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02]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3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04 11:50 읽음 : 459 관련자료 없음 ------------------------------------------------------------------------------ 제 4장 어둠의 땅 (Chapter 4 The Land of the Darkness) 창은 없었다. 아니, 창이 붙어 있을 벽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방이었다. 그러나 또한, 창이 필요없을 만큼 밝은 방이었다. 수많은 동심원을 그리며 세워진 촛대에서는 푸르스름하고 창백한 빛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빛은 기분나쁜 늪의 진흙물처럼, 천장이 보이지 않는 방을 찐득찐득하게 채웠다. 창백한 마법 촛불들의 사이를,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거닐고 있었다. 큰 키와 검은 두건 아래로 얼핏 드러난 창백하고 각진 얼굴, 그리고 꼿꼿이 세운 자세가 유난히도 시선을 끄는 모습이었다. 그의 키는 보통 사람 보다 머리 두 개는 컸으며, 온 몸을 덮은 검은 천은 비단보다도 부드러운 광택이 나는, 알 수 없는 직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촛불 사이를 거니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미끄러지는 듯 했다.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기묘할 정도로 핏기 없는 입술만을 움직여 말했다. "왔느냐, 하르크자엘."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듣기 좋은 만큼이나 소름끼치 게 차갑고, 혐오스러운 만큼이나 마약처럼 또 듣고 싶은 음성이었다. 그는 고용어로 말하고 있었으나, 고대어의 발음을 애써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하르크자엘은 그 자리에 꿇어앉아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그는 입을 열지조차 않고, 상대가 말하기만을 기다렸다. "부활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하고 그가 말했다. 예의 그 부드럽고 깊은 목소리로. 빛은 마치 그를 휩싸고 도는 듯 했고, 하르크자엘은 그 빛의 밖에 선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는 말을 이었다.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이 다가오고 있다... 그들이 오는 것이 느껴 진다. 로크 페울로니가 그들을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진다..." "클레이브가 북진(北進)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이 붉은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조차, 마치 신과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검은 로브의 인물의 목소리에 비교되어 터무니없이 천박하게 들릴 정도였다. 검은 로브의 인물은 듣기 좋으면서도 위협적인 소리로 웃었다. "과연...!" "나머지 세 열쇠의 주인은 아직 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그들도 움직일 것입니다. 보레아스가 부리는 다크 스피릿이 그들에게 접근 하고 있으니..." "네 말을 믿는다, 하르크자엘. 너는 언제나 실수가 없었지. 그래, 단 한 번을 제외하고는..." 검은 로브를 입은 인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잊기로 하자. 힐리온의 주인이 온다면 그가 마땅히 자신의 검은 찾아낼 터." "자당하신 말씀이십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검은 로브의 사나이는 잠시 촛불을 응시하며 서 있었다. 아니, 촛불에 얼굴을 고정시킨 채 아무것도 응시하지 않고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숨조차 쉬지 않는 듯 미동이 없었으며, 만약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강력한 마기(魔氣)만 아니었더라면 조각상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만큼 창백하고 고요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생각의 심연에서 깨어나듯이 입을 열었다. "내게 말할 것이 있나보구나, 하르크자엘." "송구스럽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 그래... 너는 클레이브에게 원한이 있지. 증오라고 부르기에도 부족한..." 하르크자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은 두건 아래의 창백한 입술이 비소를 지었다. "하르크자엘,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데에는 네 도움이 크다." "황송하옵니다." "네 충성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 클레이브는 네 처단에 맡기겠다. 단, 부활이 끝난 다음에..." 하르크자엘의 눈이 다시 빛났다. "감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기억해라, 하르크자엘. 의식이 끝난 다음이다. 그 이후에는 무슨 짓을 해도 좋다. 그러나 그 전에는 클레이브에게 손도 대지 말거라."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카야크 님." "아직은 그렇게 부르지 마라." 하고 검은 로브의 인물은 말했다. "나는 아직 완전한 카야크, 혼돈의 제왕이 아니니... 그렇게 불릴 날이 멀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하르크자엘은 순순히 고개를 굽혔다. "아크트에게는 어떻게 말할까요. 클레이브의 진격을 막지 말라고 이를까요?" "아니..." 하고 카야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미동도 없이 제자리에 붙어있던 머리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삐그덕거리는 소리조차 없이 매끄럽게 움직이는 것은 이상한 광경이었다. "아크트는 알아서는 안 된다. 그가 모르게 하라... 그의 욕심과 두아 스의 꾀가 모아지면 예기치 못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으니. 오르크들은 끝까지 모르게 하라. 어차피 아크트가 대군을 이끌고 나간다 해도, 진실한 힐리온의 주인이라면 그들 따위에게 개죽음을 당하지 않을테니. 그리고..." 카야크는 비로소 몸을 돌려 하르크자엘은 바라보았다. "오기 전까지 자신의 부하로써 내게 제물을 바치는 것도 괜찮겠지. 자고(自顧)로 대사(大事)일수록 많은 피가 필요한 법이니..." --------------------------------------------------------------------- 공기는 무거워져 갔다. 요정이라면 벌써 그 기운에 질식할 듯한 거부감을 느꼈으리라. 클레이브가 이끄는 군대 중 요정은 없었으나, 인간들 조차 사사건건 긴장하게 하고 쉽게 몸과 정신을 피로하게 만드는 이상한 기운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어둠의 땅의 기운. 이미 북부에는 겨울이 와 있었다. 라이난 분지는 겨울에 건조한 내륙 지방인지라 아직 눈이 내리지 않았으나, 바람만큼은 눈이 와도 놀랍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가지들만 남은 나뭇가지에는 가끔가다 하나 둘, 간신히 매달려 남은 낙엽들이 썩어 가고 있었다. 나뭇잎들이 죽어간 지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오래도록 인적이 미치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들짐승들은 무슨 일에 겁을 먹은 듯 그림자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푸드덕거리는 새의 날개짓 소리, 짐승의 발자국 소리조차 없는 적막이 군사들의 긴장감을 더욱 부추겼다. "잠깐 멈춰요!" 행군을 계속하던 클레이브에게, 그의 곁에서 계속 말을 몰고 오던 켈리가 돌연히 속삭였다. 클레이브와 그의 부관 칼릭은 순간 흠칫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흐린 날씨 덕택에 먼 곳까지 볼 수는 없었으나 - 오르크들의 땅이 되었기 대문일까, 그들이 라이난 숲에 들어선 이래 흐리지 않은 날이 없었다 - 적어도 시야가 미치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클레이브는 순전히 직관에 의해 위험을 감지하고 칼을 빼어들었다. 병사들의 발소리까지 멈춘 숲은 무덤처럼 적막했다. 바람소리조차 없었다. 한참동안 그런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마음 약한 병사들이 히스테리를 일으킬 지경이 되었을 즈음, 쉭쉭 하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터무니없게도 그것은 땅 아래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칼릭, 비켜 서요!" 켈리가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분명하게 외쳤다. 칼릭은 영문을 모르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켈리는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말 위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녀의 왼손에는 어느새 채찍이 들려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뛰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칼릭은, 몸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켈리가 더 빨랐다. 누가 조치를 취하기도 전에, 그녀의 채찍이 칼릭의 팔을 휘감았다. 팔이 거칠게 잡아당겨진다고 생각한 찰나, 칼릭의 몸은 흙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크와아아아!" 갑자기 귀청이 떨어질 듯한 괴성이 정적을 갈랐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 발밑이 흔들렸다. 반사적으로 칼을 빼어들고 몸을 일으킨 카릭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듯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그가 타고 있던 밤색 말이, 거대한 뱀의 입에 물려 있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해, 그가 본 것은 뱀이 아니라 뱀의 일부분이었다. 뱀은 얼굴 바로 아래까지만 드러나 있었고, 나머지 부분은 땅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뱀이 말을 꿀떡 삼키자, 다시금 군형을 잡을 수 없이 발 밑이 흔들렸 다. 그제서야 모두 진상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그 뱀의 몸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어느새 왔는지, 켈리가 그의 바로 곁에 서서 묻고 있었다. "켈리..." 그는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새가 없었다. 말 한 마리로는 식욕을 만족시킬 수 없었는지, 뱀은 다시 사람 키의 두 배는 뒬 법한 커다란 입을 벌린 채 켈리와 칼릭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 뱀의 이를 본 켈리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조심해! 독사에요! 저 이에 스치기만 해도 당장 죽을거야!" 독사가 땅 위에 머리를 박았다. 거의 동시에, 켈리와 칼릭은 몸을 굴려 그 공격을 피했다. 칼릭은 뱀이 금방 일어나지 못하는 틈을 타, 그 목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칼날은 뱀의 비늘에 미끌어져 버렸고, 갈색의 돌껍직 같은 비늘 몇 개가 떨어져 나가 그 자리에 피가 조금 배어나왔을 뿐이었다. 쉬이이익! 뱀은 칼릭의 공격에 무척 화가 났는지, 당장 머리를 꼿꼿이 쳐들고 노란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독니를 드러내며 칼릭을 향해 머리를 던졌다. 켈리는 칼릭에게 달려가려 했지만, 뱀의 움직임 때문에 발밑이 흔들려 균형을 잃고 넘너져 버렸다. 칼릭은 몸을 굴리며, 방패를 힘껏 쳐들었다. 팔이 떨어져 나갈 듯한 충격과 함께, 뱀의 거대한 이빨이 방패를 뚫고 들어 왔다. 그것은 칼릭의 머리까지 와서, 투구를 긁으며 멈추었다. 그러나 다행히 몸에 상처를 내지는 않았다. 쉬잇! 쉬잇! 갑자기 뱀의 목이 뒤로 확 젖혀졌다. 뱀의 이빨과 함께, 칼릭의 손에서 방패가 빠져나갔다. 칼레이브의 길고 큰 검이, 뱀의 목 뒤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것이다. 꽤 많은 양의 피가 상처에서 쏟아져 나와 흙을 적셨다. 뱀이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댔으므로,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쓰러져 나뭇잎 처럼 당 위로 뒹굴었다. 클레이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쓰러지면서도 뱀이 입을 쫙 벌린 채 자신에게 덤벼드는 것을 보고, 칼을 꽉 쥐었다. 그러나 뱀의 이빨이 그에게 덮쳐오자, 갑자기 칼릭이 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칼릭은 힘껏 칼을 휘둘렀고, 그것은 뱀의 입에 상처를 냈다. 또다시 먹이를 코앞에 두고, 뱀의 머리는 지진을 일으키며 쑥 물러났다. 또 한 번 간신히 일어나려던 사람들이 다 쓰러져 버렸다. 그러나 클레이브만은 그 와중에서도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칼을 단단히 쥔 채, 뱀의 머리 아래로 몸을 굴렸다. 뱀이 다시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고 덮쳐왔으나, 그가 바로 지난 자리의 흙만을 덥썩 물었을 뿐이었다. 클레이브는 뱀의 턱뼈 밑의 목으로, 자신의 칼을 푹 찔러넣었다. 슈우욱! 뱀의 몸이 어느 때보다도 격렬히 움직였다. 병사들은 이제 뱀의 식사가 되는 것은 고사하고 흙에 덮쳐오는 깔려 죽을 지경이었다. 뱀의 몸이 거의 전부 흙 위로 솟아올랐던 것이다. 클레이브의 머리 위로 뱀의 미지근한 피가 콸콸 쏟아졌다. 그가 무심코 한 손을 놓아 피를 막으려는 순간, 뱀의 목에 꽂힌 칼은 이미 그의 손을 벗어나고 없었다. "이런...!" 거의 제정신을 잃은 뱀은 이제 마구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것은 적의(敵意)조차 잊은 채 단지 무의식적으로 입을 벌었다 닫으며, 주위에 있는 모든 생물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계속) [12202]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4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06 22:20 읽음 : 441 관련자료 없음 ------------------------------------------------------------------------------ 클레이브조차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칼은 지금 뱀의 목에 꽂힌 채, 저 위에 있었다. 물론 그 상처로 계속 많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으니 기다리면 죽기야 하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다가는 한 명의 병사도 살아남을 것 같지 않았다. 갑자기 뱀의 몸이 멈추더니 경련을 일으켰다. 켈리가 아까 클레이브 가 만들어 놓은 상처를 통해, 자신의 칼을 뱀의 몸에 깊숙히 꽂아 넣었던 것이다. 뱀은 반사적으로 그녀를 물려고 몸을 돌렸으나, 켈리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 사이 클레이브가 쓰러진 병사의 창을 주워들어, 바로 옆까지 다가온 뱀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별 상처는 나지 않았으나, 효과는 있었다. 뱀은 다시 그의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돌진해 왔다. 클레이브는 몸을 숙였고, 그 위로 뱀의 머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클레이브는 얼른 머리 위에 보이는 자신의 칼 손잡이를 꽉 쥐었다. 뱀의 목이 나가암과 동시에, 그의 칼은 비교적 비늘이 약한 뱀의 배 부분에 긴 직선을 그리며 점점 깊이 파고들었다. 이 모든 것이 뱀이 멈출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도(氣道)에 상처를 입은 뱀이 쓰러져 껄떡껄떡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축 늘어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클레이브는 숨을 몰아쉬며 땀을 훔쳤다. 병사들이 뱀의 죽음을 확인 하기 위해, 그 머리를 창으로 푹푹 찔러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칼릭이 달려와 클레이브를 일으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클레이브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지만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비린내가 나는 것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보다 켈레브리스는...?" "예?" 칼릭은 당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클레이브에게 정신을 빼앗겨 그를 구해 준 켈리가 어디로 갔는지 찾아볼 새도 없었던 것이다. 칼릭은 허둥지둥 그녀를 마지막 보았던 장소로 달려가, 하릴없이 두리번거렸다. 켈리가 뱀의 몸에 창을 곶아 넣는 것 까지는 보았는데, 그 다음에 어디로 갔는지는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만 들리지 않았더라도, 칼릭은 날이 저물 때까지 그 자리에 그렇게 서 있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야아, 칼릭! 나 좀 도와 줄래요!" "...켈리?" 칼릭은 어이없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피식 웃으며 켈리를 바라보 았다. 그녀는 망토가 나뭇가지에 걸려, 커다란 열매처럼 앙상한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거긴 어떻게 올라갔어요, 켈리?" "놀리는 거에요? 당신 잘난 주인님 도와주려다가 뱀이 꼬리로 치는 바람에 날라갔죠, 뭐... 그래도 이 나무 덜분에 다치지는 않았어요." 켈리는 씩 웃으며 망토를 쥐고 놓지 않는 나뭇가지를 가리켰다. 칼릭은 웃음을 터뜨렸다. 갑옷을 입은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 그녀의 망토를 떼어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자유로운 몸이 된 켈리는, 거리낌없이 나뭇가지에 매달려 팔짝 뛰어내렸다. "고마워요. 그 뱀은?" 켈리가 땅에 발을 딛고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칼릭은 어깨를 으쓱 하며 미소를 지었다. "죽었어요." "확실히 죽었죠?" "병사들이 마구 찔러보고 있으니 죽지 않았어도 곧 죽겠죠." 켈리는 소리내어 웃으며 뱀의 시체 족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뱀의 몸을 쓱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눈이 뱀의 배에 머문 순간, 갑자기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불을, 어서 불을! 당장 저걸 태워 없애야 해요!" "...왜 그러는 거요?" 클레이브가 어안이 벙벙해서 물었다. 그러나 켈리가 대답할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뱀의 배 쪽으로 창을 들고 걸어가는 병사를 보고, 그에게로 달려가며 황급히 외쳤다. "안 돼! 그만 둬!" 그러나 이미 병사의 창이 뱀의 배를 길게 짖어 놓고 말았다. 그 배 에서는,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작은 새끼뱀들이 우글우글 튀어나왔다 - 아니, 새끼뱀이라고 해야 사람 키의 두 배는 될 법한 긴 놈들이었으니, 결코 '작다' 고는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가장 처음 나온 새끼 뱀이 병사의 팔목을 물자, 그는 잠시 경직된 듯 서 있더니 그 자리에 푹 쓰러져 죽었다. "이런...!" 켈리는 창백한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대담한 뱀 한 마리가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녀에게 덤벼들었다가, 머리가 싹둑 잘린 채 흙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켈리는 머리가 잘렸는데도 아직도 펄떡거리는 뱀의 몸을 칼로 푹 찔러 멈추게 했다. 그리고는 뱀의 잘려진 머리를 들추어 그 입 안을 살폈다. "아직 독은 없어요. 걱정 말고 어서 해치워요!" 하고 그녀는 기운이 난 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지금 독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새끼뱀들은 하염없이 어미 뱀의 배에서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배가 고팠는지, 도망치거나 무기를 잃은 병사들을 한 입에 덥썩 덥썩 삼키고 있었다. 클레이브가 배가 잔뜩 불러 먹이를 소화시키느라 가만히 있는 뱀의 몸을 베었을 때, 위액(胃液)과 함께 반쯤 소화된 병사의 시체가 나오기도 했다. 새끼뱀들은, 그 많은 수만 아니라면, 어미 뱀이나 오르크보다는 훨씬 쉬운 상대였다. 클레이브의 군대는 곧 그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이미 병사 여덟 명이 새끼뱀들의 뱃속으로 사라지고, 세 명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부상을 당한 후이기는 했지만. 몇 마리 안 남은 목숨을 건진 뱀들은 서둘러 숲 속으로 사라졌다. "별 게 다 나오는군... 이것도 오르크들과 한 패인가?" 뱀의 피를 뒤집어 쓴 갑옷을 입은 클레이브가, 기가 막히다는 듯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후방에서 병사들을 이끌던 데이슨도 달려왔다. "클레이브 님! 무슨 일입니까? 갑자기 뱀들이..." "이상하지 않나? 이런 괴물이... 오르크들과 십 년을 싸워 왔지만 이런 것을 불러내는 것은 보지 못했어. 기껏해야 하피와 트롤 정도였지... 이거야 마치 전설 속의 '태초의 전쟁' 때 같군." "글쎄요... 저도 뭐라고..." 데이슨도 칼릭도 어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 역시 이런 괴물을 오르크가 부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연히 이 괴물이 여기에 살고 있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갑자기 데이슨은 소름이 끼쳤다. '클레이브 님 때문인가... 그 분이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이기 때문에?' 로크 페울로니는 그에게 있어서 괴물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역시 리반 아덴에게서 로크 페울로니에 관한 전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 그러나 모여서 평화를 가져올 수도,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는 물건이라니 얼마나 어이없도록 불확실한가. 그런 결과를 알 수 없는 물건을 모으려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은 정말 드래크로니안이나 미친 로데인 인들밖에는 할 수 없는 짓처럼 느껴졌다. 그는 로크 페울로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젊었을 때부터 로크 페울로니를 괴물스러운 것으로 생각했고, 결국은 그것과 '괴물'자체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사실, 로크 페울로니의 전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괴물, 괴물, 괴물 투성이이지 않은가. '오르크들이 이런 괴물을 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만약 로크 페울로니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어서 여길 떠나야 해요!" 갑자기 데이슨의 생각을 끊고, 아까부터 생각에 잠긴 채 어미뱀의 시체를 노려보고 있던 켈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클레이브와 칼릭, 그리고 데이슨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 자신의 말을 끌어와 올라타고 있었다. 멍하니 자기를 쳐다보는 클레이브에게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서 여길 떠나야 한다니까요. 병사들을 움직여요!" "물론 떠날 거요, 켈레브리스. 하지만 일단 부상자도 있고 하니..." 침착하게 말하는 클레이브를 보고, 켈리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럴 시간 없어요. 지금 당장...!" 그러나 더 이상 설명을 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새끼 뱀들이 도망쳐 간 쪽으로부터, 병사들의 공포에 질린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던 것이다. 켈리는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늦었군...!" 비명이 들려오는 쪽으로부터 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지면서, 어미 뱀만큼이나 커다란, 그러나 그것보다도 단단할 듯한 번쩍거리는 흑갈색의 비늘을 가진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이미 병사들 몇 명을 해치운 듯, 이와 입가에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맙소사... 저건 또 뭐야?" 칼릭이 신음하듯 묻자, 켈리가 칼을 빼어들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아마 아빠 뱀일걸요." 뱀은 입을 크게 벌린 채 켈리와 클레이브, 칼릭과 데이슨이 모여 있는 쪽으로 머리를 날렸다. 그들은 재빨리 흩어지며 몸을 피했다. 그러나 이 뱀은 뱃속에 셀 수없이 많은 새끼들을 넣어 두고 있던 어미뱀보다 날렵 했다. 곧바로 머리를 든 뱀은 켈리가 미처 몸을 일으킬 새도 없이 그녀에게로 돌진해 왔고, 켈리는 헐레벌떡 달리며 기며 바위 밑으로 기어들어감으로써 간신히 뱀의 이빨을 피할 수 있었다. "켈리!" 칼릭이 대담하게도 칼을 뽑아들고 뱀에게로 달려갔으나, 그가 미처 사정거리 안에 다다르기도 전에 뱀이 몸을 돌려 오히려 그를 공격해 왔다. 그의 칼은 뱀의 이빨에 튕겨져 나가 열 발짝은 먼 곳에 떨어졌고, 칼릭은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말았다. 뱀이 그를 삼켜버리려는 찰나, 클레이브의 검이 뱀의 옆구리를 베었다 - 아니, 베려고 했다가 튕겨져 나왔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검고 미끈거리는 뱀의 비늘은 마치 철로 된 갑옷 같아서, 웬만한 힘으로는 작은 구멍조차 낼 수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공격은 뱀의 주의를 끌었고, 곧 그것의 노란 눈은 칼릭을 잊은 채 클레이브를 노려보았다. 클레이브는 잠시 뒷걸음치다가, 뱀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자 준비해 두었던 창을 뱀의 목 아랫부분을 향해 힘껏 던졌다. 방금 전의 어미뱀과의 싸움에서, 그는 뱀의 목 배 부분의 비늘이 등 부분처럼 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클레이브의 겨냥은 정확했다. 그러나 창은 간신히 뱀의 비늘만을 뚫고는, 튕겨져 나와 버렸다. 비늘이 상한 상처에서는 피도 흘러내리지 않았 다. 뱀은 멈추지 않고 클레이브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는 간신히 곁에 있던 움푹 파인 땅으로 몸을 굴렸다. 그러나 뱀의 눈은 그를 놓치지 않았고, 그 큰 몸집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재빨리 돌린 뱀은 입을 쫙 벌린 채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클레이브에게로 돌진했다. 클레이브는 일어설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본능적으로 칼을 움켜쥐었다. 그러나 뱀의 입이 클레이브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작은 단검 하나가 날아와 뱀의 혀에 박혔다. 쉬이익! 뱀은 쇳소리를 내며, 먹으를 코앞에 둔 채 미끌어지듯 뒤로 물러났다. 분노가 가득한 뱀의 시선은 클레이브가 아닌, 그의 뒤에 선 누군가를 응시하 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그 병사는 말했다. 클레이브는 비로소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려, 자신을 구해 준 인물을 쳐다보았다. 용병인지 정규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으나, 낯익은 모습이었다. 근육질이지만 마른 몸매, 새까만 망토와 새까만 머리칼, 그리고 깊이 눌러 쓴 후드 아래로 조금 드러난 단정한 얼굴... "...자네는...!" 놀라는 클레이브를 보고 그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재회의 인사 다위를 할 새는 없었다. 화가 잔뜩 난 뱀이, 단도가 꽂힌 거대한 혀를 낼름거리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 * 꺄하하... 기말시험 기간... 싫다...^^; 환 이야기, 데스는 연재 중단... 마그니랑 사자의 서는 감감 무소식... 맥빠지는 날들이로군요. 랜스는 왜 사일러스를 이해하지 못할까요? 글쎄요... 무엇보다 랜스랑 사일러스가 태어나기 전에는 아트웰이란 나라는 있지도 않았어요. (아트웰이 망한 게 약 40년 전이니...) 글구 랜스는... 아무래도 왕의 조카고. 그리고 사일러스가 아클레어 왕의 기사로 있었을 대 연기력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는 남의 입장을 받아들이기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백제는 일본에서 조공을 받았다, 발해에서는 우리 조상들이 말갈족들 다 지배하고 살았다 하는 얘기는 좋아서 하면서도... 일제시대나 원 침략기 얘기만 나오면 이를 갈잖아요. 개인이 다른 개인의 입장을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그게 국가나 민족 단위가 되면 더 어렵겠죠?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12758]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5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0 19:04 읽음 : 399 관련자료 없음 ------------------------------------------------------------------------------ "흥, 멍청한 뱀이로군!" 클레이브가 손을 쓸 새도 없이,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용병은 펄쩍 뛰어올라 자신에게로 돌진하는 뱀의 이마를 칼로 후려쳤다. 그 모든 행동이 눈에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빨라, 거대한 뱀이 미처 머리를 들어 올려 피할 새조차 없었다. 가속이 붙은 칼날은 뱀의 이마에 붙은 비늘들을 조각내면서, 그 지라에 피가 흐르는 긴 원호형의 상처를 남겼다. 쉬이이익! 화가 난 뱀이 쇳소리를 내며 목을 뻗어 그를 물어뜰으려 했으나, 이미 그는 저만큼 뒤로 물러난 후였다. 뱀의 이빨은 허공에서 부딪쳐 딱! 하는 공허한 소리만 울렸다. 그제서야 뱀은 그 거대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자신의 압에 선 작은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제야 자신의 상대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초월한 어떤 존재의 혈통이 남아 있는 자라는 것을 짐작한 것 같았다. 뱀은 고개를 숙이고 긴장에 가득 찬 쉭쉭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세 남자가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을 만큼 굵은 몸으로 그의 주위를 설설 기어갔다. 끝을 알 수 없이 긴 뱀의 몸은 곧 거대한 장벽을 형성하여 그를 가두었다. 그리고 섣불리 공격을 하지 못하는 적을 향해, 뱀의 몸을 천천히 좁혀졌다. "하하, 그런 방법으로 날 잡겠다고?" 검은 두건의 용병은 펄쩍 뛰어올랐다. 뱀 만큼이나 병사들도 당황 했다. 그는 마치 귀뚜라미처럼 힘 하나 들이지 않고, 자기 키의 한 배 반 가량 높이에 있는 뱀의 등 위로 뛰어올라 착지했던 것이다. 초원을 뛰노는 일부 요정족을을 제외하고는, 이런 도약을 한다는 종족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병사들이었다. 뱀은 잔득 화가 다서, 자신의 등 위에 올라 탄 적을 향해 사납게 긴 독니를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조금 휘어진, 가는 언월도(언월도) 모양의 칼알이 얼른 이빨을 튕겨냈다. 그러자 뱀은 그를 떨어뜨리려는 듯 하납게 몸을 들썩였으나, 그는 뒤어오를 대처럼 가볍게 무릎을 굽힌 채 바닥에 내려앉았다. 얼굴을 가린 두건이 풀려 땅바닥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드래크로니안...!" 하고 한 병사가 외쳤다. 그 말은 동료 병사들 모두를 웅성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드래크로니안 - 실제로 그 용병의 눈은 그 병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새빨간 빛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을 보고 놀란 것은 뱀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뱀은 쉭쉭 소리를 내며 목을 쉴 새 없이 움츠리고 길게 늘이기를 반복했다. 노란 눈이 긴장에 가득 찬 채 적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뱀은 더 이상 먹이를 얻기 위한 사냥이 아니라, 재미를 위한 살생이 아니라 자기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스르륵! 뱀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날랜 동작으로 용병에게 달려들었다. 용병은 재빨리 칼을 휘둘러 뱀의 머리를 밀어내며 뒷걸음질쳤다. 뱀은 잠시 멈칫하는 것 같더니, 재빨리 방향을 틀어 그의 등 뒤에서 공격해 왔다. 용병은 몸을 옆으로 던져 그 공격을 피하고, 스쳐가는 뱀의 목을 향해 힘껏 칼을 휘둘렀다. 비늘이 떨어지면서 피가 흘렀으나, 약간의 고통을 주는 것에 그쳤는지, 뱀은 다시 공격해 왔다. 뱀의 이빨이 아슬아슬하게 그 용병의 검은 망토를 찢고 지나갔다. 인간 정도의 민첩성이었다면 그 이빨은 가슴을 뚫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용병은 상처 하나 입지 않았고, 오히려 그 뱀의 눈에 재빨리 단도를 던졌다. 쉬이이익! 뱀은 갑자기 몸부림을 치며 뒤로 물러났다. 단도가 그의 왼쪽 눈을 꿰뚫은 것이다. 머리 끝까지 화가 난 뱀은 독기 어린 숨결을 뿜으며 입을 크게 벌린 채 적에게 돌진했다. 용병은 재빨리 몸을 굴려 피하며 칼을 휘둘러, 뱀의 입가에 상처를 입혔다. 재빨리 물러나는 뱀의 머리를 보며 그가 의기 양양하게 일어나려는 찰나, 뱀의 두꺼운 꼬리 부분이 그의 목덜미를 후려쳤다. "윽!" 그는 비명을 지르며 앞으로 고꾸라졌으나, 정신을 잃거나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다시 뱀의 꼬리가 그를 향해 돌진해 왔을 때, 그는 재빨리 몸을 굴려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채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서는 다시 크게 벌린 뱀의 입이 덮쳐 오고 있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했으나, 뱀의 꼬리가 어느 틈에 다시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땅 위로 쓰러졌고, 뱀의 꼬리는 순식간에 그의 팔까지 감싸며 어깨 위로 감아올라갔다. 뱀은 득의 양양하게 노란 눈을 빛내며 혀를 낼름 거리더니, 이 자랑스러운 전리품(戰利品)을 맛보기 위해 입을 크게 벌리고 달려들었다. "이거나 먹어라!" 갑자기 뛰어든 켈리가 뱀의 입을 향해, 커다란 창을 던져 넣었다. 뱀은 뭣모르고 반사적으로 그것을 집어 삼켰다가, 요동을 치며 괴로워했다. 용병을 칭칭 감고 있던 꼬리도 금세 풀려나가 경련을 일으키듯 꿈틀거렸다. "케... 켈리? 아니, 여기서 뭐하는 거야?" 검은 옷의 용병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켈리는 대뜸 그의 멱살을 움쳐 쥐더니, 근처의 마른 도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들이 있던 자리로, 뱀의 꼬리가 거칠게 내려쳐졌다. "상황 좀 파악하고 물을 수 없어, 이즈?" "너무 황당하니까 그렇지. 죽은 줄 알았더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설명하려면 길어. 그보다 넌 왜 여기 왔냐?" "그야 용병으로 지원했..." 그러니 이즐레이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들이 피한 것을 눈치챈 뱀이 고개를 모지막지하게 도랑 아래로 쑤셔박았던 것이다. 다행해 도랑이 좁아서 그 커다란 입은 조금도 벌러질 수 없었으나, 그 입의 꿈틀거림에 도랑의 흙은 계속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즈, 우리... 쟤나 조용히 시키고 얘기하자." "좋은 생각이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즐레이는 검을 들어, 비집고 들어온 뱀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검이 닿기 전, 뱀은 재빨리 머리를 빼내 었다. 이즐레이는 그것을 쫓아 도랑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그는 가만히 서서 뱀의 머리가 다시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적당한 시기에 칼을 휘둘러 그것의 윗턱에 상처를 내었다. 그러나 뱀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은 입을 조금 벌려, 이즐레이의 칼을 덥썩 물었다. "이, 이게...!" 그는 칼을 마구 움직여 뱀의 입에서 빼내려 했으나, 이 사이로 피가 흘러내려도 뱀은 그것을 놓을 생각을 않았다. 그리고 한 번 목을 휙 내저음 으로써, 칼을 꼭 잡고 있던 이즐레이의 몸을 던져버렸다. 그는 종잇장처럼 휙 날아가 나무에 부딪쳐 쓰러졌다. "이... 이런..." 이즐레이는 몸을 일으키려고 애쓰며 품 안에서 단도를 꺼냈다. 뱀의 머리가 그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는 몸을 나무에 기댄 채로, 뱀의 입을 향해 단도를 던졌다. 단도는 뱀의 입가에 박혔고, 뱀은 움찔했다. 그 틈을 타 이즐레이는 수풀 아래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뱀의 집요한 눈은 금방 그를 찾아냈다. 그는 다시 단도를 뽑았으나, 굵은 꼬리가 그의 손을 쳐 그 단도를 떨어뜨렸다. 뱀의 입은 딱 벌어진 채 그를 향해 덮쳐 왔다. 그리고... 그의 바로 코앞에서, 뱀의 머리가 풀썩 떨어졌다. 뱀은 입에서 피가 섞인 거품을 마구 붐어내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뱀은 다시 머리를 일으키려 했으나, 그럴 때마다 머리는 땅에 붙잡아 매어 있기라도 한 듯 쿵쿵 떨어졌다. "푸르(Fuhr; 북부 산간 지대에서 나는 약초의 일종. 철이 지나면 맹독이 될 수 있다)를 먹고도 이렇게 살아있다니... 정말 대단한 녀석인걸." 켈리가 뱀의 뇌를 향해 칼을 푹 찔러넣으며 중얼거렸다. 이즐레이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 "푸르... 독? 그럼..." "응, 물론! 사실 아까 그 창에 독을 발랐지. 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양이었는데, 이놈이 너무 몸집이 커서 효과가 느렸나봐. 많이 다쳤니?" 밝은 얼구로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켈리를 보고, 이즐레이는 말문이 탁 막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켈리는 도와준답시고 얼른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부측해 줄 필요 없으니 제발 이런 엉뚱한 식으로 나타나지 좀 마..." "어라? 너 화났니, 이즈? 내가 나타난 게 싫단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 그런 식으로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했는데 이런 데서 생생하게 살고 있었다는게 말이 돼? 왜 연락은 안한 거야?" "...너네 나 걱정했니?" "죽은 줄 알았다! 어휴, 정말..." "미안해. 다음부턴... 꼭 연락할께." 켈리는 정말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헝클어진 금발을 긁적거렸다. 이즐레이는 화를 내려 했으나, 오히려 웃음이 픽 터져나왔다. 정말이지 켈리 답다니까... 시이드에서 사라졌다가 북부 숲에서 불쑥 튀어나오다니! "또 신세를 졌군, 이즐레이." 하고 클레이브가 다가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이즐레이는 그를 흘끗 바라보더니, 약간 과장되게 공손한 태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리고는 자리를 떠 버렸다. 젊은 사령관은 씁쓸한 얼굴로 아무 소용 없어진 손을 든 채, 켈리를 바라보았다. "저 친구를 여기서 보다니, 의외로군요. 분명히 랜스의 친구...?" "그래요, 랜스하고 제 친구죠." 켈리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이즐레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차라리 병사들 틈으로 숨고 싶어하는 것 같았으나, 병사들은 그가 가까이만 가도 멀찍히 물러나 길을 비켜 주고 있었다. 아마도 끝까지 너런 모습이겠지. 이즐레이에게는 그들이 두려워하고 적대해야 할 존재,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까... "어서 출발해요, 클레이브. 갈 길이 멀잖아요?" 갑자기 켈리가 제정신이 든 듯이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레브리스, 하지만 우리는 부상자도 있고..." "하루라도 빨리 가야 저런 괴물들을 더 만나죠. 여기서 더 있으면 저런 뱀이 더 올지도 몰라요." "...출발을 준비시키겠소." 클레이브는 짧게 말하고 자리를 떠났다. 켈리는 의미있는 미소를 지으며 북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래요... 빨리 떠나야죠. 라우더를 향해!" --------------------------------------------------------------------- 데이슨은 너무 급히 떨어진 출발 명령에, 부상자들을 수습하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신경이 좀 날카로와진 상태였다. 벌써 저 뱀 때문에 사상자가 생겼다 - 이것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니, 사실 이 여행 전체가, 왠지 상당히 종잡을 수 없다는 느낌을 주었다. 갑자기 따라 붙은 저 켈리라는 여자도 그렇고... "아무도 안 다쳤어요?" 정말 어울리지 않게 경쾌한 켈리의 물음이 데이슨의 정신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뱀의 입 근처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켈리에게 다가갔다. 그가 보기에는 나뭇가지를 가지고 뱀의 이를 긁어 대며 장난을 차는 것 같이만 보였지만. "뭘 하는거요?" "독을 채취하는 거에요. 독침에 바르게요. 이거 한 방 맞으면 즉사 거든요. 알맞게 희석하면 좋은 마취제가 될 수도 있고..." 켈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작은 물통같이 생긴 가죽 주머니에 그 독을 담았다. 그 일이 다 끝나자 그녀는 비로소 데이슨을 정면으로 바라 보았다. "안 다치셨나보네요. 다행이에요... 병사들이 두 명 죽긴 했지만, 그리고 한 명도 독에 감염되어서 곧 죽을 거라고 하지만... 이런 놈을 만난 것 치고는 행운이죠, 뭐." "...내 아들을 도와줘서 고맙소." "하하... 우리는 일행이에요. 서로 돕는 게 당연하죠. 그렇지 않다면 왜 따라왔겠어요?" 켈리는 쾌활하게 웃었다. 근엄한 표정이던 노기사(老騎士) 역시 소리내어 웃었다. 그는 켈리에 대해 점점 좋은 인상을 가져 가고 있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트레져 헌터니 뭐니 하면서 독침이나 쏘고 칼과 채찍을 휘두르고 있으니 정상적인 여자라고 부를 수야 없다는 첫인상에는 변함이 없지만, 게다가 별의 별 쓸데없는 것을 다 아는 의심가는 여자라는 생각도 그대로였지만 - 그는 켈리에게 묘한 고귀함과 매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어쩌면 랜스조차 저항할 수 없었을지 모르는 매력이. "자, 데이슨! 원위치로 돌아가시오! 곧 출발할테니!" 클레이브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지치지도 않는 대장님이야. 보면 볼수록 랜스와 클레이브는 서로 닮았군요." (계속) [12779]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6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1 15:15 읽음 : 362 관련자료 없음 ------------------------------------------------------------------------------ 이번에 켈리는 클레이브와 칼릭의 곁에 서지 않았다. 누가 그러자고 한 것도 아니지만, 그녀는 데이슨과 함께 후방에서 말을 몰고 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길은 다시 언제 그런 소동이 있었냐는 듯이, 발자국 소리 뿐인 침묵에 묻혔다. 데이슨이 말을 꺼낸 것은, 보이지 않는 해가 중천에 떠 잔뜩 짜푸린 낮조차 조금 밝게 해 주기 시작했을 때였다. "당신은 클레이브 님이 힐리온의 주인일지 모르니 따라가는 거라고 했소... 안 그렇소?" "예... 클레이브와 랜스가요." "왜 그리도 로크 페울로니에 집착하는 거요? 로크 페울로니가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전설을 믿기라도 하는 거요? 아니면..." "내가 로크 페울로니에 집착한다고 누가 그래요?" 켈리는 짐짓 장난꾸러기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물었다. 장난기있는 미소가 감도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랜스 때문에 그러는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거요?" 켈리는 대답 대신 웃었다. 데이슨은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항상 클레이브는 어른이라고ㅡ 자신이 모셔야 할 주군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랜스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랜스는 항상 형의 골치나 썩이는, 그리고 형수의 몸종 에이레나의 가슴이나 졸이는 철모르는 말썽꾸러기일 뿐이었다. 랜스가 형보다 단지 두 살이 어릴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키가 형만큼이나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여튼 그랬다. 하지만 랜스도 이제 클 만큼 컸다 - 정확히 말하면, 혼기(婚期)가 거의 지날 정도지. 데이슨은 켈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랜스의 여자로서 에이레나 이외의 여성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에이레나가 서녀(庶女)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출신이며 외모며 인성에 별 하자가 없기 때문이었기도 하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부터 수도 귀족 영애(令愛)들의 관심을 받아 온 랜스가 가까이 하는 소녀가 그녀 뿐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켈리는...? 그녀는 객관적으로 에이레나처럼 완벽한 외모를 지니지는 않았다. 미인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한다면, 과연 에이레나를 선택할 것인가? 데이슨은 혼자서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참, 별 주책스런 상상을 다 하는군. 늙었다는 증거인가... 랜스 도련님의 문제는 그 분의 문제일 뿐이지.' 그러나 만약 켈리가 진심으로 랜스를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그러면 나쁠 것은 없었다. 특히 이 상황에서. "켈레브리스... 당신이 랜스 도련님의... 그러니까... 그... '친구'라면." 데이슨은 켈리가 랜스의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계속 고민하다가, 마침내 이렇게 말을 꺼냈다. 켈리는 그가 고심 끝에 선택한 단어를 당연한 듯 흘려들어 버렸지만. "클레이브 님께도, 랜스 님께도, 그 누구에게도... 힐리온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겠다고 맹세해 줄 수 있겠소?" 켈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랜스에게 좋은가요? 그렇다면 그렇게 하죠, 뭐.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러시는데요?" "로데인." 하고 그는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당신이 정말 단지 트레져 헌터에 지나지 않는다면 - 나는 그렇게 믿을 수 없지만, 여하튼 - 말씀해 드리리다. 로데인이라는 나라는 단순히 에스테이아가 정복했던, 인간족의 나라 중 하나, 인간들끼리 서로 싸웠던 야만적인 시대의 나라 중 하나가 아니오. 로데인은 - 훨씬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곳이오. 인간들끼리 싸웠을 때, 로데인은 인간들 뿐만 아니라 드래크로니안 까지 동원해서 동족을 죽였소. 그들은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다른 종족이, 그것도 저승에서 날아온, 모습을 마음대로 바꾸는 마족(魔族)이, 형제인 인간들이 죽이도록 방치했소 - 아니, 그것을 부추기기까지 했소. 로데인의 왕족은 그들이 가져다 주는 승리 때문에 그렇게 했고 로데인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이 전쟁터에 나가 죽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했소. 그래서 그들은 그 살인마들, 싸우고 죽이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종족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무기를 기꺼이 바쳤던 것이오. 로데인은 인간들의 수치요. 그들은 인간족 중의 배반자요. 그래서 아클레어 3세는 아트웰과 디온, 라시르, 카르히트 등등은 속국(屬國) 상태로 남겨두면서도 로데인만은 철저히 정벌했던 것이오. 그러니 클레이브 님과 랜스 님이, 자신이 그런 사람들의 후손이라는 걸 아신다면, 게다가 왕족의 후손이라는 것을 아신다면, 무척 괴로워 하실 것이오... 아시다시피, 그들의 아버지는 용들을 물리친 희대의 용사, 드래곤 슬레이어니까. 게다가..." 여기서 데이슨은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켈리의 관심을 끌었다. 데이슨은 한층 더 낮은 목소리 로 말을 이었다. "아실지 모르겠는데... 클레이브 님은 이제 왕이 되실지도 모르는 몸이오." "예? 하지만 왕에게는 엄연히 적자(適子)가..." "...하여튼 나라 일이 그렇소." 데이슨은 이런 데서 왕자를 헐뜯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겨 이렇게 말을 잘랐다. 마음 같아서야 부왕(父王)과 닮은 점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고, 검술에는 천치나 다름없고 겁쟁이에다 머리도 그다지 좋지 못한, 펠드릭이나 에릭, 마커스같은 아첨꾼들만 가까이 하는 왕자에 대해 하루종일 불평을 늘어놓고도 성이 안 찰 지경이었지만. "어쨌건... 그 일에 대해서는 비밀을 지켜 주셨으면 좋겠소." "클레이브와 랜스가 로데인 왕녀의 아들이라는 것에 대해 아주 확신하시는군요?" 이렇게 묻는 켈리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나 자기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던 데이슨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클레이브 님의 모친에 관해서는 전부터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었 소... 아무도 그 분의 출신을 몰랐기 때문이지. 리반 님은 첩 소생이긴 했지만 어쨌든 왕의 아들이었고, 많은 귀족들이 사위로 삼고 싶어했소. 하지만 그 분은 어디서 왔는지, 누구의 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여인과 결혼하셨소. 그리고 그녀에 대해서도 결코 뭐라고 설명하는 법이 없으셨소. 우리 일곱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전부터 비밀이라고는 없는 막역한 사이였소. 그런데도 리반 님은 아무에게도 아내의 출신에 관해 털어놓으시지 않으셨던 거요. 모함꾼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녀가 창녀였다고 해도, 우리는 모두 이해해 드렸을 거요 - 비록 그녀가 전혀 창녀같이 보이지 않기는 하지 만. 그리고 리반 님도 우리가 이해해 드릴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으셨을 거요. 하지만 어느 날 궁금함을 참다 못한 베릴이 물었을 때... 그 분은 웃으면서 이렇게만 대답하셨소 - '그녀는 내 아내야. 그럼 충분하지 않아?' 그리고는 한 마디 설명도 없으셨소." "그러니 창녀보다도 더 나쁜 로데인의 왕녀라는 건가요?" 켈리의 물음 속에는 농담기가 가득했다. 한창 심각하게 데이슨은 그녀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찌푸린 얼굴을 보고, 켈리는 낮게 웃으며 쾌활하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게 랜스에게 중요하다면, 약속하죠,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고맙소." 데이슨은 진심으로 말했다. --------------------------------------------------------------------- "투르가크(전진)!" "카이크(정지)!" 어둡게 내려앉은 하늘을 찢을 만큼 크고, 그만큼 탁한 목소리에 따라 거무스름한 털 위에 어울리지 않게 번쩍거리는 갑옷을 걸친 무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무겁고 파괴적인 발걸음 소리는 라우더의 성벽 속에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다크엘프들과 얼마 되지 않는 드래크로 니안, 혹은 인간들은 그 군대를 흘끔흘끔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도 죽음의 냄새를 풍기는 군대였다 - 푸이 하르크(저승의 전사들)만큼이나. 제피로스는 여느 때처럼, 성의 가장 높은 첨탑 지붕에 걸터앉아 이들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르크들의 움직임이 마치 상상 속의 군대 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것은 그도 인정해야 했다. 마치 한 마리 여왕의 지휘를 받는 개미떼처럼. 드래크로니안들은 반면 하나하나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떼처럼 제멋대로, 최소한의 규칙에 구애받으며 싸우기를 즐겼다. 그것이 어쩌면, 드래크로니안들이 항상 혼자 싸우지 않고 인간이나 오르크 등과 연합하는 까닭인지도 몰랐다. 저 번쩍거리는 군대 뒤에서 말없이, 그러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들을 따라 움직이는, 허름한 가죽 갑옷을 입은 보병들, 드래크로니안들에게는 그런 존재가 없었다. 그루크는 첨탑 밑의 테라스에 꿇어앉아, 아무래도 자기 주인의 높은 곳을 좋아하는 습성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모든 오르크 족처럼, 그는 높은 곳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하르크자엘더러, 제발 낮은 데로 내려와서 얘기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 었다. "아크트의 직속 기사단입니다, 주인님. 노이츠 쿠푸(왕의 기사단) 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요. 우리... 오르크 족을 통일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바로 그 군대입니다." 그루크는 공손히 설명하고는 침묵을 지키며 하르크자엘의 답을 기다렸다. 제피로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검은 천을 움직이듯, 대형의 변화도 없이 직사각형 모양을 이루며 이리저리 움직 이는 오르크 군사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윽고 그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오르크 족을 통일시킨 군대라... 그래, 그루크, 너의 부족을 정복한 그 군대라는 뜻이군, 안그래?" "... 그렇습니다. 만약 그때 주인님께서 저희의 목숨을 구해주시지 않았더라면..." "다 죽었을 거라는 얘기는 제발 그만해.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죄송합니다, 주인님. 벌을 내려 주십시오." "...됐다, 됐어. 나 참, 다른 종족을 다스린다는 것도 생각보다 어려운 노릇이군..." 하르크자엘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는 다시 잠시 그루크에게 향했던 눈을 오르크 부대에게로 돌렸다. "저들은 그 한심한 아크트 말을 잘도 듣는군..." "그들의 충성심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님." "어떻게 생각하나, 그루크. 저들이 에스테이아의 군대를 공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제가' 어떻게 생삭하는지를 물으시고 계십니까?" 그루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르크자엘은 너무나 당연하다 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루크는 생각에 잠긴 듯, 골똘히 땅을 내려다 보았 다. 하르크자엘은 기다렸다. "감히 한 말씀 드리옵건대... 노이츠 쿠푸에게는 패배란 없다고 들었습니다. 승리, 아니면 죽음입니다. 그들은 오르크 족중 가장 뛰어난 전사들이니까요." "승리, 아니면 죽음이라. 그거 마음에 드는데. 그러면 저들이 클레이 브 아덴의 군대를 박살내든지, 아니면 인간들이 아크트의 가장 소중한 군대를 씨를 말려 버리든지, 둘 중 하나겠군." 하르크자엘의 입가에 재미있다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니면... 행운이 내 편이라면, 둘 다 일어날 수도 있겠고." 그루크는 말 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주인의 말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르크자엘이 가끔가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등의 질문을 던질 때면, 그는 마음이 이만저만 불편해 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르크 족에서 부하의 의견을 묻는 일 따위는 거의 없었다 - 그것이 특별히 의견을 제시하도록 명령받은, 참모격의 부하라면 또 모를까. 그러나 드래크로니안 족은 거의 시도때도 없이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이제 익숙해 질 때가 되긴 했지만... "노이츠 쿠푸라고요? 하하, 그 멍청이들이 또다시 움직이기 시작했 군요!" 갑자기 그들의 곁에서 낭랑한 웃음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르크자엘과 그루크는 거의 동시에 그 쪽을 돌아보았다. 에누인 신을 받드는 자들이 입는, 발목을 덮은 짙은 남색의 로브를 걸친, 하얀 살결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 경사진 지붕 위에 발을 위태위태하게 지탱한 채 보라빛 눈을 빛내며 즐거운 듯 소리내어 웃고 있었다. "하르크자엘, 죽음을 선사하시는 저승의 바람이시여! 겨우 노이츠 쿠푸 따위를 걱정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들은 바보 말을 듣는 바보라고요. 그들의 대장이 멍청이인데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다 실행에 옮기니 놈들도 멍청이들이지요." 그리고 그는 자신이 기발한 농담이라도 던졌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요정족과 비슷한, 맑은 울림이 있는 거침없는 그의 목소리는 라우더의 어두운 하늘과 대지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하르크자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롭게 꾸짖었다. "...버릇이 없구나, 필리우스! 나는 네게 묻지 않았다." [12856]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7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2 21:46 읽음 : 337 관련자료 없음 ------------------------------------------------------------------------------ "죄송합니다, 하르크자엘 님." 필리우스는 여전히 싱글거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보레아스 님이 보내셔서 왔는데... 이런 엉뚱한 놈들 때문에 신경을 쓰시고 계시다니,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죄우지간 오르크들이란..." "닥쳐라. 네 오만함은 500 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느냐, 필리우스? 지금의 너는 그 시절의 힘의 반도 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내가 굳이 떠올려 주어야 할까?" 제피로스의 악의 돋힌 말에 필리우스의 미소가 약간 흔들렸다. 그러나 곧 그는 예의 호감가는 표정으로 얼굴을 덮고, 허리를 굽혀 사과했다. "용서하십시오, 드래크로니안의 수장님. 제가 미처 분수를 모르고 날뛰었으니,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르크자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테라스에 꿇어앉은 거대한 오르크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했을 뿐, 필리우스의 거창한 말 따위는 무시해 버렸다. 그루크가 자리를 비키고 나서도 한참동안 침묵을 지켜, 필리 우스를 아주 난처하게 만든 후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아트웰의 사정은 어떤가?" "물론 하르크자엘 님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에스테이아는 타격을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크 페울로니의 용사들은 곧 출발할 것입니 다 - 제가 엘미어의 주인을 설득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그렇다면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는 말이군?" 비아냥거리는 듯한 하르크자엘의 어조에 필리우스는 조금 망설였다. "...큰 일일수록 신중을 가해야 하는 법입니다. 이제 곧 모두 뜻대로 되실 텐데 무엇이 조급하십니까?" 하르크자엘은 자리에서 일어서 필리우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잘 들어라, 필리우스. 지금 힐리온의 주인은 라우더를 향해 오는 중이다. 그런데 나머지는 아직도 아트웰에 머물러 있어. 저기 보이는 아크트의 군사들이 클레이브의 군대를 죽이고, 그의 전진을 늦출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네가 이렇게 늑장일 피워서는 시간이 맞지를 않아." "제가 늑장을 피운다고요? 하르크자엘 님, 그런 말씀을!" "늑장을 피우는 게 아니면, 무능하다는 거냐?" 필리우스의 얼굴에서 비로소 미소가 사라졌다. "하르크자엘 님, 아무리 제가 힘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저는 태초의 전쟁 때 마왕 엠로크 님의 오른팔이었습니다. 그런 말씀은..." "그렇다면 증명해 봐라. 열흘 안에 그들이 라우더를 향해 떠나도록 만들어 봐!" "...열흘 안에요?" 필리우스는 당황했다. "하르크자엘 님... 일을 너무 서두르면 그르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못 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할 수 있으면 해라, 어둠의 정령아! 네가 내 부하, 보레아스에게 매어 있는 몸이라는 것을 잊은 건 아니겠지. 네가 더 이상 쓸모없다고 판단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너를 다시 그 얼음 속에 가둘 수 있다. 500년 동안의 차가운 얼음 안에서의 기다림이 그립거든, 마음대로 해라.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해!" '얼음'이라는 말은 필리우스를 순식간에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여유만만하지도, 미소를 짓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목에 칼이 들어온 사람마냥,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무슨 말을 시작하려다가 입을 다물 기를 서너 번 되풀이했다. 그리고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 저는 하르크자엘 님과 보레아스 님의 명령에 따릅니다. 저는 단지..." "그들을 열흘 안에 출발시킬 수 있나?" "물론입니다. 저를 믿으십시오." "그래야지, 이제야 엠로크의 마법사답군." 하르크자엘의 얼굴에 희미한 경멸의 미소가 스쳤다. 필리우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지붕 위에서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또 그를 부당하게 겁주셨군요, 제피로스 님." 보레아스가 탑의 창문에서 나타나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하지만 재미있기는 하군. 얼음에 봉인되었던 얘기만 꺼내면 금방 사색이 되어서 무슨 말이든 들으니 말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그런 거야, 보레아스?" "그 얘기는 그만 하십시오." 하고 보레아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500년 동안의 봉인은 그에게 괴로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날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답답한데...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500년 동안이나... 저는 어느 정도는, 제가 그에게 그런 짓을 한 데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이 물론, 그의 죄과를 경감시켜 주지는 않겠 지만요." "미안함을 느낀다고! 동정하는 건가? 글라노우스와 함께 태초의 전쟁 때 전장을 휘어잡았던 마법사, 얼음의 보레아스가?" 제피로스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크고 검은 날개를 펴 보레아스가 서 있는 탑으로 날아들어왔다. 보레아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피로스 님. 타냐핸 네아(태초의 전쟁) 은 이미 끝났습니다. 그리고 필리우스도 저도 이미 그 때의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날개를 잃었고, 그는 마력의 절반 이상을 잃었죠. 우리에게는 더 이상 그렇게 싸울 일도, 싸울 능력도 없습니다. 가끔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와 저는 닮은 꼴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제피로스는 격하게 소리쳤다. "필리우스는 패배자야. 그것을 알지 않나, 보레아스. 자네가 그를 패배시켰지. 하지만 자네는... 우리 종족의 영웅이야. 기억하나? 나는 아직도 시지리스에서의 그 날 밤을 기억하고 있어. 자네는 거의 죽을 뻔 하면서도 내 동생을 지켜주려고 했지... 사실 그 때는 모두 자네가 죽는 줄로만 알았지 만. 자네의 날개는... 내가 원한을 갚아 주고 말 거야.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로 갚아주지. 물론 자네에게 그 아픔이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 만..." "제피로스 님께서 너무 늦지 않게 오셨으므로 저는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보레아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 그녀가 위험을 무릎쓰고 와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고요 - 결국 그 여행으로 그녀는 목숨을 잃었습니다만. 저는 두 분 덕택에 목숨을 건진 것입니다. 그러니 원한 따위는 없습니다. 다만 감사할 따름이지요. 제... 고통은, 그냥 개인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많은 동족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겨우 날개 가지고 괴로워하다니, 제피로스 님께서는 저를 꾸중하셔야 마땅할 것입니다." 제피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낮게 웃었다. "내가 자네같은 너그러움을 가지지 못한 것이 행운일까, 불운일까?" "저는 너그럽지 않습니다, 제피로스 님..." "자네는 너그러워, 보레아스. 마치 모든 생물의 죽음에 슬퍼하는 에퀴온 신처럼 너그럽지. 반면에 나는 실리사와 같이 피로 물들었지. 아무리 피를 뒤집어 써도 증오를 식히지 못해..." 제피로스는 칼을 빼들고 창가로 다가갔다. "시지리스에서 내가 복수를 맹세했던 것을 기억하나, 보레아스? 그 때 내가 실리사 여신께, 제발 내 분노가 마르지 않도록, 인간에 대한 증오가 영원히 지속되도록 기도했던 것이 생각나나? 가끔 나는 그 기도가 너무나 완벽하게 이루어 졌다는 생각이 들어. 섬뜩할 정도로..." "제피로스 님..." "가끔가나 나는 자네가 왜 글라노우스 님의 말대로 수장이 되지 않고 나를 떠밀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그 때 어렸지. 지나치게 어리고 순진했어. 반면에 자네는 숙달된 전사였지.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하지. 만약 그 공주라는 이름의 배신자가 약삭빠른 편지를 보냈을 때, 그 때의 수장이 내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화를 면하지 않았을까... 만약 자네가 수장이었더라면...?" "제피로스 님!" 하고 보레아스는 소리쳤다. "잊으셨습니까? 이피아 공주의 요청에 재빨리 답해야 한다고 주장 했던 것은 저였습니다. 제가 수장이었더라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을 겁니다. 근거 없는 자책은 말아 주십시오!" 제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의 오르크들의 군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시엘레이스." 하고 그는 중얼거렸다. "그녀는 정말 대단한 여왕이었는데... 그녀의 자손들에게 해를 끼쳐야 한다는 것이 비극이군. 어째서 혈통이라는 것은 그 장점을 그대로 간직하지 못하는 걸까? 이피아 공주가 시엘레이스의 자손이라니... 그리고 그녀의 아들 들이 내 적이라니... 그리고 그들은 모두 글라노우스 님의 피를 이어받았고..." "혈통이라는 것은... 고작 부모와 자식의 관계일 뿐이지요. 그 각각은 다른 인간들일 뿐입니다." "그렇지..." "제피로스 님... 만약 그들을 해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면... 안 그러셔도 됩니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으니까요..."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나." 제피로스의 목소리는 조용하고도 결연했다. "깨어진 약속, 종족의 쇠퇴...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해." "로데인의 인간들도 에스테이아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새 시작을 원하신다면..." "이제 인간들은 필요 없어. 약속은 깨어졌다고. 이미 인간들은 그들 자신의 신뢰를 받을 가치가 없는 족속이라는 것을 증명했어!" 제피로스는 날카롭게 쏘아붙이고는 보레아스를 지나쳐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의 눈앞으로 검게 그늘진 복도가 스쳐갔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앞에는 넓게 펼쳐진 홀이 나타났다. 그는 미소를 지었다. 특별한 추억이 서린 홀 - 그는 바로 여기서 리반 아덴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가 여기서, 그의 목숨을 끊고 복수를 시작했던 것이다. "리반 아덴... 드래곤 슬레이어." 그는 홀의 중앙으로 오며 중얼거렸다. 아직 흰 빛을 간직한 대리석 위로 검붉은 얼룩이 남아 있었다. 시지리스의 용사가 죽어가며 마지막으로 흘린 피는 10년의 세월이 지나도 잘 닦여지지 않았다. 그는 여기서 자기 아들의 목숨을 구걸했다... "그래, 리반 아덴..." 하고 제피로스는, 마치 그가 10년 전처럼, 자신의 눈 앞에 쓰러져 있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 네게는 그 아이가 중요했겠지. 귀여운 소년이었어. 랜스 아덴이라고 했던가... 소중했겠지, 어떻게 해서든지 지켜주고 싶을 정도로 귀중했겠지. 나도 어떻게 해서든 내 동생을 지키려 했을 거야. 당신처럼... 하지만!" 그는 빈 바닥에 거칠게 칼을 찔러 넣었다. 검붉은 얼룩이 묻은 대리석 바닥은 금이 가며 으스러졌다. "네 아들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왜 우리에게서 그렇게 수많은 아이 들을, 아우와 누이들을 빼앗아 간거지? 설명해 봐. 목숨을 지켜서라도 자기 아들은 지키려 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토록 많은 드래크로니안을 죽이고 뻔뻔히 용사라 불릴 수 있나? 그래, 좋아, 당신의 아들을 살려 주었지. 하지만 그건 목숨을 조금 연장시켜 준 것에 불과해. 이제 둘 다 죽에 될 거야. 당신의 창부(娼婦)같은 아내까지, 모두, 이제 곧 페레이타의 땅, 당신의 곁으로 보내 주지. 모두 내 손에 죽게 될거야!" [12885]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8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3 11:00 읽음 : 333 관련자료 없음 ------------------------------------------------------------------------------ "혼돈의 왕, 우리의 군주이신 카야크 님께서는, 노토스 님의 부하인 두 마리 뱀이 패했다는 소식에, 매우 노하셨습니다." 라우더 성의 어두운 지하실 안,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용 노토스와 번쩍거리는 황금 갑옷을 입은 오르크 아크트, 그리고 거대한 검은 날개를 접은 하르크자엘의 앞에서, 카야크의 대리자(代理者)인 검은 로브 차림의 마법사는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묘할 정도로 감정도 억양도 없었고, 이상한 쇳소리같은 것이 섞여 있어서 듣고 있는 사람 모두를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그의 얼굴은 로브에 달린 커다란 후드로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을 벗겨 본다면 분명히 목소리만큼이나 차갑고 감정 없는 얼굴이리라. 그리고 검은 로브 아래서 빛나는 하얀 손만큼 창백하고, 뼈에 거죽만 씌운 듯한 얼굴이리라... 그의 말을 들은 노토스는 두 얼굴을 모두 찡그리며 그르렁거렸고, 아크트는 고개를 돌리며 비밀스럽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르크자엘은 검은 날개를 조금 펼쳤을 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카야크의 사자(使者)는 아크트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 아니, 그의 후드의 얼굴 부분을 그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 속에 있는 얼굴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 "카야크 님께서는 오르크 족의 왕, 아크트 님께 이 일을 맡기고 싶어하십니다." 아크트는 기쁨을 참지 못하고 그륵그륵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노토스는 한 족 머리를 위협적으로 쳐들어, 마치 검은 옷의 마법사를 치려는 듯이 이빨을 드러내었다. 그래 봤자 그는 그것을 본 듯 만 듯 꿈쩍도 않고 말을 이었지만. "노토스 님께서는 그들의 보급 부대와 만일 올 지도 모르는 지원 병력을 막아 주십시오." "그것이 카야크 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란 말인가!" 마법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토스의 두 개의 입이 한꺼번에 소리를 질렀다. 가뜩이나 큰 그의 목소리는 화가 잔뜩 난 데다, 두 개의 입으로 한꺼번에 외쳤으므로 곁에서 듣고 있던 아크트와 하르크자엘의 귀가 얼얼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마법사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것이 카야크 님께서 원하시는 일입니다." "보급 병력이라고. 그런 것은 내 가장 하찮은 부하라 할지라도 단숨에 없애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지원 병력이라고!" "당신은 이미 한 번의 실패를 하셨습니다, 노토스 님. 카야크 님의 명을 어기실 생각이십니까?" 노토스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꼬리로 바닥을 쿵 쳤다. 성이 거의 무너져 내릴 듯 흔들렸으므로, 아카트와 하르크자엘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의자의 손잡이를 꼭 잡아야 했다. 마법사만이 땅이 흔들리건 말건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그는 진동이 조금 가라앉자, 이제 노토스에게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하르크자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하르크자엘 님, 드래크로니안의 군주이신 당신에게는 인간들의 군대가 도움을 받을 예정인 두 성, 알자크와 에렌을 파괴하라는 명이 내려 졌습니다. 그 성들은 어둠의 땅에서 가장 가까운 인간들의 성..."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성의 병력을 파괴하는 즉시 라우더로 돌아오십시오. 인간 족의 주 병력을 파괴하는 것은 아크트 님의 일입니다." 말을 마치자마나 마법사는 홀연히 사라졌다. 한 줄기 바람이나 빛조차 없이. 아크트는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하르크자엘과 노토스에게 말했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지만 카야크 님께서 내 노이츠 쿠푸(왕의 기사단)을 높이 평가하시는데 내 어찌 반발할 수 있겠소? 너무 서운해 하지 마시오. 내 승리는 결국 우리 어둠의 종족 전체의 승리가 아니 겠소?" 이런 말을 떠들던 아크트는 잔뜩 화가 나 씩씩거리는 노토스를 뒤로 하고 여유 있게 걸어가 홀을 나갔다. 노토스는 그가 나가자마자, 체면도 잊은 채 마구 소리치며 화를 냈다. "저 분수도 모르는 오르크 녀석! 저..." "진정하시지요, 타락한 용족의 왕." 하르크자엘이 노토스가 마구 휘두르는 꼬리에 맞지 않기 위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말했다. "진정하라고! 우리 용족은 최강이오. 그런데 카야크 님께서는 내가 시험삼아 내보낸, 그 용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뱀새끼들의 실수만 보시고 인간족의 군대를 파괴하는 일을 아크트에게 맡겼단 밀이오 - 저 잘난 체 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못하는 멍청한 오르크에게! 오르크 족이란 우리 용족에 비하면..." "...압니다. 아마 카야크 님께서도 잘 아실 거요." 하르크자엘의 말에는 의미심장한 억양이 담겨 있었다, 노토스는 그제서야 마구 휘두르던 꼬리를 멈추고, 조금 조용해진 목소리로, 그리고 한 개의 입만을 사용해서 물었다. "무슨 뜻이오, 드래크로니안의 수장?" 하르크자엘은 날개를 접으며, 노토스가 부러뜨린 기둥 위에 내려섰다. "글쎄... 사실 나는 카야크 님께 비밀리에 명령을 받았소. 그러니 카야크 님께서 비록 노토스, 당신에게 직접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해도... 이상할 정도로 작은 임무를 주심으로써 뭔가 암시하려 하신 게 아닐까..." "날더러 카야크 님의 명령을 어기란 말이오?" 노토스는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르크자엘은 그 소리의 진동에 기둥 아래로 떨어질 뻔 했으나,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신의 충성심은 정말 존경할 만 하오, 타락한 용족의 왕이여. 물론 나는 그런 뜻으로 이야기한 게 아니오..." "그럼 무슨 뜻이오?" "글쎄..." 하르크자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 날개를 펴 가뿐히 땅 위에 착지했다. "만약 인간족의 보급 부대가 도망을 가거나 한다면... 당연히 쫓아 가야 할 게 아니겠소? 설사 그들이 인간족의 땅까지 도망간다 하더라도!" 노토스의 네 개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래졌다. 그는 허둥거리며 할 말을 찾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르크자엘은 그가 대답을 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미소를 한 번 지어 주고는, 망설임 없이 계단을 밟아 어두운 지하실 밖으로 나왔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라우더의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오르크 족의 검은 연기가 만들어 낸 우중충한 하늘 덕분에, 어둠은 더욱 빨리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방금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지하실에서 나온 제피로스에게는, 그 하늘조차 밝게 느껴졌다. "주인님...!" 그루크가 얼른 와서, 이마가 땅에 닿도록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제피로스는 무관심하게 그를 흘끗 보고는 그의 등 뒤에서 열심히 살인을 연습하기에 여념이 없는 오르크들에게 눈을 돌렸다. 푸이 하르크(저승의 전사들). 자신의 군대. 그는 언제나 그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보레아스의 고지식함을 나무랐지만, 그 역시 푸이 하르크를 볼 때마다 자랑스러움과 든든함과 함께, 착찹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젠가 보레아스는 말했었다. '글라노우스 님은 오르크 족을 몰아내느라 목숨을 거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오르크 족의 손을 빌어 그 분이 지키려 하던 인간들을 죽이고 있군요.' '하지만 글라노우스 님은 잘못 생각하셨어 - 인간 역시 오르크 만큼이나 비열하고 저주받을 존재란 것을 모르셨어. 나는 그것을 알고, 그래서 그 사실에 맞게 대처하려는 것 뿐이야.' 하르크자엘은 얼른 자기 자신에게 타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레아스의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질 날이 없으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가 환청으로 들은 동족들의 울부짖음, 시지리스에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듣한 그 소름끼치는 소리가 그의 머릿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처럼, 죽어가는 인간들의 비명과 보레아스의 나무람도 영원히 남아 있으리라. "그루크." 하고 그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주인님!" "내가 아크트의 손에서 너희 부족을 구했던 날을 기억하나?" "물론입니다, 주인님! 제가 - 저희가 어찌 감히 그 날을 잊겠습니까!" "너희 동족인 아크트는 너희를 모두 죽이려 했다. 한 놈도 빠짐없이 씨를 말리려 했지. 하지만 내가 그에게서 너희들 모두를 산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그 때 네가 뭐라고 했는지도 기억나나, 그루크?" "저희 부족 모두가 주인님의 - 하르크자엘 님의 소유물이라고 아뢰었습니다. 그러니 저희의 비천한 목숨을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가져가시옵고, 저희의 괴로움이 필요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그것을 취하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잘 기억하는구나... 그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고 있겠지?" 그루크는 그가 말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너희는 더 이상 오르크 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는 나, 하르크 자엘의 소유물, 하르크자엘의 군대, 저승의 전사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제 오르크 족과 너희의 연은 끊어졌고, 너희 부족의 목숨을 산 나만이 너희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주인님!" 그루크의 대답은 빠르고도 진심어린 충성이 담겨 있었다. 다른 종족 출신의 주군은 이 거인 오르크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마치 그 큰 몸집이 온통 충성심으로만 가득 차 있는 듯한 푸이 하르크의 지휘관을. 그래, 만약 자신이 그에게, 하르크자엘을 위해 모든 다른 오르크를 죽이라고 명령한다면, 그는, 그리고 푸이 하르크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것을 실행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충성스럽다 해도 그들은 오르크였 다 - 아니, 그 충성심이야말로 그들이 오르크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만약 그가 동족 드래크로니안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다면, 마로 그 날 밤 그는 암살당하고 말 것이다. 아니, 공공연하게 지위를 박탈당하고 처형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실제로 그와 비슷한 일은 일어나고 있었다. 하르크자엘은 그날 아침 접견했던 보레아스의 부하 마법사가 한 말을 떵올렸다. 그는 인간족이나 요정족의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떠도는 소문을 수집하는 변신술사였다. '옛 로데인 지방 - 그러니까 드라크노움의 북서쪽에, 드래크로니안 족이 남아 있다는 소문입니다. 신빙성이 없지만 불가능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제피로스 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인간족과 다시 화해하기를 주장한다 합니다. 실리사의 신관, 헤리미온이 그들이 모시는 수장(收藏)이라 합니다...' 헤르미온. 보레아스는 분명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표정이 흔들렸다. 그와 함께 신관이 되도록 어려서부터 점지된 여인. 그와 함께 교육받고, 그와 함께 신관이 되는 의식을 치루고, 그가 에퀴온의 신관이 되는 바로 그 날 실리사의 신관이 된 여인. 글라노우스처럼 새빨간 피빛의 머리칼을 가진, 누구보다도 시엘레이스 여왕을 섬겼던 실리사의 신관... 그랬기 때문에 그녀는 여왕과 함께 끝까지 싸우다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 헤르미온이 살아 있다면...? '헤르미온은 살아있을지도 모르지. 그녀라면 나를 대항해서 동족을 일으키고도 남을 거야. 언제나, 내가 어린 시절에 잘못이라도 하면, 너그러운 보레아스와는 달리 용서가 없었으니까... 보레아스는 어쩌면 나보다는 그녀의 곁에 서고 싶은지도 모르지. 그래서 인간을 죽이기보다는 그들을 다시 구하고 싶은지도 모르지...'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이미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하르크자엘은 차디 찬 미소를 지었다. 헤르미온에게는 시간이 없다 - 이미 힐리온의 주인, 더러운 배신자 공주의 아들은 이리로 향하고 있고, 나머지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도 마찬가지... 그 마음에 안 드는 다크 스피릿 녀석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푸이 하르크의 상황은 어떠한가?" "주인님의 덕택에 나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주인님께서는 그들에게 목숨을 주셨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용사들이 될 수 있는 영예까지 선물하셨습니다." "듣기 좋은 아부로군, 그루크. 그렇다면 내가 그들의 능력을 시험해 보겠다. 무작위로 50명의 군사들을 뽑아 내게 다오. 그들은 나와 함께 알자크 와 에렌을 공격할 것이다." "...단 50명 말입니까?" "더 이상은 필요없다. 쓸데없이 발이 느려지는 것은 질색이니까. 50명의 군사와 50마리의 오르크 말(馬)이면 충분하다. 나머지 군사는 네가 친히 알자크로 이끌고 오도록. 아마도 네가 도착할 때 쯤이면 푸이 하르크가 휴식을 취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요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에렌도 마찬가지." "그러나 주인님, 저희 푸이 하르크의 임무는..." "알즈크와 에렌을 공격하는 것 뿐이라고 말하고 싶나?" 하르크자엘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최강의 용사들, 푸이 하르크 마저 경외(敬畏)해 마지않는 그 미소를. "너는 카야크 님께서 겨우 그런 일에 이 하르크자엘을 쓰시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루크는 비로서 커다란 이를 드러내고, 검은 투구 아래로 오르크의 기준에서 보면 흡족한 미소라고 할 수 있는 흉측한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죽음을 부르는 바람, 하르크자엘이시어..." [12968]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9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4 08:41 읽음 : 347 관련자료 없음 ------------------------------------------------------------------------------ 에렌 성주(城主) 브렐드는 갈색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아클레어 왕이 보낸, 클레이브가 이끄는 군대가 내일이나 모레 쯤 도착하리라는 소식이 적힌 편지가 그의 손에, 심하게 구겨진 채 쥐어져 있었다. 그 소식이 온 지도 벌써 열흘이나 되었다. 사실 브렐드 영주는 이러한 일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얼마만큼 반가운 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왕이 드디어 방어만 하던 북쪽 전선의 태도를 바꾸어, 오르크들을 땅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 그리고 에렌, 그가 다스리는 에렌 성이 그 전초 기지가 된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게다가 30대 후반의 브렐드는 모든 명예를 잊고, 단지 편안히 여생을 보내기를 바라기에는 좀 젊은 나이였다. 그의 기대가 근심으로 바뀐 것은, 불과 몇 시간 전,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 부상당한 병사가 도착하면서부터였다. 그 병사는 이웃의 알자크 성의 궁수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 그리고 또한, 알자크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알자크가 함락되었다는 걸... 믿으라고?" 브렐드 성주는 세 번째로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는 앞의 두 번과 똑같은 태도로,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알자크는 큰 성은 아니지만 방어력은 무시할 수 없는 성이다. 어둠의 땅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성인데... 게다가 알자크와 에렌은 쌍둥이 성이야. 둘 중 하나가 침입받으면 서로에게 당장 연락하도록 되어 있다. 그것을 위해 특별히 훈련된 비둘기들도 수십마리 있고... 알자크가 침입 받았다면 우리 에렌 성에서 그것을 모를 수 없어!"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연락을 시도할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하고 병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주의 명으로 그리 심하지 않은 그의 상처는 말끔히 치료를 받았으나, 치료가 마음 속의 두려움까지 씻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비둘기 우리부터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주님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과 병사들이 최후를 맞는 것은 순식간이 었습니다. 그는... 하르크자엘은, 마치 검은 날개를 단 악마 같았습니다. 오랜 전설에나 나올 법한... 에렌 성주님, 이 성도 곧 침입을 받을 것입니다. 어서 피하시지 않으면..." "알자크의 군대는... 그럼 전멸인가?" 하고 브렐드 성주는 다급하게 물었다. "우리가 지금이라도 군대를 이끌고 도우러 간다면..." "소용 없습니다, 성주님. 전부 죽었습니다. 저는 시체에 깔려 정신을 잃고 있었으므로 간신히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되지 않잖아!" 성주는 끝까지 의심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자네는 하르크자엘 - 저승의 바람, 그 오르크들이 만들어 낸 헛소 문인지 실제 인물인지도 모르는 작자가 푸이 하르크를 이끌고 와 순식간에 알자크 성의 군대를 전멸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어. 하지만... 나는 요 근래 이 근처에 오르크 비슷한 것을 보았다는 소문조차 들은 적이 없어! 알자크 성을 단번에 쓰러드릴 오르크 대군이라면..." "그들은 대군이 아니었습니다, 성주님. 그들은... 백 명도 채 안 되는 것 같았습니다." "...백 명도 안 되는 오르크에 의해, 알자크의 군대가 전멸했다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르크자엘이 있었습니다." "하르크자엘, 하르크자엘, 끝까지 하르크자엘 이야기로군! 도대체..." 브렐드 성주가 이유 없는 분노를 그 병사에게 퍼부으려 하는 찰나, 마치 그의 부름에 대답이라도 하듯, 한 병사가 홀의 문을 거칠게 밀어젖히며 그의 앞으로 뛰쳐들어왔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헐떡대며, 예의도 잊은 채 소리를 질렀다. "큰일났습니다, 성주님! 오르크들이...!" 그러나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날 부분이 검게 칠해진 커다란 도끼가 날아와 그의 등에 박혔던 것이다. 그의 눈은 놀란 듯이 크게 더지더니, 다음 순간 초점을 잃었고, 그의 몸은 베어진 나무 줄기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성주의 홀 바닥을 장식한, 오색의 새들이 수놓아진 양탄자가 검붉은 피빛으로 물드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성주와 그의 기사들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제정신이 든 것은 알자크 출신의 병사였다. 그의 공포가 그의 정신을 되돌아오게 했고,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오도록 했다. "하르크자엘...!" "영광이군. 이렇게 빨리 환영을 받을 줄은 몰랐는걸." 그들의 앞에 선 청년은 차가운 조소를 얼굴 가득 담은 채, 우스꽝 스럽게 공손한 몸짓으로 귀족식의 인사를 올렸다.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 날카로운 눈매와 귀족적인 모양으로 곧게 뻗은 콧날을 가진 그는, 20대 초반의 준수한 인간족 청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 그 자수정 빛으로 차갑게 빛나는 눈동자와, 악마의 날개 모양 등 뒤를 덮은, 새까만 날개를 제외하고는. 새까맣고 단정한 옷 위에 갑옷도 걸치지 않고, 무기라고는 허리에 찬 길고 가는 검 뿐인 그의 모습은, 침랙자라기보다는 차라리 협상이나 인사차 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뒤에는, 피를 뒤집어 쓴 채 더욱 많은 피를 요구하며 탐욕스럽게 눈을 번뜩이는 검은 생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갑옷과 투구 아래로 삐져나온 팔과 얼굴은 검고 악취나는 뻣뻣한 털로 뒤덮여 있었고, 무기를 든 팔은 인간의 것보다 훨씬 길고 강해 보였고 다리는 짧았지만 웬만해서는 다치지도 않을 듯이 다부진 근육으로 덮여 있었다. 오르크, 어둠의 종족 중 가장 타락한 생물. "어떻게... 경비들은..." 브렐드 성주는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에, 적개심조차 잊고 더듬거리며 물었다. 하르크자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비병이라고?" 그의 말에 50 마리의 오르크들이 모두 탁한 소리로 웃어제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꺽꺽대는 웃음소리는 듣기만 해도 등까지 소름이 돋았다. "성주님께서 경비병들의 안부가 궁금하시다는군. 알려드려라!" 하르크자엘이 웃으면서 명하자, 오르크들이 더욱 높은 소리로 웃으며 무엇인가 한 더미를 홀 앞에 내던졌다. 그것이 홀의 밝은 횃불 아래 드러나자, 성주와 기사들의 얼굴은 새파래졌다. 경비병들, 아니 경비병들의 일부분이었 다. 셀 수 없는 종류의 무기에 찔리고, 이미 모든 무기와 갑옷은 오르크들에게 강탈당한, 조각난 시체들... "너... 이놈!" 브렐드 성주가 제일 먼저, 분노로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깨물며 칼을 뽑았다. 이어서 그의 주위에 늘어서 있던 여섯 명의 기사들이, 하나같이 칼을 빼어들고 공격할 준비를 했다. 오르크들은 환희의 함성을 질렀다. 싸움, 살인, 그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오직 하나의 방법인 그 축제가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으므로. "재미있군... 누구라도 좋다, 얘들아. 나가서 푸이 하르크의 힘을 보여 주어라!" 하르크자엘이 맑은 소리로 웃으며 소리쳤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여섯 명의 우악스럽게 생긴 오르크들이 홀 안으로 뛰어나가, 기사들의 앞을 각각 한 마리씩 막고 섰다. 기사들은 공격을 시도했으나, 제대로 칼을 휘두를 새조차 없이, 두 명의 두개골이 오르크의 두꺼운 도끼에 으스러져 나갔다. 한 기사는 오르크의 팔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어이없게도 오르크는 그 칼날을 한 손으로 잡고는 그는 벽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정신을 잃은 기사의 목을 손으로 거칠게 부러뜨리고는, 성급히 그의 갑옷과 투구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한 명의 기사는 칼도 잃은 채 오르크의 손에 잡혀 창문으로 내던져졌고, 다른 한 명의 기사는 도끼에 몸이 두동강나 즉사했다. 그 중 우두머리인 듯한 중년의 기사가 그나마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창에 배가 꿰뚫린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오르크 여섯 마리가 에렌의 여섯 기사를 제압하기까지는 채 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즐거이 보셨소, 에렌의 성주?" 하르크자엘은 빙긋이 웃으며, 브렐드 성주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성주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져서, 주춤주춤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그의 등이 벽에 닿는 순간, 그의 새파래진 입술에는 승리의 미소가 감돌았다. "네가 나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르지, 하르크자엘... 그러나 우리는 함께 죽는 거다!" 성주는 이렇게 외치며, 벽에 걸려 있던 에스테이아의 깃발을 치우고 재빨리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단추를 눌렀다. 그러자 무엇인가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두꺼운 돌벽이 내려와 하르크자엘과 그의 오르크 부하들이 들어온 홀의 입구를 막아 버렸다. 그리고 홀의 네 벽은 단숨에 무너져내려, 그리로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르크자엘은 이 상황이 모두 일어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입가의 미소마저 흔들리지 않은 채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되자 마침내, 오르크들을 향해 소리쳤다. "에렌의 성주님께 감사드려라. 돌아가시는 마당에도 우리를 위해 향연을 준비해 주셨구나! 봐라, 이처럼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이처럼 풍족한 사냥감을 본 적이 있느냐?" "아르그르! 아르그르! (죽여라! 죽여!)" "브르그! 하르크자엘! (하르크자엘 만세!)" 당황할 줄 알았던 오르크들과 하르크자엘이 오히려 물을 만난 고기처럼 나오자, 당황한 것은 인간 병사들과 성주 쪽이었다. 성주는 수많은 인간들을 향해 가차없이 돌진하며 무기를 휘두르는, 겨우 50 마리의 오르크 들을 보고 비틀거리며 벽에 몸을 기대었다. 갑자기 그가 목에 차가온 감촉을 느끼고 옆을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어느 새 다가와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하르크자엘의 웃는 얼굴이었다. "잘 봐 두라고, 에렌의 성주. 이런 구경을 하고 죽는 사람도 흔하지 않을테니." 브렐드 영주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하르크자엘은 허공을 향해 펄적 뒤어올랐다. 동시의 그의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펄럭 펴지며 홀의 높은 천정을 가렸다. 그리고 그는 무력한 먹이에게 발톱을 새우고 달려드는 맹금 (猛禽)처럼, 순식간에 칼을 빼어든 채 발 아래의 병사들에게 돌진했다. "에프라딘, 에이닌! 에그로닌 그론 테이렐라스! (벌을 받아라, 인간들아! 드래크로니안의 저주를 받아라!)" 날카로운 고대어의 외침이 하르크자엘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의 칼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빠른 속도로 원호를 그렸고, 자신이 죽는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 서너 병사들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굴렀다. 다른 병사들이 금방 개미떼같이 하르크자엘에게 몰려들었으나, 그는 그 사이조차 기다리지 못했다. 드래크로니안 특유의 빠른 몸짓으로, 그는 어느 새 자신에게 돌진해 오는 병사들의 바로 앞까지 뛰어나가 가차없이 칼을 휘두르고는, 다시 날개를 펴고 펄쩍 뛰어올랐다. 그의 칼을 막거나, 피해서 물러설 시간은 없었다. 가장 빠른 인간만이 그나마 그가 자신을 향해 칼을 드는 것을 보았고, 그 순간에 죽었다. 하르크자엘의 옷과 몸은 순식간에, 인간 희생자들의 솟구치는 피로 피투성이가 되었다. 정맥과 심장에서 튀겨져나오는 피는 그의 얼굴에까지 튀었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의 팔에 달린 칼은 마치 몸의 일부분처럼, 피를 보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듯한 주인의 움직임에 따라 베고 또 베었다.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푸이 하르크 또한 흥분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쓰러지는 동안 네 명의 오르크도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인간의 죽음도 동료의 죽음도 똑같은 흥분제가 되었다. 가장 강력한 흥분제는 물론, 그들의 가장 두려운 전설 속에 나오는 사신, 매보다 날카로운 눈으로 수명이 다한 자를 찾아내고, 화살보다도 빨리 그를 쫓아가 결코 어긋남 없는 칼로 생명의 줄을 갈기갈기 찢는다는 사신(死神)이 피와 살을 가지고 태어난 듯한, 그들의 이종족(異種族)의 주인이었다. 죽음의 세계의 심연에서 저승의 바람을 타고 오며, 그 자신의 이름이 저승의 바람이기도 한, 하르크자엘. 전투와 살생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지 못한 자를 영원한 늪에 빠뜨려 버리는, 죽음의 사자. 그리고 훌륭한 용사에겐 그의 죽음을 장식하는 최고의 상대... 브렐드 영주 역시 자신의 눈으로, '죽음의 사자'를 보았다. 병사들의 피가 천정까지 튀고, 그 속에서 희열이라도 찾듯이 자수정빛 눈을 번뜩이며 칼을 휘두르는, 검은 날개를 편 악마의 모습을. 그야말로 저승에서나 태어날 법한, 죽이기 위한 민첩함과 죽이기 위한 유연한 팔과 다리, 그리고 암흑의 날개를 가진 생물. 브렐드는 그와 그의 오르크 부대가 미친 듯한 싸움으로 에렌의 군대를 산산조각 내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수북히 쌓인 시체 위에 발을 딛고 선 채,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는 '저승의 바람'의 붉은 눈을 보았다. "이것이 전부인가, 에렌의 성주? 실망이군, 알자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하르크자엘의 목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르크자엘은 소름끼치게 낭랑한 소리로 웃으며, 새파랗게 질려 쓰러지기 직전인 성주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리고는 미동 하나 없는 그의 손에서, 구겨진 양피지 편지를 빼앗았다 - 에스텔의 군대의 도착을 예고하는 그 편지를. "재미있는데...?" 하고 그는 씩 웃었다. "푸이 하르크!" "예!" "이 성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져간다. 식량도, 보물도, 알자크 성으로 옮기도록. 가져가지 못하는 것은 파괴한다. 우물에는 독을 풀어라. 인간족의 군대는 배를 곯게 될 거야." 오르크들은 인간들의 군대가 허덕일 것을 생각하고 기쁨에 겨워, 탁한 소리로 자지러지게 웃었다. 하르크자엘의 얼굴에도 더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성에는 성주(城主)와 나만이 남는다... 그래도 리반 아덴의 아들 에게 인사는 올려야 할 게 아닌가." 하르크자엘은 칼로 성주의 목을, 상처가 나지 않을 정도로 살살 건드렸다. 그러나 성주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오르크 두 마리가 와서 그의 보석이 박힌 브러치와 펜던트를 떼어 가고, 팔과 다리를 결박할 때에도 브렐드 성주는 저항은 커녕 미동조차 않았다. [13007]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50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5 09:46 읽음 : 365 관련자료 없음 ------------------------------------------------------------------------------ 그루크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전차(戰車)를 끄는 오르크 말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다른 오르크들에 비해 몸집이 기형적으로 컸으므로, 아무리 바쁜 일이 잇어도 말을 타지 못하고 전차를 타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과 같은 때에는 몹시도 짜증 나는 일이었다. 동녘은 벌써 잿빛으로 밝아 오는데, 에렌 성(城)은 이제서야 황량한 언덕 너머로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 했으니. "하르크자엘 님!" 그루크는 부서진 성문을 통해 밀어닥치듯 들어오면서, 그의 주인의 이름을 고함쳐 불렀다. 성 안은 그가 익숙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피비린내 와 가마귀를 부르는 시체들의 악취. 까마귀들이 이미 조문객(弔問客)처럼 성의 곳곳을 까맣게 덮고, 갑자기 뛰어들어온 거인 오르크를 경계심 섞인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루크는 새삼 화가 났다. 오르크인 그는 상하기 직전의 시체 냄새에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성에 하르크자엘만 덩그러니 남겨두고, 좋다고 보물들과 식량들을 실어 온 부하 오르크들에게는 것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아무리 본인이 그러라고 명령했기로서니...! 그는 초조해진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주인님! 어디 계십니까!" "여어, 너무 그렇게 수선떨지 말라고, 그루크. 네놈은 정말 어쩔 수가 없군." 하르크자엘은 여유있는 웃음을 터뜨리며, 까마귀 사이를 뚫고 무너진 벽으로부터 나타났다. 커다란 검은 날개 때문에 그는 마치 까마귀들과 동류 (同類)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루크는 잠깐 당황했으나, 얼른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주인님! 그러나 갑자기 걱정이 되어서..." "하르크자엘에게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 하르크자엘은 싸늘하게 코웃음치며, 날개를 펴고 그루크의 코앞에 훌쩍 뛰어내렸다. "분명 나도 따라갈테니 알자크 성에서 기다리라고 말했을텐데. 부하들이 내 말을 제대로 전하지 못했나보지?" "아닙니다, 주인님. 그러나 아무래도 홀로 기다리신다는 것은..." "내가 질 수도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하르크자엘의 차가운 어조에 그루크는 식은땀이 등을 적시는 것을 느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주인님. 저는 단지..." "그루크, 너는 아무리 다른 오르크와 단절되었다고는 하지만, 요즘 너무 오르크답지 않게 굴고 있어. 너희 푸이 하르크들이 오르크가 아니란 말은,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내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말일 뿐이지, 결코 다른 오르크들과는 달리 명령을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야. 너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말에 따라야 하는 거야!" "주인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단지...!" 그루크는 더욱 더 땅에 납작 엎드렸다. 그의 굵은 목 위로 하르크 자엘의 싸늘한 칼날의 감촉이 느껴졌다. "네 싸우는 기술이, 네 힘이 지금의 반의 반만큼만 모자랐었더라도 너는 벌써 죽었다, 그루크. 하지만 네놈의 능력은 드문 것이니 일단은 살려 주지. 그러니 감사히 알고 다시는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려 들지 마!" "무... 물론입니다, 주인님! 명령을 내리는 것은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이십니다. 저희 푸이 하르크는 단지 손발처럼 그 뜻에 따를 뿐입니다." "알면 됐어. 가 봐!" 하르크자엘의 칼이 치워졌다. 그루크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었다. 그를 닮은 거대한 까마귀들이 비난하는 듯한 수백개의 눈으로 그루크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루크는 목을 만져 보았다. 상처는 없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만약 다른 오르크 족 대장이라면, 만약 아크트라면 어떤 식으로 나왔을지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손이나 귀 하나를 잘라 갔겠지. 눈을 도려냈을지도 모른다. 오르크 족에게 처벌로써 신체의 일부분을 떼어내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결코 그러는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두 갈래였다 - 삶, 아니면 죽음. 그루크는 아직도 자신의 주인을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 이제 전차를 타고 혼자서 알자크 성으로 돌아가, 하르크자엘이 돌아오기만을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는 말없이 전차에 올랐다. 하르크자엘은 무너진 성벽에 기댄 채, 그루크의 전차가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거대한 새장같이 생긴 물체가 매달려 있었고, 그 속에는 브렐드 성주가 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창백한 표정으로 하르크자엘과, 까마귀들에게 덮인 자기 병사들의 시신을 쳐다보며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너는 미쳤어, 하르크자엘. 완전히 미쳤다고. 이러고도 천벌을 받지 않을 줄 아느냐? 너는 완전히 미쳤어..." "어차피 미쳤으니까 전쟁이라는 걸 하는 거야, 성주 나으리." 하르크자엘은 빙긋이 웃으며 성주의 새장 근처로 날아가 말했다. 브렐드는 그제서야 입을 다물고, 겁에 질린 눈으로 하르크자엘을 바라보았다. 하르크자엘은 그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게 겁먹을 것까진 없어. 부하들 꼴처럼 될까봐 두려운가 보지? 내 말을 잊었나? 네 목숨은 적어도 리반 아덴의 아들이 올 때까지는 붙어 있을거야. 믿으라고. 나는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 죽음은 내 칼끝에 달렸으 니까... 오르크들이 그렇게 말하더군." "...네놈은 천벌을 받을 거야." "천벌이라고... 그런 건 없어." 하르크자엘은 브렐드가 갇힌 새장에서 가장 가까운, 부러진 기둥 위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페레이타건 아스틸라건 이조넬이건, 혹은 실리사건 에퀴온이건... 천벌 따위를 내리는 신은 없어. 정의 따위를 신경쓰는 신도 없다고. 있다면 진짜 벌받을 놈들은 다 피해가는 아주 이상한 천벌이지..." "네놈은 살인마인데다가 신성모독적이기까지 하군." "그리고 너는 무모한데다가 멍청하지, 에렌의 성주. 나는 천벌을 받아야 할 놈들을 알아. 종족이 틀리다는 핑계로 도대체 악한 생각이라고는 해 볼 겨를도 없었던 어린 아이들을 살해한 놈들이지. 같은 이유로 자기를 믿던 이들을 모두 함정에 빠뜨려 죽이려고 한 여자도 있어. 그런데 천벌은 그들을 피해가더군. 정말 이상한 일이야. 모든 불행은 그들을 피해가고 그 대신 부와 명예가 달려들더군. ...결국 그들을 벌하기 위해서는 신이 아니라 다른 산 자가 움직여야 했어. 내가 직접 그들을 벌해야 했단 말이야." 하르크자엘은 마치 옛일을 이야기하는 오랜 친구처럼, 브렐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브렐드는 그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도 잘 알 수 없었으나, 왠지 반박하려고 했을 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간신히, 힘없는 목소리로 아까 했던 말을 반복했을 뿐이었다. "네놈은 천벌을 받을 거야..." 그러나 그 자신이 듣기에도 그 말은, 마치 어리숙한 배우가 대사도 제대로 못 외우고 말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기운없이 짝이 없었다. "내가 천벌을 받아도 상관 없어." 하고 하르크자엘은 진심 어린 - 적어도 진심을 담고 있는 듯이 들리는 목소 리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은 이제 브렐드를 떠나, 먼 남쪽의 지평선을 향하고 있었다. 아침 노을을 받아 그의 붉은 자주빛 눈은 이상스럽게 빛났다. "진짜 천벌 받을 놈들이 다 천벌을 받는다면야 - 그러면 당연히 나도 천벌을 받게 되겠지만. 진짜 세상의 나쁜 놈들이 다 죄값을 치룬다면, 나는 정말이지 어떤 천벌이라도 기꺼이 받겠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천벌은 없다는 거야. 아니면... 멍청한 오르크들이 말하는 대로, 내가 천벌일 지도 모르지." "..." "...저기 우리의 손님들이 오는군." 하고 말하며 하르크자엘은 몸을 일으켰다. 가볍고 경쾌한 금속성의 울림과 함께, 그의 가는 검이 칼집에서 유연하게 빠져나와 아침놀에 황금빛으로 빛났다. 하르크자엘은 영주에게서 빼앗은 편지를 새장의 철창 사이로 던져 넣으며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기다려 보라고, 성주. 난 네 목숨을 빼앗을 거지만, 귀한 손님들을 영접할 일생 일대의 기회를 놓치게 하지 않을테니. 그것보다 더 무식한 놈들 좀 보라고. 도대체 군사를 얼마나 이끌고 오는 거야? 이 작은 성 안에 다 들어올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브렐드는 무의식중에 몸을 일으켜 하르크자엘이 보는 쪽을 바라보 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클레이브의 군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작은 개미떼같은 점이 점점 커져 드디어 사람들의 모습과 포효하는 금빛 사자를 수놓은 붉고 푸른 깃발이 보이자, 그는 새삼 자신의 병사들의 죽음을 떠올리고 몸을 떨었다. "그들을 내버려 둬. 네놈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인간들이란 말이다!" "이미 늦었어... 그런 말은 32년 전에 하셨어야지." 거의 무너진 성문을 통해, 머뭇거리며 클레이브의 군대가 입성(入城) 하고 있었다. 리반 아덴이 시지리스를 공격할 때 입었던 것과도 비슷한 은빛 갑옷을 입을 클레이브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분노를 억누르는 딱딱한 표정으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보다 두어 살 어린 듯한 갈색 머리칼의 부관, 클레이브는 그처럼 분노를 누르지 못한 채, 완전히 흥분하여 숨을 씩씩 내쉬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병사들은, 특히 아직 어린 듯한 병사들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만 둬! 들어오지 마시오. 어서 돌아가라고!" 에렌 성주 브렐드의 절박한 외침이 그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모든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은 일시에 새장 안에 갇혀 있는 성주와, 그 성주의 주위를 맴도는 검은 날개를 가진 청년에게로 쏠렸다. 그의 거대하고 새까만 날개, 그리고 거기에 그어진 하얀 흉터는 그가 누구인지 짐작하게 하고도 남았다. "하르크자엘...!" 누군가가 소리쳤고, 군사들은 찬물을 끼어얹은 듯 조용해졌다. 하르 크자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런 표정이지? 내 환영 인사가 마음에 안 든다면 진심으로 사의(謝意)를 표하오, 클레이브 대장! 하지만 성의도 있는데 기쁜 척하는 표정쯤은 지어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이... 오만한 놈!" 그의 조롱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칼릭은 이렇게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고 하르크자엘의 앞으로 말을 달렸다. "비겁한 놈. 그렇게 날아다니지만 말고 내려와 나와 붙어 보자. 네가 그렇게 잘난 '저승의 바람'이라면...!" 그러나 칼릭은 말을 다 끝마칠 새조차 없었다. 쏜살같이 날아내려온 하르크자엘이 칼을 휘둘러, 그의 말의 목을 베어 버렸던 것이다. 칼릭은 거의 반사적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성 바닥에 굴렀다. 정신을 제대로 수습하 지도 못한 그의 눈앞으로 하르크자엘의 번뜩이는 가는 칼날이 얼핏 비쳤다. 칼릭은 얼른 칼을 들어 그것을 막으려 했으나, 그가 제대로 칼을 들어올리기 도 전에, 어느 새 하르크자엘의 발은 그의 칼을 밟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가늘고 번쩍거리는 칼날은, 칼릭의 목에서 새파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인간들은... 너무 움직임이 느리단 말씀이야." 하르크자엘이 비웃음을 가득 담은 말투로, 칼릭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나와 대적하려면 실력을 좀더 키워야겠군, 애송이." 하르크자엘의 칼이 놀라운 속도로 치켜올려지는 것을 보고, 칼릭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시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칼날은 그의 몸 대신, 하르크자엘을 향해 쏘아진 화살을 두동강냈다. 활을 쏜 궁수는 멍한 표정으로, 도망치거나 자신을 방어할 궁리조차 못 한 채 서 있었다. 화살은 정확히 두동강이 나 있었다. 날아가는 화살을 떨어뜨리거나 칼날에 맞게 한다는 말은 들어 봤어도, 두동강을 낸다는 것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르크자엘이 훌쩍 날개를 펴고 떠오르는 것을 보고, 클레이브는 다급히 소리쳤다. "저 놈을 잡아라. 하르크자엘을 죽이는 자에게는 큰 포상이 있을 것이다!" 하르크자엘이 자신들에게 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병사들은 허둥 지둥 무기를 들었으나, 이미 그들의 한가운데로 들어온 그는 감히 자신에게 화살을 날린 궁수에게 칼을 휘두르는 참이었다. 궁수는 주위 사람들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목에서 피를 뿜으며 스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 중 가장 민첩한 병사가 얼른 하르크자엘의 등을 향해 창을 휘둘렀으나, 창날은 허공만을 가르며 윙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하르크 자엘이 벌써 몸을 피했다는 것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하르크자엘의 칼날은 그의 심장을 등 뒤에서부터 꿰뚫었다. "하하하... 정말 재미있군. 이런 놈들로 날 죽이겠다는 건가? 꿈도 야무지시군, 리반 아덴의 아들!" 하르크자엘은 소리쳐 웃으며 높이 날아올라, 이번에는 클레이브를 향해 날개를 반쯤 접은 채 돌진했다. 클레이브는 얼른 말을 돌리며 몸을 피했고, 하르크자엘의 칼은 아슬아슬하게 그의 망토만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러나 그가 한숨 돌리는 순간, 어느새 바로 그의 눈앞에 선 하르크자엘은 그의 목을 향해 칼을 날리고 있었다. 그 칼날이 그의 목을 치기 직전, 클레이 브는 간신히 방패를 들어 그 칼날을 막아 냈다. 그리고 거의 쉴 틈을 주지 않고 들어오는 하르크자엘의 다음 공격을, 칼로 막았다. 클레이브는 칼로 하르크자엘을 힘껏 밀어냈다. 그는 마치 탄력있는 공처럼 멀찍히 물러났다가, 다시 맹렬한 속도로 돌진해 왔다. 클레이브는 칼을 휘둘렀으나 이미 하르크자엘은 그 자리에 없었다. 검은 그림자가 자신의 머리 위를 덮고 있는 것을 보고, 클레이브는 간신히 말에서 뛰어내려 몸을 비켰다. 그의 머리 위에서 손살같이 내려오던 하르크자엘의 칼은 성의 돌바 닥을 뚫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아직 멀었어." 클레이브는 하르크자엘이 칼을 땅에서 뽑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다만, 하르크자엘의 칼날이 다시 코앞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고 칼을 들었을 뿐이었다. 둘은 칼을 맞댄 채 얼굴을 마주하고 멈추었다. [13071]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51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6 19:11 읽음 : 378 관련자료 없음 ------------------------------------------------------------------------------ 클레이브와 하르크자엘은 검을 사이에 둔 채, 상대의 표정 하나하나 까지도 읽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둘의 얼굴에는 거의 동시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이렇게 클레이브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제피로스에게 전의 리반 아덴 과의 결투를 기억나게 했다. 리반 아덴, 드래크로니안족을 거의 몰살피키다시 피 하여 그들을 시지리스 섬에서 몰아낸 자, 드래곤 슬레이어로 기억되는 영웅 - 그러나 제피로스가 복수를 위해 그를 찾아갔을 때는 그의 전성기가 지난 지 이미 20년이 넘었을 때였고, 그는 왕의 이복동생답게 평화로운 성에서 늙어 가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드래크로니안 족의 원수, 붉은 금발을 휘날리며 어린아이까지도 학살하던 살인마를 찾아갔으나 그가 만난 것은 아이와 아내가 딸린 노인이었다. 그는 물론 복수를 했다 -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복수였던가? 그것이 한치라도 그에게 만족을 주었는가? 클레이브의 얼굴에서 제피로스는 인간족의 기사 클레이브 아덴을 보지 않았다. 그가 본 것은 드래곤 슬레이어 리반 아덴, 바로 그였다. 그렇다, 10년 전 그가 찾아갔을 때, 리반 아덴은 마땅히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어야 했다. 제피로스 자신도 힘겹게 버틸 만한 강한 팔, 분노로 빛나는 파란 눈, 생명력 넘치는 붉은 금발 - 그렇게 맥이 다 빠진 늙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클레이브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하르크자엘의 눈에 고정되어 있었다. 드래크로니안 족 특유의 붉은 눈 - 물론 그것은 어떤 인간도 가질 수 없는, 이상하고 야생적인 빛을 발하는 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문에서 듣던 것과도 달랐다. 하르크자엘은 피처럼 붉고 얼음처럼 차갑고 악마처럼 잔인한 눈을 가지고 있다 - 그것이 그가 어린 시절부터 들어 온 이야기였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의 눈은 차라리 자주 빛에 가까웠고 - 차라리 이즐레이의 눈이 더 붉다고 생각되었다 - 무엇을 말하는 듯 했다. 적어도 그것은 악마의 눈같이 보이지는 않았다 - 물론, 인간의 눈 역시 아니었지만. "하!" 클레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 하르크자엘을 격하게 밀어 냈다. 하르크 자엘은 지탱하지 못하고 튕겨나갔으나, 곧 균형을 잡고 착지했다. 그리고 땅을 박차고 클레이브에게 뛰어들며, 다시 칼을 휘둘렀다. 그의 칼날을 보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했다. 클레이브는 완전히 직감으로 그 칼을 막아 냈다. 칼을 휘두르는 그의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고, 하르크자엘은 또다시 뒤로 물러서며,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재미있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클레이브는 드래크로니안을, 많지는 않아도 몇 명 만나 보고, 그들과 싸움도 벌여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드래크로니안들에 대해 좀 안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들은 보기보다 몸무게가 꽤 가벼웠다 - 아마 날기 위해서 이리라. 아무리 큰 날개를 가졌다 해도, 인간처럼 무겁다면 떠 있기조차 불편 할테니까. 하르크자엘도 클레이브 자신보다 약간 더 호리호리 한 정도로 보이지만, 몸무게는 훨씬 더 가벼울 것이다. 그리고 클레이브가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할 때마다 튕겨나듯 물러서는 그의 행동은, 클레이브의 짐작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자기딴에는 재빨리, 칼을 치켜들며 하르크자엘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는 하르크자엘 정도의 드래크로니안에게는 충분히 공격을 피하고도 남을 정도로 느린 속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칼을 들어 클레이브의 칼을 막았다. '나 같은 건 우습다 이건가, 하르크자엘! 하지만 네가 계산을 못한 게 있지. 우리 안간들은 너희보다 느리고 기술도 부족할 지 몰라도, 근력은 더 우수하다는 걸!' 클레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그는 결코 인간족 치고 힘이 약한 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식하게 힘만으로 싸우는 타입도 아니었지만. 그러나 드래크로니안 족과 상대하려면, 특히 하르크자엘과 같은 드래크로니안과 상대하려면 그 자신의 민첩성이나 기술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내 종족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하셨군!" 하르크자엘이 간신히 클레이브의 칼을 막고 버티며 말했다. 클레이 브는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도 하르크자엘과 마찬가지로 땀에 젖어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자신보다 하르크자엘이 더 힘겨워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죽어랏!" 클레이브는 있는 힘을 다해, 하르크자엘의 머리를 향해 칼을 찍어 눌렀다. 그러나 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휙 돌아가, 돌마닥에 박혔다. 어느 새 한 발 뒤로 물러난 하르크자엘은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용기는 좋았어, 리반 아덴의 아들. 생각도 나쁘지 않았고. 하지만 너무 방심했던 것 아닌가? 하르크자엘이 그런 수에 넘어가리라고 생각하다 니!" 하르크자엘은 날개를 펴고 메뒤기처럼 몸의 몇 배나 되는 높이를 훌쩍 뛰어오르더니, 클레이브를 향해 돌진했다. 클레이브는 그의 칼을 간신히 쳐 내면서 돌바닥에 뒹굴었다. 그러나 일어날 새를 주지 않고 하르크자엘은 다음 공격을 날리려 했다. "그만 둬!" 칼릭이 벌떡 일이서서, 기사도(騎士道)도 잊은 채 하르크자엘의 등에 칼을 꽂으려 했다. 그러나 이를 안 하르크자엘이 다시 훌쩍 날아올랐으 므로, 칼릭은 하마트면 그 대신 클레이브를 찌를 뻔 했다. 어쨌든 그의 덕택에 클레이브는 다시 몸을 일으키고 칼을 고쳐 잡을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내려 와라, 하르크자엘.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고 클레이브가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러나 높은 하늘에서 날개짓을 하는 하르크자엘은 웃음만 터뜨렸다. 클레이브는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더욱 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내려와, 하르크자엘. 아버지의 원수!" 그제서야 하르크자엘은 웃음을 멈추었다. "...아버지의 원수라...?" 그는 비웃는 듯한 표정을 희미하게 띄운 채 - 물론 그것은 저 아래에 있는 인간들의 눈에 보일 턱이 없었지만 - 중얼거렸다. 그가 내려올 의사가 없다고 판단했는지, 클레이브는 궁수들에게 소리쳤다. "무엇들 하느냐! 저 놈을 쏴라. 하르크자엘을 죽이는 자에게는 큰 포상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명령에 궁수들은 머뭇거리면서도 화살을 쏘아 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오히려 그것이 무슨 위험하지 않은 놀이라도 되는 듯,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자리를 그다지 바꾸지 않고 화살을 이리저리 피했다. 마치 일부러 인간 군사들의 화를 돋구려는 듯이. 그리고는 다시 눈 깜짝할 사이에 그들 사이로 내려와, 일부러 클레이브에게서 가장 가까이 있는 궁수 두 명을 베어 쓰러뜨렸다. "잘 봤나? 리반 아덴의 아들! 나는 원한다면 너 따위는 언제든지 쓰러뜨릴 수 있어. 언제든지! 지금은 단지 아크트가 길길이 날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잠시 참는 것 뿐이야!" 그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인간들이 몰려들기 전에 다시 훌쩍 날아 하늘 위로 올라갔다. 궁수들은 그를 겨냥했으나, 이번에는 그가 브렐드 성주가 갇힌 거대한 새장 주위를 맴돌고 있었으므로, 성주가 다칠 까봐 활시위를 놓지 못했다. 하르크자엘은 그것을 아는 듯이 유쾌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아니, 왜들 그러지? 아하, 그렇군, 여기 계시는 성주님이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에 방해가 되는군? 그래서야 안 되지. 잠깐 기다려,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안돼!" 클레이브와 브렐드 성주는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그 소리에 하르크 자엘은, 일부러 망설임을 가장한 표정으로 높이 치켜든 칼을 잠시 멈추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사정없이 칼을 내리쳤고, 그 칼날은 단번에 새장을 지탱하고 있던 몇 겹의 굵은 밧줄을 끊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시체를 쪼아먹느라 정신이 없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하늘은 삽시간에 마치 검은 구름이 몰려온 것처럼 어둠으로 뒤덮였다. 인간 군사들은 일제히 말을 잃고, 침묵에 빠져 들었다. 그들의 귀에는 까마귀들의 날개짓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하르크자엘의 웃음소리였다. "하하하... 하하하하! 열심히 싸우라고. 기다리고 있지! 행운을 빌겠네. 아니, 불운을 빈다고 해야 할까?" 그는 새까만 날게를 유연히 움직여, 까마귀들 사이를 헤치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의 웃음소리도 그의 모습과 함께 사라졌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가 사라져도, 그리고 까마귀들이 다시 에렌의 군사들의 시신들 위에 내려앉아도 다시 입을 열 줄을 몰랐다. 그들의 앞에는 부서진 새장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에렌 성의 성주 였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으깨진 시신이 놓여져 있었다. --------------------------------------------------------------------- '아버지의 원수라...' 제피로스는 클레이브가 한 말을 다시 마음 속에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이 주는 묘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알자크 성을 향해 날아오며 하르크자엘은 끊임없이 그 말을 되뇌었다. 원수. 그리고 복수... 사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클레이브가 하르크자엘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죽이려 든다면 그것은 정당한 일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가족의 복수는 드래크로니안 족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10년 전, 아직 어린 랜스 아덴이 그를 죽이겠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쳤을 때에도 하르크자엘은 아무런 불쾌함도 느끼지 않고 그를 내버려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수십번 되뇌인 말을,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수백 번도 더 반복한 말을 하필이면 클레이브 아덴의 입에서 듣는다는 것은 기분 나쁜 일이었다. 아니, 기분 나쁜 것 이상이었다.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불쾌한 일이었다 -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르크자엘 은 마치 부당한 모함을 들은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의 원수, 종족의 원수, 그리고 또... 모든 것이 그렇게 반복되 는가.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가 말했던 대로... '플리에타, 당신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정말 에누인 신과 이조넬 신은 복수를 금지했나요?' '물론입니다, 어린 드래크로니안 용사님. 어째서 그것이 이상하죠?' '그렇다면 어떻게 정의가 이루어질 수 있나요? 나쁜 짓을 한 자는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두려워 잘못을 범하지 않지 요. 복수가 부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도대체 그런 정의는 누가 지킵니까?' '신들이요, 어린 용사님. 그리고 자연이, 운명이요. 아스틸라 여신께 서는 모든 이들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그들의 삶에 합당한 별의 길을 주신 답니다. 악한 이들은 다음 생에서 몹시 힘든 삶을 산다는 것은 그대도 알고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두려움을 주기에는 너무 추상적입니다. 게다가 너무 늦어요. 다음 생이라는 건... 누군가 잘못을 범했다면 적어도 당장 처벌 이, 혹은 적어도 처벌의 두려움이 들이닥쳐야 해요.' '하지만 복수는 복수를 부르게 된답니다, 어린 용사여. 피는 계속 피를 부르죠. 복수는 끊임없는 피의 반복이 될 겁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는 이렇게 말하며, 아직 그녀보다 키가 작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때 그는 납득할 수 없었다 - 그러나 지금은? 그래, 플리에타의 말은 옳았다. 복수는 복수를, 피는 피를 부르고 있었다. 시지리스가 정복된 이후 그의 앞길에 놓인 것은 정말 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가 택한 인생이었다. 그리고 플리에타도 알지 못한 것이 있었다. 악인을 그대로 놔둔다면 결국 그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천신(天神) 아스틸라의 처벌은 너무나 느리거나 - 아니면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국 처벌은 복수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했다. 설사 그것이 새로운 복수를 불러온다 해도... 알자크 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망을 보고 있던 푸이 하르크의 오르크들은 아우성들을 치며 그를 맞이했다. "하르크자엘 님!" "하르크자엘 님께서 둘아오셨다!" 제피로스는 날개를 접으며 성벽 위에 내려앉았다. 그의 주위에 있던 오르크들은 세상에 다시 없는 영광이라는 듯 이마를 땅에 붙이고 절을 했다. 그들을 헤치고, 그들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그루크가 나타났다. "다녀오셨습니까, 하르크자엘 님!" "그래... 별일 없었겠지?" "예. 알자크의 식량과 에렌에서 들어온 식량 덕분에, 푸이 하르크는 당징이라도 인간족 전체를 휘어잡을 수 있을 만한 사기(詐欺)입니다." "그거 잘 됐군... 내일부터 남쪽으로 가서 인간들과 마주쳐야 할 테니. 휴식을 취하라고 일러라. 나는 가서 쉬겠다. 피곤하구나." 하르크자엘은 정말 지친 얼굴로 날개를 폈다. 그루크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해졌다. "부상을 입으셨습니까?" "아니, 그냥 피곤할 뿐이다. 가서 푸이 하르크나 돌보거라." 그루크는 걱정이 풀리지 않는 눈치였으나, 하르크자엘은 더 이상 듣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날개를 펴고 곧바로 성주의 방 테라스로 날아갔다. 성주의 방은 깨끗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 오르크들도 이곳을 하르 크자엘의 방이라고 알고 발조차 들여놓지 않은 것이다. 그는 푸이 하르크를 지휘하면서도 오르크들을 경멸하고 있었고, 그들이 흐뜨러놓은 방에서 자는 것을 탐탁치 않게 받아들였다. 처음에 그는 이 기분을 감추려고 노력해 보기 도 했으나, 오르크들이 이에 대해 기분 나쁘게 생각지 않고, 오히려 당연히 받아들인다는 것을 깨닫고는 태도를 바꾸었다. 오히려 이 방면에 있어서 하르크자엘의 까다로움은 오르크들의 경외감을 조성하고 그가 오르크들보다 훨씬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하르크자엘은 날개를 숨기고는 쓰러지듯 화려한 성주의 비단 침대 위에 몸을 눕혔다. 고작 사흘 전까지만 해도 이 침대에는 알자크 성의 성주가 누위 단잠을 청했으리라...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그는 하르크자엘에게 감히 대들었다는 죄로, 그의 칼에 그 뚱뚱한 배가 갈려 죽어 버렸다. 그리고 에렌의 영주는... 하르크자엘은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해야 했다. 내일은 다시 먼 길을 출발해야 할 테니까... 더 많은 인간들을 죽이러 가는 길을. [13163]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52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8 21:57 읽음 : 334 관련자료 없음 ------------------------------------------------------------------------------ 밤 늦게까지 에렌의 군사들의 시신을 태우는 불길은 하늘로 치솟았 다. 낮게 웅얼거리는 듯한 장송곡(葬送曲)만이 암울한 성 안을 채우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에 몰려든 까마귀들은 쫓아도 쫓아도 갈 생각을 않고, 아까운 듯이 성의 지붕을 까맣게 덮은 채 자신들의 먹이가 재로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도 큰 소리로 떠들거나 흥얼거리지 못했고, 모두들 상 (喪)을 당한 사람마냥 조용히 잠자리에 들었다. 에렌의 학살은 에스테이아의 군사 모두에게, 용병이거나 징집병이거나, 귀족 기사이거나 농노 출신의 병사 이거나, 그들 역시 죽음의 땅, 우클로우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바로 내일이라도 그들이 에렌의 병사들과 같은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보초들조차 침울한 분위기에 잠겨, 침묵을 지키며 힘없이 땅바닥만을 내려보고 있었다. 우클로우의 밤하늘에는 별은 커녕 달조차 찾아볼 수 없었 으므로, 검은 그림자가 살짝 성을 빠져나와 황량한 들판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얀 올빼미만이 그 모습을 보고 음산한 소리로 울어 댔으나,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림자는 숨을 몰아쉬며 있는 힘껏 달려, 들판 너머의 음침한 숲으로 향했다. 잎이 거의 없는 나무들이 험상궂게 휘어지고 비틀어진 그 숲의 안은 완전히 암흑이었다. 바람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 그리고 무슨 동물인지 알 길이 없는 청승맞은 울음소리만이 그 암흑을 채우고 있었다. 그림자는 숨을 간신히 가다듬으며 기다렸다. "왔는가? 인간족의 배신자." 이윽고 그가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리고, 어둠 속에서 붉게 빛을 내뿜는 한 쌍의 눈을 보았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여 절했다. "하르크자엘 님..." "인사는 생략하도록 하지. 클레이브 놈이 내가 한 일에 대해 좀 당황하고 있을테지?" 하르크자엘의 목소리는 짖궂게 물었다. "영리하신 분, 당신의 꾀는 클레이브의 작전을 완전히 망쳐 버렸습 니다. 이제 우리 인간족의 군대에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자들은 북진(北進)을 주장하고 있으니, 얼마 안 가 병사들은 굶주리고 폭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잘 됐군." 하고 하르크자엘은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한 아크트가 즐거워하게 생겼군... 언제까지 즐거워할지는 모르겠지만. 뭐, 이 기회에 아크트도 한 번 혼이 나 보는 것이 좋겠지. 좋아, 수고했다, 인간족의 배신자여. 가 봐도 좋다." "저, 하르크자엘 님!" 하고 인간 병사가 다급히 소리쳤다. "제 가족은요. 제 가족들은 언제 보게 해 주시는 겁니까? 분명히..." 갑자기 그의 말이 끊겼다. 목에 들어온 하르크자엘의 칼의 서늘한 감촉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하르크자엘이 조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르크자엘이 약속을 어기리라 생각하는가?" "아... 아닙니다! 저는..." "나는 인간들과 달라 약속을 지킨다. 네가 충분한 공적을 세우면, 가족에게 돌려보내 주는 건 물론, 평생 먹고 살 만한 보화를 줄 수도 있어. 하지만 너는 아직 노력을 덜 했단 말이다." "저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르크자엘 님!" "조금 더 걸어." 하고 하라크자엘은 비웃으며 말했다. "보상을 바라려면 그에 맞는 일을 해야지. 내가 보상을 주고 그러니 그 값은 내가 정하는 것이다. 클레이브에게로 돌아가 더 정보를 모아라. 알았나?" "...알았습니다." 인간 병사의 목에 놓여 있던 하르크자엘의 칼이 비로소 치워졌다. 하르크자엘은 좀더 누그러진 목소리로 토닥이듯 말했다. "그래야지. 네 수고 덕택에 네 가족들은 평안히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묻지. 클레이브의 군사들이 다른 경로로 식량 을 공급받을 길은 없나?" "없습니다... 클레이브 자신에 요청하기 전까지 지원 병력이나 보급 품은 없을 겁니다. 여기는 아무래도 우클로우... 저희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곳 이니까요." "수고했다. 돌아가라!" 어둠 속에서 하르크자엘의 날개짓 소리가 들렸다. 인간 병사는 다시 어둡고 황량한 들판을 지나, 에렌 성(城)으로 달음질쳤다. 제피로스는 하늘을 날며 그가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성에는 이제 시체를 태우는 불이 꺼져 가고 하얀 연기만이 피어오르고 있었 다. 저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던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방향을 돌렸다. 남쪽. 남쪽으로 갈수록 황량한 벌판은 그래도 생명의 빛이 돌았고, 짓누르 듯 무거운 공기는 그 압력을 덜었다. 하늘에는 달이 희미한 빛을 보내고, 별이 죽어가는 것처럼 깜박거리고 있었다. 그는 날고 또 날았다. 그리고 한 어두운 숲속에 내려앉았다. "자히(누구냐)!" 굵고 낮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인간의 목소리도, 요정의 목소 리도, 오르크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 보다는 훨씬 더 거대한 성대(聲帶) 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지룡(地龍)의 목소리. "하르크자엘." 하고 그는 짧게 대답했다. 문지기는 당연히 그의 목소리를 알 터였다. "아, 드래크로니안의 군주시여...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공손한 어조와 함께 커다란 얼굴이 땅으로부터 솟아나왔다. 흙빛 비늘에 박힌 금빛 눈. 긴 목과 몸통, 길고 굵은 꼬리, 날개가 없지만 강인한 근육을 가진 몸체. 그러나 머리에 난 뿔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노란 눈은 두 개가 아닌 세 개였다. 어둠의 힘으로 더 큰 능력을 얻으려다 실패한 기형(奇形). 제피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노토스가 다스리는 용족들이란 다 이들처럼, 노토스 자신과 같은 기형들이었다. 아니면 극도로 폭력적인, 미치 광이들이거나. 그렇지 않고서야 자존심 강한 용족이 일부러 보물을 쌓아 둔 동굴이나 고성(古城)으로부터 빠져나와 남의 명령을 들으려 할 리 없었다. 3 "어서 오십시오, 마침 노토스 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형 지룡은 커다란 다리를 쿵쿵 내리찍으며 동굴 문에서 비켜섰다. 제피로스는 형편없이 작은 몸집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그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복도는 홀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넓었으며, 황금 받침 위에서 빛나는 횃불로 밝혀져 있었다. 길은 평면이 아니라 점점 더 지하로 향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맨 끝, 마그마로 이루어진 거대한 호수에 노토스가 몸을 담그고 있었다. "오랜만이오, 노토스." 하고 제피로스는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노토스처럼 마그마 온천을 즐기지 않았으므로, 가능한한 높이 올라가 천정 근처의 불쑥 튀어나온 부분에 발을 딛고 섰다. 그곳마저도 제피로스에게는 상당히 더웠다.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소." 하고 노토스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들이 올 만한 길목에는 전부 아이들을 보내 놓고, 꾸준히 기다렸단 말이오. 하지만 인간이라고는 그립자도 비치지 않아!"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무척 유감이오만, 클레이브의 부대에는 한동안 지원 병력도 보급 물자도 없을 것이라는 정보가 들어왔는데..." "뭐라고!" 하고 노토스는 동굴이 흔들릴 만큼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그럼 나더러 언제까지 여기서, 아무 일도 않고 기다리란 말이오! 아크트 놈이 영웅이 되는 동안!" "흥분하지 마시오, 노토스. 그들이 오지 않으면, 우리가 가면 되는 거요." 제피로스가 가볍게 대꾸하자, 노토스는 갑자기 목소리가 줄어들며 당황한 듯 더듬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은... 명령을..." "카야크 님의 명령 말이오? 그 분도 이렇게 아무도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못 하셨을 거요 - 물론 그 분의 지혜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종종 인간들은 우리와 같은 월등한 종족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멍청하니까. 그래도 마음이 불안하시다면, 뭐, 드래크로니안 족의 수장이 증인이 되어 줄 수도 있소." "그렇다면...?" "먼저 인간들의 지원 병력이 왔고, 용족의 왕 노토스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갔다는 증언을 해 드리겠단 말이오." 노토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두 개의 머리에 달린 네 개의 눈이, 동시에 꿈뻑꿈뻑거렸다. 제피로스는 기다렸다. "그대가 약속을 지킨다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소?" 이윽고 노토스가 흔들리는 마음을 드러낸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악속을 지킵니다. 드래크로니안이니까. 배반 따위는 인간이나 오르크들에게나 어울리는 짓이요." "그러나 그대는 이렇게까지 나를 도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대 혼자서 공을 세울 수도 있지 않겠소, 드래크로니안의 군주?" "그건 과대평가요." 대답하며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홀로 인간족의 수도를 공격할 수 있겠소? 아무리 하등한 종족이라 해도, 에스텔은 그들의 중심지요. 에스텔을 정복하는 것은 우리가 힘을 합해야 가능할 것이오 - 아니면, 아크트가 어서 임무를 마치고 우리 둘 중 하나를 도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든지." '아크트'라는 말이 나오자 노토스는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아크트 따위는 필요 없소!"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우리 둘이면 충분하지." "오로크 족은 저능하고 개미떼처럼 이리저리 몰려 다니는 것만 좋아하는, 어리석은 종족이오. 어째서 노토스 님께서 아크트에게 그런 임무를 맡기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소! 오르크 따위는..." "새 시대의 건설에 필요가 없지요." 하르크자엘의 차가운 말투에 흥분해 있던 노토스는 잠잠해져 버렸다. 물론 그는 용족의 특성 대로 오르크들을 경멸했다. 용들은, 설사 노토스와 그의 부하와 같은 기형 용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다른 종족을 깔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하등한 종족은 오르크였다. 그러나 제피로스의 말은... "오르크 족을... 카야크 님의 혼돈의 왕국에서 제외시키겠다는 거요, 하르크자엘?" "하하... 그럴리가요. 다만 오르크 족은 드래크로니안을 포함한 용족 처럼, 지도자의 자리에 앉을 수는 없다는 뜻이오. 그들은 인간처럼 수명이 형편없이 짧은데다, 그 결과 가장 나이든 오르크라도 용족의 어린아이처럼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소. 그런 종족이 어떻게 우리 용족과 맞먹을 수 있겠소? 오르크 족은 노예로 태어난 종족이오.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 이전 시대에도 그들은 다른 마왕(魔王)들의 노예였소. 그러니 새 시대에도 노예의 위치가 적당할 거요. 용족들의 지배를 받는! 그편이 그들을 위해서도 차라리 행복할 거요.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노예에게 자유를 주면, 오히려 불행해지는 법이니까." 제피로스는 만족스럽게, 노토스의 결심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노토스는 이제 한결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맞는 말이오, 하르크자엘... 백번 맞는 말이오." "함께 에스텔을 공격하겠소?" "물론이오. 이제 카야크 님의 뜻을 알 것 같소. 우리가 비밀리에 에스텔을 공격하게 하기 위해 아크트에게 엉뚱한 임무를 주신 거로군." "이제야 이해하셨군요." 하고 제피로스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그 목소리 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비웃음이 스쳐갔다. 하지만 그 작은 드래크 로니안의 얼굴에 나타난 미세한 표정의 변화를, 거대한 노토스는 알아차릴 수 없었다. "카야크 님의 뜻이오. 내가 보장해도 좋소. 내가 바로, 그 분께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한 장본인이니까..." "놈들이 우물물에 독을 풀었어요. 보병 한 명이 멋모르고 마셨다가 죽었다는군요." 에렌 성의 테라스에서 군사들의 화장(火葬)을 보고 있던 클레이브, 데이슨, 그리고 칼릭에게, 켈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와아쿠였어요. 경련을 일으키면서 즉사하죠." "식량은 밀 한 톨도 빠짐없이 빼앗겼고, 군대도 성주도 없고 물은 오염되어 있다...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한 성이었군. 하루라도 빨리 출발하는 게 좋겠소." 클레이브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불은 이제 시체를 다 태우고 꺼져 들고 있었다. 병사들이 불 위에 모래를 뿌렸다. 햐안 연기가 봉화(烽火)처럼 길게 하늘을 향해 뻗어 갔다. 사람을 태우는 악취가 풍기는 가운데, 대군(大 軍)은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성의 마당에 막사를 세우고 있었다. 에렌의 자그마한 성은 부서진 곳이 많은데다가, 수많은 군사들을 다 수용할 수 없었 던 것이다. "병사들에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하시오. 내일부터는 어둠의 땅에 발을 디뎌야 하니까." 클레이브는 짧게 말하고는 등을 돌려 테라스를 떠났다. 칼릭이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데이슨과 켈리만이 테라스에 남아,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칼릭은 정말로 클레이브를 따르는군요. 데이슨, 당신도 마찬가지였 겠죠? 리반 아덴, 클레이브와 랜스의 아버지에게, 당신은 정말 충실한 부하였 다고 들었어요." 켈 리가 칼릭의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밝디 밝은 그녀의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데이슨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침울해졌다. "그 분을 구해드릴 수 있을 만큼 충성스럽지가 못했소." "미안해요. 내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아니오, 켈레브리스. 당신은 랜스 도련님의 소중한 분이니 말해 드리리다. 그들이 - 하르크자엘과 푸이 하르크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라우더 성을 침략했을 때, 리반 님께서는 내게 부인과 아이들을 맡기셨소. 장남 올란도 님께서는 이미 청년이 되어 에스텔로 가 계셨으니, 어린 클레이브 님과 랜스 님 뿐이었지... 나와 에이론드는 - 그는 당시 성의 마법사였는데 - 그 분의 명령을 다르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소. 그리고... 그 분은 돌아가셨소." 데이슨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론드는 잠시 사라진 랜스 님을 찾으러 되돌아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소. 그의 경호원 한 명만이 상처를 입으신 랜스 님을 부축하고 돌아왔지. 그 이후로 에이론드는 볼 수 없었소. 아마 죽었을 거요... 차라리 행복했던 게지. 나는 끝까지 리반 님의 명령 대로, 오르크의 저지를 뚫고 부인과 클레이브 님을 은신처로 옮겼소. 그리고 이렇게 살아 있소... 남들의 죽음 뒤에 남는다는 것은, 특히 주군(主君)과 친구의 죽음 뒤에 남는다는 건... 그건 끔찍한 거요. 켈레브리스, 당신은 알 도리가 없을 거요. 클레이브 님은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지... '데이슨, 자네라도 남아 주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자네와 칼릭까지 그 때 죽었더라면 나는 쓰러져 버렸을 거네.' 그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내 기분을 잘 아시기 때문이오. 주군을 죽게 내버려 둔 채 살아남은 죄책감... 물론 위로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리반 님과 함께 명예로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을 보상할 수 있겠소? 나는 죽지 못했소. 그리고 그 일이, 내가 죽을 때까지 나를 괴롭힐 거요." 켈리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야 기가 끝나고 잠시동안의 침묵이 흐르자, 그녀는 무거운 어조로 말을 꺼냈다. "누구나 항상 일어나지 않았던 일에 대해 스러하고 아쉬워하죠... 참 잔인한 일이에요. 나는... 비슷한 얘기를 하나 알고 있어요. 좀... 옛날 이야기죠." "해 보시오, 켈레브리스." "한 왕에 대한 이야기이죠... 그는 속임수와 배반을 알기에는 좀 어렸어요. 그래서 친구의 배반은 짐작도 못한 채, 도움을 요청하는 거짓 편지에 응답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길을 떠났죠. 그 사이 친구는 그의 적과 손잡고 그의 나라를... 거의 전멸시켰죠. 내... 스승님이 이 얘기를 해 주셨어요." "끔찍한 일이군. 젊은 왕은 어떻게 되었소?" "살아 남았죠... 거짓 편지가 그의 백성들을 학살했지만, 역설적으로 그의 목숨을 구한 셈이죠. 고통스러운 목숨을. 그는 끝까지 자신이 그들과 함께 죽지 못한 데 대해 죄책감을 느끼며 살고 있죠 - 내 말은, 그렇게 살았다고요.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대요. 스승님이 그러셨어요." 마지막 말을 하며 켈리는 좀 허둥거렸다. 그러나 자신만의 생각에 빠진 데이슨은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는 복수를 꾀하지 않았소?" "글쎄요... 복수는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아니던가요? 죽음을 보상 하기 위한 죽음 - 단지 그것을 위해 다른 이들을 죽였다면, 당신은 그를 용서할 수 있겠어요, 데이슨?" "당연하지!" 데이슨이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그는 얼굴까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백번 이해하고도 남을 거요. 나는 그가 적국(敵國)의 백성들을 모조리 죽인다 해도, 자신이 당했던 일과 똑같은 것을 앙갚음한다 해도 모두 이해할 수 있을 거요! 나도 그랬을 거요. 만약 내게 클레이브 님이 없어서, 아무도 모실 사람이 없었다면. 아무 의무도 없었다면..." 켈리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데이슨은 그녀가 넋을 잃을 만큼 아름 답다고 생각했다. "그는 복수를... 했어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잔인한 복수를 했죠. 하지만 아무도 이해하려 하지는 않을 거에요." "켈레브리스...?" 데이슨은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그러나 순간, 성문 쪽이 시끄러워졌으므로, 옛날 이야기 따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까맣게 지워져 버렸다. 그와 켈리는 얼른 성문 쪽으로 달음질쳐 갔다. 성문에는 보초 외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모여 있었다. 클레이브와 칼릭도 이미 와 있었다. [13205] 제목 : [용의 신전] 설정1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6/29 20:28 읽음 : 248 관련자료 없음 ------------------------------------------------------------------------------ * About Legendia... No.1 세계 지도 * 레젠디아의 세계관을 궁금히 여기시는 분이 많아 한 번 그려 봅니다. 사실 용의 신전에는 세계 지도 전체가 나오지도 않아요. 시지리스에서 우클로우로 이어지는... 중북부 지역이 나올 뿐이죠. 어쨌든...^^; | 카하르푸르 * | * | * 우클로우 ------- * | 로그라드 ㅅ 위리드 ********* | (北 난쟁이 왕국)ㅅㅅ ******************* | ㅅㅅㅅㅅ ㅅ 휘넨 | ㅅㅅㅅㅅㅅ드라크ㅅㅅㅅㅅ 에스테이아 ㅅㅅ | 로데인 ㅅㅅ노움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ㅅㅅㅅ | ㅅㅅㅅㅅ아트웰 ㅅ라이난ㅅ ------- ㅅㅅㅅㅅ ㅅㅅㅅ ㅅㅅ디노움ㅅ --- 디온 ㅅㅅㅅㅅㅅㅅㅅㅅㅅㅅ ㅅㅅㅅㅅㅅㅅ * -- 라시르 ㅅㅅ ㅅㅅㅅ 로운 시지리스 섬 | ㅅ 니욜 ㅅㅅ | (南 난쟁이 왕국) ㅅ | 카르히트 공국 -- | | 뭐... 정확하진 않아도 이 정도 될 겁니다. 물론 지금부터 100년 전 지도고요. 지금은 에스테이아가 다 통일하고, 우클로우가 넓어지는 등... 조금 변했지요. 륀 에뮌(남쪽 평원), 룬 카하르(북쪽 평원), 안 와크 하아르(바람의 사막)... 등등 각종 세세한 지면들을 다 표기하는 것은 통신상으로는... 아무래도 불가능이 아닐까...^^; 하는데요. 용의 신전에 등장하는 국가는(쬐금 언급되는 거 말고) 아트웰, 에스테이아, 로데인 정도입니다. 아, 물론 우클로우와 시지리스도요... 하지만 이 둘은 국가가 아니죠^^; 지명일 뿐... 역사와 각국의 풍습 등은 다음 기회에 논하기로 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이만...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PS. 알고 싶은 게 있으신 분, 쪽지나 멜 주세요. <설정> 편에서 대답해 드립니다. (하지만 이 쪽팔림은...^^;) 제 5장 얼음 심장 (Chapter 5 The Heart of Ice) 아클레어 3세의 군대가 반으로 줄어드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겨울의 문턱에 접어들면서부터 드라크노움에는 엄청난 양의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은 일 년에 한두 번쯤 함박눈이 내리는 에스텔 출신의 기사들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알론자이아, 하얀 계절이야." 하고 엘먼 왕자는 걱정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는 이제 원정대 (遠征隊) 중 왕자의 유일한 친구가 된 로이가 앉아 있었다. 남부의 시지리스 에서 자란 로이는 원정대 중 유일하게 눈을 반기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신기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눈으로 이것저것 모양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동물들의 발자국을 들여다보기도 하며 놀고 있었다. 하긴, 로이가 할 일이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그게 뭔데요?" 배가 똥똥하게 튀어나온 작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던 로이가 무심하 게 물었다. 왕자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로이를 만난 이후로 그는 미소를 짓는 횟수가 꽤 늘어났다.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계절을 말하지. 산간 지방인 드라크노움에는 남쪽이나 에스텔같은 동부(東部)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눈이 온다고 하더군.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많이 오는데요. 제 무릎도 넘어요. 차갑지만 재미있군요. 보기에도 좋고... 시지리스에도 눈이 오면 좋을텐데." "좋은 건 눈사테가 나기 전이지. 지금 오는 눈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이제 곧 대책이 없을 만큼 쏟아질텐데..." "무슨 산의 뭐라고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돈 왕자는 어리둥절해진 로이의 질문에 웃음을 터뜨렸다. "빙산의 일각 - 뭐, 하여간 앞으로 눈이 훨씬 더 많이 올 거란 소리야." "눈이 더 많이 와요? 설마... 그럼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 "그게 문제야." 하고 왕자는 한숨을 쉬었다. "언제까지나 산중에서 야영을 할 수는 없는데. 아버지가 후퇴하시면 좋으련만... 하지만 절대 안 그러실 거야." "후퇴하라고 말씀드리지 그러세요?" "그랬다간 난 죽어!" 왕자는 다시 얼굴이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로이는 한숨을 쉬었다. 왕자와 왕의 이 이상한 부자관계(父子關係)에 대해 그는 죽어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족이란 함께 있으면 당연히 편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왕자는 쥐가 고양이 피하듯 왕을 슬슬 피해 다니기만 하고, 왕은 왕대로 왕자만 만나면 고양이가 쥐 잡아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기만 하니. '으으... 난 왕자가 아니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토실토실한 눈사람을 내버려 두고 일어섰다. 눈사람의 머리는 곳 스르르 미끌어져내려 툭 떨어져 버렸다. 로이는 엘먼 왕자에게서 눈사람 만드는 법을 배웠으나, 아직은 자신이 보기에도 서툴렀다. "난 준비하러 가야겠다... 또 아무 소용없는 전투를 한 판 치뤄야 할 거야. 날도 밝았으니..." '날이 밝았다'는 것은 순전히 상투적인 표현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려서 또 한바탕의 눈을 예고하고 있었고, 전혀 밝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쨋건, 아침이 오긴 왔고 그의 아버지인 아클레어 3세가 또다시 아트웰 외성(外城)으로 돌진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난 아는 게 너무 없어요. 왕자님처럼 유식하면 참 좋을텐데." 로이가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왕자는 그런 말조차 밝은 목소리로 하는 남부(南部)의 소년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우물거리듯 대답했다. "아냐, 로이... 난 어리석어." "말도 안 돼요." "난 바보야. 차라리 왕위를 계승할 형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니, 동생이라도." 왕자는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걸음을 빨리 했다. 왕의 막사 쪽에서 랜스가 그를 마중나오고 있었다. 엘먼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왕과 함께 전투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나온 것이리라. 엘먼 자신의 아버지 곁에서! 그 자리는 왕세자의 자리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럼 뭘 해, 클레이브의 동생? 어차피 계속 지기밖에 더 하냐고! 내 팔자도 참, 클레이브가 없어지니까 그놈과 똑같이 생긴 동생이 튀어나와서 날 괴롭히는군!' 랜스는 엘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며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도망치듯 그의 앞을 달음질쳐 지나갔 다. 마음만 같아서는 기분 나쁜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 사생아(私生兒)의 아들이라거나, 창녀(娼女) 소생이라거나 하는, 에스텔의 귀족들이 흔히 클레 이브를 향해 흘리곤 하는 말들을. 하지만 자기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랜스에게 감히 그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펠드릭이 뒷전에서 하는 말이 맞아... 난 어찌할 수 없는 바보야. 겁쟁이라고! 랜스나 클레이브가 미우면 왜 그들을 암살시키기라도 하지 않지? 왜 모함조차 못하는 거야? 수백년에 걸쳐 내 조상들이 해 온 짓을, 나는 뭐가 무서워서 못 하는거지? 로이를 가까이 두는 것도, 그 애는 내가 대단한 학자고 검사인 것처럼 치켜세워 주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 데에서나 위안을 얻고... 모두들 말하는 대로, 난 평민으로 태어났더라면 더 좋을 뻔 했어. 차라리 잔악해져도 좋으니까, 무슨 짓을 해도 결과가 안 무서운,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그러나 왕자의 공상은 여기서 끝나 버렸다. 말에 탄 채 자신을 노려 보는 위풍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자, 엘먼의 머릿속은 하얗게 지워지고 말았다. 금빛 갑옷을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워 큰 키를 더욱 돋보이게 한 인간족의 왕, 수염도 머리칼도 하얗게 세었지만 혈색이 좋고 늠름한 노인은 그의 앞에 선, 가냘프고 표백이라도 한 듯 창백한 청년의 아버지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기사들은 왕과 왕자를 보고, 난처한 미소를 투구 아래로 감추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어디 가서 숨어있다 온 거냐, 엘먼? 차라리 전투가 끝날 때까지 숨어 있지 그랬느냐?" "저는..." 하고 말은 꺼낸 왕자는 그 뒤에도 무슨 말인가를 웅얼거렸으나, 아무도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왕은 한숨을 쉬고는 말의 고삐를 당겼다. "어서 따라오너라. 올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거든 말이다!" 왕과 기사들은 벌써 말을 움직이고 있었다. 엘먼은 이를 깨물며, 투구를 가져다 준 시종에게서 거칠게 투구를 빼앗았다. 로이와 검술 연습 중이었으므로 이미 갑옷은 입고 있었다. 그는 최대한 서둘러서 말에 올라탄 다음, 그에게 가능한 가장 빠른 속도로 왕을 뒤쫓았다. 그의 마음을 짐작 못하는지, 아니면 짐작하고도 일부러 속을 긁어 놓으려고 그러는지, 랜스 아덴 경이 말을 늦추어 그의 곁으로 물러섰다. "눈을 조심하십시오, 전하. 깊은 구덩이가 많습니다. 에스텔과는 많이 다르지요." '그래, 너 잘났다!' 왕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신하들의 앞에서 왕자인 자신을 망신주고 있었다. 다음 왕위를 넘겨주지 않겠다는 공공연한 암시였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다, 저 보기 싫은 두 형제, 클레이브와 랜스 때문이었다... '재수없는 아첨꾼들, 드래곤 슬레이어의 아들이라고? 흥, 그 잘난 리반 아덴은 왕의 성(姓)조차 물려받지 못한 첩의 자식, 사생아라는 걸 잊은 모양이지? 게다가 어미는 뭐냔 말야. 출신도 모르고 누구나 쉬쉬하는 창녀가 아니냔 말야! 난 아클레어 3세의 적자(適者)란 말야!' 하지만 그렇게 중얼거린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무도 상관 해 주지 않는데. 그의 아버지인 아클레어 3세조차도... 그리고 그에게는, 아덴 형제의 암살을 지시할 만한 담력조차 없었다. --------------------------------------------------------------------- "아클레어 3세가 또 놀러오는군. 정말 대단한 늙은이야. 지겹지도 않나?" 아트웰의 젊은 왕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동생에게 말했다. 아트웰의 대마법사, 왕의 동생인 스트라본도 미소를 지었다. "정보에 의하면 끌고 온 부하가 반으로 줄었다는데." "저 늙은이는 끌고 온 부하가 다 없어져야 돌아갈 위인이야. 난 가서 손님을 맞이해야겠군. 스트라본, 성을 지켜 줘." 스트라본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일러스를 따라 방을 나가려 다, 검은 갑옷 차림의 레일라는 스트라본을 바라보며 발을 머뭇거렸다. "전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나 알론자이아(하얀 계절)은 건강에 나쁘지 않겠습니까? 따뜻한 아트웰로 돌아가시는 것이..." "레일라, 이젠 내 의원 노릇까지 할 생각이야?" 하고 스트라본은 웃음을 터뜨렸다. "승리가 눈앞이야, 레일라. 오랫동안 고대했던 독립이 눈앞이라고. 그것을 내 눈으로 볼 기회를 빼앗으려 하지는 않겠지? 게다가 보다시피, 내 건강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레일라는 공손히 스트라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스트라본은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을 내밀었고, 레일라는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하얀 로브의 넓은 소매 밖으로 빼꼼히 나온 스트라본의 하얀 손은, 칼을 한 번도 잡아 보지 않아 여리기 짝이 없었다. 스트라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지?' 하고 스트라본은 레일라를 내려다보며 자신에게 물었다. 그의 입가에 소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내 몸에 달려 있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칼을 잡을 수 있는 팔과 말을 달릴 수 있는 다리가 더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레일라가 있는 이상... 에스테이아 군이 내게는 칼도 방패도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오산이야.' "로어네아루드 넬 퀘이 운론 엘리데나드, 로어바일리 넬 퀘이 제레이드론 엘호디나드. 시아 이조넬라스 넬 베이 론 디레인, 아스틸라 넬 텔롬 칼리엔헨 시엘 타로딘. (그대의 갑옷이 돌과 같아서 부서지지 않으리, 그대의 팔과 다리가 바람과 같아서 지치지 않으리. 이조넬의 자비가 결코 그대를 떠나지 않으리니, 아스틸라가 승리의 별을 그대를 위해 준비하리.)" 작은 목소리의 주문이 스트라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오른손 에 파르스름한 빛이 모였고, 그는 그것을 레일라의 붉은 머리칼 위에 올려 놓았다. 빛은 그녀의 몸 전체로 퍼져나가듯 사라졌다. "스트라본 님...?" "잘 싸우거라, 레일라. 나 대신. 왕이 동생이 전장(戰場)에 있었더라면 싸웠을 만큼, 그렇게 싸우거라." "예, 전하!" 레일라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달려나갔다. 스트라본은 그녀가 사일 러스의 바로 곁에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검은 말을 달리며, 성문을 빠져 나가는 것을 창밖으로 내다보았다. "전하,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지요?"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흑마술사 샤나였다. 스트라본은 아까와는 전혀 다른, 차갑고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옳은 말이다, 샤나. 어떻게 할까, 늙다리 왕에게 눈을 좀 선물해 줄까?" (계속) --------------------------------------------------------------------- * 으으으... 여행 전에 못 끝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용의 신전은 왜 자료집 안 올려요?" 글쎄요^^; 우선 뭐 그런 걸로 티내기도 싫고... (FFS처럼 자료집 안 보고는 얘기가 안 되는 글은 쓰고 싶지 않아요. 파운데이션이나 중간계 시리즈는 전후 얘기 몰라도 다 이해 되잖아요?) 또, 자료집을 공개하면 너무 얘기에 관계 없이 복잡한 부분이 많아 지루할 거 같아서요.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 끝난지도 벌써 500년인데... 그동안의 역사를 쓸라면... 게다가 200년에 걸치는 타냐헨 네아의 역사와... ^^; 뭐, 일단 질문을 많이 받는 것부터 조금씩 올리겠습니다. 그러니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라도 멜을...(또는 쪽지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아트웰 외성(外城)의 부근에는 하얀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미 그 주변은 온통 무릎 깊이의 눈으로 덮인 상태였다. 사일러스가 지휘하는 아트웰의 군대는 그 눈을 짖밟으며, 먹이를 발견한 맹수떼처럼 튀어나왔다. 아트웰의 말들은 에스텔의 말들과는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이 눈 속에서 자라고 먹이를 찾아 먹는 말들이었다. 그들에게 눈이란 아무리 쌓여도 신기 하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것이었다. 그것은 아트웰의 군사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이 계절, 알론자이아에 무릎 깊이까지의 눈이란 없으면 도리어 이상한 것이었다. 아클레어 3세는 눈앞의 군사들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눈, 이 쏟아 지는 눈. 40년 전에서 이 눈이 얼마나 자신을 괴롭혔던가. 그러나 그는 40년 전과 같은 멋모르는 자신감이 없었다. 그는 이제 아트웰 분지의 눈의 무서움 을 알고 있었고, 그의 눈앞을 채운 그림자 기사단의 위력도 알고 있었다. 검은 갑옷에 검은 말들을 탄, 죽음의 사자들... "덤벼라! 더러운 침략자들!" 검은 갑옷의 기사들은 아트웰의 군사들 중에서도 항상 제일 먼저 돌진해 들어왔다. 그들의 말은 눈이 오거나 말거나 똑같은 속도로 적진을 향해 돌진해 왔으므로, 눈만 내리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에스테이아의 진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을 저지하려던 기사들을 금방 도끼와 칼레 몸이 갈린 채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들의 검은 창날에는 순식간에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얀 눈 위로 뜨거운 피가 쏟아지고, 눈은 김을 내뿜으며 녹아 갔다. 휙! 아클레어 왕의 눈앞에서 검은 날의 거대한 도끼가 원호를 그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일원. 커다란 도끼에 맞아, 왕을 보호하려던 기사 한 명이 목이 부러진 채 말에서 떨어졌다. 늙은 왕은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두꺼운 갑옷 때문에 몸이 둔해진 기사는 아슬아슬하게 칼날 을 피했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왕을 향해 도끼를 내리쳤다. 도끼는 아슬아슬하게 왕의 망토를 스쳤다. "폐하!" 두 호위병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왔으나, 왕에게 가까이 가지도 못한 채 말에서 풀썩 떨어지며 쓰러졌다. 그들의 뒷목은 뼈가 드러난 정도로 잘려 있었다. 정확하게 투구와 갑옷 사이의 목을 벤 것이다. 그것도 두 명을 한꺼 번에... 왕은 그 솜씨를 기억했다. 그리고 검은 말을 타고, 거대한 도끼를 든 채 늠름히 앉아 있는, 그 모습도 기억해 냈다. 시간이 과거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에 몸을 떨며, 아클레어 3세는 소리쳤다. "레오스 갤러허드!" 40년 전의 겨울. 승리, 그러나 결코 승리라고 부를 수 없었던 전투. 1/5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자신의 군대에 맞섰던 그림자 기사단. 그리고 그 군대의 단장 레오스 갤러허드. 19세였던 아클레어 3세는 물론 그들을 전멸 시켰다 - 에스텔의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대로. 그러나 그들이 모르는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아클레어 자신의 군대도 전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사실... 그러나 분명 그 전투에서 레오스 겔러허드는 죽었다. "기억하시는군, 폭군!" 레오스의 모습을 한 기사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는, 의아하게도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아클레어 3세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군... 갤러허드가 아니야..." "아니, 맞소. 레오스 겔러허드가 아닐 뿐이지. 나는 그의 손녀, 레일라 갤러허드.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오. 각오는 되어 있겠지, 폭군?" 레일라는 오른손만으로 도끼를 들고, 왼손으로는 말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왕에게 접근해 있던 그녀의 부하는 알아서 상황을 파악했는지, 서서히 물러났다. 그녀는 가만히 늙은 왕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죽어라, 그리고 압제의 역사를 끝내라!" 거대한 도끼날은 상상 외로 빠르게 움직였다. 멈칫거리던 아클레어 3세는 무의식중에 그 공격을 칼로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도끼의 날이 칼에 부딪히는 순간, 팔이 떨어져 나갈 듯이 저려 왔다. '나도 늙은 것인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너는 갤러허드의 자손일 리가 없다. 그 가문은 내가...!" "씨를 말리려 했지, 알고 말고! 올두스 대공을 시켜서!" 레일라는 다시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 높여 웃었다. 아클레어 3세는 그 도끼날을 피하고 막느라 그녀의 말을 제대로 들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확실히 레오스 갤러허드의 자손이었다 - 그의 머리는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했으나, 그녀의 도끼날을 막는 그의 팔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레일라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올두스 대공이, 사일러스 폐하와 스트라본 전하의 부친이신 그 분이, 압제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리라 상상했었나? 천만에!" "설마... 그 유약한 올두스가 에스테이아의 왕인 나의 명령을 거역했 다는 것인가?" 아클레어 3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기억이 딜음질쳤다. 올두스 벨리언, 벨리노어 벨리언의 아들. 어린 나이에 볼모로 아트웰에 보내진 소년... 아클레어 자신보다 겨우 한 살 어렸지만, 항상 고개를 숙인 채 향수병에 걸려 있던 어린아이. 그가... "당연하지! 지금 당신의 눈 앞에 있는 그림자 기사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레일라는 도끼를 힘차게 휘둘러, 아클레어 3세의 칼에 내리쳤다. 에스테이아의 늙은 왕은 눌려 오는 도끼의 무게에 맞서 간신히 몸을 지탱 하고 있었다. 레일라는 검은 투구 아래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손들이다, 모두 그대가 싸운 그림자 기사단의 후손들이야. 그래, 물론 그대는 압제자답게, 모든 그림자 기사단의 후손을 멸하라고 명령을 내렸지? 그런 명령을 내렸던 걸 보니, 우리들의 조부모들이 그대를 꽤나 겁주었나보지? 하지만 아트웰은 압제자의 위협 따위에 놀아나지 않았어! 우리는 이렇게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 기사단으로써 교육받았다. 그리고, 지금 보라고!" 레일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꿈, 오랜 기간의 준비를 거쳐 현실로 이루어질 꿈. 그림자 기사단 - 그림자 기사단의 아이들은 그림자 기사단의 일원으로써 교육받았다. 레일라 자신도 여느 여자아이들과 달리 칼과 도끼를 쓰는 법을 교육받았다. 그녀는 또래의 소녀들이 과일을 딴다든지 바느질을 할 때에, 사내아이들 틈에서 장작을 패고 사냥을 해 가야 했다. 그 이유를 물었으나 그녀의 부모는 대답을 해 주는 법이 없었다 -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일 때 수도 에스텔에서 온 군인들에게 발각되어 처형당한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자신의 교육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스트라본의 입에서 직접 들은 후였다. 그렇게 그림자 기사단은 세습되었다 - 마치 귀족이 세습되듯이. 그리고 귀족처럼 그 혈통은 자부심을 가졌다. 실제로 그림자 기사단은 귀족 만큼이나 명예로운 것이었다. 그들을 고발한다는 것은 귀족을 고발하는 것 만큼이나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아클레어 3세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레오스 갤러허드의 명예로운 후손 앞에서, 수염이 하얗 게 센 에스테이아의 왕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소리치고 있었다. "그럼, 설마... 아트웰이 오래 전부터 반란을 꾸며 왔단 말이냐. 이 일이 사일러스 혼자만의 망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단 말이냐!" "당연하지. 아트웰은 정복당하는 그 순간부터 독립을 준비했다. 아트웰은 결코 마음 속으로부터 식민지였던 적이 없었다! 이제 왜 네가 질 수밖에 없는지 알겠지, 압제자!" 높이 치켜든 레일라의 도끼가 아클레어 3세를 향해 내리쳐졌다. 아클레어는 간신히 몸을 피했으나, 그의 말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검은 갑옷의 여기사는 말에서 뛰어내려, 말에서 떠어진 늙은 왕에게 사정 없이 도끼를 날렸다. "죽어랏!" 챙! 맑은 금속음과 함께, 레일라의 도끼는 칼에 튕겨져 아클레어 3세의 목을 비껴 떨여졌다. 랜스가 그 둘 사이를 가로막고, 칼로 그녀의 도끼를 막은 채 서 있었다. "또 만났군." 레일라는 랜스를 바라보며 비웃듯이 말했다. 랜스는 말없이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의 투구는 벗겨져, 붉은 금발은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청록색 눈은 적에게 움직임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더욱 거세진 눈발이 그들 사이로 흩날리고 있었다. 레일라는 오래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도끼를 치켜들어, 새로 나타난 적에게 내리쳤다. 랜스의 칼과 그녀의 도끼가 얽혔다. 둘은 마주본 채 움직임 없이, 그러나 사실은 서로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켜라, 랜스 아덴!" 하고 레일라가 말했다. 랜스는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어째서 안된다는 거지? 그대가 보호하는 그대의 왕은 내 부모와 조부(祖父)를 죽인 장본인이다. 아니, 온 그림자 기사단을 고아로 만든 살인 마다! 나는 죄값을 되돌려 받으려는 것 뿐이다. 그대도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다니는 입장이니 이해할 수 있지 않나!" 랜스의 검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레일라는 도끼로 거칠게 그를 밀었다. 그는 쓰러질 듯 뒤로 밀려나다가, 간신히 도끼를 균형을 잡고 날아드는 도끼를 피했다. 그의 칼이 레일라의 팔을 향해 휘둘러졌으나, 검은 갑옷을 뚫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녀는 격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랜스에게로 다시 돌진했다.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우리 모두의 부모가 죽었다. 저 자가 에스텔 에서, 아무 생각 없이 식사중에 생각나 내린 명령 하나 때문에, 우리 모두의 가정이 박살났단 말이야! 왜 너는 원수를 갚으러 다니면서 우리가 원수를 갚으려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지? 말해 봐, 왜 그렇지? 너는 에스테이아의 귀족이고, 우리는 식민지 아트웰의 백성이라서 그런가? 대답해 보란 말이야!" 랜스는 밀리고 있었다. 그는 스러질 듯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제 실력대로 칼을 휘두를 수가 없었다. 레일라의 말이 굵은 쇠사슬처럼 그의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그대도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다니는 입장이니 이해할 수 있지 않나... 모두의 가정이 박살났다. 단지 명령 한 마디 때문에. 명령 한 마디 때문에...! '...그래도 폐하를 위험에 빠지게 할 수는 없어...!' 랜스는 갑자기 거센 힘으로 레일라의 도끼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레일라는 뜻밖의 공격에 휘청거리며 물러섰다. "평화를 위해서다, 인간족의 평화를 위해서다..." 하고 랜스는 조용히 말했다. 마치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려는 듯이. "인간족은 수백년 동안 싸워 왓어.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은가? 오르크 족조차 통일체를 이루었는데, 인간들만이 서로 싸우고 죽인다. 그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나? 인간끼리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하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겠나! 설사 얼마간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미친 놈. 평화라고? 쉴새없이 왕의 끄나풀들이 드나들고, 죄가 있건 없건 의심하고 잡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고, 너는 그것을 평화라고 부르나? 눈에 띄는 전쟁만 없으면 그게 평화인가? 아트웰은 결코 평화로웠던 적이 없었어. 로운도, 디온도, 위리드도... 모두 마찬가지일걸. 하지만 압제자가 뭘 알아!" 레일라는 이성을 잃은 채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둘렀다. 랜스는 코앞 에서 스치는 바람만으로도 그녀의 일격에 들어간 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간신히 도끼를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그녀가 지치기 시작하자 칼을 날렸다. 챙! 랜스의 칼날이 그녀의 갑옷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오른쪽 어깨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물러섰다. 그제서야 그녀는 주위에 자신을 도울 아트웰 인이 아무도 없음을 알아차렸다. 정신만 제대로 차렸어도 결코 뒤지는 실력이 아니었건만, 흥분해서 잠시 이성을 잃었던 것이 실수였다. "흥... 이 정도로 날 잡을 수 있을 것 같더냐?" 그녀는 투구 아래로 비웃음을 던지며, 왼손으로 옮겨 잡은 도끼를 있는 힘껏 휘둘렀다. 랜스는 그만큼 큰 도끼를 왼손으로 정확히 겨냥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중에 멈칫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레일라는 휘파람으로 부른 자신의 말 위에 훌쩍 올라탔다.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알아라. 나중에는 본때를 보여 주겠어!" 그녀의 말은 서로 죽고 죽이기에 여념이 없는 군사들 틈으로 사라져 갔다. 랜스는 그제야 서둘러 아무 말이나 찾아 타고, 그녀를 뒤쫓기 시작했다. 랜스의 주위에 있던 서너 명의 에스테이아 기사들 역시, 그와 함께 그녀의 뒤를 쫓았다. "거기 서라, 레일라!" 하얀 눈 위에 정신없이 피와 시체가 흩뿌려지는 가운데, 말을 탄 두 기사는 쫓고 쫓기고 있었다. 레일라는 앞을 가로막는 적군을 사정없이 도끼로 후려쳤고, 랜스 역시 접근하는 적의 병사들에게 칼을 휘둘러 댔다. 둘의 사이는 점점 좁혀져서, 그녀가 아트웰의 성벽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가 되어 있었다. 갑자기 레일라는 뒤를 돌아서서, 웃음을 터뜨리며 소리쳤다. "하하하! 랜스 경, 함정에 빠지셨군!" 랜스는 영문을 몰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오히려 레일라 쪽이었다. 등 뒤로는 아트웰의 높은 성벽이 있었고, 앞으로는 랜스와 세 명의 에스테이아 기사가 그녀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그가 그녀의 말의 의미를 알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여기 있다, 랜스 경." 성벽 위에서 스트라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계속) --------------------------------------------------------------------- * 덥군요! 더워! --; 아트웰처럼 눈이 펑펑 오면 얼마나 좋을까... <설정>에서 타냐한 네아(태초의 전쟁)이 끝난 지 500년이라고 했는데... 그런데 제피로스의 나이는 300살 미만? 사실입니다. 타냐헨 네아는 거의 어둠의 세력들에 잠식되어 있던 레젠디아 대륙의 인간들과 요정족을 해방(?)시킨 거고... 그 후에도 오르크족과의 국지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건 네아 아르카스(오르크 전쟁)이라고 해서 또 딴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제피로스는 전후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죠. 사실 오르크 족이 어둠의 종족 중에서 세진 게 최근의 일이랍니다. 전에는 워낙 실력 있는 마족들이 많아서 겨우 꼬래비 수준이었죠...(필리우스의 실력을 보면 아실 터...)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랜스와 기사들이 당항하는 가운데, 레일라의 모습은 그들의 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스트라본만이 저 위에서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을 뿐이었다. 한 어린 기사가 놀란 듯 말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으나, 말은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뒤로 물러섰다. "소용 없소. 내가 당신들이 도망칠 거라는 예상도 못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겠지요? 여기는 작고 아늑한, 창살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라고 할 수 있죠. 도와달라고 소리쳐 봐도 아무 소용 없을 겁니다. 들리지 않을 테니." 스트라본은 빙긋이 웃으며 친절하게도 설명을 해 주었다. 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날 유인한 건가, 스트라본? 실망이군. 사일러스라면 정정당당히 싸웠을 텐데." "아, 그래, 사일러스 형. 그게 형님의 문제지. 도저히 편법이란 걸 인정하지 않는단 말이야. 그런 면에서 당신과 닮았다고도 할 수 있을 거요, 랜스 아덴 경! 그래서 나같은 동생이 필요한 거지. 빛에 가려지는 그림자 역할도 할..." 스트라본은 이렇게 말하며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랜스와 켈리를 속여, 해골들이 득시글거리는 미완성의 지하 통로에 가두어 놓을 때의 미소와 너무나도 비슷해서, 랜스는 소름이 끼쳤다. 사람이라는 것은 얼마나 겉보기와 틀릴 수 있는가. "소식에 의하면 그대의 형, 클레이브는 우클로우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다더군. 그리고 왕자는 겁쟁이에 백치고, 왕은 이제 늙었소. 그럼 에스테이 아의 기사 중 가장 위험한 게 누구겠소? 당연히 랜스 경, 그대가 아닐까?" "...영광이군." "한데 형님은 그까짓 옛 우정 때문에 그대를 죽이는 것을 주저하신단 말이야..." 스트라본의 얼굴에서 이제 미소가 사라졌다. 랜스는 소용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을 뒤로 물렀다. 소년같이 순진한 얼굴을 한 왕자의 눈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의 입에서 낯선 주술이 흘러나왔다. "로 케멜페이 엘뤼드 모엔 엘루디나드, 로 퀘이드페이 훼로드 라벤 에데하이나드. 아이엘 오훼인 세이 우클페이 한드리나드 론 엘푸라드 페이 드리나드, 로 아난헨 지엘라 에일딘 에일드리나드, 휘노인 테이 키아스 나우클라스...! (시간 속에 묻혀진 어둠의 힘이여, 옛 영화(榮華)를 잊은 사악한 힘이여. 여기, 어둠의 힘을 이어받은 자가 무한한 힘을 가진 그대를 부르나니, 그대 밤의 영혼을 나와 나눈 자들이여, 어둠의 형제의 부름에 답하라...!)" 랜스의 발밑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간신히 느낄 수 있는 미동이었으나, 말들은 웬일인지 당황하고 겁에 질려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스트라본의 웃음소리가 그의 외침과 함께 들려왔다. "하하하, 랜스 경, 검도 들어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은 싫겠지? 좋아, 실컷 싸우다가 죽게 해 주지! 내 어둠의 형제들을 만나 보라고!" 발 밑의 진동은 더욱 거세어졌다. 그리고 이윽고 땅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더니, 그 속에서 굵은 나무뿌리 같은 것들이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미치 거대한 뱀처럼, 말의 다리를 잡고 흔들어 쓰러뜨렸다. 랜스는 말이 쓰러지는 순간, 간신히 뛰어내려 땅에 착지할 수 있었다. 말들은 그 나무 뿌리에 질질 끌려가 땅 속으로 사라졌다. 마지막 말 한 마리가 사라지자, 나무 뿌리들은 이제 인간들 쪽으로 뻗어 왔다. "맙소사... 저게 뭐죠?" 아까 도망치려 했던 어린 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랜스에게 물었다. 랜스는 그를 흘끗 돌아보았다. 로이보다 두어 살 많을까 말까한 소년이었다. "뭔지는 알 도리 없지... 하지만 제대로 된 빛의 종족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군." 여러 개의 나무 뿌리가 랜스에게로 스멀스멀 뻗어 왔다. 어린 기사는 새피랗게 질려 마구 칼을 휘두르다가, 나무 뿌리에 팔이 잡혀 버렸다. 나무 뿌리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한 힘으로 그를 잡아당겼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발을 땅에 박았으나, 별 소용도 없이 움푹 파인 구덩이를 향해 질질 끌려갔다. "정말 보기 싫은 괴물이군!" 랜스는 과함을 지르며 칼을 휘둘러 나무 뿌리를 싹둑 잘라 버렸다. 보기보다 단단하고 탄력이 있는 그 뿌리는 잘 베어지지 않았으나, 어쨌든 두 뿌리가 베어지고 어린 기사는 풀려나서 재빨리 랜스 곁으로 달려왔다. 랜스는 그와 나무 뿌리 괴물 사이를 막아 서며 물었다. "도대체 이런 전투에 몇 번 와 본 거야?" "연습은...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진짜 전투는..." '맙소사, 폐하는 어쩌실 생각으로 이런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 거지!' 그러나 랜스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군사가 부족했던 것이다. 아트웰의 저항을 끝으로 40년 동안 이어진 '평황의 시대'. 그러나 그것은 말 뿐이었다. 레일라의 말이 옳았다 - 그것은 결코 평화의 시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북쪽으로는 오르크 족을 위시한 마족들의 공격, 각지에서 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과 폭동... 그들은 사실 수없이 많은 군사들이 죽어가는 전란의 시대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잘라진 나무 뿌리에서는 피같은 수액이 악취를 내뿜으며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잘라진 부분에서 새로운 뿌리가 돋아났다. 랜스와 기사들은 아연실색하여 색깔이 좀 연한 새 뿌리가 잘라진 부분에서 꿈틀꿈틀 기어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괴물이군...!" 랜스는 중얼거리며, 계속 새로 생겨나 꿈틀거리며 기어오는 뿌리들을 헛되이 칼로 쳐냈다. 랜스의 팔놀림이 빨라지는 만큼, 새 뿌리가 생겨나는 속도도 빨라졌다. 어린 기사는 계속 랜스의 뒤에서, 간신히 기어오는 뿌리들을 피하고 막아 내며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다른 기사들은 저마다 자신의 몸을 지키기에 바빠서 남을 상관할 틈이 없었다. "으악!" 비명이 랜스의 귓전을 때렸다. 한 기사가 칼도 놓친 채, 칼과 다리가 꽁꽁 묶여 뿌리 괴물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랜스는 급한 김에 그에게로 달려 가, 간신히 삐져나온 그의 왼팔을 꽉 잡고 끌어당겼다. 그러나 오히려 랜스까 지도 질질 끌려갈 뿐이었다. 그 기사를 잡고 있는 뿌리들을 잘라내려 했으나,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다른 뿌리들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랜스까지 얽으려 달려들었던 것이다. 랜스는 그들을 막고 잘라 내며 서서히 움푹 패인 구덩이 쪽으로 끌려갔다. "이런 세상에... 이조넬이시어..." 기사가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뿌리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는 랜스의 정신을 구덩이에 집중시켰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구덩이에 가까이 와 있었으므로, 그는 당황했다. 구덩이는 생각보다 휠씬 컸고, 왠지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숨을 쉬듯이... 랜스는 아직 그 구덩이의 안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뿌리에 묶인 기사는 그 안을 들여다 보고는, 소리를 지르며 랜스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안 돼!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랜스는 있는 힘을 다해 그 기사의 팔을 잡아당겼다. 구덩이가 서서히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것은 이미 구덩이가 아니었다. 그것이 위로 솟아오를수록 흙은 점점 떨어져 나갔고, 썩은 나무껍질 같은 피부가 드러났다. 그것은 커다란 입이었다. 주둥이가 길고, 그 끝에 보기싫은 이빨 들이 수없이 달려 있는... "맙소사... 이건 또 뭐지?" 랜스가 놀라 멍한 틈을 타서, 그 괴물의 일부분인 뿌리들은 랜스의 다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랜스는 그것이 자신의 발목에 닿는 순간 칼로 힘껏 쳐내 버리고는, 그 기사의 팔을 얽어 맨 뿌리 중 하나를 간신히 잘라냈 다. 그래봤지 어차피 금방 재생된 뿌리들이 다시 달려들고 있기는 했지만... 뿌리 하나가 갑자기 랜스의 발밑에서 솟아올랐다. 랜스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것이 자신의 발목을 묶는 것을 느꼈다. 그는 쿵 하고 땅바닥에 넘어졌다. 벌써 그의 발은 새로 생긴 구덩이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안간 힘을 써서 구덩이 밖으로 나오며, 발목을 잡고 있던 뿌리를 베었다. 악취 나는 수액이 그의 갑옷에 뚝뚝 떨어지자, 갑옷은 부식하기 시작했다. "도와 줘요. 날 죽게 내버려 두지 말아!" 그의 팔을 꼭 잡은 기사가 울부짖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랜스도 그를 도와 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가 쓰러진 틈을 타 뿌리들이 마구 달려 들고 있었던 것이다. 정신 없이 칼을 놀리는 랜스의 곁에서,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렸다. 랜스는 깜짝 놀라 얼른 그 기사를 끌어당겼다. 너무 괴물의 입 쪽에 가까이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괴물의 입은 불쑥 튀어나와, 둘을 향해 돌진해 왔다. 랜스는 기사의 팔을 잡은 해 있는 힘껏 뒤로 물러났다. 그 입은 랜스가 물러난 자리까지 미치지는 못했다 - 그러나 그 기사가 있는 곳까지는 갈 수 있었다. "으아아악! 살려 줘!" 아까보다도 더 끔찍스러운 비명과 함께, 그 기사의 몸은 괴물의 악취나는 입 속으로 단번에 없어졌다. 싹둑 잘려진 왼팔만 랜스의 팔을 움켜 쥐고 남은 채. 랜스는 그 팔을 떨쳐 내고는 뒷걸음질 쳤다. 땅은 아까보다도 더욱 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괴물의 입은 더욱 비죽이 솟아나왔다 - 그것은 눈도 코도 귀도 없이 입만 달린 얼굴이었다. 거대한 입이 목 위에 불쑥 튀어 나와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돼! 살려줘!" 비명 소리와 함께, 아까 랜스가 구해 준 어린 기사가 뿌리에 묶인 채 끌려가고 있었다. 그 소리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랜스가 얼른 그에게로 뛰어갔으나, 그가 가까이 다다르기도 전에 그 어린 기사의 몸도 괴물의 입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더러운 괴물!" 랜스는 소리치며, 괴물의 입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괴물은 굳이 피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랜스를 집어삼키려 했다. 그의 칼이 입에 닿아 상처를 내자, 움찔하며 반사적으로 물러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상처도 새 뿌리가 돋아나듯 쉽게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입은 다시 그에게로 다가 왔다. "스트라본! 이 비열한 자식!" 랜스는 성 위를 바라보며 욕을 해댔지만, 스트라본 왕자는 만족스런 미소만 지은 채 아래의 결투를 주시할 뿐이었다. 마치 즐거운 게임이라도 즐기듯이. 그보다 랜스는 더 이상 떠들어 댈 처지가 아니었다. 사냥감이 둘로 줄어들자, 뿌리들은 더욱 더 맹렬히 공격해 왔다. 랜스는 점차 몰리기 시작했 다. 뿌리의 수는 너무 많았다. 게다가 아무리 잘라 내도 새 뿌리가 돋아났다. 그와 나머지 한 기사는 지치고 있었다. 이미 마지막 남은 기사도 뿌리에 한 쪽 발목과 허리를 잡혀 있었다. 얼마 후 뿌리들은 그의 온 몸을 감쌌고, 그는 칼을 떨어뜨렸다. 랜스는 안타 까운 심정으로 그가 처한 상황을 힐끗힐끗 보기만 할 뿐이었다. 랜스 역시 발목을 뿌리에 잡힌 채 질질 끌려가며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발목을 잡히자 다른 한 쪽 다리를 잡히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랜스는 다시 넘어졌다. 얼른 뿌리들이 달려들어 그의 목과 팔, 허리를 묶으려 들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칼을 휘저었으나, 오히려 그것이 상황의 악화를 초래했다. 마구 휘젓던 칼이 뿌리에 콱 박혀 버렸고, 그 뿌리가 휙 몸을 젖히자 칼은 랜스의 손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곳에 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결국 저 교활한 마법사 따위한테!' 괴물의 입에게로 점점 가까이 끌려가며, 랜스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갑자기 유리가 깨지는 소리 같은 것이 귀를 채우고, 괴물이 타격을 입은 듯 움찔하기 전까지는. 괴물은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의 뿌리같은 발들 도 모두 일시적인 마비 상태에 빠져들었다. 랜스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본능 적으로 뻣뻣해진 뿌리들을 헤치고 도망쳐 나왔다. 땅에 꽂힌 그의 칼이 멀리서 보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칼로 달려갔다. 그가 칼을 잡아 든 순간, 이미 마비 상태에서 벗어난 뿌리 하나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이 랜스를 잡아 끌어 쓰러뜨리기 전에, 그가 먼저 칼을 휘둘러 그것을 끊어 버렸다. "또 너의 방해로군, 요정 아가씨..." 스트라본이 성곽 위에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데이미아는 하얀 로브와 평범해 보이는 나무 지팡이 차림으로, 랜스의 뒤로 와서 섰다. 그리고 스트라본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당신의 결계는 내가 깨뜨렸어요. 이 세계의 빛과 공기에 노출되었 으니, 당신의 괴물은 곧 죽을 겁니다." 데이미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괴물 쪽을 돌아보았다. 과연 그것은 힘을 비틀거리고 있었다. 뿌리들은 기운이 빠진 채 쭈그러들어 땅 위를 스멀스멀 기고 있었다. 그러나 랜스가 방심하고 칼을 꽂으려는 순간, 갑자기 한 뿌리가 맹렬하게 그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그것을 베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더 많은 수의 뿌리들이, 더 빠르고 기운찬 모습으로 그들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오르멜 아스틸라스! 플리인 아스!" 데이미아가 다급하게 외치며 지팡이를 쳐들자, 돌진하돈 뿌리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라도 부딪힌 듯 더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지팡이에서는 희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흠... 마법의 방패인가. 제법이군." 스트라본은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내가 불러내는 괴물이 평범한 것을 줄 알았다면 오산이야. 물론 곧 죽을 거란 말은 사실이야. 하지만 바로 '내' 힘을 빌어 이 세계에 온 녀석이니, 적어도 두어 시간은 버틸 수 있을 걸. 하지만 너희들이 그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계속) --------------------------------------------------------------------- * 용의 신전을 한꺼번에 받아 보고 싶으신 분은 환동 자료실로 가세요^^ go fan의 5번의 1번방... li radagast하면 용의 신전 제 2부 제 1장까지 받으실 수 있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하하... 제가 물론 올려야지요...^^; Tip! 스트라본은 24세, 데이미아는 43세인데 왜 데이미아가 더 못 싸우고, 어린애처럼 보일까요? (외모가 아니라 싸우거나 말하는 데서도...) 그것은 육체적 성장 속도와 정신적 성장 속도, 그리고 학습 속도가 거의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빨리 자라고 빨리 늙는 만큼, 빨리 배우기도 한다는 것!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족은 멸종했게요^^; 따라서 데이미아는 몸도 마음도 인간족의 15세 수준 입니다. 마법은... 워낙 소질이 있어서 좀 예외적입니다만... 잠깐! 하지만 로이도 15세인데 왜 데이미아보다 한참 어린 거 같지? 그건요~ 로이 성격이 원래 그렇기 때문이에요 (어른이 되어도 별 변화가 없을 겁니다... 나이에 관계 없어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쳇! 잘난 척 하긴...!" 데이미아가 비위에 거슬린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여유도 스트라본이 주문을 외우기 전까지만이었다. "케멜페이 넬 푸린 니드헨 라히니!" 짧은 주문이었으나 데이미아는 그 안에 들어간 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데이미아의 지팡이에서 나오던 빛은 순식간에 엷은 연기를 내면서 사그라들었고, 지팡이는 하얀 잿더미가 되어 그녀의 손에서 흘려내렸다. 뿌리들의 공격을 막고 있던 그녀의 마법 방패도, 물론 사라져 버렸다. "어...!" 데이미아가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뿌리들이 그녀와 랜스를 향해 들이닥치고 있었다. 뿌리 하나가 그녀의 목을 잡아 챘고, 랜스가 얼른 그것을 칼로 끊어 버렸다. 이번에는 랜스 혼자서 뿌리들을 상대로 싸우고, 데이미아는 그의 뒤에 숨어 있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것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쳇! 주문이야 또 걸면 되지! 이번엔 좀더 강력한 것으로... 로 타냐헨 페이, 페이 라시에나스 데인 훼로드 모엔...(태초의 힘이어, 오랜 시간으로부터 온 생명의 힘이여...)" 그러나 스트라본은 그녀가 주문을 완성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는 성곽 위에서 그녀를 흘끗 보더니, 짧게 한 마디를 던짐으로써 그녀의 시도를 무산시켜 버렸다. "제레이드 우클라드!" 순간 세찬 바람이 데이미아의 몸을 날려 버렸다. 그녀의 몸은 붕 떠서 성곽에 쿵 부딪힌 다음,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그녀는 신음하며 부딪힌 머리를 손으로 문질렀다. 주문 따위는 기억에도 없었다. 멀리서 랜스가 혼자 뿌리 모습의 괴물들과 싸우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얼른 일어서 그에게로 달려가려 했으나, 갑자기 키가 큰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막아 섰다. 어느 새 내려왔는지, 스트라본이 그녀의 앞을 막고 서 있었다. "그대는 라스헨 에이니드라지? 그런데 왜 압제자의 편을 드는 건가?" 스트라본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미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대답 따위는 애당초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요정족을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다. 이건 인간들끼리의 전쟁, 그대의 종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우리는 우리끼리 싸우게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나도 그대에게 해를 입힐 필요가 없을테니." "...랜스는 내 친구에요!" 데이미아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사실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 마디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도 이제 복잡해질 대로 복잡해져 있었으니까. 그러나 랜스는 지금까지 여행을 함께 해 온 친구라는 것, 그리고 비록 그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친구를 위기의 순간에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라도 변하지 않을 진리였다. 적어도 데이미아에게는 그랬다. 스트라본은 그녀의 대답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 데이미아의 발 아래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뿌리 세 개가 갑자기 솟아 나왔다. 도망칠 새도 없이, 그 뿌리는 데이미아의 다리와 팔, 허리를 얽어매었다. "뭐하는 거야! 놔 줘!" "걱정 마라. 너를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그냥 네 친구를 해치울 때까지만 네가 방해 못하도록 막으려는 것 뿐이야." "이 악당! 날 놔달란 말야!" 데이미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곧 뿌리의 끝이 그녀의 입까지도 막았으므로 조용해 질 수밖에 없었다. 스트라본은 조롱하는 듯한 미소를 보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랜스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지치셨군. 싸우기가 힘드나? 내가 싸움을 빨리 끝낼 수 있도록 도와줄까?" 그를 본 랜스는 지체 없이 검을 휘두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칼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랜스는 칼로 방패를 세게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보이지 않는 방패가 스트라본을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스트라본은 미소를 지으며 비틀거리는 랜스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가 불러 낸 괴물 뿌리들에게 명령했다. "죽여라." 뿌리들은 이미 얼마 전보다 더 가늘고, 더 쪼글쪼글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맹렬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마지막 빛을 발하려는 듯 더욱 맹렬해져 있었다. 랜스가 아무리 칼을 휘둘러도 혼자는 무리였다. 곧 그는 칼을 잃은 채, 데이미아와 똑같은 꼴로 뿌리에게 잡혀 버렸다. 스트 라본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자아, 내 어둠의 형제여, 명령한다. 이 자를 네 뜻대로 해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뿌리들은 랜스를 땅에서 솟아 오른 입을 향해 가져갔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 입으 먹성은 줄어들지 않는 모양인지, 그것은 이상한 검은 빛을 띈 침까지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막 랜스를 집어 삼키려는 순간, 갑자기 환한 빛줄기가 그것의 입 안으로 들어가 머리를 꿰뚫었다 - 그것도 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괴물은 머리도 뿌리도 먼지가 되어 스러져 내렸다. 랜스는 다시 한 번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정말 귀찮은 요정이로군. 이렇게 되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겠어!" 스트라본이 데이미아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어느 새 뿌리에서 풀려난 데이미아는 새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로이가 장검을 든 채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로이가 그녀를 감고 있던 뿌리를 잘라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검을 쥔 손을 달달 떠는 로이의 모습은 소녀를 구출하는 기사와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의 발언도 마찬가지였다. "야... 저사람 화났나봐. 어떻게 하지?"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넌 내 뒤에 숨어 있어!" 데이미아는 이렇게 말하며 용감하게 지팡이를 치켜들고 스트라본에 게로 걸어갔다. "미안하지만 당신 상대는 나야. 감히 날 꽁꽁 묶어두고 구경만 하게 만들려 하다니, 나도 더 이상은 안 참는다고!"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골치아프군." 스트라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짧게 주문을 읊었다. 3"케레우 우클라드, 타냐헨 테이리스 에일 퀘이드 페이! (어둠의 누이여, 사악한 힘을 가진 태고의 종족이여)!" 다음 순간 로이와 데이미아의 앞을 막아선 것은, 스트라본의 말대로 별로 선한 것과는 관계가 있어 보이지 않는, 다시 말해서 '사악해' 보이는 생물이었다. 그것은 - 아니, '그녀'는 새와 인간의 중간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키는 보통 남자보다 머리 둘 쯔이 더 컸고, 등에는 날개가 돋아나 있었으며 손과 발 대신 새의 발톱이 달려 있었다. 넝마조각 같은 것을 걸친 몸매는 흠잡을 데가 없었고, 헝클어진 금발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객관적으로 보면 미녀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그 표정이 너무 표독스러워 보여서, 어떤 남자라도 저 얼굴을 보기보다는 차라리 부드러운 표정의 추녀를 평생 보는 것을 원하리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데이미아... 저게 뭐야?" 3로이가 질겁을 하고 속삭여 물었다. 데이미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태초의 전쟁 때의 하피의 모습 같은데. 저런 걸 저렇게 힘도 안 들이고 불러내다니..." "자, 그럼 내 어둠의 누이와 잘 놀아 보라고! 나는 랜스 경과 볼일이 있으니!" 스트라본은 경쾌한 목소리로 외치고는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버렸다. 랜스는 그가 괴물을 소환하는 도중에도 몇 번씩이나 그를 공격하려 했으나, 보이지 않는 방패 때문에 그 자신만 지칠 뿐이었다. 비로소 랜스를 돌아본 스트라본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주문을 읊었다. "갈 페이 오니드 ㅋ라, 렐 오나우클 ㅋ라 카이노인 디, 디 휘일린 모엔 온 타냐, 드리인 티엔 디 넬리나드... (빛보다 먼저, 어둠보다 먼저 존재하는 힘, 그 힘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니 태초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내가 원하는 형상을 취하리라...)" "맙소사, 저건 변신 주문 아냐! 저걸 완성하기 전에 막아야 해!" 데이미아가 스트라본 쪽으로 뛰어들려 했으나, 순간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새 여인이 두 번 다시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그녀의 앞을 막아 섰다. 그리고 할퀴기라도 하려는 듯, 보기 싫은 새의 발 모양의 손을 마구 내저었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소리를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어... 어떡하지, 우리를 저기로 보낼 생각이 없나 봐!" "당연하지. 로이,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내가? 왜?" "너한테 칼이 있잖아!" "말도 안 돼. 네가 더 잘 싸우잖아!" 로이와 데이미아가 이런 한심한 다툼을 하고 있노라니, 새 여인은 황당한 듯, 멀찌감치 서서 둘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기다리는 것보다는 공격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는지, 갑작스럽게 괴성을 지르며 둘에게로 덮쳐왔다. "캬아아아!" "으아아악!" 새 여인의 고함과 로이와 데이미아의 비명 중 어느 것이 더 끔찍 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둘 중 누가 더 재빨리 몸을 피했는지도. 어쨌든 새 여인이 부지런히 쫓아 돌아다녔으나, 로이에게도 데이미아에게도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자신의 조상들이 이토록 고전하는 모습을 보았더라면 하피들은 마음이 아파 죽어버렸을느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랜스는 그들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그의 앞에서, 스트라본은 거대한 괴물 새으로 변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몸집이 사람 키의 두 배는 되고, 날개는 각각 몸 질이의 두 배이고 발콥과 뿌리는 무섭게 크고 날카로운, 독수리를 닮은 모습의 새였다. 그러나 그 깃털은 타오르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부리를 열자 그 입에서는 불길이 뿜여져 나왔다. "으악!" 랜스는 불길을 피하기 위해 몸을 굴리며 길을 비켰다. 그러자 그 새는 무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라, 랜스는 물론 에스테이아 군 전체에 마구 불길을 쏟기 시작했다. "와! 멋지다..." 로이가 멍청하게도 그 모습을 보고 감탄하자, 화가 난 데이미아가 마법 지팡이로 그의 머리를 확 후려쳤다. "아얏! 왜그래!" "바보야, 넌 사람들이 죽는데 멋지다는 소리가 나오니?" "그... 그래도 그렇게 무식하게 때리다니..." 그러나 오래 싸울 시간은 없었다. 그들에게도 열심히 때라오는 새 영인이 붙어 있었으니까. 로이와 데이미아는 열심히 도망치며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저러다가 랜스가 지겠네. 데이미아, 무슨 방법 없어?" "저 괴물을 따돌려야 방법이 생각나든 말든 하지! 로이, 네가 어떻게 좀 해 봐!" "날더러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 칼 줘 봐!" 데이미아는 이렇게 소리치며, 전혀 칼을 줄 의사가 없는 로이의 손에서 억지로 칼을 빼앗았다. 그리고는 열심히 달려가며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갈 페레이타 하라스 레이시나드, 우네이스 베일라두이 헤이스... (저승을 다스리는 페레이타, 그 누구보다 공정한 심판자의 이름으로...)" "...너 뭐하니? 뛰면서." 로이가 반은 걱정되고 반은 우습다는 표정으로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주문만을 열심히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주문이 완성되자, 칼은 은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름답지만 왠지 싸늘한 푸른 빛이었다. "자! 로이." 하고 데이미아는 로이의 손에 칼을 쥐어 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법을 걸었어. 이제 이걸로 뭘 베든, 상처라 몇 배로 깊어질거야. 그러니 네가 어서 이걸로 저 못생긴 새인지 여자인지를 베라고!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입힐테니." "싫어! 저... 여자인지 새인지한테 가까이 가기만 해도 내가 중상을 입을 거라고! 네가 싸워!" "말이 많군! 검술을 배운 건 너야, 로이!" 어쨌건 언제까지나 싸움만 할 상황은 아니었다. 높이 날아오른 새 여인은 곧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달려들었던 것이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흩어지며 그 괴물 여인 만큼이나 기괴한 비명을 질러 대며 도망쳤다. 그래도 로이는 칼을 휘두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침내 로이가 한 병사의 시체에 걸려 넘어지고, 새 여인이 그런 그의 몸 위로 덮쳐 올때서야, 로이는 자신의 손에 칼이 쥐어져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저리 가! 저리 가!" 로이는 마구 칼을 휘두르며 농부 참새 쫓듯 그 괴물 여인을 쫓으려 했으나, 그런다고 그녀가 갈 리 없었다. 그 괴물은 조금 물러섰다가 발톱(혹은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더욱 가까이 달려들었고, 로이는 교묘하게도 그 모든 팔과 다리를 비켜 가며 칼을 휘둘렀다. "으이그..."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며, 도망가던 방향을 바꾸어 로이와 새 여인 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짧은 주문을 외며 지팡이를 새 여인 쪽으로 겨누었다. "아일룬!" 금빛으로 빛나는 불덩이가 새 여인에게로 돌진했다. 정신을 충분히 집중하지 않아서, 인간이 맞더라도 치명상을 입을 수는 없는 크기의 작은 불덩이였다. 그러나 그것이 새 여인의 등에 맞았을 때, 그녀는 듣기 싫은 비명을 지르며 데이미아 쪽을 확 돌아보았다. 고통 때문이라기보다는 분노 대문인 것처럼 보였다. "이 때다!" 로이는 새 여인의 등을 향해 힘껏 칼을 휘둘렀다. 엘먼 왕자에게서 배운 자세를 기억해 내면서. 칼은 새 여인의 등을 길게 가르며 지나갔고, 가득이나 깊은 상처에 데이미아의 마법까지 동원외어 그 괴물의 몸은 아예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본 로이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그는 데이미아가 있는 쪽으로 도망치듯 달려오며 투덜거렸다. "윽... 데이미아! 너 어떻게 이런 무지막지한 마법을 쓸 수가... 으으... 싫다..." "뭐야? 나 덕분에 목숨을 건졌으면서. 넌 은혜도 모르니?" 데이미아도 로이 쪽으로 달려오면서,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은혜를 모르는 게 누군데. 내가 널 그 뿌리들한테서 구출하러 달려 오지 않았으면 너랑 랜스는..." "캬아아악!" 낯익은 괴성이 그들의 다툼 사이로 비집고 들어왔다. 로이와 데이미 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아까의 새 여인이 쓰러진 곳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로이가 처치한 새 여인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서서, 지금이라도 그들에게로 날아 올 듯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계속) --------------------------------------------------------------------- * 오늘은 좀 많군요. 오랜만에 로이와 데이미아의 합동 전투... 역시 로이가 나오면 분위기가...^^; 용의 신전 수정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르크자엘 편을 완전히 새로 덧붙여야 하기 때문에 제 2장부터 콱콱 막히는군요... 에이, 쓰던 거나 열심히 써야지...^^;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PS.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비상하는 매... 역시 명작이란 이런 것이로군요! (요즘 추천이 붐이길래 써 봤습니다. 어서 자료실 가서 li 휘긴 하세요^^) 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식간에 멀쩡해진 그 괴물을 바라보았다. "야아... 정말 신기하다..." "로이! 너 도대체 오늘 왜 이러니?" 데이미아는 이번에는 로이의 정강이를 걷어차며 말했다. "저건 아무래도 스트라본의 마력(魔力)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인간 중에서 그런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스트라본의 마력이 소진되지 않는 한 저건 아무리 죽여도 계속해서 살아날 거란 얘기야. 내가 대책을 세울테니까, 로이, 넌 어서 가서 저걸 막아!" "에? 하지만 다시 살아날 거라며!" "검술 연습 한다 생각하고 싸워!" "으아아아, 이 돌팔이 마법사..." 데이미아는 로이를 달려드는 새 여인 쪽으로 확 밀어냈다. 로이는 사실 아까의 싸움으로 자신을 얻은 터라, 이번에는 제법 싸우는 것 비슷하게 칼을 휘둘렀다. 켈리와 엘먼 왕자가 가르쳐 준 것들을 떠올리려고 애쓰면서. 그의 검술은 엉성하기 작이 없었으나, 아까의 일로 그의 칼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새 여인은 대담히 공격하지 못하고 주위를 뱅뱅 돌았 다. 덕분에 데이미아는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스트라본을 쓰러드리면 저것도 죽겠지. 하지만 어떻게 스트라본을 스러뜨린담?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데이미아는 착찹한 심정으로 거대한 새의 모습을 하고 랜스와 싸우 고 있는 스트라본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보기에도 랜스가 몰리고 있다는 것이 뻔했다. 일단 크기에서 저토록 차이가 나니... '스트라본을 한 번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건 상황이 달랐어. 그 땐 그도 방심하고 있었고... 거의 요행이었지. 게다가...' 데이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흑마술의 부작용을 되돌리는 주문. 그것은 데이미아에게도 힘겨운 마술이어서, 만약 실수라도 한다면 자신은 물론 로이 와 랜스까지 위험에 빠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정말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만약 성공한다면...? 그러면 스트라본은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는 지금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내부에는 그녀의 마법으로 인한 타격이 가시지 않은 것은 아닐까? 휘일리엔(되돌림)의 공격을 두 번씩이나 받고도 멀쩡히 살아난다는 것은 마왕에게도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는데... '스트라본의 말대로, 라스헨 에이니드가 압제자의 편에 서고, 개인적 인 이유로 한 인간을 죽게 만든다는 건...' "데이미아! 어떻게 좀 해 봐! 이게 자꾸자꾸 살아나!" 로이가 거의 울상을 짓고 소리치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마음을 굳혔다. 그녀는 랜스에게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조금만 더 버텨! 로이! 이제 곧 없어질 거야!" "어떻게 더 버텨!" 이제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로이는 칼은 아예 칼집에 꽂고 열심히 도망가며 소리쳐 항의했다. 그러나 이미 랜스 쪽으로 달려가는 데이미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랜스의 상황은 멀리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나빴다. 켈리와 이즈, 툴위그, 데이미아, 로이, 그리고 그가 모두 힘을 합쳐서 싸웠을 때에도 간신히 이겨 낸 스트라본이었다. 비록 마력(魔力)의 일부분을 로이와 싸우는 새 여인에게 넘겨 주고 있다고 해도, 스트라본 한 사람을 랜스 혼자서 감당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스트라본의 모습은, 입에서는 불을 뿜고 날개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괴물 새의 모습이 아닌가. 새는 다시 입에서 불을 뿜었다. 이미 그을을 대로 그을은 시체 틈을 굴려, 랜스는 간신히 통째로 구워지는 것을 면했다. 그러나 그가 오는 방향을 예상하고 있었던 듯, 새의 날개에 달린 발톱이 그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내리쳐졌다. "윽!" 9 랜스는 비명을 억누르며 간신히 뒤로 물러섰다. 왼쪽 어깨에서 뜨거운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스트라본의 날개에 자그마한 상처 하나를 낼 동안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랜스였지만, 이번 상처는 가장 심했다. 왼쪽 팔을 거의 움직일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새의 눈이 비웃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 눈만은 스트라본의 싸늘한 푸른 눈 그대로였다. 랜스는 오른손만으로 칼을 단단히 잡았으나, 칼의 무게 때문에 한 손으로는 정확히 겨냥할 수조차 없다는 것은 그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스트라본은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카하렐리 에디오스, 키냐헨 모디엘 레이시나드! 웨이닌 딤 로페이! 갈롬 웨이닌 딤 제레이드, 웨이 티리드 팔레인! (눈을 다스리는 정령의 여왕, 카하렐리여! 그대의 힘을 내게 내리소서! 그대의 이름으로 태양조차 얼릴 바람을 내리소서!)"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울려퍼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강한 바람이 랜스와 스트라본에게로 들이닥쳤다. 휘몰아치는 얼음조각이 섞인 바람은 아트웰의 눈보라 따위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랜스는 다만 스쳐가는 바람을 맞았을 뿐인데도, 몇 발짝 뒷걸음질을 치다가 결국 쓰러져 버렸다. 그러니 그 공격을 정통으로 받은 스트라본, 아니 스트라본이 변한 괴물 새가 훌쩍 날아가, 눈 속에 쳐박혀 떨어진 것도 놀랄 일이 아니었다. 데이미아는 달려오며 쉬지 않고 다음 주문을 외웠다. "갈 페이 오니드 ㅋ라, 렐 오나우클 ㅋ라 카이노인 디, 헤이스 드리인 지엘드 티엔! (빛보다 먼저, 어둠보다 먼저 존재하는 힘, 그 힘의 이름으로 선언하노니, 모든 존재가 그 본모습을 취할지어다!)" 그녀의 지팡이가 차가운 태양처럼 빛을 발했다. 그 빛은 헤엄치듯 스트라본에게로 날아가, 거대한 그의 몸 전체를 감싸는 반구(半球) 모양이 되어 빛났다. 그리고 그 크기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이윽고 스트라본의 모습이 보일 만큼 빛이 사그라들었을 때, 그 자리에는 괴물 새가 아닌, 하얀 로브를 입고 금발을 휘날리는 인간 모습의 스트라본이 서 있었다. 무섭게 이글거리는 눈을 한 채. "또 방해인가!" 스트라본의 목소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런 그의 목소리에서, 불같이 화가 난 고함보다도 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무의식중에 뒤로 물러섰다. 이미 너무 마력을 소모한지라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단 하나의 주문을 외울 힘만 남아 있었다... 단 하나, 가장 치명적인 주문만을. "그대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알 것 같군. 안 그래?" 스트라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그는 쓰러진 채 일어나려 기를 쓰고 있는 랜스의 앞을 지나쳐, 데이미아의 코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그에게서 자신에 대한 증오의 표정을 찾으려 했다 - 그 일에 성공한다면 적어도, 자기 자신의 보호를 위해 그를 쓰러드렸다는 변명이라도 나올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스트라본의 눈에 증오는 없었다. 그의 눈에 불타고 있는 것이라고는 의지, 그리고 갈망밖에 없었다. 그가 흑마술에까지 손을 뻗칠 수밖에 없이 만들었던, 그의 나라, 그의 형의 나라, 그들이 다스릴 나라에 대한 갈망. 데이미아는 그의 갈망의 크기를 비로소 눈치챘다. 그는 보통 인간들 이 그러하듯이 흑마술에 정신을 잠식당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강한 것이 그의 마음을 잡아 두고 있었으니까. 그 갈망이 그의 마음을 잠식 했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의 마음을 보호했다고 해야 할지 데이미아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타락한 흑마술사가 아니었다. 그는 흑마술을 이미 자신의 정신력 아래에 두고 있었다. "의도를 알 만 하군, 어린 요정족의 마법사." 하고 스트라본이 조용히 말했다.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는 기사들과 병사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가고, 아트웰의 눈이 점점 사납게 퍼붓는 가운데, 둘은 마법사 대 마법사로서, 마치 오랜 친구처럼 서 있었다. 스트라본은 그녀에게 조금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 데이미아가 환각을 본 것이 아니라면. 그는 말을 이었다. "그대는 아직 나를 쓰러뜨릴 만한 마력이 없어. 앞으로 십 년쯤 후라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경험이 부족해. 그러니 내 힘을 역이용 해서 나를 쓰러뜨리는 수밖에 없겠지... 그 때처럼." 데이미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전혀 나무라는 어조가 아니었다. "나는 비난하지 않아. 그대가 한 일은 비난받을 것이 없는 일이었어. 오히려 그것을 예상하고 피하지 못했던 내가 비난받아야지. 마법사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자신의 모든 마력(魔力)과 기술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지. 그것이 에누인의 가르침이지... 안 그런가? 라스헨 에이니드여, 나는 에누인의 가르침대로 행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라도 싸울 거야. 그대를 죽이는 것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대를 죽일 수 없어. 그대의 친구, 랜스 경의 목숨만을 원할 뿐이다. 그대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 나는 비난할 귄리가 없다. 그대가 옳다고 생각되는 바를 행해야 하겠지... 나를 죽여서라도 막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면, 부디 그렇게 하기를." 스트라본은 잠시 말없이 데이미아를 내려다보았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을 지키는 두 사람의 눈빛은 너무나도 달랐다. 스트라본의 눈에는 확신이 있었다. 데이미아는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반면, 그녀 자신의 눈은 혼란에 빠져 있을 것임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스트라본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랜스를 돌아보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 랜스는 칼을 들고 금방이라도 그를 공격할 듯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 그의 힘이 허락하기만 한다면. 이미 잔뜩 피를 흘린 그의 얼굴은 쌓인 눈처럼 창백했다. "죽어라, 반역자...!" 랜스는 있는 힘을 다해 칼을 들어올리고 스트라본을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주문조차 읊지 않고, 한 손을 들어올려 약한 마법 방패를 만들어 냈다. 지금의 랜스를 막기에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끝인 것 같군, 랜스 경." 그는 한 발짝, 랜스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의 손 안에 검은 불꽃이 서서히 형체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몸을 떨었다. 지금의 랜스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직 마력이 남아 있었다. 스트라본 의 흑마술을 역행시킬 수 있는 마력과 정신력이. 그러나...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라. 그대의 모든 마력과 주술을 동원하여.' 어머니에게서 몇 번이나 외우도록 요구받은 문장이었나. 그냥 외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 속에 새기라고 하셨지. 스트라본을 해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그럼으로써... '압제자를 돕는' 것이? "틸리엔 데인 에누인... 티리아디 이디나드... 니드 데인 아스틸라... (태양처럼 밝은... 에누인의 지혜여... ...아스틸라의 빛이여...)" 짧지만 강력한 주문, 그만큼 짧은 시간에 정신의 집중을 요구하는 주문. 그러나 그 주문은 데이미아의 입안에서만 맴돌았고, 정신은 떠나 있었다. 옳은 일일까? 옳은 일. 압제자를 돕는 것이... "아일룬 하디미라스!" 데이미아는 중도에 주문을 포기하고,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주문을 외쳤다. 금빛 불공이 스트라본을 향해 날아갔으나, 스트라본은 그것을 흘끗 보고 한 손을 들어올림으로써 중간에 터뜨려 버렸다. 불덩이, 바람, 번개, 모든 것이 잠시동안 스트라본의 정신을 흐트러 놓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트라본의 마법은 점점 완성되어 가고 있었다... 커다란, 암흑의 불길. '안되겠어...!' 데이미아는 그제서야 머뭇거리던 주문을 외웠다. "틸리엔 데인 에누인, 티리아디 이디나드! 니드 데인 아스틸라, 헤인헨펠 브레이나드! 프라딘 퀘이드 페이! (태양처럼 밝은 에누인의 지혜여! 만물의 길을 지키는 아스틸라의 빛이여! 온전치 못한 힘을 벌하소서!)" 그러나 주문은 완전하지 못했다. 데이미아는 이미 쓸데없는 주문으로 마력을 너무 소진한 상태였고, 가물거리는 정신으로는 집중도 될 리 없었다. 데이미아는 지팡이로 몸을 간신히 지탱한 채, 흐려지는 초점을 맞추어 랜스와 스트라본을 보려고 했다. 두 사람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랜스는 무릎을 꿇고 칼을 지팡이 삼아 일어서려 애쓰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쉴새없이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스트라본은 좀더 수월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조금 창백하고 어깨 부분에 피가 배어나와 있을 뿐, 거의 멀쩡해 보였다. "데이미아! 랜스!" 로이와 툴위그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 같았다. 스트라본은 그녀를 흘끗 바라보더니, 그 자리에서 연기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로이의 손이 그녀를 잡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툴위그가 랜스를 부축하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괜찮아? 데이미아?" 로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전을 맴돌았다. 데이미아는 눈물이 쏟아지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고, 마지막 힘을 모아 말했다. "...내가... 모두... 망쳐 버렸어..." 그리고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계속) "스트라본 전하!" 레일라는 검은 갑옷을 벗지도 않은 채로 왈칵 문을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그 유명한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이 이런 식으로 불쑥 들어오자, 치유술사들과 그 조수들은 놀라서 들고 있던 약병들을 다 떨어뜨릴 지경이 었다. 한 쪽 어깨를 걷어낸 채 그들의 치료를 받고 있던 스트라본 왕자만이, 그녀의 새파래진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했느냐, 레일라? 네 얼굴을 보면 백성들이 푸이 하르크가 쳐들어오기라도 하는 줄 알겠구나." 레일라는 자신이 엄청난 무례를 범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멍하니 스트라본을 바라보았다. 그는 순백색의 장식 없는 로브를 입고 금발을 한 갈래로 닿아내린 채, 상처가 난 왼쪽 어깨를 드러내고 치유술사들의 치료를 받고 있었다. 침대에 반쯤 기대어 누운 자세였지만, 전혀 쇠약해 보이지는 않았고 오히려 편안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치유술에는 문외한인 게일라였지만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은 흘끗 보고도 알 수 있었다. "...괜찮으신 겁니까, 전하...?" "보고도 모르느냐? 한데 네 얼굴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 같구나." "저는... 그 요정족의 마법사가... 그러니까..." 레일라는 당황한 나머지 말을 마구 더듬었다. "제 생각에는... 제가 생각하기를, 그러니까... 전에도 그녀가 전하께 해를 입힌 적이 있고 해서... 물론 멍청한 생각인 줄은 압니다만,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그녀가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암호 같은 문장들을 줄줄이 나열하자, 치유술사들은 처음에는 놀라고 그 다음에는 웃음을 참기 위해 숨을 멈추어야 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기서 마치 하디미르를 처음 만난 어린 시에드리아처럼 더듬거리고 있는 여성은 침착하고 냉철하기로 유명한 그림자 기사단의 레일라 갤러허드가 아닌가! 아마 동료 치유술사와 마법사들 에게 지금 본 사실을 말한다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었다. "자, 자, 레일라 경, 나가 주십시오." 치유술사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많고, 가장 성공적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아 낸 노인이 레일라를 문 밖으로 밀어내며 말했다. "지금 당신은 전장에서 돌아와 먼지투성이입니다. 설마 전하의 상처가 감염되기를 원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그렇다면 나가서 깨끗한 모습 으로 다시 돌아와 주십시오." 그리고 방문은 얼떨떨한 얼굴로 밖으로 밀려난 레일라의 코앞에서 쾅 닫혔다.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 갤러허드는 그제서야 자신이 얼마나 얼뜨기같이 보였을까 생각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도망치듯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만약 그녀가 그 문 안에서 치유술사들과 그 조수들이 미친 듯이 낄낄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이성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 었다. 레일라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나타난 것은, 마지막 치유술사가 막 스트라본의 방 문을 빠져나가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털처럼 붉은 천 위에 금빛 독수리가 수놓여진, 아트웰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치유술사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근엄한 표정으로 나타나자 다시 웃음이 터져나올고 해서, 빨리 걸음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드러오너라, 레일라. 그래, 이제 좀 진정이 되었느냐?" 스트라본마저도 얼굴에 웃음을 가득 담은 채 농담조로 물었다. 레일라는 그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결례(缺禮)를 범했습니다, 전하...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다만 걱정이 된 나머지..." "네 기분은 안다, 레일라.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내가 다시 그 어린 마법사한테 당할 거라고 생각했다니, 좀 섭섭한데. 그 때에는 그저 방심했을 뿐이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전하, 사일러스 폐하는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제가 스트라본 전하 의 칼과 방패가 되어 그 분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길리어 드로 돌아가심이 어떠신지요." 레일라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었다. 스트라본은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아무런 거동의 어려움 없이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사실 그의 상처는 거동에 불편을 줄 수 있을 만큼 깊지 않았다. 자칫하면 그에게 다시 한 번 치명타를 가할 수도 있었던 어린 마법 사의 주문은, 마음 속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가 후퇴한 것은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력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적의 원군이 너무 많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뒷처리는 샤나가 해 주었겠지만... 그리고 원래 별 것 아니었던 상처는 신속한 치료로 지금은 거의 아물어 가고 있는 수준이었다. 라스헨 에이니드. 스트라본은 동쪽의 숲을 바라보며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 다른 상황에서라면 마법사 대 마법사로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을. 그녀는 왜 하필이면 압제자의 편을 택했을까? 그는 그녀가 동요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내면에 있는 말들을 모조리 쏟아내었다. 그 말들 때문에 그녀는 동요한 것이다... 그가 약삭빠르게도, 심리전으로 그녀의 주술을 묶어 버렸던 것이다. 결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아니, 정말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을까? 그는 그녀에게 흑마술을 역행시키는 주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치명적이 될 주문. 그리고 그는 그 주문 때문에 다시 한 번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싶지 않았 다. 그렇다. 그는 무사한 몸으로 성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서 계속 그들의 곁에 남아 있고 싶었다 - 그의 형, 사엘러스 왕과, 그를 따르는 마법사들과, 그리고... 그는 익숙한 침묵을 지키며 무릎을 꿇고 자신를 바라보고 있는, 붉은 머리의 여기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나는 돌아와야 했어.' "레일라." 하고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칼을 잡는 손과 몸이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 느냐?" "아... 아닙니다, 하지만..." "너는, 내가 단지 사일러스 형을 보호하기 위해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내 바램과는 상관 없이?" 레일라는 자신의 주군이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한참 궁리해 보아야 했다. 그리고 이윽고, 머뭇거리는 어조로 말을 꺼냈다. "물론... 아트웰의 독립의 순간을 그 자리에서 보고 싶으신 전하의 마음은 압니다만..." 그녀의 말이 채 ㄱ나기도 전에, 스트라본은 쿡 하고 웃었다. '...역시 말을 꺼낸 놈이 바보인가...' 그는 그림자 없는 미소를 던지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됐다, 레일라, 난 이곳에 있는다. 랜스 아덴을 죽이는 것에는 실패 했지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다. 아무리 숲의 마법사가 그의 곁에 있다고 해도 며칠동안 전장에 나오는 것은 무리일 거야. 그리고 너와 형은 그들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켰으니, 승리는 눈앞에 있다. 우리는 이 곳에서 함께 아트웰의 승리를 지켜보게 될 거야." --------------------------------------------------------------------- "랜스는 좀 어때?" 막사에서 나오는 데이미아에게 로이가 물었다. 로이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피곤한 듯 눈을 비비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미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숲 속에 어둠이 내린 지 오래였다. 그의 허리에는 칼이 매달려 있었고, 눈 속을 헤메었는지 장화는 푹 젖어 있었다. 데이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하며 어물거렸다. "많이 좋아졌어... 위험하진 않아." "하긴, 랜스는 워낙 건강하니까... 그보다 너도 피곤해 보인다. 좀 쉬지 그래? 너도 마법 많이 썼잖아. 랜스도 저모양인데 너까지 병나면 우린 끝장이라고." 데이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로이는 모르고 있다. 그녀가 랜스가 저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 둔 장본인이라는 것을. 분명 기회는 있었다. 역행(逆行)의 주문을 스트라본에게 걸 기회는.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지금 일은 이렇게 된 것이다... "툴위그는 어때?" "여기저기 긁힌 것 빼고는 괜찮대." 하고 말하며 로이는 길게 하품을 했다. "너도 잠이라도 자지 그러니, 로이. 졸린 것 같은데..." "그럴 상황이 아냐. 왕자님이 없어져 버렸거든." 로이가 대답했다. 그의 말 속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사람들 말로는... 아마도 전장에서 불리하니까 도망친 것 같대. 도망치는 걸 본 사람도 있고... 난 믿기 싫어. 하지만 만약 그렇더라도 이해할 수 있어. 사실, 우리도 그 괴물같은 여자...인지 새인지 나왔을 때 얼마나 무서웠어? 왕자님도 결국은 마찬가지였을 거야. 하지만... 폐하는 절대 이해 못 하실 거야. 그래서 난 왕자님이 정말로 걱정돼." 데이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아직도 랜스와 스트 라본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녀 자신에 대한 책망으로 가득했다. 다행히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 아직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난 라스헨 에이니드야. 인간들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던 게 내 잘못은 아니라고...' 그러나 그것이 변명이 될까? 스트라본이 랜스를 공격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랸스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만약 스트라본을 공격했다면, 그래서 스트라본이 다시 치명상을 입었다면... '로이는 좋겠구나... 어떻게 저렇게 항상 단순한 마음으로 남을 걱정해 줄 수 있을까? 그래서 잘 하는 일이 없어도 모두들 좋아하나봐. 하지만 나는, 나는...' "너무 자책하지 마, 데이미아." 로이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미소는 이 상황에서도 밝았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넌 하는 데까지 했어. 스트라본은 너무 강한 마법사였어. 그를 이길 수 없었던 게 네 잘못은 아냐." '아니, 난 하는 데까지 하지 않았어, 로이...' 그러나 데이미아는 이렇게 말하지 못하고, 다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마워"라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로이는 그녀의 어깨를 툭 치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난 왕자님을 계속 찾아볼게. 기죽지 말고, 좀 쉰 다음에 해. 내 생각엔 네가 지금 잠을 못 자서 기분이 더 나쁜 것 같다. 전에 스트라본 하고 싸웠을 때에는 시체처럼 잤잖아? 우리들이 얼마나 곤란했었는데. 데이슨 기절한 것만도 골치아픈데 너까지 꼼짝을 안 하니..." 로이는 농담조로 말했으나, 데이미아는 화를 낼 수도 즐겁게 웃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짜내어 보여주었다. 그리고 암흑만이 깔린 숲 속으로 발을 옮겼다. 가끔가다 왕자를 찾는 횃불들만이 반딧불처럼 깜박이는 숲 속으로. 데이미아는 눈 덮인 진지(陣地)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혼자는 아니었다. 부상병들이 막사 안에 있었고 보초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졸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에게 신경쓰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혼자였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아직까지도 내리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모닥불은 힘없이 타오르다 자꾸 꺼졌다. 바람은 매섭고 추웠다. 그러나 그녀는 막사 안에 들어가지 않고 계속 바람을 맞고 서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뻔뻔스럽게도 부상자들의 막사 안에 들어가 '라스헨 에이니드 (숲의 마법사)'답게 자비를 베풀까? 아니면 그녀 일행을 위해 준비된 막사로 들어가 따뜻한 이불을 덮고 기분좋게 잠이나 청할까? 랜스. 분명 랜스는 중태이긴 하지만 생명이 위험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운 날씨, 이런 전쟁터에서는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 아클레어 왕은 벌써 남은 군사들보다 잃은 군사들이 더 많고, 그나마 반 정도는 부상병들이다. 날씨는 점점 추어질테고 식량은 이미 위험 수위다... 이런 상황에서 랜스가 잘못해서 죽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그녀 자신이 바로 살인자가 아닌가... "라스헨 에이니드... 또 우는 겁니까?"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따뜻한 짙은 남색 망토가 바람을 막기에는 너무 얇은 그녀의 로브 위에 걸쳐졌다. 데이미아는 그것을 꼭 잡은 채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보라빛 눈을 응시했다. 어둠의 눈, 한때 흑마술에 의존해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겼던 자의, 공허함이 서린 눈. 그러나 요정족의 눈. 그리고 마법사의 눈.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눈... "필리우스." (계속) --------------------------------------------------------------------- * 랜스를 묵사발로 만든 스트라본의 마법! 죽여도 죽여도 랜스가 죽지 않는 이유는? 답 : 욕을 많이 먹으니까(욕먹는 사람일수록 안 죽는 거 잘 아시죠?).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게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PS. 시에드리아와 하디미르 - 시에드리아는 디온의 공주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미모가 뛰어나 바람의 요정족을 다스리는 하디미르와 연얘를 했죠. 그런데 라시르의 왕이 디온을 침공하고 공주를 마누라 삼아 버린 겁니다...^^; 다연히 엄청 열받은 하디미르와 라시르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격돌했고, 결국 두 종족 다 위기에 이르자 신들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 해서 대책을 세운 것이... 바로 시에드리아가 독사에 물려 죽게 해 버렸다는... (황당하죠? ^^;) 혹은 전쟁에 이긴 하디미르를 벌하기 위해 그랬다는 말도 있답니다(어쨌건 전설이니까요). 그래서 죽은 시에드리아는 꽃으로 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안 와크 하아르(사막민족 말로 '바람의 땅')에만 피는 새빨간 꽃 '시에드린', 사막민족의 언어로는 '쉐이드리'랍니다. 잘 먹으면 약, 잘못 먹으면 즉사하는 꽃잎이래요.^^ 데이미아가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모디엘 우클라드, 어둠의 정령임을 알고 있었 지만, 그의 얼굴은 정말로 선해 보였다 - 그것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얼굴이 그녀에게 위안을 준다는 사실도. "어떻게...?" "당신이 나를 불렀으니까요, 라스헨 에이니드. 이해해 줄 사람을 찾지 않았나요? 당신의 모든 것을 알면서도 나무라지 않을 사람, 당신이 한 일을 전부 알고도 이해하고 공감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나밖에 더 있나요? 그 어린 소년이, 난쟁이가, 아니면 저기 앓고 있는 저 친구가 당신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나요?" 이해할 수 없지, 물론. 그것이 데이미아가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필리우스, 그는 모든 것을 알고도 그녀에게 이렇게 다뜻한 미소를 보내 주고 있지 않은가. 그의 말이 옳았다... 요정만이 요정을 정말로 이해할 수 있다. 마법사만이 마법사를 이해하듯이. "난 이제 라스헨 에이니드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필리우스. 당신은 내가 오늘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벌였는지..." "다 알고 있어요. 울지 말아요, 울지 말아요! 라스헨 에이니드, 당신은 살생에 앞서 망설였어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진실한 숲의 마법사라는 증거 에요. 당신은 친구가 위기에 놓여도 감정을 앞세워 행동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게 바로 진짜 라스헨 에이니드만이 할 수 있고, 다른 마법사들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고요!" 데이미아는 눈물을 닦으며 필리우스를 쳐다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럼요. 당신이 만약 스트라본을 죽였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금 얼마나 후회하고 있겠어요? 하지만 다행히도 당신은 현명하게 행동했고,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어요. 지금 당신의 친구는 부상당해 앓고 있지만, 죽지는 않았고 곧 회복될 거에요. 여기 당신을 위한 선물이 있어요." 필리우스는 미소를 지으며, 두 손으로 작은 주머니를 공손히 들어 데이미아에게 주었다. 남색 천으로 만들어진, 장식이 없이 수수하지만 예쁜 모양의 주머니였다. 데이미아는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열었다가, 눈이 휘둥 그래졌다. "이건... 아스티시아?" "그래요." "하지만... 설마 이 계절에 뤼아난푸르에 올라갔단 말이야?" "마법사의 좋은 점이죠. 그래서 다들 일리엔(공간이동) 주문을 배우려 하는 거고요. 당신 친구도 이제 빨리 회복되겠죠? 그럼 당신이 더 이상 죄책 감을 느낄 일도 없을테고..." "고마워!" 데이미아는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그러나 곧, 다시 근심의 그림자가 그 미소를 가렸다. "하지만 그냥 이것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닐지도 몰라. 난... 어쩌면, 이 전쟁에 끼어들어서는 안 되는 것 같아... 스트라본도 그랬어. 왜 요정족이 인간끼리의 전쟁에 끼어드냐고, 왜 라스헨 에이니드라면서 압제자의 편을 드냐고... 필리우스, 에누인의 가르침을 알지? 라인 센, 로 알루드 크로이나드, 에일 로어 헤에나, 헤이라히니(그대가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 그대의 모든 마력과 주술을 동원해서)... 스트라본은 그렇게 싸웠어. 하지만 난, 난 그렇게 싸우지 못했어. 여기 온 이후 난 친구들 때문에 내가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여기 머물렀던 거야. 한 번도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럼... 지금은, 라스헨 에이니드? 지금은 무엇이 옳다고 생각하시죠?" "난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 없어. 여기를 떠나야 해. 난 인간들의 전쟁에 끼어들어선 안 돼!" 데이미아는 결연히 대답했다.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어. 바로...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것을 찾는 것. 엄마가 그랬듯이 엘미어를 다시 손에 넣는 것. 그래서 진실한 라스헨 에이니드가 되는 것...!" --------------------------------------------------------------------- 왕은 아무 말 없이 방금 잡혀들어온 자신의 아들 엘먼을 쏘아보고 있었다. 벌써 그러고 있은 지 한 시간은 족히 넘었으리라. 사실 그는 아들의 겁먹은 얼굴만 보아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의 어설픈 칼 솜씨, 더듬거리는 말투, 불안하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 별 것 아닌 일에 깜짝깜짝 놀라는 태도... 모든 것이 다 마음에 안 들었다. 가끔 정말 자신의 아들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9'차라리 아들이 없었더라면 마음 편히 클레이브에게 왕위를 넘겨 줄 수 있으련만!'9 이런 생각을 해 본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랜스 경은 중태에 빠졌고 데려온 군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좋을 지금, 이 모든 일에 대한 분노는 그의 아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선두에서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리는, 괘씸한 반역자이지만 그 용기와 기개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한 사일러스를 보았다. 그리고 병약하 지만 영리하고 무서운 마법을 휘두르는 스트라본을 보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엘먼은 고작 전장(戰場)에서 도망쳤다는 말이나 듣다니, 이게 될 법이나 한 일인가! "할 말이 있느냐, 엘먼?" 분노를 억누르는 왕의 목소리는 거의 쉰 듯이 들렸다. 왕자는 잔뜩 겁을 먹은 눈을 내리깔았고, 그것이 왕의 분노를 더욱 부추겼다. "넌 전장에서 도망쳤어. 그게 에스테이아의 왕자가 할 짓이냐? 게다가 숲속에 숨어 있기까지 했지. 탈영은 사형감이다! 지금 내 손으로 네 목을 쳐 버리고 싶다는 것을 아느냐?" 잠시동안 왕자가 항의하는 눈으로 왕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왕이 알아채지 못할 만큼 순식간이었다. 왕은 자신의 분노를 터뜨리 느라 정신이 없었다. "엘먼! 네가 정말 내 아들이 맞느냐? 내 핏줄이 맞느냐? 2백여 년에 걸쳐 인간족을 통일하고, 그 통일일 지켜 오느라 분투한 시이그람 왕조의 자손이 맞느냐? 나는 이제 정말 확신할 수가 없다. 대답해 봐라! 네가 내 핏줄이 맞느냔 말이다. 나와 내 조상들에게 흐르던 피가 너같은 겁쟁이의 심장에도 흐르냔 말이다! 대답해 봐라!" 그러나 왕자는 대답은 커녕,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아클레어 3세는 이제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는 최소한 아들이 반박이라도 해 주기를 기대했었다... "나가!"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마치 적을 호령할 때처럼 크고 살기에 찬 외침이라, 듣고 있던 사람 모두가 깜짝 놀라서 쳐다볼 지경이었다.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어디 가서 내 아들이란 소리 따윈 하지 마라! 어서 나가 버려!" 왕자는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왕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래 그럴 수 있는 담력은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채, 홱 몸을 돌려 왕의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박에서 기다리던 로이가 그의 모습을 보고, 얼른 일어서서 쫓아오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왕자님... 우시는 거에요?" "됐어, 로이... 신경쓰지 마." "왕자님..." "난 아무렇지도 않아. 혼자 있고 싶다고. 제발 날 내버려 둬!" 그리고 그는 도망치듯 막사 안으로 들어가, 갑옷을 아무렇게다 집어 던지고 머리를 감싼 채 침대 위에 누웠다. 전시 치고는 상당히 화려한 침대 였으나, 궁정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여 금새 등이 아파 왔다. 그 역시 전장에서 도망쳐 버린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전장에 있건 없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먼저 말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는가. 에스텔에 남고 싶어하던 그를 억지로 이곳으로 끌고 온 것도 그의 아버지가 아니었는가. 그리고 애당초 그를 이런 겁쟁이로 키운 것도...! 그런데 이제 와서, 아버지는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자신만을 탓하고 있었다. 그것도 "내 아들이 맞느냐"고까지 물어 가면서... 그가 아버지를 닮지 않았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엘먼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그의 아버지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가 원해서 어머니만을 닮고 태어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이런 생각에 빠져, 누군가가 살그머니 막사로 들어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침입자가 등불을 가려 그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가렸을 때에야, 그는 비로소 소스라치며 몸을 일으켰다. "누구야?" 그러나 그 침입자의 얼굴을 보자, 엘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대신 가벼운 분노가 자리잡았다. 침입자는 바로 그의 막사를 지키던 호위기사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야? 내가 혼자 있고 싶다고 했지!" 엘먼은 짜증을 내며 물었다. 호위기사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잠시 시간을 끌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먼은 더 화를 내려다가, 그의 얼굴을 보고는 혀가 굳어져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마치 목석처럼 표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그의 눈은, 엘먼이 본 적이 없는 차가운 보라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여운 엘먼 왕자." 하고 그가 말했을 때, 그의 목소리는 낯설었을 뿐 아니라 아주 먼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았다. 엘먼은 그의 무례함을 꾸짖기는커녕, 몸을 떨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그렇게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으면서도, 언제나 멸시를 받는군요. 당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은 당신의 두 사촌, 천박한 서자(庶子)와 창녀의 아들들, 저 놀라운 모함꾼들의 것인데... 그런데도 당신은 가만히 당하고만 있군요. 당신의 노쇠한 아버지가 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둔 채!" "너... 넌 도대체 누구야?" 엘먼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위엄있는 목소리로 따지려고 한 말이었으나, 그것은 오히려 애원처럼 들렸다. "나는 당신의 편...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펠드릭의 친구이니." 호위기사의 얼굴이 조금 움직여 웃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더욱 소름끼칠 뿐이었다. 엘먼은 도망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그의 다리도 혀도 이미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마치 움직이지 않는 인형 속에 정신이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호위기사, 아니 호위기사의 모습을 한 정체불명의 침입자는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에게 선물을 하나 드리려 왔습니다 - 기억하십시오, 전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는 이것에 대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실 의무도 없습니다. 단지 이 선물을 받으실 건지, 안 받으실 건지만 말씀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게 가장 큰 선물은 네가 당장 나가는 거야.' 하고 엘먼 왕자는 생각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침입자는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빙그레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왕자님께서 대답을 주시면 저는 당장 이곳을 떠날 것입니다. 저 역시 기다리는 친구가 있으니까요." "...넌 누구지?" 엘먼 왕자가 신음하듯 물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갑자기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도 지각할 수 없을 정도로 겁이 나 있었다. "저는 필리우스... 모든 이들에게 친절한 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며, 서서히 모습을 바꾸어 갔다. 호위병의 모습은 연기가 되어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에누인을 모시는 승려의 짙은 남색 로브를 입은 검은 머리칼의 미청년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작은 은빛 상자를 소중히 바쳐 들고 있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엘먼은 서서히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잘은 몰라도, 이 사람은 자신의 적이 아니 었다. 그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러셔야죠, 전하. 저를 겁내시면 안 됩니다. 저는 전하의 충실한 종... 펠드릭과 함께 오직 전하만을 왕으로 섬기기로 맹약한 몸입니다. 그래서 지금 선물을 드리려는 것이고요." "그 선물이라는 것이 무엇이지?" 엘먼은 대담하게도 질문을 던졌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 스스럼 없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 로이를 제외하고는. "글쎄요... 그것은 전하가 무엇을 가장 필요로 하시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필리우스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필요로 하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단지 그것 하나만을 드릴 수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오직 한 번의 기회밖에 없으니까요. 되돌릴 수조차 없는 선물이니까요." 왕자는 말 없이 필리우스가 들고 있는 상자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것은 견고해 보이는 은빛의 상자로, 알아볼 수 없는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분명 그의 '선물'은 저 안에 들었으리라... "만약... 내가 악한 것을 원한다면? 예를 들면 누가 죽는 것이라든가..." "아덴 가의 두 형제를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물론 그들의 죽음을 얻으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왕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걸까요?" 물론이지! 그 둘이 죽으면 당연히 아버지께서는 내게 기대를 거실 수밖에 없으실 테니까... 아니,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선왕(先王), 즉 그의 할아버지는 호색한이었고, 아덴 형제 외에도 수없이 많은 엘먼의 사촌들이 에스테이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 그러니 왕은 금방 클레이브의 대용품을 찾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대용품이 되어야 한다... 아니, 대용품 따위는 필요 없다. 그가 랜스와 클레이브보다 훨씬 더 훌륭한 기사가 된다면? 훨씬 더 대담하고, 훨씬 더 칼을 잘 놀리고, 훨씬 더 영리한... 그야말로 '제왕다운' 왕자가 된다면...? "나는... 왕답게 되고 싶어." (계속) --------------------------------------------------------------------- * 결국 갈라지는군요... 데이미아와 일행들! 아~ 역시 "SF란에서 가장 단합이 안 되는 팀"이라는 명성이 어울립니다. ^^; 아스티시아는 뤼아난푸르(생각나시죠? 드라크노움 산맥의 꼭대기, 만년설이 덮여 있는 곳입니다)에만 나는 약초입니다. 그 영혼이 페레이타의 땅으로 가버린 사람만 아니라면, 어떤 상태에 있든 완치시킬 수 있는 약초지요^^ 전부터 계속 나오는 에누인의 가르침이란 뭐... 마법사들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정도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다를 포함한 물을 다스리는 에누인은 지혜와 언어의 신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당연히 마법의 신이기도 합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엘먼의 대답에 필리우스는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토록 따뜻한 미소가 아니었다면, 엘먼은 분명 자신의 대답이 너무 어리석었다고 생각 하고 상처를 입었으리라. 그러나 필리우스의 미소는 달랐다. "하하하... 어떤 면에서요? 아클레어 1세처럼 선하고 자비로운 왕 말입니까? 아니면..." "아냐, 그건 절대 아냐! 난 기사다운... 전사(戰士)다운 왕자가 되고 싶은 거야. 내 아버지처럼... 아니, 내 아버지보다 훨씬 더..." "그러면, 전하께 필요한 것은 검술과 지략(智略), 그리고 아랫사람들 의 경외(敬畏)를 얻을 수 있는 능력이겠군요." 필리우스는 부드럽게 말하며 은 상자의 뚜껑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엘먼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난... 난 겁이 없어야 해. 난, 피를 보고 도 아무렇지 않아야 해. 난 남의 죽음을 보고도, 어떤 학살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런 심장이 필요해!" 잠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필리우스의 목소리가 울렸을 때, 그 소리는 너무 낮고 비밀스러워서 침묵을 깼다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더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면... 왕자님께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겠군요." 그리고 그는 은 상자를 열었다. 그 속에 있는 것은, 빨간 비로드로 된 쿠션 위에 소중히 얹혀 있는, 투명한 재질의 심장 모양의 물건이었다. 무슨 재료인지는 몰라도 - 아마 수정의 한 종류일 것이라고 왕자는 생각 했다 - 그것은 무척이나 맑고 아름답게 보였고, 그만큼이나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왕자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것에 대었다가, 깜짝 놀라 떼고는 말했다. "몹시 차군." "얼음입니다, 전하. 어떤 불로도, 어떤 마법으로도 녹일 수 없는 얼음이지요. 이것은 얼음 심장입니다. 그리고 전하의 심장입니다 - 만약 원하신다면." "...이걸 내 심장 대신 집어넣는단 말야?"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입니다. 이 심장에는 모든 심약함, 모든 두려움, 모든 소심함, 그리고 모든 약하고 어리석은 감정이 빠져 있습니다. 이 심장의 소유자는 전장에 나설 때 다만 흥분과 전의(戰意)만을 느낄 것입 니다. 죽음을 볼 때 그 두려움이나 연민은 이 심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심장의 소유자는 이 세상 어떤 생물보다도 강하고 용기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그의 마음에 더 이상 약한 부분이란 없을 테니까요." 왕자는 가만히 그 선물을 노려보았다. 차갑디 차가운 빛. 저 빛 때문 에 방 안의 공기까지도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저걸 내 심장 대신 넣는다고? 불가능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필리우스 - 그를 저렇게 자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필리우스. 그가 해를 끼칠 수 있을까? 겁쟁이. 비겁자. 왕자답지 못한 왕자. 네가 정말 내 아들이 맞느냐? 이젠 끝내야 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싫으시면 그만 두셔도 됩니다." 필리우스가 상자를 닫으려 하며 말했다. 그러나 엘먼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쳐 그를 제지했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굳어진 혀를 간신히 움직여 물었다. "그걸... 가지면... 더 이상... 겁낼 게... 없어진단... 말이지...?" "물론입니다, 전하. 레젠디아 대륙의 어떤 생물보다도 용맹해지실 겁니다." "그리고... 피를... 피를 봐도, 전혀... 두렵지 않게... 된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사실, 두려운 게 하나도 없어 질테니까요." 엘먼은 몸을 떨었다. 저 차가운 빛. 저것을 심장 대신 갖고도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살아서 뭘 한단 말인가? 신하들은 뒤에서 손가락질하 며 비웃고, 아덴 형제는 친절하고 충직한 척 하면서 교묘하게 그를 바보로 만들고, 하나뿐인 아버지는 그에게 자기 아들이 맞냐고 묻기나 하는 삶...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만약 성공한다면... "그걸... 내게 줘. 얼음 심장을 내게 주고, 대신 내 심장을 가져가!" --------------------------------------------------------------------- 왕자의 호위병 중 한 명이 그의 막사에서 나왔을 때, 그에게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진지를 가로질러, 위협 하는 듯 우거진 숲 쪽으로 걸어갔다. 찌푸린 하늘에서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침 동이 트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희미하게 좀더 밝은 회색으로 물드는 하늘이, 새벽이 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숲으로 들어간 호위병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주문도 외지 않고 모습을 바꾸었다. 남색 로브와 남색 망토를 걸친, 에누인 승려 차람의 청년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어, 필리우스." 눈이 쌓인 나무들 사이에서, 데이미아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겨우 하룻밤이 지났을 뿐이었으나, 그녀의 모습은 달라져 있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과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두꺼운 갈색 망토를 걸쳤기 때문만은 아니 었다. 그녀의 얼굴은 더 이상 어쩔 줄을 모르는 어린 요정 소녀의 얼굴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제 자신이 가는 길을 스스로 택한, 마법사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말투에서도 전에 없던 자신감이 넘쳐나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처리하려던 일이 좀 시간이 걸려서요." "괜찮아, 나도 방금 왔는걸. 나한테도 할 일이 많았으니까. 아스티시 아 잎을 가공해서 약으로 만들어 놓고, 그 일부를 랜스에게 먹이고, 그리고 로이와 툴위그에게 편지를 쓰고..." 데이미아는 그녀가 쓴 편지를 생각하고 웃었다. 짧은 내용의 편지 였다 - 이제 나는 내가 할 일을 알았어요. 더 이상 인간끼리의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겠어요. 대신 나는 엘미어를 찾으러 떠날 거에요. 사실 오래 전에 그렇게 했어야 했지요... 그동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해서 폐를 끼친 것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이디실과 카자룬을 무사히 찾기를 기원합니다. 아스틸라가 당신들을 지켜 주시기를. "떠나야 할 시간이지, 필리우스?" 그녀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눈이 그치고 있었다. 햇빛이 그들의 버리 위로 희미한 빛을 던지기 시작했다. 데이미아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서 가자... 예감이 좋아, 필리우스. 모든 일이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물론 그럴 겁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아니, 데이미아." 필리우스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곁에 붙어 섰다. "저는 당신께 엘미어를 찾아드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테니까요..." --------------------------------------------------------------------- 아침이 되자 눈은 완전히 멈추었다. 구름이 걷히고 해가 중천에 떴다. 그러나 로이는 해가 뜨건 말건 눈이 내리건 말건 상관 없이, 이불 속에 폭 파묻혀 꿈나라에 빠져 있었다. 어제 멋모르고 데이미아를 구하러 갔다가 팔자에 없는 전투를 치룬데다가, 그 후에는 왕자를 찾아다니느라 남아 있던 얼마 없는 기운마저 다 소모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툴위그가 그를 번쩍 들어 이불 밖으로 꺼내 놓기 전까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야! 로이! 일어나! 웬 늦잠이냐?" 난쟁이 치고도 목소리가 큰 툴위그가 옆에서 쩌렁쩌렁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제 아무리 피곤해도 잠이 달아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로이의 얼굴을 차가운 세숫물에 푹 담그기까지 했으니... "푸! 엣취! 툴위그! 무식하게 뭐하는 거에요!" 로이는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로이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툴위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채 그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하, 어린애들 잠 깨우는덴 역시 이 방법이 최고라니까. 난쟁이 족 어린애들 늦잠은 이런 식으로 고치지!" "으... 정말 내가 난쟁이로 안 태어난 게 다행이야!" "자, 자 , 잡담할 시간 없어. 랜스가 깨어나서 우릴 보고 싶어해." 툴위그가 투덜거리는 로이를 잡아 끌며 말했다. 로이는 눈이 휘둥그 래져서 물었다. "랜스? 랜스요? 데이미아가 랜스는 사흘 후에나 정신이 들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 정신이 들었어.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치유술사들은 그가 회복하고 있다고 하던데..." 툴위그의 기뻐하는 표정 밑에는 혼란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렇게 빠른 효과를 보일 수 있는 것은 싱싱한 아스티시아 잎 뿐인데... 하지만 그건 뤼아난푸르에만 서식하는 식물이야. 이 계절에는 요정 들조차 뤼아난푸르에 올라가지 못하는데..." 툴위그의 말은 차라리 중얼거림에 가까웠다. 로이는 그가 하는 말의 의미를 거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 담긴 의혹은 로이의 마음조차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랜스의 회복이야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툴위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이도!" 랜스는 침대에서 반쯤 일어나 앉은 채 막사의 휘장을 젖히고 들어 오는 둘을 맞이했다. 로이와 툴위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랜스를 응시했다. 도저히 어제 시체가 다 되어서 툴위그의 등에 업혀 들어온 사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걱정스러울 정도는 아니었고, 고통의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목소리는 차라리 기운차다고 해도 될 정도 였다. 어제 데이미아는 그를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만도 남은 마력을 다 소모해야 했건만... "랜스... 이제... 괜찮은 건가?" 툴위그는 의심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물었다. 랜스는 그런 그의 말투가 우스웠는지 미소를 지었다. "보다시피 당장 말을 타고 출전해도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어제 좀 엄살을 피웠나보지요. 부끄러운 일입니다. 어쨌든 저를 부축하고 막사까지 데려와 주신 데에는 감사드립니다, 툴위그." 그렇게 많은 말을 하고도 그는 거의 지친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툴위그의 기쁨과 함께 그의 불안감도 점점 커졌다. 그는 독과 약초에 대해 조예가 있었다 - 그리고 그의 지식은 점점 한 가지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아스티시아. 그러나 이 눈보라치는 겨울에... 어떻게...? 그러나 그의 생각은 로이의 외침에 의해 끊어져 버렸다. "랜스! 괜찮은 거로군요! 엉엉, 난 랜스가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엉엉엉..." 로이는 아예 랜스에게 매달려 통곡을 해 댔다. 랜스는 물론 그 방 안에 있던 치유술사까지 모두 당황했다. 랜스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쑥스럽기 도 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로이를 다독였다. "자, 자, 보다시피 난 괜찮아. 치유술사들이 아직 쉬어야 한다고 해서 며칠 지겹게 누위서 보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난 별로 많이 다치지도 않았다고!" "그렇지 않네, 랜스." 갑자기 툴위그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는 듯한 랜스와 로이의 시선이 단번에 그에게로 가서 고정되었다. "어제 분명히 자네는 중태였어. 스트라본이 자네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데이미아도 다른 치유술사들도, 자네가 죽음을 면한 것만도 행운이라고 했어. 그런데 지금 자네는 이렇게 멀쩡하군. 솔직히 말해서 난 불안하네, 랜스. 물론 자네가 회복되어서 기쁘네. 하지만 기쁜 만큼 불안해... 이건..." 툴위그는 '아스티시아'라는 말을 입밖에 내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망설였다. 바로 그 순간, 로이가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데이미아에요! 데이미아가 다 치료한 거에요. 그 앤 라스헨 에이니 드잖아요! 역시 데이미아는 대단해!" "로이... 하지만 데이미아에게도 이런 치유술은..." 툴위그는 반박하려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랜스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기 때문에 그 반박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래, 맞아, 데이미아가 날 살려주기 위해 스트라본과 싸우는 걸 봤지. 그 애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데이미아는 어디 있지?" 로이와 툴위그는 거의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데이미아는 어디 있지?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일어나서 그녀를 본 기억이 없었다... "보나마나 숲 속에 있겠지, 뭐." 로이가 피식 웃으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툴위그, 랜스, 내가 찾아올께요. 그러지 않아도 걔가 어제 랜스를 자기가 다치게 했다고 꽤 고민하더라고요. 하여간 너무 착해도 문제라니까. 걘 언제나 고민 있으면 숲속을 혼자 어슬렁거리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에요. 잠시만 기다려 줘요!" 그리고 로이는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툴위그는 잠시동안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이상하게도, 로이처럼 단순히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그런지 자신도 몰랐다. 그러나 불안한 감정이 점점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데이미아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불안이, 이제 최고 수위에 이르러 표출되기 시작한다는 것을 툴위그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느끼는 것은 단지... "나도 데이미아를 찾아 보겠네, 랜스." 하고 툴위그도 일어서며 말했다. 그도 로이처럼 활달한 모습을 가장하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툴위그는 자신이 없었다. "둘이 찾으면 어쨌든 좀더 빨리 찾을 수 있겠지. 정말이지 요정들 제멋대로인 건 알아 준다니까..." (계속) --------------------------------------------------------------------- * 왜 제목이 "얼음 심장"인지 밝혀졌군요. 용의 신전에 나오는 동화적 요소 중 하나랍니다. 저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 같은 이야기들이 좋거든요. (분위기에 좀 안 맞는 것 같긴 하지만...^^;) 로이가 트롤들한테 잡혔다가 말발(?)로 빠져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로이가 되돌아온 것은 한 시간도 채 안 되서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쪽지 위에 또박또박 쓴 편지와, 영롱한 파란 빛깔로 반짝이는 액체가 든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로이는 황당해서 말할 기운도 없다는 듯이, 랜스와 툴위그에게 그 종이와 유리병을 넘겨 주며 말했다. "데이미아는 떠났어요." 랜스와 툴위그는, 당연한 일이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데이미아의 필적이 분명한 편지를 읽고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로이, 툴위그, 그리고 랜스, 혼자 먼저 출발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라스헨 에이니드고, 엘미어를 하루라도 빨리 찾는 것이 내 의무이니까요. 전쟁 역시 내가 엘미어를 찾아 완전한 힘을 얻으면, 더 수월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날 이해해 주기 바래요. 나는 지금 엘미어를 찾으러, 우클로우로 떠납니다. 로이와 툴위그, 그리고 랜스도 사정이 허락하는 한 빨리 따라와 주기 바래요. 데이미아.' "...정말 황당하네." 툴위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랜스는 화를 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저으며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갑자기 화가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데이미아는 어쩔 생각으로 이런 짓을 한 걸까? 그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바보같은 데이미아, 그렇게 안 봤는데. 도대체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람? 게다가 염치도 없이, '사정이 허락하는 한 빨리 따라와 달라'니... 정말 그렇게는 안 봤는데. 이게 어제 죄책감에 눌려서 울먹거리던 걔가 쓴 편지 맞아? "이건... 아스티시아야. 역시 내가 예상했던 대로군." 툴위그는 푸른 액체가 담긴 병을 흔들며 말했다. "이것 대문에 랜스가 빨리 회복된 거야. 아스티시아 잎이 고칠 수 없는 상처나 병은 없다고 하지. 하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가는걸. 데이미아가 어떻게 해서 이걸 손에 넣게 되었을까? 이건 뤼아난푸르, 드라크노움 산맥의 꼭대기에만 자생하는 식물인데..." "...비상약품으로 가지고 있었나보죠." 랜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툴위그는 고개를 저었다. "멍청한 소리 마. 뜯은 지 일주일이 넘는 아스티시아는 쓸 데가 3없다고. 잡초와 똑같아. 게다가 만에 하나, 브레이엔(보관) 마법으로 이걸 그 애가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그래. 그럼 자네가 다쳤을 때 곧바로 썼겠지, 왜 이렇게 뜸을 들이다가 썼겠나? 말이 안 돼, 이건..." "데이미아가 가져온 게 아닐지도 몰라요." 하고 로이가 갑자기 말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어울리지 않게 심각했으므로, 랜스와 툴위그는 둘 다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편지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말을 이었다. "이 편지를 봐요... 거의 뻔뻔스러운 내용이 아니에요? 이건... 이건 데이미아가 쓴 게 아닐지도 몰라요." "로이...?" "데이미아가 어제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시잖아요? 그 애가 이런 편지를 썼다고 생각할 수는 없어요. 이건 다른 사람이 쓴 편지일 거에요. 분명해요, 왠지 모르지만 확신할 수 있다고요!" "그럼 데이미아는 왜 없어졌단 말야?" 툴위그는 반은 웃으며, 그러나 반은 근심에 잠겨서 물었다. 로이는 지체없이 대답했다. "데이미아가 납치됐을지도 몰라요." "설마..." "어쩌면 나쁜 놈이 이 약을 줄테니 함께 가자고 했을는지도 모르죠. 걔는 그러면 능히 따라가고도 남을 애에요. 어제 그 애가 랜스 때문에 얼마나 미안해 했는지 보셨죠?" "...그럼 데이미아가 위험에 빠졌단 얘긴데." 툴위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로이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한 단어 한 단어 힘을 주어 말했다. "그 애를 따라가야 해요, 툴위그, 랜스." "그럴 수 없어." 툴위그의 대답에 로이의 눈이 커졌다. "왜요?" "생각해 봐. 여기 이 편지에 '따라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어. 만약 이게 우리의 적이 쓴 편지라면, 혹은 적의 요구대로 데이미아가 쓴 편지라면, 우리는 그의 함정에 바지는 것 아니겠어? 그리고 둘째로, 랜스는 지금 다쳤고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태야. 셋째로 랜스가 다 났더라도 그는 여기 왕과 군사들을 버리고 갈 수 없어..." "툴위그!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죠? 난 툴위그가 국왕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로이. 나도 귀족이야- 아니, 적어도 전에는 로그라드의 귀족이었어. 그리고 우리 가문이 추방된 다음에도 그렇게 교육받았고. 랜스에게는 랜스 나름의 의무가 있는 거야. 네가..." "그럼 우리끼리라도 가요, 툴위그!" 로이는 거침없이 말했다. 툴위그와 랜스는 동시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그것이 가장 간단한 해결책이긴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문 쪽에서 들려왔다. 아니, 사실은 낯익은 목소리였다. 엘먼 왕자의 목소리. 그러나 아무도 그가 그런 말투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결연하고, 자신만만하고, 어느 누구의 반박도 용서하지 않을 듯한 차갑고 굳은 목소리... 엘먼 왕자는 갑옷을 차려 입은 채, 휘장을 젖히고 막사의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들 모두에게, 왕자의 갑옷 입은 모습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낯설게 느껴졌다. 똑바로 치켜든 고개, 눈을 부릅뜨 고 상대방을 내려다 보는 태도, 입가에 서린 싸늘한 비웃음... 그것들이 엘먼 왕자를 마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와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왕자님...?" 로이가 놀라서 그를 불렀으나, 왕자는 들은 체도 않고 랜스의 앞으로 걸어갔다. 병석에 누운 이 창백한 기사를 보는 그의 눈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경멸과 우월감. 랜스는 그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좋을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속국(屬國)의 마법사에게 이렇게 당하다니, 천하의 랜스 아덴의 체면이 말이 아니군. 뭐, 비난하러 온 것은 아니오. 그대는 그런 대로 최선을 다했으니까. 실력이 안 따라준들 그대의 잘못이겠소?" 노골적인 비아냥이었다. 그러나 랜스도 툴위그도 로이도,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를 낼 정신도 없었다. 엘먼은 그런 그들을 슥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요정족의 마법사가 드디어 떠나갔다고 하더군. 그럴 줄 알았소. 요정족이 그대 때문에 여기에 언제까지고 머물러 줄 거라 생각했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은 생각이었소, 랜스 경. 요정족이란 것들은 원래 남의 생각은 하나도 안 해 주고 제멋대로니까. 뭐, 출신이 출신이니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고 비난할 수는 없겠지. 걱정 마시오, 랜스 경. 나는 고작 다친 사람 꾸중하러 여기 온 게 아니니까. 오히려 지금가지 그대가 미미하나마 최선을 다해 싸워 준 것에 감사를 표하고, 보상을 하기 위해 온 거요. 떠나간 요정족 마법사든 그대의 친구요. 그리고 그대는 그녀 혼자 떠난 것에 대해 불안해 하고 있소. 그리고 그대의 친구들은 함께 그녀를 찾으러 출발하기를 원하고 있소. 안 그렇소?" 묵묵부답. 그러나 엘먼에게는 대답이 있건 없건 상관이 없었다. 그는 계속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간단한 해결책을 주겠소. 랜스 경, 그대에게 자유를 주겠소. 떠나시오. 이 소년과, 난쟁이와 함께."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상황을 파악하고, 그리고 도 엘먼이 내뱉은 말을을 이해하는 데에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듣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윽고 랜스가, 아직도 이게 악몽인지 악몽같은 현실인지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한 채, 머뭇 거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나 폐하께서..." "아버님은 내가 설득하겠소. 나는 그 분의 아들이 아니오?" 그러나 왕이 아들의 말을 들들 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에스테이아 인이 아니었다. "황송하오나, 전하, 저는 이 곳에 남아야 할 줄로 압니다. 다만 로이와 툴위그를 보내 주신다면..." "이해를 못하는군. 나는 그대가 떠나 주기를 원하오. 걸을 수 있게 되는 즉시!" 엘먼의 얼굴은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고, 그의 말은 마치 언 칼날처럼 싸늘했다. 로이와 툴위그는 물론, 랜스조차 그의 말에 만 마디의 반박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에게는 아들이 있소. 그런데 뭣하러 조카가, 그것도 친동생의 아들도 아닌 후궁 소생의 이복 동생의 아들이 필요하겠소? 하, 그것도 이제 싸우지도 못하는 병자 조카지. 이해 하겠소? 나는 더 이상 아버님 주위에 천출의 조카가 얼씬거리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을 원치 않아. 그리고 그의 난쟁이 족속의 동료와 전투에 하등 도움될 게 없는 평민 출신 시종이 눌러앉아 식량이나 축내는 것도 원치 않고. 흥, 지표정들을 보니 내 말에 기분이 상한 모양인데, 왕세자의 말을 듣지 않고도 무사히 산 사람이 에스테이아의 역사에는 흔치 않았다고 말해 주고 싶군. 그럼, 잘들 생각해 보시오!" 아무 말도 못 하는 세 사람을 남겨두고, 왕자는 망설임 없이 막사를 나섰다. 로이와 툴위그, 그리고 랜스는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며 웃어야 할지 화를 내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이윽고 툴위그가 말을 꺼냈다. "로이, 너 저 사람이 누구같냐?" "글쎄요... 생긴 걸로 봐서는 엘먼 왕자하고 꽤 닮았는걸요." --------------------------------------------------------------------- "넌 어째서 또 여기에 나왔느냐?" 출전 준비를 끝낸 왕이, 갑옷을 갖추어 입은 채 말을 끌고 다가오는 왕자를 보고는 비난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자는 그를 흘끗 보더니 대답 3하지도 않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러나 왕은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전장에서 도망이나 치러 나왔느냐? 그렇다면 오늘도 내가 사람을 시켜 널 찾게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엘먼! 오히려 나는 사람을 시켜 널 쫓아낼테니까!" 여느 때처럼, 왕의 곁에 있던 호위병 중 하나가 얼굴을 숙인 채 웃음을 감추었다. 그러나 킥! 하는 웃음 섞인 숨소리는 왕자의 귀에 들리고도 남았다. 엘먼의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휘둘렀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호위병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동료들이 얼른 부축해 일으켰으나, 배가 갈린 그 병사는 이미 숨이 넘어가는 중이었다. 왕은 놀라서 얼굴이 창백해진 채 소리쳤다.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도대체 어떤 때라고 우리 편의 군사를..." "저는 왕세자에게 무례를 범한 자에게 응당의 처벌을 내렸을 뿐입 니다, 아버님. 전시일수록 규율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왕자의 목소리는 태연자약했다. 왕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것이 과연 그의 아들인가? 아니면... "어서 가시죠, 아버님." 왕자는 말을 이끌고 앞장섰다. 왕은 마치 말도 안 되는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은 적들과 격돌했을 때 일어났다. 왕의 바로 곁에 있던 엘먼이, 주체할 수 없이 날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하하하! 그래, 와라! 식민지의 졸개들아!" 3 망설임 없이 적진으로 뛰어드는 기사를 보고, 아트웰 군은 대체 저 정체 불명의 기사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심해야 했다. 엘먼은 자신 의 목숨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적을 죽이는 데에만 급급하고 있었다. 그의 칼날에 수많은 적의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고 마구 뒤어드는 엘먼을 보호하기 위해, 그의 호위병들도 심각한 희생을 치루어야 했다. 만약 그것을 다른 사람이 보고, 왕에게 전해 주었더라면 왕은 별 시시한 농담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 웃어 넘겼으리라. 그러나 지금 왕은 그 모습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하하하! 가소로운 것들, 지옥에나 가 버려라! 반역자들!" 왕자의 갑옷은 순식간에 적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너무 가까이서 적들을 베었으므로 내장이 갑옷에 묻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동요 없이, 적진을 잘만 쳐들어가 적들을 잘만 베고 있었다. 너무나 대담히 적진을 치고 들었으므로, 왕자의 호위병 중 한 명이 그에게 가가이 접근해 사정을 해야 했다. "전하! 너무 적진에 깊숙히 들어오셨습니다. 어서 나가지 않으면 위험..." "이 바보같은 것! 나더러 도망가란 소리냐!" 방금 아트웰의 그림자 기사의 목의 벤 그 칼로, 왕자는 지체없이 자기 호위병의 목을 날려 버렸다. 호위병들은 이제 질겁을 해서 왕자의 곁에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그런 무모한 행동 중에서도 왕자가 목숨을 잃거 나 포로가 되지 않게 지켜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의 피로 목욕을 한 듯한 그의 끔찍한 모습과 제정신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칼놀림이었다. (계속) --------------------------------------------------------------------- * 엘먼이 이상해진 건 필리우스 탓? 아님 엘먼 자신의 탓? ...문제 가정이 문제 청소년을 만듭니다.^^; (하지만 엘먼은 20도 넘은 어른...)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PS. 엘먼 왕자에 대해 감사한 말씀을 써 주신 분... 추천해 주신 오시리스님... 그리고 하이텔에 올려 주시겠다고 하신 분... 모두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 제게 용기를 주신 모든 분들도요. 근데 왜 중간중간에 3, 9 등등의 숫자가 끼어드는지 아시는 분 혹시 계세요? PPS. 환동에 래디가 실마릴리온을 번역합니다. 이건 매일 연재가 아닙니다. 격일 연재도 아니고요. 그럼 머냐고요? "작가 사정이 허락할 때 언재" 죠... (하하... 또 돌이 날라오는군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엘먼은 자신이 교육받은 모든 검술을 쏟아부어 싸우고 있었다. 전에는 한 번도 이렇게 손발이 마음대로 움직여졌던 적이 없었다. 항상 칼을 잡은 그의 손은 두려움으로 떨렸고, 발은 적이 없는 쪽으 로만 향하려 했다. 게다가 피, 붉은 피가 쏟아지는 것을 것을 보면, 그게 적군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마치 그 자신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엘먼은 어째서 자신이 그런 어리석은 두려움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적의 몸이 갈라지고 피가 쏟아지는 모습은 차라리 통쾌했다. 그의 칼날이 적의 몸에 파고드는 감촉을 느낀다는 것은 희열이었다. 그는 칼을 휘두르며 사나운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이 모든 것들을 전에는 기피했을까? 아니, 자신이 전에 이런 것들을 기피했었다는 것이 사실일까? 그것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조작된 기억처럼 느껴졌다. "어리석은 것, 무모하게도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검은 갑옷을 입은 레일라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레일라,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랜스 아덴조차 맞먹을 수 있는 상대. 그 전이라면 그를 두렵게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아니었다. 전에는 왜 그렇게 이 여자를 무서워했을까? 기껏해야 갑옷으로 몸을 가린 계집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레일라는 검게 칠한 날이 번쩍거리는 거대한 도끼를 한 손으로 치켜든 채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양 편의 병사들은 이미 둘을 위해 길을 튼 후였다. 레일라는 낮고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검술은 둘째치고라도 대단한 대담성을 지닌 기사로군, 그대는. 그대와 같은 기사가 왜 이제까지 눈에 띄지 않았는지 궁금할 정도요. 이름을 물어도 될까?" "흥, 내 포로가 되면 가르쳐 주지!" 엘먼은 칼을 휘둘러 레일라에게 덤벼들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상대한 다른 병졸들처럼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대답성에 놀라 당황하고 도주하는 그들과는 달리, 그녀는 대담하게 그의 공격을 받아쳤다. 엘먼은 자칫하면 말에서 떨어질 뻔 했으나, 얼른 균형을 잡았다. 레일라의 도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목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간신히 말을 뒤로 몰아 그것을 피했다. 금제(金製) 갑옷에 금이 가 갈라질 정도로 무서운 공격 이었다. 다른 기사였다면 얼굴을 스치는 그 바람에도 두려움을 느끼고 주춤 했으리라. 그러나 엘먼은 두려움도 경계심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마치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칼을 휘두르며 다시 달려들었다. "죽어라! 아트웰의 반역자!" 레일라는 고개를 숙여 칼을 피하고, 다시 도끼를 휘둘렀다. 그녀의 도끼를 막아 낸 엘먼의 방패가 찍 갈라졌다. 그러나 그는 방패를 던져 버렸을 뿐, 아무런 태도의 변화도 없이 똑같은 공격을 시도해 왔다. 이렇게 되자 당황한 것은 레일라 쪽이었다. '저놈... 바보 아냐? 위험하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나? 아니면 죽고 싶어 안달이 난 건가?' 난생 처음으로 그녀는 상대를 짐작할 수 없어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녀의 공격은 긴장에 차 있었고, 평소와는 다르게 계속 적을 비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은 침착했다 - 그것을 침착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녀의 도끼가 그의 가슴 보호대를 떼어내 버려도, 그의 심장 부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가 피가 흘러내리게 해도, 아니, 그 도끼와 맞부딪힌 칼날이 이가 나가도, 그야말로 요지부동이었다. "죽어랏!" 긴장한 그녀는 허점이 드러나는 자세로, 적의 목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노련한 기사였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녀의 대담한 적은 그러지 못했다. 그는 그 공격을 피하려 하다가, 도끼 날에 투구를 스치며 말에서 떨어졌다. 말은 놀라 달아나고 그는 투구가 벗겨진 채 땅 위에 뒹굴었다. "뭐.... 엘먼 왕자?" 그의 얼굴을 본 레일라는 입을 딱 벌렸다. 놀란 나머지 그녀는 적이 쓰러져 있는 동안 도끼로 내려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엘먼은 얼른 일어나 칼을 바로잡고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공격으로 말에서 떨어지 기는 했으나, 정작 상처라고는 이마가 조금 까져 피가 흘러내린 것밖에는 없었다. 오히려 정신적 충격은 레일라 쪽이 더 심각했다. '설마... 그 겁쟁이 엘먼 왕자란 말야? 그렇게도 유명하던... 그럴 리 없어! 저 눈을 봐, 저건 살의에 불타는 눈이야. 하지만 얼굴은 왕자가 틀림 없는데...' "감히 나를 말에서 떨어뜨려? 죽어라, 이 계집!" 방패도 말도 잃고 가슴 보호대도 떨어져 나간 엘먼은, 겁도 없이 검 하나만 휘두르며 레일라에게러 뛰어들었다. 그의 칼은 그녀의 말의 가슴을 스쳤고, 놀란 말은 날뛰면서 도망가시 시작했다. 레일라는 말에서 떨어지기 않기 위해, 얼른 뛰어내려 땅에 착지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엘먼은 인정사정 없이 칼을 날렸다. "죽어랏!" 레일라는 얼른 도끼를 들어 그의 칼을 막았다. 그녀는 투구 사이로 그의 파란 눈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푸른 빛인 그의 눈이 그토록 인상에 깊이 각인된 적은 일지기 없었다. 레일라는 전에도 엘먼 왕자가 아클레어 3세와 함께 아트웰에 행차했을 때 여러 번 그를 보았고, 항상 멍청하고 겁쟁이처럼 생겼다고 생각해 왔던 터였다. 스트라본이나 사일러스가 말을 걸면 얼굴이 하얘져서 눈을 내리깔고 어디론가 숨어버리는 청년. 그런데 지금, 그의 눈을 보는 것은 마치 시선으로 얼음을 만지는 것과 같았다. '...뭔가가 잘못됐어! 분명히!'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엘먼은 지쳤는지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그런데도 본인은 자신이 지쳤다는 것조차 자각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칼을 번쩍 들어올리고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죽어라!" 레일라는 가볍게 몸을 피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바로 곁에 착지한 엘먼을 향해 재빨리 도끼를 휘둘렀다. 그는 몸을 피하려 들었으나, 왼팔이 깊이 베이고 말았다. 그의 피가 레일라의 얼굴에 튀었다. 차가웠다. "제기랄!" 엘먼은 언제 배웠는지 모를 욕설을 퍼부으며 자기 편 병사들 틈으로 사라졌다. 잠시 멍하니 있던 레일라는 정신이 번쩍 들어 그를 뒤쫓았다. 그녀의 앞을 수많은 에스테이아 병사들이 가로막았으나, 모두 그녀의 도끼 앞에 쓰러졌다. 레일라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엘먼을 죽여야 한다는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그를 죽여야 했다. 무엇인가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다... "저 여자를 죽여라! 그림자 기사단의 레일라다!" 병사들과 기사들이 점점 더 많이 그녀의 앞으로 들이닥치고 있었다. 그녀는 서서히 자신이 지쳐 감을 느꼈다. 말도 안 탄 채로 적의 진지로 계속 진격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의 도끼는 마치 피를 빨아들이듯이, 더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쓰러드릴수록 무거워져 갔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곧 그녀의 부하 기사들이 그녀에게로 달려왔다.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그녀 주위에 개미데처럼 몰려 있던 에스테이아의 병사들과 기사들 을 가차없이 베어 쫓아버렸다. 레일라는 부하 한 명이 끌고 온 말 위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왕자를 잡아야 해. 엘먼 왕자를 죽여!" "불가능합니다. 적은 이미 대열을 새로 갖추었고 서서히 퇴각하고 있습니다." 레일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검은 투구를 벗어 얼굴에 튄 엘먼의 피를 닦았다. 피는 지워졌으나 그것이 처음 그녀의 얼굴에 닿을 때의 그 감촉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것은 차가웠었다... "뭔가 상당히 잘못되어 있어..." --------------------------------------------------------------------- 아클레어 왕은 갑옷을 벗지 않은 채 자신의 막사에 홀로 앉아 있었 다. 자신이 이미 진 전투를 쓸데없이 질질 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그것은 병졸들 사이에서 널리 거론되고 있는 이야기였고, 하루에 한 명씩 용에게 제물로 용사를 바치던 루디오스 왕처럼 날이 갈수록 의미없이 병사들의 목숨을 축내는 왕에 대한 반발은 커져 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병사들으 이야기일 뿐이었다. 아클레어 3세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 지, 승리의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저 병사들 - 어리석은 평민들! 왕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들은 전시에 특히 겁이 많고 어리석어졌다. 그들은 이제 랜스도 저 모양이니 후튀하고 이ㅏ스텔로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왕 자신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느끼고 있기는 했다. 그가 그의 아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도대체 그의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클레어는 지금 치유술사들에게 치료를 받고 있는 엘먼을 생각하 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하지 못할 사건이었다. 항상 그는 엘먼이 어리석은 겁쟁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레일라 갤러허드를 거의 죽일 뻔 했다.' 병사들 사이에서는 왕자에게 악마가 씌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악마일까? 그것이... 은총일 수는 없을까? 신의 은총? 사실 그도 적의 피로 범벅이 되어서도 큰 소리로 웃어대며 칼을 휘두르는 아들을 보고, 섬뜩한 느낌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혀 만족스럽 지 않다고 한다면, 전혀 자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그는 레일라 갤러허드를 꺾을 뻔 했다. 왕 자신도, 랜스도 하지 못했던 일을. "폐하... 황송하오나, 잠시 말씀을 여쭈어도 되겠나이까..." 수석 치유술사였다. 그는 하얀 수염을 늘어뜨리고 잔뜩 쉰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노인이었는데, 최근 부상자의 급증으로 과로하고 있으므로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였다. 왕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위엄있게 말했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은데. 중요한 일인가?" "저... 엘먼 전하에 대한 일이옵니다." "그렇다면 들어오게." 치유술사의 얼굴은 걱정에 차 있었다. 그는 오래도록 죽을 운명의 사람을 대해 왔고,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에게 설득력 있지만 사실과는 다른 대답을 해 주는 데에 익숙해져 있어서, 표정을 숨기는 데에는 도가 튼 인물 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걱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걱정은 금방 왕에게로 전염되었다. "그 아이의 상태가 위험한가?" 왕은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그 전에는 자신이 이렇게 아들을 걱정하는 줄을 미처 몰랐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상처는 저희들이 거의 다 아물게 했습니다. 그리고 출혈은 좀 심했지만 늦지 않게 지혈했고... 내일 쯤이면 거의 완치되실 줄로 아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무슨 걱정인가?" 노인은 머뭇거렸다. "그 분의 피가... 차갑습니다." "설마! 죽은 자의 피나 차가운 법이네." "그러나 사실입니다, 폐하... 전하의 피는 얼음처럼 차갑습니다. 치유술사들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병사들이 말하기를..." "어리석은 말은 말게!" 하고 왕이 날카롭게 말을 끊었다. 치유술사는 놀라서 입을 다물었다. 왕은 자신이 좀 심했다고 느꼈는지 좀더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그 애는 지금까지 피를 흘려 본 적이 없네. 아마도... 특이 체질이 아닐까? 전에는 이런 사례가 없었나?" "제가 아는 한에는 없었습니다, 폐하. 그러나 만약 에스텔로 돌아가 서적을 찾아본다면..." "그럼 에스텔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 일을 보류해 두기로 하지." 하고 왕이 잘라 말했다. (계속) "엘먼이었다고." 사일러스와 스트라본은 레일라의 보고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레일라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틀림없는 엘먼 왕자였습니다. 그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습 니다. 적에게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엘먼의 몸 속에서 잠자고 있던 아레나스 왕가의 피가 갑자기 폭주 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래서 자네가 놀라서 그를 베지 못한 거로군, 레일라. 분명 내가 볼 때에는 그대의 검술이 우세했는데 말이지." 사일러스 왕은 아직도 웃음을 감추지 못한 얼굴이었다. 약간의 근심이 그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는 있었으나, 그는 역시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엘먼, 그 겁쟁이 왕자라니... "웃을 일이 아닙니다! ... 용서하십시오, 폐하, 하지만 정말로 이건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와 싸울 때에는... 뭐랄까, 인간과 싸우는 것 같은 느낌이 없었습니다. 그는... 마치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못해서, 분별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인간과의 싸움이라기보다... 스켈리톤과의 싸움 같았습니다." "스켈리톤이라..." 스트라본의 얼굴이 조금 찌푸려졌다. 사일러스는 동생을 돌아 보았다. "짐작가는 데가 있어, 스트라본?" "글쎄... 사람의 성격을 갑자기 냉혹하게 만드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한지는 나도 모를 뿐더러... 아클레어 왕이 아무리 전쟁에 이기고 싶어서 제정신이 아니라지만, 아들까지 희생시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 "그는 아들에 대한 애정이 없었어. 그는 엘먼같은 자식이 있는 것을 부끄러워했지. 멀리서도 그것을 볼 수 있었어." 사일러스는 생각에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스트라본은 어깨를 으쓱했다. 왕과 왕자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다는 것은 온 레젠디아 인들이 아는 사실이었다. 아들 대신 조카인 클레이브가 왕좌에 오를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이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이 기본적인 부성애(父性愛)조차 없다고 해야 할까? 스트라본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실 엘먼을 동정하고 있었다. 아니, 동정하는 것 이상이었다. 그는 엘먼의 처지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스트라본 자신도 - 태어나서 곧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은 아기,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의원들의 숙덕거림 속에 자란 소년, 칼 한 자루 쥐어보지 못한 채 성년을 넘긴 왕자인 그도 - 엘먼처럼 될 수 있었다. 아니, 엘먼보다 더 비참하게 될 수도 있었다. 지금은 숨을 거둔 그의 어머니 브레시아가 그의 재능을 발견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기꺼이 그를 마법사로서 교육시키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아트웰의 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에스테이아 본토와는 비교할 수 없이 좋지 않았더라면, 그는 엘먼보다 더한 쓰레기로 취급받았을 수도 있었다. 엘먼. 그가 아는 엘먼은, 순진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이었다. 그는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소박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목소리로. 그런 그가 만약 음악을 신성시하는 로운이나 카르히트에서 태어 났더라면, 그는 분명히 재능을 인정받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테어난 곳은 에스테이아, 노래를 부르는 것 따위는 평민보다 못한 유랑민들이나 귀족들의 비위를 맞추는 남창이나 할 짓이고, 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남자가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나라였다. 그렇다, 왕은 왕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왕자의 인격 자체를 포기해 버렸을까. 지금까지 길러 온 자기 아들의 영혼을? 스트라본은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엘먼을 위해서,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국왕 폐하, 전갈입니다." 하젠이 급히 달려들어와 사일러스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손에 쥔 종이를 공손히 들어올렸다. 새의 발에 묶여 온 듯 중앙에 실로 묶은 자국이 있는, 작은 종이였다. 사일러스는 그것을 펴서, 깨알같이 적혀 있는 암호를 읽어내려갔다. 그의 표정에는 별 변화가 없었으나, 그것을 다 읽고 난 그는 레일라와 하젠에게 단호히 명령했다. "나가 있게. 내 동생과 단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으니." 둘은 명령에 따랐다. 스트라본은 걱정스러운 듯 사일러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나는 무슨 일인지 잘 모르겠다, 스트라본. 하지만 너는 알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구나. '얼음처럼 차가운 피'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니?" 스트라본의 얼굴이 어두어졌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팔레비엔...!" "뭐?" "아냐... 엘먼의 일이로군. 그렇지?" "그래. 스파이가 방금 속보를 보내 왔어. 엘먼의 피가 얼음처럼 차갑다는군. 치유술사들이 그렇게 말했대. 지금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고. 엘먼이 악마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다는군..."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랬는데. 정말로 왕이 아들을 죽여 버렸군." 스트라본은 슬프고도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일러스는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스트라본은 한숨을 푹 쉬고는 설명했다. "팔레비엔, 얼음 심장의 저주야. 이건 마법이라기보다는 설화나 전설 에 더 가까워... 아무도 그 주문을 모르기 때문이야.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 때의 마왕들은 이 주술을 쓸 줄 알았다는군. 모든 마왕들은 아니고, 극히 일부, 사람의 정신을 미혹시키는 데 뛰어난 마녀 루리아 하리시아(매혹적인 루리아)나 엠로크 벨라디오스(지옥의 왕 엠로크) 같은 마왕들만이. 그들은 자신의 마음이 강인해지기를 원하는 기사들을 유혹하여 심장을 어름으로 바꿔치도록 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대. 그러나... 아무도 진위를 알지 못해. 어차피 타냐헨 네아 시대의 이야기의 절반은 거짓이라고 하잖아?" "얼음 심장... 그렇다면 엘먼이...?" "그렇지 않기를 바래... 하지만 저런 갑작스런 성격의 변화도, 얼음 처럼 찬 피도... 모두 그 주문의 효과이기는 해. 하지만..." 갑자기 스트라본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이 안 돼! 그건 그냥 전설이라고. 만약 사실이라 해도, 그 주문은 더 이상 전수되고 있지 않아. 마왕과 그 부하들은 모두 레젠디아에서 사라졌어! 게다가 아클레어가 아무리 엘먼의 못마땅하다고 해도, 설마 그런 짓까지 할 수는 없어. 그건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기억과 몸은 있지만, 그 이전의 그 사람을 형성하던 인격은 모조리 사라지는 거야. 그런 주문을 왜 아들에게..." "엘먼 자신이 원했을 수도 있잖아? 너는 '자신의 마음이 강인해지기 를 원하는 기사'라고 했지. 그것보다 엘먼에게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겠어?" "지금 엘먼이 자살할 만한 용기가 있다고 말하는 거야?" "모르지... 하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대로 자살은 용기가 아닌걸. 게다가 엘먼은 너처럼 그 주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리가 없고... 게다가..." 사일러스는 어두운 얼굴로 머뭇거렸다. "그는 아마 아버지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했을 거야." 두 형제는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스트라본은 불안한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불가능해. 엘먼은 잠시 아버지께 잘 보이기 위해 악을 쓰고 있을 뿐이야. 팔레비엔의 주문을 쓸 수 있는 자는 지금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아 - 만약 그 주문이 실제로 있기나 했다면 말이지." 그리고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형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쨌든 적이 동요하고 있어. 우리에겐 잘 된 일 아냐? 랜스 경은 다쳤고, 병사들은 잔뜩 겁을 먹고, 듣자하니 라스헨 에이니드는 사라졌다는군. 이런 기회는 없을 거야. 적을 일망타진할 생각이나 하자고. 난 내일의 전투를 위해 좀 자야겠어!" --------------------------------------------------------------------- "랜스 경을 보내십시오, 아버님." 엘먼이 대담하게도 왕에게 명령조로 입을 연 것은, 눈보라가 휘날리 는 새벽이었다. 차갑게 윙윙대는 바람은 폭설을 예고하고 있었다. 왕은 자신이 바람 소리 때문에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의심하며, 아들을 쳐다보았다. 그의 아들은 하룻밤 새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항상 단정하고 묶던 머리칼은 바람에 휘날려 마구 헝클어졌고, 어머니를 닮아 양순하다고만 생가되었던 그의 눈은 인간족을 통일시킨 아레나스 왕가 특유의 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그의 눈 뿐이 아니었다. 그의 콧날은 얇고 언뜻 보면 약해 보였지만,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것이 영락없는 아레나스 가의 매부리코였고, 곱상한 달걀형의 얼굴에서도 아클레어 3세와 똑같은 강인한 턱모양은 뚜렷이 두드러졌다. 왕은 왜 그의 아들이 이제까지 아내만 닮았다고 믿었었는지 의아해졌다. 그의 아들의 목소리도, 오만할 만큼 자신에 찬 말투도 마찬가지였다. "랜스 경을 보내십시오, 아버님. 의원들이 그도 이제 걷고 말을 타는 데에 지장이 없다고 하니까요." "우리가 왜 그를 보내야 하지?" "첫번째로, 그는 떠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는 건강이지만, 싸우는 데에는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 둘째로, 그의 친구인 요정족의 마법사가 떠나서 지금 그는 그녀를 찾아 동료 난쟁이와 남부 출신 소년과 함께 떠나고 싶어합니다. 셋째로, 왕의 정통 후계자와 소문 무성한 왕의 이복 동생의 아들이 함께 중요한 전장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랜스 경에 대한 소문이 불만인 모양이로구나." "당연하죠. 어느 왕자가 그따위 소문을 좋아하겠습니까?" 왕자는 불쾌함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말했다. 왕은 웃었다. "지나치라만치 대담하구나. 하지만 우리는 랜스 경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느냐?"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여기에는 인간족의 왕이 있고 그의 왕자도 있습니다. 고작 식민지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이만하면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왜 몬스터 헌터 출신의 기사가 필요합니까?" 왕은 놀라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정말 악마가 그의 아들에게 쓰인 것인가? 치유술사들이 수근거리는 대로, 이것은 불길한 징조인가? 아니, 그럴 리 없다. 드디어 이 아이에게 숨겨져 있던 제 2의 본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을 뿐이다. 겁쟁이 엘먼이라고, 왕자답지 못한 왕자라고?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아레나스 왕조의 아들인데, 인간족의 통일을 완성시킨 아클레어 시이그람 아레나스 3세의 아들인데! 이제서야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 뿐이다. 왕은 오래간만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최초로 아들에게 아버지만이 지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자랑스러움의 얼굴을 내보였다. "네 말대로 하자꾸나, 내 아들아. 사람을 보내 랜스 경에게 전해라. 원한다면 언제든지 우리를 떠나 동료를 찾아가도 좋다고. 그리고 엘먼, 너는 나와 함께 전장으로 가자. 네가 오늘도 어제와 같은 활약을 보여주리라는 것을 믿어도 되겠지?" 왕이 왕자를 '내 아들아'라고 부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엘먼은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가 그 전에 저 말을 얼마나 듣고 싶어했던가. 그러나 이제 보니 단지 모여진 두 단어, 음절들의 조합이 아닌가? 그리고 저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던가. 그러나 지금 보니, 결국 늙은 얼굴이 웃음으로 주름살만 더 늘어나지 않는가?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는 말과 동작들. 왜 자신은 그것들을 그렇게 절실히 바랬던가? 아니, 자신이 그것을 정말 바랬던가? 엘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말에 올랐다. 부질없는 생각들. 모조리 쓸데없는 것들. 그는 허리에 찬 검의 무게만을 만족스럽게 느끼고 있었다. 피.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줄 권력과 명예, 흥분. 그것만이 그의 마음을 만족스럽게 했다. 왕은 왕자의 곁에서 말을 몰고 있었다. 그러나 만족에 넘치는 늙은 왕은 자신의 아들이 그를 볼 때, 그 시선이 단 한 조각이 애정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경멸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이 늙은이가 죽으면,' 하고 엘먼은 생각하고 있었다. '왕위는 내 거야. 아, 물론, 그 전에 이 노인에게 왕세자를 확실히 발표할 시간은 주어야 하겠지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