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장 구출(救出) (The Rescue) "또 전멸이라고...!" 이키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소리쳤다. 그 나쁜 소식을 가져온 부하의 목이 단번에 그의 칼에 의해 베어졌다. 눈을 뜬 채로 잘린 머리는 돌바닥에 피를 뿌리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는 부관을 향해 소리쳤다. "쿠푸-헤께서는 아직도 아무 소식이 없는 거냐?" 부관은 매우 난처한 듯,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땅에 닿을 정도로 숙이며 대답했다. "면목없습니다. 쿠푸 이키슈... 그... 그러나 위대한신 쿠푸-헤께서는 마지막 한 명까지 목숨을 바쳐서라도 로이히르를 수복하라는 명령 외에는..." "이런 못난 놈! 그걸 소식이라고 받아온단 말이냐?" 이키슈의 발이 부관의 얼굴을 걷어찼다. 그의 머리 위에 씌여져 있던 투구가 벗겨지면서, 출구 쪽으로 굴러갔다. 그러나 부관은 목이 붙어 있는 것마ㅣ으로도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이키슈의 발밑에 배를 납작 대고 큰절을 했다. "쿠푸-헤께서는 도대체 어쩌실 생각이길래...!" 이키슈는 이제 화낼 기운도 없다는 듯, 약탈품 중 골라낸, 붉은 비단을 씌운 커다란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하들은 모두 줄지어 늘어선 채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국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로이히르로 오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일은 순조롭게 풀리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던 인간족들은 거의 다 도망하고, 남은 일이라고는 그들이 두고 간 물건 들을 싹쓸이하고 쓸모 없어진 집들에 불을 지르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 늙은 국왕, 아클레어 3세가, 다 된 밥에 재를 뿌렸던 것이다. 그것도 오르크의 적, 모든 마족의 적이라는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왕의 근위대장이라는 클레이브 아덴과 함께.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이키슈는 벌떡 일어났다. 어쨌거나 그의 상관, 쿠푸-헤 아크트는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을 지키지 못한다면, 그래서 로이히르 지방을 손에 넣지 않는다면 어차피 무서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 뻔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명령대로 싸우다 죽는 것이 편할 것이다. "...싸우러 가자. 우리 모두, 마지막 한 명까지 싸우는 것이다. 위대 하신 쿠푸-헤의 뜻대로!" 그의 명령에 토를 다는 오르크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말없이,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처럼 비통한 분위기로 토굴을 나와 말에 올랐다. 그리고 오르크들의 고향, 우클로우를 뒤로 하고 로이히르로 향했다. 전선은 산과 척박한 돌길에 익숙한 오르크 말로는 채 두 시갇오 안 되는 곳에 있었다. 멀리서도 형편없이 무너져 가는 오르크 군의 형세가 뻔히 보였다. 오늘은 왠일인지 은빛 갑옷을 빛내며 무자비하게 칼을 휘두르는 클레이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늙은 아클레어 3세 혼자서도 힘차게 칼을 휘두르며, 거뜬히 열 사람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의 칼에 떨어지는 오르크들의 머리가 부지기수였다. "쿠푸 이키슈께서 오셨다!" "모두 힘을 내라!" 오르크들이 기를 쓰며 소리를 질렀다. 이키슈는 인간들 사이에 뛰어들어, 본보기를 보이려고 한 기사의 몸을 등 뒤에서부터 칼로 꿰뚫었다. 그 모습에 오르크들은 사기가 되살아나는지, 함성을 지르며 인간들에게 창과 도끼, 칼을 힘차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와아아악!" "아르그르! 아르그르! (죽여라, 죽여!)" 그러나 너무도 형세가 뻔한 싸움이었다. 이미 너무 많은 오르크들이 죽거나 다친 채 쓰러져 있었고, 인간 병사들은 사기등등했다. 이키슈는 인간 병사들의 창들을 간신히 막아 내며, 씁쓸한 절망을 맛보고 있었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로이히르를 수복하라니, 그것도 원군조차 보내 주시지 않은 채... 쿠푸-헤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신 거로군...' 한참동안의 전투 끝에 동이 터 오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뜨면 인간들과의 전투는 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키슈는 그러나 후퇴 명령 따위는 내리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여기서 죽게 될 것이다. 아크트의 명령을 따르던 중에. 그것이 오르크의 죽음이었다. "앗, 저 깃발은...!" 갑자기 한 인간 기사의 외침이 전장을 울렸다. 그의 목소리는 크기는 했으나, 시그러운 비명소리들에 묻힌 전장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키슈는 별 생각 없이 그 기사의 시선을 쫓다가,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산맥을 돌아, 무서운 속도로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말 한 데. 분명 그들의 선두는 검은 깃발을 들고 있었다. 아무 문장도 없는 새까만 깃발을... "푸이 하르크...!"" 이키슈는 고개를 저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꿈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말과 오르크 말을 탄 한 떼의 무리는 점점 더 빨리, 점점 더 분명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것은, 거대한 새... 아니, 거대한 검은 날개를 가진 새가만 생물이었다. 바로 용, 그것도 오르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용이었다. "푸이 하르크가 온다! 우리는 이길 수 있어! 모두 힘을 내라!" 이키슈는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 효과는 즉각적 이었다. 오르크들은 모두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흘끗 보고는, 그 말이 사실 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갑자기 사기가 높아져 소리를 질러대며 호전 적으로 인간들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의 칼날은 당당히 인간들의 칼날과 부딪 혔으며, 그들의 머리가 떨어져 땅에 뒹굴 때, 인간들의 머리도 잘려 나갔다. "마법사! 안되겠다. 주문을 외워!" 갑작스런 전세의 변화에, 당항한 아클레어 3세는 명령을 내렸다. 마법사는 자신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이 기쁜 듯,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당당히 오르크들 앞으로 나아가 소리쳤다. "더러운 마족들! 비열한 오르크들아! 내가 너희들을 벌하겠다! 갈 이조넬 데란탈..." 그러나 그가 마법을 완성할 새는 없었다. 갑자기 그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발톱이 그를 덮쳐 오더니,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짓뭉개 버렸던 것이다. 기사들의 미처 손을 쓸 새도 없이, 그 마법사의 목숨은 달아났고,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에는 날개를 가진 새까만 용 한마리가 재려앉았다. 목과 고리를 합쳐 봐야 사람 키의 세 배 정도 되는, 별로 큰 편은 아닌 용 이었다. 그러나 그 날개는 마치 암흑처럼 검고 거대했고, 특히 왼쪽 날개의 하얀 상9처는 험상궂게 인간들을 위협하는듯 했다. "하르크자엘!" "카야! 하르크자엘!" 오르크들의 환호성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용기있게 그 용을 향해 창을 던지려던 병사들조차, 그 이름을 듯고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 검은 용은 긴 목을 하는 높이 빼더니, 인간이 묘사할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길게 부르짖었다. 비명같기도 하고 환호성 같기도 한 그 소리는, 오르크들을 완전히 흥분시켰다. 그들은 미친 듯 용을 따라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자신의 생명은 아깝지도 않다는 듯 마구 날뛰며 인간들을 학살했다. 오르크들의 피로 물들었던 땅 위에 인간들의 토막난 시체가 덮여 가고 있었다. "으아악!" 간 기사의 비명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흑룡의 뿔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던 것이다. 날카롭고 희게 빛나는 뿔 앞에는 황금으로 만든 그의 갑옷 조차 별 쓸모가 없었다. 용은 뿔에 그의 갓ㅁ을 꿴 채 고개를 홱 젖혀, 그 시체를 멀리 던져 버렸다. 그것은 마침 오르크들 사이로 떨어졌고, 그 황금 갑옷과 투구를 차지하로 금방 오르크들이 까맣게 몰려들었다. "이 사악한 용...!" 다른 기사가 그 용을 향해 칼을 날렸다. 그러나 용은 슬쩍 고개를 돌려 칼을 피하고는, 자주빛 눈으로 그 기사를 쏘아보았다. 그는 그 눈빛에 기가 죽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캬아악!" 용이 기괴한 외침을 내지르며, 그 기사에게로 달려갔다. 용 치고는 몸집이 작기 때문인지, 놀랄 만큼 빠른 솜씨였다. 무슨 대응을 하기도 전에 기사 세 명이 그 용의 발톱에 휘갈겨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에게 칼을 던졌던 그 기사는, 갑옷째 용에게 덮썩 물리고 말았다. 용은 앞발로 그의 하반신을 잡아 누르고, 상반신은 이빨로 굳게 문 채 고개를 올렸다. 그 기사의 몸은 당장 두 동강으로 찢겨졌다. 용이 그의 상반신을 문 채 마구 흔들자, 그의 피와 살점, 그리고 나장 조각이 마구 주위의 병사들에게 떨어 졌다. 경험이 많은 노장조차 이 광경에는 구역질을 했고, 어린 병사들 중에는 기절해 버리는 이도 있었다. "누가 저 용을 막아랏! 어서!" 왕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손수 창을 집어들어 용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용은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마치 비웃는 듯이 자줏ㅂ 눈으로 왕을 빤히 바라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궁수들! 궁수들은 뭘 하고 있느냐!" 왕의 노한 외침에 멍하니 서서 얼어붙은 채 구경만 하고 있던 궁수들은 활을 집어들었다, 수많은 화살이 검은 용을 향해 날아갔다. 용의 움직임은 빠르고 유연했으나, 백여명의 궁수들의 공격 도한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그 새까만 비늘은 그렇게 두껍지 않은 것 같았다. 한 화살이 그 목을 스치자, 많지는 않지만 피가 흘러나오는 것이 모두의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쏴라. 피할 틈을 주지 마라!" 아클레어 3세는 노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우렁찬 목소리로, 전장 안이 다 울려퍼지도록 명령했다. 궁수들도 점점 힘을 얻는 듯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궁수가 갑자기 활을 놓치며 땅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짧고 거칠게 깍여진 오르크 화살이 박혀 있었다. 독을 너무 많이 칠해, 쇠로 된 화살촉이 벌써 녹이 슬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들의 등 뒤로부터, 이어서 수많은 화살과 손도끼가 궁수들을 향해 퍼부어졌던 것이다. 검은 깃발을 든 오르크의 무리였다. 용에게 마음을 빼앗겨서, 왕의 군대는 그들의 접근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다. 도끼와 화살 따위는 경고에 지나지 않았다. 일단 접근전을 할 수 있는 거리에 다다르자, 그 오르크 무리는 무기라고는 화살과 활밖에 없는, 갑옷조차 입지 않은 궁수들에게 무자비하게 칼을 휘둘렀다.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인간들보다 머리 둘은 더 큰, 엄청나게 큰 몸집의 거인 오르크였다. 그는 몸집이 커서 힘이 셀 뿐 아니라, 실력도 상당한 듯이 보였다. 그가 휘두르는 칼은 한치의 빗나감도 없이 상대의 허리를 싹둑 베고 지나갔다. "저 놈이 저승의 전사(푸이 하르크) 대장이라는 그루크인가...!" 아클레어 3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칼을 꽉 쥐었다. 그는 그가 다스리는 영주들어게서, '하르크자엘과 그루크는 보기만 해도 칼을 제대로 들 수 없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막상 대하고 보니 그루크는 도저히 보통 오르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 힘, 그 솜씨, 그리고 남을 압도하는 그 몸집 어디에서나, 그루크는 그가 경멸해 오던 다른 오르크들과는 근본적 으롸 달랐다. "뭣들 하느냐! 오르크들이 우리의 동료들를 죽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가! 싸워라, 오르크들을 몰아내라!" 왕은 소리치며 푸이 하르크들을 향해 말을 달려 돌진했다. 푸이 하르크의 오르크 중 하나가, 자신만만한 태도로 왕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정확한 솜씨였다. 그러나 왕이 더 빨라서, 그 도끼는 그의 아름다운 투구에 작은 흠집만을 내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리고 왕의 칼이 곧 그 오르크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아클레어 폐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 어서 싸우자!" 병사들은 마지막 남은 사기에 불을 밝히며, 죽기살기로 오르크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오르크와 인간, 양쪽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는, 보기 힘든 살육의 현장이 벌어졌다. 아클레어 3세의 군사들도, 하르크자엘의 군대 푸이 하르크와 그들의 등장으로 사기를 얻은 다른 오르크들도 전혀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오르크와 인간의 피가 한데 섞여 강을 이루고, 두 종족의 시체가 마구 뒤섞인 채 굴러다녔다. 해는 떠올랐으나, 오르크들은 이제 그런 것에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하르크자엘이 있었고 그가 곧 밤이었다. "캬아아아!" 검은 용이 정신없이 푸이 하르크를 상대로 칼을 휘두르는 아클레어 3세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 용은 아클레어 3세를 향해 날카로운 뿔을 내밀 었다. 아클레어 3세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말에서 뛰어내려 땅을 굴렀다. 그러나 그가 아끼던 백마는 피투성이가 된 채 목숨을 잃었다. "폐하...!" 쓰러진 왕을 보고, 한 기사가 황급히 달려왔다. 용의 자줏빛 눈이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클레어 3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명령했다. "이리로 오지 마!" 그러나 이미 늦었다. 용은 그 기사를 덥썩 물더니 땅에 세게 내리쳐 버렸던 것이다. 왕이 달려갔을 때, 그 기사는 이미 온몸의 뼈가 부스러진 채 죽어 있었다. "하르크자엘!" 아클레어 3세는 분노에 찬 채, 그의 앞에 서 있는 새까만 용을 향해 당당히 소리쳤다. "소문과 다름이 없구나. 이 악마, 지옥의 생명이여! 네게더 자존심이 있다면 그 용의 모습 뒤에 숨어 장난이나 칠 게 아니라, 나와 검으로 맞붙어 보자!" 용은 자줏빛 눈으로 잠시 늙은 왕을 쳐다보았다. 투구가 벗겨져 하얀 수염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지만, 그는 그의 기사들 못지않게, 아니 그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엇게 투기에 차 있었으며 강렬한 살의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눈 앞에서 용의 날개는 서서히 줄어들었다. 용의 목, 뿔, 그리고 피가 묻은 발톱들도. 그 속도는 점점 빨라지더니만, 눈 깜짝할 사이에 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왕은 하르크자엘의 나이가 적어도 100살은 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접하고 보니, 그의 모습에 속아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아무리 봐도 아직 20대 추반일 뿐인, 단정한 외모의 어린 청년으로만 보였다. 게다가 그는 방패와 갑옷조차 없이, 무기라고는 길고 가느다란 하나만 차고 있어서, 그의 손에 그토록 많은 인간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좀처럼 믿기 어려웠다. "네가... 하르크자엘?" 왕은 반신반의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이 살의에 가득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을 때, 그 의심은 여지없이 흩어져 버렸다. "그렇다. 내가 흑룡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이다. 그대는 필시 인간의 군주 아클레어겠지." 그는 목소리조차 완벽하게 인간 청년의 것이었다. "감히 나를 화나게 만들려고 하다니, 그 용기가 가상하군, 인간의 군주여. 그대가 비록 나를 화나게 하는 데 실패했을지라도,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에는 성공한 것 갖구나. 자, 검을 들고 덤벼 봐라. 어디 손이 입심을 따라가나 구경해 볼까?" (계속) "무례하구나, 하르크자엘! 너야말로 오늘 내가 네 악행을 끝내 주마!" 아클레어 3세는 생전 처음 당하는 모욕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그 분노가 그의 팔에 새로운 힘을 주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칼을 있는 힘껏 휘두르며, 하르크자엘에게 달려들었다. 어느 젊은이 못지 않은 솜씨와 속력이었다. 그러나 드래크로니안의 속도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는 분명 하르크자엘의 가슴을 정확하게 베었다고 생각했건만, 그의 검은 허공만을 갈랐을 뿐이고, 어느새 적은 한 발짝 뒤에 서서 그를 비웃고 있었다. "하하하... 드래크로니안의 속도에 대해 들은 적이 없나, 왕이여? 미안하지만 자네보다는 프라니드 영주였던 가란이 훨씬 실력이 나은 것 같군. 그리고 보니 참으로 안 됐지, 가란과 그 충성스러운 신하 마일즈..." 하르크자엘은 칼도 뽑지 않은 채 빈정거렸다. 아클레어 3세는 가란의 이야기를 듣자 잊고 있던 분노가 폭발함을 느꼈다. 성문 앞에 걸려 있던 프라니드 영주 가란과 그의 부관 마일즈의 목... 그가 분을 못 이겨 칼을 휘두르려는 찰나, 갑자기 어떤 생각이 그의 행동을 중지시켰다. '놈은 내가 흥분해서 이성을 잃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놈의 뜻대로 될 수야 없지!' 아클레어 3세는 기분나쁘게 조소하는 하르크자엘을 흘끗 본 다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소리치며 칼을 마구 휘둘렀다. "가란의 원수를 갚아 주마. 죽어랏!" 그는 눈에 뵈는 것이 없는 듯 칼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하르크자엘이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칼을 빼어드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하르크자엘은 여유있게 아클레어 3세의 허점을 향해 칼을 내리쳤다. "안녕이군, 인간족의 군주!" 그러나 아클레어의 칼은 그의 칼을 막아냈다. 그리고 그가 칼이 부딪힌 진동으로 잠시 균형을 잃은 틈을 타, 그의 목을 향해 힘차게 칼을 휘둘렀다. 노랄 만큼 바른 동작이었으나, 하르크자엘은 이미 한 발짝 뒤에 서 있었다. "이름뿐인 왕이 아니군, 정말 놀랐어!" 하고 하르크자엘은 소리쳤다. 무관심과 조소로 차 있었던 그의 얼굴에는 드디어 결투의 흥분과 기쁨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정도로는 안 되지. 다른 자라면 몰라도 그대의 손에는 절대 죽을 수 없으니까, 아클레어! 드래크로니안의 원수인 자네의 혈족에게는 말이야!" 하르크자엘의 칼이 순식간에 아클레어 3세의 가슴을 향해 날아 들었다. 그가 간신히 피하자, 숨 돌릴 툼도 없이 이제는 목을 향해 칼날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팔로... "으욱!" 갑옷 사이의 틈으로, 하르크자엘의 칼은 교묘히 그의 팔에 상처를 냈다. 왼팔이었으므로 다행히 전투에 지장을 주지는 않았으나, 그의 종족 특유의 기술인 바른 속력을 실감하고 등골이 오싹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자! 받아라!" 하르크자엘의 외침과 함께, 그의 칼이 다시 아클레어 3세의 코앞으로 날아들었다. 아클레어 3세는 갑작스런 공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한 채,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하르크자엘의 칼은 그의 목을 비껴가 새하얀 그의 머리칼을 한 움큼 자르며, 그의 볼에 작은 상처만을 내고 갔을 뿐이었다. '...그렇군! 아무리 천하의 드래크로니안이라 하더라도 미리 상대의 움직임을 예측하지 않고서는 저런 빠른 공격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족이 '피한다'는 가정하에 움직이고 있는 거야. 실제로 웬만한 기사들이 라면 반사적으로라도 공격을 피하는 것이 당연하니까...' 아클레어 3세는 마음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칼을 꽉 쥐었다. 하르크 자엘이 다시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돌진해 오고 있었다. 하지만 피해서는 안 되었다. 피하지 않는다면.. "핫!" 아클레어 3세는 그 자리에 발을 붙힌 채, 하르크자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동시에 하르크자엘의 칼도 아클레어 3세를 향해 휘둘러졌다. 둘이 상처를 움켜쥐며 한 발짝 물러선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하르크자엘의 칼은 아클레어 3세의 갑옷 틈으로 비집고 들어와, 그의 옆구리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으클레어 3세의 칼도 하르크자엘의 가슴을 스쳤고, 긴 상처가 그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허리까지를 내지르고 있었다. "윽...!" 아클레어 3세의 칼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고, 이어서 그의 몸도 땅 위에 털썩 덜어졌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의 상처는 크기만 컸을 뿐 전혀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아클레어 3세의 앞으로 다가왔다. "제법이야, 정말!" 그의 웃음소리가 아클레어의 귀를 때렸다. 아클레어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목을 겨눈 채 칼을 치켜 든 하르크자엘을 바라보았다. 바로 프라니드의 영주 가란을 죽인 칼, 그리고 옛 라우더의 영주 리반을 죽인 그 칼이었다. '제길... 내 운명도 결국은 여기서 끝나는가!' "이제 인간족의 왕의 목이 로이히르의 성벽을 장식하게 생겼군. 가란의 목이 프라니드의 성벽을 장식했듯이 말이야!"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왕이 죽음을 준비한 채 눈을 질끈 감은 순간, 그의 칼은 왕의 목이 아닌 어깨를 깊게 파고들었다. 비명을 지를 만한 고통이었이나, 급소는 아니었다. "어째서...?" 왕은 헐떡거리며 자신의 어깨에 칼을 꽂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하르크자엘에게 따지듯 물었다. 하르크자엘은 자주빛 눈으로 아클레어 3세는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제 조롱도 흥분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침착함이 그의 증오를 더욱 뚜렷이 나타내 주었다. "당신을 지금 죽일 수야 없지... 인간의 왕, 아클레어 3세! 당신은 지금 죽어서는 안 돼. 살아서 봐야 할 것이 더 남았으니까. 그래, 당신의 선조들이 쌓아올린 평화, 우리 종족을 멸종으로 몰아넣으려 하면서까지 지키려던 그 평화가 얼마나 처참히 허물어지는가 보여주지.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고, 그리고 결국에는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의 종이 되는 모습을 말야! 잘 들어 둬. 나는 당신의 나라, 인간들의 나라 에스테이아를 모조리 쑥밭으로 만들 생각이야. 모조리 전쟁의 피로 물들이고, 오르크들을 풀어놓아 불모의 땅이 되게 할 생각이야! 너희들이 가이니크를 죽음의 땅으로 만들었 듯이! 너희들이 시지리스에서 행한 일을 몇 배로 되갚아 줄 생각이야! 그러니 나이가 그때까지 목숨을 잘 보존하라고. 그리 멀지 않았으니, 당신이 늙어죽기 전에 볼 수 있을거야!" 왕은 입을 다문 채 하르크자엘의 말을 경청하고만 있었다. 그런 왕의 얼굴에 순간이나미 이해의 표정 비슷한 것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곧 강렬한 적개심이 그 표정을 지워 버리고, 왕은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소리 쳤다. "그렇게는 안될 거다, 이 악마!" "글쎄... 두고 봐야겠지?" 하르크자엘은 이렇게 말하며 왕의 어ㄲ에 꽂혀 있던 칼을 쑥 뽑았다. 갑자기 열린 상처를 통해 피가 분수처럼 솟았고, 왕은 비명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그의 비명에 기사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달려왔다. "폐하!" 그러나 그들이 그의 가까이에 갈 새도 없이, 하르크자엘의 칼이 차례로 그들을 향해 날아들었다. 첫번째 기사는 반격 한 번 못 해본 채 목이 잘려 쓰러졌고, 두 번째 기사는 첫 공격을 가까스로 피했으나 숨 돌릴 틈도 없이 날아온 다음 공격에 심장을 질린 채 즉사했다. 세 번째 기사는 하르크자엘을 등 뒤에서 공격하려 했으나, 가볍게 그의 공격을 피해 낸 하르크자엘 때문에 오히려 그 자신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은 하르크자엘의 칼날이 그의 허리를 베었다. 네 번째 기사는 칼을 놓친 채 그대로 굳어져서, 떨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는 처음 전장에 나온 16세의 소년이었다. 하르크자엘의 자줏빛 눈이 두려움에 가득 찬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자, 그는 겁에 질린 나머지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하르크자엘이 피가 둑뚝 떨어지는 칼을 든 채 그에게 다가왔을 때에도, 그는 공격은 커녕 도망가지조차 못했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상상와의 것이었다. "네 왕을 데리고 여기서 도망가라, 꼬마." "예...?" "어차피 너희는 이길 수 없다. 그러니 왕을 데리고 목숨이나 보존 해라. 여기는 왕의 무덤이 아니다. 인간족의 왕이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아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명령을 마친 하르크자엘은 손을 들어 쓰러진 왕을 가리켰다. 어린 기사는 겁에 질린 채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어서 가라. 그리고 왕에게 기억해 두라고 해. 인간족의 왕은 재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가 아끼는 것을 다 파괴한 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린 기사가 보는 앞에서, 하르크자엘의 등 뒤에는 커다란 날개가 돋아났다. 하늘을 뒤덮을듯 크고 검은 날개였다.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뒤로 하고, 하르크자엘은 인간 병사들을 더 살육하기 위해 칼을 굳게 쥐고는, 그 큰 날개로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올랐다. --------------------------------------------------------------------- "으아아아... 지루해... 열흘동안 뭘 하고 지내나..." 켈리는 기지개를 키며 저물어 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제 자진 해서 볼모가 되어 끌려온 이후 겨우 하루가 지났을 분이었다. 아니, 아직 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 였으니까. 그러나 벌써 켈리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앙... 너무 지루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로이보고 대신 가라고 할걸... 신경질 나는데 탈옥이나 해버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켈리 자신이 더욱 잘 알고 있었다. 데이슨까지 딸려 있으니 로이 일행이 멀리 가지 못했으리라는 것은 뻔했다. 스트라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가려면 열흘도 빠듯할 것이었다. 그리고 레일라가 자신을 믿고 이렇게 융숭한 대접을 해 주니, 그 신의를 저버릴 수도 없었다. 풍성한 음식에다, 깨끗한 방(비록 문은 잠겨 있지만), 그리고 새 옷... '에이 씨... 차라리 감옥 같은 데 가둬 놓으면 미안하지라도 않지...' 그녀는 길리어드 성이 보이는 곳 산기슭에 위치한, 작지만 부족함 없이 꾸며진 성의 탑에 갇혀 있었다. 경치는 끝내주는 곳이었다. 풍성하게 펼쳐진 밀밭과 포도밭이 온통 탑 아래를 뒤덮고 있었고, 저 멀리로는 하얀 길리어드 성이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주위로 아기자기한 색깔의 시장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붉은 태양이 마지막 빛을 비추고 있었다. "경치가 마음에 드십니까, 켈레브리스?"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붉은 망토 밑에 푸르스름한 은빛 갑옷을 차려입은 젊은 기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랜스와 비슷한 나이쯤 되었을까, 갑옷의 색깔을 보니 그림자 기사단 소속은 아닌 모양이었다. "늦었지만 인사드립니다. 제가 이 성의 주인, 수도 방위대(首都 防圍隊)의 대장 하젠 윈필드입니다. 레일라에게서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부족함이 없도록 모시지요." "아... 예... 인사드립니다." 하젠이 격식을 갖추어 꾸벅 절을 하자, 켈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에 맞는 예의로 답했다. 능숙한 자세로 궁중의 예의를 갖추어 인사하는 켈리를 보고, 하젠의 눈이 놀란 듯 조금 커졌다. 켈리는 순간적으로 실수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미 하젠은 호기심을 애써 감춘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랜스와 함께 데이슨을 구하러 왔을 때에는 그냥 잘 싸우는 거친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레일라 역시 검술은 하젠보다 한 수 위니까. 그러나 지금, 새로 만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궁중의 예를 차려 인사하는 켈리를 보자,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켈리는 상당한 미인이었다. 간소한 옷 위로 드러난 몸매는 완벽했고 금발은 햇빛을 받아 황금처럼 빛나며 어깨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이 출신을 모르는 미녀는 왕실의 예를 알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이곳은..." 켈리가 딴소리를 하며 창밖을 쳐다보았다. "아트웰이 에스테이아의 주요 곡창 지대 중 하나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렇게 보니 과연 척박한 북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로군요." "한 나라의 속국으로 머물기엔 너무 아름다운 곳이지요." 하젠이 대답하자, 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도 랜스처럼 당신들의 적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당신들의 일을 결단코 막을 생각이었다면 자진해서 인질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발벗고 나서서 도와줄 사정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당신은 랜스 경의 동료가 아닙니까?" "로크 페울로니를 찾아다닌다는 점에서는 그렇죠." 켈리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하고는, 창틀에 걸터앉았다. 이제 창밖에는 어둠이 덮여 가고 있었다. "그것들을 꼭 찾아야 해요. 스트라본과 사일러스, 그리고 아트웰이 당신에게 중요한 것처럼, 그건 내게 아주 중요한 문제이지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물건 따위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세상을 바꾸는 물건이니까요. 그게 모이면 평화가 시작되거나... 재앙이 닥친다고 하죠. 종말의 재앙이. 후자의 경우가 되지 않기를 바래야 겠지만." "그 전설을 믿으십니까?" 하젠이 어이없다는 듯 묻자 켈리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믿어요. 그게 중요한 점이죠. 전설은 세상을 바꿀 수 없을지 몰라도 사람들은 바꿀 수 있으니까." "우리가 세상을 바꿀 겁니다." 하젠의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사일러스 전하와 스트라본 전하, 그리고 우리 아트웰 백성 모두가 세상을 바꿀 겁니다. 로크 페울로니 따위는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에스테이아의 통치에 종지부를 찍고, 아트웰 왕국을 재건할 것입니다. 그러니 새 세상을 원한다면, 켈레브리스, 우리와 손잡는 것이 어떻습니까?" (계속) 켈리는 잠시 어이없다는 듯 하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맑은 웃음소리가 천정까지 울려퍼졌다. "제가 랜스의 첩자가 아니라고 확신하시나 보죠? 만약 당신 편에 붙었다가 배신하고 에스테이아 왕에게 정보를 팔아넘기면 어쩌려고 그래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은 에스테이아의 졸개가 아니라는 확신이 듭니다." 하젠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진지했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여간 당신은 말뿐인 통일이나, 겉보기만의 평화를 신봉하는 멍청이는 아닙니다. 왠지는 몰라도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하젠 윈필드 경." 켈리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웃음과 농담하는 듯한 표정이 사라지자 그녀의 얼굴에는 뭔가 모를 고귀함 같은 것이 언뜻 내비쳤다. "그러나 지금은 도울 수 없습니다. 나는 어쨌거나, 랜스의 친구이니 까요... 그리고 로크 페울로니를 찾아야 하는 의무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저 따위 없이도 당신들 아트웰 인들은 잘 해낼 것입니다. 날 믿으세요. 당신 들의 확신과 스트라본에 대한 신뢰, 그리고 사일러스를 향한 충성심이 당신 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켈레브리스... 당신은... 예언자라도 되나요?" 확신에 차서 말하는 켈리의 모습에 압도된 듯, 하젠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켈리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냥 말 많은 트레져 헌터일 뿐이랍니다. 로크 페울로니의 전설을 믿는..." 그리고 켈리는 다시 활짝 미소를 지었다. 수수께끼같은 고귀한 여인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늘상 볼 수 있는 아름답지만 평범한, 활달한 소녀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켈레브리스라고 부르지 말고 켈리라고 부르세요. 모두 그렇게 부르니까요." "...예, 그럼..." 하젠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녀의 방을 나왔다. 문을 닫고 빗장과 자물쇠를 채우는 것이 왠지 미안하게 느껴졌다. 켈리의 방은 탑의 곡대기였기 때문에, 그의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선형의 계단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레일라가 처음 켈리를 데려왔을 때, 그는 이런 탑이 아니라면 켈리가 누워서 떡 먹듯이 탈출해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길리어드 겅의 감옥에서도 탈출한 사람이니까. 그러나 고작 대화 몇 마디 나누고 나자 그녀가 탈출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자기의 편이 되어달라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알만해. 레일라가 왜 스트라본 전하의 말을 따르지 않고 저 여자와의 협상에 따랐는지...' 하젠은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사실 레일라가 스트라본의 명령을 어겼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무척 놀랐다. 단지 그 죄가 중해서만은 아니 었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일은, 그림자 기사들에게 있어서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왕의 해산 명령을 어기고 지하조직이 된 것이고. 그러나 레일라는 언제나 스트라본의 일부인 것처럼 그의 말을 충실히 따랐었다. 그런 레일라가... '...하지만 켈리의 말이라면 믿을 수 있겠군.' 그 역시 켈리를 만나보고 나서, 그녀와 랜스가 교묘한 계획을 짠 것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깨끗이 떨쳐 버렸던 것이다. "영주님! 레일라 경께서 와 계십니다." 집사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그를 보고 성급히 다가와 말했다. 하젠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마침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서슴없이 객실로 들어갔다. 넓지만 간소하게, 그러나 부족함 없이 꾸며진 객실에는 윈필드 가문의 상징인 은청색 매가 그려진 거대한 깃발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덩그러니 놓인 돌 식탁에 레일라가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갑옷 대신 붉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스트라본은 언제나 그녀에게 붉은 옷이 어울린다고 했었고, 그 말은 사실이 었다. "기다리고 있었어, 레일라." 하고 하젠이 말했다. 레일라는 자리에 앉은 채 물었다. "그녀를 만나보고 오는 모양이지?" "...그래." "어때? 믿을 만한 사람같지 않아?" "그래, 네 말이 맞더군. 하지만 그래도 스트라본 전하의 명령을 어기다니, 정말 놀랐어. 그 분께서는 아무 눈치도 못 채신 것 같던가?" "글쎄..." 레일라는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고민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나도 모르겠어. 그냥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 분을 속이는 건 처음이라... 아아, 내가 잘 하는 건지...!" "너무 고민 말라고. 너는 기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야. 불필요한 희생은 그림자 기사단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밖에 더 되겠어? 그리고 스트라본 전하도... 언젠가 후회하실 거야. 정말이지 네말마따나 그 분은 너무 많이 변하셨어." "하지만... 그 분이 시키는 것만을 하는 것이 내 인생이었는데." 레일라는 힘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녀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도 말했지. 내 아버지가 처형되고 나도 잡혀온 날... 난 내 인생 끝이라고 생각했어. 고작 열 살 때 말야... 그런데 그 분이 날 감옥에서 꺼내 주시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지. 내 아버지는 반역자가 아니라고. 그리고 아트웰을 위해 싸우신 훌륭한 분이라고. 그리고 내 아버지를 나쁜 사람이라고 하는 건, 그 분을 두려워하는 에스텔의 나쁜 귀족들이 꾸며낸 말이라고...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어. 네 아버지는 아트웰을 진심으로 아끼신, 흔하게 찾아볼 수 없는 영웅이셨어. 절대로 보끄러워 해서는 안돼, 레일라. 너는 반역자의 딸이 아니라 영웅의 딸이라는 걸 잊지 말아... 나는 그래서 그 분을 위해 평생을 바치기로 맹세한 거야." "..." 하젠은 대답 없이 그녀의 말을 듣기만 했다. 스트라본이 그녀를 반역자의 딸로 처형될 위기에서 구해주었다는 말은 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용을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분도 시간이 지나면 네 판단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실 거야." 이윽고 하젠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레일라는 걱정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럴까?" "그렇고 말고. 현명하신 분이잖아. 그리고 또 알아? 네 행동이 오히려 우리 아트웰에 도움이 될지. 켈리라는 여자... 내가 만나봤는데, 에스테이아의 졸개는 아니었어. 본인도 그렇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믿을 만 한 것 같더군." 하젠의 말에 레일라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씻어 버리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반한 거 아냐, 너? 하여간 넌 미인만 보면 약해져서 큰일이라니까!" --------------------------------------------------------------------- 한편, 그 시간, 클레이브와 칼릭, 그리고 그의 부하 기사 세 명은 아트웰의 문턱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마을이라고 해봤자 조그만 십들 열 몇 채와 방도 얼마 없을 것 같은 작은 여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무척 초라한 곳이었다. 아트웰의 풍요는 여기가지 미치지 못한 것 같았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지." 하고 클레이브가 제안했다. 칼릭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행을 시작한 이래 그의 표정은 한 번도 밝아진 적이 없었다. 계속 다른 곳에 정신을 빼앗긴 채, 어두운 표정과 답답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클레이브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걱정 마. 이제 저 숲만 지나면 아트웰이다. 자네 아버님은 무사할 거라고. 그렇게 쉽게 돌아가실 분이 아니란 건 자네가 더 잘 알잖아?" "예..." 칼릭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클레이브의 마음을 불현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 그는 그의 아버지가 선물한 단도의 칼날에 녹이 슬어 있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그냥 금제 손잡이가 달린 비싼 단도처럼 보였지만, 예로부터 라이드 가(家)의 부자간의 끈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가 되어 왔던 것이었다. 그가 기사 작위를 받는 날,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기사 작위를 처음 받는 날, 이 단도를 네 할아버지께 받았지. 네 할아버지께서는 증조할아버지께 받았고, 그리고 증조할아버지는 다시 고조할아버지께... 그런 식으로 이 단도는 우리 라이드 가의 아들들에게 전해져 왔단다. 내가 이제 이것을 네게 주마, 칼릭.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이 칼의 칼날에 녹이 슬 것이다. 만약 네가 이것을 네 아들에게 전해주기 전에 내가 죽는다면, 그 칼날이 부러질 것이다. 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내가 부러진 칼날을 다시 벼려야 했듯이... 그러니 이 단도를 소중히 하거라, 칼릭. 이것은 라이드 가의 최초의 기사부터 마지막 기사를 연결해 주는 소중한 끈이란다." 그리고 그 칼날은 지금 녹이 슬어 있는 것이다. 클레이브는 어두운 표정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칼릭을 흘끗 보더니, 말에서 내려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의 심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무릎이라도 꿇고 칼릭에게 싹싹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래도 데이슨 혼자 길리어드에 보내는 게 아니었어... 위험한 곳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데이슨도 이제 나이가 들었고, 자신의 영지에서 편안히 쉴 때가 되었는데...' "어서 오십쇼!" 남루한 차림의 비쩍 마른 주름투성이 여관 주인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크고 신이 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클레이브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뭐가 즐거운지 새처럼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다섯명이십니까? 마침 운이 좋으시군요. 큰 방 한 개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거든요. 거 참, 요즘은 손님들이 많기도 하지... 오늘 낮에도 손님 다섯 명이 들어오셨는데 말이죠. 방값은 5디나르면 충분 합니다, 나리. 정말 싸죠? 그나저나 기사십니까? 어디서 오셨나요?" "...방이나 보여 주시오." 클레이브는 동전을 던지듯 그에게 주며, 자신이 생각해도 쌀쌀맞게 대답했다. 그러나 주인이 보기에, 그처럼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키가 큰 기사가 인상 쓰고 대답하는 것은 쌀쌀한 정도가 아니었다. 주인은 금방 기가 팍 죽어서 말까지 더듬었다. "이... 이... 이리로 오시죠..." 그리고 그들을 2층에 있는 커다란 방으로 안내했다. 여관의 겉보기 와는 달리, 방은 가구가 없어 좀 썰렁해 보일 뿐, 널찍하고 깨끗했다. 그는 주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주인은 이제 살았다는 듯이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다들 쉬어 둬. 난 좀 나갔다 와야겠으니까." 클레이브는 부하 기사들에게 말하며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 그에게 칼릭이 얼룬 따라붙었다. "저도 가겠습니다."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때문에 자기 아버지가 위엄에 바진 것이라 생각하고 원망해도 탓할 사람이 없으련만, 칼릭의 충성심은 아직까지 수그러들 줄 모르다니. "자네야말로 좀 쉬어 둬. 여행 시작한 이래 꼴이 말이 아냐. 우리는 잘못하면 아트웰 반란군과 한 판 부딪힐지도 모르는데, 그런 상태로 어떻게 아버지를 구해내겠나? 난 그냥 뜬소문이나 들어 두려는 거니까, 별 일 없을 거야." 그리고 그는 칼릭을 방 안으로 거의 밀어넣다시피 하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여관의 식당은 좁고 한산했다. 어차피 주인도 식당으로 돈 벌려는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는 기껏해야 서너 사람이 앉아 있는 식당을 쓱 훑어보고는, 여관의 출구를 행해 몸을 돌렸다. 그런 그에게,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는 사람 있으세요, 기사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열 대여섯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었다. 남루한 차림이었으나 커다란 검은 망토는 고급품인 것처럼 보였고, 또 제법 긴 칼까지 차고 있어서 좀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얼굴은 순진한 장난기가 가득해 보여서 아주 귀여웠다. "아니... 너 혹시 아트웰의 소문에 대해 들은 적 있냐?" 그는 별 기대 않고 소년에게 물었다. 어차피 별다른 정보를 알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 소뇬의 호감가는 인상이 몇 마디 건네보고 싶은 마음을 일으켰던 것이다. 소년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소문이라면... 무슨 소문이요? 왕자의 연애담이라도 원하세요?" "아니... 사형수 얘길 듣고 싶은데." "사형수요?" "아트웰에 들렀다면 알 거다. 반역을 꾀하고 상관의 동생을 죽인 벌로 사형을 선고받은 기사... 이름은 데이슨 라이드지. 알고 있나?" 순간 소년의 얼굴에 당황한 듯한 표정이 스쳤다. 그는 얼른 그 표정을 거두었으나, 클레이브의 눈이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소년이 입을 열어 대답할 때,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는데..." 소년은 도망치듯 뒤를 돌아 클레이브의 앞을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클레이브의 손이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클레이브는 자기 딴에는 간절하게 부탁하는 태도로, 그러나 남이 보기에는 가슴이 덜컥 내려 앉을 만큼 심각하고 겁나는 태도로 말했다. "아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다." (계속) 소년은 그의 파을 뿌리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파란 눈에 긴장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은 오히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만을 더욱 뚜렷이 해 줄 뿐이었다. "뭘 알고 있지?" 클레이브는 미소를 지으며 소년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순간, 그 소년은 익숙한 솜씨로, 클레이브의 허리에 꽂혀 있던 검을 빼어들어 힘차게 휘둘렀다. 다행히 칼에 익숙한 솜씨는 아니어서 피할 수 있었으나, 너무 가까운데다 예기치 못한 공격이었으므로, 클레이브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짓이야!" 클레이브는 소년에게 엄한 얼굴로 꾸짖었으나, 소년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다시 칼을 휘두를 뿐이었다. 소년의 공격은 그가 생각 했던것보다는 훨 씬 더 정확했다. 그의 목을 정확히 겨냥하여 휘두른 칼날은, 비록 그에게 상처를 내지는 못했으나 붉은 금발을 한움큼 잘라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음 공격이, 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거... 보통 어린애는 아닌데. 하지만... 그럼 이 꼬마를 상대로 싸워야 하나...?' 클레이브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소년의 공격을 피하기만 할 뿐이었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걱을 수 있는 상대이긴 했으나, 어린 소년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기사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한산하던 식당에는 어느새 손님들이 우글대고 있었다. 여관에 묵던 손님은 물론, 마을 사람들까지 모두 와서 이 이상한 싸움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구경꾼을 뚫고, 한 난쟁이가 클레이브와 그 소년 사이로 뚜;어 들었다. "뭐야, 로이! 이 꺽다리 인간은 누구지?" 난쟁이는 소리를 지르며 소년의 앞을 막아서서는, 클레이브를 위협 하려는 듯 커다란 도끼를 마구 흔들었다. 로이라고 불린 소년은 제풀에 지쳐서 숨을 몰아 쉬며 대답했다. "이상한 사람이에요. 데이슨은 뒤쫓고 있어요!" 클레이브는 분명 소년이 '데이슨'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좀더 자세히 묻기 위해 다가서려고 하자, 난쟁이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더욱 살기등등하게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의 크기도 컸지만 그것을 바람개비 돌리듯 돌리는 난쟁이의 힘을 보니, 정통으로 맞는다면 거인이라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다. "당신 누구요?" 난쟁이는 경계심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물었다. 클레이브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그러는 당신은 누구시오, 난쟁이? 누군데 당신들은 데이슨을 알고 있소?" "나는 글렌델 가의 장남 툴위그 젠 글렌델이오. 충고하는데 엉뚱한 걸 묻고 돌아다니지 마시오. 잘못하면 내 도끼에 맞아 수명이 짧아 질 수 있으니!" 난쟁이는 정말 클레이브를 당장이라도 내리칠 듯한 기세로 말했다. 클레이브는 가만히 소년이 들고 있는 자신의 검을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검을 빼앗기다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실수였다. 덕분에 결코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그러나 그들이 데이슨을 알고 있다면,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당당히 말했다. "나는 데이슨 라이드를 찾고 있소. 보아하니 당신들은 그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정보를 준다면 후하게 사례하겠소." "포기하라고 한다면?" "나는 꼭 알아내야 합니다. 힘으로라도." 클레이브는 툴위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 대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 큰 도끼가 클레이브의 발 아래를 내리쳤다. 반사적으로 튀어올라 피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꼼짝없이 절름발이가 되어야 했을 것이었다. 툴위그는 클레이브에게 소리치며 공격을 퍼부었다. "어디 그럼 힘으로 알아내 보시지, 인간! 칼도 없는 주제에!" '이거... 일이 복잡하게 되는데...!' 난쟁이의 실력은 웬만한 왕실 기사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칼이 있어도 이길까 말까한데, 지금 클레이브는 맨손이었다. 게다가 난쟁이족답지 않게 그는 스피드도 클레이브 못지 않았다. 오른쪽에서 도끼가 날아왔나 하면 곧바로 머리 위를 가르고 지나가곤 했다. "클레이브 님!" 마침 칼릭이 칼을 들고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클레이브는 정말 위험해졌을 것이다. 칼릭은 계단을 달려내려오며, 자신의 칼을 급히 클레이브 에게 던졌다. 클레이브는 가볍게 오른손으로 그 칼을 받아들고, 칼집에서 칼을 뽑았다. "좋다, 난쟁이. 덤벼 보시지?" 난쟁이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말이 덜어지기가 무섭게 거침없이 도끼를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클레이브는 가볍게 물러서 그의 공격을 피하 면서, 그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난쟁이는 기다렸다는 듯 도끼를 들어 그의 칼날을 막았다. 난쟁이의 도끼와 클레이브의 칼이 불꽃을 내며 부딪혔고, 금속이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가 구경꾼들의 귀를 아프게 했다. 둘은 동시에 상대방의 힘에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난쟁이족은 힘이 좋다고 ㅎ지만... 이 녀석은 그 중에서도 보통이 아니군...!' '제길... 생긴 것 같지 않게 무식하게 힘센 인간이로군!' 그러나 클레이브는 툴위그와의 사움에 정신을 쏟느라 싸움의 발단이 된 소년, 로이가 사라진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칼릭과 세 기사도 둘의 싸움을 지켜 보느라, 한 소년이 그들을 밀치고 급히 계단을 올라가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들의 옆방에서 소년과 함께 나온 것은, 그의 또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였다. 그녀의 손에는 평범해 보이는 나무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 "레일라라는 여자... 거짓말을 하다니!" 그 소녀는 분한 듯이 외쳤다. "맛 좀 봐라! 제에데스 아이레인!" 살기를 느낀 클레이브는 재빨리 몸을 피했다. 그러나 주문의 위력은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천정을 뚫고 녹색으로 빛나는 번개가 내려와, 방금 전까지 클레이브가 서 있던 자리에 박혔다. 그 자리는 물론 주위의 마루까지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클레이브는 예상치 못한 진동에 밀려나가 쓰러졌다. "이... 이런 주문을?" 클레이브는 놀라서 자신을 공격한, 겨우 열 대여섯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계속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툴위그의 도끼날이 그를 향해 날아왔기 때문이다. "야아! 데이미아, 최고야!" 로이는 팔딱팔딱 뛰면서 환호성을 질렀다. 칼릭과 세 명의 기사는 그제서야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계단을 달려 올라왔다. 그러나 로이가 한 발 더 빨랐다. 로이는 아예 그들 가까이에는 가지도 않은 채, 복도에 있던 화분을 던져 한 명의 머리에 맞추었다. 클레이브가 뽑은 정예 기사는 어이 없게도 정통으로 이마 한가운데를 맞은 채 기절해 굴러떨어졌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오르크 중에도 반란군 중에도 화분을 던져 적을 공격하는 괴짜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야호! 넌 툴위그나 도와줘, 데이미아! 여긴 내가 맡을께!" 로이는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이번에는 화분이 칼릭을 향해 날아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간신히 화분을 피했는데, 덕분에 쓰러진 기사의 머리 위에 화분 하나가 더 떨어지고 말았다. 로이는 칼릭을 향해 마지막 남은 세 번째 화분을 던졌으나, 이번에는 칼릭이 양손으로 그것을 받아 버렸다. "위험한 장난은 그만 해라!" 칼릭은 이렇게 외치며 다시 계단을 올랐다. 로이는 두리번거리며 더 던질 것이 없나 찾아보았으나,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그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클레이브의 칼이었다. 명검이 분명 했으나 너무 길고 무거워서, 로이 자신이 쓰기에는 아무래도 적당치 않았다. '좀 아깝지만... 에잇!' 로이는 올라오는 기사들을 향해 칼을 던졌고, 그들은 이번에야말로 공격 다운 공격을 받고 긴장해서 몸을 비켰다. 로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달려가서 한 기사의 가슴에 박치기를 하며 계단 아래로 밀어버렸다. "윽!" 난간이 부서지면서 그 기사는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로이는 칼릭의 손에 목덜미를 잡혔다. "무슨 짓이야!" 칼릭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났으나, 차마 어린 소년을 공격할 수는 없어서 숨만 씩씩 내쉬며 소리쳤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여관 문가에서 낯익은 외침이 울려퍼졌다. "이게 무슨 일이야!" 여관 문턱에 황당해서 눈을 휘둥그렇게 뜬 랜스가 서 있었다. 그에게 비친 여관의 꼴은 말 그대로 가관이었다. 클레이브는 툴위그의 머리를 베기 직전이었고, 데이미아의 공격으로 클레이브와 툴위그는 물론 식당 안에 보인 사람들 모두가 재투성이였으며, 로이는 칼릭의 손에 들려 있었고, 형의 부하가 분명한 두 기사는 계단에서 떨어져 땅 위에 뻗어 있었고, 그 와중에서도 데이미아는 또 번개 공격을 내리려고 지팡이를 쳐들고 있으니... "와아, 랜스! 마침 잘 왔어요! 우리 좀 도와줘요!" 로이가 기쁘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클레이브의 당황한 외침도 들려왔다. "맙소사, 랜스...!" "뭐, 뭐야, 당신 랜스를 알아?" 클레이브의 칼 밑에 쓰러졌던 툴위그가 얼른 일어나 도끼를 집어 들며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러자 랜스가 한숨을 쉬며 대신 대답했다. "맙소사... 툴위그... 내 형, 클레이브에요. 형, 이쪽은 내 친구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클레이브와 툴위그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데이미아도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는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칼릭은 한층 더 당황한 표정으로 로이를 내려놓고는 랜스를 바라보았다. 랜스는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는 듯, 문가에 서서 굳어지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로이였다. 그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내며 말했다. "아하, 뭐야, 친구들끼리 싸우고 있었네... 미안하게 됐어요. 전 의적 로이라고..." "클레이브, 어떻게 이곳에...?" 랜스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클레이브는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랜스는 분명 그의 등장에 반가움과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뭔가 경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클레이브는 동생에게로 다가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얼굴이 안됐구나, 랜스. 여행이 고됐던 모양이지? 여기서 널 보다니 의외다. 나는 사실 길리어드로 가는 길이었는데..." "길리어드? 왜요?" 로이가 갑자기 날카롭게 소리쳤다. 클레이브는 놀라서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물론 사형을 선고받았다는 데이슨을 구하기 위해서였지. 그래서 너희들에게 그의 소문을 들었냐고 물은거야. 그런데 너희들은 그와 무슨 관계지? 그의 이름을 듣고 싸움까지 걸 정도라니..." "...우리가 벌써 그를 구하고 오는 길이야, 형." 랜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로이는 형이 그를 해치려는 사람인 줄 알았나보지..." "그래요! 어쨌든 오해가 풀려 다행이군요..." 로이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릭이 랜스에게 달려와 소리쳐 물었다. 오랫만에 그의 얼굴에 희색이 돌고 있었다. "아버님을 구하셨다고요? 무사하십니까? 지금 어디 계십니까?" "...무사하다고는... 좀 다치셨지." 랜스가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약초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얼른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미아가 금방 나으실 거랬어." "맙소사... 아버지의 은인들을 해칠 뻔 했군요." 칼릭은 짐심으로 미안한 듯 랜스와 로이, 데이미아, 툴위그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클레이브는 아직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듯, 의구심 가득한 표정 으로 동생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칼릭은 데이슨이 살아 있고 곧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진 것 같았으나, 클레이브 에게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다만 지금은 묻는 것이 도리가 아닐 것 같아 참고 있을 뿐이었다. "...아들이시군요?" 데이미아가 칼릭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세요. 아버님은 많이 좋아지셨으니까요. 아직은 수면초 때문에 주무시고 계시지만, 깨어나셔서 아들을 보게 되시면 매우 좋아하실 겁니다." 그녀는 칼릭이 뭐라 하기도 전에, 그를 끌다시피 데리고 로이와 그 일행이 묵는, 클레이브의 바로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물론 칼릭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는 것이 도리이기도 했고, 또 아들을 보게 되면 환자의 상태가 더 좋아지리라는 예상에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 랜스의 형, 클레이브 때문이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가 작은 일조차 놓치지 않을 날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 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놓아야 했다. 데이슨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데이미아의 치유마법과 툴위그의 약초에 대한 지식 덕분에 상태가 괘 좋아져 있었다. 얼굴은 아직 창백하긴 했으나 그저 보통 아픈 사람 정도였고, 처음 상태에 비하면 날아다녀도 좋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면초 덕택에 깊은 잠이 들어, 얼굴에 고통의 흔적은 없었다. 칼릭이 그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려고 하자, 갑자기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으르렁거리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칼릭은 뒤로 물러섰고, 문 뒤에서 보고 있던 클레이브는 얼른 칼을 뽑았다. 그러나 데이미아가 뭐라고 속삭이자, 그 늑대는 의외로 잠잠해져 뒤로 물러섰다. 칼릭과 클레이브는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였다. 데이미아는 늑대의 등을 쓰다듬으며, 칼릭에게 말했다. "우리 친구에요. 당신 아버지를 지키려고 한 것 뿐입니다. 자, 어서 가 보세요." 칼릭은 미소를 지으며 늑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앞을 지나쳐, 누워 있는 데이슨에게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칼릭은 잡든 데이슨의 손을 잡으며 그 곁에 꿇어앉았다. 클레이브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며 칼릭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쨌든 일이 제대로 풀린 셈이었다... 랜스가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수만 있다면. (계속) "자아,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주겠냐, 랜스?" 클레이브의 물음에, 아무 생각 없이 칼릭과 데이슨을 바라보고 있던 랜스는 적잖이 당황했다. 설마 클레이브를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니 조리에 맞는 거짓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만약 사실대로 말했다가는 켈리는... "랜스가 길리어드로 가서 데이슨 경을 변호해 줬어요!" 하고 로이가 얼른 둘러댔다. "데이슨 경은 랜스를 죽였다는 누명을 썼었잖아요. 그런데 랜스가 버젓이 나타났으니 풀어줘야죠, 뭐. 별 수 있나요?" 로이는 능청스럽게도 순진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 브는 그의 거짓말에 쉽게 넘어가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어이없는 누명은 어떻게 쓰게 된거야?" "그... 그러니까... 여관에서 자기가 랜스 아덴 경이라고 거짓말하고 다니던 건달이 하나 있었는데요, 그 사람이 죽었었다나봐요." "하지만 데이슨의 누명이 벗겨졌다면 올두스가 분명 내게 알려왔을 텐데..." "그... 그야... 잊어먹었나보죠. 나이가 들면 사람들은 안 까먹는 게 없잖아요?" 로이는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했다. 클레이브는 어이가 없어서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농담이겠지, 물론?" 로이는 할 말이 없어져서 클레이브를 바라보며 빙긋이 웃기만 하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을 애써 꾸며내고는 있었지만,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보다못한 랜스가 대신 대답했다. "분명 보냈는데 형이 못 받았을 거야. 아마 에스텔에 가면 지금쯤 데이슨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사과문이 형을 기다리고 있을걸." "그럼 데이슨은 왜 저렇게 다쳤지?" "오르크 때문에." "산적을 만났어요." "늑대떼 때문에." 랜스와 로이와 툴위그가 거의 동시에 대답하자, 클레이브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랜스와 툴위그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으나, 로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산에서 먼저 오르크를 만나고, 오르크를 따돌리니까 산적이 나타나고, 산적들을 다 해치우니까 늑대떼가 나오지 뭐에요. 그러니 정말 끔찍했죠. 하하하..." 말 같지도 않은 로이의 대답에 클레이브는 반박할 기운조차 잃어 버렸다. 그는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았으나, 랜스 마저도 로이의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열심히 끄덕일 뿐이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들인 거야...?' "좋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지. 사일러스가 돌아왔다는 소문은 사실인가?" "물론 놈은 가짜요." "사실이야." 이번에도 툴위그와 랜스가 동시에 대답했다. 클레이브는 이제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해서 치밀어 오르는 화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아, 저기... 그러니까, 아시잖아요... 툴위그는 가짜라고 주장하고 랜스는 진짜라고 주장하는데 아직도 의견의 일치를 못 봤다니까요. 하여간 고집들이 보통 세야죠... 하하..." 로이가 다시 재잘거렸으나, 이미 그도 클레이브를 속이기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장 치밀하게 짠 거짓말도 먹혀들까 말까 한 사람에게,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을 둘러대고 있었으니...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클레이브가 길리어드로 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도대체 이게..." "자, 자, 아픈 사람 있는데 떠들지 말고 우선 옆방으로 가자고요." 클레이브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뭐라고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데이미아가 그를 거의 밀어내다시피 하며 방 문을 닫았다. 클레이브가 머뭇거리며 방에서 물러나는 틈을 타, 로이가 랜스를 툭 치며 눈짓을 했다. 랜스는 그의 뜻을 알아듣고, 갑자기 격한 어조로 클레이브에게 따지기 시작 했다. "제발 내 친구들 앞에서 추태 부리지 말아, 클레이브 형! 날 구해 준 적도 있는 소중한 친구들인데, 게다가 데이슨의 은인들인데 형은 마치 거짓말하는 죄인 취급 하고 있군. 이게 왕의 근위대장의 예의라는 거야?" "랜스, 하지만..." "게다가 일 년이 넘게 못 본 동생마저도 완전히 사기꾼 취급하는군! 권력을 얻는 것은 의심을 얻는 것이라더니, 옛말이 하나도 틀린 게 없군. 전엔 이렇지 않았잖아. 이젠 나도 적으로 보이는 거야?" 클레이브는 말문이 막힌 채 랜스의 항의를 듯고만 있었다. 사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랜스의 동료들을, 그것도 랜스까지 한 데 싸잡아 심문받는 죄수 취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데이슨의 은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예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배은망덕한 일이기도 했다. "...미안하다, 랜스. 그리고 랜스의 동료분들도, 무례를 용서하시오. 데이슨이 저렇게 된 모습을 보니..." "아, 아, 이해 합니다. 이해하고 말고요." 툴위그는 금방 얼굴이 환해져서는 클레이브의 손을 쥐고 마구 흔들었다. 로이가 보기에는 저러다 팔이 떨어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저는 툴위그라고 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소문은 익히 들었습 니다, 랜스 아덴 경, 오르크들의 살육자! 하하, 이렇게 만나ㅂ게 되다니 정말 영광이군요. 이 아이는 로이고, 이 아가씨는 데이미아입니다. 데이슨을 치료한 치유술사죠." 로이, 데이미아, 랜스는 하나같이 어색한 웃음을 가득 담은 채 클레 이브를 바라보았다. 분위기는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비록 사과를 하긴 했으나, 클레이브의 마음 속에서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져 가기만 했다. "정말 갑사합니다, 여러분. 내친 김에 데이슨을 에스텔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드려도 괜찮겠지요? 저는 길리어드로 가야 해서..." "길리어드로 간다고요?" 로이, 데이미아, 툴위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예 합창으로 물었다. 그 소리에 클레이브가 더 놀랄 지경이었다. "예... 무슨 문제라도...?" "문제는 없지만... 데이슨을 구했으니 길리어드로 가야 할 이유가 없잖아, 클레이브?" 랜스가 허둥거리며 말했다. 클레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렇지만도 않아. 아클레어 폐하는 올두스 대공이 퇴위하고 그의 아들 스트라본이 그 자리를 물려받기를 원하셔. 그리고 사일러스의 소문도 확인해야 하고..." "그... 그건 나중에 해도 되잖아요! 데이슨을 한시라도 빨리, 안전히 운반하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닌가요? 어서 에스텔로 돌아가 훌륭한 의사들에게 보이지 않으면..." 데이미아가 끼어들며 말했다. "하지만 이제 걱정할 것 없다고..." "그거야... 아들이 눈앞에 있으니 한 소리죠! 그 말을 진짜로 믿으면 어떡해요!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다고요. 그리고... 요즘 숲에 이상한 괴물들 이랑 산적들이 자주 나오는데, 만약 공격이라도 받으면 저 사람은 끝이에요! 그... 그렇지 로이?" 데이미아의 말에 로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그렇고 말고요. 요즘 숲에서는 곰도 나오고 오르크도 나오고 하피도 나오고 상어도 나오고..." "...숲에서 상어가 나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시지리스 속담이에요. 재밌죠? 하하하..." 로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어제꼈다. 클레이브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랜스 녀석은 어떻게 이렇게 반쯤 미친 것 같은 친구들만...' 그러나 랜스조차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클레이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데이미아 의견이라면 들어야 할 것 같아. 지금까지 데이슨을 돌봐 온 사람이 데이미아라고. 그러니까..." "알았어, 랜스. 알았다고." 클레이브는 두 손을 들며 말했다. "일단은 데이미아의 뜻에 따르겠어. 그 후에 다시 이리로 오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밤은 여기서 보내고, 내일 아침 일찍 모두 에스텔로 떠나자. 이제 됐지?" --------------------------------------------------------------------- 깊은 밤, 길리어드 변두리의 빈민가 - 검은 망토를 턱까지 뒤집어 쓰고, 얼굴을 가린 채 급히 말을 달리는 사람이 있었다. 말은 이미 상당히 바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고, 그 위에 탄 사람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해 쓰러질 듯 아슬아슬한 자세로 몸을 붙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말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말이 휘청거릴 때마다, 그의 망토 아래로 은빛 갑옷과 긴 검이 드러났다. "워, 워!" 갑자기 그의 앞에 사람이 나타나자, 그는 급히 말을 세웠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말은 몸을 거의 직각으로 세우며 멈추었고, 그는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그의 앞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남루한 옷차림에 커다란 헝겁 보따리를 메고, 너무 놀라서인지 꼼짝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미친놈! 죽고 싶어 환장했냐?" 말을 달리던 기사는 간신히 몸을 가누며 화가 나서 소리쳤다.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는 더듬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나으리..." "죄송한 줄 알면 어서 비켜! 내가 바쁘지만 않았어도 오늘이 네 초상날이다!" "예, 예..." 사내는 굽실거리며 허둥지둥 말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나 기사가 말에 박차를 가하려는 순간, 갑자기 그는 들고 있던 보따리를 말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히히힝!" 말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기사는 피할 새도 없이, 말과 함께 쓰러져 말에 한쪽 다리가 깔린 채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말은 이미 죽어 있었다. 두개골이 깨어진 말의 머리맡 에는, 피가 잔뜩 묻은 허름한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그 찢어진 틈으로, 커다란 돌맹이들이 보였다. "네... 이놈!" 기사는 화가 나서 소리쳤다. 그러나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찢어진 망토와 쭈그러진 모자를 벗어던졌다. 그러자 허름한 거지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의 앞에는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긴 칼을 찬 사내가 서 있었다. 굽히고 있던 허리를 핀 그는 상당히 키가 컸으며, 눈은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야행성 동물처럼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 너는... 암살자 이즐레이...!" 기사는 새카랗게 질린 채, 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속삭였다. 이즐레 이는 대답 대신 긴 검을 쓱 뽑았다. "안됐군, 제이크, 파엘 경의 첩자... 파엘 경은 자네가 이중 첩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아냐... 난 언제까지나 그분께 충성을 맹세한 몸이야! 스트라본에게 정보를 준 건 신임을 얻기 위해서였을 뿐이야! 연기였다고!" "상관 없어." 이즐레이는 차가운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으쓱했다. "난 이미 계약금을 받았고, 내 일을 하면 그만이야." 그는 칼을 들어올렸다. 제이크는 말에 한쪽 다리가 깔린 채, 피하지도 못하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애원했다. "제... 제발, 해명할 수 있다고! 파엘 경을 만나게 해 줘!" "그건 페레이타(저승을 지키는 신)에게 가서 애원하지 그래?" "기다려! 난 네 친구에 관한 일도 알고 있다, 이즐레이!" "뭐?" 이즐레이는 멈칫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검을 내렸으나, 곧 침착 함을 되찾고 비웃었다. "엉뚱한 소리 마, 나한테 친구란 없다. 특히 발목 잡힐 친구는." "그렇지 않을 걸. 네가 스트라본에게 쫓길 때 데리고 다니던 금발의 여자 말이다! 잊지는 않았겠지? 그녀가 지금 하젠 경의 성에 있다! 날 살려 준다면..." 그러나 제이크는 더이상 말을 잊지 못했다. 그가 입을 다물 새도 없이, 이즐레이의 검은 그의 목을 잘랐다. 그의 머리는 마치 말을 계속하려는 듯한 얼굴로, 이즐레이의 발 밑에 굴렀다. 그리고 이어서,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런 건 상관 없어, 난..." 하고 이즐레이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계속) 클레이브는 착찹한 심정으로 테라스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두운 숲과 기름지지 못한 밭의 황량한 풍격 뿐이었고, 그나마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았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으나, 자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니,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방금 전 데이슨이 남긴 말 한 마디가 그의 귓전을 맴돌고 있었다. "...스트라본은...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클레이브를 애타게 찾다가 간신히 그 말을 남긴 데이슨은, 그 한 마디가 끝나는 즉시 다시 긴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랜스는 분명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올두스가 데이슨을 석방하고 사과했다고 말했다. 물론 그의 태도가 매우 이상하긴 했지만, 이런 엄청난 일을 랜스가 말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아니면 단지 클레이브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었던가... '확실히 그들은 내가 길리어드로 가는 것을 결사적으로 말리려고 했어. 하지만... 왜? 랜스가 스트라본과 한패라는 게 가능할까...?' 그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누구라도 의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항상 가장 예기치 못한 곳에서 날아오는 일격에 공든 탑이 쓰러 지는 법이니까... 랜스는 누구보다도 사일러스와 친했다. 형인 자신을 제외 한다면. 그의 영향 때문에 왕을 등진다는 것이 가능할까...? 클레이브는 인상을 찌푸렸다. 사일러스. 그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창 밖으로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것이다. 이제 결정해야 했다. 반역자들을 자유로이 내버려 둔 채 랜스와의 약속대로 에스 텔로 떠날 것인지, 아니면... "...랜스?" 그는 어두운 땅 위를 배회하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서 소리내어 불러 보았다. 등불조차 켜지지 않은 여관의 뒷마당을 서성거리던 랜스는, 클레이브에게 발각되었다는 것을 알자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 안 잤어, 클레이브?" "그러는 너는, 오밤중에 뭘 하는거냐?" "그냥... 자다 깼는데 잠이 잘 안 오더군." 랜스는 무언가 숨기려는 듯, 뒤로 물러섰다. 그는 난처한 표정을 숨기려는 듯, 일부러 클레이브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클레이브의 의심은 점점 꼬리를 물고 커져 갔다. 아무리 자신을 탓해도 소용 없었다. 이미 랜스의 행동은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있었고, 데이슨의 말은... "거기에 있어... 나도 곧 내려간다." 그는 명령조로 ㅈ게 말하고는 테라스에서 사라졌다. 랜스는 낭패한 표정으로 멍하니 빈 테라스를 지켜보고 있었다. 클레이브의 모습이 여관 뒷문에 나타나기까지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랜스, 네 행동이 이상하다는 건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겠지." 클레이브의 말에 랜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클레이브는 상관 않고 계속 다그쳤다. "설마 나더러 그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를 믿으라는 건 아니겠지?" "...믿어 줘." 랜스가 간신히 한 마디 했다. 그러나 클레이브의 마음은 정해진 후였다. "나한테 숨기는 게 뭐지, 랜스? 우린 허물없는 형제였잖아. 그런데 무슨 비밀이 생긴 거지?" "..." "네 입으로 말해 줄 수 없겠어?" "에스텔에 도착하면... 그 때 말해줄께. 지금은 우선 믿어 줘... 믿는 척이라도 해 줘. 때가 되면 다 털어놓을테니까..." 랜스는 거의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브는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얼굴을 굳히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랜스, 나한테 믿을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항상 내 곁에 있는 칼릭 조차 피를 나눈 너만큼은 신용하지 못해. 그런데 나를 실망시킬 작정이냐?" "..." "랜스.. 제발 말해 다오. 데이슨의 말이... 사실이냐?" 순간 랜스는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무엇보다도 강한 긍정. 클레이브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이구나..." "아... 아냐! 데이슨은 그냥 아파서 헛소리를 한 것 뿐이라고. 스트라 본과 사일러스는..." "데이슨은 사일러스 이야기는 하지도 않던데?"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연극은 끝이었다. 어차피 오래 끌 수도 없었을 테지만. 그는 절망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내뱉듯이 말했다. "말 할 수 없었어... 형이 길리어드로 간다면 내 친구가 죽게 돼." "뭐가 더 중요한지 정도는 알 나이가 되었을 텐데!" 클레이브는 날카롭게 꾸짖었다. 그러나 랜스는 수긍하지 않았다. 그는 칼을 빼어들고 클레이브를 향해 날카롭게 속삭였다. "미안해, 클레이브. 하지만 켈리가 죽거나 말거나 형이 길리어드로 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녀는 나 때문에 볼모가 된 것이나 다름 없으 니까! 형이 기어코 가겠다면 힘으로라도 막겠어!" "어리석은 짓 그만 해라, 랜스. 에스테이아의 장래가 걸린 문제야. 인류의 평화가 끝날지 계속될지가 걸린 문제라고. 아트웰이 반란을 일으키면 위리드, 로운, 그리고 다른 모든 속국들과 옛 나라들이 그 뒤를 따를 거다. 그것을 모르겠어? 그래도 상관 없다는 거냐?" "...상관 없다는 뜻이 아냐. 하지만...!" "나라고 이러고 싶었겠어? 나라고 에스테이아의 분열을 막기 위해, 아트웰의 독립을 막기 위해 사일러스를 희생시키고 싶었겠냐?" "...!" 랜스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칼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사일러스를... 형이... 그럼 그 소문이..." 8 "그래, 내가 사일러스를 사지로 보냈다. 뻔히 패할 것을 알면서 오르크를 퇴치하라고 라우더로 보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사일러스가 분열을 획책한다는, 반란을 괴한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그를 참수 시켜야 했을 테니까! 내가 그를 위해 해 줄 수 있었던 최선의 방법이었다. 적어도... 적어도 명예를 안은 채 죽을 수 있었으니!" "맙소사. 형은 그를 살해하려 했어. 그런데 그를 위해서였다고?"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모르겠나? 세상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이 있어. 내가 감정에 따랐다면, 지금쯤 우리 에스테이아는..." "덜 중요한 일이라고. 그러니까 사일러스의 목숨 따위는 덜 중요한 일이라는 거로군!" "...그 한 명을 살려두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몇 천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랜스, 네가 지금 꾸미는 일도 마찬가지 일이야. 너는 친구 한 명을 살리겠다고 하지. 그 결과로 내전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 그래서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지! 그리고 몇백 명이 죽는다 해도 너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겠지. 너는 친구를 구해야 했었으니까. 죽는 사람들은 네 친구도 아니고 너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니까!" "..." 랜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칼을 놓치지 않고 있었으나, 이미 끝이 땅을 향한 칼을 쥐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랜스, 아트웰을 막아야 한다. 스트라본과 사일러스를 막아야 해! 네 친구는 내가 반드시 구해 주겠다." 클레이브는 가만히 랜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칼을 쥔 채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서 있었다. "형의 개입을 알게 되는 즉시 켈리는 죽은 목숨이야. 하지만 열흘만 기다려 준다면..." "열흘이라면 아트웰인들에겐 충분한 기간이다. 모든 준비를 끝내고 오히려 우리를 공격해 올거다. 너도 그들이 일단 마음을 먹으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을텐데. 내가 장담하는데, 그들은 네 친구를 죽이지 않아. 위협하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정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너희들은 에스텔로 가라. 나도 따라가지. 연극을 하는 거다. 그들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도록. 그리고 아트웰의 반란군을 처리하는 일은, 시이드 영주 파엘 경에게 맡기자. 마침 시이드는 아트웰에서 오래 걸려야 이틀밖에 안 되는 거리이고, 군사력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시이드 영주 파엘이라면 그들의 눈에 띄이지 않고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클레이브는 랜스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차피 그가 아무리 클레이브를 막으려 한다 해도, 클레이브는 끝까지 밀고 나갈 것이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가 원했던 일이 아니었던가... "...반드시, 비밀리에 그들을 처단한다고 약속해 줘. 켈리에게 화가 미치지 않게..." 그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클레이브는 랜스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나를 믿어라. 사실대로 말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러나 그들의 포옹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갑자기 귀에 익은 목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찢으며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랜스! 어떻게 그럴 수가!" 랜스는 놀라서 형의 팔을 떨쳐 내고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로이였다. 그러나 그가 평소에 보아 오던 로이의 얼굴이 아니었다. 로이가 그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처음 알았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칼을 휘두를 듯한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얼굴은 흥분으로 말그레 해져서 숨을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눈에는 눈물까지 글썽였다. "로이...!" 랜스는 해명하기 위해 로이에게로 다가갔다. 그러나 로이는 그를 힘껏 밀쳐내며, 주먹을 휘둘렀다. "너무해! 그런 사람인 줄 몰랐는데. 켈리는 죽건 말건 상관 없다는 소린가요?" "네 친구는 죽지 않아, 꼬마." 하고 클레이브가 침착하게 말했다. "수준 낮은 위협거리일 뿐이다. 날 믿어라. 네 친구를 구해다 주지." "닥쳐, 당신은 악당이야! 심장도 없을 게 뻔해! 다 들었어. 친구인 사일러스를 죽이려고 했다고? 그리고 이젠 친동생을 속여서 친구를 배신 하게 해?" 클레이브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왕의 근위대장이자 가장 촉애 받는 신하인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한 자는 이제까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화를 내기 전에 머뭇거렸다. 저 어린 소년의 말에는 분명 진실이 담겨 있었다. 그에게는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지. 인간들이 영원토록 평화를 유지 하며, 한 나라를 이루어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다..." "사람 죽이는 평화 따위 난 필요 없어! 당신같은 작자가 근위대장 이니 모든 게 이 모양이지! 두고 봐! 당신들이 여기 와 있다고 스트라본에게 다 이르고, 당신들을 죽이고 켈리는 살려달라고 할거야! 내가 어디 못 그럴 줄 알고?" 로이는 이렇게 외치고는 마굿간을 향해 달려나갔다. 랜스가 허둥지둥 그의 뒤를 쫓았다. "로이, 기다려...!" 그러나 이미 늦은 후였다. 마굿간 문이 젖혀지며, 로이는 클레이브가 데려온 기사들 중 하나의 말을 타고는 쏜살같이 숲속으로 달려갔다. 아침 안까 낀 숲 속으로, 로이와 말의 자취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무슨 일이야?" 로이의 고함에 잠이 깨었는지, 툴위그가 데이미아와 펠히스를 데리고 달려나왔다. 칼릭을 제외한 세 명의 병사도 함께였다. 랜스가 툴위그를 향해 소리쳤다. "로이가 켈리를 구하겠다고 길리어드로 갔어요!" "뭐라고? 이런! 기어이 일을 내는군!" 툴위그는 화들짝 놀라서 아무 말이나 골라잡아 올라타며 소리쳤다. "어서 찾아야 해! 길리어드로 가면 그 앨 잡으려는 놈들이 쫙 갈렸을 텐제... 멀리 못 갔을테니 어서 찾아보자고!" 데이미아와 세 기사, 그리고 랜스와 클레이브도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있는 힘껏 박차를 가하며, 로이가 사라진 숲의 안개 속으로 뛰어 들었다. (계속) "로이! 어서 나오지 못해! 무슨 짓이야, 이게!" 툴위그는 화를 내며 안개투성이 숲을 향해 소리쳤다. 그의 뒤를 따라 데이미아의 목소리도 울려퍼졌다. "로이! 엉뚱한 짓 하지 말고 어서 나와! 제발!" 그러나 아무리 소리를 쳐도 소용 없었다. 로이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공허한 메아리만이 숲을 울리며 들짐승들을 놀래켰다. 아침 안개는 서서히 걷히고, 태양이 빛을 드러냈다. 그들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아침 식사조차 못한 채 로이의 이름을 불러댔지만, 모두 허사였다. 드디어 모두들 진이 빠진 채 터덜터덜 여관으로 돌아왔다. 맨 먼저 세 기사들, 그 다음 클레이브가 여관으로 돌아와 점심 식사를 주문했고, 그들이 식사를 끝낼 때 즈음 랜스가 넋이 나간 얼굴로 돌아와서는 식사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마지막까지 남아 숲 속을 헤메며 로이를 찾았으나, 그들도 오후가 되어 배가 고파지자 포기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여관에서는 더욱 기가 막힌 사실이 그들을 기다 리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늑대 펠히스도 로이를 찾는 북새통 중에 감쪽 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너무해, 로이는! 갈 거면 모두 같이 가야지, 어떻게 펠히스만 데리고 갈 수가 있어...!" 때늦은 점심을 먹으며 데이미아는 분통을 터뜨렸다. 랜스는 답답한 표정으로 그녀를 흘끗 바라보았다.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로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나, 그는 그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옳은 판단을 내렸다고 자부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거짓말에는 워낙 익숙하지 못한 랜스였다. '아아... 본의 아니게 형을 속이고, 이제는 동료들까지 속이게 되는군.' 랜스는 마음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이제 켈리나 로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전적으로 그의 탓이었다. 그리고 만약 천만다행으로 그들이 무사히 돌아온다고 해도, 그들의 얼굴을 이제 똑바로 볼 수 있을지... 그러나 클레이브는 얄미우리만치 침착했다. "어쩔 수 없군요. 이미 해질 녁이 다 되어 가는데, 로이 군이 정말 길리어드로 갈 생각이었다면 충분히 도착했을 겁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가 길리어드로 가게 된 겁니까? 누가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그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랜스는 아무리 자기 형이라지만 한 방 쳐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클레이브와 랜스는 어려서부터, 얼굴이 닮은 것과는 달리 성격이 판이했었다. 그것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 였다. 랜스는 언제나 클레이브의 말을 쉽게 따를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나름 대로의 논리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리고 그가 자신보다 이성적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아버지의 복수를 그만큼 쉽게 포기했을 때에도 그랫듯이...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말없이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켈리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데이슨의 부상과 스트라본, 그리고 아트웰의 저항군에 대해 전부 다 털어놓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로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외로, 클레이브는 쉽게 포기한 듯 말했다. "뭐, 싫으시다면 괜찮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 이야기라면 저도 꼬치꼬치 캐물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보다는 앞으로의 일이나 논하도록 하지요." "아, 예, 감사합니다." 툴위그는 살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얼른 대꾸했다. 그러나 데이미아의 녹색 눈은 위기를 느낀 들짐승의 눈처럼 날카롭게 클레이브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해... 어제는 그토록 의심에 차 있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러나 클레이브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툴위그에게 설명해 주기에 여념이 없었다. 데이미아는 그런 그의 친절한 태도에서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요정족 특유의 직감 이랄까, 아니면 마법사로서의 예감이랄까... 하여튼 클레이브의 태도의 변화는 쉽게 넘겨버릴 수 없는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랜스... 그렇다. 아침부터 계속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랜스도.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켈리가 무사하면 좋으련만... 그리고 로이도...' "데이미아,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툴위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서 말했다. "예? 뭐가요?" "내 참, 뭘 듣고 있었어? 클레이브는 우리가 일단 에스텔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하지만 로이는..." "근처에 시이드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 영주와 저는 할아버지 때부터 아는 사이죠." 하고 클레이브는 매력적이지만 데이미아를 더없이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에게 부탁해서 아트웰 지방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로이 군을 찾고, 보호해 줄 만한 믿음직한 기사들을 말입니다. 시이드는 풍요로운 지방이 아니지만, 그곳의 기사들만큼은 어느 곳 못지않게 용맹 하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플리에타의 딸." 데이미아는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클레이브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 사람을 그렇게 쉽게 믿어도 될까? 그러나 툴위그도 옆에서 귓속말로 거드는 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우리가 길리어드로 가기도 곤란하잖아. 게다가 우리보다는 전문가들이 더 잘 찾을 거라고." "...그래도..." "이것 봐, 데이미아, 난 그 둘을 믿어. 켈리도 로이도 행운의 별을 타고난 녀석들이야. 두고 봐, 우리가 훼방만 안 놓으면 멋지게 해낼 거라고." 툴위그는 환하게 미소짓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의아해졌다. 어떻게 사람을 저렇게 믿을 수가 있는 것일까. 잘 싸우지도 못하는 로이를, 실력은 좋지만 덜렁대는 켈리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 의심스러운 랜스의 형을... "당신이 필요합니다, 레이디 데이미아. 데이슨이 저렇게 다쳤는데 우리 중에는 치유술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와 칼릭도 기껏해야 응급 조치법을 아는 정도니까요." 데이미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로이를 찾겠다고 약속해 주셔야 해요!" "물론입니다, 레이디 데이미아." 클레이브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금 당장 시이드 영주 파엘에게 매를 띄우고, 에스텔로 출발하도록 하지요." --------------------------------------------------------------------- 해가 지고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할 때쯤, 로이는 길리어드의 변두리 빈민가를 가로질러 말을 달리고 있었다. 어디에 가야 켈리를 만날 수 있는지 따위는 생각해 본 일도 없었다. 그냥 막연히 도심으로, 레일라와 스트라본이 있는 길리어드 성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어. 빨리 레일라를 만나야 해. 왕의 군대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그러면 적어도 켈리의 목숨은 구해 주겠지.' 자신의 행동이 왕에게 반역하고 역적을 돕는 일이란 사실 따위는 로이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솔직히 그에게 왕은 어찌되어도 좋았다. 어차피 충성심 따위는 왕에게 특혜를 받는 높으신 귀족들의 문제였다. 지금 로이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켈리가 죽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 그의 말은 빠른 속도로 좁고 더러운 골목길을 가로질렀다. 몇몇 허름한 차림의 험상궂은 사내들이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로이가 탄 말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바쁜 로이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한 사내가 골목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그의 앞을 막아섰을 때조차, 로이는 하마트면 그의 머리 위로 말발굽을 밟고 지나갈 뻔 했다. "으아아아! 워, 워!" 로이는 질겁을 해서 말을 세웠다. 그 덕분에 거의 말에서 떨어질 뻔 했지만, 그 앞에 선 사람에게는 상처 하나 내지 않을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로이는 허겁지겁 말에서 내려오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 사내는 심술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흥... 좋은 말이군?" "예? 아... 감사합니다! 그럼 전 이만..." 로이는 그가 화가 나지 않았다고 판단했는지, 서둘러 다시 말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사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를 잡아 세웠다. "하, 그건 안 되겠는데." "예?" 로이는 이해하지 못하고,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만을 느끼고는 자신의 유일한 무기인 그 귀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사내는 단검을 빼어 든 채, 서서히 로이에게 다가왔다. 로이의 뒤에서도 다른 두 명의 험상궂은 사내가 나무 몽둥이를 들고 다가오고 있었다.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사과의 표시로 가진 거 다 내놔. 그 말도 함께!" "그, 그런 법이 어딨어요. 아저씨가 먼저 뛰어나오시고선!" 로이의 황당한 대꾸에 그 사내는 잠시 할말을 잃었다. 그러나 곧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이 바보야. 보면 모르냐? 우리는 강도라고. 노상강도!" "에이 참, 아저씨들도. 나 강도다, 그러는 강도들이 어딨어요?" "...너 나하고 장난하자는 거냐? 이 칼 맛좀 볼래?" "아, 아뇨..." 로이는 뒤로 물러서며 주위를 힐끔거렸다. 아무래도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들이 아니었다. 도망칠 구멍도 없었다. '으으... 정말 재수가 이상하군...' 로이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서, 칼을 빼어들었다. 그것도 최대한 멋진 폼을 잡으면서. 의외의 반응에 놀랐는지 강도들이 주춤거리자, 로이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오너라, 이 악당들아! 내가 상대해 주겠다!" "..." 강도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로이는 얼른 말 위로 뛰어올라, 켈리가 가르쳐 준 기술을 다 동원해서 멋지게 칼을 휘두르며 앞에 선 강도를 공격했다. 로이의 검이 희게 빛나는 곡선을 그으며 강도의 머리 위를 내리찍었다. 그는 얼른 단검을 들어 그 칼을 막았으나, 단검으로는 로이의 검을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는 단검을 떨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졌고, 로이는 기회를 놓칠새라 말에 박차를 가했다. "이럇! 달려라!" 그러나 말이 막 출발하려고 발돋움을 하는 순간, 강도 중 한 명이 그 목에 올가미를 걸었다. 덕분에 말은 펄쩍 뛰며 멈추었고, 로이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아야야..." 로이는 칼도 놓친 채, 바닥에 누워 울상을 지었다. 단검을 놓쳤던 강도는 얼른 로이의 칼을 집어들고, 그 칼끝으로 로이의 목을 겨누었다. "이 버릇없는 꼬마가...!" "아, 저, 저... 아저씨, 잠깐만! 저도 전직이 도적이었다고요. 그러니 피차 같은 도둑놈들끼리 좀 봐주고 지내면..." "시끄러워! 감히 내게 덤비다니. 오늘이 네 초상날이다!" 강도는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어두운 골목에서 낮고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걸." 그들은 깜짝 놀라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았다. 새까만 망토와 옷으로 차려입고,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키가 큰 사내가 천천히 그들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온통 새까맸기 때문에, 마치 어둠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두건 위로 드러난 붉은 두 눈이 음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너... 넌 누구냐!" 로이의 목에 칼을 겨눈 강도가, 간신히 두려움을 감추고 소리쳤다. 검은 옷의 사내는 비웃음으로 답했다. "그 칼을 돌려주고, 숨이 붙어 있을 때 사라져라." "치잇, 이게 누구한테...!" 그 강도는 로이의 칼을 검은 옷의 사내에게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칼을 제대로 들기도 전에, 어느새 검은 옷의 사내가 칼을 빼어들어 그의 배를 푹 찔렀다. 날카롭고 긴 칼날이 그의 배를 뚫고 지나가 등에서 튀어 나왔다. 그 광경에 동료 강도들은 물론, 로이도 질겁을 했다. "이즐레이... 붉은 눈의 암살자!" 한 강도가 서서히 뒷걸음질치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옷의 사내는 음산한 웃음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주시니 영광이군. 하지만 너희들 인생은 오늘로써 끝이다!" 이즐레이가 말을 마침고 동시에, 그의 칼날이 강도의 가슴을 파고 들었다.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옆구리까지가 깊게 패어지며, 피가 분수처럼 솟아나왔다. 그 강도는 즉사한 채 로이의 곁에 쓰러졌다. "으... 으아... 사, 사람살려!" 마지막 남은 강도는 필사적으로 소리지르며 도망치려 했으나, 몇 발짝 떼기도 전에 이즐레이가 던진 단검에 목덜미를 맞고 쓰러졌다. "이... 이즐레이?" 로이가 새파랗게 질린 채 물었다. 이즐레이는 얼굴을 가렸던 두건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안 다쳤나? 혼자서 이런 곳엔 무슨 일이지?" (계속) "아... 저...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로이는 대답 대신 이렇게 물었다. 이즐레이는 강도의 목에서 단검을 빼어내 그 옷에 비벼 닦고는, 자신의 망토 안쪽에 꽂아넣었다. "개가 가르쳐 주었지." "개요?" 로이가 묻자마자, 어둠 속에서 커다란 회색 짐승이 달려나와 로이의 품에 안겼다. 로이는 기뻐서 탄성을 질렀다. "펠히스!" 펠히스는 정신없이 로이의 얼굴을 핥기 시작했다. 로이도 깔깔거리며 그의 목덜미의 털을 쓸어 주었다. "정말 고맙다... 너 덕분에 살았어! 그리고 이즐레이도... 고마워요!" 이즐레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살다보니 고맙단 말까지 듣는군. 어쨌든 이런 곳에는 오지 말라고. 강도 천지야. 그건 그렇고 대답을 안 했잖아. 왜 혼자서 이런 델 서성거리고 있는 거지?" "...사정이 길어요." 로이는 침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즐레이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역시... 켈리 때문?" "어, 어떻게 아세요?" 로이는 깜짝 놀라 소리쳐 물었다. 이즐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거짓말인 줄 알았는데... 그렇게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놈도 잡힐 때가 다 있군. 그런데 다른 놈들은 어떻게 하고 너하고 개만 달랑 온거야? 랜스 녀석은?" "그 악당 이름은 꺼내지도 마세요!" 로이의 격한 반응에 이즐레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울 듯한 로이의 표정을 보고는 함부로 말을 꺼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내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자, 우선 일어서라. 네 칼과 말도 챙기고.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이야기를 듣지." 로이는 말없이 이즐레이가 하자는 대로 따랐다. 이즐레이는 빈민가의 골목을 지나,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시끌벅적한 거리로 로이를 안내했다.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서민의 활기가 느껴지는 거리였다. 시지리스의 해산물 시장과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물론 빈민가를 지나는 도중에, 말을 가진 로이와 어쩐지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즐레이를 흘끔흘끔 노려보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나 이즐레이가 풍기는 기묘한 분위기가 그들을 꼼짝 못하게 했다. 그것은 살기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게 옮기는 발,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동시에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은 태도... "이리로 들어와, 로이. 내가 묵는 곳이지. 오늘 떠나려고 했지만..." 이즐레이는 한 소박한 주점으로 로이를 안내했다. 시끌벅적하고 활기찬 분위기가 이즐레이와는 전혀 안 어울렸으므로, 로이는 좀 놀랐다. 미안한 생각이지만 솔직히, 로이는 이즐레이가 흉가(凶家) 같은 곳에 묵으면 딱 알맞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주점의 왁자한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좀 시끄럽지? 여기는 어딜 가든 이래. 소상인들과 여행객이 모이는 동네라서 말이야... 낯선 사람이 눈에 안 띄고 묵어가기엔 딱 좋은 곳이지." 이즐레이가 말했다. 그는 망토에 달린 두건을 눌러 써 눈이 안 보이도록 가린 다음,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작고 얼굴도 몸통도 동글 동글해서 마치 공처럼 보이는 주인이 튕겨져나와,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쇼, 커크 씨! 식사는 했소?" "아직... 늘 먹던 걸로, 세 사람 몫을 주십시오. 손님이 있으니까요." "어이쿠! 큰 개와 귀여운 소년이네. 아들이오?" "...설마... 로운에서 온 사촌입니다." "로운! 로운 좋지. 밀도 많이 나고 물고기도 많이 나고... 커크 씨 자리는 비워 놨소. 그러니 어서 가서 앉으쇼!" 주인은 구석진 자리를 가리키고는 마치 춤을 추는 듯한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이즐레이와 로이는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펠히스도 조용히 식탁 밑에 들어가 엎드렸다. 구석이라 그런지 조용하기는 했다. 남의 눈에 띄이지 않고 이야기하기에는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주인이 돌돌 달려와 스프와 빵,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조각과 야채 부스러기를 놓고 가자, 이즐레이는 로이를 똑바로 쳐다보고 물었다. "이제 말해 줄 수 있겠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로이는 다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즐레이가 떠난 후 데이슨을 구출하러 간 이야기와, 스트라본과의 전투, 레일라에게 좇긴 이야기, 그리고 결국 켈리가 자진해서 인질이 된 이야기를. 마지막에 랜스와 클레이브의 대화를 엿듣는 대목을 이야기할 때에는 어주가 격해지고 욕이 튀어나와, 이즐레이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랜스, 그 나쁜 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로이는 화를 내며 포크로 애꿎은 채소를 짖이겼다. 이즐레이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로이가 랜스에 대해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을 끝도 없이 늘어놓자, 그제서야 그는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그만 하지, 로이... 랜스 녀석, 좀 멍청한 건 사실이지만 악당은 아냐...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겠지." 그 말에 로이는 자신이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분명 오늘 새벽에 본 랜스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클레이브가 나쁜 놈인거야! 맞아!' "그래서, 혼자 켈리를 구하겠다고 온 거야? 너도 참 대책없는 녀석 이군. 어딜 가면 켈리를 구할 수 있는지 알고는 있어?" 이즐레이가 한심하다는 듯 말하자 로이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일단... 레일라를 만나려고 해요. 그리고... 사실대로..." "그건 그다지 영리한 방법이 아는 것 같은데. 사실을 말한다면 레일라는 당장 달려가 켈리의 목을 칠 걸. 차라리 그녀가 모르고 있을 동안 켈리를 구해내는 게 가능성이 있을거야." "...하지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요..." "하젠 경의 성에 있어. 길리어드의 남쪽이지." 이즐레이의 말에 로이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무룩하던 얼굴에 다시 희색이 돌았다. "...도와줄 거에요, 이즐레이?" "...난 싫어. 정보만 줄 뿐이야. 내 일은 끝났으니, 난 내일 아침 여길 뜰거야." 이즐레이는 갑자기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로이는 포기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그를 졸랐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도와 주세요. 그러니까... 아, 그래! 내가 이즐레이를 고용할께요. 그럼 되죠?" "...돈은 있냐, 너?" "응... 없지만... 훔치면 되죠 뭐. 아니면 내가 그 돈만큼 이즐레이를 따라다니면서 심부름을 해 주거나..." "뭐, 뭐라고? 난 애가 따라다니는 건 질색이야! 차라리 공짜로 해 줄테니까 제발 참아라." "와아, 정말요?" 로이는 의외라는 듯이 이즐레이를 쳐다보았다. 고마움과 신뢰가 가득한 눈빛에 이즐레이는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는 너무 낯선 표정이었다. "나도 그녀에게 빚이 있으니까... 빚지고 사는 건 딱 질색이야." "신난다! 이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로이가 의자를 들썩이며 소리쳤다. --------------------------------------------------------------------- 로이가 이즐레이의 숙소에서, 주인을 몰아내고 침대를 차지하고는 편안히 자고 있을 즈음, 랜스 일행은 에스텔로 가는 숲길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랜스가 자청해서 보초를 섰다. 그는 오늘 여관을 떠난 이래, "예", "아니오" 등등의 대답을 빼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일행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클레이브만이 가끔 나무라는 듯한 눈으로 동생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밤의 날씨는 꽤 쌀쌀했다. 북쪽으로 가고 있는데다 겨울이 오니 당연한 일이었다. 데이슨은 그를 위해 특별히 빌린 작은 마차 안에 누워 있었고, 다른 이들은 모두 풀이 말라가는 땅바닥에 망토를 침낭처럼 깔고 이불을 목까지 덮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이런 노숙도 불가능해질 것 같았다. 랜스는 밤이 깊어 지도록 멍하니 모닥불을 보고 있었다. 졸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누가 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릴 만큼 정신을 집중한 상태도 아니었다. "툴위그, 자요?" 누워서 부스럭대고 있는 툴위그에게, 데이미아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옆에 있는 툴위그도 간신히 들을 수 있는 소리인데다가, 보초를 서는 랜스와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으니 랜스의 귀에는 들릴 리 없었다. "아니. 왜?" 툴위그 역시 속삭이며 대답했다. 데이미아는 어둠 속에서 녹색 눈을 빛내며, 무슨 재미있는 계획이라도 되는 듯이 즐거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로이 따라가요!" "...뭐?" 툴위그는 놀란 나머지 큰 소리를 내서, 하마트면 랜스에게 들킬 뻔 했다. 랜스는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하고는 뒤를 돌아 보았으나, 데이미아는 규칙적인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고 툴위그는 코를 약간 골며 잠꼬대같은 말을 웅얼거리고 있었다. 평상시의 그라면 좀 더 주의를 기울였 겠지만, 지금은 로이와 켈리의 문제로 너무 정신이 복잡해져 있었다.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더니 다시 모닥불을 응시했다. 한참 후, 데이미아가 말을 이었다. "로이 혼자 가게 놔 둘 수는 없잖아요. 우리 둘이 가면 스트라본도 무섭지 않아요. 제 실력 아시잖아요?" "...랜스랑 데이슨은?" "데이슨은 이제 위험하지 않아요. 클레이브를 못 가게 하느라고 거짓말 한 것 뿐이에요. 그리고 랜스는..." 데이미아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툴위그가 나무라듯 말했다. "너 랜스 의심하는구나." "...사실은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랜스도, 랜스 형도. 우리는 모두 로크 페울로니를 찾아 여행하고 있는데, 랜스만이 다르단 말예요. 이곳 아트웰로 오면서부터 더 이상해졌어요. 귀족 티나 내고. 로이도 켈리도 안 그런데 랜스는 왜 그렇게 왕에게 집착하는지 모르겠어." "데이미아...!" "놀란 척 하지 말라고요. 툴위그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리고 그 근위대장이라는 클레이브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도 수상해요." "..." "함께 갈 거에요, 안 갈 거에요? 툴위그가 안 간다면 나 혼자라도 가요. 로이 걔는 잘 싸우지도 못한다고요. 혼자 가게 내버려 둘 수 없어요." 데이미아의 결심은 굳건했다. 툴위그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나도 가겠어." "좋아요! 그럼 당장 가자고요." "뭐, 뭐? 당장?" 그러나 툴위그가 뭐라고 말릴 새도 없었다. 데이미아는 벌떡 일어나 랜스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는 고개를 바짝 치켜든 채 당당하게 말했다. "툴위그와 나는 로이 찾으러 길리어드로 돌아가요." "...에스텔로 가기로 한 게 아니었던가?" "그건 당신과 당신 형이 미음대로 정한 거고요. 솔직히 말해서 랜스, 당신 좀 의심스러워요. 분명히 나는 오늘 새벽 당신과 로이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거든." 랜스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툴위그가 얼른 달려와 데이미아를 말렸다. "그만 둬, 데이미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자고. 길리어드는 머니까." 데이미아는 랜스를 흘끗 노려보더니, 툴위그가 건네 준 지팡이를 받았다. 그리고는 말들이 묶여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잠깐 기다려요. 저도 함께 가야죠." 랜스가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툴위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자네는 원한다면 자네 형 곁에 남아 있어도 돼." "툴위그! 우린 동료가 아닌가요?" 랜스는 한편으로는 놀라고 한편으로는 호가 나서 물었다. 그러나 툴위그는 태연했다. "우리는 로크 페울로니를 찾고 있지. 하지만 자네는 그것 말고도 다른 의무에 얽매어 있어. 에스테이아에 대한, 왕에 대한 의무 말이야. 자네는 왕가의 친족인 아덴 가의 적자니까, 하긴 그런 지위를 무시할 수도 없겠지. 하지만 그런 지위 때문에 계속 이렇게 어중간한 자세를 취할 거라면 방해 밖에 안 돼. 사실 자네가 레일라에게 선뜻 맹세만 해 줬더라도, 켈리가 볼모로 잡히는 일 따위는 없었을 거야." 랜스는 놀라움 가득한 눈으로 툴위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툴위그는 그런 그의 반응을 포기하고 해석했는지, 말을 골라 타고는 왔던 방향으로 되돌아 달렸다. 데이미아는 벌써 그의 앞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다. "...랜스에게 좀 심했던 것 아녜요?" 하고 데이미아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툴위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태도를 꾸미고는 대답했다. "사실은 네가 하고 싶은 말이었잖아. 안 그래? 어차피 떨어져 나갈 녀석이라면 일찍 떨어져 나가는 게 좋아." "...그건 그래요." 데이미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그러나 랜스는 그대로 포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앞에, 어느 새 쫓아왔는지 랜스의 흰 말이 길을 가로막고 섰다. 툴위그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막으려고 해도 소용 없어. 자네를 쓰러뜨리고도 우리는 갈 거야." "그렇다면 나도 가겠습니다. 켈리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누구보다도 제가 비난받아야 마땅하니까요. 로이의 경우도 마찬가지고..." 하고 랜스가 대답했다. "무슨... 뜻이지?" "제가 클레이브에게 다 말했습니다. 그래서 로이는 화가 나서 뛰쳐 나간 거고요." 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툴위그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랜스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데이미아는 질겁을 해서 소리쳤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전이 일어나는 걸 방치할 수가 없었어. 클레이브는 자신이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만에 하나 켈리나 로이가 위험해진다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막아야 하겠지..." "그걸 말이라고 하나요! 둘 중 하나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가 당신을 죽여 버리겠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랜스는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데이미아가 무슨 말인가 더 하려고 하자, 툴위그가 그녀를 말렸다. "그만 두게, 데이미아. 랜스도 미안해하고 있잖아. 어차피 셋이 둘보다는 낫겠지. 함께 가자고..." "싫어요. 배신자 따위와 함께 갈 수 없어요!" 데이미아의 말투는 의외로 단호했다. 감정적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분과 분노로 흐려진 말투였다면 랜스는 안도했을 테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랜스에 대한 의심이, 그것도 이성적인 의심이 너무 짙게 배어 있었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요정족이었고, 인간과 난쟁이를 경계하라고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아 온 드라이어드의 일족이었다. 플리에타의 딸, 두 번째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 그리고 엘미어의 계승자로서 인간을 신뢰하는 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숲의 요정 친구들만큼은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랜스는 그녀의 말투에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툴위그의 눈빛에는 이해가 담겨 있었다. 비록 랜스를 완전히 용서하고 있는 표정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의 눈빛, 그의 말투는 랜스의 행동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나오지 마, 데이미아. 랜스는 훌륭한 검사야. 너도 그걸 알겠지. 도움이 될 거야. 그리고 인간들 마을에 요정과 난쟁이가 달랑 둘이서 들어간다면, 당장 이목을 집중하게 될 거라고." 데이미아는 툴위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경멸 가득한 눈으로 랜스를 쏘아 보더니, 한 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말을 달렸다. "로이나 켈리가 죽으면, 당신도 내 손에 죽는 거야. 더러운 인간!" 그녀의 말 발굽 소리가 어두운 숲 속으로 스며들었다. 툴위그는 랜스에게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자, 우리도 가지." --------------------------------------------------------------------- 하젠이 눈을 든 것은 새벽녘이었다. 보통 그는 늦잠을 자는 편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해가 뜨려면 멀었는데 두들겨깨워져 일어나야 하는 일도 흔하지는 않았다. 집사는 매우 난처한 표정으로, 그를 깨우고 나서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 겔러허드가 오셨다고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매우 급한 일이시랍니다. 사일러스 전하와 스트라본 전하께서 부르신다는군요..." 그 말에 하젠의 귀가 번쩍 띄었다. 그는 허겁지겁 일어나 눈 깜짝할 시간에 세수를 하고, 은빛 갑옷을 차려입고는 성을 뒤쳐나갔다. 시종(侍從)이 허둥대며 그의 백마를 끌어내 왔다. 성의 앞에서는 검은 갑옷으로 차려입고 검은 말을 탄 레일라가, 어둑어둑한 새벽의 안개 속에 서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그녀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야?" 말에 오르며 하젠이 날카롭게 물었다. 레일라는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레 대답했다.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널 데려오라시는군... 어쨌든 심상치 않은 분위기야." "...설마... 놈들이 입을 연 건 아니겠지? 인질이 있는데..." "가 보면 알겠지." 레일라는 침울하게 대답하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하젠도 그녀와 함께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한 명은 새하얗게, 다른 한 명은 새까맣게 차린 두 명의 기사는 어둠과 안개에 싸인 한산한 거리를 지나, 길리어드의 성으로 향했다. 레일라와 하젠, 둘 다 무슨 일인지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만을, 자신들의 예측이 틀렸기만을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제발 랜스 경이 입을 열지를 않았기를, 그가 인질이 된 친구를 배반하지 않았기를. 그래서 그들이 그들에게 아무 적대감을 가지지 않은 여인을 죽이지 않아도 되기를, 아트웰의 비밀이 지켜지기를... 길리어드 성의 성문은 평소와는 달리 중무장을 한 네 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레일라와 하젠의 얼굴을 한참이나 뜯어보고 나서야 문을 통과하게 해 주었다. 레일라의 말대로 결코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성문을 들어가도, 성의 마당에 병사들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하젠의 머리칼은 곤두서기 일보 직전이 었다. 성의 건물을 지키는 것은 그림자 기사단 소속의 기사, 레일라의 직속 부하들이었다. 그 중 두 명이 레일라와 하젠을 알현실까지 데려다 주었다. 길고 긴 복도와 넓은 홀을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다시 나타나는 무장한 기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성 안은 말 그대로, 기사들로 꽉 차 있었다. "드디어 왔군, 레일라 경, 하젠 경." 은빛 갑옷으로 단단히 무장한 사일러스가, 알현실 중앙의 의자에 앉은 채 격식을 차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곁, 그의 의자보다 조금 소박한 의자에는 흰 마법사복을 입은 스트라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창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레일라와 하젠이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자, 사일러스는 당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시이드의 첩자가 전갈을 보내 왔다." "예...?" "이것이 그 전문이다." 의아해 하는 레일라와 하젠에게, 스트라본이 누렇고 평범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급히 휘갈겨 쓴, 그러나 분명히 알아볼 수 있는 디ㅏ 한 줄의 글씨만이 눈에 들어왔다. '매가 떴음.' 하젠과 레일라는 동시에 창백하게 질렸다. 매가 떴다. 그것은 아트웰 저항군의 첩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암호였다. 왕이나 고위 귀족의 명령에 의해, 군대를 아트웰로 출격시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는... 종이를 들고 있는 하젠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레일라는 신음하듯이 말했다. "그... 그럼... 시이드로 출격 명령이?" "그렇다고 봐야겠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근위 대장 클레이브가 내린 명령이라고 하더군." 사일러스의 침통한 대답이었다. "어차피 모두 예상하고 있던 일 아니었나. 이제는 정면 충돌밖에 남은 일이 없는 것 같군. 드디어, 30여년에 걸친 인류의 평화는 막을 내리는가 ...언젠가는 올 일이긴 했지만..." 사일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스트라본이 한 마디 했다. "평화가 막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헛되었던 가짜 평화가 막을 내리고 진실한 평화를 위한 전쟁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모두 이 때를 기다렸다. 이제 아트웰의 힘을 보여줄 때. 우리는 지배받는 민족이 아니라 지배하는 민족이어야 한다는 것을, 더이상 에스테이아의 왕의 명령을 따를 필요가 없음을 보여주자. 게다가..." 스트라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돌았다. "마족 측의 흑마술사들에게서 재미있는 정보를 들었다. 우리의 원수, 벨리노어 왕의 무릎을 꿇게 한 아클레어 3세는 지금 병상에 있다. 하르크자 엘의 칼이 그를 쓰러뜨렸다는군. 적의 사기는 저하되어 있을 것이다. 아니, 지금은 미처 그 소식을 듣지 못했더라도 차차 알려지면 그들의 사기는 형편 없이 떨어지겠지. 비록 수가 적다 하더라도 우리가 단연 유리하다." 사일러스는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레일라와 하젠을 향해 결심을 굳힌 목소리로 말했다.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 갤러허드, 그리고 수도 방위대의 대장 하젠 윈필드, 그대들의 충성심과 용맹함을 봄낼 때가 왔다. 저속한 에스테이아의 무리들에게 보여주어라. 그림자 기사단이, 수도 방위대가, 몇 십 년을 숨어 왔던 아트웰의 저력이 얼마나 강한지! 그대들과 그대들의 부하들의 충성을 믿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전하! 저희의 미천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레일라와 하젠은 동시에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들 앞에 선 두 왕자의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사일러스는 망토를 펄럭이며 앞장서서 알현실을 나갔다. "자, 그럼 에스테이아의 떨거지들에게 이름뿐인 평화가, 명목뿐인 지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자! 당장 시이드의 국경으로 가 그들을 환영할 준비를 해야지. 레일라, 당장 그림자 부대 전원을 이끌고 나를 따라 셀더스 요새로 오도록. 하젠에게도 당장 수도 방위대의 점검 및 배치를 명한다. 개미 새끼 한 마리라도 길리어드에 숨어들게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스트라 본은..." 사일러스는 알현실에 남은 창백한 동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지도자로서의 미소가 아니라, 형으로서의 미소를. "몸이 회복되지 않았으니 출전은 무리겠지. 아트웰의 왕위 계승자 로서 그대에게 길리어드에 남아, 수도를 지키는 이들의 정신적 지도자가 될 것을 명한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미래의 왕이여." 스트라본도 미소로서 답했다. 하젠과 레일라가 인사를 올리고 나가 려고 하자, 스트라본은 레일라를 불러 세웠다. "잠깐, 레일라, 얘기좀 해도 되겠지." "예? 예..." 레일라는 뜨끔한 얼굴로 스트라본의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거리낌 없는 얼굴로 하젠에게 명령했다. "곧 끝나니 자네는 미안하지만 잠깐 나가서 기다리고 있게." "예! 전하." 하젠은 군소리 없이 알현실의 육중한 문을 닫고 나갔다. 레일라는 불편한 표정으로 스트라본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넌 내 검이요, 내 방패가 될 거라고 했지, 레일라." "예..." 레일라의 대답에는 확신이 없었다. 스트라본의 검이자 방패가 되겠 다고 맹세한 사람은 분명 그녀였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그녀 스스로 그렇게 맹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스트라본의 요구를 어겼으니, 어찌 그의 검이며 방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녀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즈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트라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를 경악하게 했다. "네가 무슨 일을 했건, 나를 위해 했겠지. 내게 해가 되리라고 생각 하는 일은 하지 않았겠지. 그러니 만에 하나 네가 내 명령에 어긋나는 일을 했다 하더라도, 나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다, 레일라. 네가 나를 위해 그랬을 것이라고 믿으니까." "전하...!" "지금까지 네가 해 온 모든 일에 대해, 너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너는 내 충실한 신하일 뿐 아니라 충실한 친구였지. 네가 있는 한, 나는 어떤 튼튼한 팔도, 어떤 튼튼한 다리도 부럽지 않다. 그러니 설사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너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라. 네 마음을 괴롭히면 나도 괴롭히는 것이니까... 너는 언제나 나를 위해 최선의 일을 했고, 나는 그것을 안다. ...이 말을 해 주고 싶었다, 레일라." "..." 레일라는 말없이 고개를 숙인 채 스트라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녀는 비로소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전하, 말씀드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나간 일이라면 그만 두어라, 레일라. 그 대신 나를 대신헤서 형님의 곁을 지켜 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지... 내 검, 내 방패가 되어 그를 보호해 주려무나. ...사일러스 왕세자의 동생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칼을 잡을 수 있었더라면 그렇게 싸웠을 것처럼..." 스트라본의 얼굴에는 소년같은 거리낌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창백한 얼굴 때문에 그 미소는 손에 잡히지 않는 섬세한 정령의 미소처럼 보였다. 레일라도 미소를 지었다. "예, 전하, 반드시... 저는 언제까지나 전하의 검이고 방패입니다." (계속) "무슨 일이야?"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젠은 레일라가 나오자마자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리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왕족을 속이고 명령을 어긴다는 것 자체가 대죄이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잘못으로 전쟁이 앞당겨질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서는. 레일라는 태연하고 차라리 후련하다고 해도 좋을 얼굴로, 가볍게 대답했다. "다 알고 계셨나봐. 스트라본 전하는..." "뭐, 뭐야?" 하젠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궁중이라는 것도 잊고 큰 소리를 질러 버렸다. 그러나 레일라는 걱정할 것 없다고 말하는 듯 미소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바보같을 정도로 밝았다. "괜찮아. 다 이해해 주셨어. 그보다 얼른 시이드의 얼간이들을 혼내 줄 준비를 해야지. 여기서 헤어져야겠다. 너는 네 성으로 가야 할테고, 나는 그림자 기사단을 이끌고 당장 셀더스 성으로 갈 생각이니까..." "자, 잠깐! 그럼 그... 켈레브리스는 어떻게 하지?" 하젠이 아직도 침착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물었다. 레일라는 미소를 감추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죽여야지. 그게 약속이었으니까."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당당한 걸음거리로 복도를 걸어갔다. 침울한 표정의 하젠을 뒤에 남긴 채. 하젠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도 대답ㅇ은 하나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가 켈리에게 이성으로서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미인이고 이성으 로서도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설사 그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하더라도, 하젠은 공사(公私)를 뚜렷이 구분할 수 있었기에 그런 일로 망설이거나 갈등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켈리는 달랐다. 그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스테이아의 끄나풀이 아니라는 것을, 아니, 어느 누구의 끄나풀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켈리에게는 그가 전에 어느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한 긍지가 있었다. 왕족인 사일러스와 스트라본을 능가할 만한 자존심이. 그녀는 웃는 얼굴 속에 강인한 칼날을 갈고 있었고, 그 칼날을 굴복이나 타협을 모르는 채 한 곳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비록 그 곳이 어디인지 하젠이 알 길은 없었지만... 그래서 하젠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기사로서 그녀가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에스테이아의 졸개가 아닌데,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세상이 변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죽여야 한다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젠은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약속은 약속. 랜스 경이 약속을 저버렸다면 그에 해당하는 댓가를 받는 것이 당연했다. 켈리의 죽음은 그의 양심을 괴롭히고, 어쩌면 감정을 뒤흔드는 데에도 충분할 것이었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잡은 채 자신의 성을 향해 출발했다. "이제 돌아오십니까!" 문지기 둘이 문을 열며 인사를 올렸다. 이제 해가 솟을 때가 되었고, 상당히 밝아졌는데도 불구하고 안개는 걷힐 줄을 몰랐다. 한 치 앞도 내다 보기 어려웠다. 무거운 소리를 내며 성호(城浩) 위로 내려지는 다리를 보며,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도 이처럼 안개가 잔뜩 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집사는 성 앞까지 마중나와 말 고삐를 잡았다. "다녀오셨습니까?" "그래... 포로는 잘 있겠지?" "물론입니다." 물론이라고. 차라리 그 동안 도망이라도 쳐 주었다면 서로에게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행해져야 할 일은 행해지게 마련. 하젠은 말에서 내려 검을 뽑았다. 흠집 하나 없이 은빛으로 빛나는 칼날. 칼날이 잘 들어야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을 수 있겠지. 성문이 다시 무거운 소리와 함께 들어올려지고 있었다. 하젠은 성을 향해 걸음을 롬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안개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려왔다. "기다려요! 문을 닫지 마십시오!" 성문을 닫으려던 병사들은 흠칫 놀라 손을 멈추었다. 안개 속을 뚫고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 레일라의 지휘를 받는 그림자 기사단 소속의 갑옷이었다. 그러나 그 갑옷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알아 보기 힘들 정도로 깨져 있었다. 투구늘 그런 대로 봐줄 만 했으나 오른쪽 ㅁ 덥개와 어깨 보호대는 종적도 없이 날아가 있었고, 가슴 보호대도 금이 간 채 그 안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 기사는 간신히 하젠의 앞까지 말을 달려 오더니, 말 위에서 풀썩 떨어졌다.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를 부축해서 일으켜 앉히고는 투구를 벗겼다. 긴 옅은 갈색의 머리칼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된, 낯선 기사였다. 그의 이마에서 흘러나온 피가 머리칼을 온통 적시고 있었고, 두 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었다. 그 붕대 위로 온통 배어나온 피와 고름을 보니, 실명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을 움려쥐고, 피를 잔뜩 쏟아내며 기침을 했다. "...빨리 물을! 그리고 의원을 불러 와!" 집사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러는 동안 하젠은 부상당한 낯선 병사에게 몸을 굽힌 채, 다급하게 묻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이게? 그대는 어디의 기사요?" "...물을..." 낯선 기사는 쉰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쓰러졌다. 하젠은 그의 창백한 얼굴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어디서였는지 좀처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종이 가져다 준 물을 마시자, 그는 비로소 기운을 좀 차린 것 같았다. 그는 눈에 붕대를 감아 앞을 볼 수 없어서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하젠 경... 수도 방위대의 하젠 경이십니까...?" "그렇소, 내가 하젠 윈필드요." "저는 어윈... 그림자 기사대의 어윈입니다... 시이드... 시이드가... 윽!" "이봐! 정신차려! 시이드가 설마 벌써 공격을 시작했단 말인가? 겨우 오늘 새벽에 정보가 도착했을 뿐인데, 그럴 리가...!" "...저는 모릅니다... 레일라 님의 명령으로 셀더스에 머물어 시이드의 정세를 정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윈은 다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기침을 해 댔으나, 이번에는 피를 토하지는 않았다. 더이상 말을 시키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마침 의원과 그 조수들이 달려왔으므로, 하젠은 질문을 포기한 채 그를 의원에게 넘겼다. "이런 일이... 그 먼 거리를 매보다도 빨리 달려오다니, 시이드 놈들 마법이라도 쓴 건가?" 9 하젠은 망연자실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러나 만일 어윈의 정보가 사실이라면, 이렇게 머뭇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켈리의 처형 다위는 그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다시 말 위에 오르며 소리쳤다. "나는 길리어드 성으로 간다! 당장 모든 수도 방위대의 기사들에게 알려! 전쟁은 시작되었으니 모두 전투 태세에 돌입하라고!" 그리고는 그의 말은 성문을 지나, 안개 속으로 다시 사라져 버렸다. 이 북새통이 진행되는 동안, 짙은 안개 속에 몸을 숨긴 채 살금살금 열린 성문으로 들어오는 소년이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헤엣, 마침 안개까지... 하늘이 날 돕는구나!' 로이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병사들과 하젠이 충격적인 소식에 어쩔 줄을 모르는 동안 성의 건물을 향해 다가갔다. 마침 성문은 열려 있었고, 병사들이 들것에 실린 어윈의 몸을 성 안으로 나르는 중이었다. 의원과 그 조수들이 그 뒤를 따랐다. 로이는 그들이 모두 성 안으로 들어 가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그들의 행렬이 끝나고 육중한 나무문이 내려오기 시작하자, 로이는 재빨리 몸을 굴려 성 안으로 들어갔다. 로이가 재빨리 문이 기둥 뒤로 몸을 숨김과 동시에,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닫혔다. '자아... 무기고(武器庫)가 어디지?' 로이는 기둥 뒤에서 고개를 쏙 내밀고 주위를 살폈다. 하젠쯤 되는 장수의 성 치고는 그다지 넓은 편이 아니었다. 로이는 하젠이 레일라와 함께 스트라본 왕자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길래 대단한 성을 거느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게레드 영주 히루스의 성이 오히려 더 화려하고 컸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길리어드 성도 결코 큰 편이 아니었다. 물론 로이가 이제까지 보아온 성 중 가장 위풍당당하긴 했으나, 한 나라의 왕성(王城) 이었다는 점을 생각할때 말이다. '여기 사람들... 풍요한 데 비해 검소하구나.'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살금살금 계단을 향해 발을 옮겼다. 그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무기고는 항상 지하실에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없어져도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주인 없는 갑옷이나 예비 무기들을 놓아 두는 무기고는. 성 안에는 기사들이 별로 없었다. 철통 같은 경비병들 때문에 소동을 틈타 겨우 들어온 로이로서는 좀 놀라운 일이었다. 어쨌든 다행한 일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즈 말에 의하면 수도 방위대의 대장이라던데... 이 성엔 부하들도 없나?' 그러자 갑자기 로이의 생각에 대답이라도 하듯, 계단에서 한 무리의 갑옷 입은 병사들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어렴풋하던 그 소리는, 가까이 오자 귀가 얼얼해지도록 우렁차게 울리는 금속의 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로이에게는 다행이었다. 바로 그 큰 소리 덕택에 그들이 오는 것을 얼른 알아채고, 계단 밑의 먼지투성이 공간에 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질서정연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그들은 모두 20명의 수도 방위대 소속 군사였다. 은빛 갑옷이 덜그덕거릴 때마다 빛을 발했다. 그들이 양손에 든 거대한 창은, 로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이 쪽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그들의 앞에서 성문이 열리고, 그들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철컹거리는 걸음으로 성 밖으로 나갔다. '뭐... 뭐냐, 저 사람들...' 로이는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끼며 생각했다. 경험이 부족한 탓에 적절한 어휘를 끄집어낼 수는 없어도, 그들은 여느 병사들과는 무엇인가 달랐다. 망토도 두르지 않고 갑옷 모양으로 보아 그다지 높은 계급이 아닌 보병들이 확실했으나, 그들에게서는 로이가 이제까지 엿보지 못한 의지의 기운이 느껴졌다. 시지리스나 게레드의 군인들 따위는 그들에 비하면 시중 잡배에 불과했다. '이거... 저 사람들이랑 싸우는 사람들... 고생 좀 하겠는걸...' 그러나 언제까지고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로이는 심호흡을 하고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갔다는 것은 이유야 어찌됐든 로이에게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로이는 걸음 소리를 죽이며, 어두운 계단을 달려내려갔다. 쿵! "으악!" 계단 골목을 돌 때, 갑자기 나타난 어떤 물체에 박치기를 하고, 로이는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이마에 혹이 난 것처럼 욱신거렸다. 그러나 그는 켈리가 가르쳐 준 대로 얼른 일어서서 칼을 뽑고, 주위를 살폈다. '드... 들킨 건가?!' 그러나 로이와 부딪친 사람든 다름 아닌 로이 또래의 소년이었다. 그는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흰 옷을 입고 있었으며, 무기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니, 하나 가지고 있긴 했다. 그가 사용하기에는 너무 무거울 것이 뻔한 거대한 검이었다. 그러나 흰 보자기에 싼 채 들고 가다가 떨어뜨린 것으로 보아, 그가 사용할 것이 아니라 다른 기사에게 가져다 주기 위한 것인 것 같았다. "어...? 넌 누구니?" 하고 그 소년이 로이를 보고 물었다. 의심이라고는 없는 말투였다. 로이는 얼른 칼을 등 뒤로 숨기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난 로이야. 넌 누구니?" "응... 난 폴. 이반 님의 시종이야. 이 검을 가져다 드리려고 했는데..." 소년은 얼른 떨어뜨린 검을 집어 탁탁 털었다. "...좋은 검이구나. 저 아래 무기고가 있니?" "응... 복도 맨 끝쪽의 방이야. 너도 시종이니?" "아니... 난 강도야." "...뭐?" "강도라고!" 로이는 등 뒤에 숨겼던 칼을 들이대며 대답했다. 폴은 사색이 되어 뒷걸음질쳤다. 로이는 제법 진짜 강도처럼 낮은 목소리로 음산하게 속삭였다. "소리지르거나 도망치려고 하면 넌 죽는 거야. 이래뵈도 시지리스 에선 알아주는 몸이었다고. 크하하... 자, 그럼 얌전히 계단을 내려가실까?" 폴은 벌벌 떨며 로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 병사들은 어윈을 침대에 눕히고는 나갔다. 그는 이제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 가는 신음소리만 내며 축 늘어져 있었다. "약을 가져와야겠다... 그 동안 너희들이 갑옷을 벗겨라." 의원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부상당한 기사를 살펴보더니, 이렇게 말하고는 방을 나갔다. 두 조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윈의 갑옷을 벗겨 내기 시작했다. 갑옷 아래 입은 옷도 온퉁 찢어져 있었고, 함부로 감아진 붕대는 피로 범벅이었다. "정말 살아있는 게 용하군..." "이봐... 저 눈의 붕대 말이야. 저러다가 덧날 것 같아. 어떻게 해야 하지 않을까?" "...풀어버리자고. 이 친구, 실명하겠군..." 한 조수가 가위로 붕대의 매듭을 잘라 버리고는, 붕대를 풀기 시작 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붕대 속으로 갈수록 피가 많이 배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깨끗한 천이 나오는 것이었다. "어...?" 정신을 잃은 줄 알고 있던 어윈이 손을 들어 붕대를 확 잡아뜯었다. 그 아래 드러난 눈에는 전혀 상처가 없었다. 그러나 여느 눈과도 달랐다. 자비라고는 보이지 않는, 소름끼치는 새빨간 눈동자... "드... 드래크로니안...?" "도와줘서 고맙군 친구들." 어윈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눈의 붕대를 풀던 조수의 배를 걷어찼다. 빼빼 마르고 허약한 조수는 그 일격에 그대로 푹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다른 한 명은 새파랗게 질려 그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더니, 달아나려는지 뒤를 돌았다. 그러나 어윈은 잡고 있던 붕대를 그의 목에 감아, 마구 조르기 시작했다. 곧 그도 정신을 잃고 동료의 곁에 쓰러졌다. "갑옷은 다 벗겼... 응?" 약을 한아름 안고 들어온 의원은, 환자는 온데간데 없고 자신의 조수들만이 붕대로 결박당한 채 쓰러져 있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무슨 대처를 할 새도 없이, 어떤 손이 그의 목 뒤를 내리쳤다. 그는 고통을 니낄 새도 없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어윈은 그 의원도 두 조수와 마찬가 지로 붕대로 손발을 묶어 눕혀 놓았다. "...이즈?" 방문을 열고 등에 커다란 가죽 부대를 둘러멘 로이가 들어왔다. 그는 이반의 시종이라는 소년이 입고 있던 옷을 빼앗아 입었고, 그 위에 제피로스가 준 검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꽤 의젓해서 진짜 기사의 종자로서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마침 제때 왔구나, 로이!" 곁에 놓은 물수건으로 몸에 묻은 필르 닦고 있던 어윈, 아니 이즐레 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피가 다 지워진 그의 상반신과 얼굴에는 상처라고 는 하나도 없었다. 로이도 미소로 답하며 가져온 자루를 내밀었다. "여기 갑옷이랑 투구 가져왔어요. 이즈, 정말 연기 잘 하던데요? 배우 해도 되겠어요!" "끔찍한 소리 마라. 다시 토끼 피를 입 안 가득 물고 있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이즐레이는 로이가 망을 보는 동안 서둘러 가발을 벗어 던지고 피를 닦아 낸 다음, 자신의 검은 옷을 입고 그 위에 로이가 훔쳐온 갑옷을 덧입었다. 은빛 갑옷으로 차려입고 투구로 얼굴을 가린 그의 모습을 보고, 로이가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와아! 완벽해요! 누가 보더라도 수도 방위대의 기사인 줄 알겠네!" "쉿! 조용해 로이!" 이즐레이는 투구 아래로 미소를 감추며 속삭였다. "그보다도 어서 이 방을 나가자. 놈들이 알아채기 전에 켈리를 구해서 빠져나가야지!" 그는 의원의 몸을 뒤져 방 열쇠를 찾아낸 다음, 밖으로 나가 그 방의 문을 잠갔다. 쪼르르 그의 뒤를 따라 나온 로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그런데... 켈리가 서족 탑에 갇혀 있다는 말을 사실이겠죠?" "믿을 수 밖에... 200 디나르나 주고 캐낸 정보인데." 이즐레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당당하게 복도를 걸어갔다. 복도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청소하는 하인 한 명만이 그를 흘끗 보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들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서쪽 탑까지 걸어갔다. 가는 도중 몇 명의 하인과 한 명의 병사를 만났으나,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때까지 아무도 그들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로이 자신도 꽤 의젓한 시종의 연기를 하고 있었지만, 그는 무엇보다 이즐레이가 기사의 연기를 꽤 잘 해낸다는 데에 놀라고 있었다. 그의 걸음 걸이와 풍채, 말투는 연기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사의 것이었다. 결코 랜스보다 못하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만났을 대부터 이즐레이는 일개 살인 청부업자치고는 지나치게 정중하고 당당한 감이 없지 않았다. 가끔씩 던지는 거친 말투가 연기라고 느껴질 정도로. '...이즈는... 과거에 기사였던 걸까?' 로이는 한숨을 쉬면서 별의 별 생각을 다 해 보았지만,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즈와 켈리, 알 수 없는 말만 하다 사라지는 제피로스, 그리고 뒤늦게야 정체가 밝혀진 랜스... 모두들 나름대로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가장 큰 비밀은 나 자신한테 있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평범한, 공용어조차 에이론드 아저씨에게 간신히 배워 아는, 평민 좀도둑인 내가, 하필이면 이디실의 주인이라니. 내가 아는 나는... 사실 내가 아닌 걸까? 내가 뭐 사실은 훌륭한 혈통이었다든가...' 그러나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자상했던 아버지, 그리고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절세미녀에다 발랄했던 어머니, 복잡한 귀족 집안의 자손보다는 그들의 아들이고 싶었다. 고기를 잡아 팔고 그 돈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소박하지만 솔직한 사람들의 일원이고 싶었다. 세금이나 쥐어 짜고 오르크와 손잡고 동료의 생병을 헌신짝처럼 내던지는 귀족의 혈통 따위는 정말 부럽지도 않았다. "멈추시오!" 두 문지기가 날카로운 소리로 외쳤다. 어느새 탑의 꼭대기, 켈리가 갇혀 있다는 방에 다다른 것이다. 로이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바라 보았다. "수도 방위대의 기사, 하젠 님의 직속 부하이신 자일 님께서 포로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하젠 대장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오." 이즐레이가 위엄있게 말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쉽게 비키려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자일 경. 하젠 성주(城主)님께서는 자기 자신과 레일라 경 외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하젠 경께서 직접 내게 부탁하셨소." "그렇다면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편지라거나..." "모르겠소? 편지를 쓸 만한 여유가 없었소. 촌각을 다투는 일이란 말이오. 하젠 대장님께서는 지금 당장, 그 포로를 셀더스 성으로 데려오라고 명령하셨소. 전쟁의 승패가 걸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란 말이오!" 이즐레이가 제법 격한 어조로 외쳤다. 그러나 두 문지기는 그야말로 꼼짝을 않았다. "저희는 하젠 님의 명령에 따름니다. 만약 저희의 행동이 전쟁에 불리함을 초래하게 되었다면 그때 가서 벌을 받겠습니다." 이즐레이는 투구 아래로 숨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입에서 이제 기사 자일의 말투가 아닌, 암살자 이즐레이의 말이 흘러나왔다. "...너희의 충성심이 너희를 죽이는구나." "...예?" 문지기들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즐레이의 검이 문지기 중 한 명의 배를 꿰뚫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표정을 바굴 새도 없었다. 이즐레이의 칼날은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배에 박혔다가 다시 꺼내어졌고, 그는 칼이 빠져나간 뒤에도 잠시 후에야 털썩 쓰러졌다. "무... 무슨 짓을...!" 하나 남은 문지기가, 자신의 동료가 쓰러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고는, 창을 고쳐 잡으며 소리쳤다. 이즐레이의 칼날이 그의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두꺼운 갑옷을 입은 이즐레이의 움직 임은 평소보다 둔했고, 문지기가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으므로, 칼날은 그의 머리가 아닌 어깨를 비스듬히 갈랐다. "으악!" 문지기의 비명은 귀가 아플 정도로 탑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왼쪽 어깨부터 오른쪽 배까지가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즉사는 아니었지만 치명상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문지기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품 안에서 호각(號角)을 끄집어 내었다. 그가 그 호각을 불자, 날카로운 소리가 성 전체를 울리는 듯 했다. "...이런!" 이즐레이는 얼른 그 문지기의 목을 내리쳤으나, 이미 병사들이 그 소리를 들은 듯, 계단 아래에서는 발소리들이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즐레이는 투구를 벗어 던지고 그 붉은 눈을 드러냈다. 그리고 로이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놈들은 내가 맡는다. 그러니 넌 신경쓰지 말고 최대한 빨리 저 문을 열어!"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즐레이는 나선형의 좁은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고, 곧이어 칼이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로이는 구역 질이 나는 것을 참고 문지기들의 몸을 뒤져 보았으나, 열쇠는 찾을 수 없었다. '에이, 역시 야삽한 하젠이 열쇠를 가져가 버린 건가... 하는 수 없군.' 로이는 문의 열쇠 구멍 앞에 꿇어앉아, 만일을 대비하여 가져온 철사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린 다음, 열쇠 구멍으로 끼워넣었다. 그는 온 신경을 손에 집중한 채 열쇠 구멍의 미세한 굴곡까지도 모두 감지해 보았다. "로이! 멀었어?" 이즐레이의 목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서 났으므로 로이는 화들짝 놀랐다. 그는 어느새 이미 로이의 바로 뒤까지 밀려 올라와 있었다. 수도 방위대의 두꺼운 갑옷은 웬만한 공격은 그의 몸을 다칠 수 없도록 보호해 주었으나, 그의 장기인 빠른 칼놀림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수도 방위대의 공격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기다려요!" 로이는 소리치고는 다급히 열쇠 구멍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조한 상태에서는 원래 일이 더욱 안 풀리는 법, 문이 열릴 기미는 여간해서 보이지 않았다. 로이는 로이대로 울상이 되어 가고, 이즐레이는 이즐레이 대로 초조해져 가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랜스조차 그의 칼을 피할 수 없을 정도 인데, 지금은 여섯 명의 기사들 중 겨우 한 명을 쓰러뜨리고 한 명에게 가벼운 상처를 입혔을 뿐이었다. 무거운 갑옷 속에서 그는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고, 또 그만큼 초조함도 더해 가고 있었다. "에잇! 죽어랏!" 병사들 중 한 명이, 육중한 쇠몽둥이로 이즐레이의 가슴을 내리쳤다. 갑옷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금이 갔고, 이즐레이는 그 충격에 뒤로 휘청거렸다. 피부에 상처가 난 것 같지는 않았으나, 굉장한 충격이었다. 다른 병사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갑옷의 금이 간 부분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챙그랑! 가슴 보호대가 완전히 두 쪽이 나면서, 이즐레이의 상반신을 덮고 있던 갑옷은 완전히 벗겨져 버렸다. 로이가 그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 보니, 갑옷 밑에 받쳐 입었던 검은 옷도 가슴 부분이 길게 찢어져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즈! 피가..." 로이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별로 아프지도 않은 듯 한손으로 피를 슥 닦아내더니, 로이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이정도 가지고 안 죽어. 넌 어서 문이나 열어!" 갑옷이 벗겨진 이즈는 이제 평소의 실력대로,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칼을 휘둘렀다. 두꺼운 칼날을 마치 깃털처럼, 날도 보이지 않게 휘둘러 대는 이즐레이를 보자, 병사들은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그는 얼른 가장 가까이 있던 병사를 발로 차 계단 아래로 굴려 버리고, 하반신을 덥고 있던 육중산 철갑 갑옷도 떼어내 버렸다. 이제 그는 간편한 검은 옷 차림이 되어 있었고, 암살자 이즐레이의 칼날이 속도를 더히 가며 번쩍이고 있었다. "자! 이제 어디 한 번 제대로 해 볼까? 누가 붉은 눈의 암살자, 이즐레이의 희생양이 되겠느냐!" 이즐레이는 가슴에서 피가 배어나오는 데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기즉이고도 남을 정도로 차갑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병사들은 '암살자 이즐레이'라는 말에 잠시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마음을 다잡고, 탑이 흔들거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우리는 아트웰의 용사다. 하찮은 암살자 따위 무섭지 않다!" "저 놈을 잡아라! 안 그러면 하젠 님을 뵐 면목이 서지 않는다!" (계속) "흥, 말이 통하지 않는 녀석들이로군!" 이즐레이는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병사들을 향해 비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여유있게 품 안에서 단검 두 개를 꺼내어,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동작으로 맨 앞에 선 병사에게 던졌다. 작고 가벼운 단검들은 곧은 직선을 그리며, 피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윽!" 병사의 외침이 좁은 계단의 복도를 울리며 메아리쳤다. 그가 움켜쥔 왼쪽 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심장을 향해 던졌던 단검은 두꺼운 철갑 갑옷에 깊은 흠집을 내었을 뿐이었다. 상처만 입었을 뿐 목숨을 건진 병사는, 오히려 더 살기등등해져 목청껏 고함을 지르며 계단을 뛰어 올랐다. "이 건방진 것! 절대 용서 않겠다!" '정말 질색이라니까... 아트웰 녀석들의 무식한 갑옷...' 이즐레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런 일로 기가 죽을 이즐레이가 아니었다. "올테면 와라!" 계단 아래로 몸을 던지며, 이즐레이는 칼의 무게를 이용해 수직으로 곧게 내리쳤다. 그렇게 가속이 붙은 공격은 아무리 아트웰의 두꺼운 투구라 해도 막아낼 수 없었다. 투구는 쩍 소리를 내며 반으로 조개졌고, 칼날이 병사의 정수리로 파고들었다. 한쪽 눈을 잃은 병사는 이제 이즐레이의 칼에 목숨까지 잃은 채 쓰러졌다. "이 악당!" 다른 병사가 동료의 죽음에 분개하며 이즐레이를 향해 도끼를 던졌다. 인간 병사 치고는 칭찬해 줄 만한 빠른 솜씨였으나,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섞인 이즐레이는 여유있게 그것을 피해 냈다. 그리고 그 병사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다는 것을 깨닫고 미처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도 전에, 벽에 박힌 도끼를 빼어내어 그에게 다시 던졌다. "크윽!" 도끼는 그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갑옷이 갈라지고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목숨은 건졌다 해도 더이상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 병사는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는 아예 이즐레이를 향해 몸을 던져 육탄전을 폈다. "에잇! 죽일 테면 죽여라!"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즐레이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그 병사가 눈앞까지 돌진하자, 발로 그의 상처 부위를 힘껏 차서 그를 쓰러뜨렸다. "으악!" 그러나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쉽게 떨어져나가지 않았다.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면서도, 이즐레이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이... 이런!" 이즐레이는 그 병사와 함께 쓰러지면서, 얼른 칼을 들어 자신의 발목을 잡은 그의 팔목에 깊게 꽂아넣었다. 그는 비명과 함께 이즐레이의 발을 놓았으나, 덕분에 이즐레이는 남은 세 명의 병사들 한가운데에 놓인 꼴이 되고 말았다. "죽어랏! 에스테이아의 졸개!" 증오에 찬 외침과 함께 날카로운 창이, 아직 일어서지도 못한 그의 이마를 향해 내리꽂혀졌다. 이즐레이는 간신히 고개를 틀었고, 그 창은 그의 옆 이마에 작은 상처를 내며 스쳐 지나갔을 뿐이었다. 그의 몸이 자신에게로 굽혀진 틈을 타, 이즐레이는 재빨리 칼을 휘둘렀다. "커억!" 이즐레이의 칼이 갑옷의 옆구리, 이음새 부분을 파고들었다. 칼은 깊숙히 박혔고, 그 병사는 입에서 피를 내뿜으며 쿵! 하고 쓰러졌다. 두꺼운 갑옷이 돌계단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 때문에 귀가 멍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즐레이가 그 병사와 싸우고 있는 동안 다른 두 병사도 그를 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즐레이가 병사의 몸에서 갓 뽑아낸, 피로 얼룩진 칼날에 그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높이 치켜든 병사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핫!" 이즐레이는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그대로 칼을 자신의 어깨 위로 던졌다. 칼날은 날아가 그 병사의 도끼날이 이즐레이를 향해 내려쳐지기 직전에, 그의 이마에 박혔다. 그 충격으로 도끼를 든 팔이 조금 흔들렸고, 도끼날은 이즐레이의 머리가 아닌 그의 손 바로 옆의 돌바닥을 파고들었다. 이즐레이는 얼른 손을 뻗어 그 병사의 이마에 꽂힌 칼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손이 칼의 손잡이에 닿는 찰나, 날카로운 통증의 그의 오른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좁고 날카로운 창날이 그의 어깨에 박혔다가, 무지막지하게 빼내어졌다. "이제야 잡았군, 이 살인자!" 마지막 병사가 피가 뚝뚝 흐르는 창을 거머쥔 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즐레이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칼에서 오른손을 떼어 힘없이 늘어뜨리고는 왼손으로 어깨의 상처를 감싸 안았다. 금방 손을 적시는 뜨거운 피로 보아, 상처의 깊이는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하젠 영주님을 대신해서 내가 죽여 주마!" 병사는 소리치며 창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나 의외의 공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거나 받아라!" 로이가 소리치며, 이즐레이가 벗어 놓은 무거운 투구를 들어 병사의 뒷통수를 향해 던졌던 것이다. 로이의 외침에 놀란 병사는 엉겁결에 뒤를 돌아 보았다가, 마침 날아온 투구에 안중을 맞고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이즈! 괜찮아요?" 로이가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내려와 이즐르에를 부축하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로이의 부축을 거절하며, 자기 힘으로 일어섰다. 물론 자기 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은 열었어?" "예! 그런데 이렇게 피가 많이 나서..." "괜찮아... 어서 들어가자!" 계단 아래에서는 벌써 왁자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다른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로이와 이즐레이는 서둘러 무거운 철문을 열고, 켈리가 갇혀 있는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철컹!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놀라움에 가득 찬 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로이? 이즈? 여긴 어떻게...?" 그러나 로이와 이즐레이도 놀라운 건 마찬가지였다. 이즐레이가 할 말을 못 찾는 동안, 놀라움에 찬 로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켈리... 여기선 인질이 그런 옷 입어요?" 로이와 이즐레이는 물론 여기서 켈리를 만나리라고 기대했었지만, 결코 날씬한 허리의 곡선이 드러나는 하얀 비단 드레스를 입고,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빛나는 금발 위에 보석이 박힌 머리띠까지 한 켈리를 만나리라는 예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로이에게는 켈리가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아름 답고 위엄있는 공주처럼 보일 정도였다. "야아, 말도 마라! 얼마나 걸리적거리는지 몰라. 그보다, 이즈! 피 좀 봐! 많이 다쳤어?" "아... 아냐. 별거 아냐. 그보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네녀석은 몸에 뭐 숨겨놓고 다니냐? 왜 그렇게 항상 빼는거야? 어디 좀 봐! 지혈해야 되겠는데." "...그렇게 차려입어도 말투는 변하는 게 없군." 이즐레이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켈리는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실탁 위에 놓여 있던 값비싼 찻잔과 술잔들을 다 깨 가면서 식탁보를 짖어 이즐레이의 상처를 순식간에 지혈했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쾌활한 태도로 말했다. "그럼 밖에서 그 난리 치던 게 너희들이었냐? 난 또 저 사람들이 연습하는 건줄 알았지. 왠일이야?" "...왠일이냐니? 우린 켈리 구하러 온 거라고요!" 로이가 한심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러나 켈리는 태연하게, 곁에 놓인 과자를 씹어먹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봐, 열흘... 아니 앞으로 7일만 더 기다리면 알아서 석방해 줄 텐데 뭐가 걱정이야? 그러지 말고 우리 다같이 여기서 인질 노릇이나 할까? 대우도 괜찮고 식사도 아주 맛있다고." '아... 그래... 켈리는 아직 상황을 모르지...' 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상황이 변했어요... 랜스가 배신했어요. 어서 도망쳐야 해요." "뭐?" 켈리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이라도 설명을 요구할 기세였다. 그러나 이즐레이가 그 전에, 그녀의 팔을 다급히 잡아당기며 말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어!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 켈리는 붙잡고 늘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즐레이와 로이의 표정을 살피더니, 상황이 급박하다는 것을 대충 이해한 것 같았다. "좋아. 나가서 얘기 듣자고!" 켈리는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긴 치마자락에 이즐레이가 흘린 피가 묻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가 철문을 열었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저기 있다! 어서 잡아라!" 그들이 문에서 나오자마자, 마침 계단을 올라오고 있던 병사들의 눈에 띄인 것이다. 병사들은 신이 나서 고함을 지르며, 창과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왔다. 이즐레이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왼손으로 칼을 잡고는, 그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즐레이의 칼과 한 병사의 도끼가 부딪 쳤다. 그러나 왼손으로 싸우고 있는 이즐레이는, 로이가 보기에도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고 있지 못했다. 잘못하다가는 금방 병사들에게 밀릴 것 같았다. 게다가 어깨에서는 아직도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으니... "흥, 나도 있다는 걸 잊었나본데!" 켈리가 살기등등하게 외치며 이즐레이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죽은 병사에게서 빼앗은 창이 들려 있었다. 그 창에서 흐르는 피가 그녀의 하얀 손과 깨끗한 소매를 적시고 있었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 했다. 그녀는 이즐레이의 측면에서 도끼를 내리치려 하는 한 병사의 목에 창을 꽂아넣었다. 창은 투구와 갑옷 사이의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반대쪽 목을 뚫고 나왔다. 병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짐과 동시에, 그녀는 힘있게 창을 뽑아냈다. "잊, 넌 안되겠어! 상처가 너무 깊어! 여긴 내가 맡을테니까, 어서 피해!" 그러나 켈리의 걱정스러운 외침에, 이즈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하! 이 정도는 다친 것도 아니라고!" 그는 이렇게 외치면서,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눈 깜짝할 사이에 칼을 놀려 자신과 대적하고 있던 병사의 오른손을 잘라 버렸다. 갑옷이 보호해 주지 않는 관절 부분을 잘랐으므로, 그의 팔목은 아무 어려움 없이 쓱 잘려나가 버렸다. "으아악!" 그의 비명이 탑 전체를 가득 채웠고, 그는 사색이 되어 이즐레이의 앞에서 물러났다. 이즐레이는 그것 보라는 듯 켈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켈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좋은 대로..." 그러나 로이는 불안한 심정으로 그들의 싸움을 자켜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잘 싸운다 해도, 이렇게 좁은 계단에서 이즐레이와 켈리의 빠른 몸놀림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병사들은 하염없이 올라올 텐데, 이즐레이는 부상을 당했고 켈리는 불편한 옷차림 때문에 제대로 씨우지 못하고 있었다. '...오래 끌 수 없어, 이 싸움.'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싸울 수 없다면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바로 몇 발짝 위쪽에 난, 길고 좁은 창문이 보였다. 좁다고는 하지만 이즐레이나 켈리 정도의 체격이라면 어려움 없이 한 사람씩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였다. '...좋았어!' (계속) 로이는 얼른 달려가 그 창문으로 고개를 빼고, 밑을 내려다 보았다. 아쉽게도 호수나 정원같은 곳이 아닌, 그냥 흙바닥이었고, 높이도 로이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서 떨어지면 즉사하기에 제격이었다. '하지만 뭐... 담쟁이가 이렇게 무성하니까 잘만 타고 내려가면...' "핫!" 켈리가 마지막 남은 병사를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그의 갑옷의 어깨 이음새 부분에 깊게 박혔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쓰러지지 않고, 비틀 거리며 그녀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켈리는 재빨리 몸을 피했으나, 창끝은 그녀의 발목에 깊숙히 박히고 말았다. "윽...!" 켈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향해 창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의 창날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에, 이즐레이가 그의 배를 향해 칼을 찔러넣었다. "크윽!" 칼은 갑옷을 부수었고, 칼날과 함께 부서진 갑옷의 파편이 그의 배를 파고들었다. 그 병사는 피를 토하며 이즐레이를 노려보더니,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나 덕분에 이즐레이의 칼날도 이가 빠져 버렸다. 그리고 갑옷이 부서진 반동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그의 상처도 더 벌어졌다. "이... 이런...!" 이즐레이는 상을 찌푸리며 어깨를 움켜쥐고, 돌벽에 기대었다. 켈리가 얼른 부축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몰랐다. "이즈...! 정신 차리라고! 그러게 피해 있으라고 했는데 기어이 사람 말을 안 듣고...!" 켈리가 나무라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런 잔소리를 할 시간도 충분하지 않았다. 계단을 타고 다시 한 무리의 병사들이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이거 참, 곤란하게 됐네..." 켈리는 당황하며 이즐레이와 로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은 다리를 다쳤고 이즐레이는 몸도 잘 가누지 못하는 상황이니 도망친다 해도 성공할 가망이 없었고, 그렇다고 맞서 싸우는 것은 생각도 할 수도 없었다. "...운이 다라 주지 않는군." 이즐레이는 이를 악물고 몸을 가누며, 칼을 고쳐 잡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다시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켈리도 하는 수 없이 다시 창을 들었다. 어차피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잠깐!" 갑자기 로이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뭐야?" "켈리, 그런 치마 한 벌 더 있어요?" "...저 방에 들어가면 많지만... 왜?" "잘됐다. 나 한 벌만 빌려 줘요!" 켈리와 이즐레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이즐레이가 난감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로이, 저게 비싼 옷은 분명한 것 같긴 하다만..." "그게 아니고요, 내가 저걸 입고 병사들을 유인할 테니까, 켈리와 이즈는 그 사이에 도망치라고요!" "...!" 켈리와 이즐레이의 표정에 이해의 빛이 스치자, 로이는 더욱 신이 나서 빠른 말투로 지껄였다. "어차피 저들이 원하는 건 켈리 아녜요? 그러니까 내가 그 옷을 입고 저 창문으로 도망칠께요. 그래서 지붕 위에서 왔다갔다 하고 있으면, 모두 켈리나 이즈가 도망치는 데에는 신경도 안 쓸 거 아녜요? 그리고 대충 시간을 끌고 난 다음, 나도 도망치면 되고..." "하지만...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 켈리가 걱정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로이는 성공을 확신하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띄우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난 다친 데도 없고, 더군다나 딴 건 몰라도 도망치는 데에는 자신 있으니까!" 로이는 콩닥콩닥 계단을 달려올라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망토와 것옷을 벗어던지고 켈리의 긴 드레스 중 한 벌을 뒤집어썼다. 켈리와 키가 엇비슷한 로이에게 얼추 길이가 맞기는 했으나, 워낙 말라깽이인지라 셔츠 위에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헐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로이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검은 망토를 켈리에게 집어던지고, 한족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 망토 좀 잘 보관해 줘요! 친구가 준 선물이니까!" 그리고는 아까 봐 두었던 계단의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자... 우리는 어디에 숨지?" 켈리가 다친 다리를 절룩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즐레이는 함께 두리번거리다가, 쓰러진 병사들의 시체 더미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암살자들 속담 중에 멋진 게 하나 있지. 사람은 사람들 틈에 숨는 게 제격이라는..." --------------------------------------------------------------------- "아니, 영주님? 어쩐 일로 돌아오셨습니까?" 성문을 향해 미친 듯이 말을 달리는 하젠을 보고 집사가 놀라서 물었다. 그러나 하젠은 일일이 대답을 해 줄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포로는?" "...?" "어서 서쪽 탑을 봉쇄해. 그리고 병력을 보내! 여우같은 에스테이아 떨거지들...!" 하젠은 이를 갈며 명령을 내리고, 성 본채를 향해 말을 달렸다. 길리어드 성에서 마침 레일라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어쩔 뻔 했던가. 그는 출신도 잘 모르는 기사의 말에, 소년처럼 흥분한 자신에게 화가 나 참을 수가 없었다. 단지 그가 상처를 입었고, 또 그림자 기사단의 검은 갑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쑥맥같이 그의 말을 믿었다니! 랜스 경이 그렇게 쉽게 동료를 바렸다는 데에 의아해 하면서,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손을 쓸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니! '내가 셀더스에 보낸 건 아네트와 윌러야...' 레일라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까! 아니, 비웃음을 당해도, 처벌을 받는다 해도 그는 할 말이 없었다. 그따위 잔꾀에 넘어가 적을 자신의 성에 들이다니! "영주님...!" 한 병사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에게 고했다. "어윈 경께서 감쪽같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리고 의원과..." "당연하지. 그 놈은 어윈 경도 뭣도 아냐! 에스테이아의 졸개란 말이다!" "...예?" 보고를 올린 병사와, 그 주위에서 그의 말을 들은 모든 병사와 기사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하젠은 자신에 대한 분을 주체할 길이 없어 부하들에게 목청껏 소리쳤다. "포로를, 서쪽 탑에 감금된 여자를 구출하러 온 거란 말이다. 어서 서쪽 탑의 병력을 늘려라! 절대로 포로를 넘겨줄 수 없어!" 그는 말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성 안으로 들어가 서쪽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향했다. "영주님! 서쪽 탑의 포로가 탈출을...!" 그 계단에서 팔 한 쪽을 잃은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내려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그러나 하젠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를 구출하러 자신의 성까지 밀고 들어올 배짱이라면, 만만한 녀석은 아닐 터. "성 안의 모든 병력을 동원해서 포로를 잡아라. 죽여도 좋다!" 하젠은 차가운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계단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죽여도 좋다. 그가 좋아하는 말은 아니었다. 특히 다른 사람이 아니라 서쪽 탑의 포로, 켈레브리스한테라면. 그러나 이미 그녀는 에스테이아와 상관 없는 무고한 포로가 아니었다. 랜스 경은 그녀를 버리는 척 하면서 시이드의 군사를 움직였고,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사람을 움직였다. '다 짜여진 각본이었군, 켈레브리스, 그리고 랜스 경. 훌륭해. 아주 존경스러워!'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켈리의 방의 문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녀와 그녀를 구하러 왔다는 에스테이아의 졸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휑하니 열려진 방문과 텅 빈 방, 그리고 병사들의 시신만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로 도망친 거야?" 하젠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주위를 살폈다. 그의 뒤를 따라오던 기사들이 얼른 켈리의 방으로 들어가 옷장과 침대를 헤집으며 그녀를 찾았 으나, 그녀도 그녀를 구하러 온 자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도망갈 구멍이 없는데..." 하젠은 귀신에게 홀린 듯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의 중얼거림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밖에서 병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저기다! 포로가 탈출한다! 잡아라!" 하젠은 당장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다. 오래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성벽에 바짝 붙은 채, 담쟁이 덩쿨을 움켜쥐고 하얀 치마자락을 날리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벽에 꼭 붙은 채, 성의 울퉁불퉁한 굴곡에 발을 놓으며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하젠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재주도 많은 여자군." "따라갈까요?" 한 병사가 금방이라도 창밖으로 뛰어나갈 듯이 물었다. 그러나 하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궁수들에게 활을 쏘라고 해." "예? 그러나...!" 한 기사가 당황한 듯 반박하며 소리쳤다. 하젠의 켈리에 대한 태도를 잘 아는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비록 포로와 성주 사이였지만, 그토록 허물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활을 쏘라니... "영주님, 저희가 사로잡을 수..." "그만 두라니까! 어차피 사로잡아도 베어야 할 포로다. 그러니 생포할 필요 없어! 이봐라! 모든 궁수들은 포로를 향해 사격하라!" 하젠은 자신의 마음을 감추려는 듯, 오히려 그 기사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하젠의 명령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궁수들은 활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젠은 더이상 구경하기 싫은 듯, 얼른 창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제길, 이러기 싫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차라리 그가 오기 전에 그녀가 탈출해 버렸더라면, 이런 씁쓸한 기분은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포로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그 명령을 후회하는 기분이라니... 그는 얼굴에 자신의 감정이 드러났을까봐, 잔뜩 투구를 눌러 쓰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이만하면 드러날 증거는 다 드러난 셈인데... 난 아직도 그녀를 믿고 싶으니...' 언제나 자신이 사일러스 전하는 물론이고 레일라나 스트라본 전하 보다 너무나 마음이 약하다고 느끼는 하젠이었지만, 오늘만큼 그것을 심하게 즈껴 본 적은 없었다. 에스테이아의 졸개에게 활을 소라는 명령을 내리는 데에도 이만큼 마음이 착찹해야 하다니. 이것은 그 상대가 켈레브리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계속) 로이는 성벽에 바짝 붙어 땅을 향해 내려가고 있었다. 이런 일은 전직이 도둑이었던 로이에게는 낯선 경험이 아니었으나, 치렁치렁한 켈리의 치마때문에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치마자락이 밟혀 미끌어질 뻔한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참 용해. 어떻게 이런 걸 입고 살까...' 설상가상으로, 발각되었는지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저기다! 포로가 탈출한다! 잡아라!" 그리고 얼마 안 지나, 그를 향해 화살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어떤 화살은 턱도 없이 먼 곳에 가서 박혔지만, 어떤 화살들은 등줄기가 오싹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와서 박혔다. 최악의 경우에는 로이의 바로 머리 위에 와서 박히기도 했다. 흘끗 뒤돌아 보니, 바닥에서 서너 명의 궁수들이 로이를 향해 시위를 당기고 있는 중이었다. 곧이어 탑의 옥상 위에서도 궁수들의 모습이 나타났고, 화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화살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로이의 뺨을 스치고 가, 피가 흘러내렸다. '으으... 안돼겠어... 어디 가서 숨어야지!' 그러나 숨을 데가 도 어디 있단 말인가? 사방이 돌로 된, 확 트인 성벽에서. 그러나 두리번거리는 동안에도 계속 화살들은 날아오고 있었다. 게다가 궁수들도 점점 더 모여드는지, 화살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얼마 못 가 활에 맞을 것이 분명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로이는 오른팔의 손목을 담쟁이 덩굴 속에 휘저어 감았다. 그리고는 눈을 딱 감은 채, 담쟁이 덩굴을 곡 붙들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성벽의 불쑥 튀어나온 부분을 간신히 디디고 있던 발을 박찼다. 로이의 몸은 마치 고무 공이 튕겨져 나가듯 성벽에서 떨어져 나가,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야! 떨어진다!" "화살에 맞았나?" 병사들의 외침이 거센 바람 소리와 함께, 로이의 귀에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젠도 그 소리를 들었다. 그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쏜살같이 성에서 튀어나와 포로의 모습을 찾았다. 그러나 그가 하얗게 너울거리는 스카프같은 포로의 모습을 찾았을 때, 그 포로는 손목에 감고 있던 담쟁이 넝쿨의 길이가 다해, 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중이었다. "속임수야! 어서 다시 활을 쏴라!" 하젠이 냉정하게 명령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춤거리며 활을 들자, 포로는 더욱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목에 담쟁이 덩쿨을 감은 채로 마구 왼쪽으로 기어가더니, 또다시 벽을 박차고 튕겨져나와 이번에는 마치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대체 뭐 하는거야...?" 하젠은 어이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화살을 피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세상에... 난 기억할 수 없을 때부터 전장에서 자랐지만 화살을 피하려고 저러는 건 처음 보는데." 하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 안에서 한 떼의, 말을 탄 병력이 달려나왔다. 높은 곳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긴 창을 든, 하얀 갑옷과 하얀 망토로 무장한 수도 방위대의 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로이가 있는 성벽 밑에 모여, 창으로 마구 그의 발밑을 휘젓기도 하고(그러나 길이가 조금 못 미쳤다.) 창을 던지기도 했다. 로이는 아슬아슬하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발 밑을 내려다 보았다. 순간, 한 병사가 자신의 새하얀 망토를 잡아뜯었다. 그 밑에는 새카만 망토, 로이가 제피로스에게서 받은 것이 분명한 검은 망토가 있었다. 로이는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이번에는 팔목에 담쟁이 덩굴도 감지 않고 그 기사를 향해 뒤어내렸다. 다른 병사들이 대처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기사는 능숙한 몸짓으로, 한쪽 팔만을 이용해 뛰어내린 로이를 받았다. 얼굴을 가린 투구에서 이즐레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았어, 로이 아가씨!" 그리고 그 말은 닫힌 성문을 향해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저 놈을 잡아라! 한패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병사들은 소리치며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창을 던져 대고 화살을 쏘아 댔다. 단 한 명의 기사만이 엉뚱한 곳으로 창을 던졌다. 그의 창은 긴 곡선을 그리며 성문을 지탱하는 쇠사슬의 도르래로 날아가, 그 도르래를 고정해 놓은 벽돌을 맞추었다. 그 벽돌은 충격을 이기지 못해 깨어지면서 튕겨져 나갔고, 성문은 무서운 속력 으로 성호(城浩) 위로 내려앉았다. 그리고 로이와 이즐레이가 탄 말은 여유 있게 그 다리를 지나, 하젠의 성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창을 던져 성문을 연 기사가 바짝 따랐다. "탈출한다! 잡아라!" 그들은 드라크노움 기슭으 숲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젠의 병사들도 말을 몰아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회색 짐승이 튀어나와, 말을 향해 짖어 대기 시작했다. "컹컹! 컹!" 말들은 혼비백산했다. 심한 경우 주인들 덜어뜨리거나 주인의 의사 와는 관계 없이 반대 방향으로 도망치려고 했고, 좀 의젓한 말들도 앞발을 높이 치켜올리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간신히 그들의 말들을 진정시켰을 때에는, 이미 도망친 포로와 그 일행도 회색 늑대도 사라진 후였다. "...역시 놓친건가..." 하젠은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기분이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래... 어쩌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지도 모르겠군...' "어떻게 할까요, 영주님? 수배령을 내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차피 모두가 에스테이아와의 전쟁에 주력 해야 할 시기. 하찮은 포로 한 명 도망쳤다고 일을 크게 만들 수야 없지... 모든 수도 방위대에게 알려라. 이번 일은 깨끗이 잊고, 아무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을테니, 어서 길리어드 성과 수도의 외곽성(外廓城)으로 가서 에스테 이아 군의 방어에 주력하도록!" --------------------------------------------------------------------- "이봐, 좀 쉬었다 가자!" 숲길을 한참 달려 시냇가에 다다르자, 켈리가 이렇게 소리치며 투구를 벗어던졌다. 금발이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앞서 가던 이즐레이도 말을 세우며 투구를 벗었다. 로이는 그의 얼굴이 좀 창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먹을 것도 없는데 목이나 축이고 가자고.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든 아트웰을 빠져나가야 하겠는데... 아야!" 켈리는 말에서 내리던 중 다리의 상처를 건드렸는지, 인상을 심하게 찌푸렸다. 이즐레이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괜찮아, 켈리?" "물론... 잠시 다리를 다쳤다는 걸 잊었어. 이렇게 덤벙댄다니까. 그보다도 네 얼굴이 말이 아닌데... 상처에서 계속 피가 나는 것 아냐?" "...난 괜찮아."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이리 내려와서 갑옷 좀 벗어 봐! 이좀의 아트웰 인들은 왜 이렇게 무식한 갑옷을 덮어 쓰고 다니는지..." 켈리는 절룩거리면서도, 선뜻 이즐레이에게로 다가와 갑옷을 벗는 것을 도와주었다. 벌써 어깨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의 허리께까지를 흥건히 물들이고, 찐득하게 굳어 있었다. 켈리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 정도면 말을 하지!" "...별로 아프지 않아. 신경쓸 필요 없어." "...난 모르겠다." 켈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도리질을 했다. 그녀는 무거운 겁옷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그 아래로 아까 전에 입고 있던 하얗고 얇은 비단 드레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 안으로 함부로 쑤셔 넣었으므로 마구 구겨진 데다 군데군데 찢겨지기까지 했고, 정성들여 금실로 수를 놓은 부분도 마구 풀려 있었다. 그러나 켈리는 개의치 않고 기지개를 쫙 폈다. 그 모습이 마치 햇빛 속에서 날개를 파닥이는 하얀 새처럼 보였다. "야아, 이제 살 것 같군! 정말이지 저 갑옷 너무 무겁다. 랜스 녀석, 내게 이 고생을 시키다니, 정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가만 두지 않으면요...?" 로이가 켈리의 드레스를 벗어던지며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글쎄... 죽도록 패줄까?" "켈리..." "장난 아냐!" 켈리의 말투는 의외로 심각했다. "정말이지, 나 너무 기분 나빠. 저를 믿고 인질까지 돼 주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난 죽거나 말거나 상관도 없다 이거지? 그런 녀석 과는 죽어도 함께 여행할 수 없어. 만나는 즉시, 따귀를 한 대 때려 주고, 그리고 영원히 안녕이야!" "..." 로이는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었다. 그 자신도 랜스가 나빴다고 믿고 있었지만, 막상 켈리의 입에서 이렇게 듣고 보니 다른 걱정이 마음을 비집고 들어왔다. 랜스와 헤어진다. 그럼 팀은 깨지는 건가?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로크 페울로니는 계속 찾으러 다니게 될 것인가? 그러나 켈리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로이 자신도 앞으로 랜스와 여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내가... 옷을 좀 훔쳐와야겠어요." 하고 로이는 딴소리를 했다. "이런 차림으로 나다닐 수는 없잖아요? 난 기사의 시종 차림, 켈리는 공주님 같은 드레스, 그리고 이즈 옷은 피투성이... 가까운 농가에라도 가서 몇 벌 빌려 오죠, 뭐." "좋은 생각이야!" 이즈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켈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럼, 좀 부탁해, 로이! 우린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께." "푹 쉬어요. 상처도 있는데." 로이는 씩 웃고는, 숲의 그늘 사이로 유유히 사라졌다. 밝은 햇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부서지듯 비쳐드는 숲 속에는 켈리와 이이즐레이, 그리고 늑대 펠히스만이 남아 있었다. 시냇물을 핥아먹던 펠히스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물 속으로 풍덩 몸을 던졌다. 그 모습을 본 켈리도, 옷을 입은 채 물 솔으로 뛰어들었다. "야아! 정말 시원한데! 이즈도 들어오지 그래?" 켈리의 머리가 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며 소리쳤다. 물은 별로 깊지 않아서, 가장 깊은 곳이 그녀의 허리에 미칠 정도였다. 푹 젖은 켈리의 옷이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그녀의 몸의 일부처럼 보였다. 하얀 살결과 하얀 옷, 그리고 맑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금발이 마치 그녀를 거품 속에서 갓 태어난 물의 정령처럼 보이게 했다. 그녀의 눈은 나뭇잎 가이로 비쳐드는 하늘처럼 새파란 색이었다. 이즐레이는 미소를 지으며, 피에 찌든 검은 셔츠를 벗었다. 그리고 바위에 걸터앉은 채 상처에 물을 축였다. 다행히 피는 멎어 가고 있었으나, 차가운 물의 감촉이 상처를 욱씬거리게 만들었다. "어디 봐! 정말 심한데." 어느 새 왔는지 켈리가 그의 곁에 걸터앉아, 차가운 물을 그의 어깨에 뿌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가 아프건 말건 인정 사정 없이 상처를 닦아내더니, 자신의 소매를 북 득ㄷ어서 붕대처럼 그의 상처에 감았다. 덕분에 구겨진데다 물어 젖어 엉망인 드레스는 한 쪽 소매까지 없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럴 필요 없는데." 하고 이즐레이가 머뭇거리며 말하자, 켈리는 발끈 화를 냈다. "정말 너무 하는군. 그냥 고맙다고 하면 안 돼?" "...고마워." 이즐레이가 어색하게 말하자, 켈리는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었다. "뭐, 별로. 하지만 내가 더 고마운 걸." "...?" "구하러 와 줬잖아. 너도 로이도, 정말 고마워. 랜스가 배신해서 기분이 장난 아니게 나쁘지만, 너희들이 구하러 와 준 생각을 하면 금방 다시 좋아져." "...나는 로이가 부탁한 대로 해 주었을 뿐이야." 이즐레이는 붉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랜스는... 랜스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 녀석... 동료를 쉽게 버리거나 할 녀석이 아니거든..." "그런 거 내가 알 바 아냐! 기분 같아서는 당장 모가지를 분질러 주고 싶지만, 그래도 옛 정이 있으니까 참는 것 뿐이야." 켈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벌한 말을 내뱉으며, 어린 아이처럼 펠히스와 물장난을 쳤다. "이즈, 너 랜스와 친구도 아니라고 하더니만, 이럴 때에는 제법 편들어 주기도 하는군 그래?" "편 들어주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냐. 랜스 녀석, 남한테 잘못을 돌리질 못해서 혼자 고생하는 타입이야. 답답한 친구지. 그러니... 네가 좀 이해해 줬으면 해서." "...랜스와는 언제부터 알았길래 그렇게 잘 알지?" 켈리는 지나가는 말처럼 물으며 이즈를 흘끗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파란 눈은 잠시나마 날카롭게 빛났다. 이즐레이는 그 질문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륀 카하르(북쪽 평원) 지방에서... 용병 노릇을 했을 때에. 난 열 일곱이었고... 녀석은 열 아홉이었지. 용병대에서는 내가 반 년 선배였지만." (계속) "...랜스가 용병이었어? 그건 몰랐는데." "잠시동안 용병이었지. 한 2년 정도였던가... 하지만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게 어디 그 기사 양반한테 맞기나 하겠어. 결국 때려치우고 몬스터 헌터가 됐다고 하더군. 나는 이미 그 때 용명대를 뒤쳐나와 살인청부업자로 활동하던 중이었으니까... 풍문으로만 들었지. 뭐, 어치피 녀석은 실력을 키우느니 어쩌느니 하고 용병이 된 녀석이었으니... 돈 벌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다른 놈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지." "넌 왜 암살자가 됐는데?" "그게 더 돈이 잘 벌리니까. 게다가 용병보다 깨끗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고... 어차피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거야 그게 그거 아니겠어?" 이즐레이는 좀 꼬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켈리는 의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기분은 맞추기 위해 연기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맞아." 이즐레이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데." "하지만 네 말이 맞잖아, 이즈. 그게 그거 아냐? 어차피 돈 받고 누굴 죽이는 거... 조직적인 군대에서 돈 받고 사람 죽이면 괜찮고, 혼자서 의뢰 받아 그러면 안되고... 웃기는 얘기 아냐?" 켈리는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위엄 비슷한 것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물장난을 멈추고 이즐레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이란 건 정말 웃기지. 일단 여럿이 모이기만 하면 못 하는 것이 없어. 파리 한 마리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도, 군대에 징집시켜 놓으면 같은 사람들을 잘만 죽이거든. 다른 종족이라는 이유로, 혹은 같은 인간족임 에도 불구하고 다른 왕을 모신다는 이유로, 그들은 아픔도 느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그들은 죽음의 공포도 느끼지 않고, 그들에게는 집에서 아버지나 아들을 기다리는 처자식이나 노모(老母)도 없을 것이라고 믿지..." 잠시 중얼거리듯 저껄이던 켈리는, 갑자기 쏟아져 나온 그녀의 말에 놀란 이즐레이의 표정을 보고는, 쑥스러워졌는지 말을 돌렸다. "하지만 넌... 단지 돈 때문 뿐은 아닌 것 같은데...?" 켈리의 물음에 이즐레이는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켈리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붉은 눈을 가리켰다. "미안하지만 틀렸어. 나한텐 선택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거든. 이런 눈을 가지고 뭘 할 수 있었겠어? 진짜 드래크로니안들은 이정도로 눈이 빨간 놈은 도리어 없다고 하더군. 그런데 나는 피가 이상하게 섞였는지... 어쨌든 이 모양이 되어 버렸어. 드래크로니안이 붉은 눈을 가졌다는 걸 모르는 촌 사람들도 내 눈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해. 진짜 드래크로니안을 보면 인간과 구별도 못할 놈들이... 날 괴물 취급하는 거지. 어머니는 괴물에다, 아버지는 반역자라... 누가 봐도 환상적인 혈통 아니겠어. 물론 용병대에 있을 때에는 그걸 들먹이면서 꽤나 자랑을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반역자라고?" 켈리의 물음에 이즐레이는 실수했다는 표정으로 얼른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으나, 뭔가 숨기는 것이 분명한 어색한 미소였다. "요즘은 반역자가 넘쳐 흐르는 세상 아니겠어... 어딜 가도 반역자 투성이지. 게다가 제 정신을 가진 남자가 어디 드래크로니안 여자랑 결혼을 했겠냐. 인류의 적과..." "글쎄... 그건 모르지." 켈리는 한숨을 쉬며 물에 젖은 금발을 쓸어넘겼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으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이즐레이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는 그냥 그대로 말 없이 앉아 있었고, 잠시 후 켈리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 바나크, 바나크 데인 에인, 바나크 데인 에인! (오, 어리석음이여,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그가 알기로는 그 귀절은 유명한 고대어의 싯귀에 나오는 것이었다. 시엘레이스 여왕의 죽음과 함께 로데인이 멸망한 후, 한 로데인 출신의 시인이 방랑하면서 지었다는 수많은 장시(長詩)들 중 하나. 그 시인... 이름은 잊혀지고 '슬픈 노래의 주인'이라는 페르시드로스라고만 알려잔 그 자는 이즐레이와 같은, 인간과 드래크로니안의 혼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만큼은 행복하게 보냈다. 아직 멸망하지 않은 로데인, 그 수도 라벤데일, '명에로운 도시(The Honored Citadel)'에서, 평범한 교육을 받으며 보통 드래크로니안이나 인간들처럼 사랑에 바지면서,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미록 그의 인생의 1/3일 망정 그는 그렇게 살았으니, 겨우 열 네 살 때에 때 모든 평범한 행복이 박살난 이즐레이보다는 행복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켈리는 가만히 물살을 일으키며 웅얼거리듯 싯귀를 읊었다. 얼핏 보면 물장난을 치는 듯 보였으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숙연함이 배어 있어서 장나스런 느낌은 주지 않았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는 시는 이즐레 이도 아는, 페르시드로스의 또다른 시였다. "오 라베인, 이디나드 칼리엔, 트뤼아드 네신, 위르쿠드헨 하리스 아크로이나드, 이디나드 오레니 위르하룬루드, 슈게니 테이리나드 마루드, 니알 훼라 퀴드, 오 라베인 라베나드 칼리엔. 오 라베인, 칼리신헨 레이스, 레이신헨 레이스, 아시나드 레이스 데인 에인, 에디알 위르사르킨 이디나드, 드룬 시엘 헤이시엘리 레이나드, 케이뮈드셀라 데인 아스틸라, 오 라베인 시엘 데인 레이스. 오브리 데하인, 헤임가드 데인 프루크 렐 쿠아난 엘루이나드 하이드 에이로 데인 란 라야나드 엘뤼드 레이스헨 시엘, 게브레인 이디나드 오레니, 뤼아드론 아스텔 데인 에디알 오 라베인 엘뤼아드 라벤. 오 라베인, 알 로 라베인 이셀. 휘리엔 데인 아레이 시엘, 하이아디 시엘리나드 푸리나드, 에레시 데인 에디알 렐 이키드, 케이 에루 데인 란 렐 쿠아난 호디나드, 오 라베인 알 로 이핀 이셀. (오 찬미하라, 빛나는 승리, 적의 시신 위로 행진하는 당당한 전사들, 그들의 갑옷에 빛나는 보석들, 그 기나긴 유폐를 끝마치고 마침내 자태를 드러내는 전리품들, 오 영과스런 승리를 찬미하라. 오 찬미하라, 승자들의 군주, 왕들의 왕, 앞으로 모든 인간들을 다스릴 자, 그의 머리 위에서 빛나는 왕관, 아스틸라의 편애(偏愛)속에서 모든 별 위에 군림하는 저 왕성(王星), 오 왕의 별을 찬미하라. 그러나 기억하라, 제왕의 별 밑에 흐르는 피의 강, 그 강에서 뿜어져 나오는 독기(毒氣)와 원한의 악취 속에 빛나는 보석, 영원할 것 같던 왕괸의 위엄은 부식(腐植)하니 오 유한한 명예를 찬미하라. 오 찬미하라, 그대들이 찬미할 수 있을 때에. 마지막 빛을 발하며 멸해 가는 늙은 별의 운명, 피와 눈물의 강 속에는 왕관과 검의 잔재들이 침전하노니 오 노래할 수 있을 때 찬미하라.)" 이즐레이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는 그 시를 외지는 못했으나, 어린 시절을 기억을 되돌리기에는 충분했다. 드래크로니안이었던 그의 어머 니가 읊던 시. 켈리는 어떻게 아는 걸까? 그러나 그것으 중요하던가. 그는 처음 만나서부터 켈리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고, 사실 그것은 중요하지도 않았다. 둔갑한 마녀건 아트웰의 첩자건, 자신을 잡으려고 어느 원한에 사무친 귀족이 보낸 심복이건 그것이 무슨 상관일까... 반쯤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근를 바라보고 있는 이즐레이에게, 켈리는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물었다. "날 도와주지 않을래... 로크 페울로니를 찾고 싶어. 네가 살인 청부 업자 일을 계속하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 함께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가자..." "그런 것엔 관심 없어." 이즐레이는 딱딱한 표정을 가장하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표정 저편에서는 짙은 허무함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그런 것 믿지 않아... 고작 무기 네 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그것들이 인간의 마음을 바꿀 수 있나? 지나온 역사를 바꿀 수 있나? 사람 들이 잃은 것을... 내가 잃은 것을 되돌려 줄 수 있나? 사람들이, 세상이 내게서 빼앗아간 것을? ...그럴 수 없어, 켈레브리스. 그럴 수 없어. 네 개의 열쇠 같은 거... 모두 환상이야. 그런 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오히려 더 절망적인 세상으로 바꿀 뿐일 거야. 더이상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좋아질 수 있다는 거... 난 믿지 않아..." 이즐레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켈리를 향해 텅 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안... 난 겨우 이런 놈이야." "그럼 날 위해 그것들을 찾아 주지 않을래? 나와 로이를 위해!" 켈리는 집요하게 요구했다. 이즐레이는 잠시 그녀를 의아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신에 찬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넌 돈을 받고 고용되는 암살자 아냐? 그러니 내가 네게 합당한 보수를 지불한다면,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겠지. 약속해. 로크 페울로니를 찾는다면 네가 평생 바라는 것보다도 더 많은 보수를 줄 수 있어. 잠시 동안만 고생해 주면, 그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게 될 거야." "물론 그래도 상관 없지만... 너한테는 좋은 동료들이 있는데, 왜 나한테...?" 이즐레이의 물음에 켈리는 미소를 지었다. 해야 할 말이 많은 듯 보였으나, 그녀는 이렇게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너는 실력이 좋으니까. 나와 로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은 위험 천만한 길이거든." --------------------------------------------------------------------- 로이는 빠른 발로 달려 숲을 지나 인가(人家)로 향했다. 이미 중간에 한 농가에 들려 농부의 옷을 슬쩍 하고, 새하얗고 눈에 띄는 시종의 옷은 벗어 버린 후였다. 농부의 옷은 로이에게는 너무 컸지만, 소매와 바지단을 걷어 붙이니 워낙 허름한 옷이라 오히려 더 어울려 보였다. 가난한 농부의 아이들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은 어느 지방에서나 흔한 일이니까. 로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거리로 나와 빠른 걸음을 옮겼고, 그런 로이를 눈여겨 보는 사람도 없었다. 로이는 켈리의 구출 작전을 성공시킨 데 대해 무척 으쓱해져 있었다. '나도 이제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게 됐어!' 그 기분에 그는 날아가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자기는 아무것도 못하고 일행의 짐만 될 뿐이라는 생각에 시달려 왔었다. 아무리 낙천적인 로이라도 검술도 별볼일 없고 마법도 못 쓰고, 언제나 전투 중에는 남들 뒤에서 숨기만 하니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기야, 이디실의 주인이라고 판명되기 전까지는 그는 내세울 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좀도둑일 뿐이었으니. '하지만 이제 아니라고! 나도 얼마든지 도움이 될 수 있어!' 로이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그마한 여관들과 가게들이 즐비한 골목을 달려가는 로이의 발걸음이 날듯이 가벼웠다. (계속) 신이 나서 달리던 로이는 잠시 후에야 거리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거리는 이런 작은 변두리 마을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 마을들이 그러하듯이 활기찬 북적거림이 아니라, 어쩐지 불안한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는 시끄러움이었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떠들고 소근거리면서도 쫓기는 사람마냥 고개를 기웃거리기도 하고, 몹시 바쁜 일이라도 있는 듯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분위기는 이 마을 사람이 아닌 듯한, 여행자나 상인 차림의 이들에게 서 더욱 두드러졌다. '무슨 일이 있나...? 하긴, 분위기 어순선할수록 난 좋지, 뭐.'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호기심을 억누르며 가만히 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사방이 벙 뚫려서 그다지 외진 곳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여기 사람들이 이런 곳에까지 신경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주위를 살핀 다음, 왜 세워놨는지 모를 낮은 울타리를 훌쩍 넘 여관의 뒷마 당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제법 큰 배나무의 나뭇가지와 지붕을 있는 빨랫 줄에 로이의 손길을 기다리는 투숙객(投宿客)의 옷들이 가득 널려 있었다. '...잘 되는 여관인가본데. 오늘은 운이 좋군.' 로이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빨래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옷 하나를 잡아 채려는 순간, 로이의 코앞에 있는 여관의 뒷문이 덜그럭거 리는 것이 아닌가! 로이는 본능적으로, 말리려고 쌓아 놓은 짚더미 속으로 몸을 숨겼다. 로이의 예상대로, 마치 그의 뒤를 쫓듯이 여관의 둣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소녀가 나왔다. 여관의 종업원인지, 빤 옷가지들을 가득 담은 광주리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몹시도 화가 났는지, 문을 부술 듯이 발로 차서 쾅 닫고는 행군(行軍)하는 병사처럼 빨랫줄로 걸어왔다. 그녀의 뒤를 이어, 닫힌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농부 차림의 젊은이가 쫓아나왔다. 그 젊은이는 소녀의 팔을 잡더니, 뭐라고 달래기 시작했다. 로이는 그들의 대화를 엿듣기 위해 귀를 바짝 기울였다. "...후면 돌아 온다니까 그러네... 전쟁이 난다니 어쩔 수 없잖아..." "거짓말쟁이!" 소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빽 소리를 질렀다. "나하고 함께 있어 준다고 했잖아.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고 지켜 준다고 했잖아!" "곧 돌아올거야. 징집을 피할 도리는 없어. 큰 공을 세워서 멋진 선물을 가득 안고 돌아올테니까... 혹시 알아? 내가 개선 장군이 될지!" "개선 장군은 무슨 얼어죽을...! 영주의 소모품일 뿐이지 뭐. 게다가 왕을 상대로 어떻게 이긴다는 거야? 아트웰 같이 조그만 속국(屬國)이!" "그런 소리 하면 못써!" 하고 청년은 엄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진지했고, 긍지에 차 있었다. "아트웰은 조그만 속국이 아냐. 그리고 우리의 왕은 그따위 아클레 어가 아니라 길리어드에 계신 사일러스 전하라고! 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용사로써 나가는 거야!" "몰라, 난 그런 거 몰라! 하지만 왕의 군대는 끝이 없다는데 여기 사람들을 다 모아 봤자지, 뭐! 다들 죽으러 나가는 거야! 왕이고 영주고 다 거지같아. 당신도 마찬가지야! 나가서 죽든지 말든지 맘대로 해!" 소녀는 그 젊은 농부의 따귀를 힘차게 때렸다. 어찌나 소리가 크게 나는지, 아무 상관이 없는 로이도 엉겁결에 자기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니 그 청년은 두말 할 나위도 없이 비틀거리며 뺨을 감싸쥐었다. 소녀는 한 번 뒤돌아보지도 않고, 빨랫감은 내팽개쳐 놓고는 여관 안으로 뒤쳐들어가 버렸다. "이런...! 기, 기다려!" 청년도 한쪽 손으로 맞은 뺨을 감싼 채,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 들어갔다. '전쟁이라...' 로이의 마음은 착찹했다. 전쟁. 그도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 왔었다. 오르크 족과 싸운 용사들의 이야기, 용족을 몰아낸 영웅들의 이야기, 그리고 레젠디아의 인간족을 통일한 아클레어 2세와 그 아들 아클레 어 3세의 무용담... 그러나 그가 들은 것은 빛나는 갑옷과 승리의 명예, 용맹한 귀족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것은 기껏해야 전쟁의 십분의 일도 안 되는 부분일 터였다. '하지만 뭐...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어서 켈리와 이즈에게 옷이나 갖다주자...'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다시 사람이 오기 전에, 얼른 널린 옷들을 뒤져, 제법 마른 옷들을 찾아내었다. 이즐레이를 위해서 가장 큰 옷 한 벌과 얼굴을 가릴 수 있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그리고 켈리를 위해서는 치마를 훔치려 했지만, 도저히 키가 큰 켈리에게 맞는 것이 없을 것 같아 하는 수 ㅇ이 이즐레이의 옷과 비슷하지만 좀 더 작은 옷 하나를 훔쳤다. 그리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일 확인하고는 다시 담장을 넘어 유유히 여관을 떠났다. 옷을 한 아름 안고 가는 로이의 모습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경우에 마구 뒤어가면 당장 도둑이라는 의심을 받지만, 당당하게 걸어간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법이다. 사실 옷을 한아름 안고 길을 걸어야 하는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종종 일어나는 법이니까... 그래도 로이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지나가는 길에 부딪힌 뚱뚱한 상인에게서 지갑을 슬쩍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숲으로 들어와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로이는 비로소 달리기 시작했다. 아까의 대화를 엿듣느라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던 것이다. '징집이라... 이런 거로군...' 갑자기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서사시마다 나오는 수많은 병정들, 왕과 기사들이 탄 아름다운 말의 뒤를 따르는 수만개의 흙발, 그들이 하늘에 서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았을 리는 없지 않은가. 모두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영지에서 징집해 온 병사들이겠지. 강제로, 혹은 전쟁의 덧없는 환상에 빠뜨 려서. 그리고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로부터 떼어놓는다. 빛나는 승리 뒤에도 그들의 시체는 쌓여 있을텐데... 로이는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자신이 평민이면서도... '그 누나, 안됐어... 그다지 나이들어 보이지도 않는데... 나보다 서너 살 쯤 위일까... 전쟁의 위협만 아니었다면, 그 형이랑 행복하게 잘 살았을 텐데... 이제 몇 십년동안 걱정만 하겠지. 그리고 그가 죽는다면...' 로이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 누나, 그러고 보니... 에밀리아 누나를 닮았어... 시지리스에선 참 잘 놀았었는데... 지금 어디 있을까? 무사하겠지?' 시실 에밀리아와 그 아버지에 대해서, 로이는 그다지 걱정을 하지 않았다. 켄윌에서,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이 남쪽으로 떠났더라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로이는 그 소식을 들은 후 그 사람들이 에밀리아 모녀라고 굳게 믿고, 그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거나 하는 재수없는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담지도 않고 있었다. 로이는 말은 물론 생각마저도 씨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순박한 어부의 아들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살아 있기나 한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로이는 이제 생각보다 사람이 쉽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휘두르는 칼날에 그 사람의 인생이 끝나고, 그를 아끼던 사람들의 얼굴은 일그러지는 것이다. 갑자기 날카로운 가책이 로이의 미음 깊숙한 곳을 찔러 왔다. 그가 죽인 사람들, 아니면 그가 곁에서 도움으로써 랜스나 켈리, 이즐레이가 죽이도록 한 사람들 ... 그들 모두에게 어린 아이들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터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로이가 울었듯이 그 아이들도 울고, 청년이 떠나는 것을 보고 소녀가 울듯이 그 아내와 애인들도 울었겠지... "로이! 늦었잖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켈리가 소리쳤다. 이즐레이는 이미 물 속에서 나와, 나무 밑둥에 등을 기대고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의 안색은 여전히 좋지 않았으나, 아까보다는 많이 활기있어 보였고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도 멎은 것 같았다. "죄송해요! 좀 늦었죠!" 로이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감춘 채 배시시 웃으며 훔쳐온 옷가지를 풀어놓았다. "이건 이즈 옷, 이건 켈리 옷..." "고마워, 수고했어!" 켈리는 당장 물 속에서 튀어나와, 물어 잠겨 차가워진 손으로 옷가 지들을 나뀌챘다. 아닌 게 아니라 푹 젖은 채로 있기에는 좀 추운 날씨였다. 게다가 해도 서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하고 있었으니. 그녀는 꽤 추웠는 듯, 옷을 손에 넣기가 무섭게 수풀 뒤로 숨어들어 마른 옷으로 갈아 입었다. 로이가 가져온 옷은 소매가 좀 길었으나, 대충 걷어 붙이고 입을 만 했다. 이즐레이의 옷은 그런대로 몸에 맞았다. "로이, 그런데 표정이 왜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추스리며 나오던 켈리가, 로이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언제나 활달했던 로이가 풀이 죽어 있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로이는 숨길 이유가 없었다. 그는 오늘 여관에서 본 일들을 켈리와 이즐레이에게 모두 털어놓았다. "...그랬었군." 켈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로이는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면서 아트웰을 독립시키려고 할까요? 그냥 이대로 평화롭고 살기 좋잖아요. 백성들을 죽이면서까지..." "아트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들에게 그 일은, 우리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닐 거야. 그러니 전쟁을 하겠지. 그럼 에스테이아는 왜 그들을 그냥 독립시켜 주지 않고 전쟁까지 끌고 가려고 할까? 영토는 넓은데 말야." "그거야... 원래 인간족은 하나니까 그런 거 아닌가요?" "원래 인간족이 하나라고?" 켈리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 목소리가 여느 때의 켈리의 목소리와는 몹시 달라서, 로이는 깜짝 놀랐다. 그녀의 웃음은 매우 쓸쓸하고, 감슴 저린 여운을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인간족이 하나라... 하지만 에스테이아가 대륙을 통일하개 전엔 모두 따로 국가를 세우고 살았어. 물론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만... 그 전에, 원래 인간의 모습이 어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시절의 이야기는 에누인(지혜와 바다의 신)만이 자신의 책 속에 기록해 놓고 있지. 그 때 글자를 알고 있던 존재는 그 분이니까. 그러니 인간이 원래 어떻고 저떻고 한다면 바다 속의 에누인께서 비웃으실 일이지..." "하... 하지만, 인간이 합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른 종족에 대항할 수 있어요? 오르크의 전투 능력, 다크 엘프들의 마력... 그리고..." "다른 종족에게 대항한다고?" 하고 물은 것은 이즐레이였다. 그의 목소리는 한편으로는 책망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로이는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이즐레이가 반은 드래크로니안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무... 물론 이즈는 내 친구지만... 드래크로니안이지만... 이즈는 특별한 경우잖아요!" "특별할 것 없어, 로이." 하고 켈리가 말했다. "드래크로니안의 혼혈이 이즈 하나 뿐이겠니? 나도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섞였을 걸..." "옛? 켈리가?" 로이는 충격을 받아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켈리는 어떻게 보아도 완벽한 인간인데. 저 눈, 저 머리털, 저 귀, 어느 것 하나 다른 종족의 피가 섞였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인데...! "따져 보면 그렇다는 거지. 생각해 봐, 로이. 드래크로니안들이 처음 이 당에 왔을 때 그 수장(收藏) 글라노우스는 로데인의 공주와 결혼했어. 왕족까지 맞아들이는 신랑감을 귀족들이나 평민이라고 마다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생긴 드래크로니안 혼혈들이 인간들과 결혼하고, 그리고 다른 다라로 퍼져 나갔겠지. 피는 희석되고 희석되면서, 그 대신 넓게 퍼져나가는 거야. 요정족의 혈통도 마찬가지, 난쟁이 족의 혈통도 마찬가지지... 로이, 나도 이즈와 같이 드래크로니안의 후손일거야. 단지 그것이 얼마나 오래 전의 이야기이냐가 다를 뿐이지. 그리고, 로이, 너도 마찬가지야. 완전히 순수한 피라는 건 없어. 랜스, 툴위그, 데이미아, 모두... 드래크로니안 족을 원수처럼 싫어하는 우리의 왕, 아클레어 3세께서도 사실은 드래크로니안의 후손이시지. 그의 먼 조상이 로데인의 공주와 정략 결혼을 했었는데, 아까 말했다시피 그 혈통은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섞인 혈통이거든." 켈리는 미소를 지으며 로이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위엄이 깃든 미소였다. 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말이 없기는 이즐레이도 마찬 가지였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눈길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켈리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네. 이만 출발할까?" 하고 켈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볍고 활달한, 평소의 목소리 그대로였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마을을 찾아야지... 저녁도 먹고 말이야." (계속) 로이 일행이 마을에 다다른 것은 아직 해가 제 빛을 발하고 있을 때였다. 그 마을은 로이가 옷을 훔친 마을에서 꽤 떨어진 조그만 농촌 마을 이었고, 여관은 단 하나 뿐이었다. 손님이 하나도 없는 그 여관에는 늙은 노파 한 명과, 그녀의 딸쯤 되는 나이의 중년 부인만이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지친 채 들어오는 로이 일행을 보고도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세 사람이 묵을 방과, 네 사람분의 저녁 식사가 필요한데요." 켈리가 말을 걸자 비로소 그들은 느릿느릿 방을 보여주고, 상을 차려 주었다. 울적하다 못해 숙연한 분위기에 로이 일행도 모두 주눅이 들어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켈리와 이즐레이의 부상에다 켈리의 이상한 연설 덕택에, 그들은 여기까지 오면서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이상스레 엄숙한 분위기에 휩쌓여 있었던 것이다. 펠히스마저 그들의 분위기에 물들었는지 있는 듯 없는 듯 따라왔었다. "여기 무슨 일 있어요?" 참다 못해 로이가, 식사를 가져 온 중년 부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무감각한 눈으로 로이를 흘끗 보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마을의 남자들은 다들 징집되었답니다. 우리 아트웰이 독립을 한다는군요..."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똑같은 일. 이 마을에도, 저 마을에도... 그 부인은 말을 이었다. "훌륭한 일을 위해 나가는 건줄 안면서도... 어쩔 수가 없군요. 왕의 군대는 강력하다던데... 독립이 좋은 일인 줄 알면서도, 제 남편과 세 아들이 징집되고 보니... 막내는 겨우 열 여섯이었는데요. 어머님은 상심하셔서 저렇게 말도 안 하신답니다." 부인은 로이를 보더니 굳어진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막내가 꼭 저 소년만했지요..." "..." 로이, 켈리, 이즐레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의 슬픔을 그들에게 전가시킨 것이 미안했던지, 홀연히 자리를 떠 버렸다. 그 날은 로이가 보낸 가장 이상한 밤이었다. 자기 전까지 그들은 서로에게, 곡 필요한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즐레이는 무척 침울해 보였고, 활달하고 요란스럽던 켈리도 무슨 심각한 생각에라도 잠긴 듯, 허공을 바라보며 로이나 이즐레이는 상대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지 펠히스만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그녀가 털을 긁적이도록 몸을 내맡 기고 있었는데, 켈리 때문인지 펠히스까지 생각에 잠긴 것같이 보였다. 로이 역시 이유를 종잡을 수 없게 마음이 착찹했다. 그는 몸이 피곤하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잠의 세계를 청했다. 그러나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곧이어 한밤중이 되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올랐다. 이즐레이는 잠이 들자마자 연속된 악몽 때문에 깨어났다. 어두운 천정에 비치는, 달빛과 구름이 만들어낸 무늬가 마치 꿈의 연장(延長)인 전쟁터의 검은 연기처럼 보였다. 왜 꿈 속에서는 며칠동안이나 그 두려움에 시달렸던 것 같은데, 사실은 고작 두어 시간이 지났을 뿐이고 다시 자야 할 시간이 바다처럼 놓여 있는 것인지... 그는 언제나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더이상 자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게다가 천정에 그려지는 구름의 그림자인지 전장(戰場)의 연기인지가 그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테라스로 나가서 그것이 달과 구름의 장난이라는 것을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는 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차가운 바람이 그의 볼과 검은 머리채를 스치고 지나갔다. 달은 드래크로니안에게 힘을 준다... 그의 어머니는 그렇게 말했다. 문득 자신의 모습이 달빛 속에 얼마나 그로테스크하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야행성 동물의 눈처럼 빛을 발하는,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밤처럼 새까만 머리털을 가진 남자... 아까 피를 흘렸으니 얼굴을 유령처럼 창백하겠 지... "이즈, 안 자?" 켈리의 졸리운 목소리였다. 이즐레이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 았다. "...깼어?" "당연하지, 찬바람이 들어오는데..." 켈리는 잠에 취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는 사과하며 테라스의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켈리는 절룩거리며 침대에서 뛰어내려, 그의 손을 막고 테라스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경치가 좋네. 보름달밤이라... 로맨틱하군. 안그래? 달 구경하고 있었던 거야?" 이즐레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달과 그 주위의 구름들을 노려보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머리에 각인시켰다. 구름이었어. 연기가 아니라, 어머니와 그녀의 동족들의 시체를 태우는 연기가 아니라... 그냥 구름이었던 거야... "구름이... 연기같이 보였어. 꿈에 연기를 봤거든. 하늘에 꽉 찬 연기... 전쟁터의 연기였지." "나쁜 꿈을 꿨나보구나... 열이 있는 것 아냐? 상처를 제대로 치료 해야 하는 건데..." 이즐레이는 대답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자신에 비해 그녀는 얼마나 분명한 존재인가. 그녀는 저렇게도 분명한 인간의 모습, 인간의 동작을 가지고 있으니... 그런데도... "아까는... 고마웠어." 하고 이즐레이가 말했다. "응?" 켈리는 무슨 뜻이냐는 듯, 눈을 비비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혈통에 관해서 이야기한 것 말이야..." "미안. 좀 지루했지. 그냥... 언젠가 한 번 하고 싶은 얘기여서 말야..." 켈리는 멋적게 웃었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내 주위엔 없었어. 아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나는 몰랐지... 그렇지만... 항상 기다려 왔던 것 같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해 주기를... 정말 고마워."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냐." 켈리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또렷한 그림 자를 만들어 냈다. 그녀의 코는 무척이나 곧고 오똑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코를 가진 사람은 의지가 강하다고 했다... 그들의 종족은 그렇게 믿는다고. 그리고 붉은 눈은, 이즐레이처럼 드래크로니안 중에서도 드문 순수한 붉은 색의 눈은 축복의 징조라고 했지... 이자일(붉은 불꽃), 여신 실리사의 눈의 빛깔... 하지만 실리사가 누구던가. 가차없는 복수의 여신, 처벌의 여신, 바로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드래크로니안의 전형이 아니던가... "그렇지 않아. 난... 줄곧 그렇게 생각했지. 드래크로니안, 인간들의 적, 살육의 화신... 거처라고는 다른 생물들은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는 미로 밖에는 짓지 못하고, 그들의 가꾼 씨앗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싹도 트지 않으며, 요리한 음식은 양분이 되지 못하고 천을 짜면 실이 올올이 풀려 나온다는, 아무것도 만들 수 없는 종족... 오직 살생과 파괴만이 가능하고,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종족... 저승에서 올라오지 말았어야 할 페레이타의 아이들... 그 피가 내 혈관에 흐르고 있다고... 그래서 난 사람을 죽이는 일밖에 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 어머니의 능력을 물려받아 이처럼 빠른 몸놀림으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그래서 그저 슬펐을 뿐이었어. 그만큼 내게는 파괴의 피가 진하게 흐르고 있구나, 하고... 하지만 이젠..." 그는 미소를 지었다. 달빛 때문에 그의 미소는 창백하고 단정한 얼굴 위에 신비하고 아름다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너희를 도와 로크 페울로니를 찾겠어. 그런 일이 내게도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는 켈리가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의외로 켈리는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껴진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그 미소는 허무하면서도 차가운 것이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이즈. 난 그렇게 대단하지 못해. 내가 잘 하는 건 고작 말 뿐이지... 전쟁이 얼마나 처참한 건지 역설하지만 난 전란의 씨앗을 레젠디아 전체에 뿌릴지도 몰라..."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면... 그게 재앙의 시작이 될 거라고 믿는 거야? 하지만 그게 재앙의 시작이든 평화의 도래든, 그건 네 잘못이 아니 잖아?" "재앙과 평화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 이즈? 어떤 사람의 고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다고들 하지. 내가 명검(名劍)을 얻으면 그것은 내게는 행운이고 내 앞의 적에게는 불운이야. 아트웰이 진다면 아트웰 사람들에게는 재앙이고 에스테이아에게는 평화겠지. 재앙과 평하는 하나일 수도 있어. 인류 전체는 같은 것을 원하지 않아. 우리가 평화라고 믿어도,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리고... 난 내가 원하는 평화를 얻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재앙을 선물하려 하는 중이고..." 켈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웃음을 지운 얼굴로, 달을 뚫어져라 바라 보았다. 마치 달에게 대답을 요구하듯이 그러나 수천년, 수만년동안 모든 종족의 흥망을 지켜본 그 둥근 눈은 대답이 없었고, 앞으로 그 누구에게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었다. 대신 그녀의 귀에 들려온 것은, 머뭇거리는 이즐레이의 대답이었다. "...내가 이런 말 해도 된다면... 네가 하는 일은 옳은 것일 거라고 생각해." 켈리는 놀라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이즐레이는 마치 처음 인간 말을 하는 사람처럼, 매우 어색하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남한테 이런 말 하는 거 처음이지만... 너는 결코 나쁜 일 할 사람이 아냐, 켈리. 의심하지 마, 너한테 안 어울려. 내가... 로크 페울로니를 찾도록 도울 테니까..." 하고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때 가서 어떻게 되는지 보자고. 그게 네 식 아냐?" 켈리는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이즐레이와 다른 모든 이들 에게 익숙한, 개구장이같은 웃음소리였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이즈. 너에게 오늘 두 번 빚졌는걸..." --------------------------------------------------------------------- 한편, 로이는 혼란스럽고 이상하게도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아는, 그런 꿈 속을 헤메이고 있었다. 꿈 속에서 그는 제일 먼저, 에이론드를 따라 가고 있었다. 에이론드는 말 없이 앞에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로이는 그가 어디로 자신을 안내하는지도 모르는 채 열심히 발을 옮겼다. 앞은 하나도 안 보이고 단지 에이론드의 모습만이, 그의 몸에서 발해지는 희미한 광채 때문에 보일 뿐이었다. 그 외의 공간은 전부 암흑, 암흑 뿐이었다. 손을 뻗쳐 보아도 벽도 잡히지 않았고, 천장이 닿는 것도 아니었다. 발 아래 밟히는 부드러운 흙의 감촉만 아니었더라면, 완전히 허공 속을 걸어가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로이는 문득,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에이론으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눈처럼 하얀 머리칼이 허리까지 내려와, 발을 옮길 때마다 일렁이고 있었다. 키는 에이론드보다 더 컸고, 마치 고양이처럼 소리도 없이 발을 옮기고 있었다. 미끌어지듯 걸어가는 동작이 로이가 아는 누군가를 연상하게 했다... "제피로스?" 로이는 갑자기 자기 앞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써 소리쳤다. 검을 망토를 발끝까지 내려뜨린 제피로스가 창틀에 걸터앉은 채 로이를 응시하며 미소짓고 있었다. ...창틀? 웬 창틀! 그래, 로이의 주위는 더이상 암흑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성의 홀이었다. 넓디 넓은 방 안에는 가구 하나 없었고, 깨끗한 하얀 대리석만이 바닥을 덮고 있었다. 높은 천장과 겨루듯 갈게 솟은 창문으로 비쳐드는 환한 햇살만이 그 방의 장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제피로스와 로이 뿐이었다. "로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로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올려다보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디실은 라우더에 있어. 네 칼, 네 종... 찾으러 오너라. 날 위해 그것을 뽑아 주기로 약속했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너라, 로이." 로이는 제피로스의 앞으로 다가가며, 머뭇거리면서 물었다. "하지만 난... 이디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다고요. 잘 아시 잖아요. 난 기사도도 모르고..." "그런 건 필요 없어, 로이. 이디실이 가르쳐 줄거다. 너는 그것을 칼집에서 뽑기만 하면 돼." "...이디실이?" "그래. 네 마음에 속삭일 거다. 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을 테지?" 제피로스는 티없는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며 로이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혼란스러워졌다. 이디실이 가르쳐 준다고. 물론 '마음에 속삭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경험에 의하면, 이시 실이 그의 마음에 속삭이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들이었다. 이디실을 잡으면 자신은 오르크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피 속에 서고도 아무런 거부감도 느끼지 않게 되지 않던가. 게다가 이디실이 제이룬을 죽이라고 속삭였던 점을 생각 하면... "이디실을 믿어라, 로이, 그리고 나를 믿어라." 제피로스는 로이의 마음을 꿰ㄸ어 보는 듯, 차분하고도 따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라우더로 오너라, 로이, 너희는 라우더로 와야 해. 그곳에서 이디 실과 엘미어, 카자룬이 잠자고 있으니..." 제피로스의 말은 이상하게 주술적이고도 듣기가 좋아서, 그 말을 계속 듣자 로이는 마치 라우더로 가는 것이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잠이 덜 깬 사람처럼 분명치 못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가... 라우더인가요?" "아니, 여기는 네가 잘 아는 곳이다... 이리와서 구경하겠니?"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창틀에서 일어났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가 오라는 손짓을 하자, 그 창틀 앞으로 걸어갔다. 아름답고 낯익은 곳. 높이 솟은 산 뒤로 보이는 푸른 바다, 눈부시고 새파란 하늘, 그리고 산을 우랑하게 덮은 초록색의 생명력 넘치는 나무들... "...시지리스!" 로이는 놀라서 자그맣게 부르짖었다. 꿈은 거기서 끝났다. 처음에 로이는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태양은 어슴푸레한 빛을 비치며 뜰 경고만을 하고 있는 새벽 이었고, 켈리와 이즐레이도 침대 한에서 세상 모르고 자고 있는데... 그러나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로이의 바로 곁에서, 문이 조그만 소리로, 그러나 꾸준히 두들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비척비척 걸어가 문을 열었다. "에... 주인 아주머니?" 로이는 문 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 의외라는 듯이 물었다. 그녀는 얼른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빠른 어조로 말을 내뱉듯이 속삭였다. "이상한 사람들이 와서 당신들을 찾고 있어요. 없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어서 도망치세요." 그 말에 로이는 잠이 다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하젠... 여기까지 따라왔구나!' "가,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이렇게 도와 주시는 거죠?" 로이의 물음에 그 부인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 식사를 하면서 본 것과 똑같은, 따스하지만 슬픔이 담긴 미소를. "소년이... 내 아들을 닮았어요. 그래서 남의 일 같지가 않군요... 부디 무사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 뿐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고 떠났다. "무슨 일이야, 로이?"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며 이즐레이가 몸을 일으켰다. 베개 밑에서 빼낸 그의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로이는 더이상 생각해 볼 겨를 도 없이 대답했다. "이상한 사람들이 우릴 찾으러 왔었대요. 어서 도망쳐야겠어요." 이즐레이는 산속하게 움직였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 더니, 이것저것 묻거나 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바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인정사정 없이 켈리를 두들겨 깨우고는, 어리둥절해 하는 그녀에게 설명도 해 주지 않은 채 망토를 두르고, 돈이 든 주머니와 무기를 챙겨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잠이 덜 깬 켈리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쫓기고 있어." 그 대답 하나면 충분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준비를 마치고, 야밤도주하는 도둑들처럼 테라스를 통해 지붕 위로 기어올라갔다. 아래층 정문에는 추적자 중 일부가 매복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관 곁에 세워진 나무를 통해 고양이처럼 땅 위로 내려온 다음, 발소리를 죽이며 급히 걸었다. 날이 밝아 오고 있었고 시간은 많지 않았다. 얼마 안 인어 환한 했빛이 그들의 머리 위를 비출 터였다. "저기다!" 낯익은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들려왔고,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들려 왔다. 더이상 도망친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들은 칼을 빼어들고 소리가 가까워 지는 쪽을 정면으로 대하고 섰다. 어둠 속에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세 마리의 말의 형상이 보였다. 이즐레이는 품 안에서 단도를 빼어들어, 선두에 선 사람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표적은 그의 공격을 훌륭하게 피해냈다. 그러나 칼날을 피하면서 중심을 잃었으므로, 말의 등 위에서 덜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즐레이가 그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는 튀어오르듯 그에게 달려들어 목에 칼을 겨눴다. 그리고... "그만 둬! 이즐레이! 날 죽일 셈인가?" "어...? 투, 툴위그?" 당황한 이즐레이는 칼을 치우지도 않은 채 쓰러진 툴위그의 얼굴만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툴위그는 투덜거리며 자신의 목에 겨누어진 그의 칼날을 거칠게 치웠다. "도와 주겠다고 왔더니... 뭐 하는거야!" "시... 실례했소." 이즐레이는 머쓱해져서 얼른 칼집에 칼을 넣었다. 황당해지기는 켈리와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데이미아는 말에서 뛰어내려, 멍하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있는 로이에게 달려들었다. "와아! 로이!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다! 다친 데는 없지?" "어? 응..." "켈리! 무사히 탈출했군요!" 데이미아는 로이를 밀쳐내듯 그에게서 떨어져 나온 다음에, 이번엔 켈리를 향해 양 팔을 벌리고 안겨들었다. 켈리는 어리둥절한 로이보다는 좀 나은 반응을 보였다. "하하... 내가 누구냐! 어어, 그러지 마. 다리를 좀 다쳐서..." "다리? 어디 봐요! 내가 고쳐 줄테니까! 갈 이조넬, 데란탈 루미스..." 데이미아는 켈리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그녀를 앉히고 다친 발목을 짚고는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들의 곁으로, 수염 속으로 표정을 감춘 툴위그가 다가왔다. "무사했군, 켈리... 정말 다행이다." 흔한 인사였지만 감정이 꽉 들어차 있었다. 그 한 마디로도 그가 얼마나 켈리를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켈리도 이번만큼은 놀리거나 농담 으로 넘겨버리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로이하고 이즈가 구하러 와 주지 않았더라면 죽을 번 했는걸요." "그래, 맞아, 로이!" 치유 주문을 마친 데이미아가 벌떡 일어나며 따지고 들었다. "그렇게 혼자서 가 버리는 법이 어디 있어? 가려면 모두 함께 가야지! 그리고 펠히스! 로이만 따라가냐! 정말 둘 다 너무했어!" 로이는 머쓱해져서 서 있었고, 펠히스도 마치 사과하는 듯 배를 땅에 붙였다. 다리를 다 치료한 켈리가 일어나서 미소를 지으며, 데이미아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둬, 데이미아, 로이가 안 와 주었더라면 난 죽었을 거야. 그러니 한 번만 봐 줘. 그리고 이즈도 다쳤는데..." "난 괜찮아!" 이즐레이는 허겁지겁 대답했으나, 켈리와 데이미아를 당해내지 못했다. "귀신같이 하얀 얼굴을 하고 괜찮기는...!" "맞아요. 게다가 켈리를 구해주고 로이를 도와 주신 분인데 그냥 보내면 예의가 아니죠!" 이 화기애애한 광경을 랜스는 어둠 속에 선 채 멀찌감치서 지켜 보고 있9었다. 가장 먼저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을 치료를 받고 있던 이즐레 이였다. 그는 말없이 가만히 랜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따라, 이번에는 켈리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한동안 가만히 그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뭔가 결심한 사람처럼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왔다. "와 주었군, 랜스?" "...무사해서 다행이야, 켈리." 랜스는 얼굴과 목소리 가득 배어나는 죄책감을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를 보고 로이는 동정심에 화가 누그러지고 있었다. 그러나 켈리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퍽! 켈리는 그야말로 있는 힘껏 랜스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그 소리에 눌라서, 모든 일행이 그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펠히스마저도 기가 질렸다는 듯 끙끙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랜스는 비틀거리며 뺨을 감싸쥐었다.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켈리의 앙칼진 목소리가 날아왔다.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게 천만다행인 줄 알아! 뭐? 무사해서 다행?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군! 네놈 입에서 어떻게 그런 소리가 나와?" 랜스는 한 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켈리의 말이 다 지당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서 있기만 했다. 그리고 켈리는 점점 더 기세 등등하게 소리르 질렀다. "여긴 왜 온거야? 날 구하러? 설마 그렇다고는 못 하겠지! 네가 그러고도 동료고 친구냐? 너 같은 놈 친구로도 동료로도 둘 생각 없어!" "켈리...!" 툴위그가 그녀를 말리며, 팔을 끌어당겼다. 켈리는 그제서야 말을 멈추었지만 후회하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그녀는 툴위그를 향해 말했다. "난 이제부터 더이상 저 녀석과 함께 다닐 수 없어요!" "켈리, 그래도 랜스도 후회하고 있는데..." "후회? 후회하면 다에요? 툴위그가 저 놈과 함께 다녀야 한다고 고집하면 난 툴위그와도 따로 다니는 수밖에 없어요! 동료 목숨을 헌신짝 버리듯 하는 놈을 어떻게 믿고 데리고 다녀!" "켈레브리스!" 갑자기 툴위그가 엄하게 소리쳤다. 마치 딸을 꾸중하는 아버지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켈리는 질끔 놀라는 것 같더니, 의외로 더이상 대들지 않고 조용해졌다. 툴위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러나 한치도 물러섬 없는 엄한 태도로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한 번도 실수를 저지른 적이 없느냐? 랜스에게 그런 말을 해도 될 만큼 넌 당당한 거냐? 앞으로도 넌 어떤 실수도 저지르지 않고, 어던 판단도 잘못 내리지 않고, 그리고 어느 누구도 본의 아니게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느냐?" "..." 켈리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툴위그는 말을 이었다. "실수는 그림자처럼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고, 오판(誤判)은 먼지가 옷에 달라붙듯 사람의 머릿속에 달라붙는 것이다. 그것을 빠져나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랜스는 물론 잘못했지만, 우리 모두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반성하고 있고, 너는 무사해. 그런데 너는 무엇에 대해 화를 내는 거지? 너 자신이 하찮게 취급되었다는 데 대해 분노 하는 건 아니냐?" "툴위그...!"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켈리. 그리고 랜스의 사과를 받아들여라. 설마 네 자존심 때문에, 아니면 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로크 페울로니를 찾으러 가는 우리 일행을 해산시켜 버리려는 것은 아니겠지?" 켈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적의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랜스를 바라보았으나, 곧 사과의 표시로 오른손을 내밀었다. 랜스도 오른손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켈리. 용서해 달라고는 말할 수도 없어..." 그녀는 랜스의 사과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악수가 끝나는 즉시 뒤를 돌아, 성크멍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와 줘서 고마워요, 모두들. 이제 모두 만났으니 더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아트웰을 빠져나가는 것만 남았군요." 켈리는 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툴위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에게 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말을 이끌고 숲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맨 뒤에서 걸어오는 랜스에게, 이즐레이가 다가와 말했다. "켈리는... 좀 흥분한 것 뿐이야. 나중에 다시 사과해 보지 그래..." 의외의 따뜻한 말에 랜스는 놀라서 이즐레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트웰에서 그를 만난 이래, 아니 로운에서 흐지부지 헤어진 이래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친구로서의 충고였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랜스의 시선을 느끼자 얼른 냉담한 얼굴을 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앞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보라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제 7장 <구출> 끝. 제 8장 <오랜 평화의 끝>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