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Prologue) 피투성이가 된 리반 아덴의 손에서 그의 검이 힘없이 떨어졌다. 검은 쨍강 소리를 내며 피가 흥건한 라우더 성의 돌바닥에 떨어졌다. 그 전에는 눈처럼 흰 대리석이었으나, 이제는 주인의 피로, 그리고 그 성을 지키던 기사들의 피로 물들어 씻겨지지 않을 그 붉은 바닥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선, 기껏해야 그의 큰아들 정도의 나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무표정한 자주빛 눈과 등에 달린 검은 가죽 날개를 제외한다면... "시지리스의 용족을 전멸시켰다는 라우더의 리반도 겨우 이 정도 인가." 그 청년은 실망했다는 듯 말하면서, 볼에 난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손으로 닦았다. 리반이 그에게 준 유일한 상처였다. 반면 리반 자신은, 라우더의 영주이며 에스테이아 제국에서 가장 이름을 날렸던 기사 중 한 명인 그는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리반은 사그러드는 목소리를 모아 가까스로 큰 소리를 내어 물었다. 마족의 청년은 조소했다. "불쌍한 용사여! 자신이 누구에게 죽는지도 모르다니. 상관 없다. 어차피 네 죄는 죽음으로써만 갚아야 할 죄. 그러나 '열쇠'를 넘겨준다면 처자식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닥쳐라! 이 주제도 모르는 마족놈!" 이렇게 소리친 것은 리반이 아니라 그의 막내 아들, 이제 겨우 16세가 된 랜스였다. 그는 세 형제 중 그 모습에서도 성품에서도 가장 아버지를 빼어닮아,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용맹한 기사의 풍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소년은 분명 리반이 다른 가족들과 함께 피신시켰건만, 어느 틈에 아버지에게로 돌아와, 성문 한가운데에 당당히 선 채 소리치고 있었다. "랜스! 어째서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온 거냐!" 리반이 소리쳤으나, 이미 투기로 불타는 아들의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더러운 마족의 자식! 아버님에게서 떨어져!" 랜스의 호령이 성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마족의 청년은 잠시 당황했는지 붉은 눈을 크게 뜨고 그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윽고,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건 참, 대단한 아들을 두셨군! 좋다, 칼을 뽑아라, 인간족의 꼬마! 나한테서 네 아버지를 보호해 봐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랜스는허리에 찬 검을 뽑으며 아버지와 마족 사이로 뛰어들었다.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는지, 마족은 간신히 그의 공격을 막아 내며 휘청거렸다. 랜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점을 찾아 적을 맹렬히 공격했다. "윽!" 마족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재빨리 몸을 피하여 급소를 다치는 것은 면했으나, 그 대신 랜스의 칼이 그의 왼쪽 날개에 큰 구멍을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옷자락처럼 찢어진 날개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마족은 펄쩍 뛰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고통스러운 듯 숨을 몰아 쉬고는 있었으나, 그의 얼굴엔 재미있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제법이군! 역시 용사 리반의 아들이다. 어리다고 봐주다간 내가 당하겠군. 좋아, 오너라. 이제 자비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큰소리 치는 걸 보니 혼이 덜 났군!" 랜스는 소리치며 다시 마족의 심장을 겨누고 돌진했다. 그러나 이번엔 마족 청년이 가볍게 그의 공격을 막아냈다. 랜스는 조금 놀랐으나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공격을 시도했다. 마족 청년은 가벼운 동작으로 슬쩍 비켜섰다. 너무나도 빠른 동작 이었으므로, 랜스에게는 그가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정도였다. 그는 힘 하나 들이지 않는 동작으로 칼을 휘둘렀다. "으악!" 어린 랜스의 입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는 칼을 놓치며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등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 "정말 멋진 결투였다, 꼬마야." 마족은 미소를 지으며 칼을 치켜 올렸다. "네가 죽더라도 영원히 잊지 않으마." "안돼!!" 리반의 부르짖음이 성 안에 울려퍼졌다. 마족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얼른 칼을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되었다는 회심의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나?" "...지하 무기고에...조상들의 검을 보관해 둔 그 방에 '열쇠'가 있다. 금으로 장식된 은상자 안...힐리온...'세 번째 열쇠'다..." "네 말을 믿겠다." 하고 마족이 말했다. "너는 이름높은 검사니까." "이제 날 죽여라." 리반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난 내 아이의 목숨을 위해 내 의무를 저버렸으니..." 마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칼을 들어올렸다. 휙! 그의 칼이 커다란 원호를 그렸고, 리반의 목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주인님! 날개가..." 마침 성 안으로 들어오던 한 떼거리의 오르크들이 그의 날개를 보고는 소란을 피웠다. "내 날개의 상처는 곧 아문다. 더러운 손으로 만지려 들지 마!" 마족 청년은 경멸을 감추려 들지도 않고 오르크들에게 호통쳤다. 그에게 다가오던, 오르크 중 대장인 듯한 거대한 오르크는 무안한 얼굴로 물러서더니 쓰러져 있는 랜스에게 분노를 돌렸다. "이 녀석이 주인님의 날개를...!" "더러운 칼 치우지 못해!" 마족 청년은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쳤다. 오르크 무리는 금세 기가 죽어 쩔쩔 맸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 마족은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열쇠의 행방을 알았다. 이제 다른 건 제쳐두고 어서 열쇠나 찾아 둘아가자. 내가 가져올 테니 너희들은 얌전히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르크들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는 쿵쾅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거대한 몸집의 오르크 대장은 성문을 나가기 직전, 걱정과 적개심이 섞인 눈으로 쓰러진 어린 소년을 흘끗 돌아보았으나, 주인의 명령에 불복할 수는 없었다. "...내가 널 죽일거야." 랜스는 쓰러진 채, 혼자 남은 마족 청년에게 말했다. 소리를 치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겠다, 리반의 아들." 마족은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비웃는 표정은 아니었다. "언제든 와서 날 죽이고, 네 아버지의 원수를 갚거라. 너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으니." 그리고 그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지하 창고로 통하는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랜스는 그 등 뒤에다 대고 몇 번이고 소리쳤다. "잊지 말라고! 너는 내가 죽일 것이다!" 제 1장 시지리스 섬 (Siziris) "거기 서! 이 도둑놈!" 등 바로 뒤에서 영주관의 경비대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쫓아오고 있었다. 로이는 있는 힘껏 달리는 도리밖에 없었다. 언제나 발이 빠른 것이 그의 자랑이자 생계수단이었으나, 등 뒤에서 걸리적거리는 가죽 주머니 때문에 오늘은 제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으~! 그놈의 칼만 아니었어도 조용히 탈출하는 건데..." 로이는 후회 막심하다는 듯 중얼거렸으나 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로이는 언제나처럼 뒷골목으로 슬쩍 숨어들며 경비대가 알아서 포기하고 가 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왠일인지 오늘따라 게을러 터진 병사들이 기를 쓰며 따라붙었다. 마치 개과천선이라도 한 듯이. "이 쥐새끼!" 하고 외치며, 한 떼거리의 경비대가 로이의 눈앞에 놓인 골목에서 튀어 나왔다. 졸지에 포위된 로이는 옆에 있던 담을 뛰어넘어 항구로 향했다. 경비대는 그가 거의 자기 키와 맞먹는 담을 뛰어넘으리 라고는 상상하지 못한 듯,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곧 옆길로 돌아, 추격전을 계속했다. '저 거북이들이 갑자기 돌기라도 했나?' 로이는 달리면서 점점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내가 굉장한 걸 훔친 거 아냐?' 그러나 이제 와서 이거 다 돌려드릴테니 얌전히 돌아가십쇼 하고 끝낼 일도 아니었다. 특히 영주관 경비대장은 2년 넘게 로이에 대한 원한을 키우고 있었으니... "딜 아저씨!" 로이는 자그마한 여객선에 뛰어들면서 소리쳤다. "저 좀 숨겨 주세요!" 딜은 놀란 표정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경비 대장의 억센 손이 로이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이 꼬마 도둑놈! 이제야 잡았다!" 다음 순간 로이는 흙바닥에 내팽개져졌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자신을 둘러 싼 경비대 병정들을 둘러보았다. '이거 참... 난처하게 됐네!' "건방진 애송이 녀석! 감히 영주님의 가보를 훔쳐?" 경비대장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귀가 아플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아...저기..." 로이는 귀염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등에 맨 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가보인 줄 몰랐네요. 그럼 이거 드릴 테니까 가져가시죠. 다음부턴 가보 아닌 것만 훔칠께요..." "뭐어어야?!" 경비대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이 되어 당장 로이의 멱살을 잡았다. "이 자식이 정신을 못 차렸나! 너 같은 건 다시는 도둑질 못 하게 50년동안 영주관 지하 감옥에 쳐박아 줄 테다!" 로이는 경비대장의, 평균 인간의 주먹보다 1.5배는 큰 우람한 주먹이 자기 얼굴로 날아오는 것을 보고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주먹이 로이의 얼굴에 닿기 전에, 경비대장은 앞으로 픽 고꾸라졌다. 뒤에서 날아온 무식하게 큰 돌덩이가 정확히 그의 뒷통수 중앙을 강타했던 것이다. "대체 누구냐! 방해하는 놈이!" 경비대장은 벌떡 일어서서 기세좋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맞은 자리가 아프긴 아픈지,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딜의 초라한 배에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간판의 난간에 기댄 채, 한 손으로 돌을 만지작거리며, 검은 망토를 입은 젊은이가 깔깔 웃고 있었다. 한 스물 서너 살 쯤 되었을까. 차림이나 풍채가 섬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요즘 경비대 일은 어린애들을 괴롭히는 건가?" 하고 그 젊은이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하긴, 실력이 없으니 그것밖에 더 하겠어!" 경비대는 모두 입을 다문 채 갑자기 등장한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로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그들 틈을 빠져나가 그 청년에게로 달음질쳐가며 소리쳤다. "감사합니다, 기사님! 세상에, 전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는데 저 사람들이 도둑이라고 누명을 씌우면서...." "뭐라고?! 이 쥐새끼같은 놈!" 경비대장은 화가 나서 시뻘개진 얼굴로 칼을 빼어들며 소리쳤다. "네녀석을 그냥...!" 그대로 두었더라면 정말 화가 난 경비대장의 칼이 로이의 목을 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때, 낯선 청년이 검은 망토를 펄럭이며 경비 대장과 로이 사이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어린애한테 누명을 씌우면 쓰나?" 마치 어른이 아이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그 말투가 경비 대장의 신경을 더욱 더 긁어놓은 것이 분명했다. "이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디서 까부는 거야! 자꾸 방해하면 네 목숨도 없다!" "하하, 정말?" 청년은 재미있고 악의 없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이 쾌활하게 웃었다. 그리고 망토를 젖히고 길고 가는 검을 빼어들었다. 이 섬 안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모양이었다. 휘어질 듯 가는 칼날은 쇠로 만든 것이 아닌 듯, 은은하고 신비로운 은빛으로 빛났고, 작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손잡이는 수수하게 무늬가 없는 금이었다. 검을 든 그의 모습에서는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위엄이랄까, 위험스러움이랄까... "날 죽일 수 있다면 죽여 보시지!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네 목숨이 없는 것이다!" 경비대장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 청년을 바라보았다. 귀공자같이 곱상한 얼굴에 큰 키에 비해 마른 몸집. 싸움꾼의 모습이 결코 아니었다. 옷차림도 화려하지는 않았으나 얌전한 차림이, 어디서 왔는지 부모 밑에서 곱게곱게 자란 귀족집 자제나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 틀림없었다. "진짜 실력이 뭔지 맛만 보여주지." 경비대장은 짐짓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울고 돌아가지나 말아라, 이 애송이!" 경비대장은 칼을 휘두르며 그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대검이 큰 원호를 그렸다. 그러나 청년은 여유있는 동작으로 슬쩍 비켜섬으로써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남들이 미처 눈치챌 새도 없이, 청년의 가는 검이 경비대장의 갑옷을 뚫고 심장을 찔렀다. 경비대장의 육중한 몸이 쿵 쓰러졌다. 즉사였다. 나머지 경비대는 대장의 어이없는 죽음에 뭐라 감정을 느낄 겨를도 없이 멍하니 서 있었다. 로이는 새파랗게 질렸다. '이거, 이거... 일이 심각하게 돼 가잖아! 그냥 튀어 버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청년이 로이의 목숨을 구해 주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로이는 왠지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는 기사였다. 그냥 작위나 받고 영지에 머무르는, 또는 녹봉이나 받아먹으려고 멍청한 영주에게 굽실거리는 그런 기사가 아니라, 정말 악당들과 싸우는 전설 속의 기사... 적어도 로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경비대는 그자리에 얼어붙은 채 그 청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도저히 이 사태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한참이 지나 서야 그들 중 몇 명이 칼을 뽑아들며 소리쳤다. "감히 대장님을... 이 악한!" 여섯 명의 병사가 동시에 그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로이는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청년에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주... 죽이진 말아요!" 그러나 너무 늦었다. 로이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섯 개의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어 땅에 떨어졌다. 청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무관심한 표정으로 굴러다니는 머리들을 보고 있었다. 남은 경비대는 핏기가 하나도 없는 얼굴로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러다 그 청년이 고개를 들어 그들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체면불구하고 비명을 지르며 달음질쳐 도망가기 시작했다. "...쓰레기같은 놈들, 에스테이아 군복 입은 놈들은 다 저모양 이라니까!" 그 청년은 굴러다니는 머리 중 하나를 발로 툭 치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쓰러진 경비대장의 망토에 칼에 묻은 피를 비벼 닦았다. 그의 발길에 채인 머리는 로이의 발 바로 ㅁ까지 굴러와 범추어 섰으므로, 로이는 온뭄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아무래도... 모르는 척 도망가는 게 났겠어...' 하고 생각하며, 로이는 슬그머니 뒷걸음질쳤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 청년의 눈이 로이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보라색... 아니, 그보다는 붉은 색에 더 가까웠다. 자주색...? 하여튼 흔하지 않은 빛의 강렬한 눈빛. 로이는 최면술에 걸린 것처엄 그 자리에 멈추었다. "꼬마야, 다친 덴 없냐?" 의외로 그 청년은 친절하게 물어왔다. 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탁 막혔다. '다친 데가 없냐고? 아니, 사람을 일곱이나 단칼에 해치워 놓고 나보고는 다친 데 없냐고 묻는 거야?' 로이는 한 발 뒤로 물러서며 경계가 가득한 눈으로 그 청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 악의나 속임수으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 자리에서 사람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일곱이나 죽인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뭐야, 내가 무섭나?" 그는 미소까지 보이며 다시 물었다. '안 무서우면 바보게?' "아...저... 경비대를 그렇게..." 로이는 억지로 목구멍에서 목소리를 끄집어 내었다. "난 에스테이아 군복 입은 놈들이 싫어. 그나저나 너 정말로 누명 쓴 거냐? 아니면..." '정말 천하 태평이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그건 사형감이라고요!" 로이는 당황한 나머지 빽 소리를 질렀다. "이제 곧 떼거지로 몰려 올 텐데... 빨리 숨지 않으면 우리 다 죽은 목숨이에요!" "놈들이 죽은 목숨이겠지." 하고 그 청년은 친절하게 고쳐 주었다. "그럼 기다려 볼까... 떼거지로 몰려오면 떼거지로 죽인다... 재미있겠는데!" 그의 얼굴에는 장난칠 기회를 기다리는 개구쟁이와도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로이는 그가 진심으로 그러는 것인지 안면 자기를 놀리는 것을 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제가 좋은 숙소를 알아요." 로이는 사정하다시피 그의 옷을 잡아 끌었다. "아저씬 이제 떠나면 그만이겠지만, 전 여기서 살아야 된단 말 이에요!" "여기서 산다고?" 그 청년은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지. 모두 오늘 내로 여길 떠날 테니까." "모두... 떠난다고요?" 로이는 의아해져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 살인마처럼 굴더니 이젠 다 떠난다고? "물론이야. 내기라도 할까?" 그 청년은 귀엽다는 듯 웃었다. "하하하... 됐다. 그 말은 잊어버려라. 미래를 안다고 생각해도 그건 아는 게 아니지... 자, 꼬마야, 좋은 숙소란 게 어디지?" 그의 얼굴은 신경질이 날 정도로 천연덕스러웠다. 로이는 한숨을 내쉬며 앞장섰다. "따라오세요..." '아무래도 이런 사람 데리고 들어갔단 큰 일 낼것 같긴 하지만...' ------------------------------------------------------------------- 에이론드는 가만히 보이지 않는 눈을 부릅뜬 채 자리에 누워 있었다. 불편한 몸이었으나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0년 전의 그 일이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대검을 든 오르크 무리... 비룡 떼들... 땅을 덮은 인간 병사들의 시체... 10년 전, 라우더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본 광경... 아니, 11년 전이었던가? 그 일이 있은 후로 그는 자신에 대한 관심을 잊고 살아왔다. 아니, 모든 것에 대한 관심을. 영주를 지키지 못한 마법사라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 그는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 그것이 그가 라우더의 영주의 자제들을 떠나 더 먼 곳, 더 외진 곳으로 자신을 유배시킨 이유였다. 그리고 이곳, 라우더의 쓰러져 가는 나무 오두막이 그가 최후로 선택한 장소였다. 편안함도 낙도 없이 자신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장소. 그래, 낙이라곤 없었다... 단 하나를 제외하면... "아저씨,계세요?" 밖에서 활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였다. "들어와라!" 하고 그는 대답했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내려니 기침이 섞여 나왔다. "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 로이의 힘찬 발소리, 그리고 뭔가 무거운 것을 나무 식탁에 올려 놓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 그 아이는 그의 인생에서 자신이 허락한 유일한 낙이었다. 약 7년 전 - 아니, 8년 전이었던가? - 그가 이 섬에 도착했을 때, 그를 도와 준 친절한 어부와 그의 아들. 그는 약간의 치유술과 그들 부자(父子)의 도움에 의존하여 이 섬에서 근근히 살아갈 수 있었다. ...그가 로이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기꺼이 선심을 베풀던 로이의 아버지가 풍랑으로 죽고, 그의 병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자신이 치유술을 알긴 했지만,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는 자신의 병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병마의 싹은 그가 리반 아덴을 섬기며 무리한 마법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부터 싹을 키워 온 것이고, 리반의 최후의 전투, 그 끔찍했던 오르크들과의 싸움과 그 이후의 유배 생활로 인하여 돌이킬 수 없이 된 것이었으므로... "도둑질한 건 아니겠지, 로이?" "아저씨도, 참. 의적질이라니까요." 로이의 웃음소리. 에이론드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잡히고 만다, 로이. 도둑질 따위는 정직한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내가 정직한가? 잘 모르겠네. 배 좀 드실래요? 기침병에 좋다 는데..." "로이!" 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다. 이어지는 침묵. 그는 순간 당황했다. 로이가 하루이틀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니었고, 그가 그 일 때문에 정말로 화를 낸 일은 이제까지 없었던 것이다. "아... 아저씨 많이 아프세요?" 에이론드는 한숨을 쉬었다. 왜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울까... 안 좋은 일만 생각나고... "미안하다. 오늘은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구나." "배나 드세요." 에이론드는 손을 뻗쳐 로이의 손이 있을 만한 자리를 더듬었다. 로이의 손에 그의 손이 스쳤을 때, 그는 갑자기 섬뜻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로이... 혹시 너... 괴물이나 용 같은 것과 마주쳤니?" "괴물이요? 괴물같은 사람이라면 한 명 만났지만." 로이는 에이론드의 손에 배를 쥐어주며 반 농담조로 말했다. "기사 같았는데 약간 맛이 간 사람이었어요. 수십명의 경비대를 단칼에 베더라구요. 아저씨도 그걸 보셨어야 했는데..." "예끼, 이 녀석아! 단칼에 수십명을 베는 사람이 어딨냐?" 로이의 과장에 에이론드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러나 그 꺼림칙한 기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쨌건 조심해라. 네 주위에서 이상한 기가 느껴져..." "또 그 꿈 꾸셨군요..." 로이가 제법 어른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에이론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라우더였지. 요즘 왜 그 꿈만 그렇게 꾸게 되는지..." "이제 잊어버릴 때도 되지 않았어요?" 로이는 한숨을 쉬며 사과를 집어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 자꾸 생각해서..." "그리고 나는 죽지 않았지. 그게 내가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란다. 내 의무는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들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난 그러지 못했어..." 에이론드는 다시 로이의 손을 잡고 반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네가 오늘 무엇을 보고 만졌는지 난 알 수 없구나. 하지만 빛에 속하지 않은 것을 넌 만났어. 조심하도록 해라. 이런 기, 이렇게 강렬 하면서도 종잡을 수 없는 기를 나는 딱 한 번 느꼈었지. 라우더에서... 10년 전이었지. ...용들의 기는 숨길 수 없어. 너무 강렬하거든. 그런데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던 거야. 빛도 어둠도 아닌 그것이... 그들이 곧 이리로 올 거다. 내 목숨을 받으러... 리반 님은 돌아가셨는데 나만 10년 넘게 살았으니..." "소원 성취하셔서 좋으시겠네요." 로이는 잔뜩 꼬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로이, 무슨 말버릇이냐?" 에이론드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꾸짖었다. "그따위 영주, 뭐가 좋다고. 결국 이기지도 못하고 아저씨 눈멀게 한 영주 아녜요? 전 갈래요." 로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영주 얘기를 더 듣느니 그 기사양반한테 가 보는 게 훨씬 낫겠다." "로이!" 에이론드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로이가 문을 쾅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둑어둑하고 낡은 오두막에는 이제 에이론드 혼자밖에 없었다. ----------------------------------------------------------------------- 여관의 간판에는 다른 이름이 없이 단지 <여관>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놋쇠로 된 그 간판은 꽤 오래된 것으로, 주인의 정성어린 손질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아도 낡은 티가 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 간판은 이 여관 자신만큼이나 오래되었으며, 이 여관은 시지리스에 최초로 세워진 여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지리스에서 '여관'을 말할 때면 언제나 이 여관을 가리켰다. 32년 전, 시지리스가 인간 제국 에스테이아의 영토가 된 이래, 처음으로 세워진 여관. 또한 이곳은 얼마 안 되는 여행자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여관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마 '최초의 여관'이라는 소문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 같았다. 에밀리아는 여느 때처럼 여관의 카운터에 앉은 채, 바느질을 하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여관의 주인인 아버지는 먹을 것을 사러 나가고 없었다. 오늘은 여관에 손님이 들었던 것이다. 검은 망토로 몸을 감싼, 외지의 기사가... 로이가 데려온 그 키가 큰 젊은이는 자신이 기사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에밀리아도 그녀의 아버지도 로이도 모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야아, 에밀리아! 그 아저씨 아직 방에 있어?" 로이가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래 이 여관의 다락에서 묵는 로이는, 에밀리아에게는 친동생같은 존재였다. 물론 도적질을 하긴 했지만, 이 마을에서는 아무도 그것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로이는 언제나 영주나 부유한 상인한테서만 훔쳤고, 그것을 나누어 주는 데 인색함이 없었으니까. "물론!" 그녀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근데, 로이, 그 사람 어디서 온 사람이래니? 이름은 뭐고?" "몰라. 이제 물어봐야지." "그런 멋진 사람은 처음 봤어! 분명 도시에서 왔겠지?" 에밀리아가 흥분 상태를 드러내자 로이는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귀족일까? 아니,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요정 같은 건 아닐까, 혹시? 세상에, 그런 남자가 진짜로 있다니... 싸우기도 엄청 잘 싸운다며?" '...역시 여기로 데려온 게 실수였나...' 로이는 한숨을 쉬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랐다. "나, 가 볼께..." "그래, 로이! 혹시 알아낸 거 있으면 나한테도 알려주고!" 에밀리아는 환한 미소까지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로이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 청년의 방으로 발을 옮겼다. 그 사람이 그렇게 멋진가? '뭐, 좀 잘생긴 편이긴 하지만... 나에 비하면 그다지... 게다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사람 죽이는 사람인데...' 로이는 그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경비병들을 죽였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가 정육점 주인 죽은 고기 자르듯 사람 목을 베다니... 그것도 그렇게 무표정하게. 기사들이란 다 그런 걸까? 다른 모든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로이도 기사나 용사를 동경했지만, 만약 그런 것이 기사라면 절대 되고 싶지않았다. 그 때, 로이의 귀에 이상스러운 노래가 들려왔다. 실리사 렐 에퀴온 테이닌 탈레스 델 하르메이닌 데란 데이란 플로멜레인... 들어본 적이 없는 언어였다. 낯선 가락이 귀에 거슬리면서도 묘하게 매력이 있었다. 로이는 왠지는 모르지만 직감적으로 그 검은 옷의 청년이 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 건가 몰라.' 그는 왠지 불안한 기분이 되어, 시치미를 떼고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돼요?" "아, 물론!" 쾌활한 목소리였다. 그 청년은 망토를 벗어 걸어둔 채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로이는 그가 입은 옷 중 검은색은 사실 망토 뿐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런데 왜 검은 옷을 입었다고 생각했을까? "무슨 일이지, 꼬마?" 그 청년은 만면에 미소를 띄우고 물었다. 아까의 그 살인마 같은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안 가는 태도였다. "아... 제 이름은 꼬마가 아니라 로이에요." 하고 로이가 말했다. "저기... 아까 도와주셔서 감사하고... 그리고 드릴 물건이 있어 서요." 로이는 아까 영주관에서 훔친 물건들이 든 주머니를 내놓았다. 일부는 팔아 치웠지만, 아직 대부분이 남아 있었다. "저기... 돈으로 때우려는 건 아니지만, 사례로 뭔가 드리고 싶어서... 마음에 드는 것 있으면 가져가세요." 그 청년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로이, 역시 도둑질을 하긴 한 거로군?" "의적질인데요." "의적이라, 그거 좋지!" 그 청년은 일어서서 로이가 내민 주머니를 받았다. "그럼 어디 의적질의 성과를 좀 볼까?" 주머니를 맨 줄이 풀리자 제일 먼저 드러난 것은 로이가 목숨 걸고 훔친 칼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로이는 실망했다. 어두운 지하실 속에서는 이상한 빛을 내는 것이 꽤 그럴듯하게 보이더니, 이제 보니 조각도 없이 밋밋한 곳이 꼭 싸구려같았다. 단검이라고 하기엔 좀 길고 그냥 검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길이가 우스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칼을 보자 그 청년의 얼굴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그는 홀린 듯한 표정으로 그 칼의 손잡이를 쥐고 허름한 가죽 칼집에서 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작은 신음을 내뱉으며 칼을 떨어뜨렸다. "...왜 그러세요?" 로이가 놀라 물었다. 그 청년은 말없이 얼이 나간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칼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잠시 후 정신이 번쩍 든 듯, 당황하여 대답했다. "아, 아냐. 그냥 손에 상처가 있는 걸 잊고 건드려서... 네가 좀 대신 뽑아줄래?" "...그러죠, 뭐." 로이는 칼을 집어들어 칼집에서 뽑았다. 잘 손질해 놓았는지, 칼날에선 번쩍번쩍 빛이 났다. 로이가 그 청년을 바라보니, 그는 다시 멍한 눈빛으로 칼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아프세요?" "아, 아냐!" 그는 과장된 몸집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게 마음에 드신다면..." "로이!" 하고 그는 날카롭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내가 너라면, 이 칼은 아무에게도 주지 않겠다." "...?" 로이는 의아해져서 그 청년과 그 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자신의 짐을 뒤지더니 간단한 은장식이 달린 가죽 칼집 하나를 꺼내어 로이에게 주었다. 검고 이상하게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가죽 이었다. 촉감은 매우 매끄러웠고,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나 산양, 그밖의 범상한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가죽은 로이가 보지 못한,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쉽게 찢기지 않는 살갗을 가진 동물의 것이었다. "이게 원래 그 칼의 칼집이란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칼집을 받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그 칼집에 넣으려고, 그 입구까지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칼집의 입구에 로이의 칼이 닿는 순간, 칼은 이상스러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떨렸다. 그리고 로이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스스로 그 칼집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이게...저절로..." 로이는 새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이 칼을 어디서 발견했지, 로이?" "여...영주관 지하창고에서요... 이걸 잡으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종들이 흔들려서..." "시지리스의 영주... 베릴... 역시 그랬군."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제피로스라고 한다, 로이. 몇 년 전 에스텔에서 우연히 이 칼집을 손에 넣은 이후로 계속 가지고 다녔다...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하... 하지만... 이것의 원래 주인은 영주님인데..." "용들의 학살자, 베릴 말이냐?" 그 청년은 낮게 웃었다. "그럴 리 없지. 이 칼의 주인은 너다, 로이. 네가 이것을 훔친 게 아니라 이 칼이 널 유혹한 거야. 네가 주인임을 알아보고, 그 어두운 지하실 에서 나와 네 손에 잡히기 위해, 이것이 스스로 일을 꾸민 거지. 싸우기를 좋아하는 이 칼에게 그 지하 창고는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을 테니까." "유혹...?" 로이는 어두운 지하실 속에서 이상스레 빛나던 칼의 모습을 떠올리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드래크로니안의 신, 실리사와 에퀴온이 이 칼을 만들었지. 어두운 힘을 붙잡아 봉인하기 위한 열쇠로... 그리고 용족들이, 실리사와 에퀴온을 섬기는 드래크로니안 족이 이것을 레젠디아로 가져와 지켰단다. 신전 안에 깊이 감추어둔 채..."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의 원래 주인이 용들이었단 말은 들은 적 있어요. 에이론드 아저씨가 언제나 그러셨죠. 베릴 영주와 그의 동료들이 오래 전 이 섬에 와서, 난폭한 용들을 몰아내고 인간의 섬으로 만들었다고요." "그래, 인간들이 온 것은 100년이 채 안 되지. 그리고 베릴과 그 동료들이 용족을 완전히 몰아낸 건 겨우 30여년 전... 정확히 32년 전이었지. 그러나 그 동안 인간들은 용족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단다. 용족이, 드래크로니안이 수백년에 걸쳐 살아온 흔적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데에 채 50년도 걸리지 않았단다..." 제피로스는 그 말을 하며 낮게 웃었지만, 왠지 로이에게는 그 웃음이 쓸쓸하게 들렸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베릴 영주도 그 때엔 훌륭한 용사였다고 하던데. 용감하고 지금 처럼 멍청하지도 않았다고 에이론드 아저씨가 그러셨어요. 베릴과 그의 동료들은 어떤 적이라도 그 모습만 보고도 도망칠 만큼 당당하고 용맹한 기사들이었다고... 그래서 왕이 마음놓고 이 섬을 맡겼대요. 물론 지금 이 섬에서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할아버지들을 제외하면 말예요." 제피로스는 경멸이 섞이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 그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없이 어리석지. 옛날엔 자신이 바보라는 걸 몰랐고 지금은 안다는 것 정도가 차이랄까..." 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알 도리가 없죠. 전 겨우 열 다섯이고 제가 기억하는 한 영주는 바보였으니까요. 어쨌든, 그럼 저 단검은 용족의 것 아닌가요?" "용족에게 맡겨진 것은 없단다." 하고 제피로스는 말했다. 어쩐지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용들은 언제나 보관만 했지. 글라노우스, 드래크로니안의 시조는 그 칼과 다른 마법의 무기들을 가지고 이 세계로 왔지만 그 중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었어. 그의 일은 그 주인들을 찾아 나누어 주는 것 뿐이었고, 그 일이 끝나자 그의 몫도 다 끝나게 된 거지...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상냥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로이는 불안스럽게 손에 든 칼을 바라보았다. 제피로스의 말을 들으니 그 칼은 더욱 더 꺼림칙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제피로스...그렇게 불러도 되죠? 이건 제피로스가 가져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난 칼싸움도 전혀 할 줄 모른단 말예요. 게다가 어쨌든 칼집을 가지고 있었던 건..." "나도 내가 가져갔으면 좋겠구나." 하고 제피로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우리 둘 모두 화를 입을거야. 페울론은 그 주인이 보관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보관하는 사람에게도 보관을 맡긴 사람에게도 어떤 해가 올지 모른단다. 주인이 아닌데도 페울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다 죽었다. 베릴 영주도, 그리고 힐리온을 보관하던 라우더의 리반 아덴도... 하지만 너무 걱정하기 마라, 로이. 페울론은 자신의 주인을 충실히 지켜준단다." "페울론." 하고 로이가 조심스레 발음했다. 신비로운 발음이었다. 로이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이 단검의 이름인가요?" "아니... 그것의 이름은 따로 있단다... 때가 되면 알게 될거다." "그럼 페울론은?" "...알아서 좋을 게 없다. 그건 이미 죽은 언어니까." 제피로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의 얼굴은 기분나쁜 일을 생각할 때처럼 굳어져 있었고, 그 차가운 목소리는 왠지 경비병들을 죽일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로이는 더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제피로스는 창가로 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것 따위 아예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면 모두에게 좋았을텐데... 아니, 이런 것이 아예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것이 존재하고, 그 사실을 아는 이상 모두 찾으려고 기를 쓸 수밖에 없으니... 글라노우스는 어째서 이런 물건을 지상에 가져온 것일까. 실리사와 에퀴온은 왜 이것을을 지상에 가져오도록 그들의 대리자에게 시킨 것일까?" "차라리 영주가 안 오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아요." 하고 로이는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론드 아저씨 말에, 여기 용족이 살던 때는 다들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았다던데. 그럼 나도 다른 데서 태어나 베릴 영주 얼굴도 모르고, 이런 칼 따위도 안 훔쳤을 텐데." "아니, 너에 대해 한 말이 아냐." 제피로스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에 대해 한 말이지. 네 운명에 대해서는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네요." 하고 로이는 제피로스의 제피로스의 옆으로 지나쳐 가 창밖을 내다보며 의아한 듯 말했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병사를 일곱이나 죽였으니 지금쯤 난리가 나 있어야 정상인데." "베릴이? 날 잡으려고?" 제피로스는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아마 지금쯤 벽장에 숨어있거나 도망가려고 짐싸고 있을 거다." 로이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로이의 얼굴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굳어졌다. "설마..." "...?" "역시. 경비병들 죽일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대단한 빽이 있는 거죠? 왕의 친척이라도 되요?" 제피로스는 어이없다는 듯 로이를 내려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얼굴을 붉혔다. "...아닌가...?" "하하하... 좋을대로 생각해라. 그 칼 간수 잘하고."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참! 주무실 때 문 잘 잠그고 주무세요!" "왜? 아직도 영주의 병사들 때문에 걱정되나?" "아뇨. 에밀리아 때문에요. 자는데 갑자기 침입하면 곤란하잖아요." "뭐....?" ------------------------------------------------------------------------------ 시지르스의 동쪽 해안 절벽, 베릴 영주의 성- "영주님!" 하고 오늘 졸지에 경비대장으로 진급한 전 부대장이 말했다. "어째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까? 놈은 경비병들을 일곱이나 죽였고, 그 중 하나는 영주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무법자 같은 놈을 그냥 놔두시면 이 시지리스의 치안은..." "그럼 자네가 그놈을 잡아올 텐가?" 베릴 영주는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로 새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제...제가요?" 경비대장은 금방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물론 명령이시라면... 그러나... 놈의 검술이 대단한 만큼 좀더 많은 병사들을 동원해서..." "그럼 입다물고 있어!" 경비대장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힌 채 침묵했다. 베릴 영주는 긴 한숨을 쉬며 어두워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탑 아래에 펼쳐진 섬의 경관은 아름다웠다. 평안해 보이는 마을, 오밀조밀한 밭들, 그리고 그 뒤로 솟아오른 화산과 그들 모두를 둘러싼 잔잔한 바다. 그들 모두가 어둠에 덮여 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영주관에서 가장 높은 탑에 올라와, 마치 적의 침임을 망보는 병사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쓸만한 놈들은 다 오르크를 잡네, 용을 죽이네 하고 전쟁터로 나가고... 섬에 남은 놈들은 이런 놈들 뿐이니...' 베릴 영주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 섬에 병사가 많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시지리스에서 용이 사라진 지 몇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용이나 오르크 등 인간들이 흔히 마족이라 부르는 것들의 거주지 와도 한참 떨어져 있는 평화로운 섬이 되었으니까. 시지리스는 더이상, 그와 리반이 용을 몰아내려 싸우던 때처럼 최전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있다가 리반도 당했어. ...검은 옷을 입은 젊은 놈에게 말이지...' 베릴은 잠시 몸을 떨었다. 검은 옷. 전 경비대장을 죽인 청년은 분명히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피빛같은 붉은 눈이었다고...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릴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우연일 리 없다는 확신이 점점 퍼져 가고 있었다. 칼을 놓고 평화로운 섬의 통치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확실한 직감이었다. "난 자러 가겠다." 하고 베릴은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두려움을 숨기느라 그의 목소리는 몹시 딱딱해져 있었다. "보초를 두 배로 늘리도록!" "예! 영주님." 경비대장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저 놈의 영주는 형편없는 겁쟁이가 됐어... 옛날 이 섬에서 용들과 싸웠다는 게 맞긴 맞는거야?' 베릴도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리반이 그렇게 쉽게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는 이미 옛날의 용사 베릴이 아니었다. 아니, 리반 뿐이 아니었다. 마스도, 레이드도, 폴도... 모두 죽었다. 요정 피올린까지... 그녀는 화를 피하기 위해 인간들을 영원히 떠나, 그녀의 종족, 나이아드의 거주지인 이조넬 강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 모든 노력이 소용없었다. '제길... 그 리반을 그렇게 쉽게 처치한 놈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역시 이따위 섬을 맡는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 저주받을 칼도...' 그는 암울한 기분으로 침실로 가는 복도에 들어섰다. 횃불이 다 꺼져서 마치 저승으로 가는 문처럼 암흑이 뒤덮여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쓸모없는 놈들! 불은 언제나 환하게 켜 놓으라고 했는데!"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는 하인을 부르기 위해 달아놓은 종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종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 대신 끊어진 줄만이 그의 어깨 위로 스르륵 떨어졌다. 놀라서 몸이 굳어진 베릴의 귀에, 경멸과 악의가 가득한 낮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용감한 베릴, 용의 학살자 베릴! 언제부터 어둠을 두려워했지?" 베릴은 순간 온 몸이 오싹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놈이야... 리반을 죽이고 힐리온을 강탈한... 이제야 왔군!'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는가? 용사 베릴! 그래도 리반은 끝까지 발악했는데 말야!" 이상한 일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자, 오히려 베릴은 전날의 용기가 다시 샘솟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그는 30여년 전처럼 살의와 용기에 차서 소리쳤다. "리반의 원수! 용기가 있다면 모습을 보여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 줄지어 선 횃불에 불이 붙었다. 환한 복도 끝에, 창틀에 기대어 앉은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젊은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반이 죽은 것은 벌써 십 년이나 전인데...?' 그 젊은이는 일어나 베릴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용사 베릴! 꼴이 말이 아니로군. 그 기개, 그 대담함은 다 어디로 갔지? 하긴, 이제 예순이 다 됐으니. 인간의 수명이란..." "내 기개는 그대로다, 이 괴물!" 하고 베릴은 허리에 찬 검을 빼어들며 소리쳤다. "덤벼라. 내가 네게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아야겠으니!" 그 청년도 말없이 검을 빼어들었다. 둘은 한참동안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베릴 쪽이었다. "얏!" 그의 긴 칼이 재빠르게 원호를 그었다. 옛날과 다름없는 그 솜씨에 베릴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가볍게 그의 검을 밀어냈다. 잠시 베릴은 휘청거렸다. 그러나 순간, 이미 청년의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칼날을 보지도 못한 채, 반사적으로 간신히 적의 칼날을 막아냈다. '이...이건 인간의 속도가 아냐!' 그 청년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베릴의 눈앞에서 칼날이 마구 번뜩였다. 오른쪽에서, 왼쪽, 그리고 다시 중앙을 파고들며... 아예 칼이 여러 개인 것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베릴은 공격을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칼을 막아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빠른 만큼 가벼운 움직임이다.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나이가 들긴 했으나 아직도 힘에는 자신이 있는 베릴이었다. 시지리스의 용들을 몰아낸 용사들 중에서도 가장 장사로 통했었던 그가 아닌가. 다시 그 청년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베릴은 막아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칼을 밀어 버렸다. 예상대로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기회다!' 베릴은 돌진하며 그 총년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나 분명히 눈으로 보았는데도, 그 청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베릴이 당황하는 사이, 등을 꿰뚫는 통증이 그를 덮쳤다. "으악!" 베릴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성이 없으시군." 그 청년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설마 내가 당신 따위의 공격에 정말 휘청거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더러운 마물!" 베릴은 헐떡거리며 일구러진 얼굴에 애써 비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이디실은 절대 빼앗을 수 없을 거다...!" "이디실이라고! 아하하하...!" 그 청년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 베릴, 용감한 베릴! 정말 날 즐겁게 해 주는군! 이디실, 마지막 열쇠! 그 검이 당신 수중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야?!" 베릴의 얼굴에서 비웃음도, 고통의 표정도 사라졌다. 분노와 놀라움만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럼... 이디실을 훔친 것은 네놈이었단 말이냐!" 그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내 작은 친구가 내 수고를 덜어주었지... 그래도 당신은 행운아야, 베릴. 끝까지 이디실을 지키려다 용사로 죽으니... 당신의 동료 리반이 얼마나 부러워할까!" '리반이 부러워한다고...? 무슨 소리야? 리반이 변절이라도 했단 말인가?' 베릴의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기도 전에, 그 청년의 칼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래... 난... 용사로서 죽는거야...' 베릴의 눈은 힘없이 감겨졌고 그의 몸은 정신 없는 껍데기가 되었다. 청년은 죽은 베릴의 옷에,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비벼 닦았다. 그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창 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이제 어둠이 덮인 하늘에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별과 달조차 없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청년의 눈에는 무엇인가가 보였는지,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져 갔다. "아... 그래. 슬슬 친구들이 올 시간이군." ------------------------------------------------------------------------------ 이상한 신전 안... 로이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석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 볼 때 로이는 그것이 그저 거대한 도마뱀의 모습을 한 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 아래까지는 도마뱀과 비슷했으나, 목이 두 갈래로 갈려진 채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목은 점점 가늘어지면서 사람의 상반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왼쪽 목에는 사람의 두개골과 로이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의 두개골을 안고 묵념하듯 눈을 감은 남자의 상반신이, 그리고 오른쪽 목에는 창을 들고 섬뜻한 적개심을 담은 얼굴로 굽어보는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이 달려 있었다. '맙소사...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런 데 있는 거야?' 그러나 로이는 이상하게도 발을 뗄 수 없었다. 로이가 보는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석상에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이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석상 주위에서 피리를 닮은 크고 이상한 악기로 열댓명 되는 사람들이 이상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로이에게 낯선 음악, 그러나 분명히 처음 듣는 음악은 아닌 그런 음악을... 절을 하는 사람들 틈을 뚫고 키가 큰 남자가 석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피처럼 붉은, 금빛 수로 치장한 옷을 입고, 역시 같은 색 보자기에 싸인 어떤 물건을 소중히 들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에서 위엄이 배어났다. 그가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절을 하던 사람들은 조용히 비켜섰다. '저건... 제피로스?' 로이는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그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러나 그럴 리 없었다. 그 사람은 그의 옷처럼 붉은 머리칼을 땋아내리고 있었고, 게다가 제피로스보다 열 살쯤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가 석상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자, 음악이 멈추었다. 그리고 석상 앞에 있던 제단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그는 보자기를 젓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로이가 훔친 그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의 칼집에 꽂힌 채, 지하실에서처럼 이상한 빛을 발하며... "이디실!" 이라고 그 남자가 소리쳤다. 공교롭게도 그의 목소리조차 제피로스의 목소리와 상당히 흡사했다. 절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 흥분이 번져갔다. "갈 실리사 렐 에퀴온!" '뭐라는거야, 도대체?' 로이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극도로 흥분하여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로이는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로이!" 누군가가 로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로이가 묵고 있는 낡은 여관 다락방의 낯익은 모습과 에밀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휴우, 꿈이었나..."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 앉을 때, 허리에 찬 단도가 걸리적거렸다. 로이는 순간 그것을 풀러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로이, 한가하게 꿈이나 꾸고 있을 때가 아냐!" 에밀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 섬이... 침입받고 있는 것 같아!" "...뭐?" 에밀리아의 말은 로이의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침입? 마족 에게? 그런 일은 전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니었던가? 설마 실제로 이런 일이, 그것도 무슨 영웅도 용사도 아닌 우리들에게... "침입이라니..." "나도 못 믿겠어. 하지만..." 에밀리아는 대책 없이 울먹였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그녀의 아버지인 여관 주인 아저씨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오랜 경험을 가진, 무슨 일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지금만큼은 흥분과 공포로 창백 해져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로이는 5년이 넘게 이 여관에서 살았으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에밀리아! 로이!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사방이 오르크 천지다!" '오르크...?' 로이는 멍한 표정으로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로이와 에밀리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어서! 서둘러! 켄윌로 가는 배를 타야 해!" "하지만, 아버지..." "소용 없다, 에밀리아. 이제 이 마을은 지킬 수 없어. 모두 켄윌로 도망치는거다!" 켄윌로. 로이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이 곳은 30 여년 전, 에밀리아의 할아버지가 다른 인간들과 함꼐 이 섬에 최초로 정착하면서 연 여관이었다. 그들은 시지리스의 용족들이 물러간 이후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생업에 종사한 인간족이었으며, 그러므로 이 여관은 당연히 시지리스 최초의 여관이었다. 에밀리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떠벌이곤 했다. 그런데 그런 여관을 이렇게 쉽게 떠나야 할 정도라면, 분명 사태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이 마을을 지킬 가망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로이는 주인 아저씨의 팔을 뿌리쳤다. "에밀리아를 데리고 먼저 가세요, 아저씨." "로이, 왜...?" "저도 곧 따라갈께요. 하지만 에이론드 아저씨를 놔두고 갈 순 없어요. 그 분을 찾아서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먼저 가세요!" 에밀리아와 그 아버지는 뭔가 항의의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불화살이 다락방 창문을 깨고 들어와 바닥에 꽂혔고, 나무 마루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하고 로이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전 이 섬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라구요!" 주인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해 보이더니, 딸의 손을 끌고 방을 나갔다. "로이! 조심해!" 에밀리아의 외침이 멀어져 갔다. 더이상 지체할 새가 없었다. 로이는 부서진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지붕에도 불이 붙기 전에, 얼른 이웃한 창고의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여관에 수십발의 불화살이 계속해서 꽂히고 있었다. 저 아래, 땅에서 마구 활을 당기는 거무스름한 털북숭이 생물들이 보였다. 로이가 전에 본 적이 없는 괴상하게 생긴 생물이었다. 키는 사람 어른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것 같았으나, 그 몇 배로 강인해 보였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투구와 갑옷 사이로 드러난 손발은 검고 더러운 털이 나 있었고, 무척 크고 우악스럽게 보였다. '...오르크구나!' 여관의 지붕에 드디어 불이 붙으며 내려앉았다. 오르크들 사이에 환희에 찬 탁한 외침이 들려왔다. 짐승처럼 이성이 없는, 그러나 짐승과 같은 순수함조차 없는 그런 울부짖음. '맙소사... 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피했을까? 제피로스는?' 그러나 머뭇거릴여유는 없었다. 로이는 다시 지붕에서 뛰어올라, 옆에 있는 거목의 가지로 옮겨갔다. 나무를 타고 로이는 가뿐히 땅으로 내려왔다. 바로 옆에서 여관을 불태운 오르크들이 이제 다른 집들을 부수며 혐오스러운 울음소리를 내짖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마치 시체가 썩는 것 같은 이상한 악취가 났다. '저놈들한테 걸렸다간 뼈도 못추리겠군.' 로이는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며, 수풀 속에 몸을 숨기며 에이론드의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어디선가 집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소름끼치는 오르크들의 울부짖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놈들이 완전히 마을을 장악한 모양이었다. '아저씨 말이 맞아, 이 섬은 이제 지킬 수 없어... 놈들이 아직 에이론드 아저씨의 오두막만이라도 못 찾아냈으면 좋으련만! 제기랄, 영주 놈은 꼬박꼬박 세금 챙겨가더니 이럴 때 뭐하는 거야!' "우그르~!" 로이의 바로 뒤에서 섬듯한 외침이 들렸다. 로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려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털이 듬성듬성 난 커다란 오르크 한 마리가, 방금 로이가 있던 자리에 무식하게 큰 도끼를 내다 꽂았다. 얼마나 엄청난 힘으로 휘둘렀는지 도끼의 날이 반쯤 땅에 박혔을 정도였다. "이... 이봐요! 오르크 양반!" 로이는 궁여지책으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난... 난, 여길 지키는 군인도 아니고 뭐 오르크한테 해 끼친 적도 없다구요! 그러니..." "크아아아아아!" 오르크는 다시 한 번 도끼를 들어 로이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이번에도 로이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별로 대화로 풀 생각이 없나본데.' 이렇게 되면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로이는 벌떡 일어나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시지리스에서 알아 주는 달리기 솜씨 이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도망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무섭다는 오르크도 로이를 따라잡니 못하고 점점 뒤로 쳐졌다. 특히 로이가 숲으로 들어가 개울과 나무덩굴 사이로 달려가자, 그 오르크는 더이상 로이의 적수가 아니었다. '헤엣! 그럼 그렇지! 시지리스에서 제일 빠른 이 로이님을 뭘로 보고!' 로이는 신이 나서 그대로 에이론드의 오두막으로 달음질쳤다. 에이론드의 집 근처에도 벌써 오르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집이란 집엔 모두 불이 붙고, 오르크들은 도망다니는 사람을 쫓으며 학살하고 있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깨끗한 흙바닥이었던 곳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로이가 유쾌한 마음으로 과일을 안고 달려왔던 길이 이제 피로 질척 질척했다. 사방에 시체와 피, 그리고 재와 불 뿐이었다. 로이는 오르크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부서진 집들의 잔재 속에 숨어 살금살금 에이론드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 으악!" 로이는 오르크고 뭐고 잊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잘려 나가고 심하게 난도질 당한 누군가의 시체였다... 누구인지, 로이가 잘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넘어진 로이는 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서... 설마... 에이론드 아저씨는 아니겠지?' 걱정과 공포로 로이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그는 오르크가 보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에이론드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의 집 지붕에도 불이 붙어서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는 소리쳐 부르며 집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에이론드가 누워 있어야 할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오르크가 왔던 흔적도 없었다. '...혼자 도망치신 건가? 설마, 눈도 안 보이시는 분이!' 그 때였다. 로이의 뒤에서 악취가 섞인 숨결이 느껴졌다. '오...오르크!' 로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바짝 얼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오르크가 칼을 치켜드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아... 이렇게 죽는건가?' "크와아아아아악!" 갑자기 그 오르크가 귀청이 찢어질 만큼 큰 비명을 내질렀다. 로이는 그제서야 용기를 얻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일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오르크의 몸에 불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오르크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점점 타들어가다가, 결국 푹 쓰러져 버렸다. "어... 어떻게..." 로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런 로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서 여길 떠나라! 로이!" "에...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론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불바다 속이기 때문인지, 에이론드의 모습은 평소와 많이 달라 보였다. 그의 얼굴은 더이상 로이가 돌봐주어야 할 병자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지 근엄하고 위엄까지 느껴져서, 창백한 혈색조차 그를 굉장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 마법... 아저씨의...?" 에이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올려 보았다. 은으로 만든, 크고 파란 보석이 박힌 긴 지팡이였다. 에이론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마... 맙소사. 그럼 진짜 라우던지 뭔지의 마법사셨단 말야? 난 그냥 허풍인 줄 알았는데!' "아, 아저씨, 빨리 저랑 도망쳐요. 이 마을은 이제 끝이에요. 모두 켄윌로 갈 거래요! 어서 우리도 가요!" 그러나 에이론드는 고개를 저었다. "켄윌엔 너 혼자 가거라, 로이. 난 여기에 남아야 한다." "마... 말도 안 돼요! 어째서..."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더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오르크 한 떼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에이론드는 로이를 자기 뒤로 숨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사악한 것들! 물러서라!" 순간 지팡이에서 빛이 발산되었다. 로이는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떴들 때, 남은 것은 오르크들의 뼈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이론드는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안되겠어. 아저씨는 더이상 싸울 수 없어!' 로이는 힘으로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서 가요!" "로이, 난... 도망 안친다." 에이론드는 기침을 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난 라우더의 마법사... 두번 다시 도망치지 않는다." "예에, 예에, 그렇고 말고요. 저랑 같이 어디좀 가서 어떻게 저 오르크 놈들을 혼내줄까 생각 좀 해보자고요." 로이는 에이론드를 억지로 끌며 항구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다시 오르크 무리들의 습격을 받았다. 에이론드는 힘겹게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에르 페이든 시르..." 그가 주문을 외자 다시 지팡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위험스러운 붉은 빛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가 지팡이를 치켜 들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그의 팔목에 꽂혔다. "으악!" 에이론드는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지팡이든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로이는 얼른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푸른 보석이 깨어져 버린 후였다. "...다 끝났어." 에이론드가 이상스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반 님, 이제 전하의 곁으로 갑니다..." 그와 때를 거의 같이하여, 오르크들이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돌진 해 왔다. 로이가 에이론드를 밀쳐 함께 도랑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대로 저승으로 갔을 것이다. "아저씨, 제발 정신 좀 차리시고 항구로 가자고요!" "그럴 순 없습니다, 랜스 도련님... 마법사는 주군의 땅을 지켜 야죠..." '으아...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겠네!' 로이는 기가 막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르크들이 그새 그들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캬아!" 듣기싫은 울부짖음과 함께 오르크 두 마리가 로이의 앞으로 뛰어 들었다. 궁지에 몰린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찬 단도를 빼어 휘둘렀다. "...?" 로이는 의아해져서 그 청년과 그 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청년은 자신의 짐을 뒤지더니 간단한 은장식이 달린 가죽 칼집 하나를 꺼내어 로이에게 주었다. 검고 이상하게 단단하면서도 가벼운 가죽 이었다. 촉감은 매우 매끄러웠고, 무슨 짐승의 가죽인지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나 산양, 그밖의 범상한 동물의 가죽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 가죽은 로이가 보지 못한, 매우 부드러우면서도 쉽게 찢기지 않는 살갗을 가진 동물의 것이었다. "이게 원래 그 칼의 칼집이란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칼집을 받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칼을 그 칼집에 넣으려고, 그 입구까지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데 그 칼집의 입구에 로이의 칼이 닿는 순간, 칼은 이상스러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떨렸다. 그리고 로이가 놀라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스스로 그 칼집 속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이...이게...저절로..." 로이는 새파랗게 질려 말을 더듬었다. "이 칼을 어디서 발견했지, 로이?" "여...영주관 지하창고에서요... 이걸 잡으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종들이 흔들려서..." "시지리스의 영주... 베릴... 역시 그랬군." 그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제피로스라고 한다, 로이. 몇 년 전 에스텔에서 우연히 이 칼집을 손에 넣은 이후로 계속 가지고 다녔다...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해서." "하... 하지만... 이것의 원래 주인은 영주님인데..." "용들의 학살자, 베릴 말이냐?" 그 청년은 낮게 웃었다. "그럴 리 없지. 이 칼의 주인은 너다, 로이. 네가 이것을 훔친 게 아니라 이 칼이 널 유혹한 거야. 네가 주인임을 알아보고, 그 어두운 지하실 에서 나와 네 손에 잡히기 위해, 이것이 스스로 일을 꾸민 거지. 싸우기를 좋아하는 이 칼에게 그 지하 창고는 감옥이나 다름이 없었을 테니까." "유혹...?" 로이는 어두운 지하실 속에서 이상스레 빛나던 칼의 모습을 떠올리고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 섬의 최초의 지배자, 실리사와 에퀴온이 이 칼을 만들었지. 그리고 용족들이, 실리사와 에퀴온을 섬기는 드래크로니안 족이 이것을 지켰단다. 신전 안에 깊이 감추어둔 채..."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섬의 원래 주인이 용들이었단 말은 들은 적 있어요. 에이론드 아저씨가 언제나 그러셨죠. 베릴 영주와 그의 동료들이 오래 전 이 섬에 와서, 난폭한 용들을 몰아내고 인간의 섬으로 만들었다고요." "그래, 인간들이 온 것은 100년이 채 안 되지. 그리고 베릴과 그 동료들이 용족을 완전히 몰아낸 건 겨우 30여년 전... 정확히 32년 전이었지. 그러나 그 동안 인간들은 용족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 버단다. 용족이, 드래크로니안이 수백년에 걸쳐 살아온 흔적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데에 채 50년도 걸리지 않았단다..." 제피로스는 그 말을 하며 낮게 웃었지만, 왠지 로이에게는 그 웃음이 쓸쓸하게 들렸다. 로이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베릴 영주도 그 때엔 훌륭한 용사였다고 하던데. 용감하고 지금처럼 멍청하지도 않았다고 에이론드 아저씨가 그러셨어요. 베릴과 그의 동료들은 어떤 적이라도 그 모습만 보고도 도망칠 만큼 당당하고 용맹한 기사들이었다고 ... 그래서 왕이 마음놓고 이 섬을 맡겼대요. 물론 지금 이 섬에서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지만... 할아버지들을 제외하면 말예요." 제피로스는 경멸이 섞이 비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진 않아. 그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변함없이 어리석지. 옛날엔 자신이 바보라는 걸 몰랐고 지금은 안다는 것 정도가 차이랄까..." 로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알 도리가 없죠. 전 겨우 열 다섯이고 제가 기억하는 한 영주는 바보였으니까요. 어쨌든, 그럼 저 단검은 용족의 것 아닌가요?" "용족에게 맡겨진 것은 없단다." 하고 제피로스는 말했다. 어쩐지 여운이 남는 목소리였다. "용들은 언제나 보관만 했지. 글라노우스, 용족의 시조는 그 칼과 다른 마법의 무기들을 가지고 이 세계로 왔지만 그 중 하나에도 손을 댈 수 없었어. 그의 일은 그 주인들을 찾아 나누어 주는 것 뿐이었고, 그 일이 끝나자 그의 몫도 다 끝나게 된 거지... 그들의 신은 그들에게 상냥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로이는 불안스럽게 손에 든 칼을 바라보았다. 제피로스의 말을 들으니 그 칼은 더욱 더 꺼림칙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제피로스...그렇게 불러도 되죠? 이건 제피로스가 가져가는 게 나을 것 같아요. 난 칼싸움도 전혀 할 줄 모른단 말예요. 게다가 어쨌든 칼집을 가지고 있었던 건..." "나도 내가 가져갔으면 좋겠구나." 하고 제피로스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랬다간 우리 둘 모두 화를 입을거야. 페울론은 그 주인이 보관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모두에게 보관하는 사람에게도 보관을 맡긴 사람에게도 어떤 해가 올지 모른단다. 주인이 아닌데도 페울론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다 죽었다. 베릴 영주도, 그리고 힐리온을 보관하던 라우더의 리반 아덴도... 하지만 너무 걱정하기 마라, 로이. 페울론은 자신의 주인을 충실히 지켜준단다." "페울론." 하고 로이가 조심스레 발음했다. 신비로운 발음이었다. 로이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게 이 단검의 이름인가요?" "아니... 그것의 이름은 따로 있단다... 때가 되면 알게 될거다." "그럼 페울론은?" "...알아서 좋을 게 없다. 그건 이미 죽은 언어니까." 제피로스는 딱 잘라 말했다. 그의 얼굴은 기분나쁜 일을 생각할 때처럼 굳어져 있었고, 그 차가운 목소리는 왠지 경비병들을 죽일 때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로이는 더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제피로스는 창가로 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런 것 따위 아예 있다는 것조차 몰랐으면 모두에게 좋았을텐데... 아니, 이런 것이 아예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것이 존재하고, 그 사실을 아는 이상 모두 찾으려고 기를 쓸 수밖에 없으니... 글라노우스는 어째서 이런 물건을 지상에 가져온 것일까. 실리사와 에퀴온은 왜 이것을을 지상에 가져오도록 그들의 대리자에게 시킨 것일까?" "차라리 영주가 안 오는 편이 나았을 것 같아요." 하고 로이는 어울리지 않게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론드 아저씨 말에, 여기 용족이 살던 때는 다들 그런대로 평화롭게 살았다던데. 그럼 나도 다른 데서 태어나 베릴 영주 얼굴도 모르고, 이런 칼 따위도 안 훔쳤을 텐데." "아니, 너에 대해 한 말이 아냐." 제피로스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나에 대해 한 말이지. 네 운명에 대해서는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조용한지 모르겠네요." 하고 로이는 제피로스의 제피로스의 옆으로 지나쳐 가 창밖을 내다보며 의아한 듯 말했다. 벌써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병사를 일곱이나 죽였으니 지금쯤 난리가 나 있어야 정상인데." "베릴이? 날 잡으려고?" 제피로스는 짖궂은 미소를 지었다. "설마! 아마 지금쯤 벽장에 숨어있거나 도망가려고 짐싸고 있을 거다." 로이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로이의 얼굴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굳어졌다. "설마..." "...?" "역시. 경비병들 죽일 때부터 의심스러웠어... 대단한 빽이 있는 거죠? 왕의 친척이라도 되요?" 제피로스는 어이없다는 듯 로이를 내려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이는 얼굴을 붉혔다. "...아닌가...?" "하하하... 좋을대로 생각해라. 그 칼 간수 잘하고."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아참! 주무실 때 문 잘 잠그고 주무세요!" "왜? 아직도 영주의 병사들 때문에 걱정되나?" "아뇨. 에밀리아 때문에요. 자는데 갑자기 침입하면 곤란하잖아요." "뭐....?" ------------------------------------------------------------------------------ 시지르스의 동쪽 해안 절벽, 베릴 영주의 성- "영주님!" 하고 오늘 졸지에 경비대장으로 진급한 전 부대장이 말했다. "어째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까? 놈은 경비병들을 일곱이나 죽였고, 그 중 하나는 영주님께서 직접 임명하신 대장이었습니다. 그런 무법자 같은 놈을 그냥 놔두시면 이 시지리스의 치안은..." "그럼 자네가 그놈을 잡아올 텐가?" 베릴 영주는 비웃음이 가득한 말투로 새 경비대장에게 물었다. "제...제가요?" 경비대장은 금방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물론 명령이시라면... 그러나... 놈의 검술이 대단한 만큼 좀더 많은 병사들을 동원해서..." "그럼 입다물고 있어!" 경비대장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힌 채 침묵했다. 베릴 영주는 긴 한숨을 쉬며 어두워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탑 아래에 펼쳐진 섬의 경관은 아름다웠다. 평안해 보이는 마을, 오밀조밀한 밭들, 그리고 그 뒤로 솟아오른 화산과 그들 모두를 둘러싼 잔잔한 바다. 그들 모두가 어둠에 덮여 가고 있었다. 그는 지금 영주관에서 가장 높은 탑에 올라와, 마치 적의 침임을 망보는 병사처럼 두리번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쓸만한 놈들은 다 오르크를 잡네, 용을 죽이네 하고 전쟁터로 나가고... 섬에 남은 놈들은 이런 놈들 뿐이니...' 베릴 영주는 한숨을 쉬었다. 사실 이 섬에 병사가 많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시지리스에서 용이 사라진 지 몇십 년이 지났고, 이제는 용이나 오르크 등 인간들이 흔히 마족이라 부르는 것들의 거주지 와도 한참 떨어져 있는 평화로운 섬이 되었으니까. 시지리스는 더이상, 그와 리반이 용을 몰아내려 싸우던 때처럼 최전선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있다가 리반도 당했어. ...검은 옷을 입은 젊은 놈에게 말이지...' 베릴은 잠시 몸을 떨었다. 검은 옷. 전 경비대장을 죽인 청년은 분명히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피빛같은 붉은 눈이었다고... 물론 우연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베릴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이 우연일 리 없다는 확신이 점점 퍼져 가고 있었다. 칼을 놓고 평화로운 섬의 통치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느끼는 확실한 직감이었다. "난 자러 가겠다." 하고 베릴은 경비대장에게 말했다. 두려움을 숨기느라 그의 목소리는 몹시 딱딱해져 있었다. "보초를 두 배로 늘리도록!" "예! 영주님." 경비대장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저 놈의 영주는 형편없는 겁쟁이가 됐어... 옛날 이 섬에서 용들과 싸웠다는 게 맞긴 맞는거야?' 베릴도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란 말인가. 리반이 그렇게 쉽게 죽었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는 이미 옛날의 용사 베릴이 아니었다. 아니, 리반 뿐이 아니었다. 마스도, 레이드도, 폴도... 모두 죽었다. 요정 피올린까지... 그녀는 화를 피하기 위해 인간들을 영원히 떠나, 그녀의 종족, 나이아드의 거주지인 이조넬 강으로 돌아가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 모든 노력이 소용없었다. '제길... 그 리반을 그렇게 쉽게 처치한 놈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역시 이따위 섬을 맡는 게 아니었어. 그리고 그 저주받을 칼도...' 그는 암울한 기분으로 침실로 가는 복도에 들어섰다. 횃불이 다 꺼져서 마치 저승으로 가는 문처럼 암흑이 뒤덮여 있었다. 그는 화가 났다. "쓸모없는 놈들! 불은 언제나 환하게 켜 놓으라고 했는데!" 큰 소리로 투덜거리며 그는 하인을 부르기 위해 달아놓은 종에 매단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종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 대신 끊어진 줄만이 그의 어깨 위로 스르륵 떨어졌다. 놀라서 몸이 굳어진 베릴의 귀에, 경멸과 악의가 가득한 낮선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 용감한 베릴, 용의 학살자 베릴! 언제부터 어둠을 두려워했지?" 베릴은 순간 온 몸이 오싹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지도 못했지만, 그는 알 수 있었다. '그 놈이야... 리반을 죽이고 힐리온을 강탈한... 이제야 왔군!' "겁에 질려 움직이지도 못하는가? 용사 베릴! 그래도 리반은 끝까지 발악했는데 말야!" 이상한 일이었다. 적을 눈앞에 두자, 오히려 베릴은 전날의 용기가 다시 샘솟는 것을 느꼈다.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그는 30여년 전처럼 살의와 용기에 차서 소리쳤다. "리반의 원수! 용기가 있다면 모습을 보여라!"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복도에 줄지어 선 횃불에 불이 붙었다. 환한 복도 끝에, 창틀에 기대어 앉은 검은 망토를 두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의 얼굴은 젊은이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리반이 죽은 것은 벌써 십 년이나 전인데...?' 그 젊은이는 일어나 베릴에게로 걸어오며 말했다. "용사 베릴! 꼴이 말이 아니로군. 그 기개, 그 대담함은 다 어디로 갔지? 하긴, 이제 예순이 다 됐으니. 인간의 수명이란..." "내 기개는 그대로다, 이 괴물!" 하고 베릴은 허리에 찬 검을 빼어들며 소리쳤다. "덤벼라. 내가 네게 죽은 친구의 원수를 갚아야겠으니!" 그 청년도 말없이 검을 빼어들었다. 둘은 한참동안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먼저 공격을 시작한 것은 베릴 쪽이었다. "얏!" 그의 긴 칼이 재빠르게 원호를 그었다. 옛날과 다름없는 그 솜씨에 베릴 자신도 놀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가볍게 그의 검을 밀어냈다. 잠시 베릴은 휘청거렸다. 그러나 순간, 이미 청년의 칼이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칼날을 보지도 못한 채, 반사적으로 간신히 적의 칼날을 막아냈다. '이...이건 인간의 속도가 아냐!' 그 청년은 숨돌릴 틈도 주지 않고 정신없이 공격을 퍼부었다. 베릴의 눈앞에서 칼날이 마구 번뜩였다. 오른쪽에서, 왼쪽, 그리고 다시 중앙을 파고들며... 아예 칼이 여러 개인 것같이 보일 지경이었다. 베릴은 공격을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칼을 막아내기에 바빴다. '하지만 빠른 만큼 가벼운 움직임이다.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나이가 들긴 했으나 아직도 힘에는 자신이 있는 베릴이었다. 시지리스의 용들을 몰아낸 용사들 중에서도 가장 장사로 통했었던 그가 아닌가. 다시 그 청년이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자, 베릴은 막아내면서 있는 힘을 다해 그의 칼을 밀어 버렸다. 예상대로 그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기회다!' 베릴은 돌진하며 그 총년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나 분명히 눈으로 보았는데도, 그 청년은 그 자리에 없었다. 베릴이 당황하는 사이, 등을 꿰뚫는 통증이 그를 덮쳤다. "으악!" 베릴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조심성이 없으시군." 그 청년의 감정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단순한 속임수에 넘어가다니... 설마 내가 당신 따위의 공격에 정말 휘청거릴 거라고 생각했던 건가?" "더러운 마물!" 베릴은 헐떡거리며 일구러진 얼굴에 애써 비웃음을 띄웠다. "하지만 이디실은 절대 빼앗을 수 없을 거다...!" "이디실이라고! 아하하하...!" 그 청년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 베릴, 용감한 베릴! 정말 날 즐겁게 해 주는군! 이디실, 마지막 열쇠! 그 검이 당신 수중에 있기라도 하단 말이야?!" 베릴의 얼굴에서 비웃음도, 고통의 표정도 사라졌다. 분노와 놀라움만이 그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럼... 이디실을 훔친 것은 네놈이었단 말이냐!" 그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내 작은 친구가 내 수고를 덜어주었지... 그래도 당신은 행운아야, 베릴. 끝까지 이디실을 지키려다 용사로 죽으니... 당신의 동료 리반이 얼마나 부러워할까!" '리반이 부러워한다고...? 무슨 소리야? 리반이 변절이라도 했단 말인가?' 베릴의 머릿속은 궁금증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그 해답을 얻기도 전에, 그 청년의 칼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래... 난... 용사로서 죽는거야...' 베릴의 눈은 힘없이 감겨졌고 그의 몸은 정신 없는 껍데기가 되었다. 청년은 죽은 베릴의 옷에, 자신의 칼에 묻은 피를 비벼 닦았다. 그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무슨 기미를 느꼈는지 창 밖의 하늘을 내다보았다. 이제 어둠이 덮인 하늘에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별과 달조차 없는 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청년의 눈에는 무엇인가가 보였는지, 그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번져 갔다. "아... 그래. 슬슬 친구들이 올 시간이군." ------------------------------------------------------------------------------ 이상한 신전 안... 로이는 신전의 중앙에 세워진 커다란 석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 볼 때 로이는 그것이 그저 거대한 도마뱀의 모습을 한 석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워질수록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목 아래까지는 도마뱀과 비슷했으나, 목이 두 갈래로 갈려진 채 하늘을 향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목은 점점 가늘어지면서 사람의 상반신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왼쪽 목에는 사람의 두개골과 로이가 알 수 없는, 이상한 모양의 두개골을 안고 묵념하듯 눈을 감은 남자의 상반신이, 그리고 오른쪽 목에는 창을 들고 섬뜻한 적개심을 담은 얼굴로 굽어보는 아름다운 여인의 상반신이 달려 있었다. '맙소사...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이런 데 있는 거야?' 그러나 로이는 이상하게도 발을 뗄 수 없었다. 로이가 보는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석상에 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이가 있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석상 주위에서 피리를 닮은 크고 이상한 악기로 열댓명 되는 사람들이 이상한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로이에게 낯선 음악, 그러나 분명히 처음 듣는 음악은 아닌 그런 음악을... 절을 하는 사람들 틈을 뚫고 키가 큰 남자가 석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피처럼 붉은, 금빛 수로 치장한 옷을 입고, 역시 같은 색 보자기에 싸인 어떤 물건을 소중히 들고 있었다. 꼿꼿한 자세에서 위엄이 배어났다. 그가 한 발짝 디딜 때마다, 절을 하던 사람들은 조용히 비켜섰다. '저건... 제피로스?' 로이는 놀란 나머지 큰 소리로 그 이름을 부를 뻔 했다. 그러나 그럴 리 없었다. 그 사람은 그의 옷처럼 붉은 머리칼을 땋아내리고 있었고, 게다가 제피로스보다 열 살쯤은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그가 석상의 바로 앞으로 다가가자, 음악이 멈추었다. 그리고 석상 앞에 있던 제단이 스르륵 저절로 열렸다. 그는 보자기를 젓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로이가 훔친 그 단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원래의 칼집에 꽂힌 채, 지하실에서처럼 이상한 빛을 발하며... "이디실!" 이라고 그 남자가 소리쳤다. 공교롭게도 그의 목소리조차 제피로스의 목소리와 상당히 흡사했다. 절을 하던 사람들 사이에 흥분이 번져갔다. "갈 실리사 렐 에퀴온!" '뭐라는거야, 도대체?' 로이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알아듣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제 극도로 흥분하여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로이는 그 모습을 보며 왠지 불안함을 느꼈다... "로이!" 누군가가 로이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로이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로이가 묵고 있는 낡은 여관 다락방의 낯익은 모습과 에밀리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휴우, 꿈이었나..."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일어나 앉을 때, 허리에 찬 단도가 걸리적거렸다. 로이는 순간 그것을 풀러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로이, 한가하게 꿈이나 꾸고 있을 때가 아냐!" 에밀리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우리 섬이... 침입받고 있는 것 같아!" "...뭐?" 에밀리아의 말은 로이의 머리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침입? 마족 에게? 그런 일은 전설 속에서나 일어나는 일 아니었던가? 설마 실제로 이런 일이, 그것도 무슨 영웅도 용사도 아닌 우리들에게... "침입이라니..." "나도 못 믿겠어. 하지만..." 에밀리아는 대책 없이 울먹였다. 그 때, 문이 벌컥 열리며 그녀의 아버지인 여관 주인 아저씨가 뛰어들어왔다. 그는 오랜 경험을 가진, 무슨 일에도 쉽게 흥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지금만큼은 흥분과 공포로 창백 해져서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로이는 5년이 넘게 이 여관에서 살았으나, 그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에밀리아! 로이! 머뭇거릴 시간이 없어! 사방이 오르크 천지다!" '오르크...?' 로이는 멍한 표정으로 주인 아저씨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다급해진 나머지 로이와 에밀리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 끌었다. "어서! 서둘러! 켄윌로 가는 배를 타야 해!" "하지만, 아버지..." "소용 없다, 에밀리아. 이제 이 마을은 지킬 수 없어. 모두 켄윌로 도망치는거다!" 켄윌로. 로이는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이 곳은 30 여년 전, 에밀리아의 할아버지가 다른 인간들과 함꼐 이 섬에 최초로 정착하면서 연 여관이었다. 그들은 시지리스의 용족들이 물러간 이후 처음 그곳에 발을 들여놓고 생업에 종사한 인간족이었으며, 그러므로 이 여관은 당연히 시지리스 최초의 여관이었다. 에밀리아와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이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떠벌이곤 했다. 그런데 그런 여관을 이렇게 쉽게 떠나야 할 정도라면, 분명 사태는 심상치 않은 것이었다. 아저씨의 말대로, 이 마을을 지킬 가망은 없는 것이 분명했다. 갑자기 로이는 주인 아저씨의 팔을 뿌리쳤다. "에밀리아를 데리고 먼저 가세요, 아저씨." "로이, 왜...?" "저도 곧 따라갈께요. 하지만 에이론드 아저씨를 놔두고 갈 순 없어요. 그 분을 찾아서 따라갈 테니까, 걱정말고 먼저 가세요!" 에밀리아와 그 아버지는 뭔가 항의의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나 시간이 없었다. 불화살이 다락방 창문을 깨고 들어와 바닥에 꽂혔고, 나무 마루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걱정 마세요!" 하고 로이가 웃어 보이며 말했다. "전 이 섬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라구요!" 주인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해 보이더니, 딸의 손을 끌고 방을 나갔다. "로이! 조심해!" 에밀리아의 외침이 멀어져 갔다. 더이상 지체할 새가 없었다. 로이는 부서진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지붕에도 불이 붙기 전에, 얼른 이웃한 창고의 지붕으로 건너뛰었다. 여관에 수십발의 불화살이 계속해서 꽂히고 있었다. 저 아래, 땅에서 마구 활을 당기는 거무스름한 털북숭이 생물들이 보였다. 로이가 전에 본 적이 없는 괴상하게 생긴 생물이었다. 키는 사람 어른보다 조금 작거나 비슷한 것 같았으나, 그 몇 배로 강인해 보였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투구와 갑옷 사이로 드러난 손발은 검고 더러운 털이 나 있었고, 무척 크고 우악스럽게 보였다. '...오르크구나!' 여관의 지붕에 드디어 불이 붙으며 내려앉았다. 오르크들 사이에 환희에 찬 탁한 외침이 들려왔다. 짐승처럼 이성이 없는, 그러나 짐승과 같은 순수함조차 없는 그런 울부짖음. '맙소사... 저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 피했을까? 제피로스는?' 그러나 머뭇거릴여유는 없었다. 로이는 다시 지붕에서 뛰어올라, 옆에 있는 거목의 가지로 옮겨갔다. 나무를 타고 로이는 가뿐히 땅으로 내려왔다. 바로 옆에서 여관을 불태운 오르크들이 이제 다른 집들을 부수며 혐오스러운 울음소리를 내짖고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마치 시체가 썩는 것 같은 이상한 악취가 났다. '저놈들한테 걸렸다간 뼈도 못추리겠군.' 로이는 애써 두려움을 억누르며, 수풀 속에 몸을 숨기며 에이론드의 오두막을 향해 달렸다. 어디선가 집이 무너지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소리, 그리고 소름끼치는 오르크들의 울부짖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놈들이 완전히 마을을 장악한 모양이었다. '아저씨 말이 맞아, 이 섬은 이제 지킬 수 없어... 놈들이 아직 에이론드 아저씨의 오두막만이라도 못 찾아냈으면 좋으련만! 제기랄, 영주 놈은 꼬박꼬박 세금 챙겨가더니 이럴 때 뭐하는 거야!' "우그르~!" 로이의 바로 뒤에서 섬듯한 외침이 들렸다. 로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굴려 피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은 털이 듬성듬성 난 커다란 오르크 한 마리가, 방금 로이가 있던 자리에 무식하게 큰 도끼를 내다 꽂았다. 얼마나 엄청난 힘으로 휘둘렀는지 도끼의 날이 반쯤 땅에 박혔을 정도였다. "이... 이봐요! 오르크 양반!" 로이는 궁여지책으로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난... 난, 여길 지키는 군인도 아니고 뭐 오르크한테 해 끼친 적도 없다구요! 그러니..." "크아아아아아!" 오르크는 다시 한 번 도끼를 들어 로이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이번에도 로이는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별로 대화로 풀 생각이 없나본데.' 이렇게 되면 단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 로이는 벌떡 일어나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시지리스에서 알아 주는 달리기 솜씨 이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이렇게 온 힘을 다해 도망친 적은 이제까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 무섭다는 오르크도 로이를 따라잡니 못하고 점점 뒤로 쳐졌다. 특히 로이가 숲으로 들어가 개울과 나무덩굴 사이로 달려가자, 그 오르크는 더이상 로이의 적수가 아니었다. '헤엣! 그럼 그렇지! 시지리스에서 제일 빠른 이 로이님을 뭘로 보고!' 로이는 신이 나서 그대로 에이론드의 오두막으로 달음질쳤다. 에이론드의 집 근처에도 벌써 오르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집이란 집엔 모두 불이 붙고, 오르크들은 도망다니는 사람을 쫓으며 학살하고 있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깨끗한 흙바닥이었던 곳이,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로이가 유쾌한 마음으로 과일을 안고 달려왔던 길이 이제 피로 질척 질척했다. 사방에 시체와 피, 그리고 재와 불 뿐이었다. 로이는 오르크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부서진 집들의 잔재 속에 숨어 살금살금 에이론드의 집으로 다가갔다. 그러다가 무엇인가에 걸려 앞으로 픽 고꾸라지고 말았다. "으... 으악!" 로이는 오르크고 뭐고 잊고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머리가 잘려 나가고 심하게 난도질 당한 누군가의 시체였다... 누구인지, 로이가 잘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넘어진 로이는 그 시체에서 흘러나온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서... 설마... 에이론드 아저씨는 아니겠지?' 걱정과 공포로 로이는 거의 이성을 잃었다. 그는 오르크가 보든 말든 상관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에이론드의 집으로 달려갔다. 이미 그의 집 지붕에도 불이 붙어서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는 소리쳐 부르며 집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에이론드가 누워 있어야 할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오르크가 왔던 흔적도 없었다. '...혼자 도망치신 건가? 설마, 눈도 안 보이시는 분이!' 그 때였다. 로이의 뒤에서 악취가 섞인 숨결이 느껴졌다. '오...오르크!' 로이는 겁에 질린 나머지 바짝 얼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등 뒤에서 오르크가 칼을 치켜드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으아... 이렇게 죽는건가?' "크와아아아아악!" 갑자기 그 오르크가 귀청이 찢어질 만큼 큰 비명을 내질렀다. 로이는 그제서야 용기를 얻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눈일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랐다. 오르크의 몸에 불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오르크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와 함께 점점 타들어가다가, 결국 푹 쓰러져 버렸다. "어... 어떻게..." 로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멀거니 서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런 로이의 손을 잡아 끌었다. "어서 여길 떠나라! 로이!" "에...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에이론드를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불바다 속이기 때문인지, 에이론드의 모습은 평소와 많이 달라 보였다. 그의 얼굴은 더이상 로이가 돌봐주어야 할 병자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지 근엄하고 위엄까지 느껴져서, 창백한 혈색조차 그를 굉장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데에 일조하는 것 같았다. "설마... 그 마법... 아저씨의...?" 에이론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올려 보았다. 은으로 만든, 크고 파란 보석이 박힌 긴 지팡이였다. 에이론드 자신의 키보다 더 큰 것 같았다. '마... 맙소사. 그럼 진짜 라우던지 뭔지의 마법사셨단 말야? 난 그냥 허풍인 줄 알았는데!' "아, 아저씨, 빨리 저랑 도망쳐요. 이 마을은 이제 끝이에요. 모두 켄윌로 갈 거래요! 어서 우리도 가요!" 그러나 에이론드는 고개를 저었다. "켄윌엔 너 혼자 가거라, 로이. 난 여기에 남아야 한다." "마... 말도 안 돼요! 어째서..."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더이상 이어질 수 없었다. 오르크 한 떼가 그들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에이론드는 로이를 자기 뒤로 숨기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사악한 것들! 물러서라!" 순간 지팡이에서 빛이 발산되었다. 로이는 너무 눈이 부셔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떴들 때, 남은 것은 오르크들의 뼈밖에 없었다. 그리고 에이론드는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안되겠어. 아저씨는 더이상 싸울 수 없어!' 로이는 힘으로 그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서 가요!" "로이, 난... 도망 안친다." 에이론드는 기침을 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난 라우더의 마법사... 두번 다시 도망치지 않는다." "예에, 예에, 그렇고 말고요. 저랑 같이 어디좀 가서 어떻게 저 오르크 놈들을 혼내줄까 생각 좀 해보자고요." 로이는 에이론드를 억지로 끌며 항구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다시 오르크 무리들의 습격을 받았다. 에이론드는 힘겹게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에르 페이든 시르..." 그가 주문을 외자 다시 지팡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훨씬 위험스러운 붉은 빛이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가 지팡이를 치켜 들자,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그의 팔목에 꽂혔다. "으악!" 에이론드는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지팡이든 힘없이 바닥에 떨어지더니, 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로이는 얼른 그것을 집어들었다. 그러나 이미 푸른 보석이 깨어져 버린 후였다. "...다 끝났어." 에이론드가 이상스레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반 님, 이제 전하의 곁으로 갑니다..." 그와 때를 거의 같이하여, 오르크들이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돌진 해 왔다. 로이가 에이론드를 밀쳐 함께 도랑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그대로 저승으로 갔을 것이다. "아저씨, 제발 정신 좀 차리시고 항구로 가자고요!" "그럴 순 없습니다, 랜스 도련님... 마법사는 주군의 땅을 지켜 야죠..." '으아... 이거 정말 사람 미치겠네!' 로이는 기가 막혀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오르크들이 그새 그들의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캬아!" 듣기싫은 울부짖음과 함께 오르크 두 마리가 로이의 앞으로 뛰어 들었다. 궁지에 몰린 로이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에 찬 단도를 빼어 휘둘렀다. 위잉~! 로이가 든 칼이 다시 이상한 빛을 내며 진동했다. 그 울림은 로이의 손을 통해 몸 전체로 퍼져 갔다. 다음 순간, 로이는 자신도 모르는 새 오르크 무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며 정신없이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캬아아아아악!" 로이의 귀 바로 옆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비로소 로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히이익!" 주위를 둘러본 로이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가 오르크의 시체를 밟고 서 있었던 것이다. 배가 갈려 지저분한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오르크의 시체를... 뒤로 물러서던 로이는 다른 시체에 걸려 넘어질 뻔 했다. 목이 없는 오르크의 시체였다. 그리고 그 곁에는 역시 배가 갈린 오르크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내... 내가 미쳤나봐!' 로이는 질겁을 해서 사방을 살폈다. 다행히 다른 오르크들은 도망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도랑에 쳐박힌 에이론드만이 힘없이 기침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괜찮으세요?" 로이는 에이론드에게 달려가 부축해 일으키며 걱정스레 물었다. "...로이?" "예, 저에요. 이제 안 헷갈리시니 다행이네요." "그... 오르크들은...?" "제가... 따돌렸어요. 어서 가요." 로이는 대충 둘러대며 에이론드의 소매를 잡아 끌었다. '그 망할 놈의 칼을 훔친 뒤부터 모든 게 이모양 이꼴이야! 이제 다시 그 칼을 잡나 봐라!' "로이... 너나 도망쳐라... 이제 난 틀렸다..." 에이론드는 힘겹게 기침을 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입을 틀어막은 그의 손 사이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차피... 난 10년 전 죽었어야 할 사람..." "정말 여기까지 온 사람 맥빠지게 만드시네." 로이는 들은 척도 않고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이젠 그런 말 하기엔 너무 늦었어요. 같이 죽든지 같이 살든지 둘 중 하나에요!" 에이론드는 억지로 일어나며 비틀거렸다. 로이는 그를 이끌고 항구 쪽으로 향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로이도 그를 이끌고 항구까지 무사히 갈 자신은 없었다. 게다가 아직까지 가지 않고 남아있는 배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하지만 예, 그럼 저 혼자 갈께요, 할 수도 없잖아? 다 잘 되겠지, 뭐!' 그러나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아까 도망친 오르크들이 원군을 요청했는지, 뒤에서 시끌시끌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르그르! 쿠! 우그르!" 도대체 짐승 우는 소리인지 말인지 불분명한 오르크 언어가 로이의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로이의 손은 자신도 모르는 새 그 단검의 손잡이에 가 있었다. '아저씨까지 모시고 달아날 수는 없어... 역시 이걸 쓸 수밖에 없나...' 그러나 로이가 뒤를 돌아 그 칼을 뽑기 직전, 갑자기 오르크들이 멈추어 섰다. "푸우크! 하르크자엘!" 로이는 멍해져서 그들 사이에 공포의 외침이 퍼지는 것을 보고만 있었다. 그들은 눈에 띄게 겁에 질리더니,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칼 때문인가?' 로이는 가만히 허리에 찬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갑자기 에이론드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역시... 하르크자엘...!" "하... 뭐라고요?" 의아해져서 돌아보던 로이는 그대로 그 자리에 굳어지고 말았다. "요...용이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검은 용이 불바다가 된 마을을 휘젓고 있었다. 로이와 스무 발짝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키는 사람 어른의 두 배 반 정도... 용으로서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으나, 처음 용을 보는 로이를 얼어 붙게 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흑표범처럼 조용하고 날렵한 움직임, 날카롭게 솟은 두 개의 뿔, 희게 빛을 발하는 송곳니, 게다가 무엇보다 빛을 흡수해 버리는 듯 새카만 날개...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 결국 왔구나!" 에이론드는 놀랄 만큼 침착해져서 중얼거렸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용은 긴 목을 돌려 로이와 에이론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붉은, 아니 어디서 본 듯한 자주색 눈... 긴 송곳니 에는 끔찍하게도 상반신만 남은 갑옷 입은 사람의 시신이 매달려 있었다. 왼쪽 날개에는 흰 흉터가 험상궂게 빛을 반사했다. 그 용은 한참동안 둘을 바라보았다. 로이는 아무것도, 두려움조차 느낄 수 없었다. 자포자기한 상태라는 게 이런 건가... 그러나 용은 고개를 돌려 입에 물고 있던 시체를 휙 던져 버리더니, 너희들 따위는 상관도 없다는 듯 날개를 펴 날아가 버렸다. 그 큰 날개의 날개짓 때문에 주위의 공기가 온통 소용돌이쳤다. 정신없이 흩날리는 나뭇잎 들이 아직도 멀거니 선 로이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어... 어떻게 된 거냐, 로이?" 에이론드가 눈에 띄게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용이 그냥 갔어요. 우리가 맛이 없어 보였나 보죠." 로이는 비로소 신이 나서 에이론드를 일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보세요! 다 잘 될 거에요. 어서 가요!" "하르크자엘이 그냥 가다니... 그럴 리가..." 에이론드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분명히 놈은 날 죽이러..." 그러나 로이는 더이상 듯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 항구로 향했다. 용의 등장이 이제 그에게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새로운 확신을 주었던 것이다. 로이는 거의 에이론드를 억지로 끌다시피 데려갔다. 도중에 몇 번 오르크와 마주칠 뻔도 했으나, 잘 숨어서 피할 수 있었다. 이제 마을도 아까처럼 시끄럽지 않았다. 약탈과 학살은 대충 끝난 것 같았다. 어떤 오르크들은 졸고 있기까지 했다. 시체들과 재가 된 건물들만 남은, 텅 빈 거리가 로이에게는 차라리 다행스러웠다. 이윽고 항구가 로이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로이는 신이 나서 더 빠른 걸음으로, 에이론드를 업다시피 한 채 항구로 선박장으로 뛰어들었다. "에밀리아! 주인 아저씨! 저 이제 왔..." 그러나 선박장을 지키고 있는 것은 로이가 기대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열 다섯 마리의 오르크가 로이와 에이론드를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피묻은 도끼와 칼이 들려져 있었고, 바닥은 피로 덮여 미끈미끈했다. "가... 우그르..." 오르크들이 기분나쁘게 으르렁거리며 로이에게 다가왔다. 뒤늦게야 로이는 자신과 에이론드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할 수 없지!" 로이는 단도를 빼어들었다. 그러나 로이가 제대로 칼을 쥐기도 전, 오르크 한 마리가 로이의 손을 향해 단검을 날렸다. "으앗!" 로이는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칼로 그 검을 받아쳤다. 그러나 그 순간, 로이 자신의 검도 놓치고 말았다. 로이의 칼은 오르크들의 머리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오르크 한 마리가 로이의 머리를 향해 도끼를 날렸다. 로이는 고개를 숙여 간신히 피했다. 그러나 다시 공격해도 피해낼 자신은 없었다. 오르크들은 점점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던 것이다. "포위당한거냐... 로이?" 에이론드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예... 그런 것 같아요." 로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속삭였다.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제길! 이대로 죽다니... 믿을 수 없어!' "캬아아오!" 로이의 바로 뒤에 있던 오르크가 크게 울부짖었다. 그와 동시에, 그 오르크는 도끼를 휘두르며 로이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 도끼가 로이의 몸에 닿기 전, 도끼를 잡고 있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오르크는 놀란 듯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로이? 안 다쳤냐?" 쓰러진 오르크의 뒤로 긴 칼을 들고, 검은 망토를 입은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의 칼에서는 방금 죽인 오르크의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제피로스!" 로이는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누군가가 이토록 반가운 것은 처음 이었다. 오르크들은 새로운 전개에 당황했는지 주춤했다. 그 틈을 타서, 제피로스는 재빨리 칼을 휘둘러 곁에 있던 세 놈의 심장을 찔러 버렸다. 놀랍도록 빠른 그의 칼놀림에 로이는 감탄했다. 거의 칼날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오르크들은 겁을 먹었는지 제피로스를 선뜻 공격하지 못했다. 그들은 그의 공격을 간신히 피하며, 혹은 그 공격에 맥없이 쓰러지며 뒤로 물러설 뿐이었다. "어리석은 놈들! 꺼져버려!" 제피로스가 당당히 소리쳤다. 그러자 오르크들은 정말로, 창문을 깨고 걸음아 나 살려라고 출행랑을 쳐 버렸다. "와아! 대단해!" 로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그는 얼른 떨어뜨렸던 검을 집어 칼집에 넣고는 제피로스에게 달려갔다. "난 죽는 줄만 알았어요!" "조심했어야지." 제피로스는 로이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로이...?" 하고 에이론드가 부르자, 그제서야 로이는 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아, 아저씨! 안 다치셨어요?" "난 괜찮다... 그런데 오르크들이 어째서 다 간 거냐?" "제피로스가 와서 쫓아 줬어요! 제피로스, 이 아저씬 에이론드 아저씨..." "...주위에 누가 있냐?" 에이론드는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 로이의 얼굴빛이 변했다. 에이론드는 눈이 안 보였으나 기를 감지 하는 능력이 뛰어나 언제나 누가 어디에 있는지 다 알았던 것이다. '너무 무리하셔서 그런가...?' "아, 아저씨... 물론 여기 제피로스가..." "하지만 아무런 기도 느껴지지 않아! 로이, 여긴 우리 둘 뿐이다. 네가 허깨비를 보고 있거나..." "망토 때문입니다." 갑자기 제피로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제 망토는 기나 소리를 숨기는 재질로 되어 있거든요. 어쨌든 지금 옷감 얘기나 할 시간은 없습니다. 어서 도망쳐야지요." "어떻게요?" 로이는 다시 침울한 기분이 되어 물었다. "배는 다 떠나고, 남은 배는 오르크들이..." "다른 곳에 선박장이 있어." "설마!" "수백 년도 더 된 곳이지... 거의 30년동안 아무도 안 썼지만 아직 쓸만 할거야." 제피로스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쳐서 도저히 허튼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좋아, 뭐, 가 보지. 어차피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좋아요." 하고 로이가 말했다. "그럼 빨리 가야죠! 그런데 에이론드 아저씬 이제 걷는 게 무리일 텐데..." "난 놔 두고 가라, 로이." 하고 에이론드가 말했다. "난 이미..." "그냥 가만히 계세요, 아저씨는!" 하고 로이가 듣다 못해 날카롭게 말했다. "제가 다 알아서..." "그 분 말이 맞다, 로이." 제피로스는 냉랭한 말투로 로이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한시가 급해. 게다가..." "난 기를 감추는 저런 의심스런 사람과 함께 가진 않는다!" 하고 에이론드가 딱 잘라 말했다. "그리고 목소리... 당신 목소리를 언젠가 들은 적 있어. 분명히 좋은 기억은 아니었는데..."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가 날카롭게 소리쳐 그의 말을 막았다. 그리고 제피로스를 노려보며 선언했다. "에이론드 아저씨가 안 가면, 나도 안 가요!" 제피로스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했으나,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그럼 하는 수 없지... 마차라도 빼앗아 타는 수 밖에." "만세! 역시 제피로스는 대단해!" 로이는 이미 배에 다다른 것처럼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에이 론드는 불만스러운 듯, 혹은 경계하는 듯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내 뒤를 바짝 따라와, 로이!" 제피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선착장 밖으로 뛰어나왔다. 로이는 에이론드를 부축하고 그 뒤를 따랐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오르크들의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보통 '오르크 말'이라고 불리는, 다리가 여섯 개 달리고 외골격으로 둘러싸인 갈색 생물이 끄는 마차였다. 두 놈의 마부인 듯 보이는 오르크들이, 잔뜩 포식한 듯 큰 배를 안고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소리도 내지 않고 그들 뒤로 살금살금 걸어갔다. 발소리도 옷 스치는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으므로, 로이는 분명히 그가 어떤 마법을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휙! 제피로스의 칼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을 내며 원호를 그렸다. 두 마리의 오르크는 눈을 뜰 새도 없이 그대로 고꾸라져 죽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있었는지, 어디선가 듣기 싫은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깩! 깨액! 깨액!" 날카롭고 귀에 거슬리는 그 쇳소리는 분명 오르크의 울부짖음은 아니었다. "제길! 하피도 지키고 있었군!" 제피로스가 소리쳤다. "로이! 어서 타! 그 아저씨도!" 이것저것 생각할 새도 없이 로이는 에이론드를 부축한 채 마차의 짐칸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제피로스가 거칠게 마차를 몰기 시작 했기 때문에, 둘은 거의 떨어질 뻔 했다. "쿠우우욱!" 오르크 말은 마치 목에서 나오다 만 것 같은 소리를 내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보통 말보다는 좀 느렸으나 그래도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추격을 따돌리기에는 모자랐다. "으앗!" 로이는 얼떨결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새가 따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기괴하게 큰 발톱이 험상궂게 구부러져 있었다. 게다가 끔찍스럽게도, 그 얼굴은 새가 아닌 인간 여자의 모습이었다. "제피로스! 괴... 괴물 새가 따라와요!" "망할 놈의 하피들!" 하고 제피로스는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로이에게 소리쳤다. "이리 와서 대신 말 좀 몰아!" "저, 못해요!" 로이는 질겁을 해서 소리쳤으나, 이미 고삐는 강제로 로이의 손에 넘어 온 후였다. 로이는 어쩔 줄을 모르며 일단 마부석에 앉았다. 제피로스는 칼을 뺀 채, 짐칸으로 가 버티고 섰다. "깨애애액!" 네 마리의 하피들이 떼를 지어 그들의 마차를 쫓아오고 있었다. 혐오스러운 만큼이나 빨랐다. 그들은 흩어지지도 않고, 곧바로 로이를 향해 돌진했다. 망토 때문인지 제피로스는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쉭! 제피로스는 칼을 날렸다. 놀랍도록 빠른 솜씨로. 하피 두 마리가 머리가 잘린 채 땅에 쳐박혔다. 그제서야 나머지 두 마리가 그를 공격했다. 제피로스는 먼저 그의 얼굴을 향해 달려드는 놈을 푹 찔러 던져 버렸다. 그 틈을 타서, 나머지 한 마리가 그의 오른팔을 발톱으로 할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공격을 할 기회는 없었다. 제피로스의 칼이 그것의 날개 한 쪽을 잘라 버린 것이다. "깩!"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 하피는 로이의 발 바로 옆으로 툭 떨어졌다. "으악! 징그러!" 로이는 진저리를 치며 그것을 발로 차 떨어뜨렸다. 제피로스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마부석으로 와 고삐를 잡았다. 로이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짐칸 으로 갔다. "잘 하는데?" 제피로스는 미소까지 지으며 로이에게 말했다. 그러나 로이는 도저히 맞받아 미소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제피로스는 마차를 해변이 아닌, 그 반대편에 있는 사화산 쪽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러나 로이는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이미 너무 지쳐 있었고, 남은 정신은 혹시 쫓아오는 괴물들이 없나 살피는 데 온통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서서히 밝아올 때가 되어서야 로이는 자신들이 바다가 아닌 산 한복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당황한 나머지 제피로스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비밀 통로!" 그의 말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당당했다. "다 잘 될 거야. 날 믿어!" '...하긴, 내가 지금 저 사람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어...' 로이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뜨자, 야행성인 오르크 말은 완전히 시력을 잃고 갈팡 질팡했다. 제피로스는 할 수 없이 마차를 세웠다. "걸어가야겠군. 걱정 마,이제 거의 다 왔어." 하고 그가 마부석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로이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에이론드의 몸을 흔들며 말했다. "아저씨, 일어나세요. 이제 걸어가야 한대요." 그러나 에이론드는 꼼짝 않았다. 다시 한 번 흔들어도 마찬가지였다. 로이는 불길한 느낌으로 창백해진 채, 제피로스를 불렀다. 제피로스는 능숙하게 에이론드의 목에 손을 대고 맥박을 짚었다. 로이는 그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드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하구나, 로이." 하고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러나 곧 마차에서 뛰어내리며 꾸며낸 활기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언젠간 이럴 줄 알았어. 어서 가요. 오르크들이 오기 전에 빨리 떠나야죠!" 제피로스는 말없이 앞장섰다. ---------------------------------------------------------------------------- 햇볕이 강해짐에 따라 산 중턱은 점점 더워졌다. 이미 가을이 다 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사람 지치게 하기엔 충분한 더위였다. 그러나 로이 에겐 오히려 더위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더운 것은 아직 해가 떠 있기 때문 이고, 오르크를 비롯한 대부분의 괴물들은 낮 중에는 움직임이 둔해 진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야." 얼마나 걸었을까, 제피로스가 휘색이 도는 얼굴로 평범해 보이는 조그만 굴을 가리켰다. 바위 틈에 난, 낙엽과 수풀로 가려진 이 작은 굴은 아무리 보아도 들짐승이 버리고 간 것으로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크기도 너무 작아서, 제피로스같이 키가 큰 사람은 겨우겨우 들어갈 것 같았다. '모르겠다, 뭐. 믿어야지...' 로이는 군말 없이 굴 속으로 먼저 기어들어갔다. 머리를 조금만 들어도 천정에 부딪혀 흙이 우수수 떨어져내렸다. 로이는 그 중에 이상한 벌레가 섞여있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랬다. 조금만 들어가자 굴 속은 완전히 깜깜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넓이는 별로 넓어지지도 않은 것 같았다. 로이는 열심히 기어가고 또 기어갔다. 손바닥과 무릎과 허리와 목이 꽤 아파질 무렴, 그는 갑자기 허공을 짚고 흙바닥 위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조심해, 로이!" 바로 뒤에서 제피로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말해 주면 뭘해요?" 로이는 기운이 빠져서 툴툴거렸다. 암흑 속에서 제피로스의 손이 로이를 잡아 일으켰다. 로이는 새삼 그가 움직일 때 정말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친 덴 없니?" "이런 걸로 안 다쳐요. 근데 여긴 어디에요?" "말했잖아, 비밀통로라고." "...넓어져서 다행이네요." 로이는 천정과 벽을 짚으려고 손을 휘휘 내저어 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짚히지 않았다. "아까 같은 길로만 계속 가야 한다면 차라리 오르크들하고 같이 살려고 했는데." 가까운 곳에서 제피로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앞으론 계속 이래. 걱정할 것 없다, 로이." 제피로스는 로이의 손목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로이는 잠자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눈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마치 대낮의 햇빛 아래 길을 가는 것처럼 성큼 성큼 잘 걷고 있었다. "...앞이 보여요, 제피로스?" 로이가 참다 못해 물었다. "넌 보이냐?" "안 보이니까 묻죠." 3 "...꼭 보여여 가는 건 아니지." 그건 사실이었다. 에이론드도 장님의 몸으로 그렇게 오르크들을 공격했었으니까. 아마도 몸이 병들지만 않았더라도 거뜬히 이겼을지 모르지... '불쌍한 에이론드 아저씨...' 로이는 그를 위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물론 자신은 라우더의 마법사라고 했지만. 하지만 어쨌든 그가 시지리스에 표류해 온 이래, 그는 로이의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보니 그와 지낸 것이 거의 7년... "...그 아저씨 일은 정말 미안하다." 제피로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는 한숨을 쉬었다. "제피로스 잘못도 아니었는데요, 뭐... 어차피 오래 못 사실 분 이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미안하다, 로이." 제피로스는 한 마디 중얼거리듯 내뱉고는 더욱 걸음을 재촉했다. 둘은 더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냥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걷고 또 걸었다. 천만다행으로 바닥은 자갈 하나 없는 가는 흙이어서 어디에 걸려 넘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무도 마시지 않은 듯 텁텁한 공기와 장님이 된 것 같은 암흑은 참기 힘들었다. 빛이 전혀 없었으므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고 말고 할 여지도 없었다. '으으... 안 보이는 게 이런 건줄 몰랐어... 에이론드 아저씬 어떻게 이러고 살았을까... 정말 미치겠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마치 밤을 만난 야행성 맹수처럼, 그는 소리조차 내지않고 암흑 속을 미끌 어져 나아갔다. 그의 숨소리는 편안했으며, 걸음은 일정하고 안정되어 있었다. 로이는 갑자기 그가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가야 해요?" 로이는 마침내 침묵을 깨고 칭얼거리듯 물었다. "이제 곧 밝아질거야. 돌바닥이 되면 네겐 빛이 필요하겠지." 제피로스는 신경질이 날 정도로 안정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멀지 않았어. 찬 공기가 느껴지지?" '아뇨, 덥고 퀘퀘하기만 한데요.' 그러나 로이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더이상 칭얼거리는 겁쟁이 어린애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제피로스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보호자 내지는 큰형처럼 굴고 있었으니까. 로이가 차가운 바람을 볼에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적어도 반 시간은 더 걸은 후였다. 맑고 습한, 서늘한 공기가 그의 폐를 씻어냈다. 로이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조금 더 걸으니 어디에선가 약하게 출렁거리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해라, 로이. 여기 물이 있어." 제피로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로이의 발이 이끼같이 느껴 지는 무엇인가를 밟고 찍 미끌어졌다. 풍덩! "로이, 괜찮니?" 당황한 제피로스의 목소리. "...전 괜찮은데요...조금씩만 더 일찍 말씀해 주시면 안돼요?" 다시 제피로스의 손이 로이의 팔을 잡고 일으켜 주었다. 물은 그다지 깊지 않았다. 로이의 무릎을 겨우 넘을 정도였다. 게다가 흐름이 거의 없고 잔잔해서,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 같았다. "물이 차군요." 하고 로이가 말했다. "미안하게 됐다. 우선 여기로 올라오지 그래." 제피로스가 로이의 몸을 어떤 바위 위로 끌어당겼다. 그의 망토가 로이의 등에 덮이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보다 무척 가벼웠다. "여기 잠시 있어라. 내가 횃불이 될 만한 것을 가져올 테니." 로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제피로스가 첨벙첨벙 물을 헤치며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저 소리라도 나나 좀 났군.' 로이는 어둠 속에서 혼자 미소지으며 생각했다. 그러나 아까부터 로이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다. '...에이론드 아저씨도 기를 감지해서 마음대로 활동하셨다고는 하지만... 제피로스같지는 않았어. 제피로스는 지금 다 보이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저 쪽에서 희미하고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이 동굴인지 비밀 통로인지에 들어와 몇 시간만에 처음 보는 빛이었다. 어슴푸레한 밝기임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순간 눈에 작은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마음 속까지 밝아지는 것 같았다. "로이-!" 제피로스의 목소리였다. 그는 이상하게 생긴 흰 배를 타고 있었다. 너무 폭이 좁고 작아서 앞뒤로 나란히 세 사람밖에는 타지 못할 것 같았다. 게다가 그가 젓고 있는 노는 우스꽝스럽게 가늘고 길었다. 푸르스름한 빛은 그 배의 뱃머리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제피로스는 로이에게서 50 미터쯤 떨어진 거리에 배를 세웠다. 그리고는 첨벙거리며 로이에게 달려왔다. "저걸 타고 선박장까지 가는 거야. 이젠 다리를 좀 쉬어도 돼." 하고 말하는 그의 얼굴엔 기쁨이 가득했다. 그러나 희미한 불빛에 자색 눈이 이상스럽게 빛나 좀 섬뜻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로이는 벌떡 일어났다. 이제 어둠 속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기쁜지, 아니면 앉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쁜지 자신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쨌든 그는 갑자기 힘을 얻어, 제피로스보다도 빨리 배로 달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배는 정말 가늘고 약해 보였다. 우아하게 긴 초승달 모습이 탈것이라기보다는 장식품같이 보였다. 오로지 이 잔잔한 지하 수로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다. "이드릴이야."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고대어로 초승달이란 뜻이지. 용족들은 아직 날지도 못하고 헤엄도 못 치는 어린 용들을 위해 이것을 만들었지...그렇다고 하더군." 로이와 제피로스는 그 배 위에 올라탔다. 노는 제피로스가 잡았다. 배는 이상할 정도로 매끄럽고 희어서 그 재료를 알 수 없었다. 배 전체가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으며, 특히 뱃머리는 마치 등불처럼 빛났다. 아무것도 달려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출발할까?" 제피로스가 물었다. "좋아요!" 로이가 오래간만에 기분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피로스는 노로 배를 슬쩍 밀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물은 더 깊어져 있었고 마찬가지로 잔잔했으나 흐름이 뚜렸했다. 배는 물고기처럼 혼자 유연히 나아갔다. 사람이 느긋하게 걷는 듯한 속도로 배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제 빛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배 밑에서 출렁거리는 물 뿐이었다. 동굴은 얼마나 넓은지 천정도 벽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페린 화산의 중심부를 향해 가고 있는 거야."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거의 다 왔으니 넓은 게 당연하지. 이 섬의 중심부에 있다고 해도 될 거야." "...용족들이 이 길을 만들었나요?" 하고 로이가 물었다. 제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물었다. "배고프지? 우리 뭣 좀 먹을까?" 그것은 듣던 중 가장 반가운 말이었다. 로이는 열광적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제피로스는 웃으며 배 밑바닥에 6달린 뚜껑을 열고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가 그 주머니를 꺼내어 거꾸로 쏟자, 싱싱한 과일과 말린 고기 조각, 향기 나는 치즈, 그리고 아직도 말랑말랑한 빵 등이 쏟아져나왔다. "와!" 로이는 환호성을 지르며 치즈를 집어 한 입 가득 베어물었다. "브레이엔 마법이야." 하고 제피로스는 육포를 집어들며 말했다. "오랜 시간동안 시간의 흐름을 무시하여 보관하는 마법이지. 용족 들은 언제 자기들에게 이것들이 필요할지 알 수 없었거든. ...아니, 사실 별로 필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럼, 이게... 수십년 전에 만들어진 음식이란 말예요?" "수백년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표정 지을 건 없어. 용족의 마법은 확실하니까... 용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아요." 로이는 그 검은 용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하르크...뭐라고 했었지?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뻔 했지만." "그래.. 그럼 로데인이란 나라는?" "그건 그냥 전설이잖아요. 용이랑 인간들이랑 함께 살았다는 나라. 마녀가 다스렸는데, 에스테이아 사람들을 괴롭혀서 백 년 전 어떤 왕이 무찔러 버렸다죠." "전설만은 아냐, 로이." 하고 제피로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물론 전설인 부분도 없지 않지만... 아클레어 2세가 로데인의 수도를 함락한 건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98년 전이었고, 그때까지 로데인은 실재했어. 패한 후에도 많은 자들이 로데인을 다시 일으키려고 했지... 32년 전에 끝장이 났지만." "...그래요." 로이는 입안 가득히 고기조각을 문 채 대꾸했다. 사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건 음식이었지, 옛날 이야기 따윈 어찌 되어도 좋았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로데인의 수도, 라벤데일이 함락되었을 때, 시엘레이스 여왕은 - 그건 '별의 지배자'란 뜻의 이름이었는데 - 엄청난 짓을 했지. 성문을 열어 에스테이아 군대를 환영하는 척 하고는 성문을 잠근 채 불을 질러 버렸어. 물론 자기도 그 군대와 함께 타죽었지... 정말 무서운 여자였지."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이었어요?" "물론이야. 그 일로 사람들은 로데인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어. 그 소란을 틈타 용족과 사람들이 꽤 많이 도망쳤지. 그리고 그 중 상당수가 이 섬에 와서 에스테이아를 뒤집어 엎을 계획을 논했지. 여긴 바로 드래크로니안 - 그건 용족의 한 종류인데 - 족이 처음 레젠디아로 왔을 때 생겨났다는 전설의 땅이거든. 그들은 저승에서, 그러니까 땅 속에서 왔는데 지상으로 나올 문을 만들기 위해 실리사와 에퀴온이 화산 폭발을 일으켜 주었다더군. 그 폭발의 결과로 시지리스 섬이 생기고... 하여튼 그 때 그들이 이 지하수를 발견하고 수로로 이용한 거야. 용족들과... 인간들이. 사실 그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건 얼마 없었지. 이 배나 아까의 그 좁은 토굴 정도랄까..." "그런데 다 어떻게 됐나요?" "너도 알텐데. 영주 베릴이 - 물론 그 땐 영주가 아니었지만 - 라우더의 리반과 그 외의 용사들을 데리고 이리로 왔지. 그리고 섬에서 용들과 로데인 사람들을 쫓아냈어. 아니, 대부분 죽였지. 일부는 달아 났지만... 그 때 어린 용들과 사람들이 사용한 게 이 통로였지." "헤엣! 그럼 진짜 영주가 이 섬을 탈환했단 말인가요? 난 그것도 다 헛소문인 줄 알았지!" 제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허공을 노려보더니, 중얼거리듯 말했다. "켈 엘브린, 세이 펠 제이브린... - 약속이 깨어질 때, 두 종족 모두가 화를 입으리라! 로데인 왕가는 약속을 저버렸지. 그래서 로데인의 용족과 인간족 모두에게 재앙이 닥친거야." 로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로 말하자면 도대체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어쨋건 음식도 있고 괴물도 없으니 부족한 건 없는 셈이었다. "선착장이 보이는군."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하여간 눈도 밝아.' 하고 로이는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지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코 망보는 데 소질이 없는 편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 더 간 후에야 먼 곳에서 별처럼 빛나는 작은 불빛이 보였다. 어슴푸레하고 붉은 빛이었다. 점점 가까이 가면서, 그것은 모양을 갖추어 반원 모양의 작은 문으로 변했다. 매끈매끈한 바위로 만들어진 문이었다. 그리고 그 문 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이 보이고 있었다. "벌써 저녁놀이...?" 로이는 놀라서 중얼거렸다. "시간이 그렇게 된 줄 전혀 몰랐네!" 제피로스의 얼굴은 어두워져 있었다. 그가 말했다. "좋지 않군, 오르크들의 몸이 풀리기 시작할 때야." 물살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작은 배 이드릴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 문을 통해 파도가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피로스는 노로 균형을 잡으며 방향을 돌려, 동굴 안 모래밭에 배를 정박시켰다. 은이 부서진 것 같은 하얀 모래였다. 주위에는 로이가 타고 온 배와 똑같이 생긴 수십 척의 배가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다. 뒤집어진 배, 노가 어디론가 없어져 버린 배, 비스듬히 쓰러진 배 등, 단정하다고는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타고 오던 사람들이 이 배들을 대충 버려 두고, 어디론가 급히 가버린 듯한 인상을 주었다. "이제부턴 이걸 타라, 로이." 제피로스가 매우 낡은 듯한 가죽 덮개를 걷어내자, 그 밑에 평범 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나무 돛단배가 나타났다. 흰 빛이 누렇게 바랜 돛은 돛대와 함께 눕혀져 있었는데, 낡았지만 꽤 쓸만해 보였다. "서둘러야 해. 이제 곧 어두워지고, 그럼 오르크의 추격을 피할 수 없어." "...제피로스는 같이 안 가요?" 로이는 당황하여 물었다. "곧 따라갈거야." 하고 제피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오르크가 널 뒤쫓지 않는지 그것만 확인하고. 이런 배로 추격전 이라도 벌였다간 너무 결과가 뻔하니까." "...하지만..." "자, 로이, 시간이 없어. 이러다간 둘 다 죽고 말 거야!" 제피로스는 자신 넘치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오르크 따윈 내게 적수도 아냐. 내 실력은 너도 잘 알겠지?" 로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이상 그를 설득할 자신은 없었다. "내 망토는 네가 갖도록 해." 제피로스는 로이를 도와 배를 바다로 밀며 말했다. "괴물들한테서 보호해 줄 거다. 아, 그리고 이거!" 그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로이의 품에 던졌다. 로이가 배에 올라 그것을 열어 보니, 보석과 금화가 가득했다. "...이건...?" "원래 네 거잖아. 내 방에 놓고 갔더라. 의적이 그런 거 놓고 다니면 어디 쓰겠냐?" 제피로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고 있었다. 이윽고 로이도 마주 웃어 주었다. "빨리 쫓아와야 돼요! 오르크 따위한테 죽지 말고!" 제피로스는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으며 로이가 탄 배를 힘껏 밀었다. 배는 동굴을 빠져나가 붉게 물든 바다로 뛰어들었다. 로이는 점점 사라져가는 햇빛을 바라보며 서둘러 돛을 세웠다. (제 1장 끝 제 2장 <저승의 바람>으로 이어집니다) 제 2장 저승의 바람 (The Wind from the Hell) "하르크자엘!" "하르크자엘 님이 돌아오신다!" 라우더 성에서 망을 보던 오르크 경비병들은 경외가 섞인 목소리를 높여 소리쳐 알렸다.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는 보름달 한가운데,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는 작은 점이 보였다. 그 점은 점점 더 커지더니 성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용이 되었다. 검고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날렵한 몸집의 흑룡이었다. 왼쪽 날개의 흰 흉터가 달빛 속에 빛을 발했다. "하르크자엘!" 오르크들이 법석을 떠는 가운데 그 비룡은 의연히 성에서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내려앉았다. 달빛 속에서 내려앉은 용의 몸집이 서서히 줄어들었다. 오르크들이 달려갔을 때엔 이미 용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검고 큰 날개를 단, 인간의 모습의 키큰 청년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하르크자엘 님! 무사 귀환하셔서 다행입니다." 오르크 병사들은 앞을 다투어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올렸다. 청년은 고개만 까딱함으로써 그들의 인사에 간략히 답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나타난, 역시 인간의 모습을 한 젊은이를 보았을 때, 그의 얼굴에는 비로소 반가움이 나타났다. "보레아스! 별 일 없었겠지?" 보레아스라 불린 그 젊은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날개의 청년이 검은 머리칼에 온통 검은 옷으로 차리고 있다면, 그는 순백색으로 차려 입고 있었다. 긴 은발과 마법사들이 입는 흰색 로브가 바람에 날렸다. "저희들은 아무 일 없습니다, 제피로스 님... 그러나 노토스 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노토스... 그럴 줄 알았지. 아크트도 있겠지?" 제피로스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제피로스 님..." "걱정 마, 내가 몇 마디 하면 끝날 일이야. 그럼 잔소리 들으러 가 볼까?" 제피로스는 여유만만하게 말하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보레아스가 그 뒤를 따랐다. "이번엔 무슨 일입니까?" "작전상 오르크 몇이랑 하피 넷을 희생시켰지." 제피로스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러나 뒤에 남아 작아져 가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오르크들은 모두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르크자엘... 역시 '저승의 바람'이야." 누군가가 속삭였다. 제피로스는 어두운 라우더 성의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오르크 들이 이 성을 장악한 이후 횃불이나 등불을 다는 것은 금지되었다. 창문조차 두꺼운 판자로 막혀 버렸다. 그들은 빛을 싫어했으니까. 변절한 요정족(흔히 다크 엘프라 불리는)들을 위한 공간에만 희미한 등불이 허락되었다. 어쨌건 그들은 본래 빛의 종족이었으니 말했다. '라우더... 그래도 내가 처음 함락시켰을 땐 꽤 살만한 곳이었는데.' 제피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 때 라우더의 성은 횃불과 난로가 따스하게 빛나고 있었고, 성 밖은 푸르른 초원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앞으로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오르크 들이 무기를 만드는 검은 연기만이 황폐한 대지를 덮겠지. '이건 다 당신 잘못이야, 리반 아덴... 그렇고말고.' 알현실의 문을 지키던 오르크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길을 비켰다. 그는 서슴지 않고 알현실로 들어갔다. 알현실도 복도와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했다. 횃불은 두 개밖에 없고 약탈한 장식물들이 질서없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알현실을 보면 제피로스는 언제나 꼭 창고 같다는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공손히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렸다. "용의 지배자 노토스 님, 그리고 오르크 족의 군주 용맹하신 아크트 님, 종 하르크자엘이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노토스는 거대한 몸을 조금 일으켰다. 그의 두 개의 머리가 동시에 들려져 제피로스를 응시했다. 오른쪽 머리는 무표정한 얼굴로, 왼쪽 머리는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그의 곁에 앉은 아크트는 사실 꽤 거대하고 뚱뚱한 오르크였음에도 불구하고 노토스의 거구에 눌려 매우 왜소하게 보였다. 그는 경멸과 증오를 감추려 들지도 않고 제피로스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시지리스에 대해 보고할 일은 없는가, 하르크자엘?" 노토스의 우렁차고 느릿느릿한 말투가 알현실 안을 울렸다. "아룁니다. 시지리스의 영주 베릴은 명령대로 처치하였고 카야크 님의 은혜에 힘입어 섬도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이제 그 섬 안에 살아남은 인간은 없습니다." "뻔뻔스러운 놈!" 아크트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내가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은 동료를 죽이고 인간 꼬마를 도왔어. 할 말이 있나?" "그 인간 소년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이용 가치가 많은 아이 입니다. 때가 되면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그러니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오르크 중의 제왕..." "닥쳐! 이용 가치가 있어? 그래, 열 명이 넘는 오르크 용사와 하피 넷을 죽여야 할 만큼이나 이용 가치가 있다는 말이냐?" "바로 그렇습니다." 제피로스의 당당한 대답에 아크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의 얼굴만이 분을 못 참고 씰룩거렸다. "그 이용 가치란 게 무엇이지? 하르크자엘." 노토스가 물었다. 제피로스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아이가 바로 이디실의 주인입니다.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놀라움의 침묵이 그들을 감쌌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아크트였다. "그...그런...어리석은...! 네놈의 말을 누가 믿는단 말이냐, 하르크자엘! 네놈은 힐리온조차 찾아오지 못했어. 그런데 이디실을 찾고, 그 주인도 찾았다고? 노토스, 저런 거짓말쟁이는 혀를 뽑아 버려야 하오!" "그럼 믿지 마십시오." 제피로스는 여유 만만했다. "제가 없으면 어떻게 그 칼의 주인을 찾을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합니다만..." "그럼, 증거를 보여라! 그 칼을 찾았다는 증거를! 내 앞에, 이 아크트 앞에 내놔 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칼은 지금 제 수중에 없습니다." "이런... 얼간이같은! 그러고도 무슨 칼을 찾았다는 거야!" "꼭 수중에 있어야만 찾은 것은 아니지요." 제피로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그 소년이 어디에 있는지 언제든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 아이가 제 말을 따르도록 설득할 수 있습니다. 그 아이는 저를 믿고 있으니까요." 이제 아크트는 완전히 할 말을 잃고 우물거렸다. "그...그렇다 해도...어째서 오르크 용사들을 그렇게..." "그 소년이 저를 믿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계획은 성공했습니다. 오르크 용사들은 카야크 님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죽음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 충성심이 뛰어난 종족이니까요." 마지막 발언은 분명 비아냥거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크트의 반발을 완전히 무마시켰다. 그는 이제 완전히 침착해져서 짐짓 위엄있게 제피로스에게 말했다. "그대의 뜻은 잘 알겠다.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지만 다 그대의 충성심이 지극한 까닭이니 특별히 용서해 주지. 그러나 다음부터는 좀더 신증히 행동하도록, 하르크자엘." 제피로스는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이 하르크자엘, 아크트 님의 깊으신 은혜에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제 가도 좋다, 하르크자엘, 드래크로니안의 수장." 노토스가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피로스는 예의바르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올리고는 알현실 밖으로 나왔다. 오르크 병사들은 아까와 다름 없이 매우 정중하게 그에게 인사했다. 마치 그가 아크트와 노토스에게 인사했던 것처럼. 기다리고 있던 보레아스가 그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지었다. "별일 아니라고 했잖아."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나는 탑에 다시 올라가 보겠어. 오늘은 어쩐지 높은 곳에 있고 싶군. 너는 돌아가도록... 아, 그리고 망토를 하나 더 만들어 줘." "그러겠습니다, 제피로스 님. 그런데 전의 것은...?" "...잃어버렸어. 재수없는 에스테이아 졸개들과 싸우다가." 제피로스는 간단하게 대답한 뒤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오르크나 다크 엘프들은 그의 모습만 보여도 얼른 자리를 비켰다. 그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 더니, 결국 아무 옥상에나 뛰쳐나가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올랐다. 다크 엘프 한 명이 그 모습을 도취한 듯 바라보았다. 제피로스는 언제나 그의 자라였던 첨탑 꼭대기,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곳에 가 섰다. 그는 양팔을 활짝 펴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희박했으나 오르크의 악취도, 무기를 연마하는 탄내도 피비린내도 나지 않았다. 그는 한참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 항구도시 켄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해변, 어두운 동굴 안에 세 명의 젊은이가 걸어가고 있었다. 동굴 안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았으며, 공기는 축축하고 불쾌했다. 발밑은 끈적끈적한 진흙이었고, 간혹 물이 고인 채 썩어가는 얕은 웅덩이가 나타나기도 했다. 앞에서 횃불을 든 채 걸어가는 두 청년은 깡마르고 키가 작지만 건강해 보이는 모습과, 수수하지만 깔끔한 차림새가 영락없는 켄윌 토박이였다. 그러나 그들 뒤를 따르는 다른 한 청년은 그 고장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앞에 가는 두 청년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여행을 오래 했는지 매우 낡은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검게 그을은 얼굴과 햇빛에 바랜 머리털, 그리고 젊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노장의 표정이 무척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거친 삶을 살아온 것 같은 그의 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에는 어쩐지 고귀한 자의 위업같은 것이 느껴졌다. "...더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안내하던 청년 중 한 명이 갑자기 멈추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바로 곁에서 가던 다른 청년도 발을 멈추었다. 그는 아무 말 없었으나, 공포에 질린 표정은 똑같았다. 그들을 따라오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 보시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 이렇게 말하며, 그는 낡은 망토를 젖히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았다. 그 검은 무척 크고 길었으며, 남루한 옷차림에는 어울리지 않게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는 훌륭한 보검이었다. 다 떨어져 가는 가죽으로 싸맨 손잡이에는 날개 달린 사자의 조각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빛을 발하는 듯 날카로운 칼날에는 읽을 수 없는 낯선 문자까지 세공되어 있었다. 그 청년의 말에 나머지 두 사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꼭 부탁드립니다... 랜스 님만 믿겠습니다." 그들은 그 청년에게 떠맡기듯 횃불을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오던 방향을 되돌려 동굴 입구를 향해 달음질쳤다. 랜스라 불린 그 청년은 지체 없이 계속 동굴 더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깊이 들어갈수록 동굴 안의 공기는 탁해졌고, 더 습해졌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르르... 그르르..." 무슨 동물이 으르렁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누군가가 코를 고는 소리 같기도 했다. 깊숙히 들어갈수록 그 소리는 분명해졌다. 랜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럽게, 그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르르... 그르르..." 이제 그 소리는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크게 들렸다. 사람의 두개골과 알 수 없는 동물들의 뼈 조각이 발에 채였다. 진흙에 반쯤 덮인 옷자락이 보이기도 했다. 랜스는 숨을 죽이며 마지막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큰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안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커다란 호수였다. 물은 흙탕물이었고, 지나치게 녹조류가 많아 더러워 보였다. 그 호수 한가운데, 둥근 섬같이 생긴 물체가 솟아 있었다. 그러나 섬은 아니었다. "그르르... 그르르..." 그 이상한 소리가 그 물체에서 나오고 있었고, 게다가 그것은 소리에 따라 규칙적으로 부풀었다 줄어들기까지 했다. 그 물체는 거대한 물뱀의 일부였던 것이다. "...검은 물뱀이라... 내가 찾던 놈은 아니군." 랜스는 실망한 듯 중얼거리며 칼을 바로 잡았다. 물뱀은 적이 나타났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꼼짝 않고 이상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랜스가 발 밑의 해골을 집어 호수 속에 던지자, 그 물뱀은 금방 거대한 머리를 치켜들었다. 머리 하나가 랜스의 키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녹색의 거대한 눈을 부라리며, 침입자를 찾았다. '관찰력이 없는 녀석이군.' 랜스는 망토 안에서 작은 단도 하나를 집어 그 뱀의 머리를 향해 던졌다. "캬-오!" 물뱀의 비명에 동굴 안이 온통 울렸다. 동굴의 천정에서 돌덩이들이 떨어지기까지 했다. 물뱀의 왼쪽 눈에 단도가 정통으로 맞았던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물뱀은 금방 랜스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입을 크게 벌린 채 돌진했다.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독이 섞인 끈끈한 녹색 침이 흘렀다. 랜스는 날쌔게 모퉁이 뒤로 돌아서면서 그 뱀의 공격을 피했다. "캬아아아!" 물뱀은 괴성을 지르며 랜스가 선 모퉁이를 그대로 지나쳐, 무서운 속도로 반대쪽으로 기어갔다. 랜스는 기다리지 않고 검으로, 기어가는 뱀의 옆구리를 찔렀다. "캬악!!" 가속이 붙은데다 바닥이 미끈거려서 쉽게 멈출 수 없었으므로, 뱀은 칼에 찔린 채로 몇 발짝 앞으로 더 나아갔다. 그랬기 때문에 그 옆구리에는 제법 길고 커다란 상처가 나고 말았다. 랜스는 얼른 칼을 뺀 후 있는 힘을 다해 동굴 밖으로 뛰어나왔다. 물론 물뱀도 전속력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동굴 밖의 밝은 했빛 속으로 뛰쳐들자, 그 물뱀은 괴성을 지으며 당황했다. "크아아아!" '햇빛 속에서는 앞을 못 보는군 그럴 줄 알았지!' 래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날렸다. 휘잉! 검은 날렵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 물뱀의 이마 한가운데에 박혔다. 뇌를 다친 물뱀은 아무 수리도 내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정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 거대한 머리는 모래사장 위에 힘없이 털썩 떨어졌다. "...너무 쉽군." 랜스는 오히려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죽은 물뱀 에게 다가가, 증거로 지느러미의 조각을 잘라내어 작은 주머니에 담았다. 그는 죽은 물뱀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로 향했다. 그리고는 의뢰를 받은 객주로 가 지느러미가 든 주머니를 내던지듯 건네주었다. "괴물은 처치했소. 약속한 보수는?" 랜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물었다. 반신반의한 얼굴로 쳐다보던 사람들은 여관 주인이 주머니에서 아직도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지느러미 조각을 꺼내자, 모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소문 대로군.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저 괴물을...!" 그러나 랜스 자신은 아무런 긍지도 만족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담담하게 다시 보수만을 요구했다. 여관 주인은 감탄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에게 돈 주머니를 내주었다. "정말 놀랍군!" 켄윌에서 한다하는 칼잡이인 이안이 랜스의 어깨를 툭 치며 아는 체를 했다. "나이도 별로 들어 보이지 않는데... 나도 엄두를 못 내던 그 괴물을 말야! 이름이... 랜스랬지? 좋아, 오늘 내가 한 턱 낼..." "됐소." 랜스는 관심 없다는 듯 짧게 말했다. 그리고 주인장에게 무심하게 물었다. "방은 있겠지?" 여관 주인은 말없이 열쇠를 건네주었다. 랜스는 한 손으로 열쇠를 받더니 식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먹을 것을. 아무거나 좋아." 하고 그가 주문했다. "...저 친구, 왜저래?" 이안은 기가 막히다는 듯 물었다. 주인장은 고개를 저었다. "실력은 알아 주는데 용에 미친 놈이야. 검은 용 얘기만 나오면 귀가 바짝 서지. 다른 것엔 전혀 관심을 나타내지 않아. 왜 저러는지 알 게 뭐야." 주인은 빵과 고기 스튜를 접시에 담아 직접 랜스에게 가져다 주었다. 랜스는 간단히 감사를 표하고는 먹기 시작했다. ...어떤 소년의 목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기 전까지. "...그래서 내가 칼을 빼고, 놈들이랑 싸울 준비를 하니까, 글쎄 놈들이 다 도망가지 뭐에요 - 정말 죽을 힘을 다해 도망가더라구요. 그래서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보니까, 글쎄 엄청 큰 새까만 용 한 마리가..." 랜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당장 주인장을 불러 물었다. "저 애는 누구지?" "며칠 전 시지리스에서 탈출한 아이 입니다... 저렇게 탈출한 이야기를 해 주고 밥을 얻어먹죠. ...언제까지 그럴는지는 모르지만." 랜스는 더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벌떡 일어나 그 소년에게로 성큼 다가갔다. 소년이 놀란 듯,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다. 밤색 머리칼과 푸른 눈을 가진, 평범하지만 귀염성이 있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열 너댓 쯤 될까. "용이 날개가 있었나?" 하고 랜스가 대뜸 물었다. "...예?" 소년은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물었다. "날개가 있었냐고. 검은 용이었다고 했잖아. 검고 큰 날개가 있었나?" "...예... 날개가 있었죠..." "이봐, 얘기 계속 해! 밥 사줬으면 값을 해야 할 거 아냐." 소년의 옆에 앉아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람이 짜증을 부렸다. 랜스는 그를 흘끗 보더니, 금화 한 잎을 던졌다. "이거면 밥값은 되고도 남겠지. 그리고 넌 계속 얘기해 봐. 용이 어떻게 생겼지?" 소년의 눈은 금화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눈을 돌려 정면으로 랜스를 쳐다보더니, 담대하게도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남의 밥벌이를 이렇게 방해하면 되나요, 아저씨. 그나저나 난 공짜로는 얘기 안 하는 주의라서..." 랜스는 어이없다는 듯 당돌하게 손을 내민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이윽고 그의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겁이 없는 녀석이군." 그는 중얼거리며 금화 한 닢을 꺼내어 그 소년의 손에 올려놓았다. 소년은 그의 마음이 변할까 봐 걱정이라도 되는 듯, 잽싸게 금화를 나꿔챘다. "이거면 충분해요!" 하고 그 소년이 말했다. "전 나흘 전 시지리스에서 도망쳐 왔고, 이름은 로이에요. 아저씨 이름은...?" "용 이야기나 해 봐." 랜스는 짧게 말하며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로이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하고 생각하는 듯 잠시 랜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다시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신나게 떠들기 시작했다. "아~, 그 용! 정말 대단한 놈이었죠. 크기가 집채만하고 뿔이랑 발톱은 칼보다도 더 날카로운 게, 시뻘건 눈을 막 부라리면서..." "붉은 눈이었나?" "에... 자주색이죠, 정확히 말하자면. 빨간 보라색..." "자주색이 어떤 색인지는 나도 알아. 뿔은? 하나였나, 아니면 두 개였나?" "둘이요. 머리 위에 이렇게 나 있었죠." 로이는 자기 이마 위에 손가락 으로 뿔 모양을 그려 보았다. "새하얀 게 엄청 날카로와 보였어요." "날개는... 날개가 있었어?" 랜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점차 커지는 것을 느꼈다. "예... 새까만 날개요. 엄청 컸죠." "흉터... 날개에 흉터가 있지 않았나?" 로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 한쪽 날개에 하얀 흉터가 있었는데... 어떻게...?" 랜스는 더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나무 식탁을 주먹으로 쾅 치며 벌떡 일어섰다. "놈이다... 이제야 찾았군!" 그의 난데없는 행동은 그 여관에 있던 사람들 모두를 놀라게 하고 말았다. 앉아서 식사를 하던 사람들, 잡담을 나누던 사람들, 값을 지불하던 사람들... 모두가 휘둥그래진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가장 놀란 건 아무래도 그의 바로 옆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던 로이였다. "...그럼..., 전 이만 실례..." 로이는 미소를 지으며 슬쩍 그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얘기 잘 듣다가 이게 무슨 난리야...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네... 하여간 요샌 되는 일이 없다니까...' 로이는 더이상 그 낯선 사람과 상대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물론, 호기심이 조금 동하기는 했지만. "기다려." 랜스는 단호하게 말하며 로이의 어깨를 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아... 저기... 더이상은 아는 게 없는데요..." 로이는 당황하여 더듬거렸다. '큰일났네... 단단히 잘못 걸렸나봐...!' "저기... 생각해 보니까, 용은 그렇게 크지는 않고..." 로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알아." 랜스는 미소를 지었다. "용 치고 그렇게 크지는 않았겠지? 그냥 기껏해야 사람 키의 세 배 정도... 하지만 새까맣고 날개가 거대했지?" "그... 글쎄요... 그때는 도망치느라 바빠서..." "왼쪽 날개엔 칼에 베인 흉터가 있고. ...그 놈은 하르크자엘이야. 드래크로니안 중에서도 가장 냉혹한 놈이지." '...하르크자엘!' 그 이름이 로이의 머리에 들어와 박혔다. 하르크자엘, 븐명히 그 이름이었다. 에이론드가, 그리고 오르크들이 겁에 질려서 불렀던 이름. "그 이름을 들어 봤군?" 로이의 표정을 살피던 랜스가 물었다. "...도망칠 때,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아저씨는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죠?" "모를 리가 없지." 랜스는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10년 동안 그놈을 찾아다녔으니까..." "시... 십 년이요?" 로이는 완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요?" 랜스는 대답하려다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자신을 쳐다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깨달았다. "나가서 얘기하자, 꼬마야." 하고 말하며, 그는 로이를 데리고 여관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여관의 뒷마당으로 쓰이는 공터로 왔다.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었고, 바람이 제법 찼으므로 나와있는 사람은 없었다. 풀벌레와 부엉이 외엔 그들 뿐이었다. "너... 이름이 로이랬지?" 하고 랜스가 물었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말투였다. "예. 그런데..." "난 랜스야. 그 용을 찾아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1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녔지." "그 용이... 아버지를 죽였어요?" 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내가 보는 앞에서... 놈의 칼에 아버지가 쓰러지시는 걸 난 보고만 있었어. 아마 네 나이쯤 됐을 때일 거다..." "...용이 칼을 잡았다고요?" 로이는 점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놈... 하르크자엘은 보통 용이 아니었어. 드래크로니안이었지. 용의 모습도 가지고 있지만, 본모습은 사람과 같아. ...놈이 용으로 변해서 떠나는 걸 보고야 나도 비로소 알았지." "...드래크로니안." 로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까지... 그 용만 찾느라 10년을 보내신 거에요?" "겸사겸사였지." 랜스는 소리내어 웃었으나 그 웃음소리는 별로 밝지 않았다. "헌터가 된 건 놈을 죽일 만한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였어. 난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에도 놈과 싸웠지만... 역부족이었지. 있는 힘을 다했는데 겨우 놈의 날개에 상처를 낸 게 고작이었어. 하지만 이번은 다를 거야." "...날개에... 그럼..." 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흉터는 내가 준 거지." 로이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엔 미친 사람처럼 흥분하더니, 그 다음엔 그 용이 아버지의 원수라고, 그래서 10년 동안 쫓아다녔다고 하고, 다음엔 그 용이 사람으로 변한다질 않나... 그러더니 이젠 그 날개에 흉터낸 게 바로 자기라고...? ',,,날더러 그걸 믿으란 거야?' "...그 용을 이제라도 찾아서 다행이네요. 그럼 전..." 로이는 여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다시 랜스가 그를 불러세웠다. "기다려! 부탁이 있어." "...뭔데요?" "어렵지 않은 거야. 함께 시지리스로 가자. 그리고 날 그 용이 나타난 자리로 안내해 줘." "...뭐라고요?" 로이는 거의 비명을 질렀다. "시지리스로? 미쳤어요? 거긴 지금 오르크에 괴물 천지란 말이에요!" "보수는 섭섭하지 않게 주겠어." 랜스는 태연히 제안했다. "보수 문제가 아니라니까요. 난 거기서 목숨 걸고 탈출했어요. 그런데 다시 거기로 돌아가라고요? 난 못 해요. 다른 사람 찾아봐요!" 로이의 거절도 완강했다. 랜스는 가만히 자기 앞에서 버티고 소리를 지르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저만했었지...' "로이... 그 용은 많은 사람을 죽였어. '하르크자엘'이란 '저승의 바람' 이라는 오르크 말이지. 오르크들의 전설에 나오는, 저승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야. 모든 생물을 저승으로 데려간다는... 우리 말로 하면 저승사자 쯤 되겠지. 그런 이름을 얻을 만큼 놈은 많은 사람을 죽였어. 이건... 단지 나 하나만의 복수가 아냐." "그래서요?" 로이는 지체없이 물었다. "요샌 다 죽고 죽이는 세상 아녜요? 저 혼자만 유난떨다가 일찍 갈 생각 없네요." "...네가 알던 사람들 중에 그 용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을 거다." "그 용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고 다른 이유로 죽은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난 살았고, 더 살고 싶어요." "너도 언제 하르크자엘의 희생양 중 하나가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니?" "지금 당장 시지리스로 가서 죽느니 차라리 몇 년 후에 그 용에게 죽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요." "넌 아무 생각도 안 하고 사냐?" 드디어 랜스는 소리를 질렀다. "오르크와 용들에게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죽어가는데! 특히 그 하르크자엘이 얼마나 많은 용사들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넌 너만 살면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냐?" "...용사들이라." 로이는 차분히 중얼거리며 랜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많이 들은 소리네요... 난 용사님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도리 없지만. 난 상관 없어요. 용들과 싸우다 죽지 않은 용사들은 언젠가 인간들과 싸우다 죽는다고 내 친구가 그랬어요..." "네 친구?" 랜스는 놀라서 물었다. "그것 참 우연이군. 내가 아는 사람도 그런 말을 했었는데. 지금은 에이론드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에이론드라고요?" 로이가 갑자기 소리치듯 물었다. "에이론드 아저씨를 안단 말예요?" "물론... 그는 라우더의 마법사였지. 그런데 네가 어떻게..." "맙소사. 에이론드 아저씬 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구요!" 로이는 완전히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런 데서 에이론드 아저씰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가 막힌 세상이야!" "...에이론드가...시지리스에 있었어? 지금은 어딨지?" 랜스는 아직도 얼떨떨한 상태에서 물었다. 로이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셨어요. 저하고 함께 시지리스를 탈출하시려다..." "하르크자엘이 에이론드까지 죽인 거로군."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오르크와 싸우다가 힘을 너무 많이 쓰셔서 돌아가셨는데..." "그게 그거야. 하르크자엘은 보통 용과 달라서 항상 오르크들을 끌어 들이지. 분명히 시지리스에서도 그랬을 거다." 로이는 침묵을 지켰다. 그 용이 오르크들을 끌어들였다면... 그 말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하르크자엘은 로이의 원수도 되는 것이다. 에이론드 아저씨와 지금은 생사를 알 수 없는 여관 주인 아저씨, 그리고 상냥한 누나 같은 에밀리아... 그리고 랜스가 분명 에이론드와 이는 사이였다면... '에이론드 아저씨는 내가 자기 친구에게 야박하게 구는 걸 본다면 화내실 거야...' "...얼마 주실 건데요?" 하고 로이가 침묵을 깨고 물었다.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불러!" 랜스는 갑자기 환해진 얼굴로 말했다. "...많이는 필요 없고... 금화 열 닢이면 안내해 드리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뭐지?" "어두워 지기 전엔 무조건 빠져나와야 해요. 아침에 갔다가 해 지기 전에 돌아오는 거에요." 랜스는 소리내어 웃었다. "보기보다 겁이 많군! 좋아, 그럼 거래는 이루어진 거다." 로이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중얼거렸다. "무슨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 에이론드 아저씨 때문이라고요... 그 양반은 죽어서도 날 괴롭힌다니까!" ------------------------------------------------------------------------------ 랜스는 아직 졸린 눈을 비비며 선착장으로 향했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해가 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허공 속에서 파도 소리와 바다 냄새만이 올라왔다. "랜-스! 늦잠꾸러기네요! 그래서 어떻게 원수를 갚겠다고!" 로이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랜스는 눈을 돌려 벌써 배 한 척을 골라 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로이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렸던 어제 그 모습을 완전히 사라지고, 오히려 소풍 가는 어린아이처럼 들뜬 모습이었다. "제발 그렇게 원수, 원수 하면서 떠벌이지좀 마." 랜스는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너야말로 어젠 벌벌 떨더니 오늘은 왜 새벽녘부터 난리냐? 혹시 돈 더 받으려고 쇼한 거 아냐?" "빨리 가야 빨리 오죠!" 로이는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저 애송이한테 속은 것 같아...' 하고 생각하며, 랜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저씨! 주인 아저씨이-!" 로이가 큰 소리로 부르자 선착장 건물 안에서 중년의 깡마른 사내가 부시시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며 나왔다. "뭐야...?" "일행이 왔어요. 돈 받으셔야죠!" 배 주인은 랜스를 흘끗 보고는 손을 내밀었다. "열 냥만 주쇼. 배를 무사히 돌려주면 다섯 냥은 그냥 돌려드리지." 랜스는 아무 말 없이 돈을 지불했다. 그러나 로이가 또 끼어들었다. "아저씨 초보네~. 깍지도 않고!" "예끼, 이 녀석아. 남의 장사에 초치지 말어!" 배 주인은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반 농담조로 로이를 꾸짖었다. 로이는 다시 깔깔거렸다. "...다 됐으면 어서 가자." 하고 랜스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배 주인은 머쓱해져서 다시 돌아갔으나, 로이는 개의치 않고 몸을 굽혀 가져온 짐 안을 뒤졌다. "보채지 마세요. 잊은 거 없나 확인해야죠. 도시락하고... 아, 먹을 거랑 약 사는데 20 디나르 들었는데." 20 디나르라면 금화 두 닢 분이었다. 랜스는 이곳의 물가가 그렇게 비싸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봐, 꼬마야..." "꼬마가 아니라 로이에요. 설마 식비 부담도 안 하겠단 건 아니겠죠?"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오늘 지나면 다시 안 볼 놈인데...' 랜스는 포기했다는 듯 로이에거 금화 두 닢을 던졌다. "이제 됐냐?" "거의요. 이것만 입고요..." 로이는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있는 듯이, 실실 웃으며 커다란 망토를 꺼내어 걸쳤다. 랜스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새까만, 결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까만 망토. 길고 가볍게 날리는 모습이 커다란 날개와도 비슷한... 그래, 그 날개와 꼭 닮은 망토였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멋지죠?" 로이는 눈치도 없이 자랑하듯 물었다. "마법 망토래요!" "...어디서 났지?" "친구가 줬어요. ...얼굴 빛이 왜 그래요? 내일 갈까요?" "...됐어." 랜스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 망토는 꼭 입어야 하나?" "물론이죠. 마법 망토라니까요. 오르크들에게서 날 지켜 줄 거래요." 로이는 그 망토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그럼 됐어. 이제 출발하자." 랜스는 차갑게 말하며 배에 뛰어올라 그 배를 항구에 고정해 둔 줄을 풀었다. 로이도 먹을 것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망토를 펄럭이며 배 위로 펄쩍 뛰어올랐다. "출발!" 로이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배는 서서히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아갔다. 그러나 돛을 내리자 배는 육풍을 타고 금방 가속이 붙었다. 동쪽에서 해가 떠 오고, 그 해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시지리스 섬의 오똑 솟은 모습이 보였다. "...와아!" 하고 로이가 탄성을 질렀다. "정말 굉장한데. 옛날엔 우리 섬이 이렇게 멋진 줄 몰랐어..." "시지리스 - '빛 속에 선 자'라는 뜻이지." 하고 랜스가 대답했다. "멋진 이름이지. 용족들이 탐낸것도 무리가 아냐..." "...원래 용족 섬이 아니었나요?" "아니, 원래는 우리 인간들의 땅이었어. 너무 오래 전에 용족이 빼앗아서 많은 사람이 모를 뿐이지... 넌 그런 말을 누구에게서 들었지?" "...친구한테서요. 어쨋건 중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괴물들 땅이 됐잖아요." 로이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태연했다. 오히려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즐기고 있는 것 같기까지 했다. '...모르고 있는거야, 오르크의 땅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모르는 게 낫겠지...' 해가 떠오르자 날은 금세 밝아졌다. 시지리스 섬도 성큼 눈앞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녹색으로 덮인 화산섬의 모습이 아까와는 또 다른 매력을 풍겼다. "속력을 늦춰." 하고 랜스가 말했다. "오르크들이 망을 보고 있을거야." 그러나 바로 그 순간, 그의 바로 눈앞으로 화살이 휙 날아갔다. 그는 놀라서 섬을 바라보았다. 해안절벽 위에 장엄하게 우뚝 선 성의 성벽 위에서, 인간같이도 보이고 짐승같이도 보이는 물체들이 꼬물거리고 있었다. "...오르크로군!" 랜스가 신음을 내뱉듯이 중얼거렸다. "...쟤들은 잠도 안 자나." 하고 로이가 투덜거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은 투덜거릴 틈도 중얼거릴 틈도 없었다. 화살들이 그들을 향해 비오듯 쏟아졌기 때문이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배 난간 안으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머리 위로 쉭쉭 소리를 내면서 정신없이 화살들이 날아갔다. 돛은 금방 누더기가 되고 말았다. "다섯 냥 다 돌려받기는 어렵겠는데요." 하고 로이가 말했다. "넌 지금 그게 걱정이냐?" 랜스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괜히 신경질이야. 자기가 여기 와야 된다고 고집피우고 나선..." 랜스는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저 녀석은 어떻게 된 놈이야?!' "일단 배를 섬에서 좀 떨어뜨려야 될 텐데..." 랜스가 말을 떼기가 무섭게, 갑자기 불화살이 돛대에 박혔다. 찢겨진 돛이 금방 활활 타올랐다. "불화살을 쏘다니... 무식한 녀석들!" "...제 생각엔 아주 똑똑한 짓인 거 같은데요." "너 제발 입좀 안 다물래?" 불화살이 다시 떨어졌다. 배의 선체에, 그리고 돛대에 다시 불화살이 꽃혔다. 나무 배는 금방 불덩이가 되었다. "일단 헤어지고 저 섬에 가서 만나는 게 어때요?" 하고 로이가 제안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군..." 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로이는 바다로 첨벙 뛰어들었다. 점점 불이 번져가는 배 위에는 랜스 혼자만이 남아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애를 더 쫓아다니다간 나만 손해볼 것 같아..." 랜스는 기운없이 중얼거리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랜스의 머리 위로 화살이 정신없이 날아갔다. 그는 물 속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시지리스 섬을 향해 헤엄치는 그의 뒤로, 숯덩이가 된 배가 서서히 갈아앉고 있었다.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로이는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망투가 몸에 감겨 좀 거추장스럽기는 했으나, 생각했던 것처럼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섬인데...한 번 가려면 이 난리를 쳐야 하다니.' 로이는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이 많이 아픈 것은 아니었다. 뭐, 어쨌든, 사람 사는 데가 여기 하나는 아니니까. 오르크들의 화살은 수면 위로 기세 좋게 날아들더니, 힘없이 물 속에 잠겨 버렸다. 불화살들도 마찬가지였다. 물 속에 있으면 안전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언제까지나 잠수만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푸하!" 로이는 얼굴을 물 밖으로 내밀며 숨을 들이마셨다. "쿠르크! 투아!" 갑자기 바로 옆에서 오르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이는 질겁을 해서 그 쪽을 돌아보았다. 오르크들이 배를 내어 로이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엉성하게 만든 나룻배였지만, 속력은 꽤 빨랐다. 게다가 파도 때문에 로이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점점 섬 쪽으로, 다시 말하면 오르크들의 배 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아르그르! 아르그르!" 오르크들이 외쳤다. 배는 모두 세 척, 네 마리의 오르크들이 각각의 배에 타고 있었고, 특히 선두에서 로이를 향해 돌진하는 배의 뱃머리에는 갑옷을 입은 오르크 한 마리가 기세 좋게 긴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히이익!" 놀란 로이는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엉겁결에 다시 물 속으로 머리를 박아 넣었다. 바닷물 속에 잠긴 로이의 얼굴 바로 옆으로 창이 아슬아 슬하게 비켜갔다. 로이는 겁이 나서 더욱 더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수압이나 호흡 따위를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로이의 머리 위로, 배의 밑창이 했빛을 가리며 지나갔다. 로이는 숨이 턱턱 막혔으나 계속 물 속에 머물러야 했다. 나머지 두 대의 배가 앞의 한 척을 곧바로 따라왔기 때문이다. 그 두 척마저 로이의 머리 위로 지나가자, 비로소 로이는 헤엄쳐 나가며 물 밖으로 머리를 쳐들었다. "푸우! 죽을 뻔 했네!" 오르크들의 배는 로이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멀리 있었고, 게다가 로이에게서 등진 채 계속 섬 반대편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로이는 한숨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타고 온 배는 흔적도 없었고, 랜스의 모습 역시 보이지 않았다. '죽지는 않았겠지, 뭐... 그 무서운 용을 죽이겠다고 큰소리 치는 사람 인데.' 로이는 속 편하게 생각하며 유유히 섬 쪽으로 헤엄쳐 갔다. 물론 오르크들이 버티고 있는 성을 통해 갈 수는 없으니, 적당히 떨어진 해안으로 가야 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로이는 움직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특히 달리는 것과 헤엄치는 것이라면. '그건 그렇고 정말 행운이었어.' 하고 로이는 헤엄치며 생각했다. '물론 오르크들이 낮에 잘 못 본다는 건 알지만, 바로 밑에 있는 나를 눈치 못 채고 그렇게 가버리다니...' 그 망토! 갑자기 그 생각이 로이의 머리를 스쳤다. 제피로스가 준, 지금 로이의 등에 걸쳐 있는 검은 망토. 제피로스도 그걸 입고 있으니 에이론 드 아저씨조차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니 오르크들도 그 망토를 입고 있는 로이를 눈치챌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데, 이 망토!" 로이는 신이 나서 소리치며, 좀더 빨리 헤엄쳐 갔다. 로이가 섬의 외진 해변에 도착하자,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오히려 다행한 일이었다. 오르크들은 어둠에 익숙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대낮이란 그들에게는 한밤중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의 한밤중은 오르크들의 대낮이었지만. 게다가 아까보다 휠씬 따뜻해져서, 흠뻑 젖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별로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깨끗하고 하얀 백사장을 보자 로이는 오르크들의 침략이 모두 꿈일 뿐이고, 이제부터라도 다시 이 섬에서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파도소리와 모래밭에 맞닿은 숩에서 들리는 새 소리 뿐이 었다. 그러나 그런 고요함도 잠시, 갑자기 거칠게 수풀을 짓이기는 발소리가 들려오고, 새들은 겁에 질려 푸드득 날아가 버렸다. 로이는 허둥대다가 긴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 망토로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숨긴 채 납작 엎드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로이는 그것이 오르크들의 발소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크보다 훨씬 몸집이 크고 훨씬 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걷는, 인간보다도 훨씬 큰 생물의 발소리였다. "여-기에 뭐-언가 있-냐?" 놀랍게도 그것은 인간 말로 말했다. 그러나 도저히 인간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혼탁하고 낮고 우둔한 목소리였다. 로이는 호기심이 동한 나머지 두려움도 잊고 고개를 조금 들어 그것을 바라보았다. 녹색이 섞인 회색의, 돌처럼 두꺼운 피부. 인간의 흉내를 내다 만 듯한 찌그러진 얼굴. 그리고 무섭도록 길고 튼튼한 팔다리와, 거의 벌거벗은 차림, 키는 인간 남자보다 머리 서너 개는 더 클 것 같았다. '...트롤...!' 로이는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말로만 듯던 트롤들이, 세 마리 씩이나 로이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바-." 하고 다른 한 트롤이 대꾸했다. "이- 멍-청한 녀-석아, 네- 누-운으로 보-고-도, 모-르냐-아?" '무서운 건 둘째치고 저놈들 말하는 걸 듣고 있으려니 답답해서 죽겠군...' 하고 로이가 생각했다. "나-아는 머-엉처-엉이-가, 아-냐-아! 네-가 머-엉청해-, 부-!" "아-냐, 네-가 머-엉처-엉이-야, 바-!" "부-, 바-, 너희-, 두-울 다- 멍-청-이-야-아!" "너-언, 더- 머-엉처-엉해-, 비-!" '...저놈들 안 갈 건가...?' 로이는 서로 멍청하다고 싸우는 트롤들을 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셋의 정말로 '멍청한' 모습에, 두려움 따위는 잊은 지 오래였다. '...쟤네들이 알아서 가긴 다 틀린 것 같으니 내가 자리를 비켜 줘야겠군...' 이렇게 생각한 로이는 대담하게 기어가기 시작했다. 로이의 움직임에 풀잎이 좀 부스럭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트롤들은 개의치 않고 싸움을 계속했다. "비-, 이- 멍-청-아-아!" "바-아보-오-!" "새-애-대-애-가-아아-리-이-!" '...저 말투라니. 차라리 말을 하질 말지!' 로이는 완전히 안심했다. 그들에게서 빠져나가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로이가 우연히도 썩어가는 사람의 해골을 발견하고, 비명을 지르지만 않았 다면 말이다. "으아악!" 로이의 날카로운 비명은 트롤들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뒤늦게 로이는 정신을 차리고 어디론가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세 마리의 트롤들이 그 긴 다리로 쿵쿵 달려와 로이의 목덜미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로이는 졸지에 트롤의 한 팔에 의해 번쩍 들어올려졌다. "와-," 하고, 로이를 잡고 있는 트롤 바가 말했다. "우-우리-이가, 자-악은 이-인간으-을 자-압았-어!" "마-앗이-있겠-다-!" 라고 부가 말했다. '마...맛있겠다고? 으악! 어떻게 해서든 그건 막아야 돼!' 당황한 로이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는 엉겁결에 소리쳤다. "아..안돼요! 전 너무 작고 말라서 먹을 것도 없죠. 하지만 오르크 무리에게 갖다준다면 오르크들이 먹을 걸 많이 드리지 않을까요?" "오-오르크," 하고 비가 말했다. "그-으래-! 오-르크드-을, 이-인간, 좋-아해-애!" "그-래, 오-르크드-을하-안 테, 갖-다 주고오-, 먹-을 거-엇, 달-라고 하-아자-아!" "그-래, 이- 이-인간, 너-무-우 자-악아-!" '빙고!' 하고 로이는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런데 말이죠," 로이는 짐짓 걱정이 된다는 듯 물었다. "누가 절 잡았다고 오르크들한테 말씀하실 건데요?" "내-애가-아, 잡-았지-이!" 로이를 들고 있는 바는 당연하다는 듯, 누런 녹색의 이를 한껏 드러내고 웃었다. 도저히 미소라고는 볼 수 없는 미소였지만. "아-아냐-아!" 하고 부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내-가, 머-언저 봐-았으-니까-아, 내-가 자-압으-은 거-야!" "내-가 잡-으-은 거-야!" 하고 비도 끼어들었다. "내-애-애-가-, 부-보-오다, 머-언저 봐-았어!" "아-냐! 내-가 자-압 아-았어-!" "부-, 이 사-아기-이꾸-우-우-운!" "다-아-악, 쳐! 내-애가, 잡아-았어-!" 트롤들은 다시 싸우는 데 정신을 빼았겼다. 로이는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허리에 찬 단도를 소리나지 않게 빼어들었다. "크와아아악!!" 바는 괴성을 지르며 로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로이의 단검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서 거무스름한 녹색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펄쩍 뛰어내려, 아무 방향으로나 마구 달렸다. "나-아-쁘-은, 이-인간! 바-를 아-아프-으게- 해-앴어-어!" 바가 소리를 지르며 로이를 따라왔다. 이어서 부와 비도 역시 로이를 잡으려고 괴성을 지르며 쫓아왔다. 트롤은 생각보다 빨랐다. 움직임도 그렇게 느리지 않았지만, 무었보다 사지가 길어서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로 성큼성큼 따라왔다. 그저 트롤이 둔하고 느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로이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쁘-은 인-간!" 로이의 바로 뒤에 다다른 바는 소리를 지르며 큰 주먹을 휘둘렀다. 로이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으나, 풀 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세 마리의 트롤은 넘어진 로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로이는 용감하게 칼을 뽑아 들었다. "좋아! 트롤 따윈 무섭지도 않아! 올테면 와 봐!" 그러나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열심히 아까처럼 교묘히 기회를 포착해서 달아날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그 때,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로이의 머리 위로 커다란 바다 수리가 한 마리 지나갔다. 로이는 즉흥적으로 소리쳤다. "맙소사! 하르크자엘!" 트롤들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들은 금방 새파랗게 질려 굳어진 채,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로 아우성을 쳤다. 무릎을 꿇고 엎드린 놈도 있었고, 입을 딱 벌리고 정신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놈도 있었다. 가장 먼저 진상을 파악한 것은 부였다. "이- 바-아-보-오-드-을!" 하고 그는 소리쳤다. "또-오-오-, 그-이-인가-안한테- 소-옥았자-않아!" 그제서야 트롤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뒤늦게 로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로이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세 트롤은 다시 서로 상대방 때문에 '그 인간'을 놓쳤다고 탓하며 싸우기 시작했고, 지쳐서 돌아갈 기운조차 남지 않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웠다. 한편, 로이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빨리 도망가지 않았다. 이제 속력으로 트롤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로이는 망토 를 뒤집어쓰고, 살금살금 트롤들의 곁을 지나 숲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속이 뒤집히는듯한 말투로 싸우던 트롤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비로소 로이는 몸을 펴고 기지개를 켰다. "아! 정말 트롤 따위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로이는 홀가분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감사하는 듯이 등에 걸친 검은 망토를 쓰다듬었다. '이런 걸 주다니... 제피로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설마 탈출에 실패하진 않았겠지...? 그래, 제피로스는 칼싸움도 잘 하는데다, 이상한 비밀 통로까지 많이 아니까 문제없이 탈출했을 거야. 그나 저나, 그 랜스란 사람을 어서 찾아야 될 텐데...' 로이는 두리번거리며 숲을 걷기 시작했다. 로이가 어렸을 적에는 곧잘 와서 놀고 야생 과일도 따 가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상하게도 낯설고 어딘지 위험스럽게 느껴졌다. 아까 만난 트롤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오르크 땅이 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이렇게 좋은 곳에 다시는 못 오게 되다니... 슬픈 일이야.' 이런 생각을 하며 한눈을 팔고 걷던 로이는, 갑자기 어떤 움직이는 물체에 부딪혔다. "으악!" 로이는 놀라서 재빨리 물러서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로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을 더듬었다. "래...랜스?" "그래." 물에 푹 젖은 랜스는 한심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사람을 물 속에 버려 두고, 이제 겨우 만나니 '으악'이라고?" "그...그땐 어쩔 수 없었잖아요. 오르크들이 몰려왔으니까..." 로이는 해죽 웃으며 말했다. "그래~, 배까지 타고 몰려오더군! 넌 멋지게 혼자 빠져나가고. 결국 내가 다 처치했다." "...점심 먹을까요?" 할 말이 없어진 로이는 어뚱한 소리를 꺼냈다. 랜스는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그래, 전부 너 좋을 대로 해라. 널 안내원이랍시고 데려오다니, 내가 잠깐 돌았었지..." 결국 둘은 숲에 주저앉은 채 바닷물에 젖은 음식물을 먹었다. 로이는 열심히 트롤에게서 탈출한 일들을 과장을 섞어 떠벌였고, 랜스는 묵묵히 듣고 있기만 했다. "...너, 검술을 배웠니?" 로이의 말이 다 끝나자, 랜스는 난데없이 물었다. 로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검술은 무슨... 그런 건 귀족 집안 도련님들이나 배우는 거죠. 전 그런 거 배울 생각도 안 해 봤어요." "...이상하군. 트롤의 가죽은 웬만한 검술로는 벨 수 없는데..." "...칼이 잘 드나 보죠." 로이는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해 버렸다. 랜스는 금방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 하하 웃어버리고 말했다. "하하하... 그럴 수도있겠지. 넌 아마 그런 데 선천적으로 소질이 있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런 사람들이 간혹 있으니까. 그런데 에이론드가 네게 검술은 가르쳐 주지 않았어?" "에이론드... 장님 에이론드 아저씨가요?" 로이의 물음에 랜스는 좀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에이론드가... 눈이 멀었었군..." "예, 라우던지 어디서 싸우다가 그렇게 됐댔어요." "라우더... 그건 나도 알아." 랜스의 목소리는 왠지 침울했다. "이제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에이론드도... 라우더는 어둠의 종족들 손에 들어가 버리고..." "라우더가 어떻게 됐는데요?" "그 날... 그러니까 에이론드가 눈이 먼 날, 라우더의 인간족들은 오르크와 용의 침략에 맞서 싸웠지. 라우더는 천연요새에다 군 물자 보급의 요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륀 카데스, 즉 북부 평원을 지키는 군사요지이기도 해서 언제나 마족들이 노렸어. 그러다 하르크자엘이 오르크들을 이끌고 쳐들어 온거야. 인간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졌고... 라우더는 마족들 손으로 넘어갔어. 지금으로부터 약 십 년 전 일이지... 그리고 지금까지, 라우더는 계속 마족들의 땅이야." "라우더...거기가 랜스의 고향이에요?" 랜스는 잠시 로이의 눈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우더를 되찾으려고 하르크자엘을 죽이려는 건가요?" "그런 건 아냐... 전에 말했듯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지. 하르크자엘이 죽는다고 마군 전체가 죽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랜스는 큰 일을 준비하는 듯,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오르크들은 땅을 죽게 만들지. 얼마 전 라우더에 가 보았던 첩자가... 라우더는 이제 죽음의 땅이 다 되었다고 하더군. 회복되기 힘들 거야..." 로이도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시지리스의 녹색 숲을 둘러본 다음, 걱정스럽게 물었다. "여기도... 그렇게 될까요?" 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이는 그것이 긍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남은 음식을 가죽 주머니에 다시 꼭꼭 꾸리면서, 로이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지어 말했다. "가야죠, 그 하르크자엘을 찾으러." ----------------------------------------------------------------------------- "...이디실을 가진 인간이 시지리스로 돌아왔다고...?" 아크트는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이 노란 빛을 발했다. 보고를 올린 오르크는 고개를 들며 얼굴을 일그려뜨려 미소를 지었다. "예. 보고된 바에 의하면... 트롤 중 한 마리가 이상한 단검에 의해 상처를 입었습니다. 아시다시피 트롤의 피부는 웬만한 무기엔 끄떡도 안 하는데, 그 단검은 스치기만 하자 피가 마구 솟아났다고 합니다. 게다가... 그 단검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 예전에 하르크자엘이 도와주었다는 그 인간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드디어!" 아크트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입을 벌려 웃자 커다랗고 누런 송곳니와 시뻘건 잇몸이 위협하듯이 드러났다. "드디어 그 하르크자엘 놈에게 본때를 보여줄 기회가 생겼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인간을 사로잡아 와야 해. 하르크자엘에게 누가 진짜 '저승의 바람'인지 똑똑히 보여줘야지!" "쿠푸-헤!" 갑자기 어둠 속에서 조용하고 그르렁거리지만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인, 몸집이 작고 마른 오르크가 아크트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쿠푸-헤 아크트, 모든 오르크의 주인이시여. 하지만 무슨 수로 그 인간이 이디실을 뽑도록 설득할 것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날 바보로 아는가, 두아스!" 하고 아크트는 기분이 나쁜 듯 소리를 질렀다. "인간들이란 다루기 쉬운 족속들이야. 굶기고 때리면 안 하는 짓이 없지. 일단 그 인간을 잡아오기만 해. 충실한 내 노예로 만들 테니!" 두아스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물러났다. 그러나 그런 그의 얼굴엔 불만의 표정이 스쳤다. "시지리스의 총책임자는 누구지?" "가프입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하고 보고를 올린 오르크가 재빨리 대답했다. "두아스, 빨리 다크엘프 드림스피커들을 불러 가프에게 그 인간을 잡으라고 해." 아크트가 명령했다. "반드시 사로잡으라고, 죽기라도 하면 용서 않겠다고 말해!" "그러겠습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두아스는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물러가기 직전, 아크트는 비로소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 그리고 일을 마친 다크엘프들은 처치해 버려. 사고로 위장해서. 이 일이 하르크자엘의 귀에 들어가면 또 골치아파질 테니까." "...염려 마십시오, 쿠푸-헤 아크트..." 두아스는 고개를 숙인 채 물러났다. 그리고 부하들에게 다크엘프 드림스피커들을 불러오라고 명령하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갔다. "하르크자엘을 속인다고요?" 모든 설명을 들은 그의 심복이 놀라서 물었다. 두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지만 그 분은 쿠푸 노토스도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는 '저승의 바람'이 아닙니까?" "그래, 그것이 더 쿠푸-헤를 노하게 만든 것 같아. 쿠푸-헤께선 자신이 하르크자엘이라 불리고 싶으신지도 모르지. 게다가..." "...?" "하르크자엘과 그의 종족들은 마치 '열쇠들'이 자신의 소유물인 양 행동하고 있으니. 물론 전설에도 그것들을 만든 것은 드래크로니안의 조상이라고 나와 있긴 하지만..." "...드림스피커들을 부르겠습니다." 하고 심복이 말했다. "하지만... 하르크자엘은 천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도 그냥 드래크로니안일 뿐이야. 용의 모습과 인간의 모습을 오가는 종족,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지." 두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설명했다. "...언젠가는 우리 오르크들의 종이 되어야 할 종족에 지나지 않아." ------------------------------------------------------------------------ 시지리스 섬에서는 해가 이미 서산으로 기울고 있었다. 로이와 랜스는 지친 채 터덜터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결국, 하르크자엘인지 뭔지는 여기에 없는 것 같군요." 로이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목소리에 실망이 가득했다. "그렇게 큰 날개를 가졌으니 훨훨 날아가 버렸겠죠. 날개가 없는 우리도 이렇게 싸돌아 다니는데." 랜스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분에 찬 목소리로 자신에게 화를 내며 중얼거렸다. "...하르크자엘이 여기에 있는데 난 켄윌에서 그따위 물뱀이나 잡으러 다니고 있었다니...!"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로이는 위로하듯 말했다. "또 나오겠죠, 뭐... 특히 요새는 마족들이 더욱 극성이잖아요. 일이 이렇게 됐으니 보수는 반만 받을께요." "그럴 필요 없어. 너 때문에 놈이 떠난 것도 아닌데. 놈이 계속 여기 있으리라고 생각한 내가 바보였지." 랜스는 실망을 털어버리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나... 역시 오르크들을 습격해서 배를 빼앗아야 하는 건가?" "아!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로이는 신이 나서 소리쳤다. "제가 전에 이 섬을 탈출할 때 쓴, 비밀 통로가 있어요. 거기에 배도 있다고요!" 랜스는 미심쩍다는 듯이 로이를 바라보았다. "시지리스의 비밀 통로라면..." "용들의 비밀 통로죠!" "엄밀히 말해서 드래크로니안과 그 친구들의 비밀통로지. 그런 데를 네가 안다고?" "일단 따라 오기만 하세요!" 로이는 자신 만만하게 앞장섰다. 랜스는 가볍지 못한 마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시지리스의 비밀 통로... 분명 로데인 최후의 날에 드래크로니안과 로데인 잔당이 사용한, 그 수로를 말하는 거야. 아버지도 알아내시지 못한 그 길을... 저 애가 안다는 건가?' 로이는 날듯이 달려 얼마 전 제피로스와 갔던 그 길을 되짚어 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길눈이 어두운 편은 아니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날은 점점 어두워져, 숲에는 음산한 그림자가 깔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여기에요!" 로이는 당당하게 소리치며 수풀을 헤치고, 그 작은 토굴이 있던 자리를 드러냈다. 그러나 그 토굴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냥 잡초 무성한 보통 흙비탈일 뿐. 잡초들은 몇 달 전에 심어진 것처럼 무성했고, 일부러 위장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로이는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어... 분명히 여긴 줄 알았는데... 아닌가...?" "여기가 맞을 거야." 랜스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여기가 맞았을 거야, 그 때는. 아마 그 굴은 달의 운동에 따라, 아니면 기온 변화에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거나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굴일 거야. 그런 마법이 있다는 것을 들은 적 있어. 네리엔이라고 했던가... 드래크로니안은 많은 비밀 통로를 그런 식으로 만들어 놓지. 그 규칙은 그들 자신에게는 움직이지 않는 길만큼이나 자연스럽지만, 인간들한테는 호란스럽기 그지없지. 그래서 시지리스의 드래크로니안들은 멸족되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그럼 어쩌죠?" 로이는 금방 풀이 죽어서 물었다. "어쩔 수 없지. 오르크들한테서 한 척만 빌리자고." "으으... 그건 정말 싫어..." "마찬가지다! 네놈들에게 빌려줄 배 따윈 없어!" 갑자기 수풀 숙에서 탁하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언어로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어색하기 짝이 없는 발음이었다. "오르크...!" 랜스는 적개심 가득한 목소리로 외치며 당당히 칼을 빼어들었다. 로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단도를 쥐고는 겁에 질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숲은 이미 어두어졌고, 오르크의 모습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 불리해.' 하고 로이는 생각했다. '오르크들은 다 보일텐데 우린 하나도 볼 수 없으니... 게다가 난 칼 따윈 다룰 줄도 모른다고!' 로이의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오르크 두 마리가 로이를 향해 뛰어들었다. 로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바작 굽혔고, 그런 그의 등 위로 랜스의 긴 칼이 휙 스쳐 지나갔다. "크억!" 그 오르크들은 피를 토하며 멀리 나가떨어졌다. "제법인데!" 하고 아까의 그 탁한 목소리가 소리쳤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언제까지 그러고 싸울 수 있을까? 그 꼬마를 내게 넘겨라, 인간! 그러면 내 영지에 들어온 걸 한 번만 용서해 주지!" "웃기는 소리 마!" 로이가 뭐라 대답할 새도 없이, 랜스는 당당하게 외쳤다. "난 동료를 넘기는 짓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잊은 모양인데, 여긴 용사 베릴의 영지다, 이 침략자!" '쟤네들이 왜 날 찾지? 혹시 바보 아냐?' 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두려움도 잊고 피식 웃었다. '하여간 나쁜 기분은 아닌데... 왕자님이라도 된 거 같잖아.' 그러나 언제까지 웃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거무스름한 형체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풀 속에서, 나무 뒤에서... 사람의 키 만한 무기를 든 생물들... 족히 서른 마리는 되는 오르크가 로이와 랜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해 보자, 이건가!" 랜스는 미소를 지으며 칼을 고쳐 잡았다. 조금 긴장한 것 같기도 했으나, 그것보다는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로이 쪽을 슬쩍 바라보며 씩 웃고는 물었다. "로이, 네가 이렇게 유명인사인 줄 미처 몰랐다! 왜 저놈들이 저렇게 널 잡으려고 기를 쓰는 거냐?" "...저도 좀 알았으면 좋겠네요." 로이는 힘없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도 랜스처럼, 칼을 쥔 손에 힘을 주고 공격에 대비할 태세를 갖추고는 있었지만, 도저히 랜스처럼 태연해 질 수는 없었다. '이를 어쩌나... 에라, 모르겠다. 랜스는 용하고도 싸운다니까 잘 알아서 해 주겠지, 뭐.' 오르크들이 포위망을 점점 좁혀 왔다. 랜스와 로이는 바짝 긴장한 채 서로 등을 맞대고 서 있었다. "크와악!" 오르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둘에게 달려들었다. 랜스는 여유있게 제일 앞에서 달려드는 오르크의 배를 검으로 푹 찌르면서, 오른쪽에서 달려오고 있는 놈을 발로 차 버렸다. 그리고 나서 왼쪽에서 뛰어드는 오르크 두 마리의 머리를 차례로 잘라 버렸다. 그러나 로이는 그처럼 사정이 좋지 못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단도는 완전히 멋으로 쥔 채 그를 공격하는 오르크들 사이를 정신없이 도망 다니고 있는 2중이었다. 물론 로이를 공격하는 오르크들이 랜스와 싸우는 오르크들처럼 칼과 도끼와 창을 가지고 덤볐다면 그렇게 피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맨손으로, 혹은 기껏해야 밧줄과 그물을 가지고 로이에게 덤볐을 뿐이었다. 그러니 도망 다니는 데에는 이골이 난 로이는 그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도망 다닐 수 있었다. '으으... 내가 왜 이 섬에 다시 와서 이 고생이람... 이게 다 그 에이론드 아저씨 잘못이야!' 위잉~. 로이가 한참 열심히 오르크들 사이를 헤집고 도망다니던 중, 갑자기 로이의 손에 있던 단검이 이상하고도 약하게 진동했다. 칼날에서는 푸르스름하고 야릇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로이가 처음 그 단검을 영주관 지하실에서 보았을 때, 그것을 훔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그 빛이었다. '그래... 이런 식으로 도망만 다니면 뭘 해?' 로이는 갑작스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달려오는 오르크를 향해, 대담하게 칼을 휘둘렀다. 검술을 배운 적이 없는 로이의 자세는 엉성하고 허점 투성이였으며, 칼을 휘두르는 몸짓도 힘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 오르크는 거의 두동강이 난 채 흙바닥에 나가떨어졌다. "이디실!" 오르크들 사이에서 공포에 찬 외침이 번졌다. "아 이디실 카르! 이디실!" '이디실?' 랜스는 깜짝 놀라 로이를 바라보았다. '전설의 검, 마지막 열쇠인 이디실... 그것을 로이가 가졌단 말인가?' 오르크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로이에게로 위세당당하게 달려 들었던 오르크들은 뒤로 물러서고 있었고, 공격은 눈에 띄게 소극적이었다. 아예 등을 돌리고 도망가는 놈까지 있었다. 그리고 로이의 모습 또한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아까의 도망 다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제는 자신만만하게 이디실을 마구 휘두르며 오르크들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가 칼을 휘두를 때마다 검붉은 피가 튀고, 오르크들이 땅 위로 쓰러졌다. "주르 테! 아그르! 아그르!" 아까 랜스와 이야기했던 그 목소리가 큰 소리로 외쳤다. 랜스는 이제 그 오르크의 주인인 오르크를 볼 수 있었다. 보통의 오르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빛나는 황금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오르크였다. 갑옷은 잘 손질되어 있고 매우 아름답게 세공 되어 있었으나, 몸에 잘 맞지 않아 약탈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갑옷은 키가 크고 사지가 길고 굵은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갑옷이었다. 그리고 가슴 한가운데 새겨진, 창에 찔린 비룡의 문장은... "용사 베릴의 갑옷!" 랜스는 흥분한 나머지 큰 소리를 질렀다. '베릴 영주를 죽이고 갑옷을 빼앗았군... 비열한 놈!' 랜스는 자기 앞을 막고 있던 두 마리의 오르크를 사정없이 베어 버리고 나서, 그 갑옷을 입은 오르크 앞으로 뛰어들었다. "네가 대장이냐? 용사 베릴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 랜스가 분노가 넘쳐나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오르크는 이와 잇몸을 드러내며 험상궂게 웃었다. 그리고는 거의 랜스의 칼만큼이나 넓고 긴 칼을 훌쩍 뽑았다. "어리석은 인간, 이 시지리스의 영주 가프 님이 죽여주겠다!" 그 오르크는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랜스도 지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시지리스의 영주는 아무나 되는 줄 아는가? 이 더러운 오르크 놈!" 쨍! 두 개의 칼이 맞부딪혔다. 순간적으로 랜스는 휘청거렸다. 오르크 가프의 힘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하하하! 이제 무서운 줄 알겠나? 이 하룻강아지!" 가프는 다시 험상궂게 웃으며 랜스의 머리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랜스는 다시 받아냈으나, 그 진동으로 두어 발짝 뒤로 물러났다. '정말 무식하게 힘센 녀석이군. 힘 대결은 안 되겠어!' 가프가 다시 공격해 왔다. 이번에는 랜스는 그의 칼을 받아 막는 대신, 가볍게 옆으로 뛰어올라 공격을 피했다. 그러자 가프는 화가 났는지, 이상한 괴성을 지르며 더욱 살벌하게 칼을 휘둘러 댔다. 랜스는 다시 옆으로 비껴서며 피하면서, 이번에는 칼을 움직여 가프의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냈다. "이... 이... 건방진 놈! 푸! 사아크!" 가프는 거의 이성을 잃고 오르크 말과 인간 말을 섞어서 마구 욕을 해 대며 랜스를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되면 승부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쿵! 랜스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던 가프의 칼날은 허공만을 가른 채 땅에 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어느새 몸을 피한 랜스는 가프의 옆에서부터 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하르크르 테!" 오르크 가프는 피를 토하며 오르크 말로 비명을 질렀다. 오르크 말을 전혀 모르는 랜스도 그것이 '죽이지 말라'는 애원인 것은 알 수 있었다. "하나만 알려주면 목숨은 살려주지. 하르크자엘은 어디 있나?" 랜스가 냉정하게 물었다. 가프의 얼굴엔 두려움이 스쳤다. "그... 그 분은... 어디든 계십니다... 저승의 바람이니까..." "허튼 소리 마! 그걸 모른다면 난 널 살려둘 필요가 없어. 알아들었어?" 랜스가 칼을 들고 위협하자, 가프는 그제야 다 포기한 듯 말했다. "언제나... 여행 다니시는 분... 그러나... 반드시 가이니크로 돌아옵니다..." "가이니크? 그게 어디지?"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랜스는 자신의 칼날에 비친 오르크의 모습을 보았다. 칼을 든 채, 공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오르크를. 거의 반사적으로 그는 몸을 피했다. 그러나 그 오르크의 표적은 랜스가 아니었다. 그는 랜스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가프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싹둑 베었다. "이르가! 이르가! 푸! (배신자! 배신자! 죽일 놈!)" 하고 그 오르크는 째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랜스를 보고 서툰 인간 언어로 소리쳤다. "하르크자엘의 적! 죽인다! 하르크자엘, 만세!" 랜스가 뭐라고 짐작하기도 전에, 그 오르크는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러나 가프와는 달리 그 오르크의 실력은 그다지 좋지 못해서 랜스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랜스는 능숙하게 그 오르크의 칼을 막아낸 다음, 그의 배를 쉽게 찌를 수 있었다. 다른 오르크들이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이미 대장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그들은 랜스의 능숙한 칼솜씨에 형편없이 나가떨어졌고, 날이 서서히 밝아오자 슬금슬금 도망쳐 버렸다. 동쪽 바다에서 하늘을 붉히며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그 숲에 남은 것은 오르크들의 시체와 지쳐 숨을 몰아쉬는 랜스 뿐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털썩 주저앉던 랜스는, 자신이 베릴의 갑옷 때문에 흥분해서 중요한 것을 깜박 잊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이...?"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걱정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계속) 로이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차갑고 습한 돌바닥 위에 누어 있었으므로 몹시 추웠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 때문에 답답했다. 게다가 뒷통수가 매우 아팠다...마치 깨지기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만져 보니 - 다행히 묶여 있지는 않았다 - 커다란 혹이 나 있었다. '아, 그래, 머리를 맞았었지.' 로이는 그제서야 정신을 잃기 전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냈다. 잘 알 수는 없지만 그 망할 놈의 칼을 뽑고 또 난리법석을 떤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랜스는 죽었는지 도망갔는지 보이지를 않고, 자기만 그 단도를 들고 오르크들의 시체 사이에 서 있었다. 제정신을 차린 로이는 물론 어쩔 줄을 모르며 당황했고, 그러다가 오르크들의 그물에 잡혀 버린 것이다. 오르크들은 다시 로이가 그 난리를 칠까 봐 겁이 났는지, 잡자마자 뭔가 둔탁한 걸로 머리를 쳐 기절시켜 버렸다. "으휴~, 그 칼을 훔친 이후로 어째 되는 게 없어!" 로이는 한숨을 푹 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돌바닥이 너무 차가워서 더이상 누워있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다행히 머리 말고는 맞은 데가 없는 것 같았다. 오르크들은 인간을 잡으면 마구 때린다고 들은 로이에게는 다행스럽고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리고 옷도 좀 더러워진 것 빼고는 그대로였다. 제피로스가 준 망토까지. 그것이 로이를 기쁘게 했다. 물론 칼은 빼앗겼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되었다. '여길 빠져나가더라도 그 단검은 두고 나가야지!' 9 로이는 굳게 결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수없는 칼일 뿐만 아니라, 그 칼만 잡으면 내 정신이 아닌 게 진짜 귀신들린 칼 같아. 그 꿈도 그렇고...' 로이는 시지리스를 탈출한 이후에도 그 칼의 꿈을 여러 번 꾸었던 것이다. 이상스런 석상이 있는 신전, 열광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단검을 높이 쳐든 채 "이디실!"이라 외치는 붉은 머리의 남자 - 그는 보면 볼수록 제피로스와 닮아서, 몽롱한 상태에서는 제피로스에 대한 기억과 뒤죽박죽이 될 정도였다. 로이가 그 단검과 꿈과 제피로스와 자신의 한심한 상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있는 도안, 머리 위에서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슨 무거운 짐승이 걸어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면서 커졌다. 그리고 이윽고 저 멀리 높은 곳에서 자그마한 횃불이 보이기 시작했다. 횃불을 들고 있는 것은 갑옷을 입은 오르크였다. 어둠을 좋아하는 그들도 완벽한 암흑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므로 약간의 빛을 언제나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 오르크는 돌계단을 내려오고 있었고, 그의 머리 위로 돌로 된 벽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듯한 돌계단이 보였다. 그가 다가옴에 따라, 로이는 그와 자신 사이에 놓인 철창을 확실히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지하 감옥이었다. 그리고 비교적 깨끗하고 널찍한, 짚으로 된 침대 까지 딸린 독방에 로이는 갇혀 있었다. 그것은 대단한 특별대우임에 틀림없었다. 대부분의 다른 죄수들은 로이와는 멀찍이 떨어진 감방에 제대로 앉을 수도 없이 바글바글하게 갇혀 있거나, 더 운이 나쁠 경우에는 바닥 밑의 낮고 좁은 감방에 갇힌 채 좁은 철창 사이로 손가락만 내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수들은 오르크가 과반수였으나, 인간이나 난쟁이의 모습도 꽤 보였다. '...날 특별한 포로라고 생각하는군.' 로이는 영문도 모르면서 우쭐해졌다. 횃불을 든 오르크는 다른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사를 들고 있었다. 갓 구워 낸 고기였다. 그 자신이 먹을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오르크는 불로 9익힌 음식을 먹지 않으니까. 그는 그 음식을 보고 아우성을 치는 다른 죄수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 접시를 로이에게 가져왔다. "이이크르!" 그는 철문 밑바닥에 있는 좁은 구멍으로 그 요리를 거칠게 밀어 넣으며, 명령하듯 말했다. 로이는 어안이 벙벙해져 물었다. "이거 나 주는 거야?" "이이크르!" 오르크는 다시 한 번 반복했다. 횃불에 눈이 부셔서인지, 아니면 다른 일로 화가 나서인지 가뜩이나 못생긴 얼굴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니까 먹으란 소리지?" "이이크르!" "...우리말로 안하면 나 그냥 먹는다?" "이이크르! 이이크르! 요!" "...그럼 먹지, 뭐." 로이는 용감하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오르크는 만족한 듯이 보였다. 고기엔 전혀 간이 맞추어져 있지 않았고 약간 탄 듯한 맛이 났으며, 숟가락이나 포크 따위는 전혀 없었으므로 손으로 잡고 뜯어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과분했다. 다른 죄수들은 모두 굶고 있었으니까. "물 좀 갖다 줘." 오르크가 가려고 하자, 로이는 대담하게도 요구했다. 오르크는 알아듣지 못한 듯 멍청한 표정으로 로이를 바라보았다. "물 말야, 물." 로이는 손으로 물을 마시는 흉내를 내어 보였다. 오르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횃불을 감옥 안에 꽂아둔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로이는 식사를 잠시 중단한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죄수들이 먹고 싶어하는 표정이 너무 역력했으므로,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나누어주고 싶어도 그럴 방법이 없었다. 로이의 독방과 그들의 감방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말도 건네기 어려울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단 하나, 로이의 독방의 문 바로 앞의 바닥에 뚫린 구멍에 갇힌 인간족의 죄수 빼고는. 로이는 손으로 잡아뜯어 그 고기를 반으로 잘랐다. 좀 야만적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는 그 죄수에게 소리치며 그 고깃조각을 던졌다. "아저씨, 이거 드세요!" 그 죄수는 손을 철창 안으로 내밀어 덥석 그 고기를 받았다. 사실 그는 너무 마른데다 얼굴이 온통 허연 수염으로 덮였으며, 누더기를 걸치고 있어서 나이도 잘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를 한껏 드러내고 웃는 표정만은 로이에게도 분명히 보였다. "고마워... 고마워! 착한 젊은이군." 그는 다 쉰 목소리로 우물거리는 듯이 말했다. 로이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말할 수 있으세요?" "암, 암, 알고 말고! 인간 말, 오르크 말, 고대어, 다 할 줄 알지. 난 위대한 학자거든!" "아, 예... 그러세요." 로이는 반신반의하며 어물어물 대답했다. "날 안 믿는군?" "그럴리가요." "하지만 난 위대한 학자인 걸. 연금술사에 마법사이기도 하고. 왕의 고문관 이기도 했지. 나는 위대한 블라드노스도스란 말야. 에스테이아의 초대 황제 아트레암 1세때부터 충성을 맹세했고 그 마녀 시엘레이스도 봤지. 정말 미녀였어. 하지만 원래 장미는 가시가 있는 법이거든. 젊은이도 주의하는 게 좋아." "...충고 고맙습니다." 로이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완전히 맛이 갔군.' 하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착한 젊은이, 시엘레이스 정도면 그 가시에 찔릴 만 하지. 그 살결, 그 금발, 그 붉은 입술! 기억하라고, 시엘레이스의 혈통은 남아 있으니까. 위험한 여자, 아름다운 여자! 그 마녀의 자손이 남아 있어. 키가 크고 금발과 붉은 입술을 가진 아름다운 마녀들! 로데인이 끝났다고? 그 마녀를 꼭 빼어닮은 자손들이 이렇게 거리를 활보하는데?" "...황제 폐하께 그렇게 전하죠." "황제? 안 돼, 그건 안 돼! 정말로 현명하지 못한 짓이야. 내가 바로 황제에게 그 소릴 했다가 이렇게 갇혔거든. 처음엔 에스텔에 있었지. 그렇지만 황제가 날 너무 무서워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쫓겨온 거야. 오르크들이 성을 점령했다길래 풀어줄래나 했더니 다시 가두더군. 왜 그랬는 줄 알아? 날 무서워하니까! 하르크자엘 놈도 날 무서워하지. 나, 위대한 블라드노스도스는 뭐든지 알거든! 그 놈의 약점까지! 히! 히! 히!" 그 죄수는 기괴한 소리로 웃었으나 로이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로이는 건성으로, 반 농담 삼아 물었다. "그 하르크자엘의 비밀 하나만 가르쳐 주실래요?" "안 돼, 안 돼!" 그 죄수는 깜짝 놀라 펄쩍 뛰며 소리쳤다. "하르크자엘,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 놈은 이 블라드노스도스도 죽일 거야. 수천 년을 살아온 나까지도 말야! ...왜 그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어. 전에는 상냥했었는데... 물론 성인은 한 꺼풀 밑에 악마를 숨기고 있다는 말도 있지만." "...그럼 뭘 말씀해 주실 수 있는데요?" "모두, 모두!" 하고 그는 다시 그 기괴한 웃음소리를 냈다. "난 모두 알아! 자넨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하지만 전부 안다고! 그래, 젊은이, 자네가 그 칼의 주인이란 것도 알지... 그 가증스런 칼, 이디실!" "이디실!" 그 말에 로이의 귀가 번쩍 틔었다. 로이는 그에게 가능한 한 가까이 다가가 쇠창살을 잡고 애원하듯 물었다. "그 칼에 대해 얼마만큼 아세요? 말씀해 주세요, 제발!" "몰라, 몰라, 아무것도 몰라. 대체 어느 인간이 이디실에 대해 알겠어? 네 번째 페울론, 마지막 페울론! 물론 힐리온에 대해서라면 알지. 시엘레이스의 허리에 꽂혀 있던, 그 빛나는 검 말야. 그녀 자신처럼 아름다우면서 치명적이지. 그리고 난쟁이들의 카자룬, 요정들의 엘미어! 글라노우스가 화친의 표시로 준 것들. 아름답고 강한 것들. 드래크로니안이 섬기는 머리 둘 달린 괴물 신이 어둠의 땅에서 만든 것들... 하지만 이디실은, 아아, 이디실은 아무도 모르는 거야. 글라노우스가 신전을 만들어 깊이 깊이 감추어 두었지. 아무도 쓸 수 없게!" "글라노우스가 누구죠?" "불의 사자. 붉은 옷을 입고 불 속에서 뛰쳐나왔지. 그 자리에 빛 속에 선 자, 시지리스가 생겨났고. 글라노우스는 어둠의 땅을, 그의 고향을 좋아하지 않았어. 해도 달도 없었거든. 그래서 드래크로니안들을 이끌고 이 세계로 뛰쳐나온 거야." "그래서... 그래서 로데인으로 갔나요? 그럼 로데인엔 실제로 용족과 인간이 함께 살았나요?" 로이는 흥분해서 물었다. 그러나 의외로 그 죄수의 얼굴은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로데인! 로데인! 그건 내 잘못이 아냐. 애당초 그들은 그런 꿈을 꾸지 말았어야 해! 약속은 깨어지게 되어 있었다고! 인간과 용족이... 아니, 젊은이, 하르크자엘은 어디 갔지?" "...갑자기 웬...?" "아냐, 됐어. 그가 오면 그렇게만 말해 줘. 내 잘못이 아니었다고. 그러니 약속을 깬 자에게 화내고 에스테이아에게 화내고 내겐 화내지 말라고!" "...그러죠, 뭐." 로이는 머릿속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 힘없이 대답했다. '으이그... 내가 저 사람에게 왜 그딴 걸 물어봤을까...' 로이는 말없이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그 죄수는 로이가 나누어 준 고기를 뜯어먹으며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약속과 분노에 대해서, 그리고 자기 탓이 아니라는 데 대해서. 조금 지나자 그도 기운이 빠졌는지 조용해졌다. 머리 위에서 다시 쿵쿵거리며 오르크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로이는 기대에 차서 그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물을 가져왔나?' 그러나 아까 로이에게 음식을 가져다 준 그 오르크가 아니었다. 훨씬 몸집이 크고 단단하게 무장한, 두 마리의 오르크가 로이의 앞에 버티고 섰다. 그들은 거친 동작으로 로이의 독방 문을 따고는, 서툰 인간 언어로 천천히, 그러나 엄숙하게 말했다. "쿠푸께서 너를 보자고 하신다, 인간." (계속) 로이는 두 오르크 병사의 감시 겸 호위를 받아 큰 방에 들어섰다. 바닥을 빈틈없이 덮은 붉은 비단 카펫과 방 안 가득한 귀중한 가구들은 이 곳이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들이 살던 곳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오르크들에게 점령된 지금, 무용지물이 된 촛대는 멋으로 서 있고, 방 구석에서 작은 등불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방 안의 중앙, 분명히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안락의자에는, 어색하도록 화려하게 차린 오르크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식탁이 가득 차려져 있었는데, 먹다 남은 음식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두 오르크 병사는 로이를 그 오르크의 앞으로 끌고 갔다. "자네가 이디실의 주인인가, 인간?" 놀랍게도 그 오르크의 입에서는 능숙한 인간 언어가 튀어나왔다. "아... 예." 로이가 대답했다. "나는 시지리스의 새 영주, 쿠푸 오드다. 쿠푸 가프가 죽은 후부터, 내가 이곳을 지배한다." "에... 축하해요. 그럼 여긴 아직 시지리스인가요?" 쿠푸 오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는 영주인 나의 집, 시지리스 영주의 성." '...그럼 난 영주관 지하 감옥에 갇혔던 거로군. 그 경비 대장, 소원 성취했으니 죽었어도 한은 없겠네...' 로이는 이렇게 생각하며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드는 말을 이었다. "너는 위대하신 쿠푸 헤, 라우더에 계신 아크트께 보내진다. 오늘 해질녘에 출발한다." "그... 그래요? 아크트가 누군데요?" "위대하신 쿠푸-헤. 모든 오르크의 지배자!" 쿠푸 오드는 흥분하여 소리쳤다. 로이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그거 아주 영광스런 일이지만... 그런 분께서 저같은 하찮은 인간을 만나 주실까요?" "물론이다, 인간. 너는 특별하다. 이디실을 가졌으니까. 너는 쿠푸-헤를 위해 열쇠로 봉인을 푼다." "아... 누가 봉인됐는데요?" "카야크 - 어둠. 드래크로니안이 봉인한 어둠의 힘!" 로이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사실은 혼란 속을 헤매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드는 점점 열성적으로 소리치며 말했다. "카야크를 봉인한 것은 드래크로니안, 그러나 봉인을 풀고 그 힘을 갖는 것은 우리 오르크들! 하르크자엘은 그 힘을 독차지하려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위대하신 쿠푸-헤께서 모든 것을 뚫어보시고 준비해 두셨으니까." "그러니까... 아크트 님께서 힘을 갖게 되는 거로군요?" 로이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제 서서히 머릿속이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 그러기 위해서 네가 필요하다. 인간, 이디실의 주인!" "도와 드리죠. 도와 드리고 말고요." 로이는 쾌활하게 대답했다. 그 반응에, 그 자리에 있던 오르크들 전체가 당황한 것 같았다. 쿠푸 오드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말없이 로이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 왜 그러세요. 기꺼이 도와드린다는데요. 싫어요?" "...진심인가, 인간?" "뉘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친애하는 쿠푸 오드? 전 거짓말 따위엔 선천적으로 소질이 없어요. 아, 물론, 공짜로 도와 드릴 순 없지만..." "원하는 것이 뭔가?" "뭐, 간단해요. 첫째로 그 지하 감방에는 돌아가지 않겠어요. 둘째로 밥 먹을 땐 마실 거랑 소금 후추랑 같이 주세요. 셋째로 그 힘인지 뭔지 얻으면 내 몫도 나눠줘야 해요." "...조건은 받아들여졌다, 인간." 쿠푸 오드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나 로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말예요, 일단 지금 힘은 이디실을 가진 내 손 안에 있는 거잖아요? 다시 말하면, 그건 절 잡으신 쿠푸 오드 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내준다는 게 아깝지 않으세요?"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인간!" "아, 아, 화내지 마시고 잘좀 들어 보세요. 솔직히 말해서 아크트 님께 카야큰지 뭔지를 내 준다는 것도 별로 안전할 것 같지 않은데요. 하르크자엘하고 무슨 암묵적 거래가 오갔을 수도..." "하르크자엘! 그가 그렇게 말했나!" 쿠푸 오드가 빽 소리를 질렀다. 로이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여기서 겁먹고 물러선다면 그야말로 죽도 밥도 아니었다. "아... 뭐... 꼭 그런 식으로 말한 건 아니지만..." 로이는 시치미를 뚝 뗀 채 오드의 눈치를 살폈다. 그 불쌍한 오르크는 눈에 띄게 심란해 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 위를 벌떡 일어나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한참 동안이나 그는 그렇게 걸어다니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이윽고, 로이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 너는 내일 라우더로 출발하지 않는다. 대신 내 인간 동료가 있는 게레드로 보내진다. 그곳에서 기다린다!" '빙고!' 8 로이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쿠푸 오드는 대기하고 있는 두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 트룩 카라 타그르!" 병사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로이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 "오드가 꼬마를 잡았는데 그렇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제피로스는 턱을 괴고 8비스듬하게 의자에 앉은 채, 황당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발치 아래는 거무스름하고 추한, 평범한 오르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있었다. "도대체 어쩌려는 짓이야? 아크트는 나 몰래 그 꼬마를 빼돌리려고 하지를 않나...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이 동료라는 것을 잊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오르크는 지나치게 겸손해서 비굴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말했다. "위대하고 강하신 하르크자엘 님... 아크트께서는 쿠푸 하르크자엘께서 혹시 카야크의 힘을 독차지하지 않으실지 의심하고 계십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제피로스는 어린 소년처럼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놀란 듯이 말했다. "우리는 동료야.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은 친구라고. 벌써 몇 십년 전부터! 그리고 인간들과 가증스런 요정들이 우리 적이지. 자네도 알지 않나?" "물론입니다, 위대하신 쿠푸 하르크자엘... 아크트께서는 오해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이 미천한 것이 주제넘게도 이렇게 나서는 것입니다." "자네는 충복이야." 제피로스는 그 오르크를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9 "자네같은 이들 덕분에 오르크와 드래크로니안은 친구 남을 수 있는 것이지. 오드는 좀더 두고 보도록 하지. 아크트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게 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현명하신 쿠푸 하르크자엘." 오르크는 배를 땅에 대고 절을 하고는 물러갔다. 그리고 그 대신에 새하얀 로브를 늘어뜨린 보레아스가 들어왔다. "저놈 오르크들은 정말 가관이야." 제피로스는 고대어로 우스워 죽겠다는 듯이 말했다. 보레아스는 걱정이 되는 듯 한숨을 푹 쉬었다. "제피로스님, 명목상의 동료라도 동료는 동료입니다. 게다가 아크트는..." "아크트는 그냥 바보야." "...그 소년은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보레아스가 포기했다는 듯,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이디실의 주인이니 함부로 다루진 않겠지. 좀더 두고 볼까 해. 그 꼬마라면 저 혼자서도 잘 해낼거야." "...그 소년과 함께 있었다는 기사 말입니다..." "실력이 좋은 놈이라고 하더군." "그가 제피로스님을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알 게 뭐야. 인간들은 언제나 내 목에 엄청난 현상금을 걸어 놓잖아." "제피로스님... 그는 리반 아덴의 아들입니다." 순간 제피로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한참 침묵을 지키다가 냉정하게 내뱉듯이 말했다. "리반 아덴은 죄값을 치룬 것일 뿐이야. 라우더도 그렇고." "...로데인만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로데인만 부활해 준다면..." 보레아스는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제피로스의 붉은 눈이 차갑게 번쩍 빛났다. 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닥쳐, 보레아스! 로데인 따위가 다 뭐지? 그들이 우리를 배신했고, 두 종족 모두를 재앙에 빠뜨린 거야!" 보레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제피로스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하고는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제피로스는 스스로에게 확신시키듯 중얼거렸다. "인간들...배신자들! 때가 되면 다 쓸어 주겠어... 그리고 너희, 오르크들도..." ------------------------------------------------------------------ 랜스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숲을 헤매며 로이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자신도 그것이 쓸데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맙소사... 이게 무슨 꼴이람!" 그는 털썩 주저앉은 채 중얼거렸다. "보나마나 오르크들한테 잡혀간 게 틀림없어! 역시 억지로 끌고 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나 혼자 올 걸..." 어쨌건 랜스 자신이 부탁해서 함께 왔는데, 로이만 내버려두고 가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에 별로 안 드는 아이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디실이라니... 어째서 그런 아이가 이디실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그보다... 어째서 이디실은 로이가 자신을 사용하도록 허락한 걸까?' 세 개의 열쇠, 페울론에 관한 이야기는 그도 알고 있었다. 로데인의 멸망과 함께 거의 사라진 이야기이긴 했지만... 드래크로니안의 시조, 글라노우스가 저승을 빠져나와 산 자들의 세계로 올 때, 가지고 나왔다는 열쇠. 그들의 신인 실리사와 에퀴온이 암흑의 힘을 봉인할 때 썼다는 마법기들. 스스로 주인을 선택하며, 자격이 없는 자는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는... 로데인이 멸망당했을 때, 마지막 여왕 시엘레이스가 가지고 있던 세번째 열쇠 힐리온과, 드래크로니안의 신전에 보관되고 있었던 네 번째 열쇠 이디실은 에스테이아의 용사들에게 넘어왔다. 그의 아버지 리반 아덴이 힐리온을 보관했으며 그의 옛 동료, 시지리스의 영주 베릴이 이디실을 보관했다. 물론 극비에 붙여진 채... 페울론이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숨겨져 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아버지도, 베릴도 끝까지 그 보물을 지키지 못했다... 힐리온은 그 악몽같은 날 하르크자엘이 와서 빼앗아 갔고, 이디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로이의 손에 있으니까... 그나마 로이는 오르크들의 포로가 된 상태이고 말이다. '하르크자엘!' 랜스는 마음 속으로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젠가 반드시 그 빚을 갚아 주겠다... 하지만 지금은 로이의 일이 먼저야.' 랜스는 지체없이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해서든지 로이를 구해 내야 했고, 그러려면 오르크들의 행동이 둔해지고 시력이 약해지는 낮이 유리했다. '베릴의 성을 빼앗았을거야. 그의 갑옷까지 빼앗았으니... 마족 놈들, 아버지를 죽이고 에이론드도 이런 섬에서, 아무도 모르는 채 죽게 만들고, 게다가 이젠 용사 베릴까지...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어. 특히 하르크자엘! 반드시 내 손으로 처단한다!' 랜스는 칼을 뽑아 허공에 휘둘렀다. 마치 하르크자엘이 눈앞에 있기라도 한 듯이. 실제로 그는 하르크자엘이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만나게 될 것 같은 예감을 느꼈다. (제 2장 끝. 제 3장 <로크 페울로니>편으로 이어집니다.) 제 3장 로크 페울로니(네 개의 열쇠) (Lok Peuloni) 오후의 햇살이 시지리스 성을 따뜻하게 비추고 있었다. 오르크들에겐 새벽에 해당하는 시간이었다. 서른 마리쯤 되는 오르크들이 성벽 위와 성 안팎을 거닐며 성을 지키고 있었다. 피곤 때문인지 모두 느릿느릿한 움직임 이었으나, 경계심만큼은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랜스는 한참 전부터 성 가까이의 숲에서 오르크들의 경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제 어둑어둑해져 가고 시간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크들 사이에 방심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냥 들어가야겠군.' 랜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이런 대낮에 숨어들다니, 아무래도 어색했다. 물론 오르크들에겐 낮이 인간들의 밤처럼 휴식과 잠의 시간이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게다가 랜스는 슬쩍 숨어드는 것 따위는 좋아하지 않았다. 괴물과 정면 대결을 하는 것이 그가 좋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저 많은 오르크들과 정면 대결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무엇보다 로이만 구해낸 후엔 빨리 이 섬을 탈출해야 했다. 랜스는 조심스레 성으로 접근했다. 밝은 햇살 아래 숨어서 간다는 것이 너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성벽 바로 밑으로 달려간 다음, 오르크 보초가 지나간 직후에 가지고 왔던 밧줄을 성벽 위로 던져올렸다. 밧줄에 묶은 나무 조각이 덜컥!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러나 다행히 오르크들 사이에서는 아무 반응이 없었고, 밧줄도 튼튼하게 걸린 것 같았다. 랜스는 그 밧줄을 타고 땅과 거의 직각을 이루는 돌벽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랜스가 거의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오르크 보초가 다시 어슬렁 어슬렁 걸어왔다. 그러나 밧줄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오르크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랜스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가 지나간 뒤, 랜스는 가볍게 몸을 날려 성벽 위로 뛰어올랐다. 랜스는 성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제 고인이 된 시지리스의 영주 베릴은 그의 아버지 리반의 옛 친구였고, 그래서 그의 가족은 종종 이 섬을 방문했었던 것이다. 그러면 베릴은 아직 어린 그와 그의 형 클레이브에게 성 곳곳을 안내해 주며, 자신이 그들의 아버지와 함께 나쁜 드래크로니안들을 몰아낸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성 밖으로는 나와 본 적이 없어서 로이의 안내가 필요했지만, 성 안의 구조라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베릴, 당신의 원수도 내가 꼭 갚아 주겠소... 하지만 지금은 로이가 먼저야.' 랜스는 이렇게 생각하며 멀찍히 떨어진 성의 정문을 바라보았다. 성 안으로 들어갈 구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오르크의 경비가 너무 삼엄했다. 관심을 돌려놓지 않으면... 랜스는 허리에 매단 가죽 주머니에서 작은 나무 병을 하나 꺼냈다. 밧줄과 함께, 폐허가 된 마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그 안에는 기름이 가득했다. 랜스는 그 병의 주둥이에 불을 붙인 다음, 비교적 가까이 있는 건물인 마굿간을 향해 던졌다. 오르크들은 뭔가 반짝이는 것이 마굿간 지붕 위로 떨어지는 것을 어렴풋이 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짚으로 된 마굿간 지붕은 기세 좋게 불타올랐다. 이어서 목조 건물 전체가 불타며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놀란 말들과 오르크 말들이 뛰쳐나와 마구 날뛰었다. 성벽 안은 완전히 아수라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르오트! 르오트! (불이야! 불!)" 오르크들도 외치며 물을 뿌리랴, 말을 잡으랴, 우왕좌왕했다. 성의 정문을 지키는 네 마리의 오르크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이미 이 소동에 빼앗김 후였다. 그들은 넋놓고 커다란 입을 딱 벌린 채,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왼쪽 끝에 있던 오르크가 곁에 누군가가 온 것을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휙! 랜스의 단도가 정학하게 그의 이마를 꿰뚫었다. 그는 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픽 쓰러졌다. 그 다음, 랜스는 기다리지 않고,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불 구경만 하는 옆의 오르크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남은 두 마리의 오르크가 칼을 빼어 들고 그를 공격해 왔다. 랜스는 어렵지 않게 먼저 돌격하는 오르크의의 칼을 막아낸 다음, 이어서 돌진하는 놈의 배를 퍽 차 버렸다. 그는 그대로 몇 발짝 뒤로 튕겨나갔다. 처음 공격하던 오르크가 빠른 동작으로 랜스의 목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뛰어올랐으나, 오히려 랜스의 공격에 칼을 떨어뜨렸다. 그 오르크의 상복부로 칼을 찔러넣은 순간, 랜스는 등 뒤에서 소리높이 외치는 9탁한 목소리를 들었다. "수우카! 수우카! 아르그르! (침입자다! 침입자다! 죽여라!)" 랜스가 아까 발로 차 버린 그 오르크가, 동료들 틈으로 달려가며 소리치고 있었다. 랜스는 재빨리 뛰어올라 그의 등 한복판을 찔렀다. 그는 일격에 죽어 넘어졌으나, 이미 모든 오르크들이 그의 외침을 들은 후였다. "수우카! (침입자!)" "가! 아르그르! (인간이다! 죽여라!)" 몇십 마리의 오르크들이 소리치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이렇게 되면, 일단 성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랜스는 재빨리 방향을 돌려 성 안으로 달려들어갔다. 그가 막 성문을 지날 때, 커다란 석궁 화살이 그의 머리 바로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우그르! 우그르!" 성 안에서도 상황이 나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갑옷을 입은 오르크들이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조용하게 해치우는 건 다 틀렸군.' 랜스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이제는 아예 성질대로 검을 휘둘렀다. 맨 앞에서 돌진하던 오르크 두 마리는 단번에 그의 검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뒤에서도 계속 오르크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랜스는 마구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밀고 나갔다. 이어서 달려오던 오르크들의 머리가 땅에 떨어지고, 랜스의 뒤를 쫓아 성 밖에서부터 들어온 오르크들도 배에 구멍이 뚫린 채 쓰러졌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온통 오르크들의 시체였다. 그러나 그의 상태도 별로 좋지는 못했다. 오르크들의 칼이 그에게 치면상을 입히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수많은 생채기들을 내었고 계속되는 공격이 그를 몹시 지치게 했다. 오르크들은 죽어도 죽어도 계속 생겨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별로 크지도 않은 성에 오르크가 몇 마리나 있는 거야?' 이대로 가다가는 아무리 랜스가 잘 싸워도 지쳐 쓰러질 게 뻔했다. 일단 다 제쳐 놓고 로이를 찾는 데 몰두해야 했다. 그는 제대로 겨냥하지 않고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오르크들 사이를 뚫고 나갔다. 그의 기세에 눌린 오르크 무리는 슬금슬금 비켜나면서 길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랜스는 계단 앞까지 다다르자, 윗층으로 올라가는 척 하다가 갑자기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뛰어내렸다.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계단이었다. 그가 뛰어내릴 때, 화살 하나가 그의 왼쪽 윗팔에 맞았다. 그러나 다행히 살을 좀 찢고 날아갔을 뿐이었다. 랜스는 있는 힘을 다해 계단을 뛰어내려가, 지하 감옥으로 갔다. 간수인 듯한 오르크는 졸고 있었는지 매우 놀란 얼굴로, 무기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랜스 앞에 나타났다. 랜스는 그를 간단히 처치해 버리고, 열쇠를 빼앗았다. 그리고 다른 오르크들이 따라내려오기 전에, 얼른 감옥으로 통하는 문을 안에서 잠가 버렸다. 쇠로 만든 튼튼한 문이었다. 지금은 나갈 것을 미리 걱정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곧이어 오르크 한 떼가 쿵쾅거리며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 그리고 짐긴 문을 마구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랜스는 차갑고 축축한 돌벽에 몸을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상처가 생각보다 많았다. 그리고 활에 맞은 상처도 꽤 깊었는지, 욱씬거리기 시작했다. '...꼴이 정말 말이 아니군...' 랜스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벽에 횃불 하나가 걸려 있었고, 쇠창살 안에는 지나차게 많은 사람들과 오르크가 지친 모습으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로이-!" 랜스는 가장 크게 소리를 질러 불렀다. "로이! 어디 있지? 내가 왔어! 로이!" "그 작은 젊은이를 찾으쇼?" 갑자기 발 밑에서 말소리가 들려왔으므로, 랜스는 깜짝 놀라 비켜 섰다. 발 밑, 쇠창살 아래 좁은 공간이 있었고, 거기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작고 마르고 더러운 인간 남자가 앉아 키득거리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은 희게 세었으나, 이상스레 번뜩거리는 눈빛은 그가 어쩌면 옛날에 가졌을 법한 지혜를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아십니까?" 랜스가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그 죄수는 더 큰 소리로 키득거렸다. 제정신인 사람의 웃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섬뜩한 웃음이었다. "내가 아느냐고? 일개 인간인 내가, 이디실의 주인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아니, 인간은 너무 많은 걸 알아선 안 돼. 너무 많은 것을 바래서도 안되지. 지금 내 꼴을 보게나. 영생을 얻고 예지의 눈을 얻고, 그리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점점 선명해지는 내 죽음을 보는 일 뿐이네. 조심하게, 젊은이. 너무 많은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랜스는 이미 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는 감옥 더 깊은 곳으로 가며 계속 소리치고 있었다. "로이! 로이! 대답해!" 그리고 그 죄수의 목소리가 뒤에서 계속 들려왔다. "힐리온! 힐리온! 자네 핏줄에서 힐리온이 보이는군! 인간과 용의 왕! 드뤼안이 처음 그 칼을 잡고 싸웠고, 그 후에 그의 손녀의 자손들이 그것을 물려받았고, 그리고 시엘레이스가 마지막으로 그것에 작별을 고했지. 그러나 오래 가진 못할 거야..." 갑자기 위층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물밀리듯 밀려오는 무거운 발소리가. "문이 부서졌구나!" 랜스는 놀라서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곧 칼을 빼어들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까와는 달리 칼의 무게가 몹시도 그를 짓눌렀다. 단지 지쳤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왼쪽 팔의 그 상처의 고통은... '...독화살이었군...!" 랜스는 절망적인 기분이 되어 있는 힘을 다해 칼을 꼭 잡았다. 그리고 당당히 서서 오르크들이 돌격해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시끌 시끌하고 듣기 싫은 외침 소리와 함께 달려오는 오르크들의 모습이 보였다. 첫번째 오르크가 도끼를 휘두르며 랜스에게 달려들었다. 랜스는 칼을 휘둘러 도끼를 든 손을 잘라 버리고, 그 오르크가 채 팔이 잘린 고통을 느끼기도 전에 심장을 찔렀다. 그러나 두 번째 오르크가 그의 심장을 향해 칼을 휘둘렀을 때, 랜스는 그 공격을 막아 내면서 뒤로 비틀거렸다. 오르크들의 공격은 아까와는 달랐다. 그들은 모두 승리를 확신하는 듯, 눈에서 노란 빛을 뿜으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 놈들... 내가 독화살에 맞았다는 걸 다 알고 있군!' 랜스는 이를 악물며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칼을 꽉 쥐었다. 왼팔의 통증은 이미 마비 상태로 변해 있어서, 커다란 고무 막대가 팔 대신 매달려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캬아앗!" 오르크들은 이제 랜스를 둘러싼 채, 사방에서 무차별로 공격해 왔다. 오르크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아까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많은 오르크 들이 그의 칼을 피했고, 맞공격해 왔다. 그리고 그의 몸 전체가 점점 움직이기 힘들어지고 있었다. "하르! 가! (죽어라! 인간!)" 한 오르크가 높이 뛰어올라, 무식할 정도로 큰 검을 랜스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랜스는 자신의 검을 들어 간신히 그 칼날을 막았다. 그러나 오르크의 모든 체중을 담은 그 공격에, 랜스는 휘청거리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캬아아악!" 바로 옆에 있던 오르크 한 마리가, 둔중한 도끼를 들어 랜스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랜스는 재빨리 몸을 굴려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는 휘청거리는 다리로 가능한 한 얼른 일어서서, 칼을 고쳐 잡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한 오르크가 던진 도끼가 그의 오른쪽 어깨에 정통으로 맞았다. 그 도끼는 단번에 살을 파고들어 콱 박혀 버렸다. 랜스는 신음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돌벽에 몸을 기댔다. 오기로 칼을 놓지 않고 있었으나, 이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게다가 독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눈 앞이 흐려져 왔다. 랜스의 몸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벽을 스르르 미끌어져내려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곁에서 그가 쓰러지기만을 기다렸던 오르크들 중 한 마리가, 눈 깜짝할 새에 달려가 들고 있던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가 막 그것을 랜스의 머리 위로 내리치려는 순간, 날렵하게 만들어진 도끼가 날아와 그 두 손에 깊은 상처를 냈다. "크와악!" 오르크는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도끼를 떨어뜨렸다. 왼쪽 손은 그런대로 봐줄 만 했으나, 오른손은 완전히 두꺼운 살점이 떨어져 나가 뼈가 다 드러나 보였다. 휘리릭! 도끼는 날아왔던 그 방향으로 되돌아가, 기다리고 있던 난쟁이의 손에 잡혔다. 시커먼 수염이 낡은 투구 아래의 얼굴을 덮고, 근육이 불끈불끈 불거져 나온, 강인해 보이는 인상의 난쟁이였다. 그의 얼굴은 오랜 여행으로 검게 그을어 있었고 옷도 먼지와 흙으로 더럽혀져 있었으나, 타고난 기백과 위엄을 감추지는 못했다. "저리 가라. 이 더러운 오르크들!" 하고 그 난쟁이는 소리쳤다. 굵고 지하 감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 대대로 남을 지휘하고 적을 위협한 목소리였다. 오르크들은 갑자기 그가 나타나서 당황했는지,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 망설이고 있었다. 그 난쟁이는 시간을 오래 끌지 않았다. 그는 랜스를 보호하려는 듯, 그의 앞으로 뛰어들어 오르크들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어깨 뒤에 매단, 커다란 도끼를 꺼냈다. 길이가 그의 상반신보다도 길고, 날은 두 사람의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끼였다. 매우 거대한 무기였으나, 그는 마치 그것이 가벼운 나무 막대라도 되는 양 다루고 있어서, 전혀 둔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았다. "덤빌테면 덤벼!" 하고 그 난쟁이가 소리쳤다. 오르크들은 으르렁거리며 그와의 거리를 좁혀들었다. 그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오르크가 일정한 거리 안으로 들어오자 갑자기 미친 듯이 도끼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이 횃불을 반사하여 번쩍번쩍 빛을 냈고, 그럴 때마다 오르크들이 머리가 잘린 채, 혹은 배가 갈린 채 떨어져 나갔다. 한참 오르크들을 베고 있던 그 난쟁이에게, 화살이 날아왔다. 아까 랜스를 맞춘 것과 같은 독화살이었다. 그 난쟁이는 처음에는 여유있게 화살 조차도 도끼를 휘둘러 다 튕겨냈다. 그러나 화살이 점점 많아지자, 그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휘릭! 갑자기 긴 가죽 채찍이 날아와, 오르크들의 손에서 활을 빼앗아갔다. 이어서 무기를 잃은 그들 앞에 한 인간이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그 인간은 칼을 빼어들어 오르크 궁수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켈리! 때맞춰 잘 왔어!" 하고 난쟁이가 반갑게 소리쳤다. "툴위그! 내가 없으면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군요!" 왼손에는 채찍을, 오른손에는 칼을 든 채 그 난쟁이를 향해 미소를 보내는 그 인간은, 놀랍게도 남자의 차림을 한 젊은 여자였다. 기껏해여 열 여덟 아홉 살 즘 되어 보이는, 곱게 자란 인상의 예쁘장한 소녀였으나, 그런 외모와는 달리 그녀는 오르크들의 시체 위에 선 채 아무렇지도 않게 난쟁이와 대화하고 있었다. "이리 와서 좀 도와 줘!" 툴위그라 불린 그 난쟁이는 오르크들을 향해 더욱 힘차게 도끼를 휘두르며, 켈리에게 외쳤다. 켈리는 대답 대신, 단번에 오르크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크와아악!" 켈리가 휘두르는 칼에 불시의 습격을 받은 오르크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갈린 배에서 내장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켈리는 눈 깜짝도 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오르크를 향해 채찍을 날렸다. "케엑!" 채찍은 오르크의 눈에 정통으로 맞았다. 졸지에 장님이 된 오르크는 엉금엉금 기어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그녀가 보통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안 오르크들이 떼를 지어 공격해 오자, 그녀는 지체 없이 채찍을 천장을 향해 휘둘렀다. 채찍은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나무 버팀대에 감겼고, 그녀는 가볍게 뛰어올라 그 위로 올라갔다.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툴위그!" 하고 그녀가 외쳤다. 그러나 걱정스럽기보다는 무슨 즐거운 놀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리 둘로는 무리겠어요. 그냥 대충 하고 튀죠?" "그건 곤란해." 툴위그는 계속 도끼를 휘두르며, 숨을 헐떡거리면서 말했다. "...왜요?" "이 친구를 봐." 그제서야 켈리는 툴위그의 뒤에 쓰러져 있는 랜스의 모습을 보고, 비로소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 이런, 정말 곤란하네... 그럼 내가 잠시 이놈들 미끼가 될테니, 툴위그가 그 친구 데리고 도망치면 어때요?" "...날더러 이 덩치 큰 사람을 들라고?" "난쟁이들 힘 세잖아요!" 켈리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자, 갑니다!" 하는 외침과 합께. 동시에 그녀는 채찍과 칼을 마구 휘두르면서, 오르크들을 마구 공격하기 시작했다. 맹렬한 공격이었지만, 그런 만큼 오래 못 버틸 게 뻔했다. 오르크들은 금방 그녀에게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푸! 가이르! 요!" 그녀는 어색한 발음으로 오르크 말까지 외쳐가며, 그들의 관심을 자신에게 쏠리게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벌써 피투성이가 된 오르크의 시체가 늘어 가고 있었다. "...정말 제멋대로라니까...!" 툴위그는 이렇게 투덜거리며, 얼른 랜스를 등에 떠메었다. 사실 그는 난쟁이 중에서도 힘이 상당히 센 축에 속했고, 랜스 만한 인간 남자를 두 명은 거뜬히 업을 수 있었다. ...적만 없다면. 그는 한 손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자기 앞을 막고 있는 오르크들 사이를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켈리의 맹렬한 공격은 채 반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너무 한꺼번에 힘을 쓴 탓도 있지만, 그보다도 오르크들이 이제 그녀만을 노리고 정신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툴위그는 도망쳤나? ...에라, 모르겠다, 도망쳤겠지, 뭐.' 그녀는 멋대로 생각해 버리고는,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천장에 뛰어 올랐다. 오르크들은 화가 나 아우성을 쳤으나, 쫓아 올라갈 방도가 없었다. "하하하! 바보들!" 켈리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혀를 내밀며 그들을 야유했다. 그리고는 버팀대를 따라 다람쥐처럼 달려 도망갔다. "우그르! 우그르!" 오르크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쫓아왔다. 물론 그녀가 내려오지 않는 이상, 잡을 가능성은 없었지만. 켈리는 웃으면서 여유있게 달려갔다. 그리고 횃불의 바로 위에 이르자, 발로 차서 횃불을 떨어뜨려 꺼 버렸다. 지하 감옥 안은 금방 암흑이 되었다. 오르크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우왕좌왕했다. 그들의 듣기 싫은 언어로 마구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 동안 켈리는 조심조심 버팀대 위를 기어갔다. 그리고 벽에 부딪히자, 천장을 더듬어 매끈매끈한 부분을 찾아낸 다음, 힘껏 밀었다. 그 부분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고, 그 안에 빈 공간이 나타났다. 켈리는 조심스럽게 손을 더듬어 구멍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르크들이 다시 횃불을 찾아 키기 직전에, 구멍을 막아 두었던 돌을 찾아 다시 구멍을 막아 놓았다. 구멍은 몹시 좁았고 더러웠으며, 특히 천장이 너무 낮아 조금만 머리를 들어도 부딪혔다. 게다가 완전히 캄캄해서 앞을 전혀 볼 수 없었고, 구불구불하기까지 했다. 가장 끔찍한 것은 수시로 쥐들이 그녀의 손 위로 지나간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머리 위로 떨어지기까지 했지만. 그러나 반시간쯤 그렇게 기어가면 갑자기 넓어지면서, 웬만한 방 하나 만한 공간이 나타났다. 켈리는 그곳으로부터 빛이 새어나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툴위그가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었다. "야아, 살아나오셨네요!" 흙과 먼지 투성이가 된 켈리가 기어나오면서 반갑게 외쳤다. "너야말로 그 실력으로 용케 안 죽었군?" 툴위그도 반갑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는 등불을 걸어 놓은 바로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그의 뒤에는 랜스가 아직도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었다. "또 그 정의감이 발동하셨군요, 툴위그." 켈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 코도 석잔데. 이제 여기서 영영 못 빠져나가도 난 몰라." "재수없는 소리 마, 켈리! 그렇다고 안 도와줄 수도 없잖아." "하하하... 그래서 툴위그는 좋다니까. 아직 안 죽었죠, 그 친구?" "너 제발 말버릇좀 고쳐라. 이제 곧 정신을 차릴 거야." "완전히 뻗었네." 켈리는 스스럼없이 랜스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꽤 강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치르야. 오르크 독 말야." "치르가 뭔진 저도 안다고요. 근데, 툴위그가 치료한 거에요?" "그럼 나 말고 또 누가 있냐?" "아뇨, 단지... 전에 뱀에 물렸던 거 툴위그한테 치료받았다가 죽을 뻔 한 게 생각나서..." "켈리, 너!" 툴위그는 펄쩍펄쩍 뛰며 화를 냈다. "내가 말했지! 그건 백 번 중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실수라고! 그런 쓸데없는 소리 지껄일 시간 있으면 물이나 떠 와!" ------------------------------------------------------------------ 랜스는 간신히 눈을 떴다. 온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고 도끼에 맞은 어깨의 상처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지금 현재 그의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르크도, 인간도. 머리 위에서 등불 하나가 가물가물하게 타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잡혀서 감옥에 갇힌 건가?' 그러나 그는 곁에 얌전히 놓여진 그의 검을 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상처도 붕대에 잘 싸매어져 있었다. 오르크들의 감옥에서 이런 대접을 해 줄 리 없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돌로 된 굴 같은 곳이었다. 그 중앙에 그가 누워 있었고, 왼쪽으로 두 개, 오른 쪽으로 한 개의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굴 안은 어두웠고, 이상하게 생긴 등불만이 그 안을 밝혀 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갑자기 오른쪽 구멍에서 뭔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큰 짐승이 기어오는 것 같은 소리였다. 랜스는 재빨리 검을 잡았다. 몸이 아직 마음대로 움직일 것 같지는 않았으나, 마비는 이미 풀려 있었다. 이윽고 왼쪽 구멍에서, 크고 둥근 머리같은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랜스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것에 칼을 겨누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의 칼이 막 그 물체를 베기 전, 그는 아슬아슬하게 칼을 멈추어야 했다. "맙소사! 두번 구해줬다간 목이 날아가겠네!" 어이없게도 그 구멍에서 나온 것은 인간 소녀였다. 그녀는 랜스의 칼날 바로 아래 주저앉아서, 기가 막히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별로 놀란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깜짝 놀라 당황한 것은 랜스 쪽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는 지금 방금 그녀의 목을 벨 뻔 했던 것이다. "아... 저... 아가씨... 조송합니다. 전..." 랜스는 어쩔 줄을 모르며 더듬거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다. "됐어요. 다친 사람 없으니. 시체처럼 뻗어있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걸요, 뭘." "아, 그럼 아가씨가 나를...?" "아뇨, 제 골칫덩어리 친구가 댁을 구했죠. 나도 구경만 한 건 아니지만." 그녀의 말투는 독특했다. 확실히 귀족 여인들의 예의에는 맞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부대껴 온 평민들의 말투라고 보기에도 어쩐지 어색했다. 게다가 그 발음은, 여러 곳을 여행한 그도 이제까지 들어보지 못한 사투리였다. 그러나 그녀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랜스는 생각했다. 평민 남자처럼 함부로 차려 입었고 거의 남자만큼 키가 컸으나, 왠지 고귀한 혈통 처럼 보이는 미인이었다. "난 켈레브리스. 다들 켈리라고 불러요. 보물 사냥꾼이죠. 여기서 전설의 보물을 찾는 중이에요." 그녀는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랜스는 악수를 했을 때, 그녀의 손이 어려서부터 검을 잡은 손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전 랜스라고 합니다. 여기는 대체 어다죠?" "시지리스 성 안의 비밀 통로. 제가 발견한 곳이죠..." 바로 그 때, 왼쪽 구멍에서 흙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난쟁이 한 명이 그 속에서 기어나왔다. 시커먼 수염을 기르고 등에 커다란 도끼를 짊어진, 무척 건장한 난쟁이였다. 그를 보자, 랜스는 정신을 잃기 전, 가물가물한 눈으로 보았던 장면들이 생각났다. "아, 그 때 날 구해준..." "툴위그에요. 툴위그, 이리 와서 좀 보지 그래요? 우리의 환자가 이제 기운이 넘쳐서 내 목을 베려고 하던데요." "아, 이런, 깨어나셨습니까!" 툴위그라 불린 그 난쟁이는 켈리와는 달리, 좀 과장된 난쟁이식 예법으로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글렌델 가의 장남, 툴위그 젠 글렌델, 인사 올립니다." "아, 예... 전 랜스라고 합니다.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랜스도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오르크 본거지에 단신으로 뛰어드는 것은 매우 무모한 짓이지요." "...사실은 친구가 포로로 잡혀 있습니다." 랜스는 로이의 일을 떠올리고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쨋건 로이는 그가 데려온 아이였고, 그가 안전을 책임져야 했었다. 그런데 오르크들에게 잡혀가도록 놓아 두고, 이제 구해내지도 못한다니... "친구가! 오르크들에게요! 인간입니까?" 툴위그는 충격을 받은 듯 물었다. 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지 않은데." 켈리는 얼굴을 찌푸렸다.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깔렸다. 오르크가 인간을 무자비하게 다룬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가 도와주면 어때요, 툴위그?" 난데없이 켈리가 활달한 목소리로 물었다. 툴위그는 펄쩍 뛰었다. "켈리! 미쳤어? 저 오르크들한테 대항해서? 게다가 우리는 할 일이 있다고!" "그 전설의 보물 따위, 여긴 있지도 않을 텐데요, 뭐. 사흘동안 여기 죽치고 앉아 찾았어도 그림자도 안 보이잖아요? 좀 도와주고 다른 데로 가 봐요." "그건 그렇지만..." "보물이라면, 이디실을 말하는 겁니까?" 갑자기 랜스가 끼어들었다. 켈리와 툴위그는 놀라 눈이 동기래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툴위그가 대답했다. "아니, 우리는 카자룬을 찾고 있었소. 그럼 여기에 있었던 건 이디실 이었소...?" 랜스는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포로가 된 제 친구가 이디실의 주인입니다." "그렇다면 도와주지 않을 수 없군! 같은 페울론의 주인으로서." "페울론의 주인!" 하고 랜스는 놀라서 소리쳤다. 켈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툴위그를 힐끗 보고, 그가 설명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대신 말했다. "툴위그는 카자룬의 주인이에요... 난쟁이족에게 맡겨진 첫번째 열쇠 말예요.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잃어버렸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을 찾기 위해 여행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중, 여기 시지리스의 성 안에 전설의 열쇠 중 하나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을 듯고 찾아온 거죠. 하지만 결국 여기에 있었던 것은 카자룬이 아니라 이디실이었군요. 가요, 툴위그. 페울론들은 서로를 끌어당긴다고 하더군요. 분명 랜스의 친구를 찾으면 카자룬을 찾는 데에도 도움이 될 거에요." "그래. 더군다나 오르크들 손에 이디실을 맡겨둘 수야 없지! 난 난쟁이 중의 페울론의 수호자니까 말야." 툴위그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 로이는 탑 안의 방에 갇힌 채 멍청히 놀고 있었다. 방에는 비단으로 덮인 침대와 다 부서졌지만 전에는 꽤 고급이었을 나무 가구들이 있었고, 반쯤 찢어진 커튼에는 정교한 수가 놓아져 있었다. 오르크들 딴에는 좋은 방이랍시고 골라 준 방이 분명했다. '으이그... 무식한 녀석들! 땅 속 아니면 하늘 꼭대기밖에 감옥으로 쓸 데가 없냐! 이래서는 도망칠 수도 없잖아!' 로이는 툴툴거리면서 방 안을 왔다갔다 하기도 하고, 침대 위에 올라가기도 하고, 발돋움을 하여 높이 달린 창 밖을 내다보기도 했다. 창 밖은 이미 어두위져 가고 있었다. 오르크들의 말대로, 게레든지 어딘지로 출발할 시간이 거의 다 된 것이다. '뭐, 좋아... 어차피 이 섬 안에서라면 탈출한다 해도 섬을 벗어날 방법이 없으니까. 게레드인가 뭔가에 도착하면 그 때 탈출해야지. 그때까진 얌전히 굴어서 오르크들을 방심시켜 놔야 해.' 잠시 후 오르크들이 와서, 자물쇠를 열고 문을 벌컥 열었다. 영주 오드와 함께, 네 명의 덩치 큰 오르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있었고, 거의 칼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 같은 무지막지하게 큰 쇳덩이를 들고 있었다. 그 무기처럼, 그들의 몸집도 컸다. 그들의 신장과 체격은 정상적인 오르크라고 볼 수 없었다. "떠날 시간이다, 인간." 쿠푸 오드는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이는 지체 없이 일어섰다. 오르크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협력자라고 믿게 해야 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서 가요!" 쿠푸 오드는 의심스러운 얼굴로 로이를 흘끗 보았다. "인간이 침임했다. 널 구하러 온 건가?" "저요? 그럴 리가요." 로이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으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랜스가 분명해. 날 구하러 왔구나!' "너와 함께 있던 그 인간이다. 네 친구가 아닌가?" "전 그 사람 친구 아녜요. 그냥 돈 받고 일해 줬을 뿐이죠. 그건 그렇고, 어서 게레드로 가야죠!" "아 타그르!" 하고 오드가 명령했다. 그러자, 네 마리의 건장한 오르크들이 로이의 주위에 둘러섰다. 그들의 칼과 발톱을 보자, 로이는 탈출할 생각이고 뭐고 다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마지막 질문을 했다. "저... 그런데, 쿠푸 오드!" "뭔가? 인간." "에... 그러니까... 그 침입자는 물론 잡았겠죠?" 오드는 얼굴을 찌푸리며 로이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제 곧 잡는다. 넌 게레드로 가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네 명의 오르크 병사와 로이도 그 뒤를 따랐다. '만세! 아직 안 잡혔군! 제발 위험한 짓 말고 얌전히 돌아가라고요, 랜스. 난 혼자 잘 할 수 있으니까.'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탑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려가는 동안 해는 바다 아래로 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그들이 맨 아래층에 도착했을 때, 밖에는 이미 마지막 빛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로이는 그를 위해 준비된 배에 태워졌다. 다행히도 죄수 호송용 배는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크고 잘 만들어진 배였고, 단단히 무장한 만큼 호사스럽기도 한 범선이었다. 오르크들을 위해 만들어진 배라기보다는, 다른 종족을 위해 만들어졌다가 개조된 것처럼 보였다. 검은 바다 위로 배가 띄워졌다. 몸집이 작은 하급 오르크들이, 음산한 운율에 맞추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오드는 로이가 그의 방에 단단히 가두어졌는지 확인한 후, 곧 갑판으로 올라왔다. 시지리스의 그림자가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용들의 섬, 역시 불안한 곳이야.'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품 속에서 비단으로 둘둘 말은 막대기 모양의 물건을 꺼냈다. 그가 그 보자기를 풀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이디실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것으로 용족도 인간족도 끝나는 거야...' ------------------------------------------------------------------- 한낮이 되어도 시지리스 성의 오르크 병사들은 눈을 붙이지 못했다. 성 안에 잠입한 침입자들을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잡아 놓으라는 오드 영주의 명령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든 병사들이 총동원되어 성 안을 샅샅이 뒤졌으나, 인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후가 되면서부터, 오르크들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성의 지붕 위에서, 생각 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오르크들을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그 그림자는 한참 동안 오르크들의 행동을 살피더니, 지붕을 덮고 있는 돌판 하나를 들어내고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바로 켈리였다. "시작해도 될 거 같아! 다들 완전히 맥이 빠졌어." 그녀는 툴위그와 랜스가 있는 방(?)으로 들어오며, 활기차게 말했다. 그리고는 준비해 두었던 무기들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왼쪽 허리엔 검, 오른쪽 허리엔 채찍, 그리고 가죽 조끼 안에는 한 뼘 길이밖에 되지 않는 수많은 표창들... 그녀의 몸 자체가 하나의 무기고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무기가 많군?" 몇 시간 전부터 그녀와 말을 놓기로 한 랜스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켈리는 자랑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남자들 사이에서 싸우려면 아무래도 근력이 딸리니까. 다른 재주가 있어야겠지?" "목에 있는 건... 장식품인가?" "아, 이거." 켈리는 목에 걸린 이상한 모양의 목걸이를 들어 보였다. 엄지손가락 길이 밖에는 안 되는, 은으로 만든 펜던트였다. 용 두 마리가 각각 붉은 빛과 푸름 빛의 작은 보석을 입에 문 채, 엉켜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분명 떠돌이 보물 사냥꾼에게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었다. "우연히 얻었지. 독침이야 볼래?" 랜스가 말릴 새도 없이, 켈리는 그 펜던트를 입에 대고 훅 불었다. 그러자 나무 침이 날아가, 도끼를 닦고 있는 툴위그의 머리 바로 위의 벽에 박혔다. 툴위그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렀다. "켈리! 너 미쳤냐? 날 죽일 셈이야?" "하하, 걱정 마시라고요. 제가 그 정도 겨냥도 못하는 줄 아세요?"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시시한 짓 하지 말고 빨리 랜스 친구나 구하러 가자!" 툴위그는 벌떡 일어나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 뒤를 랜스가 따랐고, 켈리는 벽에서 독침을 뽑아낸 후, 허둥지둥 그들을 따라갔다. 좁은 통로를 기어, 그들은 모두 시지리스 성의 지붕 위로 나왔다. 그리고 들키지 않도록 몸을 낮추고, 성의 창문 바로 위로 기어갔다. "오르크 두 마리가 있는데." 하고, 지붕에 거꾸로 매달려 창문을 흘끗 본 켈리가 말했다. "네 독침 맛 좀 보여주지 그래?" "좋죠!" 켈리는 다시 거꾸로 매달린 채, 오르크들을 겨누고 독침을 훅 불었다. 두 오르크는 목에 따끔함을 느끼는 듯 손을 가져갔으나, 그 손이 침에 닿기도 전에, 독이 몸에 퍼져 쓰러졌다. 셋은 가볍게 창문을 통해 뛰어내려, 성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무서운 독인데...!" 벌써 죽어 버린 오르크들을 보며, 랜스가 감탄했다. 오르크 독 따위는 비교가 되지 않는 효과였다. "무기를 준비해. 언제 오르크들이 들이닥칠 지 몰라!" 하고 툴위그가 경고했다. 켈리는 왼손에 채찍을 들고 오른손은 검의 손잡이 위에 올려놓았고, 랜스는 검을 빼어들었다. 아직 어깨의 상처가 아팠으나, 이제 꽤 버틸 만했다. 툴위그의 치료는 훌륭했다. 비록 켈리가 옆에서 끊임 없이 험담을 하긴 했지만. 그들은 발소리를 죽인 채, 벽에 붙어 복도를 걸어갔다. 얼마 안 가, 오르크들이 쿵쾅거리며 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네 마리... 아니, 다섯 마리. 제일 먼저 무기를 휘두르며 나선 것은 툴위그였다. 그는 그의 큰 도끼로, 그 오르크들이 자신을 보기도 전에 두 마리의 목을 베어 버렸다. 랜스도 이에 지지 않고 달려나가, 오르크 한 마리의 배를 벤 다음, 그를 공격하려는 다른 오르크의 심장을 찔렀다. 마지막으로 켈리가 채찍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녀는 그 오르크를 죽이지 않고, 채찍을 목에 감아 쓰러뜨린 후, 칼을 뽑아 그 목을 겨누었다. "사그 가 에크 와그? (인간 포로는 어디 있지?)" 켈리가 발음이 좀 어색한 오르크 말로 물었다. "차... 차 테 스오! (나... 난 몰라요!)" "프르! 제 차 우크 하르! (말해! 안 그러면 죽을 줄 알아!)" "차 테 스오, 테 스오!" 오르크는 겁에 질린 채 소리쳤다. 랜스는 그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켈리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인간 말로 중얼거렸다. "쳇, 꼴에 영웅 흉내를 내려고 하는군!" 그러나 더이상 심문할 시간이 없었다. 복도 저쪽에서 오르크들이 웅성거리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이 오르크들을 공격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복잡하게 됐군!" 켈리는 화가 난다는 듯, 신경질적으로 채찍을 확 잡아당겼다. 목이 묶여 있던 오르크는 숨이 막혀 기절해 버렸다. 그러나 그가 죽기 전에, 켈리는 채찍을 풀어내어 다시 싸울 준비를 했다. "랜스, 싸울 만 하겠나?" 하고 툴위그가 물었다. 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멀쩡합니다." "좋아, 그럼 작전대로 하자고!" 오르크 무리가 몰려왔다. 아직 열 서넛쯤, 몇 안되는 수였다. 그러나 그들 뒤에서, 벌써 지원군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앗!" 랜스는 칼을 들고 그들 틈으로 뛰어들었다. 순식간에 선두에 서서 달려오던 오르크의 배에 큰 상처가 났다. 그 옆의 오르크가 대신 랜스를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랜스는 얼른 몸을 돌려 그 공격을 막아내고, 그 오르크의 심장을 찔렀다. 상처 입은 오르크가 다시 랜스를 공격했으나, 곧 그의 목도 랜스의 검에 날아가 땅바닥에 뒹굴었다. 툴위그는 도끼를 정신없이 휘두르며 오르크들 속을 헤쳐 나가고 있었고, 그의 바로 뒤에서는 켈리가 한 손으로는 채찍을, 한 손으로는 검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었다. 둘은 오랫동안 그렇게 함께 싸우는 것에 익숙해진 듯, 슬쩍만 보아도 손발이 척척 맞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침입자들! 이리 오너라! 이 그루트 님께서 죽여주마!" 오르크들 틈에서 목청 높이 외치는 자가 있었다. 매우 서툰 인간 언어였으나, 들을 만 했다. 그는 다른 오르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커다란 양날 도끼를 들고 있었다. "네가 대장이냐?" 툴위그가 그의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지금은 그렇다. 쿠푸 오드의 대리자, 그루트다." "그렇다면 내가 상대해 주지!" 툴위크는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그루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쉽게 툴위그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목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물론 툴위그도 그 공격을 거뜬히 막아냈다. 두 도끼가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었다. 둘의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오르크들은 대장을 돕기 위해 툴위그를 공격하려 했으나, 랜스의 방해로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툴위그는 일부러 뒷걸음질 쳐 물러나는 체 하면서, 그루트를 뒤쪽으로 유인했다. 휘릭! 켈리의 채찍이 그루트의 팔목을 찢었다. "크와아악!" 그루트는 비명을 지르며, 도끼를 놓쳤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켈리는 다시 채찍을 날려 그의 목을 감았다. "잡았다!" 하고 그녀는 즐거운 듯 소리쳤다. 그루트도 숨이 막히는 데에는 어쩔 수 없는지, 금방 무릎을 꿇고 질질 끌려왔다. 켈리는 놀이라도 하는 듯 활달한 말투로 소리쳤다. "수그! 제 차 아 하르! (공격을 멈춰! 안 그러면 이자를 죽이겠다!)" 오르크들은 웅성거리며 공격을 멈췄다. 툴위그와 랜스는 얼른 그들 틈을 뚫고, 켈리의 곁에 와서 섰다. 랜스가 그루트에게 물었다. "자아, 로이는 어디 있지? 그 이디실의 주인 말이야!" "너무 늦었다. 그는 여기 없어!" 그루트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럼 어디에?" "너희들은 모르는 곳..." 그 때, 켈리가 채찍을 더욱 세게 당겼기 때문에,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캑캑거렸다. 켈리가 말했다. "야아, 여기 없다는데. 성질 나는데 죽여 버릴까?" 9 "잠깐.. 컥, 잠깐!" 그루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 아이... 컥, 컥, 게레드에..." 바로 그 때, 화살이 켈리의 머리 위로 날아와 벽에 박혔다. 툴위그가 얼른 그녀의 머리를 그의 손으로 누르지 않았다면, 그 화살은 정확히 그녀의 이마에 박힐 뻔했다. "저것들이... 미쳤나?" 하고 켈리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공격하면 너희 대장을 죽여 버릴 거야!" 그러나 그녀의 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화살이 더 날아왔고, 그녀는 엉겁결에 그루트를 밀쳐 내며 그 뒤에 숨었다. 그리고 그루트는 순식간에 화살 다섯 개가 몸에 박혀 즉사했다. 켈리는 어이없다는 듯 그 시체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녀석들은..." "틀렸어, 켈리. 도망가자!" 툴위그가 외쳤다. 그리고 그들 셋은 일제히, 있는 힘을 다해 복도를 따라 달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화살이 간혹 그들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러나 켈리가 잠시 뒤를 돌아 독침으로 궁수들을 쏘아 버리자, 더이상 화살은 날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무시무시하게 많은 오르크 떼가 따라오고 있었으니, 상태가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얼른 창문을 통해 다시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지붕 위에도 어느 새 오르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비키지 못해!" 가장 앞장섰던 툴위그가 도끼를 휘두르며, 오르크들을 공격했다. 한 놈이 배가 갈려 쓰러졌고, 다른 한 놈은 그 공격을 피하려고 비틀거리다가 지붕에서 떨어져 버렸다. 툴위그는 이어서 그들 뒤에 있던 다른 오르크에게 도끼를 휘둘렀다. 툴위그의 뒤로, 긴 칼을 든 오르크 한 마리가 살금살금 접근해 칼을 내리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랜스의 칼에 등이 찔린 채, 저 아래로 내던져졌다. 랜스는 이어서 툴위그를 도와, 그를 공격하는 오르크들에게 칼을 휘둘렀다. 켈리는 그들처럼 창문을 통해 지붕으로 올라오려는 오르크들을, 채찍과 칼을 동원하여 떨어뜨리거나 죽이고 있는 중이었다. "이 대로는 안 되겠어! 놈들이 너무 많아!" 하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곧 켈리의 대답이 왔다. "내가 배를 훔칠께요. 적당히 이놈들 상대하다가, 얼마 후에 바다로 뛰어내려요! 랜스! 이리 와서 이 놈들 좀 막아 줘!" 랜스는 얼른 켈리의 자리로 뛰어갔다. 그가 그녀의 곁에 서서 막 지붕으로 올라오려는 오르크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순간, 켈리는 훌쩍 그 지붕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녀는 채찍으로 아슬아슬하게 테라스의 난간을 휘감아, 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테라스와 창틀 사이를 겅중겅중 뛰어 넘으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르크 두 마리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그녀에게 활을 겨누었으나, 랜스의 칼이 그들의 손목을 싹둑 베어 버렸다. 켈리의 모습은 곧 사라졌다. 랜스는 그녀에 대해 걱정할 틈도 없이, 벌떼처럼 몰려드는 오르크들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잠시 켈리가 무사히 갔는지 확인하느라 한눈을 팔고 있을 때, 오르크 한 마리가 그의 가슴에 상처를 입혔다. 다행히 얼른 피한 덕분에 살짝 스쳤을 뿐이었지만, 잘못했다간 그대로 심장을 찔렸을만큼 정확한 겨냥이었다. 그는 재빨리 반격을 가하여, 그 오르크를 지붕 아래로 떨어뜨려 버렸다. "괜찮은가?" 툴위그가 어느새 그의 곁으로 와서, 오르크를 향해 휘두르는 도끼를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물론이죠! 하지만 켈리가 걱정입니다." 랜스는 어깨에 입은 상처가 점차 고통스러워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감춘 채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에, 툴위그는 껄껄 웃을 뿐이었다. "켈리가 걱정돼? 자네가 아직 그 앨 모르는군!" 또다시 오르크들의 공격이 거세어졌다. 오르크 한 마리가 툴위그의 등을 쇠몽둥이로 내리치려 하자, 랜스는 그 오르크의 얼굴을 향해 칼을 9휘둘렀다. 그는 용케도 그 공격을 피해 냈으나, 커다란 몽둥이 때문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다음 일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심장을 찔려 죽었다. 툴위그는 지붕 위로 올라오려는 오르크들을, 도끼로 몰아내어 다시 내려 보내거나 아예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러나 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오르크들이 지붕 위로 올라와서 그들을 공격했다. 둘은 상처와 땀과 오르크들의 피로, 아주 볼만한 꼴이 되어 버렸다. "안되겠어. 바다로 뛰어내리자!" "...그래야 할 것 같군요." 툴위그와 랜스는 숨을 헐떡이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랜스가 오르크들을 막고 있는 사이, 툴위그가 먼저 성의 절벽에 위치한 벽 쪽으로 달려가 바닷물을 향해 뛰어내렸다. 풍덩! 하는 소리가 들리자, 랜스도 앞에 있는 오르크를 단숨에 베어 버리고, 그 뒤에 있던 오르크는 훌쩍 뛰어 넘어 버리고 바에 뛰어들었다. 철썩! 단단한 수면이 그의 얼굴을 때렸다. 갑자기 차고 소금기 있는 바닷물이 어깨의 상처에 닿자, 그는 고통 때문에 숨을 헉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 익숙해지고, 견딜 만한 상태가 되었다. 제정신을 차리고 수면 위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서 켈리가 탄 나룻배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툴위그가 배에 타는 것을 도와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곧 그 일이 끝나자, 랜스가 있는 곳으로 노를 저어 왔다. 랜스는 그 배로 헤엄쳐 가, 툴위그와 켈리의 도움으로 쉽게 배에 올랐다. 성벽 위에서 새까맣게 모인 오르크들이 배를 향해 화살을 날려 댔다. 그러나 아직 해가 있는 낮인지라, 그들의 겨냥은 정확하지 못했다. 그나마 노를 저어 얼마만큼 성에서 떨어지자, 화살은 그들이 있는 곳까지 미치지도 못했다. "살았다~!" 켈리가 즐겁게 외쳤다. 그러나 툴위그는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상하잖아. 오르크들이 배를 내어 쫓아오지 않는다니..." "하! 그거라면 걱정 마세요! 제가 다 불은 질러 버렸으니까요!" 켈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제서야 툴위그는 웃음을 터뜨렸다. "녀석. 그래도 이럴 땐 머리가 잘 돈다니까!" "다시 신세를 졌군." 랜스가 고맙다는 듯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켈리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에이, 그런 딱딱한 소리 하지 말자고. 동료끼린데, 뭐!" "동료?" 하고 랜스가 약간 어리둥절해져서 물었다. 그러자 켈리는 해죽 웃었다. "동료 맞잖아? 그 오르크가 랜스 친구는 게레든지 어딘지로 보냈 댔잖아. 그러니 거기까지 찾아가야지. 안 그래, 랜스?" "난... 그렇게까지 폐 끼칠 생각은..." 랜스의 대답을 끊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켈리 말이 맞아. 한 번 도와주기로 한 건 끝까지 도와줘야지! 그게 의리라는 거지. 우리 글렌델 가문에 의리 없는 난쟁이는 없었어!" "멋져요, 툴위그 젠 글렌델! 그럼 일단 이 배로는 멀리 갈 수가 없으니까, 가까운 항구에 들러서 새 배로 갈아타기로 해요." "그거 좋지! 그럼 켄윌로 가나?" 켈리와 툴위그는 랜스의 말을 들을 의사가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랜스는 그냥 입을 다문 채 듣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나오면 끝까지 거절하는 것이 오히려 폐가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들이라면 확실히 로이를 구출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랜스는 오랫동안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10년이었던가... 아버지를 잃은 후, 하르크자엘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가족을 떠난 것이. 그 동안 그는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않았다. '며칠 동안만 같이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러나 로이를 구해낼 때까지 만이야. 그 뒤에는 하르크자엘을 찾아 떠나야 하니까... 그리고 그것은 나 혼자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까...' 랜스는 자기 자신에게 굳게 타일렀다. ----------------------------------------------------------------- 그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켄윌에 도착했다. 그 동안 툴위그는 켈리가 돛단배를 훔치지 않고 노 젓는 나룻배를 훔쳤다는 데 대해 끊임없이 불평을 했고, 결국은 둘이서 싸움이 날 뻔했다. 그러나 켄윌에 도착하자, 둘은 금방 뛸 듯이 기분이 좋아져서 싸움이고 뭐고 다 잊어버렸다. 여관 주인은 랜스가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해 무척 놀라워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관심을 모은 것은 그보다는 켈리와 툴위그 쪽이었다. 난쟁이와 여행하는 인간은 옛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인간이 이목을 끌만큼 아름다운 소녀라면... "어째서 이런 여행을 하고 있는 거지?" 여관에서 투숙한 날 저녁, 랜스는 켈리와 함께 해변으로 산책을 나왔다가 이렇게 물었다. "말했잖아. 난 보물 사냥꾼이라고. 그런데 한 군데만 붙어 있을 수 있겠어?" "하지만..." "그래, 여자 보물 사냥꾼이란 흔한 일이 아니지." 켈리는 웃으며 대답했다. "실은 불독같이 생긴 바보 영주와 결혼하기 싫어서 가출했거든. 그런데 의외로 보물 사냥꾼 일이 적성에 맞더라고. 그러던 중 툴위그도 만났고... 그도 마침 카자룬을 찾아 여행하는 중이길래 같이 다니기로 했어. 툴위그의 가문, 글렌델 가는 원래 난쟁이족 중에선 이름높은 가문 이었고, 몇 대째 카자룬을 보관하던 가문이거든. 그리고 그 가문의 장남은 대대로 카자룬의 주인이었고 말야. 드래크로니안의 시조, 글라노우스가, 로데인과 난쟁이 왕국 로그라드와의 화친의 상징으로 선물한 것이지. 그 당시 로그라드 군대의 총사령관의 신분으로 그 칼을 받은 난쟁이가 자일 게르 글렌델, 바로 툴위그의 조상이었고... 그 때부터 카자룬은 난쟁이들의 보물인 동시에 글렌델가의 가보이기도 했어. 그런데 툴위그의 할아버지 때 카자룬을 오르크들한테 빼앗긴 거야. 그래서 그 가문의 전원이 난쟁이들의 땅에서 추방되었고... 툴위그는 자기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고 싶어했어. 그리고 그건 글렌델 가의 장남으로서의 임무이기도 했고. 나도 돕고 싶다고 했지. 물론 툴위그에게 신세를 졌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페울론, 즉 전설의 '열쇠'를 찾는다는 건 보물 사냥꾼 으로서는 최고의 명예였으니까. 그게... 1년이 조금 넘었지, 아마... 그러던 중 시지리스에 '열쇠' 중 하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나 해서 온 거야. 결국, 그 열쇠는 이디실 이었고 그나마 사라진 후였지만..." "...넌 평민은 아니지?" 랜스의 물음에 켈리는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내가 귀족같이 보여?" "켈레브리스는 고대어 이름이야. 그리고 넌 오르크 말도 할 줄 알고... 아마 고대어도 알겠지? 어느 모로 보나 농부나 어부의 딸이라고는 볼 수 없어." 켈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 엄밀히 말해 귀족은 아니지만...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잖아? 지금은 보물 찾아 헤매는 떠돌이에 불과하니까. 랜스, 너야말로 왜 여행 다니는데?" "...난 헌터야. 현상금 걸린 괴물들을 잡으러 다니지." "네 친구도?" "아니... 그 아이는 사실 친구라고 할 수도 없어. 만난 지 며칠 안 됐거든. 내가 시지리스 섬 안을 안내해 달라고 억지로 끌고 왔지. 그러다가... 나 때문에 잡힌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반드시 구해내야 해." "그 오르크 소굴엔 왜 왔는데?" "...하르크자엘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으니까." "하르크자엘! 설마 그 흑룡을 잡으려는 거야? 너 미쳤니? 아무리 현상금이 높다지만..." "현상금 때문이 아냐." 랜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켈리에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사실 로이를 설득하기 위해 그 일을 말한 것 빼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그의 옛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켈리와 툴위그는 처음 생긴 동료가 아닌가... "하르크자엘이 내 아버지를 죽였어. 그래서 복수하려는 거야." 랜스는 간단히 이야기했다. 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는 다 죽는 얘기 아니면 죽이는 얘기뿐이군... 내 주위에도 복수하러 간다며 떠난 사람이 많이 있었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소문대로, 페울론에 의해 어둠의 힘이 풀려나려는 것일까...?" "...어둠의 힘? 그게 무슨 말이야? 페울론들은 그냥 마검 아냐?" 랜스는 조금 놀라서 물었다. 켈리는 왠지 자신 없는 얼굴이 되어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모르지. 그냥 그런 얘기가 있어. 네 개의 열쇠 - 그러니까 고대어로 로크 페울로니라고 부르지 - 는 '최초의 드래크로니안들'이 어둠의 땅에서 가져온 거래. 그런데 사실은 그들의 신, 실리사와 에퀴온이 악의 힘을 봉인했기 때문에 마법이 깃들게 된 거라나. 그 힘을 그들은 카야크라고 부르지. 그냥 힘이라는 말도 있고, 어둠의 신이란 말도 있고... 그걸 드래크로니안들이 가져와 이리저리 나눠준 거래. 화친을 약속한 종족들에게... 그들을 보살피고 다스리기로 약속한 인간족 로데인 왕조에게 힐리온을 주고, 난쟁이에게는 카자룬 - 그건 도끼라는데, 내가 아까 말했듯이 툴위그의 조상이 가져갔지. 그리고 요정들에게는 - 무슨 마법 지팡이라는데, 까먹었어. 그런데 이디실은 줄 사람이 없어서 그냥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었다는군. 평화의 약속이 깨지면, 그 선물을 모두 재앙의 근원이 될 거라고 그랬다던데... 특히 로데인 국왕, 드뤼안은 자기 입으로 그랬다더군. 약속이 깨지면 두 종족 모두 홀딱 망할 거라고 말야. 그래도 선물을 가져간 걸 보면 옛날 사람들 공짜 되게 좋아했던 모양이야." "...많이 아는군...? 로크 페울로니의 전설은 로데인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는데..." "우리 보물 사냥꾼들에겐, 사정이 다르지." 켈리는 미소를 지었다. "고대의 보물들이 왜 보물 사냥꾼들을 유혹하는지 알아? 그건 그냥 그 보물에 박힌 금붙이나 보석 때문이 아냐. 그 보물의 현금가치 때문도 아니고... 그렇다면 차라리 강도질을 하거나 영주들의 성을 터는 게 낫게. 보물들... 그건 그것에 얽힌 이야기들 때문에 더욱 매력 있어지는 거야. 진짜 보물 사냥꾼이라면 한 보따리의 사연 없는 보석들보다 단 하나의 사연 있는 보석을 더 소중히 여기지. ...그건 내 선배 보물 사냥꾼 중 하나가 했던 말이지만. 그런 면에서 로크 페울로니는 모든 보물 사냥꾼들의 꿈인 거야. 멸망한 로데인의 기억이고, 멸망해 가는 드래크로니안의 추억이니까." 켈리는 잠시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해가 진 하늘은 별 몇 개가 힘없이 빛나는 짙은 잿빛이었다. "...하르크자엘은 원래 인간들의 친구였다고 하더군. 이름도 저승의 바람 따위가 아니었고... 난 가끔 궁금해져. 드래크로니안 족이 망해 가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변한 걸까? 옛날에는 인간을 도와 괴물들을 물리쳤다는 그들이...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변해 버렸기 때문에 멸망의 길을 걷는 걸까?" ------------------------------------------------------------------ 항구도시 샤이렘 -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들며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을 맞아 줄 사람들은 없었다. 이미 집들과 배들은 잿더미만 남아 검은 연기를 뿜고 있었고, 보이는 인간들이라고는 죽어 쓰러진 시체들이나 이제 죽음의 문턱에 거의 다 다다른 사람들 뿐이었다. 맑았던 바다 위로 진한 피가 흘러내렸다. 이미 육지 주위의 바다는 피로 물들어 혼탁한 붉은 색이었고, 고기들은 어디론가 도망치고 없었다. 그 수면 위로 사람과 오르크, 말과 트롤, 하피들의 시체가 떠다녔다. 이따금 배의 잔재가 가라앉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도... 도와줘..." 생존한 인간 기사 중 한 명이 땅에 머리를 처박은 채 죽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어깨를 꿰뚫고 긴 창이 솟아나 있었고, 상처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으나, 아직 죽음에 이르지는 않은 상태였다. 어두워져 가는 그의 시야에, 어떤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방금 이 도시에 도착했는지, 전투를 치른 흔적은 없었다. 어리둥절한 듯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모습은 분명 인간 족의 젊은 청년이었다. "도와줘...!" 샤이렘의 기사는 마지막 힘을 다해 소리쳤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그 청년은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다급하게 물었다. 샤이렘의 기사는 이제 살았다는 듯, 한결 힘을 얻어 설명했다. "오르크의 침입이 있었소... 놈들은... 그냥 영토만을 원하는 게 아냐... 에스테이아를... 인간 족을 멸해 버리려는..." "오르크가? 인간족 전체를 멸한다고요? 그게 무슨...!" "히루스... 게레드의 영주 히루스...! 그도 한패야... 자기 입으로... 오르크외 괴물들의 세상이 오면 자기는 인간 족의 통치자가 될 거라고... 어서 폐하께 알려야..." "그렇군. 오르크들이 인간 소년을 데리고 게레드로 간 건가? 가는 도중 증거 인멸을 위해 이 도시를 파괴해 버렸고." "맞소. 어떻게...?" 그러나 그 기사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청년의 등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날개, 빛을 빨아들이는 듯 검은 빛 그 자체인 거대한 날개였다. "넌 누구냐!" 그 물음에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닌 그 청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날 모른다고? 내 이름은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이다. 정보를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 보답으로, 고통스럽게 죽음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도록 해 주지!" 휙! 순식간에 하르크자엘의 긴 칼이 하늘에 원호를 그렸다. 그리고 샤이렘의 기사의 목은 허공을 날아 땅에 툭 떨어져 굴렀다. 놀라움과 분노로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하르크자엘, 아니 제피로스는 칼에 묻은 피를 그 시체의 망토 자락에 문질러 닦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역시 게레드에 있는 건가..." ------------------------------------------------------------------- 게레드는 레젠디아 대륙의 남부, 로운 강의 중류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리로 가려면 두 가지 길이 있었는데, 하나는 산길을 통해 일주일 남짓 걸어 가는 것이었고, 하나는 뱃길을 이용해 항구도시 샤이렘으로 간 다음, 로운의 수로를 타로 중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다. 오르크들이 택한 길은 뱃길이었다. 덕분에 로이는 선실에 편안히 갇힌 채(?) 사흘을 보낼 수 있었다. 불편한 것이라고는 밖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과, 아무데도 갈 수도 구경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오르크의 배들이 흔히 그렇듯이, 로이의 방도 창문 하나 없이 빛이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흘째 되는 날 한밤중, 로이는 드디어 배에서 내렸다. 그제서야 그는 더이상 바다 위가 아니고, 어디서부터인가 배가 강으로 접어들어, 이제는 바다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웅장한 선박장이 갖추어져 있는 그곳은 분명 강이었다. 물론 로이가 본 강 중에서 가장 넓고 거대한 강이기는 했지만. 그것이 바로 레젠디아에서 두번째로 큰 강, 로운 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디실의 주인." 반갑게도 유창한 인간 언어가 들려왔다. 로이는 금방 밝은 얼굴이 되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는, 호화로운 차림의 남자였다. 젊었을 적에는 꽤나 건장하고 날렵한 몸매였을 테지만, 지금은 절제 없는 생활 탓인지 군살이 많이 붙고 있었다. "저는 이곳 게레드의 영주 히루스입니다. 이디실의 주인인 당신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디 집처럼 편안히 지내시고, 불편하신 점이 있으면 사양 말고 말씀해 주십시오." "아... 저... 감사합니다, 영주님." 로이는 당황해서 더듬거렸다. 그는 살면서 영주에게 이렇게 공손한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의 상냥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로이는 그가 이유없이 싫어졌다. 오르크와 한패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꾸민 듯한 과장된 인사 때문이었을까... "이리로 오시죠, 이디실의 주인. 제가 성함을 알아도 되겠습니까?" "...에이론드." 로이는 짧게 대답했다. 그리고 말없이 히루스 영주를 따라 게레드 성 안으로 들어갔다. 게레드의 모습을 보고 로이는 한숨을 쉬었다. 도망치기 복잡하기엔 게레드나 시지리스나 막상막하인 것 같았다. 게레드는 평야 지방이었고, 성도 그래서 평원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라는 자연적인 방어 조건이 갖추어진 시지리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경비가 삼엄했고, 성벽도 높고 튼튼했다. '으이그... 내가 일 더 복잡하게 만든 건 아닌가 모르겠네...' 우연인지 오르크 오드가 정말로 로이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로이는 또다시 탑에 갇혔다. 그러나 이번엔 얼마나 탑이 높은지, 탑 아래를 내려다보면 게레드의 시내가 다 보였다. 게레드는 무척 평온하고 부유한 것처럼 보였다. 밭과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으며, 가을을 맞아 모두 황금빛으로 변해 가고 있는 중이었다. 로이는 무슨 이유로 이런 아름다운 곳의 영주가 국왕 몰래 오르크 편을 드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이튿날을 로이는 하루 종일 게레드의 경치를 바라보며 보냈다. 도저히 탈출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은 꼼짝도 안할 만큼 굳게 잠겨져 있었으며, 탑의 창문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해질녘이 되자 드디어 이성을 잃은 로이는 방 안의 귀중한 도자기들과 비단 베개 따위를 마구 집어던지며 혼자서 화를 내었다. ...벽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꽃병이나 깨뜨린다고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는 건 아냐. 안그래?" 로이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분명 방 안에는 그 자신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인간의 언어로 말하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야?" 로이는 두리번거리며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그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야. 나 여기 있어. 네 바로 앞에, 방금 내던진 베개 위에 말야." "...설마, 네가...?" 로이는 어이가 없어서 입이 딱 벌어졌다. 터져서 새털이 삐져나온 베개 위에는, 갈색의 부드럽게 윤기 나는 털을 가진 작은 생쥐 한 마리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 맞아. 나야. 너 여기서 나가고 싶지?" 로이는 눈이 휘둥그래져서 말하는 생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쥐... 쥐가 말을 하네! 으.. 정말 요새는 이상한 일들만..." "난 쥐가 아냐! 사물은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고. 난 데이미아라고 해. 넌 에이론드라고 했지?" "...데이미아... 너 여자 쥐니?" "쥐가 아니랬잖아!" "...그럼?" "난 원래 요정이야. 그런데..." "꼭 쥐같이 생긴 요정이네." "마법에 걸린 요정이라고! 으휴! 인간들은 정말 바보같애! 너 자꾸 그러면 탈출하는 것, 안 도와준다!" 그 생쥐, 아니 요정 데이미아는 신경질적으로 앞발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로이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네가... 탈출하는 걸 도와줄 수 있다고?" "물론이지! 난 5년 전 쥐가 된 이후로 죽 여기서 살았어. 그래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지. 물론 이 방 열쇠도!" "정말? 날 도와줄거야?" 로이는 흥분해서 물었다. 그러자 데이미아는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 세우며 말했다. "흠... 그런데 세 가지 조건이 있어. 첫번째로, 다시는 날 쥐라고 부르지 말아야 해!" "물론이지!" "그리고 두 번째로, 내가 어떤 물건을 찾게 도와줘야 해.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꼭 필요한 물건이거든." "도와줄께! 어차피 탈옥해도 갈 곳도 없으니까. 세 번째는?" "흠... 그건, 내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다음 이야기해 줄께." "좋아, 좋아! 뭐든지! 내가 여기서 빠져나가도록 해주기만 한다면야!" 로이는 이것저것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소리쳤다. 데이미아는 만족한 듯 작은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약속한 거다! 내일 아침이 되기 전까지 열쇠를 가져다 주겠어. 그럼 넌 여기서 빠져나온 다음, 내가 내 물건을 찾는 걸 도와줘야 해. 알겠지, 에이론드?" 로이는 만족하여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런데 내 이름은 에이론드가 아니라 로이야." "로이... 그게 더 낫군. 그럼, 이따 봐!" 데이미아는 쪼로록 바닥을 달려가 벽 틈에 난 쥐구멍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로이는 터진 베개에서 나온 새털을 한 움큼 잡아 천장을 향해 뿌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얏-호!" 나중에 가서야 데이미아가 이야기하지 않은 세 번째 조건이 무엇 인가 궁금해지긴 했으나, 그래도 걱정 따위는 되지 않았다. 무슨 조건이든, 이런 탑 꼭대기에서 오르크들과 오르크 앞잡이 인간들과 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 한편, 랜스와 켈리, 그리고 툴위그도 로이가 간 길을 그대로 밟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 켈리와 툴위그는 산길로 갈 것인가 뱃길로 갈 것인가에 대해 의견 충돌을 일으켰다. 툴위그는 난쟁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물을, 특히 바다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빨리 가지 않으면 오르크들이 로이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켈리의 위협 때문에, 결굴 배를 타게 되었다. "와~! 육지다! 육지!" 샤이렘이 보이기 시작하자 켈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그것을 본 툴위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육지 처음 보냐? 수선스럽긴..." "쳇, 사실은 툴위그가 더 좋으면서 뭘 그래요? 하긴, 난쟁이들은 다 도끼처럼 가라앉기만 하니까." "뭐... 뭐야? 너 내 수영 실력을 뭘로 보고...!" "하긴, 툴위그는 뜨기라도 하니까 날 없는 자루뿐인 도끼인가?" "켈리, 너!" 둘은 또 티격태격 말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의 싸움을 중지시킨 것은 랜스였다. 말없이 바다를 쳐다보기만 하던 랜스가, 샤이렘 항구의 심상치 않은 모습을 눈치챈 것이다. "...오르크다...!" 하고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켈리와 툴위그가 놀라서 싸움을 멈추고 물었다. "...뭐?" "저걸 봐. 오르크들이 샤이렘을 습격했군..." 술렁거림이 승객들과 선원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얼마 안 있어, 선장까지 갑판으로 달려나왔다. 그들 모두의 눈앞에 샤이렘의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붉게 물든 바다 위로 떠다니는 시체들,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집들의 잔재들... "샤이렘이...!" 하고, 선장이 낮게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 샤이렘에까지 오르크가... 어둠의 계곡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인데..." 선장은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선원들 사이에 두려움이 퍼지고 있었다. 그 불길한 침묵을 깬 것은 랜스였다. "어둠의 계곡, 우클로우에만 오르크들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르크들은 어디에건 있습니다. 시지리스도 오르크들에게 당했잖습니까." "...그러나..." "...어쨌든 저기에 선박하긴 다 틀렸군! 안그래요, 선장님?" 하고 켈리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었다.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표정에 선장과 선원들은 모두 놀랐다. "할 수 없죠, 뭐. 저기 배를 댈 생각이 없다면 나룻배라도 내려줘요. 우리들만이라도 가게. 그건 가능하겠죠?" "그... 그러나..." "아, 걱정 마시라니까요. 저희들, 보기와는 달라요!" 씩 웃어 보이는 켈리의 모습에 선장은 더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잠시 후 기껏해야 네 사람쯤 탈 수 있는 작은 비상용 배가 내려졌고, 랜스와 켈리, 그리고 툴위그는 그 배에 올랐다. "오르크 놈들, 정말 요란도 떨고 갔네." 켈리는 두렵다기보다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랜스는 그런 그녀를 흘끗 바라보며 물었다. "이런 광경을 많이 본 모양이지?" "많이? 헷, 그건 아냐. 하지만 볼만큼은 봤지. 워낙 시대가 그렇다 보니... 그러는 랜스는 많이 봤어?" 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노를 저을 뿐이었다. 샤이렘의 참혹한 광경이 그에게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라우더의 모습을. 아름답던 그 땅이 순식간에 생지옥으로 변해 버리는 그 모습을... 오르크와 하르크자엘에 의해. 켈리는 눈치없이 다시 물으려고 했으나, 툴위그가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찌르자 비로소 입을 다물었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샤이렘의 피로 물든 항구에 도착했다. "...격전이 벌어졌나 보군... 아무도 살아남지 못한 것 같아." 툴위그가 암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샤이렘의 광경을 보고서는 그 누구도 기분이 좋아질 수 없었다. 마구 뒤섞여 있는 인간과 오르크, 괴물들의 시체, 피로 물든 바다, 재가 되어 버린 건물들... "에이, 실망이네, 샤이렘은 도시 경관이 좋다고 해서 구경이나 할까 했는데 이런 꼴이라니..." 켈리는 랜스와 툴위그의 기분을 북돋우려는 듯, 한동안 떠벌거리며 수선을 피웠지만, 이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잠잠해졌다. 랜스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어쨌든 여길 떠나 게레드로 가야지." 그 말에는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흩어져 배를 찾기로 했다. 더이상 이곳에 오르크는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 오르크도 인간도 짐승들도,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 자신밖에는. "그런데 이상하잖아, 이렇게 사람을 죽이다니." 흩어지기 직전, 툴위그가 켈리에게 말했다. "이곳은 선장 말대로 오르크들 본거지와 멀리 떨어진 곳이야. 무슨 군사 요지도 아니고... 게다가 오르크들이 남아있지 않은 걸로 봐서 점령 하려고 한 것 같지도 않단 말야.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인간들을 전멸시켰다는 건..." "오르크들 속을 누가 알겠어요." 켈리는 가볍게 어깨만 으쓱하고는 배를 찾으러 가 버렸다. 한참 후에야 툴위그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들이 출발하는 선박장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해가 벌써 서산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으므로, 그들 셋은 그날 밤을 샤이렘에서 보내기로 했다. 켈리는 또 이런 시체들 틈에서 어떻게 잠을 자냐고 아우성을 쳤지만(그녀는 툴위그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시비거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어디에 오르크가 숨어있을지 모르는 뱃길을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켈리는 한참 툴툴거리다가 혼자서 저녁거리를 사냥하겠다고 떠나 버렸다. 랜스가 함께 가려고 했지만, 툴위그의 만류로 그냥 남았다. 그들 둘은 그녀가 돌아올 때까지 모닥불을 피우고 할 수 있는 데까지 시체들을 묻거나 태워 주기로 했다. "저 애는 피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하고 툴위그가 의외로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살인을 싫어해. 불필요한 죽음이 많기 때문에 세상이 이 꼴이라고 하더군. 보기처럼 살벌한 애는 아니네." "...제가 보기엔 우리들 중 가장 멀쩡한 것 같던데요." "글쎄... 마음에 맺힌 게 별로 없어서 그런가 보지. 나는 어렸을 때 오르크의 침략으로 가족들을 잃은 적이 있어서 이런 광경만 보면 그 생각이 나... 할아버지가 그 때 돌아가셨고, 내 부모님과 삼촌들도 돌아가셨지. 그리고 형제들과 사촌들도 거의 모두 죽었어. 그들의 학살을 피해 살아남은 건 스무 명이 넘던 대가족 중 큰아버지와 나, 그리고 내 사촌 한 명 뿐... 그나마 우리들은 동족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야 했어. 가보 카자룬을 빼앗겼기 때문이야. 자네도 그와 비슷한 기억이 있다고 하더군... 그러나 켈리는 전혀 아니네. 그 앤 밝게 자랐지. 그 애가 생각해낼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라곤 고작 뚱뚱보 영주와 결혼하는 정도니까 말야. 내가 그 애를 처음 봤을 때도, 독사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 치고 너무 낙천적이더라고. 결국 그 태도에 이끌려 날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선뜻 승락했지만..." "...전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하르크자엘이 제 앞에서 그 분을 죽였죠... 그건 절대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랬군..." 둘은 햇빛이 완전히 사라지자 일손을 멈추고 모닥불 앞에 앉았다. 얼마 후 죽은 토끼 두 마리를 각각 한 손에 들고, 죽은 들오리 한 마리를 허리에 찬 켈리가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오늘 저녁은 토끼 요리! 근데 두 사람 다 표정이 왜 그래요?" -------------------------------------------------------------------- "오드는 아직도 그 인간을 못 찾았단 말이냐!" 아크트는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생고기를 뜯어먹으며 화를 냈다. "인간 하나 잡는 데 도대체 며칠이나 걸리는 거냐! 에잇, 무능력한 놈들! 너희들을 부하라고 부리고 있다니!" 아크트는 먹고 남은 고기의 뼈를 애꿎은 부하들에게 던졌다. 바로 그 때, 오르크 문지기 하나가 허둥지둥 들어와 알렸다. "위대하신 쿠푸-헤! 드래크로니안의 군주가 위대하신 쿠푸-헤를 뵙고자 합니다." 8 "하르크자엘? 이젠 왜 또 그 재수 없는 놈까지 와서 날 괴롭히는 거냐! 그 놈은 아무때나 저 편할 때 날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돌려보내. 그리고 일주일쯤 후에나 와서 날 보라고 해!" "그...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십니다. 그... 이디실에 관한..." "뭐야!" 아크트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는 그 병사의 목을 베기 위해, 옆에 두었던 거대한 칼을 집어들었다. 그 때, 문 쪽에서 오르크의 목소리가 아닌 낭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죄가 없습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오르크 중의 지배자시여. 제가 당신을 뵙고자 했으니까요." "하르크자엘!" 아크트는 억누르는 듯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말했다. "미천한 저를 이렇게 만나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쿠푸-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워낙 급한 일이라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피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조롱하는 듯한 과장된 태도로 절을 올렸다. 그런 그의 등 뒤에는 저승의 바람의 상징인 검은 날개, 아크트 자신조차 두려워하는 그 거대한 날개가 버티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예의를 무시할 만큼 중요한 일이!" "그럼 감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쿠푸-헤. 시지리스의 새 영주 오드는 위대하신 쿠푸-헤의 명령을 감히 저버리고 이디실의 주인을 비밀리에 빼돌렸습니다. 이 미천한 하르크자엘, 쿠푸-헤가 허락하신다면 그를 벌하고자 합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크트는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떻게 하르크자엘이 그 일을 알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 비밀리에 이루어진 작전이었는데. 그런데도 오히려 저 놈은 아크트 자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 와서 '너한테는 비밀인데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크트는 이를 악물었다. 게다가 오드라면 오르크 중에서도 용맹하고 힘이 센 자. 오르크들로 그를 없애려면 큰 희생을 치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르크자엘이라면... "...허락한다." 아크트는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싸우다가 오드도 저 녀석도 함께 죽어 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황송합니다, 위대하고 현명하신 쿠푸-헤. 그러면 그 댓가로 제게 시지리스를 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지리스를!" 아크트는 화가 나서 벌떡 일어섰다. 그 많은 오르크들의 희생을 치루어 얻은 시지리스를 감히 요구하다니! "그건...! 카야크 님의 허락이 있어야..." "벌써 허락하셨으니 염려 놓으십시오. 쿠푸-헤 자신의 결정만이 남았습니다." '저... 건방진 놈!' 아크트는 이를 악물었다. 카야크의 허락을 얻었다면 일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허락한다...! 부디 오드를 벌하고 돌아오도록!" '하지만 네 놈 자신이 죽으면 훨씬 더 좋겠지!' "감사합니다, 위대하신 쿠푸-헤, 오르크의 지도자시여. 이 은혜, 평생을 두고 잊지 않겠습니다." 제피로스는 유유히 아크트의 문을 통해 걸어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크트는 문이 닫히자마자 미친 듯이 화를 냈다. "인간 노예들을 데려와. 내 분노가 가라앉으려면 적어도 인간 백 명의 피가 필요할 거야!" 마구 칼을 휘두르는 그를 보고, 오르크 병사들은 모두 겁에 질린 채 벽 쪽으로 물러갔다. 그러나 도리어 그의 곁으로 오는 자가 한 명 있었다. 두아스였다. "고정하십시오, 쿠푸-헤." "내가 지금 고정하게 됐어! 이제 참을 만큼 참았어. 하르크자엘! 놈이 살아 돌아온다면 내 손으로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그러셔서는 안 됩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는 드래크로니안의 존경받는 군주, 그를 죽인다면 드래크로니안 전체를 적으로 돌리시게 됩니다. 조금만 더 참으십시오. 아직 그도 그의 종족도 쓸모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은 멸망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이제 곧, 그들은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드래크로니안 일족도, 하르크자엘도..." ------------------------------------------------------------------ 게레드 성의 탑 안으로 아침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그 탑 안에 갇힌 로이는 이제 쥐를 기다리는 것도 거의 다 포기한 상태였다. '으이그... 쥐 따위를 믿다니! 내가 바보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벽 쪽에서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로이는 얼른 그 쪽을 돌아보았다. 데이미아였다. 자기 몸의 2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놋쇠 열쇠를 입에 문 채, 힘이 드는지 헐떡거리고 있었다. "야아, 데이미아! 와 줬구나!" 로이는 너무 기뻐 크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데이미아는 급히 속삭였다. "쉿! 열쇠가 없어진 걸 알면 히루스 영주가 난리를 칠 거야." "아, 그렇군. 조심해야지." "내가 밖으로 나가 이 문을 열께. 그리고 내가 이 방으로 다시 들어오면, 넌 망설이지 말고 얼른 날 들고 나가서 성을 빠져나가야 해! 이 성에 있는 한 아무도 안심할 수 없으니깐 말야. 알았지?" "걱정 마! 딴 건 몰라도 뛰는 거라면 자신 있어." 로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데이미아는 다시 열쇠를 입에 물고 쥐구멍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문 쪽에서 작게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데이미아가 다시 쥐구멍을 통해 달려와, 로이의 무릎으로 뛰어올랐다. "달려!" 하고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거의 동시에, 로이는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데이미아는 망토의 모자 속에 넣은 채였다. 다행히 문 바로 앞에는 보초가 없었다. 설마 로이가 도망치리라고는 생각을 못한 것 같았다. 로이는 아무 생각 없이, 마구 달려 계단을 내려갔다. "탈옥이다!" "저기 죄수가 도망친다!" 그제서야 눈치를 챈 병사들이 새까맣게 모여들며, 로이를 뒤쫓기 시작했다. 곧이어 이상한 달리기가 벌어졌다. 모자 주머니에 쥐를 넣은 로이가 선두에 서서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내려가고 있었고, 그 뒤를 이어 십여명의 게레드 병사들이 쫓아왔다. 이미 영주에게서 로이를 절대로 죽이지 말라는 특명을 받은 터라, 활을 쏘지도, 함부로 칼을 휘두르지도 못한 채, 이렇게 따라 달리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문을 닫아! 성문을! 나갈 수 없도록 봉쇄해 버려!"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제 거의 성문 앞에 다다른 로이의 눈앞에서, 철창이 쿵! 하고 내려앉아 버렸다. 로이는 낭패한 심정으로 이미 닫혀 버린 철창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꿈쩍할 리가 없었다. "아아... 또 실팬가...!" 로이가 울상이 되어 중얼거리자,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귀 뒤에서 들려왔다. "어쩔 수 없군! 비밀통로를 이용하자!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뭐? 비밀 통로가 있었어? 그런데, 왜...!" "어서! 시간이 없어!" 그 말은 사실이었다. 로이의 뒤로 무장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그 중 서넛이 칼을 든 채, 로이에게로 덮쳐왔다. 로이는 엉겁결에 성문 옆에 놓여져 있던 대걸레를 집어들어, 그들에게 휘둘렀다. 그런데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그 대걸레가 하필이면 한 사람의 머리통을 정통으로 치더니, 그 옆사람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이... 이 녀석...!" 더러운 걸레로 세수를 해 버린 그 병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로이를 공격했다. 로이는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대걸레만 이리저리 휘둘렀다. 성문을 가로막은 철창에 등을 바짝 댄 상태 였으므로, 더이상 뒤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휙! 그 병사의 칼이 우아하게 원호를 그렸다. 그리고 로이가 들고 있던 대걸레의 걸레 부분이 뎅겅 잘리면서 날아가 버렸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이... 이게 뭐야!" 뒤늦게 달려온 영주 히루스의 목소리였다. 잘 손질된 그의 풍성한 금발 위로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는 대걸레의 머리가 얹혀져 있었다. "여... 영주님..." 병사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로이는 자기 앞에 있던 병사를 확 밀치며 달려나갔다. 여유있게, 영주에게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영주니임-! 머리 다시 감으셔야겠네요-!" "저, 저놈 잡아!" 영주는 이제 이성이고 체통이고 다 잊고, 방방 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제서야 제정신이 든 병사들이 다시 로이를 쫓기 시작했다. 로이는 데이미아의 말대로 이층으로 올라가, 복도를 마구 달렸다. 그러나 곧, 양방향에서 달려오는 병사들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로이는 거의 반사적으로, 옆에 있는 큰 나무문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그곳은 주방이었다. 커다란 파이를 들고 가려던 시녀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진 채 로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파이가 든 접시를 빼앗아 가장 먼저 들어오는 병사의 얼굴에 던져 명중시키자, 그녀는 아예 기절해 버렸다. 이어서 병사들이 따라 들어오려 했으나, 로이가 준비대에 놓여 있던 식칼과 나이프와 포크와 급기야는 뼈 자르는 큰 도끼까지 마구 던져대자, 문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더구나 상대는 그 유명한 '이디실의 용사'가 아닌가! 주방의 요리사들과 하녀들은 너무나도 어이없는 광경에 넋을 잃고 구경만 할뿐이었다. 이윽고 던질 수 있는 것이 모두 동이 나 버리자, 로이는 마지막으로 문을 열고 빼꼼히 머리를 디민 병사의 이마에 도마를 던져 버리고는, 다시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주방 안에서도 추격전이 벌어졌고, 진짜 주방에 있어야 할 요리사와 하녀들은 겁에 질린 채 모두 도망쳐 나와 버렸다. 로이는 달리면서 자신을 잡으려는 병사들의 얼굴에 음식과 접시를 가리지 않고 던져댔다. 데이미아도 어느새 로이의 망토 모자에서 빠져나와, 병사들의 발 앞에 기름을 엎거나, 그들의 머리 위로 후춧가루나 매운 소스를 뿌리거나 하며, 로이를 돕고 있었다. 이윽고 머리를 다시 손질하고 완전무장한 히루스 영주가 붉으락 푸르락한 얼굴로 주방 문을 확 열었다. 그 다음 그가 본 것은 자기 눈을 향해 정면으로 돌진하는 커다란 수박이었고, 그 수박이 자기 이마에 맞아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기절해 버렸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몸을 훌쩍 뛰어넘어, 로이가 도망쳤다. 그 뒤를 다시 병사들이 따르고... "왼쪽! 왼쪽으로 가!" 로이의 머리 위로 가볍게 뛰어내리며,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로이는 그 말을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왼쪽, 왼쪽, 계속 왼쪽으로! 그러나 그 쪽에는 단단한 돌벽이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야! 데이미아! 막다른 골목이잖아!" "그냥 달려!" '에라, 모르겠다!' 로이는 데이미아의 말대로 그냥 달렸다. 그 돌벽에 머리를 박을 각오를 하고. 그러나 그 벽에 다다랐을 때, 로이가 느낀 것은 벽에 부딪히는 아픔이 아니었다. 물론 무엇인가 충격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늪은 곳에서 물에 뛰어들 때 느끼는 충격과 비슷했다. 아니, 실제로 다음 순간, 로이는 물 속에 있었다. 전혀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로이는 깨끗한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르는 그 물을 잔뜩 마셔 버렸다. 당황한 나머지 그는 마구 손을 휘저으며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곧 그것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물 위로 떠오르기 위해 온 몸에서 힘을 뺐다. "푸하!" 드디어 수면 위로 떠오른 로이는 머리를 들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깜깜한 동굴이었다. 천장 어딘가 작은 구멍들이 있는 듯, 실같은 햇살이 군데군데 반짝이고 있을 뿐... "괜찮니?" 로이의 귀 옆에서 몸을 바르르 떨어 털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데이미아가 물었다. "물론 괜찮지! 놈들에게 잡히지만 않으면 괜찮은 거야. 근데 여긴 어디야?" "성의 맨 밑바닥, 지하 감옥보다도 더 깊은 곳이야." "엣, 하지만 우린 분명 2층에서..." "...내가 친구들과 왔을 때, 만일을 위해 마법을 걸어 놨어. 셰이엘, 공간의 왜곡... 우리 드라이어드(숲의 요정족)들의 특기인 마술이지." "야앗, 정말?! 굉장하다! 너 마법사야?" "뭐... 그... 그런 셈이지... 지금은 저주에 걸려 이 꼴이지만..." "최고야, 데이미아! 근데 왜 이런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을 진작 안 했어?" "그... 그게 말이야..." 그러나 데이미아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 때 바로 로이의 눈 앞에서, 녹색을 띈 노란색의 커다란 눈 네 개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어서 그 눈이 달린, 로이 자신의 키만큼 큰 머리가... 주둥이가 무척이나 길고, 네 개의 눈이 험상궂게 빛나고, 우둘두둘한 피부엔 비늘과 털이 듬성듬성 나 있는, 보기 싫은 생명체였다. "저... 저게 뭐지?" "그린스케일이야... 사실은 저것 때문에..." "저거... 사람도 먹니?" "그게... 살아있는 건 다 먹지, 아마..." 데이미아의 기어들어가는 대답에, 로이는 전력을 다해 헤엄쳐 도망치기 시작했다. 섬에서 자란 로이의 수영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그러나 그린스케일은 훨씬 더 빨랐다. 그것은 머리만 볼품없이 크고 꼬리는 마치 잘린 것처럼 몽당하고 여섯 개의 다리는 빈약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로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며 로이를 추격했다. "으아아아아! 데이미아! 어떻게 좀 해 봐! 너 마법사라며!" "난 지금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라고! 너야말로 어떻게 좀 해 봐! 넌 이디실의 용사잖아!" "난 무슨 용사 따위도 아니고 그 망할 칼은 갖고 있지도 않다고!" 둘은 전력을 다해 헤엄쳐 도망가면서도 이렇게 말다툼을 계속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린스케일은 그들을 빠른 속도로 따라잡고 있었다. '안되겠다. 헤엄쳐서는 도저히 이 녀석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 로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린스케일이 그 거대한 입을 쫙 벌리고 로이를 덮쳐왔다. 로이는 간신히 옆으로 피해서 잡아먹히는 것을 면했으나, 그 물살 때문에 정신없이 파도에 떠밀렸다. 한참 물 속과 물 위를 오락가락하다가, 로이는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버렸다. "으악!" 부딪힌 다리와 팔에서 금방 피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나서 로이는 다시 물 속으로 꼬르륵 빠져들었다. "로이! 괜찮아?" 바로 귀 옆에서 들려오는 데이미아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바위다. 저 위로 올라가면 저 괴물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몰라!' 이런 생각이 로이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추스리고서, 있는 힘을 다해 바위로 헤엄쳐 갔다. 그리고 거의 수면과 직각을 이루는 바위 위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륵!" 그린스케일이 성난 소리로 으르렁거리며, 물갈퀴가 달린 앞발로 바위를 쳤다. 로이의 발 바로 아래쪽이었다. 순간 동굴 전체가 흔들거리며, 바위에서 돌 부스러기가 부서져 떨어졌다. 로이는 죽기살기로 바위에 몸을 찰싹 붙인 채, 눈을 꼭 감았다. 로이는 있는 힘을 다해 동굴의 천장과 맞닿아 잇는 바위의 꼭대기 까지 기어올랐다. 그리고는 더이상 올라갈 곳이 없게 되자, 그제서야 머리를 돌려 아래에 있는 그린스케일을 바라보았다. 그린스케일은 바위 아래쪽에 달라붙은 채, 커다란 입에서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리며 포효하고 있었다. 누렇고 들쭉날쭉한 이빨들이 로이를 위협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바위를 기어오를 능력은 없는 것 같았다. "살았다..." 로이와 데이미아는 동시에 이렇게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린스케일이 자기 머리로 바위의 밑둥을 박고 있었던 것이다. "저... 저 무식한 녀석! 아프지도 않나!" 로이가 새파랗게 질린 채 소리쳤다. 그러나 그린스케일은 상관 않고 계속 바위에 박치기를 해 댔다. 곧 바위 밑둥이 부서져내리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이가 매달려 있는 자리는 점점 더 흔들렸다. "으아아아! 떨어진다!" 첨벙!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위가 물 속으로 처박혔다. 동시에 로이와 데이미아의 몸도 그 바위에서 튕겨져나가, 거센 파도 속에 휩쓸렸다. 이런 파도 속에서는 수영이고 뭐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천장에서 바위 조각과 돌멩이들이 비오듯 쏟아졌다. "크와아악!" 그린스케일이 커다란 입을 벌리며 로이에게로 달려들었다. 로이는 물살에 휩쓸려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겁에 질려 그 괴물의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순간 물살에 휩쓸려 그린스케일의 송곳니가 아슬아슬하게 로이의 어깨만을 스쳐간 것은, 완전히 운이었다. "으악!" 로이의 몸은 힘없이 물 속으로 곤두박질쳐, 돌바달에 사정없이 내팽개쳐졌다. 그의 몸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그린스케일의 네 개의 눈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로이! 로이! 도망쳐!" 데이미아가 로이의 망토 자락을 꼭 붙들고 소리쳤으나, 로이는 이미 도망칠 기운도 없었고 반쯤 기절한 상태였다. 그린스케일의 커다란 입이 로이의 머리 위로 덮쳐왔다. "으아아악! 라이디엔! (살려줘요!)" 데이미아가 겁에 질린 나머지, 요정 언어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 비명에 대답으로 하듯, 그린스케일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캬아아악!" 그린스케일의 입에서 고통에 찬 비명이 터져나와, 동굴 안을 온통 뒤흔들었다. 데이미아는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그린스케일을 멍하니 쳐다 보았다. 그것은 분명 고통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머리 위에는,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의 모습을 한, 그러나 인간의 기가 느껴지지 않는 한 기사가 그린스케일의 눈에 검을 박아 넣고 있었다. "크와아아악!" 그린스케일이 몸을 비틀며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기사의 몸은 가볍게 동굴 천장으로 튕겨져나갔다. 그가 돌천장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고, 데이미아는 분명 그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사는 죽기는 커녕 별로 아프지도 않은지, 튕겨져나가는 동시에 칼을 휘둘러 그린스케일의 정수리 한복판에 꽂아넣었다. "캬아아!" 그린스케일이 외마디의 비명을 질렀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스럽고 귀를 찢는 듯한 소리였다. 누가 들어도 그것은 죽기 직전의 발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세차게 경련을 일으키며 온몸을 뒤틀더니, 수면 위로 쿵! 하고 쓰러졌다. 그 괴물과 싸우던 기사는 다시 튕겨져나갔다. 로이의 몸은 그린스케일이 쓰러지면서 낸 파도 때문에 물 속으로 깊이 잠겨들었다가 솟구치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데이미아는 그의 망토 자락을 꼭 잡은 채, 놓지 않고 있었다. 이윽고 수면 위에서 어떤 손이 불쑥 들어와 로이의 팔을 잡고 물 위로 끌어냈다. 아까의 그 기사였다. "...제피로스!" 로이가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제피로스는 9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로이. 넌 도대체 조용히 지낼 줄 모르는 애구나?" ------------------------------------------------------------------ "멍청한 히루스! 그 아이를 놓쳤다고?" 오드는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리며 중얼거렸다. 방금 오드에게 그 보고를 올린 오르크 병사는, 기가 죽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다. 오드는 주먹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멍청한 인간! 내가 그 인간을 어떻게 잡았는데...!" 그의 칼이 칼집에서 뽑혀져 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보고를 올린 오르크 병사의 몸에서는 목이 떨어져 나갔다. 오드는 칼을 든 채 그 시체를 노려보며 한동안 씩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문지기 한 명이 달려와 소리쳤다. "쿠, 쿠푸 오드! 크, 큰일 났습니다!" "이디실의 주인을 잃은 것보다 더 큰일이 있나?" "그, 그것이, 그, 글쎄, 하르크자엘이..." 휙! 그의 뒤로 거의 볼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칼날이 직선을 그었다. 문지기는 말을 미처 끝맺지도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쓰려졌다. 오드는 그의 뒤로 나타난, 검을 든 불청객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하르크자엘...!" "아하! 잊지 않았군." 하르크자엘의 목소리는 유쾌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솔직히 말해 좀 엉망이었다. 찢어진 옷과 상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처럼 푹 젖어 있었다. "그래, 방문하기엔 좀 안 어울리는 복장이지? 사실은 자네가 인간 영주 히루스에게 선물했던 그린스케일과 먼저 담소를 나누다 왔네. 그래서 이 꼴이 됐으니 용서해 주기 바라네. 그건 그렇고, 자네는 그 칼을 빼들고 어쩌겠다는 건가? 이런 꼴이라도 나는 드래크로니안의 군주야. 예의를 갖추 어야 하지 않겠나?" 신나게 떠드는 하르크자엘을 보며, 오드의 눈은 살기로 불타올랐다. 칼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평상시라면 나는 하르크자엘의 상대가 될 수 없어. 하지만 지금 그는 그린스케일과 싸우느라 지쳐 있고, 상처를 입고 있다... 지금이라면...' "어떻게 오셨는지요, 드래크로니안의 지배자시여?" 오드의 목소리에는 누구라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반감이 서려 있었다. 제피로스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물론 이디실과 그 주인을 받으러 왔네. 그건 자네 소요물이 아닐 텐데, 오드! 입수했으면 카야크 님께 보내는 것이 우선이 아닌가." "카야크 님께? 흥, 드래크로니안 족에게 보내는 거겠지! 그리고 너, 하르크자엘에게!" 드디어 오드는 본색을 드러내며 칼을 다잡았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오히려 여유 있는 미소를 지었다. "이건 반역이네, 오드. 드래크로니안의 군주로서, 그리고 카야크 님의 충신이자 오르크 족의 친구로서 이러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군." "흥! 반역? 나야말로 내 종족을 위하는 자다! 하르크자엘, 오르크 종족을 네 계획을 위한 소모품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같은 놈과는, 8그리고 네놈의 종족들과는 더이상 협조하지 않겠다. 오르크 족은 미래를 지배할 힘이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네놈들, 멸종해 가는 기형 용족 따위의 도움은 필요없다!" 제피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멸종해 가는 기형 용족'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벌써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드러나고 있었다. 그는 칼을 빼어 들었다. "죽음을 재촉하는군, 오르크!" "너야말로 오늘이 초상날이다. 건방진 드래크로니안!" 제피로스의 가늘고 긴 칼과 오드의 거대한 오르크 칼이 불꽃을 내며 맞부딪쳤다. 제피로스의 솜씨는 여전히 매서웠으나, 지친 탓인지 그가 자랑하는 빠른 칼놀림은 볼 수 없었다. 오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죽어라, 하르크자엘!" 오드의 칼의 굵은 칼날이 무서운 속도로 제피로스의 머리를 향해 덮쳐왔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재빨리 피하고, 그의 칼은 허공을 휘저었을 뿐이었다. 다른 오ㄹ 병사들은 겁이 난 나머지 그들의 영주를 돕지도 못하고 그 싸움을 구경만 하며 서 있었다. 오드의 칼날은 쉴 틈을 노리지 않고 다시 제피로스를 공격해 왔다. 머리, 심장, 배를 겨누며. 그러나 모두 제피로스의 재빠른 방어에 튕겨나갔고, 그에게는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었다. 한참동안 그렇게 공격에 힘을 쏟던 오드는 마침내 힘이 다해 헐떡거렸다. 그렇지만 제피로스는 말짱한 얼굴로 미소까지 띄우고 있었다. "힘이 벌써 다 빠진 건가, 오드?" "웃기는 소리 마!" 오드가 칼을 높이 쳐들고 펄쩍 뛰며 최후의 일격을 가했다. 그러나 그것은 오드의 특기이기는 했으나, 몸이 빠른 제피로스에게는 전혀 맞지 않는 기술이었다. 제피로스는 유연한 몸짓으로 그 공격을 피하고는, 오드의 뒷편으로 돌아섰다. 촤악! 제피로스의 칼날이 휘둘러졌고, 오드의 등에 뼈가 보일 만큼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인간이었다면 즉사했을 상처였다. 그러나 오르크인 오드는 숨이 붙은 채, 마지막 힘을 모아 필사적으로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놈을 죽여! 이디실을 빼앗기면 안된다!" 그러나 부하들은 선뜻 제피로스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가 두렵기로 소문난 하르크자엘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엊그제까지만 해도 함께 싸우던 한편이었으니 말이다. "어리석은 짓 마라. 오드는 반역을 저질러서 죽인 것이다. 너희들은 잘못이 없으니, 이디실만 넘겨 주면 살 수 있어." 제피로스는 침착하게 말했다. 오르크들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채, 칼을 빼어 들고 엉거주춤 서 있기만 했다. 죽어가는 오드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 놈에게 이디실을 빼앗기면 우리 종족은 끝이다. 어서 즉여!" "정말 시끄럽군!" 제피로스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짜증스러운 태도로, 칼을 휘둘러 오드의 등을 푹 찔렀다. 칼날은 그대로 오드의 심장을 관통했고, 오드는 단번에 잠잠해졌다. 그 광경에 오르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반역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해도, 오드는 그들의 대장이었다. 다른 종족에게 저렇게 개죽음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하르크자엘! 더는 용서할 수 없다!" 세 명의 오르크 병사가 이렇게 외치며 제피로스에게 돌진했다. 제피로스는 여유있게 미소까지 지은 채, 그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오르크의 칼이 아슬아슬하게 제피로스의 얼굴 옆을 스치며, 그의 머리칼을 몇 가닥 잘라냈다. 동시에 그의 가슴을 향해 다른 오르크의 도끼가 날아들어왔으나, 제피로스의 칼질 한 번에 튕겨나가 버렸다. "...명을 재촉하는군. 너희들 모두 반역죄로 사형이다!" 제피로스가 이렇게 소리치며,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띄웠다. 동시에 그의 길고 가는 칼이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공격하려던 오르크 병사의 배를 찍 갈라놓았다. 그리고 다른 오르크들이 동료의 죽음에 놀랄 새도 없이, 그의 칼이 나머지 오르크들을 차려로 베었다. 반격은 커녕 제대로 볼 수조차 없는 속도였다. 마지막에 남은 한 오르크는 도끼를 휘두르며 그의 목을 치려고 했으나, 제대로 자세를 잡기도 전에 목이 잘린 채 쓰러졌다. 구경만 하던 오르크 병사들이 비로소 제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제피로스의 주위에는 그를 공격하려던 오르크들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잠시 두려움에 찬 침묵이 흘렀다. 제피로스는 의기양양하게 오르크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보고만 있지? 너희들도 저들을 공격하지 않은 이상 반역자다. 기회를 줄 테니 내게 덤벼보지 그래?" 잠시 오르크들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는 듯, 아니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곧 그들 사이에 공포에 찬 술렁거림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들 중 하나가 급히 뛰쳐나와, 제피로스의 발 밑에 납작 엎드리고 빌었다. "용서하십시오, 위대히고 강하신 하르크자엘! 저희들은..." 그러나 그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제피로스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칼을 휘둘러, 그의 목을 싹둑 베었기 때문이다. 이제 오르크들은 상황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자는 용서 없는 하르크자엘, 저승의 바람이고, 그들 중 한 명도 살려둘 의사가 없다는 것을. 살기 위해서는 싸워야 했다. "크와아아악!" 한 오르크가 도끼를 들고 제피로스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는 곧 제피로스의 칼에 배를 갈린 채 허무하게 쓰러졌으나, 그를 기점으로 모든 오르크들이 동시에 제피로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천하의 하르크자엘이라도 수십마리의 오르크들을 혼자 상대하려면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주위에 오르크들의 시체가 셀 수도 없이 뒹굴었으나, 오르크들의 목숨을 건 공격에 그도 조금씩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곳 열린 문 안으로 다른 오르크들이 벌떼처럼 들어왔다. 맨 앞에 선 자는 기형 오르크인지 몸집이 무척 컸다. 그의 갑옷 가슴 부분에는 흑룡의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큰 도끼가 들려져 있었다. 그들이 말로만 듣던 하르크자엘의 종, '저승의 전사들'이란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크와아악!" 그 오르크는 쩌렁쩌렁한 고함을 지르며 동족들을 공격했다. 그의 공격은 좀 둔했으나, 힘만은 보기만 해도 얼마나 엄청난지 짐작이 갔다. 그의 부하 오르크들도, 다같이 그를 도와 동족들을 공격했다. 오드의 부하들은 이제 자신들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르크자엘을 공격하려다 발각된 현행범들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동족들에게 호소한다고 하더라도... 성 안은 순식간에 오르크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주인님!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거인 오르크는 제피로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거의 조용히 말할 수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제피로스는 숨을 몰아 쉬면서 방금 생긴 이마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를 닦았다. "물론 괜찮아. 시간 맞춰 잘 왔다, 그루크." "주인님은 몸을 피하십시오. 이 놈들은 제가 맡겠습니다!" "그것도 괜찮겠군."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서로 죽고 죽이는 오르크 무리를 재미 있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루크에게 덧붙여 말했다. "나는 히루스 영주에게 가 보겠다. 이 놈들을 다 치우거든 게레드 성으로 오너라. 알겠지?" "그러나, 주인님! 상처를 입으셨는데..." "설마 하르크자엘이 이 정도로 쓰러지리라 생각하는가!" 갑자기 제피로스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루크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주인님! 용서를..." "됐다. 속히 게레드 성으로 따라오도록!" 제피로스는 이렇게 말하며, 창문을 통해 간단히 성 밖으로 나갔다. 창 밖으로 그의 검은 날개가 펼쳐져, 히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루크는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시 오르크들 사이로 뛰어들어 학살을 계속했다. ------------------------------------------------------------------ 한편, 켈리와 랜스, 그리고 툴위그는 막 게레드에 도착한 직후였다. 그들은 선박장에 배를 대고, 평화로워 보이는 게레드의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죽음의 땅이 된 샤이렘을 보고 온 직후이기 때문인지, 그들 에게 게레드는 마치 풍요로운 천국처럼 보였다. "잘못 안 거 아냐? 여기 어디에 오르크들이 인간 포로를 숨겨둘 만한 데가 있겠어?" 9 툴위그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켈리를 쳐다보았다. "하, 하지만 분명 여기라고 했던 걸요. 들으셨잖아요!" "그야 듣긴 들었지만..." "잠깐!" 켈리와 툴위그의 말다툼을 끊고, 랜스가 작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둘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왜그래?" "뭔가 날아가는 게 보였어. 못 봤어?" "...새겠지." "새가 아냐. 훨씬 컸어. 그리고 새까만..." 랜스의 눈이 이상스레 빛났다. 그는 칼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손잡이를 꽉 잡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켈리와 툴위그 에게 말했다. "분명히 성 쪽으로 갔어. 난 거기로 가 봐야겠어!" "이... 이봐! 랜스!" "잠깐...!" 그러나 켈리와 툴위그가 붙잡을 새도 없었다. 랜스는 그야말로 바람처럼 달려가 버렸다. 켈리와 툴위그는 황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쟨 또 왜 저런대요?" "내가 알면 점쟁이하게?" "우린 이제 뭘하죠?" "...우리도 게레드 성으로 가 보자구. 도대체 뭐 때문에 저러나 구경 이라도 하게." 랜스는 있는 힘을 다해 게레드 성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숨이 차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러기에는 너무도 흥분해 있었다. "누구냐!" 문지기들이 그를 막으며 소리쳤다. 랜스는 망토를 젖혀 칼을 드러내 보였다. "클레이브 아덴의 동생, 랜스 아덴이오!" "서, 설마 국왕 폐하의 근위대장 클레이브 님의 동생?" 문지기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이 초라한 행색의 사내가 그런 인물이리라고는 믿기지 않았으나, 그의 칼에는 분명 너무나도 유명한 아덴 가의 문장, 비룡을 찌른 두 개의 칼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 이거 몰라뵈서 죄송합니다만... 무슨 일로...?" "영주님께 불청객이 찾아든 것 같은데."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흘 전부터 이 성은 철통같이 수비되고 있습니다. 공중에서 적이 떨어지지 않는 한 위험은 없습죠." "...영주님은 어디 계신가!" 랜스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문지기들은 금방 그가 떠돌이같은 꼴을 했다는 사실과, 방금 성문 앞으로 말도 없이 헐레벌떡 달려온 자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따라오시죠." "서둘러야 해. 내가 걱정하는 적은 바로 하늘에서 온단 말이다!" 그러나 문지기는 반신반의 하는 듯, 느긋하게 그를 영주의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문을 두드리며 물렀다. "영주님! 근위대장 클레이브 님의 동생분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그제서야 긴장한 문지기는 목소리를 높였다. "영주님! 안 계십니까?" "소용 없어." 랜스의 어두운 목소리에, 문지기는 깜짝 놀랐다. "무슨...?" "문을 부숴라. 뒷일은 내가 책임진다!" 그러나 문지기는 어리둥절해서 멍하니 랜스를 쳐다볼 뿐이었다. 랜스는 자기 발로 문을 힘껏 찼다. 쾅! 소리를 내며 문짝이 떨어져 나갔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영주는 아니었다. 영주는 그의 발밑에 죽어 쓰러져 있었다. 그 얼굴에 아직도 죽음의 공포가 선명히 나타난 채. "...하르크자엘!" 랜스가 이를 악물며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의 얼굴에 미소가 스쳤다. "이거, 이거, 리반 아덴의 아드님이 아니신가. 아버지를 쏙 빼닮았군." "닥쳐라. 네 더러운 입으로 그 분의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이렇게 소리치며 랜스는 칼을 뽑았다. 그의 눈에 살기가 불타올랐다. "이 날을 위해 10년을 살았다. 하르크자엘! 검을 뽑아라!" 제피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마치 어른이 아이의 장난을 보고 재미있어 하는 듯한 웃음을. 그리고는 칼을 뽑더니, 아까부터 놀라서 혼이 빠진 채 랜스의 곁에 멀거니 서 있던 문지기를 향해 던졌다. 퍽! 그 칼을 정확히 문지기의 목을 꿰뚫었다. 문지기의 시체는 그 칼과 함께 복도 벽에 꽂혀졌다. "무슨 짓을...!" 랜스가 칼을 꼭 쥐며 당장이라도 달려들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제피로스는 팔을 미소를 지으며 찔러 보라는 듯 두 팔을 벌렸다. "찔러 보시지, 리반 아덴의 아들! 난 무기가 없고 부상당했다. 그런데 네가 나를 공격할 수 있나? 공격할 수 있다면 공격해 보시지!" "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랜스가 어이없다는 듯 제피로스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그는 여유 만만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랜스는 뒤로 물러나 문지기의 몸에 꽂힌 칼을 빼내어, 다시 하르크자엘에게 던졌다. "허튼 수작 하지 마라. 칼을 집어라, 하르크자엘!" "하하하... 그 아비에 그 자식이로군!" 제피로스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정도로 날 이기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라, 리반 아덴의 아들. 마음을 좀더 굳게 먹고 오려무나. 그러면 상대해 줄 테니." 랜스가 보는 앞에서 제피로스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덮여 갔다. 크고 검은 날개였다. 왼쪽 날개 중앙에는 랜스가 만든 흉터가 커다랗게 나 있는... "기다려! 하르크자엘! 어딜 가는 거냐! 비겁한 놈!" 그제야 당황한 랜스가 뛰어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피로스는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만을 남기며 훌쩍 창 밖으로 뛰어내렸다. "나중에 보자, 애송이!" 랜스는 분을 못 이기고 자신의 칼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간신히 하르크자엘을 찾았는데... 이런 식으로 놓쳐 버리다니!'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을 새는 없었다. 창 밖에서 문지기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외치는 하르크자엘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사람 살려! 살인이다! 가짜 기사가 영주님을 죽이고 나도 죽이려 해! 사람 살려!" "아차!" 랜스는 황급히 칼을 집어들었다. 벌써 성의 경비병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의 방 안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 있는 영주와 칼을 든 랜스 자신 뿐이었다. 하르크자엘은 벌써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없었다. "오해입니다! 나는..." 하고 랜스가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병사들은 이미 그를 노려보며 칼을 빼어들고 다가서고 있었다. "저런 차림으로 클레이브 님의 동생이라고 주장할 때부터 의심 스러웠어!" "살인자!" 병사들이 칼을 휘두르며 랜스에게 덤벼들었다. 랜스는 어쩔 수 없이 칼을 들고 그들과 맞섰다. 그러나 함부로 칼을 휘두를 수는 없었다. 그들은 비록 랜스를 공격하고는 있지만, 오해하고 있을 뿐 평범한 인간이고 영주에게 충성하려는 병사들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칼날이 사정없이 랜스를 향해 빗발쳤다. 공격을 하지 않고 막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랜스는 혼자였고, 병사들의 수는 너무 많았다. '이걸 어쩌지...?' 병사들의 공격에 밀려나가 등이 거의 벽에 닿게 된 랜스는 난처한 표정이 되어 생각했다. 물론 그들을 마구 베고 도망치려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죽어랏!" 한 병사가 랜스의 머리를 향해 칼을 휙 찔렀다. 칼날은 아슬아슬 하게 랜스의 이마를 스쳤다. 피하지 않았더라면 정통으로 이마 한가운데를 꿰뚫었을 공격이었다. '에잇, 어쩔 수 없군!' 랜스는 이윽고 칼을 힘차게 휘둘렀다. 그의 이마에 상처를 입힌 병사가, 옆구리를 찔린 채 비실비실 비켜나가다가 푹 쓰러졌다. 그러나 숨은 붙어 있었다. 랜스는 그의 생명이 위협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찔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병사들은 동료의 부상을 보고 흥분했고, 더욱 거세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랜스, 괜찮아?!" 갑자기 툴위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다음 순간, 거대한 도끼를 든 툴위그가 랜스를 둘러싼 병사들 중 한 명의 목을 싹둑 베어 버렸다. 랜스는 툴위그의 출현이 반갑다기보다는, 병사의 죽음 때문에 당황했다. 그러나 툴위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하! 바보 같은 인간들. 덤벼 봐라! 툴위그 젠 글렌델 님이 상대해 주시겠다!" "날 빼놓지 말아요!" 천장 위에서 켈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당황하여 머리 위로 시선을 돌리자, 켈리의 채찍이 휘리릭 내려와 그 중 한 명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그가 저항할 새도 없이, 채찍은 그의 머리를 위로 확 끌어올렸다. "컥!" 졸지에 목이 매달린 병사는 칼도 놓친 채 숨이 막혀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는 버둥버둥하다가 이내 축 늘어졌다. "하하하! 어디, 또 덤벼 보시지?" "이봐, 켈리! 내 몫도 남겨 달라고!" "그만 둬! 둘 다!" 랜스의 날카로운 외침이 방 안 가득 울렸다. 툴위그는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켈리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한 순진한 얼굴로 랜스를 바라보았다. 켈리가 먼저 불만스럽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왜...?" "그 사람을 내려 놔, 켈리!" "랜스, 뭐가 문제야?" "내려 놓으라니까!" 랜스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켈리는 표정이 샐쭉해지면서, 채찍을 거칠게 풀었다. 매달려 병사의 몸은 쿵!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 "죽일 필요는 없었잖아, 켈리!" "뭐야? 도대체 넌 우리가 누굴 구하려고..." 그러나 다툴 새는 없었다. 그 틈을 타 병사들이 다시 랜스의 등을 향해 칼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다행히 툴위그가 재빨리 도끼를 휘둘러 그의 머리를 베어서 랜스는 등을 조금 스쳤을 뿐이었으나, 더이상 방심하고 서로 싸울 수는 없었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해!" 하고 툴위그가 도끼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켈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서 났는지 밧줄을 창 밖으로 던졌다. "밖에도 병사들이 쫙 깔렸으니, 지붕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어!" "켈리... 넌 높은 델 지나치게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 "흥, 난 정상이라고요. 툴위그가 난쟁이라서 고소공포증이 있는 거 아녜요?" "...어쨌든 나가고 보자!" 툴위그가 먼저 훌쩍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그는 밧줄을 잡은 다음 벽을 발로 힘껏 차서, 그 진동으로 옆에 있는 마굿간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그 뒤를 이어 랜스가 뛰어내리고, 마지막으로 켈리가 쫓아오는 병사들에게 독침을 선물한 다음, 그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내렸다. "탈출 성공!" 켈리는 랜스와 싸운 것도 금세 잊어버렸는지, 환하게 웃음지었다. 그리고는 마굿간 지붕 위를 깡총깡총 뛰어가기 시작했다. "...쟨 전생에 다람쥐 아니면 참새였을 거야..." 툴위그는 한숨을 쉬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마지못헤 켈리를 조심조심 따라갔다. 랜스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몹시 화가 나 있었다. '켈리 말이 맞아... 날 구하러 와 준 건데... 하르크자엘을 놓친 분풀이를 켈리한테 했던 거야. 바보같이...!' "잠깐!" 하고 툴위그가 소리쳤다. 먼저 가던 켈리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뭐에요?" "저거... 오르크 아냐?" 사실이었다. 오르크 한 무리가 이미 부서진 성문을 지나 성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수는 100마리가 될까말까 했지만, 그 살기는 멀리 있는 랜스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 사이에는 무늬가 없는 새까만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저승의 전사들...!" 랜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켈리와 툴위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저승의 전사들? 그게 뭔데?" "하르크자엘의 오르크 정예 부대야. 하르크자엘이 라우더를 침공할 때에도 저 놈들을 이끌고 왔었지...!" "...하르크자엘... 하지만 하르크자엘은 드래크로니안인데 왜 오르크 부대를...?" 툴위그가 못 믿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랜스는 모르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힘없이 저었다. 그러나 켈리는 의외로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드래크로니안은 전투에 내보내지 않고 싶다는 거겠지. 이미 그들의 수는 형편없이 줄어 있을 테니 말야... 하르크자엘, 정말 어이없는 놈이로군. 어쨌건 시끄러워지기 전에 빨리 뜨자고." "...하지만... 저 성에 있는 사람들은 오르크에게 당하게 놔두고...?" 랜스의 말에 켈리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놈들, 우릴 공격했잖아! 게다가 우린 할 일이 있어." "무모한 짓 말게, 랜스. 우리 힘으로 저 오르크들을 이길 수는 없어!" 툴위그도 거들었다. 랜스는 이를 악물었다. 툴위그의 말은 옳았다. 켈리의 말도. 그는 로이를 구하고 하르크자엘에게 복수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그는 게레드 성의 사람들을 오르크의 앞에 버리고 가야 하는 것이다. 라우더에서처럼... "...가자." 툴위그가 말했다. 켈리는 랜스의 표정을 흘끔 보더니 지붕 위를 달려 옆에 있는 성벽 위로 깡충 뛰어올랐다. 그리고 키가 작은 툴위그가 그 위로 오르는 것을 도와주었다. 랜스는 그들 뒤를 따라가며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르크자엘, 다음 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겠어!' ------------------------------------------------------------------ 로이는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자신이 자고 있었다는 것을 깨기 전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사방이 어두웠고, 빛이라고는 곁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뿐이었다. 그는 흙바닥 위의 얇은 모포 위에 누워 있었고, 몸은 모닥불 덕분에 따뜻했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지?' "정신이 들었니?" 귀 옆에서 데이미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여긴...?" 그제서야 로이는 정신을 잃기 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탈출, 추적, 그린스케일, 그리고 제피로스... 로이는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무척 피곤했으나, 아픈 데는 없었다. "난... 내가 다쳤는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치유 마법까지 쓰더군." 데이미아가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사실 그녀는 자기를 로이의 친구 라고 밝힌 그 검은 머리의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린스케일과의 싸움에서 이상할 정도로 안 다친 것도 꺼림칙했고, 그의 기가 아무래도 인간 같지 않은 것도 이상했다. 하지만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차가운 칼날 같은 그 자주빛 눈... '...하지만 어쨋건 로이를 구해줬고, 우리에게 친절히 대해 줬어.' "제피로스!" 하고 로이가 밝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걱정스러운 데이미아와는 달리 그는 신이 난 것 같았다. "그가 날 또 구해 줬구나. 근데 지금 어디 갔지?" "...몰라. 먹을 걸 찾아온다고 나가더니만, 올 생각을 않네." "아, 먹을거! 그러고 보니 배고프다." "..." 데이미아는 쥐답지 않게 한숨을 푹 쉬었다. 로이는 인간이라 그의 눈빛이 이상하다는 걸 못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둔해서 그런가? "야아, 로이, 깨어났구나!" 그들 바로 옆에서 제피로스의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데이9미아도 로이도 깜짝 놀랐다. 그제서야 로이는 제피로스가 처음 만났을 때에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로이의 겉옷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네 생쥐 아가씨가 겁이 난 모양인데." "그야 그렇게 소리도 없이 다니니깐 그렇죠!" 로이는 핀잔하는 투였으나 그의 얼굴엔 반가움의 웃음이 가득했다. "아, 미안! 습관이 돼서 말야." "...어떻게 그렇게 다닐 수가 있어요?" "연습하면 돼. 너무 연습하다 보니 이제 소리내며 다니는 게 더 힘들 뿐이야. 그보다, 뭣 좀 먹을래?" "와!" 제피로스가 가져온 음식 보따리를 풀어놓자 로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그는 손에 잡히는 대로 빵과 고기를 입에 쑤셔넣으며 데이미아에게 말했다. "데이미아, 너도 먹어!" "그래, 어서 먹지 그래, 생쥐 아가씨." "생쥐라고 그러지 말아요.. 얘 화내요." "하하, 그래?" 데이미아는 살금살금 기어나와 빵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마구 쫓긴 뒤라 그런지 맛이 좋았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제피로스도 아까처럼 섬뜩하게 보이지 않았다. 로이와 담소를 주고 받는 그의 모습은 그냥 보통의 온화한 인간처럼 보일 정도였다. "내가 없어져서 영주가 화가 많이 났죠?" 하고 로이가 물었다. 그러자 제피로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가셨다. "영주는... 죽었다고 하더라." "에? 죽어요? 세상에. 수박 맞았다고 죽는 사람도 있나?" "아니, 아니, 수박이 아니라, 자객이 들어와서 칼에 맞아 죽었대. 마을엔 오르크 떼가 들어와서 소란을 피우고 있고..." "...방금 전까지만 하도 살아있던 사람이..." 로이는 무섭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먹다 남은 빵을 뚫어 져라 바라보았다. 제피로스는 그런 로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서운 세상이지... 그러나 넌 걱정할 거 없다. 너는 페울론의 주인 아니냐?" 그리고는 그는 품에서 검은 보자기에 싼 물체를 꺼내어 로이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풀어 본 로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디실!" "...그것의 이름을 알아냈구나." "이게 어떻게...?" "도둑질은 너만 할 줄 아는 게 아니란다, 로이." 제피로스는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로이의 얼굴에는 그늘이 졌다. "이거... 나, 가져가고 싶지 않아요." "...왜?" "이걸 훔친 이후로 이상한 일들의 연속이에요. 에이론드 아저씨도 돌아가시고, 시지리스는 오르크 섬이 되고, 난 오르크들 포로가 되고... 게다가 이걸 뽑으면 내가 내가 아닌 것처럼 돼요." "로이, 이디실은 네 칼이야." 하고 제피로스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도 로이만큼이나 풀이 죽어 있었다. "나도 그게 내 칼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가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텐데... 하지만 그건 네 칼이다, 로이. 네가 보관해야 돼. 너도 그 칼의 힘을 알겠지... 그 칼은 네가 아니면 잡을 수 없어. 내가 그 칼을 잡았을 때 떨어뜨린 게 기억나지? 네가 그 칼의 주인이고 이제 모두 그걸 알고 있어.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그 칼을 잡는 수밖에 없어." 로이는 가만히 그 칼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무슨 소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 내가 가지고 있어야죠, 뭐. 이 칼이 제피로스 거라면 나도 좋을 텐데." 이 말에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었다. "넌 정말 착한 애구나, 로이. 하지만 그렇게 아무나 믿으면 안된다." "제피로스를 믿는 게 왜 아무나 믿는 거에요?" 제피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나중에... 내가 네 도움이 필요할 거다. 그럼 그 때, 네가 날 위해 그 칼을 뽑아 주겠니?" "물론이죠!" 로이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제피로스는 다시 로이의 머리를 쓱 쓰다듬고는 일어섰다. "난 가 봐야겠다. 넌 배가 좀 차면 왼쪽으로 가 보도록 해. 그럼 숲으로 통하는 문이 있을 거다. 그럼, 몸조심해." "자, 잠깐! 어디 가는 건데요?" 로이가 다급히 묻자, 제피로스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갈 길은 네 길과 반대편의 길이지... 그럼, 요정 아가씨, 내 꼬마 친구를 잘 부탁해. 로이, 지금 마을은 오르크 천지니까 숲에서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거다!" 제피로스는 올 때처럼 소리도 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따. 로이는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뭐... 뭐가 반대편이란 거야? 너 뭔소린지 이해 하겠니, 데아미아?" 그러나 데이미아는 아무 말 없이 제피로스가 사라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녀가 원래 요정이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 "헤엣, 완전히 영주 살해범으로 몰려 버렸어. 게다가 우리가 오르크랑 한 편이래! 오르크들이 마을을 불태우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엉뚱하게 우릴 잡겠다고 무기 들고 설치고 있어. 바보가 따로 없다니까!" 마을을 정탐하고 온 켈리는 뭔가 신나는 일이라도 되는 양 이렇게 떠벌였다. 눈살을 찌푸린 채 듣고 있던 툴위그가 한 마디 했다. "켈리, 너 철 좀 들어라. 그게 그렇게 실실거릴 일이냐?" "누가 실실거렸다고 그래요? 툴위그야말로 얼굴 좀 펴요. 곧 떠나면 될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죽을 상을 하고 그래요?" 그들이 있는 곳은 영주의 성에서 얼마 떨어진 영주 소유의 숲이었다. 졸지에 영주 살인범으로 몰린 데다 마을은 오르크들로 뒤덮여 있었으므로, 이 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었다. "랜스도 마찬가지야. 오르크 때문에 아직도 기분이 나쁜 거야?" "아, 아냐." 랜스는 황급히 대답했다. 그러자 켈리가 한숨을 푹 쉬며 지겹다는 듯 말했다. "아님 또 그 병사 죽인 거 때문이야? 잘못했다고 그랬잖아." "그야 네가 진심으로 한 소리가 아니라 내가 들볶으니까 한..." "툴위그는 가만 있어요!" "둘이 싸울 필요 없어요. 다 내 잘못인걸." 하고 랜스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태도가 너무 축 쳐져 있어서 켈리도 툴위그도 입을 다물어 버렸다. "켈리도, 미안해 할 필요 없어. 내가 잘못한 거야. 사실은 오늘 눈앞에서 하르크자엘을 놓쳐 버렸어. 그래서 화가 난 걸 너한테 화풀이했던 거야. 미안해." "하르크자엘을? 오늘 만났어?" 켈리는 금방 호기심이 동해서 캐물었다. "그래... 그 영주의 성에서. 그놈이 영주를 죽이고 나한테 덮어 씌운 거야." "정말? 근데 왜 놓쳤어?" 랜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켈리가 더 물으려 하자, 툴위그가 팔꿈치로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아야! 왜 그래요?" "넌 눈치도 없냐? 그러려면 가서 저녁거리나 잡아 와!" "쳇! 내가 음식 당담이에요? 왜 맨날 내가 잡아요?" 툴위그와 켈리는 다시 아웅다웅하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랜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오늘은 내가 아무거나 잡아올께. 내일부턴 당번을 정하자구." 그리고 그는 켈리와 툴위그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 자리를 떠나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나무가 무척 빽빽했으므로, 조금만 가자 툴위그가 피운 모닥불 빛은 거짓말같이 사라져 버렸다. 바스락! 가까운 곳에서 무엇인가 낙엽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랜스는 칼을 뽑았다. 그리고 그 물체의 위치가 잡히는 즉시 공격할 준비를 했다. 그 소리는 곧 다시, 더 분명히 났다. 바스락! 바스락! 어떤 동물이 랜스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랜스는 칼을 잡은 채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가, 충분히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 동물에게 덤벼들었다. "으아악! 죽이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 할께요!" 어이없게도 그 동물은 이렇게 비명을 질렀다. 랜스는 황당해져서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더듬거리며 말했다. "...로, 로이...?" ------------------------------------------------------------------ "아우~! 랜스는 왜 안 오는 거야. 저녁거리 키워서 잡아오나?" 모닥불을 마구 들쑤시며 켈리가 투덜거렸다. 그러자 당장 툴위그의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아직 반 시간도 안 지났다. 좀 기다려! 그리고 모닥불 좀 가만 놔 두고. 재가 다 나한테로 오잖아!" "하지만 배고프단 말예요!" 다행히 두 사람의 말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가까운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랜스였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었다. 밤색의 조금 큰 검은 망토를 입은, 귀염성있게 생긴 소년과 함께였다. "랜스... 설마 쟬 잡아먹겠단 소리는 아니겠지?" "켈리! 너 정말 계속 바보같은 소리 할래?" "어휴, 툴위그! 농담도 못해요?" 로이는 자기를 앞에 두고 싸움부터 하는 한 여자와 한 난쟁이를 휘둥그래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여자는 열 일고여덟쯤 되어 보였고, 헝클어진 금발을 가진 미녀였다. 남자 차림이긴 했지만. 그리고 난쟁이는... 로이가 난쟁이를 보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자, 자, 그만 싸워." 하고 랜스가 웃음지어며 말했다. "켈리, 툴위그, 이쪽은 내 친구 로이. 우리가 구하러 온 사람이지. 그리고 로이, 이쪽은 내 친구인 켈리와 툴위그야." "아, 얘가 랜스 친구야? 생각보다 어리네." 켈리는 금방 상냥한 태도로 돌변하여 로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친절한 누나같은 미소까지 보이면서. "만나서 반가워! 난 켈리야. 귀엽게 생겼네. 크면 미남 되겠다..." "켈-리!" 툴위그는 구제불능이라고 생각하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숨까지 쉬었다. 켈리가 다시 발끈해서 돌아보았다. "어때서요? 난 칭찬해 준거라고요!" "만나서 반갑다, 로이. 난 툴위그 젠 글렌델, 샤드 젠 글렌델의 아들이지. 저 여자가 하는 소리엔 신경쓸 거 없다." "툴위그... 걔가 툴위그 아버지 이름은 알아서 뭣에 쓰겠어요?" "뭐가 어쩌고 저째?" 툴위그와 켈리가 다시 으르렁거렸다. 로이와 랜스는 할 말을 잃고 그 둘을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 만나자 마자 저런 모습이라니...' 그 때, 로이의 옷 속에서 쪼로록 기어나온 데이미아가 툴위그의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브로인! (난쟁이!)" 갑자기 요정 언어가 들리자, 툴위그는 신경이 날카로와져 소리가 난 쪽을 휙 돌아보았다. "여기 요정이 있나?" 로이는 당황했다. 그는 얼굴을 붉히고 더듬더듬 말했다. "저기... 사실은 제가 데리고 있는 쥐가 원래는 요정이래요..." "난 드라이어드 족의 데이미아에요!" 하고 데이미아가 소리쳤다. 쥐가 소녀의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나머지 셋은 모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데이미아가 말을 이었다. "어쩌다가 히루스 영주한테 걸려들어 이 꼴이 됐어요. 그런데... 당신이 그럼 글렌델 가의 난쟁이?" "글렌델 가의 장남, 툴위그다." 툴위그의 목소리에는 경계심이 뚜렸했다. 그러나 데이미아는 오히려 긴장을 푼 것 같았다. "글렌델 가의 난쟁이라면 다른 난쟁이와 다르죠. 그들은 자일 게르 글렌델의 후손, 인간과 요정의 친구니까요. 하지만 글렌델 가는 카자룬을 빼앗겨서, 로그라드에서 추방된 걸로 아는데...?" "맞는 말이야!" 툴위그는 데이미아가 그의 집안의 역사를 잘 알자 감동한 듯이 보였다. 사실, 난쟁이들에게 자신의 가문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그 역사를 남이 알아 준다는 것이 대단한 영예였기 때문이다. "나는 카자룬을 되찾아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여행하는 중이오. 그런데 요정 아가씨는 어떻게 우리 가문을 그리 잘 알고 있소?" "당연한 일이에요. 나는 로크 페울로니 중 두번째 열쇠, 엘미르의 주인인 플리에타의 막내딸인걸요. 인간들이 흔히 엘미어라고 부르는 열쇠죠.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엘미르의 계승자가 되었고..." "플리에타! 숲의 마법사 플리에타가 죽었단 말인가?" "오래 전 일이에요. 어머니는 돌아가셨지만, 엘미르의 비밀은 끝까지 지켜졌죠. 그것을 숨긴 곳을 아는 자는 이제 저 뿐이에요. 히루스는 나를 쥐로 만들면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위치를 가르쳐 줄 거라고 생각 했지만, 그는 틀렸죠. 보다시피 나는 엘미르를 찾아 내 힘으로 본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빠져나왔어요. 로이와 함께..." 잠시 그들 다섯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데이미아와 툴위그는 서로를 빤히 쳐다보았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 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켈리가 중얼거렸다. "로크 페울로니 기레인 헤이스... - 네 개의 열쇠는 서로를 끌어 당길지니... 전설이 이루어지는 순간이군." 랜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힐리온의 주인만 제외하면 말이지..." 그 말에 툴위그가 반박했다. "힐리온의 계승자는 '레이스 데인 에인 렐 테이렐', 인간과 용의 지배자인 로데인 왕조의 후손. 로데인 왕가는 이미 전멸했으니, 힐리온의 주인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전설은 이미 이루어졌어." "그럴 리 없어요." 하고 데이미아가 반박했다. "힐리온의 계승자는 분명 어디엔가 있을 거에요. 로이의 말에 따르면 오르크들이 그 봉인을 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카야크의 봉인이 풀리기 위해서는 네 개의 열쇠와 그 주인들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어요. 그들이 그 봉인을 풀 생각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힐리온의 주인이 있기 때문일 거야." "그렇다면, 그 주인도 이제 곧 우리를 찾아 오겠군." 하고 켈리가 대꾸했다. 그녀의 눈이 흥분으로 빛났다. "우리가 어딜 가든, 만나게 될 거야... 로크 페울로니 기레인 헤이스, 알 샤이드리엔 베일 제이에니엔! - 네 개의 열쇠는 서로를 끌어당길지니, 그 때는 평화의 시작 혹은 종말의 도래일지라!" (제 3장 <로크 페울로니> 끝. 제 4장 <엘미어의 계승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