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음모 (Chapter 2 The Plot) 클레이브 아덴은 먼지투성이가 된 망토를 펄럭이며 에스텔 궁성 (宮城)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얼굴은 오래고 급한 여행으로 해쓱했으며, 그것은 바로 뒤따라 들어온 그의 부관 칼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을 탐탁찮게 바라보고 있는 나이들고 깡마른 총리대신 펠드릭을 보자마자, 달려가 물었다. "폐하는?" "고비는 넘기셨소." 펠드릭의 차가운 말에 클레이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펠드릭은 매서운 한마디를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로이히르 같은 곳에 폐하 혼자 계시도록 내버려 두고 어딜 갔던 거요? 책임 추궁이 있을테니 각오를 단단히 하시는 게 좋을 거요, 클레이브 경." "시이드에 갔었소. 그곳에 반란이 일어났소." "데이슨 경이 그렇다고 하더군. 그래서 반란은 진압했소?" "아니오... 사일러스는 쉽게 볼 상대가 아니오. 지금 그곳은 내 동생이 지키고 있소." "아! 경의 동생. 그렇군." 펠드릭은 얇은 입술에 드러난 비웃음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무례한 태도로 등을 돌려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뒤를 한 호화로운 금빛 망토를 걸친 야윈 젊은이가 허겁지겁 따라갔다. 클레이브는 그 젊은이를 어디서 보았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그가 왕의 외아들인 엘먼 아클레어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하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다 보니 얼굴까지 잊어버렸던 것이다 - 물론 기억 하기 쉬운 얼굴도 아니었지만. 펠드릭은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갔다. 그의 앞에서 마치 그의 정 반대로 만들어진 듯한, 뚱뚱하고 키가 작고 번지르르한 웃음을 흘리는 얼굴의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디온의 총독 마커스였다. 그는 펠드릭과 왕자를 보자, 공손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 작은 눈을 날카롭게 굴리며 속삭여 물었다. "그 천출(賤出)의 애송이가 돌아온 거요?" 펠드릭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단지 빨라지는 걸음이 분노를 나타내 줄 뿐이었다. 왕자는 말이 없었다. 그가 클레이브와 그 일당들만 보면 기가 죽는다는 것을 펠드릭은 알고 있었고,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클레이브 놈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하고 디온의 총독은 아부가 철철 넘치는 어조로 말했다. 펠드릭은 그의 그 말투조차 신경에 거슬렸다. 하루 이틀 듣는 것도 아닌데. 그는 자신 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겁먹은 생쥐 같은 왕자의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엘먼 전하, 어째서 그를 책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전하의 아랫사람입니다. 당당한 태도를 보이셔야지요. 그런 관용을 보이시니 자꾸 기어오르려 하는 것입니다." 신경질적인 총리대신이 입을 열자, 왕자는 질겁을 했다. 그는 옅은 금발과 옅은 푸른색의 눈 때문에, 마치 탈색해 놓은 인간처럼 보였다. 그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 도움을 구하는 듯이 통통한 마커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마커스는 짧은 다리로 키가 큰 왕자와 총리대신을 따라오느라 숨이 차서, 주군의 부름에 응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클레이브는...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오. 왕위도 그가 원한다면 그의 것이 될 거요..." 펠드릭은 울화통이 터졌다. "그렇게 못하게 막아야지요! 전하는 국왕 폐하의 하나뿐인 적자 (適子)라는 것을 잊으셨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아들 취급도 안 하시는데요..." 펠드릭은 포기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왕자는 이제 스무 살이 넘었 음에도 불구하고 어린애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러니 클레이브 아덴이 엉뚱한 일을 꾸며도 할 말이 없지... 그의 귀에, 마커스가 눈치없이 해죽거리며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저희만 믿으시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가지... 펠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그도 엘먼 왕자보다는 클레이브 아덴이 왕위에 더 잘 어울리는 인물이 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왕자는 몸도 마음도 허약했고 피를 두려워했다. 그렇다고 권모 술수에 능하지도 않았다. 그에 비하면 클레이브 아덴은... 그는 영웅이었다. 펠드릭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에스테이아 국민들의 영웅이라는 것은 제 아무리 총리대신에 왕가의 친척이라도 부인할 수 없었다. 차라리 엘먼 왕자가 어린 시절 숱하게 앓던 병들 중 하나로 일찍 죽었더라면... 그러면 클레이브 아덴은 자연스럽게 왕위 계승자가 되었을 것이었고, 펠드릭도 별 반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단 하나, 그의 모친이 도대체 어디서 뭘 하던 여자인지 알 수 없다는 점만 빼고는. 그녀는 어느날 갑자기 왕의 모험심 다분한 이복동생이 데려온 여자였다. 귀족 가문 들의 숱한 반대를 일으키며. 그녀에 대해서는 너무 알려진 것이 없어서, 나중 에는 그녀가 창녀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소문은 펠드릭 자신에게는, 약간 꺼림칙할 뿐이었다. 비록 그가 그 소문을 다른 귀족들을 상대로 아주 효과적으로 써먹긴 했지만... 진짜 문제는 엘먼 아클레어, 왕의 적자가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이었 다. 물론 클레이브가 엘먼 왕자보다 더 그럴듯해 보일는지 모른다. 그러나 엘먼 왕자가 왕의 친아들이고, 그는 조카일 뿐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왕위를 결정하는 것은 혈통, 오직 혈통인 것이다. 엘먼 아클레어가 가진 유일무이한 무기... 지금 왕이 혈통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다면, 어떻게 백성들에게 왕가의 혈통을 존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왕자가 사라지고 난 뒤, 펠히스는 신경질 가득한 어조로 마커스에게 투덜거렸다. "클레이브 아덴은 로이히르에서 왕을 버리고 떠났소. 아무리 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해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소. 게다가 그것 때문에 왕은 중상을 입고 로이히르는 오르크의 땅이 되었담 말이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클레이브 아덴이라도 이번 일을 피해갈 수는 없소." "그건 생각해 볼 문제요, 펠드릭 경... 폐하께서 그의 편을 들고 계시니까. 이미 상당수의 귀족들이 클레이브 아덴같은 기사를 이런 전시에 잡아들인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폐하는 엘먼 전하가 자신의 아들이란 것을 잊으신 건가?" "모르지... 몇 년 동안 아들의 얼굴도 안 쳐다보시니 말이오." 펠드릭은 고개를 저었다. 왕의 태도도 문제가 있었다... 언제나 다른 뛰어난 기사들과 비교를 해 가며 호통을 치니 아들이 기가 죽을 수 밖에. 차라리 다른 공부를 시켰더라면 아트웰의 스트라본같은 재능있는 마법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리고 우리 쪽 사정도 좋지 않소... 로이히르의 영주는 죽었고, 로운 영주 아르만도 올 수 없다고 하더군." "아르만이? 아니, 왜?" "로운 사정이 좋지 않은 것 같소... 아트웰의 반란은 이제 레젠디아 대륙 전체로 퍼졌소. 소문의 날개는 불사조보다 빠르고 그 독은 살모사보다 빨리 퍼진다지 않소?" "사람 미치게 하는군... 위리드는?" "위리드 대공은 내일쯤 도착할 거요... 그러나 그도 정신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 것 같소. 그는 잔뜩 겁을 먹고 있소... 에스텔에도 몸을 피하러 오는 거요. 암살 시도를 당했으니까." "암살 시도!" 펠드릭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절망했으나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어차피 예상했던 일이었다... 에스테이아의 각국은 누군가 먼저 시작해 주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이 미친 시대를... --------------------------------------------------------------------- 펠드릭에게 손님이 온 것은 바로 그날 밤이었다. 어찌 보면 최악의 접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침 바로 몇 시간 전에, 클레이브와 개인 적으로 친분이 있는 로커스 영주 어윈이 와서 펠드릭이 국왕에게 신청한 클레이브의 책임 추궁은 무산되었다고 약올리듯 전해 주고 간 뒤였기 때문 이다. 집사가 와서 손님이 왔음을 알렸을 때, 그리고 그가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별볼일 없어 보이는 승려 차림의 젊은 사내라고 했을 때, 펠드릭은 그를 성 안에만 들이고 자기 근처에는 오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머리가 아프다는 핑계였다. 아니, 완전히 꾀병이라고는 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정말로 그는 클레이브 아덴의 일을 생각하면 머리가 깨어지고도 남을 지경 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손님이 거기에 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에누인(Enuin ; 바다와 지혜의 신) 신전의 사제들이 입는 짙은 남색의 로브만 아니었더라면, 그는 그 젊은 이가 집사가 말한 '별볼일 없는 승려'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할 뻔 했다. 그는 전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마기(魔氣)가 펠드릭 의 방 전체를 덮고 있었다. 그 느낌이 얼마나 강렬하던지, 펠드릭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의 얼굴이 그저 인상 좋은 평범한 20대 초반의 젊은이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챘을 정도였다. "누구요?" 펠드릭은 이 상황에서도 목소리를 떨지 않는 자신의 자제력을 내심 자랑스러워 하면서 꾸짖어 물었다. 젊은이는 미소를 지었다. 공손하고 순진한 어린 청년의 미소였다. 순간 그는 저항할 수 없는 호감을 느끼게 하는, 검은 머리칼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순결한 사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펠드릭은 그런 그에게 마음이 끌리면서도, 동시에 그만큼 강렬한 경계심을 느꼈다. "제 이름은 필리우스라고 합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마법사이지요. 고귀하신 분께서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급히 달려왔습니다." "...나는 그대의 도움이 필요 없는데." 펠드릭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대답했다. 필리우스(Philius)... 그 이름 은 '친근한 자'라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엘먼 전하, 왕위의 적법(適法)한 계승자이신 분께서 제 도움을 필요로 하셨나보군요." 펠드릭의 심장이 나이에 비해 건강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당장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을 것이다. 필리우스는 새파랗게 질려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펠으릭을,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으며 바라보았다. 펠드릭은 더욱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넌 누구지? 에누인 신전의 승려 복장 따위는 내게 안 통한다. 네 놈은 분명 흑마술사야!" "역시 국왕에 버금가는 에스테이아의 집권자이십니다... 정말 날카로 우시군요. 놀랐습니다. 하지9만 총리대신 각하께서도 왕위 계승의 문제에는 손을 쓰지 못하고 계시지요?" 펠드릭은 대답 없이 필리우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연합을 원하는 귀족이 보낸 전령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이런 유별난 방법으로 올 리가 없다. 게다가 저런 마력을 내뿜는 흑마술사를... 그렇다면 예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나... "...너는 첩자로군." "듣던 것 이상으로 현명하시군요, 각하." "누가 널 보냈나... 아트웰인가? 너는 스트라본의 첩자인가? 그는 대단한 마력을 지닌 흑마술사라고 들었는데." "스트라본이 얼마나 굉장할지 알 도리는 없지만, 제 주인님의 발끝 에도 못 미칩니다." 노래하는 듯한 말투. 아트웰 인이 아니란 말이지... 그러나 남부에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북왕국 위리드의 반란군이 보냈단 말인가? 그러나 그의 발음... 분명히 그것은 고대어식 발음이다. 그렇다면... "설마 로데인? 하지만 로데인은 망했는데..." "하하... 제 친구들 중 로데인과 관계 깊은 놈들이 있기는 하죠. 그러나 넌 아닙니다. 말씀드리죠, 현명하신 총리대신 각하... 각하는 분명 마음 깊은 곳에 제 정체를 떠올리셨을 줄 압니다. 단지 각하의 양심이, 이 나라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고결한 마음이 그 대답을 가로막고 있는 것 뿐이죠. 고결하신 펠드릭 경, 각하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이 보이는군요. 예, 유감스럽게도, 각하의 두려움은 옳습니다. 저는 인간이 아닙니다. 저를 보내신 분 역시 인간이 아닙니다. 저를 보내신 분은 위대하신 혼돈의 힘 그 자체, 카야크 님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섬기는 마족 -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다크 스피릿(Dark Spirit)의 생존자 중 하나입니다. 저희 부족의 마력에 대해서는 들으신 바 있으시겠지요?" (계속) --------------------------------------------------------------------- * 죄송... 본의 아니게(?) 일주일간이나 용의 신전을 못 올렸군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죠? 필리우스는 원래 다른 얘기에 나오는 아이인데 잠시 찬조 출연을... 아참, 논평해 주신 오시님, 정말 감사합니다. ^____________^ Radagast... "내 집에서 당장 나가시오!" 펠드릭은 한 발 물러서며 소리쳤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다크 스피릿, 어둠의 정령들 - 다른 많은 마족들처럼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에서 멸종당했다고 여겨지던 종족들. 필리우스는 경계와 의심이 가득한 펠드릭의 시선을 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펠드릭의 앞으로 한 발 다가서며 활달한 어조로 말했다. "다크 스피릿은 멸종당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겠죠? 하지만 아닙니다, 아직은... 언제 멸종당할지 모르는 신세이긴 하지만요." "더러운 마족 같으니... 썩 꺼져!" "죄송합니다만 대답을 듣기 전에는 안 되는데요. 카야크 님께서 반드시 대답을 들어 오라고 하셨거든요. 저희와 손잡지 않으시겠습니까? 엘먼 전하의 즉위를 위하여..." "네 더러운 입에 그 분의이름을 담지 말아라. 엘먼 전하는 왕의 외아들이시니 즉의하시는 게 당연해! 마족의 도움 따위는 팔요 없다!" "그것이 각하의 대답이로군요. 잘 알았습니다." 필리어스는 스스럼없이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과 펠드릭 경이 오랜 친구이기라도 한 것처럼. "하지만 혹시 마음이 변하게 되시면, 저를 찾아 주십시오. 다크 스피릿 족의 마법사 필리어스를..." "마음이 변할 리가 없다. 썩 꺼지지 못할까!" "변하게 되실 걸요?" 갑자기 필리어스의 보라빛 눈이, 전에 없던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펠드릭의 눈을 노려보았다. 머릿속이 다 꺼내어 펼쳐지는 듯한 느낌에, 잠시 펠드릭은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다음 순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다. "경비병! 경비병! 마족이다!" 필리어스는 그 반응에 깔깔대며 웃었다. 경비병들이 아우성을 치며 펠드릭의 침실로 달려갔을 때, 그들의 눈앞에 보인 것은 마치 눈 앞의 벽이 괴물이라도 되는 양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근엄한 총리대신의 모습이었다. --------------------------------------------------------------------- "펠드릭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소, 조심하시오." 로커스의 영주 어윈 경은 클레이브를 바라보며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는 펠드릭과 거의 동갑으로, 장성한 손자까지 두고 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젊어 보여서 마치 데이슨 정도의 나이인 양 보였다. "국왕 폐하께서는 책임 문책 따위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고 하지만... 펠드릭이 그대로 물러날 사람은 아니오. 그는 나이가 들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사춘기를 맞은 소년처럼 무모한 행동도 할 수 있는 자이니 말이오." "펠드릭 경은 충성스런 신하일 뿐입니다. 엘먼 전하를 걱정하는 것 뿐이지요." 클레이브는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 막 집으로 돌아온 그는 방금 목욕을 마쳐, 아직 머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펠드릭이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요즘 들어 정도가 심해 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시이드에 오웬이라는 기사를 보내어 그를 불러들인 일만 해도... 설마 펠드릭이 그렇게까지 행동할 줄이야. 클레이브는 잠시 켈레브리스라는 여자가 오웬의 팔을 부러뜨린 사건을 생각 해 내고는 미소를 삼켰다. 그런 과격한 여자와 랜스는 도대체 어떤 여행을 하고 있었던 걸까? 물론 미녀이긴 했지만... "...클레이브 경, 내 말을 듣고 있소?" 어윈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 아니오, 죄송합니다. 동생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경의 동생이라면... 랜스 경 말이오? 그래, 지금도 여행 중이오?" "아니오, 사실은... 시이드를 랜스에게 맡기고 왔습니다." 어윈이 그 대답에 눈살을 찌푸렸다. "경의 동생을 모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라면 그렇게는 안 하겠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랜스도 이제 다 컸고요." "클레이브 경, 그대는 동생에게 너무 관대한 것 같소만... 그대에게는 약점이 둘 있소. 그대의 모친과 그대의 동생. 펠드릭은 끝까지 그것을 붙잡고 늘어질 것이오. 약점을 잡힐 일을 벌이지 마시오." "어윈 경! 내 어머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랜스가 날카롭게 외쳤으나, 어윈은 조그만 동요도 없이 말을 이었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오. 펠드릭에게는 편들어 주는 이들이 많지만, 우리에게는 편이 없소. 사실을 받아들입시다, 클레이브 경." 클레이브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랜스는 아버님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 뿐이고... 저와는 다른 방법으 로 드래크로니안들과 싸우는 것 뿐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그 애는 겨우 열 여섯 살이었어요. 저는 그보다 두 살이나 많았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 애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도록 놔 두었습니다. 저는 그 때 에스텔에 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라우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도 이틀 후에나 들었지요. 저는 그 아이에게 빚이 있습니다." "그건 다른 문제요. 설마 진짜로 랜스 경이 하르크자엘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기적이란 일어나는 법이니까요." 클레이브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어윈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벗어 놓은 망토를 걸치며, 경고하듯 말했다. "펠드릭을 조심하시오. 그는 총리대신이고, 전장에서 생활하는 그대 같은 기사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오. 자객을 보낼 수도 있소."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구요." "모르는 일이오. 그대 역시 그대의 옛 친구 사일러스를 함정에 빠뜨린 적이 있지 않소?" 클레이브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이야기는 하지 맙시다. 사일러스는 반란군이라는 사실이 이미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에스테이아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펠드릭도 에스테이아를 위해 그렇게 할지 모르지." 어윈은 이렇게 한 마디 하고는 객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클레이브는 데이슨이 그를 바래다 주도록 내버려 두고는, 그대로 안락의자에 몸을 묻었다. 에스텔로 와도, 그 자신의 성으로 와도 이곳은 그의 피난처가 되어 주지 못했다. 밖에서 힘겹게 사냥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집에도 독사들이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냥꾼의 기분이었다. 도대체 왜들 이리도 분별력이 없을까. 지금은 인간끼리 다툴 때가 아닌데... 아트웰. 그들은 에스테이아가 왕위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봉기에 힘을 얻은 다른 속국들과 멸망 왕조들도 마찬가지겠지... 그리고 오르크들과 드래크로니안들, 그 외 마족들 역시 인간들이 자기네끼리 싸우는 기회를 놓칠 리 없을 것이다... "...이러다간 인간족이 망해 버리고 말 거야..." 클레이브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아클레어 3세가 자기 아들을 공식적인 왕세자로 선언해 준다면 문제거리가 줄어들 텐데. 어째서 그는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설마 펠드릭이 염려하는 대로, 클레이브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닐지...? 갑자기 방문을 시끄럽게 두드리는 소리에, 그가 번쩍 눈을 떴다. 성을 부술 듯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대는 목소리는 분명히 그의 부관, 칼릭의 것이었다. "클레이브 님! 계십니까? 급보(急報)입니다!" "무슨 일이야?" 클레이브는 문을 활짝 열며 물었다. 칼릭이 손에 작은 종이를 든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클레이브의 앞에 그 종이를 불쑥 내밀며 소리 치듯 대답했다. "매의 다리에... 이 편지가 묶여져 있었습니다." 클레이브는 급히 그 편지를 건네받아 펼쳤다. 급히 휘갈겨 쓴 글씨는 분명 그의 동생, 랜스의 것이었다. '시이드 성 함락. 파엘 영주와 함께 도망중.' --------------------------------------------------------------------- 아클레어 3세는 아직 창백한 얼굴로 왕좌에 앉아 있었다. 부상으로 인한 좋지 않은 혈색은 오히려 그를 인간보다 한 수 위의 존재처럼 보이게 하여, 오히려 부상 전보다 더욱 위엄 있고 고귀하게 보였다. 그는 짙은 하얀 눈썹을 약간 찌푸린 얼굴로, 자신의 주위에 선 문무관(文武官)들을 둘러 보았다. 그의 왼쪽에는 그가 총애하는 젊은 근위대장, 클레이브 아덴이, 그의 오른쪽에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총리 대신인 펠드릭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빨간 카펫을 중앙에 놓고 기사 차림의 귀족들이 왼쪽에, 로브 차림의 귀족들이 오른쪽에 서 있었다. 그의 외아들, 엘먼 왕자는 왕좌 뒤에 서 있었는데, 천정에 걸린 보라빛 휘장이 빛을 가려 왕자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도 않았다. "시이드가 함락되었다고..." 왕은 쉰 목소리로 신음하듯 말했다. 항상 나이보다 젊고 활기찬 것이 그의 자랑이었으나, 하르크자엘이 준 부상은 그의 나이에 십 년쯤을 보탠 듯 했다. 왕은 이제 누가 보더라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노인이었다. "도대체 파엘은 어떻게 싸웠길래 그따위 바란군한테 진 겁니까?" 하고 디온의 총독 마커스는 거슬리는 쇳소리로 말했다. 그의 대답이 떨어지 기가 무섭게, 로커스 영주 어윈이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보다는 마땅히 시이드에서 싸워야 할 사람을 억지로 불러들인 책임을 묻고 싶군요." 그의 눈은 총리대신 펠드릭을 노려보고 있었다. 대마법사 대니얼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왕을 내버려 두고 반란군을 상대하는 것이 근위대장의 임무요?" "그 반란군이 특별히 위험하다고 생각될 때에는, 그럴 수도 있지요. 특히 왕의 허락이 있은 다음에는 말입니다." "아트웰의 반란군이 '특별히' 위험한지 어떤지 알 수 없어서 유감이 군요. 안 그렇소, 어윈 경?" "어... 어쨋거나 진 것은 파엘 경의 잘못이 큽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문책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소만..." 하얗게 수염을 기른, 이제 예순 살도 넘은 위리드 대공 푄은 더듬 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마커스는 지지 않고 클레이브를 노려보았다. "글쎄요. 듣자 하니 파엘과 함께 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고 하는 것 같던데..." 클레이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이 한심한 논쟁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대체 다들 정신이 있는 건가. 사일러스와 스트 라본은 알 분 일 초도 놓치지 않고 에스테이아에 대항해 올 것이다. 인사할 시간도 아껴서 아트웰의 반란을 종결시킬 방책을 논의해도 모자랄 판에, 다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펠드릭 역시, 클레이브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마커스의 왕자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 샀으나, 다른 면에서는 결코 그를 좋아할 수 없었다. 트기 시도때도 없는 아부와 비방은. 늙은 총리대신은 엄한 말투로 점점 과격해져 가는 귀족들간의 말싸움을 끊었다. "지금은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닌 것 같소. 책임의 문제에 대해서는 푄 경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만. 책임질 사람은 시이드 영주 파엘, 단 한 사람으로 족하겠지요. 우선은 아트웰의 반란에 대해 의논합시다." "의논하고 뭐고 할 것 있습니까? 그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은 당장 전군을 보내어 쓸어 버려야지요." (계속) 펠드릭은 이제 마커스에게는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그는 평소 마커스가 자신의 반밖에 안 되는 두뇌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반의 반도 안 되는 모양이었다. 클레이브가 웃음을 참으며 반문했다. "오르크들과 드래크로니안들은 어떻게 하고요?" 마커스는 클레이브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 기회를 타서, 로운의 아르만 총독을 대신하여 온 그의 아들 에릭이 당당히 말했다. "전군이나 보낼 것 있습니까? 그따위 촌뜨기들한테... 제가 정예 부대를 이끌고 가도록 해 주시면 당장 사일러스와 스트라본의 목을 베어 오지요."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에릭은 그와 함께 오래도록 기사 수업을 받은 동기였고, 그래서 그의 출세에 더더욱 질투를 품고 있었다. 에릭은 클레이브가 왕가의 혈통을 타고 났으므로, 자신보다 실력이 못한데도 불구하고 벼락출세를 했다는 말을 거침없이 하고 다녔다. 갑자기 클레이브는 자신이 사방에 적을 쌓아두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심해야 한다, 어윈 경의 말대로. "죄송하지만 경은 아버지의 땅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 같소만. 듣자 하니 로운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하더군요." 어윈이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찔러 보았으나, 오히려 그것은 에릭의 콧대를 높여 줄 뿐이었다. "뭐, 민란이 몇 번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저희는 페알 영주와 달라서, 일어나는 즉시 진압해 버렸죠. 로운에서 아트웰과 같은 소동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럼 로운 왕가의 후예가 살아 있다는 소문은 어찌된 거요?" "아니, 어윈 경, 지금 우리 뒷조사나 하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럴리가요. 하지만 로운 왕가의 후예가 에딘 미 치에라스(다도해) 를 십 년이나 숨어 항해하여, 대륙의 반대편에 있는 시지리스 지방으로 갔다는 소문은 유명한 겁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은 모두 다 알걸요." "솔직히 말씀드려서 들어본 적이 없지 않지요." 푄 영주가 눈치없이 대답했다. 에릭의 얼굴이 금방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아니, 그럼 위리드의 왕이 살아 있어서 버젓이 지하 왕조를 이끌고 있다는 소문은 어찌 된 겁니까? 그것도 사실입니까, 푄 경?" "어찌 그런 말을!" 푄 경은 너무 놀라서 눈을 희번덕거리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가슴에 손을 얹더니, 숨을 몰아 쉬며 비틀거렸다. 곁에 있던 어윈 경이 재빨리 부축 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한참 후,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다음, 푄 경은 흥분하여 더욱 떨리는 목소리로, 떨리는 손가락을 마구 휘두르며 소리쳤다. "마, 말을 조심하시오, 젊은이! 이, 이 늙은이의 며, 명예에 걸고, 우리 위리드에는 겨, 결단코 아무 일도 없소!" 푄 경은 흥분한 나머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로운 왕가의 후손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들을 마구 쏟아놓았다. 에릭의 반응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로운과 위리드는 물론, 디온, 미르치스, 라시르 등 에스테이아에게 망했거나 속국으로서 남아 있는 모든 국가들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그리고 그곳의 책임자들은 그들대로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아우성을 치며 남을 비방 하고 나섰다. 늙은 왕은 그들의 행동이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아예 포기했기 때문인지 멍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제발 그만들 하시죠." 총리대신의 착 가라앉은 목소리만이 그들의 어리석은 말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어린애같은 다툼이나 하던 문무관들을 바라보았다. "개인적인 싸움은 나중에 하십시오. 어전(御前)입니다." 펠드릭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왕좌 앞의 모든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할 만한 위엄이 있었다. 왕은 그제서야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몸을 꼿꼿이 세웠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클레이브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왕이 하르크자엘이 입힌 부상으로 인해 얼마나 쇠약해졌는지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부상 전의 활기도 생명력도 없었으며, 더이상 대신들의 마음에 경외감을 불어넣지도 못했다. "어둠의 종족들과의 싸움은 피할 수도 중단할 수도 없소. 그들은 온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물론 그들에게 투입해야 할 전력을 분산 시킬 수도 없소. 오르크들의 유일한 낙은 파괴이고, 드래크로니안들은 이조넬 께서 주신 능력이라고는 죽이고 파괴하는 것밖에 없는 종족이오. 우리의 전력이 분산되었다는 짐작만으로도, 그들은 능히 에스텔에 눈독을 들일 것이오." "백번 옳으신 말씀입니다, 폐하... 그러나 그렇다면 아트웰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설마 반란을 허용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에스테이아의 꿈, 모든 백성의 바램, 인간족 전체를 위한, 하나의 제국이라는 에스테이아의 이념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총리대신 펠드릭의 말이었다. "속단히지 마시오, 펠드릭. 물론 에스테이아의 근본 이념을, 그리고 선조들이 바래 마지않던 꿈을 포기할 생각은 없소. 내 대(代)에서 인간족이 다시 조각조각의 국가로 나뉘어 싸우는 야만적인 시대로 퇴보한다면, 그것 보다 부끄러운 일은 없을 것이오. 여러 나라로 나뉘어 싸운다는 것처럼 불행 하고도 부끄러운 일은 없소... 그것은 오직 우리 인간들만이 가졌던 악슴이오. 하나의 종족에겐 하나의 나라만이 적당한 법. 그것은 아트웰 인들도 동감이 리라 생각하오." "폐하...?" 클레이브가 미심쩍은 어조로 중얼거리듯 반문했으나, 왕은 듣지 못했다. 아클레어 3세는 말을 이었다. "사일러스는 내 휘하의 기사였던 때가 있었소. 나는 그의 됨됨이를 믿었고, 그가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요. 그는 오르크들에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적이 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보다도 어둠의 종족을 미워할 것이오. 내가 그를 직접 설득하겠소. 그의 조부(祖父) 벨리노어는 인간족 전체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기꺼이 왕위를 버리고 내 부왕(父王)의 휘하로 들어온 훌륭한 자요. 또한 부왕 아클레어 2세께서도 그의 포상에 결코 소홀 하지 않으셨소. 그것은 아트웰 인들도 모두 알고 있소. 사일러스 역시 현명한 붉은 방패의 기사, 벨리노어의 피를 타고난 자요. 그가 섬기던 왕이 직접 설득에 나선다면, 그는 마음을 돌릴 것이오. 왜냐하면 그 역시 인간족을 사랑 하는 기사이기 때문이오." 클레이브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 왕이 이처럼 어리석었던가? 결코 아니었다. 그가 아는 아클레어 3세, 그가 섬기던 왕은 결코 이런 어리석 은 낙관주의자가, 이런 나약하고 속편한 늙은이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잘못 되어 있었다. 분명히. 그는 무심코 펠드릭의 얼굴을 쳐다보았고, 페드릭 역시 그처럼 당황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했다. "폐하..." 클레이브는 무슨 말로 왕을 설득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일단 말을 꺼냈다. '말도 안 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으나 그는 황급히 그 말을 삼켰다. 그 말을 꺼낸 것은,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의 핏기가 모조리 가신 펠드릭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폐하! 그런 식으로 쉽게 설득될 사일러스였다면 애당초 반란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왕은 꿈쩍도 안 했다. "아트웰 인들이 그런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그들이 어둠의 종족들과 의 전선(戰線)에서 멀리 떨어진 드라크노움 분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오. 그들은 인류가 얼마나 큰 어려움에 처했는지 모르고 있소... 그것을 알게 된다면, 그들도 지금은 반란 따위를 일으킬 때가 아니라 인간족 모두가 한 나라의 통치 아래 뭉쳐야 할 때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오." 왕은 말을 마쳤다. 펠드릭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멍하니 왕을 쳐다 보았다. 이런 어린애같은 낙관이라니... 말도 안 된다. 도대체 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왕은 클레이브와 펠드릭의 어이없어 하는 얼굴을 흘끗 보더니 왕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클레이브는 그의 허리가 휘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부상 전에는 결코 그렇지 않았었는데... "사일러스를 설득하기 위해 내가 직접 아트웰로 갈 것이오. 왕자가 내 경호를 맡을 것이오. 그 동안 오르크 족과의 전투는 클레이브 경에게 일임하겠소. 아울러 그의 직위를 근위대장에서 국방대신, 왕의 대리인으로 승격하는 바이오. 전투시의 그의 명령은 바로 내 명령임을 잊지 말아 주기 바라오." 그 말에 펠드릭은 입을 딱 벌렸다. 클레이브가 왕의 전귄을 위임받 는다고. 저 어이의 출신도 모르는 사이비 왕족이! 게다가 그동안 왕자는 에스텔을 비운다고! 그것은 클레이브를 미래의 에스테이아의 지도자로 선포 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펠드릭은 지금 자신이 차라리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랬다. "폐하, 저는...!" 클레이브 역시 항의에 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러나 왕은 그 소리를 들은 즉시 클레이브에게 눈을 돌려 똑바로 노려 보았으므로, 그는 입을 당장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아는 왕의 눈빛이 아니었다. "클레이브 경." 하고 아클레어 3세가 말했다. "로이히르가 함락되었고 어둠의 종족들이 남하(南下)하고 있소. 하루 바삐 네이드 성으로 가, 그들을 막도록 하시오. 지금 이 시간부터 왕의 군대는 곳 경의 군대요. 그리고 펠드릭 경." 그는 곧바로 펠드릭에게로 눈을 돌렸다. "경에게는 나와 왕자가 아트웰로 떠난 동안 에스텔을 맡기겠소. 그대는 그 동안 에스텔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될 것이오." 클레이브 아덴의 부하로서 말이지... 펠드릭은 쓴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어쨌든 권한이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이상이오. 에스테이아에 영광을, 인간족의 유일한 국가에게 번영을!" "에스테이아에 영광을, 인간족의 유일한 국가에게 번영을, 인간족의 유일한 왕께 명예를!" 왕을 따라 외치는 귀족들의 목소리는 어쩐지 맥이 빠졌거나, 어안이 벙벙한 듯한 목소리였다. 클레이브 역시 같은 말을 외치며, 속으로는 한숨을 쉬었다. 무엇인가가 대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 "폐하를 만나게 해 주시오!" 클레이브는 왕을 따라잡으려고 복도를 달려가다가, 자신의 앞을 막는 병사들에게 격하게 소리쳤다. 병사들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폐하는 쉬셔야 합니다.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평을 받아서요." "무슨 소리인가. 나는 그 분의 근위대장이다! 근위대장이 그 분의 곁에 있지 못한다는 엉뚱한 소리가 어디 있나!" "...죄송합니다만... 근위대장은 그레인 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나으리는 국방대신이시라고..." 클레이브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어야 할지 모르는 심정이었다. 그래, 빙금 몇 분 전에 근위대장에서 국방대신으로 승진을 하긴 했는데... "무슨 일인가?" 마침 어두운 복도 끝에서 아클레어 3세가 기운없고 쉰 목소리로 물으며 걸어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클레이브가 예상하던 기운차고 위엄 넘치는 왕의 목소리와 너무나도 달라서, 왕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보이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그것이 왕의 목소리라고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었다. "폐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어둠의 종족들은 이제 곧 네이드 성에 도착할 것이네. 어서 떠나지 않으면 성을 빼앗게고 싸워야 할 것이야. 당장 출발하게." "폐하! 저는 폐하께서 제게 맡기신 직분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클레이브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계속) --------------------------------------------------------------------- * 감기에 시험에... 힘들지만 기분은 좋네요. "용의 신전 올랐네요, 기분 좋아라~" "용의 신전 어서 올려 주세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두 마디랍니다. 라라~~ 감사해요^^ 4월이 왜 잔인한 달인지 아시는 분? 그건 말이죠... 날씨가 넘 좋은데 시험이 있어서 그렇대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Radagast... PS. 동석님... 넘 감사합니다! T.T (감격의 눈물...) 왕은 의아한, 그러나 그다지 놀라지는 않은 눈으로 클레이브를 바라 보았다. 순간 클레이브난 다시금 그 눈빛에서 그가 섬기던 왕의 의연함을 읽었다. 그의 혀는 갑자기 굳어 버렸다. 그러나 어쨌든 일단 말을 꺼낸 만큼, 할 말을 해야 했다. "저는 근위대장의 직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폐하의 대리자는 엘먼 전하여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근위대장이라... 근위대장 직은 그레인 경에게 넘어갔는데. 설마 그의 직책을 배앗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클레이브? 그는 승진에 매우 기뻐 하고 있는데." 클레이브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 있었다. 왕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엘먼이라니... 객관적으로 말해 보게, 클레이브, 그 애가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을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아니, 그 애가 하르크자엘과 맞설 수나 있을 것 같은가?" "폐하...!" 클레이브는 당황하여 그의 말을 막았다. 왕은 그제서야 말을 멈추고, 주위의 병사들에게 자리를 비키라는 눈짓을 했다. 그들은 말없이 물러났으나, 이미 그들의 눈에는 의혹이 가득했다. 그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들은 것이다. 왕은 텅 빈 복도를 지나, 가까이 있는 객실로 클레이브를 인도했다. 그는 말없이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객실은 의자가 몇 개 없는, 왕궁의 방 치고는 초라한 곳이었다. 왕은 망설임없이 그다지 크지 않은 안락의자에 앉고는, 힘겨운 듯 숨을 헐떡였다. 클레이브는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자네는... 내가 너무 늙었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왕은 쓴웃음을 지으며 클레이브에게 물었다. 당황한 클레으브는 재빨리 "아닙니다"라고 대답했으나, 오히려 너무 빠른 대답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왕은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기침을 두어 번 했다. "아니, 나는 늙었네.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자비로운 이조넬 여신께 감사를 드려야겠지... 하르크자엘의 칼이 내 몸에, 나이를 알려준 모양이더군. 나는 늙었고 후계자가 필요하네." "엘먼 전하가 계십니다." 클레이브는 극도로 불안해져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왕이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게 했을 뿐이었다. "엘먼, 그렇지, 내 아들 엘먼이 있었지! 백성들이 그의 이름도 못 들어보고, 병사들은 그의 얼굴조차 모르는 잘난 내 아들! 그 놈은 제 어미를 닮았어. 그녀와 정략결혼 따위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 바보같은 결혼이 나와 그녀, 그리고 아들놈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어 버렸지. 클레이브, 솔직히 말해 보게... 엘먼이 에스테이아의 왕이 되면, 인간족의 왕이 되면 어떤 꼴이 될 것 같나?" 클레이브는 허둥대다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대답했다. "...그 분은 폐하의 친아들이시고... 왕위의 정통 후계자이십니다..." "사실이지, 크리스티나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으니, 그 놈은 내 아들이 확실하지. 아무리 나와 닮은 점이 없어도, 아무리 믿기 싫어도 말이야..." "폐하... 왕가의 혈통은 중요한 것입니다. 폐하께서 왕조를 존중하지 않으신다면, 그 어떤 백성이 왕가의 혈통을 우러르겠습니까?" "왕가의 혈통이라..." 아클레어 3세는 한숨을 쉬며 되뇌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채 서른이 되기 전에 온 에스테이 아의 영웅이 된 자, 자신의 아들과는 정 반대처럼 보이는, 그럼으로써 왕 자신과 꼭 닮은 듯이 보이는 건장한 청년. 왕의 눈빛은 한순간 부상 전의 위엄과 강렬함을 전부 회복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의 힘을 가지게 된 것처럼 보였다. 잠시 후 그 빛은 사라졌으나, 클레이브에게 왕은 더이상 힘없는 늙은이로 보이지 않았다. "왕가의 혈통." 하고 왕은 조용히, 그러나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클레이브... 자네의 몸에도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네. 자네는 내 조카니까,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불린 내 이복동생, 리반 아덴의 아들 이니까... 그 사실을 잊지 말게나." "폐하...?" "자네의 의견은 받아들일 수 없네. 내 부재중에 오르크들과 드래크 로니안들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자네 뿐이네. 그것은 온 레젠디아가 아는 사실이야. 설마 에스테이아의 영토를 어둠의 종족들에게 빼앗기게 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아니라면, 어서 떠나게. 한시가 급하네." "예, 폐하!" 클레이브는 절을 하고 객실을 나왔다. 이제 그는 왕의 명령이 단순히 병든 늙은이의 변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의 갑작스런 승진,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왕의 대리자가 된 것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어둠의 종족을 막는 것이 최선이었다. 왕의 말대로, 온 인류를 위해서. 다른 것은 그는 당분간 잊어버릴 생각이었다. --------------------------------------------------------------------- "폐하께 말씀드리십시오, 엘먼 전하. 전하는 지금 아트웰 따위로 떠나실 수 없습니다. 에스텔을 지키셔야지요. 클레이브 놈한테 자리를 빼앗기 고 싶으십니까?" 에릭은 예의도 잊고 왕자를 설득하는 중이었다. 그는 클레이브처럼 왕자와 어려서부터 함께 지낸 사이였고, 그래서 모두들 엘먼 왕자가 왕위에 오르면 그가 당연히 근위대장 직에 오르리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에릭도 마찬가지인 만큼, 그는 왕자에게 헌신적일 수밖에 없었다. 왕자는 겁을 잔뜩 먹은 눈으로 자기 주위에 버티고 선 총리대신 펠드릭과 디온 총독 마커스, 그리고 위리드 영주 푄과 오랜 친구 에릭을 둘러보았다. 그의 겁에 질린 옅은 푸른 빛 눈, 백금색 머리칼, 왕궁 안에만 있어서 하얀 피부와 어려 보이는 얼굴은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어도 악의 없고 호감가는 귀여운 청년의 얼굴로 보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만약, 그를 둘러 싸고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그의 우유부단함과 두려움 에는 지긋지긋해진 귀족들이 아니라면야 말이다... 왕자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 그의 목소리 역시 평범했지만, 남의 거부감을 일으킬 만한 목소리는 전혀 아니었다. "나... 나도 아트웰 따위엔 가고 싶지 않소.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 따위... 이, 이 성에 머물러 있고 싶소. 하, 하지만... 아버님은... 아버님은 내 말은 전혀 안 들으시오. 그런... 그런 말을 했다가는..." "전하, 전하는 그 분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미래의 왕이시고요!" 듣다 못한 에릭이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예의에 분명히 어굿나는 행동이었으나, 왕자는 화를 내기보다는 겁을 먹고 더욱 움츠러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 뒤에 불러서 있던 펠드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명목이 도대체 얼마나 실속이 있는 것인가? 왕이 단명한 왕비, 위리드의 전(前) 국왕이 항복의 표시로서 바친 크리스티나 공주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펠드릭도 잘 알았다. 그녀는 키가 작고 몸집도 자그마한, 인형 같이 아름답고 인형 같이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설마 자신의 아들조차 사랑하지 않을 줄이야... 비록 아무리 왕자가 왕을 닮지 않고 왕비만을 닮았다 해도, 그는 분명한 왕의 아이인데 말이다! "엘먼, 거기 있느냐?" 왕의 목소리가 들리자, 둥그렇게 모여 있던 대신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가장 놀란 것은 왕자였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주위 사람들은 그가 푄 영주가 가끔 그렇듯이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다. 왕은 곧바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 마치 역적모의라도 하는 듯 모여 쑥덕거리던 귀족들을 당황스런 얼굴을 숨기느라 평상시보다도 더욱 고개를 궂혀 절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들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몸둘 바를 모르는 자신의 아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내일 아침 당장 아트웰로 출발하기로 했으니 준비를 해야지!" 왕의 말투는 완전히 신하에게 명령을 내리는 주군의 말투, 그것도 감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주군의 말투였다. "...예, 아버님..." "설마 가기 싫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겠지? 이 나라 왕자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알아들었으면, 어서 하인들을 시켜 준비를 마치도록 해라! 네 갑옷도 꺼내도록 하고. 있기는 있는지나 모르겠다만." "...갑옷이요?" "당연하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우리가 갈 곳은 전쟁터란 말이다. 타협이 무산되면 그 자리에서 진을 치고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왕자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을 홱 돌려, 체면불구하고 복도를 허겁지겁 달려갔다. 마치 맹금에게 쫓기는 토끼처럼.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고 있던 왕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고야 말았군..." 펠드릭이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엘먼 전하가 타협을 성공으로 이끄신다거나, 전투에서 공을 세우신 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겠지만..." 다른 귀족들도 모두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것은 그들 모두의 바램이 었고, 그들 모두가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바램이기도 했다. "제가 엘먼 전하를 따라가 보도록 하지요." 하고 갑자기 에릭이 말했다. 펠드릭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에릭은 한 치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엘먼 전하 대신 가는 것이라면 전혀 가능성이 없겠지만, 그의 죽마고우로써 따라간다면 폐하도 허락하실 겁니다. 전투가 될지도 모르는데, 기사는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요?" 펠드릭은 상황에 관계없이 나서는 이 젊은이가 못마땅했다. 그는 별볼일 없는 그의 아버지를 그나마 현명하게 지탱해 주던 두려움조차 무시 하는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엘먼의 즉위시 출세를 보장받고 있느니만큼, 왕자의 보호에 헌신적일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전장에서 죽는다 해도 아까울 게 없는 인물이고... "좋도록 하시오." 하고 펠드릭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에릭이 기쁨 가득한 얼굴로 왕이 간 길을 따라 달려가려는 찰나, 먼지투성이의 병사가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그의 뒤로 숨을 몰아 쉬는 두 명의 경비병이 쫓아오고 있었다. "뭐, 뭐야?" 더러운 차람의 병사와 부딪칠 뻔한 에릭은 화를 내며 물었다. 그 병사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더듬거렸다. "에... 에릭 님?" "그렇다, 내가 아르만의 아들 에릭이다. 내게 무슨 볼일이라도?" "나... 나으리... 로운... 로운에 반란이..." "뭐...?" 에릭은 눈을 크게 뜨고,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병사는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그의 손에 더러운 편지 한 장을 넘겨주고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에릭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편지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에 든 편지를 힘겹게 읽어내려갔다. "에릭 경...?" 마커스가 걱정스레 물었다. 에릭은 그를 향해 창백해진 얼굴을 확 돌리더니, 소리치듯 말했다. "여러분, 저는 당장 로운으로 갑니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자, 잠깐, 에릭 경, 그렇다면 왕자님을 따라가겠다는 약속은..." "죄송합니다. 지체할 수 없습니다. 로운 수도 샤지아는 이미 반란군 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로운 총독은 이제 저...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 다!" 에릭은 당황한 나머지 사람들을 뒤로 하고, 복도를 쿵쿵 뛰어가 버렸다. 잠시 흐르던 어색한 침묵을 깬 것은 푄 경의 쉰 목소리였다. "여러분... 저도 돌아가야겠습니다. 위리드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 잠깐만, 푄 경!" 펠드릭이 당황해서 외쳤으나, 푄 경은 총총히 가 버렸다. "우리 대신 에스텔을 잘 지켜 주시오, 펠드릭 경... 어둠의 종족들에 대항해서, 그리고 왕좌를 노리는 후레자식에 대항해서..." (계속) --------------------------------------------------------------------- * 제 생을을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앙~ 이진아... 쪽팔리자나...^^;) <용의 신전> 읽어 주셔서 더욱 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마니 읽어 주시길...^^ 에스테이아의 수도 에스텔은 1000년이 넘도록 중부 무역의 중심지 였다고 전해지는, 풍요로운 도시였다. 드라크노움과 라이난디노움(성스러운 산맥)을 거쳐 가는 상인들은 십중팔구, 에조넬 강의 물살이 잔잔해지기 시작 하는 내항(內航) 에스텔에서 머무르게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스텔은 외부 의 상인들엑만 의존하지 않은 채, 밀과 가축을 자급자족하고 있다는 면에서 도 서부의 아트웰과 쌍벽을 이루는 드리나드 데일, 풍요의 도시였다. 그러나 이제 계속되는 전쟁과 징집으로, 에스텔의 거리는 한산할 뿐이었다. 군에 징집될 나이의 장정들은 눈을 씻어도 찾아볼 수 없었고, 텅 빈 거리를 이따금씩 달음질쳐가는 아이들이나 남자들의 일을 대신아는 아낙과 노인들마저도, 기운이 빠지고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가끔가다 지나 가는 청년들로 이루어진 군대는 이 쥐죽은 듯한 도시에 활기를 불어넣기는 커녕, 오히려 정적의 위압감만 더할 뿐이었다. "엄마, 엄마, 발란이 뭐에요?" 한 아이가 간판도 달리지 않은, 어두침침한 여관으로 달려 들어오면 서 계산대를 지키는 아낙에게 소리쳐 물었다. 오후의 햇살이 들어올 창 하나 없는 그 여관은 너무 어두워서, 마치 이 여관 안에서는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시간의 흐름을 피할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반란 말이냐? 누가 그런 못된 소리를 하든?" 평범하고 우울해 보이는 창백한 얼굴의 아낙이 어린 아들을 안아 올리며 말했다. 아이는 스스럼없이 재잘거렸다. "채소 파는 아줌마들이 그러는데, 서쪽에서 반란이 일어났대. 그래서 이제 우리 에스테이아 왕은 인간족 모두를 다스리지 못한대. 서쪽 사람들은 다른 왕이 다스린대..." "그런 소리 하면 못써!" 아낙은 새파랗게 질려서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아이는 새로 알게 된 이 신기한 소식을 말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남쪽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대. 그럼 그 사람들에게도 새 왕이 생겨? 반란이 일어날 때마다 왕이 생기면, 나중에는 아주 많은 왕들이 생기겠네?" "닥치지 못해!" 아낙은 아이를 거칠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아이는 그제서야 겁을 먹고, 울면서 문 밖으로 뛰어가 버렸다. 아낙은 그제서야, 아이가 뛰어나간 그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는 키가 큰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낙을 순간 그가 왕의 병사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몸이 굳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그의 모습이 낯이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여관을 불황기에도 지탱해 주고 있는 사람들, 징집을 거부한 채 숨어 지내며 여기 저기 떠돌아 다니는 암살자들 중 한 명이었던 것이다. "마빈은 있소?" 하고 그 남자가 걸어들어오며 물었다. 푹 눌러 쓴 후드 아래로 붉은 눈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는 결코 그녀를 노려본 적이 없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은 언제나 기분나쁘게 노려 보는 듯한 인상을 그녀에게 주었다 - 인간의 눈이 아닌 눈. "계... 계십니다." 아낙은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손가락으로 여러 문 중 하나를 가리 켰다. 암살자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처럼, 무심하게 돌아서서 그 문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배신이라도 했을 경우엔, 그래서 그 문 안에서 한 패가 아닌 병사들이 몰려나왔을 경우엔, 암살자의 손은 누구보다도 먼저 배신자의 목숨을 끊어 놓을 것이었다. 그녀의 동료 여관 주인 중 하나가 그렇게 죽었으므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암살자의 손이 문을 두드렸다. 문 안에서는 늙인이의 쉰 목소리가 기침과 함께 흘러나왔다. "누구쇼?" "아드님의 소식을 가져왔습니다." "그 애는 무사하오? 며늘아기도?" "아드님은 무사하십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여기서 말씀드리긴 좀 거북하군요." 문이 삐걱 열렸다. 그리고 암살자는 마술이라도 부리는 듯이 빠르게 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아낙의 눈에는 그가 마치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몸을 떨었다. 그녀는 몇 명의 암살자들과는 친하게 지낼 수도 있었고, 가끔 깊은 관계까지 갈 수도 있었으나, 저 사람은 소름끼칠 뿐이었다. "맙소사... 이즐레이! 너 살아있었구나!" 방문객을 얼싸안으며 맞이한 것은, 쉰 목소리의 늙은이가 아니라 건장한 30대 후반의 털투성이 거인이었다. 웃통을 벗은 그의 상반신에는 흉터가 가득했다. "잘 지냈어, 마빈?" 이즐레이는 얼굴을 덮고 있던 후드를 벗으면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깨를 넘어 등까지 흘러내리는 긴 검은 머리칼과, 좀 수척해진 듯한 수려한 얼굴이 드러났다. 마빈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의자를 귄했다. 좁은 방 안에는 의자가 하나 뿐이었고 더 있을 공간도 없었으므로, 마빈 자신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야 했다. "이게 얼마만이냐, 이즐레이! 난 네녀석이 또 안 오는 줄 알았지. 아다시피 여긴 숨어 지내기엔 영 젬병 아니냐? 제길, 뭐가 풍요의 도시라는 거야... 이건 유령도시야 유령도시. 근데 임마, 넌 서부 지방에서 잘 지낸다더 니 왜 또 이 구석으로 왔어? 연애가 잘 안 풀리더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이즐레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묻자, 마빈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 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시침떼지 마, 임마! 아트웰이던가 서부에서... 네녀석이 기막힌 금발 미녀 하나 꼬셔 가지고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자자하더라. 누가 눈 높은 네녀석 아니랠까봐, 절세미인에다가 귀티가 좌르르 흐른다면서?" "...내 고용주였어, 그 여자." "고용주? 으하하! 좋지... 왜 나한테는 미녀의 의뢰가 안 들어오나 몰라. 그건 그렇고, 왜 끝장난거야?" "...일이 끝났으니까." "거짓말 마, 임마! 너 그 여자 남편한테 들켰지?" "...넌 아무래도 암살자보다는 떠돌이 시인이 되는 게 나을 뻔 했다, 마빈. 그보다 여긴 더 삭막해진 것 같은데..." 이즐레이의 말에, 두서없이 떠들던 마빈은 정색을 했다. "말도 마라. 아트웰도 반란을 일으켰지, 풍문에는 로운도 그렇대지, 위리드랑 라시르도 위태위태하대지... 게다가 왕은 아직도 자기 아들을 정식 후계자로 발표하지 않아서 귀족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도대체 무슨 나라 꼴이 이모양인지 몰라. 아무래도 에스테이아가 곧 망할 모양이야." "상관 없어." 하고 이즐레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 좀 없어? 오던 도중 아들의 의뢰를 받고 늙은 부자 하나를 처치 하긴 했는데, 이거야 원, 너무 시시해서..." "일 말이지..." 갑자기 마빈은 눈을 빛냈다. "야, 이즐레이, 우리... 용병 일 다시 한 번 해 볼까?" "용병? 뭐하러? 더럽지, 시끄럽지, 눈꼴신 귀족놈들 말이나 들어야 되지... 난 싫어." "그러지 말고. 클레이브 아덴이란 친구 알지? 왕자 대신 왕이 될까 말까 하다는 그 친구 말야... 그 작자가 이번에 오르크랑 한 판 크게 붙을 모양이야. 근데 거기서 잘만 싸우면 우리 전과(前過)가 말소되는 건 물론이고, 큰 공 세우면 작위까지 준다는 거야! 우리도 이대로 살 수는 없잖아, 이제 자이도 들 텐데, 정착해서 마누라랑 자식도 둬야지. 잘만 하면 팔자가 트인다 이거야... 우리도 좀 떵떵거리면서 살아 보자고!" 이즐레이는 신기해서 마빈의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그의 친구가 이렇게 희망에 눈을 빛내며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마빈 이 여전히 빛나는 눈으로 이즐레이를 바라보았알 때, 그는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아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너도 알잖아, 마빈. 너는... 너는 발 붙을 곳을 마련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발 붙일 곳은 없어.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바보같은 친구가 있나..." "하지만." 하고 이즐레이는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발붙일 곳이 없다면 뭘 하든 상관없지. 좋아,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마빈." 마빈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하하, 고마워, 친구! 내가 장담하는데, 이번 전쟁은 예감이 좋아. 우린 멋진 포상을 받을 거라고 - 우리 둘 다! 그러니 그렇게 우울한 척좀 하지 마. 네녀석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내가 10년 넘게 더 오래 살았어!" --------------------------------------------------------------------- 로운의 새 총독, 에릭의 군대는 에스텔에서 조금 벗어난 숲을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가을의 절정을 맞아 황금빛과 붉은 빛으로 물든 숲은 놀랄만큼 아름다웠고, 행군하는 병사들의 발 밑은 푹신한 낙엽으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그 광경도 이 숲에서 잠시 쉬어 가고 있는 젊은 총독의 마음에 위안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죽음은 둘째 치고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에스텔을 떠난 자신의 행동이 영리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왕자를 따라가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복잡해진 머릿속으로, 네 명의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어느 새 졸졸 흐르는 시냇가까지 걸어왔다. 이조넬 강으로 흘러드는, 수없이 많은 작은 지류(支流) 중 하나였다. 바로 그 때, 그의 머릿속에서 생각을 모조리 씻어내 버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분좋게 흥얼거리는 젊은 여인의 노랫소리 였다. 젊은 총독은 체면 차릴 것 없이, 호위병들을 모두 이끌고 그 소리를 쫓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눈앞에, 시냇가에서 몸을 씻는 젊은 여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나이는 열 여덟에서 스물 정도...? 여인이라고 부르기엔 어리고, 소녀라고 하기엔 충분히 성숙한 나이였다. 물기를 머금은 풍성한 금발이 어깨뼈를 보일락말락하게 뒤덮었고, 탐스러운 가슴과 날씬한 허리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아쉽게도 그들의 구경은 그다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녀는 이제 다 목욕을 끝마쳤는지, 바위에 걸쳐 둔 누추한 옷을 입고 물에서 나와 버렸던 것이다. 여기저기 기운, 좀 짧은 듯한 치마 차림으로 보아 그녀는 빈농(貧農) 의 딸 정도일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허름한 옷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하하, 이런 숲에서 아가씨같은 미녀가 뭘 하는거지?" 에릭은 음흉한 미소를 감추지도 않고 숨어 있던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호위병들도 키득거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소녀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으흠... 나는 로운의 총독 에릭이다. 넌 어디 사는 누구냐?" 소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에릭은 그녀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 사는 누구인지 물었다." 그러나 순간, 참을성 없는 그의 호위병 중 하나가 그 소녀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음에 일어난 일은, 아무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그 병사는 소녀의 몸을 덮쳐 넘어뜨렸으나, 그 순간 마치 기절이라도 한 듯이 축 늘어졌던 것이다. 소녀가 거친 몸짓으로 그의 몸을 밀어내어 물 속에 떨어뜨렸을 때에야, 그들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맑던 물에 서서히 붉은 피가 번져 갔던 것이다. 소녀의 손에는 피가 흐르는, 날이 휘어진 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나머지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동료가 너무나도 어이없이 죽는 것을 목격한 세 호위병은, 처음에는 못박힌 듯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러나 곧, 죽은 동료보다 더 격렬할 기세로 그녀에게 뎔려들었다. 그러나 소녀 쪽이 한 수 위였다. 그녀는 가장 먼저 달려오는 병사의 손을 붙잡아 꺾고는, 그의 목을 단도로 그어 버렸다. 작은 칼날은 그의 동맥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끊어 버렸다. 그리고 나서는 마침 코앞까지 달려온 다를 병사의 주먹을 슬쩍 피하고는, 그의 옆구리에 단도를 푹 쑤셔넣었다. 병사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마지막 병사는 그녀의 등 뒤에서 달려들었으나, 배를 걷어채이고는 물 속으로 첨벙 빠져 버렸다. 가득이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데다 망토와 옷이 물을 머금어 쉽게 일어나지 못하는 사이, 소녀의 발이 그의 목을 짓눌렀다. 그의 머리는 물 속으로 쳐박혔고, 한참 후에 소녀가 발을 던 뒤에도, 그는 영영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계속) --------------------------------------------------------------------- * ...왜 누구는 가을에 야외에서 찬물로 목욕을 해도 감기에 안 걸리는데 저는 늦봄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해도 3중 감기에 걸리는 것일까요...? --; 상언님의 비평... 아니 찬사 감사합니다. 히히... 기분 좋아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로운의 젊은 총독은 자신의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병사가 모두 죽도록 멀거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소녀가 마지막 병사를 처치한 뒤 눈을 돌려 그를 바라보자, 비로소 그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푸른 눈이었으나, 동시에 얼마든지 냉혹해질 수도 있는 눈이었다. 에릭은 체면불구하고 도망치려고 했으나, 소녀의 손이 그의 망토를 움켜쥐었다. 그는 힘없이 그 자리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이미 그의 부하의 피로 범벅이 된 그녀의 단도가 그의 목 바로 옆에 들어와 있었다. "네녀석이 저놈들 대장이야?" 하고 소녀가 물었다. "예... 예! 그렇습니다!" 가 로운의 총독의 대답이었다. "저따위로 부하들 교육시켜서 되겠어?" "아... 안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면 다야?" "..." "옷 벗어." 에릭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예...?" "쓸데없는 싸움 하느라 내 옷이 피투성이가 됐잖아. 그러니 네 걸 입어야겠어. 그냥 벗을래, 아니면 내가 널 죽이고 벗길까?" "제... 제가 벗겠습니다!" 에릭 영주는 허겁지겁 망토를 풀고, 갑옷을 벗고, 그 안에 입은 비단 으로 된 사치스러운 옷을 벗었다. 그가 속옷 차림이 되었을 때, 갑자기 커다란 돌이 그의 정수리를 강타했다. 그는 그대로 쓰러져 기절했다. "뭐... 이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 죽어도 할 수 없지만." 소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총독의 옷을 빼앗아 입었다. 그녀는 여자 치고는 상당히 키가 커서, 영주의 옷이 좀 커 보이긴 해도 그다지 보기에 거슬리지 않았다. 그녀는 갑옷반을 내버려두고, 망토와 로운의 문장이 새겨진 보검까지 빼앗아 찼다. 그리고 기절한 영주의 몸을 뒤져, 숨겨 놓았던 비상금 까지 다 턴 다음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숲 속으로 사라지려던 그녀는, 마침 생각 났다는 듯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한 명의 기절할 사람과 네 구의 시체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아참, 내 이름을 알고 싶댔지? 내 이름은 켈레브리스. 트레져 헌터 켈리라고 부르지." 그녀는 발랄하고 거리낌없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시냇가를 떠났다. --------------------------------------------------------------------- 새하얀 말을 타고 성의 문지기와 실랑이를 벌이는 그 기사의 모습을 보았을 때, 용병들을 기다리고 있던 클레이브는 그가 에릭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갈매기가 그려진 로운의 문장을 수놓은 에릭의 망토를 입고 있었고, 에릭이 에스텔 왕성을 떠날 때 탔던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병사가 허겁지겁 달려와 전해 준 말은 아주 엉뚱한 것이었다. "젊은 여기사 한 분이 성주(城主) 님을 뵙고 싶다고 하시는데요." "...여기사?" 클레이브는 어리둥절해져서 반문했다. "로운에서 오신 분 같던데요. 들어오시라고 할까요?" 클레이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는 로운에서는 여자 기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의 궁금증은 그녀가 그의 객실로 들어오고 나서야 풀렸다.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쉽게 잊은 수 없는 외모. 켈레브리스였다. 시이드에서와 마찬 가지로, 아니 그 때보다 더, 그녀는 생기에 차고 모든 위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클레이브? 오랜만이네요. 국방 대신이 되었다면서요? 축하드려요." 그녀는 거리낌없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클레이브는 할 말이 없어서 어물거리다가, 자리에 앉으라고 말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성이 너무 아름답군요. 전 에스텔엔 처믓 뫄 보는데... 에스텔의 성은 다 이렇게 좋은가요? 아, 왜 그런 표정이세요? 죄송해요. 제가 갑자기 이렇게 들이닥쳐서 놀라셨군요. 하지만 랜스의 소식이 궁금해서요. 서정이 여의치 않아서, 못 만난지 좀 오래 되었거든요." "사실은... 로운의 에릭 경이 온 줄 알았소." "아, 정말요? 제가 그럼 혹시, 약속 시간에 쳐들어온 건가요?" "아니오, 켈레브리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대가 에릭 경의 망토를 입고, 에릭 경의 말을 타고 있어서... 이제 보니 에릭 경의 칼까지..." "아... 이거요? 헐값에 샀어요." 그것은 이제까지 클레이브가 들어온 변명 중 가장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켈리가 캐묻는다고 해서 대답을 할 것 같지도 않았고,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에게 함부로 질문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는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랜스에 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어 유감이오, 켈레브리스... 시이드 성이 함락된 이후로 도망중이라는 것밖엔..." "함락이오? 랜스도 참. 거짓말도 잘 하네..." "그럼 성이 함락되지 않았단 말이오?" 클레이브가 깜짝 놀라 물었다. 켈리는 깔깔 웃었다. "함락될 성이 있어야 함락되죠! 성이 폭삭 무너져 버렸는데. 이제 시이드에 성 따위는 없어요." 그녀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클레이브에게, 켈리는 자초 지종을 다 설명해 주어야 했다. "...그래서 난 다이크와 싸우고 있었는데, 지붕이 무너져 내려 그가 우왕좌왕 하는 사이에 얼른 도망쳐 나왔어요. 나는 트레져 헌터라 성의 어느 곳이 무너져도 안전한지 대충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빠져나와 보니까, 이건 도대체 어디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그리고 내가 그리로 가는 것보다는 에스텔로 와서 클레이브 경께 이야기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렇게..." "옳은 판단을 내리셨소, 켈레브리스."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는 시이드가 그 지경인지 전혀 몰랐소. 스트라본의 마법이 그런 경지에 이른 줄도... 그대가 때마침 왔기에, 내일 아침 폐하께서 떠나시기 전에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소. 진심으로 감사하오. 에스텔에서 묵을 곳은 정했소?" "그게... 이 곳은 처음인지라 아직..." "그렇다면 내 성에서 머무시는 게 어떻겠소? 당신을 모시게 되면 영광일 것이오." "제 영광입니다." 갑자기 켈리의 태도는 돌변하여, 그녀는 나무랄 데 없는 궁중 여인의 테도로 인사를 했다. 클레이브는 다시금 혼란스러워졌으나, 의심을 억눌렀다. 그녀는 절대 적이 아니었다. 방금 그에게 귀중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는가. 그것은 아마도... 랜스를 위해서겠지. "나는 당장 왕성으로 가서 폐하를 알현해야 할 것 같소. 그러나 그 동안 내 아내가 당신을 접대할 것이오." --------------------------------------------------------------------- 클레이브가 돌아온 것은 해가 지고 나서였다. 그러나 성과는 없지 않았다. 그는 왕이 자신의 정보를 주의깊게 듣고, 아트웰 군과 싸울 준비를 단단히 할 결심을 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온 것이다. 왕은 이조넬의 법칙 대로 몸이 쇠약해졌으나, 마음은 병들지 않았다. 클레이브는 그것을 확인해서 기뻤다. "오셨군요." 그의 아내 멜리사가 달려나오며 외쳤다. 그녀는 클레이브보다 다섯 살 어렸으나, 작은 몸집과 순진한 얼굴 덕택에 실제 나이보다 서너 살은 더 어려 보였다. 발랄하게 굽이치는 밤색의 머리칼과 사랑스러운 보조개가 지는 장미빛 뺨을 가진 그녀의 미모는 온 에스텔의 칭찬거리였다. 뒤에 물러선 켈리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서, 클레이브는 이미 둘이 친구가 되었음을 알았다. "랜스 님의 새 친구분은 얼마나 유식하신지 몰라요. 그녀가 말하길, 당신의 명성은 레젠디아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알려져 있대요. 이번 원정도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면서요!" 클레이브는 켈리가 새빨간 거짓말을 했음을 알았다. 선의에 찬, 꼭 필요한, 그러나 어느 누구도 선뜻 말하지 못했던 거짓말을. 그는 며칠 간의 근심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내의 얼굴을 보며, 켈리에 대해 새로의 호의를 느꼈다. 멜리사의 몸종 에이레나가 그들을 이끌고, 저녁 식사가 차려진 식당을 향해 갔다. 에이레나는 멜리사의 이복동생이기도 한 사생아였다. 그녀의 굳어진 얼굴을 보는 순간, 클레이브는 켈리의 출현이 적어도 한 사람에게만은 반갑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에이레나의 랜스에 대한 감정을 모르는 사람은 그의 성 안에 없었다. 백금색 머리칼에 날씬하고 작은 몸집을 가진 에이레나는 에스텔 최고의 미녀라고 불러줄 말 했다. 그녀는 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고귀한 이복누이보다 더 아름다웠고, 소박한 차림에도 불구하고 멜리사가 마련해 준 우아한 옷을 입은 켈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켈리에게는... 클레이브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켈리에게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었다. 에이레나는 가끔 설명을 요구하는 듯 클레이브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아무런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하긴, 그 자신조차 켈리와 랜스가 그냥 함께 여행하는 동료인지, 아니면 걱정할 만한 사이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으니. "네이드 성으로 오르크들을 공격하러 가신다고요?" 식사 중 켈리가 물었다. 그녀의 식사 예절은 나무랄 데 없었으므로, 클리이브는 또다시 켈리가 어떤 신분의 사람인지 궁금증이 되살아났다. 비록 그의 아내는 켈리가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가장 고귀한 여성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어명(御命)이오." 하고 클레이브는 대답했다. 멜리사는 이제 그런 이야기에도 어두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용병을 모집하신다고 들었어요. 여성도 뽑나요?" "...군인이 부족하니만큼, 실력이 된다면..." "저도 끼워 주실 수 있으세요?" 클레이브는 놀란 나머지 포도주가 목에 걸릴 뻔 했다. 그의 표정을 본 켈리는 재빨리 덧붙였다. "저 강해요. 오웬의 콧대를 꺾어 버리는 걸 보셨잖아요." "...전쟁은 결투와는 많이 다릅니다, 켈레브리스." "난전(亂戰)에는 더 자신있다고요! 랜스가 있으면 제 활약을 얘기해 줬을 텐데. 제가 랜스의 목숨을 구해 준 적도 있었어요." 클레이브는 멜리사의 뒤에 물러선 에이레나의 시선이 켈리에게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없이 식사를 하던, 그의 노모(老母)역시 마찬가 지였다. "왜 가고 싶어하십니까, 켈레브리스? 당신은 전쟁에 끼는 것을 싫어 하지 않았었나요?" "그건 인간을 상대로 싸우는 것 얘기죠. 어둠의 종족이라면 달라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흔하지 않은 열정이 깃들여져 있었다. 그 열정에 서 원한을, 그가 가진, 그리고 그의 동생 랜스가 가진 원한을 보았다면 그것은 그의 망상이었을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있어요. 아주 특별하고 밝힐 수 없는 이유가." 켈리는 진지했다. 클레이브는 목을 축이느라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힘든 전투가 될 겁니다. 원하신다면 중도하차해서 제 성으로 오십 시오." "감사합니다, 클레이브 경." (계속) --------------------------------------------------------------------- * <용의 신전>의 코믹화에 단단히 일조하는 두 사람... 바로 켈리와 로이죠. 이게 원래 웃기는 얘기가 아닌데... 얘네들만 나오면 웬 썰렁...^^;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펠드릭은 착찹한 심정으로 외성 위에 선 채, 길고 하얀 수염을 바람에 흩날리며, 서쪽으로 사라져 가는 왕의 행렬을 지켜보았다. 그 역시 클레이브의 입을 통해 시이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들었고, 그래서 더더욱 왕과 왕자가 그리로 가는 것을 말리려 했다. 그러나 왕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 그는 자신이 벨리노어를 굴복시켰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 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고민이 있으신가보죠?" 갑자기 어디선가 들은 듯한 목소리가 펠드릭의 귀를 파고들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에누인 신전의 사제복을 입은, 흑발의 호리호리한 청년이 날카로운 보라빛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의 정령..." "필리우스라고 불러 주세요. 그게 제 이름이니까요." 혐오감 가득한 펠드릭의 쉰 목소리에, 필리우스는 활달한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펠드릭은 의심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경멸 가득한 표정 덕분에 가뜩이나 주름살이 많은 그의 야윈 얼굴은 더욱 자글자글해졌으나, 그것이 그의 위엄을 떨어드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여길 들어왔지! 여기는 왕의 허락을 받은 기사들이나 귀족 들밖에는 들어오지 못하는 곳인데..." "일린(공간 이동) 주문은 멋으로 있는 게 아니죠. 빛의 마력은 유한 하지만 어둠의 힘을 빌린 자의 마력은 무궁무진하답니다." 필리우스는 여전히 활짝 웃고 있었다. 그의 웃음이 늙은 총리대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천진난만해 보이는 웃음이 그의 경계심을 누그러 뜨릴수록, 새로운 경계심의 벽을 쌓고 굳은 표정을 짓느라 온 힘을 다해야 했다. "여기는 어둠의 종족 따위가 들어올 곳이 아니다." "하지만 창부(娼婦)의 아들도 들어오던걸요." 필리우스는 순진하게 말하며 좀 떨어진 성벽에서 누군가와 이야기 하고 있는, 키가 큰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펠드릭도 그리로 시선을 돌렸고, 그 기사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두 개의 창에 찔린 비룡의 문장이 새겨진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붉은 금발을 뒤로 묶은 그 젊은이는 멀리서 보아도 금방 눈에 띄는 뛰어난 용모를 갖추고 있었다. 클레이브 아덴. 펠드릭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누그려뜨렸다. "...클레이브의 모친이 어떤 여자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해. 섣불리 창녀라고 단정지을 수 없네..." "하지만 드러내 놓고 누구라고 말할 수 있는 떳떳한 여인네가 아닌 것은 확실하죠? 비밀을 싫어하는 리반 아덴 경조차 말입니다." "..." "어둠의 지혜는 빛의 지혜보다 깊고 오래 간답니다, 존경하는 총리 대신 각하. 저는 이렇게 젊어 보이지만, 약 천 년 전, 태초의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살아왔습니다. 여원히 존속하는 어둠의 지식을 얕보지 마세요." "...그대가 클레이브 경의 어머니를 안단 말인가?" "글쎄요." 필리우스는 한 발짝 물러나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대답이 오히려 펠드릭에게, 그가 클레이브의 어머니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는 확신을 주었다. "...왜 이 늙은이를 괴롭히는 건가, 영원한 젊음을 가진 자여..." 펠드릭은 차라리 신음하는 듯이 말했다. 필리우스는 제법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런, 그러시면 곤란한데요... 제 도움을 바라셨잖아요?" 펠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클레이브를 향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키가 훨씬 작은, 금발의 기사와 이야기하는 새 국방 대신... 그는 클레이브의 곁에 선 기사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마도 시이드에서의 소식을 가져왔다는 그 기사겠지. 그녀는 네이드 성으로의 원정에도 따라간다 고 했다. 클레이브. 그라면 네이드 성의 오르크들을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로이히르까지, 아니 어쩌면, 그의 아버지가 살해당한 라우더까지 진격할는지 모르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하고 싶지만, 클레이브는 정말 가끔 상식을 초월하는 공적을 세우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무 공도 세우지 못한 왕자 대신 그가 왕위에 오르는 데 대해, 반대할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될까. 9 하지만 만약, 아스틸라 여신이 단 한 번만 클레이브 대신 펠드릭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그리고 정통 후계자인 엘먼 전하께 호의를 베풀어, 클레이브가 전사하도록 해 준다면...? "원정을 나가서 클레이브가 전사라도 한다면 참 좋을텐데 말입니다." 하고 필리우스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펠드릭은 창백해져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젊은이의 가면을 쓴, 천년이 넘는 세월을 산 어둠의 정령을 바라보 았다. 필리우스는 여전히 미소띈 얼굴로 말했다. "제 말이 뭐가 틀렸습니까?" "클레이브는... 전사하지 않을 거요. 그는..." "앞날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요, 현명하신 총리대신 각하. 운명이란 3스스로 돕는 자의 편이랍니다." 펠드릭은 그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그 자신도 몇 번씩이나 했던 생각, 그러나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계획... 그는 체면도 잊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서... 설마... 크... 클레이브는 아직... 에스테이아에 필요한 자요..." "하지만 그가 더 큰 명성을 얻고, 왕위 계승까지 확정받은 뒤라면 너무 늦지 않습니까? 용기를 가지세요, 창부의 아들이 아니더라도 이 나라에 영웅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건 살인이야. 아무리 엘먼 전하를 위하는 일이라 해도... 안 돼, 용납할 수 없어!" "그렇다면 좋도록 하세요." 필리우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펠드릭은 자신이 너무 쉽게 흥분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사실 클레이브를 암살하다니,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그의 곁에는 무엇보다도, 저 충실한 부관 칼릭이 버티고 서 있는데... "윤리적인 건 좋아요, 펠드릭 각하, 하지만 절 의심하시는 건 안 좋아요. 저는 이미 믿을 만한 살인자를 그의 곁에 붙여 놓았으니까요. 그의 바로 곁에 말입니다..." 필리우스는 서서히 몸을 투명하게 해 가며 말했다. 그는 싸늘한 비웃음이 담긴 보랏빛 눈으로, 금발의 여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는 클레이브를 마지막으로 흘끗 내려다 보았다. "저는 각하를 도와드리려고 온 겁니다. 그러니 허락하시기 전에는 그 살인자를 움직이지 않겠어요. 하지만 언제라도 말씀만 하시면... 의심하지 마세요, 클레이브 아덴의 목숨은 각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이 말과 함께 점점 희미해지던 필리우스의 모습을 펠드릭의 시야 에서 사라져 버렸다. 펠드릭은 갑자기 꿈에서 깨어난 사람과 같은 기분이 되었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에서 갑자기 현실로 내동댕이쳐져,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사람의 기분이. 그러나 필리우스의 말은 그의 가슴 속 깊이 파고들었다. 의심하지 마세요, 클레이브 아덴의 목숨은 각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펠드릭은 스스로 남을 잘 믿지 않는 성품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리우스의 말은 의심의 심연으로 가라앉혀 버리기엔 너무나도 달콤 한 유혹이었다... --------------------------------------------------------------------- 라우더의 겨울은 빨리 왔다. 북부 지방이기도 했으나, 그보다는 오르크들이 그 땅을 오염시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보레아스는 생각했다. 더러운 털을 가진 그들 종족은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내어 투박한 무기를 만들었고, 그들이 피우는 불은 꽃과 풀을 시들게 했다. 풍요롭던 라우더에 이제 나무는 몇 그루 남지 않았고, 그나마 가지만 앙상해져서 죽어 가는 중이었다. 보레아스는 눈을 들어 헛되이 별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라우더의 탁한 하늘에는 별들이 추방된 지 오래였다. 오르크들의 땅에서 점성술은 불가능했다. 달조차 병들어 있었다. 이제 이 땅은 그들의 종족이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는 곳이다, 시지리스와 가이니크가 드래크로니안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해 보았지만, 풍요롭던 십 년 전의 라우더가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드래크로니안 족 마법사의 붉은 눈은 오래도록 별빛에 굶주려 있었다. "별이 그리우시면 시지리스로 가지 그러세요?" 그의 등 뒤에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활달한 젊은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레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필리우스."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보레아스 님... 이제 우리는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당신의 부하라고요. 그것도 아주 말을 잘 듣는 부하지요." 필리우스는 자기 딴에는 보레아스의 기분을 맞추어 주느라 그러는지, 계속 실실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러나 보레아스의 목소리는 신경질적이고 날카로웠다. "마음을 읽는 척 하지 마라. 너의 그 능력은 엠로크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사라졌다는 것을 내가 모를 성 싶더냐? 바로 너를 봉인했던 마법사, 그리고 너를 봉인에서 풀어 주었던 마법사인 나 보레아스가 말이다." "...그럴 리가요." 그제서야 필리우스는 좀 기가 죽은 모양이었다. 보레아스는 말을 이었다. "게다가 그 에누인 신전의 사제복은 언제까지 입고 다닐 셈이냐? 네가 사제라도 되는 줄 아느냐? 착각하지 마라, 너는 마지막 남은 어둠의 정령, 그것도 내 힘에 의해 언제라도 다시 봉인될지 모르는 몸일 뿐이다. 네 마력에 대해 꽤나 자부심이 강한가본데, 한순간의 내 변덕만으로도 네 운명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쯤은 잊지 않았겠지." 필리우스의 얼굴에서 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굳은 표정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순진한 미소를 띈 호감가는 얼굴로, 아부를 늘어놓았다. "물론 잊을 리 있겠습니까... 저란 놈은 단지 보레아스 님의 자비와 아량 덕택에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중이죠. 예, 알고말고요. 그러니까 이렇게 온 힘을 바쳐서, 충실하게 보레아스 님의 명령에 따르는 것 아닙..." "됐다, 됐어, 네 사설이라면 이제 신물이 난다." 보레아스는 한숨을 쉬며 도리질을 했다. 그의 풀어헤친 은빛 머리채 가 하얀 로브를 걸친 어깨 위로 폭포수처럼 떨어졌다. "아무래도 너보다는 좀 조용한 녀석을 봉인에서 푸는데 그랬다. 천 년이란 세월이 지나다 보니 네녀석이 얼마나 시끄러운 놈인지 내가 잠시 잊었나 보구나. 그보다 에스텔에서의 일은 잘 처리했겠지?" "물론이죠. 펠드릭 경은 제 말을 듣는 걸 좋아하던데요. 보레아스 님은 싫어하시지만..." "그가 너를 믿더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제 능력이라면 믿고 있죠. 제가 클레 이브 아덴은 죽일 능력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직 그를 죽여서는 안된다." "물론입니다. 보레아스 님의 명령이 없는데, 제가 그에게 손끝 하나 댈 리 있나요. 이렇게 충성스러운 제가 말입니다. 기다려야죠. 천 년 가까이 봉인되어 있다 보니 기다리는 데에는 이제 아주 도가 텄습니다..." "말 좀 줄일 수 없냐?" "노력해 보지요." 펠리우스는 싱글벙글 웃으며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보레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좀 조용한 녀석을 택하는 건데. 그러나 필리우스의 능력은 탁월했다. 게다가 인간들은 그의 순진한 외모에, 그리고 기분을 맞춰 주는 말들에 쉽게 현혹될 것이다. "자네의 그 수다쟁이 흑마법사와 이야기하고 있었나보군, 보레아스?" 악의 없는 조롱이 섞인 말과 함께, 어두운 복도에서 제피로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날개를 감춘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인간의 것이었다. 보레 아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필리우스의 수다는 인간들이 마음을 열도록 만들지요. 천 년 전의 그의 혀를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엠로크가 죽기 전의 이야기이고, 지금의 그는 그당시의 능력의 반도 가지고 있지 않아." 하고 제피로스가 투덜거렸다. (계속) --------------------------------------------------------------------- * 흠... 원래 이게 매일 연제가 아닌데... 특별호로 한 번 써 봤습니다. 이제 벌여 놓은 이야기들을 슬슬 수습(?)해야 할텐데... 헉... 감이 안 잡히네요... 이걸 어떻게 다 수습해~! 아참... 경영님의 결정에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이게 먼소리야?)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PS. 앙... 벌써 얘기를 거의 다 예측하신 분들이 있다니... 미워~ T.T [10661]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28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5/02 19:32 읽음 : 554 관련자료 없음 ------------------------------------------------------------------------------ "어리석은 인간들을 속이는 데에는 충분하지요." "자네를 속이는 데에도 충분할지 모르지. 나는 저들 종족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아. 왜 어둠의 정령이니 다크 엘프니 하는 놈들을 쓰는 거지?" "제피로스 님이 오르크들을 쓰시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 때문이지요." "아직도 그게 불만이군, 자네." 제피로스는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레아스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별 하나 없이, 얼룩이 진 달만 떠 있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이 하르크던가... 그 오르크들을 해산시키십시오, 제피로스 님. 그렇다면 저도 더이상 흑마술사들의 힘을 빌리지 않겠습니다. 라우더를 보십시오. 전에는 아름답던 곳이... 이제는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합 니다. 오르크들의 숨결이 오염시켜 버린 겁니다. 우리는 그들의 숨결이 이 대륙 전체를 뒤덮는 것을 돕고 있습니다. 이건... 우리 종족이 해야 할 짓이 아닙니다." "그럼 인간들이 하라는 데로, 가만히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몫인가?" 제피로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문했다. "우리는 천 년 전, 인간들을 위해 오르크들과 싸웠어. 그러나 그들은 우리 종족을 실컷 이용한 다음 버렸지. 로데인은 우리를 배반했고 에스테이 아는 멸망시키려 했어. 그것을 그냥 보고 있어야 했단 말인가? 멸망해야 한다면, 정말 멸망해야 한다면 우리만 멸망하지는 않을 거야. 인간들도, 그들도 함께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거야!" "우리는 멸망하지 않을 겁니다. 다시 숫자가 불어나고 있지 않습지까. 미미하긴 하지만... 위기의 시대는 끝났습니다. 이제 오르크들은 필요 없습니 다. 다시 가이니크로, 시지리스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지낸다면..." "인간들은 다시 쳐들어올 거야. 시지리스에 얌전히 있는 우리들에게 그들이 무슨 짓을 했지?" 보레아스는 입을 다물었다. 제피로스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말이라면... "용서해서는 안 돼!" 하고 제피로스는 말했다. 그의 붉은 눈은 꿰뚫을 듯한 기세로 남쪽을 노려 보고 있었다. 인간들이 사는 땅. "벨 프라딘 엘다닐라디스, 프라딘 다닐라디스 - 죄가 없는 자를 벌하지 말라, 죄가 있는 자를 벌하라! 그것이 우리 종족이 살아온 철칙이야. 앞으로 살아갈 철칙이고. 우리는 로데인을 망하게 한, 우리의 삶의 터전을 빼앗은 그 종족에게 너무 많은 자비를 베풀었어. 그러니 그들이 우리를 우습게 보고 이렇게까지 공격한 거야. 로데인 몰락의 날을 기억해. 죽음의 땅이 되었던 가이니크를 기억해. 그리고 시지리스, 치에르 테이렐라스(용들의 섬)의 비극을 기억해! 그들이 무슨 짓을 했지? 그들은 자기 살 곳을 지키려는 우리 종족을 몰살했어. 그래, 우리가 그 교활한 왕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자리를 비운 사이! 아직 날 수도 없는 어린아이조차, 아니 깨어날 시기를 기다리는 알 조차, 한 명도 남겨놓지 않았어!" "제피로스 님..." "로데인의 왕녀라고? 이피아, 그 창녀같은 계집! 우리 종족은 로데 인의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에스테이아의 인간들에게 학살당했어. 뭐가 더 필요하지? 우리는 테냐헨 네아(태초의 전쟁) 때 그들을 위해 싸웠어. 그리고 이게 그 보답이야!" 제피로스는 훌쩍 뛰어올라 난간 위에 서서, 손을 들어 거칠게 황량한 라우더의 들판을 가리켰다. "오르크들의 연기로 더렵혀진 땅, 별조차 뜨지 않는 버림받은 땅, 그래도 살아 있어서 이런 땅이라도 바라볼 수 있는 게 다행인 삶! 자네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나? 나는 언제나 내 종족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그 때, 시지리스에서 그들의 비명을 들으며 함께 죽어가지 못한 벌로, 나는 30년이 넘게 그들의 비명을 들으며 살아왔다고! 복수, 그들의 슬픔을 잠재울 수 있는 건 복수밖에 없어. 피는 피로 보상해야 해!" 드래크로니안의 군주는 도전적인 눈길로 하얀 로브를 입은 마법사를 쏘아보았다. 은발의 마법사는 눈을 내리깔고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실리사와 에퀴온의 신관입니다.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실리사와 에퀴온의 뜻을 저버리고 있는 겁니다..." "천만에... 우리는 그들의 정의를 실현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이제 드래크로니안의 신관 따위는 없어. 자네는 그냥 마법사야. 이제 우리 종족의 신전 따위는 없으니... 인간들이 다 파괴해 버렸으니!" 보레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더욱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모습이 가여웠던지, 제피로스는 그에게로 다가와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그들이 어떤 종족인지 잊어서는 안 돼... 마지막 신전이 무서질 때, 그들이 자네와 자네의 동료 신관들에게 한 짓을 잊었나?" "...기억합니다..." "그들 종족은 벌을 받아야 해." "...압니다, 제피로스 님." 제피로스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보레아스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자네의 옛 상처를 건드려서 미안하네, 보레아스. 하지만... 우리 종족 모두를 위한 일이야. 자네가 그것을 잊은 것 같아서..."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제피로스 님..." "그래."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테라스를 걸어나갔다. 그의 미소는 아직도 어린 청년 시절의 그것처럼 순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시지리스의 비극을 보지 못했던 시기의 그의 미소처럼... 보레아스는 한숨을 쉬며 기둥에 몸을 기댔다. 한때는 순백색이었던 기둥, 그러나 이제는 오르크들의 무기를 만드는 연기로 검은 회색이로 깊이 물든 기둥에. 그는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신의 날개를 폈다. 그의 눈처럼 흰 날개가 서서히 그의 등을 덮는 광경을 보았다면, 누구든 그 아름다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마치 천사의 것처럼 희게 빛나는 날개. 그러나 보레아스 자신에게 그것은 슬픔을 줄 뿐이었다. 그 날개는 이미 몇십 년 전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인간들이 던진, 수십개의 창과 독화살 이 그의 날개를 꿰뚫고 지나간 이후로는. 그것은 마치 거북한 장식품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매달려 있을 뿐이었다. 인간들은 그에게 하늘을 날 수 있는, 드래크로니안 종족의 최고의 기쁨을 영원히 앗아가 버린 것이다. --------------------------------------------------------------------- "클레이브의 군대가 네이드로 진격해 올 예정이랍니다." 그루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르크자엘, 아크트, 노토스, 그리고 먼 발치의 왕좌에 앉아 있는, 카야크에게 보고를 올렸다. 이렇게 내노라 하는 지배자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직접 입을 여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려한 투구와 갑옷을 잔뜩 걸쳐, 무거워 일어서기도 힘들 것같이 보이는 쿠푸-헤 아크트는 카야크의 왕좌 왼쪽 아랫편에 앝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황금빛 몸체의 노토스가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너무나도 조용하고 거대한 모습이어 서 처음 보는 사람이라면 바위로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노토스의 한 쪽 머리는 돌바닥에 눕혀진 채 잠을 자고 있었고, 한쪽 머리는 꼿꼿이 세워진 채 그루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꼿꼿이 세워진 그의 머리는 거의 성의 천정에 닿았다. 카야크, 그들의 벌이는 모든 일의 중심이 되는 혼돈의 왕, 그는 흔하디 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아직은. 그의 주위에는 항상 어둠이 모여 있어서, 그의 얼굴을 가려 주고 있었다. 아크트나 노토스조차 그의 얼굴을 보기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의 얼굴은 심장이 멈출 만큼 아름다운 젊은이의 모습이라고 했다. 그 작은 인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기(魔氣)는 엄청났다. 겨우 그의 모습이 보일락 말락할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 그루크도, 그 위험한 기운과 위엄에 눌려 꼼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르크자엘이 그에게 물러가라는 표시로 고개를 서너 번 끄덕였을 때, 그는 구원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네이드 성이라. 까짓거 없애 버립시다. 하르크자엘, 자네는 네이드 성에 가서 그것들을 모조리 쓸어 버릴 수 있겠지." 아크트가 기분나쁜 크득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얼른 대답했다. 제피로스는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 그들을 몰살시키는 것은 푸이 하르크로서는 일도 아닙니다. 듣자 하니 온통 용병들을 긁어모아 이루어진 오합지졸 군대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들을 쓸어 버린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라고?" 아크트는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저 녀석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어'라는 불만이 목소리 전체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노토스는 침착하게, 자고 있던 머리를 깨워 제피로스 쪽으로 향하게 하며 특유의 우렁차고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문제가 무엇인지 말해 보게, 하르크자엘." "그럼 허락해 주시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첫번째로 아직은 에스테이 아가 남아 있을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인간들은 에스테이아와 독립하려는 반란군으로 나뉘어, 정신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최적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에스테이아는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고, 그것을 지탱해 주는 이들이 바로 아클레어 3세와 클레이브입니다. 그들 중 하나라도 죽는다면 에스테이아는 망할 것이고, 그러면 독립을 얻은 인간족들은 다시 힘을 모아 우리와 싸우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아클레어 3세를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은 것입니 다. 그런데 만약 클레이브의 군대가 전멸한다면, 에스테이아의 멸망은 불을 보듯 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에스테이아를 보호해 주는 입장이 되다니..." 노토스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두번째로 인간들이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라우더로 오는 길을 최소한은 터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라우더를 인간들에게 빼앗긴다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인간 첩자가, 혹은 난쟁이나 요정 첩자가 살그머니 숨어들 수 있는 경로 정도는 남겨 두어야죠. 그래야 그들이 우리에게 이용당하는 줄 모르고 로크 페울로니를 잡을 테니까요." "그놈의 로크 페울로니!" 하고 아크트는 소리를 질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하르크자엘? 이제 곧 로크 페울로니가 모이니 어쩌니 하고 설칠 때가 언젠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가? 찾아냈다고 설치던 그 엘미어, 카자룬, 이디실의 주인은 어디 간 거야?" "물론 그들은 아직 제 손이 미치는 곳에 있습니다. 아트웰에요." 제피로스는 침착하게 대답했으나, 오히려 아크트가 더 길길이 날뛰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아트웰? 아트웰? 아니, 그놈들이 아트웰에서 뭘 하고 있는거야? 맙소사! 아트웰! 아직 그 동네에서 한 발짝도 못 나왔다는 거야? 그러다가 언제 라우더까지 오겠나!" "진정하시오, 아크트..." 노토스가 말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크고 울리는 목소리도 효과가 없었다. "아트웰이라고! 원 세상에!" "진정하십시오, 위대하신 쿠푸-헤. 그들은 분명히 옵니다." 제피로스가 공손한 말로 달래 보려고 했으나, 아크트는 그가 입을 여는 즉시, 기다렸다는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자네 말을 어떻게 믿나! 자네는 힐리온을 찾는 데도 실패했어. 그래, 힐리온! 힐리온은 어떻게 할텐가? 말해 보게, 하르크자엘! 그 난쟁이와 요정, 그리고 인간족의 꼬마아이가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온다 해도, 겨우 세 개 밖에 쓸 수 없는 것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카야크 님의 봉인을 푼단 말이지? 설명해 봐, 하르크자엘, 힐리온과 그 주인은 어디 가서 찾을 건지!" 제피로스는 아크트가 마구 소리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노토스가 머리 두 개를 다 동원해서 말린 후에야, 아크트는 비로소 잠잠해 졌다. 그리고 숨을 몰아 쉬며 하르크자엘을 노려보았다. 노토스의 두 개의 머리도 제피로스에게 향했다. 그리고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카야크의 어둠에 가린 눈도 마찬가지였으라.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저는 힐리온을 찾으려는 첫 번째 시도에서는 실패했습니 다. 그러나 두 번째 시도에서는 아닐 겁니다. 이번에는 힐리온의 주인을 이용해서 그것을 찾을 생각이니까요." "...힐리온의 주인?" 노토스가 어리둥절해져서 되물었다. 아크트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제피로스는 그런 그들의 표정을 즐기듯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네이드 성으로 전격하는 인간들 중, 힐리온의 주인이 있습니다." (계속) 에스텔을 떠나기 직전, 적어도 켈리에 대한 의혹 중 하나는 풀고 갈 수 있어서 데이슨은 기분이 좋았다. 내일 새벽 일찍 네이드로 떠날 준비가 한창인 지금, 그의 부하 중 한 명이 로운 총독 에릭의 소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에릭 경은 로운으로 서둘러 가던 중 산적 떼의 급습을 받고, 네 명의 호위병을 잃고 그 자신도 중상을 입었다고 했다(편지에는 '수십명의 산적'이라고 적혀 있었으나, 그는 믿지 않았다. 아마 대여섯 명쯤 되는 지나 가던 도적 떼에게 당하고선 부풀린 것이겠지.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니 켈레브리스가 입고 있었던 에릭의 옷과 그녀가 타고 온 에릭의 말은, 말하자면 도적들에게서 산 장물(臟物)이었던 셈이다. 그는 클레이브에게 이 사실을 빨리 알리기 위해, 아덴 성의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가고 있었다. 아니, 거의 달린다고 해도 좋을 속도였다. 사실 그는 처음 켈리를 보았을 때부터, 탐탁치 않은 감정을 가져 왔다. 켈리는 보는 사람에게 호감과 강한 경계심을 동시에 일으키게 한다는 면에서, 그가 아는 누군가와 굉장히 비슷했다. 그러나 그녀는 랜스의 친구였고, 그는 자기 주군의 동생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여자에 대해 언제까지고 의심을 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데이슨 경?" 갑자기 켈리의 발랄한 목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그는 멈추어 서서, 켈리의 모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그가 머리를 갸우뚱거리며 포기했을 즈음, 갑자기 그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켈리는 창 밖에 선 채 창문 너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 그런데 그가 서 있는 곳은 성의 3층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놀라실 거 없어요." 켈리는 창을 훌쩍 뛰어넘어 들어오며 깔깔 웃었다. "나무 위에 서 있었던 것 뿐이니까. 에스텔은 밤경치가 아름답더군요." 켈리는 병사처럼 수수한 남자 옷을 입고 있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잘 익은 사과 하나를 들고 틈이 날 때마다 와삭와삭 베어 물고 있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금발과 횃불에 반짝거리는 파란 눈 때문에, 여자도 남자도 아닌 장난꾸러기 도깨비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밤의 생물처럼. 데이슨은 놀란 나머지 잠시 어물거리다가 대답했다. "클레이브 님께 전할 전갈이 있어소." "아, 중요한 전갈인가요? 설마 네이드 성이 시이드 성처럼 무너져 버리거나 한 건 아니겠지요?" "에릭 경에 대한 것이오." 데이스는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그는 켈리의 분별없는 농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난칠 일이 따로 있지, 시이드 성이라니... 그러나 켈리는 상관 않고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아!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급히 달려가는군요. 클레이브 님이 내게 가진 의심을 빨리 풀어 주기 위해서요." "의... 의심...?" "숨길 것 없어요. 클레이브 경이 나를 의심하고, 당신이 날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것쯤은 요리사들도 아니까요. 가뜩이나 정체가 의심스러운 판에, 내가 에릭 경의 옷을 입고 나타나서 상당히 곤란한 처지가 되었죠." 켈리는 이렇게 말하고선 키득거렸다. 데이슨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을 의심하는 것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오, 켈레브리스. 아무도 당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이 없잖소." "...전 몰락 귀족 출신이고, 멍청이 영주와 강제로 결혼하기 싫어서 뛰쳐나왔고, 그래서 지금은 트레져 헌터고 랜스의 친구에요. 뭐가 부족하죠?" 켈리의 대꾸는 쾌활하면서도 도전적이었다. 사실 켈리는 모든 사람 들에게 그렇게 떠들고 다녔다. 그리고 가출하여 트레져 헌터가 된 몰락 귀족 아가씨의 이야기는, 흔하지는 않아도 믿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뭔가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은... 데이슨 자신의 생각 뿐일까? "어윈 경 말이, 당신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내가 누구를 닮았기 때문이라는데요." 켈리가 빙긋이 웃으며 놀리듯 말하자, 데이슨은 울화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어윈, 그 분별 없는 늙은이, 이따위 소리나 흘리고 다니다니! 그러나 그녀의 다음 말은, 그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했다. "내가 랜스의 어머니를 닮았죠, 안 그래요?" 데이슨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그는 조용하고도 위협적인 어조로 그녀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틀렸어요, 데이슨 경. '클레이브 님의 어머니는 대체 누구요?'라고 물어야지요." "그 분을 모함할 생각일랑은 마시오!" 데이슨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알고 싶었다. 용사 리반 아덴이 어느날 갑자기 데려온, 연약해 보이는 금발의 미녀가 도대체 어떤 여자인지. 그가 죽은 때까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는 물론 수족같은 심복에게까지 한 마디 언급도 하지 않은 그녀의 실체가 무엇 이었는지. "실망인데요. 당신은 진실을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나조차 알지 못해. 당신이 어떻게 안다는 말이지? 겨우 사흘 전에 이 성에 들어온 당신이?" 참다 못한 데이슨은 격한 어조로 소리쳤다. 켈리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의외로, 한 발 물러서서 고개를 까딱 숙였다. "사실 저도 완전히 알지는 못해요, 데이슨 경. 짐작할 뿐이죠. 엉뚱한 이야기로 당신 마음을 어지럽혔군요. 죄송해요." 데이슨은 혼란해졌다. 켈리는 금방 뒤를 돌아서서는,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 반대 편으로 멀어져 갔다. 가끔 사과를 베어 물어 가면서. 데이슨은 망설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마음을 굳히고, 몸을 돌려 켈리의 뒤를 따라 달리며 소리쳤다. "기다려 보시오, 켈레브리스!" 켈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데이슨은 그녀의 얼굴에 나타난 승리의 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거부감보다 그의 호기심이 더 강했다. "말해 주시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 거요?" "사실은 거의 다 짐작이지요... 약간의 전설과. 당신이 흥미를 가질 이야기는 없을 거에요, 데이슨 경." "이미 흥미를 가지고 있소! 말해 보시오, 나는 들어야겠소." 켈리는 사과의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베어물었다. 그리고 창 밖으로 걸어가, 씨만 남은 사과를 있는 힘껏 던졌다. 사과 씨는 어둠 속으로 날아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밤의 어둠이 그것을 삼킨 것이다. 켈리는 그 쪽을 향해 손가락을 뻗쳤다. "저기가."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서남쪽이죠 - 그렇죠? 당신의 주군이었던 리반 아덴이, 다른 여섯 명의 드래곤 슬레이어들과 함께 용족을 몰아낸 곳 - 시지리스. 그 섬이 저 곳에 있죠. 그렇죠?" "..." 데이슨은 켈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몰라, 가만히 고개만 끄덕 였다. 켈리는 낮게 웃었다. 쓸쓸하고 허탈한 웃음이었다. 데이슨은 그녀가 그런 소리로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전설을 하나 알려드릴께요. 시지리스에 얽힌 전설을. 그걸 믿고 안 믿고는 당신의 선택이에요. 페레노스라고 알고 계시죠?" "물론이오, 그건... 로데인 왕조의 잔재 아니오? 로데인 멸망의 날, 마녀 시엘레이스가 라벤데일 성을 불태운 그 날, 드래크로니안 족과 함께 도망한 그녀의 아들이 페레노스의 시조가 되었지. 아직은 왕이 아니지만, 왕이 될 날을, 로데인이 새로이 부흥할 날을 기다리는 자들 - 그래서 '기다 리는 자' , 페레노스라고 이름했다고... 그러나 시지리스 사건 이후로 그들도 자취를 감추지 않았소?" "잘 아시는군요.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 마지막 페레노스, 마지막 로데인 왕가의 후손의 이야기이지요." 켈리는 꿈꾸는 듯한 시선으로 남서쪽을 바라보았다. "혹은 생각하기에 따라서 마지막이 아닐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일단 마지막이라고 치고... 마지막 페레노스의 후손은 아름다운 왕녀였죠.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시지리스를 정벌하려 할 때, 그녀는 열 여섯이었대요. 에스테이 아 군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녀는 친구인 드래크로니안들과 떨어져, 륀 에뮌(남쪽 평원)의 한 허름한 성에서 살고 있었죠. 거기서 그녀는 한 기사와 마주쳤어요. 일곱 명의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한 명이었죠." 켈리는 데이슨의 얼굴을 흘끗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데이슨은 자신의 고민이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었다. 륀 에뮌, 드래곤 슬레이어 - 켈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마음은 이미 결론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짐작이 가실 거에요.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이별 -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한 명인 그 기사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까요. 하지만 그는 약속했겠죠. 그 일을 끝내고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하지만 그를 떠나 보낸 왕녀의 마음은 편안하지 못했겠죠. 그녀는 물론 자신의 애인의 사랑을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나 - 그가 과연 살아 돌아올 수 있을까? 그 용들을 물리치고,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인 드래크 로니안들을 이기고? 결국 그녀는 고민을 하죠. 나라와 친구들이냐, 아니면 사랑이냐 - 그리고... 선택을 했겠죠." "설마..." 켈리는 푸른 눈을 들어 데이슨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 때 리반 아덴과 함께 있었죠, 마지막 남은 드래곤 슬레 이어? 일곱 번째 기사가 당신이었다는 것을, 그러나 당신은 귀족 출신이 아니어서 이름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하르크자엘의 복수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하르크자엘은 일곱번째 기사가 누구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겠죠. 당신이 리반 아덴을 다라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다 해도, 당연히 부하로서 따라가는 것인 줄 알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시지리스에서 모든 걸 보고 겪었어요. 말씀해 보세요. 시지리스는 드래크로니안의 마지막 보루였어요. 그런데 그곳에 남아 있던 용족은 몰살당했죠. 그렇다면 지금 살아 있는 드래크로니안들은 도대체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요? 당신들이 시지리스에 갔을 때, 하라크자엘은 없었 어요. 그리고 용족의 신관, 마법사인 백룡 보레아스도 없었죠. 그들은 자신의 동족들이 그렇게 학살당하도록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설마 지하실에 숨어 있지는 않았을 것 아녜요?" 데이슨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우리가 갔을 때... 하르크자엘은 없었소... 사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소... 그 때 하르크자엘은 지금처럼 무서운 자가 아니었고, 하르크자엘이라고 불리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보레아스 역시... 우리는 그들이 그냥 우리가 죽인 용들 중 하나이거니 했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에는 얼굴을 알아볼 수 있지만, 용의 모습일 때에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으니... 그러나... 그러나... 로데인의 왕녀라니... 페레노스 라니..." 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평상시의 쾌활한 어조로 돌아와 있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에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죠. 어쩌면 왕녀는 결코 용족을 배반하지 않았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그녀의 애인이 그녀를 배반했는지도 모르고." "하지만... 하지만 정말이라면? 왜 이런 이야기를 내게 해 준 거요? 당신은 대체 누구요, 켈레브리스!" 데이슨이 절망적으로 외쳤다. 켈리는 눈을 들어 그를 빤히 바라보았 다. 그리고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 하면, 당신이 이 이야기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데이슨. 하르크자엘은 이미 오래 전부터 로크 페울로니와 그 주인들을 찾고 있었어요. 그리고 만약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만약 그 왕녀의 애인이 당신의 주군 리반 아덴이었다면 - 그렇다면 클레이브와 랜스는 로데인 왕가의 혈통, 힐리온의 계승자에요." (계속) --------------------------------------------------------------------- * 하하... 깜짝... 놀라셨어요? 하나도 안놀라셨다고요? 그럼 할 수 없죠 머...^^; 지나치게 짧은 제 2장은 여기서 끝입니다. 왠지 엉뚱한 소리만 한 것 같은... 어쨌든 다음부턴 제 3장입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제 3장 아트웰 (Chapter 3 Artwelle) "눈이 내릴 것 같은데요." 부관은 눈살을 찌푸리며, 회색 구름이 무겁게 덮여 있는 하늘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엘먼 왕자는 한숨을 쉬었다. "눈이라. 드라크노움의 눈은 악명이 높다고 들었는데..." "이곳은 비교적 남부니까 별로 심하게 내리지는 않을 겁니다. 게다가 아직 가을이잖습니까, 전하." 부관은 재빨리 둘러댔다. 그러나 안내자로 고용된 현지인(現地人) 노인은, 듣기 힘든 사투리가 섞인 공용어로 덧붙였다. "그래도 드라크노움의 눈은 내륙 지방의 눈 따위와는 많이 다릅니다. 여기는 고산 기후라는 것을 명심하십쇼. 가을이나 봄은 길지 않습니다. 저희 부족에게, 지금은 겨울이나 마찬가집니다." 부관은 못마땅한 듯이 노인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외의 방법으로 불쾌함을 표시했다가는, 왕의 귀에 들어가 혼쭐이 나기 십상 이었다. 그는 그 점이 불만스러웠다. 폐하는 언제나 너무 관대하시단 말야. 반란군과 한 패일지도 모르는 놈들인데... 왕자는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그는 중얼거렸다. 투구와 갑옷은 고작 한 시간 걸치고 있었을 뿐인 데도 머리와 어깨를 아프게 짓눌렀고, 말을 탄 자신의 꼴은 그가 보기에도 어색했다. "펠드릭의 말 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에스텔에 남는 건데. 이런 투구와 갑옷을 하루라도 더 입었다간 전투도 시작하기 전에 병이 나 죽을 거야." 그는 무심하게 말라 버린 수풀을 짓밟으며 말을 몰았다. 그의 부관과 세 명의 호위병, 그리고 안내인 노인이 말을 카고 그의 뒤를 따랐다. 나뭇잎 들은 벌써 하나도 남김 없이 떨어져 말발굽 아래를 덮고 있었고, 침엽수의 뾰족한 잎들만이 남아서 바람에 음산하게 나부꼈다. 앞길을 정찰하고 오라는 것이, 그의 아버지인 왕이 초최로 그에게 내린 임무였다. 그러나 솔직히 그는 어떻게 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앞길인지, 정찰을 하라면 얼마나 자세하게 뒤져야 하는지... 그러나 그런 것을 물었다가는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했다. 차라리 대충 하고 마는 게 낫지. 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으며, 도대체 어쩌다 이런 곳엘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전하... 너무 깊이 들어가시는 것 같은데요." 안내인이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어른과 같은 말투로 말했다. "드라크노움은 위험한 곳이랍니다. 함부로 발딛다간 게히스헨 메인의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 조심하십시오." "게히스... 그게 뭐야?" "용들의 조상 말입니다. 훼로크 신의 피를 먹고 생겨난 최초의 용이 죠. 요정들과 저희 부족은 그렇게 부른답니다." "뭔지는 몰라도 인간족의 왕이 간다는데 비켜야지." 엘먼은 자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지고 있다고 느꼈다. 정말이지 이렇게 툴툴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에스텔의 왕성(王城)을 떠난 후로는 도저히 마음 편할 날이 없으니, 별 수 있나... 날카로운 심기 때문일까, 유난히도 주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불안해져서 말을 세우며, 부관에게 물었다. "이봐... 무슨 소리가 자꾸 들리는 것 같지 않아?" "글쎄요, 바람 소리 같은데요." 부관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뒤로 비웃음을 숨기는 호위병 들의 모습이 보였다. 왕자는 이를 악물었다. 다음부턴 절대로 이런 겁쟁이같은 질문을 해서 우습게 보이지 않을 거야. 그는 더욱 대담하게 말을 몰아 숲 속 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돌아오는 것은, 참다 못해 터져나오는 키득거림이었다. "누가 웃는 거야?" 엘먼 왕자는 화를 벌컥 내며 뒤를 돌아 보았다. 이것은 정말 해도 너무 한 거였다. 그가 겁쟁이라는 사실은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래도 왕의 외아들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비웃다니! 호위병들과 부관, 그리고 노인은 어리둥절해진 얼굴로 왕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웃고 있지는 않았다. 왕자가 다시 말을 돌리려 는 찰나, 아까의 그 웃음이 다시 들려왔다. 이제 그는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다. 그 웃음은 소녀의 웃음이었다. "감히 에스테이아의 왕자 앞에서 몸을 숨기고 웃는 자가 누구냐!" 엘먼은 애써 두려움을 감춘 채 숲을 향해 소리쳤다. 안내인 노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왕자의 소매를 잡으며 말했다. "전하, 돌아가십시오. 아무래도 와서는 안 되는 곳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말은 자지러지듯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소 리에 묻혀 버렸다. 하나같이 미칠 듯 즐거워하는 소녀, 또는 소년의 목소리 였다. - 오! 이리 와서 우리와 함께 놀아요. 무엇을 망설이시나요? 당신들의 세상은 위험과 근심에 가득 찬 세상, 이리 와서 근심이 없는 곳에서 놀아요. 전쟁도 명예도 사랑도, 한 순간 죽음의 바람에 날아가 버리는 덧없는 낙엽과 같은 것을. 이리 와요, 우리와 손잡고 놀아요. 당신에게 아직 그럴 삶이 남아 있을 때에... 그들은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그들의 주위를 눈에 보이지 않게 맴돌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들으라는 듯 공용어로 부르는 노래였으 나, 그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는 분명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소름이 끼치도록 매혹적이고, 정신을 혼란하게 하는 목소리였다. "전하!" 잠시 멍하니 있던 엘먼을 잡아 흔들며, 그의 부관이 외쳤다. "호위병 둘과 안내인 노인이 안 보입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왕자와 부관, 그리고 한 명의 호위병 뿐이었다. 왕자는 두려움에 질린 채, 한시라도 빨리 이 곳을 빠져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 뿐이었다. 그들의 미묘한 노래는 그를 놓아 주지 않았고, 그는 말의 고삐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 오! 우리의 친구, 어디로 가시나요? 우리를 떠나지 말아요, 근심투성이 세상으로 돌아가지 말아요. 우리와 함께 놀아요, 여기에 남아서... "전하!" 부관이 외치는 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렸다. 아니, 들었다고 상상했을 뿐인지도 몰랐다. 한 하얗고 가는 손이 나무 속에서 튀어나와, 엘먼의 투구를 벗기고 그의 머리칼을 끄다듬었다. 그는 그 나무에서 서서히 튀어나오는 그 손의 주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크고 아름다운 갈색 눈을 가진, 16세 정도의 소녀였다. 그는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자도... - 나를 떠나지 말아요, 내 사랑! 언제까지고 함께 있어요. 이 곳에, 내 곁에...! 엘먼의 머리 속에는 이미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가 그 소녀의 손에 몸을 맡기려는 찰나, 누군가가 거칠게 그를 말에서 끌어내렸다. 엘먼은 말에서 떨어져서 땅 위에 굴렀으나, 아픔은 꿈 속에서나 느끼는 것처럼 몽롱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주위에서 누군가가 싸우고 소리 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그것조차 매우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런 그의 몽롱한 의식을 뚫고, 한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아까 나무 속에서 나온 그 소녀의 목소리처럼 어리고 미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 였다. "휘일린, 디르타일리신 , 휘일린! 딜 엘켄 아렌데일라스 퓨린 론! 하인 로 데하인, 훼라 온, 알 로 디르케레닌 퀘라, 알 디 로르그린 퀘라, 휘일린, 알 로 마인 디리피엔! (돌아 가, 나의 동족이여, 돌아 가! 아렌데일의 분노가 미치기 전에. 먼 옛날, 그대들이 내 누이였고, 내가 그대들의 친구였던 때를 기억한다면 내 노래를 듣고 돌아가!)" 엘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흐릿한 눈앞에, 수십 명의 기사와 마법사와 난쟁이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은 영상이 비추어졌다. 그는 힘껏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고, 한참을 그러고 난 후에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의 부관 역시 그와 비슷한 상태인지 마구 눈을 비비고 있었다. 호위병들과 안내인 노인은 어디에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낯선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2한 명은 등까지 치렁치렁하게 내려오는 갈색 머리칼을 지닌, 어린 요정이었다. 평범해 보이는 마법사의 지팡이를 한 손에 들고 있었다. 그리고 못마땅한 듯, 경멸 어린 시선으로 엘면과 부관을 내려다보는, 건장한 난쟁이 한 명. 그리고 걱정스럽게 자신을 내려다 보는, 열 대여섯 쯤 되어 보이는 소년 한 명 - 남쪽에서 왔는지 검은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칼을 칼집에 꽂아 넣고 있는, 키가 큰 금발의 기사... "크... 클레이브 경?" 엘먼 왕자는 놀라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나 곧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클레이브보다 좀더 여위고, 두어 살 정도 어린 얼굴이었다. "랜스 아덴, 클레이브의 동생입니다." 하고 그 기사가 말했다. "엘먼 왕자님이시죠.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나는 괜찮지만... 안내인 노인과 호위병들은...?" 엘먼은 랜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면서 물었다. 그러자 요정 소녀가 난처한 얼굴로, 그의 맞은편을 손가락질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아름드리 느릅니무가,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계절을 초월하여 풍성한 푸른 잎을 단 채 위풍당당히 서 있었다. 그 아래로 늪과 같은 조그만 진흙 구덩 이가 열려 있었고, 마지막 호위병의 발이 그리로 빨려들어가는 중이었다. 얼이 빠진 듯 멍하니 보고 있던 왕자는, 무심코 달려가 그 호위병을 구해 내려 했다. 그러나 랜스의 강한 팔이 그를 막았다. "소용 없어요, 이미 죽었어요." 하고 요정 소녀가 말했다. 부드러운 녹색 눈에서 미묘한 경멸이 느껴졌다. 엘먼은 멍하니 주저앉아, 마치 늪 솔으로 가라앉듯 쉭 하고 빨려들어 가는 호위병의 발끝을 지켜보았다. 그의 발끝이 사라짐과 동시에, 늪과 같던 진흙 구덩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단단히 굳어, 주위의 다른 땅과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엘먼 왕자는 겁에 질린 채 벌떡 일어섰다. 뒷걸음질 치던 그의 발 뒷꿈치에, 무엇인가 가볍고 딱딱한 것이 부딪혔다. 해골이었다. 소스라쳐 두리번거리는 엘먼의 사야에 수십개의 해골이 들어왔다. 사방에, 특히 아까의 나무처럼 계절에 맞지 않게 푸르른 잎을 가진 활엽수들 아래에, 셀 수 없이 많은 인간과 짐승의 뼈들이 널려 있었다. "이... 이게 도대체 뭐지? 여긴 어디지?" 왕자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요정 소녀의, 짜증이 날 만큼 침착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는 나무의 정령들의 지키는 숲입니다. 나무에 숨어 사는 이들은 드라이어드 족, 저와 같은 숲의 요정족이에요. 그러나 그들은 오래 전,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에서 어둠의 종족과 싸우기를 마다하고 나무들 숲으로 숨어 버렸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린 채 나무도 요정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어요. 그러나 원래 저들은 숲의 요정족, 드라이어드입니다." 엘먼 왕자와 그의 부관은 얼이 빠진 채 요정 소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부관이 그의 칼을 빼어들고는 소리치며 나무들을 향해 달려나갔다. "용서할 수 없어, 이 괴물들!" (계속) --------------------------------------------------------------------- * 지나치게 짧고, 또 켈리가 난리치는 것(?)외에는 액션이 없는 제 2장에 대해 많은 분들이 항의를 해 주셨군요...^^; 아마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안 나온 SF란에 전무후무한 장(障)이 되지 않을까요... 제 2장의 제목이 왜 <음모>인지는 끝에 가서 밝혀집니다.^^ Radagast... 그러나 그는 몇 발짝 떼지도 못한 채, 머리에 둔탁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요정 소녀가 순식간에 지팡이를 길게 늘여, 그의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그리 힘이 세지는 않아서 기절하는 것은 면했으나, 통증은 상당했다.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외쳤다. "뭘 하는 거야!" 요정 소녀는 14~5세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얼굴에 맞지 않게, 경멸과 무관심에 찬 눈빛으로 대답했다. "말씀드렸습니다, 저들은 내 동족이고, 모습과 사는 방식이 저렇다 해도 라스헨 레이스(숲의 지배자) 아렌데일의 보호를 받고 있어요. 당신과 같은 인간이 해를 끼쳐서는 안 되죠." "저들이 내 부하들을 셋이나 죽였는데... 가만 있으란 말인가!" "몇 명의 인간이 죽었는지, 그건 제가 알 바 아녜요. 하지만 요정의 숲에서 요정을 죽이는 것은 허락할 수 없어요. 당신의 부하들과 같은 운명이 되고 싶지 않으시다면, 잠자코 절 따라오시는 게 좋을 걸요." 부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러나 요정 소녀는 그의 기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금방 제 길이로 줄어든 지팡이를 한손에 들고, 가벼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엘먼은 멍한 눈빛으로 일어서서 옷을 털었다. 요정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처음보는 요정 소녀는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소문대로 갈색 머리에 맑은 녹색 눈, 그리고 나무 속살처럼 희고 부드러운 피부를 가닌 날씬하고 아름다운 소녀이긴 했지만, 상냉한 얼굴에 어9울리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시죠... 길을 모르니 일단 저희들의 거처로 모시겠습니다. 파엘 경도 전하를 뵈어야 할 것이고...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 아이는 데이미아, 로이, 그리고 툴위그 젠 글렌델 경입니다." 랜스가 엘먼을 부축하며 공손이 말했다. 툴위그라 불린 난쟁이는 거리를 둔 채, 필요한 만큼만 약간 허리를 굽혀 절했고, 데이미아는 그를 힐끗 돌아다 보았을 뿐이었다. 로이라 불린 남부 출신의 소년은 신기하다는 듯 왕자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오! 가지 말아요, 우리와 함께 머물러요! 당신네 인간들의 세상은 슬픔으로 가득 찬 곳, 어째서 돌아가려 하나요? 숲에서는 다시 노랫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엘먼은 고개를 저으며 귀를 막았다. 랜스가 걱정스럽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왕자는 자존심이 상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어째서 랜스 경도 부관도 멀쩡한데, 자기만 이렇게 저 유령같은 것들의 노랫소리에 솔깃해지는 것인지! - 우리와 함께 있어요, 가지 말아요! 스르륵 소리를 내며, 나무 뿌리가 뱀처럼 기어 엘먼의 발치로 뻗어 왔다. 그 뿌리는 순식간에 연한 갈색의 가녀린 손이 되더니, 그의 발목을 꽉 움켜잡았다. 엘먼은 공포에 질려 숨이 넘어갈 듯 비명을 질렀다. "이것들이... 감히!" 엘먼의 부관은 더이상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뽑아 들과 나무들에 게로 달려들었다. "그들을 해쳐선 안 돼요!" 데이미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채끝나기도 전에, 그는 엘먼의 발목을 잡은 나무 뿌리를 칼로 싹둑 잘라 버렸다. 잘린 단면에 서는 피처럼 진한 수액(樹液)이 마구 쏟아져 나왔고, 엘먼의 발을 잡고 있던 손은 털썩 떨어져 마구 꿈틀거렸다. 데이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런, 어리석은...! 숲 속에서 숲의 요정을 해치다니! 어서 이 숲을 떠나야 돼요!" "흥, 그럴 순 없지. 감히 에스테이아의 군사를 우습게 본 댓가를 치루게 하겠어!" 부관은 기세등등하여 칼을 휘두르며, 나무들에게로 뛰어들었다. 뱀처럼 재빠르고 흐느적거리는 가지와 뿌리들이 그에게로 돌진해 왔다. 뿌리 하나가 재빨리 그의 다리를 감았으나, 그의 칼날이 재빨리 그것을 끊어 버렸다. 그의 팔과 목으로 뻗어 온 나뭇가지도 마찬가지였다. 꿈틀거리는 잘린 나뭇가지와 뿌리, 그리고 끈적거리는 수액으로, 순식간에 조용하던 숲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왕자의 부관의 칼솜씨는 상당했다. 그로나 그 한 명이 상대하기에, 나무들의 공격은 너무나 벅찼다. 가지 하나를 자르면 금방 뿌리 두 개가 덤벼들어 왔다. 그는 열심히 칼을 휘둘렀으나, 이미 기다란 덩쿨이 그의 발을 감아올라가고, 나뭇가지에서 뻗어나온 가냘픈 손들이 그의 못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저런...!" 멍하니 보고 있던 랜스는 부관이 밀리기 시작하자, 얼른 칼을 빼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나무들에게 뒤어들려는 찰나, 갑자기 데이미아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자칫하면 그녀를 벨 뻔한 랜스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데이미아, 뭘 하는 거야!" "그만 둬요, 랜스. 그들을 해치면 무사하지 못해요!" 데이미아의 목소리는 낮고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데이미아, 저 사람 저대로 놔 두면 죽고 말 거야!" "숲과 하나가 된 요정들을 공격했으니 당연하죠. 같은 요정조차 저들에게 상처를 입히면 살아남지 못해요. 당신이 간다 해도 살릴 수 없어요, 랜스! 어서 왕자를 데리고 도망가자고요. 저 사람을 죽이고 나면, 저 나무들은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의 피를 빼앗으려고 할거라고요!" 랜스는 머뭇거리며 힘겹게 싸우는 부관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의 주위에는 너무나 많은 나뭇가지들이 허우적대고 있어서, 그의 모습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이미 굵은 뿌리 하나가 그의 무릎 위까지 기어올라 가 있었고, 나뭇가지들은 칼을 든 그의 오른손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는 열심히 칼을 놀렸으나, 뿌리가 갑자기 거세게 그의 발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풀썩 쓰러졌다. 나뭇가지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오른팔과 목을 휘감았다. "살려줘!" 목이 막히기 직전, 부관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곧, 죄어드는 나뭇가지가 그의 기도를 막아 버렸다. "뭐해? 어서 가자, 로이!" 데이미아가 로이의 손목을 잡으며 소리쳤다. 로이는 망설였다. "데이미아... 정말 안 도와줄거야?" "도와줄 수가 없다니까!" "데이미아 말이 맞아. 이 숲에서 저들을 이길 수는 없다. 저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게 옳지도 않고." 툴위그는 침착하게 말하며 달려갔다. 로이도 데이미아에게 이끌려, 툴위그의 뒤를 따라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이런, 제길...!" 랜스는 도망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칼을 본 다음 이를 악물었다. 왕자는 그의 곁에서 벌벌 떨며, 공포에 질려 돌처럼 굳어져서 가만히 서 있었다. 부관의 몸은 이제 축 늘어져 꼭두각시처럼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나무들은 그의 죽은 몸도 내버려 두지 않았다. 먼저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그 다음에는 볼이 줄어둘면서 얼굴에 주름 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과 몸은 순식간에 천 년은 지났을 법한 미이라처럼 쪼그라들었다. "마... 맙소사!" 왕자는 신음처럼 중얼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랜스의 귀에도 들릴 지경이었다. "전하, 어서 도망치십시오!" 랜스는 그를 억지로 잡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러나 왕자는 부관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맙소사... 저런... 저런 괴물이...!"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저들의 공격을 받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 말에 왕자는 비로소 제정신이 든 듯 했다. 랜스는 왕자를 이끌고 있는 힘을 다해 숲을 헤쳐 달렸다. 뒤에서 나뭇가지들이 쉭쉭 뻗어 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나뭇가지가 랜스의 머리 뒤로 바짝 다가왔다. 그 가지의 끝은 마술처럼 긴 손가락을 가진 손 모양이 되더니, 랜스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랜스는 칼을 빼어들어 머리칼을 싹둑 잘라 버리고는 계속 달렸다. "기... 기다리시오, 랜스 경! 나는 자네처럼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왕자가 숨이 턱까지 차오른 목소리로 소리쳤을 때에야, 랜스는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그 저주받은 숲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데, 광자의 얼굴을 보니 이미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랜스는 한심한 기분이 들어 그의 팔을 잡고 거칠게 끌어당겼다. "으악!" 9엘먼 왕자가 다시 비명을 질렀다. 그의 발목에 다시 나무 덩굴이 기어올랐기 때문이다. 랜스는 칼을 빼어들어 그 덩굴을 치려다가, 데이미아의 말이 생각나서 머뭇거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나무 덩굴은 엘먼의 발목을 붙든 채 그를 마구 끌어당기고 있었다. "으아악! 사람살려! 어떻게 좀 해 봐!" 엘먼 왕자는 랜스의 팔을 꼭 붙든 채 숨 넘어가는 소리를 질렀다. 랜스는 칼을 들어, 엘먼의 발목으로 가져갔다. 왕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랜스는 대답해지 않았다. 그는 엘먼이 신고 있는 장화의 매듭을 재빨리 끊은 다음,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끌어당겼다. 장화가 벗거지면서, 엘먼과 랜스는 뒤로 나자빠져 굴렀다. 그들의 눈 앞으로, 빈 장화를 꽉 움켜준 채 꿈틀꿈틀 기어서 사라져 가는 나무 덩굴이 보였다. 왕자는 온 몸의힘이 빠진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랜스는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이 때입니다. 어서 달리세요!" "어어?" 랜스는 거의 왕자를 질질 끌다시피 하며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자... 잠깐! 난 지금 신발도 없고 더이상 달릴 기운도..." 뭔가 항의를 하려던 왕자는 뒤에서 쫓아오는 나무 뿌리들을 보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흐느적거리며 다가오는 뿌리들과 덩쿨들은 마치 거대한 문어의 발이나 구렁이 떼같이 보였다. 왕자는 아무 말 없이 있는 힘을 다해 랜스의 뒤를 따라 달렸다. --------------------------------------------------------------------- "더... 더이상은 못 가겠어!" 엘먼은 쓰러지듯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랜스는 걸음을 멈추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는 별로 숨이 차지도 않은 것 같았다. "염려 마십시오, 이제 그들의 숲은 벗어난 것 같습니다, 전하. 그보다 다치신 데는 없으신지요?" 사실 왕자는 더이상 나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목숨 걸고 달려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게다가 나뭇가지에 얼굴과 몸이 긁히고, 신발은 한 짝밖에 안 신어서 발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었고, 다리는 천근같고, 심장과 폐는 터질 것 같고... 그러나 너무나도 멀쩡한 랜스 앞에서 차마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무... 물론 괜찮고 말고." 왕자는 땅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클레이브의 동생 랜스 아덴을 직접 보는 것은 그로서는 처음이었다. 사람들의 말대로, 랜스는 정말 클레이브와 닮아 있었다 - 생김새도 그렇고, 엘먼 자신을 묘하게 기죽게 만드는 분위기도. 마치 군주처럼 의연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랜스 앞에서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헉헉대는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보일까 하는 생각이 미치자, 엘먼은 차라리 그 나무들에게 잡혀먹었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걱정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랜스의 눈마저도 뽑아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클레이브도 저렇게 청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지, 아마... 그의 아버지가 위엄 있고 맑다고 칭찬한 눈을. 엘먼 자신에 대해서는 일생동안 한 마디도 칭찬해 주지 않은 그의 아버지가 칭찬한 그 눈 말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아!" 엘먼은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무거운 다리로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자네 막사는 어디지? 어서 안내해라." 랜스는 갑자기 신경질적이 된 엘먼의 반응에 잠시 어리둥절해 했다. 그러나 곧 앞장서서 발을 옮기며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전하." 엘먼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차라리 에릭 이나 마커스를 데리고 왔으면 했다 - 적어도 그들은 엘먼을 걱정하고칭찬해 줄 줄을 알았다. 비록 아무도, 엘먼 자신조차도 믿지 않는 칭찬일지라도. (계속) --------------------------------------------------------------------- * 닭털을 다 뽑고 비둘기털을 붙인다고요...^^; 제가 그렇게 잔인한가요? 흠... 각성해야겠군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Radagast PS. 아참! 자료실에 7장이랑 2부 1장 올렸습니다. go fan 5 1 하세요^^ "...랜스 경, 아직도 멀었나?" "이제 곧입니다, 전하." 엘먼은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이제 곧'이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 벌써 네 번째였다. 그러는 동안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아까 본 그런 괴물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 같은 근거 없는 느낌에, 그는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게다가 다리도 아팠다 - 특히 신발을 잃은 발은 거의 감각이 없을 정도였다. 그는 너무 신경질이 나서, 랜스가 자신의 무능을 놀리기 위해 일부러 숲 속을 헤메게 하고 있지 않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랜스는 랜스대로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특히 난생 처음 보는, 계속해서 엄살만 피우는 왕세자에 대해서. 아마도 그 역시 화를 내고 있는지 몰랐다 - 엘먼 같은 멍청이가 클레이브의 자리를 빼앗은 것을 분하게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엘먼은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어쩌겠어... 난 아버지나 클레이브처럼은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걸. 랜스의 말과는 달리, 엘먼 왕자가 거의 지쳐 쓰러질 때쯤에서야 그들의 눈앞에는 막사가 나타났다. 허름하고 팔에 붕대를 감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누가 보더라도 패잔병들의 막사였다. 병사들은 낯선 왕자를 왕자를 보고는 경계에 찬 표정으로 창을 들었으나, 랜스가 다가가 뭐라고 하자 금방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랜스! 무사히 왔군요!" 로이가 저편에서 달려오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뒤에는 데이미아와 툴위그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로이는 랜스에게 그대로 돌진하려다가, 엘먼 왕자가 있는 것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하하... 왕자님도 무사히 오셨네요..." 로이는 멋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엘먼 왕자는 너무 지쳐 있어서인지, 로이에게 별다른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랜스는 그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로이, 이 분은 다음 왕이 되실 분이야. 어째서 버려 두고 달아난 거지? 네 행동은 터무니없이 무책임했어!" 로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랜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반박하거나 반성하는 눈빛이 아니라, 아예 그가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랜스가 한 마디 더 하려는 찰나, 데이미아가 그의 말을 막고 나섰다. "어차피 랜스가 모시고 나왔으니 됐잖아요? 사실 숲의 일부가 된 요정들을 해치고도 이렇게 살아나왔다는 게 기적이지만. 둘 다 정말 운이 좋았군요. 하지만 조심해요, 만약 그들의 손가락 하나라도 해쳤다면 이 숲 전체의 분노를 살 테니까요. 나무는 독을 품은 열매를 줄 거고, 잠자리엔 독사와 전갈이 몰려들고, 방심하고 있으면 새들이 눈을 쪼기 위해..." "그만 둬!" 엘먼 왕자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거의 비명을 질렀다. 데이미아는 짖궂은 미소를 띄며 입을 다물었다. 랜스는 이제 더이상 못참겠다는 듯, 그녀의 팔을 붙들고 낮게 소리쳤다.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짓이야! 데이미아! 저 분은 이 나라의 왕자님이시라고, 다음에 왕이 될 분이야!" "숲의 왕은 아니죠, 다행스럽게도. 이 숲은 라스헨 레이스 (숲의 지배자) 아렌데일과 게히스헨 메인(용들의 조상)이 다스리는 곳이에요. 그리고 나는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 어떤 군주의 다스림도 받지 않아요." "데이미아, 이게 라스헨 에이니드답게 구는 거야?" "라스헨 에이니드답게 구는 게 어떤 건지 어떻게 아나요, 당신같은 인간이, 살생을 위해 태어난 종족이!" 데이미아는 노골적으로 경멸을 드러내며 외쳤다. 그리고 어이없어 하는 랜스의 손을 뿌리친 다음, 성큼성큼 수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이는 그녀가 사라진 쪽과 랜스의 얼굴을 힐끔힐끔 살피다가, 데이미아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저 애 말이 맞네. 자네는 데이미아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자격이 없어." 랜스를 가만히 쳐다보던 툴위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랜스는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왜 이래요?" "우리는 자네 종족의 전쟁과 관계가 없다는 걸 알아 두게. 데이미아 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여기에 남아 자네 병사들의 상처를 돌봐 주고 있는 거야. 그녀에게 감사하게 여기게." 툴위그 역시 말을 마치고,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막사들과 지친 병사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랜스는 잠시 넋놓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나 곧, 그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왕자가 어쩔 줄을 모르겠 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다행히 왕자는 데이미아와 툴위그의 반응에 당황했을 뿐, 화가 나거나 괘씸하게 여기지는 않는 것 같았다. 랜스는 얼른 당황을 감추고, 침착한 얼굴로 왕자를 안내했다. "들어오시죠, 파엘 경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엘먼은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 한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공기가 탁한 어두운 막사 안에, 한 병자가 누워 있었다. 피가 배어나온 붕대로 가슴과 어깨를 동여 맨 기사였다. 엘먼 왕자는 어차피 파엘 경을 알지도 못했으나, 설사 그를 안다 하더라도 윤기 잃은 붉은 수염에 뒤덮인 얼굴을 알아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전하...?" 하고 병자가 쉰 목소리로 신음하듯 물었다. 엘먼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 서 있었다. 랜스가 그런 그를 보다 못해, 파엘 경의 곁으로 끌고 갔다. "시이드 성의 영주 파엘 경입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일어나서 예를 차리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엘먼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용서를 하는 건 좋은데... 날더러 지금 어쩌란 말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펠드릭이나 마커스, 아니 하다못해 에릭이라도 데려오는 건데... 그들은 항상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알려 주었 으니까... "전하... 정말 엘먼 전하이십니까?" "에? 아, 그... 그렇소." 거의 시체같은 파엘이 말을 걸자, 엘먼은 섬뜩하여 얼른 대답했다. 그는 혹시 랜스가 이제 그만 나가라는 말을 해주지 않을까 싶어서 자꾸 그를 돌아보았으나, 아쉽게도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반 송장은 그의 기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꾸 쉰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시이드는... 전하...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건 없소. 그대는 최선을 다해 싸웠다고 확신하오." 왕자는 배운 대로 읊조렸다. 9 "감사합니다... 전하... 지원군이... 지원군이 온 것입니까...?" "...아버님께서 오셨소." "아클레어 폐하께서!" 병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 그는 거의 몸을 일으키려 하다가, 거의 숨을 거둘 듯이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오! 감사합니다... 자비로운 이조넬이시여..." 왕자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자신이 지원군으로서 왔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자신과 아버지는 사일러스 와 협상을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어쨌든, 랜스 경과 그 외 사람들의 얼굴은 만족스러워 보였다. "...이제 나가도 되겠소?" 하고 왕자는 물었다. 이 시체같은 파엘 경인지 뭔지 옆에 더 서 있다가는 그가 병이 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데이미아... 너 요즘 좀 이상하다." 로이는 막사 옆에서, 아무 생각 없이 길게 누운 펠히스의 등을 쓰다 듬고 있는 있는 데이미아에게 말했다. 펠히스는 켈리가 사라진 이래 부쩍 기운을 잃고 있었다. "이즐레이가 간 뒤부터 그런 것 같아... 뭐 나쁜 일 있니?" "난 이 전쟁이 싫어!" 데이미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그 목소리가 너무나 날카로워서 로이는 질겁을 했으나, 곧 마음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전쟁이 싫은 건 모두 마찬가지야..."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너희 종족은 전쟁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로이? 적을 죽이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던데?" "..." "안 그러니? 난 너희 종족의 서사시들도 읽어 봤어. 그래, 아주 많이 읽어 봤어. 하지만 모두 다 싸우는 이야기야. 그리고 더 많이 싸우고 더 많이 죽이는 사람이 영웅이고, 누가 인간을 죽이면 그걸 벌하기 위해 당연히 더 많이 죽여야 되고..." "나, 난 사람 죽이는 거 싫어!" 로이는 엉겁결에 소리를 질렀다. 데이미아는 잠시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며칠만에 터뜨리는 웃음 이었다.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로이. 하지만 넌 예외에 불과해. 너희 종족에 는 너 같은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랜스도 마찬가지야!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면, 제발 그렇다고 얘기해 줘." 로이는 말문이 막혔다. 갑자기 그는 데이미아가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지만, 자기 나이의 두 배 이상을 살았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러나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래, 맞아'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응, 데이미아... 그러니까 내 생각엔 말야, 응... 세상에는 나나 랜스, 켈리처럼 좋은 사람도 있지만 말야, 응, 그러니까..." "좋은 사람은 얼마 없어. 난 랜스가 싫어지려고 해! 내가 그에게 몇 번이나, 이런 죽고 죽이는 어리석은 전쟁일랑은 때려치우고 로크 페울로 니나 찾으러 가자고 설득했는지 몰라. 하지만 듣지를 않잖아. 인정해, 로이, 그는 전쟁을 좋아해. 여기 있고 싶어 한다고! 랜스도 똑같이 살인마야! 켈리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그는 한 명이라도 더 죽이는 것 밖에는 머릿속에 든 게 없다고!" "말도 안 돼, 데이미아! 랜스가 살인을 좋아할 리 없잖아. 그는... 그는, 그냥 필요하다고 느낄 뿐이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파엘 경도 저렇게 됐는데 랜스가 빠지면 그야말로 이쪽 편은 박살날 거 아냐..." "필요하다고? 아니, 인간끼리 싸우는 게 로크 페울로니 찾으러 가는 것보다 더 필요한 일이란 말야? 그건 랜스가 살인마가 아니라 바보라는 설명밖엔 안 돼!" 데이미아는 맑은 녹색 눈으로 로이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로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데이미아가 알아듣게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녀는 요정이었다 - 다른 어느 때보다도 로이는 이 말의 의미를 절실히 느꼈다. 인간의 전쟁, 명예, 로이가 어려서부터 서사시로, 옛날 이야기로 들으며 자라 온 것들을, 데이미아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로이 자신은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데이미아의 말대로 우리 인간이란 종족은 좀 이상한 것이 아닐까...? "로이... 우리끼리 가자!" 갑자기 데이미아가 속삭였다. 로이는 자기 귀를 의심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우리끼리 가자... 어차피 랜스는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도 아니었어. 어차피 헤어져야 할 사람이었다고! 툴위그는 내가 이런 소리를 꺼내면 펄쩍 펄쩍 뛰지만, 너까지 함께 설득하면 잘 될거야. 혼자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은 아니니까..." "하지만 그럼, 랜스는..." "모르겠니, 로이, 랜스도 똑같은 살인마란 걸! 아니, 랜스가 저 살인 마들의 대장이란 말야!" "하지만 우리 친구야. 게다가 싸우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데... 그럼 네 치유술이 필요할거야, 데이미아!" 데이미아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으며,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어쩔 수 없구나." 그녀는 자기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고 있던 펠히스의 머리를 살짝 밀었다.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로이에게 말했다. "마음이 변하면 알려달라고 해도, 소용이 없겠지? 네 마음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는 로이를 뒤로 하고, 조용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숲 속으로 사라져 갔다. 로이는 가만히 서서 그녀의 목소리가 멀어져 가는 것을 듣기만 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로이는 기운이 다 빠진 듯 털썩 주저앉았다. 펠히스가 마치 그를 위로하려는 듯, 가만히 그의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려놓았다. 로이는 펠히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우리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계속)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요즘 용의 신전 살리기 운동...? ^^; 평해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열심히 쓸게요.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Radagast "왕께서 오셨다." "국왕 폐하 만세! 우리도 이젠 살았어." "아클레어 3세 만세!" 시이드의 패잔병들이 아클레어 3세의 일행과 합류한 것은 그 다음 날 저녁이었다. 들떠 외쳐대는 병사들 틈에서, 로이는 왕의 얼굴을 보기 위해 발꿈치를 들고 키를 높히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흥분하여 얼굴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로이를 보고, 그의 곁에 서 있던 데이미아가 시큰둥하게 투덜거렸다. "뭐 큰일이라고 이 난리람." "무슨 소리야, 데이미아! 저 분은 아클레어 대제(大帝)시라고. 이 많은 인간족을 혼자서 다스리시는 왕이시고, 그리고 레젠디아의 인간족을 통일한 영웅이고... 나와 시지리스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저 분의 모험을 읊은 서사시와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어. 아마 모든 레젠디이아의 인간 아이들이 그럴 걸. 상상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내 눈으로 볼 수 있게 되다니..." 홍조를 띄고 흥분한 어조로 설명하는 로이의 말을, 데이미아는 차갑게 끊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가 지금 그 통일 때문에 이 고생이지." "너 도대체 요즘 왜그래?" 참다 못한 로이가 한숨을 쉬며 데이미아에게 따졌다. 데이미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뭘? 실컷 만세나 불러. 하지만 실망이다. 넌 다른 인간들과 달라서 살인자를 숭상하거나 하진 않을 줄 알았는데!" "야! 데이미아!" 로이는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더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고는, 병사들을 헤치며 부상자들의 막사 쪽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이는 잠시 그녀를 쫓아갈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마침 그 때, 병사들의 함성이 드높아지며 왕이 모습을 나타냈으므로, 그의 머릿속에서 데이미아에 관한 생각은 싹 휩쓸려 나가고 말았다. 열댓명의 기사의 호위를 받고 있는 왕은, 위엄 있는 푸른 눈에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키가 큰 노인이었다. 레젠디아를 통일하고 수많은 무용담을 남긴 그였지만, 세월은 피해 갈 수 없었는지. 그러나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등은 꼿꼿했으며, 눈은 무서울 정도로 강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는 희고 몸집이 큰 말을 타고, 금빛 갑옷을 입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로이!" 랜스가 멀거니 서서 왕을 쳐다보고 있는 로이에게 다급히 속삭였다. 로이는 얼떨결에 랜스를 흉내내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 왕은 로이와 랜스의 앞에 말을 세우고, 기사의 도움도 뿌리친 채 말에서 내렸다. "이렇게 와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폐하." 랜스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클레이브의 동생 랜스 경인가." 왕의 눈빛만큼이나, 그의 목소리에서도 위엄이 가득했다. 그러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듯한 그의 목소리에는, 어쩐지 따스함도 스며 있는 것 같다고 로이는 느꼈다. "그렇습니다, 폐하. 시이드의 일은... 면목없습니다. 벌하여 주십시오." "아트웰을 과소평가한 것은 내 잘못이지..." 왕은 씁쓸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 그 근엄한 왕이 웃다니, 로이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왕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때마침 왕도 랜스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그의 곁에 꿇어앉은 남부 출신의 소년을 보고 있었기에, 둘의 눈길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로이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시 눈을 내리깔지도 못하고 왕을 그대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대의 시종(始終)인가, 랜스 경?" "아닙니다, 폐하. 이 아이는..." "아닌데요." 랜스와 로이의 대답은 동시에 튀어나왔다. 얼떨결에 대답을 해 버린 로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왕과 랜스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저는... 그러니까... 로이인데요." "시이드 출신인가?" "아뇨, 전 시지리스의 의... 아니, 시지리스 출신이에요." 로이는 '의적'이라는 말을 얼른 삼키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아무래도 왕과 그의 기사들의 표정으로 보아서, 무슨 말인가를 더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할 말은 다 했는데... 로이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랜스의 말투를 떠올리고는 이윽고 이렇게 덧붙였다. "폐하." 표정을 보니 이 말도 아니로군...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항상 말이 막힐 때 하던 습관대로 귀염성 있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왕과 그의 기사들을 더욱 당황하게 했을 뿐이었다. 왕은 마치 신기한 괴물이 라도 본 것처럼 한참동안 로이를 쳐다보다가, 랜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부상병들은 어디 있나?" "이리로 오십시오, 폐하." --------------------------------------------------------------------- "흥... 그래서, 저 노인이 인간들이 껌벅 죽는 아클레어 대제라는 사람이군요?" 부상병들의 상처를 돌보며, 데이미아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녀를 도와 붕대와 약초를 준비하고 있던 툴위그는 조용히 대꾸했다. "데이미아, 그는 그래도 인간들이 존경하는 군주야." "어차피 살인자일 뿐인걸요. 많이 죽였기 때문에 존경받는 거지요. 인간들이란 그렇게 멍청한 족속들이니까." 툴위그는 조금 놀란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데이미아는 그런 그의 눈빛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곪아 열이 오른 병사의 상처를 싸맨 붕대를 풀고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끝에서 녹색의 빛이 전해져 가, 병사의 상처에 전달 되었다. 처음에 병사는 숨이 넘어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냈지만, 곧 그의 신음은 멈추고 숨소리도 편안해졌다. 데이미아의, 손이 닿은 상처는 이미 붓기가 빠지고 열도 내려 있었다. "데이미아, 너는 라스헨 에이니드, 숲의 마법사야.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라스헨 에이니드는 모든 생물들에게 자비로워야 하는 거야..." 툴위그는 마치 딸을 타이르는 듯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병사의 상처를 새 붕대로 싸매며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자신의 종족에게밖에는 자비를 베풀지 않는 종족에게도요?" "데이미아, 날 봐라!" 툴위그는 매섭게 외쳤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이미아는 그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네 어머니가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미를 가르쳐 주지 않았나? 숲의 마법사, 모든 생물을 치유하는 자,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미를! 라스헨 에이니 드는 이유가 있어서 자비를 베푸는 게 아냐. 살아있는 것은 모두 라스헨 에이니드의 자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거야! 저들을 봐라, 데이미아, 저 인간 병사들을. 너는 저들을 돌봐주었지. 하지만 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저들을 정말 치료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어. 너는 대부분의 인간들을 싫어했고, 저들도 마찬가지였지. 너는 저들이 죽건 말건 상관 없다는 심정으로, 입으로만 주문을 외웠지. 그러니 네 치유술 이 점점 효력을 잃는 거야. 그것은 느끼지 못하겠어!" 데이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가만히 툴위그를 노려보다가, 몸을 휙 돌려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다른 병사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 다시 아까처럼 붕대를 헤치고 상처에 주문을 불어넣었다. 툴위그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밖이 갑자기 시끄러워진 것은 바로 그 때였다. 툴위그는 무심코 막사의 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휘장을 젖히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금빛 갑옷 차림의 당당한 노인을 보았다. "인간족의 군주시군요." 툴위그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만 몸을 굽혀 절했다. "저는 툴위그 젠 글렌델, 로그라드 출신의 기사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왕은 툴위그의 인사를 건성으로 받았다. 왕의 눈은 그가 오건 말건 주문을 외우기에 열중해 있는 요정족 소녀에게로 향해 있었다. 땋아내린 갈색의 풍성한 머리칼이 등까지 흘러내려 있었고, 넓은 소매 밖으로 드러난 팔은 놀랄 만큼 희고 가냘펐다. 무늬나 장식이라고는 짙은 녹색 허리띠밖에 없는 상아(象牙)빛 로브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마치 책 속에서 튀어나온 환영(幻影)처럼 기묘하게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왕이 그녀의 곁으로 성큼 다가섰으나,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주문만 계속 외우고 있었다. 왕을 따라들어온 랜스가 보다 못해 한 마디 하려고 했을 때, 비로소 데이미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녹색 눈은 도전적으로 왕의 푸른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추한 곳에 웬일이신지요, 인간족의 왕이여? 저는 드라이어드 족의 데이미아라고 합니다. 미리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만, 주술이 란 것은 왕이라고 기다려 주지 않아서요." "랜스 경이 말한 치유술사가 그대인가." 왕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전혀 주눅이 들거나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미소까지 띈 채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인간족의 왕이시여." "내 병사들을 돌보아 주어 고맙다, 요정족의 치유술사여. 내 후한 상을 내리겠다. 그리고 그대를 도울 치유술사들을 즉시 보내도록 하겠다..." "말씀을 고맙습니다만, 인간족의 왕이시여, 저를 포상하시는 것은 곧 저를 벌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괜찮으시다면 제게 휴식을 내리십시오. 치유술사들을 보내어 제가 일에서 손을 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것이 제게 가장 큰 포상입니다." "...그대의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요정족의 치유술사여." 왕은 조금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데이미아는 감사의 표시로 가볍게 절을 하고는, 도망치듯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왕을 기다리고 있던 호위병들은 갑자기 웬 요정 소녀가 튕겨지듯 달려나오자,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서 허공을 때리듯이 휘두르며, 아무도 없는 숲 속으로 향했다. '구역질 나. 살인자.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마치 세상에서 가장 인자한 사람인 양! 시이드의 유령들이 다 누구 때문에 죽었는데, 누구 때문에 저승에도 가지 못하고 원한에 묶여 있는데. 그런데 부상병 막사에 한 번 들렸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지!' 데이미아는 마음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녀는 요정 언어로 가장 모욕적인 말들을 끊임없이 내뱉었다 - 물론 누가 듣는다 해도, 툴위그 외에는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마구 수풀을 헤치며 정처없이 걷던 데이미아는 아무렇게나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얼굴을 감싸 쥐고 조용히 울음을 터뜨렸다. '저런 놈들까지 도와줘야 한단 말야? 그게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의 삶이란 말이야! 차라리 다 죽여버리고 싶어. 왕과 랜스까지, 다 죽이고 나면, 그러면 전쟁은 끝이 날테고 더이상 아무도 죽지 않을텐데.' 만약 그녀가 그냥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아니, 단지 혈통과 교육에 의해 라스헨 에이니드의 이름을 물려받았더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어머니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퀘라 라스헨 에이니드(라스헨 에이니드가 되어라)'였다. 그녀의 오빠인 제이룬도 라스헨 에이니드를, 엘미어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죽었다. 그들이 없었다면 그녀는 오래 전, 이 진절머리 나는 인간이란 살인마들을 버리고 떠났을 것이다. 숲으로, 깊은 숲으로... 한없이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엘미어를 찾게 되겠지. 그녀의 생명은, 살해당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히 지속 되니까. 아니 찾지 않으면 또 어떤가? 어차피 엘미어는 그녀가 아니면 쓸 수 없는데...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누이들의 죽음과 실종, 오빠인 제이룬의 죽음... 그것은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는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무를 다해야 했다. 모든 생명의 고향인 숲의 마법사, 모든 생명을 돌보는 치유술사. 그녀는 인간조차도, 요정과 비슷한 외모 속에 오르크와 맞먹는 심장을 감추기 십상인, 이 괴물들조차도 버려서는 안 되었다. 라스헨 에이니드니까.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어차피 난 라스헨 에이니드가 아냐! 이렇게 남아 그들을 보살핀다고는 하지만 내 마음은 벌써 그들을 떠났어. 아니, 떠난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있어. 툴위그 말이 맞아. 나는 더이상 그들을 치료해 주고 싶지 않아. 아무도 치료해 주고 싶지 않아, 치료하면 또 죽이기나 할 걸! 난 이미 그들을 혐오하고 있는데, 얼굴로만 웃는다고, 입으로만 치유의 주문을 외운다고 라스헨 에이니드가 되는 건 아니잖아! 차라리 제이룬 오빠한테나 엘미어를 넘겨 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데이미아는 이제 아예 목놓아 엉엉 울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 자신은 엘미어의 주인도 라스헨 에이니드도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실망과 증오로 꽉 차 사랑이나 자비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책하는군요, 요정 아가씨." 숲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비로소 울음을 그쳤다. 그녀는 눈물을 닦으며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미 해가 완전히 진 숲속은 너무나 어두워서, 요정인 그녀로서도 도저히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울음이 완전히 그치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시죠?"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웃었다. 데이미아는 긴장했다. 인간의 음성을 교묘히 가장하고는 있었지만, 요정의 날카로운 귀는 속일 수 없었다. (계속) --------------------------------------------------------------------- * 웬 바람이 불어 하루에 한 편씩 올렸더니... 역시 힘들군요^^; young25 이영수님 <사자의 서> 열심히 쓰세요. 정말 재밌습니다. 특히 여주인공(이시스 말고 여대생)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여호와의 증인이라니... 쿡! "당신은 누구죠. 또 왜 인간 행세를 하죠?" 데이미아는 좀더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는 다시 웃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서는 인간의 목소리를 내야 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지금 반응을 보니 실패한 것 같네요." "인간의 목소리를 내서 내 호감을 살 거라는 상상은 집어치워요. 차라리 오르크의 목소리를 내는 게 나을 걸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어린 라스헨 에이니드여." 목소리는 이제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인간이라면 그 변화를 거의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 목소리에 드러나는 기묘한 울림을 들을 수 있었다. 정령과 요정의 중간쯤 되는...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낯선 종족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내 종족과 친척이군." 하고 데이미아가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다니, 고맙군요." "하지만 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는 믿지 않아." 다시 웃음소리. 암흑 뿐이던 검은 숲 속에서, 작은 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반딧불처럼 작은 불빛이었으나, 차차 자라나 촛불 정도의 크기로, 그리고 이윽고 커다란 램프에서 빛나는 불처럼 크고 환한 빛이 되었 다. 그 불빛을 한 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사람은, 검은 머리칼을 어깨까지 기르고, 에누인을 모시는 자들이 입는 짙은 남색 사제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아니, 청년의 모습이었다 - 데이미아는 그가 그의 겉모습처럼 젊지 않다고 확신했다. 그의 보라빛 눈에서 그녀는 까마득한 세월을 읽었다. 그녀로서는 비교도 될 수 없을 만큼,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인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 보다도 훨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태고로부터의 세월을. '분명 요정의 기운(氣運)은 아냐. 그것보다 좀더 자유롭고 불안정한 기운... 정령인가? 하지만 정령치고는 너무 뚜렷한데.' 데이미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데이미아에게 한 발 다가왔다. "제 정체가 궁금하신 게로군요." "당신과 같은 기운을 가진 종족은 본 일이 없어." "당연합니다. 저는 제 종족 중 마지막 남은 자니까요. 수수께끼를 드리지요, 어린 라스헨 에이니드... 지금은 멸망당했다고 여겨지는 종족, 타냐헨 에아(태초의 전쟁)에서 사라졌다는 종족. 요정이기도 하고 정령이기도 하고, 둘 다 아니기도 한 종족. 그리고 엄청난 마력을 가진 종족... 맞춰 보시겠습니까?" 청년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 자체가 그리 못나지 않은 데다가, 거리낌없이 얼굴 천제로 웃는 듯한 표정이라서, 누구의 호감이라도 살 만한 웃음이었다. '멸망당한... 요정과 정령의 중간쯤 되는... 강한 마력을 가진 종족...' 잠시 생각하던 데이미아는 의심쩍은 표정으로 청년을 올려다보았다. "설마 당신이 (어둠의 정령)이라고 주장하는 건가?" "잘 맞추셨습니다! 저는 필리우스, 마지막 어둠의 정령입니다." 청년은 또다시 미소지으며, 정중한 인사를 했다. 너무 정중해서 좀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인사였다. 데이미아는 여전히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어듬의 정령은 멸종당했다고 들었는데. 이런 곳에서 뭘 하는 거지? 게다가 왜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차가우시네요. 저는 요정들과는 사촌지간이나 다름없는 존재인데..." "있어서 하등 도움될 게 없는 사촌이지. 너희들은 타냐현 네아에서 어둠의 힘을 편들었고, 사촌이라는 요정들과 정령들을 등졌어. 마치 다크 엘프들처럼. 너희들이 나타나면 그것은 남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기 위해서지." "천만에요! 정말 억울합니다. 저는 당신을 도우려고 왔는데요." "돕는다고 하면서 항상 말도 안 되는 댓가를 요구하잖아. 나는 다크 스피릿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 저리 가, 가뜩이나 기분도 나쁜데. 지금 내 성질 긁으면 무슨 일이 날 지 몰라." 그러나 필리우스는 한 발짝도 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연인의 목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당신의 기분이왜 나쁜지 맞춰 볼까요, 라스헨 에이니드? 그것은 그들이 당신의 도움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들을 차유함으로써, 적국 아트웰의 병사들을 당신 손으로 살해하고 있다는 것을 당신이 잘 알기 때문이지요." "닥쳐." "왜 그런 일을 계속합니까, 라스헨 에이니드? 더이상 주문을 외지 마세요.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치료가 아니라 살생입니다. 그대로 죽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러면 그보다 더 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습니다. 왜 가치없는 자들때문에 당신의 마력을 낭비합니까?" "가버려!" 데이미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 작자는 마음을 읽는 건가. 어둠의 정령이 마음을 읽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지만... "로센 라스(요정의 숲)으로 돌아가시죠, 라스헨 에이니드여." 필리우스는 오르크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만큼 깊고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라도 그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인간들은 도울 가치가 없습니다.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은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무도 뭣도 아닙니다. 당신이 그것을 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네가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무에 대해 뭘 알지, 어둠의 종족 주제에!" 데이미아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소리쳤다. 필리우스는 그런 그녀의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너무나 선량 하고 이해에 가득 차 보였다. 그의 표정은 마치 그녀의 아픔을 자신의 가슴 으로도 모두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듯 했다. 데이미아는 로센 라스를 떠나온 이후로 그런 표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물론 로이, 켈리, 그리고 툴위그는 그녀에게 잘 해 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요정인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지 완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라스헨 에이니드, 내 말을 믿으세요.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어둠의 힘을 빌어야 했습니다... 인간들이 내 종족의 마력을 질투하고 그들의 숲을 탐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떤 종족인지는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리스헨 에이니드! 이것을 보십시오!" 필리우스는 로브의 앞부분을 풀어헤쳐 가슴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들린 마법의 등불이 그의 가슴의 흉한 화상 자국을 차갑게 비추어 냈다. 왼쪽 목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 퍼진, 끔찍하게 문드러진 흉터를. 데이미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필리우스는 호소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저를 믿으십시오. 저는 살기 위해 어둠의 힘에 의존했지만, 그 이전에는 당신의 종족과 가까운 종족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나를 어둠의 힘에 의존하도록 몰고 간 겁니다. 어서 그들을 떠나지 않으면, 당신에게도 그럴지 모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 저주받은 종족을 떠나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 "데이미아! 데이미아! 어딨니!" 로이는 막사 주위를 돌며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에 들린 횃불을 보고, 커다란 불나방들이 몸을 던져 왔다. 펠히스는 그런 로이의 곁에서, 내키지 않는 듯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데이미아! 대답해!" 그러나 숲 속은 어두운 만큼이나 고요했다.몇 번 데이미아의 이름을 더 외친 로이는, 마침내 포기하고 나무 그루터기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리고는 그의 말을 알아들을지 못 알아들을지도 모르는 펠히스를 향해 분통을 터뜨렸다. "데이미아가 아무래도 너무한 거 아냐, 이건? 누군 이 전쟁에 끼고 싶어서 끼었냔 말야! 나까지 고생시킬 필요는 없잖아. 에이 씨, 그냥 쥐인 채로 놔두는 건데 그랬어! 적어도 그 땐 얘기가 통했었는데, 지금은 괜히 어려운 얘기나 해 대고..." 로이는 그외에도 몇 마디를 더 투덜거렸지만, 펠히스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꼬리를 늘어뜰이고 로이의 무릎 위에 머리를 얹은 채 반쯤 눈을 감고 있었다. 로이는 그의 머리를 긁어 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에 요즘의 데이미아는 이해할 수가 없으니... 갑자기 펠히스가 머리를 번쩍 들었다. 그는 펄쩍 뛰어오르더니 금방 이라도 달려나갈 듯한 자세로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로이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서며 더듬거렸다. "왜... 왜그래, 펠히스?" 펠히스가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냥 어둠 속을 바라 보며 으르렁거리고만 있었다. 로이는 떨리는 손으로, 허리에 찬 칼을 잡아 뽑았다. 그러나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펠히스가 적을 볼 수 있을지는 몰라도, 로이의 눈앞에는 다만 암흑 뿐이었기 때문이다. 펠히스가 이윽고 날카로운 소리로 짖으며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로이도 그를 따라 뒤로 물러났다. 로이의 손에 들린 횃불의 빛으로, 그의 앞에 선 숲 속의 그림자가 가물가물하게 드러났다. 형체는 잘 알 수 없었으나,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는 모양으로 보아 적어도 서너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부스럭거리는 낙엽을 떨어뜨리면서, 그것들은 형체를 나타냈다.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것들은 쥐였다. 그러나 보통 쥐가 아니라, 적어도 몸 길이기 로이의 두 배는 될 듯한, 거대한 괴물 쥐였다. 로이의 주먹만한 눈은 새빨간 핏빛으로 번뜩이고 있었고, 웬만한 단도의 날보다도 더 큰 앞니가 드러난 거대한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아마 로이와 펠히스가 맛있는 치즈 정도로 보였던 모양이다. 펠히스는 짖는 것을 멈추고 이제 낮게 그르렁거리고만 있었다. 온 몸의 근육이 긴장되어, 당장이라도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로이의 손은 어찌나 부들부들 떨리던지, 칼과 횃불을 놓치지 않은 것만도 큰 다행이었다.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로이는, 괴물 쥐들이 그의 앞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비로소 소리쳤다. "도망치자, 펠히스!" 이번만큼은 펠히스가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것이 확실했다. 소년과 늑대는 있는 힘을 다해 쥐들의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그러나 괴물 쥐들은 로이의 생각보다 빨랐다. 그들은 금방 로이와 펠히스의 바로 뒤로 쫓아왔다. 그리고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오르더니,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으아악!" 로이는 당황하여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 무심코 반대편으로 방향을 바꾸려 했다. 그러나 그 쪽에는, 또 다른 괴물 쥐 두 마리가 달려오고 있었다. 로이는 얼른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려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도망 치려 하자,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괴물 쥐는 그 커다란 이로 그의 망토를 꽉 물었다. "으아아아아아! 사람살려!" 로이는 엉겁결에, 들고 있던 횃불로 쥐의 얼굴을 밀었다. 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횃불에 코를 댄 쥐가, 분노와 고통이 가득한 비명을 지르며 로이의 망토를 놓았던 것이다. "크와아아아아아악!" '이때다!' 로이는 다시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나, 이제 로이는 지체없이 횃불을 휘둘렀다. 횃불은 그 쥐의 뻣뻣한 회색 털로 옮겨 붙었고, 쥐는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날뛰었다. 로이 따위의 존재는 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로이는 잠시, 너무 겁이 난 나머지 꼼짝도 못 하고 그 쥐의 날뛰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엄청나게 큰, 탁한 비명이 들려왔다. "캬아아아악!" 그 소리가 어찌나 가까이서 들리던지, 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어올라 넘어져 버렸다. 그의 눈 앞에 펠히스가, 자신의 몸집의 두 배는 되는 괴물 쥐의 목덜미를 물고 늘어진 모습이 보였다. 로이가 잠시 얼이 빠진 틈을 타, 로이의 공격 때문에 코를 데었던 쥐가 그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펠히스가 문 상처 사이로, 검붉고 찐득찐득한 피가 흘러나왔다. 괴물 쥐는 있는 힘을 다해 몸부림을 치며 괴성을 질러 댔다. 펠히스는 제법 오래 버텼으나, 이윽고 괴물 쥐의 몸부림에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펠히슨의 몸은 부드러운 낙엽 위로 풀썩 떨어졌다. 덕분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괴물 쥐에게 반격을 시도할 시간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쥐는 분노로 눈을 번뜩이며 펠히스에게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펠히스는 옆으로 몸을 굴렸고, 쥐의 거대한 이빨은 허공과 낙엽들만을 물어뜯었다. 더욱 화가 난 쥐는 괴성을 질러 대며, 다시 입을 크게 벌리고 펠히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로이가 그 쥐의 크게 벌린 입에 길고 굵은 나뭇가지를 꽂아 넣어 고정시켜 버렸다. 이제 그 쥐는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쩍 벌린 채 어쩔 줄을 모르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 틈이야, 어서 도망치자, 어서!" (계속) 로이와 펠히스는 또다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달렸다. 그러나 채 멀리 가기도 전에, 마지막 괴물 쥐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로이는 다시 횃불을 휘둘러 그것을 위협하려 했다. 그런데 마침 로이를 물려고 입을 크게 벌린 괴물 쥐가, 그 횃불을 덥썩 물어 버렸다. "캬아아아악!" 괴물 쥐는 금방 입을 벌리고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횃불은 가느다란 연기만을 내며, 그것의 침에 뒤덮여 꺼진 후였다. 쥐는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을 지르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로이와 펠히스는 이 틈을 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묵직한 바위 같은 것에 로이의 등이 무딪쳤다. "크와아아악!" "으아아아아!" 로이와 로이에게 부딪친 그 물체는 거의 동시에, 비슷한 크기로 소리를 질렀다. 로이의 등에 맞닿은 것은 바로 로이가 입 안에 나무 기둥을 꽂아 놓아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든, 그 쥐의 몸통이었던 것이다. 입을 다물지 못해서 침이 질질 흘러, 가뜩이나 보기 싫은 그 괴물의 얼굴은 아주 가관이 었다. "저리 가아아아아!" 로이는 괴성인지 외침인지 모를 소리를 지르며, 코앞에 들이닥친 그 쥐의 얼굴을 손과 발로 마구 밀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괴물의 불에 데인 코를 발로 꽝 차 버렸으므로, 괴물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로이의 그 행동은 괴물 쥐를 매우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은 마구 고개를 휘저으며, 입천정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입을 다물려 했다. 결국 얼굴이 침과 피로 범벅이 된 후에, 그 괴물의 입을 지탱하 던 나뭇가지는 우지끈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로이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어... 어떡하지... 이제 횃불도 없는데..." 도망갈 길은 없어 보였다. 몸에 불이 붙었던 쥐는 죽었는지 도망 쳤는지 보이지 않았지만, 로이 때문에 코와 입천정을 다친 쥐와, 횃불을 물었다가 입이 데인 쥐는 슬금슬금 로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았으나, 도저히 칼싸움으로 이 괴물들을 이길 자신은 없었다. 괴물 쥐들은 로이에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오자, 번쩍거리는 거대한 이를 드러내며 그를 향해 펄쩍 뛰어올랐다. "에라... 모르겠다!" 로이는 한 쥐를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그 쥐는 앞발로 가볍게 그 칼을 쳐내 버렸다. 로이는 칼을 놓치면서, 거의 본능절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덕분에 쥐에게 깔려 죽는 것은 면할 수 있었으나, 그의 칼은 영영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 어둠 속에서 뭘 찾는다는 것 자체는 불가능할 테니... "펠히스, 넌 막사 쪽으로 가서 랜스나 툴위그에게 알려!" 로이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막사 반대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쥐들이 그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펠히스는 로이의 말대로 막사로 가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 마리의 괴물 쥐들은 모두 로이를 쫓아오고 있었다. "크와아아아!"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로이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로이는 간신히 발을 멈추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가 몸을 일으키자 마자, 뒤따라오던 다른 쥐가 앞발을 휘둘렀다. 로이는 몸을 뒤로 젖혀 그것을 피했으나, 균형을 잡지 못하고 뒤에 있던 경사면(傾斜面)으로 굴러 떨어져 버렸다. "으아아악!" 로이는 구르고 굴러 계곡에 흐르던 깊지 않은 물에 풍덩! 빠져 버렸다. 물은 차고 바닥이 온통 자갈이라, 부딪친 부분이 몹시 아팠다. 그러나 쥐들이 바짝 쫓아 내려오는 것이 보였으므로, 아프다고 그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로이는 허우적거리며 계곡물의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키가 큰 나무의 가지로 뛰어올랐다. 대롱대롱 매달린 로이의 발 아래로, 괴물 쥐 두 마리가 달려왔다. 그 중 앞서 달리던 한 마리가, 로이의 발을 향해 입을 벌리며 달려들었다.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흔들어, 발까지도 그 나뭇가지에 걸쳤다. 딸각! 하고 이빨이 허공을 무는 소리가, 소름끼치게 가까이에서 들려 왔다. 로이의 발을 무는 데 실패한 쥐는 화가 나서, 이번에는 길게 늘어진 그의 망토를 덥썩 물었다. "켁...!" 로이는 망토가 목에 걸려 거의 질식할 지경이었다. 몸 전체가 굉장한 힘으로 아래로 끌어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그가 매달린 나뭇가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굵은 나뭇가지조차, 괴물 쥐의 힘을 못 이기고 휘어지며 부러질 것 같은 소리를 냈다. 망토를 고정한 브러치가 로이의 턱 아래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그는 나뭇가지를 여전히 양 팔과 양 다리로 꼭 안은 채, 입으로 브러치를 열려고 해 보았다. 그러나 쉬울 리 없었다. 열리기는 커녕, 브러치에 입을 가져가기 조차 힘들었다. 신경질이 난 로이는 브러치를 덥썩 물어 마구 잡아당겼다. 그러자 브러치의 핀이 부러져, 그의 목에 상처를 내며 튕겨져 나갔다. 망토는 그것을 물어 잡아당기던 쥐의 머리 위로 떨여졌다. 로이가 매달려 있던 나뭇가지는 갑자기 아래로 당기던 힘이 사라져, 강풍(强風)이라도 만난 듯 흔들흔들거렸다. 로이는 어지러움을 참고 간신히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두 마리의 쥐는 떨어진 망토가 로이라고 생각했는지, 있는 힘을 다해 잡아 찢고 있었다. 로이는 이 틈을 타, 더 높은 가지 위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구하러 올 때 까지만 여기서 기다리면 되겠지. 아니, 어쩌면 그 전에 저 쥐들이 갈지도 모르고... 그러나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나무가 크게 흔들렸다. 방심하고 있던 로이는 하마트면 떨어질 뻔 했다. 로이는 다시 나무에 몸을 밀착시키고,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드디어 자신들이 가진 것은 로이가 아닌 그의 망토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쥐들이, 마구 나무에 박치기를 해 대고 있었다. 로이는 다른 도리가 없어서 나무를 얼싸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나무가 흔들 리는 모양으로 보아서, 오래 버티지 못하리라는 것은 뻔했다. '크... 큰일났네...' 드디어 입을 덴 쥐의 박치기에 의해, 나무는 밑둥부터 우지끈 부러져 버렸다. "으와아아아!" 로이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는 나무에 몸을 꼭 밀착시켰다. 마침 로이의 몸은 나무가 쓰러지면 정통으로 깔려 버릴 위치에 있었으나, 그런 것은 로이의 머리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도, 가지가 워낙 굴고 많은 나무였으므로, 로이의 등이 당에서 한 뼘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나무는 멈추었다. 로이는 땅으로 내려오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살았...!" 그러나 로이의 안심은 곧 공포로 바뀌어 버렸다. 로이가 고개를 들자마자, 흉측하고 거대한 쥐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코에 코를 맞대로 서로를 쳐다보는 꼴이었다. "으아아아!" 로이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 쥐는 거대한 입을 쩍 벌리며 로이에게 다가왔다. 어찌나 입이 크던지, 로이의 눈에는 그 입과 잇몸에 박힌 큰 이빨밖에는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로이의 코앞에 그 입이 다다른 순간, 갑자기 그 입은 콱 다물어져 버렸다. 그 쥐는 빨갛고 흉물스런 눈으로, 영문을 모른 채 공포에 질린 로이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꽉 다문 입을 조금 열어, 주르륵 시뻘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죽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로이는, 차마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못박힌 듯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보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로이! 괜찮니?" 데이미아의 목소리였다. 로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일어서,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밖으로 나왔다. 한 쪽 손에 횃불처럼 빛나는 마법의 지팡이를 든 데이미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이미아..." "네 목소리를 들었어." 데이미아는 조금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뒤에는 또 한 마리의 쥐가 숯덩이가 된 채 쓰러져 있었다. 로이는 기운 없는 웃음을 터뜨 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맙소사... 죽는 줄 알았어. 와 줘서 정말 고마워!" 데이미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의 비명을 듣기 직전, 그녀는 로이를, 아니 그녀의 일행 전체를 버리고 떠날 생각을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로이에게 할 필요는 없겠지... 어쨌건, 지금 그녀는 이렇게 돌아와 있으니 말이다. '나도 참 바보같지... 그런 어둠의 종족의 말에 혹해서는!' "다치진 않았어?" 데이미아는 일부러 딴 소리를 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던 로이는, 어느 새 기운을 다 찾아 방실방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근데 여긴 참 이상한 동물들도 많구나. 나무 속에 사는 귀신 같은 요정들에 이제는 말보다도 더 큰 쥐라니..." "...로이, 너 설마 이게 원래 이 숲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데이미아가 기가 막혀서 묻자, 로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닌가?" "당연하지. 저걸 봐!" 데이미아는 아까 자신이 죽인 두 마리의 괴물 쥐가 있던 곳을 가리켰다. 로이는 놀라서 입을 딱 벌렸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놀라움 가득한 로이의 얼굴은 금새 공포로 질렸다. "큰일났다! 안 죽었나봐! 어떡하지! 어떡하지! 어서 도망치자!" "로이... 진정하고 내 말좀 들어. 확실히 놈들은 죽었으니까..." 데이미아는 토끼처럼 튀어올라 도망치려는 로이를 붙잡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로이는 그제서야 조금 진정하며 데이미아를 쳐다보았다. "그럼... 어떻게 된 거야? 데이미아, 설마 네가 보기 싫어서 치웠어?" "그게 말이 돼? 아무것도 없어진 건 없어. 이리 와 봐!" 데이미아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기는 로이를 잡아 끌고, 까맣게 타죽은 괴물 쥐의 시체가 있던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빛을 발하는 마법 지팡이를 땅에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이걸 봐!" 데이미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곳에는 보통 크기의 집쥐가, 털이 까맣게 탄 채 죽어 있었다.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래, 이게 바로 그 괴물 쥐야! 누군가 평범한 쥐를 마법으로 크고 난폭하게 만들어 놓은 거야. 흑마술이지. 이렇게 이미 있는 동물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 건, 새로운 동물을 만들어 내거나 소환하는 것보다 쉬워..." "맙소사!" 로이가 다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데이미 아는 놀라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또 왜그래?" "이런 괴물 쥐를 누가 만들었다면... 그리고 이리로 보냈다면, 설마 나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보냈진 않았을 거 아냐!" "...그거야 그렇겠지." "그럼 왜 보냈을 거 같아, 데이미아? 진지(陣地)라고. 툴위그와 랜스와 왕... 모두 있는 곳 말야! 그리로 괴물을 보냈을 거라고!" 그 말에 데이미아의 얼굴도 파랗게 질렸다. "네 말이 맞아, 로이... 어서 가 보자!" 로이와 데이미아는, 그들의 진지(陣地)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뒷모습을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눈이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마지막 다크 스피릿, 필리우스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으리라고는... "열심히 싸우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하고 그는, 사심없어 보이는 미소를 얼굴 가득 지으며 중얼거렸다. "열심히 싸우세요. 하지만 당신은 인간들을 싫어하고, 영원히 그들을 위해 싸울 수는 없을 겁니다. 당신이 알고, 내가 알지요, 어린 마법사여..." (계속) "데이미아... 저걸 봐!" 공포에 질린 로이의 외침이 데이미아의 귀를 때렸다. 이미 진지(陣 地)는 습격받고 있는 중이었다. 로이가 만난 것과 똑같이 생긴 거대한 쥐 한 마리가, 한 병사의 시체를 물은 채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와 눈이 마주치자, 그것은 물고 있던 고깃조각을 꿀꿀 삼키더니 몸을 일으켰다. 로이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 그럴 필요가 전혀 없기는 했지만. "아일둔!" 데이미아가 소리치며 지팡이를 휘두르자, 파랗게 빛나는 불덩이가 쥐를 향해 날아갔다. 그것은 쥐의 이마에 정통으로 맞았고, 쥐는 피를 토하며 뒤로 밀려나 쓰러졌다. 화가 난 쥐가 몸을 다시 일으켜 덤벼들려 했으나, 데이미아는 전혀 움츠러들지도 않고 다시 주문을 외웠다. "제에데스 아일!" 그러자 쥐의 몸은 온통 불꽃으로 휩싸였다. 쥐는 지옥의 귀신들이나 낼 법한 비명소리와 함께 데이미아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녀가 휘두르는 빛나는 지팡이에 이마를 맞자, 아까보다도 더욱 멀리 떨어져 나갔다. 입을 딱 벌린 채 그 모습을 구경하는 로이에게,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뭐 해, 로이! 어서 랜스와 툴위그, 펠히스를 찾아 봐!" "응, 알았... 나 혼자?" 잔말 없이 가려던 로이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데이미아는 매정하 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난 이 놈이랑 싸워야 되잖아!" 데이미아는 다시 덤벼드는 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쥐는 다시 튕겨져 나가 쓰러졌으나,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로이는 울상을 지었다. "하, 하지만 난 싸우지도 못하고, 무기도 없고..." "켈리한테 검술은 멋으로 배웠니? 무기는 어떻게든 찾아봐!" 데이미아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로이에게는 더이상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괴물 쥐와의 싸움에 정신을 집중했다. 로이는 하는 수 없이 랜스의 막사를 향해 발을 옮겼다. 데이미아의 말이 섭섭하긴 했지만, 맞는 말이었으 니... 진지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병사들은 괴물 쥐들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었고, 그 중 상당수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괴물 쥐들의 모습과 그들이 찢어발긴 시체들의 모습에 질려, 아예 무기를 버리고 도망을 치는 군사도 있었다. 로이는 정신없이 달려가다가, 괴물 쥐 한 마리가 그에게 등을 돌린 채 버티고 있는 것을 보고, 얼른 가까이 있는 막사 뒤로 숨었다. 쥐는 몸을 둥글게 구부리고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뜯어먹고 있었다. 로이에게 신경 쓸 겨를 따위는 없는 것 같았다. 로이는 살금살금 막사를 돌아, 그 쥐의 곁을 지났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니, 그 쥐가 정신없이 포식하고 있는 것은 번쩍 거리는 갑옷을 입은 왕의 호위병의 시체였다. 로이는 구역질이 나는 것을 간신히 참고 걸음을 빨리 하여 그곳을 벗어났다. "랜스? 툴위그?" 로이는 그들의 막사의 휘장을 열어 젖히며 소리쳐 불렀다. 그러나 그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로이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카아아악!" 괴성을 지르며, 로이만큼이나 큰 까마귀가 날아왔던 것이다. 그것은 로이가 피할 새도 없이, 그를 쓰러뜨리고는 커다란 발톱으로 그의 어깨를 움켜 잡았다. 로이는 그 크기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한 쪽 날개만도 랜스의 키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까마귀는 그 큰 날개로 힘차게 날개짓을 하며, 로이를 들고 날아 올랐기 때문이다. 이미 로이의 발은 땅 위에서 2아르(1아르는 약 1/4미터)만큼이나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놔! 이 바보같은 새야!" 로이는 마구 팔과 다를 휘저었다. 마침 그의 손에 깃털 같은 것이 한 웅큼 잡히자,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뽑아 버렸다. "캬아아악!" 새는 비명을 지르며 로이를 떨어뜨리고는 높이 날아올랐다. 로이는 땅 위에 엉덩방아를 찧고는 아파서 온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거대한 까마귀가 다시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는, 벌떡 일어나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막사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촛불 하나 켜지지 않은 어두운 막사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로이는 허둥대며 숨을 곳을 찾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졌다. 넘어지면서 손을 휘젓다가 또 무엇인가를 건드렸으므로, 사방을 깨지는 소리와 부서지는 소리, 떨어지는 소리 등으로 가득해졌다. "캬아아아악!" 까마귀가 울부짖는 소리가 바로 머리 위에서 들렸다. 그리고 막사의 천정 부분이 좍 찢겨져 나가며, 달빛이 막사 안으로 비쳐들었다. 그제서야 로이는 자신이 파엘 경의 막사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로이가 뒤엎은 것은 파엘 경의 침대였다. 그리고 뒤엎어진 침대 밑으로 생명 없는 눈을 부릎뜬 파엘 경의 얼굴이 삐져나와 있었다... "이크!" 로이는 질겁을 해서 뒷걸음질치다가, 물렁물렁한 것을 밟고 넘어질 뻔 했다. 사람의 팔이었다... "으아아악! 사람살려!" 로이는 새파랗게 질려 막사 밖으로 달려나가려 했으나, 막사의 입구 바로 앞에는 거대한 까마귀가 버티고 있었다. "캬아아아악!" 로이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까마귀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를 질렀다. 로이는 다시 뒷걸음질 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까마귀도 그 거대한 발로 성큼성큼 걸어,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새까만 눈이 로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로이의 등은 어느 새 반대편 벽에 닿았다. 까마귀는 성큼성큼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에라, 모르겠다!"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그의 곁에 있던 막사의 기둥을 등으로 밀었 다. 기둥이 흔들거리자, 막사 전체가 흔들거렸다. 까마귀는 로이의 의도를 눈치챈 듯,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면서 그에게로 뛰어들었다. "캬아아아아악!" 로이는 엉겁결에 몸을 숙여 납작 엎드렸다. 달려달던 까마귀는 기둥에 큰 머리를 부딪혔고, 별로 튼튼하지도 않은 기둥은 우지끈 부러져 버렸다. 막사의 천이 로이와 까마귀, 그리고 파엘 경의 시체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구 더듬거리며 무거운 천을 헤쳐나오던 로이에게, 파엘 경의 칼이 잡혔다.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막사를 짖고는, 그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랜스! 툴위그! 펠히스!" 로이는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방향도 없이 달렸다. "어딨어요! 파엘 경이 죽었어요! 랜스! 툴위그!" "크와아악!" 그런 그의 앞을 괴물 쥐 한 마리가 가로막았다. 이미 상당히 부상을 입은 놈이었다. 한 쪽 눈에는 긴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리고,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로이에게는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자... 차... 착하지... 그러니까... 저는 맛도 없다고요...!" 로이는 논리에도 맞지 않는 말들을, 그것도 존대말과 반말을 마구 섞어 해 대면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 쥐는 반말도 존대말도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아무 부담 없이 입맛을 다시며 로이에게 다가섰다. "사... 사람살려!" 로이는 냉큼 뒤를 돌아 마구 달렸다. 쥐도 열심히 쫓아왔으나, 다리를 절고 있었으므로 로이를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로이는 정신없이 달리다가, 가까이에 있는 막사 안으로 뛰어들었다. "으아악!" "으악!" 막사 안에 웅크리고 있던 사람과 로이는 동시에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나마 먼저 정신을 수습하고 상대를 알아본 것은 로이였다. "와... 왕자님?" "너... 넌... 랜스 경의 시종..." "시종 아녜요. 전 로이라고요!"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 싸울 시간이 아니었다. 로이를 따라온 괴물 쥐가, 그들의 막사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으아악!" "사람살려!" 로이와 왕자는 똑같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며, 엉금엉금 뒤로 물러났다. 쥐는 악취가 섞인 거친 숨을 몰아 쉬며, 그들의 막사 안으로 들어 왔다. "사... 살려주세요, 왕자님!" "로이가 왕자의 등 뒤로 숨으며 소리치자, 왕자는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이 더욱 더 새파래져서 소리쳤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에?" "나... 난 싸우는 건 딱 질색이야! 네가 날 살려주면... 그, 그래, 귀족 작위를 줄께! 어떻게 좀 해 봐!" "..." 로이는 황당해서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왕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세상에, 세상에... 이 사람이 아클레어 3세의 아들이라고?' "크와아아악!" 그러는 동안에도 쥐는 다가와서, 그들의 바로 앞에 선 채 괴성을 질렀다. 엘먼 왕자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반 실신한 상태가 되어 털썩 주저앉았다. 로이는 이판사판이라는 기분으로,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쥐에게 던져 댔다. 그릇, 포크, 나이프, 물통, 베개, 이불, 부러진 의자 다리... "가! 가란 말야! 이 괴물아!" 마지막으로 로이의 손에 잡힌 것은 램프였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램프를 던졌고, 그 속에 있던 기름은 바닥과 막사, 쥐의 등에 쏟아지면서 불이 붙었다. 쥐는 뜨거워서 놀라 날뛰었고, 그 덕분에 막사 안은 온통 불바 다가 되었다. 막사를 버티는 기둥에까지 불이 붙어, 활활 타오르는 천정은 로이와 엘먼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자비로운 이조넬, 모든 이의 어머니시여, 부디 저를 버리지 마시옵 고..." 반쯤 정신이 나간 왕자는 기도문을 웅얼웅얼 읊어 댔다. 로이는 그런 그를 마구 흔들어 가며 일으켰다. "어서 나오세요! 불에 타 죽고 싶지 않으면!" 이미 입구는 온통 불바다여서, 도저히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로이는 파엘의 칼을 휘둘러 바로 옆의 천에 구멍을 냈다. 그리고 엘먼을 끌어내다시 피 하며 밖으로 나왔다. "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그들이 나온 출구로 쥐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그제서 야 엘먼 왕자도 정신이 들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로이가 만든 출구는 쥐의 커다란 몸집에 비해 너무 작았다. 쥐는 더이상 나오지 못했다. 쥐가 계속 끌어당기자, 후들거리던 막사는 아예 무너져 내렸고, 그의 등 위로 불타는 천정이 내려앉았다. 쥐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굴렸으나, 오히려 불이 붙은 막사의 천이 더욱 더 몸에 감겼을 뿐이었다. 한동안 귀가 찢어질 듯한 소리를 지르며 요동을 치던 쥐는, 점점 잠잠해져 갔다. 그리고 이윽고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었다. 로이와 엘먼이 보는 앞에서, 움직임을 멈춘 쥐의 몸은 점점 줄어들 었다. 눈에 띌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이윽고 그 머리가 작아지면서 막사 안으로 쑥 들어가 버리더니, 활활 타오르는 막사의 잔재만 남았다. 엘먼 왕자는 머리를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이건 악몽이야... 말도 안 돼..." "어서 도망쳐야 돼요." 로이는 날카롭게 말하며, 왕자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엘먼을 그의 손을 뿌리치며 히스테리컬하게 외쳤다. "도망? 뭐하러? 어차피 다 죽을 텐데!" 그리고는 아예 실성한 듯한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계속) --------------------------------------------------------------------- * "잔인한 래디"에게 어울리는 글이로군요... 난 안돼... --; 사실은 시험기간이라서... 스트레스를 받아 얘기가 잔인하게 흘러가는 건 아닌지...^^; (작가가 시험이면 등장인물들만 불쌍하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뭐... 뭐냐, 이 사람...' 로이는 잠시 어이가 없어서 왕자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병사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 덕택에, 금방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억해 냈다. "이, 이봐요, 왕자님! 지금 그런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요!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로이는 억지로 왕자를 잡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럴 필요도 없었다. 짜증스럽다는 듯 로이를 쳐다 본 왕자의 안색이 갑자기 창백해지더니,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라...?" 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도망치는 왕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의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등 뒤에서 소름끼칠 정도로 크고 가깝게, 군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등골이 오싹해진 로이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린, 거대한 까마귀를 보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사람살려!" 로이는 아무런 생각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들고 있던 칼을 까마귀 에게 휘둘렀다. 까마귀가 칼에 입을 베어 펄쩍 뛰면서 뒤로 물러난 것은, 순전히 그 까마귀가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파엘 경의 칼은 로이가 괴물 까마귀의 밤참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해 주었지만, 동시에 까마귀가 더욱 성이 나게 만들어 버렸다. "까악! 깍!" 까마귀는 괴성을 지르며, 로이를 향해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그러나 이미 로이는 저만큼 앞에서, 엘먼 왕자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도망가는 중이었다. "와, 왕자님! 같이 가요!" "따라오면 어떡해! 흩어져야 안 잡히지!" "왕자님이 제가 가려는 길로 가시니까 그렇죠!" 까마귀는 커다란 날개로 펄럭펄럭 바람을 일으키며 두 사람의 뒤를 쫓아 날아왔다. 당연히 발로 달리는 두 사람은 날아오는 까마귀에게 금방 따라잡혔다. 까마귀는 둘의 머리를 넘어, 그들의 앞에 버티고 내려앉았다. "까아악!" "으아아아!" 엘먼과 로이는 동시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쳤다. 그러다가 엘먼은 천막을 친 줄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까마귀는 이 때가 기회라는 듯이 입을 쫙 벌린 채 그에게 달려들었다. 엘먼은 허리에 찬 칼을 처음으로 뽑아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죽어라! 괴물!" 갑작스런 공격에 놀랐는지, 까마귀는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에 용기를 얻은 엘먼은 벌떡 일어서서, 검술 선생에게 교육 받은 그대로 칼을 힘껏 내리쳤다. "캬아아앗!" 검은 원호를 그러며 까마귀의 얼굴을 가로질렀다. 그 망막이 찢어지 면서 왕자는 그 피를 뒤집어썼고, 까마귀는 괴성을 지르며 풀썩 쓰러졌다. 놀라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로이는 한참 후에야 환호성을 질렀다. "와! 멋져요, 왕자님! 왜 진작 그렇게 안 하셨어요?" 그러나 왕자는 얼굴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되어, 얼굴을 잔뜩 찌푸리 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로이가 걱정스럽게 다가가자, 엘먼은 그를 신경질적으로 밀쳐 내며 몸을 숙였다. "오... 오지 마. 나... 난 피는 딱 질색이란 말야... 우웩..." 로이는 황당해져서 입을 딱 벌린 채, 저녁식사 때 먹은 것을 다 토해내는 왕자를 쳐다보았다. 물론 괴물 까마귀의 피를 다 뒤집어 쓴 왕자의 꼴이 좀 구역질나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와... 왕자님..." "으... 듣기 싫어... 나 정말 지금 기분이 장난이 아니라고... 웩!" "하, 하지만요... 저 까마귀가 움직이는 것 같아요..." "설마!" 왕자는 깜짝 놀라 입을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로이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보기에도, 분명 까마귀의 거대한 몸은 눈에 띄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로이는 새파랗게 질린 그를 까마귀 앞으로 밀어 냈다. "어서요, 왕자님! 깨어나기 전에 완전히 죽이세요!" "시... 싫어... 눈 찢어진 것 좀 봐. 난 가까이 가기도 싫단 말야! 네가 죽이면 되잖아..." "하지만 그런 건 왕자님이 하셔야죠!" "그, 그런 억지가 어딨어. 네가 대신 죽이면 내가 나중에 큰 상을 내를 테니까..." 그러나 두 사람이 이런 실랑이를 하고 있는 사이, 까마귀는 하나만 남은 눈을 번쩍 뜨며 머리를 들어 둘을 노려보았다. 둘은 새파랗게 질려, 마치 미리 계획이라도 해 놓은 것처럼, 일제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살려!" 라고 외치면서. 까마귀는 몸을 일으켜 날개짓을 하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부상을 당한, 그것도 한 쪽 눈을 잃은 까마귀의 속도는 아까처럼 빠르지 못했다. 그것을 눈치챈 로이가 소리쳤다. "왕자님! 숲이요! 숲으로 가세요!" 왕자는 아무 이의 없이 고분고분하게, 로이가 말한 대로 숲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닌 게 아니라, 로이의 생각은 옳았다. 숲의 나무들이 그들의 모습을 숨겨 주었고, 한 쪽 눈을 잃은 까마귀는 자꾸 나뭇가지에 걸리고 부딪쳐서 점점 속도가 줄어 갔다. 문제가 있다면, 횃불을 가져오지 않았으므로 로이와 왕자조차 앞을 잘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히익!" 엘먼 왕자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로이의 곁에서 없어졌다. "와... 왕자님?" 깜짝 놀란 로이가 소리쳤으나, 그의 외침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이도 왕자와 똑같은 운명을 겪었다. 바로 그들의 앞에 있던 경사진 비탈을 데굴데굴 굴러내려, 차가운 냇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만 것이다. 까마귀는 그들을 보지 못한 채, 냇물의 위를 날아 사라져 갔다. 그것의 날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난 다음에야, 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곁에서 왕자가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으으으... 산은 정말이지 딱 질색이야... 얼어 죽겠네..." 그가 덜덜 떠는 소리까지 들릴 지경이었다. 로이는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킥 웃었다. '왕자라고 해서 겁먹었는데... 상당히 인간적이네. 지나칠 정도야...' 그러나 왕자는 그의 웃음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뭘 비웃는 거지?" "예? 아, 아무것도요..." 로이는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했다. 그러나 왕자는 화가 난 얼굴로 로이를 노려보았다 - 어둠 속에서도 그의 분노가 보이는 것 같았다. "흥, 거짓말 마. 너도 내가 겁쟁이라고 생각하는 거지." 엘먼은 내뱉듯이 말하고는, 추위도 잊은 듯 철벅철벅 물을 가르며 시낵사로 걸어갔다. 로이는 잠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서 있었으나, 곧 황급히 왕자의 뒤를 따랐다. 이해는 안 되지만 어쨌건 자신 때문에 무척 화가 난 것 같았으니까. "저, 왕자님! 그런 게 아녜요! 전 단지..." "변명할 필요 없어! 난 겁쟁이 맞으니까. 너도 봤다시피... 으악!" 로이의 앞에서 왕자의 머리는 물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는 놀라는 로이 앞에, 그의 머리는 물 속에서 다시 불쑥 튀어나왔다. "사, 살려줘!" "무슨 일이에요? 괴물이라도...?" 로이는 허리에 임시로 허리에 차 놓은 파엘 경의 칼을 뽑아 들며 외쳤다. 그러나 대답할 시간도 없이, 왕자의 머리는 다시 물 속으로 잠겼다. 로이는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왕자의 머리가 다시 물 밖으로 튀어나왔을 때, 로이는 얼른 그의 팔을 잡으며 물었다. "괴물은 어딨어요?" "그게 아니라... 갑자기 깊어졌단 말야! 난 수영 못해!" "..." 로이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왕자의 팔을 끌어당겼다. "괴물이 없다니 다행이네요... 이리로 오세요." 로이는 엘먼의 몸을 천천히 끌어, 다시 물이 얕은 곳으로 데려왔다. 엘먼은 발이 땅에 닿자 안도의 한숨을 푹 쉬었다. "고... 고마워... 그런데 무슨 물이 이 모양이지! 갑자기 깊어지고!" "...이런 데 물은 다 이래요." "...그래...?" 엘먼은 웅얼거리듯 반문하고는, 갑자기 조용해졌다. 그는 얼이 빠진 듯, 우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로이는 갑자기 어색해 진 분위기 대문에, 좀 허둥대며 왕자의 옷을 잡아 끌었다. "저기... 추운데 얼른 물 밖으로 나가죠? 저 잘 따라오시면 이젠 안 빠질 거에요." 그러나 왕자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대답이 없었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연 그가 한 말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난 정말 엉망이야... 그렇지?" "예...?" "잘 하는 거라곤 없고... 내가 왕세자라는 건 에스테이아 전체의 불운이지..." "누, 누가 그래요?" "다들 그런다는 거 알고 있어." "말도 안돼요!" 로이가 극구부인했으나, 엘먼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 말 들어도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렇게 수근대지 않아도 내가 왕자다운 왕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는데. 내게 형제라도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이런 게 현실이지. 난 하나밖에 없는 아버님의 아들인데, 칼싸움은 커녕 수영조차 못하고 게다가 피를 무서워하는 겁쟁이..." "그,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로이가 갑자기 소리쳤다. 왕자는 그제서야 로이의 존재를 자각한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엉뚱한 소리를 했구나. 지금 말한 건 다 잊어 줘. 어서 물 밖으로 나가자... 추워 죽겠다." "왕자님..." 로이는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엘먼은 거의 애원하듯 그의 말을 막았다. "제발 아무것도 못 들은 걸로 해 줘."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 절박하게 느껴졌으므로,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군말 없이 조심조심 그를 물 밖으로 안내했다. 그들이 덜덜 떨며 뭍으로 올라왔을 때, 막사 족에서 횃불과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전하!" 랜스와 왕의 기사들이었다. 로이는 반가움으로 얼굴이 환해졌으나, 엘먼은 괜히 기가 죽어 로이의 뒤로 물러났다. 마치 그의 뒤에 숨기라도 할 것처럼. "걱정했습니다. 어딜 가셨습니까? 그리고 그 피는..." 랜스가 딱딱한 어조로 왕자에게 물었다. 왕자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어물거리자, 로이는 얼른 나서서 대신 대답했다. "제가 까마귀한테 쫓기고 있었는데, 왕자님이 구해 주셨어요!" 그러나 로이는 금방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랜스를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기사들이 모두,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엘먼 왕자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눈빛 에서, 로이의 말을 믿는 기색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계속) --------------------------------------------------------------------- "아아... 이건 끝도 없네, 정말..." 데이미아는 흐르는 땀을 훔치며 그녀의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쥐들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주위에는 벌써 마법이 풀려 제 크기로 줄어든 쥐들의 시체가 셀 수 없이 널려 있었다. 그러나... "스트라본 녀석은 이런 쓰잘 데 없는 괴물을 얼마나 많이 만들어 낸 거야! 다 죽어라! 아일렌! 갈 하디미르!" 데이미아는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서 황금빛 불꽃이 번쩍이며 곡선을 그렸다. 그 불꽃은 데이미아를 중심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원이 되어, 불규칙한 모습으로 서서히 커져 갔다. 한 괴물 쥐가 괴성을 지르며 데이미아에게 달려들었으나, 곧 그 불길에 부딪쳐 새까맣게 탄 채 풀썩 쓰러졌다. 죽은 괴물 쥐는 금방 쪼그라들어 평범한 쥐의 시체가 되었다. 데이미아의 불길은 점점 거칠고 커져서, 그녀를 공격하지 않는 쥐들의 털까지 태우며 회전했다. 곧 재빨리 도망친 두 마리의 쥐만 제외하고, 다른 모든 쥐들이 까맣게 탄 채 풀썩 쓰러져 쉭쉭 소리를 내며 몸집이 줄어들었다. "하아, 하아..." 데이미아는 숨을 몰아쉬며 지팡이를 든 손에서 힘을 뺐다. 불길은 금방 스러들더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 불길이 없어지자마자, 어둠 속에 서는 다섯 마리의 쥐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이거 미치겠네, 정말..." 데이미아는 지친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지팡이를 다시 잡았다. 털의 일부분이 그을은 쥐가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이를 드러내며 펄쩍 뛰어올랐다. "캬아아!" "제에데스 아이레스!" 데이미아가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에서는 새파란 번개가 치솟아, 쥐의 미간을 가르고 지나갔다. 쥐는 데이미아의 발치에 풀썩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더니, 곧 피를 토하며 축 늘어졌다. "에엑..." 데이미아는 구역질이 나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 기회를 노려, 쥐들은 한꺼번에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이... 이런! 아일룬! 아일!" 데이미아는 서둘러 주문을 외웠다. 붉은 불꽃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그러나 준비 없이 외친 주문의 효력은 크지 못했다. 불꽃들은 쥐들에게 별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쥐들은 그녀의 공격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다. "아일룬 하디미라스!" 데이미아가 있는 힘을 다해 외쳤다. 갑자기 그녀를 중심으로 커다란 불의 구체가 형성되더니, 펑 터졌다. 쥐들은 그 충격에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겨우 두 마리의 쥐가 죽었을 뿐이었다. 나머지 세 마리는 금방 몸을 일으켜, 다시 그녀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어쩌나..." 데이미아는 몸을 숙여 공격할 준비를 하면서도,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하염없이 나오는 쥐들과 싸울 수는 없었으니... "크와아악!" 갑자기 그녀의 등 뒤에서 괴성이 울렸다. 데이미아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커대한 쥐가 그녀를 향해 돌진하는 중이었다. "아차...!" 방어 주문을 외울 새가 없었다. 쥐는 이미 그녀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녀가 부질없이 지팡이를 꼭 잡는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거친 오르크 어 주문이 튀어나왔다. "가르쿠니 자엘!" 데이미아의 볼의 스치며, 거센 바람이 불어닥쳤다. 그녀에게 뛰어든 쥐는 이마에 커다란 구머이 뚫리면서, 멀리 나가떨어졌다. 어리둥절하여 멍하 니 서 있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꽉 잡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제 팔을 잡으세요!" "어둠의 정령...!" 놀라서 더듬거리는 데이미아에게, 그는 그 와중에도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필리우스라니까요." "어쨌든 상관 없어. 어둠의 종족의 도움 따위는 받지 않아!" 데이미아는 팔을 거칠게 뿌리치며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필리우스는 피식 웃으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대책 없는 마법사님이시네요... 그렇게 지쳤으면서 혼자서 싸우시겠다는 건가요?" "흥, 네 말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아... 아일룬!" 데이미아는 더 이상 필리우스는 상관하지도 않고, 가까이 오는 쥐들을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웠다. 둥근 불꽃이 직선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그러나 그 불꽃을 맞은 쥐들은 잠시 뒤로 물러섰을 뿐, 별 상처를 입지 않은 듯 다시 다가왔다. "당신은 지쳤습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내 손을 잡아요!" 필리우스가 다급하게 속삭이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본 체도 않았다. 그녀는 아직 주춤거리는 쥐들을 향해 지팡이를 겨누고 외쳤다. "이키드 아스틸라스!" 파랗게 번쩍이는 가는 섬광이, 그 쥐들을 향해 힘차게 뻗어 나갔다. 그 빛의 결정에 쥐 한 마리가 목이 뚫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즉사했다. 그러나 그 곁에 있던 다른 한 마리는 펄쩍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괴성과 함께 데이미아를 덮쳐 왔다. "크와악!" "플리인..." "르오트 카가루트!" 당황한 데이미아의 주문이 시작되려는 찰나, 갑자기 필리우스가 그녀의 앞을 막아 서며 소리쳤다. 그의 빈 손에 껌붉게 빛나는 커다란 불덩 이가 타오르고 있었다. 쥐가 앞발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 불덩이는 필리우스의 손을 떠나 쥐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캬아아악!" "윽...!" 불공의 쥐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남기며 사라진 동시에, 내리쳐진 쥐의 앞발은 필리우스의 어깨를 베며 지나갔다. 상처를 움켜 쥔 그의 손에서 는 붉은, 그러나 인간의 것보다 조금 투명한 피가 흘러나왔다. 데이미아나 다른 요정들과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피였다. "필리우스..." 데이미아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당황하여 얼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쥐들을 더욱 숫자가 늘어난 채, 그들을 포위하고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 필리우스는 데이미아의 어깨를 잡으며 속삭였다. "더이상은 당신도 저도 무리입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당신을 데리고 도망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좋... 좋아요... 그런데..." 데이미아는 미안한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필리우스는 기회를 잡았다는 듯, 얼른 자신의 남색 망토로 그녀의 몸을 감싸며 주문을 외웠다. "카 가브네 라이그 자마스타..." 그의 주문은 데이미아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고대어도 아니었고, 오르크어도, 인간들의 공용어도 아니었다. 고대어보다 달콤하고, 오르크 어보다 어둡고 거부감이 이는 묘한 악센트를 가진 언어였다. '케멜라히드... 태고의 흑마술의 주문... 이제는 아는 마법사가 없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데이미아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필리우스를 밀쳐내 버리고 있는 힘을 다히 도망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주문은 이미 끝을 맺은 후였다. "크와아아아!" 충분히 가까이 다가온 쥐들이 한꺼번에 두 요정에게로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할퀴며 떨어졌다. 둘이 있던 자리에는 허공 뿐이었다. --------------------------------------------------------------------- "다 왔습니다!" 필리우스는 상처의 고통도 잊은 듯, 망토를 펼치며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데이미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있던 숲 속이 아니었다. 바람은 훨씬 더 차가웠고, 파도 치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주위에는 다 허물어져 내린 건물들의 잔해가 아직도 그 웅장함을 잃지 않은 채 풍화되어 가고 있었고, 어두운 달빛 아래로 검은 물이 사납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에딘(바다)...?" 데이미아는 황당해서 중얼거렸다. 필리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딘 브룬, 바깥 바다죠. 여기는 륀 카하르, 북쪽 평원의 일부랍니다." "하...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먼 데까지...!" "저희 종족의 보이지 않는 발은 바람보다도 멀리 간다고 하지요." 데이미아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런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다크 스피릿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모든 요정족들에게 있어 금기(禁忌)에 속했기 때문이다. 데이미아가 그들에 대해 들은 말이라고는, 20년도 더 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들은 요정이면서도 정령에 가까워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음 에도 불구하고, 어둠의 능력을 얻기 위해 명예를 버렸지. 네레이드 중에서도, 오레아드 중에서도, 그리고 우리 드라이어드 중에서도 다크 엘프가 나왔지만, 종족 전체가 빛을 등지고 다크 엘프의 길을 걸은 것은 그들밖에 없단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잊혀지고, 다크 스피릿이라 불리게 된 것이지. 다행히도 인간들과 난쟁이가 그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죽여 없앴단다. 잔인한 말 같지만,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우리 모두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 거야..."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종족에 대해 자랑하는 필리우스의 얼굴에서 미묘한 자부심을 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미 모두 사라져 버린 그의 종족에 대해 차마 나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필리우스가 어둠의 종족이 된 건 그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잖아... 다크 스피릿은 종족 전체가 어둠의 힘을 얻었다니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자들도 많았을 거야. 게다가 아무리 사악한 종족이었다 해도, 이제 다 죽었는 걸... 하나만 남고. 종족이 다 죽고 자기만 남으면 어떤 기분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라스헨 에이니드?" 필리우스의 물음에 데이미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물거렸다. 어설픈 동정을 보일 권리가 그녀에게 있을까...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필리우스가 자기와 동료들을 떼어놓으려고 술책을 쓰는 악한이라고 생각한 주제에. 데이미아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기서 사악함을 찾을 수는 없었다. "상처에서 피가 나네요." 하고 그녀가 말했다. 죄책감 때문에 낮은 목소리였다. "아, 이거요?" 필리우스는 상처를 흘끗 보고는,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에게 다가가 한 손을 상처 위에 올려놓았다. 상처는 그다지 깊지 않았다. 특별히 주문을 욀 필요도 없었다. 그녀의 손 아래서 벌어진 피부는 금방 깨끗하게 아물어졌다. "영광인데요, 라스헨 에이니드에게 직접 치료를 받다니..." "난 아직 라스헨 에이니드가 아녜요." 데이미아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데이미아라고 불러요... 내가 미속하다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죠... 필리우스." "미숙하다고요? 전 안 그런 것 같지만... 당신이 그 일 때문에 속상 하시다면, 좋은 스승을 한 명 소개해 드릴 수 있지요. 아, 물론, 저같은 흑마 법사 말고 진짜 흑마술에는 손도 안 대는 백마법사로요." 필리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데이미아는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으으...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사람이야!' (계속) --------------------------------------------------------------------- * 컴백을 축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 그리고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도 감사를... 하지만 전에 쓴 것을 몽땅 날려먹는 바람에 왕창연재는 불가능하답니다. 하여간 미친 래디는 별짓을 다 해...^^; Radagast... "다 좋은데, 난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해요." 데이미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의외로 필리우스는 선뜻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다시 데려다 드리죠... 지금쯤이면 괴물 쥐들도 다 갔을테니까." 데이미아는 녹색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어... 당신은, 내 친구들을 싫어하지 않나요? 그러니까..." "난 인간이 상종해서 백해무익한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당신에게 충고한 것 뿐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할 수 없지요. 억지로 잡아놓을 수야 없는 거 아니겠어요?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니까요, 라스... 데이미아님." 그는 혼란스러워하는 데이미아의 얼굴을 보고 빙긋이 웃음지었다. 사심이라고는 없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순간 천 년은 살았을 법한 그의 얼굴은 데이미아 자신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필리우스... 당신의 의도를 모르겠군요, 정말." "당신을 돕고 싶은 것 뿐입니다, 어린 마법사님." "왜요?" "그건 우스운 질문이군요... 같은 요정들끼리 당연히 돕고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요정을 진짜로 이해할 수 있는 건 역시 같은 요정 뿐이죠." 데이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요정을 진짜로 이햐할 수 있는 것은 같은 요정뿐... 그녀는 그 말을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근거가 있을까? 로이가, 툴위그가, 랜스가, 켈리가, 정말로 자신을 이해해 준 적이 있던가... '하지만 필리우스는 날 이해해. 그가 요정족이고, 마법사이기 때문일 까... 그가 아까 숲에서 내게 건넸던 그 말들은, 그래, 정확히 내가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들이었어...' "돌아갈까요, 데이미아님?" 필리우스가 물었다. 잠시 데이미아는, 그가 좀더 강력하게 자신을 설득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다. 아까 그녀를 도망치라고 설득할 때처럼, 좀더 달콤한 말로 꾄다면... 그러나 데이미아는 감정을 감춘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우스는 다시 남색 망토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는 주문을 외기 직전, 마치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이렇게 속삭였다. "혹시 마음이 바뀌거든, 언제라도 날 부르세요, 어린 마법사님. 언제라도 당신의 도움이 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 "스트라본이 우리를 죽이려고 별 짓을 다 하는군요. 아무래도 아트웰 측을 설득한다는 건 무리일 것 같습니다." 툴위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왕은 흘끗 눈을 돌려, 방금 자신을 위험에서 구한 이 난쟁이 용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장정의 네 배는 될 듯한 거대한 몸집이었던 괴물 쥐가, 지금은 보잘 것 없는한 뼘 반 짜리의 평범한 쥐의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툴위그는 난쟁이 치고 키와 몸집이 컸다 - 왕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와 태도는 귀족적이었다. 태초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던 글렌델 가의 후손이라 했지, 아마도... 그러나 오랜 여행이 인간족의 귀공자들 이 쉽게 물들 법한 연약함으로부터 그를 보호해 주었다. 허름한 옷 안으로 불끈불끈 솟은 근육이 내비치는 툴위그는 작은 힘 덩어리처럼 보였다. "스트라본... 아트웰의 두 번째 왕자." 왕은 한숨을 쉬며 이미 죽은 쥐의 자그마한 시체를 칼로 툭 쳤다. "정말 그가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오? 그 한 명의 힘으로 이런 괴물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가능하오...?" 툴위그는 대답이 없었으나, 왕은 그의 표정에서 긍정의 대답을 읽었다. 난쟁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표현 대로, '조상과 후손과 최고의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하지만 스트라본은 고작 어리고 병약한 청년이 아닌가!" "육체의 왕성함이 곧잘 다른 능력의 발휘를 막습니다. 스트라본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들 하더군요." "그대가 보기엔 어떠하오. 스트라본은 정말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마법사인가?" 툴위그는 왕의 초조한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백 년이라면 저희 난쟁이들에게는 인생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시간입니다, 폐하. 그러나 인간의 표현 대로 받아들이자면,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스트라본은 굉장한 마력을 지닌 자인 것 같습니다. 만약 그가 우리 난쟁이 족의 적이었다면, 저는 매우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하나도 안 불안하다는 말이군.' 왕은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랜스 경의 이상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 중 툴위그가 그나마 칭찬할 만 했으나, 난쟁이 귀족 특유의 솔직함은 왕에게 무례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숨긴 채,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트웰의 마법사들은 뛰어나다고들 하지... 그들과 맞붙을 수 있는 것은, 인간 중에서는 로운의 마법사들밖에 없다고 들었소. 하지만 로운도 지금 민란(民亂)으로 어수선한 상태인데다, 도움을 청하기엔 너무 멀지. 그리고 다른 종족은..." "데이미아가 스트라본을 제압한 일이 있습니다." 하고 말한 것은 랜스였다. 놀란 왕의 눈이 그에게로 쏠렸다. 아직 피로 물든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랜스가, 왕에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왕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서둘러 몸을 굽혀 인사를 했다. "갑자기 끼어들어 무례를 범한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폐하. 그러나..." 그러나 이미 무례 따위는 왕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데이미아라면... 그 어린 요정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녀는 어려 보이지만, 훌륭한 마법사입니다. 여마법사 플리에타의 친딸이니까요." 랜스는 자신을 얻어 왕에게로 한 발 더 나아가며 말했다. "플리에타... '숲의 마법사'라 불리는 치유술사 말인가..." 왕은 생각에 잠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데이미아는 너무 어리다. 그러나 요정이란 어차피 수백 살을 먹어도 어린 젊은이처럼 보이는 족속이 아니던가... "폐하, 왕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한 병사가 두려운 듯 왕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왕은 고개를 번쩍 들어 방금 죽음을 면하고 온 아들을 책망 가득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엘먼 왕자는 물에 젖은 옷을 벗고 새 옷과 갑옷으로 말끔하게 차려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보고를 올린 병사보다도 훨씬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 그를 호위하는 기사들 틈에서, 그는 보호를 받는 주군이라기보다는 호송되는 병사같은 느낌을 주었다.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구나, 엘먼." 왕이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역시 새 옷을 입고 왕자 곁에 서 있던 로이는, 왕의 말에 더욱 움츠러드는 왕자의 모습을 안됐다는 듯 바라보았다. 왕은 사정없이 말을 이었다. "괴물들이 진지 안애 들어와 설치는 동안, 너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엘먼. 하나밖에 없는 왕자로서, 그리고 내 아들로서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버님... 저는..." "그 소년을 구했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도 말거라. 어차피 아무도 안 믿는다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가끔가다 네가 정말 내 아들인지 의심조차 드는구나." 랜스는 너무 놀라서 왕을 바라보았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대화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왕이 왕세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제 언제 왕이 수명이 다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공공연하게 부하들 앞에서 내뱉는다면, 찬탈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 그리고 엘먼의 얼굴에 놀라움은 없었다. 왕 역시 태연히 말을 이었다. "잘못했다는 걸 알았거든 근신하고 있거라. 어서 가라. 더 이상 네 꼴을 보고 있고 싶지 않구나." 왕자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뒤를 따라가는 기사는 없었다. 오히려 기사들의 얼굴에는 미묘한 비웃음마저 드러나 있었다. 로이는 자신의 곁에 선 기사가 키득거리는 것을 보고, 그의 앞에 선 기사의 망토를 슬쩍 그의 갑옷의 무릎 덮개에 끼워넣었다. "이제 그만 가 봐도 좋다. 나는 랜스 경과 있겠다." 왕이 말했다. 기사들은 왕에게 인사를 올리고, 해산하기 위해 뒤를 돌았다. 순간 무릎 덮개에 걸린 망토가 확 끌어당겨지면서, 망토의 주인인 기사는 무릎 덮개가 걸린 기사의 몸 위로 쿵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 덮개의 주인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다가, 앞에 가던 기사의 망토를 또 잡아당겼고, 결국 망토가 ㅈ힌 기사 역시 그의 위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왕은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로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서로 뒤엉켜서 일어나지 못하는 세 기사와 색다른 구경거리에서 눈을 뗄 줄을 모르는 다른 기사들 틈을 지나,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 "자! 도착했군요." 필리우스는 망토를 젖히며 말했다. 그들의 앞에는 에스테이아 군의 진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서너 줄기 보이고 있었다.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았다. "쥐들은 다 간 것처럼 보이는군요. 가 보세요, 데이미아님. 그들은 지금 당신이 필요할 겁니다." "...고마워요." 하고 데이미아는 조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리고 미안해요. 난 당신이... 나쁜 사람인 줄 알았어요. 나하고 내 친구들을 떨어뜨리려고 하길래..." 필리우스는 웃었다. "제가 좀 주제넘었죠...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데이미아님. 그리고..." 그는 데이미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자신을 가지세요. 당신은 분명히 라스헨 에이니드의 이름이 부끄럽 지 않은, 훌륭한 마법사가 될테니까요." "난 죽어도 엄마처럼은 못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당신은 정말 그녀와 꼭 닮았어요, 데이미아 님.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와..." 데이미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필리우스는 얼른 시선을 내리깔며 얼굴을 붉혔다. "엄마를 아시는군요, 필리우스!" "그 분은... 그 분은 진정한 치유술사셨지요. 어떤 존재에게도, 설사 그것이 적이라 해도, 동정심을 느낄 수 있는 분이셨으니... 당신은 그 분의 모습을 가졌습니다, 데이미아님.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 분이 생각나더군요. 플리에타님 역시, 적을 죽이는 것조차 마음 아파 눈물 흘리셨던 분이었죠..." 데이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듣고 있었다. 필리우스의 시선은 먼 그녀의 얼굴을 떠나,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방해자가 그의 말을 방해하기 전까지는... "거기 누구냐!" 인간 병사의 목소리였다. 무엇엔가 취한 듯 이야기하던 필리우스는 갑자기 정신이 든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난처한 표정으로 데이미아를 바라보았다. "이런 이야기를 한 건... 당신이 처음입니다, 라스헨 에이니드... 죄송하지만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당신은 라스헨 에이니드가 맞으니까요. 저는 처음 보았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자신을 의심하지 마세요." "필리우스..." 나뭇입을 부스럭거리며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요정의 귀에나 들릴 만큼, 아직은 작은 걸음소리였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가까워 지고 있었다. 필리우스는 말을 더욱 빠르게 하여 속삭였다. "이제 가 봐야 할 시간입니다. 당신이 다크 스피릿 따위와 함께 다난다는 것을 알면, 인간들은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럼, 안녕히..." 데이미아가 뻣뻣이 서 있는 동안, 필리우스는 갑자기 몸을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언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라스헨 에이니드." 데이미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필리우스는 이런 말을 남기고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그가 입을 맞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덮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요정 마법사님?" 그녀를 발견한 병사가 기쁜 듯이 외쳤다. "여기 계셨군요! 이런 데서 뭘 하고 계십니까?" "예...? 아, 그, 그러니까, 괴물들이 더 없나 둘러보고 있었어요..." "어서 저를 따라오십시오! 지금 진지에서는 다들 마법사님을 찾고 있습니다. 부상자들이 너무 많아서..." "아, 예..." 데이미아는 허둥지둥 병사의 뒤를 따라 진지로 향했다. 손등을 여전히 다른 손으로 덮은 채. 왠지 그녀는 발걸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그 분이 생각나더군요. 플리에타님 역시, 적을 죽이는 것조차 마음 아파 눈물 흘리셨던 분이었죠...' '그래, 의심하지 말자. 난 라스헨 에이니드야... 당연하잖아. 엄마의 딸인데!'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빨리 했다. 요정 특유의 빠른 발은 곧 그녀를 안내하던 병사를 앞질렀다. "마, 마법사님?" "어서 오세요. 부상병들이 있다면서요! 빨리 가서 치료해야죠!" 데이미아는 마치 사슴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갔다. (계속) [11969] 제목 : 連용 의 신 전 載--- Part 2 No.40 올린이 : radagast(김예리 ) 97/05/31 11:46 읽음 : 437 관련자료 없음 ------------------------------------------------------------------------------ "카야크 님을 만나게 해 줘. 나는 오르크 족의 쿠푸-헤란 말이다! 알아 듣겠냐, 이 약해 빠진 마법사 놈들아!" 아크트의 목소리가 새벽부터 라우더의 성 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오르크들의 땅에서만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가 황폐해진 라우더 주변의 대지를 축축하게 얼싸안고, 성 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오는 아침 이었다. 오르크들의 하루는 이제 거의 다 지나가고, 그들은 졸리운 눈을 비벼 대며 햇빛 없는 지하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려고 하고 있었다. 단 한 명, 오르크들의 총대장, 쿠푸-헤 아크트를 제외하면. "내가 도대체 얼마나 여기서 기다렸는지 알기나 하냐! 카야크 님을 만나야겠다. 어서 들여보내 줘!" 그는 성의 가장 깊은 지하,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심장부, 카야크의 신전(神殿)을 차린 방 앞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대고 있는 참이었다. 오르크들이라면 당장 움츠러들어 맥을 못 출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의 앞을 막아 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로브로 감싸고, 얼굴조차 검은 두건으로 가린 흑마술사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카야크 님은 지금 다른 분과 만나고 계십니다." 그들은 이상할 겅도로 기계적이고 침착한, 그리고 서로서로 비슷한 목소리로,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 입을 맞추어 말했다. "지금 그 분은 당신을 만나실 수 없습니다." "몇 시간 째 똑같은 소리만 하는거냐, 이 바보같은 놈들아!" 아크트는 분을 참다 못해 길길이 뛰다가, 이제는 아예 칼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그림자처럼 아크트의 곁에 서 있기만 하던 두아스가 그를 말렸다. "쿠푸-헤! 안됩니다!" "비켜!" 아크트는 두아스를 한 발로 퍽 차 버리고 칼을 뽑았다. 몸집이 작은 두아스는 거의 한 바퀴 구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크트는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칼을 뽑아 자신의 앞을 막고 선 두 명의 흑마술사에게 달려들었다. "이 버릇없는 놈들! 죽어랏!" 그러나 그의 칼이 닿은 것은 흑마술사의 몸이 아니라, 다른 딱딱한 칼날이었다. 아크트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그러나 그의 얼굴에서는 곧 놀라움이 가시고, 험악한 증오의 표정이 번졌다. "네 녀석, 하르크자엘...!" "오래간만입니다, 쿠푸-헤 아크트." 제피로스는 빈정거리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아크트와 흑마술사들 사이에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신전의 문 앞에 켜 둔 마법의 촛불 때문에, 그의 붉은 눈이 이상스레 빛났다. 흑마술사들은 방금 아크트의 칼에 베일 뻔 했음에도 불고하고, 미동도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 마치 아무런 두려움도 느끼지 못하는 존재처럼. "버릇없는 것, 네가 뭔데 내 앞에서 방해를 하는거냐!" 아크트는 이를 갈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제피로스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오르크 족의 대장답게, 칼로써 이기지 못할 자에게는 칼로 덤비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피로스는 칼을 내린 채 웃음을 터뜨렸다. "억울합니다, 쿠푸-헤. 저는 방금 당신을 구해드린 겁니다. 카야크 님의 직속 부하인 흑마법사들을 건드렸다가는, 아무리 위대하신 쿠푸-헤라 해도 처벌을 면하기 어려울테니까요." 아크트는 이를 갈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씩씩거리며 생각해 낸 말이 고작 이것이었다. "언제부터 네 상관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말을 하게 된 거냐, 하르 크자엘!" 그러나 그 질문은 묻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 되어 버렸다. 제피로스는 마침 말 잘했다는 듯, 조소를 띄우며 얼른 대답했다. "말이 나왔으니 알려드립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부하가 아닙니다. 위대하신 카야크 님께서 내게 시지리스와 가이니크의 통치권을 되돌려 주셨고, 아울러 드래크로니안과 푸이-하르크를 지휘하는 사령관으로 임명하 셨습니다. 그러니, 쿠푸-헤, 이제 나 역시 당신과 동등한 셈이지요." "말도 안 돼! 비켜라, 당장 카야크 님을 만나야겠으니!" 아크트는 그대로 문을 향해 돌진할 기세였다. 그러나 제피로스의 웃음소리가 그를 불러세웠다 - 갑자기 달라진 그의 말투와 함께.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할 것 같소, 아크트. 카야크 님은 방금 나와의 알현을 끝내시고 취침하셨으니. 다음 기회를 이용하시는 게 어떻소?" 아크트가 너무나 분통이 터지고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동안, 드래크로니안의 수장은 여유있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참 후에야 제정신이 든 아크트는 길길이 뛰고 벽을 마구 쳐서 금이 가게 하는 등 갖은 난동을 부렸다. 흑마술사들은 여전히 미동 없이 제자리에 선 채, 그의 난동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두아스는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났으나, 한 번 더 그의 주군을 말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크트 쪽에서 그를 불렀다. "두아스!" "예... 부르셨습니까, 위대하신 쿠푸-헤!"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좀 뭔가를 죽여야겠어! 포로로 잡은 인간 들을 좀 데려오너라! 지하 3층, 고문실로!" "...예." 하고 두아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아크트의 요구는 이어졌다. "그리고 인간 계집 세 명을 데려 와. 전에 로이히르에서 잡은 어린 것들로!" "...명령에 복종하겠습니다." "빨리 데려와, 이 멍청한 놈! ...하르크자엘 녀석, 두고 보자!" 아크트가 발을 쿵쿵 구르며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두아스의 귀에서 멀어져 갔다. 두아스는 발을 질질 끌며 계단을 올랐다. 아크트의 발에 채인 얼굴이 아직도 얼얼했다. 이미 햇살이 지하 1층까지 비쳐들고 있어, 그를 역겹게 했다. 두아스는 발을 빨리 하여 인간 포로들을 잡아 놓은 감옥으로 향했다. "팔자가 사나우시군, 두아스!" 갑자기 어디선가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두아스는 발을 멈추고 두리번거렸다. 분명 그의 기억에 있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설마...? "피, 필리우스!" 두아스는 으르렁거리듯 소리쳤다. "네, 네가 어떻게...! 너는 분명 봉인당했을텐데!" 그러나 그의 앞에 선 것은 분명 필리우스였다. 호리호리한 체격, 어둠의 정령 특유의 서글서글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날카로운 눈매, 흰 얼굴과 푸른 빛이 도는 흑발, 그리고 누구의 마음이라도 당장 사로잡을 듯한 미소... "맞아, 봉인당했었지. 하지만 풀려났어. 오백 년은 낮잠을 자기엔 좀 긴 시간 아닌가. 그런데 왜 표정이 그렇지? 내가 반갑지 않나, 친구?" "그 재수없는 말투까지 옛날대로군. 나는 네녀석 같은 놈을 친구로 둔 적이 없다, 이 사기꾼! 네 주인은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나온 거지?" "내 주인이 죽었다고, 그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말인데... 내 옛 주인 발타르 님은 돌아가셨지.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다행히도, 새 주인이 생겼어. 보레아스 님이 내 새 주인님이시지." 두아스는 입을 딱 벌렸다. 가뜩이나 흉측한 오르크의 얼굴이 증오와 혐오감으로 더욱 흉해졌다. "이... 수치심도 모르는 놈!" "어라, 요즘 오르크들은 축하 인사를 그렇게 하나, 두아스?" "보레아스가 어떤 놈인데. 바로 글라노우스와 인간족의 라이스터와 함께, 네 주인 발타르 님을 살해한 놈이다! 그런데 그 놈의 수하로 들어와!" "흥분하지 말라고. 꼭 내 주인이 아니라 네 주인이 죽은 것 같군." 필리우스는 누구에게라도 호감을 줄 만한, 맑은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두아스에게 호감을 줄 수는 없었다. "천벌을 받을 녀석. 이제 내 앞에는 나타나지도 마라!" "저런 저런, 옛날보다 성격이 더 나빠졌군, 자네. 하긴, 아크트 같은 바보 밑에서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닥쳐." "정말 안됐지 뭐야, 두아스. 농담이 아니라, 자네 처지를 위해 뭐든 해 주고 싶어. 옛날의 고르탁 프오트는 정말이지 훌륭한 분이었는데 말야. 오르크였지만, 요정인 나조차도 흠모하게 되더라고. 그런데 아크트는..." "시끄러워!" 두아스는 필리우스의 말에 끌려들어가는 자신을 간신히 제지하며 소리쳤다. 필리우스는 마치 어려운 문제를 푼 학생을 바라보는 스승같이,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장하다는 듯한 표정을 띄고는 말했다. "훌륭해, 두아스! 확실히 오백 년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군." "썩 꺼져, 재수없는 다크 스피릿!" "그럴 수는 없어. 보레아스 님을 뵈어야 하거든. 플리에타의 딸을 만났다는 보고를 드려야 하니까 말이야.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네 부하 중 한 명이 그녀가 아직 코흘리개 아이라고 하더니만, 귀엽기만 하던데. 한 5~6 년 기다리면 눈부신 요정 여인이 되겠더군. 너희 오르크들은 정말이지 미(美)에 대해 문외한이란 말이야..." 필리우스는 빙그레 웃었다. "자네는 어서 가 보게. 새 주인님의 심부름을 해야 하잖아? 아까 얼핏 들었는데, 별 이상한 심부름을 다 시키더군... 자네 신세 정말 처량하게 됐어..." 두아스는 몸을 휙 돌려 빠른 걸음으로 필리우스에게서 멀어졌다. 등 뒤에서 그 요정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필리우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두아스의 귀에도, 달콤하게 들릴 만한 소리로 웃었다. --------------------------------------------------------------------- 아트웰의 아침 역시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라우더의 안개와 는 달리, 사방이 구름에 덮인 듯 하얀 안개였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옷과 머리칼이 젖을 만큼 짙은 이 안개는, 아침놀도 삼킨 채 해가 떠오르도록 걷히지 않았다. 그 짙은 안개 속을 헤엄쳐, 말을 탄 여섯 명의 그림자가 드라크노움 분지으 숲을 지나고 있었다. 선두에 달려가는 것은 하얀 로브를 입고 갈색의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희고 깨끗한 피부를 가진 날씬한 소녀였다. 아직 열 예닐곱살이 될까말까한 그녀의 얼굴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였다. 그 뒤를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둘이 따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큰 칼을 찬, 키가 무척이나 큰 금발의 기사였고, 다른 한 명은 호사스러운 망토와 안장을 늘어뜨린 왕의 사자(使者)였다. 그들의 뒤로 세 명의 창을 든 병사들이 그들을 호위하며 따라가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거요? 아트웰 성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라더니!" 왕의 사자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는 왕의 근위대 중에서 선발된, 랜스의 또래쯤 되는 젊은 귀족이었다. 오랜 훈련으로 어느 정도 검사다운 체격을 갖추고 있었으나, 가늘고 긴 얼굴은 무척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그의 말조차 그의 초조함에 전염된 듯,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안개가 끼었기 때문에 안전한 길로 가는 겁니다. 설마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이런 날씨에 늪쪽으로 가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그의 앞에서 흰 말을 몰던 데이미아 - 흰 로브를 입은 소녀 - 는 미소까지 지으며, 침착하게 대꾸했다. 사자는 불만스러운 듯 입을 다물었고, 그들을 계속 데이미아의 안내를 받으며 나아갔다. 랜스는 데이미아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데이미아, 솔직히... 네가 오겠다고 해서 좀 놀랐어." "어쩔 수 없잖아요. 스트라본의 마법으로부터 당신들을 보호할 수 있는 건 나 뿐이니까요. 하지만 난 진짜 위험에 바지기 전에는 아무도 공격 하지 않을 거니까, 너무 기대는 마세요." 데이미아는 딱 부러지게 말했으나, 그러한 그녀의 말투조차 어딘지 밝게 느껴졌다. 랜스는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요정들은 변덕쟁이라더니만, 데이미아의 기분은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단 말이야... 요 며칠 간 어쩔 도리가 없이 침울하더니, 어젯밤부터 웬 바람이 불어서 또 저러는 거지?' 아닌 게 아니라, 데이미아는 낮은 목소리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말을 몰고 있었다. 사자(使者)와 랜스를 호위하는 병사들과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저기 아트웰 성이 보이는군요!" 하고 데이미아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소풍 나온 아이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기뻐하는 듯한 말투로. 왕의 사자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가 가리키 는 쪽을 바라보았으나, 요정인 데이미아와 그의 눈이 같을 리 없었다. 그와 랜스를 비롯하여 인간들의 눈에는, 먼 거리와 짙은 안개 덕분에 성은커녕 성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자신있게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어서 따라오세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녀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야 했다. 몸무게가 가벼운 그녀를 태운 말은, 다른 말보다 훨씬 수월하게 달렸던 것이다. (계속) 과연 얼마 달리니, 그들의 앞에는 아트웰 외성(外城)의 하얀 성벽이 나타났다. 그 성은 안개 속에서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모습을 나타내었으므로, 마치 없던 성이 순식간에 생겨난 것 같이 보였다. 왕의 사자(使者)는 탄성을 내질렀다. 랜스 역시, 그 은회색 성곽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안개 속의 일부인 듯, 그러면서도 바위처럼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는 그 성의 아름다움을. "누구냐!" 성 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랜스 일행이 금방 대답하지 않자, 곧바로 화살이 그들 쪽으로 날아왔다. 안개 속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놀랍도록 정확한 겨냥이었다. 그 화살은 왕의 사자가 들고 있던 에스테이아의 깃발, 황금빛 사자(獅子)가 그려진 깃발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 곁에 있던 나무에 박혔던 것이다. "공격하지 마시오! 우리는 왕의 전갈을 전달하러 왔소!" 하고 랜스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시 침묵이 안개와 함께 그들을 감쌌다. 아트웰 외성 위에서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긴 했으나,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랜스 일행은 갑자기 그들이 공격을 개시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바짝 긴장했다. 단, 데이미아를 제외하고는. 그녀는 인간들 틈에서 20여년을 살았음 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들이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밝혔으니 저쪽도 당연히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신기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트웰 쪽에 요정이나 하프엘프(halfelf)가 있나? 인간이라면 우리가 보이지 않을텐데..." "아니, 오르크도 모자라 요정들까지 끌어들였단 말입니까?" 왕의 사자가 사색이 되어 물었다. 이번에는 데이미아가 어리둥절해 질 차례였다. "오르크라뇨?" "아트웰은 오르크들과 손잡았다고 하던데... 그래서 길리어드는 오르크들 천지라면서요?" "전혀... 물론 스트라본이 오르크들과 거래를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들도 오르크는 싫어하는 것 같던데요... 길리어드에 오르크나 괴물 따위는 없었어요." "그건 듣던 바와 많이 다르군요..." 하고 왕의 사자는 어물거렸다. 그들의 대화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트웰 성벽 쪽에서 다시 외침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성문을 열겠다! 한 사람씩 들어와라!" 육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랜스 일행은 그들이 요구한 대로, 한 명 한 명 차례로 성문을 통과했다. 랜스는 외성 위에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레일라를 볼 수 있었다. 온몸을 검은 갑옷으로 덮은 모습이었으나, 투구를 벗은 그녀의 얼굴은 아름다웠다. 왕의 사자 역시 붉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녹색 눈을 빛내는 아름다운 여기사의 모습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인이로군요... 아트웰에서는 여자들마저 싸우는 겁니까?" 그들의 뒤로 성문이 다시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호위병들을 제외한 랜스, 데이미아, 그리고 왕의 사자는 곧바로 사일러스의 앞으로 안내되었다. 사일러스는 그들을 불필요하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천정이 높은, 장식이라고는 아트웰의 국기(國旗), 왕관을 쓰고 왕홀을 든, 금빛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의 깃발 뿐인 널찍한 알현실에서, 왕과 그의 동생은 호위병들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일러스...' 랜스는 도저히 그가 옛 친구 사일러스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왕관을 쓴 황금빛 독수리가 왕홀을 잡고 있는 모습이 수놓아진 붉은 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끌며 위풍당당한 자세로 왕좌에 앉은 그는 누가 보아도 제왕(帝王)이었다. 아트웰의 왕. 붉은 옷과 붉은 망토, 그리고 금빛의 자수 (刺繡)와 금발이 어우러져, 사일러스는 마치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의 곁, 조금 낮은 의자에는, 금빛 로브를 입고 금발을 늘어뜨린, 아이처럼 순진한 표정의 스트라본 왕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그를 길리어드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천진하고 해쓱해 보였다. 왕의 사자(使者)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그의 눈은 랜스와 랜스의 곁에 선 데이미아에게 붙밖혀 있었다. 이 가냘픈 요정 소녀가 자신에게 치명적인 해를 입혔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의 곁에는 언제 왔는지, 검은 갑옷의 레일라가 버티고 서 있었다. 주인을 지키는 사나운 사냥개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고. "에스테이아 국왕 아클레어 3세가 보낸 사신(使臣)들이 폐하를 뵙고 자 합니다." 랜스 일행을 안내하던 병사는 사일러스를 향해 무릎을 꿇고 이렇게 보고했다. 그가 '에스테이아'라는 말에 무게를 두는 것이 랜스의 마음에 거슬 렸다. 에스테이아 왕은 '국왕 폐하'라고만 불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인간들의 "국왕"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에스테이아의 국왕 뿐이었으므로... 적어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어서 오시오." 사일러스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말했다. 사신을 대하는 왕의 태도 그대로였다. 랜스는 사일러스를 보았을 때, 왕의 호의와 자신의 우정을 저버린 그 배신자를 보았을 때 자신이 이성을 잃을까봐 내심 걱정해 왔었다. 그러나 이렇게 막상 그를 대하고 보니, 이성을 잃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일러스 의 앞에서 그는 아예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는 이제 사일러스가 아주 오래 전부터, 왕이 될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왕좌에 앉은, 사일러스, 그를 왕으로 모시는 스트라본과 기사들, 그들 모두에게는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랜스는 이제 알았다. 사일러스를 '아클레어 3세의 기사'라고 보았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에스텔의 귀족들 뿐이었다는 것을. 이곳 아트웰에서 사일러스는, 이미 오래 전부터 왕이었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랜스의 혀에서 말을 앗아갔음은 물론, 머릿속까지도 깨끗이 비워내 버렸다. 그러나 아클레어 3세의 사자는 이 모든 분위기에 무관심했다.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신의 품에서 왕이 친필 문서를 꺼내어, 사일러스의 앞으로 걸어가 큰 소리로 읽었다. 그에게 사일러스는 원래 자신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아클레어 3세의 기사, 지금은 시원찮은 반란군의 우두머리에 불과 했다. "에스테이아의 국왕, 전 인간족을 다스리시는 주군(主君), 아클레어 시이그람 아레나스 3세께서, 아트웰 반란군의 주모자 사일러스 벨리언에게 보내신 친필입니다. '친애하는 사일러스 벨리언 그대는 지금 우리 인간족 전체가 처한 상황을 모르는가?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을 비롯한 어둠의 종족으로부터 우리 인간족의 터전을 지켜 내기 위해 모두 힘을 합하여도 모자랄 이 때에, 반란을 일으켜 인간족의 분열을 도모함은 무슨 까닭인가? 인간족의 힘은 분산되었을 때는 미약하여 광포한 오르크나 살인의 달인인 드래크로니안에게 당해낼 수 없다. 인간족이 강한 것은 오직 그 힘이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뭉쳐 있을 때 뿐이다. 그대가 요구하는 아트웰의 독립은 불필요할 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해가 되는 일이다. 그대의 조부(祖父) 벨리노어 벨리언이 인간족 전체의 통합을 위하여 왕좌를 포기한 것을 그대는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 이후 인간족 전체가 하나가 되어, 평화롭고도 행복한 생활을 누려 왔던 것을 그대는 잊었는가? 이제 그대는 그 오랜 평화를 깨뜨리려 함인가? 단지 그대 자신이 대공(大公) 이 아닌 왕으로 불리고 싶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그대가 언제나 훌륭한 기사였던 것을 기억한다. 어둠의 종족과 싸우는 데 있어서 결코 물러섬이 없었던 전사였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죄가 가장 중한 처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당장 인간족 전채를 위해 그대의 고집을 꺾는다면, 그리고 다시 동료 인간이 아닌 어둠의 종족에게 칼을 겨눈다면, 모두 잊고 용서할 용의가 있다. 그러니 내 오랜 기사여, 어리석은 욕심을 버리고 항복하라. 나는 인간족 전체의 군주, 에스테이아의 왕의 이름으로, 그대의 반란을 당장 종결 지을 것을 명령한다...' " 왕의 친서(親書)를 듣는 것은, 랜스에게는 처음이었다. 그는 가만히 긴 숨을 들이마셨다. 아클레어 3세. 왜 클레이브가 그토록 그에게 충성하는지, 이제 랜스는 알 수 있었다. 그의 형이 자신을 견제하고 박대하는 수도의 귀족들과 부대끼면서도, 왜 수도를 떠나지 않고 왕의 곁에 남아 있는지 이제 그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어째서 '왕좌를 노린다'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을 감수하면서도 왕의 곁을 지키는지... 침묵이 흘렀다. 랜스는 사일러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클레이브와 함께 아클레어 3세의 지휘를 직접 받으며 싸운 자. 랜스는 그 편지가 그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갑자기 웃음소리가 홀 안에 울려퍼졌다. 붉은 옷을 입은 사일러스는 주체할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높은 천정까지 올라가 메아리쳐 내려오며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곧 다른 웃음소리들이 가세했다. 스트라본, 레일라, 그리고 다른 기사들... 모두들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단 세 사람, 당황해서 그들을 바라 보는, 에스테이아 왕이 보낸 세 명의 사신(使臣)들을 제외하고는. "항복이라고!" 간신히 웃음을 멈춘 사일러스가 되뇌었다. 그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행복한 평화의 시절이라고! 이제 비로소 알겠소, 그대들의 왕이 얼마나 우리 아트웰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지. 아트웰의 백성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왕 아래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때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소. 당신네들의 '행복한 평화의 시절' 동안 우리 아트웰은 고통스런 식민지의 나날을 겪었소! 나, 아트웰의 '국왕'의 답변은 이렇소.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시오, 그러면 그대들이 원하는 평화를 드리리다. 우리에게, 국가 대 국가로서 동맹을 요청하시오, 그러면 기꺼이 인류 전체를 위해 어둠의 종족과 싸우리다. 그러나 만약 우리를 부당하게 지배하려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적이 될 것이오. 그리고 아트웰 인은 그 적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 그것이 인간 족이든, 오르크 족이든!" "사일러스!" 하고 랜스가 소리쳤다. 그는 무슨 말을 꺼내려고 했으나, 사일러스는 당장 그의 말을 막으며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닥쳐라. 감히 일국의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그대는 왕실의 예절조차 모르는가!" 그의 목소리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는, 왕의 목소리였다. 아클레어 왕의 사자는 공포 가득한 눈으로 랜스를 바라보았다. 사일러스 왕이 당장 랜스의 목을 치라고 명령해도, 그에게는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랜스는 막무가내였다. "미쳤군. 넌 왕이 아니야! 왕의 기사일 뿐이다. 에스텔에서 지낸 시간을 벌써 잊었나?" 붉은 옷을 입은 젊은 왕은 비로소 일어섰다. 그는 꼿꼿이 머리를 차켜든 채, 위엄이 넘치는 걸음걸이로 랜스에게 다가왔다. "그대가 내 옛 친구만 아니었더라도, 당장 처형당했을 거요, 랜스 경... 내가 선물한 목숨을 귀중히 안고 돌아가시오. 그리고 전하시오. 기사 사일러스는 처음부터 없었소. 있었다면 가면을 쓴 왕자 사일러스가 있었을 뿐이오!" "...그렇다면... 그것은 모두 연기였나...?" 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우리가 왕의 휘하에서 보낸 시간도, 미래의 꿈을 나누던 대화도...?"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었다. 미안함과 비난이 뒤섞인 미소였다. "그대는 우정을 휘해, 에스테이아를 버리고 내 편에서 싸워줄 수 있소, 랜스?" 랜스는 넋이 나간 사람마냥, 다시 왕좌로 돌아가 앉는 젊은 왕을 바라보았다. 아트웰의 왕은 감정이 가득 담긴 푸른 눈으로 에스테이아 왕의 기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랜스가 또 결례(缺禮)를 범하여 왕의 노여움을 살까봐 잔뜩 겁을 먹은 왕의 사자는, 그 틈을 타 얼른 무릎을 꿇고 왕과 그 동생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데이미아도 가볍게 무릎을 굽혀 인사를 올렸다. 스트라본의 눈은 끝까지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트웰의 왕은 그의 옛친구가 두 동료와 함께 알현실(謁見室)을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높이 솟은 알현실의 문이 완전히 닫힐 때까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의 가장 미약한 발소리조차 복도에서 사라진 한참 후에야,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동생에게 밝은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거리낌 없는 우렁찬 목소리로, 검은 갑옷을 입은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에게 소리쳤다. "가서 준비하라, 레일라 경! 본격적인 전쟁이 임박했다!" (계속) --------------------------------------------------------------------- * 필리우스의 행동에 대해 적지 않은 항의 쪽지가... 데이미아의 숨은 인기... ^^; 필리우스는 절대! 어린애 좋아하는 변태가 아닙니다... 데이미아 이제 글케 어리지 않아요. (로이 첨 만났을 때처럼...) 어린애들 크는 거 순식간이죠...^^; 필리우스와 두아스가 잘 아는 것은 타냐헨 네아(태초의 전쟁 ; 인간족, 요정족, 난쟁이족, 드래크로니안 연합군이 어둠의 종족과 한 판 붙은 세계 대전이었죠^^;)에서 한편이었기 때문이랍니다. 다른 얘기에 나오지만, 필리우스는 흑마법사 발타르, 두아스는 오르크의 왕 프오트의 부하였죠...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갈색의 마법사 Radagast... "제길... 엘먼 님은 도대체 어디 계신 거야!" 엘먼의 호위기사는 한숨을 쉬며 숲 속을 헤메고 있었다. 왕의 사신 (使臣)들이 가져온 소식은 분명한 만큼 절망적인 것이었다 - 전쟁. "하여간 전하도 태평이셔... 폐하께서 얼마나 화가 나셨는지 짐작은 하시는 걸까? 이렇게 눈치가 없으니 언제나 야단이나 맞지..."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 마지막 한 잎까지 다 떨어진 낙엽들이 바닥을 뒤덮어, 발 밑은 푹푹 꺼지고 있었다. 헐벗은 잔가지들이 그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돌조각에 걸려 그의 망토가 죽 찢어지자, 그의 신경질은 극에 달했다. 엘먼 왕자가 왕에게 죽도록 혼이 좀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처음 그가 왕자의 호위대에 선발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또 그의 가족들은 얼마나 기뻐했던가. 그들은 그가 분명 후에 왕의 호위기사 중 한 명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왕의 호위기사라고? 흥!' 기사는 돌부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가 보기에 엘먼이 왕이 될 가능 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 '엘먼이 암살되고, 왕이 된 클레이브가 그 측근을 다 몰살하지만 않아도 더 바랄 게 없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의 귀에, 마치 그를 놀리듯 깔깔거리고 웃는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왕자가 겁먹은 듯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기사는 무릎을 굽혔다. 아무리 가망이 없는 왕자라 해도 왕자는 왕자니까.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어서 막사로..." "아버지께서...?" 왕자는 새파랗게 질려 더듬거리며 물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듯 발을 끌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기사는 몸을 일으켰다 -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일어나기 전에, 억센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목청이 눌린 그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공포에 질린 눈으로 왕자를, 아니 조금 전까지 왕자였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살고 싶은가?" 하고 그자가 말했다. 숨이 막혀 얼굴이 보라빛이 된 기사는 그의 손을 잡아 떼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의 발, 그의 몸 전체가 마치 돌로 된 듯, 자신의 의지밖에 있었다. 그의 겁에 질린 표정을 바라보며, 상대방은 즐거운 듯 미소짓고 있었다. "이대로 널 죽인다면 참 재미있을텐데. 그럴 수 없어 유감이야..."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기사는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로어레이 ㅋ 디르, 로어쉬르 ㅋ 디르... 로 하린, 렐 노딘 하딤, 로 슬린 딘, 로어딜 아니인 디르페이! (네 눈은 나의 것이오, 네 귀는 나의 것이다... 너는 죽고, 나에 의해 다시 살아날지니, 너는 내게 충성하리라. 네 의지는 내 힘에 복종하리라!)" --------------------------------------------------------------------- "야앗!"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칼로 왕자의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 진동에, 자기가 오히려 밀려나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 속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엘먼 왕자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이런, 로이, 팔에 힘을 너무 주니까 그렇게 되잖아! 어깨에 힘을 주래도!" "앙~ 너무 어렵군요." 로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몸을 일으켰다. 엘먼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런... 감기 걸리겠는데. 막사로 돌아가자." "...그럴까요?" 푹 젖은 망토를 짜며 로이도 미소를 지었다. "휴우... 그래도 켈리에게 배우는 것보단 왕자님께 배우는 게 더 쉬운 거 같아요. 친구들에게 왕자님께 검술 지도 받았다고 자랑하면... 아무도 안 믿어 줄거야!" '내 병사들 중에서도 믿을 사람 없을걸.' 하고 생각하며 엘먼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가르치는 실력이 썩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성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칼이 수월하게 다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그는 토너먼트 대회 사흘 전부터 잠을 못 이루다가, 정작 당일에 가서는 병이 나서 구경도 못 나가는 위인이었으니. 항상 귀족들은 그에게 긴장을 안겨주었고, 그래서 그는 그들 앞에서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 특히 그의 아버지 앞에서는. 하지만 로이는 ...로이는 달랐다. '이상한 일이야. 천한 신분의 아이이기 때문일까?' 처음에 로이가 그에게 검술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 때, 그는 질겁을 했다. 도대체 그에게 검술 지도를 받겠다는 것부터가 미친 생각인 것처럼 느껴졌다 - 아니면 그를 놀리는 것이든지. 그가 칼만 잡으면 백치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비참한 검술도, 아무것도 모르는 섬 지방의 촌뜨기 로이가 보기에는 대단해 보였는지... 어쨋든 로이를 따라 숲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해하던 차였으니까. 로이는 어젯밤 땅을 파는 병사들을 도와주려다가 자기 자신이 시체 대신 구덩이에 빠지고, 욕만 실컷 얻어먹은 터라, 일하는 근처에는 가까이 가지도 않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부상병들을 간호할 수 있을까 해서 환자들의 막사도 기웃거려 보았으나, 하얀 수염이 배까지 내려온 깡마른 치유술사에게서 또 잔뜩 야단만 맞았을 뿐이었다. 국왕의 직속 명령을 받는 치유술사 중 한 명인 그가, 데이미아의 출현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는 것 따위는, 로이가 알 턱이 없었으니. 데이미아도 랜스를 따라 반란군 우두머리를 만나러 가버렸고, 툴위그는 펠히스를 데리고 정찰병 들과 함께 떠난 후였으니, 로이와 놀아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로이는 왕자에게 검술을 졸라 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엘먼 자신이야... 원래 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고. "누가 왕자님보고 못 싸운대요? 어제 까마귀하고 잘만 싸우시던데요, 뭘! 절 살려주셨잖아요. 전 왕자님만큼만 실력이 돼도 한이 없겠어요." 아무 생각 없이 던진 로이의 말이 엘먼의 마음을 움직였다. 성 안에서 저렇게 거짓 없는 얼굴로, 저런 말을 던져 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물론 귀족들의 아부는 지겹게 들어 왔지만, 그들도 뒤만 돌면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을 왕자는 알고 있었다. 귀족들 뿐 아니라 병사들도, 요리사도, 청소부까지... 모두가 그를 비웃는다고엘먼은 믿었다 - 로이만 제외하고는. 엘먼은 거의 로이에게 끌려가다시피, 숲속의 시냇가로 갔다. 어제 까마귀에게 쫓기다가 굴러떨어지고, 깊이를 가늠하지 못해 물에 빠질 뻔한 그 시냇물이었다. 로이와 그는 어젯밤의 일을 이야기하며 둘이서 지칠 만큼 깔깔대고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보통의 그라면 수치심에 얼굴이 깊게 물들고, 자신의 어설픈 행동때문에 마음 깊이 상처를 입어, 다시는 그 장소를 보기도 싫어했을텐데... 그것은 로이가 검을 잡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는 아마도 누군가에게 아주 기초적인 검술은 대충 지도받은 것 같았다 - 그러나 꽤나 어색한 자세였다. 왕자는 자신이 처음 검술을 배울 때가 생각나 웃음을 터뜨렸다. 무거운 검을 후들거리는 팔로 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여섯 살의 그를 보고, 그에게 지도를 해주러 온 클레이브는 얼마나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던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그에게 어두운 기억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재미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로이가 함께 에스텔로 와 준다면 참 좋을텐데... 하지만 안 될 것도 없잖아? 로이만 좋다면. 난 왕자니까, 시종 한 명 정도 내 마음데로 고를 수 있는 거 아냐?' 엘먼은 이런 생각을 해 놓고 스스로 놀랐다.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그는 지금까지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전하! 거기 계십니까?" 낯익은 목소리에 왕자는 화들짝 놀랐다. 분명 그의 호위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호위기사가 찾아다닐 만큼 벌써 시간이 지났나? "여기 계셨군요!" 엘먼의 예상대로, 그는 자신의 호위기사였다. 그는 로이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듯, 얼른 엘먼의 발치에 무릎을 꿇더니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사신(使臣)들이 가져온 답신이 비관적이기 때문에, 몹시 화가 나셨습니다. 빨리 가 보십시오!" "아버님이?" 엘먼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지금까지의 용기 따위는 온데간데 없었다. 아버지가 화가 났다고... 그 사실이 그의 머릿속을 꽉 채워 버렸다. 로이는 갑작스런 그의 표정의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왕자님? 어디 아프세요?" "저... 저기... 왕께서 화가 나셨다잖아..." "뭐 어때요. 왕자님 때문에 화가 나신 것도 아니잖아요? 어서 가요." 로이는 스스럼없이 앞장섰다. 왕자는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그러나 목이 죄어드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왕의 막사까지 가는 기간 내내 엘먼은 말이 없었다. 로이가 몇 번 말을 걸었으나, 대꾸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그도 이내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힐끔 힐끔 쳐다볼 뿐이었다. "이제 왔느냐, 엘먼!" 예상대로 왕은 침착하고 차가운, 그러나 그 아래 분노가 끓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바로 곁에는 클레이브와 꼭 닮은 랜스가 서 있었다. 그리고 신분 차례로 왕의 주위에 늘어선 기사들은, 걱정과 기대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엘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당장 도망이라도 치고 싶을 기분이 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서 고개만 깊이 숙일 따름이었다. "소식은 들었겠지. 전쟁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유일한 왕자인 너는, 이런 중대한 소식이 도착할 때에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거냐?" 엘먼은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굳어진 것 같았다. 로이가 곁에 있었 더라면 무슨 말이라도 대신 해 주었으련만. 그러나 로이는 왕의 막사에 들어 가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그가 랜스의 시종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니. 왕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는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아들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거둬들여 버렸다. 그는 왕자가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 따위는 까맣게 잊은 듯, 주위 사람들과 함께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금의 병력으로는 아트웰과 맞서는 건 어림도 없다. 가득이나 적은 병력이 어젯밤 괴물들의 공격으로 1/3 이상 줄었으니..." "그러나 원군을 청할 시간이 있겠습니까?" "데이미아가 그때까지 들키지 않게 마법의 베일을 쳐 줄 겁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랜스 경이었다. 왕이 관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렇게 해 줄까, 랜스 경?" "물론입니다. 그녀가 제게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살육을 돕는 것을 할 수 없지만 그것을 피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돕겠다면서요. 단, 자신의 마력(魔力)은 아직 불충분하니 다른 마법사들의 마력을 좀 빌렸으면 좋겠다고 하더군요..." "그건 어려울 것 없지. 내가 데려온 다섯 명의 마법사에게 무조건 그녀의 말을 따르도록 하겠다. 그러면 이제 원군을 요청하는 문제인데..." '저 놈의 형제는 둘이 번갈아가면서 날 기죽이는구나...' 하고 왕자는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원군을 청할 거리라면... 디온 지방밖에 없습니다, 폐하. 수도를 비우면 어둠의 종족들에게 침략당할 위험이 있으니..." "하지만 그러려면 드라크노움을 넘어가야 합니다. 드라크노움에 사는 소수민족은 거의 다 아트웰에 우호적이고요. 다온만 믿는 것은 도박 입니다. 에스텔에서도 원군을 요청해야 합니다. 클레이브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북진(北進)했으니 당분간 어둠의 종족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 까요?" 엘먼은 말없이 유창하게 말하는 랜스를 지켜보았다. 도저히 오랜 기간동안 용병과 헌터를 전전하며 살던 사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동안, 왕을 비롯한 모든 기사들의 눈은 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찬탄의 눈빛, 존경의 눈빛, 질투의 눈빛... '클레이브와 닮았구나...' 엘먼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미 클레이브를 질투하는 짓 따위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 한 곳은 질투보다 더한 아픔으로 저려 왔다. 그것은 랜스를 흐뭇한 듯 바라보는 왕의 눈, 클레이브를 바라보던 것과 똑같은 자신의 아버지의 눈 때문이었다. 왕자는 조용히 막사를 나왔다. 그가 자신의 막사로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도, 왕의 막사에서는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아무도 왕자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계속) --------------------------------------------------------------------- * 엘먼에게 동정표를 던져 주시는 분들이 계시네요. 이에 따라 랜스, 클레이브 형제는 여전히 하향세...^^;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보내며... Radagast... PS. Radagast란 이름은... 톨킨의 <반지전쟁>, <실마릴리온>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래더가스트는 갠달프처럼 마법사였고, 사우론(나쁜놈)과 싸울 의무가 있었는데, 귀찮아서 다 때려치우고 새들이랑 들짐승들이랑 놀며 살았다는군요...^^; 회색분자 예리에게 어울리는 이름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