야?" 졸지에 엉덩방아를 찧은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집어들고, 벌떡 일어나 창문 으로 얼굴을 쓱 내밀었다. 그리고 때마치 창문 안을 들여다 보고 있던 용의 얼굴에 부딪쳤다. 사실 그것은 용의 얼굴이라고 부를 수도 없었던 것이, 마 치 거대한 잠자리의 눈 네 개가 박힌 개의 얼굴처럼 보였던 것이다. 개라 해도 대단히 못생긴 개였다. 귀는 없었고 털은 우중충한 회색으로 몹시 더 러워 보였으며,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 하나가 데이 미아의 키만큼 클 정도로 거대했다. "으아아아아!" 데이미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몇 발 짝 물러서다가, 무엇엔가에 발이 걸려 넘어졌다. "데... 데이미아?" 마침 그녀가 걸려 넘어진 것은 랜스의 머리였다. 랜스는 채인 부분이 아팠 던지, 헝클어진 뒷통수의 금발을 어루만지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한 듯 방 안을 둘러보다가, 이피아의 시신을 보고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녀에게로 달려가 그녀가 죽은 것을 확인하고 는, 칼을 쥐며 나지막하게 소리쳤다. "하르크자엘...!" "저기... 저기..." 데이미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개의 머리를 한 용이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 는 창문을 가리켰다. 마침 그 괴물은 그물망처럼 생긴 네 눈을 굴리며 입맛 까지 다시고 있었던 것이다. 랜스는 그 말이 하르크자엘이 저기 있다는 뜻으로 알았는지, 재빨리 전투 태세를 취하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 밖의 괴물을 보고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가... 머리를 다쳤나... 아니면 충격이 심했나..." 그는 눈을 감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 여전히 하르크자엘은 없었다. 아까 본 괴물의 얼굴도 없었고, 그 대신 거대 한 털북숭이 발이 창문을 꽉 메우며 방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있는 것이 보 일 뿐이었다. 랜스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지으며 말했다. "데이미아... 나 헛것이 보이는데..." 그러나 데이미아는 대답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아일리아스! 하디미라스!" 그녀는 주문을 소리쳤고, 동시에 엘미어를 들지 않은 그녀의 손에서 활활 타오르는 황금빛 굵은 불이 허공을 헤엄치며 뻗어 나갔다. 그것은 창을 통 해 들이밀어진 털투성이의 지저분한 발에 불을 붙였고, 그 털들은 순식간에 매캐한 연기와 검은 재로 화했다. "크아아아아아!" 괴물은 비명을 지르며 거칠게 발을 뺐다. 너무 거칠게 뺐으므로, 창문이 전 부 부수어졌음은 물론, 탑 전체가 기울어졌다. 데이미아와 랜스는 경사진 바 닥을 굴러 괴물의 위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아무거나 지탱이 되는 것을 꼭 잡고 있어야 했다. "데이미아? 저건 뭐지?" 랜스가 아직도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하르크자엘은 어딜 가고?" "지금 일이 이렇게 됐는데 아직도 하르크자엘 타령이 나와요?" 괴물은 잔뜩 화가 나서, 악취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아예 탑 전체를 물어 뜯어려 했다. 덕분에 이제 탑은 반대쪽으로 기울어, 세 사람은 자연히 방문 밖의 복도로 쏟아져나갔다. 데이미아는 얼른 방의 문을 꼭 닫아 빗장을 걸 고, 랜스를 잡아 끌며 소리쳤다. "자, 어서 도망치면 늦지 않을 거에요! 툴위그와 로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와지끈 부서지며 성난 네 개의 겹눈이 드러났다. 괴물이 문을 집어 삼켜버린 것이다. "으아아! 저런 놈에게 쫓기느니 차라리 하르크자엘이랑 랜스가 싸우는 걸 구경하는 편이 나을 뻔 했어! 팔로카!" 데이미아의 손에서 이번에는 하얗고 차가운 빛줄기가 뻗어나갔다. 괴물은 몸이 상당히 둔해 피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은 괴물의 이마에 깊은 상처를 남기며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괴물은 더욱 흥분했다. "크와아아! 크와아아!" "모... 모르겠다. 어서 도망치자고요!" 두 사람은 부리나케 달려 복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물은 이리 저리 복도 벽을 물어뜯으며 끈질기게 추격해 왔다. 한참 달려가다 보면 갑 자기 괴물의 누렇고 긴 송곳니가 벽을 뚫고 들어와, 한 뭉텅이의 벽을 뜯어 가곤 했다. 그들이 맨 마지막 층에 내려왔을 때, 이미 탑은 다 무너져 사라 져 버렸을 정도였다. 그리고 뻥 뚫린 탑의 자리에서는 커대하고 못생긴 개 가 머리를 힘겹게 들이밀고 있었다. "팔리아스! 카하렐리아스!" 데이미아가 주문을 외쳤다. 그 괴물은 피할 능력은 물론 피할 의사까지 전 혀 없는 듯 보였다. 그것은 담담히 그녀의 공격을 받아들이고는, 거의 망가 진 코와 한쪽 눈에서 검붉은 피를 철철 흘르며 더욱 화를 내는 것이었다. "크르르르르...!" 탁한 그르렁거림과 함께, 그것은 성 안으로 더욱 더 머리를 디밀었다. 이제 는 성벽 전체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정말 보기 싫은 괴물이군...!" 랜스는 칼을 두 손으로 잡으며 뛰어오를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가 괴물을 공격하려는 찰나, 갑자기 괴물이 경련을 일으키며 비명을 토해냈다. "크아아아아!" 어리동절해하는 랜스와 데이미아의 앞에, 괴물의 머리가 털썩 쓰러졌다. 그 리고는 검붉은 피로 자국을 남기며, 성 밖으로 질질 끌어내어졌다. "뭐가 어떻게...?" 성벽이 헐려 생긴 거대한 구멍으로 밖의 광경을 본 랜스는 놀라움을 감추 지 못했다. 하피들이 그 괴물의 등에 올라선 채 살을 마구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벌써 뼈와 내장이 노출되어, 하피의 독 때문에 거품을 내며 썩어들 어가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도대체... 자기 편을 공격하다니?" 랜스는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며 침착하게 대꾸 했다. "지금 이게 여기 상황이에요. 카야크가 죽어서 통제가 풀린 거죠. 덕분에 오르크들과 일부 타락한 용족들을 빼고는 모두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어 요. ...짐승의 본능대로."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랜스에게, 데이미아는 조용히 덧붙였다. "바로 카야크 - 혼돈이죠." (계속) 한참 포식을 즐기던 하피 중 하나가, 바로 그 때 랜스와 데이미아의 모습 을 발견했다. 하피들은 하늘을 까맣게 덮으며 날아올랐다. 랜스와 데이미아 는 뒷걸음질쳤다. "...확실히... 아무나 공격한다는 건 우리도 공격한다는 뜻이겠지?" "두말 하면 잔소리죠."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뒤로 감추고, 한 손만을 얼굴 앞으로 올린 채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랜스 역시 칼을 고쳐 잡으며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하앗!" 랜스의 칼이 기합 소리와 함께, 가장 가까이 다가와 있던 하피의 가슴을 갈랐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드러나 피를 토해내며, 하피는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랜스는 그 바로 곁에 착지하며, 뒤를 돌아보는 동시에 긴 원호를 그리며 칼을 휘둘렀다. 그의 등 뒤로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든 다른 한 마리 의 하피가, 그 칼날에 목을 베이고 바닥에 떨어졌다. 그것은 잠시 경련을 일 으키더니, 이윽고 완전히 죽었다. "아스틸라 니디스! 웨이닌 딤 니드 다닐리나드!" 데이미아가 소리치자, 그녀를 중심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얀 빛이 주 위를 휩쓸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하피들은 그대로 생명을 잃고 풀썩 풀썩 쓰러졌다. "흐음... 이 정도야!" 데이미아는 미소를 지으며 다음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의 등 뒤로부터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악!" "아...!" 빛이 비치지 않는 곳에 숨어 있었는지, 한 마리의 하피가 남아 그녀를 향 해 쏜살같이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주문을 욀 새도 없었다. 그러나 그 것이 데이미아를 덮치기 직전, 랜스가 재빨리 그녀를 막아서며 칼을 사선 보양으로 내리그었다. "카아악!" 하피는 어깨부터 배까지가 길게 찢겨, 피를 내뿜으며 떨어졌다. 그러나 랜 스의 표정은 전혀 기쁘지 않아 보였다. "데이미아... 다른 녀석들이 오는데!" 데이미아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다가 입을 딱 벌렸다. "오르크...!" 그 다음에 벌어진 광경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하피들은 랜스와 데이미 아와 오르크를 함께 공격했으며, 오르크들도 하피들과 랜스와 데이미아를 함께 공격했고, 랜스와 데이미아는 하피와 오르크 두 종족에 맞서 싸워야 했다. 규칙도 규율도 목적도 없는 살육의 장이었다. "이런... 적이 너무 많아!" 데이미아는 아무리 주문을 외워도 줄어들지 않는 듯한 적들 때문에 탈진해 버렸다. 그녀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을 때에, 마침 오르크 한 마리가 메이스를 휘두르며 그녀에게 돌진해 왔다. "아르그르!" 그러나 그 오르크의 메이스가 데이미아를 내려치기 직전, 어디선가 날아온 벽돌 조각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크아아악!" 오르크는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얼이 빠진 채 잠시 그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뇌진탕이었다. "야호! 맞췄다!" 낯익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울렸다. "로... 로이!" 데이미아는 놀라움 반, 반가운 반으로 이상한 표정을 짓고는, 이디실은 별 도로 하리에 차고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별돌 조각들을 들고 던 질 준비를 하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나도 왔다! 데이미아! 랜스!" 거칠고 우렁찬 음성과 함께, 걸리적거리는 오르크들과 하피들을 마구 두동 강내며 한 난쟁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검은 수염과 시원스레 번쩍이는 검은 눈을 가진 난쟁이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날의 도끼는, 그것에 닿는 적의 몸을 사정없이 가르고도 여전히 날카롭게 번뜩거렸다. "툴위그까지! 어떻게 온 거에요? 기다리고 있겠다고..." "가서 기다리다가 다시 왔다. 도대체 어른을 기다리게 하다니, 요즘 것들 은!" 툴위그의 거침없는 대답에 랜스와 데이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툴위그 자 신도 웃으며, 호탈하게 소리쳤다. "자, 그럼, 이녀석들은 저희들끼리 싸우라고 하고, 우리는 얼른 길을 뚫고 도망치자!" 툴위그는 망설임 없이 카자룬의 검은 날을 마구 휘둘렀다. 일방적인 학살 이라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오르크들의 조잡한 칼이나 메 이스 따위는 카자룬이 닿자마자 부러져 버렸고, 하피들은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로이가 던지는 벽돌은 오르크들에게는 별 효과가 없었지만, 하피들 여럿의 날개를 부러뜨릴 수 있었다. "자! 자! 어서 어서 도망치자고요!" 적의 숫자가 줄어들고 길이 뚫리자, 로이가 제일 먼저 소리치며 달려나갔 다. 데이미아와 랜스가 그 뒤를 이었고, 툴위그가 맨뒤에서 쫓아오는 오르크 나 하피들을 베어 버리며 달렸다. 복도를 조금 달려 온통 무너진 방에 숨으 니, 어디서도 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성이 흔들거리는 동안 계속 떨어지는 먼지가루들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필리우스는?" 로이가 눈치없이 물었다가, 데이미아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재빨 리 입을 다물었다. 툴위그와 랜스 역시 기운 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몰라도... 원래는 그리 나쁘지 않은 녀석 같았는 데..." 툴위그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는... 적어도 비굴하게 죽지는 않았어요. 날 위해 오르크들과 싸워 주었 지요. 자신의 선택에 의해. ...차라리 그가 조금 더 비굴한 자였더라면 더 좋 을 뻔 했지만." 데이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덕분에 나와 랜스가 살아 있는 거에요. 어쨌든...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려면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야 할 것 같군요. 우리가 모두 무사히 나가 는 것만이 그의 죽음을 가치있게 만드는 길이죠." 로이와 툴위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넷이 모두 일어선 순간, 갑자기 랜스가 차갑게 대꾸했다. "난 이대로 나갈 수 없어." "뭐...?" "난 하르크자엘을 죽여야 해." "랜스...!" 데이미아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랜스는 어느 때보다도 확고부동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봤지? 이제 그 놈은 내 아버지의 원수일 뿐만 아니라 내 어머니의 원수이기도 해. 그러니 난 절대로 그 놈을 살려둘 수가...!" "랜스, 어머닌 자결하신 거에요!" 데이미아가 낮게 부르짖었다. 랜스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의 입에서 다시 말이 나오기 위해서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무슨 뜻이야?" "랜스의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간족과 드래크로니안 족의 원한 이 끝날 거라고 하셨어요. 그 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셔서 속죄한다고 하 셨어요...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하르크자엘은 당신과 날 놔두고 가버린 거 에요. 어째서 그가 쓰러진 랜스를 살려두었다고 생각하죠?" "말도 안 돼..." "랜스의 어머니는 이 모든 복수의 고리를 없애버리기 위해 돌아가신 거에 요.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제발, 그 분의 뜻을 허사로 만들지 말아요!" "나한테는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어." 랜스가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하르크자엘이 죽기 전에는." "하르크자엘이 오래 살거라고 생각하나요?" 데이미아는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물음에 랜스와 로이, 툴위그는 모 두, 놀라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데이미아는 고개를 끄덕이 며 말을 이었다. "하르크자엘은 랜스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어요. 랜스는 내가 치료했었기 에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의 출혈은 방치해 두면 위험할 정도로 심했어요. 그리고 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난장판이 된 성에서 나가는 건 무 리에요."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표정에는 고민하는 빛이 역력했다. 잠시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고 쿵쾅거리며 성이 무너져 가는 굉 음만이 들릴 뿐이었다. 라우더, 어린 시절의 소중한 추억과 가장 끔찍한 기 억들이 모여 있는 곳. 한때는 리반 아덴의 영광된 성이었고 한때는 오르크 들의 더럽혀진 땅이었던 곳. 이곳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가고 있었 다. 랜스 자신조차 이 성과 함께 무너져 가는 느낌이었다. '뭘 위해... 싸운거지.' 하르크자엘을 죽이기 위해. 그는 10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그 목적을 위해 살아왔다. 오직 그 목적이 그를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었고, 오직 그 목적이 그를 성장시켜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다 끝났다는 것인가. 그의 어머니 의 희생, 하르크자엘과의 계약, 그것으로 끝이란 말인가. 그리고... '말해 봐라, 리반 아덴의 아들! 말해 보라고! 네 아비는 시지리스에서 부모 와 자식을 생각했던가. 네 어미는 그런 추잡한 계획을 세우며 부모와 자식 을 생각했던가 말야!'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르크자엘과 그 자신은 똑같은 처지라는 것을. 부당한 불행을 짊어 지고, 복수로 그것을 풀 수 있다는 환상 을 가진 쌍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소름끼치는 닮은 꼴이라는 것 을... 그러나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절대로 인정해서도 안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하르크자엘이, 하르크자엘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의 아버지 였다는 것을. "미안... 데이미아." 랜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툴위그... 내가 끝을 맺기 위해서는 하르크자엘의 죽음 이 필요합니다."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었다. 더 이상 말려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 녀는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랜스의 얼굴에게서 그녀는 하르크자엘의 얼굴 을 겹쳐 보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하르크자엘에게 근접해 가고 있다 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고, 결국 이런 처참한 실패를 하고서야 비로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그래서 실패에 감사해야 했던 하르크자엘을. 혹은... 드래크로니안의 수장, '따뜻한 남풍(南風)' 제피로스인 가... 랜스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져 갔다. 툴위그는 대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어쩔 수 없지, 데이미아." "...그래요. 랜스의 인생이니까..." "자신의 마음 속의 상처는 자기 자신이 치유할 수밖에 없는 거란다. 자기 나름의 방법대로..." 데이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로서는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제 피로스의 죽음을, 하르크자엘의 죽음을 그녀 자신이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 을. "그런데 랜스는 그렇다 치고..." 툴위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로이는 어디 간 거지?" "예에에에?" 13. "결국..."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망토를 풀어 시신의 얼굴을 덮었다. 다 무 너진 탑의 방에 시신은 기적적으로 무사히 남아 있었다. 마치 이종족(異種 族)의 무자비한 신이, 마지막 은혜를 베풀어 그녀의 명예를 지켜 주기라도 한 듯이. 치명적인 목의 상처, 자신의 손으로 낸 것이 분명한 그 상처를 제 외하고는, 마치 정성들여 지켜진 시신처럼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단지 돌가 루와 먼지가 조금 내려앉았을 뿐. 방의 반 이상이 허물어졌다는 것을 생각 할 때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피로 얼룩진 하얀 망토 아래로 이피아의 얼굴은 미소짓고 있었다. 평화롭 게, 언젠가 클레이브가 아주 어렸을 적에 보았던 대로. 그의 아버지가 그렇 게 살해당하고 랜스가 집을 나간 뒤로 그녀는 그렇게 웃지 못했었다. 아주 오랫동안. "페레이타의 낙원에서... 두 분이 재회하시기를 빕니다." 그는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는 슬픔조차 벗어난 듯한 경건한 태도로, 시신의 곁에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칼 위로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부하들은, 데이슨조차도,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클레이브 자신 역시 그 누구의 말도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그렇게 꿇어앉아 있다가, 곧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이 탑을 떠나도 될 것 같군. 이제 아무런 어둠의 생물도 남아 있는 것 같 지 않으니." 하고 클레이브는 말했다. "클레이브 님...!" 데이슨이 다가왔다.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격한 감정 때문에 다음 말은 잇 지 못했다. 클레이브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놀랄 만큼 침착한 푸른 눈이었다. 거의 냉 정해 보이기까지 했다. 더 이상 그의 얼굴은 그의 아버지, 리반 아덴과 닮아 보이지 않았다. 데이슨은 사실 왜 이전에 그가 리반 아덴과 클레이브를 동 일시했는지 의아해졌다. "아무 말 말게." 하고 클레이브는 말했다. "전쟁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게 마련이지. 나 혼자 겪는 일도 아닌 데, 쓸데없는 소동을 일으키고 싶지 않네. 탑을 떠나지. 아까부터 무너질 것 처럼 흔들거리고 있는데." 데이슨은 할 말을 잃고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클레이브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그리고 하얀 망토 아래 놓인, 리반 아덴이 사랑했던 여인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서두르게, 데이슨! 아무래도 폐하를 뒤쫓아 가 봐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놓이질 않는군." 클레이브가 소리쳤다. 데이슨은 말없이 명령에 따랐다. 그는 클레이브가 일 부러 냉정한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인지, 실제로 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클레이브 님!" 클레이브가 탑의 계단을 내려서기가 무섭게, 다른 탑으로 수색을 보냈던 한 무리의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가 몸소 이끌고 갔던 기사들의 표정과는 상반되는, 무척 밝은 표정들이었다. 그들은 들뜬 나머지 클레이브 일행의 침 통한 분위기도 눈치채지 못했다. "기뻐하십시오. 저희들이 누구를 찾아냈는지 보십시오!" 그 무리를 이꿀고 갔던 나이든 기사는, 기쁜 나머지 소리내어 웃으며 뒤에 서 있던 이의 손목을 잡고 클레이브에게 데려왔다. 클레이브는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클레이브." "멜리사, 무사했군." 멜리사는 언제나처럼 마치 어린 소녀와 같은 몸짓으로 달려와 남편의 품에 안겼다. 그가 먼 원정을 마치고 성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그랬듯이. 클레이브 는 기계적으로 아내를 포옹하고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그는 슬퍼해야 할지 기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슬픈 것보다 더 나빴다. "어머니도 여기 잡혀와 계세요. 저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지만... 그 분은 어 더실지 모르겠어요!" 멜리사의 말이 클레이브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는 잠시 포옹을 멈추고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밝은, 걱정에 휩싸인 동안에도 밝은 얼굴에 비 해 자신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울까 새삼 생각해 보았다. 멜리사에 비하면 그나 그의 죽은 어머니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과도 같았다. ...혹은, 멜리사와의 혼약을 그처럼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은, 그녀가 자신을 밝은 세계로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일까. "알겠소." 클레이브는 희미한 미소까지 보이며,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를 이끌고 온 중년의 기사에게 명령했다. "클로더 경, 내 아내를 무사히 성 밖으로 인도할 수 있겠지?" "예! 걱정 마십시오!" "그럼 부하들과 함께, 그녀를 보호하여 성 밖으로 나가 주게. 나도 곧 따라 가겠네. 폐하를 찾아, 그 분과 함께." "예! 알겠습니다!" 클레이브는 가볍게 멜리사의 어깨를 잡고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리고 클로더 경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그녀의 어깨 를 놓았다. "밖에서 기다리시오. 곧 따라가리다." 멜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적으로 낙천적인 여자였다. "자, 가자! 폐하는 지하 통로로 가신다고 했지?" 클레이브는 부하 기사들에게 외치며 발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가 초조했 다. 사실 그는 아까 전부터 후퇴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단시 군사들이 줄어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이 어둠의 생물들의 한가운데에서 싸 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 성이 계속 무너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별써 제대로 남아 있는 벽과 천정, 그리고 바닥은 별로 없었다. 구멍이 여기저기 뚫려 있거나 쿵쿵거리며 달릴 때 흔들거리는 것은 양호한 편이고,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 부스러 기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오르크들이 눈에 띄게 줄어든 것도 클레이브의 신경을 거슬렸다. 그들은 이 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피한 것이 아닐까. 확실히 이제 이 성 안에 남아 있는 종족이라고는 이성도 짐승의 본능도 결 여된 듯한, 도마뱀 인간들이나 타락한 용들, 그리고 하피들밖에는 없었다. 그들은 후퇴해야 했다. 비록 왕이 인정하고 있지 않더라도. (계속) 『게시판-SF & FANTASY (go SF)』 21652번 제 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108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11/19 22:38 읽음 : 595 관련자료 없음 ----------------------------------------------------------------------------- 14. "하하... 그 녀석... 제법이었어. 인간들의 성장력이란...!" 하르크자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감싼 지혈 붕대를 죄었다. 방금 전 의 전투로 또 헐거워져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땅 위에 널브러진 십여 마리의 도마뱀 인간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정도의 놈들이 이렇 게 힘이 부치다니 문제가 있었다. 게다가 피는 조금씩이라도 계속 배어나오 고, 그는 점점 지쳐 가고 있으니... '나쁘지 않지... 이렇게 죽는 것도.' 그는 도마뱀 인간의 녹색 피를 그들의 망토에 닦아 내며 미소를 지었다. 쓴웃음이 아닌 진짜 미소였다. '확실히 나쁘진 않지. 그래... 카야크의 부활을 성공시키고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처음으로 그는 두아스에게, 그 교활하고 볼품없는 오르크에게 감사를 느꼈 다. 그가 모든 것을 막아 주었다. 카야크를 죽이고 오르크들을 봉기시킴으로 써. 그리고 그것만이 자신을 멈출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두아스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그래, 아무도, 하르크자엘 자신조차 몰랐지만... "하르크자엘!" 복도의 끝에서 인간의 외침이 들려왔다. 분노에 가득 찬, 낯설지 않은 목소 리였다. 하르크자엘은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횃불의 무리를 보 았다. 그들의 선두에서 달려오는 위엄 있는 노인을 알아보기란 어렵지 않았 다. 비록 그의 이성을 잃은 듯한, 위험한 빛으로 빛나는 푸른 눈과, 광기가 깃든 미소는 하르크자엘이 기억하던 모습과 큰 차이가 있었지만. "이거 영광이로군요, 인간족의 왕이여." 벽에 기대었던 몸을 바로 세우고, 검은 망토 뒤로 칠흑같은 날개를 펴며 하르크자엘은 미소를 지었다. "저를 찾아 이곳까지 몸소 오셨습니까?" "닥쳐라! 이 마족놈!" 아클레어는 하르크자엘의 앞에 선 채,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너 같은 놈은... 한 하늘 알 함께 존재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 너만은 용서하지 않겠다!" 그는 당당하게 양손에 쥔 칼을 허공에 휘둘렀다. 과연 늙은이의 힘이라고 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재빠르고 기운찬 몸짓이었다. 그의 곁에 반원형 으로 둘러선 기사들도 칼을 뽑았다. 몇 명은 한 손에 횃불을 든 채 다른 한 손에는 창과 칼을 들고 있었다. "이런다고 사라져 가는 것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소. 이런다고 변해가는 것 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소! 어리석은 인간족의 왕이여!" 하르크자엘은 침통한 얼굴로 비웃으며 칼을 바로잡았다. 왕과 그는 상대의 허점을 노리며, 몸을 숙인 채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르크자엘은 말을 이었 다. "새 시대가 시작되고 있소. 에스테이아도, 드래크로니안들도 이 시대의 중 심이 되지 못할 거요. 갈등도 전쟁도, 수많은 인간들끼리 하겠지. 혹은, 요정 들끼리나... 이제는 그런 시대가 올 거요." "네 놈의 말을 내가 들으리라고 생각하느냐!" "부인해도 아무 소용 없소. 그대나 나나, 똑같이 패자요. 드래크로니안은 멸망을 피할 수 없겠지. 에스테이아도 마찬가지일 거요. 역사와 이야기 속에 만 남은 채 서서히 사라져 가겠지..." "시끄러워. 네놈의 사악한 종족을 내 나라와 비교하려 들지 마라!" 왕은 칼을 바로 잡았다. 하르크자엘은 눈살을 찌푸리고 눈앞을 메운 기사 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너무 많았고 그는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게다가 이런 좁은 복도 안에서는 제대로 날아다닐 수도 없었다. 왕은 하르크자엘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말했다. "네놈만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내 아들, 엘먼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설사 네놈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아들의 복수를 하시겠다는 건가." 하르크자엘은 비웃음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말했다. 아니, 사실 그는 웃음 을 감출 수조차 없었다. 인간들이란 얼마나 어리석고, 자기 좋을 대로만 생 각하는지! "무... 무엇이 우습다는 건가! 하르크자엘!" "아들을 죽인 건 그대요, 아클레어 황제.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텐데? 얘서 외면하고 있는 건가?" 아클레어 3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 무슨 말이냐!" "그의 가슴에 칼을 꽂은 것은 그대가 아니오? 나도, 그 어느 드래크로니안 도 그 자리에 있는 영광을 누리지 못했소." "그, 그래... 그것은 사실이다." 늙은 왕의 얼굴이 침통하게 그늘졌다. "그러나... 그 전에, 그 아이가 그렇게 되도록 주술을 건 것은 네놈이 아니 냐! 네놈의 부하가 아니냔 말이다!" "그렇소, 내 휘하에 있는 자가 그에게 얼음의 심장을 가져다 주었지. 나는 비록 모르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그것이 사실인 이상 내게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왕자가 어째서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생각해 본 일 이 있소?" "..." "그대는 그가 죽기 전에는 한번도 제대로 관심 가진 적이 없었소." "...사실이 아니다." "그는 그대의 아들이 아니었소. 그렇지 않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육신이 아들이라도 그대는 그를 정신적인 아들로 인정한 적이 없었소. 왜? 그가 심약아고, 실력이 없어 그대의 성에 차지 않으니까. 당신들 인간들 이란 항상 그런 식이지! 필요하면 언제든지 쌍수를 들고 환영하고, 필요 없 는 것은 가볍게 외면해 버리지. 정말 편리한 종족이오. 안 그렇소? 그리고 필요했던 것도, 다 이용하고 나면 헌신짝처럼 내버리지. 은혜나 옛 맹약 따 위는 까맣게 잊고. 그대 역시 마찬가지였소. 어리석고 마음 약한 아들보다는 클레이브 경이 친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랬겠지..." "저 놈을 죽여라!" 왕의 호령에, 칼을 든 기사들은 하르크자엘을 향해 내달았다. 하르크자엘은 그들의 공격을 피해,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서며 칼을 고쳐 잡았다. 오른 팔은 다시 피가 흐르기 시작할까봐 거의 쓸 수가 없었다. 왼손으로 잡은 칼 이 가벼운 소리를 내며 포물선을 그렸고, 투구를 쓰지 않은 한 기사가 눈이 ㅉ린 채 쓰러졌다. 다른 기사가 하르크자엘을 향해 칼을 내리쳤으나, 이미 그는 그 뒤로 물러나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하르크자엘의 칼이 그의 목을 그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주변에는 하나 둘 시체가 쌓여 가고 있었다. "죽어랏! 이 하르크자엘!" 갑자기 등 뒤에서 분노에 찬 고함으 터져나왔다. 아차, 하면서 하르크자엘 은 뒤를 돌아보았다. 왕이 그의 바로 뒤에서 칼을 든 채 돌진해 오고 있었 다. 칼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정작 그 칼날은 그의 가슴을 얇게 스쳤을 뿐이었다. 하르크자엘은 황급히 뛰어올라 뒤로 물러나, 무릎을 굽히고 착지했다. "죽여 버리겠다!" 왕은 집요했다. 하르크자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칼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왕이 공격할 기회를 갖기 전에, 얼른 뛰어올라 왕의 목을 향해 칼을 찔렀다. 쿡! 물컹한 살에 칼이 박히는 감촉이 손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러나 왕이 아니라, 갑자기 왕과 그의 사이에 끼어든 중년의 기사였다. 하르크자엘은 당 황하여 얼른 칼을 뺐으나, 이번에는 왕에게도 시간이 충분했다. "하앗!" 왕의 칼이 그의 팔을 깊이 베었다. 그나마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으니 근육 과 뼈는 무사했지, 그대로 맞았더라면 왼팔이 잘려나갈 공격이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하르크자엘의 칼이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그리고 그 칼과 그 의 사이를 한 기사가 막아 섰다. 한순간에 그는 벽에 등을 댄 채, 기사들에 게 포위당해 버렸다. "죽어라! 인간족의 적!" 왕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칼을 쳐들었다. 하르크자엘은 맨손으로 맞설 준비를 했다. 늙은 인간 한 명이라면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저렇게 많 은 수라면... "캬아아아악!" 갑자기 처참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지하 복도 안에 울려퍼졌다. 왕은 자 신도 모르게 칼을 든 손을 멈추었다. 하르크자엘 역시 표정이 굳어졌다. 살 해당하는 여자들의 비명 소리같기도 하고, 분노한 짐승의 포효같기도 한 저 울음, 그리고 메아리처럼 이어져 오는 날개소리... "하피...!" 하피라면 그 발톱이나 부리에 상처만 나면 썩어들어가는 악질적인 독 때문 에 좀 곤란하긴 해도, 그래도 전투력 자체는 별 것 없는 생물이었다. 그러나 날개 소리로 보아 저 숫자는... 그러나 하피의 울음소리보다 더욱 그의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것이 있었 다. "자! 하피씨들! 어서 오세요! 식사에요, 식사!" 열 너댓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커다란 놋쇠 냄비 를 들고, 그 한가운데를 단도로 두들겨 쩔그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가 하피들을 유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무잡잡한 피부와 검은 머리 칼, 그리고 검고 맑은 눈을 가진 귀여운 외모 - 물론 하르크자엘은 그를 기 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저 냄비 밑바닥을 두드리는 단도는, 그 길이와 칼의 광채로 보아 틀림없이... "...이디실..." 너무 어이없는 광경에 하르크자엘은 한순간 칼이고 인간 기사들이고 다 잊 고 말았다. 그 점은 인간 기사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사실 그들은 이 소년보 다는 그 뒤를 까맣게 메우며 날아오고 있는 하피들 때문에 넋을 잃은 것이 었다.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숫자였다. 공간이 없어서 벽과 천정에 몸을 부딪 치고, 서로 날개가 맞부딪치기도 하며, 하피들은 마치 거대한 벽처럼 몰려오 고 있었다. 그리고 로이는 신나게 냄비를 이디실로 두들기며 그들을 이끌고 오고 있었 다. "밥이에요! 밥! 어서 오세요! 늦으면 국물도 없어요!" 그러는 와중에도, 하르크자엘을 알아본 듯 로이는 잠시 서서 반가이 손을 은들기까지 했다.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띄고서. '...어... 어쩌자는 건가...' 하르크자엘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하피들은 오고 있었고, 인간 기사들은 거기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 었다. 기회라면 기회였다. 하르크자엘의 발이 칼을 가로막고 있던 기사의 배를 강타했다. 그가 채 쓰 러지기도 전에, 하르크자엘은 그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자신의 칼을 집어들 었다. 그리고 곁에 있던 세 병사가 공격을 시도하기 전에, 미리 차례로 베어 버렸다. "캬아아!" "크와아아악!" 인간들의 무리를 보자 하피들은 더욱 광포해졌다. 이제 냄비를 두들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로이는 한 손에는 냄비를, 한 손에는 이디실을 든 채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아클레어 3세와 그의 기사들은, 냄비와 단검 을 든 한 소년과 유래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하피 무리가 자신들을 향해 돌 진해 오는 진기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런... 로이!" 하르크자엘이 기사들을 베다 말고 중얼거렸다. 선두에서 날아오던 하피 하나가 발톱을 세우고 로이의 등을 향해 덮쳐오고 있었다. 그 발톱이 그 등을 스치기 직전, 날카로운 칼날이 그 머리를 반으로 갈랐다. 하피는 땅 위에 풀썩 떨어졌고, 하르크자엘은 칼을 꽂은 채 왼손으 로 로이의 목덜미를 달랑 들었다. "제피로스!" 로이가 반가운 듯 외쳤으나 하르크자엘은 전혀 응답해 줄 기분이 아니었 다. 그는 검은 날개를 세차게 펄럭이며 말했다. "꼭 잡아!" "...뭘요?" "...그럼 그냥 그대로 있어." 넓은 날개는 천정을 스칠 듯 날개짓하다가, 이윽고 수평으로 쫙 펴졌다. 하 르크자엘은 아클레어가 이끌고 온 인간들 중 궁수(弓手)가 없기만을 바랬다. 이렇게 좁은 복도 안에서라면 피할 틈도 없었으니. 그러나 다행히 모두 저 아래서 칼을 휘두르며 팔짝팔짝 뛰기만 할 뿐, 별다른 공격을 가하지 않았 다. 아클레어는 어이가 없어서 눈만 휘둥그렇게 뜬 채, 반대편 ㅂ고 끝으로 사 라져 가는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인간들과 하피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계속) 죄송... 오늘은 좀 짧습니다. ^^; 로이가 또다시 이상한 짓(?)을 하는군요. 하피들은 놋쇠 징을 울리면 온다고... 그리스 신화에서 그러지요^^ 그게 페르세우스의 모험이었던가? 기억이 잘 안 나네요. Radagast... 15. "도대체, 로이... 너란 녀석은...!" 하피들도 인간들도 기척이 들리지 않는 곳에 이르자, 비로소 제피로스는 날개를 접고 땅에 내려서서 로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로이는 여전히 한 손 에는 이디실을, 한 손에는 놋쇠 냄비를 든 채 왜 화를 내냐는 듯이 물끄러 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로이의 눈이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날개를 응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역시 제피로스가 하르크자엘인가요?" 로이는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눈이 제피로스의 검은 날개에서 그의 얼굴 로 서서히 움직여 못박혔다. 제피로스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로이의 얼굴은 마치 '오늘 식사는 뭔가요?'하고 묻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야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역시'라고... 그럼 알고 있었단 말이냐?" "짐작은 했죠." 하고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까지 지으면서. 여기까지 추론해 낸 자기 자신이 아주 대견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천천히, 하나하나 알게 됐죠. 드래크로니안은 붉은 눈을 가진다는 거, 빨 리 움직이고 싸우는 데에 재주가 있다는 거 - 그리고 제피로스의 눈 색깔이 그 검은 용과 똑같았다는 것도요. 오르크가 그 용을, 그 새까맣고 무섭게 생 긴 용을 '하르크자엘'이라고 불렀었죠." "..." "시지리스에 제피로스가 왔던 날, 그리고 시지리스를 탈출하던 날 해 줬던 그 옛날 이야기들 - 그걸 하나하나 생각해 봤어요. 물론 처음에는 아무 생 각 없이 그냥 거의 잊어먹고 있었는데, 차츰 - 특히 켈리의 얘기를 들으면 서 - 뭔가 잡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의심하고 있을 때, 필리우스가 말해 줬죠. 제피로스는 하르크자엘의 본명이라고." 제피로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살피듯, 아니 처음 보는 동물을 바라보듯 로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사실을 말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 저 싱글거리는 웃음과 친근한 목 소리는 그를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 이디실의 선택에는... 결국 그 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나 똑똑하죠?" 그러나 로이의 한 마디가 이 모든 생각을 제피로스의 머릿속에서 날려 버 렸다.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대단히 똑똑하군. 그런데, 내가 하르크자엘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았단 말이냐? 인간의 적 드래크로니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데도 하 피들을 이끌고 날 구하러 왔단 말이냐?" "신세 진 걸 갚았을 뿐이에요." 로이는 씩 웃었다. "사실은 데이미아가 제피로스가 많이 다쳤대서 왔는데..." "왔는데?" "지금 보니 뭐 별로 아픈 것 같지도 않고..." "..." "그리고, 또, 뭐 있었는데... 아, 맞다! 여길 빨리 나가야 해요!" 갑자기 로이는 들고 있던 냄비와 이디실을 다시 맞부딪치며 소리쳤다. 제 피로스는 긴장이 풀려, 아직도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반문했다. "왜?" "랜스요, 랜스가 쫓아온다구요!" 제피로스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역시 역사는 이대로 끝날 수 없는 것인가. 어쩌면 랜스가 그를 죽여야 역사가 끝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니, 하지만 리반 아덴의 아들이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을 죽인다면 - 제피로 스 자신은 아직도 살아남은 두 번째 페레노스의 지도자였으니 - 일은 결코 끝날 수 없을 것이다. 보레아스는 헤르미온, 혹은 그를 뒤이어 수장이 된 자 가 복수의 의무를 짊어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아무것도 끝날 수 없다. 역시... 아무것도 끝날 수 없는 것인가. "그는... 랜스 아덴은, 지금 어디 있지?" "모르겠는데요. 성 안 어딘가에 있겠죠." "...그럼 너는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왔는데?" "이디실 덕분이죠!" 로이는 씩 웃었다. "이디실이 가르쳐 줬어요." 제피로스는 로이가 들어올린, 매끈한 단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냥, '너 말야, 제피로스 좀 찾아 줘.'하고 말하고선 칼을 딱 잡고 발 내키 는 대로 달렸죠, 뭐. 얘가 제 말을 얼마나 잘 듣는데요." "...이디실이 길찾기에 쓰인다는 말은 언제 어디서도 들은 적이 없어..." "아무렴 어때요?" 로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앞장섰다. "어쨌든 여길 나가요. 랜스가 안 쫓아온대두, 성이 무너지겠어요!"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군말 없이 뒤를 따랐다. '하르크자엘이 죽음을 피해 도망인가...' 쓴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그는 별 반감 없이 로이의 말에 따 르고 있었다. 그가 이디실의 주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를 처음에 경비병 들로부터 구한 것도. 사실 제피로스 자신은 그 때 로이가 이디실의 주인이 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터였다. 그것은 그저... 그러고 싶었기 때문 이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디실 역시, 단순히 그런 근거 없는 감정에서 주인을 선택한 것 이 아닐까 - 이디실이 감정이 있다면. 이디실은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사냥 꾼, 최초의 살육자의 모습이니 말야...' 그가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로이, 숙여!" 로이가 고개를 숙일 새도 없이, 그는 로이의 머리를 푹 눌러 쓰러뜨리며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세 자루의 단검이 직선을 그리며 내달았다. 제피로스의 머리털의 끝부분이 잘려나가 흩어져내렸다. 그는 재빨 리 몸을 돌려 어느새 따라온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칼이 놓여 있었다. "잘도 도망쳤군, 하르크자엘!" 하고 아클레오 3세가 말했다. 그의 등 뒤에는 세 명의 기사만이 버티고 있 었다. "살 기회를 주었는데, 일부러 이렇게 죽으려고 쫓아오시다니. 현명함과는 전혀 거리가 머시군, 폐하!" 하르크자엘도 지지 않고 비웃었다. 제피로스 때문에 푹 고꾸라져버린 로이는 머리를 문지르며, 투덜거림과 함 께 몸을 일으켰다. "아구, 아구, 제피로스 때문에 골병 들겠어요. 불쌍한 나... 아무리 내 두뇌 가 샘이 난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갑자기 머리를 누르는 법이...!" 갑자기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클레어 3세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검 고 순진한 눈이 크게 떠졌다. 아클레어 역시 적지 않이 놀란 표정이었다. "너는... 랜스 경의... 시종...?" "폐... 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제피로스는 불안한 마음으로 칼을 잡고 있었다. 로이 가 아클레어 3세를 향해 한 발짝 내딛었을 때, 그는 그 아이를 막아야 할지 아니면 황제와 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로이는 황 제에게 가지 않고, 단지 한 발짝만 앞으로 나아간 뒤, 함박웃음을 지으며 소 리쳤다. "와아! 폐하! 이런 데서 뵙다니, 정말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 정말 반갑습 니다!" '...정말 황당하군.' 제피로스는 웃지도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흘끗 아클레어 왕의 표정을 보니 제피로스와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하여간 로이는 신나 게 재잘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아트웰 생각나요. 그쵸, 폐하? 그러고 보니 엘먼 왕자님 은 잘 계세요?" "...비켜라." 더 이상 떠들게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왕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로이는 그의 표정이 어떻건 말투가 어떻건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방금 가려고 했어요. 제피로스하고 함께, 성이 부서지기 전 에 나가려고요. 폐하도 그러셔야 할 것 같은데..." "저 놈의 목숨을 받아내기 전에는 절대 갈 수 없다!" 아클레어는 칼을 들어 제피로스의 목을 겨누었다. 제피로스 역시 칼을 바 로잡았다. 로이는 그제서야 당혹한 표정을 띄었다. "폐하..." "비켜라, 아이는 다치게 하고 싶지 않다! 저 놈이 누군지나 아느냐!" "예!" 당당하고 신나는 대답. 아클레어 3세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저... 저 놈은, 바로 그 악명 높은 하르크자엘이란 말이다! 인간들의 살육 자!" "...안다니까요. 왜 아무도 내 머릴 안 믿지..." 로이는 머리를 숙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이미 제피로스는 로이를 젖혀 놓고 세 명의 기사들을 향해 더덤벼들었고, 그의 말이 들어올려진 순간 그 중 한 명이 심장을 잃었다. 다른 한 기사는 제피로스의 목을 향해 칼을 휘 둘렀으나, 그의 칼날에 막히고 힘을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그 순간, 가 느다란 칼날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제피로스, 뒤...!" 로이가 소리쳤다. 제피로스는 반사적으로 칼날을 세우며, 뒤를 돌아보았다. "에스테이아 만세!" 나머지 한 기사가 칼날을 지면과 수평으로 세운 채 그에게 돌진해 오고 있 었다. 제피로스의 칼날이 그의 옆구리를 꿰뚫었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윽...!" 제피로스의 오른쪽 어깨를 감쌌던 붕대가 찢겨져 나갔다. 다친 상터가 다 시 칼에 스쳐, 피가 쏟아졌다. 기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비틀거리는 제피로스 를 보더니, 그대로 쓰러져 죽었다. "제길...!" 제피로스는 어깨를 움켜 쥐고 시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젠 정말 끝이다, 하르크자엘!" 아클레어 3세가 칼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칼날은 하르크자엘 의 목까지 닿지 못한 채, 중간에 어떤 단단한 물체에 맞고 튕겨져 나왔다. 흔들거리는 충격에 아클레어 3세는 다시 뒤로 몇 발짝 물러갔다. 그리고 분 노한 눈을 들어 방해자를 쏘아보았다. "으... 냄비가 두동강이 났잖아. 아깝다!" 로이는 왕의 칼에 깨끗하게 잘린 냄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위로 던져 버렸다. 왕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왜! 왜 방해하는 거냐!" "죄송해요, 폐하." 로이의 목소리는 정말 미안한듯 했으나, 비굴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당히 움츠러든 태도와 공손하려고 나름대로 애쓰는 말씨에도 불구하고, 왕과 대 등한 입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이 사람은 제 친구니까요." 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아이야... 넌 실수하고 있는 거다. 그는 하르크자엘, 인류의 적..." "저도 안다니까요! 제가 안다는 게 그렇게 못 믿겨지세요?" "그렇다면 왜 그를 돕는 거냐!" "친구니까요. 폐하께서는 왜 죽이려 하시는 거죠?" "그는 수많은 인간을 죽였다! 나는 내 백성을 위해 그를 없애려는 거다!" "...전 폐하의 백성이 아닌가요?" "물론... 너도 내 백성이다." "그럼 제 부탁인데 한 번만 봐 주시면 안돼요?" 순진한 미소. 아클레어는 이 소년이 진심인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얘야, 비키거라." "싫어요." "넌 선악을 몰른단다. 세상에는 큰 일이 있고, 작은 일이 있지. 큰 일을 위 해서는..." "그래서 아트웰과 전쟁을 벌이셨나요?" 로이의 말투는 독(毒)이 없기 때문에 더욱 날카로운 칼날처럼 아클레어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에스테이아를 위해서다. 내 나라, 그리고 너의 나라를 위해서란 말이야!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너와 같은 백성들 모두를 위해서...!" "물어 보셨나요?" "..." "시지리스 사람들 중에는 전쟁을 원하는 사람이 없었을 거에요. ...베릴 영 주라면 또 모를까. 그리고 다른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전 시지리스에 서 살았고, 또 그 땅이 우리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그 섬은 죽여서 빼앗은 섬이었더군요. 무장강도처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왕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칼날이 떨리고 있었다. "비켜! 비키지 않으면...!" "전 비키지 않아요." 로이는 태연한 얼굴로 이디실을 잡았다. 기초는 잡혔지만, 아직도 왕에 비 해서는 턱없이 엉성한 포즈. 아직 흐르는 피를 막으려 애쓰며 어깨를 움켜 잡고 있던 제피로스는, 그런 로이를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너... 이놈!" 왕이 칼을 들고 로이에게 돌진해 왔다. "이 반역자!" 로이는 칼을 잡고 기다렸다. 제피로스는 곁에 놓여 있던 칼을 잡았다. 왕은 이미 로이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수직으로 치켜세운 칼이 로이의 목을 향 해 내려쳐지려는 참이었다. 로이는 한 발 앞으로 내달으며, 발 앞에 놓여 있 던 벽돌 조각을 힘차게 차올렸다. "크윽!" 이런 공격은 예상도 못 했던 왕이었다. 주먹 두 개를 함친 것 만한 돌덩이 가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그는 칼을 놓치며 비틀거렸다. 로이는 그제서야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며, 힘차게 이디실을 휘둘렀다. 이디실은 왕의 갑 옷을 가르고, 약간의 스친 상처만을 남겼다. 갑옷이 떨어져 나간 배 위로 로 이는 힘차게 발차기를 했다. "컥...!" 왕은 정신을 잃은 채 쓰러졌다. 로이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그 러나 그 미소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이드신 어른을 이렇게 때리다니... 아빠나 에이론드 아저씨가 아셨다면 분명 야단맞았을 거야."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의아한 듯 그를 돌아보았다. "제피로스! 어깨에서 피가 많이 나요!" 그래, 제피로스. 적어도 로이에게는 항상 제피로스겠지. 그리고 보레아스도, 하르크자엘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생각해 보면 꼭 그 렇게 실패한 것만도 아니었다. "싸매는 것 좀 도와다오, 로이. 한 팔로만 할려니 힘드는군. 빨리 지혈을 하고 저 늙은이가 깨어나서 널 야단치기 전에, 어서 도망가야지!" 지하 복도의 벽에 금이 가고 있었다. 쓰러진 황제의 몸 위로 돌 부스러기 와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두 사람의 발소리,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달리는 시원스런 발소리와 돌돌돌 구르는 듯한 민첩한 걸음 소리가 어두운 복도 끝으로 사라져 갔다. (계속) 흐음... 경로효친 사상이 투철한 로이로군요. 물자절약 정신도 뛰어난 듯... 차후에 제피로스가 로이에게 물었습니다. "너 그 냄비는 왜 끝까지 들고 있었던 거야?" 그러자 로이의 대답 : "가지고 나가서 팔려고요. 쓸만하잖아요?" "... --;" 로이의 본직을 잊지 맙시다! Radagast... PS. 1주년 축하해 주신 여러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PPS. 수능 성적이... 상당히 문제가 있는 모양입니다 ^^; 하지만 좀 못본 것 같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수험생 여러분! 진짜 끝을 보기 전에는 모르는 게 시험이랍니다. 16. "로이! 어딨니?" "랜스!"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흔들리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성을 헤집고 돌아다니며, 두 사람의 이름을 외쳐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당 연한 일일는지 모르지만, 둘 중 어느 누구도 대답에 응하지 않았다. "아으... 짜증나는데 그냥 둘 다 두고 가 버려?" 툴위그는 툴툴거렸다. 데이미아 또한 이 의견에 대해 별다른 이의를 두지 않았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한 번, 있는 힘을 다해 복도에 소리쳤다. "로오오오이! 래애애앤스!" "잠깐, 데이미아, 저 쪽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툴위그가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소리쳤다. 과연 시끄럽게 무너져 내리던 복도 저편에서는 메아리처럼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메아리는 아니었다. 확실했다. 그러나 랜스나 로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이 목소리는...?" "데이미아!" "툴위그도 있네!" "이즐레이! 켈리!"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먼지 속을 헤치며 달려오는 사람들의 윤곽을 알아보 고,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그들은 서로에게 달려와 포옹했다. 이즐레이는 몸을 굽혀 데이미아를 얼싸안았고, 켈리는 너무 기쁜 나머지 툴위그를 번쩍 들어올렸다. "야! 야! 켈리! 너 뭐하는 거야!" "왜그래요? 너무 기뻐서 그러는데! 이런 데서 만나다니!" 켈리는 정말 기쁜지 힘든 줄도 모르고 툴위그를 들어올린 채 꼭 껴안고 있 다가, 털북숭이 볼에 입까지 맞추었다. 이즐레이와 데이미아는 웃음을 터뜨 렸고, 툴위그는 얼굴이 벌개져서 켈리를 밀쳐내고 뛰어내렸다. "너! 뭐하는 거야! 나 유부남이라고!" "또 해줄까요? 툴위그! 너무너무 반가워요!" "으아아아!" 툴위그는 거대한 카자룬을 한 손에 든 채, 켈리를 피해 허둥지둥 도망쳐 데이미아의 등 뒤로 숨었다.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었다. "켈리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그 말에 이즐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 한 번 변했다가 또 한 번 변해서 안 변한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 "뭐, 그런 얘기가 있어. 긴 얘기지. 나중에 들려줄께. 지금은 일단 이 성을 나가야 하니까..." 켈리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귀를 돌렸다. 툴위그가 켈리와 이즐레이의 뒤를 따라 달려오는, 혹은 그 큰 날개를 펴고 날아오는 드래크로니안들의 무리를 본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마족...!" 툴위그는 아까와는 딴판으로, 긴장하며 두 손으로 카자룬을 쥐었다. 데이미 아 역시 굳어진 표정으로 엘미어를 잡았다. 그러나 이즐레이와 켈리가 그들 의 앞을 막았다. "그러지 마. 친구들이야!" 켈리의 말에,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뭐라고?" "어쩌다가요? 분명 우릴 납치해 온..." "그게 또 말하려면 긴 얘기지..." 켈리가 대충 둘러대려 하는데, 마침 선두에서 날아오던 드래크로니안 여인 이 푸른 날개를 접고 켈리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데이미아와 툴 위그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공손한 어조로 말했다. "여왕 폐하, 남쪽에서 아직 무너지지 않은 출구를 발견했습니다. 어서 가시 지요." "에에에?" "여왕?"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입을 딱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켈리는 한숨을 푹 쉬 며 고개를 저었다. 이어서 둘의 날카로운 추궁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던 것 이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 없는 사이에 또 켈리가 일 낸 거죠?" "그러고 보니 네가 가지고 있는 칼은 힐리온...!" "우리만 빼놓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좋은 말로 할 때 진상을 밝혀!" "뭐라고 말 좀 해 봐요! 켈리!" "자, 잠깐, 말할 기회를 줘야 할 것 아냐!" 이윽고 듣다 못한 켈리가 빽 소리를 지르자,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그제서 야 잠잠해졌다. 켈리는 한숨을 푹 쉬고,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이야기를 시 작했다. "그게 말야, 그러니까... 내가 우연히 힐리온을 찾아냈거든. 아니, 그게 아니 라, 툴위그는 사정이 어떻게 됐는지 알죠. 아니, 아니, 툴위그도 반밖에, 아 니 반의 반정도 밖에 모르지. 그러니까 내가 여길 왜 와 있냐 하면... 아니, 아주 옛날 옛적에..."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켈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 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이즐레이와 가만히 서 있는 드래크로니안 여인 역 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켈리가 그런 식으로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녀의 곁에 있던 벽이 무시무시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모두 재빨 리 피해서 별 탈은 없었지만, 한동안 먼지에 눈물을 흘리며 콜록거려야 했 다. "서두르셔야 할 것 같은데요." 하고 드래크로니안 여인이 말했다. 켈리는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대답했다. "맞아, 알크메네. 이즈, 네가 내 대신 이야기 좀 해 줘." 이즐레이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켈리는 사실 로데인의 여왕감이었는데, 사정이 있어서 몸을 숨 기고 있다가 이제 힐리온도 찾았고 하니 여왕직에 복귀하게 된 거야." "..."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할 말이 없었다. "한 마디로 끝나는군..." "못보던 사이에 이즐레이까지 켈리 말하는 방식을 닮아간 것 같아요..." 켈리는 쓰게 웃었다. 먼 곳에서 기둥 하나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어쨌든, 가자! 나가는 길을 찾았다니까!" "아, 잠깐, 켈리! 로이랑 랜스가..." 데이미아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아무도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그 들은 일제히, 온 힘을 다해서 알크메네가 인도하는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 던 것이다. "폐하! 어서 이쪽으로!" 기다리고 있던 보레아스가 소리쳤다. 마빈도 그의 곁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켈리와 이즐레이의 모습을 보자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이 쪽도 곧 무너질 것 같아!" 숨을 고를 새조차 없었다. 데이미아, 툴위그, 켈리, 이즐레이, 마빈, 그리고 드래크로니안의 무리들은, 무너져 내리는 벽과 천정을 피해 가면서 열심히 복도를 따라 달렸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서도, 데이미아는 이를 악물고 켈 리에게 다가가 소리쳤다. "우리 이대로 나가 수 없어요! 로이랑 랜스가 안에 있단 말예요!" "로이는 걱정 마!" 켈리는 속 현하게 대답했다. "그 녀석... 유능한 보호자가 둘이나 있으니까." "에...? 어, 어쨌든, 그럼 랜스는요?" "랜스도 걱정 마! 그 녀석 형이 여기 있으니까." 켈리는 쾌활하게 소리쳤으나, 그녀의 입가에는 쓴웃음이 맴돌았다. 이제 랜 스도 그녀도 살아 나가더라도, 더 이상 옛날처럼 친구로서 만날 수 없을 것 이므로. 클레이브가 말한 대로, 다음에 만날 때 그들은 적일 수밖에 없을 것 이다. "출구입니다!" 알크ㅔ네라고 불리운 드래크로니안 여인이 밝게 소리치며 앞을 가리켰다. 그들은 점점 속력을 붙였다. 성은 이제 점점 더 큰 소리를 내며, 점점 더 크 게 흔들리며 붕괴해 가고 있었다. 그 굉음과 진동이 마치 그들을 쫓아오는 것 같았다. "크와아아!" 그들이 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바닥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거대한 머리가 튀어나와 앞을 거로막았다. 눈이 네 개 달린 용의 머리였는데, 그 머 리 하나만 해도 사람의 키보다 컸다. 분명히 그 눈은 악의를 품은 채 그들 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 뭐야!" 데이미아가 기겁을 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외침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 도 전, 바닥에서 그것과 똑같이 생긴, 또하나의 머리가 바닥을 부서뜨리며 불쑥 튀어나왔다. "두... 마리?" 켈리는 중얼거리며 허리에 찬 힐리온을 빼어들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조 용하고 침착한 보레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오... 저 자는 노토스, 타락한 용족을 다스리는 자입니다." "저 놈이 노토스인가..." 켈리는 입가에 조소를 띄우며 한 발 앞으로 내다뎠다. "글라노우스의 친동생, 탐욕에 눈이 멀어 마족에게 굴복한 노토스! 그래서 인간의 몸으로도 돌아올 수 없이, 드래크로니안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괴물 로 변해 버린 그 노토스 말이지..." "못하는 말이 없구나, 인간!" 노토스의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복도에 울려퍼졌다. 그의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켈리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래, 너는 드래크로니안 족과 인간족을 동시에 다스리는 지배자. 그 칼이 택한 주인이로군. 인간이라니, 글라노우스 형님의 선택은 어리석었다. 그 결 과 드래크로니안 족을 파멸로 이끌어 가게 되었지. 인간은 약하다. 그들은 배신을 좋아하지. 그러나 오르크들은, 그리고 만들어 낸 용족은 강한 자에게 복종한다! 하르크자엘이 왔을 때 나는 그가 뭔가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하지 만 그 역시 어리석은 글라노우스 형님의 계승자일 뿐이었지. 그 역시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희들의 어리석음 때문에 너희들은 스스로를 종말로 이 끌어갈 것이야!" "웃기는군." 노토스의 말을 듣고 있던 켈리가 내뱉듯이 말했다. "아카드의 보물이 탐이 나 그의 종이 되었던 주제에 말이야! 드래크로니안 의 미래라고? 파멸이라고?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이나 있나? 그러길래 지금 너는 드래크로니안이라 부를 수도 없는 그런 꼴을 하고, 타락항 용들의 왕 이란 소리나 듣고 있느냔 말이다!" 켈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노토스는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벽이 우르르 떨리며 돌덩이가 떨어져 내렸다. 켈리마저도 움찔하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기죽지 않고 계속 노토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노토스는 간신히 화를 억누른 듯한 목소리로, 두 입을 다 동원해 소리쳤다. "뭐, 상관 없다. 너희들은 항상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너희들이 끊임없이 나를 방해하는 데에는 이제 지쳤다. 너희들 중 아무도 살아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노토스의 한쪽 팔이 목 아래의 바닥을 부수며 튀어나왔다. 그 위에 있던 드래크로니안들은 재빨리 날개를 펴고 자리를 피했다. 그 팔은 켈리와 이즐 레이가 있는 쪽을 향해 덮쳐왔으나, 두 사람 모두 그 손이 바닥에 닿기 전 에 뛰어올라 몸을 피했다. 손은 빈 바닥을 덮쳐 무너뜨리며 뿌연 먼지를 일 으켰고, 켈리와 이즐레이는 그 먼지 속, 툴위그와 데이미아가 있는 곳에 가 볍게 착지했다. "보내 줄 의사가 없는 것 같으니, 이런 성 안에서 압사(壓死)하기보다는 한 번 맞부딪쳐 봐야겠지?" 그녀는 의미 심장하게 이즐레이, 데이미아, 툴위그를 차례로 바라보며, 미 소를 지었다. 그들 역시 마주 미소지어 주었다. "옛날같이 해볼까, 여왕님?" "나쁠거 없죠 툴위그!" 노토스의 긴 목이 바닥을 부수며 점점 더 높이 뻗어 갔다. 마침내는 지진 이 일어나는 듯한 진동을 일으키며 노토스의 두 앞발이 모두 1층의 바닥 위 에 올라앉았다. 그 무게 때문에 바닥이 몹시 흔들렸다. 노토스는 일부러 바 닥을 흔들어 대며, 두 개의 머리를 휘휘 저어 날아다니고 있는 드래크로니 안을 공격하려 했다. 그들의 얇은 칼날은 그의 두꺼운 피부에 깊은 상처를 남기지 못하고 있었다. "크와아아아악!" 갑자기 노토스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고통에 찬 비명. 툴위기 가 먼지 속에 몸을 숨긴 채 달려가 그의 한쪽 발목을 내리쳤던 것이다. 카 자룬의 검은 날이 근육을 파고들어 뼈를 부러뜨렸다. 뿜어져 나온 피로 범 벅이 된 툴위그는, 도끼를 치켜들며 환희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만세!" 그러나 노토스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크게 벌린 검은 입이 덥쳐 왔다. 그것을 제일 먼저 본 사람은 데이미아였다. "툴위그! 위험해요! 아일룬!" 그녀의 손끝에서 주먹만한 황금빛 빛덩어리가 긴 직선의 꼬리를 남기며 진 격하여, 그 거대한 머리에 달린 네 개의 눈 중 하나에 정통으로 맞았다. 각 막이 찢겨지고 맑은 물이 피와 함께 튀었다. 노토스는 고통을 못 이겨 그 머리를 높이 쳐들다가, 2층의 바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가 머리 를 휘저으며 만들어 놓은 구멍으로 잿빛 하늘이 보였다. "용서 않겠다! 요정족의 꼬마!" 노토스는 팔을 번쩍 들어, 데이미아를 향해 힘껏 내리쳤다. 덕분에 그 부분 은 물론 그 근방까지 완전히 내려앉아 버렸지만, 데이미아는 그의 발 밑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둥둥 뜬 채로, 그의 눈앞에서 약올리듯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이래뵈도 라스헨 에이니드라고요! 우습게 보면 곤란하죠. 제레이드 로카!" 거센 바람이 노토스의 눈을 향해 몰아닥쳤고, 그의 눈 두 개를 해쳤다. 켈 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를 드러내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데이미아를 잡으려 여념이 없는 노토스의 목을 향해, 힐리온의 금빛 날을 힘껏 내리쳤다. 비명. 그리고 노토스의 한 머리는 생명을 잃은 채, 피를 잃어 이제 쪼글쪼글하게 되어 축 늘어졌다. 켈리는 그 바로 곁에 착지했다. (계속) "크아아아!" 노토스의 남은 한쪽 머리가 울부짖었다.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은 반사적으 로 얼굴을 찌푸리며 귀를 막았다. 그 소리만으로도 성을 무너뜨릴 수 있으 리라 느껴질 만큼 큰 소리였다. 아무도 그 소리에 귀가 멀지 않았다는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거대한 구렁이처럼 길고 굵은 목이 뒤로 젖혀지며 휘어졌다. 남은 한쪽 머 리는 천정을 뚫고 나가, 계속 벽돌과 돌덩이, 버팀목을 떨어뜨리며 천정을 가르고 지나갔다. 거의 무너진 천정으로 밤이 깃들고 있는 우클로우의 어두 컴컴한 하늘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토스는 하늘을 향해 목을 더욱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비명이 아닌,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그의 웅장한 두 앞발이 바닥을 짚고, 가슴과 허리를 땅 위로 끌어냈다. "켈리! 위험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돌들을 피하느라 여념이 없는 켈리의 머리 위로 노토 스의 발이 덮쳐 오는 것을 보고, 이즐레이가 소리쳤다. 그리고 켈리가 그 외 침을 듣고 무슨 행동을 취할 새도 없이, 그는 한 팔로 그녀를 안으며 몸을 굴렸다. 다른 한 손에 쥐어져 있던 칼날이 노토스의 발톱 아래의 연한 살갗 을 찢고 지나갔다. 노토스는 반사적으로 피가 흐르는 발을 들었고, 그 사이 에 켈리와 이즐레이는 몸을 일으켰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켈리를 품에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즐레이는 서둘러 손을 떼었다. 그러나 켈리는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고마워, 이즈! 그리고 너, 이 못생긴 괴물 녀석! 감히 날 공격하다니, 다리 를 분질러 주겠어!" 켈리는 기세등등하게 소리치며 다시 노토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노토스 는 다시 그녀를 발로 내리치려 했으나, 켈리는 그 발가락 사이의 공간을 통 해 가볍게 튀어올라, 오히려 노토스의 거대하고 넓적한 발 위에 사뿐히 착 지했다. 그리고 노토스를 향해 씩 웃어 준 다음, 힐리온을 힘껏 내리쳤다. 그녀가 선언했던 대로 다리를 자를 수는 없었으나, 대신 발가락 두 개가 잘 라져 나갔다. "크와아아아!" 다시 한 번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울렸고, 노토스는 양 발을 들고 뒷다리 와 꼬기로만 섰다. 켈리는 그 전에 이미 발에서 뛰어내려, 드래크로니안들 사이에 착지해 있었다. 배의 연한 살갗을 드러낸 노토스를 보고, 이번에는 툴위그가 덤벼들었다. "하앗! 죽어라, 이 괴물아!" 카자룬이 깊숙히 배를 찢고 들어가 내장을 건드리자, 노토스는 쓰러져 몸 을 비틀었다. 툴위그는 붕 떴다가 허공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그의 머리가 단단한 돌바닥에 추락하기 전에, 한 드래크로니안이 그의 발을 잡고 다시 날아올랐다. 그 동안 이즐레이는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노토스에게 다가가, 카자룬 이 낸 상처에 자신의 긴 검을 박아 넣었다. 노토스는 그 큰 몸을 마구 뒤틀 며 꼬리와 목, 그리고 다리를 휘저었다. 긴 꼬리가 이리저리 위협적으로 움 직이며, 벽과 바닥을 때려 부수었다. 거세게 몸을 뒤틀자 이즐레이 역시 떨어져 나갔다. 그는 공처럼 튕겨나가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노토스는 크게 입을 벌리고 목을 뻗어 그를 물어뜯으 려 했으나, 이가 닿기도 전에 켈리가 그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눈 하나를 찔렀다. 노토스의 머리가 다시 높이 들어올려졌고, 켈리는 떨어지지 않기 위 헤 칼을 이마 깊숙히 꽂았다. 처음에는 피가, 그리고 이어서 하얀 점액질의 액체가 배어나왔다. 노토스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날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광란이었다. 꼬리 와 목은 사방을 휘젓고, 네 다리는 바닥을 무너뜨리기라도 하려는 듯, 마구 쿵쾅거리며 땅을 굴렀다. 마구 뒹굴어 비늘이 벗겨지고 피가 흘러도, 꼬리와 목에 버팀목이 꽂혀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움직임은 공격이 목적이 아니 라, 움직임 그 자체가 목적인 듯이 보였다. 그런 노토스를 향해, 드래크로니안들과 데이미아, 툴위그, 이즐레이는 공격 을 퍼부었으나, 허사였다. 데이미아가 그를 멈추기 위해 산 짐승을 얼리는 북방의 주문을 썼지만, 너무 몸이 큰 탓에 배와 앞다리만이 얼었을 뿐이었 다. 꼬리와 목, 뒷다리는 아직도 미친 듯 날뛰었다. 그들의 칼이 꼬리를 절 반이나 베었고, 배는 너덜너덜해져서 내장이 흘러내렸으나, 오히려 더욱 기 운차게 몸을 흔들 뿐이었다. 드디어 바닥에 금이 가고, 그들이 딛고 선 땅 전체가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모두 피해!" 툴위그가 소리쳤다. 드래크로니안들과 데이미아는 얼른 멀찌감치 비켜났다. 그리고 툴위그와 마빈도, 머뭇거리는 이즐레이를 끌고 노토스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금이 간 바닥에 주저앉기 시작했다. 노토스의 뒷다리가 바닥에 구덩이를 만들며 푹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두 언 앞다리가. 켈리는 한 손 으로만 칼을 잡은 채, 다른 한 손에는 채찍을 잡았다. "켈리!" 이즐레이가 툴위그를 뿌리치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 다음 일은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노토스의 발 아래 있던 땅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켈리는 힐리온을 뽑으며 그의 머리를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 녀의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뻗어왔고, 어느 새 가까이 다다른 이즐레이의 팔목에 감겨들었다. 이즐레이는 한 손으로는 무너진 벽을 잡아 몸을 지탱하 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 채찍을 꼭 잡았다. 노토스가 마지막으로, 호소하는 듯 길게 끄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그의 몸은 구덩이 속으로 사라졌고, 그 위로 바닥이 무 너지며 돌들이 떨어졌다. 노토스의 몸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 져 버렸다. 그리고 이즐레이가 잡았던 벽마저 무너져 내려, 그 돌의 무덤 위 로 켈리와 이즐레이도 굴러떨어졌다. 다행히 그리 깊지는 않았고, 둘은 나란 히 굴러떨어지다가 몇 발짝 안 가 멈추었다. 먼지투성이가 된 켈리는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하하... 결국 이겼군!" 이즐레이는 그런 그녀를 보고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왕이 되면 뭐 좀 변할 거라고 걱정했던 놈이 바보지...' 켈리는 먼저 일어서서 옷을 툭툭 턴 다음, 이즐레이에게 팔을 내밀었다. 그 는 그녀의 팔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가 균형을 제대로 잡기도 전 에, 켈리는 당장 그를 밀쳐내어 버렸다. 그녀의 손으로부터 채찍이 긴 호를 그리며 하늘로 뻗어 나갔다. "크아아악!" 독수리 크기쯤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날개가 달린 도마뱀이 괴성을 지르며 털썩 떨어졌다. 채찍에 맞은 날개가 이상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켈리...?" 이즐레이는 그녀의 곁으로 가 서며 칼을 뽑아들었다. 켈리는 방금 전의 미 소를 씻은 듯이 지워 버리고, 굳어진 표정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걸 봐..." 이즐레이는 할 말을 잃었다. 첫눈에 보아서는 낮은 구름이 깔려 있는 것처 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구름이 아니었다. 용들 - 크고 작은 수많은 기형 의 용들이 하늘을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하나 달린 용, 머리가 서넛 달린 용, 혹은 뱀에 날개만 달린 듯이 생긴 용 - 제각기 나름대로의 괴기스 러운 모습을 갖춘 것들, 그 옛날 언젠가 스스로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정상 적인 용의 모습을 빼앗기고 이제는 이성마저 잊은 것들. 짐승도 아니고 이 제는 용도 아닌 것들이 하늘을 메우고, 켈리와 이즐레이가 있는 곳으로 다 가오고 있었다. "노토스... 비겁한데. 졌으면 얌전히 질 것이지 부하들을 불렀단 말야?" 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채찍을 쥐지 않은 손에 힐리온을 뽑아 들었다. 그 녀와 이즐레이는 서로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동료들이 있던 곳으 로 달음질쳐 올라갔다. "아스틸라 레이스 뤼아나스, 푸린 디르 쿠딘! 아일리아스!"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졌고, 켈리와 이즐레이는 고개를 바짝 숙였다. 그들의 머리 위로 새빨간 불길이 낼름거리는 혀처럼 허공을 핥고 지나갔다. 까맣게 탄 십여마리의 날개 달린 짐승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떤 것은 이 미 죽어 있었고, 어떤 것은 몸을 뒤틀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 에는 너무 많은 기형 용들이 있어서, 금방 떨어진 것들의 자리를 채우고 접 근해 왔다. "켈리...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기형 용들의 피로 카자룬을 흠뻑 적신 툴위그가 다가와 속삭였다. 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하지만 하는 데까지 해 봐야겠죠?" 그녀의 말이 끝남과 함께, 힐리온의 날이 하늘을 향해 금빛 곡선을 그렸다. 괴성과 함께 거대한 짐승이 풀썩 떨어져 몸부림쳤다. 반쯤 잘린 날개를 가 진, 비늘로 덮인 쥐의 모습을 한 생물이었다. 그것은 적의로 눈을 번뜩이며 켈리를 물어뜯으려 했으나, 그 전에 그녀의 채찍이 목을 감아 부러뜨렸다. 그리고 힐리온은 다시 다음 희생을 찾고 있었다. 그곳에서 벌어진 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살육이었다. 기형 용들은 끝도 없이 들이닥쳤고, 오직 죽기 위해서만 돌진해 오는 것 같았다. 데이미아와 보레아 스는 곧 마법을 다 써버려 탈진한 채 주저앉았다. 상처 때문이라기보다는 피로 때문에 쓰러지는 자들이 늘어 갔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기형 용들의 시체가 깔려 있어서 그것들을 밟고 서서 싸워야 할 지경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처음과 똑같이 많은 괴물들이 죽음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그런 식으로 시간이 흘렀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모두 지쳐서 쓰 러지기 직전, 기형 용들의 날개 소리를 뚫고 조용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타냐헨 페이, 헤인 레이시나드 드리아드 오나 탈린 엘라이드 ㅋ라... (신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모든 것을 다스려 왔던 태초의 힘이여...)" 보레아스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믿을 수 없 다는 듯 중얼거렸다. "비아드(설마)..." "페이 켈 탈린 엘브리드 이센벨 레디나드 렐 브리나드 (신들도 어길 수 없는 약속을 만들고 지켜온 힘이여...)" 서서히 날개소리가 멀어져 가고 있었다. 기형 용들로 이루어진 지붕이 걷 히고, 우클로우의 희미한 햇살이 켈리와 이즐레이, 툴위그와 데이미아의 어 깨 위로 쏟아졌다. "디 놀린 갈 휘 페이. 이르 에프라디나드, ㅋ라 펠루 디아스 렐 일린 펠루! (그 힘의 이름으로 말한다. 너희 벌받은 자들, 이제 속박에서 풀려나 스스 로 떠나리라...!)" 구름이 걷히듯 기형 용들은 사라졌다. 어두운 빛깔의 날개들은 이제 우클 로우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리고 옅은 잿빛의 하늘은, 피냄새를 풍기는 거무죽죽한 날개들 대신 이제 힘차게 공기를 젖히는 오색 의 날개들이 수놓고 있었다. 드래크로니안들. 용의, 혹은 날개가 달린 인간 의 모습을 한 붉은 눈의 종족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있는 것은, 거 대한 황금빛의 용 네스토르를 탄, 불처럼 붉게 넘실거리는 머리칼의 여인이 었다. "헤르미온!" 하고 보레아스가 소리쳤다. 네스토르는 천천히, 거대한 날개를 움직여 피투성이의 땅 위에 내려앉았 다. 헤르미온은 그의 등 위에서 내려 보레아스에게 걸어갔다. "살아 있었군, 헤르미온." 보레아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붉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실리사의 신관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그 대 신 가볍게 미소를 짓고, 팔을 벌려 오랜 친구를 포옹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요, 네스토르." 켈리는 명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네스토르의 황금빛 목을 두드렸다. 네스토 르는 인간의 목소리로 웃었다. "헤르미온이 벌써 로데인을 떠나, 드래크로니안의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 었다. 운이 좋게 만났지. 그녀는 내가 이즐레이를 이리로 데려올 것을 짐작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짐작하는 정도가 아니라, 계획했겠죠." 켈리는 막 포옹을 끝낸 헤르미온에게 비난하는 눈초리를 던졌다. 그녀의 얼굴은 엄숙했으나, 말투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변명할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불의 신관! 날 속여서 복수니 뭐니 하고 쓸데없이 긴 여행을 떠나게 했지. 그리고 항상, 나중에 가면 '이건 그 뜻이 아니었습니다'라고 한단 말이야. 정말이지, 그대는 악랄한 데가 있어..." "처벌을 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여왕님." 헤르미온의 말투 역시 농담기가 섞여 있었다. "그렇지만 여행이 그대를 단련시켰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켈레브리스? 그 대는 단지 왕가의 후손으로서 여행을 떠났지만, 이제는 여왕이 되어, 힐리온 의 주인이 되어 여행을 끝마쳤습니다. ...물론, 그대가 제 말을 따라 얻은 것 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겠지만요." 헤르미온의 붉은 눈은 이즐레이를 짖궂게 바라보고 있었다. 켈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두 손 들었어, 헤르미온. 언제나 자기 지혜를 자랑해서 날 꼼짝 못하게 하 지. 그래, 그렇게 지혜로운 헤르미온이라면, 지금 내가 묻고 싶은 것을 맞춰 보지 그래?" "물론입니다. 그대가 염려하는 두 사람은 무사할 것입니다, 여왕이시여. 한 명은 언제까지나 그대의 친구일테고, 한 명은 그대의 적이 될 테지만요." "그렇지." 켈리는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웃음을 띈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제 폐허가 된 라우더의 성터를, 그리고 그 폐허 위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드래크로니안들을.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겠지, 하고 그녀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 리고 그녀는 자신이 많이 얻고 적게 잃은 편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 많은 것을 얻었다는 것을. 그녀는 힐리온을 높이 쳐들었다. 우클로우의 하늘은 언제나 다름 없이 구 름으로 덮여 있었고, 햇살은 간신히 그 장막을 통과할 뿐이었으나, 그 금빛 의 검은 마치 태양 자신처럼 빛을 발했다. "켈 ㅋ라 휘브리나드. 디아스 휘노딘 켈 세이 테일리나스 데인 하리엔, 렐 ㅋ라 미니드 에웨이나드! (약속은 다시 지켜졌다. 이제 두 종족의 약속은 죽음에서 되살아나, 새로운 빛을 얻었다.)" 10년만에 처음으로 라우더에 기쁨의 함성이 번져 가는 가운데, 켈리는 이 즐레이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이즐레이는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부터 어쩔 거야?" 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 같아서는 퍼질러 자야겠지만, 로이를 찾아서 얼른 도망쳐야겠지. 랜 스가 나타나서 길길이 날뛰기 전에..." 중얼거리듯 대답하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이즐레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다소 도전적인 어조로 물었다. "넌 남아도 돼, 이즈. 나하고 함께 간다면 랜스의 적이 될테니까." 이즐레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넌 항상 그렇게 짖궂지, 켈리. 나한테 선택의 여지란 게 있다고 생각해? 처음부터, 나는 랜스와 함께가 아니라 너와 함께였어." 켈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곧 이즐레이보다도 더 높고 밝은 소 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힐리온을 칼집에 꽂고, 두 팔을 들어 이즐레 이의 목을 감았다. "그래, 이즈.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 (계속) 하아... 이거 정말... 스스로의 게으름에 치를 떨고 있습니다. 하긴... 게으름이라기보다는 어수선한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요... 끝내는 것 만큼은 제대로 끝내고 싶은 게, 작가도 뭣도 아닌 래디의 허황된 소망... 그런데 이루기가 쉽지 않군요. ^^; 요즘은 왠지 래디도 어수선... 나우 SF게시판도 어수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리고 읽어 주시는 분들을 위해 정말이지 이를 악물고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다가 죽는 한이 있어도 중도 하차는 안 합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와 사과를 동시에 드리며... Radagast... PS. 가온비 양이 수고하시는군요. 패러디다, 리메이크다, 게다가 이번엔 인기 투표까지... 감사합니다. 그리고 켈리와 제피로스를 밀어 주신 하이텔 분들께도 감사를... ^^ 17. "캬아아아!" 하피의 날개가 검은 피를 흩뿌리며 두동강났다. 클레이브는 멈추어 서서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버리려 하지도 않고, 하피의 피를 망토에 흩뿌리며 계 속 달려나갔다. 바로 얼마 전에, 새로 단 망토도 이제 피로 제 색깔을 알아 볼 수 없었다. 무너져 가는 성 안은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사방이 막혀 있 고, 또 방금 전까지 길이었던 곳이 막히는 이 복도에서, 과연 왕을 찾을 수 나 있을는지 클레이브 자신도 의심스러웠다. "클레이브 님, 또 갈림길입니다." 앞서 가던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클레이브는 욕설 이 튀어나오려는 간신히 참았다. "직진한다." 그는 간단히 대답하고, 머뭇거리는 기사를 앞질러 달렸다. 곧 뿌연 먼지가 흩날리고 어두컴컴한 복도 안에서 거무스름한 물체가 그의 앞으로 튀어나왔 다. 그는 화풀이를 하려는 듯 그 물체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에 거칠 게 칼을 휘둘렀다. "케엑!" 탁한 울부짖음과 함께 물체가 쓰러졌다. 피가 망토와 갑옷을 적셨다. 클레 이브는 쓰러진 시체가 무엇인지 확인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조급했다. 그 자신도 인정해야 했다. 더 이상 그는 침착하지도 않았고 침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다만 자신의 혼란을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 을 뿐.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클레이브 님, 아무래도 돌아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숨을 조금 가쁘게 몰아 쉬며, 옆에서 달려오던 데이슨이 조심스레 물었다. 세 번째로 똑같은 제안이었다. 클레이브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돌아가도 자네를 탓하지 않겠네. 그러나 나는 폐하를 찾아 모시고 나가겠 어." "그러나 클레이브 님, 폐하를 도대체 어디서 찾는단 말입니까? 또 살아 계 신지 아닌지도..." "반드시 살아 계시네. 그리고 우리는 그 분과 함께 나갈 거야!" 클레이브는 딸 잘라 말했다. 데이슨은 한숨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확신에 차 있어서, 아무도 감히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의 본마음이 어떻건간에, 항상 그의 말은, 그의 표정은, 그의 행동은 그렇게 확신에 차 있었다. 이렇게 달려가는 순간에도, 그리고 데이슨에게 단호한 대답을 던지는 순간 에도 클레이브 자신은 아클레어 3세의 생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 니, 오히려 이미 죽었을 확률이 더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믈레어 3세는 노인이었고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다.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군사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여 싸웠을 것이 뻔했다. 이렇게 찾아가는 것은 무의미한 짓 이었다. 그것은 확신 때문도 아니고, 충정(衷情) 때문도 아니었다. 충성심? 만약 충성심이 습관이라면, 너무나 오래 매여 있어서 몸의 일부처 럼 된 사슬이라면,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충정은, 왕에 대한 사랑은 - 결코 아니었다. 클레이브 자신이 진심으로 왕에게 충정을 바쳤던 적이 있 었던가. 아니, 있기는 있었다. 그가 아직 어리고, 왕이 아직 젊고, 패기에 차 있었을 때. 그러나 적어도 최근에 와서는 없었다. 그가 근위대장이 되고 얼 토당토 않게 장관까지 된 이후로는, 그는 왕을 존경했던 적조차 없었다. 단 지 그래야 하니까 왕에게 복종했고, 그 자신에게는 어떤 다른 선택도 떠오 리지 않았을 뿐... 그의 충성은 습관이었고 교육받은 결과였다. 왕의 조카니까, 최고의 기사니 까. 큰형 올랜도가 전사하고 랜스가 가출한 이후 그에게는 어떤 다른 선택 도 없었다. 그는 리반 아덴의 대신이었다. 어머니에게, 동생에게, 왕에게, 그 리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왕이 그에게 반란군을 진압하라고 했을 때 그 는 그렇게 했다. 사일러스를 위기에 몰아넣을 때에도 협조했다. 그것을 원하 는지 원하지 않는지는 자신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왕은 왕자를 총애했어야 했다. 클레이브 자신도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고 개를 숙이고, 뒤돌아서 경멸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험담 한 마디 하지 않지 만 대신 더욱 더 마음을 딱딱하게 굳히는 조카가 아니라, 결코 배신하지 않 을 테지만 결코 왕을 사랑하지도 않을 것인, 근위대장이 아니라 - 왕자를 사랑했어야 했다. 왕자만이 가슴에서 왕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그의 사랑을 받기를 원했었다. 그럴 가치가 없는, 강한 것만을 추구하던 왕을 위해 얼음 심장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엘먼 왕자밖에 없었다... "...!"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침 소리를 듣고, 클레이브는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히 왕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마음 속을 뒤덮던 회의는 언제나 그렇 듯이 그의 마음 깊이 심어진 충성스런 기사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거짓말 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쫄으로!" 클레이브는 활기찬 목소리로 외치며, 목소리가 들렸던 쪽을 향해 달려갔다. "크르르르...!" 한 쌍의 거대한 노란 눈이 그의 앞을 막아 섰다.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칼 날을 휘둘렀다. 눈은 잠시 뒤로 물러나며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어둠 속 에서 사람의 키만한 거대한 발이 덮여 왔다. 클레이브는 발가락 사이로 몸 을 피한 다음, 그 발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의 칼날이 두 눈의 사이를 파 고들었다. 피가 튀었다. 그러나 클레이브의 코는 이미 피비린내에도 익숙해져서 아무 런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캬아아아!" 괴물을 죽지는 않았으나 소스라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몇 개 만 남기고 다 꺼진 횃불 속에서 클레이브는 도망가는 괴물의 뒷모습이 거대 한 도마뱀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클레이브 님!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데이슨이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클레이브는 얼굴에 튄 피를 손으로 슥 문질러 닦으며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다시 외침이 들 려왔으므로, 클레이브는 다시 그리로 정신을 빼앗겼다. 이제 분명한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폐하는 살아 계시다. 어서, 서둘러라!" 반사적인 행위처럼 클레이브는 왕의 무사를 기원했다. 왕의 신변에 아무 일이 없기를 이조넬과 아스틸라에게 기원했고, 아직 그를 데려가지 말기를 페레이타에게 기원했다. 그리고 그의 발놀림은 다른 기사들이 따라오기 힘 들 정도로 점점 빨라졌다. 그는 마치 나는 듯이 계단을 내려가고, 복도 골목 을 돌았다. "폐하!" 클레이브는 마지막 복도를 돌며 외쳤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앞으로 달려 들던 하피 한 마리를 팔로 베었다. 여인의 얼굴과 새의 어깨가 거의 두동강 나다시피 잘라져 흰 뼈를 드러냈다. 하피들과 그리 크지 않은 기형 용들 사이에, 피를 뒤집어 쓴 아클레어 3세 가 있었다. 맹렬히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심각한 부상을 당하지는 않 은 듯 했다. 그 역시 클레이브를 보고는,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클레이브 경. 와 줄 줄 알았지!" 그러나 클레이브는 대답하지 못했다. 왕의 곁에 서 있는 청년을 보고 말문 이 막혀 버렸던 것이다. 그 청년이 입을 열고 난 후에야, 클레이브는 말을 거낼 수 있었다. "클레이브... 이런 데서 만나는군..." "맙소사... 랜스?" 뒤따라 온 데이슨 역시 입이 벌어졌다. 그러나 놀라움의 순간은 지속되지 못했다. 하피들과 기형 용들의 공격이 이어졌던 것이다. 무너져 가는 성에 남은 것들이라고는, 파괴 본능밖에 남아 있지 않은, 짐승의 지능조차 지니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맹렬히,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인간을 공격했 으며, 인간들의 칼은 망설임 없이 그것들의 위에 떨어졌다. 한참의 전투 후 복도를 가득 메운 듯 보였던 하피와 기형 용들은 시체가 되어 널브러지거나, 어디론지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 그제서야 클레이브, 랜 스, 그리고 왕은 한숨을 돌리고 이야기할 기회를 가질 수 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랜스?" 클레이브의 목소리는 반갑자기보다는 추궁하는 듯했다. 랜스는 어깨를 으 쓱했다. "이리로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하자면 좀 길지... 하여간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냐, 클레이브. 어쟀든 오게 됐고... 하르크자엘을 찾아다니다가 폐하를 뵙 게 되었을 뿐이야." "너무 추궁하지 말게나." 하고 왕도 한 마디 거들었다. "저 젊은이가 없었다면 나는 죽었을 것이네." 클레이브는 그제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왕에게 물었다. "폐하, 다른 기사들은...?" 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었기에, 클레이브는 화 조차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멸을 예상하고 있었으나, 왕이 살아 있는 것 만 해도 기적이지... 그는 침착하게, 목소리 하나 높이지 않고 말했다. "패배입니다, 폐하. 하지만 적들도 이겼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성을 잃고, 많은 병력을 잃었으니까요. 이대로 후퇴한다 해도 후세에 치욕으 로 남지는 않을 것입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귀에도 성이 무너져 가는 굉음이 들려오고 있 었고, 벽을 기어가는 금과 쏟아져 내리는 돌과 먼지들이 보이고 있었던 것 이다. "자, 그럼, 또 작별이군, 클레이브 형." 랜스가 칼을 집어 들며 말했다. 그 말이 클레이브의 정신을 퍼뜩 들게 했 다. "무슨 소리야? 너는 나가지 않는단 말이냐, 랜스?" "난 하르크자엘을 찾아야 해. 그에게 복수할 기회라고. 어느 쪽으로 갔는지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어." "어리석은 소리! 너는 우리와 함께 나간다, 랜스." "클레이브 형, 내 말 좀 들어 봐. 그 놈이 이젠 어머님까지 죽였다고! 살아 있게 놔 둘 수 없어!" 클레이브는 동생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과 놀랍도록 닮은 동생을 - 아 덴 가의 3형제들은 모두 리반 아덴을 빼어닮았다고들 했다. 그러나 안타깝 게도, 로데인의 공주와 결혼할 수 있었던 리반 아덴의 자유는 동생인 랜스 혼자서 독차지한 셈이었다. 클레이브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충성스러운 기 사로서의 리반 아덴, 영웅인 드래곤 슬레이어 뿐.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 을까. 애당초 랜스에게까지 강인한 모습만을 보이기로 했던 것은, 세상 사람 들에게 뿐 아니라 가족들에게조차 리반 아덴의 대신이 되고자 했던 것은 클 레이브 자신이었던 것을. "어머니의 시신은 나도 보았다. 그건 자결한 상처였어." 랜스는 클레이브의 감정이 결여된 목소리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말이 막힌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치 처음 보는 괴물을 보듯 형의 얼굴을 뚫어져라 노려보더니, 증오가 담 겼다고 할 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형이 이해할 리가 없지...! 아버지의 죽음도, 어머니의 죽음도, 가까이서 목 격한 건 나니까 말야!" 이 말에 클레이브의 얼굴빛이 창백해졌다. 그가 입을 열어 무슨 말인가 하 려는 찰나, 한 기사의 비명이 그의 말을 막았다. 모두의 시선이 비명이 난 쪽으로, 이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갈기갈기 찢겨서 뜯어먹히고 있는 기 사에게로 쏠렸다. 그 기사의 키보다 더 큰 머리를 가진, 노란 눈을 간 도마 뱀이 팔뚝만한 송곳니와 두 갈래로 갈라진 새빨간 혀로 그를 뜯어먹고 있는 중이었다. 그 도마뱀의 미간에는, 잿빛 가죽이 ㅉ겨 아직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복수라도 하러 온 건가...? 더러운 어둠의 생물!" 클레이브는 피식 웃으며, 칼을 잡고 그 괴물에게로 다가갔다. 도마뱀이 머 리를 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거의 소리도 없 이, 고개를 움직여 클레이브의 머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클레이브는 간신히 몸을 굴려 늦기 전에 피할 수 있었다. 그의 망토가 도 마뱀의 이에 걸려 찢어졌다. 클레이브가 몸을 제대로 일으키기도 전에, 이번 에는 왕이 자신의 검을 휘두르며 도마뱀에게로 달려들었다. "커어억!" 왕의 칼이 도마뱀의 목에 닿았고, 새빨간 피를 뿜으며 도마뱀은 뒤로 물러 섰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지는 않은 듯, 곧 더욱 더 맹렬한 태도로 달려들었 다. 도마뱀의 머리가 다가왔을 때 왕은 간신히 피했으나, 등 뒤에서 덮친 꼬 리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퍽! 왕의 몸은 픽 고꾸라져, 바닥을 굴러 무너진 벽에 가서 부딪쳤다. 그리 고 도마뱀은 빠른 발걸음으로 살그머니 자신의 새로운 사냥감에게 다가갔 다. "폐하...!" 클레이브가 외치며 도마뱀을 막아 섰다. 그의 칼이, 전에 만들었던 이마의 상처를 찔러 더욱 깊숙히 들어갔다. 도마뱀은 놀라 뒷걸음질치며 고개를 세 차게 저었다. 클레이브는 칼을 꼭 쥔 채 벽 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 사이 아클레어 3세는 몸을 일으켜, 칼을 고쳐 쥐고 있었다. "멋진 괴물이로구나. 네가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해 볼까?" 왕이 미소지으며 도마뱀에게 다가갔다. 도마뱀이 그를 앞발로 내리쳤으나, 그는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대신 도마뱀의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리고 왼쪽 눈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크아아아악!" 도마뱀의 비명과 함께 아클레어 3세는 그것의 흔들거리는 머리에서 뛰어내 려 바닥에 착지했다. 그리고 그는 다른 한 쪽 눈을 공격하기 위해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마뱀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것 은 길게 뺏던 머리를 능숙하게 뒤로 젖힌 다음, 다시 쑥 빼내어 그 코끝으 로 아클레어 3세의 가슴을 강타했다. 왕은 또한번 그 괴물의 힘에 휩쓸려 벽까지 굴러갔다. 그는 재빨리 칼을 들고 일어섰지만, 이미 도마뱀의 입이 그의 머리 바로 위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벌려져 있었다. "폐하...!" 클레이브가 다시 한 번, 도마뱀과 왕 사이에 끼어들려는 찰나였다. 또 다른 비명이 그의 귀를 때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다 보고, 그와 같은 거 대한 도마뱀이 한 두 마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사방의 벽을 뚫고 나오 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큰 것 중 한 마리가 랜스의 칼을 물고 잡아 당기고 있었다. "제길...!" 랜스는 욕설을 퍼부으며 칼을 힘껏 당겼다. 도마뱀의 입에 작은 상처가 나 면서, 칼이 빠져나왔다. 그는 휘청거리는 몸을 주체한 다음, 반대 방향으로 칼을 내리쳤다. 칼은 도마뱀의 코끝을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칼 이 채 제자리를 잡기도 전, 도마뱀의 꼬리가 랜스를 쳐서 쓰러뜨렸다. "랜스!" 클레이브는 동생의 이름을 외치며 달려왔다. 이미 왕은 안중에도 없었다. 도마뱀의 입이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랜스를 덥썩 물려는 찰나, 클레이 브의 칼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었다. 끝이 두 갈래로 갈린, 두터운 혀가 칼날 에 닿아 잘려 나갔다. 클레이브의 얼굴과 팔 위로 피가 떨어졌다. "캬아아아!" 도마뱀은 놀란 나머지 고개를 번쩍 들어올리며 뒤로 물러났다. 혀가 짤렸 기 때문인지 부자연스러운 울부짖음이었다. 그 사이 클레이브는 랜스를 잡 아 일으켰다. "크으으으..." 도마뱀은 금받 다시 공격해 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클레 이브가 먼저 행동을 취했다. 그는 도마뱀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달려가, 그 얼 굴을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들어올려진 칼이 도마뱀의 미간을 향해 직행했 다. 도마뱀은 얼른 뒤로 물러서며 목을 움츠렸고, 덕분에 칼날은 가죽만을 조금 스쳐 피가 배어나오게 했을 뿐이었다. 클레이브는 그 도마뱀의 목 바 로 아래에 착지했다. 도마뱀이 눈 앞의 생물을 삼키려 입을 벌리는 순간, 또다른 칼날이 그의 목을 베었다. 랜스였다. 도마뱀은 다시 목을 움츠렸다가, 새로운 적을 노려 보았다. 바로 그 때, 클레이브는 칼을 들어 그것의 목에 박아 넣었다. 도마뱀의 비명이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그것은 피를 투하며 비틀거렸 고, 클레이브는 칼을 빼낼 새도 없이 얼른 몸을 피했다. 피와 거품을 문 도 마뱀의 머리는 땅에 쿵 처벽혀졌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것은 아직도 이 를 드러내고 랜스를 물어 뜯으려 했다. 랜스는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가, 도마뱀의 머리가 아 주 가까이 다가왔을 때 재빨리 몸을 굴려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몸을 일으 킬 새도 없이, 이제 자신이 있던 자리를 지나친 도마뱀의 목을 향해 칼을 던텼다. 칼은 직선을 그리며 날아가 도마뱀의 머리 바로 뒷편에 꽂혔다. 그 도마뱀은 마지막으로 괴성을 질렀다. 마치 노랫소리처럼 높게 시작해서, 탁 하고 낮은 죽음의 소리로 변하는 울부짖음. 그리고 그것은 경련을 일으키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랜스와 클레이브는 도마뱀의 몸에 꽂힌 칼을 빼내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제서야, 클레이브의 머릿속에는 바로 몇 발짝 곁에서 싸우고 있는 왕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폐하...!" 클레이브는 소리치며 몸을 돌렸다. (계속) 음... 클레이브 역시... 제 동생부터 챙기는군요....^^; 첫눈이 왔습니다. 전 기쁩니다. 시험 중이고, 대학 생활의 반이 지나갔고, 나 머지 반이 지나가면 뭐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하여간 지금은 기쁩니다. 사람이란 이렇게 사는 거겠죠^^;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아니나 다를까, 클레이브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채 간신히 칼로 도마 뱀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는 왕의 모습이었다. 그 곁에는 왕을 지키려고 시 도했는지, 칼을 쥔 채 쓰러진 몇몇 기사들의 시신들 - 혹은 시신의 조각들 - 이 흩어져 있었다. 아클레어 3세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도마뱀의 입가에 상처를 입혔다. 도 마뱀은 뒤로 물러섰으나, 그것의 꼬리가 날아왔다. 그러나 그 꼬리가 제대로 움직이기도 전에, 검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와 그 중앙에 꽂혔다. 도마뱀은 펄쩍 뛰며 몸을 움츠렸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클레이브가 손에 자신의 검을 든 채 달려와 소리쳤다. 왕은 무릎을 꿇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클레이브는 그와 도마뱀의 앞을 막아 서며, 칼을 들어올렸다. 쉬익, 소리를 내며 도마뱀의 통나무같은 꼬리가 다시 휘둘러졌다. 클레이브 는 고개를 숙여 머리 위로 그 꼬리가 지나쳐 가도록 하고, 다시 몸을 일으 켜 도마뱀의 노란 눈을 노려보았다. 그는 서서히, 도마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왕에게서 먼 곳으로 그 괴물을 유인했다. 도마뱀은 그가 의도하는 대 로, 천천히, 그와 같은 속도를 유지하며 따라와 주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앞 발을 번쩍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쾅 내리쳤다. 바닥이 흔들거리면서 천정에서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클레이브는 재빨리 뒤로 물러선 덕에 그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불규칙한 이들을 드러낸 거대한 입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클레이브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굴려 그 입의 아래로 굴러들어갔다. 그의 머리 위에 도마뱀의 목이 있었다. 왕과 싸우느라 이미 생채기가 많이 나 있는 목이었다. 그 중 한 상처를 통해, 클레이브는 자신의 칼을 힘껏 밀 어넣었다. 칼을 채 놓기도 전에, 괴성과 함께 도마뱀의 목이 번쩔 들어올려 졌고, 잠시 붕 떴던 클레이브는 얼른 바닥으로 뛰어내려, 쓰러진 기사들의 칼 중 하나를 집었다. 그러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도마뱀의 최후의 발악은 아주 짧았다. 그것 은 숨을 몰아 쉬며, 이상한 소리로 그르렁거리고, 적의가 가득 담긴 눈으로 클레이브를 잠깐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달려들 듯이 몸을 잔뜩 긴장시키더 니, 그대로 쓰러졌다.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도마뱀에게 다가가, 목에 꽂힌 자신의 칼을 뽑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다른 도마뱀들도 모두 도망가거나, 그의 기사들에 의해 쓰러져 있었다. "클레이브 님, 다치신 데는...?" 데이슨이 걱정스레 다가와 물었다. 클레이브는 고개를 저었다. 몸의 여기제 기에 찰과상이 생기긴 했지만, 그것은 그다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나보다, 폐하는?" 그의 질문에 데이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클레이브는 얼른 쓰러져 있는 왕에게로 달려왔다. 이미 많은 기사들이 그 의 주위에 둘러서 있었으나, 그는 그들을 제치고 왕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그럴 만한 권한이 있었다. 특히 엘먼 왕자가 죽은 지금에는. 왕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이 깃들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왕의 손을 잡았으 나, 그의 마음은 담담했다. 그는 왕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자기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괘씸할 정도로 마음에 동요가 없었다. 그는 왕의 회생이 가망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그다지 바라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충성 스런 신하답게, 그리고 총애받는 조카답게 그 자리에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크... 클레이브..." 왕이 힘겹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예, 여기에 있습니다, 폐하."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명령을 방금 받았을 때보다 조금도 더 감상적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그 목소리의 건조함을 깨닫지 못했을지 몰라도, 그 자 신은 소름이 끼치리만큼 그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왕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피식 웃었다. "이디실에... 찔린 자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하더군..." "기운을 내십시오, 폐하. 곧 에스텔에 돌아가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클레이브 자신도 믿지 않았다. "아니... 난 틀렸네... 이제... 클레이브... 자네가 왕... 내 조카..." 왕은 힘겹게 양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떨리는 손들을 간신히 진성시키며, 왼손에서 날개 달린 금빛 사자가 박힌 루비 반지를 빼내었다. 그리고 클레 이브의 손에 그것을 쥐어 주었다. "자네가... 왕..." 왕의 얼굴은 웃으려는 노력을 보였지만, 일그러져 있었다. 그의 눈은 이제 광채를 잃고 흐려져,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왜..." 하고 왕은 중얼거렸다. "왜... 하르크자엘을...?" "폐하?" 얼토당토 않은 말에 클레이브도 놀라움을 표시하며 물었다. 그러나 왕은 이미 다른 시간을 경험하고 있었고, 그 시간은 클레이브가 끼어들 수 없는 시간이었다. 왕은 이디실을 든 소년에게 묻고 있었다. "왜... 내가 아니라... 하르크자엘을... 나는... 그대의... 왕..." 그리고 이디실을 든 소년은 대답했다. 아클레어 3세가 납득할 수 없는 대 답을. 이해는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을... "아냐... 인간... 하나의... 왕국..." 그리고 왕은 마지막 숨을 내쉬었다. 클레이브는 왕의 망토로 그 얼굴을 덮었다. 마지막으로 왕이 보였던 표정 은 결코 평온하거나 의지에 찬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서글픔이었 으며, 그 다음에는 혼란이었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고집스런 노인의 얼굴 로 굳어졌다. 왕의 반지를 손에 낀 채 클레이브는 일어섰다. 그제서야 그는 아클레어 3세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자신을 실망시켰던, 그러면서도 끝까지 지배했던 영웅이며 군주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를 아껴 주었던 숙부에 대해서. "폐하..." 데이슨이 먼저 무릎을 굻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다른 기사들도 그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다만 랜스만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형을 응시하고 있 었다. "이제 형은 왕이군." 랜스의 어조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희미하게 깃들여져 있었다. "나에게 하르크자엘을 포기하고 돌아가자고, 국왕의 권리로 명령할 건가?" 클레이브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데려간다 해도 너는 다시 떠나겠지. 형으로서 부탁하마, 랜스. 돌 아가자. 하르크자엘은... 죽었을 것이다. 이 성에는 수많은 인간 기사들이 있 었고, 오르크들도 그에게 등을 진 것 같으니. 그렇지 않다면 다시 나타날 것 이고, 그러면 너는 또다른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이제... 어리석은 희생은 충분한 것 같구나." 랜스는 놀란 얼굴로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런 어조로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둘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윽고 클레이브가 데이슨과 기사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낮지만 거 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첫 어명(御命)을 내렸다. "에스텔로 귀환한다." 기사들은 일제히 일어나 그의 명령에 따랐다. 성 안을 울리는 굉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랜스는 천천히,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클레이브의 뒤를 따 랐다. 18. 로이는 제피로스의 망토 자락을 꼭 쥔 채, 어두운 복도를 달리고 또 달렸 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축축한 공기가 흐르는 복도는 암흑 그 자체였고, 마치 저 빛 속과는 별도로 시간이 흐르는 듯 했다. 아니, 홀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로이는 하루 온종일을 달려온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고, 다음 순간에는 지금 막 아클레어 3세의 앞을 벗어나 몇 분 달리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 다. 아클레어 3세를 쓰러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을 해쳤다는 데 대해 별 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마음이 불편하긴 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 정없이 때려눕힌 사람이 왕이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수염이 하얀 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들은 뼈가 약해서 조금만 넘어져도 쉽게 부러진다던데... 그리고 일단 뼈가 부러지면 잘 붙지도 않는다는데. 내가 아무래도 잘못한 게 아닌 지 모르겠어. 시지리스에 있을 때에도, 생선 가게 할아버지가 사다리에서 떨 어져서 크게 다치셨었지. 근데 돌아가실 때까지 부러진 다리가 안 나으셨어. ...하지만 아까 그 할아버진 왕이고, 적어도 생선 가게 할아버지보단 맛있는 걸 많이 먹을테니까 빨리 낫겠지, 뭐. 게다가 내가 분명히 그러지 말라고 했 는데, 다자고짜 칼 잡고 덤빈 건 분명 그 할아버지 잘못이야.' 로이가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을 때,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 저길 봐. 출구다." 어둠과 정적의 주문이 동시에 깨어졌다. 저 멀리, 눈부신 빛의 족각같은 것 이 암흑 속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그것은 커져 동굴의 출구가 되었으며, 거기서 흘러나온 빛은 점점 강해져 검고 잿빛의 돌들로 이루어진 동굴의 모습을 비추어 내었다. 동굴 밖으로 나왔을 때, 로이는 잠시 눈을 감았다. 우클로우의 아침 햇살이 란 남부에서 자란 로이에게는 햇살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흐리멍덩한 것 이었으나, 지금의 그에겐 그것조차 눈을 자극했던 것이다. 한참만에 다시 눈 을 떴을 때, 로이는 동굴 주위에 둘러선 거무스름한 형체들과 제피로스의 굳어진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차차 눈이 빛에 익숙해졌고, 로이는 그 거무스 름한 형체들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오르크...!" "이리로 올 줄 알았지, 하르크자엘." 동굴 주위를 까마득하게 덮은 오르크들 중, 선두에 선 자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칙칙한 털에 어울리지 않는 황금 갑옷 차림의 그는, 다리 여섯 달린 땅딸막한 오르크 말 위에도 역시 황금 안장을 올려 놓은 채 타고 있었다. "그래서 진을 치고 기다렸나. 할 일도 어지간히 없군, 아크트." 제피로스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크트는 잠시 표정이 굳어졌으나, 곧 끽끽거리는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아직도 큰 소리를 치는군, 하르크자엘! 그렇게 철저히 실패하고, 도망이나 치면서! 어깨에는 상처를 입어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주제에 말이지! 누가 네 계획을 그렇게 망쳐 놓았는 줄 알기나 하나? 나, 바로 나 아크트다. 오르 크들의 제왕, 이 아크트란 말이야! 내가 네 잔꾀를 꿰뚫어 보고, 널 파멸시 킨 거다, 하르크자엘! 그걸 알았으면 무릎을 꿇고 목숨이라도 살려달라고 빌 어 봐!" 아크트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찢을 듯 높아졌다. 제피로스는 차라리 한심하 다는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한참동안 머리를 싸매고, 저 오르크가 왜 저기 앉아서 사람을 못 지나가게 길까지 막고 수선을 떠는지 짐작해 보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제피로스에게 묻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물었다. "저기 저 오르크 왜 저기서 저러고 있어요?" 그러나 제피로스에게서도 별 신통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는걸. 아마 정신이 약간 이상해진 게 아닐까." 그 말은 마치 주문처럼 아크트의 웃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노란 눈을 부 릅뜨고 제피로스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용서를 비는 게 좋을 거다, 하르크자엘!" "아크트, 싸우다가 머리를 다쳤나보지? 걱정이 되는데!" "끝까지 오만을 떠는구나. 어리석은 놈!" 아크트의 손짓을 신호로, 로이와 제피로스를 둘러쌌던 오르크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었다. 제피로스 역시 검고 거대한 날개를 폈다. 그러나 그는 칼을 빼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로이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조용히 말했 다. "내려앉으면 무조건 도망쳐 숨어라. 내 걱정 말고... 알았지?" "예?" 로이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이미 제피로스의 몸은 희미한 빛을 내며 변하고 있었다. 로이는 흠칫 놀라 자신도 모르게 동굴의 입구 쪽으로 뒷걸음질쳤다. 순식간에 빛은 뭉쳐져서 제피로스의 몸을 감쌌다. 그리고 그 것은 검은 빛깔로 변하며 점점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는 물질로 변했다. 이 미 제피로스의 모습조차 이전같지 않았다. 목이 길어지고, 팔과 다리도 늘어 나 이상한 모양을 갖추었으며, 날개는 더욱 더 커졌다. 그리고 길고 유연한 꼬리와, 머리에 돋아난 두 개의 뿔 -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용의 모습이었 다. "하르크자엘...!" 오르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덮였다. 하르크 자엘, 검은 죽음의 바람의 본모습을 그들은 본 것이다. 그리고 그 거대한 날 개가 하늘을 덮으며 펼쳐졌을 때, 그것은 마치 별이 태어나기 이전의 밤이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 중앙에 새겨진 X자 모양의 하얀 흉터는 검은 빛의 섬뜩함을 더했다. 로이조차도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벌벌 떨고만 있었다. 검은 용은 목을 길게 빼며, 거침없고 웅장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오르크 들이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용은 재빨리 목을 틀어, 오르크 무리를 휘저었 다. 그리고 서너 마리의 오르크를 덥썩 물어올려, 절벽을 향해 던져 버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날렵한 앞다리가 오르크들을 찍어눌렀다. "무엇들 하느냐! 이 바보들아! 아무리 하르크자엘이라도 이렇게 많은 수의 오르크는 상대하지 못해. 어서 공격하지 못해! 아카드 님의 손이 아까운 이 겁쟁이들!" 아크트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직접 창을 잡아 던졌다. 그것은 제피로 스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으나, 적어도 도망치기 일보 직전이었던 오르크 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이제 오르크들은 서서히 진영 을 수습하고, 다시 검은 용에게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검은 날개가 날개짓을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였다. 로이는 이제 동굴 속 으로 도망가 버리려 했다. 그러나 제피로스의 꼬리가 로이를 잡아 올려 그 의 등에 태웠다. 날개가 일으키는 세찬 바람 때문에, 로이는 등의 톱니를 꼭 잡고 고개를 숙였다. 오르크들이 날개짓의 폭풍에 휩쓸려 밀려나는 것이 보 이더니, 점점 멀어져 갔다. 제피로스가 날아오른 것이다. (계속) 클레이브... 혹은 랜스를 죽여달라는 분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세상 일은 그 렇게 듯대로 되는 것이 아니랍니다^^; 클레이브가 상당히 보기 싫게 그려진 인물임에는 분명하지만... 이런 세상에 제일 각광받는 인물이고, 그리고 제일 필요한 인물일지도 모르지요. 랜스도 그런 면에서 마찬가지. 로이가 좀 귀엽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그리고 제피가 좀 멋지게 그려지기는 했지만... 세상 사람들이 다 순진 + 제멋대로의 도적 에다가 마왕 부활시키겠다고 난리치는 사람들이라면... 좀 곤란하겠지요? ^^; 이제 아크트도 나왔고... 막판이네요^^ Radagast... "이 바보들아. 도망치게 놔 둘 셈이냐! 활을 쏴! 활을!" 오르크들의 머리 위로 바람의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날아가는 하르크자엘 과,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는 오르크 군사들을 보며 아크트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오르크들은 그제서야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화살은 하르크자엘에게 미치지 못하고 떨어졌으나, 오르크들은 포 기하지 않고 그의 뒤를 쫓아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검고 거대한 날개의 날개죽지에 꽂혔다. "제피로스...!" 로이가 비명을 질렀으나, 비명은 바람 소리에 사그러들어 버렸다. 제피로스 는 금방 당에 추락하지 않았다. 그는 날 수 있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 날 아보겠다는 듯, 화살이 꽂혀 부자연스러운 날개를 열심히 움직였다. 그러나 서서히 지면이 가까워졌고, 이윽고 그의 네 발은 땅을 디뎠다. 로이는 펄쩍 뛰어내려 제피로스의 머리 부분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자 색 눈을 보며 소리쳤다. "제피로스, 화살이...! 괜찮아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대한 용의 몸은 빛을 내며 또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검고 거대한 용은 사라지고, 검은 옷과 검은 망토를 입 은 인간의 청년의 모습만이 남았다. 그러나 화살이 꽂힌 날개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로이, 도망쳐 숨어라. 어서!" 제피로스는 날개의 화살을 뽑으며, 숨가쁜 목소리로 소리쳤다. 로이는 거역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피로스에게 자신은 방해밖에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미 오르크들이 오고 있었으므로, 그는 멀리 가지 못하 고 근처의 작은 경사지(傾斜地) 아래로 뛰어내려, 그곳에 있는 작은 굴 속에 몸을 웅크리고 숨었다. 제피로스는 칼을 뽑아 들고 따라오는 오르크들을 기다렸다. 선두에서 달리 던 오르크들은 거의 모두, 하르크자엘의 '보이지 않는 칼날' 앞에 자신의 죽 음을 알지도 못한 채 쓰러졌다. 그러나 점점 많은 오르크들이 왔고, 제피로 스는 밀리기 시작했다. 로이는 굴 안에서 점점 잦아지는 칼 부딪치는 소리 와, 오르크들의 기세등등한 기합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크트! 너는 정말 '쿠푸-헤'답지 못하군. 왜 내게 직접 덤비지 못하는 거 냐? 너 자신이 나보다 약함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제피로스는 아크트를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의 목소리는 숨이 차 힘겹게 들렸다. 반면 아크트의 목소리는 탁하지만 여유만만했다. "배신자에 사기꾼! 너 같은 녀석에게는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 이런 식의 개죽음이야말로 네게 알맞은 포상이지." "고맙군 그래. 누가 개죽음을 당할지... 보자고! 아크트!" '아무래도... 이러고 앉아있는 건 곤란하겠어.' 로이는 토굴(土窟) 안에 웅크린 채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무엇을 할 수 있 단 말인가... 갑자기 그는 이디실을 빼어들었다. 그리고 칼날을 향해, 마치 자기 말을 알 아듣는 사람에게 하듯이 말을 걸었다. "이봐, 이디실... 듣고 있니? 지금 네 힘이 필요한 거 같아. 왜, 전에 오르크 를 죽일 때 내 정신을 잠깐 나가게 한 적이 있었잖아. 지금 그런 게 필요해. 해 줄 수 있겠니?" 그리고 로이는 잠시 기다렸다. 그러나 제피로스의 칼날이 오르크들의 무기 와 부딪쳐 내는 소리만이 정신산란하게 들려올 뿐, 로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로이는 다시 한 번 칼에게 사정했다. "내 친구가 위험해. 제발 부탁이니까, 날 도와줘, 이디실!" 하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저기... 전에 위협한 거, 다 취소야." "..." "...지금 나 도와주면 다음부턴 하겠다는 대로 다 하게 해 줄께." "..." "이봐... 네가 진짜 마법이 걸린 검이면 어떻게 좀 해 보라고!" "..." "...이 사이비야! 사기꾼아! 너 마법의 검도 뭣도 아니지!" "..." 드디어 로이는 한숨을 쉬며 포기했다. 그는 이디실의 매끈한 날을 보고, 그 리고 오르크들과 제피로스의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제피로스는 부 상을 당했다. 게다가 오르크는 너무 많다. 결과는 뻔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이디실의 진짜 주인이 되었다는 것 을. 이제 이디실은 그가 빈다 해도 그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이디실은 그 의 칼일 뿐이었고, 싸워야 할 사람은, 결정을 내리고 책임져야 할 사람은 로 이 자신이었다. '그래, 뭐, 제피로스가 죽으면 나 역시 살아 나가기는 힘들 거야. 그렇다면 차라리 나중에 듣기라도 좋게 같이 싸우다 죽는 게 낫지! ...하르크자엘을 도 와 싸웠다는 게 얼마나 좋게 들릴지는 좀 의심스럽지만...' 그는 칼자루를 꼭 쥐었다. '뭐... 왕도 한 방에 눕혔는데, 어떻게든 되겠지!' 제피로스는 도끼를 든 오르크 한 마리를 밀어내어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 대로 칼날을 돌려 자신의 오른쪽에 있던 오르크의 동맥을 끊은 다음, 쓰러 진 오르크가 일어나기 전에 그의 목을 찔렀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 로 싸울 수 있을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벌써 어깨의 붕대가 헐거워 져 피가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라, 하르크자엘!" 그의 등 뒤에서 한 오르크가 소리치며 도끼를 내리쳤다. 그는 훌쩍 뛰어올 라 그것을 피하며, 그 오르크의 얼굴을 발로 차 쓰러뜨렸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 올라선 채 그 뒤의 다른 오르크의 배를 갈랐다. 그러나 그의 왼편의 오르크가 내리치는 칼을 받아 쳤을 때, 그의 균형은 무너지고 말았다. 자신 도 모르게 무릎이 땅에 부딪쳤다. 절호의 기회를 만난 오르크들은 당당히 무기를 치켜들었다. 로이의 외침이 들려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그에게서 물러나라. 나는 이디실의 주인이다!" 말투가 너무나도 달랐으므로, 제피로스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제피로스로부 터 좀 떨어진 곳에, 로이가 서 있었다. 피를 머금은 이디실을 들고, 제피로 스가 예전에 준, 지금은 너덜너덜해졌으나 아직도 그 검은 빛을 잃지 않은 망토를 두른 채. 푹 눌러 쓴 후드로 얼굴을 가린 모습은 꽤 그럴듯해 보였 다. 오르크들이 움찔해 있는 사이, 제피로스는 자신의 주위를 둘러싼 오르크들 을 재빨리 베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잘 듣지 않는 날개로 날아올라, 간신 히 로이에게로 날아가 착지했다. "로이, 무슨 짓이야!" 그가 꾸짖자, 로이는 검은 후드 아래로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래도 효과 있었잖아요?" "효과라고..." 그러나 아크트의 외침은 로이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가기에 충분했다. "저 놈도 잡아라! 드래크로니안과 한패다!" "에그머니나..." 로이는 새하얗게 질려 중얼거렸다. "도망쳐, 로이!" 제피로스가 낮게 부르짖었으나, 그러지 않아도 로이는 벌써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크들의 수효가 워낙 많다 보니, 제대로 도망친다는 것조차 불가 능했다. 사방팔방에서 오르크들이 그들을 막아섰고, 순식간에 로이와 제피로 스를 한꺼번체 포위해 버렸다. "두 놈 다... 이젠 끝이다!" 아크트가 으르렁거리며 소리쳤다. 그가 명령을 내리기 위해 손을 들어올렸 을 때, 갑자기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수그르! 우 쿠운라 우크 아루우바 아르그 아우르 와그? (멈춰라! 무슨 근거에서 그대는 그들의 죽음을 명령하는가?)" 오르크들과 로이, 그리고 제피로스의 눈이 다같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 했다. 그리고 그들의 눈은 모두 놀라움에 차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것 은, 소규모의 군대, 그러나 인간에서도 오르크에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위엄 있게 정렬된 오르크 군대였다. 적절한 무장을 갖추지 않은 오르크는 한 명 도 없었으며, 투지가 불타지 않는 오르크 역시 한 명도 없는 듯 보였다. 그 리고 다리 여섯 개 달린 외골격의 오르크 말 위에 탄 기사들은, 인간 기사 들조차 부러워 할 만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 중 선두에 있는 자, 검은 겁옷을 입고 거대한 칼과 도끼를 X자로 짊어진 오르크는 다른 오르크보다 키가 머리 두어 개는 커 보였으며, 몸집은 두 배 정도 되어 보였다. "맙소사... 오르크가 또 있네..." 로이가 중얼거렸다. "푸이... 하르크...?" 제피로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아크트는 말문이 아예 막혀버린 듯,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을 뿐이 었다. 거대한 오르크는 천천히 말을 몰아 아크트에게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아 쿠푸-헤바 라그라 아루우바 아르그 아우르 츠이, 차 아르이 파우 프르. 차 아 키드르 쿠푸-헤 푸그르 투 프르! (그대가 쿠푸-헤의 권위에서 그들의 죽음을 명한다면, 나는 그것이 부당함 을 주장한다. 나는 그대가 더 이상 쿠푸-헤가 아님을 주장한다!)" "우크 마이 (너 감히)...!" 중얼거리는 아크트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로이는 의아해져서 제피로스에게 물었다.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죠?" "도전이야. 오르크의 왕에 대한... 오르크의 왕은 가장 강한 오르크다. 그러 니 항상 더 강한 자가 나타나면 왕위를 빼앗겨야 하지. 다시 말해서, 도전을 거절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렇게 대답하는 제피로스의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는 듯 했다. 그는 멍한 표정으로 검은 갑옷을 입은, 거인 오르크만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거인 오르크는 칼과 도끼를 뽑았다. 그리고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쿠푸-헤 우크 바로이! 차 그루크 우크 바로이, 케라 쿠푸-헤 푸그르 프르! 차바 파가두 그으그르! (왕은 가장 강한 자! 나는 나 그루크가 가장 강한 자, 그러므로 모두의 왕 이라고 주장한다! 나의 도전을 받아들여라!)" "그루크! 우크 마그르 그! (그루크! 넌 후회할 것이다!)" 아크트 역시 소리치며, 양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었다. 금빛 갑옷을 입은 오르크와 검은 갑옷을 입은 오르크를 남겨두고, 오르크 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물러섰다. 금빛 갑옷의 아크트가 먼저 공격했다. 그의 칼날은 공중에서 화려한 곡선을 그렸다. 오른손의 칼날이 검은 갑옷을 입은 오르크의 목으로 날려졌다. 그러나 막판에 그 칼날은 교묘히 비껴 가 서, 검은 토구를 넘어선 다음 반대편에서 돌진해 왔다. 그러나 검은 갑옷의 오르크는 너무나 간단하게 검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아 내고, 상대를 밀어 쓰 러뜨렸다. 애당초 몸집의 차이가 심하던 터라, 아크트는 그대로 땅에 쳐박혔 다. 그러나 얼른 일어나 머리 위에서부터 내리쳐지는 검은 갑옷의 오르크의 도끼를 피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오르크가 헛된 공격만을 하고 지나가자, 아크트는 훌쩍 뛰어올라 그의 뒷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오르크의 도끼가 그것을 막아 냈다. 그리고 칼과 도끼가 엉켜 있는 사이, 검은 오르크의 칼은 아크트의 머리를 내리쳤다. 투구 틈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미 아크트는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쿠푸-헤는 살인자만이 될 수 있었고, 희생자를 불쌍히 여겨 멈추는 자는 될 수 없었다. 검은 갑옷의 오르크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아크트를 발로 차 쓰러뜨렸다. 칼에서 풀려난 도끼가 높이 쳐들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내리쳐 져 아크트의 머리를 몸에서 떼어냈다.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로이는 아크트 편의 오르크들의 폭도들로 변하지 않을까 가슴을 졸이며, 이디실을 꼭 잡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크들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쿠푸-헤! 쿠푸-헤 그루크!" "슈 쿠푸-헤 가우 (새로운 쿠푸-헤 만세)!" 양편 모두에게 환호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니, 이제 양편은 더 이상 존재 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오르크들은 그루크의 오르크들이었고, 그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그루크는 아크트의 머리를 높이 들어올려, 털 을 잡고 휘둘렀다. 피가 사방에 튀었고 오르크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제피로 스는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루크는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부하들이 열광하도록 내버려 둔 채, 아크 트의 머리를 한 손에 들고 제피로스에게 다가왔다. "어째서, 그루크?" 하고 제피로스는 물었다. "이렇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대는 나에게 자유를 주었소, 드래크로니안의 수장." 그루크는 나지막하고 원시적인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분 명 공용어를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간의 언어라기보다는 오히려 야 수의 으르렁거림같이 들렸다. "그것은 내가 더 이상 그대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오. 나는 충 성 때문이 아니라 빚을 갚기 위해 왔소. 그대는 예전에 나와 나의 오르크들 을 구했소. 이제는 나와 나의 오르크들이 그대를 구했소. 이제 우리 사이에 빚은 없고 전사의 명예만이 남았소." 제피로스는 웃었다. 맑은 웃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르크들의 언어를 입에 담았다. "카이가르, 쿠푸-헤(감사하오, 모든 이의 왕이여)." 검은 갑옷을 입은 오르크 중 한 명이 인간족의 말 두 필을 끌고 왔다. 그 리고 한 필은 제피로스에게, 한 필은 로이에게 건네주었다. "이제 작별이오, 드래크로니안과 인간." 하고 그루크는 조용히 말했다. "아마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오. 그대가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 는 한. 아크트는 너무나 많은 오르크들을 죽였고 이제 우리 종족은 늘어나 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오. 우리는 우클로우로 돌아갈 것이오. 그리고 우리의 영역을 침범하는 자만을 처벌하겠소. 다른 종족과 오르크는 영원한 경계 속에서, 서로의 멸종을 모르는 채 멸종될 것이오. 아카드가 예언한 대 로. 그러니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오. 내가 죽은 후, 아크트와 같은 지 도자가 탄생하지 않는 한." "슬픈 운명이군. 하지만 우리 종족도 슬프기는 매한가지일 거요." 하고 제피로스가 대답했다. "아크트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다른 종족을 희생시킴으로써 자신의 종족을 연장시키려 했소. 아크트는 죽었소. 그러니 하르크자엘도 죽어야겠지." "제피로스...?" 로이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짜로 죽겠다는 뜻이 아니다, 로이. 단지 내가 사라질 필요가 있다는 것 이지. 하르크자엘이 사라질 필요가... 그러니 네게 부탁한다, 로이. 라우더 성 터로 돌아가라. 거기에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가서 알려 라. 인간이건, 요정이건, 드래크로니안이건 - 하르크자엘은 죽었다고. 그리고 그루크 - 쿠푸-헤. 그대에게도 같은 부탁을 드리겠소." 로이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루크 역시, 묵직한 목을 끄덕였다. 제피로 스는 어깨의 붕대를 고쳐 매고, 감사의 미소를 던지며 말 위에 올라탔다. "또 만날 수 있겠지요?" 하고 로이가 물었다.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었다. "인연이 닿으면, 로이."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인연이 닿을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에, 미소 를 지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루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비록 두 손이 닿지는 않았으나, 갑옷으로 둘러싸인 그를 포옹했다. 오르크 특유의 악취와 구역질나는 피비린내가 났으나, 그것 말고 나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고마워요, 쿠푸-헤. 날 구해 줘서, 그리고 또 제피로스를 구해 줘서." 로이는 놀란 듯 노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그루크에게 미소하며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에 올랐다. 멀리 라우더 성이, 아니 라우더 성이었던 폐허가 보이고 있었다. 성이 있던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돌과 벽돌들의 무더기 뿐이었다. 그 앞마당에 - 혹 은 앞마당이 있던 자리에 - 낯익은 얼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제피로스를 닮은, 형형색색의 우아한 용들과 함께. "로이!" 여러 목소리가 한꺼번에 울렸다. 로이는 친구들에게 미소했다 - 켈리, 이즐 레이,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 랜스만이 없었다. "어떻게 된거야?" "무사할 줄 알았어!" "왜 저 쪽에서 오는거야? 성이 무너져서 얼마나 걱정을...!" 사방의 아우성에 로이는 익숙한, 귀염성 있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머리 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말하려면 길어... 그보다 왜 여기 이 드래크로니안들과 함께 있는 거야?" "그것도 말하려면 길어." 켈리의 대답이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즐거움이 모두를 감싼 가 운데, 로이는 보레아스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잠시 그가 적이라 는 생각에 몸이 굳어졌으나, 곧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보레아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제피로스 님은...?" 천천히, 죄책감을 느끼며,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웃음이 사그러들었다. 켈 리의 손이 로이의 어깨에 얹혀졌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거침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단 이 곳을 떠나자, 우리 모두. 여기는 이제 잊혀진 땅, 잊혀져야 할 땅 이니까. 새로운 도시, 다시 태어난 도시, 라벤데일로 가는 게 좋겠어. 우리 모두 휴식할 시간과,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아주 많이 필요할 테니까." 수십마리의 용의 모습을 한 드래크로니안들은, 로이 일행과 상처를 입어 날지 못하는 동료들을 태우고 날개를 폈다. 라우더 성의 폐허는 점점 조그 맣게 흐려져 로이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치 라우더의 역사가 사라져 버리듯이.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라벤데일이 놓여져 있었다. 『게시판-SF & FANTASY (go SF)』 22972번 제 목 : 連용 의 신 전 載--- Epilogue(마지막회)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12/09 16:09 읽음 : 657 관련자료 없음 ----------------------------------------------------------------------------- Epilogue... "에밀리아, 어서 오너라!" 수염을 기른, 조금 초췌한 차림의 중년 남자는 소녀를 향해 소리쳤다. 멀리 에서 허겁지겁 달려오는, 역시 약간 허름한 차림이지만 그래도 깜찍하게 아 름다운 열 예닐곱 살의 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양손에는 꽤 묵직한 보따리들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의 흔적이 배여 있었다. 그래 도 그들은 밝은 표정을 짓고, 연신 웃음을 터뜨려 대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다니 꿈만 같아요, 아버지!" "그러게 내가 뭐랬니, 에밀리아? 세상에 안 될 일은 없댔잖아! 어서어서 서 둘러라. 이러다가 배를 놓치겠다!" "예!" 소녀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깡충깡충 뛰며 아버지의 뒤를 따라갔다. 사 내는 허름한 돛대가 걸려 있는, 전에는 꽤 위풍당당했겠지만 이제는 낡아 빠진 범선으로 걸어가 소리쳐 물었다. "시지리스로 가는 배 맞습니까?" "어서 타슈!" 흘끔 아래를 내려다 본 선원이 켄윌 사투리로 대답했다. "막 출발하려는 참이유. 때맞춰 잘 왔구만!" 별 일도 아니지만 소녀와 아버지는 기쁨에 겨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부녀 를 태우기가 무섭게, 배는 닻을 올리고 출항했다. 곧 잔잔하고 푸른 바다 위 로 시지리스 섬의 모습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이제 막 봄을 맞아, 부드러운 연록색이 우뚝 솟은 사화산을 싸고 도는 모습. 소녀와 아버지는 다시 웃음 을 터뜨렸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거유?" 아까의 그 선원이 소녀의 아버지에게 물었다. 그는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 였다. "전쟁이 나기 전에도 우리는 저 섬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지요. 내 아버지 도 여관을 했고..." "하지만 이제 시지리스는 로데인의 땅이 되었다던데 용들하고 함께 살 거 란 말이유?" "허허, 용들보다 더 무서운게 악착스런 영주 아니겠습니까." "...하기야 그렇지." 두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상과 지하와 하늘을 다스리는 세 여신(女神)의 이름으로, 그리고 땅과 바다의 물을 다스리는 두 남신(男神)의 이름으로, 휴전의 맹약은 지켜질 것 이오. 에스테이아의 과거의, 그리고 미래의 왕조의 명예로써 약속하오." "지상과 지하와 하늘을 다스리는 세 여신의 이름으로, 땅과 바다의 물을 다스리는 두 남신의 이름으로, 그리고 드래크로니안을 보호하는, 둘이자 하 나인, 여신이자 남신이며 저승의 용인 실리사와 에퀴온의 이름으로, 휴전의 맹약은 지켜질 것이오. 로데인의 과거의, 그리고 미래의 왕조의 명예로써 약 속하오." 두 왕은 양피지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넣고 옥쇄(玉碎)를 찍었다. 날개 달린 사자의 문장과 두 머리를 가진 뱀의 문장이 나란히 마주본 채 미백색 의 종이 위에 찍혀졌다. 두 젊은 왕은 서로를 바라보고, 조금은 경직된 태도 로 악수를 나누었다. 한 명은 붉은 망토로 어깨를 덮은, 붉은 금발과 청록빛 눈을 가진, 키가 큰 청년, 그리고 또 한 명은, 검은 망토 위로 굽이치는 금 발을 늘어뜨린 푸른 눈의 젊은 여인. 흰 옷을 입은 이조넬의 신관이 서로의 손을 잡은 그들의 손을 하얀 천을 덮고, 그 위로 성스러운 흙을 뿌렸다. "이로써 두 나라의 맹약은 모든 것의 어머니, 이조넬의 가호 아래 맺어졌 습니다. 위대한 여신의 허락 없이는 어느 쪽도 맹약을 깨는 것을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손에서 하얀 천이 걷어졌다. 그들은 딱딱한 태도로 서로에게 인사 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각자 자신의 신하들이 기다리고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에스테이아 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그의 모습을 꼭 닮은 금발의 기사는 망설였다. 그는 표정이 너무 가득하여 그 중 어느 표정도 읽을 수 없는 눈빛으로, 여왕의 뒷모습과, 여왕의 곁을 지키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았 다. 영왕의 기사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흰 벨벳으로 치장된 검은 옷을 입은, 날렵한 몸집과 긴 흑발, 그리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기사였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리고 헤어졌다. "클레이브가 언제까지나 휴전의 맹약을 지킬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하고 켈리는 모처럼 잘 정돈된 머리칼을 귀찮다는 듯 쓸어올리며 말했다. 그녀는 라벤데일 왕성의 창가에 걸터앉은 채, 그 전경(前景)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북부인 로데인은 시지리스보다 봄이 늦게 와, 아직도 겨울의 모습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아직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과 드래크로니안 들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곳곳에서, 새로운 집이 지어지고 낡은 건물이 보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인간들이 하는 일을 돕는 드래크로니안들이, 인간의 모습, 혹은 용의 모습으로 하늘을 덮으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서는 이즐레이가 벽에 기대어 선 채 가만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벌써 그는 대공(大公)이라 불리고 있었고, 여왕이 '전사의 눈' 을 가진 혼혈 기사와 실질적으로 약혼한 것이라는 말은 공공연하게 퍼지고 있었다. 로데인의 인간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은 그 생각에 열광했다. 인간 왕 녀와 드래크로니안 기사 - 비록 혼혈이지만 - 이리니와 글라노우스의 신화 가 다시 한 번 되풀이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보레아스는 말없이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그의 양 옆에는 소박하지만 좋 은 옷으로 차려입은 로이와 하얀 로브 차림의 데이미아가 열심히 과일과 과 자를 집어 먹고 있었다. 라우더의 몰락 이후 계속 이 성에 머무르고 있는 이 두 어린 식객(食客)은 애당초 정치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켈리는 말을 이었다. "에스테이아가 바로 서면 그들은 다시 쳐들어올거야. 옛 영토를 되찾는다 고 생각하겠지. 에스테이아는 항상 그러니까. 그것을 막는 방법은 로데인이 그보다 강성해지는 도리밖에 없어." 그리고 그녀는 시선을 성벽 너머, 먼 남쪽의 땅에 고정시켰다. "남쪽에, 아직 로데인이 재건된 것을 모르는 로데인 인들과 드래크로니안 들이 있다고 들었어. 긴 여행을 해야 할 것 같아. 허락해 줄 거지, 보레아 스? 실리사의 신관 헤르미온과 새 수장(收藏) 네스토르는 벌써 승낙했어." "제가 어떻게 반대를 하겠습니까?" 보레아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왕은 당신인데요, 켈레브리스 폐하. 그리고 제가 막는다 해도, 당신은 기어코 가시고야 말겠죠." "고맙군." 켈리는 개구쟁이 같은 모습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따뜻한 눈길로 이즐레이를 응시했다. "너도 갈 거지, 이즈?" "물론이야. 아니면 내가 여기서 혼자 뭘 하겠어?" "저도 갈래요!" 하고 로이도 나섰다. "남쪽이라면 내가 더 잘 안다구요." "하지만, 로이, 넌 시지리스로 돌아가고 싶은 것 아니었어?" 이즐레이가 놀라서 물었다. 켈리 역시 한 마디 했다. "그래, 로이, 네가 좋다면 널 시지리스의 영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런 건 필요 없어요." 로이는 방긋 웃으며 활달하게 대답했다. "영주들은 가족 관계나 복잡하고 도대체가 도움될 게 하나도 없다구요. 난 그냥 계속 여행하고 싶어요. 켈리와 다른 친구들을 만나 이런 여행을 하기 전까진,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몰랐어요. 조금 여행을 한 다음에, 시지리스 에 돌아가도 돼죠, 뭐." "고마워, 로이!" 켈리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데이미아, 그럼 너도 함께 갈래?" 그러나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요. 난 아무래도 공부를 더 해야 할 것 같아서... 라스헨 에이니드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훌륭한 마법사가 되어야죠. 난 일단 로센 라스로 돌 아가 마법을 공부하겠어요. 진짜 라스헨 에이니드가 되면, 그 대 여러분을 만나러 올게요." "그것도 좋겠죠." 하고 보레아스가 대꾸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당신이 이미 진짜 라스헨 에이니드인 것 같군요, 데이미아. 훌륭한 마법사는 마력이나 기술, 혹은 지식만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나 필리우스, 그리고 타냐헨 네아 시절 마왕이라 불리던 자들도 마력에 있어서는 우수했죠. 하지만 당신에게는 다른 것이 있습니다. 당신 은... 필리우스를 변화시켰어요. 그것은 저도 당신의 어머님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필리우스..." 데이미아는 그 이름에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필리우스에 관해 말씀드릴 것이 있어요... 모두에게. 사실은 아주 오래 전 에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로브에 달린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쪽지를 꺼내 었다. 새의 발에 묶여 왔던 편지인 듯, 여러 겹으로 접혀 가운데에 묶은 자 국이 나 있었다. "며칠 전 아침 산책을 하다가 산새 한 마리를 만났어요. 평범한 산새였는 데... 내 어깨에 와서 앉더라고요. 그래서 보니까 다리에 편지가 묶여 있었어 요." 로이가 먼저 그 편지를 펴 보았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고대어에 알맞는 글 씨체였으나, 그 내용은 공용어로 되어 있었다. 로이는 그것을 소리내어 읽었 다. '친애하는 라스헨 에이니드. 당신의 친구들 - 용감한 여왕님, 붉은 눈의 암살자님, 기운 좋은 난쟁이 아 저씨, 그리고 귀여운 도둑 - 모두 함께 보라고 공용어로 씁니다. 제가 두아 스 따위는 상대도 안 된다고 말씀 드렸죠? 설마 제가 죽기라도 했다고 생각 하시는 것은 아니실테죠. 전 이렇게 살아 있답니다. 단지 나쁜 짓을 한 것이 좀 걸려서, 그리고 두아스와 싸우느라 마력의 일부분을 잃었기 때문에, 그냥 편한 대로 죽은 척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 뿐이죠. 사람들은 필리우스라는 마법사가 죽었다고 알 겁니다. 다시는 세상에 나타 나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새로운 인생을 계속해서 살아갈 것이라는 사실을 - 왠지 당신에게는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제 새로운 삶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의 덕입니다, 라스 헨 에이니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요. 영원히 당신의 충실한 친구, 한때 필리우스라는 이름이었던 자 올림.' 먼저 웃음을 터뜨린 것은 보레아스 쪽이었다. "정말로 필리우스다운 짓입니다!" 하고 그는 소리쳤다. 이어서 로이도, 데이미아도, 켈리도, 이즐레이도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의 웃음이 가라앉은 후에, 켈리가 다시 로이에게 물었다. "그래도 로이, 난 네게 신세진 게 아주 많은데... 무슨 보답을 해 주고 싶 어! 보물이라든지, 아니면 작위(爵位)를... 그래, 작위를 수여할께. 성(姓)도 함께 말야. 로이... 테이렐그린은 어때?" "...테이렐그린?" "그래! '용족의 친구' 또는 '드래크로니안의 친구'라는 뜻으로 말야. 그게 좋 겠어. 로이 테이렐그린. 멋지지 않아?" 로이는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는 성이네요. 내 친구들을 생각나게 할 것 같아요. 좋아요, 켈리. 그런 멋진 성을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작위는 필요 없어요. 성만으로도, 너 무 충분해요." "아, 그래... 나중에 마음이 바뀌면 말해." 켈리는 아직도 섭섭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기대에 부푼 밝은 웃음이 그 녀의 얼굴을 차지했다. 창틀에서 펄쩍 뛰어올라 몸을 일으키며, 그녀는 소풍 이라도 가는 어린아이처럼 소리쳤다. "자, 그럼,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준비를 해야지? 이 귀찮은 드레스도 벗어 버리고 말야!" "로이." 성벽 위에서 마지막으로 라벤데일의 해가 저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로 이에게, 보레아스는 가만히 이름을 부르며 다가섰다. 로이는 섭섭한 표정을 띄고 그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얼굴은 한편으로는 기대에 차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여긴 정말 아름다운 곳이에요." 하고 그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전설에나 나올 법한 도시네요. 저 용들... 이런 광경을 진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여기를 떠나다니 아쉽군요. 물론, 켈리 와 이즈하고 여행을 떠나는 게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 남아 있고 싶 기도 해요." "원하신다면 언제라도 올 수 있습니다, 로이. 이곳은, 우리들은 언제나 당 신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당신은 용족의 친구, 드래크로니안의 친구 - 로 이 테이렐그린이니까요." 보레아스의 대꾸에 로이는 얼굴을 붉혔다. "정말이지 켈리는 너무 좋은 이름을 준 거 같아요. 내가...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로이, 그것은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이름 입니다. 당신과 추억에, 그리고 당신의 명예로운 비밀에..." 로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보레아스를 바라보았다. "전부 다 알고 계셨군요. 그러면서 왜 아무 말 안 하셨어요?" "그 분의 선택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분의 의도는 불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단지 종족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셨을 뿐이지요. 그러 나 그 방법에 관해서는,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르크자엘이라는 존재는 로데인 내부의 인간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의 화합에도 지장을 주겠지 요. 그 분 역시, 화합과 평화가 아니라 갈등과 전쟁, 살육의 상징인 것입니 다. 이제는... 받아들여질 수 없는..."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피로스는 전혀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는... 단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었겠죠. 우리들 모두처럼요. 안 그래요?" 보레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는 불행하지 않을 겁니다. 로이, 당신이 그의 친구로 남아 있을 테고, 그는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닐테니까요." "그런가..." 로이는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그 '종족의 운명'이라는 거. 이젠 다 끝장난 건가요? 더 이상 드 래크로니안들이 죽을 필요 없으니까. 안 그래요?" 보레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노을빛에 더욱 붉어진 그의 눈이 무척이나 쓸 쓸하게 보였다. "드래크로니안들의 운명은 이제 다했습니다. 누가 죽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서히 사라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몇 백 년 후, 레젠디아에는 어떤 드래크 로니안도 남아 있지 않게 되겠지요. 그러나 저는 만족합니다. 단지 저희들이 원하는 것은 - 타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서서히, 친절하고 참을성 있게 다가 오는 운명의 힘으로 사라져 가는 것일 뿐이었으니까요." "그건... 너무 슬픈 말이네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로이. 우리 종족의 멸망은 먼 미래의 일입니다. 그 일 은 당신 대에도, 당신의 자식이나 손주의 대에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드래크로니안들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 채, 아주 천천히 사라질 것입 니다.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제 우리 종족은 남의 손에 살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사(自然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남긴 피는 인간의 몸 속에서 남아 흐를 것입니다. 어쩌면 멸망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단지 모습을 잃고, 녹아들어가는 것입니다. 인간들에 게로... 로이 테이렐그린, 인간 중의 우리 종족의 친구여. 모든 종족은 언젠가는 멸 망합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죽을 때가 있는 것이나, 모든 나라가 멸망의 때가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드래크로니안이 먼저 사라지겠지요. 그리고 이 어서 요정족이, 그 다음에는 인간족이... 그렇게 우리는 모두 사라집니다. 그 리고 나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드래크로니안, 새로운 인간, 새 로운 요정 - 새로운 종족들이 말입니다." 이라고 쓰여진 간판이 햇빛에 빛을 발했다. 여관 주인은 문을 열어 놓으며 자랑스레 그 간판을 바라보았다. 시지리스는 조금 사람이 줄어들었 고, 건물들이 새로 지어졌을 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새 로 지어진 여관도. 역시, 용족과 산다는 것도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오르크건 용족이건 나와 내 여관을 몰아낼 수야 없지! "아버지!" 2층에서 창틀을 닦던 에밀리아가 그에게 소리쳤다. "손님이 오시는 것 같은데요?" "개업 첫날부터 손님이라. 정말 멋진데! 여러 명이냐?" "예... 세 명인 것 같아요. 한 명은 여자... 한 명은... 로이?" "뭐?" 여관 주인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그러나 그 역시 믿을 수 밖에 없었다. 언덕으로부터, 흙먼지를 일으키며, 익숙한 모습이 달려내려오 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다람쥐처럼 가볍고 생기 넘치는 몸짓으로 팔다리를 휘저으면서, 그는 익숙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저씨! 에밀리아 누나!" "로... 로이..." "로이!" 여관 앞에서 에밀리아 부녀와 로이는 포옹했다. 로이는 조금 달라져 있는 듯 했다. 키가 훌쩍 커졌으며, 얼굴도 조금은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로이는 예전처럼 밝고 활달했으며, 그들의 앞에 있었다. 마치 시간이 마법을 부려 좋은 옛날을 다시 한 번 초 대한 것처럼. "맙소사, 로이! 이게 꿈은 아니지?" "물론이죠. 아저씨, 다시 여관을 여셨네요. 아저씨라면 그러실 거라고 생각 했죠." "로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우리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던 거야?" 에밀리아의 울먹이는 물음에, 로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켈리와 이즐레이를 흘끗 돌아보고는 대답했다. "에밀리아 누나... 말해 줘도 안 믿을 걸? 엄청난 모험을 했다구. 아니, 하 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