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장 친구와 적 (The Friends & the Enemies) "으... 머리야..." 로이는 이마를 감싸 쥐며 몸을 일으켰다. 두통과 현기증이 몹시 심했고, 목도 말랐다. 그는 주위를 둘러 보고, 자신이 낯선 방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좋은 방이었지만 길리어드 왕성 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 좁고 소박한,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비좁게 세 개의 침대가 놓여져 있었고, 한 침대 위에서는 아직도 데이미아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침대에서는 툴위그가 오래 전에 깨어난 듯 난간에 걸터앉은 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에요?" 로이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툴위그는 화를 버럭 내며 대답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다음부턴 술 마시지 말아야겠어요. 머리가 진짜 아프네..." "멍청한...! 그게 술이냐? 망할 놈의 왕자가 우릴 교묘하게 속여서 수면제를 먹인 거야! 그 자식, 내가 가만 두나 봐라! 반드시 이 모욕을 배로 갚아 주고 말겠어!" 툴위그는 흥분해서 침대에서 뛰어내려, 좁은 방 안은 분주히 왔다 갔다하며9 소리쳤다. 그 소란에 데이미아도 깨어났다. 그녀는 방 안을 슥 훑어보더니, 사태를 대충 짐작한 것 같았다. "우리... 납치당했네요." "글렌델 가의 장남을 감히 수면제를 먹여서 어린애 다루듯 납치 하다니! 분수를 모르는 녀석들!" "...역시, 그럼 스트라본이었나..." 데이미아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툴위그가 무슨 대단한 꼬투리라도 잡은 듯 캐어물었다. "역시라니? 뭐가?" "그 늑대들 말예요... 생각 나요? 갈리와 함께 갈리어드로 오던 중, 드라크노움 산맥에서... 늑대 시체들이 우리를 공격했잖아요. 그게 스트라본이 보낸 거였어요." "맙소사. 그걸 왜 이제 말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사람을 처음 보았을때, 그 늑대들 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마성(魔性)과 상당히 비슷한 기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렇게 먼 거리까지 시체들을 움직여 보낼 수 있는 마법사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요. 요정들 중에서도 그런 마법사 는 보지 못했는데, 하물며 인간이야..." "과찬이십니다, 엘미어의 계승자여." 어느 새 문이 열려 있고, 스트라본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차가운 미소를 띄고 새까만 비단으로 된 마법사 옷을 입은 그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툴위그는 그를 당장이라도 잡아 죽일 듯이 노려보았으나, 덤벼들 수는 없었다. 그의 뒤에 여러 명의 중무장한 기사들이 버티고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어제 저녁 그들을 스트라본에게로 안내한 그 젊은 기사도 있었다. "무례하시군요, 스트라본 왕자!" 툴위그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렇게 말했다. 스트라본은 재미있다는 듯, 싸늘하게 웃었다. "기분이 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툴위그 젠 글렌델. 그러나 제가 여러분을 오르크들에게로 모시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렇게 하는 편이 피차 간에 빠르고 좋을 것 같아서요." "오... 오르크?" 데이미아가 놀라서 더듬거리며 물었다. 스트라본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아는 오르크들은 상당히 친절하고 예의바른 이들이니까요. 그들에게도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은 꼭 필요한 존재인 만큼, 여러분은 정중한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물론 그들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한이겠지만... 하하하...!" 그의 웃음소리를 들으니 로이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하룻밤 사이에 사람이 저토록 다른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을까. 데이미아는 기죽지 않고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은 인간인데, 어째서 오르크의 편을 들지요?" "그럼 에스테이아의 편을 들어야 합니까? 우리와 우리의 조상을 치욕 속에 살게 한, 적국의 지배 속에 살게 한 아클레어 황제를?" "다... 당신의 감정은 이해해요. 요정들도 통일 제국을 꼭 좋아하는 것만은 아녜요. 하지만 로크 페울로니를 넘겨주는 건..." "어리석고 작은 마법사여! 로크 페울로니 따위가 다 무엇입니까? 나는 그런 것은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르크들의 전투 능력과, 그들이 에스테이아에게 끼칠 수 있는 해는 믿지요. 그들이 로크 페울로니를 모두 모아, 결국 자신들이 수십년에 걸쳐 헛수고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도와주는 것 뿐입니다. 그리고 그 전까지는, 우리는 오르크들에게서 받아낼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받아내겠지요." 스트라본 왕자의 말에는 거침이 없었다. 더이상 설득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다. 로이도 데이미아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툴위그만이 조용히 물었다. "오르크들이 우리에 대한 댓가로 그대에게 무엇을 약속했소?" "그건 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 카자룬의 계승자! 당신은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할 거요. 카자룬을 찾는 것이 평생 소원이었지 않습니까?"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요. 어리석게 행동하지 마시오!" 툴위그의 말에 스트라본은 피식 웃었다. "그건 저희 사정입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군요. 그럼, 따라 오실까요?" 기사들이 곧 방에 들어와 로이와 툴위그, 데이미아의 주위에 둘러 섰다. 함께 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로이가 나가기 직전, 사정하는 눈빛으로 스트라본에게 물었다. "랜스랑 켈리는 무사한가요?" 순간 스트라본의 얼굴에 간교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상냥한 어조로 대답했다. "물론 무사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앞으로도 무사할지 어떨지는, 당신들이 우리의 말에 얼마나 잘 따라 주는가에 달려 있지요." 로이는 저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으으... 정말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어!' 그들은 체념한 채, 기사들과 스트라본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맨 앞줄에 서 있던 로이는 어제 자신과 대화했던 그 젊은 기사가 스트라본 왕자에게 속삭이는 것을 엿들을 수 있었다. "전하, 꼭 이렇게 해야 하는 겁니까?" "얘기는 끝났다, 하젠. 설마 자네도 로크 페울로니 따위가 걱정 되는가?" "그것도 걱정이지만... 아무래도 오르크는..." "인간의 적이라는 건가? 우리의 진정한 적은 황제 아클레어와 그의 심복, 근위대장 클레이브 뿐이다. 이건... 모두 형님을 위한 일이야." "물론 압니다! 그러나 사일러스 왕자님 없이도 스트라본 전하께서 잘 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 아트웰 저항군은 전하의 지도 아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형님 없이는 아무것도 안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아트웰에는... 사일러스가 필요해. 더이상 거론 마라, 하젠." "..." 길고 창문이 없는 복도였다. 공기는 차고 습했다. 로이는 이 곳이 아마 지하일 거라고 생각했다. 성의 지하, 그러나 길리어드 왕성이 아닌 다른 성... 한참을 걸은 끝에 그들은 한 방에 다다랐다. 넓고 어두운 방이었다. 중앙에 걸린 한 개의 횃불과 타오르는 난로만이 방 안을 밝헤 주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장식들은 화려했다. 두꺼운 카페트가 맨들맨들한 돌바닥을 덮고 있었고, 그 위에는 성찬이 차려진 커다란 식탁과 비단으로 덮은 안락의자가 놓여져 있었다. 그 의자에 앉아 정신없이 음식들을 입 안에 쏟아붓고 있는 것은, 금빛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보석이 잔뜩 박힌 갑옷을 입은 오르크였다. 그의 등 뒤로는 그의 호위병같이 보이는 중무장한 오르크들이, 금방이라도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고 로이와 스트라본 일행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들이 당신이 찾던 자들이오, 쿠푸-헤 아크트." 스트라본이 말했다. 로이는 흘끗 그 오르크를 바라보았다. 오르크 말에서는 흔히 높은 사람에게 '쿠푸'라는 말을 붙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저 오르크는, 옷차림으로 보아 분명 대단한 지위에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행동은 천박스럽기 그지없지만. "흠... 어린애 둘과 난쟁이라. 기대했던 것과는 약간 다르군." 아크트라고 불린 그 오르크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를 훑어보며 말했다. 스트라본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답 했다. "마음에 안 들면 거래를 취소하면 그만이오. 분명 하르크자엘 쪽에 서는 훨씬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할테니..." 아크트는 무섭게 스트라본을 노려보았다. 로이는 그 눈빛에 가슴이 오그라들 지경이었으나, 스트라본은 오히려 그를 놀리는 듯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이윽고 아크트가 부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나 네 명의 부하들이 낑낑거리며, 수레 위에 세워진 커다란 물체를 끌고 나왔다. 대략 사람의 키 정도 되어 보이는, 흰 천으로 덮여진 물체였다. 아크트는 보라는 듯이 좀 과장된 동작으로 그 천을 걷어냈다. 그러자 그 아래, 굉장하 솜씨로 조각된 석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과 검으로 무장하고 방금이라도 뛰쳐나올 듯 앞으로 노려보고 있는 젊은 기사의 모습을 조각한, 대리석 석상이었다. 조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로이였지만,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생생한 모습에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건... 아트웰의 왕자 사일러스의 석상이잖아. 왜 오르크들이...?" 툴위그가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스트라본은 그 석상의 바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뭔가 이해 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한참동안 그 석상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을 때, 데이미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갈 이조넬, 헤이엔 휘사이닌 하르페리니. 갈 아스틸라, 헤이 시엘리 휘브리인 하르휘리엔. 갈 페레이타, 카난 렐 라시엔 휘브리인 하르네리엔... (이조넬의 이름으로, 모든 사물이 원래의 모습대로 돌아가리라. 아스틸라의 이름으로, 모든 별이 제 운명을 찾으리라. 페레이타의 이름으로, 죽음과 삶이 제자리를 찾으리라...)" '저건 고대어 주문... 마법을 푸는 주문이잖아. 그렇다면 설마...?' "아...!" 누구랄 것도 없이, 로이와 툴위그, 그리고 그들을 감시하던 기사들과 오르크들의 입에서 탄성의 새어나왔다. 아크트조차 체면을 잊은 채, 입을 딱 벌리고 눈을 크게 뜨고는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트라본의 몸에서 흰 광채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광채는 곧 손으로 모아져 눈부시게 빛났다. 스트라본이 조심스럽게 양손을 모아 그 석상에 대자, 광채는 석상으로 옮겨져 나갔다. 먼저 그의 선이 닿은 석상의 이마부터, 얼굴과 목, 그리고 석상 전체로. 퍼져나가면서도 그 빛은 조금도 사그러들지 않았고, 오히려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마치 빛나는 물에 석상이 젖어 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석상이 완전히 커다란 빛의 덩어리처럼 되어 눈을 바로 뜰 수조차 없게 되었을때, 그것을 바라보던 이들은 마치 그 빛 덩어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느꼈다. "사일러스 형..." 스트라본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조용히 불렀다. 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간신히 시력을 되찾은 그들의 앞에는, 석상 대신 무장을 한, 그 석상의 모습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 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스트라본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스트라본...? 네가 어떻게 이곳에... 아니, 여긴 어디지?" "역시... 그랬었군. 사일러스 왕자가 우리와의 교환 조건이었나?" 데이미아가 놀라움에 싸인 정적을 깨고 침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스트라본과 사일러스는 흘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스트라본은 상관 말라는 듯 질책하는 눈빛으로, 사일러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러나 사일러스는 자신 주위에 늘어선 오르크들과 아트웰 병사들, 그리고 마력의 소모로 숨을 헐떡이는 스트라본을 보고는 사태를 대강 짐작했다. 그는 가만히 동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그런 소리 마, 사일러스... 이제 다 끝났어." 스트라본은 활짝 웃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보여주었던, 소년처럼 천진한 미소였다. 그는 아크트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지쳤지만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들은 약속을 지켰소. 그러니 나도 약속을 지켜야겠지... 이제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을 데리고 떠나도 좋소. 쿠푸-헤 아크트, 이들은 지금부터 당신의 것이오." "자... 잠깐!" 로이가 당황한 나머지 스트라본에게 달려가려고 했다. 오르크들의 포로가 된다는 것이 비로소 실감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한 발짝도 채 떼기 전에, 오르크 병사들의 도끼와 칼이 그의 앞을 막았다. 데이미아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소용 없어, 로이..."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들에게서 멀어지는 스트라본과 사일러스, 그리고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스트라본이 나가기 직전, 다시 한 번 아크트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 성에서 머물 수 있는 기간은 사흘 뿐이오. 그 후면 랜스 경의 실종 때문에 클레이브의 잔당이 온통 헤집고 다닐 테니까..." 그 말이 암시하는 뜻에, 툴위그는 가슴이 서늘해져 소리쳤다. "무슨 소리요, 스트라본 왕자! 랜스와 켈리가 살아 있다고 하지 않았소!" 스트라본은 툴위그를 흘끗 돌아보았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툴위그에게 경멸 섞인 미소만을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길 떠난 이후에는 절대로 다시 들어올 생각을 마시오. 그대와 나는 서로 원하던 것을 교환했고, 이로써 우리의 인연은 끝이오.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오." 그 말을 끝으로 방의 문은 쾅 닫혔다. 넓고 어두운 방 안에는 무장한 오르크들과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갑자기 아크트의 귀를 찢는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며 울려퍼졌다. 그는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쳐 웃었다. "드디어! 모두 내 손안에! 이제 모두 내 거다. 로크 페울로니도, 카야크의 힘도, 모두 내 것이야!" ------------------------------------------------------------------- "정신이 들어?" 이즐레이가 차가운 돌벽에 몸을 기댄 채, 랜스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랜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누가 치료했는지 엉성하게 싸맨 상처가 타는 듯이 아프고, 목이 탔다. 그는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둡고 습한 감옥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이 생각났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오래 잤지만 네녀석은 인간적으로 좀 심한 것 아니냐?" 이즐레이는 얼른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며 투덜거렸다. 랜스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차가운 돌벽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좀 이상하군. 왜 우리를 살려두었을까...?" "그 여자가 재주 좋게 혼자 도망쳤다더군. 아주 끝내주는 의리야. 우리를 미끼로 쓴다는 것 같던데... 설마하니 날 구하러 올 리는 없을테고, 널 구하러 올만한 사이냐?" "켈리가? 하하... 그녀는 그냥 트레져 헌터(treasure hunter)야." 랜스는 실소하며 대답했다. "트레져헌터라..." 이즐레이는 못ㅂ겠다는 듯 되뇌이면서 자리에 누웠다. 그도 상태가 랜스보다 나쁘면 나빴지 더 좋지는 못한 것 같았다. 랜스는 가만히 앉아서 눈을 감자마자 굻아떨어지는 옛 친구를 지켜보았다. 데이슨이 만든 어깨의 상처에서 출혈이 심한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몸이 아냐... 제길, 이런 상황에서 탈옥이 가능할까... 만나자 마자 칼부림에다 그 다음엔 감옥에 갇히다니, 우리 인연도 참 기구하군.' 랜스가 가만히 앉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감옥 문이 벌컥 열리더니 중무장을 한 젊은 기사 한 명이 간수 둘과 함께 들어왔다. 이즐레이는 깊이 잠들어 있지 않았던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 기사는 이즐레이에게서 멀찍히 떨어진 채, 랜스만을 보고 말했다. "나는 아트웰의 기사 하젠이오. 아트웰 '왕국'의 기사 하젠이지." "반역자이시군." 랜스가 경멸 가득한 어조로 되받았다. 그러나 그 말은 하젠의 기분을 별로 상하게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히려 그를 노려보는 이즐레이의 붉은 눈, 저주받은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섞이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그 붉은 눈이 그를 더 불안하게 하는 것 같았다. 그는 간수들에게 눈짓을 했고, 곧이어 그들이 칼을 뽑아 이즐레이를 겨누었다. 이즐레이는 우습다는 듯 그들의 칼을 내려다보더니 하젠에게 말했다. "내가 두려우신가? 드래크로니안의 피가? 하긴, 에스테이아 놈들은 드래크로니안은 지옥에서 온 악마의 피를 가졌고, 그래서 인간은 이길 수 없다고 가르치지." "닥치시오. 나는 에스테이아 인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아트웰 인이오." "하! 그러신가? 하지만 드래크로니안에 대한 미신은 다름없겠지? 내 몸에 상처를 낸 보복으로 난 당신들에게 저주를 내릴지도 몰라. 두렵지 않은가?" 헤젠은 매우 불편한 표정으로 소리내어 웃는 이즐레이를 외면했다. 간수들이 그의 목에 닿을듯이 칼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닥치지 못해, 이 튀기 자식!" 헤젠은 랜스만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당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데에는 다 이유가 있소. 당신들은 우리의 적이고 우리의 신성한 과업을 방해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해. 그러나 비밀을 지킨다면, 또 우리의 일을 좀 도와준다면 용서해 줄 수..." "켈리를 꾀어내는 일 말인가?" 랜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헤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여자 이름이 켈리요? 어쨌거나 좋소. 그녀가 도망쳐 버려서 우리는 좀 불안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어. 설마 에스테이아 군과의 전면전을 원하지는 않겠지?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직 비밀이 지켜져야 하고, 그러 려면 이 일을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밖으로 빠져나가서는 안 돼. 내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그녀가 돌아온다 해도 목숨은 보장하겠고. 게다가 당신들 셋 모두, 편안한 생활을 하도록 보장해 주지. 비밀 유지를 위해서 이 성 밖으로 나갈 수는 없겠지만, 죽을 때까지 부족함 없이 살게 해 주겠소. 이건 스트라본 전하 자신께서 약속하신 일이기도 하오." 그러나 랜스는 경멸 가득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하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당히 말했다. "반역자들의 약속을 내가 믿을 것 같은가? 우리들의 입만 막으면 폐하를 비롯한 에스테이아 전체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본데. 그 착각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어리석기 그지없군. 너희는 결국 반란의 댓가를 치루게 될 거야. 애송이 마법사 스트라본이 언제까지 너희를 보호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분을 모욕하는 말은 그만두시오. 그리고 아트웰의 저항군은9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력하오, 랜스 아덴! 당신은 그 도망친 동료를 이리로 데려올 방법만 생각해 내면 되오. 당신의 처형 소식이라면 그녀가 달려올까?" "어이가 없군! 켈리는 그렇게 멍청하지 않아. 아마도 지금쯤이면 이미 국경을 넘었을걸. 당신들이 나를 처형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 때 쯤이면, 어느 성의 뒷마당에서 아클레어 폐하께 정보를 팔아넘기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 바로 당신들에 대한 정보를!" 하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가 올 가능성이 없다는 것인가? 당신 둘은 그녀를 꾀어낼 미끼가 되지 못한다는 것인가?" "턱도 없지." "그렇다면 당신들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하젠은 으즐레이를 위협하고 있던 간수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간수 한 명이 얼른 문 밖으로 나가더니, 검은 옷을 입은 사람 둘을 데리고 들어왔다. 검은 두건으로 얼굴을 가린 사형 집행인, 망나니의 복장이었다. 한 명은 낮은 문턱 때문에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키가 컸으며, 체격도 그에 못지않게 우람했다. 다른 한 명은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는 키였으나, 동료의 몸집에 눌려 무척 왜소해 보였다. 그 둘의 손에는 엄청나게 크고 잘 갈린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원, 내 참, 교과서적인 위협이군." 이즐레이는 끝까지 빈정거렸다. 그러자 몸집이 큰 사형 집행인이 갑자기 이즐레이 쪽이로 손을 뻗치더니, 그의 목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가볍게 그의 몸을 천장을 향해 들어올렸다. 무서운 힘에, 하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아무리 움직임이 빠른 이즐레이라도 이렇게 꼼짝 없이 잡히고 나니 빠져나갈 도리가 없었다. 그는 남들이 두려워 하는 자신의 붉은 눈으로 기세 좋게 그 망나니를 노려보았지만, 이번만큼은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저 놈에게 네 친구의 목을 으스러뜨리는 것쯤은 일도 아냐." 하젠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분명 이런 일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또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의 표정이기도 했다. 랜스는 클레이브의 곁에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보아 왔고,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는 그들이 미치광이보다도 잔인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만 둬! 그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 스트라본이 고용한 살인 청부업자일 뿐이라는 걸 알고 있을텐데!" 랜스가 소리쳤다. 그러나 하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자네 친구의 목은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은데. 암살자로서 이름을 날린 이즐레이의 목이 저렇게 가늘다니 의외로군. 어때, 거트, 이즐레이의 목숨을 빼앗은 망나니로서 이름을 날려 보고 싶지 않나?" "크흐흐흐..." 거트라 불린 그 사형 집행인의 목에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르크의 웃음과도 비슷한 웃음이었다. 랜스는 그가 그냥 키만 큰 인간이 아니라, 이상스러운 괴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오르크도 인간도 아닌... "설마... 고렘...?" 랜스가 창백해져서 중얼거렸다. "생명을 만들어 낸 건가? 스트라본이 그 경지까지...!" 하젠은 만족스럽게 조소했다. "보다시피 스트라본 전하의 능력은 너희들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그 분에게 대항할 생각일랑은 일찌감치 버리는 게 좋아. 자, 그럼 어떻게 하면 그 여자를 유인할 수 있는지 말해 주실까?" "켈리는... 오지 않아." 랜스의 대답에 하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한참동안 랜스를 노려 보더니, 이윽고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렇다면 그대들의 이용가치는 없어진 셈이군. 없애버려." "컥!" 목이 막힌 이즐레이의 비명이 랜스의 귀를 때렸다. 고렘 망나니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숨이 막힌 그의 얼굴이 점차 붉게 상기 되어 갔다. 그러나 랜스도 남을 걱정할 형편이 못 되었다. 작은 몸집의 망나니가 쇳소리 같은 웃음 소리를 내며 랜스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마치 목쉰 마녀 와도 같은 목소리였다. 그의 손에서는 도끼가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제길... 내가 저 도끼를 빼앗을 수 있을까... 지금은 난 부상당했고 간수들도 있는데... 더군다나 저걸 빼앗는다 해도 하젠과 저 덩치 큰 놈은 당해낼 수 없을거야...'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랜스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주먹을 꽉 쥐고 그가 좀더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계속) "핫!" 랜스의 주먹이 그 망나니의 얼굴을 향해 날려졌다. 준비가 없었던 망나니는 그대로 그의 주먹을 맞고 비틀거렸다. 그러나 균형을 잃지는 않고, 다음 순간 랜스가 그의 배를 향해 발길질을 했을 때, 교묘히 피하면서 그의 팔을 걷어찼다. 별로 센 힘은 아니었으나, 정확히 상처 부위를 채인 랜스는 고통 때문에 맥없이 쓰러졌다. '제길! 이대로 끝인가...' 랜스는 눈 앞에 높이 치켜올려진 망나니의 도끼를 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순간, 그의 귀에 혐오스러운 비명이 들려왔다. "크와아아악!" 랜스는 얼른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어이없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의 목을 겨누고 도끼를 치켜들었던 망나니가, 황당하게도 자신의 동료, 고렘 망나니의 등을 향해 도끼를 집어던졌던 것이다. 고렘의 등 한복핀에 도끼가 꽂혀 있었다. 상처에서 피는 흐르지 않았다. 위낙 거대한 고렘인지라, 그리고 그 피부가 워낙 두꺼운지라 그 커다란 상처마저도 치면적이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것만은 틀림없었다. 그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이즐레이의 목을 조르던 손을 놓았던 것이다. 이즐레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몸을 피했다. 망나니는 과장된 몸짓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두건을 벗으며 소리쳤다. "짜잔! 기다리시고 고대하시던 켈리의 등장입니다!" 그리고 검은 두건이 벗겨짐과 동시에, 어느 모로 보나 사형 집행인 이라고는 볼 수 없는, 금발의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간수와 하젠은 물론, 랜스와 이즐레이까지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다만 고렘 망나니만이 분노에 찬 함성을 질렀다. "크르르르르!" 켈리는 그가 다가오자 얼른 단검을 던졌다. 행동이 둔한 고렘은 그것을 피하지 못했고, 그 단검은 정확히 그것의 눈에 맞고 말ㅎ다. 고렘은 다친 눈을 움켜잡으며 감옥이 다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크와아아악!" "이 때야. 도망가자!" 켈리가 랜스와 이즐레이의 손목을 끌어당기며 소리쳤다. 그들은 앞뒤 생각할 것 없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고렘의 비명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하젠과 간수들이 전력을 다해 그들을 쫓아왔다. 하젠의 날카로운 외침이 감옥 안9에 울려퍼졌다. "탈옥이다! 저놈들 잡아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간수들과 보초를 서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복도를 메웠다. 켈리는 걸리적거리던 검고 헐렁한 망나니의 것옷을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허리에 차고 있던 랜스와 이즐레이의 검을 던져 주었다. "받아! 이제 전속력으로 나가야 해. 시간 끌면 우리만 손해야!" 그리고는 자기도 채찍과 검을 각각 한 손에 들고, 마구 휘두르며 병사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이즐레이가 그녀가 준 검을 잡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흐음, 그럼 어디 몸 좀 풀어 볼까?" 이즐레이는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드래크로니안 특유의 빠른 동작 때문에 금방 그들을 추월했다. 그리고 남들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 빠른 속도로 칼을 휘둘러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두운 복도는 병사들의 시체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남은 병사들조차 이즐레이의 기세에 눌려 멀찍히 물러서며 길을 터 주었다. 이즐레이는 칼 그대로 미친 듯이, 만족스러운 미소까지 띄고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병사들의 반격으로 그러지 않아도 다친 몸이 여기저기 긁히고 찢겼으나, 그것마저도 얼마만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이봐! 그만 싸우고 어서 도망치기나 하자고!" 보다못한 켈리가 걸음을 늦추며 소리쳤다. 이즐레이는 불만스러운 듯 겁에 질린 병사들의 표정을 흘끗 보았으나, 곧 그들을 뒤로 한 채 켈리와 랜스를 따라 다시 복도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따라갈 생각도 못 한 채 멀거니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탈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맙소사... 저 살인마는 뭐죠...?" 한 병사가 얼이 빠진 듯 중얼거렸다. 하젠이 이를 갈며 대답했다. "드래크로니안... 악마의 피를 타고 난 놈이지. 듣던 대로군, 얼음의 심장을 가졌다더니, 이즐레이..." 한편, 랜스와 켈리는 이즐레이의 활약(?) 덕택에 무사히 감옥 문을 지나 밖으로 향했다. 켈리는 감옥 문을 나서기 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빗장을 지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윽...!"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이즐레이는 고개를 숙이며 피를 토했다. 랜스가 그를 부축하며,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몸으로 그렇게 날뛰니 상처가 벌어질 수 밖에..." "닥쳐. 남이야 죽건 말건 네가 무슨 상관... 컥!" 이즐레이는 그 지경이 되어서까지 랜스를 면박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켈리는 그런 그들을 숫제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요. 일단 이 성을 나가서 쉬자고." "하지만, 켈리, 이 성은 봉쇄되었을텐데 어떻게..." "다 방법이 있지!" 랜스의 말을 막으며 켈리는 장난꾸러기같은 미소를 지었다. "한 군데 봉쇄 안 된 축구가 있지 맞취 볼래? 성의 뒤쪽에 있는 출구야." "맙소사... 그... 벼랑 아래로 뛰어내리라고?" "많이 다치지는 않을 거야. 아래 물이 있으니까." "..." 갈리어드 성의 뒷면으로는 로운 강의 상류, 아트웰 사람들이 레이아 강이라고 부르는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깁고 물살이 무척 센데다가 그런 급류 치고는 몹시 넓어서, 그 쪽에만은 성벽이 쌓여져 있지 않았다. 물론 그곳에 병사를 세워 놓았을 리는 없었지만... '하긴... 옛 이야기에도 그 길을 통해 죄수들이 도망쳤다는 말이 있긴 하지... 게다가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에는 병사들이 깔렸을 게 뻔하고...' 쿵! 갑자기 감옥 문이 크게 덜컹거렸다. 랜스와 켈리, 그리고 이즐레이는 놀라서 말을 멈추고 그 문을 바라보았다. 무척 두꺼운 나무문 이었음에도 물구하고, 삐곡고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뚫릴 것 같았다. 쿵! 다시 한 면 흔들거리자, 쇠빗장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세 번쩨 에는 이윽고, 문을 뚫고 검푸르고 흉측한 손이 튀어나왔다. "...정말 무식하게 힘센 고렘이군. 시간이 별로 없겠는데." 켈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랜스와 이즐레이도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그 무지막지한 손을 보자, 절벽 아래로 뛰어내린다는 켈리의 작전에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모두 사라졌던 것이다. 밖은 이미 해질녁이었다. 한나절 가까이 랜스와 이즐레이는 의식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왕의 숲으로 접어들어, 성 뒷면의 절벽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잠복해 있던 병사들이 그들을 뒤쫓아 달려오며 외쳐댔다. "탈옥수다! 잡아라!" 그 중에는 데이슨도 끼어 있9었다. 이윽고 절벽에 다다르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멈추었다. 뛰어내릴 작정을 하고 오긴 했지만, 까마득한 절벽 아래 하얀 거품을 내며 흐르는 급류의 모습은 너무나도 위압적이었다. 작전을 세운 켈리조차 마음이 흔들릴 정도였다. 뒤따라온 병사들이 그들을 보고 비웃듯이 소리쳤다. "흥! 잘도 피하셨군. 이제 순순히 항복하시지?" '에라... 모르겠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켈리는 눈 딱 감고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 랜스와 이즐레이도 뒤따라 굽류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단단한 수면이 그들의 얼굴에 부딛히고, 그들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급류 속에 휘말려들었다. 물살은 켈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세었다. 도저히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랜스가 계속 꼬로록 꼬로록 물 속에 잡기는 그녀를 끌어내 주지 않았다면, 졸지에 익사해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랜스는 어떻게 발견했는지, 절벽 아래 난 작은 동굴 같은 공간에 발을 디디고 그녀를 끌어올려 주었다. 세 사람이 옹기종기 모여앉기에 좁지 않은 공간이었다. 켈리는 캑캑거리며 한동안 물을 뱉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의기양양해져서 웃어제꼈다. "봐! 내가 뭐랬어. 별로 안 다칠 거라고 했지?" 랜스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으나, 그런 그녀의 모습이 싫지는 않았다. 아니, 풀이 죽은 켈리의 모습이란 사실 상상할 수도 없었다. 로센 라스에서 세렉이나 다른 요정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조차, 이상해 보이기까지 한 켈리였으니까. "근데... 네 친구는...?" 켈리는 동굴 구석에 맥없이 누워 있는 이즐레이를 흘끗 보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랜스는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를 지었다. "기절했을 뿐이야. 많이 다쳤는데, 아까 병사들 상대로 싸웠던 게 몸에 무리가 갔었나보지." "흠... 넌 어때? 다친 데 안 아파?" "참을 만 해... 어쨌든 도와줘서 고마워. 솔직히, 네가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하하, 무슨 소리야. 동료잖아! 그리고 툴위그랑 로이랑 데이미아도 구하러 가야 되는데, 그 마법사 왕자를 어떻게 나 혼자 상대하냐? 너랑 같이 가야지 위험한 일이라도 시켜먹지." "...하여간 고마워, 켈리." 랜스는 몸을 동굴 벽에 기대며 미소를 지었다. 물에 젖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무리를 해서 그런지 상처가 몹시 쑤셨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켈리는 랜스가 자꾸 고맙다고 하는 게 쑥스러운지, 젖은 머리칼을 긁적이다가 기지개를 켜며 딴소리를 했다. "자아... 그러지 말고 자 두자고. 내일 아침부터는 다시 툴위그랑 로이, 데이미아를 찾으러 가야 할 것 아냐?" "...내일 아침이라고?" "당연하지. 한시라도 머뭇거릴 새가 있다고 생각해?" -------------------------------------------------------------------- 한편, 비슷한 시간, 로이와 툴위그, 데이미아는 오르크 병사들의 감시하에 낮선 성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할 줄 아는 인간 언어가 거의 없었고, 대장인 듯한 아크트만이 그나마 유창하게 공용어를 구사했다. 그는 나올 때부터 무엇이 좋은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포로들을 마차에 태워라. 편안히 모셔야 한다. 암, 귀한 손님들 이니까!" 그는 큰 소리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오르크들이었으나, 마법사 차람을 한 이들 중에는 요정족 이나 인간족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크트는 항상 공용어로 명령을 내렸다. 로이는 그들을 위해 준비된 마차에 타기 전, 자신이 머무르고 있던 성을 흘끗 돌아보았다. 밖에서 그 성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거무스름한 돌들로 지어진 그 성은, 단순하고 우아한 건물들을 좋아하는 아트웰인들의 작품답지 않게 조잡하고 험상궂어 보였다. 창문은 들쭉날쭉했고 너무 하늘 위로만 치솟아 있었다. 그러나 활을 쏘기 위한 창문과 성문의 방어 시설은 놀랄 만큼 완벽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벨리노어의 요새로군..." 하고 툴위그가 중얼거렸다. "벨리노어라면...?" "그래, 너도 아트웰의 마지막 왕, 붉은 방패의 벨리노어에 대해 들은 적이 있겠지? 이 성은 그가 마지막 저항을 위해 지었다는 숲속의 요새가 틀림없어. 아클레어 3세조차 쩔쩔 매게 만들었다는... 그 주인이 다른 나라 왕의 종이 된 이후 버려진 성이나 다름없었지. 보다시피 이 성은 싸우기 위한 성이지 살기 위한 성이 아니었으니까. 스트라본 왕자, 오르크들과의 거래에 딱 알맞은 곳을 발견했군. 조부는 이 성에서 타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그 손자는 오르크 따위와 거래를 하다니..." "자, 중얼거리지 말고 어서 타!" 인간인 듯 보이는 한 병사가 그들에게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그들을 위해 마차가 한 대 준비되어 있었다. 창문이 없는 커다란 마차였다. 죄수를 수송하는 마차라기보다는 차라리 짐을 운반하는 마차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안은, 오르크들에 의해 준비된 마차 치고 무척 편안했다. 방석과 덮개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죠?" 하고 데이미아가 물었다. 인간 병사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퉁명스럽게 대답 했다. "물론 라우더로 간다. 카야크 님께서 계신 곳!" (계속) 그 말에 아크트는 또 이유 모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일단 마차에 오르ㅌ 수밖에 없었다. "이해할 수 없어. 카야크는 힘일 뿐이라는데... 저들은 마치 사람 이름처럼 말하고 있군!"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툴위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카야크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서 들었어요?" "물론 켈리한테서지. 그 애가 그러더군. 카야크는 어둠의 힘, 또는 그걸 의인화한 신이라고. 그리고 실리사와 에퀴온이 봉인했다고..." "...켈리는 참 이상한 것도 많이 알아." 로이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내 말이 그말이야... 켈리가 어떻게 그걸 알까? 그건... 카야크는 드래크로니안의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야. 에스테이아 왕이 벌써 백 년 전에 금지한... 그런데..." 툴위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트레져 헌터들은 원래 별 이상한 신화들을 다 알잖아. 그래야 전설에 나오는 보물을 찾든지 말든지 하지. 그것보다 카야크 얘기나 해 보지 그래? 뭔가 아는 것 같은데." "아니... 그냥... 옛날에, 마법을 배우던 선생님들한테서 들은 얘기에요.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에... 자기가 바로 카야크 신의 현신한 모습 이고, 실리사와 에퀴온의 봉인을 풀어 자기 힘을 되찾게 되면 자신을 따르는 자 말고는 모두 멸하겠다고 선언하는 자가 나타났대요. 그의 마력도 엄청나서 따르는 자가 꽤 많았나 봐요. 처음엔 흑마술사들을 영입하고, 그 다음엔 오르크, 뭐 그런 식으로... 그의 제안은 항상 평범했죠. 새 세계의 지배자가 되게 해 줄 거라는... 그런데도 따르는 자가 그렇게 많았으니 뭔가 특별한 마법사이긴 했나봐요. 그리고... 제이룬도..." 데이미아는 여기까지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로이와 툴위그는 숙연 해졌다. 데이미아는 제이룬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심지어 아렌데일 여왕에게도 하지 않았으나, 로이와 툴위그, 켈리에게만은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마침 랜스는 혼수상태라서 듣지 못했지만... "그는 원래부터 흑마술에 관심이 있었죠. 자신의 마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건 피의 마법 뿐이라고 믿었으니까. 그는... 잘은 모르지만... 자신을 도우면 멸종할 운명인 드라이어드 족이 세상을 지배하게 해 줄거라는, 자칭 카야크의 말에 넘어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미 죽은 목숨 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살아나서..." 잠시 그들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모두 매우 불편한 기분이 되어 어쩔 줄 모르고있을 때, 로이가 대충 아무 말이나 꺼냈다. "그럼, 카야크가 아크트의 대장이로군? 그리고 지금 우리를 이용해서 봉인을 풀려고 하는 거고. 로크 페울로니가 봉인의 열쇠랬으니까. 그렇게 하면 말이 다 되네." "하지만, 봉인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봉인은 저승에 있다고도 하고... 게다가 봉인이 풀려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면 결국 자기가 가짜라는 걸 증명하는 꼴 아냐? 말이 되지 않아." 하고 데이미아가 반박했다. 그러나 로이도 지지 않았다. "자기가 진짜 카야크 신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잖아?" "그런 얼토당토 않은 말이 어디 있어?" "왜 안 돼? 자기가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바보들이 넘쳐나는 세상 인데. 신이라고 다른가. 게다가 어쩌면 그 친구가 진짜 신인지도 모르잖아?" "으휴~, 로이 넌 정말..." 데이미아는 차라리 웃기다는 듯이 실소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말없이 앉아있던 툴위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한 마디 던졌다. "내가... 이런 소리 하면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 녀석이 우리 셋을 잡아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처치하려는 건 아닐까?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우리, 즉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을 찾으라고 난리를 친다면... 그럼 영원히 탄로날 위험도 없고..." "으휴! 툴위그!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말아요!" 로이가 진저리를 치며 소리쳤다. 데이미아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건 그 놈이 우리에게 진짜 봉인을 풀게 할 생각이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생각이든, 그 놈 앞에 끌려가서 좋을 건 하나도 없어. 켈리랑 랜스는 뭘 하고 있는 거지...?" "근데 말이야, 데이미아..." 로이가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 데이미아를 불렀다. "응?" "궁금한 게 있는데... 로크 페울로니는 모두 네 개 아냐? 나머지 한 개가 없다면 세 개의 열쇠는 쓸모 없는 거 아냐?"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군, 잊고 있었어. 힐리온...!" -------------------------------------------------------------------- "야아, 정신이 들었어?" 이즐레이가 눈을 뜨자, 켈리가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이즐레이는 한순간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왜 이 낯선 소녀와 있는지 의아해졌다. 그러나 곧 상처의 고통과 함께,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하나 둘 생각났다. "...랜스는?"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동굴의 흙벽에 기대며 물었다. 켈리는 뭐가 좋은지 깔깔 웃었다. "서로 칼부림하는 친구라도 친구는 친구인가보네. 눈 뜨자마자 찾는 걸 보니. 걱정 마, 정탐하러 갔을 뿐이야. 나간 김에 변장할 옷도 좀 사오고. 그보다 상처는 어때?" "이정도 아무것도 아냐. 거기서 뭐하는 거지?" 이즐레이는 물에 떨어질락 말락하게 바위 끝에 걸터앉은 켈리를 보고, 경계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켈리는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낚시하는거야. 세상이 내일 망해도 아침은 먹으라는 말이 있지. 생선 좀 먹을래? 근데 소금이 없어서 간 없이 먹어야 해." "...그 속담 어디서 들었어?" "뭐?" "세상이 내일 망해도..." "몰라. 어디선가 들었겠지 뭐. 야아, 또 잡혔다!" 이즐레이는 한숨을 쉬며 즐겁게 낚시질을 하는 켈리를 바라보았다. 세상이 내일 망해도 아침은 먹어라. 그건 그의 어머니가 하던 말이었다. 붉은 눈과 빠른 몸놀림을 물려준, 그의 어머니. 인간의 남자를 선택함으로써 결국 아들에게 인간의 사히에도 드래크로니안의 사회에도 끼지 못하는 이방인의 운명을 선물한... 그는 말없이 모닥불 위에 꽂혀져 익어 가는 생선 하나를 집어들었다. 언제부터 굶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이니 간이 맞고 안맞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켈리는 엉성한 나뭇가지와 어디서 났는지 모를 투박한 실로 만든 낚싯대로, 고기들을 잘도 낚아냈다.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이즐레이는 그녀가 꽤 예쁘다고 생각했다. 랜스는 그녀가 트레져 헌터일 뿐이고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지만, 그는 이제 그따위 변명은 믿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어쨌거나, 랜스 때문에 죽음을 무릎쓰고 그 감옥으로 숨어들었다. "당신, 참 잘 싸우던데." 켈리는 낚싯대를 치우며 모닥물 앞으로 다가앉아, 이즐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그녀를 힐끔 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속도 때문이야. 그것만 빼면 아무것도 아니지." "흠... 안 그런 것 같던데.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도와줄 수 없어? 동료가 그 왕자한테 납치됐어." "날 고용하겠다는 말이야?" "뭐, 그런 셈이지... 암살 같은 것보다 오히려 쉬울거야." "안 돼. 난 비싸거든. 그리고 위험 따위는 나한테 문제가 되지 않아." "...그 말은 사실인 것 같더군." 켈리는 피식 웃으며 소메를 걷었다. 팔꿈치 바로 위에 금빛으로 빛나는, 붉고 커다란 보석이 박힌 팔찌가 있었다. 매우 세밀한 솜씨로 보석을 감싸고 도는 세 명의 날개 달린 여인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즐레이의 놀라는 표정을 보고, 켈리가 말했다. "이거면 되겠지? 진품이야. 디온의 왕이 정부 시에드리아한테 선물한 거지." "이런 걸 어떻게...?" "도굴했지 뭐. 뻔한 걸 왜 물어? 나 도와줄거지?" 이즐레이는 말없이 그 팔찌를 받아들었다. 켈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팔찌의 무게로 보아 진품임이 틀림없으니, 손해본 셈은 아니었다. '드래크로니안의 속담을 읊어 대고 디온의 국보급 보물을 가지고 다니는 트레져 헌터라... 랜스 녀석, 재미있는 동료를 데리고 다니는군?' "난 켈리야. 랜스에게서 들었겠지? 당신은... 이즈? 뭐 그렇게 부르는 것 같던데." "이즐레이야. 이즈라고 부르든 말든 맘대로 해." "이즐레이... 고대어로 '붉은 눈'이라는 뜻이군. 누가 지은 이름인지 멍청한 작명가네. 드래크로니안의 후손이라면 눈이 붉은 건 당연한 거 아냐. 누가 지었지?" "...내가." "...뭐, 꼭 멍청하다는 건 아냐. 하여간 앞으로 잘 부탁해." 켈리는 머쓱해져서 괜히 실실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별 상관 않는 것 같았다. "켈리!" 동굴 위쪽에서 랜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 옷 꾸러미를 짊어진 랜스의 모습이 동굴 입구에 나타났다. 그는 이즐레이를 보고 반가운 듯 미소지었다. "어, 깨어났군, 다행이야. 그보다, 성에서 난리가 났더군. 우릴 현상 수배한대." "흥, 그거야 당연한 일 아냐?" 켈리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것 뿐만이 아냐... 사일러스가 돌아왔다는군." "뭐라고?" 랜스의 말에, 켈리와 이즐레이는 둘 다 놀라서 소리쳤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죽었다면서?" "실종... 이었지...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하여튼... 나도 뭐가 뭔지 잘 모르겠어." 랜스는 도리질을 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켈리는 어깨를 으쓱하며 랜스가 가져온 옷꾸러미를 뒤적였다. " 이 도시는 완전히 미쳐 가는 것 같으니 빨리 나가는 게 상책인 것 같아. 나가서 얼른 로이 일행이나 구해서 여길 뜨자고." 하고 그녀가 말했다. 랜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즐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럼 섭섭하지만 여기서 안녕이군, 이즈." "무슨 소리야? 이즈도 함께 가." 켈리의 말에 랜스는 완전히 경악했다. "뭐, 뭐야?" "사실이야. 켈리가 날 고용했어." 이즈가 랜스의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재미있다는 듯 대답했다. 랜스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따질듯이 소리쳤다. "하지만, 켈리, 내게 의논도 없이!" "왜? 친구라며. 그리고 이즈 실력 좋잖아. 도움 많이 될 거야. 자, 이거 어서 입어. 엉뚱한 일 갖고 싸우지 말고 로이 일행 찾으러 가야지!" (계속) 길리어드에는 오랫만에 축제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반년 전, 사일러스 왕자가 실종된 이후 처음 맞이하는 축제였다. 올두스 대공은 이 날을 공식 휴일로 선포하고, 앞으로 열흘동안 모든 아트웰 공국이 축제를 열 것을 명령했다. 올해의 세금조차 감면했을 정도였다. 화려하게 치장한 말을 타고, 번쩍거리는 근위병들과 함께 거리를 둘러보는 올두스 대공을 보고, 길리어드의 주민들은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 했다. 그는 반 년동안 아트웰을 다스리던 그 허약한 노인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용감했던 기사의 모습, 위대한 붉은 방패의 기사 벨리노오의 아들다운 모습이 그에게 돌아와 있었다. 그는 아들을 잃기 전보다 훨씬 더 젊어진 것 같았다. 백발은 바람에 휘날려 차라리 은발같이 보였고, 오히려 그의 위엄을 더해 주었다. 하얀 눈썹 아래의 푸른 눈은 번쩍거렸고, 그의 마르고 각진 얼굴조차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놀랍게도,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사일러스 왕자가 당당히 말을 몰고 있었다. 빛나는 은빛 갑옷을 입은 그는 놀라울 정도로 반 년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을 뛰어넘어 보존된 듯이... 그가 반 년 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전혀 수척해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다지 어려움을 겪지는 않은 것 같았다. 사실, 그 일에 대해 궁금해 하는 아트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돌아왔다는 것, 그리고 올두스 대공의 슬픔과 반란군의 극성 때문에 피폐해졌던 아트웰이 곧 제모습을 찾으리라는 것이었다. 화려한 대공과 그 아들의 행진을 넋놓고 구경하는 인파 중에, 세 사람이 조금은 다른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한 소상인의 차림을 한 두 남자와, 그들과 일행인 듯 보이는 농사꾼 차림의 소녀였다. 두 남자 중 한 명은 그리 추운 날씨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망토에 달린 후드를 깊이 눌러 써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저건 분명히 사일러스로군...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어." 하고 한 남자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의 옆에 서 있던 소녀가 되받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랜스... 로이랑 그 일행은 대체 어딜 간 걸까? 난쟁이와 요정, 인간이 하나씩 섞인 일행이라면 눈에 띌 만도 할텐데, 도무지 보았다는 사람이 없으니..." 망토로 얼굴을 가린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스트라본 왕자도 그걸 알 거야. 그러니 여보란 듯이 남들에게 다 내보이면서 끌고가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이즈, 비밀이라도 새어나가는 법이야. 아트웰 반란군이 아무리 입이 무겁다 해도, 이 성 밖으로 끌고 나갔다면 반란군에 가담하지 않은 병사들의 손도 거쳤을테고... 비밀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을 텐데..." "중요한 걸 잊고 있군. 스트라본은 마법사야." 하고 랜스가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가 생각 못 하는 마법을 쓸 수도 있어. 이를테면 그들의 모습을 바꾼다거나, 순간 이동이라거나..." "그것도 그렇군. 그럼 일이 곤란하게 되는데..." 켈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녀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고개를 번쩍 들면서, 좀더 기운 찬 목소리로 말했다. "으휴, 모르겠다! 골치 썩인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일단 펠히스나 찾은 다음에 생각하자!" "어, 그리고 보니 어제부터 안 보이네..." 랜스의 말에 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어이구, 빨리도 알아차리는군? 너희 구하러 가기 전에 주점에 맡겨 놨지. 어서 가자고." 켈리가 웃으면서 앞장섰고, 이즐레이도 선뜻 그 뒤를 따랐다. 랜스도 올두스 대공과 옛 친구 사일러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흘끗 보고는, 그들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축제 때문에 가뜩이나 북적거리는 거리가, 이 기회를 이용해 한몫 잡아 보려고 노점상을 차린 장사꾼들 덕분에 발 디딜 틈이 없게 되었다. 랜스와 이즐레이, 그리고 켈리는 사람들 사이를 부대끼며 거리를 걸어다녔다. 켈리가 보통 소녀들처럼 치마와 숄로 차려입는 것을 본 것은 처음 이었다. 그녀는 항상 여행하기 편하도록 남자처럼 차리고 다녔었으니까. 랜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낯설었으나, 싫지는 않았다. "나으리! 이것 좀 보시죠." 싸구려 장신구들을 팔던 한 장사꾼이 랜스의 앞에 조잡해 보이는 목걸이를 들이대며 말했다. "참 예쁘지 않습니까? 부인께 선물하면 좋아하시겠군요!" "에... 부...인이요?" 랜스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장사꾼은 눈짓으로 켈리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켈리가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이즐레이도 얼굴을 숙이면서 어깨를 움츠리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아하하하... 우리 부부 아녜요!" 켈리가 큰 소리로 웃으며 장사꾼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는 잠시 당황한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번에는 이즐레이를 향해 정중히 사과했다. "이, 이런, 죄송합니다, 나으리. 제가 오해를 했군요. 그럼 이 숙녀 분은 나으리의...?" 이번엔 랜스도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세 사람은 무안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장사꾼을 뒤로 하고, 서로를 쳐다보며 정신없이 웃으며 길을 걸어갔다. 길을 가는 다른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떤 작은 주점 앞에서, 켈리는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여기야!" 식사 시간은 이미 지났고, 아직 술을 마시기에는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꽤 붐비는 주점이었다. 켈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자, 키가 작고 아랫배가 튀어나온, 마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주점 주인이 반가이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십쇼, 아가씨! 개를 찾으러 오셨죠?" "예. 그 녀석 잘 있겠죠...?" 그러나 켈리의 물음은 필요가 없었다. 카운터 구석에 앉아 있던 커다란 잿빛 물체가, 그녀의 몸 위로 펄쩍 뛰어올라 그녀를 쓰러뜨렸기 때문이다. 이즐레이는 놀라서 칼을 빼어들었으나, 곧 그 물체가 켈리의 얼굴을 정신없이 핥고 있는 커다란 짐승이라는 것을 알자, 피식 웃으면서 칼을 칼집에 꽂았다. "뭐야, 이 녀석이 펠히스야? 누군가 했더니, 개로군." 켈리는 소리내어 웃으며, 가볍게 펠히스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주점 안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신기한 눈빛으로 이들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인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정말 영리한 개더군요. 부럽습니다! 길리어드 지방엔 이처럼 좋은 개가 없죠. 사냥개인가요?" "아, 예... 그래요. 어쨌든 돌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아, 그럼 안녕히... 아, 아니, 잠깐만요, 잊어먹을 뻔 했네! 아가씨에게 편지를 전해 달라는 신사분이 있었어요. 그 편지를... 내가 어디 뒀더라?" 주점 주인은 정신없이 조끼의 안주머니를 뒤지며 켈리를 불러세웠다. 켈리라 의아한 듯 되물었다. "...제게요?" "아, 예. 키가 크근 신사분이었는데... 아, 여ㄱ군!" 주인은 조끼 안주머니에서 좀 구겨진, 네 겹으로 접힌 누런 종이를 꺼내어 켈리에게 건네주었다. 그 편지를 읽는 켈리의 손이 조금 떨렸다. "누... 누가 가져온 거죠?" "검은 옷을 입은, 키가 큰 젊은이였어요. 로인가 루인가... 뭐 그런 사람의 친구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더군요. 아가씨가 떠나시자마자 곧마로 문을 두드리고는, 달랑 이 편지만 건네주고는 가 버리더군요. 한적한 밤이었 는데, 발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리듯 가 버려서 기억하고 있습죠... 아니, 왜, 뭐가 잘못됐습니까? 혹시 제가 실수라도?" 켈리의 창백한 표정을 보고 주점 주인은 놀라서 물었다. 그러나 곧 켈리는 침착성을 회복하고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감사해요. 그럼 바쁘실 텐데 이제 가 보시죠." "...물이라도 갖다드릴까요, 아가씨?" "아뇨, 정말 괜찮아요." 주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흘끗 보더니, 손님들 틈으로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무슨 편지야?" 하고 랜스가 물었다. 켈리는 말없이 그 편지를 랜스에게 건네주었다. 낡고 더러운 종이 위에 큼직큼직하고 시원스러운 필체로 쓴 글이었다. 편지의 사연은 짤막하고도 놀라운 것이었다. '우리는 지금 오르크들과 함께 벨리노어의 요새에 있다. 곧 떠나게 될 것 같아. 스트라본 왕자는 오르크들과 손을 잡았어.' 그리고 그 밑에는 더욱 큰 필체로 '툴위그 젠 글렌델'이라고 서명 되어 있었다. 이즐레이는 편지를 흘끗 넘어보더니, 관심이라고는 없는 말투로 물었다. "...어쩔 거야?" "물론 벨리노어의 요새로 가야지." "조심성이 없군. 함정일거라는 생각은 안 하나?" "어쩔 수 없잖아. 설마 함정이 두려운 건 아니겠지, 암살자 이즐레이?" "하! 두렵다고? 지금 당장 떠나도 난 상관 없어." 이즐레이가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나 랜스가 갑자기 끼어들며 소리쳤다. "잠깐!" "왜? 귀족 도련님께서 뒤늦게 목숨의 소중함을 실감하셨나?" 이즐레이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랜스는 켈리에게 말했다. "이 말이 맞다면 스트라본은 반역자일뿐 아니라 오르크들의 졸개 이기도 해. 그대로 놔 둘 수 없어! 그의 마법만도 엄청난데, 오르크들의 지원 까지 얻는다면..."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켈리의 목소리는 좀 짜증스러웠으나, 랜스는 눈치채지 못했다. "에스텔로 가서 알려야..." "흥, 어련히 알아서들 안 할까. 로이 일행을 찾는 것이 가장 급해." "무슨 소리야. 이건 인간족 전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한시라도 빨리 알리지 않으면 그들은 우리 모두에게 큰 위험이 될 거야. 너도 스트라본의 반란군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거대한지 봤잖아. 그들은 정말 아트웰 왕국의 군대나 다름없어. 게다가 오르크의 힘까지 빌면...! 안 돼, 어서 에스텔로 가야 해. 스트라본과 오르크들을 물리치면, 로이와 툴위그, 데이미아는 자연히 풀려나게 돼." 그러나 켈리는 고집을 꺽지 않았다. "어느 세월에? 아니, 난 당장 그들을 구해야겠어. 랜스, 넌 오기 싫다면 오지 않아도 좋아! 이즈, 넌 나와 함께 갈거지?" "물론이야. 날 고용한 건 켈리 너니까." 이즐레이는 랜스를 놀리듯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랜스는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이즈...!" "아, 미안. 난 네가 말한 그 '인간족'에 포함되지를 못해서 말이야..." 이즐레이가 잔뜩 고인 목소리로 대답하지 랜스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또 친구의 아픈 점을 건드렸다는 죄책감 때문 이었다. 그는 얼른 눈을 돌려 켈리를 응시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줘, 켈리." "싫어!" 켈리의 대답은 단호했다. 그들 사이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켈리도 랜스도 말 없이 서로를 노려볼 뿐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이즐레이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잠깐... 두 사람, 좀 있다가 다시 싸우든지 하지 그래?" 그는 눈짓으로 중앙의 커다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가리켰다. 가벼운 무장을 한 한 무리의 군인들이, 그들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었다. 랜스와 켈리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들의 대화가 들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 일단 나가고 보자, 랜스." "...그래야겠군." 그들은 가능한한 태연하게 식탁을 떠나,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병사들이 이미 그들의 정체를 대강 눈치챈 것 같았다. 그들은 재빨리 문을 가로막더니,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어이, 거기 세 분! 왜 식사도 안 하고 떠나시지? 우리 좀 볼까?" "어머... 왜 그러세요, 나으리?" 켈리는 그럴듯하게 당황한 시골 아낙의 흉내를 내며 랜스의 뒤에 숨는 척을 했다. 그녀의 연기는 뛰어난 편이었고, 특이한 고대어식 억양조차 이상한 시골 사투리 정도로 들렸다. 그러나 병사들의 의심을 덜기에는 부족 했다. "하! 시골뜨기치고 참 좋은 칼을 차고 다니는군?" 한 병사가 랜스의 망토를 걷어내며, 그의 허리에 찬 검을 보고 소리쳤다. 아덴 가의 문장인 칼 두 개가 꽂힌 비룡이 그려져 있는 명검이었다. 이렇게 되면 다 틀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랜스는 뒤로 물러나 싸울 준비를 했다. 옆에서 다른 병사의 비명이 들려왔다. "맙소사! 이 놈, 인간이 아냐!" 어느새 이즐레이의 얼굴을 가리던 망토의 후드가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드래크로니안 치고도 붉은 그의 눈이, 소리치는 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계속) "드래크로니안...!" 누군가가 외쳤다. 이즐레이는 자신의 후드를 벗겨 얼굴을 드러나게 한 그 병사를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무례한 친구로군." 그와 거의 동시에, 그의 빠른 손이 바로 곁에 놓여있던 나이프를 집어 그 병사에게 던졌다. 누가 말릴 새조차 없었다. 아니, 나이프가 날아가 그 병사의 옆구리에 꽂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그의 행동을 예측하지 못했다. "캬아악!" 병사의 외침과 함께, 주점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주점 안의 모든 사람들은 병사들 편이었다. 그들은 증오 어린 표정으로 이즐레이를 노려보며, 마음 속으로 병사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 중 아무도, 아니 병사들 중에서도 아무도 이즐레이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했다. "...기회다!" 켈리가 이렇게 외치며, 망토 속에 숨겨두었던 검을 꺼내 병사들에게 덤벼들었다. 랜스도 짖 않고, 넋놓고 있는 병사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선두에 서 있던 두 병사의 검이 맥없이 땅에 떨어지고, 다른 한 명은 그리 깊지 않은 상처를 다리에 입을 채 쓰러졌다. 그 동안 켈리는 두 명의 병사를 쓰러뜨렸다. "이제 가자... 이런!" 켈리는 도망갈 출구가 트인 것을 보고 신이 나서 소리 치다가, 이즐레이의 모습을 보고 질겁을 했다. 그는 도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신이 나서 병사들에게 마구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여섯 명의 병사가 그의 주위에 쓰러져 있었고, 그 중 넷은 벌써 숨이 쓰러진 것 같았다. 한 명이 간신히 그의 빠른 칼놀림을 막아내고 있었지만,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병사들은 도와주기는 커녕, 그의 가까이에 접근할 엄두도 못 내는 것 같았다. 옷에는 피가 튀긴 채 야릇한 미소까지 짓고 있는 그의 ㅗ습은 사실 켈리까지도 움츠러들게 할 정도였다. 거의 궁지에 몰린 그 병사를 도와준 것은, 동료 병사들이 아니라 배불뚝이 주점 주인이었다. 그가 대담하게도 식탁에 올라선 채, 이즐레이의 머리 위로 의자를 던졌던 것이다. "드래크로니안! 죽어랏!" 하는 외침과 함께. 이즐레이가 의외의 공격을 받고 비틀거리는 틈을 타서, 그 병사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그의 검을 떨어뜨렸다. 랜스가 얼른 달려와 대신 ㅏ아 주지 않았다면, 다음 차례는 그의 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즐레이는 얼른 칼을 집더니 주점 주인을 노려보았다. "흥,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어딜 감히...!" 그러나 어느 틈에 병사를 눕혀 버린 랜스가 얼른 달려와,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충분해, 이즈! 여길 뜨자!" 이즐레이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으나, 군말 없이 랜스의 말에 따랐다. 그들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주점을 벗어나 혼잡한 거리로 달려갔다. 켈리와 펠히스는 이미 멀리까지 도망친 후였다. 병사들이 검을 들고 그들의 뒤를 쫓았으나, 도떼기 시장같은 거리에서 그들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였다. "헥헥... 큰일날 뻔 했네. 역시 너무 큰 소리로 얘기했었나봐..." 뒷골목으로 숨은 켈리가 벽에 등을 댄 채,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뒤늦게 따라온 랜스와 이즐레이가 한 마디씩 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펠히스하고 달랑 둘이서만 달아나냐?" "벌써 두 번째 아냐. 의리 끝내주는군." "흥, 다 너희들을 믿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그보다 랜스, 아무리 변장이라지만 이렇게 걸리적거리는 긴 치마를 갖다주면 어떡하냐?" 적반하장이라더니 켈리는 오히려 랜스에게 따지고 들었다. 랜스는 어이없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다가, 말싸움은 그만 두기로 했는지 간단히 대답했다. "하지만 남자 차림의 여자는 역시 눈에 띄어." "칫... 그건 그렇지만... 어? 이즈! 어깨에 피가!" 켈리가 당황해서 외쳤다. 이즐레이의 옷의 어깨 부분에 검붉은 피가 스며들고 있었다. 이즐레이는 얼른 손으로 그것을 가리더니, 침착하게 대꾸 했다. "별 거 아냐. 아까 그 바보가 던진 의자가 상처를 건드렸어." "어디 좀 봐." 랜스가 말하며 상처를 감싼 그의 손을 치우려 하자, 이즐레이는 몸을 피하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괜찮다니까!" "고집피우지 말고. 랜스가 싫으면 내가 봐 줄까?" 켈리의 말에 이즐레이는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치우며 중얼거렸다. "...정말 둘이서 박자도 잘 맞게 노는군." 분명 랜스와 켈리의 약을 올리기 위해 한 소리였을테지만, 그 둘 중 아무도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랜스는 들은 척도 않고 그의 상처를 살피더니, 다행이라는 듯이 말했다. "이번만큼은 네가 옳았군, 이즈. 별 거 아냐. 피도 곧 멈출 거고." "야아, 다행이다! 그럼 어서 출발해야지. 이즈, 말을 탈 수 있겠지?" 켈리가 즐거운 듯 소리쳤다. 이즐레이는 그녀를 흘끗 보더니 한심 하다는 듯 물었다. "말이야 탈 수 있지만 도대체 벨리노어의 요새로 갈 건데, 에스텔로 갈 건데?" "..." 랜스와 켈리는 입을 다문 채 서로를 쳐다보았다. 이윽고 랜스가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일단 로이 일행을 구하도록 하지. 그런 다음에 에스텔로 가기로 하자고..." -------------------------------------------------------------------- 오르크들의 생활은 인간들과는 정 반대였다. 그들은 해가 질 무렵 출발하여 밤새 말을 달리고, 동이 틀 무렵부터는 검은 천으로 된 막사를 세우고 잠을 청했다.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가 탄 마차에는 창문 하나 달려 있지 않았고, 불을 밝힐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작은 등불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오르크들의 움직임으로 미루어 밤과 낮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이 출발한 바로 다음 날 저녁이었다.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는 마차 안에서 할 이야기도 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크트의 화난 외침이 그들을 깨웠다. 마차 밖에서 아크트가 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있었다. 오르크 말과 인간 말을 대충 섞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9 "...왜 저러는 거에요?" 로이가 불안해져서 툴위그에게 물었다. 데이미아도 걱정이 되는지, 로이의 곁에 붙어앉았다. 툴위그는 큰 귀를 마차 문에 바짝 가져다 대고, 밖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어쨌길래 갑자기 말들이 저러는 거냐?! 푸, 수르(바보, 멍청이들)! 당장 일으켜 세워서 출발해! 그러지 않으면 너희 모두 목이 달아날 줄 알아!" "...말들이 어디가 잘뭇됐나봐." 하고 툴위그가 기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래서 출발할 수 없나본데." "와아, 잘됐어! 켈리와 랜스가 더 쉽게 쫓아올 수 있겠네요!" 하고 로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그거야 그들이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 때의 얘기지. 아마 지금쯤 길리어드 시 안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걸. 그 교활한 왕자가 우릴 여기까지 데려올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왜 그래, 데이미아? 좋게 생각하자고!" 로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난 켈리와 랜스를 믿어. 분명히 지금쯤 열심히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을 거야!" 한편, 마차 밖에서는 아크트가 거의 발악을 하면서, 죄 없는 마부 오르크들의 머리를 셋이나 베고도 아직 분이 안 풀려 씩씩거리고 있었다. 말들은 모두 죽은 듯이 쓰러져 있었다. 체온은 시체처럼 내려가 있었고, 호흡과 맥박도 아주 약하고 느렸다. 아무리 걷어차고 채찍질을 해 보아도 꼼짝도 안했다. 가냘픈 호흡만 아니라면 누구라도 죽은 말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호흡은 아주 규칙적이었고, 편안히 감긴 눈꺼풀은 그들이 아무 고통도 느끼지 못함을 말해 주고 있었다. 아크트가 아는 바로는 이런 효과를 내는 약은 단 한 종류밖에 없었다. '...두아스의 독이다!' 그러나 그의 충복인 두아스가 이런 식으로 그를 방해할 리 없지 않은가. 한시가 급한 때에 말을 재워 놓다니... 게다가 설사 그럴 마음이 있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는 지금 라우더의 본부에서 하르크자엘의 동태를 살피고 있으니까. 날개가 달리지 않은 이상, 소문도 없이 아트웰 변경까지 온다는 것은... '제기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아크트는 바위 위에 풀썩 주저앉으며 속으로 욕설을 퍼부어 댔다. 그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두아스의 독이 분명하다면, 저 퍼질러 자는 말들은 내일 저녁까지 불 속에 집어넣어도 안 깨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약효가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깨어날테니, 버려 두고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윽고 아크트는 분이 풀리지 않은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하는 수 없다. 오늘은 여기서 머문다. 포로들의 감시를 철저히 하도록!" -------------------------------------------------------------------- "...그래서 놓쳤단 말이냐...?" 스트라본은 쓴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보고를 올린 하젠은 송구 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두 번씩이나...! 차라리 목을 쳐 주십시오." "됐다. 물러가서 근신하고 있거라. 그들을 과소평가한 내게도 책임이 있으니..." 스트라본은 자리에 앉으며 힘없이 이마를 짚었다. 하젠은 물러가기 전 걱정스러운 듯 흘끔 그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아닌 게 아니라 스트라본은 지금 서 있는 것도 용한 상태였다. 랜스 경과 그 동료들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족들이 사일러스에게 건 석화(石化) 주문을 풀기 위해 너무 무리했던 것이다. 다른 마법사라면 이미 쓰러져 버렸을 것이다. 아니, 그런 마력은 아예 가지고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스트라본도 이제 한계에 다다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나 같은 것이 뭐라고 여쭐 입장이 아니다... 사일러스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그 분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 하젠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스트라본의 방을 나섰다. "내가...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면 그들의 위치를 알아내 공격할 수 있을 텐데..." 스트라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그의 마력은, 그렇게 소모하고도 아직 남아 있었다. 적어도 랜스 일행의 위치를 꿰뚫어 보고 간단한 괴물들을 소환하여 보낼 수 있을 정도는. 그러나 간신히 버티고 있는 그의 체력은 마력을 쓸 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도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것은 물론이고, 만약 성공한다 해도 그 자신은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창백하구나, 스트라본. 가서 쉬는 게 어떠냐." 구석에 서 있던 사일러스가 동생에게 다가오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스트라본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형도 돌아오고, 모든 게 다 잘 되어가는 판에 그들이 도망 치다니... 아주 조금만 힘이 남아있으면 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몸이 따라 주질 않아..." "넌 지금까지도 너무 많은 일을 해 주었어, 스트라본. 우리 아트웰 저항군은 모두 네게 감사하고 있단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그렇고..." "그들을 잡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지 몰라." "랜스라면..." 하고 사일러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의 형이... 에스텔에 있지." "사일러스도 그렇게 생각해? 그가 에스텔로 가서 클레이브에게 알릴 거라고?" 스트라본과 사일러스의 눈빛이 마주쳤다. 두 형제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윽고 사일러스가 입을 열었다. "도중에 그를 처치할 수 있다면 큰 행운이겠지만... 아무래도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 할 것 같구나. 준비가 다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우리라면 승산이 있어." "괜찮겠어? 랜스와 클레이브라면 형의 옛 친구인데..." 스트라본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었다. "클레이브는 내 친구라면서 나를 사지로 내보냈지... 그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일 대문에 나는 알게 됐어. 이 시대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그래서 전쟁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겠지. 내 걱정은 마라, 스트라본. 우리는 재건된 아트웰 왕국의 첫번째 지도자가 될 거야.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불사하겠다. 더군다나 네가 나를 위해 그렇게나 힘써 주었는데..." "사일러스..." "가서 잠을 청하거라, 스트라본. 이제부터 닥칠 일이 태산같은데, 그 전에 네 몸을 회복해 두어야지. 랜스는... 내게 맡겨라. 내가 처리할 수 있으니..." (계속) 벨리노어의 요새 뒤의 드라크노움 산맥 너머로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었다. 붉은 하늘 속의 검은 성은 마치 불에 타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흉측하고 불균형한 모습이, 마치 금방이라도 보는 사람의 머리 위로 내려앉을 것 같았다. 그러나 가까이 갈수록, 그 성이 보기보다는 견고하게 지어졌다는 것을, 아니, 어떤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히 지어졌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성 하나 정말 흉측하게도 지었군!" 켈리가 혀를 내둘렀다. "벨리노어의 의도였겠지. 적의 병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사기가 떨어지게 하려는..." 랜스의 대답이었다. 랜스, 켈리, 이즐레이는 모두 말을 타고 쉴새없이 달려, 이제 막 벨리노어의 요새 앞에 다다른 참이었다. 켈리는 원하던 대로 남자 차림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였고, 이즐레이도 이제 눈을 가리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기고 있었다. 켈리의 말 옆에는 늑대 펠히스가 지친 기색도 없이, 뭔가 생각하는 듯한 눈빛으로 벨리노어의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전쟁으로 물든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듯이... "...말도 마차도 정신없는 발자국 뿐이군. 이미 모두 떠난 것 같아." 땅을 살피던 이즐레이의 말에, 켈리도 랜스도 맥이 빠져 버렸다. 둘은 말에서 내려 직접 살펴 보았지만, 결국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성 안에서는 그나마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지만, 풀과 먼지로 덮인 숲길에는 아무 발자국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 뻔했다. 이제는 그야말로 단서가 하나도 없어진 셈이었다. "...애써 여기까지 왔는데..." 켈리가 맥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로 그 때, 코를 땅에 박고 킁킁거리며 어슬렁거리던 펠히스가 큰 소리로 짖기 시작했다. "컹컹! 컹!" 그리고는 숲속을 향해 마구 달려갔다. "펠히스? 왜그래! 거기 서!" 켈리는 당황해서 말에 오르는 것도 잊은 채, 달려서 펠히스의 뒤를 쫓아갔다. 펠히스는 켈리가 오는 것을 기다리면서, 계속해서 큰 소리로 짖어 댔다. 그는 몇 번 켈리를 향해 짖더니, 다시 몇 번을 숲을 행헤 짖기를 반복 했다. 켈리가 간신히 그의 앞에 다다르자, 그는 다시 몇 발짝 숲을 향해 달리더니, 멈추어 서서 짖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켈리가 숨을 헐떡이며, 약간 짜증이 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계속 그녀와 펠히스의 행동을 주시하던 랜스가, 갑자기 외쳤다. "모두 말에 올라타! 펠히스가 방향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뭐?" 켈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하면서도, 말을 향해 달려 왔다. 9 "저걸 봐. 분명히 우릴 안내하려 하고 있어!"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들이 모두 말 위에 오르자, 펠히스는 눈을 빛내며 큰 소리로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제세상을 만난 듯 빠른 발로, 숲 속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켈리와 랜스, 펠히스도 물론 말을 달려 그 뒤를 쫓았다. 펠히스의 걸음은 보통의 늑대보다도 훨씬 빨랐고 그의 달리는 모습도 안정되고 왠지 위엄이 있어 보였으므로, 이즐레이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분명 드라크노움 중심부에 사는 고대의 종(種)이야. 어떻게 저런 늑대와 함께 다니는 거지? ...하여간 잘 됐어. 점점 재미있어지는군...' 한 마리의 늑대와 말을 탄 세 사람의 모습이 어둠이 깔린 숲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 밤은 곧 지났고, 마차의 잠긴 문 틈으로 햇살이 새어들고 있었다. 아침이 온 것이다. 오르크들에게는 지금부터가 잠을 잘 시간이었다. 그들은 몇 명의 당번병을 제외하고는, 미리 만들어 놓은 검은 막사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계급이 낮은 병사들은 그냥 땅바닥에 쓰러진 채 잠들기도 했다. 아크트는 물론, 그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마차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라우더에 노예로 잡혀 온 난쟁이 장인들이 만든, 화려하고 편안한 마차였다. 다른 때 같으면 라우더의 성 안에 있는 것처럼 편안하게 잠을 청할 수 있었을테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발이 묶인 데 대한 불안함과 말에게 약을 먹인 범인에 대한 의구심 때문에, 그는 해가 중천에 뜨도록 눈을 붙이지 못했다. 간신히 잠이 들자 이번에는 온갖 뒤숭숭한 꿈들이 그를 괴롭혔다. 한낮이 되자 보초를 서던 오르크 병사들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마차를 지키던 네 마리의 오르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선 채로 창에 머리를 기댄 채,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햇빛 때문에 시야가 어두워진 데다가 졸립기가지 하니, 근처에 누가 와도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휙! 갑자가 한 대검이 햇빛을 반사하며, 세상 모르고 졸고 있던 보초 오르크 한 마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그 오르크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조차 모른 채, 조용히 쓰러졌다. 너무 조용히 쓰러졌으므로 그의 곁에서 졸고 있던 다른 오르크만이 놀라 눈을 뜨고, 다른 이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눈을 뜬 오르크도 놀라는 표정이 채 가시기도 전에, 목과 몸이 분리 외어 쓰러졌다. 마차를 지키던 다른 두 오르크들도 마찬가지의 신세가 되었다. 네 오르크들을 순식간에 해치운 그 살인자는, 태연히 마차의 문으로 가, 칼로 자물쇠를 부수어 버렸다. 마차의 문이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고,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뭘 보나. 어서 도망가라!" 하고 그가 말했다. 로이는 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더듬더듬 속삭 였다. "다... 당신은 오르크인데... 왜?" "어서 도망쳐라. 나는 푸이 하르크의 용사다. 너희들이 벌써 잡히면 하르크자엘 님의 작전에 차질이 있다!" 그 오르크는 유창한 공용어로 말했다. 그래도 로이가 꿈쩍 할 생각을 않자, 그는 로이의 멱살을 잡아 마차 밖으로 끌어냈다. 그 모습을 본 툴위그와 데이미아는 서둘러 마차 안을 나왔다. 그 오르크는 검은 털이 난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속삭였다. "숲에 가서 숨어라. 너희들의 친구가 너희를 찾으러 오고 있다. 숨고, 잡히지 마라. 너희가 잡히면 하르크자엘 님께서 곤란해지신다!" 로이와 툴위그, 데이미아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슬금슬금 발을 옮겼다. 바로 그 대, 거친 외침이 정적을 찢고 모두를 깨우며 울려퍼졌다. "푸우크! 사그 푸우크! (도망자다. 포로들이 도망친다!)" 로이를 되와 준 오르크는 칼을 치켜들고 소리를 지르는 오르크에게 뛰어들었다. 소리치던 오르크는 배가 갈려 쓰러졌고, 그의 외침은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오르크들이 깨어난 후였다. "이르가! 아르그르! 우그르! (배신자다! 잡아 죽여라!)" 아크트가 마차에서 나오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순식간에 조용 하던 숲은 오르크들이 칼을 들고 여기저기 피를 뿌리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비명과 살기에 찬 함성이 귀를 찢는 듯 했다. "로이! 뭐해! 어서 도망가자!" 데이미아가 넋놓고 싸움을 구경하던 로이를 잡아 끌며 소리쳤다. 툴위그는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다. "오르크의 도움이라니, 꺼림칙해. 함정이 아닐까?" "그래도 일단은 도망치고 봐야죠!" 로이는 칼을 들고 괴성을 질러대는 한 덩어리의 오르크 떼 속에서, 아까 자신을 도와 준 그 오르크이 모습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로이에게 오르크들은 다 똑같아 보일 뿐이어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어쩌면 벌써 죽었는지도 몰랐다. 저렇게 많은 무리를 상대로 혼자 싸워야 했을테니. '...고맙단 말도 못 했는데...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그가 우릴 탈출시키려다 죽은 거라면, 그를 봐서라도 다시 잡힐 수는 없어!' "자, 어서 가요!" 로이는 툴위그에게 이렇게 외치고는, 데이미아의 손목을 잡은 채 그 오르크가 가리켰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툴위그도 말없이 따라왔다. 함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한 그였으나, 오르크들의 마차 안에 갇혀 끌려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함정에 빠지는 것이 낳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그르! 우그르! (잡아라! 잡아!)" 탁한 음성의 오르크 어가 놀랄 만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벌써 로이의 탈출을 도운 그 오르크를 처치했는지, 이제는 다른 생각 다 접어 두고 도망친 포로들을 잡는 데 열중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숲에는 햇빛이 환하게 비치고 있었고, 그것은 오르크들의 시야가 어드운 반면 로이 일행은 잘 볼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그들을 추격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오르크였으나, 인간과 다크 엘프도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로이, 조심해!" 데이미아가 갑자기 발을 멈추며, 로이를 밀어 쓰러뜨렸다. 경사진 둔턱에서 그녀와 로이는 서로 껴안은 채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그들이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바로 그들의 머리 위의 땅이 깊게 패인 채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주위의 식물들은 모두 새까만 재가 되어 있었다. "다크 엘프 마법사들...!" 데이미아가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그런 그녀의 귀에 매우 난처해 하는 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근데... 데이미아, 좀 무겁다..." 그제서야 데이미아는 자신이 로이의 배 위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얼굴이 붉어져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안한 나머지 오히려 로이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이러고 있으면 어떡해! 빨리 도망쳐야지!" 그녀가 아플 정도로 로이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마구 달리기 시작 하자, 로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황급히 따라 달렸다. 한참 열심히 달리다가, 로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화났어?" "..." "그게... 데이미아, 사실은 별로 안 무거웠..." "으이그... 빨리 따라오기나 해!" 그러나 도망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 추적자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한숨 돌릴까 하면 사방에서 오르크 떼들이 마구 튀어 나왔다. 그렇지 않으면, 인가족이나 요정족의 마법사들이 마구 마법을 난사해 대곤 했다. 툴위그도 그다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로이와 데이미아와도 떨어진 채, 숲속을 헤매며 도망다니는 중이었다.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이 무었보다도 불만스러웠다. '이... 내가 도망이나 다녀야 하다니! 도끼만 있었으면 저 오르크 놈들을 박살을 내 주는 건데!' 툴위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불만을 억눌렀다. 어차피 체력이 강한 난쟁이라서 쉽게 지치지는 않았지만, 요정족이나 인간족 추적자들을 피해 다니기엔 다리가 너무 느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앞에는 요정족 마법사 들이, 그의 뒤에는 오르크 병사들이 둘러서, 그를 포위했다. "쳇, 정말 난쟁이란 말썽만 일으킨다니까... 아예 돌로 만들어서 운반하는 게 낫겠어!" 검은 색으로 물들인 나무 지팡이를 든 한 흑마술사가, 얼굴 가득 비웃음을 띄운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에서 낯선 주문이 흘러나왔다. "아일렌 차르케만! 페이 데인 데란...!" 그러나 마법사들은 주문보다 빠른 공격에는 맥을 못 춘다는 것을 잘 아는 툴위그였다. 그는 곧바로 주문을 외우는 마법사에게 돌진하여, 그를 넘어뜨리며 쓰러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거의 무식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공격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제지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설마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에게 맨손으로 달려들 거라고는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툴위그의 주먹이 마법사의 턱을 강타했고, 마법사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그제서야 오르크들이 칼을 휘두르며 툴위그에게 다가왔다. 툴위그는 마법사가 가지고 있던 지팡이를 마치 칼처럼 휘두르며, 기세 좋게 오르크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래, 어디 덤벼 봐! 어차피 도망다니는 것보단 이게 더 내 적성에 맞으니까!" 한 오르크가 칼로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여유있게 지팡이를 휘둘러 그 검을 막았다. 그러나... 싹둑! 어이없게도 지팡이는 일격에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그것도 단면까지 깨끗하게, 마치 식칼에 무우 잘리듯 잘려 버렸던 것이다. '으으... 이렇게 쉽게 잘릴 줄이야... 이거 순 싸구려아냐!' 툴위그는 당황해서 애꿎은 지팡이만 원망했지만, 그렇다고 별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오르크들은 그런 그를 보고 눈을 빛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마치 먹이를 눈앞에 둔 야수 같은 표정들이었다. (계속) '에잇, 모르겠다!' 툴위그는 부러진 나무 지팡이를 한 오르크 병사의 목을 향해 날렸다. 그 오르크는 재빨리 몸을 숙였으나, 그 뒤에 있던 오르크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날카로운 지팡이 끝에 찔러 죽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 툴위그는 정말 맨손이 되어 버렸다. 설상가상으로, 그의 발끝이 점점 차갑게 굳어가기 시작 했다. "게르메넨 다이 제에스너..." 얼음 속에 가두는 주문이었다. 그를 포위한 오르크들의 뒤에 선 요정족 흑마술사들이, 입을 모아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마력을 모았기 때문 인지, 그들의 얼음 마법은 툴위그가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순식간에 하반신이 얼어붙고, 곧 그의 배와 가슴까지 얼음으로 뒤덮였다. '제길! 내가 켈리만큼만 키가 컸어도 좀더 시간을 끄는 건데...' 툴위그의 목가지 얼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툴위그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감은 순간, 갑자기 그의 몸을 뒤덮던 얼음의 움직임이 멈추어 졌다. 그가 의아해 하며 눈을 뜨자, 얼음이 조각조각 부서진 채 그의 발 밑으로 떨어져내렸다. 마법이 완전히 풀린 그의 앞에, 주문을 외우던 세 명의 마법사가 싸느한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의 등 한복판에는 작고 날카롭게 빛나는 단검들이 하나씩 박혀 있었다. '놀라운 솜씨다. 저런 작은 검으로 상대를 즉사시키는 건 정확하게 급소를 노려야만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단검을 던진다는 이는 툴위그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랜스와 켈리가 그런 기술이 없음은 말할 나위가 없고... "하! 정말 실력없는 놈들이군! 이렇게 가까이 와도 기를 못 느끼다니!" 나무 위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청년의 목소리였다. 놀라서 고개를 쳐든 툴위그와 오르크들 앞에는, 평범한 평민 여행자의 차림을 한 20대 중반의 청년이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었으나, 눈에는 살기가 돌았다. 드래크로니안의 혈통을 나타내는 붉은 눈이었다. 날렵하게 생긴 손에는 단도가 들려 있었다. "너... 너는 드래크로니안?" 하고 한 오르크가 소리쳤다. 그는 비교적 계급이 높은 듯, 화려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드래크로니안인데 왜 우리를 방해하는 거냐! 너희 종족과 우리 오르크 족은 친구라는 것을 모르는가?" "하! 나더러 드래크로니안이라고? 게다가 네까짓 놈들과 친구라고? 그런 소릴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마!" 그 청년은 할 말을 다 하자마자, 들고 있던 단도를 서슴없이 날렸다. 손의 움직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화려한 갑옷을 입은 오르크는 피할 새도 없이 이마 한가운데에 단도가 박혀 쓰러졌다. '저 속도는 분명 드래크로니안이다... 그런데 왜 아니라고 하는 거지?' 툴위그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런 것에나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그는 놀라서 그 청년을 넋놓고 바라보는 한 오르크에게 접근해,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치고는 칼을 빼앗았다. 난쟁이족의 섬세한 금속 제품에 익숙해진 툴위그에게는 장난감처럼 조잡한 칼이었다. 손잡이도 불편 했고 무게 균형도 전혀 맞지 않았으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오르크들은 툴위그의 공격에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 다시 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자기네들의 임무는 툴위그를 잡는 것이지 어디서 ㅇ는지 모를 저 이상한 드래크로니안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툴위그가 막 오르크 한 마리의 머리를 베고, 이제 비로소 신나게 싸울 준비를 할 때, 갑자기 그 청년이 툴위그와 오르크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는 언제 칼을 뽑았는지도 모르게 휘리릭 칼을 휘둘러 근처의 오르크들을 죽거나 물러가게 한 후, 툴위그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안전한 곳에 물러서 있으쇼. 당신이 다치면 내가 곤란해져." 툴위그는 무례한 그의 말투에 화가 나서 따지려고 했으나, 곧 그가 자신의 은인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고 정중히 대답했다. "생명을 구해 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하오. 그러나 나도 함께 싸우겠소. 뒤에 숨어서 일신의 안전을 꾀하는 것은 가문의 명예에..." "그럼 맘대로 하시든지! 하지만 고맙게 생각할 건 없소. 난 계약 대로 해 줄 뿐이니까." 그 청년의 말투에는 감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툴위그는 그 청년의 곁에서 열심히 함께 오르크들을 베었다.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그의 싸우는 모습을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드래크로니안다운 빠른 스피드. 오르크 한 마리 한 마리가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때마다, 그의 얼굴엔 이상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빠르군... 그러나 너무 속도에 의존하고 있어. 종족 특유의 스피드만 아니라면 그저 괜찮은 검사 정도겠는데... 그 환상적인 단검 던지는 솜씨에 비하면...' 열심히 싸우던 그들의 등 뒤로 갑자기 쾅! 하는 폭발음이 들렸다. 그들은 영문도 모르고 먼지와 재투성이가 되어 흙바닥에 굴렀다. 화염 마법 이었다. 재수 좋게도 아직 실력 없는 마법사가 조준을 잘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조준이 빗나간 것을 안 인간족의 마법사는, 다시 서둘러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쳇!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 또 있군!" 붉은 눈의 청년은 악의 가득한 눈으로 그 마법사를 쏘아보며, 칼을 고쳐 잡았다. 곧 뛰쳐나갈 눈치였다. 그러나 금방 오르크들이 그의 길을 막으며, 마법사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빨리 이들을 해치우고 그 마법사를 공격하려는 듯 한층 더 빠른 속도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와 툴위그는 또 다른 마법 공격에 몸을 피해야 했다. 펑! 이번에는 번개 마법이었다. 해가 빛나는 하늘에서 푸르스름한 번개가 떨어져,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까맣게 태웠다. 간신히 피한 그들이 정신을 차리니, 이번에는 죽었던 오르크들이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마법사들은... 정말 질색이야!" 하고 그 청년이 소리쳤다. 그것은 툴위그도 동감이었다 - 적어도 이 순간 만큼은. 오르크들은 죽은 즉시 다시 살아나는데다가 사방에서 번개와 불꽃이 작열하니, 전세는 당연히 둘에게 불리해졌다. "툴위그! 우리가 왔어요!" 바로 그 순간, 켈리가 열심히 시체를 살려내는 주문을 외우고 있던 마법사의 목을 채찍으로 휘감으며 소리쳤다. 그녀가 채찍을 확 잡아당겨 그 마법사의 목을 부러뜨리자, 살아 움직이던 시체들은 모두 다시 풀썩 쓰러졌다. 곁에 있던 마법사가 그것을 보고, 그녀를 향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펠히스가 뛰어올라 그의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에 질세라, 랜스도 달려와서 툴위그를 둘러싸고 공격하고 있던 오르크 떼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안 다쳤죠, 툴위그?" 켈리가 쾌활한 목소리로 물었다. 툴위그는 오르크들을 상대로 바쁘게 싸우면서도,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덕분에 보다시피 멀쩡해!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3마법사들을 잃은데다 그들의 시력이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낮이었으므로, 랜스와 켈리, 이즐레이의 공격까지 받은 오르크들은 제대로 대항해 보지조차 못하고 패했다. 먼저 도망친 몇 놈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두동강이 나거나 머리를 잘린 채, 혹은 배나 가슴이 찢겨져서 피를 쏟으며 차례차례 쓰러졌다. "자, 이제 대충 해치운 것 같군." 마지막 오르크의 심장에 칼을 박아 숨통을 ㄱ어 놓으며, 랜스가 침착하게 말했다. 켈리는 달려와 자기보다 키가 작은 툴위그를 얼싸안았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하하... 하마터면 얼음 인형이 될 뻔 했는데, 이 친구가 도와줬지." 툴위그는 이즐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켈리가 고맙다는 말 대신 미소를 지었으나, 이즐레이의 표정은 냉담했다. "계약대로 해 준 것 뿐이야." 그의 대답에 켈리는 피식 웃음 뿐이었다. 그녀는 곧 이즐레이 따위는 까맣게 잊었다는 듯, 다시 툴위그에게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런데... 로이와 데이미아는?" "모르겠어. 도망다니다가 헤어졌는데, 아직 이 근처에 있을 거야." 툴위그의 대답에, 랜스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좋지 않은데. 해가 지고 있어..." -------------------------------------------------------------------- "이런... 해가 지는데?" 로이는 낭패라는 듯이 하늘을 보고 중얼거렸다. 해가 진다면 그들의 눈앞이 잘 보이지 않는 대신, 오르크들은 낮을 만난 듯 시야가 트이게 된다. 로이는 에이론드에게 들어서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은, 오르크들이 오지 않아도 충분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으아아악! 로이, 조심해!" 데이미아와 로이는 다시 한 번 비탈길로 굴러떨어졌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그들이 서 있던 언덕 위를 시뻘건 불꽃이 휩쓸고 지나갔다. 불꽃은 언덕을 넘어, 그들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핥으며 사라졌다. 다친 데는 없었으나 손과 얼굴이 화끈거렸다. 간신히 머리를 드니, 스무 발짝쯤 되는 거리에서 네 명의 오르크가 도끼를 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얼른 일어나, 그들을 피해 언독을 돌아 달려갔다. 숲은 벌써 꽤 어두워지고 있었고, 그래서 로이와 데이미아는 나무 뿌리나 돌부리에 걸려 자꾸 넘어졌다. 그러나 오르크들은 한 번 비틀거리지도 않고 잘만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로이와 데이미아의 발이 더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 지기만 했다. "미꾸라지 같은 녀석들! 모두 돌인형으로 만들어 주겠어!" 갚자기 로이와 데이미아 앞에 한 요정족의 흑마법사가 나타나며, 이렇게 소리쳤다. 그냥 나타나도 놀랄 판인데 유령처럼 없던 데서 불쑥 나타나자, 로이는 아예 비명을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마법사는 주문을 외우며 로이와 데이미아를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아이데스 아릴 데이난..." "아니툼 제에스너 테니아스!" 데이미아도 맞받아 무슨 주문인지를 외웠다. 주문을 알아들을 길이 ㅇ벗는 로이는 멍청히 앉아 있다가, 흑마법사의 지팡이에서 차가운 빛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것을 보고 질겁을 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 빛은 로이를 덮치지 못하고, 그와 데이미아의 코앞에서 갈라지더니 산산히 부수어졌다. "호오... 마법의 지팡이 없이도 그런 주문을 걸다니, 대단한 집중력을 가지셨군..." 흑마법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데이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마법으로 간신히 흑마술사의 주문은 막아 냈으나, 그 새 쫓아온 오르크들이 데이미아와 로이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으아아... 이렇게 되면 도망칠 수가 없잖아!'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데이미아에게 속삭였다. "야, 데이미아, 다시 한 번 주문 써 봐! 너 지팡이 없어도 주문 잘 쓰잖아..." "바보야, 그럼 지팡이는 왜 필요하니? 아까 그 주문은 별로 집중력이 필요 없는 거라서 간신히 쓴 거라고. 마법력을 모아 주는 지팡이가 없으면 공격 주문 같은 건 불가능해. 특별히 훈련을 받은 사람이면 몰라도..." "그... 그럼 어떡하지?" "그... 그야... 잠깐!" 데이미아는 갑자기 좋은 생각이 난 듯, 로이의 곁에 바짝 붙은 채 말했다. "내가 그럼 주문 하나 외울께. 엄호해 줘!" "뭐? 무기가 없는데 내가 무슨 수로...?" 그러나 로이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데이미아는 이미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샤이 제에드린 아이데헨 네이툼..." 그녀의 손에서 붉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흑마술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저... 저런 주문을, 마법기(魔法器)도 없이...? 말도 안 돼. 그런 마법사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도 없어...!" 그러나 데이미아는 상관 없다는 듯 계속 주문을 외웠다. 불꽃은 더욱 크고 붉게 타올랐고, 오르크들과 흑마술사는 겁에 질린 채 뒤로 물러 섰다. 데이미아는 이윽고 주문을 마치며 불꽃을 감싸고 있던 손을 획 펼쳤다. "제에데스 난!" "으아아악!" (계속) 새빨간 불덩이는 눈깜짝할 사이에 엄청나게 커지더니, 데이미아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주위에 쫙 퍼져나갔다. 오르크들은 비명을 지르며 불길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로이는 눈이 동그래져서 그 광경을 지켜 보다가, 탄성을 질렀다. "대... 대단해, 데이미아!" "대단할 거 없어. 어서 도망치자!" "뭐...? 설마 이 불길 속을?" "따라 와. 이건 하나도 안 뜨거워! 눈속임일 뿐이야!" 그 말은 사실이었다. 데이미아의 손에 이글려 달리는 로이의 살갗에 느껴지는 감촉은, 아까와 다름없이 차가운 숲의 밤공기 뿐이었다. 뜨거운 기운은 느낄래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불길만이 이글 거릴 뿐 그 불길에 타는 나무나 풀은 한 포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들은 불길이 치솟건 말건 바람에 살랑거리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르크들도 이제 그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슈우카! 다메르! 우그르! (약삭빠른 것! 속임수다! 잡아랏!)" 속아넘어간 데 대해 한층 더 화가 난 오르크들은 이를 갈며 로이와 데이미아를 쫓아왔다. 칼과 도끼를 마구 던지는 오르크들도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가 난 것은 흑마술사였다. "간악한 것! 가히 내 앞에서 환영(幻影) 마술로 재주를 부려?" "데... 데이미아! 저것 좀 봐!" 로이가 소스라치며 걸음을 멈추며 소리쳤다. 그들의 앞에 나무 한 그루가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뿌리를 발로 삼은 채, 나뭇가지를 흐느적 흐느적 휘두르면서. 질겁을 한 로이와 데이미아는 뒤를 돌아 반대편으로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곳에는 또 오르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 어쩌지...?" 로이와 데이미아가 갈팡질팡 하는 사이, 나무가 뿌리를 쭉 뻗어 로이의 다리를 감쌌다. 그리고는 로이가 미처 그것을 알아채기도 전에, 그의 몸을 쑥 끌어갔다. "어... 어?" 로이는 미처 공포를 느낄 새도 없이 뿌리에서 줄기로 옮겨졌고, 곧 나무열매처럼 가제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린 꼴이 되었다. 데이미아가 어쩔 줄을 모르다가 소리쳤다. "기... 기다려 로이! 내가 해 볼께! 갈 이조넬, 레미스 데인 헤이 라시엔...(모든 생명의 어머니이신 이조넬의 이름으로...)" "주문을 멈춰!" 그녀의 목에 섬뜩한 느낌이 다가왔다. 오르크의 칼날이었다.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오르크 여러 마리가 벌써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으... 오늘은 왜 이리도 되는 일이 없냐...' 그녀의 눈앞에 아까의 그 흑마술사가 유령처럼 스르륵 나타났다. 그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도 별 수 없군. 너희들은 말썽을 저무 많이 피우니, 얌전한 새끼고양이로 만들어 목에 줄을 묶어 데려가는 게 낫겠어." "으... 동물이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데이미아가 절망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으나, 흑마술사는 그 말에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가 로이와 데이미아를 번갈아 바라보며 중얼거렸을 때였다. "자아... 누구부터 귀여운 새끼고양이로 만들어 줄까...?" 갑자기 데이미아의 목을 겨누고 있던 칼날이 치워졌다. 그리고 그 칼을 들고 있던 오르크는 이미 시체가 된 채, 뒤로 쓰러졌다. 그의 뒤에는 데이미아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검은 옷을 입고 자줏빛 눈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칼에서는 방금 죽인 오르크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다... 당신은...!" 흑마술사가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그의 목은 몸에서 분리되어 땅 위에 털썩 떨어지고 말았다. 데이미아는 그 광경에 구역질이 나려고 했으나, 어쨌든 달려가 죽은 흑마술사의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가볍고도 단단하게 만들어진 나무 지팡이로, 꽤 쓸만한 것이었다. 데이미아는 그 지팡이를 들자마자, 시범적으로 오르크들을 공격해 보았다. "제에데스 아이레인 샤이움!" 별이 빛나는 맑은 하늘에서 우렁찬 천둥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빛을 발하는 번개가 떨어졌다. 그 번개는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오르크의 머리를 강타했고, 곧이어 그 오르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탄 채 풀썩 쓰러져 버렸다. 데이미아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제피로스!" 로이가 반갑게 소리치며 달려왔다. 그를 잡고 있던 괴물 나무는 마법사가 쓰러짐과 동시에, 평범한 나무가 되에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다. 로이다 달려와 안기자, 제피로스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돌았다. 3 "어떻게 알고 왔어요?" "...지나가는 길이었어." '...저게 말이 돼?' 데이미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피로스를 힐끔 바라보았으나, 로이는 그 말도 안 되는 대답을 곧이 곧대로 믿는 것 같았다. 제피로스는 다리에 차고 있던 작은 칼을 풀어 로이에게 주었다. "재회하자마자 전투로군. 이거라도 가지고 있어라. 없는 것보다는 도움이 되겠지." "고마워요!" 로이는 활달하게 웃어제끼며 칼을 뽑았다. 이디실과 같이 단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긴, 애매모호한 크기의 칼이었다. 그러나 로이는 상관 않고, 오르크들을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 자신만만한 태도로 노려보았다.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세였지만, 기세만은 제피로스 못지 않았다. "자! 이 멍청한 오르크들아, 덤벼 봐!" 로이가 기세등등하게 외치자, 데이미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으휴~, 잘 싸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설치긴...' 그러나 오르크들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그들은 무기를 겨누며 공격 태세를 갖추기는 했으나, 공격할 의사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공격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전투를 좋아하는 종족 오르크가 보이는 행동 치고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데이미아는 흘끗 제피로 스를 바라보았다. '저 사람 때문이야, 틀림없어. 하지만, 왜...?' 그러나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분명 오르크들이 망설이고 있는 지금은, 그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페이 자헤스라! 움 데이 라!" 그녀는 소리높여 주문을 외치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 지팡이의 움직임은 곧 커다란 돌풍이 되어, 오르크 무리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제피로스 조차 놀랄 무서운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오르크들을 날려 보냈을 뿐 아니라, 그대로 서 있는 오르크들의 몸을 찢기까지 했다. 로이는 입은 딱 벌린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아타 가르 우르가! (저 계집부터 잡아!)" 오르크들이 비로소 괴성을 질러 대며 데이미아에게로 달려왔다. 그러나 그들이 그녀 가가이에 이르기도 전에, 제피로스의 칼날이 그들 중 둘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그는 로이와 데이미아에게 소리쳤다. "잘했어, 생쥐 아가씨! 계속 이런 식으로 하자고! 로이, 넌 날 도와 오르크들의 접근을 막아 줘!" 로이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오르크들에게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러나 두 명의 오르크가 로이를 공격하자 금방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두 오르크의 칼날이 정신없이 로이에게 덤벼들었고, 그는 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자꾸만 뒤로 물러서다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자, 그제서야 아까부터 보고 있던 제피로스가 달려와 두 오르크의 머리를 눈 깜짝할 새에 날려 버렸다. 그는 여유 만만하게 로이를 연습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상해... 그의 실력이 뒤어낙도 하지만, 오르크들이 너무 성의 없이 그를 공격하고 있어...' 데이미아는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렸으나, 곧 상관 말고 주문이나 외우기로 했다. "알헤스 가인 시에란..." 그녀의 입에서 생소한 주문이 쏟아짐에 따라,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금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새가 모습을 나타냈다. 깃털 하나하나가 불꽃으로,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으며, 멀리 있는 로이와 제피로스에게까지 그 뜨거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단하군. 불새를 소환해 냈어? 저건 드라이어드의 전문 주술도 아닐 텐데!" 하고 제피로스가 중얼거렸다. 주문을 마친 데이미아는 힘이 부쳤는지, 숨을 몰아 쉬며 나무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큰 소리를 내어 명령했다. "사이엔 아르키, 엘카이즈! (오르크들을 죽여라, 불새!)" 불새는 기세 좋게, 사람의 키보다 더 긴 날개를 퍼덕이며 오르크들 에게로 날아갔다. 오르크들은 그 새에게 창이나 칼을 던지려 했으나, 너무 밝게 빛나 독바로 쳐다볼 수 없으므로 겨냥은 빗나가기가 일쑤였고, 어쩌다 제대로 던진 것도 불새는 가볍게 피해 버렸다. 그 새가 제자리에서 크게 한 번 날개를 퍼덕이자, 불꽃으로 된 깃털이 무수히 떨어져 내렸다. 오르크들은 털과 망토에 불이 붙은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데이미아는 힘이 다 빠진 채 나무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곧바로 잠이 들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그녀가 정신을 흩뜨린다면 불새는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었다. 그녀는 불새를 유지하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자기의 등 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도 듣지 못했다. 휙! 오르크가 그녀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내리친 것과, 언제 왔는지 그녀의 곁에 선 제피로스가 재빨리 그녀의 몸을 밀어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데이미아는 중심을 잃고 수풀 위로 넘어졌고, 불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데이미아?" 로이는 재빨리 데이미아에게 달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다친 곳은 없었으나, 안색이 몹시 좋지 않고 쓰러질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너... 괜찮아?" "물론이지. 너무 졸린 것 뿐이야. 그보다..." "캬악!" 오르크의 비명이 로이와 데이미아의 귓전을 때렸다. 아까 데이미아 에게 도끼를 내리쳤던 그 오르크가 처참하게도 허리가 싹독 잘린 채 쓰러져 있었다. 그 앞에는 피가 둑뚝 흐르는 칼을 들고, 제피로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의 팔꿈치에는 옷과 살갗이 찢겨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건방진 것. 오르크 주제에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내?" 제피로스의 목소리는 별로 크지도 않았고,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이 들리지도 않았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덜어지자, 로이가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오르크들은 바짝 긴장했다. 제피로스는 칼을 고쳐 잡고, 오르크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오른팔과 칼은 윤곽만 간신히 보일 분, 거의 어디에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그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 달빛에 반사된 칼날이 번뜩일 뿐이었다. '그래.... 저 사람은 분명... 드래크로니안!' 데이미아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짐작해 왔던 터였다. 그러나 확신할 수가 없었다. 드래크로니안이라면 분명 인간의 적인데, 그리고 그들의 수장이 오르크와 손잡은 지금은 요정족의 적이기도 한데 왜 로이와 자신을 도와주는가. 그러나 지금 그의 움직임을 보니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빨리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종족은,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라는 오르크조차 저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종족은 단 하나, 드래크 로니안 뿐이었다. 저승에서 보내진 전사들, 죽음의 여신 페레이타의 창조물, 오르크보다도 더욱 싸움만을 위해 만들어진 종족... '하지만... 그걸 로이에게 알려야 할까?' (계속) 데이미아는 인간들이 드래크로니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 플리에타는 그들의 수장인 글라노우스에게서 직접 엘미어를 선물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아버지 엘딘 역시, 드래크로니안들과 함께 오르크들을 물리친 경험이 있었다. "드래크로니안들을 조심해라. 하지만 인간들은 더 조심해라."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당부하곤 했다. "드래크로니안은 어느 종족보다도 강하단다. 그들은 인간처럼 생겼 지만 실은 오르크에 더 가까울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우리 빛의 종족, 아스틸 라와 이조넬의 후손이 할 수 있는 일, 즉 식물을 자라게 하고 그 열매를 먹는 일을 할 수 없단다. 그들은 옷과 무기, 그 모든 것을 얻거나 약탈해야 하고, 만들 줄 아는 것이라고는 어두컴컴한 미로 뿐이란다. 그들의 고향인 페레이타 의 땅과 비슷한 건축물이지. 오직 혼돈의 생물들을 죽이기 위해 드래크로니안은 이 세상에 왔지. 그리고 그들이 저 어두운 땅, 우리 빛의 종족은 아무도 살기를 원하지 않는 우클로우로 떠나자 드래크로니안들은 할 일을 잃었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칼을 휘두르는 것뿐이었으니까. 인간들은 그들의 올바른 운명은 오르크들처럼 스스로 사라져 가는 것이었다고들 말한단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 그들의 수장 글라노우스는 오르크와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로데인의 군사로 남음으로써 종족의 미래를 보장하려고 했어. 그 계획은 사실 실현성이 있었지. 자신의 아들들을 징집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 로데인 인들은 기꺼이 그들에게 세금과 옷과 식량을 바쳤단다. 실제로 그들은 수많은 로데인의 인간족의 생명을 건진 셈이지.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인간들을 화나게 했어. 엉뚱한 종족이 인간족 사이의 전젱에 끼어들어 수많은 인간들의 생명을 끊는다는 거지." "어차피 죽을 인간들인데 인간에게 죽건 드래크로니안에게 죽건 상관이 있나요?" "그렇지 않단다, 데이미아. 만약 우리가 아는 한 요정이 비바람이나 용 때문에 죽었다고 하자. 그럼 우리는 매우 슬플거야. 다른 요정족과의 견투로 죽었다고 하면 더욱 슬프고, 약간 화도 나겠지. 그러나 그가 오르크나 난쟁이에게 죽었다고 하면 우리가 얼마나 분노할지 상상해 보렴." "그럼 드래크로니안은 로데인의 군사가 되지 말아야 했던 거로군요."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귀여운 데이미아. 그러나 인간들은 그들의 선택이 옳지 못했다고 비난했고, 그들을 벌해야 한다고 믿었단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 로데인은 사라졌지. ...그리고 드래크로니안은, 그들은 그 일에 대해 절대 인간들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내가 말했듯이 ... 용서하는 종족이 아니라 벌하는 종족이니까. 그들은 우리처럼 자비로운 이조넬과 현명한 아스틸라의 창조물이 아니라, 오만한 훼로크와 피로 물든 페레이타의 창조물이니 말이지... 그들의 신을 언젠가 보게 될 거다. 이상한 석상이지. 그것을 보면 너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ㅇ게 될 거다. 실리사는 창을, 에퀴온은 해골을 들고 있지. 실리사는 처벌을 맹세하고 에퀴온은 희생을 슬퍼하고 있단다. 드래크로니안들은 그렇지. 그들은 적의 시신을 위해서 울어 주지만 그들이 죽기 전에는 용서하지 않는단다..."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 뿐이군...' "야, 데이미아, 정신차려! 이런 상황에서 기절하면 난 어떻게 하라고!" 로이가 난처한 얼굴로 소리쳤지만, 그런다고 이미 기절한 사람이 깨어날 리 만무했다.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며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데이미 아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르크들이 이미 그들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제피로스가 무자비하게 오르크들을 학살하고는 있지만, 그 역시 모든 오르크들을 자신의 주위에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아이고... 일이 정말 이상하게 됐네. 그러게 마법 좀 무식하게 쓰지 말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로이는 투덜투덜 중얼거리며 제피로스가 준 칼을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와 데이미아, 둘을 보호해야 하는 건 로이 자신이었다. "덤벼라, 덤벼!" 하고 로이는 오르ㅋ르을 향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오르크들은 어이가 없는지 잠시 멈추어 서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진짜로 로이를 향해 마구 달려왔다. 로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멈추려고 노력하며 켈리에게서 배운 것을 떠올렸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충분히 가까이 오기 전에는 공격하지 마라... 반격당하면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기다려서... 충분히... 에라, 모르겠다!' 로이는 오르크를 향해 있는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뭔가 칼날에 들어와 박히는 느낌이 왔다. 칼날은 생각보다 무척 날카로워서, 로이는 아무 어려움 없이 칼날에 박힌 그 물체를 쓱 갈라 버렸다. 그런데... "으아악!" 소스라치는 로이의 비명에 제피로스는 비로소 그 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서 있는 로이는 옷에 피가 좀 튀었을 뿐,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앞에 쓰러진, 국끓이기 직전의 생선처럼 배가 갈라져 내장이 다 쏟아진 오르크의 시체를 보니 왜 비명을 질렀는지 알만 했다. "으... 으... 정말 싫다..." 로이는 중얼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섰으나, 데이미아를 두고 도망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오르크들의 칼을 들고 덤벼 왔으므로 가까스로 막고는 있었으나, 아까의 그 오르크 시체가 자꾸만 생각나고 속도 메슥메슥해서, 도저히 싸울 형편이 못 되었다. 곧 로이는 한 오르크의 칼을 막으려다, 자신의 단도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비켜라. 너희들의 상대는 나다!" 다행히도 제피로스가 제 때 나타나, 오르크들과 로이의 사이로 끼어 들었다. 곧 로이의 앞에는 수많은 오르크들의 목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제피로스는 눈썹 하나 가딱하지 않고, 그들의 주위에 있는 모든 오르크들을 차례로 해치워 버렸다. 물론 그들이 로이와 쓰러진 데이미아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조금도 허용하지 않은 채. 휙! 제피로스의 칼날이 원호를 그으며, 마지막 도망치던 오르크의 등까지 갈라 버렸다. 그는 그제서야 움직임을 멈추고, 심호흡을 하며 로이를 돌아보았다. "다친 데 없지?" 로이는 주저앉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친 데는 없었으나 이건 다친 것보다 더 나빴다. 속이 가라앉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제피로스는 작게 웃으며 로이에게 다가왔다. 그의 미소는 위협하듯 빛을 바라는 자줏빛 눈과는 상반되게 무척 따뜻했다. "괜찮아, 곧 좋아질 거다. 처음엔 다 그런 거야." "죄... 죄송해요. 혼자 난리를 떨었군요. 제피로스도, 다른 사람도 모두 아무렇지도 않게 싸우는데..." 로이는 풀이 죽어 우물거리게 말했다. 제피로스의 팔꿈치와 어깨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제피로스는 날 위해 싸워 줬는데... 난 뭘 하고 있었지? 그 오르크 벳속 좀 봤다고 이 모양이 되다니... 켈리도 랜스도 툴위그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난 왜...' "로이." 하고 제피로스가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누구를 죽이는 건 결코 칭찬할 일이 못된단다. 나는 사람도 오르크도 죽이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지만, 로이, 넌 그러면 안 된다. 죽인다는 건 무서운 일이지. 난 네가 그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이미 가슴으로는 잊어버리고, 머리로만 기억하고 있는 그 진실을..." "...필요할 대에는 살인도 하는 게 기사 아닌가요? 에이론드 아저씨가 그러셨는데."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는 몸을 굽혀, 로이의 곁에 쓰러져 있는 데이미아의 맥박을 짚었다. "생쥐 아가씨가 무리한 기술을 쓰더니만, 완전히 뻗었군... 깨어나면 주술은 수준에 맞는 것만 쓰라고 해라. 이래서야..." "...많이 아픈가요?" "전혀. 마력과 체력이 서로 잘 반응하는군. 잠에 빠진 것 뿐이다." 제피로스는 소리내어 웃으면서 일어났다. "가야 할 시간이구나. 오르크들은 로크 페울로니를 라우더로 가져갈 거다. 그곳이 카야크의 군대의 근거지니까. 그리로 오거라, 친구들을 이끌고. 난 언제나 너를 주시하고 있겠다." "...제피로스가 내 형이면 좋을텐데. 같이 여행하고..." 로이의 말에 제피로스는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 넌 정말 남의 기분 맞추는 데엔 천재야! 그래서 이디실도 네가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그러나 어둠 속을 울리는 웃음소리는 제피로스의 것만이 아니었다. 한 낯선 여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숲의 그늘에서 들려왔다. "하하하! 형이라고, 감동적이군!" 로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서며 칼에 손을 얹었다. 제피로스는 그처럼 놀라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로이는 아무리 봐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뭔가 보이기라도 하는 양 주시하며 조용히 말했다. "놀라운 솜씨군, 전혀 기를 느끼지 못했어. 그 기술만은 칭찬해 주지." "칭찬이라고? 이거 대단히 자신만만하신 분이로군!"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물체'들'이. 검은 갑옷을 입고 검은 투구로 얼굴을 가린 십여명의 사람들이었다. 그 중 둘은 새까만 말도 타고 있었다. "이거, 이거, 아클레어의 개 벨리노어가 만든 그림자 기사단 아닌가? 그 부대는 해체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어찌된 거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라도 한 건가?" 제피로스는 비아냥거리며 그들의 앞으로 나아갔다. 로이고 따라가려 했으나, 제피로스는 한손으로 그를 제지했다. "그래, 우리는 틀림없는 그림자 기사단이다. 그러나 벨리노어의 졸개가 아니라, 스트라본 전하와 사일러스 전하의 군대란 말이다!" 여자의 목소리는 날카롭고도 당당했다. 말을 탄 두 사람 중 한 명인 것 같았는데, 두꺼운데다 새까만 갑옷, 게다가 투구까지 쓴 덕분에 목소리만 아니라면 여자라는 것을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벨리노어는 아클레어의 개가 되면서 해산을 명령했지. 그러나 우리 그림자 기사단은, 우리의 선조들은 그의 명령 따위는 들을 수 없었다. 우리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아트웰의 국왕 뿐! 에스테이아 국왕의 발이나 핥는 '대공' 따위의 명령을 누가 듣겠는가! 그들은 비밀리에 조직을 유지 시켰고, 늙고 노쇠해진 다음에는 자손에게 그 일을 부탁했다.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못다한 의무를 계승했고, 그렇게 이 기사단은 유지되어 온 것이다. 40여년동안!" "과연... 아트웰에 저항 조직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대단해." 제피로스의 말에는 더이상 비아냥이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진심 으로 경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그런 말투에 누그러졌는지, 그 여기사는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얌전히 항복하라. 그러면 선처를 약속하겠다. 나,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의 이름에 걸고! 우리의 목적은 탈출한 랜스 경과 그 친구들을 유인하는 것 뿐. 그러니 너희들에게는 해가 없을 것이다." "안돼요. 랜스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하고 로이가 소리쳤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개의치 않고 대답했다. "랜스 경 따위는 너희가 잡아 죽이든 구워 삶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이 애들은 넘겨주기 곤란한데. 특히 어린애들을 거리낌없이 아크트 따위에게 넘겨주는 사람들에게는." "스트라본 전하를... 모욕하는 거냐!" 레일라의 목소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제피로스는 미소까지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민감하시군 그래. 충성심이 대단하신 모양이지? 어쨌건 이 애들은 곤란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 봐." "하! 우리의 존재를 안 이상 어느 누구도 아트웰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그렇게 나오면 힘으로라도 끌고 가겠다!" "힘으로? 재미있군!"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칼을 뽑았다. "어리석긴... 그림자 기사단과 싸우겠단 말이냐? 그것도 오르크들과 싸우느라 지친 몸으로? 우리는 그런 싸움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럼 내가 오르크들을 다 처치하고, 지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계셨단 말씀이로군? 실력을 알만 해. 너희들 따위는 단칼에 해치울 수 있으니, 덤벼 보시지?" "제피로스...!" 로이가 놀라서 작은 소리로 소리치며, 제피로스의 소매를 잡았다. 아는 게 별로 없는 로이였지만, 그림자 기사단이라 불린 그 사람들에게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것이 느껴졌다. 게다가 레일라라는 여자가 말한 대로, 제피로스는 지금 오르크와의 전투를 막 끝낸 상태가 아닌가. "우리 그러지 말고 그냥 도망쳐요, 네?" (계속) 그러나 제피로스는 로이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이미 칼을 뽑아 든 그의 눈은 섬뜩한 붉은 빛을 발하고 이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마치 가면은 덮어 쓴 것처럼 모든 표정이 사라졌다. 로이는 갑자기 그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에는 느껴본 일이 없는 오싹한 기분이었으나, 이 분위기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갔다. '이게... 에이론드 아저씨가 말씀하신 '살기'라는 건가...?' 로이조차 느끼는 살기를 그림자 기사단이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레일라의 곁에서, 말을 타고 있던 기사가 긴장한 몸짓으로 칼을 빼어들었다. 굵기도 길이도 엄청난 대검이었다. 레일라가 그를 저지했다. "당황하지 마라! 저 녀석은 일부러 우리를 겁먹게 하려는 거야.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기사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레일라를 뿌리치며 소리 쳤다. "말리지 마십시오! 저 놈은 우리 그림자 기사단 모두와 아트웰 저항군을 모욕했습니다. 제가 저 놈의 버릇을 고쳐 주겠습니다, 단장님!" 그리고는 레일라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말을 달려 제피로스의 앞으로나아갔다. 그리고 제피로스는 바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휙! 눈 깜짝할 새에 제피로스는 하늘로 뛰어올랐다. 들짐승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팔은 그의 다리보다도 더 빨랐다. 제피로스의 몸이 말을 탄 기사의 앞으로 뛰어오른다 했을 때에, 그의 칼은 기사의 투구를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앞을 보기 위해 낸 좁은 틈 사이로, 제피로스의 얇고 가는 칼날이 귀신처럼 비집고 들어갔던 것이다. 모두 제피로스의 몸이 아직 공중에 떠 있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피로스는 칼을 다시 빼내며 교묘하게 착지했다. 기사는 칼을 떨어뜨렸을 뿐, 잠시 그대로 말 위에 앉아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의 투구 사이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기사의 몸이 오른족으로 기울어졌다. 마침내 철컹! 하고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기사의 몸은 말에서 떨어져 바닥에 쳐박혔다. 그의 머리에서 검은 투구가 벗겨져 머리 곁에 뒹굴었다. 준수하고 고귀해 보이는 얼굴에, 겨우 켈리의 나이 정도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똑바로 뜬 그의 눈 사이에는 뼈가 드러나 보이는 깊은 상처가 새겨져, 그 사이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이는 오싹 소름이 끼쳐서 고개를 돌려 버렸다. 다시 속이 울렁 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사의 이마에 난 상처가 구역질나는건지, 아니면 그렇게 쉽고 조용히, 숙련된 솜씨로 살인을 하는 제피로스의 모습이 소름끼치는 것인지 로이 자신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살인에 익숙한 놈이군." 레일라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피로스는 순진한 미소까지 띈 채, 레일라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별볼일 없는 부하를 두셨군, 그림자 기사단 단장! 다음 차례는 누구지? 당신인가? 아니면 모두 다 함께 덤빌 건가?" 레일라는 소리내어 웃으며 칼을 빼어들었다. "흥. 너 같은 허풍쟁이는 나 하나로도 충분해!" "과연 그럴까!" 제피로스가 다시 레일라에게로 덤벼들었다. 그의 발이 땅에서 떨어 졌나 하는 순간, 그의 칼은 이미 원호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일라의 말 위, 그녀의 몸이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제피로스의 칼은 빈 허공 만을 갈랐을 뿐이었다. "하! 관찰력이 부족하시군!" 말 뒤에서 튀어나온 레일라가, 칼을 휘두르며 제피로스에게로 덤벼 들었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몸을 약간 뒤로 젖혀, 가볍게 그녀의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는 그녀가 뻗은 팔을 거두기도 전에, 그 팔을 향해 칼을 내리 쳤다. "악!" 레일라는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팔에서는 갑웃을 뚫고 상처가 나, 적지 않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꺼운 갑옷이 없었더라면 팔이 달아났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손은 칼을 놓치지 않은 채였다. "하! 제법이야. 이제 싸울 맛이 생기는데!" 레일라는 이렇게 소리치며 칼을 왼손으로 옮겨 잡았다. 칼이 다른 손으로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아주 자연스러 워 보였다. "어디, 이것도 피하나 볼까!" 레일라는 펄쩍 뛰어올라 제피로스의 머리를 향해 칼을 직각으로 내리쳤다. 로이가 있는 쪽까지 급격한 공기의 진동으로 인한 바람이 밀려왔다. 제피로스는 분명히 정확히 계산하여 칼날을 피했으나, 그의 이마에는 작은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렸다. "하...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 건가... 레오스가 손녀를 잘 가르치긴 했나보군. 하지만 이 정도로 날 꺾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한심한데." 제피로스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지으며 이마의 피를 닦았다. 레일라는 놀란 듯 한 발짝 뒤로 물러섰으나, 이내 침착함을 회복하고 당당히 소리쳤다. "쳇, 그건 연습에 불과해!" 그녀는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검을 내리치며 제피로스를 공격 했다.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힘도 들이지 않고 그녀의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림자 부대는 멀찌감치 서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저 낯선 청년은 레일라의 공격을, 아트웰에서는 사일러스 왕자밖에 당해낼 사람이 없다고 칭송되는 여기사의 공격을 어린애 장난 피하듯 피해 내고 있었다. 듣도보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공격을 않고 자꾸만 뒤로 물러서고 있지만, 만약 칼을 휘두르기 시작한다면 레일라가 밀릴 것이 뻔했다. 그러나 대장의 명령 없이 나설 수도 없는 일이었다. "헉, 헉...!" 한참동안이나 혼자서 신나게 칼을 휘두르던 레일라는 결국 제풀에 지쳐 숨을 몰아쉬었다. 제피로스는 그런 그녀를 놀리듯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정말 재미있군. 레오스하고 똑같아. 혈통이란 건 어떻게 보면 정말 웃긴단 말이야. 아니면 교육의 결과인가..." "허튼 소리 마! 네가 내 할아버지를 어ㄷ게 안다고 그래! 내가 태어 나기도 전에 이미 돌아가신 그 분을!" 레일라는 회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 소리치며 다시 한 번 칼을 쉬둘렀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와 위력이었다. 제피로스의 발이 가볍게 땅을 박차고 뒤로 튕겨나가며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녀의 몸아 다시 균형을 이루기 전에, 그의 칼날이 이미 그녀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끝났다, 레오스의 손녀!" 제피로스의 칼이 그녀의 검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어느새 다시 하늘로 치솟을 그의 칼이 그녀의 어깨를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레일라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왼쪽 팔을 그 칼날을 향해 들어올렸다. 제피로스의 칼날은 그녀의 아랫팔에 가서 박혔다. 그러나 철로 된 검은 갑옷의 두 겹을 뚫었을 뿐, 살갗은 스치지도 못했다. 실수했다고 느낀 제피로스는 재빨리 칼을 빼며 뒤로 물러섰다. 아슬아슬하게 레일라의 단도가 그의 옷을 찢었다. 한 발만 늦었더라면 심장을 찔렀을 것이었다. "피... 피하다니?" 레일라가 놀라서 더듬거렸다. 결코 실패했던 적이 없던 방법이었다. 그리고 분명, 그녀의 오른손이 단검을 날리기 직전까지만 해도 적은 그녀의 커앞에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제피로스가 귀신처럼 사라졌다가 한 발짝 뒤에 나타난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나 당황한 것은 제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그는 자신을 살린 것은 반은 운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머지 반은 인간의 배를 뒤어넘는 드래크로니안의 스피드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대단해, 레오스의 손녀! 너와 싸우고 싶지 않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거냐!" "우리 모두 등 뒤에 다른 적을 두고 왔다. 우리가 계속 싸운다면 누가 이기든, 패자는 물론이거니와 승자도 더이상 싸울 힘이 남지 않을 것이 분명해. 그러면 오만한 에스테이아와 랜스 아덴은 누가 물리치지?" "넌... 교활한 녀석이군." 레일라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녀는 잠시 갈등하는지, 제피로스와 로이와 데이미아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확실히 그녀에겐 제피로스를 이길 강능성은 희박했고, 그녀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 기사단! 인질은 데려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방해물은 없앤다! 총공격!" "그럴 수가...!" 로이는 흥분해서 소리치며 제피로스가 준 단도를 꼭 잡았다. 그러나 그가 뛰쳐나가려 하는 순간, 제피로스가 그의 앞을 막아 서며, 그에게로 달려 오던 한 병사에게 칼을 휘둘렀다. 겨냥은 정확했고, 그는 투구와 갑옷 사이로 드러난 목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를 시작으로, 다시 로이와 제피로스의 주위에는 혈투가 벌어졌다. 그림자 기사단의 갑옷은 겉보기에도 매우 두꺼 웠고, 그래서 웬만한 공격은 거의 먹혀들지가 않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무거운 갑옷 때문에 둔했으나, 마찬가지로 몸이 바른 제피로스의 공격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갑옷의 관절마다 드러난 약한 부분의 정확한 겨냥만이 적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죽어랏!" 레일라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제피로스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검이 다시 들려져 있었다. 제피로스는 반사적으로 자신의 검으로 그녀의 검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이 레일라가 노렸던 것이었다. 그녀는 여자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힘으로 제피로스의 검을 밀어부쳤고, 제피로스는 밀리지는 않았으나 검을 치울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물론 등 뒤가 비어 있었더라면 물러서면서 그녀의 칼을 피하는 동시에 다른 공격을 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그의 뒤에 로이와 쓰러진 데이미아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회다! 모두 이 녀석을 공격해!" 레일라가 있는 힘을 다해 제피로스의 칼을 누르며 소리쳤다. 아닌 게 아니라 벌써 한 병사가 창을 휘두르며 제피로스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에잇! 이거나 받아랏!" 갑자기 어떤 둔기(鈍器)가 레일라의 뒷통수를 강타했다. 레일라는 비명을 지르며 맥없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그녀의 검은 투구가 벗겨져, 땅 위에 뒹굴었다. 병사들은 물론 제피로스까지 황당해져 버렸다. 다름이 아니라, 로이가 급한 김에 데이미아의 마법 지팡이로 그녀의 머리를 후려쳤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세게 쳤던지 지팡이의 끝이 약간 부스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황당해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피로스는 얼른 마음 놓고 자신을 공격하러 달려오던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레일라가 그를 막아 줄 거라고 생각하고 완전히 방심해 있던 상태였으므로, 그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허점 투성이었다. 순식간에 네 구의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의 시체가 땅 위에 뒹굴었다. 하늘같이 믿던 대장이 쓰러진데다 동료들까지 어이없이 쉽게 목숨을 잃자, 그림자 기사들은 전의를 상실한 듯 주춤거렸다. "으..." 레일라가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두개골의 곡선이 드러날 정도로 붉은 머리칼을 짧게 깎은, 기껏해야 켈리 정도의 나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다. 강인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로이에게 그녀에게 가 보라는 눈짓을 하며, 기사들을 향해 검을 잡은 채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로이는 그의 지시대로 레일라에게 쪼로록 달려갔다. "네... 네녀석!" 로이를 보고 레일라가 소리를 지르다가, 아직도 머리가 아픈지 다시 몸을 뉘이며 얼굴을 찌푸렸다. 로이는 한 손에는 레일라를 때려준 지팡이를, 한 손에는 제피로스가 준 칼을 든 채, 어쩔 줄을 모르다가 황당한 한 마디를 던졌다. "...많이 아프세요?" 이 말에는 제피로스도 레일라도 웃지도 못하고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로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색해진 분위기에 더욱 당황한 로이는 분위기를 좀 바꿔 보고자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저기요... 죄송해요... 그러니까... 지나가다 벽돌에 맞았다고 생각하 시면 별로 기분이 안 나쁘실..." "로이! 너 도대체 지금 무슨 소리 하는거야?" 듣다못한 제피로스가 소리쳤다. "에... 그럼... 뭐라고 해야 하는데요?" "...됐다, 됐어." 제피로스는 로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리고는 레일라의 목에 검을 들이대며, 멀찍히 물러선 그림자 기사단에게 소리쳤다. "허튼 짓 하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그리고는 로이를 향해 말했다. "자, 넌 데이미아 옆에 가 있어." 제피로스의 말에 로이는 다시 데이미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는 이 모든 소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새근새근 숨소리까지 내며 잠들어 있는 중이었다. 레일라는 일어나 앉으며 제피로스를 노려보았다. "난 타협 따위는 하지 않아! 죽일 테면 죽여 보시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걸. 사실 실력이 없으면 죽여 버려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싸워 보니 아까워졌어. 네 검술, 앞으로 수많은 인간의 피를 볼 것 같던데, 그걸 내가 막을 수야 없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넌 대체 누구지?" 레일라의 경계 어린 눈초리에 제피로스는 차가운 미소를 던졌다. "에스테이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악당 중 한명이지. 너와 같이 말야. 그런 우리가 서로 죽고 죽인다면 에스테이아 얼간이들밖에 더 좋아하겠나?" 레일라는 가만히 제피로스를 노려보았다. 그를 찬찬히 살핀 후, 그녀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군. 그렇다면 우리 아트웰 저항군이 되어 주지 않겠나? 네 실력이라면 기사단 하나는 능히 이끌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양하겠어. 하지만 제안은 고맙군." 레일라는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투구를 짐어들고 가만히 제피로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자신의 부하들에게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우리가 졌다. 무두 여기를 떠난다! 이들은 내버려 두고 랜스 경을 찾는데 전심하도록!" 어찌 보면 어이없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기사단 중 반박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묵묵히 대장의 명령에 따라 걸음을 돌렸다. 마치 로이와 제피로스 따위는 처음부터 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레일라도 지체없이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그녀는 떠나기 전, 제피로스에게 다시 한 번 말했다. "문을 열어두겠다, 에스테이아의 적. 언제라도 마음이 바뀌면 우리를 찾아오도록." "호의에 감사하오." 제피로스는 처음으로 정중한 어투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을 이끌고 어두운 숲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레일라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 (계속) "레일라가... 실패했다고? 믿기 힘든 일이로군." 스트라본 왕자는 서재의 높고 좁은 창문으로 위세등등하게 뻗은 드라크노움 산맥을 내다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산맥의 꼭대기 부근은 벌써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고, 그 아래로 갈수록 울창하고 계절을 모르는 침엽수들이 비밀을 감추듯 땅을 덮고 있었다. 그리고 산기슭으로 내려올수록 가을을 맞이하는 활엽수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숲은 아직 여름의 잔재를 간직한 길리어드 변방의 농촌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길리어드의 논과 시장 골목 사이로, 소박하고 평범한 차림의 평민 들이 분주히 걸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에스테이아의 백성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아트웰의 백성, 아트웰의 민족인 사람들이었다. 언제부터 그들을 아트웰의 백성이라고 부르고 싶어했는가, 언제부터 그의 형 사일러스가 '대공 전하'가 아닌 '폐하'라고 불릴 날을 꿈꿔 왔는가. 스트라본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는 그가 태어나 살아온 20년동안, 그가 형과 함께 한 지금까지의 시간동안 내내 그것을 원해 왔던 것 같았다. 그가 원하고 그의 형의 원하고, 그들의 기사들이 원하는 것. 아침 햇살에 곱게 땋아내린 그의 머리칼은 더욱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 그의 금발과 소년처럼 섬세하고 순진해 보이는 외모는 궁중 안의 여성들은 물론 아트웰 밖의 여자들의 가슴까지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와 인사 이상의 말을 나눌 수 있는 여성은 레젠디아 전역을 통틀어 단 한 명 뿐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 갤러허드가 뵙기를 요청합니다." "아, 그래, 들어오라고 해. 그리고 하젠, 주위를 좀 물러 줘. 아무도 엿듣지 못하도록." 스트라본 왕자는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으며 명령했다. 그러나 하젠은 그의 말뜻을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엿듣지 못하도록'은 엿들으려 하는 놈이 있다면 직책을 막록하고 가차없이 죽여 버리라는 뜻이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복종의 뜻을 표하고는 스트라본의 서재에서 나왔다. "전하!" 레일라는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며 돌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갑옷은 벗은 후였고, 길리어드 성의 호위병들이 흔히 입는 붉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녀의 체격은 어찌보면 연약하고 날씬한 것 같았지만, 자세히 관찰 하면 모두 탄탄한 근육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 부터 칼을 잡고 전투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체격, 남자조차 흔하지 않은 그런 체격이었다. "고개를 들어라, 레일라. 네 잘못이 아니다." 스트라본 왕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레일라는 일어설 줄을 몰랐다. "벌을 내려 주십시오. 그들 모두를 놓쳤습니다. 랜스 아덴의 행적조차 알지 못하고..." "네 잘못이 아니래도 그러는구나. 너는 최선을 다했다. 내가 로크 페울로니의 용사들을 너무 얕본 모양이다." 스트라본은 레일라에게 걸어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 그러나..." "하하, 난 일어나라고 명령했다, 레일라. 그래, 부상을 당했다고 하던데, 이제 괜찮으냐?" "예... 괜찮습니다." 레일라는 머뭇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이럴 때의 그녀의 모습은 스트라본의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르는 풋내기 시녀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연히 서재의 중앙에 놓여져 있는 거대한 테이블로 걸어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자아, 앉아라. 새삼스럽게 격식이나 차리려 하다니, 레일라 너도 짖궂은 데가 있군." 레일라는 황급히 스트라본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스트라본과 한 테이블에 앉아 의논할 수 있는 부하는 그녀와 근위기사 하젠, 둘 뿐이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스트라본이 자리를 권할 때면 언제나 기분이 들뜨곤 했다. "얘기해 봐라, 레일라. 랜스 아덴이 아트웰을 벗어나기 전에 우리가 그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가?" "감히 제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가능할 것 같지 않습니다. 길리어드 왕성의 감옥을 탈출한 사람에게, 느슨한 경비망을 뚫고 아트웰 밖으로 도망치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입니다. 물론 그 자신이 도망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습니다만..." "사일러스 형님이 그를 잡겠다고 하셨는데. 그 분을 믿지 못하는 거냐?" "외람된 말씀이오나 그 분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사. 쇠로 된 검에는 명수이시지만 혀와 마음의 검은 잘 다루지 못하신다는 것이 저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럼 랜스는 유유히 빠져나가 에스텔 로 간다. 가서 그의 형, 클레이브 아덴에게 고자질을 한다... 정말 좋지 않군." 스트라본은 눈살을 찌푸렸다. 소년과 같은 얼굴이 일그러지며 냉혹한 표정을 자아냈다. "아트웰의 저항군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아직 에스테이아의 대군을 맞을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클레이브의 개 데이슨에게 마법을 걸어 간신히 클레이브 녀석을 속이고 있긴 해도, 랜스 놈이 떠벌이면 먹혀 들어가지도 않겠지. 클레이브가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아클레어 왕은 다른 사람 말은 듣지도 않을 거고... 난처하게 됐군." "오르크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 그 놈들은 저희들 싸우고 싶을 때만 싸우는 종족이야, 레일라. 잔혹한데다 제멋대로지. 오르크들의 심장은 검은 색이고, 그 안에 양심 따위는 없어. 아크트 놈은 더욱 그렇고... 그들을 믿어서는 안 돼. 요정족, 난쟁이, 모두 믿어서는 안 돼... 그들을 이용할 수는 있더라도, 믿을 수 있는 건 같은 인간 뿐이라고. 드래크로니안을 봐. 처음에는 오르크와 싸우는 전사의 모습을 하고 오더니, 나중에는 로데인 인들을 부추겨 전쟁이나 일으지를 않나, 이제는 오르크 편에 붙어서 인간족을 학살하고 다니잖아. 오직 인간족, 그것도 순수한 아트웰 인들 뿐만을 믿을 수 있다는 걸 명심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레일라는 한치의 의심도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스트라본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만큼 짧은 시간 안에 사라졌다. 그는 곧, 다시 무겁게 가라앉은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어쨌건 서둘러 에스테이아와의 전면전을 준비해야겠군. 랜스를 유인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놈이라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 어쨌거나 결국 왕의 군대와 부딪치게 될 거야..."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해서..." 레일라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어쩐지 서글픈 시선으로 벽 가득히 꽂힌 책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을 송두리째 투자한 마법 서적들이었다. 어린 스트라본은 병에 걸릴 새라 무거운 모피 망토를 발끝까지 걸친 채, 이 서재에 들어와 자잘한 글자들을 벗삼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쩌다 눈이 피곤하여 밖을 내다볼 때면, 창문 밑 성의 마당에서는 그의 형 사일러스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연습을 하고 있곤 했다. 혹은, 그의 모습 대신, 작은 몸집의 소년인지 소녀인지 애매한 모습의 빨강머리 아이가 자기 키보다도 더 큰 칼을 마구 휘두르는 때도 있었다. "네가 죄송해 할 일은 없다. 내가 나섰어야 하는 일인데... 너와 사일러스 형님이 그들을 잡으러 동분서주 하는 동안 나는 편안히 침대에 누워 잠이나 자고 있었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아...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까? 전하께서는...!" 레일라는 '앓고 있었다'는 말을 하려다 황급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스트라본도 이미 그녀가 생각했던 단어를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어쩔 수 없었지. 이렇게 언제 앓아누울 지 모르는 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덕분에 이 나이가 되도록 검 한 번 잡아 보지 못하고... 명색이 아트웰의 왕자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전하는 아트웰 최강의 마법사이십니다!" "전장에 나가지도 못하는 마법사 말이냐? 형님을 오르크 소굴로 혼자 보내는 마법사 말이냐? 내가 하는 일이라곤 이 성 안에 틀어박혀 골렘이나 좀비 같은 것들만 만들어내는 일 뿐이지. 만약 내가 너처럼 칼을 잡을 수 있는 건강한 팔이 있다면, 레일라, 방패를 들고 싸울 수 있다면..." "전하...!" 레일라가 스트라본을 똑바로 바라보며 소리쳤다. 스트라본은 그녀의 녹색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레일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스트라본의 발 밑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는 녹색 눈으로 스트라본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했다. "전하! 저는 언제나 전하의 검이며 방패입니다." -------------------------------------------------------------------- 햇살은 길리어드 성의 탑들 분만 아니라 외진 드라크노움 기슭의 농촌에도 비쳐들고 있었다. 숲이 끝나는 곳부터는 선으로 자른 듯 황금빛 밑밭이 펼쳐져 있었다. 포도밭이 바로 곁에 늘어서 있었으나, 이제 포도는 추수를 끝내고 보기에만 그럴 듯하지 실속이라고는 없는 커다란 잎사귀만 잔뜩 흐늘거리고 있었다. 그 잎사귀들도 숲의 나무들처럼 누리끼리해져 떨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길리어드 성 부근, 산 아래에는 아직도 여름이 가지 않았지만, 꽤 고도가 높은 기슭인 이 촌에는 벌써 가을이 활개 치기 시작한지 오래였다. 막 아침을 맞아 여관 문을 열고 문 앞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여관 주인은, 울창하고 아직도 어두운 숲 속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 숲은 바로 벨리노어의 요새가 있는 곳, 사람들이 여간해서는 드나들지 않는 드라크노움의 숲이었기 때문이다. 벨리노어 왕이 그 음침한 성을 짓기 전부터, 그 숲에는 사람을 홀리는 유령이 나온다느니 말을 하는 짐승들이 산다느니 한 번 들어갔던 모험심 많은 청년이 전혀 늙지 않은 채로 100년 후에나 돌아왔다든지 하는 이상한 말들이 많았다. 그런데 왕이 요새를 짓고 나서, 그리고 수많은 기사 들의 목숨을 바친 뒤 아클레어 3세에게 무릎을 꿇고 나서부터는 아예 금지된 장소가 되어 버렸다. 죽은 기사들의 혼백이 성터를 지키며, 감히 자신들의 영토를 침입하는, 에스테이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가짜 아트웰 인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다.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숲에서 나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꼴이었다. 키가 크고 금발을 늘어뜨린, 강인한 인상의 젊은이와 짙은 머리색을 가진 귀여운 소년은 그런 대로 봐줄 만 했다. 그러나 소년의 곁에서 마치 오누이인 듯 재잘거리는 소녀는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멀리서 볼 때에는 그 두 아이와 또래인 듯 여겨졌던 인물은 수염이 덥수룩한 난쟁이 였고, 그의 곁에는 남자 차림을 했지만 상당한 미인인, 소녀 티를 갓 벗은 금발의 여성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커다란 잿빛 짐승이 충실한 애견처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좀 거리를 둔 채, 후드를 깊게 눌러 써 얼굴을 가린 다른 청년이 걸어오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방 있나요?" 하고 말을 건 쪽은 금발의 여인 쪽이었다. 그녀는 여관 주인이 긴장을 하건 겁을 먹건 상관 없다는 듯 발랄하게 자기 할 말을 쏟아놓았다. "사람이 좀 많죠? 눈 좀 붙일 방이 필요해요. 그리고 식사하고요. 여행을 오래 하느라 모두 피곤한데다 뱃가죽이 등에 붙어있거든요. 물론 돈은 있어요." 그녀는 제법 묵직해 보이는 가죽 돈주머니를 흔들어 쨍그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해괴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행이었건만 그 소리를 듣자 여관 주인의 의심은 누그러졌다.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그녀에게 대답했다. "들어오시죠. 숲을 지나오셨나요?" "예... 감사합니다!" 그녀는 대충 대답하여 얼버무리며, 얼른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여관에 딸린 술집 겸 식당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켈리는 얼른 값을 치루고 방으로 숨어들겠다고 말하듯이 동전 몇 닢을 꺼냈으나, 여관 주인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운이 좋으시군요. 저 숲에서 오르크가 나타났다고 하던데요." "그... 그래요?" "그래서 올두스 대공의 기사들이 그들을 소탕하러 간 모양입니다." "그랬군요!" "굉장히 많은 수였던 모양인지... 기사들 몇 명은 전사했다는군요. 하지만 결국 다 쫓아내긴 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드라크노움은 신성한 장소 라는데, 여기까지 오르크가 숨어들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모르 겠습니다. 여기는 오르크들의 땅과도 멀리 떨어져 있는 곳 아닙니까?" "정말 그래요." "게다가 아클레어 폐하가 반역자를 소탕하라고 보내 주신 기사란 작자 중 하나가, 오히려 반역을 일으키려다 체포당했다는군요." "...반역이라고요?" 잠자코 있던 키가 큰 청년이 갑자기 물었다. 여관 주인은 그제서야 그의 존재를 인식한 듯, 좀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자기 말에 빠져 들어, 신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렇습니다. 데이슨... 데니슨? 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폐하가 그자에게 반란군 소탕을 명하시고, 이리로 보내신 모양입니다. 아시다 시피 요즘 여기 아트웰이 좀 복잡합니까? 그런데 그 작자가 글쎄, 오히려 자기가 왕이 되려고 반란을 꾀했다지 뭡니까. 게다가 자기 상관 클레이브 경의 동생까지 살해했다는 겁니다. 심문을 하고는 있지만 그 시체를 어디다 숨겼는지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다나요. 도대체 그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원 참, 그 놈이 그런 흉악범인 줄은 폐하께서도 모르셨다니..." 청년의 얼굴에서 차차 혈색이 사라졌지만, 여관 주인은 알아채지 못했다. 후드로 얼굴을 가린 젊은이가 짧게 던지듯이 말했다. "켈리, 잡담 그만하고 가서 쉬는 게 어때? 우리 모두 지쳤어." 여관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즉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항상 피곤한 손님을 붙잡아 놓고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늘어놓는다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어 왔던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책맞은 버릇은 잘 고쳐지지 않았지만. 켈리라고 불린 그 여자는 재빨리 동전 몇 닢을 그의 손에 쥐어 주고는, 빠른 말투로 부탁했다. "맞아요, 아저씨. 아저씨 얘기는 나중에 듣도록 하죠. 그럼 방 좀 안내해 주실래요?" 주인은 허둥거리며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켈리와 요정 소녀를 위한 장은 방 하나와,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 방 하나로. 그리고는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허둥지둥 계단을 내려갔다. "...스트라본이 머리 쓰는군." 이즐레이는 두건을 벗어서 붉은 눈을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랜스는 아직도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데이슨이 날 죽였다고... 도대체 어쩔 생각으로 저런 터무니없는 짓을?" "널 잡으려는 거지. 미끼가 있어야 고기가 잡힐 거 아냐? 처음엔 로이와 데이미아를 미끼로 쓰려고 했었지만, 그게 잘 안되니까 데이슨을 미끼로 쓰려는 거라고." 이즐레이의 말투는 얄미울 만큼 차분했다. "하지만 데이슨이 반역 따위 저지를 사람이 아니란 건 누구나 다 알잖아. 더구나 날 살해했다니... 클레이브가 그다위 일을 믿을 것 같아? 당장 에스텔에서 항의가 날아들텐데..." "글쎄? 난 그 사람이 널 죽이려고 하는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데." 이즐레이가 빈정거렸다. 랜스가 그에게 뭐라고 하려는 찰나, 툴위그가 얼른 끼어들었다. "하지만 자네가 데이슨을 구하기 위해 에스텔로 가서, 스트라본의 술수에 걸려 죽는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자네의 시체가 데이슨의 죄를 증명 하는 증거가 될테니. 봐라, 데이슨이 자백한 장소에서 진짜로 랜스 아덴의 시체가 나왔다, 이런데도 그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가, 뭐 그런 식이지. 내 생각엔 자네가 모른척하고 에스텔로 가는게 최선일 것 같군." (계속) . "하지만 그러면 데이슨은 죽을 겁니다. 제가 길리어드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에스텔로 갔을 것이라는 걸 사일러스도 알테니까요. 아마 왕의 군대와의 전면전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데이슨의 목을 벰으로써 전쟁의 서막을 알리려 하겠죠." 랜스의 대답이었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그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켈리는 문득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집중되었음을 깨달았다. 모두 그녀가 의견을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 사실은 전혀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난 툴위그의 의견에 동의해." 하고 그녀는 짤막하게, 그리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러나 툴위그가 제동을 걸었다.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싶은 얘길 해 봐, 켈리." 하고 랜스도 거들었다. 그러자 켈리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쌀쌀한 말투였다. "좋아, 그러면 모두들 말하라고 하니까 말하지. 나는 에스텔이고 길리어드고 다 때려치우고 어서 라우더로 가서 로크 페울로니나 찾았으면 좋겠어. 이제 다들 만족해?" 이 대답에는 모두가 아연실색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사실은 라우더로 가기를 원했던 툴위그조차. 이즐레이만이 매우 재미있다는 듯, 미소띈 얼굴에 약간의 놀라움을 표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 보다도 황당해 한 것은 같은 인간인 로이와 랜스였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켈리!" "맙소사,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로이와 랜스는 거의 동시에 외쳤다. 켈리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줄 알았어. 그래서 말 안하려고 했는데." "그럼 아트웰은 아무렇게나 되어도 좋다는 소리야? 내전이 일어나 사람들이 죽어가도? 켈리, 넌 평소에도 이해 할 수 없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번 건 최악이야. 도저히 납득할 수 없어!" 랜스가 열을 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켈리의 대답을 쌀쌀하기만 했다. "지금 서둘러 달려가 너희 형한테 고자질한다고, 아니면 영웅답게 데이슨을 극적으로 구출한다고 아트웰의 기세가 줄어들 것 같은가? 아니, 우리가 무슨 방해를 해도 그들은 싸우게 돼 있어. 에스테이아 왕의 군대와 아트웰의 저항군의 충돌은, 아클레어 3세가 벨리노어의 무릎을 꿇게 만들고 그의 나라를 자신의 속국으로 만들면서부터 예정되어 온 거야. 우리가 부산 떤다고 그걸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하긴, 하루 이틀 정도 앞당기거나 늦출 수야 있겠지. 게다가 여기 있는 사람들 중, 툴위그는 난쟁이족이고 데이미아는 요정족이야. 인간들의 나라인 에스테이아의 내전에 흥미있을 리가 없지. 펠히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리고 이즐레이, 너도 마찬가지겠지? 반이 드래크 로니안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차피 에스테이아가 통치하건 아트웰이 독립하건 네겐 차이가 없을테니 말야. 그럼 남는 건 우리 셋, 너와 나, 그리고 로이 뿐이;야. 우리 셋의 사정 때문에 다른 모두를 위험으로 끌어들이자는 건 아니겠지?" 켈리의 말에 랜스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에서 틀린 점은 없었다. 특히 마지막 말은. 툴위그나 데이미아가 에스테이아, 인간들의 내전 때문에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원하지 않는 침묵을 지키는 랜스를 켈리는 신기한 동물 보듯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의외로 툴위그였다. "켈리, 우린 동료야. 랜스의 친구가 목숨이 위험하다면, 그리고 그래서 랜스가 위험에 뛰어들 작정이라면,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난 그를 도와야겠어. 게다가 인간들끼리의 살생을 막을 수 있다면 망설일 여지가 없지. 같은 종족 끼리의 살육은 언제나 비참한 것이고, 우리 글렌델 가는 언제까지나 인간과 요정들의 친구니까." "저도 마찬가지에요!" 하고 데이미아가 질세라 소리쳤다. "우린 동료잖아요. 동료의 어려움에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거에요. 모두 함께 해결하고, 그런 다음 모두 함께 다시 여행을 떠나도록 해요. 그게 동료죠." "와아! 데이미아, 최고야!" 하고 로이가 환호성을 질렀다. "...고마워." 랜스도 데이미아와 툴위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켈리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표정이 가시지 않고 있었으나, 어쨌건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두 손을 들었다. "할 수 없지. 나 혼자 고집을 피울 수야 없으니까...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두의 생각이 그렇다면 나 역시 따르겠어." "흥! 넘쳐 나는 동료애로군?" 갑자기 이즐레이가 의자에서 일어나며 빈정거렸다. "난 상관 없는 일이니 이만 가 봐야겠어." "이즈!" 랜스와 켈리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러나 이즐레이의 비웃는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그래? 내 임무는 어차피 이 두 꼬마와 난쟁이 양반을 구출하는 걸 돕는 것 아니었어? 셋 다 무사하니 이제 내 일은 끝난 셈이지. 안그래?" 그는 동의를 구하듯 켈리를 바라보았다. 켈리는 할 말이 없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네가 함께 가 줄 줄 알았는데, 이즈." "미안하지만 나는 그 잘난 너희들의 동료가 아냐. 그리고 아트웰을 빠져 나가는 길이라면 동행해도 상관 없지만, 나한테 칼을 휘두른 그 정신 나간 아저씨를 구하러 가는 길이라면 사양이야." "데이슨은 마법에 걸려 있었던 것 뿐이야!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하고 랜스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즐레이는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칼에 죽을 뻔 하고서도 그런 말을 해? 하여간 대단한 관용이야. 나같은 놈이 어디 따라가기나 하겠어?" "랜스가 칼에 찔렸다고요?" 하고 로이가 놀라서 물었다. 데이미아와 툴위그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로이와 똑같은 질문을 표정에 담은 채 랜스와 이즐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랜스는 굳어진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로이, 그는 마법에 걸린 것 뿐이었어. 스트라본의 교활한 주술이 그의 정신을 조종하고 있었던 것 뿐이야!" 그러나 이즐레이도 지지 않았다. "하! 그러셔? 내가 알기로는 정신을 조종하는 주술로도 상대방이 정말 하기 싫은 일은 시킬 수 없다던데. 안 그런가, 요정 마법사? 대답해 줘." 그는 데이미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데이미아는 잠시 허둥대다가 대답했다. "그... 그렇죠... 크로이엔은 상대방의 의식 밑바닥에 따르고 싶은 의지가 있을 때에만 가능한 마법이니까..." "들었어, 랜스? 이만하면 정신 차리라고. 나 같으면 스트라본과 데이슨의 미친 장난에는 신경 끊겠어! 친구로서 들려주는 마지막 충고니까, 새겨 들으라고! 그럼, 모두 개죽음이나 당하지 마쇼!" 이즐레이는 꽤 즐거운 농담이라도 한다는 듯이, 큰 소리로 웃으며 방을 나갔다. 랜스는 그를 외면하고 있었고,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는 별 이상한 사람도 다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켈리만이 얼른 그를 따라 방문을 쾅 닫으며 뛰어 나왔다. "이즈! 기다려 봐!" 켈리가 계단을 쿵쾅거리며 달려내려가며 소리쳤다.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에 사람들이 하나 둘 내려오고 있었고, 그들은 묘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떠나려는 청년과 그를 붙잡으려는 젊은 여자를 쳐다보았다. 이즐레이는 이런 소동이 귀찮다고 여겼는지, 후드를 푹 눌러쓴 채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야?" 그가 태연히 묻자 켈리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녀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말 그냥 가는거야?" "그렇지 않으면?" "너랑 함께 가면... 도움이 많이 될 텐데." "도움될 것도 없어. 게다가 랜스 녀석 장단에 놀아나면서 그녀석 친구 구해 줄 마음도 없고, 그녀석 형님인가 뭔가 추켜세워주려고 왕 따위 에게 아부할 생각은 더더욱 없어. 에스테이아건 아트웰이건 내겐 다 똑같아. 둘 다 망해버리면 딱 좋겠어!" 작은 말투로 속삭이듯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의 말에는 적의가 가득 배어나와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반란죄로 잡혀가 참수형 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내뱉고도 태연하게, 후드 아래의 붉은 눈으로 켈리를 노려보며 빙긋이 웃었다. "자아, 어디 관청에 가서 고발이라도 해 보시지?" 켈리는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고 곧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에 이즐레이는 당황하고 말았다. 화가 난 듯 자신을 노려보는 그에게, 켈리는 웃음을 그치고 말했다. "나도 전쟁 따위엔 관심 없어. 하지만 너는 과격하게 말하는군. 그래서야 왕의 군대가 목 잘라 버리기 딱 좋겠구나." "...염치없이 태연하군? 드래크로니안이 왕을 모욕했는데 화나지도 않나?" "언제는 인간이라더니만? 네가 그렇게 싫다면 나도 강요할 권리야 없지. 다만 함께 가 주었으면 했을 뿐이야. 그 편이 우리들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하지만 그렇게 싫다면 할 수 없지." 이즐레이는 가만히 켈리를 바라보았다. 후드가 얼굴을 가려 표정은 잘 볼 수 없었지만,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적의가 없었고 매우 침착했다. "나는... 귀찮은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을 뿐이야. 너희들에게 악의는 없어. 하지만 정치적인 일에 끼어드는 건 싫어. 나는 돈 받고 칼을 휘두르는 자객일 뿐이야." "...할 수 없지. 몸조심해. 인연이 닿으면 나중에라도 만나겠지." 켈리는 서운한 듯 미소지었다. 이즐레이는 그녀의 인사를 듣고도 쉽게 떠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한 마디 던졌다. "너도... 복잡한 일에는 휘말리지 않는 게 좋아. 랜스의 형이라는 작자는 근위대장인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암살 의뢰가 들어오는 복잡한 놈이라더군. 나도 들었을 뿐이지만... 에스테이아는 지금 콩가루야, 아는지 모르지만..." "충고 고마워." 하고 켈리는 빙긋이 웃었다. "명심하지. 하지만 랜스와 따로 가지는 않아... 아직은." 이즐레이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마치 무언가에 놀란 사람처럼 몸을 갑자기 돌렸다. 그리고는 인사 한 마디 안 남기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켈리는 무심하게 계단에 선 채, 도망치듯 여관 문을 박차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 "도대체 아트웰의 늙은이는 뭘 꾸미고 있는 거야?!" 클레이브는 화가 나서 매의 발목에 묶여 온 편지를 갈갈이 찢어 버리며 소리쳤다. 막사의 횃대에는 아직 지친 날개를 접고 숨을 몰아쉬는, 길리어드로부터 먼 길을 날아온 매가 쉬고 있었고, 그의 앞에는 부관 칼릭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 있었다. 클레이브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했다. 그의 은빛 갑옷과 아버지를 닮은 불그스름한 금발은 온통 오르크의 피로 더럽혀져 있었고, 희던 망토는 색까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찢겨져 나가 있었다. 그런 꼴이 될 때까지 격전을 치루고, 간신히 적을 전멸시키고 막사로 귀환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이 어이없는 편지 한 통이었다. 길리어드에서 날아온, 그의 동생 랜스의 살해와 칼릭의 아버지 데이슨의 혐의와 처형을 알리는 얼토덩토 않은 편지. 이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장난으로 봐 줄 수도 없는 심각한 농간이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아트웰 대공 올두스가 아들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이 나갔다는 소문을 듣어 왔다. 그러나 어린 시절 그의 쾌활하고 호탕한 모습을 본 그만은 끝까지 올두스를 믿었다. 그의 슬픔은 일시적인 것이고, 그는 곧 그것을 극복하고 옛날의 대공으로 돌아오리라고. 그런데 얼마 전에는 사일러스가 살아 돌아왔다고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 자신과 국왕 폐하를 난감하게 만들더니만, 이제는 랜스를 데이슨이 살해해서 처형할 계획이라니, 정말 노망이 났다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어쩌실 계획이십니까?" 칼릭은 억지로 초조함을 감추고 물었다. 클레이브는 갑자기 그의 기분도 생각하지 않은 채 흥분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실 지금 흥분해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닌 칼릭이었다. 랜스가 죽었다는 말 따위는 아무도 믿지 않았으나, 이 정신상태로라면 노망난 올두스가 정말 데이슨을 처형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칼릭이 있는 힘을 다해 감정을 숨기고 있는 앞에서, 자신이 어이없이 편지를 찢고 날뛰었던 것이다. 그러한 부끄러움이 클레이브가 좀더 빨리 침착성을 되찾도록 해 주었다. "아트웰 대공 올두스는 제정신이 아냐. 자네는 일단 안심하게. 내가 폐하께 가서 잘 말씀드리도록 하겠어." "감사합니다. 이런 일로..." 칼릭은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걱정의 그림자는 지워 지지 않았다. 말 한마디에 사라질 걱정이 아니라는 것은 클레이브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제길, 내 잘못이야. 데이슨 혼자 그 시끄러운 지방에 보내지 않는 건데 그랬군." "아... 아닙니다!" 칼릭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데이슨의 네 아들 중 유일하게 전사하지 않은 그는, 지나치리만큼 데이슨을 닮아 있었다. 누구라도 의심할 수 없게 만드는 충직한 갈색 눈과, 각이 지고 강건해 보이는 얼굴, 훈련으로 다져진 당당한 체격과 말을 타고 창을 휘두르는 그 훌륭한 솜씨까지도. 리반 경의 곁에 항상 데이슨이 있었듯이, 클레이브에게는 언제나 칼릭이 따라다닌다는 것조차 똑같았다. (계속) "대장님, 폐하께서 부르십니다." 마침 한 어린 병사가 들어와 클레이브에게 전했다. 기껏해야 열 예닐곱살밖에 안 된 병사였다. 여기 국경 지방인 로이히르에서는 그런 소년들 까지도 전부 오르크들을 막아 내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클레이브는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올두스 대공에 대해 참기 힘들 만큼 화가 났다. '분별 없는 늙은이 같으니라고. 그의 아들만 죽은 게 아니잖아. 우리가 여기서 어떻게 싸우는지도 모르면서, 편안히 안전한 아트웰에나 눌러앉아 엉뚱한 일이나 벌이고 있다니...!' 그러나 에스테이아의 귀족들 중 그런 행동을 하는 자는 하나둘이 아니었다. 시원찮은 지방 소영주들부터 시작해서 왕위 계승자인 아클레어 3세의 외아들 엘먼 아클레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편안한 궁 속에서 다리를 뻗은 채 이래라 저래라 떠들어대기만 했다. 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속되어 온 전쟁은 정상적인, 그리고 그들의 호화로운 생활에 아무런 불편을 주지 않는 습관에 불과했다. "마침 잘 됐군. 내가 폐하께 말씀을 드리고 오겠네. 너무 걱정 말게, 칼릭." 클레이브는 밝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막사 밖으로 나갔다. 해가 지고 있었고 바람은 무척 찼다. 에스텔의 북서쪽으로 말을 타고 달려 이틀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로이히르는, 대륙이 통일되기 전 거친 북부 유목민의 후손인 미르치스 왕국의 영토였다고 했다. 그들은 눈의 정령을 다스리는 카하렐리의 후손이라고 주장했으며, 그 주장답게 추위를 잘 안 타고 두려움을 모르는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그들만이 겨울이 긴 이 산간 지방에서 오르크들을 대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르치스의 영토가 에스테이아에 귀속되고 왕은 자결하자, 오르크와 싸우던 미르치스의 군사들은 온데간데 없고, 남은 것은 남쪽 지방에서 온 새 영주와 그와 마찬가지로 추운 것에는 도통 익숙하지를 못한, 전의가 실력을 앞지르는 어린 지원병들 뿐이었다. 너무 북쪽인데다 산간지방이기까지 했으니, 전투에 불리한 점은 다 갖춘 셈이었다. 온몸이 털로 덮인데다 짐승 같은 발을 가진 오르크들은, 쏜살같이 산등성이를 넘을 수 있었고 겨울의 추위와는 친구 사이인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가장 나쁜 점은 산간 지대에는 밤이 빨리 온다는 것이었다. 해는 계속 짧아지고 있었고, 오르크들을 일단 전멸시키기는 했지만 산만 넘으면 우클로우인데 언제 다른 오르크 무리가 쳐들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클레이브는 재법 밀과 말과 젖소가 많이 나는 지방인 로이히르에, 척박함의 상징인 우클로우가 이마를 맞댄 채 이웃해 있다는 것이 갑자기 신기하게 느껴졌다. 왕은 하얀 수염을 휘날리며 모닥불 앞에 서 있었다. 그의 갑옷에도 피가 튀었음이 분명하나, 이제는 닦여져 다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클레어 3세의 새하얀 수염과 머리칼은 색깔을 잃었을 뿐, 아직도 윤기를 잃지 않아서 세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흰색으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클레이브가 왕을 처음 만나면서부터 그는 백발이었으니, 이런 느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는 왕의 젊은 시절을 그렸다는, 풍성한 짙은 갈색 머리를 기른, 세월의 지혜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고 경솔한 자신감에 찬 한 젊은이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 젊은이와 왕을 연결시키 기는 힘들었다. "부르셨습니까, 폐하?" 하고 클레이브가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왕은 그에게 일어나라는 눈짓을 했다. "전투가 얼마나 지속될 것 같은가?" 왕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다. "이제 로이히르에 남은 오르크는 없습니다만..." 하고 클레이브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눈은 그들을 덮쳐올 듯 검게 일어선 돌산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그의 말뜻을 이해했다. "산너머는 우클로우. 방심할 수 없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이제 가을이네. 백성들은 추수를 해야 하는데 남자들은 다들 징집되어 있지. 그리고 추운 겨울은 병사들로 하여금 집을 그리워하게 만드네. 오늘도 여러 명이 탈영했다고 하더군." "여덟 명입니다, 폐하. 그 중 셋은 추적대에게 죽었습니다." "..." 왕은 말없이 산을 바라보았다. 우클로우, 저 너머에 오르크들의 고향이 있었다. 드래크로니안들은 오르크들은 모조리 멸함으로써 자기들의 임무를 완수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은 교묘히 그들의 근거지를 남겨 주고, 인간들에게 위험은 사라졌다고 설득하는 방식을 택했다. 오르크들이 사라지고 위협이 사라지면 그들의 자리는 사라질 것이 뻔하므로. 그리고 점점 자기 종족들의 발판이 사라져 가자 글라노우스는 인간들끼리 싸우도록 이간질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로데인의 공주를 아내로 맡기까지 했다. 끔찍한 일이었다. 붉은 눈의 종족이 왕으로서 다스리는 나라. 그러나 가장 끔찍한 것은 그 백성들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끝까지 그들을 갉아먹는 붉은 눈의 전사들을 위해 조세를 바쳤으며 그들이 패하고 같은 인간의 지배를 받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전투를 종결짓고 싶으십니까?"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승리는 결코 압승이 아니었어. 한 번만 더 싸운다면 어차피 우리가 질 거네. 숫자도 사기도, 우리에게 이로울 게 없네." "...알겠습니다." 클레이브는 고개를 숙여 복종의 뜻을 표했다. 그로서는 언제 새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로이히르를 버려둔다는 것이 무모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왕의 말대로 더 버티는 것도 무모한 짓이었다. 클레이브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쟁을 시작한 사람들은 인류가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면 영원한 평화 속에서 살게 되리라고 생각했겠지... "명령을 전달하겠습니다, 폐하... 그런데 외람되지만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클레이브는 침착하게 올두스가 편지에 쓴 우습지도 않은 내용을 왕에게 그대로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왕은 한숨을 쉬었다. "데이슨이라면 자네가 반란군을 소탕하라고 보낸 그 친구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곤란하게 됐군... 어서 그의 아들과 함께 가 보도록 하게. 일단 매로 편지를 띄우고. 올두스는 이제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군. ...폐위시켜야 겠어, 아무래도..." "..." 클레이브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왕은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그럼 대공 자리를 이을 인물이... 스트라본이랬지?" "...그렇습니다, 폐하." 사일러스는 한숨을 참으며 대답했다. 스트라본, 금발에 순진한 아기 같은 얼굴을 한 내성적인 마법사. 그의 손을 딱 한 번 보았을 때, 클레이브는 마치 그 손이 여자의 손처럼 여리고 희고 군살 없이 매끄럽기만 해서 당황 했다. 사일러스를 잃고 제정신을 못 차리는 올두스를 이해할만 했다. 확실히 스트라본은 사일러스보다 여러 사람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동정 섞인 호감이었다. 일 년의 반을 병석에 누워 보낸다는 아름다운 왕자에 대한 ... 그가 인기가 좋은 이유는 어떤 귀족도 그 어랜애같은 청년을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사일러스는... '사일러스는 네가 죽였어!' 클레이브는 올두스 대공의 억지를 들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힘이 빠졌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억지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가... "어쩔 수 없지. 스트라본이 왕위에 오르도록 하게. 그리고 사일러스 행세를 하고 다닌다는 그 사기꾼은 당장 목을 치도록 하게. 고인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정말 사기꾼이 틀림없을까요, 폐하?" 클레이브가 자신없는 소리를 하자, 왕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자네답지않게 왜 그러나? 그 전투에서는 아무도 살아 나올 수 없었네. 직접 눈으로 가서 확인하면 알 수 있을 걸세." 왕은 오랜 친구처럼 클레이브의 어깨를 다독거리기까지 했다. 클레이브는 걱정이 사라진 듯 미소지었으나, 그 미소는 거짓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괜찮으시다면 곧 출발하겠습니다." "지금 곧 가게! 데이슨이 고생하고 있을테니. 여기는 걱정하지 말고." 왕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 날 저녁, 달이 뜨기 시작할 무렵 길리어드에서 먼 길을 날아 오느라 지친 매는 다시 한 번 날개를 펴야 했다. 그리고 그 매가 간 방향을 따라, 클레이브와 칼릭 두 사람과 다른 세 명의 기사는 말을 달렸다. 칼릭의 얼굴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으나, 클레이브는 점점 더 깊어 가는 걱정을 안고 가고 있었다. -------------------------------------------------------------------- 한편 에스텔의 클레이브에게 보내어진 편지가 다시 로이히르로 보내어지고, 그리고 그 답장이 길리어드로 전해질 때까지 아스텔의 두 왕자는 일손을 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답장 따위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클레이브의 위협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둘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형 집행일을, 그리고 랜스 경의 일행이 무모하게 사형수를 구출하러 오기를 기다렸다. "클레이브가 화가 단단히 났군 그래!" 클레이브가 보낸 매가 도착하던 날 사일러스는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유쾌한 표정으로, 편지를 형에게 넘겨 주었다. 사일러스는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편지를 훑어 보고는, 미소도 짓지 않은 채 난로에 그 종이를 던져넣었다. "걱정되는거야?" 스트라본이 웃음을 죽이며 물었다. 사일러스는 아무 말 없이 어두워 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마침 편지가 도착한 날은 데이슨의 사형이 선고된 지 엿새 후, 즉 사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이었다. 성 앞의 광장에는 사형을 집행하기 위한 커다란 단상과 올가미가 어둠 속에서도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사일러스와 스트라본이 지금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성의 탑에서도 뚜렷이 보였다. "걱정마, 클레이브가 오기 전까지 모든 일이 끝나 있을테니. 그리고 만약 랜스가 안 온다 해도, 어치피 치룰 전쟁을 앞당기는 것 뿐이잖아?" 하고 스트라본은 쾌활하게 말했다. "...랜스는 분명히 와. 그게 내가 걱정하는 이유다." 사일러스는 중얼거리듯 대꾸했다. "그렇군... 하지만 우리 계획을 위해 그 녀석을 살려둘 수 없어. 에스테이아는 아직 우리의 비밀을 몰라야 해. 그리고 그건 랜스만 죽어 주면 간단한 일이야." "..." "사일러스, 아트웰을 생각해. 그 오르크 소굴에서도 견뎌냈었잖아. 아트웰이 에스테이아 왕의 그늘에서 벗어날 날도 멀지 않았어. 사소한 일에 마음이 흔들리면... 모두 잃게 되는거야." 스트라본은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사일러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없는 사이에 훌쩍 컸구나. 이젠 네가 다 알아서 하니... 내가 동생이고 네가 형인 듯한 생각이 든다. 전부터 생각해 온 건데, 아트웰이 독립되면 차라리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게 좋지 않겠냐?"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의 왕은 사일러스 형 뿐이란 걸 알면서. 나는 잠시 섭정 노릇을 해 줬을 뿐이지. 기억해. 형은... 우리 모두의 희망 이야." 이렇게 말하는 스트라본의 얼굴은 놀랄 만큼 진지하고 또 어려 보였다.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었으나 결코 가벼운 마음은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데이슨의 목에 걸기 위해 준비된 올가미 곁을 맴돌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데이슨을 위해 준비된 올가미가 아니라 랜스의 죽음을 위해 준비된 올가미였지만. 그의 옛 친구, 그의 동료, 클레이브가 자신을 의심했을 때조차 일말의 의혹도 가지지 않았던... '형은 우리 모두의 희망이야.'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동생과 헤어져 방으로 돌아갔다. 하젠과 레일라는 전쟁의 준비도 착착 진행되어 간다고 보고했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진척이 빠르다고. 농담이긴 했지만 레일라는 당장 전쟁을 시작해도 상관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좀더 시간이 필요했다. 오르크들의 좀더 에스테이아를 어지럽히고, 그리고 에스테이아 내부의 부패가 좀더 심해지기까지. 사실 그들은 심약한 엘먼 아클레어가 왕이 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가능성이 있었다... 단지, 랜스가 그들의 비밀을 가지고 에스텔로 살아돌아가지만 않는다면. 그는 잠자리에 들어 오지 않을 것이 뻔한 잠을 청합으로써, 스스로를 초조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예복을 갖추어 입은 채 침대 위에 앉아 날이 밝기를 가디렸다. 마음은 이미 정해진 후였다. 이미 그가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라우더로 가 오르크를 쳐부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부터,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친구라고 믿었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아주 쉽게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때부터 길은 정해진 것이었다. 날이 서서히 밝아 오고 있었다. 드라크노움의 기슭으로 둘러싸인 분지 아트웰에서 태양은 드라크노움으로부터 떠오르고 드라크노움으로 졌다. 지금 태양은 동쪽의 낮은 산맥 틈새로 얼굴을 내밀고 있는 중이었다. 햇살이 창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며,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같은 올가미의 그림자를 만들어냈다.이제 저 태양이 하늘 꼭대기로떠오르면 데이슨은 저 올가미에 걸려 사형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랜스와 클레이브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계속) 하... 요즘 문체가 좀 이상해졌죠... 휴... 제가 생각해도 너무 쓸데없는 말이 많군요... 사실은 본성이 드러나는 거랍니다. 재밌게 쓰려고 원래 문체를 숨기고 간결체로 쓰려고 노력했는데... 이... 잘 안되는군요... 하지만... 계속 노력 중이니... 지켜봐 주시길...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랜스와 사일러스 둘 다의 바램에도 불구하고, 태양은 오히려 다른 날보다도 일찍 하늘의 중앙을 향해 치닫는 것 같았다. 처음 사형을 구경하는 어리숙한 농부, 남의 불행에서 저속한 재미를 찾는 건달들,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형틀 아래로 몰려들었다. 길리어드에서 사형은 흔한 일이 아닌데다가, 그 죄수가 하필이면 에스텔에서 보내어진 관리였으므로, 아트웰 주민들의 관심은 대단했다. 길리어드 성 주변으로 돌아온 랜스 일행은 한 허름한 여관에 묵었는데, 강제징집된 남편이 전사했다는 그곳의 여주인은 입만 열었다 하면 클레이브와 데이슨을 비롯한 온갖 수도의 귀족들을 싸잡아서 비난했으므로, 랜스는 물론 일행 전부가 아주 난감해지고 말았다. 사형 집행 당일날에도 그녀의 입에서 동정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놈의 클레이븐지 뭔지가 왕을 죄지우지한다더니만 글쎄 이제는 반역자를 보냈다지 뭐유. 그 데이슨이란 작자가 폐하를 몰아내고 올두스 전하를 죽이려고 하다가 들통나니까 상관의 동생까지 죽였다니, 정말 말세유, 말세. 저 총명한 왕자님들이 그 망할 놈을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수?" 켈리는 질겁을 하고 그 여인네를 잘 구슬러, 랜스의 시야가 안 미치는 곳으로 가도록 했다. 그러나 랜스는 이제 그런 말에 대해 일일이 화낼 기력조차 없었다. 이 아트웰로 들어온 이후 들리는 거라곤 온통 그의 형 클레이브와 다른 귀족들에 대한 험담 뿐이었다. 아트웰 인들이 인정하는 용사는 아트웰 토박이를 제외하고는 에스테이아의 왕 아클레어 3세 정도였다. 물론, 그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저기... 너무 기분나빠 하지 마. 모두 바보들이라서 그래. 얼른 데이슨을 구출해서 여길 뜨자." 켈리가 멍하니 있는 랜스의 기분을 맞추려는 듯, 제법 부드러운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랜스는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화내지 않아. 처음 있는 일도 아닌걸. 어쩌다 로운에 가서 라우더 출신이라고 했다가 몰매를 맞을 뻔한 적도 있어. 어쩌면... 에스테이아는 한 번도 통일된 적이 없었던 건 아닐까..." "...통일되었건 통일되지 않았건 그런 것까지 네가 책임져야 해?" 켈리가 침울하게 물었다. 랜스는 여관의 허름한 나무 벽에 기대어 선 채, 대답 대신 조용히 물었다. "너도 클레이브 아덴은 나쁜 놈이고 왕을 쥐고 흔드는 간신이라고 생각하니?" "아니! 네 형은 분명 좋은 사람일 거야." 그러나 켈리의 대답은 너무 빠르고 과장되어서, 누구라도 랜스의 기분을 맞취 주려고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랜스가 그녀를 추궁하듯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멋적은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 나 사실은 정치 따윈 잘 몰라. 관심도 없고. 하지만..." 켈리는 허둥대며 할 말이 떨어지자, 다시 웃음으로 넘겨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랜스는 이곳에 머물러 데이슨을 구출하러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차츰 동료들의 사이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켈리는 '모두의 의견에 따르느라'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툴위그와 데이미아도 랜스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돕는 것 뿐이었고, 처음부터 그와 함께 에스테이아를 걱정하는 것은 기껏해야 어린 소년 특유의 영웅 놀이에 취한 로이 뿐이었다. '...그래서 여러 종족으로 이루어진 팀은 힘들다는 건가...' 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윗층에서 툴위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모두들 준비를 하라고! 어물쩡거리면 데이슨을 구하지 못해!" "가자." 켈리가 랜스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한편, 옆방에 있던 로이와 데이미아도 툴위그의 외침을 들었다. 마을에 돌아와 새로 산 검과 마법 지팡이로 각각 무장한 그들은 아까부터 대기 상태였다. 로이가 문을 막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데이미아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얼마나 땅이 꺼지는 한숨이었던지 로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걸음을 멈추었을 정도였다. "왜그래?" "...스트라본 왕자말야..." 데이미아는 고개를 숙인 채 말끝을 흐렸다. 로이가 자신있게 웃어 넘기며 말했다. "하하! 놈이 무섭냐? 걱정 마! 내가 있잖아, 내가!" "...무서운 게 아냐. 그는..." 데이미아는 로이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랜스를 돕는 이유는 그가 좋은 사람이고... 그리고 그를 돕는 길이 인간들을 돕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런데... 잘 모르겠어, 지금은. 인간들끼리의 전쟁에,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의 이름을 이어 받은 내가 이렇게 끼어들어도 되는 건가..."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그게... 스트라본 그사람... 악해 보이지는 않았어. 분명히 그 나름 대로 옳다고 믿는 일을 하고 있어... 모르겠어, 인간들은." 데이미아는 다시 한숨을 쉬며 로이의 시선을 피했다. 로이는 망연 자실해져서 서 있었다. 갑자기 그 속임수만 쓰는 스트라본이 나쁜 사람같지 않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그러나... '사실... 그사람 처음 보았을 때... 전혀 나쁜사람 같지 않았어. 하긴 겉만 보고는 모르는 거지만...' "로이! 데이미아! 떼어놓고 간다?" 이번에는 켈리의 외침이었다. 둘은 다급히 대답했다. "예! 내려가요!" 데이미아는 얼른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로이가 갑자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좋은 수가 있어, 데이미아! 이렇게 하자. 넌 인간들과 싸우지 않고, 재가 네 몫까지 싸우는 거야. 그리고 넌 내 몫까지 마법으로 방어를 해 주고. 그러면 넌 인간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날 보호해 주는 것일 뿐이잖아? 라스헨... 뭐의 이름에도 지장 없을거고!" 그러자 데이미아의 얼굴도 비로소 밝아졌다. "고마워, 로이! 너 정말 똑똑해." 그리고 두 아이는 갑자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계단을 돌돌돌 달려 내려갔다. 이미 여관 밖에서는 켈리와 랜스, 툴위그가 말을 준비하고 당장 이라도 형장으로 달려가려 하고 있었다. 처형 시간이 되자 형장 주위는 바글바글해져서 발 디딜 틈도 없었다. 그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흥분과 기대로 꽉 차 있었으므로, 로이는 당황했다. 당연히 슬퍼하고 억울한 죽음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다들 들떠 있어서 이상한가 보지?" 하고 켈리가 물었다. 그러는 그녀도 이상한 흥분의 분위기에 조금은 전염되어 있는 것 같았다. 로이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했다. "아트웰은 함락된지 겨우 40년밖에 안 돼. 그러니 타지의 귀족들에 대한 불만은 가득하지 워낙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탓에 아클레어 3세가 자기들의 왕이란 건 인정하지만, 나머지 귀족들은 다 쓰레기라는 거야. 물론 랜스의 형 클레이브도 포함해서... 하긴, 왕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놈들도 쌔고 쌨지만." "하... 하지만 아트웰도 에스테이아의 영토고, 여기 사람들도 다른 곳 사람들과 한 나라 백성인데..." "순진하구나, 로이. 국경을 없앴다고 마음까지 변할 것 같니? 아직 이곳의 노인들은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눈 에스텔의 기사들을 기억하고 있고, 이곳의 부모들은 자기 부모가 에스텔의 귀족의 군대에 의해 죽었다고 아이들 에게 말하고 있어. 시지리스도 이런 문제가 완전히 없었던 것 같지 않은데?"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시지리스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있었다. 노인들은 먼 옛날 인간과 용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던 '평화의 시대'이야기를 했고, 어른들은 세금을 무자비하게 걷힌 날이면 술김 홧김에 차라리 용의 지배를 받는 편이 더 편할 것이라고 투덜거리곤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을 다른 사람의 앞에서 고자질하면 안된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사실 이었다. "자, 처형이 시작되려나 보군. 모두 준비해!" 툴위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성문이 열리고 말에 태워진 죄수가 열 명의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검은 두건이 ㅅ워져 있었고, 손을 밧줄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등이 굽은 채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은 마치 그 당당한 데이슨이 아닌 다른 사람 같았다. 로이 일행은 모두 말을 골목에 숨겨놓은 채, 군중 속으로 섞여들었다. 아트웰의 군중들은 쓸데없이 썩은 과일이나 계란들 죄수에게 던져 소란을 야기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에게서는 더 차갑고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적의가 배어 있었다.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 켈리, 랜스, 모두 그들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흩어진 채 군중 속을 헤집고 들어갔지만, 로이와 데이미아만은 아까의 계획 때문에 꼭 붙어 있었다. 랜스와 켈리가 아직 형틀 앞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 데이슨의 죄목을 읽는 사일러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반역을 획책하고, 그 사실을 안 랜스 아덴 경을 살해했으며..." '맙소사. 사일러스도 스트라본이나 올두스만큼 미친 게 틀림없어!' 다급해진 랜스는 남의 눈에 띄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마구 앞사람을 밀치며 형틀 앞으로 향했다. 발판 위에는 벌써 목에 올가미가 걸린 데이슨이 서 있었고, 그 뒤에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스트라본과 올두스가 천막 안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오직 죄목을 낭독하는 사일러스의 얼굴만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아트웰의 대공(大攻) 올두스 세이키트의 이름을 대신하여, 나 사일러스 세이키트는 피고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안돼! 사일러스!" 데이슨의 발판이 치워지기 직전, 랜스의 고함이 형장 안을 울렸다. 주위 사람들은 물론 모인 사람 모두의 시선을 모을 만큼 커다란 소리였다. "저 바보가...!" 켈리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랜스는 허겁지겁, 이제는 쉽게 비켜 주는 사람들 틈을 헤치며 형틀로 달려갔다. 갑자기 할 일을 잊은 듯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일러스에게, 스트라본이 표독스럽게 외쳤다. "사일러스, 계획대로 해!" 사일러스는 적의로 가득 찬 동생의 눈을 보고, 다시 달려오는 랜스의 보습을 보았다. 이윽고 그는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형을 집행하라. 그리고 방해하는 녀석은 모조리 체포하라!" "사일러스...!" 랜스가 형틀의 바로 앞까지 달려왔을 때, 중무장으 한 병사들이 그의 앞을 막아 섰다. 랜스는 그들의 칼 뒤에서 사일러스에게 소리쳤다. "그만 둬. 데이슨이 나를 죽였다고! 터무니없는 소리 마라! 나는 여기 있지 않는가. 랜스 아덴은 여기 이렇게 살아있다!" 그러나 사일러스의 반응은 차가왔다. "저 미친놈을 당장 옥에 쳐넣어라." 그러나 그런다고 호락호락 당할 랜스가 아니었다. 그는 당장 병사 한 명의 배를 걷어차 쓰러뜨리고는, 칼을 봅아들어 다른 병사의 배를 그었다. 그의 등 뒤에서 한 병사가 도끼를 내리치려 했으나, 툴위그의 도끼가 먼저 그의 두개골을 깨뜨렸고, 멀리서 활을 쏘려던 병사 한 명은 어디서 날아 왔는지 모를 독침에 쓰러졌다. 순식간에 형장은 시체가 뒹구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일러스, 너는 내 친구가 아니었나?" 랜스가 옛 친구를 똑바로 노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일러 스의 시선은 랜스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무엇들 하느냐! 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가다렸다는 듯이 성문이 열리고,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선두는 레일라가 이끄는 그림자 기사들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데이슨의 발 밑의 받침대는 푹 꺼졌다. 올가미가 죄어지고, 목이 매인 죄수는 몸을 비틀며 서서히 경직되어 갔다. "핫!" 갑자기 어디선가 어린 소년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단상 위로 훌쩍 뛰어올라가, 올가미 줄을 끊었다. 데이슨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나 로이는 데이슨에게 안 다쳤냐고 묻기도 전에, 사일러스의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감히...!" 사일러스의 실력은 과연 감히 로이가 상대할 바가 못 되었다. 로이는 반격은 커녕 첫 공격에 칼을 잃고 말았다. 제대로 잡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사일러스의 공격은 너무나 강했던 것이다. 로이에게 사일러스를 앞지르는 재주라면 딱 한가지 뿐이었다. '튀자!' 로이는 다시 단상에서 훌쩍 뛰어내려 마구 도망쳤다. 사일러스는 다행히 로이를 쫓아오지 않았다. 그의 목표는 랜스였으므로, 로이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다. 그는 고전을 면치 못하는 부하들을 제치고, 랜스와 맞붙었다. 챙!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랜스와 사일러스는 칼을 마주한채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 "이러는 것도 오랫만이군, 사일러스." 하고 랜스가, 사일러스의 힘에 밀리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며 말했다. 있는 힘을 다해 상대방을 밀어붙이는 것은 사일러스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얼굴에는 랜스와 겨룰 때 언제나 그러하듯,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하하... 그동안 실력이 얼마나 늘었나 볼까?" 사일러스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랜스는 가볍게 칼을 부딪혀 그 공격을 밀어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랜스 자신이, 왼쪽으로 칼을 휘두르는 척 하면서 직각으로 칼날을 내리그었다. 그러나 사일러스 역시 지지 않고 그 공격을 쉽게 피했다. 막상막하였다.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 건가, 사일러스! 너는 아클레어 폐하의 충실한 기사가 되겠다고 나와 클레이브와 함께 약속한 사이가 아니었던가?" "하! 그것은 내가 내 백성들의 사정을 몰랐던, 철없고 어렸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다." "너의 백성이라고?" "그래, 이트웰의 백성, 내 할아버지의 백성이었으나 당연히 내 백성이 되어야 할 터! 인간은 인간 지도자를 가져야 한다지. 그렇다면 아트웰 사람이 아트웰 사람 지도자를 갖는 것이 당연하지 않더냐?" "그래서 인류 전체의 통일 제국을 망가뜨리려는 거냐? 인류를 다시 분열시키려는 거냐? 하필이면 오르크들이 설치는 이 때에!" (계속) "흥! 가해자가 피해자보고 참으라고 하기는 쉬운 법이지. 통일 왕국 따위는 어차피 허황된 꿈이다! 우리는 에스테이아 귀족들의 먹이가 되는 데 지쳤어!" 사일러스의 칼날이 다시 한 번 날아들었다. 랜스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사일러스가 다시 공격을 하기 전에,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칼은 사일러스의 몸 가까이도 가지 못한 채, 호공만을 갈랐을 뿐이었다. "제길! 어쩐지 랜스가 밀리는 것 같지 않아요?" 밀려드는 병사들을 막으며 싸우던 켈리가 툴위그에게 물었다. 그녀의 옆에서 싸우던 툴위그는 랜스 쪽을 흘끗 보았다. 확실히 둘의 실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그러나 사일러스가 투지에 불타 덤벼드는 반면, 랜스는 그의 공격을 막아내며 가끔 마지못해 공격하고 있을 뿐이었다. "확실히... 랜스가 불리하군." 방사들의 머리를 향해 힘껏 도끼를 휘두르며, 툴위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공격에 상처를 입은 병사는 없었다. 병사들은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않고, 그들이 힘이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툴위그도 켈리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더욱 초조해졌다. 사실 숫자면에서 워낙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얼른 데이슨만 구출해서 도망칠 계획이었으나, 이제는 데이슨이 구출은 고사하고 랜스와 사일러스의 결투도 웬만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이윽고 보다 못한 켈리가 툴위그에게 소리쳤다. "이래서는 도저히 뭐가 될 것 같지 않아! 여길 좀 맡아 줘요, 툴위그! 내가 얼른 저 왕자 놈을...!" "가만히 있어, 켈리!" 툴위그의 갑작스런 외침에 켈리는 깜짝 놀라 조용해졌다. 툴위그는 침착하게, 밀려드는 적에 대해 공격을 늦추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랜스가 네가 개입하는 걸 좋아할 것 같아? 그들은 지금 기사 대 기사로서 결투하고 있는 거라고. 알 만한 사람이 왜그래?" "젠장, 지금 기사 대 기사가 문제에요?!" 켈리는 답답하다는 듯 소리지르며, 애꿎은 병사들을 향해 화풀이를 하며 칼을 휘둘렀다. 한 명은 병사가 팔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갔다. 켈리의 움직임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팔이 뻐근해져 오고, 오래 버틸 수 없다는 느낌이 머리로 전달되어 왔다. 툴위그의 움직임도 점점 둔해지고 있는데... 그런데 적은 너무 줄어들지를 않았다. 차라리 그들이 미친 듯한 공격을 해 오고, 사방이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다면 켈리의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지쳐 가는 것은 사일러스와 랜스도 마찬가지였다. 불을 뿜는 듯하던 그들의 공격도 차츰 무뎌져 갔다. 그러나 둘은 힘이 빠지는 속도마저 비슷 했으므로, 전투는 아직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올두스 대공과 함께 앉아 구경만 하던 스트라본이 갑자기 일어서서 주문을 외친 것은 그 때였다. "이조넬 데란텔, 키린 로르티루 페이! (대지의 여신 이조넬이여, 당신의 아이에게 힘을 주소서!)" 고대어 주문이므로 켈리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제길, 저 녀석이 회복주문을...!' "툴위그! 여길 잠깐만 맡아 줘요!" "케리! 그만 둬!" 툴위그가 다급하게 소리쳤으나, 켈리는 이미 랜스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툴위그의 앞에는 아까 켈리를 공격하는 적들까지 모두 함께 밀려 왔으므로, 그는 더이상 한눈을 팔 새가 없었다. 그는 새로 장만한 도끼의 날로 적들을 밀쳐 내며, 마음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하여간 켈리, 저 녀석은...!' 스트라본의 주문 때문인지 사일러스는 갑자기 민첩해졌다. 그의 공격은 처음 랜스와 싸우기 시작할 때만큼 날카로웠다. "받아랏!" 그가 외치며 칼을 휘둘렀을 대, 갑작스러운 위력의 변화를 감당하지 못한 랜스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무의식적으로 그는 지친 사일러스의 힘 빠진 공격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는 간신히 균형을 되찾았으나, 사일러스는 반격할 기회를 주지 않고 다시 검을 날렸다. 번쩍이는 칼날이 자신의 머리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랜스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려 피했다. 그러나 검의 날은 그의 어깨부터 허리까지를 얇게 가르며 지나갔다. 상처는 피부를 조금 스쳤을 뿐이었으나, 아직 아물지 않은 허리의 상처를 지탱해 주던 붕대가 다 풀어져 버렸다. '이런...!' 시간과 데이미아의 치유술 덕택에 이제 출혈의 위험 따위는 없는 상처였으나, 아직도 이렇게 풀어헤친 채 격렬한 운동을 하기에는 너무 넓은 상처였다. 그러나 사일러스는 그의 상처를 보았을 때에도 눈을 조금 크게 떴을 뿐,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돌격해 왔다. "하앗!" 챙! 랜스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오는 사일러스의 칼날을 간신히 막았다. 마법의 힘을 빌린 사일러스의 완력은 이제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고, 지친 랜스는 간신히 지탱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일러스는 칼을 치우지 않은 채 힘으로 랜스의 칼날을 밀어붙였다.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는 랜스의 허리에서, 상처가 터져 피가 배어나왔다. 랜스가 더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낀 순간, 갑자기 사일러스의 칼이 치워졌다. 챙강! 균형을 갑자기 잃고 쓰러지려는 몸을 간신히 가눈 랜스의 귀에,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날카로운 소음이 들려왔다. 등 뒤에서 공격하려는 켈리의 칼날을, 사일러스가 교묘히 막은 것이었다. 방어를 예상하지 못했던 켈리는 잠시 비틀거렸으나, 교묘히 균형을 잡고 뒤로 물러서며 방어 자세를 취했다. "기사다운 동료를 두셨군, 랜스? 등 뒤에서 공격하다니!" 사일러스가 비웃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랜스의 얼굴이 달아 올랐으나, 켈리는 당당히 대답했다. "흥, 그러는 너는 마법의 힘을 빌린 주제에!" 켈리는 다시 사일러스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사일러스의 실력이 한 수 위였다. 그는 거뜬히 그녀의 공격을 피했을 뿐 아니라, 몸을 파히는 동시에 그녀의 허리로 칼을 휘둘러, 거의 찌를 뻔 하기까지 했다. 켈리 자신도 승산이 적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시간을 끌어 랜스에게 도망가거나, 아니면 뒤에서 사일러스를 공격할 시간을 주려는 것 뿐이었다. 랜스도 그런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있었으나, 어쩐 일인지 그는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하! 받아라!" 이제는 완전히 수세에 몰린 켈리에게 사일러스가 칼을 휘둘렀다. 검만으로 막았다면 도저히 그녀가 받아내지 못할 공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재빨리 채찍을 휘둘러 그의 팔에 감아, 검의 방향을 틀어 놓았다. 그리고 채찍이 풀려 사일러스가 비틀거리는 사이, 얼른 독침을 쏘았다. 사일러스의 빠른 동작 덕택에 그 침은 그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었고, 독이 충분 하지 못해 그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은 빠른 속도로 마비되어 갔다. "독을 발랐군...!" "하하, 미안! 난 완력엔 좀 딸리거든. 그럼 이제 싸워볼까?" 켈리는 검을 고쳐 잡으며, 사일러스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그녀의 앞을 랜스가 가로막았다. "그만 둬, 켈리!" 켈리는 잠시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랜스를 응시했다. 그리고는 웃어야 좋을지 화를 내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중얼 거리듯 물었다. "...너 나보고 말한 거야?" "그래, 켈리. 등 뒤에서 공격한 데다 독침까지 쓰다니, 기사답지 못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겠지!" "비켜, 랜스. 그 잘난 기사는 너 혼자 해먹어. 난 아니니까!" 켈리도 화가 났는지, 랜스를 거칠게 떠밀었다. 병사들도 툴위그도, 잠시 전투를 멈춘 채 이 어이없는 전개에 한눈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켈리의 말에도 불구하고, 랜스는 비키지 않고 오히려 칼을 들어올렸다. "사일러스는 내 친구다, 그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러니 기사도 아닌 사람한테 개죽음을 당하게 하는 건 도리가 아니지. 내 시체부터 밟고 넘어가라, 켈리!" 켈리는 이제 화를 낼 정신도 없는 듯, 입을 딱 벌리고 서 있었다. 그리고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은 후, 랜스에게 억지로 웃어보이며 물었다. "너 지금 농담하는 거지?" "농담같이 보여? 나부터 공격하라니까!" 그러나 둘의 대치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자기 스트라본의 웃음 소리가 형장 안을 울렸기 때문이다. "하하하... 눈물나는 우정이군. 잘 봤어, 랜스 경! 아주 감동적이야! 하지만 이 꼴을 보고도 그런 우정이 나올까?" 순간 모두의 시선이 스트라본을 향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아직 포박과 얼굴을 가린 두건이 풀리지 않은 데이슨이 높이 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미동도 없이 축 늘어진 채였다. 자세히 본 뒤에야 랜스는 그의 몸을 휘감고 있는, 거의 투명하고 보일듯 말듯 노란 빛을 띄고 있는 거대한 뱀을 볼 수 있었다. 스트라본이 불러낸 괴물이 분명했다. "이 비겁한...!" 랜스의 외침에도 스트라본은 까딱도 하지 않았다. "꼼짝 마라, 너희 둘 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자의 목숨은 없다." "스트라본...!" 사일러스마저 마비된 몸을 간신히 일으키며,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오히려 형에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친근하게,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어조로 말했다. "형, 지금이 때야. 저들은 반격하지 못해. 죽여버리라고. 마취는 내가 풀어줄 테니까! 사이스 델 카니안!" 스트라본의 주문에 사일러스의 몸은 다시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일러스는 선뜻 랜스를 공격하지 못한 채, 난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랜스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사일러스, 설마 그러지는 않겠지." 사일러스의 칼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충고를 구하는 듯이 랜스와 스트라본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스트라본은 그런 그를 보고 한층 더 큰 소리로 외쳤다. "사일러스, 형은 우리의 왕, 우리의 지도자잖아. 어서 명령을 내려 줘. 저들을 모두 없애라고 해!" "그만 둬, 사일러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면 클레이브에게도 아무 말 않겠다!" 두 사람이 모두 자신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사일러스는 한숨을 쉬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는 랜스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마지못해 하는 듯,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는 거의 들릴락 말락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죽여라." "사일러스!" 랜스가 당황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켈리의 발이 먼저였다. 잔뜩 흥분한 그녀는 땅을 박차고 사일러스에게로 맹렬하 돌진하며 칼을 휘둘렀다. "이 나쁜 녀석!" 스트라본의 회복마법은 아직 사일러스의 몸에 남은 독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상태였다. 사일러스는 간신히 켈리의 맹렬한 공격을 받아내며 비틀거렸다. 켈리는 사일러스가 아직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그를 해치우기 위해, 모든 기술을 동원하여 맹렬한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칼날이 상하 죄우로 춤을 추듯 날뛰고, 채찍까지 동원된 켈리의 공격은 인간치고는 무서울 정도로 집요하고 날랜 솜씨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서운 것은 다른 생각은 모두 접어둔 듯한 그녀의 살의(殺意)였다. '저 녀석... 진짜 사일러스를 죽이려는 거야!' 랜스는 당황하여,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려고 했다. 그러나 사일러스의 명령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랜스를 공격해 왔으므로, 그들에게로 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쳇, 이 녀석은 쓸모라고는 없는 인질이군!" 스트라본은 화를 내며 데이슨을 죄고 있던 투명한 뱀을 없애 버렸다. 데이슨은 힘없이 바닥에 털썩 떨어져 버렸다. 도망다니기에 바쁘던 로이와 데이미아가 얼른 그에게로 달려갔다. 숨이 간신히 붙어있을 뿐, 피투성이 시체나 다름없었다. "스트라본 저놈...!" 로이는 화가 나서 엉겁결에 칼을 빼어들었다. 그러나 화를 낼 시간 조차 충분하지 못했다. 병사들이 그들에게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로이는 칼을 든 채 어리숙한 자세로 반격을 준비하며 서 있었다. 아까는 마음놓고 도망다녔으나, 이제는 데이슨을 지켜야 하니 도망갈 수도 없었다. 그의 곁에서 데이미아가, 자신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소리쳤다. "걱정 말고 싸워, 로이! 네 공격은 모두 내가 막아 줄테니까! 아스틸라 휘리엔탈, 플리인 로르티루! (운명의 여신 아스틸라여, 당신의 아이를 보호하소서!)" 데이미아의 마법은 간단한 것이었으나 그 효과는 확실했다. 병사들이 로이를 향해 창들을 던졌으나, 모두 로이의 주위를 비껴갔다. 로이의 이마 한가운데로 정확히 돌진해 오던 창조차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그의 머리 위로 치솟았다. 자신감을 얻은 로이는, 어리숙한 폼으로나마 병사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의 칼에 쓰러지는 병사는 없었으나, 그들을 제지하여 데이슨의 근처에 오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멍청한...! 애송이 몇 놈 잡는 데 무슨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거야?!" 스트라본은 분노로 얼굴이 달아오른 채 소리쳤다. 그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레일라가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황급히 소리쳤다. "전하...!" "말리지 마라, 레일라! 저 놈들 따위는 단번에 없애 주겠어! 페레이타, 레이스 데인 하라스, 사 레이나드 아일 데인 벨라단, 엘켄헨 페이 헤인 펠라드 데란, 울스 데인 레젠디아...! (저승의 여왕 페레이타, 그녀가 다스리는 지옥의 화염이여, 땅 속 깊은 곳 레젠디아의 중심으로부터 오는 분노의 힘이여...!)" "맙소사... 저 주문은...!" 데이미아가 새파랗게 질린 채 스트라본을 바라보았다. 레알라는 황급히 병사들에게 소리치는 중이었다. "모두 물러나라! 스트라본 전하께서 몸수 저들을 물리치실 테니!" 그리고 형장의 땅바닥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싸우던 병사들과 랜스 일행은, 모두 전투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는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맙소사! 땅이 갈라지잖아! 지진을 불러냈네! 이런 무식한..." 그러자 데이미아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차라리 지진이면 좋게..." (계속) "이... 이런!" 사일러스를 공격하려고 칼을 높이 치켜들었던 켈리가 비틀거렸다. 그녀의 발 아래가 몹시 흔들거리며, 두 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비틀거리다가 재빨리 한 쪽 땅으로 비켜섰다. 사일러스는 병사들의 부축을 받아 뒤로 물러선 후였다. "스트라본! 그만 둬! 그런 식으로 마력을 낭비하면...!" 사일러스는 동생을 향해 소리쳤으나, 스트라본은 들은 척도 않았다. 그는 손을 높이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엘켄 데인 카야크! (혼돈의 분노여!)" 땅은 한층 더 심하게 흔들렸다. 갈라진 틈새 사이로 악취가 풍기는 뜨거운 연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데이미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생전 처음 보는 주술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신음 과도 같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세상에... 페레이타의 마법과 카야크의 마법을 마구 섞어 쓰고 있잖아. 어떻게 저것이 가능하지...?" "데이미아! 위험해!" 로이가 얼른 데이미아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거의 동시에 그녀가 서 있던 발 아래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지더니, 거기서 이상한 물체가 기어나왔다. 그 물체는 검은 녹색을 띈, 분명 어떤 동물의 일부분같이 보이는 물체였다. 번질번질한 모습이 뱀 같기도 하고 빨판이 없는 문어의 다리 같기도 하고, 무슨 말미잘의 촉수 같기도 했다. 로이는 당장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윽! 정말 구역질나는 괴물이네! 데이미아, 저건 또 뭐지?" "저건... 이름이 없어. 에누인이 이름을 짓기 전에 사라져 버린... 혼돈의 창조물의 다리들이야..." 데이미아가 얼이 빠진 듯 더듬으며 대답했다. 로이는 그 괴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에잇! 이름도 없는 게 까불고 있어! 이리 와!" 그 꿈틀거리는 생물은 그다지 민첩하지 못했다. 로이는 간단하게 그 촉수를 두동강내 버렸다. 잘려나간 끝부분이 땅바닥에 떨어져, 물에서 갓 건져낸 고기처럼 퍼덕거렸다. 잘려진 부분에서는 피도 흐르지 않고 대신 찐득찐득한 검은 물이 조금 나왔을 뿐이었다. "로이! 다시 재생되고 있어!" 데이미아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잘려진 부분에서는 이내 새로운 촉수가 꿈틀거리며 솟아났다. 그리고는 머뭇거림 없이 다시 로이를 적을 향해 몸을 뻗쳤다. "어... 어쩌지?" 병사들은 이미 모두 뒤로 물러난 후였다. 땅의 갈라진 틈으로, 그 촉수들은 점점 더 많이, 정신없이 기어나왔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동작으로, 상대의 다리와 팔, 그리고 목을 향해 휘감아 올라갔다. 랜스와 켈리, 툴위그, 그리고 늑대 펠히스는 그 괴물들을 베며 데이슨과 로이, 데이미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왔다. "이 괴물들은 또 뭐야? 스트라본이 불러낸 건가?" 켈리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녀는 쉴새없이 쏟아져나오는 괴촉수들을 베고 있었으나, 괴물의 재생 능력은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들의 다 함께 베는 것보다도, 갈라진 틈으로 쏟아져나오고 새로 돋아나는 다리의 수가 더 많았다. "젠장, 이러다 당하겠어! 데이미아, 너 마법사잖아! 무슨 수 없어?" 켈리가 자신의 다리를 휘감는 촉수 하나를 베어내며 소리쳤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의외로 담담하게 대꾸했다. "기다려요." "뭐?" "시간을 끌어요. 그럼 이길 수 있어." 로이는 데이미아의 침착한 어조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바로 아까까지만 해도 벌벌 떨던 그녀가 어느새 완벽하게 침착해져서는,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로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래? 이렇게 가다간 모두 녹초가 되어 버릴텐데!" "우리보단 스트라본이 훨씬 더 먼저 나가떨어질 거야." 데이미아는 의기양양하게 단상 위에 선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흰 로브를 입은 왕자를 흘끗 쳐다보았다. 요정의 눈을 가진 그녀는 그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트라본 왕자의 마력은 엄청나요. 하지만 체력은 그 마력을 못 지탱해 주고 있어. 지금 이 마법은 카야크의 소환술과 페레이타의 주술의 혼합, 그래서 어둠의 생물임에도 불구하고 땅 위로 올라와 우리를 공격할 수 있는 거에요. 효과도 무섭지만 지탱하는 사람의 기력은 더 치명적으로 소모되죠. 두고 봐요, 곧 제 몸도 가누지 못하게 될 테니. 그렇게 되면 내가 한 방에 날려 버릴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주세요!" "하! 역시 플리에타의 딸이군!" 툴위그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갑자기 기운을 얻은 듯, 도끼를 크게 휘둘러 기어오는 촉수들 몇 가닥을 한꺼번에 잘라 버렸다. "걱정 말고 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할 준비나 해, 데이미아! 여긴 우리에게 맡기고!" '저녀석들...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어...!' 스트라본도 그들의 계획을 눈치챘다. 얼마 더 버틸 수 없다는 것은 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벌써부터 비틀거리는 그를 레일라가 부축해 주었다. "전하! 그만하십시오. 무리가..." "닥쳐라! 너도 나를 무시하는 거냐! 끝장을 내 주겠어. 페이 데인 에두! 아니인 아르딜! (혼돈의 힘이여! 내 의지에 복종하라!)" 갑자기 촉수들의 움직임이 민첩해졌다. 로이는 다가오는 촉수 하나를 베려고 했으나, 그 촉수는 재빨리 몸을 피했고 로이의 칼은 허공을 갈랐다. 로이는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촉수를 바라보았다. "어어..." 그러나 당황하고 있을 새가 아니었다. 곧바로 날아든 다른 촉수는 로이가 그 접근을 알아챌 새도 없이 그의 배를 강타했다. 로이는 비명과 함께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촉수들이 갑자기 달려들어 그의 몸을 휘감고 갈라진 땅 속으로 끌고들어가려 했다. "으아악! 사람살려!" 로이는 비명을 지르며 정신없이 칼을 휘둘렀으나, 촉수들은 그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해냈다. 소용 없는 공격이라고 판단한 로이는 칼을 땅바 닥에 콱 박았다. 그리고 그의 몸을 잡아당기는 촉수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 그 칼을 꼭 붙들고 놓치 않았다. "이런... 로이!" 갑자기 치밀해진 촉수의 공격에 정신이 없던 랜스와 툴위그가 그제서야 로이를 발견하고는 달려왔다. 그들은 로이를 잡아 끄는 촉수들을 향해 사정없이 도끼와 칼을 휘둘렀다. 한참 공격한 끝에 촉수들은 잘려진 단면에서 검은 짓물을 뚝뚝 흘리며 물러갔다. 그러나 숨을 돌릴 틈은 없었다. "이봐! 여기 와서 좀 도와줘! 다 가버리면 난 어쩌란 거야!" 이번엔 켈리였다. 그들이 로이에게 정신을 빼앗긴 사이, 켈리가 데이미아와 데이슨을 촉수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세 촉수가 그녀의 다리를 휘감고 있었고, 펠히스가 그것들을 마구 이빨로 물어뜯고 있었다. 툴위그와 로이, 랜스는 서둘러 그녀에게 달려 갔다. '안되겠어. 시간이 없어! 이만하면 스트라본도 기운이 많이 빠졌겠지!' 데이미아는 이윽고 주문을 읊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알려준, 흑마술을 쓰고 있는 마법사에게는 치명적이 될 수 있는 주문이었다. "틸리엔 데인 에누인, 티리아디 이디나드! 니드 데인 아스틸라, 헤인헨펠 브레이나드! 프라딘 퀘이드 페이! (태양처럼 밝은 에누인의 지혜여! 만물의 길을 지키는 아스틸라의 빛이여! 온전치 못한 힘을 벌하소서!)" 촉수의 움직임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스트라본이 그녀의 주문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때가 늦은 후였다. 어떠한 눈에 보이는 공격도 그에게 날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벌써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 애송이에게 지다니...!" 검붉은 피가 정신없이 그의 입에서 쏟아지며 말을 막았다. 촉수들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땅도 언제 갈라졌나 싶게 그대로였다. 단상 위에서 기세 등등하게 주문을 읊던 스트라본은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기회야. 모두 도망쳐요...!" 데이미아는 창백한 얼굴로 소리쳤다. 더이상 생각할 새가 없었다. 켈리와 툴위그가 먼저 앞으로 나가 미처 준비를 못한 병사들을 마구 공격 하며 길을 텄다. 그리고 그 뒤를, 데이미아를 부축한 로이와 데이슨을 들쳐 멘 랜스가 서둘러 따랐다. "스트라본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레일라에게는 스트라본이 갑자기 마법을 쓰다가 쓰러진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몸에 있는 피를 다 쏟아내려는 듯, 계속 피를 토해내는 스트라본보다 더 창백해져서 그를 부축하며 소리쳤다. 랜스 일행의 도망 다위에는 신경쓸 새도 없었다. 곧 사일러스도 허둥지둥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스트라본이 왜...?" 스트라본은 아직 정신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입을 막고 쏟아지는 피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무언가 중얼거렸다. 사일러스가 그를 안아 일으키며 말했다. "말하지 마라, 스트라본! 어서 어의(御醫)를 부르지 않고 뭣들 하는 거냐!" 그러나 스트라본은 사일러스의 말을 듣지 않은 채, 남은 힘을 다해 말을 꺼냈다. "레일라...!" "예! 전하!" "...놈들을... 잡아...!" 레일라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으로 정신을 잃어 가는 스트라본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일은 단 하나였다. 스트라본의 명령을 따르는 것. 그녀는 곧 굳은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예, 전하, 반드시!"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상을 뛰어내려 자신의 말을 탔다. 이미 로이 일행은 준비해 두었던 말을 타고, 형장을 빠져나가 도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는 큰 소리로 소리치며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림자 기사대! 나를 따르라! 도망자들을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두 처단하도록!" 그리고는 연이어 말에 박차를 가하며 형장을 빠져나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이어서 검은 갑옷을 입은 다른 기사들이, 그녀의 뒤를 따라 말을 달렸다. --------------------------------------------------------------------- 사일러스는 하릴없이 스트라본의 방 앞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복도의 길고 커다란 창으로 어둠이 찾아드는 붉은 하늘이 보였다. 태양이 다시 드라크노움 저편으로 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스트라본의 치유를 맡고 있는 어의(御醫)와 치유술사들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사일러스 전하..." 레일라였다. 그녀는 반나절동안 계속 랜스 일행을 찾기 위해 돌아 다니다가, 이제서야 도착한 듯, 갑옷도 벗지 않고 있었다. "아, 레일라... 그들은 잡았나?" "죄송합니다. 아직... 면목없사옵니다." 레일라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그는 그 소식에 기뻐해야 할지 섭섭해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만약 잡힌다면, 분명 랜스와 그 동료들은 스트라본에게 해를 끼친 죄로 사형에 처해지고도 남을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 '맙소사, 사일러스... 너는 아트웰을 위해서 뭐든지 할 것이라고 맹세해 놓고서는... 스트라본이 저렇게 되었는데도 아직도 랜스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러나 랜스는 분명, 그를 공격하려는 그 여자의 칼날을 막아 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친구인 그가 기사도 아닌 자에게 개죽음을 당하게 놓아 둘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가 친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적...? "전하...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스트라본 전하는... 보기보다 강한 분이십니다." 레일라는 마치 자신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사일러스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레일라... 내가 없는 동안 자네가 스트라본의 창과 방패가 되어 주었다고 하더군. 고맙게 생각하고 있네..." "처...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언제나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레일라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사일러스는 그녀의 반응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고작 반 년인데... 스트라본은 많이 변했더군." "송구스러운 밀씀이오나 사일러스 전하의 부재가 스트라본 전하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준 것 같습니다. 이제 아트웰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레일라의 목소리는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사일러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강해졌다고..." 사실 스트라본은 점점 강해졌다. 그의 마력, 그리고 그의 마음은 마치 몸의 허약함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강해졌다. 그가 없는 반 년 사이에 스트라본은 그가 갇혀 있던 저주를 깰 수 있을 만큼 강해졌고, 그리고... 데이슨을 잡아 두고 랜스를 유인할 수 있을 만큼 용의주도해졌다. 그의 마음은 감정을 저편에 가두어 둔 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이 어렸을 때부터 '데이슨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르던 데이슨을 마법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진 고문을 가할 수 있을 만큼 딱딱하고 강해졌다. 사일러스가 오르크들의 포로가 되기 전에는, 스트라본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아니, 적어도 그런 면을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계속) "스트라본이... 내가 없는 동안 많이 힘들었나 보군." 사일러스는 빙빙 돌려서 말했다. 그러나 레일라는 그의 의도를 알아챘다. "...그 분의 변화를 눈치채셨군요." "그 애를 탓하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데이슨을 그렇게 다룬다는 것은... 그는 랜스의 친구일 뿐 아니라 나와 스트라본과도 좋은 추억을 나눈 사람이야." "...그러나 지금은 클레이브의 졸개일 뿐입니다." 레일라의 대답에는 왠지 자신이 없었다. 사일러스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바 보았다. "자네도 스트라본의 성격이 변해 간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지. 자네야말로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 온 사람이니까... 그게...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흑마술의 영향이란 건가?" "..." "자네도 알고 있겠지. 스트라본은... 흑마술에 손을 댄 5년 전부터, 우리가 아는 그 스트라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뇨! 스트라본 전하는 언제까지나 스트라본 전하입니다." 갑자기 레일라는 작은 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일러스의 시선을 피하던 그녀의 녹색 눈은 이제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전하, 그러나 스트라본 전하를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전하가 안 계시는 동안 아트웰을 지켜 오신 분입니다. 클레이브의 잔꾀에 아트웰의 저항군이 무너지지 않도록 온 힘을 쏟으신 분 입니다. 그 분이 하는 일은 뭐든지 아트웰을 위해 하시는 일입니다!" 레일라는 당당히, 마치 아랫사람을 꾸중하듯이 거침없는 태도로 말했다. 사일러스는 처음에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네, 레일라, 내 생각이 짧았어. 저 애는 날 대신해서 싸우다 저렇게 되었는데 이렇게 서서 험담이나 하려고 했다니... 나 자신이 부끄럽군." "죄송합니다, 전하." "아냐, 아냐. 나는 자네같은 기사가 그 애의 곁에 있어서 무척이나 기쁘다네. 앞으로도 그 애의 검과 방패가 되어 줄 수 있겠지? 그 애가 어떤 길로 가든지..." "저는 오직 그러기 위해서 삽니다, 전하." "...고맙네..." 사일러스는 미소를 지었다. 창 밖이 완전히 어둠으로 덮이고 나서야, 스트라본의 방에서는 하얀 수염의 치유술사가 지친 표정으로 제자들을 이끌고 나왔다. 레일라는 물론 사일러스도 그 앞에서는 예를 갖추어 절했다. 사일러스가 뭐라고 묻기도 전에, 치유술사는 세월의 지혜가 깃든 음성으로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안심하십시오, 전하. 스트라본 전하의 생명에는 아무런 위험이 없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사일러스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러나 치유술사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런데... 저 분께 이런 공격을 한 마법사가 대체 누굽니까?" "예? 마력을 너무 소모해서 쓰러진 것이 아니던가요?" 사일러스는 의아해져서 물었다. 놀라기는 레일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런 공격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스트라본이 주문을 읊다가 쓰러졌다는 것 밖에는... 치유술사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물론 상태가 저렇게까지 악화된 것은 마력의 소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굉장히 심한 타격을 입으셨습니다. 폐와 심장이 거의 다 상할 정도로... 다행히 이제는 회복되셨습니다만." "그럼 누군가가 주문을 걸었다는 건가요?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게?" 사일러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치유술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마법은 백 년이 넘는 제 생애동안 딱 한 번 보았습니다. 흑마술사에게만 통하는 빛의 마법, 지혜의 신 에누인의 힘을 빌린 마법... 고대어로 된 주술이지만 신들이 가르쳐 준 마법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고, 아무나 걸 수 있는 주술도 아니지요. 제가 아는 한, 그 마법을 쓴 유일한 마법사는... 바로 라스헨 에이니드, 숲의 마법사라 불리는 플리에타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죽었다던데...?" "저도 어떻게 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치유술사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일러스가 더 질문을 하려는 순간, 스트라본의 방에서 그를 지키고 있던 한 젊은 치유술사가 나왔다. 그는 사일러스를 보더니, 지체할 새가 없다는 듯 말했다. "사일러스 전하, 스트라본 전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레일라 경도요." "...저도요?" 레일라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반문했다. 그러나 사일러스가 조용히 그녀에게 명령했다. "가 보자, 레일라. 스트라본이 무슨 할 말이 있나 보지." 어두운 방 안에서 스트라본은 힘없이 팔을 늘어뜨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피를 토해 창백한 얼굴이 마치 유령 같았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스트라본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낯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감고 자는 듯했으나, 사일러스와 레일라가 다가가자 어떻게 알았는지 금방 눈을 뜨고 그들을 응시했다. "...내가 또 일을 망쳤어." 가 그의 첫 마디였다. 사일러스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스트라본. 네가 우리를 구한 거다. 몸은 좀 어때?" "좀 어떠냐고? 언제나 이렇지 뭐." 스트라본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자기 자신을 비웃는 듯이. 그리고 사일러스의 뒤, 어둠 속에 서 있는 레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잡았나?" "...면목 없습니다, 전하." 레일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그리 실망하는 기색도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 결코 우습게 볼 놈들이 아니야. 어쩔 수 없이 왕의 군대와의 정면 충돌을 대비해야겠군..." "그 일이라면 걱정 말아라, 스트라본." 하고 사일러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간신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있지 않으냐? 에스테이아의 군대 따위, 전멸을 시켜 주겠다. 그러니 좀 눈을 붙이고 쉬어라. 네 곁에는 이제 내가 있다. 더이상 너 혼자 아클레어와 클레이브를 상대로 싸울 필요가 없어." 스트라본은 그제서야 미소를 지었다.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맑은 미소였다. 그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형만 믿겠어." "그래야지..." 사일러스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레일라도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방을 나서기 직전, 스트라본은 다시 그녀를 불러 세웠다. "레일라, 넌 잠깐 기다려라." "예, 전하?" "나... 데이슨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스트라본의 얼굴은 창백했으나 자신에 찬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레일라는 신분도 잊은 채 나무라듯 말했다. "전하, 하지만 그 몸으로 마법을...?" "별로 어려운 것 아니니까 괜찮아. 그들은... 벨리노어의 요새에 있다. 남쪽의 동굴에... 날 대신해서 모두 죽여 주겠지?" "전하...!" 레일라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다가 되물었다. "랜스 경 뿐만이 아니라... 모두 말입니까?" "그래, 모두. 그림자 기사단의 최정예 기사들을 동원해서 한 놈도 남김 없이 해치워라." "그러나 이 중엔 어린아이도 있고, 우리 인간들의 전쟁과는 상관 없는 난쟁이와 요정도 있는데..." "나도 그들은 살려주려고 했지만, 그들까지 데이슨을 구하러 온 걸 보니 한통속도 보통 한통속이 아냐. 그리고 이미 클레이브가 너무 의심을 하고 있으니, 한 놈이라도 입을 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레일라는 대답하지 못한 채 망설였다. 스트라본의 말이라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복종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아이와 요정과 난쟁이까지 죽이라니...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챈 듯, 스트라본은 더욱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손수 해치우고 싶다만, 날 봐라, 레일라. 부축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이야. 레일라, 넌 내 칼이고 방패라고 했었지... 나 대신 내가 할 일을 해 다오. 네가 아니면 이런 일을 밑고 맡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네가 맡아 준다면, 레일라, 마음 놓고 편히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이윽고 레일라는 마음을 정한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전하. 제가 모두 처리하겠습니다. 한 놈도 빠짐 없이!" --------------------------------------------------------------------- "...정말 놈들이 여기까지 못 쫓아올까요?" 로이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툴위그는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길 바래야지. 놈들이 우리가 설마 벨리노어의 요새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 같기는 하다만... 쫓아온다 해도 켈리가 저렇게 눈에 불을 키고 지키고 있으니, 금방 도망칠 수 있을거다. 너무 걱정 마라." 그러나 로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망토로 몸을 덮힌 채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이슨을 바라보았다. '도망친다 해도 더이상 움직이는 건 저 아저씨에게 위험할 텐데...' 그들은 지금 벨리노어의 요새, 성 뒷편의 인공동굴에 차려닌 방 안에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이런 비상 동굴을 택한 것은, 눈에 띄지도 않고 도망가기에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 동굴을 찾아낸 툴위그의 설명에 따르면 밖으로 통하는 길만도 서른 아홉개였다. 그리고 방 안은 여느 성 못지않게 편리하게 차려져 있었다. 비록 침대는 다 삭아서 쓸 수 없게 되고, 천이란 천은 이불부터 베개까지 다 누더기가 되어 있긴 했지만, 난로 하나는 쓸만했다. 툴위그는 난로에서 방금 로이가 사냥해 온 토끼를 끓이고 있었다. 랜스는 아까부터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데이슨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데이미아는 로이의 망토까지 덮어쓰고는 쿨쿨 자고 있었다. 스트라본을 쓰러뜨리는 데만도 엄청난 마력을 썼는데 방금 데이슨에게 치유술까지 썼으니, 어지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켈리와 펠히스만이 망을 보러 밖에 나가고 없었다. "랜스, 자네도 눈좀 붙이지 그래? 그런다고 다친 사람 다 났나, 원." 보다못한 툴위그가 말했다. 그러나 랜스는 보일듯 말듯 그에게 미소를 짓고는, 다시 데이슨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데이미아의 치유술과 툴위그의 약초 덕분에 그의 얼굴에는 조금 혈색이 돌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상처와 출혈이 심한 탓에 그들도 확실한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스트라본이 이런 짓까지 하다니... 아니, 사일러스와는 무관한 일일까? 이젠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랜스는 허탈하게 한숨을 쉬었다. 사일러스는 분명 그와 칼을 맞대고 맹세했다. 아클레어 폐하의 최고의 기사가 되자고. 그리고 어느 오르크도 어느 드래크로니안도, 이 레젠디아 대륙에 발붙이지 멋하게 하자고. 그러나 어디서부터가 거짓말이고 어디서부터가 정말이었던가. 사일러스는 언제부터 랜스와 클레이브의 대화에 거짓 맞장구를 쳐 주었던가. 저 순진한 표정의 스트라본은 언제부터 그 뒤에 표독스런 미소를 키워 왔던가... "...나가서 켈리를 보고 오겠어요." 랜스는 가만히 있어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말했다. 그리고는 툴위그가 뭐라고 대답할 새도 없이 동굴 밖으로 나갔다. 켈리는 바위 위에 앉은 채, 펠히스의 털을 쓰다듬으며 노래를 흥얼 거리고 있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정확하지는 않아도 아마 고대어인 듯 했다. 그녀의 노래는 이상하고 낯선, 그러나 묘한 매력이 있는 어조로 랜스의 귀에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휘날리는 금발과 똑바로 선 콧날, 그리고 새파란 눈과 붉은 입술... 갑자기 그녀는 랜스와 관계가 없는 먼 종족처럼 느껴졌다. '...아마 그녀의 먼 조상 중 누군가가, 요정의 피를 이어받았는지도 모르지...' "무슨 노래야, 켈리?" 하고 랜스는 물었다. 켈리는 깜짝 놀란 듯 노래를 그쳤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버무렸다. "미안... 난 노래 잘 못해." "..." "아까는... 미안했어." 난데없이 켈리가 사과했다. 랜스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물었다. "아니, 뭘?" "네 친구... 사일러스 왕자말야. 죽이려고 했던 거... 그것도 마취시킨 다음에." "네가 옳은지도 모르지. 생각해 봤는데... 그는 아무래도 더이상 내 친구가 아닌 것 같더군..." 어두운 밤하늘에 랜스의 웃음소리가 공허하게 스러져갔다. 켈리는 조용히, 그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중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 어조는 어쩐지 로센 라스에서 세렉과 아렌데일과 대화할 때의 그녀를 연상시켰다. "혼란해 보이는구나, 랜스... 전쟁이란 다 그런거야." "하지만 지금 레젠디아의 인간들은 전쟁을 하고 있지 않아... 너도 알잖아, 인간들은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과 싸우고 있어." "아냐, 랜스. 인간들은 항상 싸우고 있어. 에스테이아가 통일을 했지만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보이게 싸우냐, 안 보이게 싸우냐의 차이지. 그리고 이제 곧... 보이게 싸우게 될 거야." 켈리의 말투는 이상할 정도로 단호했다. (계속) 랜스는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의 시선을 느꼈는지, 켈리는 갑자기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하하하... 나도 들은 소리일 뿐이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그보다 앞일을 생각해야지! 그 데이슨인가... 그 아저씨는 어떠냐? 하루라도 빨리 여길 빠져나가야 할텐데... 언제쯤이면 걸을 수 있대?" "걷기는 커녕 아직 정신도 못 차린 상태인걸..." 하고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켈리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문제인데... 내 생각엔 스트라본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아. 물론 데이미아가 혼을 내 줬으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지만..." "아직 정신을 잃고 있을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 켈리는 어깨를 힘없이 추스리며 펠히스의 털을 긁적였다. 펠히스는 얌전히 그녀의 무릎 위에 머리를 얹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마치 경계하는 듯이 광채를 발하며 띄어져 있었고, 귀도 바짝 세워져 있었다. "랜스! 켈리! 들어와서 식사해요! 펠히스도!" 동굴 안에서 로이가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켈리는 미소를 지으며 펠히스와 함께 일어났다. "그럼 먹으러 가 볼까... 잠시 쉬어도 괜찮겠지." 랜스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라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들은 항상 싸우고 있어... 에스테이아가 통일을 했지만 그 사실 에는 변함이 없어...' 그녀의 말이 그의 귓전에 울리고 있었다. '그럼 인간에게 평화는 없단 말인가... 인간족이 영원히 하나가 되는 세상이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인정하고 싶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은 차가운 무게로 랜스의 가슴 깊숙히 내려앉았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적은 오르크들과 드래크로니안과 같은 마족들 뿐이라고 믿었었고, 또 그가 살의를 품어 왔던 존재는 단 한 명, 하르크자엘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상대로 싸우는 인간들 이란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스트라본은 왕을 배반했고, 사일러스조차 랜스를 죽이려 했다. 그들보다는 비록 다른 종족이지만, 차라리 데이미아나 툴위그가 더 믿을만 하지 않은가. 결국 인간이란 다른 종족들 보다도 믿지 못할 존재란 말인가... "잠깐! 랜스! 무슨 소리 듣지 못했어?" 갑자기 켈리가 바짝 긴장하며 속삭였다. 랜스는 놀라서 움직임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그의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주위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은 느낄 수 있었다. 교묘하게 숨긴 살기(殺氣), 분명 한참 전부터 누군가가 그들 주위에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이 살기를 숨기고, 슬금슬금 다가오면서... 랜스는 칼을 빼어들었다. "켈리, 어서 가서 모두 피하라고 해! 내가 여길 지키고 있을께!" "알았어!" 켈리는 급한 걸음으로 달려 굴 속으로 들어갔다. 로이와 방금 잠에서 깬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가 토끼요리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있다가, 그녀의 소란스런 등장에 모두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어, 켈리, 너 먹는 거 좋아하는 건 알지만 좀 심한 거 아니냐? 랜스는 어디에 버리고 왔어?" 툴위그가 웃으며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켈리의 작지만 날카로운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농담 할 시간 없어요, 툴위그! 적이야! 어서 여길 바져나가야 해요!" "그... 그럼 저 요리는...?" 로이가 서운한 표정으로 김이 모란모락 나는 냄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나 켈리는 그를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그런 소리 할 때가 아냐...!" 켈리의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았다. 갑자기 동굴 밖에서 칼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낯선 남자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켈리의 곁에 있던 펠히스가 밖을 노려보며 컹컹 짖어댔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두말 할 필요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제길, 여기까지 기어이 찾아왔군...!" 툴위그가 중얼거리며, 난처하다는 듯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누위 있는 데이슨을 바라보았다. 켈리는 그를 흘끗 보더니 다급하게 속삭였다. "이렇게 해요, 전 랜스랑 저기에 나가서 시간을 끌어 볼 테니까, 툴위그는 로이와 데이미아와 함께, 저기 쓰러져 있는 양반을 데리고 도망 치는 거에요. 어때요?" "...좋아. 그럼, 어서 헤어지도록 하지!" "그래요. 아트웰을 벗어나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만나요!" "그래!" 툴위그는 얼른 데이슨을 들쳐업었다. 켈리가 막 나가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로이도 소리쳤다. "자... 잠깐! 저도 싸울래요!" 켈리와 툴위그, 그리고 데이미아는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툴위그가 꾸중하듯 대답했다. "안 돼, 로이! 넌 방해만 되니 이리 와!" "그... 그래도 켈리한테 배운 것도 있고, 나도 싸울 수 있다고요!" 로이는 기가 죽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자신의 실력이 켈리나 랜스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로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도망만 다니면서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싸우고 싶지만... "뭐, 좋아, 그럼 어서 따라와!" 의외로 켈리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툴위그는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켈리의 당당한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데이 미아도 한 마디 했다. "그럼 저도 가요!" "안 돼, 데이미아. 데이슨은 중상을 입었으니 네 치유술이 필요해. 너도 잘 알잖아? 걱정 마, 곧 만나게 될거야!" 켈리는 이렇게 말하고는 동굴 밖으로 달려나갔다. 로이도 데이미아 에게 자신있게 소리치면서, 켈리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걱정 마, 데이미아! 나중에 보자!" 데이미아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툴위그도 벌써 데이슨을 들쳐맨 채 반대쪽 통로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데이미아는 선택이고 뭐고 할 새도 없이, 얼른 데이슨의 뒤를 쫓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흥! 사냥개마냥 냄새는 잘 맡는군!" 켈리는 동굴 안으로 들어오려는 낯선 사내를 보더니, 인정사정 없이 칼을 휘둘러 목을 싹독 베어 버렸다. 몰래 잠입하려 했는지 가벼운 갑옷에 투구조차 쓰고 있지 ㅇ낳던 그는, 그대로 목이 잘려져 반격 한 번 못해본 채 쓰러지고 말았다. "랜스! 괜찮냐?" 켈리는 동굴 밖으로 훌적 뛰어나가며 소리쳤다. 매침 랜스는 검은 갑옷을 입은 두 기사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펠히스가 그 모습을 보고서, 한 기사의 망토를 덥석 물어 확 끌어당겼다. 의외의 공격에 그 기사는 뒤로 나자빠졌고, 로이가 얼른 커다란 돌을 들어 그의 투구쓴 머리 위를 쾅 내리쳤다. 투구가 찌그러질 정도의 공격에 그 기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리고 랜스는 하나 남은 기사를 수월하게 해치워 버렸다. "데이슨은?" 달려나온 켈리를 보고, 랜스가 다급하게 물었다. 켈리는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서도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 툴위그랑 데이미아가 데리고 갔으니까." "다행이군...!" 랜스도 미소를 보이며, 이마를 닦았다. 로이는 그의 이마에 작은 상처가 나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갑자기 몸이 굳어졌다. '히익... 랜스 만한 기사가 상처를 입을 정도라면... 난 뼈도 못 추릴 게 번하잖아!'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꽁무니를 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칼을 꽉 쥐고는 어둠 속에 서 있는 적들을 노려보았다. 횃불에 비친 그들의 숫자는 기껏해야 열댓 명 정도였다. 그 중 무거운 갑옷을 걸친 기사는 반 정도밖에 안 되었고, 나머지는 궁수들이나 가벼운 옷차림의 암살자들인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같이 차려입은 검은 망토와 얼굴을 감싼 두건과 투구,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살기는 로이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했다. '이거... 정말 방해만 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그들은 섣불리 달려들려고 하지 않았다. 네 명의 기사가 랜스와 켈리, 그리고 로이에게 쓰러지는 것을 본 후로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그들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마치 그들이 공격해 올 것을 기다리듯이. 그러나 랜스와 켈리가 먼저 적진을 뚫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시간을 끌자고... 툴위그가 데이슨을 탈출시키면 우리야 언제 라도 도망칠 수 있으니 말야." 켈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전혀 긴장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이란 것이 그렇게 켈리의 뜻대로만 되지는 않았다. "켈리! 랜스!" 동굴 안에서 툴위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이내 툴위그가 자신 보다 훨씬 키가 더 큰 데이슨을 들쳐멘 채 동굴 입구로 달려나왔다. 그의 뒤에는 데이미아가 지팡이를 든 채 따라오고 있었다. 켈리는 당황한 나머지 마구 말을 더듬으며 소리쳤다. "에? 투...툴위그? 왜 이리로 나온 거에요? 다른 쪽 통로로 나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통로가 벌써 봉쇄당했어!" 툴위그의 대답이었다. "말이 돼요? 뭐 서른 몇개나 되는 통로가 있다면서...!" "그 통로들도 결국 하나의 길에서 나뉘어지는 거란 말이야! 갈림길로 가기도 전에 병사들이 다 막아서 있으니 저쪽 길은 다 틀렸어! 도망가기는 커녕 저쪽에서도 병사들이 떼지어 몰려오고 있는 판이란 말야!" "아아... 일이 정말 이상하게 됐네..." 켈리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나 랜스는 이미 예상한 일인 듯,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래, 역시... 우리가 쉽게 도망치게 놔두지 않을 줄 알았지." "그래... 할 수 없지! 로이! 데이미아! 너희들은 데이슨을 좀 지켜 줘! 우리는 저들을 격파해야 될 것 같으니까!" 툴위그는 땅에 데이슨을 내려놓으며, 등에 멘 도끼를 빼어들었다. 켈리가 능숙하게 그에게 다가와, 등에 등을 마주한 채 섰다. 그들은 여유있는 미소까지 띈 채, 툴위그는 동굴의 입구를, 켈리는 동굴 앞의 적들을 마주한 채 무기를 들고 적의 공격을 기다렸다. 로이와 데이미아도 데이슨의 주위로 달려갔다. "이조넬 데란탈! 이난 데인 헤이엔! 플리인 아스! (대지의 여신 이조넬! 만물의 어머니시여! 우리를 보호하소서!)" 데이미아는 주문을 읊으며 지팡이를 높이 들어올렸다. 평범한 나무 처럼 보이던 지팡이에서 희미한 녹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며,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데이슨을 감싸는 커다란 반구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방어막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검은 기사들이 공격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랜스의 칼이 그들을 막았다. "컥!" 맨 먼저 달려오던 기사가 허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랜스의 칼날이 그의 갑옷조차 뚫고 들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랜스가 그에게 더이상 공격을 가하기 전, 다른 기사 둘이 동료를 지키려는 듯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랜스가 그 중 한 명에게 검을 휘둘렀으나, 이번에는 갑옷의 두꺼운 부분에 맞고 커다란 흠집만을 낸 채 튕겨져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른 기사가 창을 크게 휘둘렀다. 휙! 창은 커다란 원호를 그리며, 아슬아슬하게 랜스의 소매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으나, 섬뜻하도록 깨끗이 잘려진 소매는 그 창의 날카로움을 짐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사일러스와 스트라본... 이런 부하들을 비밀리에 양성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에스테이아의 정규 군대가 오르크들과 싸우느라 정신없는 사이에?!' 갑자기 랜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름을 느꼈다. 아클레어 3세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이미 둘째 치고,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이 기승을 부리는 이런 시기에 같은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 이런 병사들을 숨겨 놓은 사일러스를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긴, 스트라본은 오르크와 손을 잡기도 했으니... "더러운 놈들! 다른 기사들이 마족들과 괴물들을 상대로 싸울 때, 너희들은 성 안에 안전하게 틀어박혀서 같은 인간을 죽일 준비나 했단 말이냐? 그러고도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하는가? 덤벼라, 너희 같은 놈들은 같은 인간족으로서 인정할 수 없다!" 갑자기 랜스는 큰 소리로 소리치며 기사들의 무리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의 갑작스런 테도의 변화에, 공격을 예상치 못했던 한 기사가 깊은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나 랜스의 칼날은 쉬지 않고 다른 희생물을 찾아 날뛰었다. 당황한 기사들이, 켈리와 툴위그는 젖혀놓은 채 랜스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쟤... 왜 저러는 거야?" 마침 자신을 공격해 오던 두 기사를 가까스로 쓰러뜨린 켈리가 랜스를 보고는, 기가 막혀서 두 눈이 동그래진 채 중얼거렸다. 동굴 안에서 나오는 기사들을 막고 있던 툴위그도, 그 모습을 보고는 질겁을 했다. "저 녀석이 저렇게 살기를 띄는 건 처음 보는데... 하여튼 얼른 가서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 나겠군!" "내가 가 볼테니 여긴 툴위그가 좀 맡아 줘요!" 랜스는 벌써 기사들에게 앞뒤로 포위당한 채 싸우고 있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칼날이 들어옴에도 불구하고, 그가 휘두르는 칼날은 무뎌질 줄을 모르고 계속 날뛰었다. 적들의 칼과 창이 그의 옷을 ㅉ고, 다리와 팔에 스쳐 지나가 상처를 냈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는 듯 했다. "랜스... 저 바보가! 뒤를 조심해!" 켈리가 얼굴이 새파래져서 외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다섯 개의 화살이 랜스를 향하여 시위를 떠난 후였다. 그 중 한 개는 빗나가고, 두 개는 랜스의 칼에 부러졌으나, 단 하나는 그의 오른팔 깊숙히 박혔다. "윽! 이런..." 랜스는 상을 찡그리며 비틀거렸으나, 칼을 놓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왼손으로 칼을 바꿔 들고, 다시 적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으휴, 정말 어쩌자고 저러는 거야?" 켈리는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툴위그와 함께 궁수들을 막기 위해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검고 두꺼운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그들의 앞을 막아 섰다. "정말... 무식하게 두꺼운 갑옷이군..." 켈리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들의 갑옷은 겉보기에도, 보통 칼은 먹혀들어가지도 않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켈리의 특기는 빠르고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이었지, 완력으로 치자면 보통 검객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런 그녀는 기사들의 허점이나 노리며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는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툴위그와 로이의 다급한 외침이 그녀의 귀를 때렸다. "켈리! 아무래도 나 혼자로는 안 되겠어!" "좀 도와줘요!" (계속) 툴위그는 벌써 로이와 데이미아, 데이슨이 있는 곳까지 밀려나서 싸우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방어 주문을 유지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서 싸울 수 없는 상태였고, 로이는 반 사람 몫도 해낼까 말까였으니 툴위그 혼자 여섯 명의 기사를 상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로이는 한 사람의 기사를 상대로도 아직 안 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 용할 지경이었다. 비록 얼마 안 가 잘 것이라는 것이 너무 뻔한 싸움이긴 했지만. "으으... 이거 정말..." 켈리는 왼손으로도 잘 싸우는 랜스를 흘끗 보고는, 그는 잠시 혼자 버티도록 뇌 두자고 결정했다. 그리고는 재빨리 몸을 돌려 툴위그와 로이에게 달려갔다. "어딜!" 한 기사가 얼른 그녀의 앞을 막고 섰으나, 갑자기 그의 투구 앞으로 회색의 커다란 털덩어리 같은 것이 튀어올라 그를 쓰러뜨렸다. "고마워! 펠히스!" 켈리는 웃으며 소리치고 로이를 공격하고 있는 기사에게 달려가, 채찍을 그의 목을 향해 휘둘렀다. 채찍은 자동적으로 매끈한 투구 위를 미끌어져, 그의 갑옷과 투구 사이의 공간으로 걸려들었다. 그녀가 채찍의 손잡이를 강하게 끌어당기자, 그 기사는 목이 졸려 뒤로 비틀거렸다. 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으나, 거의 쓸 수도 없는 상태였다. "로이!" 하고 켈리가 소리쳤다. 로이는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힘껏 칼을 휘둘렀으나, 그의 갑옷에 튕겨져 나갈 뿐이었다. 또다시 돌을 들어 그의 머리를 향해 던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사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고, 켈리는 자지러지게 웃어댔다. "로이, 넌 참 이상하게 싸우는 법을 배우는구나!" "비... 비웃지 마세요..." "아, 아냐. 잘했어! 하지만... 푸하하하!" 웃음을 참지 못하는 켈리를 보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이봐! 사이좋게 웃지만 말고 날 좀 도와줘!" 그제서야 켈르는 웃음을 멈추고 툴위그에게로 달려갔다. 여섯 명의 기사가 그를 공격하고 있었고, 툴위그는 지치고 속력에 부친 나머지 도끼를 떨어뜨리기 직전이었다. 그를 공격하는 기사들 중에서도 약간 키가 작은, 커다랗고 번쩌거리는 검을 든 기사가 단연 돋보였다. 그를 처치하면 나머지 기사들은 툴위그 혼자서도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로이! 넌 툴위그를 도와!" 켈리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 기사에게 등 뒤에서 덤벼들었다. 로이는 돠ㅣ황하여 소리쳤다. "에? 제가요...? 에라, 모르겠다!" 로이는 그 중 그나마 얇은 갑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기사의 뒤로 갈려가, 몸을 쿵 부딪혔다. 부딪한 어깨가 장난 아니게 아팠지만, 그 기사를 쓰러뜨렸으니 윈하는 바는 달성한 셈이었다. "뭐, 뭐야!" 그 기사는 단번에 일어나 로이를 향해 소리치며, 칼을 번쩍 들어올려 로이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그러나 공격은 몰라도 피하고 도망치는 데에는 자신있는 로이였으므로, 그 정도 공격 즘이야 간단히 피해 버렸다. 화가 난 기사는 다시 그를 공격하려고 했으나, 그 전에 툴위그의 도끼가 그의 등을 내리쳤다. 한편, 켈리는 작은 몸집의 기사의 목을 향해 있는 힘껏 칼을 휘둘 렀다. 그러나 그의 몸에 흠집을 내기는 커녕, 갑자기 뒤를 돌아 반격하는 그의 칼날에, 목 언저리의 머리칼 몇 가닥이 싹둑 베어져 버렸다. 목에서도 작은 상처가 나 피가 흘렀으나, 그런 데에 신경쓸 새가 없었다. 그 기사의 칼이 쉴 틈을 주지 않고 돌진해 왔기 때문이다. 챙강! 켈리의 칼과 그 기사의 칼이 부딛혔다. 순간, 켈리는 움찔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칼이 맞닿은 순간, 그녀의 팔이 짜릿하게 저려 왔기 때문이다. 그 기사의 완력도 대단했지만, 잘멋했다가는 팔이 부러져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녀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게 했다. '이 놈... 결코 깔볼 상대가 아닌데...' 켈리는 난처한 표정으로 데이미아가 방어 주문으로 보호하고 있는, 쓰러진 데이슨을 흘끗 바라보았다. 이런 경우라면 체면불구하고 도망치는 것이 현명했다. 그러나 데이슨이 저렇게 뻗어 있는 상태라면... '하, 좋아! 죽기 아니면 살기다!' 켈리는 날랜 동작으로 그 기사의 목을 향해 칼날을 휘둘렀다. 그는 유연한 동작으로 몸을 숙여, 그 공격을 피했다. 그러나 그는 켈리의 왼손을 잊고 있었다. 그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가속이 붙은 채찍이 강한 힘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붙였던 것이다. 갑옷이 찌그러질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죽어랏!" 켈리는 그가 미처 일어날 새도 없이, 칼을 치켜세운 채 그의 가슴 위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켈리의 칼이 그의 갑옷과 투구 사이로 드러난 눈을 찌르려는 순간, 그의 손이 강하게 켈리를 후려쳤다. 두터운 갑옷으로 덮어 씌운 팔의 공격은 놀랄 만큼 아팠다. "으악!" 켈리는 맞은 옆구리를 움켜 쥐며 땅 위로 한 바퀴 굴렀으나, 금방 다시 균형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나 그 기사는 그녀가 공격을 재개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칼이 곧 켈리의 몸을 향해 내리쳐졌고, 켈리는 반사적으로 칼을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챙강!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녀의 칼이 날아가 열 발짝쯤 떨어진 땅 위에 박혔다. 켈리는 재빨리 그 기사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으나, 같은 수에 두 번 넘어갈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켈리가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왼손을 들어 그녀의 채찍을 두꺼운 갑옷 위에 감더니, 켈리가 미처 대처할 새도 없이 낚아 채서 그것을 빼앗아 버렸다. 그와 동시에, 시퍼렇고 커다란 그의 칼날이 켈리를 향해 날아왔다. "윽!" 펠히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켈리는 당장 두동강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간만의 차이로, 펠히스가 그 기사의 머리 부분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뛰어들었다. 그는 펠히스를 뿌리쳐 내느라 몸을 돌렸고, 그의 칼날은 그녀의 왼쪽 어깨를 스쳤을 뿐이었다. "이 짐승이...!" 그 기사는 팔로 펠히스를 힘차게 밀어 켈리의 ㅋ으로 떨어뜨렸다. 그, 아니 그녀의 외침은 의외로 여자의 목소리, 그것도 켈리의 또래쯤 되는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펠히스와 켈리를 향해 칼을 들려는 순간, 다른 방해자가 나타났다. "이 녀석! 네 상대는 나다!" 이제야 다른 기사들을 간신히 물리친 툴위그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켈리가 처한 상황을 보고는 그 검은 기사에게 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든 것이었다. 그러나 툴위그 역시 그를 단숨에 해치울 만한 실력은 되지 못했다. 툴위그의 도끼는 그 기사의 투구 옆을 비껴 갔을 뿐이었고, 오히려 그녀의 칼날이 툴위그의 오른쪽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툴위그는 다시 한 번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미 이길 가망은 없었다. 그 기사는 이미 다른 기사와의 싸움으로 지쳐 있는 툴위그의 공격 따위는 가볍게 피해냈다. 그리고 툴위그가 미처 방어할 준비를 하기도 전에, 칼을 휘둘렀다. "큭...!" 툴위그는 도끼로 그 칼날을 간신히 막아냈으나, 곧이어 날아온 그 기사의 발길질은 피하지 못했다. 그는 정통으로 배를 걷어채이고, 저만치 나가떨어졌다. "죽어랏!" 그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칼을 치켜들고 툴위그의 앞으로 달려들 대였다. 갑자기 작은 물체가 그녀의 옆쪽에서 손살같이 돌진했다. "안돼!" 힘은 약했으나, 의외의 공격에 그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대여섯 살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년이 칼을 들고 그녀의 앞을 막아서 있었다. "받아랏!" 상대가 너무 어린 데 대해 그녀가 당황하는 동안, 그는 재빨리 칼을 그녀의 배를 향해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의 갑옷이 그 공격을 거뜬히 막아 주었고, 오히려 공격한 그의 손만 저려 올 뿐이었다. "로이...!" 켈리와 툴위그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검은 갑옷의 여기사는 당황해서 굳어버린 로이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아야...!" 로이는 울상을 지었으나 칼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투구를 벗고 정면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짧게 깍은 붉은 머리, 그리고 강렬히 빛나는 녹색의 눈동자. "아, 당신은...!" "그래, 꼬마. 우린 구면이지?" 레일라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로이에게 말했다. 막상 마음을 먹고 오기는 했지만 이런 어린아이를 죽이라니,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일만은 분명했다. 스트라본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아이까지 죽이라고 했을까... "저기... 설마 우리를 다시 오르크들에게 넘기려는 건 아니실테죠?" 로이가 제법 귀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물었다. 그러나 레일라의 얼굴은 더욱 딱딱해질 뿐이었다. 침묵을 지키는 그녀에게, 남은 병사들이 켈리와 툴위그를 끌고왔다. 데이미아도 함께였다. 방어 주문의 효력은 한계가 있었고, 결국 데이슨과 함께 잡혀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레일라 단장님!" 그녀와 똑같이 검은 갑옷에 검은 투구로 차린 한 기사가 물었다. 그 물음에 켈리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당신... 레일라 갤러허드? 혹시 레오스 갤러허드의 손녀...?" "...그렇다. 내가 그림자 기사단의 단장 레일라다."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켈리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럼 그림자 기사단의 후손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소문은 정말 이었는가! 에스테이아도 망할 때가 다 되었군! 그런데 긍지 높은 그림자 기사단이 어째서 우리 같이 별볼일 없는 도망자들이나 쫓는 거죠?" "..." 레일라는 인상을 찌푸린 채 켈리의 시선을 피했다. 갑자기 켈리는 불길한 느낌에 웃음을 멈추었다. 그림자 기사단은 사실 괴거에는 명예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트웰은 에스테이아의 속국이고, 그들의 자존심은 짓밟혀진 상태. 혹시... "레일라 단장님! 드디어 잡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이 랜스를 끌고 오는 엇이 보였다. 켈리도 툴위그도 가벼운 부상을 입고 있기는 했으나 랜스는 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참담한 꼴이었다. 그의 오른쪽 윗팔에는 화살이 박힌 채 피가 흐르고 있었고, 왼손도 깊게 베인 것 같았다. 목과 볼, 그리고 어깨와 가슴에도 작은 상처들이 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레일라를 보더니 가장 기세 좋게 호령했다. "에스테이아의 군대는 오르크들과 드래크로니안의 손에서 너희들을 지켜주는데, 너희들은 그 등 뒤에서 반역이나 꾀하며 인간 사냥이나 하고 있군! 기사로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사일러스와 스트라본, 두 놈 다 나를 잘도 실망시키는군!" "입을 조심해라!" 레일라는 스트라본의 이름이 언급되자 얼굴을 확 찌푸리더니, 조용 하지만 놀랄 만큼 엄한 말투로 랜스에게 명령했다. 아무 상관이 없는 로이 조차도 뜨끔할 만큼 엄한 말투였다. 그러나 랜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틀린 말 한 것이 있나? 벨리노어는 패배를 시인할 줄 아는 훌륭한 인물이었는데, 그 자손들은 이 모양이군! 그래, 그 악귀같은 흑마술사 왕자가 뭐라고 하던가? 우리를 죽이라고?" "이 자식이...!" 레일라는 랜스를 한 대 치려는 듯,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아무리 랜스라도 꼼짝ㅇ이 잡힌 상태에서 그 철갑 장갑을 낀 주먹을 맞았더라면 턱쯤은 넉넉히 부러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레일라는 지금까지 포로를 때려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 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얼른 다시 손을 내렸다. '하긴, 이제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나는 이제 어린애와 요정, 난쟁이까지 죽이는, 기사라고 불릴 수도 없는 자가 될텐데...' "스트라본 왕자가 우리 모두를 죽이라고 하던가요?" 켈리가 침착하게 물었다. 레일라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갤,ㄹ 끄덕였다. "미안하게 됐소. 난 명령에 복종하는 수밖에..." "저와 랜스, 그리고 데이슨은 죽인다 해도 할 말이 없겠지요. 하지만 로이는 아직 어리고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인간족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 까지도...?" "예외는 없소." "맙소사... 그 순진해 보이던 스트라본이?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오는군!" 랜스가 자지러지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일라는 점점 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순진한 스트라본. 그녀도 그렇게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단지 나라에 모든 것을 바친 순수하고 희생적인 사람일 뿐이라고. 그리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그리고 그 결과는... 도대체 언제부터 스트라본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 그렇게 여려 보이는 사람이... 믿을 수 없어요!" 갑자기 로이가 소리쳤다. 레일라는 놀라서 그를 내려다 보았다. 어느새 그의 표정에는 두려움 따위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모두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로이는 놀랄 만큼 의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를 오르크들에게 안내하면서도 갈등하고 있었어요. 겉으로는 아닌 척 하고 웃고 그랬지만, 내 눈에는 다 보였다고요! 배우라면 지긋지긋하게 보았으니까. 그는 형을 구하기 위해 하는 수 없이 그랬던 것 뿐인데, 당신들은 그의 부하이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나요? 그런데 그가 우리를 죽이라고, 다 죽이라고 명령했다고요?" "너는...!" "로이의 말이 맞아요.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하고 말한 사람은 데이미아였다. 그녀는 놀랄 만큼 의연한 태도로, 레일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더이상 함부로 깔볼 수 있는 어린 소녀 같지 않았다. "나는 마법사라 어려서부터 흑마술의 위험에 대해 들어 왔습니다. 흑마술이 무섭다고 하는 건, 그것의 파괴력이 엄청나기 대문도, 마력의 소모가 많기 때문도 아니에요. 바로 그 마력이 그것을 쓰는 사람을 지배하게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위대한 현자들도 섣불리 흑마술에는 손대지 않는 것입니다. 로이의 말대로, 그는 분명 원래는 좋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백성들이 그를 따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물론 당신들도 포함해서... 그는 분명 좋은 의도로 흑마술에 손을 댔겠죠. 그런 그가 우리를 죽이라고 말했다면, 그리고 우리들을 죽인 다음 언젠가 제정신이 든다면, 분명 뼈저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내 오빠, 제이룬도 그랬으니까... 다른 사람이 그런 길을 걷게 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계속) 레일라는 한동안 말없이 데이미아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내려다 보았다. 누가 보이기에도 고민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다 못한 검은 갑옷의 기사 한 명이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레일라 단장님?" 레일라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어두운 얼굴로 중얼 거리듯 말했다. "네 말을 믿는다, 어린 마법사. 스트라본 전하는 원래 이런 분이 아니셨어... 그러나... 그러나 너희들이 살아 돌아가면 분명 에스테이아 군대에 정보를 흘리겠지.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어. 스트라본 전하께 털끝만치 라도 폐가 되는 일이라면 나는 할 수 없다..." 그녀는 대답을 구하듯이 데이미아와 로이, 켈리, 툴위그, 그리고 랜스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켈리와 툴위그는 그녀의 말의 숨은 뜻을 알아 챘는지, 난처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툴위그가 켈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켈리는 결심을 굳혔는지 레일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에스테이아 군대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 명예를 걸고 맹세하건대, 아무 말도 않겠습니다. 저희 모두." "나도 명예를 걸고 맹세하겠소, 레일라 대장. 나 툴위그 젠 글렌델은 글렌델 가의 이름을 걸고 바위처럼 입을 다물 것을 맹세하니, 제발 이 아이들 만이라도 살려 주시오." "저도... 저도 아무 말 않겠어요. 안 그러면 아스틸라의 번개가 제 심장을 찢어도 좋아요!" 데이미아의 말이었다. 로이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저도... 아무 말 안해요!" 레일라는 어렴풋한 미소를 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이 랜스에게로 미치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다시 딱딱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을 덮었다. "랜스 경, 그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랜스는 고집스레 입을 다문 채 레일라를 노려보았다. 툴위그가 꾸중 하듯 그에게 말했다. "랜스, 자네도 맹세하게. 우리 모두를 죽이고 싶나?" 그러나 랜스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다만 경멸에 찬 눈으로 레알라와 그 부하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레일라는 잠시 기다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안되겠군... 당신들은 역시 랜스 경의 동료고 에스테이아의 졸개일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아닙니다, 랜스 역시 아무 말 하지 않을 겁니다!" 하고 켈리가 날카롭게 외쳤다. 레일라가 비웃음을 띈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 보며 물었다. "흥, 그 말을 어떻게 믿지?" "믿으셔야 할 겁니다. 만약... 만약 그가 입을 열게 된다면, 여기 당신의 손에 볼모로 잡혀 있는 제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켈리...!" 랜스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다른 일행도 소리만 안 질렀다 뿐이지, 눌라서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켈리는 오히려 여유만만 하게 그들에게 미소를 보내고는, 말을 이었다. "열흘, 여기에 열흘만 머무르겠습니다. 그 동안이면 에스테이아 군대를 맞을 준비를 하기에 부족함이 없겠지요? 그 열흘이 지날 동안 아무 조짐이 없으면 저를 풀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기사의 명예를 걸고요. 그러신다면 저 또한 왕의 군대가 아트웰로 진격해 오면 처형당하게 될 위험을 감수하겠습니다." "말도 안 돼...!" 랜스는 켈리를 향해 소리쳤으나, 툴위그가 그런 그를 막았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레일라에게 물었다. "그렇게 약속해 주시겠소, 레일라 단장?" "기사의 명예를 걸고!" 하고 레일라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조금 숙여 켈리에게 경의를 표하기까지 했다. "걱정 마." 하고 켈리는, 랜스를 향해 말했다. "그림자 기사들은 약속을 잘 지키지. 그들은 전쟁 와중에도 칼을 들지 않은 사람들은 약탈하지도 범하지도 않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었어. 난 레일라 단장을 믿을 수 있어." 레일라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감사하군요. 당신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들었지, 모두? 이 분만을 모시고 귀환한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은 옷의 기사들은 데이미아, 로이, 툴위그, 랜스에게 겨누었던 무기들을 모두 치우고, 켈리만을 포위했다. 켈리는 걱정이라고는 전혀 안 하는 듯, 태평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열흘 후에 봐, 모두들! 펠히스, 나 대신 로이를 잘 부탁해! 그리고 랜스, 너 만약 이상한 소리 떠벌이다 내가 죽게 되면 유령이 되어서도 따라 다닐테니 알아서 해!" 기사들은 그녀를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랜스는 멍하니 서서 그들이 간 쪽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먼저 절망적으로 소리친 것은 로이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켈리는! 우리와는 의논도 없이...!" "켈리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 거야." 툴위그는 매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 애라면 자기 행동에 책임쯤은 질 수 있어. 설사 죽게 된다고 해도 남을 원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거다." "...나 때문이로군요." 하고 랜스가 비통하게 말했다. 그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 거리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도저히 맹세할 수가... 그래서 이렇게 되었군요. 켈리는 날 살려준 적도 있는데...!" "그렇게 걱정 말아요. 내 생각에 켈리는 무사할 것 같으니까." 데이미아는 의외로 가벼운 어조롤 말했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레일라와 그 부하들, 명예를 아는 사람들이에요. 켈리도 그걸 충분히 아니까 자신을 맡겼을 거고. 그리고 스트라본도... 정말은 나쁜 사람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 우리들이 약속만 잘 지키는 한, 그녀에게 나쁜 일은 생기지 않을 거에요. 내 말을 믿어요." "...믿는 수 밖에." 툴위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기사들이 땅에 떨구고 간 데이슨을 다시 들쳐업고는, 발을 옮겼다. "뭐 해? 켈리가 저렇게까지 해서 시간을 벌어 주었는데, 어서 여기 아트웰을 빠져나가야지. 그리고 데이슨도 어디 편한 데 가서 쉬게 해야 할 것 같아..." --------------------------------------------------------------------- "레일라 단장님, 스트라본 전하께는 뭐라고 말씀드리실 겁니까?" 검은 갑옷을 입은 기사 중 한 명이 불안한 듯, 레일라 가까이로 말을 몰아 물었다. 레일라는 흘끗 부상당한 부하들을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별 수 있나. 놓쳤다고 하겠어. 저 아가씨는 비밀리에 보호하도록 하고... 원한다면 자네는 사실대로 보고해도 좋아."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기사는 거의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부인했다. "저희는 언제나 레일라 단장님의 명령만을 듣습니다. 레일라 단장님 께서 그들을 놓쳤다고 하시면, 그럼 놓친 겁니다." "...고마워." 하고 레일라는 대답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흘끗 켈리를 바라보았다. 켈리도 마주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 짐작이 옳았군요. 당신들은 신의와 명예로 뭉쳐진 집단,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고맙군요. 그런데 이름이..." "켈레브리스... 다들 켈리라고 부르죠." 켈리의 말투는 마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처럼 스스럼이 없었다. 레일라는 점점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동료들을 위해 스스로 볼모가 되기를 택한 그녀의 용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외에도 그녀는 켈리에게 동지애(同志愛)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그녀가 켈리의 공격을 받으면서부터, 남자의 공격도 거뜬히 받아내던 그녀가 켈리의 채찍에 쓰러졌을 때부터였는지도 몰랐다. 켈리는 그녀와 동류였다.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드라크노움 기슭은 혼합림 위로, 동녘이 밝아 오고 있었다. (제 6장 <친구와 적> 끝. 제 7장 <오랜 평화의 끝>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