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에마인 이제레이드 스티나드 쉬리, 쿨록 에그로나드나우클라스, 예이나드 투이엔 드리날로우. 에브리이스 네이린 데라스 샤나로아스, 페레노스 벨리셀 하르쿤 올린... (...오 들리나니 귓가를 적시는 붉은 바람이여, 풍요의 땅에 황폐의 씨앗을 뿌리는 저주받을 그림자의 발자국이여. 소중한 이들은 타지의 흙으로 변하고 기다리는 자들은 그 뼈조차 만져보지 못한다...) -<탈레놀라 에퀴오나스(에퀴온의 신탁)> 中 TALLES TEIRELAS SEIA IDEN 용의 신전 제 2 부 제 1장 평화의 끝 (The End of Peace) 시이드 성 위로 어둠이 내려앉았다. 이 근방의 흙의 색깔 때문에 거무스름한 돌들과 흙으로 지어진 시이드 성은, 해가 지자 더욱 음침하게 보였다. 오직 침략을 위해, 살생을 위해 고작 50여년 전에 지어진 성. 시이드 성의 역사를 아는 칼릭은 이 성에 머무르는 기간 내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아버지를 따라 에스텔로 돌아가라는 클레이브를 기어코 설득하여, 그의 곁에 남기로 한 것은. 시이드는 결코 행운의 장소가 못 되었다. 적군에게건, 아군에게건... 동쪽 아트웰로부터 찬 바람이 불어와, 시이드의 외성(外城)위를 거니는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떠오르는 은빛 보름달 아래, 그들의 외성(外城)이 아름다우면서도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트웰과의 전투가 시작된 지도 벌써 나흘... 이 밤만 지나면 가이 웰(닷새. 모든 것을 십진법으로 계산하는 레젠디아에서는 열흘인 '웰가'와 그 절반 '가이웰'을 중심으로 날짜를 계산한다.) 째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아직 에스텔에서는 원군을 보내 주겠다는 소식은 커녕, 힘내서 싸우라는 말뿐인 격려조차 없었다. 마치 이쪽 일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그것이 가뜩 이나 수세에 몰리고 있는 시이드의 군사들의 사기를 더욱 꺾어 놓았다. 지난 사흘간의 전투에서 시이드의 군대는 계속 피해만을 입어 왔던 것이다. '도대체 어째서 아무 소식이 없는 거지? 이것은 단순한 반란군 토벌이 아니다. 아트웰의 도발이 성공한다면, 아니 성공할 기미를 보이기라도 한다면 그동안 잠자코 있던 여러 속국(屬國)들이 단번에 들고 일어날 터. 에스텔의 어리석은 귀족들은 그것을 모른단 말인가?' 칼릭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며 어둠이 깔려 가는 시이드의 영지를 바라보았다. 한 발 건너 아트웰과는 달리 시이드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 흙은 아트웰과 똑같은 검은 빛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아트웰의 흙처럼 곡물을 자라게 하지 못했다. 먼 옛날 이 땅에서 있었다는 오르크들의 의식(儀式)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한 자연 현상일까. 어쨌거나 이대로 아무 도움도 받지 못했다가는, 병력은 고사하고 식량과 의료품의 부족으로 아트웰에게 대항 한 번 못해 보고 무너질 것이 뻔했다. 벌써 얼마나 많은 병사들의 상처를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는가. "별일 없는가...?" 외성(外城)을 따라 걸어오던 클레이브가 칼릭을 향해 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흰 망토가 촛불처럼 휘날렸다. 바람은 찼다. 추수기(秋收期)의 바람이었다. 그러나 지금 곡식을 거두어야 할 사람은 모두 창과 칼을 잡고 이 성을 지키고 있다. 그가 이미 죽었거나 죽어가는 중이 아니라면... "적진은 조용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클레이브 님." 칼릭은 자신을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보다 파엘 영주님의 상처는...?" "중상은 아니네. 당분간 팔을 쉬기만 하면 괜찮다더군. 그러나 그의 두 사촌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했어." 클레이브는 감정이 깃들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어떤 천리안(千里眼)을 가진 자라도 그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없을 듯한 푸른 눈으로 먼 아트웰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그와 그의 아버지 리반 아덴 경이 많이 닮았다고 했다. 그 수려한 용모와 붉은 금발, 그리고 바다빛의 푸른 눈이. 그러나 칼릭의 기억 속에 있는 리반 아덴 경은 그보다 훨씬 마음을 일기 쉬운 눈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랜스와 비슷했으면 비슷했지, 클레이 브의 눈은 그의 아버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랜스 도련님이 갑자기 사라지신지도 한 가이웰이 넘었군요." 칼릭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 말에도 별다른 감정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그 애는 잘 해내리라고 믿네. 자네나 나보다 마구 굴러다니는 데에 익숙해 있는 애니까, 어떻게 되지야 않았겠지. 아마도 원하던 대로 친구를 구해내지 않았을까..." 클레이브는 낮게 웃더니 덧붙였다. 9 "파엘의 소식통에 알아보았더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최근까지 수도 방위대의 대장 하젠 윈필드의 성에 비밀스러운 포로가 잡혀 있었는데, 탈출 했다더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그 포로가 여자라지 않나... 아주 아름다운 미녀였다더군. 하젠이 죽이기 싫어할 만큼." "그 소문을 믿으십니까?" "꼭 그렇지는 않네. 하지만 난 그 소문이 사실이라면 좋겠군. 그래서 차라리 여자라도 그 애의 마음을 붙들 수 있다면... 하르크자엘의 일을 잊게 할 수 있다면 좋겠네. 그 애는 정말 너무 그 용에게 집착하고 있어. 원수를 갚는 거야 좋다지만, 하르크자엘은 혼자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가 아냐... 인간족이 모두 힘을 합쳐도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는데."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걱정이 스쳐갔다. 칼릭은 한숨을 쉬며 투덜 거리듯 말했다. "랜스 도련님께서 클레이브 님이 걱정하시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계셨으면 좋겠군요." "알고 있을걸세, 그 애는... 고집이 센 녀석이긴 해도 무심하진 않지." 클레이브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랜스가 그 포로를 찾으러 간 이유가 정말 그런 거라면... 에이레나가 너무 불쌍하군. 그렇지 않은가?" "그렇군요." 칼릭도 억지로 소리내어 웃었다. 공허한 웃음은 어둠 속에 부스러져 들어 오히려 분위기만 더 음산하게 만들었다. 지어낸 웃음, 어리석은 잡담, 이 순간에도 성 안에서는 물을 찾는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고, 클레이브도 자신도 그 일을 뻔히 알고 있는데. 벌써 시이드의 병력의 1/4이 죽거나 칼을 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이제 전투가 아니라 간신히 버티는 것이었다. "로크 페울로니의 전설을 아는가?" 아트웰의 성벽을 응시하던 클레이브가 난데없이 물었다. 칼릭은 고개를 저었다. "그 전설이라면 드래크로니안의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그래서 아클레어 폐하께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 전설에 현혹되는 것을 막으려 하셨지... 그러나 내 아버지께서는 알고 계셨네. 악과 싸우는 사람에게는 악을 아는 것도 필요한 법이니까. 내 부모님께서는 내가 처음 힐리온을, 라우더의 작은 지하 창고에 숨겨져 있던 힐리온을 본 날 그 이야기를 해 주셨지. 로크 페울로니는 드래크로니안 족이 가져온 네 개의 마법기(魔法器) 를 말하는데... 힐리온과 이디실, 또 뭐라더라... 어쨌든 네 개가 있었지. 그들의 시조 글라노우스가 그 넷을 각각 요정, 난쟁이, 인간족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말하기를, '네 개가 합쳐지면 재앙이 올 수도, 평화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는 군. 사기꾼 드래크로니안다운 말이 아닌가? 하하하..." "...그렇군요." 칼릭은 그렇게 대답했으나, 클레이브가 그런 말을 하는 뜻을 알 수 없었다. 클레이브는 마치 그런 그의 마음을 읽듯이 미소를 지었으나, 더이상 그것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칼릭에게 이렇게 말했다. "밤이 깊었군. 언제 아트웰의 반역자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 인데 잠을 자 두게. 나도 눈을 좀 붙여야겠어." 그리고 클레이브는 그 하얀 망토를 펄럭이며 성의 본채로 걸어갔다. 뒤돌아선 그의 모습에서, 망토에 새겨진 아덴 가의 문장이 뚜렷이 보였다. 새하얀 망토 위에 그려진, 검은 비룡을 꿰뚫은 두 은빛 칼의 문장(紋章). 왕의 외조카였던 리반 아덴은 시지리스의 용족들을 퇴치함으로써, 밋밋한 칼 뿐이었던 그의 깃발에 검은 비룡을 수놓았다. 그래도 그 대는 인간들에게 명예로운 나날. 적들은 오르크와 용족, 그리고 다른 어둠의 생물들 뿐이었고 인간은 인간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다... "걱정스런 모습이시군요, 칼릭 경." 갑자기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릭은 반사적으로 칼을 찬 허리에 손을 가져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을 인식하자 미소를 지으며 긴장을 풀었다. "당신이로군요, 다이크 경." "그럼 누구라고 생각하셨소?" 다이크는 미소지으며 칼릭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영주 파엘의 부관이자 먼 친척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붉은 콧수염과 머리털은 파엘과 상당히 비슷했고, 매력적이면서 바람둥이처럼 보이는 얼굴도 닮아 마치 친형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특유의 활달한 걸음으로 칼릭에게 걸어오며 말했다. "당신네 에스텔 출신들은 다 좋은데 너무 심각하시단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얼마 안 있어 국왕 폐하의 군대가 나타나 저 반역자 떨거지들을 싹 쓸어 주시리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데 뭐가 걱정입니까?" 칼릭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시이드의 기사들. 다들 좋은 기사들이었 다. 파엘 영주의 두 사촌. 무뚝뚝하지만 정말 마음이 넓은 분들이었지. 그리고 로이히르에서부터 클레이브와 칼릭을 따라 온 리크. 언제나 충성스러운 그는 시신조차 찾지 못했다. 아트웰의 궁수들이 그들의 동료의 시신을 수습할 새도 없이 화살을 날려 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괴물과 싸우다 죽은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의 손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여기 이렇게 활달하게 서 있는 사람, 붉은 머리의 다이크 경도 도대체 얼마나 오래 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오늘 파엘 경을 구해 내기 위해, 적장 사일러스의 손에 목이 베일 뻔 했다는 것을 칼릭은 잘 알고 있었다. "걱정 감사하오. 정말로 자러 가야겠군... 내일 아침부터 소란을 피울 아트웰의 반역자들을 위해서." "하하... 속 편한 소리 하시는군요, 칼릭 경. 반역자 놈들로 말하자면 언제 소란을 피울지 알 수 없는 노릇 아닙니까?" 칼릭은 웃으며 다이크 경과 헤어졌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편하지 못했다. 다이크는 왕이 군사를 보내 줄 것을 믿는다고 했다... 그러나 칼릭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에스텔이, 그 화려한 궁궐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훌륭한 왕이라고 항상 훌륭한 신하를 두라는 법은 없는 법... '세드릭 경이 이상한 소리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칼릭은 걱정 속에서 잠이 들었고, 그래서인지 깊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벽에 걸어 둔 자신의 망토가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깨어 베개 속에 숨겨 둔 단검을 뽑아 들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몸은 피곤했던지라 그 소리의 정체를 알고 나자 곧바로 다시 잠에 빠져들었 다. 긴장한 상태에서의 잠은 깊지 못했고 꿈은 불길했다. 그는 꿈 속에서도 계속 칼을 들고 적의 기사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꾸고 있었으므로, 그의 귀가 실제의 칼소리와 꿈의 칼소리를 구별해 내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러나 너무 늦을 만큼 오래는 아니었다. 칼릭은 머리 위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얼른 몸을 일으켰다. 오랜 훈련의 결과로 베개 속의 단검은 자동적으로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그가 몸을 완전히 일으키기도 전에, 갑자기 칼을 휘두르는 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이것저것 생각할 새도 없었다. 칼릭은 당장 침대 밑으로 뛰어내려 차가운 돌바닥으로 굴렀다. 칙! 하고 칼날이 이불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어둠 속에서 그의 침대 곁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어렴풋이 보였다. 칼릭은 뭄을 일으킬 새도 없이, 그의 발목을 나꿔챘다. 비명과 함께 그가 쓰러지자, 칼릭은 그의 목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에 칼을 들이댔다. "누구냐!" "놔라, 에스테이아의 졸개!" 음절이 기묘하게 흘러내리는 아트웰의 방언(方言). 순간 칼릭은 가슴이 철렁했다. 아트웰 인이 들어온 것이다. 아무리 불쾌해도 방어만큼은 철저하다고 믿었던 이 성에, 아트웰의 병사가 들어온 것이다. "어떻게 들어왔지? 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그러나 그 말은 소용이 없었다. 칼릭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그 암살자는 목을 뒤틀어 스스로 칼릭의 단검에 박아 넣었다. 동맥이 끊어졌는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칼릭의 옷을 적셨다. "이런...!" 칼릭은 실망하여 중얼거렸으나, 한숨만 쉬고 있을 새는 없었다. 그 암살자는 죽은 것이 확실했고, 윗층에서는 한층 더 큰 소리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간간히 죽어가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비명 소리가 그의 귀를 때렸다. 갑옷을 입고 정식으로 무장할 새는 없었다. 칼릭은 간단히 겉옷만 걸친 다음, 검을 잡고 방 밖으로 달려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한 괴한이 그를 향해 단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칼릭이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는 것을 보더니,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달아났다. 칼릭은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분명 저들은 적을 몰살하러 온 기사들이 아니었다. 그러기엔 포기가 너무 빨랐다. 그들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암살자들이었다. '설마... 클레이브 님...!' 칼릭은 섬뜩한 느낌에 휩싸여 클레이브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암살을 위해 들어온 자들이라면, 표적은 둘 중 하나였다. 영주인 파엘이거나, 군(軍)의실질적인 지도자인 클레이브. 그러나 오래 달릴 것도 없었다. 계단을 올라서자마자 그의 눈앞에, 여섯 명의 검은 옷을 입고 얇은 검을 든 괴한들과 맞서 싸우는 클레이브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클레이브 역시 칼릭처럼 갑옷을 입지 않은 채, 자신을 빙 둘러싼 적들을 상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의 칼의 횃불에 비쳐 불로 된 검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에스테이아 최고의 기사 중 한 명인 클레이브라 하지만 힘겨운 전투였다. 잠을 자는 도중의 기슴에 의해 그의 왼쪽 옆구리에는 깊지 앉지만 긴 상처가 그어져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그의 팔은 무거워지고 있었다. 호흡은 점점 거칠어졌고 땀이 옷과 머리칼을 적셨다. 어설픈 실력이라도 여러 방향에서 한꺼번에 내리치는 창과 검의 위력은 무시할 것이 아닌데, 아트웰의 암살자 들은 결코 뜨내기가 아니었다. 그들의 칼은 소름끼칠 만한 속도로 그의 빈틈을 찾아 파고들었다. 마침내 한 암살자의 일격이 클레이브의 지친 팔에 상처를 입혔고, 그 팔은 검을 놓쳤다. 그 암살자는 오만하게 소리치며 칼을 쳐들었다. "왕의 근위 대장이라더니, 별것 아니군. 너도 내 손에 죽는구나!" 그러나 그의 명예의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칼릭의 칼이 그의 가슴을 꿰ㄷ었던 것이다. 갑옷을 입지 않은 암살자는 등과 배가 완전히 꿰뚫린 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클레이브는 여전히 숨을 몰아 쉬며, 칼릭이 집어 준 자신의 검을 받아들었다. "괜찮으십니까, 클레이브 님?" 칼릭이 적들에게서 그의 앞을 막아 서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클레이 브는 숨을 고르며 고개만을 끄덕였다. 그는 지친 듯한 몸짓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지만, 곧 칼을 고쳐 잡고 칼릭의 곁에 나섰다. 칼릭은 그가 너무 지쳐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클레이브는 누가 뭐라고 말해도 적을 앞에 두고 휴식을 취할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둘의 칼날은 마치 한 쌍의 빛나는 날개처럼 적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아트웰의 암살자들은 투지에 불타고 있었고 기술도 상당했으나, 칼릭과 클레 이브를 당해 내지 못했다. 그들은 동료 둘이 더 목숨을 잃자, 미련 없이 어둠 속으로 기어들듯 도망쳤다. "하! 클레이브 경! 듣던 대로 상당하신 실력이군요. 이번에는 내 상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그들이 도망친 어둠 속에서 새까만 갑옷과 투구로 차려입은, 몸집이 크지 않은 기사가 걸어나오며 말했다. 그 검은 투구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여자의 것, 그것도 젊은 여자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칼을 든 모습,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여유로우면서도 빈틈없는 모습을 본 클레이브는 그녀를 얕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오만하시군. 이 분께 덤비기 전에 내게 덤벼 보시지?" 칼릭이 발끈하여 그녀의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휘두르는 칼은 맞받아 친 것은 그녀가 아니라 그녀와 마찬가지로 검은 갑옷을 입은, 다른 기사였다. 그의 뒤에는 똑같은 차림의 기사 세 명이 더 서 있었다. 클레이브는 숨을 고르려고 애쓰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지친데다 부상을 당한 상태였다. ...적도 그것은 노렸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클레이브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칼을 들었다. "기꺼이! 그 전에 당신의 이름을 물어도 되겠소?" "영광이군요. 제 이름은 생소해도 성은 들은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저는 폴 갤러허드의 딸 레일라 갤러허드, 레오스 갤러허드의 손녀이자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검은 갑옷의 여기사는 이렇게 말하며 검을 들었다. 클레이브의 검과 그녀의 검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맞부딧쳤다. 그녀의 힘은 여자라고 생각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지친 근육이라고는 하지만 그 공격은 그의 어깨까지 저리게 만들었다. 두 기사의 칼이 다시 부딪쳤다. 미치 춤을 추는 것처럼 그들의 칼은 서로 몸을 맞대었다 떨어지며, 횃불을 반사하여 이상스러운 빛의 무늬를 검고 음산한 천정에 만들어 내었다. 레일라의 칼이 클레이브의 목을 노리며 덤벼 들었으나 클레이브는 얼른 몸을 피해 그 칼은 옷깃을 스쳤을 뿐이었다. 클레이브의 칼이 그녀의 갑옷의 매듭을 끊으려 했으나, 그녀는 두꺼운 팔의 덮개를 들어 그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버렸다. 결투는 웬만해서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두 기사는 숨을 몰아 쉬며 지쳐 가고 있었다. 칼릭은 클레이브 에게 도움을 주려 했으나, 검은 기사들은 그가 레일라에게 접근하는 것을 기를 쓰고 막고 있었다. 클레이브의 칼이 레일라의 갑옷의틈을 노리며 다시 한 번 날아 들었다. 그 검은 레일라의 몸에 상처를 내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어깨 덮개를 떼어내어 날려 버렸다. 레일라는 큰 소리로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좋은 결투였소, 클레이브 경. 하지만 시간이 얼마 없으니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군요!" 그녀의 외침과 함께, 약속이라도 한 듯 방 안으로 십여 명의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달려들어와 칼릭과 클레이브를 에워쌌다. 그들 모두 보는 사람을 압도할 만한 체격과 서슬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클레이브와 칼릭을 공격할 듯, 검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꼼짝 않고 여기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여라." 하고 레일라는 말했다. 그 말과 함께, 당장 칼릭과 클리에브에게로 그들의 칼날이 덮쳐 왔다. 칼릭은 자신의 검으로 그들의 칼을 막고 그 충격에 비틀 거렸으며, 클레이브는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해내며 그 기사를 향해 칼을 내질렀다. 그러나 두꺼운 갑옷은 그의 칼날을 튕겨내어 버렸다. 클레이브는 다시 그 기사를 공격하려 했으나, 곁에 있는 다른 기사의 도끼가 그의 머리 위로 휘둘러졌으므로 그럴 새가 없었다. 이어서 칼날이 그의 어깨를 그었고, 갑옷을 입지 않은 그의 어깨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아 올랐다. 칼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클레이브의 곁에 떨어졌다. "클레이브 님!" 칼릭은 당황해서 싸우던 상대를 잊고 무작정 그를 향해 내달았다. 그리고 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칼날이 칼릭의 등을 향해 내리쳐졌다. 칼릭이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목숨을 건진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끝났군, 클레이브 아덴!" 여기사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하며 클레이브의 목을 향해 칼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녀의 칼이 그를 향해 내리쳐지려는 순간, 거센 충격과 함께 그녀의 몸은 앞으로 휘청거렸다. 몸에는 상처가 나지 않았으나 갑옷에 금이 갈 만큼 심한 충격이었다. "누구냐!" 간신히 몸을 가눈 그녀는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클레이브는 그 자리에 선 사람을 보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친 사람을 상대로 2대 5로 싸우다니. 그대의 기사도(騎士道)는 어디로 간 거요, 레일라 경?" 랜스였다. 레일라는 랜스를 보더니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 랜스 경! 내가 그대에게서 기사도에 관한 꾸지람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소. 친구를 배신하고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한 당신에게서!" 그녀의 말에 랜스의 표정이 흔들렸다. 레일라는 그 새를 놓치지 않고, 랜스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무거운 갑옷을 입은 그녀 보다는 랜스가 더 빨랐다. 그는 얼른 검을 들어 그녀의 칼날을 받아 냈다. 레일라는 예상했다는 듯, 펄쩍 뛰어올라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안타깝게도 당신이나 나나 기사도를 논할 처지는 되지 못하는 것 같소. 시간이 촉박하니 모처럼의 좋은 결투도 이런 식으로 끝을 맺게 되는군. 이봐라, 아트웰의 용사들아, 그림자의 기사들아! 당장 눈 앞의 적을 죽여라!" 그녀의 외침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무기를 들고 랜스의 주위를 에워쌌다. 그러나 랜스도 혼자 내버려진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는 당신이 졌소. 패배를 인정하시오, 레일라 경!" 툴위그의 목소리였다. 그가 마치 이 자리에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처럼, 유유히 방문을 통해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로이와 데이미아, 켈리, 그리고 펠히스와 이즐레이도 들어오고 있었다. 켈리는 여유 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 레일라! 오래간만이군요. 하젠의 성에서 당신이 보여 준 친절을 떠올리면 당신이나 당신의 부하들에게 칼을 겨누고 싶지 않지만, 먼저 우리를 공격한다면 하는 수 없소, 대항하는 수 밖에. 그러니 서로 감정 상하기 전에 이쯤에서 물러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레일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켈리를 바라보았다. "당신이 도망쳤다는 말은 하젠에게서 들었소. 명예를 중히 여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름에 걸맞지 않게 행동하시는군요, 켈레브리스." "약속을 어긴 건 랜스지 내가 아닙니다. 난 죽어 주겠다는 약속 따위 한 적 없으니까요. 그리고 얌전히 체통 지키며 죽어 줄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난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람입니다. 자, 레일라, 어떻게 하실 겁니까? 나와 싸우시겠습니까, 아니면 후일을 기약하고 내가 없을 적에 다시 오시겠습니까?" 레일라는 켈리의 당당한 행동에 피식 웃었다. 레일라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더니,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당신들이 이겼소. 부상자들을 데려가시오. 우리는 이만 떠나겠소!" 클레이브는 그녀와 그녀의 부하들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검을 집어들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순간, 그들의 앞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다음에 다시 뵙게 되기를, 두 형제분들! 오늘은 정말 즐거웠소! 그리고 켈레브리스, 다음에는 친구로 만납시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매캐한 연기 속에 레일라의 목소리만이 들려왔따. 연기는 곧 가셨으나, 그녀와 그녀의 그림자 기사들이 달아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형! 괜찮아?" 랜스는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클레이브에게 달려가,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했다. "어떻게 된 거냐?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제서야 클레이브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랜스에 툴위그, 로이와 데이미아까지, 여기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쏟아져 나오자, 클레이브는 자기 눈을 믿을 수 없는 기분이었다. 상처에서 전해오는 통증만 아니라면 별 가당찮은 개꿈도 다 있다고 생각해 버렸을 것이었다. "클레이브 경! 괜찮으십니까!" 랜스가 대담을 하기도 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를 뒤집어 쓴 다이크 경이 소리치며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기세로 보아서 그 피는 자신의 피가 아니라, 그가 죽인 적의 피 같았다. 그는 부상을 입은 클레이브와 칼릭, 그리고 낯선 여섯 사람을 보더니,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칼을 뽑아 들었다. "이 반역자들...!" (계속) "그만 두게, 다이크!" 부상에도 불구하고 클레이브의 목소리는 여전히 위엄과 힘에 차 있었다. 다이크는 그의 명령이 타당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명령 속에 깃든 위엄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칼을 멈추었다. "나를 도와준 이들이네. 내 동생, 랜스는 자네도 본 일이 있겠지." "아... 랜스 님?" 그제서야 다이크는 랜스를 알아보고 놀라워했다. 클레이브는 완전히 침착성을 회복하여 다이크를 향해 물었다. "파엘은 무사한가?" "예, 미리 대피하셨습니다. 적군도 이제는 물러갔습니다. 아마 이 성을 장악할 속셈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그러면 의원들을 좀 불러다 줘. 난 괜찮지만 칼릭이 어떤지 알 수 없으니..." 클레이브는 쓰러진 칼릭을 흘끗 보며 말했다. 그러자 어느새 그 곁에 꿇어앉아 맥박을 짚고 있던 데이미아가 자신있게 말했다. "걱정 없어요, 이 사람은. 상처도 깊지 않고, 방금 지혈(止血)했으니 출혈도 별 것 아닐 거에요." 클레이브는 가만히 마치 제 집에 온 듯 이야기하는 요정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맙소, 레이디 데이미아... 그리고 모두들. 꼭 필요한 상황에 와 주셨소. 그러나 실례를 무릅쓰고, 이 성 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물어도 되겠소?" "...문이 열려 있던데요." 데이미아는 뭐 그런 질문을 다 하냐는 듯 대답했다. 클레이브는 그다지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그의 눈은 조금 크게 떠졌다. 그것만으 로도 그는 충분히 놀라움의 표시를 한 셈이었다. 다이크는 비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이없게도 성문이 열려 있습니다. 누군가가 열어 준 것입니다. 하긴, 그 방법 외에는 비밀 통로조차 없는 이 성에 들어오는 길이 없지요..." "내부에 배신자가 있는 거로군..."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곧 의원들의 불려져왔고 칼릭은 들것에 들려갔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 자신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는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단지 상처를 소독하고 싸매도록 허락했을 뿐이었다. 그가 간단한 치료를 받을 동안 그의 동생 랜스는 말없이 그의 곁에 서 있었다. 그들 형제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이 로이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섣불리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만약 클레이브가 랜스가 허락 없이 아트웰로 갔던 것에 화가 나 있는 것이라면, 그 책임은 자신에게도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클레이브가 상처를 치료받고 옷을 갈아입고, 파엘 영주와 랜스를 동행한 채 다시 로이와 그 일행 앞에 나타나는 데에는 반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로이 일행은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다이크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영주의 접견실(接見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체를 치우고 부상자를 옮기 느라 밖은 아수라장이 되었는데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방해되지 않게 접견실에 틀어박혀 과자나 주워먹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로이와 데이미 아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켈리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펠히스의 털을 쓰다듬으며 놀고 있었다. "저는 시이드의 영주 파엘입니다. 이렇게 위급한 때에 오셔서 도움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오른팔에 두껍게 붕대를 감은, 붉은 머리털의 미남자 파엘 영주는 그들을 향해 인사했다. 로이는 얼굴을 붉혔고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의연하게 감사를 받아들였다. 검은 갑옷의 여기사(女騎士)가 켈레브리스라고 불렀던 금발의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발치에 선 커다란 늑대의 털을 어루만지고 있었는데, 그 미소는 클레이브가 보기에 감사에 답하는 미소처럼 보이다가도 어떻게 보면 잘 꾸며낸 비웃음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녀의 곁에 선 남자는 후드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키가 크고 꼿꼿한 체격의 젊은이였다. "처음 이 성에 오신 분들에게 이런 추한 꼴을 보여드려 뭐라 드릴 말씀이 없군요. 그러나 최선을 다해 여러분들을 모시는데 불편이 없도록 조처하겠습니다. 하지만 랜스 경..." 파엘은 랜스를 책망하듯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먼저 경의 무사한 귀환에 자비로우신 이조넬과 아스틸라 여신께 감사드려야겠군요. 그러나 경의 행동은 정말 무심하셨소. 형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실지 생각도 안 해 보셨소? 게다가 외성까지 봉쇄되었다고 하니..." 랜스는 클레이브를 바라보다가 죄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클레이 브는 마음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파엘 영주가 모두 대신하여 말해주고 있었으니. 그러나 겉으로는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켈리가 끼어든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용서해 주시지요, 클레이브 경, 파엘 경... 제가 그를 대신해서 이렇게 용서를 빕니다. 랜스 경은 저를 구하기 위해 길리어드로 와야 했을 뿐입니다. 반란군들의 인질이 되어 있던 저는 그들의 비밀이 누출되는 즉시 죽음에 처할 위기에 놓여 있었으니까요... 그러니 잘못이 있다면 친구들을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해 자진해서 그들의 진영에 남은 제게 있는 것입니다. 부디 저를 벌하시고 그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클레이브와 칼릭, 그리고 파엘 영주의 시선이 당장 켈리에게로 쏠렸다. 그녀의 일행들 역시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처럼 랜스의 언행에 대해 화를 내고, 그리고 오면서 내내 그와 말도 하지 않았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그를 감싸는 말을 하고 있다니... 그러나 클레이브만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숨어 있는 비아냥과 질책을 알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멋지게 포장된 말로서 자신을 위험 속에 몰아넣고 랜스가 아트웰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클레이브를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러한 그녀의 비난에 대해 반박할 말을 할 새도 없었다. 클레이브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찰나, 파엘 영주는 갑자기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던 것이다. "아니, 이처럼 아름다운 아가씨를 구하러 간 것이라면 그대는 절대로 동생을 나무라서는 안 되겠소, 클레이브 경! 여자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지요. 하물며 이런 미인이라면... 내 이름을 여쭈어 봐도 되겠소, 레이디?"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파엘 경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분수가 있지,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로이 일행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감추려 들지도 않았다. 오죽하면 그들이 데리고 있는 잿빛 개까지까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그러나 금발의 여인은 클레이브의 기대보다 훨씬 먼저 침착성을 회복하고, 미소를 지으며 영주의 물음에 대답했다. "저는 켈리라고 하는 미천한 트레져 헌터(treasure hunter)입니다. 저를 레이디(Lady)라고 칭하지 마십시오, 그 호칭은 제게 어울리는 것이 아니니까요. 귀공께서 환대해 주시닌 감사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만, 랜스 경을 비롯한 제 친구들과 전설의 보물을 찾는 여행중이라 오래 머물지 못함이 안타깝군요." '저건 완전히 궁중 예법이잖아.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웠지? 정말 알 수 없는 여자라니까...' 일행의 가장 뒤에 숨듯이 서 있는 이즐레이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파엘 경은 전혀 다른 일에 놀란 것 같았다. "아니, 떠나신다고요? 랜스 경과 그 친구분들꼐서는 우리의 전투를 돕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켈리는 '또 한 방 먹었지'라고 말하는 듯 클레이브를 바라보고 미소 지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공손하고 예의를 차린 어조로 대답했다. "랜스 경께서는 미천한 저희들과 사정이 다르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그를 제외한 저희는 곧 떠나야 할 운명이랍니다. 이조넬께서 세상의 만물을 만드실 때 아스틸라께서는 제각각의 운명을 부여해 주셨으니, 각자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지요. 랜스 경도 저희와 동행하시리라는 것이 제 미천한 소견입니다만..." "물론 저도 켈리를 따라갈 겁니다." 하고 랜스가 얼른 말했다. 켈리가 자신을 옹호하는 말을 한 뒤로 그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다. 파엘 영주는 실망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는 그가 얼마나 표정을 과장되게 짓는지 흘러 넘치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거 정말 유감이로군요. 랜스 경의 실력이라면 레젠디아 대륙에서 모르는 이들이 없고, 게다가 글렌델 가의 후예와 플리에타의 딸까지..." "본인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지요." 클레이브가 딱 잘라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나 원망은 묻어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침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런 목소리 때문에 랜스는 더욱 주눅이 들어 버렸다. 그와 클레이브의 나이는 겨우 두 살 차이였으나 이럴 때마다 랜스는 그가 두 살이 아니라 스무 살은 자신보다 위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왔던 것이다. "이들에게 방을 마련해 주시겠소, 파엘 경? 이들이 여독(旅毒)을 풀 수 있는 잠자리와 음식을 대접받기를 부탁드립니다. 비록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요." 마지막 말을 던질 때 클레이브의 눈은 똑바로 랜스를 향하고 있었다. 랜스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입을 여는 것 같더니, 곧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로이는 랜스와 클레이브의 관계 때문에 무척 어색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그들은 형제라기보다는 마치 정적(政敵)처럼 보였다. 파엘 역시 어색한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다이크에게 로이 일행을 방으로 안내하라고 지시하고는 클레이브의 곁에 남았다.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며 지친 듯이 의자에 앉았다. 어깨의 상처가 쓰려 왔다. 부상을 당하고 랜스가 갑자기 나타났을 때, 그는 이제 랜스가 정신을 차리고 붙어 앉아서 자신을 도우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변한 것은 없었다. 하르크자엘이라더 니만 이제는 전설의 보물을 찾으러 간다고? "무례한 질문이라면 용서하시오... 하지만 동생분에게 너무 냉정한 것이 아니오? 클레이브 경이 부탁한다면 랜스 경은 기꺼이 남을 것이라고 생각되오만..." 부탁한다고. 랜스에게? 제발 곁에 남아서 도와 달라고 매달린다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하르크자엘이고 아버지의 원수고 포기하게 만들고, 일생동안 원망이나 하게 만드라고? 클레이브는 쓸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랜스의 도움 없이 아트웰을 무찌를 자신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랜스가 그를 돕고 싶다고, 그래서 둘만 남은 형제라도 서로 의지해서 어떻게든 해 보자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결과는 언제나처럼 랜스의 마음 속에 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언제나 아버지였고 하르크자엘이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의 자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자신의 길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오." 클레이브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짧게 말했다. 사실 랜스의 도움 다위는 필요 없었다. 국왕의 근위기사, 에스테이아 최고의 기사인 클레 이브 아덴은 어느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망나니 같은 동생이 어디로 가버리든, 옛 친구가 적이 되어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를 보내든 말든 그는 흔들릴 이유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소... 좀 앉아 보시오, 파엘 경. 아무래도 이 성 안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소." "설마 그럴 리가!" 예상대로 파엘 경은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클레이브는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다이크의 말에 의하면 성문이 열려 있었다고 했소. 누군가가 안에서 열어 준 거요." "그럼 문지기들이...?" "모르겠소. 문지기들은 죽어 있었소. 그러니 배신자들이 그들을 죽이고 문을 열어 적을 들였든지, 아니면 문지기들의 도움으로 들어온 적들이 그들을 살해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차라리 배신한 문지기들이 죽은 것이라면 이대로 끄날 수도 있겠지만, 만약 그들은 무고하고 다른 배신자가 이 성 안에 남아 있다면..." "끔찍한 일이로군요." 파엘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들을 문을 열고 성 안에 침입했다고 생각하오? 그들은 너무 쉽게 물러갔소. 물론 그대나 나를 암살하려고 시도하기도 했고,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려고도 했지만, 모든 일이 실패했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순순히 달아났소. 물론 많은 병사들을 죽이기는 했지만 그거야 전장(戰場)에 서도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그들이 도대체 뭘 원했다고 생각하시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소." 클레이브도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계속) 밤은 어수선한 만큼 빨리 지나갔다. 셀더스 성을 중심으로 진을 친 아트웰 군은 섣불리 쳐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그들도 밤의 결전으로 오늘의 몫은 다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행이라면 다행한 일이었지만. '하지만 아트웰 군은 시이드보다 훨씬 빨리 기력을 회복할 것이다. 시이드에는 별다른 마법사들이 없지만 아트웰에서는, 특히 수도 길리어드에 서는 예로부터 훌륭한 마법사들과 치유술사들이 많으니까. 마법사가 기사 만큼이나 좋은 대우를 받고 왕자조차 검술 대신 마법을 배우는 나라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랜스는 시이드의 외성(外城)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등진 채, 불안한 마음으로 햇살이 아트웰의 외성으로 비쳐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햇빛은 물론 먼저 시이드 성에 닿은 후 아트웰에 미쳤으나, 워낙 어두컴컴한 빛깔인 시이드 성은 햇빛을 받아 보아도 별로 밝아 보이지 않았다. 반면 아트웰의 희거나 밝은 회색인 성곽은 붉은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햇빛이 시이드를 비껴가 아트웰만을 비추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째서 아직까지 에스텔에서 원군이 오지 않는 걸까? 분명 파엘 영주는 여러 번 에스텔로 지원 요청의 편지를 보내다고 했는데... 왕과 그의 측근들은 아트웰을 잃고 싶어한단 말인가? 척박하고 인구조차 적은 시이드 혼자의 힘으로 한 국가나 다름없는 아트웰을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은 뻔해. 일행과 함께 여길 떠나기로 했지만, 형을 이런 위험한 곳에 남겨두고 가고 싶지는 않은데... 물론 에스테이아 최고의 기사인 클레이브의 명성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름답구나, 저 성곽..." 켈리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언제 왔는지 켈리가 그의 곁에 선 채 아트웰의 성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도 랜스와 마찬가지로 파엘 영주가 마련해 준 새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은 연한 푸른 빛의 드레스로 그녀와 썩 잘 어울렸다. 파엘 영주는 농사꾼이나 사냥꾼처럼 차린 랜스와 켈리가 성 안을 활보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워하는 랜스와는 달리 아트웰을 바라보는 켈리의 눈에는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경탄의 표정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아트웰은 흙이 검어도 돌은 흰데. 어째서 시이드는 같은 흙에서 이런 검은 돌만이 나오는지 모르겠어." 랜스가 푸념하듯 말했다. 켈리는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검은 돌이 싫어?" "좋을 리가 있어, 이렇게 성이 음침하게 되었는데." "데이미아도 같은 말을 하더군... 아니, 그 애는 '불길하다'고 했던가. 하지만 돌의 색깔만으로 성이 음침하고 불길하게 되다니, 그런 어리석은 말이 어디 있어. 이 성이 음침한 건 돌 색깔때문이 아냐. 난 북쪽에서 이것 보다 훨씬 검은, 온통 새까만 돌로만 된 찹에 올라 보았어. 하지만 그건 음침하지도 불길하지도 않았어. 고상하고 아름다웠을 뿐. 이 성이 음침한 건 빛깔 때문이 아냐." "그럼 무엇 때문인데?" "아마도... 성을 지은 사람들 때문이 아닐까 해. 이 성을 지은 사람 들은 돌 하나하나 위에 눈물과 피를 뿌렸어. 하지만 저 아트웰의 성을 지은 사람들은 돌 하나하나 위에 웃음과 노래를 뿌렸지. 그건 엄청난 거야." 켈리는 다시 낮게 웃으며 아트웰의 성들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축복을 받은 듯 밝게 빛나는 회색 돌들을. 랜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어제는... 고마웠어." "뭐가?" "널 죽일 뻔 했는데... 내 편을 들어 줬잖아. 클레이브 형 앞에서." "이해해야지 어쩌겠냐, 네 형을 보니 나도 이해가 가더라. 얼마나 짓누르는 듯한 분위기인지... 그 사람 앞에서는 보통 사람은 말도 제대로 못 하겠더라. 근위대장 클레이브가 유명하긴 해도 설마 저 정도일 줄이야." "너는 잘만 말하던데." "나야 보통 사람이 아니니까." 켈리는 씩 웃으며 말했다. 랜스는 따라 웃었으나 그녀가 클레이브에 대해 좋지 못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그녀를 위험에 몰아넣은 것을 클레이브 탓으로 돌릴 수는 없었다. 결국 모든 것은 랜스 자신의 잘못 이었으므로. "보기엔 그래도... 좋은 사람이야." "하지만 너도 꼼짝 못 하던데, 랜스? 형과 제대로 얘기 해 본 적이나 있어?" "...나는 그를 존경해." "가족간에 필요한 건 존경과 위엄이 아니라 사랑과 이해라고. 존경 같은 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거야...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켈리는 말을 쏟아놓다가, 갑자기 대충 둘러대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랜스는 궁금증이 발동했다. "네 가족은 어땠는데? 넌 부모님이나 다른 사람을 존경하지 않았어?" "우리 가족은... 그냥 평범한 몰락 귀족이었을 뿐이야. 다들 존경할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을 갖고 있는... 네가 흥미를 느낄 만한 점은 없어." 켈리는 노골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랜스는 더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다이크 경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들을 부를 때까지 그 침묵은 깨어지지 않았다. "랜스 경, 그리고 레이디 켈리... 영주님과 클레이브 경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당장요." "헤이... 얼음 대장님께서 날 부르시느구나..." 켈리는 경쾌하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본성(本城)으로 향했다. 그 말을 들은 다이크의 눈이 둥그렇게 떠졌다. "얼음 대장님... 무슨 뜻입니까?" "내 형보고 그러는 거요... 원래 농담을 좋아해서. 어서 들어갑시다." 랜스는 허겁지겁 얼버무리며 다이크를 끌다시피 하고 본성으로 발을 옮겼다. 다이크는 앞서 가는 켈리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듯 말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로군요. 분명 귀족의 자제분이겠죠? 말투와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어... 예." 랜스는 점점 난처해졌다. 아닌게 아니라 파엘 영주도 켈리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 왔지만 그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어떤 사람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하다못해 왜 그들과 여행 하는지... 파엘의 질문은 그가 얼마나 켈리를 모르는지 실감하게 해 주었을 뿐이었다. "에스텔에서는 소식이 없습니까?" 어이없게도 다이크 경이 걱정스럽게 랜스에게 물었다. 여행을 하다 왔으니 당연히 에스텔의 소식을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랜스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에스텔에 가 본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가요... 여기 병사들은 모두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시이드의 사람들이 용맹하고 끈기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살아있을 때의 이야기이겠지요. 어서 에스텔에서 도움의 손길이 뻗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몰살당하고 말 겁니다." "아... 기다려 보십시오. 에스텔은 머니까... 이제 곧 소식이 오겠지요." 랜스는 애매모호한 위로밖에 할 수 없었다. 정말이지 여기 사람들 한테는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를 못하는구나... 어제의 접견실에서 클레이브와 파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칼릭도 함께였다. 데이미아의 말이 맞았는지 그의 안색은 별로 나빠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앞에는 파엘 영주의 덕택에 좋은 옷을 차려입은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 이즐레이가 서 있었다. 이즐레이는 망토가 없는 옷 때문에 붉은 눈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고, 그래서인지 문지기들과 영주는 그를 꺼리는 기색이 분명했다. "부르셨습니까, 영주님, 그리고 근위 대장 각하?" 켈리는 지나치리만큼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클레이브는 그녀의 조롱은 다 알고 있었으므로 미간을 조금 찌푸렸으나, 파엘은 경탄의 눈빛으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칼릭마저도 갑자기 등장한 미녀에게 호기심 을 느끼는 눈치였다. '확실히... 아름답지, 켈리는.' 랜스는 간단한 인사만을 하고 들어섰다. 클레이브는 예의 건조한 말투로 본론부터 짚어나갔다. "편안한 밤 되셨는지 모르겠군요... 여러분을 이렇게 모신 것은 다시 한 번 설득을 시도하기 위해서입니다. 랜스가 여러분에 대해서 칭찬하는 것을 들었고... 레이디 데이미아와 툴위그 경의 솜씨는 제 눈으로 확인한 바입니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부탁드리옵건대, 에스텔에서 원군이 올 때까지 만이라도 시이드에 남아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만약 도와 주신다면 저도 여러분께서 찾는 전설의 보물을 찾는데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에스테이아 국왕의 근위대장으로서 부탁드립니다." 다른 일행은 모두 웅성거리며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을 한 것은, 의외로 켈리가 아닌 데이미 아였다. "죄송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째서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레이디 데이미아." 클레이브의 목소리는 전혀 화가 난 기색이 없이 차분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도 이 순간만큼은 그 못지않게 침착했다. 그녀는 갑자기 어린 소녀가 아니라 클레이브보다 더 나이들고 그만큼 더 지혜로운 여인처럼 보였다. "첫번째로 우리는 그 보물을 찾아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 보물을 찾는 것은 욕심 때문이 아니라 의무 때문이기에 한시라도 그것을 연기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로 저와 툴위그는 요정족과 난쟁이, 다른 종족인 인간끼리의 싸움에 섣불리 뛰어들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데이미아는 성을 주위를 살피듯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이 성은 불길합니다. 뭐라 분명하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만 아스틸 라는 이 성을 위해 밝은 별을 준비해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감히 조언하건대 영주님께서도 피신하심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파엘 영주는 기가 막혀서 입이 딱 벌어졌다. 난데없이 성을 버리고 피신하라니! 그러나 칼릭과 클레이브의 입가에는 옅은 조소의 빛이 떠올랐다. "별이라... 인간족은 요정족과 달라 별의 운명을 초월할 때가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데이미아는 클레이브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전이(戰時)에 불갈하다 느니 하는 말을 섣불리 꺼낸 데이미아도 물론 지나치게 경솔했지만, 클레이 브의 발언은 분명 요정족에 대한 모욕이었다. 로이는 순간 그녀가 클레이브를 한 대 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켈리가 작정했던 대로 랜스를 쳤듯이. 그러나 데이미아는 훨씬 더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다운 방법으로 응수했다. "이 별은 여느 어두운 별이 아닙니다. 저는 예언자도 아니고 점성술 역시 잘 모르지만 이 별의 한기(寒氣)는 너무 강해서 저같은 초보 마법사조차 느낄 수 있습니다. 원래 이 별은 그냥 별이었으나 눈물과 피의 강이 뿜는 독기(毒氣)가 별의 빛을 빼앗았습니다. 이 성은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뼈 위에 세워졌고 그것 때문에 불길한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시이드의 백성들은 착취받은 적이 없소!" 파엘 경이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켈리가 얼른 데이미아를 편들고 나섰다. "물론 시이드의 백성들은 착취당한 적이 없지요. 저도 그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조부(祖父)와 아버님은 훌륭하고 자상한 영주이셨지요, 파엘 경. 그러나 그 전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이 처음 세워질 때의 일을 말입니다. 세이키트 3세의 지휘하에 이 성을 세운 사람들은, 오직 한 나라를 침략하고 그 군사들을 살육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 성을 세운 사람들은, 시이드의 백성이 아니었고 엄밀히 말해 에스테이아의 백성도 아니었습니다. 노예들, 옛 로데인과 위리드, 로운, 그 밖으 멸망당한 국가와 속국(屬國)으로 전락한 국가들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이 성을 지었습니다. 아트웰의 일부가 정복당하여 새 전쟁 노예들이 생기자 그들의 혹사당해 죽은 노예들이 반틈을 메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시이드 성은 세워진 것입니다. 그들은 죽고 지금쯤 뼈조차 남아 있지 않을테지만 그들이 이 성의 밑바닥에서 죽어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들의 울음소리를 데이 미아가 듣는 것이, 그들의 증오를 느끼는 것이 이상할 까닭이 없습니다. 눈물과 피의 강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가장 오래 흐르며 범람하는 강입니다. 저라면 데이미아의 충고를 따라 이 성에서 피신하겠습니다. 그녀는 어리지만 당신들이 얕잡아 볼 상대가 아닙니다. 그녀는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의 딸이고, 그녀의 지위의 계승자 세이아 라스헨 플리에타(두 번째 숲의 마법사) 이니까요." (계속) 켈리의 거침없는 말이 끝난 후에도 접견실 안에는 한동안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말을 들은 로이의 눈에는 접견실의 벽이 더욱 더 검고 더욱 더 음침하게 보였다. 당장이라도 그 속에서 뼈만 남은 손이 튀어나와 그의 멱살을 잡아챌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리가 그 침묵을 깼다. 클레이브의 웃음소리였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레이디 켈리. 당신은 정말 대단한 재담꾼이로 군요. 한동안 이야기에 넋이 빠져 할 말을 잃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린 아이 겁주는 옛날 이야기가 이 성을 떠나는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정말로 생각하시지는 않으시겠지요? 당신들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이 성의 죄없는 사람들은 몰살당할지도 모릅니다." 마지막 말은 로이와 랜스, 그리고 툴위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러나 데이미아의 대답은 단호했다. "죄송하지만 저희들이 나선다면 아트웰의 인간들이 대신 죽게 될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 요정들에게는 아트웰의 인간들이건 에스테이아의 인간들이건 다 똑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니 전쟁을 아예 멈출 방법이 있다면 몰라도 섣불리 나서고 싶지는 않습니다." "요정족에게만 다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같은 인간들이지요." 하고 툴위그가 거들었다. "저 역시 함부로 인간들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이 말하는 반역이라거나 하는 이유는, 송구스럽게도 난쟁이인 저로서는 거의 납득할 수가 없군요." 클레이브는 잠시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미소를 짓고는 켈리와 로이, 랜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요정분과 난쟁이분의 의견은 저렇군요. 하지만 저와 같은 인간이고, 에스테이아 사람이신 분들의 의견은 물론 다르겠지요?" '그럴까...' 로이는 착찹한 마음으로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존경스러운 사람. 그의 마음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로이는 그렇지 못했다. 그가 인간족이고 에스테이아 사람이라는 말은 물론 사실이었다. 그는 또한 아클레어 3세의 무용담을 듣고 자란 소년이기도 했고 그 영웅을 위해 뭔가 해 보이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아니었다. 로이는 아트웰의 여관에서 본 소녀와 징집당한 청년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징집당한 아들과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도움을 주려 노력했던 여관의 주인 아주머니를 떠올렸다. 그들에게서 애인을, 아들을 빼앗아갈 수 있을까. 그렇게 하는 것이 용기와 충성의 증명 일까? "아무래도 우리는 팀이에요." 로이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잠시 조용해져 있던 접견실을 울렸다. 클레이브가 재미있다는 듯, 혹은 기특하다는 듯 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로이는 그의 눈에 담긴 미묘한 경멸과 일행의 눈빛에 깃든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다. "툴위그와 데이미아의 의견을 무시하고 우리들의 마음대로 남을 수는 없어요. 그들이 가면 우리도 갑니다. 물론 저도 가고요. 게다가 전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죽이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죽여야 하지 않겠나?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말이다." 클레이브가 차라리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만약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시면 - 전 별로 아는 게 많지 못하니까요 - 그럼 그런 사람들 스스로 싸우라고 해요. 그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징집하거나,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클레이브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표정에서 잠시 침착함이 사라졌으나 로이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이렇게 높은 사람 앞에서 말을 엄청나게 많이 했다는 생각에, 극도로 당황해 버렸던 것이다. 말을 하고 싶은 대로 쏟아 넣긴 했는데 막상 생각해 보니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으아아... 내가 미쳤나봐... 바보 로이! 수준에 맞게 도둑질이나 할 것이지...' 클레이브는 그들을 설득하는 일을 푸기했는지, 한숨을 쉬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는 미소를 지었는데, 어찌나 자연스러운 미소였는지 도저히 지어낸 것 같지가 않았다. "뜻은 알겠습니다... 그럼 가서 쉬시지요. 앞으로 이런 일로 폐를 끼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말에 누구보다도 안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로이였다. 그는 얼마나 안심했는지 저절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막 접견실 문을 나섰을 때에, 갑자기 네 명의 병사가 시끄럽게 소리치며 그들의 앞으로 달려왔다. 그들의 가운데는 팔을 결박당한, 흰 망토와 갑옷으로 차려입은 기사가 있었다. "영주님! 클레이브 각하! 이상한 놈이 성 그처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잡았습니다!" 하고 한 병사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로잡인 기사는 성벽이 쩌렁쩌렁 울릴 만큼 큰 소리로 소리쳤다. "이 멍청한 녀석들! 나는 드리아 영주 세드릭 경이 직접 보낸 사자 (使者)란 말이다! 얼른 풀어주지 못해!" 클레이브는 그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더럽혀졌지만 그 기사가 입고 있는 옷은 분명 세드릭이 지휘하는 성전 기사단(聖戰 騎士團)의 기사의 복장이었다. 하얀 망토에, 검은 방패 속에 그려진 백합의 문장. "그를 풀어주어라. 분명 성전 기사단의 기사, 세드릭 경의 사자가 틀림없다." 클레이브가 병사들에게 조용히 명령했다. 그러나 그 기사가 풀려나 그의 앞에 섬과 동시에, 그는 딱딱한 어조로 그 기사를 꾸짖었다. "이렇게 큰 소란을 피우며 들어오다니, 성전 기사단은 남의 성에 입장할 때의 예법조차 배우지 않는가?" 그러나 그 기사는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그는 팔을 묶고 있던 밧줄이 풀리자 오만한 태도로 망토에 묻은 먼지를 탁탁 털더니, 마치 아랫 사람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세드릭 경의 명으로 에스텔로부터 전갈을 전하러 온 성전 기사단의 오웬입니다. 근위대장 클레이브 아덴 경, 급속히 수도 에스텔로 귀환하십시오." "그 명령을 내린 자가 누구인가? 나는 어명(御命)만 받든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엄밀히 어명은 아닙니다. 그러나 왕세자 엘먼 아클레어 전하께서 내리신 명령은 폐하께서 위독하신 지금 어명에 필적하는 위력을 지닐 터." "폐하께서 위독하시다고?" 클레이브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러나 자신을 오웬이라고 밝힌 그 기사는 마치 목석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만 까딱했다. "로이히르 전투에서 큰 부상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왕세자 전하 께서는 근위대장 각하가 속히 귀환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그런...!" 파엘 경이 신음과도 같이 중얼거렸다. 클레이브는 파엘을 흘끗 보더니 오웬에게 말했다. "물론 그런 일이라면 속히 에스텔로 가야 하겠군. 그러나 보다시피 시이드는 도움이 필요한 상태요. 아트웰의 위협 앞에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 인데, 나마저도 이들을 버리고 떠날 수는 없소. 에스텔로부ㅝ군이 도착한다면 당장 시이드를 떠나 폐하께 달려가리다." "송구스러운 말씀이오나 당신에겐 선택권이 없습니다, 클레이브 경." 오웬은 비웃음을 감추려 하지도 않고 말했다. "근위대장의 임무는 이런 외지에서 반란군이나 격퇴하는 것이 아니 라, 폐하의 곁에 머물러 그 분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아실 텐데요. 당신은 자신의 임무를 잊으셨습니다, 클레이브 경. 에스텔의 귀족들이 그것에 대해 당신의 책임을 묻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어이없는 말이 어디 있단 말이오! 클레이브 님께서는 분명 폐하의 허락을 얻어..." 칼릭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를 제지했다. 당황 따위는 기대도 할 수 없는 그의 조용한 목소리가 칼릭의 말을 끊었다. "그렇다면 정말 선택의 여지가 없군. 에스텔로 가겠소." "그럼 우리 시이드는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언제 아트웰 군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 파엘은 마치 그 모든 것이 클레이브의 잘못이라도 되는 양 따지고 들었다. 클레이브는 대답하지 않은 채 눈을 돌려 랜스를 빤히 바라보았다. 랜스는 불편한 심정이 되어 시선을 내리깔았다. 클레이브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리고 그 자신도 어느 정도 그럴 의무가 있다고 느끼고 있었으나 이미 로이 일행과 행동을 같이 하기로 결정한 그 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이, 툴위그가 불쑥 말했다. "뭐, 인간들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는 않지만 잠시 출발을 늦출 수는 있겠지요. 만약 랜스가 머물고 싶어한다면 말입니다." 데이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쉬기에 좋은 곳은 아닌 것 같지만 며칠 정도라면야 뭐..." 랜스는 다른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파엘 영주에게 말했다. "형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가 이곳에 머물겠습니다. 제 친구들은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만, 저 자신은 형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야...!" 파엘 영주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클레이브도 미소를 띄고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랜스가 이 성에 도착한 이래 클레이브가 처음으로 보여 주는 따뜻한 미소였다. 그러나 오웬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요정에 난쟁이, 여자, 어린아이까지 낀 일행이었으니 우습게 보이려면 얼마든지 우습게 보일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경을 가장 건드린 것은 이즐레이였다. "저 자는 누구요? 시이드 성에는 드래크로니안까지 들어와 있는 거요?" 거침없는 말투에 파엘과 클레이브는 잠시 할 말을 일었다. 랜스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의 주위에 있던 다른 병사들, 문지기들과 오웬을 잡아들여 끌고 온 병사들의 눈에서, 아니 칼릭의 눈에서까지 공감의 표정을 읽었기 때문이다. 모두 이즐레이의 존재에 대해 의심과 불만을 갖고 있었으나, 랜스 대문에 참고 있었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랜스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얼른 그에게 말했다. "혀를 조심하시오, 오웬 경! 정말로 예의를 모르시는군. 여기 서 있는 이즐레이는 내 친한 친구이고, 드래크로이안이 아니오." 그러나 오웬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즐레이를 시이드 성 안에서 발견한 데 대해 나름대로 매우 화가 난 것 같았다. "드래크로니안이 아니라고요? 랜스 경께서 이상한 드래크로니안 잡종을 데리고 다니신다고 하더니 그 소문이 정말이로군요. 어째서 이런 자를 성 안에 들이신 겁니까? 파엘 경, 당신은 드래크로니안이 인류의 적 이라는 것도 모르십니까? 랜스 경,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의 아버님이신 리반 아덴 경께서는 시지리스의 드래크로니안을 소탕해서 이름을 날리셨는데, 당신은...!" 그러나 그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켈리가 어깨 바로 아래까지 오는 긴 장갑을 벗어, 그의 뺨을 향해 힘껏 던졌던 것이다. 그 장갑은 철썩 소리를 내며, 그의 뺨 한가운데에 붉게 부풀어 오른 자국을 남겼다. 어이가 없어 눈이 휘둥그래진 오웬을 향해 켈리가 분명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계속) 오웬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를 내지도 못하고 눈을 휘둥그 렇게 뜬 채 켈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물론 상대방의 분노를 예상하고 그런 말을 쏟은 것이었지만, 그리고 그들 일행 중 어느 누군가가 그에게 결투를 신청하리라는 예상도 했었지만, 결코 발끝까지 내리덮는 드레스를 입고 금발을 늘어뜨린 켈리는 아니었다. 그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터뜨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하하하...! 농담도 잘 하시는군요." "농담이 아닌데요. 당신의 어리석기 짝이 없는 혀에는 결투만이 약이 될 것 같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켈리는 미소까지 띄우고 아주 정중하게 대꾸했다. 오웬은 웃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가씨, 어쩌실 생각인지 모르지만 저는 성전 기사단 중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드릭 경께서 혼자 몸으로 시이드같은 위험한 지역에 믿고 보내실 정도로요. 그런 제 칼로 아가씨같이 아름다운 분께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군요." "아하! 그러세요." 켈리의 얼굴에 미묘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로이는 시이드 성에 들어 오기 전에는 그녀가 비웃는 모습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성에 들어와 여러 귀족들과 기사들과 부딪치면서 그녀는 꽤 자주 비웃는 표정을 지었고, 그것은 그녀의 얼굴에 썩 잘 어울려서 아주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표정을 만들어 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비웃는 얼굴은 상대의 신경은 매우 긁어 놓는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보기에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의 말투 또한 신경에 거슬리면서도 지나치게 정중했다. "제가 생각이 짧았군요. 물론 성전 기사단의 이름난 기사로서 여자와 싸워 진다면 당신의 명예를 크게 깍아내리는 일이겠지요.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다니,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이 자리에서 여기 있는 이즐레이, 당신이 모욕한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면,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해 드리지요." 이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을 사람은 없었다. 오웬은 당장 표정이 바뀌어 켈리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더니, 으르렁거리듯 대답했다. "좋소, 결투를 받아들이겠소. 나중에 후회하지 마시오!" 이렇게 되니 당황하는 사람은 보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파엘 영주가 가장 어쩔 줄을 모르며 켈리에게 사정하다시피 물었다. "아... 아니 레이디 켈리... 이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합심해서 아트웰을 무찔러야 할 이 때에 우리끼리 싸우자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클레이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웬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당장 에스텔로 떠나야 한다고 말한 걸로 기억하는데. 이런 우스꽝 스러운 결투를 할 시간은 있단 말이요?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에스텔로 가기나 합시다."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하고 그들을 거들고 나선 것은 의외로 이즐레이였다. 그는 할 말을 잊은 일동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은 그냥 에스텔로 가시지요. 그리고 저 역시 이 성을 떠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이런 곳에는 들어오지 말아야 했었는데, 어쩌다 동료들을 따라 들어오게 되었군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넌 입다물고 있어, 이즈!" 하고 켈리가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에서 차가운 비웃음의 표정이 걷히고 분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꼼짝 말고 서 있어. 넌 내게 고용된 몸이라는 걸 잊었어?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그리고 당신! 성전 기사단인지 뭔지 몰라도 사과도 안 하고 나한테서 도망치려는 생각 따위 버리는 게 좋아!" "내가 도망치려 한다고 생각하는 거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투는 내가 신청해야 하겠소. 갈 길이 바쁘니 당장 시작합시다!" --------------------------------------------------------------------- "도대체 너란 녀석은 이해할 수가 없구나." 이즐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켈리에게 말했다. 그녀는 파엘 영주를 설득해서 얻어낸 갑옷을 입고, 망토를 매만지는 중이었다. 은빛으로 빛나는 갑옷과 투구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제법 늠름해 보였다. "그게 고맙다는 말이야?" 켈리는 흘끗 이즐레이를 돌아보며 농담조로 말했다. "넌 정말 멍청이야, 켈리. 전혀 할 필요가 없는 싸움이라고. 난 아무 렇지도 않대도... 기분 나빴다면 내가 결투를 신청했을 거야." "너 때문이 아냐... 내가 그 녀석이 보기 싫어서 그러는 거지. 그런 녀석들은 볼기를 때려서 가르쳐야 하는데 말이야." "농담하지 말라고, 켈리!" 이즐레이가 조금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그러나 켈리는 능청스럽게도 씨익 미소를 짓더니, 투구의 개리개를 내려 얼굴을 덮어 버렸다. 그리고는 철컹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방을 나갔다. "행운이나 빌어 줘, 이즈!" "저 바보가...!" 이즐레이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옷을 잡아당기는 손이 있었다. 툴위그였다. "그만 두게. 저 아이가 화를 내면 누구도 말리지 못해." 그는 포기했다는 듯 미소지으며 이즐레이를 타일렀다. 마치 켈리를 키운 친아버지나 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이즐레이는 대답 없이 켈리가 나간 쪽을 바라보더닌 한숨을 푹 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켈리를 많이 아시나요?" "3년동안 함께 다녔으니 안다면 아는 거겠지." "성전 기사단의 기사와 사울 만한 실력이 됩니까?" "그건 자네도 잘 알고 있을텐데." "그렇지 않아요. 이건 기사 대 기사의 결투입니다. 실전과는 달라요. 만약 켈리가 특별히 결투를 하기 위해 교육받지 않았다면..." "그렇지 않다면 어쩔 건가? 그 애를 말릴 수 없대도." "제가 대신 싸워야죠. 결국 저 때문에 이지경이 된 거 아닙니까." 이즐레이의 대답에 툴위그는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소용 없어. 그 애는 자기가 싸운다면 자기가 싸울 걸세." "...역시 이 성에 들어오지 않는 건데 그랬습니다." 이즐레이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툴위그는 눈을 조금 치켜떴다. "어째서? 켈리에게 고용되었다면서?" "저도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도와달라기에 그냥 충동적 으로 승낙한 건데... 역시 제게는 밝은 곳이나 얼굴을 드러내고 다녀야 하는 곳은 어울리지 않는군요. 어둠, 뒷골목, 비밀 통로가 제게 어울리는 곳입니다. 켈리의 부탁을 거절할 걸 그랬습니다..." "이봐, 이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툴위그는 소리내어 웃으며 이즐레이의 어깨를 쳤다. "그러지 말고 나가서 구경이나 합세. 켈리가 일을 크게 내지나 말았 으면 좋겠는데..." 결투는 성의 앞마당에서 벌어졌다. 구경꾼이라고는 클레이브와 칼릭, 영주와 그 부관, 로이 일행,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병사들 뿐이었다. 그러나 성을 수비하느라 구경을 나오지 못한 꽤 많은 병사들도 귀에서 귀로 전해진 그들의 결투의 소식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전쟁 도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두 이방인의 결투인데다, 한 명은 젊고 아름다운 여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부상을 당한 병사들조차 호기심에 구경을 나올 정도였다. "켈리좀 봐, 꽤 근사한데..." 앞자리에 앉은 로이가 흥분한 어조로 데이미아에게 말했다. 진짜 결투를 구경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미아는 별 관심이 없는 듯,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펠히스의 털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랜스의 시선은 켈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 말 위에 앉은 모습, 오웬과 인사를 나누는 태도... 결투를 하는 법을 알고 있는 거야, 켈리는... 하지만 도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누구에게? 도대체 켈르는 어떤 것들을 또 알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의 생각은 곧 함성 속에 묻혀 버렸다. 시이드의 문장인 그리폰이 그려진 붉은 망토를 두른 켈리와, 흰 백합의 망토를 두른 오웬이 각각 반대편에 가서 마주보고 섰고, 결투의 시작을 알리는 깃발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오웬은 자신의 백마를 다그쳐 몰아 켈리에게로 향했다. 켈리 역시 머뭇거림 없는 태도로, 그리고 또한 그만큼 능숙한 태도로 적을 향해 말을 몰았다. 둘의 창은 햇빛을 날카롭게 반사하며, 서로에게 겨누어져 있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서로의 방패와 창이 부딪쳤다. 방패는 창을 퉁겨내었고, 켈리와 오웬은 비틀거리며 균형을 잡은 채 서로를 비껴지나가 자리를 바꾸었다. 그러나 쉴 새도 없이 자세를 바로잡고, 창을 더욱 단단히 잡고는, 또다시 서로를 향해 말을 달렸다. 켈리의 창은 이번에도 오웬의 방패 한가운데를 맞추었다. 그러나 오웬의 겨냥은 켈리처럼 정확하지 못했다. 그의 창은 조금 윗쪽을 향하고 있었고, 켈리가 조금 고개를 숙이자 그의 창은 허공만을 내질렀던 것이다. 방패에 부딪치는 창의 충격에 오웬은 몸의 균형을 잃고 땅에 떨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함성이 구경꾼들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클레이브는 얼굴을 찌푸린 채 둘의 결투 장면을 지켜 보고 있었다. '저 여자, 결투를 해 본 솜씨야. 칼을 다룰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지만... 저 정도라고는...' 로이만이 신이 나서 손을 흔든다 팔짝팔짝 뛴다 난리를 치며 고함을 질러 대고 있었다. "켈리 잘한다! 멋지다! 아예 밟아 버려요!" 아닌게 아니라 켈리는 말에서 가볍게 뛰어내려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고, 아직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오웬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오웬은 간신히 일어섰으나, 켈리의 검은 그가 공격할 새를 주지 않고 그를 내리쳤다. 방패를 잃은 오웬은 자신의 검으로 켈리의 공격을 막았으나, 그 충격때문에 간신히 잡은 균형을 다시 잃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켈리는 그 기회를 타 그의 무기를 빼앗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지 않고, 대신 정중하게 물었다. "아무래도 저의 승리인 것 같군요. 패배를 인정하시지요, 오웬 경?" "말도 안 되는 소리!" 켈리의 말에 격분한 오웬은 벌떡 일어나 칼을 휘두르며 그녀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의 칼은 굳게 든 켈리의 방패에 튕겨져나갔고, 그는 다시 충격에 비틀거렸다. 켈리는 마치 제자의 공격을 기다리는 선생처럼, 여유있게 방패를 잡은 채 그가 다시 공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놀리고 있군요." 하고 파엘 영주가 감탄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의 감탄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오웬은 몇 번의 공갹이 실패로 돌아가자 완전히 흥분하여, 있는 힘을 다해 두꺼운 칼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젠 봐주지 않는다! 죽어라!" 그의 공격은 완력이 넘쳤고 켈리는 방패를 놓쳤다. 자신을 얻은 오웬은 더욱 힘을 주어 그녀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켈리가 더 빨랐다. 그보다 키가 작은 켈리는 고개를 숙임으로써 그의 공격을 쉽게 피해 낼 수 있었고, 그가 미처 자세를 바로 하기 전에 그녀의 칼이 그를 향해 날랐다. "윽!" 오웬의 비명이 구경꾼들의 귀를 울렸다. 켈리의 칼을 오웬의 가슴 이나 배를 찌른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칼은 그의 오른팔 부분에 박혀 있었다. 두꺼운 갑옷 덕분에 피는 별로 흐르지 않았지만, 팔이 밖으로 굽은 모습은 멸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구경하던 이들은 다들 숨을 죽인 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 로이 일행을 빼고는. 파엘 영주는 얼른 일어나 결투의 결말을 고했다. "결투는 끝났소. 레이디 켈리의 우승을 밝힙니다." (계속) "만세! 켈리 최고야!" 로이는 펄쩍 뛰어오르며 소리쳤다. 그러나 구경꾼들 중 그렇게 소리친 사람은 로이 뿐이었다. 켈리는 득의양양하게 투구를 벗어, 놀라서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구경꾼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제서야 그들 사이에서는 승자를 위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팔이 부러지셨군요. 죄송합니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켈리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쓰러져 있는 오웬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웬은 한참 그 손을 들여다 보고, 다시 켈리의 얼굴을 보더니, 혼자서 벌떡 일어나 가버렸다. 승자의 미소를 띄고 그를 바라보는 켈리에게 로이가 달려와 매달렸다. "멋있어요, 켈리!" 그의 뒤를 따라 툴위그도 걸어왔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로이와는 달리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팔까지 부러뜨릴 건 없었어, 켈리." "왜 그래요, 툴위그? 설마 내가 일부러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켈리는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툴위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아니란 말이냐? 켈리, 넌 아직도 너무 경솔해. 감정을 자제할 줄 몰라! 넌 이런 구경이나 벌이러 여행하는 광대가 아니라는 걸 잊었느냐?" 그러나 툴위그의 말에 켈리는 낮은 웃음소리를 보냈을 뿐이었다. 그녀는 로이에게 투구를 넘겨 주고는, 여유있는 걸음으로 본성(本城)을 향해 걸음을 ㅇ겼다. 툴위그는 계속 찌푸린 표정으로 그 자리에 남아, 승리를 축하하는 구경꾼들이 그녀의 주위로 몰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멋진 실력이더군요, 레이디 켈리." 클레이브가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경탄에 차 있었다. 켈리는 기분좋게 그의 악수를 받아들였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하하하... 누구나 성전 기사단(聖戰 騎士團)의 기사의 팔을 부러뜨릴 만한 운을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니지요. 당신이 전장(戰場)에 나와 주신다면 마음 놓고 에스텔로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또 그 얘기인가요? 그건 이미 끝난 걸로 아는데." 켈리는 여전히 유쾌한 어조로, 그러나 딱 잘라 말했다. "몇 번 물어도 저는 아트웰 군과 싸울 마음이 없어요. 하지만 이것 만은 말씀드리죠. 그들이 랜스를 해치려 한다면 난 대항해서 싸울 거에요. 지금 이즐레이를 위해 싸웠듯이. 그러니 당신이 랜스를 걱정하는 거라면 마음 놓으셔도 좋아요. 얼마든지 그를 위해 싸워 드릴테니까요. ...적어도 아트웰 군사들에 대항해서는." --------------------------------------------------------------------- 클레이브가 칼릭과 함께 시이드 성을 떠난 것은 바로 그 날 저녁 이었다. 그는 배웅조차 받지 않고 조용히, 파엘과 랜스 일행에게만 인사를 남긴 채 조용히 떠났다. 자신이 시이드를 뜬다는 것을 아트웰 군에게 광고해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오웬은 물론 자신이 그를 데려가야 한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부러진 팔로 말의 고삐를 잡을 수는 없었기에 남아 있어야 했다. 그가 파엘에게서 클레이브와 칼릭이 이미 떠났다는 말을 듣고 노발대발 하는 모습은 정말 가관이었으므로, 로이와 켈리는 그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데이미아는 사람이 다쳤는데 어떻게 웃을 수가 있냐고 화를 냈지만, 그들의 웃음을 멈추게 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켈리, 툴위그 말이 맞는 거죠?" "응?" "그럴 필요 없었는데... 일부러 그 사람 팔을 부러뜨린 거죠?" "좋을 대로 생각해... 하지만 팔 부러질 짓 했잖아. 이제 좀 말을 가려서 하게 될 테니, 저 친구도 나이들면 내게 감사하게 될 걸." "그걸 말이라고 해요?" "이봐, 이봐, 데이미아, 그렇게 열내지 말라고... 꽉 막힌 노인네처럼 왜그래? 팔 좀 부러졌다고 사람 죽는 것도 아니고, 곧 치료된다며." "으휴... 난 몰라요!" 데이미아는 화를 내며 쿵쾅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가 버렸다. 로이와 켈리는 머쓱해져서 그런 데이미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화났나본데... 내가 그렇게 잘못했니?" 켈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로이에게 물었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데이미아가 요즘 좀 민감해진 것 같아요. 짜증도 잘 내고, 몸도 안 좋은 것 같고... 이 성이 불길하다고 하더니 혹시 그것 때문일까요?" 켈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 확실히 요정들은 우리 인간들이 못 느끼는 걸 느끼고, 저 애는 보통 요정이 아니라 엘미어의 계승자에다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 의 친딸이니... 역시 이 성을 빨리 떠날 걸 그랬나. 정말 여러 모로 마음에 안 드는 곳이야." "뭐... 그 정도는 아닐 거에요. 제가 가서 말좀 해 보고 올께요." 로이는 켈리를 안심시키려는 듯, 밝게 웃어 보이고는 데이미아가 가버린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그리 멀리 가지 않은 채,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복도에 서 있었다. 그 복도는 시이드 성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길고 커다란 창이 많은 곳으로, 저녁때면 그 창을 통해 햇빛이 비쳐들었다. 그리고 지금 데이미아는 그 창에서 쏟아지는 금빛 햇빛을 받으며 서 있었다. 그녀의 하얀 옷과 그보 다도 더 흰 살결이 금빛으로 물들었고, 그 모습이 그녀를 왠지 인간과는 거리가 먼 존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일지 몰라도 로이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어색하게 보였다. 평소에는 그녀가 귀만 약간 뾰족하고 목소리에 요정 특유의 울림이 있을 뿐, 자기 자신이나 켈리, 랜스와 거의 다를 바 없는 존재라고 느껴 왔었기 때문이다. "데이미아... 화났니?" 로이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며 약간 겁을 먹은 목소리로 물었다. 데이미아가 대답이 없자, 로이는 한층 더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미안해. 네가 그렇게 화를 낼 죽 몰랐어. 우린 그냥..." "아니... 그것 때문에 화난 게 아니야, 로이." 이윽고 데이미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평상시의 목소리와는 달리, 왠지 어두운 현명함이 깃든 목소리같이 들렸으므로 로이는 오히려 더 기가 죽었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그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로이... 여기는 불길한 곳이야. 그리고 아스틸라는 모든 이들의 별을 위험한 소용돌이로 몰아 가고 있어... 켈리는 단지 그 사람의 팔을 부러뜨렸을 뿐이지만, 그리고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몰라. 별들이 이처럼 위험한 무도(舞蹈)에 휘말려들 때에는 발을 걸어 넘어뜨려 했던 사람도 칼 위에 넘어져 죽을지 모르는데..." "설마." 로이는 간신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한마디 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불길한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로이, 뭔가 이상하지 않아? 오르크들이 우리에게서 이디실과 엘미 어를 가져갔어. 그리고 그들은 그것들을 미리 빼앗은 카자룬과 힐리온과 함께 두었겠지. 그래, 다시 말해서... 로크 페울로니는 이미 다 모아진 거야. 그리고 그 순간부터 아트웰은 내전을 일으키기 시작한 거고... 로크 페울로니 기레인 헤이스, 알 샤이드리엔 베이 제이에니엔 (네 개의 열쇠는 서로를 끌어당길지니, 그것은 평화의 시작 혹은 재앙의 도래일지라)! 로크 페울로니가 가져올 수 있는 것은 평화뿐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로이. 그들은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어. 드래크로니안들이 처음 그것을 가져왔을 때, 그들은 오르크와 다른 어둠의 종족들을 몰아내고 평화를 가져다 주었지. 그러나 그들이 그 다음에 한 일은 인간들끼리의 싸움을 부추 기는 것이었어." "그럼... 로크 페울로니가 가져오는 것은 결국 전쟁과 재앙이라는 거야? 그러니 그것을 모으지 말아야 한다... 그 말이야?" 로이는 얼굴이 새파래져서 물었다.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로크 페울로니가 정말 모두 모였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나도 예측할 수 없어. 그것들은 아직 완전히 모인 게 아냐. 그것들의 힘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주인들이 없으니... 그러나 재앙과 평화는 동전의 양면이지. 어둠의 생물들을 몰아낼 때 요정과 난쟁이는 혐력했고 인간들은 서로 단결했어. 그러나 그 기나긴 전쟁이 끝나자 인간들은 서로 싸우기 시작했고 난쟁이와 요정들은 서로 미워했지. 이렇게 인간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면, 그것을 보고 만족스런 웃음을 짓는 자가 있을거야. 그럼 그것은 인간들에게는 재앙 일지라도 그들에겐 평화와 축복의 나날이겠지." "오르크들을 말하는 거야?" "글쎄... 오르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누군가 인간을 더 미워하는 자일 수도 있고..." 데이미아는 몸을 떨었다. "그리고 여긴 이런 위험한 시기에 머물기에 적당한 장소가 아냐... 저 아래, 지하실에서는 아직도 채찍과 혹사에 시달리는 노예들의 울음이 들려. 왜 파엘 영주는 여길 떠나려 하지 않는 거지?" "글쎄... 도망친다고 생각할까봐 그러는가 보지." 로이는 자신없이 말했다. 데이미아가 이 성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이 성이 누구라도 좋아할 수 없는 음침하고 기분나쁜 성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길하고 위험한 장소라니... 이 성은 전설의 요새 옛 로데인의 라벤데일 성 다음 가는 안전한 성이라고 켈리가 말하지 않았던가. 어둠이 찾아들고, 한 하인이 복도를 걸어가면서 횃불을 켰다. 멀리 외성벽(外城壁) 너머로 아트웰의 하얀 성이 보였다. 데이미아가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내가 스트라본을 꽤 다치게 했는데... 회복되었을까, 지금쯤?" "글쎄... 아마 그렇겠지. 랜스 말로는 길리어드엔 유명한 치유술사가 넘쳐난다니까. 그 사람이 걱정되니?"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는 나쁜 사람이 아냐... 너무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빼앗겨서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된, 불쌍한 장님일 뿐이지. 제이룬이 그랬던 것처럼... 요즘 꿈에 가끔 제이룬 오빠가 보여." 로이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이순간, 데이미아는 켈리나 랜스조차 감당 못할 만큼 낯선 지혜에 가득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물며 아무것도 모르는 로이 자신이야. 돕고는 싶었지만 그런 그가 무슨 조언을 해 줄 수 있겠는가. '가만, 가만... 기죽지 말라고, 로이! 넌 의적 로이면 되는거야. 그러니 켈리나 랜스나 데이미아 따라 할 생각 말고, 너다운 대책을 내 보라고!' "데이미아, 우리 지하실에 내려가 볼까?" "뭐?" 데이미아가 어이없다는 눈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이의 표정을 기대와 확신에 차 있었다. "그래, 저녁 먹고 지하실에 내려가 보자! 이 성의 지하실이 얼마나 잘났는지 모르지만, 제까짓게 기껏해야 쥐나 키우는 지하실이지 별 수 있어? 보나마나 다른 성의 지하실이랑 똑같을걸. 그러니까 눈으로 확인해 보자 이거야. 그럼 너도 엉뚱한 걱정 안 해도 되고, 좋잖아." (계속) 깨어나라, 아트웰의 용사들이여! 기다림의 시간은 끝났다. 창을 들어라! 말을 달려라, 어두운 적진 속으로! 돌과 같은 기다림, 오랜 굴욕, 그 모든 것의 종말이 왔나니, 대(代)를 거쳐 기다려 온 전쟁, 수십년동안 잠들었던 투지(鬪志), 그 모든 것이 우리의 몫! 깨어나라, 아트웰의 용사들이여! 적의 피로 붉게 물든 명예를 위해 칼을 들어라! 말을 달려라! 아트웰의 흰 성벽에도 어둠이 내리깔리고 있었으나, 이상하게도 병사들의 노랫소리는 하늘을 찔렀다. 달도 별도 없이 암흑만이 지배하는 밤이었으나, 어둠은 그들에게 두려움보다는 투지(鬪志)와 살의만을 높여 주는 것 같았다. 이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지도 두려움에 떨지도 않은 채 이처럼 소리높여 전투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을 보았다면,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오히려 더욱 생명을 얻은 듯 모닥불을 반사하여 뜨거운 빛을 발하는 그들의 칼날과 창날과 방패를 보았다면, 모르는 사람은 그들이 인간이 아닌, 어둠을 친구로 삼은 오르크나 그에 상등하는 종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었다. 사일러스는 성벽 꼭대기에 오른 채 자신의 부하들이 전투의 충동을 이기지 못한 채 소리높여 부르는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의 갑옷은 이 어두운 밤의 유일한 항성(恒星)처럼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의 머리칼은 한 발 먼저 어둠 속으로 뛰쳐나온 햇살같이 빛을 발하며 밤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 휘날렸다. 성벽 위에 선 채 거무스름한 시이드 성을 주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위엄이 있어서, 그의 머리 위에서 휘날리는 깃발 속의 왕관을 쓴 독수리조차 무색해질 것 같았다. 9 레일라는 가만히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사일러스와 스트라본, 용맹한 발톱을 지닌 독수리와 멀리 보는 눈과 영리한 머리를 가진 매. 이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형제가, 그리고 전우(戰友)가 어디 있을까. '확실히 이조넬께서는 만인에게 평등한 자식복을 내려 주시지 않은 모양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레일라는 피식 웃었다. 에스테이아 국왕 아클레어 3세의 아들이자, 왕세자인 엘먼 아클레어에 대한 소문이 머리를 스쳐 갔기 때문이다. 소문에 의해서만, 그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소문에 의해서만 백성 들에게 알려진 왕세자. 그는 한 번도 전쟁터에 모습을 비친 적이 없다고 했다. '에스테이아는 이미 졌어.' 레일라는 미소를 지우고 사일러스의 앞으로 나아갔으나,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승리의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일러스 폐하, 길리어드로부터 스트라본 전하가 오셨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사일러스는 국왕 폐하라고 불리고 있었다. 아트웰의 국왕 폐하, 에스테이아의 왕과 대등한 존재. 젊은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자시 걱정의 표정이 스쳤다. "스트라본의 건강은 어떠한가. '계획'을 실행할 수 있을 만 한가?" "걱정 마십시오. 완치되신 지 며칠이 지났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그 분은 아트웰 최고의 마법사, 아니 레젠디아 최고의 마법사. 무엇이 걱정 이십니까?" 레일라는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말했다. 그녀도 사실 스트라본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작은 요정 소녀,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의 딸이라는 그 아이의 공격을 받은 이래 스트라본은 말 그대로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러나 그가 일단 전장으로 나오기로 결정했다면, 그런 걱정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돌아가라 한다 해서 들을 사람도 아니니... 레일라의 말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위안처럼, 그녀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불안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 안심을 얻은 사람은 그녀 자신 뿐이 아니었다. "좋아...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믿겠네. 세상 어느 누구가 자네보다 그 아이를 더 잘 알겠나. 스트라본더러 이리로 오라고 해."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레일라는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짓고는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역시 레일라는 스트라본의 곁에 있는 게 어울려...' 사일러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혼자 조용히 웃었다. 그녀가 처음에 자신을 따라 셀더스로 오겠다고 했을 때, 사일러스는 당황했었다. 물론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를 떠나 수도에 남는 것 보다는 최전선에서 싸우고 싶은 것이 기사의 마음이겠지만, 레일라가 스트라본을 길리어드에 두고 셀더스에 가고 싶어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게 들렸다. 곧 그 의문이 풀리기는 했지만... "레일라가 형의 아우가 되어 줄 거야. 그녀가 내 대신 형을 위해 싸워 줄거야. 그녀가 형을 위해 검과 방패를 들 때, 그게 내 검과 방패라고 생각해 줘..." 그러나 그러한 스트라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레일라가 내내 불안해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긴, 스트라본의 곁을 떠나 본 일이 없으니 그럴 만도 할 테지. 더구나 그녀가 길리어드 남겨두고 온 스트라본은 병석에 누워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스트라본까지 셀더스에 도착한 지금, 그녀의 모습은 어느 기사보다도 자신에 차 보였다. 성벽의 어두운 계단 속에서 스트라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새하얀 망토를 입고 그 위에 사일러스의 것과 꼭 같은 금발을 흩날리고 있었다. '계획'에 대한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이 생각보다 건강해 보였다. "오래간만이야, 사일러스 형." 스트라본은 사일러스의 앞에 서서, 은(銀) 지팡이를 레일라에게 넘겨주고 포옹해 왔다. 사일러스도 기꺼이 한참만에 보는 동생을 껴안았다. "건강해 보이는구나." "하하... 조용한 길리어드에서 먹고 자고 있었으니 당연하지. 그러는 형도 좋아 보이는데. 이제 당당한 아트웰의 왕이야." "왕관의 반쪽은 네 몫이란다, 스트라본." "나는 왕관의 그림자로 만족해." 이렇게 말하며 스트라본은 그 특유의 어린 소년같은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의 천진난만한 표정과는 거리가 먼 것 이었다. "형은 지나치게 순수해서 말이야... 사물에 빛과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안 믿지. 그래서 내가 그림자가 되어 주고 싶은 거야. 하지만... 전장에 있다 보니 많이 변한 것 같아. 솔직히 형의 내 계획에 찬성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 기사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니까..." "쉽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놔두고 병사들을 희생시키는 건 왕의 도리가 아닐 거다. 난 이제 일개 속국(屬國) 출신의 기사가 아니니까... 그래서 실망한거냐, 스트라본?" "전혀." 스트라본은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자랑스러운 걸... 그리고 이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형이 기사로써 싸울 기회는 남아 있을테니, 걱정하지 말아. 그럼 시작해 볼까... 형이 말한 탑이 어디지?" 사일러스는 조용히 손을 들어 그들의 곁에 선, 시이드 성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높은 탑을 가리켰다. 순백색의 돌로 지어져 어두운 밤에도 그 벽이 백회색으로 은은히 빛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법사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너를 기다리고 있다, 스트라본." 스트라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서 소년의 미소가 사라지고, 그 대신 차갑도록 침착한 표정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냉혹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이제 '흑마술사 스트라본'이 활동할 시간이군... 아주 좋아, 달도 없이 무든 것이 암흑... 그리고 저 불길한 성... 모닥불을 꺼 줘. 어두울수록 좋으니까. 그리고 형과 레일라는 준비를 하도록 해. 알고 있지? 시간이 생명이야." 사일러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외성을 내려갔다. 그러나 레일라는 지팡이를 스트라본에게 넘겨준 다음에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난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애원했다. "전하, 저는 전하의 곁에 남겠습니다." "안 될 말이야, 레일라. 내 대신 형을 지켜 주기로 약속했잖아? 스트라본 왕자가 만약 몸이 약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형의 곁에서 싸웠을 거야. 그렇지 않나? 그러니 네가 대신 그 역할을 해 줘." "그러나 전하! 여기는 최전선입니다." 레일라가 고집을 부리자, 스트라본은 다시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그들이 여기까지 쳐들어올 능력은 없어. 그리고 나는 이곳 에서 한 발짝도 떼지 않을테니... 안심해. 나의 검, 나의 방패, 나의 용감한 여전사(女戰士) 레일라... 내 걱정은 말고 내 대신 싸워 줘." 레일라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어 복종의 뜻을 표했다. 스트라본은 장갑을 벗어 그녀의 앞에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그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출 때, 그는 간신히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스틸라께서 너를 돕기를, 그리고 이조넬께서 네게 자비를 베풀기 를 기원하겠다. 나의 아름다운 검이여..." 순간 레일라는 당황했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놀라 쳐다보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슬쩍 미소만을 짓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 탑으로 향했 다. 레일라 역시 얼른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문을 향해 황망히 달려갔다. 모닥불은 점점 어두워졌고 스트라본이 탑 꼭대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다 거진 후였다. 창백한 빛을 발하는 촛불들이 어두컴컴한 탑 안을 밝히고 있었다. 장식도 주술에서 흔히 필요로 하는 부적도 없는 방 안에는 돌바닥에 푸르스름한 빛을 발하는 정육각형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었고, 그 중앙에는 그것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또 하나의 정육각형이 그려져 있었다. 작은 정육각형의 꼭지점 위에는 각각 은촛대에서 초가 타오르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붉은 빛이 아닌, 유령같이 옅푸르게 빛나는 빛을 내고 있었다. 그 냄새도 마치 취할 것처럼 향기로우면서도 독했다. 그 중앙에는 거대한 촛대 위에 셀 수없이 많은 촛불들이, 그런 이상한 빛과 향을 뿜으며 타고 있었다. 그 방 안, 일곱 개의 촛대를 둘러싸고, 소매가 넓고 발끝까지 끌리는 새까만 옷을 입은 마법사 다섯 명이 스트라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옷에 달린 검은 모자를 얼굴 깊이 눌러쓰고 있었으므로, 누가 누구인지 전혀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스트라본이 문앞에 다다르자, 가장 가가운 곳에 서 있던 마법사 두 명이 얼른 다가와 그의 망토를 벗겨 내었다. 하얗디 하얀 망토 안에 스트라본은 그들과 같은 새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검은 모자가 달리지 않았다는 것만이 달랐다. 스트라본이 큰 정육각형의 한 모퉁이에 서자, 다른 마법사들도 모두 그처럼 각각 한 꼭지점 위에 발을 디디고 섰다. 그들 모두 마치 저승과 이승 의 경계에 발을 딛고 선 자처럼, 보통 사람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이상한 분위기가 풍겼다. 그들의 움직임은 나른하고 미끌어지는 듯 했고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아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스트라본처럼 강렬한 마기(魔氣)를 발산하고 있지는 않았다. 금빛 머리칼을 어깨까지 풀어헤친 채, 은빛으로 빛나는 지팡 이를 손에 쥐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선 그의 모습은, 마치 마법사 중의 제왕 과도 같았다. 그는 수많은 촛불들처럼 자신의 마력을 활활 불태우고 있었고, 그래서 신을 속이고 나중에는 형벌이 된 불사(不死)의 기쁨을 누렸다는 흑마술사 라메데스처럼 위험스럽고도 매혹적으로 보였다. "샤나, 어둠의 총애를 받는 나의 누이여. 그대는 시이드의 성에 들어갔었나?" 스트라본이 놀랄 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음침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사일러스나 레일라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그의 목소리라는 것을 부정했을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샤나도 그에 못지 않게 어둠에 싸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 스트라본, 어둠의 힘의 수호자시여, 저는 시이드 성으로 들어 갔습니다. 고통받는 영혼들의 울음소리를 좇아, 시이드의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습니다." "그대는 내가 말한 대로 했는가?" "예, 어둠의 힘의 수호자시여, 맹세코 그대의 말씀대로 따랐습니다. 원한의 사슬로 발이 묶여 페레이타의 땅에 가지 못한 영혼들을 달래고, 그들의 힘을 돋울 선물을 주었습니다." "영혼들이 기뻐하던가, 그들이 우리의 명령에 따르리라 하던가?" "제 영혼의 빛과 어둠에 걸고, 그들의 영혼은 이제 당신의 것입니다, 어둠의 힘의 수호자시여..." "수고했다, 샤나." 스트라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준비는 끝났으니, 이제 시작하자. 우리에게는 승리를, 그들에게는 해방을 가져다 줄 일을..."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다섯 마법사들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문이라기보다는 신경을 거스르는 리듬에 맞추어 낮게 콧노래를 부르는 것에 가까웠다. 그들의 노래에 따라 촛불은 푸른 빛을 띄기도, 붉은 빛을 띄기도 하며 그 빛이 변해 갔다. 그러나 그렇게 변하면서 도, 붉고 따뜻한 빛을 띄는 간격은 점점 줄어들고 푸르고 창백한 빛을 띄는 간격이 점점 늘어나, 이윽고 푸르다고도 할 수 없고 희다고도 할 수 없는 반투명한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빛이 너무나 차가워서 만지면 손을 데지 않고, 오히려 손이 얼어붙을 것처럼 느껴졌다. 스트라본이 그 촛불과 비슷한, 아니 더 차가운 빛깔로 빛나는 지팡 이를 쳐든 채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조용하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주문을 읊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오 고통의 영혼들이여, 원한의 쇠사슬에 감긴 채 눈물과 피의 바다에 가라앉은 영혼들이여, 죽음보다도 더 강한 염원을 안고 사랑보다도 더 영원한 증오를 안고 부름을 기다리는 죽은 자들이여, 내 말을 들어라. 오직 나만이 너희의 원한을 풀 수 있으니, 오직 나만이 그 복수를 이룰 수 있으니, 너희들의 상처가 아직 너희를 괴롭힌다면, 너희들의 굴욕이 아직 너희의 마음을 짓누른다면, 내 말을 들어라. 바위와 같은 잠에서 깨어나 길고 어리석은 인내에서 풀려나 내 말을 들어라..." (계속) "지하실에 들어간다고? 아니, 왜?" 지하실을 구경하고 싶다는 로이의 요구에, 파엘 영주의 부관 다이크 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은 얼굴로 물었다. 데이미아는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이 부끄러워서, 그리고 자신의 두려움을 들켰을까 걱정되어 얼굴을 붉히며 로이 의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로이는 당당하게, 어린아이의 호기심이 가득한 얼굴로 계속 졸라댔다. "이런 큰 성은 몇 번 못 와봤단 말예요. 전설에서는 성의 지하실엔 죄수들도 있고 보물들도 있고 유령들도 있고 그러던데... 저도 한 번 보고 싶어요." "맙소사. 유감이지만 우리 성엔 그 중 어느 하나도 없는데?" 다이크 경은 귀엽다는 듯이 키득거리며 대답했다. 그래도 로이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요... 하여튼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하려고요." "미안하지만, 요즘은 전쟁 중인데다 지하실엔 무기고가 있어서 아무도 들어갈 수 없어." "에이... 제가 설마 무기 가지고 장난칠까봐서요? 그러지 말고 잠깐만 ㄲ하게 해 주세요. 네?" "글쎄, 나도 보여주고 싶지만,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게 영주님의 명령이어서... 미안하다. 그 대신 탑은 어때? 남쪽 탑은 이 근방에서 가장 높은 탑인데..." "윽... 탑이라면 이제 질렸어요." "응?" "아, 아녜요. 그럼 다른 데나 구경하죠, 뭐." 로이는 얼른 얼버무리고는 허겁지겁 도망치듯 걸어갔다. 데이미아도 얼른 그의 뒤를 따랐다. "역시 못 들어가게 하는군.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지만..." 한참을 걸어 아무도 없는 복도에 다다르자, 로이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데이미아는 얼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야아, 괜찮아, 로이. 난 이제 정말 하나도 안 무서워. 지하실 같은 데 들어갈 필요 없다고..." "거짓말." 로이가 그녀의 앞에서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하지만 걱정 마. 내가 못 들어가게 한다고 못 들어갈 사람이냐? 천하의 의적 로이 아니겠어. 이 정도야..." 로이는 씨익 웃으며 소매에서 조금 녹이 슨 쇠열쇠 너댓 개가 달려 있는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데이미아가 아직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자, 그는 자랑스럽게 그것을 짤랑짤랑 흔들며 말했다. "흐흠... 그러니까 이게 뭐냐하면... 아까 하젠이 가지고 있던 열쇠야. 분명 이 중에 지하실 열쇠도 있을 걸. 내가 전에 그 사람이 문을 여는 걸 봤으니까..." "뭐... 뭐야? 로이 너 미쳤니?" 데이미아는 황당해서 소리를 빽 지르며 로이의 멱살을 잡았다. "캑캑... 데이미아... 왜 그래?" "왜 그러냐고? 내 참! 그거 어서 갖다놔!" "쉿! 조용히! 남들이 듣는다고! 그러고 이것 좀 놓고 얘기하면..." "그거 갖다 놀 거야?" "응... 그래." 로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 데이미아는 비로소 그의 멱살을 놓았다. 그러자 로이는 금방 표정이 돌변하여,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먼저 지하실에 들어가 보고, 그 다음에 갖다줄 거야. 그래도 돌려주는 건 돌려주는 거 맞지?" "뭐야? 너!" 데이미아는 발끈 성을 내며 로이를 쥐어박으려고 손을 뻗었으나, 이번에는 로이가 더 빨랐다. "데이미아, 데이미아, 그러지 말고... 네게도 책임이 있다고." "무슨 소리야?" "너하고 켈리가 자꾸 지하실이니 귀신이니 그러니까 내가 더 궁금해 지잖아. 난 처음에는 지하실 따위엔 관심 없었는데, 이제는 기필코 이 성 지하실이 어떻게 생겼나 구경을 해야겠다고." 데이미아는 한숨을 푹 쉬며 입을 다물어 버렸다. 세상에, 이게 자기와 켈리의 말 때문이라니. 하지만 그녀도 지하실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가고 싶은 마음'은 아니었다. 솔직히 그녀는 지하실에 가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지하실에서 더 멀리, 가능하다면 탑 꼭대기에라도 도망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 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지하실에 가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꼭 가야 한다고... "...들키면 다 네책임이야." 이윽고 데이미아가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하하, 잡힐 리가 없잖아, 이래뵈도 시지리스에서는 날리던 도둑 이었는데! 걱정 말고 따라와!" 로이는 기쁨에 겨워 팔짝팔짝 뛰면서, 데이미아의 팔을 끌고 복도를 달려 계단으로 향했다. 어느 계단이 지하실로 통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데이미아에게 말했던 대로, 다이크 경이 드나드는 것을 잘 관찰했었기 때문 이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횃불이 밝혀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단은 깊고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횃불의 빛마저도 다른 곳과는 달리 음산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데이미아는 순간 불길한 느낌이 전해져 와 머뭇거렸으나, 이미 로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고는 따라 내려갔다. 가기로 마음 먹은 이상 끝까지 가야 했다. 혹은, 그녀 역시 로이의 말대로 결국 평범한 지하실일 뿐일 거라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얼마 내려가자 육중한 철문이 나타났다. 로이는 여유만만하게 다이크 경에게서 훔쳐 낸 열쇠들을 차례로 끼워 보았다. 세 번째 열쇠를 끼웠을 때, 금속과 금속이 가볍게 부딪치는 '찰칵'하는 소리가, 데이미아도 9들을 수 있을 만큼 크게 들려왔다. 로이는 자신감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것 봐! 문제 없잖아!" 그리고 그는 낑낑거리며 무거운 철문을 열었다. 문 뒤에는 더욱 어둡고 더욱 긴 계단이 계속 이어져 있었다. 그 속으로부터 좋지 않은 냄새를 풍기는 바람이 휙 불어왔다. 데이미아는 점점 불안해졌다. 퀘퀘한 냄새가 신경에 거슬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불안은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녀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틀림없어...'3 "데이미아, 왜그래? 속이 안좋아? ...그냥 돌아갈까?" 로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데이미아는 무서울 정도로 단호하고 조용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냐. 계속 내려가!" "...너 괜찮아?" "물론이야. 어서 내려가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렇게 말하며 데이미아는 로이보다 앞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번에는 로이가 그녀의 뒤를 허겁지겁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데이미아의 발은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빨랐던 것이다. '이거... 계단이 괘 깊잖아. 왠지 으스스한데...' 로이는 점점 어두워지는 계단을 걸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공포는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들을 때 생기는 것처럼, 즐거운 흥분을 동반한 공포였다. 계단은 이미 상당히 깊어져 있었고, 뒤를 돌아보아도 문 따위는 이제 보이지도 않았다. 앞을 보아도 계속 계단 뿐이었다.9 "야아... 참 깊게도 팠네. 안 구래, 데이미아?" 로이는 휘파람을 불며 말했으나, 데이미아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점점 더 걸음을 빨리 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이는 그러한 그녀의 반응을 별로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이윽고 계단은 끝이 났고, 그들의 앞에는 또 하나의 육중한 철문이 버티고 있었다. 로이는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다이크의 열쇠 꾸러미를 들고 문 앞으로 나섰다. 그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끼우려 하는 순간, 그의 눈에 열쇠 구멍 바로 옆의 돌벽에 쓰여진 글씨가 보였다. '원한의 독(毒)은 세월도 흐릴 수 없다.' 왜 그 글씨가 그렇게 두두러져 보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거친 돌 위에 가는 송곳 같은 것으로 긁어서 쓴 그 글씨는, 너무 가늘고 조잡해서 얼굴을 벽에 대고 들여다 봐야 간신히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문을 열고 닫았던 다이크 경도, 그 문을 매일 청소하던 하인도 그 글을 보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그 글씨는 로이의 시선을 끌었고, 곧 그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원한의 독은 세월도 흐릴 수 없다.' 그것은 누구나 한 번 쯤 들어 보았을 법한 흔한 속담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이드 성의 귀퉁이에 쓰여진 그 글은 달랐다. 패배한 조국으로부터, 고향으로부터 강제로 끌려와 적국(敵國)의 승리를 위해 이 성을 쌓았던 사람들, 이 지하실에서 발을 묶인 채 햇빛조차 보지 못하고 죽어 갔던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새겼 을지 생각하니, 머리칼이 군도설 지경이었다. "저기... 데이미아... 정말 괜찮아?" 로이는 머뭇거리며 데이미아에게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단호했다. "난 괜찮아. 어서 열어, 로이!" '휴... 할 수 없지, 뭐... 내가 오자고 했으니...' 로이는 한숨을 푹 쉬며 열쇠를9 차례로 끼워 보았다. 맞는 열쇠가 ㅇ벗으리라는 것이 그의 마지막 희망이었으나, 어이없게도 두 번째 열쇠가 끼워지자마자 문은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로이의 상상과 달리 무기고가 이어져 있는 지하실은 널찍하고 깨끗했다. 불도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본래의 불길한 모습을 몰아내려고 기를 쓴다는 느낌을 주어, 보는 이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로이는 물론 그렇게 자세한 것까지 느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별 이유 없이 나가고 싶다는 느낌이 바짝바짝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한 냄새... '이거... 보통 지하실 냄새가 아닌데?' 로이는 무의식적으로 긴장했다. 그렇다고 무슨 시체 썩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야릇한 향기에 가까웠다. 매캐하면서도 취할 것 같고, 조금은 몽롱한 듯한 냄새... 그러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냄새 였다. 그러나 로이는 애써 불안을 감춘 채, 어깨를 으쓱이며 데이미아에게 말했다. "뭐야, 유령은 커녕 쥐 한 마리 없잖아. 내가 뭐랬어, 데이미아?" "네 말이 맞아." 하고 데이미아는 대답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섬뜩할 정도로 조용하고 긴장 되어 있었다. 로이는 놀라 더듬거리며 물었다. "뭐... 뭐야, 뭐가 잘못됐어?" "네 말대로야. 쥐 한마리, 파리 한 마리 없어. 벌레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아. 이게 정상적인 거니, 로이?" "그, 글쎄... 그러고 보니..." 로이는 자신없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주위는 기분나쁠 정도의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 정적은 단순히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고요함이었다. 그래서 그가 (혹은 그들이)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당장 온 지하실 안에 그 소리가 울려퍼질 것 같은... "여기... 기분 나쁘다. 나가자. 꼭 주위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로이는 이렇게 속삭이며 데이미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로이가 점점 더 겁을 내는 것과는 반대로, 데이미아는 점점 더 침착하고 용기있는 태도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로이. 여기 있는 것은 우리 둘 뿐만이 아냐." "뭐...?" 어이없어하는 로이를 뿌리치고, 데이미아는 텅 빈 지하실의 복도에 대고 소리쳤다. "누구지, 거기 있는 게? 모습을 보여라!" (계속) 그녀의 외침에 대답이라도 하듯, 이상한 웃음소리가 허공은 울리며 들려왔다. 아니, 웃음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웃음과 울음, 조소(嘲笑)와 신음이 바구 뒤섞인 듯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말하는 듯 하면서 도 동시에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고, 바로 귀 옆에서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로이도 데이미아도 그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로이는 등줄기가 오싹해져서,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리고 당당히 호령하던 데이미아도 기가 죽어서,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공손하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인간이나 요정은 아니죠?" -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한때 인간이었던 자들...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까의 웃음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였다. 그들의 말은 울리고 되풀이되면서, 알아 듣기 힘들게 로이와 데이미아의 귀로 다가 왔다. 서서히 커지는 메아리처럼 시작해서 서서히 잦아드는 메아리처럼 끝났 으므로, 언제 말이 시작했고 언제 끝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유... 유령인가봐, 데이미아. 어서 도망치자!" 로이가 이가 부딪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사정하듯 말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그녀 자신도 창백하게 질려 떨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호히 거절했다. "안 돼. 저들을 놔두고 갈 수 없어. 말해 봐요, 한 때 인간이었던 자들이여. 왜 페레이타의 땅으로 가지 않았나요? 왜 다른 인간들처럼 명부 (冥部)의 여왕의 심판을 받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지 않았나요?" - 원한이 독은 세월도 흐릴 수 없다. 원한의 쇠사슬은 검을 활을 멘 페레이타의 심부름꾼도 끊을 수 없어... "...당신들은 설마... 시이드 성의 건축에 투입되었던 노예들...!" 데이미아는 새파랗게 질려 한 걸음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유령들의 목소리는 다시 그 김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점점 더 실재 (實在)하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처음에는 어디서 들리는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 소리는 이제 귀 가까이, 그녀의 앞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린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들은 신음 섞인 목소리로 노래하듯 말했다. - 노예였지, 한때는. 그 이전에는 용맹한 병사들로 왕의 앞에서 창을 들고 싸웠지. 더 이전에는 행복한 농부들로 피 한 방울 안 흐르는 고향땅에 8밀을 부리며 노래를 불렀다네. 3그 땅이 피와 시체로 뒤덮이기 전. 노예였지, 한때는. 이렇게 육신이 없어지고 기억도 거의 사라지기 전에는. 돌을 나르고 돌을 쌓고 죽어 그 돌밑에 묻히는 동안 원한 말고는 모두 잊고 말았다네. 이 땅에 이 성이 세워지기 전... "데... 데이미아... 이거 보통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얼른 가서 영주 님이나... 켈리에게라도 말해야 하지 않겠니?" 로이는 더듬9거리며 아예 애원을 했다. 그의 무릎은 이미 서 있기 힘들 정도로 후들거르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의 귀에는 마치 유령 들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이제는 자기 귀 바로 곁ㅇ다 대고 속삭이며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들을 괴롭히던 사람들은 이미 다 죽었어요. 이미 다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 그 대위 죄값을 받고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이제 와서 뭘 어쩌려는 거죠? 당신들은 지금 다시 움직이려고 하고 있군요. 다시 께어나서 누구에게 뭘 하려는 거죠? 이미 당신들의 분노의 대상은 여기에 없는데!" - 아직 안 끝났어, 이 성이 여기에 있으니. 우리의 증오는 기억된다, 이 성이 여기 있는 이상. 분노의 대상이 없다고? 그럼 여기 있는 것은 뭐지? 어두운 돌, 피로 물든 기둥, 눈물로 깍고 세운 문들... 여기에 았어, 분노의 대상은. 이 돌벽, 이 기둥, 이 문... 모두가 우리가 증오하는 것. "그렇지 않아요. 설마 지금 이 성을 부수려는 건가요? 이 성에는 지금 전혀 상관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요!" - 이 돌벽, 이 기둥, 이 문... 모두가 우리가 증오하는 것. 이 성에 사는 사람들 또한 우리가 증오하는 것. 우리를 괴롭힌 자들의 자손, 그들이 없다면 그 자손이라도 우리의 증오를 받아 줘야 해... 그들의 노래는 점점 커져 갔다. 성이 울리고 흔들린다고 생각될 정도로. 아니, 실제로 노랫소리는 지하실 구석구석을 울리며 벽들을 미약하게 진동시킥 있었다. 공기가 마구 울리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정신없이 여기 저기서 바람이 불어왔고, 곧 횃불들은 모두 꺼져 버렸다. "아스틸라, 라인 디 니드! (아스틸라여, 제게 빛을!)" 데이미아가 앞을 향해 오른손을 뻗치며 외치자, 그녀의 손끝에서 한줄기 별빛이 내려않은 듯한, 눈부신 은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성벽과 성벽을 반사하며 지하실 안을 횃불보다도 더 밝게 비추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두려움을 덜어 주지 못했다. "히익! 데이미아... 저, 저게 뭐지?" 로이가 놀라서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인간의 모습이 되다 만 듯한 검은 그림자들이, 잠에서 덜 깬 듯한, 혹은 아픈 몸을 억지로 이끌고 오는 듯한 모습으로 질질 발을 끌며 오고 있었다. 고개는 푹 숙인 채였고 손과 어깨는 힘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전신이 반투명한 검은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치 흘러내리는 거처럼 형체가 분명치 않았다.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 그 그림자들은, 순식간에 수십배로 불어나 지하실 안을 가득 채웠다. "유령이야..." 데이미아는 자신도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더이상 태연하지 못했고, 빛을 발하는 오른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서 도망치자, 데이미아! 누구에게든 알려야 해!" 로이는 그녀의 왼팔을 잡고 출구로 달리기 시작했다. 유령들은 그를 잡으려는 듯 천천히 다가왔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둔해서 로이와 데이미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한순간 가까이 있던 유령의 손이 로이의 팔목에 스쳤다. 그 손은 물에 젖은 듯 차갑고 축축했고, 기분나쁘게 미끄덕 거렸다. 로이는 온몸이 오싹해져서 더욱 속력을 내어 달렸다. 뒤에서는 기분 나쁜, 아까보다도 더 커진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노래하는 듯 신음하는 듯, 분명치 못한 목소리로. - ...어두운 돌, 피로 물든 기둥, 눈물로 깍고 세운 문들... 여기에 았어, 분노의 대상은. 이 돌벽, 이 기둥, 이 문... 모두가 우리가 증오하는 것... 로이와 데이미아는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뛰어올랐다. 너무 급히 올라가느라고 계단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의 바로 뒤로 벌써 유령들이 따라오는 것이 느껴지고, 계단이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신음 섞인 노랬소리는 아무리 빨리 달려도 멀어지지 않고 귓가에서 들려왔다. - 없어져! 사라져! 피로 이루어진 성, 저주받은 성! 없어져! 사라져! 이 성에 사는 너희들 모두! 없어져! 사라져! 우리의 한맺힌 기억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는 이제 차라리 외침이었다. 로이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의 바로 눈앞에 커다란 철문이 다가왔다. 그들이 지하실로 들어올 때, 몰래 열고 들어온 철문이었다. 로이는 데이미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데이미아! 빨리!" 둘은 허겁지겁 달려 철문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뒤를 쫓아오던 것이 따라 나오기 전에 철문을 쾅 닫았다. 그리고는 얼른 열쇠로 그 문을 잠가 버렸다. "휴... 됐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더욱 창백해진 얼굴로, 로이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더듬거렸다. "끄... 끝난 게 아냐.. 로이... 저걸 봐...!" 무심코 고개를 돌린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물이 천을 뚫고 스며나오듯이, 벽에서, 잠긴 문에서, 돌바닥에서, 천천히 솟아나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로이의 비명을 들은 병사들이 갑옷을 철컹거리며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사테를 파악하기도 전에, 벽이 떨려올 만큼 커다란 유령들의 외침이 복도 안을 가득 채웠다. - 병사다! 에스테이아의 병사! 우리의 적! 그 목소리에 담겨 있는 증오에는 누구라도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그림자같은 유령들에게 둘려싸였다. 유령들을 이제 형체를 잃고 수십 명이 한 덩어리가 되었다. 그들은 마치 커다란 뱀처럼 흐물흐물한 모습으로, 병사들의 몸을 칭칭 감고 그들의 목과 코를 막았다. 병사들이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 가는 동안에도 유령들은 증오에 찬 고함을 내질렀다. - 없어져! 사라져! 피로 이루어진 성, 저주받은 성! 없어져! 사라져! 이 성에 사는 너희들 모두! 없어져! 사라져! 우리의 한맺힌 기억과 함께! 그들의 목소리는 듣기에 고통스러울 만큼 크지는 않았으나, 온 성 안을 울리게 했다. 성벽이 흔들거리고 천정에서는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데이미아는 두 손을 높이 쳐들고 소리 높여 주문을 외쳤다. "니드 아이나스 렐 티리아스, 훼일라드 페이 데인타냐! 이딘 퀘이드 나우클, 푸린 사야크스 페이! (달과 태양의 빛이여, 태초부터 이어져 온 순수한 힘이여! 그릇된 어둠을 밝히고 사악한 힘을 몰아내라!)" 그녀의 손에서 시각을 마비시킬 만큼 밝은 빛이 쏟아져나왔다. 로이는 달빛의 차가운 은빛과 햇빛의 따스하고 밝은 금빛이 한데 뒤섞인 듯한, 아름다운 빛이 어두운 복도 안을 가득 채우는 것을 보고 넋을 잃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너무나 밝은 빛에 눈앞이 캄캄해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주위에서 유령들이 내지르는 듯한, 끔찍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비명이 아니라 영혼으로부터 터져나오는 소리였다. 지상의 살아있는 생명체는 낼 수 없는 소리였다. 빛이 서서히 사라짐과 함께 그 비명도 함께 잦아들었다. 곧 주위는 다시 어두워졌으나, 로이의 시력이 되살아나는 데에는 좀 시간이 걸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데이미아를 찾아 물었다. "데이미아, 유령들이 이제 사라졌어? 아무 소리도 안 들리네..." 그러나 데이미아는 무엇엔가 홀린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그들은 아직 그대로 있어... 하지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 마법으로 흑마술이 완전히 무효화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얼마만큼의 타격은 입을텐데...?" 그녀의 말과 함께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악의가 섞인, 기분나쁜 웃음소리. 키득거리는가 하면 소리높여 웃고, 낮은 소리로 조소하는가 하면 곧 비명을 지르듯 끽끽대는 소리가 터져나왔다. 로이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회복되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슴푸레하게 천정 위로 검은 물체가 휙휙 날아다는 것들이 보였다. - 어리석은 것, 어리석은 것! 그따위 빛으로 우리를 몰아내려고? 그따위 주문으로 우리의 원한을 무마시키려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돌아 가, 돌아 가! 어리석은 짓 말고.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희생을 꼭 얻어내고야 말 테니까... (계속) "한 번 더 해보겠어!" 데이미아는 그들의 비웃음을 듯자 투지가 되살아나는지, 손을 쳐들며 주문을 외우려 했다. 그러나 로이가 얼른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소용 없어, 데이미아! 힘을 너무 낭비하지 마! 일단 도망치자!" "하지만...!" "우리 힘으로 끝날 문제가 아냐. 어서 가자!" 로이는 그녀의 손목을 꼭 잡은 채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미 아도 로이의 의견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그와 함께 도망치는 데 열중했다. 유령들은 그들의 뒤를 바짝 쫓아오며, 혹은 벽과 천정, 바닥을 통해 불쑥불쑥 눈 앞에 나타나며 그들은 비웃었다. 그러나 특별히 해를 끼칠 마음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로이와 데이미아가 깜짝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할 뿐, 공격을 해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손과 발이 미치는 곳의 벽은 급속도로 낡아 갔고, 조그만 진동에도 돌가루가 사방에서 부서져내리고 벽과 천정에는 금이 갔다. 횃불은 꺼졌고 나무는 썩어들어갔다. "맙소사... 성을 부수려나 봐!" 로이가 울상을 지으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귓가에서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악의 섞인 즐거움이 가득한 노래가 들려왔다. - 맞았어, 맞았어! 다 부숴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그러면 우리를 지상에 묶고 있는 이 원한의 사슬도 부서지겠지. 다 부숴 버려. 아무것도 남지 않도록! "누가 그렇게 놔둘 줄 알고... 피안 탈 하라스 레이시나드! 드라인 사 휘일린 로, 라이 로 에드리나드! (저승을 다스리는 창백한 여신이여! 당신에게 속한 이 자를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데이미아가 갑자기 멈춰 서며, 소리쳐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녀의 주위에서 하얗고 창백한 광채가 흘러나오더니, 그녀의 손가락을 따라 바로 앞에 있는 유령에게로 굽이치며 나아갔다. 검은 그림자같은 유령은 그 빛이 몸에 닿는 순간, 귀청이 아플 만큼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사라졌다. 로이는 무의식중에 눈을 감으며 귀를 틀어막았다. 고통스러울 만큼 크고도 영혼이 차가워질 만큼 오싹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유령들에게 호령했다. "자, 이제 잘못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았겠지! 엉뚱한 짓 하지 말고 너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고 페레이타 의 땅으로 가란 말이야!" 유령들은 그녀의 말에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들의 신음 섞인 노래는 좀더 조용해져 있었다. - 왜 우리를 괴롭히지? 너는 요정인데. 왜 우리를 괴롭히지? 너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인데. "아니, 상관 없는 건 너희들이야. 너희들의 원한은 이미 50년 전에 끝났어! 무엇을 위해 이 성의 밑바닥에 남았지? 너희를 괴롭힌 사람들은 이미 모두 죽어서 페레이타의 심판을 받았는데! 어째서 이렇게 이승에 남아, 너희들이 속하지 않은 곳에 남아 스스로를 괴롭히는 거지?" - ...죽지 않아... "뭐라고...?" - 원한은 죽지 않아. 원한은 죽지 않아. 원한은 죽지 않아. 원한은 죽지 않아...! "데이미아, 위험해!" 로이는 얼른 몸을 날려 멍하니 서 있는 데이미아를 쓰러뜨렸다. 그녀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가며, 형체가 흐릿한 검은 그림자가 쏜살갖이 허공을 갈랐다. 빠른 속도에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 그림자는 데이미아를 해치지 못한 채 벽 속에 가서 쿵! 소리를 내며 쳐박 혔는데, 그 자리에는 날카로운 칼로 판 것 같은 흠집이 생겼다. 데이미아도 로이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 가버려, 요정. 가버려. 그리고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말아!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는 숲의 게으른 종족, 네가 우리에 대해 뭘 알아! 유령들응 미친 듯이 소리지르며 로이와 데이미앙의 주위를 위협적 으로 맴돌았다. 스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마치 길고 굵은, 반투명한 검은 띄가 그들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미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서로 몸을 붙인 채 질주하는 유령들을 넋놓고 보고만 있었다. 그들의 외침은 이제 마구 혼란스러워져 내용은 전혀 들을 수 없었고, 그냥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비명같이만 들렸다. 그들의 그림자는 점점 많아졌고 횃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를 채워 갔다. 그 한가운데에 있으려니,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로이! 데이미아!" 낯익은 목소리가 복도 저편으로부터 들려오자, 로이와 데이미아는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다. 누군가가 환한 횃불을 쳐든 채 어두운 그림자 속들 돌진하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이상하게도 그 사람을 공격하지 못하고, 최대한 멀리 비켜섰다. "켈리!" 데이미아가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소리쳤다. 켈리가 한 손에는 횃불을, 한 손에는 채찍을 든 채, 유령들의 틈을 뚫고 그들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그녀는 이 성에 들어온 후 입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벗어 버리고, 랜스에게서 빌린 듯 그녀의 몸에는 좀 큰 남자 옷을 입고 있었다. 유령들은 신음하며 그들 주위에서 물러났고, 로이와 데이미아는 반갑게 켈리를 향해 달려갔다. 켈리는 그들을 보호하려는 듯 횃불을 치켜든 채 유령들 앞에 버티고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는 너희에게 볼일이 없다. 쓸데없는 희생을 치루고 싶지 않거든 비켜 서라!" 켈리의 명령에는 위엄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것이 깃들어 있었다. 유령들도 로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느낀 것 같았다. 그들은 불평하듯 낮은 소리로 신음했으나, 그녀에게로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기꺼이 비키려 들지도 않았다. 그들은 바람을 일으켜 켈리가 들고 있는 횃불을 끄고는, 기회를 노리듯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켈리는 화가 난 표정으로 유령들을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가슴 속에서, 로이가 본 적이 없는 은빛 목걸이를 꺼내었다. 처음에는 그냥 은으로 조각한, 나무를 휘어감은 두 마리의 뱀 모양의 목걸이처럼 보였다. 그러나 켈리가 그것을 치켜들자, 유령들은 놀라움에 가득 찬 신음과 함께 뒤로 물러 났다. 켈리는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알겠나, 저승의 힘이 나와 함께한다! 너희는 나를 해칠 수 없어!" 유령들은 분노와 놀라움에 가득차, 벽이 흔들리고 커다란 돌덩이가 마구 떨어져 내릴 정도로 커다란 고함을 질러 댔다. 그러나 아무도 켈리를 공격할 수 없었고, 그러기는 커녕 가까이 올 수조차 없었다. 켈리는 데이미아 에게 고개를 돌려 부탁했다. "데이미아, 이 목걸이에서 빛이 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문제 없어요!" 데이미아는 씩 웃으며 목걸에에 손을 얹고, 간단한 주문을 외웠다. "(니드 아스틸라스 아일린 로! (아스틸라의 빛이 너와 함께 하리라!)" 주문이 끝나는 순간, 그 이상한 목걸에에서는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마체 켈리의 손 위에 별이 하나 내려와 앉은 듯 했다. 로이는 너무 강한 빛에 눈이 아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 빛이 유령들에게는, 훨씬 더한 고통을 주는 모양이었다. 고통의 비명이 성의 꼭대기까지 치달아 올랐다. "자, 봤으면 길을 비켜라. 너희는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우리가 무사히 빠져나가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도 너희에게 불필요한 해는 끼치지 않겠다!" 켈리가 외쳤다. 유령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지 그 빛에 가까이 가기 싫어서인지, 벽 속으로, 혹은 천정이나 바닥 속으로 들어가 그들 주위에서 사라졌다. 켈리는 목걸이를 횃불처럼 들고, 데이미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자, 데이미아, 로이, 어서 도망치자!" "자, 잠깐, 켈리, 그 쪽은 나가는 길이잖아요!" 로이가 그녀를 따라가면서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켈리는 오히려 더욱 속력을 내며, 당연하다는 듯 소리쳐 대답했다. "당연하지. 우리는 나가야 해. 저 유령들이 하는 얘기 못 들었어? 이 성을 부술 생각이라고! 지금 탑 꼭대기부터 지하실 밑바닥가지 온통 저 놈들 투성이야!" "그렇지만... 이대로 성을 부수게 뇌둘 수는 없잖아요!" 켈리에게 끌려서 달려가면서도, 데이미아는 이렇게 항의 했다. 그러나 켈리의 대답은 차가웠다. "그럼 다른 방법이 있니? 이즈도 펠히스도 툴위그도 지금 다 성 밖으로 나가 있어! 랜스와 파엘 영주는 잠시 버틸 모양이지만 그들도 오래 가지 못할 거야. 이상하게도 저 유령들은 흑마술 붕괴 주문이 전혀 먹혀 들지를 않아! 없앨 방법이 없다고! 내 목걸이는 페레이타의 힘을 빌린 마법이 깃든 거라서 저들을 움츠러들게 할 수 있지만, 그걸로는 어림도 없어!" 데이미아도 켈리의 말에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주문의 효력이 차츰 다해 가고, 목걸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빛 자체인 양 빛나던 것이 이제 보름달 정도의 밝기밖에 못 내고 있었다. 게다가 성은 무서운 속도로 낡아 가며 부서져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발을 옮길 때마다 바닥은 삐그덕거렸고, 천정에서는 흙과 돌가루가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갑자기 발을 멈추며 소리쳤다. "그래도 이대로 놔 둘 수는 없어요. 제가 해 볼 수 있어요!" "뭐라고? 너 미쳤니, 데이미아? 아까 시도해 봤을 텐데!" 켈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가능해요. 이 유령들이 흑마술 붕괴 주문으로 사라지지 않는 건 이들이 흑마술의 산물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럼...?" "원래부터 있던 유령들이죠. 우리 오기 훨씬 더 전부터 이 성 밑바 닥에서 잠자면서, 누군가 깨워 주기만을 기다리던 유령들, 진짜 원한 맺힌 영혼들이에요. 이들을 존재하게 만드는 건 흑마술이 아니라 이들 자신의 증오와 원한이죠. 흑마술은 이들을 깨웠을 뿐이에요." 데이미아의 유창한 대답에 켈리는 잠시 이해가 간다는 듯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녀는 다시 소리쳤다. "...그런 녀석들을 어떻게 없애겠다는 거야? 더 말이 안돼잖아!" "이들을 없앨 수는 없을지 몰라도... 힘을 빼앗을 수는 있어요, 켈리. 성을 부술 만한 힘을 가진 유령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 봤나요? 아니면 자신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을 공격한다는 유령는? 이들은 스스로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힘을 주고 이들을 자극하는 건 외부의 힘이에요! 그걸 막으면 이들은 온순해지고 아무 힘도 없어질 거라고요." "...차단할 수 있겠어?" 켈리가 이윽고 설득된 듯 차분히 물었다. 데이미아는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만 준다면!" "좋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지하실로 돌아가야죠. 흑마술의 힘이 공급되는 건 지하실 어딘가가 분명해요. 지하로 내려갈수록 더 강한 힘을 느꼈으니까!" "그리고 지하에는 노예들의 뼈가 무덤도 없이 묻혀 있다고도 하지. 안성맞춤인 곳이군. 어서 가자!" 켈리와 데이미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향을 돌려, 아까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로이는 다시 유령투성이의 지하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이봐요, 켈리! 그리고 데이미아! 난 다시 그 아래로 내려가기 싫다고!" "흠, 좋아, 그럼 혼자서 나가 보도록 해! 우리끼리 가도 되니까!" 켈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로이는 하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달리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 치사해! 그 목걸이가 없으면 유령에게 공격받는다는 걸 다 알고선!" "하하, 그런가?" 가장 앞장서서 가던 켈리는 걸음을 늦추며 로이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로이는 그녀를 향해 혀를 쏙 내밀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이런 둘의 실없는 장난에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성벽과 천정, 바닥을 이루는 모든 돌과 나무들이 삐걱거리고 있었고, 그녀의 눈에도 이 성이 얼마 버틸 수 없다는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계속) 그들은 마구 흔들거리는 돌계단을 달려내려와, 지하실 앞에 섰다. 아무런 마법의 장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힘만은 느껴졌다. 흑마술을 배운 인간의 힘, 어둠과 빛이 교차하여 혼란스러운, 그리나 또한 혼란스러운 만큼 강한 힘. 데이미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거부하는 힘이 있는 곳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켈리는 정신없이 목걸이를 흔들며 유령들을 쫓아보내고 있었다. "여기다!" 드디어 데이미아가 한 곳에 멈추어 서며 소리쳤다. 그녀가 막 주문을 시작하려는 찰나, 로이가 어디서 구했는지 꽤 근사한 흰 마법 지팡이를 그녀 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없으면 힘들다며?" "와아, 고마워, 로이! 어디서 났어?" "어디서 났긴... 바로 여기가 무기 창고인데." 로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데이미아도 미소를 지으며, 몰려드는 유령을 쫓느라 정신이 없는 켈리에게 소리쳤다. "잠시만 그 목걸이로 버텨 줘요, 켈리!" "알았어! 제길, 칼도 있고 채찍도 있는데 겨우 목걸이로 버텨야 하다니 한심하군..." 켈리는 투덜거리면서도 데이미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일 만한 여유를 보였다. 데이미아는 지체 않고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오 아스틸라, 시엘리 렐 티리드 렐 아이나 레이나드, 로 이리나드 아렌디스 크로다스! 로 프라디스 타나사드 이키다스, 헤이 우클 라히니 푸리나드! 드레이엘, 엘케이 로레이, 케이나우클 레아닌 우클라히니... (오 별과 태양과 달을 다스리는 아스틸라, 그대 은빛나는 정도(正道)의 안내자여! 온갖 어둠의 주술을 몰아내는 금빛 칼을 든 처벌자여! 여기 그대의 눈을 벗어난 곳, 그늘 속에 몸을 숨긴 어둠의 마법을...)" 소리 높여 주문을 외우는 데이미아의 목소리에서는 요정 특유의 부드러운 울림이 점점 강해졌다. 마치 속이 빈 정교한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을 듣는 듯한 느낌이었다. 로이는 마치 얼이 빠진 듯 멍하니 선 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다른 때에는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이처럼 인간과 다른 줄 미처 느끼지 못했었다. 곧 데이미아가 든 지팡에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나오기 시작했고, 그녀는 무아(無我)에 이른 샤먼처럼 반쯤 취한 상태로 주문을 읊어 댔다. 그녀가 주문을 읊는 것이 아니라, 주문 자체가 힘을 가진 채 그녀의 입을 빌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로이는 그녀 주위에서 발산되는 강한 힘에 밀려 뒷걸음질치면서도, 자신이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했다. 데이미아는 물론 로이까지, 그녀의 주문이 가진 힘에 압도되어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과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던 것이다. 데이미아의 주문은, 로이는 물론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거의 완성 되어 가고 있었다. 벌써 힘을 잃은 유령들은 무기력하게 벽과 벽을 퉁하여 날아다니기만 할 뿐, 그들을 공격하려는 시도를 포기한 지 오래였고, 한시가 다르게 부스러져내리던 성벽도 풍화(風化)를 멈추었다. "사야크스 페이 우클라스, 휘일린 이엘 로 드린...! (사악한 어둠의 힘, 시작된 곳으로 돌아갈지언저...!)" 데이미아가 막 주문을 마치려 할 때였다. 갑자기 그녀의 옆에서 튀어나온 누군가가, 무방비 상태의 그녀를 향해 칼을 날렸다. 데이미아도 로이도, 방어는 커녕 미처 그가 오는 것을 알아챌 새도 없었다. 칼은 정확히 그녀의 배를 파고들었고, 데이미아는 주문을 마치지 못한 채 정신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데이미아!"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린 로이가 허겁지겁 그녀를 안아 일으켰다. 그녀는 축 늘어져 있었으나 숨을 조금 헐떡일 뿐, 위험한 것 같지는 않았다. 로이는 그녀가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레 겁을 먹었으나, 의외로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의로는 어리둥절해하는 로이의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절했을 뿐이다. 검을 칼집에서 뽑지 않은 채로 공격했으니." "...다이크 경?!" 로이는 놀라서 숨을 들이마시며 속삭였다. 파엘 영주의 부관, 다이크 는 미소를 지으며 로이와 데이미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어요! 도대체, 왜...?" 로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러나 다이크가 설사 그 물음에 대답할 의사가 있었다 해도, 그럴 시간은 없었다. 켈리가 그들의 사이로 나서며 조용한, 그러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이다. "멋진 등장이오, 다이크 경... 아니, 첩자 다이크라고 불러야 할까? 당신이 오리라고 예상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군. 스트라본이 데이미아 때문에 아주 곤란해진 모양이지?" 그녀는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으나, 다이크도 섣불리 흥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맞추었소, 켈레브리스. 유감이오, 나는 당신들은 조용히 보내 주려 했는데... 이 작은 여자아이가 스트라본 전하의 마력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 줄이야. 이제 도저히 그냥 보내 줄 수가 없게 되었소. 미안하 지만 나와 함께 가 주셔야겠소. 저항 없이 따른다면 해치지 않으리다." "하! 누구 맘대로?" 켈리는 웃어제끼며 칼을 뽑아들었다. 그녀는 다이크 경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로이를 향해 소리쳤다. "로이, 어서 데이미아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 그녀가 일단 흑마술의 전달을 끊어 놨으니 스트라본이 주문을 재개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다. 그 사이에 어서 나가!" "하... 하지만, 켈리는?" "나는 이 녀석을 손 좀 봐 준 다음에 나가겠어. 이 목걸이가 있으니, 조금 있다가 나가도 문제없어! 어서 가, 로이! 네가 있으면 마음놓고 싸울 수가 없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버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이는 어쩔 수 없이 축 늘어진 데이미아를 어깨로 부축하고, 그 불편한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로이가 멀어져 가는 것을 확인 한 켈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 다이크 경, 칼집에서 칼을 뽑으시오! 내 결투 장면을 보았으니 이제 자비심을 베풀 상황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겠지." "확실히 그렇군요, 켈레브리스." 다이크는 미소를 지으며 칼을 뽑았다. 데이미아의 힘에 의해 무력해 지고 있던 유령들이, 차츰 힘을 얻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은 그들에게 신경쓰지 않고, 기세 좋게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 르며 돌진했다. "하앗!" 다이크의 검이 능숙한 솜씨로 켈리의 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나 켈리는 여유로운 미소마저 띄우며, 가볍게 몸을 틀어 그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그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일말의 차로 그녀의 검은 그의 옷깃만을 찢었고, 다이크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오웬 경과의 결투에서 그녀의 움직임을 다 파악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건만... "방심하셨군요, 다이크 경! 내가 그 정도로밖에 안 보이던가요?" 켈리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다이크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역시... 레일라 님과 하젠 님께서 당신을 조심하라고 하셨을 때는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지. 하지만 이제 그 말이 사실이란 것을 알겠소." 그는 검을 번쩍 치켜들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며 켈리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녀가 공격을 막기 위해 칼을 들어올린 순간, 다이크의 칼날은 갑자기 방향을 틀어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만하면 끝장이라 고 생각한 순간, 칼날을 통해 그의 칼날에 느껴진 것은 단단한 금속의 감촉 이었다. 켈리의 칼날이 한 발 더 빨리 그의 공격을 막은 것이다. "멋지군요. 이제 슬슬 재미있어 지는데?" 그녀는 조금은 창백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다이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시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오래도록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잠시 넋놓고 있는 사이, 켈리의 칼날이 무서운 속력으로 원호를 그리며 그에게로 날아왔던 것이다. 가느다란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거슬리는 소리에, 다이크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반사ㅈ으로 칼을 들어 그녀의 칼날을 막아 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는 진동에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켈리의 완력은 대단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그 가속으로 인한 충격을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그가 그 충격에서 미처 벗어날 새도 없이, 켈리의 칼은 다시 그의 목을 향해 들이닥쳤다. 그는 거의 쓰러질 뻔 하면서 간신히 뒤로 물러나, 그 칼날을 피했다. 목에 종이에 스친 것처럼 가늘고 긴 상처가 나, 피가 조금 흘러나왔다. 그러나 그것을 닦을 새는 없었다. 켈리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그에게로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고, 그는 달리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칼을 들어 그녀의 칼을 막았다. 두 칼날은 깨질 듯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부딪 쳤고, 켈리는 마치 튕겨나가듯 뒤로 물러섰다. 다이크 역시 거의 넘어질 뻔 했다. 만약 켈리의 완력이 조금만 더 세었더라면, 아니 그가 다이크만큼의 몸무게를 지닌 남자이기만 했더라면, 다이크는 넘어졌을 테고, 꼼짝없이 죽음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켈리는 그렇지 못했고 다이크는 그녀의 약점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완력이 약하고 몸이 무겁지 못해... 그래서 남자들보다 빠르고 튕겨 나가는 공처럼 움직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방법이 아니면 이길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생각은 순식간에 다이크의 머리에 들어왔고, 그 생각에 대해 이것저것 검토해 볼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다이크는 켈리의 검이 바로 자신의 머리 위에서 번뜩이는 것을 보았고, 즉시 자신이 깨달은 것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는 피하지 않고 켈리의 칼을 맞받아쳤다. 팔이 저리며 그 자신도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지만, 땅에 착지한 켈리도 거의 넘어질 뻔 하며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다이크는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그녀의 방어를 예상하며 칼날을 수직 방향으로 내리쳤다. 예상대로 켈리는 칼을 들어 그의 칼날을 막았으나, 그가 기대하던 대로 칼에 칼을 맞댄 채 힘으로 겨루는 식으로는 되지 않았다. 켈리의 칼날은 마치 그의 칼날을 가볍게 퉁겨내듯 밀쳐냈고, 동시에 켈리의 몸도 마치 칼의 한 부분처럼 그에게서 팔짝 떨어져나갔던 것이다. 켈리는 그의 공격 방식에 당황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대로다... 힘의 대결을 피하고 있어. 그럼 그 지경까지 몰아 넣기만 하면, 내가 이기는 것이다!' 다이크는 미록 첫 시도가 실패했지만, 더욱 의기양양해져 칼을 치켜 들며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가 막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 한 무더기의 돌가루와 먼지, 그리고 작을 돌맹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다이크는 무의식적으로 머리를 감싸며 비켜섰다. 돌이 그의 머리와 손등을 때리고, 먼지가 그의 눈과 코를 맴게 했다. 그러나 다행히 떨어져 내린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아 그쳤고, 다이크는 칼을 놓쳤을 뿐 큰 부상을 입거나 흙에 생매장되는 일은 면할 수 있었다. 세상 모르고 싸움에만 몰입하고 있던 두 사람은 이제야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유령들, 혹은 울부짖는 그림자들은 이미 힘을 되찾은 후였고, 그들을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성은 빠른 속도로 쇠락하며 무너져 가는 중이었다. 켈리도 다이크도, 그들 주위가 마구 무너져 내리고 있고 검고 반투명한 인간의 그림자 모양을 한 것들이 셀 수 없이 벽과 천정, 바닥을 통과해 다니며 낄낄거리며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싸울 생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싸움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탈출하지 못하면, 떨어져 내리는 흙과 돌덩이 속에 꼼짝없이 생매장될 판이었다. "역시 대단해, 스트라본...!" 켈리는 찬탄하듯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을 들은 다이크가 흘끗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표정이나 말투에 비아냥의 흔적은 없었다. 실제로 켈리는 찬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자 뿐인 유령들은 마치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진 개체들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쉴새없이 낄낄거리며 날아다니는 것, 조용히 기운 빠진 모습으로 발을 끌며 걸어다니는 것, 미친 듯이 울고 웃으며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얼굴을 내미는 것, 꿈틀거리며 신음하는 것... 그들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들이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스트라본은 분명 그들의 존재를 단지 이용만 할 생각이었겠지만, 그의 마력은 이처럼 그들 모두에게 죽기 전의 개성까지 되찾아 준 것이었다. 한 유령이 다이크의 옆쪽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이미 반투명 하다고도 할 수 없이, 뚜렷한 검은 색을 띈, 질감을 가진 존재였다. 다이크는 반사적으며 비쳐섰으나, 유령은 헤엄치듯 손을 휘젓다가 그의 얼굴을 할퀴었 고, 그의 볼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유령들이 모두 그림자일 뿐이라고 생각 했던 그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계속) 는 아무래도 방학 전에 시작할 것 같지 않군요. 쓸데없이 말만 꺼내서 죄송...^^; 얘기를 구상하다 보니 생각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어느 분들 말씀마따나 <용의 신전>만으로도 휘청거리는 주제에... 하여간... 잃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리 가! 건방진 것들, 자연의 법칙을 어기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도 부족해서 사람을 해치려 하느냐!" 놀랍게도 켈리는 이렇게 소리치며, 마치 다이크를 보호하려는 듯 그의 앞을 막아서며 유령들을 노려보았다. 유령들은 불평하듯 웅얼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가 목에 건 은 목걸이에서는 이제 빛이 흘러나오지 않았 으나, 유령들은 여전히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째서...?" 다이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아까 까지만 해도 목숨을 걸고 싸웠던 상대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켈리의 표정에는 그와 같은 혼란은 커녕, 갈등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그녀는 너무도 간단하게, 전혀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 했다. "이제 당신은 칼을 잃었으니 내 적이 아니오. 자, 어서, 지금 빠져 나가야 해요. 내가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한,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면 유령들은 접근하지 못할 겁니다!" 다이크가 뭐라고 더이상 물을 새도 없었다. 켈리는 그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으며 마구 달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넘어져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면 함께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왜 내 정체를 알면서 돕는 거요? 난 아트웰의 첩자고, 벨리노어처럼 변절할 생각도 없소!" "그런 건 나와 상관없어요." 켈리는 짧게 대답하고 걸음을 더욱 빨리했다. 그들의 뒤로 돌덩이와 흙과 나무 부스러기가 마구 쏟아져 내렸고, 갑자기 그들의 앞에서 그것들이 쏟아져 나와 갑자기 멈추어 서야 하는 적도 있었다. 돌로 된 바닥도 부스러져 발이 푹푹 들어갔고, 곧 바닥 전체가 마구 흔들렸다. 그들은 유령들과 성의 붕괴에 쫓겨 계단으로 향했다. "이런...!"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탄스런 중얼거림을 내뱉었다. 이미 지하실을 벗어나는 계단은 돌더미와 흙으로 막혀 있었다. 계단 의 벽 전체가 무너져 있어, 뚫고 나갈 방도는 없어 보였다. 다이크는 절망적인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그러나 켈리는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체 만 체 하고는, 당장 방향을 바꾸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어서 이쪽으로!" "이, 이봐요, 어디 가는 거요? 이 성에는 비밀 통로도 없는데...!"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잖아요. 깔려 죽더라도 뛰다 죽자고요!" --------------------------------------------------------------------- 한편, 데이미아를 업고 가는 로이는 한 발 한 발 힘겹게 옮기며 간신히 계단을 올랐다. 물론 요정이고, 게다가 성년이 되지도 않은 데이미아는 매우 가벼웠으나, 그래도 아직 어린 로이에게는 힘에 부쳤다. 게다가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으니,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는 판국이었다. 오직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유령들의 신음 섞인 웃음소리와, 다시 삐걱거리기 시작 하는 성이 그의 발걸음을 빠르게 해 주었다. '으으... 이게 다 그 나쁜 다이크가 나타났기 때문이야!' 로이는 투덜거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힘이 들어서 등이 땀으로 축축할 정도였다. '하지만 다이크가 반역자들과 한패였다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그 사람은 영주의 사촌에다 부관이라더니 뭐가 모자라서... 으이그, 하여간 귀족들 하는 짓이란 서로 싸우고 죽이고 속이고 ... 질색이야!' 켈리가 데이미아의 마법 때문에 얼마동안은 유령들이 활동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건만, 유령들은 빠른 속도로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 아니, 로이가 충분히 빠른 속도로 가고 있지 않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길고 가파를 계단을, 로이와 거의 맞먹는 키의 데이미아를 업고 올라가면서, 그 이상의 속력은 도저히 낼 수 없었다. 지치고 짜증이 난 로이는 결국 될대로 되라는 심정에서, 유령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건 말건, 낄낄거리건 말건 상관 않고, 평정을 잃지 않은 채 꾸준히 말을 옮기기만 했다. 계단은 길지만 끝이 없지는 않았다. 곧 마지막 문이 보이고, 그 밖에서 흘러나오는 빛과 사람들의 소리는 로이에게 힘을 주었다. 이제 저 문을 지나기만 하면, 성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그는 켈리가 이미 성 밖에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분명 다이크를 오래 전에 쓰러뜨리고, 다른 길로 나가 저 밖에서 그와 데이미아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로이는 계단이 흔들거리고 밟은 돌이 마구 삐져나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힘차게 발을 옮겼다. 그는 간신히 마지막 계단을 밟고, 문 밖으로 나와 데이미아를 떨어 뜨리듯 바닥에 뉘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실과 그 계단이 가장 심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을 뿐, 아직 1층은 바닥이 좀 흔들리고 있을 뿐이지 지하실처럼 위험해 보이지는 않았다. 로이가 다시 데이미아를 들쳐 업으려는 찰나, 갑자기 지하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령들이 내는 소리였으나, 이제까지 들어온 것과는 약간 달랐다. 더욱 소름끼치고 더욱 비인간적인 소리였다. 그 신음은 상처 입고 죽어 가는 짐승의 신음과 비슷했고, 그리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한 데 어우러진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구멍에서 삐져나오는 소리 같았다. 어떤 모음과 자음으로도 흉내낼 수 없는 그 소리는, 유령이라기보다 괴물이라는 명칭이 어울릴 정도로 인간적인 이성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로이는 그 소리에 새파랗게 질려, 충동적으로 계단으로 통하는 길을 막은 철문을 닫아 버렸다. 유령들의 문은 물론 벽과 천장과 바닥가지 마음 대로 통과하여 다니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지금 그 소리를 들은 그에게는 저 괴성을 지르는 괴물도 유령들과 한 종류일지 모른다는 점, 그래서 철문 정도는 간단히 통과하여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추론 할 능력이 마비되어 있었다. 로이는 무거운 철문을 꽉 닫은 채, 마치 자신의 힘으로 그 괴물에 대항해 문을 지탱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문에 몸을 기대고 섰다. 괴성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한층 더 가까워지고 커진 소리였다. 공기의 진동이 무거운 철문을 뒤흔들었다. 이제 로이는 그 괴물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보다는, 두려움에 발을 뗄 수가 없어서 문에 기대어 버티고 서 있었다. 그것이 오는 발소리 따위는 들리지 않았으나, 점점 잦아지고 커지는 괴성과, 신음하는 듯한 커다란 숨소리는 그것이 로이의 바로 뒤까지 왔다는 사실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로이는 자신의 등으로 따뜻해졌던 철문이 급속히 식어 감을 느꼈다. 아니, 식었을 뿐 아니라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커다랗고 차가운, 살아 움직이는 젤리에 등을 대고 서 있는 느낌이었다. 로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벌벌 떨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신의 옆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검은 그림자 덩어리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로이는 철문이나 벽처럼 통과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로이의 주위에서 어둠 덩어리가, 여기저기서 들이닥치고 있었다. 다른 유령들처럼 형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덩어리진 진흙처럼 흘러내리고 스며들며 끊임없이 그 모양이 변하고 있었다. 벽과 천장, 바닥, 그리고 로이가 막고 섰던 철문으로 삐져나온 그림자의 부분부분들은 스르륵 흘러가서 서로 합쳐졌고, 그것들이 다 모인 크기는 엄청나게 컸다. 이미 그것은 성문으로 가는 복도를 꽉 막고 서 있었다. 눈도 입도 사지(四肢)도 없는 덩어리였으나, 로이는 그것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근거없는 느낌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결국 로이는 데이미아의 곁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 로이? 여기가 어디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데이미아가 몸을 일으키며 로이를 향해 물었다. 그러나 로이는 대답을 해 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데이미 아의 물음을 한 귀로 흘린 채 괴물만을 응시하고 있었고, 데이미아도 곧 로이의 시선을 따라 눈을 옮겼다. 그리고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꿈틀거리는 거대한 어둠을 바라보았다. "으... 으악! 저게 뭐야!" 데이미아가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렀다. 로이는 덜덜 떨려 잘 알아 들을 수도 없는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도대체 저게 뭐야?" "몰라... 저런 건 본 적도 없어!" 로이와 데이미아는 무릎이 떨려 일어서지도 못한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갔다. 그러나 그들의 속도와 꼭 같은 속도로, 그 어둠의 덩어리도 꿈틀 거리며 그들을 따라왔다. 그들의 움직임을 늦추면 자신도 늦추고, 서두르면 자신도 서두르면서. 이윽고 로이와 데이미아가 움직임을 멈추자, 그 그림자 덩어리도 따라오는 것을 멈춘 채 한 자리에서 꿈틀거렸다. "뭐... 뭘 원하는 거야?" 참다 못한 데이미아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 어둠의 덩어리가 대답을 할 리 없었다. 대신 대답을 하고 싶다는 듯 신음하는 듯한 끙끙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너무 크고 듣기 싫었으므로 데이미아는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로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 괴물의 괴성에서 확실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아니, 만약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다고 해도, 지금 이 상황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그 괴물과 대화를 시도해 보는 것밖에 없었다. 그 괴물의 주위는 빠른 속도로 낡아 무너져 내리고 있었고, 다른 복도도 그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 지만 위협을 느끼기에 충분한 속도로 균열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봐요, 뭔가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로이는 간신히 용기를 내어 말하며, 몸을 일으켜 그 괴물의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의 목소리는 성의 돌이 무너져 내리고 버팀목이 부러지 는 소리에 묻혀, 그 자신에게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괴물은 들을 수 있었는지, 아까와 마찬가지로 소름끼치고도 구슬픈 신음소리를 냈다. 로이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몇 발짝 더 그 괴물에게로 다가 갔다. "로이! 너 뭐하는 거니! 미쳤어?" 데이미아가 로이에게로 달려와서, 너무 놀라고 겁에 질려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로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어둠 덩어리는 갑자기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며 지옥에서 들려오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질렀다. 로이는 너무 놀라 털썩 주저앉아 버렸고, 데이미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 숨을 헐떡거렸다. 그녀가 물러나자, 괴물은 침착성을 되찾고 다시 온순해졌다. "데... 데이미아... 거기에 있어... 오지 말고... 네... 네가 오는 게... 싫은가봐... 요정이라서 그런지..." 로이는 마구 더듬거리는데다, 이가 부딪혀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이미아의 눈이 커졌다. "넌 어쩌려고?" "그... 글쎄... 말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아무래도 지금은... 그 방법 밖에는..." "로이! 조심해!" 갑자기 데이미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로이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검은 괴물 쪽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 복도가 보인 것이 아니라, 마치 눈을 감은 것처럼 캄캄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순간적으 로 로이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깨달았다. 어둠 덩어리가 몸을 부풀려 로이에게로 덮쳐 온 것이다. "으아아악!" 로이는 성이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지만,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데이미아가 얼른 그에게 달려가, 소매를 잡고 끌어내야 했다. 그러나 로이가 비로소 제정신을 차려 일어서려고 하는 찰나, 그 어둠 덩어리에서 나온 검은 끈 같은 것이 로이의 발목을 휘감았다. 로이는 다시 넘어져 그 괴물에게로 끌려갔다. 데이미아는 그의 손을 꽉 잡고 놓지 않았으나, 그녀 자신도 함께 끌려갈 뿐이었다. "너... 감히 누구에게 덤비는 거야! 시엘라드 로카!" 데이미아는 오른손을 높이 쳐들고 주문을 외웠다. 순식간에 하얗고 창백한 빛이 그녀의 손에 내려앉아, 마치 별처럼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 빛의 덩어리는 그녀의 손 위에서 마치 창처럼 긴 모양으로 늘어났고, 데이 미아는 그 모습이 갖추어짐과 동시에 그 빛을 괴물에게 던졌다. 마침 로이는 그 괴물 속으로 끌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마치 장님이 된 것처럼 사방이 어둠 뿐이었 다. 그러나 다음 순간, 눈이 아플 정도의 빛이 번쩍거렸고, 이번에는 순식간에 주위가 온통 빛이었다. 눈을 아프게 하는 강렬하고 창백한, 하얀 빛 때문에 로이는 눈을 감았다. 그의 발목을 감고 있던 촉수 같은 부분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고, 순간 데이미아가 힘껏 잡아당기는 힘에 의해, 둘은 괴물의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나가 쓰러졌다. "야호! 내가 이겼어!" 데이미아가 의기양양하게, 아직 영문을 모르는 로이를 얼싸안으며 소리쳤다. 로이는 어리둥절해서 괴물 쪽을 바라보았다. 한 데 뭉쳐있던 어둠 덩어리가 이제는 조각조각 흩어져 있었고, 그 잔재마저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 괴물이 있던 자리 저편으로, 이제는 바닥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벽과 천장은 아예 없어지다 만, 복도라고도 부를 수 없는 성의 일부분이 널려 있었다. "어... 어떻게...?" 로이가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데이미아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으나, 벌떡 일어나 활기차게 대답했다. "어떻게라니... 마법을 썼지! 생각보다 별 거 아니군...!" 그러나 그녀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겁에 질린 로이의 비명이 가뜩이나 무너져 가는 성 안을 뒤흔들었다. "데... 데이미아! 뒤를 봐!" (계속) 그러나 데이미아는 뒤를 돌아 볼 새도 없었다. 로이의 비명과 거의 동시에, 이번에는 그녀의 등 뒤의 벽으로부터 어둠 덩어리가 나타나, 순식간에 기다란 촉수를 뻗쳐 그녀의 목을 휘감았던 것이다. 데이미아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그 촉수를 잡고 떼어내려 했다. 다른 유령들과는 달리, 습기 없이 물컹거리는 물체가 손에 잡혀졌다. 어둠 덩어리는 형체 없이 흐물거리며 비명과도 같은 울부짖음을 내질렀다. 아무리 용감한 기사라도, 겁에 질려 꼼짝 못 하게 할 만한 소리였 다. 하물며 데이미아야 말할 것도 없었다. 로이가 아슬아슬한 찰나 그녀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지 않았더라면, 순식간에 괴물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것이었다. "데이미아! 뭐해! 빨리 아무 주문이나 써!" 로이는 이제는 아예 땅에서 들린 데이미아의 발목을 잡은 채, 질질 끌려가면서 소리를 질렀다. 데이미아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아까 외웠던 주문을, 얼빠진 목소리로 그대로 되풀이했다. "시엘라드 로카...!" 그러나 그 빛이 그녀의 손에 채 다 모이기도 전에, 괴물에게서 또다른 촉수가 튀어나와 그녀의 손을 덮쳤다.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다른 촉수가 그녀의 다른 손을 휘감았고, 그리고 또 다른 두 개의 촉수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로이의 팔을 휘감았다. "어... 이런...?" 로이는 도망칠 새도 없이 데이미아와 마찬가지로, 그 괴물에게 잡혀 버리고 말았다. 둘은 마치 한 그물에 낚인 두 마리의 물고기처럼, 혹은 한 거미줄에 걸린 두 마리 곤충처럼 괴물에게 잡힌 꼴이었다. 그리고 촉수는 점점 당겨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짧아지면서, 서서히 둘을 어둠의 덩어리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거... 설마 우리를 먹으려는 건 아니겠지? 입도 없는데...' 로이는 겁에 질려 이렇게 걱정하면서도,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사실, 이렇게 꼼짝없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없어 보였다. 팔 하나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모를까... 그 괴물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이 커져 보인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거대한 암흑이 자신을 덮쳐 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해가 지고 어둠이 밀려오듯, 주위가 어두워 져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게 된다는... 그 괴물은 거대한 덩어리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갈수록 오히려 뻥 뚫린 공간에 가까워 보였다. 로이의 시야가 그 어둠에 의해 뒤덮히기 직전, 갑자기 괴물의 비명이 그의 귀를 아프게 때렸다. 소름끼치는 그 소리는 괴물의 몸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그 어둠의 덩어리를 '몸'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멀리서 들어도 충분하게 크고 두려웠던 그 소리는, 가까이서 듣자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날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데이미아가 격분해서 외치고 있었다. 어느 새 그녀의 한쪽 손은 괴물의 촉수를 벗어나 있었고, 그 손에서는 창 모양의 빛 덩어리가 번쩍 거리고 있었다. 아까와는 달리, 마치 번개를 쥐고 있는 것처럼 푸른 빛과 흰 빛이 정신없이 교차하며 출렁이는 모습이었다. 괴물은 다시 촉수를 뻗었 으나, 데이미아는 그것들을 그 빛 덩어리로 잘라 버렸다. 잘린 촉수는 연기가 흩어지듯 사라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감싸고 있던 촉수들을 모두 잘라버려, 다시 땅 위에 섰다. 어둠의 괴물은 계속 그녀에게 촉수를 뻗쳤지만, 데이미아가 촉수를 잘라내는 속도에 미치지 못했다. "자, 로이를 내려 놔! 안 그러면 혼날 줄 알아!" 데이미아는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그러나 괴물은 마치 망설이는 듯, 로이를 자기 안으로 끌어들이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 꿈틀거리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긴 막대의 모양을 한 빛의 덩어리를 든 채 그대로 서서 괴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빛의 덩어리를 유지하는 데만도, 상당한 마력을 쓰고 있는 듯, 그것은 지속적으로 빛나지 못하고 그녀의 집중력이 흐려지고 회복됨에 따라 줄어들거나 흐려지기도 하고 늘어나거나 밝아지기도 하며, 끊임없이 변하고 있었다. "휘드린 딘 로이(로이를 내 놔)!" 데이미아가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괴물은 신음소리를 내며, 그녀의 명령에 따르려는 듯 로이를 들고 있던 촉수를 조금 움직였다. 그 반응에 데이미아의 긴장이 풀렸는지, 빛의 막대는 눈에 띄게 길이가 줄어들며 그 밝기도 흐려졌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를 응시하는 로이의 눈에, 그녀의 모리 위, 천정으로부터 덮쳐오는 검고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데이미아! 머리 위를 조심해!"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데이미아가 그 소리에 고개를 든 것과, 그 어둠 덩어리가 빠른 속도로 그녀를 향해 덮쳐 내려오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그러나 데이미아가 조금 더 빨랐다. 그녀는 지체 없이, 위에서부타 덮쳐 오는 괴물의 부분 따위에 현혹되지 않고, 로이를 들고 있는 괴물의 본체(本體)에 빛의 막대를 힘껏 던졌다. "갈 아스틸라, 에프라딘! (아스틸라의 이름으로, 벌을 받으라!)" 빛의 덩어리는 그녀의 손을 떠났고, 그 직후에 어둠의 덩어리는 그녀의 머리를 덮쳐 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바닥에 바짝 엎드렸다. 그러나 그 괴물의 일부분이 그녀의 몸을 내리치기 전, 빛의 막대는 괴물의 몸에 꽂혔고, 곧 눈부신 빛을 내며 폭발했다. 실제로 성의 돌이 굴러떨어지게 하는 우렁찬 울부짖음과 함께, 데이미아를 덮쳐 오던 어둠의 부분은 연기가 흩어 지듯 사라졌다. 로이를 감고 있던 촉수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그러나 데이미아가 계산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로이를 지탱하던 촉수가 사라지면 당연히 로이가 땅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 했으나, 그의 바로 아래에는 사실 그 괴물의 몸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데이미아의 공격은 그 괴물에게 충격과 고통을 주었으나, 그것을 없애 버리 지는 옷했다. 로이는 곧바로 그 어둠의 속으로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어둠 덩어리는 마구 불규칙하게 꿈틀거리면서 복도를 따라 도망치기 시작했다. "베... 베이! 에레인 로이! (아... 안돼! 로이는 두고 가란 말야!)" 데이미아는 당황해서, 자신의 힘에 부치는 싸움으로 겨우 이 괴물 에게 겁을 주었다는 사실도 잊고 그것의 뒤를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발도 없는 주제에 그 어둠 덩어리는, 꿈틀거리며 미끌어지듯이 매우 빨리 달려갔다. 게다가, 그것이 지나간 자리는 온통 돌이 부스러지고 흙은 삐져나오고 바닥은 내려앉아, 도대체가 제대로 달릴 수가 없었다. 그나마 비슷한 속도로도 맞출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인간족이 아니라 발이 빠른 요정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데이미아의 앞에, 갑자기 허연 것이 불쑥 나타 났다. 데이미아는 비명을 지르며 멈추었다. 곡괭이를 든 해골이었다. 그러나 그냥 온전한 해골도 아니고, 두개골 반 쪽이 스러지고 한 쪽 팔이 없는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뭐야, 이건...!" 데이미아는 진저리를 치면서 뒤로 물러났다. 지팡이도 없이 어둠의 덩어리와 싸우느라 너무 강력한 주문을 쓴 그녀에게는 거의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이 성의 괴물들은 이상하게도 주문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보통의 해골 같으면 남은 힘을 모아 흑마술 붕괴 주문을 씀으로써 어떻게든 되겠지만, 이 성의 해골들에게 그것이 통할 리 없었다. 이들은 시이드 성을 축조하던 노예들이었고, 이들의 원한이 다른 생각 없는 흑마술의 산물들과 달리 그들 자신은 지탱해주고 있음을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해골도 반쪽만 남은 입으로 끼익끼익 듣기 싫은 소리를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다... 갚아... 줄 테다... 다... 갚아... 줄 테다..." "이... 이봐요, 해골 아저씨! 전 아무 상관도 없는 요정이라고요!" 데이미아는 뒤로 물러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해골은 말은 할 수 있어도 들을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똑같은 말만 중얼 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다... 갚아... 줄 테다... 다..." 오싹하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뒤에도 두 해골이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가슴 반쪽이 날아간 것과, 눈에 띄게 허리가 휜 것이었다. '휴우... 다른 방법이 없군...!' 데이미아는 할 수 없이 손을 모으고 주문을 외웠다. "탈 하라스 레이나드, 딘 오닌 아일 라히예드 로르페이 게나드, 엘테이닌 사르페이 아일 로레디아! (저승을 수호하는 신이시여, 당신의 힘을 빈 언어로써 부탁드리오니, 당신의 권한으로 이들의 힘을 제하여 주십시오!)" 그녀의 합장(合掌)한 손 안에서 눈부시게 밝은 빛이 쏟아져나왔다. 세 구의 해골들은 마치 그 빛에 부딪힌 듯, 퉁겨나가 쓰러져 꿈틀거렸다. 데이미아는 숨을 몰아 쉬며 그들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법으로 그들의 힘을 없애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저들은 조금 후면 저 마비 상태에서 풀려나 다시 그녀를 공격할 것이다. 그 전에 도망쳐야 했다. 데이미아는 머뭇거리지 않고, 어둠 덩어리가 로이를 데리고 간 방향 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막 쓰러진 해골 곁을 지나는 순간, 해골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이런 일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데이미아는 돌바닥에 쿵 넘어져 버렸다. "으악!" 딱딱한 돌바닥인데다, 아까 어둠의 덩어리가 지나가서 온통 돌이 들려져 나온 위에 넘어졌으니 아픈 건 당연했다. 치마가 찢어지고 무릎이 까져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대로 엄살을 부릴 시간이 없었다. 해골들은 아직 일어서지는 못했으나, 손에 곡괭이와 삽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 설마... 페레이타의 주술을 썼는데 벌써 마비가 풀렸다는 거야? 웬만한 사자(死者)는 그대로 사라져 버리는 주술인데! 아무리 사일러스의 마법이 강력하다고는 하지만... 이것도 다 인간족의 원한 때문이라는 건가?' 데이미아는 새파랗게 질려, 고통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이것들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 이제는 로이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쳐야 했다.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해골은 아직 손 바로 곁에 있는 곡괭이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목과 그 곡괭이를 둘 다 잡기에는 팔이 약간 짧았다. 데이미아는 상반신을 날려, 얼른 그 곡괭이를 낚아챘다. "다닌 딘 일린! 로 에그로니스! (이거 놔! 이 나쁜 놈아!)" 데이미아는 이렇게 소리치며 곡괭이를 날려, 그 해골의 손목을 내리찍었다. 곡괭이의 녹슨 날이 뼈에 파고들는 기분나쁜 감촉과, 뼈가 갈라 지는 기분나쁜 소리와 함께, 해골의 손목은 끊겨 버렸다. 손은 데이미아의 발목에서 떨어졌으나, 마치 그녀의 발목을 다시 찾아 헤메이는 듯, 꿈틀거리며 손가락을 발 삼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데이미아는 소름이 끼쳐서 사자 (死者)들에 대해 배운 것도 다 잊은 채, 그 손을 향해 곡괭이를 또 내리쳤다. 곡괭이의 날이 뼈만 남은 손의 중앙에 파고들었고, 손은 여섯 조각이 난 채 흩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렇게 조각조각 흩어진 다음에도, 손의 잔재들 은 계속 꿈틀거리며 데이미아에게 다가왔다. '그, 그렇지... 이 놈들한테 물리적인 공격이 들을 리가 없지! 마법도 안 듣는 녀석들인데!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로이를 찾으러 가야 해!' 데이미아는 곡괭이를 든 채, 재빨리 로이와 어둠 덩어리 괴물이 간 쪽을 향해 달렸다. 어둠의 덩어리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그것이 간 자리는 다른 성의 부분보다 훨씬 심하게 낡아 있었으므로, 뒤를 따라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단, 그것을 따라잡은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와아악!" 갑자기 괴성을 지르며, 양쪽 벽에서 삽을 든 해골이 각각 한 명씩 튀어나왔다. 데이미아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놀라는 와중에서도 한 손에 든 녹슨 곡괭이를 놓지는 않았다. 해골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삽을 휘둘렀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드라이어드 족 답게 유연한 몸짓으로 고개를 숙여 그 공격을 피했다. 다른 해골이 곧이고 위에서 아래로 삽을 내리쳐 왔으나, 데이미아가 조금 더 빨랐다. "일린(저리 가)!" 그녀는 기세 좋게 소리치며, 힘차게 곡괭이를 휘둘렀다. 별로 센 힘은 아니었으나, 곡괭이의 묵직한 무게 때문에 해골의 가슴뼈는 그것에 맞는 즉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러나 동시에, 곡괭이의 손잡이는 데이미 아의 손을 벗어나 저 멀리로 날아가 떨어졌다. '이거... 큰일났네! 이럴 줄 알았으면 마력을 아껴 두는 건데...' 데이미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다른 해골과, 이제 다리와 상반신 이 분리되어 엉금엉금 기어 오는 해골, 그리고 계속해서 벽과 바닥을 헐고 나오는 해골들을 바라보았다. 뒤에서는 아까 그녀의 마법으로 잠시 마비되었 으나, 이제 몸이 풀려 무서운 속도로 좇아오고 있는 해골들의 철거덕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망갈 길이 없었다. '도... 도대체 웬 해골이 이렇게 많은 거야? 하나, 둘... 일곱, 여덟... 내 참, 여기가 성이야 무덤이야? 이러니 일이 생기지...' 데이미아는 이 와중에서도 이렇게 중얼거리며 해골들의 머리수를 세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온 해골이 삽을 높이 치켜 들었을 때에도, 그녀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계속) "크와악!" 해골은 괴성을 지르며 삽을 내리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굵고 거대한 칼날이 그의 어깨부터 반대 쪽 허리까지를 갈랐다. 가뜩이나 낡은데다 근육이라고는 없는 해골의 뼈는, 기분나쁜 소리를 내며 깨끗이 잘렸다. 데이미아는 그제서야 제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 갑자기 찾아온 구원자를 바라보았다. "랜스...!" "그래, 데이미아, 괜찮아?" 랜스는 급히 달려왔는지, 숨을 몰아 쉬며 대답했다. 그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그는 데이미아를 밀쳐내며, 그녀의 바로 뒤까지 다가왔던 해골들 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칼이 커다란 원호를 그렸고, 가장 가까이 있던 해골은 뼈가 부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몸이 두동강나 쓰러졌다. 그 뒤에 있던 해골이 어색한 몸짓으로 곡괭이를 치켜들어 랜스를 내리치려 했으나, 그 전에 랜스의 칼날이 그의 팔목을 잘라 버렸다. 곡괭이는 덜컹! 소리를 내며, 그것을 꽉 잡은 두 손과 함께 돌바닥에 떨어져 버렸고, 이어서 날아든 칼날에 그것의 머리도 잘려나가, 곡괭이의 바로 곁에 떨어졌다. "랜스! 뒤에!" 데이미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랜스는, 자신의 바로 뒤까지 다가온 해골의 그림자를 눈치채고 있었다. 해골은 제법 빠르게, 그의 머리를 향해 삽을 휘둘렀으나, 그것은 허공만을 휘젓고 공허한 소리를 내며 돌벽에 부딪쳤다. 해골이 머뭇거리는 사이,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던 랜스는 얼른 그것에게 돌진하여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를 쩍 갈라 버렸다. 죽은 지 꽤나 오래 된 해골인지, 뼈는 어이없게도 쉽게 부러졌다. "..다 끝난 건가?" 랜스는 호흡을 고르며 꿈틀거리는 해골의 잔재들을 내려다보았다. 데이미아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해골들은 랜스의 칼에 빠짐 없이 쓰러진 후였다. 그러나 그들이 보통 해골들과 다르다는 것은 데이미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의 해골들에게는, 이만한 타격이라면 그들을 불러낸 흑마법사가 특별한 조치를 취하기 전까지 움직이지 못할 것이었다. 그러나 시이드의 사자(死者)들이라면... 데이미아의 직감은 적중했다. 곧 그들은 엉금엉금 기어, 데이미아와 랜스에게로 다시 오기 시작했다. 그 속도에 저절로 소름이 끼쳤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자기 손으로 떨어져 나간 몸을 붙이고 달려올 가세였다. "도망쳐요, 랜스, 저들은 죽여도 소용 없어요!" 데이미아가 그의 팔을 잡아 끌며 소리쳤다. 랜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는 그녀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시체들은, 그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 움직일 수 없게 만들지 않는 이상 어떤 공격으로도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아트웰에서의 경험으로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마법이라면... "왜 마법을 쓰지 않지, 데이미아?" "저 녀석들 보통 해골이 아녜요. 저들의 원한이 놀라울 만큼 저들을 지탱해 주고 있어요. 웬만한 마법으로는 끄덕도 않는다고요! 게다가 난 지금 지팡이도 없고 너무 많은 마력을 썼으니 저들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해요." 데이미아는 달려가면서 대답했다. 랜스는 의아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되물었다. "원한이라고...?" "그래요, 원한! 저들은 우리를 자기들을 부려먹던 사람들로 생각하고 다 죽이려고 하는 중이란 말예요.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도 당신 형이랑 파엘 영주는 웃어 넘겨 버렸잖아요!" "잠깐...! 부려먹어? 그럼 설마 저들이 시이드 성을 지은 노예들이란 말야?" "그럼 누구겠어요?" 하고 데이미아는 벌컥 화를 냈다. "무덤도 없이 이런 성 밑바닥에 묻혀 있는 게. 설마 귀족들의 유골 이겠어요? 하여간 도대체 몇 명이나 되는 사람이 이 성에서 죽은 거에요? 이런 성은 귀신 때문에 망해도 할 말이 없어, 정말!" "데이미아!" 랜스는 갑자기 멈추어 서며, 데이미아의 팔을 잡아 세웠다. 그 바람에 데이미아는 거의 넘어질 뻔했다. "왜 그래요?" 데이미아는 신경질을 내며 물었으나, 랜스의 표정을 보자 태도가 변했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의 랜스를 그녀는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마치, 화를 억지로 억누르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낮게 속삭였다. "시이드 성을 지은 건 에스테이아 백성이 된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모두 왕의 보호를 배웠고... 우리 인간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야. 너와 켈리가 아무렇게나 떠들어댈 때는 빨리 출발하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만... 설마 반란군들이나 퍼뜨리는 그런 소문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거야?" "흥, 반란군이나 퍼뜨리는 소문이라고요? 그런 이 해골들은 모두 누구의 유골이죠? 랜스는 모르는가 본데, 요정족들은 다 아는 얘기라고요! 바람의 정(精)과 대화하는 하아르 족(Hahr ; 바람의 요정족)과 물의 지혜를 나누는 나이아데스 족(Naiades ; 물의 요정족)이 그 현장을 눈으로 봤어요. 그리고 방랑하는 요정족의 음유시인들이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알렸죠! 당신들은 동족인 인간들을 부려먹고 그 시체를 화장(火葬)해 주지도 않고, 무덤을 만들어 주지도 않고 이 성 밑에 쌓아 둔 거라고요!. 그리고 그 결과로 지금 아무 상관도 없는 우리가 이 고생을 하고 있고요!" "요정족들은 뭐든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이 인간족에 대해 아는 일은 별로 없어. 인간족이 사는 방식은 요정족들과 많이 달라. 더이상 내 친구들과 내 왕을 비난한다면 나도 참고 있을 수만은 없어." 랜스가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으나, 그 밑에는 억누른 분노가 도사리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어이가 없어 그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아무리 그녀가 소녀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보다 두 배에 가까운 세월을 살았고, 그리고 그만큼 여행하며 보고 들은 사실도 많았다. 그 사실을 랜스가 모르지 않을 텐데...!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어!' 데이미아는 순간 얼굴이 달아올랐다. 확실히 그녀는 성년식조차 편법으로 일찍 치른, 요정족으로 치면 어린애였다. 그 사실은 부인할 수 없었다. 인간으로 치면 로이보다도 나이가 많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그래도 나는 라스헨 에이니드라고! 랜스보다 더 오래 살았단 말야! 그런데도 내가 뭘 아냐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다 털어놓아, 랜스가 얼마나 자기보다 무지한지 깨닫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있던 자리가 심하게 흔들거렸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들이 서 있던 바닥이 뻥 뚫리며 무너져 내려 버렸다. 복도 안을 가득 메운 먼지에 쿨럭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데이미아는, 어느 새 몸이 완전히 재조립된 채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그다지 짧은 거리는 아니었지만, 요정의 눈을 가진 그녀에게는 섬뜩할 만큼 똑똑히 보이는 거리였다. '그래... 뭐... 지금 자존심 싸움 할 때가 아니지...' "알았어요... 그런 말 안 할 께요. 좋을 대로 생각하라고요. 난 입 다물고 있을 테니까, 랜스가 로이를 좀 구해 줘요!" "로이? 로이가 왜?" "검은 괴물한테 잡혀갔다고요. 푸딩 같은 그림자한테!" "...푸딩 같은 그림자?" "따라와 보면 알아요. 어서!" --------------------------------------------------------------------- '아... 진짜 깜깜하네...' 괴물의 속으로 떨어진 로이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두워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외부의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방금 아까까지만 해도 괴물의 비명과 성이 무너져 내리는 소리에 귀가 멀 듯 했는데, 이제 들리는 거라고는 로이 자신의 목소리 뿐이었다. 또, 괴물은 지금 데이미아를 피해 빠른 속도로 달려가는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전혀 그것을 느낄 수 없었다. 속도감은 고사하고 조금의 진동도 없었다. 마치 가장 고요하고 가장 어두운 방 안에 갇힌 꼴이었다. '여긴 괴물의 안 같은데... 그럼 걷다 보면 나가는 길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까부터 계속 걸어다녔는데도 불구하고, 출구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어떤 족으로 가도 그 괴물의 크기를 볼 때 지금쯤은 괴물 밖으로 나와 있거나, 적어도 벽 같은 데 부딪혀야 정상인데, 이것은 마치 광활한 공간을 헤매는 격이었다. 벽은 커녕 손에 잡히는 것도, 발에 걸리는 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괴물이라도 나왔으면 죽을 각오로 싸우기라도 하련만, 지금 로이의 경우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걷는 수밖에는 없었다. '...어? 빛이...' 로이는 한쪽 구석에서 새어나오는 빛을 보고 그리로 발을 옮겼다. 밖이었다. 그러나 로이가 상상하던 밖은 아니었다. 로이는 당연히 무너져가는 성 안으로 내동댕이쳐지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곳은 어이없게도, 막 봄을 맞은 듯한 초원이었다. 토끼들과 노루들이 로이를 쳐다보다가, 깡충깡충 도망쳐 버렸다. 도대체 어디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당황한 로이는 다시 괴물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되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의 바로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되던 괴물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후였다. '억... 도대체 이게 무슨 조화람? 여긴 도대체 어디야?' 당황한 로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정처없이 걸었다. 그런 그의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냥꾼 차림의 어른 서넛과, 그들의 아이인 듯한 예닐곱 살의 소년들이었다. 모두 손에 활을 들고 있었고, 몇몇은 사냥으 로 잡은 듯한 토끼와 꿩을 들거나 허리에 차고 있었다. 그들은 맑은 소리고 웃고 이야기하며, 석양이 져 가는 방향으로 유유히 발을 옮겼다. "저기... 이봐요, 실례합니다..." 로이는 길을 물을 셈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로이는 그들의 바로 뒤까지 쫓아가 사냥꾼 중 한 명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설마...!' 로이는 시험삼아, 그들을 향해 팔을 벌리고 뛰어들기도 하고, 마구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길을 막고 두 팔을 쩍 벌리고 서 있었지만, 결과는 로이의 예상과 같았다. 그들은 그를 그냥 통과하여 가 버렸다. '그런가... 설마 이건... 그 괴물이 생각하고 있는 거야?' 로이는 스스로 의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그 중 한 아이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 목소리는 바로 지하실에서 흐느끼며 웃던 그림자들의 목소리들 중 하나였다. 로이 자신도 왜 그렇게 느껴졌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 기억에 남는 목소리도 아니고, 분위기도 상황도 전혀 달랐는데. 게다가 그 목소리는 다른 많은 목소리의 울림과 뒤섞여서 들려왔는데... 그러나 그 확신은 모든 상식을 뛰어넘어 그를 설득시켰다. 바로 그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의 것일 수 없었다. "기... 기분나빠! 여기서 나가겠어!" 로이는 이렇게 소리치며, 무작정 내달았다. 눈앞에 무릎 위까지 올라 오는 엉킨 수풀이 가득했지만, 아무것도 발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이 로이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로이는 마치 그렇게 달려서 이 환각 속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처럼, 눈앞을 보지 않고 마구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숨이 턱까지 차올라, 도저히 계속 달릴 수 없게 되었을 때에야 멈추어 섰다. "으... 여길 어떻게 나가란 말야!" 로이는 신경질이 나서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이제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고, 별들이 창백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그만큼 지나도록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은 아까 로이가 처음 발을 내디뎠던 장소 그대로 였다. 맥이 바진 로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러다 나 여기서 굶어 죽는 거 아냐? 그리고 보니 배고프네... 목도 마르고... 하지만 여기 있는 건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를 않으니...' 그러나 물론, 그것은 단지 로이의 머리가 잠시 꾸며 낸 익살스러운 생각에 지나지 않았다. 사실로 말하자면, 로이는 자신이 이렇게 죽을 수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죽음의 고비들을 넘어 왔건만, 아직 죽음은 50여년 후에나 닥쳐오리라고 생각하는 로이였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이 장소를 빠져나가기 위한 온갖 쓸데없는 궁리를 시작 했다. '음... 그래... 여긴 그 괴물의 뱃속일거야, 아마. 옛날 얘기에서는 레비아탄(Leviathan)같은 거에 잡아먹히면 불을 피우고... 그럼 괴물이 기침을 해서 안에 있는 사람을 뱉어낸다... 아니, 재채기였나? 으휴, 아무려면 어때! 이 초원을 홀랑 다 태워 버리면... 아니, 하지만 그럴 수가 없잖아, 나뭇가지 하나 손에 잡히지 않으니!' (계속) 이런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던 로이는, 자신의 근처로 사람의 그림 자가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눈치챘다 해도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자신은 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므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신에게 말을 걸어 왔을 때, 그는 소스라 치게 놀랐다. "얘... 너 여기서 뭐하니?" 그녀는 로이 또래의, 아니 그보다 한 살 정도 어릴 듯한 어린 소녀 였다. 평범한 얼굴에 허름한 차림이었으나, 맑고 커다란 검은 눈이 아주 귀여웠다. 로이가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소녀는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했다. 그제서야 로이는 더듬거리며, 불쌍할 정도로 바보같은 말투로 물었다. "내... 내가 보이니?" "뭐?" 그 소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아니, 넌 그럼 네가 유령이라도 되는 줄 아니?" '유령? 가만있자... 유령은 얘 아닌가? 아니, 유령 속에 있는 환영이 니까 유령의 허깨비의... 으... 그러고 보니 미친 사람 동네에 가면 정상적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그러니 유령 동네인 여기에서는 혹시 내가 유령? ...으아아아! 모르겠다!' 로이가 한참동안 대답이 없자, 그 소녀는 걱정스레 물었다. "응... 길을 잃었니?" "어... 뭐... 그런 셈이지. 비슷해." "어디로 가는 중인데?" "어디든 좋아... 여길 벗어나는 길. 도대체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딘줄도 모른단 말야? 여긴 아트웰 분지, 히스 평야야. 넌 이상한 사투리를 쓰는구나. 어디서 왔니?" "저기... 시지리스 섬..." "시지리스? 거긴 용들이 사는 데 아냐?" "아... 그 근처에서." 로이는 머릿속이 혼란해져 대답했다. 여기는 분명히 로이가 살던 시대는 아니었다. 아마도 훨씬 전... 시지리스가 리반 아덴, 드래곤 슬레이어에 의해 구출되기 한참 전인 것 같았다. "응... 그래... 하지만 길을 잃었다니 참 안됐다. 이런 밤중에...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적어도 저녁식사는 대접할 수 있어." "어, 정말? 고마워!"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소녀를 따라 나섰다. 이상하게도 지금 그가 괴물의 회상(回想) 속에 들어와 있다는 생각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아니, 모든 것이 너무나 현실적이었다. 땅에 밟히는 부드러운 흙, 그의 발에 걸리는 수풀들, 그리고 차가운 밤공기와 그 소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그 소녀의 집의 나무문, 그녀의 부모와 어린 남매들... 이게 어떻게 그냥 상상이고, 그림자였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그들의 환대는 따뜻했고, 저녁은 간소했으나 맛이 좋았다. 단란한 가정이었다 - 아버지가 사냥터에서 보았던 멧돼지에 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기는 했지만. 이들이 어떻게 실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로이는 한순간 자신이 잠깐 머리가 이상해 졌었나보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 "시지리스 근처면... 남쪽에서 왔겠구나! 어째서 너같은 어린애가 혼자 여행하지?" 소녀의 어머니가 물었다. 그러나 로이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도대체 왜 여행을 시작했더라? 왜 고향을 떠나서? 그가 기억하기로는 그의 고향은 분명 시지리스... 아니, 하지만 그곳은 용들이 사는 곳인데. 시지리스 근처의 어느 마을이겠지... 그러나 마을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왜 가야 하는지도. 그러나 그 부인으 친절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아, 뭐... 대답하기 거북하면 안 해도 돼." 로이는 차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수가 없어서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그녀의 남편이 이윽고 화제를 멧돼지로부터 바꾸어, 로이에게 말을 걸었다. "여행했다면 요즘 에스테이아가 어떤지 알겠구나. 아트웰로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있던데, 정말이냐? 모두들 걱정하고 있어. 아클레어 3세는 전쟁에 미친 놈이라던데..." "...그 늙은 왕 말인가요?" "아니, 2세 말고 3세 말이다. 왕세자 말이야. 겨우 너정도 나이라는데, 전쟁에 환장을 했다는구나. 그놈, 그러다가 나라 말아먹고 말 거야. 하긴, 너같은 어린애가 알 리 없겠지." "여보, 참, 무슨 걱정이에요? 벨리노어 폐하가 계시잖아요. 한 번도 전쟁에서 지신 적이 없는... 이 마을에서까지 징집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에요." "하긴, 뭐..." '아냐... 아클레어 3세가 이길 거야...' 로이는 이렇게 생각했으나, 다음 순간 자신이 무슨 근거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의아해졌다. 그것도 마치 이미 지난 일처럼, 아주 확실하게! 그러나 아무런 근거가 없지 않은가? 그냥 섣부른 추측일 뿐. 하지만 그냥 망상이라고 넘겨 버리기엔 너무도 꺼림칙한 무언가가 있었다... '이상해... 꼭 그런 느낌이 들어... 아클레어 3세가 이길 거야... 그 전에 이 마을까지 전쟁의 여파가 미치고... 하지만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지? 나 혹시 예언자인가?' "피곤한가보구나. 잘 데가 다락밖에 없어서 어쩌지? 일단 거기라도 괜찮겠니?" 소녀의 어머니가 멍하니 앉아 있는 로이를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로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머릿속은, 소녀를 따라 다락으로 올라 가면서도 복잡할 대로 복잡해져 있었다. '이상해... 왜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어! 난 미래의 일을 알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든단 말야. 아니, 미래가 아니라 마치 과거의 일 처럼... 이제 곧 여기서 전투가 벌어질거야... 이 평야는... 척박해질거야. 더이상 히스 평야라 불리지 않고... 어두운 성이 들어서고... 모두 포로가 되어... 그 성을 짓는데 동원될거야...!' 갑자기 로이는 몸이 오싹함을 느꼈다. 소녀의 목소리, 그녀의 누이 동생과 남동생들의 목소리, 그녀의 부모의 목소리, 그리고 초원을 휩쓰는 바람 소리가 한데 섞여 이상한 신음소리와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로이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락에서 뛰어내리다 시피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딱딱한 흙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소녀의 집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 후였다. 로이가 있는 곳은 초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젯밤에 보았던, 풍요로운 초원이 아니라, 마지막 숲 한포기까지 재로 변해 버린 황량하고 헐벗은 땅이었다. 동녘이 터 오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 붉은 빛은 벌거벗은 새까만 대지를 잔인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이... 이봐요! 아무도 없어요?" 로이는 소용 없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주위를 돌아보며 소리쳐 댔다. 그리고는 검은 땅 위에 어렴풋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정신없이 달려가 흙을 파헤쳐 그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두개골이었다. 그냥 두개골이 아닌, 어린 아이의 것 같은 작은 두개골. 로이는 소름이 오싹 끼쳤다. 그러나 그의 눈은 또 하나의 두개골을 찾아낸 후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어른의 두개골... 으스러진 갈비뼈와 한데 뒤섞여 있는... 그리고 그 가까이에, 정말 작은 두개골 또 하나... "그래, 내 가족들이야..." 어디선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들어서는 말투도 목소리도 평범한 남자 어른의 목소리였으나, 계속 듣고 있으려니 목청을 통해서 나오는 것 같지 않은 이상한 울림이 드러났다. 로이는 천천히 몸을 돌려, 사냥활이 아닌 녹슨 도끼를 들고, 엉성한 가죽 갑옷을 걸친 소녀의 아버지를 바라보았 다. 그는 반쯤 얼이 나간 얼굴로, 이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어제 네가 보았던 내 딸과, 내 아내, 그리고 다른 아이들... 모두 죽었지. 에스테이아 군이... 아클레어 3세가 와서 죽였어... 벨리노어는 항복해 버렸어..." 로이는 아무 말 없이 해골을 든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순간, 자신의 손에서 해골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해골은 그의 손 바로 아래에, 마치 실수로 떨어진 것처럼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로이가 다시 몸을 굽혀 손으로 그것을 집으려고 하자, 그것은 그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니, 모든 사물이, 해골 밑에 놓인 까칠한 흙까지 로이의 손에 아무런 감촉을 주지 못했다. 로이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소녀의 아버지는 웃었다. "이젠 안 돼... 잠시 널 내 회상의 세계 깊숙히 끌어들일 수 있었지. 네가 너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너는 곧 모든 걸 기억해 냈어. 보기보다 쉽게 속아 넘어가지 않더군... 그래서 결국 나까지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달콤한 추억에서 쫓겨나 이 끔찍했던 기억을 돌이키게 됐지만. 그래... 난 벨리노어가 항복한다는 소문을 듣고 얼른 탈영했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갈 생각이었지. 드라크노움을 넘어... 전쟁의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으로... 하지만 여기서 날 기다리는 건 불에 타버린 아내와 아이들의 시체였지. 그리고 곧바로 에스테이아 군에게 끌려갔어... 시이드 성을 건축하는 데 동원되기 위해... 아니, 사실은 곧바로가 아니었는지도 모르지. 그래, 한참동안 이들의 시신 곁에 이렇게 서 있었을 거야.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죄송해요."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렇게 한 마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러나 유령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럴 건 없지. 네가 만약 내 환상을 깨지 못했다면 너도 이 속에 남아 우리의 일부가 되어야 했을 거야. 내가 내 환상에 널 끌어들인 게 잘못이겠지..." "그럼... 그 괴물은... 아저씨인가요?" 하고 로이는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유령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괴물이라고... 그것이 괴물의 모습인가? 우리는 모르니까... 하지만 나 혼자만의 것은 아냐. 누군지는 몰라도 이렇게 과거만을 그리며 사는 사람들은 나 말고도 많이 있어... 페레이타의 땅으로 날아가려 했지만 발이 너무 무거워 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남아 있는 영혼들이... 하나 둘 모여 이렇게 된 거야. 우리는 우리들의 겉모습이 어떤 지 알 수 없어. 우리가 보는 건 이 속, 추억의 세계 뿐이니까... 그리고 아픈 기억들, 원한 따위는 다 밖으로 내보내어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놔 두지. 물론 좋은 추억을 많이 생각할수록 그런 아픔과 원한이 많아 지기는 해. 왜냐하면 우리 모두 지금 우리에게는 옛 행복 중 어느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에스테이아의 군대가 빼앗아 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ㅁ 년 전부터 이렇게 살아 왔어." "하지만 다른 유령들도 있던데요. 인간의 형체를 한..." "그들은 원한을 직시하고 있지. 자신이 누구를 왜 미워하는지 분명히 아는 자들이야. 그들은 추억에서 뛰쳐나와 현실을 보고, 적을 찾지. 눈을 뜨고, 해칠 사람을 고르는 거야... 그들은 적어도 우리보다는 아직 인간이야. 원한을 품는다는 것은 그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지. 우리는 우리의 손을 떠나 있는 원한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해. 솔직히, 꼬마야, 널 끌어들이는 줄도 몰랐어..." 유령은 희ㅣ하고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자, 이제 난 행복한 추억으로 돌아갈 거야. 넌 나가라, 꼬마야..." "자, 잠깐만요!" 하고 로이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 가지만 더요! 왜 저를 아저씨의 회상 속으로 끌어들이셨던 거죠? 잘못하면 저 때문에 아픈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걸 다 아시면서?" 유령은 사라져가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냥... 혼자서 너무 오래 상상을 했어. 누군가한테 보여주고 싶었어. 가끔 우리가 병사들이나 기사들을 삼키면... 악몽 속에서 시달리다 죽어가게 내버려 두지. 아니면 우리의 잡념(雜念)속에서 죽을 때까지 헤매게 만들거나... 여기는 우리의 생각으로 이루어진 곳이니까 시작도 끝도 없거든. 하지만 너는 우리와 적이 아닌 것 같았고, 또 왠지 무엇이ㄴ 이야기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을 주었어. 그래서 보여 준 거야. 이 음침한 성이 있던 자리엔도 한때 이렇게 아름다운 초원이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와 같은 수많은 가족들이, 행복만을 아는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을... 비록 그게 전부 하루 아침에 사라져 버렸다 해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야... 마치 산 사람처럼... 단지 하소연하고 싶었던 거야... 제발 내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를 잊지 마. 그리고 이 음침한 성ㅇ 있던 자리는 원래 푸른 초원이, 히스 평야가 있던 자리라는 것을 잊지 마... 나와, 이 음침한 괴물을 이루고 있는 우리 영혼들 모두 - 비록 우리의 겉모습이 어떤지는 알 수도 없고 그럴 용기도 없지만 - 한때는 그 평야에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는 걸 잊지 마..." 유령의 목소리는 멀어져가고 있었다. 로이는 다시 눈앞이 깜깜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두꺼운 이불 같은 것에 의해 몸이 밀리는 느낌과 함께, 그는 갑자기 괴물 밖으로 튕겨져나왔다. (계속) 괴물에게서 떨어져 나온 로이는 잠시 현기증을 느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두운 성이 무척 이상하게 느껴졌다. 마치 시이드 성을 처음 본 사람처럼. 그의 기억에 의하면 이 곳에는 푸른 히스 평야가 펼쳐져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지나서야 로이는 차츰 유령들의 환상을 벗어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로이! 맙소사! 무사했구나!" 그의 뒤에서 흥분한 데이미아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이는 아직도 어지럼증을 느끼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데이미아는 그의 뒤에 아직도 버티고 있는 검은 덩어리를 보고는, 표정을 굳히며 로이를 보호하려는 듯 그의 앞을 막아 섰다. 그녀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이미 평범해 보이는 나무 마법 지팡이가 하나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 지팡이로 검은 덩어리를 때릴 듯이 겨누며,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걱정 마, 이 놈은 내가 혼내줄 수 있어!" 그리고 그녀의 곁에, 랜스도 그 괴물에게 칼을 겨눈 채 뛰어들었다. 로이는 아직도 얼떨떨해서 두 사람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데이 미아와 랜스는 서로 눈짓을 교환하더니, 지팡이와 칼을 조심스레 맞댔다. 데이미아의 입에서 짤막한 주문이,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새어나왔다. 그녀가 지팡이를 칼에서 떼자, 랜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검은 괴물 앞으로 조심스레 나아갔다. 검은 덩어리는 칼을 든 랜스에게 적의를 느꼈는지, 예의 그 듣기 싫은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촉수를 뻗쳐 왔다. "그만 둬요!" 로이가 그제서야 비로소, 그 어둠의 덩어리를 향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랜스도 데이미아도 그 외침을 자신들을 걱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데이미아는 로이에게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걱정 마! 이길 테니까. 자, 랜스, 이제 시작이에요! 페레이타 하리 엔탈, 이스닌 이키드, 퀘이드 하리스 프ㄹ나드, 에일 로르 엘푸라드 페이! (죽음의 신 페레이타여, 그대의 한없는 힘으로 그릇됨 망자들을 벌하는 저 칼날을 갈아 주소서!)" 순간 랜스의 칼날은 눈이 아프게 환하고 뼛속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푸르스름한 은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괴물의 촉수가 랜스를 향해 돌진 했으나, 그 칼날에 닿기만 해도 움츠러들거나 잘라져 버렸다. 그러나 잘라진 촉수는 다시 검은 괴물에게로 흘러내리듯 끌려가, 그것의 몸의 일부가 되었다. 여간해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이었다. "좋아요, 랜스! 마력을 더 줄 테니까 끝내 버리자고요!" 데이미아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가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 갑자기 로이가 그녀의 팔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만 둬, 데이미아!" 그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데이미아의 집중력을 흩뜨러져 버렸다. 그리고 랜스의 칼날을 빛내 주던 빛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랜스는 당황하여 뒤로 물러났고, 그보다 더 질겁을 한 데이미아는 로이에게 따지고 들었다. "왜 그래? 너 미쳤어?" "저 괴물, 우릴 해치지 않을거야..." "뭐...?" 데이미아는 어이가 없어서, 로이가 미치지 않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이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녀가 이제까지 보아 온 로이의 얼굴 중 가장 진지해 보였다. "데이미아, 저 괴물이..." 그런 그녀의 귀에 랜스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가리 키는 족을 본 데이미아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괴물은 그들을 피해 가듯, 벽을 통해 조용히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 괴물을 보았을 때에는 이미 벽을 통과하지 못한 부분은 몸의 절반도 안 되는 때였다. 그리고 그 부분마저도, 곧 벽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로이... 너 저 괴물이 도망칠 줄 어떻게 알았니?" 데이미아가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로이는 어깨를 으쓱 추스리며 둘러댔다. "그냥... 그럴 것 같아서. 그것보다 이제 어서 이 성을 빠져나가자. 곧 무너지겠어." "그래... 그렇지!" 아닌 게 아니라 데이미아와 로이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도중에도, 천정에서는 계속 흙고 나무 부스러기가, 작은 돌맹이들과 섞여 떨어지고 있었다. 랜스는 착찹한 표정으로 여지없이 무너져 가는 성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로이와 데이미아는 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둘이 다 무사하다는 사실에 들떠 있기만 했다. "랜스! 어서 와요!" "그래요, 늑장 부리다가 생매장되겠어요!" 랜스는 대답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가는 두 아이의 뒤를 따랐다. 그들의 말대로, 서두르지 않으면 무너지는 성 밑에 깔려 죽기 딱 알맞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성을 나가면...? '성이 무너져서 빠져나간다... 그건 좋아. 하지만 나가서 뭘 어쩐다는 말이지? 이런 성을 근거지로 삼고 아트웰 군에 맞설 수는 없어! 더군다나 사일러스와 스트라본을 상대로... 제길, 형만 있었어도...' 그러나 로이와 데이미아의 생각은 그 근처에도 못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애써 그 사실을 일깨워 준다 해도 아트웰 군 따위에 관심을 둘 것 같지도 않았다. 적어도 데이미아는... 로이라면 또 모르지만, 툴위그도 데이미아와 마찬가지겠지. '역시 다른 종족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랜스는 마구 흔들거리는 돌바닥을 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여유있게 이생각 저생각 하면서 달릴 수는 없었다. 그 괴물을 찾아다니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던 것이다. 이미 성은 제 형태를 유지하지 못한 채, 마치 서서히 가라앉듯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바닥은 빨려들어가듯 땅 속으로 내려앉았고, 여기저기서 버팀목이 부러져 나왔으며 천정은 마치 거대한 손이 찍어누르듯이 그들의 머리 위로 접근해 왔다. 그들은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거듭하면서, 수없이 떨어지는 돌덩이 속을 지나 성문으로 있는 힘껏 달렸다. 이제 서로가 잘 달리고 있는지 돌아볼 겨를도 없었고, 그나마 랜스만이 넘어진 사람을 부축하러 꼭 발을 멈추어 주었다. "문이다!" 하고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들 앞에 놓인 성문마저 마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성문을 버텨 주던 돌기둥은 이미 부러진 후여서, 성문은 반쪽만 간신히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것도 모자라, 계속 천정으로부터 떨어지는 크고 작은 돌과 흙이 성문을 막아 가고 있었다. "서둘러! 어서!" 불안정한 바닥에는 이제 마구 돌이 튀어나왔고, 어떤 돌은 아래층 으로 떨어져 바닥의 뼈대가 다 드러날 지경이었다. 분명히 잘 단련된 강철로 이루어진 뼈대였건만, 이제는 흘끗 보기에도 녹이 슬어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으아악!" 마침 맨 앞에서 달려가던 데이미아의 발밑이 푹 꺼지면서, 그 근처의 바닥을 이루고 있던 돌들이 모두 저 아래 까마득한 지하실로 떨어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떨어지기 직전 뼈대를 이루고 있던 철근을 잡았으나, 그 두께와는 달리 그녀의 몸이 매달리는 즉시 철근은 고무처럼 휘어지고 말았다. 손에 닿은 그 표면의 감촉만으로도 얼마나 녹이 슬었는지 알 수 있었다. "데이미아!" 로이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팔은 데이미아의 팔이 닿는 데까지 닿지 못했다. 로이는 이를 악물고 몸을 더 뻥 뚫린 바닥의 구멍으로 내밀어, 데이미아가 잡을 수 있는 위치까지 곤을 내밀었다. 데이미아의 손이 그의 손에 매달리는 즉시, 철근은 뚝 부러져 버렸다. 로이는 갑작스런 무게에 잠시 휘청거렸으나,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 며 미소를 지었다. "살았다..." 그러나 그가 데이미아를 향해 다른 한 손도 내미는 순간, 천정에서 떨어진 돌덩이가 그의 등을 때렸다. 아프기도 아팠지만, 그 진동 때문에 로이의 몸은 구멍을 향해 휘청거렸다. "어... 어..." 로이는 당황한 나머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구멍을 향해 쓰러졌다. 그러나 마침 그 자리에 막 다다른 랜스가, 그의 망토 끝을 낚아챘다. 로이는 순간 숨이 탁 막혔지만, 그러지 않았을 경우 저 아래로, 데이미아와 함께 떨어졌을 것을 생각하면 잠깐 숨 막힌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순식간에 다시 로이는 균형을 잡았고, 랜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데이미 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자, 머뭇거릴 틈 없어! 어서 나가자!" 랜스가 성문을 보고 소리쳤다. 이미 성문을 이루고 있는 돌 버팀목 중 하나가 부러진 후였고, 나머지 하나도 마구 흔들리며 금이 점점 늘어나 결코 오래 버틸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문 주변의 벽 전체가 심하게 흔들리면서 부서져내리고 있었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그렇게 혼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심성 없는 걸음으로 홀짝홀짝 삐져나온 돌들을 뛰어넘어 성문으로 달려갔다. 로이가 막 문앞에 다다랐을 때, 문을 지탱하던 나머지 한 기둥도 기어코 부러져 버렸다. 그러나 워낙 큰 문인지라, 그 부러진 기둥으로 이루어진 문의 잔재조차 로이와 데이미아가 빠져나가는 데에는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랜스가 마지막으로 문을 향해 뒤어들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문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며 주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피어올랐다. "랜스! 괜찮아요?" 로이가 기침을 해대면서도, 다급하게 소리쳤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먼지 속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곧 그 뿌연 장막(帳幕) 속을 뚫고, 기침에 헐떡이며 한 사람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랜스! 무사했군요!" 로이가 기뻐서 달려가며 소리쳤다. 랜스는 먼지투성이에다 심하게 기침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랜스! 켈리! 데이미아! 로이! 모두 무사했구나!" 툴위그의 목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펠히스가 짓는 소리도 들려왔다. 로이는 이번에는 툴위그에게로 종종 달려가, 자기 키보다도 작은 그를 얼싸안았다. "툴위그! 툴위그도 무사하셨군요!" 툴위그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먼지투성이인 로이를 얼싸안았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곧 그들이 셋 뿐이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사라졌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로이를 밀쳐내듯 떼어내며 물었다. "켈리는?" "켈리요? ...켈리는 먼저 나오지 않았어요?" 로이는 얼굴이 창백해져서 되물었다. 순간 그들 모두의 시선은 이제 성이라고도 부를 수 없이 폐허로 향했다. 데이미아는 몸을 부르를 떨며 털썩 주저앉았다. "설마... 우릴 내보내 주러..." "이런...!" 랜스는 즉시 몸을 돌려, 다시 성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몇 발짝 가기도 전에, 그의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거대한 소리가 성으로부터 터져나왔다. 마치 지옥에서부터 울려나오는 듯한 끔찍스러운 비명이었다. 아니, 고통의 비명과 슬픈 신음과 흐느낌, 그리고 통쾌하고 악의 넘치는 웃음소리가 한데 뒤섞인 듯한 소리,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하면 단지 성이 무너지는 굉음이나 동물의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도 들리는, 그런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성은 소용돌이에 빨려들어가는 배처럼 지하로 무너져내렸다. 마치 성을 이루는 바위 하나하나, 벽돌 하나하나가 더 깊은 지하를 향해 달음질치는 것처럼, 그렇게 성은 풀썩 쓰러져 버렸다. 괴이한 비명과 성이 무너지는 소리는 한 데 뒤섞여, 어떤 소리가 어떤 소리 인지 전혀 구별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마침내는 듣고 있던 사람들 모두의 귀를 멍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한참 후, 비명도 성이 모너지는 소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그들의 시야를 가리던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벽 하나 제대로 남지 않은, 돌과 썩은 나무와 벽돌의 무더기였다. "켈리...!" 툴위그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랜스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폐허가 된 성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성과 함께 유령들의 기(氣)도 사라져 버렸고, 동녘이 터 오면서 어둠도 걷혀 가고 있었으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멀리서 들려오는 낯익은 고함소리에, 그들은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랜스!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모두 널 찾고 있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은 이즐레이였다. 그는 검은 말에 오른 채, 한손으로는 피로 물든 기다란 양날검을 들고 있었다. 방금 전투를 치뤘는지 옷은 원래의 색깔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피투성이 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랜스! 뭐하는 거야? 여기서 이렇게 멀거니 성이나 바라보고... 그러고 있으면 무너진 성이 다시 세워지나?" 이즐레이는 내뱉듯이 말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외성이..." "...켈리가 저 안에 있었어." 랜스가 마치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즐레이는 하던 말을 멈추고 가만히 랜스를 바라보았다. 처음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돌았다. 마치 랜스가 재미없는 장난을 하고 있고, 자신은 진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러나 툴위그와 로이, 데이미아의 얼굴을 보자, 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설마! 농담이지?" 그러나 아무도 그 물음에 대답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데이미아가 갑자기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이가 다가가 그녀의 어개 위에 손을 얹었으나, 그 역시 얼이 빠진 듯 멍한 표정이었다. 이즐레이의 표정은 창백하게 굳어졌다. "그럴 리 없어. 그렇게 멍청한 여자가 아닌데! 보나마나 다른 통로로 빠져나와서 버젓이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야!" "이 성에 비밀 통로는 없어, 이즈. 너도 알텐데..." 랜스가 침울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더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랜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멱살을 낚아 채며 소리쳤다. "바보같은 소리 마! 지금 네녀석 헛소리 들어 줄 시간 없으니. 파엘 영주가 널 찾느라 히스테리 일으키기 직전이야!" 그제서야 랜스는 피를 뒤집어 쓴 듯한 이즐레이의 꼴을 눈치채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나?" "얼씨구, 무슨 일이 일어났나고? 성과 함께 외성의 일부도 무너져 내렸어. 그리고 그리로 아트웰 놈들이 들이닥치고 있는 중이고. 아무래도 이걸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 여긴 더이상 안전한 '성 안'이 아니라고! 파엘 영주한테 네가 곧 온다고 전할 테니까, 당장 준비하고 달려오라고!" 이즐레이는 이렇게 소리치고는, 무너진 성터를 흘끗 보더니 다시 말을 달려 왔던 방행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말은 랜스의 머릿속에서 다른 생각들을 모조리 몰아내기에 충분했다. 외성이 무너졌다.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랜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즐레이가 간 방행으로 남은 힘껏 달렸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데이미아는 분노를 터뜨렸다. "어쩜 저럴 수가 있어! 인간들은 심장도 없나봐! 켈리는 죽건 말건 전쟁에 이겨야겠다는 거야? 둘 다 꼴도 보기 싫어, 정말!" (계속) * No.17을 쬐금... 고쳤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 "하앗!" 파엘 경은 맞서 말을 달리는 기사의 몸을 향해, 자신의 거대한 칼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 기사는 칼을 놓치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그는 쉴 틈을 두지 않고, 이어서 곁에 있는 보병을 향해 칼날을 내리쳤다. 그 보병은 가죽 방패를 들어 그 공격을 막으려 했으나, 파엘의 힘과 칼의 무게는 그 방패를 부수어 버렸다. 보병은 쓰러졌고, 파엘은 투구를 쓴 그의 머리 위로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이마에서 피를 쏟으며 그 보병은 풀썩 쓰러졌다. "영주를 죽여라. 적의 지휘관을 없애는 자에게 최고의 영예가 있을 것이다!" 날카롭고 아름답다고도 할 수 있는 여인의 외침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파엘은 고개를 돌려 그 쪽을 바라보았다. 레일라,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검은 투구 속에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나, 파엘은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아니, 누구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날 부분만 은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남자의 힘으로도 들기 어려운 만큼 굵고 거대한, 검은 칼이 들려져 있었다. 그녀는 시이드의 병사들 속으로 쉬지 않고 검은 말을 달리며, 그 칼을 휘둘러 수없는 병사들을 학살하며 진형(進形)을 무너 뜨리고 있던 중이었다. 한 기사가 그녀를 막기 위해 용감하게 그 앞에 뛰어 들어 창을 휘둘렀으나, 그녀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피하며 그의 동시에 자신의 칼을 휘둘렀다. 칼의 날은 충분히 길었고, 레일라의 힘 또한 충분했다. 그 은빛 날은 기사의 옆구리를 치고 들었고, 갑옷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허리를 부러뜨렸다. "레일라, 반란군의 마녀야!" 파엘은 분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로 말을 달리며 소리쳤다. "내 목이 탐난다면 네가 베어 보아라!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내가 네 목을 가져가겠다!" 그 고함을 들은 레일라는, 염치없을 정도로 침착하레 말을 돌려 파엘을 향해 달려왔다. 그녀와 파엘의 검은 똑같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파란 불꽃을 튀기며 그 두 은빛 날을 부딪쳤으나, 어느 것에도 흠집 하나 나지 않았다. 그들은 말머리를 돌려, 서로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그러나 이번에 레일라는 파엘을 향해 칼을 내려치지 않았다. 그녀는 파엘의 검은 간신히 막을 수 있을 만큼의 힘만을 써서 칼을 들었다. 그리고 파엘의 칼이 그녀의 칼을 치고 나가는 즉시, 튕겨나가듯 다시 칼을 들어올려 휘둘렀다. 그녀의 손에 매달린 거대한 검은 마치 고무에 매달린 추처럼 유연 하게 돌아, 파엘의 어깨를 내리쳤다. "윽!" 팔이 잘려 나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갑옷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의해 그의 갑옷은 심하게 찌그러졌고, 그 아래 있던 오른팔은 부러져 버렸다. 그는 무기를 잃은 채 말에서 고꾸라졌다. 레일라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쳐들었다. "약속대로 네 목을 받아 가마!" 그녀는 파엘을 향해 힘껏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그 날이 그의 목에 닿기 직전, 작은 단검이 날아와 그 날에 부딪혔다. 그 단검은 검의 날에 흠집 하나 내지 못하고 쨍강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버렸으나, 검의 방향을 바꾸기에는 충분했다. 칼날은 파엘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미안하지만 그의 목은 아직 떨어져서는 안 되겠는데? 다음 기회를 노려 보시지,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여유있는 목소리로 소리치는 기사는 이즐레이였다. 그는 투구도 쓰지 않은 채, 갑옷도 움직이기 쉽도록 평상복 위에 간단한 보호대를 걸치고 있을 뿐이었다. 적군의 피로 범벅이 된 채, 피빛 눈으로 싸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같은 편인 파엘까지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하아, 이게 누구신가, 랜스 경을 죽이는 데 실패한 싸구려 암살자 아니신가?" 레일라는 투구 아래로 비웃으며 칼을 들었다. "붉은 눈의 암살자! 랜스 경조차 못 죽인 주제에 내 목숨은 받아갈 수 있을 것 같은가?" "그거야 해 보기 전에는 모르지!" 이즐레이는 들고 있던 검을 치켜들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말을 달려 레일라에게 덤벼들었다. 그의 칼은 레일라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으나, 갑옷의 칠을 조금 벗겼을 뿐이었다. 그의 검도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레일라가 들고 있는 거대한 검에 비해, 특히 그녀의 두꺼운 갑옷에 비해 형편없이 얇고 작았던 것이다. 또한 레일라의 검도 그의 목을 향해 휘둘러 졌으나, 그보다 이즐레이의 몸짓이 더빨라 그 날은 허공만을 가르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이즐레이는 자신의 빠른 속도에 힘입어 레일라가 미처 균형을 잡지 못한 틈을 타, 그녀의 투구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목에 칼을 찔러 넣으려 했다. 그러나 레일라는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그의 칼이 그녀의 갑옷에 맞고 튕겨 나가게 했다. 그녀는 다시 도끼를 들어 그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쳤으나, 이즐레이가 타고 있던 말의 등을 내리쳤을 뿐이었다. 그는 어느 새 말에서 뛰어내려 쓰러진 파엘 영주의 곁에 서 있었다. "정말 미꾸라지처럼 잘도 피하는군!" 레일라가 반은 감탄하며, 반은 화가 나서 말했다. 이즐레이도 맞서 대꾸했다. "누가 할 소리. 정말 무식한 갑옷에 무식한 무기를 갖고 다니는군!" 레일라는 그의 대꾸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이즐레이와 파엘 영주를 잠시 내려다보더니, 말을 돌려 떠나며 이렇게 소리쳤다. "너와는 쉽게 승부가 날 것 같지 않군, 드래크로니안의 혼혈! 지금은 적을 죽이기에 바쁘니 너와의 승부는 다음으로 기약하자!" 그리고는 새까만 말에 탄 새까만 갑옷의 여기사는 먼지와 고함이 가득한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괜찮습니까, 파엘 경?" 하고 이즐레이가 물었다. 그러나 조금도 걱정하는 투로는 들리지 않았고, 손을 잡아 일으켜 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파엘은 간신히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 앉았다. "랜스가 곧 올 겁니다. 잠시만 참으시지요." 이즐레이는 여전히 사무적인 어조로 말하고는 칼을 들었다. 그들의 근처로 벌써 적의 보병들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 주위에 시이드 병사들은 더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트웰 만세!" "사일러스 폐하 만세!" 보병들은 귀가 아프게 소리치며, 칼과 창을 휘두르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파엘 영주는 얼굴이 창백해져 칼을 집어들려 했으나, 곧 신음하며 칼을 놓치고 말았다. 그의 팔은 지금 아무것도 집을 수 없는 상태였다. 이즐 레이는 그런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랜스가 오기 전까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두르며, 제일 앞에서 달려오던 보병에게로 뛰어들었다. 보병의 창이 그의 허리를 향해 내질러졌으나, 이즐레이의 속도에 비해 어림 없는 솜씨였다. 순식간에 몸을 피한 이즐레이는 그의 투구와 갑옷 사이의 틈으로, 교묘하게 칼을 찔러 넣었다. 보병을 풀썩 쓰려졌고, 그의 미늘창은 이미 이즐 레이의 손으로 넘어 와 있었다. "좋아, 덤벼 보시지, 아트웰의 살인자들아!" 이즐레이는 웃음을 터뜨리면서,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파엘 영주를 보호해 주겠다고는 하지만 이미 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즐기듯이, 미소를 잃지 않고는 자신의 앞으로 덤벼드는 보병들에게 마구 창을 휘둘렀다. 그의 몸짓은 너무 빠르고 유연했고, 창은 마치 그의 무기가 아니라 그의 몸의 일부인 듯 했다. 파엘은 그가 싸우는 모습이 전사 (戰士)가 창을 들고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는 표범이 발톱과 이를 내보이며 싸우는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사실 이즐레이가 처음 시이드 성에 왔을 때, 그리고 그의 혈통을 증명해 주는 붉은 눈을 처음 보였을 때, 파엘 영주는 거부감이 들기는 했지만 별다른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즐레이의 반은 인간이 아니라는 너무도 확연한 증거를 목격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게 드래크로니안이라는 건가... 죽음의8 신 페레이타의 후손들... 그들의 피가 반만 섞여도 저런 모습인데, 만약 순수한 드래크로니안이라면...' 그런 생각이 파엘의 몸을 떨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장 걱정되는 것은, 저렇게 피에 굶주린 야수처럼 창을 휘두르며 피를 뒤집어 쓰는 이즐 레이가, 어느 순간 진짜로 정신이 나가서 파엘 자신까지 죽여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드래크로니안의 피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폭력을 초래하니까... 그러나 아무리 이즐레이의 몸짓이 빠르다 해도, 그의 발치에 쌓여 가는 시체의 소가 늘어난 만큼 그 역시 지쳐 갔다. 그의 움직임은 둔해졌고 (그래 봤자 웬만한 기사는 예측도 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빠른 솜씨였지만) 그의 몸에는 작은 생채기들이 늘어났다.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부터 시작된 전투가, 해가 중턱에 걸릴 무렵까지 지속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즐레이 는 웬만큼 겁을 주면 징집된 보병들이 알아서 물러가리라고 생각했으나, 아트웰의 군사들의 투지(鬪志)는 그의 상상 이상이었다. "죽어랏, 아클레어의 졸개!" 보병들이 사이를 뚫고, 거대한 검을 든 한 기사가 말을 달려 이즐 레이에게 돌진해 왔다. 새까만 갑옷으로 무장한 그림자 기사단의 기사였다. 이즐레이는 마침 한 적군의 몸에 박혀 있던 자신의 미늘창을 힘껏 뽑아, 그 기사에게 휘둘렀다. 창날은 빠르고 교묘하게, 그의 갑옷의 옆구리의 이음새 부분을 뚫고 들어갔다. 기사는 말에서 떨어졌으나, 그의 손에는 아직도 검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이즐레이의 창을 잡아 자신의 몸에 더욱 깊숙히 찔러 넣으며,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윽...!" 이즐레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으나, 그 칼날은 그의 어깨에서부터 가슴에 이르는 깊은 상처를 남길 만큼 충분히 길었다. 그나마 드래크로니안의 피를 이어받아 눈 깜짝 할 새에 몇 발짝 뒤로 물러설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이즐레이였기에 망정이지, 보통 인간이었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재주를 가진 기사라도 몸이 두동강이 났을 공격이었다. 그러나 상태는 충분히 나빴다. 그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내렸고, 싸우는 것은 고사하고 몸을 가누기도 힘들 판이었다. 이즐레이는 간신히 땅에 내팽겨진 전사자(戰死者)들의 검 중 아무 것이나 가까이 있는 것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휘두르기는 커녕,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설상가상으로 동료의 죽음을 본 다른 검은 갑옷의 기사가 말을 달려 그에게로 덤벼들었다. "아트웰 만세!" '제기랄...!' 이즐레이는 간신히 그의 칼을 피하며 들고 있던 칼을 휘둘렀으나, 아까와 같은 공격은 할 수 없었다. 칼은 헛되이 그의 갑옷에 튕겨져 나왔고, 오히려 그 반동 때문에 이즐레이 자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그 기사는 전혀 타격을 입지 않은 듯, 말머리를 돌려 공격을 재개해 왔다. 칼이 그의 머리칼을 가르며 아슬아슬하게 지나갔고, 이즐레이는 몸을 굴려 간신히 목이 잘리는 것을 면했다. 그러나 덕분에 칼을 놓쳤고, 상처는 더 길게 찢어져 움직이기조차 힘든 상태였다. "잘도 피하는군. 이번엔 어림없다!" 검은 갑옷의 기사는 매우 화가 났는지, 아까보다도 더욱 살기등등하 게 거대한 검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왔다. '...그렇게 소리지르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이즐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남은 유링한 무기인, 작은 단도를 품 안에서 꺼냈다. 이런 조그만 칼날은 저 두꺼운 갑옷에 흠집 하나 낼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아무 짓도 안 하고 앉아서 당할 수야 없으니... "크윽!" 그러나 그 기사는 이즐레이에게 다다르기 직전에, 갑자기 뛰어든 기사의 칼을 맞고 비명을 지르며 말 위에서 떨어졌다. 랜스가 그들 사이로 말을 달려,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칼을 휘두른 것이다.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휘두른 칼인지라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는 없었으나,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대를 말에서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검은 기사 역시, 그림자 기사단의 명성에 어긋나지 않는 자였다. 그는 떨어지면서도 자신의 칼을 놓치지 않았을 뿐더러, 랜스가 공격 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얼른 몸을 굴려 벌떡 일어났다. "언제 오시나 했소, 랜스 아덴 경! 아클레어의 조카의 목을 가져가면 사일러스 폐하와 레일라 님께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오!" "그거 유감이군!" 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칼을 고쳐 잡았다. 각오하고는 있었으나 '사일러스 폐하가 기뻐하실 것이다'라는 말은 그에게 짧은 고통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이즐레이를 향해 소리 쳤다. "이즈, 파엘 경을 데리고 성으로 가 줄 수 있겠어?" "물론이지!" 이즐레이는 상처를 감싸쥐며 상을 찌푸렸으나, 목소리만은 자신만만 하게 소리쳤다. 그의 한 손에는 언제 잡았는지, 검은 기사가 타고 있던 말의 고삐가 잡혀 있었다. 랜스는 마음 놓고 검은 갑옷의 기사에게 칼을 겨누었다. 파엘 경이 이즐레이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며 그에게 소리쳤다. "부탁합니다, 랜스 경!" "걱정 마십시오!" 랜스는 투구 밑으로 미소까지 보이며 대답했다. 이즐레이와 영주를 태운 말은 곧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검은 기사가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돌진해 왔다. (계속) 그의 솜씨는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랜스는 조금은 여유있는 마음으로 말을 타지 않은 상대를 향해 칼을 내리쳤으나, 예상 밖으로 그는 거뜬히 그의 공격을 받아 냈다. 뿐만 아니라, 그를 향해 대담하게도 칼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칼은 길었고, 랜스는 상대가 허점을 보인다는 것을 알면 서도 엉겁결에 몸을 피했다. '대담하군... 도대체 어디까지 준비를 한 거냐, 사일러스?' 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길리어드에서 보고 들은 바에 따르면, 아트웰의 거의 모든 백성들은 사일러스를 따르고 있었고 그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스테이아는... "죽어랏!" 검은 갑옷의 기사는 아예 죽을 각오로 덤벼드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랜스도 더이상 피하고만 있지 않았다. 그가 휘두르는 칼은 살기에 찬 만큼 맹렬하고 민첩했으나, 그만큼 이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허점을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그는 랜스의 팔과 허리 사이로, 갑옷을 스치며 칼을 찔러 넣었다. 다치지는 않았으나 몸이 흔들릴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랜스는 그의 균형이 무너진 것을 놓치지 않고, 칼을 높이 들어 재빨리 내리 쳤다. 그의 칼은 그 기사의 머리를 강타했고, 투구를 벗겨 버렸다. 그는 기절 했는지 아니면 그대로 즉사했는지, 쓰러져 미동도 않았다. "시이드의 군사들아! 충실한 왕의 부하들아! 자비를 보이지 않고 반란군을 벌하라!" 랜스는 소리 높여 외치며 허공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몸소 안장에 꽂아 두었던 창을 들고 적진으로 말을 달렸다. 그의 등장은 그래도 시이드 군에게 활기를 주었는지, 환호성을 지르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목소리는 칼과 창이 부딪히는 소리와 죽음에 임박한 비명 소리를 뚫고 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자비심 따위 때문에 지는 게 아냐... 저들이 당연히 우세하다. 오늘은 그럭저럭 넘긴다 해도, 우리들에게는 이제 성조차 없는데... 그러고 보니 성을 참 어이없게 잃었군...' 창을 휘둘러 적군의 보병들을 마구 학살하면서도, 랜스는 이런 생각에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 "랜스, 괜찮아요?" 은빛 갑옷이 피로 범벅이 되어 돌아온 랜스를 보고 로이가 질겁을 하여 소리쳤다. "하하...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랜스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목소리마저 쉬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상처는 없었으나, 너무 지쳐 있었던 것이다. 발을 옮기기도 힘들 정도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기운 빠지게 만드는 것은, 시이드의 병사들 중 절반이 그의 지휘 아래 죽었다는 것이었다. 하긴, 전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할 상황인지도 몰랐지만... '클레이브 형이 있었다면 이렇지 않았을 거야... 난 10년 동안 이리 저리 돌아다니기만 하면서 뭘 한 거지, 도대체... 결국 형이 마음 놓고 성을 맡기지도 못하는 망나니 동생이 되어 버렸군...' 그는 무너진 성의 돌덩이 위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시이드 군은 마치 야영이라도 하듯이, 한때 그들의 성의 마당이었던 곳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막사를 치고 있었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지만,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린 시이드 성터를 바라보니 허무한 웃음이 터져나오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에, 비밀 통로 하나 없다는 난공 불락의 시이드 성을 이렇게 잃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유령들이라니... "랜스..." 하고 데이미아가 걱정스럽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랜스는 투구를 벗어 떨어 뜨리듯 땅에 놓았다. 그의 금발은 땀에 젖어 있었고, 피와 먼지 때문에 더러 워져 있었다. 그는 몸을 돌에 기대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촛점이 희미한 눈을 들어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는 요정족의 소녀를 바라 보았다. "저기... 가만히 있어요. 내가 회복 주문을 쓸 테니까..." 데이미아는 랜스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고 낯선 언어로 된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랜스의 귀에는 그것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단조로운 노래같이 느껴졌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분명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고, 동시에 기운도 회복되었다. 그러나 데이미아가 그의 몸을 회복시켜 줄 수는 있어도, 마음까지 회복시켜 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랜스는 중얼거리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데이미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예?" "아냐... 다만 그냥... 난 이렇게 전쟁에 나선 적은 까마득하거든... 그래, 아무것도 모르고 책임감 따위도 없었을 때 이즈와 나갔었지... 하지만 사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야. 내... 의무를 저버렸지. 왕의 기사로서의 의무를... 그리고 형에 대한 의무를... 하르크자엘을 죽이려 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고 했고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고 생각했어." 데이미아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랜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사실, 요정인 그녀가, 여행을 오래 했다고는 하지만 자유로운 드라이어드 족으로서 테어나고 자란 그녀가 인간족 기사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이해 하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충분히 나이가 든 요정도 아니었 으니... 그러나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위로하려고 했다. "저기... 하지만 랜스도 많이 노력했잖아요.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도 분명히 중요한 일일 거에요, 인간들의 일을 잘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의무를 이행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아, 데이미아... 난 아클레어 폐하의 조카인걸." 랜스의 말에 데이미아는 움찔하여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랜스는 나지막하고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는 내 고모부셔... 아덴 가(家)는 에스테이아의 건국이래로, 수많은 왕비들을 배출했지. 내 아버지의 누이, 에디스도 그 중 하나였고..." "아... 저기... 그럼..." "난 당연히 폐하를 보호해야 했겠지... 그 분 곁에 남아서, 내 형 클레이브처럼... 데이슨이 날 나무란 것도 그 때문이야. 내가 멋대로 집을 나왔기 때문에 형이 내 몫까지 다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 그리고 형이 없는 지금, 난 그를 잠시도 대신하지 못하고 있군..." 랜스는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손에 묻었다. "형은 나를 믿고 이 성을 맡겼는데... 겨우 이 꼴이 되고 말았어." "그... 그것은 랜스 잘못이 아녜요. 어쩌다 일이 그렇게 된 것 뿐인데 요 뭐... 클레이브가 있었다 해도 스트라본의 주문을 막지 못했을 거에요. 게다가 내가 전에 말했다시피 이 성에서는 불길한... 아니, 그러니까..." 데이미아는 마구 둘러대다가, 랜스가 아무래도 반응이 없자 머쓱한 표정으로는 걸어가 버렸다. 랜스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맙게도 그를 위로하려 했지만... "힘들지 않아? 갑옷 좀 벗고 있지 그래?" 이즐레이가 막사에서 걸어나오며, 가장(假裝)된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대강 걸친 그의 셔츠 아래로 하얀 어깨와 가슴을 감고 있는 하얀 붕대가 보였다. 그의 태도는 갑자기 친근해져서 오히려 불편할 정도였다. "흥... 기운이 빠져 계시군, 귀족 도련님! 잘 싸워 놓고 왜그래? 모두들 네 칭찬을 하느라 입에 침이 마를 정도야. 귀가 안 간지럽던가?" "상처는 어때, 이즈?" "아, 보다시피 거의 다 나았어. 데이미아 덕택이지. 오늘은 팔자 좋게 쉬었으니 내일은 함께 아트웰 놈들에게 갚아 주자고. 오래간만에 5년 전 기분도 내면서..." "...넌 전쟁에서는 손 뗀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해 볼 만 하던데, 뭐. 그리고 스트라본 녀석이 날 실력 없는 암살자라고 했으니, 빚을 갚아 줘야 하지 않겠어?" 랜스는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선 이즐레이의 붉은 눈을 바라보 았다. 그의 눈은 웃고 있었다. 5년 전처럼... "이즈. 그 대 왜 그렇게 갑자기 떠났지?" "내가 그렇지 뭐... 전쟁하는 게 좀 지겨워진 차에 암살자 녀석들의 꾀임을 받았으니. 드래크로니안의 피는 다른 덴 몰라도 그런 분야에선 인기가 좋잖아?" "...거스는 마치 나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하더군. 그래서..." "그 녀석 머리는 참새만큼도 안 돼. 네가 얼마나 잘났다고 내가 네녀석 대문에 직장가지 바꾸겠냐?" "...이러니 정말 5년 전 같군..." 둘은 잠시 웃었다. 마치 세월을 건너 뛴 듯이.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그러나 어색하지 않게 간간히 웃으며 함께 있었다. 랜스가 파엘과 오웬이 그들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였다. "아... 무슨 일이오, 파엘 경? 작전 회의는 잠시 뒤인 줄 알았는데..." 파엘은 어색하게 랜스를 외면했다. 그러나 오웬은 너 마침 잘 만났 다는 듯 당당히 나서서 말을 꺼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오웬의 태도는 왠지 랜스에게 거부감과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잠시나마 켈리가 아예 저 친구를 중태로 만들어 주어 지금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게 해놨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런 랜스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오웬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 요정족의 어린 마법사와 평민 소년은 다이크 경이 첩자라고 주장 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그것을 믿을 수 없소. 여기 계시는 파엘 경도 마찬가지이고..." "설마 로이와 데이미아가 첩자라고 주장하고 싶으신 거요?" "설마! 그들은 어린애들이오. 어린애란 악의 없이도, 흥미와 상상력과 자랑하고 싶은 마음만으로 얼마든지 기억을 만들어 내는 법. 문제는 전혀 다른 데 있소. 만약 다이크 경이 첩자가 아니라면, 다른 첩자가 있을 것 아니오? 그러니 단 한명이라도 수상한 사람을 우리들 중에 두어서는..." "본론을 말씀하시오, 오웬 경!" "저 드래크로니안 말이오." 오웬은 랜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적의(敵意) 가득한 눈으로 이즐레이를 흘끗 쳐다보았다. 마치 그와 같은 존재를 똑바로 보는 것이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랜스는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았다. "이즐레이는 오늘 용감히 싸웠소. 파엘 경도 그 덕에 목숨을 건졌소. 오웬 경, 당신은 지금 개인적인 감정으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갑자기 한 기사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파엘을 호위하는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랜스는 그제서야 많은 기사들과 병정들이 몰려들어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기사는 이즐레이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드래크로니안의 붉은 눈이 불행을 가져온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저 사람이 있는 한 저희는 이길 수 없을 겁니다." "그런 바보같은 미신이...!" "바보같은 미신이 아닙니다!" 이번에 나선 것은 나이가 지긋한 마법사 차림의, 꽤 현명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저자가 들어온 이후로 이상한 일들만 생겼습니다. 한밤중에 성이 습격당하고, 탑에 둥지를 짓던 새들이 죽어 떨어지고 이제는 성이 무너지기 까지... 이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어디 있겠십니까?" "이즐레이가 온 날은 내가 온 날이기도 하오. 그렇다면 내가 불행을 몰고 온 것일 수도 있겠군?" 랜스는 분노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따졌다. 노인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소리쳤다. "랜스 님, 그런 말씀을...! 저 자는 드래크로니안입니다!" "이즐레이는 드래크로니안이 아니오." "그렇죠, 순수하지 못한 피! 그것은 더욱 나쁩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웬이 끼어들며 말했다. 랜스는 드디어 참지 못하고, 칼을 잡으며 벌떡 일어섰다. 만약 이즐레이의 손이 그를 말리지 않았 더라면, 당장 오웬을 향해 칼을 날릴 기세였다. "그만 둬, 랜스, 소용없는 짓이야. 내가 떠나는 게 낫지." (계속) "이즈...!" 랜스는 당황하여 침착하기 이를 데 없는 자신의 친구를 보고, 다시 파엘 경과 그의 병사들을 보았다. "도대체 왜들 이러시는 겁니까! 모두 오늘 이즐레이가 자신의 몸을 생각 않고 싸우는 것을 보셨을텐데요. 그는 우리들을 위해서 부상까지 입었 습니다. 파엘 경, 말 좀 해 보시오! 그가 당신의 목숨을 구했지 않소!" 그러나 랜스의 말에 동조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파엘 영주처럼 거북한 표정으로 땅만 내려다보고 있거나, 아니면 오웬처럼 무슨 헛소리냐는 듯 랜스를 똑바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들의 침묵에 랜스는 절망할 지경이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이즐레이의 날카로운 웃음소리였다. "됐어, 랜스! 바보들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털끗만큼도 없어. 마침 날 고용한 켈리도 행방을 알 수 없으니, 난 자유인 셈이지. 자, 그럼 재수 없는 반(半) 드래크로니안은 이만 사라집니다! 하지만 내가 떠나고도 전쟁에 지면 누굴 탓할 거요?" "이즈, 그만 둬." "그럼 이미 진 전쟁, 열심히들 사워 보쇼. 하지만 내가 혹시 아트웰 왕 사일러스의 곁에서 칼을 휘두르며 나타나거든, 원망은 하지 마시오!" 이즐레이는 이렇게 외치고는 유유히 막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랜스는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뒤에서 마치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하는 오웬의 목소리가 들렸다. "흥, 저 트기 놈. 저럴 줄 알았지!" "이즈, 이게 무슨 바보같은...!" 랜스는 이즐레이의 뒤를 따라 막사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그가 막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누군가의 손이 그의 망토 자락을 잡아 세웠다. "그만 둬, 랜스." 툴위그였다. 그는 침착한, 그러나 침통한 얼굴로 랜스를 똑바로 바라 보며 말을 이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일 아니었나. 이즈가 며칠이나 이들 틈에 머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무슨 말씀이시죠?" "그는 지금까지 자네와 켈리 때문에 억지로 남아 있었다는 걸 모르 겠나? 친구라면 가도록 놔 주게... 여기서 그가 다른 인간들의 혐오 어린 시선을 받으면서 어떤 기분을 가졌는지 생각은 해 봤나?" 랜스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시이드의 사람 들은 확실히 이즐레이를 싫어하고 있었다. 아니, 어떤 곳의 사람들이라도 그렇겠지. 자신조차 처음 그를 만났을 때 하르크자엘에 대한 분노가 되살아 나 몸을 떨지 않았던가... 툴위그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즐레이는 결코 인간들 틈에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즐레이는 벌써 짐을 다 챙기고, 칼까지 허리에 찬 채 막사를 걸어 나오는 참이었다. 검은 망토만이 아직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차피 그의 짐이래야, 별로 무거워 보이지도 않는 작은 가죽 주머니 하나 뿐이었지만... 순간 랜스는 그가 언제나 짐을 제대로 풀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떠날 것을 예상하는 사람처럼. "감사했어요, 툴위그. 이제 당분간 못 보겠군요." 이즐레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망토를 두르며 인사를 건넸다. 툴위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와 이렇게 빨리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는데... 하지만 사정을 알고 있으니 남아 달라는 부탁은 못 하겠군. 빨리 다시 만나기만을 기도하세." "...감사합니다." 이즐레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고 했으나, 그 때 공교롭게도 로이와 데이미아가 헐레벌떡 달려왔다. 흥분으로 얼굴이 발갛게 상기된 채, 로이가 소리쳤다. "이즐레이! 뭐에요, 정말 떠나는 건가요?" "잠시 몸을 피흐는 것 뿐이야, 로이. 나중에 보자." "말도 안 돼. 그런 멍청한 인간들 때문에!" 하고 소리친 것은 데이미아였다. 그녀는 흥분을 참지 못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온갖 고대어와 공용어를 섞어서, 요정도 인간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이드의 병사들과 오웬에게 욕을 퍼부어 댔다. 그 욕설은 나중에는 전쟁에서 홀딱 망해 버리라느니, 쌓는 성마다 무너지라느니 하는 무시무시한 저주로 바뀌었다. 그 서슬에 로이도 랜스도 이즈 자신도 질려, 말릴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잠시 후에야 이즐레이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다독거렸다. "고마워, 데이미아, 하지만 난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그리고 너무 난리 떨지 말라고. 난 수도 에스텔로 가니까, 그곳에서 금방 다시 보게 될 거야... 어차피 전쟁엔 끼고 싶지 않았어. 랜스 말대로, 난 이제 용병이 아니라 암살자니까." "...저 사람들 정말 싫어." 로이도 눈물이 글썽해져서 내뱉듯이 말했다. 이즐레이는 웃으며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머리칼을 헝클더니, 유유히 외성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그는 마침 생각났다는 듯 뒤를 돌아며, 랜스에게 말했다. "아참, 귀족 도련님! 아까 한 말은 그냥 농담이었으니 잘 싸우라고! 너라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날 실력 없다고 그런 스트라본의 콧대를 나 대신 좀 꺾어 줘! 그리고..."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리고 켈리가 돌아오거든, 내가 에스텔로 떠났다고... 에스텔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전해줘." "이즈, 켈리는...!" 랜스는 난처한 얼굴로 무엇인가 말하려다가 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살아 있을 리 없다'는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즐레이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을 흔들며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잘들 있으라고! 나중에 에스텔에서 봐!" 랜스, 로이,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는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데이미아였다. 그녀는 갑자기 분노를 터뜨리며, 발 앞에 있던 장작을 쾅 차서 무너뜨려 버렸다. 그리고는 랜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모두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선언했다. "잘 을어요! 난 이제 당신네 인간들이라면 지긋지긋해! 그러니 약속 대로 랜스의 형이 돌아올 때까지 여기 남아 주기는 하겠지만, 당신들 중 아무도 돕지 않겠어요! 부상을 당하든 말든, 죽어가든 다 잘난 인간들끼리 해결하라고 해요!" "데이미아...!" 툴위그가 놀라서 꾸짖었다. "바보같이 굴지 마! 넌 라스헨 에이니드, 숲의 마법사가 아니냐! 요정족의 마법사가 아니라 온 레젠디아의 생물의 치유자가 되어야 하는 게 네 운명이야! 만약 네 어머니가 네가 이러는 걸 아신다면..." "흥! 라스헨 에이니드가 뭔지는 나도 안다고요! 하지만 적어도 아무 잘못 없는 사람을, 아니 오히려 자기들을 도와준 사람을 쫓아내 버리는 배은 망덕한 종족들을 살려 내는 게 라스헨 에이니드의 의무는 아니라고요! 난 지금부터 아무 일도 안 하고 막사 안에 들어가 있을테니, 만약 랜스나 로이, 툴위그가 다치거든 오세요. 하지만 다른 놈들은 벼락을 내려서 날려 버릴 거야!" 그리고 그녀는 땅을 쾅쾅 구르는 듯한 걸음걸이로 걸어가 버렸다. 툴위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 힘없이 걸어갔다. 랜스는 허망한 웃음을 터뜨리며 돌벽에 기대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군... 내가 한심해 보이지, 로이?" 로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랜스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잠시동안 머뭇거리던 로이는, 마음을 정했는지 랜스의 곁에 기대어 앉았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이즈한테 가서... 함께 가자고 하면 안 돼요, 랜스? 우리 모두 이딴 사람들 어지 되든 상관 말고, 우리끼리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떠나요. 예? 전엔, 종족이니 뭐니 상관 없이 다들 함께 다닐 땐, 그냥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여행다니는 게 전부였을 땐, 힘들긴 해도 모두 즐거웠잖아요..." "그건 안 돼, 로이." 랜스는 지쳤지만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내겐 책임이 있어... 시이드 성을 지키겠다고 형과 약속했으니. 하지만 너희가 가겠다면 막을 권리는 없겠지..." "됐어요... 우리도 랜스와 함께 남겠다고 약속했잖아요. 난 단지..." 로이는 한숨을 쉬며 입을 다물었다. 둘은 한참동안 그렇게, 서로 아무 말을 나누지 않고 않아 있었다. 랜스의 시선은 아무것도 바라보지 않는 듯 공허했고, 로이의 눈은 밝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괴물의 안, 그 유령 아저씨의 추억 속에 있을 때도 저렇게 별이 빛났었지... 내가 그 여자애를, 아니 그 애의 환영(幻影)을 본 그 밤도, 그리고 그 애의 뼈를 본 날도... 그 아저씨의 환상 안에서는 저것과 똑같은 별이 빛났어. 여기가 예쁜 평야였을 때에도, 음침한 성이었을 때에도, 그리고 이렇게 전쟁터일 때에도 똑같은 별이 빛나다니, 참 우스운 일이지 뭐야...'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랜스는 자리를 털며 일어섰다. 이즐레이가 가 버렸다 해도,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시이드의 사람들이 그의 친구를 매정하게, 그것도 이유도 없이 쫓아냈지만, 그는 아직도 그들을 위해 싸워야 했던 것이다. 그가 막 떠나려는 찰나, 로이가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해서 평소의 명랑한 목소리만을 기억하던 랜스에게는 마치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랜스... 인간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는 건, 한 나라 안에서 모두 싸우지 않고 지내는 건 굉장한 중요한 일일 거에요... 그렇죠?" "...그야 물론 그렇겠지." 랜스는 로이가 묻는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애매한 어조로 대답했다. 로이는 그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랜스는 그의 물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으나, 더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이미 작전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고 파엘 영주는 막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 이즐레이는 마지막으로 허물어진 성터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그를 쫓아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모닥불 가에서는 병사들의 웃음소리마저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그곳을 습격하여, 기사들의 목을 잔뜩 베어다가 사일러스에게 바치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 쓴웃음을 지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 이즈...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지 않았나? 너는 어딜 가든 환영받을 수는 없는 존재라는 걸... 잊었던 건가?' 그는 일무러 당당한 걸음으로 발을 옮겼다. 에스텔로 가면 일거리는 많을 것이다. 곧 돈이 쌓일 테고, 저 복잡한 종족 전시장같은 일행과 함께 다니는 것보다 훨씬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지... 그래, 잠시 기분전환을 했으니 이젠 원래의 생활로 돌아갈 시간인 것이다. "이즐레이 경?" 어둠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이거 놀랍군요. 시이드의 영주님께서 배웅이라도 나오신 겁니까?" 이즐레이 스스로가 느끼기에도 그의 대꾸에는 너무도 짙은 조소가 드러나 있었다. 그는 말을 해 놓고 나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는 게 그의 의도였건만. 그러나 파엘은 상관하지 않고 대답했다. "뭐라고 사죄의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소... 하지만 지금은 전시이고, 군사들의 사기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라서..." 9이즐레이는 차라리 초연한 심정으로 이 작자가 무슨 말을 하나 궁금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파엘은 그의 반응이 없자, 점점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이... 이해해 주시시라 믿소. 그리고... 작은 성의의 표시로... 이 말과 돈을 가져가시오. 여행하는 데 도움이 될 거요. 어쨌건 나는 그대에게 목숨을 빚졌으니..." 파엘 영주는 어둠 속에서, 말 고삐와 묵직한 돈주머니를 이즐레이 에게 건네주었다. 그 무게를 느끼는 순간, 갑자기 이즐레이에게서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자신도 당황스럽기 이를 데 없는 웃음이었으나,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아하하... 하하하하... 그렇군요, 관대하신 영주님. 이게 당신의 목숨 값이로군요! 하하하... 잘 알았습니다. 일개 살인청부업자가, 영주의 목숨을 구할 기회를 얻은 데다가 이런 분에 넘치는 보수까지 받으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아하하하...!" 파엘 영주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이즐레이 역시 그의 대답 따위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는 예의를 차리지 않고 훌쩍 말에 올라, 박차를 가했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파엘은 한동안 침울하게 서 있었다. (계속) --------------------------------------------------------------------- * 독감에 걸려 또 늦어졌네요... 죄송...^^; 켈리는 실종되고, 이즈는 떠나가고... 잘들 돌아가는군요 용의 신전 팀... 어느 분이 그러셨더군요... "SF란에서 가장 단합이 안 되는 팀"이라고... 푸하하... 열심히 쓰겠습니다! 읽어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