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1 서장 ========================================================================= [비상사태입니다! 비상사태입니다!!] 기장의 떨리는 목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승객 여러분, 저희 비행기는 현재 원인불명의 기체 이상으로 비행 궤도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콰앙!! 그 말과 함께, 갑자기 비행기 한쪽에서 거대한 굉음이 들렸다. 무언가 터지는 듯한 소리였다! 거대한 콩코드 여객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꺅!!” “살려줘!!!! 아악!!” [승객 여러분, 주엔진이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당장 비상탈출을 준비해주십시오.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지금 당장...] 승객들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죽었다. 비상탈출이라니? 지금 비행기의 위치는 태평양 한가운데, 1만 미터 높이의 고도였다. 여기서 비상탈출하면 무조건 죽는다. “아악!! 살려줘!! 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엄마!! 아악!!!” 승객 모두가 죽음의 공포에 질려 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비즈니스석에 앉아있는 한 한국 …E여인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비상탈출이라고? 여기서 비상탈출해서 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안 돼! 또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이번 삶도 행복하지 못했는데. 이제 겨우 행복해지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송지현. 외과의사이자, 최연소 서울대학교 의대 교수로 발령 난 천재였다. ‘죽도록 노력했는데! 이제 겨우 지난 삶의 잘못을 갚으려고 하고 있는데!!’ 마스터 서젼(master surgeon). 그레이트 서젼(great surgeon). 희대의 천재. 괴물. 이렇듯 그녀를 부르는 별명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겠는가? 이제 죽을 운명인데. ‘이번 삶은 행복해지고 싶었는데.’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벌써 두 번째 허무한 죽음이다. 그녀의 눈앞에 지난 두 번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삶은 이곳 지구가 아닌, 다른 세상이었다. 엘리제 드 클로렌스. 귀족 가문의 딸로 태어나 황후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탐욕과 질투에 온갖 나쁜 짓은 다 하며 살다가 처형당했다. ‘그때는 왜 그렇게 살았을까?’ 떠올리기도 싫은 흑역사다. 이제는 만날 수도 없지만, 당시 잘못했던 사람들에겐 지금도 미안한 마음뿐이다. 특히 가족들.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었던 사랑하는 이들. 단 한 번이라도 그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론 이루어질 수 없는, 부질없는 바람일 뿐이었다. 당시의 잘못은 그녀 가슴의 한으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삶. 송지현. 고아로 태어나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살았다. 고아임에도 과학고 조기졸업, 서울대 의대 수석 입학, 졸업, 외과 최우수 전공의, 그리고 서울대 의대 최연소 교수! 첫 번째 삶의 잘못을 사람을 살리는 일로 갚고자 끝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이제 겨우 꿈을 펼치고, 겨우 행복해지려 하고 있었는데! 이런 죽음이라니!! 그때였다! 콰앙!! 다시금 굉음이 울렸고, 비행기가 크게 기울었다! “...!!!” 그리고 메케하게 올라오는 타는 냄새. 그녀는 죽음을 직감했다. 이미 비상탈출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닥쳐오는 공포에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 어째서일까? 문득 첫 번째 삶, ‘엘리제’로 살던 때의 가족들이 떠올랐다. 근엄하던 아버지. 엄격하지만, 마음 속 깊이 자신을 생각하던 큰 오빠. 그리고 못난 자신을 항상 아끼던 자상한 작은 오빠. 소중했던, 그때는 그 소중함을 몰랐던 이들.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들에게 저지른 자신의 잘못때문일까? 30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전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은 깊어만 갔다. '다시 한번만 만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번쩍!! 굉음과 함께 시야가 빛에 뒤덮였다. 그것이 그녀, ‘송지현’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두 번째 삶이 끝났다. 00002 1-1 ========================================================================= *** 아릿한 흑백의 사형대. 한 여인이 온몸에 피에 젖은 채 묶여 있었다. 고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화려한 옷은 온갖 고초에 더럽혀진 지 오래였고, 성난 군웅들이 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죽여라!!!” “이 악녀!!!!” 퍼억!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 그녀의 머리를 때렸다. 주륵.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렸으나, 그녀를 동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 분노에 차 저주를 내뱉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느냐?” 단두대 앞에서 황제가 물었다. 한때 그녀의 부군이었던 그는 눈가에 차가운 경멸을 담고 있었다. 황제는 시린 목소리로 말했다. “후작은... 너의 아버지와 오라비는 모두 죽었다. 모두 너 하나의 잘못 때문에!” “...!” “그들 모두 마지막까지 너를 걱정하더군. 제발 너의 목숨만이라도 살려달라고.” 그 말을 들은 그녀의 눈동자에 후회와 괴로움이 깃들었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일 뿐이었다. “지옥에서 그들에게 사죄하도록.” 황제는 차갑게 선고했다. 그리고 그 선고 뒤. 섬뜩한 기요틴이 그녀의 목 위로 떨어졌다. *** 그리고 장면이 변했다. 흑백의 수술장. 의사들이 환자를 보며 다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장 파열이야! 혈압이 너무 낮아!" "수혈은?!" "이미 하고 있어요! 하지만 출혈이 너무 심합니다." 그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환자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과연 살릴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드르륵!!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들어왔다. "환자 상태 어때요?" 작은, 아니, 가녀리단 표현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피 한 방울만 봐도 쓰러질 것 같은... 이런 거친 수술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여인. 그런데 그런 그녀를 본 의사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교수님!!" 마치 구원자를 본 듯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수술 준비는 다 됐죠? 혈압은 어떤가요?" "60대입니다." 심각한 쇼크 상태. 하지만 여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여인이 장갑을 끼며 건장한 체구의 남자 의사를 바라봤다. "김 치프." "네? 네, 교수님!" "왜 이렇게 긴장하고 있어요?" "그... 환자의 상태가..." 그 말에 여인이 웃었다. 부드러운, 동시에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미소였다. "김 치프. 이제 우리가 뭘 해야죠?" "... ... ." "말해봐요." "배를 연 후... 비장에서 출혈 혈관을 찾아 지혈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장 손상 정도에 따라 절제 여부를 결정해야 합니다."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정확해요. 그렇게 할 거예요." "... ... ." "잘 들어요. 지금부터 우리는 이 환자를 살릴 거예요. 비록 환자의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저는 우리가 이 환자를 살릴 수 있다 생각해요.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 네, 그렇습니다." 그녀의 차분한 말에 동요하던 의사들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 살릴 수 있었다. 그 어떤 환자라도. 이 여려 보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여인과 함께라면! "메스." 그리고. 수술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가녀린 여인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놓고 싸우는 철혈(鐵血)의 외과의사(surgeon)로. "오픈(open)합니다." 메스가 복벽을 갈랐다. 동맥에서 터져나온 피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적셨고, 그렇게 전쟁이 시작되었다. *** "...!!!!" 그녀, 지현은 번뜩 눈을 떴다. "또 꿈이구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들. 제국의 악녀 엘리제와, 외과의사 송지현의 꿈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그녀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난 분명 죽었는데..." 그런데 살아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익숙한 몸으로!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거울을 바라봤다. 백금발의, 인형같이 아름다운 얼굴. 엘리제 드 클로랜스. 첫 번째 삶의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자신, ‘외과의사 송지현’은 죽었다. 원인불명의 비행기 사고로. 하지만 눈을 떠보니 이 첫 번째 삶의 몸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것도 16살의 어린 시절로. ‘모르겠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살아있으니까.’ 그녀가 의식을 차린 지, 벌써 10일의 시간이 지났다. 처음 눈을 떴을 때는 혼란스러움이 극에 달했었지만, 지금은 많이 안정된 상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모르지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아가씨, 아가씨. 들어갈게요.” “아, 응. 들어와.” 곧 메이드 복을 입은 어린 하녀가 먹을 것을 들고 들어왔다. “여기 식사에요, 아가씨.” “응, 고마워.” 어린 하녀는 식탁에 조심이 음식을 내려놓은 후,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저... 아가씨.” “응?” “혹시 몸이 안 좋으신 것은 아니시죠?” “괜찮아. 왜?” 지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 조금 다르신 것 같아서요. 평소와 다르게 기운도 없으시고...”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하녀의 말뜻을 깨달았다. ‘아, 내 원래 성격이...’ 첫 번째 삶. 엘리제 드 클로렌스는 인형 같은 외모와 다르게 성격이 아주 뭐 같았다. 툭하면 성질에 짜증이었고, 주변의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도 예사였다. 그녀의 기분에 잘못 걸려 다친 아랫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나마 지금이 얌전한 편이지. 아직은 성질만 더럽고, 특별히 큰 죄를 저지른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나중에 나이가 더 들고 나면...’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떠올리고 치를 떨었다. 이 제국 최고의 명문, 클로래스 후작가는 바로 자신 때문에 멸문하게 된다. 소중했던 이들이 죽어가던 모습은 두 번째 삶에서도 그녀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었다. ‘이번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하지 않겠어.’ 엘리제 드 클로렌스의 몸으로 돌아왔으니, 그녀의 삶을 살긴 살아야 할 것이다. 지구에서 서젼, 외과의사(surgeon)의 삶을 살았던 그녀이기에, 이번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과거와 같이 후회가 가득한 삶은 절대로 사절이었다. “마리.” “네? 네!” 부드러운 그녀의 음색에 어린 하녀, 마리는 화들짝 놀라 답했다. ‘왜 이러시는 거지? 저러다 또 무슨 트집을 잡고 때리는 것은 아닐까?’ 이 어린 주인의 악랄함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린 하녀는 눈동자에 두려움을 담았다. “오늘까지지? 내가 벌 받는 날이?” “네, 아가씨.” 지금 그녀, 엘리제는 잘못을 저지른 후, 아버지인 엘 후작의 노여움을 사 저택의 외진 방에 감금되는 벌을 받는 중이었다. ‘감금 중이어서 차라리 나았지.’ 덕분에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혼란스러워하는 그녀를 누군가 봤다면 분명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 아가씨. 그렇지 않아도 후작님이 점심에 아가씨를 뵙자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네, 가족들 만찬에 참석하라 하셨어요.” “...!” 그녀는 흠칫 놀랐다. 가족 만찬이면? “모두 모이시는 거야?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큰 오라버니, 작은 오라버니까지?” “네, 당연하죠.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인 큰 공자님 빼고는 다들 특별한 일 없으시니, 모두 오실 거예요.” 두근. 지현의 가슴이 떨렸다. 드디어 이전 삶의 가족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길고도 긴. 두 번의 삶과 죽음을 지난 재회였다. *** 그리고 곧 점심. 지현은 드레스를 입은 채 저택의 식당 앞에 서 있었다. ‘들어가야 하는데.’ 그녀는 식당 문을 열지 못하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미 식사 시작이 지나, 가족들은 모두 모여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지?’ 그녀가 머뭇거리는 이유. 30년 만에 만난 가족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보고 싶었는데.’ 지구에서 외과의사의 삶을 살았다 해서 첫 번째 삶의 가족들을 가슴에서 지웠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한(恨)처럼 가슴에 맺혀 계속해서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자아는 '후작가의 공녀 엘리제'가 아닌, ‘외과의사 송지현’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지 어색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뭘 고민하는 거야, 송지현. 가족들을 만나는 거야. 그것도 30년이나 그리워했던.' 끼익. 식당 문을 열었고, 그와 동시에 안에서 담소를 나누던 가족들이 대화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의 시간이 멈추었다. ‘아...’ 그녀는 입가를 손으로 가렸다. 의도치 않게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을 말없이 사랑하던,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으로 누명을 쓰고 죽은 아버지. 못난 자신임에도 한없는 애정으로 편들어주던, 그러나 자신으로 인해 전장으로 나가 전사한 작은 오라버니. 질병으로 죽어갈 때도 친자식처럼 자신을 걱정하던, 하지만 자신은 미워만 했던 새어머니. 그들이 ‘살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엘리제? 왜 그러느냐?” 아버지가 의아한 물음을 뱉는 순간, 또륵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아...”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으나, 눈물은 주책 맞게도 멎지 않고 끝없이 흘러나왔다. “... 리제?! 왜 그래?” 항상 자신을 아끼던 작은 오라버니가 놀라 다가왔다. “벌 받는 것 많이 힘들었어? 그러게 아버지. 애가 잘못하긴 했어도, 방에 10일 감금은 너무 심했다니까요. 울지 말고. 우리 예쁜 동생. 이리와.” 작은 오라버니, 크리스가 조그만 그녀를 품에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 그 따뜻한 품에, 30년 만에 느끼는 그 익숙한 따뜻함에 그녀는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작은 오라버니. 미안했어요. 정말. 정말로... 이번 삶에선 절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할게요.' 자신의 잘못으로 크림 반도의 전쟁에 참전했던 작은 오라버니. 이전 저택에서 그의 전사 소식을 통보받았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의 참담함을 절대로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가 품 안에 암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리제? 리제?! 많이 힘들었구나. 울지마. 이제 곧 약혼까지 할 다 큰 숙녀가 이렇게 울면 안 되지.” 아버지와 새어머니도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보, 그러니까 너무 심했다고 했잖아요. 애가 아무리 잘못했어도.” “크흠, 미, 미안하다. 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구나. 내, 내가 잘못했으니 울지 말고.”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가 안절부절못해 사과했다. 하지만 지현은 그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살아있어. 모두 살아있어. 꿈이 아니야.’ 그녀는 크리스의 품에서 벗어났다. "저... 저 괜찮아요." 그리고 그녀는 가족들을 바라봤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래도 미소를 지었다. 지난 삶. 회환과 고통, 아련함이 담긴 미소였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작은 오라버니.” "왜 그러느냐, 엘리제?" 그녀는 오랜 시간... 무려 30년의 세월 동안 가슴에 묻어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사랑해요." 그리고 눈을 감았다. 감긴 그녀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그리고... 죄송했어요. 정말로.” 그렇게 그녀는 첫 번째 삶으로 돌아왔다. 00003 1-1 ========================================================================= 그녀는 간신히 눈물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버지, 엘 드 클로렌스 후작은 헛기침했다. “미안하구나. 네가 그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다.” 가족들은 그녀가 벌 받은 게 서러워서 그렇게 울었다 생각했다. 지현은 가만히 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잘못한 거니까요.” 사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았는지 모른다. ‘뭐, 무언가 잘못했겠지. 비싼 물건을 집어 던졌거나, 아랫사람에게 행패를 부렸거나.’ 본인 스스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참 그녀의 성질은 뭐 같았다. 아무리 인형처럼 예쁘게 생기면 뭐하는가? 성격이 이따위인데. ‘그래도 아직은 크게 문제가 될만한 사고는 저지른 게 없다는 게 다행이겠지?’ 지금은 제국력 283년. 그녀의 나이 16살로, 다행히 큰 잘못을 저지르기 이전의 시기였다. ‘아직 잘못하기 전이니까. 다 바꿀 수 있어.’ 반드시 이전 삶을 반복하지 않고, 가족들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리라. 지현은 그렇게 다짐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보는 가족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애가 왜 이렇게 변했지?' 평소와 너무나 달랐다. 짜증이 사라진 태도, 부드러운 말투. 그리고 도저히 16살의 어린 나이로 느껴지지 않는 차분함. 모르는 사람이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10일간의 감금이 너무 힘들었나?’ 엘 후작은 자신이 어린 딸에게 너무 심한 벌을 내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는 어떤 벌을 줘도, 상처는커녕 전혀 반성도 없었는데.’ 저렇게 온화하게 앉아있으니 보기야 좋았지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금방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겠지?’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착한 모습으로 계속 있으면 참 좋겠지만, 아마 며칠 못 갈 것이다. 자신의 딸이지만, 예쁜 외모와 다르게 성품이 너무 못 됐다. 아무리 혼내고, 가르쳐도 소용없었다. ‘내가 죽기 전에 저 아이가 철드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상상도 못 했다. 자신의 바람이 얼마나 빨리 이루어질지. 그날부터 그의 딸, 엘리제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 “마리, 나머지는 내가 할게.” “괘, 괜찮은데...” “아니야. 내가 하는 게 편해서 그래. 그리고 너 다른 일할 것도 많잖아. 가서 일봐.” 하녀, 마리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가 정말 엘리제인지 의심했다. ‘혹시 다른 사람인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저 인형같이 예쁜 얼굴을 보면 엘리제가 분명했다. “아, 그리고 아까 케이크 고마워.” “...!” 마리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이전의 엘리제는 자존심 때문에 절대 고마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정말 아가씨가 맞는 거겠지?’ 마리는 최근 그녀의 변화를 떠올렸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뀌었다. ‘심지어 우리한테 사과도 하시고.’ 가족들과의 만찬 이후, 엘리제 아가씨는 믿을 수 없는 일을 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심하게 행패 부렸던 사람들한테 찾아가 사과한 것이다! 모두 깜짝 놀라 그 사과를 받았지만, 당시 그녀가 진심으로 변했다고 생각한 이는 없었다. 한때의 변덕이고, 곧 다시 이전처럼 못되게 굴 것이라 여겼다. 사람의 인성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날 이후 아가씨는 정말로 변했다. ‘전혀 성질도 안 부리시고, 아랫사람들 배려도 해주시고...’ 마리는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심지어 어제는 한스의 어머니가 아픈 걸 아시고, 치료비도 주셨어.’ 그뿐이 아니었다. 선배 하녀인 매리가 임신했다는 소식에 선물을 주기도 하고, 몸이 안 좋은 유니에겐 약을 지어주기도 했다. 그런 배려를 받은 사람들이 엘리제 아가씨에게 얼마나 감동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갑자기 천사가 아가씨의 몸에 들어간 것일까?’ 아직 어린 마리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확실히 인형처럼 예쁜 엘리제가 온화하게 웃을 때면 마치 천사가 미소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천사가 들어온 거면, 천사님. 계속 떠나지 말고 이대로 있어주세요.’ 마리는 그렇게 바랐다. 지금의 엘리제 아가씨는 너무나 착하고, 좋아서 영원히라도 옆에서 모시고 싶을 정도였다. *** ‘아, 시간이.’ 종이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던 지현은 시계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 지현이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한 달에 가까워진다. 어느 정도 생활에 익숙해진 그녀가 최근에 시작한 일. 그건 바로 효도였다. “아버지, 저 엘리제에요.” 노크를 한 그녀는 아버지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크흠, 왔느냐?” “네, 업무 보시느라 힘드시죠? 피곤하실 것 같아 차를 준비해왔어요.” “크흠, 크흠.” 그녀가 시작한 효도는 별것 없었다. 아버지가 마시는 차, 직접 준비해주기. 가끔 디저트 해주기. 적적한 새어머니와 말벗 해드리기 등. 다 사소한 일들이었지만, 원래 진정한 효도는 마음이었다. ‘이전 삶에선 고아였어서 효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지.’ 죽고 나서야 부모님들의 소중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그래서 송지현으로 살아가며 이런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네가 이렇게 차를 끓여주니...” “??” “좋아서 말이다. 크흠. 내가 우리 딸이 달여주는 차를 마시는 날도 오다니.” 그렇게 말한 아버지는 헛기침하였다. 딸에게 이런 효도를 받은 적이 처음인 그는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그 모습을 보니, 엘리제는 가슴이 뭉클했다. 고작 차 달여드리는 게 뭐라고. ‘앞으론 자주 끓여드릴게요. 아니, 더 좋은 것도 해드릴게요.’ “차는 입맛엔 맞으세요?” “아, 그래! 참 맛있구나. 황궁에서 마시는 차도 이렇게 깊은 맛이 나지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끓인 것이니?” 엘 후작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딸이 끓여주는 차는 황궁의 전문 시녀가 끓이는 것에 비해 맛이 못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능가하는 것 같았다. “이전에 틈틈이 공부했었어요.”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 거짓은 아니니까.’ 이전 첫 번째 삶. 황후가 된 후, 차를 좋아하는 황제의 마음을 잡으려고 다도를 공부했었다. 별 효과 없는 노력이었지만, 황궁에서 배운 솜씨이니만큼, 그 실력은 웬만한 장인 못지않았다. 이후, 두 번째 삶에선 외과의사로 살면서 제대로 된 차를 끓일 일이 없었지만, 다행히 실력이 녹슬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면 이만 가볼게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아버지.” 엘 후작은 뭔가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된단다.” “아니에요. 제가 있으면 방해되잖아요. 저녁 식사 때 뵐게요. 그러면 수고하세요.” 그러고 그녀는 시끄러운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히 문을 닫고 나갔다. 엘 후작은 그녀가 나간 방문을 한참을 바라봤다. 그는 감동한 얼굴로 생각했다. ‘우리 딸이 저렇게 변하다니. 아버지 건강도 챙기고.’ 원래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한 게 자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효도까지 하니 어찌 아니 기쁠까? 그는 이 행복이 날아갈까 봐, 딸이 남기고 간 차를 조금씩, 조금씩 아끼면서 마셨다. 00004 1-1 ========================================================================= 방에 돌아온 엘리제는 종이에 무언가를 다시 적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 그녀가 적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었다. 그녀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망했던 때까지 앞으로 약 10년 정도의 세월이 남았다. ‘그때까지 일어난 중요한 일들은 대비하고 있어야 해.’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기억이 뚜렷하진 않았다. 그래도 중요한 일들은 얼추 생각이 나니, 일단 떠오르는 대로 적어 내려갔다. -2차 크림 원정, 작은 오라버니 사망. 그 문장을 적으니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이번엔 반드시 막을 것이다. -질병 악화로 새어머니 사망. -트레스탄 가(家)의 역모 사건. 클로랜스 가문의 멸문. 아버지 처형. -황후를 비호한 죄로, 큰 오라버니 처형. 가슴의 통증을 참으며, 그녀는 묵묵히 적어 내렸다. 이번 삶엔 다를 것이니까.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니까. 가족들과 관련 없는 중요한 일들도 적었다. -1차 크림 원정군, 원인불명의 전염병으로 전멸. 추정 사망자 4만 7천 명. -웨일의 하버 공작부인 파킨슨병 악화로 사망. -현(現) 황제 지병 악화로 병사. -2차 론도 대역병 사건. 브리티아 제국 수도 론도(Londo)내 추정 사망자 10만. -크림 전쟁 후, 동방에서 기원한 천연두(smallpox) 유행. 남부 3개 도시 폐쇄. 사망자 7만 명.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질병 관련 이슈가 많구나. 아직 공중보건의학이나 여러 선진 의학이 확실히 정립되지 않았을 때이니까.’ 그녀는 자신이 적은 문구를 다시 바라봤다. -2차 론도 대역병 사건. 브리티아 제국 수도 론도(Londo)내 추정 사망자 10만. 정말 무시무시했다. 그나마 대비를 해서 저 정도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 1차 대역병 때는 수도 내에서 15만이 넘는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까. ‘희생자를 줄일 방법은 없을까?’ 그녀는 고민했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자아는 ‘송지현’. 사람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하는 철혈(鐵血)의 외과의사였다. ‘전염병만이 문제가 아니야. 현대 지구에서는 중한 질병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질환으로도 여러 사람이 사망하는 시대니까.’ 그녀는 고민했다. ‘내 의학지식을 이용하면 희생자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녀의 머리에는 현대 의학지식이 들어있었다. 그것도 희대의 천재라 불릴 정도로 방대한! 사고 당시 비행기를 탔던 것도 여러 연구 업적으로 상을 받으러 세계 외과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내가 외과의사라 공중보건역학이나, 의학사(醫學史)는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래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야.’ 그녀는 자신이 첫 번째 삶으로 돌아온 하늘의 뜻이 어쩌면 이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중에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아버지인 엘 후작은 제국의 재상이었다. 그녀가 하는 이야기를 합리적으로 들어줄 것이다. '그리고 여러 일이 정리되면, 의사로서의 삶을 살아야지.' 그녀는 이전 외과의사의 삶을 떠올렸다. 차가운 메스의 감촉. 죽음과 교차하는 생의 희망. 그 긴장이 그리웠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외과의사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번 삶에서도 사람을 살리는 보람을 느끼며 살고 싶었다. ‘그리고 다른 이슈는...’ 그녀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과거들을 적어 내려갔다. 사소한 것도 있고, 심각한 내용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내용을 적은 그녀는 멈칫했다. ‘맙소사. 내가 왜 이걸 잊어먹고 있었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나와 황태자와의 약혼 발표. 제국력 283년. 탄신연회. 제국력 283년, 올해였다. '탄신연회면 7월. 앞으로 2달밖에 안 남았어!' 엘리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탄신연회. 제국의 모두가 그녀를 축복하던 그때. 황태자와 자신의 약혼이 공표되었고, 비극은 바로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 그날 저녁 식사 시간. 간만에 모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였다. "엘리제, 입맛이 없니?" "아, 아니에요. 어머니." 후작 부인은 딸의 '어머니'란 말에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는 지금껏 계모인 그녀에게 단 한 번도 '어머니'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엘 후작에게 재가한 후, 자식을 못 가져 엘리제를 딸처럼 여겼던 후작 부인은 그녀가 자신을 멀리하는 것이 섭섭했는데, 최근에는 정말 많이 바뀌었다. '그날 처음으로 날 어머니라 부를 때, 얼마나 기쁘던지.' 단순히 말로만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진짜 친어머니에게 하듯, 친근히, 그리고 공손히 자신을 대했다. 후작 부인은 그 변화가 놀라우면서도, 기쁘고 감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엘리제의 표정이 안 좋지?' 최근 딸은 항상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이상했다. 마치 큰 걱정이 있는 것처럼, 표정이 어두웠다.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요리가 나왔는데도, 거의 손도 안 대고.' "엘리제, 혹시 무슨 일 있니?" "아, 아니요." 딸은 고개를 저었지만, 누가 봐도 무슨 일이 있어 보였다.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크흠, 왜 그러느냐?" "그래, 엘리제. 무슨 일 있으면 이야기해봐. 오빠가 다 해결해 줄게." 아버지도, 작은 오라버니도 걱정스레 물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큰 오라버니만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엘리제는 주저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탄신연회 말이에요, 아버지." "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딸이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인지 깨달은 것이다. "난 또. 그건 걱정하지 말 거라." "...!" 엘 후작은 근엄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이미 폐하와 이야기를 다 끝냈다. 모두 네가 원하던 대로 될 것이다.” 엘리제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안 돼!!!’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탄신연회 때 폐하께서 너와 태자 전하의 약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거다. 네가 원하던 대로 말이다.” 그녀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아버지, 전 그 약혼에 반대입니다." "...!"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딱딱한 인상.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외모의 미남. 큰 오라버니인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렌, 그게 무슨 말이냐? 태자 전하와 엘리제의 약혼에 반대라니." "솔직히 묻겠습니다. 아버지는 저 아이가 태자 전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모든 제국의 어머니인 황후의 자리에 적합하다고 보십니까?" "너...! 그게 무슨 말이냐?!" 배려 없는 그 거침없는 말에 엘 후작이 언성을 높였다. "미천한 제가 황제 폐하가 결정한 일을 뭐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기적인 저 아이가 과연 황후의 위에 어울릴지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 식당에 갑자기 싸늘한 적막이 돌았다. '아... 형. 한 달 만에 집에 와서 또 이러는구나.' 작은 오빠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맨날 엘리제만 보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니.' 황실 근위 총기사단(銃-騎士團, 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인 렌 남작은 이기적인 엘리제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또 한바탕하겠구나. 엘리제 성격에 절대 넘어갈 리 없으니.' 그런데 엘리제의 눈치를 살핀 그는 깜짝 놀랐다. '응??' 엘리제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뭔가 알 수 없는 아련함이 가득한? '뭐지?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그의 짐작대로 엘리제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큰 오라버니, 독설은 여전하구나. 이전에는 저 독설을 참 싫어했었는데.' 이전 삶에서 황후가 된 후, 그녀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큰 오라버니는 거침없는 직언을 날렸다. 당시에는 그게 참 눈엣가시처럼 싫었는데, 이제는 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들을 했었는지. '그리고 큰 오라버니의 말은 모두 맞아. 난 황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아.' 그녀는 당시의 삶을 떠올렸다. 모든 비극은 그녀가 어울리지 않는 황후의 위에 올라서였다. '막아야 해, 이 약혼은. 무조건.' 모두에게 비극이었던 그 결혼. 비단 자신뿐 아니라, 태자에게도 그 결혼은 비극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태자 전하도 그 결혼의 희생자지. 나야, 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이지만, 그는 아무런 죄도 없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약혼을 막을지 고민해 무조건 막자. 그리고 이번 삶에선 황실과 상관없는 의사의 삶을 사는 거야.' 그렇게 그녀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00005 1-1 ========================================================================= 큰 오빠는 동생을 노려보고, 엘리제는 별말이 없고. 그날의 식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흐지부지 끝났다. "저,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방에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러고 그녀는 방으로 돌아갔다. "... ... ." 작은 오빠, 크리스가 형을 흘겨봤다. "형, 오랜만에 와서 왜 리제한테 그래?" "난 내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요즘 우리 동생이 얼마나 착하게 지내는데!" "착해? 엘리제, 그 아이가?" 렌은 코웃음을 쳤다. 크리스는 발끈해 말했다. "형은 옆에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요즘 리제가...!" "봤다. 지난 15년 동안. 그 아이가 착해졌다고?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믿겠군." "형!" 크리스가 목소리를 높이려 했으나, 렌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 난 이만 기사단으로 돌아가 보마." "... ... ."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고집불통의 완고한 형은 엘리제의 변화를 직접 보지 않는 한,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봐도 과연 믿을지. 무조건 의심부터 하는 성격이니까.' "요즘 계속 바쁘네. 언제 다시 들어와?" "글쎄. 당분간은 어려울 것 같은데." "총기사단은 이번 크림 원정에서 빠진 거지?" 렌 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크림 원정은 일단 2군단에서 전담하기로 했다. 하지만 만약 프랑소엔 공화국이 참전하기로 결정되면 로열 나이츠인 우리 총기사단도 출전하겠지." "그러면 출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네." "그렇지. 공화국도 흑해(黑海)로 향하는 재해권을 그냥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직 날씨가 쌀쌀해 렌은 얇은 코트를 걸쳤다. "크리스, 잘해라." "뭘?" "다. 집에서는 가족들 잘 챙기고. 행정부에서는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크리스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쓸데없는 잔소리. 형이야말로, 총알엔 눈이 없으니 조심하고." 렌은 피식 웃었다. "그래, 다음에 보자." *** 한편 방으로 돌아간 엘리제는 침대에 엎드려 고민에 잠겼다. ‘어떻게 하지? 탄신연회까지는 2달도 안 남았어.’ 엘리제는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와의 결혼은 자신의 가장 큰 과오였다. 그와 결혼하지만 않았어도 첫 번째 삶이 그렇게 막을 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그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이 결혼은 막아야 해.'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태자와의 약혼은 그녀, 본인이 강하게 주장해서 이루어진 것이란 점이다. 1년 전, 그러니까 15살 때 그녀는 태자에게 홀딱 반했었다. 잠시 스쳐 가는 설렘이라 하기엔 그녀는 너무 크게 열병을 앓았고, 원하는 것은 뭐든지 손에 넣어야 하는 성격상 아버지에게 태자와의 결혼을 강력히 졸랐다. ‘문제는 그게 이루어졌다는 것이지.’ 그녀의 아버지인 엘 드 클로렌스 후작이 제국의 명재상이자, 현 황제의 가장 절친한 친우인 탓이었다. 황제는 자신의 가장 신임하는 신하인 클로렌스 후작의 딸이 태자와 혈연관계 맺는 것을 기꺼워했고, 그렇게 비극이 시작되었다. ‘하아, 인제 와서 마음이 변했다고 할 수도 없고. 무려 태자와 약혼이야. 일단 약혼이 공표되면, 황실의 체면상 뒤집을 수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하지?’ 그렇게 그녀는 한참을 고민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도록 생각을 해봐도 뚜렷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황제가 마음속으로 결정한 일을 무슨 묘수로 뒤집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근심 어린 얼굴로 고민하고 있을 때, 어린 하녀, 마리가 들어왔다. “아가씨, 티에요.” 마리는 따뜻한 향이 나는 홍차를 내려놓았다. “아, 매번 고마워. 마리.” “... ... .” 그런데 마리는 바로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응? 왜 그러니, 마리?" "저, 아가씨." "??" 마리는 한참을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어린 하녀는 얼굴이 빨개져 고개를 숙였다. "어제부터 너무 표정이 안 좋으셔서. 주제넘었다면 죄송해요." 그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엘리제는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마리,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 "네." 마리가 가까이 오자, 엘리제는 기특하다는 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워. 이제 다 컸네, 우리 마리." '우리 마리'. 그 말에 마리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까지 저택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이다. 변한 아가씨는 참 이상했다. 고작 16살밖에 안 되는 어린 소녀임에도, 마치 자상한 큰언니를 보는 것 같았으니까. '계속 이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았으면.' 그렇게 소원한 마리가 나간 후, 엘리제는 홍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아무리 고민해봤자 나올 답은 없어."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방법은 단 하나야."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면돌파. 황제 폐하께 직접 고해야 해. 그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의 엘리제의 자아는 '송지현'이다. 부드러워 보이지만, 뼛속까지 골수 '외과의사'인 송지현. 지구에서 지난 삶을 살면서, 잔머리를 굴렸던 적은 없다. 모든 문제에 정면으로 부닥쳤다. 쾌도난마(快刀亂麻). Cutting the Gordian knot. 헝클어진 매듭을 칼로 자른다는 뜻으로, 외과의사가 가장 좋아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큰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약혼을 청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 와 물러달라니? 아무리 자신이 황제가 조카처럼 여기는 친우의 딸이라지만, 크게 분노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벌을 받아도 내가 감당할 몫. 이 약혼은 취소해야 해.’ 그리고 그녀는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헝클어진 매듭을 칼로 자르더라도, 효율적인 계획이 필요한 법. 그렇게 그녀는 황제가 최대한 덜 분노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일 방법을 고민했다. *** 황제 폐하를 알현할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황제가 엘 후작, 엘리제 부녀를 초대한 것이다. '황태자비가 될 나를 한 번 더 보려는 것이겠지?' 현 황제와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엘 후작이 황제와 각별한 사이였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주 안면이 있었고, 황제는 그녀를 조카처럼 귀여워했다. "아가씨, 에비앙 디자이너께 드레스를 어떤 스타일로 주문할까요?" "아니야, 그냥 있는 드레스로 입을게." "네, 하지만...? 괜찮으시겠어요?" "응, 어차피 지금도 드레스는 많잖아."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쓸데없는 사치야.' 과거 그녀는 무도회나, 황궁에 갈 때마다 매번 새로운 드레스를 제작해 입었었다. 최고급으로 주문함은 당연한 일. 그녀가 한번 입고 버린 드레스를 갖다 팔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이 나올 것이다. '그런 허영은 중요하지 않아.' 외과의사 송지현으로 살며 그녀는 자신을 꾸며본 적이 거의 없었다. 꾸밀 시간도, 여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첫 번째 삶 때 사치와 허영의 극을 경험하며 덧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내면이니까.'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상당수를 버렸음에도 드레스 룸에는 화려한 옷들이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많았다. "어떤 옷으로 할까요, 아가씨? 이건 어떠세요?" 마리는 붉은빛 드레스를 꺼내었다. 마치 장미처럼 화려한 옷이었다. 하얀 피부의 엘리제가 입으면 꽃처럼 아름다우리라. "아니야, 그거 말고 조금 더 단정한 옷은 없을까?" "이거는요?" "아니, 너무 화려한데..." 마리가 이것저것 주인의 취향을 고려해 권유했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는 드레스 룸을 보며 고민했다. '막상 입을 게 없네.' 첫 번째 삶과 다르게 지구에서 외과의사로 산 그녀인지라, 화려한 옷은 딱 질색이었다. '수술복에 흰 의사 가운이 제일 편한데. 그렇다고 수술복을 입고 폐하를 뵐 수는 없으니. 좀 단정한 스타일의 옷은 없나? 그렇다고 수수하기만 해서는 안 돼. 단정하면서도 기품 있어 보이는...' 폐하를 뵙는데, 아무 옷이나 입을 수는 없는 노릇.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이는 옷을 찾았고, 한참을 뒤진 끝에 원하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걸로 할게." "정말 그걸로 하시게요? 괜찮으시겠어요?" "응, 이게 마음에 들어." 엘리제는 하얀 색상의 깔끔한 드레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는 워낙 예쁘셔서, 화려한 드레스가 어울리시는데." 마리가 입술을 삐죽했지만, 엘리제는 담담히 웃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마리." "네?" "내가 이전에 집사께 부탁한 것, 도착했니?" "네, 아가씨. 이제 곧 저택에 도착할 거예요." "그래, 고맙고. 늦지 않게 도착하도록 다시 한 번 집사께 확인해주렴." "네." 엘리제는 어느새 황혼이 다가오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앞으로 삼일 뒤.' 앞으로 그녀의 삶은 이번 황제와의 만남에 달려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드시.'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00006 1-2 불공평한 내기 ========================================================================= 그리고 드디어 운명의 날이 도래했다. 엘리제는 드레스를 입고, 몸을 단장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을 피하고 단정하게 입었지만, 그렇다고 치장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이런 자리에서 여자의 꾸밈은 검이자, 방패.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 만큼, 소홀함 없이 최선을 다했다. “이건 이렇게 해줄래?” “평소보다 조금 화장이 옅은데 괜찮으세요?” “응,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전 엘리제는 무조건 화려한 옷에, 짙은 화장을 선호했다. 하지만 그녀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허영을 떠나, 어울리지 않아. 요란하게 꾸민다고 어울리는 게 아니니까.’ 21세기, 고도로 발달한 지구의 화장술을 경험한 그녀다. 외과의사로 살며 치장을 즐기진 않았지만, 어떤 방식이 자신의 외모에 어울리는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이 브로치와 저 목걸이, 그리고 진주 귀걸이를 해줄래?” “네, 아가씨!” 그리고 치장을 마친 그녀는 거울을 바라봤다. ‘좋아. 나쁘지 않아.’ 옆의 마리가 말했다. “와... 너무 예뻐요, 아가씨.” “괜찮니?” “네, 평소처럼 화려하진 않지만... 그래도... 너무 예뻐요. 기품있어 보이고... 이전보다... 이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띠었다. “고마워.” 그리고 그녀는 미리 준비한 물건을 들고 저택 문으로 나왔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엘 후작이 그녀를 맞았다. "다 준비됐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딸의 모습을 본, 엘 후작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엘리제...?” “네? 왜 그러세요, 아버지?” 엘리제는 푸른 눈을 깜빡였다. 엘 후작뿐이 아니었다. 마중하기 위해 나온 새어머니도, 작은 오빠도 모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하지만 다들 답을 못했다. “너...” 아름다웠다. 평소에도 예뻤지만, 오늘은 마치 그림에 나올 것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제가 특별히 아름다운 치장을 한 것은 아니었다. 공들인 화장에 진주 목걸이, 수공예 브로치, 단정한 하얀 드레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단정하면서도 기품있는 차림이 역설적으로 그녀의 외모를 극대화시켰다. 이전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었을 때는 지나친 요란함에 외모가 먹히며 오히려 매력을 반감되었다면, 지금의 기품있는 차림은 그녀의 인형 같은 얼굴에 시선을 집중시키며,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했다. 엘리제는 얼굴을 갸웃했다. “뭐 이상해요?” “아, 아니다.” 엘리제가 옆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가요, 아버지.” 후작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그, 그래. 가자.” 그렇게 둘은 마차에 오른 후, 황궁으로 향했다. *** 따각, 따각. 마차가 바퀴 소리를 내며 황궁에 들어갔다. 브리티아 제국은 브리티아 섬과 서 대륙 본토를 넘어 5개의 대양, 6개의 대륙 전체에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세계 최강의 열강이었다. 가히 해가 지지 않는 대국(大國). 그런 만큼 황궁은 크고 화려했다. 엘리제는 잠시 회한이 서린 눈으로 황궁을 바라봤다. ‘오랜만이구나.’ 과거 유폐되기 전, 황후로서 6년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 물론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그때는 이곳이 세상의 모든 것인지 알았는데.’ 그녀는 씁쓸히 시선을 돌렸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폐하와 이야기가 잘 풀려야 할 텐데.’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엘 후작이 입을 열었다. “어디 몸이 안 좋으냐, 엘리제?” “아니에요, 아버지.” “혹시 안 좋으면 말하거라. 참지 말고.” 아버지의 걱정 담긴 말에 그녀는 미소 지었다. “아버지.” “응?” “혹시 제가 잘못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만약에... 제가 사고라도 치면...” 엘 후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왜? 또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느냐?” 요즘은 잠잠하지만, 엘리제는 하루가 멀다고 잘못을 저지르는 사고뭉치였다. 후작은 단호히 말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그렇죠?” “그래, 혹시 숨기고 있는 것 있으면 지금 말하거라. 솔직히 말하면 용서해주마.” “그냥 물어본 거예요.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어요.” 아직은.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사고를 칠 거라서요. 죄송해요. 정말로.’ 나름 준비해오긴 했지만, 황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이었다. ‘폐하의 분노를 사더라도, 그래도 부닥쳐야 해. 이번 삶에서 태자 전하와의 인연은 오늘로 끝내자.’ 그렇게 다시 한 번 다짐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득 외과의사로 살던 지구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차가운 수술장의 공기. 흔들리는 바이탈(vital). 붉은 피. 숨 막힐 듯한 생사의 기로! 고달픈 삶이었지만, 수술장에서만큼은 행복했다. 그 긴박한 긴장감이, 사람을 살리는 보람이 그리웠다. ‘이번 일이 끝나면...’ 이 제국에서도 의사로 사는 삶을 살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고, 황제가 내린 벌을 받고 난 후에 말이다. *** “폐하께서는 지금 장미 정원에 계십니다.” 황궁의 시종장이 그들을 맞았다. 장미 정원은 황궁 내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곳이다. 엘리제와 엘 후작은 여러 색상의 장미들이 활짝 만개한 정원으로 들어갔다. 잠깐 걸으니 중정, 조그만 연못 옆에 대리석으로 만든 정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단아한 느낌의 정자에서, 한 중년 남성이 서류를 읽고 있었다. "...!!" 엘리제는 숨을 들이마셨다. 인자한 표정,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깊은 눈빛. 브리티아 제국의 11대 황제이자, 제국의 산업화를 이끈 희대의 명군,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였다! 후작과 그녀는 예를 올렸다. "제국의 태양, 황제 폐하께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인사 올립니다." 황제가 서류를 내려놓으며 시선을 돌렸다. "어서 오게, 후작. 클로랜스 영애도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네, 폐하." "거기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앉거라. 너희는 차를 좀 더 내오고." 황제는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엘리제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정원의 의자에 앉았다. "짐이 오랜만에 영애를 보고 싶어서 이렇게 불렀네. 거의 반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반갑구나." "황공하옵니다, 폐하." "특별히 다른 일은 없었지? 잘 지냈는가?" "네, 폐하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황제는 잔잔히 웃었다. 그 온화한 미소를 보니, 엘리제는 순간 마음이 뭉클했다. '여전하시구나.' 이전 삶, 모자란 자신임에도 황제는 한결같이 자신에게 잘해주었었다. '마음 둘 곳 없는 황궁에서 폐하의 따스함에 위로를 많이 받았었는데.' 그래서인지, 지병이 갑작스레 악화 돼 그가 사망할 때, 가슴이 참 많이 아팠었다. '좋은 황후가 되어달라 부탁하셨는데. 전혀 그 유언을 들어주지 못했어. 더구나 오늘도 몹쓸 부탁을 하러 왔으니. 얼마나 화내실까?'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요즘 몸은 괜찮으신 걸까? 지금도 지병을 앓고 계실 텐데.' 그녀는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황제는 그녀와 인사를 나눈 후,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황제의 온화한 눈가 뒤로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물론 겉으론 전혀 티를 안 내고 있지만, 의사인 그녀가 봤을 때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지병이시지? 당시 황궁 어의는 혈액 순환이 안 좋다고 할 뿐,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했었는데.' 그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정확히 진단만 내릴 수 있으면, 당시의 일을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녀는 황제가 갑작스레 혼수 상태에 빠졌던 일을 떠올렸다. 당시 태자의 정치 기반은 완벽하지 못했고, 정권을 노린 3 황자와의 다툼으로 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었다. 황제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면, 당시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혼수 상태에 빠졌을 때 폐하의 몸에서 케톤 냄새가 나섰었어. 호흡은 깊고 빠르고. 분명 산혈증(Acidosis)에 의한 혼수야. 평소 기력이 없으면서, 산혈증을 일으킬만한 질환.' 그녀는 '외과의사 송지현'으로서 단서를 추적했다. ‘분명 내가 아는 질환일 거야. 뭘까?’ 어렴풋이 답이 잡힐 듯, 말 듯했다. 00007 1-2 불공평한 내기 ========================================================================= 그런데 그때였다. 한참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황제가 빙긋 웃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따라 영애가 이상하군.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 같아. 이전보다 조신해진 느낌인데?" "...!"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전 삶 때 그녀는 철없는 행동을 많이 했었다. 황제야 조카 재롱 보듯 귀엽다고 넘어가 주셨었지만. 엘 후작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폐하. 갑자기 철이 들었는지, 이 아이가 요즘 참 많이 변했습니다." "아, 아버지." "최근 어떤 일이 있었냐면..." 그러면서 후작은 근엄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팔불출처럼 최근 변한 딸의 모습을 자랑하였다. 가족들에게 효도하는 일, 사려 깊게 아랫사람들을 챙기는 일 등. "그래서 요즘 저택 내에서 이 아이에 대한 칭찬이 참 자자합니다." "허허, 그래?" 황제가 엘리제를 바라봤다. 어릴 때부터 봐왔던 만큼, 황제도 그녀의 평소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나이가 들며 차차 나아질 거로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변했다고? "매번 자네에게 차를 달여준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 맛이 얼마나 깊은지,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그래? 궁금하군. 클로랜스 영애, 나한테도 영애의 차를 맛볼 수 있는 영광을 줄 수 있겠는가?" 그 장난스러운 말에 엘리제는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황공하옵니다. 제 미천한 솜씨가 폐하의 입맛을 어지럽힐까 걱정됩니다." "무슨 말인가? 조카나 다름없는 영애가 끓여주는 차이면, 그 어떤 차라도 좋게 느껴질 터. 걱정하지 말고 솜씨를 발휘해 보게."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혹시나 부족하더라도 많이 탓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그녀는 시종들에게 다가갔다.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들을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영애." "일단 동방 청(淸, Qing)의 흑차(黑茶)와 백차(白茶)를 준비해주세요. 그리고 물은 오늘 뜬 약수로 받아주시고..." 똑같은 찻잎을 사용해도 배합, 물의 상태, 끓이는 온도 등에 따라 차의 맛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폐하께서 선호하시던 차가...' 그녀는 기억을 더듬어 민체스터 황제가 좋아하던 방식으로 차를 달였다. 이전 삶에서도 시아버지인 그에게 가끔 차를 끓여드린 적이 있기에, 그의 취향은 잘 알고 있었다. "여기 차를 내왔습니다." 그녀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를 드렸고, 향을 맡은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향이 참 그윽하군. 내가 이전 동방 청(淸, Qing)나라의 대신이 직접 끓인 차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와 흡사한 향이야." "과찬이십니다." 한동안 향을 음미하던 그는 차의 맛을 보고, 더욱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훌륭해. 언제 이렇게 다도를 배운 건가, 영애? 이거 황궁 시종들보고 영애한테 가서 차를 끓이는 법을 다시 배우라 해야겠군." 황제가 기특한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동방의 대국, 청(淸)에서 차가 전파된 후, 차 마시기는 귀족들의 고아한 취미가 되었다. 어떤 차를, 얼마나 훌륭하게 달여 마시느냐가 귀족가의 품격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가 되어, 제국의 귀부인들은 모두 다도에 열중이었다. 따라서 교양 깊은 귀부인일수록 훌륭한 차 맛을 내곤 했는데, 엘리제가 달인 차는 제국의 어떤 귀부인과 비교해도 못하지 않은 솜씨였다. "자기 혼자 몰래 공부했다고 합니다. 저도 매일 엘리제가 끓여준 차를 마시는데, 마실 때마다 머리가 맑아지고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입니다." 엘 후작이 또 딸 자랑을 하였다. "그래, 정말 그대 말대로 머리가 맑아지고, 피로가 가시는 느낌이야. 훌륭해. 이런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다니. 부럽군, 후작." 거듭된 칭찬에 그녀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부족한 솜씨인데, 지나친 과찬이신 것 같습니다." "아니야. 그나저나, 영애." "네?" 황제가 흡족한 눈빛으로 물었다. "앞으로 황궁에 들어오면, 짐에게도 종종 차를 끓여줄 수 있겠나?"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황제는 황태자와 그녀의 결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쨌든, 훌륭한 차를 맛보게 해줬으니 영애에게 상을 줘야겠어. 혹시 원하는 것이 있나? 부담 없이 말해보게. 어차피 곧 한가족이 될 텐데, 내가 영애를 위해 뭐든지 못 해주겠나?" 마치 친가족을 바라보듯, 인자한 눈빛. "... ... ."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늦기 전에 말해야 해.'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폐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언가? 말해보게." "사실은..." 그런데 그때였다! 서늘한 음색의 목소리가 그녀의 심장을 갈랐다. "늦었습니다, 아바마마." "...!!!"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제의 안색이 딱딱히 굳었다. '설마...? 이 목소리는...?' 무감정한, 그래서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차가움.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목소리에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오, 그래. 어서 오거라." 황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이전 삶에서 그녀의 남편이었던, 엇갈림 끝에 파국으로 치달았던 이. 그녀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린 자. 황태자가 무심한 금색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황족 특유의 초상(超上)능력이 담긴 금색 눈동자. 그 투명한 금안은 북풍같이 시린 빛을 띠고 있었다. 신이 빚은 듯한 얼굴은 탄성이 나올듯한 아름다움과 차가움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시릴 정도로 차가운, 그러나 지극히 아름다운 남자. 그가 바로 브리티아 제국의 현 황태자이자 차후 희대의 명군이라 불리게 될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재회에 엘리제는 당황했으나, 동요를 감추고 예를 올렸다. 황태자는 그저 무심히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전에는 저 눈빛을 참 좋아했었는데.’ 단두대에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그녀는 황태자를 깊숙이 사랑했다. 저 차가운 눈빛도, 아름다운 얼굴도, 무뚝뚝한 말투도. 그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하지만 엇갈린 사랑이었지.’ 불행히도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와 엇갈리면 엇갈릴수록, 그녀의 마음은 일그러졌다. ‘애초에 이어지지 않았어야 했어.’ 이전 삶, 원체 천성이 못되긴 했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그런 죄악들을 저지를 정도로 악독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렇게 일그러져갔던 이유는 단 하나. 그와의 엇갈림. 정확히는 보답 받지 못하는 사랑과 냉대 때문이었다. 그렇게 그와 엇갈릴수록 그녀는 점차 일그러져 갔고, 사치와 탐욕에 매달렸다. 그리고 집착으로 변한 사랑은 금단의 선을 넘어버렸고, 그 결과 그녀는 가족을 잃고, 자신은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뭐, 다 내 잘못이지. 어리석었어. 정말로.’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말 어리석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00008 1-2 불공평한 내기 =========================================================================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이전처럼 가슴이 떨리진 않는구나.’ 하긴,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가족 간의 사랑과는 달랐다. 아무리 타오르는 열정이라도 잿더미 하나 안 남기 충분한 시간. 하물며 그런 파국을 맞은 상대라야! 뜻밖의 재회에 놀랐을 뿐, 그 이상의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황제가 태자에게 말했다. “늦었구나.” “네.” "어떤 일 때문에 늦었느냐?" "재정부와 크림 원정에 대한 예산안을 논의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중요한 문제지. 우리 제국민이 크림 반도인들에게 학살당한 시점에서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반드시 승리해야 해. 후작, 공화국의 동태는 어떤가?“ "공화국의 주력군이 검은 대륙에 묶여있는 터라, 아직 가시적인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검은 대륙의 전쟁이 거의 마무리되고 있고, 저희가 크림반도를 장악 시, 흑해(黑海)의 재해권이 넘어오게 되므로, 어떤 식으로든 개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셋은 잠시 곧 벌어질 전쟁에 대해 토의를 하였다. “원정군은 로마노프 령(領)의 2군단으로 할 생각이네. 모자라진 않겠나?” “2군단만 해도, 5만이 넘는 대병력이니 공화국의 개입만 없다면 충분하다 보입니다. 그 이상의 병력을 동원 시 재정에 부담이 갈 수 있습니다.” 엘리제는 말없이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역시 전쟁이 벌어지는구나.’ 사실 그녀는 이전 삶에서 국제 정세에 대해 잘 몰랐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1차 크림 원정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있었다. ‘원정은 실패해. 그것도 철저하게.’ 그녀는 치마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1차 원정군인 2군단이 전멸하고, 2차 원정 때 작은 오빠가 참전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 오빠, 크리스는 2차 원정 때 전사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우리가 영애를 앞에 두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했구나.” “아, 아닙니다.” “어떤가? 영애는 혹시 이번 원정에 대해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은 없는가?” “제가 어찌 감히...” “그냥 한번 들어보고 싶어서 그러네. 부담가지지 말고, 혹시 좋은 생각이 있으면 말해줘 보게.”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편안한 목소리였다. 황제는 특별히 그녀의 조언을 구하고자,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조카처럼 아끼는, 그리고 곧 가족으로 받아들일 그녀가 어떤 식견을 가졌는지 궁금한 것이리라.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말해도 될까?’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전황에 획을 그었던 몇 가지 요인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것을 아느냐, 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갑자기 변한 모습을 보인 그녀다. 국제 정세에 전혀 관심도 없다가 혜안을 제시하면 의심의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어쩌면 사람들의 희생을 줄일 수 있을지도 몰라.’ 당시 1차 원정이 실패하며, 전쟁이 길어진 탓에 수없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었다. 결국,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끝나겠지만, 그때의 상처는 무척 컸다. ‘의심 좀 받으면 어때? 가장 좋은 것은 전쟁을 막는 것이겠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최대한 희생자를 줄여야 해.’ 의사인 그녀는 사람이 죽는 전쟁이 싫었다. 전쟁을 막을 수 없다면, 희생자라도 가능한 줄이고라도 싶었다. “그러면 부족하지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어서 말해보게.” 황제가 딸의 재롱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전쟁은 2가지를 주의해야 합니다.” “호오, 2가지?” 구체적인 말에 황제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무언가?” “첫 번째는 대륙 동부의 몽셀 왕국입니다.” “흠?” 황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몽셀 왕국? 프랑소엔 공화국이 아니라?” “네, 몽셀 왕국의 참전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녀의 말에 후작이 가르치듯 말했다. “엘리제, 몽셀 왕국은 크림 반도와 연관이 없단다. 비교적 거리가 가깝긴 하지만, 지금 크림 반도에서 벌어지는 민족 분쟁과도 상관이 없고, 내륙국이라 흑해(黑海)와도 연관이 없어.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상대는 프랑소엔 공화국이야.”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아버지. 지정학적으로 보면 몽셀 왕국은 크림 반도의 전쟁에 참전할 이유가 전혀 없죠.” “그런데 왜 그들의 참전을 고려해야 하지?” “몽셀 왕국의 현 군주가 이그린트 백작이기 때문이에요.” “이그린트 백작 때문이라고?” 반문하던 엘 후작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그리고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 엘리제의 말에 숨은 뜻을 알아들은 것이다. “영애, 설마 그 말은?” “네, 이그린트 백작은 현재 국왕으로 인정받지 못한 불안전한 왕. 그가 왕위의 정통성을 얻으려면 종주국인 프랑소엔 국의 승인을 얻어야 합니다.” “...!!!” “몽셀 왕국은 프랑소엔 공화국의 전신인 프랑소엔 제국에서 독립한 나라니까요.” 황제와 후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무심한 눈빛의 황태자도 그녀를 바라봤다. “프랑소엔 공화국은 현재 군을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 이그린트 백작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대신, 우리 군의 뒤를 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 정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린 소녀의 의견이라 무시할 내용이 아니었다. 분명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허어, 몽셀 왕국이라. 생각지도 못했군. 그래, 가능성이 있어.” “네, 그렇습니다. 공화국이 절대 가만히 있지는 않을 터. 크림 반도와 가까운 몽셀 왕국을 움직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둘은 감탄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제국을 경영하는 그들도 놓친 것을 어떻게 저 어린 소녀가? 그런데 그때, 서늘한 음성이 들렸다. “몽셀 왕국이 반도에 투사할 수 있는 병력은 2만 남짓. 너는 겨우 그 정도의 병력이 우리 제국군을 위협할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 황태자였다. 오랜만에, 30년 만에 나누는 남편과의 대화에 엘리제는 알 수 없는 감정이 들었으나, 담담히 답했다. “‘정면으로 싸우면’ 우리 제국군이 결단코 패하지 않을 거라 봅니다. 브리티아 제국군은 서 대륙, 아니, 전 세계 최고의 강병이니까요. 공화국과 프러시엔 공국군을 제외하면 정면으로 우리 제국군과 싸울 수 있는 병력은 없습니다.” “잘 아는군. 그러면?” “정면으로 싸우면 말이지요.”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가 되묻기 전, 그녀는 두 개의 단어를 말했다. “도노브 강. 그리고 우크라 산맥.” “...!!!” “몽셀 왕국군이 만약 움직인다면 크림 반도로 오는 것이 아닌, 우크라 산맥 쪽으로 진격할 것입니다. 도노브 강을 타면 우크라 산맥으로 곧바로 향할 수 있으니까요.” “영애, 그 말은...” “네, 우크라 산맥은 제국에서 저희 서 대륙 본토의 로마노프 령(領)에서 크림 반도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 그 우크라 산맥을 내준다면 반도에 들어간 저희 제국군은 보급이 끊긴 채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 그렇게 되면 결과는 하나였다. 원정군의 전멸. “허어...” 정원에 다시 한 번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었다.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인 그들도 놓친 점을 지적한 그녀를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바라봤다. 00009 1-2 불공평한 내기 ========================================================================= 엘 후작이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그래, 분명 가능성이 있어. 그리고 그렇게 되면, 원정군은 끝이야. 왜 이 생각을 지금까지 못 했지?’ 황제와 황태자도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너무나 무서운, 그러나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참의 침묵 끝에 황제가 입을 열었다. “재상.” “네, 폐하.” “내일 바로 군무대신과 함께 이 내용을 상의토록 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몽셀 왕국이 실제 참전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영애가 말한 내용은 반드시 대비해야겠어. 태자, 너는 정보국에 이야기해 몽셀 왕국의 동태를 빠짐없이 살피라 이르고.” “네, 폐하.” 황제는 급히 필요한 조처를 명했다. 그리고 그는 다소곳이 차를 마시고 있는 엘리제를 경악과 감탄이 섞인 눈빛으로 바라봤다. ‘정말 대단하구나. 어찌 이런 생각을?’ 그저 인형같이 예쁘고, 어린 소녀가 이런 생각을 해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국제 정세를 꿰뚫고, 크림 반도와 연관된 각국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물론,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희대의 군략가(軍略家) 정도 돼야 떠올릴 수 있을 법한 생각 아닌가? ‘짐이 저 아이를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던 건가? 정말 대단하구나.’ “후작.” “네, 폐하.” “언제 이렇게 영애를 훌륭하게 교육한 것인가?” “하하...” 후작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최근 딸이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책도 많이 읽는 것 같긴 했지만... 이런 식견이라니? “영애.” “네, 폐하.” “그러면 아까 전, 2가지를 유의해야 한다지 않았는가?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풍토병입니다.” “풍토병?” 엘리제는 공손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사실 몽셀 왕국의 참전보다 훨씬 중요한 내용이었다. ‘원정군은 결국 전염병으로 전멸하게 돼.’ 그녀는 과거를 떠올렸다. 몽셀 왕국군 때문에 반도에 고립된 원정군은 보급이 끊긴 채 고군분투하다, 대규모 전염병이 유행해 그대로 무너져버렸다. ‘무슨 전염병이 돈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대비를 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을 거야.’ “크림 반도는 제국과 환경, 기온이 다릅니다. 특히 전쟁이 벌어질 시기는 한창 고온다습할 시기. 전염병의 창궐에 유의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옳은 말이야. 크림 반도는 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환경. 분명 전염병이 돌 수 있어. 그러면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겠는가?” “일단 의약품의 보급을 충분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위생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위생?”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아, 하고 생각했다. ‘아직 위생의 중요성이 확립되지 않은 시기지.’ 물론 이 시기의 제국에도 위생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의사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일반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네, 그렇습니다. 여러 질병이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전염된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따라서 군내에서 위생을 조금만 더 신경 쓴다면 전염병의 대규모 전파 차단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는 다시 한 번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 대단해. 그런 내용은 또 어디서 배운 건가?” 엘리제는 빈약한 변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의학에 관심이 있어서 서적을 읽었습니다. 얕은 지식에 불과해 민망합니다.” “얕은 지식이 아닌 것 같은데.”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너무 과하게 나섰나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의심을 피하려고 희생자가 늘어나는 것을 못 본척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최선은 전쟁을 피하는 것이겠지만, 불가능한 상황이니 희생자라도 최소로 줄이고 싶었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으면.’ 황제가 말했다. “오늘 영애가 한 이야기는 검토 후 적극적으로 반영하도록 하겠네. 만약 영애의 조언이 전황에 도움이 된다면 내 영애에게 브리티아 무공 훈장을 내리도록 하겠네.” “...!!!”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브리티아 무공 훈장! 황실 십자 훈장이라고도 불리는 그것은, 제국 최고의 권위를 가진 훈장이었다. 훈장을 받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명예 기사(knight) 작위가 수여된다. 즉, 브리티아 무공 훈장을 받는 것은 제국 귀족으로서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었다. “어리석은 의견이었을 뿐입니다. 너무 과하니, 거두어주십시오.” “영애의 의견을 어리석다 하면, 그 누가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있을까? 그리고 절대 과하지 않아. 만약 영애의 이야기대로 대비해, 참사를 막을 수 있다면 고작 훈장 가지고는 오히려 모자라지.” “... ... .” 엘리제는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약간 짓궂은 어조로 물었다. “그나저나 영애.” “네?” “옆에 가져온 것은 무엇인가? 짐한테 주려고 가져온 것은 아닌가?” “아...!!” 다름 아닌 가문의 집사를 통해 수소문한 물건으로 황제께 드릴 선물이었다. 계속 바치려 하고 있었는데, 자꾸 길어진 대화 탓에 마땅히 드릴 타이밍을 못 찾고 있었다. “동방 청(淸, Qing)나라에서 구한 향초입니다.” “향초?” “네, 청(淸)나라의 대인들이 사용한다는 향초로 향이 깊고, 맑아 몸의 피로를 풀어주며, 기운을 돋아주는 효과가 있다 하여 폐하께 드리고자 구해왔습니다.” 황제는 크게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인 모를 지병 탓인지 계속 피로하고, 기운이 없었다. 향초의 향을 살짝 맡은 황제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살짝 맡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게 개는 느낌이군. 훌륭해. 어떻게 이렇게 짐에게 꼭 필요한 것을 구해왔는가, 영애?” “기쁘다시니, 감사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계속 몸이 피곤하고, 기운이 없었는데. 고맙게 잘 쓰겠네.” 그 말에 엘리제는 황제의 눈을 바라봤다. 깊숙이 느껴지는 피로감. 그 순간이었다. 한가지 진단명이 퍼뜩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폐하, 혹시 최근 잠을 자도 계속 피로하십니까?” “그렇네.” “물을 자주 마시거나 하지는 않으시고요?”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군.” “물을 마셔도 계속 갈증이 일진 않으십니까?” “그것도 그래. 물을 마셔도, 마셔도 계속 갈증이 일긴 한다네.” "그러면 혹시 요의 때문에 밤에 일어난 적은 없으신지요?" "그런 적도 있네."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황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속으로 손뼉을 쳤다. 당시 황제가 죽기 전, 산혈증(Acidemia)을 알칼리 호흡(Respiratory alkalosis)로 보상하기 위해 깊고, 빠른 숨을 쉬던 게 기억났다. ‘그래, 역시 그거였어! 폐하의 지병은.’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진단명이 떠올랐다. ‘계속 치료를 못 받았으니, 그때 그런 혼수가 왔던 거야!’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고작 이런 병을 치료 못 해, 대(大)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가 병사하다니.’ 어려운 병도 아니었다. 흔한, 치료만 하면 살 수 있는 그런 병. 00010 1-2 불공평한 내기 ========================================================================= Diabetes mellitus. 한국어로 당뇨병. 황제의 지병은 이 당뇨병이 분명했다! ‘계속 치료를 못 받으니 혈당 수치가 계속 올라갔을 거고, 혈당 수치가 1000이 넘어가며 결국 산혈증이 왔겠지.’ 당뇨성 혼수, 의학 용어로 당뇨성 케톤 혈증(DKA)! 현대에서도 응급 상황이다. 응급 치료를 하면 살릴 수 있지만, 지금 브리티아 제국의 의학 수준으론 어려웠을 것이다. ‘당뇨를 완치시킬 수는 없지만, 조금만 관리하면 혼수 상태가 오는 것은 막을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뭐라고 말을 꺼내야지?’ 그녀는 머뭇거렸다. 현대 지구라면 당뇨 검사를 받아보시는 것이 좋으시겠다고 말하면 끝이지만, 이곳은 다르다. ‘당뇨란 질환의 개념은 있지만 널리 퍼지지 않았을 때고, 무엇보다 의사도 아닌 내 말을 믿어줄까?’ 다른 것보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의사도 아닌 그녀의 말을 믿어줄까, 라는 점! 그때 황제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왜 물어보나, 영애?” “그게...” “편히 말해도 괜찮아.” 결국, 그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황제의 병이 지속 악화하는 것을 모른척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당뇨가 맞는다면 간단한 식이 조절만으로도 큰 호전을 기대할 수 있으니까. “제가 최근에 본 서적 중에 폐하와 비슷한 증상을 나타내는 질환을 본 적이 있습니다.” “흐음, 영애가 의학 전공 서적을 봤다고?”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의학 전공 서적은 일반 서적과는 달랐다. 원체 전문적이라 관련 지식이 없으면, 아예 내용에 접근할 수조차 없는데, 그걸 읽었다고? “네, 폐하.” “그래, 그 서적에 무슨 질환이 나와 있었는가?” “정확한 진단명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다만 혈액 내에 당의 농도가 지나치게 올라가면 폐하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당?? 설탕 같은 것에 들어가 있는 그것을 말하는 것인가?” “네, 우리 몸에 꼭 필요한 성분이나, 여러 이유로 체내에 농도가 올라가면 폐하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서적에 적혀 있었습니다.” “흠....” 황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말을 바로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일단 당뇨란 질환 자체가 당시 널리 알려진 질환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황제의 지병은 황궁 어의도 감을 못 잡는 질환이었다. 그런 어려운 병을 의학의 문외한인 소녀가 단번에 진단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한번 밴 자작과 이야기해보겠네.” 그래도 없는 병을 지어낸 것은 아닌 것 같아, 황제는 그렇게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밴 자작은 다름 아닌 황궁 어의였다. ‘밴 경은 뛰어난 의사니, 분명 이 정도의 단서면 당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아직 생소한 개념이어서, 밴 자작은 황제의 증상을 당뇨와 연결해 생각 못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당대 제국 의학계의 거두인 그가 당뇨란 질환을 아예 모르지는 않을 터. 이 정도 단서면 분명 당뇨를 진단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진단을 내려, 생활 습관만 어느 정도 고친다면 혼수 같은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을 거야.’ 그렇게 그녀는 판단했다. 하지만 엘리제가 한가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이번 일로 자신이 어떤 주목을 받게 될지. "그나저나 오늘 영애가 짐을 많이 놀라게 하는구나. 일반인은 해석하기도 어려운 의학 서적까지 읽어보다니. 정말 대단해."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오늘 영애의 모습은 참으로 훌륭해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구나." 황제는 흐뭇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오늘 내가 영애를 왜 부른지 아는가?" "... 잘 모르겠습니다." "영애를 태자의 비로 정하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살피기 위해서였어. 마음속으로는 영애를 태자의 비로 결정하긴 했지만, 한구석 염려되는 점이 없잖아 있었거든. 그런데 오늘 그 근심을 다 덜어버리는 듯하군. 이 정도면 태자의 비로 한점의 부족함도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후작?" "...!!"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안 돼!' 전혀 그런 의도로 한 행동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혼을 파기하러 온 것이었는데, 오히려 황제는 백점 만점의 평가를 내린 듯하다. 한편 딸의 마음도 모르고, 후작이 기쁘게 웃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아, 아버지..."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로 황제의 안색을 살폈다. 그는 벌써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애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는?' 그녀는 조심히 황태자의 얼굴을 살폈다. 여전히 태자의 얼굴은 속마음을 알 수 없게 무표정했다. 이전 삶과 마찬가지로. 그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더는 미뤄서는 안 된다.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서. 그리고 저 태자를 위해서라도. '많이 분노하시겠지만.' 그녀는 입을 열었다. "폐하, 사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언가? 무엇이든 말해도 좋아." 황제는 여전히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씀드리기 정말 송구스럽지만..." 그리고... 마치 환자의 복부를 메스로 가르는 마음으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저와 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다시 한 번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엘리제?" 엘 후작이 물었다. 놀라기보단, 의아한 목소리. 너무 뜻밖의 말이라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래, 짐도 영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 태자와의 약혼을 다시 생각해달라니?" "그 말 그대로입니다. 저와 태자 전하와의 약혼을 없던 것으로 해주십시오." "...!!" 그 뜻밖의 말에 장내 모두가 굳었다. 엘 후작이 파들파들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너, 너...! 엘리제!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경악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 그럴 만도 했다. 간절히 청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약혼을 물러달라니! 결혼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더구나 상대가 무려 황태자다. "잠깐 후작. 내가 물어보지. 클로랜스 영애,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건가?" 황제가 말했다. 여전히 부드러운 음색이었으나, 엘리제는 큰 죄를 고하듯 자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황실의 위엄을 훼손한 죄,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허허." 황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째서인가? 태자와의 약혼을 간절히 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영애가 아니었던가? 그 사이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건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태자를 향한 마음이 변한 것은 맞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로 이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제가 황태자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응?" 그녀는 더욱더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최근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저같이 어리석고 부족한 소녀가 이 제국의 어머니가 될 황태자비의 자리에 과연 어울릴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보았지만, '결론은 아니다.', 였습니다." "허어..." "물론 황태자비가 된다면 제 개인에게는 무한한 영광이고, 행복일 것입니다. 하지만 황태자비는 제국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될 존귀한 이. 저같이 부족한 소녀가 황태자비가 된다면, 단순히 어울리지 않는 것을 떠나 위대한 제국의 존엄에 대한 먹칠이고, 모독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리석은 제가 황태자비, 나아가 황후가 되면 맡은 바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오히려 제국의 우환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 단숨에 말을 내뱉은 엘리제는 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자격이 되지 않은 자신이 황태자비가 됨으로써 수많은 비극이 탄생했다. 황태자비는 자신 같은 이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존귀한 여인이 올라야 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수술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 어울려.' 머리를 땅에 닿을 듯 조아리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소녀가 감히 바라보면 안 될 것을 잠시 꿈꿨습니다. 소녀의 어리석음을 벌해주십시오. 자격이 되지 않음에도, 황태자비란 과욕을 부린 죄. 그리고 그로 인해 황실과 지고한 폐하의 위엄을 훼손시킨 죄.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받겠습니다." 그녀의 백금발이 스르르 흘러내려 흙바닥에 흩어졌다. ‘이걸로 됐어. 끝났어.’ 이렇게까지 이야기했으니, 황제는 약혼을 거둘 것이다. ‘크게 분노하시겠지만.’ 그녀는 황제의 분노를 기다렸다. 얼마나 노여워하실지 두려웠지만, 피할 생각은 없었다. 어떤 벌을 내리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몫이었다. “... ... .” 정원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리제는 죄인이 용서를 구하듯, 흙바닥에 엎드린 채 황제의 벌을 기다렸고, 엘 후작은 사색이 되어 연신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한편 이 약혼의 또 다른 당사자인 황태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이전과 다른? 약간은 기이한 듯한 시선으로 그녀를 살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황제가 입을 열었다. “영애.” “네, 폐하.” “고개를 들라.” 엘리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황제를 바라본 그녀는 깜짝 놀랐다. 황제가 빙긋 웃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철든 딸을 보는 아버지 마냥 기특한 표정으로. “폐...하?” 00011 1-2 불공평한 내기 ========================================================================= “그래, 영애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 짐이 영애를 아끼면서도 마음 한구석 염려를 한 이유니까. 영애가 과연 황태자비의 역할을 잘 수행할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짐도 했었지.” 의외로 노여움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뜩함이 느껴지는? 엘리제는 다시 머리를 숙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는 황태자비가 되기에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그녀는 황제가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황제는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뜻밖의 말을 하였다. “하지만 오늘 영애의 모습을 보고 그 걱정을 많이 덜었어.” “...네?” “지금 영애의 모습을 보면, 아주 훌륭히 황태자비의 역할을 해낼 것 같거든.” “...!!” 그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오늘 영애에게 정말 많이 감탄하게 되네. 그토록 바라던 마음을 내려놓고,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다니.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참으로 기특하고 또 기특해!” “... ... .” 엘리제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뭔가 이야기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정말 황태자비가 되기에 한없이 부족합니다. 자신밖에 모르고, 성격도 모나고...!” 그녀는 자신의 흠집을 최대한 떠올려 말했다. 하지만 황제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만. 영애의 말은 충분히 잘 알겠네.” “폐하...” “영애가 올해 몇 살이지?” “...16살입니다.” 황제는 시선을 돌려 정원을 바라봤다. 여러 색상의 장미들이 기화 만발하고 있었다. “16살. 참으로 아름답고 어린 나이이지. 이 꽃처럼 말이야.” 그는 그중에서도 이제 막 봉우리가 열리고 있는 장미를 바라봤다. 그 장미는 봉우리 속으로 짙은 붉은빛을 띠고 있었는데, 만개하면 무척 아름다울 것이 분명했다. “영애의 불안감이 무엇인지는 알겠네. 막상 황태자비가 되려니, 그 책임감에 부담되는 거겠지. 하지만 부족한 면이 없는 이가 어디 있겠나?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 나야. 난 영애가 오늘 같은 모습만 간직한다면, 앞으로 훌륭한 황태자비, 황후로 커 나갈 것으로 생각하네.” “...!!”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녀는 속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무슨 콩깍지라도 쓰였는지, 황제는 그녀에게 무한한 애정을 보내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오늘 반드시 약혼을 취소시켜야 하는데.’ 오늘 물러가면, 언제 황제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리고 이대로 약혼이 공표되면, 그때는 무르고 싶어도 무를 수가 없다. ‘뭐라고 해야지? 황태자가 싫어졌다고 이야기해?’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든 이 난국을 타개코자 그녀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그러던 그 순간이었다. 이 약혼을 취소할 수 있는 한가지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폐하. 제가 약혼을 물러달라 한 것에는 한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뭔가?” 그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반응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단번에 내뱉었다. “사실... 저는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언가?” “의사(醫師)가 되고 싶습니다.” *** “... ... .” 장내에 다시 침묵이 내렸다.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침묵이다. 지금까지의 침묵이 놀람과 경악 때문이라면, 이번은 황당함 때문이었다. “... 엘리제, 네가 의사라고?” 아버지가 떠듬떠듬 물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이냐는 듯한 목소리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전 의사가 되고 싶어요.”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엘 후작은 자꾸만 거듭되는 딸의 돌발 행동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최근 얌전해진다 싶었더니, 폐하 앞에서 이런 대박 사고라니!! “영애, 그 말이 정말인가? 의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 “네, 정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영애를 아낀다 해도 거짓말은 용납지 않아.” 황제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마치 주시자와 같은,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선. 엘리제는 그 시선을 흔들림 없이 받았다. ‘갑자기 이야기를 꺼내긴 했지만, 난 정말 의사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 지구에서의 삶이 떠올랐다. 철혈(鐵血)의 메스. 맥동하는 동맥.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낼 때의 그 행복. 두근두근. 외과의사로서의 순간들을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부드럽고 여린 외모를 지녔고,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왔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외과의사였다. 그 긴장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에서 생명을 살리는, 그때의 감각과 보람을 이번 삶에서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허허. 난데없이 의사라니.” 그녀가 진심이란 것을 깨달은 황제는 헛웃음을 지었다. “후작, 그대는 영애가 이런 꿈을 가지고 있단 것을 알고 있었나?” “... 전혀 몰랐습니다.” “의사. 그래, 좋지. 뜻있는 일이야. 하지만 영애. 영애는 의사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보다 의사란 직업을 잘 아는 사람이 이 제국에 존재할까? “영애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직업이야.”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황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농담이 아닌 것 같군. 그래서 의사가 되고 싶어 여러 의학 서적들을 봤던 건가?” 황제는 아까 전 대화할 때 그녀가 의학 지식을 알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인 영애가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송구스럽지만... 제국법에 여성이 의사가 되면 안 된다는 법률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전 라온 자작가의 영애가 의사가 된 사례가 있었고요.”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러면 영애. 이렇게 묻겠네. 영애는 본인이 의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나?” “...!” 엘리제는 황제의 물음의 뜻을 깨달았다. 의사(醫師)는 연금술사(alchemist), 법률가(lawyer), 행정가(administrator)와 더불어 제국 최고의 전문직종 중 하나였다. 즉, 제국의 의사는 현대 지구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대우받는 계층으로 치열한 경쟁을 뚫어야 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렇게 대우받는 직업이 아니었지만, 100년 전부터 선진 의학의 개념이 도입되고, 대륙 전체적으로 보건을 중요하게 여기며 위상이 많이 바뀌었지. 제국에서도 의학자들을 많이 대우해주었고.’ 그래서 귀족 중에 의사가 되는 사람도 많았고, 최소 신(新)-시민, 부르주아 계층은 되어야 의사가 될 수 있었다. ‘내가 그들 사이의 경쟁을 뚫고 진짜 의사가 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이겠지.’ 황제가 재차 말했다. “이 제국에서 의사로 인정받으려면, 의학 연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해. 아무리 고위 귀족이라도 그 시험에서는 아무런 특혜도 받을 수 없어.” 과연 네가 할 수 있겠냐? 란 물음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 수 있습니다.” “...!” 황제는 잠시 말없이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무언가 고민이 있을 때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었다. “이거 곤란하군. 짐은 오늘 영애를 꼭 태자의 비로 받아들이고 싶어졌는데. 갑자기 의사가 되고 싶다고 하니. 그렇다고 농을 하는 것 같지도 않고... 곤란해.” 엘리제는 뭐라 할 말이 없어 고개만 숙였다. “영애는 왜 갑자기 의사가 되고 싶단 생각을 한 건가?” 그 말에 그녀는 먼 과거를 떠올렸다. 지구에서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첫 번째 삶 때 못난 삶을 살았던 그녀는 지구에서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었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의사가 된 후, 그 일에 푹 빠져버렸다. 중독돼 버렸다. “허허, 사람을 살리고 싶다, 라.” 황제는 그녀의 답에 말문이 막힌 듯한 표정을 지었다. “... 정말 죄송합니다, 폐하.” “뭐가 죄송하나. 가치 있고, 숭고한 일인데. 허허.” 황제는 연신 헛웃음만 흘렸다. 만약 다른 귀족 가문의 여식이 이런 말을 했다면 분명 기특하게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태자와 결혼을 생각하던 클로랜스 영애가 이러다니. 결국,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영애.” “네, 폐하.” “짐이 만약 태자와의 약혼을 명하면, 싫더라도 따라야 하는 것은 알고 있겠지?” “...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짐은 영애에게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시키고 싶진 않아. 왜인지 아나?” “... ... .” 엘리제는 답을 짐작하면서도 답하지 못했다. “내가 영애를 정말 조카처럼 아끼기 때문이야. 영애를 진심으로 아끼기 때문에, 가족으로 맞으려 했었고, 또 원하지 않는 바를 억지로 시키고 싶지도 않아.” “...!” 그 말에, 그 목소리에 담긴 따스함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지난 삶 때도 저랬다. 민체스터 황제는 못난 자신을 한결같은 애정으로 바라봐주었다. 마치 조카... 아니, 친딸을 대하듯. “그러니 이렇게 하지.” “??” “우리 내기를 하도록 하게.” 내기? “어쩌면 영애에게 조금은 불리한 내기일지도 모르겠네.” 엘리제의 의아한 시선에 황제가 빙긋 웃었다. 그러고 전혀 뜻밖의 말을 하였다. 들어보니 ‘조금’ 불리한 내기가 아니었다. 00012 1-2 불공평한 내기 ========================================================================= “시간을 줄 테니, 증명해보게. 의사로서의 가치를. 정확히 말하면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그러면 내 영애를 군말 없이 놔주겠네.” “...!!” 엘리제는 놀라 황제를 바라봤다. 민체스터 황제는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만약 못해낸다면, 그땐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거야. 어떤가?” “기한은 어떠합니까?” “영애가 성년이 될 때까지. 그 이상은 예법상 더 기다려줄 수 없네.” "...!" 그녀는 황제의 속뜻을 깨달았다. 성년이면, 내년 성인식. 즉, 6개월 정도밖에 안 남았다. ‘6개월 안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해보라니.’ 불가능한 조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기였다. '내가 지레 포기하거나 내기에 져서 황태자비가 되길 바라시는구나.' 이 정도면 사실 내기라기보단 그냥 의학의 길에 잠시 발만 담가보고 마음 정리한 후 다시 돌아오란 뜻이었다. 더구나 황제는 '의사로서의 가치', 라고 말했다. 가능성을 뜻하는 '자질'이 아니라. 정치가인 황제답게 굉장히 여러 의미가 담긴 표현이었는데, '의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일단 의사가 먼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6개월 안에 의사가 되어 뜻있는 일을 해내라니.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이건 내기를 받아들이는 순간 무조건 그녀가 지는 내기였다. 아니, 너무 말도 안 되게 불공정해 내기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녀를 반드시 황태자비로 맞아들이겠다는, 대충 체험 학습만 해보고 돌아오라는 황제의 강한 의중이 느껴진다랄까? “역시 힘들겠지?”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무조건 그녀가 지는 내기였지만. 엘리제는 선선히 답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폐하의 배려에 감사를 드립니다.” "...?!" 그 주저없는 답에 황제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는 엘리제가 의사가 되는 과정을 잘 몰라, 내기에 순순히 응했다 생각했다. 현 제국에서 의사가 되는 방법은 단 하나다. 병원에 도제로 들어가 험한 과정을 통해 일을 배우며, 교수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후, 국가 공인 시험을 통과하는 것. 하나,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의술은 책에서 보는 것처럼 고상한 일이 아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운 온갖 질병도 마주해야 한다. 과연 곱게만 자란 영애가 그 험한 길을 견딜 수 있을까? ‘남자도 버티기 힘든 과정이니까. 금방 포기하겠지.’ 그는 엘리제의 인형 같은 얼굴을 바라봤다. 피는커녕, 손가에 물 한번 묻히지 않았을 것 같은 외모. 그 험한 일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6개월이란 기한을 두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래도 사람을 살리고 싶다, 라. 참 기특한 마음이지 않은가?’ 황제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한 엘리제를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특하단 생각이 들었다. 제국의 안주인이 될 황태자비는 저런 마음을 가진 이가 되어야 했다. ‘만약 태자와의 결혼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응원해주었겠지만.’ 이미 황제는 그녀를 황태자비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는 엘리제가 병원 생활을 경험한 후 마음을 정리하는 걸 느긋이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 험한 일들은 곱게 자란 귀족가의 여식이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게 황제와 엘리제의 내기가 성립되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조건 엘리제가 패할 수밖에 없는 내기였다. 겉으로 보기엔 말이다. *** 약혼에 대한 길고 긴 대화가 끝난 후,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갔다. 약혼 이야기를 하느라 많은 심력을 소모한 엘리제는 다소곳이 앉아 묻는 말에만 대답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저택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황제가 이렇게 말했다. "이런, 그러고 보니 둘이 만난 지도 오랜만일 텐데. 늙은이들이 눈치 없이 잡고만 있었군." "네?" 무슨 말인지 순간 이해를 못 한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곧 태자와 자신의 이야기를 한 것이라곤 깨닫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닙니다, 폐하. 괜찮..." 하지만 황제는 태자에게 입을 열었다. "태자, 영애와 정원이라도 한 바퀴 걷고 오너라. 그렇지 않아도 후작과 따로 이야기할 것이 있으니."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으나, 태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원치 않게 황태자와 둘만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이쪽으로 오도록." "네, 전하." 황태자의 무뚝뚝한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불편해.' 이전 삶,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그것도 열렬히. 세상 그 무엇보다도. 조각 같은 외모부터 무뚝뚝한 성격까지, 그의 털끝 하나 사랑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그의 모든 것을 열망했다. 세상에서 오로지 그밖에 보이지 않았었는데. '다 옛날 일이지.' 엘리제는 그의 옆얼굴을 힐끗 바라봤다. 이전 삶에선 그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는데... 지금은 신기할 정도로 덤덤했다. 그저 이혼한 전 남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하긴 지난 세월이 몇 년인데. 좋게 헤어졌던 것도 아니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 그는 자신을 경멸하듯 내려보고 있었고, 곧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졌었다. 두 번의 삶이 지났음에도 잊히지 않는 그 섬뜩함에 엘리제는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아... 아닙니다." 그가 힐끗 바라보자, 엘리제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불편해. 이제 시간도 많이 지났으니 빨리 저택으로 돌아갔으면.' 자신을 사형시킨 그에게 특별한 유감은 없다.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도 일종의 희생자이지. 원하지 않는 나와 결혼해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래서일까?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뭔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불편하면서도, 미안한? '어차피 이제 개인적으로 다시 만날 일은 거의 없겠지.' 그녀는 황제와 내기를 떠올렸다. 반년 안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조건. '폐하는 내가 지레 포기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런 조건을 걸었겠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아니, 포기는커녕... '이 내기는 내가 이길 거야. 무조건.'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물론 그녀에게도 6개월 만에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라는 것은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곳은 현대 지구가 아니니까. 여린 귀족 여식의 몸으로 의사가 되는 것에 제약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상관없어.' 그녀는 자신의 지식과 실력을 믿었다. 어떤 난관이 나타난다 해도, 뚫고 나갈 것이다. 그런데 그때, 황태자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엘리제." "네?"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나?"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나 보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그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그냥 옛날 생각을 조금 했습니다." "옛날 생각?" "네." 엘리제는 그렇게만 답했다. 그는 살짝 눈썹을 찌푸린 후,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왠지 익숙한 그 무뚝뚝한 모습에 그녀는 문득 한가지 충동이 들었다. 이전부터... 그가 가끔 생각날 때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해도 괜찮을까?' 그녀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오래 고민하진 않았다.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다시 이렇게 개인적으로 마주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저... 전하." "왜 그러지?" "제가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도 좋다." 그 답에 엘리제는 걸음을 멈추어섰다. "죄송했습니다." "...??" “정말 죄송했습니다. 정말로.” 지구에서 살며 가끔... 정말 가끔 그가 떠오른 적이 있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죽음을 내린 그를 떠올릴 때마다 수없이 많은 감정이 들었지만, 가장 큰 감정은 이것. 미안함이었다. ‘나 때문에 그도 불행했을 테니까.’ 그래, 그를 사랑해서 자신도 불행했지만, 그도 불행했을 것이다. 원치 않은 여인과 살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불행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다면. 그도 다르지 않았을까.’ 그에게 냉대를 받았지만,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그도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번쯤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죄송하지?” “지금까지 모두 다요.” “... ... .” 그는 알 수 없다는 듯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급히 둘러댔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전하를 매우 귀찮게 했었잖아요. 제 철없는 고집 때문에 원치 않은 약혼 이야기도 나오고.” ‘약혼’이란 단어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가 그랬지?” “네?” “누가 원치 않는 약혼이라고 너한테 그랬지?”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 ... .” “어쨌든 이 약혼은 제가 책임지고 전하께 피해가 되지 않게 처리하겠습니다. 전하의 마음도 헤아리지 않고, 철없이 고집 피운 점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기분이 나빠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엘리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를 쫓으며 엘리제는 생각했다. ‘내가 아니었으면, 그도 더 좋은 여인과 결혼해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거야.’ 그녀는 그의 등을 향해 축복을 빌어주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다를 거예요. 우리 이번 삶에는 서로 각자 행복하게 살아요.’ 같은 하늘 아래지만, 이제 그와 자신은 겹치지 않은 삶을 살아갈 것이다. 그가 걸을 곳엔 자신이 없을 것이고, 자신의 옆엔 그가 없을 것이다. ‘축복받길. 과거 내가 정말 많이 사랑했던 분이여.’ 00013 도제 ========================================================================= 한편 그때 황제와 엘 후작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후작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어떤가?” “3황자 전하와 회동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나라에 도움은 안 되는 밥벌레 같은 놈들.” 황제는 혀를 찼다. “일단 동태를 살피겠습니다.” “그래, 하지만 너무 깊이 건드리진 말고. 그렇지 않아도 그자들이 가장 눈엣가시로 여기는 게 자네 클로랜스 가문이니.” 엘 후작은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 클로랜스 가문은 그렇게 나약하지 않습니다.” 엘 후작의 클로랜스 가문은 친(親) 황제파의 수장이었다. 아무리 귀족파라도 미치지 않는 한 클로랜스 가문을 직접 건드릴 수는 없다. “폐하.” “응, 왜 그러나?” “아까 전, 엘리제의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모두 저의 잘못입니다. 제가 따로 따끔히 혼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뭘 혼내나. 예쁘지 않은가? 곱게 자란 그 아이가 그런 기특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 ... .” “그리고 난 깜짝 놀랐어. 테레사가 떠올라서.” “...!!” 엘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 아이의 어미인 테레사도 이전 저랬던 적이 있지 않았나? 가문을 나가 간호사가 되겠다고 해서, 발칵 뒤집어진 적이 있었지.” 황제의 눈이 먼 허공, 추억을 더듬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요.” 엘 후작이 씁쓸히 답했다. 테레사. 엘 후작의 전(前) 부인이자, 엘리제의 생모로 과거 젊은 시절 황제와 그는 동시에 그녀를 연모했었다. 황제가 엘리제를 많이 아끼는 것도, 이전 자신이 사랑했던 테레사를 떠올려서인 점도 있었다. “일단 내기를 했으니, 엘리제 그 아이에게 병원에서 일해 볼 기회를 주려고. 며칠 고생하다 보면 금방 포기하겠지.” 황제는 그녀가 1주일도 못 버틸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면 교육 병원은 어디로? 황실 십자 병원으로 알아볼까요?” 후작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황실 십자 병원은 황족과 최고위 귀족들만을 상대로 하는 제국 최고의 의료기관. 아무리 클로랜스 영애라도 아무런 자격없이 그런 곳에서 교육받게 할 수는 없지.” “그러면...?” “뭘 고민하나? 자네, 클로랜스 가문도 병원을 하나 가지고 있잖아.” “...!!” 후작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그도 병원을 하나 가지고 있긴 했다. 그것도 커다란. “테레사 병원. 그곳에서 교육받게 하게.” “...!!” 테레사 병원! 엘 후작이 남몰래 지은 제국 최대 규모의 의료기관이다. “하, 하지만... 그곳은...” “왜? 테레사 병원이면 훌륭한 교육 장소가 될 것 같은데?” 황제가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후작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온갖 환자가 모이는 테레사 병원은 최고의 교육 장소긴 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테레사 병원은 빈민 구제 병원인데...’ 엘 후작이 은밀히 후원해 건립한 테레사 병원은 부유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닌,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병원이었다. 그런 만큼 험한 질환이나 일이 많았다. 평생 손에 물 한 번 묻혀본 적 없는 엘리제는 일주일... 아니, 반나절도 못 버티리라. ‘그걸 노리신 거군.’ 엘 후작은 황제의 의중을 깨닫고 생각했다. “영애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걸세.” 황제가 미소를 지었다. 왠지 악동 같은 미소였다. *** 그렇게 엘리제의 병원 교육이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다. “엘리제, 네가 의사가 되겠다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가족들의 반응은... 음... 별로 좋진 않았다. “이젠 집에서 말썽 피우는 것도 모자라 병원에서까지 난리 피우겠다고? 적당히 좀 해.” 큰 오라버니는 작작 좀 하라는 얼굴로 짜증 냈고, “음... 리제, 의사가 되고 싶으면 우리 병원 놀이할까? 오빠가 환자 해줄게.” 작은 오라버니는 곤란히 달랬으며, “... ... .” 새어머니는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엘리제가 의사가 되려고 하는 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황당해할 뿐. '잠시 저러다 말겠지.' 그렇게 모두 그녀가 한때의 변덕을 부리는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너무 두근거려서! ‘드디어 병원에 가는구나!’ 지구에서 처음 병원실습 나갔을 때가 떠올랐다. 흰 가운을 입고 얼마나 가슴이 설렜었는지. 그녀가 지구에서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이전의 삶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수술장에서 사람을 살리는 감각을 느낀 순간, 의술은 그녀의 운명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중독’이었다. 화가가 그림에 중독되듯, 작곡가가 음악에 중독되듯, 그녀는 그 환자를 살리는 감각에, 수술과 환자에 중독됐다. “작은 오라버니.” “응?” “출근할 때 저 브리티아 도서관에 데려다 주시면 안 돼요?” 작은 오빠는 제국 행정부의 관료였는데, 제국 최대 규모의 브리티아 도서관은 행정부 바로 옆에 있었다. “그래, 우리 리제 부탁인데 얼마든지. 그런데 오빠가 요즘 바빠서 일이 늦게 끝나 같이는 못 올 것 같아.” “아니에요. 저도 늦게까지 있을 거니, 일 끝나고 오세요.” 그리고 그녀가 도서관에 도착해서 한 일은 의학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나가기 전 1주일 정도 시간이 있으니, 최대한 의학 서적을 봐놔야지.’ 물론 그녀가 의학 지식이 없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머리에는 제국의 수준과는 비교도 안 되는 최첨단의 의학 지식이 들어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공부하려는 이유는 단 하나. 제국의 의학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제국의 의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그에 맞춰 치료할 수 있어.’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은 모두 현대 지구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지구와 제국은 사용 가능한 의약품, 수술 도구, 의료 기술이 완전히 다르니까. 현시점에서 밝혀지지 않은 질환들도 있고.’ 그녀는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놓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한치의 미동도 없이, 집중하여. 그렇게 밥도 안 먹고, 반나절 정도 공부한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의학 수준이 높구나. 의약품도 있을 건 웬만큼 다 있고.’ 이제 막 기차가 다니기 시작하는 대륙의 발전 수준을 생각하면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특히 의약품 쪽이 놀라워. 벌써 항생제도 있고, 마취제도 있다니!’ 지구에서 처음 항생제가 발명된 것은 1929년인데, 제국에선 벌써 항생제가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X ray 검사도 가능하고, 분자유전학을 제외한 간단한 화학 검사도 가능해.’ 엘리제는 생각지도 못한 의학 수준에 감탄했다. 제국이 이런 의학 수준을 갖게 된 것은 단 한 명의 인물 덕분이었다. 대 연금술사(Great alchemist) 프레밍! 미치광이 연금술사라 불리는 프레밍은 희대의 천재였다. ‘말이 연금술사지, 사실은 과학자나 화학자에 가깝지.’ 고도의 연금술, 정확히는 화학 지식을 이용해 평생을 의약품 개발에 매진한 그는 의학사에 획을 그을만한 약품들을 수도 없이 개발했다. ‘혹시 프레밍도 나처럼 지구에서 살다가 되살아난 사람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업적은 대단했다. ‘만약 지구였으면 노벨 의학상을 20번은 받았을 거야.’ 다만 안타까운 점은 제국의 의사들이 그의 업적을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이 있는데, 그 약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다고나 할까? ‘저 약은 부정맥에 사용하면 될 텐데 전혀 생각도 못 하고 있구나. 이 약도 그렇고.’ 프레밍이 개발한 약이 어떤 효능을 가졌는지, 어떤 질환에 사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하긴 질환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니 어쩔 수 없겠구나.’ 엘리제는 커다란 노트와 펜을 꺼냈다. 그리고 어떤 질환에 어떤 약을 써야 할지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질환에는 이 약을.’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반나절, 한나절이 지나갔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후, 떨어지고, 어둠이 깊어갔지만,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그만큼 집중해 공부에 빠져들었다. 00014 도제 ========================================================================= 브리티아 제국 행정부. “뭐? 엘리제가?” 재상인 엘 후작의 작은 아들이자, 고위 관료인 크리스는 깜짝 놀라 물었다. “아직도 도서관에 있다고?” “네.” 도서관 사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침에 오셔서는 미동도 않고 책을 읽고 계십니다. 식사도 한 끼도 안 하셨는데... 저희가 불러도 도통 일어날 생각을 안 하셔서...” “아니,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크리스는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벌써 자정에 가까웠다. ‘밥도 한 끼도 안 먹었다고? 그 아이가? 정말로?’ 얼마 전 변한 뒤부터 밥은 꼭 잘 챙겨 먹는 엘리제였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이 시간까지 공부라니? 급히 일어나 옆 건물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향했다. 커다란 도서관은 텅텅 비어있었는데, 구석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인형 같은 얼굴. 조그만, 한 손에 안으면 으스러질 듯 여린 몸. 엘리제였다. “리제!” 불렀으나 골똘히 책에 집중할 뿐 반응이 없었다. 결국, 어깨를 짚으며 크게 불렀다. “엘리제!!!” “꺄악!!!” 화들짝 놀란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 "오, 오라버니? 무, 무슨 일이세요?" 그녀는 얼마나 놀랐는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무슨 일이라니. 지금 몇 시인지 아니?" "아... 벌써..." 그녀는 시계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대체...' 그는 엘리제 앞에 놓인 산더미 같은 책들을 바라보았다. -의약학 각론(Medicine and Pharmacy). -생리학(Physiology). -가우톤 해부학(Gauton anatomy). -그라함 질병 총론(General disease of Graham) -... '저 책들을 공부했다고? 정말로?' 딱 봐도 어려워 보이는, 의학 전공 서적들이다. 책이라곤 로맨스 소설도 잘 안 읽던 동생이 저 서적들을 공부했다고? "리제." "네?" "이 책들... 잘 이해되니?" "아..."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깨달은 그녀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친 오해를 피하려고 둘러대듯 답했다. "어렵긴 한데, 그냥 열심히 봤어요." '그냥 봤다고?'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하고 그녀가 노트에 한 필기를 힐끗 바라봤다. '그냥 대충 본 수준의 필기가 아닌데?' 의학 지식이 없으므로 자세한 내용은 알아볼 수 없지만, 꼼꼼히 그리고 핵심을 꿰뚫는 필기란 것은 알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필기인가?’ 하지만 저 삐뚤삐뚤 못난 글씨는 엘리제의 필체가 분명했다. 예쁜 외모와 다르게 지렁이 기어가는 듯한 글씨는 어릴 적부터 엘리제의 전매특허였으니까. '이전부터 남몰래 의학을 공부했던 건가? 그랬을 리가 없는데? 아니면 내 동생이 알고 보니 천재?' 크리스는 얼떨떨하게 생각했다. 원래 클로랜스 가문은 우수한 혈통으로 유명했다. 자신만 해도 아카데미 문과부 수석 졸업자에, 아버지는 제국의 명재상, 큰형은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이자, 제국의 수위를 다투는 오러 나이츠(aura knight)였으니까. 그러니 엘리제에게도 숨겨진 재능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건 너무 급작스럽지 않은가?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엘리제.” 크리스는 당황을 감추며 장난스레 말했다. “여전히 글씨를 잘 못 쓰는구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엄청못난 여자가 쓴 줄 알겠는걸?” “오, 오라버니!”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첫 번째 삶도, 두 번째 삶도,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항상 지독한 악필이었다. “어쨌든 리제, 이제 늦었으니 그만 돌아가자." "아..." 그런데 그녀가 의외의 답을 하였다. "저... 오라버니. 조금만 더 공부하다가 가면 안 될까요?" "조금 더? 지금 자정인데?" "그렇긴 한데... 어차피 24시간 개방 도서관이고... 더 보고 싶은 내용이 남아 있어서." 엘리제가 우물쭈물 부탁했다. 마치 '좀 더 놀다 가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 "안 돼." "안 돼요?" "안 돼. 너무 늦었어." "응? 응? 정말 안 돼요? 응? 오라버니." 엘리제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다. '귀, 귀엽잖아!' 간만에 보는 동생의 애교에 크리스는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안 돼. 밥도 안 먹고. 이러다 몸 상한단다." "괜찮은데..." 엘리제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도 심히 귀여워, 크리스는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헝클어트렸다. "안 되는 것은 안돼. 내일 다시 같이 오자." *** 그렇게 엘리제는 공부에 매진했다. 아침 일찍 도서관에 나가 자정까지 책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도 대출한 서적을 공부했다. 거의 잠도 자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에 가족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리제, 좀 쉬엄쉬엄 하렴. 그러다 몸 상한다니까." 가족들이 걱정했으나,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병원에 나가기 전, 필요한 지식은 다 정리해야 해.' 그녀도 피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환자를 보는 일이다. 한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된다. '그리고 이런 식의 벼락치기 공부는 지구에서 질리도록 했었으니. 익숙해.' 서울대 의대 재학 시절엔 매일이 시험 전쟁이었다. 하루 밤샘은 예사였고, 심할 때는 72시간 동안 딱 2시간만 자고 공부한 적도 있었으니, 이 정도야 특별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기준이었고, 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크흠, 엘리제.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엘 후작이 헛기침하며 그녀를 찾아왔다. "괜찮아요, 아버지." "뭐가 괜찮아. 몸도 약한 편이면서." 특별히 앓는 병은 없었지만, 여린 체구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은 편이었다. 엘 후작은 복잡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 "네, 아버지." "정말 할 수 있겠느냐?" 그는 걱정스레 물었다. 이제 그도 딸이 의사가 되려는 게 한순간의 변덕이 아닌 진심인 것을 알았다. 진심이 아니라면, 이렇게 열심히 할 리가 없을 테니까. '의사라. 좋은 직업이지. 가치 있는 일이고. 하지만...' 의사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장한 남자들도 못 버티는데, 손에 물 한번 안 묻혀본 그녀가 견딜 수 있을까? 더구나 여자라서 일어나는 차별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황실 십자 병원도 아닌, 테레사 병원이라니.' 솔직히 후작은 딸을 테레사 병원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환경이 열악해 고생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잘할 수 있어요, 아버지. 최선을 다해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후작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엘리제, 혹시 태자 전하와 약혼을 피하려고 무리하는 것은 아니지? 만약 그런 거면 이야기하렴. 네가 정말로 전하와 결혼을 피하고 싶다면, 이번 일과 상관없이 내가 폐하께 잘 이야기해보마." "...!" 그녀는 흠칫 놀라 후작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아버지... .' 자신을 향한 걱정과 사랑에 그녀의 가슴이 일렁였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전 정말로 이 일이 하고 싶어요." 딸의 의지가 확고함을 다시 확인한 후작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폐하의 생각처럼 엘리제가 빨리 포기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겠군.' 딸을 사랑하지만, 그녀가 정말로 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현실적으로 생각하는 것일 뿐. 그저 후작은 그녀가 너무 고생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일단 병원 측에 네가 이틀 후부터 나간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제 부탁대로 해주신 거죠?" "그래, 그런데 꼭 그렇게 해야겠니?" "네, 제가 클로랜스 가문인 것은 안 알려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부탁. 그것은 자신의 신분을 숨겨달라는 것이었다. "일단 그렇게 하긴 했다만, 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냐? 훨씬 힘들고 불편할 텐데." "제가 아버지의 딸인 것을 알면, 제대로 교육이 안 될 테니까요." 엘리제는 이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교수로 일할 때를 떠올렸다. VIP의 자식이 학생으로 오면 어찌나 눈치가 보이며 짜증이 나던지. '더구나 아버지는 그냥 VIP 정도가 아니잖아.' 황제에게 신임받는 재상에, 명실상부한 제국의 이인자. 또한, 최고 명문가 클로랜스 가문의 가주이며, 테레사 병원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지구의 한국으로 따지면 재벌가 총수에 국무총리 겸업, 병원의 이사장인 거잖아.’ 그런 정체를 알면, 병원의 의사들이 과연 자신을 어떻게 대할까? 편히 말이나 붙일 수 있을까? "일단 너는 케이트 자작의 후원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말해두었다." 케이트 자작은 클로랜스 후작가의 가신(家臣)이었다. "네, 감사해요." "엘리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절대 무리하지 말아라." 그 깊은 걱정에 엘리제는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이틀이 지나 엘리제가 처음 병원에 가는 날이 되었다. 제국력 283년 5월 28일. 훗날, 세계 의학사(醫學史)에 기념비적으로 남을 날짜였다. *** 테레사 병원은 기다란 사각형 형태의 4층 건물로 무려 300명의 환자를 수용 가능한 제국 최대 규모의 의료 기관이었다. 물론 제국 최대란 것은 규모적 측면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여러 환경에서 열악한 점이 많았다. 그리고 그 병원 4층 구석의 교수실. ‘젠장.’ 이십 대 중반의 젊은 남자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나 그레이엄에게 16살 철부지 꼬맹이를 맡으라고?’ 남자의 이름은 그레이엄. 몰락한 팰론 남작가의 장자이자, 테레사 병원의 최연소 정식 교수인 천재 의사였다. 그가 불쾌해하는 이유는 하나. 며칠 전 떨어진 병원장의 명령 때문이었다. ‘케이트 자작이 후견하는 영애를 맡으라니. 영애는 무슨 놈의 영애야. 병원이 무슨 무도회장 놀이터인 줄 아나?’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여러 연구로 바쁜데. 쓸데없는 짐까지 떠맡으라니.’ 몰락 가문 출신인 그는 의학에 자신의 모든 삶을 걸었다. 의학의 기초를 다진 그라함 백작을 능가하는 의사가 되고 싶건만, 현실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이게 다 내 배경이 보잘것없어서 그래.’ 아무리 능력이 있으면 뭐하는가? 좋은 자리와 일거리는 배경 좋은 놈들이 다 가져가고, 자신에게는 쓰레기 같은 부스러기밖에 안 떨어지는데. ‘이제 곧 온다고?’ 그는 시계를 바라봤다. 오전 10시에 오기로 했는데, 9시 57분이었다. ‘1분이라도 늦기만 해봐라. 바로 쫓아내 주마.’ 그리곤 그는 시계를 뚫어지라 바라봤다. 자신의 새로운 ‘제자’가 제발 늦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불행히도, 침이 10시를 가리킬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마치 밖에서 회중시계를 보며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정확한 시간이었다. 00015 도제 ========================================================================= 똑똑. 노크 소리에 그레이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들어오세요.” 끼익. 낡은 소음과 함께 그녀가 들어왔다. “...!” 그리고. 그레이엄은 흠칫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상의 소녀가 들어온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로제라고 합니다.” 작고 여렸다. 그러면서도 마치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수수한 생활복을 입고 있었지만, 연회장의 수많은 보석 중에서도 가장 반짝이는 듯한 외모. 그녀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방의 분위기가 변한 듯했다. “네가...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로제라고?” “네, 그레이엄 선생님이신가요?” 차분하면서도 호감 가는 음색. 그레이엄은 얼른 정신을 차려 그녀의 미색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내가 그레이엄이다. 의사가 되려고 한다고?” “네, 많은 지도 부탁합니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레이엄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쁘게 생기긴 했다만. 전형적인 귀족 집 아가씨잖아.’ 몰락하기 전, 한때 귀족 사회에 일원이었던 그는 저런 유의 영애들을 잘 알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험한 일은 전혀 안 해본 듯한 인상. 하얀 손은 물집 하나 없이 깨끗하다. 치장 후 연회장에 나서면 무수히 많은 남자가 따르겠지만, 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몸으로 의사가 되겠다고? 그레이엄은 속으로 혀를 찼다. ‘기가 차는군.’ 확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 그리 우스워 보이나?’ 각고의 노력 끝에 의사가 된 그는 사람을 살리는 의업에 깊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곱게 자란 아가씨가 흥미로 병원에 나왔다고 생각하니, 짜증을 참기 어려웠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나이는 아닌데, 아카데미는 다녔나?” “아카데미는 다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무슨 공부를 했지? 설마 아무런 공부도 안 하고 무턱대고 찾아온 것은 아니겠지?” 병원에 들어오기 전, 보통은 아카데미 등에서 기초를 쌓는다. 기초를 쌓은 후, 유력자의 추천을 통해 병원에 제자로 들어오는 게 일반적인 방식이다. “독학으로 의학 서적을 공부했습니다.” “독학? 하.” 그레이엄은 어이가 없어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의술이 우스워 보여도 그렇지, 16살짜리 소녀가 독학으로 깨작 책을 본 후, 병원에 들어와? ‘아무리 제국 제일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봉신인 케이트 자작이라도 그렇지. 너무 하는군.’ 그는 당장 병원에서 나가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것만 아니면, 당장 쫓아낼 텐데. 제길.’ 케이트 자작은 제국의 유력자로 척을 지면 곤란하다. 자신 같은 힘없는 의사는 당장 쫓겨날지도 몰랐다. “의술이 뭔지는 아나?” “네, 압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묻지.” 그레이엄은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있나?” “... ... .” 그런데 그 질문을 들은 다음이었다. 소녀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16살 소녀와 어울리지 않는, 깊은 무거움이 담긴 눈빛. 소녀는 가만히 답했다. “네, 본 적 있습니다.” 그레이엄은 소녀의 그 알 수 없는 눈빛에 흠칫 놀랐다. 뭐야, 저 눈빛은? “의술을 배우다 보면, 많은 상황을 만난다. 만약 치료하던 중, 환자가 죽으면 어떻게 할 것이지?” 소녀는 고민 없이 담담히 답했다. “가슴에 묻을 것입니다.” “...!!!” 그레이엄은 입을 다물었다. ‘가슴에 묻는다고? 무슨 뜻인지 알고는 하는 이야기인가?’ 의사들 사이에서 ‘환자를 가슴에 묻는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불의의 일로 환자를 잃었을 때, 다시 그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환자를 가슴 속에 묻는 것이다. ‘설마.’ 그는 이 소녀가 그 의미를 알고 그렇게 답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비슷한 아픔을 경험하지 않은 의사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의 뜻을 알 리가 없으니까. ‘일단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했으니, 일거리를 주긴 줘야겠는데.’ 그는 고민했다. 원래는 일일이 데리고 다니며, 제자처럼 가르쳐야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진짜 키울만한 제자도 아니고. ‘어차피 못 버티고 금방 나갈 테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쓸데없는 심력을 쏟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는 곧 한 가지 좋은 방안이 떠올랐다. ‘그래, 그곳이면 되겠군.’ 저 여린 소녀에게 너무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만둘 거면 빨리 그만두게 하는 것이 저 아이를 위한 것일 테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따라와라. 할 일을 알려주마.” ***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테레사 병원 3층 깊숙한 곳, 메케한 냄새가 나는 병실이었다.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일할 곳이다.” 병실 문을 열자 드러난 장면은 가관이었다. “...!!” 삐쩍 마른, 관리 안 된 환자들. 지독한 악취, 더러운 몰골. 모두 부랑자 같은 행색들이었는데, 하나같이 거동이 불가능한 중환자들이었다. “이 환자들은?” 그레이엄이 답했다. “유리걸식하는 부랑자들이다. 부랑자 중 중한 질환에 걸려 도저히 살아날 가망이 없는 자들을 이곳에서 치료하고 있다.” “... ... .” “사실 저런 자들을 치료할 필요는 없지만, 클로랜스 가문의 전(前) 후작 부인, 테레사 여사의 유언에 따라 돌보고 있지. 치료비는 모두 클로랜스 후작가의 후원으로 감당하고 있고.” 그레이엄은 클로랜스 후작가에 대해 존경이 담긴 말투로 설명했다. “이 테레사 병원의 운영은 대부분 클로랜스 후작가의 지원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너도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클로랜스 가문에 대한 존경을 담고 일하도록.” 그 존경 받는 클로랜스 가문의 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쨌든 네가 이제부터 할 일은 이 환자들을 돌보는 거다.” 그러면서 그는 그녀가 부랑자들의 몰골을 보고 질색인 얼굴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확히 어떤 부분을 케어(care)해야 하는 것인가요?” 소녀의 안색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오히려 흐릿한 안쓰러움이 담긴? 그레이엄이 놀라는데, 소녀가 물었다. “환자들의 기저 질환을 모두 치료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저 환자가 편할 수 있도록 보존적 치료(conservative management)를 하면 되는 건가요?” "...!!!" 마치 동료 의사가 묻듯, 핵심을 꿰뚫는 질문. 그레이엄은 흠칫했다. “...보존적 치료만 하면 된다. 기저 질환을 치료하는 게 의미가 없는 환자들이니까. 그러니까... 욕창(pressure sore) 같은 것들을 관리해주면 된다.” 그는 그녀가 욕창이란 단어를 알아들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답변은 더 가관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욕창의 정도가 심하거나 괴사 징후(necrotic change)를 보이면 제가 관리를 해도 될까요?” “...!” 그레이엄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관리? 설마 변연절제술(debridemnt)을 알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상처가 죽었을 때의 치료 원칙은 간단한 수술로 조직을 잘라내는 것(debridement)이다. 잘라내지 않으면 감염이 악화해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설마. 아니겠지.’ 속으로 고개를 저은 그는 답했다. "할 수 있는 만큼 관리를 해도 좋다. 하지만 잘 모르는데 섣불리 건들진 말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는 몇 가지 더 지시사항을 알려주었다. 그러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가기 전 말했다. “로제, 라고 했나?” “네, 선생님.” “만약 중간에라도 힘들면 곧바로 이야기해라.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으니까.” 그녀는 그의 말에 담긴 속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힘들면 바로 그만두라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엄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얼마나 버틸까?’ 이곳에 오고 나서 그녀가 보인 태도는 의외긴 했다. 환자들의 몰골을 보고 하얗게 질려 당장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제법 의연했으니까. 그래도 오래 버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이 병실은 남자인 그도 처음에 왔을 때 적응 못 하고 도망칠 뻔했던 곳이니까. ‘며칠 안 걸리겠지.’ 그는 그렇게 짐작했다. *** 하지만 그의 예상과 다르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이런 환자들은 오랜만에 보는구나.’ 다소곳이 아무 말 안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레이엄의 속마음을 다 눈치채고 있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내가 귀찮겠지.’ 그녀는 바보가 아니다. 두 번의 죽음을 경험했고, 두 번 다 평탄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그레이엄의 속마음은 훤히 드러나 보였다. ‘이런 곳에 방치해서 제풀에 내가 포기하도록 하려는 걸 거야.’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아니, 고작 이런 걸로 왜 포기한단 말인가? ‘이런 부랑 환자들은 익숙한걸.’ 태연히 환자들을 살폈다. 물론 그녀도 나름 여자인 만큼 악취와 더러운 모습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환자가 아닌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지구에서도 이런 부랑 환자들을 많이 돌봤었다. 모교인 서울대 의대가 국립대학교인지라 부랑 환자를 돌보는 시립 병원에서도 순환 근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자를 보다 보면, 별의별 험한 모습을 다 봐야 하는데...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지.’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처음엔 피만 봐도 벌벌 떨다가, 나중엔 두 조각 난 내장을 수술하고도 태연히 순대를 먹으러 간다. ‘최대한 열심히 해서 일단 빨리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자.’ 그녀의 첫 번째 목적은 정식 의사가 되는 것! 그리고 제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방법은 한 가지다. 의학 연구원의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시험을 응시하려면 먼저 병원에서 추천을 받아야 한다. 보통은 수년씩 병원에서 도제로 일하며 실력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 황제 폐하와의 내기에 이기려면, 빠른 시간 안에 의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 필수였다. 그녀는 최대한 단기간에 의사 자격증을 따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시작하자.’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 엘리제는 먼저 주변 위생을 개선했다. ‘이런 환경에선 없는 질병도 생길 거야.’ 수북한 먼지들을 쓸고, 오물들을 정리하고, 환자의 몸을 씻겼다. 후작가의 금지옥엽이 하기엔 너무나 궂은 일. 아니, 비단 후작가가 아니더라도 이런 일들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소녀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일했다. ‘더 힘든 일도 많이 해봤는걸.’ 처음 해부학 실습을 할 때를 떠올렸다. 포르말린에 딱딱히 굳은 수십 구의 시체들. 첫날. 그 시체들의 피부를 메스로 벗겨 내고, 노란 지방을 긁은 후, 근육을 박리했다. 얼마나 끔찍하던지. 집에 와서 펑펑 울었다. 의대에 온 것을 그때 처음으로 후회했다. 그날의 일뿐이 아니었다. 의사가 될 때까지, 그리고 의사가 되고 나서도 험한 경험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그때의 일들에 비하면... 이런 일은 차라리 나은 편이니까.’ 물론 그 일들을 혼자 하지는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으니까. 굳이 혼자서 할 필요도 없고. 00016 도제 ========================================================================= 그녀는 이 병실을 담당하는 보조원들을 찾았다. “청소와 환자 목욕을 도와달라고요?” “네.” “하지만... 어째서?” “병실 위생이 너무 안 좋아 환자들에게 안 좋을 것 같아서요.” 보조원들은 병원이 고용한 중년 여성 2명이었다. 그녀들은 엘리제의 요청에 머뭇거렸다. 분명 청소와 환자 목욕은 보조원들의 몫이긴 했으나, 아무도 이 부랑자들을 신경 쓰지 않아 대충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는?” “로제입니다. 그레이엄 선생님의 도제로 들어왔습니다.” 제국의 병원에서 도제면 보통 견습생의 대우를 받았으니 보조원들보다는 확실히 윗사람이다. 보조원들은 엘리제를 살폈다. 수수한 옷을 입고 있지만, 한눈에 보아도 있는 집안의 영애 같아 보였다. 그녀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엘리제는 그녀들과 남은 일을 처리했다. 더러운 걸 치우고, 열심히 쓸고, 닦고, 환자들을 목욕시키고. 병실이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엘리제의 몸은 반비례해서 더럽혀졌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나야 끝나고 씻으면 되니까.’ 지구의 지식이 있는 그녀는 위생의 중요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지구의 위인 나이팅게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위생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도 사망률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한다. ‘어쩌면 약물치료나, 수술보다도 훨씬 손쉽게 사망률을 낮출 수 있는 게 위생 관리야.’ 청소만으로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니! 어찌 공을 안 들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한참 일에 열심일 때였다. 소극적으로 뭉그적거리던 보조원이 말했다. “저... 아가씨. 그건 저희가 할게요.” “네?” “이건 원래 저희 일이니까...” 그녀들은 민망한 표정이었다. 처음엔 억지로 따라온 그녀들이었지만, 엘리제의 열심을 보며 가책을 느낀 것이다. 저렇게 어리고, 가냘파 보이는 소녀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부랑자들을 위해 궂은일을 하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는 기쁘게 웃으며 답했다. “네, 감사해요. 같이해요.” 그렇게 3명이 함께 일하니, 끝나지 않은 것 같은 일도 끝이 났다. 부랑자들의 병실이 이전의 모습은 상상도 못 할 정도로 깨끗해진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랑자들이 엘리제에게 감사를 표했다. 병원이지만, 회복되기 어려운 중한 질환을 앓는 부랑자들이다 보니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그런데 한눈에 봐도 귀한 집안의 아가씨로 보이는 그녀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자신들을 위해 이런 일들을 해주다니! 다들 크게 감동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친절히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야.’ 위생 관리는 기초적인 조처일 뿐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환자 진료를 보기 시작했다. “환자분 어떤 것이 불편하세요?” “나는 허리가...” 그녀는 병실을 돌아다니며 모든 부랑자의 상태를 한 명, 한 명씩 꼼꼼히 체크했다. ‘이 환자는 추락 사고로 인한 허리 골절 환자. 골절은 이미 치료할 수 없어. 그러면 지금 환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은... 영양 상태 개선. 욕창 소독.’ 그녀는 개선이 가능한 요인과 불가능한 요인을 구분하여 체크했다. 그리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인들은 최선을 다해 조처했다. “욕창 소독을 해야 하니 약제부에서 소독약을 가져와 주세요.” “네, 아가씨.” “상태가 안 좋은 분들이 많아 넉넉히 가져와 주세요. 마취약과 소독된 칼도 가져와 주시고요.” “칼은 왜요?” 작은 소녀가 칼을 가져와 달라 하자, 보조원이 놀라 물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태연히 말했다. “죽은 조직을 쳐내려고요. 피가 많이 날 수도 있으니 거즈도 넉넉히 가져와 주세요.” “아, 아가씨가 하시게요? 직접? 칼로요?” 칼로 살을 잘라낸다고?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보조원이 핼쑥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할 거예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삶에서 이식 수술도 집도하던 그녀다. 그녀 기준에 죽은 조직을 제거하는 것은 너무 간단해 수술에 포함되지도 못했다. 보조원은 질린 표정을 지으며 소독약과 마취약, 소독된 칼을 가져왔다. “여, 여기요.” “환자 자세 좀 잡아주세요.” “지, 지금 여기서 하시게요?” “네, 상처가 너무 안 좋아 지금 바로 해야 해요.” 엘리제는 허리가 마비된 부랑자의 욕창 상처를 살피며 말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처치를 했다고 뭐라고 하진 않겠지?’ ‘외과의사 송지현’의 기준에선 간단한 수술이지만, 자신은 오늘 처음 병원에 들어온 견습생이다. 주제넘은 처치를 했다고 문책을 당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위험한 수술도 아니고. 그리고 이대로 두면 상태가 너무 나빠질 거야.’ 관리받지 못해 감염의 정도가 심했다. 상처 안으로 누런 염증이 차오른 것이, 이대로 며칠 두면 패혈증(sepsis)이 올지도 몰랐다. 빨리 손을 써야 했다. “환자분, 여기 안 좋은 상처를 소독하고 곪은 부분을 쨀 거예요. 마취하고 할 테니 아프진 않을 거예요.” “네, 네.” 그녀는 먼저 환자를 부드러운 말로 안심시켰다. 그리고 엎드리게 자세를 잡은 후 ‘변연절제술(debridement)'을 시작했다. “마취약 먼저 주세요.” 그런데 소독 장갑을 낀 손으로 마취하는 그녀의 머리에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대 연금술사 프레밍은 어떻게 이런 약들을 다 개발했을까?’ 지금 그녀가 사용하는 마취약도, 소독약도 모두 프레밍이 발명해낸 것이다. 그것 외에도 그가 개발한 약은 무수히 많았다.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리고 마취약, 소독약만 개발한 것이 아니잖아. 혹시 프레밍도 나처럼 지구의 삶을 경험한 이는 아니겠지?’ 그런 의심까지 들었다. 그만큼 프레밍의 업적은 대단했다. 물론 지구의 현대 약들에 비하면 그가 발명한 약품들은 매우 조악했다. 그래도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기초적인 약들을 다 발명해냈으니. 아무리 연금술의 힘을 빌렸다지만, 한 사람의 업적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한번 만나보고 싶지만... 이미 사망한 지 5년이나 됐으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환자분, 혹시 아프세요?” “아... 아, 안 아픕니다.” 그녀는 완전히 마취된 것을 확인 후 절제술을 척척 진행했다. “소독약 주세요.” 먼저 진물이 흐르는 상처를 약으로 철저히 소독했다. 그냥 단순히 소독약을 묻히는 수준이 아닌, 상처 사이사이로 약이 스며들 수 있도록 꼼꼼히 처리했다. 그리고. “칼 주세요.” “지, 진짜 직접 하시게요?” 보조원이 그녀에게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짧지만 단호한 대답. 보조원은 하얗게 변한 얼굴로 소독 칼을 건넸다. “... ... .” 엘리제는 잠시 말없이 소독 칼을 바라봤다. ‘메스.’ 두근. 원시적 형태의 메스(수술칼)이었다. 오랜만에 잡는 그 메스에 가슴이 진동했다. ‘외과의사가 된 후, 이 메스를 놓았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녀의 얼굴이 아련해졌다. 그리웠었나 보다. 이 메스의 감촉이. 이렇게나 가슴이 떨리는 것을 보니. ‘황태자비 따위 절대 되지 않아. 이게 내 운명이야. 평생 의사의 삶을 살겠어.’ 그녀는 수술칼을 쭉 내리그었다. 죽은 살들이 정확한 경계를 이루며 떨어져 나가며 피가 울컥 새어나왔다. “앗!” 지켜보던 보조원들이 비명을 삼켰다. 하지만 엘리제는 털끝 하나의 동요도 없이 손을 움직였다. 피가 나오는 혈관을 거즈로 지혈하며, 감염된 부분을 칼로 쳐냈다. 그런 그녀의 눈은 ‘후작가의 공녀 엘리제’가 아닌, ‘외과의사’의 것이었다. 강인하고, 흔들림 없는 철혈의 눈빛! 여리디여린, 인형 같은 얼굴에 깃든 그 철혈의 눈빛은 지극히 부조화스러우면서도, 동시에 모순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냈다. “어떻게 저렇게...?” 보조원들이 놀란 표정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의료인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오래 일한 덕에 수술 장면을 여러 번 본 적 있는 그녀들은 지금 엘리제의 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아봤다. ‘정식 의사 선생님들도 저렇게 수술칼을 잘 다루진 못하던데?’ 그녀들은 테레사 병원의 어떤 의사도 저 소녀처럼 수술칼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장인과도 같은 솜씨였다. 뚝! 마지막 죽은 조직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수술이 끝난 상처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상태였다. “다 끝났어요, 환자분.” 거즈로 마무리하며 엘리제는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이전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요.” 환자는 감격해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친절히 답했다. “앞으로도 잘 관리해야 해요. 불편한 것 있으며 말씀 주세요.” “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고 그녀는 멍하니 자신을 보고 있는 보조원들에게 말했다. “죄송한데... 다음 환자 상처 처치도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아... 네, 네!!” 그녀들은 화들짝 엘리제의 말에 따랐다. 그렇게 엘리제는 부랑자 병실의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치료해나갔다. *** 그렇게 일주일간의 시간이 지났다. 테레사 병원의 젊은 교수 그레이엄 남작은 한창 자신의 연구에 몰두 중에 병원장의 호출을 받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케이트 자작이 추천하신 영애는 어떻게, 잘하고 있나?” “... ... .” 그레이엄은 일순 말문이 막혔다. ‘... 어떻게 하고 있지?’ 부랑자 병실에 배치한 후, 신경 안 쓰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까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왜 아무런 이야기가 없지? 그냥 말없이 그만둔 건가?’ 당연히 하루, 이틀 안에 자신을 찾아와 그만둔다고 할 줄 알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부랑자들에게 놀라 인사도 못 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르겠다. “왜 대답이 없나? 자네를 안 찾아왔나?” 병원장, 고트 자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 아닙니다. 그...” 그레이엄은 말을 더듬었다. “... 자율학습 중입니다.” “자율학습?” “...네. 분위기도 익힐 겸 병원에서 자율학습하도록 했습니다.” 그의 어설픈 둘러댐에 대충 상황을 눈치챈 병원장은 언성을 높였다. “그레이엄! 자네 그런 식으로 할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케이트 자작이 추천한 영애야!” “죄, 죄송합니다.” 케이트 자작. 이 병원의 소유자이자 재상인 클로랜스 후작의 봉신으로 상당한 위세의 귀족이었다. “가서 똑바로 해!” “네, 죄송합니다.” 그레이엄은 한참을 머리를 조아린 후에 병원장실에서 나왔다.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바쁜데 그 아가씨까지 데리고 다니며 교육해야 한다고? 그렇게 중요한 아가씨면 본인이 직접 가르치던가!’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으나, 그는 몰락 가문 출신의 힘없는 말단 의사일 뿐이다. 시키면 해야 한다. ‘아직 있을지나 모르겠네. 벌써 도망갔을 것 같은데.’ 그는 부랑자 병실로 내키지 않은 발걸음을 옮겼다. 00017 도제 ========================================================================= 그런데 부랑자 병실에 도착한 그는 병실의 변한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뭐지, 이게? 내가 병실을 잘못 온 건가?’ 그는 문의 명패를 살폈다. 분명 제대로 온 것이 맞다. 하지만... 이 모습은? ‘어떻게 이렇게 변한 거지?’ 일단 병실이 깨끗해졌다. 이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치 제국 최고의 의료기관이라는 황실 십자 병원의 병실의 위생 상태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환자들의 상태! 단순히 깔끔해진 것만이 아니다. 분명 일주일 전에 봤을 때만 해도, 다들 희망없이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조금씩 눈가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혼란스러워하는 그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로제. 형식상 그의 제자로 들어온 그 어린 소녀가 병실 구석의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용케 여태까지 안 도망갔었군. 그런데 왜 여기서 졸고 있지?’ 그는 왜 병실이 변한 건지 그녀에게 물어보려 했다. “너...” 그런데 그가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딱딱한 소리가 말을 가로막았다. “이봐, 의사 양반. 뭐하려고?” “...?!” 병실의 부랑자 중 한 명이었다. “저 소녀를 깨우려고? 관두시지.” “뭐...?” “어제 저 소녀는 우리를 돌보느라 한잠도 못 잤어. 이제 겨우 잠시 눈을 붙인 것이니, 나중에 다시 와.” “...!!” 그레이엄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이 무슨? 하지만 다른 부랑자도 나서서 말했다. “그래, 무슨 중요한 용무인지는 몰라도 다음에 와. 저 아가씨는 좀 쉬어야 해.” 그레이엄은 상황이 파악되지 않았다. 원래 부랑자들은 예의가 없고 의료진에게 적대적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무례하게 말하는 것이야 당연하다 해도, 왜 저 소녀를 감싸는 거지? 어쩔 수 없이 나온 그레이엄은 병실을 담당하는 보조원들을 찾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는 보조원들에게 병실의 변화를 물어봤다. 그리고 들려온 대답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모두 저 소녀가 한 일이라고?” “네, 선생님. 레이디 로제는 정말 대단한 분이세요.” 보조원들은 소녀가 한 일들을 빠짐없이 말했다. 저 조그만 몸으로 더러운 병실을 정리하고, 환자들의 위생을 개선하고, 욕창을 소독하고... “죽은 조직도 메스로 수술했다고?” “네, 그뿐 아니라 어제는 안 좋은 환자까지 치료하셨어요. 한숨도 안 자고 옆에서 밤새도록요.” 보조원들의 목소리에는 심지어 존경마저 담겨있었다. 일주일의 시간 동안 엘리제의 헌신과 노력에 깊이 감동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조원들만이 아니었다. 병실의 부랑자들은 자신들을 위해주는 그녀를 거의 성녀 바라보듯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내가 너무 내버려뒀구나.’ 그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환자를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책만 보고 조직 절제술을 혼자서 했다고? 겁도 없이.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는 보조원들의 말을 다 믿지 않았다. 믿기에는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다. 병원에 처음 교육 나온 소녀가 조직 절제술을 멋지게 시행하고,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치료해냈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분명 어설프게 잘못 건드려놨겠지. 안 건드니만 못하게. 잘못 치료하면 오히려 환자의 상태가 악화하는데.’ 그는 소녀를 방치한 것을 후회했다. 학을 떼고 도망갈 줄 알았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렇게 사고를 쳐놨을 줄은 몰랐다. ‘다시는 겁 없이 이런 짓을 못 저지르게 단단히 혼내야겠군.’ 환자는 실험 대상이 아니다. 어설픈 지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절대 금해야 할 일이다. ‘한번 어떻게 해놨는지 가서 정확히 보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소녀가 해놓은 어설픈 처치들을 확인 후, 조목조목 따지며 혼내기로 마음먹었다. *** 엘리제는 누군가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깜빡 졸았나? 피곤해.’ 머리가 무거웠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을 고정하려 애쓰며 생각했다. ‘확실히 엘리제의 몸이 체력이 약하구나.’ 이전 삶 외과의사 송지현으로 살 때는 체구가 작아도, 체력은 강했다. 몇 날을 밤새며 수술을 해도 거뜬했으니까. 하지만 이 엘리제의 몸은 원체 잔병치레가 많아서 그런지 체력이 형편없었다. 조금 무리했다고 이렇게 피곤하고 머리가 아프다니. 한숨이 나왔다. ‘정신 차리자.’ 그런데 그때였다. “환자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불쾌함이 가득한 목소리. 명목상 그녀의 선생,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거리며 답했다. “... 환자들의 불편한 점을 돌봤습니다.” “그러니까 환자를 진료했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변연절제술까지 하면서? 그러다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엘리제는 그레이엄이 왜 화를 내는지 깨달았다. 확실히 아무것도 모르는 견습생이 하기엔 자신의 처치들은 위험한 감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죄송함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도제로 들어온 견습생을 이렇게 팽개쳐둔 분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고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죄송합니다. 상처가 너무 안 좋은 것 같아, 급하게 처치를 했습니다." 그레이엄은 인상을 찌푸렸다. “한번 어떻게 해놨는지 보자.” 그러고 그녀가 변연절제술을 시행한 두 번째 침상 환자의 욕창을 확인했다. 그런데... “...!!” 그레이엄은 흠칫 놀랐다. ‘뭐지? 왜 이렇게 상처가 좋아졌지?’ 원체 욕창 감염이 심한 환자라 이전 상태를 알고 있었다. ‘거의 손도 못 댈 정도였는데? 어떻게?’ 진물이나 농은 말끔히 없어지고, 심지어 깨끗한 새살이 차오르고 있었다. “바롯 경께서 왔다 가셨나?” 바롯 준남작은 테레사 병원에서 손꼽히는 수술 실력의 의사였다. 바롯 준남작 정도의 실력이면 이렇게 깔끔히 변연절제술을 해낼 수 있다. 하지만 보조원이 옆에서 말했다. “레이디 로제께서 하신 거예요.” “...!!!”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저 소녀가? 그럴 리가?! 하지만 놀람은 끝이 아니었다. “이 상처는 왜 이렇게 드레싱한 거지?” 깊은 욕창 상처 안에 소독약이 흠뻑 젖은 거즈가 들어가 있었다. “중등도의 감염 상처라 소독약을 적시는 소킹 드레싱(soaking dressing)을 적용해보았습니다.” 거즈를 빼내 보니, 확연히 호전된 상처가 나타났다. “...!! 그러면 이 환자의 수액은?” “최근 설사가 심했습니다. 탈수를 막기 위해 수액을 주었습니다.” 다른 환자들도 모두 확인해보았지만, 전부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 어린 소녀가 한 처치는 모두 한치의 틀림도 없었다. 아니, 틀림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했다. 각각의 환자들에게 필요한 치료가 빠짐없이, 그리고 정확하게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지?” “네?” “너 혼자 이렇게 해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분명 누군가 가르침을 주었을 터. 병원의 어떤 선생님이 도와주신 거냐?” 그래, 이 소녀가 혼자 한 것이 아닐 거다. 분명 누군가 와서 도움을... “레이디 로제께서 전부 하신 거예요. 지난 일주일간, 이 병실에는 레이디 로제 말고 아무도 오지 않았어요.” 옆에서 듣고 있던 보조원이 말했다. “...!!” 그레이엄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네가... 이런 치료들을 혼자 했다고? 어떻게?” “... ... .” 엘리제는 주저했다. 환자들이 안 좋아 이리저리 치료하긴 했으나, 확실히 병원에 처음 나온 견습생이 해내기엔 과한 처치들이었다. ‘뭐라고 대답하지?’ 하지만 딱히 설명할 말이 없어 조악한 거짓말을 했다. “책에서 공부하고 했습니다.” “이걸... 책에서 보고 했다고?” 믿지 못하겠단 얼굴.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뻔뻔해지기로 했다. “네.” 그레이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했다. ‘아니. 아무리 열심히 책을 봤다고 해서... 이런 치료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모든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의술은 경험이 중요하다. 책으로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봤자, 실제 임상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래서 제국 의사 시험 응시 자격을 병원에서 수련 후, 실력을 인정받은 이로 한정하는 것이다. 죽은 지식이 아닌, 임상 경험을 통해 진정한 의술을 갖춘 자만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는 소녀를 바라봤다. 다과회에서 우아하게 차 마시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은 저 소녀가 이런 치료를 해냈다고? “혹시 잘못 치료한 점이 있을까요, 선생님?” “어, 없다.” “그러면 오늘 오신 것은 환자들의 상태를 살피러 오신 건가요?” 그 말에 그레이엄은 첫 용건을 떠올렸다. ‘케이트 자작께서 추천한 영애니 잘 챙기라고 해서 온 거였지.’ 병원장의 당부가 생각났다. “로.. 제라고 했나?” “네, 선생님.” “그래, 로제. 이 병실을 담당하는 것은 오늘까지로 됐다.” “그러면?” “내일부터는 나를 따라다녀라.” 그레이엄은 설명을 덧붙였다. “내일부터는 같이 다니며 직접 너를 가르치마.” “...!” 둘의 관계는 스승과 도제(徒弟). 이제 그녀를 제자로 인정하고 제대로 된 가르침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한편 그레이엄은 복잡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한번 옆에서 잘 살펴봐야겠군. 같이 다녀보면 알겠지. 진짜인지, 아닌지.’ 하지만 그때 그레이엄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아직 진정한 놀람은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1-3 도제 fin> <1-4 도제2 start> 며칠 뒤 브리티아 황실의 황궁. 황제가 머무는 대궁에서 2명의 남자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현 황제 민체스터와 그의 주치의 밴 자작이었다. “폐하, 피로는 조금 어떠십니까?” “아직 크게 좋아지는지 모르겠군. 깊게 자도 계속 피로해.” 그 말에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신이 부족하여.” “아니네. 내가 몹쓸 병에 걸린 것이지, 어찌 자네가 부족한 탓이겠나. 자네가 부족하면 이 제국의 모든 의사는 청진기를 내려놓아야겠지.” 황제는 부드럽게 말했다. 황궁 어의이자 황실 십자 병원의 병원장인 밴 자작은 명실상부한 제국 최고의 의사 중 한 명이었다. 그가 모르면, 제국의 그 어떤 의사도 모를 것이다. ‘의사라도 모든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민체스터는 생각했다. ‘아무리 요즘 의학 수준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해도 말이야.’ 근래의 의학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한 상태지만, 한계는 있었다. 너그러운 군주인 그는 의학의 한계를 주치의의 무능으로 돌리고 싶진 않았다. ‘그저 지난 잘못에 대한 내 업보겠지.’ 황제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난치병에 걸린 게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말없이 대화를 듣고 있던 한 인영이 입을 열었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정말 모르겠나?” “죄송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문득 지난번 엘리제와의 대화가 떠올라 물었다. “그러면 혹시 이런 병은 들어본 적 있나?” “어떤 질환 말씀이십니까?” “지난번 누군가 아바마마의 증상을 듣고 혈액 속에 당이란 물질의 농도가 올라가면 비슷한 증상이 생길 수 있다고 했는데, 혹시 들은 바 있나?” “...!!!” 밴 자작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혈액 속의 당의 농도? 탄수화물(carbohydrate)의 대사체(metabolite)를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것 같더군. 그대는 잘 모르는 질환인가?” “...!!!” 어의는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어의의 반응에 황제와 황태자는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나?” 하지만 밴은 황태자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프랑소엔 공화국의 의학계에서 태자 전하가 말한 것과 같은 질환을 논문으로 발표한 적이 있었어. 증상도 폐하와 유사한...! 맙소사!’ 그는 황제의 증상을 주르륵 떠올려봤다. 피로감, 다음, 다뇨(polyuria), 다갈! 논문에 나온 증상과 일치했다! ‘내가 어째서 이걸...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지?’ 아마 지나가다 힐끗 읽은, 그것도 타국의 논문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의 입에서 논문에 명시된 진단명이 흘러나왔다. “당뇨(diabetes mellitus)." 황제와 황태자는 더욱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나, 밴?” 밴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례를 용서해주시옵소서, 폐하! 지금 당장 태자 전하가 말한 질환을 검토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당장 방을 뛰쳐나가려다가 태자에게 물었다. “태자 전하! 혹시 전하께 방금 언급한 질환을 말해준 의사가 도대체 누구옵니까? 분명 이름난 명의(名醫)일 터! 그분과도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 .” 황제와 황태자는 황당한 얼굴을 했다. 명의(名醫)? 그 아이가? <내일(수요일)은 쉽니다. 모레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18 1-4 도제2 ========================================================================= “내가 말한 질환이 아바마마의 증상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가?” “네,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분명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께서 말씀해준 것입니까? 이 병은 이전까지는 실체도 모르고 있다가, 최근에야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처음 발표된 것이라, 제국 내에서 이 질환의 존재를 아는 의사는 저를 포함해 스무 명도 되지 않을 텐데.” “... ... .” 제국에서 스무 명도 모르는 어려운 질환이라고? 황태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명의가 아니다. 그 병을 말해준 사람이 누구냐면...”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을 끊었다. “누가 말해주었느냐가 뭐가 중요하겠는가? 가서 열심히 연구해 짐의 병을 치료해주게.” 뭔가 숨기려는 듯한 말투에 밴 자작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폐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그러고 물러나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온 밴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숨기려는 것이지? 이 질환의 존재를 아는 분이면, 분명 제국의 의학뿐 아니라, 공화국의 최신 의학 지견까지 꿰뚫고 있는 대가(大家)일 터. 향후 폐하의 치료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그는 공화국의 논문을 꺼내며 생각했다. ‘어차피 수도에 그 정도 수준의 의사는 몇 명 없으니. 내가 아는 의사 중 한 명일 거야.’ 머릿속에 가능한 명단이 쭉 떠올랐다. 일단 자신이 병원장으로 있는 황실 십자 병원의 교수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들이 모여 있으니,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야. 폐하의 증상을 두고 몇 번이나 컨퍼런스를 열었지만, 이 질환을 언급한 의사는 한 명도 없었어. 그러면 로즈데일 병원의 의사인가?’ 로즈데일 병원.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급 병원이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 치들은 돈만 밝히지, 실제로 의학에 관심 있는 이들은 거의 없어.’ 그의 머리에 마지막 후보가 떠올랐다. ‘차라리... 테레사 병원에 실력 있는 의사들이 몇몇 있지.’ 테레사 병원은 클로랜스 가문이 구휼을 목적으로 만든 병원으로 전체적 의료진의 수준은 다른 병원들에 비해 떨어진다. 하지만 워낙 많은 환자를 보기 때문일까? 간혹 뛰어난 의사들이 있었다. ‘고트 병원장도 이 질환을 알고 있을 거고. 그때 잠깐 만난 젊은 천재 그레이엄도 이 질환을 알고 있을 거야. 나중에 한번 넌지시 확인해봐야겠군.’ 그는 본인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당뇨는 아직 미지의 영역에 속한 질환으로, 그 혼자만으로 황제를 치료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따라서 황제를 치료하기에 앞서, 증상만을 듣고 당뇨란 질환을 추측해낸 의사와 상의를 하고 싶었다. ‘분명 대단한 실력의 대가(大家)일 거야. 도대체 누굴까?’ *** “밴 경이 단서를 잡은 듯하군.” “네, 정말 다행입니다. 이번엔 꼭 아바마마의 병이 완쾌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황제와 황태자 부자는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데 밴 자작의 반응을 보니 엘리제 그 아이가 한 이야기가 정말이었나 보구나.” “네.”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최근에야 발표한 질병이라고? 그 아이는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거지?” 황제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밴 경에게 그 질환을 언급한 이가 클로랜스 영애란 사실을 어째서 숨기셨습니까?” 민체스터 황제는 말했다. “어차피 황태자비가 될 아이. 의학계와 자꾸 엮일 필요는 없지 않으냐? 지금 병원에 나가 있는 것도 당장 돌아오라고 하고 싶거늘.” 황제는 엘리제가 황태자비가 되길 원하지 의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황태자비, 그리고 후에 황후가 될 아이에게 의사는 어울리지 않지.’ 의사가 나쁜 직업은 아니다. 아니, 가치 있고 존중할 만한 직업인 것은 황제도 안다. 하지만 황태자비가 될 아이가 의사 일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너는 어떤 마음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엘리제와의 결혼 말이다.” “저는 그저 아바마마의 명에 따를 뿐입니다." "그래? 싫든지, 좋든지 너도 생각이 있을 것 아니냐? 어떻느냐?" 그러나 황태자는 무감정하게 답할 뿐이었다. "저는 제국 황실의 일원. 제 개인적인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에 민체스터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저리 딱딱해서.' 그의 아들, 린덴 드 로마노프는 그 누구보다도 유능한 황태자지만, 마치 감정이 메마른 듯 너무 차가웠다. ‘안타깝구나.’ 그는 자신의 아들이 가슴 속,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과연 저 메마름이 따뜻해질 날이 올까? 민체스터는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크림 원정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느냐?” “2군단이 크림 반도로 진군 중입니다. 며칠 안에 반도에 진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번 엘리제 그 아이가 말한, 몽셀 왕국의 동태는?” 황태자는 목소리를 낮추어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어냐?” “프랑소엔 공화국의 비공식 사절이 최근 몽셀 왕국에 드나들었다고 합니다.” “...!”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 말이 사실이냐?” “네, 첩보국에서 확인한 정확한 정보입니다.” “허어. 그러면 그 아이가 추측한 대로 몽셀 왕국이 참전할 가능성이 높겠구나.” “네. 사절이 다녀간 후, 몽셀 왕국군이 은밀히 움직이고 있다고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저희 군의 뒤를 칠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허어...” 황제는 탄식을 터뜨렸다. “이걸 모르고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꼬. 내가... 아니, 우리 제국이 엘리제, 그 아이에게 큰 도움을 받았구나.” 그는 엘리제에게 거듭 감탄했다. 만약 그녀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반도로 진입한 제국군은 속수무책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았을 것이다. 아니, 뒤통수 정도가 아니다. 허리가 끊기고 목이 날아갈 치명타였다. ‘참 대단해.’ 황제는 지난번 엘리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과거 철없는 모습을 완전히 버린, 정숙한 태도. 그리고 현명한 식견, 착한 마음까지. 이전에도 조카처럼 아끼는 아이였지만, 그날은 욕심이 날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반드시 황태자비로 맞아야겠어. 병원에선 빨리 나오도록 하고.’ 그 뒤로 황제와 황태자는 이런저런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가 의자에 몸을 묻으며 말했다. “린덴.” “네, 아바마마.” “다음 암행은 언제 예정이느냐?” “조만간 나가볼까 합니다.” 암행. 변장을 통해 신분을 숨긴 후 시민들의 생활을 살피는 것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이들의 비밀스러운 전통이자 의무였다. “이번엔 어디를 살필 것이냐?” “헤란로를 가볼까 합니다.” 헤란로는 봉건제가 몰락 후, 산업화의 바람을 타고 제국의 새로운 주축으로 떠오른 신(新)-시민 계급, 부르주아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헤란로 말고 피에르 구역을 가는 것은 어떠냐?” “피에르 구역 말입니까?” 피에르 구역은 비교적 가난한 서민들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특별한 이유라도?” “그곳에 테레사 병원이 있지 않으냐?” 황제가 빙긋 웃었다. “영 소식이 없는데... 엘리제, 그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한번 직접 보고 오너라.” *** 엘리제는 정식 도제(徒弟)로 그레이엄 남작의 뒤를 따라다니며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말이 교육이지, 그레이엄이 일일이 그녀에게 지식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참관. 그녀는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며 그가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바라봤다. 그레이엄은 그저 가끔 생각났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 환자의 병이 무엇인지 알겠나?” 엘리제는 스승에게 하듯,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세균성 폐렴입니다.” “어째서지? 물이 찬 것은 아니고?” “화농성 가래, 검사에서 보이는 경화 소견을 고려할 때 물이 찬 것보단 폐렴의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정확한 답변. 그렇게 짧은 문답이 끝나면, 그레이엄은 다시 그녀에게서 신경을 끄고 진료에 열중했다. 엘리제는 말없이 뒤에서 그 모습을 참관하고. ‘의대 시절 학생으로 돌아온 것 같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서울대 의대 재학시절, 병원 실습을 나갔을 때도 이렇게 교수님들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녔다. 그때는 처음 마주하는 환자들에 긴장도 많이 하고, 놀라기도 많이 했는데... 당시 추억이 생각나서 슬쩍 미소가 나왔다. ‘빨리 의사 자격증을 취득해 나도 내 진료를 할 수 있으면.’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좋지만, 역시 직접 환자를 보고 싶었다. 수술도 하고 싶고. ‘기회가 있겠지.’ 한편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은 말없이 경악하는 중이었다. ‘도대체 이 애는 뭐지?’ 관심 없는 듯 보여도 그는 꼼꼼히 소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처음엔 의학 지식을 묻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쉬운 질문들은 아니었다. 해당 사항을 정확히 알아야 답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소녀는 모든 질문에 정답을 말했다. 마치 교과서를 보고 답하듯 정확하게. ‘그래서 난이도를 높여 환자의 진단을 묻는 질문을 했는데...’ 결과는 더 가관이었다. 환자의 증상을 뒤에서 듣고 답을 하는데... 마치 노련한 의사처럼 정확했다. 그가 고민되는 질환도 척척 답을 했고, 심지어 둘의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는데, 후에 검사결과를 확인해보니 소녀의 진단이 맞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레이엄은 혼란에 빠졌다. ‘이전에 환자를 진료해본 적이 있는 건가?’ 하지만 저 어린 소녀가 환자를 진료한 경험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니면... 천재?’ 세상엔 가끔 그런 존재가 나타난다. 나이와 경험을 뛰어넘는 희대의 천재가 말이다. 대 연금술사 프레밍이 그러했고, 80년 전 의학의 기초를 새롭게 다진 그라함 백작이 그러했다. ‘모르겠군. 모르겠어. 저 소녀가 그런 천재라고?’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귀족가 아가씨가 흥미 삼아 병원에 나왔다는 편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상식을 뛰어넘는 소녀의 모습에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저, 선생님.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진료가 끝나자 엘리제가 물었다. “오늘은 더 특별한 일정은 없다. 집으로 돌아가도록.” “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그녀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였다. "잠깐. 로제." "네?" "... ... ." 그런데 그레이엄은 바로 이야기를 않고, 한참을 머뭇거렸다. "선생님?"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머쓱한 목소리로 말했다. "... 미안했다." "네?" "지금까지 널 편견을 가지고 귀찮게만 생각했어." "...!!"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사과에 그녀는 당황했다. "아, 아닙니다, 선생님." "아니야. 겉모습만 보고 너를 오해한 것 같아. 미안하다." 처음의 인상과 다르게 소녀는 깍쟁이 귀족 아가씨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가 부랑자 병실에서 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테레사 병원에서조차도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던 부랑자들이다. 세상에 어떤 의사가 부랑자들을 위해 그녀처럼 할 수 있을까? "하여튼 앞으로 잘해보자." 진심이 느껴지는 그 사과에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선생님. 앞으로 열심히 할 테니 더 잘 부탁합니다." 그레이엄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였다. “내일은 이곳 진료실이 아닌, 구호소로 나와라.” “...!”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구호소 말입니까?” “그래.” 구호소는 현대 지구로 따지면 응급실(emergency room) 같은 곳으로 외상 환자나, 응급 환자를 진료하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중환자들이 모이는 곳. 00019 1-4 도제2 ========================================================================= 그리고 그녀가 놀란 이유는 보통 구호소에는 도제 생활을 오래해 실력을 인정 받은 견습생들이 나가기 때문이다. 그레이엄도 잠시 고민했다. '이 아이를 구호소에 보내기에는 조금 빠르려나?'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왠지 이 소녀라면. 구호소로 보내도 아무런 문제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여기서 더 가르칠 것도 없을 것 같고. 구호소에서 같이 환자를 보며 가르치는 게 낫겠어.' 그리고... '중환 환자들이 응급하게 오는 구호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기도 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졌지만, 의학을 자신의 모든 것으로 여기고 있는 그레이엄. 이 상식 밖의 재능을 가진 소녀가 구호소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했다. *** 그리고 그날 저녁, 클로랜스 후작가. "엘리제." "네, 아버지." "병원에서는 지낼 만 하느냐?" 엘리제는 웃으며 답했다. "네, 즐거워요." 사실 그녀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환자를 보고 싶었으나, 견습생 신분이니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힘들진 않고?" "네, 괜찮아요." 엘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고생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빨리 포기하길 바랐으나,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병원에 갈 때마다 즐거워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나저나 테레사 병원. 이놈들을 그냥.' 그는 남몰래 엘리제의 병원 생활을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을 부랑자 병실에 넣어놓고 방치해?!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것을 숨긴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엘리제가 말리지만 않았어도. 다 잘라버리는 거였는데.' 테레사 병원의 의사들은 모를 것이다. 딸의 만류가 아니었으면, 병원에 해고의 피바람이 몰아쳤을 것이란 사실을. 특히 그레이엄인가 하는 젊은 놈팽이는 무조건 모가지였다. '저 여린 애에게 부랑자를 보게 하다니!' 병원에 나간 지 이제 10일째. 그렇지 않아도 여린 아이가 살이 더 빠졌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게 하고 싶은데, 저리 좋아하니. 하아.'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내일부터는 어디로 교육을 나간다고?" "구호소요." "뭐? 구호소?" 엘 후작은 눈썹을 꿈틀했다. 그도 구호소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었다. 외상 환자와 중증 환자를 보는 험악한 곳 아닌가! '저 약한 애를 구호소로 보낸다고? 이놈들을 진짜!' 병원장인 고트 자작을 불러 호통치고 싶었다. 도대체 도제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냐고! 그레이엄이란 놈은 당장 해고하라고! 딸이 웃으며 이렇게 말하지만 않았으면, 당장 그랬을 것이다. "가서 열심히 배우고 올게요, 아버지. 저 잘할 수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하지 말고 믿어달라는 목소리. "...!!" 엘 후작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엘리제." "네, 아버지." "누가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이야기해라. 내 가만두지 않으마!" 만약 누군가 그녀를 괴롭히면 병원에 폭풍이 몰아닥칠 것 같은 목소리. 아비의 사랑에 엘리제는 그저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 어쨌든 그렇게 엘리제는 아버지의 걱정을 뒤로하고 테레사 병원의 구호소로 나가기 시작했다. “로제라고 합니다. 오늘부터 견습생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 구호소의 모두가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지?’ ‘귀족가의 아가씨 같은데, 견습생이라고? 구호소에는 왜?’ 구호소는 환자의 상태가 중하기 때문에 병원에서 오랜 시간 도제 수련을 거쳐 실력이 무르익은 후 오게 되는 곳이다. 따라서 지금 구호소에서 일하는 도제들은 모두 최소 3년 이상의 도제 생활을 거친, 의사가 되기 직전 단계의 숙련자들이었다. 그런데 저런 소녀가 오다니? “레이디, 잘못 오신 것 같습니다. 이곳은 다치거나 중한 환자들이 오는 구호소입니다.” 도제 중 우두머리격인 청년이 말했다. 인형 같은, 그러면서도 기품이 느껴지는 소녀의 아름다운 외모 때문에 말투가 조심스러웠다. 하지만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보고 오늘부터 구호소에서 일하라고 말씀하셔서 나오게 되었어요.” “레이디의 선생님이?” 청년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뒤에서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다. 내가 이 아이의 스승이다.” “...!!” 모두 놀라 나타난 이를 바라봤다. “팰론 교수님!” 까칠한 인상, 잘생긴 얼굴. 그레이엄 드 팰론 남작이었다. “한슨.” “네, 교수님!” 도제들의 우두머리, 한슨이 긴장해 답했다. 병원 위에서야 이리저리 치이는 그레이엄이지만, 도제들이 보기엔 하늘 같은 위치의 교수였다. 특히 젊은 천재라 불리는 그의 뛰어난 실력을 모두 존경하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오늘부터 구호소에서 교육을 받을 거다. 내가 주로 가르칠 거긴 하지만, 내가 자리에 없거나, 바쁠 때는 네가 대신 좀 챙겨주도록.” 그 말에 한슨은 의문이 들었다. ‘저 소녀가 구호소에서 교육을 받는다고? 할 수 있을까?’ 구호소에서의 도제 교육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었다. 응급실의 역할을 하는 곳답게 도제들도 의사들의 처치를 도우며, 실제로 진료에 참여하게 된다. 가슴이 철렁할 응급 환자들도 많이 봐야하는데... 저렇게 여려 보이는 소녀가 버틸 수 있을까? ‘중환자는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 같은데?’ 어쨌든 존경하는 교수의 지시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난 회의에 갔다 올 테니, 구호소의 물품들이나 알아야 할 사항들을 가르쳐주고 있도록.” “네!” 그레이엄이 떠난 후, 한슨은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레이디 로제?” “네, 선배님. 그냥 편하게 로제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 그래.” 차분한 음색. 그러면서도 인형 같은 얼굴. 한창 혈기왕성한 나이의 한슨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살짝 붉혔다. 너무 예쁘게 생겼다. 태어나서 이렇게 예쁜 소녀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귀족이겠지?’ 기품있는 태도에 그렇게 생각했다. 산업화, 봉건제의 몰락, 시민 계급의 대두 등,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귀족의 위치가 변하며 작위를 잇지 못하거나, 특별히 재산을 축적하지 못한 귀족들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전문직인 의사가 되려고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한슨의 아버지만 해도 단승귀족 출신이었니까. “이쪽으로 올래?” “네.” “이곳이 외상 환자를 보는 구역이고, 여기가 수액을 모아놓은 곳이야. 수액은 어떨 때 쓰는지 아니?” 한슨은 친절히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교수님들이 24시간 구호소에 상주하고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환자가 오면 우리 견습생들이 간단히 먼저 보고, 선생님들께 보고를 드려. 그러면 각 담당 선생님이 와서 진료를 보는 식으로 구호소가 운영되고 있어.” 지구의 응급실과 비슷한 운영체제였다. 한국의 대학 병원에서도 응급실에 처음 환자가 오면 인턴이나 레지던트가 진료 후 각 전문 분야의 의사에게 노티(notify)를 하니까. “여기는 수술 도구들. 급한 외상 환자가 왔을 때 이곳에서 바로 수술을 하기도 해.” “네.” “이거는 나중에 환자가 오면 어떻게 사용하는지 직접 보여줄게.” 자신의 설명에 다소곳이 답하는 소녀를 보며 한슨은 가슴이 설렜다. 맨날 시커먼 남자들 사이에서만 지내다가 이런 귀여운 소녀라니! 점점 그의 목소리에 다부진 힘이 들어갔다. “이 도구는...” 그런데 그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구호소에 울렸다! “선생님, 여기 환자 왔어요!!” “...!” 한슨이 엘리제를 돌아보며 믿음직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가자, 로제. 어떻게 진료하는지 알려줄게.” 그런데 구역을 옮겨 환자를 본 한슨의 얼굴이 굳었다. “하아, 하아. 숨이!” 키 크고 마른 젊은 남자가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가슴이 들썩들썩 거리는 게,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가, 가슴이...! 하아, 하아!” 얼마나 숨이 차는지, 환자는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한슨이 다급히 외쳤다. “흉통 환자니 심장 전류 측정 기계 가져와 주세요! 그리고 그레이엄 선생님 불러주세요!” 고작 견습생인 자신들이 볼 환자가 아니었다. 간호사가 당직인 그레이엄을 부르러 달려간 사이, 한슨은 급히 검사를 하려 했다. “환자분, 조금만 참으세요! 금방 검사하고 조치해드릴게요!” 그런데 그때였다. 옆에 서 있던 엘리제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심장을 보는 전류 검사를 할 때가 아닌데. 이 환자의 병은 심장의 문제가 아니야!’ 이 환자를 보자마자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진단이 떠올렸다. 양상을 봤을 때 이 환자의 병은 ‘그것’이 분명했다. ‘상태를 봤을 때 그레이엄 선생님이 오실 때까지 버틸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그녀는 오늘 구호소에 처음 온 교육생이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환자에 대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의료진은 한슨으로 그녀에겐 결정권한이 없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커억...” 환자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눈을 뒤집고 넘어갔던 것이다!! “환자분!! 환자분!! 정신 차리세요!!! 여기요! 빨리 그레이엄 선생님 모셔와 주세요!! 빨리요!!” 한슨이 당황해 외쳤다. 그리고 그 순간, 엘리제가 나섰다. “선배님.” “응?” “죄송한데... 청진기 빌려주세요.” “뭐라고?” “청진기 빌려주세요. 급합니다. 빨리요!” “...!!” 한슨이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그의 목에 걸린 청진기를 낚아챘다. “죄송합니다!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 자세한 설명을 할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환자의 흉부에 가져가 폐음(lung sound)을 청진한 그녀의 안색이 굳었다. ‘역시...!’ 폐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소견과 마른 체형, 큰 키, 급작스러운 가슴의 통증, 심한 호흡곤란이 종합되자 한가지 진단이 내려졌다. ‘기흉(Pneumothorax)이 분명해!!’ 그녀는 정도(Grade)를 파악했다. ‘기흉은 흉강에 공기가 터져 나와 폐를 짜부라트리는 질환! 이 정도면 왼쪽 폐의 70% 이상은 구겨졌을 거야. 아니, 단순히 폐만 찌그러진 게 아니라...!’ 그녀는 급히 경동맥도 만졌다. 그리고 안색이 하얘졌다. 경동맥의 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한 기흉이 아니라... 긴장성 기흉(Tension pneumothorax)!!' 긴장성 기흉!! 공기가 너무 심하게 터져 나와 옆에 위치한 심장까지 압박해 쇼크가 온 상태를 말한다! ‘지금 당장 처치하지 않으면 사망해!!’ “주사기 주세요.” “뭐?” 하지만 한슨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평소의 얌전한 태도와 다르게, 강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만큼 환자의 상태가 급했다. “빨리 주사기 주세요! 가장 굵은 바늘로요!!” “...!!” 그래도 다행히 옆의 간호사가 오더(order)를 알아듣고 구호소에서 가장 큰 주삿바늘을 가져왔다. “여기요!!” 거의 대못만 한 크기의 철제 주사 심. 한슨이 놀라 물었다. “그, 그걸로 뭐하려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시간이 없었다. 주삿바늘을 들고... 마치 칼을 찔러넣듯, 그대로 가슴에 꽂았다. 푸욱! 흉벽이 뚫리며 피가 튀어 올라 그녀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직이야. 좀 더!’ 더 충분한 깊이로 바늘을 밀어 넣었다. “꺄악!” 그 과감한 처치에 옆의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한슨의 얼굴도 하얗게 질렸다. 심장, 대동맥, 폐 등 위험한 장기가 잔뜩 모여있는 곳에 저렇게 바늘을 집어넣다니! 잘못 건드리면 곧바로 사망인데! “너, 너...! 이게 무슨...?”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00020 1-5 불가능한 수술 ========================================================================= 푸슈욱. 주삿바늘을 통해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폐에서 터져 나와 장기를 누르고 있던 공기가 주삿바늘을 통해 외부로 빠져나오는 것이었다. “...!!” 그리고... “커억. 쿨럭, 쿨럭!” 환자가 의식을 차리고 격하게 기침을 하였다. 심장을 누르고 있던 공기가 빠져나와 쇼크가 회복된 것이다! “하아.”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동맥을 짚으니, 다시 맥이 돌아와 있는 것이 고비를 넘긴 듯싶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뺨에 튄 피를 차분히 닦은 후, 경악해 자신을 바라보는 한슨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급박한 상황이어서 저도 모르게...” “어, 어...” 한슨은 얼떨떨하게 답했다. 그런데 그때, 구호소 밖에서 외침이 들렸다! “환자는 어디에 있나?!”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그리고 그 혼자가 아니었다. 환자 상태가 중하다고 전해 들어서인지, 2명의 교수가 더 같이 뛰어왔다. “이 환자인가?” 모두가 모여있는 걸 본 그레이엄이 다급히 다가왔다. “어떻게 된 것이지?” 교수들이 한슨에게 물었다. “그...” 하지만 한슨은 답할 수가 없었다. 진단을 내리기도 전에 환자가 쇼크로 넘어갔고, 엘리제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살려냈으니까. 그는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제대로 파악도 되지 않았다. "주삿바늘이??" 그레이엄이 환자의 가슴에 꽂힌 커다란 주삿바늘을 보고 놀라 물었다. 바늘의 구멍에선 아직도 공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누가 이렇게 했지?" 그 말에 구호소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제에게 모였다. "로제, 네가 한 거냐?" 엘리제는 사람들의 주목에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또 일개 교육생으로 지나친 처치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환자가 사망할 상황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네, 제가 했습니다." "어째서 이렇게 한 거지?" "흉강으로 공기가 터져 나와 폐와 심장을 누르는 상태로 판단되어서 급하게 공기를 밖으로 빼주기 위해 바늘을 넣었습니다." 그 말에 그레이엄을 비롯한 교수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흉(pneumothorax)... . 그것도 긴장성 기흉(tension pneumothorax)이었나 보군. 잘했다." 그 칭찬에 한슨은 눈을 크게 떴다. 그레이엄 교수는 칭찬을 거의 안 하기로 유명한데? "긴장성 기흉은 곧바로 처치하지 않으면 환자가 사망하는 응급 질환. 로제, 네 덕분에 환자가 살았구나." 다른 교수도 감탄의 말을 하였다. "그러게 말이오, 팰론 남작. 조금이라도 늦으면 큰일 나는 질환인데. 이 소녀가 환자를 살렸군. 그런데 긴장성 기흉인지는 어떻게 알았느냐?" 그 물음에 그녀가 공손한 목소리로 답했다. "갑작스러운 호흡곤란의 양상이 기흉이 의심되는 소견이었고, 무엇보다 청진상 폐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는 공기가 음파의 전달을 차단하여 생긴 현상. 경동맥의 맥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 심장까지 눌린 긴장성 기흉에 합당하다 판단했습니다." "...! 허어, 정말 대단하구나." 교수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80년 전, 긴장성 기흉을 처음으로 기술한 그라함 백작의 저서를 읽는 듯한 완벽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도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이 아이는 도대체?' 뛰어난 지식에 놀라서가 아니었다. 이 소녀가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지고 있음은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어떻게 응급 상황에서 이런 판단과 처치를?'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실제 임상에 적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뛰어난 지식을 가질 수는 있어. 하지만... 이런 응급 처치는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도대체?’ 한치만 판단을 잘못해도 환자가 죽을 수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누구라도 긴장에 몸이 굳을 상황이었는데, 이제 병원에 나온 지 보름도 안 된 소녀가 긴장성 기흉을 태연히 진단하고 바늘로 가슴을 찔러 환자를 살렸다고? 조금만 잘못해도 환자가 죽을 상황이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그는 이 소녀를 만난 후, 몇 번이고 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천재. 그냥 천재도 아니었다. 희대의. 진정한 천재. '갑자기 내 재능이 초라해지는군.' 그레이엄은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몰락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피나는 노력을 거쳐 이 자리에까지 올라왔다. 이전 의학의 기초를 다진 그라함 백작이나 프레밍을 뛰어넘는 의학자가 되어 가문을 빛나게 하겠다는 열망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자신은 그런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가 아니란 것을. 그저 자신은 노력하는 범재일 뿐이었다. '진정한 천재는... 이런 아이겠지.' 그레이엄은 소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니, 천재라는 말도 부족할지 모른다. 지금 이 소녀가 보여주고 있는 능력과 재능은 천재라는 단어로도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했으니까. '갑자기 와인이나 한잔 마시고 싶군.' 제국 의학계의 촉망받는 젊은 교수 그레이엄은 작은 소녀를 보며 쓴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드는 생각. '지금도 이렇게 뛰어난데... 앞으로 이 소녀는 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그건 의학에 삶을 바친 의학자로서의 기대감이었다. 이 소녀는 어쩌면... 의학의 기초를 다진 그라함 백작, 아니면 대 연금술사 프레밍을 뛰어넘는 업적을 남기는 의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꿈에서 바라던. 하지만 자신 같은 범재는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영역. 그곳에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이제 막 의학의 길에 접어든 소녀에게 하기에는 지나친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왜일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그날의 일 이후, 엘리제는 테레사 병원의 유명인이 되었다. 이제 갓 병원에 교육 나온 16살 어린 소녀가 긴장성 기흉 환자를 살리다! 목격자가 워낙 많았던 탓에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쟤야.” “정말? 저렇게 여린 소녀가? 에이, 거짓말. 주삿바늘도 무서워 못 잡을 것 같이 생겼는데??” “거짓말 아니야. 내가 똑똑히 봤다니까.” “하... 말도 안 돼. 완전 곱게 자란 귀족집 영애 같은데, 주삿바늘로 흉강을 뚫어 환자를 살렸다고?” “그래, 나도 깜짝 놀랐어. 얼굴에 피가 튀었는데, 눈 한번 깜짝 안 하더라니까?”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닌 엘리제다. 사람들은 저렇게 예쁘게 생긴 소녀가 그런 급박한 처치를 해냈다는 것에 놀라 서로 떠들어댔다. 하지만... 엘리제가 친 사고(?)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쪽 팔 지혈해주세요!! 그리고 수액 부탁합니다!!” 구호소에서 일하다 보니 응급환자가 수도 없이 들이닥쳤고, 그녀의 진면목이 계속해서 드러났다. ‘이렇게까지 해도 될까? 난 이제 교육을 나온지 한 달도 안 되는 견습생인데.’ 그녀도 자신이 해내는 일들이 견습생의 수준을 한참 벗어난 것이란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의심받아도 어쩔 수 없잖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할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렇다고 눈앞에 환자를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덕분에 그녀는 테레사 병원에서 급속도로 유명해지는 중이었다. 상식을 벗어난 천재로. 물론 그렇다고 병원의 사람들이 그녀를 질투하거나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오히려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로제? 그 귀족집 영애? 최고지. 예쁘고, 착하고, 예의 바르고...” 환자 앞에선 물불 안 가리지만, 평소 그녀의 태도는 곱게 자란 귀족집 아가씨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깍듯하고 친절했다. 인형처럼 예쁜 외모,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 그러면서도 남을 배려하는 호감 가는 성격. 모두 소녀를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젊은 남자 중에는 그녀에게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지는 이들도 생겼다. “한슨, 레이디 로제 좋아하지?” “아, 아니야!” 친구의 물음에 한슨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니야? 리차드가 네 눈치 보고 있던데. 먼저 고백하려고.” “뭐?! 리차드, 그놈이? 어디 있어, 그놈?” 한슨이 펄쩍 뛰었다. 친구가 재밌다는 듯 쿡쿡 웃었다. “거봐. 좋아하잖아.” “... ... .” 한슨의 얼굴이 빨개졌다. “좋아하면 고백해. 괜히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될 리가 없잖아.” “응?” “차일 거야. 나 같은 건 무조건.” 평소 자신만만한 그답지 않은 말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아니라고 말해주지 못했다. 레이디 로제와 한슨이라. 그가 생각해도 무조건 차일 것 같긴 하다. 한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처음엔 예쁜 외모 때문에 호감이 갔었지.’ 그래, 소녀는 예뻤다. 그것도 매우. 예쁘고, 또 예뻤다. 하지만 소녀의 가장 큰 매력은 외모가 아니었다. ‘구호소에서... 그 모습...’ 한슨은 응급 환자를 볼 때의 그녀를 떠올렸다. 평소의 부드러움은 온데간데없는 모습. 오로지 환자만을 바라보며, 생명을 살리는 압도적인 처치는 마치 전장의 여인과도 같았다. ‘도저히 반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안쓰러울 정도로 여린 몸에서 나오는 그 모순적인 카리스마는 치명적 매력을 품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환자를 살린 후의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린 듯한 평소의 웃음과는 전혀 다른, 생기가 빛나는 미소. 그 환한 미소를 볼 때마다 한슨은 설렘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하아. 괴롭구나.’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그렇게 엘리제는 자신이 불쌍한 남자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한 채 보람찬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테레사 병원으로 찾아왔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폭탄 같은 선물(?)을 들고. 이전 삶, 엘리제와 황태자와의 약혼 발표가 있었던 탄신연회를 정확히 3주 앞둔 저녁이었다. <1-5 도제 2 fin> <1-6 불가능한 수술> 세계 최강의 열강, 대(大) 브리티아 제국의 수도 론도(Londo)는 프랑소엔 공화국의 수도, 빛의 도시 파리스(Paris)와 더불어 서 대륙 최고의 도시로 인구가 무려 250만이 넘었다. 250만이란 어마어마한 인구는 봉건제의 몰락, 산업화로 도시화가 가속된 결과였는데, 급격한 팽창에 따라 빈민들이 사는 거주지가 여럿 생겼다. 테레사 병원이 위치한 피에르 지구도 그중 하나로, 늦은 밤 으슥한 골목을 두 남자가 걷고 있었다. “좀 더 둘러보실 것입니까, 전하?” 중년의 남자가 젊은 청년에게 말했다. 젊은 청년은 흔하게 볼 수 있는 검은 신사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전하라니? 젊은 청년이 눈살을 찌푸렸다. “암행 중이다. 말을 조심하도록.” “아, 죄송합니다. 습관 때문에 저도 모르게.” 그들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암행을 나선 황태자와 시종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황태자의 얼굴이 평소와 전혀 달랐던 것이다. 흑발에 초상(超上)능력이 담긴 황족 특유의 금안(金眼)이 아닌, 금발에 푸른 눈. 얼굴선도 전혀 달랐다. 변장을 한 수준이 완전히 다른 사람의 얼굴. 시종이 황태자의 얼굴을 보며 감탄의 목소리로 말했다. 00021 1-5 불가능한 수술 ========================================================================= “그나저나...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전하의 초상(超上)능력은 참으로 신묘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외모를 완전히 변화시키다니.” “또.” “아, 또. 죄송합니다, 공자.” 황태자의 얼굴이 변한 이유는 바로, 로마노프 황가에만 이어져 내려오는 초상능력 때문이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황족들은 세상에 마지막 남은 신비한 힘, 초상능력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시종, 란돌 준남작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 초상능력이야말로 로마노프 황가의 진정한 상징성.’ 전 대륙에서 오로지 로마노프 황가의 인물들만이 초상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 거기서 오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했다. 수많은 왕가가 무너지는 이 격변의 시대에도 로마노프 황실이 굳건한 이유를 초상능력 때문이라 생각하는 이도 있었을 정도니까. 물론 로마노프 황가의 번영은 대대로 신민들을 생각하는 황제들의 선정 때문이지, 초상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산업의 발달로 총과 대포의 시대가 된 지금, 초상능력의 의미도 많이 퇴색되었고. 그래도 상징성만큼은 결코 무시하지 못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시민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황족들이 초상능력의 주인이란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전... 아니, 공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몸?” “근래 계속 기력이 없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긴 했지.” "잠을 계속 못 주무시는 것 아니십니까?" 잠? 황태자는 그 물음에 피식 웃었다. 15년 전의 어린 시절, '그날', 이후 그는 잠을 편하게 자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언제나 반복되는 악몽. 그러니 최근 몸이 안 좋은 것은 잠을 못 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의의 진료는 받으셨습니까?” “오래전에 받았다. 어의가 지어준 약을 먹고 있으니 곧 좋아지겠지.” 시종은 걱정스레 말했다. “제가 보기엔 약을 먹어도 큰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계속 피로해하시고요. 환궁하신 후에 다시 한 번 진료를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확실히 단순한 과로라 하기엔 피로감이 오래가고 있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뭐, 특별한 것 있겠나. 조금 더 기다려보지.” “전하... 하지만...”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하겠네.” 어쩔 수 없이 시종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이만 돌아가기라도 하시죠. 몸이 더 안 좋아질까 걱정입니다.” “... ... .” “혹시 더 둘러볼 것이 있습니까?”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한 군데 가볼 곳이 있긴 했다. 바로 테레사 병원. 그의 약혼녀가 될 클로랜스 영애가 일하고 있는 곳. -엘리제, 그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네가 한번 직접 보고 오너라. ‘엘리제... .’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와 지난번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완전히 다른 사람... 아니, ‘그녀’처럼 변해서 나타난 소녀. 그날의 소녀는 마치 ‘그녀’와도 같아 그는 몇 번이고 눈을 의심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소녀가 그날 한 말을 떠올렸다. -저 때문에 원치 않은 약혼 이야기도 나오고. 정말 죄송했습니다.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 말이 이상하게 거슬렸다. 사실 거슬릴 이유가 없는 말인데. “전하?” 시종이 또 전하란 호칭으로 그를 불렀다. 참, 말 안 듣는 시종이란 생각을 하며 황태자는 말했다. “돌아가자, 황궁으로.” 부황의 명을 받았으니 가보긴 해야겠지만, 이상하게 내키지 않았다. '약혼이라.'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기의 승패가 남아있긴 했지만, 그녀는 분명 자신의 약혼녀가 될 것이다. 그녀가 그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승리할 가능성도 없었고, 무엇보다 황제가 그녀를 원하고 있으니까. 온화한 인상을 지녔다고, 유할 것이라 생각하면 크나큰 착각이다. 황제는 전 세계를 아우르는 제국을 지배하는 철혈의 거인. 그가 원하는 순간, 이미 약혼은 결정된 것이다. 다만 조카 같은 그녀를 배려하는 마음에 시간적 유예를 둔 것이지. '뭐, 상관없지. 약혼녀가 누가 되든.' '그날' 이후, 그에게는 단 한 가지의 '염원(念願)'만이 남게 되었으니까. 그러니 어차피 약혼녀 따위. 누가 되든 중요하지 않았다. “네, 이쪽으로 오십시오. 마차를 대기해두었습니다. 거리가 있어 조금 걸어야 합니다.” 시종이 그를 안내했다. 그런데 걷다 보니, 으스스한 골목에 들어가게 되었다. “꼭 이런 길로 가야 하는가?” “이 길을 통하지 않으면 한참 돌아가야 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혹 강도가 나타나도 제가 다 해결하겠습니다, 하하.” 지금은 실없는 중년으로 보이는 시종이지만, 왕년에는 로열 나이츠에 속해있던 뛰어난 기사였다. 이런 골목에 나오는 강도 따위는 한 손으로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초상능력자이자 2년 전, 앙젤리의 전쟁 영웅이신 전하께서는 나 같은 것 따위는 비교도 안 되는 강자이시고. 군대라도 오지 않는 한, 전하를 해할 수 없지.’ 그런데 말이 씨가 된 것일까? 골목 깊숙한 곳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거... 거기 서라.” “...!!” “가, 가진 것 다 내, 내놔...” 덥수룩한 수염의 강도가 녹슨 칼을 들고 그들을 위협했다.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편 중독자군.” “그런 것 같습니다.” 칼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눈빛도 흐릿한 게 아편 중독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국법으로 아편을 다스린 지 오래되었거늘, 수도에서 버젓이 아편이라니.” “치안총감 하슬 경에게 조사를 명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저 중독자 먼저 치안대에 넘겨야겠군.” 칼을 든 강도를 만났건만, 대화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의 기색이 전혀 없었다. '저런 강도 따위 10명이고 상대할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한 시종은 허리춤에 찬 검을 꺼내 강도에게 겨누었다. 차앙! “다치기 싫으면 칼을 내려놓아라.” “다, 다가오지 마!!” 심상치 않은 시종의 기세에 강도는 뒷걸음질쳤다. 시종은 단숨에 제압할 생각으로 천천히 강도에게 다가갔다. 한편 황태자는 그 모습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무료하군.’ 생명을 위협하는 강도를 만난 상황에 어울리는 감정은 아니지만, 무료했다. ‘그래, 무료해.’ 그는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방금 든 감정은 아니었다. ‘그날’의 일 다음부터일까? 이 나라를 물려받을, 가장 존귀한 그였지만, 그의 마음은 항상 무료하고 삭막했다. ‘쓸데없는 생각.’ 그는 고개를 저었다. “히엑! 저리 가!!” 결국, 아편 중독자는 칼을 버리고 줄행랑을 쳤다. “거기 서라!” "쫓아오지 마! 죽일 거야!!" 시종이 단숨에 뒤를 따랐고, 그의 손이 강도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시종, 란돌 준남작은 잡았다는 생각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요놈! 가만히 있어라!”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소리가 울렸다. 탕!!! "어?" 란돌은 신음을 내뱉었다. 메케한 화약 냄새와 더불어 왼쪽 배가 타오르듯이 쓰라렸고, 급작스레 시야가 어두워졌다. '무, 무슨...?' "란돌!!" 흐릿한 의식 속 황태자의 외침이 들렸고, 눈앞에 권총을 들고 있는 아편 중독자가 보였다. 귀족들이 호신용으로 사용하는 2연발의 데린저 권총이었다. ‘어떻게... 권총을?’ "히익, 힉!! 내, 내가 죽인다고 했잖아! 히익!" 아편 중독자가 이성을 잃고 횡설수설하더니 달려오는 황태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너, 너도 죽인다!" 시종, 란돌은 꺼지려는 의식을 붙들려 이를 악물었다. '전하...!' 저런 총알 따위로 초상능력의 소유자인 전하를 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강도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푹! "컥!" 검극이 목을 정확히 파고들었고, 아편 중독자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즉사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황태자가 시종에게 도착했다. "란돌!!" "저, 전하... 죄, 죄송합니다. 설마 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바보같이 방심하여..." 시종은 울컥 피를 토했다. "그만! 그만 이야기하여라!!" "저, 전하..." 시종의 눈에 빛이 사라져갔다. '이런...!' 황태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왼쪽 상복부. 하필 급소에 정확히 맞았어!' 작은 충격에도 위험할 수 있는 부위가 급소다. 하필 그런 곳에 총을 맞다니! "저, 전하..." 시종이 마지막 말을 하기 위해서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껏... 감사했습니다... 강녕하시길..." “...!!”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종은 고개를 떨구었다. "란돌!! 정신 차리지 못할까!" 황태자는 급히 시종의 맥을 짚었다. 다행히 아직 맥이 있었다! 의식을 잃었을 뿐 아직 사망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해.'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잃을 것이 분명했다. '죽게 놔둘까 보냐.' 특별히 개인적인 정을 쌓은 시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내 사람’이다. 절대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 '가장 가까운 병원이?' 최고의 시설을 갖춘 황실 십자 병원은 너무 멀었다.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로즈데일 병원도 안 돼. 멀어.' 그런 그에게 한 병원이 떠올랐다. 테레사 병원! 시설은 열악하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론도(Londo) 최대 규모의 병원이었다. 그리고 운명의 장난일까? 하필 그날 저녁 당직은 그레이엄 남작과 그의 제자 엘리제였다. *** 늦은 밤임에도 테레사 병원의 구호소는 환자들로 북적북적했다. 피 흘리는 중년 남자, 고통에 신음을 삼키는 여성... 그 복잡한 아비규환 속에서 한 소녀가 의사에게 다가갔다. "어깨 탈구 환자 처치했습니다, 선생님." 젊은 교수, 그레이엄은 고개를 돌렸다. 작고 여린, 그러면서도 기품 있는. 이 어지러운 구호소와 세상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지닌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처치했지?" "탈구의 방향에 따라, 손을 들어 올린 후 외측으로 회전시키며(external rotation) 정복(reduction)했습니다." 그 말에 그레이엄은 다시 말없이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놀람이다. '이제 병원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소녀가 Kocher's methods로 어깨 탈구를 교정해내다니. 누가 이 사실을 믿을까?' 혹시나 해서 환자의 상태를 살폈지만, 역시나였다. 그레이엄 본인이 한 것보다 더 완벽한 교정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는 몇 번째일지 모를 질문을 하였다. 소녀는 천재였다. 자신 같은 어설픈 천재가 아닌, 세상의 흐름을 바꿀지도 모르는 진정한 천재. 하지만... 이제는 그 생각도 의문이 들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이럴 수 있을까? 단지 재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술은 이미 완성돼 있는 느낌이었다. 마치 의술을 몸에 새기고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의술의 요정도 아닌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어이없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녀는 대단했다. '솔직히 지금도 가르쳐준다기보단, 동료 의사와 같이 일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니까.' 오늘 특별히 환자가 많았는데, 이 소녀와 같이 일하니 거뜬했다. 소녀가 웬만한 의사 못지않은 역할을 해냈기 때문이다. "로제." "네, 선생님." "피곤하지는 않으냐?" 그 말에 엘리제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까칠한 그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괜찮습니다." "그래, 피곤하면 잠깐 들어가 눈이라도 붙이거라. 환자들도 대충 정리된 것 같으니." 그답지 않게 부드러운 말에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미소를 본 그레이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너무 예쁜 미소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설렐 정도로. 그레이엄은 속으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정신 차려, 그레이엄. 제자에게 가슴 설레 하다니.' 소녀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저 미소가 너무 예뻐, 잠시 가슴이 설렜을 뿐이다. 그래, 그랬을 뿐이다. 그랬던 것이 분명하다. 00022 1-5 불가능한 수술 ========================================================================= "선생님? 왜 그러세요?" 소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엄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네? 혹시 무슨 불편하신 점이라도?” 엘리제가 재차 물었으나, 그레이엄은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제자를 보며 가슴이 설렜다는 이야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물론 ‘젊은 천재’인 그는 굉장히 빠른 나이에 교수가 되어 이제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일 뿐이니, 그녀와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신경 쓰지 마라. 아무것도 아니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레이엄 선생님!! 빨리 이쪽으로 와주세요!! 환자 왔어요!!!” “...!!” 다급한 외침! 무언가 심상치 않은 환자인 것 같았다. “가자.” “네, 선생님.” 급히 이동해 환자를 본 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런... .” 총상을 입은 중년의 남자였는데, 상태가 심각했다. 이미 시체와도 같은 안색. 의식은 전혀 없었고 동공도 열리기 직전이었다. 아직 살아있긴 했지만, 지금 당장 사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중환. “하필 총알의 위치가...” 그레이엄은 신음을 삼켰다. 그리고 그 마음은 엘리제도 동감이었다. ‘좌상복부. 정확히 비장(spleen)이 있을 위치야.’ 그런데 그때, 딱딱히 굳은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상태가 어떤가? 반드시 살려야 한다.” 금발에 푸른 눈. 차가운 인상의 대단한 미남이었다. 일반 시민들이 주로 입는 평범한 정장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강렬한 위엄이 느껴졌다. “...!!” 그런데 그를 본 엘리제의 몸이 굳었다. ‘뭐지? 이 느낌은...?’ 처음 보는 남자인데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가 고민했으나, 확실히 처음 보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강렬히 느껴지는 익숙함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제?’ 한편 남자,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도 그녀를 보고 놀랐다. 병원에 오자마자 그녀를 만날 줄은 몰랐다. ‘조금 말랐군.’ 그녀는 늘 입던 드레스가 아닌, 의사들이 입는 수술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와 수술복은 전혀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묘하게 어울렸다. 황제의 의도대로 테레사 병원에서 제대로 고생했는지 수척해진 모습이지만, 얼굴은 밝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생기가 흐르고 있었다. ‘저런 얼굴도 하는 아이였나?’ 어린 시절부터 엘리제를 봐온 황태자였지만, 그녀의 저런 얼굴은 처음이었다. “란돌의 상태는 어떤가? 살릴 수 있겠는가?” 생각은 거기까지. 지금 중요한 것은 충성스러운 시종의 생사지, 엘리제가 아니었다. 황태자는 엘리제가 아닌, 의사로 보이는 그레이엄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제 갓 병원에 나온 그녀가 뭘 알겠는가? 그런 마음이었다. 그레이엄은 잠시 가만히 있다 입을 열었다. “... 어렵습니다.” “...!!!” 황태자, 린덴의 안색이 굳었다. 그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지? 똑바로 말해라, 의사.” “총알이 비장을 관통했습니다. 비장은 혈관이 무수히 많은 장기(hyper vascular organ). 지혈하는 게 불가능해, 안타깝지만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죽는다고? 어쩔 수 없다고? “확실한가? 정말 치료할 방법이 없는 건가?” “네, 죄송하지만... 부위가 너무 안 좋습니다. 이런 상처는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 말에 린덴은 가슴 속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본 순간, 그레이엄과 엘리제는 경악해 눈을 부릅떴다. 십자가. 뒷발로 선 두 마리의 동물. 그리고 쓰여있는 문구들. Honi soit qui mal y pense(사악한 마음을 가진 자에게 치욕 있어라.). Dieu et mon droit(신과 나의 권리). 그건 바로 로마노프 황가의 문장이었다! “아, 아니...?” 그레이엄이 당황해 말을 다듬었다. 엘리제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누구지? 황족은 아닌데? 어떻게 된 거지?’ 로마노프 황가의 인물들은 모두 초상능력이 담긴 특징적인 금안(金眼)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푸른 눈의 저 남자는 황족은 아닐 것이다. 황가의 인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웬만한 고위 귀족의 얼굴을 전부 아는 엘리제도 저 남자의 정체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수를 써도 좋다. 얼만큼의 돈이 들어도 좋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내라. 만약 살려만 낸다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다.” “...!!” 그레이엄은 곤란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떻게 하지, 제길? 비장이 관통된 상처를 치료할 방법은 없는데.’ 너무 큰 거물, 무려 황가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지만 안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황실 십자 병원이든, 황궁 어의든 제국의 그 어떤 의사라도, 이런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죄송...”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옆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로제?” 그레이엄이 깜짝 놀라 제자를 돌아보았다. 그의 제자는 굳은 얼굴로 환자를 살피고 있었다. “선생님, 할 수 있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로제? 총알이 비장을 뚫었어! 불가능해!” 그러면서 그는 치료가 불가한 이유를 설명했다. “비장은 혈관이 무수히 많아! 총알이 그 혈관들을 다 꿰뚫었을 텐데, 지혈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알고 있어요. 비장의 찢긴 혈관들을 일일이 지혈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알고 있으면서 치료라니?” 그레이엄은 소녀가 환자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마음에 무턱대고 이야기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소녀가 말했다. “비장을 잘라내면 돼요.” “...뭐?” “비장 내에서 혈관을 치료하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아예 비장을 잘라내고 그쪽으로 향하는 혈관을 묶어주면 돼요. 그러면 출혈을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 그 말에 그레이엄의 얼굴이 경악에 뒤덮였다. 그는 뛰어난 의사. 소녀가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래, 그러고 보니...’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꼭 비장 안에서 지혈할 필요는 없어. 비장을 잘라내고 그쪽으로 향하는 동맥을 묶으면 완벽하게 지혈이 가능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요컨대 물 주머니를 수선하는 것이 불가하니, 물 주머니를 없애버리고, 주머니로 향하는 호수를 막자는 것이다. 확실히 그렇게 하면 완벽한 지혈이 가능하다. 간단하지만, 이전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가히 혁명에 가까운 발상. 선진 의학의 기초를 세운 그라함 백작도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도대체 이 아이는?!!’ 하지만 그 발상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엄은 날카롭게 물었다. “비장은 복강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다. 비장 주위에 있는 위, 췌장, 장, 대망(greater omentum)은 어떻게 할 거지?” 하지만 소녀는 이번에도 막힘없이 답했다. “먼저 비장을 지탱하는 인대(ligament)를 절제 후, 비장의 위치를 회전(rotation)시키면 됩니다.” “...!!” 언뜻 이해가 안 가는 설명이었다. 이 소녀의 머릿속에 뭔가 방법이 있는 듯한데, 그 같은 범인은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 그러면. 누가 그 수술을 할 거냐? 난 네가 이야기한 수술을 할 능력이 없다.” 그 말에 소녀가 강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제가 하겠습니다.” “...뭐?”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 그레이엄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병원에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된 견습생이 그런 대수술을 집도하겠다고? 물론 그녀가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천재임은 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그때,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것 이해해요. 하지만... 이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반드시 살려낼게요. 살려낼 수 있습니다.” “...!!” 그레이엄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대로 놔두면 이 환자는 무조건 죽어요. 하지만 제가 말한 방법대로 하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니, 반드시 살려낼 테니 한 번만 저를 믿어주세요.” 그런데 그때였다. 황태자의 묵직한 저음이 그녀를 향했다. “정말 살릴 수 있나?” 엘리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가능합니다. 아니,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황태자도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는 굳게 빛나고 있었다.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지로! “...!!” 아찔할 만큼 강렬한 그 의지에 황태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런 아이였나? 하지만 그는 놀란 감정을 숨기며 차갑게 말했다. “정말 할 수 있나? 무책임한 만용은 용서치 않아.” 그는 엘리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갓 의사가 되겠다고 선언한 교육생. 정식 의사도 불가능하다 말하는 판국에 그녀가 수술해낸다고? 한편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수술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는 비장에서 끝없이 피를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일분, 일분이 지나갈 때마다 생존율이 뚝뚝 떨어질 거라 초조했다. “전 이 환자를 살리고 싶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 간절함과 초조함이 담긴 목소리. 그 목소리에 담긴 환자를 향한 마음에 황태자의 눈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결국, 말했다. “좋다. 대신 반드시 살려내라. 할 수 있겠나?” 그리고 그는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 놀랐다. 정말 저 아이에게 란돌의 수술을 맡긴다고? 하지만 사실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대로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흐르면 란돌은 무조건 사망할 것이니, 썩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그녀의 그 눈빛. 그 눈빛에 담긴 강렬한 의지가, 환자를 향하는 마음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제국의 황태자로 적지 않은 명의들을 만나본 그이지만, 지금까지 저렇게 간절한 눈빛을 가지고 환자를 대하는 의사는 본 적이 없었다.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결정되었다. *** 수술은 곧바로 진행되었다. 원체 상태가 중하기 때문에, 한치의 시간도 아까웠다. 마취 가스로 마취를 시작하고 수술을 시작하려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겼다. “또 누가 수술에 들어가지?” 엘리제와 그레이엄이 들어가긴 할 거지만, 2명만으로는 부족했다. 최소 세컨드 어시스트(second assist) 역할을 할 사람이 한 명 더 필요했다. 문제는 워낙 늦은 시간인데다, 구호소도 다른 환자들로 바빠 수술에 들어올 의료진이 마땅치 않았다. 엘리제는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그레이엄과 자신 둘만으로 수술을 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한 명이 더 필요한데... 그런데 그때, 의외의 인물이 문제를 해결해주겠다. “사람이 모자라나? 그러면 내가 도와주겠다.” “...!!” 황태자였다. 엘리제와 그레이엄은 놀라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난 2년 전, 앙젤리 전쟁에 참전했을 때 여러 의료 처치들을 해본 경험들이 있어. 괜한 어중이떠중이보단 도움이 될 거다.” 엘리제는 그 말에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괜찮을까?’ 비의료인의 수술 참가라니. 의료 체계가 잘 잡혀 있고 의료법이 엄정한 현대 지구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했다. ‘하지만 비장 파열 수술에서 세컨드 어시스트는 워낙 간단한 일만 하니, 꼭 숙련된 의료진이 들어오지 않아도 도움이 되긴 할 텐데.’ 세컨드 어시스트의 역할은 간단히 수술 기구를 잡고 있는 등, 의학적 지식이 거의 필요없는 단순한 것이었다. “빨리 결정해라. 시간이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엘리제는 결정했다. 남자의 말처럼 시간이 없었다. 다른 의료진의 손이 빌 때까지 기다리기보단 누구라도 빨리 들어가 수술을 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잘 이끌어주면 어느 정도 역할은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수술하는 모습이 다소 거북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귀한 남자의 신분을 배려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물론 피가 튀는 험궂은 수술을 직접 돕는 것은 존귀한 황태자가 하기에 적합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 시종, 란돌이 그의 최측근인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란돌은 분명 자신을 섬기는 자신의 사람이었다. 그런 ‘자신의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궂다고 고작 이런 일 하나 못 하겠는가? 린덴은 그런 마음으로 답했다. 00023 1-5 불가능한 수술 ========================================================================= 내 사람. 엘리제는 그 대답을 들으며, 남자가 딱딱한 말투와 다르게 어쩌면 좋은 사람이 아닐까? 란 생각을 잠시 했다. 남자는 말했다. “론이라 부르도록.” “알겠습니다, 론님.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마취하고, 소독 장갑을 낀 후, 프레밍이 개발한 소독약으로 수술 부위를 소독했다. ‘총상. 비장 파열...’ 사실 그녀는 처음에 고민했었다. 과연 자신이 나서도 될지. 그리고 이런 대수술을 해도 될지. 그렇지 않아도 비상식적인 능력으로 과도한 주목을 받고 있는 그녀다. 만약 이 수술까지 해내면 어떤 시선을 받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눈앞에서 환자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 환자를 살리는 것보다 중요한 게 뭐가 있겠는가?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 이제 시작이야. 잘하자, 엘리제.’ 그녀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양상을 봤을 때 최소 5등급(grade V)의 비장 손상이야. 아차 하는 순간 환자를 잃어. 잘하자.’ 이 환자는 ‘외과의사 송지현’으로서도 쉽지 않은 중환이었다. 치료하지 않았을 때의 사망률 100%. 수술을 시도해도 사망률은 높았다. 현대 지구에서도 그러니, 이곳에서는 더욱 심할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살려내고 말 것이다. 두근. 그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그 긴장감에 가슴이 떨렸다. 익숙한 긴장감이다. 그리고 그리운 긴장감이었다. 이 순간을, 메스를 다시 잡는 이 시간을 그리워했었다. “메스 주세요.” 로제는 보조원에게 수술칼을 건네받았다. 한편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얼떨결에 여기까지 따라오긴 했지만, 정말 이 수술을 진행한다고? 물론 알고 있다. 어차피 이 환자는 가만히 놔두면 죽을 운명이니, 뭐라도 해보는 게 낫다는 것을. 그리고 소녀가 아까 이야기한 대로 진행하면, 어쩌면 정말로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하지만... 정말로 할 수 있다고? 아무리 천재라도 누구도 시도도 못 해본 이런 대수술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미친 짓 당장 멈추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순간, 소녀를 바라본 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수술 필드를 마주한 소녀는 이전과 달랐다. 평소에 흐르던 부드러움은 없었다. 오로지 느껴지는 것은 철혈(鐵血)의 의지! 저 작은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마치 전장의 여인 같은 위압감이었다. “... ... .” 그리고... 황태자, 린덴은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그녀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오픈(open)합니다.” 그 말과 함께 그녀의 손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정중 절개(midline incision)! 메스가 명치에서부터 배꼽까지 일직선으로 살을 베었고, 배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파앗!!! 안에 고여있던 혈액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 “...!!!!!” 사방으로 비산하는 그 엄청난 혈액량에 그레이엄과 린덴은 흠칫 놀랐다. 놀라지 않은 것은 오로지 한 명 엘리제뿐. 그녀는 곧바로 처치했다. “더 피나는 것을 막아야 해요!! 거즈! 일단 론님께서 거즈로 압박해주세요!!!” “...!!”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대망(greater omentum)과 위를 이쪽으로 젖혀주세요!" 둘은 정신없이 그녀의 지시에 따랐다. '출혈이 너무 심해.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쇼크가 온 지 오래였다. 당장에라도 심장 마비가 올 수 있는 상황.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속히 지혈을 해내야 했다. '일단 시야를 확보해야 해.' 낭자한 피로 내부 장기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거즈 최대한 많이 주세요. 론님, 피를 닦아주세요." 현대 지구에서라면 흡입기(suction)으로 피를 빨아들여 시야를 밝혔겠지만, 이곳은 제국이다. 일일이 피를 제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 선생님, 이 철제 도구로 위장(stomach)을 이 방향으로 조금 더 젖혀주세요. 아래 갈비뼈도 들어 올려주시고요." 그녀의 지시대로 하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복강 깊숙이 숨어있던 비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그레이엄은 그녀의 지시에 따르면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너무나 능숙했다. 마치 이 수술을 수십 번이고 해본 사람처럼.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소녀에게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처가... 이걸 어떻게..." 그레이엄은 신음을 흘렸다. 비장의 상처가 너무 심했다. 총알이 비장 내부를 완전히 찢어놔 피가 울컥울컥 솟구치고 있었다. 도저히 손댈 수가 없는 상황. 그레이엄은 어쩌면 이대로 포기하는 것이 환자를 편하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이 순간, 엘리제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다. '오히려 다행이야. 총알이 다른 장기는 크게 건드리지 않고, 비장만 꿰뚫었어. 할 수 있어.' "이제 어떻게 할 거냐, 로제?" 엘리제는 답했다. "비장을 잘라낼 거예요." "...!" 그레이엄의 눈이 흔들렸다. "어떻게? 비장은 주변 장기들과 얽혀 있다. 그냥 가위로 톡 잘라낼 수 있는 게 아니야." "박리 해내면 돼요. 주변 장기, 특히 비장과 연결된 췌장 끝 부분만 박리 하면 비장을 분리해 따로 절제해낼 수 있어요." "...!!" 그레이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소녀의 말대로 할 수 있다면 비장을 절제하는 게 가능했다. 소녀의 말대로 '할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정말로?' 그레이엄으로선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할 수 있는 건지. 정말 가능은 한 건지.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 저를 믿어주세요. 할 수 있어요. 선생님만 도와주신다면. 그러면 이 환자를 살릴 수 있어요." "...!!" 그레이엄은 이를 깨물었다. "... 알겠다." 이성적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이미 상식의 범주를 까마득히 초월한 상황이다. 지금은 약에 취한 듯, 믿을 도리밖에 없다.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지은 후, 남자에게 말했다. "론님께서는 이 부분을 잡아 고정해주고, 거즈로 비장을 압박해 최대한 출혈을 막아주세요." 그러면서 그녀는 당부했다. "압박(compression)은 간단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지혈 방법이에요. 출혈을 막는 론님의 역할이 이분의 생사를 가를 수도 있어요. 잘 부탁할게요." 그 말에 남자는 그녀를 바라봤다. "알겠다." 뭔가 알 수 없는 눈빛과 낮은 저음. "...!"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남자의 모습에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바로 수술에 집중했다. "박리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기적이 시작되었다. *** "...!!" 그레이엄은 부릅뜬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이, 이건...! 도대체...!' 작은, 곱디고운 손가락에 들린 철제 수술 도구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도구가 지나갈 때마다 열리는 길들. 비장을 고정하는 인대(ligament)가 간단하게 끊겼고, 단단히 붙어있는 췌장 꼬리(pancreas tail)가 입을 벌리며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라 여겼던 일들. 하지만 소녀의 손은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완벽해.' 그레이엄은 무의식중에 생각했다. 소녀의 수술은 그가 꿈에서 바라던, 언젠가 이루길 바랐던... 그런 경지의 수술이었다. 어떻게 저런 움직임이 가능한지, 어떻게 저런 접근(approach)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른다. '그런 건... 상관없어.' 그래,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이 완벽함 앞에서. 그저 아름다웠다. 소녀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이, 그 손이 자아내는 결과가. 너무 아름다워 경외감마저 들었다. '나도 언젠가 저런 수술을 하고 싶었는데.' 그는 꿈이 있었다. 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그라함 백작을 뛰어넘는 최고의 의학자가 되자고. 그래서 의학에 새로운 지평을 열자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고, 어느 정도 성과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젊은 천재라 부르며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그 꿈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은 그저 노력할 뿐, 평범한 범재에 불과했으니까. 그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자존심 강한 척, 잘난 척하고 있지만 속은 문드러져 내렸다. ‘그런데... 그랬는데...’ 지금 그의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지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평생을 바랐던. 꿈에서 원했던 지평의 수술이다. 그때, 소녀가 말했다. “박리 마무리합니다.” 툭. 마지막 동작과 함께 비장이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이어 움직이는 손가락. “타이(tie)." 수술용 실을 든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짧고, 절제된, 그리고 부드러운 움직임. 원 핸드 타이(one handed tie)였다. 그에 맞춰 검은 수술용 실이 춤을 추었고...! 콰악! 비장으로 향하는 비장 동맥이 완벽하게 묶였다. “계속 실 주세요.”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실로 혈관을 지혈하는 기술, 타이(tie)가 계속해서 펼쳐졌다. 비장 정맥이 묶였고, 이어 위장에서 비장으로 향하는 동맥도 결찰(ligation)됐다. 그리고 그녀의 손이 멈추는 순간. “...!!” 드디어 비장의 피가 멈췄다! 피를 공급하는 혈관이 모조리 막힌 탓이었다. “끄, 끝난 건가?” 그레이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선생님. 이제 고비는 넘겼어요. 비장만 잘라내면 돼요.” “로, 로제... 너는... 도대체...” 그레이엄은 자신이 꿈을 꾼 건가 싶었다. 마치 이룩할 수 없는 경이를 마주한 예술가처럼 전율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녀는 메스로 수술의 막바지를 마무리 지었다. 툭. 칼끝 아래서, 비장이 떨어져 내렸다. “하아.” 그 순간, 엘리제는 긴 한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환자의 맥을 살핀 후 안도의 목소리로 말했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그렇게 아무도 모르는 밤, 작은 소녀의 손에 의해 전 세계 최초의 비장 절제술(splenectomy)이 마무리되었다. 의학사(醫學史)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 수술이 끝났다 해서 환자 처치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배를 닫고, 드레싱을 하고, 모자란 혈액을 수액으로 보충하고, 여러 처리를 하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레이엄은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해 엘리제가 치료했다. 그리고 대충 마무리된 후, 말없이 병실 밖에서 기다리는 남자, 론에게 다가갔다. “이제 괜찮은 건가?” “네. 아직 상태가 안 좋긴 하지만, 수술이 잘 끝나 시간이 지나면 회복할 겁니다. 다만 비장을 절제한 뒤라 앞으로 감염증에 취약할 수 있어요. 앞으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남자, 황태자는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소녀가 자신의 약혼녀로 내정된 엘리제가 정말 맞는 건가? 의술에 문외한이지만, 조금 전 소녀가 보인 수술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은 안다. 단지 뛰어난 정도가 아닌, 신기에 가까운 솜씨. 도대체 어떻게? ‘그리고 무엇보다.’ 환자를 향하는 눈빛. 그녀의 눈에는 절박함과 간절함, 그리고 빛나는 생기가 담겨 있었고, 그 눈빛은 마치 전장의 여인같이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웠다. 00024 1-5 불가능한 수술 ========================================================================= ‘거짓이라 생각했는데.’ 이전 부황께 의사가 되고 싶다고 그녀가 말했을 때 솔직히 비웃고 넘겼었다. 곱게 자란 그녀가 웬 의사란 말인가? 하지만 오늘 모습을 보니 거짓이 아니었다. 거짓은커녕, 상상도 못 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고맙다.” 짧은 감사의 말. 무뚝뚝한 목소리였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감사였다. 엘리제는 기분 좋게 미소 짓고 말했다. “론님도 오늘 많이 고생하셨습니다. 수술도 도와주시고.” 그러면서 그녀는 속으로 살짝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인력이 없어 응급 수술에 보호자가 들어오게 하다니. 지구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내 사람을 치료한 일이다. 신경 쓰지 마라. 그나저나... 란돌을 치료해줬으니, 아까 이야기한 대로 보상을 하마. 원하는 것이 있느냐? 무엇이든지 말해 보아라.” 무엇이든지.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대(大)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 소녀가 무엇을 원하든 들어줄 능력이 있었으니까. “보상은.” 소녀가 살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말고, 병원 정산부에 가서 해주세요. 저는 이 병원의 의료진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까요.” 그러면서 한마디 말을 덧붙였다. “비쌀 거예요. 테레사 병원은 신분에 따라 금액을 차등해서 받거든요. 빈민은 무료, 서민은 소액, 일반 시민은 평균, 부르조아나 귀족은 고액... 이런 식으로요.” 그건 엘 후작의 뜻으로 잘사는 놈에게 뜯어서 못사는 사람들을 돕자! 란 취지였다. 물론 뜻대로는 잘 안 되고 있었다. 못사는 사람들만 바글바글 몰렸기 때문이다. “음... 계산서 보시고 놀랄지도 몰라요. 나중에 바가지라고 화내시면 안 돼요.” 그 말에 황태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이 병원비 때문에 놀란다, 라. 웃기려는 농담이면, 하나도 안 웃겼다. ‘이번 빚은 달아놓고 나중에 갚아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그는 말했다. “알겠다.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아, 그리고 란돌은 내일 황실 십자 병원으로 옮기도록 하겠다. 괜찮겠지?” “네, 상태가 안정적이어서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술 과정에 대한 소견서를 써놓을게요.” 병원을 옮겨 환자를 치료하려면, 수술을 어떻게 해놨는지 알아야 한다. 따라서 수술 과정을 적은 소견서가 필수였다. ‘비장절제술은 낯선 수술일 테니 치료에 혼란이 있을 수 있어. 수술 과정을 최대한 자세히 써야지.’ 하지만 그녀는 그때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그 소견서가 어떤 파란을 불러일으킬지. “이제 그만 가보겠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늦었다. 암행 중에는 며칠 궁에 안 들어갈 때도 있으니 큰 걱정은 안 하고 있겠지만, 슬슬 들어가는 게 나을 듯싶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난 때였다! “...!!” 핑하고 머리가 돌아, 그는 순간 비틀거렸다. “론님?” 엘리제가 놀라 그의 손을 잡았다. “...!” 의사로서 환자에게 하는 일상적 부축. 하지만 황태자는 손에 갑작스레 닿은 따뜻한 감촉에 흠칫 놀랐다. 소녀의 손은 아까 그 대단한 수술을 해낸 손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게 부드러웠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황태자는 손을 빼며 말했다. 하지만 의사 엘리제는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간파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지만, 안색이 희미하게 파리했다. “얼굴색이 좋지 않아요. 혹시 열 기운이? 체온을 확인해봐도 될까요?” 그러면서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를 만져 체온을 확인하기 위해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 황태자는 더욱 흠칫 놀랐다. 그녀의 몸이 가까워지며 우윳빛 향기가 느껴졌던 것이다. “괜찮다. 신경 쓰지 말도록.” 그는 몸을 뒤로 뺐다. 자신을 피하는 그의 모습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곳은 병원, 그리고 그녀는 의료인. 상태가 안 좋아 보여, 진찰하려 했을 뿐인 그녀는 남자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시지 말고 제대로 진찰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괜찮아. 어지럼증은 이전부터 그랬다.” 황태자는 강한 어조로 거부했다. 하지만 철혈 의사 엘리제는 끈질겼다. 젊고 건강한 남자가 반복적인 어지럼증이라니? 뭔가 이상했다. 병이 있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잠깐이면 돼요. 이쪽으로...” 그녀가 다시 다가오자, 그는 더욱 강하게 거부했다. “정말 괜찮다!” 그러고 그는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겨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엘리제는 멍하니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왜 저러지?’ 엘리제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금 그는 최근 몇 년간 가장 당황하고 있었다. 당황하는 이유는 그 자신도 몰랐다. “론님!” “...!” 결국, 엘리제는 그의 뒤에 대고 말했다. 환자가 진료를 거부하는데 강제할 수는 없으니... “만약 증상이 지속되면 꼭 다시 오도록 하세요. 진찰해드릴 테니까.” 하지만 그는 대답 없이 병원을 빠져나갔다. 엘리제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왜 저러지? 왜 어지럼증이 있는지 진료를 봐야 할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게 그날 밤이 지나갔다. 힘들고, 파란만장한 밤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황실 십자 병원에서 환자를 데려갔고... 황실 십자 병원은 발칵 뒤집어졌다. 수술 경과를 기록한 엘리제의 소견서와 기적과도 같은 환자의 상태 때문이었다. 소견서에 집도의(執刀醫)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에, 황실 십자 병원의 의사들은 이 믿을 수 없는 수술을 누가 집도한 것인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 “이건 도대체?” 황실 십자 병원의 원장이자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런 수술을 해냈단 말인가?” 그는 소견서를 바라봤다. 몇 번을 읽었는지, 종이가 꼬깃꼬깃해진 지 오래였다. ‘말도 안 돼.’ 소견서의 글씨는 지독한 악필이었다. 마치 애들이 장난치듯 쓴 글씨.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경악을 넘어 경이에 가까운 것이었다. ‘정말로 이런 수술을 해냈다고?’ 믿을 수 없었지만, 산 증인이 있었다. 비장(spleen)에 정통으로 총알을 맞았는데도 멀쩡히 회복하고 있는 시종, 란돌이었다. '황태자 전하께 비장을 총알로 맞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흘려들었는데.‘ 황태자는 무뚝뚝한 성격답게 간단한 설명만 하였다. 비장에 총을 맞았고, 테레사 병원에서 수술했으니 데려와 치료하라고. 비장에 제대로 총을 맞았으면 지금껏 살아 있을 리가 없기에, 엇맞았거나 다른 부위를 맞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특별한 치료 없어도 저절로 피가 멈추는 가벼운 비장 손상과 총알이 정통으로 관통한 심각한 비장 손상은 이야기가 완전히 다른데. 그라함 백작의 저서에도 심각한 비장 손상은 손을 쓸 수가 없다고 되어 있고.’ 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그라함 백작의 저서는 현시대 의사들에게 진리나 다름없었다. ‘그래, 이 소견서의 내용대로 수술하면 분명 심각한 비장 손상이라도 출혈을 멈추게 할 수 있어. 추후 면역 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그건 일단 살아남은 다음의 이야기니까.’ 제국 의학계의 거성(巨星)인 그는 소견서의 가치를 단번에 알아봤다. 이건 단순한 소견서가 아니라, 논문으로 발표해 제국의 의사들이 모두 공유해야 할 내용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해서 직접 수술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다방면의 수술 경험이 많은 그는 이 소견서의 내용대로 하기가 결단코 쉽지 않음을 간파했다. 상처 부위의 정확한 해부학적 지식과 주위 장기와 비장을 박리 해내는 섬세한 손기술이 없으면 시도도 못 해볼 것이다. 제국, 아니, 전 대륙에서 이런 수술을 능숙히 해낼 수 있는 의사가 몇 명이나 될까? 황궁 어의인 자신만 해도 해낼 수 있단 확신이 안 들었다. ‘차근차근 해보려면 해볼 수 있겠지만, 이건 시간을 다투는 응급 수술. 환자가 과다 출혈로 죽기 전에 마무리할 수 있었을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자신 없었다. ‘도대체 누굴까, 이 의사는?’ 그는 혹시 황제의 병을 추측해낸 의사와 이 의사가 동일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알아봐야겠군.’ 밴 자작은 테레사 병원의 원장인 고트 자작을 찾아갔다. *** 황궁 어의인 밴 자작과 테레사 병원의 원장인 고트 자작은 아카데미를 동문수학한 사이로 막역한 지기였다. “밴? 바쁜 자네가 이 누추한 병원에 웬일인가?” 밴 자작은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저었다. “누추하긴.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을 하는 곳을 누추하다 하면 어떻게 하나? 잘 지냈나?” “나야 자네도 알다시피 항상 잘 못 지내고 있지. 맨날 병원이 파산 직전이어서 스트레스받는 것 모르나? 여기 머리 빠진 것 보라고.” “엄살은. 어차피 필요한 돈은 클로랜스 가문에서 다 지원해주고 있지 않나? 하여튼 재상께서는 참 대단하시지. 가문의 재산으로 병원을 세워 빈민들을 치료해주시다니.” 밴 자작의 목소리에는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렇다. 이 테레사 병원의 설립자는 엘리제의 아버지인 엘 후작. 어디의 손도 벌리지 않고, 가문의 재산만으로 이 막대한 규모의 구휼 사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병원장인 고트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참으로 존경할만한 분이시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나 다름없는 분이랄까?” 사실 병원장인 고트 자작은 엘 후작을 직접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 엘 후작이 병원에 모습을 거의 비치질 않기 때문이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마음일까? 그는 자신이 테레사 병원을 후원한다는 사실을 크게 드러내고 싶지 않아 했다. 그저 필요한 바를 대리인을 통해 파악해 지원해줄 뿐이었다. ‘정말 존경할 만한 분.’ 그런 엘 후작을 존경하는 이는 테레사 병원의 의사들만이 아니었다. 가깝게는 의료 혜택을 받는 황도 론도(Londo)의 시민들부터, 멀게는 뜻있는 지식인들까지. 제국의 시민들치고 엘 후작, 자신들의 재상을 존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게 다 재산이 많아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떠들며 폄훼하는 이들도 일부 있지만.’ 물론 엘 후작이 이런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부자이기 때문이다. 클로랜스 가문은 브리티아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를 축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모두 알고 있다. 돈이 많다고, 남을 위해 베풀 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을. 오히려 돈이 많을수록 못난 욕심만 채우려 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따라서 명재상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엘 후작과 클로랜스 가문은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족 가문이었다. “여기 커피나 한잔 마시게. 그나저나 무슨 일로 왔는가?” 고트 자작이 건넨 잔에서는 짙은 아라비카(arabica) 품종의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밴은 커피에 손도 대지 않고 들뜬 얼굴로 물었다. “자네에게 한가지 물어볼 일이 있어서 왔네.” “무슨?” “도대체 누구인가?! ‘그 수술’을 해낸 의사 말이야! 설마 자네는 아니겠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웬 수술? 알아듣게 설명해보게.” “그 수술 말이야! 비장절제술(splenectomy)!" 하지만 고트 자작은 눈썹을 찌푸릴 뿐이었다. “비장절제술? 비장을 잘라냈단 말인가? 그게 무슨...?” “뭐야? 자네... 설마 모르는 건가?” “그러니까 뭘?” 밴은 입을 벌렸다. 아니, 이런 기적 같은 수술이 자신의 병원에서 이루어졌는데 모르고 있다니! “이것 보게!” 그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소견서였다. “이게 뭔가?” “빨리 읽어보기나 해봐!” 고트는 친우의 닦달에 안경을 꺼내 썼다. “이게 도대체 뭐길래 그래? 글씨는 왜 이렇게 못 썼고? 애들이 낙서한 필체도 아니고...” 투덜거리던 그는 어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도 의학의 조예가 깊은 명의. 이 못난 글씨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깨달은 것이다. 00025 1-5 불가능한 수술 ========================================================================= “어떤가? 정말 미라클(miracle)하지 않은가?” “잘 봤으니 가져가게.” “뭐야, 그 반응은?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고트는 굳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거짓말이잖아.” “뭐?” “자네는 지금 저 종이에 써진 말도 안 되는 내용을 믿는 건가?” “...!” 고트는 혀를 찼다. “물론 발상은 좋아. 비장 출혈 환자가 오면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런 수술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누군지 모르지만, 공상을 그럴싸하게 잘도 써놨군.” 밴이 단호히 답했다. “거짓말이 아니야.” “뭐?” “진짜라고, 이 친구야. 우리 병원에 환자가 있어! 비장에 정면으로 총을 맞고도 멀쩡히 살아나고 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고트는 믿지 못하겠단 반응이었다. 밴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이라니까! 그것도 자네 테레사 병원에서 수술했어! 내가 확인한 사실이야. 도대체 누군가? 이 기적 같은 수술을 해낸 의사가?” 그 말에 고트는 며칠 전 보고 받았던 내용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좌상복부에 총상을 입은 환자가 왔었다고 했었지? 같이 온 인물이 황실의 문장을 가지고 있어 응급 수술 후, 황실 십자 병원으로 옮겼다고.’ 워낙 거물과 동행한 환자라 기억하고 있다. “혹시... 환자의 이름이? 란돌인가?” “그래, 란돌 경! 란돌 경은 비장에 정통으로 총상을 입어 도저히 살아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는데, 자네 병원에서 살렸어.” 고트는 입을 벌렸다. 저 종이에 쓰여있는 말도 안 되는 공상이 진짜 정말이라고? “도대체 그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누구인가?” 고트는 보고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그 수술에 참가한 의사가... “... 그레이엄. 그레이엄 교수가 그 수술을 집도했네.” 도제인 로제도 그 수술에 참가했었지만, 고트는 그녀가 당연히 조수(어시스트)로 참가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생각이었다. 로제는 이제 병원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 소녀였으니까. “허어! 그레이엄! 그 젊은 천재라 불리는 그 의사 말인가?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밴은 감탄을 터뜨렸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그레이엄을 눈여겨보고 있던 그였다. 조금 더 경험이 쌓이면 황실 십자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대단한 수술을 해내다니? ‘당장 황실 십자 병원에 자리를 마련해야겠군. 이런 대수술을 해냈으니 그를 데려오는 것을 아무도 뭐라고 못 하겠지.’ 그만큼 그레이엄이 해낸(?) 비장절제술은 대단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그레이엄 교수를 불러주게. 한번 직접 들어봐야겠어. 어떻게 이런 수술을 생각해내고 해낼 수 있었던 것인지!” 밴은 어린애처럼 흥분해 말했다. 그런데... 고트 병원장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게... 조금 문제가 있네.” “응? 무슨 말인가?” 고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그레이엄은... 그날 이후 무단결근 중이네.” “...!!” “집에서 틀어박혀 나오질 않고 있어. 마치 뭔가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말이야.” 도통 알 수가 없다는 목소리였다. *** 그레이엄 교수는 정말 무단결근 중이었다. 제자인 엘리제에게도 아무런 말도 없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혹시... 그때의 수술 때문에?’ 설마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딱히 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날, 수술 후에도 뭔가 이상하긴 하셨는데.’ 당시 수술이 끝난 새벽, 그레이엄은 평소와 달랐다. 뭔가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 덕분에 수술 후 처치를 모두 그녀가 해야 했다. ‘금방 다시 나오시겠지.’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레이엄 없이 병원에서 본인의 일에 열중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무슨 다른 일이 생기신 건가?’ 결국, 그녀는 다음날 팰론 남작가를 방문했다. 팰론 남작가는 서민들이 모여 사는 론도(Londo)의 트라스 지구에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아가씨.” “고마워요, 벨톤 경.” 클로랜스 가문 소속의 젊은 나이츠(knight)인 벤톨이 그녀를 호위했다. 벤톨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투덜거렸다. “아가씨가 이런 곳까지 직접 오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용무가 있으면 그자를 저택으로 부르면 될 것을.” “벤톨 경. 팰론 남작님은 제 선생님이세요. 저는 제자이고요.” 엘리제는 답했다. 그 짧지만 단호한 말에 벨톤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그냥 저는... 아가씨께서 고생하시는 게 싫어서... 이 동네는 길이 안 좋아 마차도 다니기 어렵고, 한참 걸어야 하고...” 엘리제는 살짝 미소 지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요. 좀 걸으면 어떻다고. 저 튼튼해요.” “에... 그리고 조금 위험할 수도 있고...” “벤톨 경이 지켜주실 거잖아요.” 그 부드러운 말에 벤톨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무, 물론 그렇습니다! 제가 다 지켜드리겠습니다!!”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네, 믿을게요.” “네! 믿어주십시오!” 사실 벤톨은 이전엔 엘리제를 싫어했었다. 이기적이고 못됐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벤톨뿐 아니라, 클로랜스 가문의 고용인들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모두 못된 아가씨를 싫어했다. 하지만... 어느 날 소녀는 완전히 변했다. 남을 가득 배려하는 성격으로 바뀐 것이다. 처음 고용인들은 그녀의 변화를 일시적인 변덕으로 여기고 믿지 않았다. 소녀가 직접 찾아와 이전 일을 사과해도 한 귀로 흘렸다. ‘하지만 일시적인 변덕이 아니었지.’ 시간이 흘러도 소녀는 한결같이 고용인들에게 친절히 대했고, 따뜻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 소녀에게 그들은 점차 마음을 열었고, 이제 완전히 소녀를 좋아하고 따랐다. 더구나 가끔 보이는 깊은 마음. 도저히 16살의 어린 소녀라 보기 어려운 깊은 행동들에 감탄이 들었다.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랄까?’ 이제 소녀는 못된 아가씨가 아닌, 모두에게 사랑받고 아낌받는 가문의 보물이었다. ‘다만 의사가 된다시는 게 걱정이 되긴 하지만...’ 벨톤은 속으로 생각했다. 타인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은 대단하지만, 저 여린 몸으로 의사라니? 건강이라도 상할까 걱정이었다. “아직 멀었을까요?” “트라스 가(街) 68번지이니,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아, 거기 더러우니 조심하십시오!” 그렇게 조금 더 걸으니 허름한 2층의 건물이 나타났다. “여기...인 것 같습니다.” 벨톤은 확신이 안 가는 얼굴로 말했다. 주소는 이곳인데, 남작가라고 하기엔 너무나 누추했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명패를 봤다. -팰론 가문.- 흐릿한 글씨로 그레이엄의 성이 적혀 있었다. 맞게 찾아오긴 한 것 같다. “들어가 선생님을 뵙고 올게요. 정말 죄송하지만... 밖에서 잠시 기다려주시겠어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엘리제는 고맙다는 듯 살짝 웃고는 노크를 했다. “계신가요?” 똑. 똑. 노크 후 기다리니, 삐그덕 낡은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하지만 나타난 이는 그레이엄이 아닌, 부드러운 인상의 노파였다. “누구시죠?” “아... 그레이엄 선생님의 제자인 로제라고 합니다. 혹시 이곳이 선생님의 댁이 맞는가요?” “네, 맞아요. 그런데... 지금 만나시긴 어려울 것 같은데...” 노파는 고민하더니 말했다. “그래도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 밖에서 본 것처럼 그레이엄의 집은 허름했다. 누추를 넘어, 빈궁해 보이는 모습. 그래도 노파가 정리한 것인지, 나름 깔끔하게 정돈되어있었는데, 빈곤한 와중에도 책이 무척 많았다. ‘전부 의학 서적...’ 엘리제는 책들의 내용을 살피며 속으로 감탄했다. 그라함 백작의 교과서는 물론, 고대의 의학사, 최신의 외국 논문들까지. 의학에 관련된 거의 모든 문서가 있는 듯했다. 그리고 손때가 자욱한 것이 이 모든 책을 몇 번이고 정독한 듯한 모습. 의학을 향한 그의 어마어마한 노력이 엿보였다. “많이 누추하죠? 대접해드릴 게 없어서... 도련님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요.” “아,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노파가 내준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어떻게 하죠? 오늘은 도련님을 뵙기 어려울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어디 아프시기라도?” “그런 건 아니세요.” “그러면...?” “하아.” 노파는 곤란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순간. “연구에 푹 빠졌어요.” “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했다. 연구? 웬 연구? “며칠 전, 당직을 서고 오시더니... 어마어마한 수술을 봤다고. 그걸 연구하겠다고. 방에 올라가셔서는 안 내려오고 계세요.” “... ... .” 엘리제는 입을 벌렸다. 설마? 그 수술이란 게? “이전부터 뭔가에 빠지면 가끔 저러긴 하셨는데. 이번엔 정말 푹 빠지신 것 같더라고요. 정말 기적 같은 수술을 봤다고 하시면서.” 노파는 미안하다는 듯 웃었다. “이해해주세요. 어릴 적 가족분들이 론도에 돈 전염병으로 모두 사망하시고 난 후, 의학밖에 모르는 분이시거든요.” 그 뜻밖의 말에 그녀는 방 한구석에 걸린 그림을 바라봤다.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동생. 행복이 넘치는 가정의 그림이었는데, 그레이엄은 10살도 안 돼 보이는 어린애였다. 까칠한 지금과 다르게, 귀여운 얼굴이 미소짓고 있다. “20년 전, 론도 대역병 사건으로 유모인 저와 도련님만 빼고 모두 돌아가셨거든요.” 1차 론도 대역병 사건. 머지않은 시기에 일어날 2차 론도 대역병과 동일한 전염병 사건으로 론도에서만 15만 명의 사망자를 낸 대 전염병이었다. “가족분들을 그렇게 잃으신 도련님은 질병을 정복하는 의사가 되시겠다는 꿈을 가지고, 지금까지 노력하고 계세요.” 그렇게 말하는 노파의 목소리에는 그레이엄에 대한 안쓰러움과 사랑이 가득했다. 엘리제는 왠지 모를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10살도 안 되는 어린 시절, 가족들을 모두 잃은 어린아이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며 의학의 길을 택했을까? 어려운 형편의 고아가 걷기에 쉬운 길도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연구도 거의 끝난 것 같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내일쯤 병원에 다시 나간다셨어요.” “아...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특별한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러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선생님께 안부 전해주세요.” “네, 조심히 살펴가세요.” 그렇게 그녀는 다소 안도 후, 벤톨과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가 팰론 가문을 나와 걸어갈 때, 2층의 창문에서 그녀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 있었던 것을. 그레이엄이었다. "... ... ." 그는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굳은 듯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로제.” 소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알 수 없는 열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 정말로 그레이엄은 다음날 병원에 출근했다. 무단결근한 게 거짓말이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는 멀쩡한 모습이었다. “선생님, 오셨어요.” “그래.” 엘리제의 인사에 그레이엄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을 정리한 것일까? 아니면 숨긴 것일까? 전일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눈동자에 일렁이던 감정의 소용돌이는 없었다. “병원장님께서 출근하시면 바로 뵈러 오라고... 지난밤 수술했던 것 때문에...” “알겠다. 로제, 너도 같이 가자.” “저도요?” “그래.” “저는 어째서...?” 병원장과 황궁 어의가 부른 것은 그레이엄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같이 가자. 할 말이 있으니.” 할 말? 무슨 할 말이 있길래 자신을? 엘리제는 순간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레이엄은 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병원장실로 찾아갔다. 00026 1-5 불가능한 수술 ========================================================================= 병원장실은 테레사 병원의 교수실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도대체 왜 자신을 데려가는지 몰라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따라갔다. 방 앞에 도착한 그레이엄은 노크 후 말했다. “그레이엄입니다.” “들어오게.” 불편한 목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그러고... 그레이엄과 함께 안으로 들어간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고트 병원장과 함께인 인물을 본 탓이었다. ‘저분은? 황궁 어의인 밴 자작?’ 과거 황후였던 그녀는 당연히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을 알고 있었다. 이번 삶도 그렇지만, 이전 삶 때도 잔병치레가 많았던 그녀를 매번 밴 자작이 치료해줬었다. ‘잠깐? 밴 자작과는 이전 삶이 아니라, 이번 삶의 어릴 적에도 안면이 있잖아?’ 어릴 적부터 곧잘 병을 앓았던 그녀는 병원 신세를 자주 졌었고, 보통은 귀족 전문 병원인 로즈 데일 병원을 이용했지만, 황실 십자 병원에서 치료 받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원장인 밴 자작과도 몇 번 안면이 있었다. ‘날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과연 밴은 그녀를 보며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소녀는?” “이번에 새로 들어온 도제인데? 왜 그러나, 밴?” “아니... 내가 아는 어떤 영애와 너무 닮아서...” “그래?” “응, 너무 닮았군. 깜짝 놀랐네.” “어떤 가문의 영애이길래?” 하지만 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뭐, 그냥 닮은 거겠지. 그 영애가 병원의 도제를 할 리가 없으니.” 어의인 밴이 떠올린 것은 연회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화려한 클로랜스 영애였다. ‘아니겠지. 그 영애가 빈민 구제 병원인 테레사 병원에서 도제를 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 무엇보다 눈빛과 인상이 다르다. 뭔가 못된 심술이 가득하던 클로랜스 영애와 차분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의 저 소녀 도제는 아예 느낌이 달랐다. ‘그래도 참 닮았군그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쌍둥이인 줄 알겠어. 내가 그 영애를 마지막으로 본 게 몇 년 전이었더라? 만약 착하게 자랐으면 저렇게 변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름다운 외모긴 하지만, 일체의 꾸밈없이 수수한 진료복의 도제 소녀. 그 심술 궂기로 소문난 클로랜스 영애와 동일인물일 리가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나저나 그레이엄. 도대체 무단결근이라니, 어떻게 된 일인가?” 고트 병원장은 불쾌한 얼굴로 탓했다. 그레이엄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이유가 있었든, 무단결근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었으니까. “죄송합니다.” “내가 자네를 아끼긴 하지만, 이런 식이면 곤란해. 응? 병원 일이 장난도 아니고. 짐 싸고 나가고 싶나?” “죄송합니다.” 이후 고트 병원장은 한참을 그를 혼냈다. 옆에서 밴 자작이 웃으며 말릴 때까지. “하하, 이제 그만하게, 친구.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 것 같으니. 그리고 ‘그런 대수술’도 해냈는데 잠시 쉴 수도 있지 않겠나?” 그 만류에 고트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또 다른 방식으로 의학에 미친 자신의 친구는 ‘기적 같은 대수술’을 해낸 집도의와 빨리 대화해보고 싶은 눈치였다. “그레이엄 교수? 오랜만이군. 나 밴이네. 기억하지?” “네, 자작님.” 제국 의학계의 대부인 밴과 신진 의사인 그레이엄은 당연히 안면이 있었다. 밴이 말했다. “자네를 정말 보고 싶었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낸 것인가?”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뭐긴? 비장절제술(splenectomy) 말이야! 자네가 집도한 것 맞지?” 밴이 상기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 대단해! 깜짝 놀랐네. 내 자네를 익히 눈여겨보고 있긴 했지만, 이런 일을 해내다니! 이건 정말 의학사에 길이 남을 수술이야!” “... ... .” 밴은 흥분해 떠들었다. 그런데 그레이엄의 반응이 이상했다. 뭐라 답을 해야 하는데, 한마디의 말도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그런 수술을 생각해낸 것인가?” “... ... .” 하지만 역시 답이 없었다. 밴과 고트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말했다. “그건... 제가 아닌, 이 아이에게 물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서, 선생님?”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돌아보았다. 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네가 아닌, 이 소녀에게 물어보라니?” 그레이엄은 대답대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 평소의 까칠함과는 다른 부드러운 미소. 그리고 그는 당연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 수술을 집도한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 아이이니까요. 이 아이에게 물어봐야지요.” “...!!!” *** 갑작스러운 폭탄선언. 모두가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인가?” 고트가 불쾌하단 어조로 물었다. “농담할 때가 있고, 안 할 때가 있지. 이 친구가 이래보여도 황궁 어의야.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이라니. 그레이엄, 자네 의학계를 떠나고 싶나?”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럴만했다. 이런 조그만 소녀가 비장절제술이란 대수술을 해냈다고? 농담도 이렇게 안 웃긴 농담이 없었다. 하지만 그레이엄은 진중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정말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하겠습니까? 저는 어시스트만 섰을 뿐, 집도는 모두 이 아이가 했습니다.” “...!!” 하지만 그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밴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레이엄, 솔직히 말해보게. 정말로 자네가 아닌, 이 소녀가 비장절제술을 해냈다고?” 그레이엄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밴과 고트를 바라봤다. “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입니다. 만약 거짓이면 주님께서 저를 저주해도 좋습니다. 정 못 믿겠으면, 당시 수술에 참가했던 보조원에게 물어봐도 좋습니다.” “...!!” 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레이엄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소녀가... 비장절제술을 해냈다고?” 그들의 시선이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소녀에게 향했다. 인형처럼 예쁘지만, 작고 여린. 수술은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 같은 소녀가? “레이디...” 엘리제는 공손히 답했다. “로제라고 합니다. 편하게 로제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래, 로제. 정말이냐? 네가 비장절제술을 집도했다고?” 밴의 물음에 그녀는 그레이엄을 돌아봤다. “... ... .” 하지만 그는 평소와 같이 까칠한 얼굴일 뿐이었다. 속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밴과 고트를 바라봤다. 둘, 모두 제국 의학계의 하늘 같은 거성. ‘뭐라고 하지?’ 엘리제는 잠시 고민했다. 이제 병원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소녀가 비장절제술이라니. 그녀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치긴 했다.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나서지 않으면 환자가 생명을 잃었을 상황이었으니까.’ 짧은 순간, 그녀는 고심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금방 마음을 정했다. ‘엘리제, 뭘 고민하는 거야?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잖아?’ 그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런 상황을 마주할 것이란 사실을. 그녀가 환자들의 위급 앞에서 실력을 숨기지 않았을 때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정 이상한 눈초리를 피하고 싶었으면 실력을 숨겼으면 될 일이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황제 폐하와의 내기에 이기려면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6개월 안에 의사로서 가치를 증명하라는 말도 안 되는 내기. 그 내기에 이겨, 황태자와의 결혼을 피하고, 의사로서 삶을 살려면 압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보이는 것은 필수였다. 마음을 정리한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네, 제가 비장절제술을 집도했습니다.” “...!!!” 그 대답에 그들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자, 자네가 비장절제술을 집도했다고? 정말로?” “네, 자작님.” 엘리제는 공손히 답했다. “그러면 수술 소견서를 썼던 것도?” “네, 제가 썼습니다. 혹시 소견서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아니, 부족하지 않아. 전혀. 허허... 허허...” 밴 자작은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지,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한편 고트는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난 솔직히 믿어지지가 않는군. 이제 병원에 도제로 들어온 지 한 달도 안 되는 것으로 아는데. 이런 대수술을 해냈다고? 말이 안 되지 않나? 자네가 정말로 수술을 해냈다면, 어떤 식으로 수술을 진행했는지 설명해보게.” 엘리제는 답했다. “비장의 해부학적 위치상 정중절개(midline incision)를 먼저 했습니다." "왜 중간 복부를 절개하는 정중절개지? 비장은 좌측에 위치해 있는데?“ “비장은 좌측에 있지만, 먼저 가운데 복부에 있는 췌장을 박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비장의 위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장기를 고정하는데도 더 유리하고요.” “...!” 복부 장기들의 해부학적 위치를 정확히 꿰뚫는 답변이었다.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이후 거즈로 피를 닦아 시야를 확보 후, 위장과 아래 갈비뼈를 위쪽으로 들어 올렸습니다. 이후 췌장 꼬리를 철제 도구로 박리해 시야를 확보 후 비장의 위치를 회전시켜 수술 진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비장을 고정하는 인대를 잘라내었습니다. 이후 비장 동맥과 정맥을...” 그녀는 비장절제술의 진행 과정에 대해 차분히 설명하였다. 현대 지구에서는 표준으로 사용하는 술식이었다. 그 설명을 듣는 고트와 밴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허허! 어떻게 이럴 수가?’ 소견서에 적힌 글을 읽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마치 아카데미 시절, 대가(大家)의 강의를 듣듯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한 설명이었다. ‘정말... 이 아이가 비장절제술을 해낸 게... 맞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직접 해보지 않았다면, 단지 상상이나 목격만으로는 절대 이런 세밀한 설명을 할 수 없다. “정말... 정말... 네가 그 수술을 해냈다고?” “... ... .” 소녀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흔들림 없는 그 눈빛은 한가지 사실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말이다. 정말 이 소녀가 그 수술을 해내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옆에 서있던 그레이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입니다. 이 아이가 한 말은 하나의 거짓도 없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보증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들은 밴과 고트는 믿을 수 없다는 신음을 흘렸다. “허허... 이걸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말... 저런 어린 소녀가 그런 대수술을 해냈다고?” 밴은 소녀를 살폈다. 작은. 그리고 수술은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 같이 여린 인상의 소녀. 도제를 하는 것도 믿기지 않는데, 이런 대수술까지 해냈다고? ‘허허. 저 젊은 천재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안 믿을 수도 없고.’ 젊은 천재라 불리는 그레이엄이 자신의 의사 인생을 걸고 황궁 어의인 자신에게 농을 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거짓이 아닌, 진실일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이긴 어려웠지만 말이다. ‘수술에 참여했던 다른 보조원에게도 확인해 보는 방법이 있긴 하겠지만.’ 확인을 해봐도 왠지 똑같은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았다. 저 그레이엄의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눈빛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황궁 어의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수술을 해낼 수 있었던 거지? 이제... 병원에 온 지 한달도 안 된 것 아니었나?”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물음. “... ... .” 엘리제는 그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해야지? 이전에 다른 세계에서 외과의사의 삶을 살았다고? 씨알도 안 먹힐 설명이다.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비장절제술에 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00027 1-5 불가능한 수술 ========================================================================= 모두가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이 아니라고? 그러면?" "아, 예전에 직접 집도를 해봤단 뜻은 아닙니다. 이전부터 여러 번 생각해봤던 치료법이란 뜻입니다." 그러면서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저는 이전부터 의사가 되길 바라며 여러 의학서적을 읽었습니다. 현 의학의 기본이 되는 그라함 총론, 각론부터... 여러 책을 공부했습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외과의사 송지현이 아닌, 엘리제는 의학 서적은커녕 로맨스 소설도 잘 안 읽는 소녀였으니까. 제국의 의학 서적을 읽은 것은 병원에 나오기 1주일 전, 벼락치기로 공부한 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몇몇 질환들은 책의 내용보다 이런 방법으로 치료하면 더 좋지 않을까? 이렇게 하면 치료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런 공상들을 했습니다.“ “... ... .”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16살, 아니, 지금보다 이전이니 그보다 어린 소녀가 의학 서적을 읽고, 이해하는 것도 모자라 새로운 치료 방법을 모색했다고? ‘... 역시 잘 안 믿는 눈치구나.’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자신의 거짓말이 궁색한 것을 안다. 하지만 딱히 더 그럴싸한 거짓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외과의사인 그녀는 애초에 거짓말에 영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더 밀어붙였다. “비장절제술은 그런 치료법 중 하나입니다. 아무리 심한 손상이라도, 비장 자체를 절제하고 혈관을 묶으면 살릴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었죠. 면역기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지만, 일단은 살려야 하니까요.” “그래, 무척 좋은 발상이다. 그런데 생각을 하는 것과 직접 수술을 하는 것은 전혀 달라. 너는 어떻게 이 고난도의 수술을 할 수 있었던 거지?” 고트의 물음에 엘리제는 답했다. 이번에도 역시 궁색한 거짓말이다.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해봤습니다. 해부학적 구조를 떠올리며 실제로 비장을 절제해내려면 어떻게 접근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해봤고, 이번에 그 접근법대로 수술했습니다.” “...!!!” 설명을 마친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 ... ." 그리고 방 안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모두 경악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고트 병원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책만 보고 그런 비장절제술을 발상하고, 구체적인 수술법까지 고안해낸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다소곳이 서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수술해낸 본인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하아, 이 소녀가 그라함 백작이나 프레밍에 맞먹는 천재란 말인가? 정말로?' 방금 이야기의 의미는 단 하나. 천재. 소녀가 단순히 재능이 뛰어나다 수준이 아닌, 상상을 초월하는... 일반인의 지각으론 가늠하기 어려운 천재란 뜻이었다. 그리고 의학의 역사상 그런 천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학의 기초를 마련한 '선구자' 그라함 백작. 그리고 약학과 진단 검사의 혁명을 이룩한 '대 연금술사' 프레밍. 그들도 책 하나를 보면, 열을 꿰뚫는 문일지십의 천재였다고 한다. 특히 대 연금술사 프레밍은 마치 날 때부터 약학을 통달하고 태어난 듯했다고.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그레이엄이 입을 열었다. "이 아이의 말은 진짜일 것입니다." "...?!" "짧은 시간이지만, 제가 선생으로 지켜본 바로는 거짓말할 아이가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아이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는 제가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의사보다도 뛰어난 재능과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고트의 눈이 흔들렸다. 자존심 강한 그레이엄은 절대 누군가를 칭찬하는 이가 아니다. 그런데 이런 극찬이라니? "도제로 들어오긴 했지만, 사실 이 아이는 저에게 배울 게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레이엄은 일순 말을 멈추었다. 그의 입가에 아무도 못 알아볼 씁쓸함이 잠시 스쳐 지나갔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미 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밴과 고트는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경악을 하였다. 그레이엄은 제국 의학계에서 촉망받는 뛰어난 젊은 의사였다. 그런데 이 소녀가 그를 능가한다고? "허허, 허어..." 밴 자작은 연신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몇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웃음을 멈추고 테이블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차갑게 식은 홍차가 혼란스러운 기분을 진정시켜주었다. 황궁 어의는 소녀를 살폈다. 저 소녀가 그런 천재라고? 저렇게 어리고 작은데? '대단하군. 대단해.' 그레이엄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거짓은 아닐 거다. 저 소녀는 정말 천재인 것이다.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레이디 로제라고 했나?" "네, 편히 불러주십시오." "그래, 로제." 어의는 잠시 푸근히 웃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이곳 테레사 병원이 아닌, 우리 황실 십자 병원에 와서 일할 생각은 없나?" "...?!!" 엘리제는 놀란 눈으로 밴 자작을 바라봤다. 황실 십자 병원! 명실상부 제국 최상위의 의료기관으로 최고라 인정받은 의사만이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런 곳에 자신을 오라고? "밴, 진심인가? 저 소녀를 황실 십자 병원으로 데려가겠다고?" "응, 진심이네." "하지만 황실 십자 병원은..." "비장절제술을 집도한 의사라면 충분히 우리 병원에 들어올 자격이 되지." 그 말에 고트는 입을 다물었다. 어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번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서 말이야. 이 소녀가 어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해." 기대심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런 친우를 보며, 고트는 고개를 저었다. 나이가 오십을 넘어 환갑에 가깝건만, 새로운 의학 지식이나 뛰어난 의사들을 보면 늘 애처럼 흥분했다. "그런데 어떻게 저 아이를 황실 십자 병원에 받을 건가?" "그야 당연히 내 추천으로..." "아니, 저 아이는 의사 자격증이 없어. 황실 십자 병원은 도제를 거의 받지 않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 밴은 허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의사... 자격증이 없나?" "의사 자격증은 무슨 의사 자격증이야. 저 아이는 이제 병원에 도제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다니까?" 고트는 혀를 찼다. 하지만 어의는 단순히 해답을 냈다. "그러면 자격증을 따면 되지." "뭐?" "그렇지 않아도 탄신연회 후 올해의 의사 자격시험이 치러질 예정이니까. 그 시험을 봐서 자격증을 따면 될 것 같은데?" 고트는 입을 벌렸다. "시험 자격은? 연구원에 인증받은 교수 3인의 추천이 있어야 하는데?" 병원에 나온 지 한 달도 안 된 도제가 곧바로 의사 자격시험이라니! 전례가 없던 일이다. 하지만 어의는 전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랑 자네, 그리고 그레이엄 교수가 추천하면 되겠네. 뭐가 문제인가?" "그, 그렇긴 하지만..." 고트는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저 소녀가 정말 의사 시험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올해 의사 시험은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그는 말끝을 흐렸다. 얼마 전 전해졌던, 의사 자격시험에 대한 이해 못 할 황명이 떠올라서였다. '왜 황제 폐하께서 이런 황명을...?' 평소 의사 자격시험은 물론, 의학 연구원의 활동에 아무런 간섭도 없으시던 황제가 특별한 황명을 내린 것이다. 이리저리 내용이 길었는데, 요약하면 이랬다. -반드시 자격이 되는 도제만 시험에 응시하게 할 것. -금년에 한해 시험 난이도를 높일 것. 실력이 되지 않는 이가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왜 폐하께서 이런 황명을 내리셨을까?' 어째서 이런 황명이 내려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엄한 황명이기에, 관계자들은 시험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밴은 명쾌했다. "이 정도면 자격이 충분하지 않나? 비장절제술을 해냈는데! 폐하께서도 이런 인재를 뽑으라고 황명을 내린 것일 걸세." 글쎄, 황제의 의도가 정말 그런 것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런 대수술을 성공한 천재가 응시 자격이 없다면, 이번 연도 자격시험은 아무도 응시하지 못할 것이니까. '황명 때문에 이번 시험은 특히 어려울 것인데. 이 소녀가 합격할 수 있을까?' 무려 황명으로 난이도를 높이라고 한지라, 이번 시험은 곡소리 나는 문제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러다 합격자가 한 명도 안 나올까 봐 출제자들이 걱정하고 있을 정도. 아무리 천재라도 이렇게 어린 소녀가 합격할 수 있을지 고트 병원장은 의문이 들었다. "너는 어떠냐? 이번에 시험을 봐도 자신이 있느냐?" 로제는 가만히 고개를 숙였다. "부족하지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예의 바르지만,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밴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과연 이 아이가 초고난도 문제로 구성된 금년 자격시험에서 어떤 성적을 받을지 궁금하구나.' 자격시험까지는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벼락치기 같은 집중 공부로 합격하기란 불가능한 시간. 거의 기본 실력만으로 합격해야 하는데... 기이하게도 소녀의 눈에선 긴장이나 주저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한 자신감? '허허, 재미있구나. 앞으로가 기대돼.' 환갑에 가까운 밴은 이제 은퇴를 바라볼 나이였다. 얼마 남지 않은 의사로서의 시간. 왠지 저 소녀와 함께라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마무리되고 엘리제는 올해 의사 자격시험을 응시하기로 하였다. '예상치 못하긴 했지만... 잘 됐어.' 그녀는 병원 앞을 홀로 걸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황제와의 내기에서 승리하려면 의사 자격증을 따는 것은 필수였다. '만약 이렇게 응시 자격을 얻지 못했으면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했을 텐데.' 그러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아까 그 말이 뭐지? 황제 폐하께서 자격시험에 황명을 내렸다니? 폐하께서 어째서?' 쉽사리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황제는 이 제국의 정상에서 군림하는 이. 그런 그가 의사 자격시험 같은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황명을 내려? '설마... 나 때문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 거다. 설마 그럴 리가. '그나저나 시험이 정말 얼마 안 남긴 했구나. 따로 공부할 시간은 거의 없겠네. 탄신연회도 코앞이고.' 그녀는 잠깐 자리에 멈추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탄신연회.' 이전 삶, 16살의 탄신연회는 참으로 특별했다.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고, 자신과 황태자와의 약혼이 발표됐었으니까. 그때 그녀는 행복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었다. 그 약혼이 비극의 시작임은 상상도 못 하고. '됐어. 이번 탄신연회는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거야. 폐하께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나와 약혼 발표를 할 일도 없을 거고. 그냥 얼굴만 비치고 바로 돌아오자.' 고위 귀족으로서 탄신연회를 아예 참석 안 할 수는 없다. 그녀는 대충 밥만 먹은 후, 저택으로 돌아와 시험 준비나 하기로 마음먹었다. '잠깐?' 그런데 그때였다. 한가지 잊어먹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이번 탄신연회 때 태자 전하의 약혼녀를 발표한다고 지난번 공표하셨잖아? 그건 어떻게 하실까?' 그녀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녀와의 약혼과는 별개로, 탄신연회 때 누가 황태자의 약혼녀가 될지 발표하기로 했었다. '대전 회의 때 언급하신 내용이라 아무리 폐하라도 무르진 못할 텐데. 다들 궁금해하고 있을 테고.' 황태자의 약혼 상대는 모든 귀족의 관심사였다. 모든 귀족이 기대하고 있을 테니, 뭐라고 발표는 하긴 해야 할 텐데? ‘설마 내 이름을 약혼녀로 발표하진 않겠지?’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 지난번에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는데, 자신을 약혼녀로 발표하진 않을 것이다. '모르겠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 폐하께서 현명히 처리하시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늘이 맑네. 날씨가 좋구나.' 선선히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살랑였다. 그렇게 시원히 바람을 맞으니, 왠지 좋은 기분이 들었다. '인제 그만 들어가자. 일해야지.' 그렇게 그녀는 다시 병원으로 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그녀는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병원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신은...?" 깊은 금발, 푸른 눈동자. 지독히도 아름다우면서도, 차가운 외모. "론님?" 이전 비장에 총상을 입은 환자의 수술을 시행할 때 보호자로 왔던 젊은 사내, 론이었다! 남자, 론은 고개를 들어 푸른 눈동자를 그녀에게 향했다. 분명 모르는 사이임에도, 이상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시린 눈동자. "왔군. 로제라고 했나?" "아... 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보러 왔어? 왜? "무슨... 일로?" 평범한 신사복 차림이지만, 저 남자는 무려 황실의 문장을 가진 고위 귀족이다. 어쩌면 황실의 인척일 수도 있는. '내가 클로랜스 영애인 것을 알고 온 건가?' 황실의 문장을 가지고 있던 고위귀족. '클로랜스 가문의 엘리제'면 몰라도, '견습의사 로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 ... ."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불편한 시선에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저...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없다." "그러면... 왜?" 그 물음에 남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말했다. "그냥 보러 왔다." "...??" 엘리제는 그 말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냥 보러 왔다고? 왜? 00028 1-6 그와 그녀의 진료 ========================================================================= 그때, 남자가 스쳐 지나가듯 말했다. "한가지 확인할 것도 있고." 엘리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남자는 차가운 외모만큼이나 불친절했다. 전혀 부연 설명을 할 마음이 없는 듯했다. "이제 됐다. 그러면 가보마." 그러고 남자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엘리제는 멍하니 남자의 뒤를 바라봤다. 도대체 뭐지? '잠깐. 그러고 보니?'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가지 생각. "잠깐만요! 론님!!" 그녀가 크게 불렀으나, 못 들은 것인지, 못 들은 척하는 것인지 남자는 돌아보지 않았다. 결국, 엘리제는 뛴 걸음으로 남자의 뒤를 쫓아가 손을 잡았다. "잠깐만요!" 남자는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흠칫 놀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냐?" "하아, 하아." 소녀는 급히 뛰어온 게 힘든지, 빨개진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지?" 그리고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진료받고 가세요." "뭐?" "진료받고 가세요. 계속 어지럽고 기력 없으시잖아요. 안 그래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남자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봤다. "치료해드릴게요." <1-5 불가능한 수술 fin>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작은 진료실. 엘리제는 남자에게 의자를 권했다. “뭐하려는 것이지?” “뭐하긴요. 진료하려고 그러죠.” 남자, 론... 아니,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사실 그는 그녀를 만나러 올 예정이 전혀 없었다. 그런 그가 발걸음을 옮긴 것은 충동... 그러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충동 때문이었다. 왜 그런 충동이 든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가 없었다. '더구나 저 아이에게 진료라니.' 물론 소녀의 말대로 계속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끼고 있긴 하다. 하지만 황궁 어의인 밴도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짚지 못하고 있는데 저 소녀가? 의미 없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그냥 뿌리치고 가면 될 일을. 한심하군.’ 처음엔 그냥 무시하고 환궁하려 했다. 하지만 꼭 진료받아야 한다고 어찌나 강력히 강권하던지. 자신도 모르게 여기까지 끌려 들어와 버렸다. ‘이런 아이였나.’ 그는 자신의 약혼자로 내정된 소녀를 바라봤다. 이 소녀가 자신이 알고 있던 엘리제가 맞기는 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쪽으로 좀 더 가까이 오세요.” 청진기를 목에 걸며 그녀가 말했다. 황태자는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그녀를 향해 의자를 당겼다. “안색이 계속 창백해요. 피로감과 무기력감을 느낀 게 언제부터죠?” “... 2달쯤 되었다.” “식사는 잘하시나요? 체중이 빠지거나 그런 것은 없나요?” “그렇지는 않다. 입맛은 조금 없긴 하지만.” “어지럼증 양상은 어떻죠? 혹시 천장이 빙글빙글 돌거나 그렇지는 않죠?” 소녀는 차분한 어조로 증상을 체크했다. 마치 꼼꼼하고 사려 깊은 의사가 할법한 물음들에 황태자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어의인 밴 자작이 했던 물음들과 비슷하군.’ 소녀는 종이에 뭔가를 적어 내리며 문진(history taking)을 이어나갔다. 평소와 달리 이지적인 느낌. 그러면서 소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왜 그러지?” “잠깐만요. 진찰하겠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그의 손을 잡았다. “...!!” 황태자는 소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다시 한 번 놀라 손을 뒤로 뺐다. “뭐하는 거지?” 하지만 엘리제는 환자에게 하듯 말했다. “촉진하려고요. 체온과 발한 정도를 확인하기 위해서요. 혹시 불편하신가요?” “... 아니다.” 진찰을 위해 필요하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린덴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다시 내밀었다. “잠시만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손등과 손바닥을 만지며 여러 정보를 캐치했다. ‘체온이 약간 낮아. 기본적으로 손바닥에 존재하는 수분도 적은 편이고.’ 그녀의 머릿속에 한가지 진단이 머릿속에 떠오르려 했다. ‘조금 더 확인해봐야겠어.’ 한편 황태자는 그녀가 좀처럼 손을 놓지 않자,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오래 만지는 거지?’ 실제로 만진 시간은 몇 초 되지 않지만, 엄청 오래 만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환자를 볼 때도 이렇게 신체 접촉을 하는 것인가?’ 황태자는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왜 그런지는 몰랐다. 그저 이유 없이 그냥 그랬다. 물론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려면 접촉이 필수인 것은 알고 있었다. 기본적인 진찰법인 시진, 청진, 타진, 촉진 중 시진을 제외한 모두가 신체 접촉(Touch to touch)을 기반으로 정보를 얻는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뭔가 마음에 안 드는군.’ 그런데 그때였다! 린덴은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 "잠시만 실례할게요. 목 쪽 진찰을 하겠습니다." 소녀가 조금 더 다가오더니... 그의 목덜미를 어루만진 것이다! "무슨?!" “증상을 봤을 때 목 쪽 진찰이 필요해서 그렇습니다. 금방 끝나니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차분한 설명. 하지만 린덴은 극히 곤란한 기분이 들었다. 작은 손가락이 그의 목덜미를 만지며 내려갔다. 부드러우면서도 간지러운 느낌. 그리고 그러면서 소녀의 우윳빛 체향이 그의 후각을 자극해 황태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이게...!' 슬쩍 만지는 것도 아니었다. 뭘 찾기라도 하는 듯, 소녀의 손가락은 그의 목덜미를 샅샅이 훑었다. 불편함을 느끼게 하지 않으려는 듯,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게 더 곤란한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소녀의 손가락이 그에게서 떨어졌고, 황태자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숨을 토했다. "너...!" 하지만 소녀는 의사의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잠시만요. 곧 종합해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는...!! 남자에게...!!' 린덴은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소녀의 눈이 너무 진지해 그러지도 못했다. 그저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의 진중한 눈빛! 결국,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 이제 더할 건 없는 건가?"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하세요?" "... 아니다. 그냥 피곤해서 그렇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고 넘어갔다. "잠깐만요. 금방 결과 설명해드릴게요." 그러고는 종이 위에 진찰한 내용을 빼곡히 기록했다. 그리고 그녀는 결과를 분석했다. '이 진찰 소견들은... '그 질환'의 가능성이 가장 높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더했다. "2달 전, 감기 기운이 있지 않으셨나요?" "그래, 감기에 걸렸었다." "당시 목덜미가 아프셨었죠? 제가 아까 만진 부위요." "... 그랬던 것 같군. 어떻게 알았지?" 황태자는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당시 그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정확한 물음이었던 것이다. 한편 그 답들에 엘리제는 자신의 추측에 확신을 내렸다. '맞아! 역시 그 질환이 분명해.' "론님의 피로감과 무기력증은 아마 이 질환 때문으로 보입니다." "뭐지?" 그리고 소녀는 진단명을 말했다. 황궁 어의도, 당대 최고라 불리는 황실 십자 병원의 교수들도 놓친 진단명이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입니다." *** "드... 쿼벵?"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처음 듣는 병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은 일반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뛰어난 의사들도 진단하기 난해한 질환이었으니까. "네, 드 퀘르벵 갑상선염에 의한 증상으로 보입니다." "그게 뭐지?" "갑상선에 급성으로 염증이 온 후, 염증에 의한 후유증으로 호르몬 기관인 갑상선에 기능 저하(Hypothyroidism)가 오는 것입니다."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갑상선은 우리 몸의 연료 같은 갑상선 호르몬을 만드는 기관이에요. 연료와 다름없는 호르몬 생성에 문제가 생기면서 론님과 같이 어지럼증, 무기력증 같은 증상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드 퀘르벵 갑상선염의 임상 양상을 차분히 설명했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De Quervain's thyroiditis). 현대 지구에서는 아급성 갑상선염(Subacute thyroiditis)로 불리는 질환으로 그녀의 설명처럼 염증이 생긴 후 갑상선 기능 저하증이 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 ." 황태자는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드 퀘르벵 갑상선염과 자신이 지난 2달간 경험한 증상은 완벽히 일치했다. 놀랍게도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의 병을 정확히 진단해낸 것이다. 황궁 어의도 갈피를 못 잡았던 병을! '대단하군.' 그는 솔직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부황의 지병을 추측해낸 일과 지난밤 믿지 못할 수술까지. 벌써 세 번이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소녀는 해결책도 명쾌히 내놓았다. "제가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무슨 약이지?" "갑상선 기능을 보조하는 약제로 이 약을 먹으면 증상이 금방 좋아질 것입니다." 그러면서 처방전을 적어주었다. "이 처방전을 약제과에 보여주면, 약을 지어줄 테니 받아가세요." "... 그래." 황태자는 다시 한 번 알 수 없다는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이 소녀가 정말 자신이 알던 그 소녀가 맞는 건지. "??" 엘리제는 진료가 끝났음에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자신을 쭈욱 쳐다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 아니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수고하셨습니다. 약 꼭 잘 복용하세요." "더 용건은 없는 건가?" "네, 없어요. 진료 끝났으니 이만 나가셔도 돼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 그래." 그러고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에서 나가려는 그에게 엘리제가 말했다. "아! 론님, 3일 뒤에 다시 오세요." "왜지?" "증상의 호전 정도를 봐서 약용량을 조절해야 하거든요. 완전히 좋아질 때까지 한, 두 달 더 걸릴 것인데 그때까지 규칙적으로 와서 진료를 받아야 해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남자의 신분을 배려해 말했다. "만약 이곳에 자주 오기 그러시면 제가 소견서를 써드릴 테니 황실 십자 병원으로 가도 괜찮아요."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지만, 남자는 고위귀족일 것이다. 어쩌다 자신의 진료를 받았어도 빈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테레사 병원에 오는 것이 불편할 수도 있다. "어쨌든 어느 병원이든 정기적으로 가서 진찰을 받으세요." 그런데 그때 그가 의외의 답을 하였다. "3일 뒤에 오마." 그러면서 그는 말했다. "너를 찾아오면 되는 건가?" 엘리제는 답했다. "만약 원하시면 다른 선생님께 오셔도 돼요. 어차피 증상을 보고 약용량만 조절하는 것이라서... 만약 이곳이 불편하시면 다른 병원에 가셔도 되고요."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리고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한테 오마." "...!" "3일 뒤에 보자." 그렇게 그와 그녀의 진료가 시작되었다. *** 그리고 며칠 뒤, 론도(Londo) 귀족 거리에 위치한 클로랜스 후작가의 저택. 반백에 가까운 중년 남자가 엘 후작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오, 고트 자작. 병원 운영에 힘써줘서 항상 고마움이 많소.” 남자, 테레사 병원의 원장 고트 자작은 고개를 젓고 평소와 다르게 극진히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테레사 병원의 모든 것은 각하의 은혜 덕에 운영되는 것. 저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테레사 병원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가문, 엘 후작의 후원하에 운영되고 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왜 날 부르신 것이지?’ 엘 후작은 대리인을 통해 조용히 후원만 할 뿐, 이렇게 따로 자신을 저택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혹시 병원에 내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는 건가?’ 고트 병원장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사소한 일로 자신을 부른 것은 아닐 지리라. <내일(화요일)은 쉽니다. 수요일 자정(00:07)에 뵙겠습니다.) 00029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앉아 차 한 잔 들도록 하시오.” “네, 각하.” 하녀가 와서 그에게 동방에서 수입한 홍차를 따라주었다. 클로랜스 가문답게 극상품의 찻잎이었지만, 고트는 후작이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부른 건지 긴장돼 향을 음미할 수 없었다. “병원을 운영하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소?” “네, 각하의 후원 덕에 큰 문제 없습니다.” “그래, 고생이 많구려.” 후작은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시간을 한참 보냈다. 결국, 고트 자작이 못 참고 물었다. “저... 각하, 혹시 어떤 일 때문에 저를...” “아... 그게...” 하지만 엘 후작은 머뭇거리듯 입을 다물었다. “...??” 고트는 더욱 긴장했다.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일이길래 제국의 이인자, 재상 엘 후작이 저리 어려워한단 말인가?! “말씀해주십시오. 병원에 제가 모르는 문제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오. 그게...” 후작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제라는 아이를 아시오?” “네?” 고트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모르오? 최근에 테레사 병원에 도제로 들어간 아이인데...” “아, 압니다. 그런데 어째서?” 로제. 모를 리가 없었다. 최근 테레사 병원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이었으니까. 그런데 천하의 엘 후작이 그 아이를 왜? “크흠, 그 아이는 어떻게 잘 지내고 있소?” 약간 겸연쩍은 듯한 목소리. 고트 병원장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답했다. “네, 잘 지냅니다. 그냥 잘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잘하고 있습니다.” “그렇소? 어떤지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시겠소?” 잘하고 있다는 말에 후작이 반색하며 물었다. 고트는 그 모습에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의 안부를 물으러 날 부른 것인가? 도대체 왜? ‘혹시?’ 순간 엘 후작의 하나 있다는 딸이 떠올랐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후작가의 공녀가 우리 병원에 도제로 들어올 리가...’ 그리고 그가 소문으로 들은 후작가의 ‘못된’ 공녀 클로랜스 영애와 로제는 너무나 달랐다. 동일인일 리가 없었다. ‘그러면 왜?’ 어쨌든 후작의 물음이니 답했다. 로제? 그녀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단 하나였다. “레이디 로제는 천재입니다.” “...!” 그 뜻밖의 말에 후작은 놀라 반문했다. “천재...? 엘리... 아니, 로제가 말이오?” “네, 그것도 보통 천재가 아닌, 하늘이 내린 듯한 희대의 천재입니다.” 후작은 입을 벌렸다. 그냥 천재도 아닌, 희대의 천재라고? 그 아이가? “그 말이 정말이오?” 후작은 고트 자작이 농담을 하나 살폈다. 하지만 완고한 병원장의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들어있지 않았다. 오히려... “네, 사실 그 소녀에게는 천재란 표현도 부족합니다.” 그러면서 고트는 생각했다. ‘나도 깜짝 놀랐지.’ 고트는 처음에 그녀가 비장절제술을 해냈단 이야기를 듣고 믿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너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래서 그녀가 지금껏 병원에 들어온 일을 샅샅이 조사했다. 첫날부터 그날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그리고 경악했다. 비장절제술만이 아니었다. 부랑자 병실을 돌본 것부터, 구호소에서 해냈던 수많은 응급조치까지. 하나, 하나가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트는 소녀가 정말로 하늘이 내린, 말도 안 되는 천재란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레이디 로제는 천재... 정말 천재입니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병원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면...” 고트는 엘리제가 한 일들을 하나, 하나 다 알려주었다. “... ... .” 그리고 그 설명을 듣는 후작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우리 딸 리제가? 정말로??’ 의사가 아니기에 의학 용어를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있었다. 엘리제가 병원에서 상식을 벗어난 일들을 해내고 있다는 것을! 후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게... 정말이오? 내가 알기로 로제란 아이는 이제 16살에 불과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도 처음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니까요. 이제 병원에 갓 나온 15살 소녀가 그런 일들을 해내다니. 하.” 고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모두 한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입니다.” “... ... .” “어쩌면... 레이디 로제는 이대로 성장한다면 의학의 선구자인 그라함 백작이나 대 연금술사 프레밍을 뛰어넘는 위대한 의학자가 될지도 모릅니다.” “...!!” 후작은 입을 벌렸다. 그도 그라함과 프레밍을 알고 있었다. 의학의 개념을 통째로 새로 세운 위대한 인물들 아닌가? 엘리제, 그 아이가? 그런 인물들과 비견될만하다고? “혹시 사람을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니오? 이름이 헷갈렸다거나...” “우리 병원의 도제 중 로제란 아이는 단 한 명입니다.” “... ... .” 후작은 놀란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웠다. 사실 그가 고트 병원장을 부른 것은 엘리제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 처음 병원에 나가는 아이가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는가? 맨날 혼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황제 폐하와의 내기는 애초에 이길 수 없는 거였고. 그저 매일 피로한 얼굴로 들어오길래 아비 된 마음으로 안쓰러워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하려 한 것이었는데... 내 딸이 천재라고? 그것도 상식을 뛰어넘는? “... 혹시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것은 없소? 버릇없게 군다거나?”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칭찬이 자자합니다. 실력도 탁월하고, 얼굴도 예쁜데, 성격도 친절하다고. 병원에서 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일하는 것을 힘들어하진 않소?” “아무래도 어린 소녀이다 보니, 피로해하긴 합니다. 병원 도제 일이 쉽진 않으니까요. 하지만 환자를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고트는 며칠 전 구호소로 직접 가서 본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작은 몸에 피로가 느껴졌지만, 얼굴에 행복과 생기가 흘렀다. 환자를 아끼는 의사의 얼굴이었다. “아직 어린 소녀에게 이런 말이 어울릴까 싶지만... 제가 보기에 레이디 로제는 천생 의사로 보입니다.” 천생 의사. 환자를 돌보는 의사에게 할 수 있는 극찬의 칭찬 중 하나. 고트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지. 그렇게 작은 소녀가.’ 정말 불가해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믿지 않는다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 그래, 알겠소. 바쁠 텐데 고맙소.” “아닙니다. 혹시라도 더 여쭤볼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그러고 인사를 한 후, 고트는 저택에서 물러났다. “... ... .” 후작은 잠시 말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딸이 있는 테레사 병원 쪽이었다. “허허. 이것 참. 그 아이가 그렇다고?” 후작은 헛웃음을 지었다. 상상도 못 했다. 딸이 병원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고 있을지. 당황스럽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좋았다. 어떤 아비가 딸에 대한 이런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을까? “엘리제...” 딸의 이름을 불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딸을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 엘리제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녀가 테레사 병원에 나간다 했을 때 많이 속상했었다. 황제와의 내기는 둘째치고 고생할까 봐. 힘든 일 때문에 고생할까 봐. 여린 몸이 아프기라도 할까 봐. 속상하고 걱정했다. 하지만...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소, 테레사.’ 그는 엘리제가 어릴 때 죽은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엘리제, 그 아이가 당신을 닮았나 보오. 언제나 철들까 걱정만 했는데 말이오.’ 테레사. 그의 전 부인이었던 그녀는 어릴 때부터 의학에 관심이 많았다. 간호사가 되겠다고 가출해 가문을 뒤집은 적도 있었으니까. ‘당신의 유언에 따라 지은 테레사 병원에서 우리 엘리제가 일하고 있다오. 신기하지 않소? 당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기라도 할 것처럼.’ 후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아이들은 모두 다 잘 자랐다오. 큰 아이 렌도, 작은 아이 크리스도 말이오. 엘리제가 가장 걱정이었지만...’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집어들었다. 전날 저녁, 딸이 병원에서 돌아와 아버지를 위한다고 직접 구워준 쿠키였다. ‘난 요즘 엘리제가 너무 사랑스럽다오. 아무에게도 주기 싫을 만큼. 주책 맞게 말이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그래서 걱정이구려.’ 답답한 음색으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소.” 그리고 그는 고개를 돌렸다. 창밖.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답답함의 원인.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한숨이었다. *** ‘후작 각하께서 왜 로제에 대해 물어봤을까?’ 고트는 고민했다. ‘혹시 정말로...? 레이디 로제가?’ 그는 소문으로 들은 클로랜스 영애에 대해 떠올렸다. 못되고 이기적인 성격. 어린 나이임에도 안 좋은 소문이 파다했다. ‘아니야. 전혀 다르잖아.’ 레이디 로제는 천재적인 실력도 실력이지만, 배려 깊고 남들에게 항상 친절했다. 소문의 클로랜스 영애와는 너무 달랐다. ‘왜일까?’ 그런데 그는 고민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제국 최고의 귀족이라는 엘 후작보다도 높은, 그야말로 지고한 이가 그를 부른 것이다. “미, 미천한 이가 폐, 폐하를 뵙습니다! 고트라고 하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고트는 벌벌 떨며 인사를 올렸다. 그런 그의 앞에서 온화한 인상의 중년인이 미소를 지었다. 남자의 정체는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 제국의 황제가 그를 부른 것이다! ‘어, 어째서 폐하가 나를?’ 고트는 머리를 바닥에 숙인 상태로 눈을 굴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침에는 엘 후작이, 오후에는 황제가 자신을 부르다니! ‘도대체 왜?’ 친우인 밴이야 어의로서 황제를 질리도록 알현하겠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훈장을 받을 만큼 좋은 일을 한 적도 없는데, 소환당하니.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일어나게. 테레사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느라 고생이 많다고 들었네.” “아, 아닙니다, 폐하.” “평소 밴 경이 자네 이야기를 많이 하네. 빈민들을 돌보는 데 어려운 점은 없나?” “송구스럽습니다. 다행히 폐하의 성은으로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내 성은은 무슨. 다 클로랜스 후작의 덕이겠지.” 황제는 바로 용건을 꺼내지 않고, 고트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다. 마치 오전의 엘 후작처럼. 편안한 목소리였지만, 고트는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지고한 황제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속이 바짝 타들어 갔다. 그런 고트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민체스터는 편안히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시중을 드는 시종장에게 말했다. “여전히 차 맛이 그 아이처럼은 안 되는구나.” “죄송합니다, 폐하.” “클로랜스 영애가 일러준 대로 달인 거지?” “네, 한치의 틀림도 없이 그대로 달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는 영 마음에 안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의 맛이 안 살아. 그 아이가 달여준 차는 깊으면서도 머리가 맑아지는 청량한 맛이었는데.” 00030 1-6 그와 그녀의 진료 ========================================================================= 시종장, 밴트 남작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신이 부족하여.” “아닐세. 어쩔 수 없지. 레시피대로 해도 손맛을 살릴 수는 없으니까. 그냥 나중에 직접 끓여달라 해야겠어. 빨리 그 아이가 끓여주는 차 맛을 매일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군.” 그 말을 하며 민체스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푸근한 느낌이 드는 미소. 그 모습을 보며, 고트는 속으로 놀란 얼굴을 했다. 한 손으로 제국을 지배하는 지고한 황제가 저런 편안한 웃음이라니? 아까 언급한 ‘클로랜스 영애’을 생각하고 그런 건가? 하지만 자신이 소문으로 들은 클로랜스 영애는...?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용건을 꺼냈다. “내가 자네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지?” “말씀하시옵소서, 폐하.” 고개를 숙인 고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그리고 황제의 입에서 나온 용건은, 전혀 상상도 못 하던 것이었다. “로제란 아이에 대해서 아나?” “...!!!” 고트는 눈을 크게 떴다. 로제? 그 아이? “모르나? 자네 병원에 도제로 들어갔다던데.” “아, 압니다!” 고트는 당황해 답했다. 당연히 안다. 하지만 황제가 그 아이를 왜? 엘 후작도 그렇고. ‘도, 도대체 뭐지? 그 아이의 정체가?’ 황제가 말했다. “그 아이에 대해 말해주겠나?” “어, 어떤 것을 말입니까?” “그냥 전부다. 어떻게 지내는지, 자질은 어떤지, 힘들어하진 않는지. 자네가 보기엔 어떤지. 전부 다 이야기해주어 보게.” 고트는 황제의 부탁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무려 지엄한 황명인지라 정신없이 로제에 대해 설명했다. “흐음, 그런가? 그 아이가 그렇게 뛰어나다고?” “네, 폐하. 신이 지금까지 만난 어떤 의사보다도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향후 제국 의학계의 미래를 밝힐 인재로 보입니다.” “아직 어린데, 지나친 평가가 아닌가?” 반문하는 황제는 무언가 뚱해 보였다. 고트는 눈치도 없이 극찬하였다. “아닙니다. 제가 비록 부족하지만, 35년이 넘게 의사 일을 하였는데, 그 소녀 같은 이는 처음입니다. 가히 그라함 백작, 프레밍에 맞먹는 자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크흠. 여린 소녀라 들었는데, 환자를 보는 것을 어려워하진 않고?” “전혀 아닙니다. 그 어린 나이로 어떻게 환자를 그렇게 보는지,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천생 의사라 할 수 있겠습니다.” “... ... .”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어딘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고트 자작.” “네, 폐하.” “오늘 수고했네. 바쁠 텐데 내가 시간을 많이 뺐었군.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네, 소신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고 고트는 조심히 어전에서 물러났다. 황제가 왜 로제에 대해 물은 걸까 궁금해하며. 그런데 그때, 황제가 그에게 물었다. “참, 자작.” “네, 폐하?” “이번 의사 자격시험은 잘 준비하고 있는가?” 테레사 병원의 원장이자, 자격시험 출제 임원인 고트는 얼마 전 받은 이해 못 할 황명을 떠올렸다. 의사시험을 어렵게 내라는. “네, 폐하. 자격이 되는 인재만이 합격할 수 있도록 문제를 엄선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드시 어렵게 문제를 내주게.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합격하는 일이 없도록.” “네, 명심하겠습니다.” 답을 하면서도 고트는 속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기존의 의사 자격시험도 충분히 어려워 자격이 안 되는 이가 뽑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어려운 의사 시험을 통과했기에 의사가 제국의 전문직으로 존경받는 것이다. ‘그리고 왜 폐하께서 의사 시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어쨌든 난이도를 다시 한 번 더 올려야겠구나.’ 그는 그렇게 어전에서 물러났다. 돌아가서 다시 한 번 자격시험 난도를 올릴 것이니, 이번 시험은 정말로 곡소리 나는 문제만 가득하게 될 것이다. “흐음...” 민체스터는 턱을 쓰다듬었다. “엘리제, 그 아이가 그렇다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평이었다. ‘며칠 버티지도 못하고 도망칠 줄 알았는데? 놀랍군.’ 그냥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천재란다. 그것도 역사의 획을 그을 재능의 천재. ‘설마.’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황제는 그녀를 무척이나 아낀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 아닌가? ‘의술을 전혀 접해본 적도 없는 아이가 그런 일들을 해냈다고? 글쎄, 뭔가 착오가 있겠지.’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니,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생각보다 잘하고 있나 보군. 저렇게 인정받고 있는 것 보니. 역시 똑똑한 아이야.’ 그는 이전 엘리제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철없음을 벗어던진 소녀는 누구보다도 현명해 보였다. ‘얼마 전 정말로 몽셀 왕국이 움직이고 있다는 전보를 받았지.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크림 원정이 큰 곤란에 빠질 뻔했어.’ 곤란 정도가 아니었다. 엘리제는 최악에는 전멸도 각오해야 할 함정에서 제국군을 구해낸 것이다. 그런 똑똑한 아이니 병원에서의 일도 저렇게 잘하는 것일 것이리라.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너무 빠지면 안 되는데.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될 아이가 말이야.’ 환자를 위하고, 여린 몸으로 병원에서 열심히 하는 모습이 기특하단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어차피 황실의 일원이 될 아이였다. 병원 일을 하다 몸이라도 상할까 걱정이 들었다. “밴트 경.” “네, 폐하.” “탄신 연회 준비는 잘하고 있지?” 시종장은 공손히 답했다. “네, 분부한 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에 대한 발표는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최측근인 밴트 시종장은 엘리제와 황제와의 내기를 알고 있었다. 클로랜스 영애가 내기에서 이기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겠지만, 아직 성인식 전까진 내기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이번에 그녀를 약혼녀로 발표하면 내기를 어기는 것이다. “내기를 어길 생각은 없네. 가볍게 한 내기라도 짐이 직접 제안한 내기가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니까.” 그는 그렇게 말했다. 황제인 그가 직접 제안한 내기이다. 그러니 아무리 황태자비로 바란다 해도 엘리제가 내기의 조건을 충족하면 그녀를 놓아줄 것이다. 그건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다만 내기의 조건이.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였다.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내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해내야 할까? 그것도 6개월 안에.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 민체스터는 자신이 질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혹시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에 대한 발표를 미루실 것입니까? 내기가 끝날 때까지?” “아니, 미루지 않아.” “그러면...?” 시종장은 황제의 의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내기를 어기지도 않으면서, 발표를 미루지도 않겠다니? 하지만 민체스터는 대답 대신 웃음을 지었다. 어딘지 짓궂은 미소였다. “클로랜스 영애도 탄신연회에 참석하겠지?” “네, 당연합니다. 백작 가문 이상의 고위 귀족들은 불가피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탄신연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니까요.” “그래.”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말했다. “좋은 연회가 되겠군.” *** 론도(Londo)의 거리가 점차 들뜬 분위기로 물들어갔다. 탄신연회는 온 제국의 축제. 평민, 귀족할 것 없이 모두 기쁜 얼굴로 축제를 준비했다. “이번 탄신연회는 폐하께서 특별히 더 성대하게 준비할 거라는데?” “그래?” “응, 빈민가의 시민들에게도 무료로 음식과 술이 제공될 거라더군.” “캬, 역시 황제 폐하! 만수무강하시길!!” 시민들은 두런두런 모여 탄신연회에 대해 떠들었다. 당금의 브리티아 제국의 국력은 서 대륙... 아니, 세계 최강을 아우르고 있었다. 서대륙을 넘어 검은 대륙, 신대륙, 동방까지. 황실 십자가기가 꽂히지 않은 곳이 없었고, 가히 해가 지지 않을 정도의 방대한 영향권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견할만한 열강은 전통적 적대국인 서대륙 본토의 프랑소엔 공화국 정도? 본토의 또 다른 군사 강국 프러시엔 공국, 해양 왕국 스파냐, 신대륙의 신 연방도 있었지만, 브리티아 제국과 프랑소엔 공화국엔 미치지 못했다. 동방의 대국 청(淸, Qing)은 이미 기울어가는 달이었고. 어쨌든 그런 국력을 소유한 제국이니만큼, 국가적 행사인 탄신연회의 규모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 탄신연회 때 중요한 발표가 있을 거라는데?” “아, 들었어.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를 발표한다던데?” “그렇구먼! 황태자 전하도 민체스터 폐하를 이을 명군이 될 인재라는 소문이 자자하지?” “그렇지. 이미 여러 분야에 전권을 위임받아 국정에 참여 중이신데, 그 능력이 대단하시다더군. 성격은 차갑지만, 능력은 황실의 핏줄 중에서도 역대 최고에 가깝다고.” “하? 그런가? 정말 대단하군. 역시 로마노프 황가야! 그런데 자네는 그런 이야기는 다 어디서 들었나?” “이 친구야. 맨날 술만 먹지 말고, 신문 좀 읽게. 신문에 다 나와 있어. 바람둥이 3황자, 검제(劍帝) 전하의 새로운 애인이 누군지도 보도됐던데?” 남자의 말처럼 브리티아 제국은 언론이 굉장히 발달해있었다. 경제, 정치부터 유명인사들의 가십까지. 언론의 자유도 비교적 높았다. “크흠,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는 누가 될까?” “글쎄, 나도 궁금하네. 어질고 아랫사람을 아낄 줄 아는 현숙한 사람이 약혼녀가 됐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황태자 전하의 성격이 다소 차갑다니 그런 여인이면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제발 좋은 사람이 약혼녀가 되었으면 좋겠군.” 그러면서 둘은 한참을 황태자와 곧 발표될 약혼녀에 대해 떠들었다. 그리고 그 시간, 테레사 병원. 제국 시민들의 화제의 중심인 황태자와 엘리제는 진료를 보고 있었다. “피로감은 좀 어떠신가요?” “많이 좋아졌다.” “몸이 무거운 느낌이나 기력 없음은요?” “그것도 이제는 없어졌다.” “가슴이 초조하거나, 두근거리는 느낌이 새로 생기지는 않았나요?” 몇 번이고 반복된 진료. 엘리제는 늘 비슷한 질문을 반복했다. 증상은 어떠하냐? 혹시 불편한 느낌이나 부작용이 생긴 것은 없느냐? 그리고 이런 문답들이 끝난 후 뭔가를 종이에 적어 내리고 약용량을 결정하였다. “네, 약용량은 이대로 유지하면 될 것 같아요. 처방전 드릴 테니 약 받아가세요.” 진료가 끝났음을 알리는 말. “... 다 끝난 건가?”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엘리제는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론님?” “... 아니다.” 그와 그녀의 진료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소녀는 딱 필요한 문답만 하고 친절히 인사를 했다. 말이 인사지 축객령이었다. 진료 끝났으니 나가보라고. 린덴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료 시간도 엄청 짧았다. 느낌상 다른 환자 진료 시간의 반도 안 보는 것 같았다. ‘꼭 이렇게 빨리 나가라고 해야 하는 건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한 그는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의사와 환자가 필요한 진료만 보고 헤어지면 되지, 무슨 시간을 더 보내겠는가? 물론 진료 시간이 짧긴 했으나, 그건 소녀가 정확히 필요한 진찰만 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헤어질 때마다, 가슴 속에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이었다. 00031 1-6 그와 그녀의 진료 =========================================================================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때, 소녀가 의아하게 물었다. “론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병에 대해 물어볼 게 있나요?” 린덴은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다. 3일 뒤에 보지.” “네, 수고하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여전히 친절한 인사. 그 친절한 인사가 괜히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을 받을 때, 소녀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다음번만 오시면 더 오지 않으셔도 돼요.” “...!”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지? 안 와도 된다니? 이제는 더 오지 말라는 건가?” 갑자기 낮아진 목소리! 그 음성에 섞인 불쾌감에 놀란 엘리제는 답했다. “아... 이제 좋아져서요. 한 번만 더 오시면 될 것 같아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병원에 안 와도 된다는데, 왜 저런 반응이지?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직 병이 안 나은 것 같아 불안해 그런가? 엘리제는 환자를 안심시키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병원은 안 올 수 있으면 안 오는 게 좋아요. 그런 말도 있잖아요. 의사의 얼굴은 자주 안 볼수록 좋다고. 걱정하지 마시고 처방한 약 꾸준히 먹으면 다 좋아질 거예요.” 그렇게 설명하는데 할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 그래.” 그렇게 그날의 진료가 끝났다. *** 린덴은 초상(超上)능력을 해제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뒤 곧바로 황궁에 복귀해 업무를 보았다. 많은 분야의 국정을 보는 그인지라,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사실 진료 때문에 3일에 한 번씩 테레사 병원까지 가는 것은 굉장히 무리하는 것이었다. 병원에 갈 여유를 만들기 위해 그는 나머지 시간을 무척 바쁘게 보내야 했다. ‘그런데 이제 오지 말라니.’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기분 나빠할 일은 아니었다. 병이 좋아져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되는 거니 오히려 기뻐해야 일. 그도 그건 알았다. 알지만,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전하.”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린덴은 고개를 돌렸다. “혹시 안 좋은 일이 있으십니까?” 날카로운 인상. 그러면서도 조각을 다듬은 듯 잘생긴 얼굴. 차갑지만 아름다운 그 외모는 잘 벼려진 보검(寶劍)을 연상시켰다. 엘리제와 닮은 백금발을 보며 황태자는 그의 이름을 말했다. “렌.” 렌 드 클로랜스 남작. 엘리제의 큰오빠이자 클로랜스 후작가의 후계자. 그리고 로열나이츠인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 제국에서 손꼽히는 오러 나이츠, 군부의 차기 실권자. 동시에 황태자의 가장 믿음직스러운 측근이자 유일한 친우였다. “전하, 얼굴이 좋지 않습니다. 혹시 다시 몸이 안 좋아지신 것 아닙니까?” “아니다. 괜찮아. 몸은 좋아.”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몸은 좋았다. 어의가 준 약을 복용할 땐 아무런 효과도 없었는데, 엘리제, 그녀가 처방한 약을 먹으니 몸이 정말 좋아졌다. 신기할 정도로. 이젠 전혀 아무렇지 않았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 사실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이렇게 빨리 나은 거야? 무슨 약을 처방했길래?’ 빨리 나은 것은 분명 다행인 일이긴 하지만,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다 나았으니 이제 오지 말라고 해서 그러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 혹시 3황자 측이 무슨 일이라도?” “아니야.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그러지 말고 말씀해주십시오. 혹시 곤란한 일이면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자네 막내동생 때문에 그렇지 않나. 라고 말할 수도 없어, 황태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남작.” “네, 전하.” “자네 동생은 뭘 좋아하나?” “...??” 렌 드 클로랜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그건 어째서...?” “그냥. 사례할 일이 생겨서. 특별한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황태자는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변명하듯 말했다. ‘고마움을 갚긴 해야 하니까. 란돌 경도 살려주고, 내 병도 치료해주고.’ 그래, 이건 감사의 표시이지, 특별한 감정이 담긴 선물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황실의 일원으로서 은혜를 그냥 넘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뭘 좋아하나? 자네 동생 엘리제는?” 렌, 엘리제의 큰 오빠는 그 물음에 고민에 잠겼다. ‘뭘 좋아하지?’ 생각해봤으나 별로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천상 군인인 그인지라, 동생이 뭘 좋아하는지 따위를 관심 두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또 맨날 동생을 혼내기만 했지,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고. 그는 그나마 떠오른 것을 답했다. “먹을 것을 좋아합니다.” “뭐?” “특히 딸기 케이크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 ... .” 전혀 도움이 안 되는 답변이었다. 감사의 표시로 딸기 케이크를 덥썩 사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다른 것은 없나?” “망고 푸딩이랑 바나나 타르트도... 우유는 싫어하고...” “아니, 그런 것 말고. 뭐, 선물할만한 것으로!” “... ...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친우를 보며 황태자는 혀를 찼다. 이 일밖에 모르는 이 같으니라고! 도움이 되지가 않았다. “뭔가 선물을 하려는데... 뭐, 좋은 생각 없나? 자네는 영애들한테 고백할 때 어떤 선물을 했나?” “... ... .” 역시 꿀 먹은 벙어리. '내가 누굴 데리고 이런 질문을.‘ 황태자는 상대를 잘못 선택한 자신을 탓했다. 평소 3황자 패거리를 비롯한 정적들에게 막힘없는 독설을 내뱉는 렌 남작이지만, 한 가지 지독히 못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여성을 상대하는 것! 무드 없고, 무뚝뚝하고, 재미없고, 독설가인 렌 남작은 여자에 완전히 젬병이었다. 지금까지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을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친우를 탓할 수도 없는 게 황태자 본인의 성격도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일에만 빠져 산 그도 여자 손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셋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는 이 황궁, 아니 론도 전체에서 최고로 꼽히는 바람둥이를 떠올렸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계승권에서 밀리는 황자이면서도 검제(劍帝)란 광오한 별명으로 불리는 이. 바로 그의 셋째 동생이자, 정적인 3 황자였다. ‘미하일.’ 린덴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정적이라도 동생에게 특별한 유감은 없다. 하지만 ‘그날’의 사건을 일으킨,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자신의 삶을 무채색의 지옥으로 만든 ‘그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그런데 그때, 총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독설가인 렌 남작이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보석은 어떻습니까?” “보석?” “네, 생각해보면 엘리제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반짝이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드레스도 항상 보석 달린 것을 좋아했고요.” “보석. 그렇군.”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성의를 표시하기 좋은 선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모든 여자가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클로랜스 영애도 좋아할까?’ 그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던 그녀를 떠올렸다. 허름한 진료복에 보석은커녕 간단한 장신구도 하지 않고 있던, 그러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던 모습. 그런 그녀와 보석은 왠지 매칭시키기 어려웠으나, 신뢰하는 수하이자 그녀의 오빠가 하는 말이니 믿어보기로 했다. 그는 시종에게 일러 선물용 보석을 마련했다. 영롱한 붉은빛을 내는 루비였다. 그리고 3일 뒤 마지막 진료를 받으러 가, 진료가 끝난 후 감사의 선물을 내밀었다. *** “사양하겠어요.” 1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 ... .” 칼같이 단호한 거절에 린덴은 잠시 말을 잃었다. “어째서지?” “이런 걸 바라고, 란돌 경이나 론님을 치료한 것은 아니에요.” “그저 감사의 표시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전 의사예요.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당연한 일. 당연한 일을 한 것뿐인데 이런 과분한 선물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 ... .” 그러면서 그녀는 상대가 기분 상하지 않게 친절히 미소 지었다. “좋은 마음으로 주신 것은 알고 있어요. 마음은 감사합니다.” “... ... .”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이런 선물을 받을 수는 없어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가 만약 간단한, 그러니까 과일이나 과자 같은 성의만 담긴 선물을 주었다면 기쁘게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선물, 한눈에 봐도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루비를 어떻게 받겠는가? 그건 그녀의 직업윤리가 허락지 않았다. 지구의 한국에서 가난하게 의사 생활을 할 때도 이런 촌지(?)는 절대 받지 않았었다. “알겠다. 미안하군. 괜한 선물을 주어서.” “기분 상하셨으면 정말 죄송해요.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기분이 나쁘진 않아. 다만.” 그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약간은 예상한 대로랄까? 연애 바보 렌 남작의 조언을 따를 때부터 왠지 느낌이 안 좋긴 했다. 다만 자신이 알던, 철없고, 사치와 허영만 밝히던 어린 엘리제가 이렇게 변한 게 놀랍달까? 솔직히 조금은 감탄스러웠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뭘요?” “난 절대 빚을지지 않는다. 너한테 받은 도움들을 어떻게 갚지?” “아, 그건. 진료비를 내는 것으로. 귀족이니 분명 과다 청구되었을 텐데...”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알량한 진료비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닌 걸 알지 않나?” “괜찮은데...” “원하는 걸 말해. 난 빚지고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누가 보면 도움을 받은 사람이 아닌, 빚 독촉하는 사람처럼 권위적인 목소리였다. 결국, 엘리제는 말했다. “딸기 케이크요.” “뭐?” “저 딸기 케이크 좋아해요. 혹시나 나중에 우연히 만날 일이 있으면 딸기 케이크나 한번 사주세요. 이왕이면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 걸로요. 거기 케이크가 엄청 달면서도 상큼하거든요.” “... ... .” 남자가 입을 다물자, 엘리제가 진심이라는 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저 딸기 케이크 엄청엄청 좋아해요. 그런데 집에선 어머니가 몸에 안 좋다고 잘 못 먹게 한단 말이에요.” 작은 오빠인 크리스가 보면, 뒷목을 잡을 만큼 귀여운 목소리였다. 항상 어른보다 더욱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던 그녀가 순간 또래 어린 소녀처럼 보였다. “망고 푸딩은?” “네?” “망고 푸딩은 안 좋아하나?” “아, 네! 그것도 좋아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바나나 타르트도 좋아하지? 우유는 싫어하고.” “...!” 엘리제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어떻게 이렇게 잘 알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눈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았다. 저 남자가... 평생 절대 안 웃을 것 같은 남자가 옅게 미소 지은 것이다! “알겠다. 그렇게 하지.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 딸기 케이크. 그것뿐 아니라,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까지.” “...!” 그 미소에, 알 수 없게 가슴이 떨렸다. 두 번의 삶. 그녀는 모르고 있었지만, 지난 삶을 포함해 처음으로 마주하는 남자의 진실 된 미소였다. 과거 그토록 바라던 그 미소. “모두 실컷 먹게 해주지. 앞으로 말이야.” <1막 : Wish - Fin> <2막 : 小和田 雅子 ??? - Start> !! 내일 (토요일 00:07)에 뵙겠습니다 !! !! 연재에 관한 중요 공지가 있습니다. 꼭 다음 편의 공지를 확인해주세요.ㅠㅠ 죄송합니다. !!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 프리미엄 연재로 전환됩니다. 00032 2-1 탄신연회 ========================================================================= <2막 : 小和田 雅子 ???> <2-1 : 탄신연회> *** 그렇게 남자와의 진료가 끝났고, 드디어 탄신연회가 다음날로 다가왔다. 론도 전체가 일주일 동안 진행되는 탄신연회를 준비하느라 들썩였다. 테레사 병원도 탄신연회 기간에는 휴진이라 구호소만 열어 응급 환자만 받았고, 도제인 엘리제도 휴가를 받았다. “여보, 이 옷은 어떤가요? 괜찮은가요?” “당신이 입는 옷은 다 잘 어울린다오. ” “그러지 말고 자세히 좀 봐주세요.” “크흠, 정말 다 괜찮은데. 뭘 고른다는 건지.” “봐주기 귀찮아서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요! 빨리 잘 봐줘요.” “저, 정말 다 예쁘단 말이오.” 평소 연회에 관심이 없던, 새어머니도 들떠 연회에 입을 드레스를 미리 준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엘리제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두 분은 이전부터 항상 사이가 좋았다. ‘이번엔 꼭 지켜드려야지.’ 지난 삶, 새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있으니까! ‘아직은 발병할 시기가 되지 않았어. 절대 놓치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과거를 더듬었다. 새어머니가 병이 생기는 시기는 앞으로 몇 년 뒤였다. 그런데 그때, 작은 오빠 크리스가 자신을 불렀다. “리제, 너는 따로 준비 안 하니?” “했어요. 이전에 봐놨던 드레스 입고 가려고요.” “그래?” 크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탄신 연회 때마다 신이 나 저택을 누비던 동생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실제로 엘리제는 탄신연회에 관심이 없었다. 아니, 관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안 가고 싶었다. ‘가서 뭐해. 좋은 일도 없었는데.’ 좋은 일은커녕 이전 삶, 15살 탄신연회는 끔찍했다. 황태자와 자신의 약혼이 발표되었으니까. ‘그때는 그게 비극의 시작인지도 몰랐지.’ 그리고 탄신연회에 가기 싫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시험공부 해야 해.’ 의사 자격시험이 코앞이었다. 탄신연회 끝나고 보름 뒤였으니까. 아무리 지구의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그녀이지만, 공부를 안 할 수는 없었다. ‘현대 지구와 이곳 의학 수준의 차이에 대한 것은 공부해야 해. 지구의 의학 수준으로 답하다 오답 처리될 수도 있으니까.’ 마음 같아선 충분히 공부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탄신연회는 얼굴만 비치고 바로 돌아와야겠어. 집에 돌아와서 공부해야지.’ 그녀는 그렇게 공부벌레 같은 생각을 했다. “리제, 무슨 생각하니?” “아... 아니에요.” “흐음?” 크리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얼굴이 조금 창백한데 괜찮니?” 그러면서 그는 동생의 이마를 살짝 만졌다. “어? 열이 있는 것 같은데?” “??”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열이 있다고?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니야. 얼굴도 창백한 게 이상한데?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고 있는 것 아니니?” “아니에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크리스의 걱정에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저었다. “봐요. 멀쩡하잖아요.” “아니야. 좀 쉬어야겠다. 책은 그만 보고 침실에 들어가서 누워있어.” 그는 엘리제가 읽고 있는 의학 서적을 강제로 덮었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조금만 더 보고 들어갈게요.” “안 돼!” “오라버니. 응? 부탁이에요. 응?” 그녀는 작은 오빠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를 부렸으나, 이런 면에서 크리스는 단호했다. “절대 안 돼! 오늘은 푹 쉬어. 그렇지 않아도 몸도 약하면서 병이라도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침대로 끌려갔다. “괜찮은데...” “우리 리제 착하지? 책은 오빠가 가져갈 테니 오늘은 꼭, 절대로 쉬렴. 알았지?” 크리스는 크림처럼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방에 수북이 쌓여있는 책들을 전부 몰수해 가져가 버렸다. 동생에게 한결같이 부드러운 태도와 다르게 행정부에서 일 처리는 칼 같다는 작은 오라버니다운 단호한 행동이었다. 결국,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된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좀 무리하긴 했지.’ 저녁까지 병원에서 일한 후, 집에 온 후에는 새벽까지 공부했다. 웬만한 남자도 버티지 못할 일정. 피곤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어지럽기도 했다. ‘그래도 지구에선 이것보다 훨씬 더 무리했었는데.’ 두 번째 삶, 인턴, 레지던트 시절에는 말도 안 되는 강도로 일했다. 3일을 합쳐 딱 3시간(과장 안 하고 정말로!)만 잔 적도 있고, 이틀 동안 한 끼도 못 먹고 일한 적도 있다. 그녀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의사는 인턴, 레지던트 시절 그렇게 일한다. ‘그래도 잘 버텼었는데. 확실히 송지현 때에 비해, 지금 몸은 약하구나. 잔병치레도 많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자자.’ *** 더 안 좋아졌다. “아...” 눈을 뜬 엘리제는 신음을 흘렸다. ‘아파... 열이...’ 온몸이 뜨거우면서도 추웠다. 전형적인 발열의 증상이었다. 머리도 아프고, 띵하니 어지러웠다. ‘뭐지? 단순 감기(Common cold)? 상기도 감염(URI)?’ 아무래도 최근 무리해 몸살이 온 것 같았다. ‘아... 오늘 탄신연회에 가야 하는데. 하필.’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탄신연회 첫날, 축일이었다. 수도에 머무는 고위귀족으로서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면 안 된다. 마침 그때, 노크 후 방문이 열리며 작은 오빠가 들어왔다. “리제! 일어났니? 몸은 괜찮아? 이제 준비해야지?” 부드럽게 말하던 크리스의 얼굴이 굳었다. 동생의 창백한 안색을 본 것이다. “리제?” “아... 네.” 크리스가 급히 동생의 이마를 만져보고 깜짝 놀랐다. 열이 펄펄 끓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봐!” 그는 급히 밖으로 나갔고, 엘리제는 몽롱한 눈으로 침대에 누웠다. ‘아파...’ 그리고 잠시 후, 크리스가 가문의 주치의를 데리고 다시 돌아왔다. 아버지인 엘 후작도 함께였다. “엘리제!” 딸의 모습을 본 엘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엘리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괘, 괜찮아요.” 하지만 그 모습이 더 아파 보여, 후작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테레사 병원 놈들! 도대체 아이를 얼마나 부려 먹었기에!! 탄신연회만 끝나기만 해봐라! 다 감봉이야! 특히 그레이엄 그놈은 무조건 모가지고!’ 밖에선 명재상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명예로운 귀족으로 칭송받는 후작이지만, 알고 보면 가족만 아는 팔불출인 후작이 이를 갈았다. “잠깐 진료하겠습니다.” 함께 들어온 가문의 주치의가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엘리제가 추정 진단을 알려주었다. “증상을 봤을 때 상기도 감염(Upper respiratory infection) 같아요.” 그 말에 주치의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정확한 의학 용어였기 때문이다. “한번 보겠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진찰을 했다. 열은 무려 38.7도.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가씨의 말씀대로 상기도 감염으로 보이는군요.” “괜찮은 건가?!” “괜찮은 건가요?” 아버지와 작은 오빠가 동시에 물어봤다. 걱정 가득한 그들의 얼굴에 주치의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 상기도 감염은 감기와 같은 거니 푹 쉬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다만 열이 높아 당분간 괴로울 테니 약을 처방하겠습니다. 잘 챙겨 드십시오.” 그러고 주치의가 나갔다. 엘리제가 약을 먹으며 보니, 진통제와 해열제였다. ‘열이 더 오르진 않겠지? 먹고 좀 괜찮아야 할 텐데.’ 엘 후작이 딱딱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엘리제.” “네?” “이제부터 병원에 나가는 것은 금지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병원에 나가 이렇게 아픈 거잖아. 몸도 약한 애가 무슨 의사라고! 내 언제고 이럴 줄 알았다. 절대 안 돼!” 얼마 전 병원에서 딸의 칭찬에 기뻐하던 것은 새까맣게 까먹고 그는 그렇게 화를 내었다. “아, 아니에요, 아버지. 이거 제가 공부하느라 무리해서 그런 거예요. 병원에서는 전혀 무리하지 않고 있어요. 다시는 안 아플게요.” “하여튼 안 돼!” 근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팔불출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엘리제는 땀을 뻘뻘 흘리며 달래야 했다. “앞으로 절대 안 무리 안 할게요. 아프지도 않고요. 그러니 화 푸세요, 아버지. 네? 네? 아버지, 아빠. 응?” 그렇게 애교 섞인 노력을 한 다음에야 간신히 아버지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옆에서 작은 오빠가 걱정스레 말했다. “탄신연회는 갈 수 있겠니, 엘리제?” “가야죠.” “무리일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안 괜찮아도 무조건 가야죠.” 다른 날도 아니고, 첫날 축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다른 귀족도 아니고, 현 제국의 최고 명문 클로랜스 가의 영애였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지 않는 한, 무조건 가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단호히 말했다. “안 가도 된다. 누가 뭐라 한다고? 나, 엘 후작의 딸이 아프다는데.” “아버지...” “폐하가 뭐라 해도 내가 책임지마.” 사랑과 걱정이 담긴 장담. 엘리제는 웃음을 지었다. 행복이 담긴 미소였다. ‘이전 삶에선 항상 엄한 모습만 보이셨는데.’ 과거엔 이런 행복을 경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느끼는 이 행복들이, 가족들이 너무나 소중했다.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괜찮아요. 그냥 얌전히 앉아만 있다가 폐하가 축일 기념문만 낭독하면 바로 돌아올게요. 어차피 전 어려서 연회 때 따로 할 일도 없으니까요.” 재상인 아버지. 행정부의 고위 관료인 작은 오빠는 연회 때도 많은 정치적 일을 해야겠지만, 자신이야 할 일이 없었다. ‘지난 삶 때는 약혼녀로 발표돼 정신이 없었지만, 이번엔 아니니까.’ 어차피 지난 삶과 다르게 이번 탄신연회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있다 돌아오면 된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이번 탄신연회 때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자신이 어떤 일을 해낼지. 전혀 상상도 못 하고 있었다. 전혀. 그녀가 해낼 일. 그건 이 순간 아무도 짐작 못 한 대형사고(?)였다. *** “브리티아 만세!” “로마노프 만세!! 민체스터 황제 만세!!!!” 온 거리가 축제로 물들어있었다. 론도의 시민들은 황실에서 제공한 공짜 고기와 맥주, 와인에 환호성을 질렀다. 황궁의 탄신연회와 별개로 시민들은 각자 자기들의 축제를 즐겼다. “다들 좋아하는군요.” “기쁜 날이니까. 그나저나 크리스, 이번 준비에 많이 힘썼다 들었다. 수고 많았다.” “별말씀을요. 아버지가 더 고생하셨죠. 요즘 크림 원정 때문에 재정부에서 한창 팍팍하게 굴던데.” 재상과 행정부의 관료는 그렇게 덕담을 나눴다. “렌은?” “형은 기사단에서 바로 연회장으로 온 데요. 요즘 2차 크림 원정군 논의가 있어서 한창 바쁜 것 같더라고요. 검은 대륙 서북부를 프랑소엔 공화국이 평정함에 따라 상황의 변동이 있어서.” “그래.” 그렇게 마차에서 부자는 국정을 논의했다. 그리고 새어머니는 딸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괜찮니, 엘리제?” “네, 어머니.” “폐하께서 축일 기념문만 낭독하면 바로 돌아오렴. 나랑 같이 오자구나.” “어머니는 조금 더 연회를 즐기다 오세요. 많이 기대하셨잖아요.” “아니야. 네가 이렇게 아픈데, 연회는 무슨 연회니.” “저 정말 괜찮아요. 그냥 감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마차는 황궁 연회장에 도착했다. 엘리제는 작은 오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대니 핑그르르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으나,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리제, 절대 무리하면 안 돼?” “네, 알겠어요. 저 신경 쓰지 말고 오라버니 일이나 잘하세요.” “일? 무슨 일?”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맨날 혼자시잖아요. 이번 연회 때는 열심히 해서 꼭 좋은 영애 만나도록 하세요. 어머니, 아버지가 말은 없으셔도 얼마나 기다리시는지 몰라요.” “엘리제, 너!” 동생의 당부에 크리스가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새어머니가 끼어들었다. “그래, 엘리제 말이 맞다. 너와 렌 모두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 남들은 너희보다 훨씬 어릴 때부터 연애다, 로맨스다, 다 말이 많은데 말이야. 일도 좋지만, 너무 일만 하지는 마렴.” “어, 어머니.” “크흠, 그래. 이 아비도 그 말에는 동의한다. 이 아비가 너희 나이 때는 말이야. 그렇게나 인기가 많았는데.” 엘 후작의 말에 새어머니가 눈을 흘겼다. “여보!” 지금의 모습에선 상상하기 어렵지만, 엘 후작은 리즈 시절 나름 바람둥이였다고 한다. 물론 사실인지는 모른다. “크흠. 어쨌든 너나 네 형이나 다들 연애에 관심이 없어서... 도대체 언제나 손주를 보여줄는지.” “...네.” 크리스는 풀이 죽어 답했다. 다들 쿡쿡 웃은 후, 연회장에 입장했다. “클로랜스 후작가(家) 입장이오!!!” “...!!” 시종이 큰소리로 그들의 입장을 알렸고, 제국 최고 명문가의 입장에 거대한 연회장의 시선이 한 번에 몰렸다. “재상께서 오셨네.” “옆에 청년은 차기 행정부의 부부장으로 꼽히는 크리스 경이군. 그런데 옆에 저 아름다운 레이디는 누구지?” “누구긴. 레이디 엘리제 아닌가.” “아! 차후 브리티아 제일의 미녀가 될 거라 기대된다는? 역시 듣던 대로 아름답군.” 사람들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감탄대로 엘리제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백금발, 하얀 피부,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절제된, 하지만 기품을 더하는 옅은 색상의 드레스. 꾸미지 않은 평소에도 인형처럼 예뻤지만, 깔끔히 단장한 지금은 마치 그림에 나오는 요정이 현현한 것 같았다. 아파서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오히려 작은 몸집과 더불어 여린 매력을 더해주었다. “... ... .” 사람들은 잠시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그 시선에 답하듯 살짝 미소를 지었다. 수줍은 듯한, 아름다움을 더하는 미소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그녀는 생각했다. ‘빨리 돌아가고 싶다. 연회는 싫어. 차라리 수술장이 낫지.’ 이전 삶을 살며 연회는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다. 음식, 술, 수다, 남자, 춤! 참 덧없었다. 차라리 수술장에서 수술하는 것이 보람차고 즐거웠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긴장감!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보람! 그녀의 삶에서 절대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무료 연재 마지막 회입니다. 지금까지 아껴주신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프리미엄 첫연재는 월요일 오전... 혹은 점심 경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 작품 후기 ============================ 많은 분이 봤다고 판단하여 기존에 작가 후기에 올렸던 장문의 사과문은 그만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기원합니다. Ps. 어제 삭제된 공지부터 해서 1200개가 넘는 코멘트가 달리며 서로 간의 많은 상처가 오고가는 것 같아 부득이 코멘트 란을 일시적으로 닫습니다. 소통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더 깊은 상처를 막고자 함이니 이해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음주 월요일 연재가 재개될 때 코멘트 창은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00033 2-1 탄신연회 %3C유료 연재 시작 편입니다!!%3E ========================================================================= 그때 한 중년의 귀족이 그들에게 다가와 엘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오, 후작. 웨일에서 늘 이야기 많이 듣고 있소.” “아, 공작 전하.” 푸근한 인상의 중년인. 브리티아 섬 중, 론도의 서쪽 지방, 웨일의 대귀족인 하버 공작이었다.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랜스 가의 차남, 크리스라고 합니다.” “경도 이야기 많이 들었소. 행정부의 촉망받는 인재라던데? 고생이 많소.” 그러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둘은 공작의 눈치를 받고,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아마 웨일 지방의 일로 논한 일이 있는 듯했다. 새어머니도 오랜만에 만난 친우에게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덕분에 엘리제는 자연스레 홀로 연회장에 남겨졌다. 그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잡고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구석 어디에 쉬고 있을 만한 곳 없나?’ 예전이라면 몸이 아파도 어떻게든 연회를 즐기려 했겠지만, 지금은 별 관심 없었다. 아예 밖에 나가서 앉아 있고 싶었지만 오자마자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기, 저 구석. 저기면 쉴 수 있겠다.’ 그녀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찾아내 걸음을 옮겼다. “하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걸었다고, 어지럽고 머리가 아팠다. 온몸이 때린 듯 아파 아무 데나 눕고 싶었다. ‘빨리 돌아갈 수 있으면…….’ 하지만 황제가 축일 기념문을 낭독할 때까지는 아직 한참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틸지 막막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요란한 나팔 소리가 울렸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 엘리제는 놀란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가 벌써?’ 황태자면 린덴 드 로마노프. 이전 삶, 그녀의 남편이었던지라 성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회를 지독히 싫어해, 항상 끝나기 직전에나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런데 벌써?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많은 이의 인사를 받으며, 황족의 자리에 올라간 그가 주변에 기립한 이들을 놔두고,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를 찾기라도 하는 모습. “……?”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전하?” 주변의 대신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 구석에서 그 모습을 보던 엘리제도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누구 찾는 사람이라도 있나?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시선이 정확히. 수많은 인파의 장벽을 뚫고 정확히 그녀가 자리한 구석으로 꽂혔다. “……!” 그 시선과 마주한 엘리제는 순간 흠칫했다. ‘날 보는 건가?’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서로를 식별하기도 어려운 먼 거리. 그녀를 알아보기도 어려울 것이고, 알아본다 해도 자신을 저렇게 빤히 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주변에 누가 있지?’ 옆을 둘러보았으나, 그녀 외에는 몇몇 시종밖에 없었다. ‘모르겠네.’ 어쨌든 자신을 보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그’도 연회에 오겠구나. 언제쯤 올까?’ 황태자를 보니 문득 ‘그’가 생각이 났다. ‘바람둥이라서 맨날 연회에 일찍 도착해 영애들을 꼬셨는데. 오늘은 안 보이네?’ 그렇게 생각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황태자와 더불어 또 다른 황족.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 그리고 이전 삶, 그녀의 유일했던 친구. ‘참 신기하지. 가까워야 할 사람들과는 그렇게 파국을 맞고, 가장 멀었어야 할 ‘그’와는 친구로 지냈고.’ 어차피 자신은 황실과 상관없는, 의사의 삶을 살 것이기에 황태자는 물론 ‘그’와도 인연을 가질 일이 없겠지만 한 번쯤 다시 보고 싶었다. 자신 혼자만 기억하는 추억이겠지만 ‘그’와의 인연은 나름 소중했었으니까. “어머, 이게 누군가요? 오랜만이에요, 클로랜스 영애.” 그때, 높은 고음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신경질적인 외모의 귀족 아가씨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더라?’ “저…… 실례지만 누구신지……?” “뭐예요? 지금 제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하! 기가 막혀!” 귀족 아가씨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어쩌지?’ 저 아가씨는 그녀를 몇 달 만에 만나는 것이겠지만, 엘리제는 2번의 삶, 30년이 넘어 만나는 것이었다. 스쳐 지나간 인연까지 잘 기억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픈 머리로 고민해 간신히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버몬트 영애.” “기억해 주셔서 참 영광이군요! 지난번 영애가 말씀했던 대로 클로랜스 가문에 비하면 참 보잘것없는 가문인데!”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보아하니 시비를 걸러온 것 같았다. ‘버몬트 백작가. 귀족파 대표 가문 중 하나.’ 버몬트 백작가는 차일드 후작을 필두로 하는 귀족파 가문 중 하나였다. 황제파의 수장인 클로랜스 가문과는 당연히 앙숙 사이. ‘사교계에서도 황제파, 귀족파로 나뉘어 참 많이 으르렁거렸었지.’ 가문의 정치적인 문제는 사교계의 여성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이전 삶, 그녀는 황제파 귀족 영애들의 우두머리로 귀족파 영애들과 수없이 싸웠었다. 물론 그건 지금 시점으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 황태자와의 약혼이 공표된 뒤에 벌어질 이야기로, 아직 그녀는 사교계에 별 인지도가 없었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았고. 성격만 못됐을 뿐, 그럴 만한 카리스마도 부족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버몬트 영애에게 이전 무슨 잘못을 했던 거지?’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 시비를 거는 것은 분명 자신이 이 영애에게 어떤 잘못을 했던 탓일 것이다. ‘뭐였을까?’ 고민한 끝에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거였군.’ 대단한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한 당사자에겐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을 터. 그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버몬트 영애.” “뭐죠?” “이전에 영애의 가문에 대해 철없이 말했던 점 죄송합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러고 엘리제는 머리를 숙였다. “……!” 그 생각지도 못한 사과에 버몬트 영애는 깜짝 놀라 입을 벌렸다. 시비를 걸러 왔으나 이런 반응은 상상도 못했다. 저 오만하고, 자신만 아는 클로랜스 영애가 이런 사과라니? 혹시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싶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사과였다. “이런다고 당시의 불쾌감이 없어지진 않겠지만…… 죄송합니다. 제가 어려 잘 모르는 마음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그, 그렇게까지 말하니 저도 넘어가죠.” 당황한 버몬트 영애는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녀가 아는 엘리제는 절대 이런 사과를 할 인물이 아니었다. 성격도 성격이지만, 클로랜스 가문에 대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쳐 있는 그녀가 이렇게 선선히 고개를 숙이다니? 하지만 엘리제의 생각은 이랬다. ‘잘못했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맞지. 잘못했는데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그것이 오히려 가문의 명예를 먹칠하는 것일 터.’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사과할 수 있었다. 그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잘못을 알고도, 외면하는 것이 더 자존심을 떨어뜨리는 것이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오랜만이에요, 클로랜스 영애. 잘 지내셨나요?” 일반 귀족 영애와 다른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음성.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두 번의 삶이 지났지만, 선명히 기억나는 목소리였다. 과연 똑똑히 떠오르는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 지구의 모델같이 큰 키. 호리호리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 약간은 짙은 피부색은 건강하면서도 시원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병약해 보이는 엘리제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미인. “차일드 영애.” 그녀는 다름 아닌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공녀였다! “다행이네요. 제 이름은 기억해 주어서.” 유리엔 드 차일드.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똑같은 말이지만, 버몬트 영애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비꼬는 게 아닌,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는 듯한 음색. 실제로 비꼬는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유리엔,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차일드 영애.’ 엘리제는 복잡한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독사 같은 차일드 후작과 다르게 유리엔과는 여러모로 애증이 교차하는 사이였다.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좋기는커녕 원수 같았다. 차일드와 클로랜스. 가문끼리 지독한 앙숙이었고, 사이가 나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유리엔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황태자를 짝사랑했었다. 즉, 그녀는 적대 가문 출신인 것도 모자라 개인적으로는 연적이었던 것이다. ‘정말 지독히도 싸웠었는데.’ 문자 그대로,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원수처럼 지냈었다. 당시에는 그게 당연하다 생각했었는데……. ‘꼭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엘리제는 씁쓸히 생각했다. 지구에 살며 이전 삶을 떠올릴 때. 유리엔 생각을 가끔 했었다. 가문의 입장이 다르고, 같은 사람을 사랑했을 뿐. 그녀는 객관적으로 참 멋진 여성이었다. 돈놀이꾼 차일드 후작의 딸이라곤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차라리 내가 아니라 그녀가 황후가 되었으면 여러모로 좋았을지도 모를 텐데.’ 심지어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유리엔이 황태자와 결혼했으면, 자신처럼 비극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파도 황실의 편으로 어느 정도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이고. ‘이번 삶에선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도 좋겠구나. 그토록 황태자를 사랑했으니까.’ 정치적 입장상 어려울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이 빠질 것이니 혹시 몰랐다. 그녀가 황태자를 사랑하는 감정도 보통 깊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죠?” 유리엔이 물었다. 엘리제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차일드 영애.” “…….” 유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엘리제의 말투가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싹수없던 평소와 다른 것은 그렇다 쳐도, 목소리에 은은한 반가움이 숨어 있었다. ‘뭐지? 내가 잘못 느낀 거겠지?’ 하지만 그녀가 잘못 느낀 것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실제로 그녀를 반가워하고 있었다. 엘리제도 자신의 감정이 신기했다. ‘그렇게 싸웠는데,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유리엔은 그런 엘리제를 보며 헛기침을 했다. “오늘 영애는 조금 이상하군요.” 사실 유리엔이 엘리제에게 온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었다. 평소 도가 넘치게 예의가 없는 엘리제를 따끔하게 혼내려고 한 것이었는데, 이건 뭐. 맥이 빠졌다. 못된 살쾡이가 순한 토끼로 변하기라도 한 느낌이다. “…….” “…….”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유리엔은 탐색하는 듯한 눈초리로, 엘리제는 그저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그런데 한참 엘리제를 살피던 유리엔은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챘다. “안색이 안 좋은데, 몸이 안 좋으신가요?” “네, 조금 감기 기운이 있네요.” “조심하시지 그랬어요. 요즘 감기가 매우 독하던데.” 말을 하고 유리엔은 아차 후회했다. 서로 이런 말을 나눌 사이가 아닌데. 하지만 클로랜스 영애의 반응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걱정에 감사드립니다, 영애. 영애께서도 건강 조심하도록 하세요.” 공손한 감사. 유리엔 공녀는 기이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도대체 넌 누구냐 하는 눈빛이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쉬도록 하세요.” 그러고 유리엔은 등을 돌렸다. 그런데 엘리제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저! 영애.” “네?” “저…….” 엘리제는 바로 이야기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유리엔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으나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 사실 엘리제는 유리엔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당당하고 멋진. 제 아버지와 다르게 인애(仁愛)를 갖추고, 마지막 순간에는 기품을 잃지 않았던 여자. 그게 그녀가 기억하는 유리엔이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은 자신과 같았지만, 그녀는 자신과 전혀 다른 여인이었다. ‘친구가 되면 좋겠지만.’ 의사 생활을 하다 시간이 나면 저런 친구와 같이 차와 케이크를 먹으며 쉬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서로의 집안을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아.” 유리엔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세요.” “아, 아니에요.” 유리엔은 알 수 없다는 듯 엘리제의 눈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왜 자신을 저런 눈빛으로 본단 말인가? 결국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부담되니 그런 눈으로 그만 보고, 다음에 기회가 되면 차나 한잔해요.” “……!” 그 말에 엘리제는 밝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꼭.” 물론 둘에게 그럴 기회가 올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 우연이라도 한 번쯤 그녀와 차를 마셔보고 싶었다. “후우, 그러면 가볼게요.”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아, 참. 클로랜스 영애.” “……?” 유리엔이 물었다. “오늘 발표의 주인공이 누가 될지 아세요?” “네? 무슨 말인지?”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 말이에요. 오늘 황제 폐하께서 축일 기념문 낭독 후, 누가 전하의 약혼녀가 될지 발표한다셨잖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몰라요.” “정말요?” “네, 몰라요.” 하지만 유리엔은 믿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말했다. “혹시 영애 아니에요?”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34 2-1 탄신연회 ========================================================================= “……!” 엘리제의 표정이 굳었다. 지난 삶, 약혼 발표 때가 떠올랐던 것이다. “버킹엄 공작의 공녀, 프러시엔 공국의 공녀, 스페냐 왕국의 공주, 합스부르엔 왕가의 왕녀 등 여러 후보가 있지만 사실 영애가 가장 유력하지 않나요?” “아니에요. 전, 절대로 아니에요.”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난 삶에선 자신으로 발표가 났었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유리엔은 더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참 부럽네요.” 깊은 슬픔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전 삶의 자신처럼 황태자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녀와 황태자 사이에는 로미오와 줄리엣보다 깊은 간극이 있었다. 무저갱보다 깊은 간극이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하여튼 쉬도록 하세요.” “네, 영애. 좋은 시간 되세요.” 유리엔이 물러가고, 엘리제는 기둥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녀와 재회한 게 반갑긴 했지만 대화를 나누었더니 더 어지러웠다. ‘조금만 쉬자. 빨리 집에 갔으면.’ 다행히 구석진 자리라 아무도 자신을 보는 이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렇게 끝날 때까지 있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를 보는 이가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란 것을. 아니, 오히려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다. *** 오늘 엘리제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몸이 안 좋아 안색이 하얬지만, 그게 가녀린 매력을 돋우었다. 수많은 귀족 영애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꽃. 연회장의 수많은 귀족 영식이 그런 그녀를 보며 가슴 설레 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녀에게 직접 다가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곧 있을 황태자의 약혼녀 발표! 혹시 그녀가 그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물론 후보자가 여럿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그녀가 가장 유력한 후보자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 “마음에 안 드는군.” 그녀를 보며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뭘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정확히는 그녀를 보고 있는 남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탄신 연회에 왔으면 정숙히 연회나 즐길 것이지, 뭘 저렇게 쳐다보고 있단 말인가? ‘마음에 안 들어.’ 그리고 그녀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왜 저렇게 입고 와서. 저렇게 차려입고 오니 남자들이 쳐다보잖아.’ 사실 탄신 연회에 오는데 예쁘게 단장하고 오는 게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 전하?” 친우, 렌의 물음에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혹시 심기를 불편하게 한 자라도? 누군지 말씀만 하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자네 막내동생이다만. 이렇게 말할 수도 없어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렌.” “네?” “자네 동생 말이야. 혹시 몸이 안 좋은가?” 초상(超上)능력자이자, 오러 나이츠인 황태자는 시력이 일반인보다 훨씬 좋았다. 저 멀리 보이는 안색이 하얬다. 평소에도 하얬지만 좀 더 창백한 느낌? 계속 움직이지 않고, 한자리에 있다가 기둥에 기대 있는 모습도 이상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렌 남작. 동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별로 관심도 없어 보였다. 도움 안 되는 친우를 보며 한숨을 내쉰 황태자는 고민했다. ‘한번 가볼까?’ 하지만 이곳 자신의 자리와 그녀가 있는 곳은 너무 멀었다. 커다란 연회장의 끝과 끝? 그리고 거리는 둘째 치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국정대신들 때문에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왜 저런 곳에 있는 거야? 마음에 안 들게.’ 그녀가 마음에 안 드는 이유가 또 하나 추가되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 황태자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림같이 잘생긴 남자가 엘리제에게 다가가 춤을 신청한 것이다! 더구나 저 남자는?!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린덴의 눈이 딱딱히 굳었다. *** “보석처럼 아름다운 레이디. 저에게 레이디와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순간 엘리제는 그 말을 못 알아들었다. 머리도 아팠고, 춤 신청을 받아본 지 너무 오랜만이었던 것이다. “레이디?” “아…… 저한테 말씀하신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엘리제는 눈을 깜빡거렸다. 길거리를 걸으면 누구나 쳐다볼 만한 미남이었다. 부드러운 느낌이었는데, 갈색 머리칼이 자연스럽게 곱슬거렸다. 그런데 뭔가 브리티아 제국인과 느낌이 달랐다. ‘프랑소엔인?’ 무엇보다 언어. 남자가 그녀에게 건 말은 브리티아어가 아니라, 혀를 많이 굴리는 서 대륙 본토의 프랑소엔어였다. 전통의 강국인 프랑소엔어는 서 대륙 각국의 귀족 사회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제도 무리 없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레이디의 아름다움에 영혼을 빼앗긴 제 이름은 루이라고 합니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사절로 탄신 연회에 참여했습니다.” “……!” 그의 이름을 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루이 경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남자는 은은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의 만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맙소사, 루이라고?!’ 그녀는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봤던 초상화랑 똑같아. 동명이인이 아니야. 그 루이가 분명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막의…… 전갈?” “……!” 남자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풀어졌다. “고결한 레이디의 입에 담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별명입니다. 그냥 루이라 불러주십시오.”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 프랑소엔 공화국의 통치자인 총통 시몬 니콜라스의 외아들이자 광활한 검은 대륙의 서북부를 평정한 프랑소엔 공화국 최고의 명장! ‘몽셀 왕국을 이용해 크림원정군의 뒷목을 자르려는 계책을 낸 것도 이 남자잖아.’ 엘리제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그 계책으로 크림으로 원정 나간 제국군은 궤멸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야.’ 곧 다가올 훗날, 2차 크림원정 때 이 남자 때문에 얼마나 많은 제국군이 피해를 보았는지 모른다. 지난 삶에서 작은오라버니가 사망한 것도 크리스의 부대가 이 남자의 전략으로 몰살당한 탓이었다. ‘그런데 왜 루이 니콜라스가 탄신 연회에 온 것이지? 원래 공화국과 제국은 서로 친선 사절을 보내지 않는데.’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전 삶에 대한 기억과 국제 정세가 얽혔고, 곧 결론을 돌출했다. ‘설마……! 그 이유 때문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차라리 지금 자신의 추측이 터무니없는 것이면 좋겠다. 하지만 그 이유가 아니라면 저 니콜라스가 굳이 직접 브리티아까지 올 이유가 없다. “왜... 저에게 춤을?” “아름다운 레이디와 춤을 추는 것은 모든 남자의 영광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전부터 레이디와 만나길 소망했었고요.” “저를... 말이요?” 루이 니콜라스는 미소 지었다. 입가만 올라간 웃음. “네. 제 계획을 막은 브리티아 제국의 희대의 군략가가 누군지 궁금했거든요. 이렇게 아름다운 레이디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내가 몽셀 왕국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을 알고 있어?’ 그녀는 루이 니콜라스의 눈을 바라봤다. 그림 같은 그 눈매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뱀 같은 눈빛. 루이 니콜라스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 레이디여. 저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솔직히 춤추고 싶지 않았다. 몸도 너무 안 좋았고, 더구나 상대가 공화국의 니콜라스라니! 엄밀히 따지면, 이전 삶에서 작은오라버니의 원수 아닌가? 하지만 특별한 사유 없이 춤 신청을 거부하는 것은 실례였다. 웬만한 신분이면 실례를 범해도 상관없겠으나, 니콜라스는 공화국에서 왕자에 버금가는 신분의 인물이었다. 30년을 독재한 현 총통의 아들이자, 차기 총통으로 강력히 거론되고 있으니까. ‘하아, 누가 말려주기라도 했으면.’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 하얀 장갑을 낀 그녀의 손이 니콜라스와 마주 닿았을 때였다. 서늘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만.” “……!” “거기까지.” 깊은 흑발, 초상능력이 담긴 금안(金眼). 조각처럼 아름답지만 지독히 차가운 인상의 남자, 황태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리제는 놀라 살짝 무릎을 숙였다. ‘황태자 전하가 어째서 이쪽에?’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예를 취한 그녀와 달리 니콜라스는 마치 친우에게 하듯 유들유들한 말투로 인사할 뿐이었다. “검은 대륙에서 2년 전 뵌 후 처음이군요. 오랜만입니다, 전하. 아니, 전하가 아니라 검은 대륙에서 부르던 영광된 존칭, 공제(空帝)라 불러드릴까요?” 하지만 황태자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린덴은 아직도 엘리제와 마주 잡고 있는 손을 바라봤다. “놔라.” “네?” “말 못 알아듣나? 그 손 놓으라고.” 마치 북풍한설 같은 말투. 평소보다 더욱 차가웠다. “……!” 니콜라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곧 다시 유들유들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제가 왜 그래야죠? 이곳 브리티아는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춤을 청하지도 못하나요?” “싫어하잖아.” “네?” “넌 눈이 나쁜 건가? 싫어하는 얼굴이 보이지 않나?” “……!” 드디어 니콜라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가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 이글거리는 시선을 받으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지.’ 물론 니콜라스와 춤을 추긴 싫다. 누군가 말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황태자 전하가 왜 갑자기? 심지어 기분도 굉장히 불쾌해 보인다. 지난 삶, 부부였던 그녀는 그의 기분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똑같이 차가운 표정이지만 저건 굉장히 불쾌한 것이다. 그런데 왜? 그가 왜 불쾌해하지? “알겠습니다. 제가 눈치 없이 실례했군요.” 니콜라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과장되게 무릎 꿇으며 엘리제에게 인사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혹시 다음에 다시 만날 운명적 기회가 저에게 찾아온다면, 그때 다시 춤을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아…… 네.” “다시 만날 날을 간절히 고대하겠습니다. 간절히 원하니 언젠가는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요.” 그는 프랑소엔 공화국의 예법대로 인사를 한 후 사라졌다. 그리고 연회장 구석에 단둘이 남겨진 두 사람. “…….” “…….” 엘리제는 어색하게 그를 바라봤다. “저…… 감사합니다, 전하.” “뭐가 감사하지?” 그 말에 엘리제는 고민했다. 진짜 뭐가 감사하지? 상대가 마음에 안 들었다 해도, 연회장에서 춤 신청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였다. 사실 그걸 막은 황태자의 행동이 이상한 것. 하지만 그래도 감사했다. 정말 저 남자와 춤추긴 싫었으니까. 그녀는 솔직히 답했다. “저분과 춤추기 싫었거든요.” “감사할 필요 없다.” 황태자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냥 그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나선 것일 뿐이니까. 특별히 널 도와주려 한 것은 아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감사해요.” 그녀는 왜 그가 이렇게 나선 것인지, 불쾌해한 것인지 어느 정도 이해했다.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에서 제국과 공화국은 전쟁을 벌였다. 황태자와 니콜라스, 모두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웠으니 감정의 골이 깊을 것이다. 만나자마자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아니, 그런데 원래 이렇게 사적인 감정으로 움직이는 분이셨나? 이전 삶에선 감정 표현 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는데? 그만큼 루이 니콜라스가 싫었나?’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더 이을 수 없었다.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했기 때문이다. “레이디 엘리제.” “전하?” “괜찮다면 춤이나 추겠나?” “……네?” 엘리제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뚝뚝한 금안(金眼)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춤 신청을 한 거야? 저 황태자가?’ 눈을 크게 뜬 그녀에게 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레이디 엘리제, 나와 춤을 춰주겠나?”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오전 09:07분에 올라갑니다.> (-앞으로는 자정이 아닌, 오전 09:07분에 글이 올라갑니다.) 네, 프리미엄 연재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몇 분이나 따라와주실지 모르겠습니다. 많은 분이 따라오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부족한 글임에도 따라와 주신.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이 공지를 읽는 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부족하니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행복하세요. 00035 2-1 탄신연회 ========================================================================= *** 화려하게 치장한 영애들, 풍성한 음식, 달콤한 술. 연회를 아름답게 하는 요소는 수없이 많았지만 그중에 으뜸은 바로 춤이었다. 감미로운 음악에 맞춰 젊은 남녀가 한 몸이 되어 펼치는 앙상블. 그건 단순한 몸짓이 아닌, 감정이고 이야기였으며 예술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황궁 대연회장의 한복판. 또 하나의 예술이 펼쳐지고 있었다. “오오, 황태자 전하께서?” “정말 전하가?” 사람들은 놀라 연회장의 가운데를 바라봤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가 작은 소녀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얼마 만에 춤을 추시는 거지?” “최근엔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신기하군.” “그런데 저 레이디는 누구지?” “재상가(宰相家)의 클로랜스 영애인 것 같군.” 연회장 모두가 둘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누군가 중얼거렸다. “아름답군.” 홀린 듯한 목소리. “저 춤이 저렇게 아름다운 춤이었나.” 그 말은 모두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래,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그러면서 조금은 빠른 음악. 그에 맞춘 절도 있으면서도 강인한 남자의 리드와 옅은 드레스를 입은 채 부드럽게 남자를 따라가는 소녀. 격식 있으면서도 부드럽고,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춤이었다. “정말 아름답네요.” “황태자님이야 원래 춤을 잘 추시기로 유명하지만, 저 영애도 대단하네요.” “그러게요.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것으로 아는데.”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둘의 춤을 감탄하며 바라봤다. “그나저나 서로 호흡이 맞지 않으면 저렇게까지 추기 어려운데, 서로 정말 잘 어울리네요.” “그렇죠? 호흡이 완전히 맞는 것 같아요. 대단해요.” 춤은 혼자 추는 것이 아니다. 서로의 호흡이 맞아야 한다. 둘의 춤은 장시간 손발을 맞춰본 이들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마치 천생연분 부부처럼 한 호흡으로 추는 것 같았다. “이전에 여러 번 같이 춰본 것은 아니겠죠?” “에이, 설마요.” 연인이나 부부가 아닌 한, 한 상대와 반복적으로 춤을 출 일은 없었다. “혹시 모르죠. 무려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이니 전하와 혹시 만남이 있었을 지도요.” “어머,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 오늘 발표될 약혼녀도 역시 저 클로랜스 영애일까요?” 귀부인들은 수다를 떨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사실 그들의 추측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는 몰라도, 엘리제는 그와의 춤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삶, 둘은 부부였으니까. 그렇게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클로랜스 영애, 엘리제는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이네. 전하와의 춤.’ 약혼녀, 황태자비, 황후.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으나, 그의 짝으로 지낸 세월이 9년이었다. 춤을 지독히 싫어하는 그였지만, 황태자로서 나서야 하는 순간이 있었고, 그때마다 그녀가 파트너로 호흡을 맞췄다. ‘리드. 여전하시구나.’ 황태자의 춤은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뚝뚝하고 절제된, 그러면서도 강한. 황족의 예법으로 다져진 그답게 완벽한 춤이었으나,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저 리드를 따라가려고, 엄청나게 노력했었는데.’ 처음 그와 춤을 추고, 망신을 당한 후 정말 발이 까지도록 연습했었다. 열심히 해서 그와 어울리는 춤을 춰 그가 자신을 돌아봐 주길 바랐었다. ‘옛날 일이지.’ 그때의 생각이 나며 기분이 씁쓸해졌다. ‘뭐, 오늘이 특별한 것일 뿐. 전하와 다시 이렇게 춤을 출 일은 없겠지.’ 오늘 왜 자신에게 춤을 신청했는지 모르겠다. 꼭 필요한 상황 아니면 절대 춤을 추지 않으셨는데. 더구나 지금 자신은 그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모르겠다. 머리 아파. 빨리 집에 돌아갔으면.’ 그런데 그때, 음악의 분위기가 빨라지며, 갑자기 그의 리드가 변했다. 거칠어진 느낌! “……?!” “무슨 생각을 하지?” 희미하게 불쾌감이 섞인 낮은 음성. “그냥…… 아무 생각도요.”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손이 갑자기 허리춤으로 파고들었다! “……?!” 엘리제는 놀라 흡 숨을 들이켰다. 그가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기며 작게 말했다. “집중해라.” “네…….” 두근. 이제 아무런 감정이 없음에도 갑작스레 밀착한 탓일까? 허리로 느껴지는 그의 손에, 코로 느껴지는 그의 체향에 그녀의 가슴이 덜컥 떨렸다. “저, 저기…… 전하.” “뭐지?” “조, 조금…….” “뭘 말인가?” 그 밀착한 상태로 황태자는 정신없이 그녀를 리드했다. 무언가에 화라도 난 것처럼. 강렬하고, 격렬한 리드였다. ‘왜 갑자기?’ 이전 삶, 이런 식의 리드는 거의 보이지 않았던 그였다. 엘리제는 혼란스러워하며 정신없이 그를 따라갔다. “…….” 한편 린덴은 그런 그녀를 금색 눈으로 내려다봤다. 실제로 지금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왜 저런 표정이란 말인가? 저 씁쓸한 얼굴이라니? 자신과 춤을 추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기에 저런 표정이 나타난단 말인가? 자신과의 춤이 그렇게 싫은 건가? ‘마음에 안 들어.’ 불쾌한 마음이 춤에 그대로 드러났다. 부드러움이 적어지고 거칠고, 강렬한 리드가 이어졌다. 지켜보던 이들이 그 모습에 감탄성을 토했다. “오오, 역시 태자 전하!” “강렬하군!” 황태자의 춤에서 역동적인 힘과 남성성이 강렬히 흘러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 강렬한 춤을 무리 없이 따라가는 엘리제에게 꽂혔다. “저 영애도 정말 대단하군. 저 어려운 춤을 저렇게나 호흡을 잘 맞추다니.” “그러게요.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네요.” 황태자도 다소 놀란 시선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하얀 얼굴의 소녀는 그다지 어려워하는 기색도 없이 자신의 리드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맞춤이 어찌나 그 자연스러운지, 마치 한 호흡으로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이렇게나 상대와 앙상블이 잘 맞는 춤을 추는 것은 처음. 이런 파트너와 함께라면 몇 번이고 출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어쨌든 그렇게 음악의 한 소절이 끝나 둘의 춤도 끝이 났고 황태자는 아쉬움을 느끼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엘리제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예를 올렸다. “…….” 황태자는 잠시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참 알 수 없는 소녀였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계책을 꿰뚫는 식견, 믿을 수 없는 의학 실력에다 더구나 이런 춤 솜씨까지? 알면 알수록 모르겠는 것 투성이였다. 그렇게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는 그녀의 안색이 창백하단 것을 떠올렸다. “어디 몸이 안 좋은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하지만 고개를 젓는 그 모습이 더 안 좋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그는 손에 낀 장갑을 벗고 그녀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 “어머?” 갑작스런 스킨십에 둘을 보던 사람들이 놀람을 토했다. “저, 전하? 왜?” 엘리제도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열이……!’ 엘리제의 이마에서 고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춤을 출 때는 장갑을 끼고, 옷 위로만 접촉이 있어서 전혀 못 느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이랬던 것이지?” “아…… 까부터요.” 황태자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이 창백하다고는 느꼈지만, 이 정도인지는 생각도 못했다.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춤 따위는 당연히 신청도 안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병원에서 무리하더니, 결국!’ 그는 론으로 그녀에게 진료를 받으러 갔을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항상 산더미 같은 환자들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저 작은 몸으로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렇게 무리하더니! 이렇게 아플걸!’ 그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따라와라.” “네?” “이리로 따라와!” “……?!” *** “저, 전하. 이곳은?” 엘리제는 당황해 물었다. 그가 그녀를 이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황족 전용의 휴게 라운지였다! 아무리 클로랜스 가문의 그녀라도 예법상 이곳엔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오로지 이 제국을 지배하는 혈통, 로마노프가의 사람들만을 위한 공간이었으니까. 하지만 황태자는 그런 것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앉아.” “하, 하지만…….” “난 두 번 이야기하는 것 싫어한다. 명령이야. 앉아.” 그 말에 결국 엘리제는 소파에 앉았다. 사실 아픈데 오래 서 있느라 너무 힘들었다. ‘편해…….’ 거의 침대와 다름없는 안락함의 소파였다.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라틴제의 가죽이 지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자고 싶다.’ 이대로 아침까지, 아니, 최소 폐하의 축일 기념문 낭독 직전까지만이라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은 듯 그가 말했다. “조금 자도 괜찮다.” “…….” “혹시 다른 로마노프가의 사람이 오면 나와 같이 왔다고 이야기하고.” 엘리제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녀가 간절히 원하는 바이긴 하지만, 오늘 그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다. 오늘 왜 이러는 것이지? “저…… 전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의 그에게 그녀가 물었다. “그런데 혹시 저를 신경 써주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황태자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게…….” 엘리제는 이걸 말할까 말까 머뭇거리다가 말을 삼켰다. -전하께서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래, 그는 자신을 싫어했다. 지난 삶 뼈저리게 그 사실을 느꼈고 고통받았다. 당시 그녀는 그 고통을 견디지 못했고, 비뚤어지며 극단적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 되었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서 그렇다.” “네?” “네 몸 상태가 이런지도 모르고 무리하게 춤을 추게 해 미안해서 데려온 거다. 특별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니, 신경 안 써도 된다.” “아…… 그렇군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냥 넘어갔다. 어차피 그에게 다른 마음이 있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배고프지는 않나?” “조금…… 요.” 아침부터 열이 나서 거의 먹은 것이 없었다. 고열로 지금도 입맛은 없지만 살짝 허기가 졌다. ‘밥은 무리고, 단 디저트나 먹었으면.’ 그런데 그때 그가 말했다. “딸기 케이크나 좀 가져오라고 하지.” “……!”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이었다. 딸기 케이크면 5조각도 먹을 수 있었다! “싫어하나?” “아니, 좋아해요!” “그래. 이야기해 놓을 테니, 먹고 잠시 눈을 붙이도록. 축일 기념문 낭독까진 아직 시간이 더 남았으니까.” 그러고 그는 연회를 돌아가려는 듯 등을 돌렸다. “전하.” “왜 그러지?” 엘리제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다. 너 때문에 그런 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도록.” 엘리제는 미소 지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좋은 연회 되세요.” “……!” 그 순간, 황태자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려다 다시 닫았다. “……?”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너도 빨리 낫도록.” 그러고 그는 사라졌고, 남겨진 그녀는 머리를 갸웃했다. 빨리 나으라고? 지난 삶, 그와 부부로 살며 수시로 아팠던 그녀지만 저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애초에 저런 위로나 걱정의 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정말 이상하시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그의 약혼녀로 내정된 사람은 누구일까?’ 예정대로 발표를 진행한다 했으니, 분명 내정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누구랑 이어져도 행복하게 지냈으면.’ 안 좋게 끝났지만 그래도 한때 부부였고 자신이 많이 사랑하던 남자다. 이번 삶에선 그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잠시 후. 시종이 쟁반에 무언가를 담아 가져왔다. 그녀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였다! ‘와아.’ 엘리제는 아픈 것도 잠시 잊고 침을 삼켰다. 마침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파이크 거리에 비아 제과점의 딸기 케이크와 똑 닮게 생겼다. 포크로 한 모금 입에 담은 그녀는 행복감을 느꼈다. ‘맛있어. 비아 제과점만큼이나.’ 역시 황궁이었다. 론도(Londo) 제일의 딸기 케이크 집이라는 비아 제과점만큼 깊고 고급진 단맛을 내다니. 수준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맛도 거의 똑같을 정도로 흡사했다. 그때 옆의 시종이 웃으며 말했다. “맛이 괜찮으시죠?” “네, 맛있어요.” “이번에 황궁에 어떤 높은 분의 요청으로 새로운 디저트 쉐프가 들어왔거든요. 파이크 거리의 비아 제과점에서 일했다던데.” “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비슷하다 했더니, 비아 제과점의 쉐프가 만든 거였어? ‘이제 그러면 비아 제과점에 가도 똑같은 딸기 케이크는 못 먹겠네. 아쉽다. 황궁 사람들 말고는 이제 맛을 못 보겠구나. 황족이나 그 가족 중 비아 제과점의 케이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나? 이제 그분은 이 케이크를 실컷 먹을 수 있겠네.’ 그녀는 그 이름 모를 누군가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2-1 탄신 연회 - fin> <2-2 뜻밖의 대형사고(?) - start>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오전 09:07분에 뵙겠습니다! 앞으로는 늘 오전 09:07분에 뵙겠습니다. Ps. 프리미엄까지 따라와주신 분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ㅠㅠ 독자님들이 남겨주신 코멘트들을 확인하고 정말 많은 위로를 얻었습니다. 일일이 답변을 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모든 분들께 너무나 큰 감사를 드립니다. Ps2. 여러 독자분들이 질문하셔서... 엘리제는 대략 160-180화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총 7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은 2막 小和田 雅子??? 의 초반부가 진행 중입니다. 다만 6막까지 쓴 후 감정선에 흐름을 봐서 만약, 6막 만으로 클라이맥스로 충분하다 판단이 될 경우, 7막은 생략할 예정입니다. 이에 따라서 분량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간편히 160-180화. +- 10화 정도의 오차가 날 수 있다고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00036 2-2 뜻밖의 대형사고(?) ========================================================================= <2-2 뜻밖의 대형사고(?)> 그렇게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누군가 그녀를 살짝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영애, 영애.” “…….” “영애?” “……!” 그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이 들어 엘리제는 눈을 번뜩 떴다. ‘아…… 잠들었구나.’ 딸기 케이크를 먹고 소파에 기대 그대로 곯아떨어진 것 같았다. ‘어지러워.’ 아직도 아픈 머리를 붙잡고 정신을 차리니, 푸근한 인상의 중년 귀부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워낙 푹 자는데 깨워 미안한데, 이제 곧 폐하께서 축일 기념문을 낭독할 거여서.”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누구지? 낯이 익은데.’ 이곳은 황족 전용 휴게 라운지. 분명 황족이나 그 인척일 것이다. 엘리제는 곧 귀부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분이구나!’ 그녀는 화급히 예를 올렸다. “하버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엘리제라고 합니다.” “뭘요. 몸도 안 좋은 것 같은데, 편하게 하세요.” “아닙니다, 부인.” 하버 공작부인! 브티리아 섬의 서쪽 지방 웨일의 대귀족 하버 공작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신분은 바로 황실의 친척이란 것! “죄송한데 저를 조금 부축해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영애?” “아, 네. 부인.” 황족의 피가 흐르는지라 공작부인의 눈동자는 금색이었다. 다만 색이 흐릿하고 옅었다. 참고로 황족에게 내려오는 초상(超上) 능력은 강할수록 금안이 짙은 색을 띤다. 뇌제(雷帝)라 불리며 역대에 손꼽는 초상 능력의 소유자인 민체스터 황제의 금안은 무척 짙었고, 황태자의 금안은 그것보다도 더 짙었다. ‘황태자는 초상 능력만 따지면 역대 최고, 아니, 역대 최고인 것은 비단 초상 능력만이 아니었지.’ 이후 3황자와의 정권 다툼에 승리하고 황제가 된 황태자는 명군 민체스터를 능가하는 통치력을 보여주었다. 자신은 사형당해 보지 못했지만, 그가 통치하는 브리티아 제국이 어디까지 번영할지 짐작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유일한 티가 있다면 바로 3 황자와의 정권 다툼 후 일어났던 혈사(血史).’ 당시 무수히 많은 피가 흘렀었다. 시민들이 론도의 비극이라 일컬었을 정도로. 물론 황태자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그걸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슬픈 일이었다. 그녀와 감정적 교류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때 일을 굉장히 괴로워했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괴로움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래, 당시의 일은 그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원래부터 너덜너덜했던 그의 가슴은 그때의 비극으로 완전히 찢어져 버렸다. ‘그리고 또 다른 티는 황후인 나였지.’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도 이번 삶에선 자신이라도 황후가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나마 그것 하나라도 그에겐 다행일 것이다. “이렇게 잡아드리면 될까요, 부인?” “네, 고마워요. 제가 다리가 조금 떨려서.” 엘리제는 공작부인을 살폈다. 정말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흐릿하게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보행동결(Freezing of gait). 특징적인 그 모습에 그녀의 머리에 진단이 떠올랐다. ‘파킨슨병.’ 사실 그녀는 공작부인을 잘 모른다. 그가 황태자와 약혼 후 결혼하기 전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인은 질식사. ‘파킨슨병은 신경세포의 퇴행으로 몸의 운동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 파킨슨병으로 목의 삼킴 기능이 떨어졌다가 음식이 숨구멍, 기도에 걸려 사망하셨지.’ 그녀는 생각했다. ‘인상이 무척 좋으신데.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 환자를 보니 의사의 본능이 자극됐다. 하지만 파킨슨병은 아무리 그녀라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지구에서도 진행만 늦출 뿐 정복하지 못한 병이니까. 질식사의 경우엔 내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 한 도와줄 수가 없고.’ 음식이 목에 걸리면 1-2분 안에 조처해야 한다. 옆에 의사. 그것도 응급조처에 능숙한 의사가 없으면 사실상 살리기 어려웠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보자.’ 기억 상으로는 그녀가 사망하는 시기가 요 근처였던 것 같다. 물론 이번에는 그때와 시기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신경 세포의 기능이 떨어져 목에 음식이 걸리는 것은 확률적인 일이니까. 조금 더 늦게 일어날 수도 있고, 당장 이번 탄신연회 때 일이 터질 수도 있다. ‘큰 문제 없으서야 할 텐데.’ 그렇게 생각하며 연회장에 들어갔다. “고마워요, 영애. 다음에 기회가 되면 뵐게요.” “네, 부인.” 황제의 축일 기념문 낭독을 앞두고 귀족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제도 클로랜스 가문의 가족들이 자리한 곳으로 이동했다. “리제, 어디를 다녀 왔었니? 찾았잖아.” “아... 잠시 쉬고 왔어요. 죄송해요, 오라버니.” “몸은 좀 괜찮고?” “네, 조금 나아요.” 도대체 어디를 갔다 왔느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잠시 쉬고 왔다고 대답했다. “곧 폐하께서 기도문을 낭독할 것이니 기다리렴.” “네, 아버지.” 이제 이것만 끝나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공부고 뭐고, 정말 푹 쉬어야겠다.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모든 귀족이 자리에서 예를 취했다. 그리고 축일 예복을 입은 황제가 성서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예의 인자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보았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모든 이에게 주의 축복이 있기를. 그러면 먼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께 감사하며 기도문을 낭독하겠습니다.” 탄신 연회 때 기도문을 낭독하는 것은 500년이 넘은 전통이었다. 브리티아 제국이 브리티아 왕국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인 것이다. 황제는 단상에서 등을 돌리고 전면에 놓인 커다란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십자가 위에는 가시 면류관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릎을 꿇고 고어로 기도문을 낭독했다. “אָבִינוּ שֶׁבַּשָׁמַיִם יִתְקַדַּשׁ שִׁמְךָ תָּבוֹא מַלְכוּתֶךָ יֵעָשֶׂה רְצוֹנְךָ כְּבַשָּׁמַיִם כֵּן בָּאָרֶץ אֶת לֶחֶם חֻקֵּנוּ תֵּן לָנוּ הַיּוֹם וּמְחַל־לָנוּ עַל־חֹבוֹתֵינוּ כְּפִי שֶׁסּוֹלְחִים גַּם אֲנַחְנוּ לַחוֹטְאִים לָנוּ וְאַל־תְּבִיאֵנוּ לִידֵי נִסָּיוֹן כִּי אִם־תְּחַלְּצֵנוּ מִן־הָרָע כִּי לְךָ הַמַּמְלָכָה וְהַגְּבוּרָה וְהַתִּפְאֶרֶת לְעוֹלְמֵי עוֹלָמִים.” 기도문 낭독 후 축일 기념문 낭독이 이어졌다. 축일 기념문 내용은 늘 그렇지만 예년과 비슷했다. 제국의 만수무강과 축복을 비는 내용. ‘이제 거의 끝났어. 이것만 버티자, 엘리제.’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것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기념문 낭독도 거의 다 끝났으니 고지가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약혼녀 발표야 금방 끝날 테니. 힘내자. 끝나면 바로 빠져나가는 거야.’ 그렇게 그녀는 의지를 돋우었다. “이상입니다.” 이윽고 기념문 낭독이 끝났다. 원래대로라면 다 같이 탄신 연회를 축하하고, 연회가 재개되는 게 정상.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한 가지 일정이 더 남았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분께 할 말이 있습니다. 바로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의 약혼자에 대해서입니다.” 드디어 황태자의 약혼녀를 발표하는 순간이었다. 황제의 목소리는 기도문과 기념문을 낭독할 때와는 달리 한결 편안했다. 이 약식 약혼 발표가 예식(禮式)이 아니라, 황가의 경사를 알리는 황제의 개인적인 발표이기 때문이다. 귀족들도 예식으로 경직된 얼굴을 풀고 기대하는 표정으로 발표를 기다렸다. 과연 누가 황태자의 약혼녀, 제국의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될까? “그런데 먼저 말할 게 있습니다. 짐이 발표 전에 한 가지 고려 못한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황제는 청중으로 있는 귀족들에게 경어를 썼다. 이는 황제를 천자(天子)로 모시는 동방의 청(淸, Qing)과는 다른 모습으로, 민체스터의 개인적 성향도 있지만 브리티아 제국의 문화 차이 탓이 컸다. “짐이 황태자의 약혼녀로 정한 레이디가 아직 성인식을 마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감기에 취해 건성으로 황제의 말을 듣던 엘리제는 퍼뜩 놀라 황제를 바라봤다. 잠깐. 이게 무슨 이야기지? ‘설마? 다른 영애의 이야기겠지?’ 성인식을 마치지 않은 영애가 자신뿐이겠는가? 유력한 약혼 후보인 버킹엄 공작 영애도, 스페냐 왕국의 공주도 모두 성인식을 치르지 않은 자신 또래였다. ‘아닐 거야. 설마.’ 그녀는 그렇게 불안을 달랬다. 황제가 말을 이었다. “물론 성인식 이전이어도 약혼 발표를 하는 것은 예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제가 그 영애와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나 했습니다. 약혼을 성인식 이후로 미루겠다고.” “……!” 엘리제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니, 지금 무슨 이야기를? 서, 설마? 그런데 그때였다.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클로랜스 가문, 아니, 엘리제에게로 향했다.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가 빙긋 웃었다. “그래서 여러분께는 죄송하지만, 약혼 발표는 그 영애. 클로랜스 영애가 성인식을 치르는 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모두 그때를 기다려 주십시오.” “……!” 그리고 그 순간. 연회장의 모든 이의 시선이 엘리제에게로 향했고, 엘리제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발표란 말인가? *** 그 뒤 어떻게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저택의 방으로 돌아온 엘리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렇게 내기를 했건만 이런 발표를 하다니! 물론 아직 황제가 내기를 어긴 것은 아니다. 그녀를 약혼녀로 발표한 것은 아니니까. -약혼 발표는 클로랜스 영애가 성인식을 치르는 날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말만 성인식 때로 미룬다는 것이지, 발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말을 듣고 그 누가 그녀를 황태자의 약혼녀로 생각하지 않겠는가? 백이면 백 모두 그녀를 황태자의 약혼녀나 다름없이 여길 것이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발표를 들었을 때, 자신과 마찬가지로 놀란 얼굴이었으니까. 황제의 오른팔이니 대충 의중은 짐작했을지 몰라도, 이런 식이었을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이대로는 안 돼.’ 절대 과거의 삶을 반복할 수 없다. 그건 모두에게 비극이었다.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황태자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의사의 삶! 엘리제의 기억을 갖고 있고 지금도 그녀로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녀의 성품과 자아는 외과의사의 것에 훨씬 가까웠다. 절대로 의사의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폐하와 담판을 지어야겠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명이 걸린 일이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내일 탄신 연회에 폐하가 나올 때, 그때 담판을 짓겠어. 이렇게는 안 돼.’ *** 그날 밤, 한참이나 뒤척이다 꿈을 꾸었다. 과거 엘리제의 삶. 그러니까 첫 번째 삶의 꿈이었다. -지옥에서 사죄하도록. 시리도록 차가운 선언. 꿈속에서 그녀는 불행했었다.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떠올리고 싶지조차 않은 기억들. 수없는 파국 끝에 결국 단두대의 날이 떨어졌고, 그 순간 엘리제는 번뜩 눈을 떴다. “하아! 하아!”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꿈이구나.” 선명하게 느껴지는 단두대 날의 섬뜩한 느낌에 목을 어루만졌다. 분명 꿈이건만, 꿈을 꿀 때마다 실제처럼 아팠다. 마치 그때 처형당할 때처럼. “하아.” 그녀는 침대 옆에 놓인 물을 마시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온 후, 거의 꾸지 않았었는데.’ 지구에서 살 때는 이 악몽을 수없이 반복했다. 마치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처럼. 악몽을 꿀 때마다 선명히 떠오르는 그 끔찍한 기억에, 과거에, 고통에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악몽을 피하려고 뜬 눈으로 보낸 밤이 몇 밤인지. 어쩌면 그녀가 의사의 길에 미친 듯이 매진했던 것도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으면, 과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아니야. 이번엔 결코 그때의 삶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몸 상태는 더욱 안 좋은 것 같았지만, 앓아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 폐하와 이야기해야 해.’ 그녀는 진통제와 해열제를 복용했다. 정량을 넘어 과량으로. 몸에 안 좋을 수도 있겠지만, 오늘만큼은 최대한 맑은 정신을 유지해야 했다. ‘더 늦기 전에. 오늘 무조건 담판을 지어야 해.’ 그녀는 그렇게 굳게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오전 09:07분에 올라갑니다. 어쩌면 두편이 올라갈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한편만 올릴 수도 있습니다.;;) Ps. 린덴의 '너'라는 표현을 여러 독자분들이 지적해주셨습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 고민했던 부분입니다. '너'라는 표현을 사용할지 말지. 고민끝에 린덴의 느낌 같은 느낌 아닌 느낌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냥 '너'라는 표현으로 결정했는데... 사실 결정하고 나서도 잘한 결정인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지적해주신 것처럼 조금 무례해보이긴 하거든요. 그런데... 원래 조금 그런 느낌 같은 느낌의 느낌의 느낌 성격이어서.;;;; 조금 더 고민해보겠습니다. Ps2. 저 주기도문은. 네, 히브리어입니다. 이 글의 배경이 사실상 가상의 유럽이니 그냥 당시의 지배적 종교였던 기독교의 것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가상의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무협에서 불교, 도교를 그대로 가져오듯이요.) 글 분량은 저 알아보지도 못할 히브리어를 제외하고 5500자 이상 되도록 하였습니다.ㅠㅠ Ps3. 많은 분들이 바라는 서브 남주는... 음...^^ 그렇지 않아도 다음 챕터에 제가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가 등장하긴 할 것입니다. 그 아이가 글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는... 지켜보면 아실 수 있겠지요.^^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00037 2-2 뜻밖의 대형사고(?) ========================================================================= ‘그렇지 않아도 벌써 신문에서 날 황태자의 약혼녀로 보도하고 있어.’ 황태자의 약혼녀 발표는 금년 탄신 연회의 최대 이슈였다. 모든 신문사에서 발표만 기다리고 있다가 호외로 발표한 것이다. [황태자의 약혼녀, 클로랜스 영애로 발표!] [클로랜스 영애, 탄신 연회의 주인공이 되다.] 이런 기사는 약과였다. [클로랜스 가문의 레이디 엘리제! 제국의 퍼스트 레이디(First lady)가 되다!] 이미 그녀가 황태자와 결혼이라도 한 듯한 기사도 무수히 많았다. 지난 삶, 정식 약혼 발표가 났을 때와 큰 차이가 없는 반응들. 이제 제국의 시민 중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하아. 잘하자, 엘리제.” 이대로라면 내기와 상관없이 황태자의 약혼녀로 굳혀질 게 분명할 터. 그러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다. 그녀는 의지를 다지고 탄신 연회로 향했다. 연회장에 도착하니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바라봤다. 마치 주인공이라도 도착한 듯한 시선이었다. “오, 클로랜스 영애. 축하합니다.” “전 폐하께서 영애를 선택하실지 짐작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엘리제에게 몰려들었다. 아직 약혼녀로 정식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곧 성인식만 치르면 약혼녀가 될 거라 여기는 것이다. 차후 황태자비, 황후가 될 여인. 모두 그녀의 눈에 얼굴도장을 찍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니에요. 아직 폐하께서 정식으로 발표하신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생각이 바뀌실 수도 있고요. 그러니 그런 축하는 받기 어렵습니다.” 엘리제는 부드럽게 그들의 축하를 거절했다. 그녀로선 정말 싫어서 하는 거절이지만, 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였다. ‘안 좋은 소문이 많았는데 다 헛소문이었구나.’ ‘사실상 약혼자로 간택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정말 겸손하네. 이전에 들었던 소문과는 다른데?’ ‘역시 황태자비로 내정된 영애다워.’ 사람들은 그녀가 겸양하는 것으로 여기고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외모, 정숙한 태도, 예의 바른 언행. 그들의 눈에 비친 클로랜스 영애는 기존의 소문과 다르게 황태자비에 정말 잘 어울리는 레이디로 보였다. “소문이 믿을 게 못 되네요.” “역시 사람은 직접 봐야지 알 수 있다니까요.” 사람들은 서로 속삭였다. “역시 폐하께서 보는 눈이 있으셔요. 제국 최고의 명문가 클로랜스 가문에, 저런 영애라니.” “그러게 말이에요. 황태자 전하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 속삭임을 들은 엘리제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아니라고. 정말 아니라고요! 라고 외치고라도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폐하와 해결을 봐야 해.’ 그래, 모든 것은 황제와의 담판에 달렸다. 이들에게 이야기해 봐야 아무런 의미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형처럼 웃으며 황제를 기다렸다. 수많은 사람 사이에 둘러싸여 있으니, 어제보다 훨씬 머리 아프고 어지러웠지만 참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황제 폐하 납십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황제가 연회장에 입장했다. 언제나처럼 온화한 미소와 함께.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는 여러 대신들과 함께였다. 현 황궁의 가장 큰 안주인인 1황비는 늘 그렇듯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안 돼. 조금만 더 기다리자.’ 그녀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황제와 독대할 기회를 엿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어머, 클로랜스 영애. 반가워요.” 푸근한 인상의 귀부인. 황실의 친척인 하버 공작부인이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금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엘리제는 예를 올렸다. “어제는 잘 들어가서 쉬었나요?” “네, 부인.” 공작부인은 동행한 하녀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원래 예법상 황궁 탄신 연회에 개인적인 시종의 입장은 불가하지만, 부인 본인이 황족이고 앓고 있는 파킨슨병 때문에 부득이 동행한 것 같았다. “앞으로 같은 식구가 된다니 기쁘네요. 황태자 전하를 잘 부탁해요. 딱딱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귀여운 분이에요.” “…….”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귀여운? 그 황태자가? 세상에서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의 조합이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정말 그를 귀엽게 여기기라도 하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은 조금 무뚝뚝해 보이지만, 어렸을 때 전하가 얼마나 착하고 사랑스러웠는데요. 나한테 뒤뚱뒤뚱 걸어와 재롱 피우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리고 부인은 목이 말랐는지, 음료를 입에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음료를 입에 넘기고 나서였다. “쿨럭, 쿨럭!” 돌연 사레가 들렸는지,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부인!”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별것 아닌 사래로 보이지만 달랐다. ‘파킨슨병에 동반된 흡인(Aspiration) 증상이야.’ 파킨슨병이 진행되면 팔, 다리의 운동 기능이 떨어짐과 동시에 식도의 삼킴 기능도 같이 저하된다. 따라서 식도로 넘어가야 할 음식이 자꾸 기도로 넘어가게 되는데, 심하면 숨구멍인 기도를 막아 질식으로 사망하게 된다. ‘병 자체를 좋게 할 수는 없지만, 흡인으로 인한 급성 사망은 막아야 할 텐데.’ 이전 삶에서도 질식으로 사망한 공작부인이다. 증상의 정도를 봤을 때, 언제 문제가 생길지 몰라 흡인을 방지하는 예방법이 필요하다. ‘기회를 봐서 예방법을 알려드려야겠어.’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질식으로 인한 사망은 사고와 같은 거라 언제, 어느 때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니 엘리제는 그녀에게 늦지 않게 예방법을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간신히 기침을 멈춘, 공작부인이 말했다. “하아, 힘드네요.” “조심하세요, 부인.” “네, 그래야겠어요. 아, 영애. 사실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떤?” “폐하께서 영애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는데, 가보시겠어요?” “……!”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드디어 황제와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운명이 걸린 대면이었다. *** 황제,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는 연회장에 연결된 2층 방의 발코니에 서 있었다. 홀 쪽으로 난 발코니라 연회장의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엘리제는 요동치는 가슴을 참으며 예를 올렸다. 민체스터가 그녀를 돌아보더니 빙긋 웃었다. “오랜만이네, 영애. 한 달 반 정도 되었나?” “네, 폐하.” “병원에서 일이 많이 힘들었나 보군. 많이 말랐어.” “아닙니다, 폐하.” “아니긴 뭘 아니야. 안색이 안 좋은 걸 보니 마음이 안 좋아.” “송구스럽습니다.” 민체스터는 혀를 찼다. “영애.” “네, 폐하.” 엘리제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가로이 안부나 나누려고 따로 부르진 않았을 터. 분명 어제 일을 꺼낼 것이다. 하지만 황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랐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 말씀하시옵소서.” “지난번 만났을 때, 짐에게 달여 준 차를 다시 한 번 타줄 수 있겠나?” 한가로이 차를 달일 마음이 아니었으나, 누구의 부탁인데 거절하겠는가. 엘리제는 공손히 답했다. “네, 폐하. 잠시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그녀는 시종에게 말해 찻잎을 비롯한 필요한 도구들을 가져오게 했고,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하아, 도대체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이신 걸까?’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고요히 차를 끓이고 있는 덕분일까? 흥분했던 가슴이 차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쨌든 잘 이야기해 보자. 이대로 흘러가게 놔둘 수는 없어.’ 차가 끓으며 향이 그윽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동방의 고요한 나라, 려(麗)를 연상시키는 깊은 그 향에 황제가 말했다. “영애는 모를 걸세. 내가 지난번 영애가 달여 준 차를 마시고, 얼마나 그 차 맛을 그리워했는지. 영애가 일러준 레시피대로 해도 도통 그 맛이 나지를 않더군. 도대체 어떻게 이런 향을 낼 수 있는 건가?” “과분한 칭찬입니다. 오히려 제 부족한 솜씨가 폐하의 입맛을 어지럽힐까 걱정입니다.” 엘리제는 겸손히 답했다. 황제는 그녀가 내온 차를 천천히 들었다. “역시 좋군.” 그는 가만히 미소 지으며 차의 맛을 음미했다. 그렇게 잠시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잔잔한 차 향 때문일까? 홀 쪽의 발코니 너머로 연회가 한참이었으나, 그들이 있는 방은 동떨어진 세상처럼 느껴졌다. “…….” 엘리제는 치마 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초조한 마음이 들었으나 참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기를. 이윽고. 황제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영애.” “네, 폐하.” “짐한테 물어볼 말이 있지?”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왔다. 어쩌면 지금의 대화가 앞으로 그녀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른다. 반드시 잘 이야기해야 한다. “네, 폐하. 송구스러우나 허락하신다면 한 가지만 여쭤 봐도 괜찮겠어옵니까?” “말해보게.” “지난번 내기는 어떻게 되는 것이옵니까?” 그녀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인식 이전, 의사로서의 가치를 증명해 내면 황태자와의 약혼을 취소하겠다는 내기. 그녀에게 말도 안 되게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이길 자신이 있었다. 아니,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무조건 이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내기를 엎으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녀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그걸 왜 물어보나?” 그런데 황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네?” “당연히 유효하지.” “……!” “영애와 개인적으로 한 내기이긴 해도, 짐은 서 대륙을 넘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한입으로 두말은 하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말게.” 그 장담에 엘리제는 당황했다. 그러면 어제 발표는?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개구진 미소였다. “정식 발표 아니지 않은가?” “…….”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심지어 정식으로 발표한 것도 아니네. 영애가 짐과의 내기에서 이기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엎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하지만…….” 그녀는 머뭇거렸다. 물론 황제의 말이 맞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니까. 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엎고자 하면 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번복하면, 황제 민체스터의 위엄이 손상된다. 그 누구보다도 드높고, 존경받아야 하는 황제의 위엄이 말이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뭐, 짐이 감수할 문제지. 걱정 말게. 로마노프의 이름을 걸고 영애의 명예가 손상될 일은 절대 없게 할 테니.”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리고 이 뇌제(雷帝)의 권위는 고작 이런 걸로 손상되지 않아.” “……!” “어차피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영애? 난 그런 면에서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민체스터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 이게 바로 로마노프 황가의 제왕학(帝王學).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Governance for serving).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이 원칙들을 지켰기 때문에, 수많은 왕가가 몰락하는 격변의 시대에도 로마노프 황가가 절대적인 황권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었고, 민체스터가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영애.” “네, 폐하.” “내기에 확실히 이길 자신이 있나 보지? 자꾸 이겼을 때를 걱정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어떻게 하지?” 황제가 짓궂게 말했다. “짐도 절대 질 생각이 없는데 말이야.” “……!” “정확한 내기 내용은 이러했지.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런데 의사로서 어떤 업적을 남겨야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하는 것인지, 짐은 잘 모르겠군. 영애가 성인식 전에 그런 업적을 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엘리제는 황제의 의향을 깨달았다. 그는 무려 ‘업적’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웬만한 일을 해낸 것으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구나.’ 더구나 이 내기의 심판은 황제로, 그가 아니라고 하면 그대로 그녀의 패배였다. 그 누구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황제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그런 대단한 일을 해내야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성인식 이전, 몇 달도 안 남은 시간 동안에. 그의 의중을 깨달은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지지 않아.’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그녀는 질 수 없었다. 반드시 이겨야 했다. ============================ 작품 후기 ============================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00038 2-2 뜻밖의 대형사고(?) ========================================================================= 그때 민체스터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런데 영애. 궁금하지 않나?” “……?” “어째서 짐이 어제의 일을 벌였는지. 사실 굳이 이런 무리한 발표 따위 하지 않아도 영애가 내기에서 이기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없을 텐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엘리제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을 이었다. “짐이 영애를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야.” “……?!” “난 영애가 우리 황실의 일원이 되길 원하네. 태자의 비가 되어, 린덴의 모자란 점을 채워주고, 짐과도 아버지와 딸 같은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어. 그 바람 때문에 짐이 욕심을 부렸네.” 진심이 담긴 목소리.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렇게까지 나를?’ 그녀는 황제의 눈을 바라봤다. 이전 삶에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모자란 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상 자신을 아끼고 총애해 주었다.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내가 친우의 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번 정숙한 모습을 보여서? 아니다. 그런 것만으론 설명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도저히 모르겠구나.’ 황제가 말했다. “그래서 영애에게 제안이 있네.” “무엇입니까?” “우리의 내기는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나?” “……?!” “영애는 모르겠지만…… 난 정말로 영애를 아끼네. 그래서 영애가 더는 병원 같은 곳에서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가 않아. 애초에 이렇게 고생할 줄 알았으면, 내기를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야. 짐은 영애가 금방 포기할 줄 알았거든.” 그리고 황제가 인자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정말로 그녀를 걱정하는 눈이다. 그는 자신의 가족이 될 것이라 여기는 그녀가 더는 괴로운 고생을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폐하…….” 엘리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마음은 알겠다. 정확한 이유야 알 수 없지만, 황제는 자신을 진정으로 가족으로 받아들이길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모두를 위해서 그건 안 됐다. 결국, 모두가 불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은 너무나 간절히 원하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어려웠다. “저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말하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비명이 연회장에서 울렸다! “꺄악!” “여봐라! 누구 없느냐?! 공작부인께서!” 황제와 엘리제는 깜짝 놀라 발코니로 향했다. 그리고 연회장에 펼쳐진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 하버 공작부인이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목을 잡고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 “……!” 황제가 급히 지시를 내렸다. “여봐라! 누가 의사를 데려와라! 빨리!” 그리고 그때. 황제의 곁에 있던 유일한 의사가 발을 달렸다! 엘리제였다! ‘빨리! 시간이 없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질식이야! 늦어도 2분 안에 살려내야 해!’ 질식(Asphyxia)! 음식물이 공기가 통하는 기도를 틀어막아 숨이 완전히 막혀 버리는 상태! 새파란 안색과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것을 봤을 때 공작부인은 질식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했는데! 이렇게 바로!’ 그녀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치렁치렁한 드레스가 걸리적거려 아예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귀족 영애로서 생각지도 못할 모습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아니, 조금 전 황제와 나누던 대화도 머릿속에 없었다. 오로지 단 하나! 공작부인을 살려야겠다는 생각만이 그녀를 지배했다. ‘빨리! 조금 더! 빨리! 1초라도 빨리 도착해야 해!’ 그녀는 왜 하필 자신이 2층에 있었을까 후회스러웠다. 짧은 계단이지만, 천국과 지옥만큼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1분 정도 지났을 때. 그녀는 공작부인에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하아!”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클로랜스 영애?” “비켜주세요!” “……?!” “빨리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빨리요! 시간이 없습니다!” 평소 부드러운 모습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박력! 우르르 몰려 있던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섰다. 엘리제는 다급히 공작부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부인! 정신 차리세요!” 강하게 치며 자극을 주었으나, 전혀 반응이 없었다. 완벽한 의식 소실, 코마(Coma)였다. ‘이런!’ 더구나 새파란 얼굴. 얼굴뿐이 아니었다.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전신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몸에 산소가 없어 생긴 청색증(Cyanosis)이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음식이 기도에 걸린 거지?’ 급히 주변을 살폈더니, 옆의 테이블에 갖가지 고기 요리와 수많은 디저트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공작부인의 자세를 앞으로 한 후, 뒤에서 배를 감싸 안았다. ‘최대한 강하게!’ 그리고 손으로 배를 눌러, 복압을 증가시켜 기도의 음식물을 배출시키는 하임리히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몇 번을 해도, 공작부인은 축 늘어져 있을 뿐 반응이 없었다. ‘안 돼! 하임리히법으로는!’ 무슨 음식이 걸린 것인지, 단순히 복압을 높이는 것만으로는 효과가 없었다. ‘어떻게 하지?’ 남은 시간은 30초. 아니, 그것도 안 남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안에 기도를 뚫어주지 않으면 공작부인은 사망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엘리제의 눈에 한 가지 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라면?’ 그래, 저 도구라면! 숨길을 뚫어줄 수 있다. 하지만 엘리제는 잠시…… 정말 1초도 안 되는 찰나 멈칫했다. ‘저 도구’를 사용해 공작부인을 살려낸 후 자신이 당할 일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강행했다. ‘나중 일은 나중에!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은 살리는 것이 먼저야!’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그 도구’를 손으로 집어 들었다. 사람들이 그걸 보고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니, 영애? 그 무슨?!” “그거 놓게!” 그녀가 든 도구는 다름 아닌 날카로운 나이프였던 것이다! 엘리제가 하려는 일은 나이프를 메스 삼아 목의 한가운데에 구멍을 내, 숨구멍을 뚫어주는 것이었다. 바로 응급 기관절개술(Emergent tracheostomy)! ‘위험하지만.’ 칼로 목을 절개하는 것이다. 위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목을 지나가는 대혈관을 손상할 시 곧바로 사망이다. ‘하지만 이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그녀는 곧바로 기관절개술을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0초 미만 남짓! 그 안에 끝내야 한다. 먼저 공작부인의 목을 뒤로 젖혀 공간을 확보했다. 동시에 나이프를 들지 않은 반대 손으로 갑상패임, 복장패임, 반지연골의 위치를 확인했다. ‘갑상샘도, 혈관도, 신경도 다 피할 수 있는 위치. 높지도 낮지도 않고, 너무 깊게 절개해서도 안 돼.’ 그녀의 손가락이 세 번째 기관지 륜(3rd tracheal ring)을 짚었다. ‘이곳!’ 곧바로 나이프를 움직였다. 칼로 목을 절개하는 것이건만, 망설임은 없었다. 망설이면 환자가 죽는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주저하지 않는 단호함! “저, 저! 말려!” “안 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순간, 그녀가 외쳤다. “방해하지 말아주세요! 방해하면 공작부인을 살릴 수 없어요! 반드시 살릴 테니 기다려 주세요!” “……?!” 간절한 의지가 담긴 외침! 사람들이 멈칫하는 순간, 나이프가 목의 정중앙을 꿰뚫었다! 파앗! 목에서 튀어 오른 피가 엘리제의 얼굴과 하얀 드레스를 물들였고, 귀족 영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꺄악!”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빡 않고 수술을 진행해 나갔다. ‘3㎝! 절개가 너무 작아도, 커도 안 돼! 깊어도 안 되고!’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생명과 직결된 기관들을 건드려서도 안 된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전신 마취 후 차분히 진행해야 하는 게 원칙이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온 정신을 집중하며 단숨에 나이프를 아래로 움직였다. 찌익! 다시 피가 울컥 솟아 나왔고, 연회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 저거 빨리 말려! 빨리!” 그러나 그 순간. 엘리제는 속으로 외쳤다. ‘정확히 됐어! 이제 숨구멍만 확보해 주면 돼!’ 숨구멍, 기도가 목의 상처를 따라 가지런히 절개되었다. 급하게 했는데도 다행히 아무런 문제없이 성공한 것이다! 절개 창 위로 음식물이 흐릿하게 보였다. 아마 저게 기도를 막고 있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10초 남짓.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숨구멍을 유지하는 튜브를 넣어줘야 한다. 지구라면 기관절개 전용 의료용 캐뉼라를 넣었겠지만, 그녀는 마침 테이블 위에 놓인 딱딱하고 굵은 대롱을 대용으로 기관으로 밀어 넣었다. ‘제발! 호흡이 돌아오길!’ 할 수 있는 조치는 모두 했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공작부인의 호흡이 회복되길 기원했다. 숨구멍을 뚫어주었으니, 이제 공작부인의 몸이 숨을 쉬어내야 했다. 만약 길을 뚫어주었는데도, 숨을 쉬지 못한다면 그때는 인공호흡을 포함한 심폐소생술을 시행해야 하는데, 생존률이 급격히 낮아진다. ‘제발!’ 그리고……! 억겁과도 같은 몇 초의 시간 후. “후우.” 공작부인이 기도로 난 구멍을 통해 길게 숨을 내쉬었다. “……!” 그 소리를 들은 엘리제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간신히 살려낸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로.’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얼마나 급박했는지, 땀이 송골송골 수도 없이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땀뿐이 아니었다. 밀착하여 응급하게 수술을 한 탓에, 얼굴과 드레스에 온통 피가 묻어 있었다. 하지만 그걸 닦을 여유는 없었다. 그녀는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을 바라봤다. 모두 경악과 혼란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연했다. 황실의 친척인 공작부인의 목을 나이프로 꿰뚫었다. 뭔가 응급처치를 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황족의 몸을 시해한 것이다. ‘아직 기관절개술이 시행되지 않을 때이니.’ 현대 지구에서야 기관절개술이 굉장히 흔한 의료 처치였지만, 이곳은 아니었다. 곧 자신에게 닥칠 후폭풍에 그녀는 눈을 감았다. ‘고생 좀 하겠구나.’ 고생 정도가 아니었다. 황족의 몸을 상하게 한 죄로, 잘못하면 황족시해죄로 중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모른 척했으면 공작부인은 사망했을 거야.’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살릴 수 있는데 어떻게 환자의 죽음을 외면하겠는가? 외과의사의 영혼을 가진 그녀로서는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무거운 군화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목덜미에 섬뜩한 느낌의 금속이 내려앉았다. “……!” 근위병, 로열 가드였다. 그녀에게 검을 겨눈 로열 가드가 차갑게 입을 열었다. “우리와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영애.” 목에 닿는 금속의 느낌이, 이전 단두대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떨리는 마음을 참으며 그녀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안내해 주십시오.” 로열 가드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목에 검이 겨누어져 있는데, 너무나 차분한 음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까.’ 남들이 오해하기 충분한 상황이지만, 그녀는 오로지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한 행동이었다. 그러니 주눅이 들 필요 없다 생각했다. 다만 압송되기 전, 반드시 일러둘 말이 있었다. “가기 전 부탁드릴게 있어요. 공작부인의 상처를 소독해 주세요.”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로열 가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목에 칼이 겨눠진 채 끌려가는 상황에서 지금 뭐라고? 하지만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상세하게 설명했다. “응급 상황이라 소독을 못하고 수술했어요. 저대로 두면 감염증이 생길 수 있어요. 황궁의 의사들에게 일러 반드시 소독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 “가죠. 안내해 주세요.” 로열 가드는 당황한 얼굴로 엘리제를 압송했다. 당황한 것은 로열 가드만이 아니었다. 연회장 모두가 경악과 혼란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2-2 뜻밖의 대형사고(?) - fin> <2-3 검제(劍帝) - start> ============================ 작품 후기 ============================ 내일 금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드디어 탄신연회 파트가 끝났네요. 사실 지금 출장을 나왔습니다. 오늘 연재분과 내일 연재분은 예약 연재로 올리겠습니다.^^ 리플 달아주신 분들, 추천해주신 분들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00039 2-3 검제(劍帝) ========================================================================= <2-3 검제(劍帝)> 그날의 탄신연회는 그렇게 혼란과 경악 속에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늦은 밤, 황궁의 어전. 한없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한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부디 통촉해 주시옵소서, 폐하!” 제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족이자, 클로랜스가의 가주, 재상 엘 후작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르게 침통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뿐인 딸이 황족의 몸을 시해하는 중죄를 저지르다니! “부디 용서해 주시옵소서! 폐하께서도 아시지 않습니까? 제 딸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아이가 아닙니다. 엘리제 그 아이가 비록 공작부인의 몸을 손상시키긴 했으나, 절대 좋지 않은 의도로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때 그 순간. 공작부인이 쓰러지고, 엘리제가 나이프로 공작부인의 목을 겨눌 때 엘 후작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저게 무슨?! 말릴 수조차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나이프가 공작부인의 목을 꿰뚫었고, 피가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엘 후작의 부인은 충격에 기절해 버렸고, 그의 하늘은 무너져 내렸다. 하나뿐인 딸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소중한 딸이 공작부인의 시해범이 된 것이다! 아니라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연회장에 있던 모두가 그 광경을 목격했다. ‘아니야! 내 딸이 황족시해죄라니! 그럴 리가 없어!’ 항상 근엄한 후작이지만 침착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엘리제 그 아이는 공작부인을 살리려 그런 게 분명해!’ 후작은 똑똑히 봤다. 엘리제가 나타나기 전, 공작부인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것을. 의학을 몰라도 질식이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딸은 나이프를 들기 전, 공작부인의 배를 잡고 살리려는 조처를 먼저 했었다. 그런 그녀가 미쳤다고 갑자기 나이프를 들어 공작부인을 해치려 했겠는가? 분명 공작부인을 살리려 그런 것일 거다. 후작은 딸을 굳게 믿었다. ‘하지만 문제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 엘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엘리제가 나이프로 공작부인의 목을 찔렀다는 점이다. 환자의 목을 칼로 찌르는 치료법이라니? 듣지도 보지도 못한 방법이다. 앞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는 그저 끔찍한 범죄로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여러 상황이 참작되어 그녀가 공작부인을 살리려는 의도로 그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인정되어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무려 황족의 몸이다. 아직 의사도 아닌 그녀가 정확하지도 않은 방법으로 황족의 몸에 칼을 대 중상을 입혔다는 죄는 피하기 어려웠다. “폐하, 부디 통촉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 사건의 최종 심판관이 황제이기 때문에. 엘리제의 처우는 황제의 결정에 달려있었다. “용서만 해주신다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르겠습니다! 저희 가문의 그란비아 섬이라도, 아니, 클로랜스 가문 전체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엘 후작은 딸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자존심도, 재산도, 가문도! 딸이 그런 중죄를 뒤집어쓰게 생겼는데, 이런 것들이 문제겠는가?! 그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딸을 사랑했다. “그만. 그만하게, 재상.”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말했다. 그의 얼굴은 온화한 평소와 다르게 딱딱했다. “짐이 설마 엘리제에게 그런 중죄를 덮어씌우겠는가? 엘리제는 자네뿐 아니라 나에게도 가족같이 소중한 아이이네. 그리고 짐도 알고 있어. 그 아이가 그럴 아이가 아니란 것은.” 그래, 황제도 알고 있었다. 당시 정황을 봤을 때 엘리제는 공작부인을 구하려 그런 일을 벌인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공작부인은 살아났다. 질식이 일어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목에 상처만 입었을 뿐, 상태도 멀쩡했다. ‘그 아이가 살려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칼로 목을 뚫는 그 정체불명의 치료가 효과를 본 것이 분명했다. 사실 처벌이 아니라 큰 상을 내려야 할 상황. ‘문제는 황족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는 건데. 그것도 의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사실 그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죽을 상황이었는데, 상처가 문제겠는가? 생명을 살렸는데, 황족의 몸을 시해했다고 탓하는 것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했는데, 거칠게 건져냈다고 탓하는 격. 제국을 경영하는 민체스터는 그런 소심한 위인은 아니었다. 더구나 의학적으로 조사를 진행하면 그녀 덕분에 공작부인이 살아났다는 점이 명확해질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벌이 아니라, 큰 상을 내려야 할 수도 있다. <황족을 살린 클로랜스 영애! 황실 훈장 수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황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지.’ 큰 벌을 내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가 엘리제를 아끼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죄가 없는, 오히려 공작부인을 구한 아이에게 무슨 큰 벌을 내리겠는가?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런 일을 해냈다면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하지만. ‘벌을 내리진 않더라도 일부러 사소한 트집이라도 잡아야겠지.’ 그 이유는 자명했다. 그녀가 자신이 아끼는 클로랜스 영애이기 때문에. ‘차라리 잘됐어. 이 기회에 병원에서 아예 손을 떼게 하여야겠어.’ 애초에 그녀가 의사가 되려는 것을 못마땅해한 황제였다. 그리고 이번 일을 겪으며 그 생각이 확고히 굳어졌다. ‘이런 위험한 일을 더 하게 할 수는 없어.’ 후에 황후가 될 아이가 칼로 목을 절개하다니! 당시 그 아이의 몸에 얼마나 많은 피가 튀었는지 모른다. 그 모습을 보며 황제는 가슴이 내려앉는 듯했다. ‘조사단에게 일러 최대한 철저히 당시 상황을 조사하라 해야겠군. 의학적으로 봤을 때 조금의 문제라도 있었다면 그걸 이유로 더는 병원에 발도 못 붙이게 해야겠어.’ 황제는 입을 열었다. “후작.” “네, 폐하.” “만약 공작부인을 살리려던 당시 처치에 문제가 없었다면, 클로랜스 영애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야. 하지만 조금의 문제라도 있었다면!” 황제는 선언했다. “그 아이와의 내기는 이걸로 끝이야. 더는 그 아이가 병원에 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걸세.” “……!” 물론 황제는 이 조사에 주관적인 입김을 개입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최고의 의사들로 꾸려질 조사단은 최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이게 당시의 처치를 검토할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 아이가 한 처치가 아무런 흠도 없는 완벽한 처치일 리는 없으니까.’ 그는 엘리제가 한 응급 처치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의학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는 처치였을 터. 최고의 의사들이 모인 조사단은 엘리제가 했던 처치의 문제점들을 세세하게 잡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조사단을 꾸리라 해야겠어.’ 황제는 시종을 통해 명령을 내렸고, 의학 연구원에서는 총 3명의 의사를 선정하였다. 그는 조사단이 결과를 가져오면 엘리제에게 다시는 병원에 나가지 못하도록 명하기로 다짐했다. 그런데 황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 3명의 의사 중, 다음의 2인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황실 십자 병원의 병원장이자 황궁 어의인 밴 자작! 그리고 테레사 병원의 교수이자, 의학계에 명성이 자자한 젊은 천재 그레이엄 남작! 둘 모두 의학에 자신의 삶을 바친 의학자들. 그들은 황제의 명을 따라 곧바로 조사에 들어갔다. *** 이튿날 늦은 저녁. 황궁의 깊은 곳에 위치한 회색 탑에도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회색 탑의 이름은 백원(百願)의 궁(宮). 따로 혈탑(血塔)이라고도 불리는 그곳은 예로부터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곳으로,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엘리제는 그 백원의 궁에 구금되었다. 탑에 새로운 손님이 찾아들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새로운 손님, 엘리제는 죄인들이 흔히 하는 행동인 억울하다느니, 용서해달라느니 그런 말도 없이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있을 뿐이었다. 감시하는 로열 가드가 걱정할 정도.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고 자정이 넘어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이 깊어갔다. 그런데 그 고요함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백원의 궁에 스며들었다. “……!” 두 눈 부릅뜨고 있는 로열 가드도 아무런 눈치를 못 챌 정도로 은밀한 움직임. 그 그림자는 좁은 궁 내부의 어느 한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로 엘리제가 감금된 방 쪽이었다. “…….” 말없이 엘리제가 감금된 방 안으로 들어간 그림자에게 희미한 달빛이 떨어졌다. 그리고 달빛을 통해 드러난 그림자의 얼굴. 놀랍게도 그림자의 정체는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 침대에 잠들어 있는 엘리제를 보는 그의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엘리제. 이 바보 같은.’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어쩌자고 그런 무모한 행동을!’ 그는 얼마 전 탄신연회 때 그녀가 저지른 일을 떠올렸다. ‘잘못됐으면 어떻게 하려고!’ 물론 그도 그녀가 공작부인을 구하려고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화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잘못됐으면 어떻게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겁도 없이! 물론 먼 친척인 공작부인을 구해준 것은 감사하다. 하지만 두 눈으로 목격한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화가 치솟았다. ‘정말 볼 때마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그는 도대체 몇 번을 했는지 모를 생각을 떠올렸다. 그는 그녀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이런저런 일로 자꾸 생각나게 하는 것도, 신경 쓰이게 하는 것도, 불안하게 하는 것도, 계속해서 떠오르는 것도, 모두다! 전부 마음에 안 들었다.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왜 여기에 온 것이지. 이 마음에 안 드는 소녀를 보러.’ 도저히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백원의 궁에 몰래 잠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초상(超上) 능력 중 하나인 그림자 걷기(Shadow walking)를 사용해야 했고, 사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하물며 이 백원의 궁에는 자신에 비할 만큼 강력한 초상(超上) 능력자가 한 명 더 머물고 있었으니까. 그의 감각을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쯤 자신의 출현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왜 자신은 이런 위험한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소녀를 보러 왔을까? 마음에 안 들어서? 자꾸 어른거리며 짜증이 나서? 일이 손에 안 잡혀서? 모르겠다.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속 그녀 생각이 났고, 어느 순간 자신은 이 백원의 궁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엘리제.’ 그는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달빛을 받아서인지, 조금은 더 창백해 보이는 안색. 그의 가슴에 들끓는 감정이 타올랐다. 그건 간절하면서도 안타까운, 그러면서도 저리게 아픈,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아, 속 편히 잘도 자고 있군. 밖에선 얼마나 애끓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인형같이 예쁜, 그러면서도 조그맣고 창백한,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외모. 나이프는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처럼 생겼으면서 잘도 그런 일을 저질렀다. ‘이번뿐이 아니야.’ 대수술, 비장절제술을 해낸 것도 그녀였다. 그리고 그는 테레사 병원에서 그녀가 수많은 험한 환자를 치료해 낸 것을 알고 있다. ‘미칠 노릇이지. 이런 몸으로.’ 하지만 문제는 그 모습이 의외로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아니, 단순히 어울린다, 정도가 아닌. 아름다웠다. 저 여린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환자를 치료할 때의 강렬한 의지가, 그리고 환자가 좋아졌을 때 환하게 웃는 미소가 그녀를 밝게 빛나게 했다. 그건 연회장에서 곱게 단장한 치장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여리면서도 그 누구보다도 강인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아름다움. “하아.” 린덴은 갑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보고 있는데, 계속 마음이 갑갑했다. 알 수 없는 갈망, 가슴이 꽉 막힌 듯이. “이제 몸은 괜찮은 건가.” 며칠 전 고열이 나던 게 생각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는 게 아직도 열이 끓고 있는 것 같았다. “아프지나 말 것이지. 그러면서 무슨 환자를 본다고.”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또 저렇게 열이 끓고 있는데, 이불은 왜 한편에 밀어버린 건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었다. 이불이 얇은 것 같다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 작품 후기 ============================ 내일 토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00040 2-3 검제(劍帝) ========================================================================= 그런데 그의 손이 이불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엘리제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돼…….” “……!” 그는 흠칫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잠투정일 뿐 다행히 깨어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무슨 꿈을 꾸는 거지?’ 소녀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변했다. “안 돼…… 안 돼…….” 안타까울 정도로 괴로운 신음. “죽지 마요…… 제발…… 제발…….” 그리고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 “……!” 린덴은 그 생각지도 못한 모습에 딱딱히 굳었다. 무슨 꿈이길래 저 강인한 소녀가 눈물까지 흘린단 말인가? 그리고 죽지 말라니? 누가? 그저 헛된 미몽이라 하기엔 소녀의 얼굴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그는 뻣뻣이 굳어 소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더 잠꼬대를 중얼거리진 않았지만, 괴로운 얼굴의 소녀의 눈가에는 잔뜩 눈물이 고여 있었다.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하아.” 린덴은 손가락을 들어 소녀의 눈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머뭇거리다 말했다. “무슨 꿈인지는 모르지만…… 명령이니 그런 꿈꾸지 마라.” 내 가슴이 답답해지니까. 그는 등을 돌려 방문으로 걸어갔다. 달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걸어간 순간, 그의 몸이 어둠으로 변했다. 초상(超上) 능력인 그림자 걷기가 발동된 것이다. 린덴은 마지막으로 엘리제를 돌아보았다. “좋은 꿈꾸길.” 부디. 그러고 린덴은 백원의 궁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아무도 모르게 그곳에서 빠져나갔을 때였다. 백원의 궁 꼭대기에서 누군가 중얼거렸다. “형님의 그림자 걷기는 오랜만이네. 저거 조금 위험하지 않나? 형수님이 그렇게 보고 싶었던 건가? 연애 세포가 전혀 없는 연애 바보인 줄 알았더니 저런 면도 있으셨네.” 젊은 남자였다. 남자는 탑의 꼭대기에 누워 있었는데, 놀랍게도 몸이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마법 양탄자에 올라탄 것처럼. 그는 빙긋 웃었다. “어쨌든 이곳에 같이 갇힌 것도 인연인데, 나도 형수님께 인사나 한번 드릴까? 의사가 되려 한다고? 의사는 대부분 술 좋아하던데 형수님도 술 좋아하시려나?”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이름은 미하일 드 로마노프. 현 황실의 3황자이자, 황태자의 정적. 그리고 론도(Londo)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서 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 검제(劍帝)라 칭송받는 남자였다. *** 의학 연구원에서 파견한 3명의 조사단은 공작부인의 상처를 철저히 조사했다. “그렇군. 그런 거였어.” 황궁 어의 밴이 중얼거렸다. “자네도 동의하지, 그레이엄?” “네, 자작님.”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1인,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교수인 카일 준남작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역시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러면 더 조사할 것 있나? 보고하도록 하지.” 그렇게 조사단은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았네. 조사는 끝난 건가?” “그렇사옵니다.” 옆에 동석한 엘 후작은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설마 황제가 엘리제에게 중벌을 내리지야 않겠지만, 만약 저들의 조사가 안 좋은 쪽으로 결론 나면 또 몰랐다. 반면 민체스터 황제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엘리제와의 내기를 끝낼 순간이 왔다. “빨리 말해보게. 어떤가? 클로랜스 영애의 응급조처에 당연히 여러 문제가 있었겠지?” 그는 티끌만큼의 문제라도 있었으면 그 핑계로 엘리제를 다시는 병원 일을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앓던 이를 뽑게 되겠군. 황후가 될 아이가 의사라니. 말도 안 되지.’ 황제는 내친김에 정식 약혼 발표도 앞당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인식까지 기다릴 필요가 무어에 있겠는가? 밴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어딘가 이상했다. 무언가 들뜬? “이건... 기적입니다.” “……뭐?” 황제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뭐라고? “완벽합니다, 폐하! 그야말로 완벽한 조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목을 칼로 찌른 조처가 완벽하다니?” “만약 그 조처가 아니었다면 공작부인은 사망했을 것입니다. 공작부인이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영애의 조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천만한 일 아닌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위험한 조처를 제대로 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밴은 황제의 기분도 읽지 못하고 흥분하여 설명했다. “그래서 기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전부터 기도가 막혔을 시 목을 절개해 숨구멍을 뚫어주려는 아이디어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워낙 위험해 제대로 시도를 못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공작부인에게 시술된 그 상처는 지금껏 의사들이 생각하던 완벽한 기관절개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의 어떤 장기도 손상하지 않고,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딱 필요한 만큼의 상처! 그 급박한 순간에 어떻게 이런 시술을 해냈는지 감탄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듣자 하니 10초도 안 되는 시간 만에 해냈다 하던데.” “……크흠.” 황제는 불편한 기침을 내뱉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완벽한 시술이었다고? 그냥 우연 아닌가? 너무 과찬하는 것 같군.” “저희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보기 전까지는요.” 그러면서 밴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한 장의 종이였는데, 애들 장난처럼 못 생기게 쓴 글씨가 삐뚤삐뚤 채워져 있었다. “무언가, 그게?” 알아보기 힘든 그 글씨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진술서입니다.” “진술서?” 진술서? 설마 저 못생긴 글씨가 클로랜스 영애가 쓴 거란 말인가? 그런데 갑자기 진술서가 여기서 왜 나온단 말인가? 밴이 들뜬 음성으로 설명했다. “그냥 진술서가 아닙니다. 영애가 어떤 의도와 방법으로 그 처치를 한 것인지 진술서에 기술했는데…… 그 내용이 마치 의학 논문을 보는 듯합니다.” “…….” 뭐? 의학논문? “이 진술 내용을 보면 목과 기관의 해부학적 관계를 정확히 꿰뚫고, 가장 안전한 위치, 가장 필요한 부위에 딱 적합한 절개를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지식과 빠른 판단, 과감한 행동이 조합된 조처로 보입니다. 그것도 10초도 안 되는 시간 동안에요! 저희도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없는데, 어찌 이제 16살인 영애가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면서 밴은 이렇게 마무리했다. “이 진술서는 형사부에 보관할 것이 아니라, 의학 발전을 위해 논문으로 발표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조처였습니다.” 그 정도를 뛰어넘는 극찬에 황제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밴이 제대로 조사를 한 건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저 이는 원래 새로운 의학 지식에 흥분하는 경향이 있지. 편견이 들어가 있을 수도 있어.’ “자네의 이름은?” 까칠한 인상의 잘생긴 젊은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의학계의 젊은 천재라 불린다 했었지? “그레이엄 드 팰론입니다, 폐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미천한 제 생각으로는…….” 그레이엄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국 의학계가 또 한 명의 희대의 천재를 만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허!” 황제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 말은 그레이엄의 진심이었다. 그는 이 조사를 하면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제자, 로제를 떠올리게 하는 천재적인 조처였기 때문이다. ‘로제 말고도 이런 천재가 있었다니!’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범재의 한계를 못 벗어나고 있는데, 허탈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들, 밴과 그레이엄은 로제와 엘리제가 동일인 것을 모르니 하는 생각이었다. “허허, 도저히 믿을 수 없군. 카일,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 황제는 이번엔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교수 카일의 의견을 물었다. 로즈데일 병원은 사실상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후작의 소유. 황제파의 수장 가문인 클로랜스 영애에게 최대한 공정한, 아니, 불리한 판정을 해줄 것이다. 황제는 귀족파인 카일이야말로 편파적인 편견이 들어간 안 좋은 평가를 해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카일조차도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고 심지어 이렇게 말했다. “……잘못된 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인정하기 싫으나…… 밴 경과 그레이엄 경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됩니다.” “... 그래도 뭔가 잘못이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큰 잘못은 아니더라도, 사소한 실수라도... 뭐라도 잘못이 있을 텐데...” 뭐라도 좋으니 말해봐! 어떤 불공정한 판결이라도 좋으니, 란 눈빛으로 황제는 귀족파 카일 교수를 바라봤다. 하지만 카일 교수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클로랜스 영애는 완벽한 조처로 공작부인을 살려냈습니다. 벌이 아니라 마땅히 큰상을 내려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저놈은 귀족파 주제에 뭐가 저렇게 올곧단 말인가?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엘 후작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간신히 참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더구나 천재적인 조처라 하지 않은가? ‘보고 있소, 테레사? 역시 우리 딸이오.’ 딸이 병원에서 고생하는 것은 싫지만, 저런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저런 조사 결과가 나왔으니 딸이 처벌받지도 않을 것이다. 반면 황제는 심기가 불편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는가? 그 아이에게 상을 내려야겠는가?” “네, 폐하. 공작부인이 살아난 것은 전적으로 클로랜스 영애 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에 마땅한 상을 내려야 한다 봅니다.” 밴은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이번 일을 의학계에 발표하려고 합니다. 영애가 진술서에 기술한 내용은 앞으로 기도가 막히거나, 기관을 절개해야 하는 환자를 치료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갈수록 가관이었다. 황족을 살렸으니, 최소 훈장감이었다. 아예 이런 경우를 위한 훈장이 따로 있었다. -황실에 큰 도움을 준 자에게 수여되는 황실 장미 훈장(皇室薔薇勳章, Royal rose medal)! 그러면 언론에서도 득달같이 보도할 것이다. [황태자의 약혼녀 클로랜스 영애, 훈장 수여. 천재적인 조처로 공작부인의 목숨을 살려내다!] [클로랜스 영애, 황족을 구해낸 공으로 황실 장미 훈장 수여!!] 이런 식으로 말이다. 더구나 황제가 알기에는 만약 이번 일로 엘리제가 훈장을 받으면 제국 역사상 ‘최연소’에 ‘최초의 여성’ 황실 장미 훈장 수훈자가 된다. 그뿐인가? 황실 장미 훈장 수훈자에게는 자동으로 기사(Knight) 작위가 부여된다. 이번 일로 엘리제는 작위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그녀는 ‘레이디 엘리제’가 아닌, ‘데임(Dame) 클로랜스’가 된다.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고작 16살의 나이로. ‘골치 아프군.’ 더구나 의학계에도 발표한다니, 의사들 사이에서도 유명세를 타게 생겼다. 마음에 안 들었으나 방법이 없었다. ‘또 제 부인을 끔찍이 아끼는 하버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당장에라도 감사를 표하러 뛰쳐나간다는 것을 판결이 안 났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간신히 말리고 있는데, 이런 판결이 나왔으니. 더구나 신문사의 반응도 걱정스러웠다. 특종을 바라는 기자들이 판결 내용을 목 놓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 판결이니, 어떤 내용의 기사들을 써댈지. 온갖 소설 같은 내용의 기사가 난무할 것 같다. 그런데 그때, 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폐하, 외람된 말씀이오나, 한 가지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실컷 외람되었으면서 이제 와 조심하기는.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말해보게.” “그…… 클로랜스 영애를 만나볼 수는 없겠습니까?” “……?” “이번 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 “허락해 주신다면 여기 그레이엄과 같이 만나 보겠습니다.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그레이엄도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도 클로랜스 영애를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제자 로제와 비견할 만한 천재라니. 어떤 영애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밴과 그레이엄은 조만간 날짜를 잡아 클로랜스 영애를 찾아가기로 하였다. 엘리제는 모르는 사이 일어난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일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Ps. 읽어주시는 분들께, 코멘트 달아주신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00041 2-3 검제(劍帝) ========================================================================= 한편 그때, 백원의 궁의 엘리제는……. 엘리제는 공부하고 있었다. ‘다행히 몸이 많이 나아졌네.’ 이틀 정도를 내리 잠만 잔 덕일까?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 몸이 좋아져, 얼마 전 면회 온 작은오빠에게 자격시험 준비에 필요한 의학 서적을 부탁했다. 어차피 판결이 날 때까지 할 일도 없으니 공부나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엘리제, 너는 도대체!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작은오빠는 그녀가 벌인 일에 잔뜩 잔소리했으나, 책은 군소리 없이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큰오라버니의 반응이 의외였지.’ 큰오라버니, 렌 남작은 잠시…… 정말 잠시 그녀를 보러왔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잘했다.” “……?!” 독설가인 큰오라버니가 한 말이 맞는지,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네가 공작부인을 구하려 그런 것 안다. 위험한 일이긴 했으나, 잘했다.”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이전 삶과 이번 삶을 통틀어 큰오라버니에게 칭찬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조금만 더 고생해라. 네 덕분에 공작부인이 살아난 것은 모두 알고 있으니, 금방 판결이 날 것이다.” 그러고 렌 남작은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최근 크림원정과 관련해서 계속 바쁜 눈치였다. ‘큰오라버니.’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봤다. ‘무사하셔야 해요.’ 탄신연회 때 참석한 프랑소엔 공화국의 루이 니콜라스가 떠올랐다.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그가 참석했단 의미는 단 하나. ‘검은 대륙의 서북부가 프랑소엔 공화국에 의해 평정된 것일 거야. 지난 삶보다 더 이른 시간 만에.’ 어째서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로 인해 공화국이 크림 반도에 병력을 투입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국도 병력을 증강할 것이고 총기사단(Rifle knightage)의 부단장인 큰오라버니도 참전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작은오라버니는 참전하지 않겠지.’ 지난 삶,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는 그 확전된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번 삶에선 무슨 일이 있어도 작은오라버니의 참전을 막을 것이다. ‘큰오라버니는 무사하고, 오히려 큰 공을 세우시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긴 매한가지였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 아차 하면 목숨을 잃는 그곳에서 이번 삶도 지난 삶과 같으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만약 참전하더라도, 제발 무사하셔야 해요. 부디.’ 그녀는 십자가를 향해 기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크림원정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그리고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얽히게 될지. 이후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가족들이 한 차례 왔다 간 후, 엘리제는 얼마 안 남은 의사 자격시험 공부를 하였다. ‘차라리 감금돼서 잘됐어. 감금되지 않았으면 탄신연회다, 병원 일이다 뭐다 해서 공부할 시간도 없었을 건데.’ 사람들은 혈탑(血塔)에 감금된 그녀를 측은히 바라봤지만 그녀는 오히려 좋아했다. 앉아서 밥만 먹고 공부만 할 수 있다니. 어찌 아니 좋겠는가! ‘어차피 판결이 나쁘게 나진 않겠지.’ 사람들도 당시 자신의 행동이 공작부인을 살리려 한 행동인 것을 짐작하고 있을 것이고, 또 여러 뛰어난 의사들이 공작부인의 상처를 검토할 것이다. 그러면 자신이 어떤 의도로 그런 행동을 한 것인지 정확히 밝혀질 것이니 그녀는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일단 그라함 각론을 다시 한 번 보고. 프레밍 약학도.’ 물론 전부 아는 내용이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머릿속 지식이 더 정확하다. 수많은 세월 동안 축적된 지구의 현대 의학이 담겨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시험이니, 출제자가 의도한 내용 즉, 브리티아 제국의 의학 수준에 맞춰 문제를 풀어야 한다. ‘폐하에게 보여드리기 위해서도 꼭 고득점을 맞아야 해.’ 그녀는 탄신연회 때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어지간한 업적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황태자비가 되라는 제의. 하지만 그녀는 절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일단 자신과 황태자의 결혼은 모두를 불행하게 할 비극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은 의사의 삶을 원했다. 그러니 반드시 내기에서 이겨 의사의 삶을 살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제 나를 황태자 전하의 약혼녀나 다름없이 여기겠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그렇게 그녀는 의지를 다지며 공부를 했다. 지구에서 과학고 조기졸업, 서울대 수석입학, 수석졸업, 최우수 외과 전공의 수료, 천재 외과의사! 그런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인 만큼 그녀의 학업 능력은 굉장했다. 그녀는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아니,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책에 매진했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늦은 저녁이었다. 그녀가 한창 책에 몰두해 있을 때, 누군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갔다. 끼익. 낡은 방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는데도, 엘리제는 미동도 없었다. 책에 집중해 못 들은 것이다.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기요?” “…….” “저기요? 나 좀 봐주실래요? 똑똑.” 입으로 노크 소리도 내보았지만 여전히 못 듣는 엘리제. ‘그’는 씨익 웃었다. 장난기가 올라온 것이다. 일부러 발소리를 죽여 그녀의 등 뒤로 이동했다. 여전히 전혀 눈치 못 채는 엘리제.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귀 옆에서 속삭이듯 물었다. “뭘 보는 거예요, 형수님? “꺄아악!” 엘리제가 화들짝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가슴이 떨어질 듯 놀란 것이다! “누, 누구세요?!” 그녀는 도망치듯 의자에서 일어나 물었다. 하도 집중해 있어서, 꿈을 꾸다 막 눈을 뜬 듯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커다란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보는 모습이 엄청나게 귀엽긴 했다. 누구라도 안아주고 싶다 느낄 만큼.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형수님. 공식적인 자리 말고 이렇게 개인적으로 뵈는 것은 처음이죠? 린덴 형님의 동생인 미하일이라 합니다. 이 비극적인 혈탑에 같이 갇힌 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드리러 왔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3황자인 미하일 드 로마노프였다! 바로 황태자의 정적(政敵)인! 미하일은 약간은 과장된 동작으로 인사 후 형수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신의 남편이 될 이의 정적인 나를 보며 형수는 무슨 반응을 보일까? 놀라겠지? 얼굴을 굳히려나? 아니면 속마음을 숨기고 친절한 표정? 그런데 소녀의 반응은 그중 아무것도 아니었다. 눈을 더욱 커다랗게 뜬 것이다. 마치 상상도 못한 사람을 만난 것처럼. “……?”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런 얼굴을? 물론 자신을 만날 것이라 예상은 못했겠지만? 더구나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놀람을 넘은 경악, 그리고 그리움과 알 수 없는 슬픔이었다. ‘뭐지?’ 그가 알 수 없다는 마음에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소녀가 그를 불렀다. 떨리는 목소리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호칭으로. “마, 맙소사. 미, 밀? 밀이 정말 맞나요?” “……!” 미하일의 눈이 크게 떠졌다! 밀? 어떻게 그 이름을? 그 이름은 세상에서 단 한 명만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아니, 이제 그 사람도 자신을 전하라 칭할 뿐, 그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 자신의 놀란 표정에 소녀는 무언가 실책을 깨달았는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예를 표했다. “아, 아니. 죄, 죄송합니다. 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딸, 엘리제 드 클로랜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공손한 예가 무색하게. 뚝. 소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 그 눈물에 미하일은 당황했다. 아, 아니, 왜? 어째서 눈물을? “혀, 형수님?” “죄, 죄송합니다, 전하. 누,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저, 정말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녀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그를 향해 웃었다. 누가 봐도 억지로 지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지는 미소였다. “다시 인사 올립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엘리제라 하옵니다.” “……!” *** 엘리제는 자신의 실책을 자책했다. 그를 보자마자 눈물 흘리다니. 더구나 ‘밀’이라 그를 부르다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밀.’ 미하일 드 로마노프. 황태자의 정적. 그리고 이전 삶, 자신의 유일했던 친구. 도저히 가까울 수 없는 사이였지만 기이하게도 그와 자신은 친했다.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닌, 마음을 나눈 친구였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아직은 악녀라 불리기 전, 많이 삐뚤어지지 않았던 시절. 그때 그녀는 궁에 뒤뜰에서 울고 있었다. 아마 황태자와의 어긋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침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3황자가 그녀의 눈물을 보고 다가왔다. ‘뭐야, 울고 있는 거예요, 형수님?’ 그러며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정적인 형님의 짝인 자신이 우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레이디의 눈물을 그냥 지나치지를 못해서.’ 그리고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녀를 위로해 주었다. 당시 상처받았던 그녀는 그 위로에 많은 위로를 받았었다. 그 뒤로도 그와 계속해서 마주할 일이 생겼고 그때마다 그는 씨익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울보 형수님이네? 요즘은 안 울어요?’ 그러며 둘은 조금씩, 자연스레 친해졌다. 정치적인 관계를 고려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되었다. 그런 그를 생각지도 못하게 만나니,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아까 전에는 왜 그런 거예요, 형수님?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보자마자 감동의 눈물을 흘릴 만큼?” 자신이 당황을 가라앉히자 그가 장난스레 물었다. 엘리제는 할 말이 없어 가만히 웃었다. ‘잘생기긴 했지.’ 황태자가 차가운, 그러면서도 천상의 조각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면, 미하일은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에게 이런 표현을 써도 될까 싶지만 그는 마치 꽃 같았다. 화사한 꽃. 그러면서도 쾌활한. 금발, 금안의 그는 그런 빛나는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그러면서도 각고의 단련을 통해 다져진 몸은 탄탄하면서도 강인했다.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다운 매력적인 외향이랄까. “흠…….” 미하일은 알 수 없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뭘까? 저 시선은. 소녀는 얌전히 웃고 있었지만, 바람둥이 중의 바람둥이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이었다. ‘서로 먼발치에서밖에 본 적 없지 않나? 내가 아무리 바람둥이여도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와 뜨거운 시간을 보낸 적은 없는데?’ 그는 혹시 자신과 사귄 사람 중 저 소녀가 있었나, 고민했지만 아니었다. 물론 자신이 잠깐 스친 인연까지 모두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예쁜 소녀를 기억 못할 리가 없었다. ‘뭐지?’ 어쨌든 그날의 인사는 그렇게 끝났다. 미하일은 의문을 가지고 자신이 감금된 방으로 돌아갔다. “엘리제라고?” 그는 침대에 누워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감금 중이라 혼자 심심했는데 잘됐군.” 어차피 할 것도 없겠다. 그는 그녀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 그 뒤, 그는 엘리제를 심심하면 찾아갔다. 형님, 그러니까 황태자의 정적인 자신이니 싫어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소녀는 반갑게 맞아주었다. 가끔 외부에서 들여온 차를 달여 주기도 했는데, 그 향과 깊음이 일품이라 더욱 자주 찾아가게 되었다. ‘기이하게 말도 잘 통하고.’ 미하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소녀는 이상하게 자신을 친근하게 느끼는 듯했다.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느낌이 그렇다. 그러다 보니 자신도 그녀가 편하게 느껴졌다. “저…… 전하. 그렇게 감금 중이신데, 계속 돌아다니시면…….” 로열 가드가 곤란한 얼굴로 말렸으나, 3황자는 싱긋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뭐, 아무려면 어때. 백원의 궁에 감금된 거지, 방에 감금된 것은 아니잖아. 어차피 우리 둘 다 곧 풀려날 거고.” 그렇게 둘은 같은 궁에 머물며 급속도로 친해졌다. 정확히는 미하일이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정적(政敵)인 형님의 부인될 소녀와 이렇게 친해져도 되는 걸까 생각될 정도. 하지만 미하일은 사람을 사귀는 것에 있어 정치 관계 같은 사소한(?) 것 따위를 신경 쓰는 소인배가 아니었다. “뭐 읽는 거예요, 형수님? 그 책 재미있어요?” “공부 중이에요. 이제 곧 의사 자격시험을 봐야 해서요.” “한 단어도 못 알아보겠는데, 이런 어려운 책을 잘도 읽네. 그런데 정말 의사가 되려는 거야?” “네, 의사가 될 거예요.” “헤에, 그러고 보니 하버 공작부인을 구한 게 형수님이라고 했지? 대단하네.” 그는 신기한 눈으로 소녀를 바라봤다. 저 여리고 조그만 소녀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한 거지? 당시 난리도 아니었다는데. “그런데 그러면 결혼은? 형님과 약혼할 거잖아.” 소녀는 평소 부드러운 말투와 다르게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건 잘못 알려진 거예요. 저와 황태자 전하는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을 거예요.” “흐음…….” 3황자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하지만 부황께서는? “그러니 저를 형수라 부르지 말고, 그냥 엘리제라고 불러주시면 좋겠어요. 편하게 리제라고 해도 좋고요.” 3황자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 리제.” 엘리제. 리제. 왠지 어감이 예쁘다 생각하며 3황자는 이름을 불렀다. 은근슬쩍 말도 놓아버렸다. 뭐, 자신은 황자고 나이도 더 많으니까. 다음 날 3황자는 공부하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엿(Taffy)이야.” “엿이요?” “응, 동방에는 중요한 시험 전에 엿을 먹는 풍습이 있거든. 먹고 한 번에 찰싹 붙으란 거니, 꼭 붙어.” “쿡쿡, 감사해요.” 그러고 보니 3황자는 과거 1년 정도의 시간을 동방 청에서 보내며 무사수행을 했다. ‘말이 무사수행이지, 가출이었지. 어린 나이에. 청뿐 아니라, 서 대륙 본토, 검은 대륙까지 3년이나. 당시 황궁이 발칵 뒤집어졌다고 하던데.’ 어쨌든 그래서 동방의 풍습에도 해박했다. ‘한국에 살 때도 시험 보기 전 항상 엿을 먹었는데.’ 엘리제는 감사를 표하며 엿을 먹었다.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달달한 것이, 딱 그녀의 입맛에 맞았다. 그 모습을 미소 지으며 바라보던 미하일이 의외의 제안을 하였다. “형수님, 아니, 리제.” “네?” “오늘 저녁에 술이나 마실래?” “……?!” “마침 좋은 와인을 가지고 있거든. 아버지가 숨겨놨던 와인을 몰래 훔친 게 있어서. 원래 혼자 아끼며 마시려고 했는데.” 그러면서 미하일은 화사한 꽃 같은 얼굴로 싱긋 웃었다. “그냥 갑자기 너랑 같이 마시고 싶어져서.” ============================ 작품 후기 ============================ 내일 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Ps. 분량은... 죄송합니다.ㅠ 각 유료 플랫폼의 일반적인 권장 기준인 5500자 전후로 맞추고 있습니다.ㅠㅠ (각 플랫폼마다 대부분 5000자 이상 정도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극의 끊어짐에 따라 조금더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합니다만, 대부분 5500자보다는 조금 더 길 것입니다. 짧게 느껴지시면 죄송합니다.ㅠㅠ 아마 제 문체가 묘사가 거의 없고 단문으로 딱딱 끊어지는 문체라(로맨스보다는 주로 무협이나 현판에서 사용하는...) 더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 싶습니다.ㅠㅠ Ps2. 읽어주시는 분들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00042 2-3 검제(劍帝) ========================================================================= “그, 그래도 감금 중인데 술은…….” “여기 있으라고 했지, 술을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했잖아. 그런 말 들은 적 있어?” 그야 아무도 그런 짓 안 하니까! 하지만 3황자는 당당했다. “없지? 그러니 해도 되는 거야.” “…….” “마시자. 너도 싫은 것은 아니지? 무려 프랑소엔 제국의 황실에 내려오던 황실주라고.” 참고로 프랑소엔 제국은 시민 혁명이 일어나기 전, 공화국의 국명이었다. “하지만...” 물론 그녀도 싫지는 않았다. 엘리제의 몸으로 돌아온 뒤로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은 없었지만, 지구에서 그녀는 외과의사였으니 어느 정도 술을 좋아하긴 했다. 하지만 이래도 되는 걸까. “아직 저는 성인식도 안 치렀는데…….” “그러면 더 마셔 봐야겠네! 성인이 되기 전, 어느 정도 술을 마셔 봐야 성인식 때 실수 안 한다고! 그때 분명 엄청 마시게 될 테니. 그리고 리제, 너는 성인이 될 때까지 몇 달도 안 남았는데 뭐가 문제야?” 뭔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왠지 탈선을 강요당하는 소녀의 심정이 되어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내일 의학 연구원에서 손님이 온다고 했었는데. 마셔도 괜찮을까?’ 그렇지 않아도 기관 절개술을 논하기 위해 내일 의학 연구원에서 2명의 손님이 온다고 연락받았다. ‘뭐, 특별한 용무는 아니고 기관 절개술에 대해서만 논한다고 한 것이니 조금 마시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 손님이 설마 밴과 그레이엄일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했다. “알겠어요. 대신 저는 조금만 마실게요.” “그래, 그래. 하지만 마시다 보면 더 마시게 될걸? 이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그야말로 천상의 맛이거든.” “네에…….” 그렇게 ‘비극의 혈탑(血塔)’이라 불리는 백원의 궁에 때아닌 술판이 벌어졌다. 안주는 심지어 로열 가드가 준비하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엘리제가 이래도 되는 거야? 하는 황당한 눈으로 바라보자, 로열 가드는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란 얼굴이었다. “언젠가 이 술이 없어진 걸 알고 화내실 부황을 위하여, 건배!” “……그런데 전하가 이번에 감금되었던 것도 탄신연회에 사용할 의례용 포도주를 훔쳐 마셔서 아니었나요?” 3황자가 갇힌 이유. 의례주(儀禮酒)를 훔쳐다 길거리의 시민들과 진탕 마신 탓이었다. 격노한 부황이 백원의 궁에 가두라 했다고. “아, 그런 건 몰라! 미인은 사귀라고 있는 거고, 미주는 마시라고 있는 거지, 의례에 사용하고 버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참 대책 없는 말이었지만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어 엘리제는 웃었다. “쿡쿡, 알겠습니다. 네.” “자, 그러면 진짜로 건배.” 짠.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부딪혔고, 얕게 깔린 와인이 찰랑거렸다. 이제는 단종된,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특이하게 황금빛이었다. 그 황금빛 와인을 목에 넘긴 그녀는 감탄을 토했다. ‘맛있어! 역시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 프랑소엔 제국 시리즈는 지상 최고의 와인 중 하나라 평해진다. 항상 구름만 잔뜩 낀 브리티아 섬의 와인은 감히 흉내도 못 낼 맛. 똑같이 명주라 불리는, 포르투의 와인조차 한참 능가하는 미주였다. ‘이 와인을 내가 또 마시게 되는 날이 오다니.’ 사실 그녀는 이 와인을 처음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 삶, 한 번 맛본 적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저 3황자 미하일과. “맛있지? 더 마시라고. 얼마든지 있으니까.” “네.” 아까 그의 장담처럼 그녀는 한 모금만 마시고 멈추지 못했다. 그만큼 맛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전 그와 마셨던, 이전 삶이 떠오르며 기분이 씁쓸해져 더욱 마시게 되었다. ‘역시 그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엘리제는 쾌활하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와인의 도수가 높아서일까? 아니면 어린 소녀의 몸이어서일까? 몇 잔 마셨다고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왔다. 그는 이전 삶에도 저랬다. 항상 자유로웠고, 즐거웠으며, 악의 없이 모두를 사랑으로 대했다. 황태자가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이라면, 3황자는 시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이였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유쾌한 기행, 신분을 따지지 않고 평민들과도 거리낌 없이 술잔을 나누는 쾌활함. 그리고 자랑스러운 제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 제국 시민들은 모두 그를 사랑했다. 수없는 염문도 그의 매력이라고 여겼다. 그 시민들의 사랑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정치적 저력. 하지만 그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저 그의 성품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일 뿐. ‘그런 그이니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었지.’ 그녀는 울적하게 생각했다. 모두에게 외면당할 때 그만이 편견 없이 자신을 바라봐주었다. 그래서 소중했다. ‘하지만 막을 수 없겠지.’ 그의 마지막을 떠올리자 한없이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는 결국 죽는다. 미래를 알고 있는 그녀이지만 그것만은 막을 수 없었다.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바꿀 수 있는 일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마치 절대적인 명제처럼, 앞으로 일어날 그 일은 정해져 있었다. ‘유일한 방법은 그가 황권을 포기하는 것이지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 황권을 노리고 있는지. 사실 관심도 없는 황제의 자리에 그가 어떤 절박함으로 목숨을 걸고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슬펐다. 그 안타까운 이유가 슬펐고, 그래서 결국 비극적 최후를 맞이할 그의 미래에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최후를 맞이하던 순간이 떠올라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당시 그의 미소를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리제? 왜 그래?” “…….” “리제?” 놀란 3황자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을 열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때 그의 마지막 말. ‘형수님, 나 사실 너한테 할 말이 있었어.’ ‘무엇인데요?’ 하지만 그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란 말 한마디만 남기고 평소와 다름없는 자유로운 표정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그때 나한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궁금했으나 이제는 그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가 없다. “…….” 그녀가 입을 다물자 자연스레 술자리도 조용해졌다. 엘리제는 잔에 남아 있던 와인을 원샷 하듯 쭈욱 들이켰다. 뜨거운 기운이 가슴에 올라오며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죄송해요. 갑자기 술기운이 올라와서 그랬어요. 이제 괜찮아요.” 미하일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초리. 그는 와인을 잔에 가득 따르더니 싸구려 럼주를 들이켜듯 한 번에 목에 넘겼다. 그 모습에 엘리제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가 말했다. “거짓말.” “……!” “내가 바보인 줄 알아?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른 꼬맹이 주제에 뭐가 그렇게 슬픈 표정이야? 세상을 몇 번이고 산 사람처럼.” 엘리제가 차분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술기운에 그랬어요. 제가 술이 약해서. 신경 쓰지 마세요.” 그 흔들림 없는 대답에 3황자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여튼 귀엽게 생겨 가지고, 실제론 귀여운 맛이 없다니까. 애 늙은이도 아니고. 그렇게 혼자 속으로 삭이면 병 생긴다.” 엘리제는 그저 웃었다. 3황자는 한숨을 쉬더니 물었다. “형님 때문에 그래? 형님이 잘 안 해주셔?” “……!”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에요. 전혀 상관없어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형님이 잘해줄 리가 없잖아. 지금까지 여자 손은커녕, 연애도 한 번 안 해본 연애 바보이시니까. 론도에서 재미없고 무뚝뚝한 남자의 순위를 매기면 아마 형님이 1등 할걸? 네 큰오빠인 렌 남작이 2등 정도 하고.” 그 말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천하의 황태자한테 연애 바보라니.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3황자이니 가능한 표현이다. “차라리 나한테 오는 것은 어때? 나는 형님과 달리 아주 잘해줄 수 있는데.” “됐네요. 전하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여인 중 한 명이 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엘리제의 말에 미하일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전하를 그리워하는 여인들을 일렬로 세우면 론도 시내를 한 바퀴 감쌀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그건 터무니없는 모함이야. 난 항상 진실 된 사랑만 했다고.” “네네, 알겠습니다. 어쨌든 전 사양이에요.” 미하일은 일부러인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고,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사실 미하일의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그의 매력에 홀린 여자가 먼저 다가온 경우가 많으니까. 그저 그의 잘못이라면 잘생기고, 매력적이라는 게 죄랄까? 어쨌든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둘은 주거니 받거니 술을 나누었고, 취기가 올라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내가 동방 청에서!” 술기운이 올라 신이 난 3황자가 이전 3년간의 무사수행을 떠들었다. 엘리제는 지난 삶,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지만 다시 재미있게 들었다. 황실에서는 가출이라 칭하는 그 무사수행은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3년간의 그 여행이 끝나고, 그는 서 대륙 최강검(最强劍)이자 검제(劍帝)라 불리게 되었으니까. 더구나 검제란 별명은 서 대륙이 아닌, 무술의 본고장이라는 동방 청의 무인들이 경외를 담아 붙여준 존칭이었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中華)이라는 착각에 완고하기 그지없는 그들이 양이(洋夷)에게 말이다. 론도의 중심가에서는 당시 그의 가출을 영웅서사시 비슷한 걸로 꾸며 펼치는 연극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말이지. 청에는 악인들이 모여 만든 집단이 있었어. 청은 땅이 워낙 넓어, 나라 크기가 거의 서 대륙 전체만 해서 중앙 정부의 손이 안 닿는 곳이 많았거든. 그런데 검룡(劍龍)이란 협객과 내가…….” 미하일은 즐거운 얼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였고, 엘리제는 열심히 맞장구쳐 주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 갔고, 술도 거의 떨어져 알딸딸하게 기분 좋은 취기가 흐를 때 3황자가 말했다. “리제, 물어볼 게 있어.” “네? 말씀하세요.” 그가 엘리제의 눈을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넌 왜 의사가 되려는 거야?” “……!” 기분 좋게 떠들 때와 다르게 진지한 물음. “그건 왜 물어보세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네가 굳이 의사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싶다는 뜻은 좋지만, 어차피 너 아니어도 사람을 살릴 의사는 많잖아. 굳이 대귀족인 네가 고생하며 의사가 되는 게 의미가 있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가 아니어도, 이 제국에 의사는 많다. 물론 그녀처럼 최첨단 의학 지식을 가지고 있는 의사는 없겠지만 어쨌든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 굳이 하위귀족도 아닌, 대귀족인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 의사가 되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충분히. 하지만……. 그녀는 대답하기 전 반문했다. “전하, 외람되지만 저도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될까요?” “응? 물어봐.” “전하께서는 왜 검(劍)을 익히셨나요?”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황족인 전하께서 검을 연마하실 이유는 없으신데.” 그렇다. 대부분 황족은 그저 검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익혔다. 황태자인 린덴이 상당한 수준으로 검술을 익히긴 했지만 그가 특이한 경우였다. 왜? 필요가 없으니까. 황족들은 강력한 초상 능력의 소유자여서 검술이 의미가 없기도 하고, 무엇보다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총과 대포의 시대. 이전 기사의 시대면 모를까, 지금은 개개인이 아무리 강해도, 전장에서 영향이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3황자는 검술을 연마했다. 그것도 검제란 칭호를 얻을 만큼 높은 경지까지. 그가 초상 능력자라서 검술을 쉽게 익힌 것도 아니다. 초상 능력과 오러, 검술은 전혀 별개였다. 오로지 본인의 피나는 노력만으로 그런 경지까지 도달한 것이다. 도대체 왜? 어째서? 3황자는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야…… 검이 좋으니까.” 그래,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검을 좋아하니까.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닌, 매혹당해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미친 듯이 좋아하니까. 엘리제가 그 대답에 빙긋 웃었다. “저도 그래요.” “……!” “저도 좋아해요. 사람을 치료하는 일.” 그녀는 지구에서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를 떠올렸다. 처음엔 첫 번째 삶의 잘못을 갚고자 선택했다. 하지만 수술장에 들어갈 때마다, 그 긴장감을 느낄 때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장면을 경험할 때마다. 그 일에 매혹되었다. “너무너무 좋아해요. 그 어떤 것보다. 이 일을 못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서 의사가 되려는 거예요.” 그래, 이건 매혹되었다기보단 차라리 중독이란 말이 어울렸다. 이제 자신은 이 일과 떨어져선 살 수가 없었다. 만약 폐하와의 내기에서 져서. “제가 의사가 될 수 없다면, 그래서 사람을 치료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저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영혼이 말라 버릴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폐하와의 내기를 이길 것이다. 그래서 저 창공을 나는 새처럼, 자유롭게 원하는 일을 하며 살 것이다. 그렇게 행복해질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00043 2-4 데임(Dame) 클로랜스 ========================================================================= [2막 : 小和田 雅子 ???] [2-4장 : 데임(Dame) 클로랜스 (1)] *** 술자리가 끝났다. 아니, 정확히는 엘리제가 술기운을 못 이겨 잠들어 버렸다. “얌전히도 잠들었군.” 미하일은 그녀를 침대에 눕혀주기 위해 두 손으로 안아 들어 올렸다. “얼씨구? 왜 이렇게 가벼워? 내 약혼녀였으면 가만히 안 두었을 텐데.” 가만히 안 두고 매일매일 맛있는 것을 먹였을 것이다. 절대 이렇게 마른 상태로 못 있게. “이건 다 형님 잘못이라니까. 얼마나 잘 못하면 절대 결혼 안 할 거라고 그래?” 그는 엘리제를 침대에 눕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백금발이 기분 좋게 와 닿았다. “이렇게나 귀여운데 말이야. 내가 형님이라면 애지중지 참 잘해주었을 텐데. 절대 도망 못 가게.” 얌전히 잠들어 있는 모습이 참 귀여웠다. 술기운 때문인지 창백한 피부의 홍조는 사랑스러움을 더했다. “물론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지.” 그는 최근 며칠간 그녀가 보여주었던 모습들을 떠올렸다. 여러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방금 전 의술에 대한 강한 의지. ‘제가 의사가 될 수 없다면, 저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영혼이 말라 버릴 거예요.’ “과연 어떻게 될는지.” 3황자도 부황과 그녀 사이의 내기를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조건이기에 당연히 부황이 승리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될지 궁금하군.” 그는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방문 넘어, 어둠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는 깊은 어둠. “어쨌든 형님.” 중얼거렸다. “잘 간수하셔야겠어요. 품 안에 보물, 제대로 간수 안 하다 잃어버리면 속상하지. 그렇지 않아요?” 아무도 없는 허공에 한 장난스러운 물음. 당연히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3황자는 쿡쿡 웃더니 잠들어 있는 엘리제에게 인사했다. “난 내일 아침 이곳, 백원의 궁을 떠나니 당분간 못 보겠네. 안녕히. 또 봐요, 레이디.” 그리고 말했다. “기대하고 있을 테니.” *** 다음 날, 엘리제는 숙취에 시달리며 일어났다. ‘으, 머리가…….’ 어린 몸으로 과음한 탓일까.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속도 안 좋았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지? 꿀물 먹고 싶다.’ 하지만 혈탑에 꿀물이 있을 리가 없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부스스한 얼굴로 물병의 물이나 들이켰다. 술은 마실 때는 좋지만 항상 다음 날이 좋지 않았다. “영애, 일어나셨습니까?” 그때, 로열 가드가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무슨 일이시죠?” “면회객이 왔습니다. 들어와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엘리제는 오늘 의학 연구원에서 사람들이 오기로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숙취에 정신이 없는데... . ‘좀 적당히 마실걸.’ 후회가 들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아, 네. 들어오라고 하세요.” “그러면 들어가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3명의 남자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상대의 얼굴을 본 엘리제는 경악했다. “……?!” 들어온 이들은 다름 아닌, 황궁 어의인 밴 자작과 그녀의 스승인 그레이엄 남작이었던 것이다! 심지어 테레사 병원의 고트 병원장도 있었다! “어? 로제?” 들어온 그들은 잠시 상황 파악이 안 된 듯했다. 자신들이 방을 잘못 찾아왔나? 왜 테레사 병원의 천재 도제 로제가 여기에 있지? 하는 눈치. 고트 병원장이 로열 가드에게 물었다. “우리는 클로랜스 영애를 뵈러 왔는데? 저 레이디가 아니지 않은가.” “저분이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가 맞으십니다.” “저 레이디가?” “네.” “저 레이디가 클로랜스 후작가의 영애라고? 황태자 전하와 결혼이 예정된?” “네, 맞습니다.” “…….” 잠시 정적이 방에 흘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 소녀가 클로랜스 영애라고? 레이디 로제가 아니라? 하지만 혼란 섞인 그 시선도 잠시. 그들은 곧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경악에 빠졌다. 도제 로제가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였다고?! ‘아. 망했다.’ 엘리제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난감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들키다니.’ 언젠가 자신이 이야기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때 들키다니.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지? 그렇게 3명의 남자와 1명의 소녀는 당황과 경악에 섞여 잠시 말을 잊고 서로만 바라봤다. “허허, 역시 클로랜스 영애였구려! 어쩐지 이상하다 했소.” 가장 먼저 정신 차린 밴 남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나 닮았었는데, 눈치를 못 챘다니. 미안하오, 못 알아봐서.” “아, 아닙니다, 자작님. 먼저 말씀을 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제는 허겁지겁 인사를 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딸, 엘리제라고 합니다.”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로 처음 하는 정식 인사였다. 그 인사를 받고, 완전히 상황을 받아들인 고트가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영애가 정말로 클로랜스 가문의?” “네, 이전 개인적 사정으로 말씀드리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사죄드리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고트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러면 이전에 후작과 황제가 자신을 불러 물었던 것이? ‘이런, 난 그런 것도 모르고! 내가 혹시 저 영애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나?’ 그는 허겁지겁 생각했다. 물론 그가 엘리제에게 딱히 잘못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딱히 잘한 것도 없었다. 가장 아래 교수인 그레이엄에게 떠넘기듯 맡기고 큰 관심을 두지 않았으니까. ‘클로랜스 가문의 가신(家臣)인 케이트 자작이 추천했을 때부터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올곧으며 권세가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의 그였지만 딱 하나 눈치를 보는 곳이 있었다. 바로 클로랜스 가문. 클로랜스는 테레사 병원의 모든 것을 후원하는 주인 가문이었으니까. 그런 가문의 딸을 대충 내버려 두었다니! ‘내가 직접 도제로 삼아 가르쳤어야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였다. 한편 고트 병원장의 반응을 보며 엘리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모든 것은 정체를 숨긴 그녀의 책임이었으니까. ‘저러실까 봐 정체를 숨긴 거였는데.’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것을 밝혔으면 애초에 정상적인 도제 생활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원장님, 모두 다 제가 가문을 밝히지 않은 탓이니 마음 쓰지 마세요. 아버지도 다 허락하신 일이고, 병원장님께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으세요.” “그, 그렇습니까?” 엘리제는 이번엔 스승, 그레이엄의 안색을 살폈다. 그 역시 경악한 표정이었다. 단순히 놀라기만 한 것이 아닌, 알 수 없는 심란함과 충격이 섞인 얼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에 기회를 봐서 따로 사죄를 드려야겠구나.’ 그녀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 자작님, 오늘은 어떤 일로 오신 건가요? 기관절개에 대해 논하기 위해 오신다 들었는데...” 엘리제는 어의에게 물었다. 비교적 가장 덜 놀란 어의가 답했다. “아, 네. 영애가 처치한 공작부인의 기관절개 때문에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나눌 말이 많았는데, 한 가지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영애에 대한 판결이 결정되었습니다.” “어떻게 되었나요?” 어의는 대답 대신 먼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합니다.” “……?” “당연히 무죄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뿐이 아니라.” 밴 자작은 잠시 뜸을 들였다. “황실에서 영애에게 황실장미훈장(皇室薔薇勳章, Royal rose medal)과 명예기사 작위를 수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 “제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황실장미훈장의 수훈자와 데임(Dame)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데임(Dame). 브리티아 제국에서 명예기사 작위를 받은 여성에게 붙이는 영광된 존칭으로, 귀족 여성에게 있어서 최고의 명예라 할 수 있는 호칭이었다. *** 보상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훈장 수여에 따라 황실에서 매달 일정액의 급료가 나오게 되었다.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그녀에게 큰 의미는 없었지만, 평생 나오는 연금이었다. 일시금으로 나오는 보상도 상당했다. 평민이라면 평생 먹고살 걱정이 없는 금액이었다. ‘너무 많아. 왜 이렇게 액수가 크게 책정되었지?’ 아마 황족의 생명을 구해서인 것 같았다. 황족을 구했는데, 쩨쩨한 보상을 하면 오히려 황실의 체면이 구겨지게 되니까. ‘그런데 폐하께서 생각보다 큰 보상을 해주시네. 마음에 안 들어 하실 줄 알았는데.’ 무죄 선고를 받을 줄은 짐작했지만, 이런 큰 보상까지 받을 줄은 몰랐다. 황실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만 주는 황실장미훈장(皇室薔薇勳章)에 명예기사 작위까지! 물론 아무도 손을 못 쓰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황족의 생명을 구했으니, 충분히 훈장과 명예기사 작위 정도는 받을 만했지만, 자신이 의사가 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황제를 생각하면 의외긴 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의사가 되는 것을 용납한다는 뜻일까?’ 그녀는 그렇게 희망적인 생각을 잠시 하였다. 하지만 물론 그건 그녀의 희망 섞인 착각이었다. 황제가 이런 상을 내린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조사단의 판결이 너무 완벽하게 결론 나고, 여론이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몰린 탓이었다. [황태자비가 될 클로랜스 영애, 과감한 조처로 황실의 어른을 구하다!] [역시 황태자비로 내정된 클로랜스 영애. 공작부인의 목숨을 구해.] 그녀가 백원의 궁에 갇혀 있을 당시, 이런 기사가 수도 없이 신문에 났던 것이다. 결국, 황제는 쓰린 속을 숨기고 그녀에게 큰 상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엘리제는 백원의 궁에서 풀려났고, 곧바로 훈장 수여식이 예정되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는 또 다른 감사를 받았다. “영애, 정말 감사하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그녀를 맞이했다. 그녀가 목숨을 구한 공작부인의 남편, 웨일 지방의 대귀족, 하버 공작이 직접 그녀를 찾아와 감사를 표한 것이다! “아, 아닙니다, 전하.” 하버 가문은 정말 어마어마한 역사를 가진 전통의 대귀족이었다. 280년 전, 브리티아 섬이 통일되기 전, 웨일 왕국의 왕가였으니까. 지금도 웨일 지방의 시민들은 로마노프 황가보다 하버 공작가를 더 존경하고 따랐다. 그런 대귀족이, 웨일 지방의 분봉왕(分封王)이나 다름없는 그가 어린 소녀를 찾아와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송, 송구합니다, 공작 전하.” 클로랜스 가문의 가주인 천하의 엘 후작도 이 사태에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전하.” “당연하긴. 영애 덕분에 부인이 살았네. 물론 병이 치료된 것은 아니지만 조심하면 앞으로 몇 년은 더 본 공작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정말 고맙네.” 그의 목소리엔 부인을 향한 사랑이 가득했다. 그 말을 듣고 엘리제는 뭉클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보람 때문에 그녀는 의사의 길에 매료된 것이다. 절대 이 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하버 공작은 한참을 진심 어린 감사의 말을 전하고 돌아갔다. 떠날 때 감사의 선물도 주려 했다.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는데, 장신구라기보단 보물이란 단어에 더 가까운 물건이었다. 그것만은 극구 사양했다. 무조건 주겠다는 공작과 실랑이가 있었으나, 엘리제도 그것만은 양보하지 않았고, 결국 공작이 졌다. “그러면 내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네. 만약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나에게 말하게. 하버 공작 가문은, 그리고 웨일은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라도 영애를 도울 걸세.” 하버 공작가와 웨일의 도움. 어마어마한 약속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저 웃으며 넘길 뿐이었다. 애초에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공작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고, 영애?” “네, 공작 전하.” 그는 얼마 전 탄신연회 때 발표된 그녀와 황태자의 약혼 내용을 떠올렸다. 황태자비로 내정되었으니, 의사가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 사실을 언급하진 않고 이렇게 응원하였다. “기대되는군. 영애는 정말 좋은 의사가 될 것 같아. 꼭 원하는 바 이루길 바라네. 만약 정말 의사가 된다면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나?” “말씀하십시오.” “만약 우리 가문의 사람이 또 아픈 일이 있으면 영애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겠나?”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네, 얼마든지요.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전하.” 그리고 그녀의 훈장 수여와 작위 수여 결정은 곧 론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신문사가 앞다투어 보도했던 탓이다. ============================ 작품 후기 ============================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44 2-4 데임(Dame) 클로랜스 ========================================================================= [2막 : 小和田 雅子???] [2-4장 : 데임(Dame) 클로랜스 (2)] *** [황태자비로 내정된 클로랜스 영애, 황실장미훈장과 기사 작위 서임 받기로 결정!] [제국 역사상 최초의 황실장미훈장, 여성수훈자 탄생! 그 주인공은 황태자비로 내정된 클로랜스 영애!] [클로랜스 영애, 성인식 이전 기사 작위 서임!] 엘리제는 오래간만에 본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 도배되어 있자,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신문에서 날?’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최근 제국 제일의 유명인사였다. [탄신연회 축일 때 황태자비로 잠정 내정!] 그것만으로도 온 제국의 시선이 집중될 만한데, 다음 날 황실의 어른인 공작부인을 시해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엽기적 사건에 온 제국의 여론이 들끓었다가, 곧 며칠도 안 되어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시해가 아니라, 과감한 응급처치였음. 그녀의 과감한 조처 덕분에 공작부인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 이런 내용이 화제가 안 될 리가 없었다. 특종을 찾는 하이애나인 기자들은 앞다투어 위 내용을 보도했고, 이 반전에 제국 시민들은 열광했다.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가 그럴 리가 없지. 나이도 어리다던데 대단해!” “정말 대단한 영애구만! 황태자비가 되신다니 참 기대돼!” 더구나 신문사의 정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어떻게 알아낸 것인지, 그녀가 테라사 병원의 도제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낸 것이다. [황태자비가 될, 클로랜스 영애, 신분을 숨기고 테레사 병원의 도제로 일하며 환자를 돌봐!] [클로랜스 영애,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으로 빈민 병원에서 일하다.] ‘망했다.’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제 온 제국민이 그녀가 몰래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던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사의 방향과 언론이 조금 이상했다. 기이하거나 이상하게 보기 보다는…….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 황태자비가 되기 전, 제국민에게 봉사하고 싶은 마음에 도제로 일해!] [선행을 실천하고 싶어 병원에 나갔다는 클로랜스 영애. 역시 클로랜스 가문의 딸다워. 후에 황태자비가 된 후가 기대돼.] 기사의 내용이 조금 이상했다. 그녀가 정말로 의사가 되고 싶어 병원에 나갔다기보단, 황태자비가 되기 전, 선행과 봉사를 위해 병원에서 일한다는 내용이었다. 제국민들은 그런 착한 여인이 황태자비가 된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다. 평소 안 좋은 소문은 씻은 듯이 사라졌고. 하지만 엘리제로서는 썩 마음에 드는 내용이 아니었다. 모든 기사가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는 것을 기정사실처럼 여기고 황태자비가 되기 전, 봉사활동이라도 하기 위해 병원에 나간 것처럼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황태자비가 될 클로랜스 영애라니.’ 기사마다 도배된 그 단어가 무척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는 황태자비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탄신연회 때 발표 때문에 그녀는 모두에게 잠정적으로 황태자비가 될 여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뭐라고 이야기하든 소용없을 것이다. ‘결국, 폐하와의 내기에서 이겨야 해. 그것 외엔 방법이 없어.’ 며칠의 시간이 지났고, 드디어 훈장 수여식 날이 다가왔다. *** 훈장 수여식 날은 의사 자격시험 딱 2일 전이었다. ‘하필 날짜가. 시험공부 해야 하는데.’ 영광된 자리이지만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훈장 수여와 작위 수여는 맡겨둔 케이크를 찾아오듯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예행연습도 해야 했고, 이래저래 굉장히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덕분에 시험 직전, 가장 중요한 시기에 공부를 거의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하필 이 날짜에 수여식을 잡은 게 황제 폐하의 음모가 아닌지 의심했다. 그리고 그 의심은 크게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너무 공교로운 날에 날짜를 잡은 것 아닌가 모르겠군.” 황제가 훈장 수여식 날 빙그레 웃으며 말했던 것이다. 대놓고 일부러 그랬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뭐라고 하겠는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한데, 과분한 상을 내리시니 감사하고 송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은 무슨. 영애 덕분에 친척 누이가 살 수 있었거늘. 황실을 떠나 개인적으로도 참 고맙네.” 그저 빈말로 하는 감사는 아니었다. 황제는 정말로 그녀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지만, 엘리제가 아니었으면 자신의 친척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다만 서로의 입장이 다르니, 마음 편히 고마워하지 못할 뿐이다. 그는 그녀가 의사가 되길 원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식을 거행하지.” 훈장 수여와 작위 수여가 진행되었다. 황궁의 거대한 예식 홀에서 귀족들의 참관 아래 먼저 훈장이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길고 긴 예배와 축사를 먼저 한 후, 몇 차례 황실 예식을 거치고 나서야 엘리제는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황실에 큰 공을 세운 클로랜스 영애에게 이 황실장미훈장(皇室薔薇勳章)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폐하.”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끝에 황제가 직접 그녀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수여된 훈장을 바라봤다. 십자가를 감싼 장미 문양의 금패에는 다음과 같은 황실 문장이 적혀 있었다. Dieu et mon droit(신과 나의 권리). 그리고 곧바로 작위 수여가 이어졌다. 엘리제가 무릎을 꿇자 민체스터 황제는 검집에서 검을 빼 들어 그녀의 양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나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는 황실에 큰 공을 세운 엘리제 드 클로랜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리노라.” 이로써 엘리제는 단순한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 아니라, 스스로 작위를 가진 데임(Dame) 클로랜스가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아버지 엘 후작은 감격에 젖어들어다. ‘보고 있소, 테레사? 우리 딸이 작위를 받았구려. 제국 역사상 여성 최초로 황실장미훈장도 받고 말이오. 그것도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의술로 말이오.’ 앞으로 남은 그녀와 황제와의 내기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하였지만, 이 순간 후작은 순순히 기뻐했다. 후작뿐 아니라,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도 새어머니도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철없던, 가문의 근심거리였던 엘리제가 훈장에 명예기사 서임까지 받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오라버니는 기사단의 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만약 참석했으면 무뚝뚝한 얼굴로 축하해 주었을 것이라고 엘리제는 생각했다. 그렇게 예식이 끝나고, 엘리제와 황제는 짧은 대화를 가졌다. “그래, 영애. 아니, 이제는 데임 클로랜스구나.” “송구스럽습니다, 폐하.” 황제는 잠시 잔잔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 아직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진 않았지?” 물어보나 마나 한 물음이었다. “죄송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한 4달 남았나?” “……!” “영애가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말이야.” “……그렇습니다.” “그래, 최선을 다해보게. 만약 영애가 내가 말한 조건대로 해낸다면 짐이 깨끗이 물러날 테니. 물론 쉽지는 않을 걸세.” -쉽지는 않을 걸세. 황제의 강한 의중이 담긴 한마디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절대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이제 모레면 의사 자격시험인데 공부는 잘하고 있나?” “부족한 만큼, 그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래, 시험 잘 보도록 하고. 꼭 합격하길 기원하네. 만약 ‘문제가 어렵게 나오기라도 해’ 시험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영애도 곤란하게 될 테니.” 그러며 황제는 빙긋 웃었다. “……!” 그 미소를 본 순간, 엘리제는 이번 시험이 절대 만만치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뭔가 시험 문제를 어렵게 내거나 하는 수를 쓴 것이 분명했다. ‘이 시험에 떨어지면 자동으로 내기에 지게 돼. 절대 붙어야 해.’ 그냥 붙는 것도 안 된다. 당당히 내세울 수 있을 정도로 고득점을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하자.’ 이제 더 공부할 시간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환자를 보며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믿을 수밖에. *** 의사 자격시험 전날. 의학연구원에서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시험 문제를 검토하고 있었다. “위원장님, 정말 이렇게 문제를 내도 되는 걸까요?” “어쩔 수 없지 않나?” “하지만 이대로 문제를 내면…… 합격률이 바닥을 길 것 같은데.” 그 말에 황실의학연구원의 수석 연구원이자, 금년도 시험출제위원장인 에릭 준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낸 문제가 말도 안 되는 난이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사자격 시험은 상대 평가가 아닌, 절대 평가. 최소 80점은 맞아야 합격할 수 있는데…… 이 문제들을 그렇게 맞출 수 있는 도제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난이도를 올리기 위해 새롭게 바꾼 형태의 문제들. 자신같이 경험이 많은 의사면 모를까, 도제들이 접근하기엔 너무 난해할 것이 분명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이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만약 합격률이 너무 낮게 나올 경우, 얼마 후에 재시험을 치를 수 있게 해 실제 의사 수급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이란 점이었다. ‘어쨌든 이번 시험은 폐하께서 지시하신 대로 자격이 안 되는 이가 합격하는 일은 없겠군.’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만약 이번 시험에 합격하는 도제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의학계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굉장한 난도의 시험을 통과한 수재로서. ‘과연 이번 시험도 90점 이상을 획득하는 이가 나올까?’ 평소 의사 자격시험은 약 90점에서 95점 사이에서 수석자가 결정된다. 하지만 90점은커녕 수석자가 합격선인 80점도 못 넘는 것은 아닐지. 출제위원장은 걱정 섞인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음 날, 대망의 의사 자격시험이 시작되었다. 어쩌면 엘리제의 남은 삶을 결정할지도 모르는 시험이었다. *** 자격시험은 의학연구원의 대강당에서 치러졌다. 시험 범위는 질병 기초, 총론, 각론, 약학 등 의학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며, 도제들은 200개가 넘는 문항을 온종일 풀어야 한다. ‘꼭 잘 보자.’ 오전 8시. 아직 시험이 시작되기 1시간 전, 엘리제는 일찌감치 시험장에 도착해 시험을 준비했다. ‘반드시 붙어야 해.’ 만약 떨어지면 황제와의 내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방심하지 말고, 꼼꼼히 최선을 다해 풀자.’ 그녀는 노트 필기를 꺼내 최종 정리를 하였다. 어차피 현대 지구에서부터 이미 다 알고 있던 내용이었지만, 운명이 걸린 시험이니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많이 어렵게 나오겠지?’ 며칠 전 황제의 목소리에 섞인 뉘앙스를 고려할 때 굉장히 어려울 게 분명했다. 실제로 병원 내에서 이번 시험이 무진장 어려울 것이란 소문도 돌았었고. 같이 시험을 치를 예정인 도제들이 사색이 되어 한탄하던 것이 떠올랐다. 망했다고. 엄청 어렵게 나올 것이라고. 난이도 조절에 실패해 재시험을 치러야 할 거란 소문이 시험을 치기 전부터 돌았으니,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나올지 짐작이 안 됐다. ‘상관없어. 나 자신을 믿자.’ 엘리제는 적당히 긴장하되 과도하게 겁을 먹진 않았다. 비록 시험 준비 기간은 짧았지만, 그녀가 의학에 바친 시간의 밀도는 다른 도제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의대에 입학 후. 다른 이들은 상상도 못할 노력을 해온 자신이니까. ‘난 천재 따위가 아니야.’ 밴과 그레이엄은 자신을 천재로 여기고 있지만, 사실 그녀는 천재가 아니었다. 사실 그녀야말로 진정한 노력파. 지구에서 홀로 살아가며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지금까지 내 노력을 믿자.’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Ps. 막의 이름과 장의 이름을 중간에 넣는 것이 번잡해 보여, 앞으로는 각 화 처음에 넣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00045 2-4 데임(Dame) 클로랜스 ========================================================================= [2막 : 小和田 雅子???] [2-4장 : 데임(Dame) 클로랜스 (3)] *** 처음 공부를 시작한 것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고아로 일가친척 하나 없던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살길로 공부를 택했고, 정말 피나게 노력했다. ‘그때 고아로 살며 가난을 뼈저리게 알았지. 그리고 이전 삶에서 내가 얼마나 행복하게 살았는지도 깨달았고.’ 그래도 다행히 고아원에서 마음씨 좋은 후원자를 만나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후원자의 사업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원이 끊겼지만,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했다. 그 후원자가 아니었으면 자신은 일찌감치 공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의대에 입학하고 나서도 살기 위해 공부했어.’ 무일푼인 그녀가 의대 학비를 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장학금밖에 없었다. 성적 미달로 장학금이 끊기면 당장 학교에 다닐 방법이 막막했다. 학자금 대출은 얼굴도 못 보고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그녀 앞으로 빚을 남겨놔 어려웠고. 알바로는 한계가 있었다. ‘덕분에 죽어라 공부하는 수밖에 없었지. 남들이 연애도 하고, 동아리다 뭐다 하며 대학생활의 낭만을 즐길 때 그녀는 공부에만 전념했다. 남들이 독종이라 혀를 둘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힘들었던 시기다. 너무 힘들어 남몰래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울었다. ‘그때 힘들고 쓸쓸해 이전 삶의 가족들을 정말 많이 그리워했었는데.’ 하지만 그런 노력이 쌓여 지금의 그녀를 만들어 내었다. 한국에서도 그레이트 서젼, 괴물 외과의사라 불리던 그녀를 말이다. ‘어쨌든 잘 보자, 엘리제.’ 그렇게 곧 1시간이 거의 지났고 시험이 시작하기 직전, 엘리제는 가방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예쁘게 포장된 그 상자에는 짙은 색깔의 엿이 들어 있었다. <꼬맹이의 합격을 기원하며!> ‘난 꼬맹이가 아닌데.’ 그 문구를 읽은 엘리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선물을 준 사람은 다름 아닌, 3황자인 검제 미하일이었다. 이전 삶, 유일했던 친구인. 시험 전날인 어제, 클로랜스가의 저택에 몰래 나타나더니 선물을 전해준 것이다. “떨어지면 혼내준다! 그러니 꼭 붙어!” 그렇게 장난처럼 이야기하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엘리제는 달콤한 엿을 입에 넣으며 생각했다. ‘네, 꼭 붙을게요. 고마워요, 밀.’ 밀. 지난 삶, 자신만 부르던 그의 애칭. 이번 삶에도 그 애칭으로 그를 부르게 될 날이 과연 올지 모르겠다. 이윽고 9시 정각. 시험을 치를 모든 도제가 자리에 착석하고, 긴장한 얼굴로 시험지를 기다렸다. “책상 위에 물건은 전부 아래로 내려놓으시고, 부정행위가 발각 시 영원히 의사시험을 치를 자격이 박탈되니 주의하십시오.” 완고한 인상의 시험관이 경고 후 시험지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면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좋은 결과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땡. 시험을 시작하는 종이 울렸고, 도제들은 시험지를 허겁지겁 펼쳤다. 엘리제도 시험지의 문제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 문제들을 본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형태의 문제들이 종이에 적혀 있었던 것이다. *** “아…… 이런.” 시험장 곳곳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걸 어떻게 풀라고?” 당황이 역력한 목소리들. 모두 문제의 난이도에 좌절했다. 심지어 시험이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됐는데, 짐을 꾸리고 떠나려는 이도 있었다. 엘리제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형태의 문제가 나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까. 다만 당황의 이유가 남들과 달랐다. 문제의 난이도가 높아서 당황한 게 아니라……. ‘이건 지구의 KMLE나 USMLE Step 2ck의 문제 형태와 거의 흡사하잖아?’ KMLE(Korean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USMLE(US Medical Licensing Examination)! 각각 한국과 미국의 의사 면허시험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녀는 문제를 다시 한 번 훑었다. [2번 문제 - Female / Age : 35] 3일 전부터 시작된 복통으로 병원에 왔다. 38도의 발열이 있었다. 복통의 위치는 정중앙에서 우하복부로 이동. 통증 부위에는 압통이 있었다. 상기 환자의 가장 가능성 높은 진단과 치료는? 현대 지구 의사 시험에서 표준으로 채택하고 있는 전형적인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였다! ‘원래 이곳 브리티아 의학연구원의 시험은 대부분 단답형 주관식 서술 문제로 알고 있었는데?’ 그녀가 알고 있는 제국의 의사 자격시험의 문제는 대부분 이런 형태다. -맹장염의 진단법과 치료법은? -폐렴의 치료법은? -심근경색의 심장 전류 검사 소견은? 머릿속 지식을 백과사전식으로 묻는 단답형 서술형. 현대 지구 대부분의 선진국 의과대학에서는 21세기가 되며 주류에서 밀려난 방식이다. ‘이렇게 증상만 주고 진단과 치료법을 추론하는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는 한 번도 안 나온 걸로 아는데?’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듯한 이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는 처음 접하면 굉장히 어려운데. 다들 어렵게 느끼겠구나.’ 정확한 지식은 기본에 환자를 보는 능력까지 동시에 요구되는 문제 형태이다.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난이도를 어떻게 높일까 했는데, 이런 식으로 문제 난이도를 높였구나.’ 이 문제 형태의 변화는 의학연구원 교수들의 머리 빠지는 고뇌의 결과였다. 사실 의사 시험의 난이도를 높이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없는 질환을 창조해 낼 수도 없고, 희귀병만 주구창창 낼 수도 없으니까. 평생 한두 번 볼까 말까 한 희귀병으로만 문제를 도배하는 것은 제대로 된 시험이라 할 수 없었다. -국가 공인 의사 시험에 걸맞은 내용의 문제면서, 난이도를 높여야 한다! 그 과제 앞에 출제위원들은 고뇌를 거듭했고, 그 결과 시대를 까마득히 앞서 이런 선진 형태의 문제가 탄생했다. ‘대단하구나. 지구에서도 이런 형태의 문제가 도입된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 엘리제는 감탄했다. ‘확실히 이런 형태의 문제가 더 좋은 문제지. 난이도도 어렵고 단순히 암기형 지식이 아닌, 실제 환자를 진단하는 능력을 측정할 수 있으니.’ 사실 난이도를 올리라고 말한 황제도 이런 결과는 상상 못했다. 자신의 말도 안 되는 요구가, 이렇게 의학 시험의 질을 올리는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그래도 이런 형식의 문제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난이도가 확실히 올라가긴 할 텐데.’ 한국에서도 이렇게 단답형에서 추론형으로 문제가 바뀐 직후 의사 시험 합격률이 8~90%대에서 50%대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번 브리티아 제국 의사 시험 합격률도 형편없이 곤두박질할 것이다. ‘하지만 난 이런 형태의 시험은 익숙한걸.’ 지구에서는 임상 수업에 들어간 이후로 대부분 이런 형태로만 시험을 봤다. 따라서 지식을 묻는 단답형보다 이런 추론형이 더 풀기 편했다. ‘그래도 정신 바짝 차리자.’ 그리고 단순히 문제의 형태만 바뀐 게 아니었다. ‘문제 자체의 난이도도 무척 높아. 드문 병들의 비중도 굉장히 높고, 간단한 치료법을 묻는 것도 아니야.’ 엘리제는 긴장해 문제를 풀어나갔다. ‘이런 문제는 학생 수준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내용인데.’ 이전 삶, 의사로서 살며 직접 진료를 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문제도 수두룩했다. ‘합격 커트라인도 80점으로 한국 의사고시보다 훨씬 높으니.’ 물론 현대의 의학 지식이 훨씬 공부할 내용이 많고, 복잡하니 단순 비교는 어려웠다. 그래도 100점 만점에 80점이면 결코 낮은 점수는 아니었다. 하물며 작정하고 어렵게 낸 시험이니. 그녀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꼼꼼히 읽으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다만 천하의 그녀도 풀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으니, 다음 문제들이 그러했다. [123번 문제. Male / Age : 50] 다음, 다뇨, 다갈로 내원한 환자이다. 만성적인 피로감과 체중 감소를 호소하고 있다. 상기 환자의 진단법과 가장 가능성 높은 진단명, 치료법은? ‘전형적인 당뇨 환자의 문제.’ 바로 현 황제인 민체스터가 앓고 있는 당뇨 문제였다. 진단법도 간단하고, 진단명도 간단하고, 치료법도 명확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이게 아직 제국의 의학 수준으로는 정립되지 않은 내용이란 것이지.’ 바로 그것이었다. 현대 지구의 의학으로는 고민할 것도 없는 내용이지만, 지금 제국의 의학을 고려하면 도대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는 내용. ‘아니, 이런 정립되지 않은 내용들은 문제로 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두 문제도 아니었다. 이런 문제가 시험 중간중간에 지뢰처럼 숨어 있었다. 적지 않은 수가. ‘이걸 다 틀리면 불합격이잖아.’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런 내용의 문제는 그녀라도 백 프로 정답을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직 제국에서 정립되지 않은 내용이니 채점을 하는 교수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지?’ 그녀는 고민했으나,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어. 최대한 쉽게, 이 시대의 수준에 맞추어 정답을 적어나갈 수밖에.’ 엘리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의학지식을 현 제국의 의학 수준에 맞추어 답을 적어 내려갔다. 채점 교수들이 알아볼 수 있게 최대한 쉽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납득할 수 있게 의학적 논리를 담아. 제발 좋은 결과가 나오길 십자가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 그렇게 8시간의 시험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엘리제는 다른 수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하여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끝났다.’ 시험은 끝났지만 기분이 홀가분하진 않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문제가 훨씬 어려웠던 탓이었다. 그래도 대부분은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었지만, 그 정립되지 않은 내용의 문제들. 그 문제들 답이 어떻게 처리될지 모르겠다. ‘시간이 100년쯤 지나면 내 답이 맞는다고 규명될 테지만 지금은 아니니.’ 최대한 제국의 의학적 수준에 맞춰 논리적으로 기술했지만 채점 교수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다 오답 처리되면 어떻게 하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 불합격이다. ‘안 돼! 그것만은!’ 이번 시험에 떨어지면 황제와의 내기도 패배다. 즉, 꼼짝없이 황태자와 결혼해야 하는 것이다. ‘절대 안 돼. 그렇게 될 바엔 차라리 이 제국을 떠나겠어. 이 제국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의사로 살겠어.’ 어린 소녀의 몸으로 출가해 제국을 떠나면 끔찍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차라리 그게 나았다. 과거의 삶을 되풀이할 바에는. ‘물론 나도 이전 삶의 악녀 엘리제가 아니니까. 똑같은 비극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겠지만. 그래도 싫어.’ 그녀는 이전 삶, 린덴과의 결혼생활을 떠올렸다. 그를 사랑하긴 했지만, 당시 결혼 생활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사랑하니까 더 고통스러웠지.’ 사랑하는 이에게 외면받는다는 것은,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지독한 고통이었다. 이번 삶에도 그런 고통을 더 느끼고 싶진 않았다. ‘내가 이번 삶에서 바라는 것은 오로지 하나야. 원하는 일을 하며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 그러기 위해선 이번 시험을 통과해야 할 텐데, 막상 시험을 치르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정말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하아, 결과 발표가 언제였지?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지? 모르겠다.’ 그녀는 의학연구원 입구까지 터덜터덜 나왔다. ‘벤톨 경은…… 아직 안 오셨구나.’ 마중 나오기로 한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을 찾았으나 예정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끝난 탓에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벤톨 경이 올 때까지 입구 옆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고 배고파. 단것 먹고 싶다.’ 우울해서 그럴까? 갑자기 단 음식이 마구마구 당겼다. 딸기 케이크,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 초콜릿 무스, 프랑소엔 마카롱 등등. 애프터눈 티 전용 삼단 트레이에 잔뜩 디저트를 쌓아놓고, 생각 없이 흡입하면 얼마나 좋을까? ‘새어머니가 안 된다고 하겠지? 건강에 안 좋다고?’ 엘리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누가 케이크 사준다고 유혹하면 납치라도 당해줄 마음이 있는데. 단 것, 혀가 얼얼할 정도로 단 음식 먹고 싶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은 잘 본 건가?”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46 2-4 데임(Dame) 클로랜스 ========================================================================= [2막 : 小和田 雅子???] [2-4장 : 데임(Dame) 클로랜스 (4)] *** 무감정에 가까운 무뚝뚝한 음성. 익숙한 그 목소리에 엘리제는 고개를 돌렸다. “론 님?” 엘리제는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금발의 푸른 눈. 차갑지만 조각같이 지독히도 잘생긴 얼굴. 그리고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분위기. 론이었다! “여긴 무슨 일로? 의학연구원에 일이 있으신가요?”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의학연구원에는 딱히 일은 없다.” “그러면 어째서 이곳에? 아시는 분이라도?” 엘리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학연구원만 딸랑 있을 뿐, 교외에 가까운 곳이다. 변변한 저택이나 가게도 전혀 없어, 황실의 인척으로 추정되는 론 같은 고위 귀족이 방문할 만한 곳이 아닌데? 론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널 보러 왔다.” “네?”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어째서? “왜…… 요?” 론, 아니, 황태자는 그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왜?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그녀가 오늘 시험 본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생각나서 왔을 뿐이다. “지난번 오늘 시험을 본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잘 봤나?” “……아니요. 그냥 그랬어요.” 엘리제는 풀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못 본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비교한다면, 그녀보다 고득점을 받은 도제는 없을 테니까. 다만 의사자격시험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다. 무조건 8할 이상을 맞추어야 하는데, 이론이 정립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불안했다. 최선을 다해 답을 기술했지만, 다른 문제를 다 맞혔다는 보장도 없고, 채점 교수가 그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 다 오답처리 될 것이다. 그러면 불합격이다. ‘이번이 유일무이한 기회인데.’ 다른 이들이야 재시험을 치든지 하면 되겠지만 자신은 아니지 않은가? “…….” 둘 사이가 잠시 조용해졌다. 엘리제는 시험 걱정 때문에 이리저리 떠들 기분이 아니었고, 황태자는 침울한 그녀를 보며. ‘마음에 안 드는군. 정말로.’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깟 시험이 뭐라고. 저런 얼굴이란 말이야.’ 물론 알고 있다. 저 소녀에게 있어, 이 시험은 부황과의 내기가 걸린 중요한 시험이란 것을. 그래서 더 못마땅했다. ‘나랑 결혼하기가 그렇게 싫은 건가.’ 어차피 자신의 의지로 결정된 결혼은 아니다. 그래서 소녀가 부황과 그런 내기를 할 때도 신경 쓰지 않았다. 소녀가 내기에 이길 리도 없고, 설사 이겨 자신과 약혼을 취소한다 해도 상관없었으니까. ‘결혼 상대가 클로랜스 가문만 있는 것도 아니고.’ 브리티아 섬 북단의 스코트 지방을 지배하는 버킹엄 공작가(家)도, 프랑소엔 공화국을 견제할 수 있는 프러시엔 대공가(大公家)도, 지금은 많이 쇠약해졌지만 한때 서대륙 전역을 지배하던 합스부르엔 왕가(王家)도. 모두 좋은 선택지였다. 어차피 황족, 그것도 황제가 될 이에게 결혼할 ‘대상자’가 누구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니까. 그러니 황태자는 굳이 소녀와의, 클로랜스 가문과의 결혼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날’ 이후 생긴 자신의 단 하나의 염원만 이룰 수 있다면 충분했다.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황제가 되려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저 침울한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정확히는 이상하게 화가 났다. ‘마음에 안 들어.’ 소녀가 자신과의 결혼을 완강히 거부하는 것도, 얼굴이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는 것도. 모두 못마땅했다. 그래서 말했다. “따라와라.” “네?” “따라오라고.” “론 님?” “먹을 거라도 사주마. 아니,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나? 아니면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 원하는 음식은 뭐든지 사줄 테니 따라와.” 저 침울한 얼굴이 못마땅하니, 그녀가 그렇게 좋아한다는 단 음식이라도 잔뜩 먹여야겠다. 그래서 표정이 밝아지는 것을 보면 자신의 기분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다. 그렇게 황태자는 멋대가리 하나도 없는, 낭만을 중시하는 귀족 영애였으면 두 손 들고 도망갈 데이트 신청을 하였다. *** 그가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길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던 마차였다. “올라와라.” 엘리제는 얼떨떨하게 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사실 그의 말을 따라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지만, 그가 너무 당연하다는 듯 이끌어 자신도 모르게 따라와 버렸다. “어디로 모십니까, 전…… 아니, 공자님?” 마차에 대기하고 있던 황실 시종이 변복한 채 물었다. 린덴은 소녀가 마차에 오르자 답했다. “디저트 카페.” “네? 디…… 뭐라고요?” “론도에서 가장 유명하고 맛있는 디저트 카페로.” 황실 시종은 당황했다. 디저트 카페라고? 저 황태자가? 그래도 시종은 속마음을 숨기고 공손히 말했다. “요즘 론도에서 가장 유명한 디저트 카페는 피카딜리 거리의 카페 레이입니다만, 그쪽으로 모실까요?” 황태자는 뭘 물어 보냐는 듯 바라봤다. 알아서 안내하라는 눈초리. “네, 그러면 카페 레이로 모시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엘리제가 놀라 그들의 대화를 만류했다. “괘, 괜찮아요. 카페 레이까지는.” “싫나?”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카페 레이는 최근 론도에서 가장 핫한 디저트 집으로 그녀도 꼭 가보고 싶긴 했었다. “그건 아니지만. 너무 멀고……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그냥 주변에서 대충 사주시면 돼요.” “어쨌든 싫다는 것은 아니군.” “싫은 건 아니지만…… 그,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괜찮은데…….” 그는 그녀의 말은 깨끗이 무시하고 시종을 바라봤다. “출발해.” “네, 공자님!” 그리고 시종은 엘리제를 보며 공손히 말했다. “출발하겠습니다, 레이디. 이동 중 혹시라도 불편한 점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아, 아…… 네.” 따각따각. 말발굽이 도로에 닿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며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언뜻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모두 최고급의 자재로만 이루어진 마차의 내부를 보며 엘리제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이신 거지? 왜 나에게?’ 그녀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으나, 그는 전혀 설명해 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녀를 신경도 쓰지 않고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겠다. 나쁜 의도는 아니겠지.’ 아니, 설마 맛있는 걸로 유혹 후 납치하려는 걸까? 황실의 문장을 가진 고위 귀족이 그러지는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런데…….’ 엘리제는 창밖을 보는 그의 옆모습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잘생기긴, 진짜 잘생겼구나.’ 그녀는 세 번의 삶을 통틀어 이렇게 잘생긴 남자는 딱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바로 전 남편인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이 론이란 남자는 가히 그에 비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3황자 미하일도 비슷한 급으로 아름답지만 느낌이 전혀 다르니까.’ 3황자 미하일이 화사한 꽃 같다면, 이들 린덴과 론은 조각을 연상시키는 미남이었다. 그것도 신이 직접 다듬은 듯한 조각. 그녀는 그렇게 멍하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시선을 돌렸다. ‘황태자 전하의 인척일까?’ 느낌이 비슷한 게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모르는 그의 인척이 있다는 게 의외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마차는 길을 달렸다. ‘그런데 이상하네. 전혀 불편하지가 않아.’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타인과의 침묵을 불편해한다. 더구나 이 남자는 진료 때문에 몇 번 봤을 뿐, 정확한 신분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와의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과 같이 있을 때처럼. ‘왜지?’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그렇게 불편하지 않은, 어쩌면 편안한 침묵 속에서 길을 달렸고, 피카딜리 거리의 카페 레이에 도착했다. 다행히 3층의 자리가 비어 있어 피카딜리 거리의 좋은 전망을 보며 앉을 수 있었다. 남자는 출발하기 전 장담처럼 디저트를 잔뜩 시켜주었다. 단순히 딸기 케이크만 시킨 게 아니라 카페에서 가장 비싼, 3단 트레이 종합 세트를 시켜준 것이다. 당연히 딸기 케이크와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를 포함시켜서. “아…… 그냥 케이크 하나면 되는데…….” “나 돈 많다.” “네?” “내가 보기보다 돈이 아주 많으니. 부담 없이 먹으라고.”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엘리제가 미소를 지었다. 남자가 나름 농담을 한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하나도 재미없이, 썰렁하기만 했지만. 어쨌든 시험 스트레스로 너무 피곤하고, 배고파 그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맛있어!’ 단맛이 입안에 들어오자, 그녀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그래, 역시 스트레스에는 단 게 최고야! 한편 황태자는 디저트에는 포크를 가져가지도 않은 채 그녀만 바라봤다. ‘그래도 잘 먹는 건 보기 좋군.’ 늘 불만스러운 그녀지만, 밝아지는 얼굴을 보니 그의 불편한 마음도 조금 풀어졌다. ‘단 음식만 사줄 수는 없으니, 뭘 좋아하는지 더 알아봐야겠어. 설마 단 음식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겠지? 어린애도 아닌데.’ 그녀에게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저 밝은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져 그럴 뿐이다. ‘렌 남작…… 이 알려나? 아니, 모르겠군.’ 자신의 친우를 떠올린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큰오빠인 주제에 그는 동생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하여튼 매번 도움이 안 되는군. 동생한테 관심도 안 갖고 지금까지 뭐 하고 산 거야?’ 가장 믿음직한 측근에서, 한순간에 도움 안 되는 놈으로 전락한 렌 남작이다. ‘크리스. 그래, 그가 좋겠군. 행정부의 관료라고 했나?’ 엘리제의 작은오빠, 크리스. 서글서글한 인상이 떠올랐다. 왠지 그라면 렌 남작보다는 훨씬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무슨 핑계로 부르지? 그와는 딱히 친분이 없는데.’ 그는 간단히 답을 내었다. ‘행정부의 관료니, 불러 국정이나 논하자 해야겠군.’ 아직 일개 관료에 불과한 크리스가 제국의 황태자와 국정을 논할 필요가 있을 턱이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작은오빠인 크리스가 생각지도 못하게 행정부의 차기 실세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둘은 그렇게 물 흐르듯 시간을 보냈다. 엘리제는 아주 맛있게 애프터눈 티 종합 세트를 먹어치웠다. 최근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더 맛있었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한 후, 집에 돌아가려 했는데 마침 피카딜리 거리에서 유행하는 연극이 눈에 들어왔다. ‘대문호 스피어의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극. 보고 싶다.’ 나름 큰 시험이 끝났는데, 그냥 집에 들어가기 아쉬웠다. 그렇다고 차마 저 남자에게 같이 연극을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혼자라도 보고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저 공연을 보고 싶은가?”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개를 저었으나 얼굴은 완전히 ‘보고 싶어요’였다. “그러면 보고 가지.” “저, 정말 괜찮아요!” 그가 정말 표를 끊을 기세라 엘리제는 화들짝 말렸다. “보고 싶은 것 아닌가?” “그, 그렇지만……! 그래도……!” 잘 모르는 남자와 연극이라니! 특히 저 연극은 사랑 이야기를 다룬 극이었다. 보통 연인이 같이 보는. “로, 론 님은 저 공연 보고 싶지 않잖아요. 괜히 저 때문에 억지로 그럴 필요 없어요.” “누가 그랬지?” “네?” “나도 저 공연 보고 싶다.”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저 냉막한 얼굴의 남자가 러브스토리 연극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정말요?” “정확히 말하면.” 그가 엘리제의 푸른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너와 같이 보고 싶다.” “……?!” 그 갑작스러운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네, 네?” “왜? 안 되는가?” “아, 아니요! 아, 아니…… 그게?” 당황한 그녀는 횡설수설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지? -너와 같이 보고 싶다. 나랑 같이 보고 싶다고? 왜? ============================ 작품 후기 ============================ 내일 금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47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1)] *** 두근.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서, 설마? 날?’ 그녀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날 본 것이라곤 병원에서밖에 없는데, 그런 마음을 가질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러고 보니 오늘 그가 보여준 모습이 이상하긴 했다. 이유 없이 보러 온 것이나, 디저트를 사준 것이나……. ‘아, 아니야. 정말 설마?’ 두근거리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방금 자신이 낯 뜨거운 말을 했다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표정. 아니, ‘같이 보고 싶을 수도 있지, 그런 걸 가지고 뭐?’라는 느낌. “왜? 같이 보고 싶으면 안 되는 건가?” “아, 아니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이유는 없다. 아니, 없나? 있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혹시 나와 공연을 보기 싫어 그러는 건가?” 그가 불쾌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됐군.”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표를 끊었다. 가장 비싼 VVIP석으로. “들어가지.” 입구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엘리제는 알 수 없는 떨림을 느끼며 그 손을 잡았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드는 손이었다. *** 연극이 끝나고, 엘리제를 집 근처로 데려다 준 황태자는 마차에 몸을 기대었다. 최근 초상(超上) 능력을 너무 자주 사용해서인지 피로했다. “즐거우셨습니까, 전하?” 시종이 웃으며 물었다. 그 물음에 린덴은 고민했다. 즐거웠냐고? “글쎄.” 나쁘진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좋았다. 그녀의 밝은 표정을 보는 것이, 그녀의 놀란 눈을 보는 것이, 옆에서 걷는 것이,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그 모든 것이 즐거웠다. 자신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놀랄 정도로. ‘그날’ 이후 이런 즐거움은 처음인데. “저…… 그런데 전하.” “왜 그러지?” “너무 변검(變臉, Changing Face) 능력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아니온지? 주제넘은 걱정인지 모르겠으나, 혹시라도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입니다.” 황태자는 부정하진 않았다. 확실히 최근 무리하긴 했다. 그가 아무리 강력한 초상능력자라도 외향을 바꾸는 변검 능력은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이니까 변검을 이렇게나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최근 변검을 너무 자주 사용하긴 했지.’ 다른 것은 몰라도 변검의 매개체가 되는 아티팩트에 무리가 가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 ‘조금 조심하긴 해야겠군.’ 만약 아티팩트에 문제라도 생기면 강제휴지기가 와 한동안 변검 능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이렇게 그녀를 찾아갈 수가 없겠군.’ 그 생각이 들자, 갑작스레 기분이 나빠졌다. ‘조심해야겠어, 꼭.’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렇게 여러 일이 있었던 의사자격시험 날 이후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엘리제는 일상생활을 하며 시험 결과를 기다렸다.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 답이 확실하지 않은 문제들 때문에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애써 감추었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기다려 보자.’ 그리고 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엘리제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 엘 후작도 노심초사하며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우리 리제가 붙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는 딸의 합격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보고 있었다. 물론 그녀가 병원 사람들에게 상식 밖의 천재라 불리며 여러 대단한 일들을 해낸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제 의학의 길에 접어든 지 몇 달 되지도 않지 않았는가? 붙는다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더구나 이번 시험은 과도하게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많고.’ 얼핏 연구원에 확인해 보니 합격률이 역대 최악을 넘어, 바닥을 길 것이란 이야기가 있었다. 난이도 문제로 몇 달 뒤 재시험을 치러야 할 것 같다고. 그런 고난이도 시험을 과연 엘리제가 붙을 수 있을까? ‘리제가 꼭 의사가 되길 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엘 후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딸이 병원에서 훌륭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동시에 의사가 되어 고생하는 것은 싫다. 안 좋은 감염성 질병들을 진료하며, 건강이라도 상할까 걱정이었으니까. 그의 솔직한 심정으로는 의사는 무슨? 평생 품에 넣고 살고 싶다. 하지만 딸이 너무 원하므로. 너무나도 소망하므로. 그녀가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꿈이 꺾여 눈물 흘리는 딸의 모습 따위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설사 이 제국의 황제가 딸을 황태자비로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말이다. ‘만약 엘리제, 네가…… 정말로 폐하와의 내기에 승리한다면, 그때는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태자 전하와의 결혼을 막아주마. 이 클로랜스 가문을 걸고서라도 말이다.’ 물론 황제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그녀를 황태자비로 바라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평생을 충성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충성을 바칠 황제이지만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딸은 그에게 소중했다. 한편 느긋한 마음으로 시험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황제인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였다. “그래, 이제 곧 시험 결과 발표지?” “네, 폐하.” 시종장 밴트가 공손히 답했다. “그래. 엘리제, 그 아이가 어느 정도의 점수를 받았는지 궁금하군.” 총명한 아이이고, 여러 뛰어난 모습을 보여 왔으니 저득점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진 않는다. 분명 어느 정도 고득점은 했겠지. 하지만 합격까지는 무리일 터. ‘이걸로 이 내기도 끝이군.’ 문득 황제는 개인적 내기 때문에 국가 공인 시험에 개입했다는 것에 살짝 가책을 느꼈으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는 이 나라의 황제다. 평생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 없이, 오로지 나라의 발전과 신민들의 영화를 위해 살아왔는데, 이 정도의 월권을 누가 뭐라 할 수 있겠는가? ‘같이 시험을 쳐 피해를 본 도제들에게는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내기를 마무리 후 재시험을 볼 수 있게 할 예정이니 역시 큰 상관은 없을 것이다. “저…… 폐하. 그렇지 않아도 연구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응? 무슨 일로?” “조금 의외의 결과가 나와서…….” 황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의외의 결과? 시종장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게…….” 한편 그 시각, 의학연구원. 십여 명의 교수가 모여 심각한 얼굴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러면 재시험은 확정이군요.” “네, 그렇게 해야겠습니다. 합격률이 너무 낮습니다. 예년의 반의반도 안 되는 합격률이라니.” “반의 반이 뭡니까? 붙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무래도 그 환자 케이스 형태의 문제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환자 케이스 형태 문제의 의도가 나빴던 것은 아닌데. 기존의 단답형 문제보다는 환자를 진료하는 능력을 더 정확히 평가할 수 있지 않겠소?” 출제위원장인 에릭 준남작은 결론을 내렸다. “어쨌든 행정부에 보고 후, 인가가 떨어지면 재시험 일정을 잡도록 해야겠습니다. 정확한 내용이 결정되면 각 병원에 공문을 보내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사안을 이야기하죠.” 그 말에 모두의 얼굴이 진중해졌다. 다음 사안. 역대 최악을 기록한 합격률만큼 중요한 내용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일개 신입의사들의 합격률보다 훨씬 중대한 사안이었다. 의학계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이번에 논의할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출제위원장 에릭 교수가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가 꺼낸 물건의 정체가 의외였다. 삐뚤삐뚤 못생긴 글씨가 써진 몇 장의 종이. 다름 아닌 이번 의사자격시험을 친 누군가의 답안인 것이다! 고작 수험생의 답안을 의학연구원의 최고위원들이 논의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교수들의 눈빛은 심각했다. “모두 이 답안은 읽어보셨죠?” “네, 다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답안의 내용들을.” “…….”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 서로의 눈치만 살필 뿐. 위원장 에릭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먼저 말해보겠습니다. 솔직히 전 이 답안들을 보고 그날 밤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 에릭은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10년 동안 고민하던 내용의 답이 정확히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문제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위장 절제술 후 담즙 역류를 방지할 방법을 기술하시오.> 위장절제술은 최근에야 시도되고 있는 최고 난이도의 수술이었다. 그런데 아직 초기 단계의 수술이어서인지 여러 부작용이 많았다. 그래서 제국과 공화국의 의학계에서는 그 부작용을 최소화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고, 그런 최신 의학 지견을 알고 있는지 문제를 낸 것이었는데……. ‘기존 그 어떤 의사도 생각하지 못한 방안을 답안으로 적어 제출했지.’ 처음엔 그냥 오답 처리 하려고 했다. 전혀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내용이었기에. 글씨도 알아보기 힘들게 엉망이었고. 하지만 이리저리 수술 도식도 그려져 있고, 전문 용어를 동반한 내용이 잔뜩 적혀 있길래, 삐뚤삐뚤한 글씨를 참아가며 한번 진지하게 읽어봤는데…… 경악했다. ‘어떻게 이런 발상을?!’ 출제위원장인 에릭은 제국 내 위장절제술의 최고 대가였다. 그래서 답안에 적혀 있던 삐뚤삐뚤한 글씨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건 혁명이었다. ‘Roux-en-Y 위 우회술이라고? 분명 이렇게 수술하면 담즙 역류를 확실히 막을 수 있어. 수술의 난도야 훨씬 올라가겠지만.’ 그리고 단지 이것뿐이 아니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10년을 고민한 내용이 이렇게 풀리다니. 허무할 지경이더군요.” 연구원의 또 다른 출제위원이자 로즈데일 병원의 저명한 교수 미크가 말했다. 그가 낸 문제는 바로 자신의 주력전공인 심장 부전 환자의 치료. “대학자 프레밍이 개발한 약을 그렇게 사용하면 된다는 생각을 왜 지금까지 못했는지. 저 자신이 한심스럽더군요.” 이들 출제위원은 문제를 어렵게 내라는 황제의 황명을 받고 많은 방안을 고민했었다. 기존의 단답형에서 환자 케이스 형태로 추론 능력을 물었고, 희귀병의 비중도 높였다. 그리고 가장 최고 난이도의 문제들! 교수들이 각자 자신의 세부전공에서 아직 치료가 정립되지 않은, 의학계에 화두가 되고 있는 내용을 문제로 냈었다. 최신 의학 지견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그리고 그런 문제들에 대해 어떤 아이디어를 가졌는지 묻기 위해. ‘예상대로 최신 의학 지견을 묻는 문제를 푸는 도제들은 거의 없었지.’ 끄적끄적 답안을 적어도, 말도 안 되는 공상이거나 황당한 내용뿐이었다. 개중 일부 몇 문제를 맞추는 이들도 있었으나, 극히 일부. 하지만…… 딱 한 명. 단 한 명만이 모든 문제에 답안을 적어 넣었고, 그리고 그 답안의 내용은 모든 출제위원을 경악에 빠뜨렸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출제위원장 에릭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떤 답들은 최신 의학 지견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아니, 그저 꿰뚫는 수준이 아닌, 답안자의 식견이 내용에 곁들어져 있는데, 그 내용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단지 그 정도만이었으면 이들 모두가 이렇게 심각하게 논의를 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대단한 수재가 나타났다고 여기면 그만이었을 테니. 하지만…… 몇몇 문제의 답안이 그들 모두를 경악에 빠뜨렸다. ‘이건…… 말도 안 돼.’ -위장절제술의 수술적 기법! -심장 부전 환자의 치료! -수술 중 감염증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적인 소독법! 제국과 프랑소엔 공화국의 거장들이 오랫동안 갑론을박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던, 모두 의학계의 큰 화두들이었다. 그런데…… 이 종이에. 고작 의사자격시험에 적힌 삐뚤삐뚤한 악필에 기존 패러다임을 아득히 뛰어넘는 가설과 이론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곧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48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2)] *** 어린 도제의 의견이라고 터무니없다 무시할 수도 없었다. 출제위원들은 모두 각 분야의 대가들. 그들 모두 저 답안에 적힌 내용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존 학설을 통째로 흔들 혁명적 가설과 이론이었다. “나는…… 이 답안의 내용을 학회의 의학자들과 상의해 볼 생각이오.” “저도 그래야겠습니다. 이건 저 혼자서 알고 있을 내용이 아니니까요.” 해당 분야의 전문 교수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답안의 내용은 단지 자신들만 알고 있을 내용이 아니었다. 반드시 학회에 보고해야 했다. 그만큼 대단한 이론들이었다. 그때 한 위원이 물었다. “그러면 이 답안은 모두 정답으로 처리하면 되겠죠?” “그거야 당연하지 않소? 이런 답안을 정답 처리하지 않으면 뭘 정답 처리한단 말이오?” “하지만 그러면…….” 말을 꺼냈던 위원이 주저하며 말했다. “이걸 다 정답처리 해버리면 너무 고득점이 됩니다.” “이렇게 뛰어난 답안을 적었으니, 고득점이 아닌 게 이상하지 않겠소? 몇 점이길래 그러오?” “……99점입니다.” 잠시 불신에 찬 침묵이 장내에 내려앉았다. 한 위원이 떠듬떠듬 물었다. “구십…… 몇 점이라고요?” “99점입니다.” “자, 잘못 채점한 것 아니오? 이번 시험 차석이 82점으로 알고 있는데?” “정확합니다. 혹시나 오류가 있을까 5번이나 채점했습니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제국 의사자격시험 역대 최고점이 95점인가 그렇다. 그런데 99점이라고? 이렇게 어렵게 낸 시험에서? 200문항 중 딱 2개만 틀렸단 소리 아닌가? “아, 아무리 저런 뛰어난 답안을 적어내었다 해도 말도 안 되는 점수인데…….” 한 교수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그러면 틀린 2문제는 뭡니까?” 채점을 맡은 교수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폐렴의 증상을 묻는 문제와 단순 감기의 치료법 문제입니다.” “뭐요? 그건 그냥 거저 주는 최저난이도의 문제 아닙니까? 다른 문제는 다 맞추고 왜 그런 문제를?” “답안에 쓴 글씨가 삐뚤삐뚤해 도저히 알아볼 수가 없어서... 부득이 오답처리 했습니다. 왜 이렇게 글씨를 못 쓰는지 채점하기 진짜 힘들더군요.” “... ... .” 교수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저 쉬운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다 맞혔다고? 정말로? 위원들의 반응에 위원장 에릭 준남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도 처음 채점 결과를 들었을 때 저런 반응이었다. “그만. 답안 내용은 제가 몇 번이나 검토했으니,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 우리 브리티아 제국 의학계에 ‘선구자’ 그라함 백작을 능가하는 천재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반쯤 농담 섞인 말투였지만, 그 말은 위원장의 진심이었다. 이 답안의 내용을 보면 천재란 말도 오히려 부족했다. ‘더구나 이 답안을 쓴 분은.’ 이 답안의 주인공은 애초에 어느 이름 없는 도제가 아니었다. 진즉부터 제국 수도 론도의 의학계, 아니, 제국 전역에서 유명한 이였다. 위원장 에릭 준남작은 답안 주인공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데임(Dame) 클로랜스.” 데임 엘리제 드 클로랜스. 시대를 뛰어넘는 비장절제술로 론도의 의학계를 경악에 빠뜨린 소녀. 그리고 그 경악이 가라앉기도 전에, 과감한 기관절개술로 하버 공작부인의 목숨을 구해 여성 최초의 황실장미훈장과 명예기사 작위를 받은 이. ‘또…… 황태자비가 될 분이시기도 하지.’ 제국 최고 명문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인 그녀는 이번 탄신연회 때 황태자비로 ‘사실상’ 내정되었다. 즉, 단순한 의사 지망생이 아닌,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지고한 여인이었다. ‘왠지 아깝구나. 이런 능력을 가진 분이 황태자비가 되신다니.’ 위원장은 속으로 생각했다. 지고한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아깝다니. 누가 들으면 황당해할 생각이지만 진심이었다. ‘처음 기관절개술로 하버 공작부인을 살려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그저 대단하신 분이 황태자비로 내정되었구나, 라고만 생각했지만.’ 이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혁명과도 같은 답안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만약 의사가 된다면 의학계의 발전에 크나큰 이바지를 할 것 같은데.’ 그는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 엘리제의 수석 합격 소식은 제국 의학계를 강타했다. [황태자비가 될 데임 클로랜스! 최고 난이도의 의사자격시험에서 역대 최고점으로 수석을 차지하다!] 이번 시험은 극악한 난이도로 합격률이 바닥을 기었다. 단순히 합격만 해도 주목을 받았을 텐데, 역대 최고점이라니? 그리고 단순히 최고점으로 수석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답안에 적었던 내용들은 곧바로 제국 의학계 학회에 보고돼 혁명적 논란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이게 정말 데임 클로랜스께서 생각해 낸 발상들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저도 이번에 학회에 보고된 내용을 보고 눈을 의심했습니다. 지금껏 고민하던 문제들을 이렇게 풀어내다니!” “그런데 데임 클로랜스라면 이번에 황태자비로 내정되신 분 아닙니까? 그 명문 클로랜스 가문의?” “네, 맞습니다. 참 대단하시지요?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 이렇게 의학적으로도 뛰어나시다니.” “하!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지만…… 조금 아쉽구려. 이 답안의 내용을 보고서 우리 황실 십자 병원으로 데려오려고 했는데. 하필 데임 클로랜스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로즈데일 병원도 교수직을 제안하려 했는데.” 제국 의학계에 어느 정도 영향력 있는 의사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그녀에 대해 떠들었다. 그만큼 이번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수석 합격 소식은 단순히 의학계에서만 회자된 것이 아닌, 일반 제국 시민들에게도 퍼졌다. 특종의 냄새를 맡은 하이에나 기자들이 번개같이 기사를 써서 낸 것이다. [데임 클로랜스! 역대 최고점으로 의사자격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함! 황태자비가 된 이후가 기대돼!] 수석 합격과 황태자비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사소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최근 제국의 최고 유명인인 엘리제가 또 일을 터뜨렸다는 것이 중요했다. 기자들은 마치 인기 배우의 가십이라도 터진 것처럼 기사를 퍼뜨렸다. 덕분에 일반 시민들도 모두 엘리제의 수석 합격 소식을 알게 되었다. “하, 정말 대단하시네. 우리 황태자비님.” “그러게. 잘은 모르지만, 엄청 어려운 시험이라고 하던데.” “그래, 내가 아는 부르주아 가문의 차남은 벌써 4번째 낙방하고 있어. 그런데 수석 합격이라고?” “이렇게 총명하신 분이니 황태자비가 되어서도 잘하시겠지?” “그럼! 마음도 천사 같다지 않은가? 빈민 구제 병원인 테레사 병원에서 몇 달째 봉사 중이시니.” “정말 이런 분이 황후가 되셔야 하는데. 금번 황후와 황비께서는…….” 그런데 그 말을 하던 시민이 주변의 눈초리를 받았다. 현 황실의 황후와 1황비, 그리고 1황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암묵적인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건 시민들이 로마노프 황가와 희대의 명군(名君) 민체스터 황제를 존경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크흠, 내가 실수했군. 그런데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어째서 의사자격시험까지 치르신 거지? 단순히 봉사활동이 아니라, 정말 의사가 되려는 건가?” “그러고 보니 그러네. 어차피 곧 황태자비가 되실 텐데, 왜 시험까지 치르신 거지? 그것도 수석 합격까지 하면서?” 시민들은 의문을 가졌다. 뭔가 앞뒤가 안 맞았던 것이다. “몰라. 뭔가 큰 뜻이 있으시겠지. 어쨌든 우리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실 데임 클로랜스를 위해 건배!” 엘리제의 가족들도 크게 기뻐했다. 특히 노심초사하던 엘 후작의 기쁨은 특히 컸다. “크하하! 역시 우리 딸이구나!” 과거 근엄함의 대명사였던,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딸 바보로 변한 제국의 명재상은 체통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봐라! 오늘은 가문의 잔치다! 창고의 술통을 모두 열어라! 하하! 좋은 날이니 모두 다 같이 먹고 즐기자!” “와! 엘리제 아가씨 만세!” 고용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렇게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에 갑작스러운 잔치가 열렸다. 맛있는 음식과 질 좋은 술에 가문의 모두가 기분 좋게 취해 갔다. 작은오빠, 크리스가 와인에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녀를 걱정했다. “리제, 의사가 되어서도 꼭 몸조심해야 해.” “네, 작은오라버니도요.” “내가 몸조심할 게 뭐가 있니? 네가 걱정이지. 하여튼 위험해 보이는 환자에겐 절대로 접근하지 말고.” 작은오빠는 동생이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느껴지는 듯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잔소리에 엘리제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행복했다. ‘작은오라버니. 이번엔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게 할 거야.’ 그녀의 추측이지만, 이제 곧 크림원정은 확전된다. ‘지난 삶에선 내가 한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 작은오빠가 그 확전된 전쟁에 참전했었지.’ 과거, 그녀는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큰 실수를 했었고, 그걸 만회하기 위해 작은오빠가 전쟁에 참전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못했다. ‘이번엔 작은오라버니가 참전할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그때 간만에 집에 돌아온 큰오라버니, 렌 남작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합격 축하한다. 못난 줄만 알았더니, 잘하는 것도 있구나.” 그 축하에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체 무뚝뚝한 큰오라버니라 아무 말도 없이 지나갈 줄 알았었는데. “고마워요, 오라버니.” 그런데 큰오라버니가 오늘따라 이상했다. 머뭇거리며 이상한 것을 물은 것이다. “음…… 엘리제.” “네?” “너 좋아하는 음식이 뭐냐?” “……네?” “좋아하는 공연은? 혹시 좋아하는 취미는 없느냐?” 엘리제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의심했다. 하지만 민망해하는 얼굴을 보니,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그건 왜요?” “…….” 꿀 먹은 벙어리. ‘나도 몰라.’ 렌 남작 본인도 왜 이런 쓸데없는 질문을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전하는 왜 이런 걸 궁금해하시는 거지?’ 동생이 뭘 좋아하든 자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각자 좋아하는 것 알아서 하며 잘 살면 되지! 하지만 자꾸 물으니 신하 된 입장에서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차라리 테르시오의 파훼법이나 포병대의 운영, 공화국의 경기병에 대한 대처, 이런 질문이 낫지.’ 렌 남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렇게 클로랜스 가문의 밤이 행복하게 물들어갔다. 즐거운 밤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모두가 행복해하고 있을 때, 엘리제의 합격 소식을 듣고 우울해하는 이가 있었다. 만 제국민의 경외와 존경을 한 몸에 받는 명군 민체스터 황제였다. ‘수석 합격이라고?’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것도 역대 최고점? 그렇게 시험 문제를 어렵게 냈는데? 정말 대단하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엘리제, 그 아이는 도대체 얼마나 자신을 놀라게 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아직 내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엘리제는 그저 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한 것일 뿐이니까. 물론 수석 합격이 대단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어차피 매년 한 명씩 꼭 나오는 수석 합격자이다. 내기의 조건, ‘황태자비, 후에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더 가치 있는 일을 해낼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 그것에는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러다…… 엘리제 그 아이가 정말로 내기에서 건 조건을 뛰어넘는 일을 해내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성인식까지 이제 고작 4개월. 그 안에 대단한 일을 해봤자, 얼마나 해낼 수 있겠는가? 그녀가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2달 남짓한 시간 동안 그 아이가 보여준 모습들. 어쩌면……. 민체스터의 마음속에 자신이 내기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떠올랐다. 그는 괜히 이유 없이 뒷머리가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토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49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3)] *** 그렇게 엘리제는 자격을 갖춘 정식 의사가 되었다. 그것도 역대 최고점 수석 합격자뿐 아니라, 역대 최연소 합격자로. 사람들은 황태자비가 될 거라고 알려진 그녀가 이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녀는 원래 일하던 테레사 병원에서 계속 일했다. 다만 이전과 차이가 있다면, 도제가 아닌, 의사로서 정식 취직했다는 점이었다.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가 테레사 병원에서 계속 일한다고? 그 황태자비로 정해진?” “그렇다는데?”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그녀를 지켜봤다. 클로랜스 가문만 한 대귀족 출신이 의사가 된 적도 거의 없었고, 황태자비로 내정된 이가 의사가 된 적은 더더욱 없었으니까. “대단하시군. 빈민들이 주로 오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닐 텐데.” “그러게 말이야. 남자들도 학을 뗀다던데. 황태자비가 되기 전, 건강이라도 상하는 것 아닐까 걱정이야.” 사람들의 시선은 주로 호의적이었다. 황태자비가 될 거라 예정된 지고한 여인이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돌보는 것이 나빠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까운 시선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황태자비가 될 거면서, 왜 의사를 한다고 그런담? 저거 다 그냥 정치적 쇼 아니야?” “그러게.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주로 클로랜스 가문과 대립 관계인 귀족파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엘리제가 황태자비가 되기 전, 대중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쇼를 벌이고 있다고 폄훼했다. 근거 없는 헐뜯음은 아니었다. 실제로 엘리제는 테레사 병원에서 일하면서 시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고 있었으니까. [퍼스트레이디가 될 지고한 여인,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빈민구제병원에서 남을 위해 봉사하다!] 사실 어느 정도 오해였지만, 일반 시민들은 열광했다. 세상에 저런 황태자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당장 옆 나라 프랑소엔에서 앙투 황후가 시민들의 분노로 단두대에 목이 잘린 게 50년도 안 된 일이었다. 합스브루엔 가문 왕녀들의 사치도 유명한 일이었고. “위대한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그리고 데임 클로랜스를 위하여 건배!” 시민들은 펍에서 술을 마시며 황실의 이름을 위해 건배할 때 엘리제의 이름도 같이 건배했다. 그만큼 그녀는 아직 정식 약혼도 안 했으면서 시민들에게 굉장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황태자비가 이런 인기를 얻은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당사자인 엘리제는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난 황태자비가 되지 않을 거니까.’ 그녀는 그렇게 굳게 생각했다. 4개월. 그 안에 반드시 황제와의 내기를 이길 것이다. 그래서 황태자와 연관 없는 평범한 의사의 삶을 살 것이다. ‘최선을 다하자, 엘리제.’ 그런 마음으로 그녀는 최선을 다해 환자들을 돌봤다. 아니, 꼭 내기가 아니라도 그녀는 환자를 돌보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좋아하는 일이니까. 꿈에서 바라던 일이니까. ‘즐거워.’ 의사 자격증을 따니 너무 좋았다. 도제 때와 다르게,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신의 진료를 할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기회.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고 행복하게 환자를 진료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이주일. 한 달, 두 달. 폐하와의 내기와는 별개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몸이 약한 탓에, 여러 차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엘리제는 정말 원 없이 환자에 몰두했다. ‘넌 이상해.’ 과거 한국에서 서울대 의대 친한 동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환자를 보는 게 그렇게나 즐겁다니. 물론 어느 정도 보람이야 느낄 수 있지만. 아무리 보람차도 결국 일이잖아. 그런데 즐거워? 넌 이상해. 아무리 좋게 봐줘도 넌 일중독, 워커 홀릭이야.’ 그래,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이상했다. 이 일이, 환자를 보는 것이 이유 없이 좋았으니까. 하지만 꼭 이유가 필요하겠는가? 화가가 그림을 좋아하는 데에는, 가수가 노래에 중독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자신도 그저 이 일에 빠졌을 뿐이다. 어쨌든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시간의 흐름이 멈췄으면 싶을 만큼, 행복한 나날들. 하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평온한 행복을 더 허락하지 않았다. 3달. 성인식을 딱 한 달 남겨둔 그때. 그녀의 운명을 뒤바꾼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났다. 첫 번째 사건은 크림반도를 향한 프랑소엔 공화국의 참전이었다. 확전이 될 거라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참전이 결정된 프랑소엔군의 규모였다. 40만. 무려 40만이었다. 이전 삶과 비교했을 때 두 배가 넘는 대군으로, 이런 대군에 맞서려면 천하의 브리티아 제국도 상비군만으로는 불가능했다. 대규모 징병이 불가피했다. 그렇게 갑작스러운 전운이 론도에 몰려들었다. 사건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건은 바로 론도 대역병(大疫病).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제국의 수도 론도에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제 드 클로랜스, 이 작은 소녀는 이 사건들로 인해 의학사(醫學史)가 아닌, 일반 역사서(歷史書)에 처음으로 이름을 남기기 시작한다. ***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 제국을 통치하는 세 명의 거인이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놈들이 미쳤나 보군. 40만? 정확한 정보겠지, 재상?” 황제 민체스터가 혀를 찼다. “네, 폐하. 프랑소엔 정규군 30만, 검은 대륙의 무어군 7만, 스위센의 용병 3만. 도합 40만이 맞습니다.” 40만. 정말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니콜라스 총통, 그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시몬 니콜라스. 프랑소엔 공화국을 무려 30년이나 독재한 자. 사실 공화국은 말만 공화국이지, 피의 독재자 니콜라스 총통의 개인 소유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크림반도 이남의 흑해가 저희의 영향권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건 너무 많아. 15만, 많아도 20만 정도로 생각했는데.” 그때 옆에서 가만히 있던 황태자 린덴이 입을 열었다. “위기감을 느껴서인 것 같습니다.” “위기감?” “네, 현재 크림에 원정 중인 2군단은 큰 피해 없이 승전 중입니다. 클로랜스 영애의 조언 덕에 공화국의 계책이었던 몽셀 왕국의 개입도 큰 피해 없이 막았고, 마침 유행했던 전염병도 적은 피해로 끝났습니다. 이대로 원정이 진행된다면 크림반도가 저희 제국에 떨어지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 어지간한 지원군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다 판단해 이런 대군을 일으킨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건 공화국 정부에 밀파된 정보원이 보낸 정보를 토대로 한 추측으로 정확한 판단이었다. “어쨌든 우리도 물러날 수는 없으니 전면전의 양상이 되겠군.” “네, 큰 전쟁이 될듯합니다.” 참 얄궂은 일이었다. 과거 엘리제가 전략을 조언한 이유는 단 하나,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하려 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 일이 부메랑처럼 돌아와 대규모 확전의 빌미가 되다니. “돈놀이꾼만 좋아하겠군. 여기저기서 많이 빌리려 들 테니. 그네가 제일 좋아하는 것 아닌가? 전쟁 나면 돈 빌려주고 이자 받아먹는 것.” “그러게 말입니다.” 엘 후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돈놀이꾼. 귀족파의 차일드 후작을 뜻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수장으로 있는 국제금융재벌인 차일드가(家)의 족속들을 칭하는 말이다. 차일드 가문은 브리티아 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저 프랑소엔 공화국에도, 스페냐 왕국에도, 프러시엔 공국에도. 서대륙 열강들에 각자 다른 이름으로 뿌리를 내려 수많은 은행을 운영하고 있었다. 사실상 서대륙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자들. 그런 강력한 금권(金權)을 가지고 있기에, 황제인 민체스터도 함부로 손을 못 대고 있는 것이었다. “재상.” “네, 폐하.” “우리가 투입할 수 있는 상비군이 어느 정도지?” “급한 대로 서대륙 본토 북단의 로마노프령(領)에서 15만 정도입니다. 다른 대륙에 주둔 중인 병력은 움직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될 듯합니다.” “그러면 추가로 브리티아 섬에서 최소 15만 이상은 징병해야겠군.” “그렇습니다.” 민체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민체스터는 잠시 친구의 눈으로 돌아가 자신의 오랜 벗인 엘 후작을 바라봤다. “귀족 가문에선 최소 2명씩은 참전해야 할 거야. 괜찮겠나, 엘?” “……!” 그 물음의 의미를 깨달은 엘 후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굳게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걸 물으십니까?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은 귀족의 가장 큰 명예.”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미안하고. 주님의 가호가 클로랜스에게 임하길.” 2명의 참전. 그 말은 엘 후작의 두 아들, 렌과 크리스가 모두 참전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최악의 경우 두 명 모두 전사해 직계의 대가 끊길 수도 있는 일. 하지만 아무리 고위귀족이라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에는 예외가 없었다. 아니, 고위귀족이기에 더욱 앞장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그것이 브리티아 제국의 오랜 전통이었고, 귀족의 명예였기 때문이다. 만약 아들들이 전쟁에서 모두 사망해 대가 끊길 경우, 방계의 혈족을 입양해 가문을 잇곤 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를. 둘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제발.’ 엘 후작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착잡한 마음은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린덴, 너도 꼭 조심해야 하느니라. 아무리 초상 능력자라도 총알이 피해가지는 않으니.” 황제가 아버지의 마음으로 말했다. 황실도 군역의 의무에 예외는 없다. 아니, 그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 -군대는 로마노프를 위해 싸우고, 로마노프 황실은 조국인 브리티아를 위해 싸운다! 이게 바로 브리티아 제국의 원칙이었으니까. 실제로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 전쟁 때 1, 2, 3황자가 모두 참전했었고, 그중 첫째인 1황자가 공화국의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시체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한 첫째의 주검을 보고, 민체스터는 남들 앞에서 눈물을 제대로 흘리지도 못했다. 제왕이었으니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하지만 남몰래 얼마나 통곡했는지 모른다. 아무리 철혈의 제왕이라도 그도 결국 아버지였다. 아들의 죽음은 그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 넣었다. 15년 전, 황실의 비극 이후 두 번째 대못이었다. 그 이후 다시는 핏줄의 죽음 따위 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도 황태자, 그리고 3황자 모두 참전할 것이다. 황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 그는 말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황태자를 돌아봤다. 그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그날의 비극’ 이후 표정을 잃은 자신의 아들. ‘다 내 잘못이지.’ 황제는 씁쓸하게 웃었다. 알고 있다. ‘그날’의 일이 린덴에게 어떤 상처가 되었을지. 자신조차도 아직 이렇게 아픈데, 어렸던 그는 어땠겠는가? 돌이킬 수 있다면. 아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과연 돌이킬 수 있을까? 민체스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탁 트인 시야로 250만 시민이 사는 수도 론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씨가 좋군.” 그가 사랑하는 수도의 전경. 저 전경을 위해, 시민들을 위해 일평생을 바쳤다. 그래서 명군이라 칭송받는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과연 의미 있는 삶이었을까? 이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의 삶은? “정말 날씨가 좋아.” 그는 중얼거렸다. 하늘이 시리도록 맑아서일까? 갑자기 한 가지 바람이 들었다. ‘린덴이 출정하기 전, 엘리제 그 아이와 약혼식 올리는 모습이라도 봤으면 좋겠군.’ 하지만 그때, 민체스터가 모르고 있는 사실이 있었다. 프랑소엔 공화국의 참전 말고도, 론도에 또 다른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단 것을. 2차 론도 대역병(大疫病) 사건. 엘리제의 이전 삶, 론도 시내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전염병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벌써 이 순간, 론도의 각 병원에서는 사망자들이 발생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일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50 2-5 변곡점 ========================================================================= 50화.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4)] “또 죽었군.” 테레사 병원의 젊은 교수 그레이엄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몇 명째지?” “총 4명이에요.” 간호원이 답했다. “흠…….” 그레이엄은 고민이 되는지 책상을 두드렸다. “고약한 일이군. 설사병으로 이틀 만에 4명이나 죽다니.” “원래 쇠약한 노인들이어서 그런 것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간호원의 의견에 그레이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빈민들이다. 심한 위장관염 즉, 설사병으로 사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다만 의사로서의 감이랄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는 시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뻣뻣이 굳은 시체. 영혼이 떠난 그 주검은 수없이 많은 죽음을 경험한 의사가 보기에도 섬뜩한 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체 옆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존재가 한 명 서 있었다. 백금발의 인형처럼 예쁘고 여린 소녀였는데, 시체는커녕 피 한 방울만 봐도 기절할 것처럼 생겼으면서 커다란 눈을 똑바로 뜨고 시체를 살피고 있었다. 소녀, 엘리제에게 그레이엄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데임 클로랜스? 특별한 점이 있습니까?” 그는 이전과 다르게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다. “아, 선생님. 그냥 이전처럼 편하게 말씀 주셔도 괜찮아요.” 엘리제는 그 경어가 부담스러워 말했으나, 그는 고개를 저으며 선을 그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데임께서 저에게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하지만…….” 사실 그레이엄의 말이 맞았다. 엘리제는 작게는 황실에서 내린 기사 작위의 소유자이며, 크게는 대 클로랜스 가문의 직계, 동시에 황태자비로 내정되었다 여겨지는 이다. 신분으로만 따지면 일개 몰락 귀족 출신인 그레이엄보다 까마득히 높았다. ‘그래도 예법을 떠나 너무 선을 그으시는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레이엄의 태도는 단순히 예를 차리는 것이 아니었다. 저건 선이고 벽이었다. 자신을 향한. ‘정체를 숨겨 배신감이 커서겠지? 다 내 잘못이니 뭐라 할 말이 없구나.’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가 선을 긋는 이유는 아마 그것 때문인 것 같았다. 정체를 숨겼던 것. 정상적인 도제 생활을 위해 정체를 숨기는 게 불가피했었지만, 자신의 잘못이 맞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서운함을 풀어주실까?’ 그런데 그녀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레이엄은 단순히 그런 이유로 선을 긋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그가 중간중간, 아무도 모를 때 자신을 어떤 갈망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혹시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데임?” “아…….” 엘리제는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탈수가 심해요.” “그야 당연히?” 그레이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위장관 염(Acute gastroenteritis), 설사병으로 사망했으니, 탈수가 동반되는 게 당연했다. 그런 뻔한 사실을 왜 언급하는 거지? 하지만 저 데임 클로랜스의 의견이다. 무언가 이유가 있을 거라 짐작한 그레이엄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임상 경과와 비교해 탈수가 너무 심해요. 패혈증은 거의 동반되지도 않았는데도요. 그리고 이상한 점은.” 엘리제는 주저하더니 말했다. “최근 사망한 4명 모두가 전부 그래요. 모두 질환의 양상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탈수가 심해요. 마치 모두 어떤 특별한 질환을 똑같이 앓기라도 한 것처럼.” “……!” 그레이엄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의 뜻은? 데임께서는 이들의 질환이 역병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역병(疫病)! 다른 말로 돌림병, 전염병. 그 단어의 의미는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250만의 시민이 한 곳에 뭉쳐 사는 론도에서 죽음에 이르는 전염병이 돌면 사망자가 일이백 정도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일단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가능성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 확인해 보면 좋겠습니까?” “로즈데일 병원과 황실 십자 병원. 그리고 요크 병원, 크로이던 병원 등. 론도 시내에 어느 정도 시설을 갖춘 병원에 모두 연락을 해서 비슷한 증상의 사망자가 있는지 확인해 보면 될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이들 사망자 주위에도 비슷한 설사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없는지도 확인하고요.” 그레이엄은 감탄했다. 엘리제가 말한 것은 현대 지구에서 사용하는 역학 조사 수단으로 간단하지만 확실한 방법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각 병원에 인편으로 연락만 해보면 되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레이엄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사라졌다. 그리고 홀로 남은 엘리제. 그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혹시…… 그 전염병이 유행하는 것은 아니겠지?’ 이전 삶, 마침 이 시기쯤 론도에 대규모의 전염병이 유행했었다. 무려 10만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던 2차 론도 대역병 사건! ‘아니야. 확실하지 않아. 그리고 이전 삶에서 유행했다고, 이번에도 또 유행하란 법은 없잖아.’ 사실 그녀는 당시 정확히 어떤 질환이 유행했는지는 모른다. 마침 론도에 없기도 했었고, 의학적 사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사람들이 설사를 심하게 앓다 사망했다고만 들었다. ‘설사병. 정말 당시의 그 전염병이 유행하는 거면 어떻게 하지?’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진실로 그 전염병이 맞는다면 지난 삶처럼 이번에도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어떻게 하지?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엘리제.” 그녀는 말했다. “막아야지.” 당연한 결론. “당시 무슨 질환이 유행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래도 막아야 한다. 지난 삶처럼 수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물론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해내야 한다. 무려 10만이 넘는 이들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 다행히 자신에게는 여러 현대 의학 지식이 있다. 어떻게든 방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다른 문제지만, 이 전염병을 해결하면 폐하와의 내기도 이길 수 있겠구나.’ 최소 수만 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황제라도 그 생명의 가치를 부정하진 못하리라. 만약 전염병을 해결해 내기만 한다면 황제와의 내기는 필승이었다. ‘물론 최선은 전염병이 애초에 유행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만약 이전처럼 전염병이 도는 것이 맞는다면 반드시 해결하겠어.’ 그래서 수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대재앙을 막고, 폐하와의 내기에서도 이겨 앞으로 황태자와 관계없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리라. 그녀는 그렇게 결연히 다짐했다. *** 그날 밤, 엘리제는 퇴근하던 중 뜻밖의 손님과 마주했다. “일은 다 끝났나? 오래 걸렸군.” 서늘한 목소리, 금발의 푸른 눈, 가슴이 떨리도록 아름다운 얼굴. 그, 론이었다! 그가 병원 입구에 몸을 기댄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두근.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이었다. 두근. 엘리제의 가슴이 뛰었다. ‘너와 같이 보고 싶다.’ 그때부터였다. 의사자격시험을 치르고 피카딜리에서 단둘이 공연을 본 날. 그날부터 론을 만나면 알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그 떨림을 애써 가라앉히며 물었다. “로, 론 님? 혹시 저 기다리신 거예요?” “그래.” “……어째서? 혹시 무슨 이유라도?” “이유? 없다. 그냥. 그냥 보러왔다.” “……!” 무뚝뚝한 말.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지난 3달간, 그는 종종 자신을 찾아왔다. 별다른 용무도 없이. 그냥. 그렇다고 찾아와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게 맛있는 것을 사주고,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공연을 보고, 가끔 한적한 공원을 함께 걸었다. “잠깐 시간 괜찮나?” “아, 네. 그런데 무슨 일로?” “너에게 할 말이 있다.” “……!” 그 말을 들은 순간, 엘리제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뛰었다. 할 말? 무슨? ‘혹시?’ 밑도 끝도 없이, 망상이 들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엘리제. 론 님이 날 좋아할 리가 없잖아?’ 그는 자신에게 호감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다. 그저 이유 없이 찾아와 같이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자신을 찾아온단 말인가? 왜 맛있는 것을 사주고, 공연을 같이 보고, 시간을 보내 자신의 가슴을 떨리게 한단 말인가? “잠깐 걷지.” 그는 늘 그렇듯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엘리제는 말없이 그를 따라갔다. 혹시나 자신의 떨림이 그에게 새어 나갈까 걱정하며. *** 그들은 마차를 타고, 자리를 옮겼다. 테레사 병원 근처 피에르 지구는 빈민가라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만한 장소는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그들이 향한 곳은 테즈 강 인근의 공원이었다. 한창 공사 중인 거대 시계탑 근처의 그 공원은 연인들이 주로 찾는 곳으로 유명했고, 그들도 지난 몇 달간 함께 산책한 적이 있었다. “저…… 하실 말씀이란 게?” 강이 내려다보이는 벤츠에 앉은 엘리제가 물었다. 푸른 강은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 하지만 남자, 론은 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 없이. 자신의 눈동자에 그녀를 새겨 넣기라도 할 듯, 깊게. 그 깊은 눈빛에 왜인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냥. 보고 있고 싶어서.” “……!” 눈 하나 꿈쩍 않고 뱉은 그 말에 그녀의 얼굴이 살짝 달아올랐다. 놀리는 것인가 하고 그를 봤지만, 그의 눈동자는 진지했다. 그 진지한 눈빛에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시선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 남자는 정말.’ 론은 가끔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낯 뜨거운 말을 던진다. 자신을 꿰려는 바람둥이의 수작인가 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지난 몇 달간 만나본 그는 그런 수작을 걸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다. 수작은커녕 여자를 대하는 게 굉장히 미숙했다. 마치 연애라곤 한 번도 안 해본 것처럼. “그리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이제는 볼 수 없을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엘리제의 심장의 떨림이 멈추었다. “……네?” 엘리제는 멍하니 반문했다. 그게…… 갑자기 무슨? “사실 오늘은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론이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웃는 듯하면서도 어딘지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무엇인가요?” “작별 인사. 앞으로 너를 보러 오기 힘들 것 같다.” “……!”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엘리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 어째서요?” “2차 크림원정군. 그 원정군으로 참전할 예정이다.” “……!” 엘리제는 입으로 손을 가렸다. 그렇다. 남자는 황실과 연관 있는 고위귀족. 그러니 2차 원정군으로 참전하는 것이다. 전쟁이 일어날 때마다 고위귀족들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하기 위해 각 가문마다 최소 1명씩의 자제를 참전시키니까. ‘우리 클로랜스 가문도 큰오라버니가 참전하겠지.’ 아직 작은오라버니, 크리스의 참전 소식을 못 들은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군요.” 뭐라고 할 말이 없어,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갔다 오라고, 건강하라고. 덕담을 해줘야 할 텐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입을 열면 가슴이 울컥할 것 같았다. “로제.” “…….” “로제.” 그가 계속해서 불렀으나, 그녀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알 수 없이 요동치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왜 이럴까? 자신과 그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그런데 그때.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에 와 닿았다. “……?!” 서늘한 감촉. 그는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이라도 만지는 것처럼 조심히 그녀의 얼굴을 자신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곤 그녀를 바라봤다.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눈에 새기려는 듯. ============================ 작품 후기 ============================ 내일 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51 2-5 변곡점 ========================================================================= [2막 : 小和田 雅子???] [2-5장 : 변곡점 (5)] *** “론…… 님?” 두근. 엘리제는 그 깊은 눈동자에,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의 감촉에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로제.” “……네.” “지난 몇 달간. 너와 만나 즐거웠다. 그러니…… 꼭 몸조심하고 지내고 있도록.” 낭만이라곤 하나 없는, 멋대가리 없는 인사.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알 수 없이 가슴이 흔들려 그녀는 그의 손가락에서 벗어나 화급히 고개를 숙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그래.” 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지내도록.” 그리고 뚜벅뚜벅 멀어졌다. 점점 사라지는 그의 등을 보며 엘리제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쟁이라니.’ 사실 그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아니다. 이렇게 감정이 흔들릴 이유가 없는데. 하지만…… 가슴이 아팠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혹시나 그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게. 모두 싫었다. 지난 몇 달간, 그와 만나며 생각보다 많은 정이 들었나 보다. 그의 무뚝뚝한 얼굴이, 재미라곤 하나 없는 말투가, 연애 한 번 못 해본 듯한 딱딱한 태도가. 싫지 않았나 보다. ‘괜찮겠지? 그래도 고위귀족이니까.’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전쟁의 총탄은 귀족과 평민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 삶,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도 고위귀족이지만 전사했다. 심지어 2년 전 검은 대륙의 전쟁 때는 1황자가 전사했다. 황족이자 초상능력자였던 그가 말이다. 그도, 무뚝뚝하게 서 있는 모습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저 남자도 전쟁에서는 어떻게 될 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그에게 달려갔다. “론 님!” “……?!” 그녀는 다급히 손을 목 뒤로 가져가 무언가를 풀었다. 그리고 그걸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이것! 이것 가져가세요!” “……뭐지?” 보니 진주로 장식된 십자가 목걸이였다. 다만 화려하기보단 세월이 묻은 듯한 장신구였다.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 “그러니. 그러니! 주는 것 아니고, 맡기는 거니 꼭 돌려주세요!” 남자의 눈이 커졌다. 그는 잠시 목걸이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봤다. “정말…… 나에게 주는 게 맞는 것인가?” 이건 ‘징표’였다. 연인이나 가족이 전쟁에 나가는 사랑하는 이의 무사 생환을 기원하며 맡기는. “주는 것 아니에요. 맡기는 거예요. 그러니 반드시 돌려줘야 해요. 만약 돌려주지 않는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절대로.”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강하게 말했다. “그러니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앞장서지도 마요. 비겁해져도 돼요. 다치면…… 그래서 이 목걸이를 돌려주지 않으면, 절대,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니 꼭 무사히 돌아와요.” 그는 그 말에 미소 지었다. 황태자인 자신에게 앞장서지 말고, 비겁해져도 된다니. 그래도 그 말이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고맙다. 반드시 돌려주마.” *** 엘리제를 클로랜스 가문에 내려준 후, 론, 아니, 황태자는 마차에서 변검 능력을 풀었다. “아슬아슬했군.” 그는 변검의 매개체가 되는 아티팩트를 바라봤다. 작은 초상화가 새겨진, 손가락만 한 아티팩트는 희미한 금이 나 있었다. “앞으로 최소 반년, 아니, 1년은 사용하지 못하겠군.” 너무 변검 능력을 자주 사용한 탓이었다. 원래는 2달에 한 번 정도가 적절한데, 며칠에 한 번꼴로 써버렸으니. ‘그래도 작별 인사는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군.’ 그는 엘리제를 떠올렸다. 항상 못마땅한 그녀. 그러나…… 항상 보고 싶은 그녀. 방금 자신을 향해 눈물을 글썽일 때는 강하게 껴안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정말 간신히. 이제 그 얼굴을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빌어먹을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물론 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 황태자, 린덴의 얼굴로 보러 가면 되니까. 하지만. ‘전하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아니, 틀렸다.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그녀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자신을 싫어했다. 매우. 결혼을 그렇게나 완강히 거부할 정도니. 물론 그녀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의사가 되고 싶기 때문인 것은 안다. 하지만 론일 때의 자신과 황태자일 때의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너무나 달라, 그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황태자인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담긴 감정은 단 하나. 강한 거부감이었다. ‘빌어먹을.’ 그 생각을 떠올릴 때마다 속이 뒤집어졌다.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왜 이 마음에 안 드는 소녀는 자신의 가슴에 이렇게나 깊숙이 들어온 걸까. 왜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고, 그리고 안타깝게 하는 걸까. ‘‘그날’ 이후 내가 이런 감정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무채색 한 세상에 빛이 들어왔다.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자신을 싫어했다. 그 사실이 그를 좌절하게 했다. ‘이렇게 모습을 바꿔 찾아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기만이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알고 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그녀를 찾아가는 것은 기만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자꾸만 떠오르고, 보고 싶은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인제 그만 가야지. 이런 속임은 멈추어야지, 몇 번이고 다짐해도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술이나 먹어야겠군.” 술 상대는 렌 남작이 좋겠다. 렌은 술을 싫어하지만 상관없었다. 잔뜩 먹여 동생에게 당한 울분을 그에게라도 대신 풀어야겠다. “하아.” 그는 소녀가 자신에게 준 징표를 바라봤다. 진주로 꾸민 십자가. 옆면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만들어진 지 너무 오래돼, 장신구라기보단 골동품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십자가를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 조심히 품 안에 집어넣었다. *** 한편 저택에 돌아온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렇게까지 늦은 시간도 아니건만, 이상하게 가라앉은 느낌. 정확히는 슬픔에 잠긴 분위기였다. “어머니?” 그녀는 놀라 새어머니를 불렀다. 항상 밝던 새어머니가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다. “엘리제, 흐윽.” “어,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소식을 들었다. “……뭐라고요?” 엘리제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큰오라버니와…… 크리스, 작은오라버니가…… 전쟁에 나가게 되었다고요?” 와장창. 그녀의 세계가 산산이 부서져 나갔다. *** 그 뒤 얼마나 울었는지,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엘리제는 자신의 방에서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푸른 눈이 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안 돼. 어째서? 왜?” 뭐가 잘못된 걸까? 왜 크리스 작은오라버니가 전쟁에? “귀족 가문당 2명씩 자발적 명예 참전이라고?” 말이 자발이지, 강제 징병이다. 이전 삶에선 이렇지 않았다. 일반적인 전쟁 때처럼 각 한 명씩만 참전하였다. 그럼에도 당시 작은오빠가 참전했던 것은 자신이 가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했던 작은오빠는 그 실수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예로 갚기 위해 전쟁에 자원했고,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전사자 : 크리스 드 클로랜스.] 저택에서 그 전보를 받았을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랑하는 오빠를 죽음으로 밀어 넣다니.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울어도 그 슬픔이 잊히지 않아 지구에서까지 그를 그리워했다. “안 돼. 절대로. 이렇게 또 오라버니를 잃을 수는 없어!” 엘리제는 부르짖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건 자신의 잘못을 갚기 위해 나가는 자발적 참전이 아니었다. 프랑소엔 공화국에 맞서기 위한 국가의 부름이었다. 귀족 자제로서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안 돼, 오라버니. 아아!’ 그녀는 침대에 엎드려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슬픔을 다시 겪어야 한다고? 작은오라버니를 또 이렇게 잃어야 한다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가족을 잃는 그 고통을 다시 겪는다면 자신은 버틸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리제, 리제? 자니? 들어가도 되겠니?” “……!” 작은오빠 크리스였다! 끼익. 그가 문을 열고 들어와 부드럽게 말했다. “많이 놀랐지, 우리 동생?”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둑이 터지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크흑. 흐윽. 어엉! 오라버니! 오빠!” 크리스가 동생을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묻히는 순간, 엘리제는 펑펑, 말 그대로 펑펑 울었다. “가지 마요. 응? 제발. 제발…….” 안 되는 것을 알면서도 엘리제는 빌었다. “우리 동생. 착하지? 울지 말고. 오빠 잘 다녀올게. 너무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안 돼, 흐윽. 제발…….” 물론 이번 삶은 다르니까. 지난번처럼 꼭 오라버니가 전사한다고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중요한 운명적 사건은 어김없이 다가온다는 것을. 그저 시기와 형태가 조금씩 다를 뿐이었다. 만약 전쟁에 나간다면, 작은오라버니는 이번에도 전사할 것이다. 뚜렷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닌 확신이지만 너무나 불안하고 생각만으로 괴로웠다. “리제. 오빠가 하나 부탁이 있어.”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아주며 작은오빠가 말했다. “오빠에게 징표를 줄래? 네 징표를 받으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반드시 돌아와 돌려줄 테니, 부탁해.” 엘리제는 그 말에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싫어요.” “리제.” “절대 싫어! 징표 따위! 절대로 주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마치 못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악을 쓰고는 벌떡 일어나 방을 뛰쳐나갔다. “리제!” 작은오빠가 불렀으나 멈추지 않았다. 복도를, 현관을, 정원을 벗어나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 통곡했다. ‘아아! 안 돼! 절대로!’ 작은오라버니의 죽음을 다시 겪을 수는 없다. 막을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난 삶에선 자신 때문에 죽었으니, 이번 삶에선 반드시 막아내고야 말겠다. 그렇게 그녀는 울며 다짐했다. ‘하지만 어떻게?’ 결연한 다짐과 별개로, 그의 참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일한 방법은 작은오빠가 징병을 회피해 도망하는 것. 하지만 작은오빠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그는 차라리 명예롭게 죽으면 죽었지,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다. ‘제발!’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 잔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그녀는 좌절했다. 그렇게 슬픈 밤이 지나갔다. *** 날이 밝았다. 늘 새벽같이 병원에 출근해 환자를 돌보던 그녀였지만, 손가락 하나 꼼짝하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하지만 그녀는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그레이엄이 이른 아침부터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데임…… 클로랜스?” 그는 퉁퉁 부은 엘리제의 눈을 보고 흠칫 놀랐다. 그냥 부은 게 아니다. 지금도 얼핏 눈물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엘리제는 다급히 눈가를 닦고 물었다. “네, 선생님. 무슨 일이신가요?” “…….”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레이엄은 그 모습에 무어가 답답한지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어제 데임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대한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아…….” 하루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다 취합을 한 듯했다. 그레이엄답게 빠른 일 처리. 그런데 왜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저택에 직접? “직접 오신 것 보니 뭔가 문제가 있나 보군요.” <다음편 바로 올라갑니다.> 00052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2)] *** 엘리제의 마음이 불안해졌다. “……네.” 그레이엄은 조사 내용을 보고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최근 설사병에 동반된 심한 탈수로 사망한 환자는 저희 병원에서 4명. 그리고…… 론도 전체로 보면 79명입니다.” “……!” 79명. 아무리 론도에 250만이란 시민이 모여 살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주로 어떤 병원에서 사망자가 나왔나요?” “대부분 저희와 비슷한 숫자였으나 크로이던 지구에 있는 크로이던 병원에서 30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 “그리고 더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뭐죠?” “점점 환자의 발생 속도가 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제저녁에 우리 병원에만 새로운 환자가 7명이나 왔습니다. 그리고 그중 3명의 상태가 불안정합니다.” “……!”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다른 병원의 상황도 비슷한 듯합니다. 특히 크로이던 병원의 경우 수용 한계를 초과해, 우리 병원에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엘리제의 안색이 하얘졌다. 2차 론도 대역병(大疫病) 사건. 10만이 넘는 사망자를 냈던, 그 끔찍한 사건이 재현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전염병 소식은 곧 론도 전체를 강타했다. 환자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늘어나며,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보도했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전염병 창궐!] [3일 만에 사망자 100명에 육박! 이 시간에도 기하급수적으로 환자가 늘어!] [20년 전, 15만 명의 사망자를 냈던 론도 대역병(大疫病) 사건과 환자들의 증상이 유사해!] 전운의 불안이 가시지 않았던 론도가 한순간에 패닉에 빠졌다. “다 도망가야 하는 것 아니야?” “20년 전 역병이랑 유사하다고? 그때도 엄청 죽었잖아. 안 돼!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 이 시대의 전염병은 그 무엇보다 무서운 재앙이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한 번에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는 흑사병이 주기적으로 창궐했고, 전염병이 한번 돌 때마다 적게는 수만, 많게는 수십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특히 이런 피해는 도시화로 인해 가속화되었는데, 많은 인구가 오밀조밀 모이며 전염이 쉽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세계 최고의 인구 밀도를 자랑하는 브리티아 제국의 수도 론도는 전염병에 가장 취약한 지역이라 할 수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실에서 곧바로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했다.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수많은 대신이 비상 회의에 모여들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나? 갑자기 전염병이라니.” 황제 민체스터가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대신들이 이런저런 의견을 내놓았다. “시민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대피시킨단 말입니까? 론도에 사는 시민들의 숫자는 250만이 넘소. 발생한 지역을 폐쇄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대신들 모두 우왕좌왕할 뿐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행정부 공중보건부의 부장인 갈릭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중보건부 부장 갈릭입니다. 발언하겠습니다.” 그는 일반 시민 출신으로 행정부 부처의 부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과거 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그는 의사시험에는 계속 낙방해 의사가 되진 못했지만, 당시의 지식을 살려 관련 부서에서 두각을 보였다. 의사가 공중보건부의 수장이 아닌 것이 의외로 비칠 수도 있지만, 사실 의사가 관련 부처의 수장인 경우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없다. 그건 현대 지구도 마찬가지다. “이 전염병은 과거 20년 전, 론도 대역병 사건과 같은 질환으로 보입니다.” “허, 그런가. 큰일이군. 거의 15만에 가까운 사망자를 낸 전염병 아닌가.” 사망자가 15만. 너무 어마어마해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은 숫자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 우리 공중보건부에선 당시 질환을 분석해 질병의 전파를 막을 방도를 마련해놓은 상태입니다.” “정말인가?” 갈릭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어서 그 방도를 말해보게.” “20년 전의 전염병은 바로 독기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독기?” “그렇사옵니다, 폐하. 독기(毒氣). 그건 바로 나쁜 공기를 뜻하는 것인데, 론도 시내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발생한 쓰레기와 오물들로 인해 공기가 탁해지고, 악취가 발생하면서 이런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악취를 제거하면 자연스레 전염병이 사그라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가.” 자신만만한 말이었지만, 민체스터의 표정은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독기라고? 정말로?’ 20년 전, 대역병 때도 그는 황제였다. 15만에 달하는 시민들이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목격했다. ‘고작 악취를 없애는 조처로 그 끔찍했던 전염병을 없앨 수 있다고?’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는 의학에 문외한이었다. 일단 전문가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그런데 그 자리에서 황제 말고도 똑같은 의문을 품은 자가 있었다. “정말 그런 조처로 이 전염병을 막을 수 있는가?” 차가운 목소리.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갈릭 부장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악취로 인한 전염병이니 악취만 없애면 이 역병은 없어질 것입니다.” “악취로 그렇다고? 그런데 왜 설사 증상이 발생하는 것이지? 악취 때문에 발생하는 질환이면 설사가 아니라, 폐렴이 발생해야 하는 것 아닌가?” “……?!” 갈릭은 말문이 막혔다. 황태자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얼마 전 론으로 엘리제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던 것이다. ‘이런 상한 음식을 먹으면 설사병에 걸려요.’ ‘설사병이라고?’ ‘네, 입에 들어간 음식은 위장관으로 내려가거든요. 그래서 안 좋은 음식을 먹으면 장에 탈을 일으켜 설사를 발생시켜요.’ ‘그래? 설사는 나쁜 공기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는가?’ 그 물음에 그녀는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쿡쿡 웃었다. 린덴은 그 웃음을 떠올리니, 갑자기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얼마 전 봤었지만, 또 보고 싶었다. ‘아니에요. 공기를 마시면 폐로 가니, 나쁜 공기를 마셔도 폐렴이 생기면 생겼지, 설사는 생기지 않아요. 물론 피를 타고 장까지 와 설사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일이라서.’ 생각해 보면 당연한 발상이다. 공기는 폐로 가는데, 왜 설사병이 생기는가? 폐에서 대변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그, 그게…… 이건 저 혼자만의 의견이 아니라 의학계에서 내린 결론입니다.” 갈릭 부장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변명하듯 말했다. 사실 그가 말도 안 되는 공상을 말한 것은 아니었다. 독기설. 당시 론도 의학계가 20년 전 전염병에 대해 내놓은 결론이었으니까. 아예 근거 없는 결론인 것은 아닌 게, 당시 사망자가 주로 악취가 많은 지역에 사는 주민이긴 했었다. 그때 황제가 말했다. “일단 알겠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니 자네가 말한 조처를 우선적으로 시행하게. 그리고 혹 다른 원인은 없을지 의학연구원 쪽에도 자문하고.” “네, 폐하!” “그리고 린덴.” 그는 아들을 바라봤다. “이 일은 네가 총괄하여 맡는 것이 좋겠구나. 수많은 희생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으니 꼭 잘 부탁한다.” 최소 수만. 어쩌면 수십만의 생명이 걸린 중요한 일이다 보니, 이 나라를 책임질 황태자에게 직접 맡기는 것이다. “네, 알겠습니다.” 린덴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면서 그는 생각했다. ‘엘리제, 그녀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몇 번이고 기적적인 천재성을 보여준 그녀다. 어쩌면 그녀는 정확한 답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렇게 비상소집회의가 끝났다. 공중보건부의 부장 갈릭은 곧바로 자신이 이야기한 조처를 했다. 주요 발생 지역의 악취를 최대한 없앤 것이다. 원래 까마득히 오래 걸릴 일이었지만, 근위병의 대규모 지원을 받아 순식간에 처리했다. 하지만 호언장담과 다르게 전염병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사망자는 300명으로 늘어났다. 추가적인 환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며칠 안에 사망자가 1,000명을 넘을 것이고, 20년 전의 그때처럼 수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안 돼! 죽고 싶지 않아!” “이 론도를 떠나야 해!” 그런데 그렇게 론도가 공황에 빠지고 있는 그 순간이었다. 이 전염병의 정체를 정확히 진단해 낸 의사가 있었다. 테레사 병원의 작은 소녀 의사.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 늦은 밤. “독기가 아니에요.” 테레사 병원에서 엘리제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아니라고요?” “네, 절대 공기로 인한 전염병은 아니에요.” 그레이엄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전염병은 20년 전, 론도 대역병과 동일한 것이었다. 그래서 의학계에선 이번 전염 사건의 명칭을 2차 론도 대역병으로 명명했다. “데임, 20년 전의 전염병의 원인은 나쁜 공기 때문이었습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때도 독기 때문이 아니었어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공기 때문에 생긴 질환이면 폐렴 같은 호흡기 증상이 나타나야 해요. 이렇게 위장관, 설사 증상이 아니라.” 그래, 인플루엔자나, 조류독감, 사스, 스페인 독감 같은 폐렴성 질환이면 나쁜 공기가 원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설사병은 아니었다. “이 병의 원인은 먹을 것, 정확히 말하면 오염된 물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그녀는 진단을 생각했다. ‘이건 그 병이 분명해.’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한국을 포함한 웬만한 선진국에서는 자취를 찾기 어려운 질환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이 질환을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책에서만 봤을 뿐. 하지만 지구에서도 후진국에선 여전히 창궐하는 주요 전염병이었다. ‘도시의 발전 수준을 봤을 때도, 시기적으로 맞아.’ 지구에서도 1800년대, 19세기에 수없이 많은 희생자를 만들었던 전염병. 한국의 과거, 조선에서도 최소 50만 명 이상을 사망시킨 질환.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다행이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이 전염병이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어.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내버려 두면 끝도 없는 희생자가 나오겠지만, 발병의 원인, 진원지를 찾는다면 전염의 고리를 끊을 수 있었다. ‘다행이야.’ 그런데 수만이 넘는 사람을 살릴 방도를 찾아낸 그녀의 얼굴이 씁쓸했다. 평소라면 활기에 반짝였을 텐데. 그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뭐가 좋겠어. 이걸 해결한다고 작은오라버니가 전장에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너무 다행이고 기뻤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슬펐다. ‘그래도 황태자 전하와의 약혼은 확실히 파할 수 있겠구나. 내기는 지킨다고 했으니.’ 수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그 누구라도, 설사 황제라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하아.” 평소라면 무척 기뻤을 것이다. 사람들의 생명도 구할 수 있고, 황태자와의 약혼도 파할 수 있고. 그래서 앞으로 펼쳐질 비극도 피하고, 원하는 삶도 살고. 하지만 지금 드는 생각은 단 하나.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를 어떻게 하면 전화(戰火)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였다. ‘방법이 없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굳혔다. ‘있어! 한 가지 방법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면서도, 작은오라버니가 참전하지 않을 방법이!’ 그렇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방법이 있었다! 전염병을 해결 후, ‘한 가지의 거래’를 황제에게 요구하면 된다. 오라버니의 군역을 면제해 달라는 거래는 아니었다. 그건 오라버니가 가문의 명예 때문에 거부할 테니까. 하지만 가문의 명예를 오히려 드높이면서도, 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피하게 할 방법이 있었다. ‘지금 요구하면 폐하께서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 하지만 이 전염병을 내가 해결해 낸다면? 그러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들어주실 거야. 그때 했던 내기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히 굳어졌다. 방금 떠올린 ‘방법’. ‘그 방법’을 시행할 때 자신이 어떤 일을 겪어야 하는지 떠올렸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합니다! 00053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2)] ‘하지만 그러면 내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해.’ 가슴이 차가워졌다. 간단하지만, 어쩌면 그녀의 남은 인생을 포기해야 하는 방법이었다. 그녀는 새장 속의 새가 되리라. 영혼을 잃은. ‘작은오라버니.’ 엘리제는 그의 부드러운 얼굴을, 따뜻한 목소리를, 자신을 향한 사랑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전 삶, 그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도 떠올렸다. 영혼을 잃은 새장 속의 새가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작은오라버니가 다시 죽으면? 난 견딜 수 있을까? 엘리제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 그날, 엘리제는 밤늦게 저택으로 돌아왔다. 마차 안에서 그녀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고민을 하십니까?” 가문의 호위기사인 벤톨 경이 물었다. “한 사람 생각을 했어요.” “누구 말입니까?” “오와다 마사코(小和田 雅子).” 낯선 이름에 벤톨 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구에서 읽었던 기사가 잠시 떠올랐을 뿐, 그녀도 잘 아는 인물은 아니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겠지?’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오로지 이 방법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저택에 들어가는 순간, 두 명의 인영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 왜 이렇게 늦었느냐?!” “리제!” 아버지 엘 후작과 작은오빠 크리스였다. “지금 론도에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이렇게 늦게 들어오고! 내일부터 병원에는 출입금지다, 엘리제!” “그래, 리제. 내 생각에도 병원엔 가면 안 될 것 같아. 전염병이라도 옮으면 어떻게 하려고. 네가 환자를 생각하는 것은 알지만, 이번엔 절대 양보 못해.” 자신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둘은 보니 엘리제는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 걸까? “아버지, 그리고 작은오라버니.” “응?” “사랑해요.” “……?!” 뜻밖의 말에 아버지와 오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리제는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래, 새장에 갇힌 새는 영혼을 잃을 뿐 살아갈 수는 있다. 하지만 만약 내가 다시 이들을 잃는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가족들을 사랑했다. “아버지, 오라버니.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꼭 들어주세요.” “오냐, 말만 하렴. 무엇이든 내가 다 들어주마. 대신 병원에 나가는 것은 안 된다. 당분간 출입금지야!” “그래, 리제. 말만 해봐.” 그들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의 그녀는 너무나 착하고 사랑스러워 무슨 무리한 부탁이라도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서 나온 부탁은 다소 의외의 것이었다. “제가 앞으로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용서해 주세요.” “……?!”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잘못이라니? 무슨? “엘리제,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냐?” 착해진 딸이 이전처럼 못된 일을 저지르진 않겠지만 의아했다. “더 묻지는 말아주세요. 그냥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만약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 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저는 그냥 할 테니까요.” “……!” 그러고 그녀는 크리스를 바라봤다. “작은오라버니.” “으, 응?” “고마웠어요.” “……?!” 그리고 미안했어요. 지난 삶, 나 때문에 그렇게 되어서. 너무나. 고개를 갸웃하는 작은오라버니를 보며 그녀는 미소 지었다. ‘그래, 이번엔 내 차례야.’ 지난 삶, 작은오라버니는 자신 때문에 죽었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이 희생할 차례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엘 후작은 딸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잔잔히 웃고 있지만, 그의 사랑하는 딸은 어딘지 위태로워 보였다. “내일 아침 일찍, 황궁에 가겠어요. 그래서 황제 폐하를 뵈어야겠어요.” “……무슨 용무가 있길래? 폐하는 원한다고 알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시간을 다투는 일이에요. 아마 폐하께서도 기뻐하실 거예요.” “……?” 엘리제는 짧게 선언하듯 말했다. “이 론도에 돌고 있는 전염병을 없애겠어요.” *** 다음 날 이른 아침. 그녀는 정복을 입고, 곱게 단장을 하였다. 평소 거의 치장을 하지 않는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 “와아, 아가씨, 너무 예뻐요.” 어린 시종 마리가 감탄을 터뜨렸다.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마리의 감탄처럼 오늘 그녀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런데 클로랜스 가문의 정복을 입은 탓일까? 일반적인 귀족 영애들의 화려한 아름다움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절제되면서 차분한 아름다움. 검은 정복에서 감히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기품이 흘러나왔다.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이 그녀에게 말했다. “준비됐습니다, 아가씨.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고마워요.” 밖으로 나가던 중 그녀는 저택의 홀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향해 기도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목 아래로 백금발이 차분히 떨어져 내렸다. ‘부디 저와 함께 해주소서.’ 엘리제는 아버지, 엘 후작과 함께 클로랜스 가문의 마차를 타고 황궁에 입궁했다. “아침에 미리 연락을 드렸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거다.” “네, 감사해요.” “그런데 엘리제. 정말로 이 전염병을 없앨 수 있는 것이냐?” 이렇게 빠르게 황제를 독대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재상의 딸이면서 황제에게 총애받는 황태자비 후보여서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림 없는 대답. 하지만 엘 후작은 걱정이 들었다. “네가 위험한 것은 아니지? 혹시라도 그렇다면 난 절대 네가 나서는 것을 찬성할 수 없다.” 딸이 해결 못할까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걱정은 단 하나. 딸이 병원에서처럼 환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나서다 몹쓸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할까였다. 만약 딸이 전염병에 걸릴 위험이 있다면 그는 절대 그녀가 나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이 전염병은 사람 간에 전파되는 것이 아니에요.”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어전에 도착한 엘리제는 잠시 대기 후 황제와 독대할 수 있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잘 지냈느냐?” 황제가 반갑게 그녀를 맞았다. 최근의 악재들 때문인지, 민체스터는 얼굴이 좋지 않았다. “그래, 데임 클로랜스. 이번 전염병에 대한 방책이 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한 치의 주저도 없는 대답. 그 확신에 찬 목소리에 황제는 그녀가 진실로 해결책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행정부의 공중보건부도, 의학연구원도 실마리를 못 잡는 중인데?’ 다른 이가 저렇게 말했으면 믿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소녀는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제’였다. 고작 몇 달 사이에 제국 의학계를 뒤흔들고 있는 희대의 천재. 근거 없이 저런 확언을 하는 것이 아닐 테다. “이 전염병은 독기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걸 아는가?” “문헌에서 이 질환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이 질환은 동방의 힌디, 그중에서도 뱅갈에서 유래한 전염병입니다.” “……!” 황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힌디는 먼 동방에 자리한 청과 더불어 제국의 최대 교역국이었다. “그 말이 정말인가, 데임 클로랜스?” “네, 그렇습니다. 힌디에 장기간 거주한 윌리엄 경의 천축견문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의 전염병과 똑같은 증상의 역병이 여러 차례 발병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건 엘리제가 따로 공부한 사실이었다. 지구에서도 동방에서 이 전염병이 유래했으니, 이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확인했던 것이다. “허허, 힌디라. 정말 대단하군. 그런 사실을 알아내다니.” 황제는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그 어떤 의사도 짐작 못하던 병의 정체를 단번에 간파해 내다니. 아무리 엘리제가 의사가 되길 바라지 않는 황제이지만, 그녀의 재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 독기가 아니면 도대체 이 질환의 정체가 무엇인가?” 엘리제는 진단명을 말했다. “콜레라(Cholerae)입니다.” *** “……콜레라?” 낯선 이름의 병이었다. “네, 폐하. 설사와 구토를 심하게 일으키는 역병으로, 동방의 영을 다녀온 로우랜드(Low-Land) 상인들의 기록을 보면 이 콜레라란 병이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허허, 콜레라. 콜레라라.” 황제는 엘리제에게 물었다. “그런데 질병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해서 전염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해결책은 있는 건가?” 정확한 지적이었다. 정체를 안다고 해서, 모든 전염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만약 그렇다면 현대 지구에서는 전염병이 모두 사라져야겠지만, 실상은 감기의 유행도 예방하기 어렵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 콜레라의 경우는 차단이 가능했다. 방법만 알고 있다면. “역학조사를 통해 가능합니다.” “역학조사?” “네, 폐하.” 역학조사(Epidemiologic survey). 전염병 차단의 기본이 되는 기술. “만약 저에게 권한을 주신다면, 3일 안에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3일? 말도 안 되는 기간이었다. 20년 전, 1차 론도 대역병이 유행했던 기간이 수개월이었는데, 고작 3일이라니. 아무리 엘리제, 그녀라도 이 장담은 허풍처럼 들렸다. “겨우 3일 안에 해결할 수 있다고?” “어렵더라도 그 안에 해결해 내야 합니다.” 엘리제는 그렇게 답했다. 그래, 무조건 3일 안에 해결해 내야 했다. 그녀에게는 사실 그 시간도 길었다. 오만이 아니었다. 앞으로 하루하루가 더 지나갈 때마다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테니까. 3일이 지나면 사망자는 500명을 넘어, 1,000명에 육박할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늦어도 3일 안에는 해결해야 했다. “허허, 그래. 내 영애에게 권한을 위임해 주지.” 그녀의 강한 눈빛을 본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금 상황에서 엘리제 말고는 다른 대안도 없었다. 모두 악취네, 나쁜 공기네 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을 뿐이니까. “그런데 폐하.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진정한 용건을 이야기했다. “제가 정말로…… 3일 안에 이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지난번 폐하가 말씀하신 조건을 충족한다고 봐도 되겠습니까?” “……!”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제와 황제의 내기. 그것은 황태자비, 황후가 되는 것보다 의사로서 가치 있는 일을 해내면 약혼을 파해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건…….” 황제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만약 클로랜스 영애가 이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내기는 짐의 패배구나.’ 최소 수만 명, 어쩌면 수십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정말 전염병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이 내기의 승리자는 엘리제였다. ‘허허.’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었다.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 오히려 그녀가 해결해 내길 간절히 기원해야 했다. ‘과연 이 아이가 해결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불가능한 일. 하지만 민체스터는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림 없는 확신에 차 있었다. 민체스터는 왠지 그녀라면, 이 소녀라면 이 전염병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허허. 그래, 영애가 만약 전염병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내기는 당연히 영애의 승리지.” 황제는 씁쓸히 웃었다. “그런데 영애.” “네, 폐하.” “황태자비가 되는 것이, 아니, 린덴과의 결혼이 그렇게나 싫은 건가?”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그 답에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영애와 한 가족이 되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가 없군. 이 민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이니 지키겠네. 영애가 전염병만 해결한다면 황태자와의 약혼은 없는 것으로 처리하겠네. 이 민체스터의 이름을 걸고 집행할 것이니, 안심해도 좋아. 영애에게는 어떤 불이익도 가지 않을 것이야.”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54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3)] *** 엘리제에겐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황태자와의 파혼. 이 몸으로 돌아온 후, 가장 강렬히 염원하던 바를 이루는 순간이었으니까. 황제도 쓸쓸히 축하의 말을 건넸다. “이번 일만 잘 해결하면 원하던 바를 이루겠군. 축하하네.” “…….” 그런데 엘리제의 반응이 이상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리고 감사의 말도, 황송하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어딘지 슬픈 표정을 짓더니. “아닙니다. 전염병을 해결하더라도…… 예정대로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겠습니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 그 말에 황제의 눈이 커졌다. 지금 뭐라고? “그 말…… 정말인가?” “네, 폐하.”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약간은 아파 보이는 미소였다. “대신, 폐하와의 내기에 이긴 보상으로 두 가지 조건과 한 가지 부탁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이것만 들어주신다면 황태자비가 되겠습니다.” “……!”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심상치 않은 부탁일 것이라 예감한 탓이다. “무엇인가?” “첫 번째 조건은 정식 약혼식은 크림전쟁이 끝난 뒤로 미뤄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그건 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오히려 기특한 생각이었다. 역병과 확전된 전쟁으로 민심이 안 좋을 때 국가적 축제인 황태자의 약혼식을 거행하는 것은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조건은?” “만약…… 황태자 전하가 저와의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전하의 의견을 존중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 지난 삶, 엘리제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자신도 그와 결혼해 불행했지만 그도 자신 때문에 불행했을 것이라고. 원하지 않은 이와 살아야 했으니까. 그러니 그에게도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 만약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다른 이와 함께할 기회를. “그건…… 역시 문제 될 것이 없겠군. 그러면 한 가지 부탁은 무엇인가?” 황제는 이 부탁이 소녀가 진정 원하는 내용일 거라 짐작했다. 실제로 이 부탁이야말로 엘리제의 진정한 바람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황태자와의 파혼도, 의사로서의 삶도 사실상 포기하고 바라는 부탁. 그건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며, 아니, 오히려 드높이며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일단 이렇게 말했다. “그건 이 전염병을 해결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흠?” “죄송합니다. 어차피 며칠 걸리지 않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황실에도, 이 제국에도 나쁜 부탁은 아니란 것입니다.” 민체스터는 인상을 찌푸렸으나,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지 않았다. “허허, 짐을 너무 궁금하게 하는군.” “송구스럽습니다.” “아니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3일. 그 안에 전염병을 해결해 짐에게 뭘 원하는지 말해주게.”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폐하, 그 전에 한 가지만 먼저 청해도 되겠습니까?” “뭔가?” “제가 전염병을 해결한 후 한 가지를 부탁하면 그 부탁이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고, 제국의 뜻에 반하지 않는다면 들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 생각지도 않은 청에 황제는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그러는가?”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 민체스터의 입장에서 무리한 부탁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폐하의 입장에선 굉장히 사소한 부탁입니다. 폐하께, 그리고 이 제국에 동전 1센트의 피해도 끼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제 부탁을 들어주면 제국과 이 영광된 황실에 큰 이득이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면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 클로랜스 가문의 명예에도, 크림에 원정 갈 제국군에도, 황실의 영광에도. 그리고 작은오라버니에게도. “그러니 제발 부탁합니다. 나쁜 부탁이 절대 아니오니, 들어주시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십시오. 만약 들어보고서, 폐하께 무리한 부탁이거나 제국의 뜻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그때는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황제가 손해 볼 것은 없는 조건이었다. 미리 들어준다 약속을 해도, 만약 무리하거나 나쁜 부탁이면 거절하면 되니까. 민체스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 로마노프 황실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하지만 영애가 이야기한 대로 제국의 뜻에 반하는 부탁일 경우엔 들어줄 수 없어.”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이마를 대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하기는. 만약 전염병을 해결해 낸다면 오히려 우리 황실과 브리티아 제국이 영애에게 큰 도움을 받는 것인데. 고개를 들게.” 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들어준다 하긴 했지만, 괜히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유리한 줄 알고 계약서에 사인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당했을 때의 느낌이랄까? 엘리제가 전염병을 해결하고, 황태자비로 들어오면 그토록 원하던 바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괜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쨌든 잠시 쉬고 황태자에게 가보게. 이번 전염병 관리는 황태자의 책임하에 이뤄지고 있으니까. 내가 영애에게 최대한 협조하라고 말해놓지.”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황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무슨 부탁인 것이지? ‘무리하거나, 나쁜 부탁은 아니라고 했으니.’ 하지만 이 순간, 황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엘리제가 내건 사항. 제국과 황실, 그리고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란 말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 *** 엘리제는 장미 정원에 앉아 황태자의 연락을 기다렸다. 붉은 장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이 우울하게 가라앉았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이렇게 원점으로 돌아왔구나.’ 비극적인 삶을 겪은 그녀가 이번 삶에서 가장 크게 세운 목표는 황태자와의 결혼을 피하는 것이었다. 그와의 결혼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으니까. 그래서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결국 이렇게 이전 삶처럼 되어버렸다. ‘아니,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이 나빠. 그때는 의사란 소망이 없었으니까.’ 그래, 그때보다 지금이 더 최악이었다. 자신은, 외과의사의 영혼을 가진 자신은 이제 의사의 길에 벗어나서는 살 수가 없었다. 그 생과 죽음이 교차하는 숨 막히는 긴장. 그리고 사람을 살리는 보람. 그것들을 떠나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인가? 그건 화가에게서 붓을 뺏는 거고, 작곡가에서 음악을 뺏는 거고, 삶을 뺏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아직 1년 정도의, 크림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유예 기간이 있었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의사가 아닌 황태자비로서 살아야 하리라. “오와다 마사코.” 그녀는 작게 중얼거렸다. 지구에서 오래전 읽었던 기사가 떠올랐다. 오와다 마사코(小和田 雅子). 현 일본의 황태자비. 그리고……감옥에 갇힌 나비. 황금 새장에 갇힌 공주. 하버드 대학교 학부, 옥스퍼드 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인 그녀는 일본 외무성의 가장 촉망받는 외교관으로서 빛나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날개가 꺾인 것은 일본의 황태자인 친왕(親王)과 결혼한 이후부터였다. 누구보다 빛나던 그녀는 왕실에 갇힌 나비가 되었다. 그리고 빛을 잃고 날개가 꺾였다. 별것 아닌 이웃 나라 일본 왕실의 이야기. 그냥 오늘따라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어쩔 수 없어.’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 화급히 닦았다.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이걸로 작은오라버니는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거야. 그러니 됐어.’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닦았으나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따지고 보면 다 네 업보잖아, 엘리제. 그렇게 못되게 굴었으니 이번에 갚는 것일 뿐이야.’ 그녀는 눈물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와의 결혼도. 그래,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야. 난 이전 삶의 엘리제가 아니니까. 내가 못되게 굴지 않으면 그때의 비극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 그래, 난 달라졌으니까. ‘비록 사랑받지는 못하겠지만, 나도 그를 사랑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되는 거야.’ 지난 삶. 보답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그녀는 삐뚤어져 갔다. 원래도 못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약 사랑받았다면 그렇게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번 삶에는 그와 결혼해도 아프지 않을 거야. 그렇게 혼자만 바라보다 말라비틀어지지 않을 거야.’ 이번엔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 혼자만 바라보던 사랑은 지난번만으로도 너무 아팠으니까. ‘그러니 됐어. 그렇게만 하면 돼. 모두 잘됐어. 잘했어, 엘리제.’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던 그 순간이었다.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흑, 흐윽.” 봇물이 터진 듯. 서럽게. 이유도 없이. 모두 다 잘됐으니, 울 이유도 없는데. 하지만 그녀는 도저히 눈물을 멈출 수 없어,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엉엉 울었다. ‘론 님.’ 갑자기 그가 떠올랐다. 이제 볼 수 없는 그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차가운 얼굴이, 무뚝뚝한 말투가, 재미없는 농담이, 여자에 서툴러 투박하지만 자신을 생각하던 그 태도가. 보고 싶었다. 그를 만나 하소연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다. ‘아아, 제발…….’ 그런데 하늘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준 걸까? 이 자리에서 도저히 들릴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엘…… 리제?” 서늘한 음성.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그러나 이 순간 너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어째서 그가 여기에?’ 아니, 있을 수도 있었다. 그도 황실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녀는 급히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론…… 님?”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가 아니었다. 흑발의 금안, 차가운 인상에 조각 같은 외모. 론과 비슷한 느낌이었지만 전혀다른 사람.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내가 착각했구나.’ 서러운 마음 때문이었을까? 어지간히 론이 보고 싶었나 보다. 이런 착각을 하다니. “…….”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이 이상했다. 엘리제가 예를 올렸음에도, 답도 없이 뚫어져라 그녀를 노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전…… 하?” “무슨 일이 있었지?” “네?”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울고 있느냐는 말이다!” 엘리제는 당황해 눈물을 닦았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시옵소서.” “아무 일도 아니야? 그런데 천하의 그대가 그렇게 울어?” “저, 정말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마 황태자는 자신과 황제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아직 못 들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지? 어쨌든 그녀는 황태자가 더 뭐라고 하기 전 허겁지겁 몸을 가다듬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흐트러진 옷차림도 정리했다. 그리고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눈이 퉁퉁 부었을 것 같지만 그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개인적인 일 때문에 그랬습니다. 국가적 재난을 논하기에 앞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 흐트러진 모습을 추스른 그녀를 보며,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굉장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노려보았다. “따라와라. 부황께 이야기 들었다. 전염병에 관해 이야기하지.” 황태자는 그녀의 답을 듣지도 않고, 등을 돌려 휘적휘적 걸어가 버렸다. 보폭을 따라가기 어려운 빠른 걸음. 그런데 그 배려 없는 모습이 누군가를 다시 떠오르게 했다. 무뚝뚝한 또 다른 남자, 론이었다. 그도 항상 이렇게 그녀를 뒤에 두고 휘적휘적 앞으로 걸어갔었다. 그때는 참 여자를 대할 줄 모른다고 속으로 쿡쿡 웃었는데, 앞으로 못 본다 생각하니 그리웠다. ‘언젠가는 다시 볼 수 있겠죠? 꼭 조심하세요.’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딘가에 있을 그를 향해 기도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55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4)] ***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황궁에서 공무를 보는 용도의 건물인 리엔 궁이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의학연구원의 교수, 황실십자병원의 명의(名醫), 공중보건부의 관료 등. 궁에는 전염병과 관련된 전문가가 우글거리고 있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여 건성으로 예를 받았다. 엘리제가 우는 모습을 봐서일까? 기분이 최악이었다. “전하…… 근데, 저 소녀는?” 공중보건부의 부장 갈릭을 비롯한 여러 이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적 재난 사태에 대응하는 이 비상대책본부에 웬 소녀? 그런데 그녀를 알아본 이가 있었다. “오, 데임 클로랜스! 어서 오시오!”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이었다. 그는 희대의 천재로 이름난 엘리제를 반겼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자작님.” “허허, 영애도 이 대책본부에 합류한 거요? 영애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터! 반갑소.” 그들의 대화에 사람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모두 의학계에 발을 걸친 자들. 데임 클로랜스의 소문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저 소녀가 데임 클로랜스라고? 정말? 피 한 방울 못 보게 곱게 생겼는데?’ ‘생각보다 더 어리잖아?’ 그들은 불신에 찬 표정으로 엘리제를 살폈다. 희대의 천재라고 이름 높았는데,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왠지 소문이 과장된 것 같았다. “전하, 그런데 데임 클로랜스는 어째서 이곳에 온 것입니까?” 공중보건부의 갈릭이 물었다. 황태자가 책임자로 있지만, 실무적으로 대책본부를 운영하고 있는 것은 그였다. 평민이지만 남몰래 귀족파의 후원을 받고 있던 갈릭은 어린 소녀가, 특히 황제파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 이곳에 온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황태자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툭 던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데임 클로랜스가 전염병을 해결할 것이다. 그러니 공중보건부의 역량을 총동원해 그녀를 지원하도록.” “네?” “자세한 설명은 그녀에게 직접 들어라.” “……?!” 장내가 경악에 빠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 저 소녀가 전염병을 해결할 거라고? 모두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의심했지만,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한 그대로다.” 그러고 그는 회의실 가장 상석에 깊숙이 앉아 그들을 바라봤다. 할 말 다했으니, 이제는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태도. 결국, 그들은 어려운 황태자 대신 만만한 엘리제를 바라봤다. “데임 클로랜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데임께서 전염병을 해결하신다고요?” 갈릭의 말에는 황당함이 담겨 있었다. 엘리제는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갑자기 어린 소녀가 나타나 이 끔찍한 전염병을 해결한다는데,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겸손을 떨며 물러나지는 않았다. 겸손을 떨며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염병이 퍼지며 희생자는 늘고 있다. 최대한 빨리 일을 진행해야 했다. “네, 제게 이 전염병을 해결할 방도가 있습니다.” “……!” 갈릭은 불신의 말투로 말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이 전염병은 독기(毒氣) 즉, 나쁜 공기로 퍼지는 것입니다. 나쁜 공기, 악취를 완전히 제거하지 않는 한 전염병은 차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도 나쁜 공기, 악취를 제거하는 데 열중이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완전히 잘못된 접근법이었다. “이 전염병은 나쁜 공기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공기로 인한 전염병이라면 설사가 아닌 폐렴이 왔을 것입니다. 이 전염병은 먹을 것, 특히 물로 인한 것입니다.” “그 말 증명할 수 있소?” 그녀는 황제에게 했던 설명을 하였다. 동방 힌디에서 기원한 콜레라. 그 설명을 들은 몇 명의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 그러고 보니,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소. 로우랜드 상인들이 쓴 서적에 청과 영에서 비슷한 질환이 있었다고.” “그러게 말이오. 힌디의 뱅갈이라.” 밴을 비롯한 황실십자병원의 명의들이었다. 원체 의학의 조예가 깊은 이들이다 보니, 머나먼 동방의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적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녀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난…… 데임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려. 근거 없는 이야기 같은데…….” 그들의 반응에 그녀는 낙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도 그들이 설명 한 번에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유의 문제는 압도적인 학술적 권위로 누르거나,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납득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러면 방법은 간단했다. 직접 눈으로 보여주면 된다.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그러면 제 말을 증명해 보일게요.” “어떻게 말이오?” “저에게 론도 시내가 자세히 표시된 대축척의 지도와 50명의 인원만 지원해 주세요. 그러면 이틀 뒤부터 전염병이 없어지는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갈릭을 비롯한 공중보건부의 관료들은 그녀가 진심인가 바라봤다. “영애, 악취를 제거하기 위해 하나의 손이 아쉬울 때요. 그런 근거 없는…….” 그런데 그때, 차가운 음성이 끼어들었다. “잔말 말고 지원해.” “……!”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하, 하지만…… 전하……?” “명령이다. 그리고.”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공중보건부, 너희가 지금까지 한 게 뭐가 있지? 악취? 황실 근위대를 모조리 부어넣어 지금 론도의 공기는 매우 쾌적해졌다. 하지만 전염병은 여전해. 너희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조금이라도 전염병이 꺾여야 하는 것 아닌가?” “……죄,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는 지적이었다. “지금도 한시가 다르게 환자가 늘어가고 있다! 탁상공론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가능성이 있다면 뭐라도 해야 할 때야. 그러니 쓸데없는 이야기 그만하고, 빨리 움직여!” “네, 전하!” 관료들이 혼비백산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엘리제는 황태자를 의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날 도와주었어?’ 물론 황제의 언질을 들은 탓이겠지만, 지난 삶 땐 이런 적이 없었는데. “감사합니다, 전하.” “됐다. 그런 말은 전염병을 해결하고 나서나 하도록.”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관료들에게 부탁했다. “지금 바로 지도를 가져와 주세요.” “지도를 말입니까?” “네, 론도 시내가 자세히 묘사된, 가장 큰 축척으로 된 지도를요. 그리고 도와주시는 분들의 역할이 중요한데요. 잘 들어주세요.” “말씀하십시오.” “어려운 것은 아니에요.” 그녀는 말했다. “각 병원에 나가, 이 전염병을 앓는 환자들의 거주지를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론도 시내를 나타낸 지도에 거주지를 정확히 표시해 주세요.” “……?!” 그녀가 시키는 것은 바로 역학조사(Epidemiologic survey). 현대의 지구에서도 전염병 차단에 첫 단계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 환자들의 거주지. 간단한 내용이었지만, 조사하는 데 의외로 꽤 시간이 걸렸다. 론도의 모든 병원을 조사해야 하는 일이고, 현대 지구처럼 통신이 되는 시대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직접 찾아가 확인해야 했다. 그래도 공중보건부의 전폭적 지원 덕에 반나절 안에는 모든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현재까지 총 환자 1,237명. 그중 사망자는 345명이었다. “모두 조사했습니다, 데임.” “고마워요.” 엘리제는 환자들의 거주지를 론도 지도에 일일이 표시했다.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모두. 환자는 갈색, 사망자는 적색으로. ‘뭐하는 거지? 저게 무슨 의미가 있지?’ 그리고 그녀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순간, 하나의 규칙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모르는 사람이 봐도 확연한 규칙성이 드러났다. 그건 브로드가(街), 크로이던 지구, 크롬웰 지구에 대부분 환자가 밀집해 있었던 것이다! 몇 명의 관료가 흥분해 외쳤다. “이 세 개의 지구를 폐쇄해야 합니다! 이 3지구의 사람들의 입, 출입을 막으면 전염병의 전파를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시 전염병을 대하던 흔한 방책이었다. 흑사병이나 천연두의 경우, 영지 전체를 폐쇄하고 불태우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인구 밀도가 낮던 봉건 시대에나 가능한 방법이지, 론도 같은 대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의미가 없어요.” “네?” “환자는 이 세 개의 지구에서만 발생한 것이 아니에요. 지도를 봐요.” 과연 그녀의 말처럼, 드문드문 다른 지구에도 환자가 퍼져 있었다. 이래서는 폐쇄의 의미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이 세 곳에 문제가 있긴 있어. 전염병의 원인도 이곳에 있을 거야. 뭘까?’ “갈릭 부장님.” “네, 데임.” 갈릭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이런 재난 사태에 어린 소녀의 지시나 들어야 한다니! ‘저런 소녀가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안다고.’ 물론 소녀가 의학계를 뒤흔드는 천재란 것은 들었다. 하지만 영 기분이 나빴다. “다른 지구에 발생한 환자들이 최근 이 세 곳, 브로드가(街), 크로이던, 크롬웰 지구에 방문했는지 지금 바로 확인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건 금방 확인되었다. 모두 이 세 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역시 이 세 곳에 원인이 있어. 이 안에 답이 있을 거야.’ 그녀는 확신하고 지도를 바라봤다. ‘이 세 지구의 공통된 요소를 찾아야 해.’ 그리고 그 안에서도 환자의 분포 차이가 생기는 요인을 파악해야 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에서 하는 조사는 이걸로 끝. 이제는 내가 직접 발로 뛸 차례야. 눈으로 보고 원인을 찾아내야 해.’ 황태자가 그녀에게 물어봤다. “어딜 가려는 거지?” “브로드가로 가려고요.” “거긴 왜?” 황태자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왠지 못마땅해하는 모습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가서 살피려 합니다.” 그런데 황태자의 반응이 의외였다. “안 돼. 허락하지 않겠다.” “네?”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꼭 직접 가야 하는 것인가? 다른 사람 보내. 그대가 가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그녀는 당황하며 말했다. 왜 저러시는 거지? “보고로 알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염병의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어, 현장 조사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혹시 제가 그곳에 가면 안 되는 이유라도……?” “…….”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이유? 없다. 아니, 정말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긴 하다. ‘브로드가(街)는 환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곳이잖아, 젠장.’ 가서 옮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이 전염병의 사망률은 현재 30%. 아니, 점점 사망자의 비중이 늘어 50%에 육박하고 있다. ‘이 여자는 왜 자기 몸은 안 챙기는 거야? 도대체 몸도 약하면서!’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환자가 우글거려 폐쇄까지 고려하는 브로드가(街)에 갔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그래서 혹시 잘못되기라도 하면? 린덴은 그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상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엘리제는 이 전염병이 사람 간에 옮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지만, 정확한 것은 모르는 것 아닌가? 절대 그녀가 위험지역에 가게 하고 싶지 않았다. “전하, 혹시 제가 제대로 원인을 파악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그러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다. 그녀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론도에 없겠지. 그건 확실하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된다.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로 부탁했다. “전하, 어떤 이유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혹 제가 모르는 사이 전하의 마음에 불편을 끼친 게 있다면 사죄드립니다. 다만…… 폐하께 저는 이 전염병을 해결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 지엄한 명을 따르기 위해선 현장 조사가 불가피합니다. 보고만으로는 원인을 파악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발 통촉해 주시옵소서.”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안다. 황태자도. 그녀의 말이 옳음을. 하지만 그녀가 그런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 싫었다. ‘하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결국, 황태자는 백기를 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는 늘어가고 있는데, 개인적 이유로 계속 고집을 부릴 순 없으니. 대신. “좋다. 하지만 조건이 있다.” “어떤 것입니까?” “위험지역의 현장 조사는 나도 같이 가겠다.” “……?!”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자신이 같이 간다고 전염병을 막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혹시 위험에 노출되지는 않는지. 두 눈으로 지켜봐야겠다.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56 론도 대역병 ========================================================================= [2막 : 小和田 雅子???] [2-6장 : 론도 대역병 (5)] *** 1854년, 지구의 런던에는 존 스노 박사란 인물이 살고 있었다. 그는 당시 런던 소호 거리에 유행하던 전염병을 지도와 데이터 조사를 통해 차단했다. 세계 최초의 역학조사였고, 그의 방법은 현대까지 내려와 널리 사용되고 있다. 엘리제가 지금 사용하는 역학조사도 그의 방법을 따라 하고 있는 거였다. ‘마침 당시 소호 거리에 돌던 전염병도 콜레라였지. 그때도 일주일 만에 1,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었어.’ 그녀는 현대 역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존 스노 박사를 떠올렸다. 그보단 자신이 훨씬 유리했다. 그는 콜레라란 질환에 대해 모르고 있었지만, 자신은 콜레라의 증상, 원인균은 물론이고, 전파 방식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으니까. ‘콜레라는 음식물, 정확히는 물에 의해 전파돼.’ 이렇게 광범위한 사람들을 전염시킬 수 있는 전파 방법은 단 두 가지다. 하나는 사람 간의 공기를 통한 전파. 인플루엔자 등이 그렇다. 공기를 움켜쥘 수 없듯, 한 번 돌기 시작하면 막을 방법이 없었다. 지구에선 20세기 초, 인플루엔자의 아형인 스페인 독감이 5,000만이 넘는 인구를 몰살시키는 일도 있었다. 그 정도로 전파력이 끔찍했다. 다른 하나는 물에 의한 전파다. ‘음식물은 어차피 먹는 사람이 제한되었으니 전파가 심하지 않아. 하지만 물은 달라. 같은 공급원에서 공급되는 물을 먹으면 모조리 감염되니까.’ 그러니 어떤 상수원이 콜레라균(Vibrio cholera)에 오염되었는지 찾아내야 했다. ‘그게 만만치 않아서 문제지만.’ 론도는 같은 구역이라도 위치, 용도에 따라 수도 공급 회사가 다르다. 상수원도 제각각이다. ‘여러 개의 상수원이 오염되지는 않았을 거야. 이 3개의 지역에 공통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도 공급 회사와 상수원을 찾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았다. 동행한 황태자가 지시하니, 한 시간도 안 되어 행정부에서 명단을 추려왔다. 세 개의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 공급 회사는 총 3개였다. 테즈사. 벨벳사. 피요르 수도 회사. 이 중 벨벳사와 피요르 수도 회사는 론도 전역에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다만 지역적 특성상 이들 세 지역에만 상수원이 달랐다. ‘이 세 회사 중 하나일 거야. 정확히 알아내야 해.’ 모든 상수원을 폐쇄할 수는 없다. 물 없이 사람이 살 수는 없으니. 그러니 정확한 범인을 찾아야 했다. ‘각 수도 회사가 구역 내에서 정확히 어떤 지역에 물을 공급하는 거지?’ 그것은 각 수도 회사에 요청해 알아냈다. 확실히 황태자가 옆에 있으니, 일 처리 속도가 전광석화다. 만약 그녀 혼자 했으면 훨씬 오래 걸렸을 것이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됐다. 제국과 시민을 위하는 일이다. 너는 빨리 전염병이나 해결하도록.” 다음 대의 명군이 될 자다운 답변이었다. 그 지원에 힘입어, 엘리제는 하나하나 단서를 밟아갔다. 마치 탐정처럼. 그리고 곧 하나의 회사가 제외되었다. ‘벨벳사는 아니야. 역학 지도와 맞지가 않아.’ 그녀는 환자가 발병한 지도와 수도 공급 상황을 비교했다. 벨벳사는 아니었다. ‘그러면 테즈사? 아니면 피요르 수도 회사?’ 두 회사는 모두 역학 지도와 일치하는 곳에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다만 용도가 달랐다. 테즈사는 거리의 공용 식수를, 피요르 수도 회사는 건물들에 수돗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환자들에게 물어봐도 대부분 두 회사의 물을 모두 먹었다고 하니.’ 난감했다. 최악에는 두 회사의 물을 전부 폐쇄해야 할지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왔다! “전하, 여쭐 게 있습니다.” “뭐지?” “현재 론도의 오수가 최종적으로 흘러가는 곳이 어디입니까?” 린덴은 답했다. “테즈 강 하류다.” “……!” 그녀는 다급히 말했다. “전하, 지금 바로 테즈 강 하류에 가 봐야겠습니다.” 그러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테즈 강 하류로 향했다. 잠시 후……. “……!” 엄청난 악취와 오수에 더럽혀진 강물을 본 순간, 그녀는 확신했다. 원인을 찾았다. 바로 이 테즈 강 하류에서 물을 끌어올려 브로드가(街), 크로이던 지구, 크롬웰 지구 거리에 공용 식수를 공급하던 테즈사였다. 이곳이 콜레라균의 서식지였던 것이다. *** 엘리제의 의견대로 곧바로 테즈사에서 공급하던 거리의 공용 식수가 차단됐다. 파앙! 요원들이 식수 파이프의 밸브를 떼어갔다. 테즈사에서 강력히 항의했고, 공중보건부의 관료들도 반대했지만, 황태자의 말 한마디에 조용해졌다. “이 결정에 대한 결과는 내가 책임진다.” “……!” 엘리제는 놀라 황태자를 바라봤다. 그는 무뚝뚝하게 말할 뿐이었다. “난 이 전염병 사태의 총책임자다. 그러니 설사 네 판단이 잘못되었더라도 책임은 내 몫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그 말에 그녀는 순간 알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말했다. “전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께서 곤란하실 일은 없을 것입니다.” “걱정 따위 안 한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로. “널 믿으니까.” 그래, 마음에 안 드는 그녀지만 그는 그녀를 믿고 있었다. “……?!” 한편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화들짝 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한참 멀어지는 중이었다. ‘날…… 믿는다고?’ 이전 삶, 그의 짝으로 10년 가까이 살았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엘리제의 조처 후, 다음 날. 처음으로 전염병 환자가 줄어들었다. *** 공용 식수를 차단한 다음 날, 발병 환자가 최초로 100명 미만으로 줄었다. 매일 수백 명씩 기하급수적으로 늘던 추세가 확연히 꺾인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정말 데임 클로랜스의 주장이 맞았단 말인가?’ 황실 비상대책본부의 위원들. 즉, 공중보건부의 관료, 의학연구원의 교수, 황실십자병원의 명의들은 경악에 빠졌다. 그들은 모두 엘리제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었다. 아니, 믿기는커녕 비웃고 있었다. 천재라더니,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그나마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그녀의 말을 귀 기울여 듣긴 했지만 완전히 믿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공중보건부의 관료들은 황제와 황태자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그들이 예상한 것과 정반대였다. 그녀의 주장이 옳았던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들의 불신과는 별개로 다시 또 다음 날. 발병 환자가 30명 미만으로 줄었다. 전염병의 전파가 완전히 꺾인 게 분명했다. ‘다행이야, 정말로.’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환자가 드문드문 발생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이전에 콜라레 균에 감염된 사람이 잠복기가 지나며 발병한 탓이었다. ‘콜레라의 잠복기는 주로 1~2일. 길어야 5일이니, 이제 곧 완전히 환자가 끊길 거야.’ 그녀의 예상은 정확했다. 3일이 지나는 순간, 환자가 거짓말처럼 뚝 끊긴 것이다. 몇 명 정도는 생겼지만 거의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죽음의 재앙 앞에 벌벌 떨던 론도의 시민들은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끝난 거야? 벌써?” “살 수 있는 거야?” 이 시대 전염병의 공포는 상상을 초월했다. 수만에서 수십만이 짚단처럼 죽어 나갔으니까. 가족이 죽고, 일가친척이 몰살하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그런 재앙이 될 거라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끝나다니? 500명이 넘는 희생자가 나오긴 했지만, 20년 전 15만에 비하면 정말 적은 숫자였다. 론도의 시민들은 기적이 일어났다고 기뻐했다. 하지만. 이건 우연한 기적이 아니었다. 한 명의 소녀. 그녀가 만들어낸 의학의 결과물이었다. 시민들도 곧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축복이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사정을 알아낸 신문사들이 앞다투어 보도했기 때문이다. [죽음의 전염병을 정복한 데임 클로랜스! 250만 론도 시민들의 목숨을 구해!] [데임 클로랜스, 완고한 관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판단으로 ‘콜레라 맵’을 이용, 전염병의 원인을 차단! 론도를 죽음에서 구해내!]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원래 이 전염병의 원인은 나쁜 공기 즉, 독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의학적 역학 관계를 기반으로 진정한 원인을 밝혀내 전파를 차단하다니! “황태자비가 되실 데임 클로랜스께서 우리를 구해 주셨구만.” “그러게. 마음만 착하신 게 아니라 정말 대단하이.” 론도의 시민들은 그녀에게 열광했다. 원래부터 시민들의 사랑을 받던 엘리제지만, 이번은 그 열광의 정도가 달랐다. 폭풍과도 같았다. “데임 클로랜스 만세!” “황태자비 만세! 만만세!”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엘리제의 이름을 칭송했다. “이거 데임 클로랜스가 아닌, 성(St). 엘리제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게 말이네.” 성(St. 聖). 세인트(Saint). 사람들을 위해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주어지는 영광된 존칭이다. 과한 게 아니냐 할 수 있겠지만, 놀라운 의학적 판단으로 수십만 시민의 목숨을 구했으니 그 존칭에 부족할 것이 없었다. 그리고 또 한 명 주목받는 인물이 있었다. 바로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이번에 황태자 전하께서 전적으로 데임 클로랜스를 신뢰하고 지원해 주셨다며?” “그래, 신문에서 그러더군. 그리고 전염병이 한창 위험할 때 데임 클로랜스와 함께 전염 지구를 같이 살폈다던데?” “천생연분이군그래. 빨리 데임 클로랜스께서 황태자비가 되시면 좋을 텐데!” “예끼! 이 사람아. 데임 클로랜스는 아직 성인식도 안 치르지 않았나?” “몇 달 뒤면 성인인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바로 약혼하고 결혼까지 하면 되지!” 원래 황태자는 3황자에 비해 대중적 인기가 떨어졌다. 통치력과 제왕으로서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유쾌한 3황자에 비해 친근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 그리고 엘리제와 결혼이 예정된 사이란 사실 하나만으로 인기가 급격히 올라갔다. 모두 엘리제 덕분이었다. “데임 클로랜스, 그리고 황태자 전하의 결혼을 위하여!” 이렇게 건배를 하는 시민들도 있을 정도였다. 그때, 화제의 주인공 엘리제는 테레사 병원에 있었다. 추가적인 전염은 끝났지만, 환자가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기뻐하는 그 순간에도, 사경을 헤매는 콜레라 환자들이 많았다. ‘적절히 치료하면, 치사율을 급격히 낮출 수 있어.’ 현대 지구에서 콜레라의 치사율은 1% 내외였다. 반면 론도에서 콜레라의 치사율은 약 40%. 50%에 육박하고 있다. 적절한 치료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만큼 치사율을 낮출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원칙을 알면 이런 끔찍한 치사율은 낮출 수 있다. ‘폐하께 드릴 부탁은 먼저 이 환자들을 치료하고 나서 말하자.’ 그렇게 다짐한 엘리제는 일단 환자들의 회복에 열중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시민들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역시 데임 클로랜스. 조금도 쉬지 않으시고.” “그러게 말이야. 듣자 하니 몸도 약하다고 하던데.” “저러다 황태자비도 병에 걸리는 것 아니야? 그러면 안 되는데.” 몇몇 사람은 벌써 그녀를 황태자비로 호칭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가 빨리 자신들의 퍼스트레이디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한편 엘리제는 환자들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며 다른 의사들에게 치료의 핵심을 알려주었다. 혼자 모든 환자를 치료할 수는 없으니까. 동료 의사들이 있는데 그럴 필요도 없고. “콜레라 환자가 사망하는 이유는 탈수와 전해질 불균형 때문이에요. 설사와 구토가 일반 위장관 병에 비해 너무 심하기 때문이죠. 그러니 최대한의 수액 공급과 전해질을 공급하는 데 주력해야 해요.” 그렇다. 콜레라가 무서운 이유는 설사와 구토가 너무 심해 탈수와 전해질 균형이 완전히 깨지기 때문이었다. 이것만 교정해 주어도 상당수의 사망자를 막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테레사 병원의 의사들은 지난 몇 달간 엘리제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봐왔다. 따라서 아무런 의심 없이 그녀의 지침을 따랐고 그 결과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녀는 다른 병원에도 치료 원칙을 알려주었고, 곧 론도 전체에서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가 급감했다. 그렇게 엘리제는 20년 전, 론도 시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대역병을 정복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금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57 2-7 가족 ========================================================================= [2막 : 小和田 雅子???] [2-7장 : 가족 (1)] 엘리제 드 클로랜스. 이번 일로 인해 그녀는 두 가지 별명을 얻게 된다. 현대 역학의 창시자. 그리고 콜레라의 정복자. 후대에 무수히 많은 별명으로 불리게 될 그녀에게 붙은 첫 번째 별명이었다. 그리고 콜레라가 완전히 정리된 후. 그녀는 황궁에 입궁했다. 지난번 이야기했던, 황제에게 미뤄두었던 부탁을 고하기 위해. *** “허허! 클로랜스 영애, 어서 오게. 마침 영애에게 무슨 상을 주어야 할지 태자와 상의하고 있었네. 이 제국을 위해 정말 큰일을 해주었어!” 민체스터 황제는 환한 얼굴로 그녀를 맞았다. “황송합니다. 폐하의 은총 덕입니다.” “짐의 은총은 무슨. 모두 영애 덕이지. 진짜로 3일 만에 대역병을 해결하다니. 정말 대단해. 대단해.” 황제는 연신 그녀를 칭찬했다. 그럴 만했다. 20년 전, 15만이 죽는 참상을 직접 목격한 황제다. 그런 대재앙을 이렇게 해결하다니. 고작 대단하다는 단어로는 이 업적을 표현할 수 없었다. 기적. 이건 바로 기적이었다. “도대체 어떤 상을 줘야, 이 공을 갚을 수 있을지 모를 지경이야. 그렇지 않나, 태자?” “그렇습니다.” 옆에 동석한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 학조사라 했던가? 콜레라 맵? 어쨌든 금번에 영애가 사용한 방법은 공중보건부와 의학연구원에 잘 전수해 주게. 늘 영애의 도움만 받고 있을 수는 없으니.” 당시 론도를 비롯한 서대륙의 대도시는 이와 비슷한 전염병을 반복적으로 앓고 있었다.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채 인구가 과도하게 밀집한 탓이었다. 그래서 엘리제는 한 가지를 건의했다. “폐하, 앞으로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책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좋은 생각이 있는가?” 황제는 반색하며 물었다. 이제 그는 엘리제의 이야기라면 뭐든지 일단 믿고 보게 되었다. “콜레라란 전염병은 물이 오염되어 생기는 것. 이번에 병이 생긴 것도 도시의 오수 처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계속 말해보게.” “그러니 이번 기회에 비용이 들더라도 도시의 하수도를 정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수도를 제대로 정비해 물의 오염을 막는다면 콜레라를 영원히 퇴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전염병의 발병도 예방할 수 있고요.” 황제는 그녀의 말이 옳다 생각했다. 공화국의 수도인 ‘빛의 도시, 파리스’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도시인 론도는 이전부터 오수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번 기회에 정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영애의 말에 따르겠네. 시일이 걸릴 대공사지만 늦지 않게 시작해야겠어.” “이왕 정비할 것, 규모를 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론도는 세계의 수도로서 나날이 인구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만약 현재 인구인 250만 명을 기준으로 정비하면,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한 번 대공사를 시행해야 할까 걱정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의 인구에 맞추어야겠는가?” 엘리제는 고민 후 답했다. “최소 500만 이상을 기준으로 잡아야 한다 생각합니다.” “……?!” 황제와 황태자는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500만?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가, 영애?” 500만. 어마어마한 숫자다. 4억의 인구를 가진 동방의 청이면 모를까, 아직 서대륙 어느 열강도 그런 인구의 도시를 가진 나라가 없다. “네, 그렇습니다. 제국의 발전 속도를 생각하면 그 정도도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제국이 어디까지 번영할지는 모르겠다. 달은 차면 기우는 법이니, 영원히 세계 최강의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겠지. 그래도 지구의 경우를 비교해 보면, 론도의 인구는 앞으로 최소 500만은 돌파할 것이다. 그것도 그렇게 머지않은 미래에. 그러니 공사는 기술력이 되는 한 크게 하는 것이 좋았다. “허허, 이거 영애의 배포가 생각보다 훨씬 크군. 500만이라. 그래,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영애니 그 정도 배포는 가지고 있는 게 좋겠지.” 황제는 넌지시 이전에 나누었던 대화를 언급했다. 엘리제는 자세를 고쳤다. 본론을 이야기할 때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가 오늘 온 이유는 하수도 정비를 건의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 이제 지난번 영애가 말했던 부탁을 들을 때가 왔군. 한번 말해보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황제가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는 이야기 전 물었다. “폐하, 말씀드리옵기 전에 여쭐 게 있습니다.” “무엇인가?” “지난번 했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것입니까?” 지난번 약속. 어떤 부탁을 하더라도 제국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 로마노프 황실의 이름을 걸었네. 주님과 제국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한, 무조건 들어주겠네.” “감사합니다.” 민체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그러는가? 괜히 불안하군. 빨리 말해보게.” 엘리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 부탁을 한 후에 후폭풍이 걱정된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가문의 명예를 높이면서도, 작은오라버니가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법은. “큰 부탁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빨리 말해보래도.” 그녀는 말했다. “저 엘리제가 가문의 차남 크리스 대신 클로랜스 가문을 대표하여 이번 2차 크림원정군으로 참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뭐?” 장내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도저히 들을 수 없는 말을 들은 듯 황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황태자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딱딱히 굳었다. “지금…… 뭐라고?” 엘리제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다시 한 번 말했다. “클로랜스의 딸이 가문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그리고 로마노프 황실에 충성을 바치기 위해 요청합니다. 제가 명예로운 군역의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종군 의사(醫師)로서 크림원정에 참전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녀가 찾은 답이었다. 크리스 대신, 자신이 종군 의사로서 참전하는 것. 이러면 가문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예를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다. *** 그러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됐는지 모르겠다. “…….” 엘리제는 떨리는 걸음으로 어전을 나왔다. 전신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황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문의 마차를 향해 걸어가다, 전신에 힘이 풀려 궁의 복도에 주저앉아 버렸다. ‘저질렀어.’ 방금 황제는 난생처음으로 자신에게 화를 냈다. 그냥 목소리만 높인 것이 아니었다. 고성을 지르며 불같이 분노했다. 이전 삶,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웃으며 넘어가 주던 그가 말이다. 그만큼 자신의 부탁이 노여웠으리라. ‘죄송합니다, 폐하.’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딸같이 아끼는 아이가 전쟁터에 간다니. 만약 자신이 이런 부탁을 할 줄 알았으면, 그는 절대 미리 들어주겠단 약속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걸로 됐어.’ 모두가 분노할 것이다. 아버지와 특히 작은오라버니는 상상도 못할 정도로 화내겠지. 어쩌면 자신을 가문에서 쫓아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나았다. 설사 가문에서 쫓겨나더라도, 아니, 자신이 전장에서 총알을 맞는 일이 생기더라도. 작은오라버니의 죽음을 다시 한 번 전해 듣는 것보단 이게 훨씬 나았다. ‘그래, 잘한 거야. 잘했어, 엘리제.’ 그런데 그때였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데임 클로랜스?” 서늘한, 그러면서도 깊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가 그녀를 찔렀다. 놀라 고개를 돌리니 황태자인 린덴 드 로마노프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에 타오르는 분노를 담고서. ‘뭐지?’ 엘리제는 그 눈빛에 놀랐다. 이제까지 그가 저렇게 분노하는 것은 처음 봤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물었다, 데임 클로랜스!” 더구나 언성을 높이기까지. 엘리제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아직 떨렸지만, 애써 참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하! 모르겠다고?! 엘리제!” “……?!” 엘리제는 화들짝 놀랐다. 그가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것이다! “저, 전하?!” 그녀는 당황해 그를 불렀다. 그냥 잡은 게 아니었다. 분노한 탓인지 강한 악력이 느껴지며 그녀의 손목이 하얘졌다. “전쟁에 참전하겠다고?! 그대가?!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장난하나?!” 그는 그녀를 노려봤다. 엘리제는 당황하면서도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지? “가문의 명예와 황실을 위해서입니다.” “뭐?” 가문의 명예와 황실을 위해. 그건 그녀가 표면적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작은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 대신 참전한다 할 수는 없으니까.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저는 비교적 뛰어난 의사입니다. 제가 의사로 참전하면 수많은 제국군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 특별한 장기가 없는 크리스 오라버니가 참전하는 것보다 제국과 황실에 도움이 될 게 분명하며, 가문의 명예도 더욱 높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술로서 영광스러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는 것입니다.” 그녀의 말은 옳았다. 크리스 오라버니가 참전하는 것보단, 자신이 전장에서 훨씬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고, 그건 곧 가문의 명예로 이어질 것이다. 더구나 황태자비로 내정된 자신 아닌가? 자신이 참전하면, 선전 효과도 있었다. ‘고귀한 황태자비도 전장에서 싸운다!’라며. 시민들은 더더욱 황실에 충성하며 싸울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설명.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엘리제는 속으로 씁쓸히 생각했다. 그래, 다 거짓말이다. 저런 것들 관심 없었다. 전장에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리 타인을 살리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지만, 그녀도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전장이 무섭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작은오라버니를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한편, 황태자는 그녀의 조리 있는 설명에 더욱 분노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도대체 왜 맨날 이따위란 말인가?! 자신을 얼마나 더 가슴 아프게 하려고! 지금도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조마조마하다. 혹시라도 저 작은 몸으로 무리하다가 아플까, 나쁜 병이라도 옮는 것이 아닐까. 하루에 몇 번이나 걱정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전쟁에 참전한다고? 그녀가 전장에 나가면 그는 걱정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이다. 혹시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자신은 미쳐 버릴 것이다. “안 돼.” “네?” “2차 원정군의 총사인 내가 허락하지 않겠다! 네가 전쟁은 무슨! 전쟁이 여자들의 놀이터인 줄 아나!” “……!” 그는 이번 2차 원정군의 총사령관이었다. 황태자이기도 했고 2년 전, 앙젤리 전쟁에서 탁월한 지휘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참전을 거부할 권한이 있었다. 물론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말이다. ‘안 돼. 나는 무조건 참전해야 해.’ 엘리제는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일단 힘을 줘, 그에게 잡힌 손을 뺐다. 손이 빨갛게 변해 아팠지만, 참고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전하, 제 참전은 폐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아무리 총사로 예정된 전하라도,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거절할 수 없습니다.” “……!”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합당한 이유? 없다. 그저 죽는 것보다 싫을 뿐이다. 그녀가 전쟁에 나가는 게. “저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의술적인 면으로 볼 때나, 황태자비라는 선전적인 면으로 볼 때나 제가 참전하는 것이 제국군에 유익하지 않습니까?” “그딴 것 필요 없어.” “네?” “고작 그딴 것 필요 없다고!” 그대가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딴 게 중요하겠는가? 황태자는 턱밑까지 차오른 그 말을 삼켰다. ============================ 작품 후기 ============================ 내일 토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58 2-7 가족 ========================================================================= [2-7장 : 가족 (2)] 하지만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안 그러던 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전 삶에선 항상 이성적이고 냉철하기만 했었는데.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후에 약혼이 예정되어 있긴 하나, 아직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러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마치 상처라도 입은 것처럼. 실제로 그녀의 말은 그의 가슴을 난도질했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이 그의 마음을 산산이 찢어놓았다. “그래, 그대와 난 아무런 사이도 아니지.” 황태자의 입에서 비틀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흥분해서 잊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그녀가 전쟁에 나간다는 사실에 너무나 걱정되고, 속이 상해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잊고 있었다. “미안하군. 언성을 높여서. 제국의 황태자로서 클로랜스 가문의 딸인 자네가 상할까 염려되어서 그랬던 것이니 잊어주길 바란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이만.” 그렇게 인사 후 황태자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일까? 저렇게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니 그녀도 이상하게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자신의 방에 돌아가 책상에 앉은 황태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시간이 지나 약혼식을 올리면 모를까? 부황이 억지로 맺은 인연일 뿐, 그녀와 자신은 아직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빌어먹을.” 그런데 그 말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칼로 가슴을 도려내는 것이 덜 아플 만큼. 너무나 아팠다. 도대체 얼마나 더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 젠장.” 그녀가 자신을 이렇게나 싫어하니, 물러나야 하는 걸까? 더는 상처받지 않기 위해? 하지만 입술 사이로 비틀린 말이 흘러나왔다. “웃기지 마. 이 내가. 이 린덴 드 로마노프가? 절대 물러나지 않아. ‘그날’ 이후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생겼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말한다. 황태자는 모든 것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그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왔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가 가진 것 중, 그 어느 것 하나 거저 얻은 것이 없었다. 15년 전의 ‘그날’. 그 비극으로 어린 소년이었던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싸늘한 주검 앞에서 부르짖으며 외쳤다. 절대 잊지 않겠다고. 반드시 황제가 되어 이 비극을 일으킨 자들을 단죄하겠다고.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念願)을 가지고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그저 어미, 누이와 놀기 좋아하던 순진한 소년은 검을 들었고, 책을 펼쳤다. 제왕학을 익혔고, 경제, 경영, 정치, 문화 등 모든 것을 익히고 또 익혔다. 오로지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 위한 노력이었다. 아니, 그건 노력이라 부를 영역이 아니었다. 집념이고 독기였다. 그 집념과 독기 덕에 그는 모든 이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황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독기를 가진 자신이다. 포기하지 않는다. 절대로. ‘엘리제.’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아파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뭐? 아무리 아파도 놓지 않겠다. ‘그날’ 이후 유일하게 생긴 바람이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다 해도, 그래서 자신의 가슴이 너덜너덜해진다 해도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그녀의 마음을 가지질 것이다. ‘그러니 제발 다치지 마라, 엘리제. 제발.’ *** 론도의 대귀족들이 모여 사는 화이트 거리. 그곳에 위치한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이 발칵 뒤집어졌다. 엘리제의 참전 소식을 들은 것이다. 심약한 새어머니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으로 기절해 버렸다. “엘리제! 너!” 엘 후작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이가 딱딱 부닥쳤다. “네 오라비를 대신해 참전한다고? 절대! 절대 안 된다!” “죄송해요, 아버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너……!” 작은오라버니도 불같이 화를 냈다. 이전과 이번 삶을 통틀어 그가 이렇게 화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니, 그녀에게 화를 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전장에서 죽어가는 환자를 치료하고 싶어요. 그래서 폐하께 참전을 요청했어요. 죄송해요.” 그녀는 그렇게 거짓말했다.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엘리제의 지금까지 행적을 봤을 때, 일견 그럴싸해 보이는 거짓말이긴 하다. 물론 엘 후작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 거짓말은 오히려 그의 분노를 더욱 불태웠다. “절대 안 돼! 전염병도 모자라, 이제는 전장의 환자를 치료한다고?!” 엘 후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염병을 치료한다고 나섰을 때도 걱정에 가슴이 터지는 줄 알았다. 다행히 별일 없이 끝났지만, 도대체 며칠을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 모른다. 그런데 전염병도 모자라, 이번엔 전쟁이라고? “내 너를 처음부터 병원에 보내지 말아야 했다! 전쟁은 무슨? 이제부터 넌 병원에도 출입금지다!” “……죄송해요.” 엘리제는 고개를 숙인 채 죄송하단 말만 반복했다. 가족들의 마음을 이해하기에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고집을 굽히진 않았다. 결국, 그런 그녀를 보며 엘 후작은 폭발했다. “아비 말을 이렇게나 안 듣다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생각도 않는 거냐?! 이제부턴 넌 내 딸도 아니다! 꼴도 보기 싫으니까 이 저택에서 나가라!” “……!” “생각을 바꾸기 전에는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마!” 엘리제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녀에게 불같이 화내는 아버지의 눈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이다. 그건 작은오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크리스 역시 걱정으로 눈동자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버지…… 작은오라버니 사랑해요.’ 그런 그들을 보며 엘리제도 눈이 시큰거렸다. 사랑한다. 저들을. 너무나도. 하지만 그러므로 자신이 가야 했다. 가족의 죽음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절대로. 다치더라도, 혹시나 잘못되더라도 그건 자신이어야 했다. “아버지, 작은오라버니.” 엘리제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죄를 빌 듯 깊게 바닥에 머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란 말은 삼켰다. 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와, 이 말을 다시 저들에게 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그렇게 엘리제는 한밤중에 집에서 쫓겨났다. 가주인 엘 후작은 완강히 선언했다. ‘참전을 취소하지 않는 한, 절대 집에 들이지 않겠다!’ 한마디로 참전을 취소하란 이야기였다. 물론 엘리제는 그럴 수 없었다. “어디로 가지?” 대귀족의 저택들이 모여 있는 화이트가(街)에 한복판에서 엘리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테레사 병원을 떠올렸으나, 거기는 안 됐다. 아버지가. ‘병원에서도 해고다! 의사는 무슨? 앞으로 병원 근처에 올 생각도 하지 마!’ 했으므로. 졸지에 그녀는 실업자가 되었다. “하아.” 엘리제는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 집 근처 벤치에 주저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콜레라와 싸우느라 몸을 혹사했다. 그런데 오늘 황제와의 면담, 황태자와의 다툼, 그리고 가족들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로가 너무 심했다. “머리 아파. 춥네…….” 엘리제는 중얼거렸다. 벌써 가을이 깊어, 날씨가 쌀쌀했다. 찬바람을 맞으니 머리가 아팠다. 이마가 뜨뜻한 것이 조금 열이 있는 것 같기도. ‘또 감기가 오나…… 졸려…….’ 그렇게 엘리제는 멍하니 있었다. 피곤하고, 아프고, 졸렸다. ‘따뜻한 침대에 눕고 싶은데…… 따뜻한 차와 함께…….’ 그런데 그때였다. 뚝. 뚝- 어두운 밤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아, 비가…….” 두둑. 드득- 한 방울씩 내리던 게 곧 줄기를 이루고, 장대처럼 쏟아졌다. 엘리제는 피할 생각도 못하고 순식간에 홀딱 젖었다. “…….” 갑자기 한 방울 눈물이 흘렀다. 왠지 자신의 처지가 기구하게 느껴졌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괜찮아. 내 지난 삶의 죄를 갚는다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냥.’ 그냥 다 궁상맞게 기구하다 느껴졌다. 이렇게 쫓겨난 것도, 갈 곳 없이 비에 맞는 것도, 전쟁에 나가는 것도, 황태자와 다시 결혼해야 하는 것도. 모두. “…….” 그렇게 그녀는 말없이 비를 맞았다. 비가 오면 딱 하나 좋은 게, 눈물을 숨길 필요가 없다. 온몸이 홀딱 젖고, 찬 기운에 하얀 입김이 나오며 몸이 살짝 떨렸지만,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맙소사? 데임 클로랜스? 맞죠?” “……?!” 고음의 음성. 놀라 고개를 돌리니,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도대체 뭐 하고 있으세요?” 모델같이 큰 키. 당당함이 엿보이는 아름다운 얼굴.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공녀, 유리엔 드 차일드였다! 유리엔 옆에는 한 젊은 남성이 우산을 들고 그녀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형제인지, 친척인지 유리엔과 똑 닮았는데, 왠지 인상이 오만하고 독선적이게 보였다. “맙소사, 비가 이렇게 오는데. 얼굴 하얗게 질린 것 봐. 빨리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고 뭐 하세요?” 유리엔은 엘리제의 몰골을 보고 놀라 말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못 들어가요.” “네?” “……쫓겨났어요.” 유리엔은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뭐? 쫓겨나? 엘리제는 풀죽은 얼굴로 말했다. “제가 크게 잘못한 게 있어서. 그래서 쫓겨났어요.” “…….” 유리엔은 그녀가 농담을 하나 살펴봤다. 하지만 저렇게 덜덜 떨며 비를 맞고 있는 것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로까지 불리는 그녀가 자신에게 그런 시답잖은 농담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데임 클로랜스. 기적 같은 의술로 론도를 구한 성녀.’ 유리엔은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채 반년. 아니, 반년도 안 됐다. 그녀가 변한 시간은. 그 짧은 시간 만에 그녀는 완전히 다른 이가 되었다. 못된 공녀에서,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로. 지금 저 소녀는 론도의 어떤 귀족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냥 작아 보이는걸.’ 하얗게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동정심을 자극했다. 적대 가문의 딸이자, 자신이 사랑하는 황태자와 결혼할 예정인 소녀에게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소녀는 비에 젖은 강아지 같았다. “어디 갈 곳은 없어요? 이러고 밤새 비 맞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갈 곳…….” 엘리제는 고민했으나, 딱히 떠오르지가 않았다. 황궁? 황제 폐하도 만만치 않게 화난 상태라 무리였다. 그때 순간 떠오른 얼굴. ‘론 님…….’ 론, 그라면 자신을 받아줄지도. 하지만 그녀는 그가 어디 사는지커녕, 정확한 성도 모른다. 신분을 밝히는 걸 꺼리는 듯해 자세히 묻지 못했던 탓이다. ‘보고 싶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 ‘전쟁에 나가면 만날 수 있을까?’ 그럴지도. 하지만 엘리제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쟁에서는 안 만나는 게 좋을 듯했다. 의사인 자신을 만난다는 건 그가 다쳤다는 뜻일 테니까. “…….” 유리엔은 말없이 엘리제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이라도 올래요?” “……예?”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유리엔, 그녀의 집은 귀족파의 수장인 차일드 가문의 저택을 뜻한다. 옆에 말없이 있던 남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유리엔, 저 소녀는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야.” 차일드 가문과 클로랜스 가문은 사이가 안 좋다 못해, 원수와도 같았다. 서로 암살자를 안 보내는 게 신기할 정도로. 하지만 유리엔은 이렇게 답했다. “알아요. 그게 뭐 어때서요?” “…….” “지난번 탄신연회 때, 같이 차나 한잔하기로 했었죠,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제가 차나 한잔 대접할게요. 초대를 받아주시겠어요?” 그렇게 엘리제와 유리엔. 그녀들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일요일 09시 7분에 올라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모두 감사드립니다! 00059 2-7 가족 ========================================================================= [2-7장 : 가족 (3)] 엘리제는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들어왔다. 우습게도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 뒤에 있는 게 차일드 가문의 저택이었다. 그녀는 차일드 가문 앞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유리엔은 집에 들어가다 그녀를 본 거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이랑 코앞이네. 이 정도면 이웃사촌이 아닌가?’ 엘리제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나름 이웃사촌이 맞긴 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패권을 다투는 이웃사촌. ‘집 안은 의외로 검소하네. 차일드 가문답지 않게.’ 돈놀이꾼이라 조롱받기도 하는 차일드 가문의 정체는 국제 은행 재벌 집단의 수장이었다. 브리티아 제국 은행. 파리스 투자 은행 차일드 은행 프러시엔 중앙은행 시티 앤 모던스 은행 YP 은행 BSTC 은행. 차일드 가문과 서대륙에 퍼져 있는 그 밑의 계열 가문들이 소유한 은행의 명단이었다. 어마어마한 명단이 아닐 수 없었다. 즉, 그들이야말로 세계 최고의 부자로 그들이 다루는 금화의 양은 웬만한 열강들의 재정을 훌쩍 능가했다. ‘사실상 서대륙의 경제를 움켜쥐고 있는 가문.’ 나라를 움직이는 데에는 돈이 든다. 전쟁이든, 건설이든, 투자든, 뭐든 다 돈, 돈, 돈이다. 그런데 그 돈을 모두 세금으로만 충당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이 은행에 돈을 빌려야 할 때가 많은데, 그 돈을 빌려주는 곳이 바로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이었다. ‘어차피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돈은 돌려받을 수 있으니까. 만약 못 갚으면 국가 소유의 재산을 헐값에 받아넘기고.’ 그렇게 그들은 막대한 금력을 이용해 돈을 빌려주고, 고리의 이자를 받으며 앉아서 헤엄치는 식으로 재산을 불려 왔다. 그래서 생긴 조롱 섞인 별명이 돈놀이꾼이다. 돈놀이꾼 차일드 가문. 하지만 실상은 모든 나라가 눈치를 보는, 어마어마한 금권(金權)의 소유자. 민체스터 황제도 눈엣가시처럼 여기면서도 감히 차일드 가문을 손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것치곤 검소해. 집 안이 온통 황금으로 덮여 있을 줄 알았는데.’ 그냥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과 비슷했다. 그런데 그때, 방문이 열리며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유리엔이 들어왔다. 하늘하늘한 옷감 사이로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씻으셨나요, 데임?” “아, 네. 배려 감사합니다.” 유리엔은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하녀에게 목욕물을 준비시켜 그녀가 씻을 수 있도록 했었다. “비에 젖었으니, 잘 씻어야죠. 안 그러면 감기 걸린다고요. 그렇지 않아도 맨날 감기에 걸리신다면서요.” “아, 네. 그런데 제가 자주 감기에 걸리는 건 어떻게?” 유리엔은 코웃음 쳤다. “요즘 데임이 수도에서 얼마나 인기인 줄 아세요? 피카딜리의 최고 인기 배우보다 더 하다고요. 데임의 일거수일투족을 취재해 특집으로 올리는 잡지가 있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그런 것들 보다 보니 자연히 알게 되었네요.”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옷은 맞으세요?” 엘리제는 홀딱 젖은 옷을 벗고, 유리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좀…… 크네요.” 모델 같은 유리엔의 옷이다 보니, 여자치고도 작은 체구의 엘리제에겐 엄청 컸다. 소매도, 가슴 폭도, 힙도 헐렁헐렁한 모습에 유리엔은 왠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아직 애기네, 하는 표정? 반면 엘리제는 계속 멍한 표정이다. “데임?” “아, 네?” “어디 몸이 안 좋으세요?” 유리엔은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따뜻한 차를 마셨는데도, 계속 안색이 하얗다. “그냥…… 조금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요.” 엘리제는 답했다. 열이 올라오는 것이 또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또요?” “네.” “정말 자주 걸리시네요. 혹시 면역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에요? 면역이 떨어지면 감기에 자주 걸린다는데.” 엘리제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아니에요. 그냥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그러면서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유리엔이 면역이란 개념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구에서라면 몰라도, 이 시대에 흔하게 알려진 개념이 아닌데? 그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유리엔이 답했다. “한번 공부해 봤어요.” “공부요? 의학을요?” “네.”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차일드 가문의 공녀가 의학을 왜? “부러워서요.” “누구를요?” 그 순간, 유리엔은 그녀를 바라봤다. “누구긴요. 데임이죠.” “……저를요?” “네.” “……왜요?” 나를? 왜? 유리엔은 씁쓸히 웃더니 말했다. “데임은 제가 세상에서 가장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가진 분이거든요. 그래서 한번 따라 해봤어요. 저도 영애처럼 의학을 공부하면 같은 행운이 올까 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으로.”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엔이 세상에서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탓이다. ‘그건…… 아마 황태자의 비.’ 그래, 그녀는 황태자를 사랑했다. 그것도 가슴 깊이. 이전 삶의 자신에 비해 못하지 않을 정도로. “뭐, 어쩔 수 없죠. 우리 가문은……. 언감생심 감히 바라지 않아요.”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지만, 그녀의 눈은 갈망으로 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를 향한 마음에 가슴이 아프리라. 엘리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유리엔 공녀라면 아주 좋은 황태자비, 황후가 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기적이 몇 번이고 일어나지 않는 한, 그녀와 황태자는 맺어질 수 없었다. 오히려…… ‘앞으로…….’ 엘리제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떠올리고, 어두운 얼굴을 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아마 이전 삶과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방법이 없겠지.’ 이것만큼은 엘리제도 방법이 없었다. 이미 그들 차일드 가문은 3황자, 미하일과 한배를 탔다. 그리고 무엇보다 황태자 린덴은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염원은... ‘하아.’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자신과 다르게 당당하고 멋진, 아름다운 저 여인이 그런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 “제가 데임께 괜한 이야기를 했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유리엔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안 좋은 것 같은데 푹 쉬세요. 잠자리를 준비해 놓으라 할게요.” “아, 그렇게는 괜찮은데…….” 엘리제는 손을 저었다. 자신이 적대 가문인 차일드의 저택에서 묵다니.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하지만 유리엔은 핀잔을 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보아하니, 이 밤에 갈 곳도 없는 것 같은데. 비바람에 또 나가서 덜덜 떨게요? 그냥 주무시고 가세요.” “……감사합니다.” 거절할 처지가 못 되는지라, 엘리제는 감사를 표했다. “하늘을 보니 비가 계속 올 것 같은데, 만약 갈 곳 없으면 며칠 더 있다가 가도 돼요. 저택에 방은 많으니까요.”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지 차일드 가문에 신세를 질 순 없다. 내일 날이 밝으면, 어떻게든 지낼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엘리제는 생각했다. ‘작은 병원에라도 가서 일하며 당분간 숙식을 해결해야지.’ *** 하지만 엘리제는 다음 날도 차일드 가문을 떠나지 못했다. 비에 맞으며 감기에 된통 걸렸는지, 고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이다. 39도를 넘나드는 고열이라서, 침대에서 꼼짝도 못했다. “나, 나가야 하는데……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침대에 파묻혀 빨개진 얼굴로 말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피식 웃었다. 아픈 사람한테 할 생각은 아니지만, 유리엔은 엘리제가 동생같이 귀엽단 생각을 했다. 저렇게 작고 여리면서 그런 일들을 해왔다고? 전쟁에도 참전할 예정이고? 대단하긴 참 대단했다. “됐어요. 빨리 낫기나 하세요.” 유리엔은 의사까지 불러주었다. 그것도 테레사 병원, 황실십자병원과 더불어 론도 3대 병원이라는 로즈데일 병원의 수석 교수를. “약을 지었으니, 빠지지 않고 복용하십시오. 2~3일 정도 지나면 좋아질 것입니다, 데임.” 로즈데일의 수석 교수 카일 준남작은 엘리제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제국 의학계의 신성(新星)이자, 황태자비가 될 그녀가 감기로 자신의 진료를 받는 게 신기했던 것이다. 그것도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서!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쾌차하십시오.” 몸이 낫기 전, 3일 동안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차일드 가문에 머물렀다. 마음이 무척 불편했지만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리엔, 그녀와 조금은 가까워진 것이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유리엔은 감기를 앓는 엘리제를 여러모로 많이 돌봐주었다. 마치 친동생을 살피듯. 엘리제는 진심으로 감사해했고, 유리엔은 피식 웃으며 괜찮으니 나중에 식사나 한번 사라고 했다. ‘이렇게 계속 친하게 지냈으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서로의 입장상 편하게 지낼 수야 없겠지만, 엘리제는 유리엔, 그녀가 좋았다. 그리고 몸이 거의 나아갈 무렵 이런 일도 있었다. 저택의 주인인 차일드 후작이 그녀를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암셀 드 차일드 후작.’ 만찬 테이블에서 그를 마주한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대륙의 경제를 한 손에 쥔 자! 그리고 아버지와 황태자의 정적(政敵)이자 귀족파의 수장. 마지막으로 현 황실의 공식적 안주인인 1황비의 친오라버니. 그런 대단한 인물이 그녀 앞에서 야채수프를 먹고 있었다. 간이 안 맞는지 싱겁다, 라고 중얼거리며. “아버지는 건강하신가?” “아, 네.” “감기는 괜찮고? 카일 교수가 그러길, 감기가 심하다던데. 쿨럭.” “덕분에 많이 좋아졌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각하.” “조심해야지. 의사인 영애가 더 잘 알겠지만, 몸 관리를 잘 안 하면 늙어 고생한다네. 나처럼. 쿨럭. 요즘 기침이 계속 나와 불편해 죽겠어.”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천하의 차일드 후작과 이런 일상적 대화라니! 죽을 만큼 불편했다. ‘그나저나.’ 엘리제는 샐러드를 깨작거리는 차일드 후작을 조심히 살폈다. ‘생각보다 평범하구나.’ 날카로운 눈매는 독사(毒蛇)란 별명 그대로지만, 가족들과 식사하는 모습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병으로 죽은 장자를 대신해 후계자로 맞은 수양아들인 알버트와 딸인 유리엔에게 간간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할 뿐, 제국의 패권을 다투는 야심가다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유리엔에겐 이리저리 잔소리하기도 했다. 옷차림이 정숙하지 못하다느니, 매번 너무 늦게 들어온다느니, 파티장에서 술은 적당히 마시라느니. “알았으니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아버지. 데임께서 보고 계시잖아요.” 평소에도 잔소리가 많은지 유리엔이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일반 가정집에서 아버지와 딸의 투닥거림과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어서 엘리제는 의외란 생각을 했다. ‘집에선 가정적인 성격인 건가?’ 이렇게만 보면, 그냥 완고한 인상의 왜소한 중년 남자로만 보였다. 평소의 악명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잔소리 많은 가정적인 독사(毒蛇) 차일드 후작이라니. 어떻게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그런데 한참 식사 중, 누군가 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쿨럭, 갑자기 일이 생겨 먼저 일어나 봐야겠군. 초대하고서 먼저 일어나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각하.” 원래부터 건강이 안 좋은지, 차일드 후작은 말을 할 때마다 연신 기침을 했다. 그런데 식당을 나서기 전, 그가 엘리제를 돌아봤다. “참, 영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나?” “부탁…… 말입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차일드 후작이 나한테 부탁이라니? “저, 아이.” 그는 손가락으로 유리엔과 닮은 오만한 인상의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차일드 후작의 수양아들로, 엘리제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유리엔과 같이 있던 남자였다. “이번에 영애와 같이 2차 원정군으로 크림에 나간다네. 그럴 일이 있으면 안 되겠지만, 혹시라도 몸이 상하거든 영애가 잘 봐줄 수 있겠나?”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60 2-7 가족 ========================================================================= [2-7장 : 가족 (4)] “……!” 혹시라도 아들이 부상을 당하면 잘 치료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남자가 얼굴이 살짝 붉어져 말했다. “괜찮습니다, 아버지. 제 실력을 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의 도움을 받을 바엔.” “알버트.” 차일드 후작이 가만히 말을 끊었다. “그런 이야기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지펠, 그 아이도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거늘.” “……!” 지펠. 2년 전, 전사한 1황자를 말한다. 1황자는 1황비 태생으로, 1황비의 오라비인 차일드 후작에게는 조카가 된다. 참고로 3황자인 검제(劍帝) 미하일도 1황비 태생으로, 차일드 후작의 조카였다.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법. 그리고 뛰어난 실력의 의사는 네 생명을 한 번 더 연장해 줄 수가 있어.” “……네.” 알버트는 뭔가 불만이 있는 듯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영애. 만약 그런 일이 생기면 잘 봐줄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순간, 엘리제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전 삶에서 내가 알버트 경을 만난 적이 있었나? 없었다. 크림전쟁 이후, 차일드가(家)의 차기 당주(當主) 후계자는 공녀인 유리엔이었다. 그 말의 의미는 단 하나. 현 후계자인 수양아들 알버트가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것이다. 멀쩡히 건강한 그가 물러날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크림전쟁 때 전사했구나. 아니면 심각한 부상을 입었거나.’ 엘리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 사실을 내색하진 않았다. 대신 이렇게 답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의사입니다. 그런 부탁하지 않으셔도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만약 저 아이를 도와준다면 나, 암셀과 차일드 가문은 그 은혜를 잊지 않을 거야.” 그렇게 차일드 후작은 기침하며 식당에서 나갔고, 그날의 만찬은 끝이 났다. ***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온 지, 4일째 되는 날. 엘리제는 완전히 몸이 나았다. ‘정말 나가야겠구나.’ 너무 오래 있었다. 이제는 더 신세 질 수 없었다. ‘집에 갈 순 없겠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쫓겨나 있으니 아버지, 오라버니, 새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벌써 화가 풀리셨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택의 하녀가 엘리제에게 다가와 말했다. “저, 데임. 찾아오신 분이 계세요.” “네, 저를요?” 엘리제는 놀란 얼굴을 했다. 차일드 가문에 머물고 있는 나를 찾아? ‘혹시?’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찾아올 만한 이는 단 하나다. “클로랜스 가문에서 오셨어요.” 역시! 그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요동쳤다. ‘누가 오셨지? 작은오라버니? 혹시 아버지? 용서해 준다는 뜻일까? 아니면 더 화를 내시려고?’ 손님은 차일드 가문이 불편한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저택의 입구에 있다고 했다. 엘리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택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 “큰…… 오라버니?” 차가운, 마치 보도(寶刀)를 벼린 듯한 아름다운 남자.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 왜 큰오라버니가?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큰오라버니, 렌은 동생의 쫓겨남 같은 사소한(?) 일에 나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렌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늘 그렇듯 못마땅한 시선으로. “……왜 그렇게 보세요?” “마음에 안 들어서. 이제 사고 안 치나 했더니. 역시나 사고뭉치는 영원히 사고뭉치구나.” 뭔가 발끈하게 만드는 말투였으나, 뭐라 대답할 말은 없었다. 대박 사고를 치긴 했으니까. 렌은 한숨을 내쉬더니 툭 말했다. “따라와라.” “네?”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따라와. 가르칠 게 있으니.” “가르쳐요? 뭘요?” 렌은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죽이는 법.” “……네?” “정확히는 자신을 지키는 법이다. 따라와라.” *** 타앙! 귀가 찢어지는 듯할 굉음이 사방에 울렸다. “……!” 엘리제는 난생처음 듣는 그 소음에 잔뜩 몸을 움츠렸다. 렌이 혀를 찼다. “뭘 이런 소리 가지고 놀라는 거냐? 전장에 나가면 매일 듣게 될 텐데.” “…….” 그가 엘리제를 데려온 곳. 그곳은 다름 아닌 총-기사단의 사격장이었다. “저…… 오라버니. 여기는 왜?” “왜? 2차 원정군으로 간다며. 총 쏘는 법 배워야지.” “하지만 전 의사로 참전할 예정인데.” 그녀는 일반 보병이 아닌 의사로 참전할 예정이니, 직접 전투에 참가할 일은 없다. 그러니 사격을 배울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렌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아무런 방어수단도 없이 전장에 가겠다고?” “……!” “물론 의사인 네가 전투에 휘말릴 일은, 후방 병원까지 전선이 무너지지 않는 한 없겠지. 그래도 전장에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그러니 잔말 말고 받아라.” 그러고 렌은 천에 둘러싸인 물건을 건네었다. “이건?” 물건을 건네받고 묵직한 무게에 엘리제는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천을 풀어보니 차가운 회색의 금속이 나타났다. 권총, 최신식 7연발 리볼버였다. “…….” 처음 만지는 총의 감촉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시간이 많이 없으니 바로 시작하자. 총 장전하는 법, 쏘는 법 다 모르지?” 그런 걸 알 리가 없다. “이게 약실이고, 탄알이 들어가는 부위다. 최신식이어서 옆으로 뺄 수 있게 되어 있고. 발사 방법은 간단하다. 공이를 뒤로 당겨 장전 후.” 그러면서 큰오라버니가 시범을 보여주었다. “이 방아쇠를 당기면 발사다.” 타앙! 굉음에 엘리제는 다시 한 번 움찔 놀랐다. 총의 소음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컸다. “봐라.” 오라버니의 말에 시선을 돌리니 50m 밖 과녁의 한가운데가 정확히 관통되어 있었다. 사거리가 짧은 리볼버 권총으로 50m의 표적을 정확히 뚫다니. 총기사단의 부단장다운 대단한 사격 솜씨였다. “너한테 이 정도의 실력을 바라진 않는다. 의사인 너한테 필요도 없고. 20미터, 아니, 15미터 앞의 과녁만 맞혀라. 그러면 합격점을 주지.” “15미터요?” 엘리제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15미터면 바로 코앞이다. 그 거리만 맞추면 된다고? 한 번도 총을 쏴본 적은 없지만, 그 정도는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렌은 비웃음을 지었다. “쉬워 보이지? 한번 해봐라. 참고로 합격점을 받을 때까지는 여기서 못 나간다. 밥도 안 먹일 거야.” 완전 강압적인 큰오라버니였다.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총을 들었다. ‘15미터. 그 정도는.’ 고난이도 수술도 척척하던 자신이다. 고작 그 정도 거리 사격을 못 할까 보냐? 그런 생각으로 총을 쐈으나, 결과는 놀라웠다. 7발 중 한 발도 못 맞혔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과녁 근처에 떨어진 것도 없었다. “뭐하는 거냐?! 집중해서 제대로 쏴! 가늠자를 정확히 봐야지!” 렌 남작은 마치 견습 기사단원을 가르치듯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고 다시 총을 들었다. 타앙! 타앙! 하지만 이번에도 한 발도 못 맞혔다. “방아쇠를 당길 때 손끝이 움직이잖아! 그러면 당연히 안 맞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집중해! 눈과 어깨와 총의 가늠자가 일직선이 되게! 그렇지 않으면 절대 안 맞으니!” 렌은 엘리제가 잘못할 때마다 호되게 혼냈다. 그러나 아무리 쏴도 맞지 않았다. “지금 뭐하는 거야! 한 발도 안 맞잖아. 똑바로 해!” 결국, 엘리제는 총을 내려놓았다. “못하겠어요.” “뭐?” “못하겠다고요! 아무리 해도 안 맞아요. 손도, 어깨도, 허리도 너무 아프고요!” 엘리제는 강하게 항의했다. 사격을 시작한 지 벌써 2시간째다. 무거운 금속 권총을 들고 뻣뻣하게 손을 뻗어 사격하니, 너무 힘들었다. 평소에 관심도 없다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큰오라버니도 서운했고. “애초에 의사로 참전하는 제가 사격을 잘할 필요가 없잖아요!” 하지만 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경고하는데 총 다시 들어.” “……!” “넌 겨우 이 정도의 각오도 없이 전쟁에 나간다고 한 거냐?” 그가 말을 이었다. “사격술. 그래, 의사인 네가 총을 쏠 일은 거의 없겠지. 나도 네가 총을 쏠 일이 전쟁 내내 한 번도 없었으면 좋겠다. 후방 병원에서 일할 네가 총을 쏘게 된다는 것은, 우리 군이 패전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큰오라버니는 그녀를 똑바로 직시하며 말했다. “그 만약의 경우! 네가 위험할 때 이 한 발이 너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어! 그걸 왜 몰라?! 그러니 너를 걱정하고 있는 아버지와 크리스,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총 들어!” “……!” 그 순간, 엘리제는 깨달았다. 큰오라버니가 왜 자신을 이렇게 몰아붙이는지. 그건 걱정이었고, 사랑이었다. 전쟁에 나가는 동생을 향한. 만약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조금이라도 동생의 생존율을 높이고자 하는 바람이리라. 그 생각이 들자, 그녀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죄송해요.” “됐고. 총이나 들어. 내가 참전 준비로 시간이 많이 없어, 너를 오래 봐줄 수가 없다. 그러니 집중해.” “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총을 들었다. 아까와는 다른 각오로. ‘그래, 무슨 일이 생겨도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어.’ 그래서 아버지와 오라버니, 어머니를 다시 만날 거다. 걱정시켜서 죄송했다고.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줄 것이다. 타앙! 타앙! 그녀는 마치 처음 수술을 배울 때처럼 집중해 렌의 말을 따랐다. 그리고 이윽고. 탕! 과녁의 한가운데가 뚫렸다. 타앙! 타앙! 다시 연이어 명중! ‘됐어!’ 엘리제는 오라버니를 돌아보았다. “저 잘했죠, 오라버니?” 하지만 렌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잘하긴? 양심이 있어봐라. 수백 발을 쏴서 겨우 3발 맞췄는데.” 역시 렌다운 답변에 엘리제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칭찬 좀 해주면 덧나나? 그런데 그때, 렌이 지나가듯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제 조금. 아주 조금 낫긴 하군. 아직 한참 멀었지만.” “……!” 엘리제가 물었다. “오라버니, 그거 나름 칭찬하신 거죠?” “칭찬은 무슨. 아직 멀었으니, 더 열심히 하기나 해.” 그녀는 배시시 웃었다. 큰오라버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왠지 모르게 즐거웠다. “네, 더 열심히 할게요.” “그래, 이제 난 기사단에 들어가 봐야 하니, 혼자 더 연습하고.” 그리고 렌이 말했다. “참, 엘리제.” “네?” “집에는 언제 들어올 거냐?” “……!”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들어가고 싶지만…… 아버지랑 오라버니 화가 안 풀리셔서.” “쓸데없는 이야기 말고, 지금 당장 돌아가.” “……!” 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크리스 그 못난 놈도 다 네 걱정만 하고 있다. 밖에서 뭐 하고 있는지, 괜찮은 건지. 미운 네가 뭐가 그렇게 예쁘다고 다들 그러는 건지, 원.” “…….” “어차피 아무리 가족들이 말려도 전쟁에 참전할 거잖아?” “……네.” “그러면 돌아가서 싹싹 빌고 잘해. 출전하기 전이라도 효도하고 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그렇게 그녀는 쫓겨난 지, 4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 엘 후작과 작은오라버니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다들 며칠 만에 얼굴이 굉장히 상해 있었다. 걱정이 심했던 것 같다. 엘리제는 뭐라 할 말이 없이 고개를 숙였다. “엘리제.” “네, 아버지.” “이리로 와라.” “…….” 그녀는 머뭇거리며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가 그녀를 끌어안은 것이다. “아, 아버지?” “엘리제.” 엘 후작이 조용히 말했다. “사랑한다, 내 딸.” “……!” “그러니…… 꼭 조심해야 한다. 털끝 하나라도 다치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그 짧은 말에, 그 안에 담긴 사랑과 걱정에 엘리제는 마음이 울컥했다. “네…… 아버지.” 엘리제는 그렇게 답했다. 뭐라 하고 싶은 말이 더 맴돌았지만, 가슴이 울렁거려 더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저 오랜만에 느껴지는 아버지의 품에 더 안겨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엘리제 드 클로랜스의 2차 크림원정군 참전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 전쟁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 그래서 종군 의사로 참전한 자신이 어떤 일들을 해낼지. 어떤 이름을 얻게 될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2막 : fin> <3막 : Lady with the Lamp - start> ============================ 작품 후기 ============================ 내일 월요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61 3-1 크림 반도 ========================================================================= [3막 : Lady with the Lamp] [3-1장 : 크림 반도 (1)] 시간이 물처럼 흘렀다. 워낙 대규모의 군이 출정하는 것이라, 곧바로 떠날 수가 없었다. 군인도 모집하고, 장비도 점검하고, 보급 체계도 세워야 했다. 그래도 브리티아 제국은 세계 최강국답게 2차 원정군 출정 준비를 착착 진행시켰다. “리제, 꼭꼭 조심해야 해. 가서 만약 무서우면 곧바로 돌아오고.” 크리스가 몇 번이나 당부하며 걱정을 했다. “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나도 같이 출정해야 하는데.” 크리스는 자신도 같이 출정하겠다고 주장해 모두를 곤란하게 했다. 엘리제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의 출정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큰아들, 딸까지 전쟁에 나가는 판에 작은아들까지 전쟁에 나가는 걸 누가 원하겠는가? 한참을 싸운 끝에 그의 출정을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정말 곧 출정이구나. 내일이 출정식이라고?” “네.” “성인식을 전장에서 치르게 생겼네.” 크리스는 자신이 속상한 듯 말했다. “성인식이야 괜찮아요.” 첫 번째 삶, 두 번째 삶을 포함해 성인이 되는 것만 3번째이다. 그러니 성인식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일 출정식 잘 마치고. 연설 준비는 잘했지?” “네, 여러 번 연습했어요.” 엘리제는 출정식 때 연설을 맡았다. 굉장히 중요하고 영광된 역할이었는데, 이는 그녀가 황태자비로 내정되어 있고, 현재 론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의 출정 소식은 론도, 아니,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태자비로 예정된 데임 클로랜스! 크림원정군으로 참전 결정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본이라 할 수 있어.]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 성(St.) 엘리제!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원정군으로 참전!] 솔직히 민체스터 황제는 그녀의 참전 소식을 선전으로 이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런 큰 사건(?)을 언론에서 놓칠 리가 없었다. 군부에서도 병사 모집과 사기 진작을 위해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렸고 효과는 예상대로 최고였다. “데임 클로랜스를 위하여!” “황태자비를 위하여!”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지고한 여인. 그것도 론도를 죽음에서 구해낸 데임 클로랜스가 병사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에 참전한다니! 시민들은 크게 감동했다. “우리도 가자!” “황태자비를 지키자!” “공화국 놈들을 무찌르자!” 모두 사기충천하여 외쳤고, 젊은이들의 입대 문의가 빗발쳤다. 덕분에 병사 모집은 조기마감.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대거 탈락시키는 믿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져, 시민들의 엘리제를 향한 지지와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출정식 날이 밝았다. 브리티아 섬에서 출전할 15만의 병력이 론도 인근의 항구, 바킹항에 집결했다. 특유의 붉은 제복을 입은 제국군이 오열을 맞춰 정렬해 있는 모습은 엄정하기 그지없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란 말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는 모습. 군악대의 음악과 함께 3명의 인물이 단상에 올라왔다. 황제인 민체스터. 그리고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마지막으로 연약한 여인의 몸, 그것도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으로 참전을 결정한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로마노프 만세!” “브리티아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그들을 보고 병사들이 큰 환호성을 질렀다. “전체 차렷!” 부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백전노장의 맥가일 원수가 부대를 지휘해 황제에게 예를 올렸다. “전 부대! 위대한 황제 폐하께 받들어 총!” 15만의 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충!” 빈틈없는 제식(制式).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총검이 하늘을 찌르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급하게 모집했지만, 이들은 경험이 없는 병사들이 아니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남자들은 누구나 일정 기간, 최고 수준의 군사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 황제가 고개를 끄덕이자, 맥가일 원수가 명했다. “부대! 세워 총! 쉬어!” 다시 총검이 절도 있게 움직였고, 15만의 병사가 부동자세로 황제를 바라봤다. “자랑스러운 제국의 병사 여러분.” 민체스터가 입을 열어 연설을 시작하였다. 제국군의 승전과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연설. 기나긴 연설 끝에 민체스터가 축복을 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가호가 여러분께 임하길 기원합니다.” 이어 총사령관인 린덴의 차례였다. 그의 연설은 성격답게 짧았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우리는 승리한다. 프랑소엔 놈들에게 이 위대한 제국을 도발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도록 하자. 제군들과 함께라면, 이 브리티아 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사인 제군들이라면 연약한 프랑소엔 놈들 따위 몇이 달려들어도 상관없다. 한걸음에 짓밟을 것이다. 그리고 조국으로 돌아와 개선식을 올리자. 온 제국 시민들이 제군들의 이름을 높이고 기억할 것이다!” “와아아!” “브리티아 제국 만세!” 사기를 진작하는 그 연설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마지막은 드디어 엘리제의 차례였다. 장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긴장하지 말자, 엘리제. 잘할 수 있어.’ 단상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나오는 순간.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장내가 떠나갈 것 같았다. “데임 클로랜스! 마이 레이디(My Lady)!” “황태자비 만세!” “퍼스트레이디(First Lady)! 마이 레이디!” 모두가 그녀에게 열광했다.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임에도, 자신들을 위해 전장에 나서는 여린 소녀. 모두의 마음속에 그녀는 단순한 황태자비를 넘어 누구보다 존귀하고, 지켜야 하며, 자신들과 함께하는 마이 레이디였다. “친애하는 병사 여러분.” 이윽고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을 빠짐없이 듣기 위해서다. 엘리제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내가 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을까?’ 이런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저들의 오해처럼 숭고한 뜻을 위해 전장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참전 이유는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생명을 걸고 싸울 저들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왜냐면 그녀가 의사이기 때문에. “다른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여러분 중 누군가는 다칠 것입니다. 죽는 사람도 나올 것입니다.” 그 말에 병사들이 숙연해졌다. 그래, 자신 중 누군가는 다치고 죽을 것이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의사로서 여러분과 함께 가지만 모두를 살릴 것이라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여러분과 주님께 약속하겠습니다.” 엘리제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여러분이 다쳤을 때, 상처로 고통받을 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분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무도.” 그래,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럴 능력은 없다. 하지만. 대의명분보다는 작은오라버니 때문에 나가는 전쟁이지만. 그래도. 한 명의 의사로서. “아무도. 그 누구도 홀로 덧없이 스러지는 분이 없도록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이것이 저의 약속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축복이 함께하길.” “와아아!” 짧지만 진심이 담긴 연설에 제국의 병사들은 다시 한 번 환호했다. “데임 클로랜스!” “성(St.) 엘리제!” “황태자비 만세! 마이 레이디!” 15만의 병사가 한마음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 서 있던 황태자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 엘리제는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왜 손을? 그러나 곧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선전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병사들은 둘이 다정히 손을 잡은 것을 보고 더욱 열렬히 환호했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로마노프 만세!” “제국의 승리를 위하여!” 엘리제는 붙잡힌 손이 신경 쓰였지만, 병사들을 위해 웃어 보였다. 잡힌 손이 왠지 모르게 뜨거웠다. 한편 황태자는. ‘엘리제.’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제국군의 사기를 위해 그녀의 손을 잡은 것이 아니었다. ‘왜 이렇게 나를 미치게 한단 말인가.’ 그저 그녀를 향한 갈망이 들어, 그 갈망을 참을 수 없어 잡았을 뿐이다. ‘결국, 참전을 막지 못했지.’ 그간 그토록 노력했지만, 황제가 황실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 때문에 그녀의 참전을 막을 수 없었다. 참고로 민체스터 황제는 그날 이후 자신의 경솔했던 약속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어쩔 수 없어.’ 린덴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내가 지킬 수밖에.’ 그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걱정만으로도 이렇게 괴로운데 그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가슴이 멎어버릴지도 모른다. ‘중간에 본국으로 쫓아내려 해도, 이 고집불통 여자가 말을 들을 리 없으니.’ 그러니 방법은 단 하나다. 자신이 지킬 수밖에. 그렇게 출정식이 막을 내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찰칵! 커다란 렌즈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모습을 담았다. 최근 개발돼, 서대륙 신문사들에 처음 도입되기 시작한 사진기란 발명품이었다. 신문사들은 출정식에서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다정한 모습을 흑백 사진으로 보도했다. 한편, 출정식이 한창인 그때. 론도 황궁의 깊은 곳에 자리한 비처. 엉겅퀴가 우거진 유리궁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무슨 일이긴. 전쟁에 나가기 전, 어머니를 뵈러 왔지.” 금발, 금안. 꽃처럼 화사한 얼굴의 남자.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이자, 서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 동시에 황태자의 정적인 3황자 검제(劍帝) 미하일이었다! 그는 검은 신사복에 코트를 입고 있었는데, 허리춤에 은색 검이 이질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출정식 아니십니까?” “어차피 부황의 잔소리나 들을 텐데 가서 뭐해. 대신 부단장 보냈어.” 부단장. 3황자가 단장으로 있는 검기사단(劍-騎士團)의 부단장을 뜻한다. 전원 오러 나이츠로 이뤄진 검기사단은 서대륙 최강의 돌격 기병대였다. 유리궁의 시종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그냥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왜?” “……아시지 않으십니까.” 항상 밝은 3황자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웃으며 말했다. “어미, 아들 사이인데 뭐 어때. 오늘 못 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못 본다고. 얼굴만 보고 가지, 뭐.” “……알겠습니다. 황비 마마께서 상태가 불안정하니, 오래 있지는 마십시오.” 시종장은 어쩔 수 없이 건물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3황자의 어머니이자 현 황실의 안주인인 1황비가 머물고 있는 유리궁은 작은 저택만 했다. 궁 내부는 관리는 잘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황량한 느낌이 들었다. ‘나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3황자는 씁쓸히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꺄아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랄 소리였지만, 3황자와 시종장 모두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익숙했던 것이다. 그저 미하일의 표정만 조금 더 어두워졌다. “꺄아악! 아악! 안 돼!” 방 앞에 선 시종장이 조심히 문을 열었다. 미하일이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아들 왔어요.” 그 순간! 퍼억! 파창! 무언가 날아와 그의 이마를 때리고 산산이 깨져 나갔다. 유리잔이었다. “어머니.” 미하일은 이마와 어깨에 묻은 유리들을 털어내며 그녀를 불렀다. 서대륙 최강검답게 자동적으로 오러가 발동해 다치진 않았다. “어머니, 저 왔어요. 미하일…… 아니, 밀이에요.” 그는 방 안에서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중년의 여인을 바라봤다. 마리엔 드 차일드. 아니, 이제는 마리엔 드 로마노프가 된, 황후가 없는 현 황실의 안주인.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62 3-1 크림 반도 ========================================================================= [3-1장 : 크림 반도 (2)] 하지만 그녀는 아들이 왔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미하일의 눈이 꿈틀했다. 자해라도 했는지 손등 여기저기에 상처가 가득했다. “약을 가져와.” “네, 전하.” 시종장이 약을 가져왔고, 미하일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머니, 저 이제 크림반도로 떠나요. 반도의 사람들이 우리 제국민을 학살해 전쟁이 일어났거든요.” 과연 알아들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마리엔 황비의 눈은 여전히 초점 없이 흐릿했다. 그래도 미하일은 계속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올게요. 어머니 기쁘게 공도 많이 세우고요. 그래서 황제가 되어 황태후로 호강시켜 드릴게요. 그러니.” 그는 어머니를 조심히 껴안았다. “잘 지내고 계세요. 사랑하는 나의 레이디.” 그렇게 짧은 면담 후, 미하일은 유리궁을 나왔다. “조심히 갔다 오십시오. 강건하시길.” 시종장이 전장에 나가는 그에게 말했다. “그래, 나 없는 동안 잘 부탁하고. 상처는 잘 살펴줘.” “네, 전하.” 시종장이 들어가자, 미하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에 접어든 하늘은 맑고 청명했다. 답답한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도대체 누구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것일까?’ 어머니? 아니면 부황 민체스터? 차일드 가문? 그것도 아니면 황후? 글쎄, 모르겠다. 답답했다. ‘황위고 뭐고, 여행이나 가고 싶군.’ 그는 신사복 허리춤에 매달린 은색 검을 바라봤다. 동방 청에서 친우였던 협객, 검룡(劍龍) 운학이 가문의 보물이라며 선물로 주었던 비천검(飛天劍). ‘그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고민할 것도 없고. 술도 실컷 마시고.’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참 행복했던 시절이다. 지금이라도 비단길을 타고 달려가고 싶을 만큼. ‘그녀와 같이 가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미하일은 문득 한 명의 인물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밀이라 부르던 소녀. 황태자비로 내정된 주제에 의사가 되겠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그러면서 숱한 일들을 해낸 소녀. 엘리제 드 클로랜스. 그녀가 문득 떠올랐다. ‘황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같이 여행이나 가자고 해볼까. 그녀는 의술 여행하고, 나는 호위무사 하고.’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생각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정권 다툼보다는 한 천 배쯤. 하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은 황제가 되어야 하니까. “다녀올게요. 잘 지내고 계세요.” 그는 뒤를 돌아 유리궁에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그렇게 3황자 검제(劍帝) 미하일 드 로마노프는 자신만의 출정식을 마쳤다. *** 며칠의 시간이 지난 후. 브리티아 섬 건너, 서대륙 본토 동쪽에 위치한 크림반도였다. 콰앙! 콰앙!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의 인근 평야에서 대규모 회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포가 수없이 불을 뿜었고, 파란 복식의 공화국군이 제국군에 총검을 들고 돌진했다. “끄아악!”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자유와 평등. 공화국의 기치를 외치며 달려드는 공화국군에 제국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평원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고, 그 피는 대부분 브리티아 제국군의 것이었다. 그런데 그 지옥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얕은 산의 중턱에서였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흐음, 역시 신문은 브리티아 제국 것이 재미있다니까. 아버지가 언론을 너무 죽여 놔서 공화국 언론사들은 영. 그런데 제국은 이렇게 언론을 풀어놔도 괜찮나?” 마치 그림처럼 잘생긴, 부드러운 인상의 젊은 남자가 여유롭게 신문을 읽고 있었던 것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지옥도 옆에서 신문이라니? 하지만 남자의 정체를 알면, 이 기행을 납득할 수 있었다. 사막의 전갈. 남자는 다름 아닌, 검은 대륙의 서북부를 평정한 프랑소엔 공화국 최고의 명장 루이 니콜라스였던 것이다! 이 피로 얼룩진 지옥도를 연출한 것도 바로 그였다. 심페폴을 수비하고 있던 제국군을 교란 작전으로 흔든 뒤, 혼란을 틈타 총공격을 했고, 결과는 다음과 같다. 남자는 다 이긴 전투에 흥미를 잃고, 브리티아 제국의 신문을 읽는 데 열중했다. “흠?” 그런데 신문의 토픽란에 그의 흥미를 강하게 끄는 기사가 있었다. “황태자비가 될 여인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고?” 토픽란에는 흑백 사진으로 출정식에서 연설하는 예비 황태자비의 모습이 실려 있었다. 제복을 입은 탓일까? 기품이 느껴지는 아름다움에 루이는 입꼬리를 올렸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참으로 아름다운 소녀였지.” 그는 이 소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바로 제국의 탄신연회 때. 사절로 갔다가 춤을 신청했고,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아니, 그것 아니어도 그는 이 소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몽셀 왕국을 이용해 제국군의 뒤를 치려던 내 계획을 간파한 게 바로 이 소녀였으니까.” 그의 미소가 짙어졌다. 현명하고 지극히 아름다운 소녀. “좋군. 아주 좋아.” 그런데 그때였다. 공화국 장교가 그에게 다가 와 전투 경과를 보고했다. “각하, 대승입니다. 제국군 추정 사망자 7,000명으로 적군은 북쪽으로 후퇴 중입니다. 이로써 반도 이남은 우리 공화국의 세력권으로 넘어왔습니다.” “추적해.” “네?” “추적해서 최대한 많이 죽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충성!” 간단히 명령한 루이는 다시 신문으로, 엘리제의 사진으로 시선을 돌렸다. “참으로 아름답단 말이야.” 그는 홀린 듯 말했다. “가지고 싶을 만큼.” 그러고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곧 제국의 황태자, 공제(空帝)가 이끄는 제국의 2차 원정군이 도착하리라. 이 소녀가 포함된. “잘됐군.” 그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을 격파하다 보면 이 소녀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가지면 되겠지. 승전의 전리품으로 말이야.” 이 아름다운 소녀를 전리품으로 갖는다라. 저 인형처럼 예쁘고 기품 있는 소녀가 눈물지으면 얼마나 고혹적일까.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공제와의 싸움도 그렇고. 참 재밌는 전쟁이 되겠군.” 그렇게 엘리제, 린덴, 미하일. 루이. 그 밖의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생각과 이유를 가지고 크림반도에 모여들었다. 2차 크림전쟁의 시작이었다. *** 15만의 장병을 태운 브리티아 제국의 함대가 북해를 지나 발토해를 가르고 있었다. 수많은 증기선이 바다를 항해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이런 규모의 함대는 제국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로열 네이비(Royal Navy)라 불리는 제국의 함대는 세계 최강의 해군 전력이었으니까. 공화국도 해군력만큼은 제국에 한참 못 미쳤다. 서대륙 나머지 열강들이 모두 모여야 비슷한 수준. 그만큼 제국의 해군력은 압도적이었다. “이런 배 타본 적 있어, 리제? 대단하지?” 3황자 미하일이 친근하게 엘리제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 백원의 궁, 혈탑(血塔)에서 만남 후 종종 미하일이 그녀를 찾아가서, 둘은 이제 많이 친해진 상태였다. “없어요. 확실히 크네요.” 황태자를 비롯한 그녀와 3황자는 기함인 퀸 엘리자베스호에 탑승해 있었다. 제국 해양 기술력의 결정체인 엘리자베스호는 무척 거대하고 위엄이 넘쳤다. “리제는 론도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지? 이제 멀미는 괜찮아?” “바람이 잠잠해 지금은 약간 나아요.” 엘리제는 약간 하얀 안색으로 말했다. 배를 처음 타는지라 멀미로 엄청 고생했다. “이제 곧 로마노프령(領)의 상트부르항에 도착할 거야. 상트부르가 어디인지는 알지?” “네, 당연히 알죠.” 로마노프령은 로마노프 황가의 개인 영지를 뜻하는 말이다. 제국의 땅이면 그냥 제국이지, 왜 이런 명칭이 붙었느냐면, 로마노프 황가가 원래는 이곳 서대륙 북단의 상트부르 근처를 지배하는 대공가(大公家)였기 때문이다. 멀리 왕족의 피가 섞였을 뿐, 사실 브리티아 섬과는 상관이 없던 가문. 그런데 그 로마노프 가문이 브리티아 섬의 왕가가 된 것은 다소 황당한 이유 때문이었다. ‘내전으로 왕위 계승자가 모조리 죽어버린 탓이었지.’ 약 350년 전, 당시는 왕국이었던 브리티아에 큰 내전이 일어났다. 왕위를 놓고 왕실과 귀족이 두 패로 나뉘어 일으킨 그 싸움은 무려 30년을 끌었고, 왕가의 피가 섞인 사람의 씨를 말려 버렸다. 당시 힘없는 왕족들은 죽지 않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살았을 정도. 그렇게 광란의 내전 후, 정신을 차린 귀족들이 새로운 왕을 모시려고 봤더니 섬 안에는 남아 있는 왕족이 없었다. ‘그래서 무려 왕위 계승 서열 58위였던 로마노프 대공이 왕으로 취임했고.’ 반대도 많았지만, 딱히 마땅한 사람이 없어 로마노프 대공은 얼떨결에 대공 겸 브리티아 왕으로 취임했다. 로마노프 왕조(王朝)의 시작이었다. ‘여기서 반전은 로마노프 가문의 통치력이었지.’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 지배자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이런 파격적인 기치를 가지고 있는 로마노프 가문은 대(代)마다 거듭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래서 100년도 안 돼 브리티아 섬을 통일해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번영을 거듭하더니 작금에 이르러서는 세계를 아우르는 최강의 열강이 되었다. “로마노프령에 도착해서는 육로로 이동할 것이니 각오해야 해. 말은 탈 줄 알지?”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 전 렌 오라버니에게 혼나며 배워 이제 어지간하게 탈 줄 안다. 그런데 미하일이 짓궂게 말했다. “만약 말 타는 게 힘들면, 내 말에 태워줄게. 이래 봬도 서대륙 최강의 기사라고. 승마감은 걱정하지 마. 내 허리만 잘 잡고 있어.” “뭐예요. 사양할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인데? 진심이야.” “됐어요. 전하의 허리를 잡고 말을 탔다가, 론도에서 전하를 기다리는 영애들의 원망을 어떻게 감당하라고요?” 그 말에 미하일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고,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친구로 지냈던 지난 삶의 기억 때문일까? 이번 삶에선 많은 만남을 가지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편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런 그들을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이었다. ‘둘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거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저렇게 하고 있는 거야?’ 2층의 함장실에서 갑판의 엘리제와 미하일을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좋다고 저렇게 웃는 거지, 저 소녀는?’ 미하일과 이야기할 때마다 뭐가 좋은지, 연신 미소를 짓는 엘리제를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에게는 미소는커녕 그렇게 싫은 티나 내면서! ‘옷은 또 왜 저렇게 입은 거야? 젠장.’ 엘리제가 입고 있는 옷은 제국군의 제복이었다. 군사 제복이다 보니 그녀의 백금발과 인형 같은 하얀 얼굴에 어우러져 고결한 기품이 흘렀다. 그런데 붉은 제복이 몸에 딱 달라붙어서일까? 이상하게도 묘하게 고혹적인 느낌이 함께 들었다. 린덴은 다른 놈들이 그녀를 쳐다볼 때마다 열불이 솟구쳐 참을 수가 없었다. ‘육지에 도착하면 바로 전서구를 보내 여성용 제복을 새로 디자인하라고 해야겠어. 최대한 펑퍼짐하고 못나게. 색깔은 화려한 적색이 아닌, 누리끼리한 황토색 정도가 적당하겠군.’ 그렇게 세계 최초의 여군 전용 제복이 결정되었다. ‘하여튼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하루에도 몇 번을 하는지 모를 생각을 중얼거리며 린덴은 눈을 감았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하지?’ 그가 고민하고 있는 것은 엘리제를 대하는 것이었다. 린덴은 출정 전 결심한 것이 있었다. 첫 번째는 그녀를 지키는 것. 자신은 이 전쟁에서 그녀를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고 두 번째는 그녀의 마음을 가지는 것. 아무리 아프고, 상처 입어도 그는 그녀의 마음을 가지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여자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점이었다. 연애는커녕 여자를 불필요한 장식쯤으로 여겼던 그가 여자의 마음에 대해 어떻게 알겠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고민해 봤으나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조언이라도 구해볼까, 고개를 돌렸으나 옆에 서 있는 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벽창호인 렌 남작.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아니다.” 도움이 안 됐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평화로운(?) 항해 끝에 함대는 로마노프령에 도착했다. 그리고 곧바로 크림반도로 진격해 전선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선에 도착한 린덴의 얼굴이 굳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63 3-2 Lady with the Lamp ========================================================================= 전선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다. 1차 원정대였던, 2군단은 반쯤 궤멸하여 있었고, 로마노프령에서 미리 출발한 본토 소속 15만의 지원군은 크림반도 북단까지 몰려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모두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 때문이었다. *** 총사령관인 린덴은 먼저 병력을 추렸다. 제국의 병력은 브리티아에서 지원 온 15만과 로마노프령에서 지원 온 15만. 그리고 궤멸된 2군단의 패잔병을 합쳐 대략 32만이었다. “수적으로 열세군.” “네, 적들은 약 40만이 넘으니까요.” 백전노장 맥가일 원수가 답했다. 귀족도 아닌, 평민 출신으로 군부의 원수까지 오른 그는 제국군의 전설과도 같은 노장이었다. “몽셀군 2만, 크림군 1만에 무어군 7만, 스위센 용병 3만, 그리고 공화국군 30만이 맞나?” “네.” 10만이 넘는 병력 차이. 하지만 린덴은 이렇게 말했다. “해볼 만하겠군.” 맥가일 원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대(大)브리티아 제국군이니까요.” 그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브리티아 제국군은 세계 최강의 군대. 크림군, 무어군, 스위센 용병 따위 적수가 아니었다. 문제는 공화국군과 기만술의 달인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사막의 전갈이 거슬리는군요. 어떻게 계책이 들어올지 모르니.” 맥가일은 하얀 눈썹을 찌푸렸다. 황태자 린덴은 짧게 답했다. “교활한 계책을 상대하는 법은 간단하다. 정공법으로 간다.” “정공법이요?”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그는 검은 대륙에서 앙젤리의 패권을 두고 사막의 전갈과 전쟁한 적이 있었다. 결과는 자신의 미세한 판정승. 공화국과 제국은 화평 조약을 맺고, 앙젤리를 중립국으로 두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진정한 승리라 볼 수는 없지.’ 당시 제국의 피해는 막심했다. 1황자인 지펠이 사망했고, 수많은 병사가 죽었다. 모두 루이 니콜라스의 계책에 휘말린 탓이었다. 그때 깨달은 것. “계책을 따라가려다 기만술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그저 정공법으로 나간다. 우리는 대(大)제국군.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사(邪)에는 정(正)으로. 그게 그가 사막의 전갈에게 내놓은 답이었다. 그렇게 린덴은 전선을 정비했다. 여러 요충지를 기반으로 서와 동으로 부대를 나누었고, 맥가일 원수와 또 다른 장군, 라이트 후작에게 각 부대를 맡겼다. 그리고 자신은 중앙의 사령부에서 중앙군을 이끌며 양 부대를 지휘 및 지원하였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기울던 제국군과 공화국군의 전투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그리고 그때 엘리제는 종군 의사로서 야전 후방 병원에 배치되었다. 야전 후방 병원은 황태자가 자리한 사령부 지척에 위치해 있었다. “이쪽입니다, 데임. 발걸음을 조심하십시오.” “네, 감사해요. 얼마나 남았죠?” “거의 다 왔습니다.” 명을 받은 병사가 그녀를 안내해 주었다. 병사는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여인이자, 론도를 구한 의술의 성녀 엘리제를 선망의 눈으로 바라봤다. 마음만 고운 게 아니라 얼굴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분이 우리 제국의 황태자비.’ 병사의 마음에 사기가 올라갔다. 저런 퍼스트레이디를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더 걸은 후, 병사가 말했다. “다 왔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눈을 깜빡였다. “……다 왔다고요?” “네, 데임. 이곳입니다.” 엘리제는 병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봤다. 분명 건물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저곳은……. “저곳이…… 병원이라고요?” “네, 저곳이 사령부 휘하 후방 야전병원입니다.” 다 쓰러져 가는 회색의 건물. 사람이 머물 것이라곤 상상도 못 할 정도로 더러운 저 건물이 야전병원이라고? ‘말도 안 돼.’ 엘리제는 자신이 잘못 본 것이길 바라며 다시 한 번 바라봤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폐가보다도 못한, 다 쓰러져 가는 저 건물이 대(大)제국군의 생명을 책임지는 야전병원이었다. *** “으아아!” “죽고 싶지 않아……!” “아아……!” 내키지 않은 마음을 삼키고 건물에 들어가 보니, 곳곳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맙소사.’ 엘리제는 비명을 삼켰다. 부상병들의 상처가 끔찍해서가 아니었다. 총탄과 화약에 짓이겨진 상처는 차마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긴 했지만, 그녀는 지구에서 외과의사를 하면서 웬만큼 끔찍한 상처에는 면역되어 있었다. 그녀가 놀란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누워 있는 환경 때문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마치 더러운 공중화장실을 연상시키는 비위생적인 방에 수십 명의 부상자가 한데 뭉쳐 있었다. 자신의 공간을 가지고 누워 있는 것이 아닌, 물건을 쑤셔 넣듯, ‘말 그대로’ 뭉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처에 대충 붕대 정도만 감긴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다. 테레사 병원의 빈민 병실도, 아니, 론도의 슬럼가도 이렇진 않다. 지상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란 생각이 들 정도. ‘이런 상황이면 오히려 병이 생길 거야. 살 사람도 모조리 전염병에 걸려 죽겠어.’ 엘리제는 치를 떨었다. 사실 그녀가 전쟁에 참전한 이유는 뭇 사람들의 오해와 다르게 큰 뜻을 가져서가 아니었다. 그저 작은오라버니를 죽음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녀의 마음을 차갑게 식게 하였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한 명의 의사로서, 이들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었다. ‘이건 그냥 부상병들을 방치해 둔 거나 마찬가지야. 죽든지, 알아서 살아나든지. 아니, 방치보다 더 나빠. 밖에 버려두면 전염병은 안 옮겠지만, 이건 부상병들끼리 서로 병이 옮아 다 죽을 상황이잖아!’ 사실 당시 군대 야전병원의 이런 참상은 브리티아 제국뿐 아니라, 서대륙 어느 열강이나 마찬가지였다. 군대가 병사들 개개인의 부상을 회복시키는 데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지구에서도 군 병원이 실제로 의료시설다워진 것은 근현대에 가까워서였다. 그전에는 이곳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한 명, 두 명을 치료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기본적인 시스템을 개선해야 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분히 누군가를 치료할 환경도 아니고, 이런 환경에선 그녀가 한 명을 살릴 때 100명이 죽어갈 것이다. ‘책임자를 만나자.’ *** 야전병원의 책임자는 엘리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을 뿐이니까. 사실 지금 군에서 그녀의 위치는 조금 모호했다. 원정군으로 참전했으니, 민간인은 아닌데 군인으로서 정확한 계급과 위치가 없었다. 그저 뛰어난 의사이자, 황태자비로 내정된 여인으로 대우받을 뿐. 뭔가를 요구할 제대로 된 권한과 직위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그 황태자비 후보란 이름 덕에 곧바로 책임자를 만날 수 있긴 했었다. “존귀한 데임 클로랜스를 뵙습니다. 야전병원의 책임자인 헤인츠 대위라고 합니다.” 약간은 과장된 인사. 헤인츠 대위는 배가 나온 30대 후반의 남자였는데, 살집에 묻힌 눈이 게으른 인상을 주었다. 한편 그와 인사를 나눈 엘리제는 속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그에게서 이상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이건 알코올 냄새인데? 설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국군 대위가 전장에서, 그것도 대낮에 술을 마실 리가 없지 않은가? “병사들을 위해 참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곳이 야전병원이니 환자들을 돌보시면 됩니다. 많은 병사를 살려주시기를 부탁합니다.” 헤인츠는 말했다. 예의 바르긴 하지만, 관심 있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저랑 상관없이 당신이 알아서 치료하면 됩니다란 느낌? 실제로 그는 그녀가 부상병들을 돌보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떻게 되든,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는 배배 꼬인 마음으로 생각했다. 헤인츠 대위는 원래 병원의 책임자가 아니었다. 원래 직위는 포병대의 중대장. 하지만 몇 번이나 거듭된 실책으로 좌천을 거듭해 한직 중의 한직인 이곳까지 쫓겨 온 것이다. 곧 강제 전역당할 것이 분명한 상태로, 그는 자신의 유배지인 이곳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든 큰 관심이 없었다. “헤인츠 대위님.” “네, 데임.” “이곳 환자들을 위해 드릴 말씀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엘리제는 귀찮은 그의 안색을 보고, 이야기가 안 풀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일단 말했다. “병사들의 치료를 위해 환경 개선이 시급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제는 자신이 느낀 점과 의사로서 시급히 개선해야 할 점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그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환경이 그런 걸요.” “……!” “론도에서만 자란 고귀한 데임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원래 전쟁이란 것이 다 그렇습니다. 어쩔 수 없는 것이지요.” 그 관심 없는 반응에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밑에서 환자들은 죽어가고 있는데, 책임자는 관심도 없다니. “전장의 환경이 열악한 것은 저도 압니다. 그래도…… 그런 상황 속에서라도 부상병들이 가능한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아닐까요?” 그래도 엘리제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거야 그렇지요. 하지만 그건 제 권한 밖의 일입니다. 저는 그냥 이 병원을 관리하라는 명만 받았거든요. 정 데임께서 환경 개선을 하고 싶으시면 다른 계통에 건의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게으른 공무원과 군인의 특기인 책임 돌리기였다.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 부분을 상의하려면 어느 쪽으로 찾아가야 할까요?”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병원에 물품을 보급하는 사령부의 보급처에 한 번 문의해 보십시오.” 그 말을 듣고, 엘리제는 등을 돌렸다. 저치와 더 이야기해 봤자, 얻을 게 없을 것 같다. “조심히 가십시오.” 엘리제는 곧바로 병원을 빠져나와 사령부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헤인츠 대위는 비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사령부도 이곳 야전병원 따위 큰 신경 쓰지 않는다고.’ 자신같이 끝난 군인을 처박아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야전병원은, 정확히 말하면 군 의료는 사령부의 주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끝난 군 생활. 이 할 일 없는 곳에서 적당히 있다가 적당히 전역하면 되지.’ 헤인츠 대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 엘리제는 사령부로 향했다. 다행히 야전병원과 린덴이 있는 사령부는 지척이어서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를 알아본 한 장교가 말했다. 그녀는 사정을 설명하고, 병원의 보급 계통 책임자와 면담을 요청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래도 그녀의 신분 때문일까. 금방 담당자와 면담할 수 있었다. “충성! 황태자비를 뵙습니다!” 경례하는 존 소령은 야전병원을 비롯한 중앙군에 보급을 담당하는 영관급 장교였다. 보급 업무의 핵심을 맡고 있어서인지, 좌천을 거듭한 낙오자 헤인츠 대위와는 예의와 기강이 비교도 되지 않았다. “아직 황태자비가 아니니, 그렇게 예를 차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편하게 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일단 앉으십시오. 커피 드십니까?” “네.” 존 소령은 그녀에게 차를 대접했다. “전장이라 질 나쁜 커피밖에 없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야전병원 문제로 오셨다고 하셨습니까?” 헤인츠보다 훨씬 호의적인 태도에 엘리제는 희망을 품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씀해 주십시오.” “부상병들을 치료하기 위해 환경 개선이 필요합니다. 의약품의 보급도 원활하지 않고요.” 엘리제는 헤인츠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음…….” 존 소령은 턱을 쓰다듬었다.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00064 3-2 Lady with the Lamp ========================================================================= [3-2장 : Lady with the Lamp (2)] 뭔가 곤란한 표정. “그런가요.” 그러며 조심히 입을 여는데, 목소리는 예의는 발랐지만 골자는 헤인츠 대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임.” “네?” “정말 죄송하지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네?” “이곳은 군대입니다. 병사들이 열악한 치료를 받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건 전장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존 소령은 고개를 저었다. “데임께서 론도에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한 명의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이해합니다. 병사들을 책임지는 지휘관으로서 그런 마음에 감사하고요.” “……!” “하지만 이곳은 전장입니다. 부상을 당하고, 총탄에 죽는 것이 당연한 곳이지요. 전장이라서 부족한 치료는 병사들 개개인이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엘리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존 소령의 말은 이 시대 군 지휘부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병사들이 열악한 치료를 받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만 여겼다. 이 최악의 환경을 조금만 개선해도 사망자가 획기적으로 줄 수 있다는 발상은 하지도 못했다. “론도에서처럼 최고의 치료를 하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엘리제는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의 환경 개선이면 돼요. 큰 지원이나 자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조금의 도움만 있으면, 지금처럼 최악의 사망률을 훨씬 떨어뜨릴 수 있어요.” 하지만 존 소령은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데임의 말씀이시니 고려해 보겠습니다.” “고려해 보시겠다는 말은?” “기회를 봐서 윗선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존 소령은 웃으며 말했다. “이야기가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중앙군에 탄약과 포탄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요.” 그렇게 엘리제는 밖으로 나왔다. 사령부까지 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윗선과 상의한다고? 도대체 언제?’ 자신이 한 부탁이니 언젠가 상의를 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태도를 볼 때 적극적으로 건의할 것 같긴 않다. 만약 이야기가 잘 풀린다 해도, 지원이 올 때까지는 또 얼마나 오래 걸릴까? 지금 이 순간도 부상병들은 끔찍한 환경 속에서 부상이 악화하고 있는데. ‘너무 만만히 생각했어. 단순히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자만했다. 현대 지구의 의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장의 환자들을 숱하게 살려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마치 론도에서 해냈던 것처럼. 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이 전장에서 필요한 것은 기적적인 의술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치력. 힘이 필요해.’ 이 끔찍한 병원 환경을 개선하고 미개한 군 의료를 개선할 정치력. 그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녀는 고민했다. 자신은 일개 원정군에 불과했다. 뛰어난 의사이긴 했지만, 제대로 된 직위도 없었다. 따라서 그저 이렇게 메아리 없는 건의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물론 황태자비. 퍼스트레이디가 될 여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존경의 사유이지, 권한을 가진 직위가 아니었다. 명예로운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란 것도 마찬가지. ‘제국군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전통의 집단. 아무리 황태자비라 해도 근거 없이 마음대로 권한을 사용할 수는 없어.’ 황태자비. 아니, 황후, 황자가 오더라도 적합한 절차와 근거에 따른 명이 아니면 저들은 꿈쩍도 안 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순간 무력한 마음이 들었으나,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생각하자. 해내야 해, 엘리제. 그래야 부상병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어.’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사령부엔 무슨 일이지?” “……!” 깜짝 놀라 돌아보니 차가운 조각 같은 얼굴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전하를 뵙습니다.” “예는 됐다. 무슨 일로 사령부에 왔지? 야전병원으로 배치된 것 아니었나? 용무가 있나?”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 말씀드리면?’ 황태자는 원정군의 총사령관이다. 다른 사람을 통할 것 없이 황태자만 설득하면 만사형통이었다. 그녀는 고민했다. ‘전하께 이야기해볼까?’ 물론 개인적으로 부탁하는 것이 꺼려지긴 한다. 개인적인 부탁을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민체스터 황제에 의해 강제로 결혼이 예정되어 있긴 하지만 그뿐이다. 약혼식을 올린 것도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황태자와 그녀는 아직 아무런 사이도 아니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걸린 일이다. 밑져야 본전인데,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으로 그녀가 주저할 때였다. 황태자가 먼저 그녀에게 물었다. “무슨 용무로 온 거지? 혹시 용무가 있으면 나한테 이야기해도 된다.” “그게...” 그녀가 주저하자 황태자는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괜찮으니 이야기해라. 빨리.” 결국, 그녀는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은 야전병원에서…….” 병원의 환경이 열악해, 개선이 필요할 것 같다. 지원 요청을 하러 왔다. “그래서? 지원은 받기로 했나?” “아니요. 존 소령께서 윗선과 상의를 해본다고는 하셨는데, 확답은 안 주셨습니다.” 엘리제는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황태자는 의외의 말을 하였다. “잘됐군.” “네?” “그 윗선의 꼭대기가 바로 나야. 그러니 나한테 이야기해라.” “……!” “따라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보지.” *** 황태자의 방은 사령부 건물의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전장임에도 그의 방은 평소 성격처럼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면은 이전 삶과 똑같으시네.’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사실 그녀는 방을 깨끗이 정리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지구에서도 그녀의 기숙사 방은 이리저리 어지럽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글씨도 이전 삶처럼 똑바르시고.’ 자신이 워낙 악필인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액자로 보관해 후세에 물려줘도 좋을 만큼 명필이었다. “앉지.” 하지만 이전 삶과 똑같은 건 그것 두 개였다. 최근 그는 기이한 모습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자, 한 잔 들어.” “……!” 지금 그는 그녀에게 차를 달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직접! 저 황태자가! “괘, 괜찮습니다. 어찌 제가.” 엘리제는 화들짝 놀라 사양했다. “왜? 싫은가?” “그, 그건 아닙니다. 다만 황송하여.” “싫지 않으면 마셔.” 엘리제는 어색한 마음으로 차를 마셨다. 그가 직접 내려준 차를 마시다니. 엄청 불편했다. 그리고 불편한 것뿐 아니라 맛도 없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뭐야? 맥가일 원수. 이야기가 다르잖아?’ 평민에서 군부의 원수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위인, 맥가일. 총사령관인 린덴과 부총사령관인 맥가일은 자연히 많은 대화를 나누었고, 린덴은 우연히 맥가일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껄껄! 전하! 저만 믿으십시오! 제가 이래 봬도 왕년에 론도에서 알아주는 쾌남이었습니다!’ 황태자의 생각지도 못한 고민에 맥가일이 호언장담했다. 연애하면 자신이 박사라고! 자신만 믿으라고! 왠지 별로 믿음이 안 갔지만, 그래도 린덴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자는 부드러움에 약합니다. 전하께서 데임께 부드러운 모습을 보인다면, 데임은 사르르 녹아내릴 것입니다.’ 그 말에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부드러움. 젠장, 그가 제일 자신 없는 거였다. 그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말로 하시기 어려우시면,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어떻게?’ ‘둘이 단둘이 있을 때 차를 달여 주신다거나 하는 겁니다. 분명 감동할 것입니다!’ 그러며 맥가일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러다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져서 크림에서 공주님이라도 태어나는 것 아니냐고. ‘좋기는. 무슨. 개뿔.’ 차를 마신 엘리제는 전혀 감동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냥 불편해 보였다. 그가 끓인 차가 너무 맛없어서였지만 그는 몰랐다. 황태자는 입맛을 쓰게 다시고 본론을 꺼냈다. “그래, 자세히 이야기해 보지. 야전병원의 환경을 개선해야겠다고?” “네, 현재 상태에선 부상병들의 치료가 제대로 이뤄질 수가 없습니다. 치료는커녕 환경이 너무 안 좋아 없던 병도 생길 지경입니다.” “환경을 개선하면? 개선하면 우리 제국군이 어떤 이득을 기대할 수 있지?” 황태자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그 이득을 위해 제국군이 투자해야 하는 자원은? 만약 비율이 맞지 않는다면 지원해 줄 수 없어.” 사실 그는 엘리제가 요청하는 거는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설사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째로 달라는 것일지라도. 그냥 이유 없이 다 들어주고 싶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빠져 있으니까. 여자 때문에 나라를 망친 얼간이 폭군들의 심정이 이해가 될 지경. 하지만 그는 이 제국군의 통수권자다. 아무리 엘리제, 그녀의 부탁이라도 정확한 기준을 통해 판단을 내려야 했다. “…….” 한편 엘리제는 그가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했음을 깨달았다.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지원이 결정되리라. 짧은 시간, 그녀의 머릿속에서 현대 의학 지식에서 산출된 결론이 도출되었다. “기대할 수 있는 이득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상자의 사망률을 지금보다.” 그녀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10배 낮출 수 있습니다.” “……!” 어지간한 린덴도 그 말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배? 확실한가?” “네.”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축소한 것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군 병원의 환경을 개혁 후 부상병 사망률이 42%에서 2%로 20배나 떨어졌으니까.’ 부상병 사망률 42%는 현재 크림반도의 야전병원 사망률과 정확히 일치했다. ‘정말이군.’ 린덴은 확신에 찬 대답을 듣고 그녀가 거짓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하긴 저 소녀는 엘리제다. 론도를 죽음에서 구해낸. 거짓말 따위를 할 리가 없다. 진실일 것이다. “제국군이 투자해야 하는 자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수처리를 비롯한 쾌적한 환경. 그리고 본국으로부터 원활한 의약품의 보급. 필요한 인력의 지원입니다.” 큰 것들은 아니다. 모두 어렵지 않은 것들. 아니, 다른 걸 떠나 사망률을 2배도 아닌 10배나 낮출 수 있다지 않은가? 아무리 큰 비용이 들어도 할 만한 투자이다. ‘당장 시행해야겠군.’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바로 승낙하는 것보단 그게 낫겠군.’ 자신에게 떠오른 생각에 그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묘책. 그야말로 묘책이다.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며, 어쩌면 한 가지를 더 이룰 수 있는. “좋다. 네 이야기는 잘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네 이야기에 흥미가 가서 지원을 해주고 싶어.” “감사합니다, 전하!”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런 사안은 나 혼자 듣고 독단으로 결정할 수가 없다. 위급하거나, 중대한 사안이면 총사인 내가 결정하겠으나, 그런 것은 아니니. 무슨 말인지 이해하나?” 엘리제는 이해했다. 군부에서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리라. 확실히 그러면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는 부하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고, 자신도 일의 진행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건 엘리제의 오해였다. 2년 전, 앙젤리 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운 린덴의 군 장악력은 고작 이런 걸로 흔들리지 않는다. 엘리제에게는 그냥 거짓말한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하지.” “……?” “이틀 뒤, 사령부 주관 전체 회의가 있다. 그 자리에 참석해서 네 주장을 나에게 설득해 보아라.” “……!”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듣기에 네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면 네 요청을 들어주겠다.” “알겠습니다. 깊은 배려에 진심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전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말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에게 고마웠다. ‘그가 날 배려했기 때문에 가능한 최고의 기회야.’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없었으리라. 아마 그녀 홀로 힘겨운 투쟁을 해야 했을 것이다. 기약도 없이. 그런데 그때 그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말로만?” “네?”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것이냐?” ============================ 작품 후기 ============================ 내일 목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00065 3-2 Lady with the Lamp ========================================================================= 3-2장 : Lady with the Lamp (3) 엘리제는 당황해 물었다. “그, 그러면? 혹시 바라는 것이라도?” “내가 너를 도와주었으니, 너도 내 부탁을 하나 들어주어야지. 그렇지 않으냐?” 그, 그런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어떤…… 부탁을…….” 그리고 황태자가 한 말은 정말로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한번 웃어봐라.” “네?” “맨날 찡그리고 있지 않으냐. 한번 웃어보라고.” 그러며 황태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앞에선 잘도 웃으면서. 내 앞에선 절대 웃지 않지. “네, 네…….” 엘리제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조금 더. 잘 웃어봐라.” “네…….” 엘리제는 마치 지구에서 사진기 앞에 섰던 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름 잘 지어졌다 생각하며 물었다. “이 정도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봤던 것이다. 그가, 저 린덴 드 로마노프의 얼굴이 자신의 미소를 보고 잠시 부드러워진 것이다. ‘뭐, 뭐지?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인가?’ 이전 삶, 9년을 짝으로 지냈지만 한 번도 못 본 얼굴이다. “엘리제.” “네, 네, 전하?”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이유 없이. 자신도 모르게. “그,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오, 오늘 감사했습니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그의 방을 나갔다. 탁! 그의 방문을 닫고, 몸에 힘이 빠져 그녀는 벽에 몸을 기대었다. 두근. 가슴이 뛰었다. 알 수 없게. 그리고 방에 남은 린덴은. ‘미치겠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렇게 좋다니.’ 안다. 방금 미소는 그저 억지로 지은 것이란 것을. 그래도 좋았다. 저 얼굴이 미소를 그리는 게. 저 미소를 매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맥가일 원수에게 다른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해야겠군.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 야전병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틀간 자료를 정리했다. 환자들의 상태, 부상 원인, 사망원인 등을 체계적으로 종이에 적어 내렸다. 다행히 크림전쟁 발발 후 병원에 들렀던 병사들에 대해 간단한 의무 기록이 있었기에 자료는 풍부했다. ‘그런데 전하. 마지막에 도대체 뭐였을까?’ 엘리제는 떨리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았다. ‘정신 차려. 엘리제. 이상한 생각하지 마.’ 별 의미 없었을 것이다. 그게 분명했다. 아니, 그래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생각했다. 그리고 최대한 집중해 이틀 뒤 회의를 준비했다. 금방 시간이 지나, 사령부 주관 회의가 다가왔다. 그녀는 두툼한 자료를 들고 회의에 참석했다. “그래서 서부 전선에서 공화국군의 진군이 주춤합니다.” “동부의 포트랭 요새가 공격받았으나, 검제 전하의 검기사단의 측면 기병 돌격으로 기습 후, 격퇴하였습니다.” 총사인 황태자에게 각 방면의 참모가 보고하였다. 전열을 완전히 정비한 덕일까? 전황은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은 듯했다. “전하, 그런데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사령부 회의에 어쩐 일로?” “아아.”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 중 그녀가 말할 안건이 있다. 기다리도록.” “네.” 엘리제는 얌전히 앉아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렸다. 전황, 부대 배치, 보급, 정보 등 중요한 안건이 끝나고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그녀의 차례가 왔다. “종군 의사로 참전한 엘리제 드 클로랜스입니다. 부상병의 생존율 증가를 위해 건의가 있어서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군부의 요인들은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의료는 물론 꼭 필요한 것이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군부의 중핵인 그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적의 격파와 승리! 따라서 승리를 위한 행위 외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역시 별 관심이 없어.’ 엘리제는 그 반응을 예상했다. 그래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을 먼저 꺼냈다. 질질 끌면 반응만 안 좋아질 테니. “현 야전병원 부상병들의 사망률은 40% 이상입니다. 부상을 당하면 반 가까이가 사망하는 것이지요. 이는 군 전력에 큰 누실이 되며, 승리에도 큰 장애가 됩니다. 만약 이 사망률을 낮출 수 있다면 전쟁에 승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엘리제는 장내를 둘러보았다. “이 사망률 42%를 10배 이상 낮출 방법이 있습니다.” “……!” 그 말에 군부의 모두가 경악에 빠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데임이 론도를 구한 영웅인 것은 아오. 하지만 10배라니. 너무 허언이 심하지 않소?” 엘리제는 고개를 젓고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 근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 “펼쳐주세요.” 같이 온 2명의 병사에게 그녀는 부탁했다. 병사들은 커다란 두루마리 종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단상 앞에 펼쳤다. “……?!” 종이에는 정체불명의 막대기와 원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요, 데임?” “다이어그램입니다.” 다이어그램. 통계를 기호, 선, 점 등을 사용해 이해시키는 설명적 그림으로 직관적이기 때문에 설득 및 프레젠테이션에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나, 이 시대에는 익숙한 방법은 아니었다. “이 원의 날개들은 시기별 사망자의 원인을 나타낸 것입니다. 안의 빨간 부분이 부상으로 인한 사망이고, 바깥의 파란 부분이 다른 원인으로 인한 사망입니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군부의 핵심. 즉, 제국의 엘리트들이다. 그녀의 말을 단숨에 받아들여 다이어그램을 이해했다. 그리고 원에 담긴 통계적 의미에 모두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허허, 이럴 수가?” “이게 제대로 된 정보요, 데임?”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4개월 사망자의 사망 기록을 토대로 만든 자료입니다. 정확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불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사망의 원인. 부상은 단 2%도 되지 않았다. 모두 설사나 폐렴 등 다른 감염성 질환이 합병되어 사망한 것이었다. ‘나도 이 사실을 의대에서 처음 배울 때 놀랐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실제 전쟁에서 병사들이 사망하는 원인은 거의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질병이 합병해 사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최첨단 군 의료 시스템을 가진 현대의 미군도 80% 이상이 질병에 의한 사망이니까.’ 그녀는 설명을 이었다. “이 그래프는 사망에 이르게 한 질병을 도식화한 것입니다. 대부분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전염되는 질환들입니다.” “…….” 장내가 조용해졌다. 모두 그녀가 하는 말의 요지를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야전병원의 환경만 개선한다면 전염성 질환들의 발생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고,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급격히 낮출 수 있을 것입니다.” “허허, 그래도 10배라.” 사람들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때, 총사령관인 황태자가 말했다. “해보지.” “전하?” 모두 린덴을 바라봤다. “들었지 않나? 무려 사망률을 10배나 낮출 수 있다고. 이건 할까 말까 고민할 게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되는데?” “그건 그렇습니다.” 무려 10배다. 10배, 아니, 최소 3배만 사망률이 낮아져도 군 전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혹 반대하는 사람 있나?” “없습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그리고 그때, 엘리제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지원을 얻어낸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이제 제대로 된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그 순간,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결정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단순히 지원을 해주는 것이 아닌. “엘리제 드 클로랜스를 제국군 삼군(三軍) 사령부 소속, 임시 의무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 일을 진행하도록 하지.” “……네?”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삼군 사령부 소속 의무사령관? 이게 무슨 말? 이해 못한 건 군부의 요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듣지 않았나. 데임 클로랜스를 병사들의 회복을 책임지는 의무사령관으로 임명한다고.” “하, 하지만 제국군 편제에 그런 보직은 없습니다!” “없으면 만들면 되지, 뭐가 문제인가?” 그러며 린덴은 부총사령관인 맥가일 원수를 바라봤다. “원수, 총사인 내가 사령부 소속의 의무사령부를 만드는 데 군법상 문제가 있는가?” “없습니다, 전하.” 사실 린덴은 맥가일과는 이야기가 끝난 상태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말을 더듬거렸다. “하, 하지만…… 그래도…… 전례가…….” “그만.” 황태자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지금껏 의무사령부라는 편제가 없었던 게 이상한 것 아닌가? 전쟁할 때마다 최소 수만 명씩 죽고 다쳐나가는데 말이야.” “……!” “그리고 사망률을 10배 이상이나 낮추는 거대 프로젝트야. 이 프로젝트를 어느 부서에서 감당할 건가? 보급? 작전? 정보? 말해보지.” 언급당한 부서의 장들은 눈을 피했다. 자신들은 그런 프로젝트를 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면 모두 동의한 것으로 알지. 데임 클로랜스, 직위는. 음, 대령 정도가 적당하겠군.” “……!” 이번에도 사람들은 경악했다. 대령이라니! 장군(Star) 바로 밑의, 최고위 지휘관이었다. 편제마다 다르지만, 보통 1,500명 정도를 지휘하는 연대장이 대령이었다. “그, 그건 너무 과합니다, 전하.” “뭐가 과해? 사령부 정보 참모장 계급이 뭐지?” “……준장입니다.” 준장. 원 스타의 장군을 뜻한다. “사령부 작전 참모장은?” “준장입니다. “사령부 군수지원부 사령관은?” “……소장(two star)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지? 원래 사령부 소속 특수 병과의 장은 준장이 아니었나? 대령이 아니라 준장 직위가 맞다고 하는 것인가?” 사람들은 하얗게 질려 고개를 저었다. 장성인 준장이라니! 말도 안 된다. “아니면, 그대들 중 이 직위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 있나? 나는 론도를 3일 만에 구한 저 소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인물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들, 아니, 제국군 전체를 통틀어도 저 소녀보다 잘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제국군 외부의 민간인사를 살펴도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역사상 대역병을 3일 만에 해결한 의사는 아무도 없으니까. “물론 아무 조건 없이 이런 중책을 맡기는 것은 아니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임시’라고.” “그러면 그 말씀은?” 황태자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데임 클로랜스, 너에게 임시로 의무사령관 직위를 맡기는 대신 조건이 있다.” “하명하시옵소서.” 솔직히 엘리제는 지금 정신이 없었다. 그저 지원만 받으려 한 건데, 의무사령관이라니? 자신보고 군 의료의 수장이 되라는 것 아닌가? ‘잠깐. 그러고 보니 내가 생각하는 일을 하려면 이게 가장 낫긴 하잖아?’ 군대에서 일을 진행하려면, 군 조직의 특성상 그에 걸맞은 계급과 권한이 없으면 굉장히 힘들다. 고작 며칠 만에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설마 그걸 알고? 힘을 실어주시려고?’ 그래도 이건 너무 파격적인 것 아닌가?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모르겠다. 그때, 황태자가 조건을 말했다. “3개월이다. 3개월 안에 네가 말한 성과를 이루어내라. 만약 이루어낸다면, 그때는 그 공과 능력을 인정해 임시가 아닌, 정식 의무사령관으로 임명하겠다. 단!” 조건은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만약 3개월이 지났는데도 네가 말한 성과. 사망률이 10배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너에게 책임을 물겠다!” “……!” 사람들이 황태자에게 물었다. “전하, 책임이라면?” “이 전쟁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 강제로 전역시킬 것이다.” “……!” 그렇다. 이게 바로 린덴이 생각해 낸 묘책이었다. 강제 전역.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었다. 그녀를 못 보게 되는 것은 싫지만, 그녀가 전장에 머물다 혹시라도 모를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더 싫으니까. 지금도 이렇게 불안한데 그녀가 털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66 3-2 Lady with the Lamp ========================================================================= 2장 Lady with the Lamp-4 ‘정말로 사망률이 10배 이상 떨어지면 좋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더 좋고.’ 이왕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 확실히 해준다. 자원뿐 아니라, 파격 인사를 통해 직위와 권한까지 주어서. 사망률을 10배나 떨어뜨리는 일이니까. 또 그녀가 의무사령관으로 있으며 군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면 앞으로도 제국군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하려면 높은 계급과 직위는 필수였다. ‘이득 보면 이득 봤지 손해 볼 것은 없는 파격 인사지.’ 만약 그녀가 생각만큼 못한다면 그때는 파격 인사의 대가로 전역시키면 된다. 자신에게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전쟁터 옆에 놓고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니까. ‘어찌 돼도 좋아. 이왕이면…… 그녀가 전역하면 더 좋을 텐데.’ 린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망률은... 한 9배 정도 떨어졌으면 좋겠군.’ 그러면 사망률 감소도 이루고, 그녀도 전역시킬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세계 최초의 의무사령부(Medical Command)가 쾌도난마로 뚝딱 만들어졌다. 머지않은 미래에 모든 열강이 따라 할 편제였다. *** 물론 그 파격적 인사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무리 황태자비가 될 분이라지만 대령이라니.” “그러게 말입니다. 더구나 의무사령부(Medical Command)라니요. 내 평생 그런 부서는 들어본 적이 없소이다.” “그리고 예비 황태자비께서 말한 대로 해도 사망률이 10배나 감소할 리 없지 않습니까? 이번만큼은 태자 전하께서 잘못 판단하신 것 같습니다.” 군부의 몇몇 인사가 이런 불만을 표했다. 하지만 크게 드러내진 못했다. 총사령관인 린덴이 평소에 워낙 뛰어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군부의 인물들은 황태자이자 총사령관인 그를 지휘관으로서 존경하고 있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존경하는 윗사람을 깎아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도 사람이시니. 한 번쯤은 잘못 판단하실 수 있겠죠.” “그러게 말이오. 총사령관께서도 인간다운 면모가 있긴 하시구려. 앙젤리 전쟁 때도 곁에서 모셨는데, 전혀 빈틈이 없으셔서 혀를 내둘렀었는데. 당시 사막의 전갈 때문에 다 패한 전쟁을 총사령관이 뒤집으셨었죠.” “어쨌든 이번 데임의 일은 지켜봅시다. 어차피 사망률이 10배 이상 떨어지지 않으면 책임을 문다셨으니.” “허허, 10배라. 데임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수치를 발표하셨는지 모르겠구려. 그런 사망률의 감소가 가능할 리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 엘리제가 허황된 주장을 하였다 생각했다. 정말로 사망률이 10배나 떨어질 거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편, 엘리제는 곧바로 일에 착수했다. 군대에서 직위와 계급, 권한이 주어지니 할 수 있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이래서 한국에서는 별(장군)이 되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는구나.’ 그녀는 지구에서 들은 말을 떠올렸다. 장군은 아니지만, 대령은 하늘 아래 지상에서 가장 높다는 계급이다. 원래대로라면 온갖 보고에, 결제에, 회의를 통해 한참을 끌었을 일들이 착착 해결되었다. ‘먼저 환경개선부터. 이게 가장 시급해.’ 자신에게 배속된 병사들을 통해 병원 환경을 개선했다. 일단 건물을 청소하고 피와 배설물이 묻은 침대 등을 빨래했으며, 오물을 버렸고 통풍구를 만들었다. 혼자서는 엄두도 안 나는 일이었으나 병사들이 달려드니 순식간이었다. 곧 야전병원은 못 알아볼 정도로 깔끔하게 변모했다. 물론 그녀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환자 수는 턱없이 많은데 건물이 너무 작아. 공간이 너무 없어, 환자끼리 너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러면 전염병이 잘 퍼지는데.’ 그래서 아예 임시 건물을 더 지었다.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건물이 쑥쑥 세워졌다. 이것 역시 그녀가 직위가 없었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문제 없이 시원하게 진행해 버렸다. 모두 황태자가 내려준 직위 덕분이었다. ‘의약품 보급도 너무 부족해.’ 그건 어떻게 된 일인지 진상을 살폈다. 혹시나 보급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지. ‘뭔가 이상해. 의약품 부분 예산이 이렇게 적게 배정되지는 않았을 텐데.’ 분명 일정 규모의 예산이 의약품 보급을 위해 배정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들어오는 의약품은 예산보다 훨씬 적었다. 수상한 일. 조사 후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책임자인 헤인츠 대위가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그 사실을 확인 후 곧바로 그를 해임했다. 이전부터 술을 마시다 눈에 띄는 등 선처의 여지가 없었다. 더구나 예산을 중간에 빼돌린 증거도 확인돼 그는 단순한 해임이 아니라, 헌병대에 넘겨져 큰 벌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엘리제는 임시 의무사령관 및 야전병원의 원장이 되었고, 이후부터는 의약품의 보급이 조금씩 원활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이 부족해. 어떻게 하지?’ 엘리제는 고민했다. 이건 보급처와 협상해서 해결할 일은 아니었다. 배정된 예산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총탄, 포탄, 의복, 식량 등, 어찌 보면 전쟁에 더 중요한 물품에도 돈을 써야 하는데, 무작정 예산을 늘려 달라 할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가문에 편지를 썼다. ‘우리 가문이 차일드가(家)만큼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클로랜스는 제국에서 손에 꼽는 부자였다. 이 정도는 감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우리 가문의 부(富)는 모두 제국에게서 얻은 것이니까.’ ‘지난 300년간, 제국의 신하로서 받은 부이니, 제국의 신민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맞다.’ 그게 평소 빈민을 구제하며 아버지가 하던 말씀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 존경받는 이다운 발언. 그러니 이번 그녀의 부탁도 들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노력 덕에 의료 여건이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환경이 깨끗해진 탓에 새로운 감염병의 발병이 확연히 줄어들었고, 만성적인 의료 보급품 문제도 다소 해결되었다. 또 엘리제는 행정적인 일뿐 아니라, 두 팔을 걷고 뛰어다니며 환자를 치료하였다. 아무리 해도 해도, 전투는 끝이 없었으며 그녀가 살릴 환자도 끝이 없었다. “등불을 든 천사(The Lady with the Lamp)…….” 누군가 그녀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달마저 자취를 감춘 밤마다 그녀가 등불을 들고 나타나 환자를 살폈기 때문이다. 삶의 희망을 잃고 꺼져가던 부상병들에게 등불과 함께 나타난 그녀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힘내세요. 좋아질 수 있어요.” “가, 감사합니다. 정말 좋아질 수 있을까요?” “네, 좋아져서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해드릴게요. 그러니 힘내세요.” 자신의 반만 한 작은 소녀의 따뜻한 말에 병사는 눈물을 흘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물론 그녀가 모든 환자를 살린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녀라도 그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전장의 여건상 간단한 처치들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그들과 함께했다. 상처를 치료했고, 손을 잡아주었고, 같이 아파해 주었고, 누군가 죽을 때 같이 슬퍼해 주었다. 그렇게 처음 출정 때 했던 약속처럼 그들이 홀로 스러지지 않도록 함께했다. 누군가 다친 자신과 함께한다는 것. 그건 머나먼 이국에서 홀로 죽어가던 이들에게 크나큰 위로였다. “등불을 든 여인…….” 누군가 처음 한 그 말은 곧 제국군 진영 전체에 퍼져 나갔다. 부상에 회복된 병사들은 병영으로 복귀해 그녀에 관해 이야기했고, 모든 병사는 자신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녀에게 감동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동한 것은 전장의 병사들뿐이 아니었다. 곧 브리티아 섬으로도 그녀의 이야기가 전해 들어갔다. 죽음을 앞둔 병사들이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 것이다. [어머니, 건강하신가요? 이곳은 많이 추운데 브리티아 섬은 어떤지 모르겠네요. 이렇게 편지를 한 것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예요. 저는 아마 곧 주님의 곁으로 돌아갈 것 같아요. 보고 싶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마지막에 어머니 얼굴을 보고 올 걸 그랬어요. 어머니가 끓여준 수프가 먹고 싶네요. 사랑해요. 그래도 마지막이지만 많이 쓸쓸하진 않아요. 저희와 함께하시는 분이 있거든요. 참 착한 분이세요. 그분 덕분에 쓸쓸하게 가진 않을 것 같아요. 아, 눈이 흐려져 더 편지를 쓰진 못할 것 같아요. 꼭 건강하세요. 주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천국에서 기원할게요.] 이러한 편지가 고국의 가족들에게 도착했다. 편지를 읽은 가족들은 눈물 흘렸다. 그런 가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뒤. 종군 기자가 보낸 기사가 한 장의 흑백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렸다. 전쟁의 참상을 알린 기사였는데, 동봉된 사진은 다름 아닌, 죽어가는 병사의 손을 잡고 있는 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브리티아 섬을 울렸다. 소중한 이를 전장에 보낸 사람들에게 사진 속 죽어가는 병사는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아들이고, 동생이었으며, 연인이었다. 그 소중한 이의 가슴 아픈 모습에, 그리고 그 옆을 지키는 소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혔다. 그 소녀는 다름 아닌 엘리제였다. 그뿐 아니라 소녀가 가문의 사비를 들여 부족한 의약품을 사들였단 이야기도 퍼졌다. 종군 기사가 기사를 낸 것이다. “우리도 동참하자.” “그래, 가족을 위한 일이야.” 이제 갓 서대륙에 도입된 흑백 사진 기사는 전쟁의 참상을 고국에서도 잘 알 수 있게 하였다. 사람들은 전장에 나간 가족을 위해 성금을 모았고, 부족한 의약품 구입에 사용하도록 부탁했다. 덕분에 부대에 만성적인 의약품 부족은 완전히 해결되었다. 그리고 그 기사 덕분에 엘리제에게 더욱 크나큰 도움을 주는 일이 일어났다. “저희도 왔습니다, 데임.” “선생님!” 엘리제는 깜짝 놀라 반색했다.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비롯한 여러 의료인이 그녀를 도와주기 위해 크림반도로 온 것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금방 오려 했는데, 여러 일이 발목을 잡아서.” “아니에요. 와줘서 정말 감사해요!” 그녀는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렇지 않아도 홀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에 큰 한계를 느끼고 있던 차였다. ‘정말 다행이야. 숨통이 트이겠어.’ 무려 의사가 20명, 도제(견습의사)가 15명이었다. 간호원도 50명이나 되었다. 모두 엘리제의 기사에 감동하여 전장에 자원한 것이다. “정말 감사해요. 정말로.” 소녀는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렀다. 전선은 황태자 린덴의 지휘 아래, 루이 니콜라스의 공화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반복했다. 다만 황태자의 꿈쩍 않는 지휘 덕분일까? 여러 전선에서 제국군에 유리한 정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동부 방면의 군이 적의 주요 요새를 함락해 남쪽으로 전진했다. 교착 상태에 빠지려던 전선 상황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선전이었다. 그리고 엘리제는 여러 지원에 힘입어 의료 환경을 완전히 개선했다. 이제 시궁창 같은 환경 속에 부상병이 방치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병사들은 이전에 비하면 천국 같은 환경에서 각자 부상 정도에 맞춰 적합한 치료를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부상병을 살릴 수는 없었지만, 엘리제는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망률이 감소하는 것을. 이윽고 3달 뒤. 사령부와 약속한 날이 다가왔다. 임시 의무사령관 엘리제는 사망률을 통계 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토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67 대회전 ========================================================================= 3장 대회전-1 “……!” 2%. 믿을 수 없는 통계 결과였다. 린덴은 엘리제가 낸 보고서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정말로 해냈군.’ 그냥 해낸 정도가 아니었다. 42%에서 2%. 사망률이 무려 20배가 넘게 감소한 것이다. 이건 그녀를 믿었던 린덴도 예상치 못한 수치였다. ‘엘리제, 정말로 너는…….’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바라는 그녀는 항상 저 하늘 위에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감탄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항상 새로운 기적으로 자신을 놀라게 했다. 한편 그 결과에 제국군 사령부는 난리가 났다. “허허, 정말로 그게 진실이오? 2%? 20%가 아니고?” “나도 믿지 못해서 확인해 봤는데 정말이라고 합디다. 그리고 실제로 부상병들의 병영 복귀율이 크게 늘었어요.” 3개월 만에 사망률 20배 감소! 두 귀로 듣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건 군 전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구려.” “그게 이를 말이오? 2% 사망률이면 웬만한 부상이면 다 산다는 이야기 아니오?” 2%. 20배. 그건 단순한 산술적 수치가 아니었다. 부상을 당해 병원에 온 이들 중 98%가 살아서 돌아간단 뜻이었다. “허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구려.” “정말 소문대로 데임 클로랜스의 의술은 하늘의 경지에 올라 있는 것 같소.” 그들은 엘리제의 의술이 뛰어나 이런 기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전장에서는 의술을 펼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부상의 합병증 및 전염병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애초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부상을 당해 병원에 오는 경우는 많지 않아.’ 그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에 이를 부상을 당하면 병원에 오기도 전에 죽는다. 따라서 병원에는 치료할 만한 중상이나, 경상 환자가 많았는데 이런 부상은 합병증과 감염만 막으면 살릴 수 있다. ‘이 말은 과거에는 살릴 수 있는 간단한 환자도 합병증과 감염병으로 다 죽었다는 뜻.’ 엘리제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녀의 군 의료 개혁 덕에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일단 가시적으로도 군 전력이 향상됐다.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했기 때문이다. 사기적인 측면에서도 이로웠다. 부상을 당해도 살아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데임 클로랜스 만세!” “황태자비 만세!” 이런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역시 황태자 전하시군. 데임께서 이런 일을 해내실 줄 알고 파격 인사를 하셨던 거야.” 당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 인사를 감행했던 린덴에게도 찬사가 쏟아졌다. 엘리제의 위상도 달라졌다. 황태자 덕분에 낙하산으로 높은 직위에 올랐다고 고깝게 보는 시선이 쑥 들어갔다. 모두 그녀가 만들어낸 기적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2차 크림원정의 초반은 제국군에게 나쁘지 않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때 프랑소엔 공화국군은……. *** “적들의 방어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으니.”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에 자리한 공화국의 사령부. 파란 제복을 입은 수뇌들이 심각한 얼굴로 전황을 상의하고 있었다. “역시 공제(空帝). 철벽과도 같습니다. 도저히 뚫을 수가 없어요.” “더 골치 아픈 것은 검제(劍帝)이지요. 교전하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검기사단(劍騎士團)을 이끌고 벼락같이 돌진해 전열을 무너뜨리니.” 공화국의 수뇌들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서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 검제! 그리고 300명 전원이 오러 나이츠로 이루어진 대륙 최고의 돌격 기병대 검기사단! 공화국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정말 이런 총과 대포의 시대에 검이나 사용하는 그런 구시대적인 전력을 못 당해 내다니.” 누군가의 푸념에 한 장군이 고개를 저었다. “오러 나이츠는 구시대적이라고 할 병력이 아니지 않소. 그들의 오러는 총알을 막아내니.” 기사가 철저히 몰락한 시대이다. 하지만 오러를 사용하는 오러 나이츠는 달랐다. 오러를 전신에 두르면 잠시나마 총알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장식 강선 총은 아무리 빨리 쏴봤자 1분에 3발이 고작이니.” 당시 총의 사정거리는 길어야 200m 정도이다. 그런데 분당 발사 속도가 빨라야 3발이니, 재장전하는 데 무려 20초가 걸리는 것이다. 여기서 오러 나이츠의 무서움이 발동한다. 최초의 총알을 오러를 통해 막아내고 벼락같이 돌진하는 것이다. 20초면 돌격 시간으로 차고도 넘쳤다. “일단 돌격을 허용하면 일반 보병으로선 막을 방법이 없지요. 딱 붙어 있는데 총을 쏠 수도 없으니.” 그때 누군가 말했다. “사실 오러 나이츠도 오러 나이츠지만, 로마노프 황가의 초상능력도 무섭긴 마찬가지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앙젤리에서 1황자 염왕(炎王) 지펠을 잡을 때 기억이 나는구려. 참 끔찍했는데.” “아직 공제가 전장에 안 나서고 있지만, 나설 때를 대비한 대책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뭐, 설마 나서겠소? 그래도 총사령관인데. 앙젤리에서도 직접 나선 적은 드물지 않소? 특별한 일 없는 한 뒤에서 지휘만 하겠지요.” “하지만 앙젤리에서도 나설 때마다 악몽을 만들었죠. 대비는 해야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 이야기를 하며, 앞으로 전쟁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그런데 한참을 토의한 뒤였다. 한 젊은 장군이 분개한 듯 탁자를 치며 말했다. 탁! “이렇게 이야기해 봤자 뭐하겠습니까? 이런 산발적인 공방은 적에 의도에 휘말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총공격을 해야 합니다!” “……!” “우린 적에 비해 병력의 수에서 우위에 있습니다. 한 번에 군을 휘몰아치면 아무리 제국군이라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 그들은 상대편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있으니까. 공화국의 수뇌들은 가장 상석에 앉은 이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느낌의 그림처럼 잘생긴 젊은 남자.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는 말없이 그들의 논의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하?” “흐음. 장군?” “네, 각하?” 그런데 그의 나온 말은 엉뚱한 것이었다. “혹시 등불을 든 여인이란 말을 적 있나?”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장군은 당황한 표정을 했다. “듣긴 들었습니다만.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를 뜻하는 말 아닙니까?” 엘리제의 이름은 공화국군 사이에도 퍼져 있었다. 짧은 시간, 워낙 인상적인 인도주의적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제국에 생포된 공화국 포로를 치료해 주기도 했다. “지금 어디에 있지?” “제국 사령부 인근의 야전병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코프스크에 있는 거군.” “네.” 루이 니콜라스는 미소를 지었다. “지금 적의 3군이 어디에 있나?” “서쪽 방면 군이 비트란에, 사령부의 중앙군이 코프스크에 있습니다.” 이어 장군은 분한 듯 말했다. “동쪽 방면 군은 보크네 요새까지 내려왔고요.” 보크네 요새.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공화국의 세력권이었다가 제국군에게 탈환당했다. 그런데 루이 니콜라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좋군. 이상적이야.” “네?” 그 말에 수뇌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새를 뺏겼는데 좋다니? 하지만 니콜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짧게 명했다. “전군을 북진시킨다.” “……!” 회의장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각하, 그 말은?” “적의 3군을 한 번에 친다. 특히 적의 동, 서 양면 군을 향해 집중시키도록.” 총공격 명령이다!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작전명은 ‘모루 작전’이다.” “알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수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분주히 작전을 준비했다. 이 전투가 이번 전쟁의 분수령이 되리라. 한편 루이 니콜라스는 느긋이 지도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얼마 전 뺏긴 보크네 요새를 향했다. ‘3달. 3달이나 기다렸지. 일부러 요새의 방어를 약화해 적이 뺏어주기만을 바라며. 드디어 때가 왔군.’ 그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적의 3군을 향한 총공격. 그런 게 통할 리가 없지. 상대가 누구인데.’ 그래, 통할 리가 없다. 그런 무식한 총공격이 통할 상대였으면 2년 전에 자신에게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작전은 그게 아니었다. ‘이건 어떨까? 공제?’ 루이는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줬던 적의 위대한 존칭을 떠올렸다. 그의 시선이 지도 북쪽 중앙을 향했다. 그곳에는 적의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코프스크. 이곳에 그 아름답고 고결한 소녀가 있다고? ‘이번 작전이 끝나면 볼 수 있겠군.’ 루이 니콜라스는 빙긋 웃었다. ‘등불을 든 여인이라. 기대되는군.’ 그렇게 공화국의 ‘모루 작전(Anvil tactics)’이 시작되었다. 엘리제의 지난 삶. 제국군에 악몽 같은 피해를 준, 작은오라버니 크리스를 전사시킨 작전이었다. *** 한편 공화국군의 북진 소식이 아직 전해지지 않아 제국군의 분위기가 다소 평화로울 때. 엘리제는 환자 진료에 열심 중이었다. 이제 의료 시스템적인 면은 많이 개선됐지만 일은 끊이지 않았다. 환자가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 지혈 좀 해주세요! 소독도 해주시고요!” “네, 데임!” 그래도 추가로 지원 온 그레이엄과 여러 의사의 도움이 컸다. 그들과 함께 엘리제는 수많은 병사를 살릴 수 있었다. “하아.” 잠시 틈이 나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람차긴 하지만 힘들긴 힘들구나.’ 안 힘들 수가 없었다.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환자들을 돌보고 있으니. ‘아버지, 어머니, 크리스 오라버니. 다들 잘 지내고 계시겠지?’ 엘리제는 서쪽, 저 멀리 있을 브리티아 섬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웠다. 보고 싶었다. ‘빨리 전쟁이 끝나 돌아갈 수 있었으면.’ 하지만 엘리제는 아직 전쟁이 끝날 시기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지난 삶과 비슷하게 돌아갈지는 모르지만, 몇 번의 더 큰 전투가 있어야 해. 최소 3번. 3번의 큰 사건이 일어나야 하니.’ 그녀는 전황을 뒤흔들었던 3개의 사건을 떠올렸다. 사실 이전 삶에서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모른다. 그저 크리스 오라버니 때문에 전후에 기록을 찾아본 정도다. ‘그나저나, 론 님은 무사히 잘 계실까?’ 그녀는 론을 생각했다. 전장에 와서 혹시나 우연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했으나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다. 아마 사령부에 있는 중앙군이 아닌 동군이나 서군 쪽으로 배치된 것 같다.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찌릿했다. 그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병원에 오지 않았잖아. 만약 다쳤으면 이곳에 왔을 거야. 그러니 괜찮을 거야.’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만약 죽거나, 심하게 다치면 이곳에 후송 올 수도 없다는 것을. ‘아니야. 괜찮을 거야. 반드시 다시 만나 어머니의 유품을 돌려주실 거야.’ 애써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이상하지. 론 님과 나는 아무런 사이도 아닌데. 왜 이렇게 걱정되는 걸까?’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만난 기간도 짧다. 고작 몇 개월? 만나면서 특별히 한 것도 없다. 그저 같이 밥을 먹고,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었고, 가끔 그녀가 좋아하는 길을 산책했다. 그것뿐이다. 심지어 그는 무뚝뚝하고 재미도 없었고 여자를 대하는 것도 서툴렀다. ‘그런데. 그것뿐인데. 왜.’ 이렇게 자꾸 생각나는 걸까. ‘모르겠다.’ 그녀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음성이 그녀에게 들렸다. “왜 한숨을 쉬는 거지?” “……!” 론 님? 그를 떠올리게 하는 서늘한 음성에 순간 그녀의 가슴이 뛰었으나 곧 가라앉았다. ‘그가 아니야.’ 고개를 돌리니 역시 그가 아닌, 황태자 린덴이 서 있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68 대회전 ========================================================================= 3장 대회전-2 “충성. 전하를 뵙습니다.” 엘리제는 군 예법으로 경례했다. 그러며 그녀는 생각했다. ‘왜 이렇게 자꾸 헷갈리는 걸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부상병들을 돌보기 위해서인지, 그는 가끔, 아니, 자주 야전병원에 시찰을 왔는데 이렇게 뒤에서 부를 때마다 매번 론 님과 헷갈렸다. ‘목소리도, 얼굴도 완전히 다른데. 분위기가 비슷해서일까?’ 그러고 보니 론과 황태자는 느낌이 정말 흡사했다. 가면을 쓰면 구별이 안 될 것 같았다. “부상자들을 살피러 오셨습니까?” “……그래.” “많은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전 삶, 자신과의 관계는 별개로 그는 정말 훌륭한 지휘관이고 지도자였다. ‘이렇게 군 의료를 개선할 수 있었던 것도 다 전하 덕분이지.’ 그가 자신을 밀어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직도 홀로 지리한 싸움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주 병사들도 살피러 오시고.’ 뭔가 너무 자주 오는 감도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덕분에 병사들은 크게 감동했다. 한낱 일개 병사들의 부상을 살피러 황태자이자 총사령관인 그가 행차한 거니까. ‘원래 2년 전 전쟁 때도 이러셨나? 그러셨겠지?’ 그녀는 그렇게 짐작했다. “……엘리제.” “네, 전하?” “사실 할 말이 있다. “무엇입니까?” 그런데 그는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고민이라도 있는 표정. 엘리제의 얼굴도 굳어졌다. 도대체 무슨 심각한 일이길래 전하께서 저런 표정이지? 이윽고 그가 말했다. “생일 축하한다.” “……네?” “생일 축하한다고.”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린덴이 천에 쌓여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그리고 천을 벗기니. “……!” 화사한 붉은 장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시선을 돌려 다른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 성인식 날도 못 챙기고. 오늘은 성인이 된 생일인데, 제대로 기념해 주지 못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 전장의 사정이 여의치가 않아. 만약 전선의 사정이 좋아진다면 이전의 못 챙겼던 성인식까지 같이 챙겨주마.” “아, 아닙니다. 괘, 괜찮습니다.” 그녀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어떻게 그가 자신도 까먹고 있던 생일을 알고? “혹시 장미는 싫은가?” “아, 아닙니다! 좋아해요. 가, 감사합니다.” 장미. 우연이겠지만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꽃을 받아 든 순간이었다. 두근. 지난번 그의 집무실에서 느껴졌던 알 수 없는 떨림이 다시 왔다. 하지만 그녀는 이 뜻밖에 일에 혼이 나가 그 떨림을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저 놀라고,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웠다. “그래, 그만 가보마.” “아……! 네, 네!” 그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사라지기 전, 이렇게 말했다. “아, 엘리제.” “네?” “그게…… 음…… 사령부에도 자주 오도록 해라. 그래도 사령부 소속 의무사령관 아닌가? 음…… 그리고 오면 올 때마다 꼭 내 집무실로 찾아와 보고하고.” 보고? 무슨 보고? 하여튼 엘리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 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내일 적의 진군에 대한 참모 전체 회의가 있으니 그것부터 참석하면 되겠군.” 그리고는 그는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엘리제는 멍하니 장미를 바라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가 나한테 장미라니?’ 지난 삶, 9년이나 짝으로 지냈으면서도 그에게서 꽃을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생일이라고 그가 뭘 챙긴 적이 없었다. 물론 선물을 받긴 했었다. 여러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하지만 그건 궁내부에서 예산을 사용해 알아서 챙긴 거였지, 그가 개인적으로 신경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진료복을 입은 한 소녀가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어머, 전하께서 주신 거예요, 데임?!” “아, 레이디 제이.” 레이디 제이. 그녀는 로즈데일 병원의 도제였었는데, 신문에서 엘리제의 기사를 보고 이곳으로 자원해서 와 그녀를 도와주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 레이디 제이는 장미꽃을 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와, 예뻐요. 이런 겨울에 장미라니. 전하께서 데임을 생각하시는 게 역시 보통이 아니시군요. 저는 언제나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남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그, 그런 것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엘리제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전하가 나를 생각한다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레이디 제이가 말했다. “바쁘신데도 매번 꼬박꼬박 데임을 보러 오시잖아요.” “네?” “며칠에 한 번씩 꼭 야전병원에 오는 게 데임을 보러 오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부상자를 생각해서 그러는 거죠. 저 때문에 오시는 것은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레이디 제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요? 이상하다. 올 때마다 데임을 힐끗힐끗 보시던데. 내가 잘못 본 건가.” “……잘못 본 것 아닐까요?” “그런가요. 흠, 전 데임 때문에 황태자 전하가 야전병원에 오시는 거라 짐작했는데.” 아직 어린 레이디 제이는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그가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차가운 전하가. ‘이 생일 선물은 렌 큰오라버니가 신경 써준 거겠지? 그래도 동생이 성인이 되는 17번째 생일을 전장에서 보내는 게 불쌍해서? 그래서 본인이 직접 못 오니 전하께 부탁한 거겠지?’ 그래, 최전선에 나간 큰오라버니가 자신이 직접 못 오니, 친우인 전하께 부탁한 것일 거다.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도 알고 있었다. 큰오라버니가 절대 그럴 위인이 아니란 것을. 큰오라버니, 렌은 자신의 생일이 며칠 인지는커녕 몇 월인지도, 어쩌면 겨울인지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렇게 그녀는 혼란에 빠져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 다음 날이 다가왔다. ‘회의에 참가하라고? 도착하면 매번 자신의 집무실로 와서 보고하라고?’ 엘리제는 황태자의 명을 떠올렸다. 왜? 설마 전하가 나를? 순간 그런 생각이 떠올랐으나, 고개를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엘리제. 전하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 그 전하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그럴 리가 없으시다. 그녀는 그렇게 결론 내렸다. 하지만 그 결론 뒤에 따라오는 의문. ‘그런데 그러면 왜 이런 선물을 주신 걸까?’ 물론 예비 약혼녀에게 생일 선물을 줄 수도 있다. 아니, 안 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큰 선물도 아니고, 고작 꽃이고. 하지만…… 문제는 상대가 린덴 드 로마노프란 것이다. 이전 삶, 그는 생일 따윈 절대 챙기지 않았다. 그녀의 생일뿐 아니라, 자신의 생일도 안 챙겼다. 그에게 생일이란 번거로운 황실의 행사 날일 뿐, 축하할 만한 기념일이 아니었다. 누구의 생일이든 늘 최소한의 형식적인 행사만 마치고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그런데 왜?’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모르겠다. 사령부에나 가자.’ 빨리 회의에 참석 후 돌아와 환자나 봐야겠다. 그렇게 엘리제는 사령부로 향했다. 그녀를 알아본 병사들이 경례했다. “충성!” “안녕하십니까!” 일반 병사들뿐 아니라 콧대 높은 장교들도 그녀에게 깍듯했다. 처음 전장에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 당시에도 그녀를 예비 황태자비로서 존중하긴 했으나 뭔가 형식적인 면이 있었다면, 지금은 마음을 다해 그녀에게 예를 다하고 있었다. 3달간 모두에게 완전히 인정받은 탓이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데임?” “회의에 참석하러 왔어요. 그 전에 전하를 뵈려고 하는데요.” “총사령관님 말씀이십니까? 방금 전선에서 급한 보고가 들어와서 당장은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급한 보고? 무슨 일이지? 어쨌든 그녀는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를 피할 이유는 없지만, 지금은 그냥 껄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회의 때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뭐 하고 있지?’ 시계를 보니 2시간 넘게 남았다. 일찍 오기도 일찍 왔고, 황태자에게 온 급한 보고 때문인지 회의 시간이 살짝 늦춰진 것이다. ‘보급처에 가서 의약품 수급에 대해 상의나 해야겠구나.’ 그녀는 늘 들르는 보급처에 들어갔다. “충성! 데임을 뵙습니다!” 존 소령이 벌떡 일어나 경례했다. 그 역시 지난번보다 훨씬 깍듯해졌다. 엘리제는 군인들의 그 칼로 자른 듯한 경례가 잘 익숙해지지 않아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말씀드린 소독약 보급 문제를 여쭤보러 왔어요.” “아, 그건 프러시엔 공국을 통해 보급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 물품이 온 것 같은데 제가 지금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걸릴 테니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존 소령은 바로 그녀의 용건을 해결해 주기 위해 사라졌다. 덩그러니 남은 엘리제는 보급처를 둘러보았다. ‘다들 바쁘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보급처에는 존 소령 혼자서 일하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장교가 서류를 붙잡고 원활한 보급을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저건 식량 보급 서류, 저건 탄약…….’ 그들이 하는 업무를 보던 엘리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시선을 끄는 서류철을 발견한 것이다. <장교 사망자 명단.> “……!”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한 명 꼭 확인해 보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절대로. 론 님이 전사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동시에 드는 생각. ‘사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 계속 걱정되니까.’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과 반대의 마음이 충돌했다. 그런데 그때 한 젊은 장교가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고 물었다. “데임? 혹시 확인하고 싶은 이가 있습니까? 금방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 결국 엘리제는 답했다. “혹시…… 이름만 아는데, 가능할까요?” “성은 모르십니까? 그래도 가능합니다.” “론. 론이에요.” “네,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젊은 장교는 서류철을 들고 휘리릭 넘기며 확인했다. ‘제발…….’ 기다리는 엘리제의 가슴이 찌르르 떨렸다. 만약 그가 전사했으면 어떻게 하지? 그를 다시는 못 본다면?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무사할 거야. 제발, 주님.’ 그녀는 기장에 달린 십자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까마득히 걸린 듯한 시간. 장교가 웃으며 말했다. “없습니다.” “네?” “사망자 명단에 없습니다. 아마 무사한 모양입니다.” 하아! 엘리제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어찌나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땀에 물들어 있었다. 장교가 물었다. “그런데 데임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어느 부대에 소속되어 있습니까?” “아……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참전한다고만 들어서.” “그러면 찾아드릴까요?” “……!” 엘리제는 놀라 그를 바라봤다. “장교 인명 첩은 제가 관리하는 업무라서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나요?” 장교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진 않을 것입니다. 뭐, 오래 걸려도 찾아드려야죠. 다른 분도 아닌, 등불을 든 천사의 일인걸요.” 등불을 든 천사.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민망했다. “그, 그러면…… 혹시 부탁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장교는 기분 좋게 대답 후 커다란 인명 첩을 꺼냈다. 그러며 ‘론, 론, 론……’ 이렇게 중얼거리며 인명 첩을 눈으로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찾아도 되는 걸까?’ 엘리제는 그런 고민이 들었다. ‘그냥 어느 부대에 소속됐는지 찾아보기만 하는 것이니까. 찾아갈 것도 아니고.’ 그래, 이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친구. 그와 자신을 친구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는 사람의 행방을 찾는 것이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장교가 그녀에게 말했다. “저…… 데임?” “네, 찾으셨나요?” “그게…….” 장교는 고개를 갸웃하며 답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그녀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일인가요?” “론이란 분이 참전하신 것 맞습니까?” ============================ 작품 후기 ============================ 내일 일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69 대회전 ========================================================================= 3장 대회전-3 “네?” “없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없다고요?” “네, 3번이나 뒤졌는데, 아무리 찾아도 론이란 이름의 참전자는 없습니다.” “……!” 엘리제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론 님이 참전자 중에 없다고? *** ‘어떻게 된 거지?’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사령부의 복도를 걸었다. ‘그분이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는데.’ 그건 확실했다. 론, 그가 전쟁에 참전한다고 자신을 속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째서 참전자 명단에 없는 거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황태자의 생일 선물부터 해서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다.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탁! “앗!” 어깨에 강한 충격이 와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넘어졌다. 멍하니 걷다가 앞에서 오는 누군가와 부닥친 것이다. ‘아, 아파.’ 탄탄히 단련한 군인의 몸이라 그런지, 돌에 부닥친 듯 어깨가 아팠다. 바닥에 쓸린 다리도 아렸고.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 봐서.”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잘못한 것 같아 사과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익숙한 얼굴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던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것입니까?” 유리엔 공녀와 똑 닮은 외모. 그러면서도 오만한 느낌. 차일드 가의 차기 당주인 알버트였다! 그는 장갑을 낀 손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아…… 네.” 부축을 해주긴 했으나, 친절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는 먼지를 털듯 자신의 어깨를 털었다. 그녀와 부닥쳤던 부위이다. “앞으론 꼭 조심하십시오.” “……네, 죄송합니다.” 그러고 알버트는 회의장에 먼저 들어갔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군의 모두가 그녀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몇몇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대부분 귀족파 출신의 귀족들이었고 알버트는 그중 하나였다. 이해는 했다. 자신은 차일드 가문의 적인 클로랜스의 딸이었으니까. 특히 저 알버트는 방계에서 입양된 이라 열등감 비슷한 것이 있었고, 그 열등감을 황제파에 대한 적개심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빨리 회의가 끝나고 야전병원으로 돌아갔으면.’ 엘리제도 회의장에 들어갔다.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자리에 착석해 총사령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을 본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던 것이다. ‘뭐지?’ 모두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마치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회의장 전체에 무거운 공기가 가득했다. 그녀가 의아함을 품을 때, 회의장 상석 근처의 문이 벌컥 열리며 황태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들어오자마자 한 이야기는 엘리제가 여태껏 해온 혼란스러운 고민을 한 번에 날려 버렸다. 이런 한가로운 고민을 할 때가 아니었다. “적이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다.” “……!” “첩보원이 전한 적의 작전명은 모루 작전. 이에 대한 긴급회의를 시작한다.”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모루 작전. 이전 삶, 작은오라버니 크리스의 목숨을 앗아갔던 적의 계략이었다. 그리고 목숨을 잃은 것은 크리스뿐이 아니었다. 당시 제국군은 끔찍한 피해를 입었었다. *** “공화국군이 반도의 수도 심페폴에서 모두 북진하였습니다. 그 수는 방어를 위한 필수적인 병력을 제외한 40만입니다.” “……!” 정보 장교는 커다란 지도를 가리키며 브리핑했다. “군을 총 세 개로 나뉘어 진격 중인데, 아마 우리의 중앙군과 서군, 동군을 한 번에 총공격하려는 의중으로 파악됩니다.” 그 말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특히 서군, 동군 쪽을 향한 병력이 큽니다. 아마 중앙군에 비해 병력이 적은 서군, 동군에 타격을 주려는 목적으로 보입니다.” 현재 제국군은 중앙에 15만, 서군에 7만, 동군에 10만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3군이 긴밀한 연계를 펼치며, 한쪽이 불리해지면 중앙군에서 지원군을 보내 균형을 유지하는 전략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동서, 양쪽으로 향하는 적의 규모는 얼마나 됩니까?” “각각 15만 명씩으로 파악됩니다. 중앙 쪽으로는 10만이 오고 있습니다.” “……!”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앙으로 오는 10만의 병력은 주로 무어군, 크림군 등, 혼성군이란 점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공화국의 의중을 파악했다. “중앙엔 잡병인 혼성군을 보내고, 동, 서 양면에는 정예 15만 명씩이라. 이건 중앙군의 발을 묶은 뒤 우리 동, 서 양면 군을 각각 격파하겠다는 뜻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동, 서 양면 군이 수적으로 너무 열세입니다. 빨리 지원군을 보내야겠습니다.” “얼마나 보내는 게 좋겠습니까?” “말이 혼성군이지, 무어군은 무시해도 좋을 잡병. 이곳 사령부에는 5만의 병력만 남겨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그 말이 옳다고 여겼다. 제국군은 세계 최고의 강병. 아무리 10만이라도 저런 잡병들을 상대하기 위해 같은 수가 있을 필요는 없다. 사실 5만도 많았다. “빨리 지원군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특히 동군은 보크네 요새까지 전진해 있어, 거리가 멉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래도 빨리 이 사실을 눈치채 다행입니다. 지원군만 보낸다면 큰 문제 없이 막겠지요.” 동, 서 각각에 5만씩의 병력을 지원하면 공화국군과 병력 차이는 크게 준다. 비슷한 병력과 상황이면 제국군이 공화국군에 밀릴 이유가 없다. 모두 다소 느긋한 마음으로 그렇게 결론 내렸다. “사막의 전갈도 다급한가 봅니다. 이렇게 급한 공격을 다 하다니. 하하.” “그러게 말이오. 이거 생각보다 빨리 승전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때, 엘리제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니야! 그게! 그렇게 양 군으로 지원군을 보내면 끝이야!’ 그녀는 파랗게 질려 생각했다. ‘그게 바로 사막의 전갈이 원하는 바야!’ 지난 삶과 똑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대응 작전을 펼쳤다 사막의 전갈의 작전에 휘말려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장을 갈랐다. “그게 다인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는 없는가?” “…….” 총사령관의 물음에 모두 고개를 저었다. “동, 서 양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하. 그러면 이 총공격을 수월히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장군이 사람들을 대표해 말했다. 하지만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해. 이런 눈에 뻔히 보이는 작전을 펼친다고? 그 루이 니콜라스가?’ 뚜렷한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감’이 이상했다. 2년 전 전쟁 때도 무수히 많은 위기를 감지하게 해준 느낌이 이번에도 경고를 울렸다.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지?’ 그는 뚫어져라 전략 지도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설마……? 그런데 그때였다. 누군가 회의실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만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 그 뜻밖의 인물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임 클로랜스?” 다름 아닌 엘리제였다! “데임께서 왜?” 그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녀는 사령부 소속 의무병과의 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 안건은 전투 작전이었다. 의무병과의 장인 그녀가 발언할 게 없는 주제인 것이다. “여러 장군님 앞에 주제넘게 나서는 점을 먼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꼭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이렇게 나섰습니다.” “말해보십시오.” 엘리제는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발언을 뭐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전쟁과 작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건방지게 나선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겠지. 하지만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었다. 제국군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적군의 의도에 대해, 사막의 전갈의 진짜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의심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모두가 놀라 웅성거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이오, 데임? 이 작전의 진짜 목적이라니.” 엘리제는 말했다. “저는 이 작전이 ‘모루 작전’이 아니라, ‘정과 망치 작전(Chisel and Hammer Tactics)’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 *** 정과 망치! 사령부의 장군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과 망치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단 한 명. 그 자리에서 단 한 명만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내가 생각한 걸 그녀도 떠올린 건가?’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녀가 지금껏 믿을 수 없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해도, 이건 군사 작전이었다. 그녀의 전문 분야와 전혀 연관이 없는. ‘설마. 아니겠지.’ 엘리제는 굳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전체적인 공격을 의미하는 ‘모루’와 다르게 ‘정과 망치’는 집중을 의미합니다. 한 점에 모인 힘, 즉 정을 망치로 때려 단번에 굳건한 바위를 격파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건 우리도 알고 있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오?” 한 노장이 말했다. 중앙군의 군단장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이런 작전 회의에 발언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그런 시선은 그 노장뿐이 아니었다. 그 자리의 대부분이 그녀의 발언을 못마땅하게 바라봤다. 그럴 만했다. 아무리 엘리제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해도, 그건 의료에 국한된 거였으니까. 더구나 전투와 싸움은 남자들의 신성한 전유물이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어린 소녀의 참견을 기뻐할 장군은 아무도 없었다. ‘역시.’ 그들의 날카로운 시선에 엘리제는 몸이 따가웠다. 하지만 그래도 꿋꿋이 말했다. 자신이 이대로 물러나면 제국군에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생할지 모른다. “저는 사막의 전갈의 진정한 목적은 모루 작전을 통한 동, 서 양군의 각개격파가 아니라, 중앙에서 양쪽으로 지원군을 보내게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정확히 말하면 지원군을 보내도록 해 중앙군을 약화시키는 게 목적이지요.” “그 말은?” “네, 제 추측이긴 하지만 동, 서 양군을 공격하려는 것은 속임수. 저들은 동, 서 양쪽으로 향하던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약해진 중앙군을 한꺼번에 공격할 것입니다. 압도적인 병력으로요.” “……!” 동, 서로 향하던 병력의 방향을 틀어 약해진 중앙군을 공격한다! 그게 바로 지난 삶에 이루어졌던 모루 작전, 아니, 정확히는 정과 망치 작전이었다. 사막의 전갈의 속임수에 넘어갔던 제국군은 동, 서 양쪽으로 지원군을 보내 중앙군을 약화시켰다. 그 결과 중앙군은 5배가 넘는 공화국군과 싸워야 했고, 결과는 당연히 대패. 크리스 작은오라버니는 그 참담한 전투 때 전사했다. ‘물론 시기와 병력의 규모는 이전 삶과 차이가 있지만, 그 정과 망치 작전이 분명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한 장군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무서운 이야기구려. 데임의 말대로라면 우리의 대패요. 하지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오?” 소녀의 추측은 분명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만약 동, 서 양쪽으로 향하던 공화국군이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군을 공격하면 그건 대재앙일 테니까. 하지만 믿을 만한 근거가 없었다. “제가 이런 추측을 한 이유는.” 엘리제는 입을 열었다. “바로 지리적 요인과 저희 군의 병력 분포 때문입니다.” “……?!” “실례지만 잠시 나가 설명하겠습니다.” 그녀는 단상에 나가 지도를 가리켰다. ============================ 작품 후기 ============================ 내일 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70 대회전 ========================================================================= 3장 대회전-4 “이곳 코프스크, 중앙군이 위치한 곳입니다. 서남쪽의 비트란, 서군이 위치해 있고, 동남쪽의 보크네 요새, 동군이 위치해 있습니다. 이상 중앙군을 꼭지로 하는 삼각형 모양으로 군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라이트 각하의 활약으로 동남쪽의 점, 동군이 보크네 요새까지 내려가 있지요.” 그건 제국군 장군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음은 공화국군의 진군 방향입니다. 서군으로 향하는 1군이 펨페스, 동군으로 향하는 2군이 코릴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며 엘리제는 부연 설명을 하였다. “펨페스, 코릴. 두 곳 모두 이곳 중앙군이 위치한 코프스크로 향하는 갈림길이 있는 곳입니다. 방향만 틀면 가도를 타고 곧바로 이곳 중앙군으로 돌진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그 속도는 우리 서군과 동군이 중앙군을 뒤늦게 지원 오는 것보다 빠를 것입니다. 서군 쪽에는 우크라 산맥이 있고, 동군은 보크네 요새까지 진격한 상태로 중앙군에서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요.” 엘리제의 설명이 끝난 후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었다. 그녀의 말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허어…… 정과 망치라…… 중앙군…….” “하지만…….” 소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지만, 그들 모두 전장에서 뼈가 굵은 베테랑들. 그 심각성은 충분히 알아차렸다. 한편 총사령관 린덴은. ‘정말 대단하군. 정확해.’ 그녀에게 경탄하고 있었다. 자신이 떠올렸던 추측과 일치했다. 아니,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자신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확했다. 자신은 그저 사막의 전갈의 진짜 목적이 중앙군이 아닐까? 정도만 떠올렸으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그래, 의학적인 면은 이해한다. 의술에 관한 한 그녀는 불가해한 천재였으니까. 하지만 이건 의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군략(軍略) 아닌가? ‘도대체 너는?’ 린덴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 알면 알수록 도저히 모르겠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안달 나게 하였다. ‘엘리제…….’ 하지만 그가 감탄했다고 해서, 장군들이 모두 설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녀 주장의 허점을 짚었다. “분명 무서운 지적이오. 하지만 그저 추측에 불과한 것 아니오? 적이 그렇게 움직이리란 보장이 있소?” “맞습니다. 적들이 중앙군을 향해 가도를 타고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동, 서 양군은 큰 곤란에 빠질 것입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긴 하다. 적들이 중앙군을 칠 것이란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녀는 그저 지난 삶을 통해 알고 있을 뿐이다. 다만. 정황적 근거는 한 가지 있다. ‘이걸 이야기해도 될까?’ 엘리제는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받아들이지 안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말해보자.’ “이건 제 추측이지만…… 동군이 보크네 요새까지 진격한 것이 어쩌면 사막의 전갈의 작전일지도 모릅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동군이 보크네 요새까지 한참 남쪽으로 내려감에 따라 중앙군과 거리가 멀어져, 유사시 급하게 지원을 할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하지만 장군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아니, 데임. 듣자 듣자 하니 너무한 것 아니오? 그러면 우리 동군이. 라이트 각하께서 보크네 요새를 탈환한 게 적들이 함정으로 거저 내주었기 때문이란 말이오?” “허허, 아무리 전쟁에 무지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심하구려. 보크네 요새는 크림반도 동부의 핵심적인 요충지이오. 아무리 작전이라지만, 그런 요충지를 적에게 내주는 바보는 없소이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의 반발이었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어떻게 하지?’ 이제 할 말은 다했다. 남은 것은 군부에서 그녀의 의견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였다. 하지만 지금 분위기를 봤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것 같지가 않다. ‘안 돼! 큰 희생자가 나올 거야.’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떻게 해야지? 무슨 방법이 있지?’ 그렇게 고민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어 속으로 발을 동동 굴릴 때, 한 명의 목소리가 회의에 끼어들었다. “실례합니다. 제가 한 말씀만 올려도 되겠습니까?” “……?!” 약간은 삐딱한 젊은 목소리. 사람들은 시선을 돌렸다. “차일드 공자?” 자신감 있지만 오만한 인상의 젊은 남자. 알버트 드 차일드 공자였다! “네, 정보부의 참모 차일드 중령입니다. 장군님들 앞에서 한 말씀만 올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엘리제를 힐끗 바라봤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시선. 그 눈빛에 엘리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돼! 여기서 차일드 공자마저 반대하면!’ 군에서 그는 일개 참모에 불과할지라도, 실제 신분은 제국을 주름잡는 귀족파의 수장 차일드 가문의 후계자였다. 당장 이곳 군부의 수뇌 중에서도 차일드 가문의 뒤를 따르는 귀족파의 인물이 적지 않은 터. 만약 알버트가 반대하면 그들도 같이 반대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저는 데임 클로랜스의 의견에 일부분 동의합니다.” “……네?”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알버트는 그녀를 향해 입술을 살짝 비틀더니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부에서 보크네 요새 탈환전시 석연치 않은 상황을 여러 발견하였습니다.” “……!” “여러 정보가 있었지만, 결론만 말하면 분명 중요한 요충지인데도 공화국에서 이상하게 신경을 덜 쓰는 느낌이었습니다.” “그 말은 무엇입니까? 공화국이 보크네 요새를 일부러 내주었다는 뜻입니까, 공자? 동군을 남쪽으로 전진시켜 중앙군과 떨어뜨리기 위해?” “글쎄요. 이 정보들만 가지고 그렇게 단정 지을 수는 없겠죠. 그냥 참고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보크네 요새까지 진격함으로써 동군과 중앙군의 거리가 너무 멀리 벌어지긴 했다는 것입니다. 데임의 말처럼 급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발 빠르게 지원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엘리제는 알버트를 끔뻑끔뻑 바라보았다. 나를 도와주고 있어? 귀족파인 그가? 그런데 그때, 총사령관 린덴이 말했다. “이제 그만. 모두의 의견. 다 잘 들었다.” “…….” “결론을 내겠다. 맥가일 원수, 잘 듣도록.” “네, 전하.” 옆에 앉아 있던 부총사령관 맥가일 노장이 고개를 숙였다. “중앙군에서 5만씩을 차출해 각각 동, 서 양면으로 보낸다.” “……!” 엘리제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안 돼!’ 그렇게 하면 중앙군은 궤멸이다! 지난 삶의 악몽이 반복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총사령관. 전장에서 그의 결정은 법이나 다름없었다. 엘리제는 절망에 눈이 컴컴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가 똑바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는 척만 한다.” “……?!” “사막의 전갈만 기만술을 쓰라는 법 있나? 우리도 전갈을 낚아보지.” 장군들이 놀라 그를 바라봤다. “전하, 그 말씀은?” “동, 서 양면으로 빠져나간 각각의 5만 군들은 이곳 중앙군 근처에서 몰래 대기한다. 그래서 우리 중앙군이 약해진 줄 알고 전갈이 달려들면, 좌우에서 협공한다.” 모두의 눈이 커졌다. 그러면 삼면 협공이었다! 아무리 공화국군이 수적으로 우세해도 큰 혼란에 빠지리라! 하지만 린덴은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맥가일 원수, 서군에 연락을 넣도록.” “어떤 연락을?” “전장을 우회해 공화국군의 뒤를 따르도록.” “……!” “공화국군이 우리 중앙군의 삼면 공격에 혼란에 빠지면 서군은 그대로 뒤를 친다.” 모두 그 계책을 듣고 경악했다. 만약 그렇게만 된다면 궤멸적 피해를 보는 것은 공화국이었다. “하, 하지만 전하…… 만약 적이 중앙군을 공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한 인물이 물었다. 린덴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만약 패전한다면. 그 책임은 내가 진다.” “……!” “물론 도박을 하는 게 아니야. 이번 적의 총공격은 원래부터 수상했어. 난 클로랜스 대령의 말이 맞는다고 믿는다.” 믿는다. 그 말이 엘리제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지난번 론도 콜레라 사건 때 이후로 두 번째 듣는 말이었다. “엘리제.” “네, 네, 전하?” “고맙다. 네 의견이 결정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만약 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가장 큰 수훈자는 바로 너이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의 조언 덕분에 추측이 확신으로 변했으니까. 린덴은 군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장군들.” “네, 전하.”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이번엔 우리가 사막의 전갈을 사냥할 것이다. 모두 단단히 각오하고 준비하도록.” “……!” *** 그렇게 회의가 끝났다. 엘리제는 장군들 앞에 섰던 긴장이 풀려 다리가 떨렸다. 하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회의장을 나섰다. “잘 준비해야겠구려.” “그러게 말이오. 비밀을 잘 유지해야 할 듯하오.” 회의 때는 설왕설래했지만, 더 이상 잡음은 없었다. 총사령관이 결정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결정한 이상 따른다. 그게 군인이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장군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었다. “사막의 전갈을 사냥한다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떨리는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제국군의 무서움을 보여줄 때입니다.” 사막의 전갈을 사냥한다! 생각만 해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한편, 엘리제는 야전병원으로 돌아가려 발걸음을 옮겼다. ‘빨리 돌아가자.’ 그런데 그때였다. 그녀는 한 인물을 발견하고 서둘러 뒤를 따라갔다. “알버트 공자님!” “……!” 젊은 남자, 알버트가 그녀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그가 귀찮은 내색을 보였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네?” “회의 때 저를 도와주신 것 감사합니다.” 알버트는 이마에 주름살을 만들었다. “됐습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리고 분명히 말하지만 도와준 것 절대 아닙니다. 그저 제 생각도 마찬가지이기에 발언한 것일 뿐. 그러니 절대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절대’가 두 번이나 들어간 강한 부정. 그런데 너무 강한 부정이다 보니, 오히려 반대의 느낌이 들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쿡 웃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원래 말투가 이런가?’ 한편 알버트는 웃는 엘리제를 뚱한 얼굴로 바라봤다. “뭘 그렇게 웃습니까?” “그냥요.” 알버트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조심히 안 가도 됩니다. 바로 앞이 제 방이니.”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알버트는 말꼬투리를 잡았다. 그러고 정말 코앞에 있는 집무실로 들어가기 전,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안부 전해 달라더군요.” “네?” “유리엔 그 아이가 말입니다. 데임께 꼭 안부 전해 달라고.” 그러며 그는 투덜거렸다. “편지로 몇 번이나 부탁하던지. 그렇게 안부가 전하고 싶으면 직접 데임께 편지하면 될 것을.” 엘리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알버트 공자님, 안부 전해줘서 고마워요.” “됐습니다. 빨리 들어가기나 하십시오.” 그러며 그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문틈 사이로 그가 사라지기 직전, 엘리제는 갑작스러운 마음이 들어 이렇게 외쳤다. “알버트 공자! 전투 때 꼭 몸조심하세요!” “……!” 닫히던 문이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이런 소리가 새어 나오며 다시 닫혔다. “당신도 조심하십시오.” 며칠 뒤, 제국군과 공화국군이 충돌하였다. 코프스크 대회전. 지금껏 유례가 없던, 크림반도의 운명을 건 대전(大戰)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화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71 대회전 ========================================================================= 3장 대회전-5 “전령의 보고입니다! 적들이 우리 중앙군이 위치한 코프스크 인근까지 접근하였다고 합니다.” “병력의 수는?” “30만입니다.” 너무나 어마어마해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숫자였다. 사령부 지휘관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하지만 긴장일 뿐, 두려움은 아니었다.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에. “정말로 데임의 말대로 되었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허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예측을?” 지휘관들은 얼마 전 있었던 작전 회의를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당시 그녀의 발언을 기꺼워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주제넘게 나선다고 불쾌해만 했었지. 하지만 이후 전황은 소녀의 예측에 정확히 맞아떨어져 갔다. ‘만약 예비 황태자비의 말에 따르지 않았더라면.’ 모두의 가슴에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동, 서 양쪽으로 지원군을 보낸 중앙군은 단 5만의 병력으로 30만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5만 대 30만. 결과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중앙군이 무너지면 동, 서에 고립된 동군, 서군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을 터. ‘데임께서 이 제국군을 구하였구나.’ 어린 소녀가 한 일은 단순히 적의 움직임을 예측한 것이 아니었다. 이 제국군을 궤멸의 위기에서 구원해 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측 덕에 반격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한편, 개전이 코앞에 다가온 그 순간 린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이제 곧 크림반도의 운명을 가를지도 모를 대전(大戰)이 시작된다. 제국군을 이끄는 통수권자로서 부담감이 없다면 거짓말일 터. ‘준비는 완벽하지만.’ 그는 자신이 마련한 여러 계획을 떠올렸다. 그래, 완벽했다. 변수가 없는 한 공화국군은 올가미에 걸려들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몰라.’ 동방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말이 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 진인사는 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전쟁의 승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 ‘제발.’ 그는 엘리제가 ‘론’인 자신에게 준 징표를 어루만졌다. 진주로 장식된 낡은 십자가가 손끝에 느껴졌다. ‘엘리제, 너도 반드시 무사해야 한다.’ 이번 코프스크 회전은 그녀가 있는 야전병원도 사정권에 든다. 혹시나 몰라 야전병원 쪽으로 두터운 방비를 해두었지만, 계속 걱정이 들었다. ‘엘리제, 네가 손끝 하나라도 다친다면 나는 미쳐 버릴 거야.’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그녀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절대로. 그때, 한 참모가 그에게 말했다. “전하, 모두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과 불안 따위는 마음속에 묻으며 그는 철혈의 지휘관의 가면을 썼다. “오늘을 위해 모두 수고 많았다.” 총사령관 린덴이 장내에 모여 있는 지휘부에게 입을 열었다. “다들 들었겠지만, 적이 이곳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적의 수는 무려 30만. 우리 중앙군 15만에 비해 2배나 많다.” 하지만 황태자는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렵나?” “아닙니다!” “그래, 개미 떼 따위 아무리 수가 많아도 무서워할 이유가 없지. 우리가 누군가?” “대(大)제국군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대제국군이다. 세계를 호령하는.” 그렇다. 제국군. 그것은 적에게는 공포를, 아군에게는 무한한 자부심을 주는 단어였다. “우리 제국군이 무서워할 적은 없다. 하물며 함정에 들어오고 있는 개미 떼 따위야.” 린덴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장들(My lads).” 그는 차갑게 선언했다. “이제 우리는 사냥을 시작할 것이다. 모두 풍성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오늘 저녁은 사막의 전갈의 목을 보며 축배를 들자. 알겠나?” 지휘관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네, 전하(Yes, My Lord)!” 그렇게 코프스크 회전이 막을 올렸다. *** 콰앙! 콰앙! 대포 소리와 수류탄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전투 지점과 거리가 제법 있는 야전병원이었지만, 옆에서 터지듯 굉음이 들렸다. “데, 데임……! 전하께서 승리하시겠죠?” 어린 도제, 제이가 벌벌 떨며 엘리제에게 물었다. 나이만 따지면 어리긴 엘리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제이에게 불안해하지 마라는 듯 차분히 미소를 지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이.” 사실 엘리제도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대비했지만,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몰라.’ 완벽한 준비를 했어도, 의외의 결과가 나온 전쟁이 인류사에 얼마나 많았는가?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전쟁은, 그리고 이런 큰 대전의 결과는 하늘에 달려 있었다. 더구나 상대가 루이 니콜라스가 아닌가? 절대 안심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 군이 패전하면 곧바로 이곳까지 적들이 밀려들 거야.’ 병원의 다른 이들은 괜찮다. 모두 정식 군인도 아니고, 인도주의적 치료를 위해 자원 온 이들이었으니까. 공화국군도 저들을 험하게 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포로로 잡혀 적에게 끌려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로마노프 황실의 예비 황태자비였으니까. ‘잡혀가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어쩌면 그냥 눈 먼 총알이나 대포의 파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그녀를 못 알아본 병사들에게 궂은일을 당할지도. 어떻게 되든 모두 최악이었다. ‘불안해하고 있어 봤자 바뀌는 것은 없어. 최선을 다했으니 믿자. 그리고 난 내 할 일을 하고 있어야지.’ 그녀는 잠시 기원하듯 하늘을 향해 눈을 들었다. 그리고 곧 고개를 돌려, 자신을 보고 있는 야전병원의 의사들과 간호원들에게 말했다. “여러 선생님들. 지금까지 너무 감사했습니다. 선생님들 덕분에 많은 환자를 살릴 수 있었어요.” “…….” “전투가 시작됐으니, 곧 환자가 몰려들 것입니다.” 그리고 소녀는 말했다. 담담하지만 강하게. 저 여리고 작은 몸에서 나왔다고는 생각 못할 의지가 담긴 음성이었다. “큰 전투가 벌어지고 있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이전과 같습니다. 환자를 살립니다.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한 명이라도 많은 환자를 살리는 것. 그게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니까요.” 그녀의 말에 불안에 잠겨 있던 의료진들의 눈에 각오가 깃들었다. 작고, 여린 소녀는 그들에게 선언했다. “전투와 상관없이 우린 우리의 일을 합니다.” 그렇게 그들은. 그리고 엘리제는 자신들의 전쟁을 시작했다. ***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제국군을 무찔러라!” “크악!” 회전은 처음엔 공화국군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5만의 병력밖에 없는 제국군의 본진은 공화국군의 총공격에 속절없이 밀렸다. 그런데 그렇게 수없이 많은 피가 평원을 적실 때, 이변이 일어났다. 동, 서로 떠난 줄 알았던 지원군들이 공화국군 양 허리에 나타나 강력한 공격을 펼친 것이다. 양옆에서 그들을 에워싼 제국군은 각각 5만 명으로 무려 10만의 대군이었다. “크악!” “으악!” 정면에는 제국군의 본진. 그리고 양옆에는 10만의 대군. 그 삼면에서 벌어지는 합공에 공화국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몰아붙여라!” “폐하를 위하여!” 그제야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는 자신이 함정에 빠진 것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말도 안 돼!’ 여자처럼 고운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의 계책이 완전히 간파당하다니?! 간파당한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의 마음을 손바닥 보듯 완벽하게 파악당한 것이다. “모두 전열을 정비해라! 흔들리지 마라!” 급하게 명했으나, 공화국군의 전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병력의 수는 공화국군이 훨씬 많았으나, 허를 찔린 대가는 컸다. 삼면에서 이루어지는 합공에 전열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3황자, 검제 미하일이 이끄는 검기사단도 이들의 붕괴를 가속시켰다. 혼란에 빠진 적 진영을 마치 사자가 토끼 떼 사이에 뛰어든 것처럼 휘저었던 것이다. 그 강맹한 모습은, 제국군에게 저들이 아군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공화국군의 전열은 완전히 흐트러졌고, 전장식 소총 간의 전투, 라인 배틀(Line battle)에서 전열이 무너지면 그대로 끝이었다. 공화국군은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붕괴하였다. “이, 이럴 수가……!” 루이 니콜라스는 고성을 질렀다. 항상 부드럽게 단장된 그의 머릿결은 흙먼지에 헝클어진 지 오래였다. ‘도대체 누가? 어떤 책략가가 이 계책을 알아챈 것이지?’ 공제? 의심은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신중한 그의 성격상 이렇게 전격적으로 동, 서군을 버리는 위험을 감수하고 포위 작전을 감행하기 어려웠을 텐데? 분명 그의 작전을 간파한 책략가가 따로 있을 것이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 수모는 절대 잊지 않으마! 누구인지 반드시 확인해 혹독히 갚아주마.’ 그는 손을 부르르 떨며 다짐했다. “일단 후퇴한다!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라!” 그리고 그 순간. 피슝! 파공음과 함께 그의 그림 같은 이마 옆으로 피가 튀어 올랐다. “크아악!” 루이 니콜라스는 손으로 이마 옆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각하!” 놀란 병사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한 치만 깊었어도 목숨을 잃었을지 모를 상처였다. ‘빌어먹을! 기다려라. 이 치욕은 반드시 갚아주마!’ 루이 니콜라스는 정체 모를 책략가에게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비트란에 머물러 있던 7만의 서군이 린덴의 밀명을 받고, 공화국군의 뒤를 친 것이다. 정면, 양옆, 그리고 후방까지. 그 삼엄한 포위 공격에 공화국군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리고 아침에 시작해, 밤이 되고, 다음 날 해가 뜰 때까지 이어졌던 전투가 막을 내렸다. “황제 폐하 만세!”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제국군은 총검을 하늘로 찌르며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완벽한 대승이었다. 공화국군은 기존 전선에서 한참이나 뒤로 물러나서야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반도 북부에 머물러있던 제국군은 기세를 몰아 중부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반도의 수도인 심페폴을 다시 가시권에 두게 된 것이다. 그렇게 전장의 흐름이 다시 제국군을 향해 넘어왔다. *** 회전은 끝났지만, 엘리제의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환자들이 홍수처럼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여기 진통성 마약 주세요! 이쪽으로 와서 거즈로 지혈 좀 해주세요!” 부상병이 너무 많아 의료진만으로는 손이 모자랐다. 몸이 성한 병사들도 합류해 부상병 처치에 손을 보탰다. ‘다행이야. 그래도 피해가 크지 않아.’ 생각보다 병력의 피해가 굉장히 적었다. 수십만의 병력이 충돌한 회전인 것을 감안하면 거의 피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워낙 압도적인 전투를 벌인 탓이었다. 덕분에 군 수뇌부에서는 그녀에 대한 찬사가 자자했다. 예비 황태자비가 사막의 전갈의 계략을 정확히 파악해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고! 이번 대승에 대한 1등 훈장은 예비 황태자비가 받아야 한다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상이라니.’ 엘리제는 환자를 치료하며 쓴웃음 지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괴로운 눈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제국군이 압승한 탓에 공화국군은 대패하게 되었다. 병력 손실도 컸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의 조언 때문에 많은 인명이 상하게 된 것이다. 비록 적군이라 할지라도. ‘아니야. 그건 지나친 생각이야.’ 전쟁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공화국의 군인들이 다치는 것이 꺼려져 입을 다물었으면, 그때는 그녀의 소중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을 것이다. 결국 나쁜 건 전쟁이었다. ‘아무도 다치지 않으면 좋을 텐데. 아군이든 적군이든.’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생각.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했다.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그 방법밖에 없어.’ 죽어가는 모든 환자를 살릴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환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겠다. 그렇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고 환자들을 돌봤다. ============================ 작품 후기 ============================ 내일 수요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2 3-4 위험한 수술 ========================================================================= 3장 위험한 수술-1 그리고 5일 정도가 지났다. 회전에 이어진 추격전, 새롭게 형성된 전선에서의 전투. 극심한 혼란이 지나고, 전장이 안정을 찾아갔다. 야전병원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전투가 잦아들며 부상자들의 발생 수가 줄어든 것이다. 물론 평온해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부상병은 발생했고, 엘리제를 비롯한 의사들은 잠을 못 이루며 환자를 치료했다. “데임 클로랜스, 이 복합 상처 감염을 살펴주세요.” “네, 그레이엄 선생님. 아, 아까 말씀하신 저기 탈구 환자는 치료가 끝나서 부대 복귀하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정신없이 환자를 보던 중이었다. 엘리제는 의외의 초대를 받았다. “승전 연회라고요?” “네, 데임.” 전령으로 온 초급 장교가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답했다. “오늘 밤, 지난 회전의 대승을 기념하여 연회가 열릴 예정입니다. 병사들에게도 고기와 약간의 술을 내려 승전을 기념할 거고요.” 전장에서 술과 고기라. 얼핏 이해가 안 갔지만, 사기진작을 위한 일인 것 같았다. “그렇군요.” “네, 데임. 그러면 저녁에 뵙겠습니다.” 초급 장교는 당연히 그녀가 참석할 거로 생각하며 말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못 갈 것 같아요.” “……네?” “환자가 너무 많아서요. 초대 감사하다고 전해주세요.” “하, 하지만.” 초급 장교는 당황했다. 이 승전의 가장 큰 공로자는 다름 아닌 엘리제였다. 즉,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연회에 빠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엘리제는 완고했다. “제가 승전 연회에 가면 이곳에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하나요?” “하지만…… 딱 하루에 불과한데…… 황태자 전하께서 꼭 오시라고 당부하셨는데…….” “지금도 일손이 모자란 상황이에요. 살 수 있는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죽어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런 상황에서 의사인 제가 빠지면, 그만큼 죽는 사람이 늘 수밖에 없어요.” 물론 그녀도 승전 연회에 가기 싫은 것은 아니다. 아니, 가고 싶었다.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조금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그러면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는 환자들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전하께는 죄송하다고 전해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단호히 연회 참석을 거절했고, 초급 장교는 힘없이 사령부로 돌아갔다. 옆에서 듣던 제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연회에는 참석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데임? 전하께서도 직접 부르셨다고 하는데.” “괜찮아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환자를 위한 일이다. 사적으로는 늘 차갑고, 딱딱한 전하지만, 이런 공적인 면에서는 관대한 분이니 이해해 줄 것이다. “데임! 여기 수류탄 손상 환자 왔어요! 빨리 와주세요!” 또다시 닥친 환자에 엘리제는 달려갔다. 그렇게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승전 연회의 밤이 밝았다. 군 진영 전체가 모닥불로 밝게 타올랐고, 병사들도 모처럼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여러모로.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의미를 남긴 밤이 시작되었다. *** “God save the King!” 군영 여기저기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전투와 추위에 지친 병사들이 모닥불에 둘러앉아 간만에 고기와 술을 마시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황제 폐하 만세! 브리티아 제국 만세!” 어느 정도 술이 들어가자 병사들은 어깨동무하며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거기에 꼭 빠지지 않는 이름. “황태자비 만세! 데임 클로랜스 만세!” 그녀가 전장에 도착한 뒤, 이제 4개월 남짓 되었다. 그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모든 병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하게 되었다. 자신들과 함께하는 등불을 든 여인으로. 모두의 레이디로. 심지어 술에 취해 이렇게 말하는 병사도 있었다. 그녀에게 치료받았던 젊은 병사였다. “나, 오늘은 꼭 데임께 고백할 거야!” “이 미친놈아, 황태자비가 될 분한테 무슨 고백이야?!” “몰라! 나 데임한테 반했단 말이야! 말리지 마!” “야, 저놈 잡아! 저러다 사형당해!” 그렇게 전장에 흥겨운 밤이 깊어갔다. 한편, 사령부 승전 연회장에서는. “엘리제가 안 온다고?”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초급 장교는 쩔쩔매며 말했다. “네, 환자를 돌봐야 해서 갈 수 없다고, 전하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옆에 있던 장군들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군요. 이번 승전의 1등 공신이 참석하지 않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데임이 아니었으면, 이런 승리도 없었을 터인데.” 모두 당시 작전 회의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중앙군은 궤멸당하고 동, 서 양군도 전장에 고립되어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우린 그것도 모르고 어리석은 의견이라 면박 주었었지.’ 모두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황태자도 어느 정도 사막의 전갈의 계책을 눈치챘었기 때문에 그런 궤멸적인 피해를 입진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조언이 결정에 큰 도움이 된 것은 확실했다. 왜냐하면 린덴의 경우 짐작만 할 뿐 마음의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하, 예비 황태자비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닙니까? 제가 병사들에게 전해 듣기로는 잠도 거의 주무시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아름다우시지만 몸이 상할까 걱정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날도 쉬지를 않으시니.”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가 늘 하는 걱정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엘리제를 떠올렸다. 다른 사람의 건강을 치료하면서, 도대체 왜 자신의 몸은 챙기지 않는 건가? ‘조금 쉬게 하려고 일부러 불렀건만.’ 그도 안다. 그녀가 전장에 온 후, 단 한 번도 제대로 쉰 적 없이 자신의 몸을 혹사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일부러 전령을 보내 불렀다. 오늘 하루라도 편히 쉬도록. 하지만 이런 날까지 환자를 봐야겠다니! 물론 전장의 상황이 급하고, 환자들이 위중한 것은 안다. 그래도 일단 자신의 몸 먼저 챙겨야 할 것 아닌가!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승전을 축하하며 사령부에서 이런저런 이벤트를 준비했고, 사람들은 흥겹게 박수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린덴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머릿속은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엘리제.’ 그녀가 없는 연회 따위. 그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엘리제가 있는 병원 쪽을 바라봤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미치도록. *** “조금만 더 힘내세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감사합니다, 데임. 이런 날 쉬지도 못하시고. 저희를 위해.” 병사가 감동한 눈으로 자신의 상처를 소독하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정말 고마우면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젊은 병사는 화약을 들고 불더미에라도 뛰어들 기세로 말했다. 저 소녀의 부탁이라면! 죽음도 무릅쓸 수 있었다. “빨리 나으세요.” “네?” “정말 고마우면, 빨리 나으세요. 더 다치지 말고, 그래서 전쟁이 끝나면 가족들에게 무사히 돌아가세요. 그게 제 부탁이에요.” “…….” 그 따뜻한 말에 병사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가슴이 울컥하며 눈에 물기가 차올라 그는 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렇게 엘리제는 야전병원 전체를 돌아다니며, 환자를 살폈다. 등불을 든 채 어두운 병실을 누비는 그녀의 모습은 말 그대로, ‘등불을 든 여인’이었고, 부상당해 누워 있는 병사들에겐 따뜻한 빛이었다. ‘그래도 새로 부상병들이 안 와서 다행이구나.’ 전쟁은 전선이 반도의 수도 심페폴 주위로 교착되면서 잠시 소강상태였다. 그런데 그렇게 병실을 도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데임, 데임.” 어린 소녀 도제, 제이였다. “네?” “잠깐만 이쪽으로 와보세요.” “네? 무슨 일이에요?” “빨리. 빨리요.” “……?”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제이는 설명해 주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제, 제이?” “빨리요. 늦었어요.” 혹시 안 좋은 환자라도 왔나? 엘리제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 야전병원에서 가장 뛰어난 수술 실력을 가진 의사는 당연히 엘리제였다. 그래서 상처가 심각한 환자가 오면 이렇게 급하게 그녀를 찾았다. ‘바로 수술 준비를 해야겠구나.’ 그래도 여유가 있어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다행이었다. 환자가 한꺼번에 몰려들 때는 수술 자체를 못할 때도 많으니까. 그런데 제이가 그녀를 이끌고 가는 곳이 이상했다. 부상자가 모이는 야전병원 구호소를 지나쳤던 것이다. “제이? 환자가 구호소에 있는 것 아닌가요?” “환자요? 아니에요.” 도대체 뭐지? 제이가 그녀를 끌고 간 곳은 다름 아닌 야전병원의 회의실이었다. ‘갑자기 여기에는 왜?’ 얼떨떨해하는 그녀를 제이가 뒤에서 밀었다. “빨리 들어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다고요.” “……네?” 그리고 방에 들어간, 엘리제는 왜 제이가 그렇게 자신을 끌고 왔는지 깨달았다. “와아! 병원장님이시다!” “빨리 오세요, 데임. 기다리고 있었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 박수를 치며 그녀를 환영했다. 그런 그들 앞에 어디서 구한 건지, 케이크며 디저트, 음료수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건…… 어디서?” “전하께서 보내주셨어요.”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전하……요?” “네, 황태자 전하께서 고생이 많다고, 노고를 위로하며 보내주셨어요.” 한 간호원이 감명받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기쁜 날이니, 정말 급한 환자가 아니면 이 음식들 먹으면서 쉬라고 친히 명령까지 내리시고요.” 그 간호원은 두 손을 잡으며 몽롱한 표정을 했다. “저희가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돼 그렇게 명령하셨겠죠? 딱딱하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다정하신 것 같아요.” 그 말에 나이 든 간호원이 피식 웃었다. “이게 어디 우리를 걱정하셔서 그런 것이겠니? 다 데임을 걱정해서 그렇게 명령하신 거겠지. 그렇죠?” 그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태자 전하께서 데임을 생각하시는 마음이 깊으시니까.” 엘리제가 당황해 손을 저었다. “아, 아니에요. 다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모두를 걱정하시는 마음에 그러셨겠죠.” “에이, 전령이 보낸 명령에 친히 언급돼 있던 걸요? ‘명령이니 야전병원장 클로랜스 대령도 필히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 도대체 그런 명령은 왜 내리셨단 말인가? 엘리제는 다시 혼란스러운 마음이 들려 해 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된 것, 우리 건배나 해요. 다들 수고가 많은데.” “네, 좋아요. 데임.” 모두 사령부에서 보내 준 음료를 각자 잔에 담았다. 그리고 카라멜 빛 진저에일을 하늘로 들어 건배하였다. 한 남자 의사가 아쉬운 듯 말했다. “아, 술이었으면 더 좋을 텐데.” “가져올까요? 진영에 조금 있던데.” “됐어. 언제 환자가 올지 모르는데, 술은 무슨.” 제이가 간만에 맛보는 진저에일을 홀짝이며 행복한 표정을 짓더니, 엘리제에게 물었다. “데임은 술 마실 줄 아세요?” “네, 좋아해요.” “네? 좋아한다고요?” 모두 놀라 엘리제를 바라봤다. 생긴 것만 보면 작고 여린 인형처럼 생겨 이슬만 먹을 것 같은 그녀다. 물론 생김새와 실제 내면이 굉장한 괴리가 있는 그녀지만, 그래도 술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엘리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좋아해요. 저 외과의사잖아요.” 첫 번째 삶을 살 때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석을 더 좋아했지. 하지만 두 번째 삶을 살 때, 밤늦게 수술이 끝난 후 동료들과 한 잔, 두 잔 하다 보니 그 맛을 알게 되었다. ‘해장국집에서 많이 마셨는데.’ 잠시 이전 삶이 떠올라 슬쩍 미소를 지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73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2 첫 번째 삶의 기억을 가지고 ‘엘리제’로 살고 있지만, 그녀의 정체성에 지대한 역할을 한 것은 두 번째 삶, 외과의사 송지현의 것이었다. “헤에, 그러네요. 론도 로즈데일 병원에서도 수술하시는 교수님들은 모두 술을 좋아하시던데.” 제이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데임은 어떻게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신 거예요?” 그 물음에 사람들이 엘리제를 바라봤다. 모두 궁금해하는 내용이었다. 저 ‘엘리제 드 클로랜스’, 희대의 천재, 론도를 구한 영웅, 등불을 든 여인은 어떻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까? “그건…….” 엘리제는 진저에일이 든 잔을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뭐라고 이야기하지? 사실 그렇게 거창한 이유는 아니다. 두 번째 삶에서 의사를 선택한 것은 첫 번째 삶을 속죄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엘리제로 돌아오고 나서도 의사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좋아서요.” “네?” “좋아서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뭔가 숭고한 이유를 기대했던 이들은 그 간단한 답에 맥 빠진 표정을 지었다. “에이, 데임. 거짓말하지 마세요.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에요? 기도하다가 갑자기 무슨 소명을 느꼈다거나.”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예요. 너무 좋아서. 그래서 선택했어요.” 그래, 다른 이들의 오해와 다르게 숭고한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의사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단지 이 일이 좋아서였다. ‘만약 내가 다른 일에 빠졌다면 그 길을 택했겠지.’ 만약 그림에 빠졌다면, 화가의 길을 택했을 것이다. 음악에 빠졌다면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고. 그녀는 그저 환자를 치료하는 일에 빠졌을 뿐이다. 수술할 때 차가운 메스의 느낌에, 긴장감에, 사람이 살아나는 보람에. 그저 푹 빠졌을 뿐이다. 그러니 숭고하다느니, 성인이라느니 하는 말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야. 그저 이 일을 좋아할 뿐이니까.’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행복. 그건 중독이었다. 도저히 이 길을 떠나선 살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의사의 삶을 사는 것도 오래 남지 않았지.’ 엘리제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그녀는 작은오라버니를 위해 이 전쟁에 참전하려고, 황태자와의 결혼을 약속했다. 전쟁이 끝나고, 황태자비가 되면 새장에 갇히리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턱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그런 엘리제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그레이엄 남작이었다. 그는 구석에 기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거운 눈동자에 소용돌이치는 것은 짙은 갈망이었으나, 아무도 그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님?” 엘리제는 그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쳐다보시지? “혹시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데임.” “네?” 그레이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음성이 하나의 의미를 이루려는 순간이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장내에 내려앉았다. “잘 쉬고 있는가?” “……!” 그 익숙한 목소리에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놀란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전하를 뵙습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총사령관인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그래, 모두 앉지.” 생각지도 못한 그의 출현에 모두 엉거주춤했다. 황태자 전하가 이곳에 왜? 엘리제가 그 마음을 대표해 조심히 물었다. “저…… 전하, 야전병원엔 어인 일이십니까?” 황태자는 말했다. “그대들이 잘 쉬고 있는지, 살피러 왔다.” “가,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잘 쉬고 있는지 보러 왔다고? 고작 자신들을? 저 지고한 황태자께서 친히? 그들의 의문 섞인 시선을 피해 황태자가 눈을 돌리며 말했다. 뭔가 궁색한 목소리였다. “뭐…… 그대들이 늘 고생이 많으니까 말이야.” 여전히 이해 불가능한 설명이었다. 물론 병원의 그들이 고생하는 것이야 사실이지만, 전쟁에서 고생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 부대원들도 그들 이상으로 고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왜 오신 거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심지어 그는 금방 돌아갈 생각도 없는지, 그녀 바로 옆의 의자에 턱 하니 앉았다. 그러고 그들 사이에 마련된 음식을 보며 물었다. “음식들은 입에 맞는가?” 질문을 받은 남자 의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네, 네! 전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다행이군.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그대들끼리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게.” “…….” 린덴의 친절한 말에 그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그러겠는가?! 총사령관이자 황태자인 그가 떡하니 옆에 앉아 있는데! “엘리제.” “네, 네?” 엘리제는 놀라 답했다. “너도 편히 쉬어라. 늘 고생이 많은데.” “아, 아닙니다.” 그녀는 자신의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보자 최근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그녀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화악 붉어졌다. 그뿐 아니라 생일을 맞아 장미꽃을 받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 일들을 떠올리니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불편해졌다. 도대체 그의 의중을 모르겠다. ‘오늘은 어떤 이유로 오신 거지? 정말로 우리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다른 이유가 있을 턱은 없지만 그래도 이상했다. 노고를 위로할 것이면 의무대보다는 목숨을 걸고 싸운 전투 부대에 가는 것이 맞는 것 아닌가? 더구나 오늘은 중요한 승전 연회 날. 훨씬 중요한 일이 많을 텐데? 어쨌든 그렇게 황태자와 엘리제는 나란히 앉아서 입을 다물었다. “…….” 한편 사람들은 황태자가 엘리제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그가 이곳에 온 진짜 이유를 알아차렸다. 바보가 아닌 한, 모를 수가 없었다. “크흠, 저는 이만 환자를 돌보러 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선생님! 저도 같이 가요!” 한 명, 두 명 황태자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가? 수고하게.” “네,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전하!” 그렇게 사람들은 마치 도망이라도 치듯 회의실에서 빠져나갔고, 황태자는 그들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엘리제도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환자를 살피러…….” 그러고 그녀는 등을 돌려 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마음이 불편해 빨리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였다. 탁! 차가운 감촉의 손이 그녀의 손등을 잡았다. “……!” 황태자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던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너는 남아 있어.” “어, 어째서요?” 엘리제가 당황해 물었다. 그에게 잡힌 손등이 화끈거렸다. 분명 차가운 감촉이거늘 뜨거웠다. 왜 이런 느낌이 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냐고?’ 린덴은 그녀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늘 그렇듯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을 뿐이다. 조금 더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조금 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왕이면 단둘이. “그냥.” “……네?” “중요한 환자라도 있는 건가? 네가 직접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그건…….” 그런 건 아니다. 지금 딱히 급한 환자는 없었다. “아니면 그냥 있어. 명령이다.”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을 했다. ‘차라리 환자라도 왔으면.’ 그녀는 눈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이 불편한 상황에서 자신을 구해줄 이가 없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아까 전 벅적거리던 게 거짓말인 것마냥 회의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황태자가 그녀의 손을 잡는 순간, 어머나! 하며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 그사이에 다 어디 간 거야?’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눈에 유일하게 회의실을 떠나지 않았던 이가 들어왔다. 그레이엄이었다! 그는 아까 전 자세 그대로 벽에 기대 그녀와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만이 가득 찬 눈으로. “그대는?” 황태자도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레이엄을 보았다. “그레이엄 드 팰론 남작이라 합니다, 전하.” “팰론?” 어디서 본 얼굴인데? 황태자는 미간을 좁혔다. “네, 전하. 이전 첼트넘 지방을 봉토로 황가를 섬겼었습니다.” 하지만 황태자는 팰론 남작가가 이전 첼트넘 지방의 영주였든, 아니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단 하나, 저 남자가 어째서 아직도 회의실에 남아 있느냐는 것이었다. 눈치도 없이. “그대는 돌볼 환자가 없는가?” 눈치껏 빨리 꺼지란 뜻으로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네, 지금 급한 환자는 없습니다.” 그러며 그는 전혀 자리를 비킬 생각이 없는지,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을 그들, 정확히는 엘리제에게 향하며. ‘이놈……? 설마?’ 황태자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러고 보니 기억났다. 저놈을 어디서 봤는지. 테레사병원에서 엘리제의 선생이라 했던가? ‘감히……?’ 갑자기 황태자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올랐다. 특별히 그가 무슨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본 것이지만 속이 뒤집혔다. 저건 단순히 스승이 제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자신이 그런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기에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엘리제를 저런 눈으로 바라봐?!’ 그녀를 저렇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린덴은 당장에라도 권총을 꺼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드럽게’ 명했다. “나가.” “…….” “귀가 안 좋은 건가? 지금 내 말 안 들리나? 당장 나가라고.” 그레이엄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러면 이만.” 그러고 그는 등을 돌려 회의실을 빠져나갔고, 린덴은 입술을 비틀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어딜 감히.’ 물론 그가 특별한 감정을 담고 그녀를 바라본 것인지는 정확하진 않다. 하지만 마음만 같아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둬 자신만 보고 싶은 그녀거늘, 저런 눈빛이라니.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닳을까 불쾌감이 들었다. ‘엘리제, 정말 어딘가에 가둬놓고 싶군. 진심으로.’ 린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만 그녀를 볼 수 있고, 그녀의 눈도 나에게만 향하고. 그렇게 그녀를 독점할 수 있다면.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찌릿했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지. 아직 마음도 얻지 못했으면서.’ 현실을 떠올린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얻기는커녕 그녀는 자신을 볼 때마다 항상 화들짝 놀라며 거부감을 보인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아무리 거부해도 기필코 그녀의 마음을 얻겠다고 다짐했지만, 그 싫은 눈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싫어하는 눈빛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팠다. “저…… 전하, 손을 그만…….” “……!” “조금…… 아파서…….” 엘리제가 떠듬떠듬 말했다. 린덴은 놀라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생각 없이 계속 잡고 있었다. “미안하다. 많이 아픈가?”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프지만 그보다 더 이상하게 화끈거렸다. 그렇게 황태자와 엘리제는 단둘이 회의실에 남았다. 엘리제는 그의 바로 옆에 혼자 앉아 있으니 불편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불편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환기하고자 입을 열었다. “저…… 전하.” “왜 그러지?” “……어째서 저보고 남으라 하셨는지요?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황태자는 고개를 저었다. 할 말? 물론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이라도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감정이 수도 없이 가슴에서 요동쳤다. ============================ 작품 후기 ============================ 내일 24일 09:07분에 올라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4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3 린덴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특별히 할 말은 없다.” “그러면 어째서?” 거듭된 물음에 린덴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가? 그냥 있으라 했다.” 그저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랬거늘! 린덴은 속으로 말했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냥 있으라 했다고? 왜?’ 그의 대답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불편해졌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후 둘은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엘리제는 머리와 가슴이 혼란스러워 입을 다물었고, 린덴은……. ‘젠장, 어떻게 단둘이 남긴 남았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지 그녀가 좋아할까?’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는 맥가일 원수가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맥가일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전하! 여자들은 유머 있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난 유머 같은 것 모른다.’ ‘어쨌든 말 없는 남자는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니 데임과 단둘이 있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고, 유창한 말주변으로 데임을 즐겁게 해주십시오!’ ‘젠장, 유머와 유창한 말주변이라니. 가능한 걸 조언하라고! 나한테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조언을 듣고는 있지만, 왠지 전혀 믿음이 안 가는 맥가일 원수. 린덴은 여자에 대해 모른다. 사귀어본 적도 없고,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정략혼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그러니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마음을 얻을 수 있는지 알 리가 없다. 그저 간절히 원하는 그녀를 코앞에 두고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끙끙댈 수밖에. ‘빌어먹을, 셋째는 어떻게 그렇게 자연스럽게 영애들을 대하는 거지?’ 그는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라 불리는 3황자 미하일을 떠올렸다. 목숨을 걸고 다투는 정적이지만, 이 순간은 그의 말주변이 부러웠다. ‘맥가일 원수가 알려준 유머라도 말해야 하나? 총을 쐈더니 새가 날아갔다는?’ 하지만 그 유머를 말하는 순간, 둘 사이가 얼음처럼 얼어 벌일 것 같은 본능적 위기감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왠지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똑. 똑. “……?!” 둘이 있는 회의실의 문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황태자는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인상을 찌푸렸고, 엘리제는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괜찮으니 들어오세요!”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문 너머로 나타난 얼굴을 보고 엘리제와 황태자는 눈을 크게 떴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전하?” 화사한 꽃 같은 미남. 붉은 제복 밑으론 검술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가 눈길을 끌었다. 그는 엘리제를 반가운 눈길로 보더니, 옆에 앉은 린덴을 보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라? 형님도 여기 계셨네? 내가 방해한 건가?”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미하일?” 린덴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타난 이의 정체는 다름 아닌 3황자 검제 미하일이었다! 미하일은 형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엘리제를 바라봤다. “잘 지냈어, 리제? 오랜만이네.” “네, 전하. 특별한 일은 없으셨어요?” “응, 나는 늘 건강하지. 알잖아. 나 강한 거.” “그래도 꼭 조심하세요. 전장은 위험하니.” 엘리제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반가움이 담겨 있었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인지라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실제로 엘리제는 이전 삶의 유일한 친구였던 미하일에게 깊은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린덴은 마음에 안 든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다, 미하일.” “아아. 다른 건 아니고. 사실 리제에게 물어볼 게 있어서.” 그 말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검제 3황자 전하가? “리제, 하나만 물어봐도 돼?” “네, 전하. 무슨 일인데요?”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물음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나한테 수술법을 가르쳐 줄 수 있어?” “……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질문이란 말인가? 난데없이 수술법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 환자가 한 명 있는데 네가 수술할 수는 없고, 내가 직접 해야 할 것 같아서.” 더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환자가 있는데, 자신이 직접 수술해야 한다니? 그러며 그는 자신의 오른쪽 배를 가리켰다. “여기에 뭐가 박혔는데, 어떻게 수술해야 할까? 대충 다 잘라내고 꺼내면 되나?” 위치를 보니 간 하단, 부신과 콩팥이 있는 부위였다. 후복막강 장기로 저곳에 총탄이 박혔으면 부신과 콩팥 일부를 절제해야 한다. 어려운 수술로 이곳 의사 중 저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유일했다. 당연히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더더욱 아니었고. “전하, 제가 수술할게요. 환자는 지금 어디 있나요? 혹시 적진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 거예요?” “아니, 환자는 이곳 야전병원 근처에 대기하고 있어.” 엘리제는 더욱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처에 있다면 빨리 병원으로 데려올 것이지 왜? “빨리 이곳으로 데려와 주세요. 콩팥이 있는 부위인데 시간이 지체되면 피가 많이 나 위험할 거예요.” “이곳으로는 데려올 수가 없어.” “네? 어째서요?” “그게…….” 미하일은 황태자를 보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안 돼. 사실 죽게 내버려 두는 게 맞는 것 같지만, 나름 친척이라 내버려 둘 수가 없네.” “친척…… 이요?” “응. 밉상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어서.” 그의 말에 그녀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3황자 전하의 친척? 친가인 로마노프 황족은 아닐 거고, 3황자의 외가는 차일드 가문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러고 보니 한 명 있었다! 차일드 가문에서 참전한 공자가. “……설마?” “응, 알버트. 너도 지난번 얼굴은 봤지? 그놈이야. 이대로 두면 곧 죽을 것 같아.” “……!” 엘리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알버트 드 차일드! 차일드가의 차기 당주. 그가 죽을 부상을 입었다고? 그의 오만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그가 했던 말도 떠올랐다. ‘당신도 조심하십시오.’ 엘리제는 급히 말했다. “그가 다쳤다고요? 왜 병원으로 데려오시지 않은 거예요? 지금 빨리 데려오세요! 저는 당장 수술 준비를 할 테니!” 그녀는 미하일이 가리킨 부위를 떠올렸다. 부신과 콩팥! ‘쉽진 않겠지만, 빨리 수술하면 살릴 수 있어.’ 다른 의사는 안 된다. 하지만 자신이라면 현대 지구의 수술 실력을 가지고 있는 자신이라면 살릴 수 있었다. “빨리요. 한시가 급해요!” 그런데 미하일의 반응이 이상했다. “이곳으로는 데려올 수가 없어.” “네, 그게 무슨?” “말했잖아. 그냥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사실 맞는다고.” 엘리제는 미하일이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죽게 놔두는 게 맞는 것이 어디 있는가? 살릴 수 있으면 무조건 살려야지. “하아. 리제,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 형님, 미안. 리제 좀 잠시만 빌릴게.” “이곳에서 이야기해라.” “에이, 너무 그러지 마. 잠시만 빌릴게. 나가서 이야기해도 괜찮지, 리제?”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가서 이야기해요.” 그녀 본인이 나가서 이야기하겠다는데, 말릴 방도도 없어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빨리 이야기하고 돌아와라.” 그렇게 3황자는 황태자의 시선을 피해 엘리제를 회의실 밖으로 데려갔다. 충분히 거리가 떨어진 후 상황을 설명했다. “이곳에 데려오면 모두가 위험해질 수 있어.” “……네?” “그놈 몸 안에 박힌 게 총류탄용 소형 수류탄이거든.” 엘리제는 잠시 그 말뜻을 이해 못했다. “수, 수류탄이요?” “응. 하필 공화국군이 쏜 총류탄에 맞았어. 아, 총류탄이 뭐냐면 수류탄을 발사하는 총이라 생각하면 되는데…….” 총류탄(銃榴彈, Rifle Grenade). 현대 지구의 유탄 발사기의 초기 형태와 유사한 물건으로 총알 대신 소형 수류탄을 발사하는 무기이다. “여러 문제점 때문에 제국군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공화국군은 바넬이란 화학자가 개발한 총류탄을 종종 사용하고 있거든. 수류탄을 날렵하게 소형화시켜서. 어쨌든.” “…….” “다행히 터지진 않고 불발되었는데, 배 안에 수류탄이 총알처럼 박혀 버렸어. 이걸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수류탄의 종류가 충격신관으로 된 놈이라…….” 미하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술 중 잘못 건드리면 터질 수도 있어. 그러면 다 죽어. 알버트도, 수술하는 사람도, 근처에 있는 사람은 모두.” “……!”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한 명을 살리려다 수술하는 사람이 모조리 몰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알아.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맞는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정이 든 놈인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고 너를 포함해 다른 사람을 위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위험은 나만 감수할 거야. 그러니 너는 나한테 수술 방법만 알려줘. 수술은 내가 할 테니.” “……!”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미하일, 그가 수술한다고? ‘절대 안 돼. 불가능한 일이야.’ 아무리 그가 최강의 오러나이츠라도 가능한 것이 있고, 불가능한 것이 있다. 설명만 듣고 수술을 할 수 있으면 누가 의사를 못하겠는가? 더구나 이곳 크림에서 그 수술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자신밖에 없다. 그만큼 예민한 손놀림이 필요한 수술이다. 미하일이 자신의 말을 듣고 수술하면 백 프로 실패해 수류탄을 건들 것이다. 그러면 수류탄이 그의 코앞에서 터지겠지. ‘그러면? 그러면 그는? 아무리 오러 나이츠라도 괜찮을 리가 없잖아!’ 아무리 검제라도 수류탄이 바로 앞에서 터지는데 무사할 리가 없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짧은 순간 생각을 마친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환자를 보여주세요.” “응?” “알버트 공자께 저를 안내해 주세요.” “……리제!” 엘리제는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상태를 직접 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겠어요.” *** “크으으…….” 알버트는 들것에 실린 채 인근 야산에 대기하고 있었다. “……!” 그의 모습을 확인한 엘리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상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다리가…….” 피로 물들어 있는 우측 복부는 물론이고, 왼쪽 발이 발목부터 형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왼쪽 발목은 대포의 포탄에 휩쓸리며 떨어져 나갔어. 그나마 이건 응급처치를 잘해서 큰 문제는 없을 거야.” 3황자 미하일은 씁쓸히 말했다. “대포의 포탄에 휩쓸리고 총류탄에 맞았는데도 다행히 목숨은 건졌어. 운이 좋았지.”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운이 좋아? 이걸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까? 론도의 차일드 가문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날 날이 생각났다. 비 오는 날 유리엔을 에스코트하던 이 자신감 넘치는 남자는 본인에게 이런 불행이 닥칠 것이라 상상한 적이 있을까? 사이좋은 인연도 아니건만, 이 비참한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데임 클로랜스?” 한편, 이미 의식이 없는 알버트 곁에서 노심초사 있던 젊은 장교들이 그녀를 알아봤다. 엘리제도 그들을 알아봤다. ‘카르만 경? 라오스 경도?’ 귀족파 가문의 영식들로 모두 그녀에게 고깝게 대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출현에 서로를 바라봤다. ============================ 작품 후기 ============================ 내일 25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5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4 엘리제는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또 시비를 걸려고? 이런 상황에?’ 저들은 그녀가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란 이유만으로 필요 없는 시비를 종종 걸었었다. 그러든 말든 큰 신경은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환자의 상태가 급해 시비를 받아줄 상황이 아니었다. “데임.” 그런데 이어진 그들의 행동에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제발 알버트 공자를 구해주십시오!” “……?!” “제발! 이렇게 간절히 부탁합니다!” 귀족파의 영식들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매달린 것이다! “이런 부탁 염치없는 것 압니다. 하지만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데임 말고는 알버트 공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발……!” 그렇게 말한 그들은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서로 사이는 좋지 않았지만, 그녀의 실력만큼은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알버트를 살릴 능력을 가진 의사는 오로지 엘리제밖에 없었다. 그녀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이, 일어나세요.” “만약 알버트 공자를 살려주신다면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저 카르만 자작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오스 가문의 이름을 걸겠습니다!” 엘리제의 눈동자가 다시 흔들렸다. 저런 부상이면 살아나도 정계에 복귀하기는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런 간절한 부탁이라니. 오만한 인상과 다르게 알버트는 주변인들에게 많은 인망을 쌓았던 것 같다. 그런데 딱딱한 목소리가 그들을 찔렀다. “일어나. 리제는 치료에 참여하지 않아.” “……!” “치료는 내가 한다. 그러니 리제에게 괜히 부담 주지 말고 일어나.” 3황자였다. 귀족파의 영식들은 말을 더듬었다. “하, 하지만…… 전하! 알버트 공자를 치료하려면……!” “그래서? 리제보고 알버트를 수술하라고? 수술하다 수류탄을 잘못 건들면 죽는데?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라는 말이냐?” “…….” 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놈은 밉상이긴 하지만 내 사촌이야. 그리고 난 최악의 상황이라도 오러로 내 몸을 지킬 수 있고. 그러니 위험은 내가 감수한다.” 3황자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리제, 나한테 어떻게 수술해야 하는지만 알려줘.”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상처를 살필게요.” 그녀는 알버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일단 다리는 괜찮아. 지혈도 완벽하고 처치가 잘됐어.’ 상처에 비해 전체적인 몸의 상태는 나쁘지 않은 듯했다. 의식은 없었지만, 맥을 짚을 때 혈압도 잘 유지되고 있었고, 심장의 박동수도 지나치게 빠르진 않았다. 수술만 잘하면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역시 복부의 수류탄이었다. ‘도대체 수류탄이 어떤 식으로 어느 부위에 박혀 있는 거지?’ 그녀는 조심히 복부의 개방 상처를 손으로 열어 보았다. 울컥. 피가 쏟아져 나오며 그녀의 하얀 손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리고 드러나는 내부의 풍경을 굳은 눈으로 살폈다. “……!” 오른쪽 복부 깊숙이, 후복막강. 간의 밑. 콩팥과 부신이 위치한 곳. 그곳에 날렵한 쇳덩이가 박혀 있었다! ‘저게 수류탄?’ 그녀가 매체에서 보던 수류탄과는 많이 다르게 생겼다. 동그랗기보단 길쭉하면서, 뾰족한 게 마치 총의 탄알처럼 생겼다. 물론 일반적인 탄알보다는 몇 배는 컸다. “바넬이란 화학자가 개량한 수류탄이야. 총으로 쏘기 적합하게 일반 수류탄보다 작고, 날렵하지. 디자인 자체는 혁신적이야. 치명적 문제가 있지만.” “무슨 문제요?” “지나치게 둔감하거나 지나치게 예민해.” “……예?” “이렇게 몸에 박힐 때까지 안 터지거나, 안 터지는가 싶어 안심하고 있으면, 툭 건들기만 해도 터진다고. 한마디로 조절이 안 돼. 쏘기도 전에 총 안에서 터지는 일도 부지기수고.” 한마디로 최악이었다. 수술 중에 툭하고 잘못 건들면 터질 수도 있다는 것 아닌가? 물론 안 터질 수도 있겠지만. “위험하네요.” “그래, 그러니 빨리 어떻게 하는지나 알려주고 병원으로 돌아가.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 말도 안 되는 말에 엘리제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을 상황이 아닌데, 웃음이 나왔다. “안 돼요.” “뭐?” “절대 못한다고요. 전하께서 수술을 어떻게 해요?” “왜? 그냥 적당히 잘라내면 되는 것 아니야?”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간의 삼각 인대를 자르고, 간의 위치를 상방으로 올린 후, 부신 정맥, 부신 동맥을 지혈해야 해요. 또 주변의 연조직을 메스로 박리한 후, 부신을 콩팥에서 떼야 해요. 그리고 이후에는……“ 그녀는 최대한 짧게 수술 과정을 그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물었다. “지금 제가 이야기한 것 하나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그것도 수류탄을 안 건들면서.” “…….” 3황자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그는 그녀가 이야기한 것을 10%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은 그냥 잘라낸다고 끝이 아니에요. 모든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고요.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수류탄만 잘못 건드려 알버트 공자는 죽고 전하만 다치실 거예요.”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건가?” 3황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실 그녀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저 손 놓고 있을 수가 없어 그녀에게 수술법을 가르쳐 달란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것이다. “딱 하나 있어요. 알버트 공자도 살고, 아무도 다치지 않을 방법이. 물론 백 프로는 아니지만.” 3황자가 눈을 크게 떴다. “어떤 방법이야?!” 엘리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솔직한 말로 다른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없었다. 이 방법이 유일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짧게 답했다. “제가 수술을 하는 거예요.” “……!” “수류탄을 건드리지 않고, 부신 절제술과 부분 콩팥 절제술을 한꺼번에 해내면 모두가 안 다치고 알버트 공자를 살릴 수 있어요.” *** 부신 절제술. 부분 콩팥 절제술. 이 시대의 의학 수준에선 까마득히 어려운 수술이겠지만, 그녀에게는 지구에서 늘 하던 일상적인 수술이었다. ‘문제는 수류탄이지만. 안 건들면 돼. 할 수 있어.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난 할 수 있어.’ 그건 과신이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을 알고 하는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자신은, 외과의사 엘리제는 이 수술을 해낼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3황자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리제 네가 수술한다고? 절대로 안 돼!” “전하.” “무조건 안 돼! 네가 그런 위험에 처할 바엔 차라리 치료를 포기하는 게 나아!” 엘리제는 달래듯 그에게 말했다. “전하, 위험하지 않아요. 저에겐 그렇게 어려운 수술이 아니에요. 수류탄을 안 건들고 주변을 다 절제 후 한꺼번에 들어내면 돼요.” 사실 그녀는 비슷한 수술 경험이 있었다. ‘갈색세포종 수술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갈색세포종(Pheochromocytoma). 신경 호르몬이 분비되는 종양으로 수술 중 실수로 혹을 건들면 교감신경을 자극하는 물질이 과다로 분비되어 환자를 위험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혹을 건드리지 않은 채 수술을 해야 한다. 고도의 집중력과 손기술이 필요한 수술. 하지만 그녀는 그 갈색세포종 수술을 몇 번이고 성공한 경험이 있었다. 바로 이 수류탄이 박혀 있는 부신 부위에. ‘그 수술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충분히 승산이 있어.’ “전하, 만약 어려울 것 같으면 바로 중단하면 돼요. 그러면 위험하지 않아요. 하지만 시도해 보지도 않으면, 이 알버트 경은 무조건 죽어요.” 사실 솔직히 이야기해서 그녀도 수술하기 싫었다. 자신감이 있다 해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만약 실수라도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밖에 없었다. 그리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알버트는 무조건 죽는다. 그러니 다른 답이 없었다. “…….” 3황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말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알버트는 죽는다. 하지만 수술을 하면 그녀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 그건 더 싫었다. 이 모순된 상황 속에서 그는 갈팡질팡하다 입을 열었다. “좋아. 하지만. 조건이 있어.” “무엇인데요?” “그 수술에는 나도 같이 들어갈 거야. 너와 나. 둘이서 해.”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전하.” “만약 안 듣는다면 수술도 절대 허락할 수 없어. 어차피 도와줄 사람 필요하잖아? 괜히 엄한 사람 끌어들이지 말고 나로 해.” 미하일은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어요.”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 최소한 한 명은 그녀를 도와줘야 하는데,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일이니 그가 도와주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리제. 만약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 수류탄이 터지더라도 내가 넌 털끝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할 거야. 설사 내가 죽더라도 말이야. 내 몸으로 막아서라도 너를 지키겠어.” 엘리제는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제가 잘할게요.” 그녀는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미하일은 빈말로 뱉은 말이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카르만 경, 병원에 빨리 내려가 수술 준비를 해달라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준비가 끝나면 건물 하나를 비워 달라고 전해주세요.” 혹시나 수술이 잘못되면 수류탄이 터질 수도 있다. 그러니 건물을 비워 달라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데임!” 카르만이 내려간 후, 그녀는 3황자에게 말했다. “우리도 알버트 공자를 데리고 빨리 내려가요.” “그래.”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그녀를 잡았다. 서늘한, 그러면서도 분노가 가득한 음성이었다. “지금…… 이런 말도 안 되는 수술을 하겠다고?” “……?!”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였다! “전하, 여긴 어떻게?” 놀란 엘리제가 물었으나,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노려보았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엘리제. 데임 클로랜스! 다시 한 번 묻겠다! 지금 이 말도 안 되는 수술을 하겠다고?!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는?!” “……!” 그의 눈빛에 담긴 아득한 분노에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왜? 왜 이렇게 화나신 거지? 엘리제는 떨림을 멈추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 전하. 알버트 공자는 지금 당장 수술받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입니다. 이 수술을 할 수 있는 이는 병원에 저밖에 없으므로 제가 수술해야 합니다.” “……시끄러.” “……전하?!” “시끄럽다고!” 그 거친 말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린덴은 자신이 그녀에게 험한 말을 했다는 자각도 못했다. 그만큼 분노했다. “너는 도대체! 도대체! 왜 자신이 위험할 수 있단 것을 생각하지 않는 거야! 왜 네 몸은 신경 쓰지 않는 거냐고! 왜?!”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녀의 참전을 들었을 때 이후로 이렇게 화난 적은 처음이었다. “저, 전하.”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서, 설마…… 걱정하는 건가? 나를?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가 자신을 걱정하다니.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러면서 드는 생각. 걱정하는 게 아니라면 저 말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저 분노는? 분노 뒤에 요동치는 저 눈빛은?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뒤죽박죽 섞였다. “위, 위험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잘못되면?” 린덴은 으르렁거렸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 그 말에 엘리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이게 무슨 말이지……? “저, 전하?” “명령이다. 넌 이제부터 감금이다.” “……!” ============================ 작품 후기 ============================ 내일 26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6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5 “수술은 무슨! 지금 당장 병원. 아니, 숙소로 돌아가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나올 생각도 하지 마!” 그런데 그때였다. “형님.” 황태자의 등 뒤에서 미하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태자가 분노한 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뒤로 가 있었던 것이다. “미하일……! 너도……!” 황태자가 고개를 돌리며 노호성을 토하는 순간이었다.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잠시 진정하세요.” 파앗! 미하일의 손가락이 황태자의 뒷목을 강하게 누른 것이다! “……너…… 너……?!” 아찔하게 머리가 울려 황태자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 미하일……!” 린덴의 동공이 선명한 금빛으로 물들었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서 종이가 찢어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로마노프 가의 인물에게만 이어져 내려오는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퍼억! 3황자는 태연한 얼굴로 손날로 린덴의 뒷목을 다시 내려쳐 버렸다. 린덴은 머리가 울리는 충격에 비명도 못 지르고 기절해 버렸다. “저, 전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이게 갑자기 무슨 짓이에요?!” 미하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너무 흥분한 것 같아서. 뭐, 정신만 잃게 힘을 조절했으니, 걱정은 안 해도 돼. 한 8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날 거야.” 그녀는 급히 황태자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동공을 확인하고 기초 반사를 확인하고. 다행히 미하일의 말대로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무슨 짓이에요?! 갑자기 폭력이라니! 위험할 수도 있다고요! 특히 머리는!” “미, 미안. 그나저나 형님을 때렸네. 이거 총사령관 폭행죄로 또 영창 가는 것 아닌지 모르겠네. 지난번 영창(군대 내 감옥)에서 며칠 지내보니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던데.” 미하일은 걱정된다는 얼굴을 했다. “어쨌든 일어나시면 내가 싹싹 빌 테니 넘어가자고.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하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 3황자는 지난 삶과 바뀐 게 없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 방금 황태자의 말이 떠올랐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두근. 그녀의 가슴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그가 나를 걱정한다고? 저렇게 화낼 만큼?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단 수술에만 집중하자.’ 온 정신을 집중해도 모자란 수술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전하와의 일은 수술이 끝난 후. 그때 다시 생각하자.’ 그렇게 그녀는 애써 황태자와의 일을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하지만 생각이란 것이 억지로 밀어 넣는다고, 밀어 넣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방금 황태자의 말들은 계속해서 그녀의 머릿속을 헝클어뜨렸다. “괜찮겠어, 리제? 갑자기 얼굴이 안 좋은데? 무리일 것 같으면 그냥 수술하지 않는 것이…….” “아니에요.”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에요. 할 수 있어요.” *** 늦은 밤, 알버트의 응급수술이 시작되었다.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병원 건물 하나를 통째로 비웠다. 아무리 소형이라도 수류탄의 위력은 끔찍했으니까. “장갑 먼저 끼세요. 복강 안으로 균이 들어가면 안 되니까요.” 엘리제는 3황자에게 소독 장갑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소독약으로 알버트의 복부를 소독했다. “…….”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를 수술을 하기 전이건만 담담한 모습. 미하일은 묘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리제.” “네, 왜요?” “두렵지 않아?” “…….”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당연히 두렵죠.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는데. 두렵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3황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이 수술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무도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왜 수술을 시도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만약 네가 수술을 포기해도 알버트, 이놈은 천국에서 이해할 거야.”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을 잘못 선택한 탓이에요.” “응?” “전 의사니까요.” “……!”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저도 이 수술하기 싫어요. 하지만…… 살릴 수 있는데, 어떻게 외면하겠어요? 나밖에 살릴 수 없는데.” 그래, 그녀도 이 수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쪽으로 미루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들은 어쩔 수 없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어.’ 그녀는 지구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의사는 위험에 노출될 때가 종종 있었다. 전염병에 감염될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를 치료하거나, 에이즈에 걸린 사람을 수술하거나, 악천후 속에서 추락 위험을 무릅쓰고 헬기로 환자를 이송하거나. 모두 크고 작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이런 위험을 기꺼워하는 의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과하고 의사들이 크고 작은 위험을 무릅쓰고 환자를 치료하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사람을 살리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렇게 폭탄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는 것은 많이 극단적인 상황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지구에서도 전쟁터에서 이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고.’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바로 시작할게요.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됐으니, 빨리 진행해야겠어요. 전하께서는 꼭 제가 이야기한 대로 움직여 주셔야 해요.” “그래.” 엘리제는 수술대 앞에 섰다. 그리고 메스를 든 순간, 그녀의 표정이 바뀌었다. 작고 부드러운 소녀에서, 철혈(鐵血)의 외과의사로. 머릿속을 흩뜨리던 황태자의 일은 잊었다. 그저 그녀는 눈앞에 환자와 수술만 생각했다. “……!” 3황자는 돌변한 그녀의 분위기에 눈을 크게 떴다. “오픈하겠습니다.” 오픈(Open). 수술을 시작하는 단어. 그녀는 곧바로 수술칼을 움직였다. 찌익. 아래 갈비뼈 바로 밑으로 기다란 피 길이 생겨나며 살이 벌어졌다. 부신에 접근하기 위한 늑골 밑 절개였다. 벌어진 살 사이로 울컥 피가 쏟아졌고 수류탄에 짓이겨진 장기가 드러났다. 어지간한 지옥도는 다 경험한 3황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모습. 하지만 작은 소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내부 장기를 살폈다. “…….” 3황자는 그런 엘리제를 말없이 바라봤다. 하얗고 여린 소녀가 철혈의 얼굴로 수술에 열중하는 모습은 모순적인 느낌을 주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으면서…… 어울렸고, 여린 외모와 다르게 강인한 아름다움을 풍겼다. 마치 전장에 선 신화 속 여전사, 발키리처럼 말이다. ‘형님께서…… 왜 그렇게 빠지셨는지 알겠군.’ 그는 그녀가 수술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미하일은 엘리제를 그저 마음이 끌리는 소녀로만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여린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런 강인함이라니? 모순된 아름다움. 수없는 여인과 만나본 그이지만, 이런 매력은 처음이었다. 아찔할 정도로 강렬했다. ‘이거 위험한데? 그렇지 않아도 끌렸는데 너무 욕심나잖아.’ 그런데 그때였다. “전하.” “응?” “집중해 주세요. 전하가 실수하면 알버트 공자는 물론 저희도 죽어요.” 따끔한 질책에 미하일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응, 미안.” “여기 간을 잡아주세요.” 미하일의 손에 간이 잡혔다. 단단하면서도 살짝 물컹한 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조심히 위로 당겨주세요. 먼저 간을 고정하는 인대를 잘라낼 거예요.” 첫 번째 단계. 삼각 인대를 제거해 간을 위로 젖혀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평소라면 별로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지만, 수류탄이 걸렸다. ‘최대한 조심해서.’ 그래도 탄이 간을 피해서 다행이었다. 만약 부신이 아니라 간에 박혀 있었다면 그녀는 수술을 시도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녀라도 수류탄을 건들지 않으며 간을 절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전하, 그런데 이 수류탄은 어느 정도의 충격에 터지는 거예요?”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정해진 게 없어. 사실 이 총류탄은 모두 엉망으로 만들어진 불량품에 가까운 놈들이라. 안 터지기도 하고, 그냥 툭 건드려서 터지기도 하고. 그래서 우리 제국군은 안 쓰는 물건인데, 이딴 거를 공화국 놈들은 왜 쓰는 건지.” “그러면 조금만 건드려도 터진다는 가정하에 수술해야겠네요.” 이럴 땐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수술해야 한다. 그녀는 수류탄에 어떤 충격도 가지 않게 심혈을 기울여 삼각 인대를 잘라냈다. 툭! 그런데 가위에 인대가 잘리는 순간이었다. 간과 인대에 연결된 장기가 움찔 흔들렸다! “……!” 엘리제와 3황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수류탄을 바라봤다. 다행히 수류탄은 미동도 없었다. “하아, 이거 조마조마하고만.”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는 그 말에 동의했다. 잘못 건드리면 죽을 수도 있다니. 아무리 그녀라도 긴장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아. 침착하게 하면 돼. 갈색 세포종 수술해 봤잖아? 그 수술과 다를 것 없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을 추스르며 수술을 진행했다. ‘일단 출혈을 막기 위해 혈관 먼저.’ 부신과 콩팥 일부를 절제하기 위해선 먼저 혈관을 모두 막아야 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철제 집게를 들었다. 그리고 조심히, 최대한 부드럽게 수류탄 바로 옆에 위치한 부신 동맥에 집게를 가져갔다. 달칵! 금속성을 내며 집게가 닫혔다. 이번에도 수류탄은 미동도 없었다. ‘다음.’ 엘리제는 다음 목표인 부신 정맥을 바라봤다. 이번엔 조금 더 깊어 철제 집게로는 어려울 것 같았다. ‘타이, 실로 묶어야 해.’ 타이(Tie). 수술용 실로 혈관을 묶어 결찰하는 방법이었다. 단 문제가 있다면 손가락을 직접 깊숙이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수류탄을 건드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괜찮아. 최대한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그녀는 수술용 실을 들었다. “뭐하려고, 리제?” “이 실로 저 안에 있는 혈관을 묶을 거예요.” “혈관을 묶는다고? 위험할 것 같은데?” 미하일이 놀라 물었다. “부드럽게 하면 괜찮아요.” 그 대답에 미하일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말리진 않았다. 이미 그녀가 하는 걸 말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대신 이렇게 했다. “잠깐만.” “……?” 탁. 그의 손이 그녀의 왼손을 움켜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그의 딱딱한 감촉에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전하?” “그거 오른손으로만 하는 거지? 왼손은 내가 잠깐만 잡고 있을게.” “어째서?”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널 지켜주려고.” 엘리제는 그의 말을 이해 못했다. 어차피 수류탄이 터지면 다 끝인데, 무슨 지켜주고 말고 할 게 있는가? 하지만 미하일의 표정은 진지했다. “괜찮아요.” 그녀는 왼손을 빼낸 후, 곧바로 타이를 했다. 그림 같은 원 핸디드 타이! 손가락들이 허공에서 수를 놓자, 매듭이 생겨났고, 곧 기다란 검지가 일직선으로 파고들었다. 부신 동맥을 피해, 수류탄 옆에 위치한 부신 정맥으로! 질끈. 실이 묶이며 정맥이 결찰되었다! 이번에도 수류탄은 전혀 건들지 않았다. ‘됐어. 이제는 콩팥 위쪽으로 오는 혈관을 묶은 후, 부신을 복강에서 박리 해내면 돼.’ 콩팥의 혈관을 묶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수류탄이 박힌 부신과 비교적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수류탄이 박혀 있는 부신을 후복막에서 박리해 내는 일이었다. ‘메스와 철제 도구로 떼어내야 하는데.’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복막과 연조직에 쌓인 부신을 박리 하는 것은 본드에 붙은 물건을 면도칼로 살살 긁어내 떼어내는 것과 비슷하다. 과정 자체가 어려울 것은 없지만, 역시 문제는 수류탄이었다. ‘수류탄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모든 과정을 마쳐야 해.’ 생각만 해도 까마득한 일이긴 했다. 메스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하니까. 그러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수류탄은 잊자. 긴장하면 더 안 돼.’ 그녀는 메스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심히, 부드럽게. 평소보다 훨씬 천천히. ============================ 작품 후기 ============================ 내일 27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7 3-4 위험한 수술 ========================================================================= 4장 위험한 수술-6 그래도 지난 삶, 필사적으로 쌓아둔 노력 덕분일까? 다행히 수류탄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이분지 일 정도를 박리해 낼 수 있었다. ‘대단하군.’ 3황자는 그런 그녀를 경탄의 눈으로 바라봤다. 의술과 다른 길을 걷고 있지만 그래도 검술의 정점에 이른 그이기에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해내고 있는 일이 얼마나 섬세하고 어려운 손놀림을 요구하는 것인지. ‘어떻게 이런 수술을 할 수 있는 거지?’ 그는 수많은 이가 가졌던 의문을 떠올렸다. 그만큼 놀라웠다. 정말 이 소녀라면 아무 문제 없이 수류탄을 제거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경탄과 다르게 엘리제는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못 느끼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 타앗! 엘리제의 손이 일순 미끄러지며 메스를 놓쳤다! “리제?!” “아……?!” 3황자와 엘리제 모두 가슴이 덜컥하여 수류탄을 바라봤다. 천만다행으로 이번에도 수류탄은 조용했다. 분명 건드려졌는데 터지지 않은 것이다. “괜찮아, 리제?!” “아…… 죄송해요. 실수했어요.” 그렇게 답하는 엘리제의 얼굴에는 땀이 흥건했다. “리제…… 너?” “괜찮아요. 정말로.” 그러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했어.’ 오랫동안 집중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지구에서도 10시간 이상 집중해 수술한 적이 많으니까. 하지만 고도의 긴장이 문제였다. 혹시라도 수류탄이 터질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게 되었다. 하얀 소독 장갑 안에 그녀의 손은 긴장으로 땀이 가득 찬 지 오래였다. ‘지금이라도 그만둬야 할까?’ 그녀는 고민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할 수 있어. 긴장만 풀면 돼. 릴랙스. 너 자신을 믿어, 엘리제.’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이어 할게요.” “…….” 그런 그녀를 미하일은 불안한 눈으로 바라봤다. 작은 소녀는 여전히 강인해 보였지만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미하일은 무거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부탁 때문에 위험을 감수한 소녀다. 절대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슥. 스윽. 고요한 수술방, 메스가 움직이는 소리만 들렸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은 덕일까? 아무런 문제 없이 수술이 진행됐다. 이윽고, 부신의 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좋아. 이대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박리가 끝난 후, 부신을 살짝 들어보니 수류탄의 날카로운 끝 부분이 부신을 뚫고 후복막에 아예 파묻혀 있었다. ‘이러면 수류탄을 안 건들 수가 없잖아?’ 아니, 부신에 가려진 후복막을 살짝 도려내면 안 건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녀에게도 고난이도 테크닉이었다. 너무 위험했다. 엘리제는 고민했다. ‘어떻게 하지?’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포기하는 것이 맞았다.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니까. 그 순간 그녀의 머리에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엘리제, 꼭 무사해야 한다. 꼭.’ 자신을 떠나보내며 눈을 붉히던 근엄한 얼굴의 아버지. 그리고 끝없이 자신을 걱정하던 작은오라버니와 새어머니. ‘어떻게 해야죠?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짧은 시간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고,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나라도 이건 아니야. 너무 위험해. 할 만큼 했잖아, 엘리제? 안 그래? 죽을 수도 있다고.’ 두 번의 삶을 살았다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첫 번째 삶, 단두대에 처형당하고 나서 지구에서 얼마나 많은 악몽을 꿨었는가? 오히려 두 번의 죽음을 생생하게 경험했기에 죽음이 더욱 두려웠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만약 내가 죽으면? 날 기다리는 아버지는? 가족들은?’ 그래,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건 너무 위험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끄으으…….” 마취 가스에 잠들어 있던 알버트가 신음을 흘렸다. “……!” 엘리제의 눈이 다시 흔들렸다. 그녀가 포기하고 장갑을 벗는 순간 저 알버트는, 자신감 넘치던 오만한 사내는 목숨을 잃으리라. ‘이 아이를 잘 봐줄 수 있겠나?’ 갑자기 차일드 후작의 부탁이 떠올랐다. 자신을 간병하던 유리엔 공녀의 얼굴도. 그녀의 눈동자에 습기가 차올랐다. ‘도대체, 도대체…… 어떻게 해야지? 누가 알려주세요. 도저히 모르겠어요.’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두려웠다. 죽고 싶지 않았다. 도망가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를 살리고 싶었다.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억겁 같은 몇 초가 흘렀다. 그리고 그녀는 결정을 내렸다. ‘죄송해요,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그녀는 론도에 있는 가족들에게 말했다. ‘저 조금 위험한 짓을 하려고 해요. 정말 죄송해요. 저도 이게 아니란 것을 알지만, 도저히 포기하지 못하겠어요. 만약…… 수술이 무사히 끝나면, 그래서 살아나면, 꼭 효도할게요. 절대 다시는 이런 위험한 짓 하지 않을게요.’ 그녀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제발 저를 지켜주세요. 아버지, 어머니, 오라버니. 주님.’ 그리고 그녀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메스의 칼날이 수류탄의 끝 부분이 박힌 후복막을 조금씩 도려내었다. 어려운 일이었다. 시야는 여러 장기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고, 손이 움직이는 각도도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최선을 다했다. 론도에 있는 가족들을 떠올리며. 무사히 수술을 끝내겠다는 필사적인 일념으로. 그리고 이윽고 그 작업이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덜컥! 절대, 절대로 들려선 안 되는 소리가 울렸다! “……?!” 엘리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3황자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제길!” 수류탄의 충격신관이 자극된 것이다! 이제 곧 폭발한다! ‘안 돼!’ 엘리제의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변했다. 곧 닥칠 죽음의 공포에 몸이 뻣뻣이 굳었다.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찰나의 순간, 가족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들에게 미안했다. 기껏 다시 살아났건만,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죽다니. ‘정말 죄송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이었다. 가족들과 함께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 그녀의 머리에 떠올랐다. 차가운 인상, 조각 같은 얼굴. ‘론…… 님?’ 론? 아니, 론이 아니었다. 하나의 얼굴에 두 명의 남자가 겹쳐 보였다. 론과 겹쳐 보이는 그는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어째서?’ 그런데 그녀가 멍하니 의문을 품는 순간이었다. 다급한 손길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리제!” 미하일이 와락 거칠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전하?!” 그는 그대로 그녀를 땅바닥에 엎어트렸다. “꺄악?!” 그리고 자신의 온몸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절대 다치게 하지 않아!’ 미하일은 이를 악물며 대자연의 기운, 기(氣), 서대륙에서 오러라 불리는 기운을 최대한 끌어 올렸다. 그러고 자신의 몸은 도외시하고 그 기운을 모조리 그녀 쪽으로 둘러 버렸다. “조심해, 리제!” 미하일은 곧이어 닥칠 충격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탁! 수류탄이 터지는 순간이 되었다. ***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미하일은 눈을 깜빡거렸다. 뭐지? 이미 죽어서 아무것도 못 느끼는 건가? 그의 몸에 안겨 있는 엘리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리제?” “……네, 전하?” “……너 살아 있는 거지?” “……아마도요.” “그러면 나는?” “……전하도 살아계신 것 같은데요?” 둘은 그렇게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분명 수류탄이 작동했는데? 왜 안 터진 거지? 미하일은 곧 답을 깨달았다. ‘이런 빌어먹을. 완전히 불량품이었구나.’ 조금만 건드려도 터지는 예민한 탄이 아니라, 신관이 작동해도 아예 터지지 않는 불발탄이었던 것이다! 불발탄에 이렇게 마음 졸여 했다니, 미하일은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천만다행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흐윽. 흑.” 그의 품 안에 안겨 있던 엘리제가 울음을 터뜨렸다. “리, 리제?” “죄, 죄송해요. 흐윽. 너무 놀라서.” 그녀는 눈물 흘리는 게 부끄러운지 허겁지겁 손등으로 눈가를 비볐다. 하지만 워낙 놀란 탓인가? 울음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리제.” 미하일은 따뜻한 얼굴을 했다.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니 아까 전 굳세게 수술하던 의사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냥 귀엽고 여린 또래 소녀처럼 느껴졌다. “괜찮으니 조금 더 울어도 돼.” “……!” 그러면서 그는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엘리제의 얼굴에 탄탄한 그의 가슴이 와 닿았고, 그 따뜻한 손길에 그녀는 알 수 없게 울컥하였다. “흐윽. 크흑.” “그래, 그래. 많이 놀랐지? 진정하고.” “나. 나 죽고 싶지 않았어요. 정말로…… 흐윽.” “그래, 아무 일도 없었어. 놀라지 말고.” 미하일은 아이를 달래듯 엘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잠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진정할 수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추태를 부려서.” 엘리제는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린 게 민망한지 시선을 피했다. 미하일은 싱긋 웃었다. “뭘. 난 좋았는데? 얼마든지 울어도 좋다고.” “……!” 엘리제의 얼굴이 일순 달아올랐다. “저, 전하.” “왜?” “그런데 이제 좀…….” “뭘?” 엘리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그, 그게…… 이제…… 몸을 좀…….” 그녀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하지만 미하일은 알아들었으면서도 못 알아들은 것마냥 물었다. “응? 뭘 말하는 거야?” “그게…….”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눈과 눈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가까운 것은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폭발 순간 그가 그녀를 엎어뜨리고 몸 위에 밀착한 탓에 지금 그들은 한 몸으로 붙어 있었다. 더구나 그냥 붙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한쪽 손은 그녀의 머릿결에 있었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참으로 야릇하기 그지없는 구도. “그, 그…… 그러니까…… 모, 몸을 조금…….” 엘리제는 민망함에 제대로 말도 못하고 더듬었다. 미하일은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이 소녀는 아까는 그렇게나 강인한 모습이었으면서, 지금은 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럽단 말인가?! “뭘? 응?” “그, 그러니까…… 비, 비켜 달라고요!” 결국, 엘리제는 빽 소리 질렀고 미하일은 쿡쿡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그렇게 웃으세요?” 엘리제는 뾰로통하게 물었다. “쿡쿡, 그냥. 좋아서. 몸은 괜찮아? 넘어질 때 다친 데는 없지?” “네.” 엘리제는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그에게 새로운 소독 장갑을 건네었다. “받아요. 바로 수술 진행할 거니까.” “네, 네.” 금세 외과의사의 모습으로 돌아간 그녀를 보고 미하일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참 여러모로 대단했다. “빨리 끝낼게요.” 불발탄인 것을 몸으로 확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그녀는 쓱쓱 메스를 움직였다. 지금까지의 가슴 졸임을 복수라도 하듯 쾌도난마의 손짓이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시원했다. 한결 여유가 생긴 분위기에 미하일은 장난 삼아 물었다. “리제.” “네?” “우리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여행이나 가지 않을래?” “여행이요?” 엘리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웬 여행? “그냥 너랑 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 뭐, 테마는 의료 봉사 여행 정도로 할까? 너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나는 네 호위기사로 따라다니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장난. 어디까지나 농담 같은 물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그래요. 가요.” “……뭐?” “재미있겠네요.” 미하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이야?” “네, 기회가 되면 가요. 기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3황자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둘이 여행을 갈 기회가 올 리는 없지만, 엘리제의 시원한 승낙에 기분이 좋아졌다. ============================ 작품 후기 ============================ 내일 28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78 3-5 감금 ========================================================================= 5장 감금-1 “어디로 여행 가고 싶은데?” “글쎄요. 전 론도 밖으로 나가본 적이 거의 없어 잘 몰라서…… 동방의 려(麗)는 가보고 싶긴 하네요. 어디가 좋아요?” 엘리제는 부신(좌우의 콩팥 위에 있는 내분비샘)을 철제 집게로 찌익 뜯어내며 물었다. “검은 대륙은 아무래도 덥고. 난 동방의 청이 좋았어. 서대륙과는 문화가 완전히 다르거든.” “려는 안 가보셨어요?” “거기까지는. 그래도 려도 매우 조용하고 예쁘다고 하던데? 한번 가볼래?” “신대륙은요? 동부 해안가에 커다란 다섯 개의 호수와 폭포가 있다고 하던데. 거의 우리 브리티아 섬만 한.” “안 가봤어. 그것도 같이 가보자.” 그렇게 둘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수술을 마무리 지었다. 마지막으로 손상당한 콩팥 일부를 절제하기 직전이었다. 미하일이 말했다. “리제.” “네?” “나보고 전하가 아니라 밀이라 불러줄래?” “……!” 그 말에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밀. 그녀에게는 깊은 의미가 있는 이름이었다. 첫 번째 삶, 유일한 친구였던 그를 부르던 명칭이었으니까. “……네.” 그녀의 승낙에 미하일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겠다 한 거지? 그러면 지금 바로 말해봐. 밀, 밀이라고.” “……밀.” “그래! 앞으론 그렇게 부르라고.” 탁. 이윽고 그녀의 메스를 따라 손상당한 콩팥 일부가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이 끔찍한 수술의 대단원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하아, 끝났어. 아무도 안 죽고.’ 알버트는 무사했다. 그뿐만 아니라 모두가 무사했다. ‘다시는 이런 수술 안 해. 절대로.’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수술 중 쌓인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미하일도 기쁘긴 매한가지였다. 죽을 거로 생각했던 알버트가 살았다. 리제도 무사하고, 이제 자신을 밀이라 부를 것이다. 이것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하하! 이런 수류탄 따위!” 그는 그녀가 수술 중 빼놓은 소형 수류탄을 집어 들었다. 마치 총알처럼 날렵하게 생긴 모습. “밤하늘의 별이나 되어라!” 마치 포환던지기 선수처럼 수류탄을 창밖으로 멀리 집어 던졌다. 제국군 부대가 없는 야산 쪽으로. 서대륙 최강검답달까? 그들을 애먹였던 수류탄은 정말 별이라도 될 것처럼 쭉쭉 날아갔다. 그리고 한참을 날아간 뒤에야 야산에 떨어졌는데……. 콰앙! 어마어마한 굉음을 내며 터져 버렸다! 멀리 떨어져서 터졌음에도 땅이 진동하듯 울리는 굉음이었다. “……?!” 3황자와 엘리제는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불발탄이 아니었어?” “그, 그러게요?” “아까 전은 그러면 왜 안 터진 거지? 분명 신관이 작동했는데?”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 하늘 위에 계신 분이 도우신 건가?” 미하일의 얼빠진 물음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그러게요. 그런가 봐요.” 어쨌든 좋았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인근 부대가 난리가 나서 달려갔지만 사소한 일이었다. 그녀는 지혈을 마무리하고 굵은 실로 배를 닫았다. 다 잘 끝났다. *** “으아,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진짜 힘드네.” 수술장을 나서며 3황자는 기지개를 켰다. “그러면 알버트, 저놈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이곳에서 조금 더 치료 후 본국으로 이송될 거예요. 더는 전투를 수행할 상태가 아니니까요.” 다행히 생명은 건졌지만, 부상이 나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알버트의 진짜 싸움은 이제야말로 시작이었다. 부상의 회복부터 재활까지. ‘재활할 수 있을까?’ 복부의 상처야 수술이 성공적이니 괜찮다. 부신과 콩팥은 몸에 2개씩 있어서 하나를 떼어내도 큰 문제 없으니까. 하지만 왼쪽 발목의 절단이 문제였다. 이제 그는 몸이 회복되어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 ‘차기 당주(當主)로 복귀하기는 어렵겠지?’ 엘리제는 이전 삶처럼 유리엔이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녀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쨌든 리제 너도 가서 잘 쉬라고. 오늘 무리했으니까.” “네, 전하.” 미하일이 고개를 저었다. “밀. 밀이라 하기로 했잖아?” “아…….” “밀이라 해봐.” “네, 밀.” 미하일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은 밤. 내 꿈 꾸고.” “제가 왜 밀 꿈을 꿔요?” “그냥. 그냥 내 꿈 꿔.” 그런데 그렇게 둘이 싱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저벅저벅. 차가운 군화 소리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누구지? 우리가 나갈 때까지 이 건물 비워 놓으라 했는데?”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 나타난 군인들의 명패를 본 순간, 얼굴이 굳어졌다. MP(Military Police.) 제국군 내의 경찰. 헌병대였다! 헌병대가 왜? 선두에 선 중년 남자가 앞으로 나서며 경례를 올렸다. 남자의 어깨에는 선명한 별 계급이 수놓아져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미하일 각하.” “갈트 준장.”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미하일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갈트 준장. 크림반도에 주둔하는 제국군 헌병대의 수장으로 이전 미하일과 악연이 있었다. “또 뵙는군요.” “무슨 일이지?”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각하를 뵈러 올 일은 단 하나란 것을.” 그러고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뵙고 싶지 않았는데. 안타깝습니다.” “안타까우면 그냥 못 본 걸로 하면 안 될까? 영창 또 가기 싫은데.” 영창. 군대 내 감옥을 뜻한다. “그건 곤란합니다. 저도 받은 명이 있어서. 죄목은 아시죠?” “설마 그거?” “네, 맞습니다. 총사령관 폭행죄.” 미하일은 뒷목을 부여잡았다. 설마 했더니 정말로?! 형제끼리 때릴 수도 있지! 이 소심한 형님 같으니라고! 미하일은 힐끗 옆을 바라봤다. 3층 건물 창문. 이 정도면! 하지만 그의 꿍꿍이는 시도도 전에 가로막혔다. “애들아.” 철컥. 철컥. 철컥. 철컥. 뒤에 병사들이 라이플을 3황자에게 겨누었다. 미하일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이봐. 나 이렇게 보여도 나름 황자라고. 계급은 검기사단의 단장으로 중장이고. 진짜 쏘려고?” “총사령관께서는 여차하면 쏘라고 하시긴 했습니다만. 뭐, 그건 곤란하겠죠. 어쨌든 따라오십시오.” “영창 보낼 거지? 영창 싫은데!” “당연하죠.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러십니까? 며칠 쉬다 나오십시오.” “바퀴벌레 나오잖아!” “뭐, 어쩔 수 없죠. 몸에 해롭진 않으니 너무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3황자는 헌병대의 병사에게 질질 끌려갔다. 이번엔 갈트 준장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클로랜스 대령.” “아, 아. 네!” “귀관도 우리와 같이 가줘야겠습니다.” “……!”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자신이? 갈트 준장은 곤란히 웃었다. “죄목을 아십니까?” “자, 잘…….” “상관에 대한 명령 불복종 죄입니다.” “……!” 엘리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설마 이 수술을 한 것 때문에? 갈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데임.” “……네.” “저는 개인적으로 데임을 존경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몸으로 전장에 와서 저희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는 남들이 못 듣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도대체 전하께 무슨 잘못을 하신 것입니까?” “……!” “황태자 전하를 옆에서 모신 지 꽤 되었는데, 이렇게나 분노하시는 것은 처음입니다. 도대체 데임과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갈트는 혀를 찼다. “뭐, 설마 데임께서 진짜 큰 잘못을 하진 않으셨겠지만, 전하께서 워낙 분노하셔서 걱정이군요.”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그렇게 화내고 있다고? 자신이 수술한 것 때문에? “어쨌든 저희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실례를 용서하시길.” 그렇게 그녀는 헌병대에 끌려갔다. *** 며칠 뒤,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 공화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고 있는 시청에서 한 뚱뚱한 중년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는지요, 각하? 제국 놈들이 심페폴 코앞까지 치고 들어왔는데…….” 지극히 조심스러운 말투. 중년 남자의 이름은 쥬페르 백작으로 이 크림반도를 실질적으로 다스리던 군주였다. 그리고 그런 쥬페르 백작 앞에는 그림처럼 잘생긴 젊은 남자, 루이 니콜라스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물론 각하께서 다 복안을 가지고 계시겠지만, 시민들이 너무 불안해하고 있어서…….” 쥬페르 백작은 루이 니콜라스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루이 니콜라스는 장미처럼 붉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시민? 시민이 아니라 백작. 당신이 불안한 것 아닙니까? 겁이 너무 많은 것 같군요. 아니면 우리를 믿지 못하거나.” 일국의 군주에게 하기에는 무례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하지만 쥬페르 백작은 불쾌한 빛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오히려 화들짝 놀라 이렇게 둘러댔다. “아, 하하. 아닙니다. 제가 왜 불안해합니까? 각하께서 친히 대 공화국군을 이끌고 계시는데. 공제든 검제든 뇌제든 모두 각하의 상대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가십시오.” “네?” “전쟁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겁먹은 꼬리 말고 이만 꺼지라고요.” “……!” 그 모욕에 쥬페르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래로 내린 손이 부들부들 떨렸으나, 역시 화를 내지는 못했다. 공화국군과 루이 니콜라스는 집 안에 들어온 호랑이였으니까. 호랑이를 자극하면 물려 죽는다. “죄,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는 뒷걸음질로 방에서 물러났다. 방문이 닫히자 옆에서 기립해 있던 또 다른 젊은 청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이 너무 심하셨던 것 아닙니까?” “뭘?” “그래도 반도인들에게 영향력이 큰 자인데…….” 루이 니콜라스는 코웃음 쳤다.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치울 놈이야.” “…….” “제국군을 물리치면 이곳에 우리 공화국의 괴뢰정부를 세울 거니까.”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저 쥬페르 백작은 공화국이 군을 파견한 것이 제국을 크림반도에서 무찌르기 위해서라고 여기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공화국의 진짜 목적은 이곳 크림반도를 자신들의 영토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대륙 북부의 로마노프령(領)을 견제하고, 흑해의 제해권을 손에 쥐는 것. 그런 목적이 없었으면 아예 군을 파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 그나저나 우리 모루 작전을 간파한 책략가가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루이 니콜라스는 눈썹을 꿈틀했다. 눈썹을 꿈틀하자 그의 그림 같은 이마 곁으로 난 깊은 상처가 같이 꿈틀했다. 이번 코프스크 회전의 패전 시 퇴각하며 입은 상처였다. 한 치만 깊었어도 두개골이 함몰돼 죽었을 것이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흉측한 흉터로 남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처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통증에 그는 차갑게 중얼거렸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 그리고 그의 계책을 두 번이나 간파한 책략가. “이 빚들은 반드시 갚아주마.” 개전 초기, 몽셀 왕국을 이용하려는 계책을 간파한 것도 그녀였다. 그녀 때문에 당시 공화국은 막심한 손해를 입었다. 몽셀 왕국을 뒤에서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무용지물이 된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번 모루 작전 때 그녀 때문에 입은 피해는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꼭 생포해야겠어. 반드시.” 포로 교환? 그딴 건 필요 없었다. 전리품으로 삼겠다. 그래서 처절히 농락해 망가뜨릴 것이다. 그 순백함이 더러움에 물들 때까지. 그러기 위해선 일단 제국군을 무너뜨려야 했다. “파비앙.” “네, 각하.” “검은 대륙에서 ‘그 물건’은 어디쯤 도착했지?” “아마 며칠 안에 도착할 것입니다.” “‘제물’로 사용할 검기사단(劍騎士團)의 포로들은?” “영관급 포로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명령한 대로 무어인 시종들도 붙였습니다.” “그래, 그들이 이상한 점을 눈치채면 안 돼. 알겠나?” “네, 주의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파비앙은 잠시 주저하며 루이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사막의 전갈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할 말이 있나?” “저…… 각하.” “왜?” 파비앙은 역정을 각오하며 말했다. “……꼭 이 방법을 사용하셔야겠습니까?” “……!” “너무 비인도적입니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국 내에서도 비난 여론이 클 것입니다.” <바로 다음편 올라갑니다.> 00079 3-5 감금 ========================================================================= 5장 감금-2 비인도적. 루이는 자신의 부관이자 친우인 파비앙의 말을 부정하진 않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까. 확실히 비인도적인 계책이긴 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어차피 전쟁. 결과적으로 이기기만 하면 된다. 이기기만 하면 무슨 수단을 썼든 모두 정당화돼.” “하지만…… 혹시라도 실패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는 여론을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랬다. 계책이 성공하면, 그래서 대승을 거두면 승리로 잘못을 가릴 수 있었다. 하지만 비인도적인 방법을 썼는데, 심지어 실패했다? 그러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30년간 공화국을 독재한 니콜라스 가문의 반대파를 비롯한 공화국 내 여러 지식인이 벌 떼처럼 달려들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의 대패로 그에 대한 비난 여론이 있을 텐데, 그때는 감당이 안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루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 계책은 실패하지 않아. 그러니 그런 생각은 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제국군에는 데임 클로랜스가…….” 파비앙은 등불을 든 여인의 다른 별명 하나를 떠올렸다. 그 데임 클로랜스라면, 어쩌면 자신들의 계책을 무산시킬지도 몰랐다. 하지만 루이는 불쾌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듣지 않겠다. 너는 계획이 차질이 없도록 검기사단의 포로들이나 보고 오도록.” “……알겠습니다.” *** 헌병대에 끌려간 엘리제는 즉결 판결을 받았다. 그녀가 받은 판결은 다름 아닌 ‘자택 근신’.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무기한 자택에서 대기해야 하는 벌이었다. ‘그래도 큰 처벌은 아니구나.’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명령 불복종은 군대에서 다루기에 따라서 한없이 엄하게 처벌할 수 있는 죄였다. 물론 당시 그녀의 상황은 일반적인 명령 불복종과는 거리가 있긴 했다. 그래도 황태자가 워낙 크게 분노했다길래 어떤 벌이 떨어질까 걱정했는데, 자택 근신이면 굉장히 약한 처벌이었다. “그런데…… 저는 자택이 없는데 어디서 근신해야죠?” 엘리제는 헌병대의 갈트 준장에게 물었다. 그녀는 다른 고위 장교와 다르게 개별 숙소가 없었다. 낮이고, 밤이고 주구장창 야전병원에서 환자만 봤기 때문이다. “평소처럼 병원에서 대기하면 될까요?” 하지만 갈트 준장은 고개를 저었다. “숙소는 없지만 데임께서 머물 곳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네?” “아직 정식으로 식을 올린 것은 아니라 예법상 사소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뭐, 명령이니 큰 문제는 없겠지요. 다른 방을 마련해 드리면 좋겠지만, 사정상 어려워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주십시오.” “……예?” 엘리제는 그의 말을 이해 못하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어쨌든 따로 머물 곳이 있다는 건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갈트 준장을 따라간 엘리제는 자신이 머물 방을 보고 입을 벌렸다. “이곳은?” “네, 데임께서 근신하실 곳입니다. 추가적인 명령이 있을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면 됩니다.” “하, 하지만…….”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무슨 문제라도?” “……방이 너무 좋은 것 아닌가요?” 그렇다. 그녀의 눈앞에 나타난 방은 근신 장소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깔끔하고 단정했다. 전장이니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론도나 파리스 시내의 호텔이라 해도 믿을 만한 수준. “총사령관의 명령입니다.” “네?”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명령하셨습니다. 데임께서 이 방에서 근신할 수 있도록 하라고.” “…….” 도대체 또 왜 그런 명령을? 다시금 머리가 혼란스러워지려 해,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알겠어요. 그러면 이곳에서 대기하면 되는 거죠?” “네, 식사는 병사들이 방으로 가져다 드릴 것입니다. 방 안에 욕조와 화장실이 연결되어 있으니, 편하게 사용하시면 됩니다.” “…….” 욕조와 화장실이 딸린 방이라니! 이 방은 정말 호텔이라도 된단 말인가? “그럼 저는 이만.” “……네, 조심히 가세요.” “참, 데임.” 갈트 준장은 나가기 전, 그녀를 돌아봤다. “이런 속담 알고 있습니까?” “……?” “Nothing is so unpalatable as a lovers' quarrel.” “……!” 엘리제는 당황한 얼굴을 했다. 갈트 준장이 말한 속담은 한국어로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였다. “저, 저희는 아직 그런 관계가…….” 하지만 갈트 준장은 듣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모쪼록 잘 화해하시길 바랍니다. 뭐…….” 그러곤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알고 보면 나름 귀여운 분이니까 말이지요.” “……!” 악어나 상어가 귀엽다면 모를까? 그 황태자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에 갈트 준장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아, 어렸을 적에 전하는 참 귀여우셨습니다.” “이전에 뵌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전 황궁 근위대 출신이었거든요. 그 당시, 어렸을 시절의 전하를 자주 뵈었었는데, 정말 귀여우셨지요.” “.......” “정말입니다.” “......네.” 그렇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갈트 준장은 사라졌다. ‘하아, 뭐가 뭔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왜 전하께서는 이런 호화로운 방에 나를 근신시킨 거지?’ 벽에 걸려 있는 장을 열어보니 심지어 편하게 입을 수 있는 여성용 파자마도 걸려 있었다. 급하게 구한 것인지 사이즈는 훨씬 컸지만, 방금 세탁한 듯 깨끗했다. 마치 근신이 아니라, 휴가라도 온 느낌. ‘설마?’ 문득 그녀의 머리에 얼마 전 황태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도대체 그렇게 일해서 언제 쉬는 거지? 조금은 쉬어야 할 것 아닌가. 왜 본인의 몸은 생각하지 않는 거지?’ 살짝 짜증이 섞였던 목소리. “설마…… 나보고 쉬게 하려고 일부러?” 아니다. 아니다. 고작 설마 그런 이유로 그가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다. 하지만……. 자꾸만 드는 의문. ‘왜…… 나를 걱정하는 거지?’ 알버트를 수술하기 전의 분노. 그건 분명 걱정이었다. “하아.” 목숨을 건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건만,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뒤죽박죽 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알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정말로.’ 그녀는 침대에 털썩 엎드렸다. 전장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폭신한 감촉이 몸을 감쌌다.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피곤했다. 아니, 피곤하지 않아도 그냥 자고 싶었다. 그래서 잠에 빠져 이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녀는 강제적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근신 생활은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갇혀 있을 뿐 너무나 편안했다. 전장에서 이런 편안함을 누려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물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먹고 씻고, 자는 것에 불편함이 없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전장에서는 지나친 호사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데임.” “감사해요. 매번 이렇게 가져다주셔서.”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병사는 진정으로 영광이란 표정으로 경례했다. 엘리제는 민망하게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병사들이 매번 자신 때문에 음식을 가져다 나르는 게 미안했다. ‘이런 건 내가 가져와도 되는데. 미안하게.’ 하지만 엘리제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의 식사 당번을 하기 위해 병사들이 어마어마한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들의 정신적 레이디이자, 등불을 든 천사에게 식사를 가져다주는 영광을 누리는 일이다. 병사들은 식사 당번을 한 번이라도 해보기 위해 웃돈을 주고 거래하기까지 해 장교들이 단속에 나설 정도였다. ‘오늘은 등심 스테이크. 또 고기구나.’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식을 주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사육하려는 것인지 나오는 음식마다 영양가 만점이었다. 한 번은 남기려고 했으나, 식사 당번 병사가. ‘안 됩니다. 모두 드셔야 합니다.’ ‘네?’ ‘전하의 명령입니다.’ 도대체 왜 그런 명령을...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언제까지 있어야 하는 걸까? 너무 오래 쉬었는데. 병원은 잘 돌아가고 있을까?’ 사실 그렇게 오래 쉬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으로 삼 일도 안 쉬었으니까. 여태껏 노동 강도를 생각해 보면 며칠은 더 쉬어야 몸의 피로가 씻길 것이다. ‘하지만 마음이 불편한걸.’ 지구에서도 자타공인 워커 홀릭이었던 그녀는 이런 휴식이 불편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가 일해야 할 것 같았다. ‘알버트 공자는 잘 회복되고 있겠지?’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순조롭게 회복 중인 것 같았다. 귀족파의 영식들이 몰래 와서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언제나 콧대 높던 그들은 그녀가 알버트를 목숨을 걸고 살려준 것에 크게 감동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나저나.’ 엘리제는 시선을 돌려 벽장을 바라봤다. ‘저기에 왜 남자 잠옷이 있는 걸까?’ 자신의 펑퍼짐한 파자마가 걸려 있던 곳 옆에 남성용 잠옷이 같이 걸려 있었다. ‘그냥 걸려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재질이 최고급 실크였다. 그것도 동방 청, 광주(廣州)에서 직수입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고가라 저 실크로 잠옷을 만들어 입는 것은 황족이나 론도의 고위귀족들밖에 없다. ‘도대체 누구 것이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 그날 깊은 밤, 엘리제는 방에 연결된 욕조에서 미리 받아놓은 물로 몸을 씻었다. 아직 겨울인데 물이 차가웠지만, 그래도 씻을 수 있는 게 어디인가? 그녀는 감사한 마음으로 하얀 살결을 물로 닦았다. 목욕을 마친 후, 목욕 타월로 몸을 감싼 그녀는 방 안에 들어가려 문고리를 잡았다. 그런데 벌컥 문을 열려던 그 순간이었다. 왠지 싸한 느낌이 들어 잠시 멈칫했다. ‘뭐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느낌, 느낌이 이상했다. ‘별것 아니겠지?’ 그러며 끼익 하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방 안을 들여다본 순간! 그녀는 얼음처럼 얼어버렸다. 방 안에 한 남자가 서 있었던 것이다! “꺄아악!” “……?!” “누, 누구세요?!” 그녀는 허겁지겁 몸을 가렸다. 목욕 타월로 감싸긴 했지만, 가슴 위며 허벅지며 맨살로 드러난 곳이 수도 없이 많았다. “나, 나다.” “……?!” “진정해라. 나다.” 놀라 남자를 보니,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황태자도 자신이 목욕 타월만 감싸고 나온 것에 놀란 눈치였다. 평소와 전혀 다르게 시뻘게진 얼굴로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고 있었다. “미, 미안하다. 씻고 있는 줄 모르고 막 들어왔다.” “저, 전하가 여긴 어째서……?” 엘리제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기며 물었다. “여기? 내 방이니까 들어왔지.” “……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지금 뭐라고? “크흠, 크흠.” 황태자는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여긴 내 방이다.” “……!” 엘리제는 당황해 물었다. “하, 하지만…… 저는 여기서 근신을 하라 들었는데…….” “알고 있다.” 그 답에 그녀는 더욱 당황했다. 알고 있다고? “내가 지시했다. 네가 내 방에서 근신하도록.” “……!” *** 그녀는 급히 파자마를 입었다. 제복을 입고 싶었지만, 마침 세탁한 상태다. ‘하루만 있다가 세탁할걸.’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황태자 앞에서 파자마라니.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파자마도 문제가 있었다. 사이즈가 너무 큰 탓에 가슴이 푹 패여 보였던 것이다. “어, 어째서 제 근신을 전하의 방에서 하라고 하셨는지요?” 엘리제는 그와 멀찍이. 방의 끝에서 끝까지 떨어져 물었다. 황태자는 붉은 조끼를 벗으며 답했다. 하얀 셔츠 사이로 탄탄한 살결이 비쳐, 그녀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방이 없어서.” “네?” “네가 머물 방이 없었다. 그래도 레이디이고, 황실의 일원이 될 너인데 창고에 머물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고 새로 방을 꾸며줄 수도 없고. 그래서 내 방에 근신하라 한 것이다. 어차피 난 전장 지휘로 방에 거의 돌아오지 않으니까.” “…….” 나름 납득이 가는 설명이었다. ‘아니, 납득이 가는 설명이 맞나?’ 엘리제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이제 황태자와 관련해서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 어쨌든 전하께서 오셨으니 전 나가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그녀는 꾸벅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방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었다. 덥석. 그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 그 차가운 감촉에, 그러면서도 화끈 뜨거운 느낌에 엘리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29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80 3-5 감금 ========================================================================= 5장 감금-3 “왜 나가지?” “그, 그야…… 전하께서…… 오셨으니까요.” “그냥 있어. 명령이다.” “……?!” 엘리제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왜? 어째서?’ 그녀는 자신의 바로 옆에 와 있는 린덴의 얼굴을 바라봤다. 냉막한 금색 눈동자. 하지만 그 차가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알 수 없는 갈망. ‘혹시…… 전하께서 내 몸을 바라시고?’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젊은 남녀가 늦은 밤, 단둘이 한 방에 있으니 그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아, 아닐 거야. 전하는 그러실 분이 아니야.’ 그녀는 이전 삶, 그와의 잠자리를 떠올렸다. 둘은 부부였으니 당연히 그와 몸을 섞은 적이 많았다. 하지만 행복한 잠자리는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했으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과의 관계를 별로 원하지 않았다. 그저 황제의 의무로서 황후인 자신을 안았을 뿐이다. 의무에 의한 관계라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슬픈 잠자리였다. ‘어쨌든 전하는 별로 그런 쪽의 욕망이 없으셔. 그러니 아닐 거야.’ 한 가지 위로가 되었던 점은 그가 다른 여자를 찾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이런 어른의 욕망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도 아닐 거다. ‘그렇겠지?’ 하지만. 저 금색 눈동자에 깃든 알 수 없는 소용돌이를 본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엉클어졌다. 정말 아닌가? ‘혹시 전장에 있다 보니…… 여자의 몸에 대한 마음이…….’ 그럴 수도 있었다. 그녀는 그가 절대 그런 욕망에 휘둘리는 남자가 아니라 생각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더구나 이곳은 전장이니까. 온갖 감정이 극단적으로 터지는 곳이니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진다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마, 만약 정말 내 몸을 바라는 거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결혼한 후에는 그의 요구에 응할 의무가 있겠지만, 아직 그와 그녀는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뭘 그렇게 보는가? 안 쉬는가?” “…….” “이곳이 쉬기에 가장 편할 것이다. 그간 계속 무리했으니, 며칠이라도 푹 쉬어. 나는 신경 쓸 필요 없고.” 엘리제는 의구심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냥 쉬면 되나요?” “그러면?” “……아닙니다.” 그녀의 손을 놓은 그의 눈빛은 어느새 평상시로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차갑고, 감정 없는.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그렇지. 전하가 그런 욕망을 가지실 리가 없잖아.’ 그녀는 그를 의심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는 남녀 간의 욕망에 대해선 깨끗하기 그지없는 남자였다. 한 방에서 자도 큰 문제 없을,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남자인지도 몰랐다. “그러면 편히 쉬십시오.” 엘리제는 그에게서 벗어나, 방구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린덴은 커튼을 치더니 갑갑한 제복 상의를 벗고, 편한 내의로 갈아입었다. ‘전하와 같은 방에서 밤을 보내게 되다니.’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복잡했다. 물론 낯 뜨거운 일이 일어나지야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많이 화나지는 않으신 것 같구나.’ 갈트 준장이 워낙 겁을 줘 걱정했는데, 평소와 큰 차이는 없어 보였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엘리제가 모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린덴은 화가 안 난 것이 아니란 것을. 지금도 그는 그때 그녀가 위험했던 사실만 떠올리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그저 티를 안 내고 있을 뿐이다. 그가 3황자 미하일을 무리해서 영창에 처넣은 것은, 자신을 폭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엘리제를 위험에 빠뜨린 원인을 제공한 것에 대한 복수였다. 한편 엘리제는 그런 그의 마음은 짐작도 못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도대체 왜 그렇게 화내셨던 걸까?’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라니. 누가 들어도 이상하지 않은가? ‘하아, 설마……?’ 한 가지 가정이 떠오르려 했으나, 애써 머리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복잡한 기분이 더욱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물었다. “왜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이지?” “아…… 여기서 쉬려고 합니다.” “불편하지 않은가?” “괜찮습니다. 편합니다.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니 편히 쉬십시오, 전하.” 제발 저한테 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저는 여기서 쥐 죽은 듯이 있을 테니. 엘리제는 속으로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린덴이 그녀의 바람을 따라줄 리가 없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편하다고?” “…….” “내 곁에 있는 것이 그렇게 싫나?” “……?!” 갑작스러운 물음.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화급히 고개를 저었으나, 사실은 정확한 지적이었다. 그의 옆에 있기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방 가장 구석에 이렇게 쪼그려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래?” “네.” “그러면 이쪽으로 와라.” “어디로…… 말입니까?” “여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본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바로 그의 침대 옆자리였다! “어차피 너도 잠을 자야 하지 않은가? 맨바닥에서 잘 생각인가? 이쪽으로 와서 쉬어라.” “괘, 괜찮습니다.” “왜?” “제가 옆에 있으면 전하께서 불편할 것 아닙니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엘리제는 강한 목소리로 둘러댔다. 황태자 옆에서 자라고? 별일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그건 아니었다. 그런데 황태자가 이렇게 말했다. “안 불편하다.” “네?” “네가 옆에 있는데 내가 왜 불편하지?”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붉어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 그게…… 침대가 좁으니…….” “하나도 안 좁다.” 하필 침대는 더블 퀸 이상의 사이즈였다. 둘은 물론 셋이 누워도 충분한 크기. “저, 저는 침대보다 이곳이 훨씬 편합니다.” “침대보다 맨바닥이 편하다고?” 좌식 생활을 하는 한국이면 모를까, 입식 생활을 하는 브리티아 인 중 맨바닥에서 자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게…… 네! 원래 바닥에서 자는 것을 좋아합니다.” “…….” 황태자는 매우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그러는 건가?” 엘리제는 화들짝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건!” 그를 믿지 않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는 남자로서 그를 믿었다. 그는 여자의 몸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얼마나 관심이 없으면 황태자의 신분으로도 지난 삶, 자신과 결혼할 때까지 동정이었을까? 정확하진 않지만 이번 삶의 그도 지금까지 동정일 것이다. 아마도. 하지만 그렇게 믿는 것과 옆에서 잠을 청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날 무얼로 보는 건가? 물론 후에 식을 올리면 부부의 의무를 다해야겠지만, 그전에는 절대 손 하나 건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 린덴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안 되겠군.” “……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전하?” “가만히 있어.” 그녀는 앉은 상태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뭐, 뭐하려고? 탁. 엘리제의 등 뒤에 딱딱한 벽이 부닥쳤다. 더는 물러갈 곳이 없어진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하?” 그 순간이었다! 그의 한쪽 손이 그녀의 무릎으로 파고들었다. 반대 손은 허리춤에! “꺄악! 무, 무슨?!” 그러고 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가만히 있어. 손끝도 안 댈 테니.” 소, 손은 이미 대고 있지 않은가?! 무릎 뒤로 느껴지는 그의 손에, 허리에 닿은 그의 감촉에, 얼굴에 맞닿은 그의 탄탄한 가슴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붉어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두근.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치며, 목, 손, 다리 할 것 없이 전신이 타는 듯 달아올랐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침대로 돌아갔다. 그러고 침대 한쪽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거칠게 들어 올렸을 때와 다르게 혹시라도 그녀가 다칠까 부드럽게. “어차피 침대는 넓으니 여기서 자도 돼. 알았나?” “……네.” 그녀는 혼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으나 더는 뭔가를 생각할 정신이 없었다. 그저 심장에 문제라도 생긴 것마냥 가슴만 미친 듯이 뛰었다. “자라.” “……네.” 황태자가 등불을 껐다. 어슴푸레한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장담한 것처럼 그는 그녀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가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잠을 청할 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그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터질 것 같은 것은 가슴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한데 왜 가슴이 터질 것 같은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랬다. ‘왜? 어째서?’ 최근 수도 없이 가졌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설마……? 머리 구석에 한 가지 가정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더 생각하면 이 터질듯 복잡한 가슴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서. ‘모르겠다. 자자, 자야 해.’ 일단 이 순간을 벗어나야 했다. 자고 일어나면 그도 옆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잠을 청했다. 도저히 잠을 잘 상태가 아니었지만, 억지로 눈을 감았다. 마치 현실에서 도피하듯. *** 그렇게 그녀가 눈을 감고 달빛 속 시간이 흘렀다. “…….” 얼마나 지났을까? 옆에 누워 있던 황태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엘리제.” “…….”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자나? 엘리제?” 그녀는 어느덧 잠든 건지 쌕쌕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바라봤다. “잘도 자는군. 난 남자로 보이지도 않는 건가.” 본인이 손끝 하나 안 건들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한 주제에 린덴은 그렇게 투덜댔다. ‘방금.’ 그는 아까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하필이면 그녀가 씻고 나올 때 방에 들어와 그녀의 몸을 봐버렸다. 목욕 타월에 가려진 하얀 나신을 본 순간, 그의 머리는 하얗게 비어졌다. 얇은 다리, 타월에 드러난 허벅지, 그리고 작은 어깨에 도드라진 쇄골. 잠시였지만, 그녀의 모습은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끝없이 떠오르며 그를 괴롭게 했다. 만지고 싶었다. 안고 싶었다. 소유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것이라 새겨두고 싶었다. 생전 처음 느끼는 타는 듯한 욕망이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겠지.’ 날 믿으니, 아니, 남자로 생각도 않으니 이렇게 옆에서 편하게 자는 것이겠지. 그는 이 순진한 소녀를 대상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계속 떠오르는 것을 어쩌겠는가? 그도 너무 괴로웠다. “엘리제. 넌 왜 이렇게 날 미치게 하는 거냐?” 이 소녀를 어떻게 하면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그녀가 자신을 바라만 봐준다면, 한 번만 진심으로 웃어준다면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그녀를 바랐다. ‘내가 미쳤지.’ 린덴은 본인의 생각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오늘도 그렇고.’ 원래 그는 그녀가 머무는 동안, 이 방에 올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지만,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얼굴만 보려고 왔다.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 얼굴만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랬지.’ 그러나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 같이 있고 싶다. 함께 더 있고 싶다. 그녀가 자신의 옆에서 잠드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렇게 잠시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30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Ps. 지금까지는 일일 연재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슬슬 연재 주기를 조정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제 곧 타 플랫폼에도 올라갈 예정이라서요. (사실 어느 플랫폼에 언제, 어떻게 올라갈지는 저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 부분은 출판사에 전적으로 맡기고 있고, 각 업체들과 협의가 필요한 부분이라서요.) 이번주까지는 매일 연재를 유지하지만, 다음주, 1월 첫주부터는 주5회 월화수목금 연재로 바뀔 것 같습니다. 1월 2일부터 며칠 동안은 연참... 을 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ㅠㅠ 어쩌면 1월 1일도 쉴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ㅠㅠ 좋은 하루 되세요!! 00081 3-5 감금 ========================================================================= 5장 감금 - 4 그래서 방을 나가려는 그녀를 잡았다. 억지로 자신의 옆에 눕게 했다. ‘많이 놀랐겠지?’ 그는 방금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던 행동을 떠올렸다. 그도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모르겠다. 계속 자신을 밀어내는 그녀를 보고 욱하고 충동이 들었고, 자신도 모르게 일을 저질러 버렸다. 미친 짓이었다. ‘엘리제. 하아, 엘리제.’ 그녀를 ‘내 엘리제’라 부를 수 있는 날이 올까? 온다면 그게 언제일까? “하아.” 그런데 그 한숨 소리가 큰 탓이었을까? 엘리제가 신음을 내며 뒤척였다. “으음…… 으…….” “……!” 린덴은 혹시나 그녀가 깼을까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그래도 다행히 꿈을 꾸다 낸 소리일 뿐, 잠에서 일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음…… 으…….” 린덴은 그녀의 신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또 악몽을 꾸는 건가?’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는 그녀가 잠든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 그녀가 하버 공작부인을 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백원의 궁, 혈탑(血塔)에 갇혔을 때 초상 능력을 이용해 여러 번 자는 모습을 보러 갔던 것이다. “그때도 매번 이렇게 악몽을 꾸더니…….” 무슨 꿈을 꾸는 건지, 그녀가 편히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괴로워하며 눈물 흘렸다. 그래서 언젠가 지나가듯 물어본 적이 있었다. 잘 때 악몽을 꾸진 않느냐고. 소녀는 전혀 아니라고, 악몽 같은 것 없이 잘 잔다고 대답했었다. “잘 자기는 무슨…….” 어느덧 소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죽지 마요. 제발…… 제발…….” 그리고 늘 비슷한 잠꼬대. “살려 주세요…… 제발…… 죽고 싶지 않아요…….” “……!” 도대체 이 어린 소녀는 늘 무슨 꿈을 꾸고 있단 말인가? 이런 잠꼬대라니. 얼굴도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하아,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젠 하다못해 잠자는 모습까지 자신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소녀에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거 아느냐, 엘리제?” 중얼거렸다. “난 네가 마음에 안 든다. 정말로. 정말로 마음에 안 들어.” 그는 머뭇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어깨를 조심히 감쌌다. “그래도…… 네가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난 네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가 않아.” 내가 아프니까. 네가 아픈 것보다 내 가슴이 훨씬 아프니까. 그러니. “꿈속에서라도 아프지 마라. 제발.” 그녀의 몸이 그의 품에 안겨들었다. 린덴은 마치 깨지기라도 할까 조심히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가 준 ‘징표’. 그의 옷 안에 걸린 진주 장식 십자가가 그녀의 등 뒤에 살포시 와 닿았다. 그렇게 달빛 비추는 밤이 깊어갔다. 엘리제는 모르고 있지만, 이번 삶 그와 그녀의 첫 포옹이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일까? 그의 품에 안긴 순간, 괴로움에 떨던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마치 악몽에서 벗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 심페폴 교외에 위치한 아담한 별장.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이 만발했을 것이 분명한 아름다운 휴식처에 공화국군이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그래, 이상은 없는가?” “충성! 네, 이상 없습니다, 중령님!” 별장을 찾은 이는 파비앙 중령. 공화국군의 총사령관 루이 니콜라스의 친우이자, 부관이었다. “그래, 검기사단의 포로들은?” “특별한 이상 동향은 없습니다.” “모두 오러 나이츠들인데 위험한 행동은 없나?” “손을 구속해 두었습니다.” 별장에 갇혀 있는 포로들은 다름 아닌 검제가 이끄는 검기사단의 오러 나이츠들이었다. ‘오러 나이츠. 참 지긋지긋한 자들이지.’ 파비앙은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그들이 사용하는 오러의 정체는 사실 별것 아니지만.’ 오러의 정체는 이미 규명됐다. 수력, 화력, 풍력 같은 대자연에 떠도는 기(氣). 그 줄 에너지(joule energy)를 동방에서 전해진 특수한 단전호흡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신비하기는 차라리 로마노프 황가의 초상 능력이 훨씬 신비하지. 뭐, 그것도 언젠가 과학적으로 규명될 날이 오긴 하겠지만.’ 지금도 과학자들 사이에는 로마노프 황가의 초상 능력에 대한 가설이 여럿 있었다. 뇌와 혈액으로 전해지는 유전 물질로 인한 현상이란 등 말이다. 그들이 황족인 탓에 제대로 연구를 할 수가 없어서 그렇지, 만약 일반인이었다면 진작 낱낱이 해부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오러든 초상 능력이든 지금 우리 계획과는 상관이 없는 일.’ 그의 얼굴이 무겁게 변했다. ‘정말 이 계획을 그대로 진행해도 되는 걸까?’ 그는 이 계획이 두려웠다. 실패할까 두려운 게 아니었다. 성공할까 두려웠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최소한의 선이 있는 법이거늘.’ 물론 전쟁은 무조건 이기는 게 최선이란 루이 니콜라스의 말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선이 있는 법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하아.” 하지만 그는 선택권이 없었다. 자신은 그저 명을 수행하는 장기판의 말이었으니까. “손이 묶여 있으니 누군가 도와줘야 할 텐데. 지금 수발은 누가 들고 있나?” “명대로 무어인들이 도와주게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수레에 새롭게 실려 온 무어인들로 바꾸었고요.” “그래, 자네들은 새로운 무어인들과 접촉하진 않았지?” “네, 당부하신 대로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래, 반드시 접촉하면 안 되네.” 한 병사가 그 당부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중령님, 왜 그 무어인들과 접촉하면 안 되는 것입니까? 멀리서 보니까 안색도 별로 좋지 않던데. 피를 흘리는 이도 있었고.” “그건 알 것 없네. 자네들의 임무는 이 별장에서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감시하는 것. 괜히 쓸데없이 무어인이나 포로들과 가깝게 접촉할 필요 없어.” 파비앙은 그렇게 둘러대었다. “어차피 저들은 며칠 뒤 제국으로 돌려보낼 거니. 그때까지만 수고해 주게.” 병사들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저들을 풀어준다는 말씀입니까? 검기사단인데?” 검제를 필두로 한 검기사단의 기사들은 공화국군에게 악몽 같은 존재였다. 간신히 포로로 잡았다 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풀어준다고? 풀어주면 자신들에게 곧바로 칼을 겨눌 게 분명한데? “그쪽 포로와 맞바꾸기로 했네.” “……그렇군요.” 정말 파비앙의 말대로 며칠 뒤 심페폴 북쪽의 야산에서 포로 교환이 일어났다. 검기사단의 기사 2명과 공화국의 영관 장교 2명을 바꾸기로 한 것이다. 당시 이런 식의 포로 교환은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다. 그래서 제국군은 총사령관인 황태자에게 보고할 것도 없이, 제의를 승낙했다. 별다른 의심은 전혀 하지 못했다. “이봐, 맥, 잭! 칠칠치 못하게 포로로 잡히고 말이야!” “전하! 저희를 위해 몸소!” 포로로 잡혔던 검기사단의 맥과 잭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포로 교환을 위해 3황자가 직접 마중 나온 것이다. “너희들 일인데, 당연히 내가 나와야지. 안 그래?” 미하일은 시원하게 말했다. 사실 검기사단의 유래는 총기사단과 다르게 로열 나이츠가 아니었다. 그저 검제 미하일의 무명을 동경한 젊은 오러 나이츠들이 집결해 만든 기사단인 것이다. 따라서 단장인 미하일과 단원들 사이에 관계는 끈끈하기 그지없었다. 술에 진탕 취해 형, 동생 할 때도 수 없었다. “얼굴이 많이 상했는데? 공화국 놈들이 괴롭혔어?” “아닙니다. 시종까지 붙여 잘 대접받았습니다.” “시종?” “네, 손을 묶어놓고 무어인을 붙여주더라고요. 그런데 전하야말로 얼굴이 상하신 것 같습니다.” 미하일은 끔찍한 표정을 지었다. “아, 소심한 어떤 분 때문에 고생을 좀 해서.” “혹시 영창이라도 가신 겁니까?” “어떻게 알았어?” “딱 표정이 그러셔서…….” “맞아. 으…… 그놈의 벌레들. 내가 다시는 영창에 가나 봐라. 영창 갈 바에는 차라리 탈영을 하지!” 맥과 잭은 3황자의 여전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돌아가자!” “네, 전하!” 그렇게 그들은 말을 타고 현재 검기사단이 주둔 중인 부대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며 망원경으로 보며 미소 짓는 이가 있었다.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계획대로군.” “네, 각하.” “이왕이면 검제도 걸려들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지금 검기사단이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지?” “프라바입니다.” 프라바는 심페폴을 가시권에 두고 있는 소도시로 제국 중앙군의 새로운 주둔지였다. 코프스크의 승리로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주둔지의 위치가 바뀐 것이다. 아마 제국의 사령부도 조만간 프라바로 옮길 것이 분명했다. “좋군. 아주 좋아.” 루이 니콜라스는 그림 같은 얼굴로 비릿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우리는 와인이나 마시며 기다리자고.” 그의 얼굴이 미소를 지음에 따라 눈가에 난 상처가 흉측하게 꿈틀거렸다. “제국군이 무너지기를 말이야.” 그는 이 계책이 끝난 후 마주할 소녀를 떠올렸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내 계책을 두 번이나 무산시켰지?’ 그 순백한 아름다움을 지닌 소녀는 그를 끝없이 자극하고 하고 있었다. ‘죽지 말라고. 곧 만나야 하니.’ *** 며칠 뒤, 엘리제는 야전병원으로 돌아왔다. 자택 근신이 해제된 것이다. 병원의 사람들은 그녀의 복귀를 반겼다. “고생하셨어요, 병원장님!” “아…… 네.” “많이 힘드셨죠?” 제이를 비롯한 사람들은 그녀가 벌을 받는 것이 위험한 수류탄 제거 수술을 강행해 황태자의 분노를 산 탓이라 생각했다. 물론 정확한 추측이다. “그때 수술은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데임.” 그레이엄이 말했다. 원래도 딱딱한 말투지만 더 딱딱했다. 마치 화라도 난 듯.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위험하긴 했다. “죄송해요, 선생님.” “다음에는 수술하더라도 반드시 저에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왜 항상 혼자 위험을 감수하려 하십니까?” 당시 그녀는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사들에게 수술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저 건물만 빨리 비워 달라 했다. “네, 꼭 그럴게요.” “반드시입니다.” “네.” 제이도 말했다. “그러게요. 데임. 너무 위험했어요. 그때 전하께서 얼마나 많이 화내셨는데요.” “……그래요?” “네, 데임께서 수술하고 있을 때 건물 밖에서 난리도 아니셨어요. 전 황태자 전하가 그렇게 무서운 분이신 것 처음 알았어요.” 당시를 회상하며 제이는 몸을 떨었다. “그렇게 막 화를 내면서도, 당장에라도 뛰쳐들어가고 싶어 하셨어요. 하지만 그러면 혹시라도 수술 중인 데임께서 놀라 위험해지실까 또 전전긍긍하시고. 하여튼 그랬어요. 옆에서 보는 저희가 얼마나 조마조마했는데요.” “……!” “어쨌든 데임께서도 고생하셨어요. 얼굴 안 좋은 것 봐요. 그래도 전하께서도 아무리 화가 나셔도 그렇지, 약혼녀를 감금시키면 어떻게 하시나. 치이.” 제이는 엘리제의 어두운 표정을 살피며 속상한 얼굴을 지었다. 사실 엘리제의 얼굴은 전혀 나빠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나아졌다. 근신 기간 동안 워낙 잘 쉬고, 잘 먹었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속 근심과 혼란 때문에 표정이 안 좋았다. ‘하아.’ 그녀를 번뇌케 하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황태자였다. 엘리제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환자를 봐야겠어요. 새로 들어온 환자들한테 안내해 주세요.” ***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부상병의 상처를 치료했고, 등불을 들고 환자들과 함께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 하지만 곁의 몇몇 의사는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는 점을 눈치챘다. ============================ 작품 후기 ============================ 내일 31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타 플랫폼에 들어간다고 해서 조아라 연재 중단은 당연히 없습니다.;; 완결은 대충 180화 정도로 예상하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00082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1 “데임.” “네, 제이?” 제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괜찮으세요?” “뭐가요?” “요즘 무리하는 것 같아서…….” 그러며 제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물론 평소에도 항상 무리하긴 하시지만…….” 엘리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평소와 다른 것 전혀 없는 걸요.” “하지만…….” 제이는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들의 대화처럼 평소에도 무리는 했다. 아니, 워낙 환자가 많다 보니 엘리제가 무리하지 않는 날이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평소와 지금의 그녀는 뭔가 달랐다. 평소에는 진짜 환자를 위해 노력하는 느낌이라면, 지금의 그녀는 무언가에 쫓기듯 일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일부러 몸을 혹사시키는 듯한 느낌. 이상한 점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계속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지?’ 환자를 보는 틈 사이, 엘리제는 그녀 자신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으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고 무언가에 깜짝 놀라 고개를 젓곤 했다. 그런 이상한 모습이 하루에 몇 번이고 목격되었다. ‘도대체 왜 저러시지?’ 그때, 한 간호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클로랜스 병원장님.” 군인들은 그녀를 데임이나 대령님으로 부르지만, 의료진들은 주로 그녀를 야전병원의 원장으로 불렀다. “네? 무슨 일이죠?” 간호원이 웃으며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어요.” “……!” 엘리제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크게 흔들렸다. “환자를 보러 오신 건가요?” “네.” “그러면 그레이엄 선생님께 말씀드려 안내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데임?” 그 말에 간호원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데임께서 안내하지 않으시고요?” 황태자는 주기적으로 야전병원에 방문했다. 표면적인 이유야 환자를 돌보기 위해서라지만, 엘리제를 제외한 병원의 사람 중 그렇게 여기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누가 봐도 그녀를 보러 온 건데, 그레이엄보고 안내하라니?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저는 지금 환자를 봐야 해요.” “하지만…….” 간호원은 그녀가 돌보는 환자를 살폈다. 상처가 크긴 했지만, 활력 징후가 정상이고 출혈도 없어 별로 급한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이 환자 말고도 처치해야 할 환자가 많아요.” “…….” “그리고 꼭 병원장이 총사령관을 마중해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군법에 적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따지면 그건 그렇다. 결국, 간호원은 곤란한 얼굴로 그레이엄에게 갔고, 제이는 엘리제를 살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생각으로. 하지만. “……?!” 그녀의 얼굴을 본, 제이는 입을 다물었다. ‘데임……?’ 환자를 살피는 엘리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빨간 입술이 하얘질 정도로 강하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얼굴로. ***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생일 축하한다.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그에게 들었던 말들이 끝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무리 환자에게 집중하려고 해도, 어느 순간 다시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말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뒤에서 안았어.’ 그 밤. 린덴이 그녀를 처음으로 안은 그 날. 그녀는 자고 있지 않았다. 아니, 처음엔 잠들어 있었지만 중간에 일어났다. 다른 사람이, 그것도 그가 뒤에서 자신을 안고 있는데 어떻게 계속 잠들어 있었겠는가? ‘어째서? 왜?’ 그녀는 혼란스럽게 생각했다. 이전 삶, 그는 관계를 가졌어도 그런 식으로 자신을 안은 적은 없었다. 그저 의무적으로 관계를 마친 후, 씻고 각자 잠을 잤을 뿐이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 따뜻하게……? 그녀는 그때 등 뒤에 닿았던 그의 느낌을 떠올리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싫었나? 아니, 싫지는 않았다. 그게 문제였다. ‘뿌리치지 못했어.’ 아직 약혼도 하지 않은 남자가 자신을 등 뒤에서 안고 있었다. 손끝 하나 건들지 않겠단 약속을 어기고. 그러면 당연히 뿌리쳤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왜? ‘싫지 않았으니까.’ 그래, 싫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렇게 냉대에 지쳐 망가졌으면서도. 파국 끝에 단두대에 처형당했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하아…….” 그래, 잘 모르겠다. 그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말들을 하는지, 이런 행동들을 보이는지. 전혀 모르겠다. ‘아니, 거짓말하지 마. 엘리제.’ 그녀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그가 그러는 이유. 짐작 가는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보가 아니니까. 그저 외면하고 있을 뿐. 그래, 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은 거다. 진실을 마주하면, 판도라의 상자를 연 소녀처럼 그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하지만…….’ 그녀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진실이 어떻듯. 자신은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난 삶처럼. 그녀는 그게 두려웠다. 너무나. *** 다음 날, 야전병원으로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여, 리제! 잘 지내고 있었어? 형님이 괴롭히진 않았어?” “전하?!” 싱그러운 웃음. 검제 3황자 미하일이었다! 엘리제는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반겼다. 그녀에게 그는 항상 반가운 친구였다. “밀.” “네?” “전하라 말고, 밀이라 하라 했잖아.” “아, 미안해요. 밀.” 엘리제는 웃으며 말을 바꿨고, 미하일도 마주 웃었다.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이에요?” “아…… 아파서.” “네?” 엘리제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아프다고? 최강의 오러 나이츠인 그가? “아, 별건 아니고. 감기에 걸린 것 같아서.” “감기요? 밀이요?” “응, 으슬으슬 춥고 기침 나오네.” 엘리제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러 나이츠인 그가 감기에 걸렸다고?’ 물론 걸릴 수 있었다. 오러든 초상 능력이든 질병 면역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 하지만 오러 나이츠는 단순히 특수 호흡으로 자연의 줄 에너지(Jule energy)만 이용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도 일반 기사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극한의 무술 단련을 한다. 그런 만큼 일반인들과는 비교도 안 되게 체력이 좋았다. 즉, 오러 나이츠들은 건강 체질 중의 건강 체질이라 할 수 있었고, 3황자는 그런 오러 나이츠의 정점에 서 있는 자인데? “크림반도의 겨울이 길어서인 것 같아. 원래도 겨울이 길고, 봄 없이 바로 더운 여름이 오는 지역인데, 도대체 이번 겨울은 언제 끝나려는지 모르겠네.” 미하일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다른 서대륙은 슬슬 봄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만, 크림반도는 여전히 추웠다. 마치 봄이 영원히 안 올 것처럼. “그냥 안 오려다가, 네 얼굴이나 볼까 하고 겸사겸사 왔어. 약이나 대충 지어줘.”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제대로 진찰을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응? 그냥 감기라니까. 열이랑 기침 말고는 아무런 증상도 없어.” 그녀도 그가 단순한 감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환자를 보며 쌓인 육감이었다. “제이, 체온계를 가져오세요.” “네, 데임!” 그리고 체온을 재본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39.3도! 엄청난 고열이었다! “아니, 괜찮아요? 열이 엄청 높아요.” “어…… 괜찮은데? 39.3도라고? 잘못 잰 것 아니야?” 다른 부위에서도 재봤지만, 이번엔 39.4도! 여전히 높았다. 그녀는 고민하다 말했다. “안 되겠어요. 입원해야겠어요.” “엥? 무슨 감기 가지고 입원이야. 나, 이래 보여도 검제라고!” 그의 말이 옳았다. 고작 감기 가지고 입원이라니.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이상하게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의사의 감은 기이하게 정확한 면이 있었다. 따르는 것이 좋았다. “검제든, 서대륙 최강검(最强劍)이든, 동방 오존(五尊)이든 다 안 돼요. 뭔가 이상해요. 입원하세요.” “필요 없는데…….” 미하일은 투덜거렸으나, 그녀는 강제로 그를 입원시켜 버렸다. 다행히 당장 검기사단은 작전이 예정되어 있지 않아, 그는 입원할 수 있었다. “오래 안 있으셔도 돼요. 열 떨어질 때까지만 있으세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리제.” “네?” “이거 나 걱정해서 그러는 것 맞지?” 능글맞은 물음에 리제는 살짝 당황했다. “그…… 그건 아닌데…….” “아니야? 그러면 나 서운한데. 내가 이렇게 아픈데 걱정도 안 해주는 거야?” “아, 아니, 걱정은 되는데…….” 당황해 더듬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이 소녀는 이런 농담에 무척 약했다. 그래서 더 놀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가만히 엘리제를 돕던 제이가 말했다. “저…… 데임.” “네, 제이?” “혹시…… 전하를 제가 진료해도 될까요?” 응? 놀라 제이를 보니, 어린 소녀는 앵두 같은 얼굴로 손을 저었다. “아, 아니……! 데임께서는 항상 바쁘시니까. 감기 정도는 제가 보면 데임께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하지만 엘리제는 소녀의 속마음을 단번에 눈치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이가 미하일을 보는 눈은 선망 그 자체였으니까. ‘미하일 전하의 팬이었구나.’ 엘리제는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3황자 미하일. 론도 최고의 바람둥이. 그리고…… 서대륙 최강의 무인. 3년간의 가출 동안 그가 청에서 벌인 모험은 전설과도 같은 것이었다. 어찌나 대단한 일들을 해냈는지, 콧대 높은 청 사람들이 양이(洋夷)인 그를 동방 오존 중 하나인 검제라 높여 불렀고, 청 황실에서 브리티아 황실에 감사의 선물을 보낼 정도였다. 그런 그의 모험은 여러 극 작가들에 의해 편집돼 론도에서 인기리에 공연 중이었고, 젊은 영애들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그의 팬이 되었다. “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데임!” 제이는 크게 기뻐했다. “대신 만약 무언가 변화가 있거나 이상이 있으면 저한테 곧바로 말해주셔야 해요. 알았죠?” “네!” 그러며 엘리제는 3황자를 흘겨봤다. ‘하여튼 지난 삶도 그랬지만, 참 바람둥이라니까.’ 그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눈빛에 3황자가 항변했다. “왜? 왜 그렇게 봐? 그 눈빛은 뭐야?” “제이는 아직 어려요.” “그래서 뭐?!” “그냥요. 어리다고요.” 3황자에겐 퍽이나 억울한 말이었다. *** 그렇게 3황자를 입원시킨 후 엘리제는 잠시 그를 잊고 있었다. 심페폴 인근에서 다시 공방이 거세지며 부상자가 몰려들었던 것이다. 정신없이 환자를 처치하며 엘리제는 이마의 땀을 닦았다. ‘힘들구나.’ 몸도 힘들었고, 다친 부상병들의 신음이 그녀를 가슴 아프게 했다. 그래도 정신없이 바쁘니 딱 하나 좋은 것이 있었다. 너무 바빠 딴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건 좋았다. 그렇게 그녀는 모든 것을 잊고 환자 처치에 열중했다. 황태자도 잊고, 지난 삶도 잊고. 그저 목각 인형처럼.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그래서일까? 그녀는 이상점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제이?” “네, 데임?” “얼굴이? 괜찮아요?” 엘리제는 놀라 어린 소녀를 바라봤다. 주근깨가 있는 뺨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못해도 38.5도 이상의 고열이었다. 아니, 언제부터? “오늘 아침부터 그랬어요. 기침 나오는 것 봐서 감기인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데임.”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아침부터 그랬다고? 고열에 기침?’ 물론 감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발열, 기침을 나타내는 질환 중 가장 흔한 병이 감기이니까. 하지만 왜일까? 기분 나쁜 느낌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기분? 병원에서의 경험상 이런 육감은 항상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치명적 결과를 안고.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83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2 ‘도대체?’ 엘리제는 괜찮다는 제이를 끌고 가 방사선 촬영을 하였다. 야전병원은 그녀 덕분에 개선을 거듭해 단순히 깨끗해진 게 아니라, 이제 X-ray 기계와 간단한 피 검사도 가능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이 정도면 론도의 병원들에 비해 그다지 쳐지지 않는 설비였다. ‘폐 X-ray는 정상이야. 폐렴은 아닌데? 뭐지? 그냥 정말 감기인가?’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무 과민한 건가? 감기에 걸린 것일 가능성이 가장 높긴 한데.’ 하지만 계속 느낌이 안 좋았다. 마치 2차 론도 대역병 때처럼 불길한 기분이 등줄기를 찔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엘리제는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우웩!” “제이!” 제이가 메스꺼운 표정을 짓더니, 와락 무언가를 토했다. 깜짝 놀라 그녀에게 달려간 엘리제의 얼굴이 굳었다. 피였다! 음식물을 토한 게 아니라, 새빨간 피를 뿜은 것이다! “제이?!” “데, 데임? 이게……?” 제이도 자신이 피를 토한 게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제이의 진료복이 흥건히 피로 물들었다. 엘리제는 급히 활력 징후를 체크하고, 응급 처치를 하였다. “여기 누가 와서 도와주세요! 수액 좀 달아주세요! 위장 보호제도 같이 가져와 주시고요!” 곧 그녀 말고 여러 의사가 달려들었다. “제이, 괜찮지?” “걱정하지 말고. 금방 좋아질 테니.” 제이는 의료 지원단의 가장 어린 소녀였다. 그런 만큼 모두의 아낌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엘리제뿐 아니라, 여러 의사가 성심을 다해 치료했고, 덕분에 제이의 상태는 금방 안정됐다. 한 남자 의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왜 피를 토한 거야? 놀라게.” “죄송해요.” “최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니? 이런 건 대부분 위장관 궤양 출혈의 가능성이 높아.” 위장관 궤양 출혈. 토혈(위나 식도 따위의 질환으로 피를 토함)의 가장 흔한 원인으로 의사들은 그녀가 과중한 업무로 스트레스를 받아 위에 궤양이 생겨 피를 토했다 짐작했다. 하지만 한 명, 엘리제는 눈썹을 찌푸렸다. ‘궤양 출혈? 갑자기? 아니야.’ 그때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그레이엄이 입을 열었다. “데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단순 위궤양 출혈인 것 같습니까?” 모두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지난 몇 달간 그녀의 기적 같은 실력을 봐온 그들이다. 이제 그들은 론도의 최고 의학 석학보다 그녀의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아니요. 다른 원인을 생각해 봐야 해요.” “어째서입니까?” “고열(高熱)이요.” “……?” “위궤양은 복막염으로 진행하지 않는 한, 열이 나지 않으니까요.” 의사들은 그 말에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 놓치고 있었는데, 위궤양은 열이 나지 않는다. 위산이 과다 분비되어 위벽이 깎이는 질환이기 때문이다. “위궤양에 감기가 동반되어 열이 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물론 그렇기도 하죠. 하지만 두 개의 병이 갑자기 오는 것은 너무 공교롭잖아요. 한 번 다른 원인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어떤 검사를?” 그녀는 짧게 답했다. 다행히 최근 로마노프령에 요청해 검사 기계를 들여왔었다. “혈소판 수치요.” 혈소판. 몸의 지혈 작용을 돕는 혈액 성분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검사해 보겠습니다.” 곧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검사 결과를 확인한 엘리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이게…… 맞는 건가요?” “네, 저도 이상해 2번이나 검사했습니다.”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숫자가 쓰여 있었다. 1.5만. 정상의 15만에 비해 10분의 1밖에 안 되는 수치였다. 일반적으로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치. 이 정도 수치면 가만히 있어도 출혈로 사망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그런데 그때였다! “데임! 데임! 빨리 와주세요!” 한 간호원이 다급히 뛰어들었다. “……?!” 간호원이 급박히 소리쳤다. “급성 토혈 환자가 왔어요! 3명이나! 모두 상태가 안 좋아요.” “……!” 토혈 환자가 3명이나? 그녀의 등줄기에 한기가 돋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한 가지 단어. 전염성 출혈열. 제국군에 원인 미상의 출혈열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사막의 전갈이 뻗은 마수가 제국군의 진영에 죽음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 3명의 환자 모두 제이와 증상이 비슷했다. 감기와 유사한 고열, 그리고 갑자기 동반된 토혈. ‘분명해. 이건 그냥 단순한 감기나 위장관 출혈이 아니야.’ 환자를 살핀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세히 살피면 3명의 눈에는 결막하 출혈이 관찰되고 있었다. 급성 출혈 질환 환자에서 특징적으로 보이는 소견이었다. ‘갑자기 왜?’ 이런 출혈열은 절대 자연 발생하지 않는다. 분명 어디선가 매개체를 통해 바이러스가 들어온 것이다. ‘크림반도에 이런 출혈열을 일으키는 풍토병(어떤 지역의 특수한 기후나 토질로 인하여 발생하는 병)이 있었나?’ 엘리제는 고민했다. ‘아니야. 없어.’ 참전을 결정 후, 크림반도 풍토병에 대해 자세히 공부했기 때문에 확실히 알고 있었다. 크림반도에 이런 출혈열은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어디서 전염된 것이지? 아니, 무슨 병인 것이지?’ 출혈열! 이건 고열과 출혈을 동반하는 질환을 총칭하는 단어였다. 정확한 진단명이 아니라. 문제는 출혈열의 종류가 한두 개가 아니란 점이다. ‘서울 바이러스도 출혈열이고, 황열도 출혈열이야. SFTS도. 마버그 병도 출혈열이고. 라싸 열도 마찬가지.’ 당장 그녀의 머릿속에 비슷한 증상을 일으키는 병이 5개도 넘게 떠올랐다. ‘현대 지구에서 아프리카를 공포에 몰았던 에볼라도 고열과 출혈을 동반하는 출혈열의 일종이고. 도대체 그중 뭐지?’ 엘리제는 책상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천하의 그녀라도 단서가 너무 적었다. 이래서야 병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조금 더 단서를 모아야 해.’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다음 날 새로운 3명의 환자 중, 2명이 열이 악화되더니 갑작스레 폐에서 출혈을 일으켜 사망한 것이다! “……?!” 그러나 악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곧바로 10명의 출혈 환자가 다시 몰려들었다. 그중 3명이 폐출혈이 발생해 죽었고, 2명이 위독해졌다. 다음 날에는 다시 20명의 환자가 발생했다. “이게 갑자기 무슨 전염병인 거지?” “이거 이러다 다 죽는 것 아니야?” 제국군 진영에 갑작스러운 공포가 내려앉았다. 이 시대 사람들의 전염병에 대한 두려움은 상상을 초월했다. 병이 한번 돌 때마다 수십만의 단위가 툭하면 죽어 나갔으니까. 특히 군대에서 전염병의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밀집 생활을 하고 위생이 좋은 것도 아닌지라 아차 하면 순식간에 퍼져 나가기 일쑤였고,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가 나곤 했다. 병사들은 서로 모이면 겁에 질려 떠들었다. “우리 부대에서도 고열 환자가 발생했어.” “우리도 그래. 난 이렇게 죽고 싶지 않은데.” “벌써 50명이나 죽었데. 곧 죽을 사람도 많다고 하고.” “어떻게 하지? 이러다 다 죽는 것 아닐까?” 그때 한 병사가 분연히 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우리에겐 데임 클로랜스가 있잖아!” “……!” “데임 클로랜스는 론도를 3일 만에 대역병에서 구한 영웅이라고. 이번에도 이 전염병을 물리쳐 주실 거야!” 그 말에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등불을 든 천사가 이번에도 우릴 살려줄 거야.” “그래, 조금만 기다리자. 예비 황태자비께서 분명 방책을 마련해 주실 거니까.” 병사들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엘리제가 있는 야전병원이 위치한 방향이었다. 그렇게 작은 소녀, 엘리제의 어깨에 제국군의 희망이 집중되었다. *** 하지만 그때, 엘리제는 그들의 희망과 다르게 난관에 봉착해 있었다. ‘도저히 모르겠어. 이 병은 뭐지?’ 처음엔 기침과 고열로 발병한다. 그러다 위장에서 출혈이 발생해 토혈하고, 상태가 악화하며 폐에서도 출혈이 발생해 호흡 곤란으로 사망한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아닐 수가 없다. 현재까지 치사율은 무려 50%. ‘신증후군 출혈열? 아니야. 에볼라? 그것도 아니야.’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전염성 출혈 질환들을 떠올렸다. 모두 아니었다. 출혈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양상이 맞지 않았다. ‘새로운 병일까? 아니면 지구에서는 없어진 병?’ 모든 전염병이 세기를 이어 내려오진 않는다. 몇십 년만 유행하고 사라지는 전염병도 많았다. 어쨌든 이 출혈열은 그녀가 모르는 병이었다. ‘내가 지금 이 병을 진단 내리는 것은 불가능해. 현대 지구의 전자 현미경이라도 있으면 바이러스의 정체라도 확인했겠지만.’ 그녀는 고뇌했다. ‘어떻게 하지?’ 최대한 빨리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환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이미 많이 늦었어. 더 늦으면 안 돼.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통제 불능이 될 거야.’ 엘리제는 초조히 생각했다. 모든 이가 그녀만 목을 빼놓고 바라보는 상황이다. 그녀가 빠르게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면 수없이 많은 사망자가 나오며 제국군은 무너질지도 몰랐다. 고작 병 하나에 최강 제국군이 무너진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갈 수도 있지만, 고래로 전염병에 무너진 강군은 수도 없었다. 특히 이런 치사율이 높은 병은 치명적이었다. ‘당장 정확한 진단을 찾는 것은 불가능. 그렇다면.’ 그녀의 눈이 깊어졌다. 수없이 많은 삶과 죽음 앞에서 결정을 거듭한 외과의사의 눈빛이었다. ‘진단을 내리는 건 포기해. 어차피 지금 상황에서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신이 아니다. 완벽하게 해결해 내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럴 수가 없다. 우선순위를 결정해야 한다. ‘안타깝지만…… 이런 상황에서 모두를 살릴 수는 없어. 추가적인 발병자와 사망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만 생각하자. 나머지 일들은 모두 뒤야. ’그 방법‘을 쓰자.’ 그렇게 생각한 그녀의 가슴이 시큰 아파져 왔다. 이 전염병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을까?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떠오른 의문. ‘이 전염병은 어디서 온 걸까? 정말 자연적으로 생긴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크림반도의 풍토병이 아니니까. 왜 갑자기 이런 병이 유행한 걸까? 공교롭게. 그것도 제국군에서만. ‘설마……?’ 한 가지 소름 끼치는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곧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리 사막의 전갈이라도.’ 그녀는 그 가설을 한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너무 지나친 비약이었다. ‘어차피 ‘그 방법’으로 병을 해결하다 보면, 원인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녀가 생각해 낸 ‘해결책’. 그건 기본적으로 지난번 론도 콜레라 사건 때와 동일한 원리였다. 다만 방법이 전혀 달랐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불가피한 희생을 필요로 했다. ‘아무도 위험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불가능해. 어쩔 수 없어.’ 그녀는 굳게 생각했다. 생각을 정리한 엘리제는 총사련관 린덴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지난밤 이후, 마음이 복잡해 최대한 그를 피해왔지만, 지금은 그런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킬 때가 아니었다. ============================ 작품 후기 ============================ 아, 내일도 연재를 하게 되었습니다. 1월 1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Ps. 1월 1일에 한편, 1월 2일에 2편, 1월 3일에 2편, 1월 4일에 2편. 이렇게 올라갈 것 같습니다. 00084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3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 며칠 전만 해도 포탄의 굉음이 도시 한가운데까지 울려 퍼졌지만, 지금은 조용했다. 제국군이 갑자기 진군을 멈춘 탓이다. “잘 진행되고 있는 것 같군.” 루이 니콜라스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국군의 피해는 어떤가?” “현재까지 사망자 100명 정도입니다. 전염병에 감염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는 300명 정도이고요.” 파비앙이 답했다. “그래? 생각보다 사망자가 적군. 검은 대륙에서는 사망률이 80%에 육박했는데.”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 때문인 것 같습니다.” “흠?” “여러 치료 방법을 동원해 최대한 사망자의 발생을 막고 있다고 합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법이 많아, 내용을 전해 들은 우리 군의 수석 군의(軍醫)가 계속 감탄하고 있습니다. 의학계에 대신 발표하고 싶을 정도로 하더군요.” “그런가? 등불을 든 여인은 쓸모없는 노력을 하고 있군.” 루이 니콜라스는 비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전염병. 한두 명 치료하는 게 중요한 일이 아닌데 말이야.”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까요?” 파비앙은 등불을 든 여인이 론도를 3일 만에 대역병에서 구해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파비앙.” “네, 각하.” “이 전염병은 론도 대역병과는 달라. 알지 않나?” 물론 안다. 검은 대륙에서 똑똑히 목격했으니까. “등불을 든 여인이 밝혀낸 것처럼 론도 대역병은 물에 의해 전파되지, 사람 간의 전파는 안 일어났어. 하지만 이 전염병은 아니야. 사람 간에 전파가 일어나지. 그것도 체액으로 쉽게.” “…….” “이 전염병의 가장 무서운 점은 높은 사망률이 아니야. 바로 사람 간에 쉽게 전파된다는 점. 그게 제일 두려운 점이지.” 사람 간의 전파. 그건 밀집한 생활을 하는 군대에 치명적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어쨌든 두고 보자고. 등불을 든 여인이 어떤 대책을 마련하는지.” 루이 니콜라스는 여유롭게 말했다. *** 그 시각, 엘리제는 총사령관 린덴과 만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잘 지냈나?” 린덴이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비교적 오랜만에 만나는 그들이었다. 그가 야전병원에 계속 방문했지만, 그녀가 피했기 때문이다. “그간 많이 바빴나 보군.” “……네.” 엘리제는 일부러 짧게 끊어지듯 답했다. 중요한 일로 왔으니, 사적인 감정을 나누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어떻게 지냈지? 얼굴이 지난번보다 조금 상한 것 같은데.” “…….” “환자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몸도 챙기도록 해.”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용무를 말했다. “전하, 저는 군의 의무를 책임진 의무사령관으로서 군영에 유행 중인 전염병에 대해 논의하고자 왔습니다.” 다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그 목소리에 린덴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도 그의 눈을 마주 봤다. 무뚝뚝한 금안의 깊은 곳. 너무나 아득히 깊어, 눈치채기도 어려운 그곳에 선명한 갈망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차라리 못 봤으면 하는 그 감정에 그녀는 가슴이 울렁했지만 모르는 척했다. “그래, 전염병 이야기를 하지. 먼저 셋째의 상태는 괜찮나?” 일단 린덴은 전염병을 앓고 있는 3황자의 안부를 물었다. “아직은 위험합니다.” 3황자는 거의 최초의 감염자다. 그래서인지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의 혈소판 수치는 고작 8천! 정상 15만의 20분지 1도 안 되는 수치다. 열도 끝없이 39도를 넘나들고 있었다. ‘만약 그가 신체를 극한까지 단련한 오러 나이츠가 아니었으면, 이미 사망했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는 어디서 감염된 것이지?’ 3황자는 굉장히 초기에 감염되었다. 어쩌면 그가 최초의 감염자일지도 몰랐다. ‘조사해 봐야겠어. 어쩌면 감염원인을 찾을 수 있을지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린덴이 이어 물었다. “그래, 너는 지금 전염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사실 병사들의 동요를 고려해 말을 아끼고 있긴 하지만, 우리 군은 굉장히 곤란한 상태야. 그래도 엘리제, 너라면 해결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기대를 품은 물음이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은 답이 안 나올 정도로 곤란했다. 사람들 간에 끝없이 전파되는 전염병을 인력으로 어떻게 해결하겠는가? 하지만! 이 기적을 만들어내는 소녀라면 해결책이 있을지도 몰랐다. 역시 엘리제는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완전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그러면?” “대신 불완전한 해결책은 있습니다.” “무슨 말이지?” “많은 사망자가 나올 것입니다. 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습니다.” “……!” 많은 사망자. 그 말에 린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느 정도의 사망자를 말하는 거지?” “정확하진 않지만 1,000명, 아니, 500명은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처음 1천 명을 언급한 그녀는 500명으로 말을 바꿨다. 500명도 너무 많았다. 어떻게든 이 이상은 죽지 않도록 해낼 것이다. “500명이라.” 황태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생각과 달리 사망자가 많이 나와서가 아니었다. ‘이런 치명적 전염병을 500명의 사망으로 막아낼 수 있으면 그건 완벽한 거지.’ 500명의 인명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염병 한 번에 수십만의 사람이 죽는 시대다. 그 정도의 숫자면 희생자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속상해하는 그녀의 생각과 다르게 말이다. ‘최악의 경우 군의 전면적인 후퇴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정말 대단하군.’ 그는 엘리제를 감탄의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른 이도 아닌 그녀가 한 말이다. 그러니 린덴은 무조건 이뤄진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그녀를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그래, 어떻게 하면 되지? 아니, 무엇이 필요하지?” 그는 전폭적 지원을 할 생각으로 말했다. “이 전염병을 해결하는 데는 큰 도움 하나와 작은 희생이 하나 필요합니다.” 아리송한 대답이었다. 큰 도움 하나와 작은 희생 하나? “큰 도움은 뭔가?” “저에게 계통에 상관없는 전군의 병력 통제권을 주십시오.” “……?!” 뜻밖의 요구에 린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군의 통제권? 그게 무슨 의미를 뜻하는지 알고 있나?” 전군의 병력 통제권. 어떤 병력이든 움직일 권한을 달라는 것으로, 그녀는 지금 총사령관인 그의 권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무리한 부탁인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큰 희생을 막으려면 반드시 필요합니다.” “…….”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요구였던 것이다. 하지만 고민은 잠시. 그는 금세 결정을 내렸다. “좋다. 그렇게 하지. 너에게 내 권한을 위임해 주마.” “……!”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일단 요구를 하긴 했지만, 너무 큰 부탁이라 정말 들어줄 것인지는 의문이었는데, 이렇게 빠른 승낙이라니? 하지만 린덴은 늘 그렇듯 무덤덤하게 말했다. “난 너를 믿으니까.” 믿는다.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그래, 그런데 통제권을 가지고 뭘 할 거지?” “격리 조치를 시행할 예정입니다.” “격리?” “네, 역학 조사에 기반한 선제적 격리를 해야 합니다.” “흠?” 엘리제는 자세히 설명했다. “이 전염병은 처음에 감기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다 출혈이 진행해 사망하지요. 그 와중에 사람 간의 전염은 현재 환자의 분포 양상을 봤을 때 침이나, 혈액 등 체액이 타인의 몸에 튀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추정을 말했다. 정확한 진단명은 모르지만, 이 질환은 환자의 체액이 몸에 튀었을 때 일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공기나 비말(날아 흩어지거나 튀어 오르는 물방울)에 인한 전염보다는 전파 속도가 비교적 느렸기 때문이다. 다량의 환자가 나온 것은 밀집된 군대라는 특성 때문으로 판단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반으로 현재 출혈열이 발병한 환자 주변의 접촉자를 모두 조사할 것입니다. 조사 결과 초기 증상인 감기 증상이 있다면 잠재적 환자로 보고 격리 치료를, 없어도 접촉한 경험이 있으면 잠재적 감염자로 보고 모두 따로 격리할 예정입니다.” “……!” 린덴은 그녀가 왜 병력 통제권을 요구했는지 깨달았다. 이런 일을 해내려면 확실히 병력을 움직일 권한이 필요했다. “굉장한 규모의 일이겠군.” “네, 하지만 필요합니다.” 황태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효과는 확실하겠어.’ 이렇게 하면 원천적으로 전파를 차단할 수 있다. 혹 추가적 감염이 일어나도 외부로는 퍼지지 않는 것이다. ‘대단해. 정말로.’ 그녀가 내세운 대책은 단순해 보이지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질병의 양상에 대한 이해, 전염 경로 추정을 기반으로 기준을 세우고, 그 기준으로 역학 조사를 해 대규모 격리를 시행하는 일이니까. 현대 지구야 선진국마다 이런 통제를 하는 전문기관이 따로 있지만, 이 시대는 아니다. 오로지 그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역학 조사는 그대 혼자서는 무리일 테니, 정보부의 요원들에게 협조토록 하지.” “네, 감사합니다.” “좋아. 그런데.” 린덴은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한 가지를 물었다. “혹시 이 전염병이 공화국의 수작일 가능성은 없나?” “……!”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첩보원이 알아보길, 공화국군에는 전염병 피해자가 전혀 없다고 해서 말이야. 전장에 전염병이 돌면 보통 양군에 피해가 동시에 있게 마련인데 이상해.” 날카로운 의심이었다. 엘리제는 무겁게 대답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다만?” “역학 조사를 하며 원인을 밝혀낼 생각입니다.” “좋아, 만약 미심쩍은 정황이 있으면 나에게 바로 이야기해 줘.” 린덴은 차갑게 말을 이었다. “정말로 공화국이 연관되어 있으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전쟁이라도 지켜야 될 선이 있는 법. 정확히 밝혀내기만 할 수 있다면, 공화국에 큰 정치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무엇보다 린덴, 그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가끔은 총보다 펜이 무서울 때가 있지.’ 만약 정말로 공화국군이 이런 비인도적인 일을 획책했고, 엘리제가 정확히 증거를 잡는다면. 그때는 공화국군은 크림반도에서 명분을 잃을 것이며, 국내외의 큰 비판에 휘말릴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전장의 분위기가 제국으로 넘어올 수밖에 없다. ‘결국, 모든 일은 엘리제에게 달려 있군.’ 제국군을 구하는 것도, 진정한 원인을 알아내는 것도 모두 이 작은 소녀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린덴은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또 그녀에게 의지하게 된다. 마음만 같아서는 품 안에만 넣어두고 싶은데.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입을 열었다. “그런데 작은 희생 하나는 무엇이지?” 희생. 말을 꺼낸 황태자는 문득 그 말이 거슬렸다. 혹시? 역시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작은 희생. 그건 의료진의 피해를 의미합니다. 이 병을 해결하는 데는 불가피하게 일부의 의료진들이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 “완벽한 격리가 이루어진 후, 그 격리된 공간으로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의료진도 함께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황태자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격리 장소로…… 의사가 들어가야 한다고? 너무 위험한 것 아닌가?” 그저 지금처럼 환자를 치료하는 것과 격리 장소에 들어가는 것은 전염의 위험도가 차원이 달랐다. 격리 장소는 전염병 환자만 우글거리는 곳이니까. 전염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의사가 들어가 치료하지 않으면 그곳의 환자들은 모두 죽을 테니까요. 하지만 분명 위험한 일이기에 지원자에 한해서 들어가려고 합니다.” 황태자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지원자? 그러면 엘리제 너는? 설마 너도 들어간다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물어보려 했으나, 당연히 정해진 답이 돌아올 것 같아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기적인 소녀가 자원 안 할 리가 없었다. ‘도대체…… 이…….’ 얼마 전, 그녀가 수류탄 수술을 할 때가 떠올라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갑자기 미칠 듯이 화가 났다. 이 여자는 왜 매번 이런 식이란 말인가?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엘리제는 말을 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1월 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85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4 “그래서 조금이라도 감염 위험을 낮추기 위해 보호구 제작을 도와주였으면 합니다.” “보호구?” “네, 체액성 전염을 막는 걸 도와주는 복장으로…….” 그녀는 현대 지구의 기억을 더듬어 설명했다. 마치 우주복처럼 전신을 감싸는 보호구. 물론 이런다고 현대 지구처럼 완전히 차단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감염 확률을 크게 낮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열심히 설명하였지만 린덴은 제대로 듣지 않았다. ‘보호구? 그딴 것 만들면 되지.’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가 격리 공간으로 들어가느냐, 안 들어가느냐, 그것만이 중요했다. 그녀가 들어가, 다시 위험에 노출되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단호히 말했다. “그래, 네가 말하는 것들은 모두 들어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조건이 있다.” “무엇입니까?” “네가 격리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허락지 않겠다. 절대로.” “……!”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테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어. 이건 총사령관이자 황태자로서의 명령이다.”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그걸 몰라서 물어보는 건가! 네가 그곳에 들어가 병에라도 걸리면, 그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소녀는 그런 그의 마음도 모르고 딱딱하게 말했다. “저는 이 전염병 대책의 책임자입니다. 그런 제가 격리 공간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그래도 안 돼.” “그리고 아시지 않습니까? 격리 대상자들을 정확히 분류하고 치료하려면 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대 안 된다고!” “……?!” 갑작스러운 고성! 린덴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고, 엘리제는 흠칫 놀랐다. 황태자는 불길처럼 타오르는 금안으로 말했다. “절대 안 돼. 네가 격리 공간에 들어간다고? 그 위험한 곳에? 웃기지 마!” “…….” 엘리제는 그 분노와 격정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요?’ 그래, 그가 왜 이러는지 안다. 어떻게 모르겠는가? 저렇게 선명한 감정을 내뱉고 있는데. 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외면하고 싶었다. 그에게 다시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전하.” 엘리제는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전하께서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으나, 이건 공적인 일입니다. 전하의 개인적인 이유로 필요한 일을 막지 말아주십시오.” “하, 공적인 일이라고?”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를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린덴은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입니다.” “……싫다고.” “네?” “정말 모르겠나? 싫다고! 네가 또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게! 혹시라도 네가 잘못되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 이기적인!” 울컥. 엘리제는 다시 가슴이 울렁했다. 그의 말을, 그 걱정을 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머리가 어지러우며 현기증이 났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뱉었다. “전하의 그런 공적이지 못한 말씀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뭐?”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 아. 그녀는 말을 내뱉은 순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덴의 눈이 고통으로 물들었던 것이다. 도저히 외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저리게.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파하는 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그녀도 아팠다. “그렇군. 거북하군.” 씁쓸한 목소리. “미안하다.” “……!” 그녀는 뭐라 말하려 했으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그대로 이루어주겠다.” “전하…….” “그러면 이만 나가보도록. 오늘 수고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물며, 그를 바라봤다. 뭐라고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나,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가슴만 울렁했다. 결국, 뒤돌아서 나갈 때 그가 말했다. “엘리제” “…….” “하나만 약속해 주겠는가?” 엘리제는 그를 돌아봤다. 잔인한 말을 들은 그의 눈에는 여전히 아픔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프지 말아주겠는가? 제발. 부탁이야.” “……!”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을 괴롭혔다. 손끝이 떨렸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 그날 밤, 사령관저로 돌아온 린덴은 술을 마셨다. “……빌어먹을.” 그는 평소 술을 즐기진 않는다. 특히 총사인 자신이 전장에서 술이라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너무 아팠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거북하단다, 내가. 난 그녀를 이렇게나 바라는데. “하아.” 얼마나 더 이렇게 아파야 하는 걸까? 아니, 안 아플 날이 오기나 할까? 그녀가 날 보며 웃어주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젠장.” 더 빌어먹을 일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가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보고 싶었다. 하얀 얼굴이, 푸른 눈동자가. 웃는 얼굴도, 환자에 열중하는 얼굴도, 인상을 찌푸리는 얼굴도, 모두. 모두 보고 싶었다. 같이 있고 싶었다. “하아.” 그런데 그때였다. 똑. 똑. “들어와도 되겠습니까, 전하?” “들어오게.” 린덴은 술잔을 내려놓았다. 몇 잔 마시긴 했으나, 원체 술이 강한 편이기에 흔들림은 전혀 없었다. “충성! 보급처의 로든 중령입니다.” “그래, 어서 오게. 지시사항은 잘 전해 들었나?” “네, 전하! 빠짐없이 면밀히 작성에 들어갔습니다.” 지시사항. 그건 엘리제가 부탁한 의료진을 보호할 보호구를 제작하는 일이었다. “전하께서 지시한 보호구는 특별한 문제 없이 곧바로 제작돼 보급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 때문에 저를……?” 로든 중령은 총사령관이 왜 따로 자신을 불렀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잘하라고.” “네?” “보호구 완벽하게 만들라고.” “……!” “그 어떤 의료진도 감염되지 않도록 제국군의 모든 기술력을 집약시켜 최선을 다해 만들어.” 그러며 린덴은 무겁게 말했다. “만약 보호구에 문제가 있어, 그로 인해 한 명이라도 전염된다면 너에게 책임을 물겠다.” “……!” 로든 중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총사령관의 말뜻을 단번에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충성!” 그러고 로든 중령이 돌아가고 홀로 남은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도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닦달한다고 해서 전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저 불안하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녀가 혹시라도 병에 걸려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엘리제.’ 그는 탁자에 내려놓은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자신에게, 아니, ‘론’에게 준 징표. ‘신이여.’ 린덴은 당시 대부분 브리티아 인들이 그렇듯, 신의 존재를 믿긴 믿었다. 하지만 좋아하진 않았다.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날’ 모든 것을 잃었던 자신이 어떻게 신을 좋아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성서의 교리는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제, 그녀가 제발 무사하기를. 이 전염병 속에서도 아무런 탈 없기를.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렇게 그는 목걸이 옆의 문구를 간절히 읽었다. *** 이후, 엘리제는 전격적으로 조처에 나섰다. 일단 정보부의 요원들과 함께 접촉력을 조사했다. 서대륙을 통틀어 군대에서 처음으로 행해진 역학조사였다. 그러고 조금이라도 감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은 모조리 따로 격리했다. 기준은 그녀가 정한 프로토콜에 따랐다. 대상자는 많았다. 일단 검기사단의 단원들 전부. 그리고 중앙군의 부대 다수가 산발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런 격리는 무리입니다.” “이렇게 많은 인원을 격리하면 적의 공격에 대비할 수가 없습니다.“ 몇몇 이가 반대를 표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강력히 밀어붙였다. 이런 전염병 통제는 어설프게 하느니, 안 하느니만 못하다.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마치 댐에 난 구멍처럼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어질 것이고 그건 아웃브레이크, 대유행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끝이었다. 전쟁이 문제가 아니었다. 수만, 어쩌면 십만이 넘는 사람이 죽을 것이다. “어쩔 수가 없어요. 지금은 일단 제 지시에 따라주세요.” “하지만…….” “그리고 지금은 공화국군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에요.” 그렇다고 엘리제가 앞뒤 사정 안 가리고 무작정 격리를 강행한 것은 아니었다. ‘공화국군은 기다릴 거야. 우리 군이 스스로 무너질 때까지. 그 전에 괜히 대규모로 공격했다가 오히려 전염병만 옮으면 더 손해니까.’ 그리고 다른 면도 생각했다. ‘차라리 군의 운영 측면에서도 잠재적으로 감염 가능성 있는 자들은 빼는 것이 나아. 전염병의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 정확한 판단이었다. 상당한 병력을 격리를 위해 빼내야 했지만, 잠재적으로 불안한 인원들을 제외하니, 오히려 남은 병력의 운영이 자유로워졌다. 전염병의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탓이었다. 사령부의 많은 사람이 그런 엘리제의 전격적 조처에 감탄하고 환영했다. “역시 데임 클로랜스. 론도 대역병을 3일 만에 해결한 영웅답군요.” “과연 이렇게 하면, 전염병을 확실히 차단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대로 군이 괴멸하나 걱정했었는데, 데임 클로랜스 덕분에 한시름 놓았습니다.” “이거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셨으면 어쩔 뻔했소이까?”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 엘리제를 감탄하며 바라봤다. 하지만 사람들의 감탄과 다르게, 엘리제의 진정한 전쟁은 지금부터였다. 격리 공간에 환자들을 따로 분류 후, 치료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까지 환자가 몇 명이죠?” “총 750명입니다. 야전병원에서 치료 중입니다.” “격리 인원은요?” “일만 명에 가깝습니다. 따로 격리 공간을 마련해 관리 중이고, 만약 중간에 초기 증상인 감기가 생기면 곧바로 병원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엘리제는 공간을 두 개로 나누었다. 첫째는 실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는 야전병원. 이곳에는 엘리제를 비롯한 자원 의사들이 머물며 치료를 했다. 두 번째는 환자와 접촉한 인원을 격리하는 공간. 이곳에서 머물다 의심 증상이 생기면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다. 두 공간 모두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전염병이 외부로 퍼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조치다. 기존의 야전병원은 새로운 전선인 프라바 근처로 옮겼다. 전선이 심페폴 근처로 남하함에 따라 애초에 병원 이전을 고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질은 없었다. ‘이제 군 전체에 전염병이 퍼질 위험은 크게 줄었어.’ 일단 엘리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악의 상황, 일단 군 전체에 전염병이 퍼지는 대재앙은 막았다. 위험 요소가 있는 인원을 모두 격리한 덕분이었다. 만약 조사에 구멍이 있어 산발적으로 환자가 생기면, 지체없이 격리 공간으로 이송하고 접촉자를 추가로 격리했다. 그녀의 이런 조치들 덕에 전염병은 더 이상 제국군 내부에서 퍼지지 않게 되었다. ‘다행이야.’ 사실 이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 최소 수만이 넘는 병력이 몰살당할 위기에서 구해낸 것이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만족하지 않았다. ‘앞으로 할 일은 이미 발생한 환자들을 치료하는 일이야.’ 현재 전염병에 걸린 사람은 750명. 앞으로 잠복기가 지나 발병할 인원까지 고려하면 최소 1,000명 이상이 위험했다. 그들을 살려야 했다. 그렇게 엘리제는 다른 자원 의사들과 함께 환자를 치료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대 지구에서도 출혈열은 무서운 병이다. 하물며 이 시대에는 출혈성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기술이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이었다. 체액이 튀면 의사들도 전염될 위험성이 있었으니까. 보호구를 입었다고 해도, 전염을 백 프로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엘리제를 비롯한 여러 명의 자원 의사는 자신들이 전염될 것을 각오하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진료했다. 물론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묵묵히 환자를 위하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들이 의사(醫師)이기 때문에. 그래, 의사이니까. 환자의 생명을 살릴 권리와 책임이 있는 의사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86 3-6 전염병 ========================================================================= 6장 전염병 - 5 그래도 한 가지 고무적인 일이 있었다. 전염병 환자들의 사망률이 꺾이기 시작했다. 50%를 넘어 60~70%에 육박하던 사망률이 거의 10%대까지 떨어진 것이다! 이는 엘리제가 급하게 새로 도입한 치료 방법 덕분이었다. “아무리 해도 살릴 수가 없습니다. 방법이 없어요.” 당시 의사들은 치료하면서도 절망감에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위장관의 출혈은 위험하지 않아요. 심하게 피가 나는 것도 아니고, 수액 치료를 하면 보통 좋아지니까요. 하지만 폐의 출혈이 문제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모든 환자가 폐출혈로 사망하고 있어요.” 폐출혈! 당시로는 의사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이었다. 몸 깊이 있는 폐에 접근할 수가 없었으니까. “폐에서 나는 출혈을 도저히 지혈할 수가 없어요.” “이대로 손 놓고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지. 하아…….” 그렇게 의사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고민하던 엘리제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출혈을 멈추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데임? 피가 나는데 지혈을 할 필요가 없다니?” “지금 폐출혈로 사망하는 환자들의 경과를 자세히 보면, 과다출혈로 죽는 것이 아니에요.” “그러면……?” 엘리제는 자신의 분석 결과를 말했다. “폐출혈로 폐 안에 피가 나다 보니, 마치 물에 빠진 것처럼 산소 교환이 되지 않아 사망하고 있어요. 폐에 물이 차서 죽는 익사자처럼요.” “……!” 그렇다. 출혈성 전염병이지만, 사망에 이르는 원인은 과다 출혈이 아니었다. 바로 폐에 피가 차서, 즉, 물이 찬 것처럼 산소 교환이 안 되어 저산소증으로 죽었던 것이다. 물에 빠진 익사자와 유사했다. “그러면 해결책은?” “산소 치료예요.” 산소 치료(Oxygen therapy)! 인위적으로 고농도의 산소를 공급해 주는 것이다. 이러면 폐에 피가 찬 상태에서도 저산소증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데임, 산소를 어떻게 공급한단 말입니까?” 한 의사가 물었다. 산소 치료는 현대 지구에서는 굉장히 흔하게 사용하지만, 이 시대에는 익숙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산소를 공급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동용 산소 방(챔버, chamber)를 사용하면 돼.’ 이동용 산소 방(챔버)! 마차나 기차 등에 실어서 이동하는 산소 공급 방이었다. 휴대용 산소까지 개발된 현대 지구와 비교하면 조악하기 그지없는 산소 치료 시설. 하지만 이 당시에는 산소를 공급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내가 알기로 현재 서대륙에는 이동용 산소 챔버가 10개 정도 있어. 브리티아 섬에 있는 것을 가져오기에는 바다를 건너야 하니 시간이 너무 걸리고, 근처에서 구해야 하는데.’ 적국인 공화국에서 빌릴 수는 없었다. 가까우면서도, 이동용 산소 챔버가 있는 국가. ‘그나마 프러시엔 공국이 가장 가까워. 빌릴 수 있을까? 아니, 무조건 빌려야 해. 안 그러면 이 환자들은 다 죽어.’ 엘리제는 어떻게 하면 프러시엔 공국의 챔버를 빌릴 수 있을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데임 클로랜스에게. 감사의 선물을.> 이런 메시지와 함께 이동용 챔버가 화물 기차에 실려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발신자는 놀랍게도 귀족파의 수장 차일드 가문이었다. “……어떻게?” 놀란 엘리제가 물었다. 대리인이 공손히 답했다. “알버트 공자를 구해준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데임. 지난번 위험을 무릅쓰고 공자를 구해주신 일. 후작 각하를 비롯한 모든 이가 크게 감동해하고 있습니다.” “……!” “물론 고작 이런 걸로 은혜를 다 갚을 수는 없겠지만, 그냥 사소한 선물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차일드 가문은 국제 은행 재벌의 수장이었다. 프러시엔 중앙은행의 소유자인 마르크 백작이 이들의 방계였으므로, 이동용 산소 챔버를 구하는 일쯤이야 식은 죽 먹기였던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마음껏 쓰시고 편할 때 마르크 백작께 돌려주십시오. 아, 만약 원하시면 그냥 클로랜스 후작가로 가져가도 상관은 없습니다.” 대리인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름 농담이라 한 말 같았다. 세계 최고의 재벌가다운 농담이었다. 어쨌든 덕분에 전염병 치료에 활력이 붙었다. 폐출혈로 인한 저산소증이 산소 치료를 통해 해결되었고, 기타 여러 문제는 엘리제를 비롯한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 달려들었다. 그 결과가 사망률의 급감! 한때 70%에 육박했던 사망률이 10%대까지 떨어졌다. 거의 최초의 감염자, 검제 3황자도 좋아졌고, 제이도 병석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제국군을 죽음의 마수로 몰아넣었던 정체불명의 전염병은 점차 해결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모두 엘리제와 죽음을 각오한 여러 의사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들의 노력과 헌신은 브리티아 제국 전체로 널리 퍼졌다. [예비 황태자비, 데임 클로랜스! 죽음의 전염병을 막아내!] [죽음을 각오한 의사들, 제국군을 구해내다!] 원정군의 전염병 사건은 제국 본토에서도 초유의 관심사였다. 잘못하면 수십만에 달하는 젊은 장병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시민이 그들을, 엘리제와 의사들을 환호했다. “역시 우리의 황태자비!” “데임 클로랜스와 고생한 의사들을 위해 건배!” 특히 엘리제는 벌써 몇 번째 혁혁한 공을 세웠는지 모를 지경이다. 코프스크 회전부터 이번 일까지. 그녀가 아니었다면, 지금까지 제국군은 어떤 피해를 입었을지 모른다. 여린 소녀의 몸으로 참가해 그 어떤 장군들보다 큰 공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정말 대단하군, 대단해.” 론도의 황실에서 황제 민체스터가 혀를 찼다. “이거 이러다 크림원정 1등 훈장을 자네 딸에게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과찬이십니다.” 엘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과찬은. 클로랜스 영애가 아니었으면 우리 제국군이 어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해.” 확실히 그랬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제국군은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쩌면 패전으로까지 갔을지도 몰랐다. ‘승전해도 상처가 컸겠지.’ 하지만 딸이 큰 공을 세웠지만, 엘 후작은 답답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난 네가 공 같은 것은 하나도 안 세워도 좋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왔으면 좋겠구나.’ 날마다 그녀가 걱정돼 잠이 들 수가 없었다. 밥은 잘 먹는지, 작은 몸으로 아프진 않은지, 혹시나 다치진 않았는지. 너무나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고집을 피웠어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내지 않는 건데.’ 엘 후작. 제국 전역에서 존경받는 명재상이지만, 그에겐 제국군이나 전쟁의 승패보다도 딸이 훨씬 더 소중했다.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 전염병은 그렇게 해결 단계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제 잠복기도 거의 끝나가니, 더 큰 피해는 없겠구나.’ 지금까지 총 사망자는 478명. 그녀가 황태자에게 공언한 대로 500명이 넘지 않았다. 물론 이것도 가슴 아픈 숫자였지만, 질병의 전염력이나 치명도를 고려하면 대단한 결과였다. 엘리제가 고안한 보호구 덕분인지, 의료진의 피해도 거의 없었다. 황태자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그녀도 아무 탈 없었고.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야. 한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남은 문제. 그것은 바로 전염병의 원인이었다! ‘뭔가 이상해. 정말 자연적으로 유행한 전염병일까?’ 처음에는 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설마 사막의 전갈이라도 이런 악독한 수를 쓰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료를 거듭할수록, 역학 조사를 할수록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의심을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 그건 바로 병의 정체였다. ‘이 병은 1년 전, 검은 대륙의 중북부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이야.’ 치료 중, 그녀는 론도의 황궁 어의 밴 자작에게 자문을 구해 병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다. 병의 진단명은 ‘전염성 폐 출혈열’! 1년 전, 검은 대륙 중북부를 휩쓸었던 전염병이었다! ‘왜 검은 대륙에서 유행하던 전염병이 갑자기 크림반도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검은 대륙의 병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크림반도에 나타날 리가 없지 않은가? 그것도 제국군에만. ‘정말 설마……?’ 그리고 그녀는 질병의 경로를 밝히는 역학 조사를 하던 중, 섬뜩한 단서를 발견했다. 바로 공화국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검기사단의 단원, 맥과 잭이었다. *** “포로로 있을 때, 검은 대륙에서 온 무어인의 시중을 받았다고요?” “네, 데임.” 맥과 잭은 병석에 누워 엘리제에게 답했다. 전염병을 심하게 앓은 그들은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몸이 크게 쇠약해진 상태다. “그들의 증상이 우리 군에 돈 전염병과 유사했습니다. 계속 기침을 했었고, 한 여인은 종종 코피를 흘렸었어요.” “……!” 엘리제는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혹시 그들 말고 군 내에서 전염병 환자를 접촉한 적이 있나요?”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가 아프기 시작한 후, 3황자께서도 발병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검기사단의 단원들도 저희와 접촉 후 전염병에 걸렸고요.” 엘리제는 역학 조사 결과를 다시 한 번 검토했다. 확실히 이들은 그 어떤 환자와도 접촉한 경험이 없다. 포로로 있을 때 시중을 받은 무어인을 제외하고는. ‘역학 조사 결과 이 전염병이 최초로 발생한 부대는 검기사단이야. 그렇다면 이들 맥과 잭 경이 최초 발병자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데.’ 한 가지 끔찍한 가설이 떠올랐다. 이들이 검은 대륙에 가서 병에 옮아 왔을 리는 당연히 없다. 그렇다면 그 무어인들이 이들에게 병을 옮긴 것인데……. ‘설마…… 일부러……?’ 그녀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막의 전갈!’ 그녀는 이 사실을 곧바로 검기사단의 단장인 검제 미하일에게 알렸다. 그도 병을 심하게 앓았지만, 서대륙 최강검답게 지금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상태다. “그게 정말이야, 리제?”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확인해 봐야 한다 생각해요.” 미하일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굳었다. 이번 전염병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검기사단이었다. 300명의 단원 중 100여 명이 감염되고, 30명이 넘게 사망했던 것이다. 오러 나이츠의 가치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아닐 수 없었다. “……알겠어.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밀.” “리제는 리제의 일을 해. 이건 내가 해결할 테니.” 미하일은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기사단의 단원들은 모두 3황자 미하일의 친구이자 형제 같은 이들이었다. 그런 소중한 이들이 30명이 넘게 죽은 것이다. “이 일이 정말 사막의 전갈 때문에 일어난 일이면.” 그는 말했다. “나 검제의 이름으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어.” *** 미하일이 먼저 향한 곳은 총사령관 린덴의 지휘실이었다. 업무를 보던 린덴이 힐끗 눈만 들어 그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지?” 피를 나눈 형제건만 반가운 인사는 없었다. 그럴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지금은 전쟁 중이라 서로 발톱을 감추고 있을 뿐, 종전 후 론도로 돌아가면 그들은 서로의 목숨을 건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황위를 향한 싸움을. “사막의 전갈 때문에 왔어, 형님.” “그게 무슨 말이지?” “이번 전염병.” 짧은 말이었지만, 린덴은 알아들었다. 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형도 의심은 하고 있었지? 사막의 전갈과 이번 전염병 말이야.” 당연한 이야기였다. 이번 전염병은 여러모로 수상쩍은 면이 많았다. 적의 수작이 의심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뚜렷한 근거가 없는 의심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근거가 필요했다. “의심할 근거를 찾아냈나?” “아아, 리제 덕분에 말이야.” 그런데 그 와중에 린덴이 짧게 말을 끊었다. “리제가 아니라, 형수님이라고 불러라.” “뭐?” “그녀는 네 친구가 아니다. 황태자비가 될 소녀니, 공손하게 대해.” 그 말에 미하일은 입술을 비틀었다. 이 와중에 진짜. ============================ 작품 후기 ============================ 내일 1월 3일 09:07분에 올라갑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87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1 3황자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황태자비가 될지, 안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 게임이 끝나기 전에는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어쨌든 그 마음은 감추고 3황자는 말했다. “리제가 이 전염병이 공화국 때문에 퍼진 거란 잠정적 근거를 찾았어.” 그는 엘리제가 조사한 결과를 말해주었다. “어때?” “그렇군.”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감탄했다. ‘확실히 이 정도면 엮어 넣을 수는 있겠군.’ 공화국군의 포로로 잡혀 있다가 병에 걸린 무어인의 시중을 받고 전염병에 걸렸다. 그리고 곧바로 포로 교환을 통해 제국군의 진영으로 보내졌다. 이 정도면 거의 확실했다. 적당히 언론사를 통해 꾸며 발표하면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루이 니콜라스와 공화국은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반도에서의 명분을 상당수 잃을 것이다. ‘또 엘리제, 그녀의 도움을 받는군. 대단해.’ 린덴은 그녀 생각을 하자 또 가슴이 시큰 아파왔다. 그날의 다툼 이후,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보고 싶었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이런 아픈 말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아무리 아파도 보고 싶었다. 빌어먹을 일이었다. “하지만 조금 아쉽군. 조금만 더 명확한 근거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공화국 놈들이 그 무어인들이 병에 안 걸렸었다 둘러댈 수도 있으니 말이야.” 엘리제가 찾아낸 근거도 훌륭하지만, 좀 더 직접적인 증거가 있으면 확실할 것이다. 그래서 3황자가 말했다. “그건 내가 해결하겠어.” “어떻게?” “그 무어인들의 시신을 구해오면 되겠지. 구해와 부검을 하면 되잖아.” “……!” 린덴은 흠칫 놀라 미하일을 바라봤다. 그렇다. 시체를 구해와 부검을 통해 질병에 걸려 있었단 사실을 확인해내면 빼도 박도 못하게 된다. “공화국의 포로로 있었던 맥과 잭을 감시했던 공화국의 병사를 매수해 알아냈어. 당시 시중을 들었던 무어인들이 며칠 안 돼 모두 사망했다고. 루이 니콜라스가 시체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명령해 교외의 별장에 그대로 버려져 있다고 해. 별장도 같이 버려진 채 방치 상태고.” “그러면?” “검기사단으로 그곳을 들이닥쳐 무어인들의 주검을 구해오겠어.” 린덴은 가만히 동생을 바라봤다. “위험할 텐데?” 아무리 방치된 곳이라 해도, 적의 근거지 인근이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괜찮아. 알잖아? 나 검제야.” “……!” 짧지만 강한 의미가 담긴 말. 그렇다. 그는 검제(劍帝). 전장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가만히 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뭐, 개인적으로는 평화주의자라 ‘복수’는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야.”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뼈가 있는 말. “그래도 사막의 전갈. 그놈은 얄밉네. 한 방 먹여줘야겠어.” “…….” “어쨌든 그거 말하러 왔어. 출정 전 총사인 형님한테 신고해야 하니까 말이야. 충성! 사령부 직속, 검기사단과 중장 미하일. 심페폴 인근의 교외로 작전 수행하러 떠나겠습니다. 이상 보고 끝.” 미하일은 장난스럽게 보고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러면 금방 다녀올게.” “……미하일.” “왜?” 린덴은 짧게 말했다. “조심해라.” “……!” 그 말에 미하일의 표정이 잠시 사라졌다. “그거 나한테 한 말 맞아?” “그래.” “왜? 농담이면 별로 재미없는데.” 미하일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하일. 난 너를 싫어하진 않아.” “하지만 우린 적이지. 결코, 같이 살아갈 수 없는. 누군가 죽어야 하는.” 그건 조금 슬픈 말이었다. “…….” “나도 형님을 싫어하지 않아. 아니, 좋아해. 형님이 어릴 적 얼마나 귀여웠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 어린 시절, 큰형님인 지펠과 둘째인 린덴, 그리고 자신. 마지막으로 누이까지. 이 4명이 황궁 장미 정원에서 뛰놀던 시절을 미하일은 잊을 수가 없다. 아릿한 기억이었다. 물론 린덴은 큰형님인 지펠이 자꾸 괴롭혀 싫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미하일에겐 참 그리운 추억이었다.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지금은 공화국을 앞두고 휴전 중이지만, 우린 분명한 적이야. 물론 만약 내가 이길 경우, 난 형님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반대로 형님이 이길 경우, 형님은 날 죽이겠지. 안 그래?” “난 널 죽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안 죽일 거야?”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했다. “네가 ‘내가 하려는 일’을 막지 않는다면.”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그건 날 무조건 죽이겠다는 말이군.” 미하일은 더 이상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불필요한 시간만 소모할 뿐이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의외의 이야기를 했다. “미하일. 황위를 포기할 생각은 없느냐? 네가 이 정쟁에서 물러난다면 너에게 로마노프령을 주겠다. 그저 이름뿐인 공왕(公王)이 아닌, 너의 독립왕국으로 주겠어. 너의 자손들은 서대륙 북단 로마노프령의 오롯한 왕이 될 것이다.” “……!” 엄청난 제안이었다. 동쪽으로는 얼음으로 덮인 극지에 둘러싸이긴 했지만, 로마노프령은 오히려 브리티아 섬 본토보다 넓고 알짜배기인 영토였다. 웬만한 열강들보다 로마노프령 자체의 저력이 더 클 정도. 그런 곳을 독립국으로 주겠다니? 하지만 미하일은 반문했다. “내가 황위를 포기하면? 형님도 하려는 일 포기할 거야?” 린덴은 탄식했다. “네가 내 입장이라면…… 너는 포기할 수 있겠느냐? 그날, 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그 목소리에는 뼈저린 고통이 담겨 있어,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미하일도 안다. 린덴이 결코 그 염원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미하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둘 모두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싸움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모두가 옳았다. 아니, 모두가 잘못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각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싸움을 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을게.” “뭐지?” “2년 전, 큰형님 지펠. 형님이 죽인 거야?” “지펠을 죽인 것은 사막의 전갈과 공화국군이다.” “그래서. 죽였어?” 린덴은 가만히 미하일을 바라보다 답했다. “난 그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 원하지 않았군.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만 가볼게.” “그래.” 그렇게 두 형제는 대화 후 헤어졌다. 길거리의 먼지보다도 가치 없는 대화였다. *** 미하일은 곧바로 검기사단을 움직였다. 추악한 계획에 동료를 잃은 기사단의 분노는 컸다. 마치 범이 토끼 무리를 덮치듯 몰아쳤다. 특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검제의 검은 공포 그 자체였다. 공화국군은, 그리고 검기사단의 기사들은 그가 왜 동방에서 오존(五尊), 검제(劍帝)란 존칭을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공화국군의 얄팍하게 쳐진 방어선을 뚫고, 곧바로 별장에 도착한 그들은 문제의 무어인들의 시체를 수거했다. 물론 전염을 우려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겹겹이 안전장치로 싸서 운반했다. 그들의 가공한 급습에 혼이 빠진, 별장 근방의 공화국 수비대는 그들을 감히 쫓을 생각도 못했다. 어차피 말을 타고 쫓아가 봤자 잡을 수도 없었겠지만 말이다. “이 무어인들에게서 전염병이 옮은 것이 분명합니다.” 특별히 로마노프령에서 초빙받아 제국 군진에 머물고 있던 부검의는 무어인들의 주검을 보고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이미 부패가 시작된 지 한참 된 시신이지만, 전신 여기저기에 출혈 자국이 흥건했으니까. 특히 부검 결과 폐에는 피가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추악한!” “아무리 전쟁이라도 이런 짓을 하다니!” 제국군은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지켜야 할 선이 있는 법이다. 현대로 갈수록 전쟁이 무자비해지긴 하지만, 아직은 전장에서 여성과 민간인에 대한 존중과 기사도가 남아 있는 시대였다. “공화국군을 무찔러라!!” “적들을 용서하지 말아라!!” 제국군 모두가 공화국군에 대한 적의로 불타올랐고, 이는 사기진작으로 이어졌다. 반대로 공화국군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다. 공화국의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렸다. “니콜라스 각하가 그런 비인도적인 계책을 썼다고? 아니야. 믿을 수 없어. 모두 제국군, 공제(空帝)의 수작 아니야?” “하지만…… 제국군에서 증거를 들이밀던데.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아.” 자유와 평등을 기치로 삼는 공화국이다. 공화국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와 평등이란 진보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그리고 그 자유와 평등에는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이 포함된다. 그런데 그 자유와 평등을 위해 싸우는 자신들의 군대가 아무리 적이라지만, 전염병을 퍼뜨리는 추악한 짓을 하다니! 크게 사기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래로부터 내려온 진리처럼 사기가 떨어진 군대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공화국군은 분노에 찬 제국군의 총검 돌격을 당해내지 못했고, 여기저기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만족할 생각은 없지.’ 린덴은 차갑게 생각했다. 루이 니콜라스, 그놈 때문에 엘리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전염병을 치료해야 했다. 다행히 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그 시간 동안 그는 미칠 만큼 그녀를 걱정해야 했다. 그건 정말 끔찍한 고통이었다. 하루하루, 그녀가 잘못될까 봐 타는 듯한 시간을 보내야 했으니까. 그는 자신에게 그런 끔찍한 고통을 안겨준 니콜라스를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전쟁은 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란 걸 보여주마.’ 확실히 그는 사막의 전갈보다는 기기묘묘한 책략에서는 뒤처졌다. 하지만 사막의 전갈이 전쟁만 아는 위인이라면, 그는 황제의 권한을 위임받아 제국을 운영하는 거인(巨人)이었다. 그는 전장에서 전방위적으로 공화국군을 압박하면서, 동시에 정략적으로 사막의 전갈을 흔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는 언론.’ 제국의 황태자인 그가 움직일 수 있는 언론은 수도 없었다. 브리티아 황실은 제국의 언론사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언론사에도 어느 정도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비인도적인 핫이슈는 굳이 뒷공작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각국의 언론사에 객관적인 정보만 가져다줘도 신나서 기사를 써댔다. [공화국의 사막의 전갈. 악마의 계책을 사용.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어.] [앞에서는 정의를 수호하는 공화국. 뒤에서는 전염병을 제국군에 퍼뜨리는 만행을 저지르다.] [자유와 평등은 과연 누구를 위한 기치인가? 과연 공화국군은 자유와 평등을 수호한다 말할 자격이 있는가?] 이런 유의 기사가 서대륙 전체에 퍼졌다. 특히 공화국의 언론은 벌집처럼 뒤집어졌다. 공화국의 수도, 파리스의 시민들은 신문 기사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웅성거렸다. “아니, 이게 정말이야? 우리 공화국군이 이랬다고?” “거짓말 아니야?” 아무리 루이의 아버지, 시몬 니콜라스가 30년간 철혈의 독재를 펼치고 있다지만, 프랑소엔은 기본적으로 ‘공화국’이다. 신분의 차별이 없고 만인이 평등한. 따라서 정치인부터 뜻있는 지식인, 자유를 추구하는 일반 시민들까지 니콜라스 가문의 독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는 이는 수도 없이 많았고, 이들이 불처럼 일어났다. 더구나 이번 비인도적인 계책 말고도, 최근 패전을 거듭하고 있는 사막의 전갈 아닌가? “루이 니콜라스는 지금까지의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나라!” “국제 전쟁법을 위반한 루이 니콜라스는 당장 본국으로 돌아와 재판을 받아라!” 루이에 대한 반대 성명이 강하게 터졌다. 문제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88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2 애초에 공화국에는 이번 크림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가 많았다. 크림반도 인근 흑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제국군을 상대하기 위해 너무 큰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40만. 아무리 공화국이라도 허리가 휘청할 병력이었다. “정부는 크림반도에서 철수를 검토하라!” “전쟁만 일삼는 니콜라스 일당은 물러나라!” 그렇게 비둘기파들도 거리로 나와 당국과 루이 니콜라스를 규탄했다. 원래 프랑소엔인들은 기질이 불같은 면이 있었다. 한번 팔을 걷고 일어나자, 반대파의 기세가 불을 타오르듯 타올랐다. 모두 린덴이 의도한 대로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비공식적 라인을 통해 공화국의 정치인들도 움직였다. 모두 니콜라스 부자의 반대파로 브리티아와는 정치적 목적에 따라 비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크림반도에서 연달아 실패하고 있는 루이 니콜라스를 경질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린덴의 공작들은 오래지 않아 루이 니콜라스에게 직격으로 내리꽂혔다. “빌어먹을! 제기랄!” 와장창! 쨍그랑! 루이 니콜라스는 닥치는 대로 집무실의 도구를 집어 던졌다. 거울이 깨지고 유리잔이 박살 나며 와인 병이 붉은 액체를 터뜨렸다. 항상 여유가 있던 평소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 그런 그의 옆에는 갈가리 찢어진 신문들이 있었다.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루이 니콜라스, 이번에도 또 패해.] [하늘이 벌을 주는가? 연전연패의 수렁에 빠진 루이 니콜라스.] 제국은 물론, 어느 나라나 할 것 없이 이런 기사들이 도배되고 있었다. 공화국도 마찬가지다. 틀린 기사는 아니다. 전염병 계책이 실패한 후 공화국군은 연전연패 중이니까. 애초에 공화국군은 세계 최강인 제국군보다 병력의 질에서 다소 떨어졌다. 그런 판에 기세까지 밀리니, 열세를 뒤집을 수가 없었다. “제기랄!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루이 니콜라스는 분노에 시뻘게진 눈으로 외쳤다. 그런 그의 얼굴 한편에는 기다랗고 흉측한 흉터가 자리하고 있었다. 코프스프 회전 시 눈가에 입었던 상처가 그사이 곪아 농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탓이었다. ‘술을 많이 마셔, 상처가 덧난 것 같습니다. 당분간 와인은 자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화국의 군의(軍醫)가 평소 시도 때도 없이 와인을 즐기는 그에게 충고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나는데 분통을 터뜨리는 충고였고, 루이는 그 의사를 당장 군영에서 쫓아내 버렸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기랄!” 사막의 전갈은 갑자기 수술받은 부위가 아파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수술을 받았음에도 염증이 가라앉지 않아, 그의 얼굴은 한편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붓기와 상처 때문에 그의 얼굴에선 이전의 그림 같은 외모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특히 커다란 수술 자국은 염증이 사라진 뒤에도 일평생 흉측하게 남으리라. ‘이게 다 클로랜스, 그년 때문이다.’ 루이 니콜라스는 이를 갈았다. 그래, 모두 다 그년 때문이었다. 처음 몽쉘 왕국을 이용한 계략이 실패한 것도, 코프스크 대회전 때 대패를 한 것도, 전염병 계책이 아무런 효과를 못 본 것도, 그리고 오히려 계책이 발각돼 정치적 역공을 당한 것도, 그래서 이렇게 연전연패하고 있는 것도, 얼굴에 이렇게 큰 흉을 얻은 것도. 모두 다 그년 때문이었다. 실제로 일부에선 그녀를 이렇게 부르는 이도 있었다. 전갈 사냥꾼. 그의 계책을 연달아 무산시켜 생긴 별명으로, 루이에겐 엄청난 치욕을 주는 별명이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절대로.’ 처음의 호기심은 이 사라졌다. 이제 그 소녀를 바라보는 감정은 단 하나. 복수심. 반드시 사로잡아 이 치욕을 갚아주리라. 차라리 죽여 달라 빌게 만들 것이다. ‘머지않아. 곧.’ 그런 그의 마음속에 또다시 악마의 계책이 피어올랐다. 사막의 전갈이 혹독한 마음으로 짜낸. 이번이야말로, 클로랜스 그 계집도 빠져나갈 수 없을 계책이었다. *** 프라바 인근의 제국군 사령부.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제국군의 사령부는 코프스크에서 남쪽의 프라바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린덴을 비롯한 장군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좋군요. 이대로라면 곧 심페폴을 탈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두 황태자 전하와 예비 황태자비 덕분입니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공화국과 다르게 회의 분위기는 좋았다. 연전연승 중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때, 린덴이 차분히 물었다. “사막의 전갈은 특별한 움직임은 없나?” 황태자의 물음에 부총사령관 맥가일 원수는 시원하게 답했다. “네, 심페폴에 틀어박혀 꼼짝도 못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전갈이라도 이런 상황에서 함부로 더 수작을 부리긴 어렵겠죠.” 요즘은 기사가 랜스 돌격하는 시대가 아니다. 서대륙의 서쪽 끝 스페냐 왕국에서 북쪽 끝 로마노프령까지 기차가 다니고, 전장의 참사가 곧바로 사진에 실려 본국에 기사로 발표되는 시대. 이런 시대에는 아무리 원정 나와 있는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도 자국의 여론을 신경 안 쓸 수가 없다. 잘못하면 본국에 보고돼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으니까. 따라서 사막의 전갈의 움직임도 소심해질 수밖에 없다. 한 번이라도 더 실패하면 그때는 정말 경질될 테니까. “이대로 여세를 몰아 심페폴을 함락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승전이 눈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전하.” “모두 전하와 예비 황태지비님 덕분입니다.” 맥가일 원수를 비롯한 장성들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하지만 좋은 분위기와 다르게, 린덴은 무언가 석연치 않음을 느꼈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대로 사막의 전갈이 무너질까? 과연?’ 물론 특별히 눈에 보이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냥 감이었다. 왠지 사막의 전갈이라면 또다시 기기묘묘한 계책을 내놓을 것 같았다. ‘뭐, 그래도 상관은 없겠지.’ 린덴은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필승의 계책은 그놈만 세우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는 목소리를 낮춰 은밀히 맥가일 원수에게만 말했다. “맥가일 원수.” “네, 전하.” “‘그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맥가일 원수가 그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렇습니다. 차질 없이 시작했다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제 조금의 시간만 더 지나면 이 전쟁도 끝입니다.” 그렇다. 이 순간. 린덴의 반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마 사막의 전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으리라. ‘그래, 나는 전갈, 네놈에 비해 국지적 전술 능력은 떨어진다. 하지만 전쟁의 승패를 좌우 짓는 것은 ‘대국적 전략’이지, ‘국지적 전술’이 아니야.’ 아마 그의 계획이 성공하면 전쟁은 그걸로 마무리되리라. 만약 그렇게 되면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빠른 승전이었다. ‘모두 엘리제 덕분이지.’ 린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모두 엘리제 덕분이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코프스크 대회전에서 패배했을 것이고,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지금도 반도 북쪽에서 피나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지난번 전염병으로 병력이 궤멸했거나. 모두 그녀 덕분에 이 횡액들을 피할 수 있었고, 하나하나가 어마어마한 공이 아닐 수 없었다. ‘엘리제.’ 갑자기 린덴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맥가일 원수는 황태자가 무거운 표정을 하자 걱정스레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아니. 별것 아니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래, 별것 아닌 일이었다. 아니, 별것 아닌 일이 아닌가? 자신에게는 전쟁의 승패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긴 했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진 이유는 최근 계속 그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엘리제. 언제까지 나를 피할 생각인 거지?’ 주기적으로 병원을 방문함에도 그녀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그를 피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안 계십니다.” 또 병원을 방문했으나, 허탕이었다. 린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에 있는 거지? 병원에 있는 거면 나오라 해. 할 말이 있으니.” “병원에 안 계십니다.” “그러면?” “전선에 순회진료를 가셨습니다.” 그 말에 린덴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순회진료라고? ‘빌어먹을. 순회진료는 무슨 순회진료.’ 순회진료는 전선에 나가 있어 병원에 오지 못하는 병사들을 위해 의사가 직접 부대에 방문해 진료하는 것을 뜻한다. 지금껏 어떤 의사도 하지 않았던 일이었는데, 최근 의무사령관 엘리제가 고안해, 본인이 몸소 실천 중이었다. 병사들의 반응은 당연히 대감동!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레이디가 될 여인이 연약한 몸을 이끌고 자신들을 위해 직접 부대까지 와서 치료해 주는데, 감동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이 순회진료 덕분에 등불을 든 여인, 엘리제의 이름은 다시 한 번 제국군 전체에 크게 울려 퍼졌다. 제국군 모두가 그녀의 헌신을 높이 칭송했다. 단 한 명만 제외하고 말이다. ‘망할. 등불은 든 여인은 무슨. 제기랄.’ 총사령관 린덴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다 마음에 안 들었다. ‘순회진료 때문에 얼굴을 볼 수가 없잖아.’ 순회진료를 시행한 후 그는 그녀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부재중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까지 나를 피한단 말이지?’ 린덴은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피하려고 순회진료를 나간다는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늘 병원을 비우고 일선 부대로 진료를 가는 이유가 자신 때문일 거라 짐작했다. 순회진료를 가지 않을 때도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얼굴을 피했기 때문이다. ‘엘리제. 내가 그렇게 싫단 말이냐?’ 부글부글 화가 났다. 비참한 기분도 들었다. 또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가장 최악의 사실은 이렇게 더러운 기분 속에서도 그녀가 보고 싶단 것이었다. 그때, 그의 앞에 서 있던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 의사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환자를 살피실 거면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린덴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환자를 살핀다는 핑계는 그가 병원에 오기 위한 핑계일 뿐이었다. 그녀가 없는데 환자를 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됐다.” “그러면 조심히 가십시오.” 문득 황태자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남자 의사를 바라보았다. 무뚝뚝하니 잘생긴 얼굴. 그레이엄이라고 했던가? 엘리제의 선생이라는. ‘재수 없게 생겼군. 마음에 안 들어. 쫓아내 버릴까.’ 심사가 꼬여서일까? 그냥 다 마음에 안 들었다. 특히 자신도 못 보는 그녀 옆에서 늘 같이 있을 거로 생각하니 열불이 확 뻗쳤다. ‘젠장.’ 린덴은 짓씹듯 말했다. “클로랜스 대령에게 말을 전해라.” “어떤?” “그렇게 도망 다녀도 소용없다고.”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넌 그냥 그렇게만 전해.” 황태자는 입술을 비틀었다. 그는 다음에는 억지로라도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담판을 지을 것이다. ‘도망 다녀도 소용없다고.’ 자신은 절대 그녀를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까. ‘어디 계속 도망 다녀봐. 세상 끝까지라도 쫓아갈 테니. 네가 날 싫어해도 상관없어.’ 그래,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밀어낼 때마다 너무나 아프지만. 그래도 자신은 그녀를 가질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만약 그녀가 새처럼 날아 도망가려 한다면, 그는 그녀를 꽁꽁 묶어 새장에 가둬서라도 가질 것이다. ‘이건 네 책임이야, 엘리제. 네가 날 이렇게 만들었어. 난 이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4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089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3 한편 엘리제는 본인이 기안한 순회진료를 열심히 다니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데임. 저희를 위해 이렇게나.” “이 먼 곳까지 직접 와주시다니.” 한 병사가 감동해 말했다. 부상을 당했다고 모두 병원에 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선의 여러 사정상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이들에게 엘리제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저렇게 여린 몸으로 이 험한 곳까지 오다니. 우리를 위해.’ 병사들은 감동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저 작은 몸으로 이런 헌신이라니. 더구나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 아닌가? 그럼에도 흙먼지가 날리고, 피가 낭자한 전선에서 환자들을 돌보는데 거리낌이 없다. 병사들은 그녀, 등불을 든 여인에 대해서는 그 어떤 칭송도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리제 본인은 그런 감탄을 듣고는. ‘아니야. 난 이런 칭찬을 들을 자격이 없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숭고한 뜻으로 하는 일이 아니니까.’ 그녀가 이 순회진료에 매진하는 이유. 그건 린덴이 짐작한 대로 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하아, 이렇게 피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닌데.’ 그녀도 알고 있다. 그를 무작정 외면하는 게 답은 아니란 것을. 하지만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무서워.’ 지난 삶, 그녀는 그를 사랑했다. 목숨보다도 더 깊이,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과거 천성이 악했다 하더라도, 그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지 않았으면 그래서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겪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망가졌을까? 단두대에 처형당할 정도로? 물론 안다. 이번 삶은 지난 삶과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두려웠다.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던 기억은 트라우마가 되어 내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가 환자 치료에 열중했던 것은 그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한 점도 일부 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더라도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결단코 흔들리지 않겠다고.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에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솔직히 조금…… 거북합니다.’ 그 말을 했을 때,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아파하는 눈을 떠올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이 아릿하게 저려왔다. 떠오르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에게 생일 선물을 내밀던 일. 지난밤 등 뒤에서 자신을 부드럽게 안았던 일. 그리고 그저 서 있는 얼굴 등. 끝없이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아무리 몰아내려 해도 소용없었다. “하아.” 그녀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자신이 싫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뚱하니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웬 한숨이냐?” “큰오라버니?!” 한 자루의 보검처럼 차갑고 아름다운 외모. 렌 드 클로랜스 남작이었다! “여기는 웬일이세요?” “웬일은. 여기가 우리 부대잖아.” 아, 그러고 보니 그녀가 지금 방문한 부대는 다름 아닌 총기사단과 그 휘하 연대였다. 렌이 부단장으로 있는. “네가 대령이라니. 말세군.” 렌은 혀를 차며 그녀의 계급장을 살폈다. 대나무 3개. 로열 나이츠의 부단장인 렌과 동일한 계급이었다. 그 심히 못마땅하다는 표정에 엘리제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요.” 그녀도 자신의 계급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배려였지.’ 그때는 잘 몰랐지만, 이건 그의 배려고 선물이었다. 군대는 여러 특성상 계급이 낮으면 일 처리가 굉장히 불편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파격적 처치들은 계급이 뒷받침되지 않았으면 진행이 굉장히 어려웠을 것이다. “하아.” 또 그의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요즘 그녀의 머릿속에선 그가 떠나갈 때가 없었다. 그 사실이 참 답답하고 싫었다. “뭘 그렇게 계속 한숨이야? 어린것이.” 렌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나저나 큰오라버니는 잘 지내셨어요? 한 번도 저 보러 안 오시고.” “내가 널 왜 보러 가? 무슨 볼일이 있다고. 싸우는 것도 바쁜데.” 큰오빠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황태자 때문에 마음은 답답했지만, 큰오라버니를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하나뿐인 여동생인데, 좀 따뜻하게 말해주면 안 돼요? 그렇게 불친절하면 여자들 다 도망가요.” “여자 따위 관심 없다.” 참고로 렌은 황태자와 더불어 론도의 천연기념물이었다. 연애는커녕 여자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러지 말고…… 아버지, 어머니가 큰오라버니 언제 결혼할지 걱정이 태산인데…….” 그렇게 대화를 나누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왜?” “오라버니는 고민이 있을 때 어떻게 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그럴 때가 있잖아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그럴 때 어떻게 하세요?” 답을 바라고 한 물음은 아니다. 그저 답답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막막한 마음으로 한 물음이었다. 그런데 큰 오라버니가 엉뚱한 답을 했다. “총을 쏜다.” “……네?” “권총 꺼내봐. 지금.” “네?” 엘리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고민을 물었는데, 웬 총? 하지만 렌은 단호하게 재촉했다. “빨리. 설마 안 가지고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에요.” 권총을 어디 두었더라? 원체 신경을 안 써 잘 기억이 안 났다. 그녀는 왕진 가방 안을 한참 뒤지고 나서야 7연발 리볼버를 찾아냈다. 그 소홀한 모습에 렌은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뭐라고 했어? 전장에서 총은 생명이라고. 만약 지금 갑자기 적이 나타났으면 넌 그냥 죽은 목숨이야.” “…….” 맞는 말이어서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물론 속으로 입술은 살짝 내밀었다. ‘오라버니는 고민 상담은 안 해주고, 웬 총이야?’ 그런데 렌은 더욱 가관인 요구를 했다. “쏴봐.” “네?” “저기 나무 끝에 튀어나온 부분 있지? 맞춰봐.” “……농담이죠?” 갑자기 웬 총질을 하라고? 그러나 렌은 농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빨리. 아니면 벌써 총 쏘는 법 잊어버린 것 아니겠지? 그렇게 가르쳤는데.”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고 총을 겨누었다. ‘이게 뭐하는 건지.’ 타앙! 높은 굉음과 함께 그녀에게 강한 반동이 전해졌다. 엘리제는 렌에게 배운 대로 그 반동을 견디고 표적을 바라봤다. 명중! 총알은 표적을 정확히 꿰뚫었다. 렌이 입술을 비틀었다. “더 쏴봐.” “또요?” “그래. 저기 저쪽에 튀어나와 있는 것들 표적으로 하면 되겠다.” 엘리제는 그 말에 따랐다. 타앙! 타앙! 갑작스레 조용한 전장에 총소리가 울리고, 총기사단의 병사들이 놀란 얼굴로 소녀를 바라봤다. “예비 황태자비께서 총을?” 그냥 쏘는 것도 아니었다.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명중이었다. 엘리제는 모든 것을 잊고 표적만 바라봤다. 높은 고음이 울리며 총의 반동이 전해질 때마다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고도의 긴장과 묘한 시원함이었다. 마치 잡념을 총에 실어 쏘아 보내는 듯했다. ‘이래서 총을 쏴보라 한 건가?’ 그렇게 7발의 탄을 다 쏜 후, 엘리제는 총을 손에서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법 나쁘진 않군.”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명중률이 극악한 권총으로 백발백중이라니. 이 정도면 권총의 명사수라 할 만했다. 엘리제는 오빠에게 칭찬받은 동생의 기분이 되어 으쓱했다. “오라버니도 알겠지만, 원래 제가 손재주가 있다고요.” 렌은 피식 웃었다. “총을 쏠 때 명중시키려면 어떻게 해야지?” “손이 흔들리지 않아야죠.” “아니, 그전에 눈은?” “표적을 주시해야 해요. 총을 쏘기 전부터, 방아쇠를 당긴 후까지도.” 사격의 요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표적을 응시하는 것이다. 방아쇠를 당기는 중, 표적에서 눈을 돌리면 절대 맞지 않는다. “그래, 정확하다.” 그러며 렌은 동생을 바라봤다. “난 고민도 그렇게 해결한다.” “……!” “살다 보면 막막한 고민이 많지. 잘 해결 안 되는 일도 많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고. 그럴 때마다 난 그 일들에 정면으로 마주했다.” “…….” “외면하고 도망가기만 해서는 절대 해결되지 않으니까.” 엘리제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외면하고 도망가는 것.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오라버니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 도망가지 말고 직시하라고? 나는 어떻게 해야지? “하아.” 렌은 깊은 한숨을 내쉬는 동생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이만 가보마.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잘 해결하고.” “네, 꼭 몸조심하세요.” “너야말로. 총은 꼭 몸에 가지고 다니고. 이번처럼 가방 속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면 혼날 줄 알아라.” 혀를 차며 하는 말에 그녀는 입술을 내밀었다. “사령부 인근 야전병원에 있을 때는 안 가지고 있어도 되죠?” “아니, 그때도 항상 가지고 있어.” “왜요? 어차피 거기까지 공화국군이 쳐들어올 일은 없잖아요.” 렌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 “아무리 우리가 이기고 있다지만, 전쟁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어느 순간, 어디서 적이 출현할지 모르는 게 전쟁이야. 그러니 항상 가지고 있어.” 그러며 그는 덧붙였다. “물론 나도 네가 그 권총을 사용할 일은 없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네가 그 권총을 사용한다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는 뜻이니까.” *** 한편 그때, 공화국군의 근거지, 반도의 수도 심페폴. 사령부로 사용하는 시청사에 칼날 같은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꼭 이 작전을 사용해야겠습니까, 각하?” 파비앙이 무겁게 물었다. 그 반대 의사가 담긴 발언에 한쪽 얼굴에 기다란 수술 자국이 나 있는 루이 니콜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 “아니면? 파비앙, 네놈에게 더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거냐? 빌어먹을 제국 놈들을 엿 먹일 수 있는 방법 말이야!” 버럭 화를 낸 그는 얼굴의 통증에 신음을 흘렸다. ‘빌어먹을. 이번 작전이 끝나기만 하면.’ 루이는 자신에게 이런 상처를 안겨준 엘리제를 떠올렸다. 이 작전만 끝난다면,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손에 떨어지리라. 한편 파비앙은 입을 다물었다. ‘전술 자체는 좋아.’ 이번에 루이 니콜라스가 고안한 전술은 훌륭했다. 아마 이번에야말로 제국군에게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적을 기만할 방법이었다. ‘하아.’ 파비앙은 한숨을 내쉬었으나, 늘 그렇듯 그에겐 권한이 없었다. 그저 루이의 명을 수행할 뿐. “빨리 미끼를 불러와.” “……알겠습니다.” 그리고 곧 나타난 이는 이십 대 초반의 젊은 장교였다. “충성! 피에르 중위입니다! 각하를 뵙습니다!” 피에르 중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단순히 총사령관을 대면한다는 긴장감은 아니었다. 이번 작전에 그가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해 어렴풋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래, 피에르. 잘 왔어. 고생이 많군.” “아닙니다!” “대충 이야기는 들었나?” “그렇습니다, 각하!” 피에르 중위는 딱딱하게 굳어 답했다. “그래, 나도 이런 명령을 내리게 되어 마음이 좋지 않군. 하지만 이해하고 있겠지? 자유와 평등을 이루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하단 것을.” 자신의 죽음을 언급하는 총사령관의 말에 피에르 중위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자유와 평등을 위해 죽어줄 수 있겠지, 중위?”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90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5 “……그렇습니다.” 이번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목소리도 조금 떨렸다. ‘죽고 싶지 않아.’ 피에르는 고국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결혼을 약속한 연인도 떠올랐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자신에게 선택 권한은 없었다. 따라야 한다. ‘이 작전을 거부해도…… 죽겠지.’ 그는 알고 있었다. 이 작전을 거부하면 자신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제물을 찾겠지.` “이 작전이 성공하면, 그래서 제국군에게 승리하면, 자네에게는 총통께서 직접 내리는 영광된 훈장이 수여될 거야.” “……감사합니다.”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죽은 다음 받는 훈장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편 루이는 그런 피에르 중위의 마음은 신경 쓰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면 자네가 이번 작전에서 해야 할 일을 알려주지.” 그리고 설명을 들은 피에르 중위가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파비앙.” “네, 각하.” “레오 장군에게는 이야기가 잘 전해졌지?” “네, 이미 준비를 끝낸 상태입니다.” “좋아. 잊지 말라고. 우리의 진짜 목표는…….” 루이의 눈이 전장 지도를 향했다. “프라바니까.”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심페폴 북단의 프라바. 사령부와 엘리제가 머무는 야전병원이 위치한 곳이었다. *** 다음 날, 어스름한 저녁이 깔리는 시점. 심페폴에서 출발한 전령이 말을 달렸다. 공화국의 동쪽 방면 군, 2군단을 향해서였다. ‘제발! 제발!’ 전령, 피에르 중위는 이를 악물고 말에게 채찍질했다. ‘죽고 싶지 않아!’ 그는 자신의 임무를 떠올렸다. 그 임무를 달성하려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지만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서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었다. 사랑하는 연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제발! 2군단에 무사히 도착할 수만 있으면!’ 그가 2군단에 무사히 도착하면 ‘어쩔 수 없는’ 작전 실패였다. 피에르는 제국군을 만나지 않고 이 위험 지역을 돌파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상대는 제국군이었다. 분명 제국군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 지역으로 왔음에도, 꼬리를 잡혀 버렸다. 목적지까지 절반도 오기 전의 일이었다. “공화국의 전령이다! 잡아라!” “거기 서라!” 그 목소리를 들은 피에르 중위는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5명의 기병대가 자신을 쫓고 있었다. ‘아아! 총기사단!’ 그들의 어깨에 새겨진 총과 검이 교차하는 문장을 본 피에르는 아득한 절망감을 느꼈다. 검기사단과 더불어 제국 2대 기사단 중 하나인 총기사단이었다! ‘안 돼! 도망가야 해!’ 그는 발굽의 징으로 말을 박찼으나, 상대는 총기사단이다. 검기사단이 오러 나이츠로 이뤄진 최강의 돌격 기병대라면, 총기사단은 전원이 명사수로 이루어진 최강의 총기병대. “어딜 도망가려고!” 타앙! 찢어지는 굉음이 울리고, 피에르 중위가 탄 말이 단번에 쓰러졌다. 다리에 정확히 저격당한 것이다! “크악!” 바닥을 떨어진 피에르는 비명을 질렀다. 끔찍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아아……! 엘르!’ 그는 연인의 이름을 속으로 불렀다. 제국군에게 잡혔으니 이제 끝이었다. 남은 길은 단 하나,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다. “가서 잡아와!” “옛썰(Yes, sir)!” 이미 다 잡았다 생각한 제국군은 느긋하게 피에르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혹시나 마지막 발악을 하지 않을까 총을 겨누고 주의하며. 그런데 그 순간, 다 잡은 고기가 의외의 행동을 하였다. 가슴에 급하게 손을 집어넣더니, 무언가를 꺼내 입안에 집어넣어 삼킨 것이다! “아니?!” “편지잖아?! 말려!” 제국 군사들은 놀라 눈을 떴다. 그들은 피에르가 삼킨 게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다. 편지였다! 분명 작전 기밀이 적혀 있을! 화들짝 놀라 그에게 다가갔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이런! 빌어먹을!” 더구나 그들이 자신에게 도착하기 직전, 피에르는 마지막 작전을 수행했다. 권총을 꺼내 들어 자신의 이마에 겨눈 것이다. 그리고……. 제국 군사들 중 책임자가 급하게 외쳤다. “안 돼! 잡아!” 편지까지 삼켰는데, 전령마저 자살하면 작전 기밀을 알아낼 방법이 없다! 하지만……. 타앙! “……!” 피가 튀며, 피에르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즉사였다. “이런 제길!” 제국 군사들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하죠, 소위님? 분명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던 놈 같은데.” 책임자인 소위도 그렇게 생각했다. 잡히자마자 편지를 삼키고 자살하는 전령이라니. 얼마나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더구나 제복을 살피니 계급도 중위였다. 초급이긴 하지만, 당당한 장교 계급. 보통 중위는 중대장의 직책을 맡는다. 단순히 전령으로 쓰기에는 너무 직위가 너무 높았다. 분명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그는 고민했다. 무슨 정보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전황에 크게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배를 가른다.” “네?” “배를 갈라서 편지를 꺼낸다. 삼킨 지 얼마 안 됐으니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을 거야.” “하지만…….” 시신을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수하가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위는 단호히 명했다. “어쩌면 우리 제국군을 위험하게 할지도 모를 정보야. 반대로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정보기도 하고.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렇게 그들은 피에르의 배를 갈라 식도에 남아있는 편지를 꺼냈다. 소위의 말대로 배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편지의 내용은 온전했다. 소위는 편지의 내용을 먼저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건……!” 편지에는 제국군의 우익을 뒤흔들 내용이 적혀 있었다! “빨리 사령부에 전해야 해!” 편지의 내용에 따르면 시간이 얼마 없었다. 작전 감행일이 코앞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문제의 편지는 제국 사령부에 전달되었다. 사령부가 발칵 뒤집어졌고, 곧바로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 “이거 정말 엄청난 정보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모르고 있었으면 어쩔 뻔했습니까? 또 뒤통수를 맞을 뻔했어요.” “미리 알아 정말 다행입니다.” 사령부의 장군들이 흥분하여 떠들었다. 서신의 내용은 그만큼 중요한 정보였다. 그들은 다시 한 번 서신의 내용을 살폈다. <친애하는 레오 장군에게.> 제국의 3군단이 계획대로 보흐라드에 접어들었소이다. 예정대로 양면 합동 공격을 시행하겠소. 작전 시행일은…….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모르고 있었으면 3군단, 5만에 달하는 병력이 대패할 뻔했다. “참 등골이 서늘하군요. 물론 우리 제국군 3군단이 일방적으로 당하진 않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적이 이번에 동원할 병력은 총 10만 명! 코프스크 이후 또 한 번의 대회전이 일어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한 참모가 의견을 제시했다. “이 정보…… 역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말인가?” “이 서신을 보면 적들의 진군 방향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방향에 맞춰 우리가 미리 매복했다가 역공을 가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공화국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을 겁니다.” 장군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작전이었다. “그렇게만 하면, 분명 크게 이길 수 있겠소이다.” “전황을 아예 굳혀 버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분위기를 타고 있는 제국군이었다. 이 정보를 이용해 또다시 대승한다면 아예 승전을 굳힐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병력은 어디서 동원합니까? 서신에 적힌 작전시행일을 보면 너무 시간이 촉박해 멀리 있는 부대를 동원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문제는 바로 시간. 작전시행일까지 시간이 너무 촉박해 인근에 있는 부대 말고는 적에게 역습을 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수도인 심페폴만이 아니었다. 크림반도 서쪽 끝부터 동쪽 끝까지 기다란 전선을 형성해 동시다발적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따라서 급하게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잠시 의견이 오고 간 후, 한 장군이 해결책을 내놓았다. “여기 프라바, 사령부를 지키고 있는 수비병을 동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 “지금 프라바에 주둔 중인 병력은 총 3만. 이 중 최소의 병력만 남기고 전부 동원하면 될듯합니다.” “그러면 이곳 사령부의 수비는 어떻게 합니까?” 의견을 제시한 장군은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3군단을 공격하기 위해 10만이나 되는 병력을 움직일 공화국군입니다. 이곳 사령부를 공격할 여력 따윈 없을 것입니다.” 그 말이 옳았다. 그렇지 않아도 열세인 공화국군이다. 작전을 위해 10만이나 동원하는 판에 사령부까지 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하?” 부총사령관 맥가일 원수가 황태자의 의견을 물었다. 총사령관인 린덴은 말없이 장군들의 토론을 듣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사령부의 병력을 동원해 적들에게 역습을 가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되긴 합니다만.” “내 생각도 그렇긴 하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뜻하지 않은 정보 획득으로 세우는 완벽한 작전이었다. 이 역습이 성공해 대승한다면 공화국군에게 치명적 타격을 입힐 수 있다. 어쩌면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타격을. ‘그렇게만 되면 내 계획은 시행할 필요도 없겠군.’ 욕심이 날 정도로 완벽한 상황. 하지만 그는 쉽게 작전을 승인하지 못했다.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정말 그냥 이렇게 하면 되는 걸까?’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의심할 만한 근거는 없었다. 공화국 장교가 자살하면서까지 지키려던 작전 기밀을 운 좋게 얻은 것이니까. 아마 사막의 전갈도 전령이 편지를 삼키고 자살까지 했는데, 배를 갈라 정보를 가져갔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이유 없이 느낌이 안 좋아.’ 그는 책상을 두드렸다. ‘하지만 느낌이 안 좋다는 이유만으로 병력을 안 보낼 수는 없어. 너무나 좋은 기회이니까.’ 고민하던 그는 잠시 결론을 보류했다. ‘엘리제, 그녀와 상의해 봐야겠군.’ 엘리제, 어쩌면 그 소녀라면 그들이 놓치고 있는 이 작전의 맹점을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안 계십니다.” 린덴을 맞은 건, 밉상인 그레이엄이었다. “아직도? 아직도 안 돌아왔다고?” “네, 전령을 통해 환자가 많아 조금 늦는다고 연락 왔습니다. 아마 내일 저녁이나 모레쯤 병원에 돌아올 것 같다고 합니다.” 린덴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이 여자가 정말.’ 며칠 전, 그는 결심했었다. 그녀가 자신을 피하니 억지로라도 만나 담판을 짓자고. 그는 그녀에게 아무리 도망 다녀도 소용없으니 포기하라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억지로 만나려 해도, 일단 돌아와야 만날 것 아닌가? ‘이틀 뒤에 온다고? 작전은 어떻게 하지?’ 시간에 맞추려면 늦어도 내일은 병력을 이동해야 했다. 이틀 뒤면 너무 늦었다. ‘생각을 들어보고 싶은데.’ 감이 꺼림칙했다. 하지만 근거 없는 감만으로 작전을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녀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었지만, 이래서야 불가능했다. ‘어쩔 수가 없군.’ 결국, 그는 출정을 결정했다. ‘이번 작전이 끝나면 순회진료는 영원히 금지해야겠어. 반드시.’ 그녀가 반발해도 이번만큼은 절대 안 됐다. 순회 진료가 반드시 필요하면 다른 의사 보내라고. 그렇게 명할 것이다. 다음 날, 린덴이 이끄는 3만의 병력이 공화국군을 역습하기 위해 출발했다. 프라바, 사령부에는 최소한의 병력인 2천의 수비병만 남겨두었다. 그리고 린덴이 떠난 날 늦은 밤, 엘리제가 프라바의 병원에 돌아왔다. 대규모 작전이 벌어졌다는 것을 아직 모르고 있는 그녀는 린덴을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도망 다니는 것은 답이 아니야. 어떻게든 답을 내야 해.’ 그녀는 큰오라버니의 조언을 생각했다. 어떤 답을 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은 답이 아니었다. 엘리제는 환자를 진료하며 고민을 거듭했다. 그리고 그 순간. 린덴과 엘리제가 엇갈린 그때. 사막의 전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령부, 엘리제가 있는 프라바를 향하여. ============================ 작품 후기 ============================ 내일 5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091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6 프라바 인근의 야전 병원은 항상 그렇듯, 부상병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엘리제와 의료진들이 건물 안에서 환자를 치료하며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제를 보조하고 있던 제이가 창밖을 보고 놀라 말했다. “어, 눈이 내려요. 데임.” “그러네요.” 제이의 말에 엘리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정말로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아직도 눈이라니. 다른 나라들은 이제 슬슬 봄기운이 올 때인데.’ 반도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하늘이 슬퍼하는 탓일까?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아직도 한겨울처럼 추웠다. 이러다 정말로 봄 없이 덥고 습한 여름이 곧바로 올지도 모르겠다. ‘병사들이 고생하겠네.’ 그녀는 사령부를 떠나 작전을 나간 병사들을 떠올렸다. 한창 진군 중에 눈이 오니, 애로가 많을 것 같았다. ‘그는…… 괜찮겠지?’ 그녀는 또 자신도 모르게 그를 생각했다. 원체 중요한 작전이기에 황태자인 그도 직접 친정하였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괜찮겠지? 그러다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또. 또 생각했어.’ 요즘 그녀는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시도 때도 없이 그가 비집고 들어왔다. “하아.” 그녀는 한숨을 내쉬고 창밖을 바라봤다. 병원 근처에 쌓인 새하얀 눈은 밝고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곧 이곳에서 일어날 일은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한편 그때, 린덴도 눈을 맞고 있었다. “눈이 오는군요.” “그렇군.” “길이 어려워지기 전에 조금 더 속력을 내야겠습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프라바도 눈이 오려나? 엘리제는 괜찮겠지? 따뜻하게 입어야 할 텐데.’ 정신없이 환자를 볼 때 그녀는 아무렇게나 입고 진료를 한다. 부상자들이 끝없이 밀려드는데, 옷을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였다. 린덴은 그런 그녀가 얇게 옷을 입었다가 눈을 맞으며 감기라도 걸릴까 걱정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몸은 왜 그렇게 약한지. 다음의 청에 나가 있는 영사에게 명해 보약이라도 구해야겠어.’ 이왕이면 청의 황제가 먹는 최고급의 걸로 구해야겠다. 그녀에게 아무거나 먹일 수는 없으니까. ‘려(麗)의 홍삼도 좋다고 하던데. 그것도 구해야겠군. 그런데 려에는 영사가 없는데 어떻게 구하지? 뭐, 어떻게든 구할 수 있겠지.’ 어차피 구하는 거야 아랫것들이 할 일이니까. ‘이번 전투만 끝나면 본국에 연락해 당장 구하라 해야겠어.’ 그렇게 그는 그녀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전투.’ 그는 생각을 돌렸다. ‘정말 이대로 가도 되는 걸까. 뭔가 잘못 판단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계속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근거도 없이 불안한 기분.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정찰대를 먼저 보냈으니, 곧 돌아오겠지.’ 그는 계속 불안한 기분이 들어 정찰대를 작전 지역으로 먼저 보냈다. 뭔가 이상한 점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여러 필의 말을 번갈아가며 죽으라 달릴 그들은 곧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전하! 각하!” 과연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군영 멀리서 큰 목소리가 들렸다. 정찰대의 기병이었다! 기병은 죽을힘을 다해 작전 구역까지 달려왔는지, 전신이 땀에, 핼쑥한 얼굴이었다. “……!” 린덴은 기병을 본 순간,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기병의 표정이 굉장히 다급했던 것이다. 큰일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린덴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찰 결과는?” “큰일 났습니다!” “……!” “지금 목적 지역과 적 진군 예정지를 정찰했는데...!!” 그러고 정찰대의 보고를 들은 린덴과 맥가일 원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완전히 당했다! 없었다. 적이 향할 것이라 예상했던 목적지에도, 그리고 예상 진군로에도.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적 장교가 자살까지 하며 지키려던 작전 기밀은 다름 아닌 사막의 전갈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이런 제길! 멍청한!’ 린덴은 불안한 감을 무시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수하 장교를 자살시키면서까지 적을 속인 전갈의 비정함을 욕할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큰 피해를 입기 전, 적의 진정한 목적을 파악해야 했다. ‘3군단이 목적이 아니었어. 그러면 진짜 목적은?’ 곧바로 답이 떠올랐다. ‘사령부인 프라바!’ 그들이 떠남으로써 비어버린 프라바가 분명했다. 바로 엘리제가 지금 있는! ‘안 돼, 엘리제!’ 지금 프라바에 있는 병력은 2,000명에 불과했다. 적들의 전면공격을 받으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지금 당장 프라바로 회군한다. 빨리!” “네, 전하!” 린덴은 회중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늦지 않았어. 아니, 늦지 않았어야 해.’ 그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 정보를 늦지 않게 얻었다는 점이다. 그가 무리해서 정찰대를 독촉한 탓이었다. 만약 정찰대를 빨리 보내지 않았다면, 아예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다행히 멀리 나오진 않았어. 전속력으로 돌아가면 어쩌면 늦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엘리제……! 꼭 무사해야 한다! 꼭!’ 아득한 마음으로 기원했다. 그녀가 만약 잘못된다면, 그는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제발!’ *** 무언가 잘못됐다는 점을 깨달은 것은 밤이 되기 전, 늦은 오후였다. 콰앙! “……?!” 땅이 울리는 듯한 어마어마한 굉음. 야전병원의 모두가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대포 소리 같은데? 왜 대포 소리가?” 한 남자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령부의 수비병들이 훈련을 하나?” “그러겠죠? 혹시 들은 것 있으신가요, 데임?” 엘리제도 알고 있는 바가 있을 리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저으려는 순간……! 콰앙! 다시 한 번 천지를 울리는 굉음이 터졌다! 이번엔 아까보다 더 가까웠다. “꺄악!” 제이가 깜짝 놀라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숙였다. 다른 의사들과 간호사들도 놀란 표정을 했다. 그리고! 타당! 타앙! “크악! 공화국군이다! 경보를 울려!” “아악!” 갑작스러운 총소리와 비명! 엘리제의 안색이 하얘졌다. 갑자기 공화국군이라니? 이곳 프라바에? 그녀는 다급히 병원 3층의 창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밖을 내다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눈에 닿는 모든 곳이 푸른 제복의 공화국군이었다. 특히 가슴에 판금 갑옷을 입은 흉갑기병대, 큐래시어(Cuirassier)가 제국군 군영에 돌격해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제국 병사를 도륙하고 있었다. “크아악!” “죽어라, 제국 놈들!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그리고 전면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한 남자. ‘사막의 전갈!’ 부상을 당했는지, 한쪽 얼굴에 흉측한 상처가 나 있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그는 악마 같은 눈으로 병사들을 휘몰아치고 있었다. ‘속았구나!’ 그녀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정확한 정황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 알 수가 없지만, 적에게 역습을 가하려 떠난 린덴과 사령부는 저 사막의 전갈의 기만술에 속은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하지?’ 적이 코앞까지 닥치다니. 그녀의 손이 두려움에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주먹을 움켜쥐며, 침착하려 애썼다. ‘정신 차려, 엘리제. 너는 이 병원, 의무부대의 장이야. 전투가 벌어졌으니, 내가 이들을 챙겨야 해.’ 제국군이 저들을 물리쳤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일단 숫자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못해도 2만은 되어 보이는 병력이다. 특히 제국의 총기사단과 비견되는, 공화국의 최정예, 흉갑기병대만 5,000명이 넘어 보였다. ‘어떻게 하지? 침착히 생각해. 내가 이들을 살려야 해.’ 그녀는 자신 밑의 사람들을 떠올렸다. 제이, 그레이엄 남작, 그리고 수많은 의사와 간호원들. 모두 자신을 돕기 위해 머나먼 브리티아에서 이곳까지 자원 온 이들이다. 최소 이들은 모두 무사히 살려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그녀가 있는 방의 문이 와락 열렸다. 엘리제는 적인지 알고 깜짝 놀라 허리춤의 권총을 부여잡았다. “데임!” 하지만 다행히 공화국군이 아니었다. 붉은 제복을 입고 있는 제국군 장교였다. “공화국군입니다. 도망가야 합니다!” 총이라도 맞았는지 그 장교는 어깨 한편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급한 얼굴. 엘리제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참으며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황이 많이 안 좋나요?” “네, 흉갑기병대의 돌격에 방어선 대부분이 무너졌습니다. 이곳 프라바는 이미 끝났습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해 버틸 테니 데임이라도 빨리 도망가십시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예상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지?’ 장교가 다시 재촉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도망가십시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도망은 못 가요. 저는 이 병원의 책임자예요.” “데임!” 이름 모를 장교는 버럭 소리를 높였다. “물론 아랫사람과 환자를 생각하는 데임의 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데임의 그 숭고한 뜻에 여러 차례 감명받았고요!” “……!” “하지만 데임께서는 혼자만의 몸이 아닙니다! 이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실, 그 누구보다도 지고한 몸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죽는 것보다, 데임이 무사히 탈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러니 빨리 도망가십시오!”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도 안다. 자신은 단순한 귀족가의 영애가 아니다. 작게는 재상가의 딸이며, 크게는 황태자비가 될 여인이다. 또한 현(現) 제국군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인사이며, 병사들에게 가장 많은 존경과 은애를 받는 여인이다. 그러니 이곳 프라바의 누구보다도 적에게 잡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반드시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어차피 도망갈 수 없어.’ 이건 쓸데없는 고집이 아니었다. 그녀는 냉정히 판단했다. ‘내가 저 흉갑기병대를 따돌리고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승마를 배웠지만, 권총 사격만큼 능숙해지진 못했다. 그저 남들만큼 달릴 수 있는 정도다. 반면 저들, 흉갑기병대는 기마술의 최고 달인들이었다. 그리고 기마 사격에도 능숙했다. 저들을 뒤에 두고 도망쳐 봤자, 1㎞도 못 가고 잡힐 것이다. ‘어차피 잡힐 거면,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 해.’ 그녀가 해야 할 일. 그건 바로 병원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또 다른 병사가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데임!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 “적 사령관, 루이 니콜라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이곳 야전병원으로 오고 있습니다! 데임을 잡으러!”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나를 잡으러 오고 있다고? 그 사막의 전갈이? ‘끝이구나.’ 그가 직접 온다면 정말 벗어날 방법은 없다고 봐야 했다. 자신은 분명 포로로 공화국에 끌려갈 것이다. 어쩌면 그의 계책을 여러 번 방해한 괘씸죄로 고초를 당할지도. ‘루이 니콜라스.’ 그림 같은 외모에 독사 같은 속마음이 담긴 그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녀는 갑자기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두려웠다. 그에게 잡혀가기 싫었다. 하지만 루이 니콜라스가 자신에게 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 순간. 그녀는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두려웠지만 벌벌 떨며 책상 밑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그녀에겐 이 순간 책임져야 할 이들이 있었으니까. 자신이 설사 포로로 끌려가더라도, 최소한 제이와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료진들은 구해야 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녀의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닿았다. 7연발 리볼버(Revolver). 큰오라버니가 그녀에게 준 선물이었다. 드디어 이 선물을 사용할 순간이 다가왔다. ============================ 작품 후기 ============================ 내일 06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092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7 “사령부 점령했습니다!” “적의 방어선은 모두 무너졌습니다!” “주요 진지 모두 점령했습니다!!” 공화국의 병사들이 속속 보고 하였다. 사령부가 점령됐으니, 프라바는 함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지금 루이 니콜라스의 최고 관심사는 사령부의 점령이 아니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등불을 든 여인은?” “네?” “등불을 든 여인은 어디에 있느냐고. 놓치면 안 된다. 반드시 잡아야 한다.” 공화국 장교가 떠듬떠듬 답했다. “충성! 알겠습니다!” 곧 그녀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사령부 인근의 야전 병원. 바로 그곳이었다. ‘이곳 근처에 있군.’ 루이 니콜라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드디어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몇 번이고 치욕을 안겨주었던 그녀를! ‘전갈 사냥꾼이라고?’ 그는 최근 들어 그녀가 듣고 있는 별명을 떠올렸다. 그에게 끔찍한 치욕을 주는 별명. 이제 이 치욕을 갚아줄 때가 왔다. “내가 직접 가겠다.” 그는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 사막의 전갈을 만나기 전, 엘리제는 제복을 가다듬었다. 이곳의 책임자로 적 사령관을 만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엘리제는 거울을 봤다. 붉은 제복 가슴 편에 그녀의 신분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국군 의무사령관. 클로랜스 대령. 이 직위를 내려준 그가 떠올랐다. ‘그는 괜찮겠지? 함정은 이쪽이었으니.’ 아무리 전갈이어도 공화국군의 여력상 양쪽에 모두 함정을 파진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안전할 것이다. ‘왜 나를 흔들어서.’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생일 축하한다.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그의 말들이 떠올랐다. ‘왜 나를 흔들어서…….’ 이런 순간까지 생각나게 하는 걸까.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이제 못 볼 수도 있겠지?’ 이제 자신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전쟁에서 포로의 처우는 전적으로 포획자에게 달려 있으니까. 공손한 대접을 받으며 지내다 종전 후 포로 교환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지금껏 전해 들은 사막의 전갈의 무자비한 성격상 그런 꿈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고 생각했다. 뛰어난 전술가적인 면모와 별개로 그의 추악한 성품은 유명했다. 이전 삶, 론도 사교계에 있던 자신의 귀에도 몇 번이고 생생히 전달될 정도로. ‘바보 같아.’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지금껏 그에게서 도망 다녔다. 지금도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은 그가 무서웠으니까. 이전 삶, 자신을 파국에 이르게 한 그에게 다시 빠지고 싶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제 앞으로 못 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가 보고 싶었다. 또륵. 가슴이 울렁거리며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다급히 그 눈물을 닦았다. ‘약해지지 말자, 엘리제.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아 있잖아.’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창밖을 통해 서쪽을 바라봤다. 브리티아 섬이 있는 방향이다. ‘아버지, 오라버니, 어머니. 이렇게 되어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가족들에게 간절히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귀국하면 꼭 전하고 싶었던 말을 속으로 미리 말했다. ‘사랑해요. 정말로.’ 그렇게 마음속 인사를 한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이제 결전의 때였다. 엘리제는 방을 나서, 2층으로 내려갔다. 2층의 위치한 병원 회의실에는 제이,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료진들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 하죠, 데임?” 제이가 벌벌 떨며 물었다. 그녀뿐이 아니었다. 의료진들 모두가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이 닥칠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저, 저. 죽고 싶지 않아요. 흐윽. 흑.” 어린 제이가 훌쩍훌쩍 눈물을 흘렸다. 엘리제는 본인도 불안하고 떨리긴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속마음을 숨기며 미소를 지었다. 남을 안정시키기 위한 미소다. “걱정하지 마요, 제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그, 그럴까요?” “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엘리제는 다른 의료진들을 돌아봤다. “지금까지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 “선생님들 덕분에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었어요. 만약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전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작별인사. 마지막 감사 인사였다. 이제 이들과는 이번이 마지막이리라. 그녀는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으나 참았다. “선생님들께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무엇보다 선생님들은 전투와 상관없는, 인도주의적인 치료를 위해 온 의료진이니까요.” 제이가 훌쩍이며 물었다. “데, 데임은요? 데임은 어떻게 하시게요?”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적들이 엘리제를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다는 사실을. 엘리제, 작은 소녀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레이엄을, 자신을 항상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는 까칠한 선생을 바라봤다. “선생님, 지금까지 항상 감사했습니다. 처음에 테레사병원에서 정체를 숨겼던 것은 다시 한 번 죄송하고요.” “……데임.” 그레이엄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작은 소녀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강한 어조로 명했다. “의무사령관, 대령 클로랜스. 그리고 제국의 예비 황태자비로서 여러분께 명합니다.” “……!” “지금 이 시각 부로 이곳 회의실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아래에서 어떤 소란과 비명이 들리더라도.” 모두의 눈이 커졌다. 지금? “데임?” “반론과 질문은 허용하지 않겠습니다.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이 회의실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그러고 엘리제는 등을 돌려 회의실에서 나왔다. 뒤에서 사람들이 그녀를 불렀으나, 외면했다. 이제 사막의 전갈을 맞을 차례다. ‘잘할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은 없다. 벌써 이렇게 다리가 떨리는데. 그를 직접 만나면 얼마나 두려울까. 하지만 해내야 한다. 어차피 잡혀갈 거면 저들과 환자들의 안전이라도 얻어야겠다. 그녀는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중간에서 멈추어 섰다. 계단 난간 너머로 병원의 중앙 복도와 입구가 보였다. ‘이제 곧.’ 그녀는 사막의 전갈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끼익! 콰당! 병원의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푸른 제복의 공화국군이 들이닥쳤다! 숫자는 대략 10여 명. 그중 가운데 서 있는 남자와 그녀의 시선이 똑바로 마주쳤다. “……!”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얼굴이 퉁퉁 붓고, 기다란 흉이 나 이전과 전혀 다른 인상이었지만 그가 분명했다. 두근두근. 엘리제의 가슴이 두려움과 긴장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그녀는 그 떨림을 멈추게 하려고 허리 뒤에 숨긴 차가운 리볼버를 움켜쥐었다. “호오?” 한편, 사막의 전갈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병원 건물의 끝과 끝이어서 거리가 상당했지만, 워낙 조용한 공동이었던 탓에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졌다. “이게 누구야?” 비릿한 미소. “제국의 영웅, 엘리제 아닌가?” 사막의 전갈은 과장되게 손을 펼치더니 인사를 올렸다. 장난스럽게. 조롱하듯. “보고 싶었소. 나를 몇 번이고 엿 먹인 제국의 여인이여.” “……!”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꿈속에서도 엘리제, 그대를 만나게 되더군. 이제 드디어 그 여한을 이루었군.” 그 적의가 가득한 인사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엘리제가 아닙니다.” “뭐?” “저는 니콜라스, 당신에게 제 이름을 부르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저의 직책은 제국군 삼군사령부 휘하 의무사령부의 장. 클로랜스 대령이라 부르십시오.” “…….” 루이 니콜라스는 그녀의 딱딱한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 아니, 클로랜스 대령?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나 보군, 쿡쿡.” “…….” “좋아. 좋아. 역시 이렇게 나와야지. 날 몇 번이고 엿 먹인 여인인데 말이야. 벌벌 떨며 장롱에 숨어 있기라도 했으면 크게 실망할 뻔했는데, 역시 기대대로야.” 그는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허리를 숙여가기까지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실제로 그는 크게 기뻐하고 있었다. 어찌 안 기쁘겠는가? 크림에 와서 계속해서 패해다가 처음으로 제국군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고, 더구나 이 ‘전갈 사냥꾼’이라 불리는 여인도 손에 넣게 되었는데. “뭐, 자신의 처지는 심페폴에 끌려오면 알게 되겠지. 하나만 미리 알고 있으라고.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라고, 공화국에서도 퍼스트레이디 대접을 해줄 거라 기대하면 안 된단 사실을.” 루이는 빙글 웃었다. “그나저나. 클로랜스 대령, 그대는 여전히 아름답군.” “……!” 그는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 시선에 엘리제는 독사가 몸을 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작년 제국의 탄신연회 때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었던 그대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제복을 입은 그대는 뭐랄까. 강렬한 매력을 풍기는군. 남자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 말이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민망한 말을 내뱉었다. 심페폴로 돌아가 저 아름다운 소녀를 농락할 생각을 하니 흥분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자신에게 몇 번이고 패배를 안긴 저 소녀가 눈물 흘리는 모습은 얼마나 짜릿할까? 상상만 해도 흥분되었다. ‘포로 교환? 웃기지 마. 저 소녀는 내 전리품이다. 영원히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한걸음,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10여 명 공화국 병사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미 다 끝난 전투고, 연약한 여인을 잡는 일이라 그들의 태도는 느슨하기 그지없었다. “그거 아나? 내가 대령, 그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 “이렇게 보게 되어 정말 기뻐.” 그런데 엘리제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의 소름 끼치는 말들에 몸서리치지도, 뭐라고 대답하지도, 그렇다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루이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을 뿐이다. 그 기이한 반응에 루이가 의아함을 품을 무렵.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20m. 조금은 먼, 하지만 가장 적절한 거리에 이르렀을 때. “나, 제국군의 의무사령관 클로랜스 대령이 공화국의 니콜라스 원수에게 협상을 제안합니다.” “……협상?” 루이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대령, 협상이란 단어의 뜻을 잘 모르나 보군. 협상은 서로 동등한 입장에 있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야. 아니면, 서로 걸 조건이라도 있거나.” “걸 조건은 있습니다.” “호오?” 전갈은 재밌다는 얼굴을 했다. “역시 등불을 든 여인. 마지막 순간까지 날 즐겁게 해주는군. 그래, 들어보기나 하지.” 어차피 다 잡은 물고기. 루이는 너그럽게 말했다. “제가 원하는 내용은 이곳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들의 생명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병원의 의료진들은 포로로 잡지 말고, 곧바로 제국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대가 걸 조건은?” 어려운 사항은 아니지만, 굳이 들어줄 필요도 없는 부탁이다. “제가 걸 조건은.” 그 순간 엘리제는 가만히 루이의 얼굴, 정확히는 미간을 바라보았다.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진동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그 심상치 않은 눈빛에 루이가 흠칫하는 순간,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철컥! “……!” 그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공화국군 병사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질 때. 엘리제가 가만히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에는 차가운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루이 니콜라스, 당신의 목숨입니다.” “……!” 기다란 병원 복도 사이에 죽을 듯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07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093 3-7 엇갈림 ========================================================================= 7장 엇갈림 - 8 전갈과 공화국군의 병사들은 이 갑작스러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무, 무슨?”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정신을 차리고, 병사들이 소총을 엘리제에게 겨누려는 순간! 루이 니콜라스가 그들을 말렸다. “그만! 계집애처럼 호들갑 떨지 마.” “가, 각하?” “너희는 저 소녀가 권총을 발사할 수나 있다고 생각하나?” “……!” “보라고. 저 다리 떨리는 것.” 그렇다. 엘리제의 다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공포와 긴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쏘면? 저 거리에서 근처에 맞출 수나 있을 것 같아? 천장이나 바닥에 안 맞으면 용하지.” 권총은 뛰어난 휴대성에 비해 명중률이 극악하다. 오죽하면 영관 장교에게 주어지는 권총이 호신용이 아니라, 자살용이란 말이 있을까? 지금 그녀와 루이의 거리는 약 20m. 권총의 명사수가 아닌 한, 맞추기 어려웠다. “대령, 역시 마지막 기백마저 멋지군. 도저히 귀족가의 여식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야. 그런데 그거 아나?” “…….” “그런 모습이 나를 더욱 자극한다는 것을.” 그러며 그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 엘리제가 찢어지듯 외쳤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다가오면? 그러면 어쩔 건데? 쏘기라도 할 건가?” 루이가 비웃음을 지었다. 저벅. “쏠 수 있어? 아니, 사람한테 쏴본 적이나 있어? 응?” 저벅. “없지? 한번 쏴봐. 자, 이렇게 손 내밀 테니 말이야. 이 손을 향해 한번 쏴보지. 쏠 수만 있다면 말이야.” 저벅. 저벅. 루이는 고양이가 궁지에 몰린 쥐에게 향하듯 걸음을 내디뎠다. 여전히 엘리제는 다리를 파르르 떨 뿐, 총을 발사하지 못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십시오! 정말로 발포합니다!” 그 모습을 보며 공화국군의 병사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실제로 그녀가 총을 발사할 거라, 그래서 루이에게 상처 입힐 거라 여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뭐 해? 빨리 쏴봐. 여기 손 내밀었잖아. 응?” 저벅. 저벅. 루이는 몇 발자국 더 내디디며 오른손을 허공 위로 뻗었다. 그는 저 아름다운 소녀의 눈이 긴장과 공포에 물든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엘리제가 이를 깨물었고! 타앙!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그리고……! “크아악!” 찢어질 듯한 고통이 울려 퍼졌다. 허공에서 흔들리던 루이의 오른손목이 총알에 그대로 관통된 것이다! “각하!” “크아악! 으악!” 루이는 고통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비명을 질렀다. 손이 끊어질 듯한 통증에 머리가 하얗게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 “이년이!” 뒤늦게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그녀에게 총을 겨누려 했다. 하지만 엘리제가 날카롭게 외쳤다. “모두 움직이지 마십시오!” “……!” “단 한 명이라도 움직인다면! 그때는 머리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은 없습니다!” 그다음은 없다. 그 말은 다음에는 루이를 죽이겠단 뜻이었다. 꿀꺽. 모두가 긴장된 침을 삼켰다. 엘리제가 어린 소녀라고 무시하는 마음은 깨끗이 사라졌다. 아니, 오히려 이 순간 그들은 약자가 되었다. 루이 니콜라스란 인질을 잡힌 약자가 말이다! “그러니 움직이지 마십시오!” 엘리제는 비명을 지르듯 반복해 외쳤다. 그녀는 피가 날 듯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쐈어! 정말로!’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쏴본 적이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두려웠다. 무서웠다.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안고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참고. 작은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동맥 쪽을 맞은 것 같으니, 빨리 치료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제안한 협상을 잘 생각해 주십시오. 제가 말한 조건만 들어준다 약속한다면 총을 치우겠습니다.” 하지만 루이는 대답하지 못했다. 끔찍한 고통에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크악! 으으…….” 엘리제의 말대로 동맥이라도 뚫린 것인지 피가 펑펑 쏟아졌다. 마치 수도 댐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은 출혈량이다. 그의 팔은 물론, 상체 전체가 피에 젖었다. “크으……!” “약속해 주십시오. 이 병원에 있는 의료진들과 환자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루이 니콜라스가 버럭 비명을 질렀다. “그래, 알았다! 빌어먹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마!” 하지만 엘리제는 단호히 말했다. 저렇게 대충 뱉는 약속을 믿을 수는 없다. 하물며 저 루이 니콜라스는 배덕과 기만의 상징 아닌가? “자유와 평등에 걸고 맹세해 주십시오.” 하지만 자유와 평등. 공화국이 신봉하는 가치를 건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다른 공화국 병사들 앞에서 한 맹세이니 어지간해서는 지킬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조건도 아니었고. “크…… 알았다! 제길! 자유와 평등을 걸고 맹세하마! 이 병원에 있는 자들은 손끝 하나 안 건들 테니 빨리 총 치워!” 루이는 발광하듯 외쳤다. 동맥에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출혈에 그는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이런 출혈이 지속하면 사망한다. 빨리 지혈을 해야 한다. 그의 맹세에 엘리제는 눈을 감으며 총을 내렸다. 됐다. 이걸로 이 병원에 있는 자들은 일단 안전할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책임은 다했다. 저 루이를 인질로 잡고 탈출을 시도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그건 절대 무리였다. 그에게 총을 겨누고, 협박한 것만으로도 그녀는 모든 기력을 다 쏟아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당장에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끝났어.’ 그녀가 총을 내리자, 공화국 병사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가, 각하! 지혈을……!” 일부는 루이에게 붙어 팔뚝을 끈으로 묶어 응급 지혈 처치를 시도했고, 일부는. “이년! 빨리 잡아!”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엘리제는 반항하지 않았다. 다행히 도박이 성공하긴 했으나, 저들을 상대로 자신의 반항이 먹힐 가능성은 없다. 그나마 몸이 덜 상하려면 가만히 있는 것이 나았다. “손 뒤로 해서 묶어!” 병사들은 그녀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쿠웅! ‘아악!’ 온몸으로 땅에 충돌한 그녀는 아득한 통증에 비명을 삼켰다. 끔찍하게 아팠다. “묶어!” 자신들의 사령관에게 총을 쏜 것을 갚기라도 하려는 듯, 등 뒤로 그녀의 팔을 꺾고 거칠게 밧줄로 손을 묶었다. 거친 밧줄이 그녀의 여린 피부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등불을 든 여인, 엘리제 드 클로랜스는 공화국군의 포로가 되었다. 루이 니콜라스가 쓰러진 그녀를 보며 이를 갈며 말했다. “바로 심페폴로 옮겨!” 그녀에게 받은 이 빚은 심페폴에서 철저히 갚아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병원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안쪽으로 울려 펴졌다. “급보입니다!” “……?!” “동쪽에서 제국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루이 니콜라스가 통증 속에서도 놀라 외쳤다. “뭐라고?!” “이곳 사령부를 지키던 병력입니다. 총 병력 3만 명! 공제가 직접 이끌고 있습니다!” “……!”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제국군이 도착했고, 곧바로 프라바 탈환전이 벌어졌다. 린덴이 이끄는 3만의 제국군은 마치 해일이 몰아치듯 공화국군을 덮쳤다. “와아!” “크악!” 공화국군은 정신없이 저항했으나 열세였다. 일단 숫자가 2만으로 3만인 제국군에 비해 적었고, 점령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여서 전열도 엉망이었다. 그리고 가장 밀렸던 것은 바로 기세! “황태자비를 구하자!” “등불을 든 천사를 구해라!” 제국군 모두 이곳 프라바의 야전병원에 자신들의 레이디, 등불을 든 천사, 엘리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병사들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공화국군에게 돌격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공제 린덴이 있었다. ‘엘리제! 제발! 제발!’ 그의 눈동자가 금빛으로 미친 듯이 타올랐다. 린덴은 로마노프 황가의 역사상 가장 강한 초상 능력자로 평가받는 이. 자신의 초상 능력의 특성상, 몸에 가해질 반작용 때문에 평소에는 강한 초상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린덴이지만, 지금 그는 분노와 걱정에 눈이 먼 상태였다. ‘만약 엘리제가 손끝 하나라도 상해 있다면! 너희 중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겠다!’ 그는 호랑이가 포효하듯 공화국군을 몰아붙였다. 그런 린덴과 제국군의 노도와 같은 기세에 프라바를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공화국군은 일방적으로 밀렸다. 결국. “후퇴하라! 모두 심페폴로 후퇴하라!” 동맥 출혈로 엘리제와 같이 심페폴로 실려 간 루이 니콜라스를 대신하여 공화국군을 지휘하던 파비앙이 다급히 외쳤다. 이대로는 전멸이었다. 공화국군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목숨만 건지고자 허겁지겁 도망쳤다. 결국, 전투 결과는 제국군의 대승! 사막의 전갈이 자국 장교를 자살시키면서까지 계책을 꾸몄건만, 결과적으로 대승을 거둔 것이다. 하지만 제국군에게 전투의 결과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태자비께서는?! “데임 클로랜스가 없어!” 제국군 모두 엘리제가 공화국군에게 포로로 끌려간 것을 깨달았다. “공화국군을 잡아라! 등불을 든 천사를 구해라!” “절대 놓치면 안 돼!” 프라바는 크림반도 전역으로 길이 나 있는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래서 린덴이 새로운 사령부의 위치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제국군 그 누구도 수복한 프라바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의 레이디, 등불을 든 여인을 구하기 위해 제국군을 쫓았다. 그리고 그 군을 만류해야 할 총사령관 린덴은. ‘엘리제! 안 돼!’ 오히려 시뻘게진 눈으로 선두에서 공화국군을 쫓았다. “전하! 전하! 더 이상 쫓으면 위험합니다!” 맥가일 원수가 하얘진 얼굴로 그를 만류했지만 린덴은 듣지 않았다. 이성을 잃은 맹수처럼 끝없이 공화국군을 추격할 뿐이었다. 그녀를 되찾기 위해! 하지만. 아무리 쫓아도, 심지어 홀로 심페폴의 성벽이 보이는 곳까지 말을 달려도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국군이 몰아치기 전, 루이 니콜라스가 미리 심페폴로 출발한 탓이었다. “엘리제! 으아악!” 린덴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질렀다.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비명이었다. 그렇게 프라바 공방전이 막을 내렸다. *** 프라바 공방전이 벌어진 다음 날이었다.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의 시청사. 공화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는 그 건물 옆에 위치한 관사였다. 사막의 전갈의 부관, 파비앙 중령이 건물 안에 들어가 4층 꼭대기에 위치한 방에 공손히 노크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런데 안에서 들리는 음성이 의외였다. 여린 소녀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네, 들어오세요.”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끼익. 문이 열리니 단정하게 정리된 방이 나타났는데, 한 소녀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백금발의 푸른 눈, 인형같이 예쁜, 작고 여린 소녀.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파비앙이 공손하게 물었다. 프랑소엔어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프랑소엔어를 사용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다. 프랑소엔어는 서대륙 귀족계에서 공용어처럼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수백 년 전 프랑소엔 왕국이 브리티아와 비교도 안 되는 강국이었기 때문이다. “네, 덕분에요.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녀는 처음 험하게 끌려갈 때와 다르게 나쁜 대우를 받지 않고 있었다. 나쁜 대우는커녕 마치 손님을 모시는 듯한 최고의 대우였다. 방 앞에 감시하는 경비병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흉흉한 루이 니콜라스의 분위기 때문에 잔뜩 고초를 예상한 것을 생각하면 의외의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닙니다. 전장이다 보니 더 좋은 대접을 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건 모두 사막의 전갈의 부관 파비앙의 배려 덕분이었다. 그가 엘리제에 대한 대우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특별히 명한 것이다. 물론 이런 특별 대우가 가능한 것은 현재 니콜라스가 손에 입은 부상 때문에 과다 출혈이 심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덕이다. “저…… 혹시…… 저에게 이렇게 잘해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래도 저는 적국의 포로인데.” 엘리제가 조심스레 물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1월 8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00094 4-1 탈출 ========================================================================= 4막 - She and He, He and She 1장 탈출 - 1 “레이디께서는 제국의 황태자비가 되실 분이 아닙니까? 아무리 지금은 전쟁 중이라지만, 브리티아의 황실을 무시할 수는 없죠.” “그래도…….” 그렇다 쳐도 대우가 과했다. 마치 호텔 같은 방의 시설. 그녀에게 제공된 옷도 화려하진 않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진 고가의 일상복이다. 제공되는 식사도 부족함이 없고. 적진만 아니면 휴가를 온 듯한 대우였다. “물론 그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샤를이란 친구를 아십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이름이다. “……잘 모르겠는데요.” “역시 기억 못하는군요. 하긴 레이디께서 치료하신 이가 한둘이 아닐 테니.” “……?” 파비앙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부하입니다. 지난번 제국군에 포로로 잡혔을 때 레이디께서 살려준 이이기도 하죠.” “……!” “그 친구가 돌아온 후, 등불을 든 여인에 대한 칭송을 그렇게나 하더군요. 말 그대로 천사라고. 레이디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다고. 언젠가는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이런 말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랬나? 누구인지 도통 기억이 안 났다. “이 자리를 빌려 샤를을 비롯해 포로로 잡힌 우리 공화국 병사들의 생명을 살려주신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 아니에요.” 엘리제는 당황해 고개를 저었다. 특별한 뜻을 가지고, 포로로 잡힌 공화국군을 치료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환자가 있으니 치료한 것뿐이었다. 무엇보다 그녀가 의학을 배운 현대 지구의 의사들은 환자를 적아를 가리지 말고 치료해야 한다는 제네바 협약의 정신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어쨌든 편히 쉬십시오.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안에서는 자유롭게 있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파비앙은 타국의 예비 황태자비에게 하듯 공손히 인사 후 방을 나갔다. 그런데 그가 방문을 닫기 직전이었다. 엘리제가 그를 불렀다. “저…… 경(Sir)!” “파비안 중령이라 부르면 됩니다.“ “주, 중령님.” “왜 그러십니까, 레이디?” “저…… 니콜라스 원수께서는…… 어떠신가요?” 물어보는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의 눈에 담긴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감이었다. “수술 후 병상에 누워 있습니다. 거동하실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더 걸릴 듯합니다.” “아…….” 그녀가 지금 파비앙의 배려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루이 니콜라스가 침상에 누워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녀에게 당한 총상 때문에. ‘절대 용서하지 않으마! 심페폴에 도착하기만 하면!’ 루이는 그녀를 거칠게 끌고 가며 그렇게 악을 썼다. 그래서 엘리제는 심페폴에 도착하면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몰라 속으로 벌벌 떨었다. 하지만 하늘이 그녀를 도우신 건지, 아니면 그에게 벌을 내린 건지, 심페폴에 도착하자마자 전갈은 쓰러져 버렸다. 원인은 과다출혈! 그녀에게 당한 총상이 하필이면 손목동맥을 찢어버린 탓이었다. 병사들이 그 자리에서 급하게 지혈을 시도했지만, 완전할 수가 없었고, 심페폴로 오는 내내 피가 조금씩 흘렀던 것이다. ‘나를 풀어주었으면 완벽히 지혈해 줄 수 있었을 텐데.’ 엘리제는는 그런 생각을 하였다. 뭐, 그녀를 괴롭힐 생각만 한 건 그였으니, 인과응보라 할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심페폴에 돌아오자마자 응급 지혈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는 상태다.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엘리제는 불안함에 치마를 움켜쥐었다. 상대가 일반적인 이면 이렇게까지 불안해하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적국의 포로라도, 고위 귀족의 딸, 그것도 황태자비로 예정된 그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는 루이 니콜라스였다. 일반적인 기준으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특히 이전 삶, 사교계에서 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 바다 건너 브리티아 섬까지 소문이 들릴 정도로 그에 대한 악명은 높았다. 더구나 그는 자신에 대해 악감정도 깊지 않은가? “하아.” 그녀는 그가 병석에서 일어난 후가 걱정되었다. 한편, 파비앙은 한숨을 내쉬는 소녀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파비앙도 루이 니콜라스가 일어난 후가 걱정되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 소녀를 가만히 둘 리가 없으니까. 그는 이 순백한 소녀가 루이에게 고초를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단 내가 막아보기야 하겠지만.’ 루이의 성격을 알기에 자신이 없었다. ‘차라리 누가 이 소녀를 구하러 오기라도 했으면.’ 하지만 누가 온단 말인가? 아무리 밀리고 있다지만, 이곳엔 공화국의 주력이 모여 있다. 그 누구도 여기까지 뚫고 들어올 수는 없다. 역대 최강의 초상 능력자라는 공제나, 서대륙 최강검이라는 검제라면 혹시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니, 공제나, 검제라도 무리겠지.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이 적지에 올 리도 없고.’ 그들은 제국군을 이끄는 통수권자다. 동시에 제국의 다음 대를 이끌 황제 후보이기도 하고. 파비앙은 엘리제가 아무리 제국에서 존경받는 예비 황태자비라 해도, 그들이 목숨을 걸고 이 적진에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 히이잉! 한 필의 백마가 제국군 사령부가 위치한 프라바에 도착했다. 백마에 탄 이를 알아본 병사들이 경례했다. “충성!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말에서 내리는 이는 다름 아닌 3황자 검제 미하일. 전날 벌어진 프라바 공방전 때 서쪽 전선에 나가 있다가 지금 복귀한 것이다. “총사령관은?” 짧게 묻는 그의 표정은 평소와 전혀 달랐다. 화사한 얼굴 속에 타오르는 감정은 선명한 분노! 그 섬뜩한 기세에 질문을 받은 병사는 흠칫 놀라 답했다. “아, 안에 계십니다.” “그래.” 그는 거친 걸음으로 사령부 건물로 들어갔다. ‘빌어먹을. 리제가 잡혀갔다고? 그 루이 니콜라스에게?’ 파란 핏줄이 튀어나오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들끓는 감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형님은 도대체 뭘 한 거야? 이래놓고 약혼자라고? 자기 여자 하나 변변히 지키지 못하면서?!’ 안다. 황태자 린덴이 일부러 그녀를 지키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것을. 불가피한 상황이었겠지. 그럼에도 용서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만큼은 지켰어야 했다. 설사 하늘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해도 말이다. 어쩔 수 없었단 말은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녀가, 그 작은 소녀가 루이 니콜라스의 손아귀에 있다는 사실이니까! ‘빌어먹을. 리제.’ 처음 혈탑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자신을 밀이라 부르며 눈물짓던 모습.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알버트를 수술하던 모습, 또 전염병이 돌 때 자신을 치료해 주던 모습. 미하일에겐 그 하나하나가 너무나 소중한 모습들이었다. 이미 그녀는 그의 가슴속에 너무나 깊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이렇게나 소중한데. 형님이라 믿고 맡겼었는데! 그런데 잃어버려?’ 곧 린덴의 방 앞에 도착한 그는 잠시 비천검을 잡았다. 감정이 들끓어 조절되지가 않았다. 이대로 린덴을 만나면 보자마자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을 것 같았다. “후우, 후우.” 그런데 그렇게 그가 감정을 다스리는 중이었다. 먼저 온 손님이 있는지, 방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대화라기보단 일방적인 고함. “안 됩니다, 전하!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방 밖에서 미하일은 멈칫했다. 고함의 주인은 그도 익히 아는 이였다. 맥가일 원수. 평민으로 군사령관의 위치까지 오른 전설적인 위인. 항상 공손한 그가 황태자에게 소리를 질러? 무슨 일이기에? “절대 안 됩니다! 군 통수권을 포기하겠다니요?!” “난 이미 결정했다.” “그래서요?! 그래서 군 지휘권을 저와 미하일 전하에게 넘기고 심페폴로 홀로 들어가시겠다고요?” “내가 없어도 원수, 자네와 미하일이 있으면 제국군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이기고 있는 전쟁이기도 하고. 그리고 내가 없어도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계획만 마무리되면 이 전쟁은 무조건 승리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맥가일이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고성으로 소리를 질렀다. “심페폴에 홀로 들어가면 아무리 공제라 불리시는 전하라도 죽습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들이야? 방 밖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는 미하일은 기가 막힌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내가 죽는 게 낫지. 엘리제, 그녀가 잘못되기라도 하는 것보다는.” “전하!”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아나, 원수?” 린덴이 비틀린 목소리를 내었다.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야. 응? 심장이 멈춰 있는 것 같다고.” 황태자에게 맥가일은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전하. 이 늙은이가 이렇게 두 손을 빌며 부탁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심페폴을 함락하면 황태자비께서는 자연스레 저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심페폴 함락? 그게 언제인데? 우리의 그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최소 한 달은 기다려야 하는데 그때까지 기다리라고? 지금도 내 심장은 찢어질 것 같은데?” 미하일은 밖에서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벌컥 문을 열어버렸다. 저 바보 같은 대화를 더는 못 들어주겠다. “……?!” “미하일 전하?!” 갑작스레 나타난 그에게 둘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놀란 것은 미하일이 더했다. 황태자 린덴의 믿지 못할 옷차림을 본 탓이었다. “아니, 형님? 그 옷은?” 어디서 많이 본듯한 푸른 제복. 황태자이자 제국군의 총사령관인 린덴이 공화국군의 제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입을 쩍 벌리며 황당한 표정을 짓는 동생에게 린덴이 뭘 보냐는 듯 말했다. “뭐?” “……그거 설마 변장이라고 한 것은 아니겠지? 그거 입고 나 공화국군이요, 하고 심페폴에 잠입하려고?” “네놈이랑 상관없는 일이니 신경 꺼라.” “하나도 안 어울린다고! 그리고 형님 얼굴이 얼마나 유명한데! 아무도 안 속을 거야!” 하지만 린덴은 듣는 척도 안 하고 자신이 할 말만 하였다. “어쨌든 잘 왔다. 명령할 게 있었는데.” “뭐? 무슨 명령?” 린덴은 자신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그에게 건네었다. 무슨 부엌 식칼 다루듯 대수롭지 않게 건네었지만, 검에는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총사령관의 군 통수권을 상징하는 검이었던 것이다! “이걸 왜?” “이제 네 거다.” “뭐?” “난 이제 심페폴에 갈 것이니, 이제 네가 군을 이끌어야지.” “……!” 미하일은 입을 벌렸다. 이게 무슨? “참고로 이건 총사령관으로서 내리는 군령이다. 반론은 허용하지 않아.” 미하일은 검을 받지 않고 손을 절레절레 저었다. “어이, 형님. 잠시 진정하라고. 맨날 얼음장 같더니 오늘따라 안 어울리게 왜 그래? 나도 많이 흥분하긴 했지만, 형님이 이러시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잖아.” 하지만 린덴은 짧게 말했다. “받으라고. 군령이다.” “아아, 잠시만. 하아.” 미하일은 이성을 잃은 형님에게 한숨을 내쉬고 맥가일 원수를 바라봤다. 맥가일 원수는 제발 좀 말려 달라고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아, 형님. 그건 알지? 심페폴에 공화국군이 몇 명이 있는지.” “…….” “10만이야. 10만.” “그래서?” “뒷일을 생각해야지. 가서 잘못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하지만 린덴은 차갑게 말했다. 낮고 차갑지만 그득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다. “10만이든, 100만이든 뭐? 뒷일? 지금 그녀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그게 중요한가?” “……!” 미하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이런 분이셨나? 심장이 얼음으로 만들어진 분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쨌든 받아라. 내가 심페폴에 가 있는 동안 네가 군을 이끌어야 하니.” “싫어.” “내 말 못 들었나? 군령이다.” “군령? 내 평생 이런 황당한 군령은 처음이네. 아니, 뭐. 황당한 것을 떠나서.” 미하일은 품속에 손을 집어넣더니 봉투 하나를 꺼내 린덴에게 집어던졌다. “나 이제 군령 안 따라도 되는데?” “……?!” “사표 낼 거거든.” 맥가일은 미하일이 던진 봉투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 봉투에는 ‘사표’라고 적혀 있었다. 이 황자들이 정말! 맥가일은 절망 어린 표정을 지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9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Ps. 원래는 내일은 주말이어서 쉬려고 했으나... 출판사님이 이번 주말도 연재하라고 하셔서... 연재합니다...;;; 다음 주말부터 주 5회 연재로 바뀔 예정입니다. 00095 4-1 탈출 ========================================================================= 1장 탈출 - 2 “나 이제 제국군 아니야. 그러니 형님이 뭐라고 할 권한 없어.” “너 설마?” “그래. 리제는 내가 구하러 가.” “……!” 린덴이 낮게 말했다. “안 돼. 용납지 않겠다.” “용납은 무슨. 내가 그냥 간다는데.” “네가 가면 죽는다.” “그러는 형님은?” “황위를 포기할 셈이냐?” 미하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아니지. 어떻게든 살아 돌아올 거야.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리제를 구하러 가는 거니까. 그리고 내가 죽으면 리제도 못 구하잖아?” 그러며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어? 리제를 들고 하늘로 솟아나면 되겠지. 땅으로 꺼지거나. 그러면 살 수 있겠지.” “미쳤군.” “지금 만만치 않게 미친 형님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시간 아까우니 그만 이야기하자. 리제는 내가 구하러 가. 형님은 여기서 군대나 잘 지휘하라고.” “안 돼.” “아, 도대체 왜?” “내 것을 네놈 따위에게 맡길 순 없으니까.”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미하일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린덴이 말을 이었다. “난 너와 달리 심페폴에 혼자 들어가도 죽지 않으니까.” “뭐? 그게 무슨?” 린덴이 가만히 미하일에게 물었다. “미하일. 마지막으로 묻겠다. 정말 내 군령을 안 들을 것이냐?” “당연하지.” “그렇군. 알겠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이고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창의 방향은 심페폴이 있는 남쪽이었다. 그런 형의 옆모습에 미하일은 일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뭐지?’ 그리고 형이 다시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미하일은 그 불안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린덴의 동공이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초상 능력의 발현이었다! “이런 제길!” 그가 어떤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지 깨달은 미하일은 화급히 몸을 피하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었다. 아무리 검제라도 미리 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저 초상 능력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이런!” 미하일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천장이 빙글빙글 돌며 의식이 흐릿해졌다. 린덴의 고유 능력인 ‘의식 추방’이었다. “이이……! 이런 제길!” 미하일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저항했다. 광대한 기운이 전신에 몰아치며 초상 능력에 맞섰다. 하지만 린덴은 말했다. “포기해. 이미 의식 추방에 걸린 이상 아무리 검제인 너라도 저항할 수는 없다.”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금빛으로 빛났다. 재차 의식 추방을 사용한 것이다. “아……!” 미하일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런 사기적인……!’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린덴의 초상 능력은 치명적 단점이 존재함에도 그 속성상 위력이 너무 사기적이었다. 미리 대비하면 버틸 수가 있지만, 무방비 상태에서 일단 걸려들면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버텨야……!’ 마지막 발악으로 미하일의 눈이 금빛으로 빛났다. 그도 자신만의 고유 초상 능력을 발현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쉬어라.” 린덴이 그의 뒤로 오더니 뒷목을 손날로 후려쳤다. 지난번 자신을 기절시킨 것을 복수라도 하려는 듯이 똑같은 동작이었다. “커억!” 결국 미하일은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식 추방에 걸렸으니 최소 며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아아…….” 맥가일 원수가 두 황자의 다툼에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어가는 일이란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린덴의 코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전하!” “괜찮다.” 익숙한 태도로 피를 닦아낸 그는 쓰러진 미하일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영창에 넣어.” “영창…… 말입니까?” “그래, 이왕이면 습한 곳으로.” 참고로 습한 영창엔 벌레가 많이 나온다. “죄목은…… 상관의 허락도 없이 사표를 내려 한 죄. 그리고 상관 명령불복종죄 정도면 되겠군.” “…….” 무언가 개인적인 사심이 가득 들어간 듯한 즉석 판결이었다. 심지어 별로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정말, 정말…… 이렇게 가셔야겠습니까?” 맥가일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린덴에게 매달렸다. “그래.” “전하, 제발…… 가면 죽습니다.” 린덴이 의아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부터 원수도 그렇고, 미하일 이놈도 그렇고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왜 죽는단 말이지?” “……!” “모두 뭔가 잊어먹고 있는 것 같군.” 린덴은 미리 챙겨둔 짐을 등에 메었다. 무얼 집어넣었는지 산더미처럼 큰 배낭이었다. “내가 왜 앙젤리에서 공제(空帝)란 이름을 얻었는지 말이야.” “……!”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공화국, 그놈들이야.” 맥가일의 눈이 커졌다. 린덴은 차갑게 말했다. “특히, 만약 엘리제, 그녀가 터럭 하나라도 상해 있다면 루이 니콜라스와 공화국 놈들은 내가 왜 허무(虛無)의 공제라 불렸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될 것이다.” *** 하루가 지났다. 공화국의 군의가 모조리 달라붙어 치료한 덕분에 루이 니콜라스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는데. “내…… 오른손을 잘라야 할 수도 있다고?” 루이 니콜라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수석 군의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답했다. “네, 각하. 죄송합니다.” “아니? 총알 한 발이잖아! 손이 터져 나간 것도 아니고! 손목 끝에 맞았는데 왜 손을 잘라?! 제대로 치료한 것 맞아?!” 루이 니콜라스가 버럭 화를 내었다. “총알이 하필 손목동맥을 뚫고 지나갔습니다. 응급 수술 끝에 지혈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동맥을 살리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원래 손목동맥은 손에 혈액을 공급해 주는 혈관입니다. 반대쪽에 동맥 하나가 남아 있으나, 그래도 손끝으로 피가 원활히 가지 않을 수도 있어 괴사가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공화국의 군의들은 출혈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손목동맥을 묶어버렸다. 현대 지구라면 동맥을 묶는 것이 아니라 미세 실로 찢어진 동맥을 봉합했겠지만, 이 시대에 그런 섬세한 수술이 가능한 외과의사는 오로지 엘리제 그녀밖에 없었다. ‘등불을 든 여인에게 도움을 요청할까도 했지만.’ 안타까운 얼굴을 한 군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루이 니콜라스가 수술을 받는 도중에도 ‘엘리제, 엘리제!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이러며 이를 가는데 어떻게 도움을 요청했겠는가? “만약 경과를 지켜본 후, 손에 괴사가 진행된다면 불가피하게 손목을 절단해야 할 듯합니다.” “……!” 루이 니콜라스의 얼굴이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얼굴에 난 상처도 모자라 손목을 절단해야 한다고? “꺼져.” “……네?” “꺼지라고 이 돌팔이들아! 네놈들이 제대로 치료를 안 해서 그런 거잖아!” 와장창! 그는 성한 팔로 주변의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의사와 간호원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쳤다. “각하! 진정하십시오!” 부관인 파비앙 중령이 화급히 말렸으나, 이미 루이 니콜라스는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닥쳐! 술! 술을 가져와!” “각하, 상처에 술은 좋지 않습니다. 얼굴의 상처도…….”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닥치라고!” 쨍그랑! 유리잔이 파비앙의 얼굴을 정확히 스쳐 벽면에 부닥쳐 박살 났다. 조금만 옆이었으면 파비앙의 얼굴은 유리잔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전갈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으르렁거렸다. “내가 이렇게 되었다고 파비앙, 너마저 무시하는 거냐? 응? 그런 거야?!” “…….” 파비앙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옆의 병사에게 말했다. “포도주를 가져와라. 가장 순한 것으로.” “네, 중령님!” “기분을 상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먼저 군무로 나가보겠습니다. 몸에 안 좋으니, 부디 과음은 하지 마시길.” 그리고 공손히 경례 후 병실을 나섰다. 문을 닫은 파비앙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전쟁은 졌구나.’ 이미 전황은 기울대로 기울어 있었다. 그런데 총사령관인 전갈마저 저런 상태니.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든 아군의 피해를 줄일 방법을 생각해야겠군.’ 그때, 병실 안에서 찢어지는 듯한 괴성이 들렸다. “제길! 나를 이런 꼴로! 엘리제! 가만두지 않겠다!” “……!” 그 한심한 꼴에 파비앙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총통 시몬 니콜라스의 독자인 루이 니콜라스는 어릴 때부터 큰 실패라곤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오로지 성공과 천재라는 칭송. 또한 공화국의 지배자인 총통의 아들이란 배경 속에서 그는 삐뚤어진 괴물로 자라났고, 그 결과가 저것이다. 추하기 그지없었다. ‘하아, 오늘은 레이디 클로랜스가 머무는 관사에서 머물러야겠군.’ 니콜라스의 부관인 그는 따로 집무실이 있어 엘리제가 있는 관사에 갈 필요가 없었지만, 왠지 기분이 안 좋았다. 설마 저런 몸 상태로 루이가 허튼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술에 취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답답하구나.’ *** 그날 늦은 밤. 잠자리에 들기 전, 파비앙은 엘리제를 찾아갔다. “불편한 것은 없으십니까, 레이디?” “덕분에요. 항상 감사합니다.” 차분히 감사를 표하는 엘리제를 보며 파비앙은 눈에 감탄을 띠었다. ‘적진에 포로로 있는데, 참 의연하구나. 저렇게 어린데.’ 물론 안다. 겉으론 차분하지만,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다는 것을. 여린 소녀의 몸으로 홀로 적진에 포로로 잡혀 있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속마음이 어떻든, 소녀는 흔들리는 모습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세계를 호령하는 브리티아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다운 의연함과 기품이었다. 최근 추한 모습만 보이고 있는 자신의 상관과 참으로 비교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소녀의 대단함이 어디 의연함과 기품뿐이겠는가? 전쟁 초반 몽셀 왕국의 기습을 막을 작전을 제안한 것도, 제국군 야전병원의 사망률을 2%로 내린 것도, 코프스크 대회전을 승리로 이끈 것도, 전염병을 막은 것도 모두 이 소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화국군이 이리도 빨리 패배의 구렁텅이 빠진 것은 공제도 검제도 아닌, 모두 이 소녀 때문. 하지만 파비앙은 적의가 들지는 않았다. 그저 감탄이 나올 뿐이다. ‘이제 17살이라 했던가? 내 동생보다도 어리잖아.’ 그런데 저렇게 작고 여린데 누구보다도 강해 보인다. 그 사실이 참으로 신기했다. “무슨 할 말이 있으신가요, 중령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파비앙에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그냥…….”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밑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가, 각하! 진정하십시오!” “닥쳐! 비켜!” “지, 진정을……!” 파비앙과 엘리제는 놀라 서로 바라봤다. “이…… 소리가 뭐죠?” 그녀가 감금된 방은 관사 꼭대기 4층이다. 그런데 얼마나 소란을 피우고 있는지 1층에서 들리는 듯한 고함이 4층까지 선명히 들렸다. ‘아아! 결국!’ 파비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단번에 상황을 판단했다. 루이 니콜라스가 드디어 엘리제를 만나러 이곳에 온 것이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안 돼. 막아야 해.’ 물론 포로에 대한 처우는 승자의 권한이었다. 최근 들어, 인권이니 뭐니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인권은 무슨. 결국, 전쟁에서 포로를 죽이고 살리고는 승자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이런 고귀한 소녀를 단순히 분풀이를 위해 농락하려 하다니? 이 소녀는 향후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신분이다. 아니, 그걸 떠나서 파비앙은 이 소녀가 루이 같은 이의 손에 농락당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운 소녀다. 단순한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은 많다. 하지만 이 소녀에게서는 그런 겉만 아름다운 여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광채가 있었다. 강한 발걸음으로 자신의 길을 가며, 타인을 밝히는 이에게서 나는 광채가 말이다. 즉, 추악하게 망가진 루이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레이디 클로랜스.” “네?” 파비앙은 불안에 떨리는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절대 이 방에서 나오지 마십시오.” “……!” “반드시입니다.” 그러고 파비앙은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096 4-1 탈출 ========================================================================= 1장 탈출 - 3 밖으로 나온 파비앙은 욕설을 삼켰다. 젠장, 안에서 잠기는 형태면 좋을 텐데, 불행히도 포로를 감금하기 위한 것이라 밖에서 잠기는 형태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각하를 막을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답은 불가능이었다. 지금의 루이는 어떤 말도 듣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막아야 해. 무조건.’ 저 추악한 루이에게 더럽혀질 소녀가 아니었다. 막아야 한다. 곧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의 루이가 건물 4층으로 올라왔다. 수술받은 오른손을 붕대로 감고 있었는데, 복도 멀리서도 술 냄새가 확 풍겼다. “파비앙? 네놈이 왜 여기에?” 루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레이디 클로랜스에게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루이가 휘적휘적 파비앙에게 다가왔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입구를 경호하던 병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쫓아왔다. 루이는 비틀린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저 안에 레이디에게 나도 볼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 파비앙의 얼굴이 굳어졌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다음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음에 다시?” 루이가 입술을 비틀었다. “내가 말했지. 비키라고. 아니면.” 그리고 섬뜩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죽고 싶어?” “……!” 파비앙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레이디 클로랜스에게는 무슨 볼일이 있으신 것입니까?” “무슨 볼일이냐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빨리 비켜!” 하지만 파비앙은 고개를 저었다. “비킬 수 없습니다.” “뭐?” 루이는 헛웃음을 지었다. 파비앙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는 비록 포로이나, 제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될 여인입니다. 이런 밤에, 그것도 이렇게 술에 취해서 오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다음에 다시 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 하하!” 루이는 허리를 굽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짜악! 파비앙의 뺨을 성한 왼손으로 갈겨버렸다. “……!” 머리가 울리는 충격에 파비앙은 휘청거렸다. 주륵. 입술이 찢어졌는지 한줄기 피가 흘러내려 주먹으로 닦았다. “진정하십시오, 각하.” “닥쳐!” 짜악! 다시 따귀가 날아왔다. “비켜. 좋은 말로 할 때.” 하지만 파비앙은 물러서지 않았다. 빨개진 뺨으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각하의 명이라도 오늘만큼은 따를 수 없습니다.” “너……!” 루이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는지, 뒤의 병사들에게 명했다. “당장 이놈을 끌고 가 감옥에 가둬! 파비앙 네놈은 지금 이 순간부터 직위 해제다!” “하, 하지만…… 각하.” “어서!” 그러나 병사들은 머뭇거리며 따르지 않았다. 아무리 총사령관이라도, 말이 되는 명령이 있고, 말이 안 되는 명령이 있다. 그리고 지금의 루이는 존경받는 사막의 전갈이 아니라 연달은 패배로 추악하게 몰락한 폐인처럼만 보였다. 그들은 눈치만 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루이는 병사들마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철컥. 권총을 꺼내 들어 파비앙의 머리에 겨눈 것이다! “가, 각하!” 병사들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루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명령하지. 꺼져.” “…….” 자신의 이마에 겨누어진 총구를 본 파비앙의 눈이 흔들렸다. 시뻘게진 루이의 눈은 진심이었다. 자신이 물러서지 않으면 진짜로 쏠 것이다. ‘하. 내가 고작 이런 놈을 위해.’ 파비앙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는 죽음의 공포보단 허탈함을 느꼈다. 지금껏 그의 친우이자 수하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은 무엇이었나. “쏘십시오.” “뭐?” “쏘라고요, 개자식님아.” “……!” 생각지도 못한 욕설에 루이의 눈이 멍해졌다. 지금…… 나한테 뭐라고? “이이……! 너……! 파비앙!” 루이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한번 막 나간 파비앙은 계속 막 나갔다. “어디 한번 쏴봐! 내가 눈 하나 깜짝 하나! 이 개자식아!” “너, 너……!” 루이의 눈이 독해졌다. 그래, 내가 이런 꼴이 되니 파비앙마저 자신을 무시하는 것이다. 다 엘리제, 그 계집 때문이다. 괴물은 그렇게 추하게 생각했다. “좋아. 소원대로 죽여주지.” “각하, 멈추십시오!”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루이는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이었다! 끼익! “잠시만요!” 방문이 열리며 다급한 목소리가 그들 사이를 갈랐다. 결국, 엘리제가 못 참고 방에서 뛰어 나온 것이다! “레이디! 들어가 있으십시오!” 파비앙이 놀라 외쳤다. 작은 소녀의 눈동자에는 겁이 가득했다. 하지만 소녀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니콜라스 원수. 저한테 볼일이 있으신 것 아닌가요? 파비앙 중령님은 그만 놔주시고, 저와의 용무를 보시죠.” “레이디! 들어가라니까요!” 파비앙이 다급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나 소녀는 흔들리는 눈을 다 잡으며 굳은 표정으로 니콜라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하하! 그래! 내가 볼일이 있는 것은 그대이지! 이 파비앙 놈이 아니라!” 루이가 광소를 터뜨렸다. 그는 권총의 쇠뭉치로 파비앙의 머리를 후려쳤다. “커억!” 파비앙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뇌진탕으로 기절했다. “중령님!” 엘리제는 화급히 몸을 숙여 그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살피기도 전에 거친 손이 그녀의 손목을 잡아 들었다. “꺄악!” “이런 놈 살필 정신이 있어? 응?” 루이가 추악한 눈으로 그녀의 몸을 살폈다. “이제 내 용무를 봐야지. 안 그래?” “……!”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는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제 자신에게 일어날 비극을 짐작했다. ‘아…… 안 돼!’ 엘리제의 몸으로 다시 돌아온 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그녀는 눈동자를 돌려 창문을 바라봤다. 4층 창문.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손을 뿌리치면 저 창문에 뛰어갈 수 있다. 물론 뛰어내리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녀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았다. 살아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 사막의 전갈에게 치욕을 당할 바엔 정말 죽는 게 나았다. ‘아아……!’ 그리고 이 순간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한 얼굴이 있었다. 린덴 드 로마노프.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정체 절명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솔직해졌다. 그가 보고 싶었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가 보고 싶었다.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그의 무뚝뚝한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주여, 제발!’ 그 순간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그 더러운 손 놔라.” 지극히 차가운, 그러면서 억겁의 염화와도 같은 분노가 담긴 목소리. 도저히…… 이 자리에서 절대로 들릴 수 없는 목소리에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설마……? 설마……? 놀란 건 그 자리의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고, 공제?!” “……!” 천상의 조각 같은, 그러면서도 시리도록 차가운 남자가 불같은 분노로 명했다. “그 더러운 손 놔. 잘라 버리기 전에.”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제는 왈칵 눈물을 흘렸다. ‘아아…… 전하!’ 린덴 드 로마노프. 그녀를 사랑하는 그가 왔다. *** 모두가 유령을 보듯 린덴을 바라봤다. 헛것을 본 듯 눈을 비비는 병사도 있었다. “어떻게? 공제가 이곳에?” 루이도 그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엘리제를 붙잡고 있던 팔을 자신도 모르게 풀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거지?” 하지만 린덴은 그들에게 신경도 쓰지 않았다. 푸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엘리제만 바라봤다. “이리로 와.” “……!” 낮지만 따뜻한 목소리. 엘리제는 다시 와락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으며 그에게 달려갔다. 모두 적의 총사령관 린덴이 출현했다는 사실에 놀라 그녀를 잡을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듯 경보를 울렸다. “적이다! 적의 총사령관, 공제가 왔다!” “비상! 관사의 4층이다!” 순식간에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사령부 옆의 관사는 병사들과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따라서 머물고 있는 병사가 수도 없었다. 아까야 루이가 개인적으로 추태를 부리는 중이었던지라 별로 나와 있는 병사가 없었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적의 총사령관이 자국 사령부에 출현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했다. “뭐? 적의 총사령관이?” “농담 아니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수도 없는 병사들이 놀라 관사의 방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얼핏 봐도 관사 건물 안에만 50이 넘어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경보에 놀란 인근의 병사들도 관사 근처로 달려왔다. 곧 건물 근처로 푸른 제복의 공화국군이 수도 없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사면초가(四面楚歌)의,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린덴은 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달려온 소중한 소녀만 바라봤다. “저, 전하?” 엘리제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와락! 린덴이 그녀를 갑작스레 껴안았다. “저, 전하?!” 그의 단단한 품이 그녀를 으스러지게 짓눌렀다. 그녀를 안은 그의 팔이 파르르 떨렸다. “……괜찮았나?” 짧지만 낮은 떨림이 담긴 목소리. 그 음성에는 그간 그의 고통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엘리제는 다시 한 번 가슴을 울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타앙! 날카로운 총소리가 울리며 그들이 서 있는 바닥 주변을 때렸다. 엘리제는 놀라 고개를 돌렸다. 루이 니콜라스였다. 그가 성한 한쪽 팔로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어떻게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잘 됐군. 공제. 스스로 무덤 자리를 찾아온 건가?” 린덴은 가만히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여전히 양팔로 엘리제를 감싸 안은 채로. 그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에 루이 니콜라스는 발끈했다. “상황 판단이 안 되는가 보군. 먼저 그 건방진 눈알부터……!” 그때, 린덴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 판단이 안 되는 건 너다, 전갈.” “뭐?” “다치더니 머리도 나빠진 건가. 이 나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그렇게 여유가 있을 수 있는 거지? 신기하군.” “……!”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하늘이 질긴 삶을 이어준 걸까? 린덴의 말을 듣는 순간, 루이는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고, 머리를 뒤로 휙 젖혔다. 동시에 린덴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고, 공간이 갈라졌다. 서걱! “크악!” 찢어지는 비명. 루이의 목이 있었던 부위의 공간이 통째로 베어진 것이다. 린덴의 무(無) 속성 초상 능력인 공간 베기였다! 초상 능력이 발현하기 전 뒤로 목을 젖힌 탓에 다행히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지만, 기다란 자상을 입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목에 기다랗게 난 상처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왔다. 루이는 벌벌 떨며 외쳤다. “모두 쏴! 뭐해?! 빨리! 쏘라고!” 그런데 그때, 린덴이 중얼거렸다. 정확히 루이 니콜라스의 목을 주시하며. 그러며 엘리제가 험한 꼴을 보지 못하도록 더욱 강하게 그녀를 안았다. “피했어?” “……?!” 그 말과 동시에 루이는 다시 한 번 죽음을 느꼈고, 이번엔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하지만. 공간이 다시 한 번 뒤틀렸다. 그리고...!! ============================ 작품 후기 ============================ 내일 10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97 4-1 탈출 ========================================================================= 1장 탈출 - 4 서걱!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탓에 정확한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지만, 간신히 목숨을 건진 대가는 컸다. 그의 왼팔이 팔꿈치에서부터 공간 베기에 그대로 잘려 나간 것이다! “크아악! 크악!” 린덴은 그 고통스러운 비명을 차갑게 바라봤다. 엘리제를 납치한 것도 모자라, 그녀를 범하려 했다. 일말의 동정도 필요 없는 놈이다. 오히려 이 순간, 확실히 숨통을 끊어놔야 했다. 하지만 그때였다. “공제를 잡아라!” 타앙! 타앙! 사격 준비를 마친 공화국군이 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린덴의 눈이 다시 금빛으로 변하며 그와 그녀의 주위의 공간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무(無)속성의 공간 방어였다. ‘아쉽군.’ 그는 바닥에서 구르며 비명을 지르는 루이 니콜라스를 차갑게 바라봤다. 이렇게 사격을 받는 상황에서 자신 혼자면 모르겠지만, 엘리제가 있는 상태에서 저놈을 잡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다가 일순 방어가 약해져 그녀가 상하기로도 하면 큰일이니까. “이제 가야겠군.” “어, 어떻게요?” 엘리제는 혼이 빠진 얼굴로 말했다. 지금 이게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상황인지 모르겠다. “밖으로.” “네? 그게 무슨……?” 엘리제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고 계단이고 모두 공화국군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그녀는 곧 답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그가 어떻게 아무도 모르게 이 건물 4층에 올라왔는지도 알 수 있었다. 린덴이 그녀의 무릎과 허리를 잡아 번쩍 안아 들었던 것이다. “저, 전하?!” “꽉 잡고 있어. 놀라지 말고.” “네?” 그러고 그가 자신을 안고 향하는 방향을 본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저, 전하? 저기는?!” “꽉 잡아.” 창문이었다! 그는 4층의 창문으로 가더니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꺄악!”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이, 이렇게 죽다니!’ 물론 아까 전처럼 루이에게 범해질 바에는 죽는 게 낫긴 했지만, 이건 너무 갑작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린덴이 그녀를 안은 그대로 발을 허공에 내디뎠다. 동시에 그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무(無) 속성 초상 능력, ‘공간 밟기’였다. 그의 발이 닿는 곳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그는 마치 계단을 밟고 내려오듯 허공을 내려왔다. “저, 저!” 관사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는 공화국군은 입을 쩌억 벌렸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너무 놀라 총을 쏘는 것도 잊어버렸다. “이, 이런 사기적인……!” 한 장교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기적. 그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증기선과 기차가 다니고, 사진이 찍히는, 총과 대포의 시대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능력이라니. “정신 차려! 정신 차리지 않으면 2년 전, 염왕(炎王) 지펠을 잡을 때 꼴이 난다!” “……!” 누군가의 외침에 모두 침을 꿀꺽 삼켰다. 2년 전, 검은 대륙의 앙젤리에서 공화국군은 제국의 1황자 염왕 지펠과 싸웠었다. 결국, 지펠은 전신이 포탄에 갈가리 찢겼지만, 공화국군이 입은 피해도 악몽과도 같았다. 더구나 공제는 염왕에 비해 몇 수는 강한 초상 능력자 아닌가? “공제는 무(無) 속성 초상 능력자! 강하지만 그만큼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니 정신 차리면 잡을 수 있어!” 한 장교가 외쳤고 모두가 그 독려에 정신을 차렸다. 그래, 초상 능력자라도 결국 인간이다. 그리고 이곳은 공화국의 본거지. 10만이 넘는 병력이 있으니, 아무리 공제라도 살아서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리라. “잡아!” “보는 대로 쏴! 생포하지 않아도 된다!” 늦은 밤, 크림의 수도 심페폴이 환하게 빛났다. 갑작스러운 적, 공제를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그때 린덴은 엘리제를 미리 준비해 둔 말 위에 올리고 있었다. “말 위에 탈 수 있겠나?” 10만에 달하는 병사가 자신을 잡기 위해 움직이고 있지만, 그에게선 별다른 초조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네, 전하…….” 그 뚫어지는 시선에, 그 갈망과 걱정에 엘리제는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전하, 어째서……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그런 질문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 알고 있다. 지금 그는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아무리 그가 강하다 해도, 이곳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그는 왔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바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런 그의 마음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한 번 울렁거렸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그녀가 앉아 있는 말 위에 올라와 그녀의 등 뒤에 앉았다. “……!” 갑자기 등 뒤에 와 닿는 그의 감촉에 그녀는 흠칫 놀랐다. “같이 가야 한다.” 말은 한 필이다. 그러니 같이 타고 달려야 한다. 그리고 말이 두 필이어도 각자 따로 타면 날아드는 총탄에 그녀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전하.” “물론 네가 나를 불편해하는 것은 안다.” 이전 엘리제의 잔인한 말로 둘은 불편한 상태로 지냈었다. 그러다 오랜만에 만난지라, 린덴으로선 엘리제의 흔들리는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도 잠시만 참아라. 지금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니.” 그러며 그는 몸을 숙여 말의 고삐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를 감싸 안았다. “……!” “불편하겠지만 참도록.” 사심 어린 손길이 아니었다. 혹시나 초상 능력을 뚫고 오는 총탄이 있더라도 자신의 온몸으로 그녀를 보호하려는 몸짓이었다. 실제로 작은 체구의 그녀는 그의 탄탄한 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두근. 그런 그의 의도를 앎에도 엘리제의 가슴은 다시 한 번 미친 듯이 뛰었다. 자신의 배를 감싸 안은 그의 차가운 손이 너무 뜨거웠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주책 맞은 두근거림이었다. ‘나 어떻게 해.’ 엘리제는 빨개진 얼굴로 생각했다. “역시 불편한가?” “아, 아니요!” 엘리제는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붉어진 얼굴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심장의 떨림은? 혹시라도 새어나가 그가 알아차리면 어떻게 하지? 그때 그가 말했다. “출발한다. 겁먹지 말도록. 넌 내가 지킬 테니까.” “……!” “간다.” 그는 구둣발로 말의 옆구리를 찼다. 히이잉! 그리고 시작되었다. 그녀와 그, 그리고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 “쏴!” “발사!” 정면에 십여 명의 병사가 나타났다. 미리 기다리고 있었는지, 그들은 진형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무리 공간 방어라도 잘 짜인 진형에서 나오는 화망(火網)을 형성한 집중포화를 맞으면 무사할 수 없다. 자신은 몰라도 그녀가 다칠 수도 있다. 그렇게 판단한 린덴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눈 가리기!” 병사들 개개인 눈앞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그러고 곧 울려 퍼지는 비명! “아악! 눈이!” “안 보여!” 눈에 들어오는 빛을 일시적으로 일그러뜨리는 능력이다. 이제 저들은 십여 분 정도 시력을 잃을 것이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그 정도면 린덴에겐 충분했다. “잘 잡아.” “네, 전하!” 린덴은 그대로 눈을 부여잡고 있는 병사들 사이를 단숨에 돌파해 버렸다. ‘이대로 계속 직진. 그러면 성벽에 도착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는 심페폴 내부의 구조를 자세히 파악하고 들어왔다. 자살하러 온 것이 아니라,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니까. 당연히 탈출로를 익혀둔 것이다. 하지만 그 길은 당연히 평안하지 않았다. “공제다!” “잡아라!” 타앙! 타당! 콰앙! 수많은 소총병의 사격은 물론, 수류탄의 공격도 수도 없었다. 그때마다 린덴은 초상 능력으로 방어하며 길을 돌파했지만, 엘리제가 걱정되어 불안 초조했다. ‘내가 다치는 것은 괜찮아.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안겨 있는 작은 몸을 바라봤다. 이 소녀가 작은 상처라도 입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한계가 오기 전에 빨리 탈출해야.’ 린덴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초상 능력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그의 몸에 큰 무리를 준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다른 황족들과 속성이 전혀 다른 초상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아직 과학적으로 정확히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초상 능력은 로마노프 일가에 유전적으로 내려오는 혈액의 어떤 성분이 자연의 에너지와 반응하여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화력, 수력, 풍력, 뇌력 같은 에너지와 말이다. 그래서 로마노프 일가의 사람들은 대체로 그러한 속성 에너지를 능력으로 사용한다. 현 황제인 민체스터는 벼락의 힘을, 1황자였던 지펠은 불의 힘을. 3황자 미하일도 오러와 검술과는 전혀 별개인 그 자신만의 속성 에너지를 능력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린덴의 의식 추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긴 했지만 3황자의 초상 능력은 그의 검술 실력과 결합하면 재앙과도 같은 위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린덴의 초상 능력은 그 무엇도 아니었다. 바로 무(無) 속성이었다. ‘처음엔 아예 초상 능력이 없는지 알았지. 그 생각대로 어린 시절엔 아예 초상 능력이 없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의 비극 이후, 단 하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거치며 깨달았다. 자신에게 초상 능력이 없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무(無) 속성. 어마어마한 능력이었다. 하지만 단점이 존재했다.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그의 몸에 반작용이 돌아왔다. 이전 엘리제를 만나러 가기 위해 사용하던 변검 능력 정도는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이런 전투 기술들은 반작용이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왔다. 그녀를 위해. ‘상관없어. 그런 반작용 따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 단지 하나. 그녀만 무사히 구해내면 된다. 그러면 그 뒤에는 얼마든지 괴로워도 상관없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멈추십시오, 전하.” “……!” “본 장군을 등 뒤에 두고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표정의 변화가 없던 린덴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아는 목소리였던 것이다. 린덴은 천천히 말을 멈추어 세웠다. 확실히 ‘그’를 등 뒤에 두고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래, 오랜만이군.” 하얀 수염과 지긋한 주름살. 하지만 형형한 눈빛. 공화국의 최정예인 흉갑기병대의 사령관이자, 공화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 위고 중장이었다! “2년 전 일 이후로 뵙고 싶었습니다, 전하.” “…….” “드디어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위고 중장은 이마를 가로지르는 흉터를 만지며 말했다. 2년 전, 앙젤리에서 린덴에게 당한 상처였다. 스릉. 위고 중장은 갈색 군마 위에서 기병 검을 꺼내 들었다. 엘리제가 불안한 시선으로 린덴을 봤다. “전하…….” 린덴도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소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내가 지킬 테니. 그는 가만히 위고 중장을 바라봤다. 위고는 늙은 사자답게 멀찍이서 신중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설프게 덤볐다가 무 속성 초상 능력에 걸릴까 대비하는 것이다. 린덴도 신중하긴 마찬가지였다. 7연발 리볼버를 꺼내 든 그는 찰칵 장전했다. ‘의식 추방을 쓸까?’ 하지만 의식 추방은 상대가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경우, 효과가 떨어졌다. 특히 위고 중장 같은 강자가 정신을 굳건히 하고 있으면 효과가 없었다. 미하일의 경우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태에 걸려서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만약 대비했으면 그도 그렇게 무참히 쓰러지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그들은 신대륙 서부 황야의 무법자들이 서로 노려보는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타앙! 시작은 린덴의 권총이었다! 리볼버가 불을 뿜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1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98 4-1 탈출 ========================================================================= 1장 탈출 - 5 파앗! 위고 중장은 총알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냈다. 전신을 감싼 오러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조심하십시오! 검에는 눈이 없으니!” 그러고 그는 그대로 린덴에게 돌진했다. 타앙! 타앙! 연달아 총을 쏜 린덴은 권총을 엘리제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까앙! 검과 검이 부닥치며 불꽃을 튀겼다. “……!” 자신의 코앞에서 멈춘 위고의 검을 보며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곧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얼핏 생각하면 린덴의 일방적 우세일 것 같았다. 그에겐 초상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위고는 공화국 최고의 검술가. 린덴의 초상 능력을 강렬한 의지로 피하고 버텨내며 맹렬한 프랑소엔 검식으로 그를 몰아붙였다. 브리티아 제국 내에서도 위고에 맞먹는 검술을 지닌 자는 검제 미하일과 엘리제의 큰오빠 렌 남작, 그리고 로열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린덴에게는 품 안에 안겨 있는 엘리제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지금 가급적 강력한 초상 능력의 사용을 자제해야 했다. 심페폴을 탈출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초상 능력을 사용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하! 전하. 순순히 포기하십시오. 그러면 포로로서 대접해 주겠습니다!” 늙은 위고는 의기양양해 외쳤다. 린덴은 얼굴을 굳혔다. ‘이대로는 안 되겠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끝을 내야겠어.’ 저 멀리 적의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저들마저 합류하면 그때는 더욱 빠져나가기 어려워진다. 그렇게 그가 무리해 강력한 초상 능력을 이끌려던 찰나, 팽팽한 접전이 끝나는 일이 일어났다. 위고와 린덴, 둘 모두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타앙! “어?” 위고는 자신의 어깨를 멍하니 바라봤다. 총알에 꿰뚫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시선을 앞으로 돌리니, 공제의 품에 안긴 어린 소녀가 이를 악물고 리볼버로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리볼버가 다시 불을 뿜었다. 위고의 시야가 빛으로 번쩍였다. 타앙! 타앙! 타앙! 이번엔 간신히 오러로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흔들린 이상 승부는 끝났다. 초상 능력의 올가미에 걸려든 것이다. 린덴의 ‘눈 가리기’, ‘의식 추방’이 번갈아 들어갔고, 결국 위고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말에서 떨어졌다. 한동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 위고를 쓰러뜨린 후 린덴은 다소 당황해 엘리제를 바라봤다. 이 작은 소녀가 총질이라니? 작은 소녀는 떨리는 손으로 총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떻게 총을 쏠 생각을 한 것이지?” “쏘라고 주신 것 아니었나요?” “아니, 그냥 가지고 있으라 준 건데…… .” “그, 그런가요. 죄, 죄송합니다.” 당황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피식 웃었다. 이런 모습도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내가 미친 게 맞는 거겠지? 어쨌든 그녀 덕에 큰 문제 없이 공화국 최강자인 위고를 막을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추가적인 흉갑기병대가 달려오는 듯해, 린덴은 서둘러 말을 달렸다. “잡아! 저러다 빠져나가겠다!” 길을 달리면 달릴수록 쫓는 인원이 많아졌다. 위고와 싸우며 잠깐 낭비한 시간이 컸다. 얼핏 뒤를 돌아보니 대로에서 까마득한 기병대가 그를 쫓고 있었다. 아무리 그라 해도 이제 멈추어 서면 끝이었다. 한 번에 성문을 주파해야 했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저 멀리 성문이 보였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성벽으로 말을 달렸다. 그리고 드디어 성문에 도착한 순간. “…….” 엘리제는 좌절했다. 성문이 굳건히 닫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 중인 수도의 성문이 한밤중에 열려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잡아라! 저 앞에 갇혔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등 뒤에서는 흉갑기병대가 떼를 지어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저들을 모두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짧은 순간 고민해 봐도 그녀의 머리로는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늘로 솟아오르지 않는 한,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가겠는가?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의외의 행동을 하였다. 말을 좀 더 앞으로 몰더니, 성문에 다가간 것이다. “전하?” “쉬잇.” 그는 조용하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성문에 손을 가져다 대더니 눈을 감았다. “……?” 마치 벽을 짚고 명상이라도 하는 듯이 고요한 표정. 하지만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주위 공간이 시야가 어지러울 정도로 일그러지더니! 우웅. 우웅. 고요한 파동과 함께 철로 만든 성문이 기이한 진동음을 내며 떨리기 시작한 것이다. “……?!” 그 놀라운 광경에 엘리제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쩌적. 쩌저적. 마치 흙으로 만든 얇은 벽이 지진에 금이 가듯 성문에 금이 갔다. 이후 와르르. 철로 만든 성문이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다! “……!”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에 엘리제는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았다. 그건 뒤따르던 흉갑기병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말을 달리는 것도 잊고 멍하니 멈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저, 저……?” 이 믿을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킨 린덴이 짧게 말했다. “가자.” “…….” 그런데 그를 올려다본 엘리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저, 전하……?!” “조용히.” 그의 입가에서 피가 주륵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안색도 창백한 게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린덴은 흔들림 없는 얼굴로 말했다. “간다.” 그러고 발굽으로 말허리를 차 심페폴을 벗어났다. 공화국의 자랑 흉갑기병대는, 그리고 여러 병사는 경악에 휩싸여 감히 그를 쫓을 생각도 못했다. *** “커억!” 심페폴의 성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린덴은 왈칵 피를 토해냈다. “전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새빨간 선홍색의 피였다. 출혈양도 많았다. 하지만 린덴은 옷으로 피를 닦더니 오히려 그녀를 보며 걱정했다. “다친 데는 없느냐?” “……!”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왜? 왜? 저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도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걸까? 목숨이 위험한 곳에 왜 자신을 구하러 온 걸까? -알잖아. 그래, 안다. 모를 수가 없다. 저렇게 온몸으로 외치는데. 이제 외면하지 못한다. “미안하다.” 그는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 판단해서 널 위험하게 만들었어.” 그는 사막의 전갈의 기만술에 넘어가 그녀를 포로로 만든 것을 말했다. 그녀는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이전 삶 자신에게 단두대를 내렸던 이 남자가 왜 이렇게 바보같이 바뀌었을까? 도대체 왜?!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급히 그에게 말을 꺼냈다. “빨리 몸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안 됩니다. 피를 토하신 걸로 봐서 내부 장기가 상하셨을 수도 있어요.” “정말로 괜찮아.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니 시간 지나면 저절로 나을 거다.” 그러나 의사로서 엘리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피를 토했고, 저렇게 안색이 창백하다. 분명 몸 내부 어딘가가 상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냥 시간이 지나면 나을 거라고? “전하…… 빨리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그런데 린덴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상황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기쁜 표정으로. “지금…… 나를 걱정해 주는 건가?” “……!” “그렇지? 걱정해 주는 것이 맞는 거지?” 그는 약간의 씁쓸함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너의 걱정이…… 의사로서 환자를 염려하는 마음이겠지만…… 그래도 기쁘군.” 그의 목소리에는 이렇게라도 그녀의 관심과 염려를 받을 수 있어서 기쁘다는 마음이 들어 있었다. 그 순간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야. 의사로서 환자를 향한 걱정?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이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듯 저밀게 아픈 감정이 어찌 의사로서 환자를 향한 감정일까? “어쨌든.” 린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곳은 이런 대화를 나누기 적절하지 않군. 곧 공화국군이 몰려올 테니 말이야. 따라잡히기 전에 빨리 이동해야겠어.” “그러면 북쪽으로?” 제국군의 진영은 심페폴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북쪽은 안 돼. 심페폴 바로 북쪽엔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으니까.” 물론 제국군 군영을 향한 최단 거리는 일직선으로 북쪽 방향이다. ‘나 혼자라면 강행돌파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적들이 밀집해 있어도 린덴 혼자라면 돌파를 시도해 볼 법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겐 그녀가 있다. 무리하게 돌파를 시도다가는 그녀가 상할 수도 있다. ‘그건 절대 안 돼.’ 이미 그는 그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가 상할 바엔 자신이 죽는 것이 낫다. 그러니 그는 차선책을 택했다. “남서쪽으로 간다.” “남서쪽이요?”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남서쪽이면 제국군 군영과 오히려 멀어지는데? “심페폴 북쪽에 모든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기 때문에 남서쪽엔 적의 병력이 거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서쪽엔 우크라 산맥의 지맥이 연결돼 있다.” “……!” 엘리제는 그의 의중을 알아챘다. “우크라 산맥은 크림반도에서 가장 험난한 산맥. 우린 공화국군의 눈을 피해 우크라 산맥을 타고 북쪽으로 이동한다.” *** 그렇게 그들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크라 산맥으로 향했다. 린덴의 예상대로 공화국군은 거의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방향을 파악당하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공제가 북쪽이 아니라, 남서쪽으로 향했다고?” “네, 장군.” “우크라 산맥을 통해 북쪽으로 향할 속셈인가 보군.”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지난밤, 엘리제의 총에 맞은 어깨 부위를 붕대로 감싸고 있었다. ‘확실히 우크라 산맥이면 우리 군의 눈을 피해 북쪽으로 달아날 수 있겠어.’ 우크라 산맥은 험지. 아무리 반도 중부 이남을 장악하고 있는 공화국군이라도 산맥에 속속들이 군을 배치하고 있진 않는다. “그래도 놓칠 수는 없지.” 그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역전의 기회야.’ 현재 공화국군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전방위적으로 제국군에게 밀리고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유는 예비 황태자비인 엘리제 때문이었다. -황태자비를 구하자! -등불을 든 여인을 납치한 공화국군을 가만두지 말자!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었다. 고귀한 몸으로 등불을 든 채 제국군과 함께하는 여인이었고, 그들 모두의 마음속 레이디였다. 그런 그녀를 잡아갔으니! 제국군의 분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전장 어디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고 공화국군을 향해 돌진했고, 병력의 질은 물론 기세까지 밀린 공화국군은 속수무책으로 패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라스 각하마저.’ 지난밤, 공제는 등불을 든 여인을 구해가며 니콜라스의 왼쪽 팔을 잘랐다. 그렇지 않아도 오른팔에 총상을 입어 몸 상태가 안 좋았던 니콜라스에겐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중상이었다. 또다시 응급 수술을 받아 간신히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그리고 몸 상태보다 최악은 정신 상태였다.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엘리제! 공제!’ 하며 분노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총사령관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급하게 임시로 흉갑기병대의 사령관인 그가 공화국군을 이끌고 있었다. ‘지금 상태로 가다간 우리 군의 패전은 기정사실. 이제 단 하나 남은 기회는 공제를 잡는 것이다.’ 그래도 단 하나 운이 좋은 것은 바로 적 총사령관인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이 자신들의 세력권에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우크라 산맥이 복잡해도 공제 혼자라면 모를까. 등불을 든 여인과 함께라면 움직임의 제한이 있을 터. 병력을 투입하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그렇게 판단한 위고 임시 사령관은 강하게 명령했다. “가능한 병력을 모두 우크라 산맥에 투입해라. 반드시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을 잡아야 한다.” 그 명대로 공화국의 병력이 우르르 우크라 산맥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린덴과 엘리제를 잡기 위하여. ============================ 작품 후기 ============================ 내일 1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099 4-2 동행 ========================================================================= 2장 동행 - 1 지긋지긋하게 긴 크림의 겨울 탓에 아직 우크라 산맥은 흰 눈에 덮여 있었다. 산맥에 도착해 어느 정도 길을 걸은 린덴과 엘리제는 깊은 동굴을 찾아 잠시 휴식을 취하러 들어갔다. 공화국군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북쪽으로 넘어가야겠지만, 휴식을 취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더는 길을 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린덴의 상태 때문이었다. “전하……?!” “괜…… 찮다.” 린덴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했다. 엘리제가 화들짝 놀라 그의 몸을 만져 보니 마치 얼음장 같았다. ‘저체온증(Hypothermia)!’ 이 정도면 34도보다도 낮아 보였다. 굉장히 낮은 체온으로, 오히려 고열보다도 더 안 좋은 상태다. 열마저 나지 못할 정도로 안 좋은 상황에 저체온증이 오기 때문이다. ‘이런 몸 상태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힘든 티 하나 내지 않고 그녀를 이끌었다. 오로지 그녀를 지키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전하…….’ 엘리제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와 재회한 이후 현기증이 날 듯 계속해서 마음이 어지러웠다. ‘전하는 왜 이렇게 바뀐 것일까?’ 이전 삶에선 이러지 않았다. 그와 그녀는 부부, 즉 동반관계였지만 그건 말 그대로 형식적인 관계일 뿐이었다. 아니, 그녀의 마음은 안 그랬지만 그는 그랬다. 그의 눈은 항상 차가웠고,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 어떤 감정도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이 바라는 염원만 강렬히 추구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는 괜찮다. 너는 괜찮은가? 눈 때문에 많이 추운데…….”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숨을 쉬면서도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그. 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바보 같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목숨을 버릴 각오로 나를 구하러 왔고, 저렇게 안 좋은 상태에서도 본인의 몸은 돌보지 않고 나를 걱정하고 있을까. 바보같이. 왜 이렇게 바뀌었을까. 왜 이렇게 그는 바보가 되었을까? ‘이러지 마세요. 전하.’ 그녀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지 못하도록. ‘저 힘들어요.’ 뚜욱. 결국,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음이 너무나 흔들렸다. 찢어질 듯한 흔들림이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아팠다. 너무나. ‘문제가 있으면 직시해.’ 큰오라버니 렌의 말이 떠올랐다. ‘눈을 피하면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그래, 그의 말이 옳다. 자신은 더 이상 그의 마음을 외면할 수 없다. 어떻게든 답을 내야 한다. 알고 있다. 그런데 그때였다! “쿨럭! 쿨럭!” “전하!” 그 거친 기침에 그녀의 가슴이. 마음이 덜컹 내려앉았다. 급히 그를 살피니 전신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 찮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야.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린덴은 눈을 크게 떠 그녀를 바라봤다. 처음이다. 그녀가 그에게 목소리를 높인 것은.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이 그에게 목소리를 높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저 끝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저렇게 몸이 안 좋은데, 신경 쓰지 말라니. 그냥 두면 낫는다고? 말이 되는 소리인가! “빨리 치료를 해야겠습니다. 이대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요.” 계속 가슴이 요동쳐 엘리제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침착해. 엘리제. 마음을 가라앉혀. 너는 의사야. 전하를 돌볼 사람은 지금 나밖에 없어. 그녀는 최대한 빠른 동작으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먼저 활력 징후를 확인했다. ‘족배 동맥에서도 맥박이 확인돼. 정확한 혈압은 모르지만, 맥의 강도를 보면 다행히 쇼크 상태는 아니야.’ 문제는 맥박수와 체온, 그리고 내장 출혈이었다. ‘맥박은 분당 140회, 체온도 34도 이하의 저체온증이야. 내장 출혈은 다행히 처음 이후로 재발은 하지 않고 있지만. 왜 이렇게 맥박이 빠르고 체온이 낮은 거지? 특별히 감염증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린덴은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라고 했다. 그녀는 저체온증의 기전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떠올렸다. ‘저체온증은 물에 빠지거나 하지 않는 한, 보통 심각한 염증 프로세스의 결과로 나타나는데. 그러면 그의 초상 능력이 몸속의 사이토카인을 자극하는 걸까? 사이토카인 스톰처럼?’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초상 능력은 아직 과학이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이니까. 어쨌든 그녀는 이 순간 해야 할 조처를 결정했다. ‘일단 염증 작용을 가라앉히고,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해야 해.’ 염증 작용을 가라앉히는 방법은 하나. 항염증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그들에게는 항염증약이 있었다. 린덴이 무겁게 들고 온 가방에 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약은 어째서?” “네가…… 혹시 아프면 먹이려고 챙겨왔다. 네가…… 몸이 자주 아프니까.” 린덴의 짧은 답에 엘리제는 다시 가슴이 울렁거렸다. 진짜 바보 같은 남자다. 일단 그녀는 그에게 항염증약을 복용시켰다. 낮은 체온에 목이 마르는지, 그는 간신히 약을 삼키며 말했다. “고맙다.” “…….” 그는 입꼬리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래도 나쁘진 않군. 그대가 이렇게 나를 걱정해 주는 게. 지금 이 상황이 꿈인가 여겨질 정도야.” “전하…….” “꿈이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은데…….” “그런 이야기는 몸이 다 낫고 하십시오.” “그래, 걱정하지 마라. 금방 좋아져 그대를 지킬 테니.” 그의 목소리가 차차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지나치게 무리한 탓에 잠이 들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자고 일어나마.” 그러고 그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최대한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해.’ 저체온증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굴의 기온도 추웠다. 아무리 항염증약을 먹었다지만, 이대로 잠이 들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어떻게든 체온을 높여야 했다. 그녀는 일단 자신이 치마 위 겉에 두르고 있는 외피를 벗어 그에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온 짐에서 보온이 될 만한 모포를 찾았다. 이렇게 우크라 산맥을 탈 걸 미리 계산한 것인지, 그는 모포마저 가져온 것이다. 그녀가 춥지 않도록. 그녀는 그 모포도 그에게 둘러주었다. ‘안 돼. 이걸로는 모자라.’ 그녀는 고민했다. 어떻게 그를 더 따뜻하게 하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를 조금 더 따뜻하게 해줄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순간 멈칫했다. 아무 생각 없이 시행하기에는 주저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의사니까. 이건 치료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 그녀는 그렇게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엘리제는 그에게 다가가 두 팔로 그를 감싸 안았다. “……!” 그의 몸이 순간 흠칫 떨렸으나, 곧 잠잠해졌다. 다행히 잠에서 깨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가 깨서 자신의 얼굴을 보면, 붉어진 얼굴을 고스란히 들켰을 테니까. ‘전하…… 린덴…….’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몸이 그녀의 온몸으로 느껴졌다. 어째서일까? 그의 몸은 차가운데, 그의 몸과 맞닿은 그녀의 얼굴과 몸은 뜨겁게 빨개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품 안에 닿은 그를 느끼니 주책맞게 가슴이 뛰었다. 이전 삶이 떠올랐다. 파국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를 바랐다. 자신은 그의 품에 있기를 원했고, 그가 자신의 품에 있기를 바랐다. 마치 지금처럼 말이다. ‘전하…… 제발 좋아지세요. 주여, 도와주세요.’ 그녀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를 더욱 끌어안았다. 이렇게 자고 일어나면 그가 다시 완전히 좋아져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의 가슴에 닿은 그녀의 손에 한 가지 금속 물질이 와 닿았다. ‘이건? 뭐지?’ 십자가 목걸이였다. 끝 부분이 오돌토돌한 것이 진주 장식이라도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전하께서 왜 십자가 목걸이를?’ 그녀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그가 십자가 목걸이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신을 믿기는 했지만, 좋아하진 않았으니까. 마음속 깊이 한 가지 강렬한 염원(念願)을 가지고 있는 그는 용서를 강조하는 십자가의 기치를 싫어했다. 그런데 그 순간,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 ‘설마……?’ 엘리제의 손끝이 떨렸다.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 그녀의 어머니, 테레사의 유품이 바로 저것과 같은 진주 장식 십자가 목걸이였다. 그리고 그녀는 이 전쟁에 참여하기 전, 한 남자에게 그 유품을 징표로 준 적이 있다. 바로 ‘론’에게. ‘아니, 아닐 거야. 그냥 비슷한 종류일 거야. 진주 십자가 목걸이가 어머니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지금까지 이상했던 점들이 무수히 떠올랐다. 단순히 닮았다기엔 너무나 똑같았던 론과 린덴의 모습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조심히 그의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그의 목걸이를 꺼내 들었다. “……!”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 문구를 읽은 그녀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자신이 론에게 준 그 목걸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왜 론 님에게 준 목걸이를 전하가?’ 무수히 많은 생각이 점멸했다. 하지만 당연히 답은 하나였다. 론이 린덴이었던 것이다! ‘어째서? 어째서 전하가? 왜 론 님으로 나에게 접근했던 것이지?’ 그녀는 혼란에 빠졌다. 그와의 여러 만남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살려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첫 만남은 테레사병원에서 황실 시종의 총상 수술 때문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그와 만났었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그냥 보러 왔다.’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자신을 보러 왔다. 갑상선의 병도 황실십자병원에서 치료받으면 되는데, 굳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꼭 자신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리고. ‘먹을 거라도 사주마. 아니, 딸기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나? 아니면 망고 푸딩? 바나나 타르트? 원하는 음식은 뭐든지 사줄 테니 따라와.’ 디저트는 손도 안 대면서, 늘 자신을 위해 맛있는 디저트 카페에 갔으며. 뮤지컬이라곤 관심도 없으면서. ‘너와 같이 보고 싶다.’ 늘 자신과 함께했다. 왜 그랬을까? 왜 전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했을까? 당연히 이유는 간단했다. 그때부터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굳이 ‘론’이란 인물로 자신을 속였던 것일까?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추측이 떠올랐다. ‘설마 내가…… 전하를 싫어해서?’ 확신과 비슷한 추측이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황태자가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가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전하…….’ 엘리제의 마음이 찌잉 울렸다. 그녀는 그를 싫어했다.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서 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론’이란 인물로 정체를 숨기고 다가온 것이다. 그것도 수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전하…… 왜 그렇게 하셨어요.’ 그런 생각들을 하니 알 수 없이 가슴이 울컥했다. 론도에서 ‘론’과 보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무뚝뚝하고, 위트 넘치는 재미는 없었지만 행복한 순간순간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그와의 만남을 기다렸다. 병원에서 일하다가도, 오늘은 그가 오지 않을까,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하…….’ 그녀는 다시 중얼거렸다. ‘언제부터 제 옆에 있었던 것인가요. 언제부터 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인가요.’ 그리고 떠오르는 마음. ‘저는 언제부터 전하께 마음이 흔들렸던 것인가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는 다시 그의 품 안에 ‘징표’를 넣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전하, 론 님으로 저 속인 것 넘어가 드릴 테니.’ 그녀는 중얼거렸다. ‘그때 약속했던 것처럼 나중에 이 ‘징표’ 저에게 돌려주세요. 지금 아픈 것 다 낫고, 무사히 론도로 돌아가서요.’ -주여, 당신의 가호가 임하소서. 그녀는 징표에 써진 문구를 중얼거렸다. 그 축복이 그에게 임하기를. ============================ 작품 후기 ============================ 내일 13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00 4-2 동행 ========================================================================= 2장 동행 - 2 그 시각, 제국군의 사령부 프라바. 한 무리의 젊은 장교들이 총사령관실에 몰려들어 강하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각하! 출정을 허락해 주십시오!” “이대로는 참을 수 없습니다!” 나이 지긋한 노장군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참게. 조금만 기다리면 우리 군의 승리야.” 하지만 젊은 장교들은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하극상이라 처벌받아도 할 말 없는 목소리 높이였다. “승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등불을 든 여인이 적의 손아귀 안에 있단 말입니다!” “아니, 지금 예비 황태자비께서는 심페폴에서 탈출해 우크라 산맥에…….” “그러니까 지금 당장 달려가 구해야 합니다!” 노장군, 임시 총사령관 맥가일 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게 몇 번째 시달림인지 모르겠다. 일반 병사, 초급 장교, 중급 장교, 고급 장교, 심지어 장군들까지! 당장 심페폴과 우크라 산맥으로 달려가자고 얼마나 그를 들들 볶던지. 심지어 지금 자신에게 달려들고 있는 젊은이들은 귀족파의 영식들이었다. 바로 클로랜스 가문과 대치점에 있는. ‘등불을 든 여인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는 저희 모두의 레이디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며 지금 당장 등불을 든 여인을 구하러 가야 한다고 외쳤다. “이 사람들아. 다 이긴 전쟁이야. 그렇게 막무가내로 움직이면 어떤 피해를 입을지 몰라. 그리고 개인을 구하기 위해 군을 움직일 수는 없어.” 고래로 한 개인을 위해 군 전체를 움직인 사례는 없다. 심지어 동방의 청에서는 하늘의 아들이라 부르며 떠받드는 천자(天子), 황제가 북쪽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일어났는데, 그때 청나라 사람들의 선택은 천자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황제를 뽑는 것이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천자도 이럴진대, 아무리 예비 황태자비라도 일개 여인을 위해 군을 움직일 수는 없다. 더구나 다 이기고 있는 전쟁 아닌가? 지금의 압도적인 전황과 더불어 황태자 린덴이 뒤에서 꾸민 전략이 곧 시행되면 승전이 굳혀질 것이다. ‘하지만…….’ 맥가일은 씁쓸히 생각했다. ‘이 나도 당장 뛰쳐나가고 싶으니 문제지.’ 알고 있다. 절대 군을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것을. 하지만 임시 총사령관인 자신마저 우크라 산맥으로 총진격을 외치고 싶은데, 다른 이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황태자 전하의 지시가 아니었다면 당장 움직였을 텐데.’ 린덴은 엘리제를 구하러 떠나기 전, 단호히 명령했다. 그녀는 자신이 구할 테니 맥가일은 절대로 군을 움직이지 말라고. 이제 한 달, 아니, 빠르면 보름. 그 정도의 시간이면 린덴의 전략이 완성된다. 황태자는 그걸 망치지 않기 위해 단호히 명령한 것이다. ‘하아, 힘들군.’ 그렇게 젊은 장교들이 물러가고 맥가일 원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의 빈자리를 채우랴, 저런 호소들을 들으랴,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총사령관저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병사가 급박히 뛰어들어왔다. “각하, 큰일 났습니다!” “……?!” 맥가일 원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큰일? 무슨?! 병사가 다급한 얼굴로 외쳤다. “3황자 전하께서!” “……?!” “영창에서 탈옥하셨습니다!” 깜짝 놀란 맥가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분명 2중, 3중으로 잘 감시하라고 했을 텐데?” 황태자인 린덴이 적 진영에 홀로 들어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3황자는 제국군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린덴이 그를 영창에 가두라고 명령한 것은 단순히 악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런 이유가 있어서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3황자의 성격상, 가만히 두었다가는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니까. “철저히 감시하고 있었는데…….” “있었는데?” “초상 능력으로 철창을 모두 잘라버리고, 하늘을 솟아올라 사라졌습니다. 이 종이를 던지시면서요.” 그러며 병사는 엉거주춤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종이에 써진 글씨를 읽은 맥가일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표> 검기사단 단장직. -중장 미하일 드 로마노프. 아아……! 도대체 이놈의 황자들은! 맥가일은 좌절한 마음으로 물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셨느냐? 그건 파악했겠지?” “남서쪽, 우크라 산맥을 향해 가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며 병사는 주저주저하다가 조심히 말했다. “바보 형과 예쁜 레이디를 구해오겠다고. 혼자 갈 테니 따라오지 말라고…….” “…….” 그 말을 들은 맥가일은 하얀 머리를 쥐어뜯었다. 울고 싶었다. *** 엘리제의 기도 때문일까, 아니면 약이 잘 들은 것일까, 다음 날 정신을 차린 린덴의 몸은 한결 좋아진 상태였다. “몸 상태는 어떠십니까, 전하?” “많이 괜찮아진 것 같다.” 린덴은 신기한 눈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원래 초상 능력의 반작용이 오면, 며칠은 고생하는데 이번엔 하루 만에 말끔히 좋아졌다. 체온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 덕인가.’ 린덴은 왠지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다 좋아진 것 같아. 네 덕분인 것 같다. 내가 자는 사이, 무슨 처치를 한 거지?”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트, 특별히 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 “네, ……네!” 린덴은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렇게 당황하지? 그는 워낙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그녀가 밤새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단 것을 알지 못했다. “어, 어쨌든 다행히 좋아진 것 같지만, 이상 증상이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워낙 염증 반응이 심했던 것 같아 뒤늦게 이상 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린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의사로서 으레 하는 이야기겠지만,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는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았다. “좋군.” “네?” “엘리제, 너에게 걱정의 말을 들으니 말이야. 몇 번이고 아파도 좋겠어.” 그래서 너의 걱정을 조금 더 들을 수 있다면. 그러면 몇 번이고 아프고 괴로워도 좋을 텐데. 린덴은 그런 마음으로 말했다. “……!” 그 말뜻을 알아들은 엘리제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그러지 마십시오.” “뭐가?” “그, 그러니까…….” 엘리제는 말을 더듬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하나도 정리가 안 됐다. “……?” 황태자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엘리제는 필사적으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일단 이 당황에서 벗어나 할 말은 해야 한다. 그녀는 숨을 내쉬며 굳은 마음으로 말했다.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무얼 말하는 거지?” “저 구하러 온 것 말입니다.” “……!” 엘리제는 일부러, 최대한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는 이 제국의 황제가 되셔야 하는 존귀한 몸이십니다. 고작 저 같은 일개 여인을 위해 이런 위험을 자초하시다니요.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셨습니다. 잊으시면 안 됩니다. 황제가 될 전하의 몸은 이 제국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는 것을. 앞으로는 절대 이런 일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물론 안다. 황태자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구하러 왔는지.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버리고 자신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다른 이는 몰라도, 황태자인 그만큼은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그녀의 말에 심기가 상한 듯 비틀린 목소리였다. “웃기지 마.” “……!” 린덴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황제? 고작 그 자리 따위가 뭐라고?” “저, 전하!” “물론 황제 자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 하지만!” 황태자는 숨을 들이쉬었다. 그래, 황제가 되는 것은 중요하다. ‘그날’ 이후 그가 살아가는 이유가 된 하나의 염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자리니까. 하지만. “너보다 중요하진 않아.” “……!”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에겐 황제도, 이 브리티아 제국도, 나의 이 생명도! 너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으르렁거리듯 내뱉는 그의 말에 그녀의 심장이 다시 파르르 진동했다. ‘아아…… 전하.’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도저히 그를 마주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저 타오르는 시선을, 저 갈망을 감히 마주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러고 거칠게 자신을 바라보도록 하였다. “나를 봐, 엘리제.” “……?!” “나를 보라고.” 엘리제의 눈망울이 크게 흔들렸다. 항상 차갑기만 한 그의 금안은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하였다.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이미 넌 내 심장이 되었으니까. 밀어내려 해도 소용없어.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의 마음이 내려앉았다. 가슴이 떨려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 그 후, 린덴과 엘리제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동했다. 그녀를 구하러 오기 전 짧은 시간, 린덴은 많은 준비를 하였다. 애초에 우크라 산맥을 탈 생각을 하고, 휴대용 비상식량과 보온이 되는 옷, 그리고 자세한 지도와 나침반 등을 챙겨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행히 며칠간은 공화국군을 피할 수 있었다. 어쩌면 이대로 쭈욱 가면, 아무런 문제 없이 제국군 진영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제.” 린덴은 앞서 걷고 있는 엘리제를 불렀다. 하지만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 “엘리제?” “네, 네? 전하?” 그녀가 빨개진 얼굴로 답하자 린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지? 계속 말도 없이.” “아, 아닙니다.”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뭐가 불편한가?” “아, 아니요.” 그녀는 화들짝 말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전하 때문이잖아요.’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라니. 그 말을 들은 순간부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 어떻게 하지?’ 자신의 턱을 잡고 타오르듯 바라보던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계속해서 심장이 뛰었다. 마치 심장이 고장 나 부정맥이라도 온 것처럼. 도저히 그를 마주 볼 수가 없어,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다. “엘리제.” “…….” “엘리제!” 계속되는 외면에 그는 결국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 손목에 느껴지는 뜨거운 감각에 엘리제는 철렁 놀랐다. 그저 손을 잡은 건데 왜 이렇게 심장이 떨리는 것이지? “도대체 뭐하는 거지? 나한테 불만이 있나?” 다시 타오르는 듯한 금색 눈동자.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 없어요. 불만.” “거짓말하지 마.” 그는 그녀가 자신의 눈을 피하자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탁. 다시 그녀의 얼굴을 잡아 자신을 보게 했다. “내가 말했지?” “……!” “도망쳐도 소용없으니 날 보라고. 외면할 생각하지 말라고.” 두근. 두근. 엘리제의 귀에 심장의 고동이 들렸다. 너무 떨렸다. 그의 타오르는 눈동자를 보는 것이, 그의 뜨거운 손에 닿은 감촉을 느끼는 것이, 그의 감정을 마주하는 것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져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타악. 하필 뒤에 있던 나무에 그녀의 몸이 막혔다. 푸스스. 가지 위에 걸려 있던 눈이 그들에게 떨어졌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 둘은 그렇게 잠시 서로를 말없이 바라봤다. 두근. 두근.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엘리제의 가슴이 끝없이 뛰었다. 이러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맹수에게 잡힌 초식 동물이 되었다. 도망치려 했으나, 맹수는 놔주지 않았다. ‘아아…… 전하.’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이 강압적인 상황이 싫지가 않았다. 오히려 느껴지는 감정은 강렬한 속박에 따른 떨림이었다. 싫지 않다. 오히려 그가 더 자신을 몰아붙여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놔, 놔줘요.” 그러나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싫어.” “제, 제발…… 부탁…… 이에요.” 그녀는 빌듯 말했다. 이렇게 더 그에게 잡혀 있으면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그의 얼굴이 굳었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101 4-2 동행 ========================================================================= 2장 동행 - 3 “전…… 하?” 의아한 목소리로 묻자,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 “언제부터 이런 것이지?” “네?” 그녀는 무슨 말인지 몰라 반문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열이 났느냔 말이야.” “아…….” 그 말에 그녀는 자신의 체온을 체크했다. 뜨거웠다. 정확한 온도는 모르지만, 최소 38.5도는 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급히 그의 손에서 벗어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쩌다 고열이…….’ 아마 강행군과 눈 덮인 우크라 산맥의 추운 날씨 탓에 감기가 온 것 같았다. 린덴은 여린 그녀를 배려 못 한 자신을 탓했다. “안 되겠군. 쉬어야겠다.”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화들짝 답했다. 그러며 그녀는 정말 괜찮다는 듯 짐짓 강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냥 감기입니다. 정말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더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발끝이 희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하면 안 되는가? 저 작고 여린 소녀는 왜 이렇게 항상 강한 척하는지 모르겠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 고작 감기이지만 그녀의 몸에서 열이 나니 자신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왜 저렇게 몸은 약해 가지고. 린덴은 앞장서 가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갑자기 닿은 그의 감촉에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전하?” “따라와.” “네?” “쉬어야겠다. 명령이니 따라와.” ***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오다가 발견한 한 동굴이었다. 그들에겐 천만다행으로 우크라 산맥엔 몸을 녹일 만한 작은 굴이 많이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간다.” “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시간이 늦었어.” 린덴은 밖을 바라봤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괜히 밤사이 강행군을 하다 다치거나 그녀의 몸이 악화하면 그게 더 큰일이다. “어차피 근처에 공화국군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 내일은 다시 강행군으로 이동해야 하니, 오늘은 푹 쉬어.” “네…….”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자리에 앉았다. 사실 티를 안 내고 있었지만, 몸이 많이 지친 상태긴 했다. 자신 때문에 걸음이 늦어져 그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 내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과연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 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머리도 아파오고, 전신이 무거웠다. ‘빨리 나아야 하는데.’ 그런데 그때 린덴이 말했다. “잠깐 엘리제.” “네?” “일어나 봐.” 그가 다가오더니 그녀가 앉을 자리에 자신의 외피를 깔아주었다. 그러고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바닥이 차다.” “저, 전하…… 괜찮습니다.” “난 안 추워. 명령이니 편하게 앉아.” 그뿐이 아니었다. 엘리제가 자리에 앉자, 배낭을 뒤지더니, 모포를 꺼내 그녀의 몸에 둘러주었다. “쉬어라.” 그가 들고 온 커다란 배낭엔 별의별 물건이 다 들어 있었다. 따뜻한 외피, 모포, 마른 식량, 비상약 등. 대부분 약한 그녀를 배려하기 위해 챙겨온 것이다. ‘하아, 전하…….’ 그런 그의 마음에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삶이 떠올랐다. 이전에 그는 이렇지 않았다. ‘도망쳐도 소용없어. 날 봐.’ 저렇게 뜨겁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처럼 따뜻하지도 않았다. 그저 한없이 차가웠을 뿐이다. 한없이 차가워 파국에 이르렀고, 결국 자신은 망가져 단두대의 칼날을 받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난 어떻게 해야지?’ ‘눈을 돌리지 마. 직시해.’ 큰오라버니의 말. 그리고 그의 말. ‘날 바라봐.’ 그래, 이렇게 도피해서는 안 된다. 그는 달라졌다. 그러니 과거를 핑계 삼아 그를 피하면 안 된다. 그를 마주 바라봐야 한다. 답을 내야 한다. ‘하아, 하지만…….’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어두워진 얼굴을 린덴이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괜찮나?” “아…… 괜찮습니다.”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 소녀는 약한 모습을 안 보이는 것이지? 고열이 오르는데, 약한 티도 안 내는 모습을 보니 그의 가슴이 더 아프고 끓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괜찮긴. 그렇게 얼굴이 안 좋으면서. 하긴 이렇게 추운데 몸이 좋을 턱이 없겠지. 잠시만 가만히 있어봐라.” 그러더니 그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서 앉았다. 그리고. “……전하?!” “가만히 있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다 안았다. 갑자기 그의 몸이 느껴지며, 그녀의 가슴이 미친 듯이 진동했다.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려는 것이니, 불편해도 참아.” 물론 그건 거짓말이다. 특별한 마음은 많았다. 다만 추운 그녀를 따뜻하게 해주려는 의도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 “난 신경 쓰지 말고, 눈이라도 붙여라.”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탄탄한 가슴이, 차갑지만 뜨거운 체온이,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나 바보 같아.’ 그녀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그가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불편하지 않았다.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따뜻했다. 무거운 마음과 별개로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알고 있어.’ 그는 자신을 좋아한다. 이전 삶과 달랐다. 그리고 자신도 그가 좋았다. 이전 삶처럼,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도 더. 그건 그녀가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자신은 그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난 정말 바보야. 겁쟁이야.’ 이전 삶의 기억이 자꾸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파국을 맞았던 과거가, 단두대의 칼날이 트라우마처럼 마음이 열리는 것을 가로막았다. -직시해야 해. 알고 있다. 그리고 두 번의 삶을 통해 또 알고 있는 사실. -계속 눈을 돌리다가는 후회할 수도 있어. 그래, 알고 있다. 이렇게 계속 눈을 돌리다가는 후회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 안다고. 난 바보야. 겁쟁이야. 정말로.’ 엘리제는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은 그녀가 몸이 아파 그런 것인지 알고, 조금 더 부드럽고 강하게 엘리제의 몸을 안아주었다. 그 강인하고 부드러운 손길에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 그러고 그녀가 잠에 빠진 후. 황태자는 자신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내려다보았다. ‘엘리제.’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움찔. 그녀의 몸이 잠시 흔들렸으나 더 움직이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아프지 마라.” 그는 나직이 말했다. “네가 아프면 내가 더 훨씬 아프니까.” *** 다음 날에도 엘리제는 아팠다. 열이 조금 더 올랐다. 아무래도 하루 정도 더 쉬어야 좋아질 것 같지만, 엘리제는 괜찮은 척 말했다. “다 나았습니다.” 물론 속을 린덴이 아니었다. “거짓말하지 마.” “정말 좋아졌습니다. 보세요.” 그녀는 힘껏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금세 다시 풀썩 넘어졌다. 린덴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 또다시 그의 품에 갇힌 엘리제는 화악 얼굴이 붉어져 말했다. “저, 전하? 왜…… 또?” “이렇게 몸이 뜨거운데 괜찮다고? 거짓말하는 나쁜 버릇은 누구한테 배웠지?” “저…… 정말 괜찮습니다.” 계속 부정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였다. 그런 충동적인 행동을 한 것은. 린덴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가 그녀의 이마에 와 닿았다. “……!” 그의 얼굴이 바로 앞에서 느껴지자 엘리제는 뻣뻣이 굳었다. 온몸이 전기에 맞은 것 같았다. 본인이 행동하고도 린덴도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바로 코앞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얼굴에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이 그녀의 붉은 입술을 훑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바로 앞에서 보이는 그 붉은 입술을 마주하니, 갑자기 타는 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가지고 싶다. 저 입술을 범해, 가지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전하…….” “……!” 그 말에 린덴은 화들짝 놀라 그녀의 이마에서 얼굴을 뗐다. 그러며 헛기침하며 말했다. “어쨌든 이마가 이렇게 계속 뜨겁지 않으냐?” “아? ……네, 네.” 그녀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뭐라고 물어봤는지, 하나도 안 들렸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더 쉬도록 하겠다.”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적들이 없는 루트를 파악해 이동했으니. 지금쯤 공화국놈들은 완전히 반대 방향에서 헤매고 있을 것이다.” 우크라 산맥은 넓다. 그 넓은 산맥에서 2명을 찾는 것은 백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동 루트를 파악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 못 찾지.’ 모략의 달인인 사막의 전갈이라면 모를까, 고지식한 위고 중장이 지휘하는 한, 공화국군이 그들을 찾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다. 애초에 지리를 파악한 린덴이 적들의 허를 찌르는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돼. 너는 빨리 낫기나 해라.” “……네, 전하.” 어쩔 수 없이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 전 자신의 이마에 닿은 그의 느낌이 너무 선명해, 똑바로 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동굴에서 하루 더 쉬기로 하였다. “좀 쉬고 있어라. 난 잠시 근처를 둘러보고 오겠다.” “네, 전하.” 그가 동굴을 나가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나 어떻게 해…….’ 그와 함께하는 한순간, 한순간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에게 도저히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아.’ 곧 그가 돌아왔다. “근처에 공화국군은 없는 듯하다. 안심하고 쉬어라.” “……네.” 그렇게 하루 동안 휴식을 취하며 린덴은 엘리제를 간호했다. 그녀가 춥지 않도록 모포를 둘러주고, 때에 맞게 약을 챙겨주며, 심지어 비상식량을 이용해 죽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중간 밖으로 나가 공화국군이 근처에 오는지도 확인했다. 분명 자신도 힘들 텐데 그런 내색은 일절 없었다. 오로지 그녀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그의 정성 어린 간호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전하.’ 따뜻했다. 몸도 따뜻했지만, 마음이 더 따뜻해졌다. 지구에서 그녀는 고아였다. 몸이 아파도 아무도 그녀를 간호해 주지 않았다. 그저 혼자서 끙끙거렸을 뿐이다. 그런 기억 때문일까? 이런 그의 정성 어린 간호에 더욱 마음이 울렁거렸다. 또다시 알 수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그녀는 무릎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난 정말 바보야. 정말. 정말로.’ 이전 삶, 경험했던 단두대의 칼날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신은 바보였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순간이 좋았다. 너무나. *** 한편 비잔티움 인근의 흑해로 접어드는 해안. 프랑소엔 공화국의 해군 함장 샤를은 조타실에서 부관에게 물었다. “크림반도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한 5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습니다.” “안개가 짙군. 암초가 있는 지역은 아니지만 조심해야겠어.” “네, 함장님.” 10여 척에 이르는 공화국 함대가 크림반도를 향해 안개가 낀 바다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보급품과 지원군 조달을 위한 함대였다. “전황이 많이 안 좋다던데.” “네, 그렇다고 합니다.” “큰일이야.” 샤를은 시가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애초에 무리해서 일으킨 전쟁이다. 아무리 흑해의 재해권을 얻기 위해서라지만, 40만의 장병을 동원하다니. 공화국이 휘청할 규모의 파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리했는데, 전쟁에서 패전한다? 그 후폭풍이 얼마나 심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시몬 니콜라스가 30년간 공화국을 지배했다지만, 어쩌면 이 패전으로 권력을 내려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패전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균형이라도 맞춰야 해. 압도적으로 패해 버리면 강화 회담을 할 때 조건을 감당할 수가 없어.’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제국의 총사령관인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가 아군의 세력권에 갇혀 탈주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패전을 피할 수 없다면 이들이라도 반드시 잡아야 했다. “저, 함장님!” “응?” “전방에 식별 불가한 함정들이 나타났습니다!” “뭐?” ============================ 작품 후기 ============================ 내일 14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02 4-2 동행 ========================================================================= 2장 동행 - 4 샤를은 놀라 망원경을 들었다. 정말 안개 너머로 흐릿한 그림자들이 보였다. “뭐지?” 정확히 보이지 않지만,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배들의 크기도 최소 장갑함이나 전열함으로 보였다. ‘설마?’ 샤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전 세계에서 저런 규모의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는 딱 두 국가뿐이다. 바로 자신들, 프랑소엔 공화국과 브리티아 제국! 그리고 이 근방엔 자신들 말고 공화국의 함대가 없었다. 그 말은……?! “로마노프 황실기, 로열 네이비(Royal Nayv)입니다! 비상! 제국 함대입니다!” 조타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제 샤를 제독의 눈에도 보였다. 적들 배에 꽂혀 있는 장엄한 로마노프 황가의 깃발이! ‘아니, 저 표식은 제국 3함대의 깃발? 왜 동방 힌디에 있어야 하는 3함대가 흑해에?!’ 샤를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브리티아 제국의 3함대는 동방의 힌디 근방에 주둔하고 있는 함대로 어마어마한 화력을 자랑했다. ‘어째서? 내가 지금 잘못 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 순간 그의 이런 의문은 무의미했다. “적 함대 다가옵니다! 함장님,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샤를은 화들짝 명령을 내렸다. “포문을 열어라! 접근을 허용하면 안 돼!” 그러나 제국의 해군, 로열 네이비는 그야말로 세계 최강이다. 공화국도 강한 해군력을 가지고 있지만, 제국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 바다에서 로열 네이비를 당해낼 수 있는 함대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적 함대 U자 형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막아! 포를 쏴! 당장!” 공화국의 함대가 다급히 불을 뿜었다. 하지만 제국의 철갑 함대는 유유히 그 공격을 무시하고 공화국의 함대를 에워쌌다. 마치 그림을 그리는 듯한 우아한 조타술이었다. 그리고 열리는 제국 함대의 포문. 끼잉. 철컥. 철컥. “안 돼!” 샤를은 비명을 질렀다. 콰앙! 하늘을 울리는 대포 소리와 함께, 공화국의 함대가 바다로 가라앉았다. *** 제국의 3함대의 사령관 루이스 후작은 망원경으로 최후를 맞은 공화국의 함대를 바라보았다. “아군의 피해는?” “퀀트 호와 마젤랑 호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현재 수리 중입니다.” “그래.” 루이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 전하의 명은 숙지하고 있지?” “네, 제독.” 제국 3함대의 부사령관 랑트 백작은 고개를 숙였다. “기함인 전열함 퀸(Queen) 호를 비롯한 1진은 이곳에서 대기하며 공화국의 배를 오는 족족 격파한다. 크림반도의 공화국군의 총알과 밀이 한 톨도 남지 않을 때까지 보급을 완전히 끊을 것이다.” 루이스 백작은 황태자 린덴이 내린 두 번째 명을 전달했다. “그리고 자네의 2진은 굴카족 용병들과 함께 크림반도의 남쪽에 상륙한다.” 굴카족. 힌디 북쪽 히리야 산맥의 전투 민족으로, 서대륙 밖에서 제국군에 드문 패배를 안겨준 절대의 강병이었다. 지금 3함대와 함께한 대규모 수송선에는 그 용병들이 3만이나 타고 있었다. 제국군의 수까지 합치면 5만 이상의 대군. “공화국군이 밀집해 있는 심페폴 이남은 현재 무주공산. 우리 3함대가 그 이남을 모조리 점령한다.” 루이스 백작은 차갑게 말했다. “이 전쟁은 그걸로 끝이다. 황태자 전하의 명을 따라 우리 제국 3함대의 손으로 이 전쟁을 끝낸다.” *** 한편 우크라 산맥의 한 기슭. 한 화사하게 생긴 꽃 같은 남자가 건량을 씹고 있었다. “아,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남자는 지도를 보며 투덜거렸다. “지금쯤 이쯤 도착해야 하는데? 설마 바보 형님, 길 잃은 것 아니겠지?” 그러며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 경관이라곤 눈과 나무, 그리고 봉우리밖에 없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설마 길을 잃은 건 나인가? 여기가 아닌 건 아니겠지?” 남자는 다시 지도를 뚫어지라 살폈다. 왠지 길을 잃은 것은 연애 바보 형님이 아니라, 자신인 것 같다. 사실 그는 길을 찾는 데 영 소질이 없었다. 동방에서 무사 여행할 때도 툭하면 길을 잃었으니까. “아, 정말 어디에 있느냐고?!” 그런 그의 주변에는 이십여 명의 푸른 제복을 입은 공화국 병사들이 쓰러져 신음 흘리고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검제(劍帝),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 자신도 모르게 우크라 산맥에서 조난 중이었다. *** 그렇게 동굴에서 휴식을 취하고, 엘리제와 린덴은 다시 산을 이동했다. 이틀을 푹 쉰 탓에 엘리제의 몸은 많이 나아졌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산을 이동하던 중이었다. “여기서 잠시만 쉬고 있어라.” “네?” 그녀를 놔두고 린덴은 잠시 어딘가를 다녀왔다. 그리고 곧 나타난 그는 손에는 의외의 것이 들려 있었다. “전하, 그건?” “꿩이다.” “꿩이요? 그건 어째서……?”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식량으로 사용하려고.” “아…….” 산맥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챙겨온 비상식량이 거의 떨어졌다. “꿩은 못 먹나?” “아니요. 잘 먹어요.” “잘 먹어?” “네, 맛있잖아요.” 린덴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생각했다. ‘한국에서도 은근히 찾아 먹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한국에서 병원 생활을 하며 가끔 외과의 높은 교수들과 회식하러 간 적이 있다. 흔하게 먹는 요리는 아니지만, 나름 닭과 오리를 섞은 듯해 별미였다. “그런데 불을 피워도 되나요?” 불을 피우면 연기가 오른다. 그러면 공화국군에 그들의 위치를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잠깐이니 괜찮다. 초상 능력으로 가리면 되니까.” “아…….” “그 정도 초상 능력은 몸에 부담도 가지 않아.” 확실히 전투에 사용하는 초상 능력이 아니면, 간단간단한 것들은 몸에 부담을 거의 주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요리할 테니.” “전하께서…… 요리를 하신다고요?” 엘리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평생 요리는커녕 주방에서 물 한 번 안 묻혀봤을 텐데 요리라니? 하지만 린덴은 무뚝뚝한 말투로 말했다. “그래, 나 나름 잘한다.” “…….” 전혀 신뢰가 가지 않는 말이었다. 어쨌든 린덴은 요리를 시작했다. 털을 다듬어 꼬챙이에 꿩을 꿰고, 장작을 모으고, 성냥으로 불을 지피고. 어찌 된 일인지, 의외로 정말 능숙했다. “이런 건 도대체 언제……?” “2년 전, 앙젤리에서.” 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앙젤리 전쟁에서 그는 사령부의 사령관이 아니라, 일선 부대의 전투 지휘관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전하가 해주는 요리를 먹는 날이 오다니.’ 엘리제는 복잡한 시선으로 장작 구이에 열중 중인 린덴을 바라봤다. 참 다시 살고 볼 일이다. 그가 직접 해주는 요리라니! 지난 삶에서는 상상도 해본 적 없다. 심지어 그녀가 앉아 있는 바위에는 모포가 펼쳐져 있었다. 춥다고 그가 직접 깔아준 것이다. ‘이러고 있으니 꼭 캠핑 온 것 같네.’ 장작에 불이 붙으며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추운 겨울, 남자가 땔감을 가져와 불을 붙이고 여자를 위해 맛있는 장작 구이를 해준다! 눈이 빨개져 그들을 쫓고 있는 공화국군만 아니면, 완전히 알콩달콩한 캠핑의 한 장면이었다. ‘하아.’ 다시 좋은 기분이 들어,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았다. 이 순간이.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바보같이. 아무런 생각 없이 지금처럼 따뜻한 불을 쬐며 그를 바라보고만 있고 싶었다. -이 겁쟁아. 빨리 이 마음을 정리해. -알잖아. 도망만 가면 언젠가는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창 장작 구이에 열중하던 린덴이 꼬치에 고기를 꽂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번 맛봐라.” 그런데 그녀는 고기를 바로 받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 “왜 그러지?” “아, 아니…… 전하.” “응? 왜?” 엘리제는 뭐라 표현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리고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터지려고 해 그걸 참는 것도 곤란했다. “그…… 얼굴이…… 쿡.” 다름 아닌, 조각 같은 그의 얼굴에 검은 재가 잔뜩 묻었던 것이다! 항상 흔들림 없고 완벽하던 그가 숯검둥이 얼굴이라니! “쿡쿡.” 결국, 그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러지?” “얼굴이. 얼굴이…… 쿡쿡.” 그 말에 그는 자신의 얼굴을 쓰윽 만졌다. 검은 재가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그녀가 웃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상한가?” “아니요. 아니요. 그래도 잘생기셨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순간 아차 했다. 그에게 잘생겼다니. 웃다가 너무 편하게 말해버린 것이다. ‘그래도 잘생기시긴 하셨는걸.’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첫 번째 삶도 그렇고, 두 번째 삶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보다 잘생긴 사람은 없었다. 아니, 실제로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그보다 잘생긴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겐 그가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저렇게 숯검둥이 된 것도 멋져 보였으니까. ‘잘생겼다고? 이렇게 재가 묻었는데?’ 린덴은 그녀가 자신을 놀리는 것인가 살짝 고민했다. 어쨌든 정말 간만에 엘리제가 웃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아 넘어가기로 했다. 저렇게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놀려도 얼마든지 좋았다. “어쨌든 먹어봐라.” “네,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고기를 받아 한입 깨물었다. 천연 그대로의 장작 구이. 닭과 오리가 섞인 부드러우면서도 담백한 맛…… 을 기대했는데. ‘읍. 뭐지, 이 맛은?’ 그녀는 린덴을 올려보았다. 그도 고기를 깨물며 말했다. “맛이 괜찮을 거다. 2년 전, 앙젤리에서도 야전에서 내가 취식을 하면 다들 맛있다고 좋아했거든.” “……혹시 그 칭찬을 하신 분들이?” “내 부하들이지.” “……혹시 굉장히 과하게 칭찬하진 않던가요?” “그랬지. 맛이 괜찮았던 것 같아.” 역시나. 그가 요리를 잘할 리가 없지. 그는 상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한 칭찬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기 이리로 줘보세요.” “왜?” “제가 더 맛있게 해드릴게요.” “엘리제, 네가?” 황태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귀족가의 영애인 엘리제가 요리를? 그야 야전에서 전쟁을 수행하며 생존을 위해 해본 것이지만, 그녀는 요리해 볼 기회가 없었을 텐데? 하지만 엘리제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 이래 봬도 제가 요리 경력이 꽤 길다고요.” “……그대가?” 의아한 시선에 엘리제는 아차 했다. 그녀의 요리 경력은 의과대학에 들어간 후, 자취하면서부터다. “어쨌든 기대하세요.” 뭐, 사실. 맨날 대학 도서관에서 살아서 요리 경험 자체는 많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나을 것이다. ‘자취생의 요리 실력을 보여줘야지.’ 그런 생각으로 그녀는 그가 가져온 커다란 배낭에서 양념을 꺼냈다. 도대체 이 가방은 마법이라도 걸려 있는지, 별의별 게 다 들어 있었다. 의아한 시선으로 황태자를 바라보니,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혹시나 너에게 요리해 줄 일이 생길까 가져왔다.” “……!” 다시 얼굴이 붉어지려는 것을 참으며, 그녀는 꿩고기에 양념을 쳤다. ‘어차피 여기서 스튜나 찜을 만들 수도 없으니, 간만 맞춰도 훨씬 나을 거야.’ 고르게 소금을 쳐 간을 맞추고, 살짝 덜 익은 부분을 다시 익혔다. 그리고 비린내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후추를 쳤다. 그것만으로도 맛이 훨씬 좋아졌다. 아까 전엔 비린 맛이 나고 밍밍했다면, 지금은 진정한 천연 꿩 장작 구이가 되었달까? 캠핑 와서 먹는 것 같았다. “대단하군.” 황태자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맛있어. 밖에서도 이런 맛을 낼 수가 있군.” 사실 별로 한 것도 없건만, 그 칭찬을 들으니 엘리제는 왠지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한 요리를 그가 잘 먹으니 기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가 불쑥 물었다. “그러면 이제 엘리제, 네가 나에게 요리를 해줄 건가?” “아…… 이곳에서 요리할 일이 있으면 제가…….” “아니, 그것 말고. 론도에 돌아가서 말이야.” “……!”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지만, 모르는 척 대답했다. “한 끼…… 정도는 가문에 오시면 해 드릴게요.”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한 끼 말고. 난 자주 먹고 싶은데?” ============================ 작품 후기 ============================ 내일 15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03 4-3 직시 ========================================================================= 3장 직시 - 1 “한 끼 말고. 난 자주 먹고 싶은데?” “……저 사실 요리 잘 못해요.” “이거 맛있는데? 그리고 요리 경력이 길다며?” “그, 그게……” 엘리제는 버벅거렸고, 린덴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관없다. 네가 해주는 요리면 뭐든 좋을 것 같군.” “……저, 저…… 남은 고기 타는지 보고 올게요!”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엘리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장작 구이를 살피러 갔다. ‘그가 내가 해준 요리를 먹는다고.’ 요리를 종종 해주는 사이. 그런 관계는 단 하나다. 부부. 그녀는 고기를 살피며 자신도 모르게 그가 자신이 만든 요리를 먹는 상상을 해보았다. 무뚝뚝한 그는 반찬 투정은 하지 않겠지. 맛없어도 맛있는 척 먹어줄 것이다. 아니, 의외로 반찬 투정을 하려나? 린덴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그녀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싫지 않은 상상이었다. *** 그 뒤로도 둘은 길을 걸었다. 린덴이 계속 공화국의 허를 찌르는 방향으로 가서인지, 다행히 공화국군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며 중간중간 그들은 이전처럼 노숙을 하고 요리를 해먹었다. 린덴은 그녀가 무슨 요리를 해주든, 맛있게 먹어주었다. 솔직히 별로인 요리도 있었는데, 그냥 맛있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도 그가 잘 먹으니 기쁘단 마음이 들었다. 한번은 장작 구이를 하느라, 둘 모두의 얼굴이 까매져 서로 깔깔 웃은 적도 있었다. 엘리제가 먼저 웃었고, 그도 쿡쿡거리며 웃었다. 그녀는 그가 소리 내어 웃는 것은 그때 난생처음 보았다. 봄이 오기 전, 마지막 한파가 몰아치려는 것인지 밤에는 한층 더 추워졌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둘은 꼭 껴안고 잘 수밖에 없었다. “이리로 와라.” “하지만…….” “그러면 따로 자다 얼어 죽을 것이냐?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니 이리로 와.” 엘리제는 그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특별한 마음이 생겨서요.’ 그에게 꼬옥 안기니 추위 속에서도 따뜻했다. 하지만 문제는 심장의 떨림. 그리고 그의 몸에 닿는 부분이 전기가 닿은 듯 찌릿했다. ‘이전에는 안 그랬는데.’ 이전 삶. 부부였으니, 당연히 서로의 몸을 맞닿을 일이 있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손을 잡거나, 춤을 추거나, 아니면…… 관계를 가질 때나. 하지만 그의 차가운 눈 때문이었을까? 그를 사랑했음에도 이런 식으로 가슴이 떨리거나, 닿은 손이 찌릿하진 않았다. 특히 사랑이 아닌, 의무로 인해 억지로 맺는 관계 때는 떨림은커녕 조금 슬펐다. 그러나 지금은…… 왜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 같은지. ‘하아. 모르겠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냥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이전 삶도, 앞으로 그와의 관계도. 물론 안다. 이렇게 계속 피하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다 언젠가 후회할지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지금은 그냥 노곤히 이렇게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고 싶었다. 좋았다. *** 하지만 다음 날, 그들의 탈주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을 이끌고 한창 길을 걷던 린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전하……?” 린덴은 대답하지 않고, 가방에서 급히 망원경을 꺼냈다. 그리고 산 아래를 굽어 살폈다. “……!” 그의 얼굴이 딱딱해졌고, 그녀의 등줄기로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문제가 생겼다.” “네……?” “공화국군이 우리의 꼬리를 잡은 것 같다.” “……!” 엘리제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지금까지 그들은 항상 공화국군의 허를 찌르며 이동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그들을 찾은 거지?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루이 니콜라스, 그놈이 직접 추격을 시작한 것 같군.” 망원경 저 너머로 보이던 한 장면. 한쪽 팔이 잘린 채, 시뻘게진 얼굴로 병사를 다그치는 젊은 지휘관이 있었다.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 그가 그사이 병석에서 일어나 직접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막의 전갈은 위고 중장과 다르게 모략과 전술의 달인. 린덴의 이동 경로를 예측해 낸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 그때 숨통을 끊었어야 하는데.’ 린덴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쨌든 상황이 곤란해졌다. 지금껏 공화국군을 지휘하던 위고 중장은 순수한 열혈 무인이라 그저 병력을 무작정 우크라 산맥에 때려 넣기만 해, 빈틈으로 지나갈 수 있었지만, 루이 니콜라스는 달랐다. 폐인이 되었다 해도 한때 사막의 전갈이라 불리던 모략의 달인. 철저한 계산으로 그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해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엘리제, 힘들겠지만 속도를 내야겠다.” “네, 전하!”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정도만 더 이동하면 공화국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조금만 더 힘내라.” 그러며 린덴은 간절히 바랐다. ‘제발 아무 일 없이 돌파할 수 있기를. 하루. 딱 하루만 마주치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공화국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 수도 있어.’ 하루만 더 가면, 양측 세력이 비등하게 교전을 벌이는 지역이 나타난다. 거기까지만 가면 된다. 그러면 변고를 눈치챈 제국군이 구원군을 보내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얼마 뒤 그들은 푸른 제복의 병사들과 맞닥뜨렸다. “공제(空帝)다!” “……?!” “전원 발포 준비! 니콜라스 각하의 명대로 즉결 사살한다! 너는 신호탄을 쏴!” 그들은 무슨 명을 받았는지, 생포할 생각도 없이 곧바로 발포를 준비했다. 피유웅! 곧 붉은 신호탄이 수놓았고, 그들을 향해 총알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수류탄도 날아왔다. “엘리제!” “전하!” 린덴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공간 방어가 펼쳐지며 총알이 튕겨 나갔다. 그리고……! 콰앙! 수류탄의 파편이 그들을 덮쳤다. ‘크윽!’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크게 앓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재차 무리한 초상 능력을 사용하니 린덴의 속이 진탕됐다. 하지만 린덴은 자신의 품에 안긴 작은 소녀를 바라봤다. ‘너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내겠다. 엘리제.’ 그렇게 이를 악물며 다짐한 그는 엘리제를 한 손에 안고 돌파를 시작했다. 방향은 일직선으로 북쪽 방향. 거리는 하루거리. 끔찍이도 긴 거리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공제를 발견했다고?” “네, 각하!” 루이 니콜라스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큭큭 웃음을 터뜨렸다. “잘했어. 잘했어. 큭큭.” 그 광기가 흐르는 모습에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은 소름을 느꼈다. 전령으로 온 병사도 침을 꿀꺽 삼켰다. 공화국 최고의 명장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지 오래였다. “저, 정말 보는 즉시 사살합니까? 생포하지 않고 말입니까?” “그래.” “하지만…….” “죽이라고! 아니면 네가 죽고 싶어?!” 루이 니콜라스는 뻘게진 눈으로 고함을 질렀다. “공제든, 등불을 든 여인이든. 다 죽여. 내가 갈 때까지 그 연놈들이 살아 있으면 너희가 죽을 줄 알아.” 그런 그의 왼팔은 팔꿈치부터 잘려 있었다. 오른팔도 손목동맥이 상해, 기능을 못 하고 있었다. 양팔을 다 잃은 것이다. 모두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 때문이었다. ‘절대 용서하지 않아.’ 그는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일은 생각지도 않고 이성을 잃고 생각했다. “나도 간다.” “각하?” “그놈들의 최후를 직접 목격해야겠어.” 루이는 괴물처럼 웃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까악. 하늘 위에서 검은 깃털을 가진 까마귀가 푸드득 나무 위에 내려앉았다. 까악. 그 흉조(凶鳥)는 다시 한 번 불길한 울음을 흘렸다. 정확히 루이 니콜라스를 바라보며. *** 한편, 우크라 산맥의 북동쪽 가도. 한 무리의 기병대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가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다, 단장님. 이렇게 가도 괜찮은 것입니까?” 어깨에 총과 검이 교차하는 문장을 지닌 붉은 제복의 장교가 당황해 물었다. 얼음 같은 인상의 아름다운 미남자는 말을 달리며 짧게 답했다. “안 되지.” “그, 그러면 어째서? 맥가일 원수께서는 각 부대마다 반드시 제자리를 지키라 명령하지 않으셨습니까?” “명령 불복종이다.” “네에?!” 장교는 당황해 젊은 미남자를 바라봤다. 얼마 전까지 총기사단의 부단장이었던, 이제는 전(前) 단장의 사망으로 신임 단장이 된 렌 남작은 ‘명령 불복종이 뭐?’란 표정이었다. “우리가 지금 누굴 구하러 가는 거지?” “…….” “그리고 우리는 누구지?” 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이천의 기병대가 결연한 얼굴로 그를 따르고 있었다. “너희에게 하나 묻겠다!” “네, 단장님!” “너희가 누구냐?!”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황실의 자랑스러운 로열 나이츠(Royal Knight), 총기사단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누굴 구하러 가는 것이지?” “나의 주인(My Lord)을 구하러 갑니다!” 렌은 말을 달리며 기병용 라이플을 들어 올렸다. “그래, 우리는 우리의 주인, 황태자 전하와 예비 황태자비를 구하러 간다! 명령 불복종은 내가 책임지겠다. 로열 나이츠인 우리는 우리의 충성(Royal)을 다한다!” “와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가도를 울렸다.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돌린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전하.’ 또 생각했다. ‘너도 절대 다치면 안 된다.’ 그는 초조히 입술을 깨물었다. ‘내 동생.’ *** 렌과 총기사단의 결연한 의지와 별개로 린덴과 엘리제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초상 능력자인 그는 분명 강했지만, 인간인 이상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돌파해도, 적은 끝없이 몰려들었다. “1진 돌격!” “와아!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좁은 협곡, 푸른 제복을 입은 병사들이 끝없이 린덴과 엘리제에게 달려들었다. 린덴은 이를 악물며 초상 능력을 움직였다. ‘진공 만들기.’ 병사들의 진형 한가운데의 공기가 일시적으로 증발하며 진공 상태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비어버린 공간을 메우기 위해 휘몰아치는 공기의 후폭풍! 후웅! “아악!” 돌격하던 병사들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형편없이 쓰러져 버렸다. 한순간에 소대 규모에 달하는 인원을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기적을 선보였지만, 적의 공격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2진 일제 사격!” 타앙! 타앙! 타앙! 마치 비가 내리듯 총알이 쏟아졌다. 공간 방어를 하였지만, 화망(火網)을 형성한 총알 세례는 린덴의 내부에 타격을 주었다. ‘큭.’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느낌을 억지로 참으며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어떻게든 엘리제가 다치지 않도록 온몸으로 그녀를 감싸며. 린덴은 전방에서 일제 사격을 가하는 적 진형을 향해, 초상 능력 ‘공간 찢어발기기’를 시전하였고, 곧 비명을 지르며 적들이 쓰러졌다. 생명을 잃은 적들은 거의 없었지만, 당분간 거동은 어려울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위력. 하지만 힘을 사용할 때마다 그의 내부는 문드러져 갔다. “저, 전하…….” “난…… 괜찮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엘리제의 눈이 끝없이 흔들렸다. 결국. 린덴은 끝없이 몰려드는 적들을 향해 연거푸 초상 능력을 사용하다 반작용이 와 거칠게 기침을 토했다. “쿨럭. 커억.” “전하!” 린덴의 입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본 엘리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괜…… 찮다. 정말 괜찮아.” 린덴은 장갑으로 쓰윽 피를 닦았다. 장갑이 빨갛게 물들었다. 한계에 도달했는지, 숨길 수 없는 통증이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갔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래서 말했다. “이대로는 안 돼요. 절 놓고 전하 혼자 가세요.” “뭐?” “전하 혼자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전하 혼자 가세요. 빨리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자신도 모르게 버럭 소리쳤다. “제가 싫어서 그래요!” “뭐?” “저도 싫다고요! 전하가 다치는 것! 전하가 괴로워하는 것! 전하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 싫다고요! 저도 아프다고요!” “……너?” 린덴의 눈이 커졌다. 지금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거지? 엘리제의 눈동자에서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주말 토, 일요일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 주 월요일 18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04 4-3 직시 ========================================================================= 3장 직시 - 2 그녀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빌듯 말했다. “그러니 제발 부탁이에요. 절 놔두고 혼자 가세요. 제발…… 제발…… 부탁이에요.” “엘리제…….” 린덴의 가슴이 요동쳤다. 지금…… 그녀가 자신을 향해 눈물 흘리고 있는 게 정말…… 맞는 건가? “엘리제…… 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그들을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공제 전하.” “……!” 린덴과 엘리제는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경갑을 갖춘 3명의 젊은 남자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앙젤리 이후로 처음 뵙겠습니다.” 린덴은 짓눌린 신음을 뱉었다. “삼기사(三騎士).” “네,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비교적 나이 들어 보이는 이가 공손히 예를 올렸다. 젠틀한 신사 같은 인상이었지만, 린덴과 엘리제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린덴은 물론, 엘리제도 삼기사(三騎士)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삼기사.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과 더불어 공화국 최고의 오러 나이츠들의 별명이다. 한 명, 한 명이 위고 중장에 맞먹는 실력자였는데 비슷한 나이 또래라 늘 형제처럼 어울려 다녀 삼기사란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서로의 뜻이 잘 맞는 만큼, 합공이 무시무시했다. ‘하필 지쳐 있는 상태에서.’ 린덴은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최악의 상태에서 최악의 상대를 만나 버렸다. “이렇게 뵙게 되어서 유감이군요, 아름다운 레이디. 빛의 도시, 파리스의 거리에서 만났으면 데이트 신청이라도 했을 텐데.” 삼기사 중, 셋째가 엘리제에게 찡끗 미소를 지었다. 바람둥이 같은 인상이었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하지 마. 공제에게 집중해라.” 엄격한 인상의 둘째가 말했다. “네에, 네에. 형님들. 그러면 바로 시작하죠.” 스릉. 그들은 각자의 검을 꺼냈다. 첫째는 기병용 세이버(Sabre), 둘째는 레이피어, 셋째는 톱니 같은 날의 잔인한 검, 프랑베르쥬(Flamberge)였다. 린덴도 검을 꺼내 들었다. “레이디는 뒤로 물러나시죠.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삼기사는 말했다. 황태자도 그녀에게 말했다. “엘리제, 뒤로 물러나라.” “하지만…….” “어서! 옆에 있으면 방해돼!” 린덴은 초상 능력을 이용해 엘리제를 뒤로 밀어내었다. 삼기사는 여성에 대한 존중인지, 그녀가 안전거리로 물러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러면 갑니다, 전하. 사살을 명받아 손속에 사정을 둘 수 없음을 이해하시길.” 그 말과 동시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파앙! 시작은 린덴의 초상 능력, 공간 베기였다. 프랑베르쥬를 든 셋째의 목이 있던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졌다. “크윽! 오러 나이츠의 육감으로 간신히 그걸 피해낸 삼기사의 셋째는 신음을 흘렸다. 그사이, 첫째와 둘째가 단숨에 린덴과의 거리를 좁혔다. 타앙! 검에 맺힌 오러와 공간 방어가 부닥쳤다. 지금껏 많은 무리를 한 탓에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던 린덴은 신음을 삼켰다. 주륵. 그의 코에서 한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전하!” 엘리제가 비명 지르듯 외쳤다. 린덴은 이를 악물고 힘을 끌어올렸다. 자신이 쓰러지면 그녀도 끝이다. 그러니 그는 절대 질 수 없었다. 파앙! 파앙! 계속해서 공간 베기가 펼쳐졌고, 의식 추방, 눈 가리기 등. 수많은 초상 능력이 삼기사에게 작렬했다. 삼기사도 이를 악물고 오러를 린덴에게 휘둘렀다. 그렇게 뒤를 돌아보지 않는 치열한 공방이 수도 없이 이어졌다. *** 그리고……. “커억! 쿨럭!” 린덴은 계속해서 피를 토했다. “전하!” 엘리제가 그에게 뛰어왔다. “아아…… 전하. 전하…….” 결국, 승자는 린덴이었다. 삼기사는 모두 차가운 땅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이긴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등 뒤에 난 기다란 자상에서 흘러나온 피에 상의가 붉게 물들었고, 무리해서 초상 능력을 사용한 대가로 계속해서 선홍빛 피를 토했다. “전하, 전하…… 어떻게…… 어떻게…… 흐윽…… 끄윽…….” 엘리제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녀의 눈에서 끝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때, 린덴이 흐릿한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엘…… 리제. 너는 괜찮으냐?” “……!” 그 걱정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었다. “전하, 전하…… 흐윽. 끄윽. 제발…… 나를 놔두고…… 끄윽.” 린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거의…… 다 왔다. 저…… 앞의 협곡만 넘으면…… 돼…….” “끄윽, 흐윽…… 그러면 전하 혼자서라도…… 제발, 제발.” “괜…… 찮다니까.” 그러며 린덴은 힘겨운지 눈을 옅게 감았다. “잠시만…… 쉬었다…… 출발하자.” “전하, 전하…….”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 린덴의 등 뒤. 쓰러져 있던 삼기사의 셋째가 떨리는 몸을 붙들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 그의 손에는 흑색의 금속, 권총이 들려 있었다. 삼기사의 셋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총구를 정확히 린덴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아…….’ 그리고. 찰칵. 총이 장전되었다. 저 권총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린덴은 죽을 것이다. 눈을 감은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가 죽는다고? 그 순간 엘리제의 시간이 멈추었다. 세상이 회색으로 변하였다. 마치 생명을 잃은 것처럼. 지금껏 그와 함께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렇게 웃으니 예쁘지 않으냐. 가끔 내 앞에서도 그렇게 웃도록 하여라.’ ‘생일 축하한다. 제대로 못 챙겨서 미안하다.’ ‘만약 잘못돼서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고?!’ ‘왜 너는 네 생각만 하는 거야?! 이 이기적인!’ 그뿐이 아니었다. 론도에서 ‘론’으로 자신과 함께했던 시간. 무뚝뚝한 시선으로 자신을 담던 눈동자.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구하러 와준 일. 피를 흘리면서도 자신을 먼저 걱정하는 눈빛. 그리고 이번 우크라 산맥에서 그와 함께하던 시간들. 왜 모르고 있었을까? 아니, 왜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을까? 이전 삶의 악몽 따위. 단두대의 칼날 따위. 중요한 게 아니란 것을. 중요한 것은 바로 ‘그’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그의 죽음을 앞둔 이 순간. 그녀의 속마음은 고백했다. 그래, 그녀는 이전 삶의 기억이 두려웠다. 이전 삶의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그녀의 마음을 닫아버렸다. 하지만. -그가 죽으면…… 넌 살 수 있어? 아니, 없었다. 이전 삶의 악몽 따위. 그의 죽음 앞에서 다 사소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가 죽는데. 그가 없는데. 고작 이전 삶의 기억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녀도 이제 그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는데. ‘린덴…… 전하…….’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며 세상이 붉게 변했고, 엘리제는 선택했다.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리고 당연하게. 그녀의 몸이 린덴을 감쌌다. 그리고 그 순간. 타앙! 붉은 세상에 총성이 울렸다. 퍼억! 린덴의 눈이 커졌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엘리제의 오른 어깨에서 피가 튀어 올랐다. “엘…… 리제……?” 린덴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감싼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의 상의가 순식간에 피로 젖어드는 모습이 그의 뇌리를 마비시켰다. “엘리제! 안 돼!” 그는 마지막 힘을 끌어 올려 초상 능력으로 삼기사의 셋째의 목을 베고, 엘리제를 끌어안았다. 인형처럼 힘이 빠진 그녀가 그에게 매달려 흔들렸다. “전…… 하.” “어째서! 어째서! 안 돼! 엘리제!” 린덴이 미친 듯이 그녀를 불렀다. 그 음성을 들으며 엘리제는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린덴이 그토록이나 보고 싶어 했던 자신을 향한 그녀의 미소였다. ‘아아. 내가 막았구나. 다행이야.’ 그녀는 흐릿한 의식으로 생각했다. ‘난 정말 바보야.’ 조금만 더 빨리 마음을 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전 삶의 기억 따위가 뭐라고. 왜 나는 이렇게나 그를 거부했을까. ‘문제를 회피하면 결국 이렇게 후회하게 되는 것 알고 있었으면서.’ 그녀는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두 번의 삶을 살며, 그리고 의사 일을 하며 깨달은 것이 있다. 문제를 회피하면 결국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알면 뭐해. 내가 이렇게나 바보인데.’ 그래도. 그래도 다행이었다. 지금 이 순간 총을 맞은 것이 그가 아니라 자신이어서. 그리고 지금이나마 마음을 인정하게 되어서. 그래서 그녀는 입을 열었다. “전하…… 린덴…… 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엘리제!” 엘리제는 뿌연 시야로 끝없이 흔들리는 그의 금안을 바라봤다. 아아. 저 차가운 금안에 눈물이 고이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저 당신을…….” 하지만 그녀는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이다. “엘리제! 정신 차려! 엘리제! 엘리제!” 황태자 린덴은 그녀를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 저벅저벅.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피가 방울방울 떨어졌다. 그의 걸음 뒤로 하얀 눈에 붉은 피가 쭈욱 이어졌다. “엘리제.” 중얼거렸다. 그의 양손에는 하얀 소녀가 피에 젖은 채 늘어져 있었다. “웃기지 마. 네가 이렇게 죽는다고? 절대……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아.” 린덴은 짓씹듯 말했다. 무리한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이미 그의 몸은 전신의 감각이 없어진 지 오래다. 시야도 흐릿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를 살려야 하니까.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그녀를 살리고 말 것이다. ‘제발, 제발…… 엘리제.’ 그는 엘리제와 달리 의사가 아니라,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총상을 입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은 중요한 혈관이라도 다쳤는지 출혈량이 많다는 것. 그래서 알고 있는 지식과 심지어 초상 능력까지 동원해 어떻게든 지혈을 시도했다. 그의 간절한 정성 때문일까? 다행히 출혈이 어느 정도 멈추긴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이미 흘린 피가 많아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하얀 안색은 시체가 같았고, 맥도 빠르고 얕았다. 전형적인 저혈량 쇼크 증상이었다. ‘빌어먹을. 왜 맨날 너는 내 가슴을 이렇게 아프게 하는 거냐.’ 린덴은 이를 악물었다. 힘이 빠져서일까, 아니면 습기가 계속 차올라서일까, 시야가 계속 흐려졌다. ‘엘리제. 제발…….’ 그는 자신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보니, 그의 가슴이 칼로 도려내지는 것 같았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아픔이었다. ‘제발 살아만 나다오. 부탁이다. 제발…….’ 그래서 날 얼마든지 아프게 해도 좋으니. 제발……. 그는 간절히 빌었다. ‘아까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그 말을 들려줘야지.’ 가슴속, 그녀가 준 십자가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징표’도 돌려받아야지. 엘리제. 응?’ 또 ‘론’으로 그녀와 디저트 가게에 가던 것도 생각했다. 딸기 케이크와 바나나 타르트, 망고 푸딩을 특히나 좋아하던 그녀. 그녀가 무사히 살아나기만 한다면 온 론도, 아니, 제국에 있는 맛있는 케이크란 케이크는 모조리 사다 줄 텐데. 그래서 단 음식을 먹으며 애처럼 좋아하던 모습을 다시 볼 텐데. 그런 생각들을 하니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 작품 후기 ============================ 내일 19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00105 4-3 직시 ========================================================================= 3장 직시 - 3 죽지 마. 제발…… 부탁이니……. “하아, 제발…….” 린덴은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안고 산맥을 돌파했다. 그의 몸도 만신창이였으나, 어떤 적이 나타나도 무릎 꿇지 않았다. 어느덧 그도 자신이 흘린 피로 흠뻑 젖었으나 그녀를 품 안에서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윽고. 그의 시야 너머로 목적지인 협곡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지막 목적지였다. 저 협곡만 지나면 드디어 우크라 산맥에서 벗어나며 공화국군의 세력권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 밖은 공화국군과 제국군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완충 지역. 제국군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 ‘다 왔으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라, 엘리제.’ 하지만. 협곡에 다가간 린덴은 아득한 절망감에 빠졌다. 이미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쪽으로 올 줄 알고 있었지, 공제.” 괴물 같은 표정.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였다! 그리고 전갈의 주위로 무수히 많은 병력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족히 1,000명은 넘어 보이는 병력이었다. ‘아아…….’ 린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결국, 이렇게 끝나는 것인가? 이런 몸 상태로 공화국 정예 1,000명이라니. 아무리 자신이라도 이제 더 이상은 방법이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역시 공제야. 혼자 몸으로 도대체 몇 명을 쓰러뜨린 거야?” “…….” “등불을 든 여인은 죽은 건가? 아쉽군. 살아 있으면 조금 가지고 놀다 죽이려 했는데.” 루이 니콜라스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우리의 지긋지긋한 인연도 이제 끝낼 때가 되었군.” 그가 팔꿈치밖에 안 남은 왼팔을 들어 올렸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 신호와 함께 무수히 많은 소총병이 장전을 완료했다. 전갈의 팔이 떨어지는 순간 일제히 발포할 것이다. 마지막 순간. 총구들을 보며 린덴은 간절히 기원했다. 이제 자신은 저 총알 세례를 막을 힘이 없었다. ‘제발…….’ 그래, 자신은 죽어도 괜찮다. 하지만 이 소녀만큼은. 자신이 사랑하는 이 소녀만큼은 살려야 하는데. ‘제발…….’ 그런데 그 최후의 순간.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장내를 갈랐다. “드디어 찾았다!” “……?!” 모두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봐도 아무도 없었다. “누구지? 누가 말한 거지?” “어디에 있는 거지?” 그때, 공화국의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저……! 하늘에!” “……?!” 높다란 나무 길이 정도의 허공에 화사한 인상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허공을 계단으로라도 삼은 듯이. 그의 검은 군화 밑으로 희미한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검제(劍帝)!” 공화국의 병사들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하지만 검제, 미하일 드 로마노프는 공화국군이 아닌, 린덴과 엘리제를 보았다. “가관이군.” 그의 화사한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혈인이 된 바보 형님과 총에 맞은 예쁜 레이디를 본 탓이었다. “정말 가관이야.” 낮은 중얼거림. 그러고 다음엔 검제는 이 모든 일의 원흉, 사막의 전갈, 루이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그 허공을 뚫는 시선에 루이 니콜라스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선연히 느껴지는 검제의 살기(殺氣)였다. *** 검제는 초상 능력을 거둬 사뿐히 린덴과 엘리제 옆으로 내려왔다. 린덴은 꿈을 꾸듯 멍하니 물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는?”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그냥 왔지.” 미하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나저나 그때 의식 추방 진짜 강하게 썼더라? 방심하고 있었는데 치사하게.” “……영창에서 탈옥한 건가?” “그래, 탈옥했다. 어쩔래? 또 영창에 넣을 거야?” “탈옥…… 한 거면, 영창에 다시 가야지…….” 그 말에 미하일은 이마를 꿈틀했다. 진짜. 이 바보 형님이. “내 영창 일부러 습하고 구석진 곳으로 배치한 거지? 곰팡이랑 벌레 많이 나오게.” “……그래.” 린덴은 부정하지 않았고, 미하일은 다시 이마를 꿈틀했다. 아, 정말 진짜. 내가 벌레랑 곰팡이 싫어하는 것 알고. 저런 몸 상태만 아니면 드잡이질이라도 하겠는데. “하아.” 미하일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 “…….” “여기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라고.” 린덴은 지칠 대로 지쳐 흐릿해진 눈동자를 들어 잠시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금빛 눈동자들이 마주쳤다. “뭐해? 빨리 가라고. 시간 없잖아. 리제, 죽일 거야?” “……그래.” 린덴은 거부하지 않았다. 미하일의 말처럼 사양할 시간도 없었다. 그녀를 살리기 위해선 일분일초라도 빨리 제국 군영의 병원으로 가야 했다. 미하일은 손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공화국 놈들 때문에 저 협곡으로는 못 가니, 저 방향으로 가. 하늘에서 살피니 저쪽으로 가도 길이 연결되어 있어.” 린덴은 그가 가리킨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짧게 말했다. “……고맙다.” “별말씀을.” “……꼭 살아 돌아와라. 명령이니.” 미하일은 그 말엔 살짝 놀랐다. 살아 돌아오라니. 슬프게도 둘 사이에는 조금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살아 돌아오라고? 진심이야?” “……그래.” 그러며 린덴은 말했다. “……돌아오면 무단 탈옥 죄로 영창에 다시 갈 각오는 하고.” “…….” 그는 지금 린덴의 말이 진담인지, 살짝 농담한 것인지 고민했다. 미하일은 리제를 안은 채 힘겹게 걸어가는 린덴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봤다. 미하일과 린덴은 정적(政敵). 이제 곧 론도로 돌아가서 서로를 죽고 죽여야 하는 관계였지만, 왠지 아주 잠시. 일순간 일반적인 형제로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15년 전, 백원(百原)의 궁에서 일어난, 로마노프 황가의 혈사(血事), ‘혈탑(血塔)의 비극’ 이전처럼 말이다. 그때, 린덴과 엘리제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루이 니콜라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외쳤다. “막아!” 미하일이 루이 니콜라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누구 마음대로?” “……!” 다시 선연히 느껴지는 살기. “허억!” 루이 니콜라스는 허겁지겁 추하게 뒷걸음질 쳤다. 미하일은 허리춤에서 한 가지 물건을 꺼내 들었다. 검제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권총이었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 있지.” 그러며 가만히 루이 니콜라스의 인중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다른 놈은 몰라도, 네놈만은 기회가 되면 없애야겠다고.” “……!” 루이 니콜라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 거기서 쏜다고 맞을 것 같으냐?!” 지금 미하일과 전갈의 거리는 400m가 넘는다. 권총은 물론 소총도 닿을 수 없는 거리. 하지만 미하일은 피식 웃었다. 얼음 같은 웃음이었다. “당연히 이 거리에서 총알이 닿을 리가 없지.” 루이 니콜라스는 미하일이 무슨 의중을 가졌는지 몰라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타앙! 권총이 불을 뿜었다. “일반적인 총알이라면 말이야.” 투명한 바람이 공이를 맞고 튀어나온 총알을 감쌌다. 미하일의 초상 능력은 다름 아닌 바람, 풍(風) 속성. 총알이 향하는 허공의 바람 저항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길을 총알을 감싼 쐐기 모양의 바람이 날아들었고……! 퍼억! 루이 니콜라스의 이마가 정통으로 뚫렸다. “……컥.” 그렇게 사막의 전갈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사망했다. 한때 제국을 떨게 하였던 모략의 귀재치고는 다소 허망한 최후였다. “각하!” “니콜라스 각하!”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공화국군이 비명을 질렀다. 급히 상태를 살폈으나, 이미 즉사한 상태였다. “이이! 검제!” 공화국 최강의 오러 나이츠이자 흉갑기병대의 사령관 위고 중장이 분노로 고함을 질렀으나, 미하일은 검을 빼 들며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 선.” 파앗! 바람이 불며 그의 전방 50m에 기다란 선이 생겼다. “이 선 넘어오면 다 죽인다.” “……!” 미하일은 빙글 웃었다. “난 어딘가 무른 형님과 달라서 말이야. 착한 인상과 다르게 한다면 해. 그리고 나 지금 리제 때문에 조금 빡쳐 있어서.”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위고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공화국군은 1,000명이 넘는다. 그런데 고작 한 명이 1,000명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하일은 루이가 죽어 자동으로 지휘권을 넘겨받은 위고 중장에게 말했다. “뭐가 이상하지, 위고 중장? 중장은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청(淸)에서 원래 불렸던 별명이 무엇인지.” “……!” “검귀(劍鬼)였다고. 쉽게 말해 검에 미친 귀신.” 미하일은 과거 3년간의 가출을 떠올렸다. 가출. 그건 장엄한 오페라로까지 꾸며지는 그의 영웅담에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그의 어머니인 1황비 마리엔이 결국 미쳤다. 아직은 성숙하지 못했던 그는 어머니의 광증을 견디지 못했고, 결국 무사 여행을 떠났다. 말이 무사 여행이지, 도망이고 가출이었다. ‘어쩌면 미친 것은 어머니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티가 나지 않았을 뿐. 당시에는 미하일도, 큰형님 1황자 지펠도, 작은형님 2황자 린덴도 모두 미쳐 있었다. 그렇게 처음 가출을 나왔을 당시, 그는 어딘가 망가져 있었고 서대륙, 검은 대륙을 지나 밀항을 통해 청나라에 갔을 때는 그 정도가 가장 심했다. 아무리 악인을 향해서라지만, 그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고, 그 무자비한 검술을 본 청인들은 미하일을 검귀(劍鬼)라 두려워했다. 검룡(劍龍) 운학. 은화(銀花) 남궁소예 등. 당시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어쩌면 검에 먹힌 살육귀(殺戮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다들 다시 한 번 보고 싶군. 어렵겠지만.’ 미하일은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었다. 지금은 잡념에 빠질 때가 아니라 싸울 때다. “참고로 나 지금 화가 정말 많이 나 있거든. 최근 이렇게 화가 난 적이 언제인지 모를 지경이야.” 그러며 검제는 웃었다. 잔잔한 웃음이건만, 1,000명의 군대가 흠칫 놀랐다. “그러니 올 거면 이 악물고 와. 조금 거칠 수도 있어.” *** 한편 린덴은 뚝뚝 피를 흘리며 길을 걸었다. ‘이제…… 조금……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지긋지긋한 공화국군의 세력권에서 벗어난다. 앞의 협곡에 마지막 공화국군이 모두 모여 있었던 것인지, 그의 앞에는 어떤 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이제 린덴은 초상 능력은커녕 검 하나 들어 올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조금만…… 제발…… 조금만 더 버텨다오…… 엘리제…….’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소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때였다! “파비앙 중령님. 어차피 이곳으로 공제가 오겠습니까? 각하께서 처리하시겠죠.” “그래도 각하의 명령이니 우린 이곳을 사수하고 있겠다.” 린덴은 다시 아득한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까지 공화국군이 있는 것이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일개 소대 규모, 즉 3~40명 정도? 평소라면 가볍게 제압할 병력. 하지만 지금 그는 30명은커녕 5명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하지?’ 설상가상으로 적들은 순찰이라도 하는지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제 산맥이 끝나는 부분이라 그런지, 파비앙 중령이라 불린 적 지휘관은 갈색 군마를 타고 있었다. 린덴은 일단 짙은 수풀 속으로 몸을 숨겼다. 군인이라기보단 성실한 학자처럼 생긴 적 지휘관, 파비앙 중령은 5명 정도의 적병과 함께 린덴이 숨은 수풀 쪽으로 다가왔다. 린덴은 제발 적들이 자신들을 눈치채지 못하길 빌었다. 하지만. “……!” 하필 적 지휘관과 린덴의 눈이 딱 마주쳤다. 린덴은 이를 악물었다. 끝장이었다.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면으로 저들을 돌파해야 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계속 날씨가 춥군.” 파비앙 중령이라 불린 적 지휘관이 쓰윽 눈을 돌리며 병사에게 말을 건 것이다. 마치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 작품 후기 ============================ 내일 20일 09: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00106 4-4 운명 ========================================================================= 4장 운명 - 1 “아, 네. 그러게 말입니다. 파리스는 지금쯤 봄일 텐데.” “자네도 파리스 출신인가?” “네, 중령님. 제가 이래 뵈어도 마르뜨 언덕에서 잘나가는 놈이었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잘생긴 것 같기도 하군.” 그 말에 병사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중령님. 이놈 말을 믿으십니까?” “이놈보다는 중령님이 훨씬 잘생기셨습니다.” 그 화기애애한 대화를 들으며, 린덴은 눈을 깜빡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못 본 건가?’ 아니다. 분명 봤다. 적 지휘관의 갈색 눈동자는 짧은 시간이지만, 분명히 자신과 자신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훑었다. 더구나. “그러고 보니 자네들의 말이 맞는 것 같군.” “네?” “이곳에 공제와 등불을 든 여인이 올 리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죠?” “계속 대기하느라 쉬지도 못하고 있는데, 자네들은 저쪽으로 가서 잠시 쉬고 돌아오게.” “중령님께서는?” “나는 이곳에서 아까 못다 한 생각이나 잠시 정리하겠네.” “네, 금방 쉬고 돌아오겠습니다!” 중령의 명에 공화국 병사들은 신이 나서 사라졌다. 그들이 멀찍이 사라지자, 파비앙은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에서 내려 본인도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이런 중얼거림을 남기며. “이제는 말을 타는 것이 좋을 겁니다.” “……!” 린덴은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적의 지휘관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지? 어쨌든 지금은 호의를 거절할 때가 아니다. 특히 말이라니. 지금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다. 그는 급히 엘리제를 안고 말에 올라탔다. ‘파비앙이라고.’ 그러고 말의 배를 차 미친 듯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한편, 그런 그들의 뒷모습을 파비앙이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파비앙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이 들키면 교수형이겠군.’ 다 잡은 적의 총사령관을 놓아주었다. 잘못 걸리면 교수형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도 평소라면 절대 적 총사령관을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등불을 든 여인을 이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지.’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상처 입은 작은 소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왜인지 모르지만, 저 소녀를 이런 곳에서 죽게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모르겠군. 이 일로 나중에 잘못되면 제국에 망명 신청하면 받아주려나.’ 그렇게 파비앙, 공화국의 중령이자 향후 몇 차례의 혁명 끝에 프랑소엔 공화국의 총통이 되는 그는 복잡한 머리로 생각했다. *** 드디어 탁트인 평야가 나타났다. 린덴은 제국군 부대를 향해 말을 달렸다. 사실 온몸이 한계에 이른 그는 방향 감각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본능적으로 북쪽을 향해 말을 채찍질했다. 그런데 얼마 말을 달리지 않아, 저 멀리서 우루루 먼지 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 그 모습을 보고 린덴은 우뚝 말을 멈추어 섰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시야가 흐릿해 정확한 적아가 구별되지 않았다. 적인가? 아군인가? 만약 저 기병대의 정체가 공화국의 큐래시어면 자신들은 그걸로 끝이었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도망칠 수 없었다. ‘제발. 주여.’ 그는 가슴 속 십자가 징표를 잡고 품에 안긴 작은 소녀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이윽고……. 선두에 선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린덴은 온몸에 맥이 탁 풀렸다. “전하! 엘리제!” 보도(寶刀)와 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 차가운 얼굴은 평소와 다르게 초조함에 덮여 있었다. 렌이었다. “……늦었잖아.” 황태자는 중얼거렸다. 늦었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너무 늦어 나중에 엘리제의 몸이 회복되면 기념으로 죽을 때까지 술이라도 먹여야겠다. 저이가 제일 싫어하는 독한 위스키로. 그렇게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태자비께서는?!” 로열 나이츠들이 하얗게 질려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그녀와 그, 그와 그녀의 여행이 끝을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엘리제를 치료하는 것이다. *** 한편 그때, 협곡에 남은 미하일은 공화국군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투 장면이 묘했다. 분명 1대 1,000의 싸움이건만 겁에 질려 있는 것은 1,000명이었다. “으으…… 괴물 같은.” 공화국군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선, 넘어오지 마라니까.” 검제 미하일은 차갑게 경고했다. “쏴! 쏘라고!” 한 장교가 병사들에게 명했다. 공화국군은 이를 악물고 소총을 겨누었다. 타앙! 타앙! 하지만 이미 진열이 흐트러져서인지 화망 형성도 되지 않았고, 그 탓에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그나마 검제에 근처에 닿은 총탄은 그의 초상 능력, 에어 배리어(air barrier)를 뚫지 못했다. “총 말고! 수류탄! 척탄병 어디 있나?! 수류탄을 던져!” 확실히 수류탄은 오러 나이츠도, 초상 능력자도 무시하기 어려운 폭발력을 가지고 있었다. 수류탄 전문 보병인 척탄병이 미하일에게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하지만. “소용없다니까.” 그의 발이 허공을 밟았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가속을 시작했다. 파앗! 일순간 그의 몸이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라졌다. 미하일은 폭발이 일어나기 전 허공에서 수류탄을 낚아채 그대로 공화국 병사들의 머리 위로 던져 버렸다. 콰앙! “크악! 으악!” 공화국 병사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바닥에 엎드렸다. 수류탄이 한참 허공 위에서 터진 덕분에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검제의 말도 안 되는 무위에 사기는 바닥을 쳤다. “이익! 대포를 쏴!” 그들은 공제를 잡기 위해 소형 대포도 끌고 왔었다. 치익! 콰앙! 불이 타오른 후 포문이 불을 뿜었다. 아이언 볼! 궤적에 닿는 것은 모조리 파괴해 버리는 철제 쇠공이 미하일에게 직선으로 날아왔다. 하지만 미하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검을 들었다. 우웅! 단전의 호흡과 더불어 자연의 에너지, 오러가 검에 모여들었고, 그는 그 기세 그대로 중단세로 베었다. 서걱! 그리고 다시 일어난 믿지 못할 일. 아이언 볼이 두부처럼 검에 잘려 나간 것이다. “으……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 도저히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위를 계속해서 보여주는 검제에게 공화국 병사들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기가 질려 주춤거렸다. 미하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 선 넘어오지만 마. 그러면 살려준다.” 이미 아무도 그가 정한 선을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대치가 이어졌다. 1명이 1,000명을 핍박하는 말도 안 되는 대치 속에서 미하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힘들군. 이제 곧 한계인데.’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사실 허세였다. ‘이런 다수와의 싸움은 기세에서 밀리면 그대로 끝이니까.’ 린덴과 다르게 그는 이런 싸움의 경험이 많았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무조건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 그나마 시간을 끌고 버틸 수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곧 한계였다. ‘확실히 초상 능력을 사용하면 금방 피로가 오긴 하는군.’ 무(無) 속성의 린덴은 초상 능력을 사용할수록 몸에 반작용이 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유(有) 속성의 초상 능력을 사용하는 황족들이 무한대로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부작용이 없다 뿐이지, 피로도는 똑같았다. ‘이제 슬슬 벗어났겠지?’ 그는 린덴과 엘리제가 떠난 시간을 계산했다. ‘내가 이렇게나 고생하는데 리제가 잘못되기만 해봐라.’ 그는 린덴의 품에 처져 있던 엘리제를 떠올렸다. 만약 그녀가 잘못되면 그때는……. ‘아니야. 괜찮을 거야.’ 미하일은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소중한 존재가 된 것은 린덴뿐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녀는 미하일, 그의 가슴 속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이제 슬슬 나도 이곳을 떠야겠군.’ 미하일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공화국군을 노려보았다. 그러며 슬금슬금 공화국군이 눈치 못 챌 정도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도망갈 준비를 하였다. *** 린덴과 엘리제는 드디어 제국군 군영에 도착할 수 있었다. 혈인(血人)이 된 총사령관과 등불을 든 여인을 보고 제국군 모두가 경악했다. “전하!” “아니, 황태자비께서!” 홀로 군을 진두지휘하며 고군분투하던 맥가일 원수가 화급히 뛰쳐나왔다. 본인의 신분을 잊고 무책임하게 행동한 황태자에게 잔뜩 잔소리라도 하려 했지만,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입을 다물었다. 초상 능력의 반작용으로 괴롭게 꺼져가면서도, 자신의 소녀를 향해 형형히 타오르는 눈빛. “빨리. 빨리 수술 준비를 해!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려라!” “……!” “반드시 살려야 한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잘못된다면…… 너희를 절대……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린덴은 허겁지겁 달려온 의사들을 겁박했다. 황태자의 그 흉포한 기세에 의사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한 의사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저, 전하. 전하께서도 치료를…….” 엘리제뿐 아니라 린덴의 몸 상태도 엉망이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황태자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난 됐다.” “하, 하지만…….” “날 신경 쓸 정신이 있으면 엘리제를 조금이라도 더 돌보라고! 난 괜찮으니!” 발작적인 외침. 평소와 전혀 다른, 이성을 잃은 모습이었다. ‘엘리제, 제발.’ 그가 그러는 이유는 이곳 군영까지 오며 엘리제의 상태가 한층 더 악화한 탓이었다. 장기간 피를 흘린 탓인지 이제 맥도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간신히 느껴지는 맥은 실낱같이 약했다. ‘아아, 제발. 제발…….’ 린덴은 그녀가 이대로 목숨을 잃고 자신을 떠나버릴까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초조함과 불안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런 불안함은 린덴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등불을 든 여인께서?” “황태자비께서?” 그녀의 몰골을 본 제국군 병사들이 크게 동요했다.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었다. 바로 그들 모두의 소중한 여인이었다. “상태가 좋지 않아. 빨리 응급 수술에 들어가야 해.” “그래, 반드시 살려야 해.” 의사들도 이를 악물었다. 지금 제국군 군영의 의료진들은 엘리제의 헌신에 감동해 자원하여 전장에 온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그들에게 이 작은 소녀는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동료이자 본받을 만한 스승이었고 이상이며, 빛이었다. 이렇게 이 소녀를 잃을 수는 없었다. 군 병원에 곧바로 수술이 준비되었고, 엘리제는 창백하게 의식을 잃은 채 수술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수술이 시작하기 직전. 린덴이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누가 그녀의 수술을 집도할 것이지?” “저입니다, 전하.” 그녀의 스승, 그레이엄 남작이 답했다. 이 군영에서 엘리제 다음으로 뛰어난 수술 실력을 가진 이는 다름 아닌 그레이엄이었다. “자네가?” “네.” 평소 린덴은 마음속으로 엘리제의 스승이라는 그레이엄을 못마땅해했었다. 그레이엄이 자신의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던 탓이다. 하지만 이 순간. 린덴은 그런 마음을 버리고 그의 손을 잡았다. “……!” 그레이엄은 지고한 황태자가 자신의 손을 잡자 흠칫 놀랐다. 그리고 린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간절한 목소리. “제발…… 제발…… 부탁한다.” “……!” “그녀를 살려다오. 어떤 보상이라도 하겠다. 제발 부탁한다.” 그레이엄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황태자를 바라봤다. 저 황태자가 ‘부탁’이라고 했다. 명령 외에는 절대로 해보지 않았을 만인지상의 지고한 이가. 그만큼 간절한 것이리라. 그레이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마음이…… 그리고 우리 모두의 마음이 전하의 마음과 같습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반드시 살리겠습니다.” 짧지만 확고한 의지가 담긴 말. 그리고 수술장의 문이 닫혔다. ============================ 작품 후기 ============================ 내일 2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07 4-4 운명 ========================================================================= 4장 운명 - 2 그레이엄을 비롯해 군영 내 최고의 실력을 가진 의사들이 수술을 시작했다. ‘데임 클로랜스, 아니, 로제.’ 그레이엄은 이전 그녀가 사용하던 가명을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처음 자신의 교수실에 왔던 순간이 떠올랐다. ‘전 당신을 그냥 쫓아내려 했었죠.’ 그는 처음에 그녀를 싫어했다. 부랑자 병실에 방치했고 도망가길 바랐었다. 분명 그랬는데 그녀는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것일까? 자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그녀만 바라보게 된 것일까. ‘죄송합니다. 데임 클로랜스. 전 사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결코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마음. 그녀는 황태자비가 될 것이다. 그러니 자신은 그저 그녀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그레이엄은 씁쓸히 웃었다. 그가 그녀에게 이 마음을 밖으로 보이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가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로제.’ 그레이엄은 표정을 굳혔다. 반드시 그녀를 살릴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 수술은 길었다. 황태자는 응급 처치를 받은 후 꼼짝도 않고 수술장 앞에 앉아 수술이 끝나길 기다렸다. 마치 석상이라도 된 것 같았다. “저, 전하. 전하께서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괜찮다.” “하, 하지만…….” 의사가 땀을 뻘뻘 흘렸다. 맥가일 원수도 사색이 되어 황태자에게 말했다. “전하, 몸을 돌보셔야 합니다.” “괜찮다고.” 언제나 이지적이고 냉철하던 황태자다. 찔러도 피나 한 방울 나올까 의심되던 그가 이성을 잃고,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응급 처치를 받았다지만,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는 상태인데…….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금방 회복되실 겁니다.” “알아.” 그 말에 린덴은 강하게 긍정했다. 그 긍정은 확신이나 믿음보다는 간절한 기원이었다. ‘제발…… 좋아져야 한다. 엘리제…….’ 린덴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토록이나 자신이 무력하다니. 자신의 심장인 그녀가 저렇게 생명이 걸린 수술을 받고 있는데, 제국의 만인지상인 그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하늘을 보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린덴은 씁쓸히 생각했다. ‘도대체 요즘 몇 번이나 기도하는지 모르겠군.’ 15년 전 ‘그날’ 이후 그는 신을 찾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그는 몇 번인지도 모를 정도로 계속해서 신을 찾고 있다. 모두 엘리제 때문이다. ‘그런 것 따위 상관없어. 엘리제…… 너만 괜찮아진다면.’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작은 체구로 환자를 보며 미소 짓던 모습을, 여리지만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모습을, 론도의 테스 강변에서 다소곳이 걷던 모습을, 케이크를 먹으며 좋아하던 모습을. 심지어 그녀의 삐뚤삐뚤 못난 글씨까지. 전부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편안히 누워 기다리고 있을 기분이 도저히 아니었다. ‘이렇게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는 없어.’ 그는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그런 마음은 린덴만이 아니었다. 군 병원이 위치한 프라바. 3만의 제국군이 머물고 있는 그 군영에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밥 됐어. 밥 먹어.” “안 먹어.” “뭐?” 취사병은 놀라 잭슨을 바라봤다. 산만 한 덩치의 잭슨은 늘 밥이 모자라다 투정 부리던 놈이었는데? “정말 안 먹어? 어디 아파?” “아, 몰라. 조용해.” 그러며 잭슨은 눈을 감았다. 뭐야? 취사병은 다른 병사들에게 말했다. “밥 됐어. 다들 나와.” “안 나가.” “뭐?” “우리 초소는 다 안 먹을 거야. 다른 초소에 넘겨줘.” 이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전쟁에 나온 병사가 밥을 안 먹겠다고 사양하다니. 취사병은 눈을 깜빡였다. “후회하지 마. 나중에 달라고 해도 안 준다.” “그래.” 오히려 병사들은 귀찮다는 듯 손짓했다. 진짜 뭐야? 그런데 옆에 초소를 가니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도 식사를 거부한 것이다. “너희도 안 먹는다고?” “그래. 다른 초소 줘.” “…….” 하지만 그 옆의 초소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한 취사병은 중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중대장 라인 대위는 당황해 물었다. “뭐? 병사들이 식사를 거부하고 있다고?” “네, 모두 안 먹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대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군인이 단식이라니. 원래 단식은 강한 불만이나 문제가 있을 때 항의의 의미로 행하는 경우가 많다. ‘도대체 무슨 불만들이 있길래?’ 어쨌든 가만히 놔둘 일이 아니다. 단식할 정도의 불만이라니. 더 큰 일이 일어나기 전, 정확히 무슨 불만이 있는지 확인하고 해결해야 했다. “너희 도대체 무슨 불만이 있는 거냐?” 라인 대위는 초소의 분대장들을 불러 먼저 대화를 시도했다. “밥을 안 먹다니. 불만이 있으면 먼저 지휘관인 나에게 이야기해야지, 다짜고짜 단식하면 어떻게 해?” 그런데 대답이 의외였다. 분대장들은 웬 불만이냐는 듯 말했다. “불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단식을?” “아…… 그건…….” 그들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기도 중이었습니다.” “뭐? 웬 기도?” “지금 데임 클로랜스께서 수술을 받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희 부대에 계신 군종 목사님이 식사를 거르며 기도하시길래 따라 해봤습니다.” 그 말에 라인 대위는 입을 벌렸다. 예비 황태자비를 위해 기도 중이었다고? 부대원 모두가? 식사까지 거르며? 그는 짧은 머리의 분대장에게 말했다. “자네 구교잖아? 근데 목사님을 따라 기도해?” “그게 뭐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자네는? 무교잖아? 근데 무슨 기도야?” 같은 브리티아인이지만, 종교는 조금씩 달랐다. 물론 주로 신교나 구교였지만, 무교도 가끔씩 있었다. 평소 무신론을 주장하던 대머리 분대장, 스캇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 뭐. 그렇긴 한데요.” “근데?” “제가 두 달 전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파편에 튄 상처가 곪아서. 근데 등불을 든 여인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분 아니었으면 전 죽었을 거란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이가 여기에 한둘이 아닙니다.” 스캇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으시고 헌신하던 소중한 레이디께서 지금 사경을 헤매고 있단 말입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게 하늘에다 대고 비는 것밖에 없으니, 기도라도 해야죠. 지금 구교든 신교든 무교든 무슨 상관입니까?” “…….” “그러니 수술이 끝날 때까지라도 뭐라고 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다들 심각하다고요.” 그래도 라인 대위는 뭐라고 하려고 입을 열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한 분대장이 낮게 말했다. 과거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감옥에 수감 경력이 있던 병사였다. “만약 등불을 든 여인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때 공화국 놈들은 저희의 분노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 결국, 라인 대위는 그들을 만류하지 못했다. 그렇게 사령부 프라바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은 한마음으로 수술이 시행되고 있는 병원과 하늘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출정 전, 출정식에서 그녀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여러분이 다쳤을 때 때, 상처로 고통받을 때 제가 옆에 있겠습니다.’ 작은 소녀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그녀는 다친 그들과 함께했다. 그래서 그들은 간절히 기원했다. 자신들의 등불을 든 여인이 쾌유하길.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수술장 앞에서 기다리는 린덴의 시야가 깜깜하게 변하고 있을 때. 드디어 수술장 문이 열리며 한 중년 의사가 밖으로 나왔다. 수술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러 결과를 알려주러 온 것이다! “어떻게 됐나?!” 린덴은 다급히 일어나며 물었다. 안 좋은 몸으로 워낙 급하게 일어나, 현기증이 일며 몸이 휘청 흔들렸다. “전하! 진정하십시오!” 맥가일이 불안 초조한 얼굴로 린덴을 부축했다. 하지만 황태자의 눈은 의사의 입에 고정되어 있었다. 제발! “그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린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밝은 목소리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린덴은 그렇게 믿었다. 그녀는, 그 작은 소녀는 거짓말처럼 일어나 이전처럼 강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묻는 그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어…… 떻게 됐지?” 중년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은 잘되었습니다.” “……!”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다행히 총알이 중요 신경이나 근육, 뼈, 힘줄을 건들지 않아 후유증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레이엄 경께서 심혈을 다해 수술해 상처 치료만 잘 받으면 흉터도 거의 안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은 희망적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의사의 얼굴이 어둡단 말인가? “수술은 잘되었는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가?” “지금까지 피를 너무 많이 흘렸습니다. 수액으로 보충하였지만, 출혈의 정도가 너무 심해 한계가 있습니다. 빈혈 수치가 너무 낮아 장기에 산소 공급이 원활히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면?” “수술은 잘 끝났지만, 이대로라면 과다 출혈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린덴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웃기지 마.” “…….” “웃기지 말라고! 그녀가 죽는다고?!” 고함을 지르자 피잉 머리가 돌며 비틀거렸다. 맥가일이 만류했지만,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가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런데 그때, 의사가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였다.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합니다.” “……뭐지?!” “하지만 위험합니다.” “……?” “검사 결과를 봤을 때 실패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그리고 만약 실패하면 데임 클로랜스께서는 사망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 외엔 없습니다.” “……!” 린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 방법이 뭐지?” 의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혈입니다.” *** “수…… 혈이라고?” 수혈(輸血). 환자의 몸에 직접 타인의 피를 주입하는 것을 뜻한다. 현대 지구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라 어린애도 아는 의료 처치. 하지만 린덴은 낯선 단어를 중얼거리듯 읊조렸다. “네, 전하. 부족한 혈액을 타인의 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수액을 주사하듯 직접 혈관에 넣어주게 됩니다.” “그러면…… 하면 되지 않는가? 뭐가 문제지?” 깊은 의학 지식이 없는 린덴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가 필요하면 넣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시대 때 수혈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타인의 피가 몸에 들어가면 높은 확률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거부반응?” “네, 몸에 들어간 피가 체내 거부 반응에 의해 용해되며 고열이 일어나며 검은 소변이 나오게 되지요.” 의사가 말하는 것은 현대 지구에서 ‘급성 용혈성 수혈 부작용’라 불리는 거부반응을 뜻한다. 현대 지구에서는 상식적인, ABO 등의 혈액형 미 일치로 일어나는 거부반응으로, 일단 발생하면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킨다. “그래도 다행히 최근 데임 클로랜스께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뭐지?” 린덴은 급히 물었다. “수혈 전 미리 몸 외부에서 혈액끼리 반응시켜 보는 것입니다.” 지구에서는 1901년이나 되어서야 시작된 혈액형 교차반응 검사(cross-matching test)였다. 엘리제는 크림반도에 온 후, 전쟁터에서 수혈의 필요성을 곧바로 깨달았고, 간단한 교차 반응 검사를 도입했다. 그녀가 그 검사를 도입하기 전까지는 제국의 의사들은 과거 지구의 의사들이 그랬듯 혈액형의 존재를 모르고 무작위적으로 수혈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 결과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아 거부반응이 수없이 일어나 수혈 부작용으로 인한 사망률이 50%에 육박하고 있었다. “데임께서 도입하신 방법 덕분에 50%에 육박하던 수혈 부작용 사망률이 1% 미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바로 다음편 올라갑니다!!> 00108 4-4 운명 ========================================================================= 4장 운명 - 3 “그런데? 그러면 그 방법을 사용해 수혈하면 되잖아. 뭐가 문제라는 거지?” 린덴은 일분일초가 귀중한 시간에 이런 쓸데없는 설명을 하는 의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사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데임께 맞는 혈액형이 없습니다.” “뭐?” “지금 건장한 병사들의 혈액을 채취하며 계속 교차 검사를 하고 있는데, 그 어떤 혈액과도 데임의 피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납니다.” “……!”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제가 혈액 교차 반응을 도입한 이후로,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떤 피가 들어와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다니?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길래. ‘도대체 모르겠구나.’ 세상 사람들의 혈액에는 단순히 ABO type 말고도,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더 많은 요소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의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데임 클로랜스라면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을까?’ 왠지 그녀라면 왜 이런 반응이 일어나는 것인지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수술대에 누워 있다. 그녀 없이 자신들만으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지?” “일단 데임께 맞는 혈액을 조금 더 찾아보긴 할 것입니다만, 만약 맞는 혈액이 없다면.” 의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은 한숨이었다. “아무 혈액이라도 주입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거부반응이 일어나면?” “그때는……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 없다. 그녀가 사망한다는 뜻이었다. 그 절망적인 말을 들은 순간이었다. 콰앙! 린덴이 벽을 강하게 후려쳤다. “빨리 구해.” “…….” “맞는 혈액. 빨리 구하라고! 무슨 수를 써도 좋으니!” “네, 전하!” 그 흉포한 기세에 의사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제길, 엘리제! 엘리제!’ 맞는 혈액을 찾지 못하면 이대로 그녀를 보내야 한다고? ‘웃기지 마. 절대. 절대 너를 이렇게 보내지 않아.’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강하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하지만 그 누구의 피를 반응시켜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저주라도 내린 듯, 그녀의 피는 모든 피에 거부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수술하던 집도의들의 피도 시도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아아, 엘리제.’ 린덴은 흐릿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미 수술이 끝난 엘리제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없이 시체처럼 창백한 그녀의 안색은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이 자리에 누워 있는 게 네가 아니라, 나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죽어가는 게 자신이었다면, 그랬다면 좋았을 것 같다. ‘내 피라도 줄 수 있으면, 그러면 내 모든 피를 너에게 주었을 텐데. 그래서 내가 죽더라도 너만 살아날 수 있다면.’ 그는 그렇게 절망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내 피는 검사해 보지 않지?” “아…….” 의사들이 황태자를 바라봤다. “전하께서는 수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수혈하려면 최소 400㏄ 이상의 혈액을 빼내야 한다. 하지만 현재 린덴은 그런 부담을 감수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큰 이유. “아마…… 전하의 피를 검사하셔도 똑같을 것입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이의 피를 반응시켜 봤다. 다 소용없었는데 황태자의 피라고 다르겠는가? 똑같을 것이다. “…….”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도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피가 그녀의 혈액과 일치할 확률은 기적이 일어날 확률보다 낮다는 것을. 아무리 그녀가 자신의 약혼녀라도 실제로는 피 한 방울 안 섞이지 않았는가? ‘만약 엘리제와 내 피가 일치한다면 그건 우리가 기적보다도 더 깊은 운명이란 뜻이겠지.’ 황태자는 실없이 생각했다. 어쨌든 좋았다.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는 없었다. 기적보다도 힘든 확률이라도 바라고 싶었다. “실패해도 좋으니. 그래도 내 피도 검사해 봐.” “……알겠습니다.” 의사들이 조심히 존귀한 그의 피를 채취했다. 그리고 엘리제의 혈관에서 뽑은 혈액에 반응을 해보았다. “…….” 모두 검사 결과를 기다렸다. 크게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이의 피가 일치하지 않았는데 약혼자인 황태자라고 다르겠는가? 그건 검사를 명한 황태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기적을 바란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피가 그녀에게 맞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그저 발악이었을 뿐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붙들고 싶은. 그런데 분명 그랬는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누군가 엘리제의 혈액을 보며 중얼거렸다. “왜…… 응집 반응이 일어나지 않지?” 원래 예상대로라면 딱딱하게 응집 반응이 일어나야 한다. 지금까지 그녀의 피는 모든 혈액에 거부반응, 즉 응집 반응을 나타냈다. 그런데 전혀 변화가 없었다.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안 지나서 그런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마찬가지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린덴은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내 피는…… 괜찮은 것인가?” “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의사들이 다급히 재검사를 시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응집 반응은 일어나지 않았다. 황태자와 엘리제의 혈액이 일치하는 것이다! “Oh, My God!(오! 신이시여!) 이런 기적이!”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기적. 이건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내…… 피가 그녀에게 맞는 것인가?” 황태자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한 의사가 흥분해서 외쳤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황태자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 환희는 초주검이 된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이 순간 그는 온 세상이 구원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면 엘리제는…… 엘리제는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한 완고한 인상의 의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피를 수혈받으면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또 무슨 문제?” 황태자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놈의 문제는 왜 끝도 없이 나온단 말인가! “현재 전하의 몸은 수혈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 “간신히 억지로 버티고 계시지만, 전하께서도 몸 상태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 몸으로 수혈은 무리입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린덴의 몸도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 그런 상태에서 수혈이라니. 하지만. “그딴 것 상관없다.” 그는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수혈을 시작해! 지금 당장!” “하, 하지만! 전하!” “명령이다! 지금 황태자인 나의 명에 따르지 않을 생각인가?” 서릿발 같은 단호한 외침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의사들은 황태자의 몸에서 피를 뽑아 엘리제의 몸에 수혈을 시작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것 같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피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곧바로 무리가 왔다. 머리가 어지러우며 시야가 하얘졌다. 하지만 황태자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엘리제, 너만 살아날 수 있다면 이런 것 따위.’ 몇 번이고,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낮은 목소리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힐끗 눈을 떠보니 까칠한 인상의 남자, 그레이엄이었다. 황태자는 이 와중에도 그의 감사가 마음에 안 들어 입술을 비틀었다. “내 여자다. 그러니 네가 감사할 필요 없다.” “…….” “너는 엘리제나 잘 치료하도록.” 그렇게 황태자의 피가 엘리제에게 수혈되었다. 조금씩 그의 피가 들어갈 때마다 종잇장 같은 그녀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흐릿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은 가슴이 울컥했다. 자신의 피가 그녀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니. 그건 놀라우면서도 환희가 넘치는 광경이었다. “좋아…… 지는 것인가?” 린덴은 의사들에게 물었다. 듣는 의사들이 흠칫 놀랄 정도로 그의 목소리에는 기력이 없었다. “네, 전하. 이제 데임께서는 좋아질 것으로 보입니다.” “다행…… 정말 다행이군.” 린덴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졸렸다. 이제 잠시만 눈을 붙였다, 뜨면 다시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볼 수 있겠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앉은 채로 의식을 잃었다. “전하!” “전하! 정신 차리십시오!” “전하를 병실로 옮겨! 빨리!” 결국, 그가 쓰러지자 의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의식을 잃은 채 급히 응급처치를 받는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며칠 뒤. 사령부가 위치한 제국군 군영에 거지 몰골을 한 남자가 도착했다. “정지! 누구냐!” “아아. 나야, 나.” 남자는 힘없는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경계를 서던 병사는 총으로 남자를 겨누다 눈을 크게 떴다. 거지 몰골이긴 했는데, 익숙한 얼굴이었던 것이다. “3황자…… 전하?” “그래, 나야.” 남자, 3황자 검제 미하일은 한숨을 푹 쉬며 답했다. “드디어 도착했네. 왜 이렇게 길이 어려운 거야.” 그가 며칠이 지나서야 군영에 도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화국군 때문이 아니라 길을 잃은 탓이었다. 심각한 길치인 그는 우크라 산맥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가다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나저나 풍(風) 속성 초상 능력자인 주제에 길치라니. 참 미하일다운 일이었다. “아아, 드디어 집에 왔네. 오는 길에 다른 군영에서 듣긴 했는데 리제는 괜찮아진 거지? 형님도 괜찮다고 하고.” “…….” “어쨌든 씻을 물 좀 준비해 줘. 먹을 것이랑 같이.” 그런데 병사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의 정체를 알았음에도 겨누고 있는 총을 내리지 않았던 것이다. “뭐해? 나 미하일이라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총사령관님의 명을 받아서.” “명? 형님이 무슨 명을?”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미하일은 인상을 와락 구겼다. 설마? 그 바보 형님이? 그때, 그가 군내에서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영창 가셔야죠, 전하.” “으악! 갈트 준장!” 군대 내 경찰, 헌병대(Military Police). 갈트 준장이 마치 새디스트같이 얄미운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명은 아시죠? 무단 탈옥죄.” “아악!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난 형님과 리제를 구했다고!” “네, 큰 공을 세우신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건 차후 포상이 내려질 것입니다. 얼핏 들으니 무척 큰 상이 내려질 거라 하더군요. 기대하십시오. 하지만 공은 공, 잘못은 잘못이지 않습니까? 잘못한 것은 벌을 받아야죠. 어물쩍 넘어가면 군 기강이 서지 않습니다. 그러니 뭐, 군 기강을 세운다 생각하시고 잠깐 한 몸 희생하시죠, 전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별것입니까?” “아악! 무슨 헛소리야?! 싫다고! 영창 싫어! 또 벌레 나오는 방 줄 거잖아?!” “이번엔 특별히 깨끗한 방으로 드리겠습니다. 좋은 방이 남아 있으면요.” “거짓말하지 마!” “근데 벌레는 왜 이렇게 싫어합니까? 쯧, 다 큰 남자가.” “그러는 넌 좋아?!” “뭐, 저야. 영창 갈 일이 없으니까요. 하여튼 갑시다. 시간도 늦었는데.” 미하일은 끌려가며 비명을 질렀다. “아악! 이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이 바보 형님을 진짜!” ============================ 작품 후기 ============================ 내일 2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00109 4-4 운명 ========================================================================= 4장 운명 - 4 그 시각. 크림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해안 요새 퐁트뢰. 경비를 서던 스위센 용병들이 하품했다. “하아, 피곤하네. 좀 자도 되려나.” “뭐, 여기까지 제국군이 오겠어. 좀 자.” “그럴까.” 퐁트뢰는 반도의 서남부 해안 교통의 요충지로, 흑해로 향하는 중요 항구이기도 했다. 따라서 굳건한 요새가 세워져 있었지만, 그 요새를 지키는 병력은 적었다. 고작 2,000명 남짓한 스위센 용병들이 전부. 공화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주력들은 모두 반도의 중부, 심페폴 인근에서 제국군과 각축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전황이 안 좋다던데.” “그러게. 공제가 심페폴로 혼자 들어와서 사막의 전갈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며?” 아직 사막의 전갈의 사망 소식은 반도 남부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화국이 형편없이 밀리고 있음은 모두 알고 있었다. “모르겠다. 우리야 뭐, 돈이나 대충 받으면 되지. 이런 데서 죽으면 개죽음이야.” 한 용병이 말하며 하품을 찍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하품을 한 입을 다물기 전, 그는 믿지 못할 광경을 보았다. “저건?” 그는 자신이 헛것을 보았나 눈을 비볐다. 하지만 헛것이 아니었다. 옆에 용병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웬 배들이?” 한두 대가 아니었다. 낮게 깔린 해무를 뚫고 시커먼 철갑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수가 아찔했다. “공화국의 함대인가?” “아니야. Liverty, Equaility, and Fraternity(자유, 평등, 박애) 깃발이 없잖아. 뭐지?” 공화국은 자유와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삼색의 깃발을 사용한다. 하지만 저 함대가 사용하는 깃발은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병사가 깃발 문장을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제국 황실기다! 제국 3함대야!” “뭐, 제국 3함대?!” 많은 이가 제국 3함대가 어떤 함대인지 알고 있었다. 동방에 주둔하며 적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화력을 지니고 있는 함대였다. “말도 안 돼! 3함대는 동방에 주둔하는 함대잖아!” 그리고 3함대뿐이 아니었다. 얼마나 많은 병력이 실려 있는지, 수송선들도 끝없이 뒤에 늘어서 있었다. “대포, 대포 준비해!” “적선의 접근을 허용하지 마!”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고작 2,000명의 군기 빠진 용병들이 막기엔 3함대는 너무나 강력한 적이었다. 기잉. 철컥. 철컥. 요새에 다가온 장갑함들이 포문을 열었고, 곧 수많은 대포가 불을 뿜었다. 벼락과도 같은 위력의 포격이었다. “크악!” “아악!”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는 기능을 잃고 너덜너덜하게 변해 버렸고, 무력화된 요새 앞 해안가로 수송선들이 접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배의 문이 열리며 나타난 굴카 용병들. 세계에서 가장 드높은 산맥, 히리야의 지배자이자 과거 청의 대제(大帝)를 격파하고 브리티아 제국군에도 악몽을 안겨주었던 이들. 그 전투 민족들이 쿠크리를 들고 요새에 진입했고, 그걸로 퐁트뢰 요새의 주인이 바뀌었다. “요새의 점령이 끝났습니다.” 3함대의 부사령관 랑트 백작은 그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러면 우리는 황태자 전하의 작전을 수행하겠다.” 황태자 린덴이 그들에게 내린 작전. “이제부터 심페폴 이남의 모든 요충지를 우리 3함대가 점령한다.”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의 종막을 선언하는 명령이었다. *** 수혈이 끝난 후, 엘리제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는 것을 목격한 린덴은 곧바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실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군영에 도착하기도 전에 쓰러졌으리라. 어쨌든 그런 그의 마음 덕에 엘리제는 살 수 있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군영에 도착하기 전에 진즉 죽었을 것이다. “엘리제.” 린덴은 병실의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얇은 커튼 하나를 두고 침대에 누워 있는 하얀 얼굴의 소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심장, 엘리제였다. ‘아픈 것은 싫지만 이건 좋군.’ 둘은 지금 한 병실에 입원 치료 중이었다. 야전 병원의 열악한 환경상 1인실이 없었기 때문인데, 그는 좋았다. 눈만 뜨면 그녀를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자신을 영원히 떠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얼마나 아프던지. 지옥의 고통이 이러할까. 무저갱과도 같은 좌절이었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린덴은 조금 더 그녀를 가깝게 보고 싶어 몸을 옆으로 돌리려다 끊어질 듯한 격통을 느끼고 신음을 흘렸다. “큭.” 도주 당시 워낙 초상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해 온몸이 만신창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수혈까지 했으니, 당분간 병실에서 벗어날 생각은 꿈에도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도 좋았다. 그녀가 무사해서, 그녀가 자신의 곁에 있어서. 이렇게 계속 같이 있을 수만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아파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지?’ 원체 의사들이 정성을 쏟은 탓일까, 그녀의 몸은 굉장히 많이 회복된 상태다. 특히 그레이엄, 그 마음에 안 드는 놈은 어찌나 그녀에게 붙어 있던지. ‘물론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서 그런 것인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에 안 들었다. 굉장히. ‘의사들은 쇼크의 후유증 때문에 못 일어나는 것이라고. 곧 아무 이상 없이 정신을 차릴 거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그래도 빨리 환한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크윽.” 린덴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옆의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엘리제.” 그의 손이 그녀의 백금발에 와 닿았다. 부드러운 감촉. 그러고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 조심히 그 머릿결을 쓰다듬었다. “이제 넌 내 거다. 이제는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날, 수혈하던 밤을 떠올렸다.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에게 피를 줄 수 있었다. 그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고,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래,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분명했다.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물론 서로의 피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은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린덴은 그냥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서로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 때문에 신이 그런 기적을 일으켜 준 것이라고. ‘그런데 그때 총을 맞았을 때, 엘리제는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 ‘전하…… 린덴…… 저…… 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리고 그녀의 말. ‘저 당신을…….’ 그 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녀가 위독해 정신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설마? 그녀도 나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항상 자신을 밀어내던 엘리제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때의 눈빛은…….’ 마지막 순간. 자신을 바라보던 엘리제의 눈빛에는 안타까운 갈망이 가득했었다. 무엇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왜 안타까워했던 것일까? ‘엘리제…… 빨리 일어나라.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인지 알려줘야지.’ 린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 징표도 다시 받아가야지.’ 그는 진주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이 목걸이도 돌려주어야 한다. ‘또 너랑 하고 싶은 게 많아. 그러니 빨리 일어나길.’ 그래, 그는 하고 싶은 게 많았다. 그녀가 웃는 모습도 보고 싶었고, 그녀와 아무것도 아닌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도 싶었다. 조용한 공원을 같이 걷고 싶기도 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파스타와 케이크도 먹고 싶었다. 론도에 돌아가면 러브 스토리 연극도 같이 보고 싶었다. 물론 린덴은 잡담도, 산책도, 파스타도, 디저트도, 연극도 모두 싫어한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라면 그도 좋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엘리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졌다. “전…… 하……?” “……!” 린덴의 눈동자가 크게 뜨여졌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흐릿하게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푸른 눈을 보는 순간, 린덴은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가 눈을 뜨면 너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이 순간 그는 한마디의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가슴이 요동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엘…… 리제…….”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지금 이 순간이 꿈은 아닌지. 만지면 터져 나가는 거품 같은 환각은 아닌지 두려워하면서. 하지만 아니었다. 너무나 부드러운 촉감이 그의 손끝에 와 닿았다. 그녀가 맞았다. “전…… 하…….” 그녀는 자신의 뺨을 만지는 그의 손길에 흠칫 놀란 듯했다. 하지만 이제 막 의식을 차려 몽롱한 탓인지 피하거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저…… 꿈을 꾸었어요.” “무슨 꿈을?” “긴 꿈인데 악몽이었어요. 길고…… 끔찍한.” 그 말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악몽을?’ 이전 엘리제가 잠을 잘 때마다 잠꼬대하던 것이 떠올랐다. 매번 도대체 무슨 악몽을 꾸는지, 그녀는 항상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또 똑같은 악몽을 꾼 것인가? 그런데 그 순간, 엘리제가 살짝 웃었다. 옅지만 잔잔하고 평온한 미소. 마치 무언가를 내려놓은 것처럼, 평안한 그 표정에 린덴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악몽을 꾸었다면서 왜 저런 표정이지? “이제 괜찮아요. 악몽 꾸어도. 나…… 이제 알았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냥…… 그게…… 그러니까…….” 그녀는 무언가를 설명하려는 듯 떠듬떠듬 말하였다. 하지만 무언가 힘에 부치는지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눈동자의 빛도 다시 스르르 줄어들었다. “미안…… 미안해요. 저…… 조금만…… 나…… 전하께…… 할 말이…… 있는데…….”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조금 더 쉬어라.” “네…… 조금만…….” 곧 엘리제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다시 의식이 가라앉은 것이다. “하아.”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것이지?’ 지난번 총에 맞는 순간부터, 두 번째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일까. 그것도 저렇게나 아련한 눈빛으로. “일어나면 이야기해 주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처음 의식을 차렸으니, 완전히 의식이 돌아오는 것도 멀지 않을 것이다. 린덴은 그녀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며 말했다. “푹 자라. 악몽 따위 꾸지 말고.” 그러고 그는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 벽면에 기대앉아 하염없이 그녀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에게 창틈 사이로 잔잔한 달빛이 내려앉았다. ***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 그녀는 다시 의식을 차리지 않았다. 의사들은 곧 의식을 차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린덴을 달랬다. 심한 쇼크를 앓은 후 완전히 의식이 회복될 때까지 오래 걸리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하지만 설명을 들어도 린덴은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계속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린덴은 병실에서 의외의 손님을 맞았다. “……!” 근엄한 얼굴의 중년 귀족. “……엘 후작?” 명재상이자, 명실상부한 브리티아 제국의 2인자, 엘리제의 아버지인 엘 드 클로랜스 후작이었다! 그의 근엄한 얼굴은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뒤에는 엘리제의 작은오빠 크리스도 서 있었다. 항상 부드럽던 그의 얼굴도 후작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인상, 렌 남작도 있었는데 뭔가 평소와 다르게 아버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토, 일요일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00110 4-4 운명 ========================================================================= 4장 운명 - 5 “전하를 뵙습니다.” 엘 후작은 먼저 황태자인 린덴에게 예를 표했다. 하지만 성의 있는 태도는 아니었다. 예를 표하면서도 후작의 시선은 한 곳. 바로 자신의 딸, 엘리제에게 꽂혀 있었다. “……엘리제. 내 딸.”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딸을 본 아버지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눈물을 참으려는지, 후작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덧없이 눈물 한 방울이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목숨보다도 소중한 딸이 전쟁에 참여해 고생하다 적에게 납치당하고, 총까지 맞아 의식을 잃고 있다니. 후작은 너무나 속이 상했다. “……후작.” 린덴은 엘 후작을 불렀다. 말없이 눈물 흘리는 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많이 좋아진 거라고? 이제 금방 깨어날 거라고? 하나도 위로 안 될 것이다. 자신도 그런 말이 하나도 위로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탄식하듯 말했다. “……미안하오. 다 내 잘못이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엘리제를 위해 목숨을 내던지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그는 미안하다 말했다. 빈말이 아니라, 그녀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정말 미안했다. 그의 잘못도 아니면서, 다 미안했다. 엘 후작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이 아이를 위해 하신 일들, 전부 다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이 아이가 잘못한 것이지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가 잘못한 것이지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전쟁터에 오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군 병원 사망률 20배 감소, 등불을 든 여인, 코프스크 대회전 승리의 주역, 대전염병 유행 차단 등. 그녀가 이 전쟁에서 해낸 일이 수도 없이 많건만, 후작에게 그런 것들 따위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딸이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가슴이 찢어질 듯 속상할 뿐이었다. “전하.” “……말하시오.” “엘리제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 그 뜻밖의 말에 황태자는 눈을 크게 떴다. 후작은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이 아이를 전장에 두지 못하겠습니다.” “……알겠소. 그렇게 하시오.” 아버지가 딸을 데려간다는데 뭐라고 하겠는가? 더구나 그녀가 이 위험한 곳에서 떠나기를 바라는 것은 린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계속 신경이 쓰이는데, 론도에 돌아가기 전에는 못 듣게 되었다. 그리고 훨씬 더 큰 문제. ‘보고 싶을 텐데. 어떻게 버티지.’ 옆에 두며 이틀에 한 번꼴로 볼 때도 보고 싶어 일이 잘 안 잡혔는데, 아예 본토로 돌아가면 그리움을 어떻게 감당할지 막막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엘 후작을 말리진 않았다. 자신의 감정보다 그녀의 안전이 당연히 중요하니까. 대신 이렇게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최대한 빨리 이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겠군.’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제국군의 총사령관 린덴은 빠른 종전을 결심했다. “의사의 소견으로는 움직이는 데 큰 무리는 없다고 하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엘 후작은 그렇게 말했다. 클로랜스 가문에서 미리 준비해 온 최고 시설의 마차와 의료진이 엘리제의 이송에 동원되었다. 먼저 근처 역으로 이동 후 기차를 통해 가까운 로마노프령에 가 신식 병원에서 치료를 마무리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배를 타고 론도로 돌아갈 예정이라 한다.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엘리제와 엘 후작, 크리스를 태운 마차가 전장을 떠났다. 로열 나이츠, 총기사단의 휘하 연대가 호위를 맡았다. 엘 후작은 과분하다며 사양했으나, 린덴이 억지로 붙였다. 호위대장은 당연히 렌 남작이었다. “…….” 린덴은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녀가 사라지자 왠지 가슴이 비는 듯한 느낌이 들어 빨리 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다시 한 번 굳게 다짐했다. 마차가 시야에서 사라진 후, 고개를 돌린 린덴은 문득 중얼거렸다. “봄이군.” 군데군데 나무에서 꽃이 피고 있었다. 드디어 영원할 것 같은 겨울이 지나고 크림반도에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론도에서 만날 때는 지금과 다를까?’ 마지막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어딘지 아련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 ‘그랬으면 좋겠군.’ 아픈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듯. 그녀와 자신의 관계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래서 앞으로는 그녀와 같이 웃고 싶었다. 저 꽃이 피는 것처럼 화사하게 말이다. 4막 She and He, He and She - fin *** 5막 : Love 1장 원죄. - 1 시간이 흘렀다. 황태자 린덴의 전격적인 작전 덕분에 봄이 지나기 전, 반도의 수도 심페폴과 그 인근을 제외한 반도의 모든 요충지가 제국군의 손에 넘어왔다. 공화국군은 보급이 끊긴 채 심페폴에 고립되었고, 여름이 다가오자 도저히 전쟁을 수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말라비틀어진 채 간신히 제국군에 대항했지만, 사실 저항할 기력도, 의지도 사라진 상태. 그렇게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다가올 때, 결국 프랑소엔 공화국의 총통 시몬 니콜라스는 론도 로마노프 황실에 서신을 보냈다. 강화 제의였다. 이로써 반도에서 제국민이 학살당함으로써 벌어졌던 크림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많은 피를 흘렸지만, 결국 제국의 대승리였다. 처음 제국민 학살을 주도했던, 반도의 과격주의자들을 체포했고, 그 밖에 전략적으로 얻은 소득도 컸다. 우선 흑해(黑海)의 재해권을 완벽하게 얻었다. 이제 서대륙 북동부와 중동 대륙의 바다는 오롯이 제국의 영향에 놓이게 되었다. 두 번째는 공화국에서 받은 막대한 전쟁 배상금. 그 액수는 전비를 한 번에 만회할 정도로 막대했고, 무리한 원정에 배상금까지 물게 된 공화국은 재정이 뿌리째 흔들렸다. 이는 나중에 철혈(鐵血)의 독재자 시몬 니콜라스의 몰락과 프랑소엔 2공화국이 건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 공화국에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다름 아닌 엘리제를 구해준 파비앙 중령이었다. 나중에 그가 공화국의 총통이 됨으로써 제국과 공화국의 관계는 많은 변화를 맞게 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먼 미래의 이야기. 그렇게 전후 협상 과정 중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었고, 새로운 해가 다가왔다. 그리고 엘리제는 18살 생일을 앞둔 소녀가 되었다. *** 파리스(Paris)와 더불어 서대륙 최고의 도시 론도(Londo). 하지만 문화의 중심이라는 빛의 도시, 파리스가 화창한 것과 다르게 론도에는 늘 안개가 자욱했다. 더구나 겨울이 깊어지니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눈으로 변해, 마차를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서기관님, 오늘은 일찍 퇴근하세요?” 그 론도의 중심, 황궁 옆에 위치한 행정부. 관료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일을 하는 젊은 여인이 웃으며 물었다. 서기관이라 불린 젊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이었는데, 훈훈하게 잘생겼다. “네, 어떻게 알았어요?” “오늘 그날이잖아요.” “아…….” 청년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에 한 번 카린 베이커리에서 특제 케이크가 나오는 날 맞죠? 그거 다 팔리기 전에 사가셔야 하잖아요.” “네.” 여인은 부럽다는 듯 말했다. “저도 서기관님 같은 오빠가 있으면 좋을 텐데. 제 오라비들은 절 보면 못 잡아먹어서 항상 안달이거든요.” “하하.” “하긴 저라도 서기관님의 동생분 같은 동생이 있으면 잘해줄 것 같아요.” 그 말에 청년은 미소를 지었다. 맞는 말이었다. 자신의 동생이 특별하긴 하지. 그의 동생은 바로 다름 아닌 엘리제였으니까! 청년, 크리스는 생각했다. 누구라도 엘리제같이 사랑스러운 동생이 있으면 잘해주지 않고 못 배길 것이라고. ‘아니, 형님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크리스는 막내 여동생에게도 항상 까칠한 형을 생각하며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어쨌든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아, 서기관님.” “네?” 젊은 여인이 서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곧 다른 보직으로 옮기시죠?” “네, 황태자 전하의 비서관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곧 전하께서 본국으로 귀국하시면 옮기게 될 거예요.” 차후 황제가 될 황태자의 비서관! 어마어마한 요직이자 권력의 핵심 자리로 옮기게 되는 것이다. 젊은 나이임에도 능력을 인정받은 덕이었다. 특히 전쟁에 참전하기 전, 엘리제의 취향을 알기 위해 황태자는 도움 안 되는 렌 대신 그를 불러 몇 번 독대한 적이 있는데, 그때 크리스의 능력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축하를 드려야 하는데, 아쉽네요.” “뭐가 아쉬워요. 오히려 저랑 일하느라 힘드셨을 거면서. 이제 ‘리볼버’는 갈 테니, 편하게 일하세요.” 그 말에 젊은 여인은 당황해 손을 저었다. ‘리볼버’는 부드러운 인상과 다르게 단호하고 확실한 일 처리 때문에 붙여진 그의 별명이었다. 확실히 쉴 틈 없이 몰아치는 그의 일 처리 스타일 때문에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잘해주셨잖아요.” 크리스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잘 따라줘서 더 고맙고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밥이나 한 끼 해요.” “……네.” 그러고 크리스는 정장에 코트를 걸치고 우산을 펼치며 사라졌다. 젊은 여인은 작게 중얼거렸다. “밥 안 사줄 거면서.” 아쉬운 눈으로 크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떻게 1년 내내 눈치를 못 채냐. 내가 얼마나 티를 많이 냈는데. 여동생만 챙기고. 바보, 서기관님.”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 일찍 퇴근한 크리스는 카린 베이커리에 들러 엘리제가 좋아하는 케이크를 샀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해 품절 전에 구입할 수 있었다. ‘또 사온다고 뭐라고 하려나?’ 엘리제가 그에게 케이크를 사달라고 부탁한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이런 궂은 날씨에 오빠가 고생하는 것을 바랄 그녀가 아니니까. 그냥 그가 사고 싶어서 사가는 것이다. 동생이 맛있게 먹는 것이 좋아서. ‘리제.’ 크리스는 크림반도에 그녀를 찾아갔을 때를 떠올렸다. 어깨에 총을 맞고 누워 있는 모습이 얼마나 가슴을 찢던지, 아버지와 그 모두 그녀를 전쟁터에 보낸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그래도 다행히 잘 회복되었다. 병원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와 푹 요양한 덕이다. 그녀는 후유증 없이 다시 완전히 건강해졌다. ‘물론 건강이란 단어는 그 아이와 어울리지 않지만.’ 다 좋아지긴 했지만, 건강하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았다. 원체 약했던 아이니까. 지금도 툭하면 감기에 걸려 골골거렸다. 마음만 같아선 집에서 못 나가게 하고 싶지만, 하고 싶은 일은 뭐가 그렇게 많은 것인지. 동생이 최근 ‘새로 얻은 직장’에서 해내고 있는 일들의 양을 보면, 일벌레라 불리는 자신도 혀가 내둘러졌다. ‘황제 폐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말릴 수도 없고.’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기특하긴 했지만, 무리는 안 했으면 좋겠는데. 늘 너무 무리하는 것 같아 걱정이 들었다. 너무 무리 말고, 쉬엄쉬엄하라고 만류해도. 괜찮다고 웃으며 답할 뿐이다. ‘오늘도 자정 넘어서까지 안 자면 강제로 불을 꺼버려야겠어.’ 그렇게 부드러운 ‘리볼버’는 단호하게 생각하며 클로랜스 가문의 저택에 들어갔다. “오셨습니까, 공자님?” “응, 리제는? 아직 안 돌아왔나?” 크리스는 오자마자 동생부터 찾았다. “아닙니다. 오늘 공식 휴무라서. 출근 안 하셨습니다.” “그러면? 방에서 일하나?” 그 물음에 가문의 기사, 벤톨 경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응, 왜? 무슨 일 있어?” 하지만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근처 정원에서 엘리제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꺄악!” “……?!” 크리스는 깜짝 놀랐다. 동생이 비명을? “리제!” 그는 귀하게 사온 케이크를 대충 팽개치고 다급히 소리가 들린 곳으로 달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정원에 도착한 크리스는 맥이 풀렸다. 뭐야. “하, 하지 마요!” “뭘 하지 마, 리제?” “눈 뿌리면 차갑단 말이에요!” 정원엔 가디건을 걸친 하얀 소녀와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모델 같은 여인이 있었는데, 서로 정원에 쌓인 눈을 뿌리며 놀고 있었던 것이다. 고고하면서, 자신감 넘치는 인상의 여인은 씨익 웃으며 양손에 눈을 들고 엘리제에게 다가갔다. 엘리제는 겁먹은 토끼처럼 뒷걸음질 쳤다. “하지 마요. 언니. 응?” ============================ 작품 후기 ============================ 내일 26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1 5-1 원죄 ========================================================================= 1장 원죄 - 2 “리제가 먼저 했잖아?” “그, 그건 장난으로 조금…….” “하여튼 이리로 와.” “꺄악! 싫어요!” 여인은 매정하게 눈을 뿌렸고, 눈을 뒤집어쓴 엘리제는 자신도 양손으로 눈을 뿌렸다. 하지만 두 눈 질끈 감고 허우적거리는데 맞을 턱이 있나? 눈싸움은 여인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크흠. 크흠!” 동생이 가련하게 당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보던 크리스는 헛기침하였다.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두 여자가 고개를 돌렸다. “오빠!” 이제 그를 오라버니가 아닌, 오빠라 부르게 된 엘리제가 활짝 웃으며 뛰어왔다. 눈에 뒤덮여 완전 하얀 눈 토끼가 된 엘리제의 몸을 털어주며 크리스가 잔소리했다. “누가 추운데 이렇게 나와서 놀래? 또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간만에 언니가 와서.” “또 감기 걸리면 그때는 밤에 논문 쓰는 거 금지야.” “안 돼요! 지금 쓰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한 논문인데…….” 하지만 크리스는 부드러운 얼굴로 칼날같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안 돼.” 그러고 그는 고개를 돌려 엉거주춤 서 있는 도도한 인상의 여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유리엔.” “……그러게요. 일찍 오셨네요.” 어딘가 불편한 대답에 크리스도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이름은 유리엔 드 차일드. 클로랜스 가문의 가장 큰 적인 차일드 후작가의 적녀이자, 차기 당주(當主) 후계자였다! ‘어쩌다 둘이 이렇게 친해진 거야.’ 크리스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크림반도에서 귀국한 후 엘리제와 유리엔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리제가 전쟁 때 전(前) 후계자였던 알버트 경의 목숨을 구해주었다고 했지. 그것도 자기의 목숨을 걸고 수술해서.’ 그 일로 암셀 후작은 엘리제를 몇 번이고 초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적의 딸이었지만, 엘리제의 목숨을 건 헌신은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하는 감동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며 엘리제는 유리엔과도 계속 만나게 되었고, 그렇지 않아도 길 건너 이웃사촌(?)이었던 그녀들은 마음도 잘 통해 금세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난 불편하단 말이지.’ 크리스는 씁쓸히 생각했다. 지금은 전쟁 때문에 잠잠하지만, 이제 곧 론도에는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황태자와 3황자. 황위를 놓고 다투는 형제들 간의 전쟁 말이다. 그리고 그 전쟁은 총칼을 들고 하는 싸움보다 더 슬프고 괴로울지도 몰랐다. “……미리 말씀드리지만, 눈싸움은 제가 시작한 것이 아니에요. 리제, 동생이 먼저 시작했어요.” 그 말에 크리스는 추운지 얼굴이 빨개진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 그 시선에 켕기는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그냥 전…… 장난친 건데…….” 크리스는 한숨을 내쉬고 유리엔에게 말했다. “어쨌든 추운데 들어가시죠. 케이크나 먹읍시다.” *** 그들은 접객실로 들어가 따뜻한 난로 앞에 몸을 녹였다. 그러고 크리스가 사온 케이크와 엘리제가 달인 차로 티타임을 가졌다. 유리엔은 차향(茶香)을 맡으며 감탄했다. “언제나 생각하지만 리제의 차는 정말 훌륭한 것 같아.” “그래요, 언니?” “응, 동방의 귀인들이 직접 끓인 것 같아. 난 아무리 해도 이렇게 안 우려지던데 어떻게 하는 거야?” 엘리제의 다도(茶道)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전 삶, 황후로 살며 부단한 노력을 한 덕분이었다. “천하의 데임 클로랜스가 설마 다도까지 훌륭한 레이디라고 누가 상상하겠어? 너무 완벽하잖아.” “어, 언니.” 민망해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쿡쿡 웃었다. “물론 눈싸움을 좋아하는 소녀란 것도 상상 못하겠지만 말이야. 제국 최고의 의료기관인 황실십자병원의 수석 교수이자 신임 황궁 어의(Royal Physician)의 취미가 눈싸움이라니.” “아, 아니에요! 오늘은 그냥 장난으로…….”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만약 또 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 “안 해요!” 당황하는 엘리제를 보며 유리엔은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재 제국의 가장 이름 높은 명사(名士)가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녀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뭐, 신기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지.’ 저 크리스만 해도 집에선 마냥 좋은 오빠지만, 행정부에서의 별명이 ‘리볼버’다. 그리고 그 별명은 귀족파가 지은 별명이다. 저 크리스가 추진한 정책으로 귀족파가 손해 본 게 한둘이 아니었다. ‘하아.’ 한 가지 떠오른 생각에 유리엔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언니?” “아, 아니야. 일은 할 만해?” “네, 너무 좋아요.” 엘리제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 모습을 보며,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피는 한 방울도 못 보겠는데.” “좋아하는 일이니까요.” 엘리제는 최근 새로운 직장을 얻었다. 아버지인 엘 후작은 그녀가 다친 후 의사 일을 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데 이제 절대 무리하는 것을 보지 않겠다고. 그래서 원래 직장인 테레사병원에서도 해고당하고, 강제로 요양하던 중 의외의 곳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엘 후작도 차마 반대하지 못할 곳에서. “그나저나 참 대단해. 최연소 황실십자병원의 수석 교수 겸 황궁 자문 어의라니.” 그녀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온 곳은 황실 직속 의료기관인 황실십자병원과 황궁에서였다! 그들은 무려 제국 최고 병원의 수석교수직과 황제를 직접 진료하는 황궁 자문 어의직을 제안했다. 엘리제는 당시를 생각했다. ‘나도 깜짝 놀랐지.’ 아무리 그녀의 명성이 높다고 해도, 18살도 되기 전에 수석교수직과 황궁 자문 어의라니. 유례가 없던 일이다. 하지만 배경을 알고 이해했다. ‘폐하께서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시다니.’ 황제 민체스터의 건강이 갑작스레 안 좋아진 것이다. 황궁 어의이자, 황실십자병원의 병원장인 밴 자작은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황제를 치료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최고의 의사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선택된 것이 바로 엘리제였다. 그녀가 지금까지 이룩한 의학적 업적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밴 자작은 한마디로 반대를 잠재웠다. ‘그러면 자네들이 폐하를 치료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의외는 폐하의 반응이었지.’ 그녀가 의사가 되는 것을 그토록 이나 반대하던 황제다. 그런데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별 반대 없이 승낙했다. ‘영애가 어의라고? 좋군. 사실 린덴, 그 아이도 워낙 부탁하고 나도 생각이 바뀌어 영애에게 ‘선물’을 하나 주려 하기도 했었고.‘ 이런 아리송한 말도 하였다. 무슨 선물인지 물었으나, 웃으며 이렇게만 답하셨다. ‘지금까지 한 번도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 황궁의 궁내부장이 분명 반대할 것이고, 법적 절차가 있어 처리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리네. 허허. 나도 살면서 내가 이런 법안을 발의하게 될 줄은. 하여튼 조금만 기다리게.’ ‘도대체 뭘까?’ 그때, 유리엔이 말했다. “황실십자병원에서 수석교수로 일하는 거 힘들지 않아?” “즐거워요.” 엘리제의 답에 유리엔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 워낙 고명한 의사가 많아서 어린 영애가 왔다고 싫어하지는 않아?” “뭐, 그런 분들도 계시긴 해요.” 엘리제는 여상이 답했다. 당연히 모두가 그녀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명성이 높다지만, 일단 너무 어리지 않은가? 편견을 가지고 보는 이들도 당연히 있었다. 다만 이제 곧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의 그녀이기에 대놓고 말을 못할 뿐이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런 시선은 익숙하니까.’ 엘리제는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한국에서 서울대 의대에 최연소 교수가 됐을 때도 그녀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어차피 그런 시선이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없어질 테니. 신경 쓸 필요 없어.’ 그때 그녀가 그들에게 답으로 보여준 것은 뛰어난 실력이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뛰어난 실력을 보이니 그녀를 배척하던 이는 모두 사라졌고, 그녀를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그건 그녀가 적을 만들지 않는 공손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긴 하다. 평소 호감 가는 태도에 뛰어난 실력이 조화를 이루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티 나게 나를 못마땅해하는 교수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최선을 다하다 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라 생각했다. 엘리제의 그런 의연한 태도에 유리엔은 대단하단 얼굴을 했다. 저렇게 작고 여린 소녀가 어떻게 저렇게 강인한지 감탄이 나왔다. “이제 슬슬 일어나 봐야겠다.” “가시게요?” “응, 오래 있었잖아. 가봐야지.” 엘리제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놀러 오실 거죠?” 유리엔은 그녀가 아쉬워하는 얼굴이 왠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나야 괜찮은데, 리제 네가 항상 바쁘잖아. 오늘도 간신히 쉬는 거면서.” “다음 쉴 때 또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런데 다음에 시간이 나도 네가 날 만날 수 있을까?” “네?” 유리엔은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곧 전하 오시잖아. 세기의 로맨티스트 황태자 전하 말이야.” “……!”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그건…….” 엘리제가 공화국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황태자가 그녀를 구하러 간 것은 제국 전체에 널리 퍼졌다. 자신의 여자를 위해 죽음도 불사한 그의 행동에 제국의 모든 소녀가 감동했고, 졸지에 그는 평소의 딱딱한 이미지와 다르게 세기의 로맨티스트가 되어버렸다. ‘부럽네.’ 유리엔은 속으로 잠시 씁쓸히 생각했다. 그녀는 남몰래 황태자를 연모하고 있다. 물론 이루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고, 속으로만 삭이고 있는 감정이지만 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태연히 물었다. “오래 못 봤잖아. 거의 10개월은 되지 않았나? 보고 싶지?” “…….” 엘리제는 대답하지 않고 얼굴만 붉혔다. ‘전하.’ 그녀는 무뚝뚝한 얼굴의 그를 떠올렸다. 유리엔이 말이 맞았다. 그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 오죽하면 꿈에서도 그를 그리워할까. 이제 그는 꿈에서 그녀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리지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웃어주었다. *** 황실십자병원은 황궁에 바로 붙어 있었다. 원래 설립 목적이 황족과 고위 귀족들을 진료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제와 황족을 진료하는 어의는 모두 황실십자병원의 병원장이나 수석교수직을 겸임했다. 마침 때맞춰 수석교수였던 게임 경이 개인 사정으로 사임해 그 자리를 엘리제가 맡게 되었다. 그리고 그 신임 수석교수인 엘리제. 그녀는 황실십자병원의 수술실에서 한창 수술에 열중 중이었다. “타이(Tie), 실 주세요.” 당연히 어의라고 황제와 몇 안 되는 황궁의 황족만 진료하는 것이 아니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로 일하며 고위 귀족들의 치료도 같이 병행한다. 이는 황족만 전담하는 동방의 어의와는 다른 모습으로, 오히려 현대 지구의 대통령 주치의와 비슷했다. 주로 명문 대학의 명망 높은 교수가 맡게 되는 대통령 주치의들도 본인의 진료를 같이 병행했으니까. “여기 있습니다, 교수님.” 엘리제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춤을 췄다. 그리고 질끈 묶어지는 동맥. 그녀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메스가 움직이며 위 주변의 림프절들을 툭툭 쳐 내었다. 위를 잘라내기 전 시행하는 D2 절제였다. 엘리제가 지금 집도하고 있는 수술은 다름 아닌 위암 환자의 위절제술. ‘위암 환자에서 재발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림프절을 최대한 많이 쳐내야 해.’ 암세포는 전이가 일어나기 전, 가장 먼저 근처의 림프절로 이동한다. 그러니 재발을 막기 위해선 림프절을 최대한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테크닉이었다. 위 근처 3㎝만 절제하는 D1과 다르게 D2 절제는 현대 지구의 미국의 의사들도 어려워하는 절제법이다. 하지만 위암 수술의 최고봉은 위암 유병률이 높은 한국과 일본의 의사. 그녀는 그중에서도 괴물이라 불리던 서젼(Surgeon)이었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들은 감히 시도할 생각도 못할 위치의 림프절들을 가벼운 손놀림으로 툭툭 쳐 내었다. “지혈 포셉(철제 도구) 주세요.” “네, 교수님!” 거침없는 수술 진행. 쾌속하게 림프절 D2 절제/를 끝내고 위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탈칵. 철컥. 찌익. 고요한 수술방에 그녀의 손이 자아내는 소리만 들렸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한편 수술방에 있던 모두가 경악해 그녀의 수술을 바라봤다. 이곳은 제국 최고의 의료 기관, 황실십자병원이다. 그런 만큼 최고의 의료진이 최고 수준의 수술을 한다. 따라서 어지간한 실력에는 놀라지도 않는다. 따라서 저 소문이 자자한 천재 소녀, 등불을 든 여인이 교수로 온다고 했을 때도 다들 코웃음 쳤었다. 잘해봤자 얼마나 잘하겠어. 당연한 의심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해온 헌신과 업적들은 폄훼할 거리가 없었지만, 수술 실력도 그만큼 어마어마할 것이라 상상하긴 어려웠다. 일단 나이가 너무 어렸던 것이다. 하지만…….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00112 5-1 원죄 ========================================================================= 1장 원죄 - 3 ‘어떻게 이런 수술을? 말도 안 돼?’ 참관차 들어온 피터 교수의 눈동자가 요동쳤다. 두 눈으로 보면서도 지금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황실십자병원의 차기 수석교수감으로 여겨지던 명의인 그가 평생을 추구하던, 아니, 그보다 더 드높은 경지의 수술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봉합실 주세요.” 어느새 위의 전방부 1/3을 잘라 내, 위아전절제술을 마무리한 엘리제가 실을 부탁했다. 그러고 소장을 끌어당겨 길을 내, 잘라낸 위와 연결하는 재건술을 시행했다. ‘Roux-en-Y 재건술!’ 피터 교수는 다시 한 번 경악했다. Roux-en-Y 재건술! 이전 의사 자격시험에 엘리제가 답으로 적어낸 수술법이었다. 당시 그녀가 적어낸 획기적인 답안은 학회에 거센 파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수술을 실제로 시행한 의사는 없었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너무 고난이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저 소녀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수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아무런 주저도 없이, 낯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게! ‘믿을 수가 없구나. 믿을 수가 없어.’ 피터 교수는 무려 의학에 30년의 세월을 바친 의학자. 이 순간, 그는 그레이엄 남작이 엘리제를 보고 처음 느꼈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대단해. 정말 대단해…… 어떻게 저렇게…….’ 하지만 자신의 시간을 무상하게 만드는 소녀의 실력에 좌절하거나 질투를 하진 않았다. 비슷한 실력이어야 좌절하고 질투하는 것이다. 저 압도적인 실력 앞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그저 경외였다. 그리고 또 하나 느끼는 감정은 기대감. 앞으로 저 소녀와 함께하는 황실십자병원 생활에 얼마나 놀라운 일이 많을까 기대가 되었다. ‘저런 분이 황태자비가 되다니.’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저런 희대의 천재는 병원에만 가둬서 수술만 시켜야 하는데! “클로즈(Close)합니다.” 수술을 끝내는 선언이었다. 어느새 재건술을 끝내고, 지혈까지 마무리 한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어시스턴트들이 우렁차게 말했다. 젊은 의사가 공손히 말했다. “마무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교수님.”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피에 젖은 장갑을 벗었다. “오늘 수술은 이걸로 끝인가요?” 그녀는 수술장에 난 창으로 밖을 보았다. 이미 시간이 늦어 어둑어둑한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네, 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뒤의 처치를 부탁할게요.” “네, 교수님!” 그녀가 수술복 위에 하얀 가운을 걸치고 수술장을 나가자 남은 인원들이 혀를 내둘렀다. “방금 데임께서 수술하시는 것 봤어? 난 이 수술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는 것 처음 알았어.” “그러게. 나도 깜짝 놀랐어. 어떻게 저런 손놀림이 가능한 것이지?” 모두가 경악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이제 곧 황태자 전하와 약혼하고 결혼하시면 의사는 그만 두시겠지?” 그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원체 압도적인 실력에 깜빡깜빡 잊고 있지만, 그녀는 예비 황태자비였다. 황후가 되고 나서도 의사 일을 계속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쉽다. 계속 같이 일하면서 배우고 싶은데.” “그러니까. 수술 하나하나가 예술인데.” “황후가 되신 다음에도 의사 일을 할 수는 없겠지?” “당연히 안 되겠지. 지금까지 역사상 황후가 다른 직업을 가진 것 봤어?” “하지만 제국법에 황후가 다른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는 법이 있어?” “몰라. 어쨌든 안 되지 않을까?” 모두가 아쉬운 얼굴로 그녀가 사라진 수술 문을 바라봤다. *** 엘리제는 가운을 걸친 채 자신에게 주어진 교수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4시 30분. 간만에 조금 시간이 남는다. ‘30분 정도 시간이 있으니…….’ 펜을 들었다. 그녀는 워커홀릭답게 요즘 거의 온종일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보통 저녁 10시쯤? 아버지가 너무 싫어해서 그 시간이 넘으면 집에 가서 남은 일을 처리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지만, 그래도 꼭 빠지지 않고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아직 크림반도에 있는 이들을 위한 편지 쓰기였다. ‘먼저 큰오라버니.’ 그녀는 렌을 위해 편지를 썼다.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혹시 궁금할까 봐 집안의 여러 일을 적었다. 봉투에 편지를 넣으며 그녀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여동생이 이렇게 편지를 써서 보내주는데 답장은 한 번도 안 하고.’ 큰오라버니답달까? 아무리 편지를 보내도 단 한 번도 답장이 없었다. ‘다음엔 밀.’ 밀. 3황자는 렌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오히려 먼저 그녀에게 끝없이 편지를 보냈다. -답장해! 빨리 보고 싶다. 이런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덕분에 거의 펜팔 하는 수준으로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아 그녀의 방에는 그가 보낸 편지가 가득히 쌓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전하…….’ 두근. 그를 떠올리자 그녀의 가슴이 뛰었다. 앞에 둘과는 달랐다. 단순히 편지지에 펜을 가져가는 것일 뿐인데, 가슴이 설레었다. 보고 싶었다. ‘전하.’ 처음엔 생각했다. 오랫동안 떨어져서 못 보고 있으면,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생각났다. 그녀는 천천히 글씨를 적어 내려갔다. 앞의 두 명에게 적을 때와는 전혀 다른 정성으로. -전하께 엘리제가. 여기 론도는 추운데, 크림반도는 안 추우신가요? 거기까지 쓴 엘리제는 펜을 멈추었다. ‘안 추우신가요?’라니. 뭔가 없어 보이는 표현이잖아. 뭔가 더 고풍스럽고 예쁘게 표현할 수는 없을까? 그녀는 편지지를 구겨 버리고 다시 쓰기 시작했다. -전하께 엘리제가. 이곳은 눈이 많이 왔는데, 그곳도 많이 왔나요? 아니야. 이것도 아니야. 더 없어 보이잖아. “난 왜 이렇게 문장력이 없을까.”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글씨체도 못나게 삐뚤삐뚤. 다른 귀족가의 영애들 보면 글씨도 예쁘고, 문장도 굉장히 고풍스럽게 쓰던데. “이런 편지를 전하께 보낼 수는 없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없는 문장력이 갑자기 생기겠는가? 아무리 써도 조악한 문장만 나왔다. ‘나 그래도 논문은 잘 쓰는데.’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차라리 도표와 통계로 이루어진 의학 논문을 한 편 완성해서 보내는 게 쉬울 것 같았다. ‘매번 이래서 전하께만 편지 못 보냈는데.’ 지난번 그에게서 온 편지가 떠올랐다. -잘 지내나? 몸은 건강한가? 곧 보자. 황태자다운 짧은 문장. 그래도 워낙 필체가 강렬하고 품격 있어 자신과 다르게 남성적이고 멋진 느낌이 들었다. 문제는 마지막에 덧붙인 추신. Ps. 그런데 왜 매번 나에게만 편지를 안 하는 것이지?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거라고요.’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에게 관심도 없는 큰 오라비 렌과 친구인 밀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에게 보내는 편지가 어떻게 같겠는가? 그가 자신의 글씨를, 문장을 하나하나 볼 것이란 생각이 드니 정성 들여 쓰고 싶었고, 예쁘고, 좋은 문장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 덕분에 매번 쓰레기통에 편지지만 쌓이고, 정작 편지는 못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편지 말고, 선물이라도 보낼까.’ 그렇지 않아도 그가 크림반도에서 추울까 스웨터를 짠 적이 있다. 하지만 하늘이 내린 수술 솜씨를 가진 그녀이지만, 자수 솜씨는 꽝이었다. 어떻게 완성하긴 완성했는데 도무지 사람이 입을 옷이 아니었다. ‘하아. 이번엔 꼭 우아하게 써서…….’ 그런데 엘리제가 한참을 편지지와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그리고 들어온 인물을 본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황제를 최측근에서 모시는 시종장 밴트 경이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시죠?”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데임.” “……?” “폐하께서 데임을 잠시 뵙자고 하셔서요.” “……?”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궁 어의가 된 그녀는 최근 매일 황제와 진료를 위한 면담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또? “아,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며 밴트 시종장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줄 ‘선물’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고 보니 황제는 그녀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었다. “기대하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영애가 일평생을 통틀어 가장 바라던 것이니 분명 기뻐할 거라고.” 그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선물인 거지? *** 황실십자병원과 황제가 머무는 궁은 지척이었다. 유사시에 의사들이 곧바로 달려갈 수 있기 위한 건물 배치였다. 저녁이 가까운 시간이건만, 황제 민체스터는 집무실에서 업무에 열중이었다. 생각해 보면 민체스터는 자는 시간과 대신들을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늘 집무실에 있었다. 마치 서류 보는 기계인 것처럼 항상 일만 했다. 그녀는 그가 개인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미식을 탐하지도, 술을 마시지도, 여인을 찾지도, 오락을 즐기는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권력을 누리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 일만 했다. 어쩔 때 보면 그는 황제가 아니라, 제국이란 거대 기계의 나사부품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황제란 나사부품 말이다. ‘폐하.’ 엘리제는 심란한 눈으로 황제를 바라봤다.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황제는 그녀를 아꼈다. 그래서 가족으로 맞으려 했고, 그녀의 가장 큰 소원인 의사의 길을 가는 것을 막으려 했다. 당시엔 그게 얼마나 끔찍했는지 모른다. ‘지금도 황후가 되면 의사 일을 못 하는 게 아쉽지만.’ 아쉽다? 아니, 사실 그런 단어로 표현할 말은 아니었다. 이제 황태자를 향한 마음을 인정하게 되었지만, 의사 일을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새가 날개를 잃으면 이런 아픔일까? 마음이 도려내지는 것처럼 아팠다. 다만 피할 수 없기에 억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사실 최근 무리하는 것은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앞으로는 못한다고 생각하니 마지막 불꽃이라도 태우려는 마음으로. ‘하지만…….’ 그녀는 최근 반년 만에 훌쩍 살이 빠진 황제를 바라봤다.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민체스터는 몸이 쇠약해지며 기력이 크게 떨어졌다. 저렇게 약해진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았다. 여러 사정이야 어쨌든 이전 삶에서도, 이번 삶에서도 자신을 많이 아끼는 그였기에. 밴트 시종장이 기척을 알렸다. “폐하, 데임 클로랜스가 왔습니다.” “오, 왔는가?” 황제는 서류에서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어의가 아니라, 마치 딸이 온 듯 반기는 모습이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바쁜데 내가 불렀군.” “아닙니다, 폐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영애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 많이 괜찮아졌어. 고맙네. 혈당 수치도 많이 좋아지고.” 황제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피로가 느껴지는 얼굴에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27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3 5-1 원죄 ========================================================================= 1장 원죄 - 4 ‘지금 폐하께서 앓고 계신 병이 도대체 뭘까? 다른 증상은 없고, 기력만 계속 없어 하시니.’ 그녀도 황제의 병을 정확히 진단 못 하고 있었다. ‘의심이 가는 병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의심 가는 질환은 많았다. 몸 깊은 곳 숨어 있을 정체모를 암, 자가 면역 질환, 희귀한 내분비 병, 혈액병 등등……. 이 모든 질환이 다 황제와 같은 증상을 나타낼 수 있었다. ‘현재 지구라면 모조리 다 검사를 해보아서 진단해 냈을 텐데.’ 그녀가 지구에 있었다면, 병을 진단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검사에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저런 병들은 현대의 진단 도구들 없이 밝혀낼 수가 없었다. ‘보전적인 처치밖에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그녀는 답답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명확한 진단을 모르니,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보조적인 치료들뿐. 그것만으로도 황제의 상태는 많이 호전되긴 했지만, 근본적인 치료를 못하니 상태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래, 요즘 하고 있는 여러 일은 잘되고 있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녀가 공손히 답했다. “부족하긴. 기적의 천사라 불리는 영애가 부족하면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겠는가.” 황제는 짓궂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에 엘리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의 천사라니, 과분합니다.” 기적의 천사는 크림전쟁 때 그녀의 활약을 본 이들이 지어준 또 하나의 별명이었다. “열심히 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원래도 몸이 약한 것으로 아는데, 그러다 건강 상할까 걱정이 돼. 재상이 영애 걱정을 얼마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네, 폐하.” 그렇게 둘은 두런두런 대화하였다. 민체스터는 어의를 대한다기보다는, 조카딸을 대하듯 그녀를 편안하게 대했다. 엘리제는 한결같이 공손히 답하며, 황제가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그녀가 지금 진행 중인 여러 일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 황제가 문득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영애. 내가 바쁜데 계속 쓸데없는 말만 했군.” “아닙니다, 폐하.” “그래, 내가 왜 영애를 불렀는지 궁금하지? 주고 싶은 ‘선물’이 있어서 불렀네. 아마 크게 기뻐할 거야. 영애가 가장 바라던 것이니.” 그러며 황제는 웃었다. “내가 이 ‘선물’을 영애에게 주기 위해 궁내부장과 얼마나 다퉜는지 모르네. 절대 안 된다는 것을 간신히 고쳤어.” 그 말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선물을 말하는 것이지? 만약 보석 같은 거라면 필요 없는데. 하지만 황제는 바로 선물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잠시 말을 돌렸다. “그 전에 영애, 내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네, 폐하. 말씀하시옵소서.” “영애는 나중에 황후가 되면, 어떤 황후가 되고 싶은가?” “……!” 그 말에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황후. 그녀에게 그 단어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 삶, 황후가 되어 파국을 맞았고, 그래서 이번 삶, 황후가 되지 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녀는 황후가 될 것이다. 더는 그를 부정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대신. 엘리제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저는 황후가 되기에 부족한 여인입니다.” “흐음……?” 황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부족하면 도대체 누가 황후에 어울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죽어라, 악녀!’ 이전 삶을 떠올렸다. 당시 그녀는 최악의 황후였다. 린덴과의 사랑이 엇갈려 삐뚤어졌다고 하지만, 당시의 죄악들은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생각했다. “부족하므로 노력하겠습니다.” 이전 삶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고. 오히려 이전 삶과 정반대의 황후가 되겠다고. “부족함을 잊지 않고, 항상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낮아지며 다른 사람들을 위한 황후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이 제국에 부끄럽지 않은 진정한 퍼스트레이디(First Lady)가 되고 싶습니다.” 퍼스트레이디. 첫 번째 여성. 가장 존귀한 여성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녀는 이전 삶, 제국의 퍼스트레이디였다. 하지만 정말 존귀한 여인이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스스로 높인다고 존귀해지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그때 그녀는 추했다. 대신 이번 삶에서는 진정한 퍼스트레이디가 되겠다. 그녀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존귀한 여인이 말이다. ‘잘할 수 있을지는 자신 없지만.’ 그래도 엘리제는 의지를 다졌다. 노력할 것이다. “하하, 역시 등불을 든 여인다운 말이군. 기특해. 아주 기특해.” 황제가 마뜩한 표정을 지었다. 기특한 딸을 보듯, 그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영애.” “네, 폐하.” “지금까지 미안했네.” “폐하?” 놀란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황제인 그가 갑작스레 사과라니? “내가 영애의 뜻도 헤아리지 않고, 너무 막무가내로 결혼을 밀어붙였지.” “…….” 황제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사실 개인적인 이유가 있긴 있었네. 영애를 너무나도 가족으로 맞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니 이해해 주기 바라네.” “……폐하.” 엘리제는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 황제가 그녀에게 불쑥 서류를 내밀었다. “폐하?” “선물이네. 읽어보게.” 의아한 마음으로 서류를 읽은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폐, 폐하…… 이, 이것은……?” “왜? 마음에 안 드나?” 빼곡한 글이 적혀 있는 서류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궁내법 개정안> 발의자 : 황제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 개정 내용 : 제국력 285년 부로 황후의 위(位)에 오를 여인은 황제의 재가하에 다른 직업을 겸업할 수 있다. 단, 내명부 업무 수행에 문제가 없는 범위하에서 허용한다. “……!” 이 말도 안 되는 법은 단 한 명만을 위한 것이었다. 그 누가 황후를 하며 겸업을 바라겠는가? 바로 의사의 길을 바라는 그녀를 위해 개정한 것이다! “폐, 폐하……? 어째서……?” “뭐, 사실. 짐이 처음 생각한 것은 아니었고. 린덴, 그놈이 하도 편지로 졸라대서. 그리고 나도 크림반도에서 영애가 해낸 일들을 보고 조금 생각이 바뀌었네.” 그러며 그는 징긋 미소를 지었다.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영애가 의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긴 했지만. 사실 영애 같은 의사를 내명부에만 묶어두는 것도 조금 아까운 일 아니겠나. 앞으로 어떤 일들을 더 해낼 수 있을지 모르는데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영애 본인이 그토록 바라기도 하고 말이야.”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워서 뭐라고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뚜욱.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그녀의 눈동자에서 흘러내렸다. “폐, 폐하…….”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봇물이 터지듯 쏟아나왔다. 이 갑작스러운 일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간 얼마나 속상해했는가? 결국,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지만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황태자를 받아들이기로 했음에도, 의사를 포기해야 하는 것 때문에 마음 한구석이 계속 무거웠다. 지금이야 의사 일을 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막상 결혼해 새장 속에 갇힌 새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할지 막막했었다. 그런데 이런 뜻밖의 선물이라니? ‘전하…….’ 분명 린덴의 마음이리라. 그녀도 알고 있다. 황태자는 자신이 의사 일을 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누가 좋겠는가? 본인이 사랑하는 여인이 험한 일을 하는 것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원하니까. 이런 무리한 일을 해준 것이다. 황궁에는 당연히 지엄한 법도가 있다. 이건 그 법도를 완전히 뭉개 버리는 일이다. 황후가 의사 일을 겸업하다니. 말이 되는가? 모르긴 몰라도 뒤에서 굉장한 잡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했다.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 ‘전하.’ 그런 생각이 들며 그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오늘따라 그가 더 보고 싶었다. “끄윽, 흐윽. 죄, 죄송합니다, 폐하. 추태를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황제 앞이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민체스터는 말없이 그녀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간신히 진정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기쁜가?” “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의학의 길은 화가에게 그림과 같고, 음악가에게 음악과 같다. 아니, 심하게 말하면 노름꾼의 도박이나 마약 중독자에 마약과도 같았다. 즉, 결코 떨어뜨릴 수 없는 것이었다. 민체스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고집 때문에 저 여린 소녀를 지금까지 마음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그렇다고 황궁의 일에 소홀하면 안 되네. 개정안을 보면 알겠지만 황궁의 일에 소홀하지 않은 범위에서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엘리제는 빨개진 눈으로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런 것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몸이 가루가 되어 부서지더라도 해낼 것이다. “영애.” “네, 폐하.” “선물은 마음에 드는가?” “네, 그렇사옵니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든다 뿐이겠는가? 그녀에게는 다이아몬드 광산을 통째로 주는 것보다 백배는 더 큰 가치가 있는 선물이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면 짐의 부탁을 하나 들어주겠는가?” “부탁…… 말입니까?”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大)브리티아 제국의 황제인 그가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네. 나쁜 부탁도 아니고.” 왠지 이전 자신이 전쟁에 참전할 때 황제에게 했던 거짓말과 비슷한 말투였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선물을 주었는데, 무슨 부탁을 못 들어주겠는가? “말씀하십시오. 능력이 된다면,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네.” 그러며 황제는 어딘가 쓸쓸한 말투로 말했다. “앞으로 잘해주게.” “네?” “그냥.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이야. 린덴을. 그리고 미하일을 잘 부탁하네.”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황제는 지금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폐하.” “알아. 내가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 영애의 치료를 받으니 몸도 이전보다 많이 좋아졌고 말이야. 하지만…… 세상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것 아닌가.” 황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모습은 전 세계에 영향을 떨치는 제국을 경영하는 거인(巨人)이 아니라, 힘없이 작아 보였다.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하는 부탁은 아니야. 그냥. 잘 부탁하네.” “……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왜일까. 가슴이 한없이 무거워졌다. “그래, 고맙네. 난 조금 졸려서 잠시 자고 일어나야겠군. 내일 또 보도록 하게.” “네, 폐하. 평안히 쉬시옵소서.” 그러고 엘리제는 조심이 뒷걸음질 쳐 황제의 집무실에서 나왔다. 홀로 남은 민체스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는 책상의 서랍을 열어 액자를 꺼내었다. 대제국의 황제와 어울리지 않는 그 빛바랜 액자에는 4명의 인물을 그린 초상화가 담겨져 있었다. 젊은 시절의 민체스터와 어린 린덴, 그리고 검은 머리의 이름 모를 여인과 어린 소녀였다. 초상화 속 10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는 흑발에 금안이었는데, 분위기가 차분해 방금 나간 엘리제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녀를 안고 있는 흑발에 푸른 눈을 가진 조용한 인상의 여인.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소?” 민체스터는 그녀를 보며 중얼거렸다. “황후.”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보고 싶구려.” 눈을 감은 민체스터는 꿈을 꾸었다. 대략 30년 전. 아직 이십 대의 젊은 청년. 황태자였던 시절. 원죄(原罪)가 시작되던 날이었다. *** 론도의 피카딜리 거리.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피카딜리 거리는 론도 최고의 번화가였다. 수많은 공연과 카페, 술집에는 항상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그 피카딜리의 가장 고급스러운 카페 3층. 2명의 남자와 1명의 여자가 두런두런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 가벼운 인상의 사내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민체스터. 그러니까 들어봐. 내가 지난밤 체스터 자작가의 영애와 말이야.” “엘!” 하지만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아리따운 소녀가 날카롭게 그의 말을 끊었다. 엘이라 불린 청년은 찔끔하여 소녀를 바라봤다. “왜? 마리엔?” “황태자 전하께 민체스터가 뭐예요! 도대체 예의범절이라곤!” 씩씩거리며 말하는 소녀는 굉장히 아름다웠다. 화려한 금발에, 호수 같은 푸른 눈.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당시 론도 최고의 미녀라 불리던 차일드 후작가의 공녀, 마리엔 드 차일드였으니까. ============================ 작품 후기 ============================ 내일 28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4 5-1 원죄 ========================================================================= 1장 원죄 - 5 “뭐 어때? 우리끼리만 있는데. 너무 딱딱하게 구는 것 아니야?” “그래도 예의를 차리세요. 전하는 엘, 당신의 친구가 아니라 다음 대의 황제가 되실 분이란 말이에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묘한 카리스마가 흘렀다. “마리엔, 난 괜찮아.” “하지만 예법이…….” “엘 말대로 우린 오랜 친구고. 엘마저 딱딱하게 굴면 난 많이 슬플 거야.” 그 말에 가벼운 인상의 남자가 화색을 띄웠다. “그렇지, 민체스터?” “그래그래.” “하하. 내가 다른 데서도 이러는 것은 아니잖아. 이래 봬도 내가 제국 최고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자라고!” 그러며 최고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자는 지난밤 자신이 꼬신 체스터 자작가의 영애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서 하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대귀족 차일드 가문의 공녀, 마리엔은 못마땅하단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외면했고,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는 잔잔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니까 다음 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청년, 엘이 우뚝 입을 다물었다. “엘?” 민체스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박이다.” “뭐?” “완전 내 이상형이야.” 민체스터와 마리엔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엘의 눈은 창밖 거리에 꽂혀 있었다.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어 그가 누구를 보고 말하는 건지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봐, 엘…….” “잠깐! 나 잠깐만 갔다가 올게!” 그러고 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뛰쳐 내려갔다. “…….” 민체스터와 마리엔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하여간…….” 민체스터는 쿡 웃음을 터뜨리며 차를 입가에 가져갔다. 너무나 엘다운 모습이었다. “웃을 일이 아니에요. 대클로랜스 가의 후계자가 저런 꼴이라니. 참 큰일이라니까요.” 마리엔이 투덜거렸다. “지금의 클로랜스 후작께서는 그토록 이나 훌륭하신데, 엘은 왜 저 모양일까요? 아버지의 도움으로 기사단에 들어가서도 훈련은 맨날 빼먹고 여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고.” “뭐, 나름 귀엽지 않아?” “그렇게 말할 게 아니라니까요. 총기사단에서 엘을 쫓아내야 한다고 진작부터 말이 많다고요.” “언젠가는 정신 차리고 잘하겠지.” 마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는 너무 사람이 좋으시다니까요. 그래도 아무리 친구라도 이렇게 계속 감싸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러며 중얼거렸다. “엘이 전하의 반의반만이라도 닮아야 할 텐데.”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는 그를 향한 짙은 감정이 흔들리고 있었다. “…….” 민체스터는 자신을 향한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민체스터, 엘, 마리엔 셋은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였다. 그리고 마리엔은 그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 글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듯이, 좋아하지 않는 데도 이유가 없는 법이다. 뭐, 굳이 꼽자면 그녀가 황실도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국제 금융계의 재벌, 차일드가의 적녀라는 것? 그녀의 오라비가 암셀이라는 것? 어쨌든 민체스터는 마리엔,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다.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엘이 3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잘됐나?” 민체스터가 웃으며 물었다. 엘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응, 두 명인데. 그중 한 명이 진짜 예뻐. 오랜 친구라 그런지, 분위기는 둘 다 비슷한데. 백금발의 레이디가 진짜 예뻐. 둘 다 부르주아 가문의 영애들인데, 그 예쁜 백금발의 레이디는 간호사가 꿈이라 하더라고. 특이하지?” 민체스터는 그 말을 듣고 실소했다. 어느새 그런 이야기까지 들었데? 참, 엘의 능력이 대단하긴 하다. 곧 엘이 꼬신 두 명의 여인이 카페로 올라왔다. 민체스터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녀들을 돌아봤다. 그리고……. “……!” 그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굳어졌다. 엘의 말처럼 정말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그것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강렬하게 빛나는 푸른 눈동자. “테레사라고 합니다.” 백금발의 여인이 부드럽게 인사했다. “미…… 밀러라고 하오.” 민체스터는 자신이 평소 사용하던 가명을 말했다. “멋진 이름이시네요.” 테레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방긋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민체스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 가만히 서 있던 여인이 자신을 소개했다. “레베카라고 합니다.” 여인은 제국인으로서는 특이하게 흑발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눈길을 끄는 점은 그것뿐. 민체스터는 곧 다시 테레사라 자신을 소개한 여인에게 정신을 뺏겼다. 흑발의 여인도 자세히 살피면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워낙 조용한 분위기 때문인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였다. 민체스터가 앞으로 자신과 레베카, 그녀가 어떤 운명으로 엮일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과 레베카와 마리엔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지 못했던 것은. *** “……!” 거기까지 꿈을 꾼 민체스터는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또 그 꿈이군.” 민체스터는 반복되는 ‘악몽’에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날부터였다. 행복과 원죄의 씨앗이 동시에 싹트기 시작한 것은. “레베카.”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볼 수 없는. 레베카 드 로마노프. 제국의 11대 황후이자 1황녀 이블린과 2황자 린덴의 어머니. 그리고 과거의 ‘그날’, 백원(百原)의 궁, ‘혈탑(血塔)의 비극’의 주인공. 그는 답답한 마음에 창문을 열어 론도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서대륙 최고의 도시 론도. 그가 일평생을 바쳐 일구어낸 풍경이 보였다. 시민들은 말한다. 민체스터는 희대의 명군이라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의 통치 아래 브리티아는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으니까. ‘다 의미 없지.’ 그는 쓰린 표정을 지었다. ‘그날’ 이후 린덴은 가슴속에 칼을 담았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것을 잊기 위해 오로지 일에만 매진했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될 명군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해서 성공한 삶이었을까? 글쎄, 아닐 것이다. 자신은 ‘그날’ 이후 단 하루도 행복했던 적이 없으니까. “미안하오.” 민체스터는 가족들이 그려진 초상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에 희미한 물기가 차올랐다.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이블린…… 너에게도…… 정말 미안하구나. 린덴, 너에게도…… 내가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그랬으면…….” 그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미안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죽은 1황자 지펠에게도, 3황자 미하일에게도 미안했다. 린덴도, 미하일도, 그리고 지펠도.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으면서 선대의 잘못을 물려받았다. 이제 린덴과 미하일 사이에선 비극이 일어날 것이다. 죄가 있는 자신으로선 말릴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그들의 한(恨)을. 하지만 말리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자식들 모두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아.”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민체스터는 작은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죽은 1황녀 이블린과 똑 닮은 분위기의 소녀. 그가 아끼는 소녀. “네가 제발 잘해주었으면…….” 그는 그녀의 별명을 떠올렸다. 기적의 천사. 그 별명처럼 기적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니까. 결국, 비극은 일어날 것이다. 다만 미래에 일어날 차가운 비극에 그녀가 자신의 아들들에게 조금의 따스함이라도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해줘도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았다. *** 제국력 285년 새해의 겨울. 크림반도의 수도, 심페폴에는 황실십자기가 나부끼고 있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반도의 눈도 끝이군.’ 한때 공화국군이 사령부로 사용하던 시청의 집무실에 앉아 린덴은 생각했다. 종전한 지 어느덧 4개월. 이미 대부분의 병력은 본국으로 귀국한 상태다. 이제 반도에 있는 제국의 병력은 고작 2만 남짓. 하지만 린덴은 아직도 이 지긋지긋한 크림반도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총사령관으로서, 제국의 황태자로서 전후 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뭐가 이렇게 할 일이 많은 거야. 이런 일들까지 내가 직접 해야 하는 건가.’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이 많은 것은 사실 당연했다. 반도의 새로운 정부와 앞으로 제국과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으니까. 그건 알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었다. 다 때려치우고 당장 론도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가 이렇게 끊임없이 속으로 투덜거리는 이유. 그건 단 하나, 엘리제 때문이었다. ‘도대체 언제 볼 수 있는 거야.’ 벌써 못 본 지 10개월이다. 너무 보고 싶어 금단증상이 일어날 지경이다. ‘엘리제.’ 작지만 당당한 소녀. 그리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소녀. 그녀가 총에 맞았을 때가 생각났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으면 죽었지,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그때 엘 후작보고 데려가지 말라고 해야 했나.’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이렇게 애타는 증상이 심할지는 몰랐다. 정말 상상도 못한 타는 듯한 갈망이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줄어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심해졌다. 미칠 노릇이다. 서류를 보다가도 그녀 생각에 몇 번이나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지 모른다. 마약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금단증상이 이럴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제 곧 가니. 기다려라.’ 다행인 점은 곧 며칠 후면 심페폴을 떠난다는 점이었다. 지긋지긋한 전후 처리가 드디어 마무리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크림반도와 론도는 너무 멀었다. ‘젠장, 론도는 왜 하필 서대륙 끝 브리티아 섬에 있는 거야.’ 론도로 가려면 기차를 타고 로마노프령(領)의 상트부르항에 가야 한다. 그리고 또 증기선을 타고 발토해와 북해를 건너야 한다. 물론 대양을 건너야 하는 신대륙이나 동방의 청, 힌디에 비하면 가까운 거리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잘 지내고 있겠지?’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다. 큰오라버니인 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황실 어의와 황실십자병원의 교수가 되었다고 하니까. 씩씩하게 잘 지내서 다행이긴 한데, 그게 또 심술이 났다. ‘난 이렇게 널 생각하며 잘 못 지내고 있는데, 너는 그냥 잘 지내고 있단 말이지?’ 그도 안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심술이란 것을.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못 봐서 그런가, 계속 심술이 나는 것을. ‘이번에 가면 절대 놓아주지 않겠어.’ 그는 굳게 생각했다. 이제는 절대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보지 않겠다. 옆에 꽁꽁 묶어둘 것이다. 벗어나려 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그때, 방문에 노크 소리가 났다. “렌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전하?” “들어와라.” 그의 친우이자 가장 신뢰하는…… 아니, 이제는 엘리제 때문에 점수가 조금 깎인 렌 남작이 들어왔다. 저이는 일만 잘하지, 동생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 그게 린덴의 불만이었다. “보고 때문에 왔습니다. 총기사단 휘하 2연대 모두 복귀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래.” 그러며 렌은 이러저런 보고를 추가로 하였다. “이상입니다. 그러면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런데 린덴의 반응이 이상했다. 돌아가라,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조금 머뭇거리며 친우의 눈치를 살폈다. 렌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 “……왔지?” “네?” 차가운 인상의 아름다운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편지.” “……네?” “네 동생한테 편지 오지 않았냐고.” “오긴 왔습니다만. 그건 왜?” “…….”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속에서 열불이 났다. ‘도대체 왜 나한테는 안 보내는 것이지?’ 동생한테 하나도 관심 없는 저놈한테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면서! 심지어 눈치를 보니 미하일, 그놈도 매번 편지를 받는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왜 자신한테만 안 보낸단 말이냐? 물론 엘리제가 그에게 아예 편지를 안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편지를 보냈다. 그것도 격식을 한껏 차린 어투로 말이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 클로랜스 가문의 여식,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린덴은 그 편지의 어투도 마음에 안 들었다. 저 무관심한 큰 오라비나 미하일, 그놈에게는 편하고 친근하게 편지를 쓰면서, 왜 자신에게는 항상 저런 기계 같은 말투로 보내는 것이지? 친근감이라고는 일 푼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져와.” “네?” “총사령관으로서 이상한 내용의 편지가 군 내부에 반입되지 않는지 확인해야겠다. 그러니 가져와 봐.” 이게 말인가, 똥인가. “……알겠습니다.”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은 요구였지만, 애초에 동생의 편지에 별 관심이 없는 무뚝뚝한 오빠는 주군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편지를 받아본 린덴은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정작 편지의 주인인 큰 오라비는 30초 만에 대충 훑어봤지만, 그는 무슨 외교 협정 조약 문서 검토하듯 꼼꼼히 한 글자, 한 글자를 살폈다. 눈에 박아 넣는 것 같았다. -큰오라버니에게. 그녀의 글씨는 예쁜 얼굴과 다르게 삐뚤삐뚤 못났다. 하지만 그 글씨조차도 그에게는 귀여웠다. -론도는 많이 추워요. 크림반도도 많이 춥죠? 감기 조심하시고요. 아버지, 어머니는 모두 건강하세요. 저도 건강하고요. ‘건강하다니 다행이군.’ 그는 ‘저도 건강하고요’란 문장에 특히 집중해서 봤다. 항상 약한 그녀가 감기라도 안 걸리는지 걱정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29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5 5-1 원죄 ========================================================================= 1장 원죄 - 6 -작은오빠는 요즘 계속 바빠요. 일이 많은 것 같아요. ‘작은오라비, 크리스. 그놈은 저놈보다는 낫지.’ 린덴은 멍하니 서 있는 렌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저 동생에 하나도 관심 없어 도움 안 되는 렌보다는 훨씬 도움 되는 오라비였다. -이제 전하께서 귀국하시면 부서를 옮긴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더 바쁜 것 같아요. 그 순간 린덴은 눈을 집중했다. ‘전하’라고. 자신의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곧 실망했다. 그때 한번 지나가듯 나오고, 자신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나에 대해 할 이야기가 그렇게 없는 건가.’ 물론 친오라비에게 하는 편지에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적을 필요는 없다. 그도 안다. 그런데 그냥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편지의 내용을 몇 번이고 꼼꼼히 읽은 그는 렌에게 물었다. “답장은 했나?” “답장 말입니까? 안 했습니다.” “……왜?” “답장을…… 해야 합니까?” 그 대답이 린덴을 울컥하게 했다. 자신은 받고 싶어도 못 받는 편지를 이렇게 받으면서. 고마운지도 모르고 답장도 안 해?! “렌.” “네, 전하.” “오늘 바쁜가?” “아닙니다. 저녁이라 일과 끝나서 쉴 예정입니다.” “잘됐군.” “네?” “오늘 나와 같이 술이나 먹지.” 그 말에 렌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술……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어째서긴. 자네와 마신 지도 오래되지 않았나.” 렌의 치명적인 약점은 술이 약하단 것이었다. 제국 전체에서 꼽히는 강자인 주제에 맥주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져 정신을 못 차렸다. 그래서 린덴은 평소에는 그에게 술을 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그의 여동생 때문에 얄미울 때는 술을 한 잔 주고 싶었다. “싫나?” “그, 그건 아니지만…… 맥주 반 잔 정도만…….” 린덴은 강하게 말했다. “맥주는 무슨. 위스키.” 렌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위스키. 그가 가장 무서워하는 술이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잘하라고.’ 린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마 렌은 왜 자신이 황태자에게 위스키를 받아야 하는지 평생 짐작도 못할 것이다. 렌과의 술자리는 길지 않았다. 죄라곤 동생에게 무심하다는 것 외에는 없는 렌에게 차마 독한 위스키를 강권하지 못해 맥주를 주었지만, 그마저도 몇 잔 못 마셔 골골 잠이 든 탓이었다. “쿨…….” “…….” 린덴은 낮은 숨소리를 내며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는 렌을 바라보았다. 저렇게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니, 나름 엘리제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바람이나 쐐야겠군.’ 린덴은 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고 보니 귀국 전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용무가 있긴 했었다. 밖으로 나오니 제국군 방한용 코트를 입었음에도 날씨는 추웠다. 숨을 쉴 때마다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생각했다. ‘론도도 춥겠지?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그 생각의 주체는 당연히 엘리제였다. 왜 이렇게 몸이 약해 툭하면 감기에 걸리는지. 마음에 안 들었다. ‘어쨌든 지금 그놈이 있는 위치가…….’ 다그닥. 다그닥. 말을 타고 거리를 달리니 심페폴 여기저기서 제국군들이 여유 있게 술을 즐기고 있는 것이 관찰되었다. 정국도 안정을 찾았고, 이제 며칠 뒤면 본국으로 귀국하니 크림반도의 마지막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 적당히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에서 지휘관들도 용인해 주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말을 타고 달렸을까. 시 외곽에 위치한 커다란 규모의 호텔이 나타났다. 건물은 호텔인데 제국군이 통째로 빌려 쓰고 있는 듯 경호를 서는 병사들이 보였다. ‘여기인가.’ 맞는 것 같았다. 안에서 왁자지껄한 소음이 들렸던 것이다. “전하! 제 잔도 한 잔 받으십시오!” “아! 그만! 이미 취했다고!” “안 됩니다!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면 또 언제 이렇게 마시겠습니까?! 오늘은 마시고 죽으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가서도 맨날 마실 거잖아! 살려줘!” 그리고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들. 익숙한 목소리였다. 린덴은 고개를 젓고는 호텔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 홀에서 왁자지껄 파티를 벌이던 인원들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그들의 정체는 3황자와 검기사단. 린덴의 적들이었다. “이곳엔…… 무슨 일이십니까, 전하?” 갑작스레 나타난 황태자에게 검기사단의 부단장이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부단장, 로버트는 로열가드의 수장 길버트와 총기사단의 렌과 더불어 제국의 손꼽히는 강자였다. “아.” 린덴은 얼굴이 빨개져 있는 미하일을 바라봤다. “딸꾹, 형님?” 미하일은 형님이 왜 왔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나 최근엔 영창 갈 일 한 것 없는데?” 어지간히 영창에서 고생했는지, 만나자마자 영창 이야기였다. 린덴은 피식 웃었다. “영창 보내려고 온 것 아니다.” “그러면?” “술이나 한잔하려고.” “뭐?” 미하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은 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오랜만에 피우는 담배였다. “술이나 한잔하지. 동생.” *** 검기사단의 기사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고 있어, 조용히 술을 마실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호텔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근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성벽 위로 올라가 술을 꺼냈다. 바람이 불어 매우 추웠지만, 덕분에 미하일은 술기운을 깰 수 있었다. “무슨 일이야? 이유 없이 나랑 술 마실 형님이 아니잖아?” “특별한 이유는 없다.” “정말?” “그래.” 그러며 린덴은 챙겨온 잔에 술을 따랐다. “보드카네?” “추우니까. 로마노프령(領)산이다.” 서대륙 북단의 로마노프 령 사람들은 워낙 날씨가 매서워 추위를 잊기 위해 독주인 보드카를 즐겨 마셨다. 그렇게 둘은 안주도 없이 보드카를 쭈욱 들이켰다. “크으. 보드카는 소주랑 맛이 비슷하다니까.” “소주?” “있어. 동방 술.” 그러며 3황자는 잠시 추억에 잠기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항주에서 친구들, 검룡(劍龍) 운학과 은화(銀花) 남궁소예와 술을 마시던 것이 떠올랐다. 정말 진탕 마셨었는데. ‘그립군.’ 소주, 백주, 황주, 분주 등등. 세상에 있는 술을 모조리 마실 기세로 마셨었다. 하지만 곧 그의 입가가 씁쓸해졌다. 그립기에 슬펐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기억이니까.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이 툭 물었다. “동방은 즐거웠었나?” “좋았지.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그렇군. 나도 한번 가보면 좋겠군.” 린덴은 외국이라곤 전쟁으로 앙젤리와 이곳 크림반도에 온 것 외에는 가본 적이 없다. “다시 가보고 싶나?” “가보고 싶지. 친구들 다 잘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미하일은 잠시 허공을 바라봤다. 어깨에 놓인 짐만 아니었으면 당장 떠났을 것이다. “그렇군.” 둘은 그리고 말없이 술을 마셨다. 왜인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그 무거운 분위기가 싫었던 건지 미하일이 일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갈 거야. 나중에.” “그래?” “응, 리제랑 같이.” “뭐?” 갑자기 린덴의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엘리제랑? 기분 나쁜 농담은 하지도 마라.” “농담 아닌데? 이미 약속했다고. 같이 여행 가기로. 청(淸)뿐 아니라, 려(麗)도. 그리고 신대륙의 오대호까지. 다 같이 가보기로 했어.” “거짓말하지 마.” “진짜야. 못 믿겠으면 편지로 물어보던지.” 린덴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편지가 와야 편지로 물어볼 것 아닌가. 그리고 미하일 저놈의 얼굴을 보니, 거짓말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 저놈이랑 여행을 가기로 약속했다고?’ 이 여자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추운 날씨임에도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론도에 도착하기만 해봐라. 옆에 꽁꽁 묶어놔 자신만 바라보게 할 것이다. 다른 곳으로는 눈도 돌리지 못하게. 그때, 미하일이 빙글빙글 그를 약 올렸다. “그러고 보니 형한테는 편지 거의 안 오지? 나는 이틀 전에도 편지 왔었는데.” “……총사령관의 명령이니 입 다물어라.” 화났다. 진짜 화났다. 형님의 분노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린덴은 커다란 잔에 보드카를 콸콸 따르며 말했다. “마셔.” “아, 왜?! 너무 많잖아! 이건 폭력이야! 주폭!” “총사령관으로서 검기사단의 단장에게 주는 격려주다.” “거짓말하지 마! 이거 개인적인 악감정으로 주는 거지?!” “아니면 영창 가든지.” “무슨 놈의 영창이야! 내가 이번 전쟁 때 영창을 몇 번이나 간 줄 알아?!” “다 잘못했으니 간 거지. 이유 없이 보낸 적은 없다.” 둘은 한참을 티격태격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정신없이 아옹다옹했을까. 둘은 뚝 입을 다물었다. 너무 유치하다고 느낀 것이다. 대신 미하일이 배를 잡고 시원하게 웃었다. “쿡쿡. 형님이랑 이런 대화는 진짜 오랜만이네. 간만에 재미있어. 재미있어.” “난 재미없다.” 린덴이 무뚝뚝하게 답했다. “형님.” “왜?” “내가 리제 꼬시면 어떻게 할 거야?” 린덴은 동생을 가만히 바라봤다. “목숨 걸고 꼬셔라.” “……!” 미하일은 대답 없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목숨 걸어라라. ‘일단 그건 론도에 돌아가서.’ 지금은 형님과 술을 마실 때이다. “한 잔 더 줘. 그 폭력적으로 큰 잔 말고, 정상적인 잔으로.” 쪼르륵. 린덴은 다시 보드카를 따라주었다. 그렇게 다시 둘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그리고 가져온 술이 다 떨어져 갈 무렵. 린덴이 지나가듯 물었다. “미하일.” “왜, 형님?” “포기할 수는 없겠나?” 미하일도 지나가듯 답했다. 술을 한 잔 털어 넣으며. “어떻게 그러겠어. 그래도 내 어머니인데.” “그렇군.” “형님은?” “나도 그렇지.” “그래.” 성벽에 선 둘은 가만히 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이 깔린 평원은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예전에 지펠 형님이 동방 명(明) 시대 때 쓴 소설 읽고, 도원결의(桃園結義) 따라 한 것 기억나?” “아아, 그 소설이 세 개의 나라가 싸우는 이야기였나? 명작이었지.”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원결의는 아니었지. 복숭아나무가 아니라, 장미 정원에서 했던 맹세였으니까.” “그래도 맹세를 하긴 했잖아. 대충 따라서.” 미하일은 쿡쿡 웃었다. “그때 형님이 장비였나? 지펠 형님이 유비였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장비였던 것이지? 아무리 봐도 지펠, 그놈이 장비에 제일 가까운데.” “그러게. 형님은 장비는 아니지. 그때 형님 성격은 오히려 유장에 가까웠는데.” “뭣이?” 유장. 그 소설에 나오는 착하고 무능한 군주였다. “왜? 유장 나름 착하잖아. 물론 지금은 유장은커녕 조조에 가깝지만.” “내가 조조라고?” “나름 칭찬이라고.”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미하일은 다시 쿡쿡 웃었다. 그러고 보드카 병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술 다 떨어졌다.” “그런가.” “응.” 병을 보니 어느덧 비어 있었다. 마치 모래시계의 모래가 떨어진 것처럼. 그래서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올 시간이 된 것처럼.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쉬어라.” “응, 형님도.” 인사를 나눈 둘은 각자의 길을 향해 사라졌다. 방금까지 같이 술을 나눈 게 거짓말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크림반도의 이야기가 막을 내렸다. 그리고 엘리제의 이전 삶, 역사에 기록되었던 론도의 비극이 막을 올렸다. <주말(토, 일요일) 연재는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 주 월요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6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1 론도 거리의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근래 들어 가장 큰 규모의 다툼이었던 크림전쟁이 막을 내리고, 그 승전의 용사들이 귀국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곧 있을 성대한 개선식에 모두가 들뜬 마음으로 축제를 준비했다. “아가씨, 이제 곧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신 대요.” 저택의 어린 하녀 마리는 어느덧 2년이란 시간이 지나 귀여운 티가 나는 소녀가 되어 있었다. “……응.”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전하께서 오시는구나.’ 두근. 그를 생각하자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진동했다. 지난 10개월간. 그가 보고 싶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그리움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커졌다. ‘언제쯤 도착하실까.’ 이제 상트부르 항에서 배를 탔다고 하니 어느 정도 시일이 걸릴 것이다. 바다 사정에 따라 배의 항해 속도도 다를 것이고. ‘조심히 오셔야 할 텐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드는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나…… 전하를 어떻게 대해야지?’ 총을 맞는 순간, 그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그런데 그 뒤로 그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음을 인정한 것은 그녀 스스로일 뿐, 그와의 관계는 아직 평행선이었던 것이다. ‘전하.’ 우크라 산맥에서 그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난 너를 놓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니. 그러니 도망갈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밤마다 추위를 막기 위해 그가 자신을 감싸 안았던 것도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마에 닿았던, 그의 이마. 코앞에서 느껴지던 숨결. “아가씨? 괜찮으세요?” “……!” 마리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엘리제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이제 터질 것 같았다. “아니야. 괜찮아.” “정말 괜찮아요? 요즘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니에요?” “응. 아니야.” 두근두근. 그와 닿았던 순간들을 떠올리자 민망하고 부끄러우며, 간질간질한 마음이 들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실제로 보면 나 어떻게 하지. “아가씨. “응?” “저 스웨터랑 목도리 전하께 드릴 거죠?” 마리는 엘리제가 그를 위해 틈틈이 짠 스웨터랑 목도리를 가리켰다. 물론 말만 스웨터와 목도리지, 엉망으로 망해 제대로 된 형태는 아니었다. “저런 걸 어떻게 드려. 그냥 버릴 거야.” “그래요? 하지만 정성 들여 짜셨는데.” 마리는 왠지 저런 스웨터와 목도리라도 황태자가 기쁘게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엘리제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저런 볼썽 서러운 것을 어떻게 선물하겠는가. “마리. 나중에 시내의 옷가게에 같이 갈래?” “정말요?” 마리는 놀란 얼굴을 했다. 엘리제가 최근 2년 동안 옷가게에 가자고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어린 하녀는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 예쁜 모습 보여드리려 그런 거죠?”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그냥 옷도 다 낡고 해서…….” 뻔히 티 나는 거짓말이다. 애초에 수술복과 가운만 선호하는 그녀는 옷이 낡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주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어린 하녀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네, 같이 가요. 제일 예쁜 옷으로 골라 드릴게요.” *** 그렇게 엘리제는 그가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설레는 가슴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교수님, 이 환자분은 라온 자각가의 영식으로 췌장염으로 입원하였습니다. 현재…….” “…….” “교수님?” “아, 아. 네. 죄송해요. 췌장염이라고요? 수액 치료와 통증 조절을 해주세요.” 엘리제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들을 놀라게 한 기적의 의사가 빈틈을 보여서가 아니다. 아무리 가슴이 설렌다 하여도 환자를 보는 일에 큰 빈틈을 보일 그녀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놀란 이유는 단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원래 아름다운지는 알고 있었지만.’ 인형 같은 얼굴의 엘리제는 과거부터 론도 최고의 미녀로 꼽혔다. 거기다 시간이 지나며 18살의 생일을 앞둔 소녀가 되면서, 인형 같은 외모에 조금씩 여인의 향기가 깃들고 있었다. 마치 꽃이 만개하기 시작하는 듯한 아름다운 향기가 말이다. 인형 같은 외모에 차분한 성숙미가 더해지기 시작하자,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간단한 수술복에 가운만 입어도 그 외모를 가릴 수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수술복에 가운이 그녀의 외모를 가장 빛나게 하였다.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환자를 볼 때였으니까. ‘더구나 요즘은.’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최근 그녀는 설레 보였다. 항상 강인하게 환자를 보던 그녀가 소녀처럼 설레 하니, 너무나 사랑스러워 보였다. 덕분에 황실십자병원의 애꿎은 젊은 남자 의료진들은 그녀를 보며 애꿎은 가슴만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비가 될 분만 아니어도, 당장 고백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가련한 남자 중 일인. 아니, 단순히 가련하다는 단어만으로는 지금까지의 가슴 아픔을 다 표현하기 어려운 남자, 그레이엄 남작은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세요, 선생님?” “아닙니다, 데임.” 그레이엄 드 팰론. 그는 지금까지의 연구 업적과 크림반도에서의 헌신을 인정받아 엘리제와 비슷한 시기에 황실십자병원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직위는 정식 교수!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는 제국의 의사 중 가장 빛나는 위치라 할 수 있었다. 최고라 인정받는 의사들만이 황실십자 병원에 발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황실십자병원의 교수가 되는 것은 내 오랜 꿈이긴 했지만.’ 그레이엄의 표정은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엘리제 때문이었다. 앞으로도 그녀를 옆에서 볼 수 있으니 기뻤지만, 동시에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두고도 티도 낼 수 없다는 것은 너무 큰 고문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더라도, 못 보는 것보다는 아픈 것이 나았기에, 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론트 남작가에서 데임께 수술을 부탁하였습니다.” “저에게요?” 론트 남작가는 귀족파에 속하는 가문이다. 즉, 클로랜스 가문의 적대 가문. 물론 그녀는 치료하는 데 있어, 그런 정치적 이념 따위 신경 쓰지 않았지만, 상대측이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로즈데일병원에서 치료가 불가하다고 이야기했다고 하더군요.” “아…….” 엘리제는 사정을 이해했다. 그녀의 수술을 목격한 이가 많아지며, 점점 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불가능한 질병도 데임 클로랜스에게 가면 살 수 있다!’라고. 물론 엘리제도 인간인 만큼 엄연히 한계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병원에서 불치의 판정을 받은 이에게 그녀는 마지막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귀족파든, 뭐든 할 것 없이 최후의 순간 그녀에게 치료를 부탁하러 오는 것이다. 물론 엘리제는 정치적 이념 따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의사이니까. “네, 알겠어요. 정확히 어느 부위 수술이죠?” “위 분문부 암입니다.” 위 분문부는 식도와 맞닿아 있어서 수술이 쉽지가 않았다. 위 전체를 잘라내고, 식도 일부도 잘라내야 한다. 그리고 소장과 잘라낸 식도를 연결해야 하니, 고난이도에 속하는 수술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일정을 잡을게요. 가능한 날이…….” 그녀는 달력을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빽빽이 일정이 차있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다. 어의이니 황제의 진료도 봐야 하고, 몰려오는 환자들 수술도 해야 하고, 수석교수이니 아카데미에 나가 강의도 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황제의 재가를 받아 진행하는 보건 프로젝트들과 연구 논문들. 몸이 3개라도 부족한 일정이다. ‘수술 일정이 너무 빽빽이 차 있는데.’ 커다란 달력에는 날짜마다 예정된 수술이 적혀 있었는데, 어찌나 빼곡한지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어쩌지. 너무 미루면 안 되는데.’ 그런데 빼곡한 수술 일정 사이, 비어 있는 날이 눈에 띄었다. ‘아, 이날은…….’ 바로 린덴이 론도에 도착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크림에서 떠나기 전, 그는 이런 편지를 보냈다. -마중 나오도록. 안 나오면 혼날 줄 알아라. 엘리제는 그 편지를 보고 입술을 삐죽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중 가려고 했다고요.’ 황태자가 복귀한다고 거창한 입항식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이 복귀한 상태고, 곧 대규모 승전 연회와 개선식을 치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예비 황태자비로서 꼭 그를 마중 나갈 필요는 없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지만.’ 그래도 그와 무려 10개월 만에 만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마중 나가려 했었다. 그날을 위해 수술도 모두 비워 놓았다. 그뿐이 아니다. 시내의 옷가게에서 드레스도 새로 장만했다. 그에게 예뻐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가급적이면 그날은 비워놓고 싶었지만 그래도 환자의 치료, 그것도 늦어지면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는 암 환자의 수술을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미룰 수는 없다. ‘그리고 아침 첫 수술로 하면 늦지 않게 마중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도착 예정 시간은 대략 늦은 오후 경. 보통 예정 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경우가 많으니, 일찍 수술을 시작해 점심 전에 끝내면 서둘러 치장을 하고 배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엘리제는 말했다. “이날로 수술 일정 잡아주세요, 선생님.” “이날 말입니까?” 그레이엄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에 담고 있는 그는 그녀가 왜 그날을 비워 놓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수술을 일찍 시작하면 늦지는 않을 것 같으니 그렇게 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론트 남작도 만났다. “론트 남작입니다, 데임.” “네, 반가워요. 남작님의 수술을 집도할 엘리제 드 클로랜스입니다.” 중년 남자는 굉장히 불편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론트 남작. 3황자의 측근인 귀족파의 대표 인물 중 하나로, 거침없는 언사로 유명했다. 정계에서 그녀의 아버지인 엘 후작과도 여러 차례 다툼이 있었는데 그의 딸에게 목숨이 걸린 수술을 받게 되다니. “정말…… 제 수술을 해주는 것입니까?” 남작은 믿기 어려운 눈으로 물었다. 엘리제는 그가 왜 그런 물음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본인의 뜻과 상관없이 황제파의 가장 핵심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당연하다. 황제파의 수장 클로랜스 후작가의 적녀이자, 황태자의 예비 약혼녀였으니까. 물론 의사인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안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작의 불안감을 가라앉혀 주기 위해 말했다. “남작님.” “네?” “남작님은 오늘 저에게 어떤 이유로 오셨나요?” “그야…… 치료받으러…….” “저도 그렇습니다.” 엘리제는 살짝 웃었다. 부드러우면서도 다른 사람을 안정시켜 주는 미소였다. “저는 지금 예비 황태자비로 이 병원에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의사로서 이 병원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로지 환자만 바라봅니다.” “……!” “저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러니 남작님도 이 병원에서만큼은 다른 것 신경 쓰지 마시고 오로지 치료받는 것에만 집중하세요.” <바로 다음 편 올라갑니다!!> 00117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2 “데, 데임…….” 그녀의 말에 남작은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정쟁을 벌이며 클로랜스 후작가에 못되게 군 것이 몇 번인가. 그런데 저런 따뜻한 태도라니. 그리고 태도만 따뜻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는 것은 의사로서의 강한 자신감이었다. 남작은 그녀에게 진찰을 받으며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살 수…… 있을지도 몰라.’ 모든 의사가 그를 포기했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이 순간 생각했다. 등불을 든 여인. 그녀 같은 의사와 함께라면 자신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고. *** 한편 브리티아 섬 동쪽의 북해(北海). 한 떼의 증기선이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제국 2함대였다. ‘이제 곧이군.’ 총사령관 린덴은 갑판에서 서쪽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론도, 그녀가 있는 곳을. ‘왜 이렇게 느린 것이지.’ 세계 최고의 추진 동력을 갖춘 증기선이건만, 린덴은 투덜거렸다. 느렸다. 너무. 마음만 같아선 하늘을 날아서라도 론도에 도착하고 싶었다. 이제 도착할 날이 며칠 남지 않았지만, 가까워질수록 더욱 마음이 타들어 갔다. 보고 싶었다. 빨리. ‘이제 보면 놔주지 않을 거다. 각오해.’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엘리제. 강단 있는 초식동물. 절대 그녀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도망가려 해도 소용없었다. 맹수가 되어 철저히 사냥할 것이다. “언제쯤 도착할 예정이지?” “그…….” 북해와 발토해를 담당하는 제국 2함대의 제독은 도대체 몇 번이지 모를 질문을 또 듣고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황태자는 하루에 7번쯤 저 질문을 하고 있었다. 제독은 늘 하던 똑같은 대답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속력을 내고 있습니다. 아마 예정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일찍 도착할 수는 없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황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론도에 도착했으면 좋겠군.’ 보고 싶었다. 정말로. *** 드디어 대망의 도착 예정 날이 다가왔다. 이른 새벽, 엘리제는 들뜬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아가씨, 오늘은 꼭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응, 꼭 그럴게.” 마리가 신신당부했다. “단장하실 것이 많단 말이에요. 꼭 꼭 빨리 와야 해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 드레스 정말 괜찮을까? 너무 몸매 선이 드러나는 것 같은데…….” “요즘 최신 유행이에요! 아가씨는 뭘 입어도 예쁘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피부 괜찮아? 어제 잠을 설쳐서…….”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드디어 그를 만난다는 생각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 혹시 피부가 거칠어졌으면 어쩌지? “예뻐요. 예뻐. 돌아오시면 제가 다 단장해 드릴 테니 빨리 오시기나 하세요.” “응.” 그러고 그녀는 마차에 올라타 황실십자병원으로 향했다.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전하를 만나면 어떻게 대해야지?’ 이제 그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예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리라. 과거의 파국은 트라우마가 되어 그녀를 30년이나 넘게 괴롭혔으니까. ‘그래도.’ 두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자신은 그를 마주 보려고 노력할 것이다. 깨달았으니까. 과거에 대한 두려움보다 그가 소중하다는 것을. 이제 자신도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니 조금씩 조금씩 노력해 갈 것이다. ‘전하.’ 다만 걱정되는 것은 어떻게 그를 대해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깨달은 후 첫 만남이었다. 뭐라고 인사를 해야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지? 무슨 말을 해야지? 어색하면 어떻게 하지? 물론 그녀도 안다. 이런 고민이 시답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사소한 것도 신경 쓰이는 것을. 그가 마음에 들어온 탓일 거다.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고마워요, 경.” 엘리제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호위역을 해주고 있는 벤톨에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리는 순간, 그녀는 생각했다. ‘일단 병원에 왔으니 수술에 집중하자. 그에 대한 생각은 나중에.’ 자꾸 떠오르는 그에 대한 생각을 고개를 저어 밀어내었다. ‘집중해. 엘리제.’ 그녀에게는 수많은 수술 중 하나일지 몰라도, 수술을 받는 란트 남작에게는 자신의 생명이 걸린 일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개인적으로 중요한 날이라도, 잡념으로 수술에 지장이 가게 할 수는 없었다. ‘전하에 대한 생각은 수술이 끝나고 나서 하자.’ 그녀는 자신의 교수실에서 드레스를 벗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하얀 가운을 걸쳤다. 그렇게 외과의사로 변한 작은 소녀는 수술실로 내려갔다. “오셨습니까, 교수님.” 미리 나와서 기다리던 어시스턴트들이 그녀를 맞았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준비는 다 되어 있나요?” “네, 교수님.” “환자는 어디 있죠?” “수술실 옆에 누워 있습니다.” 그녀는 긴장한 얼굴로 수술을 기다리는 란트 남작에게 다가갔다. “데임.” 불안한 목소리였다. 엘리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미소 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불안해하지 마세요. 한숨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나 있을 것이니.” “저…… 살 수 있겠습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살 수 있어요.” 짧고 간단한 말. 그녀는 마주 잡은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그 작지만 강인한 손을 느끼며 란트는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는 눈시울을 붉히며 생각했다. ‘아아. 내가 정말로 살아날 수 있다면.’ 그렇다면 정치적 이념을 떠나서, 이 소녀에게만큼은 절대 그 은혜를 잊지 않으리라. 그렇게 귀족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점차 고조되는 그때. 론도의 이른 아침, 병원의 한구석에서 한 줄기의 따뜻함이 불기 시작했다. *** 수술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애초에 위 분문부 암은, 위암 중에서 가장 치료가 어려운 암이다. 기존의 림프절 절제도 철저히 해야 했고, 위 일부가 아니라 위 전체를 잘라야 했으며, 심지어 식도의 하부도 잘라내야 한다. 그것만으로도 고난이도인데 란트 남작은 해부학적 변형도 있었다. 덕분에 엘리제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해야 했다. “하아.” 결국, 고비를 넘기고 난 후,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래도 신경 쓰일 것 같아, 일부러 수술장에 놓인 회중시계를 치워 버렸다. 워낙 집중하고 수술해 바깥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무리까지 잘하자.’ 그래도 다행인 점은 진땀을 흘리긴 했지만, 체감상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진 않은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려운 부분은 다 지났으니, 침착히 진행하면 늦지 않게 그를 마중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중. 최선을 다하자.’ 엘리제는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여 수술했다. 한편, 그런 그녀를 어시스트하는 의사들은 그녀의 손놀림을 보며 계속해서 경악하고 있었다. ‘역시 데임 클로랜스. 억지를 부려 어시스트에 들어온 보람이 있구나.’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은 제국 최고의 의사로 모두 이름 높은 대가였다. 따라서 다들 의학에 대한 열정이 깊었고, 더 뛰어난 의술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데임 클로랜스, 이 기적 같은 소녀의 수술은 하늘이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다들 조금이라도 더 그녀의 수술을 자세히 보고자 어시스트를 자청했고, 참관하러 들어오는 교수도 많았다. ‘정말 대단해. 저 부위에서 저런 테크닉을.’ 그렇게 의사들의 경악 속에서 수술이 진행되었고. “클로즈(Close) 합니다.” 드디어 엘리제는 수술을 끝내는 선언을 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러면 죄송한데, 마무리를 부탁할게요.” “네, 교수님.” 엘리제는 장갑을 벗으며 수술장을 나왔다. ‘시간이.’ 나오자마자 시계를 보니, 아뿔싸. 벌써 12시였다. ‘아직 늦은 건 아니겠지?’ 그녀는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배가 예정 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특히 이렇게 먼 바다를 건너는 함선들이. 서두르면 늦지 않을 거야.’ 그녀는 자신의 몸을 살폈다. ‘빨리 저택에 돌아가서 치장하고.’ 수술하면서 팔에 피가 튀어 있었고, 진땀을 흘린 탓인지, 이마에는 땀도 맺혀 있었다. ‘너무 엉망이잖아.’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10개월 만에 만나는 그. 최대한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데. 아무래도 저택에 돌아가면 치장하기 전에 먼저 씻어야겠다. ‘일단 팔에 묻은 피 먼저.’ 이 상태로 저택에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녀는 수술장 한편에 마련된 수도관으로 향했다. 물을 틀어 팔을 닦으며 초조히 생각했다. ‘빨리. 빨리 닦고 가자.’ 이런 모습이 아닌, 최대한 예쁘게 치장해 그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그렇게 외과의사가 아니라, 여자로서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도저히. 도저히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엘리제.” 낮은 저음. 손을 씻던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설…… 마……? “엘리제.” “……!” 낮은 저음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차가웠지만, 타오르는 듯한 열망이 담겨 있는 음성.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려 버렸다. 그였다! 린덴. 그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 ‘전하…….’ 그녀의 눈동자에 피잉 눈물이 돌았다. 아무런 이유 없이 가슴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 그가 벌써 이곳에? 이런 의문은 떠올리지도 못했다. 감정이 너무 요동쳐 다른 사고가 마비된 탓이다. 보고 싶었다. 정말로. 정말 많이. 그런 그가 자신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뒤돌아서지 못했다. 뒤돌아서 그를 마주하면 이 요동치는 감정을 조절하지 못할 것 같았기에. ‘전하…….’ 그렇게 그녀는 뻣뻣이 굳어 속으로 그의 이름만 불렀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단단한 무언가가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 그의 팔이었다. 뒤로 다가온 그가 양손으로 그녀를 강하게 껴안았다. 온몸으로 와 닿는 그의 단단한 느낌에, 그리고 그의 체향에 엘리제는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아아…… 전하.’ 정말 그였다. 그토록 바라던. 그때 린덴이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마중 나오지 않았지?” 하지만 엘리제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너무 격동해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마디라도 하면 눈물이 흘러버릴 것 같았다. 린덴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환자 때문에 그랬겠지.” 그는 자신에게 안긴 소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두 손으로 그녀를 안고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그는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조금 더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자신의 심장. 나의 모든 것. 그는 낮게 말했다. “보고 싶었다.” “……!” 그 낮지만, 따스한 말을 듣는 순간. 결국, 그녀는 한줄기 눈물을 흘러내렸다. ‘저도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머리가 하얘져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 닿은 어깨가, 배가. 그리고 그의 몸에 닿은 등이 타오를 듯 뜨거웠다. 가슴이 요동치고 진탕했다. 이대로 무너져 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잡았어.” 그는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가 되어 말했다. “그러니 이제는 절대 놔주지 않을 거야.” ============================ 작품 후기 ============================ 내일 2월 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8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3 “……!” “네가 싫어한다 해도 상관없어. 각오해.” 아아, 전하. 엘리제는 현기증이 났다. 자신을 향한 그의 갈망에 전신이 묶여 버리는 것 같았다. 아찔한 속박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는 아직 나의 마음을 모르는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표현한 적이 없으니까. ‘나도 전달해야 해. 마음을.’ 하지만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가슴이 떨려, 그의 얼굴을 마주 보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마음을 전달한단 말인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달해야 했다. 어떻게? 결국, 그녀는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전하…….” 개미가 기어가는 듯 작은 목소리였다. “왜 그러지?”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차를 한잔 대접해도 될까요?” “차?” 린덴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을 낮추자 자연히 그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밀접했다.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차가 아니라, 바로 너인데?” “……!” 그녀의 가슴이 파르르 흔들렸다. 나를 바란다니? 더구나 귓가에서 느껴지는 그의 입김도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전하…….” 그녀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제 교수실에 조, 좋은 차가 있어요. 차를…….” 비는 듯한 음성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차라. 지금은 그녀를 느끼고 싶지, 차를 마시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그저 너를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 그녀를 송두리째 가지고 싶었다. 그야말로 미칠 듯한 갈망. 그는 힐끗 시선을 돌렸다. 마침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료진들이 경악해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는 네 방에서 마시는 건가?” “네, 네. 전하.” “그 방엔 아무도 없나?” 엘리제는 그걸 왜 물어보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아…… 네. 저만 사용하는 방입니다.” “그렇군.” 린덴은 미소 지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단둘이 있을 수 있다는 거지. 차에 관심은 없었지만, 그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초식동물은 맹수를 자신의 방에 초대했다. *** 엘리제는 린덴을 자신의 교수실로 데려왔다. 왜인지 그와 단둘이 있는 게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어 문을 살짝 열어두었으나. 달칵. 린덴이 문을 닫아버렸다. “……왜 문을?” “방해받기 싫으니까. “뭘요?” 물었으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강렬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었다. 꿀꺽. 그녀는 침을 삼켰다. ‘나, 나 뭔가 실수한 건가?’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으나, 애써 외면했다. 오랜만에 봐서일까. 그는 이전과 달랐다. 아니, 자신을 향한 갈망은 동일했으나, 조금 더 거침이 없었다. 그건 그녀가 모르는 그의 심경 변화 때문이었다. 이전 그녀가 총에 맞아 죽어갈 때 그는 다짐했다. 만약 그녀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때는 절대 그녀를 손에서 놓지 않겠다고. 반드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꽁꽁 묶어두겠다고. “여기 앉으세요. 차, 차를 끓여드릴게요.” 엘리제는 일부러 그의 시선을 피하며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 린덴은 잠시 앉아 그녀의 방을 살폈다. ‘생각보다 지저분하군.’ 그녀의 인형 같은 외모를 생각하면 차분히 정리된 전경이나, 아늑한 핑크빛 교수실이 상상되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냥 일 중독 교수의 너저분한 사무실이랄까. 여기도 서류. 저기도 서류. ‘하긴 글씨도 삐뚤삐뚤 못 쓰니까.’ 엘리제가 부끄러운 듯 말했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민망해요.” 그녀는 그의 집무실을 떠올렸다. 자로 잰 듯이 정리된 그의 방과 비교하면 자신의 방은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전하는 지저분한 것 싫어하시는데.’ 왜 미리 방을 정리하지 않았을까. 그녀는 후회되었다. “미리 정리하지 않고 초대해서 죄송해요. 다음에는 정리를 하고…….” 그런데 린덴이 의외의 말을 하였다. “난 이 방이 좋은데.” “네?” “네 향기가 느껴지니까.” “……!”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빠, 빨리 차 끓여드릴게요.” 그녀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멀어졌다. 도저히 그의 시선을 받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조그만 교수실에서 도망가 봤자 어딜 가겠는가. 그의 눈은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쫓아왔고, 그 눈빛을 느낄 때마다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찻잎을 물에 올리고 불을 끓였다. ‘제발 진정해, 심장아.’ 그녀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좋은 차를 우리려면, 마음을 가다듬고 집중해야 하는데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계속 그만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때, 린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뭐지?” 놀라 고개를 돌리니 그가 열린 캐비닛 속에서 한 물건을 보고 있었다. ‘아!’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자신이 그에게 주기 위해 짠 목도리 실패작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가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가 가리기 전, 그가 먼저 그 목도리 비슷한 실패작을 낚아챘다. 린덴은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네가 짠 것인가? 누굴 주려고 짠 것이지?” 그녀의 얼굴이 다시 빨개졌다. 대답할 수 없다. 이런 못난 물건을 그를 위해 만들었다고는. 부끄러웠다. “…….” 그런데 그 침묵을 린덴은 오해해 받아들였다. 그의 기세가 흉포해졌다. “말해. 누구야.” “…….” 탁. 그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그 뜨거운 감각에 그녀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움츠러들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빨리 말하라고. 누굴 주려고 짠 거지? 설마 미하일, 그놈인가?” “아, 아니에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여기서 미하일 이름이 왜 나온단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 뒤 캐비닛 안에 수북이 쌓여 있는 편지지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이건……?” “……!”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린덴이 보고 있는 것은 그에게 쓰다가 못난 문장에 완성하지 못한 편지들이었다! ‘안 돼! 저 편지들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다, 닫을게요!” 그녀는 급히 캐비닛 문을 닫았다.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부끄러웠다. 하지만 가만히 보고 있을 린덴이 아니었다. 그녀의 손을 잡아 문을 닫는 걸 저지하고는 수북이 쌓인 편지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그리고. “……!”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아아……! 어떻게 해.’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너…….” 린덴은 흔들리는 눈으로 편지들을 봤다. -전하께. 엘리제예요. 춥지는 않으신가요? -전하께. 눈이 많이 내리네요. 크림반도는 어떤가요? -전하께. 론도는 비가 왔어요. 혹시 몸은 아프지 않은가요? -전하께. -전하께. -전하께. 삐뚤삐뚤 못난 글씨. 대부분 편지는 길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 그를 향한 편지였다. “나에게…… 편지를 거의 쓰지 않은 것 아니었나?” 엘리제는 민망함에 고개를 숙였다. “안…… 쓰지 않았어요.” “그러면……?” “제가 글을 잘 못 쓰니…… 조금이라도 더 잘 써서…… 보내고 싶어서…… 전하에게 보내는 거니까…….” 쥐죽은 듯한 목소리였지만, 린덴에게는 천둥보다 더 크게 들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내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것이 맞는 건가? 나에게 보내는 거니 조금이라도 잘 쓰고 싶었다고? 왜? 설마…… 이 말의 의미는? 린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엘…… 리제?” 엘리제의 얼굴은 완전히 홍당무처럼 변해 있었다. “차, 차 끓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녀는 급히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으나, 맹수는 놔주지 않았다. 탁. “……!” 자신의 팔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느낌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녀를 자신에게로 강제로 끌어당겨 앞에 밀착시켰다. “내가 말했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 “내가 바라는 것은 차 따위가 아니라 너라고.” 그의 손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그 손은 뺨에서 귀로, 목덜미를 훑었다. ‘아.’ 그녀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전기에 맞은 것 같다. 그의 손이 닿는 곳이 너무 뜨거웠다.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엘리제.” “…….” “엘리제.” 그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와 그녀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숨결이, 체향이 서로에게 닿았다. 자신을 갈망하는 그의 눈동자에 엘리제의 몸은 뻣뻣이 굳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그에게 꽁꽁 묶여 버렸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닿았다. 스치듯 만지는 손가락. “내가……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 “하지만 상관없어.” 그가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정말로. 정말로. 그와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고작 손가락 하나도 안 될 정도의 거리. “네가 오해하게 한 것이니. 이대로 계속 오해할 테니까.” “……전…… 하.” “도망갈 생각 하지 말도록.” 안 놔줄 테니까. 영원히. 그러고 그의 얼굴이 더…… 조금 더 내려왔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닿기 직전까지 다가왔다. 엘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나 어떻게 하지.’ 머리가 하얘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울렸다. 똑. 똑. 조금은 큰 노크 소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둘은 깜짝 놀랐다. 특히 엘리제는 마치 도망가듯 그에게서 화들짝 떨어졌다. “드, 들어오세요!” 린덴은 확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뭐야? 하필 이런 순간에. ‘그래도.’ 그는 여전히 홍당무 같은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쩌면 단순히 오해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잘 써서…… 보내고 싶어서…… 전하에게…… 보내는 거니까…….’ 이 말의 의미는 하나였다. 그녀도 어쩌면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떠오르는 우크라 산맥에서의 기억. ‘저도 싫다고요! 전하가 다치는 것! 전하가 괴로워하는 것! 전하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 싫다고요! 저도 아프다고요!’ 그녀가 자신을 향해 눈물 흘리던 것도 떠올랐다. 어쩌면, 어쩌면……? “엘리제…….” 그는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그저 오해하고 짐작만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 그녀에게 제대로 듣고 싶었다.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때. “들어가겠습니다.” 훼방꾼이 들어왔다. 그 훼방꾼의 얼굴을 본 엘리제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빠!”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 작은 오빠 크리스였다! 엘리제는 마치 곤란에 처해 있다가 백마 탄 왕자라도 만난 것처럼 그에게로 달려갔다. 크리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동생을 가볍게 안아주었다. “우리 리제. 밥은 먹었어?” “아직요. 오빠는요?” “나도 아직 안 먹었지. 오늘 일 늦게 안 끝나지? 저녁에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 “네. 네.” 그 지나치게 다정한 모습에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다른 놈이었으면 요절을 냈겠지만, 저 이는 그녀의 친오라비인 크리스였다. 그나마 렌보다는 조금 더 낫다고 평가되는.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아, 그게…….” 크리스는 그 물음에 그녀를 안은 팔을 놓고, 황태자를 돌아보았다. “전하를 뵙습니다. 신임 비서관인 크리스 드 클로랜스입니다.” “……그래, 여기는 무슨 일이지? 난 자네 동생에게 용건이 있다만.” 별 용무 없으면 빨리 돌아가지? 란 말투로 황태자가 말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2월 3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19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4 하지만 린덴에게는 불행히도 크리스는 아무런 일 없이 온 것이 아니었다.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왔습니다.” “아바마마가?” “네, 전하. 폐하께서 지금 바로 뵙자고 하시더군요.” 그 말에 린덴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항구에 입항한 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와 버렸다. 원래는 황제인 민체스터에게 먼저 가 보고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는데. 너무 그녀가 보고 싶어 앞뒤 안 가리고 달려온 것이다. ‘어쩔 수 없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린덴은 엘리제를 바라봤다. “엘리제.” “네, 네? 전하?” 엘리제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봤다. 방금 맞닿을 뻔했던 그의 입술이 떠올라 그녀의 가슴을 뛰게 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 “곧 다시 올 테니.” 일반적인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러지 않았다. 그의 타오르는 듯한 시선은 이런 뜻을 담고 있었다. ‘금방 잡으러 올 테니.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기다려’라는. 린덴은 또 생각했다. ‘직접 들어봐야겠어. 내 오해가 맞는 것인지.’ 그는 살짝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의 오해가 맞는 것인지, 그녀의 입으로 직접 들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옆에서 크리스가 또 훼방을 놓듯 말했다. “전하, 빨리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 그렇게 둘은 사라졌다. 홀로 남은 엘리제는 다리에 힘이 빠져 응접용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의 손길이, 자신에게 다가오던 입술이 떠올랐다. 가슴이 계속 뛰었다. *** 하지만 금방 잡으러 온다는 말과 다르게 린덴은 한참이나 그녀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아바마마를 뵙습니다.” “그래, 정말 수고가 많았다.” 민체스터가 옅게 웃으며 승전 후 복귀한 아들을 맞았다. 린덴은 안 본 사이, 부쩍 마른 아버지를 보고 일순 말을 잊었다.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기력이 없어 보였던 것이다. “아바마마…….” 민체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엘리제, 그 아이가 처방한 약들을 먹고 많이 나아지기도 했고.” “…….” “태자, 너는 그래, 고생이 많았지? 브리티아 섬과 다르게 기후가 안 맞아 힘들진 않았더냐? 전쟁 시 입었던 상처들은 무리 없이 나았고?” “저는 괜찮았습니다. 아바마마께서는…….” “괜찮으니 정말 걱정 안 해도 되느니라.” 그렇게 둘은 황제와 원정군의 총사령관이라기보단 일반적인 아버지와 아들처럼 그간의 일들을 나누었다. “그래, 네가 정말로 큰일을 해주었어. 피할 수 없어 일어난 전쟁이지만, 반드시 승리했어야 했는데, 네 덕에 큰 승리를 거두었구나.” 민체스터는 총사령관이었던 아들의 공을 치하했다. 하지만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제 공이 아닙니다.” “그러면?” “엘리제,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전쟁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빠르게 공화국군에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녀의 공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로 참전한 그녀이지만, 이번 전쟁 때 중요한 분기마다 어김없이 커다란 공을 세웠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몽쉘 왕국의 참전을 대비 못해 2군단이 전멸했을 거고, 코프스크 대회전 때 패배했을 것이며, 전염병의 창궐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이 순간, 제국이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그녀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 그렇지. 이번 승전식 때 공로에 따라 상을 내리기 위해 전공을 따져 보았는데. 엘리제, 그 아이의 전공 순위가 어마어마하더구나.” 승전식의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 가장 큰 전공을 세운 10명에게 황제인 그가 직접 황실십자훈장과 더불어 포상을 내리게 된다. 지금껏 여성이 그 영광된 명예의 자리에 선 적이 없었는데, 엘리제는 여성이자 제국 역사상 최연소로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아니, 그냥 단순히 그 자리에 서는 것뿐이 아니라……. ‘전공 순위가.’ 처음 그녀의 전공 순위를 확인한 황제는 놀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하지만 검토 결과 그 순위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낮은 감이 있었다. ‘하여튼 대단해. 정말 대단해.’ 민체스터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태자.” “네, 아바마마.” “약혼은 언제 할 것이냐?” 민체스터가 어딘지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이전 그 아이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있었지. 네가 만약 자신을 바라지 않으면, 약혼을 취소해 달라고.” “…….” 그 말에 린덴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건 엘리제가 전쟁에 참전하기 전 내건 조건이었다. 만약 황태자가 자신을 원하지 않으면, 그가 원하는 여인과 이어질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가 원하지 않는 불행한 결혼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약혼 취소라고? 꿈도 꿀 생각하지 마.’ 린덴은 속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은 이미 그녀 없이는 못 살게 되었는데, 웬 파혼이란 말인가. 방금 봤는데도, 지금도 또 보고 싶어 가슴이 타건만. ‘빨리 약혼을 해야겠군.’ 생각해 보니 예비 황태자비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그녀와 자신은 공식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아니었다. 정식 약혼식을 안 치렀으니까. ‘약혼자라.’ 그는 그 단어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약혼식을 치르든 안 치르든 그녀를 놔줄 생각은 없었지만, 공식적인 관계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녀의 손가락에 자신이 준 반지를 끼우고 싶었다. 이 여자가 바로 내 여자라고. 내 거라고. 말이다. ‘아니, 약혼 관계만으론 부족하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약혼자란 이름으로 그녀와 자신이 얽히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가 마음속 원하는 것은 고작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깊숙이 원하는 것. 그건 그녀와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그는 물었다. “아바마마.” “왜 그러느냐?” “황실의 예법상 황태자가 약혼식 없이 바로 결혼할 수는 없습니까?” “…….” 황제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이 못하던 농담을 배워왔나 바라봤다. 물론 린덴은 농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농담 따위 할 줄 몰랐다. ‘그녀가 내 아내라.’ 부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단어였다. 그녀는 자신의 아내가 되고,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 된다. 진정으로 오롯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 맑은 눈빛도, 하얀 피부도, 숨결까지도. 모두. ‘궁내부장에게 예법을 살펴보라 해야겠군. 예외 조항은 없는지.’ 그렇게 린덴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 그 뒤로도 그는 며칠 동안이나 엘리제를 만나지 못했다. 일이 끝없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승전식 준비, 대신 회의, 정책 검토, 타국의 외교관 알현 등등. 하나하나가 가벼운 것이 없었고, 툭하면 걸어오는 귀족파의 시비에 일 처리를 빨리 끝낼 수도 없었다. 그래서 간신히 하나를 끝내 한숨을 돌리려 해도, 신임 비서관인 크리스가 또 일을 물어왔다. “다음 의회에서 논의될 세법 개정안입니다. 귀족파의 핵심 인물인 메르키트 백작이 제안한 입법안입니다.” “…….” 린덴은 서류에 사인하다가 가만히 크리스를 올려다보았다. 렌도 그렇지만, 이 크리스도 은근히 엘리제를 닮았다. 형제니 당연한가? 모두 특징적인 백금발인 것도 그렇고. “전하?” “……아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대는 참 유능한 비서인 것 같군.” 린덴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그래, 이 크리스는 누가 엘리제의 오빠 아니랄까 봐 참 유능했다. 부드러운 인상과 다르게 한 치의 빈틈도 없었고, 왜 행정부에서 ‘리볼버’란 별명으로 불렸는지 며칠 만에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너무 유능하잖아. 너무. 이렇게까지 유능할 필요는 없다고.’ 린덴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모름지기 비서의 일이란 무엇이겠는가? 상관이 업무를 빠뜨리지 않고,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비서의 역할이었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는 완벽했다. 어찌나 꼼꼼하고 업무 처리가 빠른지, 린덴에게 쉬지 않고 해야 할 일을 던져 주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을, 다음 일이 끝나면 그다음 일을. ‘덕분에 나도 업무 효율이 확실히 늘긴 했지만.’ 문제는 쉴 틈이 없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엘리제, 그녀를 보러 갈 틈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왜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못 보는 거지?’ 황실십자병원과 그의 궁은 멀지 않았다. 애초에 그녀가 일하는 황실십자병원과 황궁이 붙어 있었으니까. ‘왜 론도에 와서도 보고 싶어 해야 한단 말이야.’ 그런 그의 불만도 모르고 크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또 건네주었다. “이건 그 입법안을 검토하고 살피실 서류입니다. 웨일의 만스 시에서 건의한 내용으로…….” “…….” 무언가 크리스에 대한 점수가 급속도로 깎이고 있었다. 왠지 렌이 조금 더 나은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비서관으로서의 능력은 더할 나위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던 다음 날이었다. 점점 불만이 쌓여 폭발하기 직전. 대전 회의를 가던 중, 린덴은 발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이 정원 너머 어딘가에 꽂혔다. “전하? 회의 시작에 늦을 수도 있습니다.” 크리스가 재촉했으나, 린덴은 이렇게 답했다. “늦어도 돼.” “네? 대신들이…….” “대신들? 기다리라고 해. 비서관, 너도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도록.” “전하?” 하지만 린덴은 듣지 않고, 척척 전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전하?!” “기다려. 금방 다녀올 테니.” 그가 향한 곳은 정원 너머. 그곳에 엘리제가 있었다! 왕진 가방을 손에 쥐고, 간호사 한 명과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엘리제.’ 크리스의 말처럼 바로 가지 않으면 대전 회의에 늦겠지만, 지금 그게 문제인가? 며칠 만에 그녀를 봤는데. ‘대전 회의 따위, 조금 늦어도 돼.’ 대신들과 정국을 논하는 대전 회의가 순식간에 ‘따위’로 전락하였다. 그의 발걸음이 초조하게 뛰듯 빨라졌다. 하지만 바삐 걸음을 옮겼어도 정원 너머에 도착했을 땐 그녀는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린덴은 인상을 구기고 주변에서 경비를 서던 가드에게 물었다. “여기로 데임 클로랜스가 오지 않았었나?” “네, 그렇습니다, 전하!” “어디로 갔지?” “하버 공작부인께서 고열이 난다 하여 진료를 보러 가신 다고 들었습니다.” 하버 공작부인. 웨일의 대귀족 하버 공작의 부인으로, 황실의 먼 친척이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전 2년 전, 탄신연회 때 엘리제가 목숨을 구한 적이 있었다. ‘젠장.’ 그런 용무라면 가서 잡을 수도 없다. ‘왜 이렇게 얼굴 보기가 어려운 거지?’ 그녀가 보고 싶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손길을 어루만지며, 작은 몸과 체향을 느끼고 싶다. 이렇게 가슴은 타오르는데, 옆에 두고도 못 보니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굳은 얼굴로 생각했다. ‘오늘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고 만다.’ 그 얄미운 크리스가 방해하더라도, 아무리 일이 바빠도 상관없었다. 오늘만큼은 그녀를 잡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다짐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2월 4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20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5 하지만 그 다짐은 쉽지 않았다. 대전 회의가 생각 외로 길어졌던 탓이다. “전하, 그 개정안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름살이 자글자글한 비호감 외모의 중년 귀족 사내가 손을 들어 반대했다. 린덴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메르키트 백작.’ 저 메기 같은 인상을 지닌 남자의 정체는 메르키트 백작. 상원의 위원장으로 차일드 가문의 암셀 후작에 이어 귀족파 서열 2위의 귀족이었다. 차일드 가문이 서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금권으로 귀족파의 뒤를 받힌다면,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은 막대한 정치력으로 황제파와 직접 맞서는 역할을 하였다. ‘짜증 나는군.’ 평소에도 골머리를 앓게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했다. 단순히 이번 개정안이 귀족파의 손익을 건들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상원은 행정부에서 이 개정안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무리한 개정안입니다. 원점에서 다시 기안해야 합니다.” 귀족파의 여러 인물이 강하게 반대 의견을 피력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들이 오늘따라 유독 강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 그는 시선을 돌려 그 원흉을 바라봤다. 저 멀리 정장을 입고 앉아 있는 꽃같이 화사한 외모의 젊은 남자.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 그의 동생이자 정적이었다. 미하일은 가벼운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 ‘미하일.’ 린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크림전쟁이 끝난 이상, 이제 곧 자신과 저 미하일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이 싸움의 패자는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와 미하일 모두 마음속으로 원하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그저 어쩔 수 없는 일일 뿐이다. 속으로 한숨을 내쉰 린덴은 안건을 다시 살폈다. 왜일까? 늘 꾸던 악몽이 떠오르며 갑자기 피로하단 마음이 들었다. 그냥. 그녀가 보고 싶다. 미친 듯이. *** 한편 그때, 엘리제는 하버 공작부인을 치료하고 궁을 나서고 있었다. 공작부인의 발열은 폐렴 초기 증상이었다. 이런저런 처치를 하고 나서, 상태가 안정되는 것을 확인 후 궁에서 나왔다. ‘좋아지셔야 할 텐데.’ 엘리제는 황실십자병원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부인은 파킨슨병이 진행되며 자꾸 여러 합병증이 발생하고 있었다. 웨일이 아닌, 궁에 머물고 있는 것도 이런저런 치료를 위해서였다.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죠?” “마티스 자작가 영애의 탈장 수술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교수님.”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아니, 테레사병원에서 일할 때보다 지금이 훨씬 바쁜 것 같았다. 어의로서 황제와 황족들의 건강을 챙기는 것 외에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로서 수술도 해야 하고, 교수로서 아카데미에서 강의도 해야 한다. 그것뿐인가? 황제의 재가를 받고 진행하는 보건 프로젝트들도 있고, 개인적으로 진행하는 연구 논문 작성도 있다. 그야말로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상황. 그래도 바쁘고 피곤해도 그녀는 행복했다. 원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 ‘전하.’ 엘리제는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저 멀리 보이는 하나의 궁을 바라보았다. 사자궁. 황태자인 린덴이 머무는 궁으로, 후에 그녀가 결혼 후 들어갈 곳이었다. ‘많이 바쁘시겠지?’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 마음이 참 웃기다. 그와 마주했을 때는 그렇게 떨려 어쩔 줄 몰라 했으면서 안 보니 또 이렇게 보고 싶다. ‘금방 오신다셨으면서.’ 그날의 짧은 만남 이후, 아무런 소식이 없다. ‘10개월 만에 오셨는데. 계속 못 뵈는구나.’ 물론 알고 있다. 이제 막 복귀한 그가 얼마나 바쁠지.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만나면 또 얼굴만 빨개져 아무 말 못할 거면서. “교수님?” 간호사가 멍하니 서서 사자궁을 바라보는 엘리제에게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스 영애의 수술은 정확히 얼마나 남았죠?” “한 시간 반 뒤에 시작이에요. 하버 공작부인의 치료 때문에 넉넉히 미뤄놨어요.” 그 말을 들은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생각했다. ‘내가…… 한번 찾아가 볼까?’ 하지만 곧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 내가 어떻게 찾아가…….’ 아무리 약혼자로 예정된 사이라지만, 불쑥 어떻게 황태자를 찾아가겠는가. 아니, 사실 그가 황태자인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같은 황자라도 친구인 미하일을 찾아가야 한다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를 찾아가는 것은 이유 없이 부끄러웠다. ‘그래도…… 보고 싶은데.’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잠깐 찾아가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그러니까 바쁘시니 잠시 기운을 내시라고…… 난 어의니까 혹 바쁜데 몸이 이상하지는 않는지…….’ 그녀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어의니까 황태자의 몸을 살펴야 한다고? 뭔가 말도 안 되는 핑계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잠시만 찾아뵙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실제로 크림반도에서 복귀한 후 검진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으니까. ‘그, 그래. 어차피 한번은 전하의 몸 상태를 살피러 가야 하니까.’ 그래, 이건 의사로서 검진을 위해 가는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마음을 정한 엘리제는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와 거울을 살폈다. ‘조금만 머리를 다듬고.’ 현재 그녀는 전혀 꾸미지 않은 상태였다. 화장은커녕 머리는 포니테일로 질끈 묶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니, 꾸민 것보다 더 예뻤지만, 그녀는 서둘러 거울을 보며 이리저리 다듬었다. 일단 머리를 풀었다. 끈을 풀자 부드러운 백금발이 가운을 입은 어깨 밑에서 찰랑거렸다. 그리고 민낯에 희미하게 기초화장을 하였다. 물론 검진하러 가는데 치장을 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일하던 얼굴 그대로 그를 만나러 가기는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그렇게 외과의사 엘리제는 설레는 소녀가 되어 교수실을 나왔다. 혹시나 그가 피로해할까 봐 피로를 풀어주는 찻잎과 간단한 다과도 챙겼다. ‘그런데 만나면 뭐라고 하지?’ 며칠 전 마지막 순간 그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그의 말. ‘내가 바라는 것은 차 따위가 아니라 너라고.’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의 입술에 거의 맞닿을 뻔한 그의 입술도 떠올랐다. ‘쓰,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엘리제. 그냥 검진하러 가는 거야. 크림반도에서 돌아온 전하의 몸이 괜찮은지. 그러니 잠깐만 뵙고 나올 거야.’ 하지만 한번 떠오른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당시의 생각이 머릿속을 휘저었다. 뒤에서 자신을 감쌌던 그의 몸짓, 자신을 만지던 그의 손길. 모두 선명히 떠올랐다. ‘이,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려.’ 콩닥. 콩닥. 심장이 이상하게 뛰었다. 지금 이 가슴의 떨리는 느낌이 도대체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그녀가 사자궁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엘리제는 의외의 말을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안 계십니다.” “아…….” 이전에 그녀에게서 목숨을 구함받은 적 있던 란돌 경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언제쯤 오실 예정이신가요?” “지금 대전 회의가 한창이실 테니 아마 꽤 걸릴 것입니다. 돌아가시면 전하께 데임의 방문 소식을 알려드릴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특별한 일로 온 것은 아니니…… 전하께는 따로 말씀해 주지 마세요.” 그러고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물었다. “전하께서 요즘 많이 바쁘시죠?” “네,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셔서 잠도 잘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그렇군요.”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힘없이 황실십자병원으로 돌아가려다, 문득 한가지 생각이 나 몸을 돌렸다. “저, 란돌 경.” “네, 데임?” “이 차(茶)를 전하께 달여 드릴 수 있으시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챙겨온 작은 단지를 건네주었다. 딸의 과로를 걱정한 엘 후작이 어렵사리 구한 동방 귀인들의 차로 피로를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배합 방법과 물을 달이는 방법은…….” 이전 삶, 황태자는 차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지금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맛이 우러나오도록 레시피를 일러준 후 병원으로 돌아왔다. 엘리제는 교수실로 돌아온 후, 의자에 앉았다. ‘수술 준비해야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를 만나러 사자궁으로 향할 때만 해도 기운이 넘쳤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힘이 빠졌다. 엘리제는 고개를 강하게 젓고, 다시 머리를 한 갈래로 묶었다. 그리고 수술을 준비하러 병실로 내려갔다. *** 대전 회의는 깊은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자궁으로 돌아온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치는군.’ 회중시계를 보니 저녁 9시 30분이었다. 저녁은커녕 휴식도 없이 비생산적인 논쟁을 벌이니 몸이 추욱 늘어졌다. “대전 회의가 길어졌군요.” 시종 란돌이 말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들과의 회의가 늘 그렇지.” “그러게 말입니다. 하여튼 한심한 작자들입니다.” 이전 암행 때, 총상을 입어 엘리제에게 비장절제술을 받았던 란돌은 장기간 요양을 한 후 얼마 전 궁으로 복귀했다. 왕년에 로열 나이츠, 총기사단의 단원이었던 그는 시종이라기보단 기사에 가까운 몸을 가지고 있었다. 말투도 시종치고는 가벼웠다. “식사를 준비시킬까요?” “아니, 됐다. 그냥 조금 쉬고 싶군.” “그러면 위스키라도?” 위스키라. 한잔하고 싶긴 했지만, 그는 책상을 바라봤다. 회의에 갔다 온 사이, 서류가 또 쌓여 있었다. 분명 그 얄미운 크리스가 가져온 것일 거다. “아니, 처리해야 할 서류가 있어서. 술은 어려울 것 같군.” 그러자 란돌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러면 차(茶)는 어떠십니까?” “차?” “네, 마침 피로를 풀어주는 차가 들어왔는데.”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그가 평소에도 늘 즐기는 음료다.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느낌이 좋아 그렇지 않아도 차분히 한잔 마시고 싶긴 했다. 저 덜렁거리는 란돌이 끓이는 차는 영 깊은 맛이 안 나긴 하지만. ‘그러고 보니 그녀가 그렇게 차를 잘 달인다고 했지?’ 아버지인 민체스터에게 몇 번이고 칭찬을 들었었다. 엘리제, 그녀가 끓이는 차는 그야말로 론도 최고라고. ‘한번 끓여 달라 해야겠군.’ 그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한 번뿐이겠는가? 나중에 같이 살게 되면 매일 그녀의 차를 마실 수 있을 것이다. ‘빨리 약혼. 아니, 결혼해야겠어.’ 생각이 꼬리를 물며 자연스레 그녀가 떠올랐다. 차뿐 아니라, 그녀와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았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 서류를 던져 버리고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은데. ‘엘리제.’ 그때, 란돌이 돌아와 찻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뜨거우니 조심히 드십시오.” “흠?” 린덴은 차를 보며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굉장히 그윽한 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저 란돌은 황궁 시종이지만 다도에는 영 재능이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향이 나지? 다른 시종이 끓인 건가? 살짝 맛을 본 다음에는 더 놀랐다. 이전 란돌이 달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깊은 맛이 느껴졌던 것이다. 풍미도 제법 자신의 취향에 맞았다. “누가 이 차를 끓인 거지?” “네?” “네가 이런 차를 달였을 리는 없고. 이 밤에 누구에게 부탁한 것이지?” “제가 끓인 것입니다.” “그대가?” 그 믿을 수 없다는 표정에 란돌은 억울하단 얼굴을 했다. “네, 새로운 레시피대로 달여 보았습니다.” “새로운 레시피? 누가 알려준 거지?” “데임 클로랜스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의외에 말에 황태자는 눈을 번쩍 떴다. 데임 클로랜스? 엘리제, 그녀가? 란돌에게 차 달이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왜? “그녀가 왜 너에게 차 달이는 법을 알려준 거지?” “오늘 오후에 잠깐 오셨었는데. 전하께서 요즘 과로하신지 물어본 다음, 찻잎을 주면서 레시피를 알려주고 갔습니다.” “……!” 린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다고? “그 말 정말인가?” “네?” “그녀가 정말 나를 찾아왔느냐고.” 다급한 물음에 란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잠시 오셨다 가셨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용무로 온 것은 아니니, 따로 전하께 알리지는 말라 하시더군요.” 그 말에 린덴은 저 눈치 없는 시종에게 화라도 내고 싶었다. 그녀가 찾아왔으면 당장에 알려야지! 모를 뻔하지 않았는가! 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지금 이따위 서류나 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00121 5-2 마주 보다 ========================================================================= 2장 마주 보다 - 6 ‘왜? 왜 날 찾아온 거지? 그것도 특별한 용무도 없었다면서?’ 자신이야 그녀를 간절히 열망하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직 그녀의 마음을 정확히 모르는 그는 혼란스러운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떠오르는 몇 가지 일들. ‘저도 싫다고요! 전하가 다치는 것! 전하가 괴로워하는 것! 전하가 죽을지도 모르는 것! 싫다고요! 저도 아프다고요!’ ‘조금이라도 더…… 잘 써서 보내고 싶어서…… 전하에게 보내는 거니까…….’ 그리고 그녀의 캐비닛에 수북이 쌓여 있던 자신을 향한 편지들. ‘……설마? 정말로……?’ 린덴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 도저히 상상할 수 없지만 설마…… 그녀가 자신을……? 두근. 그 가정이 떠오르자, 가슴이 뛰었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런 것에 상관없이 무조건 그녀를 가지겠다고. 오로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얼마나 바랐는가?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가길.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길. ‘아니야. 아직은 정확히 몰라.’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가슴은 계속해서 뛰었다. 단지 추측일 뿐이지만,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풍랑처럼 거세게 일었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확인하고 싶다. 만나서 그 작은 몸을 끌어안고, 그녀의 마음을 확인해 보고 싶다. 그리고 거기까지 생각이 진행했을 때, 그는 더 머뭇거리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얄미운 크리스가 던져준 서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잠시 나갔다 오겠다.” “네? 이 시간에 어디를?” 란돌이 당황해 물었다. 벌써 저녁 10시가 넘은 시간이다. 린덴은 검은 코트를 걸치며 말했다. “암행.” “……네? 갑자기 어디로 암행을……?” “클로랜스가(家)로 암행 다녀오겠다.” “크, 클로랜스가요?” 란돌은 입을 벌렸다. 재상가에 왜 암행을 다녀온단 말인가? 하지만 린덴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다녀오마.” 그렇게 짧은 말을 남긴 후, 궁을 나와 곧바로 말을 달렸다. 클로랜스 저택. 바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그런 그의 등 뒤로 한 송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옅은, 아름다운 겨울눈이었다. *** 부지런히 말을 달린 결과 오래 걸리지 않아, 클로랜스 저택이 위치한 화이트가(街)에 도착했다. 화이트가(街)는 귀족들이 모여 사는 곳답게 거리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말에서 내린, 린덴은 클로랜스 저택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저택 2층, 그녀의 침실 쪽을 바라봤다. ‘불이 꺼져 있군. 자고 있나?’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 보니 무작정 오긴 왔지만, 시간이 너무 늦긴 했다. 잠이 들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 ‘젠장.’ 왜 이렇게 만나기가 어렵단 말인가. 가슴은 열망으로 이렇게 타들어 가고 있는데. 빨리 그녀를 보고 싶고, 그녀를 끌어안아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품 안에 가둔 채 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미 잠이 들었는데, 강제로 깨워 납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제길. 이러니 빨리 결혼을 해야.’ 그는 아직 제대로 데이트도 안 해본 주제에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하면 이렇게 못 만나 가슴 타는 일은 없을 텐데.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되면, 그래서 같이 살게 되면, 손안에서 한순간도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그녀의 얼굴을 볼 것이고, 그녀가 일어나면 입맞춤해 줄 것이다. 그리고 커피와 빵을 마시고, 같이 식사를 하며, 한적할 때는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와 차를 마시고, 같이 산책을 할 것이다. 매일,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렇게 그녀와 함께라면, ‘그날’ 이후 늘 악몽을 꾸는 자신이지만,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궁내부장을 다시 한 번 닦달해야겠어. 정말 약혼 없이 결혼은 안 되느냐고.’ 며칠 전 물었을 때는 질색해 경기를 일으켰었다. 말도 안 된다고. 역사상 그랬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예법에 어긋난다고. ‘전하! 황후가 되실 분이 의사 겸업을 할 수 있도록 말도 안 되는 개정안을 내시더니 약혼 생략까지! 정말 이 늙은이를 말려 죽일 것입니까!’ 이러며 고래고래 난리였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비틀었다. ‘예법. 그따위 것.’ 그런데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마차가 멈추는 소리가 들리더니, 뜻밖의 음성이 그를 불렀다. “전…… 하?” “……?!” 살짝 떨리는, 익숙한 여린 목소리. 엘리제였다! 그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마차의 문이 열리며 추운 날씨 탓에 회색 코트를 걸친 그녀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전…… 하? 이 시간에 이곳엔 어떻게……?” 그의 앞에 도착한 그녀는 푸른 눈을 커다랗게 뜨며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눈을 본 그는 일순 충동을 참지 못해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 엘리제가 당황해 그를 불렀다. “저, 전하……?” 하지만 그를 거부하진 않았다. 단단히 느껴지는 그의 몸에 그녀의 가슴이 다시 뛰었다. 그의 품에 들어와서일까? 추운 날씨가 따뜻하게 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때 들리는 낮은 목소리. “이제야 일이 끝나 돌아오는 것인가?” “……네.” “보고 싶었다.” “……!” 그 낮지만 달콤한 목소리에 엘리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후에 그와 만나지 못하고 하루 내내 계속 기운이 없었는데,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저도요. 저도 보고 싶었어요.’ 엘리제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등 뒤를 마주 감싸 안았다. “……!” 자신의 등 뒤에 옅게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에 린덴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놀라 품 안에 안긴 그녀를 내려다보니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뭉클.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린덴의 가슴이 알 수 없이 울렁거렸다. 지금 자신의 품 안에 느껴지는 그녀가 꿈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둘은 잠시 가만히 서로를 느끼고 있었다. 옅은 눈송이가 둘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 린덴은 한 손으로 엘리제의 머리와 얼굴에 내려앉은 눈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이 얼굴에 닿자, 그녀가 살짝 움찔했다. 엘리제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그의 등 뒤를 감쌌던 손을 내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 “오늘 왜 나를 찾아온 것이지?” “……!” 그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물들었다. “그, 그건…….” “말해봐라. 명령이다.” 그 말을 들은 엘리제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를 찾아간 이유? 단 하나다. ‘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귓가에서 바로 그의 숨결이 느껴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이야기를 하겠는가.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 그게…… 검진을 위해서요.” “검진?” “네, 크림반도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 건강은 괜찮으신지 확인하려고…… 그게 전…… 어의이기도 하고…….”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 “그…… 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품 안에 안겨 옆으로 돌아가 있던 그녀의 턱을 잡더니, 똑바로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 쿵. 품 안에 안겨 그의 얼굴을 코앞에서 마주하게 된 그녀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너무 가까웠다. 그의 굳은 입술에서 나오는 숨결이 곧바로 느껴졌다. “저, 전하…….” 제발 놔달라는 듯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놔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물으마. 정말 그 이유 때문인가?”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금안이 타오르듯 그녀를 직시했다. 그 시선을 피하고 싶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마치 마음을 꿰뚫듯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결국 그녀는 입을 열었다. “거, 걱정도 됐고요…….” “걱정?” “네, 그게…… 전 어의니까…….”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초식 동물이 자꾸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 그는 그녀의 허리를 감싼 손에 더욱 강하게 힘을 주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거짓말하는 아이를 혼내듯. 둘의 몸이 으스러지듯 강하게 밀착했다. “엘리제.” “…….” “정확히 말해라.”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얼굴이 귓불 끝까지 빨개졌다. 결국, 그녀는 고백했다. “……보고 싶어서요.” 그 목소리는 개미가 기어가는 것보다 작았다. 그래서 린덴은 그녀의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너무나 소망하던 말이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뭐? 안 들린다. 다시 말해봐라. 조금 더 크게.” “…….” 그녀의 얼굴이 더욱더 붉어졌다. 한 번 말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니. 그러나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보고…… 싶어서요.” 이번엔 린덴도 똑똑히 들었다. 그의 무뚝뚝하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보고 싶어서 나를 찾아왔다고?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누구를? 누구를 보고 싶어서 온 거지?” “…….” 이제 엘리제는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누구긴, 누구겠는가? 바로 눈앞에 있는 그이지. “전…… 하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린덴의 가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가 차올랐다. 그건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벅찬 기쁨이었고, 가슴이 찢어질 듯 격동했다. ‘내가…… 내가…… 지금…… 정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 건가?’ 그는 그렇게 의심했다. 하지만 꿈이 아니었다. 그의 품 안에 느껴지는 엘리제의 작은 몸도, 눈앞에서 떨고 있는 푸른 눈동자도 모두 현실이었다. 나를 보고 싶어 했다고? 그 말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그녀의 마음에도 자신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습니까?’ ‘전하가 이러시는 것…… 솔직히 거북합니다.’ 과거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자신을 밀어내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그때와 달랐다. 붉게 물든 얼굴에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 엘리제.’ 격동하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더 확인하고 싶어 그는 다시 한 번 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나를 보고 싶어 한 거지?”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어째서? 그 이유야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아도 민망해 죽겠는데, 자꾸 꼬치꼬치 묻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대답해 봐라. 듣고 싶으니.” “……그냥…… 그냥…… 보고 싶었어요.” “그냥? 넌 나를 싫어했던 것 아니었나?” “…….” 도저히 그를 마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쥐죽은 듯 말했다. “……시, 싫어하지 않아요…….” “……!” “그러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린덴의 눈동자가 폭풍을 만난 듯 흔들렸다. ‘신이여. 정말 이게 꿈이 아니란 말입니까?’ 너무나 기뻐 오히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러다 눈을 감았다가 뜨면, 꿈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다. 헛된 미몽을 꾼 것처럼. “다시 말해봐라. 아니, 정확히 말해봐라. 싫어하지 않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그러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전하를…….” 그녀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해 버린 엘리제는 지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민망함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 그의 품 안에 더욱 얼굴을 파묻었다. ============================ 작품 후기 ============================ 내일뵙겠습니다! 00122 5-3 상흔 ========================================================================= 3장 상흔 - 1 하지만 그 순간. “……!” 그가 그녀의 얼굴을 다시 들어 올렸다. 다시 코앞에서 그와 얼굴을 맞대게 된 엘리제의 가슴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엘리제.” “…….” “엘리제.” 린덴은 계속해서 그녀를 불렀다.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그의 품 안에서 그녀의 심장이 떨렸다. 한 음절, 한 음절에 담긴 깊은 갈망. 그 갈망에 취해…… 그녀도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듯 말했다. “네…… 전하…….” “엘리제…….”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귀, 귓불, 뺨. 마치 귀중한 보석을 만지듯 그의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엘리제는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하…….” 마지막. 린덴의 손가락이 그녀의 붉디붉은 입술에 닿았다. 그의 감촉을 입술에서 느끼며 엘리제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엘리제…….” 그 빠지고 싶을 정도로 깊고 푸른 눈을 보며, 린덴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으나, 피하진 않았다. ‘아…… 전하.’ 그렇게 그와 그녀의 거리가 사라지려는 순간. 놀란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전하?” “엘리제?” “……!” 그 뜻밖의 목소리에 놀란 엘리제가 화들짝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오, 오라버니? 오빠?” 목소리의 주인들을 확인한 린덴은 속으로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녀의 오라비들인 렌과 크리스였다! ‘또 결정적인 순간에.’ 큰오라비인 렌은 상황 판단이 안 되는지 보석 같은 얼굴을 어벙하게 눈을 껌뻑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작은오빠, 크리스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밀회 장면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엘리제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왜, 왜 나오셨어요?” “크흠. 왜 나오긴. 마차가 도착했는데 네가 안 오니 걱정되어 나와 봤지. 날씨가 쌀쌀한데 안 춥니? 아버지가 또 감기 걸릴까 걱정하시던데.” 헛기침한 크리스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며 황태자를 흘끗 보는데…… 착각일까? 왠지 그 눈빛이 ‘도둑 놈’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두 번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받은 린덴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친오빠만 아니었어도! “아닙니다. 혹시 제가 저녁에 드린 서류는…… 내일 아침까지 검토해 주셔야…….” “안다. 알아. 돌아가서 할 거다.” 그 얄미운 말에 린덴은 발끈해 말했다. 갈이 치워 버릴까. 하지만 유능하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크리스는 지금껏 그가 만나본 비서관 중 가장 완벽했다. 왠지 얄미운 것만 빼고는. “가자, 리제.” “……네.” 엘리제는 여전히 붉어진 얼굴로 오빠들에게 다가갔다. 크리스가 우산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를 가려주었고, 연애 바보 렌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저희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전하.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그래.” “서류는 내일까지 꼭 부탁드리…….” “한다고.” 린덴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놈. 이거 일부러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백금발 3형제는 저택으로 들어갔고, 린덴은 눈을 맞으며 그녀가 사라지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갔군.’ 방금까지 함께 있었으면서, 눈앞에서 사라지니 다시 가슴이 휑한 느낌이 들어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봐도 계속해서 보고 싶으니, 정말 중증의 중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그가 말을 타고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저, 전하!” 다급한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렸다. “……!” 놀라 돌아보니 작은 소녀가 그에게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엘리제?” “하아, 하아.” 급하게 와 힘든지, 숨을 몰아쉰 그녀는 무언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눈이 많이 오니 이걸 쓰시라고…….” “…….” 챙이 넓은 모자와 망토였다. 눈이나 비를 막는 용도로 사용하는. 소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그…… 날씨가 추운데…… 건강이 상하시면 안 되니까…… 저는 황궁의 어의이기도 하고…….” 그 우물쭈물한 말을 듣자, 린덴은 다시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와락. 다시 한 번 그에게 껴안긴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입술이 엘리제의 이마에 와 닿았다. “……!” 그 차갑지만, 타오르는 듯한 감촉에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엘리제.” “……네, 전하.” “내 궁에 와서 나에게 차를 달여 줄 수 있겠나?” “언제……?” 그는 가만히 입술을 떼고, 그녀의 눈가 앞에 입술을 가져갔다. “언제든.” “……!” “이제 앞으로 그대가 살 곳이니. 언제든 와도 좋다.” 그대가 살 곳. 그 말에 엘리제의 가슴이 살짝 떨렸다. 후에 언젠가 그와 하나가 되면. 그녀가 살 곳. 방금 이마에 와 닿은 입술의 감촉도 떠오르며 심장이 진동했다. 린덴이 나직이 말했다. “가급적 매일. 그래. 매일 네가 와서 차를 달여 주었으면 좋겠군.” 엘리제가 시선을 피했다. “매…… 매일은 어려워요. 병원 일이 바빠서…….” 그 대답에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때 그녀가 부끄러운 눈으로,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봤다. “그래도…… 최대한 자주 가서 달여 드릴게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린덴의 입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웃음이 나왔다. 가슴이 터질 듯한 충만감. ‘그날’ 이후 무채색의 지옥으로 변한 그의 마음에 넘쳐흐르는 환희. 너무나 벅차 꿈처럼 여겨지는 행복감이었다. 그렇게 그녀와 그. 둘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축복하듯 하늘에서 옅은 눈이 송이송이 내리는, 어느 예쁜 겨울 저녁 밤의 일이었다. *** 엘리제와 린덴이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하던 그 순간. 브리티아의 산업화를 이끈 명군(明君) 민체스터는 꿈을 꾸고 있었다. 삼십 년에 가까운 머나먼 옛날. 오늘처럼 똑같이 눈 내리던 어느 겨울날. 검은 예복을 입은 수많은 사람이 북적이며 클로랜스 저택을 드나들고 있었다. “아, 왜. 엘 이 자식은 하필이면 결혼식을 눈 내리는 겨울날 하는 거야?” 검은 예복이 어울리지 않는 거친 인상의 남자가 투덜거렸다.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의 단원이었다. “그러게 란돌. 듣자 하니 엘 그놈 사고 쳐서 결혼하는 거라는데?” “사고?” “응, 임신시켰데.” 그 대답에 총기사단의 단원인 란돌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란돌은 총기사단의 소대장으로 낙하산으로 들어온 클로랜스 가문의 골칫덩이 엘의 선배였다. “엘, 그 놈답군. 다워. 상대가 평민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국 최고의 명문 클로랜스 후작가가 발칵 뒤집어졌겠군.” “뭐, 완전 평민은 아니고. 중부 지방의 부르주아 집안 출신이라고 하던데. 이름이 테레사였나? 이미 임신한 다음이고 현 후작께서도 워낙 성품이 좋으셔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것 같더라고.” “참, 별일이군. 그나저나 엘 이놈은 결혼하면 그 바람기는 좀 가라앉으려나?” “글쎄? 힘들지 않을까. 워낙 철없는 놈이니. 단장님께서도 결혼 뒤에도 이런 식이면 기사단에서 내쫓는다던데?” 총기시단원의 단원들은 훗날 제국의 명재상이라 불리게 될 엘을 뒤에서 거침없이 깎아내렸다. “아, 예식 시작한다. 빨리 들어가자.” 그렇게 여러 하객이 이 희한한 결혼식에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식장에 입장했다. 결혼식은 차분히 진행됐다. 젊은 엘은 결혼식 내내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보는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신부 테레사는 당차던 평소와 다르게 다소곳이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참 예뻐 보였다. “이상으로 엘 드 클로랜스와 레이디 테레사가 주님의 축복 아래에서 한 부부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짝짝짝. 하객들은 그 행복해 보이는 한 쌍에게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다. “엘 저놈. 이제 정말 철들어야 하는데.” 선배 란돌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이제 사고 안 칠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예쁜 부인을 두고 또 사고 치고 싶겠어?” 그 말에 란돌은 입을 다물었다. 하긴, 저런 부인을 맞으면 자신이라도 바람기가 없어질 것 같았다. “어쨌든 돌아가자. 춥다.” 하늘에서 송이송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하객들은 추운 입김을 뱉으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북적이던 식장이 한산해졌을 때. 저택의 뒤편, 화이트가(街)의 도로에서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온화한 인상의 남자, 당시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인 민체스터 드 로마노프였다. “하아, 제길.” 차분한 평소와 다르게 그는 욕설을 내뱉었다. 욕설뿐이 아니었다. 어디서 술도 마셨는지,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째서.” 그가 이렇게 아파하는 이유. 그건 다름 아닌 친우인 엘과 결혼한 테레사 때문이었다. “내가 뭐가 부족하다고.” 술에 취한 민체스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민체스터와 엘은 테레사를 두고 사랑의 경쟁을 벌였다. 그리고 그 승자는 황태자인 그가 아니라 후작가의 골칫덩이 엘이었다. 민체스터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아니, 이미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놔주었지만 이렇게 결혼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 “제길.” 그는 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가슴이 너무 찢어져,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오늘 하루는 진탕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전하.” “……!” 익숙한 목소리에 민체스터는 고개를 돌렸다. 금발에 푸른 눈, 고귀한 기품의 여인. 당대 론도 최고라고 불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민체스터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순간 가장 보기 싫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여인의 이름은 마리엔 드 차일드. 국제 금융 재벌인 차일드 가의 공녀이자, 어릴 적부터 소꿉친구. 그리고 얼마 전 그의 약혼녀가 된 여인이었다. “전하…… 어째서 이렇게 술을?” 마리엔이 놀란 얼굴로 비틀거리는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걱정 어린 손이 그의 몸에 닿는 순간. 탁! 민체스터가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저, 전하?” 마리엔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술에 취해서일까? 민체스터는 비틀린 소리를 냈다. “가.” “……?!” “꺼지라고! 너 따위는 지금 꼴도 보기 싫으니!” 갑작스러운 폭언에 그녀의 커다란 푸른 눈이 흔들렸다. 아픔이 깃들며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마리엔은 입술을 깨물며 그 아픔을 참고, 걱정 어린 말투로 말했다. “전하, 많이 취하셨습니다. 날씨가 추우니 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니면 저희 저택이라도.” 차일드가의 저택은 이곳 클로랜스가의 저택 바로 옆이었다. 그러나 민체스터는 피식 웃고 다시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너희 저택? 그 더러운 돈으로 세운?” “……!” “다시 말하지만 꺼져. 지금 네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역겨움을 참기 어려우니.” “저, 전하.” 결국, 마리엔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꺼지라고!” “어, 어째서 저에게 이렇게…….” “어째서? 몰라서 물어? 너 때문에! 네 고집 때문에 테레사가 내 곁을 떠났어! 네가 고집을 피워 내 약혼녀가 되는 바람에! 응?!” 민체스터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리엔은 그를 사랑했다. 그리고 현 황제는 대륙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차일드가의 공녀인 그녀를 황태자의 배필로 결정했다. ‘끔찍한 일이지.’ 민체스터는 이를 갈았다. 그는 그녀가 싫었다. 고리대금업자인 차일드 가문도 싫었다. 이렇게나 싫은데 결혼해야 한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다. “저, 전하…….” 마리엔의 눈에서 한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더는 그의 곁에 있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부, 불편을 끼쳐 드려…… 죄, 죄송합니다. 흐윽. 그, 그래도…… 날이 추우니…… 조, 조심히 들어가시옵소서.” 그리고 그녀는 차일드가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벽을 넘어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말은 쉽니다. 월요일 뵙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뵙겠습니다!! Ps. 사실은 설 연휴여서... '아, 설이다! 다음주 수요일까지 합법적으로 쉬어야지!'라고 좋아했는데... 출판사님이 연재하라고 해서(어버버...) 설에도 정상 연재합니다.ㅠㅠ 월요일날 뵙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0123 5-3 상흔 ========================================================================= 3장 상흔 - 2 민체스터는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냥 다 짜증 났다. 한번 밉기 시작하면 한없이 미운 법인가 보다. 저렇게 우는 것도, 저렇게 울면서도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다 싫은 것을 보면 말이다. ‘젠장.’ 그는 비틀거리며 시내의 펍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이지만, 잔뜩 취하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았다. “무얼 드릴까요, 손님?” “흑맥주.” “네.” 민체스터는 커다란 맥주를 한 번에 들이켰다. “한 잔 더.” “소, 손님?” “빨리.” 그렇게 민체스터는 한없이 술을 들이켰다. 마치 마시고 죽을 사람처럼. “소, 손님. 이제 그만…….” “괜찮아…… 한 잔…… 더…….” 펍의 주인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봐도 귀족가의 공자로 보이는 저 청년은 이미 술에 떡실신한 상태다. 그런데 끝없이 술을 달라고 하니. ‘같이 온 일행은 없나? 혼자 온 건가?’ 펍의 주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때,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밀러.” 밀러. 민체스터가 가명으로 쓰는 이름이었다. “……누구?” 민체스터는 흐릿한 눈을 들었다. 희미한 시선 속으로 흑발의 여인이 보였다. “레…… 베카?” 차분한 인상의 미녀. 테레사의 친구인 레베카였다. “그만 마시세요. 이런 모습, 당신답지 않아요.” 그 말에 민체스터는 피식 웃었다. “나답지 않아? 나다운 게 뭔데?” 이렇게 가슴이 찢어지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뺏겼는데 나다운 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하아.” 한숨을 내쉰 레베카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펍의 주인에게 말했다. “한 잔 더 주세요.” “네, 네.” 민체스터가 그 술잔을 받아가려는 순간, 레베카가 낚아챘다. “……?” “제가 마실 거예요.” 그러고 그녀는 벌컥벌컥 술을 들이켰다. 차분한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에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레…… 베카?” 테레사와 어울리며 레베카와도 많은 만남을 가졌지만, 그녀가 술을 저렇게 마시는 것은 처음 봤다. “하아.” 탁. 술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말했다. “한 잔 더 주세요.” “……?!” 그리고 벌컥벌컥. “레, 레베카?” 민체스터는 완전히 당황했다. 지금 뭐하는 거지? 어느덧 3잔을 한 번에 비워 버린 흑발의 여인은 붉어진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아파하세요?” “그거야…….” 사랑했으니까. 민체스터는 말을 삼켰다. 그런데 레베카가 취기가 오른 얼굴로 말했다. “왜 모르세요?” “……뭘?” “당신이 그렇게 아파하면, 저는 더 아프다는 것을.” “……?!” 민체스터의 눈이 커졌다. 이게 무슨 말이지? 레베카. 흑발의 차분한 인상의 여인은 외모만큼이나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저도 당신을 사랑해요. 그걸 왜 모르세요?” *** “……!” 민체스터는 번쩍 눈을 떠 꿈에서 깨어났다. 어느덧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꿈이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꿈. 철없던 젊은 시절의 꿈이다. “참, 어렸지.” 정말 어린 시절이었다. 엘도, 자신도. 천방지축이었던 엘. 그리고 어른스러운 척했지만 속 좁은 아이였던 자신. ‘진정 어렸던 것은 엘이 아니라, 나였지.’ 그의 표정이 후회로 물들었다. ‘내가 조금만 성숙했다면. 그랬다면, ‘그날’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까?’ “하아.”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깊고 깊은, 괴로움과 후회로 점철된 한숨이었다. 그는 명군이었다. 시민 모두가 그를 칭송한다. 하지만 그는 실패자였다. 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할 텐데. “주여.” 민체스터는 방구석에 놓인 십자가를 바라봤다. “이런 죄인인 저도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하는 그는 이전보다 부쩍 마르고, 기력 없어 보였다. 그렇게 깊고 깊은 밤. 창밖은 펑펑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그날의 그때처럼. 론도가 하얗게 변했다. *** 간밤에 수북이 내린 눈으로 론도가 하얗게 변했다. 희대의 명군, 뇌제 민체스터의 통치 아래 번영을 누리고 있는 론도의 시민들은 밝은 얼굴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 어젯밤 엘리제와 린덴이 서로를 마주 봤던 화이트가(街)의 도로. 이른 아침부터 한때의 마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간밤에 잘 주무셨소, 백작?” “그냥 그렇소이다. 요즘 꿈자리가 늘 뒤숭숭하구려.” 메기 같은 인상의 귀족 남자가 퉁명스레 인사를 받았다. 메르키트 백작. 제국 상원의 위원장이자 귀족파 서열 2위의 대귀족이었다. “눈 때문에 늦지 않았나 모르겠구려.” 클로랜스 저택 앞에 모여들고 있는 마차들은 모두 황태자의 적, 3황자의 귀족파 일원들의 것이었다. 물론 그들이 이곳에 모인 것은 클로랜스 가문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바로 클로랜스 저택의 바로 건너편인 차일드 가문에서 회동하기 위함이었다. “어쨌든 빨리 들어갑시다.” 서대륙의 돈줄을 쥐고 있는 가문답지 않게 검소한 차일드 저택에 들어가며 상원 위원장 메르키트 백작은 고개를 돌렸다. ‘클로랜스.’ 귀족파의 대적인 황제파의 수장 가문. 그리고 최근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이 사는 곳. 오늘 귀족파의 귀족들이 차일드 가문에 모이는 이유는 바로 그 ‘위협이 되는 인물’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였다. “이걸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러게 말이오.” “모이긴 모였지만, 답이 나올지.” 차일드 가문의 회의실에 모여들며 귀족파의 귀족들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 논하고자 하는 인물의 곤란성 때문이다. 최근 그들 귀족파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인물. 그 인물은 차기 황제인 황태자도, 재상인 엘 후작도, 크림전쟁 후 군부의 실력자로 떠오르는 렌 남작도 아니었다. 바로 엘리제 드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Lady with the Lamp)이었다. 론도 시민, 아니, 제국 전체에서 그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인기와 지지를 얻고 있는 제국의 예비 퍼스트레이디. 바로 그녀가 그들 귀족파를 가장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 고풍스럽지만 약간은 낡은 회의실의 원탁 테이블에 귀족파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앉았다. 그들이 모두 모인 후, 끼익 문이 열리며 도도하고 당당한 인상의 미녀가 들어왔다. 국제 금융 재벌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當主), 유리엔 드 차일드였다. 그 뒤를 따라 날카로운 인상의 장년인, 귀족파의 수장, 차일드 가문의 암셀 후작이 들어왔는데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 수척해 보였다. “모두 모였습니까?” “네, 후작님.” 과거 엘리제와 대면했을 때와 다르게 많이 마른 모습.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지만, 어딘지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곧 전하께서 오실 테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며 한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남자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였다. 꽃처럼 화사한 그의 얼굴은 이전 엘리제를 대할 때와 달리 한없이 딱딱했다. 걸음걸음에 정장 허리춤에 매달린, 검제(劍帝)의 상징인 비천검(飛天劍)이 흔들렸다. “모두 앉으시죠.” “네, 전하.” 미하일은 가장 상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 좌우에 귀족파 서열 1위 암셀 후작과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이 자리했다.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모임을 갖게 된 이유는 최근 시민들 사이에서 압도적인 지지율을 얻고 있는 엘리제 드 클로랜스에 대한 논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미하일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가 뭐라고 하려는 순간, 한 중년 귀족이 손을 들어 발언했다. 얼마 전까지 동방의 대국 청에 영사로 나가 있던, 외교계의 거물 류스 자작이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라면 예비 황태자비 아닙니까? 의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녀가 우리에게 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메기, 메르키트 백작은 질문한 류스 자작을 바라봤다. “자작은 귀국한 지 얼마 안 되어 데임 클로랜스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 같구려.” “들어는 봤습니다. 워낙 유명하니까…….” 그녀. 데임 클로랜스는 현 제국의 가장 유명한 명사(名士)였다. 청에 파견 나갔던 류스 자작조차도 그 이름을 들어봤을 만큼, 명성이 높았다. “2년 전,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빈민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위해 일했고. 2차 론도 대역병에서 론도를 구했고, 크림전쟁에 참전, 부상병들의 사망률을 20배나 낮췄으며, 등불을 든 여인으로 병사들에게 봉사. 또 전쟁을 승전으로 이끄는 공을 수차례나 세웠고, 현재는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로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있지요.” 류스 자작은 청에서 전해 들은 그녀의 대표적인 업적들을 거론했다. 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 만에. 그것도 어린 소녀가 이루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업적들이었다. “황제파인 클로랜스 가의 영애이지만, 같은 제국인으로서 존경할 만한 인물이라 생각했습니다만…… 그녀가 왜 우리에게 위협이……?”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데임 클로랜스는 정치적 이념을 떠나 존경할 인물이었지, 적대할 인물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녀의 업적 중 적대할 만한 것이 어디 있는가? 숭고하단 말이 어울리는 업적들이었다. 귀족파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문제요. 그녀는 남들은 사교계에서 생각 없이 하하 호호할 어린 나이에, 그것도 황태자비가 될 지고한 신분으로 믿을 수 없는 일들을 연거푸 해냈소. 그래서 현재 론도, 아니, 제국 전체에서 시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인이 되었다오. 지금 길거리에서 그녀 욕을 한마디라도 하면 분노한 시민들에게 곧바로 돌팔매를 맞을 것이오. 그만큼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인가? 그녀가 해낸 일들을 보면, 그런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메르키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그녀의 남편이 될, 황태자의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고 있소. 문제는 바로 그것이오.” “……!” 류스 자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말은…….” “그렇소. 원래 시민들의 황태자에 대한 지지율은 우리 3황자 전하에 비해 훨씬 낮았소. 그런데 그게 최근 역전되고 있는 것이오.” 류스 자작은 침음을 흘렸다. 생각지도 못한,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다. 원래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의 지지율은 3황자에 비해 훨씬 낮았다. 시민들에게 친근한 검제에 비해 훨씬 딱딱한 이미지였던 탓이다. 시민 중 자신들에게 친근한 3황자가 황제가 되길 내심 바라고 있던 자가 많았었다. “우리 귀족파가 황태자에 비해 가장 큰 우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3황자 전하를 향한 시민들의 지지였소. 계승권에서는 밀리지만, 시민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3황자 전하라는 명분이 있었던 것이오. 그런데 그 지지가 황태자를 향해 돌아서고 있소. 바로 그 등불을 든 여인 때문에.” 모두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사실 그들 귀족파가 3황자를 황제로 추대할 수 있는 가장 큰 명분은 시민들의 지지였다. -계승 서열이 밀리더라도, 시민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바로 검제 3황자 전하이시다! 이런 명분으로 3황자를 황제로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지지가 황태자를 향해 돌아선다면, 명분 자체가 사라진다. 그러면 정쟁 자체를 벌일 수가 없었다. 정통성에서도, 실력에도, 명분에도 밀리는 데 무슨 싸움을 하겠는가? 군사적으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뒤집을 도리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이 상황을 손써야 하오. 그게 지금 우리가 오늘 모인 목적이오.” 메르키트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작품 후기 ============================ 화요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24 5-3 상흔 ========================================================================= 3장 상흔 - 3 “…….”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그때 누군가 조심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손을 씁니까? 데임 클로랜스가 의사 일을 하는 것을 막을 수도 없고.” 다른 이도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황제 폐하께서 개정안까지 내지 않았습니까? 황태자비가 되어도 의사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모두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문제는 알지만, 딱히 방법이 없었다. 환자를 위한 인술을 펼치는 것을 누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제 와이프가 다음 주 데임 클로랜스께 위암 수술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는데…….” “저도 아버지의 수술을 부탁드려야 하는데…….” “제 아들의 종기 수술도…….” “저도 다음에 진료를 받기로 예약을…….” 귀족들이 눈치를 보며 조심히 말을 꺼냈다. 그렇다. 엘리제는 명실상부한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외과의사. 그녀만 바라보고 있는 환자가 수도 없었다. 그리고 병은 귀족파의 귀족들에게도 공평하게 찾아온다. 그들 가족 중 그녀가 아니면, 그냥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할 환자가 꽤 있었다. 이미 치료를 받고 있는 이도 있고, 곧 진료가 예약된 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의사 일을 못하면 낭패를 보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었으니까. 그 반응들에 메르키트의 눈썹이 꿈틀했다. 콰앙! 그는 거칠게 책상을 내려치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그게 무슨 안이한 소리들이오?! 지금 상황을 모르는 거요?” “…….” “만약 우리가 정쟁에 밀린다면, 그래서 저 린덴 드 로마노프가 황위에 오른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소? 그는 절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오. ‘그날’의 일을 벌써 잊은 것이오?!” 그 물음에 모두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그날’. 모두의 머리에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황후인 레베카 드 로마노프와 1 황녀인 이블린이 백원(百願)의 궁에서 한 줌의 피로 변한 날. 그날 이후 백원의 궁은 혈탑(血塔)이란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어렸던 린덴은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했고,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오로지 하나의 염원(念願). 복수를 위해 황위에 오르려 하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건…… 우리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소.” “상황이 그렇게 되었을 뿐인데…….” 당시 사건에 깊게 연루되지 않았던 귀족들이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메르키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걸 누가 모르오? 문제는 황태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란 거요. 그가 황제가 되는 순간. 이 론도에는 피바람이 불 것이오.” “…….” “그리고 엄밀히 말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날의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소.” “하지만 그래도…….” 그때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최소 3명은 죽겠지.” 3황자 미하일 드 로마노프였다. 미하일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빙글 웃었다. “바로 나와 내 어머니, 외숙 말이야.” 그의 어머니, 외숙. 바로 1황비인 마리엔과 차일드 가문의 가주인 암셀 후작을 뜻한다. 둘 모두 ‘그날’의 비극의 주역들. 만약 린덴이 황제가 된다면 그 둘은 무조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도 죽겠지.’ 그 둘의 죽음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도 죽게 될 것이다. ‘답답하군.’ 미하일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다. 당시 자신의 어머니와 숙부는 큰 잘못을 했다. 어떤 핑계를 대도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러니 린덴의 복수는 정당하다. 하지만. ‘내 어머니란 말이야.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그리고 내 외숙이고. 제길.’ 어떻게 아들로서 어머니가 죽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그녀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는 사실 황위에 관심 없다. 하지만 린덴이 황위에 오르면 어머니가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황위에 올라야 한다. 싸움의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라도. 그래도 싸워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아.’ 속으로 깊게 한숨을 내쉰 그는 생각했다. ‘여행이나 가고 싶군.’ 미하일은 자신의 허리춤에 차인 검을 바라봤다. 비천검(飛天劍). 하늘을 난다는 뜻의 검. 과거의 아픔에서 훨훨 벗어나라고 친우가 선물해 주었던 검이다. 그 이름 그대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털고 여행을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이전처럼 항주의 소호에서 배를 띄어놓고 친우와 술이나 먹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 그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백작이 방금 한 이야기는 어떻게 할지 다들 잘 생각해 보자고.” “전하.” “다음 회동은 크림전쟁의 승전식이 끝난 다음으로 하지.” 곧 있으면 크림전쟁의 승전식이었다. 3황자가 모임을 파하자, 다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가 예를 표하고 사라지려 할 때, 미하일이 가만히 메르키트 백작을 불렀다. “백작.” “네, 전하?” “백작은 잠시 나를 보지.” “……?” 의아한 얼굴로 백작이 남자, 미하일이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백작. 그거 알지?” “네?” “내가 백작을 참 좋아하는 것.” “아…… 네. 압니다.” 메르키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뿐 아니라 저 미하일은 사람이 좋아 누구든 가리지 않고 좋아한다. 그런데 갑자기 왜 그 이야기를? 그뿐만 아니라 뭔가 분위기도 이상하다. 웃고 있는데 왠지 섬뜩한 느낌? “내가 황위에 오르면 백작의 공을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백작.” “네?” 미하일이 가만히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 메르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제 말이야. 데임 클로랜스.” “…….” 미하일이 웃으며,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한테 털끝 하나라도 손댈 생각하지 말라고.” “……!” “난 백작을 참 아끼거든? 그러니 백작이 허튼 생각을 하면 참 슬플 거야.” 메르키트의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검제. 서대륙 최강검이, 동방에서 가장 강한 무인 중 하나인 동방 오존(五尊)이라 불리던 미하일이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거역할 수 없는 위압감이 담긴 눈빛.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메르키트는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데…… 어째서?” 메르키트는 조심히 물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는 현재 3황자의 자리를 가장 위협하는 일종의 적이었다. 그녀 때문에 시민들의 지지가 황태자에게 넘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싸움도 못하고 질 판인데? “왜긴?” 하지만 미하일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답했다.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 혈탑의 비극. 과거 황후인 레베카는 모욕적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백원의 궁에 유폐되었다. 물론 모두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실제로 그런 추한 잘못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누구의 조작인지, 너무나 명확한 증거들이 나왔고 그녀는 그 누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폐하, 아닙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것을?!’ 레베카는 눈물로 사랑하는 남편에게 빌었고, 1황녀 이블린도 빌었다. 아직은 어렸던 2황자 린덴은 그저 울음만 터뜨렸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침묵했다.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들어주지 ‘못했다’. 그 추악한 죄의 증거를 들이민 것이 1황비 마리엔과 차일드 가문이었기 때문에.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레베카가. 어느덧 그가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게 된 황후가 그런 추악한 잘못을 저지를 리가 없다는 것을. 하지만 당시 갓 황제가 된 그는 무력했다. 지금이야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으로 강력한 황권을 다졌지만, 과거에는 대륙 전체를 쥐고 흔드는 차일드 가문을 거스르기 어려웠다. 특히나 그가 다른 황자를 제치고 황위에 오른 것은 클로랜스 가문의 도움과 더불어 차일드 가문의 도움이 막대했으니까. 또 그들 손에 명확한 증거까지 쥐어져 있으니. 도저히 그들을 거스르며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결국, 그는 그렇게 말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황후는 유폐되었고, 그녀를 향해 비난이 쇄도했다. ‘출신이 천한 것은 역시 어쩔 수가 없어.’ ‘더러운 황후를 폐위시켜라!’ 애초에 평민 출신인 그녀를 황후에 올렸을 때도 반대가 막심했었다. 많은 귀족, 특히 1황비 마리엔을 지지하는 차일드 파의 귀족들이 황후의 폐위를 주장했다. 그런 상소가 올라올 때마다 레베카는, 그 흑발의 차분한 아름다움을 지녔던 그녀의 영혼은 점점 말라 비틀어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지옥 같던 어느 날. 어렸던 린덴은 울면서 백원의 궁을 찾아갔다. 엄마를 보고 싶어서. 물론 가드의 제지로 만나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고 싶어서. 그리고 백원의 궁에 어린 린덴이 도착한 순간. 쿵! 검은 무언가가 그의 눈앞으로 떨어졌다.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 순간. 눈앞이 핏빛으로 변했다. 어머니 레베카와 누이 이블린이었다. 말라 비틀어가던 그들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아…….’ 자신의 눈앞에서 한 줌의 피로 변한 어머니와 누이를 본 어린 린덴의 세상이 정지했다. 그렇게 그의 세상이 무채색의 지옥으로 변했다. ‘그날’, 혈탑의 비극 이후 린덴은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나오는. 그들이 핏물로 변하는 꿈을. 그리고 그때부터였다. 그저 엄마의 손을 잡고 우는 것밖에 못 하던 ‘바보 린덴’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하던 미소가 사라졌다. 표정을 잃은 아이에게 남은 것은 단 하나의 염원. 복수.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아이는 자신의 모든 삶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렸던 린덴은 너덜너덜한 가슴에 칼을 담았다. *** “……!” 린덴은 번뜩 눈을 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생각했다. ‘또 그 꿈이군.’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는 ‘그날’ 이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그들의 꿈을 꾸었으니까. 심지어 이제는 꿈을 꾼다고 해서 아프지도 않았다. 아프려고 해도 아플 가슴이 남아 있어야 고통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잠깐 잠이 들었나 보군.” 어제 엘리제와 만나고 돌아온 후 그 얄미운 크리스가 던져준 서류를 처리하느라 너무 늦게 잤다. 한 두세 시간쯤 잤나? 피로한 상태에서 이른 시간에 일어나 다시 업무를 보다 깜빡 존 모양이다. 악몽 때문일까?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와 그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무채색의 지옥에서 한 줄기 빛으로 다가온 소녀. 그리고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이 된 그녀. 어제 보고 왔음에도 그녀가 또 보고 싶었다. 간절히. ============================ 작품 후기 ============================ 내일 10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25 5-3 상흔 ========================================================================= 3장 상흔 - 4 그녀를 떠올리자 놀랍게도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싫어하지…… 않아요…… 전하를…….’ 그 말들을 떠올린 순간 다시 가슴에 벅참이 차올랐다. 간질간질하면서도, 터질 것 같은 느낌.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일까? ‘보고 싶군.’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정말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금단 증상이 일어나는 것처럼 그녀가 생각났다. 보고 싶었다. 함께 있고 싶었다. 그리고 작은 손을 만지고 싶었다. 품 안에 가두고 싶었다. 그 이마에, 붉은 입술에 입술을 맞추고 싶었다. 결국, 그는 충동을 참지 못했다. “란돌.” “네, 전하.” “비서관은?” “전하께서 명하신 신무기 개발 건으로 개발청을 방문 중입니다. 기밀을 요하는 일이라서 직접 갔습니다.” 마침 잘됐다. 그 얄미운 크리스가 없을 때가 기회였다. “잠시 나갔다 오마.” “전하? 어디에 가십니까?” “황실십자병원.” 그 말에 눈치 없는 시종이 물었다. “병원엔 무슨 일로……?” 그는 짧게 답했다. “시찰 간다.” 그래, 시찰. 그녀를 시찰하고 와야겠다. *** 한편 그때 엘리제는. “쿨럭. 쿨럭.” 밤사이 추운 공기를 계속 마신 탓일까. 감기에 걸려 있었다. 하얀 마스크를 낀 채 연신 기침을 하는 그녀를 보며 그레이엄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데임?” “아, 네. 조금 감기에 걸려서요. 괜찮아요.” 하지만 얼굴이 빨간 게 가볍게 걸린 것이 아닌 것 같다. 열도 제법 나 보인다. 못해도 38도 이상? 그레이엄은 못마땅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자주 감기에 걸리는 것입니까?” 내 가슴이 아프게. 그레이엄은 그 말은 삼켰다. 옆에서 바라만 보는 것도 힘든데, 아픈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제가 원래 몸이 약해요.” “검사라도 받아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번 가을부터 제가 본 것만 해도 3번째입니다.” 그 걱정 어린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 삶 때도 툭하면 감기에 걸렸었다. 원체 몸이 약한 탓이다. ‘조금 튼튼한 몸이면 더 좋긴 할 텐데.’ 할 일은 많은데 자꾸 아프니 불편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조금 쉬기라도 하십시오. 다음 수술은 제가 대신할 테니.”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데임.” 하지만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큰 감기도 아닌 걸요.” 지구에서 의사로 일할 때도 감기에 걸린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의사도 사람이니 이런저런 잔병치레를 한다. 하지만 입원할 정도로 중병이 아닌 한, 아프다고 일을 쉬는 의사는 한 명도 없다. 심지어 인턴, 레지던트 시절에는 맹장염 같은 수술을 받고 곧바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 그녀도 아프다고 쉬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결국 한숨을 내쉰 그레이엄이 말했다. “그러면 이리로 와보십시오. 열도 나는데, 제가 간단히 진료라도 해드리겠습니다. 계속 기침하니 가슴 청진도 해봐야 할 것 같고요.” “아, 네. 감사해요.” 엘리제는 고마움을 표했다. 아무리 의사라도 자기 몸 진료는 정확히 못한다. 그가 봐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녀는 진료를 위해 그레이엄의 앞에 앉았다. “간단히 바이탈 먼저 확인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그녀는 맥박을 측정하기 위해 그레이엄에게 손목을 내밀었다. 하얀 팔목을, 마음속으로만 바라보던 소녀의 팔목을 잡으려는 순간 그레이엄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곧 얼굴을 굳히며 생각했다. ‘정신 차려, 그레이엄. 진료 중에 무슨 생각이야.’ 최대한 머리의 잡생각을 떨쳐내며 진료에 열중했다. “분당 맥박 108회군요. 열이 꽤 납니다.” “아, 네.” “특별히 어떤 게 주로 불편하십니까? 목은 안 아픕니까?” “목은 괜찮아요. 기침이 주로 나는데, 폐렴 같은 증상은 없어서 폐렴보다는 일반적인 상기도 감염일 것 같아요.” 엘리제는 추정 진단을 말했고, 그레이엄도 동의했다. 단순 감기로 보이긴 했다. 다만 기침이 심해서 폐렴을 확인 위해 청진을 해봐야 했다. “네, 청진기로 폐 소리만 확인해 보고 약을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선생님.”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처음 그레이엄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을 엄청 귀찮아해서 쫓아내려 부랑자 병실에 버려두었는데. 어느덧 그와도 많이 가까워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돌아 앉으십시오.” 청진기를 든 손이 얇은 진료복을 입은 그녀의 등 뒤에 올라갔다. “숨 크게 들이쉬십시오. 그리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낮은 음성이 그들 사이를 울렸다. “지금…… 뭐하는 짓들이지?” 불쾌감이 담겨 있는 목소리. 황태자 린덴이었다. “전하? 여긴 어떻게?” 엘리제가 놀라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린덴은 답하지 않았다. 린덴의 눈이 그녀의 등 위에 올라가 있는 그레이엄의 손에 꽂혔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물었다.” “……!” 엘리제는 당황했다. 갑자기 이곳엔 왜 온 것이지? 아니, 그것보다 왜 저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시지? 어젯밤에 헤어질 때만 해도 기분이 좋으셨는데? 하지만 같은 남자인 그레이엄은 그가 왜 불쾌해하는지 바로 눈치챘다.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공손히 말했다. “데임께서 감기 기운이 있어 잠시 진료를 보던 중이었습니다, 전하.” “…….” 그 말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그녀가? 엘리제의 얼굴을 살피니 과연 눈가가 발그레했다. 마스크 안으로 콜록콜록 기침까지 하고 있고. “엘리제. 이리로 와봐라.” “아…… 괜찮아요, 전하. 그냥 살짝 걸린 거라…….” “명령이다. 와.” 머뭇거리며 다가가니, 그가 갑작스레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강렬히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얼굴이 다른 의미로 붉어졌다. “저, 전하?” 그녀가 그레이엄을 의식하며 말을 더듬었다. 황태자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아프라고 했지?” 아까의 노여움과는 전혀 다른 감정이 담긴 목소리. 그건 짙은 걱정이었다. “……죄송해요.” “아프지 마라. 네 모든 것은 내 거니까. 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내뱉는 숨결까지도. 모두 다 내 것이니 아프지 마. 명령이다. 무엇보다…….” 네가 아프면 내가 훨씬 아프니까. 린덴은 그렇게 말하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걱정과 노골적인 애정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네, 전하.” 그는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다 정말 그녀의 몸에서 고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안 되겠군. 좀 쉬어야겠어.”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리고 할 일이 많아서…….” “할 일?” “네, 이제 곧 수술도 3개 들어가야 하고, 끝나고 강의도 나가야 하고, 보안 정책 담당자와 미팅도 가져야 해요. 그리고…….” 말을 들을수록 린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이 일 중독 여자가! 도대체 할 일이 뭐가 이렇게 많단 말인가? 몸도 안 좋으면서. “됐어. 다 취소해. 명령이다.” “전하?” 엘리제가 놀라 절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 제가 해야 하는 수술이에요. 강의도 제 강의이고요. 다 제 일인데 아프다고 안 할 수는 없어요.” 책임감 강한 엘리제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린덴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녀가 아픈데 그따위 것이 문제겠는가? “됐어. 다 필요 없어.” “전하?” “자네. 그레이엄이라고 했나?” 가만히 그들을 보던 그레이엄이 고개를 숙였다. “네, 전하.” “이 병원에는 다른 의사는 없나?” “……!” “내 것이 될 그녀다. 그런데 이렇게나 많은 일을 해야 하는가? 자네들은 뭐하는 거지?” 다소 무례하긴 했지만, 그 말이야말로 그레이엄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저 일 중독 소녀는 본인 스스로 너무 많은 일을 하려고 해서 탈이었다. 물론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수술이나 일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픈데. “데임께서 하시기로 예정된 3건의 수술. 다 제가 집도하겠습니다.” “선생님?!” “괜찮습니다. 데임. 이래 뵈어도 나름 저도 젊은 천재라 불리던 의사였습니다. 아니면 저를 못 믿는 것입니까?” “…….”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린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뺀질뺀질해 보이는 게 생긴 것부터 마음에 안 드는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은 나름 마음에 들었다. “그래, 그 수술은 다 네가 처리하도록. 아니.” “……?” “앞으로 그녀가 할 수술 중 간단한 것은 다 자네가 했으면 좋겠군.” 그레이엄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하의 지엄한 명.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전하!” 엘리제가 당황해 그를 불렀지만, 린덴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카데미 강의?” 그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그의 뒤에는 황실십자병원의 원장이자 전(前) 황궁 어의인 밴 자작이 황태자의 행차에 헐레벌떡 마중 나와 있었다. 밴 자작은 무언가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그 강의는 다른 교수를 보내겠습니다.” “자작님? 그 강좌는 제 이름으로 되어 있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데임만큼은 아니어도 그 분야의 정통한 교수로 보낼 테니. 확실히 데임께서는 조금 쉬실 필요가 있습니다.” 황태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무슨 미팅이 있다고 했나? 밴 자작.” “네, 전하. 오후에 행정부의 보건 정책과와 데임께서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 “취소시켜.” 엘리제는 깜짝 놀라 황태자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하지만 황태자는 독선적인 독재자처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잠자코 가만히 있어! 하는 눈빛.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저 황태자를 누가 말리겠는가? ‘교수실로 돌아가서 잠시 쉬다 밀린 논문이나 마무리 지어야겠구나.’ 그러나 황태자는 그녀를 이대로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엘리제. 너는 나를 따라온다.” “네? 어디로?” “따라와라.”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그렇게 엘리제는 린덴에게 납치당했다. *** 린덴이 그녀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그의 집무실이었다. 그의 성격을 나타내듯 마치 자로 잰 듯 깔끔한 방. 심지어 수북한 서류조차도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너저분한 엘리제의 교수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전하? 이곳엔 어째서?” 엘리제는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의아해했다. 지난 삶, 부부로 지낼 때도 그의 집무실에 와본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이 묻은 코트를 란돌에게 넘기며 짧게 말했다. “이곳에서 쉬어라.” “네?” “내 옆에서 쉬어.” 그러며 린덴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냥 놔두면 또 어딘가에서 일하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니 네가 쉬는 것을 내가 옆에서 두 눈으로 지켜봐야겠다.” “하지만…….” 엘리제는 머뭇거렸다. 황태자의 집무실에서 쉬라니? 그게 말이 되는가? 물론 쉬자면 못 쉴 것은 없다. 저 옆에 침대만큼 포근해 보이는 소파에 누우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이곳이 황태자의 집무실이란 것과 그와 단둘이 한 방에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머뭇거리게 했다. 싫으냐고?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을 고백한 게 불과 어제이다. 그런데 곧바로 단둘이 한 방에 있어야 한다니. 무언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면서, 조금 민망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11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26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1 하지만 린덴은 주저 없이 란돌에게 명했다. “데임 클로랜스가 쉴 수 있도록 따뜻한 담요를 가져오도록.” “네, 전하.” “따뜻한 것도 마시는 것이 좋겠어. 뭘 마시고 싶지, 엘리제?”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소파에 몸을 앉히며 말했다. “코코아요.” “코코아?” “네, 최대한 달게 해서요.” 그 말에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예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입맛은 참 유아틱하다. “그래, 코코아. 따뜻하고 달게. 그리고 같이 먹을 수 있게 딸기 케이크도 좀 내와라.” 린덴은 말했다. 엘리제는 그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디저트를 말하자 잠시 놀랐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니, ‘론’과 딸기 케이크를 먹으러 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전하는 징표는 안 돌려주실 생각이실까?’ 린덴이 론인 것은 알았으나, 그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아직 차분히 그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다. 뭐, 서로의 마음을 알았으니 중요하지 않은 문제가 되기도 했고. ‘언젠가는 론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오겠지. 징표는 어머니의 유품이니 돌려받았으면 좋겠지만.’ 그것도 사실 큰 상관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 괜찮았다. “뜨거우니 조심히 드십시오, 데임.” 란돌이 웃으며 코코아와 케이크를 내오고 사라졌다. 그렇게 엘리제는 린덴과 단둘이 방에 남겨졌다. ‘따뜻하네.’ 란돌이 준 담요를 몸에 두르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코코아를 마시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그녀는 힐끗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는 린덴을 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 그렇게 거부하려고 했지만 결국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버린 사람. 이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전하.’ 그녀는 속으로 그를 불렀다. 단둘이 한 방에 있지만, 걱정했던 것처럼 어색함은 없었다. 그냥 아늑한 마음이 들었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코코아에서 올라오는 김만큼이나 따뜻하고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많은 일이 있겠지만.’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황제 민체스터가 자신에게 지나가듯 했던 부탁이 떠올랐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말이야. 린덴을, 그리고 미하일을 잘 부탁하네.’ ‘폐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알고 있을까?’ 엘리제의 얼굴이 슬퍼졌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앞으로 론도에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어떤 피가 흐를지. ‘그리고 앞으로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의 옆에 서서.’ 엘리제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사실 말릴 수 없는 일이다. 그 비극이 어떤 이유로 일어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도 되는 걸까? 이전 삶 때는 그냥 외면했었다. 사랑하는 그의 뜻에 반하기 싫어서. 그저 모른 척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옳은 것일까? 무엇보다 그 비극을 일으킨 후, 평생을 바라던 복수를 한 후 저 황태자는 굉장히 괴로워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해 있던 그의 가슴은 그 비극 이후 완전히 부서져 버렸다. 어머니와 누이를 위한 복수는 그에게 후련함이 아닌, 처참함만을 안겨주었다.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그를 도와줄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한숨에 황태자가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괜찮아요.” “그렇게 앉아 있지 말고 좀 누워서 한숨 자라.”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앞에서 어떻게 누워 있겠는가? “괜찮아요.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편해요.” “내 앞이어서 불편해서 그런가? 상관없으니 편히 누워라.” “정말 괜찮아요.” 거듭 권했으나, 엘리제가 고개만 젓자 린덴은 못마땅하단 표정을 지었다. “안 되겠군. 늘 말을 안 들으니.” “네?” “혼을 내줘야겠어.” 그는 보던 서류를 한 뭉치 집어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제는 도대체 뭘 하려는지 몰라 당황해 그를 올려다봤다. “전하?” 린덴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소파, 그녀의 바로 옆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더니, 부드러운 동작으로 자신 쪽, 정확히는 허벅지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얼굴이 그의 다리를 베는 모습으로 자연스레 눕게 되었다. “……전하?!” 졸지에 황태자의 허벅지를 베고 눕게 된 그녀는 놀라 바동거렸다.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숙이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귓불과 거의 밀착해서. “가만히 있어라. 늘 말을 안 듣는 벌이야. 그리고.” 그는 나직이 입을 움직였다. “움직이면 더 큰 벌을 주겠다. 예를 들면.” 그러며 그는 고개를 좀 더 숙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으나 충동적으로……. 그의 입술과 그녀의 귓불이 맞닿았고, 그 순간 그의 혀가 가볍게 그 귓불을 훑고 지나갔다. “……!” 그 생각지도 못한 느낌에 엘리제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쿵. 귀로부터 강렬한 전류가 흐르며 심장이 멎는 듯했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린덴도 본인이 저질러 놓고는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감각이지? 가슴, 아니, 온몸이 찌릿했다. ‘엘리제.’ 그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에게 갇힌 초식 동물을 바라봤다. 가지고 싶다. 저 앙증맞은 귓불을. 이렇게 감질 맛나게 스치는 것이 아닌, 철저히 농락하고 싶었다. 아니, 귓불만인가? 저 붉은 입술도 범하고 싶었다. 저 입술을 벌려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입술부터 시작해 그녀의 모든 곳에 자신을 새겨놓고 싶었다. “저, 전하…….” 놀랐는지, 살짝 떨리는 몸이 그를 더욱 자극했다. 린덴은 앞뒤 안 가리고 그녀에게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참으며 말했다. “이건 벌이니 가만히 있어라. 만약 또 바둥거리면.” “……!”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다.” 그 말에 엘리제의 몸이 부동자세로 굳었다.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다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나 괜찮은 걸까?’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무언가 맹수의 아가리에 들어와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맹수에게 잡힌 초식 동물이었다. 도망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맹수의 처분만 기다릴 수밖에. “…….” 얌전해진 그녀를 보며, 린덴은 무언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전부터 신경 쓰이는 저 붉은 입술. 바동거리면 저 입술에 그 벌을 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가져온 서류를 펼치며 말했다. “난 여기서 일을 처리할 테니, 이대로 편히 쉬도록. 몸이 안 좋으니 눈을 붙이는 게 좋겠군.” 그 말에 엘리제는 지극히 곤란한 마음이 들었다. 황태자의 다리를 베고 어떻게 자겠는가? 아니, 그런 걸 떠나 아까 전 귓불에 닿았던 그의 입술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 이런 상태로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그녀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전하…… 다리가 불편하실까 걱정이…….” 린덴은 답했다. “더 벌 받고 싶나?” 그 말에 엘리제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벌? 도대체 무슨 벌? 혹시 지금 내가 상상하는 그런 벌? ‘그, 그건 안 돼.’ 지금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데, 더 심한 벌을 받으면 못 버틸 것이다. 그녀는 속으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 삶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과거 그녀와 그는 부부였다. 사랑은 없었지만, 신체적 접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아니, 지금 이런 가벼운 터치와는 비교도 안 되는 농밀한 접촉이 수도 없었다. 부부였으니까. 하지만 그때는 이렇지 않았다. 그가 정해진 날마다 자신을 안을 때도 이런 강렬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아니, 그때는 오히려 조금 슬펐다. 사랑이 없는, 부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행위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살짝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심장이 멈춰 버리는 것 같았다. ‘하아. 정신 차려, 엘리제.’ 하지만 린덴은 그녀가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릿결 위에 올라오더니, 부드럽게 쓰다듬기 시작한 것이다. “……?!” “가만히 있어라.” 그러며 낮지만,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난 신경 쓰지 말고 편히 쉬어라.” 엘리제는 깊은숨을 삼켰다. 이러며 편히 쉬라는 게 말이 되는가? 물론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다. 지난 삶에서는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따뜻함. 아늑할 정도로 부드러웠지만, 그녀는 편안하게 그 손길을 느끼지 못했다. 그 손길이 닿을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가슴이 고장 난 것 같다. ‘정신 차려, 엘리제. 정신 차려.’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차리려 했다. 물론 별 소용없었다. 그렇게 초식 동물은 얼굴을 붉힌 채 꼼짝도 못하고 맹수의 손길을 고스란히 느꼈다. 한편, 맹수, 린덴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거. 크리스, 그놈한테 한 소리 듣겠군. 오늘 안에 처리해야 하는데.’ 서류의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리 집중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오로지 뇌리에 들어오는 것은 자신에게 갇힌 그녀. 허벅지에 닿은 그녀의 감촉이 자꾸 그를 자극했다. 참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 손에 그녀가 닿을 때마다 가슴이 더욱더 타올랐다. ‘엘리제.’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발개진 얼굴로 눈감고 있는 모습. 자신의 손이 닿을 때마다 눈썹 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떨리는 눈가에 입술을 가져가고 싶었다. 그곳부터 시작해 천천히 내려가 저 붉은 입술을 범하고 싶었다. 미칠 듯한 충동. 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그 충동을 참으려 노력했다. 당장 이 순간이라도 저 입술을 범하고 싶었지만. ‘참아. 놀랄 거야.’ 아직은 너무 빠르다고 생각했다. 저 소녀는 분명 놀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그 충동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하아.’ 그는 자신이 이렇게 자제력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일평생을 참으며 살아왔건만. 도대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방 앞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내무대신이 방문하였습니다. 들라 할까요?” “……!” 엘리제는 그 말에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바동거리는 그녀를 손으로 안으며 말했다. “가만히 있으라 했지?” “하, 하지만…… 내무대신께서?” “괜찮아. 어차피 내 것이 될 그대다. 무슨 상관이냐?” 내 것이 될.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반항했다. “하지만 그래도 예법이…….” 린덴은 피식 웃었다. “예법? 그게 뭐지?” 먹는 건가? 하는 말투. “황족에게 중요한 게 뭐지?” “…….” “신민들을 위하는 능력이야. 예법은 그다음이고. 그리고 난 황태자로서 손색이 없지. 유능하니까. 그러니 예법은 조금 어겨도 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인가! 말이 안 통하니, 이길 수가 없다, 란 명언처럼.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으니 엘리제는 일순 반박할 말을 잃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12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27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2 린덴은 거침없이 밖에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라!” “네, 전하.” 문이 끼익 열리며 내무대신이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 다?” 예를 올리던 내무대신은 황태자의 무릎을 베고 있는 엘리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엘리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아…… 진짜 미워.’ 내무대신은 곧 정신을 차리고 부드럽게 웃었다. “두 분이 사이가 좋으시군요. 전하와 비가 되실 분 사이의 금실이 이토록 화목하니 나라의 경사입니다.” 나쁘게 보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당연했다. 다른 여인도 아니고, 그녀가 누군가. 데임 클로랜스. 황태자와 결혼이 예정되어 있고, 현재 제국에서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소녀였다. 그런 소녀가 자신의 주군인 황태자와 좋은 금슬을 가지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아, 몰라.’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엘리제는 더욱더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반면 황태자는 뻔뻔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가?” “아, 네. 지난번에 명하신 재무 지표 변경 사항에 대하여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특별한 내용은 없습니다. 여기 변동 사항을 모두 적어두었으니, 가볍게 검토해 보시면 될 듯합니다.” 내무대신은 빠르게 말을 마쳤다. 그 눈치 빠른 모습에 황태자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수고했네. 언제 식사라도 같이 한번 하지.” “네, 영광입니다, 전하. 소신은 이만 물러갈 테니 좋은 시간 되십시오!” 내무대신은 행복한 한 때를 보내는 젊은 한 쌍을 보며 오늘은 자신도 일찍 퇴근해 부인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 내무대신이 나간 후,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 “엘리제?” 하지만 답이 없었다.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 “엘리제? 왜 답이 없지?” “…….” “방금 일로 기분이 상했나? 왜 그러지?” 그 말에 엘리제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상하진 않았다. 그가 자신을 갈망해서 그러는 것인 것을 아니까. 싫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제는 어느 정도는 확실히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전하.” “왜 그러지?” 그녀는 조심히 그의 무릎에서 일어나고 말했다. “저 전하가 싫지 않아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아해요. 이렇게 손끝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하지만. “그래도 방금 같은 경우엔 조금 주위를 신경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왜지?”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 말에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엘리제는 혹시 그의 기분이 상했을까 봐 눈치를 봤다. “죄송해요. 하지만 그래도 저…… 부끄러워서…….” 그러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미안하다.” “……!” 그 사과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자존심이 강한 황태자다. 그런데 저런 선선한 사과라니? “아, 아니에요. 그냥…….” “내가 내 생각만 해서 네 배려를 하지 못한 것 같군.” 그가 미안해하자, 엘리제는 괜히 자신이 더 미안해져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싫지는 않아요. 그냥…….” 그런데 그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황태자의 눈이 번뜩였다. “……싫지 않아?” “……?!”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나 지금…… 말실수한 건가? 그녀는 당황해 횡설수설했다. “아니, 그게…… 둘이 있을 때면 몰라도……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러니까 둘이 있을 때는 괜찮다는 거지?” “……!” 그게 왜 그런 말이 되는데?! 아니, 그런 뜻인 게 마, 맞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바라보면? 엘리제는 갑자기 이글이글 타오르는 그의 눈빛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같은 소파 안에서 어딜 도망가겠는가? 더구나 그가 한 손을 들어 그녀가 도망 못 가게 머리 뒤를 감쌌다. “엘리제.” “……전하.” 자신을 향하는 맹수의 눈빛에 그녀는 가슴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 말했지?” “무슨?” “바동거리면 벌을 주겠다고.” “……!” 그는 낮게 말하며 더욱 다가왔다. “벌을 받아야지.” “……!” 아. 점점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 어떻게 해야지?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 바로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 그의 입김이 입술로 느껴졌다. “엘리제…….” 낮고 달콤한 목소리. 엘리제의 몸이 살짝 떨렸다. 이대로……? 이대로 입맞춤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들며 그녀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뭐지?” 린덴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녀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허겁지겁 말했다. “감기 옮아요.” “감기?” “네, 지금…… 입…… 그러니까…… 그걸 하면 감기 옮을 거예요. 절대 안 돼요.” 린덴은 피식 웃었다. “괜찮다. 감기. 그대의 감기면 옮아도 돼.” 그러며 다시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다르게 완강한 거부였다. “절대. 절대로 안 돼요.” 그렇지 않아도 단둘이 한 방에 있어 감기를 옮길까 걱정되던 차였다. 입맞춤하면 무조건 감기를 옮기게 될 것이다. 자신 때문에 그가 아프게 되다니. 그건 죽어도 싫었다. 그녀가 정말로 거부하는 것을 깨달은 황태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따위 감기! 걸려도 상관없는데! “너한테서 옮는 감기는 기쁘게 걸릴 수 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세요? 절대 안 돼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감기가 나으면 괜찮은 건가?” 별 기대 없이 던진 질문.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는 당연히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 네.” “……!” 놀라 그녀를 바라보니, 엘리제가 얼굴을 사과처럼 붉힌 채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녀는 떠듬떠듬 말했다. “스…… 승전식쯤엔 감기가 다 나을 테니…….” “그러면 승전식 날엔 괜찮다는 건가?” 린덴이 활화산 같은 눈빛으로 말했다. 엘리제는 뭔가 큰 실수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러니까 감기가 나으면…….” “그래, 승전식 날. 알겠다.” 린덴은 ‘승전식 날’이란 단어를 몇 번이고 되뇌었다. 뭔가 승전식 날 해가 밝자마자 사고를 칠 것 같은 말투였다. 참고로 승전식은 며칠도 남지 않았다. “아, 아니. 꼭 그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래, 알겠다.” 하지만 전혀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귓불까지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지금 내가 무슨 사고를 친 것이지? 그런 그녀를 보며 린덴은 피식 웃었다. 저렇게 귀엽게 얼굴을 붉히면 자꾸 괴롭혀지고 싶지 않은가? 원래는 이쯤 하려 했으나 더 그녀를 괴롭히고 싶었다. “그러면 벌은 어떻게 할 것이지?” “네, 벌이요?” “바동거리면 벌을 받기로 했잖아. 그건 어떻게 할 것이지?” 무슨?! 엘리제는 말도 안 된다는 눈빛을 보였으나, 그는 맹수이자 폭군이었다.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도대체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된 거야? “어떻게 할 것이지?” “뭐, 뭘요?” “벌 말이야.” “몰라요.” “몰라? 그러면 아까 하려던 것을 그대로 하면 되겠군.” 오히려 마뜩해하며 자신에게 다가오려 하자,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입맞춤은 절대 안 돼요.” “그러면?” 엘리제는 정말 울 것처럼 울상을 지웠다. 미웠다. 그런 그녀를 보며, 황태자는 피식 웃었다. 왜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멈춰야 하는데.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 더. 더 괴롭히고 사랑하고 싶었다. 품에서 놔주고 싶지 않았다. “알겠다. 그러면 이렇게 하지.” “네?” “입맞춤은 네 말대로 기다릴 테니, 대신.” 엘리제는 그가 과연 무슨 말을 할까 마음을 졸였다. 린덴은 씨익 웃으며 짓궂게 말했다. “네가 내 볼에 입을 맞춰주면 되겠군.” “……!” “그건 감기를 옮길 일도 없지 않은가?”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 나보고 볼에 입을 맞추라고? 모, 못할 거야 없지만. ‘미워. 정말 미워.’ 지금껏 그를 보고 싶어 했던 것 취소. 가슴 떨려 했던 것 취소. 마음 고백했던 것 모두 취소! 물론 싫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미웠다. “하, 한 번만이에요.” 엘리제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얼굴이 다시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볼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입술과 그의 차가운 볼이 닿았고, 정전기가 일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어 놀라 화급히 입술을 떼었다. “돼, 됐죠?” 린덴도 놀라 자신의 볼을 만졌다. 이게 도대체 무슨 느낌이지? 입술끼리 닿은 것도 아니고 겨우 볼에 닿은 것이건만, 마치 찰나 간 몽롱한 꿈을 꾼 것 같다. 멍해지는 느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부족한데?” 엘리제는 결국 빽 소리 질렀다. “뭐에요! 이제는 정말 몰라요!” 그 반응에 린덴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어 와락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껴안음에 놀란 엘리제가 그를 불렀다. “전하?” 린덴이 나직이 말했다. “사랑한다.” “……!” 그 말에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다시 말했다. “사랑한다. 정말로. 엘리제.” 짧지만 깊은 목소리. 내 목숨보다도. 너를 사랑해.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계속해서 속삭였다. “난 너와 함께하고 싶은 게 많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네 얼굴을 보고 싶고, 식사도 매끼 같이 먹고 싶으며, 차도 함께 마시고 싶다. 그리고 맛있는 디저트도 함께 먹고 싶고, 예쁜 길을 손 잡고 걷고 싶고, 재미있는 공연도 보고 싶어. 바로 너와 함께. 영원히 너와 함께하며 모든 것을 같이하고 싶으니. 절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거다. 그러니 각오해.” 낮지만 달콤한 목소리. 그리고 그 사랑을 듣는 순간. 왜일까? 뚜욱. 엘리제의 눈동자에서 한 방울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그녀는 당황해 눈물을 닦았다. 왜 눈물이? 하지만 그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뚝뚝 떨어졌다. “엘리제?” 린덴은 갑자기 엘리제가 울자 당황했다. 엘리제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갑자기?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신의 눈물을 보며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자, 그녀는 왜 자신이 눈물을 흘렸는지 깨달았다. 행복했다.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자신을 향해 웃어주는 그를 보는 것이. 가슴이 터질 것처럼 행복했다. 지난 삶 그토록 바라던 행복. ‘앞으로 그와 내 앞에 무슨 일이 펼쳐질지는 모르지만.’ 그래, 그와 자신 앞에는 장밋빛 미래만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속에 어떤 상처를 안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했다. ‘앞으로도 계속 행복했으면.’ 그런 마음을 담아 엘리제는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눈물을 흘려 추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도요, 전하.” “……!” 뚝. 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래도 그녀는 더욱 짙게 웃었다. 그를 향해. “영원히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랑해요. 그러며 그녀는 속으로 기도했다. 그와 내 앞에 행복한 축복이 가득하길. 그리고 그의 상처가 따뜻해지길. 그렇게 그녀는 간절히 빌었다. *** 이후 며칠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린덴이 고대하고 고대하던 승전식 날이 다가왔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주말은 쉽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키스는 다음주 월요일에 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ㅠ) 좋은 주말 되세요!! 00128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3 며칠간의 시간이 지나고, 춥디추운 론도 날씨가 수그러들며 조금씩 봄기운이 올라오려 할 때. 대망의 승전 기념식이 다가왔다. 론도 시민들은 서로 들뜬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오늘 드디어 개선식이구나.” “그래, 구경 가야지. 가게 문도 다 닫았다고.” “대경기장 가서 전공 포상식도 구경할 거지?” “가야지.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광경인데.” 전 세계에 영향력을 투사하는 브리티아 제국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잦았다. 하지만 이번 크림전쟁처럼 수십만 단위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던 전쟁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비교적 최근의 앙젤리 전쟁도 십만 단위가 충돌했을 뿐이다. 특히 숙적인 프랑소엔 공화국에 이토록 큰 승리를 거둔 것은 거의 처음. 가히 압도적이란 단어가 어울릴 정도의 대승이었다. 그런 만큼 이번 승전 기념식을 맞는 시민들의 표정은 크게 들떠 있었다. “과연 이번 전쟁에 최고 전훈자(戰勳者)는 누구일까?” “글쎄, 당연히 총사령관인 황태자 전하와 부총사령관인 맥가일 원수 아니야?” “그거야 당연한 거고. 그다음 순위 말이야.” 시민들의 관심이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에 쏠렸다. 전쟁 중 공훈을 따져 최상위 10명에게 황제가 직접 내리는 황실십자훈장! 누가 과연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될까? “글쎄, 클로랜스가(家)의 대공자?” “아, 새로 총기사단의 단장이 된 그분? 그분도 유력하지. 하지만 내가 군부에 있는 친척에게 듣기로는 다른 사람이라고 하던데?” “누구? 3함대의 사령관 루이스 후작? 아니면 여러 성을 함락시킨 라이트 후작?”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분들도 10인에 들어가긴 하겠지. 하지만 전공 서열 1위는 아니야.” “그러면 전공 서열 1위는 누군데?” 남자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놀라지 말라고. 그 주인공은…….” 그리고 전공서열 1위의 정체를 들은 시민은 깜짝 놀랐다. “아니, 그게 정말이야? 정말 그분이?” “그렇대도. 나도 듣고 놀랐어. 하지만 그분이 세운 공을 하나하나 듣고 보니 그럴 만하더라고. 패전이 될 뻔한 전쟁을 몇 번이나 뒤엎은 것이니까.” “하, 그렇군. 역시.” 시민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몇 시간 후면 승전 기념식과 개선식이 시작되니, 그때 같이 가서 보자고.” “그래.” 한편 같은 거리, 시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마차 안에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중년의 귀족이 있었다. ‘제길.’ 메기 같은 인상. 귀족파 서열 2위,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이었다. 그가 속으로 욕설을 내뱉는 이유는 얼마 전 입수한 전공 서열에 대한 내용 때문이었다. ‘검제 전하께서 서열 1위가 아니라니.’ 검기사단의 단장인 3황자 검제 미하일이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은 무수히 많았다. 그럼에도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을 제외하고 따진 실질적 전공 순위가 1위가 아니었다. ‘그 인물’에게 밀린 탓이다. 메르키트 백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 황태자의 지지율만 올라가겠군.’ 사실 미하일이 전공 서열 1위를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전공 서열이 학교 시험 등수도 아니니까. 큰 공을 세웠으면 됐지 1위를 하든, 2위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문제는 실질적 전공 서열 1위를 차지한 인물의 정체 때문이었다. ‘골치 아프군.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고.’ 그는 자신의 주군, 미하일의 경고를 떠올렸다. ‘왜긴? 내가 그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지.’ 메르키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승전 기념식에서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실질적 전공 서열 1위에 오를 주인공. 그건 다름 아닌, 등불을 든 여인, 엘리제 드 클로랜스였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이 온 론도를 진동시키게 생겼다. 그게 귀족파 메르키트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녀의 명성이 올라가는 것은 황태자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 승전 기념식은 론도 근교의 대경기장에서 진행됐다. 2,000여 년 전, 서대륙을 통일한 라틴족이 세운 대경기장은 인원을 수만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규모여서 국가의 대규모 행사는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짜앙! 군악대의 징소리와 함께 엄정한 제식을 펼치며 제국 근위대가 입장하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허공에 터지는 축포 소리와 군악대의 화려한 음악 소리에 시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 “브리티아 제국 만세!” 그리고 이 승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 전공 포상식에 참석할 인원들은 경기장 내부에서 대기 중이었다. “엘리제, 몸은 괜찮으냐?” “네, 아버지. 괜찮아요.” 엘리제는 한결 좋아진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제국군 제복을 입고 있었다. 재상 엘 후작은 감회가 벅찬 얼굴로 딸을 바라봤다. 2년 전만 해도 맨날 말썽만 피우던 딸이 전쟁에 나가 이렇게나 큰 공을 세워 전공 포상식의 주인공이 되다니. ‘물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절대 위험한 전쟁에 참전시키지 않겠지만.’ 딸은 전쟁에 참전해 포로로 잡혀간 후 총상을 입었다. 의식을 잃은 딸을 봤을 때 얼마나 참담했는지. 그래도 이 순간은 기뻤다. 딸이 공을 인정받아 큰상을 받는 것이니까. ‘아니, 황실십자훈장은 단순히 상이란 단어로 넘길 영광이 아니지.’ 황실십자훈장! 브리티아 무공 훈장이라 불리는 그 훈장은 군인 가문이라면 3대에 걸쳐 자랑할 만한 큰 영광이었다. 더구나 오늘 황실십자훈장을 받는 것은 엘리제뿐이 아니었다. 큰아들 렌도 전공 서열 10위 안의 전훈자로 선정돼 황실십자훈장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딸과 아들이 모두 커다란 훈장을 받는, 그야말로 가문의 영광인 상황. 아버지로서 엘은 괜히 가슴이 시큰해져 하늘을 바라봤다. ‘보고 있소, 테레사? 우리 자식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자랐다오.’ 엘은 감상적으로 변하는 마음을 추스른 후 딸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곧 전공 포상식이니 잘하고. 나는 그만 폐하 곁으로 올라가 봐야겠구나.” 엘리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재상인 아버지가 단상을 향해 사라지자, 엘리제도 감회가 서린 얼굴로 대경기장을 바라봤다. ‘여기도 오랜만이구나. 이전 삶, 마지막 순간에 이곳에 왔었는데.’ 좋은 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단두대에 처형당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니까. 이전 처형당했던 곳에서 큰 상을 받게 되다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죽어라, 악녀!’ 당시의 기억이 났지만, 그녀는 얼굴을 굳히진 않았다. 과거의 일이다. 똑같이 황후가 되어도 이번 삶은 전혀 다를 테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 뭐 하고 있지?” “아, 전하.” 조각 같은 얼굴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낮은 미소를 본 순간, 엘리제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전 삶, 자신에게 단두대의 칼날을 내렸던 이. 하지만 이제는 따뜻하게 웃어주는 이.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들어온 이. 린덴이었다. “몸은 괜찮은가?” “네, 괜찮아요.” “다 나은 건가?”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기는 말끔히 나은 상태다. 괜찮다. “많이 걱정했는데 다행이군. 그런데.” 그리고 황태자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면 그때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건가?” “네, 무슨 약속?”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그의 강렬한 눈빛을 보고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의 얼굴이 갑작스레 화악 붉어졌다. 엘리제가 그에게 했던 약속.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약속도 아니었다. “잊지 않고 있겠지?” 린덴은 웃었다. 그 웃음은 이런 말을 담고 있는 듯했다. ‘네가 이야기했던 승전 기념식 날이 되었으니, 네게 입 맞춰도 되는 거겠지?’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 승전 기념식의 하이라이트는 두 가지였다. 전공을 세운 전훈자들의 포상식과 곧바로 이어지는 전쟁 영웅들의 마차 거리 행진. 그리고 이 순간, 그 첫 번째 하이라이트인 포상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렌 드 클로랜스.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의 신임 단장으로 코프스크 대회전, 잔코이 탈환전, 사캬 회전, 심페폴 공방전, 빌로히르스크 회전 등에서 세운 공을 인정하여 황실십자훈장과 특별 포상으로 일 계급 특진을 명하노라.” 먼저 클로랜스 가문의 대공자인 렌이 황제 앞에서 무릎을 꿇고 훈장을 받았다. “와아!” 황실십자훈장. 제국 최고의 영예를 나타내는 그 무공 훈장 수여에 군웅들이 큰 함성을 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렌은 훈장과 더불어 특별 포상을 받고 단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그는 대령 계급에서 한 계단 올라간 준장이 되었다. 청년 장성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루이스 후작. 그는 제국 3함대의 사령관으로 황태자의 명을 따라 반도 이남을 점령한 공으로 훈장과 특별 포상을 받았다. “와아!” “브리티아 만세!” 다음은 보크네 요새를 비롯한 여러 성을 점령한 라이트 후작. 그렇게 전공 순위에 따라, 이름이 호명되었고, 한 명 한 명 단상으로 나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영광된 훈장과 각자에게 수여된 특별 포상을 받았다. “다음은 전공 서열 4위.” 이윽고 4위의 순서가 왔다. 관례적으로 1위와 2위는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의 몫이니 4위면 그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전공 서열 2위였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중장.” 황제가 그 이름을 불렀다. 곧 대기석에서 화사한 외모를 지닌 3황자가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와아! 검제!” “검제 만세!” “3황자 만세!” 아까 다른 훈장 수훈자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평소의 그를 향한 시민들의 인기를 알 수 있는 함성이었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은 3황자를 본 황제의 눈에 남모를 애잔함이 스쳐 지나갔다. “미하일 드 로마노프. 검기사단의 단장이자 로마노프 황실의 황자로 참전. 젤레스크 전투, 오르키제 회전, 코프스크 대회전, 카호카 공방전, 헤르손 전투, 바쉬탄카 전투, 노바사 공성전…….” 황제의 입에서 수많은 공이 나열되었다. 미하일은 일선 기동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 수없는 전투에 참가했고, 그때마다 공을 세웠다. 가히 검제의 위명에 걸맞은 전공들. “……등의 공으로 황실십자훈장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숙여 훈장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상급이나, 계급 특진 등 추가적인 포상을 받았지만, 황족인 만큼 특별 포상은 없었다. 그리고 미하일이 물러나려는 순간, 민체스터가 나직이 말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조용한 목소리. “미하일.” “네, 아바마마.” “잘 지내고 있느냐?” “……!” 황제가 아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건네는 안부. 아버지의 물음에 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건강히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가끔은 내 궁에도 찾아오너라. 차나 한잔 마시자꾸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짧은 대화를 나눈 후, 미하일은 등을 돌려 단상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 대망의 3위. 1, 2위가 총사령관과 부총사령관의 몫이니 3위가 그들을 제외하고 실질적인 전공 서열 1위의 주인공이었다. 과연 누가? 모두가 침을 삼키며 발표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황제 민체스터가 그 주인공의 이름을 불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대령.” 그 호명과 함께. 붉은 제복을 입은 하얀 소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경기장의 모두가 놀라 그 소녀를 바라봤다. 저 소녀가 전공 서열 3위의 주인공이라고? 하지만 놀람도 잠시. 곧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 데임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 만세!” “황태자비 만세!” “와아! 퍼스트레이디! 마이 레이디!” 그야말로 대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 아까 전 미하일이 받던 환호를 훌쩍 압도하는 크기였다. 시민들 모두 저 소녀가 전쟁에서 어떤 일들을 해냈는지 알고 있었다. 특히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소녀가 저 여린 몸으로 자신들에게 어떤 헌신을 했는지, 어떤 고락을 함께 나누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엘리제는 단순한 예비 황태자비가 아니라, 자신들의 앞을 밝혀준 등불을 든 여인이었고, 마음속 마이 레이디였다.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129 5-4 첫키스 ========================================================================= 4장 첫키스 - 4 소녀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자, 민체스터가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클로랜스 후작가의 영애이자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 초대 의무사령관으로 임명.” 그러고 그녀의 공을 읊었다. “전쟁 초기 몽셀 왕국의 준동을 간파하여 2군단의 고립을 막고, 의무사령관으로 의료 개혁을 시행하여 부상자들의 사망률을 20배 이상 감소시킴. 또 코프스크 대회전시 적의 계략을 간파하여 대승을 이끎. 그리고 공화국의 전염병 전파 작전 시 의무사령관으로 대응하여 전염병을 차단하는 공을 세움.” 다른 수훈자들에 비하여 공적의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모두 어마어마했다. 그녀가 세운 공 중 하나라도 없었으면 공화국에 이런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코프스크 대회전이나, 전염병 같은 경우는 패전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상기 공으로 황실십자훈장을 내리노라.”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수만 군중 앞에 섰음에도 떨림 없는 의젓한 태도. 역시 엘리제다웠다. 민체스터는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는 그녀가 받을 추가적인 포상을 말했다. “또한, 상기 공으로 엘리제 드 클로랜스에게 계승 자작의 위(位)와 크로머 지역을 봉토로 내리노라.” 자작(viscount). 아니, 여자작(viscountess). 이로써 엘리제는 성 앞에 레이디를 붙일 수 있는 작위의 주인이 되었다. 단순한 귀족가의 아가씨를 뜻하는, 이름 앞에 레이디를 붙이는 ‘레이디 엘리제’나 준작위인 ‘데임 클로랜스’가 아닌, 오롯이 한 작위의 여주인을 뜻하는 ‘레이디 클로랜스’가 된 것이다. 더구나 봉토. 봉건제가 몰락한 후, 황실이 귀족에게 영지를 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특히 크로머 지역은 황실 직영지로 있던 동부 해안가의 풍광 좋은 휴양지로 굉장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땅으로, 그녀의 공이 워낙 컸기 때문에 상급으로 내린 것이다. “공에 비해 과분한 상에 감사합니다.” 엘리제는 당황하지 않고, 감사를 표했다. 모르고 있었다면 생각지도 못한 작위 수여와 봉토에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었던 상태였다. 그리고 그 포상 수여가 끝나자 다시 우레와 같은 박수가 대경기장을 흔들었다. “우와아!” “등불을 든 여인 만세!” “황태자비 만세!” “레이디 클로랜스! 레이디 클로랜스!” 군웅들은 그녀의 새로운 호칭인 ‘레이디 클로랜스’를 열광했다. 상이 과하다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공화국에 이런 대승은 불가능했다. 이겼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어쩌면 졌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녀는 ‘등불을 든 여인’이다. 바로 자신들과 함께 울고 웃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민들은 마치 자신이 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환호를 했다. 그 환호에 엘리제는 단상에서 몸을 돌려 군웅들을 바라보았다. ‘…….’ 무언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 삶, 바로 이곳에서 욕을 들으며 단두대에 처형당했다. 그런데 똑같은 자리에서 이런 환호라니. 알 수 없는 감동이 치밀어 올랐다. 기뻤다. ‘앞으로도 잘하자.’ 이제 자신은 퍼스트레이디가 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일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와는 다를 것이다. 그녀 스스로가 다른 걸음을 걸을 테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할 수는 없어도 그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그런 마음을 담아 엘리제는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와아! 레이디 클로랜스 만세!” “만세! 황태자비 만세!” 그렇게 귀가 얼얼한 함성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너무나 커다래 경기장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이 될 정도의 함성이었다. 그 함성은 그녀가 단상에서 내려간 다음에도 멈추지 않아, 잠시 포상식을 멈춰야 하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크흠, 다음은 맥가일 원수.” 이어 부총사령관인 맥가일 원수의 차례. 군부의 전설적인 인물인 그는 이런저런 훈장까지 합쳐 벌써 14번째의 훈장 수여였다. 정복 여기저기가 훈장으로 가득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리고 마지막은 린덴. 총사령관이었던 만큼, 공도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군웅들의 환호가 이상했다. “황태자 만세!” “총사령관 만세!” 이런 외침도 있었지만. “휘잇! 세기의 로맨티스트 만세!” “남자 만세!” “로! 맨! 티! 스! 트!” 이런 환호가 주를 이루었다. “…….” 그 함성을 들으며 엘리제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사막의 전갈에게 잡혀갔을 때 연인을 구하러 홀로 적진에 난입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총사령관으로서는 낙제인 행동이었지만,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게 한 일이었다. 제국을 물려받을 지고한 신분으로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목숨을 걸다니.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 듣자 하니 당시의 일을 극으로 꾸미려는 작가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환호성 중에는 이런 외침도 섞여 있었다. “등불을 든 여인을 꼭 행복하게 해라!” “울리면 가만 안 둔다!” “부럽다!” 뭔가 황실 모독죄에 가까운 발언들이 섞여 있었던 것 같지만…… 즐거운 축제일. 다들 대충 넘어갔다. 그렇게 첫 번째 하이라이트인 전공 포상식이 끝났고, 곧바로 두 번째 하이라이트, 참전 영웅들의 마차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레이디 클로랜스.” 지붕이 뚫린 마차 위에서 황태자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원래는 선두의 마차에는 부총사령관인 맥가일과 함께 타야 하는 것이었지만, 특별히 예비 황태자비인 그녀가 동승하기로 했다. “조심히 올라오도록.” “네, 전하.” 린덴은 부드럽게 그녀를 끌어 올렸다. 그의 손이 허리를 감싸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손이 닿은 곳이 뜨거웠다. 더구나 마차에 올라와서 보니 의례용 가두 마차인지라 공간이 좁았다. 어쩔 수 없이 그와 계속해서 몸이 맞닿아 신경이 쓰였다. “감기 나은 지가 얼마 안 됐는데. 힘들지는 않나?” “네, 괜찮아요.” 그녀는 최대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대답했다. “이대로 선 채 론도 대광장까지 간 후, 황궁으로 들어갈 거다. 꽤 걸릴 거야. 중간에 앉을 수도 없으니 힘들면 나한테 기대도록.” 낮지만 따뜻한 음성. 혹시나 자신의 그녀가 무리할까 걱정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곧 마차가 출발하였다. 그들이 탄 선두의 마차 뒤로 여러 전훈자들이 탄 마차가 줄을 이었고, 마지막으로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의 정예가 말을 타고 따랐다. “와아! 브리티아 만세!” “로마노프 만세!” 대경기장에 있던 시민들이 열렬한 박수로 그들의 행진을 환송했다. 마차는 대경기장을 나와 론도 시내로 접어들었다. 거리 행진 코스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민들이 준비하고 있던 꽃을 던지며 그들을 맞았다. “와아!” 여러 전쟁 영웅이 있었지만, 시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단연 선두의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 엘리제였다. 공적도 공적이었지만, 그녀가 잡혀갔을 당시 서로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이야기는 수많은 시민의 가슴을 울렸다. 황태자는 그녀를 위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었고, 그녀는 마지막 순간, 그를 위해 총알에 몸을 던졌다. 어찌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겠는가? 그런 둘이 개선식 행진 선두에 서 있으니 이목이 쏠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여인들의 환호는 상상을 초월했다.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잘 어울린다!” “행복하세요!” 엘리제는 선두에 서서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환호를 받을 거로 생각은 했지만, 예상했던 거와 조금 종류가 달랐다. 마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개선식 행진이 아니라 약혼 기념 행진으로 보일 정도의 외침이었다. ‘전하께서는?’ 엘리제는 힐끗 린덴을 바라봤다. 그는 조각 같은 얼굴에 속을 알 수 없는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원래부터 남 앞에 나서는 이런 행사를 좋아하지 않으니, 불편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하.’ 이전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그의 얼굴은 참 잘 생겼다. 마치 천상의 조각 같다고 할까? 그가 마음속으로 들어와서인지, 최근에는 더욱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전하. 린덴.’ 그녀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렇게 그의 옆에 서서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니. 왠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그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왜 자꾸 보는 것이지?” 그 물음에 그녀가 희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너무 티 나게 쳐다봤나 보다. “그냥…… 요.” 그러고 엘리제는 고개를 돌려 다시 시민들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를 보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특별히 더 입을 열지는 않았다. 대신. 탁. “……!” 엘리제는 일순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왼손이 옆에 있던 자신의 오른손을 잡았던 것이다. 놀랐으나, 손을 빼진 않았다. 분명 그의 손은 차가웠건만 맞닿은 느낌은 따뜻했다. 이상했다. 그저 손을 잡은 것이 건만 가슴 속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 그녀는 속으로 그를 불렀다. 그렇게 시민들의 환호 속에서 마차는 거리를 돌았다. 행진 시간은 길었다. 거리 자체가 길기도 했지만, 충분히 시민들이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천천히 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힘들진 않나?” “아…… 괜찮아요.” 사실 조금 힘들었다. 아까 승전 기념식 때부터 너무 오래 서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병원에서 수술할 때는 이것보다 더 오래 서 있을 때도 잦았지만, 몸이 회복된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현기증이 돌기 시작했다. 살짝 파리한 그녀의 얼굴을 보고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군. 아직 대광장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에 린덴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늘 말을 안 들으니. 어쩔 수가 없군.” “네?” “이리로 와라.” 그가 한쪽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부드럽게 자신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의 품에 기대게 된 그녀가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전하?” “괜찮으니 조금 기대고 있어. 무리하지 말고.” “하, 하지만…….” “명령이다.” 그는 늘 그렇듯 폭군처럼 말했다. 심지어 한마디의 협박을 덧붙이면서. “말 안 들으면, 이 자리에서 입 맞춘다.” “……!” 그녀의 얼굴이 하얘졌다. 지금 뭐라고? 이 자리에서?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직시하며 말했다. “지금도 간신히 참고 있으니, 가만히 있어.” 그 말에 그녀는 얌전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설마 이런 상황에서 정말로 그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라면 혹시 모른다. ‘이래도 되는 건지.’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시민들은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다정한 모습에 오히려 더 큰 환호를 지르며 열광했다. “와아! 황태자 만세! 황태자비 만세!” 심지어 이런 외침도 있었다. “뽀뽀해라! 키스해라!” 그리고 그 외침은 점점 군웅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키스! 키스!” “키스해라!” 마치 결혼식장에서 뽀뽀를 바라는 하객들 같은 마음으로 군웅들은 외쳤다. 그 외침들을 듣고 엘리제는 얼굴을 붉히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그렇게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그저 바라볼 뿐인데, 방금 들은 외침들 때문인지 엘리제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엘리제.” “……네, 전하.” 린덴은 무언가 말을 하려고 주저하다 입을 다물었다. 둘 사이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녀의 가슴이 괜히 뛰었다. “…….” 그렇게 말없이 가만히 기대고 있자 문득 엘리제는 그의 품이 포근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감사해요, 전하.” “뭐가 감사하지?” “그냥…… 전부 다요. 모두.” 그에게 감사한 것은 무수히 많았다. 크게는 전쟁 때 자신을 구하러 와준 것부터, 작게는 이런저런 사소한 배려까지. 하지만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저를 사랑해 줘서 감사해요.’ 그냥 그런 마음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 행복하다고. 그에게 안겨 있는 이 느낌이 너무나 따뜻하다고. “와아!” 그리고 그때, 막 마차가 대광장으로 접어들었다. 밀집한 군웅들이 우렁찬 환호로 그들을 맞았다. 귀가 마비될 정도로 거센 함성. 그리고 그 함성 속에서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그도 그녀를 바라봤다. 품 안에 안긴 탓에 서로의 거리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웠다. ‘전하.’ 귀가 안 들릴 정도의 함성 때문일까? 그녀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 그 고백에 린덴의 눈이 거세게 흔들렸다. 처음이다. 그녀가 이렇게 먼저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은. “와아아! 만세!” 수많은 외침이 광장을 뒤덮었지만, 이 순간 그의 눈에는 오로지 그녀만 보였다. 그녀도 그만 보였다. 그의 얼굴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그 말…… 정말인가……?” “……네.” 엘리제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손이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입술이 그에게 가까워졌다. “……!” 그리고 그의 얼굴이 조금 더…… 조금 더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기 직전. 린덴이 나지막이 말했다. 깊은 갈망을 담고. “나도…… 나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순간. 아. 엘리제는 신음을 토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0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1 첫 키스. 강렬한 느낌에 그녀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짜릿? 전기가 흐르는 듯한? 아니, 고작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의 혀가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와 거침없이 그녀를 농락했다. “아…… 아…….”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머리가 마비되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영혼의 뿌리까지 그에게 침범당하는 느낌, 정복당하는 느낌이었다. 다리에 힘이 탁 풀리며,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그의 팔뚝을 잡았다. 그가 한쪽 팔로 허리를 강하게 감싸 안아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그리고 짧은 입맞춤에 아쉬운 얼굴을 하며 입술을 떼고 살포시 이마에 다시 입 맞추며 말했다. “사랑한다.” “……!” 그녀는 한마디의 답도 못했다. 온몸의 힘이 쫘악 빠졌다. ‘아…… 나 몰라…… 어떻게 하지…….’ 그와 입맞춤을 했다. 그것도 개선 행진에서. 상상도 못한 대형 사고를 친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센 환호성이 대광장에 울렸다. “휘익! 황태자 전하 만세! 황태자비 만세!” “더 뽀뽀해라!” “만세!” 그들의 입맞춤을 본 군웅들이 광적으로 열광한 것이다. 망측하게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다른 이들끼리면 몰라도, 그들은 서로 하나가 되기로 예정된 황태자와 황태자비가 아닌가? 금실이 좋은 것은 오히려 마뜩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애초에 황태자와 그녀의 로맨스를 기뻐하던 시민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눈앞에서 사랑의 키스까지 보자 아예 난리가 났다. “뽀뽀해!” “한 번 더 해라!” “오늘 바로 결혼해라!“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엘리제는 귀 끝까지 얼굴을 붉혔다. 나 도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거지. 황태자가 그런 그녀를 돌아봤다. “한 번 더 하라는데?” “……안 돼요!” 엘리제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한 번 더 하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린덴은.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될 이로서 시민들의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지.” “……!” 그녀는 화들짝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무리였다. 그가 그녀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췄고, 그녀의 머리가 하얘졌다. ‘아…… 정말 미워…….’ 정말 미웠다. 정말. 정말. 그렇게 크림전쟁의 승전 기념식과 개선 행진이 마무리되었다. 시민들 사이에서 우레와 같은, 아니, 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그리고 그날,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의 사랑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고, 황태자는 다시금 황태자비를 열렬히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로서 명성을 날리게 되었다. *** 그렇게 개선식이 화려하게 마무리된 후, 론도에 봄이 오기 시작했다. 아직 쌀쌀함이 가시지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봉우리를 여는 꽃들이 보였다. 그날의 개선식 후, 엘리제와 린덴의 사이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눈에 띄는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었다. 워낙에 바쁜 엘리제의 일정 탓에 만나기 어려운 것은 여전했지만 늦은 밤 정원의 깊은 곳, 밀회를 갖는 둘이 목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글쎄, 전하와 레이디 클로랜스께서.” “어머, 정말?” 시녀들은 웃으며 그들의 로맨스를 떠들었다. 한편, 황궁에 인접한 곳에 자리한 검기사단의 병영. 연무장에서 3명의 오러 나이츠가 삼재진(三才陣)을 이룬 채 한 남자를 상대하고 있었다. “조심하십시오, 전하!” “하압!” 검기사단의 부단장 로버트가 기합을 지르며 검을 내질렀다. 파앗! 오러가 맺힌 진검이 공기를 꿰뚫었고, 곧바로 양옆에서 다른 두 명의 기사가 상단세와 하단세로 검을 휘둘렀다. 강철이라도 찢어발길 기세. 하지만 단신으로 그들을 상대하는 금발 금안의 남자, 검제 미하일은 가볍게 그 공격들을 피했다. “……!” 부단장 로버트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들 3명은 오러 나이츠로만 구성된 검기사단에서도 최강의 기사들이었다. 그런데 저 검제는 늘 그렇지만, 너무나 쉽게 자신들을 상대했다. ‘초상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아닌데.’ 초상능력이 뭔가? 미하일이 단원들을 상대할 때는 오러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오로지 순수한 무술의 힘만으로 그들을 압도하는 것이다. ‘오늘만큼은 반드시!’ 옷깃이라도 자르리라! 그런 의지로 기사들은 미하일에게 검을 휘둘렀다. 반면, 미하일은 약간은 멍한 눈으로 그 공격들을 바라봤다. 무언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눈치. 까앙! 까앙! 진검 대련 중에 한눈을 파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는 검제(劍帝). 서대륙 최강검이자, 동방 청에서도 검룡(劍龍)과 검마(劍魔)를 제외하고는 적수가 없었던 초절정의 검수(劍手)였다.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몸이 움직이며 기사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리제.’ 그가 정신이 팔린 이유. 그건 다름 아닌 작은 소녀, 엘리제 때문이었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어젯밤 귀족파 서열 2위인 메르키트 백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것이 떠올랐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전하! 승전 기념식과 개선식 이후 황태자의 지지율이 급상승했습니다! 모두 레이디 클로랜스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무슨 수라도 내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저희는 손도 못 쓰고 무너집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3황자 미하일이 황태자에게 앞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통성도, 정치력도. 배경 세력도 이전에는 차일드 가를 위시한 귀족파가 우세했으나, 황태자의 십 년을 넘는 노력 덕에 그 우세도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그가 오로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지지. 그런데 그 시민들의 지지마저 황태자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아시지 않습니까? 현시대에서 시민들의 지지는 정권 승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란 것을.’ 백작의 말이 옳았다. 시민들의 지지는 권력 승계에 굉장히 중요한 요소였다. 시대가 변한 탓이다. 전통의 서대륙 강국이었던 프랑소엔 제국은 시민들의 혁명으로 황실이 무너졌다. 그뿐 아니라 서대륙 전체에서 시민들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심지어 브리티아 제국에서 독립한 신대륙의 신 연방의 경우, 오로지 시민들의 투표만으로 국가 지도자를 선출한다. 그런 시대 배경에서 아무리 브리티아 제국이라도 시민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는 황태자에 비해 정통성도 밀리지 않는가? 이렇게 시민들의 지지가 넘어간 상태에서 정권 다툼을 벌이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고.’ 미하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까앙! 자신도 모르게 그의 검에 힘이 들어가며 맞상대하던 로버트는 신음을 삼켰다. “크윽!” ‘무슨 수라도 내야 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안다. 알아. 하지만 무슨 수?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상대로? 지난밤, 얼마나 답답했는지 메르키트 백작은 심지어 이런 이야기도 했었다. ‘정 방법이 없다면 전하께서 엘리제 자작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그 말을 떠올린 미하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정말 급하긴 급했나 보다. 물론 리제와 자신이 친하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예비 형수님인데……. ‘사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긴 하지만.’ 미하일의 얼굴이 씁쓸해졌다. 그래, 이 순간 그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진정한 이유. 그건 지지율이 떨어져서도, 그래서 정권 다툼에 불리해져서도 아니다. 오로지 단 하나. 얼마 전 개선식 때 목격했던 엘리제와 린덴의 입맞춤 장면 때문이었다. ‘하아.’ 당시 마차 거리 행진 때, 전공 서열 4위였던 미하일은 둘의 바로 뒤 마차에서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똑똑히 목격했다. 둘의 입맞춤 장면을. “…….” 수많은 시민이 광적으로 열광했지만 그 순간 미하일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알고 있었다. 형님이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마음도 형님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알고 있어도, 사랑하는 여자가 눈앞에서 다른 남자와 키스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때 그녀의 눈빛. 떨리는 빛으로 린덴을 마주하던 그녀의 눈동자를 본 순간, 미하일은 깨달았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린덴이 가득 들어가 있음을. ‘하아.’ 가슴이 쓰려도 어찌하겠는가? 다 자신의 잘못이다. 진즉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 자신의 탓. ‘그래도 이렇게 아플 줄은 몰랐는데.’ 그는 씁쓸히 웃었다. 자신은 언제부터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이리저리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면서? 알버트의 수술을 같이하면서? 아니면 전염병에 걸린 걸 치료해 주었을 때? 모르겠다. 처음엔 그냥 마음 가는 친구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하아.’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 전하! 조심!” 로버트가 비명을 질렀다. 워낙 생각에 깊게 잠긴 탓이었는지, 미하일의 검이 일순 멈추었고, 로버트의 검이 그대로 그의 목으로 찔러 들어간 것이다. 자신의 손으로 3황자의 목을 찌를 상황에 부닥친 로버트는 검의 방향을 틀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대련을 목격하던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그리고 검극이 목을 꿰뚫기 직전! 미하일의 눈이 낮게 가라앉으며 손이 움직였다. 잔상도 남지 않을 정도의 극쾌의 움직임. 탓! 엄지와 검지가 검극을 정확히 움켜쥐었다. “……!” 그 모습을 본 로버트와 기사들은 눈을 부릅떴다. 찔러 들어오는 검을 손가락으로 잡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은 무위였다. “저, 전하. 괜찮으십니까?” 미하일은 고개를 저어 우울한 생각을 떨치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위험했잖아. 많이 늘었네, 부단장?” “…….” “원래 옷깃 베면 부단장이 이긴 걸로 하기로 했는데, 이것도 내가 진 걸로 쳐야 하는 건가?” 미하일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목 앞의 겨눠진 검을 치우고, 자신의 비천검을 검집에 밀어 넣었다.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하지. 내가 진 걸로 할 테니 다음에 술이나 살게.” “……어디 나가십니까?” 대련장을 나가는 미하일에게 로버트가 물었다. “응, 나갔다 오려고. 연습 열심히 하고 있어.” “어디로 가십니까?” 미하일은 지나가듯 말했다. “황실십자병원.” “병원이요? 어째서?” 그는 방금 검을 잡은 손가락을 보여줬다. “치료받아야지.” “아…….” 로버트는 입을 벌렸다. 완벽히 막은 줄 알았는데, 엄지와 검지, 위아래로 기다란 열상이 나 있었다. 피도 흘렀다.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다. “마침 병원에서 제일 예쁜 의사의 얼굴이 보고 싶어지기도 했고 말이야.” 병원에서 제일 예쁜 의사. 그건 바로 엘리제였다. *** “아니, 밀?” 그가 병원에 왔다는 이야기에 황족을 담당하는 어의인 엘리제가 곧바로 나왔다. 손가락에 난 기다란 열상을 보며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상처가 꽤 깊었다. “어쩌다 이렇게?” “아아, 검술 연습을 하다 어쩌다 보니. 별건 아니야. 겸사겸사 네 얼굴도 볼 겸해서 왔어.” “별거 아니긴요! 상처가 이렇게 깊게 났는데.” 엘리제는 그의 손을 잡고 상처를 이리저리 살폈다. 미하일은 그녀가 자신을 걱정해 주자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온 보람이 있군.’ 사람의 마음이 참 웃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그녀 때문에 죽을상이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니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1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2 “괜찮아. 대충 소독만 하면 돼.” “아니에요. 손가락에는 힘줄이 섬세하게 붙어 있어 잘못 베이면 끊어질 수도 있어서 무시하고 넘어갔다가 나중에 큰일 날 수도 있어요. 하여튼 어쩌다 이렇게 깊게 베인 거예요? 검술 연습을 해도 검제라고 방심 말고 꼭 조심해서 해야 한다고요. 알았어요, 밀?” 잔소리. 하지만 기분 좋은, 걱정 어린 잔소리에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꼭 주의하지요, 선생님.” 그 장난 섞인 대답에 엘리제는 입술을 삐죽했다. “하여튼…… 어쨌든 다행히 힘줄은 괜찮아요. 하지만 살이 들릴 정도로 베어져 꿰매야 할 것 같아요.” “꿰매?” 미하일은 일순 움찔했다. “네, 왜요?” “그거…… 혹시 주사 맞고, 막막 바늘로 살 찌르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니야?” “당연하죠.” 왜 저러지?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미하일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착각일까? 왠지 얼굴이 살짝 하얗게 질린 것 같다. “괘, 괜찮아, 리제. 내 생각에는 그냥 소독만 하면 될 것 같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너무 깊게 베여 그냥 소독만 하면 절대 제대로 안 붙어요. 펄럭거릴 정도로 살이 떨어졌다고요.” “아니야. 붙을 것 같은데…….” “안 된다고요. 저 바쁘니 빨리 이리로 와요. 금방 꿰매 드릴게요.” 엘리제는 안 다친 팔의 손목을 덥석 잡고 처치실로 그를 이끌었다. 그녀에게 끌려가며 미하일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 잠깐! 리제, 리제!” “왜 그래요?” 결국,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참 검제답지 않은 고백이었다. “주사랑 바늘 찔리는 것 싫단 말이야!” “…….” 엘리제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애도 아니고……. “농담하지 말고 빨리 오세요.” “농담 아니야! 진짜야!” 그는 마치 크림전쟁 당시 갈트 준장에게 영창으로 끌려갈 때처럼 반항했다. “저…… 밀? 아니, 전하?” “……왜?” “검제 아니셨나요? 서대륙에서 가장 강한 기사라는…….” “그거랑 이거는 별개야! 차라리 검에 맞는 게 낫지. 그리고 난 워낙 강해 칼빵 맞을 일도 거의 없었다고!” “…….” 참 대단하시다. 그녀는 떼쓰는 애기 환자를 보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밀.” “왜?” “싫어해도 소용없어요. 빨리 오세요.” “잠깐! 잠깐!” 그렇게 엘리제는 강제로 그를 처치실로 끌고 갔다. 잠시 후, 엘리제는 다친 손가락 모두 깔끔히 꿰맨 후 말했다. “다 됐어요.” “……몇 바늘이나 꿰맨 거야?” “양 손가락마다 깊숙한 피하 층에 5바늘, 그리고 피부에 5바늘씩요?” 총 20바늘이다. 어쩐지 아프더라며 미하일이 투덜거리자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뭘 그렇게 엄살이에요? 예전에 전쟁 때 전염병에 걸렸을 때는 주사 잘 맞았잖아요.” 루이 니콜라스의 전염병 계책 때 미하일은 거의 첫 번째 감염자로 무수히 많은 주사 치료를 받았다. “당시엔 정신도 비몽사몽했고, 어쩔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때도 싫긴 마찬가지였어. 하여튼 얼굴이나 보러 왔다가 이게 무슨 꼴이야.” 계속 구시렁대는 그를 보며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어쨌든 붕대로 고정해 놨으니 당분간 손가락 움직이면 안 돼요. 검술 훈련도 최소 10일은 자제하시고요.” “10일이나?” “네, 움직이다 실밥 터지면 다시 꿰매야 하니 조심하세요. 한 3~4일 정도 있다가 다시 오세요. 상처 봐 드릴게요.” 그렇게 엘리제는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알아야 할 내용을 다 언급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면 조심히 돌아가세요. 나중에 다시 뵐게요.” 그런데 그의 반응이 이상했다. 엘리제가 일어났는데도, 같이 일어나지 않고 빤히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밀?” “…….” “밀? 왜 그러세요?” 재차 부르자 그가 미소를 지었다. 방금 투덜거릴 때와는 조금은 다른 얼굴. “리제.” “네?” 미하일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닫았다.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말했다. “내 부탁 하나만 들어주면 안 돼?” “네? 말하세요. 들어줄게요.” 그녀는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은 자신의 친구였다. 그러니 부탁 정도야. 그런데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이지? “이렇게…… 잠시만 보고 있으면 안 돼?” “……?”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부탁이지? “제 얼굴을요?” “응.” “……왜요?” “그냥.” 엘리제의 얼굴이 더 아리송해졌다. 미하일의 눈동자는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 아련한……. ‘뭐지?’ “네, 그러세요. 그런데…… 왜?” “고마워.” 미하일은 정말로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장난스러운 평소와는 다른 눈빛으로. 어딘지 깊은 금안으로. 그녀의 얼굴을 자신의 눈에 새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왠지 어색한 느낌이 들어 엘리제는 그를 불렀다. 그 부름에 미하일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장난기와 밝음이 담긴 평소의 눈으로.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 오늘따라 예뻐 보여서.” “네? 거짓말하지 마요.” “정말이야. 원래도 예뻤지만 오늘은 너무너무 예뻐 보이는걸. 한눈에 반할 정도로.”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내뱉는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장난은.” “쿡쿡. 장난치는 것 아닌데. 어쨌든 이만 가볼게. 다음에 보자고.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러고 미하일은 등을 돌려 나가려했다. “…….” 왜일까? 엘리제는 그의 등이 무언가 쓸쓸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딘지 평소와 다른 행동도 그렇고. “저, 밀!” “응?” 미하일이 고개만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가 말했다. “꼭 손가락 조심하시고요. 손가락 다 나으면 언제 술…… 아니, 식사라도 한번 같이해요.” “식사?” “네, 크림반도에서 귀국하면 같이 술이나 식사하기로 해놓고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 말에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다. 아까 전 왠지 억지로 지은 듯한 웃음과는 다른, 진심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 꼭 그러자. 식사 말고 술로. 고마워.” *** 병원에서 나온 후, 미하일은 복잡한 심경을 정리하기 위해 론도 시내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어슴푸레 어둠이 깔리며 뚜둑뚜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군.” 그는 손을 들어 빗방울을 받았다. 생각보다 줄기가 거셌다. 소나기인 것 같아 잠시 비를 피하려고 건물 처마 밑에 몸을 숨겼다. “오래 오네.” 하지만 기다려도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홀딱 젖을 것을 각오하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이었다. 끼잉. 끼잉. 작은 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뭐야?” 고개를 돌리니, 작은 강아지가 다리에 상처를 입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애완용인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어미 없는 길 강아지 같았다. 무시하고 그냥 갈 길 가려다, 미하일은 잠시 머뭇거렸다. 비에 젖어 오돌오돌 떠는 모습이 불쌍하단 생각이 든 것이다. “에휴, 내가 원래 좀 착해서.” 한숨을 내쉰 그는 강아지를 품 안에 안았다. “다리 나을 때까지만 돌봐주마. 운 좋은 줄 알아.” 끼잉. 낯도 안 가리는지 강아지는 그의 품에 얼굴을 비볐다. 미하일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왠지 답답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 듯한 느낌이다. “이름을 뭐라고 하지? 론?” 짓궂은 마음으로 형님의 아명을 불러봤다. “아니면 린덴?” 론, 아니면 린덴으로 강아지 이름을 지을까 하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리제?” 오, 이건 좋은 것 같았다. 귀엽게 생긴 게 어울리기도 하고. “강아지에 자기 이름 붙였다고 싫어하진 않겠지? 아, 몰라. 없을 때만 부르면 되지.” 그렇게 강아지의 이름이 정해졌다. 그는 장난스레 말했다. “리제, 이제 네 이름은 리제다. 알았지?” 끼잉. “말 잘 들어야 해? 응?” 추운지 강아지 리제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미하일은 강아지를 손으로 감싸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갔다. *** 추위가 완전히 꺾이고, 봄이 다가왔다. 황궁 정원에 붉은 장미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고, 론도 시내 여기저기에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했다. 사람을 저절로 행복하게 하는 봄기운. 하지만 그런 따뜻한 봄기운을 받으며 린덴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예쁜 초식 동물이 자꾸 자신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안 돼요. 그날은. 다음에 해요.” “어째서지?” “오전에 배닐 남작의 수술이 예정되어 있어요. 오후에는 천연두 예방 관련한 미팅이 있고요. 의과대학 설립에 대한 계획서도 써야 하고요. 그리고 곧 있을 궁전 연회에 대해 궁내부장과 상의도 해야 해요.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엘리제의 말을 듣고 린덴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뭐 이렇게 할 일이 많단 말인가? 이 일중독 같으니라고! 제국의 국정을 보는 자신보다 그녀가 훨씬 바쁘게 일하는 것 같았다. “……다 미뤄.” “안 돼요. 지난번에도 미루라고 해서 다 한 번씩 미룬 일들이란 말이에요.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그러면 우리 일은?” “그거야 다음에 하면 되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그녀의 말에 린덴은 얼굴을 구겼다. 물론 그들의 일은 중요한 용무는 아니었다. 그저 론도 시내로 나가 맛있는 밥과 디저트를 먹고, 공연을 보기로 한 데이트 약속이었으니까. 별것 아닌, 어찌 보면 아무것도 아닌 용무. 하지만 린덴에게는 중요했다. 얄미운 크리스가 던져준 정책 검토 따위보다는 훨씬! ‘젠장. 도대체 저 일중독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입맞춤까지 나눴으나 어째 관계에 진전이 없는 것 같다. 늘 그녀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신이고, 갈망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물론 그거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간절히 갈망함에도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굉장히 적었다. 엘리제가 너무 바빴던 탓이다. 어의에 수석교수, 수술, 외래 진료, 입원 환자 회진, 아카데미 강의, 보건 정책 프로젝트 진행, 의학 논문 작성. 거기에 최근에는 황제의 재가를 받아 정식 의과대학 설립도 추진하고 있다. ‘아바마마는 왜 의과대학 설립을 허가하셔서!’ 물론 필요한 일이긴 하다. 현행 의사 양성 방식은 주먹구구인 면이 있었으니까. 아예 전문 아카데미처럼 의과대학을 설립하면 양질의 의사를 육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 의과대학 설립을 진행하면서 그녀가 더욱 바빠졌단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 해도, 그럴 수도 없었다. 가장 체계적이고 확고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는 게 그녀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내명부 일까지.’ 그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현재 브리티아 황실은 안주인이 부재했다. 1황비 마리엔이 있었지만, 광증에 빠져 칩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황실 내부의 일은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늙은 궁내부장이 대충대충 처리해 왔다. 어차피 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중요하지, 안살림이야 아무려면 어떠냐는 것이 황제의 생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엘리제, 그녀가 있기 때문이다. 황후와 황비가 부재하니 그녀가 황태자비가 되면 이 황실의 안주인이 된다. ‘그래도 아직 식을 안 올렸으니 원래는 벌써 내명부 일을 할 필요는 없지만. 젠장, 귀족파 메르키트 백작, 그놈 때문에.’ 얼마 전, 대전 회의 때 엘리제의 끝없는 지지율 상승을 걱정한 메르키트 백작이 결국 일을 쳤다. ‘레이디 클로랜스가 의사로서 훌륭한 인물인 것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병원 일에만 열중이어서, 과연 이 브리티아 제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소임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됩니다!’ 어떻게든 엘리제의 평판을 떨어뜨리려는 의도였다. 인품이든 전공이든 의학적 업적이든, 외적으로는 도저히 흠잡을 거리가 없으니, 황궁 안주인으로서의 자질을 공격한 것이다. 틀린 지적은 아니었다. 그녀가 의사 일에만 열중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 공격에 엘리제는 이렇게 대응했다. ‘타당하신 지적입니다. 부족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궁의 일을 배워 향후 제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부끄럽지 않은 이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아직은 이르지만 예비 황태자비로서 조금씩 황궁의 일을 배우기로 한 것이다. 귀족파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은 당시 쾌재를 불렀었다. 제대로 된 사교 활동도 하지 않던 그녀가 궁의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녀가 궁의 일을 배우며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그걸 최대한 부풀려 평판을 깎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2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3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 린덴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봤다. 그녀가 처음 내명부의 일을 시작했을 때가 떠올랐다. 저 소녀는 천재 의사인 것도 모자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내명부의 일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미,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혹시 예전에 내명부의 일을 해보신 적이 있으신 것입니까?’ 그녀의 일 처리를 본 늙은 궁내부장은 경악했다. 엘리제는 겸손히 고개를 저었으나, 그녀의 일 처리 능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마치 이전부터 늘 해오던 일인 것처럼 능숙하고 정확한 솜씨! 이전 삶, 황태자비, 황후로서 산 세월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과연 등불을 든 여인이라고 탄성을 터뜨렸다. 의학적 업적, 전장에서 세운 탁월한 전공, 제국 최고의 수술 솜씨도 모자라 완벽한 퍼스트레이디의 자질까지! 시민들은 그녀야말로 하늘이 내린 제국의 진정한 안주인이라고 치켜세웠다. 메르키트 백작의 의도와 다르게 엘리제의 지지율이 다시 한 번 하늘을 찌를 듯 오른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소녀를 짝으로 맞이할 린덴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완벽할 필요는 없다고.’ 정확히는 그녀가 유능해 너무 바빠 불만이었다. 차라리 능력이 없었으면! 그러면 이렇게 바쁘지 않았을 테고, 조금 더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저 소녀는 완벽한 능력만큼이나 치명적인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일중독! 물론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에 의사 일을 열심히 하는 면이 있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줘도 그녀는 일중독이었다. 그것도 중증의!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자신을 좋아한다고 했으면서. 맨날 일만 한다. 그게 그의 불만이었다. ‘가끔은 날 봐달라고. 아니, 안 봐도 되니 시간이라도 내달라고.’ 그때, 그녀가 왕진 가방을 펼치더니 그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엔 어디가 아프신가요, 전하?” “아…….” 린덴은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바쁜 그녀가 이렇게 그를 보러온 이유. 그건 그가 아프다고 해서 어의로서 진료를 보기 위해서였다. “가슴이 아프다.” “가슴이요? 갑자기 왜……?” 엘리제의 눈에 걱정이 깃들었다. 그 걱정의 빛을 본 순간, 린덴은 살짝 죄책감이 들었다. 사실 안 아팠다. 하도 그녀를 못 봐,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꾀병을 부린 것이다. ‘엘리제, 네가 일만 하니까 그렇잖아.’ 그래도 이제 와 꾀병이었다고 할 수도 없어 그는 뻔뻔하게 말했다. ‘뭐, 아예 완전히 거짓말인 것은 아니니까.’ 가슴이 아프긴 했다. 바로 그녀 때문에. 이렇게 얼굴을 보니 낫긴 했지만, 못 보고 있을 때는 항상 조금씩 아렸다. “어느 부위가 아픈가요?” “정확히는 모르겠군. 이쪽인 것 같다.” 그러며 그는 왼 가슴을 가리켰다. 심장이 왼쪽에 있다고 했던가? “어떤 식으로 아프신가요? 둔하게? 조이듯이? 아니면 콕콕 찌르듯이?” 그 물음에 그는 평소 감각을 떠올리며 답했다. “아리듯이.” 그녀 때문에 맨날 아리니까. “아리듯이요?” “그래.” “음…….” 그녀는 몇 가지 질문을 더 했다. “특별히 더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이 있나요?” “있긴 있다.” “어떤 상황인가요? 예를 들면 운동할 때라든지, 술을 마실 때라든지, 잠을 못 잘 때라든지.” 이번엔 린덴은 답을 하지 않았다. 가슴이 특별히 더 아플 때. 그건 그녀를 보지 못할 때였다. “전하?” “그건 넘어가지.” “말씀해 주셔야 정확히 진단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린덴이 입을 열지 않자,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흐음…….” 엘리제는 평소와 다르게 진단이 헷갈리는 듯했다. 당연했다. 꾀병인데, 무슨 진단을 정확히 내리겠는가? 정확히 내려도 문제다. 꾀병인 게 들통 날 테니까. ‘도대체 뭘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붉은 입술을 만지며 고민했다. 린덴은 그 모습을 보며 저 손가락을 치우고 자신이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잠시 진찰을 해볼게요.” “얼마든지.” 엘리제는 먼저 그의 손목을 짚어 맥을 확인했다. 그러며 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맥박 횟수도, 맥의 규칙성도, 맥압도 다 정상이신데…….’ 한편, 린덴은 그녀의 손이 자신을 어루만지자, 와락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지금은 진료 중이니까. 엘리제가 청진을 위해 조금 더 그에게 다가왔다. 꼼꼼히 심장 소리를 들어본 그녀는 역시 이상이 없자 조심히 그에게 물었다. “전하, 늑연골염을 확인하기 위해 제가 잠시 가슴을 만져 봐도 괜찮을까요?” “……그래.” 늑연골염(Costochondritis). 흉벽에 염증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질환이지만, 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이 순간, 그의 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신체 진찰 중 어느덧 바로 앞까지 다가온 그녀의 얼굴. 그리고 붉은 입술이었다. “…….” 그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가지고 싶었다. 저 붉은 입술을.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농락하고 달뜬 신음을 듣고 싶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엘리제는 그가 그런 삿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모른 채 열심히 진찰을 해 나갔다. 먼저 통증 부위를 만지며 압통이 유발되는지 물었다. “만질 때 아프진 않으신가요?” “…….” 대답이 없다. 괜찮은 거로 생각하며 그녀는 가슴 여기저기를 만졌다. 그가 불편하지 않게 최대한 조심히. 그리고 부드러운 손놀림으로. 그 부드러움이 오히려 그를 자극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괜찮으신가요, 전하?” “…….” “……전하?” 이윽고 이상함을 느낀 엘리제는 고개를 들었고 깜짝 놀랐다. 그가 타오르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 하?”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입술이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읍?!”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리를 질렀으나 소용없었다. “저……!” 몸을 바동거렸으나 강한 팔이 그녀의 몸을 감싸 안았다. 마치 그녀의 몸이 자신의 것이라는 듯 강렬한 껴안았다. 그리고 입술이 열리며 농밀한 접촉이 이어졌다. ‘아…….’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갑자기…… 왜……?’ 일순 이런 생각이 들었으나, 길게 잇진 못했다. 머리가 하얗게 변한 것이다. “아…… 아…….” 그녀가 흘리는 소리를 들으며 린덴은 길게 입맞춤을 이어갔다. “저, 전하…… 제발…….” 그녀가 애원하듯 말하며 매달렸으나 그는 못 들은 척했다. 놔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녀를 느끼고 싶었다. “하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난 후, 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저, 전하…….” 그녀가 당황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단정한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여전히 그의 품속에 갇혀 있는 상태로. “어째서……?” 그 물음에 린덴은 입술을 비틀었다. 왜긴. 서로 사랑하는 사이끼리 입맞춤을 나누는 데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 “싫은가?” 그 물음에 엘리제의 얼굴이 사과처럼 달아올랐다. 방금의 붉힘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부끄러움이었다. “그, 그건…….” “싫은가?” 린덴은 집요하게 물었다. 결국, 엘리제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건…… 아니요.” 그 대답을 하며 귓볼 끝까지 달아오른 엘리제. 너무 붉어 얼굴이 터질 것 같다.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거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사랑스러웠다. 정말 놔주고 싶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렇게 안고 있고 싶었다. “말해봐라.” “……네? 뭘?” “지난번 개선식 때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다시 한 번 더 말해봐라.” 엘리제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 말을 다시 하라고? 지금? 붉었다 파랬다, 다양하게 바뀌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린덴이 짓궂게 말했다. “안 그러면 다시 키스한다.” “……!” 결국, 엘리제는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작게. 개미가 기어가듯. “……좋아해요.” “뭐? 안 들린다.” “조…… 좋아한다고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린덴의 마음에 다시금 환희가 차올랐다. 처음 듣는 것도 아니건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느낌. 그 기쁨을 계속 느끼고 싶어 다시 말했다. “안 들리는데?” 결국, 엘리제는 빽 외쳤다. “좋아한다고요!” 린덴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힘을 주어,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껴안으며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엘리제가 눈을 크게 뜨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거짓말쟁이! 키스 안 한다고 했으면서! 란 뜻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린덴은 좋아한다 말 안 하면 키스한다고 했지, 좋아한다고 말하면 키스 안 한다고는 안 했다. 그러니까 애초에 좋아한다고 말했어도 키스할 생각이었다. “아…….” 반항하던 것도 잠시, 촉촉하게 젖어드는 키스에 엘리제의 몸이 몽롱하게 늘어졌다. 이 남자는 분명 자신이 첫 키스일 텐데, 왜 이렇게 강렬한 걸까? 그리고 자신은 왜 이렇게 키스를 당할 때마다 무방비로 축 늘어지는 것일까. ‘이전 삶에는 이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녀는 멍하니 생각했다. 린덴이 입을 맞춘 상태로 중얼거렸다. “엘리제.” “……아.” “엘리제, 내 것, 내 엘리제.” 그 갈망에, 그 사랑에, 거침없이 자신을 헤집는 그의 느낌에 엘리제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무런 말도, 아무런 몸짓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를 느꼈다. “하…….” 길고 긴, 그렇지만 한없이 아쉬운 키스를 끝내며 린덴은 그녀에게서 떨어졌다. 엘리제는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한 얼굴이었다. 눈가에는 언뜻 눈물도 맺혀 있었다. “엘리제?” “……!”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다시 화악 빨개지는 얼굴. 저 하얀 얼굴은 어찌 저렇게 쉽게 붉어지는지 귀엽기 그지없었다. ‘더 괴롭힐까.’ 그런 마음이 들었으나, 더 괴롭히면 정말 그녀가 울 것 같아서 참았다. “……가, 가슴 아픈 것은요?” 그래도 엘리제.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상태에서도,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환자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다.” “네?” “이제 괜찮아졌다.” 그제야 그가 꾀병을 부린 것을 깨달은 엘리제는 화를 내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뭐, 뭐예요! 걱정했는데. 거짓말을…….” 린덴은 미소를 지으며 바동거리는 그녀를 다시 안으로 끌어당겼다. 부드럽게. 하지만 못 벗어나게. “거짓말한 것 아니다.” “정말요?” “그래, 정말 아팠어.” 그러며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말했다. “너 때문에 아팠다.” 엘리제는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나 때문에 아팠다고? 이게 무슨 말인가? 황태자는 말을 이었다. “정말 너 때문에 아팠어. 보고 싶어서.” “……!” “그런데 지금은 괜찮지만, 네가 가면 또 아플 것 같군. 그러면 또 불러도 되겠지?” “하지만…….” “넌 어의잖아. 그러니 황태자인 내가 아픈 것을 책임져야지.” “……!” 그게 왜 그렇게 된단 말인가! 엘리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황태자는 독선적이고 뻔뻔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3 5-5 미하일 ========================================================================= 5장 미하일 - 4 그런데 그때였다. 문밖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비서관 크리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오빠다! 엘리제는 화들짝 린덴의 품에서 벗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방 안에서 그와 이런 민망한 짓을 한 것을 오빠에게 절대 들킬 수 없었다. 한편, 린덴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비서관이니 그의 집무실에 찾아오는 것은 당연했지만, 괜히 마음에 안 들었다. ‘하여튼 얄미운 놈.’ 일 처리 능력은 클로랜스 가문 혈통답게 어마어마하게 유능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크리스는 자신과 엘리제의 사이를 은근슬쩍 훼방하는 얄미운 놈이었다. “들어가겠습니다.” 곧 문이 끼익 열리며 부드러운 인상의 잘생긴 미남이 들어왔다. “오빠!” “응, 리제. 여기는 웬일이니?”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진료하러 왔어요.” 그래, 진료하러 오긴 했다. 중간에 이렇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민망한 마음이 들어 힐끗 린덴을 흘겨보았다. ‘하여튼 미워.’ 물론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쨌든 진료는 끝났으니, 저는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오빠.” 그러고 엘리제는 황태자에게도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린덴은 그녀가 나가는 뒷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보다가 비서관 크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진료라니. 몸이 많이 안 좋으십니까?” “…….” “전하께서 몸이 안 좋으시다니. 큰일이군요.”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어째 내용은 걱정인데, ‘정말 아픈 것 맞느냐?’로 들리는 것은 자신의 피해의식인가? 아니다. 자신을 보는 저 크리스의 눈빛엔 엘리제를 사랑으로 볼 때와 다르게 ‘동생 도둑놈!’이란 단어가 쓰여 있는 듯했다. 사실 그 추측은 크게 틀린 생각은 아니었다. 행정부의 악명높던 ‘리볼버’ 크리스는 공과 사가 확실한 성격이었으니까. 공적으로는 존경하는 주군인 황태자 전하이지만, 사적으로는 동생 도둑. 그것이 공과 사를 철저히 나누는 크리스가 황태자를 보는 시선이었다. 참고로, 최근 딸 바보 엘 후작이 황태자를 보는 시선도 조금 비슷했다. “……그래, 어쨌든 무슨 일이지?” “지난번 명하신 내용의 조사를 완수했습니다.” 짧은 대답. 그리고 그 답을 듣는 순간, 황태자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정말인가?” “네, 전하.” 리볼버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며 서류를 내밀었다. “귀족파 몰락의 시작이 될 열쇠입니다.” *** 황태자의 사자궁을 나선 엘리제는 이번엔 어전으로 향했다. 황제 민체스터의 진료를 볼 시간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미워.’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조금 전 그와의 입맞춤을 떠올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싫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꾀병으로 자신을 부르다니. 더구나 눈치를 보니 이번 한 번으로 끝낼 것 같지가 않다. 물론 그를 보는 게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지만……. ‘몰라.’ 그녀는 복잡한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가슴은 자꾸 콩닥콩닥 뛰는지. 가슴 한구석이 고장이라도 난 것 같다. 그런데 바삐 발걸음을 옮기던 중, 엘리제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했다. ‘어?’ 그들도 엘리제를 보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차일드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독사란 별명답게 날카로운 눈매. 하지만 어딘지 이전과 다르게 마른 듯한 몸. 귀족파의 수장인 암셀 드 차일드 후작이었다! “오랜만이군, 데임. 아니, 이제는 레이디 클로랜스지. 여자작이 된 것을 축하하네.” 암셀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적대 가문의 딸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퍽 친근한 목소리였다. 전쟁에서 그녀가 수양아들인 알버트를 목숨을 걸고 구해준 후, 가까워진 탓이었다. “오랜만이네. 일하는 중이야?” 뒤에서 아버지를 수행하던 유리엔이 반갑게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도 웃으며 인사했다. “네, 언니. 잘 지내셨어요?” “뭐, 그냥 그랬어.”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그늘이 진 얼굴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을 뿐 답하지 않았다. 그들, 귀족파가 잘 못 지낸 데에는 엘리제도 큰 몫 했으니까. 갈수록 떨어지는 3황자의 지지율 때문에 귀족파는 잠 못 드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황궁엔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대답은 암셀 후작이 하였다. “동생을 보러 왔었네.” “아…….” 암셀 후작의 동생. 1황비 마리엔을 뜻한다. “얼마 전, 동생이 감기에 걸렸을 때 치료해 주었다고 들었네. 고맙네.” “아…… 네, 각하.” 엘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리엔 드 차일드, 아니, 마리엔 드 로마노프. 과거 혈탑의 비극을 일으킨 주역이자 광증에 빠진 여인. 그리고 미하일의 어머니. ‘하아.’ 이전의 삶을 떠올린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엔은 황후 레베카를 모략에 빠뜨렸다. 그리고 황후 레베카와 1황비 이블린은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혈탑에서 목숨을 버렸다. 이제…… 린덴은 어머니와 누이의 복수를 할 것이다. 오로지 그 하나의 염원만을 위해 황제에 오르려는 그였으니까. ‘하지만…….’ 곧 일어날 그 비극을 그리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파져 왔다. 방금 린덴의 집무실에서 두근거렸던 감정이 환상이었던 것처럼. 과거, 그 비극 후 미하일이 죽었다. 유리엔도 죽었다. 귀족파의 많은 인물이 죽었다. 론도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혈사를 일으킨 린덴의 마음은 부서졌다. 분명 정당한 복수였지만, 모두에게 상처밖에 남지 않은 복수였다. ‘그때부터였어. 전하가 변한 것은.’ 복수를 이룬 후, 황위에 오른 린덴은 눈부신 통치력을 보이며 브리티아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망가진 뒤였다. ‘나와 본격적으로 엇갈리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지.’ 이전부터 자신에게 무뚝뚝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예의를 차리던 그였다. 하지만 그 비극을 일으킨 후에는 마음이 부서진 탓일까? 철저한 차가움으로만 일관했다. 그래서 엇갈림 끝에 좌절한 자신은 저지르지 말아 할 죄악을 저질렀고, 그는 거침없이 단두대의 칼날을 내렸다. ‘물론 이번 삶은 조금 다르겠지만.’ 다시 그 비극이 일어난다더라도, 이전처럼 그가 자신에게 차가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상처받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처럼 무너져 내릴지도 몰랐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무저갱에 빠진 듯 무겁게 했다. “폐하께 가는 것인가?” 그때, 암셀 후작이 물었다. “아, 네.” “폐하의 건강은 괜찮으신가?” 엘리제는 암셀 후작의 눈을 바라봤다. 황제의 건강이 안 좋은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동태를 살피려는 물음일까? 하지만 눈치를 보니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한 물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외부인에게 황제의 건강 사항을 알리는 것은 금기여서 일반적인 대답만 했다. “네, 강녕하십니다.” “다행이군. 건강 잘 챙겨주게. 물론 제국 최고의 의사라는 등불을 든 여인이니,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러며 그는 옅게 웃었다. “나이가 드니, 몸이 좋지가 않아. 원래 있던 폐병도 안 좋고. 이러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르겠어.” “아버지!” 유리엔이 뒤에서 무슨 말이냐는 듯 외쳤다. “아직 한창이시면서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하지만 암셀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본인 스스로가 몸의 안 좋음을 알고 있는 탓이다. 그리고 엘리제도 ‘괜찮으실 거라고’ 덕담하지 못했다. 곧 그의 건강이 어떻게 될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구나.’ 황제 민체스터의 쓰러짐이 비극의 전주곡이었다면, 암셀의 병사는 비극의 절정이었다. 귀족파를 통제하던 그가 갑작스레 사망하며 싸움은 통제 불가로 치달았고 수많은 피가 흘렀던 것이다. 만약 암셀이 그렇게만 쓰러지지 않았어도, 그토록 많은 피가 흐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금이라도 희생을 줄일 방법이 없을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당시 암셀의 급환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평소의 지병과는 전혀 다른 질병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폐하를 잘 부탁하네. 나름 한때 친우였던 적도 있으니.” 그 말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와 그가 친우였다고? “아, 모르고 있었나? 페하와 나, 그리고 엘 후작, 마리엔 모두 친한 친구였어. 물론 폐하는 날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 “어쨌든 이만 가보겠네. 다음에 한번 저택에 놀러 오게. 청에서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암셀 후작은 유리엔의 부축을 받으며 황궁에서 사라졌다. 엘리제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 한편, 사자궁의 집무실에서 크리스와 린덴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태자는 크리스가 건네준 서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군. 완벽해.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대단하군.” “운이 좋았습니다.” 크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겸양했지만 린덴은 크게 감탄했다. 얄밉긴 하지만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제…… 사용하실 생각이십니까?” “기회를 봐서.” 린덴은 답했다.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황태자는 다른 사안을 물었다. “재정부에 지시한 사항은?” “비밀리에 진행 중입니다.”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열 가드의 길버트 백작은?” “동의하였습니다.” “신무기는?” “개틀링 말씀이십니까? 개발 완료 단계입니다. 기밀은 철저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 대답을 들은 후, 린덴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크리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하,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무언가?” “귀족파의 인원들을 모두 숙청하실 생각이십니까?” “……!” 린덴은 흠칫 크리스를 바라봤다. 리볼버는 평소와 같이 부드러운 눈매에 옅은 미소를 짓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이 모든 계획이 그들의 숙청을 가리키고 있으니까요.” 린덴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와 크리스의 눈이 허공에서 말없이 교차했다. 황태자가 답을 하지 않자, 크리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혹시나 주제넘은 질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다. 아니야. 자네라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지. 한배를 탄 몸이니까.” 크리스. 리볼버라 불리는 행정가이자 클로랜스 가문의 직계. 자신의 비서관으로 굳이 그를 임명한 것은 유능한 것과 더불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엘리제랑 관련해서 이렇게 얄미울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친우인 렌과 더불어 자신의 그림자로 일하고 있는 존재. 그러니 충분히 저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었다. “이만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편히 쉬십시오.” 크리스가 집무실을 나간 후, 린덴은 목을 젖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왠지 갑자기 피곤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숙청이라.’ 그래, 맞았다. 자신은 그들을 모두 숙청할 생각이다. ‘아니, 내가 하려는 것은 숙청이 아니야.’ ‘그날’이 떠올랐다. 자신의 눈앞에서 핏물로 변해 죽어가던 어머니와 누이. 그래, 그가 하려는 것은 숙청이 아니라 복수였다. 바로 어머니와 누이를 그렇게 만든 자들을 향한. 오로지 그것 하나만을 위해 일평생을 살아왔고, 이제 곧 그 결실을 거둘 때가 온다. ‘때가 오면.’ 지금은 귀족파든 자신이든 서로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곧 때가 오면, 그때는 서로가 칼을 꺼내 들 것이고 저들 귀족파는 그가 만든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걸로 이 복수는 끝이지.’ 그는 생각했다. 평생을 염원하던 그날이 오는 것을. 어머니와 누이를 그렇게 만들 자들을 단두대에 처단하는 상상을. 하지만 언제부터일까? 그런 상상을 해도 후련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마비된 듯한 느낌. 이미 그런 감정을 느낄 가슴이 마모된 탓일지도 모른다. “하아.” 그는 짧게 숨을 토해냈다. 갑자기 차가 마시고 싶었다. 엘리제가 직접 끓여주는. 그녀가 달인 차를 마신 후, 그녀를 꼭 껴안고 느끼고 싶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가만히 있고 싶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4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1 그날 이후, 시간이 지났다. 엘리제의 일상은 큰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일. 일. 일. 늘 바빴다. 내명부에서 하는 일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는데, 이미 황후로 살며 질리도록 해본 일이라 어려울 것은 없었지만, 한층 더 바빠졌다. ‘조금 피곤하구나.’ 아무리 그녀라도 피로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휴식 없이 계속해서 일만 하니, 점차 피로가 쌓였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만 정리되면 조금 낫겠지.’ 아무리 일중독인 그녀라도 평생 이렇게 일에 치여 살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은 황태자비, 황후가 될 예정이니까. 의사 겸업을 허가받았다 해도 앞으로도 병원 일에만 매달려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것보다 전하가 너무 속상해하시니.’ 그녀는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별의별 핑계로 자신을 불러댔다. 머리가 아프다, 몸이 으슬으슬하다, 배가 아프다, 다리가 아프다 등등. 어의로서 황태자가 아프다는데 안 가볼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가보면 맨날 꾀병이었다. 한 번은 정색하고 이런 식으로 꾀병을 부리면 곤란하다고 했더니, 속상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대의 얼굴을 볼 수가 없지 않은가?’ 그 말에 엘리제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확실히 자신은 너무 바빴다. 그와 약속한 데이트를 미룬 게 도대체 며칠인지. ‘그래도 하고 있는 일을 미룰 수는 없으니. 지금 벌인 일만 해결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나겠지.’ 그녀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연기할 수 있는 성질의 것들이 아니었다. 특히 천연두 예방 접종! ‘이제 머지않아 남부 지역에 천연두가 유행할 거야.’ 천연두! 콜레라만큼, 아니, 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서운 전염병이다. 지구에서는 19세기에만 추정치 3억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당시 전 세계 인구가 10억 정도였으니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알 수 있다. 그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머지않은 시기에 브리티아 섬에 상륙할 예정이었다. ‘그 전에 백신 접종을 끝내놓아야 해.’ 하지만 지구면 몰라도 이곳은 아직 예방 접종이 개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것은 영국의 제너가 처음 고안한 종두법. ‘원시적인 예방 접종 방법이지만 다른 방법이 없으니.’ 현대 지구라면 계란 등을 이용하거나, 세포 배양 방법을 사용했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른 일들도 미룰 수가 없는 일이고.‘ 의과대학 설립은 조금 늦게 추진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것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진행을 넘길 수도 없었던 게, 현대 지구의 선진 의학 교육 커리큘럼을 아는 이는 그녀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설립될 의과대학의 이름은 ‘클로랜스 의대’였다. 그녀의 생각을 들은 엘 후작이 기쁜 마음으로 딸 바보처럼 말했기 때문이다. ‘의과대학? 그래, 얼마든지 진행하렴. 이 아비가 돈은 다 대주마! 황실의 도움? 필요 없다.’ ‘의과대학 설립에 맞춰 교과서도 집필해야 하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시대의 의사들에게 의학의 지표는 ‘선구자’ 그라함 백작의 저서였다. 가히 의학의 바이블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엘리제가 보기에는 틀린 내용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엘리제는 틈틈이 새로운 교과서를 집필하고 있었다. 현시대 과학과 기술력에 맞는 내용으로. 가볍게 시작한 집필이지만, 막상 써보니 이것도 어마어마한 대작업이었다. 가히 모든 질병 총론, 각론을 다 집대성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확실히 하는 일이 너무 많아.’ -천연두의 퇴치자. -예방접종의 창시자.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의 창립자. -현대 의학을 이끈 자. 등등. 지금 하고 있는 일들로 후세에 무수히 많은 이름을 얻게 될 그녀이지만,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는 것은 맞았다. 최근 하루 평균 수면 시간이 3시간도 안 되었으니까. 사실 몇몇 일은 급할 게 하나도 없는 일들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급했다. ‘전하와 귀족파의 정권 싸움 때문일까?’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최근 들어 황제의 몸은 조금 더 안 좋아졌다. 곧 정권을 내려놓을 거란 소문이 정계에 파다했다. 그에 따라 귀족파와 황제파의 사이는 급속도로 냉각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실제로 양 계파의 귀족들끼리 권총 결투를 하다 황실십자병원에 실려 오는 사례도 생기고 있었다. 물론 그녀야 귀족파 내부에서도 큰 인망을 얻고 있어서 정권 다툼에서 열외의 존재였지만, 몇몇 귀족파의 인물은 그런 그녀에게조차 적대감을 표시했다. 특히 대표적인 인물은 귀족파 서열 2위이자 상원 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 ‘크흠! 잘 지내시오, 레이디 클로랜스?’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그는 불편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었다. 특별히 그 시선을 마음에 두진 않았지만. 곧 귀족파와 황제파 사이에 본격적인 다툼이 시작될 것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중요한 일들이 마무리되면 조금 여유를 가지는 게 좋겠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 민체스터를 진료할 시간이 가까웠다. ‘약이랑 청진기랑…….’ 필요한 진료 물품을 왕진 가방에 챙기고 병원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녀는 의외의 인물을 마주쳤다. “전하?” 그저 얼굴만 마주한 것일 뿐인데, 두근 가슴이 설렜다. 천상의 조각 같은 얼굴. 황태자 린덴 드 로마노프가 병원에 들어오고 있었다. ‘아…… 나를 보러 오셨구나.’ 엘리제는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폐하를 진료하러 가야 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는데. 어쩌지. 린덴이 그녀가 들고 있는 가방을 보며 말했다. “아바마마를 진료하러 가는 건가?” “……네, 죄송해요.”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사과했다. 매번 그를 서운하게 하는 것 같아 미안했다.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어차피 너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니.” 그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응? 그러면 왜? 지고한 황태자인 그가 특별히 병원에 올 이유가 없을 텐데? 그때, 웃음기 섞인 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전하는 저희를 뵈러 온 것입니다, 레이디 클로랜스.” “자작님?” 전임 어의이자, 황실십자병원의 원장인 밴 자작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생인 그레이엄 남작도 있었고, 아카데미 강의 과목이 겹치는 페이톤 교수도, 자신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보건 정책과의 관료도 있었다. ‘전하께서 저들을 보러 왔다고?’ 엘리제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전하?”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 너와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 쓰지 말고 볼일 보도록.” 정말? 모두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인데? 그러나 그들도 모두 손을 휙휙 저었다. 그녀보고 빨리 가라는 듯.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자작님. 저희는 모두 전하와 따로 상의할 내용이 있어서 모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표정이 묘했다. 왠지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불안감이 등줄기를 스쳤으나, 별일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러면 금방 다녀올게요.” 그녀가 병원에서 사라지자 린덴이 입을 열었다. “모두 이렇게 모여 줘서 고맙다.” “아닙니다, 전하.” “그러면 이전에 미리 이야기했던 대로 며칠만 수고해 줬으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중요한 건 그녀가 돌아왔을 때 일이 남아 있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반드시 며칠 동안 그녀 대신 일을 완벽히 처리해 놓도록.” “네!” 이해할 수 없는 대화들. 린덴은 특히 밴에게 말했다. “밴 자작, 그대는 특히 신경 써주도록. 그녀가 없을 때 아바마마의 옥체를 살펴야 하니.” “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엘리제 자작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저도 나름 론도 최고의 명의라 불리던 몸이니.” 그 말에 린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다들 고맙군. 이번 일이 성공적으로 끝난다면 내 섭섭지 않게 사례를 하지.” “감사합니다! 하시려는 일 좋게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모두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명. 그레이엄만 똥 씹은 표정이었다. “그래, 그러면 난 이만 가보지. 그녀가 아바마마를 진료하고 나올 때까지 준비를 마쳐야 하니.” 그가 지금 하려는 일. 그건 ‘납치’였다.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그는 그녀를 납치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물론 며칠간 단둘이 함께 보낼 여행은 덤이었다. ‘계속 날 서운하게 했지.’ 린덴은 자신을 서운하게 한 벌로 여행 때 그녀를 혼내주기로 결심했다. 맛 좋은 밥을 잔뜩 먹이고, 달달한 디저트를 실컷 먹이고, 좋은 호텔에 강제로 쿨쿨 재우고, 예쁜 거리를 한없이 걸으며, 그렇게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를 혼내줄 것이다. ***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는 먹구름(?)은 상상도 못한 채 엘리제는 황제의 진료에 열중하고 있었다. “체중이 조금 더 빠지셨습니다, 폐하.” “그런가? 그래서 그런지 입맛이 도통 없군.” “그래도 식사를 잘하셔야 합니다. 제가 입맛을 돋우는 음식을 내도록 궁내부에 이야기해 놓겠습니다.” 민체스터는 가만히 웃기만 했다. 어의가 아니라, 며늘아기를 보는 듯한 눈빛에 엘리제는 왠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하여.” 최대한 노력하고 있지만 민체스터의 건강은 조금씩 조금씩 안 좋아지고 있었다. 물론 그건 그녀의 잘못은 아니었다. 아무리 뛰어난 의사라도 의학의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특히나 이렇게 기술력이 부족한 시대에는. 민체스터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다 알고 있어. 영애 덕분에 몸 상태가 많이 나아졌다는 것을. 네가 아니었으면 난 진즉 주님 곁으로 떠났을지도 모르지.” 어의가 된 후 매일 면담을 하면서 그녀와 민체스터는 많이 가까워졌다. 그는 엘리제를 어의, 데임, 레이디, 자작 같은 호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어릴 때부터 부르던 영애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죄 많은 나를 부르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폐하…….” 엘리제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그를 불렀다. 민체스터는 그저 빙긋 웃었다. “영애, 우리 잠시 산책이나 하지 않겠나?” “폐하?” “그냥 집무실에 계속 있다 보니 갑갑해서 말이야. 적당한 운동은 몸에도 좋다고 그대도 말하지 않았던가?” “……알겠습니다.” 그렇게 엘리제는 민체스터와 장미 정원을 산책하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시종장인 밴트 경과 로열 가드의 수장인 길버트 백작이 따랐다. ‘길버트 백작.’ 엘리제는 목석같은 얼굴로 자신들의 뒤를 따르는 길버트 백작을 바라봤다. 황궁 경호대인 로열 가드의 수장인 그는 금욕적인 인상의 중년 남자로, 검제 미하일을 제외하고 제국에서 가장 강한 세 명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참고로 나머지 두 명은 큰오라버니인 렌과 검기사단의 부단장인 로버트였다. “꽃이 예쁘게 폈군. 영애도 꽃을 좋아하는가?” “네, 좋아합니다.” “그래? 일만 좋아하는지 알았더니 꽃도 좋아하는구나?” 민체스터가 웃으며 농담을 했고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바쁘게 지내는 것도 좋지만 가끔 여유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보는 것도 좋아.” “…….” “안 그러면 나처럼 후회할 수도 있으니.” 엘리제는 민체스터를 바라봤다. 병환 때문일까? 황제는, 브리티아의 발전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그는 왠지 작아 보였다. “영애.” “네, 폐하.” “영애는 지금까지 살면서 크게 후회할 일을 한 적이 있느냐?” 민체스터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그 질문이 딱히 자신의 대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5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2 “나는 있네. 큰 잘못을 했어.” “…….” “그래서 벌을 받았었지. 악몽 같은 벌이었네. 그 뒤로 그 악몽을 잊기 위해 일평생을 일만 하고 살았지만 잊히지가 않는군.” 엘리제는 아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무리 자비로운 주님이라도, 이런 나를 용서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말은 들은 엘리제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용서하실 겁니다.” “응?”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왜일까? 저런 황제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나 자책한단 말인가? 물론 그녀도 알고 있다. 민체스터가 ‘그날’, 혈탑의 비극을 지금껏 자책하며 괴로워하고 있음을. 하지만……. 그게 어찌 그만의 잘못이겠는가? “저도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 “네, 오늘만 해도 아침에 아버지께 투정을 부렸고, 환자에게 속으로 불평을 했고, 어제는 황태자 전하를 서운하게 했어요. 며칠 전에는 새어머니의 생신을 잊어 기분을 상하게도 했고요.” 그 말에 민체스터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런가? 하지만 그런 잘못들은…… 사소한 것 아닌가?” “네, 사소한 잘못들입니다. 하지만 사소한 잘못만 저지른 것은 아니에요. 저도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할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 민체스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은 이전 삶, 정말 많은 죄를 저질렀다. 그런 자신에 비하면 민체스터의 죄가 뭐가 중하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폐하.” “…….” “죄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크든, 작든 말이에요. 물론…… 죄를 저지르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만 괴로워하세요. 그녀는 그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하.” 민체스터는 입술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걱정 어린 그녀의 눈빛을 보니 왠지 기분이 따뜻해졌다. “고맙군. 고마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영애를 린덴의 짝으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민체스터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걱정이군. 내가 곧 있을 좋은 날까지 기력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 엘리제는 의아한 얼굴을 했다. 갑자기 웬 좋은 날? 얼마 뒤 예정된 탄신연회를 말하는 건가? 그 표정을 본 민체스터는 곧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영애는 아직 못 들었나 보군.” “무엇을 말씀이신지?” 하지만 민체스터는 대답 대신 혀를 찼다. “이런 린덴, 이 녀석. 혼을 내줘야겠군. 아직까지.”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좋은 날? 그런데 황태자를 왜 혼낸단 말인가? 민체스터는 이렇게만 말했다. “곧 린덴이 직접 알려줄 것이야. 만약 시간이 지났는데도 별말 없으면 나한테 이야기하게. 그 녀석을 따끔하게 혼내줄 테니.” “아…… 네.” 엘리제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민체스터는 잠시 잔잔히 그녀를 바라보다 말했다. “영애.” “네, 폐하.” “내가 잠시 하루, 이틀만 여행을 다녀와도 될까?” “네?”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여행이라고? “어디로 행차하실 생각이십니까?” “아, 뭐. 대단한 곳을 가려는 것은 아니고. 늘 이맘때쯤 가던 곳인데, 최근 몇 년간 못 가서. 브리티아 섬 중부 지방이네.” 중부라. 론도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금방 갈 수 있는 거리이긴 하다. 바람을 쐬러 가려는 것일까? “가급적 무리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그래도 잠시 하루 이틀 정도는 다녀오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몸에 무리가 갈 일정은 최대한 피하셔야 하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저나 밴 자작이 동행해야 합니다.” 민체스터의 상태가 급하게 안 좋은 것은 아니기에 그 정도 일정은 다녀와도 괜찮았다.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만 한다면 말이다. “그래, 고맙네. 잠시 다녀오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제가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야. 나도 영애와 같이 오순도순 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바쁜 영애를 뺏으면 린덴 그 아이가 화낼 것 같군. 밴과 여기 길버트 백작과 다녀오겠네.” 그러며 민체스터는 잠시 장미 정원에 핀 꽃들을 바라보았다. “영애.” “네, 폐하.” “이전 짐이 한 부탁을 기억하지?”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녀에게 큰 선물을 주며 한 부탁.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를 부탁하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 고맙네.” 민체스터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시간 가는지 모르고 떠들었군. 종종 나와 이렇게 산책을 해주겠나, 영애.” “네, 폐하.” 황제는 무엇을 보려는 것인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제 그만 돌아가지.” *** 엘리제는 어전을 나와 황실십자병원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특별히 한 일은 없었지만 황제와 나눈 대화 때문일까? 이상하게 마음이 무겁고 기운이 없었다.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를 부탁하네.’ 그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자신 또한 간절히 원하고 있는 바다. 린덴과 미하일 모두 자신의 소중한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제 곧 벌어질 혈사에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지난 삶처럼 그냥 외면? 사랑하는 린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아니야. 그건 절대 답이 아니야.’ 하지만 그러면? 그러면 어떻게? “하아.” 마치 난치병을 마주한 의사처럼 갑갑한 심정이 들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황태자 린덴이 서 있었던 것이다. 커다란 백마를 이끌고. “전하?” “왔군. 진료는 끝났나?”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한 일이다. 그저 그의 얼굴을 보기만 했을 뿐인데, 조금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 같다. “병원에서의 일은 잘 보셨어요?” “그래. 잘 해결됐다.” 반면, 엘리제와 다르게 린덴은 뭔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그 불만 가득한 얼굴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하?” “왜 그런 표정이지?” “네?” “왜 그렇게 울상이냔 말이야.” “아.” 엘리제는 그제야 자신이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 고개를 젓는 엘리제를 보며 눈썹을 꿈틀한 린덴은 다가오더니 그녀를 안아주었다. “……!” 엘리제는 흠칫 놀랐으나 가만히 그의 품을 느꼈다. 따뜻했다. 린덴은 특별히 뭐라고 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녀를 안아만 주었다. 그 말 없는 행동이, 그 따뜻함이 그녀의 마음에 위로를 주었다. “……고마워요.” “뭐가?” “그냥…… 그냥 전부 다요.” 엘리제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단단한 품 안에 파묻혀 아무런 생각 없이 계속 있고 싶었다. “…….” 린덴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좋은 느낌. 그의 체온은 무뚝뚝한 얼굴처럼 늘 차가웠다. 하지만 왜 이렇게 닿을 때마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걸까? “점심은 먹었는가?” “아니요. 아직.” 린덴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시간이 지금 몇 시인데?” “일이 바빠서.” “내가 잘 챙겨 먹으라고 했지? 지난번 약속하지 않았는가? 절대 거르지 않겠다고. 도대체 왜 맨날 거르는 거야?” “죄송해요.”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좋았다. “하아.” 린덴은 한숨을 토했다. “안 되겠군. 혼을 내줘야겠어.” “네?” “이리로 올라와라.” 린덴은 백마 위에 올라탄 후 그녀를 끌어 올렸다. 얼떨결에 그의 앞에 앉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전하? 어딜 가시려고요?” “널 혼내려.” “네?” 엘리제는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무슨 말이지? 린덴은 피식 웃었다. “농담이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맛있는 것을 사주마.” “아…….”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또 바쁜가?” “아니에요. 그런데 저 맛있는 것 먹고 싶은데.” 바쁘긴 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하지만 기분이 가라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잠시 나갔다 오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그와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웠고. “그래, 맛있는 것. 그리고 단 디저트도 좋겠지?” “네, 딸기 케이크나 초콜릿 쉐이크요.” “그래, 네가 좋아하는 망고 푸딩이랑 바나나 타르트도 사주지. 프랑소엔 마카롱도.” 린덴은 몸을 숙여 말고삐를 잡았다. 자연스레 그와 엘리제의 몸이 밀착되며 그녀가 그에게 안긴 자세가 되었다. 왠지 그의 품에 안겨 크림반도 심페폴에서 탈출할 때가 떠올라 엘리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간다.” 탁. 그의 손이 움직이자 말은 황궁을 달리기 시작했고 납치가 시작되었다. 범인은 백마 탄 왕자님. 달콤한 납치였다. *** 엘리제가 이상한 점을 느낀 것은 몇 시간 뒤였다. 처음 린덴은 그녀를 피카딜리의 멋들어진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현대 지구였으면 미슐랭 별을 3개는 받았을 법한 그 레스토랑은 미리 연락을 받았던 것인지,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를 극진히 대접했고 엘리제는 간만에 즐거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최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카린 베이커리의 디저트까지. 짧지만 행복한 기분 전환이었고, 엘리제는 이제 병원에 돌아가서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마차에 올라탔는데…… 뭔가 이상했다. 피곤한 마음에 깜빡 졸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론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전하?” 놀라 찾았는데, 그는 자신의 바로 옆에서 조각 같은 얼굴로 신문을 보고 있었다. “일어났나? 피곤한 것 같은데, 조금 더 자도록 해라.” “…….” “앉아서 자면 관절에 안 좋으니, 자, 여기에 머리를 베고 누워.” 그러며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가리켰다. 그녀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어쨌든 그가 옆에 있으니 놀란 가슴은 가라앉았지만. “전하, 마차가 길을 잘못 든 것 같아요.” “길?” “네, 황궁은 이쪽이 아닌데…… 아니, 아예 론도를 벗어난 것 같은…….” 그녀는 창밖을 바라봤다. 론도도, 그렇다고 근교 도시도 아니었다. 웬 한적한 시골길? 들판에 난 꽃들이 예쁘게 그들을 보고 있었다. “아, 제대로 가고 있다.” “네?” “황궁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 아니거든.” “네, 네? 그러면 어디로?” 린덴은 신문을 접으며 피식 웃었다. 위험해 보이는 웃음. “납치범한테 그런 걸 물어보면 어떻게 하느냐?” “……네? 납치범…… 요? 누구를 납치……?” 그는 그녀를 바라봤다. 왠지 불길해 보이는 그 금안에 그녀가 움찔할 때, 그가 다가왔다. “전…… 하?” 뒤로 물러났으나 좁은 마차 안에서 어디를 가겠는가? 그가 그대로 입술을 덮었고, 그녀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전기가 흐르듯 머리가 하얘져 신음을 뱉었다. “아…… 저…… 전하?” 린덴은 살짝 입을 뗀 후, 옅게 눈물이 맺힌 그녀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말했다. “누구긴? 너를 납치 중이다.” “……?!” 엘리제는 상황이 이해가 안 돼 눈만 깜빡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나를 납치해? 하지만 그녀는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내가 계속 말 안 들으면 혼내준다고 했지?” 린덴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었던 것이다. 혀가 붉은 입술을 벌렸고, 거침없이 안을 헤집으며 농락했다. “저, 전하…….”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몸을 움켜쥐며 그는 낮게 말했다. “혼내주려 납치하는 거니, 잠자코 따라와.” “……!” 린덴은 생각했다. 사실 이 납치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할 굉장히 중요한 용무. 하지만 그 용무를 보기 전에 먼저 혼부터 내줘야겠다. ‘바쁘게 지내며 지금까지 나를 속 상하게 했지.’ 그러니 같이 시간을 보내며 잔뜩 혼내줄 것이다. 잔뜩.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6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3 오래 지나지 않아 마차는 론도 북쪽에 위치한 어느 작은 소도시에 멈추어 섰다. 시간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늦은 오후쯤. “조심히 내려라.” 먼저 마차에서 내린 그는 손을 뻗어 혹시나 그녀가 발을 헛디디지 않게 에스코트했다. “꽤 오래 왔는데, 몸이 불편하지는 않나?” 엘리제는 그 말에 얼굴을 붉혔다. 몸은 괜찮았다. 그와 방금 한 입맞춤 때문에 부정맥이 온 것처럼 가슴이 뛰어서 문제지. “전하…….” “왜 그러지?” 엘리제는 조심히 그에게 말했다. “저…… 할일이 많은데.” 그녀는 황태자에게 항의하며 론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의 대답은 하나였다. 입 다물라는 듯 거친 입맞춤. 어찌나 많이 키스를 당했는지, 입술이 살짝 부어 있었다. 이번에도 또 키스당할까 봐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이번에 그는 키스 대신 답을 해주었다. 물론 납치범답게 돌려보내준다는 뜻의 답은 아니었다. “괜찮다. 내가 다 처리해 놨으니.” “네?” “아까 보지 않았는가. 그대의 업무는 다른 사람들이 다 나눠서 할 예정이다.” “……!” 그제야 병원에서 황태자와 만났던 이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모였던 게? “그대만큼은 아니지만 다들 유능한 이들이다. 엘리제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남은 일들을 다 끝내놓으라고 황실의 이름으로 명해놨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하, 하지만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일인데.” 그래도 미련을 못 버리는 일중독 소녀를 보며 황태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엘리제.” “네?” 흠칫! 위기감을 느낀 그녀가 뒷걸음질 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고, 품 안으로 그녀가 들어오자. 하얗게 튀어나온 귓볼을 지그시 깨물었다. “……!” 엘리제의 몸이 탁 멎었다. 마치 전기에 감전되기라도 한 것처럼. ‘이, 이게 무슨……?’ “저…… 전하?” 떨리는 목소리. 린덴은, 아니, 맹수는 낮게 말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일 생각은 그만하도록.” “…….”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자신을 향하도록 했다. 그리고 코앞까지 입술을 가져가 말했다. “그러니 다른 것은 잊고, 나만 바라봐.” *** “…….” 엘리제는 말없이 린덴의 뒤를 따랐다. 방금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어. 그러니 나만 바라봐.’ 그의 말처럼 이 한적한 시골 도시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정말로 세상 속에 그와 그녀 둘만 있는 듯한 느낌. 그런데 이상했다. 납치범과 단둘이 있는데, 싫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저 가슴만 두근두근 떨렸다. ‘하아, 모르겠다.’ 뭔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마구마구 들었으나, 납치당한 판에 무슨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그를 따라갈 수밖에. “……전하.” “왜 그러지?” “혹시 지금 어디를 가는 중인지요?” “아.” 그는 지금 지도를 보고 있었다. “잠시 들를 곳이 있다.” “무슨 일로?” “가보면 안다.” 그런데 지도가 엉성한 건지, 아니면 처음 와보는 곳이라 헷갈리는 것인지 그는 좀처럼 목적지를 찾지 못했다. 계속 같은 곳만 헤매기를 몇 번째. “……미안하군. 처음 와보는 곳이라.” 왠지 머쓱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그를 보자, 엘리제는 쿡쿡 웃음을 지었다. “크림반도에서는 길 잘 찾지 않으셨나요?” “……여기서도 금방 찾을 수 있다. 잠시만 기다려라.” 탈출 당시 그는 길치 검제 미하일과 다르게 탁월한 방향 감각으로 그녀를 이끌었었다. ‘전하가 내 목숨을 구해줬었지.’ 당시 생각이 떠오르며 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막의 전갈에게 치욕을 당하기 싫어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을 위해 싸우다 상처를 입었던 것도 떠올랐다. 그때 참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런저런 생각이 나며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자신을 납치한 것은 당황스럽고 밉지만. 그래도. “전하.” “응?” “좋아해요.” “……!” 그녀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옆에 놓인 그의 손을 조심히 만졌다. “손…… 잡고 걸어도 돼요?” “…….” 린덴은 답이 없었다. 그녀가 빼꼼이 다시 물었다. “싫…… 으세요?” 그리고 그 순간. 탁! 그의 차가운 손이 뜨겁게 그녀를 붙잡았다. “……!” “그럴 리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영원히 안 놓아줄 테니, 너도 놓을 생각하지 말도록.” 그러며 타오르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 그녀의 마음이 다시 파르르 떨렸다. 아…… 전하……. 계속 그의 눈길을 보고 있다가는 가슴이 고장 날 것 같아,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영원히는…… 안 돼요.” “뭐?” “수술도 해야 해서.”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누가 일중독 아니랄까 봐! 그때, 엘리제가 물었다. 약간은 수줍은 목소리로. “전하, 하나만 부탁해도 돼요?” “뭔데?” “이대로 잠시 걸으면 안 돼요?” “이대로?” “네, 그러니까…… 이렇게 손잡고. 옛날부터 이런 예쁜 길을 전하와 손잡고 걸어보고 싶었거든요.” 그 부탁에 린덴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이 일중독 마음에 안 드는 소녀는 사랑스럽긴 또 왜 이렇게 사랑스러운 걸까? “얼마든지.” 그렇게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길을 걸었다. 인적 드문 시골 소도시의 길은 론도의 거리와 다르게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마치 동화 속 거리에 들어온 듯한 느낌? “거리가 참 예뻐요. 원래 소도시들은 다 이렇게 예쁜가요?” “그렇지는 않을 거다. 원래 이곳 노버러의 거리는 근방에서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니까.” “전하는 이곳에 이전에 와본 적이 있으신가요?” “아니.” “그런데 어떻게?” “이번에 나오면서 란돌에게 물어봤다.” “아.” 그녀는 그가 일부러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예쁜 거리를 함께 걷고 싶었던 것이다. 왠지 뭉클한 기분이 들어 그녀는 그에게 조금 몸을 기댔다. “좋아요.” “뭐가?” “그냥 전부 다요. 거리도 예쁘고…….” 그리고……. ‘전하도 좋아요. 사랑해요.’ 왠지 쑥스러운 마음이 들어 그 말은 입에 삼켰다. “그나저나 시간이 늦겠군. 해가 지면 안 되는데.” “어딜 가는 중인데요?” 엘리제는 의아한 마음에 물었다. 린덴은 마치 공연 시간에 늦은 것처럼 초조한 기색을 보이더니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말했다. “아, 찾았군. 다 왔다.” “……?” 무엇인가 보니 성당이었다. 갑자기 미사를 드리려고? 하지만 린덴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따라와라.” “전하?” 그는 그녀를 이끌고 성당, 아니, 그 옆에 위치한 종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선형 계단을 가진 종탑은 높고 높았다. 린덴은 엘리제가 미끄러지거나 발을 잘못 디디지 않도록 조심히 에스코트하며 탑을 올랐다. “힘들진 않으냐?” “아, 괜찮아요. 그런데 왜 탑에는?”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하려는 거지? “거의 다 올라왔다.” 그리고 탑에 꼭대기에 올라간 순간. 그녀는 그가 왜 자신을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높은 탑 밑에 펼쳐진 소도시의 전경. 아기자기한 건물들, 도시에 흐르는 부드러운 강, 그리고 뒤에 펼쳐진 푸른 들판과 낮게 깔리기 시작한 황혼. 아름다웠다. 번잡한 론도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전망이었다. 그는 이 아름다운 전망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이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던 것이다. “……괜찮은가? 볼만한가?” 린덴이 어딘지 염려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그녀가 만족할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엘리제는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보다 그런 그의 모습에 더 마음이 울컥했다. ‘전하…….’ 가슴이 울렁거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편, 린덴은 그녀가 답을 하지 않자 머쓱하게 말했다. “앞으로도 여러 곳에 갈 테니까. 더 좋은 곳도 보게 될 테다. 여기는 란돌 그놈이 추천해 준 곳이라 원래 믿을 만하지 못했어.” “예뻐요.” “응?” 엘리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혼을 등진 그녀의 얼굴이 붉게 변했다. “너무 예뻐요. 감사해요. 이런 아름다운 곳에 저를 데려와 줘서 너무…… 너무 감사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말로 꺼내진 않았으나, 마음으로 전달된 것일까? 그는 그녀의 하얀 얼굴을 쓰다듬었다. “나도.” 그리고 부드럽게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사랑한다. 나의 엘리제.” *** 소도시에는 머물 만한 곳이 없어 마차를 타고 잠시 더 이동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를 때쯤 인근의 도시, 케인즈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 내 가장 좋은 특급 호텔 앞에 멈춰 선 마부가 황태자에게 말했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 그는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엘리제를 불렀다. 하지만 원체 수면 부족이었던 탓일까? 그녀는 좀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오히려. “우웅.” 귀여운 소리를 내며 그에게 안겨들었다. “하여튼 무리하지 마라니까. 도무지 말을 안 들으니.” 린덴은 투덜거리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말을 안 들으니, 벌을 내려야겠다. 오늘 내릴 벌은 강제로 잠자기였다. 특급 호텔 포근한 방에서 강제로 늦잠 자기. 배고파도 소용없었다. 아침은 룸서비스로 방으로 배달시킬 거니까. 침대에서 먹게 할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내일 정오까지는 기상 금지였다. ‘란돌, 일 처리는 제대로 해놓았겠지?’ 그녀의 아침 식사를 위해 근방에서 브런치로 유명한 쉐프를 미리 수배해놓기로 했다. 특별히 내일 아침만 그녀를 위한 특식을 만들기 위해. ‘일단 그러려면 방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자는 것을 깨우기 싫었지만, 아니, 이렇게 자신에게 안긴 자세라면 영원히 자게 놔두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깨워야 할 것 같았다. “엘리제.” “…….” “엘리제?” 하지만 묵묵부답. 그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네가 안 일어나서 그런 거야.” 그는 지긋이 그녀의 귓살을 깨물고 혀로 핥았다. “……!” 역시 효과는 즉효. “저, 전하?!” 화들짝 놀라 잠이 깬 그녀를 보며 린덴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 늦게 깨도 좋았을 텐데. 왜 이렇게 예민한 거야? 그녀는 정신이 덜 드는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케인즈다.” “아…….” 론도 북부의 도시 중 나름 큰 규모의 도시였다. 그런데 꽤 거리가 떨어진 곳인데,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나를 안 돌려 보내줄 생각이신 건가? “저…… 그런데 저는 언제 집에…….” “안 돌려 보내줄 건데? 말하지 않았나. 그대는 지금 납치당한 거라고.”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무슨 납치범이 저리 당당하지? “가족들이 신경 쓰이는 거라면 걱정하지 말도록. 미리 연락을 다 해놨으니.” “정말요?” “그래.” 엘리제는 왠지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었으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하긴 했다. 허락을 안 받아서 그렇지. ‘음…….’ 제국 최고의 명문이자 자신의 가장 큰 우군인 클로랜스 가문을 생각한 린덴은 침음을 삼켰다. 왠지 이번 납치가 끝나고 나면 크리스의 눈빛이 한결 더 싸늘해져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점점 크리스의 눈빛과 닮아가는 엘 후작의 눈빛도 그렇고. 그 둘은 자신을 ‘도둑놈’이란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렌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고. ‘아닌가?’ 왠지 지난번 만났을 때 렌마저 도둑놈, 아니, 그래도 주군이니 ‘도둑님’, 이란 눈빛을 힐끗 보였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자신의 착각이겠거니 황태자는 단정했다. “일어나자. 들어가야지.” “어디를요?” 멍하니 물어보다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눈앞에 특급 호텔이 보였던 것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7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4 ‘자, 잠깐.’ 그러고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 집에 들어가지 못하니 외박을 해야 한다. ‘그와 같이 외박해야 한다고?’ 엘리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어졌다. 이, 이건 아니잖아? “전하.” “왜?” “방은…… 따로 잡으신 거죠?”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은 모르겠다는 듯. “글쎄? 란돌이 예약해 놓는다고만 들어서. 확인해 봐야겠군.” 그리고 왕년에 로열 나이츠였던 란돌. 평소에는 칠칠치 못했지만, 이번만큼은 완벽한 일 처리를 보였다. “최상층의 로열 스위트룸입니다.” 단정한 정복을 입은 여직원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케인즈 시의 특급 호텔 쉬트의 최상층에는 방이 단 하나였다. 그와 같은 방을 쓰게 된 것이다. ‘이, 이건 정말 아니잖아.’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등줄기에 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착각일까? *** “다른 방을 쓰겠어요.” 결국, 엘리제는 선언했다. 아무리 그를 사랑한다지만 결혼도 안 했는데 이건 아니었다. 그녀는 곧바로 접수대로 향해 빈방을 문의했다. 하지만. “죄송합니다, 레이디. 방이 남아 있지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이렇게 호텔이 큰 데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요? 비싼 방이라도 상관없어요. 얼마든 상관없으니…….” 지금 돈이 문제겠는가? 그리고 그녀는 돈이 많았다. 계속 벌기만 하고 병원에 처박혀 쓰질 않았으니까. 더구나 최근 영지도 받지 않았는가. 그녀는 무려 영지가 있는 영주였다. 제국에 몇 없는. “죄송합니다. 전부 풀(Full)입니다. 아마 다른 호텔에 가도 비슷한 사정일 것입니다.” “어째서죠?” “내일 케인즈 시 전통 축제가 있거든요. 그래서 인근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어요.” “아…….” 엘리제는 그 말에 입을 벌렸다. 축제라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떠오르는 한 가지 사실. ‘혹시 전하께서 일부러 나 때문에 축제인 도시에?’ 예전에 그에게 말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길거리 축제 같은 것에 참석해 보고 싶다고. 당시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그래? 그러면 조만간 데려가 주지. 론도 인근에서는 매년 열리는 케인즈의 전통 축제가 제일 유명하다고 하던데.’ 그냥 지나가듯 한 이야기라 생각했는데. 설마 정말로 그때 이야기했던 것 때문에? 그런데 그때였다. 뒤에서 가만히 접수대의 이야기를 듣던 린덴이 말했다. “미안하군. 란돌이 방 하나를 예약할지는 몰랐어.” “아, 아니요. 전하.” 그가 사과하자 그녀는 당황했다. 일부러 이렇게 계획한 게 아니었나? 뭔가 죄 없는 그를 의심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하지.” “어떻게?” “상황이 이러니 같은 방을 쓰도록 하지. 하지만 걱정하지 말도록. 그대를 건들거나 하지는 절대 않을 테니.” 그러며 그는 물었다. “혹시 나를 못 믿는가?” “……아니요.”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왠지 믿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의 말을 믿은 것도 우습긴 하지만……. ‘그, 그래도 전하는 욕망에 휘둘리는 분은 아니시니까.’ 부부로 그와 지냈지만 그가 색을 밝히는 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남자. 그러니 욕망에 휘둘리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그녀는 ‘애써’ 생각했다. 물론 엘리제가 고려 못한 것이 있었다. 지금의 그는, 이전 삶의 그가 아니란 것을. *** 탁. 방문을 열고 들어오자 아늑하면서도 고급진 방 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물론 클로랜스가의 저택에서 살고 있고, 중후한 황궁에도 쉴 새 없이 들락거린 엘리제지만, 부티크하게 꾸민 호텔 방의 화려한 풍경은 나름 색다른 매력을 주었다. “…….” 방 안에 들어온 엘리제는 방구석에서 엉거주춤하게 있었다. 믿는다 했고, 실제로 믿지만 단둘이 그와 한방을 쓰려니 역시 어색하고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피곤하지 않은가?” “아, 아! 네, 네!” 뻣뻣하게 답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 그가 가까워지자, 엘리제는 흠칫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손길. “아…….” 평소와 같은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그와 단둘이 한방에 있다는 긴장감 때문일까? 가슴이 미칠 듯이 뛰었다. 손이 닿는 부위마다 타는 듯이 화끈거렸다. 자신을 믿으라고 했던 맹수는 벌벌 떠는 초식 동물에게 말했다. “먼저 씻지 그러는가? 물을 뜨겁게 덥혀 놓았을 텐데.” “아! 네, 네!” 엘리제는 도망치듯 그의 손길에서 벗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뜨거운 수증기에 몸을 맡기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 나 어떻게 하지.’ 그냥 손이 살짝 닿은 건데 아직도 화끈화끈했다. 얼굴이 빨갰다. 아니, 빨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온몸 전체가 새빨갰다. ‘몰라…….’ 그녀는 씻을 생각도 못하고 계속해서 떨리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한편, 욕실 밖에서 린덴은.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미치겠군.” 란돌. 방을 하나만 예약하다니. 물론 그가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잘했다. 방을 두 개 예약했으면 오히려 화가 났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내가 자제할 수 있을까.’ 그녀에게 믿으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는 거지, 단순히 몸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를 가지는 것은, 그녀와 하나가 되는 것은, 그저 입맞춤하고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됐다. 사랑하는 연인이 입맞춤 등으로 서로를 가까이하는 것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엘리제가 원하지 않으면 그것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고, 그녀를 지켜줄 생각이었다. 이렇게 납치를 했지만 그건 거짓 없는 진심. 하지만……. ‘정말 내가 참을 수 있을까.’ 한방에 들어온 순간, 그 결심이 곧바로 흔들렸다. 단둘이 좁은 한 공간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했다. 정말…… 정말로 내가 참을 수 있을까? 아까 전 손을 뻗었을 때, 손끝에 닿은 느낌만으로도 자제력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특히나 지금. 욕실 안에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사이로 그녀가 몸을 씻고 있을 거로 생각하니 가슴이 요동을 쳤다. ‘젠장.’ 그는 필사적인 자제력을 발휘하기 위해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안쪽 욕실에서 씻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자꾸 이상한 상상이 들며, 참기가 어려웠다. 괴로울 정도였다. ‘하아. 양이 라도 세어야 하나.’ 그렇게 그가 입술을 깨물던 중이었다. 끼익. 욕실의 문이 열리며 엘리제가 나타났다. “……!” “전…… 하?” 린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름다웠다. 빨개진 얼굴, 촉촉하게 젖은 백금발, 덜 닦은 탓인지 물기가 맺혀 있는 하얀 피부, 그리고 평소보다 더욱 붉은 기가 도는 입술. 평소에도 예뻤지만, 지금은…… 지극히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자극적이었다. 속살이 언뜻 언뜻 보이는 하얀 목욕 가운을 입고 나왔는데 눈을 둘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왜 그러세요?” 그가 굳게 입을 다물고 있자, 엘리제는 의아한 얼굴로 눈동자를 깜빡였다. 귀여우면서도 가슴을 자극하는 모습. 결국, 린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스쳐 지나가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더 보고 있으면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전하?” “씻고 나오겠다.” 그리고 탁 문을 닫은 그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진정하자. 바보같이 지금 뭐하는 거야? 전 세계를 호령하는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이자 탁월한 국정 능력을 인정받은 이, 또한 적국의 공포 대상인 공제이기도 한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빌어먹을. 하나도 소용없었다. 믿으라고 했던 말을 과연 지킬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 몇백 마리나 되는지 모를 양을 센 후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킨 황태자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욕실을 나섰다. 하지만……. “……씻으셨어요?” “……!” 침실 가운을 입고 침대 한구석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본 순간, 가슴이 덜컥 다시 요동쳤다. 엘리제는 어색한 얼굴로 자신이 입고 있는 침실 가운을 보았다. “조금 이상하죠?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희미하게 상기된 인형 같은 얼굴. 아직 물기가 덜 말라 흐트러진 백금발. 그리고 가운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하얀 속살. 아름다우면서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젠장.’ 엘리제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찾아봐도 이것 외엔 입을 것이 없어서. 직원에게 부탁해 갈아입을 드레스를 구해달라고 해야겠어요.” 린덴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하지 마.” “……네?” “…….” 아뿔싸.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엘리제의 얼굴이 조금 더 붉어졌다. “하, 하지 마요?” “…….” 둘 사이가 한층 더 어색해졌다. 둘은 뻘쭘하게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었다. 엘리제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어색해.’ 사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둘이 있었던 적이 처음은 아니다. 크림반도에서 탈출할 때도 함께 밤을 지새웠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이유 없이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를 믿지만…….’ 그래, 그를 믿는다. 그는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아니, 욕망에 큰 관심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남자이니까. 물론 최근 자신에게 하는 것을 보면 정말 그런지는 조금 의문이 들긴 하지만. 그 의문은 애써 외면했다. ‘그래, 아무런 일 없을 거야.’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하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저…… 힘드실 텐데 그렇게 서 있지 마시고 앉으세요. 아니면 피곤하니 누울까요?” 누울까요? 그 말이 린덴의 가슴에 꽂혔다.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건만 그의 마음은 해일을 만난 것처럼 흔들렸다. ‘젠장. 같은 침대에 있으면 내가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양 칠백사십이 마리. 칠백사십…… 아니, 몇 마리째였지?’ 양을 다시 세어보려 했으나, 그녀에게 정신이 팔려 숫자가 잘 떠오르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디자인한 가운인지 이런저런 틈으로 그녀의 하얀 속살이 계속 힐끗힐끗 보였다. 훤히 드러난 어깨, 얇은 쇄골. 은은히 보이는 가슴골. 린덴은 침을 꿀꺽 삼켰다.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문이었다. ‘다른 방으로 가서 자야겠군.’ 결국 참을 수 없던 린덴은 다른 방의 침대에서 자기로 결정했다. 이대로는 자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녀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았다. ‘아니, 꼭 지켜줘야 하나?’ 그런데 순간 이런 의문이 치밀어 올랐다. ‘우린 결혼할 사이인데.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데. 그녀만 거부하지 않는다면…….’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전하? 왜 그러세요?” 그녀가 커다란 푸른 눈을 깜빡거리며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린덴은 죄책감을 느껴졌다. 저렇게 순수한 그녀를 상대로 이런 못된 생각이나 하다니. ‘미치겠군.’ 이렇게 미치도록 그녀를 바라지만 아직 그녀가 원하지 않으므로,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가지는 것은,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입맞춤과 단순한 어루만짐과는 다른 것이니까. 하지만 동시에 드는 갈망. 이런저런 것 상관없이 그저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하나가 되고 싶고, 저 순수함을 범하고 싶었다. 저 하얀 속살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너무나 모순되는 생각의 충돌에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괴로웠다. 빨리 이 방을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나가서 자마.” 그러며 린덴은 스위트 룸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나갔다. 호텔의 최고급 방이었기에 당연히 딸린 작은 방이 있었다. 그는 그곳에서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젠장, 왜 침대가 없는 거야?’ 그 작은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아니, 있었던 것 같은데 얼마 전 치운 것인지 카펫에 침대 자국만 눌려 있었다. ‘왜 침대를 치운 거지?’ 그때,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전하! 아, 글쎄 말입니다. 제가 젊을 적 연모하던 영애와 몰래 여행을 간 적이 있는데 침대가 두 개나 있었지 말입니다. 그래서 각자 침대를 쓰고 자느라 얼마나 속상했던지! 방에 침대를 여러 개 두는 호텔은 모두 혼나야 합니다!” “…….” 예전 란돌이 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참, 별걸 가지고 열 낸다고 한심해했었는데…… 설마, 이놈이? ‘레이디 클로랜스를 납치하신다고요?!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호텔이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완벽하게 세팅해 놓겠습니다!’ 그러며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던 것도 떠올랐다. 저만 믿으십시오! 하며 웃던 것도.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8 5-6 달콤한 납치 (1) ========================================================================= 6장 달콤한 납치(1) - 5 혹시나 해서 거실도 다시 살폈지만 의자만 있지, 누울 수 있는 기다란 소파는 없었다. 그것도 원래 있었는데 치운 것 같았다. ‘란돌. 이놈…….’ 린덴은 시종의 배려에 화내야 할지, 칭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엘리제가 그의 등 뒤에 주저하며 다가왔다. “전하? 이곳에서 자시게요? 하지만 침대가…….”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아니면 방금 몸을 씻은 탓인지 그녀의 달콤한 체향이 그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린덴의 이성이 마비되었다. 확 몸을 돌리더니 다짜고짜 그녀의 입을 덮쳐 버렸다. “저, 전하?” 놀란 그녀가 벗어나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손으로 그녀의 양손을 잡았다. 벗어나지 못하게.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입안을 헤집었다. “아…… 아…….” 엘리제는 전신의 힘이 빠져 신음을 흘렸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으나, 곧 등이 벽에 닿으며 갇혔다. 그렇게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둔 채 린덴은 이성을 잃고 그녀를 농락했다. “저…… 전하…….”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 키스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제발…….” “……!” 그녀의 떨리는 말을 듣고서야 린덴의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말했다. “놀랐으면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린덴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 소녀는 날 이렇게 힘들게 만들까. 도대체 그녀만 앞에 두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살갗이 와 닿는 느낌에 다시 마음이 흔들려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한편, 엘리제는 머뭇거리니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아주었다. 솔직히 많이 놀라긴 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우리 이제 자요. 전하도 피곤하시죠?” “……그래.” 그녀는 그와 침실로 가려 했으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난 그냥 여기서 자겠다.” “하지만 침대가?” “괜찮다. 그냥 바닥에서 자면 된다.” 엘리제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린덴은 진심이었다. 지금 이렇게 달아오른 상태에서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잔다고? 그건 정말 고문일 것이다. “정 그러시면 제가 이곳에서 잘게요. 전 바닥에서도 잘 자니까요. 전하께서 침대에서 주무세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는 침대에서 편하게 자라. 바닥에서는 내가 잘 거니.” 잠시의 실랑이 끝에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침대에서 같이 자요.” “…….” 그녀는 순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믿고 있어요.” “…….” 린덴은 속으로 인상을 구겼다. ‘젠장, 믿지 마.’ 그는 아까 전으로 돌아가 자신의 말을 취소하고 싶었다. 내가 대체 무슨 배짱으로 그런 약속을 한 거지? 어쨌든 저렇게까지 순수하게 믿는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잔다고 고집을 부릴 수도 없어 결국 같이 침대로 향했다. 그녀는 불을 끄며 자리에 누웠다. “편안히 주무세요.” “……그래.” 그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린덴도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엘리제는 그가 자신의 옆에 누워 있다는 사실에 잠시 두근거리다 원체 수면부족이었던 탓에 곧 잠에 빠졌다. 그리고 린덴은……. ‘미치겠군. 정말로.’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녀가, 예쁜 초식동물이 자신의 옆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다.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지도 모른 채. ‘나도 자자.’ 하지만 잠이 올 턱이 있나. 잠에 들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뜨고 몸을 돌려 잠이 든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제 악몽은 꾸지 않는 건가.” 다행히 평안해 보이는 얼굴.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 머리칼을 치웠다. 곱게 감긴 예쁜 눈꺼풀에 조심히 입을 맞추었다. “우웅…….” 그녀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으나, 깨진 않았다. “잘도 자는군.”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날 이토록 괴롭게 만들어놓고, 혼자서 저렇게 잘 자다니. 얄미운 마음이 들었다. “하아, 엘리제.” 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맨날 날 속상하게 하고, 일만 좋아하고, 얄밉지만. 그래도. “사랑한다.” 정말로. 정말 많이. 내 목숨보다도. “사랑해.” 그런데 그때였다. 엘리제가 우웅 하고 소리를 내더니 뒤척이며 침대에서 몸을 움직였다. 원래 얌전히 자기보다는 잠버릇이 있는 편이어서 이불을 벗고 침대에서 굴러다니는 그녀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침대 위를 뒤척이더니……. 그의 품 안에 쏙 들어와 버렸다. “……!” 린덴은 숨을 흡하고 들이켰다. 간신히 자제하고 있는데, 이 초식동물이……! 그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나보고 어떻게 참으라고.’ 다시 미칠 듯한 갈망이 치밀어 올랐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철저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온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하지만……. ‘믿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믿고 있어요.’ ‘젠장.’ 그는 초인적인 의지로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양 칠백사십사 마리, 칠백사십오 마리…….’ 하지만 효과 없었다. 그래서 종목을 바꿨다. ‘별 하나, 별 둘, 별 셋…….’ 별을 천 개까지 센 그는 서글퍼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아, 바늘이라도 가져올걸.’ 허벅지라도 찌르면 조금 참기 쉬울 것 같았다. 그렇게 밤이 깊어갔다. 린덴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밤이었다. *** 엘리제는 늦게 일어났다. 평소처럼 새벽에 눈을 뜨긴 했지만, 린덴이 왜인지 시뻘게진 눈으로 더 자라고 강압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더 자고 눈을 뜨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몇 시지?’ 맙소사.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30분이었다. 정말 넋을 잃고 곯아떨어졌던 것이다. “일어났나?” “아, 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조각 같은, 아니, 그보다 아름다운 린덴의 얼굴을 보니 엘리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니. 왠지 꿈만 같았다. “잘 잤나?” “네, 전하.” 린덴이 그녀에게 다가 와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입맞춤을 했다. 사랑이 담긴 모닝 키스였다. “아…….” 그 달콤함에 엘리제는 신음을 흘렸다. 그는 아쉬움을 남기고 입술을 떼었다. “아침 먹어야지?” “아…… 네. 시간이 늦었는데…….” “준비해 놓으라고 했으니, 곧 가져올 거다. 조금 더 누워 있어.” “아니, 이제 일어나야죠.” “더 누워 있어. 평소엔 거의 잠도 자지 않잖아. 납치당했을 때라도 더 쉬어.” 납치. 그 말을 듣자 엘리제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병원에 남겨두고 온 일이 걱정되긴 했지만 이 순간이 행복하단 생각이 들었다. ‘일은……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엘리제는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납치범의 명령을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그녀는 린덴의 눈이 빨간 것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전하, 조금 피곤하신 것 같은데…… 혹시 잠자리가 불편하셨는지?” “……아니다.” 린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군.’ 결국, 그는 어젯밤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몸을 껴안고 잠이 들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정말 번뇌가 넘치는 괴로운 밤이었다. ‘란돌, 이놈.’ 그는 이 사단을 만든 란돌을 떠올렸다. 그런데 혼을 내주리라 생각했지만, 상을 주어야 할 것 같기도 하다. 한잠도 못 자서 그런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그렇게 둘은 룸서비스로 늦은 아침 식사를 하였다. 식사 메뉴는 엘리제의 취향을 한껏 고려한 브런치였다. 달달한 디저트도 함께 대령했다. 행복한 표정으로 식사를 마친 엘리제는 물었다. “전하.” “왜 그러지?” “이제 우리는 론도로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 가야 할 곳이 있다.” “가야 할 곳이요?” 그제야 이 납치의 목적을 언급하는 린덴이었다. “그래, 같이 가서 해야 할 것이 있다.” “어디인가요? 그리고 해야 할 것이라니?” 하지만 린덴은 알려주지 않았다. “가보면 안다.” “……?”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먼가요?” “아니, 이곳에서 멀지는 않다. 중부 지방이니까. 기차를 타고 가면 금방이다.” “그러면 오늘 바로 출발하나요? “아니, 출발은 내일 한다.” “그러면 오늘은?” 린덴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나와 같이 시간을 보내야지.”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다가가 다시 입맞춤하였다. “아…….” 혀와 혀가 얽히며 후식으로 마셨던 커피 향이 느껴졌다. 짙은 여운이 남는 키스였다. 그는 엘리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늘만큼은.” 그리고 짙은 금안이 그녀를 담았다. “한순간도 놔주지 않을 테니 각오해.” *** 정오까지 그와 침대에서 함께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호텔 밖 거리는 케인즈 시의 전통 축제로 한창 시끄러웠다. “아름다운 레이디, 잘생긴 젠틀맨! 이리로 와서 맛 좀 보고 가세요!” 시끌벅적한 거리의 분위기. 꽃이 만발한 거리 안에서 시민들이 흥겹게 즐기고 있었다. 엘리제는 눈을 껌뻑거리며 거리를 둘러보았다. “거리 축제는 처음인가?” “아, 네.” “케인즈 시의 축제는 크게 2가지 단계로 진행한다고 한다. 오전, 이른 오후에 이렇게 일반적으로 즐기다가, 늦은 오후에 하이라이트가 시작하지.” “하이라이트요?” “그래, 토마토 축제.”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토마토? “토마토 싸움을 한다.” “에?” “그러니까 눈싸움을 하듯 토마토로 시민들끼리 싸움을 한다고 하더군. 원래 스페냐 왕국의 발렌스 지방의 전통 축제인데, 어쩌다 보니 전파되었다고 한다. 과거 시장이 그 축제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나?” 도무지 상상이 안 가는 장면이다. 토마토를 던지며 싸우다니.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아시는 거지? “전하께서는 이 축제에 와본 적 있으세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자세히?” 린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열었다. “그대 때문에 공부했다.” “아…….” “네가 이전에 말하지 않았는가. 재미있는 축제에 와보고 싶다고.” 그 말에 그녀는 가슴이 뭉클했다. 혹시나 자신 때문에 이 케인즈 시에 온 건가 했는데, 정말이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축제를 구경시켜 주기 위해. 엘리제는 옆의 린덴에게 붙었다. 팔과 팔이 맞닿았고,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히 팔짱을 꼈다. “……!” 린덴이 놀라 그녀를 보았다. 엘리제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싫…… 으세요?” 린덴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리가. 그는 다른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사랑하는 나의 엘리제. 그렇게 둘은 축제를 구경했다. 우선 황궁에서 절대 먹을 수 없는 길거리 음식들을 먹었다. 소스 범벅인 꼬치를 먹었는데, 달달하니 맛있었다. 엘리제는 그의 뺨에 소스가 묻자 웃으며 손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린덴도 그녀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손수건이 아닌, 혀로 직접. “……!”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자, 린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거, 거짓말하지 마요!”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39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1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춤도 추었다. 귀족 연회의 격식 있는 춤은 아니었다. 그저 시민들끼리 특별한 규칙도 없이 흥겨움에 몸을 맡기는 춤. 린덴은 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추고 싶어 하는 것 같아 함께 춤을 추었다. 엘리제가 눈치를 보며 물었다. “춤 싫어하지 않으세요?” “싫어한다.” “아, 죄송해요. 저 때문에…….” “아니야.” 그는 엘리제의 허리를 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어 체향을 맡으며 말했다. “싫어하지만, 너와 함께하는 것은 다 좋아.” “……!” 목덜미에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엘리제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 그게 뭐예요.” “정말이다.” 사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춤뿐이 아니었다. 단 디저트도, 그녀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도, 러브스토리 연극도, 모두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취향 따위 뭐가 중요하겠는가? 그녀와 함께하면 무엇이든지 다 기쁜데.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둘의 눈에 희한한 물건이 보였다. “웬 피아노가?” 성당에서나 볼법한 커다란 피아노가 길거리에 놓여 있었다. 한 시민이 웃으며 설명했다. “축제용으로 시에서 준비한 거예요. 치실 줄 아는 분 있으면 자유롭게 치시면 돼요.” 피아노 체험 같은 것 같았다. “전하, 저 쳐봐도 돼요?” “그래.” 엘리제는 간만에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물론 실력은 형편없었다. 어릴 적 클로랜스 가문의 영애로서 교양으로 배우긴 했지만, 그게 도대체 몇 년 전인가? 지구에서의 삶을 포함하면 수십 년 전이다. 엘리제는 민망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잘 안 되네요.” 린덴은 피식 웃고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본인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전하? 연주하시게요?” “그래.” 엘리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시민들도 조각같이 생긴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자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했다. 린덴은 잠시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잘 들으라는 듯. 그리고. 그의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콰앙! 강렬한 시작.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선율. ‘아…….’ 엘리제는 속으로 탄성을 삼켰다. 믿을 수 없게도 아름다웠다. 강렬하면서도 달콤한, 부드러운 연주였다. 그때, 린덴이 건반을 누르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간절한 열망이 담긴 시선. 그 시선을 받는 순간, 엘리제는 이 곡의 이름을 떠올렸다. 프러시엔의 천재 음악가가 작곡한 피아노곡이었다. 오로지 자신이 사랑하던 여인을 위한 열정적인 곡. 그 곡을 그가 연주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를 위해서. 뭉클. 엘리제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왜일까? 이유 없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연주하는 내내 린덴의 눈은 계속해서 그녀를 향했다. 그의 눈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내가 너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고. 결국, 엘리제는 급히 고개를 돌려 눈을 비볐다. 한 방울 눈물이 손가락에 흘렀다. “와아! 최고다!” 연주를 마친 그에게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는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왜 울지?” “그냥…… 좋아서요.” 그녀는 그에게 안겨 들었다. 린덴은 살짝 눈을 크게 떴다가, 그녀를 포근하게 안아주었다. 그 따뜻한 품 안에서 엘리제는 눈물을 흘렸다. 행복했다. 너무 행복해서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로. 눈을 뜨면 깨질 환상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행복하지만 불안했다. 이 행복이 사라질까 봐. 난 이 행복이 사라져도 살아갈 수 있을까? 아예 몰랐을 때는 괜찮았다. 하지만 이런 행복을 경험한 뒤, 잃으면 버틸 수 있을까? 안다. 이런 불안이 쓸데없는 걱정이란 것을. 너무 행복해서인 것 같다. 이런 쓸데없는 걱정이 드는 것은. 엘리제는 조금 더 그를 느끼고 싶어 더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린덴은 그런 그녀를 말없이, 더욱 강하게 안아주었다. *** 그렇게 축제를 즐긴 그들은 대망의 하이라이트, 토마토 축제에도 참가했다. 물론 싸움에 직접 낀 것은 아니었다. 그냥 구경하러 관람자로 참석했다. “기대돼요. 어떨지.” “황태자로서 이런 토마토 낭비 축제는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은 된다만. 도대체 세금이 얼마나 낭비되는 건지.” 그렇게 말했지만 그도 즐거운 얼굴이었다. 곧 토마토를 한가득 실은 커다란 바구니들이 거리 양측에 준비되었고, 푸른 옷, 붉은 옷으로 편을 나눈 시민들이 양손에 토마토를 들고 서로를 주시했다. “시작!” “와아!” 퍽! 퍽! 마치 눈싸움을 하듯 물컹물컹한 토마토가 서로를 향해 날아갔다. “악! 꺄악!” “하하! 와아!” 시민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 범벅이 되었다. 엉망으로 변한 얼굴로 시민들은 서로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엘리제도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유쾌한 광경은 난생처음이었다. 린덴은 계속 ‘세금 낭비’라고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를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그녀가 웃으니, 그도 그냥 좋았다. 그런데 그 즐거운 관람이 돌변한 것은 한순간이었다. “꺄악?!” 퍼억! 누군가 엘리제를 향해 토마토를 던진 것이다! 얼굴에 정통으로 토마토를 맞은 그녀의 얼굴이 엉망으로 변했다. “엘리제!” 린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감히?! 고개를 돌리니 웬 턱수염 아저씨가 웃으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레이디! 같이 놀아요! 신사분도 가만히 있지만 말고! 하하!” 그 말에 린덴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감히! 용서하지 않겠다! 엘리제가 그 기세에 놀라 그를 말렸다. “저는 괜찮아요.” “너는 여기에 가만히 있어라.” “네?” “내가 복수를 해주마.” “무, 무슨?” 그렇게 공화국군을 벌벌 떨게 하던 공제가 자신의 그녀를 위해 나섰다. 양손에 토마토를 들고. 퍼억! 퍼억! 순식간에 얼굴에 토마토를 얻어맞은 턱수염 아저씨가 꽥하고 쓰러졌다. 엘리제가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전하. 그거 방금 토마토에 초상 능력?” “착각이다.” “하지만 분명…….” “착.각.이다.” 강하게 강조하는 린덴의 말에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초상 능력이었는데……. “와아! 저기도 던져라!” “엉클의 복수를 하자!” 우군이 쓰러진 것을 목격한 시민들이 우르르 엘리제와 린덴에게 달려들었다. “꺄악!” 엘리제는 놀라 비명을 질렀고, 린덴은 코웃음 쳤다. 흥. 어딜 감히! 그렇게 세계 최강국 브리티아의 황태자는 그녀를 위해 토마토 개판 싸움을 하였다. 치사하게 몰래몰래 초상 능력까지 사용하면서. 그리고 30분 뒤. 땅! 징소리가 울리며 축제의 끝을 알렸다. “끝났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와아!” 시민들이 토마토를 허공에 집어 던지며 함성을 질렀다. 엘리제는 입을 벌리고 린덴을 바라봤다. “저, 전하.” “왜?” 조각보다도 더 아름답던 그의 얼굴은 토마토 범벅으로 변해 있었다. 얼굴뿐이겠는가? 걸치고 있던 검은 신사 정장 전체가 빨갰다. 토마토로 샤워한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엘리제도 마찬가지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토마토였다.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는 잠시 서로의 추한 몰골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쿡쿡.” “큭.” 서로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은 점점 커졌다. “하하. 아. 하하.” 엘리제는 아예 배꼽을 잡고 웃었고, 린덴도 입술을 실룩샐룩했다. 그렇게 케인즈 시의 축제가 끝났다. 함께해서 더욱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그들은 말끔히 몸을 씻었다. 옷을 갈아입고, 맛있는 식사를 하니 어느덧 달이 떠오른 밤이 되었다. ‘벌써 하루가 지나갔구나.’ 엘리제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축제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일까? 시간이 늦었지만 이대로 하루를 마감하기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린덴에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제안을 하였다. “저…… 전하.” “왜 그러지?” “많이 피곤하신가요?” “괜찮다.” 한편 방에 돌아온 후, 다시 번뇌에 휩싸여 있던 린덴이 답했다. 저 엘리제는 축제 때 긴장을 푼 것인지, 단둘이 한 호텔 방에 있게 됐는데도 어제처럼 떨지 않았다. ‘정말 날 믿는 것인가?’ 젠장. 믿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진심으로. 지금도 가운 안으로 비치는 속살이 신경 쓰이는데.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진정 원하지 않는 한, 그녀를 가지는 것만은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어차피 부부가 될 것인데, 라는 생각이 끝없이 충돌했다. 괴로워 죽겠다.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피곤하지 않으시면…… 술이나 한잔하실래요?” “……!” 린덴이 흠칫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순진한 표정이었다. “그냥…… 이대로 자기 아쉬워서요. 맛있는 튀김 안주랑 고기 안주도 먹고 싶고요.” “…….” 그가 답을 않자, 그녀가 조심히 물었다. “싫으세요? 피곤하면 괜찮고요.” “……마시자.” 그는 깊은, 정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예쁜 초식동물이 이제는 날 아예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 이미 다 씻고 침의로 갈아입은 상태라 술은 방에서 룸서비스로 마시기로 했다. 곧 황태자와 예비 황태자비를 위해 호텔 최고의 쉐프가 잔뜩 솜씨를 부린 안주가 방으로 도착했다. “와아.” 윤기가 흐르는 바삭한 감자튀김, 스테이크 볶음, 오색 창연한 과일 안주 등등. 엘리제는 갖가지 안주를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 린덴은 속으로 다시 한숨을 삼켰다. ‘그렇게 귀여운 표정 짓지 말라고. 날 믿지도 말고.’ 속살이 비치는 침실 가운을 입고, 저런 표정을 지으면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참으란 것인가? 미칠 것 같은 고문이었다. 더 이상 셀 양이나 별도 없었다. ‘안주 내올 때 바늘이라도 가져오라고 할 걸 그랬나.’ 그런 그의 속마음도 모르고 엘리제가 물었다. “전하는 안 드세요?” “……먹겠다.” 술은 작은 오크통에 담긴 흑맥주였다. 린덴은 원래 도수가 높은 위스키를 선호했으나, 엘리제가 시원한 맥주를 원하기도 했고, 독한 술을 마시면 도저히 자기 자신을 주체할 자신이 없어서 흑맥주를 마시기로 했다. “술은 마실 줄 아나?” 한 잔만 마셔도 곯아떨어지는 친우 렌을 떠올린 린덴이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해요.” “좋아해?” “네, 수술 끝나고 마시는 술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이곳에서야 그럴 일이 없었지만, 지구에서는 밤늦게 수술을 끝내고 간단히 한잔하고 헤어지는 일이 많았다. ‘순댓국에 소주가 참 좋았는데. 감자탕도 맛있었고. 이곳에서 순댓국이나 감자탕을 먹을 수는 없겠지?’ 지구에서 즐기던 야식을 떠올렸다. 언제 여유가 되면 만드는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 ‘전하는 좋아하실까?’ 그도 좋아하면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내가 가끔 해주기도 하고. ‘나중에 내가 요리해 주면 싫어하실까? 그러진 않으시겠지?’ 그녀는 살짝 얼굴 붉히며 생각했다. 지난번 우크라 산맥에서 탈출할 때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자신이 해주는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때, 린덴이 그녀에게 잔을 내밀며 말했다. “한 잔 하지.” “네.” 엘리제는 기분 좋게 맥주를 마셨다. 꿀꺽꿀꺽 잘도 마시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정말 생각보다 잘 마시는 것 같았다. “전하는 안 드세요?” “마실 거다.” 린덴도 시원하게 한 잔 들이켰다. 엘리제는 그가 마시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그 웃음에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 웃지?” “좋아서요.” “뭐가?” “그냥 이렇게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는 게요.” 축제를 같이 보내며 한층 가까워진 것일까. 엘리제는 한결 편하게 그에게 말했다.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좋군.” 사랑하는 이와 술을 같이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이 번뇌하는 가슴만 아니면 말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Ps. 원래는 3/1일이라 쉴려고 했는데... 출판사님이 연재하라고 해서 내일도 올라옵니다.(삐뚫어지고 싶다...) 00140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2 한 잔 마셨다고, 엘리제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돌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그를 자극했다. 젠장. 저렇게 인형 같은 얼굴에 홍조가 돌면 자신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미칠 지경이다. 그런 린덴의 마음은 모른 채 엘리제는 맥주를 한 잔 더 마셨다. 꿀꺽, 맥주와 함께 떨리는 목 울림에 린덴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대로 저 입술을 범하고 싶은데. 입맞춤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 키스를 하면 거기서 자제할 자신이 없었다. 선을 넘을 것 같았다. ‘하아.’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한 3잔쯤 마셨을 때일까? 그녀는 취기가 오르는지 조금씩 발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전…… 하.” “그만 마시는 것이 좋겠다.” “아…… 괜찮아요. 딸꾹.” “…….” “저, 정말 괜찮은데. 딸꾹.” 그녀는 딸꾹질하는 게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다. “지, 진짜…… 괜…… 딸꾹.” 린덴은 고개를 젓고, 경고하듯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가 말했다. “그만 마셔. 안 그러면.” 그러며 지그시 귓불을 깨물었다. “정말 혼내줄 테니.” “……!” 귀에서 전해지는 찌릿한 느낌에 엘리제의 몸이 떨렸다. “알았나?” 그런데 술을 마신 탓일까? 엘리제는 조금 달랐다. 평소라면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텐데, 무려 반항이란 것을 한 것이다. “조, 조금만…… 더 마시면 안 돼요? 딸꾹. 고작 맥주인데…… 조금만 더…… 많이 안 마실게요.” “…….” 린덴은 눈썹을 꿈틀했다. 사실 그녀가 술을 마시는 것은 상관없었다. 오히려 발개진 얼굴로 딸꾹질하는 것이 귀여웠다. 하지만 그녀가 무방비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자제할 자신이 없었다. 즉, 문제는 자신이었다. 린덴이 답이 없자, 거절로 알고 엘리제가 시무룩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그만 마실게요. 죄송해요. 그냥 오늘 축제를 보고 기분이 좋아서 그랬어요.” 하아. 저런 귀여운 표정으로 저렇게 예쁘게 말하면 어떻게 안 들어주겠는가? “……한 잔만이다. 더 이상은 안 돼.” 그 말에 예쁜 초식동물은 기쁜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마셨다. 하지만 린덴은 곧 자신의 승낙을 후회하게 되었다. 그 한잔을 더 마신 후, 엘리제의 얼굴에 완전히 취기가 오른 것이다. “딸꾹. 딸꾹. 아…… 죄, 죄송해요.” 엘리제도 본인이 취한 것을 깨닫고 그에게 사과했다. 물론 술주정을 부린 것도 아니고, 취한 것을 사과할 이유야 없지만. “……괜찮다. 인제 그만 쉬자.”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도 그녀를 먼저 재우고, 또 그녀 옆에서 괴로운 밤을 보내야 할 것 같았다. ‘정말 바늘을 가져오라고 할까.’ 그런데 그때였다! 술에 취해 과감해진 것인지, 엘리제가 자신의 몸을 그의 어깨에 기댔다. “……!” “저…… 잠시만 이러고 있으면 안 돼요?” 린덴은 흡 숨을 멈추었다. 그녀의 우윳빛 체향이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술은 더 안 마실 테니…… 그냥 잠시만 이러고 있고 싶어서.” “……그래.”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소녀는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래도 당연한 말이지만, 싫지는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가만히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가슴이 떨리도록 좋았다. “전하.” “린덴.” “네?” “이제 전하라 부르지 말고, 린덴이라 불러라.” “하지만…….” 엘리제는 취한 상태에서도 그건 주저되는 것 같았다.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미하일, 그놈한테는 잘도 이름을 부르면서! “명령이다. 지금 당장 린덴이라 불러.” “하, 하지만…….” “당장. 지금 해봐라.” “……린…… 덴.” 그 말은 그에게 깊은 만족감을 주었다. 고작 이름을 부른 것이건만 달콤한 느낌이 들었다. “다시.” “린…… 덴.”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엘리제는 멍하니 그의 이름을 반복했다. 몽롱한 달콤함이 방 안에 감돌았다. “졸리는가?” 그리고 자신에게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엘리제게 린덴이 물었다. “아…… 괜찮아요.” “인제 정말로 그만 자도록 하지?” “조금만 더요. 지금 좋아서…… 전하.” “린덴.” “아…… 네, 린덴. 나 이전부터 사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어요.” “뭐지?” 그녀는 그에게 조금 더 파고들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그의 체온은 차갑지만 따뜻했다. 신기했다. “우리는…… 혹시 운명일까요?” “……!” 린덴은 살짝 의외인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물론 그는 그녀가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늘이 정한. 하지만 누구보다 이성적인 그녀의 입에서 ‘운명’이란 감상적인 단어가 나오다니? 조금 뜻밖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실 신기한 일이 있었어요.” “무슨?” “크림전쟁 때 제가 총에 맞았던 것 기억나세요?” 당연히 기억난다.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때 다른 사람들의 피가 안 맞아 피를 못 받고 있었는데, 전하…… 아니, 린덴의 피만 맞아 저에게 수혈을 해주셨잖아요.” “그랬지.”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운명적인 일이었다. 그때 오로지 자신만이 그녀에게 피를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엘리제, 이 과학적인 의사는 당시의 일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사실 조금 연구를 했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린덴의 피와 제 피를 비교해서.” “언제?” “얼마 전예요. 기억나시죠? 검진 상 검사하려 뽑은 피로 제가 확인해 본다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연구해 보니 신기한 결과가 나왔어요.” “어떤?” “저희 둘의 피는 완벽히 일치해요.” “일치한다고?” “네, ABO뿐만이 아니라, Typing까지.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완전히요.” 취한 그녀는 의학 용어를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ABO? Typing? 린덴은 모르는 용어였다. “왜? 일치하면 안 좋은 건가?” “아니, 안 좋을 건 없죠. 어쨌든 신기해요. 이렇게 서로 일치하다니.” 린덴은 피식 웃었다. “뭐가 신기한가?” “네?” “네 말대로 우리가 운명이니 일치하는 것이지.”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그런 걸까요?” “당연하지. 우리는 하늘이 정해준 사이인 것이다. 아니, 하늘도 우리 사이를 찢지 못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것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린덴은 그런 거라고 치기로 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엘리제도 그렇게 치기로 했다. 그와 자신은 운명이라고. “하암.” 계속 감기는 눈으로 하품하는 그녀를 눕혀 주었다. 취기에 그녀는 앙탈을 부렸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다고. “조금만…… 조금만요…….” 그 귀여운 모습에 린덴은 한숨을 삼켰다. 저 사랑스러운 모습 그대로 가지고 싶었다. 범해 버리고 싶었다. ‘하아.’ 그때, 그녀가 몽롱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린덴. 사랑해요.” “……!” “사랑해요. 정말로. 정말로 사랑해요.” 그러며 그녀가 그의 볼에 입술을 맞혔다. “……!” 린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제, 너…….” 하지만 술기운 때문일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올라 반쯤 감긴 눈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멍하니 잠에 취해 자기가 지금 무슨 위험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뺨에서 입술 쪽으로. 그녀의 입술이 미끄러질 때마다 린덴은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붉은 입술이 자신의 입술에 와 닿을 때. “……!” 린덴의 이성이 뚝 하고 끊어졌다. 입술을 건드는 촉촉한 느낌에 머리가 하얗게 변했고, 생각이 마비된 그의 몸이 그녀를 덮쳐 들어갔다. ‘이건…… 이건…… 너 때문이야.’ 린덴의 혀가 엘리제의 입안을 침범했다. 달콤함보다는 강렬한, 오로지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키스였다. 혀의 밑동이, 그 안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기세로 그녀를 침범했다. ‘엘리제!’ 린덴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침대 위에 눕혔다. 자연스레 그가 그녀의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린덴은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졌다. 여리면서도 미치도록 부드러운 감촉. 손에 닿은 그 느낌에 그의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렸다. 이대로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전신에 하나의 틈도 남기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새긴 후 완전히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 갈망을 담아 그는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그의 손이 허벅지, 그 위, 그녀의 은밀한 곳으로 향했다. ‘아, 엘리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는 이상한 점을 느꼈다. 평소와 다르게 그녀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이다. 승낙도, 거부도, 그렇다고 신음도, 떨림도.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의 얼굴을 본 순간. 린덴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젠장.’ 엘리제는 잠들어 있었다. 완전히 취해서. ‘이 나쁜!’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잠이 들다니! 린덴은 심각한 얼굴로 번뇌했다. 어떻게 하지? 이 갈망을? 잠이 들었지만 그대로? ‘망할.’ 하지만 어떻게 그대로 하겠는가? 그녀가 이렇게 잠이 들어 있는데. “엘리제. 엘리제.” 그는 혹시나 그녀의 어깨를 흔들어 잠에서 깨워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우웅 하고 뒤척일 뿐 잠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망할. 정말 나쁜. 제길.’ 린덴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도대체 이 소녀는 나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끝없이 중얼거리며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도저히 가슴이 진정이 안 돼 입술을 깨물며 양을 세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천 마리까지 세었으나, 효과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종목을 바꿨다. ‘별 하나, 별 둘…… 젠장.’ 양을 세든, 별을 세든 계속 그녀의 몸만 떠올랐다. 달아오른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라운지에 연결된 끈을 당겨 직원을 불렀다. 호텔 직원이 공손한 태도로 방에 들어왔다. “네, 무슨 일이십니까? 술상을 치울까요?” “그래, 치우고.” 그리고 린덴은 머뭇거리다 말했다. “바늘을 가져와라.” “네?” 직원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반문했다. 린덴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바늘 가져오라고.” “네, 네.” 호텔 직원이 의아한 얼굴로 사라진 후, 린덴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오늘은 정말, 진짜로 마음에 안 들었다. ‘오늘 일. 나중에 반드시 꼭 혼을 내주마. 꼭. 각오해.’ 린덴은 그렇게 이를 갈았다. 물론 어떻게 혼을 낼지는 그만이 알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의 숫자를 세며 밤을 지새웠다. 그녀를 혼내줄 수 있는 날이 최대한 빨리 다가오기를 기원하면서. 굉장히 서글픈(?) 밤이었다. *** 다음 날, 날이 밝고 늦잠을 잔 그들은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가 말했던 ‘목적지’로 향하는 것이다. “전하, 피곤하신 것 같아요.” “……그래.” 린덴은 퀭한 눈으로 말했다. “잠자리가 불편하셨는지……?” “……아니다.” 말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대는?” “전 잘 잤어요. 쌩쌩해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어제 본인이 취해서 벌인 일은 기억도 안 나는 것 같다. 진짜 마음에 안 든다. ‘나중에…… 반드시, 꼭 혼내주마.’ 그는 굳게 다짐했다. 그냥 혼내는 것이 아닌, 하루 종일 혼내줄 것이다.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게 혼내줘야지.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41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3 어쨌든 그들은 케인즈 역에서 중부로 이동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미리 예약되어 있었고, 최고급 VIP 객실 한 량을 통째로 이용했다. “이렇게 한 칸을 다 이용해도 되는 거예요?” “상관없다. 어차피 다 내 거다.” 그 말에 엘리제는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브리티아의 기차는 모두 국가 소유였으니까. 엘리제는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 칙칙! 기관이 달아오르는 소리가 나며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리 준비된 과자를 먹으며 나른히 시시각각 변하는 풍광을 감상했다. “전하.” “린덴. 린덴이라고 불러라.” “아…….” 엘리제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린…… 덴.” “더 자연스럽게. 한 번 더 불러봐라.” “……린덴.” 엘리제는 이름을 부르며 살짝 얼굴을 붉혔다. 린덴은 그 귀여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얄밉긴 참 얄미웠지만 동시에 사랑스러웠다. 도대체 저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저……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론도에는 언제?” “왜? 빨리 돌아가고 싶나?” “그건 아니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계속해서 이렇게 그와 있고 싶었다. 영원히. ‘좋으니까.’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눈을 뜨면 그가 있고, 무엇을 해도 그와 함께라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에 따뜻한 행복을 주었다. 하지만 린덴은 이렇게 답했다. “내일 돌아갈 거다. 오늘이면 볼일이 끝날 거니.” “아…….”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클리우드 시이다.” 클리우드 시? 처음 들어보는 곳이다. “그냥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도시다. 대양이 보이는 서부 해안가의.” “그러면 그곳에는 왜?” 하지만 그건 답해주지 않았다. “가보면 안다.” “…….” 그리고 기차가 철로를 달렸다. “그런데 엘리제.” “리제.” “응?” 엘리제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저한테도…… 엘리제…… 말고, 리제라고 불러주면 안 돼요?” 린덴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리제’는 가까운 사람이 그녀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래, 리제.” 둘은 그렇게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기차 여행을 하였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배가 고프지 않게 틈틈이 단 과자를 먹고, 음료도 먹었다. “리제, 이쪽으로 내 옆에 와서 앉아라.” “왜요?” “멀어서 이야기가 잘 안 들린다.” 거짓말. 엘리제는 입술을 삐쭉 내밀었으나, 모른 척 속아주었다. 그녀가 옆에 와서 앉자 린덴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녀도 그에게 어깨를 기댔다. 그 상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씨 이야기도 하고, 연극 이야기도 하고, 그녀가 좋아하는 디저트 이야기도 하고, 새로 생긴 스테이크 집 이야기도 하고. 야채는 싫다는 이야기도 하고. 어쨌든 그렇게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시간이 흘렀고, 낮게 황혼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기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클리우드 시는 서부 해안가에 위치한 예쁜 항구 도시였다. 갈매기가 기분 좋게 울며, 절벽 해안가에는 알록달록한 집들이 놓여 있었다. 마치 엽서 사진에 나올 듯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예뻐요.” 린덴은 잔잔히 웃었다. “마음에 드나?” “네, 너무 좋아요.” “다행이군.” 린덴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일단 밥 먼저 먹지. 저녁 시간 때이니.” 그가 그녀를 데려간 곳은 서대륙 본토 라틴 지방의 전통 음식, 화덕 피자와 파스타 집이었다. “와아.” 뜨끈뜨끈한 김을 내며 나온 피자를 보며 엘리제는 탄성을 지었다. 주방장이 사람 좋게 웃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레이디.” 기다랗게 늘어지는 치즈가 미각을 만족하게 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환상적인 맛이었다. ‘파스타도 맛있어.’ 이런 시골 항구 도시에 이렇게 맛있는 집이 있다니? 엘리제는 행복해하며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반면, 린덴은 그런 엘리제를 흐뭇하게 바라볼 뿐, 좀처럼 포크를 가져가지 않았다. “전…… 아니, 린덴. 입맛에 안 맞으세요?” “아니, 괜찮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지만, 엘리제는 그의 식성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전하는 이런 요리 안 좋아하시지.’ 피자와 파스타뿐이 아니다.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들. 달달한 디저트, 고기 요리들. 모두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정반대인 담백하고 가벼운 요리를 좋아했으니까. 하지만 항상 그녀에게 맞춰주는 그였다. 식사뿐 아니라, 모든 것을. 그 사실을 떠올리자, 그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전하.’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그러면 이제?” 엘리제는 도대체 이 작은 항구 도시에 무슨 볼일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린덴은 웃으며 답했다. “잠깐 먼저 조금만 걷자. 그 뒤에 이야기해 줄 테니.” “……?” 식사를 하고 나오니 짙은 황혼이 깔려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도시 뒤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로 이끌었다. 도시 사람들이 이용하는 산책로인지 양옆으로 푸른 나무들이 그들을 맞았다. 엘리제와 린덴은 그 호젓한 길을 걸었다. 그녀는 옆에서 걷는 그의 손을 조심히 움켜잡았다. 자신에게 닿는 그녀의 느낌에 린덴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의 하얀 이마에 입맞춤했다. 그렇게 둘은 말없이 서로를 공유하며 산책로를 걸었다. 특별한 대화는 없었지만, 황혼이 깔린 항구 도시의 산책로를 단둘이 걷는 것은 평온한 행복감을 주었다. 엘리제는 그의 손을 잡고 걷는 이 순간이 영원히 계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린덴이 원하던 목적지가 나타났다. “저기 잠시 앉을까?” “아…… 네.” 산책로가 완만한 오르막길이어서인지, 도착한 곳은 전망대처럼 높은 지대의 절벽이었다. 시에서 만들어 놓은 것인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벤치가 놓여 있었다. 린덴이 먼지를 닦아주었고, 둘은 벤치에 앉아 절벽 아래 풍경을 감상했다. ‘와…….’ 엘리제는 감탄을 터뜨렸다. 아름다웠다. 절벽 아래 대양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옆으로는 아기자기하게 예쁜 항구 도시가 파노라마처럼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짙게 깔린 황혼. 붉게 물든 바다 도시가 그녀의 가슴을 울렁이게 했다. “마음에 드는가?” “네, 아름다워요. 정말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은 처음이에요.” 빈말이 아니었다. 많은 곳을 가본 그녀지만,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풍광은 처음이었다. “다행이군. 사실 이곳은 예전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소라 너와 같이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다.” 린덴도 잔잔한 표정으로 황혼을 감상했다. “저 바다가 대양인가요?” “그래, 저 바다가 대양이다.” “그러면 저 너머에 신대륙이 있는 거죠? 오대호가 있다는.” “그렇지. 가보고 싶나?” “네, 가보고 싶긴 한데…….” 그 말에 린덴이 말했다. “가보고 싶으면 같이 가지.” “네? 하지만…… 전하…… 아니, 린덴은…….” 황제가 될 그가 신대륙 여행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린덴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황제가 되더라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한 법이니까. 아니면 외교 사절로 신 연방에 방문해도 되겠군.”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말만이라도 고마웠다. “린덴. 고마워요.” “뭐가 고맙지?” “그냥…… 전부 다요. 이번에 특히…… 저…… 많이 좋았어요. 갑자기 납치해서 놀라긴 했지만요.” “…….” “고마워요. 정말로.” 납치였지만 달콤한 납치였다. ‘론도로 돌아가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겠지만.’ 이 꿈같은 납치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부터는 똑같은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그녀는 환자를 볼 것이고, 그는…… 이제 곧 3황자 미하일과 본격적인 정권 다툼을 벌일 것이다. 그 사실이 엘리제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그녀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렇게 그에게 안긴 상태로 황혼에 물든 대양을 바라봤다. “엘리제.” “네, 린덴.” “사랑한다.” 그러면서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겹쳐졌다. 평소와 다르게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 그의 혀가 그녀의 혀를 달콤하게 감쌌다. 엘리제는 그 부드러움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저도…… 저도요, 린덴.’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너무나 커 깨어질까 무서운 행복. 그때, 그가 그녀에게 말했다. “엘리제, 사실 너에게 할 말이 있다.” “네, 무엇인데요?” “그게…….” 린덴은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그가 무언가를 주머니에서 꺼내, 그녀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본 순간, 엘리제의 눈이 파도를 만난 듯 흔들렸다. “그것…… 혹시 받아줄 수 있겠나?” “리, 린덴……?” 엘리제는 입을 가렸다.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린덴은 평소와 다른 머쓱한 얼굴을 했다. “미안하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원래 이런 데 말재주가 없어. 여자를 감동하게 하는 재주도 없고, 미사여구를 말하지도 못해. 그래서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린덴은 깊은 금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깊고 깊은 마음을 담고서. “엘리제. 나와 결혼해 주겠나?”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의 눈에서 뚜욱 눈물이 떨어졌다. 생각지도 못한 프로포즈였다. “아…….” 엘리제는 허겁지겁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왜일까? 저 무뚝뚝한 목소리에 담긴 사랑이 느껴져서일까? 거창하지도, 달콤하지도 않은 프로포즈였건만 흔들리는 가슴을 도저히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린덴이 약간 불안한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싫은 건 아니겠지? 싫어도 소용없다. 무조건 강제로 결혼할 거야.”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는 결국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끄윽. 흐윽. 저, 전하…… 린덴…….” “에, 엘리제? 왜?” 돌연 울음을 흘리며 자신에게 안겨 드는 그녀에게 린덴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프로포즈를 했는데 왜 기뻐하지 않고 우는 거지? 설마 싫은 건가? 린덴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싫은가? 그래도 소용없다. 프로포즈지만, 선택 사항은 없어. 이미 넌 내 거야.” 엘리제는 자신의 마음을 전혀 모르는, 이 여자 바보 남자에게 화급히 고개를 저었다. “흐윽. 안 싫어요.” “그러면 왜?” “당연히 좋으니까 그렇죠!” 빽 말한 후 다시 그의 품 안에 안겨 들었다. 이전 삶이 떠올랐다. 그와 끝없이 엇나간 끝에 비극을 맞이했던 삶. 그때가 떠오르며 지금이 꿈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말 꿈인 것은 아니겠지? 이 행복이 환상인 것은 아니겠지? 한편 린덴은 그녀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뚝뚝하지만 평소와 다르게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제. 울지 마라. 바보같이 왜 울어.” “흐윽.” 그는 그녀를 몸에서 살짝 떼어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밀착시켜 혀로 눈물을 닦았다. “사랑한다. 정말로.” “린덴…….” 다시 얽히는 그와 그녀의 입술. 몽롱한 키스 후, 그는 벨벳 반지 케이스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손가락에 딱 맞는 금색 반지가 그녀를 속박하는 듯해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였다. “엘리제. 이제 너는 완전히 내 거야. 그러니.” 린덴은 그녀를 가슴에 안았다. “앞으로 영원히 내게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142 5-7 달콤한 납치 (2) ========================================================================= 7장 달콤한 납치(2) - 4 그렇게 그의 납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날 깊은 밤, 린덴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곁에는 그녀가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엘리제.’ 그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라만 봐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제 빨리 식을 진행해야지.’ 프로포즈를 했으니, 이제부터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는 절차고 뭐고 상관없이 무조건 최대한 빠르게 일정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약혼 따위는 생략하고 싶은데. 어차피 약혼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 문제에 관해 궁내부장과 여러 번 다투었으나, 결국 이길 수가 없었다. ‘전하. 차라리 저를 죽이십시오! 그것만은 안 됩니다! 황실 역사상 그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도대체 왜 로마노프 황실에는 그런 쓸데없는 규칙이 있는 건지. ‘예법이 뭐라고. 젠장.’ 하루라도 빨리 그녀와 하나가 되고 싶은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약혼을 생략할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약혼 뒤 곧바로 빠른 결혼식! 그는 약혼과 결혼식을 경주마처럼 단숨에 돌파하기로 결심했다. ‘결혼만 해봐라.’ 정말 하루 종일 혼내줄 것이다. 이번에 밤마다 받은 고통을 10배, 아니, 100배로 돌려줘야지. 그뿐인가? 절대 품에서 안 놔줄 것이다. 밥을 먹을 때도, 길을 걸을 때도, 무얼 하든 다 함께할 것이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깊게 잠든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잔잔하게 웃은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와의 용무가 성공적으로 끝났으니, 마지막으로 들를 곳이 있었다. 끼익. 방에서 나오니 늙은 청지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가시렵니까, 도련님?” “아아, 그래.” 늙은 청지기는 그를 전하로 부르지 않고, 도련님이라 불렀다. 워낙 어릴 때부터 보아오던 사이여서 그렇다. 이곳은 황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민체스터 개인 소유의 별장이었다. “여기 준비해 두라 한 것입니다.” “그래.” 린덴은 청지기가 건네는 바구니를 챙겼다. “밤이 늦었는데,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그는 마구간에서 갈색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말을 달렸다. 달빛 외에는 의지할 데 없는 어두운 밤이었지만, 익숙한 길인지 어렵지 않게 방향을 잡았다. 갈색 말은 항구 도시를 벗어나 교외의 외딴길로 계속해서 들어갔다. 길옆으로 서부 해안가, 대양이 검은 파도를 철썩였다. “…….”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클리우드 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린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방금 엘리제를 보며 따뜻한 표정을 짓던 얼굴은 없었다. 그저 무표정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가는 곳은 그의 아픔이 잠들어 있는 곳이니까. 그리고. 인적 없는 해안가의 절벽 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 묘지였다.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두 개의 묘비가 서 있었다. 묘비의 문구는 짧았다. 민체스터가 사랑하는 레베카, 이블린. 이곳에 잠들다. 레베카. 이블린. 린덴의 어머니와 누이. 그의 눈앞에서 한 줌의 핏물로 변했던 가족들. 황후 레베카는 딸과 혈탑에서 몸을 던지기 전, 유서에 고향 근처인 이곳 서부 해안가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제가 왔습니다, 어머니. 누이.” 린덴은 묘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가 너무 오랜만에 왔지요. 죄송합니다.” 그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바구니에는 생전에 그들이 좋아하던 빨간 튤립과 장미가 담겨 있었다. 린덴은 조심히 그 꽃들을 묘비 앞에 올려놓았다. “그곳에서…… 잘 지내고 있으십니까?” 린덴은 그들의 안부를 물었다. 대답을 들을 수 없는 허무한 물음. 그의 표정이 쓸쓸해졌다.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아직도 밤마다 그들의 꿈을 꾸었다. 그들이 눈앞에서 핏물로 변하는 끔찍한 그때의 꿈을. 죄 없이 그렇게 죽은 그들이 천국에서라도 잘 지내고 있을 리가. “사실…… 저는 사랑하는 소녀가 생겼습니다. 작고, 예쁜 소녀입니다. 가끔 많이 얄밉기도 하지만요.” 그는 어머니에게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 그녀와 결혼하려고 합니다. 이미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가슴이 되었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이런 저라도…… 웃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 이미 너덜너덜해진 가슴은 어쩔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얻은 상처는 그가 평생 지고 가야 할 괴로움이었으니까. 그래도 그녀와 함께라면 이런 나라도 조금은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거와 별개로 그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죄 없이 죽은 그들을 위해. “어머니. 누이.” 그는 낮게 말했다. “이제 정말 오래 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머나먼 옛날. 그가 어렸던 시절. 그들이 스러져 가던 때가 떠올랐다. 가문의 위세를 힘입어 황비의 자리에 오른 마리엔은 황제를 사랑했다. 하지만 황제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한 명. 황후 레베카. 그는 황비 마리엔을 철저히 냉대했다. 그 냉대에 점점 비틀어져 가던 마리엔은 질투에 눈이 멀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황후 레베카에게 추악한 모함을 한 것이다. 가문의 힘을 동원해 완벽한 증거를 마련해서. 차일드 가문을 따르던 귀족들이 그에 동조했다. ‘역시 천한 피는. 더럽다니까.’ ‘평민 출신이 황후에 오를 때부터 알아봤어. 더러운 계집이 황후의 위에 올라서. 이 대 브리티아 제국의 수치라니까.’ 비난은 점점 더 강도를 더해갔다. ‘추악한 죄를 저지른 황후를 폐위하라!’ ‘황실의 명예를 먹칠한 황후를 끌어내려라!’ 그런 비난이 유폐되어 있던 레베카에게 끝없이 쏟아졌다. 그 비난을 들으며 그의 어머니 레베카의 영혼은 말라 비틀어져 갔고, 결국 버티지 못하고 끔직한 선택을 하게 되었다. 같이 괴로워하던 딸과 함께 목숨을 버린 것이다. 그리고 린덴은 그 일을 일으켰던 이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리엔 황비, 암셀 후작, 그리고 당시의 일에 동조했던 귀족파의 귀족들.” 린덴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 금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 단 한 명도.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거다. 모두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어머니와 누이를 위로할 것이다. 그게 그가 일평생을 바라왔던 단 하나의 염원. “이제 정말 멀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 염원을 이루면. 그들도 저 세상에서나마 편안해질 수 있지 않을까. 더는 꿈에서 괴로운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지 않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평안히 계십시오.” 린덴은 잠시 말없이 묘지를 바라보다가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후. 두둑.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옅은. 어딘지 슬픈 느낌의 비였다. 그렇게 달콤한 시간이 끝나고. 론도의 비극. 각자의 싸움. 그리고 그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6막 각자의 싸움 *** 그렇게 달콤했던 납치가 끝나고 엘리제와 린덴은 론도로 돌아왔다. ‘일상으로 돌아왔구나.’ 엘리제는 병원의 교수실에서 차를 마시며 멍하니 당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걸었던 소도시, 종탑. 맛있는 음식들. 즐거웠던 축제. 호텔에서 그와 함께 마셨던 맥주. 그리고 프로포즈. 모두 꿈과도 같은 기억들이었다. ‘전하. 린덴.’ 론도에 돌아온 그는 곧바로 궁내부장에게 일러 약혼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절차 따위는 상관없으니 최대한 빨리. 속도에 중점을 두고 진행하라고. 왠지 속마음이 보이는 것 같아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내게 이런 날이 오다니.’ 처음 다시 돌아왔을 당시가 떠올랐다. 그때 지상 최대의 목표는 황태자와의 결혼을 피하는 것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자신은 또 그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전 삶처럼. 하지만 싫은가? 그렇지 않았다. 이전 삶과는 달랐으니까. 자신과 그 모두, 이전 삶의 엘리제와 린덴이 아니었다. -자신은 그를 사랑하고, 그도 자신을 사랑한다. 그래, 누군가 그랬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마음에 들어왔을 뿐인데 온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을 보면. 세 번의 삶을 살지만,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를 많이 사랑했던 첫 번째 삶 때도 이런 감각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만큼 서로 사랑한다는 것. 그건 기적과도 같은 감정이었다. ‘보고 싶네.’ 얼마 전 봤으면서 또 생각이 났다. 그도 그럴까? 난 이렇게 그를 생각하고 있는데,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을까? 혹시 그도 날 생각하고 있을까? 그렇게 멍하니 린덴만 생각하다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 차려, 엘리제. 할 일이 많잖아.’ 꿈같은 납치를 당했다고 해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할 일은 여전히 많았다. 그리고 마음속 가장 큰 근심. ‘그와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엘리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앞으로 이 론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론도의 비극.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과 자신의 소중한 친구인 미하일은 결국 충돌한다. 그것도 처절히. 그 결과 자신에게 항상 기분 좋게 웃어주던 미하일이 죽는다. 아름답던 유리엔도 죽는다. 수양아들을 걱정하던 암셀 후작도 죽는다. 귀족파의 무수히 많은 귀족이 죽는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은. 그 비극을 일으키고 마음이 망가졌었다. ‘나는 이 싸움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엘리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말리고 싶었다. 소중한 이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정말 간절히. 복수를 이루고 괴로워하는 그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엘리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무뚝뚝한 남자는 그 복수를 감당할 만큼 모질지 못했다. 무엇보다 복수는 그에게 후련함보다는 또 다른 괴로움만을 안겨 주었다. 동생 미하일을 죽였다는 죄책감과 수없이 많은 이의 피를 흘렸다는 자괴감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말려?’ 혈탑의 비극은 오로지 마리엔 황비와 귀족파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니 어머니의 원수를 갚으려는 린덴의 복수는 정당하다. 만약 그들을 용서한다더라도, 그건 린덴 스스로가 결정할 일이었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사랑하는 연인인 그녀라도 마찬가지였다.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전 삶처럼 모른 척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수많은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또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주여. 제발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답답한 마음에 그녀는 기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발. *** 하지만 그녀의 기도와 다르게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만 갔다. 일단 민체스터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만 갔다. 엘리제와 밴을 비롯한 여러 의사가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지만 악화를 늦추는 데 그칠 뿐이었다. “이거…… 영애의 약혼식과 결혼식에는 꼭 참석하고 싶은데. 가능할지 모르겠군.” 민체스터의 힘없는 목소리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좋아지실 것입니다, 폐하.” 그렇게 말했지만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불가능한 일은 있었다. ‘이전 삶의 당뇨 합병증으로 사망하실 때와는 달라.’ 그녀의 치료로 황제의 당뇨는 잘 조절되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결정한 일일까? 당뇨와 상관없이 황제의 건강은 계속해서 안 좋아지고 있었다. 정확한 원인을 알아낼 수도 없이. ‘현대 지구라면 여러 분자진단학 기법 등을 통해서 원인을 알아낼 수 있었을 텐데.’ 그녀는 그것이 안타까웠다. 현대 지구의 기술이 있다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를 텐데.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143 6-1 결투 ========================================================================= 1장 결투 - 1 황제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영애.” “네, 폐하.” “그때 내가 했던 부탁은 기억하고 있지?”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제가 자신에게 큰 선물, 의사 겸업을 허락해 주며 했던 부탁. ‘나중에 린덴과 미하일, 그 아이들을 부탁하네.’ 그녀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내가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것 아닌지 모르겠군. 미안하네.” “아닙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부탁은 자신이 가장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가 없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린덴과 함께해서 행복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그리고 황제의 건강이 악화됨에 따라, 귀족파와 황제파 간의 긴장도 격화되어 갔다. 황위 계승이 코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특히 황제가 정무에 손을 떼며, 황태자 린덴에게 권력이 조금씩 이양되는 기미를 보이자, 귀족파들의 초조함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절대 안 되오!” 콰앙! 귀족파 서열 2위 메르키트 백작이 회의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회의장에는 3황자 미하일과 암셀 후작을 제외한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이렇게 진행되다가는 황태자가 그대로 황위를 계승받게 될 것이오!” 귀족파 귀족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알고 있었다. 지금 그들 귀족파와 3황자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볼 때, 머지않은 시기에 황위 이양이 일어날 것 같은데,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정통성에서도 밀리고, 세력에서 압도하는 것도 아니다. 황태자 개인의 흠을 잡을 수도 없다. 이미 린덴은 황태자로 보위하며 뛰어난 국정 능력을 연거푸 보여주었다. 이전이라면 지지율이 낮은 점이라도 트집을 잡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현재 황태자 린덴의 지지율은 정상을 달리고 있었다. 크림전쟁의 승전과 예비 황태자비, 등불을 든 여인 때문에. “정식 약혼 발표가 난 후 지지율이 다시 폭등했소. 이대로는 그가 황위를 물려받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오! 그리고 그가 황위를 물려받게 되면 우리는 끝이오.” 귀족파 인물들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혈탑의 비극을 눈앞에서 목격한, 그래서 복수의 칼을 평생 갈아온 그가 황제가 된다. 그러면 자신들의 처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저희에게는 암셀 후작이 계시는데…… 설마…….” 한 귀족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황제가 되더라도 차일드 가문을 건드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메르키트는 메기 같은 인상을 찌푸렸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차일드가. 국제 금융계의 대재벌인 그들은 브리티아 제국이라도 감히 건들 수 없는 금융 제국을 구축하고 있었으니까. 지금은 봉건 영주의 시대가 아니다. 여섯 개의 대륙이 하나로 묶여 교역을 하고 있고, 서대륙 끝의 브리티아 섬에서 동방 끝의 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산업화는 물류 생산의 폭발을 이끌어냈고, 론도에만 250만의 넘는 시민이 거주한다. 그런 거대한 세계란 생명체를 지탱하는 것은 ‘돈’이란 혈맥이었다. 돈이 없다면 세계의 모든 움직임은 한순간 정지한다. 세계 최강국이라는 브리티아 제국도 대혼란을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전 세계의 돈줄을 움켜쥐고 있는 차일드 가문은 그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가문이다. 그들이 서대륙 열강에 빌려준 돈들을 일시에 회수하거나 대출을 멈춘다면 전 세계 경제는 한순간에 멈출 것이다. 가히 금융 제국의 황제라 부를 수 있는 강력한 금권. 그런 차일드 가문이었기에 현 황제 민체스터도 감히 아내의 복수를 할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차일드가를 건드린 후 그 후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하지만.’ 메르키트 백작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그가 이 계산을 안 하고 있을까? 그 황태자 린덴이?’ 오로지 일평생을 복수를 위해 살아온 황태자다. 그런 그가 차일드 가의 금권을 고려하지 않고 있을까?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라면, 그 황태자라면 분명히 계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금권의 사각을 뚫고 자신들의 목을 쳐 낼 계획을 가지고 있겠지. ‘젠장.’ 메르키트는 초조하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이대로 진행하다가는 최후의 방법밖에 남지 않게 돼.’ 최후의 방법. 그건 바로 군사적 정변을 뜻한다. 메르키트와 귀족파라도 절대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 하지만 저 린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그래서 자신들의 목을 치려 한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에게는 검제 전하와 검기사단이 있으니까.’ 정변을 일으킨다면 승산은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가 공제라 불린다지만 3황자는 서대륙 최강검인 검제. 그리고 론도 내 주둔 중인 검기사단은 전원이 오러 나이츠로 이루어진 말도 안 되는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로열 나이츠인 총기사단은 대부분 론도 교외에 주둔하고 있으니, 검기사단으로 길버트 백작의 로열 가드만 제압하면 된다. ‘아니야. 정변은 아니야.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해.’ 메르키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그라도 그런 최악의 수를 선택하고 싶지 않았다. 정변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쥐가 되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아.” 메르키트의 고뇌가 깊어졌다. 그렇게 일촉즉발의 나날들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엘리제가 병원의 일, 보건 정책, 궁내부의 일에 더해 약혼 준비까지 하며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 바쁜 와중에도 린덴과 가끔 만나 아쉬운 만남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결국, 폭탄의 도화선이 터져 버리는 대사고가, 그리고 엘리제가 처음으로 그들의 다툼에 개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다. *** 발단은 대저택이 모인 화이트가의 도로에서였다. 콰앙! 히이잉! 요란스러운 충돌 소리와 함께 말의 비명이 울렸다. 간밤에 내린 비 탓일까? 도로 한가운데에서 마차 충돌 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무슨 일이냐?!”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메기 얼굴 메르키트 백작은 인상을 와락 쓰며 마차에서 내렸다. 충돌 시 벽에 부닥친 탓에 오른팔이 심하게 아파왔다. “저쪽에서 마차가 들이닥쳐서…….” 상대 마차를 본 메르키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날아오르는 매 문양. 도리슨 백작이었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싫어하는 놈이.’ 도리슨 백작은 재정부 장관으로 재상인 엘 후작과 더불어 황제파에서 수위에 꼽히는 권력자이며, 린덴의 밀명으로 모종의 비밀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대귀족이었다. 사실상 황제파 서열 2위의 핵심 인물. 그런 도리슨 백작은 얄미운 말투로 다혈질인 메르키트와 툭하면 충돌하곤 했다. 과연 마차의 문이 열리며 메르키트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빤질빤질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나타났다. “이거 메르키트 백작 아니오? 마부 교육 좀 잘 시켜야겠소이다. 큰일 날 뻔하지 않았소?” “뭐라고?! 잘 달리고 있는 마차에 들이받은 주제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허. 우리가 들이받았다고 말하셨소? 이거 참 내가 창문으로 봤을 때는 정반대였는데 말이오. 여봐라. 저 메르키트 백작의 말이 참이냐?” 도리슨의 마부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주인처럼 얄미운 말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정해진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저 메르키트 백작가의 마부가 낮술이라도 했나 봅니다.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던 저희에게 마차를 돌진하다니.” 메르키트의 마부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도 정해진 방향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먼저 충돌한 쪽은 저쪽입니다!” 그 말에 도리슨 백작이 호통을 쳤다. “허! 이 천한 놈이 거짓말을! 솔직히 말하지 못할까? 누구에게 배웠기에 그딴 거짓말이냐?!” 메르키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누구에게 배웠기에. 주인인 그를 대놓고 질책하는 말이다. “지금 말 다했소, 백작?” “다 안 했소. 마차 사고를 일으킨 것에 대해 사과를 받아야겠소. 다행히 아무도 안 다쳤지만, 하마터면 크게 위험할 뻔했소이다.” “사…… 과?” 메르키트의 얼굴이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붉어졌다. 실제로 누가 잘못을 했는지는 도리슨도 메르키트도 모른다. 마차 안에서 밖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메르키트는 그래도 아마 자신의 마부가 실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은 했다. 왜냐하면 성품이 착하고 성실해 마부로 쓰고 있긴 해도 평소에도 이런저런 잔실수가 많은 이였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실제로 누가 잘못했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도리슨 백작과 메르키트 백작은 그저 서로의 흠을 잡아 망신을 줄 의도였던 것이니까. “왜 못하겠소? 이거 실망이구려. 명망 높으신 메르키트 백작께서 자신의 잘못도 인정하지 못하는 소인배인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는데.” “지금…… 나한테…… 소인배라고…… 했나? 이 제비 같은 녀석이!” 도리슨 백작의 얼굴이 굳었다. 제비 같은 녀석. 빤질빤질한 얼굴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별명으로,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였다. “제비? 그 말 당장 사과하시오.” “사과? 웃기지 마라. 네놈이야말로 나 메르키트를 모독한 것을 무릎 꿇고 사과해라.” 도리슨 백작은 비웃음을 지었다. “소인배를 소인배라고 한 것이 뭐가 잘못이오?” “뭐?” 서로 지나치게 격해져 있던 탓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감정이 안 좋았던 사이인 탓일까? 도리슨 백작은 자신도 모르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버렸다. “지난 과거, 레베카 황후께 백작이 한 일을 보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소만.” “……!” 아차. 도리슨 백작은 내뱉고 나서야 자신이 지나치게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메르키트 백작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진 것이다. 도리슨 백작이 무언가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이건…….” 하지만 그 순간. 철썩! 무언가 날아와 도리슨의 얼굴을 때렸다. 놀라 보니 메르키트가 끼고 있던 하얀 장갑이었다. “……!” 장갑을 본 도리슨 백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메르키트가 싸늘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말 잘했다, 도리슨. 내가 소인배라고? 그러는 넌 얼마나 대단한지 보지.” 그러며 그는 품 안에서 기다란 은색 금속을 꺼내 도리슨에게 겨누었다. 7연발 리볼버였다. “나 메르키트 백작. 도리슨 백작에게 귀족의 명예를 걸고 결투를 신청한다.” “……!” “결투 시기는 지금 당장. 설마 소인배처럼 도망가진 않겠지, 도리슨?” 도리슨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진정하시오, 메르키트 백작. 지금 이 화이트가에서 총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메르키트가 피식 웃었다. “왜 겁나나?” “……!” “결투 방식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하지. 서로 스무 걸음을 걸은 후 사격을 시작하는 것으로. 입회인은…….” 마침 화이트 가를 걸어가던 한 노귀족이 보였다. 랑슬 자작. 문인으로 황제파도, 귀족파도 아닌 명망 높은 노귀족이었다. 입회인으로 딱 적절한 신분. “저 랑슬 자작에게 부탁하면 되겠군.” “……!” “왜? 다시 한 번 묻지만 겁나나? 주둥이만 산 네놈답게 겁나면 사과해도 좋아. 다만 개처럼 무릎 꿇고 하는 사과가 아니면 받지 않겠다.” 결국, 그 말에 도리슨 백작의 얼굴도 싸늘하게 굳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00144 6-1 결투 ========================================================================= 1장 결투 - 2 “지금 그 결정. 후회하게 될 것이오.” “얼마든지.” 그렇게 이른 오전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결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도 귀족파와 황제파의 최고 핵심 인물들끼리.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은 서로 등을 맞대고 화이트가의 한복판에 섰다. “저, 정말 결투를 하시겠습니까?” 강제로 입회인이 된 노귀족, 랑슬 자작이 하얀 얼굴로 물었다. 랑슬 자작은 중립파지만 둘의 결투를 말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정국이 살얼음 같은데, 각 계파의 핵심인물인 둘 중 한 명이라도 다치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투는 귀족의 고유 권한이었다. 그리고 감정 다툼 끝에 서로가 받은 명예 손상이 너무 컸다. 이런 상황에서 물러서면 둘 모두 두고두고 비웃음당할 것이다. “자작은 걱정하지 말고 진행해 주시오.” 둘은 이를 악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기회에 저 재수 없는 녀석을 없애겠다.’ ‘어쩔 수 없다. 차라리 이번에 메르키트 백작을 제거해야지.’ 둘 모두 각 계파의 핵심 인물. 생각지도 못한 결투를 벌이게 되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상대의 목숨을 뺏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합법적으로 상대를 죽일 수 있다면 각자의 계파에 큰 이득일 테니까. 랑슬 자작은 어쩔 수 없이 신호를 내렸고, 둘은 양방향으로 얼굴을 굳힌 채 걸어갔다. 그리고 이윽고 스무 걸음. 찰칵. 찰칵. 권총이 장전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고. 곧바로 돌아선 그들이 서로를 향해 총을 쐈다. 타앙! 타앙! “……!” 첫발은 불발! 그들은 두 번째 발사를 준비했다. ‘한 번에……!’ 도리슨은 이를 악물었다. 생각지도 못한 결투에 휘말렸지만, 질 생각은 없었다. 반드시 귀족파의 핵심 인물인 메르키트를 제거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메르키트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심장을……!’ 다시 타앙! 총성이 울렸고. “커억!” 외마디 비명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메르키트의 안색이 환해졌다. 자신의 총알이 도리슨을 관통한 것이다! 순식간에 도리슨의 배가 시뻘겋게 물들어갔다.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도리슨이 격통을 참으며 다시 총을 겨눈 것이다. 아득해지는 의식을 붙잡으며 정확히 메르키트의 가슴을 향해. “……!” 그리고 그 총구를 본 순간, 메르키트는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급히 총을 들어 다시 도리슨을 겨누려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타앙! 총성이 울렸고. 퍼억! 메르키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아…….’ 메르키트는 도리슨과 다르게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중앙 가슴이 정통으로 관통된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그제야 총소리에 놀라 화이트가의 저택들에서 사람들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미 둘은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였다. 그들이 흘린 피로 화이트가의 도로가 빨갛게 물들었다. “비키시오! 도대체 이게 무슨?!” 마침 저택 안에서 업무를 보던 재상 엘 후작이 사람들을 제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하얗게 얼굴을 굳혔다. “아니, 도리슨. 그리고 메르키트 백작?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옆에 서 있던 노귀족, 랑슬 자작이 허겁지겁 상황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들은 엘 후작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무슨 이 바보 같은! 애들도 아니고!’ 물론 둘의 사이가 원래 안 좋았던 것은 안다. 그리고 말다툼을 하다 명예가 손상된 귀족들끼리 결투를 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고. 하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지! 하필 이렇게 안 좋은 시기에! 그는 급하게 주변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둘 모두 살려야 합니다! 빨리 병원으로 옮길 준비를 해주십시오!” 사람들이 허겁지겁 그들을 마차에 실어 병원으로 옮겼다. 엘 후작이 직접 그들을 따라갔다. 그는 초조히 입술을 깨물었다. ‘둘 모두 살려야 해. 반드시.’ 안 그래도 폭풍 같은 정국이다. 그런데 각 계파의 핵심 인물이 서로의 총을 맞고 사망한다? 어떤 후폭풍이 몰아닥칠지 모른다. 물론 언젠가는 부닥쳐야 할 그들이지만, 이런 식의 예상치 못한 충돌은 황제파도, 귀족파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처를 본 엘 후작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의학에 문외한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상처가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화이트가에 바로 붙어 있는 로즈데일병원에 간 엘 후작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죄송합니다. 이런 상처는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로즈데일병원의 수석교수 카일 준남작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수술을 해도 안 되는 것이오?” “메르키트 백작님은 현재 심장 손상이 의심됩니다. 그리고 도리슨 백작님의 경우도 간이 관통되었습니다. 단순히 위장이 관통된 것이 아니라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하아…….” 엘 후작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이를 어쩐단 말인가? “반드시 살려야 하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촉즉발의 상황인데. 앞으로 론도 정국이 어떻게 될지 막막했다. 그런데 그때, 수석교수 카일이 한 줄기 희망이 담긴 말을 하였다. “그런데 어쩌면…… 불가능할 가능성이 높지만…… 제가 아는 한 의사라면 이런 총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게 누구요?!” 카일은 익숙한 이름을 꺼내었다. “황궁어의 겸 황실십자병원의 수석교수인 레이디 클로랜스입니다.” “……!” “엘리제 자작, 그분이면 이런 총상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레이디 클로랜스. 엘리제 자작. 딸의 이름이었다. *** 그때 엘리제는 린덴과 같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교수실에서 서류를 보며 일하는 중이었는데, 린덴이 찾아왔다. “전하…… 아니, 린덴 무슨 일로?” 웬일이냐는 듯한 물음에 린덴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왜? 오면 안 되는가?” “아니, 그건 아니지만…… 혹시 용무가 있나 해서요.” “그냥 보러 왔다. 보고 싶어서.” 보고 싶어서.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제 익숙해질 법하건만, 저런 직설적인 표현이 꽂힐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저 지금은 할 일이 있는데…… 끝나고 제가 찾아가면 안 될까요?” “일 끝나고 나서 온다고? 어느 세월에? 내가 늙어 죽고 나서야 오겠군. 도대체 우리가 지난번 얼굴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은 하나? 이렇게 내가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얼굴을 구경도 할 수 없으니.” 뭐가 서운한지 린덴은 불퉁불퉁 말했다. 엘리제는 배시시 웃었다. 맨날 바쁜 것은 자신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가 저러니 그냥 왠지 기분이 좋았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 네가 일하는 것은 방해 안 하마. 나도 일할 것 가져왔으니, 서로 같이 일이나 하자.” “정말요? 거짓말 아니에요?” 그녀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그가 이렇게 일이나 같이하자고 찾아온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끝(?)이 좋지 않았다. 밀폐된 공간에 맹수와 단둘이 함께 있으니 예쁜 초식동물이 무슨 일을 당했겠는가. ‘하, 하여튼 정말 밉다니까.’ 이 방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린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납치 사건 이후 변한 것이 있다면, 그의 접근이 거침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무, 물론. 나도 시, 싫은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으니 곤란했다. “오늘은 안 돼요. 재정부에 기획안을 제출해야 한단 말이에요.” 선을 긋는 그녀의 말에 린덴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누가 뭐라고 했느냐? 난 정말 일 하러 온 것이다. 일.” 일이란 단어에 강조를 넣으며 서류를 펼쳐 보여주었다. “알겠어요. 믿을게요.” 그간의 행적을 보면 솔직히 전혀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같이 일이라. 일만 하는 거면 당연히 좋았다. 정말로 린덴은 보란 듯이 응접용 소파에 앉아 서류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얄미운 크리스가 가져다준 일거리였다. ‘크리스, 그놈.’ 그녀의 작은 오빠를 떠올린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예상대로 그 납치 사건이 일어난 후, 그가 자신을 보는 시선이 한결 더 싸늘해졌다. 그나마 이전은 도둑‘님’에 가까웠다면, 지금은 그냥 도둑‘놈’이었다. 유능하지만 않으면 잘라버리는 건데! 누가 그녀의 오빠 아니랄까 봐 너무 유능하니 자르지도 못한다. “…….” 그는 엘리제를 힐끗 바라봤다. 그녀는 백금발을 한 갈래로 묶고 수술복에 가운을 입은 채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전혀 꾸미지 않은 모습.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엘리제. 리제.’ 그는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정말로 같이 일하러 온 것인데, 자꾸 그녀가 신경 쓰여 서류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곁눈질로 엘리제만 바라보다 린덴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 집중은 잘하는군. 나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 건가?’ 자신은 그녀가 의식돼 글자가 하나도 안 들어오건만, 그녀는 전혀 그런 게 없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최상의 집중력! 마치 자신은 먼지가 된 듯한 느낌이다. 의식은커녕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렇단 말이지.’ 왠지 꼬인 마음이 들어 말했다. “엘리제. 리제.” “…….” 하지만 대답도 없다. 집중해서 못 듣는 것이다.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말 혼을 내줘야겠다. 물론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었지만 내 마음이었다. “크흠. 리제. 리제?” “……네? 부르셨어요?”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고개를 드는 엘리제. 린덴은 자신의 소파 옆자리를 두드렸다. “잠시 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쪽으로 와 보도록.” “할 이야기가 있다고요? 거기서 하셔도 되잖아요.” “너무 멀어.” “안 먼데…….” “멀다고. 잘 안 들리니, 옆으로 와라.” 시커먼 속이 훤히 보였다.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붉어졌다. “거, 거짓말하지 마요. 이상한 짓 하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녀도 학습 능력이 있었다. 지금껏 린덴이 찾아왔을 때 저 소파 옆자리에서 그에게 당한 일이 도대체 얼마인가? 떠올리기도 민망했다. 린덴이 얼굴을 구겼다. “이상한 짓이라니. 아니야.” “그래도 싫어요. 일해야 해요.” 결국 그는 작전을 바꿨다. “그러면 이야기는 다음에 하고 차나 타주겠나?” “차요?” “응, 차. 깔끔한 동방 차가 마시고 싶군. 네가 달여 주는.” 엘리제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차만 마실 거죠?” “날 못 믿나?” 그렇게까지 말하니 어쩔 수 없어 그녀는 차를 달여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청량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여기. 뜨거우니 조심히 드세요.” “그래.” 그리고 그녀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차가운 손이 덥석 엘리제의 손목을 잡았다. 흠칫 놀라는 순간, 그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자신의 품으로. “리, 린덴?!” 그녀는 그의 가슴에 풀썩 안겼고, 당황해 고개를 드는 순간. “읍……!”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엘리제는 믿으라면서요! 란 표정을 지었으나 소용없었다. “믿느냐고 물어봤지 키스 안 한다고는 안 했다.” 거짓말쟁이! 하지만 그런 항의는 곧 사그라졌다. 그의 혀가 얽혀 들어가며 정신이 몽롱해진 것이다. “아…….” 그는 탐닉하듯 한참이나 그녀를 괴롭혔다. 엘리제의 몸이 파르르 떨렸고, 눈가에 눈물이 살짝 맺힐 때쯤에야 그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나, 나빠요.” “뭐가?” “이상한 짓 안 한다고 했으면서.” “내가 그랬나? 잘 기억 안 나는데?” 린덴은 피식 웃었다. 왠지 위험해 보이는 그 미소에 그녀는 화들짝 고개를 저었다. “이젠 그만. 절대 안 돼요. 나 일해야 해요.” “일해. 누가 하지 말래?” “이래 놓고 어떻게 일해요!” 린덴은 쿡쿡 웃었다. 이 소녀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왜 이렇게 나를 애타게 할까.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엘리제. 리제.”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여진 반지가 그의 마음을 흡족하게 했다. 나의 소녀. 절대 놔주지 않을 내 것. ‘빨리 결혼해야겠어. 최대한 빨리.’ 뾰로통한 그녀의 이마에 린덴이 가볍게 입맞춤했다. 밖에 나가면 지금 이 시각에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녀와 함께인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잊혔다. 가슴이 벅차 왔다. 그런데 둘이 그렇게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들의 행복을 산산이 부수는 일이 일어났다. “자작님! 큰일 났습니다! 응급 환자입니다!” “……!”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45 6-1 결투 ========================================================================= 1장 결투 - 3 린덴의 품에 안겨 있던 엘리제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무, 무슨 환자인가요?” 동료 의사에게 민망한 모습을 들킨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그런 민망한 마음을 한순간에 날려 버렸다. “권총 결투로 인한 총상 환자입니다! 한 명은 심장 손상이 의심되고, 한 명은 간 손상이 의심됩니다!”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심장 총상! 간 총상! 둘 모두 죽음에 이르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 전하,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엘리제의 다급한 인사에 린덴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떨어지기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환자에게 물불 안 가리는 열정을 보내는 그녀를 사랑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응급 처치는 하고 있는 거죠?” “네, 그레이엄 남작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총 결투라니. 환자들은 누구죠?” 그리고 의사가 한 말은 엘리제는 물론, 린덴의 얼굴도 하얗게 굳게 만들었다. “상원위원장인 메르키트 백작과 재정부 장관 도리슨 백작입니다.” “……!” *** 엘리제는 물론, 린덴도 급하게 구호소로 뛰어 내려갔다. 그만큼 이번 일이 중대한 사태였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무슨 이런 상황에 권총 결투를.’ 린덴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물론 귀족 사회에서 권총 결투야 워낙 흔한 일이기야 하지만. 그래도!’ 사실 일반적인 서대륙 귀족 사회에 대한 상상과 다르게 서대륙 귀족들끼리 결투는 굉장히 일상적인 일이었다. 프러시엔이나 오스트리엔 국의 귀족들 같은 경우엔 조금만 시비가 붙어도 바로 칼부림이 일어났고, 결투로 난 얼굴의 흉터를 영광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 나라의 귀족 젊은이 중엔 일부로 얼굴에 흠집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브리티아는 조금 덜했지만, 역시나 결투가 드물지 않게 벌어지는 편. 그러니 정치적 적대 관계에 있는 이들끼리 사소한 일로 감정을 다투다가 명예를 훼손시켜 결투를 벌이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하필이면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이라니!’ 여러모로 곤란했다. 모두 양 계파의 핵심 인물. 한 명이라도 죽으면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정국은 걷잡을 수 없는 갈등으로 치달을 것이다. ‘아직은 안 돼. 아직은.’ 그리고 그런 상황은 린덴, 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린덴이든 미하일이든 아직은 그런 파국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제길. 다들 나이도 많이 먹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금 참지!’ 그리고 곧 엘리제와 그는 구호소에 도착했다. 워낙 중요한 인물들이어서 그런지, 구호소에는 이미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비켜 주세요! 환자는 어디 있나요?” “레이디 클로랜스!”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구원자를 만난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반겼다. “이쪽입니다!” 엘리제는 그들 사이를 헤쳐 환자에게 다가갔다. 다급한 걸음에 하얀 가운이 펄럭였고, 걸음을 옮기는 그녀의 얼굴에서 린덴에게 뺨을 붉히던 소녀의 모습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철혈의 외과의사!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환자들을 살폈다. 둘 모두 상태가 심각했다. 특히나 안 좋은 것은 가슴에 정통으로 총알을 맞은 메르키트 백작이었다. 시체처럼 변한 안색으로 지금도 피를 흘리고 있는데, 즉사하지 않고 이곳까지 살아서 온 것이 기적으로 여겨졌다. ‘어쩌다 이렇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메르키트 백작은 귀족파 인물 중 그녀에게 가장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뒤에서 이를 갈았을 뿐 아니라, 모두 무위로 돌아갔지만 어떻게든 흠집을 내려 노력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엘리제는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의사로서 환자를 보았다. “두 분 모두 바이탈이 어떤가요?” “안 좋습니다. 우상 복부가 관통돼 간에 심한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도리슨 백작님도 쇼크 상태이고, 메르키트 백작님은 더욱 심각합니다. 수축기 혈압이 고작 60에 불과합니다.” 수축기 혈압 60! 당장에라도 사망할 수 있는 심각한 쇼크 상태다. “혹시 메르키트 백작님의 가슴 엑스레이를 찍었나요?” “네, 여기 있습니다.” 환자를 살피던 그레이엄 남작이 방사선 소견을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엘리제는 그것을 보고 표정이 더욱 굳었다. 심장. 총알이 그 심장 한가운데에 정확히 들어가 있었다. ‘심장 관통상!’ 모든 부상 중 가장 치명적이라는 심장 관통상이었다.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리고 도리슨 백작의 부상도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급하게 상처를 살피니 총알이 간을 기다랗게 찢어발긴 것 같았다. 어쩌면 간 뒤쪽에 대정맥(Inferior vena cava)도 상했을 수도 있다. “어떻습니까? 레이디 클로랜스. 둘 모두…… 살릴 수 있겠습니까?” “…….” 그레이엄이 그렇게 물어보자 웅성거리던 구호소가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그렇다. 제국 최고의 황실십자병원이라지만, 이런 치명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의사는 아무도 없었다. 오로지 희망을 걸 수 있는 의사는 단 한 명. 기적의 천사이자 등불을 든 여인인 레이디 클로랜스! 그녀밖에 없었다. 황태자도, 메르키트의 사고 소식에 급하게 뛰어온 3황자 미하일도, 재상 엘 후작도, 황제파의 인물들도, 귀족파의 인물들도 모두 간절히 그녀의 입만 바라봤다. 그녀가 안 된다고 하면 더는 방법이 없었다. 저들은 죽을 것이다. “…….” 하지만 엘리제는 좀 더 상처를 살필 뿐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이 길어지자 구호소에 있는 인물들은 극도의 초조감을 느꼈다. 누구든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될 인물들이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능해요. 제가 직접 수술하면 두 분 다 치료할 수는 있어요.” “……!” 그 놀라운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부릅떴다. 특히 심장이 다쳤단 말에 거의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던 귀족파의 인물들의 놀라움이 컸다. “저, 정말이야, 리제? 메르키트 백작을 살릴 수 있다고? 심장이 다쳤는데?” 미하일이 물었다. 심장이 다쳤는데, 살릴 수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엘리제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해요. 물론 가능성은 높지 않아요. 하지만 시도해 볼 수는 있어요.” 심장 총상. 일반적인 상식처럼 대부분 즉사한다. 하지만 극히 드물게 살아서 병원까지 이송되는 경우가 있다. 관통 시 심장마비가 일어나지 않은 경우다. 그럴 때엔 심장 수술을 통해 살릴 수 있었다. 다만 그 확률이 굉장히 낮았다. 현대 지구에서조차 사망률 80~90%! 극악할 정도이다. 하지만 시도해 볼 수는 있다. 그리고 어쩌면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역시 레이디 클로랜스! 등불을 든 여인! 감사합니다!” 귀족파 인물들이 눈물을 흘릴 듯 기뻐했다. 믿을 수 없다고 하는 인물은 없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기적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 그녀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것이다. 이전 엘리제를 깎아내려야 한다며 주장하던 사람들도 정신없이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런데 그때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무슨 문제?” 문제란 말에 미하일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메르키트 백작님, 도리스 백작님 모두 바로 수술을 받아야 해요.” “……!”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굳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환자는 두 명. 그리고 그녀의 몸은 하나. 둘 중 한 명밖에 살릴 수 없는 것이다! 구호소에 죽을 듯한 침묵이 깔렸다. 모두 간절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레이디 클로랜스! 제발 부탁합니다! 메르키트 백작님을 살려주십시오!” 시작은 귀족파였다. 나이가 지긋한 한 귀족이 거의 무릎 꿇다시피 고개를 숙이며 그녀에게 외쳤다. 깜짝 놀란 황제파의 귀족들도 그녀에게 매달렸다. “안 됩니다! 도리슨 백작님을 살려주셔야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도리슨 백작님은 황태자 전하께 큰 힘이 될 인물입니다!” “무슨 소리요?! 메르키트 백작님을 살려야 합니다!” 구호소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지체 높은 귀족들이 엘리제에게 매달렸다. 말로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직접 그녀에게 몰려왔다. “무, 물러나십시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의사들이 깜짝 놀라 엘리제를 보호하려 하였으나 소용없었다. 귀족들에게 휩쓸리며 엘리제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어떻게 하지?’ 몸이 하나니, 두 명의 수술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누구를? 도리슨 백작은 사랑하는 린덴의 중요한 인물이고, 메르키트 백작은 소중한 친구 미하일의 중요한 인물이다. 누구를 어떻게 선택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두 개의 외침이 구호소를 갈랐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지금 당장 물러나라!” “그만! 모두 리제에게서 물러나!” 황태자와 3황자였다. 엘리제가 곤란해하는 것을 본 둘이 동시에 고함을 친 것이다. “하, 하지만…… 전하…….” 귀족들이 각자 자신의 주인들을 머뭇거리며 바라봤다. 특히 귀족파 인물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엘리제 자작이 도리슨 백작을 살리는 선택을 할 것으로 생각했다. 당연한 일 아닌가? 그녀는 황태자의 짝이었으니까! 미하일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분노를 담고서. “다시 말하지만 당장 물러나. 그녀를 곤란하게 하지 마. 아니, 번잡하니 아예 구호소 밖으로 나가 있어.” 황태자도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한테서 물러나라. 당장. 그대들도 나가 있어라.” 귀족들이 머뭇거리며 명에 따라 구호소 밖으로 나갔다. 이제 구호소에 남은 인물은 황태자와 미하일과 아버지인 엘 후작뿐. 하지만 그들도 이렇게 말했다. 동시에. “잠시 산책이나 하고 와야겠군.” “나도 나갔다 올게, 리제.” 그들의 말에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들은 자신이 선택에 부담감을 느낄까 봐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다. 자신들은 신경 쓰지 말고, 소신에 따른 선택을 하라고! ‘린덴. 미하일.’ 분명 저들도 간절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단 한 명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중요한 인물을 살려주기를. 하지만 그녀가 부담스러워할까 그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그때, 구호소를 나가며 린덴이 동생에게 물었다. “넌 어딜 가려고?” “나가서 담배나 피우게. 형님도 담배나 피울래?” 미하일이 형에게 답했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담배 끊었다. 너는 원래 안 피우지 않았나?” “형님이 자꾸 나를 핍박하니 가슴이 답답해서 피우게 됐네. 그런데 어떻게 끊었데?” “원래 거의 피우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리제가 하도 걱정을 하며 끊으라고 해서.” 형의 말에 동생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셨어요? 좋겠네.” “너도 끊어라. 건강에 안 좋다고 한다.” “그게 형님이 할 말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담배를 시작했는데?!” 이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둘의 대화를 들으니, 엘리제는 실소가 나오며 왠지 가슴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엘리제.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넌 의사야. 정신 차려.’ 눈을 감았다. 메르키트 백작. 도리슨 백작. 그들의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저 의사로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게 가장 환자들을 위한 선택일지. ‘생각해. 어떤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인지.’ 둘을 동시에 수술할 수는 없다. 그러면 한 명만 살려야 할까? 한 명은 죽게 놔두어야 할까? 사실 답은 그게 맞았다. 정확히는 살릴 확률이 희박한, 심장이 다친 메르키트 백작은 포기하고 조금 더 확률이 높은 도리슨 백작을 수술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어쩌면 살릴 수도 있는 사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선택을 주저하게 했다. ‘정말 방법이 없을까? 둘 모두를 살릴 방법은? 생각해, 엘리제. 시간이 없어. 지금 당장 생각해 내야 해.’ 그리고 그 순간.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46 6-2 양방 수술 ========================================================================= 2장 양방 수술 - 1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어쩌면 둘 모두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결정했어요.” 그녀의 말에 구호소를 나가던 린덴과 미하일이 흠칫 멈췄다. 아버지 엘 후작이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냐, 엘리제?” 엘은 염려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치적 관계에 그녀가 부담을 느끼는 것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엘리제가 짧게 답했다. “메르키트 백작님을 살릴 거예요.” “……!” 그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그녀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서도 의학적으로도 한 명을 고른다면 비교적 살릴 가능성이 높은 도리슨을 치료하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동시에 도리슨 백작님도 살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몸이 하나건만 둘을 한꺼번에 살리겠다니? “수술방을 두 개 열겠어요.” “네?” “메르키트 백작님과 도리슨 백작님의 수술을 동시에 준비해 주세요. 지금 당장.” “……!” 그렇다. 지금 그녀가 하려는 것은 양방 수술. 수술방을 두 개 열고 동시에 수술을 진행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들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몸이 하나인데, 수술을 동시에 시작해서 무엇하겠는가? 어차피 한 명의 수술밖에 못할 텐데.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그레이엄 선생님, 피터 교수님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녀는 이 황실십자병원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최고의 수술 실력을 지녔다고 평해지는 두 교수를 지목했다. 피터 교수는 엘리제가 아니었으면 다음 대의 어의가 되었을 거라 여겨지는 명의였고, 그레이엄 교수도 피나는 노력으로 괄목한 실력의 성장을 이뤄 그녀 다음가는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그레이엄 선생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요. 만약 선생님이 아니라면, 지금 제가 하려는 일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에요.” 그녀의 말에 그레이엄 남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기적 같은 소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모르지만, 자신을 신뢰하는 말이었다. 그게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무엇입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꼭 그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엘리제는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전 상태가 급한 메르키트 백작님을 먼저 수술할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수술을 30분 안에 끝내겠어요.” “……!” 그레이엄의 눈이 커졌다. 심장 총상 수술을 30분 만에? 말도 안 되는 일. 다른 이가 말했으면 미쳤다고 욕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녀는 등불을 든 여인. 빈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안에 메르키트 백작님을 살리고, 도리슨 백작님의 수술방으로 넘어가겠어요. 그러니 그레이엄 선생님께서는 그동안 도리슨 백작님의 배를 열고 기본적인 수술을 진행하고 있어주세요.” “기본적인 수술이라면?” “손실제어수술.” 손실제어수술(Damage control surgery)! 치명적인 외상 환자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하기 전, 기본적인 지혈술 등 당장 생명을 살리기 위한 급한 처치를 뜻한다. “그 손실제어수술을 하고 있어주세요. 그러면 30분 뒤 제가 넘어가 나머지 본격적 수술을 할게요.” “……!” 그레이엄을 비롯한 의사들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기적 같은 실력은 알지만, 심장 수술을 30분 안에 마무리하고 간 손상마저 해결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30분 안에 메르키트 백작을 살린다. 까마득히 어려운 일인 것은 맞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면 애초에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인 것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전 이 두 환자분 모두를 살리고 싶어요. 그리고 가능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바로 시작해 주세요.” 그렇게 의학사에 남을 법한 동시 대수술이 그녀의 손에 진행되었다. *** 곧바로 수술이 시작되었다. 둘 모두 심각한 쇼크 상태. 일분일초도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빨리! 빨리 옮겨주세요!” “네, 교수님!” “수술방에 올라가면서 수액도 계속 주입해 주세요! 준비한 혈액 수혈도 시작해 주시고요.” 병원의 모든 의료진이 이 불가능해 보이는 수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엘리제 자작을 비롯한 피터 교수, 그레이엄 남작, 그리고 제국 최고의 수술 실력을 지닌 의사들이 수술에 참가했다. 그렇게 바야흐로 의학사에 남을 법한 대수술이 시작되려는 순간. 어찌 보면 이 사태의 진정한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두 남자가 수술장에서 벗어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황태자 린덴, 그리고 3황자 미하일이었다. “오랜만이네. 승전 기념식 이후 처음인가? 잘 지냈어?” “그래.” 린덴은 그답게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둘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원래도 친근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고, 서로의 목을 노리고 있는 지금은 더욱 그러하다. 침묵이 어색했는지 미하일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님도 한 대 피울래?” “됐다.” “그래, 그러면 나만 피운다.” 미하일은 담배 연기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그러고 곧 인상을 찌푸렸다. “크. 써. 이런 걸 지금까지 어떻게 피운 거야?” “자주 안 피웠다. 지금은 끊었고.” 린덴은 담배 연기를 맡으니 한 대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하일의 여전히 밝으면서도 무거운 얼굴을 보니 더욱 담배가 당겼다. 하지만 고개를 저었다. 담배를 피우면 그녀가 걱정하니까. 끊기로 약속했으니까. 참았다. “수술 잘되겠지?” 미하일이 물었다. 사실 이런 질문이 우스울 정도로 무모한 수술이었다. 30분 안에 심장 수술을 해내고, 그 뒤 간 손상 환자를 살려내겠다고? 다른 사람이 이야기했으면 미쳤다고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한 이는 그녀. 등불을 든 여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기적을 낳아온. 린덴은 답했다. “아무리 엘리제라도 한계는 있겠지. 이번 수술은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성공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힘든 수술이니. 그래도.” “그래도?” “난 내 그녀를 믿는다.” 내 그녀. 미하일이 그 말에 입술을 삐죽거렸다.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었지만 그 생각만큼은 동감이었다. 자신도 그녀를 믿는다. “그래, 잘되겠지.” “그래.” 그 뒤로 둘 사이의 대화가 사라졌다. 둘은 말없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날이 좋네.” 중얼거린 미하일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꿀꿀해서 피우기 시작했는데, 난 아무래도 담배 체질은 아닌 것 같네. 나도 끊어야겠어.” “…….” “그만 들어가자. 수술이 어떻게 되는지 봐야지.”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하일이 먼저 등을 돌려 휴게실을 나가려 했다. 그런데 미하일이 휴게실의 문을 열려고 할 때, 린덴이 그를 불렀다. “미하일.” “……응?” 린덴이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하일을 바라봤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형님?” “……아니다.” 미하일은 어깨를 으쓱했다. “싱겁긴. 그러면 나가볼게.” “……그래.” 동생이 나간 문을 보고, 린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자신이 포기하지 못하듯, 동생도 포기하지 못한다. 그래, 수없이 생각했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고개를 저은 후 린덴은 수술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수술장에 도착한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그의 소녀는 작은 몸으로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 수술 준비는 신속히 끝났다. 곧바로 메스를 들고 흉부 절개를 시작하려는 순간! 간호사가 비명을 질렀다! “엘리제 교수님! 환자가!” “……!” 메르키트의 백작의 몸이 전기에 맞은 듯 경련하고 있었다!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쇼크에 의한 간질 발작!’ 그녀는 급히 외쳤다. “지금 바로 혈압 확인해 주세요!” “수축기 혈압 40입니다!” 수축기 혈압 40! 거의 사망 직전의 상태였다. 이래서는 30분은커녕 수술을 시작하지도 못한다. ‘빨리 쇼크 먼저 회복시켜야 해!’ 그녀는 재빨리 원인을 파악했다. ‘목 정맥이 팽창한 것을 보면 단순한 과다 출혈에 의한 쇼크는 아니야. 오히려 이런 상태는 심낭 압전!’ 심낭 압전(Cardiac tamponade)! 출혈로 심장 주위에 피가 차 심장을 짓누르는 상태를 말한다. 짓눌린 심장은 펌프 기능을 못해 심각한 쇼크가 온다. ‘빨리 해소해 줘야 해.’ 그녀는 주저 없이 행동했다. “바늘 주세요! 최대한 굵은 걸로요.” “아? 네!” 간호사는 환자가 쇼크인데 왜 갑자기 바늘을 찾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었으나 군말 없이 따랐다. 지금껏 보여준 능력으로 다들 엘리제의 말이라면 아무런 의심 없이 신뢰했다. 굵은, 대못만 한 주사기를 받은 엘리제는 곧바로 찔러 넣었다. 다름 아닌, 가슴의 정중앙! 심장이 위치한 쪽을 향해 칼을 찌르듯. “교, 교수님?!” 어시스트하던 의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심장에 주삿바늘을 찔러 넣다니?! 하지만 엘리제는 멈추지 않고 쭈욱 찔러 넣었다. 푸욱! 피부와 근육이 뚫리는 소리가 울렸다. 꽤 깊이 들어간 것 같은데 그녀는 더욱 바늘을 밀어 넣었다. 그 모습에 모두가 놀라 침을 꿀꺽 삼켰다. ‘도,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심장을 잘못 건들면 사망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심장을 다친 환자가 아닌가? 그녀를 믿지만 너무나 위험해 보이는 시술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모두가 긴장에 얼굴을 굳히고 있는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 쭈우욱. 주삿바늘로 죽은피가 빨려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 근처에 고여 심장을 짓누르던 피였다. 출혈량은 많았다. 주사기로 나온 피만 1리터가 넘었다. “혈압 다시 재주세요.” 심장을 짓누르던 죽은피가 빠져나가며, 심장이 다시 박동하기 시작했다. “네, 교수님! 수축기 혈압 80이에요! 올라갔습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심장 눌림증이 해소되었구나. 일단 다행이야.’ 자칫하면 위험할 수 있는 심낭 천자를 시도한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을 벌었을 뿐이야. 곧 똑같은 쇼크가 올 거야.’ 그리고 다시 쇼크가 오면 그때는 이런 임시방편으로는 살릴 수 없다. 메르키트 백작은 사망할 것이다. 방법은 단 하나. 그 전에 수술을 끝마쳐야 한다. ‘30분이란 시간이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30분이란 시간을 제시한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30분을 넘기면 이 메르키트 백작을 살릴 수 있을 확률은 없다. 그때까지 못 살리면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그 안에 살려야 해.’ 그래도 다행일까? 이런 심장 관통상은 복합적 합병증이 일어나지 않는 한, 수술이 오래 걸리지는 않는다. 다만 수술적 테크닉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고 위험할 뿐이다. ‘가슴을 연 후, 심장을 메스로 째 총알을 꺼내야 하니까.’ 맥동하는 심장을 칼로 째야 한다니. 끔찍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그 순간 환자가 죽을 확률도 엄청나게 높았다. 하지만 살리려면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00147 6-2 양방 수술 ========================================================================= 2장 양방 수술 - 2 ‘내가 살릴 수 있을까?’ 메스로 가슴을 열려는 순간, 그런 의문이 들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포기하고 도리슨 백작을 치료하러 가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괜한 욕심에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곳은 현대 지구가 아니라 심장 수술을 보조하는 도구들도 없었다. ‘현대 지구라면 심장을 멈추는 약을 쓴 후, 심장을 대체하는 기계인 에크모(ECMO)를 돌리며 천천히 진행했겠지만.’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현대 지구에서 그런 도구들의 도움을 받아 수술해도 사망률이 80%가 넘는다. 지금 이 순간은 어떨까? 내가 수술하면 이 환자가 살아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리 높게 봐도 10%도 안 된다. 그래도. 살리고 싶었다. 둘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서 자신에게 온 환자니까. 적지만 살릴 가능성이 있으니까. 물론 과욕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고 싶었다. ‘주여. 도와주소서.’ 그녀는 짧게 기도하고 말했다. “바로 오픈(Open)합니다. 피터 교수님, 준비해 주세요.” “네, 레이디 클로랜스.” 황실십자병원에서 그녀 다음가는 실력자인 피터 교수가 어시스트로 들어와 굳은 얼굴로 답했다. “메스.” 간호사에게 수술칼을 건네받은 그녀는 곧바로 절개를 시작했다. 가슴의 정중앙에서 왼쪽 갈비뼈 사이로 쭈욱 내리그었다. 메스가 지나가며 피부와 그 밑의 피하조직. 그리고 여러 겹으로 겹쳐진 근육들이 쩌억 입을 벌리며 갈라졌다. 울컥 피가 튀었지만, 작은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철제 도구로 갈비뼈 사이 벌려주세요.” 그녀가 낸 길을 따라 미리 준비해둔 철제 도구가 들어왔다. 피터 교수가 도구를 조작해 강력한 힘으로 갈비뼈 사이를 벌렸다. 그러자 드러나는 가슴의 풍경. “……!” 끔찍했다. 심장, 정확히는 우심실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구멍으로 심장이 뛸 때마다 울컥울컥 피가 솟구치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총알이 심장 안으로 파고들었구나.’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총알이 심장벽을 뚫지 못했다면, 그냥 총알을 빼내고 심장벽만 수리하면 됐을 텐데, 안으로 박혀 버린 상태다. ‘총알이 박힌 위치를 보니 피의 흐름을 막고 있어서 가만히 놔둘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심장벽을 메스로 더 째서 총알을 꺼내야 해.’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각오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막막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심장벽을 메스로 절개하겠습니다. 피터 교수님, 준비해 주세요.” “네, 레이디 클로랜스.” “이제 혈압이 계속 떨어질 것입니다. 잘 모니터해 주세요.” 피터 교수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엘리제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메스를 움직였다. 끝없이 박동하고 있는 심장, 우심실에 구멍이 뚫린 부위부터 위의 방향으로. 찌익. 절개 길이는 길지 않았다. 그저 기다란 철제 도구를 집어넣을 수 있고, 총알을 꺼낼 수 있을 정도의 크기.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양의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컥. 울컥. 수술 필드가 순식간에 피로 뒤덮였고, 엘리제의 수술복도 피에 흠뻑 젖었다. “혈압 떨어집니다! 수축기 혈압 70!” 혈압을 모니터하던 간호사가 외쳤다. 하지만 간호사의 외침이 아니어도 혈압이 떨어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갑작스러운 저혈량 충격에 심장의 맥동하는 힘이 약해진 것이다. 금방이라도 빛이 꺼질 것처럼 심장의 힘이 떨어졌다. ‘10분! 아니, 5분 안에 총알을 꺼내고 심장벽도 수리해야 해!’ 5분도 길었다.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었다! 언제, 어느 순간 심장마비가 와 사망할지 모른다. “피터 교수님! 거즈로 피를 닦아 시야를 확보해 주세요!” “네!” 그러고 엘리제는 기다란 철제 집게 도구를 집어 들었다. 철컥. 집게의 잠금을 풀고 절개한 구멍으로 조심히 밀어 넣었다. ‘제발……!’ 총알이 심장 정확히 어디에 박혀 있는지는 모른다. 심장 안에는 피가 가득 차 있어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엑스레이는 대략적인 위치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오로지 짐작만으로 위치를 캐치해 꺼내야 한다.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장은 움직이는 기관. 더구나 빈방을 뒤지듯 아무렇게나 헤집으면 심장 전류 시스템을 건드려 치명적 부정맥이 와 곧바로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심방으로 향한 삼첨판막 쪽!’ 그녀는 조심히 집게를 움직였다. 하지만 없었다.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교수님, 혈압 더 떨어져요! 60입니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득하게 급한 상황이었지만 침착하려 애썼다. ‘아직 괜찮아. 할 수 있어, 엘리제.’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그녀의 얼굴에도 튀었다. 백금발이 붉은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수도 없었다. 그녀는 다시 철제 집게를 움직였다. 그리고 판막 옆으로 이동한 순간. 딸각! 집게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총알을 발견한 것이다! “……!” 엘리제의 표정에 일순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곧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그녀는 얼굴을 굳혔다. ‘이런. 코흐 삼각형 쪽이야!’ 코흐 삼각형(Koch triangle). 심장을 움직이는 전류계의 중요한 지점인 방실 결절(AV node)이 있는 곳이다. ‘급하게 잘못 빼내다가는 그대로 심장 전류 이상인 부정맥이 올 수도 있어. 그러면 곧바로 사망이야.’ 간호사가 다시 혈압을 알렸다. “교수님, 혈압 50입니다!” 그 순간, 엘리제는 손을 움직였다. 아무리 철혈의 그녀라도 이런 상황에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차분히,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총알의 제거를 시작했다. 제발 심장의 전류 시스템을 건들지 않도록 기원하며. ‘주여, 제발.’ 찰칵. 철제 집게가 총알을 물었다. 다행히 구경이 큰 총알이 아니라 집게에 무리 없이 물렸다. 그리고 조심히, 최대한 심장을 건들지 않도록 노력하며 총알을 뒤로 빼내었다. 수술실 모두가, 린덴도 미하일도 숨을 삼키고 그 모습을 지켜봤다. 그리고……! 피에 젖은 철제 집게가 모습을 드러냈다. 집게의 끝에는 얇은 총알이 물려 있었다. “아아……! 신이여!” 모두가 탄성을 터뜨렸다. 저 등불을 든 여인이 다시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부정맥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감탄하고 있을 때, 엘리제가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집중해 주세요!” “네, 교수님!” 그렇다. 고작 총알을 꺼냈을 뿐이다. 이제 가장 중요한 심장벽 수리를 해야 한다. “수술실 주세요.” 엘리제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심장벽을 보수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실로 찢어진 부위를 다시 잇는 것이다. 하지만 그 테크닉의 난이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심장은 움직이는 기관이다. 그냥 얌전히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좌우심방, 좌우심실이 유기적인 흐름에 따라 비틀며 박동한다. 더구나 피도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갈기갈기 찢어진 근육을 외심막, 심근, 내심막의 층을 맞춰 꿰매야 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 극악한 난이도의 봉합을 지극히 짧은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 환자가 사망하기 전에. 제국, 아니, 전 세계를 통틀어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 해.’ 그녀는 손을 움직였다. 피터 교수가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피를 닦아냈지만, 당연히 닦아내도 끝없이 피가 쏟아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엘리제는 마치 눈을 감고 봉합을 하듯, 오로지 감각,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손을 움직였다. “…….” 수술장 안에 죽을 듯한 침묵이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혈압이 떨어졌지만, 간호사는 입을 다물었다. 이 순간 혈압을 알리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미 그녀가 조처할 방법도 없었다. 어차피 엘리제도 손으로 심장의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마비가 코앞이었다. 그리고 심장마비가 일어나면 환자는 죽는다. 방법은 단 하나. 그녀가 성공적으로 봉합을 마쳐야 했다. 그리고 그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지나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시간이 끝난 후. 드디어 봉합이 끝났다! “……!” 피터 교수는 눈을 부릅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어시스트 의사도, 간호사도,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수술 필드를, 정확히는 메르키트 백작의 심장을 바라봤다. 멈췄다. 심장의 벽이 깨끗하게 봉합되며 피가 멈춘 것이다! 모두가 엘리제를 바라봤다. 저 작은 소녀가 또다시 믿을 수 없는 일을 일으켰다. “하아.” 엘리제는 힘든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레, 레이디 클로랜스…….” 피터 교수가 경악과 경탄으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그들의 안도가 너무 빨랐던 것일까? 봉합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끔찍한 일이 일어나 버렸다. “교, 교수님! 시, 심장이! 심장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 엘리제가 급하게 눈을 떴다. 그리고 정지해 있는 메르키트 백작의 심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 엘리제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뇌리가 하얗게 비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심장마비가 일어난 것이다! “레이디 클로랜스…….” 피터 교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수술장 모두가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 모두가 포기하고 넋을 놓은 그 순간! 엘리제가 움직였다. 수술대 위로 올라가더니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여 심장 마사지를 시작한 것이다! “교, 교수님?” “아직 안 끝났어요! 아예 심장이 사망한 게 아니라, 저혈량 충격에 의한 일시적인 심근 기절일 수도 있어요! 빨리 최대한 수액 공급을 더 해주세요!” “……!” 그러며 그녀는 온몸으로 심장을 압박했다. 열려 있는 심장에 직접! 심폐소생술 중 개흉 심장 직접 압박(open chest cardiac massage)이었다. ‘조금만! 조금만! 심근 기절이야. 저혈량 쇼크만 회복시키면 살릴 수 있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린 체구가 안쓰러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피 묻은 얼굴에 안타까운 땀이 맺혔다. “빨리 수액 주입해! 빨리! 수혈도 더 해!” 그렇게 그녀가 안간힘을 다해 메르키트 백작의 생명을 연장하는 사이 다른 의사들이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후. 두근. 두근. 메르키트 백작의 심장이 다시 맥동하기 시작했다. 약하지만 확실히! “움직인다!” “살았어! 살렸다고!” 수술장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엘리제는. ‘아……!’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이대로 환자를 잃는 줄 알았다. ‘힘들어.’ 수술대에서 내려온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수술은 그녀로서도 정말 힘든 수술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극도로 긴장해서 그런지 괴로울 정도로 힘들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운을 내자, 엘리제.’ 다시 맥동하는 심장을 보자 긴장이 한 번에 풀리며 다리가 후들거렸다. 당장 주저앉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곧바로 도리슨 백작에게 가서 두 번째 수술을 진행해야 했다. “피터 교수님.” “네, 레이디 클로랜스!” 기적 같은 일을 해낸 그녀에게 피터 교수가 존경을 담아 답했다. 오늘 목격한 수술은 그의 일평생 기억으로 간직하며, 이상향으로 삼을 것이다. “뒤의 처치를 부탁해도 될까요? 두 번째 수술을 진행해야 해서요.” “맡겨만 주십시오.” “네, 감사해요. 아직 저혈량 쇼크가 회복된 것이 아니니, 추가적인 수액처치와 수혈로 혈압도 회복시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을 나가려는데,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이디 클로랜스!” 의사들이 깜짝 놀라 그녀를 불렀다. 그러나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긴장해 그랬던 것 같다. ‘정신 차려, 엘리제. 아직 수술은 끝나지 않았어.’ 엘리제는 피에 젖은 장갑을 벗고 새로운 장갑을 끼며 생각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48 6-2 양방 수술 ========================================================================= 2장 양방 수술 - 3 피에 젖은 것은 장갑뿐이 아니었다. 수술복, 팔, 다리, 심지어 얼굴까지 피에 범벅이었다. 몸에 묻은 피를 닦고, 수술복을 갈아입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곧바로 도리슨 백작을 치료해야 했다. ‘하아.’ 한숨을 삼키고 옆의 수술방으로 가려는데, 낮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리제.” “……!” 황태자 린덴이었다. 지금껏 밖에서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그녀를 부른 것이다. 그런데 그의 눈빛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안타까움이 담긴 가라앉은 눈빛이었다. ‘엘리제.’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그녀가 수술하는 것을 직접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럴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자신의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수술하는 모습을 목격한 그는 안쓰러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녀가 무리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듯 속상했다. “전하?”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그가 다가왔다. 그리고……. 꽈악.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저, 전하? 피가?” 엘리제는 당황해 그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 보는 것보다 자신의 몸에 젖은 피가 그에게 묻을까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린덴은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너무…… 무리하지 말아라.” “……!” “네가 힘들면…… 내가 속상하니.” 그 진심 어린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네…… 전하. 린덴.” 그녀는 잠시. 정말 잠시 그의 품을 느꼈다. 가슴이 따뜻해지며 힘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의 몸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저 다녀올게요.” “…….” “나중에 메르키트 백작님한테 맛있는 거라도 얻어먹어야 할 것 같아요. 이번 수술은 너무 힘들었어요.” 그녀의 농담 섞인 말에 린덴이 고개를 저었다. “저놈 말고 내가 사줄게. 뭐 먹고 싶어? 단 음식? 딸기 케이크? 바싹 익힌 스테이크 요리?” “음…… 딸기 케이크 말고 다른 거요.” 린덴은 그 거절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딸기 케이크를 거절하는 것은 처음이다. “딸기 케이크도 좋지만 이번에는 다른 음식 먹어요.” “어떤?” “맨날 제가 좋아하는 것만 먹었으니, 이번엔 린덴이 좋아하는 것으로 먹어요.” 그 말에 린덴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네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니까.” “치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쨌든 절대 무리하지 마라.” 린덴은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맞추었다. 엘리제는 그에게서 떨어진 후, 옆의 수술방으로 걸어갔다. 두 번째 수술. 도리슨 백작의 간 총상을 치료하기 위해. ‘조금만 더 힘내자, 엘리제. 할 수 있어.’ 그리고 작은 소녀, 외과의사는 굳은 얼굴로 수술방의 문을 열었다. “레이디 클로랜스!” 기다리고 있었는지 방의 모두가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엘리제는 도리슨 백작의 상태를 살폈다. “현재 바이탈은 어떤가요?” “수축기 혈압 107. 맥박은 130회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생각보다 훨씬 괜찮았다. 아까 전보다 호전된 상태인 것이다. ‘그레이엄 선생님.’ 그녀는 수술 필드 가운데에서 지혈에 열중인 그레이엄 남작을 바라봤다. 아마 그가 해낸 일일 것이다. 그레이엄도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셨습니까, 레이디 클로랜스?” “네, 선생님. 쉽지 않으셨을 텐데 감사해요.” 그 말에 그레이엄이 까칠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저도 이래 봬도 젊은 천재라 불리는 명의입니다. 이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엘리제도 마주 웃었다. 그녀는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수술 장갑을 주세요.” “네, 교수님.” 찌익. 새롭게 장갑을 낀 그녀는 수술 필드 앞에 다가갔다. 이미 그레이엄이 배를 열어놓아 커다란 간이 붉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철제 집게 주세요. 바로 수술 이어서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녀의 두 번째 싸움이 시작되었다. *** 방금 극악한 난이도의 심장 수술을 마친 탓일까, 아니면 그레이엄 남작의 전 처치가 훌륭해서일까? 심각한 정도의 간 손상이었지만 엘리제는 한결 편안한 느낌을 받으며 수술을 진행했다. “간십이지장 인대에 접근합니다. 시야 확보해 주세요.” “네, 교수님.” 다른 어시스트 의사가 창자를 당겨 시야를 밝혔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것은 프링글 조작(Pringle Maneuver)! 간으로 향하는 간 동맥, 문맥 정맥을 차단해 버리는 것이다. 그레이엄이 간을 손으로 당기며 그녀의 조작을 도왔다. 엘리제는 고맙다는 시선을 보낸 후 철제 집게를 움직였다. “차단합니다.” 찰칵! 금속성이 울리며 철제 집게가 간 동맥, 문맥 정맥을 단단히 물었다. “이렇게 하면 간으로 향하는 혈류가 차단되는 것입니까?” 그레이엄의 감탄이 섞인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한 간 출혈 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하면 간에 피가 부족해 간 손상이 올 수 있으니, 오랫동안 사용하는 것은 피해야 해요.” “그러면?” “앞으로 최대한 빨리 수술을 끝내야 하죠.” 늘 그렇듯, 출혈 환자의 수술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환자가 저혈량 쇼크로 사망하기 전에 지혈을 완료해야 하니까. “세임 선생님은 거즈로 출혈 부위를 패킹해 주세요. 그레이엄 선생님은 한 손으로 대동맥에서 간으로 향하는 혈관이 나오는 부위 위쪽을 지긋이 압박해 주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을 따르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울컥울컥 쏟아지던 피의 상당 부분이 멈춘 것이다. 간의 해부학적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 조처 덕분이었다. ‘이제 총알을 꺼내고.’ 엘리제는 간 아랫부분에 박혀 있는 총알을 바라봤다. 메르키트 백작의 심장에 박혀 있던 총알보다 구경이 더 컸다. 만약 이 정도 구경의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면 메르키트 백작은 병원에 오기도 전에 즉사했을 것이다. ‘그래도 심각한 손상이긴 하지만, 다행히도 간을 절제해 내야 할 정도는 아니야. 문제는 총알이 박히며 생긴 동맥 손상들인데.’ 그 동맥 손상을 치료하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었다. 엘리제는 굳은 표정으로 총알을 조심히 간에서 빼내었다. 짱! 미리 준비해 둔 철제 그릇에 총알을 떨어뜨렸다. 금속성이 수술장을 울리는 순간. 울컥. 다시 피가 솟구쳐 올랐다. 관통면에서 절단된 동맥들이 노출되며 출혈이 시작된 것이다! ‘침착하게.’ 순식간에 수술 필드가 피로 차오를 만큼 많은 양의 출혈이었지만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거즈로 피를 닦아 달라 부탁한 후 차분히 손을 움직였다. “지혈용 철제 집게. 최대한 많이. 그리고 수술실도 준비해 주세요.” 찰칵! 찰칵! 찰칵! 그녀는 일단 지혈용 소형 철제 집게로 혈관들을 집었다. 집게가 혈관을 단단히 물자, 절단면이 입을 다물며 피가 멈추었다.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출혈을 멈추게 한 그녀는 한 손으로 수술용 실을 들었다. 그리고 손가락이 춤을 추었다. “원 핸드 타이.” 그 손가락의 움직임에 어시스트하던 의사가 감탄성을 토했다. 실로 혈관을 묶어 지혈하는 기법인 타이. 그녀의 손가락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그야말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타이였다. 그 절제되고 정확한 움직임은 아름답다 느껴질 정도. 질끈. 잘린 동맥이 실에 묶였다. 그녀는 차분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타이. 그리고 힘을 잃는 동맥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 총알이 박혔던 관통면은 완벽히 지혈되었다. ‘이제 마지막. 하대정맥 손상만 치료하면 돼.’ 그녀는 가장 어려운 간 뒷부분에 위치한 하대정맥을 바라봤다. 하대정맥(Inferior Vena Cava). 인체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대동맥과 더불어 가장 큰 혈관 중 하나이다. 총알이 깊게 뚫고 가며, 그 하대정맥에도 상처가 났다.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그레이엄이 물었다. 천재라 불리는 그이지만, 저 대정맥의 손상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엘리제는 짧게 답했다. “간단해요. 꿰매면 돼요.” “혈관을…… 말입니까?” 그레이엄은 놀라 물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조금 전에는 심장도 꿰맸다. 그리고 과거 지구에서는 현미경을 보며 미세 혈관도 잇던 그녀였다. 저런 커다란 대정맥쯤 꿰매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하지만 그레이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 시대 의사들에게 혈관을 수리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군요.” 그는 그녀를 마음속으로 연모하고 있다. 밝힐 수 없는, 괴로운 짝사랑이었다. 그래서 한 다짐이 있다. 한 남자로서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의학적 실력으로라도 그녀를 옆에서 도와주겠노라고. 그런 마음으로 노력하고, 또 노력해 왔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는 닿을 수 없는 하늘과도 같아 좌절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 엘리제가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도 하실 수 있으세요.” “제가…… 말입니까?” “네, 안 해보셔서 그렇지. 선생님의 실력이시면 충분히 하실 수 있으세요.” “……!” “이번에 제가 하는 것 보시고 다음에 해보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엘리제는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레이엄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어차피 앞으로는 지금처럼 내가 중환자 수술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그레이엄 선생님이 뒤를 이어주셨으면 좋겠어.’ 그녀는 황후가 될 것이다. 황후가 되면 지금처럼 병원에 매여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마 지금의 반의반도 병원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전에 그녀는 이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에게 가능한 많은 것을 전달할 생각이었다. 특히 저 노력하는 천재 그레이엄 선생님은 자신의 뒤를 이을 천재라 여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레이엄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녀의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가슴이 먹먹했다. 이게 그가 아픈 마음을 안고, 그녀 곁에 머물러 있는 이유였다. “그러면 봉합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은 다시 수술에 몰두했다. 봉합용 철제 집게에 얇은 실을 끼운 엘리제는 대정맥을 한 땀 한 땀 꿰매기 시작했고, 그레이엄은 그녀의 손동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하며 지켜봤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고, 이윽고. 타악. 그녀는 지혈용 도구를 수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무리하겠습니다.” 길고 길었던 수술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메르키르 백작과 도리슨 백작, 둘 모두를 아무런 문제 없이 살려낸 것이다! “수고하셨습니다!” 또 한 번의 기적을 일으킨 작은 소녀에게 수술장 모두가 존경을 담아 외쳤다. 엘리제는 장갑을 벗으며 힘겨운 미소를 지었다. 참 힘든 수술이었다. 그렇게 의학사에 한 획을 그은 또 하나의 대수술이. 그리고 터질 것 같은 론도 정국에 큰 영향을 끼친 수술이 마무리되었다. ============================ 작품 후기 ============================ 주말은 쉽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00149 6-4 부자(父子) ========================================================================= 4장 부자(父子) - 1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이 살아났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장 총상과 간 총상을 입은 환자를 동시에 살려내다니. 특히 심장 총상을 치료한 것은 가히 기적과도 같이 여겨졌다. 이 시대에 심장이 다친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니, 현대 지구에서조차 심장 부상을 치료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메르키트 백작과 도리슨 백작의 수술은 각각 학회에 보고되었고, 제국 의학계는 물론 공화국, 프러시엔, 오스트리엔 등 서대륙 전체 의학계를 경악으로 빠뜨렸다. 단 하나의 수술만 해도 의학사에 기록될 수술이었는데, 그런 대수술을 한 번에 해내다니! “레이디 클로랜스? 엘리제 자작? 여자인가?” “왜? 알지 않나? 크림반도의 등불을 든 여인, 그녀야. 브리티아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아……! 정말 대단하군.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런 수술을. 완전 기적이 아닌가?” 브리티아, 프랑소엔, 프러시엔 등 서대륙 전체 의학계가 그녀의 수술에 경악하며 감탄했다. 원래부터 제국 최고의 의사로 여겨지던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드높였고, 서대륙 전체에 그녀의 이름이 각인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감탄하고 칭송한 것은 의학계뿐이 아니었다. 론도의 귀족들. 그들도 그녀를 칭송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처구니없는 결투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빠질 뻔한 정국을 안정시킨 것이다. 물론 곧 충돌할 서로였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뜻하지 않은 파국은 아무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기적 같은 수술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론도 정국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을 정도였다. 특히 귀족파의 인물들은 감탄을 넘어서 감동에 가까운 감사를 느꼈다. 자신들은 정적이라 적대하던 그녀가 메르키트 백작을 살려낸 것이다. 사실 당시 상황을 봤을 때 그녀가 메르키트 백작을 포기했어도 아무도 비난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 그만큼 심각한 상처였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오로지 환자를 살리겠다는 의사의 마음으로 큰 무리를 하면서까지 그를 살려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그녀를 적대하고 있었다지만 그런 그녀의 마음에 인간적인 감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레이디 클로랜스에게는…… 정말 감사하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녀가 아니면 메르키트 백작은 어떻게 되었을지.” 중책을 맡고 있으면서도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결투라는 크나큰 실수를 한 메르키트였지만, 그는 차일드 가문과 더불어 귀족파의 중심이었다. 만약 그가 죽었으면 어떤 폭풍이 몰아닥쳤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런 감사의 마음이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닌 메르키트 백작 본인이었다. “백작님, 가슴의 통증은 어떤가요?” “……괜찮소이다.” “숨이 차거나 어지럽거나 하는 증상은 없나요?” “……좋아졌소이다.” “다행이네요. 혹시나 다른 불편한 증상은 없나요?” 메르키트는 하얀 가운을 입고 친절하게 증상을 체크하는 백금발의 소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날 살려준 것이지…….’ 수술 후 의식을 차린 메르키트는 혼란에 빠졌다. 일단 자신이 살아났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을 살린 것이 엘리제 자작이란 것에 더 놀랐다. 그리고 자신을 치료한 과정을 듣고는 놀람을 넘어 경악했다. 어째서? 어째서 그런 무리를 하면서까지 자신을 살린 것인가? 자신은 그녀의 적인데. 그녀를 헐뜯으려고 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주군인 3황자의 만류만 없었으면 그녀에게 수작을 부렸을지도 모른다. ‘나였으면 그냥 죽게 놔뒀을 텐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 물어보니 소녀는 별 고민 없이 답했다. “환자를 살리는 데 의사에게 특별한 이유가 필요한가요.” “…….”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백작님께서도 이곳에서는 다른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몸을 회복하는 데만 집중하세요. 불편한 것 있으면 저한테 말씀 주시고요.” 그 친절한 말에는 아무리 옹고집 메르키트라도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귀족파에는 그녀에게 치료를 받은 이가 꽤 있었다. 본인이 받든 가족이 받든 말이다. 그들이 왜 레이디 클로랜스만큼은 정치적 이해와 상관없는 성역이라고, 무슨 일이 있어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존중해야 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성녀.’ 낯 뜨거운 단어였지만 메르키트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를 중얼거렸다. 사실 그녀만큼 성녀, 세인트(Saint)란 단어가 어울리는 이도 없었다. 고귀한 몸으로 구제 병원에서 빈민을 위해 일했고, 론도를 대역병에서 구했으며, 크림반도에서는 병사들과 함께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예비 황태자비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성녀란 칭호를 받지 못한다면, 누가 그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까? ‘그래, 다른 사람들의 말이 맞았구나. 이 소녀는 정치적인 눈으로 바라볼 존재가 아니야.’ 귀족파든 황제파든. 이 소녀는 그런 이기적인 관계로 엮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메르키트는 지금껏 자신이 그녀를 어떻게든 헐뜯으려 했던 것이 미안하고 후회되었다. 고작 정치적인 목적으로 폄훼할 소녀가 아닌데. ‘황태자는 복도 많군. 이런 소녀를 황태자비로 맞게 되다니.’ 그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저 소녀가 미하일의 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레이디 클로랜스.” 방을 나가는 엘리제를 메르키트가 불렀다. “네, 백작님? 혹시 불편한 증상이라도?” “……감사하오.” “……!” 엘리제는 살짝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을 적대하던 그에게 이런 직접적인 감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아닙니다, 백작님.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이 감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뭐라도 은혜를 갚고 싶구려.” “괜찮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내 마음이 불편해서 감사의 선물이라도 하고 싶소. 혹시 나에게 부탁할 일은 없소? 정치적 입장 차이가 있어 큰 부탁은 들어주지 못하겠지만…….”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원래 옹고집인 메르키트 백작은 완강했고, 결국 그녀는 말했다. “딸기 케이크요.” “……딸…… 뭐요?” “딸기 케이크요.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거예요.” 메르키트는 메기 같은 얼굴로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 들은 줄 알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웃으며 말했다. “퇴원하고 다음에 입궁하실 일이 있을 때 카린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를 사다 주세요. 최근 론도에서 가장 맛있는 케이크 집이에요.” 그 말에 메르키트는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딸기 케이크라니. 자신의 심장을 살려낸 외과의사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너무나 소녀 같은 단어가 아닌가? “알았소. 카린 베이커리면 되겠소? 윈던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도 맛있는데 그건 어떻소?” “윈던 베이커리요?” 엘리제는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윈던 베이커리는 카린 베이커리와 맞먹는 전통의 딸기 케이크 강자였다. 그런데 귀족가 영애나 알 내용을 메르키트 백작이 어떻게 알고 있지? 메르키트는 얕게 웃었다. “얼마 전 웨일 지방으로 시집간 딸이 가장 좋아하던 베이커리요. 나도 먹어봤는데 아주 달달한 게 맛있더구려. 단 음식 좋아하오?” “좋아해요!” 달달, 이란 단어에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가, 곧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나도 모르게…… 단 음식 너무 좋아해서…….” 메르키트는 큭큭 웃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이 소녀를 대상으로 무슨 생각을 해왔던 것이지. “퇴원하면 바로 사다 주겠소. 카린, 윈던 베이커리의 딸기 케이크 모두다.” “네, 감사해요.” 그러고 엘리제가 정말로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 메르키트가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 “……?” “그냥 듣기만 하시오. 나중에 혹시…… 혹시라도 나에게 무언가 부탁할 일이 있으면 말하시오. 물론 내 입장이란 게 있으니, 큰 부탁은 못 들어드리오. 하지만 우리 계파와 주군인 3황자 전하에게 위해가 가지 않는다면 가급적 들어주려 노력하겠소.” 엘리제는 백작을 돌아보았다. 메르키트는 무거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저 빈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엘리제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오.” 그러고 그녀는 방을 나섰다. 방금 메르키트가 한 약속이 앞으로 폭풍처럼 변할 론도 정국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 누구도. *** 그렇게 다소 어처구니없었던 결투 사건은 막을 내렸다.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경솔하게 행동했던 두 사람에게 황태자와 3황자는 큰 꾸지람을 내렸다. 둘 모두, 특히 순간의 분노를 못 이겨 천추의 한을 남길 뻔한 메르키트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지금 상황에서 본격적인 충돌은 서로 원하지 않는 바이기에 서로에게 사과 서신을 보내는 것으로 일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론도 정국은 다소 안정을 찾는 듯했다. 결투 사건 이후로 서로 눈에 띄는 마찰을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황태자든 3황자든 드러나지 않게 각자의 싸움을 준비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목에 확실한 비수를 꽂아놓을 수 있게. 그렇게 불편한 고요가, 그리고 폭풍 전야의 시간이 흘러갔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고. 그리고 고대하고 고대했던 황태자와 레이디 클로랜스의 약혼식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커다란 사건이 일어났다. 황제 민체스터가 쓰러진 것이다. *** 사건은 외교 정책을 정하는 회의 때 일어났다. 기력이 갈수록 쇠약해지며 대부분의 정무를 린덴에게 맡긴 민체스터는 가급적 몸에 무리가 가는 활동은 삼가고 있었다. 다만 이번 정책 회의는 최근 프랑소엔 공화국에서 일어난 쿠데타에 따른 대외정책을 정하는 중요한 회의였기에 참석하였다. “이번 쿠데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시몬 니콜라스가 암살당하면서 지금 공화국의 수도인 파리스는 복마전 그 자체라고 합니다. 은밀히 지원하면 원하는 인물을 총통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봅니다.” “하지만 그러면 타국의 정치에 개입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 우리 브리티아에 친화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을 총통으로 세울 수 있으면 그런 비난을 감수할 만하지요. 다른 나라도 아닌 프랑소엔 공화국이니까요.” 프랑소엔은 서대륙 전통의 강국이었다. 섬나라 브리티아가 삼류 국가 취급을 받을 때도 당당히 서대륙 최강국 중 하나로 군림하던 나라. 지금도 브리티아 제국과 더불어 전 세계를 아우르는 최강국 중 하나였다. 그런 프랑소엔 공화국을 대하는 외교 정책을 정하는 자리인지라, 회의는 쉽게 끝나지 않았다. 서로 전문적인 근거를 토대로 의견을 나누었다. “그래, 다들 이야기는 잘 들었네.” 민체스터는 외교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닌 것 같군. 지금 결정에 따라 앞으로 공화국을 대하는 우리 태도가 결정될 테니까.” 그러며 그는 황태자 린덴을 돌아보았다. “이 결정은 너에게 맡기마. 내 대가 아닌, 네 대에 영향을 미칠 결정이니까. “……!” 린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바마마. 그런 말씀은…….” 내 대(代)가 아닌, 네 대. 지금 민체스터는 본인의 뒤를 생각하고, 나라를 물려받을 다음 대의 황제 린덴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조금씩 권력을 이양받고 있지만, 아버지에게 직접 듣는 그 말은 린덴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했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표정을 짓느냐. 사람마다 다 때가 있는 것이거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곧 쾌차하실 것입니다.” 화내듯 정색하는 아들에게 민체스터는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래. 내가 말실수했구나. 물론 내 건강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야 주님만이 아시는 일이긴 하지. 이러다 다시 좋아질 수도 있고 말이야.” “아바마마…….” “그래도 이 결정은 네가 하려무나. 내가 당장 어떻게 되지 않는다고 해도, 네 대에 영향을 끼칠 정책인 것은 맞으니까.” 그러며 민체스터는 조언했다. “나야 시몬 니콜라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총으로 공화국을 대했지만, 너까지 꼭 그럴 필요는 없단다.” “…….” “중요한 것은 시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이야. 그러면 어떤 선택을 하든 크게 후회하지 않을 거다.” 섬기기 위해 지배한다(Governance for serving). 황제의 권위는 신민들을 위하는 마음으로부터. 민체스터는 잔잔한 목소리로 로마노프 황가의 제왕학을 언급했다. 그가 일평생을 따른 통치 철학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0 6-4 부자(父子) ========================================================================= 4장 부자(父子) - 2 “뭐, 너야.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잘하겠지.” 민체스터는 아들을 믿었다. 그가 사랑하는 똑똑한 아들은 이 브리티아 제국을 자신 이상으로 번영의 길로 이끌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남긴 씨앗으로 인해 일어날 비극이었다. ‘내가 조금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민체스터는 속으로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린덴의 가슴을 찢어놨던 혈탑의 비극은 결국 자신의 원죄 때문이었다. 당시 그가 조금만 더 성숙하게 행동했더라면 그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지 않았을까? 그게 그는 일평생 후회스러웠다. 더구나 그때 죄악의 씨앗이 다시금 또 다른 비극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말릴 방법이 없었다. 린덴, 저 아이는 일평생 품어온 원한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미하일, 그 아이도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는 결국 파국으로 끝날 것이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하루에도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답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편을 들어주는 것은 가능하겠지.’ 황태자 린덴의 편을 들어 귀족파를 모조리 쳐 낸다? 물론 그러면 정권 다툼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또 다른 소중한 아들 미하일의 죽음과 귀족파의 몰락을 뜻한다. 또 귀족파는 황제인 자신에게 눈엣가시 같은 지긋지긋한 존재이긴 하지만, 사회의 암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의 역할이 있었다. 황제파 귀족들이 도시 귀족과 신흥 부르주아들을 대표하는 세력이라면, 귀족파 귀족들은 전통의 지방 봉건 지주들을 대표하는 세력인 것이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 끝없이 부닥치지만, 귀족파든 황제파든 모두 브리티아의 귀족이었다. 즉, 단순히 마음에 안 든다고 목을 칠 존재들은 아니었다. ‘하아, 괴롭군.’ 속으로 한숨을 내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난 일어나 보겠네. 머리가 어지럽군.” 황태자를 비롯한 대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밴트 경과 같이 돌아갈 테니 자네들은 굳이 마중할 필요 없네. 계속 사안을 논하게.” 그런데 그렇게 그가 손을 내젓는 순간이었다. 민체스터는 갑자기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 그가 갑자기 떨리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린덴이 놀라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아바마마?! 갑자기? 괜찮으십니까?” “괜…… 찮다.” 하지만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민체스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리고 온몸에서 힘이 빠지더니 풀썩 쓰러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여봐라!” 대신들도 깜짝 놀라 소리쳤다. “어의를 불러라! 빨리!” 마침 회의실 밖에는 의사가 대기 중이었다. 바로 제국 최고의 의사라는 레이디 클로랜스가! 최근 민체스터의 건강이 악화하며 어의인 그녀는 전임 어의인 밴 자작과 또 다른 명의인 피터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가급적 황제 곁에 머물러 있었다. 엘리제는 황제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살피기 위해 당장 급한 일을 제외한 많은 일을 미룬 상태였다. “엘리제 자작님! 폐하께서!” 엘리제가 화급히 민체스터의 상태를 살피러 들어왔다. 민체스터는 린덴의 품 안에 쓰러져 있었다. “전하! 갑자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니 갑자기 쓰러지셨다. 빨리 살펴다오, 엘리제.” 린덴은 아버지의 쓰러짐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며 황제의 상태를 살폈다. ‘동공반사는 정상이야. 다른 반사들도 괜찮고. 맥박 횟수도 괜찮아. 다만 혈압만 낮으신데…….’ 그녀는 활력 징후를 확인한 후, 눈동자를 살피고, 여러 신경 반사를 체크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꼼꼼히 살핀 후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혈압이 낮은 것 외에는 모두 정상이었다. “다행히 특별한 문제로 쓰러진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전하.” 엘리제는 대신들 앞이어서 황태자에게 공손한 존칭을 썼다. “그러면? 어째서 쓰러진 것인가?” 린덴이 걱정 어린 눈으로 물었다. “아마 기력이 약해진 것에 따른 저혈압이 일시적으로 온 것 같습니다.” “병환 악화에 따른 것인가?” “네, 전하.” 엘리제의 대답에 린덴의 얼굴이 무거워졌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더욱 악화하였다는 말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일단 십자 병원으로 옮겨 혹시 다른 문제는 없는지 추가적인 검사를 해봐야겠습니다. 보존적 치료를 받으시면 의식은 금방 회복하실 것입니다.” “……그래. 고맙다, 리제” 그렇게 황제 민체스터는 황실십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 이런저런 검사를 하였지만, 다행히 특별히 다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의 추측대로 병환 악화에 따라 일시적으로 저혈압이 발생했던 것 같다. “그래도 일단 며칠은 더 입원해서 경과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엘리제는 그렇게 말했다. 귀족들을 진료하지만 황실십자병원은 기본적으로 황족, 그리고 황제를 위한 병원이었다. 따라서 의사들의 동선에 가장 가까운 층 하나 전체가 황제를 위한 병실로 준비되어 있었다. 물론 황실십자병원 건립 50년 동안, 그 층이 사용된 것은 전대 황제가 사망할 때 이후로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 민체스터가 처음으로 그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파장은 굉장히 컸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이 퇴장할 시기가 다가왔단 의미니까. 황위 계승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낀 론도 정국은 소리 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두 다음 대의 황제가 될 린덴과 그에 맞서고 있는 미하일만 바라봤다. 그들의 행보에 따라 앞으로 제국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대의 황제가 될 린덴은 그때 장미 정원에서 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 말없이. 무거운 눈으로. 한없이. 그렇게 얼마나 꽃을 보고 있었을 때였을까? 가벼운 인기척이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엘리제, 그가 사랑하는 그녀가 그를 보고 있었다. “……린덴.” “리제.” 린덴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처럼 다가가 으스러지도록 안아주고 싶었지만, 오늘은 왠지 기운이 나지 않았다. “아바마마는 어떠신가?” “괜찮아지셨어요. 이틀 정도 더 요양 후 퇴원하실 수 있으실 것 같아요.” “다행이군. 역시 등불을 든 여인이야.” 그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는 왠지 그가 웃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아파 보였다. “린덴…….”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바람이 불며 정원에 쌓인 낙엽을 쓸었다. ‘아파.’ 엘리제의 가슴이 저려왔다. 그를 사랑해서일까? 아무런 말도 없었지만 그녀는 그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무뚝뚝한 금안은 지금 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니 자신도 너무 아팠다. 린덴은 자신이 힘들어하는 것을 그녀에게 보이기 싫은지, 고개를 돌려 다시 정원을 바라봤다. “난 괜찮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수고가 많았을 텐데, 가서 쉬도록. 내가 나중에 다시 찾아가마.” “……린덴.” 그녀는 머뭇거렸다. 하지만 린덴의 말처럼 그를 놔두고 떠나지는 않았다. 그를 보는 게 저릿하게 아파서, 놔두고 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히 뒤에서 그를 감싸 안았다. “……!” 등 뒤에 와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 린덴은 흠칫 놀랐다. “……리제?” “네.” “난 정말 괜찮다.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그녀는 그의 등에 대고 고개를 저었다. 하나도 안 괜찮은 것이 느껴졌다. 그가 아파하니 속상했다. “알고 있겠지만…… 저……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 “그러니…… 당신이 아프면 저도 아파요. 힘…… 내세요.” 엘리제는 자신이 조금 더 유창한 위로를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다. 그저 가슴이 아파 힘내라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진심이 담긴 탓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그녀의 말이기 때문일까. 그 짧은 위로는 백 마디 말보다 더 그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었다. “…….” 린덴은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억지로 억누르려던 감정이 흔들렸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엘리제는 그의 등에 얼굴을 묻었다. “그거 알아요? 저 늘 린덴과 하고 싶은 게 많아요.” “뭐지?” “같이 맛있는 디저트도 먹고 싶고, 산책도 하고 싶고, 공연도 보고 싶고, 지난번 납치 때처럼 같이 여행도 다니고 싶어요. 그런데 그것만큼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요?” 린덴은 그녀의 답을 기다렸다. “힘들 때 서로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힘들 때, 린덴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린덴이 힘들 때는 제가 옆에서 같이 있으면 좋겠어요.” “…….” “특별히 도움이 안 되더라도…… 그래도…… 그냥…….” 린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엘리제는 주저하며 물었다. “혹시…… 제가 옆에 있는 게…… 싫으세요?” 린덴은 고개를 젓고는 그녀의 품에서 살짝 벗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의아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제를 보더니, 꽈악. 그야말로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린…… 덴……?” “……고맙다.” “……!” 린덴은 낮게 숨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로…… 고마워.” 그 말을 듣고 엘리제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의 등을 마주 안아주었다. 힘내라는 듯이. 그런 그녀를 보며 린덴은 무뚝뚝한 얼굴이 살짝 흔들렸다. 나의 리제. 나의 목숨. 어찌 이렇게 모든 것이 사랑스러울까. 사실 마음이 정말 무거웠는데, 그녀의 말을 듣고 조금은 따뜻해졌다. “우습지? 이제 황제가 되어야 할 내가 감정에 흔들리는 게.” “아니, 절대 아니에요.” “이미 알고는 있었어. 아바마마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고, 어쩌면 빠른 시일 안에 각오를 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치니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는군. 아버지니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황제가 되면 철혈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데 참 실격이야.” 그때,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저한테는 괜찮아요.” “응?”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게만큼은 괜찮아요. 그러니 힘들 땐 저에게 오세요. 그래 주시면…… 좋겠어요. 당신이 아플 때…… 곁에 있고 싶어요.” 그 말에 린덴은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을 향한 진심이 가득한 푸른 눈빛. 마음이 흔들렸고,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육체적인 행복보다는 사랑을 나누는 입맞춤. “전하…….” 아파하지 말라는 듯, 그녀가 더욱 그를 끌어안았다. 입맞춤을 끝내고 린덴은 애정이 담긴 손길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정말 고맙다. 사실…… 요즘 아버지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았거든. 많이 위로가 됐어.” 신경 쓰이는 일. 그 말을 들은 엘리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린덴이 말하는 일이 무엇인지 짐작한 탓이다. ‘미하일과 귀족파를 칠 계획.’ 린덴도, 미하일도 뒤에서 서로를 향해 비수를 다듬고 있었다. ‘둘 다 나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지만.’ 그 둘과 모두 가까운 그녀였다. 하지만 다른 마음은 모두 털어놓아도 그들은 형제의 싸움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녀와 상관없는, 각자의 싸움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다 알고 있는 걸…….’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만으로도 눈치챌 수 있었다. 뒤에서 둘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이미 경험했던 일이니까.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시엔 자신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모른 척 외면했다. 하지만 이번엔? 지난번 같은 외면은 답이 아니지 않을까? 그때, 린덴이 그녀에게 말했다. “사실 요즘 이상하게 이유도 없이 심적으로 힘들군. 별다른 이유도 없는데 말이야.” “……린덴.” “하지만 리제, 그대 덕분에 괜찮다. 너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여린 사람.’ 그래, 저 무뚝뚝한 얼굴과 다르게 그의 마음 아득히 깊은 곳은 여렸다. 분명 그는 유능한 황태자다. 황제가 되면 눈부신 통치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렸다. 아무도 모르고 있겠지만, 이제 그녀만큼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저 여린 마음으로 어린 시절 얼마나 아팠을까.’ 눈앞으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그. 그때 그가 받았을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또 얼마나 아파할까.’ 그가 최근에 이유도 없이 힘들어한 이유. 그건 본인이 세운 계획 때문일 것이다. 3황자도 나름의 비수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는 그걸 모두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은 동생을 포함한 모두를 죽음의 올가미에 빠뜨릴 계획을 세운 상태다. ‘아마 본인은 자신이 왜 심적으로 힘든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지만.’ 한숨이 나왔다. 이전 삶, 모든 복수가 끝나고 그가 허망한 고통에 빠진 것이 떠올랐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복수였을까?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1 6-5 약혼식 ========================================================================= 5장 약혼식 - 1 ‘난…… 또 그가 괴로워하는 것을 봐야 하는 걸까? 또다시?’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옥죄어왔다. 그건 끔찍한 고통이었다. 그때, 린덴이 그녀를 자신의 품에서 놔주었다. 그리고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춘 후 이야기했다. “어쨌든 오늘 정말 고맙다. 약혼식이 얼마 안 남았으니 몸 관리 잘하고 있도록. 또 아프지 말고. 매번 툭하면 아프니까 말이야.” “네, 린덴.” “대신들이 기다리고 있어 이만 나는 가보겠다. 나중에 내가 찾아가지.” 그는 아쉬운 듯 그녀의 뺨을 잠시 만지다가 사라졌다. 바람을 맞으며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엘리제는 멍하니 생각했다. ‘나……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지?’ 이제 비극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막막한 일. 하지만 그 순간.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저었다. “엘리제. 왜 계속 방법이 없다고만 하는 거야? 언제는 방법이 있는 문제에만 부닥쳤어? 본질을 생각해.” 그녀는 강하게 중얼거렸다. “너…… 그가 또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잖아. 또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잖아.”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거였다. 그녀는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비극이 일어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잖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없다고 하지 말고, 어떻게든 생각해 내. 그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이 순간 그녀는 앞으로 다가올 비극에 대해 자신의 행보를 결정했다. 움직일 것이다. 물론 방법은 아직도 전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해낼 거야.’ 그를 위해, 그리고 모두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물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그래도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와 모두를 위한 방향으로. 그렇게 장미 정원에서 엘리제는 결심했다. 그 결심이 어떤 일을 해낼지, 아직은 아무도, 그녀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 지나치게 신경을 쓰며 스트레스를 받은 탓일까? 그날 이후, 엘리제는 없던 병이 생겼다. 툭하면 재발하는 감기에 더해 만성 두통이 생긴 것이다. ‘아파. 편두통인가?’ 엘리제는 감기약과 두통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생각했다. 상당히 많은 양의 약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약을 먹어도 괜찮은 것인가?” 엘리제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특별히 몸에 안 좋은 약들은 아니에요.” “하아. 도대체 그대는 왜 매일 아픈 것이지?” 속상한 목소리에 엘리제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앞에서 한두 번 아픈 것이 아니다 보니 미안했다. 왜 이렇게 난 몸이 약한 걸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데……. 엘리제는 통증을 참으며 짐짓 밝게 말했다. “괜찮아요. 고작 감기랑 편두통인데요, 뭘. 신경 쓰지 마세요. 금방 나을 거예요.” 린덴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껴안았다. 부드럽게. 따뜻하게. “제발…… 제발 아프지 마라. 내가 속상하단 말이다.” “……네.”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이제 익숙해질 법하건만 그의 단단한 품에 안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아, 약혼식은 어떻게 하지? 이렇게 몸이 안 좋은데. 미룰까?” 린덴의 말에 엘리제는 깜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약혼식을 어떻게 미뤄요?! 이제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이미 준비 다 끝났다고요. 지방의 귀족분들도 올 채비를 다 끝냈을 거고.” “하지만 그대가 아프지 않나.” “저 정말 괜찮아요. 고작 두통이에요. 두통.”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약혼식을 미룰 수는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알까? 그녀가 아프면 자신은 열 배, 스무 배로 아프다는 것을. 왜 저 작은 몸은 늘 아픈 것일까.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는데.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야.’ 마음만 같아서는 병원 일이고 뭐고 다 금지하고 품 안에 가둬놓고만 싶은데. 그녀가 워낙 좋아하니 그럴 수도 없다. 그때, 엘리제가 그의 품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다 나을 테니.” “……그래, 꼭. 약속이다.” 그렇게 대망의 약혼식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린덴이 간절히 원하는 서로 진정한 하나가 되는 것, 부부가 되는 결혼식은 아니지만 그래도 감동이 아닐 수 없었다. 길고 길었던, 그리고 아픔과 행복이 있었던 그들의 사랑이 하나의 능선을 넘게 되는 것이니까. 약혼식이 끝나면, 그러면 이제 그녀는 공식적으로 그의 짝이 된다. 그 사실이 린덴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리고 그 약혼식을 반기는 것은 린덴만이 아니었다. 일반 시민들도 그들의 약혼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레이디 클로랜스와 황태자 전하께서 약혼식을 올리는구나.” “진즉 올리지. 기다리다가 목이 빠지는 줄 알았네.” “결혼식도 곧바로 올려라!” 그들은 모두의 지지를 받는 연인이었다. 특히 엘리제, 등불을 든 여인은 제국 전체에서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명사였고, 황태자도 크림반도에서 그녀를 구출한 낭만적인 이야기로 크게 사랑받고 있었다. 시민들 모두가 고대하던 그들의 약혼식에 환호성을 질렀다. 폭풍 속 찻잔과도 같은 정계의 긴장과 다르게 론도의 거리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레이디 클로랜스 만세!” “등불을 든 여인 만세!” “결혼도 바로 해라!” “결혼식은 꼭 대경기장에서 해라!” 약혼식은 론도 대성당에서 올리기로 되어 있었다.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초대받은 황족과 귀족들 외에는 참석이 어려웠다. 시민들은 직접 등불을 든 여인의 예식을 보고 싶어, 결혼식은 꼭 대경기장에서 치르길 요청했다. 그런데 술에 취해 다소 다른 반응을 보이는 몇몇 시민도 있었다. “크흑. 등불을 든 여인이 약혼하다니. 내 마음속 레이디였는데.” “난 크림반도에서부터 그분을 사모했단 말이야! 레이디 클로랜스 같은 분은 만인을 위해 독신으로 남아야 하는데!” “그래!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도 등불을 든 여인이 아깝다!” “꼭 행복하게 해줘라! 등불을 든 여인을 울리면 가만 안 둔다!” 그녀의 극성팬들이었다. 어쨌든 약혼을 기뻐하든 아쉬워하든 그녀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다. 일반 시민들뿐 아니라, 귀족들도 약혼을 환영하는 것은 같았다. 정확히는 귀족 중, 황태자를 지지하는 황제파의 인물들이 크게 기뻐했다. “드디어 두 분이 약혼식을 올리시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크림원정이다 뭐다 해서 많이 늦어진 것 같습니다. 약혼 공표가 난 지 벌써 2년이나 되었는데.” “하여튼 정말 기쁜 일입니다. 하하.” 엘리제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다. 그런 그녀가 주군의 공식적인 짝이 된다니. 크게 기쁜 일이었다. 반면 황제파의 모두가 기뻐할 때, 속 쓰려 하는 인물들이 있었다. 현 황태자의 가장 강한 우군이자, 측근. 제국의 2인자인 명재상 엘 후작과 그의 작은아들 크리스였다. “재상 각하. 레이디 클로랜스의 약혼을 정말 축하드립니다. 온 제국의 경사입니다!” “하…… 하. 그, 그렇습니까?” “그렇고말고요!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엘 후작은 별로 기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소태를 씹은 표정.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사위는 다 도둑 놈이라더니. 왜 이렇게 속이 쓰리지.’ 분명 황태자인데. 곧 황제가 될 분인데. 자신의 새로운 군주인데. 그냥 싫었다. 평생 애지중지 키웠더니 애먼 놈…… 아니, 애먼 분이 납치해 가는 기분이었다. ‘물론 엘리제의 마음도 이전과는 다르지만.’ 알고 있다. 딸의 마음에 그가 들어가 있음을. 그런데 웃긴 게 그 사실이 더 싫었다. 딸이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니! 왜 그게 속이 쓰린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슷한 생각을 하는 엘과 크리스 부자는 어색한 얼굴로 축하의 인사를 받았다. 한편, 큰오라버니 렌은 복잡한 눈치였다. 존경하는 주군이자, 친우인 린덴과 막내 동생이 짝으로 이어진다니. 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고, 자신과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 썩 기분이 좋지 않을까? 그게 동생 뺏기는 오빠의 심정이란 것을 모르는 렌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황제인 민체스터. 최근 주로 병석에 누워 있는 그는 정말 크게 기뻐했다. “그래, 약혼식 준비는 잘하고 있는가?” 그녀를 만날 때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그런 질문을 해댔다.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네, 폐하.” 민체스터는 흡족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제 내 진료는 보러 오지 말도록 하게.” “폐하?” “약혼식을 올릴 영애가 이런 데 시간을 뺏겨서야 쓰겠는가? 약혼식 준비에 집중하게.” “안 됩니다, 폐하.”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약혼식 준비도 중요했지만, 현재 그녀는 민체스터의 치료에 핵심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그녀가 빠지면 굉장히 치료에 난항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고개를 저었다. “약혼식을 올리지 않은 지금이야 괜찮지만, 이제 곧 황태자비, 황후가 될 것인데 지금처럼 내 곁과 병원에만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의 직을 당장 그만두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조금씩 황궁에 들어올 준비를 해야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무리 의사 겸업을 허가받았다 하더라도, 황태자비가 되면 의사 일이 주 업무가 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공식적으로 황실과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 병원 일을 주로 하는 것이지만, 약혼식을 올리면 내명부의 일을 우선하도록 조금씩 업무를 조정해야 할 것이다. 특히 어의직은 조만간 그만두어야 했다. 황태자비가 황족을 돌보는 어의를 할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폐하의 진료를 보는 것은 허락해 주십시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엘리제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그 부탁에 황제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염려하는 마음에 진료하려는 것임을 안 것이다. 시아비를 걱정하는 며느리의 마음을 그 어떤 시아비가 싫어하겠는가? “그래, 하지만 너무 무리해서는 안 돼. 영애가 없어도 밴 그이와 다른 의사들도 잘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네, 감사합니다, 폐하.” “아, 그리고.” 민체스터는 한 가지 이야기를 더했다. “영애의 약혼식 때는 내가 꼭 참석하겠네.” “……폐하.” 엘리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황태자의 약혼식이니 아버지이자 황제인 그가 참석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그의 건강 상태였다. 대성당에서 치르는 약혼식은 전통 예법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굉장히 장시간 치러지고, 체력적으로 힘들었다. 단순히 앉아 있는 것이라 해도 이런저런 식을 다 진행하고 나면 족히 반나절은 지나게 될 터인데, 괜찮을까? 하지만 민체스터는 완강했다.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절대 양보 못하네. 약혼식뿐만 아니라 결혼식 때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참석할 거야. 그렇게 알고 있게.”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2 6-5 약혼식 ========================================================================= 5장 약혼식 - 2 엘리제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아끼는 그녀와 아들의 약혼식에 참석한다는 것을 무슨 수로 말리겠는가? ‘괜찮으셔야 할 텐데.’ 이런저런 걱정 때문일까, 최근 생긴 두통이 다시 띠잉 하고 아파져 와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 귀족파의 귀족들도 그들의 약혼을 축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속마음은 쓰리기 그지없었지만 그래도 다른 이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이었다. “약혼식까지 올리면 황태자 전하의 지지율이 하늘을 찌르겠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들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등불을 든 여인이 3황자 전하의 짝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그러면 내 일평생 소원이 없겠소.” 저 등불을 든 여인이 자신들의 편이면 얼마나 좋을까! 엘리제는 자각 못하고 있었지만 현재 제국에서 그녀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껏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 그것은 곧 힘이고 정치력이었다. 물론 엘리제, 스스로는 그걸 기반으로 무언가를 누릴 생각이 전혀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이 행복했으면 좋겠구려.” 그 말에 귀족파의 인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의 존재는 참 묘했다. 그녀 때문에 황태자의 지지율이 급등했고, 귀족파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할 수도, 적대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행복하길.” 물론 그녀의 행복과 그들의 행복은 양립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순간, 귀족파의 인물들은 모든 정치적 사항을 잊고 약혼식을 올릴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그렇게 모두가 그녀를 축하하고 있을 때. 아픈 표정을 짓고 있는 인물이 있었다. 3황자 미하일이었다. “리제.” 그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물론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하지만 알고 있어도, 아픈 것은 아픈 거다. “리제.” 다시 중얼거렸다. 아파서, 그리고 미련하게도 이 순간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런데 그때, 끼잉 소리를 내며 강아지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왔다. 지난번 길거리에서 주운 그 녀석이었다. 이름은 장난삼아 지은 ‘리제’. 미하일은 살짝 따뜻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너라도 내 옆에 있구나.” 그는 강아지를 들어 품에 안았다. 끼잉 소리를 내며 강아지가 그의 얼굴을 핥았다.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나 걱정해 주는 거야? 괜찮아. 괜찮아.” 주인이 속상해하는 것을 안 걸까, 강아지가 끼잉끼잉거렸다. 미하일은 잔잔히 웃었다. “고마워.” 강아지가 설마 자신을 위로하려고 저런 애교를 부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아픈 이 순간 누군가 옆에 있어주는 것이 고마웠다. ***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은 미하일뿐이 아니었다. 그레이엄. 그녀의 곁에서 가장 가슴앓이를 오랫동안 한 불쌍한 남자. 그가 주점에서 술로 아픈 속을 달래고 있었다. “남작님, 그만 마시시죠.” 주점의 주인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그를 만류했다. 단골로 오는 집인지라,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만, 항상 냉철한 저 의사가 저렇게나 취하도록 마시는 것은 처음 봤다. “그냥…… 오늘은 더 마시고 싶군.” 그레이엄은 술에 취해 중얼거렸다. ‘리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약혼식을 올린다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녀는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녀 때문에 이렇게나 아파한다는 것을. ‘하아.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날이 올까.’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자신은 평생 그녀의 옆에서 괴로워하겠지. 속마음을 드러내지도 못하고. 고작 약혼식도 이렇게 아픈데. 결혼하면 얼마나 아플까. ‘미안합니다. 이렇게 속이 좁아서.’ 그레이엄은 쓰린 표정을 지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는 사랑이니 그녀의 행복을 축하해 줘야 할 텐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축하해야 한다 생각하지만 가슴은 그저 아프기만 했다. 이 마음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아.”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아픈 가슴을 참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행복하길…… 내가 사랑하는 분이여.’ 그렇게 며칠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와 그의 약혼식 날이 다가왔다. *** 대성당. 론도 황궁 인근에 위치한 대성당은 제국 최대 규모를 자랑했지만, 이 순간 그 넓은 규모가 무색하게 터질 듯이 붐비고 있었다. 거국적인 약혼식을 앞두고 수많은 귀족이 몰려온 탓이었다. 론도 전체, 아니, 제국 전체에서 웬만한 귀족들은 전부 모여든 것 같았다. 론도 대성당은 제국뿐 아니라 서대륙 전체에서도 수위에 꼽히는 규모였지만, 너무 많은 인파가 몰린 탓에 안에 발을 들이지도 못하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그 대성당 안, 대기실. 인형 같은 한 소녀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약혼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떨리시죠, 아가씨?” “……조금.”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하는 약혼식도 아니어서 별다른 감흥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막상 약혼식 날이 되니 굉장히 떨렸다. 긴장돼 밤도 설쳤다. “나 오늘 이상하지 않니, 마리?” 어느덧 소녀가 된 어린 하녀 마리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 예뻐요. 너무너무.” “빈말은.” “빈말 아니에요. 정말 요정…… 아니, 천사 같아요.” 마리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원래도 예쁜 그녀지만…… 오늘은 정말 미의 천사가 강림한 것 같았다. 인형 같은 얼굴, 곱게 단장한 피부, 찬란한 백금발. 그리고 천사의 날개처럼 아름다운 예식용 백색 드레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눈이 부실 정도였다. “참, 마리. 내가 챙겨온 가방에서 약을 좀 가져다주겠니?” “아…… 아직 머리가 아프세요?” “응, 좀처럼 가라앉지가 않네. 꽤 시간이 지났는데.” 마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 아름답고 완벽한 아가씨의 유일한 단점은 약한 몸이었다. 툭하면 걸리는 감기는 기본이고, 최근에는 몹쓸 두통까지 생기셨다. “너무 무리하셔서 그래요.” “괜찮아. 약 먹으면 돼.” 두통이야, 뭐. 그녀는 그런 생각으로 약을 손바닥에 들고 물컵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다 안 나은 건가?” “아, 린덴.” 린덴이 걱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준비는 다 하셨어요?” “준비? 됐다. 대충하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그는 예식용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졌다. 엘리제는 평소보다도 더욱 멋지게 느껴지는 그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는 그녀에게 다가와 이마를 어루만졌다. “살짝 미열도 있는 것 같군. 도대체 언제 낫는 거지?” “금방 나을 거예요. 별것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엘리제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으나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에게 한 소리 해야겠군.” “네?” “내 여자가 맨날 아프지 않나. 그렇게 의사가 많은데,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건지. 그대가 아픈 것은 모두 그 이들이 그대에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다.” 빈말로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 그들에게 한 소리 할 기세라 엘리제는 그의 팔짱에 매달렸다. “저 정말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는 자신에게 매달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 네?” 엘리제는 애교 부리듯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추었다. “읍, 린덴! 지금은……!” 엘리제는 피하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머릿결을 잡고 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아찔한 느낌. 자신의 안을 헤집는 그의 느낌에 그녀의 다리가 풀렸다. 그래도 공들여 화장한 것을 아는지, 거친 키스가 들어오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혀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이 그녀의 정신을 더욱 아득하게 했다. “그, 그만…… 제발.” 엘리제는 그의 팔에 매달려 부탁했다. 린덴은 살짝 입을 떼고, 그녀의 귓가에 말했다. 짓궂게. “싫은데?” 엘리제는 울상을 지었다. “화, 화장 망가진단 말이에요. 힘들게 했는데…….” 그 말에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만 같아선 저 예쁜 눈동자에 눈물이 맺힐 때까지 입맞춤을 나누고 싶었지만, 오늘은 약혼식 날이니 이 정도로 참아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으니.’ 이제 그녀는 자신의 것이 될 테다. 그런 생각으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하지만 곧 든 생각에 인상을 구겼다. ‘약혼이 아니라 바로 결혼을 해야 했는데.’ 그게 이 순간 그의 천추의 한이었다. 오늘 예식이 약혼이 아니라 결혼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첫날밤도……. ‘궁내부장을 갈아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밀어붙였어야 했는데.’ 그때, 엘리제가 드레스를 가다듬고 물었다. “저 이상하지는 않죠?”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예뻐. 너무.” 그러며 조심히 드레스와 화장이 망가지지 않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들어온 그녀에게 속삭였다. “지금 바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예뻐.” 엘리제는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곧 그의 숨겨진 말뜻을 알아듣고 사과처럼 얼굴을 붉혔다. “도, 도대체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린덴은 시치미 떼며 오히려 반문했다. “무슨 이상한 생각? 난 그냥 결혼하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 엘리제는 의심의 눈빛으로 그를 흘겨봤다. “그거 아세요?” “뭐?” “린덴, 조금씩 능글맞아지는 것 같아요.” 그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런가? 그럴지도. “그대가 너무 귀여워서 그렇지.” 그러며 그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엘리제의 얼굴이 시뻘게지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다. “아, 좀! 다른 사람들이 본단 말이에요.” “보면 어때? 어차피 하나가 될 사이인데. 사이가 가까우면 좋은 일이지.” “그래도……!”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늘 그렇듯 그는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입을 맞추려는데……. 옆에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둘의 모습을 보고 있던 마리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아가씨…….” “응, 왜?” “저…… 손님이…… 폐하가…….” “……!” 엘리제가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떨어졌다. 정말로 황제 민체스터가 와 있었다! 기력이 약해져 로열 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이 끄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그는 아들과 예비 며느리의 다정한 모습에 살짝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지었다. 엘리제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으로 예를 표했다. “폐, 폐하를 뵙습니다.” “그래, 크흠. 둘이 사이가 좋군.” 엘리제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졌다. 아, 린덴. 정말 미웠다. 정말로! “그냥 한번 식전에 우리 며늘아기 얼굴이나 보고 싶어서 왔네.” 민체스터는 웃으며 ‘며늘아기’라고 그녀를 칭했다. 대제국의 황제가 황태자비에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친근한 단어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엘리제는 자신도 모르게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저 단어는 이전 삶, 약혼 후 민체스터가 그녀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당시 그는 당뇨 합병증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그렇게 그녀를 부르며 예뻐해 주었다. 린덴과의 결혼 문제로 그녀의 속을 많이 상하게 하긴 했지만 과거든 지금이든 그는 한결같이 자신을 아꼈다. ============================ 작품 후기 ============================ 내일 09시 07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3 6-5 약혼식 ========================================================================= 5장 약혼식 - 3 ‘이번 삶은 언제일까.’ 그녀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생각했다. 당뇨는 그녀의 지식으로 큰 문제 없이 조절하고 있지만 하늘의 뜻일까. 그의 건강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악화일로였다. ‘지금까지 봐온 병의 성격상 갑자기 빠른 시간 안에 돌아가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몰랐다. 언제, 어느 순간 어떤 일이 생길지. 걱정된 그녀는 이것저것을 물었다. “폐하, 어제 수면은 편히 취하셨습니까?” “그래, 영애가 준 약을 먹고 잘 잤네.” “어지럽거나 기력이 빠지거나 하는 증상은 없습니까? 팔다리에 저린 느낌이 들거나…… 혹시 불편하신데 무리해서 나오신 것은 아니신지…….” 여러 질문에 민체스터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이런 날까지 환자 걱정인가, 영애? 오늘의 주인공은 영애네. 그러니 오늘만큼은 다른 걱정하지 말고 영애와 린덴에게만 신경 써.”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걱정을 거두진 못했다. “폐하, 만약 조금이라도 몸이 좋지 않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식 중이라도 제가 달려가겠습니다.” “허허.” 황제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못 말리는 며느리라고. 고생 좀 하겠다고. 린덴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고생입니다, 아버지. 라는 의미로. “어쨌든 난 먼저 가보겠네. 곧 식장에서 보게, 영애.” 민체스터는 그녀와 그의 약혼이 그렇게 기쁜지 만면에 웃음을 거두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지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떠나는 그에게 예를 표한 엘리제는 걱정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정말 괜찮으신 걸까.’ 왠지 오늘따라 민체스터의 안색이 더 하얘 보였다. 표정은 한없이 밝지만 말이다. 기쁜 날이라고 몸이 안 좋은데 무리하는 것은 아닌지. 곧 다른 사람들도 그녀에게 인사하러 왔다. 식이 시작되기 전 얼굴을 보러 온 것이다. “리제, 축하해!” 3황자 미하일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밝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지난밤 아픔은 갈무리한 걸까? 꽃처럼 화사한 얼굴에 축하의 미소가 떠 있었다. “고마워요, 밀.” 미하일은 너무 예쁘다느니, 형님은 도둑놈이라느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무뚝뚝한 얼굴의 린덴을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정국 속, 칼을 겨누고 있는 두 형제의 눈이 마주쳤다. 아무래도 친근하게 이야기를 할 사이는 아닌지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뭐라 서로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덕담을 나누기도 어색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린덴이었다. “……와줘서 고맙다, 미하일.” 미하일은 미소를 지었다. “축하해.” 짧은 답.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고, 미하일은 돌아갔다. 그리고 여러 손님이 찾아왔다. 그레이엄 남작. 유리엔 공녀. 또 같이 일하는 황실십자병원의 동료 의사들. 크림반도에서 인연이 있었던 의료진들. 이제 곧 의사가 되어 황실 십자 병원에 수련을 받으러 올 예정인 레이디 제이. 그리고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이들. 수없는 이들이 찾아왔다. 장기간 입원하다 얼마 전 퇴원한 메르키트 백작도 따로 찾아왔다. 아직 걷기가 쉽지는 않은지 지팡이를 짚은 채. 그렇게 많은 이의 축복을 받은 후,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황태자 전하와 레이디 클로랜스께서 입장합니다!” “와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레이디 클로랜스!” “퍼스트 레이디!” “등불을 든 여인!” 린덴을 향한 외침도 있었다. 주로 그의 낭만적 구출에 반한 귀족 영애들이었다. “꺄악! 황태자 전하! 로맨티스트!” “…….” 어쩌다 무뚝뚝 린덴의 별명이 로맨티스트가 되었는지, 요지경인 일이었지만 나름 린덴은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그들이 대성당의 단상에 올라가자, 함성이 뚝 멈췄다. 이제 예식이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주님 앞에 감사드리며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린덴과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브리티아 제국 황실의 약혼식은 전통적으로 종교 예식이었다. 그래서 약혼식 장소가 대성당인 것이다. 목회자의 인도로 약혼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기도하겠습니다.” 전통 종교 예식인 탓에 약혼식은 길고 길었다. 묵념, 기도, 찬트, 설교, 축도, 다시 기도, 언약 등등. 모든 절차를 합하면 가히 4시간에 가까운 행사였다. 한창 설교를 들으며 린덴은 속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뭐가 이렇게 긴 거야.’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이런 행사들은 쓸데없는 허례허식이 많았다. ‘결혼식도 아니고 고작 약혼식인데.’ 그냥 ‘앞으로 결혼식 때까지 잘 지내다, 잘 결혼하십시오!’라고만 이야기하면 되지. 무슨 쓸데없는 과정이 이렇게 많은지. 그렇다고 자신들을 축복하는 내용들도 아니다. 그냥 전부 다 허례허식들. 마음에 안 들었다. 지루하기도 지루했지만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이유는 단 하나. ‘엘리제가 힘들잖아.’ 그는 옆에 서 있는 엘리제를 바라봤다. ‘저렇게 약한데 어떻게 계속 서 있으라고.’ 다른 하객들이야 앉았다, 일어났다 무리할 것이 없었지만 엘리제는 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단상 앞에서 계속 서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몸이 약한 그녀가 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린덴은 속으로 열불이 뻗쳤다. ‘황위에 오르면 다 없애 버린다. 이런 과정들. 전통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그때, 엘리제가 그를 돌아봤다. 걱정 어린 그의 눈빛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기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듯이. 린덴은 한숨을 삼켰다. 한시라도 빨리 끝났으면. 그는 결혼식만큼은 허례허식 없이 그녀가 편할 수 있는 예식을 진행하리라 결심했다. “…….” 한편 그때 엘리제는 황제 민체스터를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괜찮으실까.’ 오랜 시간 서 있어야 하는 자신도 힘들지만, 긴 예식으로 민체스터의 몸에 무리가 갈까 걱정이었다. 편한 의자에 앉아 있긴 하시지만 이런 긴 예식은 쇠약한 몸에 무리일 텐데……. ‘더 강하게 만류를 했어야 했는데.’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시간이 흘렀다. 길고 긴 여러 과정이 지나고, 약속의 입맞춤도 하였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절차가 다가왔다. “황제 폐하께서 납십니다.” 단상 뒤의 상석에서 앉아 있던 민체스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길버트 백작의 부축을 받으며 단상으로 걸어왔다. 마지막 절차를 진행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감사의 축배.’ 엘리제는 감사의 축배 절차를 떠올렸다. 로마노프 황실은 약혼식과 결혼식 마지막 순서로 아들이 아버지에게 지금껏 내려준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에 축배를 올리는 절차를 진행한다. 아버지가 아들이 준비해 온 축배를 마신 후, 축복의 말을 함으로써 예식이 끝나는 것이다. “…….” 린덴과 엘리제는 민체스터가 단상으로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다. 기력이 쇠한 상태로 오랜 시간 앉아 있어서일까? 민체스터의 다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축하한다, 린덴. 그리고 엘리제.” 단상에 오른 그가 다시 축하의 말을 건네었다. 엘리제와 린덴은 고개를 숙였다. “그래, 린덴. 네가 주는 축배를 마셔 보자구나.” “네, 아바마마.” 옆에서 황실 시종이 비단에 싼 황금 술병을 가져왔다. 린덴이 직접 준비한 예식주이다. 술병은 자그마했다. 딱 한 잔 정도의 크기였다.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바마마.” “그래.” 민체스터는 기쁜 얼굴로 잔을 받았다.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 약간의 술만 따르는 그에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기쁜 날이니 더 주거라. 그리고 축배를 많이 마셔야 너희도 축복받을 것 아니냐.” “……네, 아바마마.” 어쩔 수 없이 린덴은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예식용의 작은 술병이라 한 잔 가득 따르니 술이 바닥났다. 은은한 황금빛이 도는 술이 스테인드글라스 빛을 반사했다. 워낙 마음이 기뻐설까? 민체스터는 아들이 올린 술을 한 번에 들이켰다. 꿀꺽. 그리고 잔을 내려놓은 그가 미소 지으며 축복의 말을 꺼냈다. “오늘은 참 기쁜 날이구나. 내가 얼마나 이날이 오기를 바랐는지 너희는 모를 것이다.” “감사합니다.” “너희 모두…….”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민체스터가 말을 멈췄다. “……?” 고개를 숙이고 축복의 말을 기다리던 엘리제와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그리고……. “커억!” “……?!” 민체스터가 가슴을 움켜쥐더니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쿨럭, 커억!” 그리고 쏟아내는 한줄기 선혈! “폐하?!” 엘리제가 깜짝 놀라 황제에게 다가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쿨럭. 가, 가슴이…….” 가슴을 움켜쥔 민체스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뒤집히더니, 그대로 옥체가 무너져 내렸다. “……!” “폐하!” 대성당이 경악에 빠졌다. 모두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봐라! 의사를! 빨리 의사를 불러라!” 엘리제를 대신해 대기하고 있던 밴 자작과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화급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하기 전, 바로 옆에 있던 의사, 엘리제가 쓰러진 황제를 살폈다. “폐하! 정신 차리십시오! 폐하!” 손가락으로 목의 경동맥을 짚은 엘리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맥이 없었다. 단순 실신이 아니라 심장마비가 온 것이다! ‘어째서……? 어떻게……?’ 그녀의 머리가 백지처럼 새하얗게 변했다. 아무리 그녀라도 황제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에 냉철함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얗게 변한 머리와 다르게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황제를 살리기 위해! 파악! 곧바로 인공호흡을 한 엘리제는 하나로 겹친 손바닥으로 황제의 전흉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심장마비를 회복시키기 위한 심폐 소생술(CPR)이었다. “밴 자작님! 인공호흡을 도와주세요!” 엘리제를 다른 의사들에게 도움을 청하며 온몸으로 가슴 압박을 하였다. 곱게 차려입은 백색 드레스가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피터 교수님, 폐하의 몸에 바로 강심제를 투여해 주세요! 2분 간격으로 제가 말할 때마다요!” “알겠습니다!” 혼비백산해 달려온 의사들이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엘리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어째서? 왜 이렇게 갑자기?’ 걱정은 하긴 했다. 혹시나 몸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지. 하지만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라니! ‘병환이 안 좋긴 하셨지만 이렇게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일으킬 병은 아니었어! 도대체 왜?’ 물론 민체스터가 앓고 있던 병이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모른다. 그저 모종의 만성병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을 뿐. 하지만 지금까지 쌓은 임상 경험으로 추정할 때 이런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를 일으킬 병은 아니었다. 그것도 객혈과 흉통을 동반하면서. ‘술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황태자 린덴은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쓰러짐에 뻣뻣이 굳어 있었다. “아바마마…….?” 그 모습을 보고 엘리제는 필사적으로 가슴을 압박했다. ‘원인이 무엇이든 살려야 해! 무조건 살려야 해!’ 원인은 지금 당장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무조건 살려야 한다. 이렇게 민체스터가 사망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마비된 심장의 기능이 돌아올 때까지 인위적으로 피를 순환시키기 위해 허리를 숙여 전신의 힘을 이용해 가슴을 압박했다. 압박이 이어지며 허리와 팔이 끊어질 듯 아팠고, 그녀의 이마에서 괴로운 땀이 끝없이 흘러내렸지만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제발! 제발……! 폐하!’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심장의 기능을 억지로 올리는 강심제가 몇 차례 들어가고, 그녀의 백색 드레스가 완전히 흐트러질 때쯤이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주말은 쉽니다.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4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1 두근. 경동맥을 짚고 있는 밴 자작의 손가락에서 희미한 맥박이 느껴졌다. 심장이 돌아온 것이다! “맥이 느껴집니다!” “아아……!” 의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심장이 돌아왔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었다. 엘리제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지시했다. “급성 심장마비가 발생한 뒤라 언제 다시 문제가 생길지 몰라요! 지금 바로 활력 징후 먼저 확인해 주세요.” “네!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의사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수축기 혈압 60입니다! 맥박은 140회. 호흡수 30회입니다!”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심각한 쇼크였다. 간신히 심장박동만 돌아온 상태인 것이다. 지금 민체스터의 몸의 기능은 모두 엉망이라고 봐야 했다. ‘빨리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야 해. 그래야 후유증 없이 폐하의 몸을 회복시킬 수 있어.’ 물론 원래부터 쇠약했던 민체스터다. 이번 심장마비로부터 회복된다 해도 완벽히 건강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돌아가게 할 수는 없었다. 의사로서, 아니, 이제 그의 새로운 딸이 될 마음으로서! “지금 바로 황실십자병원으로 이송하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주세요.” “네!” “이동하는 중에도 계속 맥을 체크해 주세요. 혹시라도 맥의 횟수가 줄어들거나 약해지는 느낌이 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엘리제는 하얀 예식 드레스를 입은 상태 그대로 의사들을 지휘해 민체스터를 이송했다. “…….” 예식장에 모여 있던 귀족들은 황망한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지금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황제 폐하께서 왜 저렇게 갑자기……. “이, 이거……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원래 건강이 안 좋긴 하셨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다, 다시 일어나실 수 있을까? 등불을 든 여인이 같이 가긴 했지만 심장마비가 오셨던 것 같은데…….” “도대체 왜?” 물론 민체스터의 몸이 원래 안 좋은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단순 실신도 아니라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라니? 당황스러울 정도로 급작스러웠다. “병이 갑자기 더 악화하신 건가?” “그럴 지도. 하지만…… 혹시…….”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의문. -혹시 술에 문제가? 하필 공교롭게 민체스터는 황태자가 바친 술을 마시고 곧바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마치 소설에서나 볼 수 있는, 독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증상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단상의 황태자에게 향했다. 린덴은 평소의 냉철한 모습과 다르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 순간 대성당에 죽을 듯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황태자의 얼굴만 바라봤다. 물론 아닐 거다. 독살이라니? 황태자인 그가 그럴 이유가 없다. 모든 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그때, 로열 가드의 수장인 길버트 백작이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전하.” “길버트 백작.” 길버트 백작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죄송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린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네,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황태자도 로열 가드의 인도를 받고 대성당에서 사라졌다. 남겨진 귀족들이 웅성웅성거렸다. “뭐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정말 황태자 전하가 그러신 것은 아니겠지?”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하지만 왜 하필…….” “폐하는 회복되실까?”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었다. 모두의 얼굴이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직감했다. 고요한 전야가 끝났음을. 황제가 저런 일을 당한 이상, 이제 론도에 진정한 폭풍이 몰아닥칠 것임을. 황제파와 귀족파의 인물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각자 이 사태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고민하며. 그렇게 모두의 축복을 받던 약혼식이 생각지도 못한 사고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의 일을 기점으로, 론도 정국에 총성 없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 그날의 사건은 론도, 아니,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황제 폐하, 황태자가 바친 축배를 마시고 심장마비로 쓰러지다!] 온 시민이 경악했다. 모두가 축복하던 약혼식 날 이런 끔찍한 일이 발생하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폐하께서는 어떻게 되시는 거야?” “그러게. 정말 이대로 승하하시는 것은 아니겠지?” 시민들은 삼삼오오 모여 그날의 일에 대해 떠들었다. 황제 민체스터는 시민들의 존경을 받는 명군이다. 그런 명군이 아들이 바친 축배를 마시고 쓰러지다니!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가. “설마…… 황태자 전하가 일으킨 일은 아니겠지?” “에이, 이 사람아! 무슨 큰일 날 소리를! 전하가 왜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그렇긴 하지만…… 상황이…….” “난 오히려 다른 게 의심되는데.” 한 시민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뭐가 의심된다는 말인가?” “이게 황태자 전하를 음해하려는 음모가 아닐까 하고 말이야.” “……!”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이들이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모라고? 누구의?” “지금 상황에서 전하를 음해할 이들은 단 하나 아닌가.” 모두의 머리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귀족파. 만약 이게 정말 음모라면 그들 아니면 이 음모를 꾸밀 이들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앞서 생각하지 말게.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하고 다니다 경을 칠 수도 있어. 당분간 입조심하고 다니게.” “…….” “이제 곧 론도의 분위기가 흉흉해질 테니까.” 그 말이 옳았다. 황제가 이렇게 쓰러진 이상, 그리고 이런 사건이 일어난 이상 정국은 폭풍을 만난 것처럼 요동칠 것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몸조심해야 해.” 시민들은 모두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시각, 차일드 가문의 저택. 이 중대한 사태에 귀족파 인물들이 모여 회동을 가졌다. 3황자 미하일도, 암셀 후작도, 몸이 불편한 메르키트 백작도, 핵심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모였다. 그만큼 심각한 사태였으니까. “…….” 기다란 테이블에 앉은 그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황제의 심장마비라니. 엄청난 일이기도 했고, 사안이 너무 예민했다. 하필 황태자가 건넨 축배를 마시고 발생했으니까. 모두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며 자신들의 주인인 3황자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 3황자 미하일은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 정치적 파장을 떠나, 자신의 아버지가 쓰러진 일이다. 가슴이 요동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만히 암셀 후작에게 물었다. “외숙부.” “네, 전하.”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손을 쓴 것은 아니시지요?” 듣던 귀족파의 인물들이 숨을 흡 하고 들이켰다. 황제의 독살. 지금 미하일은 그걸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암셀 후작은 이전보다 더욱 마른 얼굴을 저었다. “아닙니다. 물론 상황이 안 좋아 이런저런 생각을 안 해봤던 것은 아니지만 아닙니다.” “그러면?” “원래 앓고 있던 병환과 연관되어 일어난 일이겠죠.” 귀족파의 인물들도 황태자가 설마 술에 독을 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일단 그럴 이유가 없었다. 모든 것을 가진 황태자가 왜 술에 독을 타겠는가? 이번 일은 다소 이상하긴 하지만 원래 앓고 있던 병이 악화되어 생긴 일이라 보는 것이 합당하다. 문제는 상황이 너무 공교롭다는 것이다. 하필 황태자가 건넨 축배를 마시자마자 심장마비가 일어나다니. “하지만.” 암셀 후작이 나직이 말했다. “이 기회를 그냥 넘기면 안 되겠죠.” “……!” 암셀 후작은 ‘기회’란 단어를 사용했다. 귀족파의 인물들이 흠칫 그를 바라봤다. 그렇다. 급작스럽긴 하지만 이건 그들에게 있어 기회였다. 어쩌면 황태자를 실각시킬 수도 있는. “실제로 폐하가 어떤 이유로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있죠.” “…….” “원래부터 중병을 앓던 폐하가 회복될 확률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 옆에 있다고 해도 말이지요. 어쩌면 오늘이나 내일 당장 승하하실 수도 있습니다.” 귀족파 인물들은 쥐 죽은 듯이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고 황태자는 자신의 무죄를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죄를 증명하려면 황제 폐하가 왜 심장마비를 일으켰는지를 밝혀내야 하는데, 그게 과연 쉬운 일일까요?”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변수는 등불을 든 여인인데. 아무리 그녀라도 심장마비의 원인을 밝히긴 쉽지 않을 것입니다. 대부분 급성 심장마비는 원인 불명으로 결론 내려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 “그래서 만약 황태자가 폐하의 심장마비 원인을 밝혀내지 못해 본인의 무죄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혐의를 벗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면…… 그걸 빌미로 그를 폐위시킬 수도 있습니다.” “……!”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 어쩌면 황제가 사망할 수도 있는 사건. 그러니 혐의를 벗지 못한다면 폐위까지 갈 수도 있었다. 아니, 그들 귀족파가 그렇게 만들 것이다. 암셀 후작이 지병인 폐병으로 쿨럭쿨럭 기침을 하더니 3황자에게 말했다. “어쨌든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손을 쓰겠습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태자를 폐위로 몰아가겠습니다.” 미하일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형님.’ 아비의 병환을 이용해 형님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일이다. 그게 그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약혼식 때 환히 웃던 엘리제의 얼굴도 떠올랐다. 하지만. 둘은 이미 전쟁을 시작했다. 지는 쪽이 모든 것을 잃는 전쟁을. 미하일은 씁쓸한 입맛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진행하도록 하십시오, 외숙부.” *** 차일드 가문은 먼저 신문사를 움직였다. 일단 자신들 소유의 신문사를 움직였고, 그 밖에 신문사에도 손을 썼다. 곧 오묘한 느낌의 기사들이 거리를 장악했다. [의문의 심장마비. 축배와의 관련성은 정말 없는 것인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평소 질병 양상으로는 설명되지 않아.] 딱히 결론을 단정 짓기보다는 의문을 제기하는 기사들. 하지만 의문에 불과하지만 파장은 컸다. 원체 상황이 공교로웠던지라 아니라 생각하던 시민들도 기사를 보며 조금씩 의문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그때 폐하께서 마셨던 술과 전혀 연관이 없는 걸까?” “그러게.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 그럴 이유가 없으시잖아.” “그렇긴 하지만 왜 하필…….” 그렇게 시민들은 목소리를 낮춰 의문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차일드 가문은 교묘히 시민들 사이에 소문을 냈다. 어쩌면 황태자가 정말로 황제를 독살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사자궁의 시종이 시장에서 정체불명의 물체를 사는 것을 목격.] [황태자가 마련한 축배는 이전에 예식 때 사용한 술과는 전혀 다른 종류라 함.] 명확한 근거는 없었다. 차라리 가십에 가까운 소문들. 처음에 시민들은 에이, 설마 하면서 그 소문들을 흘려들었다. 하지만 소문은 끝이 없었고,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점점 의구심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말 황태자가 꾸민 짓이 아닐까? 아니라면 왜 하필 술을 마시자마자 황제가 쓰러졌단 말인가? 시민들은 조심히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래서 대중심리가 무섭다. 설마가 의혹으로, 의혹이 의심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차일드 가문은 선동꾼을 움직였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0155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2 “진실을 규명하라!” “사건을 철저히 수사해라! 아무리 황태자라도 진실을 가릴 생각은 하지 마라!” 거리 여기저기서 이런 외침이 터져 나왔다. 모두 차일드 가문의 사주를 받은 선동꾼들이었다. 그런 외침들은 그렇지 않아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시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폈고, 곧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론도의 피카딜리 거리, 대광장, 찰스 광장 등에 수많은 시민이 집결했다. 그들은 ‘독살범을 반드시 엄벌하라!’란 플랜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심지어 이런 외침도 있었다. “폐하를 음독한 황태자를 폐위시켜라!” “진실을 철저히 밝히고, 황태자를 단두대에 보내라!” 이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불경한 말. 마치 황태자가 황제를 독살했다는 것이 확정이라도 된 듯한 시위였다. 모두 차일드 가문의 사주대로였다. 시위가 격해질수록 시민들의 의심은 깊어졌고 여론은 점차 악화되었다. *** 그리고 그때, 황태자를 추종하는 황제파의 인물들은. 콰앙! “절대 아닙니다! 전하께서 독살 모의라니요! 그게 말이 됩니까?!” “그렇습니다! 다들 미친 것 아닙니까?” “암살 모의를 했다면 그네들, 귀족파에서 했겠지요! 전하께서 왜 암살 모의를 합니까?!” 모두가 분노해 열변을 토했다. 암살 모의라니! 기가 차지도 않는 모함이었다. 황태자가 왜 그런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만약 암살 모의를 했다면 귀족파가 했겠지. 황태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큰일이구나.’ 황제파의 수장, 재상 엘 후작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되는 중상모략이지만 당장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축배는 황태자가 직접 준비한 술이다. 운반을 담당한 시종을 심문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 특별한 혐의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술이 남아 있으면 그걸 다른 사람에게 먹여 보기라도 할 텐데. 그러면 독이 안 들어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을 텐데. 하아.’ 하지만 ‘감사의 축배’ 절차 때 사용하는 예식주는 보통 한 잔 분량 정도의 아주 적은 양만 준비한다. 민체스터 황제가 모두 마셔 버려 다른 이에게 실험해 볼 만큼 양이 남아 있지가 않았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백원의 궁에 들어가셨습니다.” “허…… 그건 죄인들이나 들어가는 곳 아니오. 어찌 황태자 전하를 그런 곳에.” 백원의 궁은 죄를 지은 황족을 유폐시키는, 이전 황후 레베카가 목숨을 버리기도 했던 곳. “폐하의 상태는 어떻답니까? 꼭 쾌차하셔야 할 텐데.” 한 귀족이 초조한 안색으로 물었다. 무혐의를 입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황제가 승하하면 상황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썩 좋지는 않은 것 같소. 등불을 든 여인이 잠도 안 자고 붙어 치료에 열중이긴 합니다만…….” “하아…….” 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애써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이니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주지 않겠소? 나는 그녀를 믿소.” “그렇긴 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이니…….” 레이디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명의이자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킨 여인. 이 순간 그 자리의 모두가 간절히 기원했다. 그녀가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켜 주기를. 그래서 황제 폐하도 쾌유시키고, 나아가 이번 심장마비의 원인까지 밝혀내 황태자의 무혐의를 밝혀내 주기를. ‘제발.’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귀족파에서 긴급회의를 요청한 것이다. 바로 황제의 음독 사건과 관련한 황태자의 처벌에 관한 회의를. *** 귀족파의 강력한 요구하에 긴급회의는 곧바로 소집되었다. 상석에 암셀 후작과 메르키트 백작이 자리했다. 그리고 3황자도 있었다. 3황자는 평소와 전혀 다른 딱딱한 얼굴이었다. “갑자기 무슨 긴급회의입니까?” 재상인 엘 후작이 황제파를 대표해 발언했다. “이 상황에서 다른 주제랄 것이 있겠습니까? 폐하의 음독과 관련해 논하고자 회의를 요청했습니다.” 음독. 그 단어에 황제파 인원들이 웅성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요? 음독이라니! 근거도 없이 그런 모함을!” 암셀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음독이 아니란 말입니까? 음독이 아니라면 왜 황제 폐하께서 축배를 마시자마자 피를 토하고 쓰러지셨단 말입니까?” “그거야 원래 앓던 지병으로!” “원래 앓고 계시던 지병의 증상 중 가슴을 움켜쥐고 피를 토하는 증상은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소만? 그런데 하필 황태자가 마신 술을 마시고 그런 증상을 보였다라…… 이걸 음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것 아닙니까?” 그 말에 황제파의 인원들은 발끈한 표정을 지었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절대 음독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너무 공교로웠다. 하필 술을 마시자마자 쓰러지셨으니! “음독이 아니라 다른 원인 때문에 그랬다는 증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음독이라 판단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으로 보입니다만. 음독이 아니란 증거가 있습니까?” 그 말에 황제파의 귀족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증거는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현재 폐하의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등불을 든 여인의 소견으로는 독으로 인한 증상일 가능성은 떨어진다 하였습니다.” 암셀은 피식 비웃음 지었다. “확실한 이야기입니까? 그녀가 폐하의 원인을 정확히 밝혀낸 것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은 제국 최고의 의사입니다. 그런 그녀의 말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있겠습니까?” “제국 최고의 의사이지만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황태자의 약혼녀이자, 클로랜스 가문의 딸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편견이 들어간 소견을 말할 수밖에 없을 터. 객관성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명확한 진단을 밝혀낸다면 모를까 인정할 수 없습니다.” 황제파의 귀족들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역시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엘 후작이 차분한 소리로 말했다. “음독이 아니란 증거는 없지만 음독이란 명확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상황이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엘 후작은 가만히 암셀을 바라봤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폐하가 쓰러지신 일입니다. 그런 대사건을 단순히 정황만으로 판단하자고 하시는 것입니까, 후작의 말은?” “……!” “그게 차일드의 방식입니까?” 그 말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암셀이 엘 후작을 노려보았지만 엘은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엘도 알고 있었다. 지금 상황은 황태자에게 지극히 불리했다. 물론 명확한 증거는 어느 쪽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정황이 너무 공교로웠고, 귀족파의 수작인지 여론도 지극히 안 좋았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정말로 황태자는 황제 시해범으로 실각할 위기였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밀려선 안 된다. “제국법에 의하면, 음독, 독살 같은 살인죄는 단순한 정황만으로 그 죄를 추정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암셀 후작, 당신의 주장은 제국법의 근본적인 원칙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황제파의 다른 귀족들도 기세를 몰아 주장했다. “그렇습니다. 단순히 정황만으로 이런 큰 사건을 급하게 판단하려 하다니. 도대체 그게 어느 나라의 방법입니까? 황태자 전하께 죄를 물으려면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황제파와 귀족파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이 정황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주장과 그것만으로는 죄를 확정할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런데…… 그렇게 회의장의 분위기가 과열될 때였다. 가정 상석에 앉아 있던 미하일이 입을 열었다. “그만.” “……!” “엘 후작.” 3황자가 자신을 부르자, 엘은 그를 바라봤다. “네, 전하.” “현재 이 제국에서 최종 사법권을 가진 이가 누구지?” “황제 폐하입니다.” 제국은 황제가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아바마마가 의식을 잃은 지금은?” “……!” 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원래는 황태자였다. 하지만 지금은 용의자로 몰려 있으니 자연스레 다음 계승자에게로 그 권한이 넘어간다. 따라서 3황자 미하일이 최종 사법권자였다. 황태자를 판결한 권한이 하필 적에게 있는 것이다. “전하…… 이십니다.” “그렇군. 잘 말했다. 그러면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내가 이 사건을 판결하는 데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나?” 황제파 인물들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의는 많았다. 하지만 황위 계승권자의 사법권 계승은 헌법에 명시된 일이다. 그러니 원칙적으로 맞았다. “없는 것으로 알고 판결을 내리겠다.” “……!” 미하일의 눈이 잠시 아픔이 깃들었다가 사라졌다. 이미 서로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 치지 않으면 죽는다.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도 죽는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먼저 그대들의 의견을 모두 다 잘 들었다. 양측 모두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하일의 말을 들으며 엘은 급히 생각했다. ‘안 돼! 3황자가 판결을 내리게 하면! 후폭풍을 감당할 수 없어!’ 최소 이 자리에서 음독범으로 판결이 나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제국법상 음독, 독살 사건은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판결을 내릴 수 없게 되어 있어! 음독범으로 몰아도 무조건 불복해야 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하일의 판결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미하일이 내린 판결은 다른 것이었다. “음독 여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판결 내릴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그대들의 주장처럼 어느 쪽도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하지만!” “……!” 단호한 목소리에 황제파의 귀족들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미하일은 평소와 다른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의 축배를 마시고 부황이 쓰러진 것은 분명한 사실! 설사 의도된 음독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잘못된 술을 진상해 지엄한 옥체를 손상한 죄에 대한 책임은 벗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 하지만…… 그건…… 꼭 축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축배를 마시고 쓰러지셨는데 축배 때문이 아니라? 그게 말이 되는가?” 아니다.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음독은 아니어도, 실제로 술과 황제의 쓰러짐이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미하일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포했다. “오늘은 일단 이것으로 마치지. 부황의 치료 과정 중 명확한 다른 원인이 밝혀지지 않는 한, 형님은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3황자를 필두로 귀족파의 인원들이 우르르 먼저 회의실을 나갔다. 남은 황제파의 귀족들은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아. 이를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다른 원인임을 밝혀내지 않는 한, 저들의 음해를 막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러게 말입니다. 어떻게 다른 원인임을 밝혀낼지.” 생각지도 못한 위기였다. 이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면 황태자는 그대로 몰락할 수도 있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결국…… 등불을 든 여인이 기적을 일으켜 주길 바랄 수밖에 없겠구려.” 그 말에 모두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 이제 남은 희망은 그녀밖에 없었다. 그녀가 폐하가 쓰러진 진정한 이유를 밝혀내면 황태자의 혐의는 단번에 벗길 수 있었다. ‘제발.’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녀가 있는 황실십자병원 쪽을 바라봤다. *** 엘리제는 황실십자병원에서 황제를 진료하고 있었다. “혈압은 어떻죠?” “수축기 85에 이완기 40입니다.” “조금 나아지긴 하셨지만 아직도 낮군요.” “네, 교수님. 수액을 충분히 투입하였는데…….”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조처들을 다 하고 있는데, 쇼크 상태에서 좀처럼 회복되지가 않았다. ‘도대체 원인이 뭘까?’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56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3 갑갑한 마음 때문일까? 최근 들어 계속 그녀를 괴롭히던 머리가 띠잉 하고 다시 아파와 엘리제는 한 손으로 잠시 머리를 짚었다. 그녀를 보조하고 있는 그레이엄이 걱정스레 말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 같습니다. 잠시라도 눈을 붙이는 게 어떻습니까?” “괜찮아요.” “하지만…… 벌써 이틀째 한숨도 안 주무시지 않았습니까? 식사도 거의 안 하시고…….” 그렇다. 약혼식 후 벌써 이틀의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엘리제는 단 한 순간도 민체스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치료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한 체력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 그러나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자신의 몸이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민체스터를 회복시켜야 했다. 우선적으로 억울하게 시해범의 누명을 쓰고 있는 황태자를 위해서 그랬다. 황태자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서는 황제가 쓰러진 이유를 정확히 진단해 내고 살려내야 했다. 그리고 황제를 살리고 싶은 이유는 그뿐이 아니었다. ‘폐하.’ 그녀는 의식을 잃고 침대에 누워 있는 황제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이 안타까움으로 물들었다.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었고, 황태자비 문제로 대립할 때는 그가 미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자신을 한결같이 아꼈다는 것이다. ‘영애 얼굴을 보니 오늘도 힘이 나는군. 맑은 차나 한잔 달여 주지 않겠나?’ 민체스터가 했던 말들이 떠오르며 가슴이 울컥했다. 그를 이렇게 잃고 싶지 않았다. 물론 원래부터 병환이 있었으니, 언젠가는 헤어짐의 순간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다. 암 환자의 가족들이 어떻게든 환자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녀도 그를 떠나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향해 보내는 따뜻한 시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뭘까? 엘리제, 생각해 내. 이런 쇼크를 일으키는 질환은 많지 않아. 네가 이미 다 알고 있는 질환일 거야. 생각해 내, 제발.’ 엘리제는 그의 심장마비가 평소 앓던 병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했다. 그의 병은 천천히 진행하는 만성 질환이지, 이렇게 갑작스럽게 악화하는 병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극물도 아니야.’ 그것도 생각해 보았다. 혹시 귀족파에서 린덴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설마 미하일이 이런 독한 수를 사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믿었지만, 의사로서 모든 가능성을 확인해 봐야 하니까. 하지만 체내 반응이 독극물에 의한 급성 반응과는 조금 달랐다. ‘완전히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일단 독극물 가능성은 낮아. 오히려 당시 폐하의 증상은 폐나 심장 쪽에 급성 문제가 온 것에 가까워.’ 당시 눈앞에서 목격한 것을 떠올렸다. 민체스터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울컥 객혈을 토했다. 가슴 통증은 심장의 문제를 의미하고, 객혈은 폐의 문제를 의미한다. 분명 급성으로 심장이나 폐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래서 심장 검사와 폐 엑스레이 검사를 했지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둘 다 아무런 이상이 나오지 않아.’ 문제는 그것이었다. 검사상 이상 소견이 발견되지 않았다. 저렇게 쇼크가 심한데! ‘이건 단순히 기술력의 한계가 아니야. 뭔가 놓치고 있는 거야. 뭐지? 뭘 놓치고 있는 거야, 엘리제. 생각해 내.’ 심장마비를 일으킬 정도의 쇼크를 일으키는 질환은 많지가 않다. 특히나 객혈과 흉통을 동반한 질환은. 그리고 그런 질환들은 대부분 지금의 기술력으로도 단서를 추정할 수가 있다. 심장에 문제가 있으면 심장 전류 검사에서 파형의 변화가 나오고, 폐에 문제가 있으면 엑스레이에서 병변이 나오니까. 하지만 가슴 통증과 피를 토했으면서 각 장기를 보는 검사는 정상이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하아.” 엘리제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에게 그레이엄이 말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쉬고 오십시오.” “괜찮아요.” “안 괜찮습니다. 그거 압니까?” “네?” “지금 평소와 전혀 다르단 것을.”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레이엄이 짐짓 엄한 말투로 말했다. “당신은 환자를 볼 때 항상 이성적이었습니다. 불같은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판단과 처치는 지극히 냉철하게 하였지요.” 그건 그레이엄이 그녀를 더욱 존경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불같은 마음과 냉철한 이성. 의사로서 가장 이상적이라 여겨지는 마음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은 냉철함을 잃고 있습니다. 물론 폐하를 어떻게든 살리려는 마음 때문인 것은 압니다. 하지만 의사가 그렇게 초조한 마음을 가지면 적절한 판단을 하기 어려운 법입니다.” “……!”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보다 본인 몸을 챙겨야 환자도 돌볼 수 있는 법입니다. 이틀이 넘게 한잠도 안 자고, 식사도 거의 안 한 상태에서 어떻게 폐하를 제대로 진료할 수 있겠습니까?” “…….” 틀린 말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녀는 초조한 마음에 너무 무리하고 있었다. ‘하아. 하지만 어떻게 초조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엘리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민체스터다. “아직 쇼크에서 다 회복되신 것은 아니지만 다행히 지금 폐하께서는 큰 변동 없이 활력 징후가 유지 중입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잠시 쉬고 오십시오.” “하지만…….” “그러다 당신이 쓰러지기라도 하면 더 큰 문제입니다. 이곳엔 저도 있고, 밴 자작님도 있으며, 피터 교수님도 계십니다. 다른 의사도 많습니다. 큰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진료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변화가 있으면 당장 부를 테니 조금이라도 쉬고 오십시오.” 그래도 그녀는 좀처럼 민체스터 곁을 벗어나지 못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활력 징후를 적어놓은 종이만 바라봤다. 결국, 그레이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결코 권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잠시라도 쉬려면. “그러면 황태자 전하께라도 잠시 다녀오십시오.” “……!” “얼굴이라도 뵙고 오십시오. 아마…… 그분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린덴. 그녀도 그가 보고 싶었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엘리제가 흔들리는 것을 안 그레이엄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갔다 오십시오. 오는 길에 잠시 눈도 붙이고요. 병원 안에서 주무시면 무슨 일이 있을 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어요. 잠시만 백원의 궁에 다녀올게요.” 결국, 그녀는 주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가 린덴에게 향했을 때는 이미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다. 고요한 황궁을 걸어 백원의 궁에 도착했다. “전하를 뵈러 왔어요.” “아…… 레이디 클로랜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로열 가드는 그녀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던 약혼식이었나?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시아비가 될 황제는 혼수상태고 약혼자인 황태자는 혐의를 받고 감금 중이다. 모두가 그녀의 행복을 바랐건만 최악의 약혼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쪽입니다.” 로열 가드는 백원의 궁 깊은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들어가겠습니다, 전하. 레이디 클로랜스께서 오셨습니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고. 린덴, 그의 얼굴이 나타났다. “……!” 엘리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핼쑥했다. 지난 이틀간 식사는 제대로 한 것일까? 초췌한 얼굴에 무뚝뚝한 금색 눈동자는 평소와 다르게 아픔이 깃들어 있었다. 아버지의 급환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린덴.” 그녀는 천천히 린덴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울컥거렸다. “……엘리제.” 그리고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순간. 왈칵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푸른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라 뚜욱 떨어졌다. “으흑. 리, 린덴…….” 린덴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아주었다. “울지 마라. 리제…….” “으흑. 흑……! 죄, 죄송해요. 흐윽…….” 그의 품에 안겨 엘리제는 펑펑 눈물을 쏟았다. 위로를 받아야 하는 것은 그이건만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다 속상했다. 황제 폐하가 그렇게 된 것도. 린덴이 슬퍼하는 것도. 너무너무 속상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린덴은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본인이 더 아플 텐데. 말없이. 묵묵히. 한참을 울고 난 그녀가 간신히 진정하자 그가 물었다. “며칠 사이 왜 이렇게 말랐느냐? 밥은 잘 먹고 다닌 건가?” “……네. 잘 먹었어요.” “거짓말. 누가 거짓말하라고 가르쳤지? 부탁이니 제발 그대의 건강도 챙겨. 머리 아픈 것은 어떻지?” 엘리제는 그가 걱정할까 거짓말했다. “머리는 다 나았어요. 이제는 약도 안 먹어요.” 거짓말이다. 잠을 못 자서일까, 아니면 민체스터가 그렇게 되어서일까? 두통은 오히려 더 악화했다. “거짓말 아니지?” “네, 정말이에요.” 린덴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틀 사이에 더욱 마른 얼굴을 조심히 어루만졌다. “제발 부탁이다. 몸을 챙겨. 그대마저…… 안 좋아지면 난 못 버틸 거다.” “…….” 그 말에 엘리제의 마음이 다시 울컥 치밀어 올랐다. 눈물을 참으려고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백원의 궁에서 지내는데,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괜찮다. 귀족파 놈들이 거슬리게는 하지만 그거야, 뭐.” 귀족파는 그를 어떻게든 시해범으로 몰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작은 실제로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혐의를 벗지 못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따로 대비책이 있는 것일까? 린덴은 크게 동요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저 황태자라면 이 최악의 상황에서도 무언가 대비책을 마련해 놨을 것 같다. ‘내가 급성 심장마비의 원인을 밝혀내면 자연히 혐의가 벗겨질 텐데.’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황제가 쓰러진 원인을 밝혀내면 그의 혐의를 벗길 수 있다. 그뿐인가? 원인을 알면 황제를 치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가 없으니 가슴이 미칠 듯이 답답했다. ‘하아.’ 이후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린덴이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의…… 상태는 어떠신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궁금했을 텐데 이제야 꺼내는 질문. 아마 두려웠으리라. 안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엘리제는 흔들리는 마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아직은 좋지 않으세요.” 의사로서 객관적인 답변. “……그런가.” 그는 낮게 탄식했다. 그 모습이 자신의 가슴을 더 아프게 해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황제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좋아지실 거예요.” “……?” “제가…… 제가 그렇게 할게요. 최선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꼭…… 꼭…….” 왜일까? 말을 하는 중에 자꾸 울먹거리게 되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자꾸 눈물이 고이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았다. 린덴은 잔잔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괜찮다, 리제. 알고 있어. 네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흐윽. 흑…… 죄, 죄송해요. 저, 정말 죄송…… 흐윽.” “괜찮아. 정말로. 정말 괜찮아. 그대가 뭘 잘못했다고 울어.” 그녀는 계속 떨어지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을 물었다. 얼마나 강하게 물었는지,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제.” “저…… 정말로…… 폐하를 좋아지게 할게요. 정말로요. 정말…….” 린덴은 잠시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고 있다. 그녀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그리고 그녀 이상 가는 의사는 이 세상에 없음을.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한계는 있을 것이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 의학의 한계였다. 괜찮다고. 너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려다 그는 그저 짧게만 말했다. “……고맙다. 내 엘리제.” *** 짧은 만남을 가진 후, 엘리제는 백원의 궁에서 나왔다. 보고 싶던 그를 만났지만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아.” 끝없는 한숨. 말없이 아파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그녀는 아무도 없는 황궁 정원 벤치에 앉아 무릎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제발. 생각해 내, 엘리제.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검사상 이상 소견이 없는 폐와 심장의 문제. 그것도 심장마비와 쇼크를 일으킬 정도의. 뭘까? 도대체 뭘까? ‘하아, 주여. 제발 알려주시옵소서.’ 그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57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4 “교수님! 교수님!” 저 멀리서 그녀를 부르는 다급한 소리가 들렸다. 황실십자병원의 젊은 의사였다. 엘리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과연. “큰일 났습니다! 폐하께서!” “……?!” “다시 쇼크가 악화하였습니다!” “……!”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엘리제는 가운을 펄럭이며 다급히 물었다. “활력 징후는 어떤가요?!” “수축기 혈압 60에 맥박 160회입니다. 호흡수도 35회로 빠릅니다!” 간신히 유지되던 활력 징후가 다시 심각한 쇼크에 빠진 것이다. 그녀는 다급히 민체스터를 살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얬다. 숨이 찬지 호흡도 가빴다. ‘폐에 문제가?’ 청진기로 폐음을 들었으나 여전히 정상이었다. “검사에 이상은 없나요?” “여전히 다 정상입니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검사는 정상인데 이런 쇼크에 호흡곤란이라니! “혈압유지 위해 수액 더 주세요! 약도 투입하고요!” “네, 교수님!” 응급 처치를 하며 그녀는 초조히 생각했다. ‘생각해 내. 이제 더는 시간이 없어. 지금 바로 생각해 내지 못하면 폐하는 돌아가실 거야. 안 돼. 절대 그렇게는 되지 않게 하겠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모든 가능성을 다 고려했다. 마치 백과사전을 펼쳐놓고 쭈욱 훑듯 비슷한 증상을 가진 질환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당시 상황도 되짚어 보았다. ‘술을 마시자마자 가슴을 움켜쥐며 피를 토했어. 술에 영향을 받는 질환이었을까?’ 하지만 술에 영향을 받아 이런 증상을 일으키는 병은 그녀가 알기로 없다. 술이 심장에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러면 검사에 이상 소견이 나왔을 것이다. ‘당시에 다른 특이 사항은 뭐가 있었지? 술 말고…… 주여. 제발. 알려주시옵소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스쳐 지나쳤던 사실이 한 가지 떠올랐다. ‘예식을 하며…… 4시간 동안 앉아계셨지. 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그 생각이 떠오른 엘리제는 멈칫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황제의 문제 목록이 쭈욱 떠올랐다. ‘원래 앓고 있던 만성 질환. 4시간 동안 무리하게 앉아 있었던 상태. 그리고 객혈, 흉통, 쇼크, 호흡곤란. 여러 검사상 이상 소견 없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문제 목록(problem list)를 기반으로, 기적적으로 한 가지 추정 진단이 떠올랐다. 확실하진 않지만……. “설마…… 폐 색전증?” 폐 색전증(Pulmonary embolism)! 폐로 가는 혈관을 피딱지가 틀어막는 초응급 질환이다. 만성병을 앓는 환자에서 주로 생기는 그 질환이면 현재 황제와 같은 증상을 나타낼 수 있다. 그것도 엑스레이나 심장 전류 검사상 아무런 이상 소견 없이.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확실하진 않아. 그냥 가능성이 있을 뿐이야.’ 폐동맥은 오른쪽 심장에서 곧바로 나온다. 그곳에 피딱지가 들어차면 심장에서 나가는 피의 흐름이 막히므로 심장이 기능을 못 한다. 그 결과 오는 것은 심각한 쇼크. 심장마비를 동반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바로 민체스터의 경우처럼. 문제는 폐나 심장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닌, 혈관이 막히는 질환이기 때문에 엑스레이나 심장 전류 검사에서는 이상 소견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진단해 내기가 굉장히 어렵다. 현대 지구에서도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갑자기 이유를 못 찾고 돌연사하는 경우, 많은 원인이 이 폐 색전증이었다. ‘정말 폐 색전증일까?’ 여러 임상 양상을 봤을 때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의심은 가는데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폐 색전증은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진단할 수가 없는 병이야.’ 이 질환을 진단하려면 CT가 필요하다. 아니면 다른 핵의학 검사나 하다못해 초음파라도. 모두 이 시대에는 불가능한 검사다.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는 폐 색전증을 확실히 진단해 낼 수가 없다. ‘어떻게 하지? 확실하지 않으면? 치료를 할 수는 없는데.’ 엘리제는 고민했다. 그녀가 주저하는 이유. 험악한 치료 방법 때문이었다. ‘폐 색전증을 치료하려면 가슴을 열어야 해. 그리고 폐동맥과 심장을 메스로 열어 피딱지를 꺼내야 하는데…….’ 개흉 수술! 폐 색전증을 치료하려면 바로 그 개흉 수술을 해야 했다. 굉장히 위험한 방법이다. 특히나 저렇게 몸 상태가 안 좋은 환자에게는. ‘만약 가슴을 열었는데 폐 색전증이 아니면? 그때는 돌이킬 수가 없어.’ 폐 색전증이 정말 맞는다면 상관이 없다. 그러면 가슴을 여는 수술만이 민체스터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니라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쇼크 상태인데 그대로 사망할 것이다. ‘어떻게 하지?’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무나 어려운 선택이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제를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선택이 오히려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의사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수액에 반응이 없습니다! 혈압 더 떨어집니다, 교수님!” “……!” 옆에서 밴 자작이 나지막이 탄식했다. “폐하. 주여…….” 다른 의사들도 눈을 감았다. 치료에 반응하지 않으니 더는 방법이 없었다. 아마 황제는 이대로 악화하다 사망할 것이다. 밴 자작이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엘리제에게 조심히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 이제…… 황태자 전하를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3황자 전하도요.” “…….” 가족이 임종을 지켜볼 수 있게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황제의 얼굴을 바라볼 뿐. 밴은 그 작은 소녀에게 안쓰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레이디 클로랜스, 당신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폐하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아마 폐하께서도…… 천국에서 당신께 감사할 것입니다.” 그 말이 그녀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엘리제가 물었다. “더는 방법이 없겠죠?” “네, 이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다 했습니다.” “이대로 놔두면 폐하는 승하하시겠죠?” 밴은 씁쓸히 웃었다.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그녀가 이런 물음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도저히 폐하를 놓아줄 수가 없어서 리라. “네,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이제는 놔드려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 그 말을 들은 엘리제는 마음을 결정했다. 이대로 놔두면 민체스터는 죽는다. 수술을 해도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하지 않을까? “황태자 전하를 불러주세요.” “네, 그러겠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시라고 언질하겠습니다.” 하지만 엘리제는 포기하고 임종을 준비하려 황태자를 부르려는 것이 아니었다. “수술 준비도 해주세요.” “네?” 밴이 놀라 그녀를 바라봤다. 갑자기 무슨?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수술 준비를 하면서 최대한 빨리 전하가 이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어쩌면…… 위험하지만 폐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을 수도 있어요. 그 방법에 대해 전하와 상의하겠어요.” “……?!” 위험하지만. 만약 자신의 선택이 틀렸다면, 큰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것을 감수하고 민체스터를 살리는 길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위험하다 할지라도 이 길을 택하지 않으면 그를 살릴 방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수술은, 특히 이런 생명이 걸린 위험한 수술은 그녀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 특히 장자인 황태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전하께 말씀을 드려야 해.’ 곧 린덴이 로열 가드와 함께 십자병원에 도착했다. “엘리제, 어떻게 된 일이지?” 그가 굳은 눈으로 물었다. “설마 아바마마께서?” 최악의 상황을 짐작한 것인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에요.” “……그 말은?” “네, 많이 안 좋으십니다.” 린덴의 눈이 괴로움으로 물들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짧지만 깊은 슬픔이 담긴 음성.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시도해 볼 방법이 있긴 있어요. 어쩌면 폐하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는…….” 린덴의 눈이 커졌다. “그게 뭐지?!” 엘리제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린덴의 표정이 시시각각 굳어졌다. 상황을 이해한 것이다. “……위험하군.” “네, 위험합니다.” 엘리제는 솔직히 말했다. 선택이 맞는다면 황제를 살릴 수 있다. 하지만 틀린다면? 그녀의 심정은 수술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수술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지만, 위험을 감수하면 어쩌면 황제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런 사안은 의사 혼자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족의 생각도 중요했다. ‘더구나 그냥 환자가 아니니까.’ 그녀는 의사로서 가급적 정치적 사항은 생각지 않으려 하고 있지만, 이번 경우는 그럴 수가 없었다. 민체스터는 황제다. 린덴은 황태자고. 특히 공교로운 상황 덕에 혐의를 벗지 못하고 유폐 중이었다. 만약 수술해서 그녀의 생각이 맞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만, 틀렸다면? 그래서 민체스터가 수술 중에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정치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귀족파가 절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때 린덴이 대답했다. 고민 없이 곧바로. “진행해라.” “……!” 그 주저나 고민 없는 답에 엘리제는 살짝 놀랐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어쩌면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다. 그의 동의로 그녀가 수술했는데, 황제가 죽으면 그는 그대로 몰락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린덴은 말했다. “아버지를 살리는 일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그게 무슨 방법이라도 당연히 시도해 봐야겠지. 정치적인 사안은 그다음 문제야.” “……!” “그리고 무엇보다…… 난 그대를 믿는다.” 믿는다. 그 말에 그녀는 그를 바라봤다. 그의 금안에는 깊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엘리제는 갑자기 울렁이려는 가슴을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그렇게 자정이 넘은, 새벽에 가까운 시간에 응급 수술이 시작되었다. 집도의는 엘리제, 어시스트는 황실십자병원 최고의 의사인 밴과 피터 교수가 들어왔다. 그 외에도 수많은 의사가 유사 상황에 대비해 수술장 근처에서 대기했다. “바로…… 진행하시겠습니까?” 밴과 피터가 불안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들도 설명은 다 들었다. 분명 지금으로선 이 방법 외에는 없긴 했었다. 하지만 무려 황제의 옥체다. 확실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 옥체에 칼을 대야 한다니. 더구나 그냥 수술도 아닌, 개흉 수술이다. 극악한 위험도로 꼽히는. 물론 방법이 없으니 다른 일반 환자였으면 주저 없이 위험을 감수했을 것이나,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엘리제는 굳건히 답했다. 이미 고민은 끝났다. 남은 것은 그저 기도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뿐! ‘도와주시옵소서.’ 짧게 기도 후 말했다. “메스 주세요. 시작하겠습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58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5 엘리제는 이 순간 눈앞에 환자가 민체스터인 것을 머리에서 지웠다. 이런저런 잡념은 수술을 방해할 뿐이다. 그저 환자로만 보고 수술을 진행했다. 찌익. 가슴 정중앙을 메스가 가르며 피가 흘렀다. 하지만 다른 부위와 다르게 바로 내부까지 가르진 못했다. 가슴 정중앙에는 복장뼈이 있기 때문이다. ‘오른 심장과 폐동맥에 접근하기 위해선 저 복장뼈를 양옆으로 절단해야 해.’ “뼈 절단할 철제 칼 주세요.” 밴과 피터 교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것은 정중흉골절개술(Median sternotomy)! 특별히 제작된 커다란 철제 칼로 가슴 중앙의 뼈를 위아래, 일자로 절단하는 것이다. 뼈를 절단하다니. 이야기만 들어도 끔찍한 술기. 더구나 과도한 힘이 들어가거나 자칫 실수라도 하면 주변 갈비뼈가 손상되거나 바로 밑의 심장이나 대동맥 등이 상할 수도 있다. “뼈 절단합니다.” 하지만 저 여린 체구의 소녀는 커다란 철제 칼을 들고 주저 없이 뼈를 절단하기 시작했다. 커다란 칼과 뼈가 마찰하는 소리가 드득 수술장을 울렸다. 온갖 산전수단을 다 겪은 의사도 흠칫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엘리제는 굳은 얼굴로 쇄골 부위부터 명치까지 일자로 뼈를 절단했다. 멈추지 않고 단 한 번에. 그리고……. “……!” 밴과 피터의 눈이 흔들렸다. 기다란 복장뼈가 좌우로 깨끗하게 절단되며 그 안의 심장과 대동맥, 폐가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한 흉골 절개술!’ 그들은 급박한 상황 중에도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저 작은 소녀 외에는 이 흉골 절개술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는 의사는 없었다.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그녀에게 배우고 있긴 하지만 아직 까마득했다. “…….” 엘리제는 민체스터의 가슴 안 장기들을 살폈다. 심장, 폐동맥. ‘제발, 주여.’ 정말 그녀의 짐작대로 저 폐동맥 안에 피 떡이 차 있으면 그걸 빼내 주면 민체스터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면? 그때는 방법이 없었다. ‘제발…….’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수술칼을 가져갔다. 현대 지구처럼 초음파나 CT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피 떡을 확인하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폐동맥을 메스로 째서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물론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폐동맥은 대동맥과 더불어 인체에서 가장 큰 혈관. 메스로 째는 순간 어마어마한 출혈이 일어날 것이다. ‘제발…… 제발…….’ 찌익. 메스가 폐동맥의 중심 부분을 쨌다. 울컥! 분수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붉은 피가 그대로 그녀의 뺨에 피어올랐다. 그리고. “……!” 그녀는 아찔함을 느꼈다. 없었다. 아무것도. 그저 걷잡을 수 없는 피만 솟구치고 있을 뿐이었다. 엘리제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폐색전증이 아니었나? 그러면 민체스터는? ‘아니야. 아직 먼 부위의 혈관들이 남아 있어. 그곳까지 확인을 해봐야 해.’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피 사이로 먼 부위의 폐동맥 혈관 벽에 희끗희끗하게 검은 물체가 보였다. “……!” 그녀는 벼락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피 떡(blood clot)이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했다. 피 떡이 폐동맥 우측을 막고 있었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던 것이다! 엘리제는 곧바로 처치에 들어갔다. “철제 집게 주세요! 얇고 긴 것으로요!” 혈관의 절개한 부위로 얇은 집게를 넣었다. 그리고 조심히. 조심히. 혈관 벽을 손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길게 밀어 넣었다. 이윽고 탁하고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고, 그녀는 그걸 집게로 물었다. 철컥! 그리고 집게를 뽑자 기다랗게 딸려 나오는 피딱지! 그걸 보고 의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 맙소사!” “신이여!” 정말로 등불을 든 여인의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저런 게 폐동맥을 막고 있었으니 쇼크가 회복이 안 되었던 거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폐동맥은 우측 심장 바로 앞에 있는 혈관인데, 저런 게 피의 흐름을 막고 있었으니.” 의사들이 흥분해 떠들었다. 저런 피 떡이 심장의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으니, 몸에 혈액 공급이 안 돼 쇼크가 왔던 것이다. 엘리제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되었다. 이걸로 막힌 피의 흐름을 뚫어주었으니, 심장도 제 기능을 할 것이고, 쇼크도 회복될 것이다. ‘살릴 수 있어!’ 과연 혈압을 체크한 간호사가 외쳤다. “혈압 조금씩 올라갑니다, 교수님!” 밴과 피터 교수가 감탄을 넘어 존경이 담긴 얼굴로 엘리제를 바라봤다. 어떻게 또 이런 기적을 일으킨 것인지. “이제 끝난 것입니까, 레이디 클로랜스?” “아니요. 이런 피딱지는 여러 군데에 한꺼번에 생기는 경우가 많아 다른 부위의 폐동맥도 확인해 봐야 해요.” 지금 빼낸 곳은 우측의 폐동맥이었다. 그녀는 반대 측의 폐동맥도 꼼꼼히 살펴 피딱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 추가적인 피딱지가 관찰되었다. 모든 부위를 꼼꼼히 살핀 후, 얇은 실로 동맥을 꿰매기 시작했다. 얇은 혈관을 봉합하는 엘리제의 손기술에 밴 자작과 피터 교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그녀의 손기술은 가히 하늘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다른 이들은 감히 흉내 내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일단 급한 처치를 끝낸 그녀는 잠시 숨을 돌렸다. 이제 막힌 길을 뚫어주었으니 민체스터의 쇼크는 회복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한 단계가 더 남았어. 가장 위험한.’ 엘리제는 메스를 움직였다. 메스가 닿은 부위를 본 밴과 피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레이디 클로랜스? 거기에는 왜?” 그녀가 메스를 가져간 부위는 우측 심장이었다. “일단 동맥에 피딱지를 모두 제거했지만, 피딱지가 우측 심장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걸 꺼내줘야 해요. 안 그러면 우측 심장의 피딱지가 다시 폐동맥으로 날아가 똑같은 상황이 또 반복될 거예요.” “아…….” 물론 그녀도 심장을 여는 수술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워낙 위험했으니까. 그래도 완벽히 수술을 마치기 위해서는 불가피했다. “절개합니다.” 찌익. 벌컥! 심장벽이 열리는 순간, 피가 솟구쳐 올랐다. ‘시간 싸움이야! 최대한 빨리!’ 역시 추가적인 피딱지가 관찰되었다. 그걸 철제 집게로 꺼낸 후, 엘리제는 곧바로 손을 움직였다. 절개한 심장을 다시 봉합하기 위해. 1초, 2초. 회중시계의 초침이 움직일 때마다 민체스터의 몸에서 혈액이 빠져나갔고, 그녀의 몸도 피로 물들었다. “교수님, 다시 혈압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듣지 못했다. 모든 생각을 잊었다. 모든 감각을 닫았다. 오직 박동하는 우측 심장의 움직임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작은 손에 달린 바늘이 심장벽을 뚫었다. 깊게 들어간 바늘은 반대 측 벽을 뚫고 다시 올라왔고, 질끈. 실이 묶이며 벽이 닫혔다. 그렇게 그녀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절개된 벽이 오므라들었고, 시간이 지나자. 탁. 심장의 벽이 완전히 닫히며 피가 멎었다. “…….” 순간 수술장에 침묵이 흘렀다. 모두 믿을 수 없는 일을 해낸 소녀를 바라보기만 할 뿐, 감히 입을 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작은 소녀는 들고 있던 바늘을 살짝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말했다. “수술 끝났습니다. 클로즈하겠습니다.” “…….” 수술의 성공을 선언하는 문장. 잠시의 정적 후. “와아아!” “레이디 클로랜스 만세!” “등불을 든 여인 만세!” 수술장이 터질 듯한 함성으로 뒤덮였다. 저 작은 소녀가 기어코 황제를 살려낸 것이다! ‘……린덴.’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린덴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제.” “전하.”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와락. 피에 젖은 그녀를 껴안았다. “저, 전하? 피가…….”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더욱 그녀를 강하게 안았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정말로…….”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다행이었다. 정말로. 민체스터가 이렇게 급하게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있어서. 린덴이 더 아파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어서. 그리고 이런 피딱지를 발견했으니 그의 혐의도 완전히 풀리게 되었다. ‘사랑해요, 린덴. 정말로…….’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수술을 마무리해야 해요, 전하.” “그래.” 복장뼈를 절단해 놨으니 서둘러 다시 붙어야 했다. 엘리제는 절단한 복장뼈를 철심으로 다시 이을 준비를 하였다. 못에 가까운 커다란 쇠바늘을 이용해 철심을 박는 뼈 봉합은 굉장한 힘 소모를 요구한다. 솔직히 엘리제는 체구가 여려, 이 뼈 봉합을 할 때마다 매우 괴로웠지만, 그녀 말고는 제대로 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황태자비가 되기 전에 최대한 많은 교수님에게 이 기술을 전파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뼈 봉합을 하려는데, 뭔가 가슴 안쪽 깊은 곳에 이상한 물체가 보였다. ‘어, 저게 뭐지?’ 심장 뒤쪽 깊은 곳. 이렇게 가슴을 열지 않았으면 절대로 관찰하지 못하는 부위. 아니, 가슴을 열었어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깊은 부위. 그곳에 종괴가 있었다. ‘……설마?’ 황제의 병은 미지의 만성 질환. 그녀는 그 질환을 모종의 혈액 질환이나 자가 면역 질환, 아니면 밝혀지지 않은 종괴로 추정했었다. ‘혹시…… 저게 폐하의 질병의 원인인?’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메스와 철제 집게를 이용해 조심히 종괴를 떼어냈다. “……!” “레이디 클로랜스? 그 종괴는?” 밖으로 나온 종괴를 관찰한 의사들과 엘리제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임파선 종괴랑 비슷한 형태잖아!’ 임파선 종괴, 임파종. 경험적으로 봤을 때 임파종과 거의 흡사한 형태의 종괴였다. ‘임파종이면 폐하의 증상이 다 설명돼! 설명 불가능한 체중 감소, 기력 감소가 모두 임파종의 증상이니까.’ 심지어 이번에 발생한 폐색전증도 임파종에서 흔하게 오는 합병증이었다. ‘제대로 확인해 봐야겠어. 임파종이면…… 프레밍이 남긴 약물을 이용해 어쩌면 치료를 시도해 볼 수도 있어.’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생각했다. 대연금술사, 아니, 대약학자로 불러야 할 프레밍은 생전에 무수히 많은 약을 개발했다. 프레밍의 정체가 의심될 정도로 시대를 뛰어넘는 약도 많았는데, 대표적인 약들이 항생제, 강심제, 마취제, 승압제 등등이었다. 그런 종류 중에는 도저히 용도를 알 수가 없어서 버려져 있는 것들이 꽤 있었는데, 단 한 명, 엘리제만큼은 사용법을 알 수 있었다. 지구에서 사용했던 약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약 중에 혈액병이나 임파종에 사용하는 면역 억제제가 있어. 그 약들을 잘 조합하면 어쩌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몰라!’ 아직은 모른다. 저 종괴의 성질을 정확히 분석하고 연구해 봐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민체스터를 회복시킬 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물론 심장마비까지 겪었으니, 이전처럼 완전히 건강하게 되지는 못하시겠지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의식을 회복하는데 만도 어느 정도의 세월이 걸릴지 모른다. 그러니 권력 승계는 변함없이 일어날 것이다. 앞으로 일어날 정국의 혼란에도 큰 영향을 끼치진 못할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중에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어느 정도 건강을 찾으면 자신과 린덴을 보며 미소 지어줄 수 있을 것이다. 장미 정원에서 자신이 달여 주는 차를 마시며 즐거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것 아닐까? 아니, 그것보다 의미 있는 일이 있을까? ‘폐하.’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뵙겠습니다!! 00159 6-6 민체스터 ========================================================================= 6장 민체스터 - 6 수술 성공 후 민체스터의 상태는 순조롭게 안정을 찾아갔다. 일단 쇼크가 회복되었고, 기타 활력 징후도 정상으로 돌아갔다. “대단하군요. 이렇게 거짓말처럼 좋아지시다니.” 황실십자병원의 의사들이 감탄을 토했다. 등불을 든 여인은 아무리 봐도 놀람이 끝이지 않는다. “심장마비를 일으킨 폐색전증 같은 유의 질환은 수술로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절대 좋아지지 않아요. 대신 수술해서 악화한 원인을 제거하면 금방 좋아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렇군요. 항상 많이 배웁니다.” 그 설명에 교수들은 존경의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황실십자병원에서 일하게 된 지 이제 1년 정도. 그 기간 동안 제국 최고의 명의라는 십자 병원의 교수들은 그녀의 말이라면 사과가 포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엘리제를 신뢰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면 아바마마는 언제 깨어나시는 거지?” “그건…… 더 시간이 걸릴 거예요. 조금…… 오래 걸릴 수도 있어요.” 린덴의 물음에 엘리제가 답했다. 심장의 기능은 회복되었지만 약혼식 당시 왔던 심장마비가 문제였다. 옆에 있던 엘리제가 곧바로 심폐소생술을 시행했지만, 아무래도 뇌에 피가 덜 가며 부담이 갔을 것이다. 이런 경우 의식이 언제 회복될지는 몰랐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군. 그러면 그 임파…… 선 종괴라고 했나? 그 병에 대한 치료는? 종괴를 뗀 것으로 치료가 완료되는 것은 아닌가?” “다른 종괴와 다르게 임파선 종괴는 혈액병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약물치료를 해야 해요.” “이제 바로 하는 것인가?” “아니요. 지금은 몸 상태가 안 좋으셔서 최소 의식이 회복된 다음에 진행할 예정이에요.” “그러면…… 좋아지실 수 있는 건가?” 엘리제는 조심히 답했다. “완전히 이전처럼 건강해지시긴 어려워요. 무리한 일은 하기 힘드실 거예요. 치료 반응도 살펴야 하고요. 그래도 특별히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편하게 지내실 수 있을 정도로는 회복될 가능성이 있어요.” 그 대답에 린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한숨이었다. “고맙다. 정말…… 정말로 고맙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제가…… 조금 더 잘했으면 좋았을 텐데…….” 솔직히 그녀는 아쉬웠다. 더 빨리 민체스터의 병을 진단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진단이 늦어진 것은 엘리제의 잘못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심장 뒤에 몰래 숨어 있는 종괴를 알아낼 재주는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확실한 추정 진단도 없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개흉 수술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다만 이 시대에 CT나 기타 진단 검사 도구들이 있었으면 진즉 황제의 병을 진단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너무 아쉬웠다. “아니야. 정말…… 정말…… 고맙다. 이 나라의 황태자로서도, 그리고 아바마마의 아들로서도 너무 고마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전하. 아니, 린덴. 고맙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 말에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살짝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저…… 당신을 사랑하니까요. 그…… 사랑하는 사이끼리…… 그렇게 고맙다는 말…… 하는 것 아니래요…….” 린덴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는 살짝 부끄러운 표정으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왜요?” 린덴은 대답 대신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작은 몸이 으스러지도록. 몸에 닿는 단단한 품에 그녀의 심장이 쿵쾅거리도록.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숙여 붉은 입술을 훔쳤다. “아…… 리, 린덴…… 여기서는…….” 거침없이 탐하는 그의 혀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지며 몸이 나른히 풀렸다. 그는 그녀를 한참이나 괴롭히고 나서야 입술을 떼었다. 엘리제는 사과 같은 얼굴을 그의 품에 묻었다. “여, 여기 병원 복도라고요. 사람들이 봐요.” “그래서? 보면 어때서?” “부, 부끄러워요.” 린덴은 웃었다. 귓불까지 붉어진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그는 품 안에 안긴 백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 말대로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지. 대신.” “대신?” “너한테 상을 줄 거야. 황태자로서, 아니, 이 나라의 주인이 될 이로서 주는 감사의 상이니 그건 거절하지 말도록.” 그 말에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뭘 주려고 그러지? 보석은 필요 없는데? “전 상으로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은데요? 아, 오늘은 바나나 타르트도.” 린덴은 피식거렸다. 그놈의 딸기 케이크랑 디저트는 지겹지도 않나? “그대를 위해서 아예 황궁에 디저트 경연 대회를 열어주지. 그대를 심사위원으로 해서. 제국 최고의 요리사만 참석할 수 있도록 하지.” 농담이라 생각한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정말요?” “그래, 우리 브리티아뿐 아니라, 프랑소엔 공화국이나 스페냐 왕국, 로우랜드 등에서도 초빙해도 좋겠군.” “와아,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생각했다. 반짝이는 눈이 귀여웠다. 저 눈을,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고 싶은데. 상이고 자시고 결혼 먼저 할까? “좋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대회를 열면 돈이 너무 많이 들잖아요. 저는 카린 베이커리 케이크면…… 읍?” 말을 잇던 엘리제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다시 입을 맞춰왔던 것이다. 복도에서 그만! 하며 그의 가슴을 두드렸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탐하며 말했다. “디저트는 디저트대로 받고, 상은 따로 줄 테니 거절하지 마. 뭐, 거절해도 줄 거지만.” 도대체 무슨 상을 주려고? 엘리제는 키스를 당하며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린덴은 알려주지 않았다. *** 그녀의 수술 성공 소식은 곧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등불을 든 여인, 기적 같은 수술로 황제 폐하를 살려내다!] 전 세계를 아우르는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를 구한 일이다. 제국, 아니, 전 세계의 모든 언론사가 그녀가 해낸 일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정말 다행이야. 폐하께서 고비를 넘기셨다니.” “그러게. 정말 많이 걱정했는데. 새벽마다 교회에 나가 기도했다고.” “나는 성당에 나가서. 이대로 폐하가 잘못되는 줄 알고 얼마나 마음이 졸이던지.” 민체스터는 개인적으로 완벽한 성품을 가진 이는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의 편애는 혈탑의 비극이 벌어지는 단초를 마련했고, 여러 성격적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황제 민체스터는 일평생 제국을 위해 봉사했다. 어떨 때 보면 그는 권력을 가진 황제가 아니라, 그저 제국이란 거대 기계의 부속품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의 통치 아래 제국은 산업화를 성공적으로 마쳤고, 온 시민은 영광된 번영을 누렸다. 그런 만큼 시민들의 그를 향한 존경과 사랑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황제 폐하 만세!” “등불을 든 여인 만세!” “뇌제 민체스터 만세! 황태자비 만세!” 기사를 접한 시민들이 론도 거리에 뛰쳐나와 신문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살얼음 같던 정국 분위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거리가 축제로 변했다. 시민들은 황제의 이름과 레이디 클로랜스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했다. 그리고 감사하는 것은 시민들뿐이 아니었다. 귀족들, 특히 황제파에 속한 이들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덕분에 황제가 살아난 것은 물론 황태자도 혐의를 완벽하게 벗게 되었으니까. “레이디 클로랜스 덕분에 살았구려.” “그러게 말입니다. 그녀는 정말 기적의 천사입니다.” 그리고 다른 인물도 그녀에게 찾아와 감사의 인물을 하였다. “고마워, 리제.” 한참 황제의 진료를 보고 있을 때 찾아온 이를 보며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3황자 미하일이었다. “밀.” “정말 고마워.” 미하일은 다시 말했다.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웃고 있는 그의 눈에 괴로움이 보였다. ‘밀…….’ 그녀도 알고 있었다. 황제가 쓰러져 있을 때, 귀족파에서 황태자를 음해했던 것을. 그리고 그 음해는 저 미하일의 지시 아래 이뤄졌다. 하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사실. 깊은 밤. 병원마저도 고요에 잠든 늦은 밤마다 미하일은 민체스터를 찾아왔다. 그러고 괴로운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담겨 있던 아픔은 무엇이었을까? ‘하아.’ 이 두 형제는 왜 이럴까? 차라리 독하기라도 하지. ‘하긴 독했으면 이런 싸움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겠지.’ 린덴이 비정했으면 어린 시절 어머니의 죽음을 모른 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파마저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안아 권력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하일이 비정했으면 어머니를 외면하고 그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로마노프령의 독립 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어디 아파?” 미하일은 그녀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괜찮아요. 최근 무리해서 그런 것 같아요.” 미하일은 그녀의 이마를 살짝 어루만졌다. 갑자기 닿은 그의 느낌에 엘리제는 살짝 놀랐으나, 특별히 사심이 없는 손길이란 것을 알아 피하진 않았다. 미하일의 체온은 린덴과는 다르게 따뜻한 느낌이었다.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은데. 절대 무리하지 마. 알았지?” “네, 그럴게요.” “밑에 의사들 많잖아. 혼자 하려고 하지 말고. 최대한 부려 먹으라고. 너는 착해서 먼저 다 하려고 해서 문제야. 원래 높은 사람은 거들먹거리며 시키기만 하는 건데.” 그 말에 엘리제는 미소 지었다. 미하일도 마주 미소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둘은 잠시 그렇게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리제. 나 사실 할 말이 있어.” “네, 말하세요.” 하지만 미하일은 주저하며 바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밀?” “아니다. 몸 건강히 잘 지내.” “……?” 그녀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 가볼게. 다음에 봐.” 그러고 그는 사라졌다. ***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민체스터는 완전히 안정을 찾았다. 물론 의식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건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 한창 진료에 열중이던 엘리제는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들었다. “저에게…… 백작 위를 내리기고 결정되었다고요?” “네, 자작님. 아니, 이제 백작님이 되시겠군요.” 소식을 전하러 온 시종은 기쁜 표정으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니, 왜 어째서? 이건…… 너무 과한데…….” 그녀는 당황해 말했다. 백작이라니! 얼마 전 받은 자작 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자작이 일반적인 귀족의 계급이라면 백작부터는 고위 귀족에 반열에 들어간다. 봉건 시대라면 수많은 남작, 자작을 거느리며 가히 한 지역의 왕과도 같이 군림하는 존재. 시대가 바뀌어 그런 권세는 없어졌지만, 그 명예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 백작 위를 자신에게 내리겠다니? 도대체? “너무…… 과한데요.” 하지만 시종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과하지 않습니다. 자작님은 우리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폐하의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기적 같은 수술로요. 그리고 그 외에도 세운 공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나이는 이제 18살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그것도 여인의 몸으로 백작 위를 받다니. 계승이 아닌 황실로부터 직접.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시종은 오히려 이렇게 반문했다. “저는 전혀 과하지 않다 생각합니다. 황제 폐하의 생명은 고작 백작 위에 비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0 6-7 파국 ========================================================================= 7장 파국 - 1 “……!”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물었다. “이 내용은…… 황태자 전하가 발의하신 건가요?” 혐의를 벗은 황태자 린덴은 의식을 잃은 민체스터를 대신해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사실상 황제와 같은 권위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귀족파는 그 대리청정에 반발했지만 반대할 어떤 명분도 없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떤 대신도, 귀족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크게 찬성했습니다. 아마 론도의 시민들도 자작님을 승작시키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부담되지만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이런 걸 바라고 한 일이 아닌데.’ 그렇게 그녀는 일개 귀족가의 영애에서 16살에 기사(Dame) 서임. 17살에 제국군 대령, 의무사령관 재직, 18살에 자작 위 수여, 그리고 같은 해에 백작 승작을 하는 유례없는 기록을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 뭐, 사실 황후가 될 그녀이기에 이런 작위는 실제적 의미는 없긴 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명예였다. 제국 역사상 여성이, 그것도 이렇게 어린 나이에, 남편의 작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공으로 백작이 된 것은 처음이니까. 서대륙 전체를 둘러봐도 없던 일이다. 그리고 린덴이 준비한 진짜 상은 고작 명예뿐인 승작이 아니었다. “……전하?” 그녀는 작위 수여식 날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상에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건……?”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상을 줄 거라고. 받아.” “하,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합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그녀는 무릎을 꿇으며 사양했다. 정말 너무 과했다. 그가 아니, 황실에서 그녀에게 내린 것은 무려 ‘황실 십자가’였으니까! 황실 십자가(Royal cross)! 머나먼 옛날부터 내려온 황실의 보물로 다이아몬드로 수놓아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조각된 목걸이였다. 신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었다는 성서의 교리처럼 황실 십자가의 소유자에게는 한 가지 권한이 부여된다. 바로 무소불위의 면책권! 한 대에 한하여 이 보물의 소유자는 그 어떤 죄를 지어도, 황제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권한. 황실에 어마어마한 은혜를 끼친 자에게만 수여되는 보물로 브리티아 제국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 십자가가 수여된 적은 10번이 되지 않는다. “감히 받기 어렵습니다.” 엘리제는 곤란한 얼굴로 거절했다. 너무 과했다. 그리고 자신이 저걸 받아 어디에 쓰겠는가? 하지만 린덴은 완강했다. “황제 폐하의 권한을 대신하여 내리는 상이다. 거절은 허락지 않는다.” “…….” 그래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작위 수여식에 온 다른 사람들이 못 듣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받아라. 혹시 모르지 않느냐? 나중에 부부 싸움하고 써먹을 일이 생길지.” “……!”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부부 싸움으로 이 면책권을 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하아.’ 결국, 문무대신들이 자신만 보고 있어 엘리제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을 받았다. 짝짝짝! 수많은 사람이 그녀의 작위 수여를 축하해 주었다. 그렇게 그녀는 엘리제 백작이 되었다. 한 번에 한하여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수 있는 면책권도 얻었다. 지극히 영광된 작위 수여식이었다. *** 그녀의 작위 수여가 끝난 후, 황태자 린덴은 사자궁으로 돌아왔다. 시종 란돌과 비서관인 크리스가 그를 맞았다. “차를 내올까요?” “그래, 엘리제가 알려준 레시피대로.” 엘리제는 그를 위해 사자궁의 시종장 란돌에게 이런저런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덕분에 그는 이전과는 비교도 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차 맛을 내게 되었다. 곧 란돌이 차를 내왔고, 린덴과 크리스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지금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전하.”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수고. 그가 백원의 궁에 감금돼 고초를 겪었던 것을 말한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뭘, 그런 걸 수고라고. 부황께서 좋아지셔서 천만다행이지.” 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크리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다행입니다.” 그러고 둘은 잠시 말없이 차를 마셨다. 약간은 긴장된 침묵. 이윽고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 시작하실 것입니까?” 린덴이 그를 바라봤다. 크리스는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눈가는 지극히 차가웠다. “…….” 린덴은 잠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한참이나 론도의 풍경을 바라봤다. 크리스는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준비는?” “끝났습니다.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이번 전하의 감금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런가?” “네, 이번 사건 때 귀족파에서 여러 여론을 이용해 전하를 음해하려고 한 증거를 확보했습니다. 그 사실을 터뜨리면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 3황자의 지지율을 폭락시킬 수 있을 듯합니다.” 민체스터는 모든 이의 존경을 받는 황제이다. 그런데 그런 황제의 위급을 이용해 형제를 음해하려고 하다니. 친근한 3황제의 이미지는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 “그렇군.” “네, 그렇게 일단 시민들이 등을 돌리게 한 후, 손가락부터 하나하나 쳐 내면 될 듯합니다. 손가락부터, 손등, 손목, 팔꿈치, 어깨까지.” “……그래.” “나름 3황자도 대응하겠지만, 그게 우리가 노리는 것이니까요. 결국, 그들은 이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그들의 죽음을 뜻한다. “그래, 이제 시작해야겠군. 자네가 수고가 많군.” 크리스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우군인 클로랜스 가의 직계로 황태자가 꾸민 암계에 수족 역할을 했다. “이후 자네의 공을 절대 잊지 않겠네.” 크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전하의 신하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그런데 외람되오나, 한 가지 질문만 해도 괜찮겠습니까?”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게.” “혹시…… 정말 혹시나 여쭈옵니다. 그들을 치는 게 꺼려지십니까?” “……!” 그 물음에 린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자넨 내가 그들에게 무슨 원한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그런 질문이라니?” 눈에 띄게 불쾌해하는 황태자의 물음에 크리스는 크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되는 질문 정말 죄송합니다. 그저 얼굴이 좋지 아니하여 외람된 질문인 줄 아나 여쭈어 보았습니다.” “얼굴이 좋지 않은 것은 피로해서 그렇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질문은 하지도 말도록. 아무리 그대가 엘리제의 오라버니라도 받아줄 수 없는 것이 있어.” “……네, 정말 죄송합니다.” 크리스는 깊이 사과했다. 린덴은 굳은 얼굴로 명했다. “알겠으면 곧바로 가서 시작하게. 모든 준비가 무르익었으니, 지체할 필요는 없겠지.”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로열 가드의 길버트 백작은 부황이 아닌, 내 호위를 서도록 하고.” 오로지 황제만 따르는 로열 가드의 수장 길버트 백작. 대리청정을 시작한 그가 사실상 제국의 황제나 다름없게 되었다지만, 길버트 백작을 호위로 쓰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부황이 엄연히 살아 있고, 아직 정식으로 황위를 계승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단 길버트 백작 먼저 반발할 것이다. 그가 현재 충성을 바치는 대상은 민체스터지, 린덴이 아니기에. 평소 사려 깊은 황태자 린덴답지 않은 명령. 하지만 크리스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저 길버트 백작이야말로, 황태자 린덴이 꾸민 암계에 방점을 찍을 존재였으니까. “네,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그래.” 크리스가 나가자 린덴은 인상을 구겼다. “꺼려지느냐고? 이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평생을 바라온 염원이다. 오로지 이 복수 하나만을 원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밤마다 나타나는 피에 젖은 어머니와 누이. 그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복수를 끝내면 피에 젖어 눈물 흘리는 그들도 더는 자신의 꿈에 나타나지 않으리라. ‘어머니, 누이.’ 그는 매일 반복하는 꿈을 떠올렸다. 비참하게 피에 젖어 있는 그들은 항상 자신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안타까운 얼굴로. 하지만 자신은 늘 듣지 못했다. 그들은 뭐라고 자신에게 말하려는 걸까. 매일 밤마다. 반복하며. ‘이 복수를 끝내면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일이 끝나 그들의 한이 풀리면 그들도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그 마지막 순간에 본인들이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지 않을까.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 다음 날 론도 시내에 묘한 소문이 돌았다. 황제의 위급 당시, 신문사의 기자들이 모종의 사주를 받고 일부러 황태자에게 불리한 편향된 기사를 썼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소문은 사실로 드러났다. 황태자의 명을 받은 크리스가 모아둔 증거를 터뜨렸던 것이다. [신문사의 기자들, 검제 3황자의 사주를 받아 편향된 기사를 작성해!] [황제 폐하의 병환 시 3황자, 황태자를 음해해!] 심지어 그뿐이 아니었다. 당시 시위를 일으켰던 선동자들 대부분이 귀족파, 3황자의 사주를 받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론도 시민들은 술렁거렸다. “이게 정말이야? 3황자 전하가 그러셨다고?” “믿을 수 없는데…….” 3황자 미하일은 시민들에게 굉장히 친근한 이미지였다. 높은 신분임에도 한치의 거리낌 없이 자신들과 술잔을 나누는 가깝고 친근한 황자. 그게 그에 대한 시민들의 생각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음흉한 흉계를 꾸미다니! 그것도 존경받는 황제가 위중한 틈을 타서. 시민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증거가 너무도 확고했다. 크리스가 무슨 수를 쓴 것인지, 당시 귀족파의 사주를 받았던 기자들이 속속 자백을 했던 것이다. 그것도 3황자에게 불리하게. ‘3황자 검제 전하의 부탁을 받고 일부러 편향된 기사를 썼다.’ ‘원하지 않았는데, 강요받았다.’ 선동꾼들도 경찰에 체포돼 자백했다. ‘모두 3황자 전하의 명을 받고 한 일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차일드 가문과 3황자 전하께서 명하셨습니다. 최대한 황태자 전하에 안 좋은 쪽으로 시위를 몰아가 달라고.’ 그 내용을 전해 듣고 시민들은 혀를 찼다. “허, 세상에 정말 믿을 사람 하나 없구먼.” “그렇게 착해 보이던 3황자 전하께서 뒤에서 이런 음해 공작을 하시다니.” “그러게 말이야.” 3황자에 대한 시민들의 시선이 급속도로 싸늘해졌다. 3황자는 원래부터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보다는,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인에 가까웠다. 그 시민들의 사랑과 지지가 그의 정치력의 가장 큰 밑천이었고. 하지만 아버지의 병환을 틈타 형을 음해하려고 했단 사실이 대대적으로 퍼지자, 그의 지지율은 곤두박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여파가 가라앉기 전이었다. 황태자 린덴은 3황자에게 두 번째 공격을 벌였다. 다음 수는 그의 손발을 끊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1 6-7 파국 ========================================================================= 7장 파국 - 2 “랑함 자작님, 치안총감 하슬입니다. 지금 당장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가족들과 식사를 하던 귀족파의 일원, 남부의 대지주 랑함 자작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놀라 소리쳤다. 치안총감 하슬은 딱딱한 얼굴로 죄목을 읊었다. “세금 탈세 죄, 뇌물수수죄, 농작물 거래법 위반죄로 귀하를 체포하겠습니다.” “……!” “지금 이 시각 부로 귀하의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거 놓지 못할까?!” 랑함 자작은 강하게 반발했으나, 치안총감은 법원에서 발급한 구속영장을 내밀었다. “변론은 법정에서 하십시오.” “놔라! 이건 모함이야!” 그렇게 귀족파 랑함 자작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그리고 이런 광경이 론도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황태자와 치안부가 공조해 확보한 증거들을 한 번에 터뜨린 것이다. 특히 이번 일은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함으로써 사법권을 손에 넣게 된 점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연이은 악재에 귀족파는 순식간에 공황에 빠졌다. “이건 말도 안 됩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구속의 칼바람을 피해간 귀족파들이 차일드 가문의 저택에 모여 분노를 토했다. “물론 우리가 일부 불법적인 일을 저지른 점도 있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관례적인 일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들 황태자파는 어디 깨끗하답니까? 오히려 상법이나 거래법 위반 등은 저들이 더 심합니다!” 그들이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한 잘못이긴 했다. 하지만 세상사 어디나 그렇듯,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특히 그들처럼 고위직에 있는 이들이. 그들이 대단한 부패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하던 대로 관례적인 정도를 저질렀을 뿐이다. “물론 관례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법을 어긴 것은 분명한 잘못이나 너무 과하군요. 벌금형으로 끝날 수 있는 정도도 일부러 구속하여 감옥으로 끌고 가다니. 이건 대리청정을 시작한 황태자의 탄압입니다.” 그래, 이건 탄압이었다. 그것도 노골적인. “어떻게 합니까?” 모든 인원이 상석에 앉아 있는 3황자와 암셀 후작, 메르키트 백작을 바라봤다. 3황자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를 보며 암셀 후작이 가만히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전하와 제가 긴밀히 논의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돌아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각하.” 귀족파의 인원들은 불안한 눈으로 차일드 가문의 저택을 나섰다. 메르키트 백작, 그리고 차일드 가문의 차기 당주, 유리엔까지 4명만 남게 되자, 암셀 후작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안 좋은 것 같습니다, 전하.” “구속 사태 말고도 무슨 일이 더 있습니까?” “네, 얼마 전 재정부에서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말에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재정부? “황태자가 재정부를 통해 은행을 설립한다더군요.” “은행 말입니까?” “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은행 말입니다.” 미하일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은행이라니? 획기적 발상이긴 하나, 지금 상황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가 알기에 브리티아 제국의 재정은 은행을 운영할 만큼 넉넉지 않다. 나라가 부유했지만, 워낙 국가의 규모가 커 돈 나갈 일이 많으니 적자를 면하기도 어려웠으니까. 그리고 그 재정 부족은 로마노프 황실이 차일드 가문을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수가 틀린 차일드 가문이 한꺼번에 돈을 회수하면 나라가 마비될 수도 있으니까. “그 은행의 주 역할은 우리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처럼 예금이나 대출을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바로 새로운 화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종이로 만든 돈, ‘지폐’를 만드는 것입니다.” 미하일은 알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종이로 만든 돈이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금이나 은이 섞이지 않은 돈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화폐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미하일이 말한 것은 금화본위제도. 현시대 전 세계의 기축 통화는 금화나 은화다. 제국의 펀드화도, 공화국의 돈도, 동방 청에서 유통되는 동전도, 모두 모양만 다를 뿐 금이나 은을 기반으로 한다. 금이나 은이 섞여 있지 않으면 통화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제국이든, 어떤 나라든 마음대로 돈을 찍어낼 수 없는 것이다. 금의 생산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차일드 가문이 서대륙을 호령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금화와 은화의 흐름을 독점하고 있었으니까. “종이로 돈을 만들어도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을 텐데요. 왜 형님이 그런 허튼 수고를?” 하지만 암셀은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건 화폐의 혁명입니다.” “네?” “종이로 만든 돈은 로마노프 황실과 브리티아 제국의 직인이 찍힌다고 합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든 지급 능력을 보증할 수 있도록.” “……!” 미하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그 말은……?” “네, 다른 나라도 아닌, 전 세계 최강국인 제국의 보증입니다. 금, 은을 넘는 보증 효력을 가지고 있지요. 이 종이로 만든 화폐는 금화와 은화와 더불어 순식간에 새로운 기축 통화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어쩌면 후에는 금화와 은화의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습니다.” “……!” 그 말의 뜻은 자명했다. 여태껏 서대륙 돈의 흐름을 장악했던 차일드 가문의 금권이 상당수 약화된다는 것이다. 차일드 가문의 은행들이 장악하고 있던 금화와 은화 말고도 새로운 기축 통화를 사용하면 되니까. “그렇게 우리 가문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면…… 황태자의 다음 행보는 하나일 것입니다.” “…….” “기회를 봐서 모조리 치겠지요. 우리 모두를.” 정확한 말이었다. 지금껏 민체스터가 이를 갈면서도 차일드 가문에 손을 못 댄 이유는 바로 그 어마어마한 금력 때문. 유사시에 차일드 가문이 돈의 흐름을 막아버리기라도 하면 대혼란을 피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태자가 고안한 새로운 화폐가 있으면 금화의 흐름이 막히더라도 그런 혼란을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다. 더구나 황태자는 평생 원한을 갈고닦은 인물이다. 방패가 사라진 그들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입니다.” “…….” “정변을 일으켜 우리가 먼저 그를 쳐야 합니다.” 장내에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변. 반역을 뜻한다. 차마 입에 담기에도 무서운 단어. 하지만 더 이상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었다. 지지율도, 여론도, 정통성도, 세력도. 이대로면 황태자는 곧 황제가 될 것이다. 황제가 된 그는 그들에게 죽음의 철퇴를 내릴 것이다. 그러니 죽임당하기 전에, 먼저 황태자를 죽여야 한다. “꺼려지십니까?” “…….”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술을 깨물었다. 꺼려지느냐고? 당연히. 형제를 치는 일이다. 꺼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형님을 쳐야 한다고? 이 내가?’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찌나 세게 움켜쥐었는지, 피가 통하지 않아 주먹이 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승산은 충분합니다. 저희에게는 전하와 검기사단이 있으니까요.” 서대륙 최강검 검제! 전원이 오러나이츠로 이루어진 검기사단! 전 대륙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는 최고의 전투 전문가들. “물론 아무리 검기사단이라도 대규모 병력과 싸우는 것은 무리지만,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황태자의 목. 대규모 군대와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기회를 틈타, 전하와 검기사단이 한 번에 몰아쳐 황태자를 죽이기만 하면 정변은 성공입니다.” “…….” 암셀 후작의 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다. 다른 것은 필요 없다. 오로지 황태자만 죽이면 된다. 그러면 모든 명분과 세력을 떠나 3황자의 승리였다. 그리고 황태자를 죽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는 3황자, 검제가 있으니까. 아무리 공제라 불리는 황태자라도, 3황자의 무력에 비하면 한 수 아래였다. “천만다행으로, 저희를 돕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로열 가드인 길버트 백작이 저희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 모두가 놀라 암셀을 바라봤다. 길버트 백작이면, 미하일을 제외하고 제국 최고의 검사이자, 로열 가드의 수장이었다. 현 황태자를 호위하는 자이기도 하고. 그만 돕는다면 황태자의 목을 베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 될 것이다. “그가 어째서?” “그의 부인이 차일드 가문의 먼 친척입니다. 가문 자체가 우리 귀족파와 인연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가문이지요. 그리고 그런 것보다는 최근 황태자의 경호를 서며 많은 마찰을 빚고 있다고 합니다.” “마찰이요?” “네, 사실 아직 황위를 물려받지도 않았는데, 그가 황태자의 호위를 서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고,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일로 의견 충돌이 잦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황태자가 아예 선언했다고 하더군요. 황위에 오르면 길버트 백작을 내칠 것이라고.” “허…….” 메르키트 백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만약 길버트 백작만 도와준다면, 일이 생각보다 쉽게 풀릴 수도 있겠군요. 어차피 론도 내에 있는 부대라고 해봐야 로열 가드와 소수의 수도 경호대인데, 로열 가드를 배제할 수 있으니까요.” “네, 총기사단이야 근교에 머물고 있으니, 결정적인 순간에는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황태자 한 명의 목숨을 뺏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암셀은 그때까지 아무 말도 않고 있는 3황자를 향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 “…….” “전하.” 거듭된 부름에 미하일은 입을 열었다. 짓눌린 듯한 목소리였다. “말씀하시오.” “마음을 굳게 먹으셔야 합니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습니다.” 그 말에 3황자는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그래, 알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란 것을. 암셀의 말처럼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을 것이다. 이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무뚝뚝한 형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를 보며 웃던 리제의 얼굴도 같이 생각났다. 가슴이 아팠다. 괴로웠다. “전하.” 재촉하는 암셀의 말에 미하일은 결국 입을 열었다. “... 알겠습니다, 외숙부.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셀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저는 길버트 백작과 은밀히 연락을 취하며 때를 살피겠습니다. 전하는 검기사단을 잘 준비해 주십시오.” 대화를 끝낸 미하일은 방 밖으로 나왔다. 문을 닫은 그는 벽에 몸을 기대며 한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빌어먹을…….” 손가락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 손으로 형님을 쳐야 한다고? 그 수밖에 방법이 없다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차일드 가문의 깊은 방에서 역모가 결정되었다. 론도의 하늘에 핏빛 구름이 감돌기 시작했다. *** 메르키트 백작과 3황자가 돌아간 후, 방에는 암셀 후작과 딸 유리엔만 남게 되었다. 몸이 안 좋은 그가 딸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는 배에서 격통이 올라와 크윽 하고 신음을 흘렸다. “아버지?” “괜…… 찮다.” “빨리 진통제를.” “아…… 니, 소…… 용없어. 잠깐만…… 이대로…….” 암셀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리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아버지가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로즈데일병원의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현재 상태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어쩌면 조만간 급격히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안 좋아진다는 말이 무슨 뜻이죠?’ ‘어쩌면 급하게 안 좋아져 최악의 경우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암셀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통증이 가라앉았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는 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고개를 저었다. “이제 괜찮다. 걱정 안 해도 된다. 가자꾸나.” “아버지.” 그녀는 주저하다 말했다. “혹시…… 레이디 클로랜스의 진료를 받아볼 생각은 없으세요?” 레이디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의사인 등불을 든 여인을 뜻한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녀라도 특별한 방법이 있겠느냐? 이미 췌장의 기능이 다 망가진 것을.” “그래도…….” “무엇보다, 지금 우리는 황태자와 전쟁을 치르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진료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에 유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런 방법밖에 없는 걸까? 그를 죽여야 한다니.’ 유리엔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녀는 황태자를 연모하고 있었다. 오래된 짝사랑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스쳐 지나가듯 본 그에게 온 마음을 뺏겼다. 시간이 지나도 식지 않는 사랑. 하지만 자신은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자신은 그의 어머니와 누이를 죽음으로 몬 차일드 가문의 적녀였으니까.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아. 감히 내가 어떻게 그런 것을 원하겠어?’ 그래, 언감생심 바라지 않는다. 황태자는 자신들을 죽여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다. 자신들도 황태자를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 무슨 사랑을 바라겠는가? ‘다만 한 가지 바라는 것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랑이 이뤄지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단 하나 바라는 것. 그의 손에 죽고 싶지도 않았고, 그를 죽이고 싶지도 않았다. ‘무리한 바람이겠지.’ 그녀는 씁쓸히 웃었다. 항상 당당하고 도도한 그녀였지만,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떠올리자 눈물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자신들이나 황태자, 둘 중 하나는 죽는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왜 그러느냐, 유리엔?” “……아버지.” 아버지의 의아한 물음에 유리엔은 조심히 물었다. “저희와 황태자 전하는…… 하나의 길을 갈 수는 없겠지요?”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2 6-7 파국 ========================================================================= 7장 파국 - 3. “……!” 암셀의 얼굴이 굳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예요. 사실 황태자의 입장에서도 저희 차일드 가문과 귀족파를 품으면, 강력한 힘이 생기는 것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륙 전체의 금줄을 장악한 차일드 가문과 전통 지주 세력인 귀족파. 황태자파에 더해 그들마저 하나로 품으면 린덴은 어마어마한 통치력을 가진 황제가 될 것이다. 물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되면 미하일 전하는?” “전례에 따라 로마노프령의 대공이 되시겠지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미하일 전하는 황위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하지만 암셀은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말한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 “황태자는 절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유리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전하께 용서를…… 구한 적도 없잖아요.’ 문득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황태자는 정말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을까? 그렇게 그가 피에 미친 복수귀일까? 모른다. 왜냐면 차일드 가문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암셀 후작과 마리엔 1황비는 그에게 용서를 구한 적이 없으니까. 눈앞에서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목격한 어린 소년은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했다. 당시의 일은 차일드 가문의 위세에 유야무야 대충 넘어갔다. 그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아무런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린덴이 복수의 칼을 갈아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 않을까? 만약……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그들이 황태자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으면 혹시나 뭔가가 달라졌을까? 그래도 황태자는 자신들의 피로 어머니의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었을까? 물론 여러 정치적 상황상 있을 수 없는 가정이었다. 그래도 유리엔은 그게 항상 궁금하고 안타까웠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물었다.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해봐라.” 암셀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유리엔은 당돌한 평소 성격과 다르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리 딸이라도 아버지의 기분을 너무 건들까 꺼려졌던 것이다. “괜찮다. 말해봐라.” 결국, 유리엔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황태자 전하께 그날의 일을 사과할 생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으셨나요?” “……!” 그리고 그 물음을 듣는 순간. 암셀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마치 얼음장처럼. “…….”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암셀은 얼굴을 굳힌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리엔은 괜한 질문을 했나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한 번은 꼭 물어보고 싶었다.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 된, 그날의 일을 아버지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사과? 무슨?” “…….” “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왜 그날의 일을 우리가 사과해야지?” “아버지.” 암셀은 배에서 다시 통증이 올라오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넌 우리가 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냐? 이 암셀이 왜 그런 죄악을 저질렀겠어?” “……아버지.” “자그마치 20년이다. 20년. 내 동생 마리엔이 황제 민체스터 때문에 고통받은 시간이.” 복통 때문일까? 암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을 깨문 그의 이빨이 부르르 떨렸다. “어린 시절부터 마리엔은 한결같이 민체스터만 바라봤어. 그가 자신에게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이. 아무리 냉대하고, 외면하고 고통을 줘도. 한없이 그만 바라보며 그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민체스터는 그런 내 동생에게 어떻게 했지? 외면하는 것도 모자라, 근본도 없는 여인을 황후로 앉혔어. 수없는 세월 동안 자신을 바라본 내 동생은 보잘것없는 황비의 자리로 밀어버리고! “…….” “그래, 황후, 황비의 자리 따위는 아무래도 괜찮아. 하지만 마리엔이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너는 아느냐? 이렇게 광증에 빠질 때까지! 20년. 무려 20년이야. 그 시간 동안 내 동생이 눈물 없이 잔 날이 며칠이나 될까?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그 순간, 격통이 다시 덮쳐 암셀 후작은 신음을 흘리며 말을 끊었다. “……아버지. 의사를…….” “아니, 됐다. 불러도 소용없어. 어쨌든.”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황태자와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둘 중 한 명은 피를 흘려야 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가슴이 답답했다. 암셀이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엔, 내 딸아. 마음이 그렇게 약해서 쓰겠느냐. 그래도 걱정하지 말거라. 내 너를 위해서라도 지지 않으마. 비록 몸이 이렇다 하나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는 버틸 수 있다.” *** 한편 황태자 측은 계속해서 귀족파를 압박했다. 대리청정을 통해 얻은 사법권으로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귀족파를 구속해 옥에 가뒀고, 일체의 참작도 없는 엄한 벌을 내렸다. 그리고 때맞춰 출범한 ‘로마노프 은행’은 차일드 가문의 날개를 꺾었다. 로마노프 은행이 새로이 발행한 ‘지폐’가 기존 화폐 질서를 완전히 개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차일드 가문이 수호하던 금화본위제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권 다툼과 상관없이 만성적인 통화 부족을 해결한 ‘지폐’의 개발은 훗날 역사에 린덴의 대표적 업적으로 칭송받는 일이었다. 그 여파를 몰아 린덴은 귀족파를 더욱 압박하는 발표를 하였다. 정식으로 황위를 이양받는 대관식 일정을 잡은 것이다. 더구나 이런 선언도 했다. ‘황위에 오른 후, 혈탑의 비극 때 일어났던 일을 철저히 재조사하겠다! 죄가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귀족파로서는 간담이 서늘하다 못해, 목이 떨어지는 듯한 말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쥔 그가 당시의 일을 재조사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당시의 일에 가담했던 그들은 단 한 명도 화를 피하지 못할 것이다. 특히 차일드 가문과 마리엔 황비는 무조건 죽임당할 것이다. 그들을 지키려는 미하일도 마찬가지였다. 이 3명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 압박에 맞서 3황자 측은 조용히 정변을 준비했다. 모든 면에서 밀리고 있는 그들에게 남은 수는 오로지 하나, 군사적 반역밖에 없었다. 그들은 은밀히 길버트 백작과 연락을 취하며, 검기사단을 정비했다. 기회를 틈타, 황태자의 목을 칠 수 있도록. *** 황태자의 사자궁. 린덴은 길버트 백작과 단둘이 면담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과 다르게 둘의 분위기는 가까워 보였다. 아니, 단순히 가까운 게 아니라, 대화 내용을 보니……. “자네가 수고가 많군.” “아닙니다, 전하.” “그래, 하지만 조심해야 해. 귀족파 놈들이 눈치채서는 곤란하니까.” 길버트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명심하고 있습니다.” “귀족파의 의심을 덜기 위해 자네가 조금 더 궂은일을 겪어야 할 텐데 괜찮겠나?” “제국의 불순분자를 솎아내는 일입니다.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없는 내용의 대화가 연이어 이어졌다. 귀족파가 믿고 있던 길버트 백작의 배신은 그들을 반역의 올가미로 얽어맬 황태자의 계략이었던 것이다. 황태자는 일부러 길버트 백작을 자신의 경호로 삼았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연거푸 모욕을 주었다. 사이가 벌어진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었다. “하여튼 정말 수고가 많네. 이 공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그러면 앞으로도 귀족파 놈들과 은밀히 연락을 유지하고 있어주게.” “네, 전하.” “저들은 곧 미끼를 물 것이다. 초조할 테니까.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한 번에 목을 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길버트가 나가자, 린덴은 눈을 감았다. ‘이제 곧 끝나겠군.’ 린덴은 중얼거렸다. 이 함정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될 것이다. ‘모조리, 한 명도 빠짐없이 얽어맬 수 있어.’ 그는 일부러 귀족파가 역모를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혈탑의 비극과 연관된 인물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단두대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사실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서 무작정 복수를 할 수는 없었다. 혈탑의 비극은 끔찍한 비극이었지만, 워낙 오래된 일이었고, 그 당시의 일만으로 피의 복수를 하기는 어려웠다.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는 어느 정도의 징역을 선고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라고 막무가내의 폭력을 행사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계책이 귀족파가 군사적 정변을 일으키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무려 군사 정변, 반역이니까 연관된 귀족파의 인원들을 모조리 단두대에 보낼 수 있었다. 오조리 복수를 위한 계책이었다. ‘어머니, 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린덴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이 일만 끝나면 그는 과거에서 벗어날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의 한을 달래고, 그들을 악몽에서 해방할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눈을 감은 그의 머릿속에 기뻐하는 어머니와 누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저 안개에 갇힌 듯 머릿속이 뿌옜다. 가슴도 이상하게 답답했다. ‘너무 과로했나.’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최근 확실히 무리하긴 했다. 그는 피로한 눈을 붙여 잠시 잠이 청했다. 늘 그렇듯 그는 똑같은 꿈을 꾸었다. 어머니와 누이가 나오는 꿈. 린덴은 꿈에 나타난 어머니와 누이에게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꿈은 조금 이상했다. 원래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일체의 표정 변함없이 가만히 그의 얼굴만 바라보다 끝나야 하는데. 그들의 눈빛이 살짝 변했던 것이다. 어딘지 안타까운. 슬픔이 깃든 눈빛으로. ‘……?!’ 린덴은 그들의 눈빛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하지만 그 변화는 지극히 짧았다. 곧 그들의 눈동자는 평소의 무감정한 빛으로 돌아왔다. 마치 그가 잘못 보기라도 했던 것마냥. ‘…….’ 그런 그들에게 린덴이 무어라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무채색한 세계가 흐트러지며, 그는 번뜩 눈을 떴다. 꿈에서 깨어난 것이다. “아…….” 린덴은 고개를 흔들었다. 무언가 멍한 느낌이었다. 뭐였지, 방금 꿈은? 그들이 왜 그런 눈빛을? 수없는 세월 동안 꾸어온 악몽이지만, 그들의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내가 많이 피로하긴 한가 보군.”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악몽도 곧 마지막이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왜일까? 문득 그녀가 떠올랐다. 엘리제. 자신의 소녀.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옆에서 그녀를 느끼고 있고 싶었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살얼음 같던 대치 속. 균형이 깨지는 일이 발생했다. 지병을 앓던 암셀 후작이 쓰러진 것이다. 그만 바라보던 귀족파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3 6-7 파국 ========================================================================= 7장 파국 - 4. 로즈데일 병원의 최상층, VVIP 입원실. 오로지 차일드 가문의 인물을 위한 그곳은 층 전체가 하나의 병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병실의 깊은 곳, 병상의 침대에 파리한 안색의 장년인, 암셀 후작이 누워 있었다. ‘외숙부.’ 미하일은 침중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외숙부?” “……괜찮습니다, 전하.” 암셀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전혀 괜찮은 얼굴이 아니었다. 거의 시체 같은 낯빛. 미하일은 방금 전 의사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원래부터 췌장이 기능을 거의 못했는데, 거기에 괴사성 췌장염이 합병되었습니다.’ ‘괴사성 췌장염이 뭐지?’ ‘쉽게 말해 감염증으로 썩어 들어간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치료는 할 수 있는 건가?’ ‘항생제를 쓰고는 있지만 어렵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듯합니다. 짧으면 며칠. 길면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안에 사망하실 확률이 높습니다.’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암셀 후작이 미하일에게 나직이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습니까? 이렇게 안 좋으면서……!”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암셀은 씁쓸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하필 이렇게 정국이 안 좋을 때 쓰러지게 되다니. 내가 며칠이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괜찮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도 직감하고 있었다. 본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내가 쓰러지면 앞으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암셀은 탄식했다. 귀족파의 수장인 그가 급환으로 사망하면 귀족파는 끝장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흔들리고 있었는데,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하지만 내 딸 유리엔은? 마리엔은? 저 미하일 전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안 돼. 이렇게 세상을 떠나면. 죽기 전에 정변을 마무리해야 해.’ 자신이 죽으면 귀족파는 무너질 것이다. 그러면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끝이었다. 그러니 서둘러 정변을 마무리해야 했다. “전하.” “네, 외숙부.” “아무래도 시기를 앞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 “……!” 미하일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행히 길버트 백작에게서 얼마 전 연락이 왔습니다. 조만간 황태자가 론도 근교를 방문할 예정이라고요.” 암셀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그곳은 총기사단의 주둔지와는 거리가 멀고 검기사단의 군영과는 일직선으로 가까운 곳입니다. 거사를 시행하기에 가장 최적의 시기와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 “이제는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귀족파는 무너질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암셀은 고열에 달뜬 얼굴로 힘겹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반드시 황태자의 목을 쳐야 합니다. 마음 굳게 먹으십시오, 전하.” “……알겠습니다.” 미하일의 무거운 목소리에 암셀이 미하일을 바라봤다. “전하, 혹시 아직도 피를 나눈 황태자에게 검을 빼 드는 것이 꺼려지십니까?” “…….” 미하일은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방법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 굳게 먹고 있으니, 외숙부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며 미하일은 병실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 테니 외숙부는 몸조리 잘하고 있으십시오. 만약 다음에 왔을 때 더 안 좋아져 있으면, 혼내줄 것입니다.” 암셀 후작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네, 좋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 병실을 나온 미하일은 창밖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하는데.’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도저히 잘 되지가 않았다. 형님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 어머니도 죽는다. 그러니 형님을 죽여야 한다. 변하지 않는 명제. 하지만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할까? 왜 이리 가슴이 터질 것 같을까? “하아.”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형님의 목을 베는 장면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손이 떨렸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해야 했다. 이제는 이 방법밖에 남지 않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어떻게든 다른 방법은 없을까? ‘리제.’ 미하일은 창밖을 바라봤다. 그곳엔 황실십자병원이 있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엘리제가 있는 곳.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이미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지만, 그래도 그냥 잠시라도 좋으니 얼굴이 보고 싶었다. 환자를 진료하며 반짝이는 눈이 보고 싶었고, 시시껄렁한 농담에 웃는 미소도 보고 싶다. 그냥…… 잠시만 같이 있고 싶었다. “하아.” 그는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엘리제는 그때 병원에서 민체스터의 진료를 보고 있었다. 이제 정식 약혼자가 되었으니, 진작에 어의직에서 사퇴하는 것이 맞지만, 황제가 아직 건강을 되찾지 못한 관계로 그녀의 퇴직도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그래도 그녀의 노력 덕에 민체스터는 많이 안정된 상태다. 혈압을 비롯한 활력 징후도 완전히 돌아왔고, 여러 수치도 정상인 상태였다. 다만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은 의식. ‘언젠가는 돌아오시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심장마비 후 심폐소생술을 한 경우, 원래 의식 회복이 더디다. 그래도 그녀가 옆에서 곧바로 심장 마사지를 시작했었고, 심폐소생술 시간도 길지 않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의식이 회복될 거로 생각했다. ‘하아. 그것보다.’ 그녀는 황제의 병실 한편에 놓인 진료 책상 앞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정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돌아가는 소문들이 심상치 않았다. 귀족파의 구속, 로마노프 은행의 출범, 대관식, 암셀의 급환. ‘이전 삶과 똑같아.’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똑같을까? 비록 시기는 달랐지만, 지금 론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과거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암셀 후작의 급환 소식까지.’ 그녀는 허리를 숙여 책상 위에 팔을 대고 얼굴을 묻었다. 복잡한 소식 때문인지, 마음이 답답했다. ‘난 어떻게 해야지.’ 린덴과 미하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이 소용돌이치는 정국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곧 정변이 일어난다. 궁지에 몰린 귀족파가 들고 일어설 것이다. 하지만 그건 황태자의 함정이다. 정변은 철저히 제압되고, 관련된 수많은 이의 피가 흐르게 된다. 미하일도 죽고, 1황비도 죽고, 유리엔도 죽는다. 자신에게 윈던 베이커리의 케이크가 최고라고 말하던 다혈질 메르키트 백작도 죽는다. 그 밖에 지금껏 자신의 치료를 받고 감사하다고 말하던 수많은 이가 죽는다. 하늘이 눈물 흘린다고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비참했던 론도의 비극. 그 비극이 곧 일어난다. ‘밀에게 정변을 포기하라고 부탁해 볼까?’ 물론 부탁은 해볼 수 있다. 부탁이 대수겠는가? 비극만 막을 수만 있다면 무릎을 꿇고 빌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않는다. 서로가 칼을 들게 된 과거의 괴로움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칼을 거두지 않을 테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떠올려 보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제국 최고의 의사. 시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는 명사. 황태자의 약혼녀. 귀족파와 황제파가 동시에 가깝게 생각하는 이. 그리고 절대 면책권인 황실 십자(Royal cross)의 소유자. 이것들이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걸 통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엘리제.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내. 이제 시간이 없어. 곧 비극이 일어날 거야. 그 안에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해.’ 물론 그녀도 본인을 과대평가하지는 않았다. 비록 많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자신이 힘없는 이임은 알고 있다. 두 거대한 세력끼리의 정권 다툼에 일개 의사인 자신이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보고 싶어. 소중한 사람이 죽는 것을, 그리고 나중에 그가 후회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그녀는 책상에 엎드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 때문인지, 몸이 무거웠다. 엘리제는 무거운 머리를 짚고, 허리를 폈다. 띵하고 현기증 나는 시야를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린…… 덴?” 검은 머리, 조각 같은 얼굴. 황태자 린덴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오셨어요?” “아까.” “죄송해요. 오신 줄 몰랐어요.”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얼굴만 보려고 온 것이니까. 아바마마는 괜찮으신가?” “네, 많이 좋아지셨어요.” “그렇군. 항상 고맙다.”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하는 일인걸요. 그런데…….”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며 머뭇거렸다. “왜 그러지?” “……아니요.” 엘리제는 한숨을 삼켰다. 그녀와 그는 제법 오랜만에 보는 거였다. 3황자 측과 이런저런 다툼으로 린덴은 엘리제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마주한 그는 얼굴이 좋지 않았다. 피로감이 가득한? 딱히 뭐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평소와 달랐다. “왜 그러는가? 말해봐라.” 린덴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그녀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잘 지내셨는지요?” 많은 의미가 함축된 물음. 린덴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잘 못 지냈다.” “아…….” “그대가 보고 싶어서 말이지.” 린덴은 그녀에게 다가오더니 백금발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녀를 자신에게 끌어당긴 후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리제.” “린덴…….” 그가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넌 잘 지냈느냐? 몸이 아프진 않았고?” 작금의 어지러운 정국과 전혀 다른 따뜻한 말. 그 목소리에 담긴 따스함에 엘리제는 이유 없이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괜찮았어요.” “거짓말. 조금 전에도 몸이 안 좋은 것 같던데? 왜 이렇게 자주 아픈 거지? 속상하게.” “정말. 정말로 괜찮아요.” 엘리제는 그의 품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마음이 답답해서일까? 그의 단단한 품을 느끼고 싶었다. “하아. 안 되겠어. 아바마마의 진료는 밴이나 다른 교수에게 맡기고 그대도 입원시켜야겠어. 이렇게 맨날 아픈데 무슨 놈의 진료야.” 그녀는 가만히 웃었다. 그 미소에 린덴은 불만 섞인 표정을 지었다. “웃지 마라. 난 진지하니. 입원시킨 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다 검사해 봐야겠어. 하여튼 이 병원의 의사들은 뭘 하는 것인지. 내 비가 될 그대가 툭하면 아픈데 보고만 있다니. 다 잘라버려야겠어.” 린덴은 다시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리제.” “네.” “잠시 산책이나 할까, 우리? 혹시 바쁜가?”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안 바빠요.” 둘은 황궁의 정원을 걸었다. 언제 시간이 그렇게 간 것일까? 벌써 겨울이었다. 이미 낙엽이 진 눈에는 흰 눈이 희끗희끗 쌓여 있었다. “춥지는 않나?” “괜찮아요. 날씨 따뜻한 걸요. 하나도 안 추워요.” “거짓말하지 마라. 얼굴이 빨가면서.”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리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최대한 춥지 않도록. “추운데 괜히 나왔군. 빨리 돌아가야겠어.”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리고…….” “그리고?” “조금 린덴과 걷고 싶어요. 이렇게 같이 걷는 것 좋아서…….” 그 말에 린덴은 엘리제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도 그를 바라봤다. 둘의 눈동자가 잠시 허공에서 얽혔다. “사랑한다, 엘리제.” “……저도요, 린덴.” 둘의 얼굴이 겹쳐졌다. 입술과 입술이, 혀와 혀가 섞여 들어갔다. 달콤한 사랑이 담긴 키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석을 다루듯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 린덴.’ 왜일까? 그의 사랑을 느끼는데, 가슴이 울렁거렸다. 달콤했지만 슬픈 느낌이 들었다. 아마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곧 그가 일으킬 혈사, 복수를 끝내고 그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괴로워할 그를 생각하는 게 아팠기 때문이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월요일 뵙겠습니다!! 좋은 주말 되세요. 감사합니다!! 00164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1. 깊은 입맞춤 후 그는 그녀를 놔주었다. “그러면 잠시만 걸을까?” “……네.” “추우면 바로 이야기하고. 감기 걸리면 혼내줄 테니.” 그렇게 둘은 정원 길을 산책했다. 손을 잡고 말없이 서로를 느끼며. 그렇게 조용히 걷다가 엘리제가 눈 덮인 나무를 보며 문득 말했다. “거기 생각나요.” “어디?” “크림반도의 우크라 산맥이요.” “아…… 힘든 기억이었지.” 린덴은 혀를 찼다. 포로로 잡혀간 그녀를 그가 구출해 둘은 우크라 산맥을 통해 탈출했다. 확실히 힘든 기억이었다. 둘 모두 죽을 뻔했으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그래도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왜?” “린덴…… 당신과 같이 있었잖아요.” 그 말에 린덴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깊은 시선. 엘리제는 약간 민망한 마음이 들어 얼굴을 피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그리고 그 순간. 그가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마치 으스러지듯 품에서 절대 놔주지 않겠다는 듯. “린…… 덴?” 엘리제는 놀라 린덴을 불렀다. 그가 말했다. “사랑한다.” “……!” 짧지만 강렬한 마음이 담긴 문장. 그가 그녀를 안은 그대로, 귓가에 대고 말을 이었다. “리제,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느냐?” “네, 말씀하세요.”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겠느냐?” “……!” 뜻밖의 부탁에 엘리제는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바로 눈앞에 놓인 그의 금색 눈은 그녀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린덴은 그녀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네가 없다면 난 한순간도 못 버틸 것 같아서. 그래서 부탁하는 거다. 제발…… 내 곁에 영원히 있어주지 않겠느냐?” “전…… 린덴의 곁에 영원히 있을 거예요.” “그렇지?” “네, 영원히. 영원히 함께할 거예요.” 린덴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고맙다. 난 너만 있다면 다 상관없다. 모두…… 괜찮아. 하지만 네가 없다면 견디지 못할 거다.” “린덴…….” 엘리제는 그의 말을 듣는데 이유 없이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등을 껴안았다. 그렇게 둘은 겨울 정원 아래에서 잠시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이 둘의 볼을 스칠 때쯤, 린덴이 그녀를 놔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내가 요즘 피로해서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것 같군. 그냥 해본 말이니, 크게 신경 쓰지 말도록.” 린덴은 아쉬운 듯 다시 그녀의 볼을 어루만진 후 말했다. “바람이 차니 그만 들어가자.” “…….” 그러고 그는 궁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리제는 따라가지 않고 우두커니 서서 그의 등 뒤를 바라봤다. ‘전하…… 린덴…….’ 왜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할까? ‘보고 싶지 않아.’ 그래, 그가 비극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수많은 이가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그 피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가 괴로워하는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왜냐면 자신은 그를 사랑하니까. 이미 그는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래, 이제 그는 그녀 자신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 그 사실을 떠올린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나…… 혹시나 곧 다가올 비극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이! ‘……!’ 그녀의 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굳었다. ‘가…… 능할까?’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대단한 방법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방법 자체는 단순했다. 문제는 이 방법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인 것이었다. 이 일을 성공해 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적었다. 어쩌면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단순히 역효과가 아니라, 그녀는 그의 분노에 직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외에는 없어.’ 엘리제는 자신의 역량에 대해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다가올 비극을 막을 능력이 없다. 자신은 그저 일개 의사이자 황태자의 약혼녀일 뿐 힘을 가진 세력가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방금 떠올린 이 방법은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아니, 이 방법 외에는 그녀가 다가올 비극에 맞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해도…… 될까? 전하께서 많이 분노하실 수도 있어.’ 그녀는 그를 사랑한다. 이제 그녀도 그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을 잘못 사용하면 그는 자신에게 분노할 수도 있다. 어쩌면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원한은 크고 깊었으니까. ‘하지만…… 전하가 아픈 것 보고 싶지 않아…….’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분노를 사는 것은 무서울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닐까? “엘리제?” 앞서가던 린덴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지 않고 뭐하지?” 엘리제는 주저하며 말했다. “전하.” 그녀는 린덴이 아닌, 전하란 단어를 사용했다. “왜 그러지?” “지난번 승작식 때 저에게 황실 십자가를 주셨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그건 왜 이야기하지?” “그러면…… 저는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린덴은 흠칫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소녀는 떨리는, 하지만 굳은 눈동자로 그를 보고 있었다. 무언가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깨달은 그도 표정을 굳혔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지?”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지, 갑자기? 억지로 더 물어보려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엘리제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해로운 일을 하진 않을 것이라 믿은 것이다. 대신. “아니, 황실 십자가를 사용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겠다. 이제 곧 황위에 오를 이로서 면책권은 인정하지 않겠어.” “네? 그게 무슨……? 분명 황실 법에 무조건적인 면책권을 인정한다고…….” 엘리제는 당황해 그에게 항의했다. 피식 웃은 린덴은 엘리제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 다정한 포옹에 엘리제는 눈을 크게 떴다. “……전하?” “엘리제,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 거냐? 면책권? 그게 우리 사이에 왜 필요하지?”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왜 네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설마 진짜 잘못을 저지르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니, 잘못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내가 널 사랑하니 다 용서해 주마. 그러니 무슨 일이든 마음껏 해도 좋아.” “……전하.” 그 한정 없는 애정에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에게 황실 십자가를 준 것은 죄를 지었을 때 그걸로 용서를 빌라는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네가 그런 죄를 저지를 리도 없고, 우리 사이에 무슨 면책권이냐? 그저 아바마마를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일 뿐이었다.” 따뜻한 그의 말 덕분일까? 엘리제는 조금 용기를 가졌다. 그래서 조심히 물었다. “그러면 전하. 저…… 조금은 주제넘은 짓을 해도 괜찮을까요?” “주제넘은 짓?” “네.” 린덴은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 소녀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엘리제가 다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혹시 기분을 상하게 하더라도…… 그래도 저 싫어하지 않으실 건가요?” 결국, 린덴은 와락 그녀를 안았다. 그리고 거칠게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 “저, 전하?” 린덴은 그녀의 입술을 범하며 불쾌하다는 듯 내뱉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 궁금하지만 네가 원치 않으니 더 물어보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너를 싫어하게 된다니.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응?” “저, 전하…….” “내가 널 싫어하는 일 따위는 절대 오지 않아. 알겠어?” 그러며 그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똑똑히 알라는 듯, 일부러 아프도록. 엘리제는 그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네, 감사해요. 사랑해요, 린덴.’ 그러며 그녀는 간절히 마음속으로 바랐다. 물론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을 해내도, 비극을 막을 수 있는 확률은 굉장히 적다는 것을. 그래도. 모두가 행복하게 되었으면. 제발 그럴 수 있었으면. *** 린덴과 헤어진 엘리제는 병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임 어의인 밴 자작을 찾았다. “무슨 일입니까, 백작님?” “죄송하지만 잠시만 폐하의 진료를 맡아주실 수 있으실까요?” “아, 네. 물론이죠. 그런데 무슨 일로?” “어디 다녀올 데가 있어서요.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길어도 2~3일 정도…….” 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엘리제는 더 이상의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곳 병원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니니, 무언가 용무가 있을 거로 생각한 밴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감사해요. 폐하는 현재 대부분 호전된 상태라서 기본적인 처치만 하면 될 듯해요. 지금 들어가고 있는 보조약들과 수액은…… 그리고 영양 공급은…….” 그녀는 밴에게 황제의 상태에 대해 인계했다. 하나라도 놓칠까 꼼꼼하게. 마치 가족을 걱정하는 듯해 밴은 웃으며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는 제가 책임지고 진료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가운과 진료복을 벗고, 활동이 편한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코트를 걸치고 왕진 가방을 들었다. 엘리제는 방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하려는 일이 정말 맞는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겠다. 자신이 이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황태자의 분노만 자극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일을 하면 자신은 그의 분노를 살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실망할 수도 있다. ‘나를 싫어하게 될지도.’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싫어.’ 그가 자신에게 실망하다니. 그래서 싫어하게 된다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까마득한 아픔이었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해야 했다. 그를 사랑하니까. 다가오는 비극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 방법 외에는 없으니까. 그러니 미움받을 것을 각오하고 해야 했다. 아무런 의미 없을지라도. 오히려 그의 미움만 받는 것으로 끝날지라도, 이 순간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주여. 도와주시옵소서.’ 짧게 기도한 엘리제는 방을 나섰다. 시간이 없었다. 암셀 후작이 급환으로 쓰러진 이상, 과거를 비추어 볼 때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고작해야 2~3일. 그 안에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로열 가드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경례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마차를 부를까요?” 로열 가드의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마차는 필요 없었다. 그녀의 목적지는 바로 옆이었으니까.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황궁 안 한 건물을 바라봤다. 황태자 린덴의 사자궁 옆의 흰색 건물, 장미궁이었다. ‘밀.’ 엘리제는 그 장미궁 주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녀가 찾아가는 곳은 장미궁, 바로 3황자 미하일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완결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본편 완결은 181화이며, 이후 잠시의 휴식 후 외전이 연재될 예정입니다. (외전 분량은 아직 미정입니다!) 감사합니다! 00165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2. 장미궁을 방문하자 시종이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아, 전하께서는 지금 궁에 계시지 않는데…… 죄송합니다.” “언제 돌아오시나요?” “아마 3시간 정도 걸릴 듯합니다. 돌아오시면 방문 사실을 고해 드릴까요?” 3시간. 기다리고 있기에는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다른 용무였으면 돌아갔다 다시 왔겠지만 그럴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안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종은 그녀를 안쪽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엘리제는 시종이 내온 차를 마시며 가만히 미하일을 기다렸다. ‘잘되어야 할 텐데.’ 그녀는 생각했다. 이 일을 하려면 일단 미하일의 승낙이 필요했다. ‘밀은 거절하지 않을 거야. 오히려 환영할 거야.’ 3황자는 한결같이 이 정권 싸움을 원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원하는 것은 황위가 아니라 자유로운 새처럼 저 하늘을 훨훨 나는 것. 문제는 혈탑의 비극의 당사자인 암셀 후작과 황태자의 반응이었다. 일단 황태자의 반응을 차치하고라도, 암셀 후작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막막하긴 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응접실 안에서 생각지도 않은 소리가 들렸다. 끼잉. ‘응?’ 웬 강아지였다. 품종 좋은 혈통이 아닌,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누런 강아지. ‘웬 강아지지? 밀이 강아지를 키웠었나?’ 엘리제는 고개를 갸웃했다. 강아지는 그녀에게 다가 와 혀를 내밀어 발을 핥았다. 그녀는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렸다. “얘, 간지러워.” 강아지는 이번엔 왕진 가방을 바라봤다. 이런저런 물건이 잔뜩 든 가방이 신기한 눈치였다. 엘리제는 귀여운 마음이 들어 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강아지에게 보여줬다. “이거 청진기야. 처음 보지? 그런데 넌 이름이 뭐니? 밀이 네 아빠니?” 끼잉! 맞는다는 듯, 소리 지르는 강아지. ‘강아지라니.’ 누군가 선물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전통 고급 품종도 아닌, 누리끼리한 누렁이를 황족에게 선물하는 이는 없을 테니까. ‘길에서 주어온 걸까? 밀답네.’ 너무 미하일다운 취향 같아 엘리제는 자신의 상황도 잊고 쿡쿡 웃었다. 강아지의 털을 어루만졌다. 끼잉. 강아지는 간지럽다는 듯 몸을 털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눈동자가 점점 애잔해졌다. ‘내가 하려는 일이 실패하면…… 이 강아지는 밀을 잃겠지?’ 한숨이 나왔다. 어깨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멍! 강아지가 돌연 소리를 지르더니, 그녀의 손에 들린 청진기를 낚아채 달아난 것이다! “어! 안 돼?!” 엘리제는 깜짝 놀라 강아지를 쫓았다. 저 청진기는 장인에게 부탁해 특별히 제작한 최고급의 것이었다. 아니, 그걸 떠나 린덴이 선물해 준 것이라 잃어버리면 안 됐다. “얘! 이리 가져오렴!” 하지만 강아지는 장난을 치는 거로 생각했는지, 열심히 그녀에게서 달아났다. 그렇게 장미궁에서 생각지도 못한 술래잡기를 한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엘리제는 허리를 숙여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원래 바닥인 체력이라 조금만 뛰었는데,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디로 간 거지? 아니, 여긴 어디지?’ 정신없이 쫓아 장미궁 깊은 곳에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다시 응접실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렸을 때였다. 그녀의 발목을 우뚝 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자리한 복도 옆에 자리한 방 안에서였다. “그러면 그때 황태자의 목을 치는 것이오?” “네, 그때가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습니다.” “총기사단이 움직이지는 않겠지요?” “네,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낮은 소곤거림.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 건?’ 생각지도 않게 엿듣게 된 역모 모의였다! 심지어 아는 목소리들도 있었다. “길버트 백작이 정확한 시기를 알려주기로 했소. 황태자가 교외로 나가면 검제 전하와 검기사단이 급습할 것이오. 아무리 황태자가 공제라 불릴 정도로 강하다 해도, 서대륙 최강의 오러 나이츠인 3황자 전하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요.” “이번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요. 반드시 성공해야 하오. 그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죽소.” 엘리제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이곳을 벗어나야 해.’ 손이 파르르 떨렸다. 물론 그녀는 그들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죽이려는 계획을 직접 귀로 듣자,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빨리…… 이곳을.’ 혹시라도 자신이 그들의 계획을 엿들었다는 것을 들키면 상황이 곤란해진다. 다른 음모도 아닌, 역모 계획이다. 자신은 차기 황후가 될 이이고. 아무리 귀족파가 그녀를 존경한다지만, 역모 계획을 엿들은 것을 알면 고분고분 놔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모든 것이 걸린 일이었기에. 어떻게든 입을 막으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녀의 계획은 시작부터 꼬인다. ‘조심히. 발소리 내지 말고.’ 워낙 긴장해서인지 발끝이 떨렸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주군인 3황자의 장미궁이라서 그런지, 모의하는 이들이 크게 밖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중이었다. 엘리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울렸다. 멍! 멍! 청진기를 물고 있던 강아지가 엘리제에게 다시 돌아와 큰 소리로 짖었던 것이다. ‘아……! 안 돼!’ 엘리제는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등줄기로 한줄기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덜컥하는 문소리와 함께. “누구냐?!” 놀라 뛰쳐나온 이들은 그녀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니? 레이디 클로랜스? 어째서 이곳에?” 숨 막힐 듯한 적막이 그들 사이를 흘렀다. 엘리제는 최대한 당황하지 않으려 애썼다. 자신이 저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것을 티 내면 안 된다. “오, 오랜만이에요. 메르키트 백작님. 최근 몸은 괜찮으신지요?” “…….” 모의하던 이들 중, 가장 익숙한 메르키트 백작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는 친근하게 인사하던 평소와 다르게 한없이 딱딱한 얼굴로 물었다. “……어디서부터 들었소, 엘리제 백작?” “무슨 말씀이신가요?” 엘리제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노력하며 반문했다. 그러나 메르키트는 백전노장의 정치인. 엘리제의 눈동자를 보고, 그녀가 자신의 대화를 눈치챈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들어버렸구려.” 엘리제는 흠칫 놀랐지만 놀람을 감추며 고개를 저었다. “뭘 들었다는 건가요?” “시치미 떼지 마시오. 하…….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백작에게 들켜 버리다니.” 메르키트는 깊게 탄식을 내뱉었다. 옆에 있던 다른 이들도 탄식을 뱉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모두 엘리제를 존경했다. 정치적 이념을 떠나 성녀와도 같이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역모 모의를 들키다니. 이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놔줄 수 없었다. 그녀를 놔주었다가는 거사를 치르기도 전에 음모가 새어나갈 것이고, 그건 그들의 몰살을 뜻하는 것이었으니까. “무슨 말씀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 미하일 전하를 뵈러 온 것이니 돌아갈게요.” 그녀도 곤란한 마음으로 말했다. 자신은 이미 저들의 음모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괜찮다고 잠시만 날 믿으라고, 내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과연 역시. 찰칵. 섬뜩한 금속성이 울렸다. 그리고 그녀의 관자놀이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 “……!” 옆에 서 있던 한 중년 귀족이 총을 겨눈 것이다. 귀족파의 중핵인 유트 자작이었다. “이렇게 총을 겨눠 정말 죄송합니다, 백작님. 하지만…… 저희와 함께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 그렇게 엘리제는 생각지도 않은 납치를 당하게 됐다. ‘이런.’ 그녀도, 귀족파도 모두 곤혹스러운 상황이었다. 특히 그녀보다는 귀족파가 곤혹스러워했다. “이 일을 어찌 해야 한단 말이오? 하필 레이디 클로랜스에게 들켜 버리다니.” 다른 이도 아닌, 황태자비가 될 그녀였다. 그녀를 놔주는 순간, 그들의 역모 모의는 곧바로 황태자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이대로 놔둘 수는 없습니다. 입을 다물게 해야 합니다.” 한 귀족의 말에 다른 이가 쏘아붙였다. “어떻게 입을 다물게 한단 말이오? 등불을 든 여인을 죽이기라도 하겠단 말이오?” 그 말에 모두가 침묵에 빠졌다.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녀를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차마 그 방법을 원하는 이는 귀족파 중 아무도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닌, 등불을 든 여인 아닌가? 아무리 역모를 앞두고 있다지만 그런 고귀한 여인을 죽여야 한다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방법이었다. “감정적 이유를 떠나서도 그녀를 죽이면 안 됩니다. 우리가 그녀를 죽였다는 것을 시민들이 알면 후에 그 후폭풍을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거사 날까지 그녀를 가둬두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제안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곧 클로랜스 가와 황실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혐의가 돌아올 게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러니 그것도 답이 되지 않습니다.” 결국, 귀족파의 인원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답이 없었다. 그녀를 가둬도 안 되고, 풀어줘도 안 된다. 그렇다고 죽이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여도 변고를 눈치챈 황실이 그들을 의심할 것은 뻔했으니까. ‘하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메르키트 백작이 하늘을 보며 탄식했다. ‘과연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까?’ 연달아 악재만 터지다 보니, 앞에 펼쳐진 운명이 너무나 어둡게 느껴졌다. 자신들은 과연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때였다! 한 거친 음성이 그들 사이를 갈랐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하나입니다!” “칼라일 자작.” 머리가 희끗희끗한 거친 인상의 남자는 육군 장성 출신인 칼라일 자작이었다. 그는 과거 검은 대륙에서 여러 전투를 경험한 경력이 많았다. “이제 남은 방법은 단 하나. 지금 당장 늦어도 내일 해가 떠오르기 전에 황태자를 쳐야 합니다!” “……!” 그 전격적인 말에 모두 흠칫 놀라 칼라일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장 황태자를 쳐야 한다니?” “간단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며 칼라일은 설명했다. “저 엘리제 백작을 풀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가두든, 입을 막든 황실은 곧 그녀의 부재를 알게 될 것입니다. 단번에 우리를 의심하겠지요.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황태자가 아직 그녀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한 지금뿐입니다.” “…….” 귀족파의 분위기가 침중해졌다. 칼라일의 말이 맞았다. 이렇게 상황이 꼬인 이상, 원래의 계획을 밀고 갈 수는 없었다. 급작스러웠지만, 황실이 그녀의 변고를 눈치채기 전,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한숨을 토한 메르키트는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3황자 전하가 도착하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마침 벌컥 문이 열리며 3황자 미하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화사한 평소와 다르게 딱딱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전하.” “이야기는 오면서 다 들었다.” 그는 말했다. “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 엘리제가 납치된 곳은 론도 근교의 별장이었다. 인적이 드문 그곳은 테즈 강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엘리제는 별장 안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손은 묶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미하일의 얼굴이 더욱더 딱딱해졌다. 메르키트가 곤란한 얼굴로 말했다. “그게…… 도주 우려 때문에…….” “……풀어. 지금 당장.” 서늘한 기세에 메르키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미하일이 물었다. “그리고 왜 이렇게 자고 있는 거지? 이 향은? 설마 수면향인가?” “……네, 전하.” 미하일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낮은 한숨에 불과했지만 듣는 이들은 이유 없이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치워. 지금 당장.”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6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3. “……네.” 감시하던 기사들이 허겁지겁 밧줄을 풀고, 수면향을 치웠다. 미하일은 굳은 눈으로 잠들어 있는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안타까움과 아픔이 담긴 눈동자로. ‘리제.’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손을 뻗어 조심히 그녀의 백금발을 어루만졌다. 간절히 바라지만 이제 절대 닿을 수 없는 그녀. 마음 깊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하아.’ 그때, 메르키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거사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야기를 들으셨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그녀의 실종 사실을 클로랜스 가와 황태자가 눈치챌 것입니다.” “…….”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메르키트는 말을 이었다. “칼라일 자작의 말처럼…… 오늘 밤밖에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미하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답했다. “검기사단에 전해. 오늘 밤, 야간 연무(硏武)가 있을 거니 준비하라고.” 연무. 검 훈련을 뜻한다. 야간 훈련은 검기사단에서 흔하게 하는 일정이었다. 하지만 메르키트는 3황자의 말에 숨은 속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침중한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 봐. 나는 곧 따라갈 테니.” “네, 전하.” 조심스럽게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엘리제와 미하일만 남게 되었다. “…….” 미하일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말없이. 가만히. “리제.” 그는 다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조용히. 그녀가 깰까 봐 조심하여. “이제 이렇게 널 보는 것도…… 마지막이겠지? 난 이제…… 형님과 싸우러 가야 하니.”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 사실 너한테 하고 싶은 말 있다? 어쩌면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백금발을 다시 어루만졌다. “나 너 사랑해.” 마음속으로만 담아두었던 지금까지 꺼내지 못했던 고백. “많이. 정말 많이 사랑해.” 중얼거렸다. “모든 걸 다 잊고 네 얼굴만 보고 있고 싶을 정도로. 그냥 네 손만 잡고 있고 싶을 정도로.”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마를 가린 백금발을 쓸어올린 그는 주저하며 살짝 입술을 맞췄다. 입술을 뗀 그는 그녀의 얼굴을 담으려는 듯, 하염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나 이제 형님을 죽이러 갈 거야.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지만, 나……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는 계속해서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혼잣말로 꺼내었다. “하긴 잘할 수 있는 게 이상한 거겠지? 형제끼리 죽이는 건데. 그걸 어떻게 잘할 수 있겠어? 역사서나 소설 책보면 황가의 형제들끼리 잘도 서로 죽이던데 어떻게 그렇게 잘하나 모르겠어. 말도 안 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상한 것은 나인가? 원래 황위를 앞에 두고는 피도 눈물도 없이 비정해져야 하는데. 후세의 역사가들이 보면 날 얼간이라 비웃을지도 모르겠어.” 거기까지 이야기한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사랑해. 정말.” 그는 한 번 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춘 후,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애검, 비천검을 들고 방을 벗어났다. 문을 닫기 전, 미하일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아마 자신이 그녀를 보는 것은 이 순간이 마지막이리라. ‘우리.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3황자가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운 건 그녀와의 관계뿐이 아니었다. 형님과도 이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의미 없는 가정. 오늘 밤이 지나면 형님과 자신 한 명은 죽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미하일은 자신의 검을 바라봤다. 급작스러운 거사였지만 승산이 없지는 않았다. 그건 그가 서대륙 최강검인 검제였기 때문이었다. 어떤 병력이 지키고 있어도 그의 앞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론도에서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이는 오로지 공제 린덴뿐이었다. 아니, 사실 황태자도 객관적인 무력에서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는 황태자와 비교해 몇 수는 위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하일은 자신이 형님의 목을 베는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 ‘싸우기도 전에 이런 꼴이라니. 정신 차려. 오늘 싸움에 모든 것이 달려 있어.’ 미하일은 고개를 털었다. 방 밖으로 나와 별장 앞을 흐르는 테즈 강을 바라봤다. 고요한 강물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으며 얼굴을 굳혔다. ‘이제 가자.’ 그러고 자신의 말에 올라타려 몸을 돌렸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등 뒤에서 들린 하나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잡았다. “……밀.” “……!” 수면향에서 덜 깬 것일까, 약간은 흔들리는 음성. 미하일이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그녀의 목소리였다! “…….” 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평소처럼 밝은 미소를 띠었다. “일어났어, 리제? 조금 더 자지?” 등을 돌리니, 작은 소녀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백금발이 옅게 흔들렸다. “……밀.” “추울 텐데. 들어가 있어.” “밀.” 엘리제는 그를 반복해 부르며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와 그의 거리가 좁혀졌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녀가 다가올수록 미하일은 흔들리는 마음을 부여잡기 힘들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처음으로 밀어냈다. “다가오지 마.” “…….” “다가오지 말라고! 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이러 가야 하니!” 하지만 엘리제는 멈추지 않았다. “밀.”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다가오지 말라고.”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울고 있어요…….” “……!” 미하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투명한 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울지 마요, 밀.” 미하일은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웃기지 마. 안 울어. 내가 무슨 눈물이야. 이건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거라고.” “…….” “왜 그렇게 봐? 정말 아니야. 아니라고.” 지금까지 쌓여온 한이 터져 버린 것일까? 말과 다르게 끝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바람이 강하네요.” “그렇지? 왜 이렇게 바람이 강해서.” 그런데 그 순간……. 미하일은 눈을 부릅떴다. 그녀가 발꿈치를 들더니 작은 팔로 자신을 감싸 안은 것이다. “……리제?” “그냥…… 바람이 세서…… 잠시만 이러고 있을게요.” “…….” 미하일은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참으려 했으나 지금까지의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감싸 안은 작은 몸 때문일까. 결국, 그는 참지 못했다. 그의 어깨가 말없이 들썩였다. 그녀는 가만히 그 등을 두드려 주었다. ‘밀…….’ 엘리제는 아련한 눈으로 그런 그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아파야 할까? 린덴도, 미하일도. 둘 모두 자신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인데. 그녀는 나직이 말했다. “밀, 이전에 약속했던 것 기억나요?” “무슨?” “저와 여행가기로 했던 거요.” 미하일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기억나지.” 이전 크림전쟁 때 차일드가의 후계자 알버트를 수술하며 했던 약속이다. 저 동방의 청과 려, 신대륙의 오대호까지. 같이 여행을 가자고. 절대 이룰 수 없는 꿈같은 약속. “그 약속 안 지키실 거예요?” 미하일이 애써 웃었다. “지키고 싶지. 하지만…… 어렵잖아. 무엇보다 형님이 내가 너와 단둘이 여행 가는 것을 지켜보겠어?” 여행이라니. 정말 간절히 가고 싶다. 그녀와도, 아니, 혼자라도. 모든 걸 내려놓고 바람같이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엘리제가 의외의 말을 하였다. “3명이 같이 가면 되잖아요.” “응?” “3명이 가족 여행 안 돼요?” 미하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그녀가 농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웃었다. “그러게. 3명이 가면 되겠네. 그런데 형님이 싫어하지 않을까? 너랑 단둘이 가고 싶어 할 텐데.” 분명 그 독점욕 많은 린덴은 싫어할 거다. 혼자 그녀를 독차지해야 하니까. 하긴 그 어떤 남자가 좋겠나. “무엇보다…… 형님과 나는 절대 여행을 같이 갈 수 없어. 이유는 너도 알지?” 오늘 밤, 둘 중 한 명은 죽을 테니까. 미하일은 그 말을 삼켰다. 그런데 엘리제가 고개를 저으며 생각지도 않은 물음을 던졌다. “같이 갈 방법이 있으면요?” “응? 그게 무슨……?” “혹시…… 밀과 린덴이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요?” “……?!” 미하일은 놀라 엘리제를 바라봤다. 그녀는 그의 금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린덴과 똑 닮은 눈동자. “밀, 한 가지만 먼저 물을게요. 황위를 진정으로 바라시나요?” 미하일은 고개를 젓고 한 치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알잖아. 난 그런 거에 관심 없어.” “그러면 만약 린덴과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황위를 포기하고 물러설 수 있나요?” 그 물음에 미하일은 입을 다물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왜 안 그러겠는가? 얼마든지 물러설 수 있었다. 하지만 물러나면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다. 싸우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밀,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저를 믿나요?” “당연히 믿지.” 미하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한 마음을 품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엘리제는 잠시 숨을 들이켠 후,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제게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어쩌면 둘의 싸움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물론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높지만요.” “……?!” 미하일은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그게…… 뭐지?” 엘리제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미하일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놀람으로. “하지만…… 그건…….” “네, 물론 알고 있어요.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죠.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어차피 지금보다 더 상황이 안 좋아질 수는 없잖아요.” “너는? 그건 형님의 건드릴 수 없는 역린(逆鱗)이야. 네가 그 말을 하면 너에게 분노할 수도 있어.” 그 말에 엘리제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그녀가 지금 가장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단지 분노하는 것이면 괜찮다. 하지만 실망하면? 그래서 날 싫어하게 되면? 그러면 난 어떻게 하지? 그 아픔을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해야 한다. 그를 사랑하니까. 소중한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네, 알고 있어요. 그래도…… 린덴과 밀을 위해 해내고 싶어요.” 미하일은 잠시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 소녀는 그를 굳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에게 잠시만…… 잠시만 시간을 주세요. 부탁해요.”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7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4. 고민 끝에 미하일은 그녀의 제안을 승낙했다. 사실 그도 그녀의 시도가 성공할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더 이상 악화될 상황도 없었다. 파국을 피할 수 없다면 도박을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귀족파 인물들의 반발은 미하일이 억눌렀다. 다행히 엘리제와 연관된 오늘의 일을 알고 있는 이들 자체가 소수였기에 가능했다. 다만 귀족파의 중핵인 메르키트 백작이 문제였는데, 이전 심장 총상을 입었을 때 그녀에게 목숨을 구함 받은 적 있어서, 반대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당시 그는 엘리제에게 그녀의 부탁이라면 어떤 것이라도 들어준다고 약속한 적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하일과 헤어져 론도에 돌아오니 늦은 오후였다. 납치당한 시간이 점심경이었던 탓이다. “어머, 아가씨? 이 시간에 웬일로 들어오셨어요?” 하녀 마리가 놀라 그녀에게 말했다. 저녁 10시 이전에는 들어온 적이 거의 없었는데? “아, 일이 있어서. 마리, 그보다 나 좀 도와줄래? 부탁할 게 있는데.” 엘리제의 말을 들은 마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황태자 전하께 기별을 넣어달라고요? 오늘 저녁에 찾아뵈어도 될지?” “응.” “어째서……?” 마리가 알기로 엘리제는 이렇게 황태자에게 기별을 넣은 적이 없었다. 어의라 늘 황궁을 들락날락했고, 찾기 전에 황태자가 그녀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따로 드릴 말이 있어서. 그리고 드레스를 갈아입고 싶은데, 도와줄래?” “아, 네. 어떤 스타일로 준비할까요? 최근에 론도에 유행하는 어깨가 파인 스타일로 할까요?”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원래부터 그런 드레스는 취향이 아니었고, 진중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싶었다. “그냥 단정하게.” 마리는 그녀의 요청에 따라 그녀의 치장을 도와주었다. 단정하지만 곱게. 평소 치장을 꺼리는 엘리제였지만, 오늘만큼은 마리의 도움을 받았다. 최대한 깔끔한 스타일이었지만 원체 아름다운 그녀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빛이 났다. 치장이 끝난 후 곧 황궁에서 답변이 왔다. 당연히 승낙이었다. 마리가 황궁에 다녀온 이의 말을 전했다. “‘그대의 방문이면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당장 오라고’ 하셨다는데요?” 엘리제는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나의 린덴. 오늘 대화가 끝난 후에도 웃으며 그를 마주할 수가 있을까? 두려웠다. “그러면 다녀올게.” *** 마차를 타고 엘리제는 사자궁에 도착했다. 어의로서, 그의 연인으로서 수시로 들락거렸던 사자궁이지만 오늘따라 가슴이 떨렸다. ‘제발. 주여.’ 짧게 기도 후, 방문 사실을 알렸다. 시종인 란돌이 먼저 마중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백작님.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란돌은 그녀를 보고 살짝 눈을 떴다. 간단하게 입고 다니던 평소와 다르게 곱게 단장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다. 물론 평소에도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눈이 부시달까? 단정한 검은 드레스가 인형 같은 하얀 얼굴을 아름답게 빛냈다. “란돌 경?” “아, 죄송합니다.” 멍하기 그녀를 보다 화들짝 놀란 란돌은 고개를 젓고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때, 린덴은 집무실에서 급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 ‘엘리제가 온다고?’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봤는데?’ 그가 황실십자병원에 방문해 그녀와 같이 정원을 산책한 게 오전쯤이었다. 물론 그녀가 오는 것은 좋다. 그는 언제나 그녀를 보고 싶어 했으니까.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머리가 답답한 이 순간도, 그녀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감이 차올랐다. 다만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이런 식의 방문을 거의 안 하는 그녀였으니까. 더구나 가문의 사람을 보내 정식 방문 요청까지 하다니? ‘무슨 할 이야기가 있는 건가?’ 똑똑. “전하, 란돌입니다. 엘리제 백작께서 오셨습니다.” 그 노크 소리에 린덴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들어와라.” “네, 전하.” 끼익 문이 열렸다. 그리고 나타난 그녀의 모습에 린덴은 눈을 크게 떴다. “……리제?” “전하.” 평소와 다르게 곱게 단장한 모습에 놀란 것이다. 다른 이들에게도 아름다워 보이니, 사랑하는 그의 눈에는 얼마나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한참이나 넋을 잃고 바라보다 엘리제가 민망한 표정을 짓자 린덴은 헛기침을 하였다. “그래, 이쪽으로 와서 앉아라. 그런데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이렇게까지 차려입고, 정식으로 방문 요청까지 하면서 말이야. 하고 싶은 이야기라도?” 그의 앞에 앉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막상 입을 열려고 하니 떨렸다. 그의 반응이 무서웠다. “……?” 린덴은 그녀가 침묵하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반응을 보니 정말 그냥 온 것은 아닌가 보다. 그는 함께 산책할 때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가지 잘못을 해도 전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인가요?’ 도대체 무슨 일인 거지? ‘안 좋은 일은 아니겠지?’ 물론 그녀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할 리야 없겠지만 원체 종잡을 수 없는 그녀다. 2년 전에는 부황과 내기를 해, 전쟁에 참전한 적도 있으니까. 안심되지 않았다. “말해봐라.” 엘리제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전하, 먼저 한 가지만 부탁해도 돼요?” “무엇이지?” “……제가 전하께 차를 한 잔 달여 드려도 될까요?” 린덴은 차보다는 그녀의 용무를 먼저 듣고 싶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해 주겠지.’ 곧 방 안에 고요히 차를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하는 차향이 퍼졌다. 린덴이 가장 좋아하는 향이다. 린덴은 엘리제가 내온 차를 마셨다. 역시 부황 민체스터가 극찬한 맛답게 란돌 따위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 둘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덴은 엘리제가 입을 열길 기다렸으나, 그녀는 말이 없었다. 다만. ‘도대체 뭐지?’ 지그시 깨물고 있는 입술, 치마 위로 희미하게 움켜쥐고 있는 주먹. 린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지금 자신 앞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알 수가 없었다. “차 맛이 좋군.” 린덴은 그녀가 자신 앞에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이 심히 마음에 안 들었으나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도록 먼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이제 결혼하면 그대가 달여 주는 차를 매일 마실 수 있는 건가?” “……네, 전하.” “그 말 정말이지? 꼭 매일 달여 주어야 한다고. 알았지?” 그 말에 엘리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리제.” “네.” “내 옆으로 와보겠나? “……네.” 엘리제는 주저하다가 그의 곁에 앉았다. 그녀가 오자 린덴은 부드럽게 어깨를 안아주었다. “……!” “잠시 이러고 있지.” 그 따듯한 말에 엘리제는 갑자기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사랑한다. 그가 자신에게 화내는 것이 무서웠다. 혹시나 실망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지? 그녀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린덴.” “그래.” “……사랑해요.” 린덴은 그녀를 바라봤다. 사랑한다는 목소리에 옅은 떨림이 담겨 있었다. “……리제?” “사랑해요. 정말로. 정말 많이 사랑해요.” 그러며 엘리제는 그의 품 안에 안겨들었다. 린덴은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였지만 그래도 부드럽게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느냐? 말해보아라. 다 괜찮다. 무슨 일이지? 누가 속상하게 하기라도 했느냐? 다 혼내줄까?” 그녀는 자신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감았다. 다 잊고 그의 손길을 느끼고 있고 만 싶었다. 이 따뜻함을 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안 돼.’ 그가 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이 무서웠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했다. 그를 사랑하니까. 나중에 그가 아파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니까. 그때, 린덴이 말했다. “넌 내 거다. 그러니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다 괜찮다. 편하게 말해.” 엘리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살짝 흐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었다. “전하, 사실…… 오늘 제가 온 것은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알고 있다. 편히 말해봐라.” 엘리제는 잠시 그의 눈을 바라봤다. 이제 자신이 입을 열면 저 사랑이 담긴 눈동자가 차갑게 변하겠지? 이건 그의 역린이다. 사랑하는 사이여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아무리 상대가 자신이라도 분노하리라. 그가 자신에게 차갑게 변하는 것은 상상만 해도 아프고 무서운 일이었지만 물러서서는 안 된다. 그녀는 말했다. “혹시……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그리고. 그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따뜻하던 그의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입가에 걸려있던 옅은 미소가 사라졌다. ‘그들’이라 에둘러 표현했지만, 황태자는 그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그가 물었다. “지금 잘못 이야기한 거겠지, 리제? 아니면 내가 잘못 들었거나.” 나직하지만 그래서 더욱 무겁게 느껴지는 목소리. 엘리제는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하지만 잘못 말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그녀는 일부러 그들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마리엔 황비와 암셀 후작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면, 그를 더욱더 자극할 것 같아서. “…….” 엘리제의 걱정과 다르게 그는 불처럼 분노하진 않았다. 다만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녀는 그게 더 가슴이 떨렸다. “하아.” 그는 탄식을 터뜨렸다. “고개를 들어라.” 그녀가 자신을 마주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엘리제. 너는 혹시…… 과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인가? 하긴 그때 너는 굉장히 어렸을 때이니까.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겠지?” “…….” “그 일은 차마 입으로 꺼내기도 싫은 추악한 것이었다. 난 그때 일을 일으킨 추악한 자들을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몰라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으니 이해하마. 하지만 다시는 내 앞에서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면 한다.” “……전하.” 그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오늘은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군. 조심히 돌아가도록.” 대화의 단절을 뜻하는 몸짓이었다.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알고 있다. 자신의 부탁이 주제넘은 것임을. 더 이야기하면 그는 정말로 분노할지도 몰랐다. 아니, 지금도 자신이기에 이 정도로 참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저…… 알고 있어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당신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 린덴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알고 있다고? 그런데 이런 부탁을?” 그리고 그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대를 사랑한다. 깊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어떤 부탁이라도 들어주고 싶을 만큼.” “……전하.” “하지만 이 부탁만큼은 들어줄 수 없어.”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난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아. 아니, 할 수 없어. 너라면 할 수 있겠는가?”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68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5. 그러며 그는 말을 이었다. 감정이 격해진 탓일까. 그의 목소리가 점차 올라갔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누이가 죽어갔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이 핏물로 변했어. 너라면 그런 끔찍한 일을 일으킨 자들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야. 성서에 나오는 용서? 하!” 린덴은 화를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미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내 아픔을 알고 있다고? 지금도 어머니와 누이가 밤마다 내 꿈에 나타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잠이 드는지 그대는 알고 있나? 밤마다 죽은 그들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 아느냐고.” “린덴…….” “그들도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이 기나긴 세월 동안 내 꿈에 나타날까. 어머니와 누이를 위해서라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하기 위해서라도 복수를 멈출 수는 없어.” 그러며 그는 다시 등을 돌렸다. “……그대에게 화내고 싶지 않으니 돌아가. 오늘은 그대와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군.” 하지만 엘리제는 떠나지 않았다. 그저 아련한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고 있는 그를 바라봤다. ‘린덴…….’ 가슴이 아팠다. 그의 마음이 이해가 갔기에 더욱 아팠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눈앞에서 지켜본 어린 소년은 과연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그 원한을 품고 살아온 세월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지만 이 복수가 과연 그의 어머니가 원하는 것일까?’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모르겠다. 죄 없이 죽었으니, 복수를 바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저렇게 괴로움에 묻혀 사는 것을 과연 바랐을까? “린덴…… 한 가지만 물을게요.” “…….”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히 물었다. “만약 혹시나 전 황후마마와 황녀 전하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래도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 린덴은 그녀를 다시 돌아보았다. 그리고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복수 말고 다른 방법? 불가능한 일이야.” 그는 피식 웃었다. “혹시나 모르지. 암셀 후작과 마리엔 황비가 어머니의 무덤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빈 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그러면 그들의 한도 풀릴지도.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그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 숨을 들이켰다.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군. 정말 이제 그만 돌아가.” “……린덴.” “부탁이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난 그대에게 화내고 싶지 않아. 그러니 이만 가줘.” 더는 이야기할 수가 없어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주제넘은 말로 심기를 어지럽혔습니다.” “…….”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편히 쉬십시오.” 엘리제는 그의 궁에서 물러났다. 그녀가 사라진 후,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선반에 놓여 있는 위스키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잔에 가득 채운 후 한 번에 들이켰다. “하아. 다른 방법으로 어머니와 누이를 위로한다고?”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 사자궁 밖으로 나온 그녀는 추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마음이 안 좋아서일까, 추위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역시 그의 반응은 완강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을 갈아온 원한이다. 그녀의 말 몇 마디로 풀어질 리가 없지 않은가. “하아.” 그녀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일은 주제넘은 일이다. 그녀는 당사자가 아니니까. 혈탑의 비극에 맺힌 한은 당사자들이 해결하는 것이 옳았다. 용서하든 목숨으로 혈채를 갚든 그건 모두 당사자의 권리였다. 그러니 이대로 그의 의견을 존중해 물러서야 할까? 그래서 비극이 일어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나중에 그가 후회에 괴로워하는 것을 봐야 하는 걸까? ‘아니야. 그건 아니야.’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사실 그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대로 물러나는 것이 맞았다. 단순히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저렇게 분노한다. 자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정말 그의 역린을 깊숙이 찌르게 될 것이고 그때는 단순히 분노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심지어 성공할 확률도 높지 않았다. 아니, 아무런 의미 없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계기’를 만드는 것뿐이니까. ‘그 이상은 당사자들끼리의 문제야.’ 그래, 그녀가 하려고 하는 것은 한줄기 계기를 만드는 것. 그 계기가 어떤 씨앗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고,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오로지 당사자들만이 결과를 결정할 것이다. ‘그래도 하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죽은 황후와 황녀의 한을 풀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늘 악몽에 나타나는 그들이 미소로 그를 바라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한줄기 가능성에 불과할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 아닐까? “전하. 린덴.” 엘리제는 그가 있는 사자궁을 바라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사랑해요.” 그 말을 꺼내는 순간,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저…… 주제넘은 일을 하려고 해요. 정말 죄송해요. 정말로. 당신이 나 싫어하게 되면 어떻게 하죠? 나 이제 당신 없으면 살 수가 없게 되었는데.”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사랑해요.” 그래, 그를 사랑한다. 그러니 한줄기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마지막 노력을 하고 싶다. 설사 그 일로 미움받게 될지라도 말이다. 엘리제는 그길로 왕진 가방을 들고 어딘가로 향했다. 목적지는 로즈데일병원. 병석에 누워 있는 암셀 후작을 향해서. ‘계기’를 위해서는 그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병원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엘리제.” 병실에서 유리엔이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들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귀족파의 인원이 병실에 모여 있었다. “……언니?” “아버지가 의식을 잃으셨어. 곧 임종하실 거래.” “……!” 엘리제의 얼굴이 하얘졌다. *** ‘임종한다고? 곧?’ 너무 늦게 온 걸까? 이대로 암셀 후작이 죽으면 그녀가 하려던 일은 시도도 못해 보고 끝날 것이다. 엘리제는 침대에 다가가 암셀 후작을 살폈다. 창백한 안색, 펄펄 끓어오르는 고열, 미약한 맥박. 그녀는 단번에 그의 상태를 알아챘다. ‘패혈성 쇼크!’ 패혈성 쇼크(Septic shock)! 몸을 감염시킨 균이 전신을 떠돌며 온 장기를 망가뜨리며 쇼크를 일으키는 상태다. 현대 지구에서도 가장 흔한 사망 원인 중 하나를 차지하는 심각한 상태. ‘괴사성 췌장염이라고 했지? 췌장을 썩게 한 균이 전신에 퍼지기 시작했구나.’ 괴사성 췌장염은 굉장히 무서운 질환이다. 적절히 치료받지 못하면 대부분 사망한다. ‘이런 상태면 수술을 해야 하는데.’ 하지만 그 수술도 굉장히 위험하다. 그건 원래 암셀이 앓고 있던 지병 때문이었다. 그는 원래 폐에 지병이 있었다. 그리고 만성적으로 췌장 기능이 안 좋았다. 단순히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췌장의 기능이 거의 안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췌장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고 고난이도의 수술이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안 쓰고 놔두면 무조건 사망할 거야. 어떻게 하지?’ 그런데 그때, 귀족들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곧 임박한 암셀 후작의 죽음을 맞아 귀족들의 얼굴은 지극히 어두웠다. “……엘리제 백작님.” 누군가 그녀에게 물었다. “암셀 후작님의 임종을 보러온 것입니까?” “…….” 엘리제는 입을 다물었다. 임종을 보러온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녀는 암셀을 치료하러 왔었다. 그를 치료해 내고 용무를 이야기하려 했었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상태가 악화하여 있다니. “하아. 후작님. 이렇게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필 이런 상황에서.” 옆에 있던 메르키트가 길게 탄식했다. 비록 황태자의 화폐 개혁으로 날개가 꺾였다지만 차일드 가문은 여전히 대륙 최고의 금융 재벌이었고, 귀족파의 구심점이었다. 그가 사망하면 귀족파는 실질적 수장을 잃게 된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통째로 흔들릴 것이다. 어차피 곧 일으킬 정변에 모든 것이 달렸지만 이래서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메르키트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하아. 이를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없고.’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한 가지 생각이 메르키트의 머리에 떠올랐다. 있었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이를 수 없이 치료한 사람이. 그것도 지금 바로 자신의 옆에. 그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고 기적을 바라는 마음으로 말했다. “……엘리제 백작.” “네, 백작님.” “혹시…… 백작께서 후작님을 살려주실 수는 없으시오?” 그 말에 방 안에 모든 이가 엘리제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묻고 싶었던 물음이다. 물론 다들 알고 있다. 지금 암셀의 상태는 지극히 어렵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등불을 든 여인 아닌가?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명의. 다른 의사와는 차원이 다른, 하늘에 닿은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여인. “…….” 엘리제는 말없이 암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후, 대답 대신 유리엔에게 말했다. “레이디 유리엔.” 평소의 편한 호칭이 아닌 경칭에 유리엔도 존칭으로 답했다. “……네, 백작님.” “제가 잠시 후작님의 몸을 살펴도 될까요?”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활력 징후를 확인하고 청진기로 폐의 소리를 확인했다. 배의 사방면을 만져보는 등, 후작의 상태를 꼼꼼히 살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로즈데일병원의 수석교수 카일 준남작이 입을 열었다. 그는 암셀의 주치의로 치료를 전담하고 있었다. “원래 췌장에 만성적 염증이 있었는데, 이번에 괴사가 오면서 썩어들어갔습니다.” “괴사 부위는 어딘가요? 췌장 머리 쪽인가요?” 카일 준남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머리 쪽으로 보입니다. 부위가 췌장 몸체나, 꼬리 쪽이면 어떻게든 접근해 수술로 썩은 부위를 잘라내겠는데, 머리 쪽은 워낙 인접해 있는 장기가 많아 손을 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상태가 좋진 않았다. 하지만. “……아니, 가능해요.” “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아니, 워낙 상태가 안 좋아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지만.” 그리고 이어진 그녀의 말에 모두가 눈을 크게 떴다. “그래도 치료할 가능성이 있어요.” “……!” 그녀는 다시 말했다. “물론 실패 확률이 높아요. 지병인 폐병도 있고, 기존 췌장에 만성적인 염증도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치료를 시도해 볼 수는 있어요.” 주치의인 카일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백작님? 물론 백작님의 수술 실력이 하늘에 닿아 있음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췌장 머리 쪽에는 무수히 많은 장기가 있습니다. 그 장기들을 피해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은 정확했다. 췌장의 몸체나 꼬리 쪽은 앞을 가로막은 위와 장만 치우면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하지만, 머리 쪽은 아니었다. “췌장 머리 앞에는 위, 십이지장, 담관, 담낭이 있습니다. 이 장기들을 어떻게?” “다 잘라내면 돼요.” “네?” 카일은 멍하니 반문했다. 다 잘라낸다고?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00169 6-8 움직임 ========================================================================= 8장 움직임 - 6. “네, 위 앞부분과 십이지장, 담관, 담낭 다 잘라내면 돼요. 그러면 췌장 머리 쪽으로 접근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그러면 잘라낸 장기들은 어떻게 합니까?” 췌장 머리의 병이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장기들을 잘라내면 죽는다. 어떻게 하려고? “문합 테크닉을 통해 끌어 올린 소장 옆에 췌장의 남은 부분을, 그 앞에 담관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를 연결하면 돼요.” “…….” 카일은 입을 벌렸다. 무슨 뜻인지 머릿속에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단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수술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 게…… 가능합니까?”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해요.” 그녀가 하려는 것은 바로 휘플 수술(Whipple operation)! 췌장 머리에 병이 있을 때, 표준적으로 시행하는 수술이다. 휘플 수술은 이식을 제외하고 외과 분야의 최고 난이도로 꼽힌다. 대학 병원의 능숙한 교수들도 보통 6~8시간 이상 걸리고, 10시간 이상 걸리는 케이스도 수두룩했다. 그만큼 고난도의 대수술이다. “그, 그럴 수가…….” 카일 준남작은 그런 수술이 가능하단 것에 충격을 받은 듯 말을 잃었다. 그가 알고 있는 의학적 상식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달랐다. “백작님, 혹시…….” “가능하다면 후작님을…….” 귀족파의 인원들이 주저주저하며 말했다. 그들은 의학적 사항은 몰랐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껏 수없이 많은 기적을 일으킨 등불을 든 여인이란 것은 알았다. 그러니 그녀라면! 그녀라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또다시 기적을 일으킬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강하게 매달리지는 못했다. 작금의 상황이 걸렸던 것이다. 자신들은 황태자를 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황태자의 약혼녀다. 그런데 그때, 유리엔이 엘리제에게 말했다. “……백작님.” 경칭. 단순히 친분 있는 사이가 아닌, 차일드가의 후계자로서의 말하는 것임을 뜻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차일드가의 차기 당주 유리엔 드 차일드가 엘리제 백작님께 부탁합니다. 저희 아버지를 치료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만약 저희 아버지를 살려주신다면, 차일드는 백작님의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차일드의 차기 당주로서의 약속.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거창한 부탁이 아니어도 어차피 그녀는 암셀 후작을 치료하러 이 병원에 왔다. 그가 살아나야 자신이 생각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다만. “아무리 저라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아요. 실패할 수도 있어요. 아니, 수술이 성공적으로 되더라도 그저 일시적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될 수도 있어요.” 그녀는 정확한 사실을 설명했다. 수술에 실패할 가능성도 높고, 성공하더라도 그저 죽음을 몇 개월 미루는 결과가 나올 확률도 높았다. 원래부터 몸의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리엔은 고개를 저었다. “최선을 다해줄 것이니, 믿고 있겠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말에 엘리제는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어요. 패혈성 쇼크에 대해 제가 이야기한 처치들을 먼저 해주고, 수술 준비를 해주세요.” 카일 준남작이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수술 어시스트는? 저희 병원에서 혹시 원하는 의사가 있습니까?” 카일은 수석교수였지만 외과 수술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하지만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로즈데일병원도 론도의 유수한 병원 중 하나였지만, 이번 수술은 워낙 대수술. 최고의 의사가 어시스트를 서야 했다. “지금 바로 황실십자병원에 사람을 보내, 제가 말하는 분을 데려와 주세요.” “누구입니까?” 그녀는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의사의 이름을 꺼냈다. “그레이엄 드 팰론. 그분을 불러주세요.” *** 그렇게 암셀의 수술이 시작되었다. 그녀의 부름을 받은 그레이엄은 곧바로 로즈데일병원으로 달려왔다. 암셀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췌장 머리 쪽 괴사이군요.” “네.”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존 췌장의 기능이 워낙 나쁜데, 치료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봐야죠.” 그 대답에 그레이엄은 자신이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느꼈다. 이런 중한 질환에 치료할 수 있느냐가 어디 있겠는가. 그저 의사는 최선을 다할 뿐이지. “어떻게 접근하실 것입니까?” “지난번 설명해 드린 휘플 수술을 할 거예요. 기억나시나요?” 그녀는 점점 병원의 일을 정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예 의술에서 손을 떼지는 않겠지만, 결혼 후 내명부의 일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서다. 그 일환 중 하나가 교수들에게 자신의 수술 노하우를 전파하는 거였다. 휘플 수술도 그런 과정 중 설명한 적이 있었다. “네, 기억납니다. 그 고난도의 수술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레이엄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기억났다. 듣기만 해도 고난도라 굉장히 인상적이었었다. “네, 시간이 없으니 지금 바로 시작할게요.” 엘리제와 그레이엄은 수술대 위에 누운 암셀의 양옆에 섰다. 그녀는 메스를 들고 잠시 눈을 감았다. ‘반드시 살려야 해.’ 암셀이 이대로 사망하면 비극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물론 그녀가 그를 살려낸다고 해도 비극을 무조건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누누이 생각했던 것처럼 결국 아무 의미 없을 확률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계기를 마련해 볼 수는 있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노력해 볼 수 있었다. ‘도와주소서.’ 짧게 기도한 그녀는 메스를 움직였다. “오픈합니다.” 메스가 움직이며 살이 갈라졌다. 피가 튀었다. *** 그때, 황궁의 사자궁. 늦은 시간임에도 황태자 린덴은 비서관 크리스가 전해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준비는 잘되고 있나?” “네, 예정된 날짜에 맞춰 총기사단이 움직일 것입니다. 개틀링 기관총의 성능 확인도 끝났습니다.” 개틀링! 지구에서는 1862년에 개발된, 역사상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기관총이다. 린덴은 그 기관총을 검기사단과 미하일을 상대할 수로 준비했다. 아무리 오러나이츠라도 분당 600발의 연사가 가능한 그 괴물 앞에서는 방법이 없으리라. 크리스가 답했다. “귀족파는?” “길버트 백작이 전해준 날짜에 맞춰 움직일 듯합니다. 아, 검기사단이 야간 훈련을 준비하다가 취소했습니다.” “야간 훈련?” 황태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돌발 변란의 징후는 아니었나?” “그럴 가능성을 고려해 유심히 주시했으나, 특별한 이상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그렇군. 로열 가드와 수도 경비대, 총기사단에 전해 언제든 돌발 사태에 대비할 수 있도록 해. “네, 전하.” 그러고 황태자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말없이 한참이나 서류를 바라보았다. “……?” 크리스는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황태자의 분위기가 평소와 달랐다. 기분도 무척 가라앉아 있었고 눈은 서류를 향해 있는데, 읽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빠져 있는 듯했다. “전하? 혹시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잠시 쉬어야겠군. 크리스, 그대도 볼일 보도록.” “알겠습니다.” 크리스가 나가자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사랑하는 그녀가 자신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려서일까? 아니면 사랑하는 그녀에게 화를 내어서일까?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화내서 많이 놀랐을까?’ 그녀에게는 항상 좋은 말만 하고 싶고 사랑만 속삭이고 싶은데 화를 내버렸다. 엘리제가 자신에게 사죄하고 궁을 나가던 것을 생각하자 기분이 더욱 엉클어졌다. 그녀는 잘 돌아갔을까. 내가 화내서 마음에 상처는 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며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은 그의 가장 예민한 부분이었다. 그 누구도, 그녀라도 건들 수 없는. ‘혹시나……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린덴은 쓴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들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래도…… 그들을 살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그는 중얼거렸다. “가능할 리가 없잖아.” 눈앞에서 핏물로 변한 어머니와 누이. 밤마다 나타나 고통스러워하는 그들의 한을 어떻게 풀겠는가? 오로지 복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왜일까? 자꾸 가슴이 답답한 느낌이 들어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 췌장 머리를 잘라내는 휘플 수술은 외과 분야에서 고난도로 꼽히는 수술이다. 췌장 머리 주위로 온갖 장기와 혈관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수술에 걸리는 시간도 장시간. 숙련돼도 일반적으로 6~8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도 차분히 하면 어려울 것은 없어. 심장이나 혈관 수술처럼 한순간 한순간에 생명이 오가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암셀 후작은 그렇지 않아도 쇼크에 빠져 있다. 8시간이나 되는 수술을 버텨낼 상태가 아니었다.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해. 주변 장기를 잘라내는 것도 최소한으로. 몸에 부담이 안 가는 방향으로.’ 그러며 그녀는 타임 리미트를 결정했다. ‘3시간. 그 안에 끝내도록 하자. 그 안에 끝내지 못하면 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사망할 가능성이 높아.’ 3시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일반적인 숙련자가 8시간이라면, 최고 수준의 췌장 외과의사들은 3~4시간 만에 수술을 끝내기도 한다. 다만 약해진 몸에 최대한 부담을 안 주면서 진행해야 한다. 빠르지만 섬세하게. 난도가 한층 더 높았다. ‘그래도 해내야 해. 무조건.’ 굳은 각오로 암셀 후작의 배를 가른 그녀는 첫 번째 단계를 밟았다. “간을 뒤로 젖혀 주세요.” 육중한 간이 물러나며 시야가 보이자 가위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간에서 뻗어 나오는 관을 싹둑 잘라내었다. “……!” 그레이엄의 눈이 커졌다. 방금 엘리제가 자른 것은 간의 담즙이 흐르는 중요한 관이다. 잘못되면 생명을 잃는데. 저렇게 한 치의 주저도 없이 잘라 내다니. 하지만 그녀는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 곧바로 옆에 위치한 동맥을 짚더니. “타이(Tie) 해서 묶어주세요.” 그레이엄이 실로 그 동맥을 묶자 역시 잘라버렸다. 정확하면서도 신속한 수술 진행. “최대한 빨리 진행할 것입니다. 잘 따라와 주세요.” “네, 백작님.” 그리고 움직이는 그녀의 손놀림. 엘리제의 손이 펼치는 광경을 본 그레이엄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원래도 그녀는 수술 속도가 빠른 편이었는데, 이번은 현란할 정도였다. 잘라낸 담관과 동맥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췌장 머리를 후복막강에서 찌익 뜯어내 올렸다. 그리고 메스로 췌장의 붙어 있는 십이지장의 앞부분을 잘라냈다. 그러자 드러나는 췌장의 머리 부분! ‘거의 다 괴사했구나.’ 엘리제는 신음을 삼켰다. 췌장 머리가 썩으며 진물이 차 있었다. 저기서 균이 자라 전신을 떠돌며 몸을 망가뜨렸던 것이다. ‘저 부분을 잘라내야 해. 하지만 썩지 않은 다른 췌장 부위도 만성 염증으로 많이 상해 있어서 최대한 조금만 잘라내야 해.’ 그렇지 않아도 만성 염증으로 상해 있는 상태라 너무 많이 자르면 췌장 기능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조심히.’ 그녀는 신중히 메스를 움직였다. 날카로운 칼이 움직이며 췌장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0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1. 썩은 부위가 남지 않도록, 하지만 최대한 최소한으로. 또 주변 장기가 상하면 안 된다. 섬세한 손놀림이 필요한 일. “혈압은 어떤가요?” 수술 보조를 하던 카일 준남작이 말했다. “수축기 70입니다.” 지속적인 쇼크 상태. “시간은 얼마나 지났죠?” “1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췌장 절제까지 한 시간.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였지만 쇼크에 빠진 암셀 후작이 얼마나 더 버텨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조금 더 속도를 내야 했다. “계속 진행합니다.” 툭. 이윽고 췌장 머리가 몸에서 완전히 잘라 떨어져 나갔다. 그와 동시에 췌장 머리와 연결된 혈관에서 솟구치는 피들! “선생님, 타이로 지혈 부탁합니다!” “네, 백작님!” 순식간에 피가 흥건히 차올랐지만 지혈은 그레이엄에게 맡기며 그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다음엔 십이지장 끝을 잘라낼 차례! 쩌억! 처음에 십이지장 앞부분을 자르고 이제 뒷부분마저 자르니 십이지장 전체가 잘려 나갔다. 그러자 십이지장에 연결되어 있던 췌장 머리도 같이 몸에서 떨어졌다. “아…… 이렇게 췌장 머리 부분을.” 그레이엄은 감탄을 뱉었다. 췌장 머리 부분은 십이지장과 붙어 있기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다. 그런데 저렇게 십이지장과 한 번에 잘라내다니. 역시 엘리제기에 가능한 테크닉이었다. “그러면 오염된 부분을 세척하겠습니다.” 썩은 부위는 잘라냈지만 여기저기 균이 남아 있을 것이다. 깨끗한 물로 꼼꼼히 복강 안을 씻어낸 후, 그녀는 이제 재건을 시작했다. 담관과 췌장, 십이지장을 한 번에 잘라 냈으니 그걸 모두 일정한 규칙에 따라 이어주어야 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오래 걸리는데.’ 잘라낸 부위들을 실로 하나하나 이어주어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무렇게나 붙이면 안 됐다. 섬세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확실히 이어야 한다. 그녀는 초조히 물었다. “혈압은 어떤가요?” “60입니다!” 여전히 심각한 쇼크였다. 어쩌면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있는 상태. ‘빨리. 최대한.’ 엘리제는 급히 손을 움직였다. 먼저 소장을 끌어 올려 수술실로 소장의 벽과 췌장의 몸 쪽을 두 개의 층으로 이어나갔다. 특히 췌장 안의 효소가 나오는 길, 췌관을 소장 벽에 조심히 이었다. 그야말로 절정의 단단 문합술! 그리고 얇은 담관의 길을 소장 쪽으로 새로 내주었다. 둘 모두 한 치의 오차만 있어도, 몸 안으로 췌장액이나 담즙액이 새어나가며 치명적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는 어려운 테크닉. 암셀 후작의 몸 상태를 봤을 때 그런 합병증이 일어나면 돌이킬 수 없었다. 그녀는 심혈을 기울이며 수술실을 움직였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이제 조금만 더!’ 마지막은 소장과 위를 연결해 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수술실을 움직였다. 역시 마찬가지로 위장의 내용물이 밖으로 새어 나가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심혈을 다해서. “…….” 한편, 귀족파의 귀족들은 수술장 밖에서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런 그녀의 수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 귀족파에게는 암셀 후작이 필요했다. 이렇게 그가 사망하면 귀족파는 뿌리째 흔들릴 것이다. ‘제발. 등불을 든 여인이여. 기적을……!’ 그들은 의학의 문외한이기에 수술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다만 어마어마한 수술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유리엔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 제발.’ 정치적 사안도 사안이지만 자신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이렇게 보내고 싶지 않은 그녀는 간절히 수술이 잘 끝나길 기도했다. 그리고 이윽고 3시간여의 시간이 지나고. 엘리제가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혈압은 어떤가요?” “80입니다. 다행히 조금 올라갔습니다.” 그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클로즈하겠습니다.” 배를 닫겠다는 말에 귀족파의 인물들은 떨리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엘리제…… 수술은 혹시?” 유리엔이 수술장 문 사이를 통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엘리제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 그 말에 유리엔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러면?” “네, 경과를 봐야겠지만…… 아마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과 동시에 사람들의 입에서 짧은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유리엔의 눈동자에도 눈물이 돌았다. 등불을 든 여인이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 수술이 끝났다고 쇼크가 바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었다. 엘리제는 암셀 후작의 바로 곁에 붙어서 집중 치료를 하였다. 수액을 적절히 투입하고 항생제를 쓰고 약물을 조절하고. 고된 수술을 끝냈지만 여러 치료를 하느라 엘리제는 전혀 쉬지 못했다. 원체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쇼크를 회복시키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다. 한편 귀족파의 인원들은 그렇게 고군분투하는 그녀를 보며 감사와 감동을 느꼈다. ‘성녀.’ 그래, 그녀는 정말 성녀였다. 그녀를 성스럽다 하지 않으면 도대체 그 단어를 어디에 사용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엘리제의 노력 덕분일까? 암셀 후작은 다음 날 쇼크에서 회복되어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 눈을 뜬 아버지를 보며 유리엔은 울컥 손으로 입을 가렸다. “……유리엔?” “네, 아버지. 흐윽.” 죽는 줄 알았던 아버지가 살아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반면 암셀 후작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분명 마지막 순간, 흐릿하게 의식이 꺼져가며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죽어 지옥에 온 건가?’ 그는 자신이 죽어 갈 곳은 당연히 지옥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지옥이라니? 그 순간, 그는 지병인 폐병으로 쿨럭 기침을 했다가 배에서 격통을 느꼈다. 평소 느끼던 췌장의 통증과는 전혀 다른 찢어지는 고통. 놀라 배를 보니, 수술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그때, 염려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증이 많이 심할 겁니다. 당분간 거동에 조심하셔야 해요.” “……!” 고개를 돌리니 여린 체구에 인형 같은 얼굴의 소녀가 보였다. 엘리제 드 클로랜스. 제국 최고의 명의. 그녀의 얼굴을 본 암셀 후작은 상황을 깨달았다. ‘그녀가…… 날 살려준 건가? 하지만 어떻게?’ 모두가 포기했던 자신의 병이었다. 아무리 등불을 든 여인이라도 방법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백작이 날 치료해 준 것인가?” “네, 후작님.” 그 말에 암셀은 자신의 몸을 다시 살폈다. 수술 상처 통증은 있었지만 배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는 격통이 없어졌다. 펄펄 끓어오르던 고열도 호전된 것 같았다. 믿을 수 없는 일. 죽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백작.” 암셀이 엘리제를 불렀다. “네, 후작님.” 그러고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엘리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후작님?”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독사라 불리는 암셀이. 서대륙 최고의 금권을 가진 그가 깊은 감사를 표한 것이다. “감사하네. 정말…… 정말로.” 단순히 말뿐이 아니었다. 후작으로서의 위신도 생각하지 않고 크게 고개를 숙였다. 엘리제는 놀라 급히 그를 만류했다. “아, 아닙니다, 후작님. 몸을 그렇게 움직이시면 상처에 좋지 않습니다.” “고맙네. 정말로…… 어찌 나를…….” 진심으로 암셀은 마음속으로부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신을 살려주다니. 단순히 어려운 병을 치료해 주어서가 아니다. 그가 저 소녀에게 감사와 감동을 느끼는 이유. 그건 자신이 ‘암셀’임에도 어려움을 무릅쓰고 치료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암셀, 그는 엄밀히 말해 소녀의 적이었다. 현 황제 민체스터의 눈엣가시였고, 황태자의 원수였다. 동시에 클로랜스가의 대적이었고, 지금은 황태자와 서로 목숨을 다투는 귀족파의 수장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엘리제의 진료를 받지 않았던 것은 그녀라도 방법이 없을 거로 생각한 면도 있지만, 이런 정치적인 사안 때문이 컸다. 물론 저 소녀야 그런 정치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지만, 그래도 자신만큼은 도저히 저 소녀의 진료를 받을 수 없었다. “나 암셀은, 그리고 우리 차일드는 자네, 엘리제 백작의 은혜를 결단코 잊지 않겠네.” “각하.” 그러며 암셀은 감사가 가득한 눈으로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저 소녀에게는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다. 여러 귀족파의 귀족을 치료해 준 것도 그렇고, 최근 메르키트 백작을 살려주었으며, 과거에는 그가 아끼던 수양아들 알버트의 목숨도 살려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자신마저도 죽음에서 건져주었다. 단순히 감사하다는 말로는 갚을 수 없는 은혜들. “그런데 날 어떻게 수술한 건가? 카일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던데.” 엘리제는 수술 과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던 암셀은 어느 순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얼굴이 어두워졌다. “아버지?” 유리엔이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 그를 불렀다. 암셀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유리엔, 잠시만 나가 있거라. 내 엘리제 백작과 잠시 따로 할 말이 있으니.” “무슨 말씀을……?”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물어볼 게 있어서니.” 유리엔이 나가자 엘리제는 그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암셀은 우선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힘든 수술이었을 텐데, 정말 고맙네.” “아닙니다. 그런데 저에게 따로 무슨 할 말이?” “엘리제 백작. 사실은 물어볼 것이 있네. 솔직히 대답해 주길 바라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암셀은 입을 열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것인가?” “……!” 엘리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암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네. 지금 당장 급한 치료는 하였지만, 근본적인 병이 치료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이 수술로 원래 병은 더 악화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렇습니다, 각하.” 엘리제는 솔직히 답했다. 어차피 숨길 일도 아니었고, 숨길 상황도 아니었다. “얼마나 남았다고 보면 되겠는가?” 엘리제는 그의 상태를 생각했다. 췌장의 기능이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곧 여러 내분비적인 문제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췌장에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 만성적인 폐병도 있었다. ‘후작님의 폐병은 아마 간질성 폐질환의 종류일 가능성이 높아. 현대 지구에서도 치료할 수 없는 병.’ 그 폐병도 계속해서 진행 중이었다. 그러니……. “정확히는 모릅니다. 길면 2~3년이지만 빠르면 몇 달 안에 다시 안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다시 안 좋아진다. 후작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때는 사망한다는 뜻이었다. ‘빠르면 몇 달이라.’ 슬플 정도로 짧은 기간. 그래도 후작은 감사했다. 오늘 죽을 뻔한 것이 몇 달이나 연장되지 않았는가? 그 시간이면 급한 일들을 정리하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 그때쯤이면 정권 다툼도 마무리되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살아 있으면 됐다. “백작.” “네, 각하.” “이전부터 백작에게는 고마운 일이 참 많네. 우리…… 이런 사이가 아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이런 사이. 그 말이 엘리제는 왠지 쓰게 들렸다. “어쨌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혹시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보게.” “…….” “백작도 알겠지만 최근 정국 상황상 나중에는 들어주지 못할 가능성이 높네. 그러니 혹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지금 바로 말해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해보겠네.” 그 말에 엘리제는 암셀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그와 나눌 말이 있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1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2. “그러면…… 실례지만 한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말해보게.” 암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제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날, 혈탑에서 벌어졌던 비극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 암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치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황태자와 같은 반응, 아니, 그보다 더 거부감이 심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날의 일은 황태자뿐 아니라, 그에게도 뼈저린 역린이었으니까. “그날의 일? 혈탑의 비극?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내가 잘못했다고?” 암셀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황태자가 시키던가? 죽기 전 죄라도 뉘우치라고?” “그건 아닙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하아.” 암셀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짚었다. 그러고 잠시 말없이 감정을 다스리더니 말했다. “미안하군. 내 생명을 구해주었지만 그 일만큼은 도저히 좋게 반응할 수가 없어.” “…….”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때의 일은 더 이야기할 거리가 없네. 그날의 일로 황태자와 난 원수가 되었고, 그걸로 끝난 거야.” 그러며 암셀은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황태자와 죽고 죽이는 관계가 되어 이런 상황까지 되었지만 그래도 난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네.” 엘리제는 말없이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암셀은 다시 말했다. “그래,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난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아.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당시에 내 동생이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알고 있으니까. 난 가여운 내 동생을 도저히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을 수가 없었어. 그러니 그날의 일에 대해선 더 할 이야기가 없네.” 그 말은 듣는 엘리제는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그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아무런 이유 없는 악의로 당시의 일을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미쳐 버린 1황비 마리엔, 암셀의 깊은 한. 혈탑의 비극은 일평생 민체스터의 냉대를 받아온 동생의 고통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다. 동생의 고통이 아니었다면 암셀도 그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래도…… 그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유가 있다고 해서 잘못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엘리제는 씁쓸히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받아들이지 않겠지.’ 한두 마디 말을 듣는다고 해서 평생을 가져왔던 암셀의 생각이 갑자기 바꿀 리는 없다. 그녀도 그걸 알았다. 다만. “……실례지만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무언가?” “그때…… 황후 레베카 마마의 죽음을 바라셨습니까?”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불편한 침묵이 방 안에 흘렀다. “그게 중요한가? 황후의 죽음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어.” 그래, 의도한 비극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 의도하지 않았을까? 남편의 냉대에, 그리고 황후를 향한 편애에 매일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동생을 보며 정말 황후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었나? “그러면 황후 마마의 죽음을 정말 후회하지 않으십니까?” 암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거 아나, 백작? 아무리 그대가 내 생명을 연장해 주었다 해도, 그건 너무 주제넘은 질문이야.” “…….” “후회하느냐고? 그럴 리가. 내 동생이 황제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아나? 무려 20년이야! 20년! 고통받은 시간이! 결국엔 저렇게 미쳐 버리기까지 했지.” 암셀은 짓씹듯 말했다. “차라리 마음을 받아주는 척이나 하지 말지! 황위에 오르기 위해 우리 차일드 가문을 이용하기 위해 약혼을 해놓고, 철저히 외면했어! 당연히 돌아가야 할 황후의 자리는 천한 평민에게 줘버리고, 선심 쓰듯 황비 직위만 던져놓고 돌아보지도 않았지. 내 동생이 유리궁에 유폐되듯 버려지고 나서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상상이나 하나?” 엘리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은 옳았다. 분명 마리엔 황비에 대한 처신은 민체스터가 잘못한 면이 많았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폐하도 그걸 알고 있으시지.’ 브리티아를 번영으로 이끈 명군 민체스터의 유일한 오점. 그건 바로 혈탑의 비극과 마리엔 황비였다. 만약 젊은 시절의 그가 제대로 처신했다면 혈탑의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일평생 후회하셨어. 죽을 때까지.’ 이전 삶, 그는 아끼는 며늘아기인 그녀에게 속마음을 언뜻언뜻 내비쳤다. 자신이 젊은 시절의 일을 후회한다고. ‘조금 더 잘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면 그때의 일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늘 씁쓸히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건 이번 삶도 마찬가지다. 그는 그때의 일을 오로지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일평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잘 모르겠다. 그때의 비극은 정말 오로지 민체스터 혼자만의 잘못이었을까? 분명 일정 부분의 책임은 있겠지. 하지만 어찌 그게 다 그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렇다고 암셀과 마리엔 황비가 이유 없이 잘못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었다. 그들도 원래부터 악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마리엔 황비는 혈탑의 비극을 일으키기 전, 론도 시내에서 현숙하고 어질기로 명성이 높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정말이었다. 그런 그녀가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죄악을 저질렀을까? 그 심정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전 삶, 엘리제도 비슷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그녀도 린덴의 냉대를 못 견디고,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녀도 처음부터 악했던 것은 아니다.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였다. 하지만 끝없는 냉대가 그녀를 변하게 했고, 결국 그런 죄악까지 저지르게 만들었다. 그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은, 그리고 질투는 사람을 비뚤어지고 일그러지게 한다. 그러니 당시 혈탑의 비극을 일으켰던 마리엔 황비의 마음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옳은 일은 아니지.’ 그것이 그녀의 결론이었다. 그래, 어떤 괴로운 마음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든, 잘못은 잘못이었다. 자신이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전 삶의 잘못이 정당화되지 못하듯이. 이 일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백작이 하려는 말의 전부인가? 미안하군. 좋은 답을 들려주지 못해서.” 엘리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할 말이 더 있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그 일을 후회하지 않아. 잘못 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알고 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암셀 후작의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는 없다는 것을. 그래도. “각하.” “말하게.” “……정말 죄송하지만 아까 전 저에게 말씀하셨던 것. 후작님께 드리는 부탁을 지금 해도 되겠습니까?” 암셀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날의 일을 회개하라거나 사과하라거나 그런 것이라면 듣지 못한 걸로 하겠네.” “아닙니다.” “그러면?” “……미하일 전하의 아픔을 봐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 뜻밖의 말에 암셀은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엘리제는 마지막 부탁을 하였다. “그리고 일평생 괴로워해 온 황태자 전하의 마음도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저는 각하와 황비 마마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황태자 전하는 그날의 일로 일평생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각하께 마리엔 황비 마마가 소중하시듯이 황후 마마와 황녀 전하도…… 황태자 전하의 소중한 어머니와 누이였습니다.” 그러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지금 제 말이 주제넘은 것임을 압니다. 하지만 평생을 고통받아온 황태자 전하의 사랑하는 이로서, 그리고 미하일 전하의 소중한 친우로서 부탁합니다. 그날의 일로 고통받아온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번만 생각해 주시면 안 될까요?” 왜일까. 말을 하는데 눈물이 맺히려고 했다. 아마 린덴, 미하일. 평생을 괴로워해 온 그들의 아픔이 떠올라서였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은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으로 평생을 고통받아왔다. 지금 이 순간도, 그리고 앞으로도 고통받을 것이다. 그리고 미하일은? 자유롭게 저 하늘을 나는 것이 꿈인 그는 그날의 비극의 굴레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다. 그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울컥했다. “각하께서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껏 귀족파에 정치적 이념과는 상관없는 도움을 드려 왔다는 것을. 물론 큰 도움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보상을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하지만…….” 엘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 도움들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기쁘셨다면 제 부탁을 한 번만 숙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들은…… 황태자 전하와 미하일 전하는 그날의 비극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하셨습니다.” 암셀은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는 한참이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마나 되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만 가보게.” 엘리제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더는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충분히 말할 만큼 말했다. 더 이상의 말은 의미가 없었다. “편찮으신 몸에 죄송합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쾌유하시길 주님께 기원합니다.” 엘리제는 병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방문을 나서려는 순간이었다. “백작.” 암셀이 그녀에게 말했다. “네, 각하.” “……오늘 날 치료해 준 것 고마웠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편히 쉬십시오.” *** 로즈데일병원을 나온 엘리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싸늘한 바람이 그녀 주위를 떠돌았다. ‘다른 방법을 써야 했을까?’ 그녀는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처음에는 자신이 받은 황실 십자가로 귀족파의 죄를 감해달라고 린덴에게 빌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가 없었다. 그러라고 하사한 황실 십자가도 아니고, 그의 한 서린 원한은 어떻게 푼단 말인가?‘ 그가 납득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래도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 그녀는 씁쓸히 생각했다. 알고 있다. 방금 자신이 한 행동. 그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자신의 말을 듣고 과연 암셀 후작이 죄를 뉘우칠까? 글쎄. 그럴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만약 암셀 후작이 뉘우친다면? 그래서 황태자에게 사과를 한다면? 그러면 황태자는 그 사과를 받아줄까? 그렇게 평화롭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그것도 역시나 회의적이었다. ‘현실은…… 동화가 아니니까.’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 현실은 동화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그녀가 이리저리 뛰어다닌 일은 남들이 보면 비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렇게 한다고 다가올 현실이 바뀔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 나도 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일을 했던 이유.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라서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린덴이 행복하길 간절히 바라기에. 그리고 소중한 미하일이 죽길 바라지 않기에. 그래서 이런 무모한 일을 했다. 무력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이런 것밖에 없으니까. ‘주여.’ 엘리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자신에게 내린 황실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도와주소서.’ 그녀는 그렇게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오늘 쉬는 날인줄 몰라서...ㅠㅠ 연재 쉰다고 미리 출판사에 이야기를 못했네요. 꼭 평일 공휴일에 한번 쉬어보고 싶었는데... 어쨌든 내일 뵙겠습니다!! 00172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3. 살얼음 같은 정국 속, 하루가 더 지났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난 덕에 암셀의 몸 상태는 확연히 좋아졌다. 쇼크도 완전히 회복되었고, 수술 부위에 통증이 있긴 했지만, 병실 안을 걸어 다니는 거동도 가능했다. 하지만 몸이 좋아졌음에도 그의 얼굴은 어두웠다. “아버지, 통증이 많이 심하세요?” 걱정스러운 딸의 물음에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 그건 어제 엘리제가 남기고 간 말 때문이었다. ‘그들은…… 황태자 전하와 미하일 전하는 그날의 비극으로 인해 평생을 괴로워하셨습니다.’ 암셀은 생각했다. 그날의 일을 저지른 것은 동생을 위해서였다. 그러니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맞는 건가? 정말로? ‘미하일 전하. 지펠 전하.’ 마리엔의 아들들. 조카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그날의 비극 이후 웃음을 잃었다. 장미 정원에서 도원결의 놀이를 하며 우애를 맹세하던 형제들은 그날 이후 ‘적’이 되었고, 행복을 잃었다. 대신 아픔을 얻었다. 왜 그걸 지나쳤을까? 아니, 왜 모른 척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후작. 후작.’ 뒤뚱뒤뚱 걷던 귀여운 아이. 당시 린덴은 참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던 그 순한 아이는 그날 이후 표정을 잃었다. 오로지 가슴의 고통 속에 칼을 담았다.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많은 이가 불행해졌다. 고통받았다. 그러면 자신은 옳았던 건가? “유리엔.” 그는 딸을 불렀다. “네, 아버지.” 유리엔이 의아한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넌 그날의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난 세월 동안 아버지가 혈탑의 비극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적은 처음이었다. 꺼내기는커녕 그녀가 언급하기만 해도 불쾌히 화냈었다.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네 생각이 듣고 싶구나.” 유리엔은 머뭇거렸다. 하지만 대답을 피하진 않았다. 그녀는 이 문제에 대해 아버지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숙모님, 마리엔 황비 마마가 괴로우셨을 것 같아요.” “그러느냐?” “네.” 자신이 황태자를 짝사랑하고 있기에 고통을 짐작할 수 있었다. 보답받지 못하는 사랑은 정말 괴로웠다. 그러나. “그렇지만 그날의 일만큼은 아버지와 숙모님이 잘못했다고 생각해요.” “……!” 암셀은 딸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리엔은 아버지의 심기를 거슬렸을까 봐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하지만 눈을 피하진 않았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을 단도직입적으로 해버린 유리엔은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암셀은 평소처럼 화내진 않았다. 그저 그는 로즈데일병원 밖의 창밖을 바라봤다. 차일드 가문의 재력으로 만든 로즈데일병원은 워낙 고층의 건물이라 론도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암셀은 저 끝에 있는 황궁을 보았다. 그리고 그 황궁 깊숙이 있는 백원의 궁, 혈탑도 보았다. 모든 비극이 일어났던 곳.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말없이 있다 입을 열었다. “유리엔.” “아버지. 혹시 기분이 상하셨다면…….” “아니다. 내 너에게 이를 말이 있는데, 잘 듣겠느냐?” “네?” 유리엔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딸을 보는 암셀의 눈이 잔잔히 따뜻해졌다. “아버지?” “우리 차일드의 금언을 가슴에 새기고 있느냐?” “아, 네.” 금언. 차일드의 당주가 될 자가 가슴에 새겨야 할 문장이었다. “네, 당연히…… 그건 왜요?” 갑작스러운 말에 유리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다. 잠시만 이쪽으로 와보겠느냐?” 그녀는 오늘따라 이상한 아버지의 태도에 머뭇거리며 다가갔다. 병상 침실에 딸이 다가오자, 암셀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하였다. 딸을 어깨를 잠시 살짝 껴안은 것이다. “아, 아버지? 왜 갑자기?” 유리엔은 당황했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냥. 한 가지 생각이 나서 말이다.” “무슨 생각이요?” 하지만 암셀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하였다. “지금 바로 외출 준비를 해주겠느냐?” “아버지?” 유리엔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바로 어제 수술을 받았다. 물론 침실에 누워 있기만 할 필요는 없지만 외출이라니. 말도 안 됐다. 하지만 암셀은 다시 말했다. “오늘 꼭 가야 할 곳이 있단다. 반드시 가야 하니, 준비해 주도록 하거라.” *** 차일드 가문의 마차가 암셀을 태우고 론도 시내를 달렸다. “괜찮으십니까, 각하? 너무 무리하시는 것은 아닌지.” 그를 모시기 위해 따라온 중년의 기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차 밖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던 암셀은 문득 입을 열었다. “스탠 경.” “네, 각하.” “자네가 우리 가문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오래된 것 같은데.” 중년의 기사, 스탠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35년째입니다.” “그런가. 정말 오래되었군.” “네, 화기의 발달로 기사단이 해체돼 갈 곳 없는 종자였던 저를 소 공자였던 후작님께서 받아주셨지요.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암셀이 물었다. “자네는 자네의 삶을 후회하지는 않나? 평생을 우리 차일드를 위해, 나를 위해 살았는데.” 스탠이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이십니까, 각하. 각하를 모실 수 있어서 정말 기뻤습니다. 저에게 후작님은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니까요.” 스탠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도 자신의 주군이 밖에서 어떻게 불리는지는 알고 있었다. 독사. 돈놀이꾼. 혈탑의 비극을 일으킨 이. 명망 높은 엘 후작과 반대로 악명만 높은 주군. 그래도 암셀은 주변 사람들을 아꼈다. 특히 스탠, 그에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었다. “그런가?” “네.” 그 말에 암셀은 웃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그런데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네. 갑자기 궁금해서.” 이후 암셀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 스쳐 지나가는 론도의 풍경을 보며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 평소와 다른 주군의 모습에 스탠은 고개를 갸웃했다. 따각따각. 그렇게 한참을 달린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브리티아 제국의 황궁이었다. “황궁에 도착했습니다. 유리궁으로 가겠습니까?” 스탠이 물었다. 그는 암셀의 용건이 당연히 1황비 마리엔이 머무는 유리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유리궁에 가려는 것이 아니네.” “그러면?” “백원의 궁으로 가지.” “……!” 스탠은 깜짝 놀라 주군을 바라봤다. “백원의 궁…… 말씀이십니까?” 평소 혈탑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싫어하는 주군이었다. 그런데 그곳을 직접 가겠다고? 암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곳에는…… 어째서?” 그 물음에 암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째서? 그도 모르겠다. 그냥 한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안내해 주게.” 백원의 궁은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장소였다. 따라서 수많은 사연이 맺혀 있는 곳. 정권 다툼에 밀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고, 정말 죄를 저질러 갇힌 이도 있었다. 황후 레베카도 이곳에 갇혔다. 그리고 그녀의 딸과 같이 목숨을 버렸다. “…….” 암셀은 잠시 말없이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냥 평범한 석재 건물이었다. 건물 위로 높은 탑이 솟아 있었다. 혈탑이란 별명처럼 피 칠이 되어 있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감옥처럼 삼엄해 보이지도 않았다. “이곳인가.” 암셀은 중얼거렸다. 외벽을 보던 그는 시선을 돌렸다. 백원의 궁 주위에는 가시덩굴이 있었는데,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아무런 나무도, 꽃도, 가시덩굴도 없이 휑한 땅. 바로 혈탑의 꼭대기에서 몸을 던진 황후 레베카와 황녀 이블린이 떨어진 장소였다. 하늘이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피를 슬퍼한 것일까? 저 땅에는 그날 이후, 어떤 식물도 자라지 않게 되었다. ‘마리엔 황비 마마가 소중하시듯이 황후 마마와 황녀 전하도 황태자 전하의 소중한 어머니와 누이였습니다.’ 작은 소녀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가.” 암셀은 중얼거렸다. 그런 것 따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오로지 주변만 돌아봤다.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도 벅차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자신의 것을 챙기는 것도 그에게는 벅찼다. 그래서 자신만, 주위만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백원의 궁은 비어 있었다. 죄를 지은 황족이 유폐되는 곳이니까. 애초에 로마노프 황실은 손이 귀해 황족이 많지 않았다. 이 넓은 황궁에 머무는 이들도 몇 안 되는데, 백원의 궁에 사람이 머무는 경우는 드물었다. 로열 가드가 잠깐 제지했으나, 제국 최고의 권세가 차일드 후작인 것을 알고 떨떠름하게 비켜주었다. 암셀은 말없이 백원의 궁 내부를 살폈다. 마찬가지로 평범했다. 약간은 낡은 방에 기본적인 가구들이 있을 뿐이었다. “백원의 궁에 황족이 유폐되면 방 안에만 있게 되는 건가?” “네, 각하. 원칙적으로 방 밖으로 나오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런가.” 로열 가드의 답에 암셀은 방 안을 다시 살폈다. “이곳이 황후 마마가 머물렀던 곳인가?” “……네.” 로열 가드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저 암셀 후작은 황후 레베카를 죽게 한 자다. 그런 그가 황후에 대해 물어보니 좋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군.”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곳과 비슷한 구조의 방. 낡은 침대와 테이블이 있었다. 안쪽에 작은 창문이 트여 있었다. “6개월인가?” “네?” “황후 마마가 머물렀던 기간이.” “…….” 암셀은 방구석에 난 창문을 바라보았다.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의문. 황후는 6개월이나 이 방에 갇혀 있으면서 저 작은 창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전에는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던 의문이다. ‘폐하! 거짓입니다! 아닙니다! 제발 믿어주시옵소서!’ 당시 그녀가 울부짖던 것이 생각났다. 암셀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란 것을. 왜냐면 그녀의 죄는 모두 그가 꾸며낸 음모였으니까. 저 창을 보며 희망을 품었을까? 황제가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하지만 그 희망은 자신의 손으로 모두 끊어버렸다. 결국, 황후는 6개월 동안 말라 비틀어갔다. 그래서 죽었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딸이 자신에게 했던 말. “하아.” 암셀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를 부축하던 스탠 경이 놀라 물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네.”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로열 가드에게 물었다. “건물 위 탑은 지금 개방 중인가?” “……네.” 스탠 경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탑을 올라가시려고요? 안 됩니다. 지금도 무리하고 있는데.” 대수술을 받은 지 이틀도 안 됐다.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터무니없이 무리하고 있는 것인데 종탑이라니? “괜찮네. 등불을 든 여인이 워낙 단단하게 수술해 놔서 끄떡없는 것 같군.” “하, 하지만 절대 안 됩니다.” 하지만 암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한번 올라가 보고 싶어.” 스탠이 강하게 만류했으나,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암셀은 평소에 부리지 않았던 고집을 부렸다. 더군다나. “나 혼자 올라갔다 오겠네. 자네는 여기에 있게.” “각하?!” 지금도 부축을 받아서 걷고 있는 암셀이다. 그런데 탑의 계단을 혼자 걸어 올라가겠다고? ‘오늘따라 도대체 왜 이러시지?’ 스탠은 흔들리는 눈으로 암셀을 바라봤다. 주군이 이상했다. 단지 이상한 것을 떠나서 어쩐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3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4. 하지만 결국 스탠은 주인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암셀은 홀로 탑을 올라갔다. “하아, 하아.” 탑은 가파른 나선형 계단이었다. 원래 폐병이 있던 그인지라,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숨 쉬기가 괴로웠다. 수술받은 부위에서도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암셀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옮기고, 쉬고, 다시 한 걸음 옮기고. 그렇게 탑을 올라갔다. 그리고 이윽고. 끼익! 낡은 철문이 열리며 탑의 꼭대기 층이 나타났다. 건물에 솟아 있는 탑. 백원의 궁이 혈탑이란 별명을 갖게 한 황후 레베카가 몸을 던진 곳. “…….” 암셀은 입을 다물었다. 건물 위, 워낙 높이 솟아 있는 탑이라 황궁은 물론 론도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그는 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높군.” 내려다보기 힘들 정도로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다. 이곳에서 황후는 딸과 함께 몸을 던졌다. “난…… 잘못하지 않았어.”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그 의문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그날의 일로 고통받아온 두 사람의 고통을 한 번만 생각해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등불을 든 여인. 모두에게, 심지어 적인 자신에게도 한결같은 선의로 대하던 소녀의 말. 자신이 살아온 또 하나의 이유, 유리엔. 그녀의 질책도 생각났다. ‘이유가 있다고 잘못이 정당화될 수는 없으니까요.’ ‘난. 이 암셀은 무엇을 위해 살아온 걸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차일드 가문은 오로지 돈을 숭상한다. 프러시엔 공국에서 시작한 그들의 계파는 자신들만의 금융 제국을 세웠고, 프랑소엔과 브리티아 제국이 대륙 전체의 운명을 건 해전을 벌일 때 주가 정보 조작을 해 대륙의 금줄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오로지 돈만을 바라는 가문. 그런 가문의 당주인 그는 일평생 돈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정말 돈이 가장 중요했나? 아니다. 그의 삶의 이유는 가족이었다. 마리엔과 유리엔. 불쌍한 동생과 하나밖에 없는 딸. 그들을 위해 살았다. 하지만 제대로 산 것일까? ‘잘못 살지 않았다. 잘못하지도 않았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야.’ 암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유리궁에 버려져 날마다 울던 동생. 그 동생을 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으니까. 하지만…… 정말? 정말 잘못하지 않은 걸까?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아.” 암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신은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몇 달…… 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근거는 없었다. 그저 직감적인 느낌이었다. 자신의 삶이 길게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탓일까? 속마음이 물었다. 정말 잘못하지 않았나? 암셀의 얼굴에 깃든 씁쓸함이 더욱 짙어졌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가? 암셀은 그 깊은 물음에 애써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답하는 순간, 지금까지의 삶이 부정될 것 같았기에.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아.” 그는 괴로운 숨을 토했다. ‘남은 시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이제 귀족파와 황제파는 파국만이 남았다. 이제 서로가 서로의 목을 벨 것이다. 그리고 그건 결국 자신이 뿌린 씨앗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의 비극이 아니었다면, 황태자 린덴은 귀족파를 이렇게 적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파도 황태자에게 칼을 겨누지 않았겠지. 새로운 황제를 맞아 황제파와 귀족파는 각각 신흥 상인 계층과 기존 대지주 계층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시대를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돌이키기엔 늦었다. 이미 파국을 앞두고 있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다. 그들 앞에는 피의 길밖에 남지 않았다. “유리엔.” 그는 딸의 이름을 불렀다.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목숨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 지면 딸은 죽을 것이다. 정변을 꾸민 가문의 후계자를 살려둘 리가 없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자신의 잘못 때문에 딸이 죽게 되는 것이다. “하아.” 그런데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이곳에 암셀, 네놈이 웬일이지?” 낮은. 그러나 서늘한 분노가 담긴 목소리. “……!” 암셀은 고개를 돌렸다. “전하.” 깊은 분노가 담긴 차가운 금안. 나타난 이는 바로 황태자 린덴이었다. *** 린덴은 비틀린 목소리를 뱉었다. “어찌 네놈이 감히 이곳에 올 생각을 했지?” “…….” “이곳은 네놈 따위가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분노로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감히…….’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저 추악한 놈이 발을 디딘단 말인가. 이 백원의 궁은 그의 아픔이 담긴 성역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 추악한 놈이 이곳에 오다니. 저놈이 발을 디뎠다는 것만으로도 오물로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감히 이곳에 오다니. 설마 어머니와 누이를 모욕하러 온 건가?” 맹렬한 적의에 암셀은 쓴웃음을 지었다. 등불을 든 여인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황태자 전하는 그날의 일로 일평생을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과거 황태자의 모습도 떠올랐다. ‘후작. 후작.’ 순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으로 원한을 갚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 뜻으로 온 것은 아닙니다.” “하! 그러면? 사죄라도 하려고 온 건가?” “…….” “왜? 죽을 날이 머지않으니, 자신이 죽인 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궁금하기라도 했나 보지?”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온 것 보니 몸은 많이 나아졌나 보군. 그거 하나는 다행이야. 네놈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걱정했었는데. 죗값을 치르지도 않고 편안하게 죽으면 어떻게 하나 말이야.” 암셀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잘됐어. 기다리고 있어라. 네놈의 목은 반드시 내 손으로 직접 쳐줄 테니. 단두대도 필요 없어.” 그러며 황태자는 등을 돌렸다. 저 추악한 놈과 한마디의 대화도 더 나누고 싶지 않았다. “경고하니 당장 이곳에서 꺼져. 지금이라도 네놈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으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황태자 전하.” 암셀이 그의 등에 나직이 입을 열었다. 린덴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암셀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 하지만 암셀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그를 바라볼 뿐. 한참이나 지속되는 침묵에 린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자는 거지? 암셀의 눈빛은 기이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지만, 어딘가 머나먼 곳을 더듬는 듯한 눈동자. 린덴이 다시 인상을 찌푸리려는 순간이었다. 도저히 생각지도 못한 말이 그의 귀에 들렸다. “……죄송했습니다.” 린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뭐? “……죄송했습니다.” “……!” 린덴은 눈을 부릅떴다. 처음엔 잘못 들었나 했다. 도저히 저 추악한 놈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암셀을 바라봤다. 린덴의 얼굴에 담긴 감정은 놀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극한 차가움. 그는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린덴이 다시 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고 물었다.” “…….” “……죽고 싶나, 후작?” 린덴은 암셀에게 다가가더니 왈칵 멱살을 잡았다. “……죄송하다고? 나를 능멸하는 것이냐? 그래, 죽기 전 나와 어머니, 누이를 한 번에 능멸하려고 이곳에 왔나 보군.” 암셀은 눈을 감았다. 멱살을 움켜쥔 린덴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뭐라고? 죄송하다고?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인제 와서? “아니면 그냥 죽고 싶은 것인가? 이 자리에서 내 손에 죽고 싶어서 날 조롱하는 것이지?” 암셀은 말했다. “조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 그러면? 설마 진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냐?! 이 가증스러운!” 린덴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멱살을 쥔 손을 팽개쳤다. 암셀은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그런 그를 보며, 린덴은 품 안에서 권총을 꺼내었다. 찰칵! 총알을 장전하고는 그대로 암셀 후작의 미간에 겨누었다. “그 가증스러운 입에 다시 한 번 물으마. 진심이라고?” “…….” “대답해! 지금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쏘겠다.” 총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 반면 암셀은 미간에 총이 겨눠진 상황임에도 차분히 그를 바라봤다. “진심입니다.” “이……! 끝까지……!” 린덴은 이를 악물었다. 계속되는 능멸에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못 참으려는 찰나! 황태자와 암셀의 눈이 마주쳤다. “……!” 린덴은 흠칫 놀랐다. 암셀의 눈이 공허했던 것이다. 평소의 날카로운 빛이 아니었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 순간 린덴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 암셀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하지만 린덴은 인정할 수 없었다. 저 추악한 놈이 죄를 뉘우쳤다고? 있을 수 없는, 아니,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가증스러운……!’ 린덴은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권총이 불을 뿜었고, 총알이 암셀의 머리칼을 스쳐 벽에 박혔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구를 틀어 목숨을 뺏는 것을 자제한 것이다. 완벽한 복수를 위해서는 저놈을 지금 이렇게 죽여선 안 된다. 린덴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 네놈은 미안해할 자격도 없어. 그리고 편하게 죽을 자격도 없다. 가증스러운 말은 닥치고 기다리고 있어라. 네놈이 이렇게 죽으려고 나서지 않아도 너와 마리엔, 그리고 귀족파의 운명은 이미 다 결정되어 있으니까.” 등을 돌려 탑의 계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송했다고? 진심이라고? 내가 평생 들었던 말 중, 가장 웃기고 기분 나쁜 말이군.” 그때, 암셀이 나직이 말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받아들여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린덴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죽어.” “……!” 그는 손가락으로 탑 너머를 가리켰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뛰어내려. 어머니와 누이가 죽었던 것처럼. 똑같이. 그러면 네 사죄를 받아주지.” 린덴은 분노를 못 이겨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저 추악한 암셀이 자신의 말을 따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하면 저와 마리엔을 용서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 린덴은 입을 다물고 암셀을 바라봤다. 암셀의 눈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둘 사이 잠시 침묵이 흘렀다. 린덴은 낮게 말했다. “네놈이 할 수 있다면. 그러면 용서해 주지.” 그리고 그는 대답을 듣지 않고 탑의 계단을 내려왔다. *** ‘빌어먹을. 제길.’ 계단을 내려가며 린덴은 욕설을 내뱉었다. ‘뭐라고? 인제 와서?’ 그는 암셀의 사과가 진실로 진심일 것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건 가증스러운 능멸이 분명했다. ‘제길.’ 하지만 탑을 불쾌히 내려가던 그는 걸음을 우뚝 멈추어 섰다. 방금 본 암셀의 눈빛. 무언가 비어 보이던 그 눈동자는 거짓을 말하는 이의 것이 아니었다.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놈이 진심일 리가 없잖아.’ 린덴은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빌어먹을. 진심이면? 진심이면 어쩔 건데?’ 어머니와 누이가 그놈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그러면 용서해 주어야 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가슴이 요동쳤다.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제기랄!” 결국, 그는 주먹으로 탑의 벽을 후려쳤다. 손등에 피가 흘러내렸지만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 작품 후기 ============================ 바로 한편 더 올라갑니다!! 00174 6-9 실타래 ========================================================================= 9장 실타래 - 5. ‘어머니, 누이.’ 백원의 궁 밖으로 나와 그들이 떨어졌던 장소를 찾았다. 그들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당신들의 한을 갚아주겠습니다.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습니다. 이제…… 정말, 정말 멀지 않았습니다.’ 그래, 오늘의 일은 분명 자신의 마음을 흔들려는 수작이다. 이 능멸은 곧 갚아줄 것이다. 그렇게 린덴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 궁 옆으로, 생각지도 못한 소리가 울렸다. 쿠웅! “……!” 린덴의 몸이 뻣뻣이 굳었다. 무언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들리는 육중한 소리였다. 갑자기 뭐지? 뭐가 떨어진 거지? ‘설마……?’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암셀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뛰어내려. 어머니와 누이가 죽었던 것처럼. 똑같이. 그러면 네 사죄를 받아주지.’ 아닐 거다. 저 독사 암셀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가 없다. 그런데 왜일까? 이유 없이 팔이 파르르 떨렸다. “…….” 린덴은 소리가 났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뭐라고 말하는데 잘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장소에 도착한 린덴은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암셀이었다. 그가 정말로 탑에서 몸을 던졌다.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 평안해 보였다. *** 린덴은 멍한 얼굴로 사자궁에 돌아왔다. 차일드 후작의 자살로 론도 전체가 난리가 났지만 정신을 추릴 수가 없었다. ‘그가 죽었다고? 정말로?’ 린덴은 중얼거렸다. “왜?” 왜 자살했단 말인가? 도대체 왜? ‘……죄송했습니다. 진심으로.’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고? 그래서 자살했다고? “웃기지 마.” 그는 짓눌린 신음을 뱉었다. “웃기지 말라고!” 도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어머니와 누이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이제는 이런 식으로 자살해? ‘웃기지 마. 그래도 용서할 수 없어.’ 그의 손이 계속해서 떨렸다. 감정이 요동쳐 조절되지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요동치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비서관 크리스를 불렀다. “전하? 차일드 후작이……!” 크리스는 다급히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알 수 없는 혼란으로 요동치는 린덴의 눈동자를 본 것이다. “전하?” “크리스, 지금 당장 로열 가드와 총기사단을 움직여라.” 크리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로열 가드와 총기사단을? 린덴은 짓씹듯 명했다. “론도 내에 있는 모든 귀족파의 귀족들을 다 잡아들여.” “전하?” “정변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기다릴 필요도 없지. 이미 그들이 길버트 백작과 연계해 역모를 꾸민다는 증거를 다 가지고 있는데.” 명을 받은 크리스는 머뭇거렸다. 물론 린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들은 귀족파의 인원들이 역모를 꾸미려는 증거를 다 확보한 상태다. 그러니 그 증거만으로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굳이 정변을 일으키기 기다린 것은 조금 더 확실히 적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성을 잃으셨어.’ 그래, 지금 황태자 린덴은 정상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큰 혼란에 빠져 있었다. “전하, 잠시 진정하시고 결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당장 수도 내에서 병력을 움직이기에는 미하일 전하와 검기사단이 걸립니다.” “아, 미하일. 검기사단.”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내 손으로 해결하겠다. 그리고 그 전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벽에 걸린 검을 꺼내 들었다. “마리엔 1황비. 그 죄인의 목을 먼저 베겠다.” 크리스가 만류했으나 린덴은 듣지 않았다. 무작정 유리궁으로 향했다. ‘빌어먹을.’ 그의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이 얽혀들었다. ‘……죄송했습니다.’ “닥쳐!”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런 죄를 저질러 놓고, 이제 와서 사죄라고? 그런다고 자신이 받아들여줄 것 같은가? ‘절대 용서하지 않아. 절대로.’ 그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론.’ 론. 린덴의 아명. 그 이름을 부르던 이는 그의 어머니였다. 흑발의 아름다운 그녀는 늘 차분한 사랑이 담긴 목소리로 아들을 불렀었다. ‘론은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어렸던 그는 이렇게 답했었다.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음악가?’ ‘네, 지난번 음악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악기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 말에 레베카는 쿡쿡 웃었었다. 린덴, 아니, 어린 론은 조심히 물었다. ‘나 황제 안 되고 싶은데. 음악가하면 안 될까요?’ 레베카는 부드럽게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된단다.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과거의 일을 떠올린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란 말이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게 바로 제 행복입니다. 저들의 피로 원한을 갚지 않는 한 저에게 평안은 없습니다. 어머니가 바라던 그의 행복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다. 바로 그들 때문에!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늘, 모든 것을 끝내겠습니다.’ 그런데 왜일까? 검을 차고 유리궁으로 향하는데 그들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어머니와 누이. 그들은 왜인지 아릿한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린덴은 알 수 없이 가슴이 울컥했다. 도대체 모르겠다. 그들이 왜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지. 왜 유리궁에 도착할수록 표정이 슬퍼지는지. ‘제기랄. 제기랄!’ 그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그때, 떠오르는 한마디. ‘만약 그분들의 한을 다른 식으로 풀 수 있다면…… 그러면 저들을 살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 엘리제가 했던 말.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린덴은 버럭 소리쳤다. 이윽고 유리궁에 도착한 그는 저지하는 시종을 거칠게 밀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엔!” 쓸쓸한 궁 안에 그의 외침이 메아리쳤다. ‘어디지? 어디에 있느냐?’ 시뻘게진 눈으로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이 유리궁에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리엔이 광증에 빠진 후 한 번도 보러 온 적이 없었으니까. 널따란 유리궁 안에는 쓰러진 시종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일일이 문을 열며, 방 안을 확인했다. 바로 목을 베기 위해 한 손에는 검을 움켜쥔 채. 그리고 마지막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와장창! 방 안에서 무언가 요란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리는 비명 소리. 린덴은 그 소리에 흠칫 멈칫했다가 곧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인가 보군.’ 분명 마리엔이 광증에 빠져 내는 소리일 것이다. ‘네년도 이제 끝이다.’ 그는 벌컥 문을 열었다. 그리고……. “마리엔.” 단죄를 위해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었다. 린덴의 눈이 흔들렸다. “끄, 끄…… 폐…… 하…….” 마리엔 황비는 방구석에 쪼그려 벌벌 떨고 있었다. 자해한 것인지 흉터투성이인 팔에, 드레스 곳곳이 피에 젖어 있었는데, 그가 들어온 것은 눈치도 못 챈 것 같았다. 젊은 시절 아름답게 빛나던 금발은 푸석푸석하게 변해 있었다. “…….” 린덴은 입술을 깨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건만 여전히 마리엔은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오로지 광증에 빠져 벌벌 떨 뿐이었다. 그는 검을 들어 올렸다. 은색의 날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제 이것을 내려치기만 하면 마리엔의 목은 떨어질 것이다. 드디어 어머니와 누이의 복수를 하게 되는 것이다. “…….” 그런데 왜일까? 평생을 바라고 바라온 복수인데, 이상하게 손이 내려가지 않았다. 검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순간 떠오르는 암셀의 말. ‘……죄송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미하일의 얼굴도 떠올랐다. 오로지 어머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과 적대하는 동생. “……웃기지 마.” 린덴은 비틀린 목소리를 흘렸다. 그때, 마리엔 황비가 광증에 빠져 다시 소리를 내었다. “끄…… 폐하…… 밀러…… 밀러…….” 밀러. 젊은 시절, 그녀가 민체스터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린덴의 눈이 다시 요동쳤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닥쳐!” 이를 악물고, 검을 더욱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 그었다. 바로 마리엔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 그가 사랑하는 엘리제였다! 다급히 나타난 그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검을 멈추지 않았다. 더욱 힘을 주어 내리그었다. 그리고……! 파악! 검날이 마리엔 황비의 목…… 바로 옆에 박혔다. 목숨을 뺏기 직전 마지막 순간, 방향을 튼 것이다. “……전하.” 상황을 들은 것일까. 엘리제는 눈물이 맺힌 눈으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린덴은 돌아보지 않았다. 오로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원수, 마리엔 황비를 노려볼 뿐이었다. “끄…… 으…… 폐…… 하…….” 목숨을 잃은 뻔한 상황이었건만, 마리엔은 여전히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자신의 목 옆에 박힌 검날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린덴도. “하, 하…….” 린덴은 웃음을 흘렸다.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이게 뭐냐고! 제기랄!”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터져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다시 떠오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린덴은 이를 악물고 등을 돌려, 방을 빠져나왔다. 검도, 마리엔 황비도 버려둔 채. 자신이 사랑하는 엘리제도 놔두고. ‘빌어먹을. 제길.’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다. 속으로 끝없이 욕설을 내뱉으며 거칠게 끝없이 걸었다. 가만히 있으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렇게 정신없이 걸으니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백원의 궁. 레베카와 이블린이 떨어졌던 비극의 장소. “하…….” 그곳에 도착한 린덴은 헛웃음을 흘렸다. “하…… 하…….” 왜일까? 갑자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끝없이 떨어졌다. ‘어머니…… 누이…….’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냥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제길…….’ 린덴은 눈물을 멈추고자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평생의 괴로움이 터진 것일까. 도저히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저벅. 그의 등 뒤로 조심스러운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곧…… 따뜻한 느낌이 등에 닿았다. 엘리제였다. 그녀가 그를 등 뒤에서 안은 것이다. “린덴…….” “…….” 린덴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희미한 떨림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아픈 떨림이었다. “……나.” “네, 린덴.” “……절대 그들을 용서하지 않아.” 린덴은 강하게 되뇌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 말에 엘리제는 울컥 눈물이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린덴. 그래도 괜찮으니…….” “…….” 엘리제는 눈물 흘리며 말했다. “아프지 마세요……. 제발…….” 다른 건 모르겠다. 그가 아프니 그녀도 아팠다. 그녀는 양팔로 그의 가슴을 감싸 안았다. 그저 그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둘은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 린덴이 감정에 못 이겨 내렸던 명령은 일단 크리스의 필사적인 만류로 저지되었다. 만약 그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론도 한복판에서 검기사단과 총기사단의 유혈 충돌이 벌어질 뻔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어둠이 깊어졌지만 린덴은 잠을 이루지 않았다. “…….”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아.”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그들을 용서할 수 없어. 절대로.” 그래, 어떻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슴에 답답함이 치밀었다. 암셀이 탑에서 떨어진 장면이 생각났다. 마리엔이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생각났다. 왜?! 도대체! 끝까지 악하게 있을 것이지, 마지막 순간 자신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단 말인가?! ‘제길. 빌어먹을.’ 그는 죄 없이 불행히 죽은 그들을 떠올렸다. ‘어머니. 누이.’ 하지만 왜일까. 이전과 다르게 그들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생각나는 말.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어머니가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며 했던 다른 말도 생각났다. ‘사랑한다, 내 아들.’ 왜일까. 그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빌어먹을.” 눈을 질끈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 밑으로 떨어졌다. 문득 미하일이 떠올랐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날의 비극의 굴레에 벗어나지 못하고 일평생을 괴로워한 동생. 엘리제, 자신이 사랑하는 그녀도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이 뒤죽박죽 얽혔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그는 다시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깊은 새벽.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깜빡 옅은 잠이 들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어머니와 누이가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 다음 날, 이른 아침. 린덴은 눈을 떴다. 전일 격랑에 휩싸였던 모습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평소의 냉철함을 되찾았다. 그는 란돌에게 명했다. “비서관 크리스를 불러라.” “네, 전하.” 곧 크리스가 도착했다. “부르셨습니까, 전하?” “그래.” “어떤 일로……?” “오늘 만찬회를 열겠다.” “네?” 크리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정국에 갑자기 만찬회라니? “장소는 황궁 글로리아 홀에서, 시간은 정확히 정오에. 그리고 참석 인원은 귀족파 인원 전원.” “……!”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귀족파의 인원들을 초청해 만찬회를 열겠다고? 그게 무슨? “그리고 글로리아 홀에는 다음 서류를 준비하여라.” 그러며 린덴이 건네 준 서류를 본 크리스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귀족파의 인원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증거를 담은 서류였던 것이다! “오늘 만찬회에서 저들 귀족파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겠다.” <주말은 쉽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00175 6-10 용서 ========================================================================= 10장 용서 - 1. 린덴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3황자 미하일에게도 만찬회 전에 사자궁으로 오라 전하도록. 황제의 직권을 대리하여 내리는 황명이니 거절은 용납지 않겠다고 전해라.” ***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째각째각 울리는 시계 소리를 들으며 린덴은 눈을 감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이. “…….” 비서관 크리스는 그런 황태자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귀족파 전원을 동원한 만찬회라니. 그리고 3황자 전하와 단독 면담까지.’ 황태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어제처럼 감정에 못 이겨 내린 명령은 아니란 것이다. 지금 황태자의 분위기는 냉철한 평소와 똑같았다. 아니, 오히려 더 차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때, 린덴이 가만히 물었다. “크리스.” 크리스는 공손히 답했다. “네, 전하.” “엘리제는 지금 어디에 있지? 병원에 있나?” 크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답했다. “……암셀 후작의 장례식에 갔습니다.” 황태자는 그 말에 잠시 침묵했다. “……많이 슬퍼하던가?” 크리스는 씁쓸히 답했다. “네.” “……그렇군.” 린덴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암셀의 죽음은 엘리제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화합으로 이어지는 계기를 만들려 했지만 그게 그의 죽음으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린덴은 낮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눈을 감았다. 둘 사이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다시 시간이 흘렀고. 시계가 만찬회가 시작하기 한 시간 전을 가리켰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전하, 란돌입니다. 3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의 동생, 미하일이 도착했다. *** 외숙부인 암셀의 죽음 때문일까? 미하일의 얼굴은 슬픔에 잠겨 있었다. 린덴은 눈을 뜨며 말했다. “어서 와라.” “……갑자기 무슨 일이야?” 미하일은 경계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런 갑작스러운 면담이라니? 또 곧 이어지는 만찬회는 무엇이란 말인가? 린덴이 동생에게 말했다. “일단 앉지. 란돌, 차를 가져와라. 어떤 종류를 좋아하지? 그나마 백차(白茶)를 좋아했던가? 청의 백차로 가져와라.” “네, 전하.” 얼마 지나지 않아 란돌이 차를 내왔다. 따뜻한 향이 방 안에 퍼졌다. 린덴은 차를 입가로 가져가며 크리스와 란돌에게 말했다. “너희는 이만 나가봐라. 미하일과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으니.” “……전하.” 크리스는 황태자의 안위를 걱정했다. 궁지에 몰려 역모를 꾸미고 있는 3황자다. 단둘이 있는 틈을 타 검을 휘두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가봐라.” “하지만…….” “명이다. 나가 있어.” 어쩔 수 없이 둘이 나가자 린덴은 동생에게도 말했다. “너도 앉아.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냐?” “…….” 미하일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린덴을 바라봤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때 문득 드는 생각. ‘혹시 리제가 하려던 일이?’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모른다. 어차피 더 악화할 상황도 없고, 다름 아닌 그녀가 시도하려는 일이기에 시간을 주었지만,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던 일 아니었나. 그는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고 물었다. “무슨 생각이야? 우리가 지금 이렇게 차나 마실 사이는 아니잖아.” “그렇지.” 린덴은 동의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면서 한가롭게 차라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말했다. “그러면 바로 용건을 이야기하지.” “…….” 미하일은 굳은 얼굴로 린덴의 말을 기다렸다. 린덴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하일.” “듣고 있어.”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난 마리엔 황비를 용서할 수 없다. 절대로.” “……!” 미하일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계속 마리엔 황비를 감싼다면 난 너를 죽일 수밖에 없다.” “알고 있어.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른 거야?” 미하일은 고개를 저었다.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이야기다. 애초에 둘이 싸우고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린덴은 마리엔을 용서할 수 없다. 미하일도 어머니를 포기할 수 없다. 그게 바로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린덴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작 그 이야기를 하러 부른 것은 아니지.” “그러면?” 린덴은 동생의 눈을 바라봤다. 자신과 닮은, 하지만 더 부드러운 눈매의 금색 눈동자. “난 억울하게 죽은 레베카의 아들로서, 그리고 이블린의 동생으로서 마리엔 황비를 단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단죄의 내용을 지금 너에게 말하마.” “……!” “마리엔 황비를 데리고 이 브리티아 섬을 떠나라. 영원히. 살아 있는 한 다시는 브리티아 섬을 밟지 마라. 마리엔 황비가 같은 땅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으니. 이게 바로 내가 내리는 단죄다.” 그 말을 들은 미하일은 눈을 부릅떴다. 잠깐? 이건?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 린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해.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단두대로 다스리겠다. 마리엔 황비뿐 아니라 너까지 모두.” 서릿발 같은 명령. 하지만 미하일은 흔들리는 눈으로 린덴을, 자신의 형을 바라봤다.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형님? 정말로?” 영원히 브리티아 섬에 돌아오지 못하는 혹독한 추방령. 하지만 린덴이 원래 원하던 목숨을 뺏는 것에 비하면 사실 용서나 다름없었다. 미하일은 이 생각지도 못한 용서에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정말로? 오로지 복수를 위해 일평생을 살아온 그가 아닌가? 정말 이런 용서를? “……어째서?” 그 물음에 린덴은 눈을 감았다. 왜냐고? 그도 모르겠다. 사실 지금도 마음속에서는 마리엔 황비의 목을 치고 싶은 마음이 들끓어 올랐다. 살려두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사랑한다, 내 아들.’ 어제부터 자꾸만 떠오르는 그 말을 생각한 순간 다시 가슴이 울컥했다.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모르겠다. 그냥…… 그냥……. 그는 다시 요동치려는 가슴을 참으며 말했다. “선택해라. 받아들이지 않으면 피로 죗값을 갚도록 하겠다.” *** 그리고 그 시각, 황궁의 글로리아 홀. 대연회를 하는 장소인 그곳에는 만찬회 준비가 마련되어 있었고, 수없이 많은 귀족이 불안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귀족파의 인원들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우리를 한 번에 초대하다니.” 그들 중 이 자리에 오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인원이 빠지지 않고 참석한 이유는 단 하나. 초청장에 쓰여 있던 단 하나의 문구 때문이다. -참석하지 않는 자, 피로 그 값을 물리라! 그 문구 때문에 꺼림칙하면서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암셀 후작이 살아 있었다면 강단 있게 초청을 거부했을지도 모르지만, 암셀이 죽은 지금은 구심점이 될 자가 사라졌다. 한 귀족이 두려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함정은 아니겠죠? 우리를 한꺼번에 제거하려는.” 다른 이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아니겠죠. 이렇게 공개적으로 만찬회를 초청해서 그런 일을 할 리가…….” 귀족들은 설마 그들을 죽이기 위한 함정은 아닐 거로 생각했다. 비밀리에 초대한 것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공개적으로 만찬회를 초청해서 근거도 없이 살육을 일으킬 수는 없을 테니까. 모두 그런 생각으로 초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마음이 끊임없이 들었다. 함정이면 어떻게 하지? 지금 이 자리에는 귀족파 인원이 대부분 모여 있었다. 황태자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기로 각오하고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이면, 그들은 모두 끝이었다. 그렇게 그들이 마음속으로 떨고 있을 때,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만찬회 시작 시각인 정오가 다가온 것이다.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식사를 즐기고 있으라 하셨습니다.” 정성스럽게 준비한 요리가 만찬회 테이블에 차곡차곡 쌓였다. 하지만 앞에 놓인 음식에 손을 대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황실에서 솜씨를 부린 요리들이니 모두 최고의 진미들이었지만, 식사를 즐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도대체……?’ 모두 황태자가 등장하기만 초조히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시종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홀의 문이 열리며 황태자가 만찬회 장으로 들어왔다.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린덴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암셀의 죽음으로 이제 귀족파 서열 1위가 된 메르키트 백작이 대표로 나서 말했다. “이렇게 만찬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그런데…… 혹시 저희에게 어떤 하명할 말씀이 있으신지…….” “…….” 린덴은 잠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봤다. 무감정한 눈동자. 메르키트는 그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감정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선명한 증오가 느껴졌다. ‘좋지 않구나.’ 메르키트는 불안감을 느꼈다. 저 황태자는 항상 자신들을 저렇게 바라봤다. 그에게 귀족파란 암셀 후작과 마리엔 황비의 음모에 동조해 황후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 그는 속으로 한탄했다. 혈탑의 비극은 암셀과 마리엔의 주도하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들 귀족파가 동조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끝없이 황후를 비방했고 황후의 직위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리고 그 상소들은 황후의 영혼을 말라 비틀게 했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그러니 자신들은 저 황태자의 원수였다.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모두 모인 건가?” “네, 전하.” 메르키트는 답하였다. “내가 너희를 부른 이유가 궁금하겠지. 우리가 사실 이렇게 마주앉아 사이좋게 밥을 먹을 관계는 아닌데 말이야. 그렇지?” 그 말에 장내가 침묵에 잠겼다. 황태자는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너희를 만찬회에 초대한 이유가 있다. 크리스, 준비한 것을 내오도록.” “네, 전하.” 비서관 크리스가 손짓하자 곧 시종들이 그릇들을 내왔다. 그릇은 원형의 철제 덮개로 덮여 있어, 안의 내용물이 보이지가 않았다. “……?” 귀족파의 인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뭐하려는 것이지? 웬 음식을? “너희 손으로 열어보아라.” 그들은 의아한 얼굴로 철제 덮개를 치웠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음식이 아니라, 한 뭉치의 종이가 나왔던 것이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나온 것은 음식이 아니었다. 한 뭉치의 종이였는데, 그 내용을 읽어본 사람들은 경악에 휩싸였다. “이, 이건…… 이…… 이럴 수가…….” 단순히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공포였다. 그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서류에 쓰여 있는 내용은 다름 아닌, 그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던 증거였다! 애초에 길버트 백작의 회유가 음모였으니, 증거를 모조리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역모와 관련된 증거뿐이 아니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죄가 있다면 모조리 서류에 적혀 있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6 6-10 용서 ========================================================================= 10장 용서 - 2. “저, 전하…… 이것은……!” “조, 조작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귀족파의 인원들은 공황에 빠져 소리를 질렀다. 정변을 일으키기도 전에 증거를 들켰다. 그리고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두대에 목을 들이밀고 있는 상황이란 것을 깨달았다. 저 황태자가 손짓 한 번만 하면, 자신들은 모두 한 줌의 핏물로 변할 것이다. 자신들뿐 아니라, 가문도 멸문이었다. 그리고 악몽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촤악! 만찬회 장 벽 쪽에 서 있던 시종들이 커튼을 일제히 치웠다. 그리고 드러나는 섬뜩한 무기들. 수많은 총신으로 이루어진, 분당 600발의 연사가 가능한 기관총, 개틀링이었다. 무려 5대. 황태자가 손짓만 하면 만찬회 장 안에 있는 이들은 모두 목숨을 잃을 것이다. “……!” “저, 전하! 살려주십시오!” 모두가 허겁지겁 목숨을 구걸했다. 린덴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입 다물어라. 지금부터 한마디라도 더 하면 당장 목숨을 거두겠다.” “……!” 장내에 죽을 듯한 침묵이 가라앉았다. 귀족파의 귀족들은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며 황태자를 바라봤다. 린덴은 얼음 같은 눈으로 그들을 주시하다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시종들이 무언가를 홀의 밖에서 가져왔다. 귀족파의 인원들의 눈이 커졌다. 시종들이 가져온 것은 다름 아닌, 불이 펄펄 끓어오르는 화로였던 것이다. ‘왜 화로를?’ 설마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태워 죽이려고 화로를 가져온 것인가? 그들은 공포에 질려 생각했다. 그때, 린덴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상원위원장 메르키트.” “…….” “그리고 서부의 윌리엄, 중부의 에릭, 웰링턴, 매피슨.” 그는 가만히 몇몇 이름을 거론했다. “내가 왜 너희의 이름을 따로 부른 지는 잘 알고 있겠지.” 호명당한 이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모두 백작급 이상의 대귀족으로, 귀족파의 중핵이었다. 동시에 혈탑의 비극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이었다. 아마 따로 중한 벌을 내리려고 언급한 것이리라. “솔직히 말하지. 난 너희를 모두 죽이고 싶다. 단순히 이름을 부른 이들뿐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전부다! 모조리 목을 베어 어머니의 영정 앞에 바치고 싶어.” 그 말에 모두가 벌벌 몸을 떨었다. 이제 그의 신호 한 번이면 저 무자비한 총의 포화에 자신들은 형체도 남지 않고 사라질 것이다. 이미 눈을 질끈 감고 생을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린덴은 한참이나 말없이 그들을 노려보았다. 숨이 막힐 듯한 적막이 홀 안에 가득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었다. 린덴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탄식과도 같은 한숨.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그 한숨에 귀족파의 인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 순간. 황태자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너희를 모두 죽여 버리는 것보단, 그래도 살려두는 것이 제국에는 조금 더 낫겠지. 이런 너희라도 나름의 역할이 있는 자들이니까.” “……?” “그러니! 단 한 번의 기회를 주겠다.” 린덴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잊고 나에게, 이 공제에게 충성을 바쳐라. 목숨과 영혼을 걸고, 영원히. 그러면 공제의 이름으로 맹세하니, 너희의 죄악은 이 화로에 던져 잊겠다.” “……!” 귀족파의 귀족들은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이게 무슨……? “저, 전하……?”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저 황태자가 자신들을 용서해 주다니? “물론 이름을 따로 거명한 자들은 안 돼. 간단히 용서하기엔 죄가 크니. 이름을 거명한 자들은 재산을 몰수하고 작위를 박탈해 평민으로 강등시키겠다.” 그 말에 귀족들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저 정도면 굉장히 자비로운 처사였다. 이름이 거명되었던 자들은 귀족파의 중핵임과 더불어 혈탑의 비극 때 황후가 목숨을 끊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저들만큼은 단두대에 보낼 것으로 생각했다. 린덴은 제왕의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거절해도 좋다. 원하지 않는 것을 강요하진 않겠다. 하지만 거절하면 나도 국법으로 너희의 죄를 엄단할 수밖에 없다.” 역모에 대한 국법.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가문의 멸문이었다. ‘도대체 어째서?’ 귀족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물론 황태자의 제안은 그들로서는 천국에서 내려온 밧줄과도 같았다. 하지만 왜 그가 이런 자비를? 물론 이렇게 자신들을 거두면, 정치적으로 이득이 있긴 했다. 황제파뿐 아니라, 자신들 귀족파까지 휘하로 거두면 모든 귀족 세력을 망라하는 강력한 황권을 얻게 되는 것이니까. 일찍이 유례가 없던 절대 황권의 탄생이었다. 그것도 한 줌의 피도 흘리지 않고.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그 절대 황권은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들을 한꺼번에 죽이면 제국에 혼란이 일기야 하겠지만, 오로지 복수에 눈이 먼 황태자가 그런 걸 신경 쓸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황태자는 그 이유를 따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그저 지엄한 목소리로 명했다. “지금 당장 선택해라. 충성을 맹세하면, 이 화로에 역모에 대한 증거를 던지겠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국법대로 처리하겠다.” 그 말에 귀족파의 인원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망설이는 눈빛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사실상 정권 다툼은 끝난 것이다. 그들의 패배였다. 이제 남은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죽음이냐, 아니면 새로운 황제의 시대를 맞아 충성을 바칠 것이냐.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한 명, 두 명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윽고 그 자리의 모두가 무릎을 꿇고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께 충성을 맹세합니다!” 길고 길었던 정쟁이 끝을 맺는 소리였다. 그렇게 론도의 비극은 막을 내렸다. *** 미하일도 황태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미 기운 싸움이었고, 그가 황위 다툼을 벌였던 이유 자체가 어머니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그는 황위 따위에는 큰 관심 없었다. 미하일은 준비되는 대로 곧바로 마리엔과 함께 브리티아 섬을 떠나기로 했다. 귀족파는 글로리아 홀에서 맹세했던 대로 황태자에게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단, 메르키트를 비롯해 혈탑의 비극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한 중핵들은 재산이 몰수당하고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굴욕적인 처벌이었지만 가문의 몰살을 피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감사했다. 그렇게 황태자는 정쟁에서 완전히 승리했고, 황제파를 비롯해 귀족파까지. 제국의 모든 정치 세력을 한 손에 쥐어진 절대 황권의 주인이 되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의 막을 연 그날. 황태자는 혈탑에 올랐다. “…….”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오롯한 제국의 주인이 되었지만, 그의 얼굴에 기쁨의 빛은 없었다. 그저 가라앉은 눈빛으로 어머니가 죽은 곳에서 론도의 전경을 바라볼 뿐.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린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날이 깊어가며, 황혼이 지고 있을 때, 그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전하.” 익숙한 목소리. 그가 사랑하는 그녀였다. “왔는가.” 린덴은 고개를 돌려, 엘리제를 바라봤다. 담담하지만 아픔이 흐르는 눈동자에 엘리제는 가슴이 울컥했다. “……전하. 린덴.” 그는 씁쓸히 웃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탑 위라서 바람이 차다. 나는 괜찮으니 내려가 보도록.” “…….” 하지만 엘리제는 내려가지 않았다. 저렇게 온몸으로 아파하는데, 어떻게 두고 내려가겠는가.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히…… 조심히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 등에 와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린덴은 흠칫 놀랐다가 눈을 감았다. 왜일까? 괜찮았는데,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따뜻함을 느끼니 다시 가슴이 흔들렸다. “……괜찮으신가요?” 린덴은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다, 라고 답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은 것 같다. 아팠다. “괜찮지…… 않은 것 같군.” “……린덴.” “사실 잘 모르겠다.” 린덴은 저 멀리 펼쳐진 론도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아파 보여, 엘리제는 더욱 힘을 주어 그를 껴안았다. “난 어머니와 누이의 원한을 갚길 원했어.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이 순간에도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던 마리엔 황비와 귀족파의 놈들의 목을 치고 싶어.” “…….” “하지만……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군. 잘…… 모르겠어.” 그래, 잘 모르겠다.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한 것인지. 다만 계속해서 떠오르는 말. ‘사랑한다, 내 아들.’ 린덴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왜 계속 저 말이 떠오르는지. 왜 자신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그냥…… 계속 가슴이 울컥했다. 그때, 그의 등을 감싸 안고 있던 엘리제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전 그 두 분이 복수를 바랐는지, 아니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다만?” “이건…… 제 생각이지만…… 그분들은…… 린덴의 지금 선택을 싫어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어째서지?” 린덴이 물었다. 엘리제는 답했다. “왜냐면…… 그분들은…… 복수보다도 린덴이 행복하길 바랐을 테니까요.” “……!” 그 말에 린덴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가?” “네.” 엘리제는 조심히 말을 이었다. “저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간절히요. 왜냐면…… 사랑하니까요.” 그 말에 린덴은 그녀의 품 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의아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엘리제를…… 그대로 껴안았다. 자신의 품 안으로. 강하게. 으스러지게. 린덴은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난 네가 무슨 일을 하든 상관없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린덴은 가만히 물었다. “리제.” “네, 린덴.” “나도…… 이런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 물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봤다. “네, 행복해질 수 있어요.” “그럴까?” “네, 왜냐면…… 제가 옆에 있을 거니까요.” “……!” 그 말에 린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리제는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리고 말했다. “제가 옆에 있을게요. 계속…… 계속…… 영원히…….” “…….” “사랑해요, 린덴.” 린덴은 말없이 그녀를 더욱 깊게 껴안았다. 그리고 그녀를 느끼며 말했다. “정말 내 곁에 계속 있을 건가?” “네, 계속요.” “정말로?” “네.” “나중에는 귀찮을지도 몰라. 내가 떨어지지 않아서. 난…… 네가 없으면 안 되니까.”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저도…… 당신이 없으면 안 돼요, 린덴.”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많은 아픔. 눈물과 상처의 길을 지난 후의 마주 봄이었다. 엘리제는 가만히 속으로 기도했다. ‘우리의 앞날에 축복과 행복이 가득하길.’ 그런 그들을 축복하듯, 황혼이 내려앉았다. 황혼을 맞아 론도가 붉게 물들었다. 아름다운 정경이었다. 자신들의 앞날도 저렇듯 아름답길. 그렇게 엘리제는 속으로 기도했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7 종장 ========================================================================= 종막 : Forever 종장 시간이 흘렀다. 그 후 많은 일이 있었다. 일단 황태자 린덴의 대관식. 그는 대성당에서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황관을 썼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12대 황제, 공제(空帝)의 즉위였다. 이후 제국은 그의 통치 아래 공전의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미래에 프러시엔에서 발족한 게르마니아 제국에서 시작한 세계대전을 통해 역사의 축이 신대륙, 신 연방에게 넘어갈 때까지 지속할 팍스 브리티아나의 시작이었다. 엘리제의 지난 삶과 다른 점이 있다면 지극히 평화로운 대관식이었단 것이다. 과거엔 3황자, 마리엔 황비는 물론 귀족파의 인원을 모조리 단두대에 보내고 나서 황위에 올랐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박수 쳤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우선 귀족파의 인원들, 그들이 모두 살아 무릎 꿇고 있었다. 자신들을 용서한 새로운 황제에게 감읍하며 진정으로 충성을 바치기로 했다. 그들은 엘리제에게도 감사의 시선을 보냈다. 다들 알고 있었다. 이 화합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뒤에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실제로 그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목은 모조리 단두대에 잘려 나갔을 것이다. 한 가지 더 감격스러운 일은 바로 선황인 뇌제 민체스터가 직접 린덴의 머리에 황관을 씌워주었던 것이다. “축하한다, 린덴” 민체스터는 황관을 넘기며 미소를 지었다. 엘리제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일까? 길고 긴 시간이 지나고, 그는 드디어 의식을 차렸다. 몸은 형편없이 쇠약해졌지만, 그래도 가끔 그녀와 장미 정원에서 차 한잔 할 수 있을 정도까지 회복하였다. 금색 관이 린덴의 머리에 올라가자 대주교가 선포했다. “이로써 린덴 드 로마노프가 브리티아 제국의 12대 황제가 되었음을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겠습니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황태자 린덴은 황제가 되었다. *** 그리고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바로 3황자 미하일의 추방이었다. 대관식이 있기 전, 늦은 밤, 섬 동쪽의 작은 항구. 조막만 한 작은 배가 놓여 있었다. 그와 마리엔 황비가 탈 배였다. 마중하는 인파는 없었다. 한때 황태자와 더불어 정국을 양분하던 3황자였지만, 쓸쓸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3황자는 만족했다. 그는 태어나서, 아니, 혈탑의 비극 이후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어깨에 놓인 짐이 없어졌다. 그리고 형제에게 칼을 겨누지 않아도 된다. 청의 친우 운학이 준 검, 비천검(飛天劍)이란 이름처럼 하늘을 나는 새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그는 만족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을 쓸쓸하지 않게 하는 한 명의 존재. “리제.” 그가 사랑하는 작은 소녀가 그를 위해 마중 나와 있었다. “이 멀리까지 왜 왔어? 힘들게.” “밀.” 엘리제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제 앞으로는 영원히 그를 볼 수 없으리라. 밝게 웃던 그의 미소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미하일은 그녀를 보며 잔잔히 미소 지었다. 이전과는 다른 편안한 웃음이었다. “어디로 갈 거예요?” “글쎄. 일단 로우랜드에 내려, 서대륙을 돌려고. 프랑소엔은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정권이 뒤집어지고 있어 분위기가 흉흉해 어머니와 가기에는 조금 그렇고, 오스트리엔이나 갈까 싶어.” 미하일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짤츠감머구트랑 알프스의 풍광이 예쁘던데. 그 예쁜 풍광들을 보다 보면 어머니의 증상도 좀 좋아지시지 않을까? 짤부르크에서는 음악도 듣고, 수도 비엔에서는 공연도 보고 하지, 뭐.”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다행히 밝아 보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조금 좋아지시면 비단길을 따라 청도 다시 한 번 가보려고. 친구들은 다 잘 있는지 모르겠네. 결혼은 했으려나?” “그렇군요. 밀.” “응?” 엘리제가 그에게 말했다. “꼭 건강하세요.” 그 말에 미하일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도 이제 그녀를 보는 것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같이 갈 수 있으면.’ 이전 크림반도에서 알버트를 수술할 때 했던 약속처럼, 그녀와 같이 훨훨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사정도 안 될뿐더러, 그녀의 마음에 있는 것은 그가 아니었으니까. “리제.” “네?” “나…… 사실…… 할 말이 있어.” “무엇인데요? 말해보세요.” “…….” 하지만 미하일은 입을 다물고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과거에도 그는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말해주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이지? 이번에는 듣고 싶었다. “괜찮으니 편히 말해보세요.” “…….” 하지만 미하일은 좀처럼 꺼내지 못했다. 사랑해. 그가 하려는 말은 바로 이것이었으니까. 어차피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마지막이니 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야, 떠나는 마당에 괜히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자. 이런저런 생각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무슨 말이든 괜찮아요. 듣고 싶어요. 말해주세요.” 그 말에 결국 미하일이 입을 열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렸다! “출발 시각은 언제지?” “……!” 둘 다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봤다. 검은 머리의 금색 눈. 조각 같은 외모. 린덴이었다! 미하일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왜 형님이 이곳에? 설마 날 마중하러? 동생의 놀란 시선에 린덴은 헛기침하였다. “특별히 널 마중하러 온 것은 아니다. 그냥……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다.” “…….” 볼일? 이 깡촌 항구에? 저 지고한 분이?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빛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정말 마중 온 것 아니다.” “……아, 네.” 미하일은 쿡쿡 웃음을 지었다. 솔직하지 않은 면이 참 형님다웠다. ‘그래도 단 둘뿐이지만, 제국에서 가장 지고한 두 명이 마중 왔으니, 나름 나쁘지 않은 마지막이군.’ 미하일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신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이도 아닌, 그녀와 형님, 이 두 사람이 마중 왔다는 것이 기뻤다. 그때, 린덴이 무뚝뚝하게 손을 내밀었다. “……!” 미하일은 놀라 그 손을 봤다. 악수 신청이었다. “왜? 안 잡나?” “……아니.” 미하일은 마주 그 손을 잡았다. 이렇게 형님과 악수를 하는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차갑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이 손바닥에 닿았다. “미하일.” “응, 형님.” “잘 지내라.” “……!” 미하일은 입술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도.” 그렇게 두 형제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미하일은 마리엔 황비가 미리 타 있는 작은 배에 올랐다. 그리고 브리티아 섬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고 등을 돌리는 찰나. 린덴이 말했다. “미하일.” “응?” “시간이 지나면 로마노프령으로 와라.” “……?” 미하일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린덴이 지나가듯 말했다. “간단히 술이나 먹자.” 그 말에 미하일은 미소 지었다. “그래, 기다릴게.” 그렇게 미하일을 태운 배가 멀어졌다. 엘리제는 그 배가 완전히 멀어져, 눈에서 안 보일 때까지 모습을 지켜보았다. *** 린덴이 황제에 오른 후, 많은 것이 변했다. 일단 의회 체계. 황제파와 귀족파가 주축이 된 양당 체계로 변하였다. 황제파와 귀족파는 서로 대표하는 입장은 다르지만, 하나의 주군을 섬기는 이로써 건전한 대립을 이어갔다. 엘리제의 이전 삶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는 제국에 굉장히 좋은 효과를 가져왔다. 한 측으로만 정책이 편향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린덴은 절대 황권을 쥐었지만, 의회의 권한을 상당히 인정해 주었다. 국제 정세에 밝은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브리티아는 입헌군주국의 시대로 가야 할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엘리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입헌군주국이요?” “그래, 날이 갈수록 시민들의 힘은 커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이런 신분제가 없어지거나 유명무실해지는 날이 올 것이다. 당장 신대륙의 신 연방과 프랑소엔만 해도 그렇지 않으냐?” 엘리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대 지구의 삶을 살다 온 그녀는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의 예측은 정확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조금씩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가 말한 것은 바로, ‘군림하되 지배하지 않는다’(Kings reign but do not govern)였다. 그렇게 브리티아는 새로운 황제의 통치하에 조금씩 새 시대를 향해 나아갔다. 브리티아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다는 공제의 시대, 황금시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엘리제는 그 황금시대의 새로운 축을 맡게 된 유리엔을 만났다. 유리엔 드 차일드. 이제는 암셀을 대신해 차일드 후작이 된 그녀는 의회의 양당을 구성하는 귀족파의 수장으로서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 이름을 바꾸신다고요?” “응, 아무래도 기존 귀족파란 이름을 그대로 가져갈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귀족파란 이름 자체가 조금 웃기잖아.” 엘리제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유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한 그녀는 이전보다 한층 성숙해 보였다. 실제로 그녀는 뛰어난 정치적 역량을 보이며 귀족파를 이끌었고, 제국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전 후작의 죄를 사죄한다는 의미로 막대한 재산도 기부했지.’ 엘리제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일드 가문은 재산과 작위를 유지했다. 암셀이 죽음으로 죄를 갚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브리티아 황실이라도 그들의 작위와 재산을 몰수할 수 없었다. 그들의 작위는 브리티아에서만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계파는 온 서대륙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브리티아의 후작이자, 전 프랑소엔 제국의 백작, 프러시엔의 백작, 스페냐의 자작 위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파가 아니면 당 이름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등불당.” “……네?” 엘리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촌스러운 것 같은? 아니, 그것보다 어째 당 이름이 어디서 들은 것 같은 느낌인데……? “이 브리티아 제국의 앞날을 밝게 비추는 당이 되자는 뜻의 이름이야.” “아…… 네.” 유리엔은 웃으며 말했다. “물론 네 별명에서 따왔다는 것도 맞아. 사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란 의미도 있지만 다들 너에게 감사하는 의미의 이름을 짓고 싶어 했어.” “…….” “엘리제, 너는 우리들의 은인이니까.” 그렇게 등불당이 발족하였다. 훗날 황제파의 후신인 시민당과 더불어 브리티아 정계를 양분하는 당파였다. *** 이런저런 일과 더불어 이런 일도 있었다. “크음. 너희 둘, 오늘 이 아비와 이야기 좀 하자.” “……?” 엘 후작의 말에 두 아들, 렌과 크리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의 표정이 왠지 좋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최근 정계에 안 좋은 일은 없었는데? 해외에서 갑자기 돌발 변수라도 생겼나? 그런 의문으로 크리스는 물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신지?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안 좋은 일? 안 좋은 일이야 있지! 바로 너희 때문에!” “……네?” ============================ 작품 후기 ============================ 드디어 종장이군요. 지금까지 함께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본편은 181화로 완결납니다. 외전은 5월 중 시작할 예정입니다. 00178 종장 ========================================================================= 종장 “일단 앉아라!” 아버지뿐이 아니었다. 새어머니와 엘리제도 아버지 옆에 앉았다. 두 아들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 앞에 앉았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자신들은 새 황제의 측근으로 차기 정부의 실세가 될 가문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우리 때문에 안 좋은 일이라니? 엘 후작은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너희! 도대체 결혼은 언제 할 거냐!” “……!” 렌과 크리스의 눈이 커졌다. 결혼! 생각지도 않고 있었던 일이다. 엘 후작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아! 도대체 너희 나이가 몇인데 무슨 생각들이냐! 내가 너희 나이 때에는 한 번에 만나는 애인의 수가……! 크흡! 크흠!” 그는 리즈 시절의 여성편력을 꺼내려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새어머니가 꼬집은 것이다. 멍들 정도로 강하게. 하여튼 애들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어, 란 표정으로 잠시 남편을 흘겨본 그녀는 아들들에게 말했다. “그래, 이제 너희도 결혼할 시기가 되었는데, 어디 만나는 레이디는 있니?” “…….” 없다. 렌은 론도의 모든 시민이 인정하는 천연기념물, 벽창호였고, 크리스는…… 엘리제처럼 일중독에 동생 바보였다. 엘은 푹푹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들아, 이제 곧 막내인 엘리제는 결혼하는데, 너희는 어쩌려고 그러는 거냐?” 엘은 생각만 하면 화가 났다. 품에만 두고 싶은 딸은 곧 결혼해 떠날 거고, 내보내고 싶은 이 시커먼 놈들은 결혼은커녕, 여자를 만날 생각도 안 하고 있으니! “아무나 괜찮다! 평민이어도 좋으니! 아무나 데려와!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 “1년 안에 만나는 여자가 안 생기면, 그때는 구제의 여지가 없다고 보고 내가 강제로 짝을 정해주겠다!” 식겁할 이야기. 그런데 크리스의 반응이 이상했다. “정말로 아무나 괜찮습니까?” “……응?” “정말 아무나 괜찮습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신 거죠?” “그, 그래. 너…… 혹시……?” 엘과 새어머니, 엘리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크리스에게 레이디가? 크리스는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뭐, 아직입니다만. 그래도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는 있습니다.” “누구냐! 내가 당장 밀어주마! 혹시 레이디를 꼬실 노하우를 모르는 거면, 내가 오늘 밤! 데이트부터 첫날밤까지의 노하우를……! 크흡!” 엘은 다시 허리를 꼬집혀 신음 흘렸다. 크리스는 고개만 저을 뿐, 누구인지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워낙 콧대 높은 고양이라서 쉽지가 않군요. 기다려 주십시오.” 이렇게만 말했다. 이제는 벽창호 렌의 차례. 그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엘은 그에게선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 왕년의 잘나가던 바람둥이였던 엘의 기준으로선 저놈은 구제 불능이었다. 저놈은 중매만이 답이었다! “너는 여자 없지? 내가 아무나…….” 그런데 렌이 정말 의외의 말을 하였다. “아버지.” “응?” “그 노하우, 저한테 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엘 후작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말? 렌은 평소와 똑같은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마음에 두고 있는 레이디가 있는데, 접근하는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입을 벌렸다. 저 목석 렌이 마음에 두고 있는 이가 있다고? 생각지도 않은 돌발 선언이었다. 물론 그도 그 레이디가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만 말했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묵묵한 의지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과연 그가 론도 최고의 천연기념물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 한편, 엘리제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그레이엄. 그는 황실십자병원의 교수실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괴롭구나.’ 특별히 안 좋은 일이 있는 건 아니다. 아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각고의 노력 덕에 그는 황실십자병원의 최고의 의사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다. 린덴의 즉위 후, 본격적으로 내명부의 일을 챙기느라 병원 일에서 손을 많이 뗀, 엘리제의 업무를 대신하는 것도 바로 그. 물론 아직 많은 면이 부족하지만, 그레이엄은 그래도 엘리제의 실력을 가장 많이 전수받은 의사로 여겨지고 있었다. 전임 어의인 엘리제 이후, 새로운 어의가 된 피터 교수가 몇 년 뒤 은퇴하면 차기 어의로 가장 유력시되고 있기도 했다. 그야말로 의사로서 최고로 전도유망한 미래만 남았다고 보면 되는 상태. 하지만 그의 마음은 늘 그렇듯 행복하지 않았다. 바로 엘리제 때문이었다. ‘언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씁쓸히 생각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의 미소를 보는 것이 늘 아팠다. 앞으로 어의가 되면 어떻게 하지? 자신이 황궁 어의가 되면 자신이 그녀의 진료를 전담하게 될 것이다. 그녀가 아픈 모습을 어떻게 보고 있을지 가슴이 답답했다. ‘하아. 도대체 난 무슨 죄를 지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그런데 그때,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레이엄 교수님, 손님이 왔습니다. 들어오라 할까요?” “아.” 그레이엄은 까먹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오늘 손님이 오기로 했었다. 그는 방 밖에 물었다. “오늘 오기로 한 새로운 도제인가요?” “네.” 원래 황실십자병원은 도제를 거의 받지 않지만, 최고의 자질을 가진 이들에 한하여 도제를 받았다. 지금 새로 온 도제도 그레이엄이 익히 알고 있던 이다. 그는 과거 테레사병원에서 엘리제를 처음 도제로 봤을 때를 떠올랐다. 그녀와 자신의 만남도 이렇듯 스승과 도제로 시작했었다. 그때, 자신은 그녀를 부랑자 병실로 쫓아냈었는데. 당시만 해도 이런 마음을 가지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었다. “교수님?”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레이엄은 고개를 저었다. “들어오라 하세요.” 다른 생각은 그만. 지금은 새로 온 도제를 맞을 차례다. ‘이번에 오는 도제는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아니, 단순히 모르는 사이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도제는 익히 잘 아는 사이였다. 끼익. 문이 열리자, 그레이엄은 반갑게 새로운 도제의 이름을 불렀다. “오랜만입니다, 레이디 제이. 잘 지냈습니까?” 레이디 제이. 바로 크림반도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어린 도제였다. 그녀는 실력을 인정받아 이곳 십자 병원으로 오게 되었다. “네, 교수님.” 그리고 그녀가 방문을 열고 나타난 순간. 그레이엄은 흠칫 놀랐다. 예뻤다. 2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탓일까? 레이디 제이는 얼굴에 흐르던 어린 티가 없어지고, 어엿하게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 있었다. 특히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갈색 머릿결이 싱그러웠고, 푸른 눈이 기분 좋게 빛나고 있었다. “교수님도 잘 지내셨나요?” “……아, 네.” 그레이엄은 멍하니 있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그 인사에 제이는 활짝 웃었다. 보는 이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미소였다. “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교수님.” 그리고 왜일까? 그레이엄은 그 밝은 미소를 보고, 알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그레이엄은 새로운 도제를 맞았다. *** 이런저런 수많은 일이 있었고, 그것과는 별개로 엘리제는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린덴이 즉위 후, 아직 결혼식을 올린 것은 아니지만 안주인이 없는 황궁 내명부의 일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대신 황실십자병원의 일은 많이 줄였다. 황후가 될 텐데 지금처럼 병원의 일에 주로 매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민체스터가 의식을 회복한 후에는 어의직도 사퇴하였다. 하지만 어의직을 그만두고 병원 일을 줄였음에도 그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이전부터 진행한 프로젝트들 때문이었다. 일단 천연두 예방 접종 프로젝트! 수만 명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었다.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이 시기 대규모 천연두가 유행해 수만 명의 사망자가 나왔던 남부 지방에 먼저 예방 접종을 시행했다. 덕분에 실제로 천연두가 유행했을 때 피해는 정말로 경미했다. 마치 천연두가 아니라 감기가 유행했나 싶을 정도로 가벼운 피해였다. 덕분에 그녀에 대한 찬사가 다시 한 번 쏟아졌다. 그렇게 엘리제는 일단 남부 지방의 피해를 막은 후, 브리티아 전역으로 예방 접종을 확대해 나갔다. 브리티아뿐이 아니었다. ‘천연두는 지구에서도 19세기에만 수억 명의 사망자를 낸 질환이야. 예방법을 온 세계에 전파시켜야 해.’ 황실의 협조를 통해 프러시엔도, 스페냐 왕국도, 오스트리엔도, 적국인 프랑소엔도. 가능한 모든 곳에 예방 접종을 전파했다. 천연두로 피해를 겪던 그들 나라가 그녀에게 큰 경의를 표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예방 접종의 창시자. 천연두 퇴치자. 이번 일로 그녀가 얻게 된 별칭이었다. 그녀가 진행하고 있는 중요 프로젝트는 그것뿐이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식 의과대학의 설립. 기존의 주먹구구식의 도제 양성 방식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커리큘럼을 갖춘 세계 최초의 의과대학이 설립됐다. 클로랜스 가문의 재정 지원을 받아 세운지라, 클로랜스 의과대학이라 이름 붙였다. 훗날 세계 3대 의과대학이라 불리게 될 곳으로, 그녀는 그 의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직을 역임했다. 의과대학의 커리큘럼 자체가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자리가 잡히기 전까지는 다른 이에게 맡길 수가 없었다. 또한 그녀는 머릿속의 지식을 이 시대의 과학 수준에 맞추어 풀어내 의학서를 새로 집필하였다. 훗날 의학의 바이블이라 불리게 될 저서로 그녀를 ‘현대 의학의 어머니’라 불리도록 만들었다. 그 와중에 황실십자병원의 교수들에게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이제 황후가 되면, 지금보다도 더욱 의사 일을 할 시간이 제한될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내용을 전파해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몸이 두 개, 아니, 세 개, 네 개라도 모자랄 시간을 보냈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중 중요한 일도 했다. 바로 새어머니의 병을 치료한 것이다. “리제…….” 수술대에 누운 새어머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엘리제는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한숨 자고 일어나면 끝나 있을 거예요.” 이전 삶, 새어머니는 질병으로 사망했다. 그녀가 앓았던 병은 다름 아닌 유방암. 이번에 엘리제는 시기를 기억하고 있다가, 초기에 발병을 잡아냈다. 원체 초기라 간단한 수술만 하면 완치될 것이다. 딸의 따뜻한 말에 새어머니는 눈을 감았다. “네가 어릴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크다니.” “어머니.” 이전 못되던 아이가 어찌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는지. 아니, 단순히 훌륭하게 자랐다는 말로 표현할 게 아니었다. 그 어떤 단어로도 지금까지 엘리제의 업적들을 수식하기 어려웠다. 거룩할 정도로 대단했다. “편히 한숨 자세요. 금방 끝날 테니.” “……그래.” 새어머니는 딸을 믿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마취가 끝나자, 엘리제는 외과의사로 돌아와 수술칼을 들었다. “오픈(Open)합니다.” *** 정신없이 지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린덴이 고대하고 고대했던 대망의 결혼식이 눈앞에 다가왔다. 엘리제는 그 결혼식을 앞두고도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아니, 결혼식 전이라 더 바빴다. 그런데 이제 결혼식 준비 및 대부분의 일이 마무리되어 한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엘리제가 납치당한 것이다. 바로 백마 탄 왕자님, 아니, 이제 황제님, 린덴에게 의해. 1박 2일의 짧은, 하지만 행복한. 지난번에 이어 두 번째 납치였다.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79 종장 ========================================================================= 종장 *** 이번엔 엘리제도 저항을 하지 않았다. 사실 둘은 이미 미리 이야기가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계속 그렇게 바쁘게만 지내면 납치해 버린다?’ 얼마 전, 린덴이 그렇게 말했었고. ‘안 돼요.’ ‘해야 할 일은 대부분 정리되지 않았나?’ ‘그렇기야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녀도 특별히 싫지 않은 눈치라 린덴은 눈을 빛냈다. ‘어디로 납치당하고 싶지?’ ‘그게 뭐예요.’ ‘골라, 특별히 납치될 장소를 선택할 수 있게 해주지.’ 그 말에 엘리제는 쿡쿡 웃었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납치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그러면……. ‘바다가 보고 싶어요. 아, 그렇다고 납치를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요.’ ‘알겠다, 바다. 바다.’ 린덴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오늘의 납치가 일어났다. 자신을 태우고 론도 남쪽으로 빠져나가는 마차를 보며, 엘리제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또 납치당했네요.” “싫나?” 린덴은 웃으며 물었다. 엘리제는 고개를 젓고, 옆에 앉은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안 싫어요, 납치범님.” “왜?” “제가 납치범님을 사랑하니까요.” 그 말에 린덴은 어깨에 기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녀도 그를 바라봤다. 이어지는 사랑이 담긴 입맞춤. 서로의 혀가 느껴지고, 타액이 섞였다.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그 강렬한 느낌에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리제.” “네?” “오늘 너무 자극하지 마.” “네? 네?” “오늘 밤 참기 힘드니까.”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여행, 아니, 납치당했으니 오늘 밤은 그와 함께 같은 방에서 보내야 한다. ‘설마?’ 그 생각을 하자 심장이 주책 맞게 뛰었다. 지난번 납치당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그가 지켜주었지만 이번에는? 슬쩍 그의 얼굴을 보니, 왠지 그의 얼굴도 살짝 붉었다. 그 모습을 보니 심장이 더욱 뛰었다. “…….” 그렇게 마차는 둘을 태우고 가도를 달렸고, 곧 기차로 갈아탔다. 기차가 향한 곳은 론도 남부의 항구 도시, 브이튼. 브리티아 해협과 접해 있는, 미항이었다. *** 가을이 다가오는지 하늘은 높고 날씨는 선선했다. 기차에서 먼저 내린 린덴은 손을 들어 그녀가 내릴 수 있도록 에스코트해 주었다. “와, 바다 냄새 나요.” “좋나?” “네, 시원해요.” 그 말에 린덴은 잔잔히 미소 지었다. 그의 따뜻한 미소를 보니, 엘리제는 알 수 없이 가슴이 뭉클해졌다. 정권 다툼을 끝낸 후, 귀족파의 인원들을 용서한 이후 그는 조금 변했다. 뭐랄까. 조금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할까? 무뚝뚝한 성격은 여전했지만, 날 선 면이 사라졌다. 그리고 괴로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평안해 보였다. ‘정말 다행이야.’ 이전 삶과는 정반대의 변화였다. 그때는 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날카롭게 변했으니까. 그와 본격적으로 틀어지기 시작한 것도 그 피의 비극 이후부터였다. 그전까지는 그저 무뚝뚝하게 그녀를 대했다면, 마음이 망가진 이후부터는 철저히 그녀를 냉대했다. 그 냉대를 못 견디고 그녀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었다. 그때, 린덴이 말했다. “조금 더 좋은 미항에 갔으면 좋을 텐데. 시간이 워낙 없었으니.” “여기도 충분히 아름다운 걸요. 좋아요.” 그는 옆에 선 그녀의 허리를 손으로 껴안았다. “그대와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아. 같이 가주겠나?” 허리에서 느껴지는 그의 느낌에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가고 싶은데요?” “그대가 바다를 좋아하니, 브리티아 섬의 아름다운 항구들, 리버항, 휘니항도 가고 싶고. 그렇게 아름답다던 니스 항도 가보고 싶군.” “니스 항이요? 거긴 적국인 프랑소엔의 항구잖아요.” “뭐, 밀입국하면 되지. 아니면 점령해 버리거나. 요즘 혁명이다 뭐다 해서 정신없어 보이던데, 1함대로 미리 점령해 놓을까?” 참고로 1함대는 브리티아에 주둔하는, 전 세계 최고의 화력을 가진 최강 함대였다. 엘리제는 그의 농담에 쿡쿡 웃었다. 참, 황제니까 할 수 있는 농담이다. “같이 가줄 건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어디든, 어디라도. 함께 가요.” 그 말에 린덴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디든, 어디라도. 이제 그와 그녀는 그렇게 영원히 하나의 길을 걸을 것이다. “조금 걷지.” “네.” 브이튼은 조그만 항구였다. 역 옆으로 아기자기한 예쁜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길 끝에 푸른 바다와 항구가 보였다. 둘은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었다. 바닷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특별한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서로를 느끼며 풍경을 감상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그저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린덴.” “왜 그러지?” “무슨 생각하고 있어요?” 린덴은 답했다. “그대 생각?” 엘리제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 농담하지 말고요.” “농담 아니다. 진짜야.” 린덴은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를 사랑한다. 세상 그 무엇보다. 목숨보다도. 자신이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바로 그녀가 아닐까. 그녀가 없었다면, 자신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내 삶에 의미가 있었을까. 그때, 엘리제가 조심히 물었다. “그때…… 많이 힘들지는 않으셨나요?” 그 물음에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귀족파를 용서해 주었을 때 이야기다. “조금은.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잘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요?” “그래.” 린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용서 이후, 짐을 내려놓은 탓일까. 더 이상 어머니와 누이는 그의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도 그들을 놓아줄 수 있게 되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토록 원하던 복수를 포기했는데, 마음이 평안해지다니. 피로 복수를 했어도 이렇게 마음이 평안했을까? 글쎄, 모른다. 하지만 린덴은 왠지 그렇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엘리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그때 주제넘게 나선 것은…….”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그도 알고 있다. 그녀가 뒤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암셀이 뒤늦게나마 죄를 뉘우친 것은 다 그녀 때문이다. 당사자가 아닌, 그녀가 그런 일들을 했던 것은 분명 주제넘은 이긴 했다. 하지만……. “사과하지 마라.” “네?” “조금 주제넘으면 어떤가.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데.” “……!” “나도 그대에게 중요한 문제가 있다면, 그대를 위해 주제넘게 나설 것이다. 그러니 사과하지 마.”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으며 그에게 몸을 기대었다. “고마워요.” 린덴은 생각했다. 그날의 용서는…… 그래, 사실은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잘못하지 않은 것 같다. 지금 그녀와 길을 걷는 게 이렇게 행복하니까. 그러니 됐다. 린덴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말했다. “사랑한다.” “네…… 저도요.” 그렇게 둘은 해변가에 도착했다. 푸르게 펼쳐진 바다에 엘리제가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볼만한가?” “네, 예뻐요.” “더 좋은 곳도 많다던데. 이번에는 워낙 시간이 없어서.” 이번 1박 2일도 간신히 만든 것이었다. 돌아가면 대신들이 얼마나 그를 들들 볶을지 모른다. “잠깐 앉을까?” “네.” 그들은 해변가에 놓인 벤치에 앉았다. 아직 날이 따뜻해서 그런지, 바닷가에는 물놀이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해변가와 사람들을 구경하다, 문득 무언가를 생각한 엘리제가 가방을 뒤졌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아, 조금은. 그대는?” “저도 조금요. 그래서…….” 엘리제는 무언가를 꺼내었다. 그녀가 꺼낸 것을 본 린덴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저…… 드셔 보실래요?” “그대가 직접 만든 건가?” “네, 좋아하신다고 해서…….” 엘리제가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샌드위치였다. 이전 그가 말한 취향대로 만든. 오늘 납치한다고 해서 직접 싸온 것이었다. 린덴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다.” “정말요?” “응. 황궁의 메인 쉐프가 만드는 것보다 훨씬 맛있군. 그대에게 배우라고 해야겠어.” 그 말에 엘리제는 미소를 지었다. 빈말인 것은 알지만 기분이 좋았다. 린덴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이 소녀는 왜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게 간단히 요기를 마친 그들은 가방에서 다른 무언가를 꺼내었다. 부스럭부스럭 뒤져 나온 것은 사진기였다. 같이 여행을 온 것을 기념하러 사진을 찍으려는 것이다. “이걸 찍으면…… 영상이 남는 것인가?” 린덴은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진기가 서대륙에 도입된 지 이제 겨우 2년째였다. 크림전쟁 때 최초로 사용되었고, 이제 웬만한 신문사에서는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어떻게 사용하는 거지?” 린덴은 커다란 사진기를 이리저리 살폈다. 대충 설명을 듣긴 했지만, 처음 보는 신식 도구인지라 익숙하지가 않았다. 반면 엘리제는 아주 익숙한 물건이었다. 초기 형태의 물건이지만, 곧 사용법을 파악하고 린덴에게 알려주었다. “저기 서보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됐고. 그대가 저쪽에 서봐라.” 그러며 그녀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대의 모습을 남기고 싶어. 영원히.” 그 말에 엘리제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눈에 담긴 사랑 때문일까? 괜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찰칵! 찰칵! 린덴은 해변을 배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사진을 찍고, 엘리제가 말했다. “우리 같이 찍어요.” “같이?” “네.” 그러며 그녀는 대신 찍어줄 사람을 찾았다. 마침 항구에 정박해 있던 해군 함선의 장교가 해변가를 걷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실례지만…… 부탁을 하나 해도 될까요?” “네?” 젊은 장교는 웬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그리고 곧 뒤에 서 있는 린덴의 얼굴까지 보고 화들짝 경악했다. “추, 충성! 폐, 폐하를 뵙습니다!” 아니, 황제와 예비 황후가 왜 이 작은 항구에?! 린덴은 쓸데없는 예는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거기 사진이나 찍어주도록.” “네, 네! 명에 따르겠습니다!” 엘리제는 사진기의 조작법을 알려주었다. “이걸 이렇게 조작하면 돼요. 어렵지는 않아요.” “네, 알겠습니다!” 젊은 장교는 평생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열심히 그 설명을 숙지했다. “찌, 찍겠습니다.” 워낙 긴장한 모습에 린덴이 혀를 찼다. “손 흔들린다. 이상하게 나오면 안 돼.” “아! 죄, 죄송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그와 그녀는 하얀 백사장을 배경으로 섰다. 푸른 바다가 싱그럽게 철썩였다. 린덴은 가만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엘리제는 그를 슬쩍 보았다. 그는 그녀를 보며 웃고 있었다. “사진 찍으니 앞에 보세요.” “그래. 그대도.” 엘리제는 그에게 살짝 몸을 기대었다. 그는 조금 더 힘을 내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찍습니다!” 찰칵! 둘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밝게 웃고 있는, 행복해 보이는 사진이었다. ============================ 작품 후기 ============================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00180 종장 ========================================================================= 종장 그 뒤로 둘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물놀이도 했다. 황제와 예비 황후가 물놀이라니,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었지만 뜻하지 않게 그렇게 됐다. 엘리제가 해변가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에게 물을 끼얹은 것이다. “꺄악!” 깜짝 놀란 엘리제가 비명을 질렀고, 한창 즐겁게 놀던 어린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깔깔!” 그 모습을 보며 린덴이 눈에 불꽃을 튀긴 것은 당연한 일. 엘리제가 말렸으나 그는 처절한 복수를 해주었다. 무려 초상 능력을 이용한 물놀이! 해변가는 그에 의해 평정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 그와 그녀 모두 쫄딱 젖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물에 젖은 서로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전 토마토 축제가 생각났다. 즐거웠다. 맛있는 식사도 했다. 바닷가에서 바로 잡힌 해산물 요리였다. “와아.” 싱그러운 왕새우와 게, 바닷가재. 거기에 최고급 화이트 화인까지.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하는 식사는 행복했다. 어둠이 깔리자, 해변가에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항구 사람들이 모여, 기분 좋게 악기를 연주했다. 둘은 같이 그 음악을 감상했다. 린덴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행복하군.” “……!” 그 말에 엘리제는 놀라 그를 바라봤다. 처음이다. 그가 행복하다는 말을 한 것은. 린덴이 그녀를 돌아보고 잔잔히 웃었다. “그대와 있으니 행복해.” “……저도요.” 엘리제는 중얼거렸다. 그녀도 행복했다. 이렇게 그와 같이 있는 것이. 시간이 멈추었으면 할 정도로.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밤이 깊어져 둘은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황궁 시종장이 된 란돌이 예약한 최고급 호텔이었다. 조용한 여행을 할 것이라고, 소란 없도록 하라고 미리 단단히 이야기해둔 덕에 큰 소요는 없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란돌, 이 시종 놈이 또 방을 하나만 예약한 것이다. ‘음…….’ 린덴은 신음을 삼켰다. 이를 어쩌지? 여기까지 왔는데, 당연히 그녀와 한방에서 밤을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방에서 밤을 지새우면 참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지금도 이렇게 그녀를 가지고 싶은데, 옆에서 누워 있는 것을 보고도 그녀를 지켜줄 수 있을까? ‘불가능하겠지.’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번에도 그토록 괴로웠는데, 이번에는 절대 불가능이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것이다. ‘두고 보자. 결혼만 하면.’ 그는 순백한 엘리제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는 지금까지의 괴로움을 수백 배로 해서 돌려주리라. 침대에서 놔주지 않을 것이다. “방을 하나 더 준비하도록.” “하나 더 말입니까?” “그래.” 호텔의 대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의 앞이라고 의문을 표하겠는가. 화급히 또 다른 최고급 방을 정리시켰다.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이 있긴 있군.’ 그런데 돌발 사태가 발생했다. 엘리제가 그의 손을 잡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저…… 같은 방에서 자면…… 안 돼요?” “……!” 린덴은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이게 지금 무슨 소리이지? 그녀는 사과처럼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냥…… 오늘은 같이 있고 싶어서요.” 그 사랑스러운 모습에 린덴의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 여자가! 오늘 나를 또 얼마나 고문하려고! *** 그렇게 둘은 같은 방에 들어왔다. ‘빌어먹을.’ 방에 들어오자마자 린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저 방에 들어왔을 뿐인데, 벌써부터 가슴이 세게 뛰었다. 깊은 밤. 한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있다니. ‘바늘도 안 가져왔는데. 어떻게 참지.’ 그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지고 싶었다, 그녀를. 진정으로 하나가 되고 싶었다. 그녀의 온몸에 자신의 흔적을 새기고 싶었다.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영원히 가두고 싶었다. 벌써부터 이렇게 그녀를 향한 갈망이 타오르는데, 오늘 밤새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엘리제가 말했다. 느낌일까? 왠지 그녀도 긴장한 듯했다. “씻으시겠어요? 아니면 먼저 씻을까요?” “아, 그대 먼저 씻도록.” “네, 금방 씻고 나올게요. 쉬고 계세요.” 욕실 안에서 그녀가 씻는 소리가 들렸다. 적나라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놈의 호텔들은. 왜 방음이 하나도 안 되는 거야!’ 물론 싫은 것은 아니지만. 아니, 좋지만……. 그래도 참기 너무 괴로웠다. ‘양 하나, 양 둘, 양 셋…….’ 그렇게 세계 최강국의 황제 폐하는 궁상맞게 양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물론 늘 그렇듯, 별 효과는 없었다. 그렇게 서로 씻고, 잘 시간이 다가왔다. 발칙한 시종, 란돌의 모략일까? 누워 잘 수 있는 침대는 단 하나였다. 심지어 큰방에 어울리지 않게 작은 사이즈였다. 나란히 누운 상태에서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그녀의 살결이 스쳤고, 그때마다 그는 그녀를 향한 갈망을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계속해서 갈등하는 마음. 결혼 전이니, 그녀를 지켜주어야 한다. 아니, 그런 것과 상관없이 갖고 싶다. 하나가 되고 싶다. ‘사랑하니까. 그리고 이제 곧 결혼할 것이니,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끝없이 그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누워 있던 엘리제가 입을 열었다. “린덴, 자요?” “……아니.” 린덴은 쓴웃음을 지었다. 잘 수 있을 리가 있나. 그대가 이렇게 옆에 있는데. 그때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그를 바라봤다. “저…… 린덴.” “왜 그러지?” “사랑해요.” “……!” “사랑해요, 정말로.” 왜일까. 그 말이 그의 가슴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마워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항상.” 그 사랑스러운 말에 결국 린덴은 이성이 뚝 끊어졌다. 그는 그녀의 턱을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칠게 입을 맞췄다. “읍? 리, 린덴?” 그녀는 당황해 피하려 했으나 그는 놔주지 않았다. 집요하게. 한 손으로 그녀를 가두고, 입안을 농락했다. “아…….” 그 강렬한 키스에 엘리제는 곧 몽롱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귓가를 어루만지고, 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마다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움츠렸다. 이윽고 그녀의 쇄골을 어루만지며 그가 말했다. “리제.” “……네, 린덴.” 그와 그녀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금색 눈동자에 타오르는 갈망을 느끼고, 엘리제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 너를 가지고 싶다.” “……!” 그 직접적인 말에 엘리제는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린덴은 긴장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싫은가?” 엘리제는 고개를 숙였다. 이 바보 남자. “그런 걸…… 말로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이 바보.” 하지만 역시 연애 바보, 동정 린덴. 그녀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시, 싫은가……?” 그녀는 민망함에 더욱더 얼굴을 붉혔다. 아, 진짜 바보. 그녀는 고개를 아예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시, 싫지…… 않아요. 사,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말이 끝난 다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았다. “……!” 놀라 보니, 그가 타오르는, 정말 불처럼 타오르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잘못 듣지 않은 거지?” “…….” 엄마야. 그녀는 지금이라도 말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했다. 눈빛만으로도 잡아먹히는 것 같다. 그가 그녀의 옷을 벗겨 내렸다. 워낙 긴장해서 그런지, 손이 떨려 간단한 침의를 벗기는 데 자꾸 헛손질했다. “사랑한다…… 사랑해, 내 엘리제.” “……저도요.” 그가 다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이윽고. 하얀 나신이 완전히 드러났다. 린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름다웠다. 달빛에 새하얀 살결이 빛났다. 엘리제는 민망함에 몸을 가렸다. “그렇게…… 보지 마세요. 부끄러워요.” 그는 그녀의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둘 모두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윽고 운명의 시간. 그가 걱정스레 물었다. “처음에…… 아프다던데…….” 그녀를 가지고 싶지만, 그녀가 아픈 것은 싫었다. 하지만 엘리제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괘, 괜찮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부끄러움으로 떨렸다. “당신이니까…….” “……!” 그렇게 그날 밤, 둘은 완전한 하나가 되었다. 길고 긴 밤이었다. *** 다음 날, 정오가 가까운 늦은 아침. 엘리제는 힘겹게 눈을 떴다. ‘아파.’ 전신이 두드려 맞은 듯 아팠다. 온몸 여기저기가 울긋불긋했다. 어젯밤의 일을 떠올린 엘리제는 얼굴을 붉혔다. ‘하여튼 미워.’ 그간의 괴로움을 복수한 것일까? 밤새 얼마나 괴롭히던지. 정말 미웠다. 그때, 옆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나?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지.” 그녀와 다르게 맑은 목소리. 그가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미워요.” “뭐가?” “몰라요. 전부 다. 미워요.” 그 말에 린덴은 쿡쿡 웃었다. 확실히 자신이 생각해도 지난밤, 너무 괴롭히긴 했다. ‘하지만 네 책임이야.’ 린덴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자신이 어떻게 멈추겠는가? 그러니 어젯밤의 일은 전부 그녀의 책임이었다. ‘이제 같이 살기만 해봐라.’ 궁을 따로 마련할 필요도 없었다. 계속 같이 지낼 것이다. 그렇게 다짐한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사랑한다.” “몰라요.” “몰라? 어젯밤 사랑이 부족했나?” 그 말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짐승을 보듯 그를 바라봤고, 그는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전에 비해, 참 많이 능글맞아진 그다. 결국, 엘리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사랑해요.” “목소리에 사랑이 부족한데. 역시 어젯밤 사랑이 부족해서…….” “충분했거든요!” 그녀가 화를 내자, 린덴은 다시 쿡쿡 웃었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이렇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정도로. 그는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어젯밤 기억이 나 그녀는 바동거렸다. “이거 놔요.” “또 사랑할까?” “그만해요! 결혼해도 당분간은 금지예요!” “뭐? 그건 안 돼. 황명이다.” 대제국의 황제님은 기존 자주 사용하던 말투인, ‘명령이다’에서 한층 업그레이드된 ‘황명이다’를 사용했다. 그렇게 아옹다옹 투닥거리다, 오전이 지났다. 둘은 침대에 나란히 앉아 호텔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원래는 점심 기차를 이용해 론도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녀의 몸이 좋지 않아 하루 미뤘다. “오늘 올라가야 하는데…….” “괜찮아. 하루 늦어도 된다. 어차피 급한 일은 다 하고 왔잖아?” “저야 그렇긴 하지만…… 국정은 괜찮아요?” 린덴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 안 괜찮았지만, 대신들이 난리 치겠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크리스, 그놈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그렇게 둘은 미항에서 하루 연장된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몸이 안 좋아, 주로 호텔에 머물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둘이 같이 있었기에. 저녁이 되었을 때, 엘리제의 몸이 많이 나아져 그들은 간단히 산책하러 호텔을 나섰다. 시간이 늦어, 이미 짙게 어둠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밝은 달빛과 바닷가에 늘어선 건물의 불빛 덕분일까? 산책하는 데 지장은 없었다. 오히려 고즈넉한 느낌이 좋았다. 둘은 가만히 손을 잡고 바닷가를 걸었다. 말없이. 서로를 느끼며.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항구의 만에 도착했다. 달빛을 받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모습에 그녀는 탄성을 토했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나들이를 오지. 더 좋은 곳도 많이 가고.” 엘리제는 웃었다. “또 납치하시게요?” “그래, 매일매일 납치해서 살아야겠어.” 그 말에 쿡쿡 웃은 엘리제는 그의 품에 기대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과거를 떠올렸다. 처음 그와 다시 재회했을 때의 순간. 그를 밀어내던 기억들. 크림 반도에서 그와 함께한 시간. 그리고 서로를 마주 보기 시작한 후의 시간. 그 밖에 함께 걸은 순간순간들. 모든 것이 소중했다. 린덴이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소중히…… 정말 소중히 말했다. “사랑한다, 내 엘리제.” “네, 저도요.” “앞으로…… 놔주지 않아. 영원히 함께할 거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네.” 앞으로 그들은 함께 길을 걸을 것이다. 그 길의 순간순간들은 어떨 때는 기쁘고, 어떨 때는 아프기도 하며, 슬플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할 것이다. 서로 사랑하니까. 영원히. ============================ 작품 후기 ============================ 내일 뵙겠습니다! 00181 에필로그 1 ========================================================================= 에필로그-1 행복한 납치가 끝나고, 다시 시간이 흘러 대망의 결혼식 전날이 다가왔다. 결혼식 전야를 맞아 시민들은 기쁜 얼굴로 대화를 나누었다. “두 분이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제국의 흥복이야. 자네도 결혼식에 참석할 거지?” “당연하지. 이미 가게 문도 다 닫았다고.” 등불을 든 여인은 온 제국 시민의 사랑을 받는 여인이었다. 평민이든, 귀족이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그녀를 아끼고 사랑했다.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 거리는 온통 축제 분위기였고, 사람들은 마치 가족이 결혼하는 것처럼 그녀의 결혼을 기뻐했다. 원래 전통적으로 황실의 결혼식은 대성당에서 치러지지만, 이번만큼은 대경기장에서 진행하기로 했다. 워낙 많은 시민이 결혼식에 참석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인원이 참석하기를 희망해, 수만 명을 수용 가능한 대경기장도 자리가 모자랄까 걱정이었다. 물론 그녀의 결혼식을 모두가 기뻐하는 것은 아니었다. 약혼식 때처럼 슬퍼하는 이들도 있었다. “크흑, 내가 등불을 든 여인을 사모한 게 벌써 2년째인데!” “나도 마찬가지야! 크림 전쟁 때부터 짝사랑했다고!” “등불을 든 여인은 만인의 여인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바로 엘리제의 열성팬들. 그들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결혼을 아쉬워했다. 그렇게 론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떠들썩하며, 결혼식 전야가 깊어갈 때였다. 만인의 축복의 주인공, 엘리제는 가문의 호위기사만 대동하여 홀로 대경기장을 찾았다. “…….” 엘리제는 말없이 경기장을 바라봤다.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다니.’ 엘리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경기장은 그녀에게 깊은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첫 번째 삶, 악녀 황후의 삶을 살 때 죄악을 저지르고 단두대에 처형된 곳이 이곳이었기 때문이다. ‘죽어라, 악녀!’ ‘목을 베어라!’ 당시 그녀를 향하던 비난이 생각났다. 떠올리기만 해도 아픈 기억들. 참으로 후회되는 삶이었다. 하지만 이번 삶은 달랐다. 엘리제는 회귀 후의 시간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사가 된다고 선포했던 일들. 의사가 되어서 했던 일들. 전쟁에 참전했던 일들. 귀족파와 황제파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그와의 사랑. ‘이번 삶, 후회하지 않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아무도 그녀를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만인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물론 그녀라고 모든 것을 잘했다고 할 수는 없다. 실수도 있었고, 더 잘할 수 있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왔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삶을 후회하지 않았다. ‘바로 내일.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야.' 그래,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경기장을 바라봤다. 대경기장은 국가적 결혼식을 맞아 미리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녀는 내일 이곳에서 모든 이의 축복을 받으며, 그와 진정한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와의 사랑도, 다른 삶도.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 드디어 국가적 결혼식 날의 밝았다. 아직 예식까지 몇 시간의 시간이 남았음에도 대경기장은 새벽부터 달려온 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등불을 든 여인 만세!” “퍼스트레이디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모두가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결혼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대경기장 안쪽에 마련한 신부 대기석에 순백한 드레스로 곱게 차려입은 엘리제가 얼굴을 붉힌 채 예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이상하지는 않니, 마리?” “전혀 안 이상해요. 너무 예뻐요. 마치 천사가 내려온 것 같아요.” “빈말하지 말고.” “빈말 아닌데, 정말 너무너무 예뻐요.”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새하얀 드레스와 면사포를 쓴 엘리제의 모습은 지극히 순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세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아름다움을 보는 듯했다. 찾아온 손님들 모두 그녀의 모습을 보고 말을 잃고 감탄을 터뜨릴 정도였다. “정말…… 아름답습니다, 마마.” 귀족파, 아니, 등불당의 대표로 찾아온 유리엔 후작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제 황후가 될 엘리제이니, 그녀는 경어를 사용했다. 엘리제는 민망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와줘서 고마워요, 언니.” “아닙니다. 당연히 참석해야지요. 누구 결혼식인데요.” 황제와 황후의 결혼식이니 예법상 오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오늘 결혼식에 온 이들은 단순히 예를 차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모두 마음으로 그녀와 그를 축하해 주기 위해 왔다. 유리엔을 시작으로 엘리제와 연이 있었던 수많은 사람이 그녀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대기실로 찾아들었다. 병원에서 같이 일했던 이들, 그녀에게 치료받았던 이들, 크림에서 도움을 받았던 이들, 은혜를 입었던 귀족파의 귀족들, 셀 수도 없었다. 너무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일일이 인사를 받고 있다가는 예식 시작까지 시간이 모자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오기도 했다. “결혼 축하합니다, 백작님. 아니, 이제는 황후 마마로 불러드려야겠군요.” “알버트 백작님!” 엘리제는 깜짝 놀라, 나타난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의족에 목발을 짚고 있는 남자의 이름은 알버트 드 차일드! 크림 전쟁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진 이였다. 원래 차일드가의 차기 당주였던, 그는 부상 후 본가였던 프러시엔으로 돌아가 백작위를 물려받아 현재 프러시엔 중앙은행의 부총재직을 역임하고 있다고 한다. “불편하실 텐데…… 이곳까지.” 엘리제는 감사와 미안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외발로 프러시엔에서 이곳까지 오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버트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와야지요. 덕분에 목숨을 건져,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걸요. 이 목숨은 엄밀히 말하면 당신이 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였다. “당신에게 항상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결혼식, 진심으로 축하하며 주님의 축복이 임하길 기원합니다.” 엘리제는 감사의 미소를 지었다. “네, 알버트 백작님께도요.” 그렇게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수많은 이가 찾아왔다. 정신없이 인사를 받다 보니 시간이 지났고, 곧 식장으로 나갈 시간이 다가왔다. 마리의 손을 잡고,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려 준비하는 찰나. “엘리제.” “아버지.” 아버지, 엘 후작이 그녀를 찾아왔다. “다 잘 준비됐느냐?” “네, 아버지.” “축하한다.” 아버지의 축하를 듣는 순간, 엘리제는 알 수 없이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아버지의 눈가에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오늘부터 그녀는 ‘엘리제 드 클로랜스’가 아닌, ‘엘리제 드 로마노프’가 된다.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떠나 다른 이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모든 딸 가진 아버지가 다 그렇듯, 그도 딸의 결혼을 기뻐하면서도, 씁쓸히 서운해하고 있었다. “크흠, 내 이렇게 서운할 줄 알았으면 이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약혼을 취소시킬 걸 그랬다.” 아버지는 농담하였다. 하지만 그 농담을 하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애정 어린 눈물이 맺혀 있었다. 엘리제는 미소 지었다. 그녀도 아버지의 품에서 떠나는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아버지.” “응?” 그녀는 아버지의 팔짱을 끼었다. “사랑해요. 결혼 후에도 궁에 자주 찾아오실 거죠?” “……!” 엘 후작은 그 말에 스르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사랑한다, 내 딸. 매일 찾아가마.” *** “와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을 받으며 결혼식이 진행되었다. 원래 황가의 결혼식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는 종교 예식이 주였지만, 약혼식 때 학을 뗀 린덴의 주장으로 대폭 생략해 버렸다. 물론 궁내부장 등 깐깐한 대신들이 반대했지만,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또 그런 무식한 예식을 진행하다가 몸이 약한 황후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너희가 책임질 것인가!’ 실제로 선황이 약혼식 때 장시간 예식을 못 견디고 쓰러진 게 1년도 되지 않은 일이라, 대신들도 강하게 반대하지 못했다. 덕분에 허례허식이 대폭 축소된, 오로지 서로를 위한 결혼식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 폐하 입장하시겠습니다!” 결혼 예복을 차려입은 린덴은 비단 카펫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왔다. 평소 무뚝뚝한 표정과 다르게 얼굴 만연에 행복이 가득해 시민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제 폐하 만세!” “로맨티스트 만세!” 황제의 위에 올랐건만 아직도 시민들 사이에서 로맨티스트라 불리는 그였다. 어찌 보면 불경하다 할 수도 있었지만, 브리티아는 황제를 천자(天子)로 모시는 동방이 아니었다. 이 정도의 친근함은 눈감아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로맨티스트란 별명은 린덴 본인 마음에 들어 하는 별명인지라, 더욱더 특별한 제지를 하지 않았다. 다음 차례는 엘리제. 새하얀 드레스와 기다란 면사포로 단장한 그녀는 아버지, 엘 후작의 에스코트를 받아 나타났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나자. “와아아!” “등불을 든 여인 만세!” “마이 레이디! 퍼스트 레이디!” 대경기장이 떠나갈 듯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행복해라! 황제는 황후를 울리지 마라!” “꼭 행복하세요!” “레이디 클로랜스 만세!” 그 함성을 들은 엘리제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죽어라, 악녀!’ 이전 삶, 저주를 받으며 생을 마쳤던 이곳에서 이렇게나 큰 축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리고 더욱더 그녀를 흔들리게 하는 것. “엘리제.” 린덴. 그가 행복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그. 정말 멀고도 멀었던 길이었다. 그 시간 동안 서로 얼마나 엇갈리고, 아팠는지. 그래도 괜찮다. 이제 이렇게 하나가 될 것이니까. 둘은 단상 앞에 나란히 섰다. 대성당의 대주교가 주례를 섰다. “음……. 대 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의 결혼식을 주님의 이름으로 거행하겠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최소 4시간은 진행해야 할 식순이었지만 황제의 요청하에 허례허식을 대폭 생략했다. 어차피 결혼식에서 중요한 것은 딱 두 개 아니겠는가? 바로 사랑의 언약과 약속의 입맞춤. 먼저 축가, 축도, 축언 등 둘을 축복하는 식순들이 지나가고, 대주교가 말했다. “그러면 둘의 결혼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제 사랑의 언약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폐하께 여쭙겠습니다. 황후 마마를 맞이함에 앞서, 일평생 동안 그녀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그 말에 린덴은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강한 열망이 담긴 눈동자. 그의 대답은 짧았다. “당연히.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세상천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그대를 향한 내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그저 미사여구가 아니었다. 그의 눈동자에 담긴 열망은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이 순간 너를 바란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바라고 또 바랄 것이라고. 넌 오로지 내 것이니, 날 벗어날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말라고. 그 갈망에 엘리제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번엔 대주교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황후 마마께 여쭙겠습니다. 폐하를 부군으로 맞이함에 앞서, 영원히 사랑으로 대할 것을 맹세합니까?” 엘리제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네, 맹세합니다.” 그 사랑의 맹세가 끝나자, 대경기장이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와아!” “황제 폐하 만세! 황후 마마 만세!” 단 한 명, 아버지인 엘 후작만이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기쁜 날인데, 왜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 주책 맞은 일이었다. 드디어 식순의 마지막 순서. 약속의 입맞춤. 사랑을 맹세하며 하는 입맞춤으로, 그 순서가 되자 대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함성에 휩싸였다. “와아!” “황제 폐하 만세! 로맨티스트 만세!” “황후 마마 만세!” “뽀뽀해라!” “뽀뽀!” 미칠 듯한 함성. 엘리제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그와 처음 입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결혼식 때 으레 하는 입맞춤이거늘, 왜 이렇게 가슴이 떨리는지. 그녀가 주저하자 린덴이 한 걸음 다가왔다. 엘리제는 긴장으로 흠칫 한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가지 말라는 듯, 린덴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 그가 그녀를 바라봤다. 오로지 사랑만이 담긴 눈동자. 그 깊은 타오름에 엘리제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엘리제.” “……네, 폐하.” “사랑한다. 영원히.” 그 말에 엘리제는 눈을 감았다. “……저도요.” 둘의 얼굴이 천천히 겹쳐졌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의 축복을 받으며 둘은 하나가 되었다.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그녀와 그, 그와 그녀의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작품 후기 ============================ 내일 에필로그 2로 뵙겠습니다! 00182 에필로그 2 ========================================================================= 에필로그 2 시간이 흘렀다. 브리티아 제국은 역사상 가장 영화로웠다던 공제 시대를 거쳐, 최고의 번영을 이룩한다. 하지만 역사의 축은 움직이는 법. 게르마니아 제국으로 인해 일어난 두 차례의 세계 대전으로 역사의 축은 서쪽으로 움직이게 했다. 어쨌든 그건 린덴과 엘리제 후대의 일. 그리고 150년이 지난 뒤. 동쪽의 한 나라. “쏭! 일어나!” 검은 머리의 젊은 아가씨가 기숙사 2층 침대에 누워 있다가 힘겹게 눈을 떴다. “조금만…… 어제 너무 늦게까지 공부해서…….” “뭘 조금만이야! 도대체 시험도 없는데, 어제는 왜 공부를 한 거야?! 비행기 시간 늦겠어!” “몇 시인데?” “10시야! 비행 출발 시각까지 4시간밖에 안 남았어!” 쏭이라 불린 아가씨는 고개를 갸웃했다. 작은 체구의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여인이었다. “4시간이면 넉넉하지 않아?” “이게 비행기 안 타본 티 내네! 면세점도 들러야 하고, 늦지 않게 보딩 하려면 3시간 전에는 도착해야 한단 말이야! 당장 일어나!” “하암.” “빨리! 이러다 여행 못 가겠어! 안 가도 돼?” 안 가도 돼? 란 물음에 쏭이라 불린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된다. 목적이 있는 여행이었으니까. “아니, 가야지.” “그러니까 당장 일어나!” 그렇게 친구로 보이는 둘은 허겁지겁 준비해 기숙사를 나섰다. 그들은 공항버스를 타고,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아, 너 때문에 늦을 뻔했잖아.” “미안.” 송은 혀를 살짝 내밀며 미안하단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어제 공부는 왜 한 거야? 물론 송, 네가 지독한 공부벌레란 것은 알고 있지만 여행 전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심했잖아.” “그냥…….” “으이구, 말 안 해도 알겠다. 이번에 직접 클로랜스 가문의 생가(生家)에 가본다고 생각하니, 떨려서 본 거지?” “……응.” 송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 32판 새로 나왔던데, 그것 봤어?” “응.” 그녀가 본 책은 바로 ‘현대 의학의 어머니’가 기술한 교과서였다. 이 시대 모든 현대 의학서는 바로 ‘그녀’가 기술한 교과서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무려 150년 전에 작성한 내용이지만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조금씩 손을 볼 뿐, 지금도 크게 개정할 만한 내용이 없다는 것은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항공사가 어디지?” “BA. 본토가 아니라 섬으로 바로 가는 직항편이야.” “돈은 얼마나 환전해야지?” “섬에서 시작해 본토까지 한 달 가까이 여행하는 거니, 200만 원 정도 환전했는데?” “통합 단일 화폐로 대부분 되는 거지?” “응, 아. 본토에서는 주로 기차로 이동할 거니 패스 확인하고. 섬에서 파리스로 이동할 때 탈 승차권도 챙겼어?” “응, 다 가져왔어.” “그러면 빨리 탑승하자.” 둘은 비행기에 탑승했다.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따라 일반석에 앉았고, 곧 비행기가 이륙했다. “으, 기대된다. 여행 완전 좋다던데. 난 파리스가 제일 기대되는데, 너는?” “나야, 뭐. 알잖아.” 송의 대답에 친구는 혀를 찼다. “하여튼 너도 특이해. 그 멀리까지 여행가는 목표가 그것이라니. 물론 위대한 위인이기야 하지만…….” 송은 그 말에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도 자신이 조금 특이하단 것을 알았다. 하지만……. ‘내 꿈인걸.’ ‘그녀’. 자신에게 의사의 꿈을 꾸게 한 인물. 송은 ‘그녀’의 위인전을 읽고 의사의 꿈을 품었다. 송은 지금 자신의 꿈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그녀’가 황후가 되기 전, 살았다던 클로랜스 가문의 생가. 그곳이 이번 여행의 목표였다. *** 긴 비행 끝에 공항에 도착했다. 둘은 완전 녹초가 되어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 절차를 밟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에 탔다. “우리 숙소가…… 피카딜리 거리 쪽에 있나?” “응, 그곳 유스호스텔이야.” 이곳의 물가는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가난한 학생인지라 호텔에 묵을 엄두도 못 냈다. 그들은 숙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싣고 시내를 구경했다. “와, 완전 건물들 예쁘다. 저것, 봐. 그림 같아.” 친구의 말에 송도 거리를 구경했다. 정말 근대의 거리에 들어온 듯한 건물들이 그녀들을 반겼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현대적인 모던함이 섞인 거리의 풍경이었다. “와, 저기 근위대다!” “어디?” 친구의 말에 버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말을 탄 붉은 제복의 군인이 보였다. 허리춤에 기병용 검이 매달려 있었다. 물론 의장용 근위대였지만, 덕분에 과거를 느낄 수 있었다. 1시간여가 지나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황과 거리가 멀기도 했지만 길이 막혀 더 걸렸다. 세계 어디를 가나 수도의 교통 체증은 다 비슷한 것 같다. 친구가 짐을 풀며 물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는데, 어떻게 할 거야? 도착하자마자 생가에 가보려고 했잖아?” “음……. 오후 4시까지라서, 오늘은 늦은 것 같고. 내일 아침에 가야지, 뭐.” “그러면 나가서 관광하자! 이 근처에 맛있는 케이크 집 있데! 150년 넘는 전통의!” 친구가 가이드북에서 찾아 이끌고 간 곳은 딸기 케이크가 맛있다는 카린 베이커리! “황후가 사랑하던 베이커리라고 하던데?” “그래?” “진짜인지는 모르지만 맛은 진짜 있네.” 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좀 달지 않아?” “황후도 단 것 좋아했나 보지. 딸기 케이크를 제일 좋아했다고 여기 가이드 북에 적혀 있네.” 그러며 둘은 시내 여기저기를 관광했다. 과거 최강대국이자, 지금도 세계 최고의 강국 중 하나인 나라의 수도인지라 볼 것은 무궁무진했다. 뮤지컬도 보고, 빅밴도 가고. 피시 앤 칩스(Fish and chips)와 더불어 흑맥주도 먹고. “피시 앤 칩스는 그냥 튀김이네. 별로 맛은 없다.” 친구의 말에 송은 쿡쿡 웃었다. 동감이었다. 친구가 맥주를 쭈욱 마시며 말했다. “역시 볼 게 많네. 이 도시 기원이 라틴족 아니었나?” “난 잘 모르겠네. 그래?” “응, 아마 2,000년 전쯤 섬에 도착한 라틴족이 세운 게 맞을 거야. 그때 이름이 론디니움인가 그랬을걸?” 여행을 오기 전에 미리 이것저것 공부했는지 친구는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송.” “응?” “네가 내일 만나러 가려는 그분. 남편이 참 공처가였던 것 같지 않아?” 그 말에 송은 웃었다. 하루 관광을 해보니,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내 엘리제를 위하여, 란 말이 적혀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정말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았나. 물론 황후로서도 워낙 온 시민의 사랑을 받는 분이었다고 하지만.” 송이 내일 만나러 갈, ‘그녀’. ‘그녀’가 역사에 길이길이 전해질 이름을 남긴 것은 의학 때문이었지만 황후로서도 굉장히 훌륭했다고 한다. 황금시대라는 공제의 시대가 있었던 것은 어쩌면 황후인 그녀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그렇게 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맥주를 마시다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송은 일찍 일어났다. 바로 여행의 목적인 클로랜스 생가를 방문하기 위해. “화이트가…… 화이트가…….” 그녀는 지하철를 타고 화이트가로 향했다. 수백 년 전부터 대귀족들의 거주지였다는 화이트가는 지금도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부호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인가?” 그녀는 지도를 가방에 집어넣으며 한 저택을 바라봤다. 가이드북과 비교해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전부터 사진으로 숱하게 봐서 알고 있었던 곳이니까. 클로랜스 공작가(公爵家). 엘리제 드 로마노프가 어린 시절 살던 생가. 제국의 명문가, 클로랜스 후작가는 그녀의 사후, 이곳을 생가로 지정해 보존하기로 했다. 이후 대를 이어온 숱한 공으로 공작가가 된, 클로랜스 가문은 근교로 저택을 옮겼고, 이곳을 그녀를 기리는 수많은 사람을 위한 공간으로 보존했다. “관광 오신 건가요?” 정문에 서 있던 중년의 백인 남성이 물었다. 공무원이었다. 저택 자체는 클로랜스 가문의 소유였지만, 국가 지정 문화재로 관리는 국가에서 하고 있었다. “아, 네. 입장할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라디오 가이드를 드릴까요? 아니면 따로 비용을 지불하면 직접 안내원의 가이드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비용을 확인한 송은 입을 다물었다. 안내원의 가이드는 원화로 치면 무려 4만 원. 대충 30분 코스라 들었는데, 비쌌다. 하지만 송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내원의 가이드를 받을게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전문 안내원이 나와 그녀를 이끌었다. 안내원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환영해요. 의대생이신가요? 아니면 벌써 의사?” “아, 네. 의대생이에요.” 어떻게 알았지? 안내원은 친절하게 웃었다. “이곳에 관광 오시는 분들은 의료 기관에 종사하시는 분이 많거든요. 그러면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안내원은 차분히 그녀, 엘리제가 지내던 생가를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어디에서 지냈고, 어디에서 공부했고, 어디에서 일했는지. 그러며 중간중간 그녀의 삶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분이 처음 의사가 된 것은 16살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못 말리는 말괄량이였다고 하더군요.” “말괄량이요?” 송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내원은 짓궂게 웃었다. “사실은 말괄량이가 아니라, 정말 못된 성격으로 사교계에서도 유명했다고 해요.” “에이, 그건 못 믿겠어요. 지어낸 이야기 아니에요?.” “어쨌든 그 뒤 테레사병원에서 일을 시작해 최단 기간에 의사 자격증을 따셨죠.” 테레사병원. 현재 세계 3대 의과대학 중 한 곳인 클로랜스 의대의 교육 병원으로, 전 세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병원 중 하나였다. “재미있는 것은 그때 그분이 그레이엄 백작의 제자로 들어갔다는 거예요.” “닥터 그레이엄의 제자로요?” 그건 모르던 이야기다. 송은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닥터 그레이엄. 일반인들은 잘 모르지만 무수히 많은 의학적 업적을 남긴 인물. “네, 그리고 콜레라를 퇴치하고. 크림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시죠?” “아, 네.”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 그것 아세요? 그분이 왜 크림전쟁에 참전했는지?” “그거야 죽어 가는 생명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안내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틀린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사실은 황제 폐하와의 결혼을 피하기 위함이란 설이 유력해요.” “……네?” 송은 황당하단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요?” “네, 당시 그녀의 주변 인물들이 남긴 비공식적인 기록을 보면, 그런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당시 엘리제가 참전했던 이유는 작은 오라버니를 살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건 전해지지 않은 진실. 어쨌든 송은 안내원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이거 국가에서 운영하는 문화재라고 했으면서 왠지 사이비 안내원이 안내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안내를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장소. “이곳이 그분의 침실이에요. 벽면에 사진과 간단한 이력들이 있으니 읽어보세요.” “아…….” 송은 그 방에 들어온 순간,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썼던 것으로 보이는 침대 맞은 편 벽면에 액자에 담긴 사진이 걸려 있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하는 작은 소녀와 한 남자의 사진. 남자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는데, 소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둘 모두 행복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 밑으로 그녀의 간단한 이력과 별칭들이 쭈욱 적혀 있었다. 엘리제 드 로마노프. 브리티아 제국의 12대 황후. 제국 최초의 여성 황실 장미 훈장 수훈자. 최연소 데임 서임자. 콜레라의 정복자. 역학의 어머니. 광휘의 천사. 등불을 든 여인(The Lady with the Lamp). 제국 의무 사령부 초대 대장. 최연소 제국 대령 임명자. 기적의 천사. 최연소, 최초 여성 황실 십자 훈장 수훈자. 최연소, 여성 백작 서임자. 화합자. 예방 접종의 창시자. 천연두 퇴치자. 세계 최초 의과대학의 창시자. 현대 의학의 어머니. . . .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문구가 적혀 있었고, 마지막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그리고. 린덴의 사랑하는 아내. <외과의사 엘리제 -完> ============================ 작품 후기 ============================ 다음주 외전으로 뵙겠습니다!! < 후기 : > 안녕하세요, 유인입니다.^^ 외과의사 엘리제를 지금까지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외과의사 엘리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은 글입니다. 제 부족 때문에 여러 독자님들의 지적을 들을 때마다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많이 남습니다. 전작인 메디컬 환생을 완결 후 세웠던 목표가 '꼭 전작보다 나은 글을 쓰자.'였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만약 글을 읽는 중 실망한 독자분이 계시다면 이 자리를 빌어 용서를 빕니다. 그래도 이 글을 쓰면서 너무 즐거웠습니다. 글을 쓴다기 보다는, 키보드를 두드리는 게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정신없이 빠져서 썼습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부족한 글이었지만, 독자님들께서도 글을 읽는 동안 조금이라도 즐거우셨다면 작가로서 더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엘리제, 린덴, 미하일. 그리고 그레이엄, 렌, 크리스, 등. 제가 사랑하는 그들과 함께한 여정이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지금까지 함께 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끝을 맺기가 아쉬워 외전을 준비했습니다. 1장 - 길거리 데이트 2장 - 임신 대작전 3장 - 로마노프 령에서 온 편지 로. 총 3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2장은 엘리제와 린덴의 이야기, 3장은 엘리제와 미하일의 이야기입니다. (총 분량은 12편 내외가 될 것 같습니다.) 연재 예정 일자는 다음 주인 5월 첫째주입니다.(월요일이나, 수요일쯤 시작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리며, 외전까지 함께 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유인 배상 00183 외전1 길거리 데이트 ========================================================================= 1장 길거리 데이트-1 황궁의 평화로운 아침. 따사로운 햇살이 창틈 사이로 쏟아지고 있었다. “음…….” 넓은 침대의 이불에 파묻혀 있던 백금발의 소녀는 눈부신 햇살에 인상을 찌푸렸다. 피곤한지 눈을 뜨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때 조각 같은 인상의 남자가 소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조금 더 자도록.” “으음, 지금 시간이……?” 소녀는 멍하니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얼마 안 됐어. 더 자.” 그러며 남자의 손길이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간지러운 느낌에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마, 만지지 마요, 린덴.” “뭘?” “그, 그…….” 소녀는 민망함에 말을 더듬었다. 점점 더 자신의 민감한 부위로 와 닿는 그의 손길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만…….” “싫은데?” 결국, 소녀는 항의하듯 말했다. “어, 어제 분명 그만한다고 약속하셨잖아요!” 밤새 괴롭혔으면서! 아무리 그만해 달라 애원해도 끝없이 괴롭혀서 도대체 몇 시에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아침 해가 뜨자마자 또 괴롭히려 하다니! 하지만 남자, 황제 린덴은 짓궂게 말할 뿐이었다. “내가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더 집요해지는 그의 손길에 소녀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정, 정말 그만하세요!” 싫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 반대였다. 이제 그와 결혼한 지 벌써 3년. 그와의 사랑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아니, 시간이 흐를수록 깊어져만 갔다. 그가 없었던 과거를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 육체적인 사랑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쾌락을 위한 관계가 아닌, 사랑의 나눔이어서일까? 그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다만 문제는. ‘너무 힘들어.’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그는 도무지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를 않았다. 그것도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물론 그를 사랑하니 자신도 싫지 않았으나…… 아니, 좋았으나 그에게 밤새도록 시달리고 나면 몸이 녹초가 되어 다음 날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린덴. 정말 그만하세요. 이제 더는 안 돼요.” 엘리제는 결국 달아오르는 몸을 못 참고 그의 손을 밀어냈다. “왜?” 엘리제는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오늘 바쁘단 말이에요. 보건정책과와 회의도 해야 하고, 곧 다가올 탄신연회 예산도 검토해야 하고, 오후에는 수술도 잡혀 있어요. 그리고 수술 전에 잠깐 귀부인들과 다과회도…….” 줄줄이 나오는 그녀의 스케줄에 린덴은 미간을 좁혔다. 끝이 없었다. 도대체! 이전부터 늘 불만이었다. 이 소녀는 왜 항상 이렇게 바쁘단 말인가?! 결혼 전에도 그랬지만, 결혼 후 황후가 된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내명부의 일만으로도 적은 양이 아니었고, 내명부의 일을 완벽히 하면서 의사 일까지 같이하려니,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물론 이전보다 의사 업무는 많이 줄였다. 현재 그녀의 주 업무는 의사가 아닌, 황후로서의 일이다. 그래도 오로지 그녀만이 가능한 업무나 수술이 아직도 많아, 적지 않은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고 있다. ‘도대체 황제인 나보다 더 바쁘니.’ 린덴은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음에 안 들어. 정말로.’ 의사 일을 겸업하면서도 황후로서의 일도 누구보다 완벽하게 처리하니 탓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원체 바쁘니, 자신과 보내는 시간이 적은 것이 불만이었다. 마음 같아선 품 안에 가둬놓고, 항상 같이 지내고 싶지만 현실은 저녁에나 간신히 얼굴을 보는 정도다. “오늘 일은 몇 시쯤 끝나지? 저녁은 같이 먹을 수 있는 거겠지?” “수술이 끝난 후, 저녁에는 예술 협회 후원회에 잠시 참석해야 할 것 같아서 늦을 거 같아요. 먼저 드세요.” 린덴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또? 어제도 늦게 들어오지 않았는가? 그제도 일이 늦게 끝났던 것 같은데. 도대체 그대와 저녁을 같이 먹은 게 언제인지 모르겠군.” 그 불만 섞인 목소리에 엘리제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죄송해요. 그래도…… 오늘 후원회는 꼭 참석해야 하는 모임이라…….” 그러며 엘리제는 린덴의 눈치를 살폈다. 확실히 본인이 생각해도 심하게 바쁘긴 했다. 황후의 일, 의사의 일 모두 완벽히 해내려니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린덴에게 쭈뼛쭈뼛 말했다. “……죄송해요. 내일은 꼭 일찍 일을 끝낼게요.” “…….” 그래도 그가 대답하지 않자 엘리제는 조심스럽게 애교를 부렸다. “응? 응? 네? 화 푸세요. 미안하고 사랑해요. 네? 대신 내일은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연극 보러 가요. 일 꼭 일찍 끝낼 테니.” “하아.” 린덴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운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그녀를 사랑한 것은 자신이니.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았다. 얇은 파자마 너머로 느껴지는 그의 단단한 가슴에 엘리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말로만?” “네?” 엘리제는 잠시 말뜻을 이해 못하고 물었다.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냐?” “아…….” 삐쭉한 말에 그가 원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주저하다 고개를 들어 입술을 그의 뺨에 갖다 대었다. 뺨에 하는 베이비 키스였다. 입술에 닿는 그의 느낌에 엘리제의 가슴이 뛰었다. “됐…… 죠?”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면?” “거기 말고 다른 곳에.” 그러며 그는 그녀의 입술을 바라봤다. 금색 눈동자 깊은 곳에 흐르는 갈망이 느껴져 엘리제의 얼굴이 화악 달아올랐다. 그녀는 주저주저하다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갖다 대었다. 그리고 서로의 입술이 닿는 순간! 그가 그녀의 머리를 끌어안더니, 혀를 밀어 넣어 안으로 강렬하게 덮쳐 들어갔다. “아…… 린덴…….” 전기에 감전되는 듯한 키스. 자신을 애태우는 것을 혼내주려는 듯 집요하고 강렬한 키스였다. 그는 마치 농락하듯 그녀의 입안 저 깊은 곳까지 철저히 괴롭혔다. “리제.” 린덴은 그녀의 귓가로 입술을 가져갔다. 귀로 느껴지는 그의 입김에 엘리제는 몽롱하게 답했다. “……네, 린덴.” 그는 그녀의 귓불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날 너무 애타게 하지 마라. 밤에 혼내줄 테니.” *** 린덴과 엘리제가 부부가 된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린덴은 부부가 된 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궁을 찾았다. 아니, 찾았다기보다는 아예 그녀의 궁에서 살았다. 본인의 사자궁은 정무를 볼 때만 방문하고, 정무가 끝난 후에는 꼭 그녀의 백합궁으로 돌아왔다. 결혼해도 각자 다른 궁에 머무는 것이 아닌, 마치 한 집의 사는 일반 부부처럼 지냈다. 궁내부에서 예법에 어긋난다고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렸으나, 린덴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결혼하기 전, 그가 간절히 바랐던 것. 삶을 그녀와 함께하는 것. 고작 예법 때문에 그 행복을 포기하라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시종들은 어쩔 수 없이 황제가 머무는 데 불편하지 않도록 물품들을 황후의 궁으로 조금씩 옮기기 시작했고, 3년이 지난 지금, 사자궁은 황제의 궁이라기보다는 정무만 보는 집무실이 되어버렸다. ‘엘리제.’ 린덴은 사자궁의 회의실에서 대신들과 회의를 마치고 잠시 그녀를 떠올렸다. ‘보고 싶군.’ 방금 봤는데, 또 보고 싶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나날이 행복한 일상이었다. 아니, 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단순히 행복이란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지독한 중독, 갈망. 그녀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터질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심장이 고장 난 것 같았다. 복수만 바라던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든 것이 벅차고 충만한 시간들. ‘그 문제만 아니면 완벽할 텐데.’ 린덴은 그녀와의 유일한 문제를 떠올리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그 문제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주변에서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런 압박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엘리제도 많이 걱정하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난 엘리제, 너만 있으면 되는데 그까짓 게 뭐라고.’ 린덴은 혀를 차며 생각을 돌렸다.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곧 해결될 것이다. ‘지금쯤 수술하고 있으려나? 황실십자병원의 의사 놈들은 도대체 언제쯤 그녀 대신 수술을 완벽히 해낼 수 있는 거야.’ 십자 병원의 의사들은 제국…… 아니, 세계 최고의 의사인 그녀의 수술을 배우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여전히 미흡했다. 그들의 실력이 나아지면 그녀가 바쁠 일도 많이 줄어들 텐데. ‘조금 더 닦달해야겠어.’ 특히 그레이엄. 그놈을 독촉해야겠다. 이유 없이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지만 그나마 가장 나은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게 린덴은 그녀에 대해 생각하며 정무를 보았다. *** 다음 날, 엘리제는 최대한 빨리 일을 마쳤다. 린덴과 이전부터 약속한 거리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였다. “일은 다 끝난 건가?” “네, 다 마무리하고 왔어요. 많이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그나저나 오늘은 응급수술 때문에 중간에 안 돌아가도 되는 거지?” “아…… 네. 아마도요.” 지난번 데이트 때는 갑자기 그녀 외에는 손쓸 수 없는 혈관 파열 환자가 발생해 연극 중간에 일어난 일이 있었다. 그가 항상 이 데이트를 얼마나 고대하는지 알고 있는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오늘은 괜찮을 것이다. 지난번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 린덴이 친히 황명으로 최고의 의사들이 철통같은 당직을 서도록 명령했으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드레스 갈아입고 올게요.” 병원에서 바로 돌아온 상태라 그녀는 간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암행에 가까운 비공식적인 외출인지라, 황후로서 예복을 갖추어 입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간만에 데이트여서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냥 그대로 나가지.” “네? 하지만.” 린덴은 부드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허리에 와 닿는 그의 단단한 팔에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그대로 그녀의 귓가를 살짝 깨물며 낮게 말했다. “지금도 충분히 예뻐. 데이트 나가지 말고 바로 덮치고 싶을 정도로.” “……!” 엘리제의 얼굴이 사과처럼 물들었다. 그녀는 민망한 마음에 그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지, 짐승.” “뭐가?” “어제도 그렇게나 힘들게 했으면서!” “그런가?” “그, 그래요.” 엘리제가 원망스럽게 답했다. 하지만 린덴은 씨익 웃었다. “난 잘 모르겠는데. 왜냐하면…….” 그는 그녀의 귓불을 부드럽게 혀로 쓸어내렸다. 그의 혀에 닿은 귓불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직도 난 모자라거든.” “……!” 갈망이 담긴 목소리에 엘리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다 데이트를 나가기도 전에 침실로 끌려갈 것 같다는 위기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단 도망쳐야 했다. “빠, 빨리 드레스 갈아입고 올게요.” “괜찮다니까?” “제, 제가 안 괜찮아요!” 엘리제는 도망치듯 그의 품에서 벗어나 드레스 룸으로 달아났다. 린덴은 아쉬운 듯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대로 덮쳐 버리고 싶은 충동이 굴뚝같았지만…… ‘뭐, 오늘 밤도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쉬움을 억눌렀다. ============================ 작품 후기 ============================ 외전은 주3회(월수금) 연재입니다!! 감사합니다! 00184 외전1 길거리 데이트 ========================================================================= 1장 길거리 데이트-2 그녀와의 외출은 린덴의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였다. 그녀와 손을 잡고 거리를 구경하며, 연극을 관람하고, 맛있는 식사와 디저트를 먹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온 세상에 오로지 둘만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모든 것을 잊고 서로만 바라보게 된다. “다 준비되었나?” “네.” 귀족들의 외출복으로 차려입은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챙이 넓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물론 그 정도로 이목을 피할 수는 없다. 그들은 황제와 황후였으니까. 그것도 모든 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그래서 린덴은 자신과 그녀에게 약한 변검(變劍) 능력을 걸었다. 이전 그녀와 가까워지기 전 정체를 숨기고 ‘론’으로 만나기 위해 사용했던 능력이었다. 린덴은 옆에 선 엘리제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았다. “왜요? 혹시 뭐 이상해요?” “손.” “네?” “팔짱 끼라고.” 그 말에 엘리제는 배시시 웃으며 그의 팔에 자신의 손을 걸었다. 그녀가 팔짱을 끼자 린덴의 무뚝뚝한 표정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사랑의 행복이 담긴 그 미소를 보며 엘리제는 말했다. “그거 알아요?” “뭐가?” “고마워요.”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 사랑해 줘서. 그리고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요. 저도 정말로 많이 사랑해요.’ 그 속마음을 들은 것일까? 린덴은 깊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요?” 괜히 민망한 마음에 엘리제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얼굴을 잡고 자신 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 생각지 않은 키스에 그녀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부드럽지만 정열적인 감촉. 결혼한 지 3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와의 키스는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언제나 뜨겁고, 전기가 흐르는 듯하고, 정신이 몽롱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삼키는 듯한 입맞춤. “그,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의 팔목을 움켜잡는 순간, 린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랑한다, 정말로.” “……!” 엘리제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요.” 그렇게 둘은 마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마차는 고급스러운 자재를 썼지만 황가의 문양은 새겨져 있지 않았다. 황족이 암행을 나갈 때 이용하는 마차였다. “…….” 엘리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마차의 내부를 살폈다. “왜 그러지?” “아니, 그냥요. 옛날 생각이 나서요.” ‘로제’로 ‘론’을 만나던 때의 이야기였다. 당시 린덴은 ‘론’으로 그녀를 만나러 올 때 종종 이 마차를 이용했었다. ‘그때만 해도 폐하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었는데.’ 론이 그였을 것이라고도 상상 못했다. 크림 반도에서 처음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놀랐었는지. 당시만 해도 그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몰랐었다. 아니, 스스로의 감정에 대해서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많은 엇갈림이 있었고, 그에게 많은 상처를 주기도 하였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그래,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고비도 많았고, 괴로운 일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그의 옆에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을 사랑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고마웠다. 그의 곁에 있는 것이 행복했다. ‘한 가지 걱정만 아니면…… 모든 것이 행복할 텐데.’ 엘리제는 살짝 어두운 얼굴을 했다. 행복 속에 숨어 있는 한 가지 걱정. ‘난 언제 아기가 생길까?’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것이 행복한 결혼 생활이었지만 큰 문제가 있었다. 금슬이 나쁜 것도 아닌데도, 도통 아기가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갑작스레 어두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고 린덴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지?” “아…… 별것 아니에요.”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린덴은 속지 않았다. “아기 문제 때문에 그러는가?” “…….” 엘리제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는 혀를 찼다. “괜찮대도. 곧 생길 거다.” “하지만 벌써 3년이잖아요…….” 엘리제는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이지.’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처음에야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2년, 3년이 되어가니 점차 주변에서도 걱정하고 그녀도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괜찮다. 원래 우리 로마노프 가문이 손이 귀해. 곧 생길 거다.” 린덴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따뜻하게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난 그대만 있으면 돼. 후손 따위는 없어도 된다.” 엘리제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정말이야. 난 정말 너만 있으면 돼.” 린덴의 말은 거짓이 아닌 진심이었다. 물론 그도 안다. 황제로서 대를 잇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이란 것을. 하지만 그의 개인적인 솔직한 심정으로는 아이는 안 갖고 싶었다. 그렇지 않아도 바빠 자신에게 소홀한 그녀다. 만약 아이가 생기면 또 얼마나 그쪽에 관심을 쏟을 것인가! 자신은 한 걸음 더 관심에서 멀어질 게 분명하다.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게 질투하는 꼴이지만, 원래 그는 그녀의 일에 관해선 질투심이 넘쳤다. ‘정 안 되면 다른 황족을 입양해서 대를 이으면 되잖아. 로마노프령에 간 미하일, 그놈이 나중에 아들을 낳으면 데려와도 되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 엘리제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가지고 싶단 말이에요. 저와 린덴의 아기…….” 그 말에 린덴은 자신에게 안긴 그녀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추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 “아이는 생길 거다. 반드시.” 확신에 찬 어조에 엘리제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요?” “오늘 밤도 노력하고, 내일 밤도 노력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노력할 거거든.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안 생길 리가 있느냐?” 엘리제의 뺨이 화악 붉어졌다. 린덴의 얼굴이 짓궂어졌다. 거리 데이트가 끝나고 궁으로 돌아가서 그녀를 괴롭힐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리, 린덴!” “뭐가? 분명히 말하지만, 이건 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엘리제는 붉어진 얼굴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저희만 가는 것인가요?” 경호에 대한 물음이었다. “저 뒤에서 로열 가드 몇 명이 따르고 있다.” 그러며 린덴은 혀를 찼다. “그렇게 필요 없다는데도.”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고 싶은데, 부득부득 따라오는 근위대가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하여튼 궁내부장 이놈을 갈아치워야지.” 엘리제는 그 말에 쿡쿡 웃었다. 둘이 이렇게 비공식 외출을 나갈 때마다 꼬장꼬장한 궁내부장은 펄쩍펄쩍 뛰었다. 혹시나 변고라도 생기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이 론도에서 무슨 일이 생긴다고.” 선황 민체스터의 치적부터 그에게 이르기까지. 거듭된 선정으로 론도의 치안은 대륙 최고였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긴다고 해도 군대가 몰아치지 않는 한 그의 털끝 하나 상하게 할 수 없거늘, 궁내부장은 막무가내였다. ‘절대 안 됩니다! 꼭 외출하셔야겠다면 근위대를 데리고 가십시오! 최소 100명은 데리고 가야 합니다!’ 100명이라니! 그럴 바엔 외출을 안 하는 게 나았다. 결국, 황제는 궁내부장과 옥신각신한 끝에 최소의 경호 인원만 대동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로열 가드들은 변복한 후 멀찍이 그들을 따랐다. “지금 바로 극장으로 가는 거죠?” “그래야 할 것 같다. 시간이 얼마 없어서.” 시간이 있다면 전망 좋은 카페에서 간단히 차를 마시고 가는 것도 좋겠지만 연극 시작 시간에 도착하기 빠듯했다. “그런데…… 린덴은 오늘 하는 연극 별로 안 보고 싶어 하지 않았나요? 그냥 다음번에 다른 연극을 볼까요?” 엘리제가 조심히 물었다. 그들이 지금 보려는 연극 제목은 ‘애절한 사랑.’ 왠지 삼류극처럼 보이는 제목의 연극은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그가 아니라,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였다. 하지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보고 싶다.” “정말요? 저 때문에 보는 것 아니에요? 그런 거면 괜찮으니 그냥 다른 극을…….” “아니야, 정말 좋아해.”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린덴은 그녀와 함께 보는 연극이라면 어떤 장르라도 다 좋았다. 애초에 그의 관심사는 연극이 아니라 그녀였으니까. 사실 연극의 내용은 먼지만큼의 흥미도 없었다. 그냥 그녀가 자신의 옆에 앉아 즐겁게 연극을 구경하고 있으면 그것만으로 자신은 행복했다. 연극을 보며 다채롭게 변하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덤이고. 그녀의 얼굴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아마 평생 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보고 또 봐도 갈망만 늘어나지. 단 하나 불만이 있다면 그녀의 눈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그녀의 마음에 자신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녀는 신경 쓰는 것이 너무 많았다.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건만……. ‘콱 납치해 버릴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린덴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미 같이 살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곳으로 가서, 단둘이 서로만 보고 싶었다. 그녀의 눈이 자신만 향했으면 좋겠다. 물론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황제고, 그녀는 황후이자 제국 최고의 의사이니까. 잘 알고 있지만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하세요?” 린덴은 옆에 앉은 그녀의 어깨를 다시 껴안으며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잡아 옆에 두고 싶다고.” “늘 옆에 있잖아요?” “모자라.” 그리고 말했다. “턱없이.” ***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대극장에 도착했다. 론도 최대 규모의 대극장은 프랑소엔의 자랑, 파리스의 오페라에 뒤지지 않는 웅장함을 지니고 있었다. 대극장의 관장인 랑콤 준남작이 그들을 맞았다. “대브리티아 제국의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를 모시게 되어 지극한 영광입니다.” 그러며 장황한 예를 다하려는 관장에게 린덴은 고개를 저었다. “됐다. 한두 번 오는 것도 아니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다 가고 싶으니,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쓸데없는 소란을 삼가도록.” “명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그러면 늘 모시던 자리로 안내하겠습니다.” “그래.” 엘리제가 연극을 좋아하기 때문에 둘은 대극장에 종종 방문했다. 그때마다 남들의 눈이 닿지 않는 사각에 위치한, 그러면서도 연극이 가장 잘 보이는 VVIP석에서 극을 관람했다.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뜻밖의 인물들을 발견했다. “어?” 크림같이 부드러운 얼굴, 은은한 백금발. 따뜻한 느낌의 미남자가 도도한 인상의 아름다운 레이디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레이디 차일드, 이쪽으로 오십시오.” “가고 있어요. 그리고 에스코트는 괜찮으니 손은 안 잡으셔도 돼요.” 쌀쌀한 말투였지만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무언가 귀엽다는 눈빛? “어쨌든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매진이라 간신히 표를 예매할 수 있었는데.” “안 봐도 되는데, 왜 표를 예매해서.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이 연극을 보러 온 것은 원래부터 보고 싶었던 극이어서 그렇지, 딱히 경과 함께 오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절대로.” “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네, 안 합니다.” 어쩐지 능글맞은 웃음으로 남자는 답했다. 여인은 그 대답이 불만족스러운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리고 무언가 말을 하려는 찰나. 엘리제가 반가운 목소리로 그들을 불렀다. “크리스 오라버니! 레이디 차일드!” “……?!” ============================ 작품 후기 ============================ 다음주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