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엘미어의 계승자 (The Successor of Elmir) 산더미같이 쌓여진 시체 위로 한 남자가 걸어간다. 고귀한 빛깔, 자색의 눈을 가진, 키가 크고 당당한 군주의 풍모를 갖춘,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이다. 허리께까지 늘어뜨린 새빨간 머리칼이 마치 피가 흐르는 것 같이 보인다. 그의 손에는 역시 핏빛 비단으로 싸인 긴 막대기 모양의 물건이 들려있다. 그는 그 물건을 소중히, 두 손으로 바쳐들고, 거리낌없이 인간과 오르크, 난쟁이와 요정의 시체를 밟고 지나간다. 그의 앞에서 한 여인이 기다리고 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청록색 눈이 별처럼 빛난다. 막 소녀티를 벗은 젊은 여성처럼 보이지만, 그 눈빛에는 가장 나이많은 인간보다도 더 깊은 경험이 서려 있다. 붉은 머리의 남자가 비단 보자기에 싸인 물건을 그 여인에게 건네 준다. 그녀는 공손히 선물을 받아들고, 조심스레 보자기를 벗긴다. 선물이 모습을 나타낸다. 길고 가는 은지팡이. 그 끝에는 커다란 녹색 보석을 박은 금빛 초승달이 조각되어 있다. 그 여인이 고개를 든다... 아니, 아까의 그 여인이 아니다. 어린 소녀. 아직 몸집이 작고 호기심 어린 눈을 가진, 어린 소녀다. 그러나 그 녹색 눈만은 변함없이 빛을 발하고... "엘미어...!" 보레아스는 작게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눈앞에 그 소녀의 모습이 선명했다. 그는 그 영상을 머릿속에서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은빛 머리칼이 땀에 젖은 얼굴에 달라붙었다. 언제나 일부러 예지몽을 꾸게 만드는 마법은 힘겨운 것이었다. 특히 그 마법을 자기 자신에게 거는 일은. "보레아스 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경이 좀 날카로워져 있던 그는 화들짝 놀랐다. 목소리가 날카롭게 터져나왔다. "누구냐?" "에이아입니다." 방문을 열고 요정 여성 한 명이 와서 공손히 절을 했다. 그 종족 특유의 날렵한 몸짓으로. 그녀의 얼굴에 아까 꿈에서 본 소녀의 얼굴이 겹쳐졌다. 보레아스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어디가 편찮으신가요?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난 아무렇지도 않다. 용건은?" "게레드에 가셨던 하르크자엘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 보레아스는 일어나 옷을 갈아입고 그의 군주를 접견할 준비를 했다. 몸이 피곤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최근 몇 달 동안 최소한 사흘에 한 번 꼴로 예지몽을 꾸는 마법을 자신에게 걸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디실의 주인의 행방을 제피로스에게 알렸고, 그리고 리반 아덴의 아들의 행동도 미리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알고자 했던 것은 끝까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준비를 마치고 방을 나서서 아크트와 노토스의 접견장으로 갔다. 언제나 전투에서 돌아오면, 제피로스는 이들 둘을 만나야 했다. 오르크 족의 지배자인 아크트, 그리고 드래크로니안을 비롯한 용족을 지휘하는 노토스. 그리고 이번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째서 이디실의 주인을 잡아오지 못한 건가, 하르크자엘!" 하고 아크트는 제피로스에게 추궁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한 태도였다. "위대하신 쿠푸-헤, 그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드가 이미 그 인간 소년을 빼돌린 후인지라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공격할 것을 알고 미리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힘 닿는 데까지 찾아보았습니다만..." "지금 날더러 그 말을 믿으라는 거냐!" "오드의 부하가 직접 그렇게 말했습니다. 위대하신 쿠푸-헤께서 잠시 잊으신 것이 아닌지?" 아크트는 이를 악물었다. 제피로스의 말에 반박할 근거는 없었다. 분명 포로로 잡힌 오드의 부하 다섯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오드 휘하의 정보통이 하르크자엘의 습격을 미리 알려주었고, 그래서 이디실의 주인을 빼돌렸다고. 그들은 그 정보원이 누구인지까지 가르쳐 주었다. 정보원으로 지목된 오르크는 처음에는 발뺌했으나, 고문 끝에 자백하고 처형당했다. "이번 일은 넘어가도록 하지, 하르크자엘." 하고 노토스의 머리 하나가 알현실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약속대로 시지리스는 그대의 종족의 것이다. 그러나 요즘 들어 실수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르크자엘. 좀더 주의하도록." "면목 없습니다, 노토스 님. 반드시 이디실의 주인을 찾아 카야크 님의 심려를 덜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피로스는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물러갔다. 알현실의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드래크로니안 족의 대마법사 보레아스였다. "무사 귀환하셔서 기쁩니다, 전하." 하고 보레아스가 허리를 굽혀 인사를 올렸다.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뻣뻣한 격식은 집어 치우게, 보레아스. 다들 별일 없겠지?" "모두 무사합니다, 제피로스. 그런데 '그들'이 엘미어를 찾으러 떠날 것 같습니다." "...또 쉐이렌(예지몽을 꾸게 하는 마법)을 쓴 건가? 어쩐지 안색이 안좋다 했지. 그런 일은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러지 않아도 가이니크의 결계를 푼 이후 피로해 있을 텐데..." 제피로스가 꾸중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보레아스는 지지 않았다. "넘겨 버리실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엘미어를 찾아낼 것이고, 그럼 엘미어와 이디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자룬이 우리 수중에 있다고 해도, 그 주인은 그들 중에..."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카자룬이나 힐리온, 엘미어는 이디실과 달라서 혈통만 맞으면 누구든지 잡을 수 있네, 보레아스. 반드시 계승자로 인정받지 않은 자손일지라도 쓸 수 있다는 뜻이지. 그래서 다크 엘프들이 자기 생명까지 줄여 가며 그 플리에타의 아들을 살려낸 게 아니겠나. 그건 그렇다 치고 정말 안색이 말이 아니군. 특별히 알고 싶은 게 있는 건가? 그렇다면 내가 조사해 줄 수도 있어. 앞으로도 당분간 여행을 다닐 예정 이니까..." 보레아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으나 그 시간이 너무 짧았으므로, 제피로스조차 알아챌 수 없었다. "제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제피로스 님." "...몸을 조심하게. 자네는 우리 종족 중 최고의 마법사이고, 내가 없을 때엔 우리 종족의 보호자이기도 하니 말야. 그리고..." 제피로스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거대한 오르크 한 마리가 헐레벌떡 달려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일이냐, 그루크?" 제피로스가 조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드의 다섯 부하들 말입니다, 모두 죽어 버렸습니다." "모두? 그것 참 안됐군." 제피로스는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고문한 놈들을 처형할까요?" "뭣하러? 그냥 놔 둬." "하지만 주인님께서 다섯 명 모두 살려두라고..." "그건 어제까지 일이었지. 이제 놈들은 필요없어 졌으니 어차피 죽이려고 했었어. 용건이 끝났으면 가 보도록!" 그루크는 잠시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배가 땅에 닿도록 절을 했다. "제 부하들이 주인님의 너그러움에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루크는 아까와는 달리 여유 있는 걸음으로 제피로스를 떠났다. 제피로스는 다시 보레아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보레아스는 불만 스러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피로스님, 오르크들을..." "어차피 죽을 놈들이었네, 보레아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지. 오르크들의 일은 나만의 문제야. 자네도, 다른 드래크로니안도 걱정할 필요 없네." 보레아스는 잠시 제피로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그들은 엘미어를 찾으러 떠날 것입니다. 그리고 찾게 되겠지요... 엘미어의 계승자는 요정족의 소녀,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의 눈을 가진 어린 요정입니다." ------------------------------------------------------------------ "하앗!" 새벽의 산안개를 뚫고 로이의 기합이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로이의 망토 속에서 곤하게 잠을 자고 있던 데이미아는 깜짝 놀라 깨어났다. 로이는 대충 검 길이 만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켈리에게 덤비고 있는 중이었다. 켈리 역시 나무 막대를 들고 로이에게 맞서고 있었다. 로이는 막대기를 무작위로 휘두르며 켈리를 공격했으나, 그녀의 일격에 번번히 그 나무 막대를 떨어뜨리거나, 심한 경우 발에 채여 나가떨어지기까지 했다. "너무해요. 발길질까지 하는 법이 어딨어!" 흙투성이가 된 로이가 투덜거렸다. 9 "뭐야? 넌 그럼 적이 목숨이 간당간당해도 얌전히 칼만 휘두를 것 같니? 꾀부리지 말고 칼 들어!" "아앙~! 켈리 누님~!" "시끄러! 먼저 검술 배우겠다고 조른 사람이 누군데 그래? 네 친구가 너보고 자길 위해 검을 써 달라고 했다며. 너정도 실력으로 도움이나 되겠냐?" "도대체 새벽부터 웬 소란이야?" 켈리와 로이의 대화를 깨고 툴위그의 퉁명스러운 말이 들려왔다. 그러자 켈리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새벽은 무슨! 해가 중천에 떴다고요. 얼른 일어나요! 엘미어 찾으러 로센 라스로 가기로 했잖아요." "거긴 요정들 동네라고." 하고 툴위그가 투덜거렸다. "글렌델 가 난쟁이들은 요정과 인간의 친구라면서요, 뭘!" "도대체 왜 또 싸우는 거야?" 숲 저편에서 토끼 두 마리를 잡아오던 랜스가 한심하다는 듯 물었다. 그 토끼를 보자, 켈리도 툴위그도 말다툼 따위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둘은 거의 동시에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침식사다!" "..." 곧 모닥불이 피워지고 식사가 준비되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요리는 툴위그의 몫이었다. 그가 항상 불만을 표시하긴 했지만. 토끼 요리를 큰 앞니로 갉아먹으며, 데이미아가 물었다. "그런데 모두 함께 엘미르를 찾으러 가 줄 건가요?" "난 갈거야!" 하고 켈리가 소리쳤다. 그녀는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았다. "카자룬에 이디실, 그리고 엘미어라. 정말 멋진 모험이 될거야!" "나도 가겠어. 로크 페울로니는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이디실에 엘미어까지 찾으면, 곧 카자룬도 손에 넣게 되겠지." 하고 툴위그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랜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랜스는?" "나는..." 랜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여는 순간, 켈리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랜스도 함께 가야지! 지금까지 함께 싸웠잖아!" "하지만 난 로크 페울로니 따위에는 관심 없어. 난 하르크자엘을 찾아 죽이기만 하면 돼." 랜스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켈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그거야. 로이 말에 따르면 하르크자엘이 로크 페울로니를 다 모아서 봉인을 풀려고 한다며! 그러니 엘미어와 카자룬을 찾다 보면 놈과 부딪치는 건 시간문제 아니겠어?" 랜스는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혼자 여행하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러나 그의 말끝은 로이와 켈리의 소란에 묻혀 버렸다. 둘이 잔뜩 신이 나서 소리를 질러 댔기 때문이다. "와!" "만세!" 그리고 그런 그들을, 데이미아는 한심하다는 듯이, 그러나 어느 정도 정감을 가진 태도로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시끄러운 인간들이라니까...' (계속) 아침 식사를 끝내고 그들은 다시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북쪽을 향해서. 배를 타려면 또다시 오르크들과 대면해야 했기 때문에, 그들은 숲을 가로질러 가는 길을 택했다. 영주의 사유지인 숲은 그다지 험하지 않았다. 그러나 도중에 엉뚱한 숲으로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루 종일 길을 찾아 헤매고 그 다음 날도 쉬지 않고 걸어서야 해질 녁쯤 되어 작은 마을에 다다를 수 있었다. 성은 커녕 그다지 큰 집들도 없이 오두막만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초라한 마을이었으나, 조용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몇 안 되는 주민들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그들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특히 난쟁이인 툴위그는 모든 사람들이 빤히 쳐다보기 때문인지, 조금 기분이 나빠 보였다. "방 있어요?" 켈리가 여관 문을 힘차게 열어제끼며 소리쳐 물었다. 여관 주인은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곱상하게 생긴 인간 소녀와 아직 어린 소년, 그리고 입을 꾹 다문 키가 큰 인간 남자와 난쟁이로 이루어진 이 일행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비로소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영주의 기사들이신지요?" 켈리에게서 방값을 받던 여관 주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켈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엣? 우리가 기사처럼 보여요?" "...그런 건 아니지만... 어쨋든... 용병이라든지..." "헤헤, 영주 따위와는 인연 없네요!" 켈리의 말에 비로소 주인장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 예,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요즘 이 근방을 지배하는 테온 영주가 병사들을 풀어놓고 그것도 모자라 인간 사냥꾼들까지 고용하고 있답니다. 산적떼을 잡는다나..." "테온 영주! 그렇다면 여기가 륀 에뮌(남쪽 평원) 지방인가요?" 여관 주인은 신기하다는 듯 켈리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만... 신기하군요. 고대어 지명으로 부르는 사람은 요즘 많지 않죠. 다들 그냥 남족 평원이라고 부른답니다. 그나저나 영주의 병사들 이랑 현상금 사냥꾼 떼들이 얼마나 극성인지... 누가 진짜 산적인지 모르겠다 니까요, 허허..." 주인장은 친절하게도 방 앞까지 안내를 해 주었다. 노숙에 지친 그들은 짐을 팽개쳐 놓고, 죽은 듯이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딱 한 명, 데이미아만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로이의 어깨 위에 타고 있었으므로 별로 피곤해질 일도 없었을 뿐더러, 로이와 만난 이후 누군가 그녀를 감시하고 있다는 듯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쥐의 몸으로는 그녀는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그냥 불길한 예감만을 느낄 뿐...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던 데이미아는, 간신히 잠이 들자마자 부스럭거리는 로이 때문에 다시 깨어나야 했다. "뭐야? 로이! 아직 새벽이잖아!" 데이미아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로이는 연신 싱글거리며 속삭였다. "데이미아, 우리 마을 구경 나가자!" "...이런 새벽녘부터?" "아침이 되면 또 출발해야 할 거 아냐? 그러니 모두 깨어나기 전에 얼른 갔다와야지. 난 시지리스랑 켄윌 빼고는 마을을 구경한 적이 없어. 게레드에선 갇혀있기만 했고. 너도 그렇지?" 생각해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데이미아도 피곤하긴 했지만, 인간 마을을 구경하고 싶다는 호기심도 만만찮았다. "그래, 가 보자. 잠이야 나중에 네 망토 모자 속에서 자면 되지, 뭐!" 그래서 둘은 살금살금 여관을 빠져나갔다. 아직 새벽 안개가 걷히지 않은 마을은 한적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가계 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그리고 농기구를 둘러메고 밭으로 나가는 사람들도. 항상 어업이 주종을 이루었고 밭농사는 겸업으로만 하는 시지리스 섬에서 자란 로이는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졌다. "...에이론드 아저씨 말이 맞아." 하고 로이가 중얼거렸다. "응?" "사람들 사는 건 다 다르지만 근본은 같다는 말... 에이론드 아저씬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는데. 읽고 쓰는 법도... 여기에 같이 오셨으면 좋았을걸..." 에이론드의 기억을 떠올리자 로이는 다시 시무룩해졌다. 데이미아는 난처해 하다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 얘길 못 들었네. 부모님은?" "돌아가셨어. 내가 아주 어렸을 적에 오르크의 침입이 있었대. 엄만 그 때 돌아가셨는다는데 난 얼굴도 기억 안 나. 아빤 어부였는데 풍랑을 만나 돌아가시고... 너는?" "...내 어머니는 마법사셨어. 숲의 마법사, 라스헨 에이니드라고 불리셨지... 아버지는 궁사였고. 두 분 다 인간족의 침입으로 돌아가셨어. 20년쯤 전에. 오르크와 결탁한 인간들이었지. 나는 도망다니다가 히루스 영주한테 잡혀서 쥐가 되어 버렸고." "...20년? 그럼 너 몇 살이야?" "43살... 그, 그래도 요정으로 치면 너보다 조금 어린거야!" "..." 데이미아가 항변했지만 로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데이미아는 괜히 말했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었으나, 그래도 그 말 덕택에 둘 다 에이론드니 부모님이니 하는 우울한 대화들은 깨끗이 잊게 되었다. 안개가 걷히면서 거리는 시끌벅적해졌다. 여관 주인이 말한 대로 병사들, 용병들과 현상금 사냥꾼들 덕택에 장사는 잘 되는 것 같았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신이 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골목 저골목 기웃거리며 다녔다. 둘이 한참 거리를 누비고 있을 때, 어느 골목에서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 사람살려!" 로이 또래쯤 되는 소년의 비명이었다. 로이는 깜짝 놀라 그리로 달려가 보았다. 똑같은 문장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병사 셋이, 어떤 소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있었다. 구경꾼들은 겁이 나 말리지도 못하고 서 있기만 했다. "이 도둑놈, 너 산적 일당과 한패지?" 하고 한 병사가 말했다. 소년은 겁에 질려 더듬거리며 소리쳤다. "아, 아녜요. 전 그런 사람들 몰라요!"3 "이게, 그래도 거짓말을!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릴래?" "...지,진짜 모른다니까요!" "당장 지하 감옥에 넣어 주겠어!" '...왜 어딜 가든 병사들은 그렇게 지하 감옥에 애착을 느낄까...?'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병사가 그 소년을 때릴 듯이 손을 높이 쳐들자 소리를 질렀다. "헤이! 아저씨, 잘못 찍으셨네요! 진짜 산적은 난데!"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로이에게로 쏠렸다. 데이미아가 질겁을 해서 속삭였다. "로이! 너 미쳤니?" "헤엣! 걱정 마. 도망치는 거라면 내 전공이야!" 이렇게 대답하고는, 로이는 휙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워낙 발이 빠른 로이인데다, 그들은 갑옷에 무거운 검과 방패까지 들고 있으니 따라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로이는 일부러 그들이 너무 뒤쳐지면 자신도 조금씩 발을 늦춰 가며, 그 소년이 도망칠 시간을 끌었다. "헥헥, 거...거기 서!" "너... 잡히기만 해 봐라!" 병사들은 기를 쓰고 따라오다가, 이윽고 포기했는지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로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가며 골목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었다. "...대단해!" 데이미아가 감탄했다는 듯 소리쳤다. 로이는 우쭐해졌다. "뭐, 이정도야. 그나저나 그 애는 잘 도망쳤는지..." 그 때, 로이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엊었다. 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의 그 소년이었다. "저... 고마워." 하고 그는 쑥스러운듯 말했다. "난 세이라고 해. ...아까 너 덕분에 살았어." "뭘, 그 정도 갖고! 근데 너 정말 산적 떼하고 아는 사이니?" "응... 사실은, 그래... 내 형이 산적 패중 일원이어서 산적 소굴에서 살거든. 하, 하지만 난 산적 아냐!" "뭐 어때? 나도 도둑인걸. 산적은 아니지만. 시지리스의 의적, 로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로이는 활짝 웃었다. 그 모습에 세이는 자신을 얻었는지 미소를 지었다. "정말? 어쩐지 잘 뛴다 했어!" 두 소년은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골목 저쪽에서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저기다! 두 놈 다 잡아!" "으휴, 끈질기기도 하네! 세이, 우리 서로 반대편으로 뛰자!" "으...응!" 로이의 외침에 세이는 오른쪽 골목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리고 로이는 왼쪽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렸다. 이번에 쫓아오는 병사들은 작정을 단단히 했는지, 웬만큼 달려도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현상금 사냥꾼 처럼 보이는 가벼운 옷차림의 사람들은 발도 빠르고 매우 끈질겼다. "어서 잡아!" "산적은 조무래기라도 목 하나당 20디나르다!" 처음 와 보는 낯선 골목인지라 로이도 도망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얼마 못 가, 로이의 앞쪽에도 병사들이 나타났다. 왼쪽, 오른쪽, 어디를 보더라도 병사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서는, 한 현상금 사냥꾼이 세이의 목덜미를 달랑 잡은 채 들고 오고 있었다. "후후, 이 꼬마 산적 놈들. 다 잡혔군!" 로이는 칼을 뺄 준비를 했다. 이제 세이를 도와줄 여유는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혼자만이라도 빠져나가야 했다. 칼을 들고 적당히 설쳐대면 병사들은 물러설 것이고, 그 정도면 로이가 빠져나갈 시간은 충분했다. '...아차!' 그러나 로이는 금방 칼에서 손을 뗐다. 이 칼은 이디실이었고, 이 칼은 잡으면 제정신이 나간다는 것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두번씩이나 그의 앞에 배가 갈리고 목이 잘린 채 널브러져 있던 오르크 시체들을 본 로이는 그 칼을 뺄 수가 없었다. 만약 인간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게 된다면...? 열 명 남짓한 병사들이 로이의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로이는 칼에 손을 대었다 떼었다 하며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 머리 위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산적 잡겠다고 모인 사람들이 애들이나 괴롭히면 쓰나?" (계속) "아니?!" 병사들은 일제히 머리를 듣고 그 말을 한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오래 찾을 것도 없었다. 다섯 명의 남자가 지붕 위에 올라선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 넷은 청년이었고, 한 사람은 그들보다 조금 나이가 들어 보였으며 턱수염이 더부룩했고, 더 우람한 몸집이었다. 그들 모두 허름한 차림이었으나, 각기 들고 있는 칼이나 도끼, 활 등은 손질이 잘 되어 있었다. "산적떼가 마을 안까지...!" 하고 한 병사가 소리쳤다. 그러나 그가 채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활을 들고 있던 청년이 그의 어깨를 관통시켜 버렸으므로, 그는 그 자리에서 기절해 버렸다. "형!" 세이가 활을 든 청년을 향해 반갑게 소리쳤다. "저놈들 잡아라. 한 놈도 놓쳐선 안돼!" 병사들은 소리치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세이의 형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은, 서슴지않고 지붕에서 뛰어내려 병사들 한복판에 섰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곧바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산적들은 잘 다듬어진 기술은 아니었지만, 민첩하고 재빠게 무기를 휘둘렀다. 정규 훈련을 받은 병사들과 비해 전혀 뒤지지 않았다. 특히 그들 중 두목 격인 듯한 털보 사내는 병사 서넛을 거뜬히 제압하고 있었다. 로이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에 호감을 느꼈다. 그들은 제피로스나 켈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싸웠다. 켈리와 제피로스는 일격에 적을 죽이기 위해 무기를 휘둘렀으나, 그들은 그것보다는 오히려 겁을 주어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이 목적 같았다. 그들 주위에는 죽은 사람은 얼마 없고 기절해 쓰러진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로이가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을 때, 세이가 와서 로이의 팔을 잡아당겼다. "로이, 어서 피하자! 우리가 피해야 저들도 도망가지." "아, 하지만 나는 일행이..." 그 때였다. 지붕 위에 머물러 활을 쏘며 동료들을 엄호하던 세이의 형이, 낮은 비명을 지르며 활을 떨어뜨렸다. 그의 어깨에 작은 단도가 박혀 있었다. 세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형?"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골목을 가득 메우며, 병사들과 3현상금 사냥꾼, 용병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크! 함정에 걸렸구나!" 하고 털보 사내가 소리쳤다. 병사들은 곧 그들을 가득히 에워쌌고, 그들은 상대편의 숫자에 밀리기 시작했다. 세 명의 현상금 사냥꾼이 지붕 위로 올라가, 부상을 당한 세이의 형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로이와 세이의 주위도 수많은 병사들에게 둘러싸였다. 로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이디실의 손잡이를 꼭 쥐었다. "요놈들, 이제 죽었다!" 아까 로이를 쫓아오느라 애를 먹은 병사 한 명이 칼을 쳐들며 로이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로이가 막 이디실을 뽑으려 할 때, 그는 어이 없게도 힘없이 로이 앞으로 픽 쓰러졌다. 그의 목에는 로이가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나무침이 꽂혀 있었다. "...켈리?" "그래, 나다!" 세이의 형이 서 있던 지붕 위에 켈리가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의 옆에는 세이의 형이 탄복하는 듯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현상금 사냥꾼 세 명은 그들의 발치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이 죽었다는 것은 말 안 해도 알 수 있었다. "나도 왔다 로이!" 하고 소리치는 것은 툴위그였다. 그는 커다란 도끼를 언제나처럼 휘두르고 있었는데, 그걸 보기만 하고도 병사들이 알아서 뒤로 물러나고 있었으므로 조금은 지루해 보였다. 랜스는 로이를 보자 가벼운 미소만을 던졌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포위당해 위험에 처한 산적들에게 달려가서, 병사 둘을 칼로 쓰러뜨리고 한 명을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그의 기세에 당황한 병사들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용병인 듯한 사내 둘이 마구 칼을 휘두르며 랜스에게 덤볐지만, 곧 한 명은 랜스의 칼에 옆구리를 찔리고, 한 명은 어깨를 깊이 베인 채 물러났다. 산적들이 그를 탄복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랜스다. 몬스터 헌터 랜스야!" 하고 어떤 용병이 소리쳤다. 그러자 용병들도 병사들처럼 공격을 주저하기 시작했다. 켈리는 어느 새 지붕에서 내려와 로이 곁에 서 있었다. 병사들이 로이에게 달려오자, 켈리는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군! 이것들은 봐주면 안된다니까!" 휙! 켈리의 채찍이 날아갔다. 그 채찍은 그녀를 공격하려던 한 병사의 목에 휘감겼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녀는 채찍을 휙 잡아당겼다. "컥!" 그 병사는 그대로 쓰러졌고, 채찍은 다시 풀려났다. 한눈에도 그의 목이 부러져 즉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만하게 보았던 켈리가 의외로 가장 살벌하게 나오자, 병사들은 아예 기가 질린 듯 했다. 그런 그들을 보고 켈리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덤빌 놈 또 있어?!" "건방진 것!" 하고 소리치며, 한 용병이 뛰어나왔다. 기습을 당한 켈리는 간신히 칼로 그의 공격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두 번째로 칼을 휘둘렀을 때, 그녀는 가볍게 피하고는 그의 배가 꿰뚫려지도록 푹 찔러 버렸다. "봐. 이런 놈들하고는 이렇게 싸워야 해!"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보기에도 소름끼쳤다. 그런 그녀를 말린 것은 랜스였다. "켈리, 그만 둬!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야!" "그래서? 오르크들보다 나을 게 없는 놈들 아냐!" 켈리도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조금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로이는 얼른 그녀에게로 달려가 사정했다. "켈리! 괜히 일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그냥 도망가요. 예?" 켈리는 대답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표정은 이미 그녀의 생각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자기 실력을 다해 적을 뚫고 도3망치기 시작했다. 단, 로이와 세이는 켈리와 랜스의 곁에 서서 엄호를 받아야 했다. "이봐! 거기, 기사! 그리고 예쁜 아가씨! 말을 타!" 털보 사내가 어느 새 말 여러 필을 끌고 와서 소리쳤다. 치장으로 보아서 영주의 병사들 중 비교적 고관들이 타는 말 같았다. 그들은 곧 말 위에 올랐고, 털보 사내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로이는 켈리와 함께, 세이는 랜스와 함께 말을 탔다. "이그, 이녀석! 왜 수습 못할 일을 저지르고 그래?" 켈리가 로이의 등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아까의 켈리의 모습에 긴장하고 있던 로이는 그제서야 해죽 미소를 지었다. 이제 비로소 평상시의 켈리로 돌아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말을 타고 한참을 달려갔다. 숲이 우거진 산을 올라 두어 시간쯤 말을 타고 달리니, 한 마을이 나타났다. 이상한 마을이었다. 돌벽과 나무 울타리를 마구 섞어 담을 쳤는데, 그 위로는 나무 위에 지은 집들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장난감 집 같아!" 로이가 중얼거렸다. 8 문 앞에서 그들은 모두 정지했다. 역시 허름한 차림이지만, 어디서 훔쳐 왔는지 꽤 좋은 창을 든 두 문지기가, 그들을 막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털보 사내를 보자 딱딱했던 표정을 곧 풀었다. "앗, 베어론 부대장님?" 베어론이라 불린 부대장은 한숨을 푹 쉬며, 세이를 가리켰다. "그래. 이 말썽꾸러기를 구하려다 이꼴이다. 쌍칼잡이 휴와 궁수 델이 많이 다쳤으니 의사 양반을 불러와!" "예! 그런데 저 사람들은 포로...?" "말 조심해! 우리들의 은인들이시다. 말 잘못 했다간 저 아가씨가 목을 부러뜨릴지도 모른단 말야!" 그 말에 툴위그는 쿡쿡 웃었고 켈리는 얼굴을 붉혔다. 문지기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켈리의 곱상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을 열어 주었다. 마을은 생각보다 매우 넓었으며, 이상스레 들뜬 듯한 활기에 차 있었다. 집들은 아직도 계속 지어지고 있는 중인 듯, 혹은 보수 공사 중인 듯 수많은 사람들이 나무 위에서 판자와 못과 망치를 들고 작업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이요. 편히 머무쇼. 나는 두목에게 가 보아겠으니." 하고 베어론은 자랑스러운 듯 말하고는, 어디론가 말을 탄 채 달려가 버렸다. 곧이어 자칭 의사라는 건달 같아 보이는 사람이 와서, 다친 사람들을 자기 오두막 안으로 데려갔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운반하는 것을 보고, 랜스도 끼어들어 그들을 부축했다. "저기... 저 여자가 너네 누나니?" 하고 켈리를 조심스레 손가락질하며, 세이가 로이에게 속삭였다. "응... 뭐... 친누나는 아니지만..." "너무 무섭다... 난 산적 마을에 살았어도 그렇게 싸우는 사람은 처음 봤어!" "..." 로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말없이 슬쩍 켈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벌써 어떤 산적 청년 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툴위그만이 그녀의 뒤에 멀찌감치 서서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인간들이 너무 북적거려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툴위그가 이윽고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켈리에게 물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지? 우린 로센 라스로 가기로 한 거 아니었어?" "아, 그렇지! 진작 말씀하시지 그러셨어요?" 켈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이마를 탁 치며 소리쳤다. 그 모습에 툴위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젊은 애가 정신이 저 모양이니... 랜스도 불러 와. 한시가 급한데!" "아, 잠깐만요!" 하고 아까 그들이 구해주었던 산적 중 하나가 황급히 말했다. "하지만 두목님은 만나고 가셔야죠. 우리 은인이신데..." "미안하오만, 한시가 급하오." 하고 툴위그가 거만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켈리를 올려다 보았다. 의외로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쉽게 동조했다. "우린 가야 할 데가 있어요. 빚은 나중에 받도록 히죠." 로이는 그녀가 인간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툴위그의 편을 들어 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숲에서 같았으면 말끝마다 붙잡고 늘어 졌을텐데... 그러나 그 산적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센 라스까지 가신다면서요? 그곳은 머니까, 두목님께 말씀드리면 말을 주실지도 몰라요." 말을 얻는다는 소리에 툴위그와 켈리는 입을 다물고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로센 라스까지는 걸어서 며칠이 걸릴 지 몰랐다. 그러나 말을 타고라면... "은인님들! 두목님이 부르쇼!" 베어론보다 훨씬 더 건장한 사내가, 다른 산적 셋을 거느리고 와서 그들에게 말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말투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말투에 있는 공손함이라든가 친절이 전혀 없었다. 마치 죄수를 끌고 가는 듯한 태도였다. "무슨 일이야?" 랜스가 의사의 오두막에서 니오며 물었다. 그러자 그 건장한 사내는 랜스를 흘끗 보고는 다시 말했다. "두목님이 부르쇼. 어서 갑시다!" 그리고는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들을 주위에 빙 둘러서서, 두목의 거처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계속) "흥, 이럴 줄 알았지." 하고 툴위그가 코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겁이 난 로이가 놀라서 물었다. "뭐가요?" "의심하고 있는 거야. 우리가 그 병사들과 한패고, 계획적으로 그들을 살려주고 여기에 들어온 게 아닌지. 기껏 살려줬더니만... 인간들은 이 모양이라니까." "아, 아, 걱정 말아요. 오해는 풀리게 돼 있다고요." 켈리의 태평스러운 위로였다. 랜스는 입을 꾹 다문 채,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목의 거처도 다른 집들과 다를 것 없는 나무 위의 오두막이었다. 그곳을 지키던 문지기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길 들어가려면 무기를 내놓아야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손하게 손을 내밀었다. 눈빛에는 불쾌한 의심이 가득 했다. 랜스가 막 공격하려는 찰나, 켈리가 순순히 칼과 채찍을 넘겨주었다. 그녀는 싱긋 웃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긴장할 것 없어. 의례적 절차일 뿐이니까." 그러나 로이는 그녀가 목에 건 독침만은 넘겨주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좀 특이한 모양의 목걸이처럼 보였으니까. 이어서 툴위그가 도끼를 내어주었다. 그 도끼를 받아든 문지기는 마구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그것을 옆에 세워 두었다. 그리고 로이가 허리에 찬 이디실을 허리띠채 풀러 주었다. "허리띠 부분을 잡으세요. 칼 잡지 말고요." 로이의 경고에 문지기는 별 이상한 애도 다 있다는 듯 쳐다보았으나,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마지막으로 랜스가 머뭇거리며 칼을 내주었고, 그들은 사다리를 타고 두목의 집으로 올라갔다. "페일드 두목님! 그들이 왔습니다!" 하고 그들을 따라온 그 건장한 사내가 외쳤다. 그러자 켈리가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두목 이름이 페일드야?" "들여 보내!" 하는 목소리가 오두막 안에서 흘러나왔다. 별로 크지는 않지만 빈틈없고 낮은 목소리였다. 건장한 사내는 그들을 오두막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검소하게 만들어진 방이 보였다. 로이 일행 넷에 (물론 데이미아도 있었지만 너무 작으니까 빼고) 그들을 감시하는 건장한 사내, 그리고 두목과 그를 호위하는 부하 둘이 있은 그 방을 꽉 차서 한 사람도 더 못 들어올 것 같았다. 두목은 그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훑어보았다. 왼쪽 이마에서 볼에 이르는 깊은 흉터가 있었고, 그것 때문에 왼쪽 눈의 시력을 잃은 것 같았다. 걷어 붙인 팔뚝에도 수많은 흉터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쯤 전에는 꽤 미남이었을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시선은 켈리에게 고정되었다. 의심 반, 놀라움 반인 눈빛. 이윽고 켈리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간만이네요, 페일드 두목님! 아니면 스승님이라고 부룰까요?" "...켈리! 너 정말 채찍잡이 켈리 맞냐?" 페일드의 음성에 놀라움과 즐거움이 섞여들었다. 켈리는 만면 가득 미소를 띄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일드는 당장 달려와 그녀를 얼싸안았다. "맙소사. 당장 파티를 열어야겠군! 이런 일이 있나! 3년만이지?" "...아직 그쯤은 안됐고, 2년 반쯤 됐죠. 살아계셔서 정말 기뻐요." 로이외 툴위그, 랜스는 어리둥절해져서 서로 얼싸안고 기뻐 어쩔 줄을 모르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데이미아까지 로이의 옷 속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구경할 정도였다. 건장한 사내도 갑작스런 사태의 변화에 놀란 듯 눈만 휘둥그렇게 뜨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두목이 명령했다. "이봐, 곰! 옛 제자가 왔으니 환영식을 열어야겠다! 당장 준비시켜!" "예...옛!" 하고 그 곰이라 불린 건장한 사내는 허둥지둥 두목의 오두막을 나갔다. 페일드 두목은 아직도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로이 일행에게 말했다. 9 "자아, 밖으로 나갑시다. 여긴 너무 좁군요. 내 부하들을 구해주신 분들이 채찍잡이 켈리의 친구들이었다니!" 그들은 순순히 밖으로 나갔다. 랜스는 아직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듯, 켈리와 팔짱을 낀 산적 두목을 힐끗힐끗 바라보았지만, 로이와 툴위그는 이제 사태가 호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켈리가 웃으며 두목에게 말했다. "소개할께요, 두목! 내 친구들이에요. 이쪽이 로이, 난쟁이 용사 툴위그 젠 글렌델, 그리고 몬스터 헌터 랜스. 아, 쥐 이름은 데이미아고요." "아, 그래요. 모두 환영해! 하하하!" 벌써 주위에는 산적들이 호기심을 느끼고 그들을 구경하러 모여 있었다. 곰이라는 그 사내가 두목의 옛 제자가 왔다고 동네방네 소문낸 것이 분명했다. "두목의 제자라... 어째 보통 실력이 아니다 했지!" 어느새 로이의 바로 뒤에 선 부두목 베어론이 중얼거렸다. 한참 두목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던 켈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말을 꺼냈다. "두목! 우린 로센 라스로 가요. 도와주실 거죠?" "하하하! 물론이지! 단, 오늘 밤은 여기서 우리랑 잔치를 열어야 해!" ------------------------------------------------------------------ 그루크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하르크자엘의 방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 방으로 가려면 드래크로니안들을 유난히도 많이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는 그리로 가는 것이 딱 질색이었다. 드래크로니안, 빛과 어둠이 나누어지기 전에 만들어진 종족. 그들은 언제나 그에게 미묘한 신비감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의 특이한 변신 능력 때문도 아니었고, 하르크자엘의 종족이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들 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있을 수 있는 종족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인간이나 난쟁이 요정들처럼 빛의 종족도, 오르크나 트롤처럼 어둠의 종족도 아닌, 그들 모두의 상식을 비웃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나 하르크자엘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서 명령을 내렸으니까. 그가 하르크자엘의 방 문앞에 이르렀을 때, 그 문을 열고 마법사 드래크로니안이라는 흰 옷을 입은 청년이 나왔다. 그는 그루크를 힐끔 보더니 마지못해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총총히 걸어가 버렸다. 그는 하르크자엘처럼 드러내고 경멸어린 시선을 하지 않았고, 무섭게 화를 내는 법도 없었으나, 그것때문에 가끔 그루크는 하르크자엘보다 그의 존재가 더 끔찍하게 여겨졌다. 게다가 가이니크인지 어딘지 갔다 온 이후로는 얼굴 까지 창백하게 되어서는 드래크로니안 특유의 소리도 없는 발걸음으로 걸어다니는 모습이, 영락없는 유령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루크는 방문을 두드리며 조심스러운 인간 언어로 말했다. "들어오너라." 하르크자엘의 감정 없는 목소리를 듣자, 그루크는 인간 사냥을 나갈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 이마가 거의 땅에 닿도록 무릎을 숙였다. 그의 주인, 하르크자엘은 테라스의 난간에 걸터앉은 채 어두워진 라우더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날개가 그의 옆얼굴을 거의 다 가려, 표정을 전혀 볼 수 없었다. "힐리온이 프라니드에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다... 정확하지 않지만 가 봐야 할 것 같다. 푸이 하르크(저승의 전사들)을 집결시켜라." 힐리온. 하르크자엘은 그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는 것을 그루크는 알 수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힐리온은 그의 최초의 실수였으니까. 힐리온의 회수 말고 그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그러나 힐리온, 간교한 영주 리반은 아들의 목숨의 댓가로 힐리온을 주겠다고 하고서는 어디론가 그것을 빼돌려 버렸다. 게다가 그 가짜 칼을 빼앗느라, 하르크자엘은 날개에 깊은 상처까지 입었던 것이다. "명령에 따르겠습니다, 주인님. 그러나, 그렇다면 이디실과 엘미어는 ...?" "쿠푸-헤는 그 일을 직접 처리하고 싶으신가보더군. 네가 신경쓸 일이 아니다, 그루크. 네 의무는 내 명령에 따르는 것 뿐!" 하르크자엘의 목소리는 낮지만 날카로웠다. "죄송합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당장 저승의 전사들에게 출전 준비를 시키겠습니다." 그루크는 절을 하고는 하르크자엘의 방 밖으로 나왔다. 그의 방으로 부터 꽤 먼 거리를 걸어오고 나서야 그루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르크자엘은 오르크 따위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오르크들 사이에 이미 널리 퍼진 소문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언제나 긴장해야 했다. '...그러나, 나는 30년동안 그분을 섬겼는데도 이렇게 살아 있다.' 그루크는 자신도 모르는 새 마음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동족들에게 몰살당할 뻔한 우리 부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그분 덕분이야...' 한편, 제피로스는 먼 남쪽, 게레드 쪽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주위 어딘가에 로이가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그가 없는 사이, 아크트가 다시 로이를 잡기 위해 물불을 안 가릴 작정이라는 것은 안 보아도 뻔했다. '...뭐,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도 어차피 아크트의 조무래기들한 테나 당하는 이디실의 주인이라면 인정할 수 없으니... 그리고, 로이의 곁엔 리반 아덴의 아들이 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왼쪽 날개에 있는 흰 흉터를 쓰다듬었다. 10년 전에 이미 그에게 이런 흉터를 줄 수 있었던 인간. 이제는 분명 누구와 대적해도 지지 않을 용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인간들의 습득능력은 용족의 상상을 초월하니까... ------------------------------------------------------------------ 랜스에게 도적들의 파티는 즐겁다기보다는 정신이 하나도 없는 아수라장처럼 느껴졌다. 도대체가 순서나 규칙이라고는 찾이볼 수 없었다. 음식은 산더미같이 쌓아놓고, 먹을 사람은 먹고, 놀 사람은 놀고, 음악도 종일 연주하면서 춤출 사람은 춤추고 싫은 사람은 관두라는 식이었다. 그래서 랜스는 되도록이면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조용히 앉아 그들이 즐기는 모습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모두 나름대로 즐거운 것처럼 보였다. 툴위그는 처음에 인간들을 피했지만, 그들이 계속 존경어린 호기심을 보내자, 금방 기분이 풀어져서는 그들 사이에서 모험담을 떠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로이는 세이와 금방 친해져서는 둘이서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데이미아는 계속 로이 어깨 위에 앉아 있었는데, 이 산적 소굴에 들어온 이후로는 계속 말없이 평범한 쥐인 것처럼 꾸미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도 이런 생소한 분위기가 싫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켈리 - 그녀는 두목 페일드의 제자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 온통 산적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부두목 베어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말소리가 랜스에게까지 들렸다. "...그래, 페일드 두목이 전에는 보물찾기를 했었단 소릴 하신 적 있어. 그런데 그게 정말이란 말이오, 아가씨?" "그렇다니까요. 그 때 내가 그의 제자가 되어서 지금도 보물찾기로 먹고 사는 거 아니겠어요." 몸집이 큰 사내, 곰이 탄복한 듯한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자네, 여기서 뭐하나?" 갑자기 누군가가 랜스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랜스는 반사적 으로 오른손을 칼 손잡이에 올렸으나, 그가 누군지 깨닫고는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렸다. "...두목님이시군요." "그냥 페일드라 부르게. 자넨 산적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것 가지고 칼을 뽑으려 하다니, 무서워서 어디 살겠나?" 페일드는 술에 취한 것 같았고, 그런데도 아직 반 쯤 남은 술병을 손에 들고 연신 마셔 대고 있었다. 랜스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그만..." "아니, 아니, 그럴 것 없네. 그보다도 그런 버릇이 생길 정도라니, 자네도 대단히 피곤하게 사나 보군. 하긴, 켈리도 나 만나기 전까진 그랬지." "켈리가요?" 랜스는 상상이 안 간다는 듯 물었다. "암, 그렇고말고. 자네처럼 항상 긴장하는 꼬마 아가씨였지. 그게 열 다섯살 때였던가... 툭하면 바짝 긴장하곤 했어. 그런데 한 번 폐허 탐험을 같이 하더니만 내 제자가 되고 싶다고 하질 않겠나... 이유가 뭐였느지 아나?" "...아뇨." "대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더군. 나같은 멋진 대장이 되려면 말야. 하, 참 귀여운 애였는데. 저런 아가씨가 되다니..." "...그녀는 살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더군요." 랜스의 말에 좀 풀어진 듯한 페일드의 눈이 번쩍 띄였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자네에게 얘기 하나 해 줌세. 내가 저 애한테 채찍 다루는 법을 가르칠 때 노상 한 얘기가 뭐였는지 아나? 여자는 남자보다 체력이 딸린다, 그러니까 미리 포기할 생각이 아니라면 어떻게 남자들을 이길지 머리를 배는 굴려야 한다는 말이었어. 그 애는 그걸 똑똑히 새겨들었던 거지. 채찍... 물론 채찍도 열심히 배웠지만, 그 이상의 일이 있었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모험이었지. 어떤 영주의 영지 안에 있는 폐허에서 보물을 빼내 오기로 했었어. 미리 보초들에게 돈을 쥐어 줬는데, 글쎄 이놈들이 욕심 때문에 영주한테 고자질을 하지 않았겠나. 영주는 우리가 보물을 찾게 하고는 그 다음 자기가 가로채려고 했던 거야. 폐허의 토굴에서 나와 켈리, 그리고 다른 두 부하가 기어나오자, 영주의 병사들이 쫙 깔렸지 뭔가..." (계속) "병사들은 너무 많았고, 우리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무사가 아닌 보물 사냥꾼들일 뿐이었지. 곧 두 부하는 중상을 입고 쓰러지고 나와 켈리도 상처를 입고 궁지에 몰렸어. 드디어 나까지 허리를 깊이 베이고 쓰러지자, 난 다 끝이라고 생각했지. 그 때 그 애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글쎄요. 혼자 적을 다 무찔렀나요?" "예끼, 이 친구야, 농담 말게. 그 애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사에게 덤벼들어 그를 쓰러뜨렸지. 그리고는 그 시체를 계속 푹푹 찔러댔던 거야. 그러니 다른 놈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나? 새파랗게 질려서 주춤주춤 물러날 수밖에. 그 애는 미친 듯이 시체만 계속 공격하고, 병사들은 그 애가 진짜 미쳤다고 생각했는지 멀찍이 물러서서 구경만 했다네. 어떤 놈들은 아예 막 구역질을 해 대고... 그러던 중 다른 일행이 와서 우리는 모두 무사히 구출 되었지." "..." 랜스는 말이 없었다. 그는 실제로 조금 구역질이 났다. 켈리가 그런 방법을 쓰다니, 아무리 죽음을 코앞에 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내가 그 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그녀를 공격할 수 있었을까?' 미친 듯이 시체를 찌르고 또 찌르는 작은 여자아이... 손이고 칼이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겠지... 시체는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고... 그 광경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게 칼을 들 수 있을까? '...' 그는 그 자신에게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자신이 한없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시체를 향해 칼을 높이 쳐든 어린 소녀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하르크자엘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마에서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피, 찢어진 옷과 망토, 그리고 칼을 팽개친 채 짓는 그 가증스런 미소가. '날 공격할 수 있나?' '...하르크자엘이 맞아. 난 아직도 애송이야... 나보다 대여섯 살은 어린 켈리보다도...' 9 "마음에 안 드나보군... 그러나 우리는 모두 켈리에게 감사하고 있네. 우리는 그 애에게 목숨을 빚진 거야. 그런 방법이 아니었다면, 열 일곱살짜리 여지아이가 어떻게 병사 수십명 속에서 세 동료의 목숨을 구해 낼 수 있겠나? ...몰론, 아덴 가의 아드님에게 어울릴 방법은 아니겠지." 하고 페일드가 말했다. 랜스는 놀라 상념에서 번쩍 깨어나, 경계하는 눈빛으로 페일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페일드는 너털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자네의 검에 있는 문장과, 그 형을 꼭 닮은 얼굴을 보고도? 걱정 말게. 난 비록 자네 형 덕분에 고생 좀 한 적이 있긴 해도, 형에게 진 빚을 동생에게 갚는 성격은 아니니.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걸세. 귀족이라면 무조건 두들기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니깐 말야." 페일드는 술에 취한 걸음으로 비틀비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자신의 오두막의 지붕 겸 전망대 위로 올라가, 남은 술병을 비웠다. "여전히 과음하시네요, 두목!" 켈리의 목소리였다. 그녀가 바로 곁의 굵은 나뭇가지에 앉은 채, 미소를 지으며 페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몸이 날래구나, 켈리..." "하하하! 두목에게 배운 덕분이죠. 그 전에는 나무는커녕 밧줄도 제대로 못 탔잖아요." "흐음, 그래... 아직도 약혼자 영주보다는 전설의 보물에 관심이 더 많은가, 귀족 아가씨?" "...그 거짓말은 미안하게 됐어요.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거 아시잖아요." 켈리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사과했다. 페일드는 혀가 꼬부라진 말투를 집어치우고 진지한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아직도 로크 페울로니를 찾을 수 있다고 믿나?" "당연하죠! 두목은 비밀을 지키는 분이니까 하는 얘긴데..." "이디실의 주인을 찾았다는 얘기군." 켈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떻게...?" "그 꼬마아이겠지. 세이의 친구라는... 이미 이디실의 주인이 나타나, 오르크와 귀족들이 그를 찾아내려고 안달한다는 소문이 여기저기로 퍼져 가고 있어. 나는 그따위소문 믿는 편이 아니지만, 그 소년의 칼에 손을 댔을 때... 모든 것이 들어맞더군." "...맞아요, 로이가 이디실의 주인이죠." 켈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엘미어를 찾으러 가는 중이죠. 그 다음엔 내 친구 툴위그, 그 난쟁이의 보물인 카자룬을... 두목의 도움이 필요해요." "...말 정도라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어. 음식과 무기도..." 하고 말하며 페일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켈리, 나는 네가 사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넌 젊고 용감해. 네 말대로 운명을 개척할 힘이 있어. 그런데 왜 그따위 보물에 대한 의무에 얽매어서는...?" "페일드." 하고 켈리가 조용히 말했다. "내 운명도 내 의무도 내가 선택한 거에요. 잘 아시면서." -------------------------------------------------------------------- 로이 일행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직 산안개가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출발했다. 산적 소굴의 주민들은 모두 나와 마중해 주었으며, 특히 세이는 로이와의 이별을 무척 아쉽게 여겼다. 두목 페일드는 그가 가진 가장 좋은 말 네 필과 식량을 그들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로이에게는 별도의 선물도 준비되었다. 어느 귀족의 마차를 습격하여 빼앗은 검이었다. "로이, 네 단도도 멋지지만, 싸우려면 어쨌든 검이 더 쓸모 있지. 이걸 가져가거라. 그리고 열심히 배워서, 다음에 올 땐 멋진 솜씨의 검사가 되어서 오거라." 하고 페일드가 말했다. 로이는 감사하여 어쩔 줄을 모르며 그 검을 받았다. 검술을 배우는 초보자를 위해 만든 검인 듯, 적당히 가볍고 그리 길지도 않았다. "감사합니다... 잊지 않을께요." 그리고 그들은 출발했다. 로센 라스, 요정의 숲이라는 그곳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인간은 거의 없었다. 그 점에서는 요정과 사이가 좋지 못한 난쟁이들도 다를 바가 없었다. 단지 드라크노움이라고 불리는, 레젠디아 대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산맥 어딘가에 있다는 전설만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데이미아의 기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장소는 정확히 아는 거겠지, 데이미아?" 툴위그는 몇 번씩이나 그녀에게서 다짐을 받았다. 아무리 요정과 인간의 친구인 글렌델 가의 난쟁이라고는 하지만, 종족간의 뿌리깊은 불신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켈리가 전에 로이에게 몰래 이야기 해준 대로, 난쟁이인 툴위그는 요정이란 전부 '쓸데없는 서사시나 지껄이는 게으른 허풍쟁이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드디어 데이미아는 신경질을 냈다. "몇 번이나 말해야 돼요? 난 거기서 살았어요!" 그러자 툴위그는 질문을 그쳤으나, 눈에는 아직도 의심의 빛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로이는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었다. 왜 그런지는 그 자신도 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 날 저녁 그들은 드디어 륀 에뮌의 작은 언덕들을 벗어나 험난한 드라크노움으로 들어섰다. 길이 갑자기 가파르게 변하고, 숲은 낙엽이 져 가는 활엽수들 대신 하늘을 찌를 듯한 침엽수들이 나타났으므로, 그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드라크노움의 침엽수들은 무시무시할 만큼 컸으며 검게 보일 만큼 짙은 녹색을 띄고 있었다. 산맥의 내부로 들어갈수록, 나무들은 점점 더 커졌으며 점점 더 빽빽해졌다. "...이제 진짜 드라크노움이군. 여기까지 들어온 사람은 많지 않을 거야..." 얼마만큼 갔을까, 켈리가 중얼거렸다. 발밑에는 이제 긴 수풀 따위는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이제는 빛이 사라져 시커멓게 보이는, 하늘을 덮은 침엽수들과 그늘을 좋아하는 신비로운 모양의 꽃들과 이끼류 뿐이었다. 흙조차 검은 빛이었다. "...날이 밝은 다음에 다시 출발하는 게 어때?" 툴위그가 제의했다. 이 숲의 이상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당한 것 같았다. 확실히 드라크노움에는 낯선 기운이 도사리고 있었다. 어둠도 빛도 아닌 위협이. 그들 모두는 툴위그의 제안에 찬성하고, 말을 세우고 모닥불을 피웠다. 이미 한치 앞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산간 지방에서는 바닷가보다 해가 훨씬 빨리 지지." 하고 켈리가 로이에게 친절히 설명했다. 툴위그는 모닥불에 어떤 가루를 뿌려넣었다. 향기라고는 할 수 없지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은, 이상한 냄새가 나는 가루였다. "야생동물에게 경고하는 거야. 그들과 표정이나 말로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해도 냄새로 의사소통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는 것을, 난쟁이 족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 툴위그가 설명했다. 로이는 탄성을 질렀다. "와! 신기해..." 그러자 켈리는 한숨을 쉬며 걱정스럽게 말했다. "신기하지. 하지만 드라크노움의 짐승들에게 이따위 방법이 통할 것 같지는 않은데... 차라리 시이그를 준비하는 게 어때요, 툴위그?" "시이그?" 로이가 어리둥절해져서 묻자, 랜스가 경멸어린 태도로 말했다. "들짐승들에게 먹을 것을 바친다는 거야. 주는 것을 먹고 자기들은 해치지 말도록 비는 것이지. 북방 유목민의 미신이야. 그만 둬, 켈리. 음식만 축낼 뿐이야." 그러나 켈리는 어깨를 으쓱 하더니, 짐을 풀러 고기 두 조각을 꺼내어서는 어두운 나무들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랜스가 다시 뭐라고 하려 는데, 툴위그가 그를 말렸다. "미신이라도 이유는 있는 거네, 랜스. 할 수 있는 건 해야 하지 않겠나. 식량이야 사냥해서 해결하면 되고... 여기는 드라크노움, 더이상 인간이나 난쟁이의 영역이 아니야. 여기의 주인은 들짐승과 나무들이네. 우리는 마땅히 그들에게 예의를 표해야 해." 랜스는 늘상 하던 대로 군말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 납득의 빛이라고는 없었다. 데이미아는 그들을 비웃듯이 말했다. "흥! 동물들을 그리도 두려워하다니, 인간도 난쟁이도 정말..." 얼마 후 켈리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말없이 식량을 나누어 먹었다. 아무도 말할 기분이 나지 않았을 뿐더러, 억지로 말을 꺼내 보았자 무엇에 눌린 듯한 이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켈리의 '시이그'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 날 밤 들짐승의 습격을 없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끊임없이 들리는 올빼미 소리와 늑대 울음소리,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발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깨어나야 했다. 로이를 제외하면 그런 소리들을 처음 듣는 사람은 없었지만, 드라크노움에서 듣는 소리들은 무엇인가 달랐다. 나이팅게일의 노래조차 위험스러운 유혹이 깃든 것처럼 들렸다. 차갑고 축축한 산안개가 그들을 덮고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잠을 제대로 못 잔 그들은 눈을 비비며 일어나 짐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 데이미아의 안내를 받아 길을 떠났다. 아침이 되었지만 드라크노움의 분위기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제 어젯밤과는 달리 침엽수림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도 나무 사이로 날아드는 새들도 볼 수 있었지만, 전혀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두 신경과민이 되어서, 로이는 다람쥐만 보고도 소스라치게 놀랄 지경이었다. 그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일행은 데이미아만 빼고, 계속되는 긴장 상태에 아주 녹초가 되어 있었다. 데이미아만은 고향에 돌아간다는 사실 때문인지 즐거운 흥분상태에 빠져 있었고, 다른 이들의 불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계속) "으으으... 차라리 뭔가 터졌으면 좋겠다!" 사흘째 되는 날 밤, 참다 못한 켈리가 혼잣말로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말해서, 로이와 랜스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툴위그는 펄쩍 뛰며 꾸짖었다. "재수없는 소리 마! 들짐승의 땅 드라크노움에서 인간이나 난쟁이가 무슨 힘을 쓸 수 있을 것 같나!" "...그냥 말만 해 본 것 뿐이에요." 켈리가 시무룩해져서 대꾸했다. 그러나 툴위그는 대답이 없었다. 로이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데이미아에게 애걸하듯 물었다. "...이러다간 우리 모두 미쳐버리고 말 거야. 로센 라스까지는 아직 멀었어?" 그러자 데이미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이제 곧 도착해. 한 이틀... 사흘쯤? 하지만 너희 인간들은 너무 이상해. 이 산이 그렇게 싫어? 아름다운 곳이잖아." 확실히 아름다운 곳이간 했다. 로이도 그것은 인정했다. 하늘 위로 시원하게 뻗은 거대한 침엽수들,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지의 풀꽃들, 그리고 수많은 다람쥐와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놓아두지 않는 어떤 것이 그곳 전체를 덮고 있었다. 밤새 부엉이 한 마리가 로이의 머리 위에서 울어댔다. 로아는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돌을 던져 그 부엉이를 쫓으려고 하다가,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이 숲은 들짐승의 것이라는 툴위그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그래...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갖추자고... 하지만 다른 곳에서 부엉이 비슷한 새라도 만난다면, 정말 가만 안 놔둘거야!' 3 로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잠이 들었다. 온통 부엉이만 잔뜩 나오는 꿈을 꾸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흔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러나 그를 잡아 흔든 사람은 다름 아닌 랜스였다. "뭐에요, 랜스? 아직 한밤중이잖아요!" 로이는 안심되는 한편 너무 놀란 것이 부끄러워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일어나 있는 사람은 랜스 하나가 아니었다. 켈리와 툴위그, 데이미아 까지, 로이만 빼고는 다 깨어 있었다. 짐조차 다 꾸려진 상9태였다. "...무... 무슨 일 있어요?" 그제서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로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켈리가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짐승들이... 이상한 것 같아." 그제서야 로이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푸른 빛을 발하는 눈들을 볼 수 있었다. 수십, 아니 수백 개의 눈들을. 그것들이 나무 그들 밑에서 로이와 그 일행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저... 저건...?" "늑대야. 천천히, 천천히 움직여. 그리고 가등한한 저것들을 똑바로 보지 마." 하고 켈리가 충고했다. 그러나 로이는 그것들이 늑대떼의 눈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늑대라면 시지리스 섬에도 많지는 않지만 살고 있었다. 그러나 가끔 가축을 물어가는, 좀 고약한 짐승일 뿐이었다. 로이를 노려보는 그 눈은, 그 살기는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드라크노움의 짐승들은 좀 특이한 데가 있지. 하지만 걱정 마.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해치지 않아. 그건 어디에 사는 동물이건 똑같아." 마치 로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데이미아가 말했다. 그녀 혼자만은 아직도,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밝은 목소리였다. 로이는 벌벌 떨며 간신히 모포 ㅂ으로 기어나와, 모포를 개어 말 위에 실었다. 그의 손이 너무 떨렸으므로, 켈리가 와서 도와주었다. "어서 출발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가는 거야." 툴위그가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 위에 오르며 속삭였다. 그들은 모두 대답 없이 말 위에 올라탔다. 데이미아만이 여전히 즐겁게 속삭였다. 3 "걱정 말아요. 절 믿으세요. 먼저 공격만 안 하면 돼요!" 그러자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듯, 툴위그가 발끈 신경질을 냈다. "그럼 왜 저 녀석들이 우리 주위로 몰려든 거야? 우린 공격도 안 하고 시이그까지 바쳤는데!" "시이그 따위는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니까요." 하고 랜스도 지지 않고 말했다. 그 말에 켈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 보았다. "제발... 지금은 그냥 가고 나중에 싸우면 안돼요?" 로이가 울듯한 목소리로 그들에게 애원하자, 그제서야 모두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천천히, 늑대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말들조차 잔뜩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늑대떼는 완전히 그들의 야영지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조심스레 몰며 지나가자, 길을 비켜 주었다. 로이의 발 바로 옆에서 늑대떼의 파르스름한 눈이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여긴 우리 땅이야. 우리 말 잘 듣지 않으면 혼이 날 줄 알아!' '으으... 난 죽어도 이 일을 잊지 못할거야...' 로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말의 고삐를 꼭 붙들었다. 어깨 위에서는 데이미아가 계속 소근거리고 있었으나,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그들은 툴위그, 랜스, 로이, 켈리의 순으로 말을 몰며, 겹겹이 에워 싼 늑대들 틈을 뚫고 나왔다. 그들이 이제 다 늑대떼에게서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 툴위그의 말 앞으로 늑대 한 마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히히힝~!" 툴위그가 놀란 만큼, 그의 말도 놀랐다. 그 말은 펄쩍 뛰며 뒤로 물러났다. 바로 늑대떼가 있는 그 쪽으로. "그르르..." 늑대떼는 갑작스러운 말의 움직임에 바짝 경계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모습으로 서서히 툴위그의 말에게 접근했고, 그것이 더욱 말을 겁나게 만들었다. "히힝! 히히힝!" 말은 이제 툴위그의 통제를 벗어나 날뛰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말의 발굽을 피해 가며 미친 듯이 짖어댔다. 그들의 날카롭고 큰 송곳니가 달빛에 희게 ㅂ났다. 그 모습을 보고, 말은 더욱 놀라 날뛰었다. "툴위그! 늑대들을 해쳐서는 안 돼! 차라리 도망쳐요!" 데이미아가 날카롭게 외쳤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날뛰던 툴위그의 말이 서서히 거리를 좁혀오던 늑대 한 마리에 힘껏 발길질을 한 것이다. 그 늑대는 동료들 틈으로 휙 날려져 땅에 곤두박질쳤다. 곧 고개를 들고 기세 좋게 컹컹 짖어대긴 했으나, 몸을 일으킬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이를 계기로, 늑대들이 모두 귀청이 찢어지도록 짖어대며 툴위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말은 놀라 도망치려고 했으나, 이미 까맣게 모여든 늑대 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늑대들이 말의 발길질을 피해, 다리와 목을 물고 늘어졌다. 금방 말은 보기 딱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어 비틀거렸다. 늑대들은 툴위그도 공격했으나, 그는 오랜 여행으로 단련된 민첩한 몸짓으로 간신히 그들의 이빨을 피해내고 있었다. "히히힝~!" 말이 드디어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듯 크게 비틀거렸다. 툴위그는 거의 말에서 떨어질 뻔 했다. "툴위그! 내 말에 타요!" 아까부터 그의 곁으로 가려고 노력하던 랜스가, 과감하게 늑대들 속으로 성큼 뛰어들며 소리쳤다. 말이 몹시 저항하며 몸을 비틀었으나, 그의 손아귀에 힘있게 쥐어진 고삐를 거역할 수는 없었다. 말은 겁에 질려 발버등 치면서도, 늑대들 틈으로 달려들어갔다. 쓰러져가는 말에 탄 툴위그가 필사적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랜스가 옴켜쥐는 순간, 늑대 한 마리가 펄쩍 뛰어올라 그의 정강이를 물었다. "윽!" 툴위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신음했다. 랜스의 손을 잡은 그의 손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빠졌다. 그 늑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다리를 확 잡아당겼다. 툴위그는 랜스의 손을 놓치며 말에서 떨어졌다. 늑대들이 기다 렸다는 듯, 그의 주위로 까맣게 모여들었다. 툴위그는 벌떡 일어나 도끼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늑대들이 더 빨랐다. 그가 도끼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한 마리가 그의 손목을 물어 그것을 떨어뜨렸다. 이것을 본 랜스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칼을 빼어들었다. "랜스! 안돼!" 하고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랜스의 칼이 툴위그에게 덤벼드는 늑대 한 마리의 배를 가른 후였다. 너덜너덜한 시체가 된 늑대가 툴위그와 랜스의 앞에 툭 떨어졌다. 늑대들은 잠시 겁을 먹은 듯, 짖는 것을 멈추고 으르렁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툴위그는 재빨리 랜스의 말에 올랐다. 그러나 늑대들은 결코 겁을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 서면서, 더움 그들을 단단히 포위하여 빠져나갈 구멍이 없도록 만들었다. 아까부터 로이의 주위에서 그를 보호하던 켈리는 채찍을 빼어들었다. 그 모습에 데이미아가 질겁을 하여 말렸다. "켈리, 저들을 공격해선 안돼요!" "나도 알아. 하지만 이미 일이 틀어졌어." 켈리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그리고 로이에게 말했다. "로이, 넌 틈이 생기면 딴생각 말고 도망쳐. 알았지?" "하지만...!" "나도 그럴거야. 이제 뭉쳐서 싸우면 저놈들을 자극할 뿐이니까. 흩어져 숨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야!"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켈리가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반박할 거리도 없었을 뿐더러, 그러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난 아직 칼도 잘 못쓰고... 하지만 이게 뭐야. 이디실의 주인 이라면서 짐만 되고 있으니...' 갑자기 늑대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소름이 끼칠만큼 살기등등한 소리였다. 로이는 그 소리에 몸이 완전히 굳어 버렸다. 그래서 늑대 한 마리가 자신의 얼굴을 향해 정면이로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었다. "하앗!" 그 늑대의 공격을 막아 준 것은 켈리였다. 그녀의 채찍에 튕겨나간 늑대는 동료들 틈으로 풀썩 떨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수십명의 늑대들이 로이와 켈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켈리는 채찍을 휘둘러, 로이를 늑대들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곧 까맣게 모여드는 늑대들 틈에서 그녀도 녹초가 되고 말았다. 그녀의 말은 벌써 온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로이! 이제 더이상 너를 지켜줄 수 없어. 도망쳐, 어서!" 켈리가 소리치면서, 늑대떼 한가운데로 죽어가는 말을 마구 몰았다. 그녀의 예기치 못한 행동에 놀란 늑대떼는 곧 로이를 제쳐두고 그녀에게 일제히 덤벼들었다. 로이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켈리와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로이가 도망치는 것을 눈치챈 늑대 몇 마리가, 그의 말 뒤로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나 말도 생사를 걸고 달리는 상황인만큼, 늑대들에게 쉽게 잡히지는 않았다. 로이는 방향조차 보지 못하고 눈을 꼭 감은 채 말 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한 늑대가 켈리의 말의 목을 덥석 물고 늘어졌고, 말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켈리는 말이 쓰러지기 직전에 말의 등을 박차고 뛰어올라, 바로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그 위로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늑대떼가 새까맣게 나무 밑둥에 모여 사납게 짖어대고 있었다. 랜스와 툴위그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고, 로이가 말을 달려 도망치는 모습만이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하게 보일 뿐이었다. '모두 무사해야 할텐데...' 켈리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떤 커다란 물체가 그녀의 뒷퉁수에 부딪혔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발을 헛디뎠으나,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곁의 나뭇가지를 잡아 늑대떼 속으로 떨어지는 것은 면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눈을 들었을 때, 그녀의 앞에서 커다란 갈색의 물체가 다시 돌진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재빨리 채찍을 휘둘러 그것을 나꿔챘다. 부엉이였다. '부엉이...? 부엉이들이 늑대하고 합작이라도 한다는 말이야?' 그러나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사방에서 부엉이와 올빼미, 그리고 다른 날짐승들이 켈리에게 덤벼들기 시작한 것이다. 채찍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나무 줄기에 꼭 붙었다. (계속) 로이도 켈리의 비명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늑대들의 짖는 소리에 파묻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당장 돌아가 그녀의 생사를 확인 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이미 로이의 말은 통제 불능이었다. 로이의 말은 그야말로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방향을 알아서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발이 닿는 대로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어두워서 한치 앞도 볼 수 없었다. 로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고삐를 손이 아프도록 꼭 잡고 있는 것 뿐이었다. "히히힝!" 갑자기 말이 비명을 지르며 멈추었으므로, 로이는 거의 떨어질 뻔 했다. 눈앞에 가파른 절벽이 가로놓여 있었다. 더이상 도망칠 길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디실, 날 다시 한 번만 도와줘!' 로이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이디실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그것을 뽑을 시간은 없었다. 늑대 한 마리가 로이의 말을 향해 덤벼 들어, 다리를 덥석 물었던 것이다. 말은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뒷걸음치다가, 벼랑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물론 그 위에 탔던 로이와 데이미아도 함께. 로이가 떨어지면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절벽 끝에 서서 미친듯이 짖어대며, 급속히 멀어져 가는 늑대떼였다. 그리고 곧 무엇인가 둔탁한 것이 로이의 머리를 강하게 때렸고, 그 다음 일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로이는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았고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고 게다가 온 몸이 움직일 수 없을 것처럼 쑤셨으나, 다행히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았다. 로이는 눈을 떠 주위를 둘러보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늑대 열댓 마리가 그의 바로 곁에서, 뼈와 내장이 드러난 말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저건 내 말...! 그런데 왜 나는 잡아먹지 않았지...?' 그러나 로이의 몸을 푹 감싼 검은 망토를 보는 순간, 궁금증은 사라졌다. 기를 감춘다는 제피로스의 망토... '...제피로스가 또 나를 구한 셈이군...' "로이? 로이, 깨어났니?" 귀 옆에서 데이미아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반가운 나머지 곁에 늑대가 있다는 것도 잊고 큰 소리로 말했다. "데이미아! 무사했구나!" 기운이 빠져서 아주 큰 소리를 낼 수 없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 이었다. 데이미아는 질겁을 해서 종알거렸다. "조용히 해! 바로 옆에 늑대가 있어!" 로이는 늑대를 흘끗 보고 고개를 끄덕인 다음, 속삭여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 난 네 곁에 있었어. 늑대들도 있었고..." "...찾으러 가야겠네." "뭐야? 언제 늑대를 또 만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래도 우리 둘만 있는 것보다는 안전할거야. 넌 지금 쥐가 되어 있고, 난 가뜩이나 싸우지도 못하는데다 다치기까지 했으니..." 그 말에 데이미아는 더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어?" "응..." 로이는 고개를 간신히 끄덕이며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검던 하늘이 이제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동쪽 하늘은 잿빛이라 해도 좋을 정도였다. "조금 있으면 날이 밝을 것 같아.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리고 로이는 다시 깜박 잠이 들었다. 꿈도 꾸지 않는 깊고 피곤한 잠이었다. 깨어났을 때, 두통은 조금 나아져 있었고, 하늘은 아침놀의 붉은 빛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검던 침엽수들은 차차 제빛깔인 녹색을 찾았다. 늑대들은 말의 고기와 내장을 다 긁어먹은 후, 입에 고깃덩이를 물고 뼈만 남은 말의 시체를 떠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로이는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늑대들의 발소리마저 사라지고 대머리 독수리들이 말의 뼈 주위로 하나 둘 내려앉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지친 몸을 일으켰다. 일어나려니 온 몸의 뼈마디가 항의라도 하듯 아팠으나, 그대로 누워 있는 것은 더 끔찍했다. 독수리들은 로이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것을 보고도 피해 날아가지 않았다. 어서 비키라는 듯이 힐끔힐끔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섬뜻해져서, 로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능한 한 빨리 놀려 그들로부터 도망쳤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니?" 한참 걷던 로이가 데이미아에게 물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여긴 요정들도 자주 오지 않는 곳이야... 드라이어드라고 이 산의 전부를 마음대로 헤집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로센 라스가 우리의 땅이듯,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각자의 영역이 있지." "그럼 여기가 다른 동물의 영역이라는 거야?" "...모르겠어... 아마 그런 것 같아. 설마..." "설마, 뭐?" "그...글쎄... 이건 우리들도 잘 모르는 전설일 뿐인데... 레젠디아에 사는 모든 용족의 시조, 게히스헨 메인의 이야기야. 다섯 명의 창조신 중 막내인 훼로크가 만든 생명체... 훼로크는 다섯 남매 신들 중 가장 창의적 이면서 동시에 가장 말썽꾸러기인 신이기도 했지. 그는 혼란이 끝나고 빛과 어둠, 선과 악이 나뉘어진 후에 생명체를 만들어내자는 신들의 합의를 무시 했대. 그리고 빛과 어둠의 지식을 모두 갖춘, 수명도 없고 그 지식의 한계도 없는 생명체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게히스, 즉 용이야. 그런데 게히스의 본질은 한계가 없다는 데 있었거든. 그래서 다섯 신의 창조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면서 점점 커진 거야. 한없이 커졌지. 나중에 모신 이조넬, 모든 생명의 어머니인 최고신이 그 모습을 보고 노발 대발했어. 그래서 훼로크는 그의 누이이자 어머니인 그녀의 처벌에 따라 땅 위로 내려와 용을 처리해야 했지. 그런데 그 용은 죽으면서 커다란 산맥이 되었고, 그 피에서 수없이 많은 다양한 용족들이 태어났지. 하늘로 뿜어 오른 피는 비룡이 되고, 물로 흘러들어간 피는 수룡으로, 그리고 땅 속으로 흘러들어 저승까지 다다른 피는 드래크로니안 족으로... 물론, 그들은 후에 동족들이 사는 땅을 찾아 저승을 등지고 왔지만. 그리고 그 산맥, 용들의 고향인 산맥은 드라크노움이라 불리게 되었지." "...이 산맥이 그 용... 정말 엄청나게 큰 용이었군." "그래... 그런데, 사실 죽은 건 게히스헨 메인의 육신 뿐이라는거야. 정신은 살아서 이 산을 지키고 있다는 거지... 그게 이 근처 어딘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그 용이 그렇게 지혜롭다면, 내 친구들이 어디 있는지 좀 가르쳐 줬으면 좋겠군." 로이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계속 발 닿는 대로 걸어갔다. 숲길은 침엽수들의 그림자 때문에 어두웠으며, 지금이 아침인지 한낮인지 아니면 저녁때가 다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단지 피곤해질 대로 피곤해진 로이의 발과 점점 더해 가는 배고픔이 시간을 짐작하게 해 줄 뿐이었다. "으으... 더이상은 못 가겠어." 로이는 드디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데이미아가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많이 아프니?" "아니... 그냥 배고파서 그래. 좀 있다가 다시 걷자." 둘은 말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쩐지 신비롭고 경건하기까지 한 분위기가 숲을 감싸고 있었다. 로이는 그제서야 오랜 시간동안 어떤 동물의 소리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들의 노래소리는 커녕 들짐승이 지나가다 나뭇잎 밟는 소리나 벌레가 윙윙거리는 소리조차 없었다. 파리 한 마리, 벌 한 마리 보이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로이는 피곤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데이미아... 여기... 어쩐지 이상해. 나가야겠어." 그리고는 데이미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발을 급히 옮기기 시작했다. 데이미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이 숲의 이상스러운 분위기를 눈치챈 것이다. 로이는 발을 돌려 왔던 길을 되짚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낯익은 길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검푸른 침엽수들만이 점점 더 울창해질 뿐이었다. 로이는 당황한 나머지 이 길 저 길로 마구 헤집고 다녔다. 그러나 어느 길로 가건 점점 더 울창하고 조용한 숲으로 간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로이는 결국 포기해 버렸다. 이제 나무들이 너무 거대해져서, 줄기는 거대한 기둥 같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 달린 가지들은 온통 하늘을 덮어서 주위를 어두운 동굴 속처럼 만들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 간신히 비쳐 들어오는 가는 햇살만이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해 줄 뿐이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이런 데가 드라크노움에 있었나...?" 데이미아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로이는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곧 주위는 완전히 어두워졌고, 더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깜깜하고 바람 소리만이 귀를 간지럽히는 그곳은 동굴이나 감옥과 다름없었다. 사방이 뚫려 있고 벽 따위는 없었지만, 나갈 수 없다는 사실이 로이의 가슴 깊이 들어와 박혔다. '...여기서 나갈 수 없어. 나갈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로이는 그 생각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러고 있지, 뭐... 어차피 여기서 굶어죽을 건데, 피곤하게 헤맬 필요 없잖아?' 그러나 그 순간, 데이미아의 절박한 외침이 정적을 깨뜨렸다. "로이! 속지 마! 그건 네가 생각하는 게 아냐!" "뭐...?" 로이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이 숲의 길 잃은 영혼들, 여기서 나가는 길을 허락 받지 못한 채 몸은 삭아 없어지고 영혼만 남은 인간과 요정들이 하는 말들이야.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로이, 날 믿어! 흔하지 않지만 나가는 길을 허락 받은 요정이 분명히 있었다고!" '나갈 수 없어... 데이미아가 틀린 거야...' 이런 생각은 로이의 마음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나가는 길이고 뭐고 다 귀찮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여기서 이러다가 잠들어 죽으면 모든 것이 쉽게 끝나지 않을까. 그 오르크들도, 늑대들도.... '늑대...!' 갑자기 로이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아! 내가 뭐하고 있는 거야? 어서 친구들을 찾아야지!' 로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직도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갈 수 없어... 포기해...' 그러나 로이는 이제 그것이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취하고 있을 뿐이지, 그리고 그의 귀 밖이 아닌 머리 안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뿐이지, 그것은 분명히 타인의 말이었다. "야! 누군지 그만 좀 해! 이제 안 먹혀드니까!" 로이는 허공을 향해 이렇게 소리쳤다. 그러자 머릿속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들더니, 한참 후에는 사라져 버렸다. "별 재수 없는 귀신들 다 보겠네... 데이미아, 어서 가자! 들어오는 길이 있으니 나갈 길도 있겠지!" "그래, 그래야 로이지!" 데이미아가 기쁜 듯이 대꾸했다. 그러나 로이가 막 걸음을 떼려는 찰나,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가 아닌 머릿속에서 들려온다는 것은 아까의 목소리들과 똑같았으나, 이번 것은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인간...' 조용하고 속삭이는 듯 낮지만 무한한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로이는 그 목소리의 기운에 압도되려는 자신을 간신히 추스르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야? 허튼 수작 안 통한다고 내가 말했지!" (계속) '두려움이 허세로 나타나는 법... 나를 두려워하지 말라, 인간...' 그 목소리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상냥한 태도로 말했다. 로이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뭐야? 이건... 설마 게히스헨 메인...?' '그렇다... 혹은 용들의 조상... 후세의 생명들이 내게 붙인 이름...' 그 목소리의 대답에 로이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이건! 내 마음 속까지 들여다보는 거야?' '놀라지 마라, 인간... 내가 그대의 마음에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그대의 마음의 목소리를 직좁 들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 "음... 좋아요." 하고 로이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게히스헨 메인, 그럼 제가 지금 가장 알고 싶어하는 게 뭔지도 아시겠네요?" '물론이다. 그대가 알기를 원하는 것은 내 숲에서 나가는 길. 그리고 동료들의 생사...' "가르쳐 주실 건가요?" 하고 이번에는 데이미아가 물었다. 그녀의 머리에도 로이의 머리에 들리는 목소리가 똑같이 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알려 주겠다,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의 딸. 그대와 그대의 인간 친구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으니...' '그 유령들이 저 용의 시험이었단 말야?' 하고 로이는 생각했다. 그러자 당장 대답이 날아들었다. '그렇지는 않다. 그들은 단지 이 숲의 유령... 내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해 나가는 길을 허락받지 못한 존재들일 뿐... 그들의 슬픔이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신들과 같은 길을 걷도록 유혹하는 것이다. 한밖에는 남지 않은 가여운 정신들...' "그들이 불쌍하다면 왜 내보내지 않았죠?" '가치가 없는 자는 게히스헨 메인의 숲에 들어와서는 안된다... 만약 들어왔을 때에는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것이 내가 이 숲을 지키는 방식... 그리고 내 친구들이 이 산맥을 지키는 방식...' 로이는 침묵했다. 게히스헨 메인의 방식은 분명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무턱대고 반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려움이 없다면 이 숲에 발을 들여놓고, 나무를 베고 짐승을 죽이지 않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바로 그렇다, 인간... 두려움, 그것이 우리들과 인간들 사이의 예의... 그러나 그대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무 걱정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의 발이 인도하는 대로 나아가라... 내가 그 발을 내 영지 밖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것이 첫번째 물음의 해답...' "그럼 두번째 물음은?" 로이가 다급하게 물었다. '걱정하지 말라... 그대의 친구들 중 페레이타의 땅(저승)으로 간 자는 없으니... 목적지에서 모두 만나게 될 것이다...' "목적지? 로센 라스 말인가요?" 로이가 다시 물었으나, 더이상 게히스헨 메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로이는 한숨을 쉬고는, 아무데로나 걸어가기 시작했다. -------------------------------------------------------------------- 툴위그는 머리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렸다. 켈리가 물통을 그의 머리 위에 쏟아붓고 있었다. "켈리...! 살아있었군..." 툴위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켈리는 씩 웃으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몇 군데 긁힌 것 빼고는 멀쩡해요! 하지만 툴위그는 엉망 진창이네요. 그래서 걷기나 하겠어요?" 툴위그는 일어나 앉으려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눅대에게 물렸던 정강이의 상처가 생각보다 깊었던 것이다. 솔직히 그 자신도 이런 다리로 오래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켈리도 그다지 말짱해 보이지는 않았다. 흙투성이가 된 옷이 찢어져 크고 작은 상처들을 드러내고 있었다. 툴위그처럼 깊은 상처는 없었지만, 그녀도 녹초가 될 만큼 격전을 치룬 게 분명했다. "랜스는...?" 툴위그가 억지로 일어나 ㅇ으며 물었다. 켈리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요. 실력 좋으니 어디선가 잘 있겠죠." "으휴, 냉정하긴... 하여긴 인간들이란..." "냉정한 게 아니라 그를 믿는 거라구요. 그보다 로이가 걱정이에요." 이렇게 대꾸하며 켈리는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 보았다. 마치 로이의 모습을 찾으려는 듯이.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그들을 포위하듯 둘러싼 빽빽한 침엽수들 뿐, 로이와 데이미아의 모습이 보일 리 없었다. "...이제 어떡하지?" 툴위그는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10여년 간의 여행 끝에 드디어 이디실과 엘미어의 주인을 찾고, 이제 로크 페울로니가 한자리에 모이는 것도 시간 문제라고 믿었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어떡하긴요. 로이랑 데이미아를 찾아야죠. 그 어린애들이 이 미친 짐승들만 가득한 숲에서 어떻게 하겠어요?" 켈리가 뭐 그런 쓸데없는 것을 다 물어보냐는 듯이 대답했며, 손을 툴위그의 눈앞에 쑥 내밀었다. "자! 일어나서 찾아보자구요. 설마 업어달란 소린 안 하겠죠?" "켈리... 하지만 말야... 내 생각에는 그 애들이 이미..." 툴위그는 어두운 얼굴로 더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켈리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 이디실의 주인이 말인가요?" 툴위그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녀는 이런 식이었다. 독사에 물렸을 때도, 지하 미궁에서 길을 잃었을 때도, 며칠씩 잠도 못 자고 욕심 많은 인간족의 영주에게 쫓겼을 때도... "...넌 최악의 경우 따윈 생각 안 하나보지. 젊다는 게 좋긴 좋구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에요?" "사실이잖아." 툴위그는 기운을 내어 켈리의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다리의 상처가 몹시 욱신거렸으나,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켈리에게 부축을 부탁할 수도 없었다. 그녀 역시 늑대들과 싸우느라 지쳐서 쓰러지기 직전일테니까. 절룩거리며 혼자 힘으로 것는 도리밖에 없었다. "말들은 도망갔나?" "그랬으면 차라리 좋게요. 다 먹힌 것 같아요." 침엽수들의 그림자가 땅을 어둡게 덮고 있었다. 태양을 볼 수 있으면 방향이라도 짐작해 보련만, 하늘을 덮은 나뭇가지들과 어지럽게 ㄱ친 울창한 침엽수들 사이에서는 그것도 불가능했다. 방위를 안다 해도 뽀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로센 라스로의 길을 아는 유일한 인물인 데이미아가 없었으니까. 그들은 정처없이 걷고 또 걸었다. 늑대들의 침입에 신경이 곤두선 그들은 다람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말과 함께 있던 식량도 깡그리 잃었으므로, 먹은 것이라고는 깨끗한 시냇물과 야생 과일 몇 개 밖에 없었다. 물론 사냥을 할 수도 있었으나 켈리도 툴위그도 더이상 드라크노움의 짐승들에게 덤빌 배짱은 없었다. "저것 봐요!" 한참을 걷던 중, 켈리가 갑자기 어떤 곳을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검은 빛과 잿빛의 털뭉치같은 것이 잔뜩 흩어져 있었다. 땅은 피가 흘러들어 붉은 빛이었다. "늑대떼들의 시체군... 우리가 싸웠던 장소로 돌아온 건가?" "아녜요, 툴위그. 자세히 봐요. 늑대 시체 뿐이 아녜요!" 사실이었다. 늑대들의 시체 속에, 갑옷을 입은 오르크들의 시체도 함께 뒤섞여 있었다. 격전이 벌어졌던 듯, 늑대의 시체건 오르크의 시체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꼴들이었다. "맙소사! 오르크도 늑대도... 엄청나게 많군." "늑대는 최소한 80마리... 오르크는 50마리쯤 되는 것 같은데요. 두 편 모두 전멸한 것 같군요." 켈리는 대담하게 한 오르크의 시체로 다가가, 그 위에 엎어져 죽은 늑대의 시체를 치웠다. 그러자 그 오르크의 갑옷 가슴 부위에 있던 문장이 드러났다. 세 개의 해골 위에 검과 도끼가 세워져 있는 문장이었다. "멋진 문장이네요... 공들여 세공했어요. 대장이 틀림없어요." 툴위그도 그 문장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쟁이들이 흔히 그렇듯 그 역시 광물에 대한 분별력이 뛰어났다. 이 갑옷은 분명 오르크들의 고향, 우클로우에서만 나는 금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세공술은 오르크들의 솜씨가 아니었다. '난쟁이나 인간 노예가 만든 것일까...?' "이제 모두 이해가 되네요. 오르크들이 이 숲에 침입해서 늑대들을 죽였어요. 그래서 늑대들은 모든 외부인들에 대해 경계하게 된 거고, 그러다 보니 어젯밤 같은 일이 생긴 거로군요." 켈리는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 시체들 사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몇 발짝 옮기기도 전에, 툴위그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쓰러뜨렸다. "위험해!" 쓰러진 그들 위로 아슬아슬하게 늑대 한 마리사 스쳐 지나갔다. 목표물을 공격하지 못한 그 늑대는 시체들 위로 털썩 떨어졌다. 툴위그는 재빨리 일어서서 그의 거대한 도끼를 뽑았다. 부상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날랜 몸짓이었다. 이에 질세라, 켈리도 펄쩍 뛰듯 일어나 칼을 뽑았다. 둘은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그 늑대가 다시 공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늑대는 한참동안이나 쓰러져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으나, 금방 다리가 꺾이면서 다시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저 녀석, 다쳤군." 하고 툴위그가 도끼를 제자리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켈리도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아까의 공격은 저 늑대가 마지막 힘을 다한 것이 틀림없었다. 툴위그가 조용한 걸음으로 그 늑대에게 다가갔다. 늑대는 송곳니를 한껏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자... 착하지... 도와주려는 거야..." 늑대의 허리에 작은 오르크 도끼가 박혀 있었다. 치명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꽤 깊은 상처인 것만은 분명했다. "켈리, 오르크 도끼가 박혀 있어." "...그래서, 뽑아주자고요?" 켈리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성인군자 나셨네. 난 일 없으니 하려면 혼자 하세요. 물려 죽어도 난 몰라!" "좋아, 그럼 혼자 하지 뭐." 툴위그는 태연하게 말하고는 다시 늑대에게로 한 발 다가섰다. 늑대는 위협을 느꼈는지 귀가 아프도록 큰 소리로 컹컹 짖었다. 그래도 툴위그가 물러갈 기색이 없자, 아예 입을 크게 벌리고 덥썩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늑대의 이빨이 툴위그에게 박히기 직전, 켈리가 소리쳤다. "쉬린! 사 헤인 로!" 늑대의 움직임이 아슬아슬하게 멈추었다. 그의 눈이 한편으로는 놀란 듯, 한편으로는 의심스러운 듯 켈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짐승의 눈이 아닌, 지성이 깃든 눈이었다. 툴위그가 놀라 물었다. "뭐라고 한 거야?" "도와주려는 거니까 물지 말라고요. 고대어만 알아듣다니, 잘난 체 하는 녀석이네. 늑대 주제에..." 켈리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좀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 늑대를 향해 물었다. "로 데하인 라히예드? (고대어를 알지?)" "크르르르...." 늑대는 의심을 감추지 않았으나, 어쨌든 입을 다물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툴위그는 용기를 내어 그 늑대의 바로 옆까지 다가갔다. 매우 커다란 늑대였다. 북부 산간 지대인 툴위그의 고향, 로그라드에서도 이만큼 큰 늑대는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긴 잿빛 털은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은빛 윤기가 흘렀다. 툴위그가 그 늑대의 옆구리에 박힌 오르크 도끼에 손을 댈 때에도, 그는 미동 없이 켈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표정이 담긴 눈으로. 마치 '저 인간 여자는 누구이길래 고대어를 아는가?'라고 묻는 듯했다. 툴위그는 힘껏 오르크 도끼를 빼내었다.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지를 줄 알았던 늑대는, 의외로 잠시 꿈틀하며 신음하듯 으르렁거렸을 뿐이었다. 켈리가 얼른 와서 자신의 망토를 찢어, 늑대의 상처를 지혈해 주었다. (계속) "참을성이 대단한 놈이군!" 켈리가 감탄했다. 늑대는 그제서야 경계심이 누그러진 듯, 그녀의 손을 한 번 살짝 핥았다. 오만한 태도였다. 마치 귀족이 평민에게 자비심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툴위그는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저 녀석... 아무래도 늑대 같지 않아. 저 표정 하며..." "왜 그래요, 이 녀석 도와주자고 먼저 그런 게 툴위그 아니었어요?" 켈리와 늑대는 이미 꽤 친해진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물을 조금 따라 그 늑대가 핥아먹도록 했다. "도대체 고대어 알아듣는 늑대가 어딨어?" "드라크노움의 늑대니까요. 용들의 조상, 게히스헨 메인의 지혜를 공유하는 짐승들이죠. 전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들은 늑대가 기운을 차릴 때까지 잠시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그 늑대가 네 발로 일어섰을 때, 그들도 길을 떠나기 위해 일어섰다. 그러나 그 늑대는 할 말이라도 있는 듯, 가려고 하는 켈리의 망토 자락을 물고 끌어당겼다. "...따라오라는 것 같은데요?" "그럼 따라가 보지 뭐." 툴위그는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다. 그에게 이 늑대는 말 모르는 짐승이라기보다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쯤으로 느껴졌다. 늑대가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날렵하고 조용한 걸음걸이였다. 상처의 고통 따위는 거의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 뒤를 켈리와 툴위그가 지친 발걸음으로 따랐다. 어두운 숲을 뚫고 반 시간 남짓 걸어가자, 그들의 시야가 트이면서 눈 앞에 밝은 호수가 나타났다. 아름답고 맑은 호수였다. 들오리들이 고기들과 함께 투명한 물 위를 떠다니고 있었고, 고운 자9갈이 깔린 물 밑이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잔잔하고 맑았다. 그 주위로는 거대한 침엽수들이 든든한 호위병들처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숫가 옆, 켈리와 툴위그의 바로 앞에, 피투성이가 된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놀라서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랜스?!" 켈리가 어쩔 줄을 모르고 멍하니 서 있는 사이, 툴위그는 재빨리 달려가 랜스를 안아 일으켰다. 상처투성이였다. 특히 왼팔에는 보기만 해도 섬뜩할 정도로 크게 살점이 뜯겨나간 자국이 있었다. 체면불고하고 걸음아 나 살려라 출행랑을 친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늑대들과 정면으로 맞붙은 것이 분명했다. 그의 맥박을 재어 본 툴위그는 비로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다행이야. 생명에 지장은 없을 거야. 그런데 왜 늑대들은 그를 죽이지 않았을까? 이 상태라면 분명히 쉽게..." "저 호수 때문이겠죠." 켈리가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로센 쉐리엘, 요정들의 물... 여긴 늑대들의 영역이 아니라 요정의 땅이에요. 늑대들은 여기서는 아무것도 죽일 수 없었겠죠. 숲의 요정족, 드라이어드 족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늑대는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듯, 고개를 숙인 채 고리를 흔들었다. "어쨋거나 다행이군... 그런데 이 친구를 이제 어떻게 데려가지...?" 그러나 그러한 툴위그의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울창한 침엽수들 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던 것이다. "무기를 버려라! 침입자!" 서툰 공용어였다. 켈리와 툴위그는 놀라서 두리번거렸으나, 겹겹이 엉킨 침엽수림 속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지 않고도, 이상한 울림이 있는 맑은 목소리의 주인이 요정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무기를 버려라!" 다른 목소리가 말했다. 이와 동시에, 가느다란 화살 한 개가 날아와 툴위그의 발의 바로 앞에 꽂혔다. 툴위그는 놀라서 펄쩍 뛰며 화를 내었다. "요정들이란...!" "툴위그,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겠어요." 켈리가 불안한 듯 경고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 새 그의 커다란 도끼가 쥐어져 있었다. "올 테면 와 봐라. 이 버릇없는 요정들! 내가 손님에 대한 예의란 것이 뭔지 가르쳐 주지!" 켈리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시 화살들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발 밑으로가 아니라 툴위그의 가슴을 정확히 겨냥해서였다. 그러나 그의 커대한 도끼날이 그 화살을 막아 내었다. 힘없이 땅 위에 떨어지는 화살을 보고, 그는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멀리서 활 쏘는 것밖에 하지 못하다니, 요정들이란 역시 어쩔 수 없는 겁쟁이군! 용기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직접 덤벼 보시지!" "툴위그!" 켈리가 말리려고 했으나, 이미 늦었다. 숲에서 녹색의 물체가 재빨리 튀어나와 툴위그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녹색 옷을 입은 요정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단도가 반짝 빛났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툴위그의 목을 노리며 덤벼들었으나, 툴위그는 어렵지 않게 그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큰 도끼를 마구 휘두르자, 그 요정을 피하기 위해 비틀거리다가 미끄러져 쓰러졌다. "뭐야, 애송이로군!" 툴위그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말 그 요정의 얼굴은 앳된 소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로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까. 그러나 분명 50살쯤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툴위그! 어리석은 짓 그만 해요!" 켈리가 날카롭게 경고했다. "내가 뭘? 먼저 공격한 건 이 녀석인걸. 안 그래?" "사야크스 브로인! (더러운 난쟁이!)" 요정 소년은 목에 도끼의 날이 닿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의가 가득한 말투로 소리쳤다. 그 말에 툴위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말 버릇없는 애송이군!" 켈리는 툴위그가 그 소년을 정말로 해치려 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료 요정들은 달리 생각한 것이 틀림없었다. 또 한 명의 요정이 숲에서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페이 세이스 제에데스...!" 그 요정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왔고, 곧이어 작고 푸른 불덩이가 툴위그를 향해 돌진했다. 불시의 습격을 당한 툴위그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다. 그 기회를 틈타, 잡혀 있던 요정 소년은 재빨리 친구에게로 도망쳤다. 툴위그의 앞에 버티고 선 요정도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녹색 옷 대신 마법사들이 입는 하얀 로브를 입고 있었다. 공격이 빛나간 것을 깨닫고 그의 얼굴에 수치심의 표정이 스쳤다. 그러나 곧 다시 새로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알 다렌 샤이드..." 그러나 툴위그가 기회를 줄 리 없었다. 곧 도끼가 그에게 날아들었고, 그는 주문을 집어치우고 몸을 날려 피해야 했다. 그 소년이 다시 일어섰을 때, 그의 목 옆에는 켈리의 서늘한 칼날이 들어와 있었다. "안됐다, 꼬마야. 난 이런 바보같은 싸움에 끼고 싶지는 않지만, 내 동료를 죽이게 놔 둘 수야 없지." "정말 성가신 애들이야!" 툴위그가 옷을 털며 투덜거렸다. 그러자 켈리가 그를 노려보며 핀잔했다. "진짜 성가신게 누군데..." 그러나 그 순간, 켈리도 툴위그도 얼굴이 굳어지고 말았다. 갑자기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목 위의 얼굴을 제외하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예의가 없으시군요, 난쟁이, 그리고 인간." 숲에서부터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깊고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흰 로브를 입고 흰 지팡이를 짚은, 요정족의 남자가 걸어나왔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라고는 없었고 머리칼은 윤기가 흐르는 갈색이었으나, 세상의 슬픔을 모두 안다는 듯한 눈동자는 그의 무한한 나이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이 소년들이 우리를 먼저 공격했는걸요, 에이니드(마법사님)!" 하고 켈리가 대꾸했다. 툴위그는 분에 찬 표정으로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먼저 당신들이 우리의 영지에 들어왔습니다." "지나가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녜요? 당신네 드라이어드들은 저 늑대들보다도 더 이해심이 없군요." 그러자 잠시 기분나쁜 표정이 그 요정의 얼굴에 스쳤다. 켈리에게 잡혀 있던 요정 소년은, 그제서야 재빨리 그에게로 도망쳤다. "에이니드 세렉...!" "닥쳐라, 모레이드!" 세렉이라 불린 그 요정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내 뒤를 이어야 할 네가 이 무슨 경거망동이냐! 루밀과 함께 집에 돌아가 있거라. 곧 알맞은 벌을 내리겠다!" 그 말에 두 소년은 기가 완전히 죽어서 숲 속으로 사라졌다. 켈리가 그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에이니드 세렉... 키야스 데인 플리에타? (마법사 세렉... 플리에타의 남동생?)" 그녀의 말에 세렉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이윽고 따지듯 물었다. "인간으로서 내 누이를 알고, 고대어를 말할 줄 알다니? 당신의 정체는 무엇이오? 흑마술사들의 밀정?" "그냥 좀 유식한 여행자라고 해 두지요. 인간족이라고 모두 고대어, 라히예드를 잊은 것은 아닙니다, 세렉." 켈리는 여유있는 미소까지 보이며 답했다. "어쨌든 이 마법좀 풀어 주면 안 되나요?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당신의 조카, 플리에타의 딸 데이미아와 함께 여행하던 일행입니다...비록 지금은 이렇게 서로 흩어지게 되었지만요." 세렉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플리에타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소, 인간! 데이미아도 마찬가지요."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된 것이었겠죠. 시신을 확인했습니까? 그녀는 엘미어의 계승자였고, 그 비밀을 지키기 위해 피신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곧 이곳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그녀를 직접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이 사실을 알겠습니까?" 세렉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가 지팡이를 한 번 가볍게 흔듬과 동시에, 켈리와 툴위그의 몸은 마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다. 켈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단한 마력입니다! 주문조차 읊지 않고 그렇게 묶기 마법을 사용하시다니... 역시 플리에타의 동생분이시군요. 그녀도 '눈빛 하나로 바람의 움직임조차 멈추어 버렸다'고 하지요." "당신들의 아부나 들으려고 풀어준 것이 아니오. 만약에 엘미르의 계승자이기도 한 제 조카 데이미아가 살아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당신들은 당장 우리의 여왕님이신 아렌데일께 그것을 말씀드려야 하오. 당신들 자신의 입으로!" 세렉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가 말을 마치자 숲에서 열 명 정도의 요정들이 활과 단도로 무장한 채 걸어나왔다. 모두 드라이어드 족의 빛깔인 녹색과 갈색의 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어린 소년이나 여성도 끼어 있었다. "저 요정이 우릴 의심하는군 그래!" 툴위그가 툴툴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켈리가 얼른 조용히 하라는 눈짓을 보내며 속삭였다. "지금은 험한 시대에요. 드라크노움까지 오르크가 들어오다니... 저들의 경계는 당연한 거라고요." "흥, 하지만 요정들은 언제나 저 모양인걸. 우리 글렌델 가는 언제나 요정들에게 친절했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아왔지만, 그 댓가로써 동등한 친절과 신뢰를 되돌려 받은 적은 없었어!" 세렉은 그들의 대화에는 관심도 없는 듯 했다. 데이미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부터 그는 침착성을 잃고 있었다. 그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갑자기 정신이 든 듯 동료 요정들에게 말했다. "저들의 무기를 빼앗으시오. 여왕님께 데려가야 합니다." 켈리와 툴위그는 순순히 무기를 내 주었다. 랜스는 키가 큰 요정 궁수의 등에 업혀졌다. 요정들이 그들을 호송해 가려 하자, 아까부터 아무 반응 없이 그 광경을 지켜보던 늑대가 그들을 따라 나섰다. "...펠히스?" 세렉이 놀랍다는 듯 그 늑대를 보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해가 안된다는 듯, 켈리와 툴위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붙임성이 있는 늑대가 아닌데...?" 그러나 그들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세렉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상관없다는 듯 호수 쪽으로 몸을 돌렸다. "갈 아스틸라 렐 아렌데일, 레이스 데인 라스헨 로센! (아스틸라와 숲의 요정의 지배자, 아렌데일의 이름으로!)" 툴위그와 켈리는 호수의 물이 반으로 갈라지지는 않을까 기대하며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들의 얼굴에 나타나는 실망을 보고, 한 요정 여인이 경멸스럽다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인간과 난쟁이들이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밖엔 보질 못한다니까!" 세렉이 호수의 표면 위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는 옷자락 하나 적시지 않은 채 수면 위에 둥둥 떠 있게 되었다. 다른 요정들도 마찬가지로 수면 위를 걸어갔다. 툴위그와 켈리도 좀 긴장하며 수면 위로 올라섰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출렁거리는 모래 표면 위에, 혹은 커다란 젤리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하여간 희한한 종족이라니까..." 켈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계속) 호수를 건넌 그들은 잠시 숲길을 걸었다. 켈리와 툴위그가 이제까지 걸어온 다른 숲들과 다를 바가 없는 숲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그들의 머리 위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며,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툴위그도, 켈리도 본 적이 없는 풍경이었다. 계절과 인간의 도끼와 들짐승과 날씨의 변덕에서 벗어난, 나무들의 세계. 그 세계에는 계절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햇살은 따뜻한 봄날의 것이었고 여름과 가을과 봄에 피는 꽃들이 모두 제멋대로 피어나고 있었다. 나무들도 제각기 봄의 산뜻한 연두빛과 여름의 짙은 녹색과 아직 윤기가 흐르는 초가을의 노란 나뭇잎들을 마음대로 내어 걸고 있었다. 그러나 헐벗은 나무는 단 한 그루도 없었다. 바닥에는 무성한 녹색 수풀 위로 형형색색의 낙엽들이 쌓여 있어서, 질 좋은 양탄자처럼 푹신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요정들, 나무들 사이로 수많은 요정들의 모습이 보였다. 갈색 혹은 녹색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종족들, 녹색 눈과 갈색 혹은 금발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가진, 숲의 종족 드라이어드. "로센 라스, 요정의 숲이로군..." 하고 켈리가 경탄에 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렉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아 데인 에인(인간의 전쟁) 이후 이 땅에 발을 들여놓은 외부인은 당신들이 처음입니다. 자, 갑시다. 데이미아가 살아 있다면, 아렌데일께서 당장 그 이야기를 들으셔야 하니까." "그러나 랜스는...?" 툴위그가 항의했다. 그러자 세렉은 그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대답했다. "부상자는 우리가 알아서 치료합니다. 설사 적이라 해도 상처 입은 자에게 함부로 대하지는 않으니 염려 마시죠." "그냥 가요, 툴위그. 지금으로선 이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으니까." 켈리도 거들었다. 툴위그는 걱정스러운 듯 정신을 잃은 랜스를 흘끗 바라보고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켈리와 함께 세렉의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만일을 위해 바짝 긴장한 두 명의 요정이 따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요정들은 랜스를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로센 라스는 꽤 넓었다. 한참을 걷자 비로소 세렉이 말했다. "아렌데일, 레이스 데인 라스헨 로센의 거처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켈리도 툴위그도 그런 광경은 본 일이 없었다. 열 그루의 거대한 나무들이 원을 그리며 둘러서 있었다. 몇백 사람이 들어가 누워도 좋을 만큼 큰 원이었다. 그 나무들은 모두 같은 종류로, 두 사람이 함께 팔을 벌리고 안으면 간신히 맞닿을 정도로 굵었고, 그 표면은 깨끗한 눈처럼 흰빛이었다. 그 나무들은 키가 몹시 커서 하늘에 닿아 있는 것처럼 보였고, 열 남자의 키쯤 되는 높이부터 가지가 뻗어 있었다. 그 가지들은 서로 겹치고 뒤엉켜서, 어떤 가지가 어떤 나무에서 나온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 모든 나뭇가지에 수많은 꽃들과 나뭇잎들이 달려 있었다. 작고 흰 꽃들이 무리를 지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쉴새없이 꽃잎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는 당장 새로운 꽃봉오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뭇잎 역시 계속 새로 돋아나고 성숙하고 금빛으로 변하여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 주기가 각각 달라 연두색, 짙은 녹색, 황금색의 나뭇잎이 한데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땅은 위에서 눈처럼 떨어져내리는 꽃들과 낙엽들에 의해, 푹신한 이불처럼 뒤덮여 있었다. 세렉과 요정들은 서슴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도 없는 건가...?" 켈리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렉이 핀잔하듯 대답했다. "문지기 따위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이 숲의 모든 나무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데." 켈리는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런 식으로 여왕의 거처에 마음대로 드나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무 밑, 넓은 원형의 홀 중앙에는 높은 의자가 있었다. 분명 나무 줄기가 이리저리 얽힌 것에 불과한데도, 신기하게도 그것은 높은 계단과 그 꼭대기에 얹혀진 커다란 의자의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상스러운 의자 위, 녹색 눈의 요정 여인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밝은 갈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칼 위에 얹힌, 금빛 낙엽으로 엮어진 왕관이 그녀의 신분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세렉이 나무 줄기로 된 계단을 올라가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른 요정들도 한 발 물러서 무릎을 꿇자, 켈리와 툴위그도 영문도 모르는 채 그냥 그들을 따라 무릎을 꿇었다. 계단 위에서는 세렉과 여왕이 무엇인가 요정 언어, 즉 고대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먼 데다, 그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소근소근 이야기했으므로, 고대어를 아는 켈리도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왕이 눈을 돌려 켈리와 툴위그를 똑바로 돌아보았을 때, 그들 둘 다 그 위엄에 잔뜩 주눅이 들어 버렸다. 여왕은 일어서서 계단을 내려와 그들에게로 다가섰다. 그녀는 키가 컸고, 그 얼굴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옷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다른 빛깔로 변했는데, 녹색 같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했다. 숲의 빛깔이었다. "플리에타의 딸의 소식을 가져 오셨다고요, 인간, 그리고 난쟁이?" 여왕은 그들 앞에 서서 공용어로 물었다. 그러나 발음은 고대어 식이어서, 듣기에 아름답긴 했으나 좀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한 바람에 낙엽이 스치는 소리 같았다. "그렇습니다, 라스헨 레이스(숲의 지배자)! 이 난쟁이는 툴위그 젠 글렌델, 자일 게르 글렌델의 직계 자손이며, 저는 여행자 켈레브리스입니다." "글렌델 가! 그렇다면 세렉! 그대는 실수를 했군. 글렌델 가는 우리 종족의 친구요." 여왕의 말에 세렉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툴위그는 당장 표정이 밝아졌다.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여왕 폐하!" "그리고 그대, 고대어를 아는 인간! 게다가 고대어 이름까지 가지고 있군요.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던가요?" 켈리는 어색할 정도로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폐하, 불행히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이상한 일이군요. 그대의 얼굴은 낯이 익은데. 그렇다면 데이미아의 소식이나 말해 주시오. 그녀가 살아 있습니까?"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저희는 그녀의 안내로 드라크노움에 왔으며 이 숲, 로센 라스를 찾아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도착을 코앞에 두고 늑대들의 습격을 받아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늑대들." 아렌데일 여왕은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이 숲을 지키는 전사들입니다. 공정하고 용서가 없죠. 그들을 자극했다면 데이미아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디실의 주인과 함께 있으니까요." 켈리의 발언은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다. 아렌데일 여왕은 크게 충격을 받은 모습은 아니었으나,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세렉과 다른 요정들은 우스울 정도로 표정이 굳어졌다. "엘미르의 계승자에 이디실의 주인까지... 그럼 벌써 새 시대가 열릴 시기가 되었다는 뜻인가요?" 아렌데일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웃음을 띄운 채 물었다. 그러나 켈리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 세렉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믿을 수 없습니다, 아렌데일! 갑자기 끼어드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저들은 거짓말쟁이입니다. 이디실의 주인이라고요? 이디실은 용족의 손을 벗어난 이후 아무도 그 행방을 알지 못하는데! 분명 데이미아가 살아 있다는 말도 새빨간 거짓말일 것입니다!" "거짓말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툴위그도 흥분해서 외쳤다. 여왕의 어전이라는 것 따위는 이미 잊은 것 같았다. 세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비웃음을 숨기지도 않고, 툴위그 에게 소리쳤다. "브로인(난쟁이)! 당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증거를 대 줄까? 지금 당장, 여왕님의 앞에서 데이미아의 모습을 설명해 보시오. 그 애를 만났다면 그 정도는 쉬운 일이겠지!" 툴위그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의... 모습은 보지 못했소. 그녀는 마법에 걸려 쥐의 모습이..." "하! 쥐의 모습? 핑계도 가지가지군. 당신들은 데이미아를 보지 못했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그애의 이름을 써먹었을 뿐이지! 감히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 플리에타를 뜻함)의 일족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모욕하다니!" 그 말에 툴위그는 얼굴빛이 달라질 만큼 분노했으나,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켈리는 침착하게 세렉을 노려보며 대답했다. "세렉, 당신은 예의를 모를 뿐 아니라 어리석기까지 하군요. 도저히 현명한 플리에타의 동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요! 그런 질문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정족의 서사시를 웬만큼 아는 사람이라면, 플리에타의 딸들이 모두 그녀를 빼닮았고, 그러므로 여기 계신 아렌데일과 흡사한 모습 이라는 것 쯤은 쉽게 대답할 수 있을 테니까요! 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툴위그가 사실을 말하도록 놓아 두었습니다. 그 이유로는 첫째, 당신이 조카에 대한 애정 때문에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고, 둘째, 툴위그도 저도 거짓말쟁이가 아니라 명예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그런 뻔한 질문은 하지 마십시오. 명예를 모르는 거짓말쟁이라면 당신을 쉽게 속이고 로센 라스에 발을 들여놓을 테니까요!" 세렉은 항의하기 위해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으나, 아렌데일 여왕이 그를 막았다. "그만하면 됐네, 세렉. 이 자는 그대를 속일 수 있으면서도 속이지 않았어. 그것은 이 자가 정직하다는 것을 뜻하네." "그러나..." 세렉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툴위그와 켈리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켈리의 얼굴을 본 순간, 갑자기 표정이 굳어지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치 이제까지 보지 못한 것을 보았다는 듯이. 툴위그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으나, 별로 달라진 점은 없었다. 평상시와 달리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 잠시동안의 침묵을 깨고 아렌데일이 침착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켈레브리스, '약속을 지키는 자'? 우리가 데이미아를 찾으러 정찰대를 내보내야 하오? 오르크들이 늑대들을 공격하고 로센 쉐리엘에 인간과 난쟁이가 찾아오는 이 시기에?" "그렇지 않습니다. 데이미아는 스스로 이리로 옵니다..." 그 다음 말은 할 새가 없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면서, 흰 활로 무장한 요정이 여왕의 앞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아렌데일! 침입자입니다. 인간이 로센 라스로 들어왔습니다!" 그 말에 세렉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우리 일족을 대동하지 않은 인간이 로센 쉐리엘을 지나 이 땅으로 들어오다니...?" "하지만 그는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어린 소년이..." "이리로 데려와라." 아렌데일은 조금도 놀라지 않고 그 요정에게 명령했다. 그는 재빨리 튀어나가더니 곧 동료와 한 명의 인간 소년과 함께 돌아왔다. 인간 소년은 검은 망토를 입고 있었으며, 두 손이 뒤로 결박되어 있었다. 툴위그와 켈리는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로이...?" 로이가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다가, 위엄있는 여왕과 자신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세렉을 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세렉은 로이를 심문하려는 듯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도 전, 로이의 품에서 작은 갈색의 동물이 튀어나와 여왕의 발 앞에 멈추어 섰다. "아렌데일, 레이스 데인 라스헨 로센(숲의 요정족의 지도자시여)!" 모습은 달랐으나 그 목소리는 모든 요정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아렌데일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교차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크게 떴다. "데이미아...?" 세렉은 놀란 나머지 말도 떼지 못하고 숨을 멈추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데이미아... 데이미아, 예르 데인 케렌 플리에타? 로 웨이 라시인? (데이미아... 플리에타 누님의 딸 데이미아냐? 네가 살아 있었던 거냐?)" "물론 저입니다, 아렌데일, 그리고 사랑하는 세렉 삼촌!" 하고 데이미아가 당당하게 말했다. 로이와 그 일행을 고려해서인지, 고용어로 말하고 있었다. "부끄럽게도 이런 모습이지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제 친구, 로이를 풀어 주세요. 그는 저를 도와 이 숲까지 데려다 주었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고생을 저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 서 있는 툴위그와 켈리, 이들 역시 제 동료입니다. 절대 위험한 자들이 아닙니다. 제 어머니인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의 이름에 걸고 보장합니다." 아렌데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요정들에게 명령했다. "그 소년을 풀어 주게. 드라이어드를 구한 은인은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아야지."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이의 바로 곁에 있던 요정이 작은 단도로 그의 팔을 묶었던 끈을 끊었다. 로이는 기쁜 표정을 지으며 데이미아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아렌데일은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한데, 데이미아, 그대의 모습은 어찌된 건가?" "마법 때문입니다. 오르크들과 다크 엘프, 요정족의 배반자들과 친분이 있었던 게레드의 영주 히루스 때문에 이런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렌데일, 제 긴 이야기를 말씀드리기 전에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 니까? 제 동료 로이는 가벼운 부상을 당하고 몹시 피곤한 상태입니다. 이 점은 툴위그와 켈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청컨대 이들에게 휴식과 치료를 허락해 주십시오." (계속) 그 말에 아렌데일은 고개를 들어 로이를 바라보았다. 아까처럼 지나치는 시선이 아니라, 마치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을 대하듯,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녹색 눈에 로이는 불안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로이는 비로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대가 이디실의 주인인가?" "그...이상한 칼이라면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여왕 폐하." 로이는 더듬거리며 허리에 찬 단도를 풀어 여왕에게 보여 주었다. 요정들 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대어를 모르는 로이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디실! 이디실!'하는 소리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그 칼을 뽑을 수 있는가?" "예..." 로이는 조심스레 칼의 손잡이를 쥐고, 칼집에서 반쯤 꺼내어 보였다. 그 칼이 칼집을 벗어날수록 그의 긴장감도 커졌다. 이 칼을 뽑아 길을 막는 요정들을 모두 해치우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됐다. 그대가 이디실의 주인임은 증명되었다." 하고 아렌데일이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얼른 칼을 칼집에 집어넣었다. 그와 함께 긴장감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디실의 주인이 분명하군. 드라크노움의 시조, 글라노우스가 그 칼을 레젠디아 대륙에 가져온 이후, 그것을 잡은 자는 그대가 최초이다. 인간도, 요정도, 난쟁이도, 그 어떤 종족의 어떤 용사도 이디실에 의해 거부 당하고 고통만을 느끼며 물러났지. 그러나 이제는 그대가 갖게 되었군. 이 땅에 온 것을 환영한다, 인간의 소년, 이디실의 주인! 그대의 이름은?" "저... 로이입니다, 여왕 폐하." 로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순진한 태도에 여왕은 미소를 지었다. "로이, 그대에게 할 말이 있다. 여기에 데이미아와 함께 남아 주겠나? 그리고 세렉, 툴위그와 켈레브리스에게 식사와 휴식, 그리고 치료를 제공 하도록 자네에게 맡기겠네. 아울러 아까의 의심과 언쟁에 대해 이들에게 사과하도록." 세렉은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아렌데일의 손에 입맞추었다. 그리고는 켈리와 툴위그에게 다가서서 말했다.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데이미아, 플리에타 누님의 마지막 자손인 저 아이는 너무나 오랫동안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듣는 순간 이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부디 아량을." 갑자기 돌변한 세렉의 태도에 툴위그와 켈리는 되레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아, 아니, 내가 오히려 어린 요정에게 싸움을 걸고 어른답지 못하게 굴었소. 글렌델가의 명예에 어긋나는 짓을 했소. 용서를 빌어야 할 쪽은 바로 나요." 툴위그가 허등지둥 말했다. 그러자 로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하다는 듯,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세렉은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우리는 화해된 거로군요. 글렌델 가의 툴위그, 그리고 인간 켈레브리스. 이리로 오십시오. 쉴 곳과 음식을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툴위그와 켈리가 세렉을 따라 원 밖으로 나가자, 아렌데일은 남은 요정들에게도 자리를 비킬 것을 명령했다. 원형의 공간 안에는 그녀와 로이, 그리고 데이미아만이 남게 되었다. 아렌데일은 미소를 지으며 데이미아를 내려다보았다. "너무 오랜 기간동안 떠나 있었네, 데이미아. 모든 드라이어드들이 자네가 죽었다고 생각했지. 자네의 삼촌, 세렉조차도. 그는 오랜 기간 자네에 대한 걱정으로 고통받았네. 그런데 지금, 이 동료들과 함께 고향에 돌아온 자네를 보니, 다시 헤어질 날이 멀지 않은 것 같군." "송구스럽습니다, 여왕 폐하. 어서 돌아오고 싶었지만 이런 쥐의 모습으로는... 로이가 도왔기에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이리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남매들과 함께 엘미어의 비밀을 지키려고 이 숲을 떠날 때에도, 그리고 인간의 영지와 다른 요정족의 땅을 방랑하며 악의 눈길에서 피해 다닐 때도, 그리고 히루스의 손에 잡혀 이런 모습이 되었을 때에도 그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플리에타의 딸 데이미아, 엘미어의 계승자이고, 바로 두 번째 '숲의 마법사'가 되기로 서약한 자니까요." "그렇다면 그것이 자네가 돌아온 목적이군, 데이미아. 엘미어를 찾고 어머니의 이름을 찾는 것, 그리하여 그대의 어머니처럼 이 숲을 나가 타지의 마법사로서 사는 것!" 데이미아는 힐끗 로이를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아렌데일, 숲의 요정의 지배자시여. 지금은 엘미어의 주인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여기 서 있는 로이는 이디실의 주인이고, 툴위그는 카자룬의 계승자로 그것을 찾아 여행 중입니다. 곧 카자룬도 찾게 될 것이고 힐리온도 나타나겠죠. 로크 페울로니 기레인 헤이스, 알 샤이드리엔 베일 제이에니엔! - 네 개의 열쇠는 서로를 끌어당길지니, 그 때는 평화의 시작 혹은 종말의 도래일지라! 저는 엘미어를 찾아 이들과 함께 가야 합니다. 제 어머니,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가 드라이어드 뿐만이 아닌 모든 종족들을 위해 싸웠듯이." 아렌데일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헨 에이니드의 후계자답군, 데이미아. 그대는 부끄럽지 않은 드라이어드다. 그렇다면 로이, 그대는 이 아이가 엘미어를 찾아 숲의 마법사, 라스헨 에이니드의 이름을 얻도록 도와주고, 그리고 이 아이와 함께 평화의 시대를 열기 위해 여행하겠는가?" "...전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데요. 칼싸움도, 활 쏘는 것도..." 로이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데이미아가 엘미어를 찾는 걸 도와주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아직 세 번째 조건이 남았으니까... 그게... 같이 여행하는 거라면 약속을 지킬 수 밖에요. 하지만,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 전 정말 훔치는 거랑 도망치는 것밖에 할 줄 아는 일이 없다고요." 로이의 말에 아렌데일은 소리내어 웃었다. 바람에 낙엽이 스치듯 가볍고 거침없는 웃음소리였다. "로이, 그대의 마음과 그대 손에 들린 이디실로 충분하다. 그러나 그대는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그대가 가진 것이 도망치는 기술과 훔치는 기술 뿐이 아니라는 것을. 데이미아와 로이, 로센 라스의 주인이자 드라이어드 족의 여왕의 이름으로, 그대 둘에게 플리에타의 유언에 따라 탈레스 데인 테이렐, 용의 신전으로 가 엘미어를 찾는 것을 허락한다. 언제 떠날 생각인가?" "가능한한 빨리요. 내일이라도 좋습니다." 하고 데이미아가 얼른 대답했다. 아렌데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로이를 돌아 보았다. "동료의 의견에 동의하는가, 이디실의 주인?" "예, 그러죠, 뭐. 뭘 좀 먹고 잠도 푹 잔 뒤라면 언제라도 좋아요." 로이의 대답이었다. 아렌데일은 그들을 내려다보며,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플리에타의 딸 데이미아, 그리고 이디실의 주인 로이, 그대들에게 하룻밤의 휴식을 허락한다. 편안한 잠자리와 풍성한 식사, 그리고 상처의 치료를 위한 치유술사들을 하사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오늘 밤이 지나고 내일 아침 해가 뜨는 즉시, 엘미어를 찾아 로센 라스를 떠나도록!" ------------------------------------------------------------------ 로이와 데이미아는 여왕의 말대로,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길을 떠났다. 로이는 켈리와 툴위그에게라도 말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의 했으나, 데이미아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엘미어를 찾으러 떠나면서 광고라도 하겠다는 거야, 로이? 언제나 이런 중요한 일은 조용히 이루어졌어. '뿌리가 조용히 일하는 동안 나뭇잎은 아무것도 모르게 하라'는 거지. 어차피 늦어도 내일까지는 돌아올 걸 뭐." "켈리가 알기라도 하면 우린 둘 다 죽은 목숨이야." 로이는 툴툴거렸으나 어쩔 수 없었다. 엘미어를 찾는 일은 어쨌거나 드라이어드 족의 일이었고, 로이는 데이미아의 부탁에 의해 끼어든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드라이어드 족의 방식대로 할 수밖에. 그러나 다행히도, 데이미아의 삼촌 세렉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비밀리에 켈리와 툴위그에게 알려 로이를 배웅하게 해 주었다. "어제의 일에 대한 사과의 의미입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툴위그는 처음에는 어쩔 줄을 모르다가, 이제는 '사과' 이야기만 나오면 아주 지긋지긋해 했다. '요정족은 사과도 감사도 확실히 한다'는 옛말을 몸소 확인하는 중이었으니까. 켈리는 허리에 붕대를 감은 커다란 잿빛 늑대를 데리고 나와, 로이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펠히스'라는, 짐승에게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가진 늑대였다. 요정족의 녹색 옷을 입고 늑대를 쓰다듬는 그녀는, 이상하게도 로이와 같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요정 족에 더 가까운 존재처럼 보였다. "랜스는요?" 로이가 묻자 켈리와 툴위그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어물거렸다. 그러나 세렉이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랜스의 상처는 좀 깊어서 말이야... 치유술사들이 치료하느라 재워 두고 있단다. 그러나 걱정 말아라. 드라이어드의 치유술은 요정족 중 으뜸, 네가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다 나아 있을 테니까." 로이에게는 새것처럼 보수된 검은 망토와 드라이어드 족의 녹색 옷과 신발, 그리고 충분한 식량과 물이 주어졌다. 그 외에도 세렉은 특별한 돌을 선물로 주었다. "멜렌, 빛의 조각이다. 어둠 속에서 9네게 빛을 줄거야. 데이미아를 부탁하는 의미로, 이것을 네게 주마." 멜렌은 달걀 모양의 매끈한 조약돌로, 목에 걸 수 있도록 끈이 달려 있었다. 회색과 흰색의 무늬가 아주 예쁘다는 것 외에는 별로 특별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와, 예쁜 돌이네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로이와 데이미아는 로센 라스를 떠나 로센 쉐리엘로 향했다. 세렉과 켈리, 툴위그, 그리고 늑대 펠히스가 그들을 호수 바로 앞까지 배웅 했다. "데이미아를 잘 부탁한다, 로이. 아스틸라 넬 헤인 로(아스틸라 여신께서 너희들을 돕기를)!" 하고 세렉이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로이는 데이미아를 어깨 위에 올리고, 처음 이 숲에 들어올 때 그녀가 가르쳐 준 대로 주문을 따라 읊었다. "갈 아스틸라 렐 아렌데일, 레이스 데인 라스헨 로센! (아스틸라와 숲의 요정의 지배자, 아렌데일의 이름으로!)" 그리고는 조심스레 수면 위로 발을 디뎠다. 로센 라스를 벗어나, 다시 위험이 도사리는 짐승들의 영지로. 그들을 배웅하고 온 세렉이 이상하다는 듯 아렌데일에게 물었다. "데이미아는... 엘미어의 계승자이기는 하지만,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주술을 쓸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자네 말이 맞네, 세렉. 데이미아는 지금 주술을 쓸 수 없지." "그러나... 저들은 로센 쉐리엘을 건너 오지 않았습니까? 부정한 자라면 당장 삼켜 버려, 아무리 수영을 잘 하는 자라도 물 밑의 진흙으로 만들어 버리는..." "아마도... 로이라는 저 소년의 힘이겠지." 아렌데일은 수수께끼같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면 이디실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 반나절이 지나도록 로이는 데이미아의 지시에 따라 숲을 헤치며 걸었다. 로센 라스에서 하룻밤을 지냈기 때문인지, 숲이 전처럼 낯설고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세렉의 말대로, 드라이어드 족의 치유술사들은 정말 대단했다. 로이가 입었던 상처가 깨끗이 사라졌음은 물론, 여행 중에 누적된 피로까지 말끔히 사라졌던 것이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한참을 걸은 후, 나무 그늘에 앉아 식사를 했다. 드라이어드 족에게 육식 식사라고는 없는 것 같았다. 식사란 식사는 모두 즙이 많은 낯선 열매들이나 재료를 짐작할 수 없는 빵인지 과자인지로 구성 되어 있었다. 물론 맛있는 식사이긴 했지만. "어렸을 때 엄마와 함께 이 길을 자주 걸었었지. 엄마는 언제나 언젠가는 나 혼자 이 길을 찾아와야 할 거라고 말씀하시면서, 잊어버리지 않도록 자주 데리고 오셨어. 이 길을 이제 와서 너와 함께 걷게 될 줄이야!"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고 데이미아가 말했다. "근데... 도대체 어딜 가는 거야? 드래크로니안의 신전... 뭐 그런 데리고 했던 것 같은데...?" "탈레스 데인 테이렐, 용의 신전이지! 레젠디아 대륙 안에 딱 네 개 뿐이야. 전에도 종족들 사이에 온통 전쟁이 벌어졌던 적이 있었어. 그 전쟁은 에스테이아가 로데인 멸망시킨 것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끔찍했대. 그런데 드래크로니안의 시조, 글라노우스가 로크 페울로니를 가지고 와서 간신히 이겼지. 전쟁이 끝나자 글라노우스는 로크 페울로니를 숨겨둘 곳을 지하에 만들도록 했어. 드라크노움에 엘미어를 숨겨둘 곳, 로데인 어딘가에 힐리온을 숨겨둘 곳, 뭐 이런 식이었지.그런데 침입자를 막고 행운을 가져다 달라고 그들의 신인 실리사와 에퀴온의 석상을 세웠어. 그래서 용의 신전이라고 불리게 된 거야." "그랬군... 그럼 땅 속에 있단 말야?" "그래, 그것도 대단한 미로 안에. 하지만 걱정 마. 내가 길을 훤히 아니까! 자, 이제 그만 쉬고 출발하자!" 로이는 가볍게 몸을 일으켜 데이미아가 안내하는 대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도 로이도, 숲속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새의 모습이지만, 불길한 여인의 얼굴을 하고, 악의가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는 하피의 눈이 있다는 것을... (계속) 아크트의 직속 부하, 오르크 족의 라샤크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잠시도 쉴 새 없이 서쪽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외침이 들려왔다. "하피입니다, 라샤크 님!" 그 외침과 함께 요정 한 명이 재빨리 나무에서 뛰어내려 왔다. 키가 크고 늠름한 모습의 오리어드(산의 요정족)이었으나, 이마에 흑마술의 혜택을 입었다는 표시인 검은 뿔의 낙인이 찍혀 있었고, 오레이드 족의 자랑인 만ㄱ은 검은 눈빛은 뿌옇게 흐려진 지 오래였다. "수고했다. 전원 출발 준비!" 라샤크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50여명의 오르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대열을 갖추었다. "멋지군요, 아크트 님이 직접 선정하신 정예 부대답습니다." 한 요정이 라샤크에게 걸어나오며 감탄했다. 금빛 자수와 모피로 장식된 화려한 비단 로브를 입고 금으로 된 지팡이를 든, 마법사 차림의 요정이었다. 그는 이 드라크노움의 종족인 드라이어드처럼 보였으나, 역시 다크 엘프의 상징인 검은 뿔의 문신이 이마에 찍혀 있었다. "주문은 확실하겠지, 제이룬?" 라샤크가 그 요정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어떤 들짐승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그보다는 빨리 그 아이들이나 찾으러 가시지요? 그들을 놓치면 엘미어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없어집니다. 길은 제가 대충 알지만, 오직 데이미아만이 용의 신전의 결계를 풀 수 있으니까요." 라샤크는 그의 마지막 발언은 듣고 있지도 않았다. 하피가 그를 향해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여자의 얼굴에 새의 몸을 한 이 괴물은 그의 바로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들에게 우리를 안내해라, 이 괴물 새야! 놓치면 네 모가지를 대신 가져가겠다!" 라샤크가 그 하피에게 윽박지르듯 소리쳤다. 하피는 그 말을 알아 들었는지, 다시 날개짓을 하며 날아올랐다. 라샤크와 그 부하들이 전투에 대한 흥분으로 거친 소리를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 "자아, 여기야!" 로이와 데이미아가 어떤 너구리 굴 같은 토굴 앞에 다다르자, 데이미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용의 신전, 탈레스 데인 테이렐의 입구! 어서 들어가자고!" "...토끼굴 신전이 더 알맞은 이름 같은데..." 로이가 그 안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뭐야, 로이! 설마 겁나는 건 아니겠지?" "누, 누가 겁이 난다고 그래! 이까짓 토끼굴!" 로이는 당당하게 소리를 지르며, 데이미아를 등에 태우고 굴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다행히도 로이가 걱정하던 토끼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굴은 결코 넓지 못했고, 너무 울퉁불퉁하고 꼬불거렸다. 로이가 열 다섯 살짜리 소년이 아니라 어른 남자였다면 좀 고생스러웠을 넓이였다. 얼마나 갔을까, 빛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한참을 기어들어가자, 로이의 머리가 자꾸 부닥치던 천장이 갑자기 높아졌다. "어...?" 어둠 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두리번거리는 로이에게 데이미아가 말했다. "멜렌을 꺼내 봐!" 로이는 그녀의 말 대로 목에 걸어 옷 속에 감추어 두었던 멜렌을 꺼내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멜렌은 작은 등불처럼 빛을 발하여 그들의 주위를 환하게 밝혀 주었다. 커다란 촛불 하나쯤 되는 밝기였다. 로이는 신기한 나머지 입을 딱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이게 바로 멜렌, 빛의 조각, 꺼지지 않는 등불이지! 자, 로이, 어서 가자! 지금부터가 중요해. 완전히 미로거든." 데이미아가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로이는 그녀의 말대로 얼른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이 있는 곳은 돌로 된 커다란 반구형의 공간이었고, 저 멀리 앞에 다른 곳으로 가는 구멍이 뚫려 이었다. 돌을 녹여 만든 것처럼 보이는 원형의 커다란 구멍이었다. 그리로 들어가려고 하자, 갑자기 데이미아가 외쳤다. 9 "잠깐! 구멍이 다섯 개야. 외쪽에서 두 번째 길로 들어서야 해!" 로이는 얼른 한 발 물러서 옆의 벽을 살폈다. 왼쪽에 똑같은 구멍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왼족에도, 또 그 왼쪽에도... 로이는 구멍을 다 찾은 다음 왼족에서 두 번째 구멍으로 들어갔다. 길은 계속 그런 식이었다. 몇 발짝 안 가서 다시 길이 두 개로 나누어졌고, 그 다음엔 다시 세 갈래였다. 그리고 두 갈래로, 네 갈래로... 그런데 넓은 바위 동굴로 이루어진 미로를 헤매면서, 로이는 이상하게도 이러한 일이 처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았다. 시지리스, 제피로스의 손에 매달려 암흑 속을 헤쳐온 그 기억... 이상하지만 그 길과 이 미로는 닮은 점이 있었다. 그 때, 어둠 때문에 길을 분간하지 못하고 제피로스에게 의지했듯이, 지금은 미로 속에서 데이미아에게 의지하고 있지 않은가. "저기... 데이미아, 혹시 이 길 계속 가면 배 타는 데 나오지 않니?" 로이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데이미아는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어?" "역시 그랬구나. 여기 비슷한 데에 가 본 적 있어. 시지리스에서..." "...드래크로니안이 설계한 건축물은 대부분 비슷하다고들 하지. 미로와 어둠, 그리고 물... 하지만 그들은 결코 친절한 족속이 아냐. 내가 너라면, 로이, 다시는 사전 지식 없이 그들의 미로에 발을 들여놓거나 하지 않을 거야." 데이미아가 반신반의하는 태도로 말했다. 로이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들은 한참을 더 걸어야 했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데이미아가 지;시하는 대로 발을 옮기기만 했다. 처음에는 어느 쪽으로 가는지 방향을 따져 보려고 하기도 했으나, 머리만 아파질 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점점 아래쪽, 더 깊은 지하를 향해서 내려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있는 곳은 그들이 처음 왔던 반구형의 홀의 아래층쯤 되는 깊이인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적당히 발이 피곤하고 적당히 배가 고파지자 앉아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러나 지하 미로 속에서 하는 식사가 숲속의 식사처럼 맛이 좋을 리 없었다. 둘은 말없이 음식만 우적우적 먹어치웠다. 한참 말 없는 식사가 계속되고 있는데, 갑자기 데이미아가 먹는 것을 멈추고 조용히 속삭였다. "로이, 누가 있는 것 같지 않아?" "이 복잡한 미로 속에? 박쥐겠지." "드래크로니안의 신전에 박쥐 따위가 산다는 것은 들어본 적도 없어!" 데이미아는 잔뜩 긴장해서 화를 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로이 자신도 무슨 소릴를 들었다. 옷깃이 스치는 소리같은... 로이는 먹다 남은 음식을 챙기며 데이미아에게 속삭였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누군가 있어!" "어쩌지? 이 장소는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곳인데 미행자를 딸고 왔으니!" 데이미아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로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밝은 얼굴이 되어 그녀에게 말했다. "데이미아, 이 미로 어디에서건 길을 찾을 수 있어?" 9 "그야 물론! ...그런데 왜?" "좋은 생각이 있어. 예의 없는 침입자들을 가둬 버리자!"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데이미아가 길을 지시하기도 전에 아무 길이나 성큼성큼 들어갔다. "로이! 그쪽 길고 가면 뱅글뱅글 돌게 돼!" 데이미아가 외쳤다. 그러나 로이는 씩 웃을 뿐이었다. "바로 그거야! 미행자들을 뱅글뱅글 돌게 해 주고, 우린 네 말을 따라 무사히 엘미어를 찾으러 가는 거야!" 그러자 비로소 데이미아의 표정도 밝아졌다. 로이는 점점 빠른 걸음으로 이 길 저 길로 마구 헤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도 이제 분명히 그를 미행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작기는 하지만, 확실한 발소리, 그리고 옷 스치는 소리가. 적어도 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로이와 데이미아를 따라 미로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 이상한 미행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미행을 전혀눈치채지 못하는 척 하느라, 시시한 잡담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로이는 갑자기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미아! 이제 길을 불러 줘!" "그래, 왼쪽! 왼쪽이야!" 그러자 비로소 사태를 파악한 미행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놓치면 안 돼! 놓치면 우리는 미로 안에 갇히게 된다!" "크와아악!" 오르크들의 분노에 찬 외침이 동굴 안을 울렸다. 로이의 발에 더욱 속력이 붙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데이미아도 바빠졌다. "오른쪽! 가운데, 왼쪽에서 세 번째! 그래, 그 쪽!" 오르크들의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로이를 뒤쫓고 있었다. 로이는 그 소리를 듣자 자신의 계산이 형편없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열 마리가 아니라 수십 마리는 될 것 같았다. 따돌리기도 그만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일을 벌인 이상, 즉기살기로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른쪽! 계속 오른쪽! 이번엔 가운데!" 오르크들은 생각보다 훨씬 끈질겼다. 이런 지하 미로 속에서 그들을 놓친다면 길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다가 굶어 죽을 것이 뻔하므로,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로이의 목에 걸린 빛나는 돌, 멜렌이 그들을 이끄는 표적이 되었다. 한 오르크의 화살이 로이의 발 바로 밑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로이가 막 모퉁이를 돌 때, 아슬아슬하게 그의 어깨 옆으로 비껴갔다. 상처는 입지 않았으나 옷이 조금 찢어졌다. "우그르! 우그르! (잡아라! 잡아!)" 오르크들의 목소리는 끔찍스럽게도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화살도 점점 많이 날아왔다. 로이는 이리저리 화살을 피하며 달리느라, 땅이 축축해 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크와아악!" 한 오르크가 고함을 치며 로이의 다리를 향해 도끼를 집어던졌다. 로이는 재빨리 몸을 비틀어 그 도끼를 피했으나, 미끄러운 이끼를 밟고 미끌어져 넘어지고 말았다. 오르크들의 환성이 동굴 안을 울렸다. "캬아아아악!" 로이는 순간 당황했다. 일어날 틈도, 없이 40여 마리의 오르크들이 자신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아무리 재빨리 일어나 달린다 해도 도망칠 수 없었다. "우그르 가! (잡았다, 인간!)" 한 오르크가 승리에 찬 고함을 지르며 로이의 눈앞에 뛰어들었다. 순간, 로이는 반사적으로 이디실을 빼어들어 그의 코앞에 겨누었다. 그러자 갑자기 오르크들 사이에서 당황한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디실...?" "이디실!" "가 이디실 카르! (인간이 이디실을 갖고 있어!)" 두려울 것 없어 보이던 그들이 갑자기 당황하기 시작했다. 로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간신히 두려움을 감추고 소리쳤다. "난 이디실의 주인이다! 너희는 날 이길 수 없어! 숨이 붙어 있을 때 얼른 돌아가라!" 이 허세는 놀랍게도 꽤 먹혀 들어가는 것 같았다. 오르크들이 슬금 슬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로이는 우쭐해진 나머지 엉뚱한 생각 까지 들었다. '이대로 밀고 쳐들어가 볼까... 혹시 알아? 내가 이길지! 난 이디실을 가졌잖아?' (계속) "로이, 뭐해? 이 틈에 어서 도망치자!" 데이미아의 다급한 목소리가 로이가 제정신을 차리도록 만들었다. 로이는 어느새 자신이 금방이라도 오르크들을 공격할 듯한 자세로 칼을 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하여간... 이 칼만 잡으면 난 인간이 이상해 진다니까!' 로이는 마지막으로, 아까보다도 더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시 말한다! 난 이디실의 주인! 어느 누구도 날 이길 수 없다! 죽고 싶지 않거든 당장 물러가라!" 오르크들은 동요하는 것이 분명했다. 술렁거리는 목소리들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로이는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며 그들을 향해 한 발 다가 섰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재빨리 몸을 돌려 있는 힘을 다해 도망쳤다. 예상치도 못한 로이의 행동에 오르크들은 어이가 없어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깨닫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아까보다 더 큰 고함을 지르며 그를 뒤쫓아왔다. 이리저리 미로를 돌며, 로이는 그들의 살기 넘치는 고함소리를 들어야 했다. "데이미아, 잠깐 쉬었다 갈까?" "뭐, 뭐라고? 너 미쳤니?" "내게 생각이 있어!" 로이는 돌벽의 갈라진 틈을 보고는, 얼른 그리로 비집고 들어갔다. 로이가 들어가 쪼그리고 앉으니 꽉 차는 넓이였다. 그리고 멜렌을 옷 속으로 숨기자, 주위는 완전히 깜깜해지고 아무도 로이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뭐, 뭐야! 갑자기 빛이 없어졌다!" 공용어로 오리어드 족의 다크 엘프가 소리쳤다. 당황과 공포로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럴 리가 있나! 잘 찾아 봐!" 하고 소리친 것은 라샤크의 목소리였다. "없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은 거라고요! 악명 높은 드래크로니안의 미로 속에서!" "그럴리가?" 오르크들이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공용어로, 그리고 어떤 이들은 험상궂은 오르크 어로. 벽 틈새에 쪼그리고 앉은 로이도 그들의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쿠푸 라샤크는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어리석은 소리! 이 동굴 안에서 굶어죽으란 소리냐? 모두, 세 개의 조를 짜 흩어져서 그들을 찾도록 한다!" "흩어지라고요? 라샤크, 그것은 안 될 말입니다!" 어떤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요정의 음성이었다. "제이룬! 뭐냐.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싸늘한 웃음소리가 동굴 벽을 울리며 퍼져 갔다. 로이는 만약 유령이 웃을 수 있다면 꼭 그런 목소리로 웃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위대하신 쿠푸 헤 아크트의 군대가 미천한 저에게 의지하셔야 할 것 같군요." "...네가 길을 찾을 수 있기라도 하단 말이냐?" 라샤크의 목소리엔 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요정은 개의치 않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따라오시죠." "...좋아. 하지만 만약 일이 틀어진다면 네놈이 가장 먼저 죽을 줄 알아라!" 라샤크는 으르렁거리며 부하들어게 명령을 내렸다. "모두 대열 정비! 이제부터 제이룬의 뒤를 따른다!" 오르크들은 어둠과 공포 속에서도 라샤크의 말을 따랐다. 흔들림 없는 발소리가 돌바닥을 타고 로이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발소리들은 서서히, 로이와 데이미아에게서 멀어졌다. 숨소리 하나, 옷자락 스치는 소리 하나조차 들리지 않을 때까지, 로이와 데이미아는 벽의 틈새 속에 숨어 있었다. 이윽고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로이는 재빨리 멜렌을 꺼내고 그 틈새에서 기어 나왔다. "자, 멋지게 따돌렸지!" 로이는 승리감에 취해 자신만만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래도 걱정이 가시지 않는 듯, 조용히 속삭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훌륭해, 로이. 하지만 서두르지 않으면 다시 발각될지도 몰라!" 로이는 고개그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미로를 빠져나가기 전에는 마음을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데이미아를 어깨 위에 올리고, 그녀의 지시에 따라 복잡한 비밀 통로를 헤쳐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축축해진 땅에 이제 물웅덩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이제는 아예 커다란 호수에 의해 길이 막혀버렸다. 잔잔 하고 얕고 맑은, 그러나 끝을 볼 수 없이 넓은 호수였다. 그 호수가 끝나는 곳에도, 천장에도 멜렌의 희미한 빛이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 "...정말 시지리스하고 비슷해..." 하고 로이가 중얼거렸다. "시지리스의 비밀 수로도 이렇게 넓고 잔잔했었는데..." "자, 어서, 로이! 저쪽으로 가! 머뭇거릴 틈이 없어!" 로이가 잠시 한눈을 팔자, 데이미아는 다급하게 재촉했다. "데이미아, 오르크들은 다 따돌렸잖아. 뭐가 그리 급한거야?" "그게... 예감이 안 좋아. 그들에겐 다크 엘프가 있고... 아니, 그냥 기분이 그래. 어쨌든 엘미어를 찾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을 것 같아!" 로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데이미어가 가리키는 쪽으로 첨범첨벙 물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로이의 무릎께까지 밖에 안 되는 깊이였다. 저 앞에서 하얀 초승달 모양의 물건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이드릴?" "저 배를 아는구나?" 데이미아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응... 전에 타 본 적 있어. 드래크로니안이 만든 거라지?" "...로이, 넌 가끔 어디까지 아는지 잘 모르겠어." 데이미아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로이는 웃기만 하면서 그 배에 올랐다.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모든 길들이 시지리스의 비밀 수로와 흡사했다. 그러므로 기억을 잘 되살리기만 하면, 얼마든지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로이는 능숙한 몸짓으로, 가는 노를 저어 이드릴을 움직였다. 조금 노를 저어 가자, 물의 흐름이 분명해지며 배가 저절로 떠 가기 시작했다. 시지리스의 수로보다는 조금 흐름이 급했으나, 마음놓고 배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잔잔했다. "드래크로니안은 항상 이런 식으로 길을 만드니?" 할 일이 없어진 로이가 느긋하게 배 위에 앉아, 데이미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들은 물을 좋아하지. 그리고 미로와 어둠으로 블청객을 골탕먹이는 것을 즐기고.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미로 속에서 살기 때문에 길을 유난히 잘 기억한다고 하더라. 이런 꼬불꼬불한 미로도 그냥 동네 골목으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나... 로데인이 한창 번창하던 시절, 인간족의 왕이 드래크로니안만의 도시라 만들라고 땅을 내 주었대. 그러자 그들은 그 땅 속에다가 수백 수천 갈래의 길이 겹쳐지고 꼬이는 미로의 도시를 만들었어. 그리고 물론, 가장 아래층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수로로 만들어진 물의 마을을 만들었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도시를 가이니크, 고대어로 '미로'라고 불렀지. 로데인이 망할 때까지 그곳은 시지리스와 함께 드래크로니안의 고향이었대." "멋져!" 로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미로의 도시! 얼마나 멋질까? 아직도 거기서 드래크로니안들이 사는 거야? 미로를 집같이 여기면서?" 데이미아는 조금 슬픈 태도로 고개를 저었다. "로데인이 멸망하자 가이니크도 사라졌어. 자신들의 나라를 잃은 드래크로니안들은 앙심을 품고 에스테이아의 군대를 가이니크 안으로 유인하고는, 자기들만 슬쩍 빠져나오곤 했지. 그 미로는 그들 외의 어떤 종족도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었거든. 군사들이 죽는 것까진 왕이 참았는데, 세 아들이 모두 거기 들어가 실종되어 버리자 드디어 분노가 폭발했어. 그래서 가이니크 주위에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도록 죽음의 결계를 쳤지. 그 이후로는 그곳에서 아무도 살지 못한대. 인간들도, 드래크로니안도, 벌레 한 마리, 풀 한 포기조차..." "...무서운 일이로구나." 로이는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전쟁이 일어나도 잘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아. 그런데도 왜들 자꾸 싸울까...?" 둘은 잠시 침울한 분위기에 젖어 말없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데이미아가 기쁨에 찬 비명을 질렀다. "저길 봐! 탈레스 데인 테이렐! 용의 신전이다! 엘미어가 있어!" 로이는 얼른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은빛으로 빛나는 별들로 둘러쌓인 바위가 보이고 있었다. 아니, 별이 아니라 멜렌, 로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조약돌과 똑같은 돌들이 그 바위 표면에 수없이 박혀 있는 것이었다. 그 바위는 수면 위로 불쑥 솟아 있었고, 매우 높이가 높아서 어디서 끝나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중앙에는, 커다란 검은 구멍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암흑으로 통하는 것 같은 그 구멍의 모습이 로이는 왠지 꺼림칙했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가는 노를 저어 이드릴을 그 안으로 몰고 갔다. 그 구멍은 자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고, 오래 되었는지 무척 매끄러웠다. 그리고 그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서너 척의 이드릴이 정박되어 있는, 바위로 된 육지가 있었다. 로이는 배를 정박시키고 육지로 올랐다. 이제부터는 다시 멜렌의 희미한 빛에 의존해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미로가 아냐. 그냥 길을 따라가면 돼!" 데이미아가 로이의 어깨 위에 올라타며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는 그녀의 말대로,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또다른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거칠게 만들어진 계단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물 밑으로 가는 건가?' 로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계단은 규칙적이고 표면이 평평하게 되어 점점 내려가기가 쉬워졌다. 벽과 천장도 마찬가지였다. 울퉁불퉁하던 표면은 점점 깨끗하고 매끄러워졌고, 조금 더 가자 부조(한 면에서만 볼 수 있는 조각)까지 나타 나기 시작했다. 로이는 경외감에 차서 그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무기를 들고 있는 늠름하고 키가 큰 남녀의 모습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등에 커다란 날개가 달려 있었다. 처음에 벽이 모자랄 만큼 수가 많던 그들은 창에 찔린 사람, 머리가 잘린 사람 등의 조각이 나타남에 따라 점점 수가 줄어 갔다. 그리고 이윽고, 날개가 달린 한 남자가 갑옷을 입고 왕관을 쓴 인간 남자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개는 바짝 들려 있었고, 그는 인간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손에 든 선물을 바치고 있었다. 천으로 감싼 긴 검이었다. "드래크로니안의 역사야." 데이미아가 설명했다. 인간 남자가 말을 타고 날개 달린 자들과 함께 싸우는 조각이 나타났다. 이어서 난쟁이들과 요정들도. 전쟁은 끝났다.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진 가운데 날개가 달린 남자는 마법사의 옷을 입은 요정 여인과 갑옷을 입은 당당한 풍채의 난쟁이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다. 천으로 감싼 마법의 지팡이와, 역시 천으로 감싼 커다란 도끼를. 그리고 조각은 끝났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커다란 문 앞에 서 있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물결과 나무 덩굴, 그리고 용과 요정들의 모습이 조각된 거대한 문 앞에. 그 속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디어 왔구나...!" 데이미아가 감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로이가 말릴 새도 없이, 그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문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데...데이미아? 잠깐만!" 당황한 로이도 엉겁결에 그녀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문턱을 넘자마자, 갑작스런 밝은 빛이 로이의 시력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다. 마치 태양 안에 있는 것 같았다. 눈물이 날 정도였다. 로이는 눈을 꼭 감은 채,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떤 벽 같은 것에 부딪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뒤로 넘어졌다. "여긴 결계가 쳐져 있어, 로이. 걱정 말고 기다려! 난 괜찮아!"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에는 전에는 없던 이상한 울림이 있었다. 로이는 눈을 뜨고 그녀의 모습을 찾으려 했으나, 사방이 빛, 빛, 빛뿐이었다. 너무나 밝은 빛은 암흑과 다름이 없었다. 로이는 포기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피부로도 빛이 더욱 강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로이의 몸을 뒤로 물러나게 할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계속) "데이미아?!" 로이는 눈을 뜨고 무엇인가 보려고 노력하며, 필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서히 빛이 약해져 갔다. 바람도 잦아들었다. 로이의 눈에 커다란 원형의 방의 모습이 들어왔다. 높은 원추형의 천장, 매끈매끈한 원형의 바닥, 조각으로 뒤덮인 넓은 곡선의 벽,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석상... 로이가 꿈에서 보았던 바로 그 석상이었다. 창을 든 여인과 해골을 든 남자의 상반신이, 한 용의 하반신에서 합쳐지고 있었다. 여인은 살의를 가진 듯, 남자는 책망하듯 로이를 노려보고 있었고, 그들의 등 뒤로는 거대한 날개가 벽과 천장을 가리고 있었다. 실리사와 에퀴온, 드래크로니안의 신... 그리고 그들의 발치 아래, 누군가가 서 있었다. 로이 또래쯤 되어 보이는, 흰 옷을 입은, 사슴처럼 날렵한 몸매의 요정족 소녀였다. 긴 갈색 머리칼이 허리까지 흘러내리고, 가는 손목에는 우아하고 가느다란, 녹색 보석이 박힌 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녹색 눈이 따뜻한 눈빛으로 로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 로이는 그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너 덕분이야, 로이." "맙소사... 데이미아?"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 몸을 일으킬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상관 없다는 듯, 요정족 특유의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사뿐 그에게 걸어왔다. "그래, 나야, 데이미아야, 로이. 내 본모습이지. 너 덕분에 마력과 본모습을 되찾았어. 그리고 물론, 엘미어도 찾고. 이제 너희의 여행, 로크 페울로니(네 개의 열쇠)를 찾는 여행에서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데이미아라고?" "그렇다니까!" 데이미아의 웃음소리는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어서 돌아가자, 로이.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거야!" 로이는 엉겁결에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그들이 신전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한 그림자가 그 문을 막고 섰다. 오르크는 아니었다. 요정, 그러나 이마에 검은 뿔의 문신이 있는 다크 엘프였다. "오랜만이구나, 데이미아!" 하고 그 요정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이미아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물러섰다.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드라이어드의 수치!" "...친오빠에게 가혹하게 구는구나." "흥, 제이룬은 30년 전에 죽었다. 넌 오르크의 졸개일 뿐이야!" '에... 친오빠?' 로이는 그 말에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의 얼굴은 데이미아와 닮은 점이 많았다. 갸름한 얼굴과 나무 속처럼 햐얀 피부, 그리고 짙은 녹색의 눈동자... 구러나 데이미아의 눈에 있는, 드라이어드 족 특유의 생명령 넘치는 눈빛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런 눈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으나, 로이는 그 눈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죽어 있는 눈동자, 그것은 이미 한 번 죽었던 자의 것이었다. "드래크로니안의 망토... 이걸로 날 속였군. 하지만, 데이미아, 내가 설마 이따위 미로에서 길을 잃기라도 할 거라고 기대했던 거냐? 네가 아직 태어나기 전부터 엘미어의 계승자로 점지되었던 내가, 그래서 이 미로 안을 너보다는 수십번도 더 드나들었던 내가?" "그건 당신이 죽기 전의 이야기지. 당신은 죽었고, 엘미어는 내가 계승하게 되었어." "난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왔다. 엘미어를 계승하기 위해서. 네 말대로 난 한 번 죽었지만, 오히려 그것 덕분에 더욱 강한 흑마술의 힘을 얻었지. 엘미어의 계승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힘을!" "잘난 척 하는군? 기껏해야 오르크들과 흑마술사에게 목숨을 구걸 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먹고 사는 괴물이 된 주제에! 그들이 그 댓가로 엘미어를 요구하던가? 날 죽이고 이것을 빼앗으라고?" "죽이고 빼앗으라고? 오, 이런!" 제이룬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의 웃음도 산 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로이는 왠지 그 목소리가 삐걱거리는 뼈에서 나온 소리같이 들려 소름이 쫙 끼쳤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그러나 난 하나 남은 누이동생에게 그런 짓까지 하고 싶지 않구나. 그러니 내가 그렇게 해야 하기 전에 그것을 내게 넘겨라, 데이미아. 넌 이미 본모습으로 돌아왔으니, 그런 것은 필요없지 않니? 오르크와 다크 엘프에게 빼앗겼다고 하면, 모두 이해할거야." 데이미아는 지팡이를 꼭 움켜쥐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제이룬은 그런 그녀에게 미소를 지었다. 죽은 자의 미소, 흑마술의 힘에 물든 자의 싸늘한 미소였으나, 아직 생전의 상냥함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내게 다오, 데이미아, 원래 주인은 나였으니! 엘미어의 계승자가 걷게 되는 길은 네 생각보다 훨씬 험난하단다. 고난과 책임의 길이지. 그 길을 내게 넘겨라. 그리고 넌 자유롭게 살아라!" "...당신은 우리 종족의 수치야. 흑마술로 죽음에서 도망치기나 하는 자에게 이것을 내줄 수는 없어." "넌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알고 있어. 이대로 가면 드라이어드 족은 멸망한다. 이런 시기에, 숲에 꼭꼭 숨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난 우리 종족 모두를 위해 이러는 거야. 데이미아, 널 해치고 싶지 않다. 넌 내 하나 남은 동생이고 가장 귀여운 애였다. 그러니 어서 엘미어를 내게 넘겨. 넌 언제나 착한 동생이었지...?" 그러나 데이미아는 흔들림 없는 태도로 소리쳤다. "엘미어의 계승자는 나야! 다크 엘프 따위에게 넘길 수 없어!" 제이룬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는 유리알 같은 차가운 눈으로 데이미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힘으로 빼앗을 수밖에 없군!" 제이룬은 들고 있던 금빛 지팡이를 높이 치켜올렸다. 그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 지팡이의 중앙에 박힌 검은 보석이 차가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페이 세이스 제이데스 라, 아스킨 엘 데스 라우레..." 로이는 놀라운 나머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보석 둘레로 커다랗고 창백한 불꽃이 이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 불덩이는 점점 더 커지더니, 이윽고 그 지팡이의 머리 부분 전체를 감싸며 타올랐다. "가야스 야 헤렌!" 제이룬이 데이미아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푸른 불줄기가 그녀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돌진해 왔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녀의 은 지팡이, 엘미어를 가볍게 휘두르며 외쳤다. "아스틸라 넬 사이엔 아스! (아스틸라여, 저희를 보호하소서!)" 놀랍게도 불길은 로이와 데이미아를 피해 옆으로 갈라져 지나갔다. 그러나 옆으로 지나가기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볼이 얼얼할 정도의 뜨거움을 느꼈다. 정통으로 맞았다간 뼈도 안 남고 다 타버릴 게 뻔했다. '세상에, 아무리 남매끼리 사이가 안 좋기로서니 이렇게 살벌하게 싸우다니...!' "역시 엘미어, 로크 페울로니 중 두 번째 열쇠 답군!" 제이룬이 감탄과 분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데이미아, 이젠 봐주지 않는다. 날 원망 마라, 네가 선택한 거니까!" "사야크스 아르크헨 프레인! (더러운 오르크의 한패거리!)" 데이미아가 지지 않고 소리치자, 제이룬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졌다. 그는 다시, 더 빠르고 격한 말투로 주문을 외웠다. 데이미아는 얼른 로이를 밀쳐내며 말했다. "넌 어디 가서 섬어 있어!" "하지만..." "이건 플리에타의 혈족끼리 해결할 문제야!" 이번에는 푸르스름한 번개불이 데이미아에게 닥쳐 왔다. 그녀는 놀랄 만큼 빨리 로이를 멀찌감치 밀쳐내면서, 동시에 엘미어를 휘둘러 그 번개를 튕겨내어 버렸다. 그리고 제이룬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머니의 이름을 더럽히고, 숲의 종족에게 수치를 가져다 준 자! 엘미어의 계승자로서 용서할 수 없다! 사히 엘레이스 가이아스 라!" 강한 바람이 갑자기 방 안을 휘젓기 시작했다. 데이미아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로이조차 그 바람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제이룬은 얼른 방어 주문을 외웠으나, 바람은 이미 그의 망토를 날려 버리고 팔과 어깨에 상처를 남긴 후였다. "건방진 것! 용서 않겠다! 카이스 야 헤렌, 갈 카야크!" 제이룬의 지팡이에서 아까보다도 더 굵고 강렬히 빛나는 불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사히에렐 다이예즈!" 데이미아가 재빨리 방어 주문을 외웠다. 반원형의 빛이 그녀를 감쌌다. 그러나 제이룬의 불이 그 빛의 막을 강타하자, 데이미아는 그 막과 함께 서너 발짝 쯤 뒤로 밀려났다. 그녀가 거의 한계에 이르렀을 때, 제이룬도 힘에 부친 듯, 숨을 몰아쉬며 불길을 거두었다.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고 둘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이렇게 서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대로 놔 둔다면 데이미아도 그녀와 싸우는 다크 엘프도 성치 못할 게 뻔했다. 게다가 둘은 친남매가 아닌가. '정말... 요정들이란 이해를 못하겠어!'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며 무의식중에 이디실의 손잡이를 잡았다. 잠시 숨을 고르며 상대방을 정탐하던 데이미아와 제이룬은 다시 싸움을 시작하고 있었다. "제이레스 아이레인 가..." "페이스 데이 라헤델 하스!" 데이미아와 제이룬의 지팡이에서 각각 녹색의 번개불과 검붉은 불꽃이 뻗어나갔다. 눈을 아프게 할 만큼 강렬한 빛과 함께, 로이는 잠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쿠르르릉... 쿵! 갑자기 뭔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나면서, 지진이라도 나는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로이는 균형을 잃고 다시 넘어졌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돌 부스러기들이 잔뜩 쏟아져내렸다. 먼지에 기침이 났다. 간신히 눈을 뜨자, 흙투성이가 된 데이미아와 제이룬이 아직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심하지는 않지만 가벼운 상처를 입을 상태 였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이러다가 두 남매가 이 동굴 다 부수겠네!' 로이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이디실을 빼어 들었다. "가야스 야 알레인, 갈 아스틸라!" 데이미아의 외침과 함께, 그녀의 지팡이에서 보기에 섬뜩할 정도로 새빨갛게 빛나는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 불꽃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못한 제이룬을 향해 돌진했고, 그는 방어 주문을 외울 새도 없이 오른쪽 어깨에 커다란 화상을 입었다. "크윽!" 제이룬의 신음과 함께, 그의 지팡이가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내가 이겼군...!" 데이미아는 승리감에 들뜬 얼굴로 숨을 몰아 쉬며 제이룬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제이룬은 재빨리 왼손으로 지팡이를 집어들더니,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가야스 야 헤렌!" 창백한 불꽃이 다시 데이미아를 공격했다. 예상하지 못한 공격에 그녀는 다급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엘미어를 들어 그 공격을 막았다. 다행히 얼미어에 접근한 그 불꽃은 급격히 힘을 잃고 사그러들었으나, 데이미아는 그 힘에 튕겨져나가 벽에 등을 부딪히며 쓰러졌다. "아직도 적을 과소평가하는구나, 데이미아!" 제이룬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면서 소리쳤다. "페이 제이데스..." 그러나 그의 주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로이가 갑자기 달려들어 그를 쓰러뜨리고, 그 목에 이디실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이디실...?" 제이룬이 쓴웃음을 지으며, 칼날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중얼거리듯 물었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이디실의 주인 로이에요. 살고 싶다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에요... 내가 데이미아와 함께 무사히 여길 나갈 때까지." (계속) "로이!" 데이미아가 콜록거리며 로이에게 걸어왔다. 흙투성이에다 옷이 잔뜩 그을어 있었으나, 많이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제이룬을 힐끗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다시 로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를 보호하는 기사인가?" 로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데이미아 친구일 뿐이에요." "그렇군. 기사는 아냐. 손이 떨리고 있는걸. 사람을 죽여본 적이 있기나 한가?" "...그렇게 함부로 말할 처지가 아닐 텐데요." 로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이룬은 그런 그를 보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로이가 떨리는 까닭은 그를 찌를 수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를 찔러야 한다는 생각, 데이미아와 자신이 무사히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를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걷잡을 수 없이 떨리게 했다. '그래도 해야 해... 우리가 살아서 나가려면... 우리는 기다리는 사람 들이 있잖아. 그리고 저 요정은 이미 한 번 죽었던 목숨... 정의를 행하는 거야...' 제이룬은 로이의 생각을 읽었는지, 데이미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데이미아, 난 정말 널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네가 너무 고집이 셌던 거야. 널 쓰러뜨렸다 해도 죽이진 않았을 거다. 날 믿지? 우린 언제나 의가 좋은 남매였지..." "닥쳐." "사실대로 말해 봐라. 내가 영원히 죽어서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니? 네가 날 많이 그리워했다는 걸 안다. 네 앞에서 내가 두 번 죽는 꼴을 보고 싶으냐?" 데이미아는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로이, 네 뜻대로 해! 난... 아무래도 이 자를 죽일 수 없이니까...!"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룬이 말을 할수록 로이는 그가 위험한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원한다면 누구의 약점도 이용할 수 있는 사악한 자라는 것을. 게다가 데이미아에게 친오빠를 죽이도록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를 죽여야 한다면 로이 자신이 해야 했다. 로이는 이디실을 불끈 쥐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정말로 갑작스럽게 로이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마음, 제이룬을 죽이라고 부추기는 그의 마음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그리고 그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게히스헨 메인의 영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로이는 제이룬을 찌르려는 것처럼 칼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다음9 순간 그 칼날이 강타한 것은, 제이룬의 목이 아니라 그의 지팡이였다. 금으로 된 지팡이는 쨍강 소리를 내며 두동강이 났다. 제이룬과 데이미아가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이를 쳐다보았다. 로이는 아디실을 칼집에 집어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헤헤헤... 인정하기 싫지만 당신 말이 맞는 거 같네요. 아무래도 아직은 사람을 못 죽이겠어요. 음... 한 1,2년 뒤라면 몰라도. 하지만 지팡이가 이 꼴이 됐으니, 이젠 우릴 공격하지 못하겠죠?" 제이룬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그런 그를 향해 씩 웃어주고는 데이미아의 손목을 잡아 끌었다. "자, 데이미아, 돌아가자! 네 꼴 좀 봐. 남매 상봉 두 번 했다간 레젠디아 대륙 전체가 날아가겠다." 데이미아는 말없이 로이의 손에 이끌려 그 방을 빠져나왔다.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는 그녀의 오빠를 뒤로 하고. 계단을 거의 다 올라오자, 비로소 그녀는 입을 열었다. "...왜 안 죽였지?" "너도 못 죽였잖아. 네가 마지막으로 그를 공격할 때 알았어. 그의 심장이나 머리를 공격했더라면 단번에 끝났을텐데, 넌 그의 어깨에 불을 쐈잖아... 그리고 난 친구들에게 무사히 돌아갈 수만 있으면 만족해." "하지만... 제이룬이 나중에 복수하러 올지도 몰라." "그럼 또 도망치지 뭐! 한 번 했는데 두 번째라고 못하겠어?" "그래... 맞아!" 비로소 데이미아는 명랑한 목소리로 웃어제꼈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동굴 안의 공기를 유쾌하게 흔들었다. 로이도 따라 웃었다. 곧 계단의 끝이 보였다. 그들은 정박되어 있는 이드릴을 향해 달려 갔다. 그러나 몇 발짝을 남겨놓고, 그들의 뒷목에 칼날의 섬뜩한 감촉이 와 닿았다. "멈추어라, 이디실과 엘미어의 주인!" 공용어를 쓰고는 있지만 분명 오르크의 목소리였다. "제이룬이 실패한 것 같군. 내 이럴 줄 알았지..." "실패한 건 아닙니다, 쿠푸 라샤크. 서운해 하실까봐 몫을 남겨 놓았을 뿐이지요." 계단에서 제이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낭패한 심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이룬! 꼴이 말이 아니군. 이 꼬마들에게 당한 건가?" "...그런 셈이죠." 제이룬은 어깨를 으쓱하고 그들의 앞으로 다가왔다. 라샤크는 피식 웃더니 데이미아의 목에 칼날을 들이대었다. "그럼, 자네가 살아 있으니 이 계집아이는 이제 쓸모 없겠군." "기다리십시오, 쿠푸!" 제이룬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아이는 제 처분에 맡긴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라샤크는 제이룬의 표정을 흘끗 보더니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정들이란...!" "무슨 뜻입니까? 그 아이의 목에서 칼을 치우십시오. 그 아이의 처분은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것이 위대하신 쿠푸-헤, 아크트 님의 결정 이었습니다! 설마 벌써 잊으신 것은 아닐 테죠?" "시끄러워!" 라샤크가 거칠게 소리쳤다. "아크트 님의 결정은 내가 이 작전을 지휘하는 총대장이라는 것 이었다. 그건 모든 결정권이 내게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그렇다면 나는 엘미어의 주인이오." 제이룬의 말투가 변했다. 라샤크의 얼굴이 분노로 씰룩거렸다. "미리 말해 두는데 아크트 님께서는 당신보다 내가 더 가치있다고 느끼실 것이오. 오르크 대장은 또 구하면 되지만 엘미어의 주인, 플리에타의 혈통을 지닌 자는 날이면 날마다 만나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니 만에 하나 여기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의 책임은 모두 라샤크, 당신이 지게 될 것이오." "...감히 나를 위협하는가? 제이룬!" "그 애는 약속대로 내게 넘기시오. 안 그러면 당신에게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도 난 책임질 수 없소. 나는 라스헨 플리에타의 아들이오. 그 능력은 이제껏 보아 와서 잘 알고 있겠지." 제이룬의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서렸다. 로이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팡이가 없는데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하지만 에이론드 아저씬 그러지 못했는데...' "여기까지 왔는데, 그래서 피 한방울 보지 말고 돌아가란 말인가!" 드디어 라샤크는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건방진 요정족. 너희 계집애같은 종족은 그럴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우리 오르크 족은 아니다. 그건 우리 방식이 아냐! 우린 그렇게 곱게 돌아갈 수 없어. 이것들 때문에 한 고생을 생각해 봐라!" "당신네들이 무슨 고생을 했든 난 상관없소. 난 약속한 대로 내 동생을 넘겨받기만 하면 되오. 그럼 이 일을 아크트 님꼐 고해 바치지는 않겠소." "시끄럽다! 대장은 나야. 그리고 넌 반역을 저지르고 있어! 저 놈도 함께 잡아라!" 라샤크의 외침에 오르크들은 좀 당황하는 듯 했다. 제이룬은 분명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존재인 것 같았다. 그러나 대장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한 얼굴을 하자, 머뭇거리며 제이룬에게 칼을 겨누었다. "어리석은...!" 제이룬의 얼굴에 경멸에 찬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그 죽은 자의 눈으로 자신에게 칼을 겨눈 채 다가오는 한 오르크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 오르크는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칼이 그의 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그는 곧 목을 잡으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신음했다. "컥...컥...!" 다음 순간, 로이와 데이미아는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오르크들도 모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 오르크의 고통스럽게 벌어진 입으로부터 엄청나게 크고 독기어린 붉은 빛을 가진 사마귀의 얼굴이 삐져나왔기 때문 이다. 곧 그 오르크는 쓰러졌고, 무섭게 경련을 일으켰다. 그 사마귀는 이제 허리께까지 빠져나와 있었다. 그 주위는 온통 오르크의 검붉은 피가 흥건했다. "커..억!" 마지막 비명을 지르며 그 오르크는 죽어 축 늘어졌다. 그러자 그 사마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 피도 마찬가지였다. 남은 것은 목을 옴켜잡고 쓰러진 오르크의 시체 뿐이었다. 제이룬이 섬뜩할 만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 내 힘을 잘 보았느냐?" 그리고 그는 로이와 데이미아 쪽으로 성큼 발을 디뎠다. 오르크들은 새파랗게 질려서 뒤로 물러났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 데이미아의 손목을 잡았다. "자, 이제 원한다면 출발하시오, 쿠푸 라샤크!" '쿠푸'라는 말을 할 때 그의 말에는 비아냥거림이 짙게 배어나왔다. 라샤크는 잠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건 반역이다, 제이룬." "좋으실 대로 생각하시오." "넌 처음부터 우리와 협력할 생각이 없었지. 그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이동생을 위해서 동료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거냐?!" "당신의 잘못이었소. 아크트는 원래 내 협력의 조건으로 이 아이의 목숨을 보장했소." "상관 없다. 그 아이를 넘기고 용서를 빌어라. 안 그러면 반역자로 간주하고 처형하겠다!" 제이룬은 흘끗 데이미아를 내려다 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나는 반역자로군!" "저 놈을 잡아라. 공격하지 않는 놈은 모두 반역자로 간주하여 내가 처리하겠다!" 오르크들은 잠시 공포가 가득한 얼굴로 제이룬을 바라보며 머뭇 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모두 칼을 휘두르며 그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제이룬은 우습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주문을 외웠다. "페이 세이스 제이데스 라..." 그의 손끝에 파란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주문이 진행됨에 따라 불꽃은 점점 더 커지고 강렬해졌다. 로이조차 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가야스 야 헤렌! 갈 카야크!" 제이룬의 외침과 함께 주위에 강렬한 빛이 솟구쳤다. 로이는 반사 적으로 눈을 감았다. 얼굴이 타는 듯이 뜨겁고, 바람이 그의 몸을 밀어냈다. 겨우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서서 제이룬을 바라보고 있는 데이미아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주위엔 검게 탄 오르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제이룬은 그런 데이미아를 보더니 호통을 쳤다. "뭘 멍하니 보고 있나! 도망쳐라. 엘미어를 지켜야지!" 그의 표정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꾸미고 있었으나, 얼굴은 창백했고 호흡은 거칠었다. 아까 데이미아와의 싸움으로 너무 힘을 소모한 데다가, 마법기도 없이 싸운다는 것이 힘에 부치는 것이 분명했다. 데이미아는 최면술에 걸린 듯 슬금슬금 이드릴 쪽으로 발을 옮겼다. 로이가 그런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이드릴 위에 끌어올리듯 태웠다. "이르가! 하르! (배신자! 죽어라!)" 갑자기 오르크의 탁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반만 남고 다 타버린 라샤크가, 도끼를 들고 제이룬에게 달려들었다. 제이룬은 간신히 피하며 그의 가슴에 다시 불덩이를 날렸다. 라샤크는 당장 숯덩이가 되어 죽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디서 날아왔는지 작은 도끼 하나가 제이룬의 등에 박혔다. "제이룬!" 그제서야 데이미아가 제정신이 든 듯 소리쳤다. 제이룬은 그녀를 흘끗 보더니 소리쳤다. "어서 가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한다면 망령이 되어서도 그 값을 치루게 해 줄 테니!" 데이미아는 더이상 떼쓰지 않았다. 그녀는 과감히 노로 이드릴을 밀어내어 물 위에 띄웠다. 그 사이 제이룬은 그의 주위로 몰려드는 오르크 세 마리에게 번갯불을 내려 숯덩이로 만들었다. "아스타 엘 파하스 가이 젤...!" 그의 입에서 이상스러운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숯덩이가 된 세 구의 오르크 시체와 라샤크의 시체가 벌떡 일어섰다. 제이룬을 공격하러 오던 오르크들이 공포에 질려 그자리에 우뚝 서 버렸다. 되살아난 오르크 시체들은 움직임도 뻣뻣했고 몹시 느린 편이었으나, 적에게 공포감을 심어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르가 아르그르! 슈우르 테! (배신자를 죽여라! 겁먹지 말고!)" 한 오르크가 기세 좋게 소리치자, 비로소 일방적으로 시체들에게 당하고 있던 오르크들이 힘을 얻어 무기를 휘둘렀다. 라샤크의 시체가 퍽! 소리를 내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 몸에서는 피도 나지 않았고, 검은 재만 풀썩 일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다른 한 시체의 머리도 베어져 물 속에 쳐박혔다. . 제이룬은 여기저기로 불덩이를 쏘아 대며 오르크들의 접근을 막았으나, 역부족이었다. 순식간에 그의 등에 두 개의 도끼가 박혔다. 그가 그 공격의 충격으로 멈칫 하는 순간, 한 오르크가 그의 왼팔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가야스 야 헤렌!" 제이룬이 외치는 순간, 그 오르크는 머리에 불덩이를 맞고 저만치 뒤로 떨어져 나가 쓰러졌다. 장력한 불꽃에 머리는 이미 타 없어진 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제이룬의 왼팔도 떨어져 나갔다. "제이룬! 아스헨 키아스! 아스 데하인 로 할, 갈 아스틸라! (제이룬! 나의 오빠, 아스틸라의 이름에 걸고, 영원히 잊지 않겠어!)" 데이미아가 활짝 웃으며 제이룬에게 소리쳤다. 제이룬은 입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왼팔은 떨어져 나가 있었고, 그의 얼굴은 이미 산 사람의 얼굴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다. 그러나 그는 멀리서 보기에도 분명한 미소를 뜨우고 있었다. "아스틸라 넬 펠리인 로! (아스틸라가 너를 지켜 주시기를!)" 그가 소리쳤다. 그 순간, 뒤에서 달려온 오르크 한 마리가 그의 등에 칼을 박아 넣었다. 칼날이 그의 몸통을 뚫고 가슴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몸은 힘없이 꺾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마치 처음부터 생명이 없었던 것처럼. 그리고 그의 몸은 빠른 속도로 먼지가 되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르크 병사가 당황하며 칼을 뽑았을 때, 제이룬의 몸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그러나 이미 그 때, 데이미아와 로이는 이드릴을 타고 사라지고 없었다. 오르크들은 그제서야 자신들이 제이룬의 이상한 죽음에 정신을 빼앗긴 동안, 그들을 밖으로 안내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드래크로니안의 미로 속을 영원히 헤메 이면서, 결코 유쾌하지 않은 전설의 일부분으로 남을 것임을... (제 4장 <엘미어의 계승자> 끝. 제 5장 <승리의 그림자>로 이어집니다.) 제 5장 승리의 그림자 (The Shadow of Victory) "영주님! 가망이 없습니다. 이미 오르크들이 성문을 뚫고 들어 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병사가 쓰러지듯 무릎을 꿇으며 갑옷과 검으로 무장한 프라니드의 영주 가란에게 소리쳤다. 영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의 본채만이라도 지켜라. 이제 곧 국왕 폐하께서 몸소 도착하실 것이다. 오르크들이 프라니드까지 세력을 확장하도록 놓아 둘 수는 없다!" "국왕 폐하가 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영주님, 일단 몸을 피하십시오. 이대로라면 해가 뜨기 전에 성을 장악당합니다!" "어리석은 소리! 병사들은 다 뭘 하고 있느냐. 프라니드의 병사들은 고작 오르크 몇백 마리도 상대할 수 없단 말이냐?" "...그냥 오르크가 아닙니다. 무늬 없는 새카만 깃발을 들고 있고... 용이 그들을 지휘한다고 합니다. 검은 비룡이!" "...하르크자엘...!" 영주의 입에서 신음과도 같은 비탄스러운 중얼거림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명령에 망설임이라고는 없었다. "상관 없다. 이 기회에 하르크자엘의 목을 폐하께 바치자. 나도 남아 싸우겠다. 그러니 어떤 병사의 후퇴도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곁에 선 기사들은 그를 말리려 했으나,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을 박차고 나갔다. 벌써 성의 본채 안까지 오르크들이 밀고 들어 오고 있었다. 몇 겹의 나무와 철창으로 된 성문은 참담하게 찌그러져 떨어져 나간 후였다. 프라니드의 병사들은 필사적으로 오르크들을 막으려고 앴지만, 죽음도 상관 없다는 듯 밀어닥치는 그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영주는 당당히 소리치며 그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곧 국왕 폐하의 원군이 올 것이다. 그때까지 프라니드를 지켜야 한다! 그 전에 후퇴하는 자는 용서 않겠다!" 영주의 등장에 병사들은 조금 힘을 얻은 것 같았다. 가란 영주는 이제 50을 바라보는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기사와 병사들이 무색할 만큼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가 첫번째 검을 휘두르자, 그를 얕보고 돌진 하던 오르크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영주의 흰 갑옷에 오르크의 거무퉤퉤한 피가 흘러내렸다. 이어서 그는 자신에게 던져진 도끼를 방패로 막아 내고는, 한 기사를 쓰러뜨리고 그의 심장을 찌르려 하는 오르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가란 영주님 만세!" "우리의 땅을 지키자!" 병사들의 함성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승승장구하던 오르크들의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인간 시체 일색이던 성의 바닥에 오르크의 시체가 하나 둘 늘어갔다. 그리고 인간과 오르크의 피로, 성의 하얀 대리석 바닥은 사방에 붉은 얼룩이 졌다. 프라니드의 병사들은 이제 거의 오르크들을 성 밖으로 밀어 내고 있었다. 그러느라 죽은 병사의 시체가 성 안에 산더미같이 널려 있었으나, 어찌됐든 오르크들에게서 성을 지키는 것이 이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오르크들 사이에서 공용어로 외치는 당당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푸이 하르크! 저승의 전사들! 너희들의 실력이 고작 이거냐? 싸워라, 하르크자엘이 너희들과 함께 있다. 너희들은 지지 않는다. 나, 하르크자엘은 패배를 용서하지 않겠다!" 맑고 거침없이 우렁찬 그 목소리는 오르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 호통에 오르크들은 다시 힘을 얻어, 미친 듯이 괴성을 지르며 진격해 왔다. "크와아아악!" "하르크자엘! 하르크자엘!" "가 아르그르! 아르그르! (인간을 죽여라, 죽여라!)" 한 기사가 선두에서 말고 들어오는 오르크의 머리를 세로로 베었다. 그 오르크는 쿵 쓰러졌으나, 쓰러지면서까지 그 기사의 배에 도끼를 박아 넣었다. 쓰러진 오르크의 시체 위로 그 기사의 시체도 풀썩 쓰러졌다. 다른 오르크 두 마리가 가란 영주를 공격했다. 두 손에 칼을 하나씩 든 오르크와, 무식하게 큰 도끼를 든 오르크였다. 그들은 영주를 구석으로 몰아 갔다. 영주가 쌍칼을 즌 오르크의 오른손을 베고, 도끼를 든 오르크의 한쪽 눈을 빼앗았으나, 그들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한참의 전투 끝에야 그는 도끼를 든 오르크의 배를 가를 수 있었다. 그 오르크는 끝까지 하나 남은 눈을 부릎뜨고 영주를 노려보며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다른 오르크의 칼날이 영주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영주는 젊은이나 다름없는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비틀며 그 오르크의 머리를 베었다. 싹둑! 그 오르크의 머리가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그의 칼이 영주의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제길! 나도 몸이 예전같지 않군...!' 가란 영주는 어깨를 움켜잡으며 숨을 돌리고 다른 병사들을 살폈다. 모두 그리 좋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오르크 무리의 선두에 선, 인간 청년의 모습을 한 기사가 휘두르는 칼은, 대여섯 명의 기사가 달라붙어서도 당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묻지 안고도 영주는 그의 정체를 직감할 수 있었다. "하르크자엘...!" 과연 그는 저승의 바람이라 불릴 만 했다. 그의 칼솜씨는 바람처럼 빨랐고, 그만큼 무자비했다. 그가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칼을 휘두르자 한 기사의 칼이 천장을 향해 치솟았고, 그 칼이 땅에 떨어 지기도 전에 그 기사의 머리가 싹둑 잘라져 천정으로 던져졌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곁에서 그를 공격하고 있던 다른 기사들은 그에게 아무런 치명적인 해도 입히지 못했다. 고작 볼과 어깨, 그리고 무릎에 가벼운 찰과상을 입힌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건장한 인간 남자보다 머리 둘은 더 커 보이고, 몸무게는 적어도 두 배쯤 나갈 것 같은 거대한 오르크가 버티고 있었다. 그 체격만으로도 병사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한 그 오르크는, 멀리서 보기에도 헌신적으로 하르크자엘을 엄호하고 있었다. "하르크자엘!" 부하들의 죽음을 보다 못한 영주는 최대한 크고 당당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하르크자엘의 눈이 차가운 빛을 내며 영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 보았다. 소문에서 듣던 대로, 피처럼 선명한 자주빛 눈동자였다. "나는 이 성의 영주 가란이다. 더이상 내가 다스리는 사람들의 죽음을 방관할 수 없다! 나와 일대일로 싸우자. 네가 라우더에서 그랬던 것처럼!" "영주님! 안됩니다!" 한쪽 팔을 잃은 기사가 달려오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영주 자신도 알고 있었다. 불과 몇십 년을 살고 체력이 쇠한 자신이 수백년을 살고도 젊음을 유지하는 하르크자엘에게 일대일로 도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어 보이는지를. 그러나 그는 그 기사의 말을 무시했다. '내게도 기회는 있다... 수많은 용사들이 드래크로니안들을 무찔렀지 않는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에겐 그 나름의 재주가 있는 것이다!' "부하들을 물러가게 하고, 나와 직접 싸우겠다는 것인가? 에스테이아 식으로?" 하르크자엘의 목소리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날더러 인간을 믿으라는 것인가?" "너는 믿을 수밖에 없다. 내가 너를 믿고 이런 제안을 하니까!" 하르크자엘의 입가에 서려 있던 비웃음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는 정중한 대도로 영주를 바라보녀 대답했다. "그대의 청은 받아들여졌소, 프라니드의 영주! 그루크, 푸이 하르크를 물러가게 해라!" "예, 주인님!" 그 거인 오르크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복종했다. "영주님, 저 자는...!" 또 다른 기사가 영주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그는 영주의 부관으로, 충성스러운 마일즈라 불리는 기사였다. 그러나 영주의 결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주위를 물러라. 이제 우리 둘의 대결이다. 만약 내가 지더라도, 끼어드는 자는 용서 않겠다!" 기사 마일즈는 영주에게 무슨 말인가 더 해 보려고 했으나, 그의 표정을 보고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뒤로 물렀거라. 영주님의 명령이시다! 아무도 적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병사들은 술렁거리며 불안한 기색을 보였으나, 어쨌든 마일즈의 명령에 따랐다. 오르크들은 그들보다 자신만만한 분위기였다. 오르크의 표정을 읽을 수 있는 자가 있었다면, 아마 그들이 미소짓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네가 지면 조용히 물러갈 것을 약속하나, 하르크자엘?" 가란 영주가 조용히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하르크자엘은 그 물음에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선의의 미소였다. "물론 약속하오. 뿐만 아니라 내가 이기더라도 얌전히 항복하는 자에겐 어떤 해도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하지만 대항하는 자나 비겁한 행동을 하는 자는, 여기 있는 오르크들, 저승의 전사들의 처분에 넘겨질 것이오." 마지말 말에 오르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가란 영주는 그들의 살기를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반드시 이겨야 했다. 하르크자엘은 말을 마치고 발소리도 없이 가란 영주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는 키가 컸으며 가늘고 긴 칼을 쥔 모습이 당당하고도 날렵해 보였다. 영주는 자세를 낮추며 힘을 주어 검을 잡았다. 둘은 한동안 긴장을 풀지 않고 서로를 살피기만 했다. 인간 병사들과 오르크들도 조용히 숨을 죽인 채 두 지도자의 대결을 지켜 보았다. 너무나도 조용해서 상대방의숨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가란 영주는 하르크자엘의 호흡이 자신보다 거칠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이 탓에 방금 전까지 성 안에서 지휘를 하던 자신에 비해, 하르크자엘은 줄곧 성 밖에서 오르크들과 똑같이 싸우지 않았는가. 자신보다 지쳐 있는 것이 당연했다. '...승산은 있어!' 가란 영주는 재빨리 하르크자엘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돌진 했다. 하르크자엘의 칼이 그의 공격을 막기 위해 목 위로 올려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가란은 재빨리 손을 놀려, 그의 목이 아닌 심장을 향해 칼을 내리꽂았다. 챙! 칼날과 칼날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퍼졌다. 하르크자엘은 성큼 뒤로 물러서 감탄과 놀라움, 당황이 뒤섞인 표정으로 가란 영주를 바라 보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날카로운 공격에 놀란 것이 분명했다. '기회다!' 영주는 적이 당황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칼은 큰 원호를 그리며 하르크자엘의 머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그 공격을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피해 냈다. 그리고 영주가 공격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 그의 가슴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다. 영주는 칼을 제대로 잡지도 못한 채 간신히 그의 공격을 받아 쳐냈다. 챙강!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을 쥔 영주의 손에 큰 충격이 왔다. 그는 칼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았다. 첫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두 번째 공격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배를 향해. 가란 영주는 자세를 가다듬을 틈도 없이 또 그 공격을 막아 내야 했다. 잠시 그의 몸이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하앗!" 하르크자엘의 고함과 함께 그의 칼날이 머리 위에서 날아왔다. 대체 어떻게 하길래 그렇게 빠른 속도로 여기저기서 칼날이 날아오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다. 가란 영주는 재빨리 몸을 피하며 쓰러졌고, 하르크자엘의 칼날은 그의 팔을 스쳤을 뿐이었다. 그러나 피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영주는 그의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하얀 칼날을 보았다. 피할 방법이 없었다. 영주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쓰러진 채 눈을 질끈 감고, 몸을 피하지 않은 채, 하르크자엘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으윽!" "컥!" 하르크자엘과 가란 영주의 입에서 동시에 신음이 터져나왔다. 영주의 가슴에는 하르크자엘의 길고 가는 칼이 꽂혀 있었다. 갑옷도 그 칼날 아래 금이 가 깨어져 버렸고, 그 칼끝은 영주의 몸을 꿰뚫은 채 성의 돌바닥에서 멈추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위에는 하르크자엘이, 영주의 몸에 꽂힌 칼을 꼭 잡은 채, 가슴을 왼손으로 누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왼손의 손가락 틈으로 선홍색의 피가 흘러나와, 영주의 갑옷에 툭툭 떨어졌다. 영주는 죽음의 그림자가 덮이기 시작한 얼굴로 하르크자엘을 올려 보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가...이겼다. 하르크자엘...!" "그런 것 같군... 그러나 당신도 얌전히 죽지는 않는군, 프라니드의 영주! 경의를 표하오. 내게 이런 상처를 준 인간은 당신이 처음이니..." 하르크자엘이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미소를 짓고 말했다. 갑옷을 입지 않은 하르크자엘의 상처는,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영주가 기대했던 것보다 꽤 깊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주의 고개는 푹 옆으로 젖혀졌다. 숨을 거둔 것이다. 하르크자엘은 다시금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 영주의 몸에서 칼을 뽑았다. "주인님!" 갑자기 그루크의 날카로운 외침이 하르크자엘의 귀를 때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앞에서 번뜩 이는 마일즈의 검이었다. 아무리 하르크자엘이라 할지라도 이런 급습에 대항할 도리는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부상까지 당해 거동이 불편한 몸이었다. 그는 재빨리 칼을 들어 적의 공격을 막았으나, 반사적으로 나온 엉성한 행동에 불과했다. 목숨을 건 마일즈의 공격에 하르크자엘은 쓰러질 듯 휘청거리며 뒤로 밀쳐졌다. 그의 오른쪽 어깨에 커다란 상처가 생겨, 피가 흘러내렸다. 마일즈의 얼굴에 비장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다시 칼을 높이 쳐들고 하르크자엘을 향해 돌진했다. "죽어랏!" 그러나 하르크자엘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마일즈의 칼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그루크의 거대한 칼이 마일즈의 몸을 두 토막으로 잘라 버렸기 때문이다. "약속을 어겼다! 인간들을 죽여라! 모조리! 가 아르그르!" 그루크의 우렁찬 외침이 성 안을 울렸다. 다시금 인간과 오르크들은 엉겨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영주도 그 부관 마일즈도 잃은 프라니드의 병사들에게 희망이란 없었다. 다음 날 해가 떠오르기 한참 전에 프라니드의 인간 병사들은 몰살당했다. 목숨을 건진 것은 몇 명의 포로들과 탈영병들에 불과했다. 그 사이 인간들의 보급품으로 상처를 싸맨 하르크자엘은 오르크들 틈에 나와 소리쳤다. "힐리온을 찾아라! 성 안을 구석구석 뒤져라! 탐나는 것이 있거든 가져도 좋다. 그러나 이 영주의 갑옷과 방패는 힐리온을 찾는 자의 것이다!" 휘황한 영주의 무장은 오르크들을 열광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금방 만족과 흥분에 가득 찬 오르크들의 함성이 성을 흔들 듯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기꺼이 탐색과 약탈을 시작했다. 그들의 탐색이 계속되는 동안 하르크자엘은 아무 물건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프라지드 성의 가장 높은 곳, 망루대의 지붕 위에 걸터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에게 접근하여 보고할 수 있는 것은 저승의 전사들의 대장, 그루크 뿐이었다. "주인님... 샅샅이 뒤졌지만, 힐리온 따위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포로들을 심문해 봐도..." "여기에 없겠지." 하르크자엘은 의외로 너무나 침착하게 대답했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주인님, 어떻게...?" "처음부터 그리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였다. 하는 수 없군. 영주의 갑옷은 네가 갖도록 해라. 내 목숨을 구한 댓가로. 방패는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공적이 컸던 놈에게 주어라." "주인님. 제가 주인님의 목숨을 몇 번을 구한들, 그것은 주인님께서 제게 베푸신 은혜의 절반도 쫓아가지 못합니다..." "그 말은 지겹게 들었다. 내가 시킨 대로 해라. 군말은 약자나 하는 법!" 그루크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감사의 표시로 허리를 깊이 굽혀 절했다. 그의 주인이 그것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말을 꺼냈다. "오늘 해질 녘까지... 에스텔에서 왕의 군사들이 온다고 합니다." "그럼 약탈을 일찍 끝내야겠군. 부하들에게 서두르라고 해라." "주인님... 에스텔은 여기서 말을 달려도 적어도 사나흘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에스텔 군사들이 오른 도착한다면, 최소한 일주일 전에 출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기마대만 온다 해도 사흘은 거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지역을 침공한 것은 겨우 그저께 저녁이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 앞에서 네 계산 실력을 자랑하자는 건 아닐테고..." "그들은 우리가 오기 전에 우리의 공격을 알았습니다. 첩자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푸이 하르크(저승의 전사들)에?" 하르크자엘은 예사로운 말투로 지나가듯 물었으나, 그 한 마디에 그루크는 큰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아닙니다!" 그루크의 얼굴이 흥분으로 실룩거렸다. "그런 일은 제가 용납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주인님을 배신하는 자가 제 부하들 중에 있다면, 저는 그 놈에게 가장 잔인한 죽음을 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제 아들 중 하나라 하더라도! 그러나 라우더에는 주인님을 시기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왜 드라크노움의 엘미어를 찾는 데 주인님이 아닌 라샤크가 가야 했습니까? 그것도 그 의심스러운 다크 엘프의 지식에 의존해서... 드라크노움의 신전의 미로는 바로 주인님의 종족이 만든 것인데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리석은 라샤크를 그리로 보내고 주인님을 이곳, 프라니드로 불러온 것입니다. 부정확하기 짝이 없는 소문을 빌미로! 죄송합니다. 주제 3넘은 말인 줄 압니다만..." 비로소 하르크자엘의 눈이 그루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루크는 도저히 인간의 모습을 한 존재들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으나, 그가 화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라우더에서 나를 없애고 싶어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네 동족들 이다. 오르크, 내가 나타나지 않았었다면 분명 카야크의 힘을 독차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종족... 다크엘프와 다른 용족은 그 수와 세력이 너무 적고, 나머지 종족이래야 짐승 정도의 지능 뿐이니... 그런데 너는 내게 네 동족을 고발하려는 거냐?" "저를... 저희를 구해주신 것은 저희 동족이 아닙니다. 바로 주인님 이십니다. 저희는 모두 그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하르크자엘은 피식 웃었다. 경멸과 피곤함이 섞인 비웃음 이었다. 그의 입에서 고대어가 튀어나왔다. "로, 슬라드 플리이스! (너, 충성스런 보호자여!)" 그루크가 고대어를 알아들을 리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하르크자엘이 고대어를 중얼거릴 때, 그것은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이번 에는 용서를 비는 뜻으로 허리를 깊이 굽혔다. 동이 터 오는 하늘에서 커다란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스스름없이 하르크자엘의 어깨위에 앉았다. 그는 까마귀의 발목에 묶인 편지를 풀어 슥 훑어보았다. "라샤크가 드라크노움의 신전의 미아가 되었나 보군. 내 이럴 줄 알았지." 하르크자엘이 도리질을 하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는 라우더로 돌아간다. 왕의 군대가 와서 일이 복잡해지기 전에 부하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라. 전권을 네게 맡긴다. 그리고..." 하르크자엘의 얼굴에 일순간 잔인한 미소가 스쳤다. "겁쟁이 왕이 오실 모양이니 환영식을 해야지. 영주와 부관의 목이 제일 먼저 그들을 맞도록 해 주어라." ------------------------------------------------------------------- 태양이 서쪽 드라크노움 산맥의 너머로 서서히 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반대쪽, 동쪽의 금빛 평원으로부터 먼지를 흩날리며 수백명의 기마대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들의 은빛과 금빛 갑옷과 병사들의 단단히 손질된 창들이 저무는 햇살에 장엄하게 빛을 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로, 당당하게 울부짖는 날개 달린 금빛 사자의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누구라도 그 깃발을 보면 고개를 숙이는, 바로 에스테이아 왕실의 깃발이었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눈처럼 하얀 백마를 타고 달리는 자는 나이 지긋한 국왕 아클레어 3세였다. 이제 예순을 바라보는 그의 수염은 눈처럼 희었으나, 몸매는 아직 군살이 없이 다부졌고 눈빛은 무서울 정도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누구라도 의심치 않을 왕의 풍모였다. 그러나 그의 풍채도 시종일관 그의 곁에서 말을 달리는 기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키가 크고 꼿꼿하게 몸을 세운 그 청년은 그 자신이 왕으로 오인받을 수 있을 만큼 당당해 보였고, 어느 적이라도 섣불리 공격할 수 없을 만큼 빈틈없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방패에는 에스테이아의 귀족들 중 가장 잘 알려진 문장, 비룡을 찌른 두개의 칼, 아덴 가의 문장이 조각되어 있었다. 그 당당한 기사들은 평원을 가르듯 무서운 속도로 프라니드 성을 향해 진격했다. 왕의 가슴에는 조바심과 근심이 점점 커져만 갔다. '이틀 전 저녁에 공격이 시작된다고 했다... 이틀 전 저녁에... 가란의 실력이라면 분명 늦지 않았을 터... 그러나 상대는 하르크자엘!' "폐하...! 저곳에..." 정찰병으로 보냈던 한 기마병이 헐레벌떡 뒤어오며 소리쳤다. 그의 얼굴 가득한 공포의 표정은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모든 상황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이미 늦은 것인가...?' "전멸했습니다. 한 사람도 남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영주님은..." 그 병사는 새파랗게 질려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왕은 어두운 표정으로 기마대를 멈추도록 지시했다. "늦었단 말인가... 보병들을 따로 오게 하고 기마대만 서둘러 진격 하게 한 보람도 없이..." 왕의 목소리가 고통에 찬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은빛 투구를 벗으며 근위대장, 리반의 아들 아덴 가의 클레이브가 명령을 기다리며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보병대에게는... 매를 보내라. 수도 에스텔로 돌아가라고." 늙은 왕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프라니드로 간다... 전사한 영혼들에게는 그 명예에 맞는 장례를 치루어야 할 테니..." 명령은 전달되었다. 그리고 기마대는 다시 전진했다. 그러나 아까와 같은 속도도, 당당함도 없이. 그들은 싸워 보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었다. "맙소사..." 누가 말했는지, 갑자기 어디선가 낮은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3병사와 기사들도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잠시 숨을 멈추었다. 멀리서도 그 끔찍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성문 앞에 사슴 머리의 장식처럼 높이 내걸린 두 사람의 머리, 고귀하던 영주와 그의 충성스런 부관의 머리를. 눈동자는 새가 파먹었는지 오르크들이 빼앗았는지 없었고, 그 머리의 아래, 성문의 문턱에는 까마귀떼가 징그럽도록 잔뜩 앉아 있었다. 기마대가 접근하자 그 검은 새떼들은 불길한 울음소리를 내며 날아 도망쳤다. 마치 검은 구름이 물러가듯이. 그리고 그들이 앉았던 자리에는 머리 없는 시체 두 구가 뒹굴고 있었다. 갑옷까지 빼앗기고, 새들에게 파먹힌 시체가. "가란...!" 늙은 왕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나왔다. 클레이브는 그의 얼굴이 잠시 일그러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곧 침착성을 회복했다. "...장례를 치뤄야 한다. 최고의 용사와 그 충성스런 신하에 맞는... 가란은 그럴 가치가 있으니." 클레이브는 주군에게 고개를 숙이고 말없이 성문을 향해, 눈 없이 그를 내려다 보는 두 개의 머리를 향해 말을 몰았다. '하르크자엘... 멋진 환영 인사군.' 클레이브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그 넘쳐나는 증오를 숨기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클레이브는 서슴없이 두 손을 들어 창에 꽂힌 가란 영주의 머리를 빼내었다. 그리고 공손히 그 머리를 두 손으로 바쳐 들었다. "하르크자엘 놈..." 어느 새 그의 바로 뒤에 왕이 서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클레어 3세는 한층 더 늙은 모습으로 옛 친구의 머리를 내려다 보았다. 투구를 벗은 그의 얼굴은 반쯤 얼이 빠진 듯 했다. "...보지 마십시오, 폐하." 클레이브의 말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봐야 하네. 친구를 구하지 못하고 외면까지 해서야 안되지." "폐하께서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고맙군..." 아클레어는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으나 얼굴이 일그러질 뿐이었다. '제길... 가란과 함께 로데인의 잔당을 소탕했던 것이... 에스텔까지 공격해 온 비룡과 하피 무리를 무찔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것이 이름 높은 기사의 죽음이란 말인가? 겨우 이 광경이 통일 제국 에스테이아의 모습인가...!' 클레이브는 자신의 새하얀 망토를 벗어 성문 앞에 쓰러진 머리 없는 시체들 위에 덮었다. 그의 등 뒤로 왕의 공허한 명령이 들려왔다. "모두 여기에 머문다. 프라니드의 전사자들은 하르크자엘과 오르크 들을 상대로 외롭고 기사답게 싸웠다. 그들의 죽음에 걸맞는 장례 절차가 끝날 때까지, 이 성은 우리가 지킨다!" 클레이브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가란 영주의 머리만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죽음의 걸맞는 장례 -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장례도, 어떤 복수도 죽은 자의 생명에 보상이 될 수 없음은 물론, 살아있는 자의 죄책감을 덜어줄 수도 없었다. 그는 10 년 전, 겨우 열 일곱살 때 그 사실을 알았다. 라우더, 영지 전체의 죽음, 그리고 그의 아버지의 죽음 ... 아무리 많은 눈물이 뿌려진들 무슨 소용일까. 그의 비석 앞에서 울고 간 영주들은 모두, 오르크와 하르크자엘의 공포 때문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한 자들이었다... 클레이브는 가란 영주의 머리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의 동생은 아버지의 죽음을 하르크자엘의 죽음으로써 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죽음은 갚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사전에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죽은 후에 적 몇 백명을 더 죽인들 아무런 소용이 없어. 이것은 멸망하느냐 멸망당하느냐의 전쟁...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 그 모든 마족을 멸할 때까지 내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 라베인 아스틸라, 사르헤이넨 델 라시인 아스! 라베인 레이스 데인 뤼아난! 레이스 데인 시엘리! 라베인 레이스 데인 휘리엔, 사 넬 헤인 아스! 사 넬 헤인 아시르펠, 라베나드 라스헨 로센! 사 넬 플리인 아시르휘리엔, 레이스 데인 뤼아난, 레이스 데인 시엘리! 요정들의 노랫소리가 해가 진 로센 라스 전체에 조용히 울려퍼졌다. 노래라기보다는 시의 암송이라고 해도 좋을, 단조로운 음조였다. 그러나 그 소리는 그들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다른 노래들 못지 않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언제나처럼 로센 라스는 계절에 관계 없이 온화한 바람이 불고 있었으며, 어두운 하늘엔 은빛 보름달과 창백한 별들이 반짝였다. 그 아래, 광장이라고 해도 좋을 로센 라스의 중앙, 유일하게 나무가 없는 곳에 숲의 종족 드라이어드들이 모두 둥글게 모여 앉은 채 조용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읊조리고 있었다. 로이와 랜스, 툴위그는 맨 앞줄에 앉은 채, 조금은 어색하고 조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취한 상태로 그 노래를 듣고 있었다. 켈리는 좀 달랐다. 그녀는 그 노래를 조금 아는 듯, 아는 부분이 나올 때면 요정들과 함께 흥얼거리고, 모르는 부분은 콧노래로 때우며 그들과 일부분이 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커다란 잿빛 늑대, 펠히스가 그녀의 무릎 위에 고개를 올린 채 길게 누워 있었다. "저 노래를 알아요?" 로이가 조그맣게 속삭여 켈리에게 물었다. "응... 저들의 운명을 지켜 주는 아스틸라에게 기도를 올리는 거야. 있다가 말해 줄께. 지금은 조용히 해야 해." 켈리의 대답에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요정들은 오래 기다리도록 만들지 않았다. 곧 노래가 잦아 들었고, 광장 중앙에는 금빛 나뭇잎의 관을 쓴 그들의 여왕, 아렌데일이 나타났다. 그녀의 뒤에는 마법사의 지위를 나타내는 하얀 로브를 입은 어린 소녀가 따라오고 있었다. 데이미아였다. 그녀의 하얀 살결과 긴 갈색 머리칼, 그리고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가벼운 걸음걸이 등을 보는 순간, 로이는 우스꽝스럽게도 그녀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낯선 존재인 것처럼 느껴졌다. 아렌데일의 손에는 은빛의 허리띠가 들려져 있었다. 어두운 밤인 데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았으나, 무슨 문자들의 가들 적혀 있는 것 같았다. 여왕은 그것을 높이 들어 요정들에게 보여주더니, 데이미아의 허리에 손수 매어 주었다. "저 애는 이제 제자의 신분을 벗어나 완전한 마법사가 된거야." 켈리가 로이의 귀에 대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세렉이 녹색의 보자기에 감싼 기다란 물건을 들고 그들에게로 다가 왔다. 그리고 그 물건을 데이미아에게 내밀었다. 데이미아는 조심스레 그것을 받아 보자기를 폈다. 녹색의 보석이 별처럼 빛을 발했다. 엘미어. 데이미아는 높이 그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갑자기 요정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박수는 치지 않았다. 로이는 이 종족이 박수를 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대신 그들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똑같은 가사, 그러나 훨씬 생기있고 화려한 곡조로. 라베인 아스틸라, 사르헤이넨 델 라시인 아스! 라베인 레이스 데인 뤼아난! 레이스 데인 시엘리! ...... 드라이어드들은 아쉽게도 그다지 질서 있는 종족은 아니었다. 의식은 흐지부지 끝나고 당장 노래와 웃음이 광장을 메웠다. 그리고 어디서 나왔는 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술과 음식들도 곧 마련되었다. 음식이래야 빵과 과자 비슷한 것 조금과 과일 뿐이었지만. "로이!" 데이미아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엘미어를 든 채 로이에게 달려왔다. 이제는 로이가 알던 활달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후였다. 로이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까 멋있었어, 데이미아!" "정말?" 둘은 금방 다시 깔깔 거리며 담소하기 시작했다. 랜스는 가만히 구석에 선 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너도 좀 즐기지 그래? 내일 아침이면 또 그 고생스러운 여행이 시작인데." 어느 새 켈리가 그의 곁에 와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나무 컵에 담긴 드라이어드의 음료가 두 잔 들려 있었다. 그녀는 한 잔을 랜스에게 건네주었고, 그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랜스는 그 음료가 전혀 맛있지 않았다. 무슨 풀즙처럼 쓰기만 했다. 툴위그도 질색을 했다. 그러나 켈리만은 예외였다. 그리고 보니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이 요정들 틈에서 잘 어울리고 있었다. 고대어를 잘 하기 때문일까...? "고대어는 어디서 배웠어?" "말했잖아. 보물 사냥 하기 위해 도굴꾼들한테 배웠다고." 켈리는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부모님한테 배운 게 아니고? 네 이름을 고대어로 지어 주신 건..." "이름이야 어디서 주워들어 지었겠지. 내 이름 얘기 자꾸 하지 마. 그거 무슨 뜻인지나 알아? 약속 잘 지킨단 뜻이래. 무슨 이름이 그러냐? 나 콤플렉스 있다고."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추궁할 수는 없었다. 랜스는 무안해져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세렉이 다가와 말을 걸기 전 까지는. "켈레브리스!" 하고 세렉이 반갑게 불렀다. 하얀 마법사의 정장에 은빛 망토를 두른 그의 모습은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켈리는 자신의 본명이 불리자 한숨을 푹 쉬었으나, 어쨌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아난 데인 살리나드 시엘리! (축복의 별이 빛나는 밤이군요 - 요정들의 밤인사)" "아난 데인 살리나드 시엘리.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데이미아가 그러더군요." 세렉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려고 노력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섭섭함이 가득 배어났다. "죄송합니다. 조카와 재회하자마자 저희에게 빼앗기는 격이니..." "별말씀을. 그 애는 플리에타의 딸, 숲의 마법사입니다. 어차피 로센 라스에만 머무를 아이는 아니죠..." 세렉은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건 그렇고... 에스테이아의 통일 이후 인간들은 고대어를 다 잊었다고 생각했었는데..." 랜스는 자신을 흘끗 돌아보는 세렉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드라이어드들은 모두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통합되어 강대해져 가는 인간들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있었고, 에스테이아의 통일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특히 세렉 -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 전설 속의 숲의 마법사의 동생이라는 그는 랜스의 칼을 보고 그 문장을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두 개의 칼에 꽂힌 비룡, 아덴 가의 문장을. 켈리와 세렉은 정신없이 요정족의 역사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이제는 인간들 틈에서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그 이야기들에 관해. 랜스는 슬그머니 그들에게서 빠져나왔다. 켈리는 거의 눈치채지 못했으나, 세렉은 금방 그의 부재를 알았고 또한 반갑게 받아들였다. "저 사람은 정말로 누굽니까, 켈레브리스?"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세렉이 물었다. "말씀드렸잖아요. 떠돌이 검사라고." "그 칼의 문장을 보셨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에스테이아의 첩자를 반기지 않습니다. 단지 당신의 친구이고, 데이미아의 동료이니 그를 받아들인 것 뿐입니다. 당신이 그가 아무 문제 일으키지 않을 거라 약속했으니, 그 말을 믿는 것이죠 - 켈레브리스, 약속의 이행자." "...무슨 말씀이시죠? 요정들이 에스테이아를 적대시한다는 건가요?" "하하... 그럴리가요. 우리 요정족은 인간들과의 갈등은 원하지 않습 니다. 드라이어드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 제국의 적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도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요정들이 에스테이아의 통일 전쟁, 네아 데인 에인에서 다른 국가의 편을 들다가 전사했지요. 로데인, 아트웰, 혹은 디온... 그들은 친구들을 돕기 위해 싸우다 죽었고 우리 요정들은 그것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건 벌써 백 년쯤이나 전의 일인데요. 랜스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그렇겠죠." 하고 세렉은 켈리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그렇지 않을 텐데요'라고 말하는 듯이. 켈리는 왠지 불안해져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세렉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간의 수명이란 어떤 면에서는 부러운 것입니다. 짧은 인생이니 만큼 누적되는 슬픔도 적겠죠. 그러나 우리 요정족은 아닙니다. 인간들은 잊기 쉽죠. 자신들에게는 할아버지 적의 일이고, 이미 죽은 역사인 일이 우리 요정족이나 용족에게는 살아 고통을 주는 기억일 수 있다는 것을..." 켈리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들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요정들의 활달한 노랫소리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세렉은 켈리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폈으나, 그녀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이윽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켈레브리스, 고대어를 아는 아름다운 인간. 당신의 친구로서 당신을 걱정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는 - 인간들도 요정들도 - 너무나 잊기 쉽지만... 헤이 칼리엔 드리인 사르나우클, 헤이 제미엔 드리인 사르니드 - 모든 승리에는 그림자가 있고, 모든 패배에는 빛이 있다..." 켈리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세렉을 바라보았다. 3 "에이니드 세렉! 사 틸린 자히 ㅋ 딘! (마법사 세렉!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아시는군요!)" 세렉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켈레브리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당신을 위해 싸워 줄 용기가 없지만, 결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제 누님, 라스헨 에이니드 플리에타가 그러했듯이 저와 데이미아도 당신의 편이라는 것을 믿어 주시겠지요?" -------------------------------------------------------------------- "하르크자엘, 방금 귀환했습니다." 제피로스는 노토스의 앞에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급히 응급 처치만 거친 어깨와 가슴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욱신거리고 쑤셨다. 출혈도 생각보다 심했다. 그러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고, 게다가 몸이 아픈 기색을 저 오만한 아크트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그 오르크는 질투에 사로잡혀서 제피로스의 흠집을 잡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까. 노토스는 두 개의 머리에 각각 둘씩 달린 붉은 눈동자로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은 부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부상을 입었군, 하르크자엘." 언제나 그렇듯이 거대한 노토스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그리 힘을 준 것도 아닌데,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리고도 남았다. "황송합니다. 프라니드의 영주 가란과 그 부관에게 상처를 입었으나, 심하지 않습니다. 그 두 기사를 비롯하여, 프라니드의 모든 인간족을 몰살 시켰습니다." "...그러나 힐리온은 찾지 못했다고?" "...황송합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꼴 좋군!" 노토스의 곁에서 듣고만 있던 아크트가 잔뜩 심술이 난 목소리로 내뱉듯이 말했다. 그의 얼굴엔 하르크자엘을 야단칠 기회가 생겨 기쁘다는 표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고작 칼 하나 갖고 몇 년이나 끌 생각인가? 그러고도 저승의 바람, 하르크자엘인가?" 그러나 제피로스가 입을 열기도 전에, 노토스가 대신 변호해 주었다. "그 비난은 오르크들의 지배자 아크트, 당신이 들어야 할 것 같소만. 그에게 프라니드에 힐리온이 있다는 정보를 준 것도, 또 그를 꼭 그곳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당신이니 말이요." "나는...!" 아크트는 분노로 얼굴을 실룩거렸으나, 노토스의 거대한 머리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자 금방 기가 죽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게다가 당신은 엘미어를 빼앗는 일에도 실패하지 않았소? 카야크 님께 당신이 할 수 있다, 하르크자엘에게 맡길 필요가 없다고 그렇게 자신 만만하게 고하더니만! 이제 흑마술사 제이룬까지 죽었으니 천상 그 말썽 많은 계집아이를 사로잡는 수밖에 없게 생겼잖소!" "...제이룬은... 어차피 우리 일에 적합하지 않았소. 그는 너무나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크트는 이렇게 대꾸했으나, 목소리는 이미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노토스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제피로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명령했다. "상처를 치료하고 휴식을 취하도록, 하르크자엘. 곧 너와 저승의 전사들의 실력이 또 필요해질 것이다." "황송합니다." 제피로스는 고개를 깊이 숙여 노토스에게 절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아크트에게도 똑같이 공손하게 절을 했다. 그러나 너무나 과장된 행동 이어서 누구라도 그것이 비아냥거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아크트는 이를 갈았으나 그를 처벌할 방법은 없었다. 이미 노토스도 하르크자엘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었고, 카야트 님도 그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쓰린 속을 안고 성의 지하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포로들을 살인하고 음식을 마구 주워 삼키며 화를 삭히는 수밖에 없었다. "심기가 불편하십니까? 위대하신 쿠푸-헤!" 두아스가 그의 부름을 받고 급히 달려와, 마구 날고기를 뜯어먹고 있는 그를 보고는 물었다. "당연히 심기가 불편하고 말고! 네놈이 가르쳐 준 대로 했는데도 하르크자엘은 멀쩡히 살아 돌아왔고, 라샤크와 제이룬은 그 미로에서 나오질 않았으니 죽지 않았더라도 조만간 굶어 죽을 게 뻔하고, 엘미어는 눈앞에서 놓쳐 버리고! 심기가 좋을 리 있냐?" 아크트는 마구 화를 내며 은접시와 놋쇠 술잔 등등을 집어던졌다. 두아스는 재치있게 고개를 숙여 그것을 피했으나, 그의 곁에 있던 한 오르크 병사는 이마 한가운데에 접시를 맞고 벌렁 나자빠져 버렸다. "진정하십시오, 위대하신 쿠푸-헤, 체통을 지키셔야죠." "네놈의 목이 내 밥상에 오르는 걸 보면 진정이 될지도 모르지, 두아스!" "황송합니다. 그러나 이 미천한 몸에게도 목이 잘리기 전에 말씀을 드릴 기회를 주신다면, 아직 엘미어는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라고 여쭈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그들이 어디로 갈지는 잘 모르지만, 엘미어와 이디실을 찾았으니 분명 다음 차례는 카자룬이겠지요. 그렇다면 서쪽 끄트머리에 남아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드라크노움을 넘어 오겠죠..." "본론부터 말해라, 두아스, 이 멍청한 놈아!" "드라크노움을 넘어 오면, 당연히 아트웰입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아트웰? 그곳은..." 아크트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는 탐욕스럽게 거무스름한 혀로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두아스는 교활한 웃음을 지으며 주군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첩자를 통해 들으니 하르크자엘의 부상은 생각보다 심하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제대로 돌보지 않았으니 그 용하다는 드래크로니안 족의 하얀 마법사도 당분간 애를 먹을 거라고요... 쿠푸-헤께서는, 그 동안 자신의 뜻을 이루실 시간을 갖게 되실 겁니다." ------------------------------------------------------------------- 로이와 그 일행은 로센 라스를 떠나 드라크노움을 넘어 가고 있었다. 카자룬을 찾으려면 어쨌건 동쪽 끝에 있는 오르크들의 소굴, 우클로우(어두운 땅) 가까이로 가야 한다는 것이 툴위그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꼭 그의 말을 따르지 않더라도, 서쪽 변경 지방에 머물러 있어서는 아무것도 찾지 못한다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변경 지방을 벗어나 레젠디아 대륙의 중심부로 가기 위해서는, 드라크노움을 넘어야 했다. 켈리의 친구인 늑대 펠히스가 안내를 맡았다. 처음 켈리가 그와 동행하자고 우겼을 때에는, 모두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펄 뛰었다. 늑대에게 그렇게 당하고 나서 늑대 동료라니!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켈리는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펠히스는 이제 혼자야. 오르크들 때문에 일족을 전부 잃었어. 그는 복수하고 싶은 거라고. 우리를 도와 오르크들과 싸우면서!" 결국 툴위그를 제외한 모든 일행이 펠히스를 데리고 가는 데에 찬성했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펠히스는 편안하면서도 빨리 드라크노움을 넘을 수 있는 길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동행하면서부터는 들짐승들도 눈에 띄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빽빽한 침엽수들은 드라크노움에 이상스러운 위압감을 불어넣어 사람들의 접근으로부터 보호하기도 했으나, 그 자체가 드라크노움의 상징 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거의 모든 드라크노움 산맥이 온통 침엽수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드라크노움에서도 침엽수가 자라지 않는 곳이 두 곳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겨울이 오지 않는 로센 라스였고, 다른 하나는 뤼아난푸르(하늘의 끝)라고 불리는, 산맥의 꼭대기였다. 뤼아난푸르는 이름 그대로 레젠디아 대륙에서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 가면 보름달이 뜨는 밤에 천신 아스틸라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전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곳은 너무 높아 어떤 나무도 자랄 수 없었고, 약간의 풀들과 이끼, 보잘것 없이 생긴 풀꽃들이 지면을 덮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일년 중 반이 넘는 기간이 눈에 덮여 있었고, 뤼아난 푸르 중 가장 높은 세 개의 봉우리에 쌓인 눈은 결코 녹지 않을 정도였다. 이미 가을이 한창 무르익을 시간이었고, 뤼아난푸르는 온통 눈에 덮여 있었다. 아무리 펠히스가 지름길을 가르쳐 주었다 해도, 드라이어드의 아렌데일 여왕이 선물한 마법 모포가 없었더라면 모두 꼼짝없이 얼어죽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마법 모포도 그들의 목숨을 살려 줄 수는 있어도 편안함 까지 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얼어 죽지는 않았으나, 얼어 죽을 것 같은 기분을 매일 밤 맛보았다. 그런 식으로 간신히, 그들은 드라크노움의 정상을 넘어 동쪽 면으로 들어섰다. 로이는 드라크노움의 정상에 대해 몹시 기대했으나, 결과는 실망 스러울 뿐이었다. 온통 구름이 눈앞을 가린데다, 너무 추워서 감회고 뭐고 느낄 시간이 없었다. 나중에 툴위그에게 불평을 털어놓자, 그는 귀엽다는 듯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뤼아난푸르에 오면 레젠디아를 한눈에 볼 수 있다'라는 말을 정말로 믿었나? 다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야. 여긴 언제나 이렇지. 온통 구름 투성이... 그나마 눈이 안 오는 게 다행이라고. 하긴,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땐 실망이 컸었지..." 로센 라스를 떠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였다. 모두 안개투성이의 뤼아난푸르의 기후에 지쳐서,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갑자기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줘! 괴물, 괴물이...!" 그리고 그 목소리는 듣기 싫은 괴성들에 의해 묻혀 버렸다. 안개 속이었지만 그 소리는 너무 크고 또렷해서, 들려오는 방향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로이 일행은 모두 피곤함도 잊은 채, 그 비명이 들려 오는 곳으로 무기를 달려갔다. "캬아아악!" 로이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무시무시하게 큰 잿빛 새였다. 안, 엄밀히 말하면 새가 아니었다. 얼굴은 끔찍하게도 여자의 얼굴, 그것도 악의를 가득 담은 새빨간 눈을 가진 일그러진 여자의 얼굴이었다. 잿빛 머리털이 마구 엉킨 채 깃털과 함께 안개 속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시지리스 에서 도망칠 때 로이와 제피로스를 공격하던 바로 그 괴물 새였다. 그러나 이번엔 서너 마리가 아니라, 최소한 수십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날아다니거나 땅에 내려앉은 채, 산양 떼들과 그것을 몰고 온 듯한 세 명의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이미 정신을 잃었는지 땅에 쓰러진 후였다. "...하피다!" 툴위그가 혐오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는 지체없이 등에 멘 도끼를 빼어들었다. "이 못된 괴물들! 저리 가지 못해!" 그는 도끼를 마구 휘두르며 하피들과 공격을 받는 사람들 사이로 다짜고짜 뛰어들었다. 불의의 습격에 한 마리의 하피가 목이 잘린 채 땅에 풀썩 떨어졌다. 툴위그와 거의 동시에, 랜스와 켈리도 하피들에게 뛰어들며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랜스의 칼에, 툴위그를 공격하려던 하피 한 마리의 몸이 두동강나 떨어졌고, 켈리는 그녀에게 돌진하던 한 마리의 날개를 잘라 버렸다. 그 하피가 죽지 않은 채 땅에 풀썩 떨어지자, 펠히스가 얼른 목을 물어뜯어 숨통을 끊어 놓았다. 로이와 데이미아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로이는 오래 전 산적 대장 페일드에게 받은 검을 빼어들었다. "하앗! 받아랏!" 그는 켈리가 가르쳐 준 대로,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하피를 향해 힘껏 칼을 휘둘렀다. "캭!" 로이가 공격한 하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힘없이 풀썩 떨어졌다. 그러나 하피의 몸이 칼에 부딪힐 때의 반동을 생각하지 못한 로이는, 휘청 거리다가 넘어져 버렸다. 그런 그의 머리를 향해 다른 하피가 덮쳐왔다. "으아아아!" 로이는 당황한 나머지 배운 것도 다 잊고 마구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하피는 간단히 단단한 발톱으로 그 칼을 잡고, 다른 한 발은 로이의 머리를 때리기 위해 높이 치켜들었다. "사... 사람살려!" 로이는 당황한 나머지 발로 하피의 배를 뻥 차 버렸다. 순간 하피는 발톱으로 잡고 있던 칼을 놓치고,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러나 곧 다시 균형을 잡고, 살기등등한 괴성을 지르며 로이에게 덤벼들었다. "캬아아악!" 그러나 마처 로이에게 다다르기도 전에, 데이미아가 엘미어를 치켜 들며 큰 소리로 주문을 외웠다. "제이레스 아이레인!" 그러자 그 하피를 향해 녹색의 불꽃이 뿜어져 나갔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은 축제 때의 통닭처럼 잘 구워진 채 땅에 쿵 떨어졌다. 로이는 얼른 일어나 다시 칼을 잡았다. 그리고 데이미아와 등을 맞붙히고 섰다. 하피가 다시 달려들었을 때, 로이는 자신있게 칼을 휘둘렀다. "캭!" 이번에는 로이의 칼이 하피의 심장을 정통으로 꿰뚫었고, 로이도 넘어지지 않았다. 데이미아도 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며 엘미어를 힘차게 휘둘렀다. "세이스 제에데스!" 또 한 마리의 하피가 불에 데인 채 죽었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서로에게 씩 웃어 주었다. "제법인데, 로이?" "누가 할 소리!" 하피들 무리의 한가운데서 싸우는 랜스와 툴위그, 그리고 켈리의 주위에는 벌써 하피들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펠히스는 그들의 무용을 지켜보며 꼼짝하지 못하는 세 양치기의 주위를 돌며, 하피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윽고 하피의 무리는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안개 사이로 그들의 불길한 잿빛 날개가 모두 사라지자, 그제서야 양치기들은 제정신을 차렸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셋 중 우두머리인 것 같은, 40대 중반의 양치기가 말했다. 그들은 투박한 가죽옷을 입고 있었으며, 그들의 말투는 거북할 정도로 억양이 강했다. 다른 한 명은 로이보다 한두 살쯤 더 많아 보이는 소녀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로이 일행에게 좀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이 산간 지방에는 외부에서의 방문 객이 별로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하하...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그런데, 저 사람이 하피에게 상처를 입었나요?" 툴위그의 말을 끊고 켈리가 날카롭게 물었다. 양치기는 잠시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쓰러진 동료를 보고 알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 예, 저 친구는 아까 그 괴물에게 물렸습니다. ...그것의 이름이 하피인가요?" "맙소사, 물렸다고요?" 툴위그가 당황을 감추지도 않고 소리쳤다. "하피의 이에 물리면 곧바로 무었이든 부패하는데...!" 그의 말에 두 양치기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양치기 소녀가 떨리는 손으로 쓰러진 청년의 팔에 난 상처를 풀어 보자, 아니나 다를까 열기와 함께 악취가 물씬 풍겨나왔다. 상처가 벌써 벌겋게 부어오르며 썩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툴위그는 사색이 되었다. "맙소사... 하피의 독은 마법이야.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는데..." "잠싼만요!" 갑자기 데이미아가 끼어들며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데이미아는 쓰러진 청년에게 성큼성큼 걸어가, 그의 상처에 손을 얹었다. 너무나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아무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알레그 라이 테니이드 만..." 데이미아의 입에서 생소한 주문이 흘러나왔다. 그와 함께 엘미어의 녹색 보석이 희미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더 밝아졌고, 이윽고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밝게 빛이 나자 데이미아는 그 보석을 상처 위로 가져다 대었다. "갈 아스틸라 렐 이조넬!" 그녀가 손을 떼었을 때, 청년의 상처는 아직 벌어져 있었으나 독기는 완전히 가신 후였다. 부어오른 부분도 고름도 악취도 없었다. 그냥 단순히 짐승에게 물려 피가 나는 상처일 뿐이었다. "와... 대단해..." 로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입밖에 내지 않았을 뿐이지, 로이와 똑같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켈리가 웃기 시작했다. "맞아, 그래. 엘미어의 주인 라스헨 에이니드(숲의 마법사) 플리에타는 유명한 치유술사였는데. 그걸 깜박 했군! 어쨌든 정말 멋져, 데이미아!" 데이미아는 약간 지친 듯했으나,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나이든 양치기는 다친 청년을 등에 둘러 메며 감탄했다. "대단하군요. 저희 마을에도 마법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만, 요정족의 마법사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의 표시로 저희 마을에 초대해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십습니다만... 이래뵈도 부자입니다. 저 산양떼들이 모두 제 소유니까요." 식사라면 모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인간 마을이라면! 모두 제대로 잠자고 식사해 본 지가 몇십 년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들이 초대에 응하자, 나이든 양치기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잘됐군요. 제 이름은 갈리라고 하고, 보시다시피 다야크 족의 양치기 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딸 이다라고 하고요. 이다! 어서 산양을 모아! 마을로 돌아가자!" 이다는 능숙한 솜씨로 서둘러 산양들을 모았다. 그의 말대로 갈리는 꽤 부자인 듯, 하피들에게 상당한 수의 산양을 빼앗겼을텐데도 아직 매우 많은 산양들이 남아있었다. 그들은 모두 윤기가 흐르는 밝은 갈색 털과 아름답게 굽은 둥근 뿔을 가진 몸집이 큰 것들로, 아무것도 모르는 로이가 보기에도 무척 훌륭한 종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이들은 다야크 족이군..." 하고 랜스가 중얼거리자, 로이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3 "다야크 족? 들어본 적이 없어요." "뤼아난푸르, 다른 사람들은 추위와 척박한 토양때문에 살지 못하는 곳에 마을을 이루어 산다는 이목민족이야. 난 그들이 진짜9 존재하는 줄은 몰랐는데..." 갈리와 이다의 발은 무척 빨랐고, 로이 일행은 허덕거리며 있는 힘을 다해 따라가야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렇게 급히 간 덕택에, 짧은 시간 안에 갈리의 마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다야크 족의 마을은 작은 원형이었다. 집은 기껏해야 스무 채가 넘지 않을 것 같았고, 마을 중앙에는 산양을 가두어 놓는 우리가 있었다. 집들은 모두 나무로 단단하고 소박하게 지어져 있었다. 모두 비슷비슷한 모양이라서 좀 우습기도 했다. 사람은 얼마 없었고, 모두 가죽으로 된 투박하고 일하기 편한 옷들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외부인인 로이 일행을 보자 신기하다는 듯 걸음을 멈추었다. 특히 난쟁이인 툴위그의 작은 키와 데이미아의 뾰족한 귀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여기가 제 집입니다." 갈리의 집은 과연 그 마을에서는 꽤 큰 편에 속했다. 딸 이다가 우리에 산양을 몰아 넣으러 간 사이, 갈리는 다친 청년을 침대에 눕히고 로이 일행을 집 안으로 안내했다. 장식이라고는 짐승의 털가죽으로 된 양탄자 뿐인, 소박한 집이었다. 살이 찌고 마음이 좋아 보이는 그이 아내가 그들에게 저녁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식사는 물론 산양 고기였다. "하피들이 많이 오나요?" 식사를 끝내고 랜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갈리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괴물 말입니까? 처음입니다. 정말 놀랬어요. 저 애래 지방에 검은 털을 가진 사람 모양을 한 괴물들이 왔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다 허풍인 줄 알았는데..." '...오르크를 말하는 거로룬.' 하고 로이는 생각했다. 갈리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말을 계속했다. "세상에, 모두가 두려워하는 드라크노움에 저런 괴물들이 감히 드나들다니... 이 산은 막내신 훼로크께서 직접 만들고 게히스헨 메인(용들의 조상)이 지켜주는 곳인데 말입니다.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하여간 용사님들이 아니셨으면 저희는 모두 죽었을 겁니다. 정말 갑사합니다." 그는 로이 일행에게 함빡 웃어보이고는 데이미아를 향해 툭별히 미소를 지었다. "특히 요정 마법사님... 정말 놀랍더군요. 저희 마을에도 마법사가 있기는 하지만... 당신이 아니었다면 제 사위놈은 꼼짝없이 죽었을 겁니다." "에... 사위요? 그럼 혹시 이다의...?" 켈리가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갈리의 집 안에서 그의 아들들은 보았으나, 딸은 어린 이다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갈리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누구 남편이겠습니까?" "아... 저... 어릴 때 결혼했나보죠?" 로이가 놀라서 묻자, 갈리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저 애도 이제 곧 열 일곱이나 되는걸요. 그럼 데이미아 님은 로이 님의 아내가 아닙니까?" "...!" 켈리는 큭큭거리며 웃음을 참기 위해 괴상한 소리를 냈고, 로이와 데이미아는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다. 그제서야 자신의 확신이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갈리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저... 어디로 가시는 길이신지요? 가능하다면 답례로 음식과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만... 혹시 산을 내려가 길리어드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길리어드가 여기서 가까운가요?" 랜스는 갈리의 말에 귀가 솔깃해진 듯 물었다. 그러나 로이는 처음 듣는 지명에 어리둥절해질 뿐이었다. 갈리는 내내 말이 없던 랜스가 자신의 말에 관심을 나타내자,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아, 물론이죠! 여기서 말을 타고 가면 채 이틀도 안 걸립니다. 저희는 열흘에 한 번씩, 가죽과 육포, 치즈를 팔고 다른 생활 용품을 사기 위해 꼭 길리어드로 내려가죠. 물론 아트웰이 에스테이아의 속국이 된 이후 쇠퇴하긴 했어도 아직도 길리어드는 멋진 곳입니다. 그만한 상업 도시는 이 근방에, 아니 레젠디아 대륙 전체에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길리어드... 그렇다면 생각보다 훨씬 북쪽으로 온 거로군. 펠히스 녀석, 순 엉터리 아냐." 켈리가 그녀의 의자 옆에서 몸을 길게 뻗은 채 졸고 있던 은빛 늑대를 흘겨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랜스는 오히려 이 말을 듣고 매우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어때? 이 기회에 길리어드로 가 보면?" "...거기 가서 뭐하게?" "이봐, 길리어드는 큰 도시고 온 레젠디아 대륙의 상인들이 다 모이는 도시라고. 분명 카자룬에 대한 소문도 들을 수 있을 거야." 랜스는 조금 흥분한 것 같았다. 로이는 랜스가 이토록 기대에 찬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다른 일행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만. "너...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은데?" 툴위그가 묻자, 랜스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알먼드 대공의 아들 사일러스 왕자와 아는 사이입니다. 어렸을 때 그의 함께 에스텔에서 기사 수업을 받았죠. 그라면 기꺼이 우리를 도와 줄 겁니다, 툴위그." "뭐... 그렇다면. 달리 갈 데가 있는 것도 아니니..." 툴위그가 승낙하자 다른 일행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랜스는 미소를 지으며 - 결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 갈리에게 말했다. "그럼 길리어드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아니, 저희가 바로 내일 쯤에 길리어드로 갈 예정이었습니다. 물건을 팔 때가 되었거든요. 저와 제 아들 두 놈, 그리고 다른 상인 세 명과 그 조수 들이 갈 건데... 어떻습니까? 함께 가시면! 식사도 잠자리도 저희가 모두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하긴 하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켈리의 말에 갈리는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휘휘 내저었다. "폐라뇨! 저희 쪽에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에스텔에서 기사 수업까지 받으신 분들이 호위를 해 주신다면 저희도 맘놓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 드라크노움 기슭에 검은 털북숭이 괴물들이 자꾸만 나타난다고 해서 모두 걱정하고 있는데..." 결국 로이 일행은 갈리와 그의 동료 상인들과 함께 길리어드로 가기로 되었다. 갈리가 말한 대로, 그들의 합류에 반대는 없었다. 그들은 갈리의 집에서 밤을 보낸 뒤, 아침 일찍 짐마차들과 함께 다야크 마을을 나섰다. 다야크 족과 함께 여행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들은 소박 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고, 게다가 산을 내려가는 편한 지름길을 잘 알고 있었다. 첫날 해개 지기 전에 그들은 풀과 이끼만의 헐벗은 뤼아난푸르를 벗어나, 침엽수림으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하늘을 덮은 침엽수 사이로 서서히 노란 낙엽수가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드라크노움이 끝나 가는 건가요?" 하고 로이가 물었을 때, 갈리의 아들 중 한 명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기사님. 단지 이제 좀 낮은 곳으로 왔을 뿐이죠. 저 나무들이 바로 아스펜, 옛 노래에 타나실(태양 나무)이라고 나오는 나무들 입니다. 아스펜은 다른 지방에도 많지만, 타나실이라고 불리는 것은 여기 드라크노움의 아스펜들 뿐이죠, 기사님." "...저 기사 아녜요..." 로이는 다야크 족 상인들이 자꾸 기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못 마땅했아. 도대체 칼도 제대로 다룰 줄 모르는 기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디실의 주인인 걸 알면 아예 영웅이라고 부르겠지? 으휴, 어쩌다 그 칼이 내 손에 들어와서 팔자에도 없는 기사 흉내람...' 그러나 드라크노움의 아스펜 나무들은 과연 아름다웠다. 늦은 가을을 맞아 떨어지기 직전의 샛노란 금빛은 정말 태양 나무라 불릴 만 했다. 로이는 시지리스에서도 아스펜을 본 적이 있었으나, 드라크노움의 아스펜은 그 이름처럼 뭔가 달랐다. 그들은 금빛 낙엽이 깔린 숲에서 야영을 했다. 다음 날 해 지기 전에 길리어드에 도착할 것이라고 갈리가 말해 주었다. 그러나 그 일정은 조금 앞당겨지지 않으면 안되었다. 한밤중, 모두 깊이 잠들어 있을 때, 갑자기 펠히스가 큰 소리로 짖어대며 모두를 깨웠던 것이다. "컹! 컹컹! 컹!" 그의 울음은 너무나 커서 옆에 있던 켈리는 물론, 다야크 족 상인들 까지 단번에 일어나 버렸다. 상인 중 하나가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아가씨! 아가씨 개좀 조용히 시켜요!" 그러나 펠히스는 점점 더 큰 소리로 짖어댈 뿐이었다. 경고하듯, 혹은 위협하듯이.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데이미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두 짐을 꾸려요!" 하고 그녀가 소리쳤다.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침입자가 있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침입자라니?" 갈리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러나 대답이 필요 없었다. 어둠 속에서 커다란 늑대 십여 마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펠히스 만큼이나 컸고, 움직임은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다. 붉게 빛나는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으나 생명력은 없었다. 그 눈은 로이에게 낯익은 것이었다. 이미 죽은 자의 눈, 제이룬의 것과 같은 눈빛... 로이는 손을 떨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검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을 칼집에서 빼려 하는 순간, 갈리의 두꺼운 손이 로이의 어깨 위에 얹어졌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침착하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기사님들. 여기 늑대들은 우리들을 공격하지 않아요. 시이그를 바쳤으니 조금 저러다 갈 겁니다..." 그러나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툴위그가 그를 밀어 넘어뜨렸다. 그 위로 아슬아슬하게, 늑대 한 마리가 허공을 물어뜯으며 뛰어올랐다. 조금 이라도 늦었더리면 갈리의 목은 그 이빨에 의해 뜯겨져 나갔을 것이었다. 툴위그는 도끼의 날이 없는 부분으로, 그 늑대의 허리를 쳐 던져버렸다. "이런 일이...?" 갈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늑대들을 쳐다보았다. 로이는 칼을 배어들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미 죽은 늑대를 마법으로 움직이는 것 같아요!" 그 말에 펠히스가 맞장구치듯 꼬리를 흔들며 컹컹 짖었다. 그것을 본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럼 다시 마법을 풀어 주자고! 테레안 에이 네미엔...!" 엘미어가 은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늑대들은 비틀거리며 고통스럽게 으르렁거렸다. 그들의 눈에서 빛이 꺼져 가고 있었다. 데이미아는 엘미어를 한 늑대에게 겨누었다. "알 제네이덴 라..." 그러나 슬금슬금 뒷걸음질치던 늑대는, 궁지에 몰리자 갑자기 큰 이를 드러내며 공격적으로 변했다. "컹!" 한 늑대가 아예 죽음을 각오했다는 듯, 막무가내로 데이미아에게 덤벼들었다. 갑작스런 공격헤 당황한 데이미아는 급한 김에 아무렇게나 엘미어를 휘둘렀다. 녹색 보석에서 작은 흰 빛 덩어리가 나가며, 그 늑대의 정수리를 맞추었다. 그 충격에 늑대는 쓰러졌지만, 곧 다시 일어났다. 급히 쓴 마법이라 타격이 크지 않은 것 같았다. "데이미아, 조심해!" 다른 늑대가 그녀의 목을 향해 뛰어오르는 것을 보고, 로이가 얼른 소리치며 칼을 휘둘렀다. 너무 일찍 휘두른 탓에 늑대의 코끝을 스치는 데에 그쳤으나, 어쨌든 그 늑대는 물러났다. 그러나 이제는 그 늑대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숲 속에 숨어 그들을 포위한 채 감시하고 있던 다른 늑대들, 아니 다른 늑대 시체들이 모두 어둠 속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나왔던 것이다. "포위당했어!" 갈리가 비통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툴위그는 걱정 말라는 듯 씩 웃었다. "염려 마십쇼. 잘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데이미아, 너 정말 저 마법 풀 수 있냐?" "예... 하지만 주문을 외울 시간이..." "걱정 마라. 우리가 그동안 저놈들의 접근을 막아 줄 테니 어서 저 기분나쁜 흑마술을 풀어 버려!" 툴위그는 기세등등하게 늑대들 앞으로 나아가며 거대한 도끼를 위협히듯 휘둘렀다. 랜스와 켈리도 지지 않고 데이미아를 뒤로 한 채 늑대 떼에게 다가갔다. 로이도 자신은 없었으나, 어쨌든 그들의 곁에 붙어서 칼을 잡고 있었다. "크르르르..." 늑대들은 으르렁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들의 시선은 주문을 외기 시작한 데이미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주문이 자기들에게 가장 위협적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았다. 소리도 없이 한 마리의 늑대가 뛰어올랐다. 그러나 툴위그가 힘껏 휘두른 도끼에, 단번에 두동강이 난 채 땅에 떨어져 버렸다. 그 시체는 땅에 닿기가 무섭게, 풀썩 하는 소리를 내며 부서져 버렸다. 그 자리에는 한 줌의 먼지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이룬이 죽을 때의 모습과 똑같군...' 로이는 오싹하는 기분을 느끼며 흘끗 데이미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주문을 외우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미에서 땀방울까지 흘리면서. 로이는 검을 꼭 잡았다. '그래. 나도 데이미아에게 질 수야 없지! 멋지게 싸워 보이겠어!' 늑대들은 한 두 마리로는 안되겠다고 느꼈는지 떼를 지어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은 처음 드라크노움에 왔을 때 치룬 늑대들과의 전투보다는 훨씬 쉬었다. 숫자도 그만큼 많지 않았고, 게다가 유연하고 날렵했던 그 때의 늑대들과는 달리 행동이 인형처럼 뻣뻣했다. 게다가 그들의 공격 목표는 랜스자 켈리, 툴위그가 아니라 그들 뒤에 있는 데이미아였다. 랜스의 칼에 두 마리의 배를 째어 던져버렸고, 켈리도 한 마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뒤를 이어 공격하던 다른 한 마리의 목을 날려 버렸다. 그리고 죽은 늑대들의 시체는 땅에 닿는 즉시 먼지로 변하여 사라져 버렸다. 우왕죄왕하던 로이는 비교적 작은 늑대 한 마리가 자신에게 달려 오자, '지금이 기회다!'라고 생각하며 힘껏 칼을 휘둘렀다. 칼이 푹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그 늑대의 목이 반쯤 잘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로이가 방심하며 칼을 늦추자, 결국 그 늑대의 몸이 로이의 칼날에 덜렁덜렁 매달린 꼴이 되고 말았다. "으아아아! 징그러! 떨어져! 떨어져!" 로이는 질겁을 하여 마구 칼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목의 한가운데까지 콱 박힌 시체가 그렇게 쉽게 떨어져 나갈 리 없었다. 로이는 정신없이 마구 칼을 흔들었고, 그러느라 다른 늑대가 자신을 공격하러 오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컹!" 그 늑대가 힘차게 짖으며 로이의 얼굴을 향해 뛰어올랐을 때에야 그는 비로소 상황을 눈치챘다. 이번에는 칼에 늑대의 시체가 매달렸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온 힘을 다해 칼을 휘둘렀다. 물론 매달린 늑대도 함께. 로이를 몰어뜯으러 달려오던 늑대는 자기 동료의 시체를 입에 문 채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결국 늑대의 공격도 막고 칼에 덜렁거리던 시체도 빼 내긴 했지만... "으앗!" 잠시 방심한 로이의 목으로 다시 늑대 한 마리가 뛰어올랐다. 로이는 칼을 놓치고 꼼짝없이 늑대에게 깔린 꼴이 되었다. 늑대에게서는 심하게 악취가 풍겼다. 짐승의 냄새가 아니라 시체의 냄새였다. 늑대의 발톱이 파고든 어깨와 다리에서 금방 피가 흘렀다. 늑대는 입을 크게 벌리고, 로이의 얼굴을 물어뜯으려 했다. "컥!" 그러나 아슬아슬한 순간, 펠히스가 그 늑대의 목을 물고 땅에 힘차게 3내팽개쳤다. 로이는 얼른 일어나 칼을 집어들었다. 펠히스는 얼른 달려가 아직 일어나지 못한 늑대의 목은 다시 물고, 마구 비틀며 질질 끌었다. 다른 늑대가 펠히스의 몸 위로 뛰어올랐으나, 이번에는 로이의 칼이 펠히스를 보호했다. 이번에도 단칼에 베는 것은 실패했으나, 어쨌든 한 번 휘두르니 늑대가 피를 흘리며 마구 화를 냈고 두 번 휘두르니 낑낑거리며 도망갔으니, 대충 성공한 셈이었다. 갑자기 데이미아가 소리 높여 외쳤다. "모두 비켜요! 알 사야데린!" 높이 치켜든 그녀의 지팡이에서 환힌 빛이 쏟아졌다. 마치 갑자기 한밤중에 태양이 나타나기라도 한 것 같았다. 모두 눈이 부셔서 잠시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어두워져 시야가 트였을 때, 그들의 앞에는 늑대떼는 없었고 푸석푸석한 먼지만이 가득했다. 간혹 먼지 틈으로 늑대의 뼈 비슷한 것이 보이기도 했다. 데이미아는 숨을 헐떡이며 비틀거렸다. 켈리가 그녀를 부축해 앉혔다. "가까운 곳에... 마법사가 있어요." 데이미아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흑마술사... 그 사람이 이것들을 조종한 거에요. 너무 강해서 마법을 끊어버리기가 힘들었어..." "어쨋든 감사합니다... 기사님들을 모시고 오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 했군요!" 갈리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떨며 말했다. "아직 밤이지만 지금 출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 사람 사는 데로 가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아요. 기사님들만 괜찮으시 다면..." "물론 괜찮고 말고요. 아닌게 아니라 더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요." 하고 데이미아가 대답했다. "마법사는 또 우리를 노릴 겁니다. 그가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제가 주술을 걸겠습니다. 그러나 제 마력은 지금 거의 바닥난 상태이기 때문에,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발각되고 말 거에요." 짐은 벌써 챙겨진 후였다. 늑대들은 사람들만을 노렸는지, 짐마차와 말들은 모두 무사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음식을 먹지 못하는, 하루살이 시체들에 불과했으니. 하지만 갈리는 무척 놀랐고, 이 일을 더욱 괴이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데이미아가 주술을 걸었고 그들은 출발했다. 데이미아는 몹시 피곤해 했으므로, 그녀의 말에는 다른 상인이 타고, 그녀는 마차 안에서 쉬기로 했다. 그녀는 금방 세상 모르고 잠이 들어 버렸다. 산간 지방의 아침은 늦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서서히 동이 터 왔다. 로이는 이제 활엽수들만이 줄을 잇고, 침엽수는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드라크노움을 거의 벗어난 것이었다. 완만하고 편안한 내리막길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모두 아침을 먹지 않은 상태였으나, 아무도 감히 멈추고 식사하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해가 막 중천에 떳을 무렵, 그들의 눈 앞에서 숲이 사라지고 넓은 초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릎까지 오는 잡초들로 뒤덮인 금빛 초원이었다. 사슴 몇 마리가 풀을 뜯다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그 초원 너머, 로이가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큰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크고 작은 집과 가게들이 잘 정비된 길을 마주보고 늘어서 있고, 사람들이 그 사이를 정신없이 오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엔, 풀밭 속에 홀로 우뚝 선 나무처럼 낮은 지붕들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성이 보였다. 붉게 물든 담쟁이들이 잿빛 성벽을 덮고 있는 웅장한 성이었다. 바로 아트웰의 수도, 길리어드의 왕성이었다. -------------------------------------------------------------------- 라우더 - 한낮이었다. 두아스는 지하실에 있는 자신의 넓은 방에서 곤히 수면을 취하는 중이었다. 그의 조수가 정신없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지르기 전까지는. "두아스 님! 두아스 님! 나와 보십시오! 글쎄 푸이 하르크의..." 그 다음은 커다란 비명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두아스는 놀라 벌떡 일어나며 무기를 찾았다. 그러나 그 전에, 방문이 쿵! 하고 열리며 거의 트롤만큼이나 거대한 오르크가 들어왔다. 그 방문은 난쟁이 노예들이 만든 자물쇠가 네 개나 달려 있는 것이었으므로 두아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그루크?" "그렇소. 내가 올 걸 예상했군, 두아스!" 그루크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잠에서 덜 깬 두아스의 귀를 아프게 했다. 두아스는 최대한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하려 했으나, 떨리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실례요? 이... 이런 시간에..." "시끄럽군! 당신 휘하의 다크 엘프에게서 다 들었소. 하르크자엘 님이 왜 쓰러져서 아직까지 깨어나지 않으시는지!" "그... 그거라면 프라니드에서 무리를 했기 때문이 아니겠소... 에... 또... 그리고..." "시끄러워! 독을 만드는 데 재주 좀 있다고 자랑하고 싶은가본데, 너 자신이 편안히 죽을 수 있는 독이나 만들지 그래? 우리 푸이 하르크 (저승의 전사들)가 바보로 보이나? 또 한번만 이런 잔꾀를 부렸다간 네 놈을 십 년에 걸쳐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 줄 줄 알아!" '...망할 놈의 다크 엘프. 푸이 하르크한테 잡혀가니 다 불었군? 그러길래 미리 죽여 버렸어야 하는건데...' 두아스는 속으로 이를 갈며 욕을 퍼부었으나, 그것을 여기 그루크 앞에서 내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한 번 꽉 쥐기만 해도 자신은 으스러져 죽을 것이 뻔하니까. "무... 슨 오해가 있으신가본데요. 조... 존경스러운 푸이 하르크의 쿠푸... 서...설마 제가 하르크자엘 님께 악의를 품고 있다는 모함을 들으셨다면 ..." 그루크는 미소를 지으려고 잔뜩 일그러진 두아스의 얼굴을 손으로 후려쳤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지만, 두아스는 침대에서 떨어짐은 물론 바닥 구석까지 저만큼 굴러가 버렸다. 그루크는 재수없다는 듯 침을 뱉었다. "잘 들어 둬. 네가 아크트 님의 그늘에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나 본데, 내 말 한 마디면 당장 널 보호해 주는 손으로 네 머리를 칠 수도 있어. 무슨 말인지 잘 알테지, 넌 나보다 더 쿠푸-헤를 잘 아니까! 또한번 이런 잔꾀 부리면 증명을 해 줄 테니 알아서 해!" 그리고 그루크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가 버렸다. 두아스는 그가 멀리 간 것을 확인하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욕을 퍼부었다. "무식한 기형 오르크 같으니...!" 푸이 하르크. 오르크이면서도 오르크가 아닌 이들. 두아스는 그들이 형성되도록 방치해 둔 아크트의 어리석음을 비난했다. 하긴, 아크트의 짧은 식견으로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 당시 하르크자엘은 말 잘 듣고 실력 좋은 애송이에 불과했는데. 그가 아크트에게 대항할 수 있는 저런 부대를 만들 작정이었노라고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하여간 더이상 하르크자엘을 병석에 묶어둘 수 없다면... 행동을 빨리 해야겠군...' -------------------------------------------------------------------- 길리어드는 로이에게 생소한 지명이었다. 그러나 아트웰이라면 에이론드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아트웰은 지금 올두스 대공이 다스리고 있단다. 그 아버지가 바로 그 유명한 붉은 기사 벨리노어였지. 그는 끝까지 항복하지 않아서 지금 왕, 아클레어 3세의 속을 지독히도 썩였어. 다른 나라들이 다 항복한 후에도 아트웰의 왕만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으니 말야. 부하들이 다 변심하거나 죽고, 수도까지 잃은 후에도 왕은 항복하지 않고 아홉 명의 부하들과 함께 드라크노움으로 도망했지. 그 기슭에 외진 작은 성이 있었는데, 그 성에 살면서 온갖 덫을 설치해 놓아 그를 잡으러 오는 왕의 기사들의 생명을 빼앗곤 했어. 그의 덫을 피해 가기란 드래크로니안의 미로를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웠으니까. 마침내 어린 왕 아클레어 3세가 손수 창과 검을 들고 그의 성으로 향했지. 현명한 그만이 벨리노어의 함정을 모두 피해 갈 수 있었어. 그리고 드디어 벨리노어와 일대일로 대결해서, 그를 쓰러뜨렸지. 그 누구도 이기지 못했던 붉은 방패의 왕을 겨우 19세의 아클레어 3세가 쓰러뜨린 거야! 하지만 아클레어 3세는 그의 목숨을 원하지 않았어. 그의 충성을 원했지. 마침내 벨리노어는 그를 주군으로 섬기겠다고 맹세하고, 충실한 붉은 기사 로서 남았지. 그의 막내 아들, 올두스는 볼모로 에스텔로 보내고 말야. 결국 벨리노어도 죽고 나머지 큰아들들도 죽자 올두스가 대공의 자리를 물려 받았지... 에스테이아의 속국이 된 이후 아트웰의 왕은 대공이라 불리게 되었으니..." 길리어드의 주위는 높고 튼튼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입구, 거대한 성문에는, 화살을 발톱으로 잡고 있는 금빛 독수리의 문장이 새겨진 붉은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같은 문장을 새긴 망토를 입은 여러 명의 병사가 지키고 서 있었다. 바로 아트웰의 문장이었다. "이젠 독수리의 발에 화살이 있군... 통일 전에는 독수리의 머리엔 왕관이, 그 발엔 왕홀이 있었는데." 하고 툴위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누구냐!" 문지기들은 창을 겨누며 로이 일행에게 날카롭게 소리쳤다. 갈리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열흘에 한 번씩 내려오는 다야크 족 상인들입니다. 여기 통행증도 가지고 왔습니다." "흠... 들어가도 좋소." 의외로 문지기들은 짐을 슥 훑어보더니, 자세한 조사도 안 하고 그들을 그냥 들여보내 주었다. 어떤 병사는 어린 로이가 귀여웠는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기가지 했다. "웬 군인들이 이렇게 많죠? 길리어드에 군인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말은 금시초문이에요. 게다가 통행증이라니, 여긴 유명한 상업도시인데..." 하고 켈리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갈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죠. 시대가 시대니까... 언제 오르크나 다크 엘프가 들어 올지 모르니까요. 아닌게 아니라 오르크 부대에게 당한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더군요. 게다가..." 갈리는 목소리를 낮추어 흥미진진한 이야기라도 하듯 말했다. "여기엔 지금 반란군 투성이래요. 에스테이아의 지배를 받는 게 싫다나... 통일 전이 더 살기 좋았다는 거죠. 제멋대로인 아트웰 사람다운 생각 아닙니까?" "와아!" 로이는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반란군이라니! 옛날, 대륙의 통일이 이루어지고 나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에스테이아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에이론드는 그런 이야기들을 잘 알고 있었고, 로이에게 들려주기를 좋아했다. 로데인의 마녀, 시지리스로 도망한 용족의 잔당, 디온의 망명 정부,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미르치스의 대신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그러나 랜스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말을 몰기만 했다. 그의 귀로 반란군에 대해 갈리가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데... 반란군들은 아트웰 왕조를 다시 세우려고 한대요. 다시 왕관 쓴 독수리의 문장을 달고... 그들은 필요하다면 흑마술사나 오르크들 과도 손잡는다고 하던데..." '반란군이라고... 오르크에 용족도 모자라서 이젠 같은 인간들까지... 클레이브 형이 힘들겠군...' 그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클레이브만을 남겨놓고 헌터가 되겠다느니 하며 훌쩍 집을 나온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큰형 에롤드마저 오르크 토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시기에...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휙휙 저었다. '잘 하고 있을 거야... 나한테는 내 할 일이 있어. 하르크자엘을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형이 하려고 하지 않는 일...' "여기서 헤어져야 할 것 같군요." 한 가게 앞에 다다라 갈리가 서운한 듯 말했다. "기사님들께 신세 정말 많이 졌습니다. 약소하지만 사례로..." 그는 돈이 든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로이 일행은 필요 없다고 아우성을 쳤으나, 갈리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들은 돈을 받고 헤어졌다. "아...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 마차에서 한참 자다 내린 데이미아가 기지개를 켜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우선 밤에 못 잔 잠을 보충하기 위해, 여관을 찾았다. 갈리어드는 무척 번화한 도시였다. 거리에는 아트웰 토박이나 흔히 볼 수 있는 에스테이아 사람들 말고도, 터번을 쓴 남쪽 지방 사람들이나 창백한 피부와 큰 키를 가진 북쪽 사람들이 넘쳐났다. 게다가 요정이나 난쟁이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그래서 요정 한 명과 난쟁이 한 명, 그리고 인간 셋으로 이루어진 로이 일행도 그다지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들어간 여관의 주인도, 그들에게 아무런 호기심도 관심도 나타내지 않았다. 그냥 켈리의 곁에 선 펠히스를 흘끗 보고는 예의상 물을 뿐이었다. "참 큰 개로군요. 늑대 피가 섞였겠죠?" 그들은 아직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점식식사를 한 후 곧바로 곯아 떨어졌다. 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너무 피곤한 탓인지, 로이의 꿈지리는 무척 뒤숭숭했다. 에이론드와 붉은 방패의 기사, 검은 용, 게다가 로이가 본 적도 없는 수많은 기사들이 정신없이 그의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말발굽 소리와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에 머리가 쿵쿵 울릴 지경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로이는 쿵쿵거리는 소리가 단지 그의 머릿속에서 나는 소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옆방에서 뭔가 마구 부서지고 넘어 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로이는 일어나 앉았다. 랜스와 툴위그, 그리고 켈리도 깨어난 채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단지 데이미아만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쿨쿨 잠이 들어 있었지만. "왜 저러는 거래요?" 하고 로이가 물었다. 그러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몰라... 방금 일어났어." "누가 싸우는 것 같은데..." "이걸 가 봐야 돼, 말아야 돼?" 그들은 망설이며 옆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곧 죽을 것 같은 사람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자, 그들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으아악! 살려줘요, 사람 살려요!"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옆방은 둘째치고, 복도부터가 아주 아수라장이었다. 옆방에 있던 꽃병들이나 의자들, 그리고 기타 부서질 수 있는 것들은 다 부서진 채 복도에 널브러져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독수리 문장의 망토를 입은 병사 대여섯 명이, 민간인처럼 보이는 세 사람을 마구 때리면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었다. "도대체 이게...!" 랜스가 그들그들을 말리러 방을 나가려 하자, 어느새 왔는지 여관 주인이 그들을 막으며 속삭였다. "군인들이 반역자들을 잡아가고 있는 것 뿐입니다. 제발 신경쓰지 마세요." 그의 말투는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러나 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를 밀치고 병사들 앞으로 나아갔다. "뭐야, 이건?" 한 병사가 랜스를 보고 거친 말투로 내뱉듯이 말했다. "너도 폐하께 반기를 든 반역자냐?" "난 에스테이아의 충실한 백성이오. 하지만 왕의 백성을 함부로 괴롭히는 당신들은 누구요?" 랜스의 말에 병사들은 서로를 흘끗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 중 대장인 듯한 자가 랜스의 어깨를 떠밀며 말했다. "이 애송이가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하네. 하지만 그 입 얌전히 닥치고 있지 않으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아. 반역자들을 잡아들이는 군인들을 방해하다니, 이건 교수형 감이야!" "반역자라고...?" 랜스는 병사들에게 잡힌 세 명의 남자를 흘끗 보았다. 평범하고 무식한 소작농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그 중 한 명이 애원하듯 말했다. "아닙니다요, 나으리. 저희는 충실한 왕의 종입죠..." "닥쳐!" 대장이 그 사람의 얼굴을 때리려고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랜스가 얼른 그 손을 덥썩 잡았다. 그는 뿌리치려고 했으나, 랜스의 팔힘은 의외로 강하여 뿌리치기는 커녕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증거가 있소?"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이... 증거 보여 주면 네놈이 알아? 이거 어서 놓지 못해?" "반역죄라면 왕이나 대공의 체포장이 있겠지. 그게 에스테이아의 법이니까. 지금 가지고 있소?" "반역죄라면 반역죄지 말이 많아! 저놈들 편드는 걸 보니 너도 반란군이군?!" '...정말 기가 막힌 논리네.' 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것은 랜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는 피식 웃으며 대장의 팔을 비틀어 밀쳐냈다. "으악!" 대장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부하 병정들이 어이없다는 듯 그와 랜스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대장은 곧바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지더니, 큰 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저 놈도 한패다! 함께 체포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병사들 세 명이 일제히 칼을 빼어들고 랜스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랜스는 칼을 뺄 생각도 하지 않고, 빙긋이 웃으며 그들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한 명이 랜스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소리쳤다. "순순히 항복하시지? 그럼 목숨은 살려주겠다!" 랜스는 마치 칼을 처음 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 칼날을 들여다 보더니, 손가락으로 그 칼을 잡아 밀어냈다. 병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게 누굴 놀려? 어디, 맛 좀 봐라!" 그는 정말 랜스의 목을 베려는 듯, 칼을 휘둘렀다. 그러나 랜스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그 공격을 피하고, 그의 배를 발로 힘껏 찼다. 그 병사는 비틀거리며 저만큼 뒤로 물러나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두 병사가, 랜스에게 칼을 휘두르며 공격해 왔다. "이 녀석! 위험한 놈이다! 죽여도 상관 없어!" 하고 대장이 소리쳤다. 그러나 죽이고 말고는 이미 병사들이 결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랜스가 칼도 빼어들지 않은 채, 두 병사들을 다 제압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 명은 랜스의 주먹에 코피가 터진 채 로이의 앞으로 나가 떨어졌고, 다른 한 명은 팔을 붙들려 검을 놓친 채, 랜스의 손에 붙들린 처지가 되어 있었다. "이 자식이...!" 로이의 앞으로 쓰러진 병사가 단도를 빼어들며 랜스를 공격하려고 했다. 로이는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리는 그의 앞으로 슬쩍 다가가 옆에 있는 계단을 향해 그의 배를 힘껏 밀어 버렸다. "으아아아~!" 그 병사는 손을 마구 휘젓다가 계단으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대장은 어이없다는 듯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표정으로 칼을 빼어들고 뒷걸음질쳤다. "너... 감히... 내가 누군줄 알고..." "네가 누구인가 따위엔 관심도 없다!" 랜스는 그제서야 칼을 뽑았다. 그러나 공격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칼의 손잡이에 새겨진 문장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이 문장을 모르진 않겠지?" "그... 그건... 아덴 가의...?" "그래. 여기 길리어드에서는 제국의 법도 안 지키고 사람을 잡아간단 말이냐? 올두스 대공은 대체 뭘 하고 있지? 당장 그를 만나야겠으니, 어서 안내해!" 대장은 잠시 얼떨떨한 얼굴로 랜스와 그의 칼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히 떠올랐다. "흥! 너 같은 거렁뱅이 꼴을 하고 그 세도가인 아덴 가 사람이라고? 그런 난 아트웰의 대공이다! 어디서 훔친 칼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는 어림도 없어, 임마!" 이제 랜스가 당황할 차례였다. 어이없는 나머지 말문도 막힌 채 그가 멍청히 서 있는 사이, 대장은 갑옷 속에서 호각을 꺼내 힘차게 불었다. 호각 소리가 여관 안에 시끄럽게 퍼졌다. 그리고 그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문과 창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병사가 쏟아져 들어왔다. 대장이 랜스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저 놈을 잡아! 반역자들과 한패인데다 업무 집행을 방해했으며, 절도죄에다 아덴 가 사람임을 사칭한 죄..." 병사들이 랜스를 노려보며 칼을 빼어들었다. 그러자 툴위그와 로이도 얼른 도끼와 검을 빼어들며, 랜스를 돕기 위해 다가섰다. 그들 사이에는 곧 전투가 벌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랜스는 난처한 얼굴로 병사들과 로이, 그리고 툴위그를 바라보았다. '이거... 본의 아니게 사일러스의 군대와 싸우게 생겼잖아. 인간들을 다치게 하는 건 정말 싫은데...' 그러나 그 긴장을 깨고, 갑자기 켈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어머... 이런! 반역자였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하지만 멋진 기사님, 설마 저도 잡아가실 건 아니시겠죠? 전 그냥 따라온 것 뿐이라고요." 문가에 기댄 채, 켈리가 대장을 향해 상냥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랜스는 황당해져서 툴위그에게 다지듯 물었다. "...왜 저런대요?" "놔 둬. 이런 일을 해결하는 데 의외로 소질이 있는 애니까." 툴위그의 대답은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대장의 눈이 켈리에게로 쏠렸다. 구불거리는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키가 크고 아름다운 아가씨. 그는 금방 미소를 띄우며 친절히 말했다. "물론이오, 아가씨. 아가씨는 이리 와서 내 곁에 서 있어요. 기사는 귀부인을 보호해야 하는 법이니까!" "...놀고 있네." 하고 로이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켈리는 대장 쪽으로 걸어가며 로이에게 살짝 윙크를 했다. 그녀의 망토 틈으로 오늘 새로 장만한 채찍이 살짝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대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채, 켈리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켈리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에 살짝 자신의 왼손을 얹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의 손목을 비틀어 등 뒤로 가져감과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채찍을 그의 목에 걸러 죄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대장의 얼굴은 숨이 막혀 보라색으로 변했고, 켈리는 아까 그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소리쳤다. "자! 모두 얌전히 길을 비켜! 안 그러면 이 자의 목을 부러뜨려 버릴 줄 알아!" 병사들은 놀란 나머니 입을 딱 벌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로이나 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툴위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역시 켈리야! 훌륭해!" "자아, 어서 여길 빠져나가자고요! 귀찮은 일 생기기 전에!" 그러나 일은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들의 방 쪽에서, 한 병사가 데이미아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걸어나온 것이다. "흥! 이쪽도 포로가 있다! 대장님을 풀어 놓으시지?" 데이미아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켈리를 바라보았다. 켈리는 좀 당황한 듯 허둥대다가, 침착성을 되찾고 씩 웃으며 말했다. "흥! 싫다면?" "그럼 이 아이의 목숨은 없다." "그럼 대장의 목숨도 없어. 그럼 너희들은 대장을 살리지 못한 죄에 대해 문책받게 될 걸. 봉급도 줄고..." "대... 대장을 죽이면 이 아이도 죽이겠어!" "걜 죽이면 대장 도 죽는다니까." "..." "..." 이윽고 그들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둘 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로이도 랜스도 툴위그도, 그리고 다른 병사들도, 하다못해 늑대 펠히스까지 가만히 선 채 멀뚱멀뚱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여관 안에는 긴장감이 깃든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얼마나 그런 상태로 있었을까. 갑자기 여관 문이 벌컥 열리며, 크고 위엄있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도대체 뭐하는 짓들이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쏠렸다. 키가 크고 몸집이 당당한, 은빛 갑옷을 입은 40대의 남자가 문에 서 있었다. 어깨에는 푸른 망토가 걸쳐져 있었으며, 그 망토에는 다른 병사들과는 달리 두 개의 칼이 꽃힌 검은 비룡이 수놓아져 있었다. 윤곽이 뚜렷한 얼굴을 검은 수염이 덮고 있었다. "...데이슨?!" 랜스가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소리로 외쳤다. 그 소리에 그 기사는 랜스를 돌아보았다. 랜스의 얼굴을 알아보자, 그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외쳤다. "아니, 랜스 도련님? 이런 곳에서 무엇을...?" 그러나 그는 말을 끝까지 마칠 수 없었다. 그가 랜스에게 한눈을 판 틈을 타, 켈리가 과감히 대장을 벽 족으로 밀어버리고 맹렬하게 데이슨에게로 돌진했기 때문이다. 켈리의 어깨가 데이슨의 갑옷의 가슴 부분에 쿵 부딪혔고, 불의의 습격을 받은 데이슨은 쓰러졌다. 켈리는 얼른 칼을 뽑아 데이슨의 목에 겨누고는, 신이 나서 외쳤다. "하! 이제야 인질다운 인질을 잡았군! 꼼짝마. 저항하면 장님으로 만들어 주겠어! 이제 순순히 그 여자앨 넘기시지?" "케... 켈리!" 랜스가 당황하여 외쳤다. 그의 말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켈리는 비로소 주위를 돌아보았다. 당황한 랜스와 어이없다는 표정의 로이, 그리고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툴위그를 보고, 그녀는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낌새를 챈 것 같았다. "...내가...뭐... 잘못했냐?" 그녀는 더듬거리며 물었으나, 데이슨의 얼굴에 들이댄 칼을 치우지는 않았다. 그래서 데이슨은 랜스를 쳐다보며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랜스 도련님. 죄송하지만 친구분더러 칼좀 치우라고 말씀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길리어드 왕성, 데이슨의 임시 거처 - "난 자네가 형 곁에 있는 줄 알았는데..." 랜스는 데이슨이 따라 준 술잔을 기울이며 추궁하듯 물었다. 그 방 안에는 그들 둘 뿐이었다. 다른 일행은 데이슨의 부하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뜬 후였다. "그렇게 나무라지 마십시오, 랜스 도련님. 저는 영주님의 명령으로 이곳에 왔으니까요. 그리고 그 분 곁에는 제 아들 칼릭이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데이슨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영주님...' 랜스는 그 호칭에 마음이 산란해졌다. 그의 기억 속에서 그것은 아버지의 호칭이었다. 물론 아버지도 큰형도 돌아가셨으므로, 클레이브가 영주라고 불리는 것은 아주 당연했지만... "형은 잘 지내지?" "칼릭 말로는 아주 잘 지내신다고 합니다. 오르크들의 침입 때분에 힘들어 하신다고는 하지만, 그건 인간족이면 모두 겪고 있는 일이니까요... 랜스 도련님을 무척 걱정하신다고 하더군요." 랜스는 말없이 술을 한 모금 삼켰다. 데이슨이 그런 그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게 형님을 걱정하시면서... 왜 돌아가지 않으십니까?" "난... 아직 원수를 갚지 못했어." "랜스 도련님, 현실을 받아들이십시오. 아버님은 돌아가셨습니다." "감히 그런 말을...!" "사실을 말씀드린 것 뿐입니다. 리반 님은 훌륭하신 기사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데이슨의 말투는 강경했다. 랜스는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아버지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데이슨이... "그리고 지금 영주님은 바로 클레이브 님이십니다. 아버님께 비겨도 결코 뒤지지 않을... 돌아가신 아버님은 그토록 생각하시면서, 왜 살아 계신 형님을 도울 생각은 안 하십니까?" "...클레이브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데이슨은 한숨을 푹 쉬었다. "오르크 부대가 프라니드를 전멸시켰습니다. 성은 텅 비었고... 폐하 께서는 그 성을 클레이브 님께 맡길 작정이신가 보더군요. 그러나 귀족들이 다 말리고 나섰습니다..." "좀 과하긴 하군. 형은 아직 서른 살도 안 되었는데, 이미 일곱 개의 성을 맡고 있으니." "모르는 척 하지 마십시오. 그 분은 뛰어나신 분입니다. 게다가 그 능력에 합당한 지위와 인정을 받고 있고, 왕가의 친척이기까지 하니 모함 받을 조건은 다 갖춘 셈이지요. 지난 해, 황태자 아클레어 4세가 사냥 도중 말에서 떨어지자, 몇몇 귀족들은 클레이브 님께서 음모를 꾸미셨다는 소문까지 퍼뜨렸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의 동생은 그 분을 도울 생각은 않고, 용이나 찾으로 돌아다니며 오히려 걱정을 끼치고 있으니..." 랜스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꾹 다물고 듣고만 있었다. 데이슨은 자신이 약간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알현 신청을 해 두었습니다. 늦어도 내일 중으로 스트라본 왕자님 께서 만나 주실 겁니다." "스트라본? 사일러스는 어디 가고?" "모르셨군요... 사일러스 전하는 전사하셨습니다." 랜스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데이슨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오르크 토벌대의 대장으로 뽑혀 라우더로 가셨지요... 아무리 현명 하신 폐하라 해도 실수하실 때가 있더군요. 겨우 수천 명의 군대로 라우더를 탈환하라니... 라우더까지는 이르지도 못한 채 모든 군대가 실종되었죠. 물론 사일러스 전하도 함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만..." "...그랬군..." "사일러스 전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 아트웰은, 특히 길리어드 일대는 전쟁 상태나 다름없습니다. 아시다시피 사일러스 전하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좋으셨죠... 그런데 이곳 사람들 중 몇몇이 그 분을 잃은 슬픔에 못이겨 누군가의 음모로 그 분이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에스테이아 왕실이라든지..." "그래서 반란군을 일으킨다는 건가...?" "아트웰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장사꾼에 무정부주의자라고들 하죠... 여기서 그들의 봉기를 막는 것이 클레이브 님께서 내리신 제 임무입니다. 아까 도련님께 행패를 부린 놈은 스트라본 전하가 붙여 주신 제 부관인데... 성질은 그래도 이 지역 유력가라기에 못 떼어버리고 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시죠." 랜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엉망이군... 사일러스는 죽고... 반란군에... 이 어수선한 곳을 곧 그 병약한 스트라본이 맡게 된단 말이지..."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랜스는 멍하니 벽만 쳐다보고 있었고, 데이슨은 안절부절하며 술잔만 홀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데이슨이 침묵을 깨고 말을 꺼냈다. "제가 어렸을 적에는 대륙이 통일되면 평화가 오리라고 굳게 믿었었 죠... 그러나 인간이란 원래 싸우게 마련인가 봅니다. 선왕 아클레어 2세의 말씀대로... 랜스 도련님, 마음을 잡으시지요. 이런 일이 사일러스 왕자에게만 일어나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난 하르크자엘을 죽여야 해." 하고 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약속하지. 금방 하르크자엘을 죽이고... 그리고... 곧장 클레이브 형에게로 가서 그를 돕겠어." -------------------------------------------------------------------- 로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비쩍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노인 앞 에서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엄밀히 말해 그 노인, 즉 아트웰 대공 올두스는 로이가 아니라 로이 곁의 랜스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지만. 길리어드의 왕성은 게레드나 시지리스의 성과는 비교도 안 되게 화려하고 컸다. 성문부터 시작해서 대공이 앉는 의자까지, 작은 것이 없었다. 병사들의 키까지 큰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다. 지금 로이는 로크 페울로니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고향으로 돌아가 얌전히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랜스는 달랐다. 신기하게도 그는, 이 엄숙한 분위기에도 전혀 기가 죽지 않는 듯이 보였다. "어서 오시오, 클레이브 근위대장의 동생, 랜스 아덴 경!" 올두스 대공은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어쩐 일로 이런 곳까지 찾으셨소? 전에는 당신 형님께서 와서 내 큰아들의 목숨을 받아 가더니만, 이젠 하나 남은 아들인 스트라본의 목숨도 접수해 가려고 오셨소?" 로이는 놀라서 랜스를 바라보았다. 궁중 예절 따위와는 인연이 없는 로이였지만, 귀족들이 보통 이런 식으로 인사하지는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인사가 아니라 완전히 시비였다. "아버님...!" 올두스 대공의 왼쪽 의자에 앉아있던 스트라본이 난처한 낯빛으로 낮게 외쳤다. 로이는 흘끗 그를 바라보았다. 하얀 옷을 입은, 흰 얼굴과 금발을 가진 청년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다워 보였으나 그만큼 창백하고 약해 보였다. 켈리와 거의 동갑처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그가 자기 또래의, 아니 자신보다 더 어린 소년처럼 생각되었다. '이해가 가... 왜 데이슨 아저씨가 파리 한마리 못 죽인다고 했는지... 그런데 저런 사람이 대공이 된단 말이지...' "...사일러스의 일은... 정말 유감입니다. 어제 여기에 와서야 알았 습니다." 랜스는 머뭇거리는 어조로 대답했다. 올두스는 예전에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아들의 죽음이 호쾌한 사람이었던 그를 창백하고 비쩍 마른, 신경질적인 노인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할 말은 해야 했다. "사실.... 여쭈어 볼 일이 있어서 들렸습니다만... 오는 길에 유쾌하지 못한 일을 보아서 이렇게 공식적인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죄없는 민간인들을 반역자로 몰아서 잡고 계시더군요..." "역적을 잡아들이라고 성화를 한 것은 그대의 형, 클레이브 근위대장 쪽이었소. 설마 그 청을 내가 거절해야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들은 죄없는 민간인이었습니다. 반란군 따위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그대가 어떻게 알지? 이곳 아트웰에서 평생을 산 내 부하들보다 그대의 눈이 더 정확하다고 주장하는 거요? 하긴, 형이란 작자는 죄없는 내 아들을 모함해서 사지로 보냈으니, 그 동생이 반란군을 민간인이라고 우겨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랜스는 기가 막힌 나머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올두스 대공을 노려 보았다. 스트라본 왕자는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한참 뒤에야 랜스는 흥분된 목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형님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난 아무도 모욕하지 않았소, 랜스 경. 단지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 그대의 형 클레이브 경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아들 사일러스가 '독립을 요청할 소지가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실을 잊은 거요? 아니면 그가 사일러스를 라우더로 보내 오르크를 퇴치하게 하라고 아클레어 폐하께 부추긴 일을 부인하는 거요? 왜, 그 애의 능력이 뛰어나니 언젠가 자기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지?" "올두스 대공, 그건 터무니 없는 소리요!" 마침내 랜스가 앞으로 나서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이 분노로 창백해져 있었다. "잊으셨나본데, 사일러스가 죽은 이유는 형님의 작전을 무시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아드님을 잃으신 슬픔 때문에 이성을 잃으셨다고 생각하여 그냥 넘어 가겠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모욕을, 특히 제 형님에 대한 모욕을 참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흥! 이제는 위협인가? 아나 모르겠는데, 내 딸네미가 당신이 가출한 사이 왕의 친동생과 결혼했소! 아무리 아덴 가의 세력이 막강하고, 이젠 클레이브가 왕이 될거라는 소문까지 나돌기는 해도, 아직은 나는 왕의 인척 이고 아트웰의 대공이란 말이오!" 올두스 대공도 함께 소리를 질렀다. 험악한 표정의 랜스가 대공의 앞으로 나서려 하자, 그의 주위에 있던 호위병들이 창을 들이대며 그의 앞을 막았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켈리가 랜스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기며 말했다. "랜스, 여기서 정보 얻기는 다 틀린 것 같아. 그냥 가자고!" "미쳤어? 지금 정보 얻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난...!" 그러나 켈리는 랜스의 항의를 무시했다. 그녀는 랜스를 뒤로 밀쳐 내고 앞으로 나아가, 대공의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폐가 많았습니다, 올두스 대공 전하. 제 동료가 잠시 이성을 잃었나 봅니다.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자비를 베풀어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그만 둬, 켈리!" 하고 랜스가 소리쳤다. 켈리가 그를 끌고 얼른 나가려고 했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대공에게 소리쳤다. "결투를 신청합니다, 아트웰 대공 올두스! 당신은 내 형과 내 가문을 모욕했소!" "그만 둬, 랜스! 듣지 마십시오, 전하! 당장 이곳을 뜨겠습니다!" 올두스 대공은 자신의 앞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외쳐 대는 이 두 젊은이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켈리와 랜스는 한껏 소리를 지르고 나서, 서로를 노려보았다. 잠시 알현실 안에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이윽고 올두스 대공이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랜스 경, 미안하지만 그대는 내게 결투를 신청할 자격이 없소. 그리고 이 곳을 마음대로 떠날 수도 없소. 지금 이 시간부로 그대와 그대의 동료 모두를 체포하겠소. 죄목은 반란군을 잡으려던 아트웰 정규군을 방해 하고 상해한 죄, 그리고 그럼으로써 반란군들을 도피시킨 죄요. 할 말이 있서든 재판 때 하도록!" -------------------------------------------------------------------- "뭐라고요? 랜스 도련님이 투옥을?" 스트라본의 설명에, 데이슨은 깜짝 놀라 따지듯이 소리쳤다. 마치 그것이 스트라본의 잘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스트라본은 그의 반응에 더욱 기가 죽어서,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버님께선... 제정신이 아닌 것 같소. 형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 아무리 설득해 보려고 해도 막무가내요. 체포했으니 다음 순서는 재판 이라시면서..." "맙소사...!" 데이슨은 황당해서 입이 딱 벌어졌다. 아들을 잃고 나서 올두스 대공의 정신이 오락가락 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런 일은 상상한 적도 없었다. '이 늙은이가 이젠 완전히 맛이 간 게 틀림없어! 세상에,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클레이브님의 동생을 감방에 쳐넣는단 말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다. 올두스 대공도 따지고 보면, 왕의 인척이 아닌가. 그의 딸이 왕의 하나뿐인 동생과 결혼했으니... 그리고 클레이브를 상대로 일을 벌인다면 수많은 귀족들이 그의 편에 붙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랜스는 반란군으로 지목되어 쫓기던 이들을 도와주기 까지 했으니, 구실도 충분한 셈이다. 그러니 클레이브의 부모인들 못 잡아 넣을까... 아니, 투옥에 그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의 올두스 대공같이 뒷일을 생각하지 않는 성격이라면 처형까지도... "제가 전하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알현을 주선해 주십시오!" 그러나 스트라본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알현 따위는 응하시지도 않을 뿐더러 얼굴을 맞댄다 해서 마음이 변하실 분도 아니오. 차라리 클레이브 경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맙소사, 에스텔에서 여기까지는 밤새 말을 달려도 일주일 거립니다!" "그렇군... 시간이..." 스트라본 왕자는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데이슨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잘 모르겠소. 아버님께서는 처형 따위는 안 할 거라고, 단지 놀라게 하는 것 뿐이라고 말씀하시지만... 아시다시피 형님의 실종은 그 분의 이성을 모두 빼앗아갔소. 처형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소." 데이슨은 힘이 빠져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그는 전 영주인 리반 아덴을 따라 여러 번 전투에 나갔었고 대책없이 포위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난감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 스트라본의 표정은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는 세상 끝난 사람처럼 쉴새없이 머리를 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님이 실종되신 이후로 모든 일이 이모양이니... 역적이 ㄷ끓고, 오르크들의 출몰에다, 아버님은 이성을 잃으시고...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제가... 에스텔로 매를 띄워 보도록 하죠. 그때까지 어떻게든..." 하고 데이슨이 말했으나, 자신이 듣기에도 가망이 없는 말이었다. 세상에 무모한 사람처럼 무서운 것은 없는 법. 올두스 대공이 될대로 되라 하고 랜스를 처형시키기로 했다면, 그는 초고속으로 일을 진행시킬 것이 틀림 없었다. 클레이브가 그 사실을 알고 방해하기 전에... "하는 수 없군..." 하고 스트라본이 말했다. "조금 불명예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랜스 경은 탈옥하는 것이 좋겠소." "탈옥이라고요? 하지만..." "내가 나선다면... 가능하겠지..." 데이슨은 놀라서 스트라본 왕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스트라본 왕자가 ㄱ 많은 어린 소년같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하,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그러는 수 밖에." 스트라본 왕자는 과분한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같이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분명 어떤 결의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형님은 언제나 내게 잘해 주셨소... 그 분의 친구들을 이런 식으로 대접할 수야 없지. 그런데 그 대신 부탁이 하나 있소." "예! 무엇이든지!" 데이슨의 시원스런 대답에도 불구하고, 스트라본 왕자는 얼굴을 붉히며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는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말을 꺼냈다. "그것이... 이 일이 알려지면 아버님의 입장이... 그러니까... 매우 난처해질 것이오. 내 말은... 어차피 랜스 경은 탈출할 거고..." "알겠습니다, 전하!" 데이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 일은 아트웰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지요. 클레이브님께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랜스 도련님도 반역죄로 몰렸다가 탈옥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없으니까요." -------------------------------------------------------------------- "누구ㄴ! 어... 스트라본 왕자님?" 지하 감옥의 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은 기세등등하게 창을 들이대다가, 스트라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성급히 무기를 거두었다. "아... 저... 죄송합니다. 불빛이 어두워서... 그런데 이런 곳에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게다가 호위도 없이 혼자서..." "오늘 잡혀온 죄수들에게 물을 것이 있다." 스트라본은 반대는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두 문지기는 더욱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어린애같기만 하던 왕자가 이렇게 명령을 내릴 때도 있다니, 정말 꿈에도 상상 못 하던 일이었다. "래... 랜스 경과 그 친구분 말입니까? 하... 하지만 대공 전하께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그럼 잊으셨나 보군. 나를 이리로 보낸 것도 바로 아버님이신데 말야. 가서 아버님께 직접 오시라고 해야 할까?" 문지기들은 잠시 망설였다. 올두스 대공이 자신이 한 말을 잊고 다른 사람을 보내다니, 아무래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스트라본 왕자를 보내다니... "죄송합니다. 호위병들과 함께 오시죠... 그들은 위험한 죄수들이라..." "...그렇다면 하는 수 없군." 스트라본 왕자는 체념한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돌아서는 대신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아니엔 로르!" 문지기들은 왕자의 손끝에서 희미한 빛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곧 깊은 잠에 빠져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졌다. 스트라본 왕자는 태연하게 그들의 옷을 뒤져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 문의 열쇠를 꺼냈다. 그는 그 열쇠로 재빨리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육중한 철문을 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갔다. "아니, 왕자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간수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며 그를 맞이했다. 지금까지 스트라본이 지하 감옥에 들어온 적은 없었다. 간혹 올두스 대공과 사일러스 왕자가 아주 잠깐씩, 중요한 죄수를 심문하거나 죄수들이 부당한 취급을 받고 있지 않나 살피기 위해 들어와 볼 뿐이었다. 스트라본은 신기한 곳에 온 어린아이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아... 아버님이 랜스 경과 그 친구분을 만나 보라고 하셔서..." "호위도 없이 말입니까?" "그냥... 몇 마디 묻기만 할 거니가 호위는 필요 없어." 요즘 반란군을 잡느라 성화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언제나 이런지 빈 감방이 거의 없었다. 갇힌 사람들은 무관심한 눈빛으로 화려하고 깨끗한 옷으로 치장한 스트라본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모두 부당한 취급을 받지는 않았으나, 어쨋든 초췌하고 절망적인 모습들이었다. "이리로 오십시오" 처음 보는 지하 감옥의 모습에 당황하고 있던 스트라본에게, 간수가 말을 걸었다. 그는 스트라본을 감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한떼 세력이 컸던 찬탈 주모자이나 정신 이상의 살인마들, 또는 탈옥의 명수들처럼 위험한 죄수들만을 가두어 두는 곳이었다. 그 방들 중 한 곳에, 랜스와 켈리가 갇혀 있었다. "고맙소, 이제는 가 보도록." 하고 스트라본이 간수에게 말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꾸민 목소리였으나 끝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간수는 머뭇거렸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위험한 사람들이 아냐. 내가 혼자 다룰 수 있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스트라본 왕자의 얼굴에 조금 짖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푹 자면서 기다리도록." "예...?" 간수가 귀를 의심하며 스트라본을 올려본 순간, 그의 눈 앞에 이상 스런 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스트라본은 간수의 허리춤에 달린 열쇠를 꺼내어 랜스와 켈리가 갇혀 있는 감방의 문을 열었다. 너무 마음이 앞섰는지, 맞는 열쇠를 찾는 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우두커니 앉아있던 켈리와 랜스가 벌떡 일어섰다. 다행히 아무도 묶여 있지는 않은 상태였다. "스트라본 왕자...?" 랜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스트라본은 망토 속에 감추어 왔던 둘의 무기를 던져주며, 다급히 속삭였다. "빨리 이리로 오십시오. 탈옥하는 겁니다. 시간이 없어요!" "아니, 도대체 이게..." 랜스는 너무 황당한지 발을 떼지 못했다. 그런 그를 켈리가 얼른 잡아 끌고 감방을 나왔다. 스트라본 왕자는 이미 감방들 사이로 난 복도로 달리고 있ㄷ다. "어서 이리로!" "잠깐! 거긴 우리가 왔던 곳과 반대 방향인데..."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겁니다. 어차피 요즘은 경비가 삼엄해서 지상 통로로 나갈 수는 없으니,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로 나가야 합니다." 스틀본의 대답에, 켈리도 랜스도 얌전히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스트라본 왕자님?" 갑자기 한 골목에서 간수가 튀어나왔다. 켈리와 랜스는 질겁을 해서 멈추어 서며, 칼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러나 그들이 칼을 뽑을 새도 없이, 스트라본이 그를 해치워 버렸다. "아니엔 로르!" 그 한 마디의 주문에 간수는 죽은 듯이 쓰러져 버렸다. "재워 놓은 것 뿐입니다. 깨어나기 전에 어서 여기를 떠나야 해요." 하고 스트라본의 설명했다. 랜스와 켈리를 그를 따라 정신없이 지하 더 깊은 곳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스트라본 왕자의 걸음은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닌데다, 그는 몹시 쉽게 지쳤다. 맨 아랫층에 이르렀을 때에는, 켈리와 랜스는 멀쩡한 반면 빨리 가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던 스트라본은 쓰러질 듯 숨을 몰아쉴 정도 였다. 그 모습은 랜스에게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그래... 스트라본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지. 그래서 검술을 배우지 못하고 마법만을...' "괜찮아요?" 스트라본이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켈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 보이며, 땅바닥에 꿇어앉았다. 바닥은 여러 가지 각진 모양으로 잘려진 돌로 덮여 있었다. "비밀 통로로 통하는 문이 여기 어디 있었는데... 아, 여기 있군요." 스트라본은 커다란 돌 하나를 찾아내고는 그것을 바닥에서 들어 내기 위해 낑낑거렸다. 그러나 돌은 조금 덜컹거릴 뿐, 움직을 생각을 않았다. 보다 못한 랜스가 그 대신 돌을 번쩍 들어냈다. 그 돌 밑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 뻥 뚫려 있었고, 그리로 내려갈 수 있도록 나무 사다리가 놓여져 있었다. "통일 이전... 전쟁이 나서 성이 포위되면, 이 통로를 이용해 탈출 하거나 음식을 운반해 왔다고 하더군요. 길리어드의 변두리에 있는 숲으로 연결됩니다. 이 횃불을 가져가시죠." 랜스는 스트라본을 잠시 바라보다가 횃불을 받아들었다. 그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랜스는 이제까지 그가 형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린아이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하고 켈리가 말했다. "하지만, 전하, 나머지 일행은요? 그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저희들은 떠날 수 없습니다." "그 소년과 요정, 그리고 난쟁이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스트라본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그들은 지금 탑 안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보다 오히려 탈옥시키기 쉬울 것입니다. 아무래도 다른 종족들은 외교상의 문제도 있고 하니 지하 감옥에 가둘 수야 없지요. 그리고 그 소년은 아직 어린아이 이니... 먼저 비밀 통로를 이용해 탈출하십시오. 그럼 곧 그들도 따라 보내겠 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트라본 왕자. 그런데 그럼 당신은..." 랜스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의 근심어린 목소리에, 스트라본은 다시 어린 소년같은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십시오. 아버님이나 형님이나 언제나 제게는 관대하시지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 며칠간의 근신이면 끝날 겁니다. 그보다는..." 스트라본 왕자의 목소리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아버님을... 너무 나무라지 말아 주십시오. 그 분은... 나름대로 이곳 아트웰을 위해 노력하고 계시는 겁니다. 저도, 제 형님도... 모두 각자 최선 이라고 생각되는 일을 할 뿐입니다..." "물론 이해합니다." "그럼, 나중에 뵙지요. 지금은 우선 가셔야 합니다." 그들 셋은 서둘러 작별 인사를 했다. 그리고 랜스와 켈리는 어두운 공간 안으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머리 위에서 끼익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무거운 물체를 내려놓듯이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스트라본 왕자가 돌문을 닫은 것이다. -------------------------------------------------------------------- "스트라본 왕자님께서 뵙기를 원하십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젊은 기사는 의외로 공손한 말씨로 로이와 데이미아, 그리고 툴위그에게 말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ㅊ을 든 병사 넷이 그들 셋을 둘러쌌다. 그러나 죄수를 몰아가는 듯한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중요 인물을 호위해 가는 듯한 몸짓이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랜스는?" 툴위그가 당당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그 기사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할 뿐이었다. "저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스트라본 왕자님께 직접 여쭈시지요. 저는 당신들은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따라가 봐요, 툴위그." 하고 로이가 말했다. "어차피 여기는 저들의 성이잖아요. 그리고 스트라본 왕자라면 우릴 도와줄지도 몰라요. 그 사람... 인상이 나쁘지 않았어." 툴위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그 기사에게 명령 하듯 말했다. "그럼 안내하쇼!" 젊은 기사는 지체없이 탑을 내려가는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툴위그와 데이미아, 로이, 그리고 네 명의 아트웰 병사들이 따랐다. "그 사람... 스트라본 왕자 말이야..." 하고 데이미아가 불안한 듯 말을 꺼냈다. "응?" "아니... 그저... 마법사 같았어." "와~, 마법사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나보지?" 로이가 감탄하며 물었다. 데이미아는 더욱 자신없는 목소리가 되어 우물거렸다. "아니... 저... 그런 것도 있지만.... 아니, 아무것도 확실한 건 없어." "맞습니다." 하고 갑자기 젊은 기사가 끼어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감정이 있는 인간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확실히 그 말투에는 자랑스러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스트라본 전하는 훌륭한 마법사시지요. 실종되신 사일러스 전하도 훌륭한 기사이셨지만... 그 분의 능력은 많이들 인정해 주는데 스트라본 전하의 명성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편입니다. 하긴, 몸이 허약하셔서 전투에 참가하시지 못하니..." "하지만 전쟁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훌륭한 마법사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내 생각엔 그 반대일 것 같은데." 로이의 대꾸에 그 기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법이지요. 역시 이디실의 기사... 아니, 실례했습니다." 그 기사는 허둥지둥 입을 다물며 다시 감정 없는 표정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그의 끝말을 놓치지 않고, 걱정스러운듯 툴위그 에게 속삭였다. "이상하잖아요, 어떻게 로이가 이디실의 주인이라는 걸 알았을까요?" 그러나 툴위그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대꾸할 뿐이었다. "그럴 수도 있지, 뭐. 그나저나 저 로이 녀석은 넉살도 좋지. 아무 하고나 별 얘기 다 한다니까..." -------------------------------------------------------------------- "여기입니다. 들어오시죠." 젊은 기사는 그들을 넓고 깨끗한 방으로 안내했다. 귀한 손님을 접대하도록 꾸며진 방인 듯, 푹신하고 붉은 카펫 한가운데에 화려하게 조각된 둥근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그 주위에는 마찬가지로 호사스러운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세 의자는 마치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를 기다리는 듯 비어 있었고, 한 의자에만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가늘게 반짝이는 금발과 소년 같은 미소를 가진, 섬세한 미모의 왕자였다. 그는 알현실에서 볼 때보다 더욱 고귀해 보였고 더욱 약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이시어. 먼저 제 아버님의 무례에 대해 사과드려야겠군요." 스트라본 왕자는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로이와 툴위그는 그의 공손한 말투에 어쩔 줄을 모르며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기세등등하게 따졌다. "우리가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이란 걸 어떻게 알았죠?" 그러나 스트라본 왕자는 미소를 조금도 거두지 않고 대답했다. "랜스 경에게서 들었습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데이미아는 입을 다물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기도 했다. 그러나 스트라본 왕자의 인상이 좋다는 로이와는 달리, 그녀는 그의 앞에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서는 너무나도 강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타고 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그런 강력한 힘이... 그가 몸이 약한 것은 아마도 체력이 그 마력과 균형을 이루지 못해서일 것이다. 하긴, 저런 마력과 체력이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인간이나 요정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인지도 몰랐다. 강한 체력을 타고나는 난쟁이나 용족이라면 몰라도... '그리고 저런 마력을 제대로 방출할 수 있으려면 백마법만으로는 어림도 없어... 저 사람... 분명히 어린애같이 순진한 표정을 하고는 있지만...'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이리로 와서 앉으시지요." 스트라본 왕자의 제안에, 그들은 일제히 의자에 앉았다. 하나같이 긴장되어 뻣뻣한 몸짓들이었다. 스트라본은 그들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십시오. 사실, 저는 여러분을 석방시키기 위해 이 곳으로 모셔온 것입니다. 내일 아침이 밝기 전에 책임지고 여러분을 길리어드 밖, 아버지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로이와 툴위그, 데이미아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룻밤 사이에 난데없이 체포당하고 투옥당했다가 이젠 내보내 준다니. 그들의 표정을 보고 스트라본이 덧붙였다. "물론 믿기 힘드시겠지만... 사실 아버님은 모르시는 일입니다. 즉, 여러분은 탈옥을 하시는 것이지요. 하지만 제가 책임지고 아버님을 설득 해서 차후에 불명예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만 갈 수는 없소! 켈리와 랜스는?" 하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그러나 스트라본은 이번에도 지체없이 대답했다. "그들은 이제 안전한 곳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자아, 이제 다 아셨스면 마음 놓으시지요. 제가 여러분을 곧바로 성 밖으로 모시지 않고 이곳으로 모셔온 것은 사죄하고 화해하기 위해서입니다. 아트웰은 예전부터 다른 종족에게 우호적인 상업국가, 난쟁이나 요정들과 나쁜 기억을 간직할 수는 없지요. 그리고 로크 페울로니의 주인들이라면 더더욱..." 스트라본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수많은 보석이 박힌 금으로 만들어진 술병을 들었다. "사죄와 화해의 표시로 여러분께 이것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아트윌 남부에서 나는 포도주는 천상의 음료라고들 하죠. 제가 사죄의 표시로 이것을 따르면, 여러분은 그것을 마심으로써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설마, 라이오스 지방에서 나는 포도주? 그런 거라면 사양할 이유가 없죠!" 툴위그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데이미아가 책망하는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자, 그는 머쓱해진 듯 변명했다. "사과의 표시래잖아. 왕자님이 우릴 탈출시켜 주신다는데, 저걸 안 받으면 저 분을 모욕하는 거라고." 그것은 데이미아 자신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도 잔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로이도 신이 나서 포도주를 홀짝였다. 술을 마셔 보는 것은 처음 이었다. 시지리스에 있을 때에는 에이론드가 절대 못 마시게 했으니까. 게다가 툴위그의 말을 들으니 뭔지는 몰라도 유명한 술인 모양이었다. 사실 로이로서는 술맛을 잘 알 수 없었다. 냄새와 빛깔은 붉은 보석 처럼 유혹적이었지만, 맛은 기대와는 달리 좀 썼다. 그러나 스트라본 왕자가 자꾸 잔을 채웠기 때문에, 로이는 유명한 것을 먹는다는 기분에 홀짝홀짝 다 마셔 버렸다. "이거... 독하군요." 툴위그가 눈동자가 반쯤 풀린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이미아 역시 식탁에 턱을 괴고, 감기는 눈동자를 간신히 뜨고 있었다. 로이도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눈이 가꾸 감기고, 머리가 납덩이로 된 것처럼 무거웠다. 그런 그들을 둘러보며, 스트라본 왕자는 알쏭달쏭한 말을 했다. "천상의 음료가 포도주라면, 잠은 천상의 선물이죠." 그리고 그는 무슨 말인가를 더 했다. 아니, 그냥 로이가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다음 순간, 로이는 식탁에 머리를 뉘었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으으으... 무슨 비밀 통로가 이모양이야!" 켈리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질렀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있는 곳은 비밀 통로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세 갈래의 길이 있어서 다 한 번씩 들어가 보았지만 허사였다. 한 길은 파다 만, 막힌 길이었고, 다른 두 길은 뱅뱅 돌도록 서로 이어져 있었다. 밖으로 통하는 길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발이 부르트도록 이 길 저 길 기웃거려 보았지만, 없던 길이 생길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여긴 비밀 통로가 아닌 것 같아. 스트라본 왕자가 착각 했었나보지...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 랜스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왔던 길로? 그래서 어쩌려고?" "성으로 다시 들어가서... 어떻게든 해야지. 여긴 아무래도 나갈 길이 없어." 켈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너무 위험한 일이긴 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처음 이 통로로 내려왔던 사다리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이 길 보니까 생각나는 게 있는데..." 하고 켈리가 말을 꺼냈다. "응?" "아니... 아무래도 길리어드 성에 비밀 통로가 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어. 오히려 비밀 통로를 만들려고 했었단 얘긴 들었었는데... 왜, 그, 마지막 왕, 벨리노어 있잖아. 결국 에스테이아 왕한테 항복하고 붉은 방패의 기사가 된 사람. 그 왕이 비밀 통로를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했다는... 만약 그 소문이 사실이면, 길리어드 성엔 비밀 통로 따위는 없다는 소리지..." "뭐... 그럼 스트라본 왕자가 우리한테 거짓말을 했단 말야?" "글쎄... 별로 믿을 만한 옛날 얘기는 아니지만, 만약 그 말이 사실 이라면..." 랜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켈리, 그럴 리 없어. 스트라본을 아까 봤잖아! 순진한 어린애같은 사람이야. 뭣하러..." "알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야, 랜스. 그는 아무9것도 못한다고, 파리 한 마리 죽일 배짱 없다고 네가 그랬지만, 사실은 아버지 몰래 우릴 탈출시킬 만큼 담이 센 사람이었잖아? 게다가... 랜스? 왜그래?" "사다리가 없어." 랜스의 목소리는 소름끼치도록 공허했다. "뭐...? 그럴 리가...!" 9"사다리가 없다고... 우린 이제 올라가지도 못해." "설마... 여기가 아닌 거 아냐?" "틀림없이 여기야... 여기 사다리가 놓여 있던 자국까지 있어. 믿기 힘들지만... 스트라본 왕자가 치운 것 같아." 랜스는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켈리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새까만 암흑만이 시야를 가릴 뿐이었다. 말없이 앉아 있는 랜스에게, 그녀는 따지듯이 물었다. "그래서, 뭐야, 파리 한 마리도 못 죽인다는 그 왕자가 우릴 여기서 굶겨 죽이려고 한단 말야?"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 "저길 봐..." 켈리는 무의식적으로, 랜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돌아보았다. 수십개의 해골들이 삐그덕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해골은 아직 살점과 옷이 썩다 말고 늘러붙어 있는 상태였고, 또 어떤 해골은 뼈조차 완전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부스러져 있는 상태였다. 그들은 손에 낫과 곡괭이 등,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을 들고, 어색하고 경직된 걸음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스트라본이건 올두스 대공이건... 이 집 식구들 완전히 미쳤어." 랜스는 너무나 기가 막힌 나머지, 방어할 생각도 않고 고개를 절레 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환영을 예상하고 왔던 길리어드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이야... "비밀 통로를 파는 작업에서 죽은 사람들이군..." 하고 켈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벨리노어 왕이 비밀 통로를 파는 것을 중단한 이유는, 이 부근은 지반이 약해서 이런 큰 굴을 지탱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 그도 한 번 큰 사고가 터져서, 안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죽은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 았지... 이 사람들은 그 때 깔려 죽은 사람들이 분명해." "어쨌든 이 괴물들을 처치해야 하루라도 오래 살겠군?" 랜스는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거대한 곡괭이를 든 해골을 노려보며 칼을 뽑아들었다. 켈리도 한 손에는 칼을, 다른 한 손에는 채찍을 쥐었다. 그나마 스트라본이 무기를 되돌려주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랜스의 코앞까지 다가온 해골이 곡괭이를 쳐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리칠 새도 없이, 랜스의 칼날이 얼른 그 해골의 갈비뼈를 베었다. 그 해골은 뒤로 말려나 풀썩 쓰러져 버렸다. '다행인데. 이것들... 움직임이 아주 둔해!' 랜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 해골을 지나쳐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다른 해골들에게로 다가갔다. 두개골의 반쪽이 떨어져 나간, 녹슨 쇠몽둥이를 든 해골과 팔 한 쪽이 없는 곡괭이를 든 해골이었다. 쇠몽둥이가 랜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쳐졌으나, 단련된 검사인 랜스에게는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였다. 랜스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하고는, 그 해골의 머리를 베어 버렸다. 그리고 곡괭이를 든 해골이 제대로 공격을 시도해 보기도 전에, 그 해곡의 허리를 싹뚝 베었다. "랜스! 뒤를 조심해!" 갑작스런 켈리의 외침에, 랜스는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랜스가 쓰러뜨렸던, 갈비뼈가 부러진 해골이 곡괭이를 쳐든 채 막 그를 내려치려고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켈리의 채찍이 재빨리 그것의 손목을 휘감아 부러드려 버렸다. 곡괭이는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으나, 해골은 그대로 랜스에게 덤벼들었다. 랜스는 반사적으로 그 해골의 배를 발로 힘껏 찼다. 그러자 징그럽게도 배 부분이 부러져서, 해골은 두동강이 나고 말았다. "내가 분명히 베었는데..." 랜스는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며 켈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켈리는 그의 말을 듯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칼끝으로 방금 그녀와 랜스가 쓰러뜨린 해골 쪽을 가리키며 더듬거렸다. "저... 저걸 봐, 랜스..." 랜스의 공격으로 두동강이 난 해골이 삐그덕거리며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상반신은 상반신 대로, 하반신은 하반신 대로, 따로따로 움직이면서. 상반신은 손목 없는 팔을 다리 삼아 몸을 일으켰고, 허리까지밖에 안 남은 하반신은 이제 다 일어서서 랜스에게로 걸어오는 중이었다. 공허한 구멍만이 뻥 뚫린 해골의 눈이 랜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럴수가..." "이것들, 죽일 수 없어. 스트라본 왕자, 생각보다 고단수야..." 켈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럴리가...!" 랜스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해골 부대의 한복판으로 달려나가 닥치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경직된 움직임의 해골들은 랜스의 칼날을 제대로 막아 보지도 못한 채, 목과 허리가 베어져 쓰러졌다. 그러나 쓰러진 해골들은 10분도 채 안 되어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목이 없는 채로, 혹은 다리와 상반신이 따로 따로 분리된 채로 랜스를 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기세 좋게 해골들을 베던 켈리와 랜스도 곧 녹초가 되었다. 아무리 느리고 싸움을 잘 못 하는 해골들이라지만, 이렇게 끝도 한도 없이 온다면 막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열심히 해골들의 몸을 분해시킨 덕분에, 싸워야 할 숫자는 더 늘어났다. 하나 뿐이었던 해골이 머리와 다리, 몸통으로 분리 되어 제각각 공격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이러다간 우리가 제풀에 지쳐 쓰러지겠어!" 켈리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마찬가지로 간신히 호흡을 추스리던 랜스가 기운없는 대꾸를 했다. "그럼 어쩌자고?" "체면이 좀 안 서지만... 도망치자!" "어디로?" 그 물음에는 켈리도 대답할 도리가 없었다. 이곳에 출구가 없다는 것은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하지만... "랜스, 우린 여기서 나갈 수 있어!" "뭐?" "나갈 수 있어. 네가 그랬지, 스트라본 왕자는 몸이 무척 약하다고. 이렇게 시체들을 하염없이 움직이게 한다는 건 마력이나 정신력은 물론 체력도 상당히 소모하는 일이야. 그런데 나갈 구멍도 없는데, 어차피 가만 놔 두면 굶어 죽을 텐데 일부러 힘들여서 해골 병사까지 만들었다는 건 말이 안 돼!" 켈리는 다가오는 해골들 -아니, 해골의 분리된 조각들을 차례로 해치워가며, 띄엄띄엄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랜스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앞에 버티고 선, 머리와 한쪽 팔이 없는 해골을 발로 차 흙으로 된 벽에 쓰러뜨렸다. 해골이 풀썩 쓰러지면서, 벽 전체가 먼지를 일으키며 흔들렸다. 그 진동은 천장으로까지 이어져, 머리 위에서도 흙이 쏟아졌다. "켈리!" "왜?" "알아냈어.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을지! 네가 여기는 지반이 약해서 비밀 통로를 만들 수 없다고 했지?" "그런데...?" "그걸 역이용하는거야. 비밀 통로를 계속 파들어가려고 한다면, 당연히 이 토굴이 무너질테고, 그러면 밖으로 나가는 길이 생길 것 아냐?" "너 미쳤니? 그러다 생매장되기 십상이야!" "해골한테 죽는 것보다 낫지 뭐! 이리 와!" 랜스는 칼을 칼집에 꽂고 해골이 가지고 있던 녹슨 곡괭이를 집어 들고는, 있는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켈리도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리고 물론, 그들의 뒤로는 수많은 해골들의 잔해가 따라 왔다. 다리는 달려서, 다리 없는 해골은 팔을 다리 삼아 달려서, 그리고 두개골만 남은 것은 데굴데굴 굴러서... "랜스, 질문이 있어!" "뭔데?" "그럼 굴 팔 동안 저기 뒤에 따라오는 애들은 어떻게 할 건데?" "그야... 내가 팔 동안 네가 막아야지!" "이런..." 어느새 그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파다 만 토굴이었다. 랜스는 힘차게 곡괭이를 들어올려, 막힌 벽에 내리꽂았다. 벽과 천장이 흔들리면서, 사방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켈리는 다시 칼과 채찍을 들고, 랜스에게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해골들과 싸울 준비를 했다. 이윽고 선두로 달려오던 두개골 하나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펄쩍 튀어올랐다. 켈리는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에 맞은 두개골은 조각조각으로 부서져 떨어졌다. 이어서 하반신만 남은 해골이 진격해 왔다. 그러나 켈리의 칼에 다시 다리 한 쪽씩으로 나뉘어진 채,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그 해골은 잠시 꿈틀거리다가, 곧 다시 일어나 한 다리로 깡충깡충 뛰며 돌격해 왔다. "랜스! 아직 멀었어?" 숨이 턱까지 차오른 켈리가 마구 칼과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랜스는 정신없이 곡괭이질을 하며 소리쳐 대답했다. "아직 모르겠어! 곧 무너질 것 같은데!" "으으... 그 왕자 녀석, 어린애 같이 순진한 얼굴로 잘도 사람을 고생 시키는군! 여기서 나가기만 해 봐, 가만 두지 않겠어!" 랜스는 뻐근해져 오는 팔로 있는 힘을 다해 벽을 내리치고 또 내리 쳤다. 검술로 단련된 팔이기는 했지만, 이런 종류의 노동에는 전혀 익숙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곡괭이질은 그 자신이 보기에도 미숙하기 짝이 없었고, 게다가 팔과 어깨는 빠질 듯이 아파 왔다. '제길... 깔려 죽어도 좋으니 제발 어떻게 좀 돼라!' 랜스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벽이 아닌 천정을 행해 힘껏 곡괭이를 던졌다. 그러자 먼지와 돌덩이가 그의 머리 위로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다. "랜스? 어떻게 한 거야?" 켈리가 싸우다 말고 팔로 머리를 감싸며 소리쳤다. 그녀의 머리 위로 정신없이 돌이 떨어지고 있었9기 때문이다. 벌써 상당수의 해골들이 돌과 흙에 깔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무... 무너진다!" 랜스는 천장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켈리를 밀쳐내며 그녀와 함께 바닥에 뒹굴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켈리와 랜스가 서 있던 자리에 바위와 흘더미가 무너져내렸다. 흙먼지가 쓰러진 그들 위로 덮쳐왔다. 한참 후에야 그들은 몹시 기침과 재채기를 해 대고, 눈물을 훔치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성공이다!" 한참동안 기침을 해 대던 켈리의 입에서, 승리의 함성이 튀어나왔다. "저걸 봐! 구멍이 뚫렸어! 맙소사, 랜스! 넌 천재야, 천재!" 그녀는 랜스가 정신을 가다듬기도 전에, 멀쩡한 사람 정신도 다 빼놓을 정도로 방방 뛰며 수선을 피웠다. 랜스는 간신히 먼지 속을 뚫고 켈리가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성공이었다. 천정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밑에는 흙더미가 높이 쌓여 있어서 구멍까지 올라 가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신난다! 랜스, 어서 와! 이 지긋지긋한 굴 속을 빠져나가자고!" 켈리는 팔짝팔짝 뛰며 굴 흙더미를 올라, 뻥 뚫린 구멍으로 향했다. 그 밖으로는 별이 빛나는, 초승달이 뜬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엇!" 갑자기 켈리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흙더미 속에서 해골의 손이 불쑥 나와, 그녀의 발목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그녀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으며 발을 확 잡아당겼다. 해골들을 손가락이 떨어져 나오며, 그녀의 발은 자유롭게 되었다. 랜스가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꿈틀거리다가 잠잠 해지는 손가락들을 보고, 여운이 남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은 두 번씩이나 흙더미에 묻혀 죽는군..." "알게 뭐야. 이젠 가자!" 켈리는 옷을 털며 구멍 밖으로 나갔다. 공교롭게도 길리어드 성의 정원 한복판이었다. 그들은 올두스 대공의 꽃밭을 엉망으로 만들며 탈출했던 것이다. 켈리는 뭐가 좋은지 키득거렸다. "이것 봐. 그 할아버지, 가뜩이나 너 싫어하는데 이젠 완전히 잡아 먹으려고 하겠다. 어서 여길 뜨는 게 좋겠어." "하지만... 로이와 데이미아, 툴위그는?" 랜스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켈리는 비로소 그들이 생각난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래... 하지만 그들도 이 성 안에 있을 것 같지는 않아. 우리 둘만 이 토굴 안으로 들여보냈다면, 그들은 함께 죽여버리고 싶지 않았던 거라고밖에... 아, 이런!" 켈리가 갑자기 생각난 듯,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랜스는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왜그래?" "그 해골들 말이야. 이젠 움직이지 않니?" "조금도. 완전히 죽은 것 같은데..." "큰일났어, 랜스. 어서 여길 도망쳐야 해!" "뭐?" "스트라본 왕자가 우리가 탈출했다는 것을 알아챘어!" 켈리는 이렇게 대답하고는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랜스는 영문을 모르는 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들은 성의 꽃밭을 마구 짓밟고 달려, 여러 가지 나무들이 울창한 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데다 특별히 신경써서 가꾼 나무들이 즐비해 있었으므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다. 몸을 숨기 기엔 딱 알맞은 장소였다. "휴... 여기라면 아무도 못찾겠지?" 켈리가 비로소 멈추어 서며 중얼거렸다. 랜스는 헐떡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생각해 봐, 랜스. 머리가 잘려도 멀쩡하던 해골들이 왜 그깟 흙더미에 묻혀 죽겠어? 그들이 움직임을 멈춘 건, 흙더미 때문이 아냐. 스트라본이 그들에게 보내던 마력을 끊어 버린 거지." "그럼.. 우리가 나온 것을 알고...?" 랜스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해?" "가능할 거야, 아마...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먼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아는 사람이 있었어. 게다가 여기서 성 안이라면 그리 먼 거리도 아냐." "그렇다면... 스트라본이 그 해골들을 멈추었다는 건, 다른 조치를 취해 놨다는 뜻이겠군?" 랜스가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켈리가 대답을 하려는 찰나, 갑자기 숲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보기보다 똑똑하신 분들이군!" 랜스와 켈리는 바짝 긴장하여 무기를 빼어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만이 어렴풋이 파악ㄷ 뿐, 어두운 나무 그림자 속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디를 향해 방어할 준비를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 목소리는 한층 더 비웃듯이 말했다. "하하... 하지만 이리로 숨다니, 그건 정말 멍청한 행동이었어. 뭘 그리 두리번거리시지? 내가 어디 있는지 안 보이나? 당연히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당신들이 다 보이는걸. 그래, 지금 그 놀라는 표정까지 다 보인다고!" "허세가 대단하시군?" 랜스 역시 비웃듯이 대꾸했다. 그러나 그의 당당한 어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작은 단검 하나가 랜스의 이마를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랜스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피했고, 그 단검은 그의 옆이마를 살짝 스치며 근처에 있는 나무 줄기에 꽂혔다. 정확한 겨냥이었다. 랜스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치 자신에게 타이르듯이 켈리를 향해 말했다. "...소리를 듣고 던진 거야." "그렇지 않아." 하고 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다 보이는 것 같아... 그렇지? 이봐, 목소리만 들리는 당신, 인간이 아니지?" "상황을 잘 모르시는군. 시건방진 소리를 떠드는 걸 보니! 물론 난 인간이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약간 떨려 왔다. "그래, 엉뚱한 소리를 해 대는 벌로 당신부터 죽여 주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떤 그림자가 켈리를 향해 덤벼들었다.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빠른 속도였다. 얼굴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만 아니라면, 랜스는 그것을 허깨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챙! 하고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서야 랜스는 고개를 돌렸다. 켈리와 어떤 낯선 청년이 칼을 맞대고 있었다. 검은 옷에 검은 복면을 하고 있었으므로, 이처럼 어두운 숲속에서는 가까이에서도 거의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대... 대단하군. 내 칼을 막다니. 이건 짐작도 못했는걸!" 복면을 한 청년이 침착성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켈리는 칼을 치우지 않고 대답했다. "드래크로니안과 겨룰 때에는 눈을 믿어선 안 되지. 당신의 그 속도, 그리고 그 눈을 보니 혈통이 확실해지는군. 안 그런가, 드래크로니안!" "닥쳐, 이 건방진 것!" 그는 흥분한 어조로 소리치면서, 마구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칼날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켈리는 아예 정면 대결을 포기한듯, 가끔가다 칼로 상대방의 칼질을 간신히 맞받아낼 뿐, 계속 피하기만 하고 있었다. 만약 그 청년이 제 실력을 발휘한다면 분명 위험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랜스가 보기에도 그는 이성을 잃고 기분 내키는 대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랜스는 그 둘의 싸움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속도, 저 몸놀림... 저건 분명 하르크자엘...!' 물론 그가 하르크자엘일 리는 없었다. 랜스 자신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르크자엘이 그보다 훨씬 능숙했고 이성적이었다. 외모와 목소리도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또한 그가 싸우는 모습, 스피드에 모든 것을 의존하고 싸우는 모습은 하르크자엘과 놀랄 만큼 비슷했다. 하르크자엘도 갑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자신의 빠른 몸놀림만을 무기 삼아 싸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켈리는... 그녀는 분명 드래크로니안의 스피드를 막아 내는 방법을 알고 있어. 아니, 저건 오랫동안 교육받고 연습한 솜씨야! 어째서... 그녀가...?' "이봐, 드래크로니안!" 하고 랜스는 칼을 빼어들며 소리쳤다. 켈리와 복면을 한 청년은 동시에 그를 돌아보았다. 랜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난 네 종족에 원한이 많은 사람이다. 네가 정말 드래크로니안이라면, 네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나다!" "너 미쳤니?" 켈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녀보다 더 흥분한 것 같았다. "나를 감히 드래크로니안이라고 불렀겠다? 죽어랏!" 그리고 당장, 무서운 속도로 랜스를 향해 돌진해 왔다. 보통 기사라면 당연히 단칼에 베어졌을 속도였다. 그러나 랜스는, 하르크자엘과 싸우기 위해 오랫동안 그와 대적하는 방법을 연구해 온 터였다. 그는 간신히, 그 청년의 칼이 그의 목을 베기 직전에 막아낼 수 있었다. 가벼운 몸짓으로, 복면을 한 청년은 튕겨나가듯이 랜스의 반격을 받아들였다. 예상대로 그의 공격에는 별로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운 없는 공격도 아니었지만, 그의 완력을 전부 모아 칼을 휘드르고 있지 않은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조차 하르크자엘과 비슷했다. "하!" 다시 그 청년의 칼이 날아들었다. 너무 빨랐다. 속도만 가지고는 결코 하르크자엘에게 뒤지지 않을 것 같았다. 랜스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전에, 다시 그의 가슴을 향해 칼이 날아 들었다. 구 칼날이 랜스의 어깨를 얕게 베고 지나갔다. '젠장! 피해서는 안 돼. 속력 대 속력으로 나가다간 어떤 인간도 드래크로니안을 이길 수 없어. 랜스, 왜 연구한 대로 하지 않지?' 다시 눈앞에서 그 청년의 칼이 번뜩이고 있었다. 랜스는 피하려 들지 않았다. 그가 연구한 바로는, 드래크로니안에게 깊은 상처를 입히는 방법은 단 하나 뿐이었다. 그는 왼팔에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지만,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서서 칼을 휘둘렀다. "윽!" 그 청년이 옆구리를 움켜쥐며 재빨리 뒤로 물서섰다. 그의 칼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흙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옆구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고, 랜스의 팔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 어떻게..." "세상에...!" 복면을 한 청년과 켈리는 누가 더랄 것도 없이 놀라운 표정으로 랜스를 바라보았다. 랜스는 팔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닦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오랫동안 네 종족의 움직임을 연구해 왔다, 드래크로니안." "이런...!" 그 청년은 비틀거리다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않았다. 랜스는 천천히 걸어가 그의 얼굴에서 복면을 벗겼다. 그리고는 충격을 받은 듯,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마... 맙소사. 넌... 이즐레이(Izlei ; '붉은 눈'이라는 뜻)...? "오랫만이군, 랜스... 5년만이지?" 그 청년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랜스 또래 정도나, 그보다 한두 살쯤 더 어려 보이는 단정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위험한 야행성 동물처럼 붉은 광채를 내뿜고 있었다. "팔자가 늘어지셨군... 이런 데서, 미녀와 데이트 중이셨나?" "이즈... 왜 나를 공격했지?" 랜스가 경계를 늦추며 물었다. 이즐레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의뢰받았으니까... 내까짓 게 공격한다고, 네가 죽어 줄 놈이냐?"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랜스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부축해 주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켈리가 재빨리 그를 넘어뜨리며 소리쳤다. "조심해, 랜스!" 무방비 상태의 랜스늠 별로 강하지 않은 켈리의 힘에도 넘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위로, 이즐레이의 품에서 나온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간만의 차였다. 랜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그의 손을 차서 칼을 떨어 뜨렸다. 이즐레이는 켈리를 노려보며, 채인 손을 옴켜쥐면서 뒤로 물러섰다. 랜스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이 녀석 잘도...!" 랜스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칼을 빼어들고 그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오히려 어서 베라는 듯 목을 늘어뜨렸다. 갑자기 들려온 스트라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랜스는 정말 홧김에 그의 목을 베엇을지도 몰랐다. "정말 실망이군. 그 유명한 암살자 이즐레이가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그것은 스트라본 왕자의 목소리가 분명했으나, 전혀 그의 목소리같이 들리지 않았다. 너무나 냉혹한 말투였다. 어두운 수풀 속에서 그가 나타났을 때, 랜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을 정도였다. 소년같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차갑고 감정 없는 표정이 서려 있었다. "스... 스트라본?" 랜스는 놀라서 존칭을 붙이는 것도 잊은 채, 어려서 부르던 대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스트라본은 그의 얼굴을 흘끗 보더니 말을 이었다. "정말 놀랍군요, 랜스 경. 그 토굴에서 탈출해서 테이레스까지 쓰러뜨리다니, 이건 정말 상상도 못했어. 형이 친구를 잘못 사귄 게 아니군!" "스트라본... 이게 도대체...!" 랜스는 스트라본의 뒤로 나타나는, 석궁과 창, 칼로 무장한 병사들을 보고 넋을 잃은 채 더듬거렸다. 켈리는 가만히 그들을 노려보다 말했다. "저걸 봐, 랜스. 저들이 입은 옷을! 아트웰의 문장... 그러나 독수리 머리 위에 왕관이 있군. 옛 아트웰 왕국의 문장이야. 스트라본, 당신이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였군!" 스트라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싱긋 웃더니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다 죽여버려. 물론 저 실력없는 암살자 녀석도! 절대로 증거를 남겨서는 안된다." 그리고는 홀연히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아직도 얼떨 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랜스가 무심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말했다. "설마... 스트라본! 미쳤어...?" 그러나 무장한 병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랜스는 멍한 얼굴로 그들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켈리가 재빨리 채찍을 휘둘러 한 병사의 얼굴을 후려치지 않았다면, 그의 칼이 랜스의 몸을 베었을 것이었다. "랜스! 뭐해, 정신 나갔어? 이놈들,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그제서야 랜스도 칼을 빼어들었다. 이즐레이도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뭐야, 너희들이 감히 날 해치겠다고? 어디 덤벼 보시지. 그 버르장 머리 없는 왕자 녀석, 감히 나를 무시했겠다!" 그리고는 그는 래스의 공격 때문에 떨어뜨렸던 칼을 집어들었다. 궁수들이 석궁을 들었다. 랜스는 몸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스트라본, 누구나 다 어린아이같이 순진하고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그 왕자가 그토록 교묘한 함정에 그들을 빠뜨리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이처럼 많은 병사들까지 동원했던 것이다. '내 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간신히 피하며 궁수의 가슴을 찔렀다. 켈리가 독침을 부는 것이 보였다. 곧 궁수 둘과 창을 든 명사 한 명이 풀썩 쓰러졌다. 이즐레이도 멍청히 서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단검을 던져 댔다. 다섯 명의 병사가 단검에 급소를 찔린 채 즉사했다. 단검이 떨어졌는지, 그는 드래크로니안 특유의 속력으로 칼을 휘두르며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에 압도당한 병사들은 물러서거나, 아니면 멍청히 서 있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랜스의 칼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쓰러졌다. 그러나 그는 급소는 노리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노력하는 중이었다. 병사들은 쓰러졌지만, 대부분 정신을 잃거나 무기를 잡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랜스... 저기..." 켈리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랜스는 열심히 칼을 휘두르며 대꾸했다. "뭐야?" "죽은... 병사들이 다시 일어나는데..." 정말이었다. 랜스가 아까 목을 베어버린, 궁수의 시체가 일어나서 석궁을 쏘아 대고 있었다. 머리가 없으니 눈도 없는데, 어떻게 보는지 겨냥도 잘 해서 그들에게 화살을 날려 대는 중이었다. 이즐레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왕자 녀석, 생각보다 더 재수없는 놈이군!" 그는 칼을 고쳐 잡고는 저돌적으로 궁수에게 달려들었다. 굵은 화살이 그의 어깨를 꿰뚫고 박였으나, 잠깐 멈칫 했을 뿐이었다. 곧 궁수의 머리 없는 시체는 두 조각으로 갈라져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다행이 이 시체들은 해골처럼 조각조각 부서져도 움직이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제기랄..." 이즐레이는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 쉬며 어깨에서 화살을 뽑았다. 랜스가 비틀거리는 그를 무심코 부축했다. 그러나 의외로 그는 랜스의 팔을 매몰차게 밀어내고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기까지 했다. "곤란한데... 포위됐어. 도망갈 구멍이 없어!" 켈리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즐레이는 차가운 웃음을 띄우며 간신히 몸을 가눈 채, 칼을 고쳐 잡았다. "흥, 올 테면 오시지! 죽어 줄 테니까, 그 대신, 너희도 함께 죽는 거다!" 그는 정말 죽어도 상관 없다는 듯이, 병사들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둘러 댔다. 보다 못한 랜스도 그의 곁으로 달려가, 막 그의 등을 찌르려던 병사 한 명을 쓰러뜨렸다. 켈리는 그들이 싸우는 모습을 흘끗 보다니,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염없이 군사들이 쏟아지는데, 저런 식으로 싸우다간 금방 쓰러지고 말 텐데...' "이즈! 안되겠어. 내가 대충 막을테니 넌 몸을 피해!" 랜스가 피투성이가 된 채 칼을 휘두르는 이즈를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또 그 잘난 기사도가 도졌군. 나야말로 괜찮으니 귀족 도련님이나 피하시지 그래?" 랜스는 한숨을 쉬고, 적과 싸우는 데에나 신경을 집중하기로 했다. 길리어드 성의 병사들은 왕성을 지키는 군사답게, 숙련된 솜씨를 가지고 있었다. 여관에서 싸웠던 데이슨의 멍청한 부하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금세 랜스와 켈리, 이즐레으는, 둥글게 둘러선 병사들 한가운데서 등에 등을 맞댄 채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어째 운이 나쁜 날 같아." 켈리가 맥빠진 목소리로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랜스와 이즐레이는 말없이 군사들을 노려보며,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궁수들이 그들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었다. 그들이 막 활시위를 놓으려는 찰나, 멀리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냐? 성 안에서 무슨 짓이냐!" 데이슨이었다. 랜스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데이슨! 여기야!" "랜스 도련님?" 병사들은 당황하여 데이슨이 다가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켈리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독침을 불어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이즐레이도 지지 않고 단검을 전져 댔다. 궁수 여러 명이 랜스의 칼에 쓰러졌다. 포위망을 뚫은 그들은 데이슨의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아니, 여기서 무슨 일이십니까? 게다가 그 상처는..." 데이슨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랜스에게 물었다. 그의 곁에는 늑대 펠히스가 꼬리를 치며 서 있었다. 랜스는 숨을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그게... 말하자면 길어요. 그보다는 어서 여길 빠져나가야..." "빠져나가시다니요?" 데이슨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길리어드 성의 감옥에서 탈옥을 하셨으니 그리로 돌아가셔야지요." 랜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것은 켈리도 마찬가지였다. "데이슨... 무슨...?" "법의 적용에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클레이브 님의 동생분이라도 마찬가지! 그것이 형님께서도 원하시는 바일 것입니다. 자, 얌전히 가시죠. 제가 도련님께 칼을 빼어들지 않아도 되도록..." 데이슨이 칼집에 손을 얹었다. 그러나 순간, 이즐레이의 검이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오랜 경험으로 단련된 실력인지라, 얼른 피해서 어깨를 깊게 베었을 뿐이었지만, 어쨌든 가볍지 않은 상처였다.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나와 풀밭을 적셨고, 데이슨은 힘없이 쓰러졌다. "무슨 짓이야, 이즈!" 랜스가 당황하여 칼을 뽑으며, 이즐레이의 앞을 막아섰다. 이즐레이는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몸을 일으키려 애쓰는 데이슨을 노려보며 말했다. "비켜, 랜스. 저건 꼭두각시야!" "그 말이 맞아, 랜스. 저 사람의 정신은 조종당하고 있어!" 하고 켈리도 독침을 불 준비를 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랜스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데이슨은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해친다면 너도 가만 두지 않겠어! 죽이려면 내 시체부터 밟고 넘어가라고!" 그 말에 켈리는 망설였다. 그러나 이즐레이는 서슴없이 랜스에게 덤벼들었다. "하! 그러면 못 할 줄 알고? 좋다. 너부터 죽어라!" 이즐레이의 칼이 랜스의 심장을 겨눈 채 긴 원호를 그렸다. 너무 빠른 속력이었으므로, 지켜 보는 사람에게는 칼이 아닌 큰 원반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랜스는 간신히 막으며 넘어질 듯 몸을 휘청거렸다. 부상 때문에 움직임이 둔해지긴 했으나, 이즐레이의 솜씨는 결코 우습게 볼 것이 못 되었다. 게다가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그는 상대와 이유를 불문하고 이판 사판으로 덤벼드는 체질이었다. 랜스는 당황하며 칼을 고쳐 잡았다. '제길... 막기만 하면 결국 내가 딸릴 텐데... 그러지 않아고 다친 이녀석을 내가 또 찔러야 하나...?' 그러나 갑지가, 있는 실력을 다해 랜스를 밀어붙이던 이즐레이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그의 어깨를 뚫고 나와 있었다. 데이슨의 칼이었다. 이즐레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자신의 어깨에 칼을 박아넣은 채,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당당하게 서 있는 데이슨을 노려 보았다. "제길... 그 몸으로 움직이다니... 대단한 늙은이군..." 그리고 이즐레이는 생명 없는 인형처럼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랜스는 난처한 표정으로 데이슨을 바라보았다. "데이슨... 도와줘서 고맙지만... 이사람은 내 옛친구라고!" "감사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고 데이슨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그는 얼른 이즐레이의 몸에서 칼을 뽑아 랜스를 향해 휘둘렀다. 어색하고 경직된 동작이었으나, 전혀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랜스는 옆구리에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무... 무슨 짓을... 데이슨!" 랜스는 데이슨에게 따지려 했으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이 그의 말을 막았다. 랜스는 한 손으로는 상처를, 한 손으로는 피가 쏟아지는 입을 막으며, 힘없이 풀밭에 무릎을 꿇었다. 데이슨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앞에서 쓰러져 가는 랜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곧 믿지 못할 말들이 쏟아져나왔다. "클레이브 님의 동생이나 되어서 탈옥이나 하고 다니다니! 너처럼 형의 얼굴에 먹칠이나 하는 동생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뭐라고...?" "너는 그 분의 동생이면서 그 분을 도운 적이 없어. 언제나 원수를 갚는다 어쩐다 하면서, 일만 일으키고 걱정만 끼쳤지. 네가 갑자기 헌터가 되겠다고 했을 때, 또 용병 부대에 들어간다 어쩐다 했을 때, 그 분의 기분이 어떠실지 생각은 해 봤나? 네가 게레드의 영주 히루스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파다할 때, 그 분이 어떤 곤란을 겪으셔야 했는지 상상한 적이나 있어? 물론 없겠지! 넌 언제나 그렇게 무책임했어. 클레이브 님과는 천지 차이지!" '맙소사... 이건 정말 지독한 악몽이군. 어서 깨어나야 할 텐데...' 정신을 잃어 가는 랜스의 귀에서, 데이슨이 냉정한 목소리가 차츰 멀어져 갔다. "그러나 이젠 다 끝이다. 그 분은 내가 지킨다. 전에 리반 영주님을 지켜 드리지 못한 몫까지! 더이상 그 고귀하신 분이 쓸모없는 골칫덩어리 동생 때문에 불명예를 당하시는 일은 없을 거야..." 그리고는 답답한 정적만이 남았다. (제 5장 <승리의 그림자> 끝. 제 6장 <친구와 적>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